나는 힐러다. 수많은 게임의 치료사, 의사, 사제, 프리스트, 성기사, 어콜라이트, 주술사 등등 어떤 게임을 하던지 간에 나는 힐러를 택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다. 그냥 뒤에 서있는 것이 좋았고 나로 인해 아군이 빛을 발하는 것도 좋아 보였다. 말없이 묵묵히 도움이 되는 내가 겸손하고 멋지기도 했다. 그것을 인정받아 나의 캐릭터는 항상 힐러 랭킹 1위를 차지하였고 그 어떤 전사들이건 나를 알아보고 도움을 받길 원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어느 날 1:1 결투신청을 자청한 한 전사가 있었다. 재미로 하는 것이니 나는 웃으며 아무생각 없이 그 대결을 받아 주었다. 그리고 졌다. 전사는 ‘역시 타테(그 당시 내 아이디)님은 힐러 로서는 엄청 강한데 싸움에는 취약하군요?’ 나는 반박했다. ‘그야 제가 보조 쪽으로 스킬과 스텟을 투자했으니 싸움에는 약할 수밖에요.’ 그 전사는 고개를 주억 거렸지만 어째서인지 몹시도 불쾌했다. 당연히 싸움에 투자한 전사를 이기지 못하는 게 당연한 것인데 왜 화가 나는 것일까. 그것을 계기로 큰 사건이 터졌다. 게임을 바꿔 무협 쪽에서 일어난 100 : 100 정파VS사파 결투 때 일이었다. ‘타테! 여기 치료!’ 맨 앞을 지휘하던 도황(刀皇)의 외침이었다. ‘이미 하고 있어! 혈점, 응급치료!’ 나의 손은 재빨랐다. 그리고 누구보다 빠르게 치료를 완료했다. 이 정도는 이제 눈감고도 할 수 있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다친 다음에 치료하는 방법은 범인에 불과하다. 나는 사전에 위험요소를 파악하여 다치기 전에 아군이 다칠 부위를 미리 파악한다. 그렇게 하면 1초도 안 된 찰나의 순간 이미 어느 부위, 딱 맞는 강도의 치료 시전을 완료 할 수 있다. 이건 내 고유의 스킬 ‘심연의 눈’이라고 명명했다. 물론 스킬이라 말했지만 이건 스킬 따위가 아니다. 그동안 수많은 힐러를 하며 얻어낸 나만의 깨달음이니까. 그런 식으로 길고긴 사투를 벌였고 결국 나와 암살자 이렇게 1:1 상황이 만들어 졌다. 왜 이런 양상이 되었냐면 그도 그럴 것이 내가 힐러니 전멸을 당한다면 맨 끝에 죽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어떤 게임을 해도 첫 번째 죽거나 반대로 마지막에 죽는 건 변함없는 힐러의 룰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친 암살자와 대충 무난한 상태인 나하고 정파와 사파의 종지부를 찍을 한판의 대결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졌다. 그때 참혹하게 무너진 나의 기분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힐러는 어째서 보조밖에 못하는 것일까. 암살자에게 단칼에 즉사 당하니 내가 이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정파인들은 눈을 돌리고 욕설을 퍼부었다. 내가 치료할 때는 감사하다고 고개 숙였던 인간들이 180도 달라진 표정으로 날 매장시킨 것이었다. 전부 가식이었던 걸까? 나는 무엇 때문에 힐러를 하고 있었던 것인가. 곱씹고 되씹은 다음에 결국 그 게임을 접게 되었다. “하아.” 하늘은 몹시 푸르렀다. 손으로 턱을 괴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이 짓도 꽤나 할만 했다. “나기찬! 수업 똑바로 안 들을래?” 교탁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두 팔을 퍼덕 거리는 여담임의 모습이 안 봐도 눈에 선했다. 나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샘, 힐러란 건 도대체 뭘까요?” “또, 또 그런다! 힐러란 게 죽이든, 밥이든 네가 수업을 방황하는 것과 어떤 합일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수업은 듣지 그러니!” 음, 우리 담임이지만 퍽이나 말을 잘했다. 박수라도 쳐주고 싶지만 왠지 내키지가 않아 그만두었다. “하아.” 다시 먼 산보기. 일명 멍 때리기 스킬을 시전 했다. 이것도 나의 고유 스킬 중 하나다. 시도 때도 없이 고독을 씹는 그닥 좋지 않은 스킬이었지만. “너, 너 정말 나기찬!” - 딩동댕동~ 가까스로 종이 나를 살렸다. 아니, 사실 이미 알고 있던 것이었다. ‘심연의 눈’스킬을 발동시켜 지금 타이밍 때 스피커에서 멜로디가 나올 것을 예상하고 무시했던 것이니까. 그거야 알 리 없는 담임은 단지 운이 좋은 놈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기찬아, 이번에 새로 나온 게임 아냐?” “응? 뭔데?” 무심히 듣고 있는 척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게임광인 나는, 한쪽 귀를 쫑긋 세워버렸다. 나와 동급이라 부를 정도로 게임광인 ‘임상천’은 누구라도 들을세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작게 말했다. “20세 미만은 플레이 할 수 없는 게임이 저번 주 화요일에 오픈했데.” “20세? 많이 잔인한가?” 상천이가 히쭉 웃었다. 뭔가 불쾌한 기분. 저 썩소(썩은 미소)를 보고 있자니 괜히 화가 났다. “성인물이다. 그것도 할 수 있어. 진짜 실체감을 느끼는 뇌파인식 컴퓨터로 하는 게임인데 오감이 현실과 똑같데.” 오감이 현실과 똑같다라… 아, 그만 상상해야겠다. 일단 다리를 꼬고 앉아 아무렇지 않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말을 받았다. “게임인데 성인물 이라니 조금 황당하잖아. 게다가 우리는 아직 고1인데 할 수 도 없을 테고.” “게임은 전통 판타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긴 한데 서로 눈이 맞은 남녀끼리 방을 잡아서 직접 할 수도 있게 만들었다나봐. 뭐, 그걸 중심으로 만들었다기보다 작은 일부에 불과하지만 말야. 물론 잔인성도 없지 않아 있어서 20세로 낙인찍힌 거겠지. 뭐, 훗날에는 할 수 있잖아.” 흥미는 가지만 그다지 내키지 않아 이내 시선을 창밖으로 다시 돌렸다. “그때 사건은 빨리 잊어버려. 네 실수도 아니잖아. 우리 무적의 힐러, 나기찬이 그딴 일로 고심하는 게 말이나 되?” “말은 청산유수네.” 누구나 눈치 챌 아부였지만 나는 누구나 그렇듯이 어쩔 수 없이 웃었다. 방과 후, 여전히 반쯤 풀린 눈을 하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왔다. 밖은 밝았지만 집안은 먹구름이 잔뜩 깔린 것처럼 어두침침했다. 언제나 이 집은 답답한 기분을 돋구어냈다. “나왔어.” “어, 왔어? 기다려 금방 씻고 밥 차려 줄게.” 저 멀리 화장실 너머에서 누나의 말소리가 울렸다. 나는 가방을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지고 말을 받았다. “설마, 또 고등어조림? 그거라면 사절!” “야, 엄마가 꼭 너 밥 먹이라고 했단 말야.” “비린내 나잖아, 싫어!” “하여튼, 만날 어린애라니까!” 우씨, 어린애란다. 지금 고1이 들을 소리인가. 우리 엄마는 내가 한 끼라도 밥을 안 먹으면 아주 죽는 줄 알았다. 물론 그것이 부모의 사랑이란 건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평소에는 그저 귀찮기만 하고 집착이 너무 강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뿐이지. -띠리리리, 띠리리리. 지금 시간 이 타이밍, 나의 ‘심연의 눈’을 발동시켜 데이터를 읽어보니 걸어 올 사람이라면 우리 집착의 엄마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착했다. 분명 받자마자 ‘밥 먹었니?’라고 말씀하실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좋은 생각이 있지. 나는 목소리를 잠시 가다듬은 뒤, 히죽 미소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소연이니? 기찬이는 왔어?” “응, 밥 먹었어.” “밥 먹디? 고등어조림밖에 없어서 걱정했는데.” 이것이 나의 필살기 ‘누나 목소리 따라 하기’라고 들어는 봤나?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이 기술은 오늘에 와서 엄마마저 속이는 완벽한 누나의 목소리를 자랑한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복수와 나의 기회가 동시에 찾아 왔다는 걸 잊어먹을 뻔했다. “기찬이 요즘 힘이 없던데… 멍하니 먹더라고. 전에 말한 패키지 게임 안 사줘서 그런 거 아냐?” “정말 기운이 하나도 없디? 그거 사줘야 하나… 어쩔 수 없지 나중…….” - 휙! “너, 너, 너!”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몸에 타월만 둘러맨 늘씬한 몸매의 여성이 수화기를 가로채간 것이었다. 이 예쁜 여성은 누구 인고 하니 쌍심지 돋은 눈을 보아 우리 누나인 듯했다. 밖에서는 누구나 알아 줄 퀸카로서 남자위에 군림하는 그런 누나이지만 나한테는 그저 못된 마귀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이럴 때가 아니지. 뭔가 날아오기 전에 냅다 튀어야겠다. “방금 전화 받은 거 기찬이야! 어, 엄마, 있다가 통화하자. 너, 거기 안서!” 나는 냅다 뛰어서 방으로 들어가 문 밖으로 머리만 내민 채 혀를 내밀었다. “우왁!” 리모컨이 시속 100Km를 자랑하며(내 느낌상이다) 나에게 날아와 급히 문을 닫았다. - 쾅! 어이구, 힘도 세요. 이러니 어느 남자가 우리 누나보고 결혼하자 그럴까. “너 잡히면 죽는다!” 소리도 꼭 저 멀리 테니스 치는 샤라포바 저리 가라는 윽박질이구만. 내 이것만큼은 박수쳐준다.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치는 둥 하릴없이 서있다 이내 재미없어 침대에 누웠다. “후, 지겹다.” 문득 침대 옆에 고이 잠들어 있는 캡슐을 바라보았다. 나의 애인 1호인 이 캡슐은, 중학교 입학 때부터 내가 아끼고 사랑해준 나의 유일한 기계였었다. 다들 컴퓨터를 살 때 나는 이 캡슐을 구입하고 뇌파를 인식하는 게임을 즐겨왔던 것이었다. 덕분에 아직도 컴퓨터 한 대 없는 가엾은 고딩이지만 지금까지 후회 한 번 한적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것도 고물이 되어서 고물상에서 조차 받아주지 않는 말 그대로 유물급인 캡슐이 되어버렸다. 지금 나오는 캡슐은 자가 시스템으로 사용자가 들어가기만 해도 모든 걸 프로그램이 주인을 인식하고 최고의 편안함을 주어 24시간 안에 있어도 불편함이 없다는데 내 캡슐은 아직도 홍채인식을 할 때면 눈이 시리고 12시간만 누워있어도 몸이 찌뿌드드해졌다. “20세 게임이라.” 오늘 상천이가 알려준 게임이 문득 생각났다. 성인물 판타지라니 생각만 해도 아랫도리가 뻐근해져왔다. 한 번 어떤 건지 해보기라도 할까? “그러고 보니 어떤 게임인지 물어 보지도 않았네?” 누나는 게임회사 디자인을 맡고 있으니 알지도 몰랐다. 한 번 물어나 볼까? “누나, 혹시 20세 게… 에겍?” “잡았다, 요놈!” 맙소사, 지금까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역시 사악한 면은 나보다 월등히 우위를 차지하고 있단 말이야. 꼭 쥐구멍에서 나온 쥐 같잖아? 오호, 누나가 고양이라니 퍽이나 어울리군. “아야야야야, 그만해.” 머리카락 잡아당기는 고양이라니 말도 안 되지. “너, 밥 먹어야지. 어딜 어영부영 넘어가려고 그래? 너 때문에 엄마한테 시달리는 거 나도 질색이란 말야.” “아, 알았어. 밥 먹을 테니까 그만 놔줘!” 머리카락 한 뭉텅이는 빠진 것 같았다. 저 악력은 어떻게 기른 것일까 궁금하기 그지없군. “어서 먹어, 방금 차렸으니까.” 결국 또 저 생선 비린내 나는 이물질을 먹어야 하는구나. 휴우, 한숨만 나왔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20세용으로 판정받은 게임 나온 거 뭔지 알아?” “그거? 어제 남친이 한창 시작해서 나도 캡슐 방까지 끌려들어가 잠깐 했던 건데 이름이 뭐더라… 아스게이날? 아스가이날? 헷갈리네.” 그 남친이 왜 그랬는지 안 봐도 알겠다. “이미 시작했다고? 어땠어?” “밥 다 먹으면 알려줄게.” 젠장, 역시 나에 대해 너무 잘 아는 여자다. 이러면 먹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별수 없지 필살! “어머머, 밥만 다 먹으면 어떻게 해!” “우그그그, 켁켁! 푸후, 어쨌든 다 먹었잖아. 밥은 침과 섞이면 포도당이 나와서 달다구. 꽤나 먹을 만하다니까?” 누나의 질렸다는 표정이 너무도 잘 보였다. “그러셔? 댁이나 많이 드셔요.” “어쨌든, 어땠는데?” “음, 그게 꽤 하기 복잡했어. 자기 현재 신체 사이즈부터 데이터로 복원시켜야 할 수 있게 되어있어서 초음파 레이저까지 동원해 내 몸을 백업 했다니까. 그래도 시작하니깐 그럴만하다는 걸 알 수 있었지.” “어땠는데?” 갑자기 누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잉? 실성했나 왜 저런데. “너, 아까부터 어땠는데 라고만 말하는 거 알아?” 괜히 쑥스러워 졌다. “으, 약 올리지 마!” “알았어, 알았어. 그러니까 그 게임은 조금 달랐어. 내가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발바닥의 감각, 옷이 스치는 느낌뿐만 아니라 주위에 부는 바람까지 느껴질 정도로 정교… 아니, 현실과 같았어. 이번에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는 회사의 저력이 느껴질 정도라니까. 대충 하다가 말아서 더는 모르겠지만 이 누나도 직장만 아니었으면 시작했을지 몰라.” “와, 와, 와!” 계속 감탄사만 내 뱉는 내가 우스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진정 감탄했으니까. 정말 놀랍다. 이런 할 만할지도 모르겠다는 필이 팍! 하고 뇌리를 관통했다. 거의 돌진하다시피 방에 들어와 캡슐을 열어 몸을 뉘였다. 이 아늑함과 함께 딸려오는 풋풋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윽, 이거 방향제라도 뿌려야겠는데.” - 지잉. 내가 안정되게 눕자 캡슐 뚜껑이 자동적으로 닫쳤다. [메인 프로그램 작동. 실행시킬 프로그램을 부르십시오.] 자, 어떤 게임이라고 했지? 아, 그래. “아스게이날.” [오류. 잘못 부르셨거나, 있는 게임이 아닙니다.] “아스가이날?” [오류. 잘못 부르셨거나, 있는 게임이 아닙니다.] 젠장, 둘 다 아니라 이거지. 그렇다면. “아스파이널, 아르카디아, 아르디피아, 아스게이널, 아스카이널, 아브라카타브라!” [오류. 잘못 부르셨거나, 있는 게임이 아닙니다.] [오류. 잘못 부르셨거나, 있는 게임이 아닙니다.] [오류. 잘못 부르셨거나, 있는 게임이 아닙니다.] [오류. 잘못 부르셨거나, 있는 게임이 아닙니다.] [오류. 잘못 부르셨거나, 있는 게임이 아닙니다.] [오류. 잘못 부르셨거나, 있는 게임이 아닙니다.] “헉, 헉.” 첫 번째 시도는 무참히 박살나고야 말았다. “여보세요?” “야 이 자식아!” “어라, 기찬이냐? 웬일이야, 전화를 다하고.” “불러.” “뭘?” “불러!” “음… 수화기 상태가 불량인가. 헛소리가 다 들리네.” - 뚜, 뚜, 뚜. 쿨럭, 아무리 머리, 다리 다 때어서 말했다손 치더라도 무참히 끊어 버리다니. 뭐 이런 거룩한 자식이 다 있어! 아까의 두 배의 속도로 번호를 눌렀다. “아, 왜!” “그 20세 게임 이름이 뭔지 부르라고!” “아, 그거? 그건… 근데 그건 알아서 뭐하게? 하지도 못하잖아.” 움찔, 안 되겠다 마음을 가다듬자. “구, 궁금해서.” 젠장 나도 모르게 더듬고 말았다. “흠… 그래? 뭐 그렇다면야. 그 게임 이름이 아마 ‘아펜하르트’란 게임이었지?” - 뚝. 흥, 복수다. 나는 방으로 쏘아진 벌처럼 질주해 다시 캡슐에 누웠다. [메인 프로그램 작동. 실행시킬 프로그램을 부르십시오.] “아펜…….” 잠깐, 생각해보니 열 받네. 이놈의 눈팅이는(누나를 막 말할 때 자주 쓰는 언어다)뇌의 주름이 없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맨 앞에 ‘아’자하고 다섯 글자라는 것만 빼고 죄다 틀릴 수 있는 것일까. 억양도 완전 틀리잖아? [오류. 잘못 부르셨거나, 있는 게임이 아닙니다.] 기계 음성으로 인해 정신이 돌아온 나는 화를 삭이고 일단 게임 이름을 불렀다. “아펜하르트.” - 위이이이잉.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음, 오래 걸릴까? 그나저나 성공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어마어마한 생각을 하고 있다. 그건 일명 사기. 법적으로 처벌 받을 수 있는 짓을 하려하는 것이다. 한때 주민등록 생성기로 무한 아이디를 만들고 게임했던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 그런 짓이었지만 지금 뇌파를 이용하는 게임이 개발 되고부터 그 사람의 모든 데이터가 주입되는 터라 사칭하거나 상대의 아이디를 역용하는 짓은 중벌로 간주되게 법이 재편 되었고 최소 징역 3년에 처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라, 남성이 여성의 아이디로 들어가서 온몸을 벋고 스트립쇼를 했다면 그건 그 여성의 인권침해요 어쩌면 성희롱에 강간까지 해당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지금이야 홍채, 음성, 지문인식까지 게임에 적용되어 절대 그런 짓은 무리겠지만 간혹 해커들이 자가 프로그램을 만들어 한다고 신문에 나오니 아예 못하는 건 아닐 것이었다. [용량이 부족합니다. 용량을 확보해주십시오.] “엥? 용량이 부족해? 넉넉하게 있었을 텐데. ‘무림일대기’삭제.” [‘무림일대기’삭제 합니다.] [용량이 부족합니다. 용량을 확보해주십시오.] “또? ‘어나더월드’삭제.” [‘어나더월드’삭제 합니다.] [용량이 부족합니다. 용량을 확보해주십시오.] “젠장, ‘이스’ ‘시하르’ ‘아르카디아 연대기’ 전부 삭제.” [‘이스’ ‘시하르’ ‘아르카디아 연대기’삭제 합니다.] - 위이이이잉. 결국 다 삭제 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나는 드디어 이 게임을 다운 받는데 성공했다. [‘아펜하르트’실행합니다. 아이디 및 비밀번호를 음성으로 입력해주십시오.] 왔다.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나는 다시 목을 가다듬었다. 아이디와 비번은 항상 하나만 사용하는 누나니까 분명 이걸 거야. “아이디 나소연, 비밀번호 예쁜이.” 닭살이 돋는 비밀번호 이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되라 제발 되! […입력되었습니다. 홍채인식을 합니다.] “아싸 됐다!” 홍채를 인식하는 센서가 내 동공을 파고들었다. [입력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나소연님. ‘아펜하르트’에 접속하시겠습니까?] 자, 여기서 왜 내가 홍채인식을 무사히 넘겼을까 모두 궁금해 할 거라 생각된다. 답은 간단하다. 홍채가 누나와 난 같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사기라고 말 할 수도 있지만 어째서 인지 우리 남매는 태어날 대부터 눈동자만큼은 누구보다 똑같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고 훗날, 정말 몇 십만 분의 일 확률로 같은 홍채라는 걸 알았을 땐 세간이 놀랄 정도로 이슈가 되었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당시 간드러지는 눈팅 목소리를 뱉었다. “접속.” [접속되었습니다, 즐거운 시간되십시오.] 나는 천천히 가수면 상태에 빠져 들었다. <아펜하르트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예쁜이’님 시작 포인트로 이동합니다.> “자, 잠깐. 보통은 캐릭터 생성되는 장소에 가야하는 거 아냐?” 눈앞이 확 하고 밝아 졌다가 나타나는 풍경에 감탄사를 내질렀다. “우와, 정말 현실 같잖아? 그래픽이 아니라 진짜 하늘이네.”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나는 주위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문득 내 모습을 보았다. 잘록한 허리, 풍만한 가슴, 쭉 뻗은 다리하며 세간의 말을 빌리자면 완벽한 S라인을 그리는 이 몸은 누구의 몸일까. 펄럭 거리는 소매를 걷어 팔목을 보니 얇은 상처 하나가 보였다. 이건 분명 저번 주에 내가 장난하다 누나에게 상처 낸 그 자국이었다. 최근에 누나가 몸을 백업했다했으니 이건 분명 눈팅의 몸일 것이었다. “하하하… 캐릭터를 다시 생성할까. 캐릭터 온!” 나는 손가락을 번쩍 들어 어느 모 게임의 설정된 말을 외쳤다. -찌르르르르르, 찌르르르. 작은 새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그 상태 그대로 3분 동안 굳어 있었다. “도움말도 없이 그냥 무작정 시작했으니 당연히 모를 수밖에. 그렇다면…….” 내 옆을 지나가는 어느 마법사(로브를 입고 있어 편할 대로 생각했다)에게 다가가 질문했다. 물론 두 팔로 가슴을 모으고 매우 매혹적인 미소를 짓는 걸 잊지 않았다. “저기요, 마법사님~” “헉!” - 펑! <상대가 정신혼란을 느끼고 소량의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매혹’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무, 무슨 잡소리야! 어째서 이런 것에 데미지를 입는 건데? 아니 그 이전에 ‘매혹’이란 스킬은 왜 생성 되는 건데? “헉, 헉. 마법 수련 때문에 정신집중 상태였는데…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 않습니까?” 음, 뭔지 모르겠지만 미안했다. 그런데 왜 화를 내고 난리야? “무슨 소리에요? 제가 뭘 했다고 죽을 뻔해요.” “아, 아닙니다. 뭐, 죽지 않았으니 넘어가죠. 그나저나 왜 부르셨죠?” 아, 그렇지. 깜빡 잊을 뻔했네. “이 캐릭터가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생성하려고 하는데요. 어떻게 해야 하죠?” “간단합니다. 일단 캐릭터를 삭제하고 신체를 백업한 다음, 다시 생성하면 됩니다.” 다시 신체를 백업……. 다시 신체를 백업……. 다시 신체를 백업……. 저 말이 내 머릿속에 한동안 맴돌았다. 맙소사, 결국 나는 남자캐릭터로 못한다는 말이 아닌가. 물론 이 몸매도 나쁘진 않지만 거짓으로 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꽤나 꺼림칙한데. “아하하, 감사합니다.” “뭘요. 초보자이신가보죠? 더 궁금한 사항은 없으신가요?” 그것을 계기로 나는 이 게임 시스템에 관해서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이 게임은 현실과 더욱 근접하기 위해서 사람의 신체를 도입해 자신만의 캐릭터 단 하나를 만들 수 있다는 거였다. 완벽한 신체 백업을 통해 자신이 남성이거나 여성이란 것을 거짓으로 만들 수 없고, 오직 인간부터 시작 되어 후천적으로 게임에 룰에 따라 변하는 것 빼면 자신의 외모까지도 변형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게임 상에서 눈이 맞고 지금같이 진짜라는 인식 때문에 놀랄 수도 있는 것이었다.(누나가 잘났긴 잘났나 보다) 두 번째. 이 게임의 룰은 J. R. R 톨킨 반지의 제왕을 토대로 한 전통 유럽 판타지를 배경을 기본 바탕으로 하되 자기만의 독창적인 요소를 접목시켰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여기서는 직업이라는 게 따로 없었다. 전사, 마법사, 궁수, 프리스트 등등 기존에 있는 간단한 직업이 설정되어 시작되지만 이건 어느 때든 변한다고 한다. 즉, 자기 마음먹기에 따라서 궁수지만 마법을 쓰는 궁수라거나, 전사지만 힐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 스킬 개념이 무척이나 특이했다. 여기서는 스킬 북을 구입해서 익힌다는 설정이나 계열만의 기존의 스킬을 익히는 그런 스킬이 아예 없다. 이곳에서 명명하는 스킬은 현실스킬 즉, 자신이 숙련되어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스킬이 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땅에 떨어진 돌을 던진다고 해보자. 그 돌을 그냥 던지면 앞으로만 날아가지만 자신이 하루 종일 노력해서 야구선수처럼 변화구가 된다면 그것은 숙련 된 것이므로 ‘돌 던지기’스킬이 된다는 것이다. 일단 스킬이 되면 그것은 더욱 숙련 시킬 수 있고 돌을 더욱 큰 바위로, 바위를 1개가 아닌 3~4개 이상을 던질 수 있게 숙련 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스텟이란 것이 필요했다. 힘에 와장창 투자해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내가 ‘아펜하르트’를 처음 시작해서 배운 스킬은 ‘매혹’이 되었다. 숙련이란 것 자체가 불가능한 남성인 내가 어째서 이런 황당 무괴하고 쓸데없는 스킬을 배우게 된 건지 아직도 알 수 없었지만 나의 시작은 그렇게 순탄치가 않았다는 걸 이참에 말해둔다. 젠장, 젠장, 젠장. 나는 지금 마을 중앙 분수대를 빙빙 돌며 생각 하고 있다. 그래, 사실대로 말하자면 제대로 궁상떨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적어도 이게 무슨 직업인지는 알아야지.” 비록 원치 않아 누나의 신체로 백업되어 들어왔지만(사실 내가 멋대로 들어왔지만.)알건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에, 그러니까. 열려라, 마음의 문이여… 이었던가.” 가슴에 두 손을 모아 작게 읊조리자 눈앞에 상태창이 오픈 되었다. 이것도 황당하다. 보통 ‘상태창 오픈’이거나 머릿속으로 생각하면 뿅하고 떠야 하는데 무슨 연극도 아니고 제스처까지 취해야 하는 걸까. 열려라, 마음의 문이여? 낮 간지러워서 대중들 앞에 이런 말을 할 수나 있을까? 성별 여 이름 예쁜이 종족 인간 나이 23세 직업 마법사 Level 1 소속 - 칭호 - 힘 1 월(月) 0 민첩 1 암(暗) 0 체력 1 화(火) 3 지능 10 수(水) 3 정신력 10 목(木) 3 행운 1 금(金) 0 탄력 1 토(土) 3 방어 1 천(天) 0 종족특성 : 없음 칭호특성 : 없음 직업특성 : 없음 포인트 : 0 스킬 1. 매혹 <숙련도 1/100> 6. 2. 7. 3. 8. 4. 9. 5. 10. “마법사라… 레벨은 아예 올릴 생각도 안했군. 그래도 꼴에 뭐 좀 안다고 처음 포인트 분배를 지능과 정신력에 투자했네.” 여기 포인트는 자신의 스텟에다 분배 할 수도 있지만 속성 란에 줄 수도 있었다. 저것은 친화력과 저항력을 말한다는데 이 캐릭터는 법사라서 기본 5대 원소에서 4원소에 주어진 듯 보였다. “어쩐다. 마법사를 해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마법사치고 뭐 기본 마법도 없고, 아이템도 없고. 주먹질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하다 거슬리는 스킬 하나의 존재가 보였다. 여기선 한 캐릭터 당, 단 10개밖에 스킬을 주입시키지 못한다는데… 한 번 배우면 다시는 취소도 안 된다는 말이었다. “아아아아아아! 그런데 이게 뭐야!” 지나가던 주위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뭐라 한 마디씩 하려다 나의 외모를 보고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외침으로 인해 상대의 스태미나가 하락했습니다.> <‘고성방가’스킬을 배우셨습니다.> <‘매혹’의 숙련도가 10 상승했습니다.> “우어어어어어어어…….” 이렇게 나의 두 번째 스킬은 ‘고성방가’가 되었다. “저기… 님, 어디 아프세요?” “으으읍.” “왜 입을 막고 있으세요.” “으으으으읍!” “거참, 이상한 유저 다보겠네.” 녹색의 원피스를 입은 여성 유저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지나갔다. 그렇다. 나는 지금 또 어떤 스킬이 강제로 주입될지 몰라 나를 철저히 봉쇄하는 것이었다. 움직이지 말라, 말도 하지 말라, 생각도 해서는 안 되느니.(훗날에 안 거였지만 사실 스킬 찾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니며 나 같은 타입은 희귀케이스라고 불렀다.) “어라? 님은 아까 그분?” 고개만 들어 말 걸은 상대를 쳐다보았다. 가장 처음 본 그 마법사였다. <‘매혹’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 이 녀석… 반했군. “흠흠, 무슨 풀리지 않는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어쭈, 표정관리해라. 벌건 모습이 아주 밉상이었다. “어떻게 키울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요.” 일단 목을 가다듬고 눈팅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어휴, 내가 저런 놈을 상대로 뭐하는 짓인지. “어떤 직업이신데요?” “마법사라 되어 있네요.” “되어 있다고요?” 아차, 실수다. 일단 나의 필살 완소미(완전 소중한 미소다.)로 무마해야겠다는 생각에 방긋 웃었다. <‘매혹’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알기 쉬운 놈. “그냥 그렇게 직업란에 명시되어 있다고요.” “그, 그렇죠? 하하하, 난 또, 해커가 조종하는 거 아닌가하는 황당한 생각을 했네요.” …수정해야겠다. 의외로 무서운 놈이다. “그나저나 마법사라면 키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하나는 직접 전투하며 경험을 쌓는 전투법사가 있는가 하면 저처럼 매일 책이나 읽고 생각하며 지식과 정신력을 올리는 마학자 타입이 있죠.” 이 녀석, 조금 유식한데? “어떻게 그런 걸 다 알고 계세요?” “제가 워낙 책을 좋아하는지라 이것저것 보다보니 알게 된 잡다한 지식이에요.” 녀석, 칭찬해주니 좋텐다. 그나저나 그럼 나는 어쩌면 좋을까. 일단 책을 잃는 건 귀찮으니 패스하고 나머지 남은 전투법사로 가야하나? “전투법사로 간다면 그에 따른 좋은 점이나 나쁜 점을 알고 계세요?” “그쪽으로 기울었나보죠? 그럼 그 방면으로 자세히 알려드리죠. 아직 오픈 된지 일주일 밖에 안 됐는지라 후일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단체전에 특화된 스킬을 배운다고 해요. 지금까지 나와 있는 전투법사의 대표적인 스킬은 더블스펠, 원소 친화력, 무기 원소주입이 있죠.” 뭔지 모르겠지만 ‘매혹’이나 ‘고성방가’보단 좋아 보였다. 그래서 눈을 초롱초롱 뜨고 더 말 해달라는 모션을 취했다. “화, 수, 목, 토의 스텟을 올려주는 원소 친화력은 숙련도가 증가함에 따라 포인트가 증가하죠. 무기원소 주입은 전투법사의 고유스킬과도 같은데 일반 무기에 특정 원소를 주입하여 그 원소의 고유 힘을 더 끌어 올리거나 직접 공격하기도 하죠. 마지막으로 더블스펠이라는건 아직 공격마법이 뚜렷이 나온 게 아니라서 쓸모는 없지만 훗날 가장 기대되는 스킬이기도 해요.” 녀석은 꽤나 즐겁게 설명해주었지만 왠지 나는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후우, 힐러란 뭘까요.” 뜬금없는 내 말에 녀석은 답했다. “힐러요? 지금은 실상 힐러가 없는 상태죠. 직업이야 사제가 있긴 하지만 정작 힐을 하는 스킬 자체가 없으니 빛으로 공격을 하고 있긴 한데 그게 힐러 인가요? 그냥 법사지.” 의외의 정보가 들어왔다. 지금은 실상 힐러가 없다? 그럼 내가 힐러를 택했어도 힐러가 아니라는 말인데… 반대로 말해서 힐러를 택하지 않았어도 힐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조금씩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 필드로 나가죠. 전투법사를 하시겠다면 제가 조금 도와드릴게요.” 어쭈구리, 언제 우리가 되었지? 뭐, 넘어가고 일단 나는 간드러지게 웃었다. “네, 감사해요.” <‘매혹’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이놈 변탠가. 마을 밖, 초원으로 나왔다. 짙게 깔린 잔디가 온 땅을 매우고 있었는데 듬성듬성 있는 나무들이 밋밋함을 감춰주고 있어 퍽 나쁘지 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여기가 ‘아페타 마을’의 있는 녹색초원이란 필드에요. 주로 나오는 것은 동물이기 때문에 선제공격을 하지 않아 초보유저에게 사랑받는 필드이기도 하죠.” 나는 무심코 듣다가 내가 있던 마을이 아페타 마을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페타 마을이라… 나쁘지 않은 마을이네요.” 멍하니 마을을 바라보았다. 내 두 번째 스킬인 멍 때리기 스킬이 발동된 것이었다. 밖에서 본 마을의 모습은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듯 보였다. 여기저기 뾰족이 깎은 기둥의 탑들이 있어 들쑥날쑥 했지만 잿빛과 거의 같은 계통의 돌을 쌓아서 그런지 통일된 모습이었다. 어찌 보면 웅장하기까지 했다. 갑작스레 바람이 불어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가 얼굴을 가리는 걸 방지하기 위해 어깨너머에 있는 머리들을 등 뒤로 쓸어 넘겨야했다. <‘매혹’의 숙련도가 25 상승했습니다.> 엥?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멍 때리기 스킬을 그만두고 주위를 둘러보자 하나같이(남자들만)나를 보며 입을 쫙 벌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물론 내 옆에 있는 이 녀석도 포함이다) “순간 빛이 나는 것 같았어.” “인간 맞아? 저게 본 모습이라고? 혹시, 종족이 천사 아니야?” “분명히 그럴 거야. 이번에 처음으로 나온 종족인가 봐!” 그 밖에도 별 황당한 웅성거림이 있었으나 못들은 걸로 하겠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겠네요.” “아… 음… 네? 어, 어디로… 으헉!” 정신 좀 차려라 이 녀석아! 나는 녀석의 손을 붙잡고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달렸다. <‘매혹’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매혹’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매혹’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이 자식아, 그깟 손 하나 잡은 거 가지고 5초마다 반하지 말란 말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뭔가 마구 꼬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 뒤에 서 계세요. ‘정신집중’스킬 발동, 불 속성 교합, 화이어!” 녀석의 외침에 나타난 불덩이는 저 앞에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고 있던 노루 한 마리를 깨끗하게 불태워 버렸다. “원샷, 원킬이네요.” “하하, 기본 속성만 써서 화이어를 날리면 이정도 파워가 나오지 않는데 마학자의 고유스킬 ‘정신집중’이 속성 파워를 올려서 가능한 거예요.” 또 좋텐다. 그렇게 우리 둘은 한동안 주위 동물 죽이는데 시간을 때웠고, 레벨이 올라가는 걸 간간히 느끼며 서있던 나는 왼편에서 사냥터를 지나가는 파티의 모습이 보여 멍 때리기 스킬 시전으로 인해 생각지 못하게 지켜보게 되었다. “아타셰님, 그러게 렙도 적으면서 왜 나섭니까. 그냥 뒤에서 보조나 하시라니까.” 한 얍삽하게 생긴 놈의 말이었다. “그게… 위험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백색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검은 단발머리의 작은 소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한 말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게 뭡니까. 다시 고블린 소굴까지 걸어가야 하지 않습니까. 힐러가 힐을 못하면 뒤에서 빛의 화살이나 쓰시지 왜 나서서 저희 파티에 피해를 주냔 말입니다.” 우람한 덩치에 전사 같은 놈이 한 말이었다. “저기… 죄송합니다.” 작은 소녀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이는데 마지못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못 봐주겠다. 도저히 못 봐주겠다. 다섯 명이 모여 있는 파티에 다가가 그 대장격인 것 같은 우람한 덩치 앞에 섰다. “당신은 뭐, 뭐야?” 그리고 뒤 돌아 네 명에게 핍박받아 고개 숙이고 있던 여성유저 얼굴에 거칠 것 없이 손을 올려붙였다. - 짝. 그리고 정적. 모두 경악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말했다. “당신은 자존심도 없어요?” “아… 아…….” 충격이 큰 듯, 그 여성유저는 말을 잇지 못했다. “힐러의 고충도 모르는 저런 바보 같은 것들에게 핍박받았는데 화나지도 않아요?” “…….” “아무리 묵묵히 뒤에서 보조만 한다고 저들이 모든 걸 같잖게 보는데 어떻게 죄송하다는 말이 나올 수 있죠? 적어도 힐러라면… 적어도 힐러라면! 다른 건 몰라도 뒤에서 벌어지는 룰과 자부심만은 반박 하란 말야!” 이건 나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힐러란 무엇일까 계속 고민하고 속에 응어리 맺힌 이 답답함이 드디어 입 밖으로 터져 나온 것이었다. - 퍽! “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등에서 찌릿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설마 발로 차인건가? 무방비 상태의 사람 등을? “못 들어주겠구만. 여자들끼리 쫑알쫑알 신파극 하는 것도 아니고 너도 힐러인가? 내 이참에 힐러들을 몰살시켜주마!” “차, 참아 기태야!” “저 무식한 놈, 또 성질 폭발했네.” 힐러는 언제나 약자다. 앞에서 받쳐주지 않으면 힐러는 살지 못했다. 어찌 보면 공생관계. 그래, 그게 문제였어. 힐러는 강해야 돼. 그리고 앞에 서야 돼. “킥킥킥.” “…….” “…….” 내 웃음이 꽤나 소름끼쳤던 모양일까. 다들 표정이 굳었다. 그 정도로 내 웃음의 여파는 강했던 것 같다. 일이 심각해진 것 같아 달려오던 마법사 그 녀석도 그 자리에서 멈칫 했을 정도니까. <‘고성방가’의 숙련도가 20 상승했습니다.> <‘고성방가’의 숙련도가 20 상승했습니다.> <‘고성방가’의 숙련도가 20 상승했습니다.> <‘고성방가’의 숙련도가 20 상승했습니다.> <‘고성방가’의 숙련도가 20 상승했습니다.> <‘고성방가’스킬이 업 되었습니다. 스킬명이 ‘침묵의 웃음’으로 바뀝니다.> “결정했다.” 천천히 일어나 날 차버린 전사의 눈을 주시했다. 그리고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침묵의 웃음’의 숙련도가 20 상승했습니다.> “나는 강해지겠다. 그래서 앞에 서겠다. 나는 힐러의 사령관이 되어 주겠다!” 그리고 나는 그 전사에게 죽었다. <‘예쁜이’님은 전사 하셨습니다.> <포인트 및 경험치가 일부 하락하며 가까운 마을 광장에서 부활 합니다.> <접속을 해제하시겠습니까?> <‘아펜하르트’접속을 해제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 딩동댕동~ - 덜커덩! “헉, 헉. 세, 세이프!” “오오오.” - 짝짝짝. 종과 동시에 들어온 나는 주위 사람들의 갈채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나기찬, 네가 어쩐 일이냐? 늦게 다 오고.” “늦잠 좀 잤다.” “늦잠? 늦게 일어날 때는 한창 재미있는 게임을 시작할 때뿐이었는데.” 책상에 고개를 파묻으며 못들은 척했다. 이놈한테는 그냥 회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설마…….” “서, 설마?” 찔리는 게 있어 움찔하는 나. “그 패키지 게임 산거 아냐?” “…….” 역시 저놈은 눈치가 제로였다. “야, 나도 좀 하자. 치사하게 혼자 하기냐?” “없어.” “거짓말.” “진짜야.” “뭘 믿고?”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하하, 알았어, 인마. 그보다 전에 내가 말한 ‘아펜하르트’게임 있잖아… 응? 왜 움찔 하냐?” 나도 정말 거짓말 잘 못하는 타입 같았다. “그 게임이 지금 엄청 뜨고 있다나봐. 어제 올라온 동영상인데 대박이라니까?” “동영상?” 왠지 소름이 돋는 이 기분. 어째서 일까. ‘심연의 눈’이 발동하려 했다. “그래! 그 동영상이 말이지… 이리 와봐 지금 홈피 들어가면 핫이슈로 뽑혀 있으니까.” 녀석은 나를 질질 끌고 교탁 옆에 있는 작은 컴퓨터로 다가가 세워 놓았다. “에, 그러니까. 아! 여기 있다.” 흥미 없는 척 했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게임광이었으므로 그 핫이슈라는 것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그것은 아펜하르트 게임 상에서 한 유저가 찍은 동영상이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어느 녹색 초원이었는데… 잠깐, 초원? 어느 한 지점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여성유저를 찍은 동영상이었다. 그 여성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한 천상의 낙원이었고, 바람에 휘날리는 그녀의 머리칼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맙소사. 저 천상의 낙원은 뭐야. 그리고 내 머리가 언제 금색이 되었지? 포샾질의 절정이잖아! 마지막은 더 가관이었다. 살짝 미소 짓는 얼굴이 나오고 (아페타 마을의 웅장함을 느낄 때 나도 모르게 미소 지었나 보다.)아래 자막으로 ‘아펜하르트로 오세요, 당신만을 위한 천사가 기다립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말 예쁘지 않냐? 너희 누님과 겨뤄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니까.” 우리 눈팅 맞습니다요. “그러고 보니 너희 누님하고도 닮았는데? 예쁜 건 다 똑같다는 말이 사실 인가봐.” 그러니까 우리 눈팅 맞대도? 머리가 지끈거려 온다. 포토샾질로 인하여 대부분 눈팅의 본 모습을 모르겠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걸 눈팅이 보게 되어 눈치를 챈다면 나는 정말 천사가 되어 천당에 올라가 하프를 연주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물론 맞아죽어서) - 덜컹. “나왔어.” 언제나와 같이 어두침침한 집을 들어오며 짧게 말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유심히 둘러보며 혹시나 눈팅이 있지 않을까 조마조마 했다는 것 정도? 나는 긴 정적감에 안심하고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나 오늘 야근한다. 엄마가 너 꼭 밥 먹이라고해서 식탁 차려 놨으니까, 밥 먹고 일찍 자라.> 식탁위에 써져 있는 메모장이었다. 아주 날 밥 돌이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이건 밥 먹여 죽일 작전이 분명해. 식탁보를 살짝 들추자 역시나 어제 나왔던 고등어조림이 어김없이 식탁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밖에 반찬은 더미로 올려 있을 뿐이었다. “고등어조림으로 객사 시킬 작전일지도 몰라.”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나는 방으로 들어가 캡슐에 몸을 뉘었다. [메인 프로그램 작동. 실행시킬 프로그램을 부르십시오.] “아펜하르트.” [‘아펜하르트’실행합니다. 아이디 및 비밀번호를 음성으로 입력해주십시오.] “아이디 나소연, 비밀번호 예쁜이.” 이젠 완전히 익숙해져 버린 이 말투에 잠시 오금이 저렸지만 뭐 어떤가, 말 뿐인데. […입력되었습니다. 홍채인식을 합니다.] 홍채를 인식하는 센서가 내 동공을 파고들었다. 이건 아무리 익숙해도 기분이 결코 좋지 않은걸. [입력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나소연님. ‘아펜하르트’에 접속하시겠습니까?] “접속” [접속되었습니다. 즐거운 시간되십시오.] 나는 익숙한 기분으로 천천히 가수면 상태에 빠져 들었다. <아펜하르트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예쁜이’님. 시작 포인트로 이동합니다.> 맑은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자 내 앞은 분수대가 힘차게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어제 죽고 여기서 다시 부활한 것이었다. ‘나는 강해지겠다, 그래서 앞에 서겠다. 나는 힐러의 사령관이 되어 주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진장 낮 간지러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결정했다. 이제 진지하게 이 게임에 임해볼 작정이었다. “일단 나에 대해 자세히 알아둘 필요성이 있겠어. 열려라, 마음의 문이여.” 성별 여 이름 예쁜이 종족 인간 나이 23세 직업 마법사 Level 5 소속 - 칭호 - 힘 1 월(月) 0 민첩 1 암(暗) 0 체력 1 화(火) 3 지능 10 수(水) 3 정신력 10 목(木) 3 행운 1 금(金) 0 탄력 1 토(土) 3 방어 1 천(天) 0 종족특성 : 없음 칭호특성 : 없음 직업특성 : 없음 포인트 : 20 스킬 1. 매혹 <숙련도 42/100> 6. 2. 침묵의 웃음 <숙련도 21/100> 7. 3. 8. 4. 9. 5. 10. 어제 잠깐 그 마법사 녀석이 도와줘서 5레벨이 된 모양이다. 포인트 20이 생겼지만 일단 뭘 올려야 할지 모르므로 패스하고… 아, 그러고 보니 스킬 설명도 지금까지 안 봤잖아. ‘고성방가’가 ‘침묵의 웃음’으로 바뀐 것도 신기하고 이참에 봐둘까. “열려라, 잠재 된 힘이여.” 1. 매혹(패시브) - 간혹 상대를 유혹 시킨다. 매우 강력한 미모만이 습득 할 수 있는 고유 스킬. 2. 침묵의 웃음(패시브) - ‘고성방가’의 변화형 스킬. 강력한 카리스마로 상대를 경직 시킨다. 설명만으로는 하나도 모르겠다만 꽤나 좋지 않아 보이는 이 스킬들을 어찌 이끌고 사냥해야 하나 심히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정말 버스 아니면 렙업은 꿈도 못 꾸겠는 걸?” 아이템도 없겠다. 돈도 없겠다. 가진 건 외모뿐이라는 건가. “어? 저분 설마 그 동영상에 나온 유저 아냐?” “비슷하긴 한데 머리가 검정색인 걸?” “아냐, 봐봐. 얼굴이 비슷하잖아. 옷차림도 그렇고.” 망할, 이젠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할 판이다. 일단 나는 광장을 벗어나기로 했다. 후드가 달린 로브 같은 거 어디 없을까? 광장을 벗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작은 아이템 가게가 눈에 보였다. - 딸랑. “어서 오세요 손님. 무엇을 드릴까요?” 우람한 덩치에 작은 콧수염이 매우인상적인 주인이 한 말이었다. “저기… 얼굴을 가릴 만한 그런 거 없나요?” 돈이 없어서 일단 입고 있는 초보자용 옷이라도 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런 옷은 몇 백 벌 있어도 쓸모없을 테니까. 그래도 이거 쪽팔려서 도저히 얼굴이 들리질 않네. “아, 로브를 말하는 거군요. 어디보자, 방어하기 좋은 체인로브부터, 가죽, 천 등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가장 싸 보이는 천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우물거렸다. “저걸로 할게요. 그런데… 저기, 물물교환도 되나요?” “음? 물물교환 이라면 어떤 것으로…….” 내 겉옷을 집게손가락으로 집어 살짝 들어 올리자 조금씩 주인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이거 손님이 아니라 거지였나? 이봐요, 보아하니 여성 같은데 우리 가게는 자선사업 하는 곳이 아닙니다.” 역시나인가. “하하, 미안해요. 역시 될 리가 없겠죠.” 나는 헤프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매혹’ 스킬 발동.> <‘매혹’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침묵의 웃음’ 발동> <‘침묵의 웃음’의 숙련도가 10 상승했습니다.> “아, 아니. 꼭 그렇다고는… 아! 생각해보니 이건 쓸모가 없는 물건이군요. 이참에 버리려고 했는데 그러니까, 저기… 괜찮으면 입으셔도 됩니다.” “…….” “…음, 싫으십니까?” “…….” 이거 뭔가 될 것 같은 기분. “이거 어쩌죠? 정말 감사해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아름다운 미소를 던졌다. <‘매혹’ 스킬 발동.> <‘매혹’의 숙련도가 10 상승했습니다.> “저, 여기 지팡이, 가죽 옷, 가죽바지, 가죽신발도 처분할 생각이었는데 이것도 괜찮으시다면…….” “어머머, 어쩌죠? 이렇게까지 해주시다니, 호호호.” 간드러지게 최대한 헤퍼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웃어주는 센스! 이건 어떠냐? <‘침묵의 웃음’ 발동> <‘침묵의 웃음’의 숙련도가 20 상승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분이 입는다면 저에겐 더 없이 영광일 것입니다. 다음에 또 찾아 주세요. 물건을 싸게 팔아 드리겠습니다.” <‘멘히버 아이템 가게’의 호의도가 많이 올랐습니다.> <‘멘히버 아이템 가게’의 상태가 우호적이 되었습니다.> <‘아페타 마을’의 호의도가 조금 올랐습니다.> 호의도 라는 시스템에 관해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는 다른 게임을 해봐서 알 것 같기도 했다. 호의도가 높아 물건을 싸게 산다거나 비싸게 팔 수 있는 유용한 시스템이겠지. 일단 밖으로 나와 로브부터 둘러 쓴 후, 내가 받은 아이템에 대해 체크해보았다. - 한손 나무 지팡이 (일반) 숙련도 1/100 초보 유저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지팡이. 직접 공격하거나 마법을 사용할 때 정신집중의 도움을 준다. 변형은 최대 3번까지 가능하며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사용이 편안해진다. - 천 로브 (일반) 숙련도 1/100 초보 유저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천 로브. 추위를 어느 정도 막아 줌. 변형은 최대 3번까지 가능하며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사용이 편안해진다. - 가죽 상의 (일반) 숙련도 1/100 초보 유저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가죽 상의. 추위를 어느 정도 막아 주며 충격도 어느 정도 흡수해준다. 변형은 최대 3번까지 가능하며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사용이 편안해진다. - 가죽 바지 (일반) 숙련도 1/100 초보 유저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가죽 바지. 추위를 어느 정도 막아 주며 충격도 어느 정도 흡수해준다. 변형은 최대 3번까지 가능하며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사용이 편안해진다. - 가죽 신발 (일반) 숙련도 1/100 초보 유저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가죽 신발. 추위를 어느 정도 막아 주며 충격도 어느 정도 흡수해준다. 변형은 최대 3번까지 가능하며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사용이 편안해진다. 간단히 말해 이제 나는 초보용 세트를 장비 했다는 말이 되는군. 이 지팡이로 동물을 때려잡을 수도 있겠는 걸? 하지만 이제 알아버린 관계로 노가다 같은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나의 스킬 ‘매혹’ ‘침묵의 웃음’은 의외로 쓸모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여기저기 거리를 활보해 다녔다. 그러며 간혹 유저들을 통해 용병 시스템에 관에 물어보니 아직 용병이란 개념은 구현 되지 않았으며 회사에서도 언급을 회피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이 게임은 현실을 기본 바탕으로 깔린 게임이었다. 용병 같은 시스템은 회사에서 구현 하는 게 아니라 현실 같은 NPC에게 도와달라고 해서 같이 싸우면 그게 용병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현이고 뭐고 그냥 우리가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생각은 쉬웠지만 실행은 좀처럼 어려웠다.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부탁할지 막막했던 것이다. 이리저리 골목을 기웃거려도 보고 마을 곳곳을 찾아 봤지만 내가 찾을 만한 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또 어느 골목을 기웃 거릴 때였다. <퀘스트 ‘도적들의 습격’이 발동 되었습니다.> “거기 지나가는 아리따운 여성, 잠시만 우리 얘기 좀 들어 주겠는가?” “우리가 조금 돈이 없어서 그런데 돈 좀 가진 거 있나?” 나는 왜 스킬을 처음 받을 때도 그 모양이고 필드를 처음나간 것도 그렇고 어째서 모든 처음 시작하는 건 안 좋은 일뿐일까? 일단 피해보기 위해서라도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가진 게 없어서 어쩌죠?” <‘매혹’ 스킬 발동.> <‘매혹’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생각이 바뀌었다. 이제 돈은 필요 없어.” “야, 첫 번째는 나야!” <퀘스트 ‘도적들의 습격’이 ‘강간범’으로 정정 되었습니다.> “…….” 망할, 생각해보니 그렇다. 지금 내 스킬은 착한 사람들에겐 매우 유용한 스킬이었지만 저런 부류한테는 반대로 독이 아닌가. “하하, 노, 농담이지? 설마 진짜 강간하겠어?” “괜찮아, 안 아프게 살살 해줄게.” 문득 상천이의 예전 말이 떠올랐다. ‘성인물이다. 그것도 할 수 있어. 게다가 진짜 실체감을 느끼는 뇌파인식 컴퓨터로 하는 게임이라 오감이 현실과 똑같대!’ 오감이 현실과 똑같대……. 오감이 현실과 똑같대……. 오감이 현실과 똑같대……. 이봐, 그래도 강간 당한다란 말은 없지 않았냐고. 천천히 음흉한 눈빛을 발하며 다가오는 3인조 형씨들을 보자니 저절로 뒷걸음질 쳐졌다. “하하, 저기 전 남자인데 안 봐주나요?” “그런 거짓이 속는 도적이 있다면 그 놈의 눈깔은 동태눈일 것이야, 흐흐.” 당신들을 전부 동태눈으로 인정 합니다. “앙탈 그만 부리고 이리와… 아니, 우리가 가지. 음하하하하!” 왁, 어억! 이, 이봐, 농담은 그만둬! 난 남자란 말이야! - 퍽, 퍼버버벅! “어윽!” “악!” “컥!” 비명도 다양한 3인조 도적… 아니 강간범이었다. “소연아, 괜찮아?” 난 급히 옷을 추스르며(진짜 말 못할 정도로 쪽팔렸다)생각했다. 저 목소리, 저 억양, 그리고 우리 눈팅을 알고 있는 인물이라면……. “서, 설마! 태식이 혀… 오빠?” “그래 혀오빠는 모르겠다만 그 오빠는 맞다. 그때 안할 거라면서 혼자 하고 있었다니 좋으면서도 꽤나 쓸쓸한 걸?” 인상 좋게 미소 지으며 긴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는 저 인물은 우리 눈팅의 애인인 황태식 형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난 건데 우리 눈팅이 이 게임을 시작한 이유가 바로 저분의 독촉 때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한마디로 나는 망했다. “아하하, 어쩐 일로 여기를 다.” “음? 말투가 조금 이상하다? 평소에는 내 위에 앉는 사람이 왜 이리 소심해졌어?” 내 ‘심연의 눈’이 위험 200%를 감지했다. “조금 놀라서요.” 그리고 나의 최강 미소파워를 날렸다. “뭐야, 그 요상한 미소는?” 맙소사! 이 인간에게는 안 먹혔다. 이미 누나에게 적응이 완료 되었다는 건가? 완전 내 천적이잖아! 나의 최강 미소파워는 한 순간 요상한 미소가 되고 말았고 정말 내 미소는 요상한 것처럼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보다 조심해. 여기는 20세 전용이라 아무리 게임이라고 해서 가볍게 보면 안 돼. 방금 같은 경우 정말 100% 강간은 당하지 않겠지만 엄청난 수치심을 준단 말야. 소연이 네가 큰 수치심을 느껴 버린다면 제기 불가능으로 캐릭터가 삭제될 위험까지 있어.” 그 말은 인정했다. 정말 여러 가지 의미로 제기 불가능에 놓일 뻔했으니. “언제부터 시작한 거야? 그냥 날 부르지 그랬어?” “음, 그게 어쩌다보니.” 최대한 조심하며 눈팅의 말을 흉내 냈다. 이 사람은 정말 위험해. 들킬 위험이 다분하니까 더 조심에 조심을 기해야 했다. “하긴, 초보자가 뭔 생각을 하겠냐. 뭐하고 있었어? 내가 도와줄까?” “오빠 안 바빠요?” 나는 제발 좀 떨어져라 한 말이었지만 상대는 다분히 오해한 것 같았다. <‘매혹’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너, 너 왜 이리 귀여워졌냐? 이거 다시 보게 될 것 같아.” 여러 가지 의미로 정말 기분 나빴다. 내 작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하나의 애물단지를 등에 얹어 아페타 마을을 다시 나서게 되었고, 다시 찾아 간 익숙한 초원 필드에 도착하였지만 태식 형은 거침없이 그 초원을 벗어나 더 멀리 나아가고 있었다. “초원이 적당하지 않아요? 혀… 오빠?” “옹알이 하는 것도 아니고 혀오빠가 뭐야? 뭐, 여기서 올리면 오래 걸리잖아. 그냥 고블린 지대로 가자.” 뭘 믿고 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야 모든 게 생소하니 따라갈 수밖에. 고블린, 요정의 돌연변이라고도 하며 추잡스런 얼굴과 뾰족한 귀를 가지고 있는 몬스터였다. 주제에 자아가 있어서 간단한 무기를 사용하고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하다고 하는데 이건 다른 게임의 보편적인 내용일 뿐이고 여기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대충 비슷하리라 생각되었다. “여기야. 지금부터 조심해야 돼. 내 뒤에만 바짝 붙어있어.” “그런데 오빠, 직업이 뭐에요?” “나? 좀 자랑해도 될까? 마나를 이끄는 검사, 마검사라는 직업이지. 이래보여도 아직 몇 없는 히든 직업이야.” 이보세요, 댁 코가 하늘을 찌르시겠습니다만. “지금 레벨이 몇이야?” 형 물음에 나는 간단히 손을 폈다. “5? 그래도 좀 하긴 했나보네. 우리 귀여운… 왜 피해?” 얼굴이 다가와서 본능적으로 피해버렸다. 위험해, 도적들보다도 더 위험해! “우리 사랑이 벌써 식은 거야?” “하하, 그게 아니고 저기 고블린이 나왔는걸요?” “화이어 볼!” - 펑! 화르륵. <레벨이 올랐습니다.> 순식간이었다. 태식 형이 마법을 쓴 것과 동시에 레벨이 된 것은. “겨우 고블린 한 마리에 우리 사랑이 떨어질 리가 없잖아.” 큰일이다. 오지 마! 악, 어헛, 우와악! - 퍽! “헉, 헉. 이 인간이 미쳤나! 적당히 하라고요!” 나도 모르게 냅다 주먹을 갈겨 버렸다. 지금 내 머릿속은 완전 적색경보였다. “에? 벌써 예전모습으로 돌아온 거야? 그 여성스런 모습도 좋았는데, 쩝.” “…….” 새삼 우리 눈팅의 존재감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저 인간 만날 맞고만 살았나? “그래도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았으면 해. 네 앞에서는 이런 모습이지만 남들은 미지의 마검사라 불리고 있거든. 워낙 혼자 사냥하다 보니 내가 그리도 궁금했나 봐.” “헤에, 미지의 마검사라니 꽤나 이미지 관리 했었나 봐요?” “이건 비밀인데, 그 짓도 꽤나 할 만하더라고.” 태식 형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상쾌한 미소를 던졌다. “저기 또 고블린.” “엑, 너무해. 나의 매혹에 걸리지 않다니. 파이어 볼!” - 펑! 화르륵. 어리바리한 한 마리의 고블린은 또 다시 경험치의 희생양이 되었다. 아니, 그 전에 매혹이라고? “그거 설마, 스킬?” “응, 더블스펠로 화속성과 토속성을 조합시키면 ‘화이어 볼’스킬이 만들어져. 이것도 최근에 알려진 마법사 스킬 조합이라 아는 사람은 몇 안 되고 대부분은 스킬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도 모를 걸?”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 그 전에.” “응? 설마, ‘매혹’을 알아? 이거 무지 희귀 스킬인데. 그 조건이 아마 나이가 30이하일 것하고, 얼굴이 예쁘다거나 멋있어야 할 것, 그리고 마지막이 가장 처음 말건 상대가 ‘매혹’으로 인해 데미지를 받을 것인데 어떻게… 설마 배운 거야?” 이번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어떤 놈이야! 감히 누굴 넘보고 내 소중한 애인을!” 손잡으니 5초마다 반하는 어떤 마법사랍니다. 그보다, ‘매혹’이 그렇게 까다롭게 생기는 스킬이었구나.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나쁘다고 해야 하나. “흠흠, 나도 우연히 얻은 건데 처음에는 삭제하고 다시 할까 생각도 했었어. 그런데 의외로 좋더라고. 일단 호의도가 높아질 뿐만 아니라 많은 유저들한테 주목을 받는 스킬이랄까?” 퍽이나 좋으시겠어요. “뭐, 뭐야 그 눈초리는. 변태 아니니까 그 눈빛은 거둬줘. 뭐, 넘어가고 5렙이니까 아마 지금 ‘무기속성 주입’을 배울 수 있을 거야. 스텟창을 확인해서 원소 속성란 아무거나 20포인트를 만들어봐. 그 속성을 무기에 주입할 수 있을 거야.” 이제 6렙이지만 별거 아닌 문제니 넘어가기로 했다. “열려라, 마음의 문이여.” 낮 간지러운 말을 태식 형 앞에서 하는 게 조금 껄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지. “오, 귀여워.” 못 들은 걸로 하겠다. 성별 여 이름 예쁜이 종족 인간 나이 23세 직업 마법사 Level 6 소속 - 칭호 - 힘 1 월(月) 0 민첩 1 암(暗) 0 체력 1 화(火) 3 지능 10 수(水) 3 정신력 10 목(木) 3 행운 1 금(金) 0 탄력 1 토(土) 3 방어 1 천(天) 0 종족특성 : 없음 칭호특성 : 없음 직업특성 : 없음 포인트 : 25 스킬 1. 매혹 <숙련도 55/100> 6. 2. 침묵의 웃음 <숙련도 51/100> 7. 3. 8. 4. 9. 5. 10. 현재 화, 수, 목, 토에만 3포인트씩 주어져 있고 나머지는 0이다. 내 포인트가 25이니 어느 것이든 20포인트를 줄 수 있겠구나. 나는 힐러 쪽으로 갈 생각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천’쪽에 20포인트를 지정했다. <‘무기속성 주입’스킬을 배우셨습니다.> 호, 드디어 제대로 된 스킬이 생겼구나. 왠지 모르게 기쁘다. “열려라, 잠재 된 힘이여.” 1. 매혹(패시브) - 간혹 상대를 유혹 시킨다. 매우 강력한 미모만이 습득 할 수 있는 고유 스킬. 2. 침묵의 웃음(패시브) - ‘고성방가’의 변화형 스킬. 강력한 카리스마로 상대를 경직 시킨다. 3. 무기속성 주입(액티브) - 8개 속성 중 천(天)만을 주입시킬 수 있으며 오직 무기에만 속성 주입이 가능하다. 시간은 3분 동안 유지되며 지능, 정신력, 탄력이 높을수록 시간과 능력이 올라간다. 월(月) : 알 수 없음 암(暗) : 알 수 없음 화(火) : 알 수 없음 수(水) : 알 수 없음 목(木) : 알 수 없음 금(金) : 알 수 없음 토(土) : 알 수 없음 천(天) : 언데드 / 악마 몬스터 공격 시 5%확률로 절명 시키며 10% 확률로 치명타, 빛의 보호로 인해 일시적인 방어력이 증가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무지 긴 설명을 읽으며 내가 포인트를 이제 어디에다 투자해야 할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대충 지능, 정신력, 탄력과 각 속성마다 무기 주입이 있는 거 보니 다 20씩 찍으면 된다는 거였다. “끝났어? 발동시켜봐.” 오오, 이거 은근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까지 액티브 스킬을 사용한 적이 없어 어찌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는데 전에 마법사 녀석이 했던 말을 인용하여(그러고 보니 그 녀석 아이디도 안 물어봤다)시전 해보았다. “‘무기속성 주입’ 발동.” <‘무기속성 주입’이 발동되었습니다. 목표를 생각해주십시오.> 내가 태식 형의 바스타드 검(정확히 그 검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게임에서 본 검이랑 비슷해서 마음대로 생각해버렸다)을 보는 순간 그 검에서 백색 빛이 번쩍 하더니 은은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무기속성 주입’의 숙련도가 2 상승했습니다.> “이게 뭐야, 빛? 법사가 사제도 아니고 빛이 뭐야. 보통은 불이나 물로 해야 하는 거 아냐?” “잔말이 많네. 신경 끄세요. 이제 고고!” 태식 형은 투덜거리면서도 나에게 어쩔 수 없는지(사실 눈팅에게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진지하게 검을 고쳐 잡았다. “소연아, 신나게 고블린 잡으며 놀고 있을 테니까 15렙 되면 말해라. ‘원소친화력’스킬트리 알려줄 테니까.” “논다고요? 도대체 렙이 몇 이길래.” 저 멀리 고블린 무리들 쪽으로 달려가며 태식 형은 손바닥을 폈다. “5렙?” “50이야!” 내 가벼운 농담에 너무 크게 반응하는데? 태식 형은 한 고블린 무리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변화무쌍한 바스타드 검은 말 그대로 고블린 들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다지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건 별로 내키지가 않았다. 나에게 힐러의 사령관이란 목표가 있는 이상은 말이다. 그래도 지금은 힘이 없어서 변명이 될지 모르겠지만 인내를 가지고 버틸 것이다. 이것도 조금 핑계에 불과하지만 어쩌겠는가, 약자는 묵념해야지. 이 빚은 훗날에 내가 크게 된다면 꼭 갚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금은 편하게 도움 받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 전에 일단 저 형부터 어떻게든 처리해야 할 텐데. 누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 아닌가. 어쩌나, 어쩌나……. 태식 형은 광기에 차서 고블린들을 무참히 썰고 있었는데 나는 그 모습을 불안한 마음으로 한동안 바라보았다. 귓가에 레벨업 안내 말이 간혹 들렸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헥, 헥, 휴우, 힘들다. 조금만 쉬자.” 땀에 흠뻑 젖어 터벅터벅 걸어오는 태식 형의 모습을 보며 나는 거짓말로 회피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역시 진실을 말해야겠다고 결정했다. “저기, 잠깐 앉아 봐요. 얘기 좀 해요.” “응? 무슨 얘기?” “그러니까, 저기… 저 말이에요.” 내가 뜸을 들이자 태식 형이 갑자기 표정을 굳혀(이 인간도 우리 눈팅 같은 부류라 진지모드로 가면 부담스러울 정도로 멋져 보인다)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혹시…….” “호, 혹시?” “욕구불만이냐? 아까 그 사건도 그렇고, 설마 일부러 그곳에 간 건…….” “아니야!” 데자뷰 현상이 일어났다. 상천이 녀석처럼 이 인간도 눈치가 제로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떨까? 알 수 없지만 내 숨소리가 거친 것만큼은 알 것 같았다. <‘매혹’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너 진짜 귀엽다. 소연아, 그냥 밖에서도 그 성격으로 생활하면 안 될까?” 누나, 어째서 저런 남자랑 사귄 거야. 이건 그냥 변태잖아. “하아, 그만두죠. 지금 15렙이니까 스킬트리나 알려줘요.” “아아, 그렇지 참. ‘원소친화력’의 스킬 조건은 레벨 15 이후부터와 4원소 화, 수, 목, 토의 속성 포인트를 각각 10으로 맞추면 돼. 그렇게 하고 20렙이 되면 자연스레 전투법사 직업과 ‘더블스펠’스킬이 만들어질 거야.” 나는 기분이 상해 성의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다음부터는 ‘더블스펠’로 속성끼리 조합을 할 수가 있어. 나처럼 화와 토를 조합하면 ‘화이어 볼’스킬이 생성되지. 드디어 마법사로서 공격마법이 생기는 거야. 하지만 스킬 칸이 총 10개라는 걸 명심하고 잘 생각해서 조합해야 돼. 까닥 하단 캐릭터를 망칠 수가 있으니까. 알았지?” 한 마디로 나 혼자 키울 수 있는 단계는 20렙부터라는 건가? 게임 참 어렵게도 만들어 놨네. 법사나 힐러 같은 캐스터 계열은 버스가 아니면 키울 생각도 못하겠는 걸. “아! 지금 몇 시지?” “지금 현실시간으로 밤 8시네요.” “망했다. 오늘 친구와 약속 있는데. 소연아, 미안하다. 오빠 먼저 나가봐야겠다. 마음 같아서는 마을까지 데려다 주고 싶지만 지금 급해서 나가봐야겠거든?” “그러세요.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래, 그럼 오빠 먼저… 이상하다. 누구 만나러 가는지도 안 물어봐? 정말 사랑이 식었나 왜 이러지. 예전에는 꼬치꼬치 캐물었…….” “알았으니까 어서 가요! 안 급해요?” 태식 형은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했지만 내가 자꾸 떠밀자 마지못해 접속을 해제했다. “나는 절대 저런 남자가 되지 않으리라.” 오늘 나는 또 다른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제 그럼, 또 다른 스킬을 얻어 볼까. 열려라, 마음의 문이여.” 성별 여 이름 예쁜이 종족 인간 나이 23세 직업 마법사 Level 15 소속 - 칭호 - 힘 2 월(月) 0 민첩 2 암(暗) 0 체력 1 화(火) 3 지능 11 수(水) 4 정신력 13 목(木) 3 행운 2 금(金) 0 탄력 2 토(土) 3 방어 1 천(天) 20 종족특성 : 없음 칭호특성 : 없음 직업특성 : 없음 포인트 : 53 스킬 1. 매혹 <숙련도 56/100> 6. 2. 침묵의 웃음 <숙련도 51/100> 7. 3. 무기속성 주입 <숙련도 3/100> 8. 4. 9. 5. 10. 지금 보니 갑작스레 추가 보너스 포인트가 올라간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힘, 민첩, 행운, 지능, 탄력, 수속성이 각각 +1씩 올라갔고 정신력은 무려 +2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포인트도 렙업마다 5씩 주는 줄 알았는데 레벨이 올라갈수록 조금씩 더 많이 주는 것 같아 보였다. 일단 나는 화, 목, 토의 각각 7포인트, 수에 6포인트를 지정하였다. <‘원소 친화력’스킬을 배우셨습니다.> “좋았어! 열려라, 잠재 된 힘이여.” 1. 매혹(패시브) - 간혹 상대를 유혹 시킨다. 매우 강력한 미모만이 습득 할 수 있는 고유 스킬. 2. 침묵의 웃음(패시브) - ‘고성방가’의 변화형 스킬. 강력한 카리스마로 상대를 경직 시킨다. 3. 무기속성 주입(액티브) - 8개 속성 중 천(天)만을 주입시킬 수 있으며 오직 무기에만 속성 주입이 가능하다. 시간은 3분 동안 유지되며 지능, 정신력, 탄력이 높을수록 시간과 능력이 올라간다. 월(月) : 알 수 없음 암(暗) : 알 수 없음 화(火) : 알 수 없음 수(水) : 알 수 없음 목(木) : 알 수 없음 금(金) : 알 수 없음 토(土) : 알 수 없음 천(天) : 언데드 / 악마 몬스터 공격 시 5%확률로 절명 시키며 10% 확률로 치명타, 빛의 보호로 인해 일시적인 방어력이 증가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4. 원소 친화력(패시브) - 4원소의 조화를 깨우친다. 화(火), 수(水), 목(木), 토(土)의 원소와 친화력이 증가하여 각각 원소의 추가 포인트+1 증가, 탄력에 따라 원소의 조화가 증가, 지능, 정신력에 따라 추가 포인트 증가한다. 4원소 추가 포인트 증가 스킬이구나. 지능, 정신이 얼마나 올라 가냐에 따라 더 포인트가 증가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럼 탄력이란 스텟은 과연 무엇일까? 원소의 조화가 증가한다? 조화가 증가하면 뭐가 좋아진다는 건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겔겔겔.” “태식오빠, 가래 낀 그딴 웃음 짓지 마……?” …잠깐, 태식 형은 아까 로그오프 하지 않았던가? 생각의 늪에서 급격하게 정신이 끌려나왔다. “여자다, 겔겔.” “먹을 거다.” “적이다.” 그렇다. 나는 여기가 적진 한 가운데였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포위한 고블린 한 무더기는 나를 포위 한 채 흉흉한 눈빛으로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천천히 걸어온 것이지만 내 눈에는 달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마음을 다잡고 내 고유스킬인 ‘심연의 눈’을 발동하여 그 몬스터의 정보와 지형특성을 알아보았다. 고블린은 몸집이 작아 공격을 한다면 하반신에 대부분 타격이 갈 테고 나무 몽둥이가 전부이니 멍 같은 상처가 생길 것이었다. 지형은 사방에 풀이 듬성듬성 나있는 흙 밭이라 몸을 가릴만한 것이나 던질만한 것 등등 아무런 특이사항이 없었다. 나의 스킬인 ‘매혹’, ‘침묵의 웃음’, ‘무기속성 주입’, ‘원소 친화력’을 가지고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 없었다. 결론은… 나는 살 방법이 없다, 제기랄. “‘무기속성 주입’ 발동!” <‘무기속성 주입’이 발동되었습니다. 목표를 생각해주십시오.> 내가 지팡이를 주시한 동시에 한 마리의 고블린이 돌진해왔다. <‘무기속성 주입’의 숙련도가 2 상승했습니다.> - 퍽! “으윽!” 허벅지에서 묵직한 아픔이 전해져 왔다. 아무리 현실답게 만들었다지만 이거 너무 아프잖아! 다리가 푹 꺾어졌지만 은은히 빛나는 지팡이를 다리삼아 간신히 서 있을 수 있었다. “먹이다.” “먹이다, 먹이다.” 내가 약해서 적이 아니라 먹이라는 걸 이젠 완전히 인식한 걸까. 다들 침을 질질 흘리며 식탐의 욕구를 마구 흩뿌리고 있다. 나는 지팡이를 보았다. 천속성이 주입된 이 지팡이는 언데드나 악마였다면 어느 정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었을 텐데. 엄연히 자연과 요정으로 분류되는 이 녀석들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지팡이에 불과했다. “결국, 죽는 건가.” 허무하다거나 화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게임의 깊은 매력 속에 빠져들어 흥분이 들 정도였다. “킥킥, 이 게임이 나를 중독자로 만들겠는 걸.” <‘침묵의 웃음’스킬 발동.> <‘침묵의 웃음’의 숙련도가 20 상승했습니다.> “키킥!” “적이다, 적이다!” “적이다, 적이다!” 의도치 않은 스킬 발동에 고블린 들의 경각심만 부추기고 말았다. 그래도 잠시 경직되었는지 움직이지 않아서 그나마 살 시간을 벌 수는 있었다. “인마, 너희들. 지금은 이렇게 가지만 훗날에 두고 보자 이거야. 이 어여쁜 형이 꼭, 다시 찾아 올 테니까.” 그리고 정말 상쾌한 기분으로 씩 미소 지었다. 모든 것을 해탈한 그런 마음으로. <‘매혹’스킬 발동.> <‘매혹’의 숙련도가 10 상승했습니다.> “…….” “…키킥, 누구냐!” ‘매혹’에 겁이라도 먹은 거냐? 몬스터 주제에 감정도 많았다. “잘 기억해둬라. 훗날 힐러의 사령관이 될 예쁜이…가 아니라 ‘타테’다!” “타데, 타데. 키킥!” “겔겔, 데려간다. 타데, 타데.” <퀘스트 ‘고블린 로드의 치료’가 발동 되었습니다.> 이봐 들, 내 이름은 타데가 아니라 타테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뒤통수에 강한 충격을 느껴서 서서히 정신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우왁!” 정신을 잃은 직후에 나는 강제적으로 가수면 상태가 해제돼, 게임에서 튕겨 버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캡슐 안에서 나올 생각도 안하고 나는 그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분명 나는 마지막에 퀘스트를 받았다. 그 뭐더라 고블린 로드의 뭐였는데 체념? 친척? 치질? 음… 이건 좀 아닌 것 같군. 어쨌든 나는 죽지 않았고 잠시 기절해서 튕긴 것 같았다. “‘아펜하르트’ 접속.” [게임 사정으로 인해 한시간 동안 접속 하실 수 없습니다.] “역시 게임 상 일부러 튕긴 것이군. 응? 캡슐 밖에 왜 내 모습이 보이지?” 신기했다. 진짜 자연스런 모습으로 캡슐 밖에서 고블린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화들짝 놀라 캡슐뚜껑을 벌컥 열어 젖혔다. “누, 누나.” “너… 나기찬, 그렇게 메모까지 해뒀건만. 밥도 안 먹고 또 게임 질이얏!” “우아악, 살려줘!” 우리 눈팅은 게임 상에서의 나보다 훨씬 강한 존재였다. “카드 여기 있습니… 풋!” “…….” “죄, 죄송합니다. 너무 웃겨서 그만, 34번 컴퓨터입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게임방 아르바이트생은 이리저리 할퀴고 멍든 나의 안습(안구의 습기 찬다는 줄임말)적인 얼굴을 보고 웃은 것이었다. 이봐요, 댁 덕분에 결코 좋은 시간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혼자 구시렁거리며 34번 컴퓨터에 앉아 부팅을 눌렀다. 그 유명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로고가 잠깐 보인 후, 윈도우 화면이 나타났고 나는 바로 인터넷으로 들어가 ‘아펜하르트’를 입력했다. 잠시 캡슐에 들어가지 못하는 한 시간 동안 이참에 아펜하르트 게임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집을 나선 것이었다. 정말이다, 절대 눈팅을 피하기 위해 도망 나온 게 다시 말하지만 절대 아니다. 인터넷이 정보를 읽어 아펜하르트에 관한 정보를 뱉어냈다. 나는 볼 것 없이 바로 아펜하르트 홈페이지를 클릭했고 곧 음침하고 웅장한 검정 바탕의 한 홈페이지를 볼 수 있었다. “어디보자, 스테이터스 정보가 아! 여기 있다.” 캐릭터 란에 있는 스테이터스 정보를 클릭했다. 그러자 각각 스텟이 나열되었고 그에 따른 부연설명이 곁들여 내가 찾는 정보가 모두 함축되어 나왔다. 힘 - 포인트가 증가함에 따라 파워, 아이템 소지 한계치, 카리스마가 증가하며 외형적으로 강한 이미지가 된다. 민첩 - 포인트가 증가함에 따라 스피드, 반사 신경이 발달하며, 시아가 넓어진다. 외형적으로 날카로운 이미지가 된다. 체력 - 포인트가 증가함에 따라 스태미나, 체력이 증가하며 지형, 날씨에 관한 저항력이 증가한다. 외형적으로 듬직한 이미지가 된다. 지능 - 포인트가 증가함에 따라 지식습득, 마나를 받아들이는 한계치, 마나를 뱉어내는 한계치가 증가하며 외형적으로 지적인 이미지가 된다. 정신력 - 포인트가 증가함에 따라 인내력, 즉사확률, 마나로 인한 피드백 확률과 마법시전 방해의 효과를 줄인다. 외형적으로 침착한 이미지가 된다. 행운 - 포인트가 증가함에 따라 아이템 습득 확률, 치명타 확률이 증가하며 퀘스트 보상이 커진다. 외형적으로 헤픈 이미지가 된다. 탄력 - 포인트가 증가함에 따라 마나의 조화, 유연성이 높아지며, 마법저항력이 높아진다. 외형적으로는 부드러운 이미지가 된다. 방어 - 포인트가 증가함에 따라 치명타 당할 확률, 스태미나 하락 확률을 줄이며 방패사용 능력이 증가한다. 외형적으로는 묵묵한 이미지가 된다. 월(月) - 달빛의 속성, 기본 마법으로 ‘염력’이 있다. 암(暗) - 어둠의 속성, 기본 마법으로 ‘부패’가 있다. 화(火) - 불의 속성, 기본 마법으로 ‘화이어’가 있다. 수(水) - 물의 속성, 기본 마법으로 ‘워터’가 있다. 목(木) - 자연의 속성, 기본 마법으로 ‘활력’이 있다. 금(金) - 철의 속성, 기본 마법으로 ‘굳건한 의지’가 있다. 토(土) - 흙의 속성, 기본 마법으로 ‘어스’가 있다. 천(天) - 빛의 속성, 기본 마법으로 ‘빛의 화살’이 있다. 내가 몰랐던 사실들이 하나둘… 아니, 전부다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스텟에 따라 외형적으로도 변한다는 글귀하고 그동안 의아해했던 탄력에 대해 상세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이지 깜짝 놀란 사실이 있었는데 그건 속성마다 부여되는 기본 마법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마법사 녀석이 쓴 ‘화이어’하고 사제가 쓴다는 ‘빛의 화살’이 스킬이 아니고 기본 마법이었다니. 지금까지 공격스킬 하나 없다며 툴툴거린 내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허참, 이래서 정보는 중요한 거라니까.” 나는 이참에 또 다른 정보가 없나 이리저리 홈페이지를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유저랭킹? 이런 것도 이미 구현되어 있었던 건가?” 호기심으로 나는 유저랭킹란을 들어가 보았다. 레벨 직업 이름 호칭 1 68 배틀마스터 애디 용병왕 2 63 미공개 글로리시나 스피드사신 3 미공개 미공개 루히비드 결계의마도사 4 48 용소환사 주르르 드래곤소환사 5 54 레인저 어둠의조이 일발필중 6 50 미공개 미공개 영웅슬레이어 7 50 마검사 멋쟁이 미지의마검사 8 미공개 미공개 레쓰비 대부 9 미공개 미공개 다덤벼 맨손마스터 10 미공개 미공개 미공개 미소천사 - 랭킹은 매주 화요일 마다 수정되며 1~100의 랭킹만이 기록 됩니다. 랭킹에 드는 방법은 오직 게임 상의 유저들 간에 명성이 포인트가 되며 포인트를 주는 방법은 게임 상에서 만이 가능 합니다. 명성에 의거하여 유저 분들이 부르는 호칭이 자동 입력되니 호칭만은 미공개로 설정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랭킹 정보 및 수정을 하시려면 로그인 한 후, 자기정보란에서 설정하시거나 게임 상에서 랭킹정보를 외친 후, 수정하시면 됩니다. 무심한 눈길로 쭉 읽어 가는 도중에 눈이 7번에서 멈춰 버렸다. 레벨 50, 직업 마검사, 아이디 멋쟁이, 호칭 미지의마검사. 이 정도면 정말 고블린이라도 이상하다 눈치 챌 만큼의 정보였다. 우리 눈팅 아이디가 예쁜이에 그 남친은 멋쟁이라… 아주 커플캐릭터를 만들려고 작정을 한 거 였구만. 그보다도 태식 형이 랭킹 7위라는 것은 정말 놀랄만한 정보였다. 50레벨이 어느 정도 강한 건지 전혀 모르고 있던 나는 그때 당시 별 놀람이 없었는데 지금 보니 정말 대단한 거였다. 그 많은 폐인 아저씨들을 무찌르고 당당히 7위로 껑충 뛴 다는 게 말이야 쉽지 다른 게임을 많이 섭렵한 나는 이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나도 랭킹이란 게 있을까?” 설명서대로 자기정보란에 들어가 누나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 한 후, 랭킹 정보를 들어가 보았다. 10 미공개 미공개 미공개 미소천사 - 레벨, 직업, 이름 공개여부를 잠그시거나 푸실 수 있습니다. 눈을 껌뻑껌뻑 뜨다 한 번 비볐다가 관자놀이를 잠시 문지른 후, 다시 보았다. 10 미공개 미공개 미공개 미소천사 “…….” 미소천사라. 이게 무슨 영문인지 나는 10분 동안 생각해야만 했다. “미소천사라…….” 자판기를 두드려 ‘미소천사’란 단어를 입력. 정보를 훑어보았다. 그랬더니 뜨는 건 뜬금없는 동영상 한편. 어느 한 지점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여성유저를 찍은 동영상이었다. 그 여성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한 천상의 낙원이었고 바람에 휘날리는 그녀의 머리칼이 반짝반짝 빛나고… 이건 그때 그거잖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조회 수만 이미 수만 번 대를 넘어가있었고 리플 수만 1000여개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 리플들을 잠시 살펴보니 가관을 넘어서 다들 광신도의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는 걸 이참에 말해둔다. (아이디) 쌀탱이 : 아, 천상의 여신이시여. 저를 거룩히 여기시오며 나라에 임 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도 같이 나에게도 이루어지리니. (아이디) 스팅 : 신의 검이 되겠다. 다짐한 저로서는 당신을 저의 레이디로 섬기고 싶습니다! 어디 계신 겁니까. 세상 끝까지라도 따라가 당신 발등에 입맞춤을 할 것입니다. (아이디) 미소천사 팬클럽 회장 : 스팅님, 개인행동은 자제해주십시오. 만약 개별적인 행동을 하겠다면 우리 미천 클럽이 제재에 들어갈 겁니다. (아이디) 스팅 : 사랑은 자유 아닙니까? 왜 그쪽이 난리? (아이디) 미소천사 원빈 : 자유이기 이전에 이미 미소천사님은 우리 모두의 우상입니다. 당신 때문에 상처라도 받으시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아이디) 미소천사 궁수 : 님도 우리 미천 클럽 오삼. 아디 삭제하고 미소천사 스팅으로 재가입 궈궈. …등등 난리도 아니었다. 이건 아주 소수의 글을 나열한 것에 불과했다. 나도 모르는 새에 팬클럽이 생기고 아이디까지 삭제하며 새로운 아이디를 만들 정도의 광신도들은 내 간단하게 말해서 정신이 돌아 현실과 게임을 구별 못하는 고블린이라 말해둔다.(어째서인지 죄다 나쁜 놈들은 고블린에 빗대고 있다) 골머리를 싸매며 입을 잘근잘근 씹다가 문득 컴퓨터 우측 하단부에 있는 시간을 보게 되었다. - PM 22:13 이런 젠장,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도 8분이 더 지나갔잖아. 나는 거의 내빼듯 게임방을 빠져 나왔다. 그때 정말 내빼는 줄 알고 아르바이트생이 앞을 막은 작은 해프닝이 있었으나 별거 아니니 넘어가겠다. “헉, 헉.” 집이 무너질 듯이 달려 들어온 나는 일단 주위부터 두리번거렸다. 아, 이건 절대 눈팅이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다. 잠시 목이 뻐근해서다. 진짜다, 믿어 달라. “좋아, 이상 없음.” 목이 뻐근하지 않아서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다시 빛살 같은 스피드로 내 방문을 열었다. …왠지 톰과 제리에서 나오는 제리가 된 기분이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캡슐에 몸을 뉘었다. [메인 프로그램 작동. 실행시킬 프로그램을 부르십시오.] “아펜하르트.” [‘아펜하르트’ 실행합니다. 아이디 및 비밀번호를 음성으로 입력해주십시오.] “아이디 나소연, 비밀번호 예쁜이.” 이젠 어떤 것이 내 목소린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러다 나 여자 되는 거 아닌지 몰라. […입력되었습니다. 홍채인식을 합니다.] [입력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나소연님. ‘아펜하르트’에 접속하시겠습니까?] “접속.” [접속되었습니다. 즐거운 시간되십시오.] 나는 익숙한 기분으로 천천히 가수면 상태에 빠져 들었다. <아펜하르트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예쁜이’님. 시작 포인트로 이동합니다.> 밝은 햇살과 청명한 하늘이 나를 반겨… 주지 않고 습기 차고 어두컴컴한 동굴이 비웃기라도 하듯 나를 가두고 있었다. 맞다. 나는 고블린에게 머리를 맞아 기절했었지 참. 그럼 여기는 고블린들이 서식하는 동굴인 걸까? “일어났다, 일어났다.” “겔겔, 일어났다. 타데, 타데.” “타데가 아니라 타테다 타테!” 나는 정말 예수 같은 마음으로 이름을 정정해주었다. “타데?” “타테!” “타데?” “…….” 하지만 그 짓이 무의미한 짓이라는 걸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너희들, 날 어찌할 셈이야?” “타데, 타데. 우리 로드 아프다.” “타데, 타데. 힐러 사랑방이라 했다. 사랑방, 사랑방.” “치료해라, 치료해라.” 사랑방이 아니라 사령관이라 정정해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무의미한 짓이란 것을 알기 때문에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녀석들 그걸 알까? 힐러 사령관이란 말을 현재형이 아니라 미래형으로 말했다는 사실을. “혹시, 못 고친다면?” “타데, 타데 먹는다.” “먹는다, 먹는다.” “고친다면?” “타데, 타데 우리 친구, 살려준다.” “살려준다, 살려준다.” “못 고친다면?” “먹는다, 먹는다.” “살해 한다면?” “살려준다, 살려준… 게겍?” 낚였군 그래. 내 소심한 복수 작렬이었다. “일단 그 로드에게 대려다 줘. 상태를 봐주마.” “게겍, 이쪽이다. 타데, 타데.” 저 타데, 타데 거리는 게 굉장히 거슬렸지만 어쩔 수 없으니 걸어갔다. 놈들의 다리를 살짝 걸어 넘어트린 건 두 번째 말하지만 정말 작은 일이니 이번에도 넘어가도록 하겠다. “우리 로드다. 타데, 타데.” “겔겔, 나 고쳐라, 아프다.” 이놈들은 로드건 졸병이건 존댓말 자체가 아예 없네. 별 시답잖은 생각을 다하다 일단 고블린 로드라는 녀석을 관찰해보았다. 다른 고블린들에 비해 조금 비대한 몸집과 커다란 덩치. 지금 많이 아픈지 푸르죽죽한(다 다른 놈들도 푸르죽죽해서 저게 아픈 건지 솔직히 모르겠다)얼굴과, 축 처진 귀가 ‘나 아프다.’하고 광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가 아픈 거야?” 고블린 로드는 겔겔거리며 말했다. “전에 인간한테 뾰족 한 거 찔렸다. 상처가 아프다. 계속 벌어진다. 피 나온다.” “인간? 누군데?” “먹었다, 모른다.” 무척이나 간단명료한 대답이군. 일단 저 고블린의 아픈 이유는 병이 아니라 상처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솔직히 그 전까지 병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었는데 완전 대 반전 영화를 보는 것 같다는 황당한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라, 저 얼굴이 정상인의 얼굴이라면 우리 예전 한국영화, 한강에서 나오는 괴물은 예쁜 편이 아니겠는가. “일단 그 아픈 것을 치료하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 나에게 며칠간에 시간을 줄 수 있나?” “겔겔, 알았다. 시간 준다. 오늘 해가 질 때까지 해주면 된다.” …며칠간 달라고 말한 내 말은 벌써 뱃속으로 들어가셨나? “며칠간 시간을 달라고!” “알겠다. 해가 질 때까지 준다.” 무식한 것을 넘어 어찌 보면 작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드는 나였다. “젠장, 열려라, 마음의 문이여.” 성별 여 이름 예쁜이 종족 인간 나이 23세 직업 마법사 Level 15 소속 - 칭호 미소천사 힘 2 월(月) 0 민첩 2 암(暗) 0 체력 1 화(火) 10+1 지능 11 수(水) 10+1 정신력 13 목(木) 10+1 행운 2 금(金) 0 탄력 2 토(土) 10+1 방어 1 천(天) 20 종족특성 : 없음 칭호특성 : 없음 직업특성 : 없음 포인트 : 26 스킬 1. 매혹 <숙련도 65/100> 6. 2. 침묵의 웃음 <숙련도 71/100> 7. 3. 무기속성 주입 <숙련도 5/100> 8. 4. 원소친화력 <숙련도 없음> 9. 5. 10. 자, 시간이 얼마 없다. 그러니 오늘 정보를 토대로 잘 생각해보자. 속성 조합에 따라 스킬이 만들어 진다고 했었지. 하지만 지금의 난 ‘더블스펠’을 배우지 못해서 조합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럼 방법은 두 가지 뿐이다. 20렙을 올려서 ‘더블스펠’을 배워 스킬을 창조시킨 후 치료하거나, 아니면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스킬만을 이용해 치료해야 했다. 둘 다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고 또한 시간도 많이 필요한 일이었다. 허나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라면 지금 게임 상으로 2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뜻했으므로 시간이 많은 게 결코 아니었다. 그럼 결론은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는 건데… 일단 속성 마법을 생각해보았다. 월(月) - 달빛의 속성, 기본 마법으로 ‘염력’이 있다. 암(暗) - 어둠의 속성, 기본 마법으로 ‘부패’가 있다. 화(火) - 불의 속성, 기본 마법으로 ‘화이어’가 있다. 수(水) - 물의 속성, 기본 마법으로 ‘워터’가 있다. 목(木) - 자연의 속성, 기본 마법으로 ‘활력’이 있다. 금(金) - 철의 속성, 기본 마법으로 ‘굳건한 의지’가 있다. 토(土) - 흙의 속성, 기본 마법으로 ‘어스’가 있다. 천(天) - 빛의 속성, 기본 마법으로 ‘빛의 화살’이 있다.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일단 월, 암, 화, 토, 빛은 공격마법에 속하는 것 같았다. 그럼 나머지 수, 목, 금 정도가 남게 되는데 이것들로 치료하기란 불가능 할 것 같았다. 게다가 나는 금속성 포인트가 제로 아닌가. 시작부터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무기속성 주입’스킬을 보았다. 만약에 수, 목 무기속성 주입이 조금씩 재생능력이나 상처 치료능력이 주어진다면 해볼 만한 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26포인트라. 만약 정답이 아니라면 남은 건 8포인트로 끝장이군.” “무슨 말이냐, 겔겔.” “너 잘생겼다고.” 결정했다.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으니 한 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수에 9포인트를 지정했다. <‘무기속성 주입’스킬이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열려라, 잠재 된 힘이여.” 수(水) : 인간형 몬스터에게 10% 확률로 결빙효과가 주어지며 매 공격 시 상처부위는 결빙되어 스태미나가 하락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꽤나 좋은 조건의 무기 주입이었지만 지금의 나한테는 망했다 라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죽고 다시 할까? 지금의 나로서는 솔직히 무리잖아. “하지만 왠지 힐러랭킹 1위를 독차지 하던 이 타테가 이런 놈 하나 못 고쳐주다니 자존심 상하는 걸.” “겔겔, 무슨 말이냐.” “너 멋있다니까.” 조금 오기가 생겼다. 죽이 되 든 밥이 되 든 한 번 해보자란 생각을 하며 다시 9포인트를 이번엔 목 속성에 지정했다. <‘무기속성 주입’스킬이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열려라, 잠재 된 힘이여.” 목(木) : 수(水)속성 몬스터에게 공격 시 자연의 기운이 깃들어 스태미나 및 체력이 흡수된다. 몬스터가 죽을 경우 흡수한 체력을 가진 식물 몬스터 생성.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입을 쩍 하고 벌렸다. 이건 너무 좋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이것도 그다지 치료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실패인가.” 어깨를 으쓱하며 포기하려는 찰나. 나의 ‘심연의 눈’이 발동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저거 잘하면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심연의 눈’을 발동시켰다. 상처 위치 파악, 혈액 응고 상태 확인점검, 파손상태 확인. 고블린의 속성은 요정의 변성 체니 목(木). “‘무기속성 주입’발동, 수(水).” <‘무기속성 주입’의 숙련도가 2 상승했습니다.> 어디서 주웠는지 모를 이가 많이 나간 단검을 주시했다. 그것을 들고 있던 고블린은 갑작스런 푸른빛에 놀라 단검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난 그것을 줍고, 주위 고블린 모두에게 무거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지금부터 치료에 들어간다. 내가 무슨 짓을 하던 간에 치료를 방해하면 절대 로드는 살릴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라.” 주위를 쭉 훑어본 후, 고블린 로드에게 다가갔다. 로드는 어째서인지 사색이 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드답게 참아봐라.” 단검으로 고블린 로드의 찔린 상처 주위를 살짝 도려냈다. 이가 많이 빠져서 그런지 도려내기 무척이나 힘들다. “크퀘엑!” “로드가 공격당했다. 타데, 타데 공격했다!” “로드 아프다, 로드 아프다.” “막아라, 타데, 타데 공격해라!” “입 닥쳐!” <‘침묵의 웃음’ 발동.> <‘침묵의 웃음’의 숙련도가 29 상승했습니다.> <‘침묵의 웃음’ 스킬이 업 되었습니다. 스킬명이 ‘침묵의 절규’로 바뀝니다.> 고블린들이 일순 정지했다. 나 역시 땀으로 온몸이 흥건했다. 로드의 상처부위는 수속성의 힘으로 작은 결빙상태가 되어 상처가 얼음덩이로 막혀버렸다. 좋아, 여기까지는 내 생각대로야. “‘무기속성 주입’ 발동, 목(木).” <‘무기속성 주입’의 숙련도가 2 상승했습니다.> 이가 나간 단검은 푸른빛을 거두고 이번엔 에메랄드 빛 즉, 녹색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얼음덩이에 푹 꽂아 넣었다. 완전 수속성인 얼음으로 부분적인 수속성 몬스터로 만든 뒤, 목속성 에너지를 투입시킨다. 원래 목 속성인 고블린은 이 에너지를 받고 힐을 받는 것과 같이 자체치료 한다는 게 목적인 것이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얼음덩이가 녹색 빛을 발하기 시작하며 상처가 아물기 시작한 것이었다. 헌데 고블린의 표정이 아직도 편치 않아 보였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위 고블린이 다시 사나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타데, 타데 못 고쳤다. 로드 아직 아프다.” “죽여라, 죽여라.” “먹이다, 먹이다.”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나의 생각은 분명 맞아 들었다. 하지만 고블린 로드는 아직도 아프다. 왜지? 어째서, 무엇 때문에. 보여라, 봐야한다.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를. 눈을 떠라, 열려라! 나의 ‘심연의 눈’이여 보여 다오, 내가 간과한 것을! <‘심연의 눈’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심연의 눈’ 발동.> <‘심연의 눈’의 숙련도가 15 상승했습니다.> - 서쪽 동굴의 고블린 로드(에타브레) 종족 : 요정 속성 : 목(木) 크기 : 중형 H P : 2,100 / 10110 S P : 0 / 0 태양의 파편은 루시아니안 나무를 수호하는 페어리들의 변형체인 요정으로 현재에 와서 많이 퇴색하였지만 각자 무리를 지어 종족을 유지하고 있다. 고대 시대 때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 마법은 퇴화한 모양. 서쪽 동굴의 고블린 로드는 독이 깃든 할버드(Halberd) 창촉에 찔려 상처와 양귀비 독에 중독된 상태이다. 머리에 울리는 말들이 뇌리에 박히며 왠지 아무렇지 않게 해결책이 떠올랐다. “토 속성 8포인트 지정, ‘무기속성 주입’ 발동, 토(土)!” <‘무기속성 주입’이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무기속성 주입’ 발동, 목표를 생각해주십시오.> <‘무기속성 주입’의 숙련도가 2 상승했습니다.> 내가 단검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자 모래 색과도 같은 은은한 토파즈 빛이 단검에 일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고블린 로드 상처 부위에 푹 소리가 날 정도로 깊게 꽂아 넣었다. “쿠에에에에엑!” 내 얼굴에 진득한 녹색 피가 튀었다. 하지만 내 정신은 오로지 찔러 넣은 단검에만 쏟아 붓고 있을 뿐이었다. 단검은 토파즈 빛에서 은은한 연두 빛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아까 에메랄드와는 사뭇 다르게 조금 탁한 빛을 내 뿜고 있었다. 그리고 고블린 로드는 비로소 편안한 상태를 내 비쳤다. 그걸 확인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정신이 물고 터지듯 빠져나가 다시 기절하고 말았다. “어헉!” 가수면 상태에서 튕기듯 깨어난 이 기분은 두 번째 경험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정감이 가지 않았다. 캡슐을 빠져나와 냉장고 안에 있는 물통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시린 기분이 뇌까지 울려왔다. “파하! 내가 지금 무슨 경험을 한 거지.” 그때 상황을 기억하려 했는데 머리가 너무 아파 관뒀다. 입안이 시려서 아픈 게 아니라 과도한 뇌사용으로 지끈 거리는 것이었다. 나는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부엌 식탁에 놓여있는 탁상시계를 보았다. “새벽 1시라. 일단 자야겠는데.” 아픈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몽사몽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가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그날의 일을 마감했다. -띠띠띠띠띠! 알람시계가 요란히 울리고 나는 팔을 요란히 휘저었다. “시끄러워!” - 퍽! 우당탕. 눈 없는 손에 제대로 적중한 듯 소음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물론 시계에는 크나큰 충격이 와 닿았겠지만. “도대체 몇 시… 어헉!” 건전지가 튕겨나가 멈춰버린 시계의 짧은 바늘은 정확히 ‘3’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긴 바늘이 어디 있는지 볼 필요도 없을 정도로 크로스카운터 친 작은 바늘이었다. “으아악! 지각이잖아!” 이미 지각을 넘어서 결석이라 해도 좋을 만큼 황당한 시간인지라 혹시 오후 3시가 아니라 새벽 3시가 아닐까 하는 기대에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기대는 만날 고등어조림만 주는 센스 제로의 눈팅처럼 무심한 햇살에 의하여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 무너진 마음을 부여잡고 알람시계가 고장 난거라 다시 한 번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 손목시계를 보았지만 내 전자시계는 냉정하게 ‘3’이란 숫자를 보여주었다. “누나, 왜 나 안 깨웠어!” 부엌 쪽에서 후끈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주황빛 앞치마를 두른 내 캐릭터가, 더운지 붉게 물든 얼굴로 뒤 돌아 보았다. “어- 일어났어?” “어- 상쾌한 오후야… 라고 할 줄 안거야? 덕분에 개근상은 먼 나라로 비행했는데!” 눈팅은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며 다시 요리를 시작했다. “아직도 꿈속을 헤매는 거야? 달력을 봐.” 명백한 비웃음에 화가 나야 하는데 그 미소가 무척이나 날 허무하게 만들었다. 어째서 유저들이 다들 매혹 되었는지 조금은 그 기분을 알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사무치는 오싹함을 억누르며 달력을 보았다. 어째서인지 색이 파랗다. “으음, 그러니까… 토요일?” “딩동댕.” 장난스런 얇은 목소리가 무척이나 듣기 좋았… 다기 보다 가증스러웠다. 그래 가증이야, 절대 좋은 게 아냐. 생각해보니 애초에 나는 오늘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게임할 목적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손수 알람까지 오후로 맞춰 놓은 건데. 정말 나는 꿈속을 헤맨 것 같았다. “꿈 깼으면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식탁에 앉아. 다 되었으니까.”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엉거주춤 식탁의자에 앉았다. “누나가 웬일이야? 밥을 다하고.” 눈팅은 부글부글 끓는 된장찌개를 식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요즘 내가 해준 게 없었잖아. 그래서 이참에 힘 좀 내봤지.” “뭐, 뭐야, 갑자기.”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대 사건이다. 눈팅이 아니, 누나가 사람이 되었다! “그 괴물 보듯 하는 눈깔, 내리 깔아라, 동생아?” 나는 공손히 내리 깔았다. “너, 어제도 고등어조림이라고 밥 안 먹었잖아. 우리 동생 객사시키기 싫어서 그런 거니까 일단 먹어봐, 어서.” 어깨가 움찔 거렸다. 무섭다. 나는 부처 손바닥에서 놀고 있는 거 같아. 떨리는 손으로 수저를 들어 된장찌개를 한 숟갈 펐다. “독 없으니까 손 좀 그만 떨고 처먹어 줄래, 동생아?” 나도 모르게 다시 움찔 해버려 기껏 퍼 올린 두부가 도로 떨어져 버렸다. 만회하겠단 심정으로 다시 퍼 올려 재빨리 입에 가져갔다. 음, 음. 이건 무척이나……. “맛있어?” “아니.” “두부만 먹은 거 아냐?” “아니.” “응어리진 된장 먹은 거 아냐?” “아니.” “그렇게 맛없었어?” “아니.” “…….” “…….” 나도 모르게 눈팅의 눈을 피했다. 곁눈질로 보건데 눈팅의 입은 희미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어쩜 좋아, 엄마가 왜 널 귀여워하는지 알아버렸어.” “이익, 내가 뭘!” 에잇, 내가 미쳤지. 번복 못하나? 제길. 무척이나 늦은 아침식사를 마치고(오후에 먹었으니 점심인가)부대끼는 속을 다스리며 조심히 캡슐 안으로 몸을 뉘었다. 정말, 정말 맛없는 식사 때문에 속 버린 거다. 많이 먹어서 그런 게 절대 아니다. [‘아펜하르트’ 게임에 접속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게임 상에서 눈을 뜨자마자 첫 번째로 날 반긴 건 수없이 알려오는 기계음이었다. <‘고블린 로드의 치료’ 퀘스트를 완료 하셨습니다. 보상으로 10실버를 획득하셨습니다.> <‘서쪽동굴 고블린’의 평판이 중립적이 되었습니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더블스펠’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직업 ‘전투법사’로 전직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가래 낀 목소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타데, 타데 일어났다. 일어났다!” “타데, 타데 우리 친구다, 로드 고쳤다, 우리 친구다!” “오로로로로로로!” “오로로로로로로!” 게다가 뭐 영화에서 나오는 인디언들처럼 손바닥으로 입술을 처가며 덩실덩실 내 주위를 돌기까지 했다. 내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 “시끄러워! 그리고 춤추지 마! 더불어 어지러우니까 그만 돌아대!” <‘침묵의 절규’ 발동.> <‘침묵의 절규’의 숙련도가 10 상승했습니다.> <‘서쪽동굴 고블린’ 평판이 약간 하락했습니다.> “타데, 타데 무섭다, 무섭다.” “알았다, 그만한다. 타데, 타데 그만한다.” 고블린들은 무지 주눅 든 표정으로 그 긴 귀를 축 늘어트린 채 우울해했다. 내 말을 고분고분 듣는 모습에 조금 당황되기도 했지만 고블린들 행동이 너무 황당해서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내참, 기죽은 고블린 이라니.” “그런데 타데, 타데 목소리 이상하다.” “타데, 타데 목소리 오우거 같다.” “이게 월래 내 목소리니까 신경 끄셔.” 그렇다. 몬스터에게 굳이 여성으로 속일 필요가 없어서 편하게 내 말투를 쓰는 것이었다. “타데, 타데 목소리 안타깝다.” “남 이사.” “타데, 타데 목소리 우리랑 같다.” “절대 안 같아!” 난 한동안 고블린들의 도발에 일일이 넘어가 ‘침묵의 절규’ 숙련도를 올릴 수 있었다. <영양실조 상태가 되었습니다. 모든 기능이 최하로 하락하며 컨디션 및 체력이 일정한 시간으로 하락 합니다.> 빽빽 소리 지르다 갑자기 뜨는 기계음에 깜짝 놀라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고 보니 머리도 핑 돌고 몸도 힘 하나 들어가지 않았다. 두 번이나 기절하고 지금까지 내 분신에게 밥도 먹이지 않았으니 어쩌면 이건 당연한 결과 일지도 몰랐다. “혹시 먹을 거 있어?” “타데, 타데 배고프다, 배고프다.” “먹을 거 갔고 온다, 먹을 거 갔고 온다.” 고블린들은 여기저기 수선스럽게 미로처럼 이어져 있는 길을 내달려 사라졌다. 횡 하니 혼자만 남게 되자 ‘진작 이럴 걸’하는 자책 비슷한 생각을 했지만 이내 지워버리고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큰 대자로 벌렁 누워버렸다. 좋아, 배도 부르겠다, 스태미나도 채워졌겠다. 이제 제대로 한 번 시작해볼까? 고블린들이 날라준 음식을 먹고, 마음껏 히스테리 부려 전부 쫓아낸지라 현재 혼자인 상태였다. 그렇다고 나를 저돌적인 무식한 놈이라 생각지 않길 바란다. 이러려고 미친 것 마냥 날뛴 건 아니었으니까. 그 저주스런 음식을 먹게 된다면 누구라도 나 같은 행동을 취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 음식이 무엇이었냐 또다시 묻지 않길 바란다. 그 지렁이 생각만 하면… 우웁, 젠장 또 시작이다. 모든 건 상상에 맡기겠다. “열려라, 마음의 문이여.” 성별 여 이름 예쁜이 종족 인간 나이 23세 직업 전투법사 Level 20 소속 - 칭호 미소천사 힘 3 월(月) 0 민첩 2 암(暗) 0 체력 3 화(火) 10+2 지능 13 수(水) 19+2 정신력 13 목(木) 19+2 행운 3 금(金) 0 탄력 2 토(土) 18+2 방어 2 천(天) 20 종족특성 : 없음 칭호특성 : 없음 직업특성 : 피드백 확률 5프로감소 포인트 : 28 스킬 1. 매혹 <숙련도 65/100> 6. 더블스펠 <숙련도 없음.> 2. 침묵의 절규 <숙련도 11/100> 7. 3. 무기속성 주입 <숙련도 11/100> 8. 4. 원소친화력 <숙련도 없음> 9. 5. 심연의 눈 <숙련도 16/100> 10. 직업란에 뚜렷이 명시 된 ‘전투법사’ 그리고 20레벨을 달성했다. 이 황당한 퀘스트가 의외로 엄청난 경험치를 가져다 준 것이었다. 흐뭇한 기분으로 읽어 내려가다 스킬 창에 시선이 도착했다. 늘어난 스킬이 2개나 있었다. “열려라, 나의 잠재된 힘이여.” 1. 매혹(패시브) - 간혹 상대를 유혹 시킨다. 매우 강력한 미모만이 습득 할 수 있는 고유 스킬. 2. 침묵의 절규(패시브) - ‘고성방가’, ‘침묵의 웃음’에서 변형된 상태. 목소리가 닿는 모든 생명체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고 직접 당한 자는 3초간 스턴 상태를 주며 5프로 확률로 버서커 상태가 된다. 단, ‘침묵의 절규’ 발동 시, 약간의 스태미나와 SP가 하락하며 2분의 대기시간이 있다. 수가 많아질수록 하락하는 수치도 증가된다. 3. 무기속성 주입(액티브) - 8개 속성 중 수(水), 목(木), 토(土), 천(天)만을 주입시킬 수 있으며 오직 무기에만 속성 주입이 가능하다. 시간은 3분 동안 유지되며 지능, 정신력, 탄력이 높을수록 시간과 능력이 올라간다. 월(月) : 알 수 없음 암(暗) : 알 수 없음 화(火) : 알 수 없음 수(水) : 인간형 몬스터에게 10프로 확률로 결빙효과가 주어지며 매 공격 시 상처부위는 결빙되어 스태미나가 하락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목(木) : 수(水)속성 몬스터에게 공격 시 자연의 기운이 깃들어 스태미나 및 체력이 흡수된다. 몬스터가 죽을 경우 흡수한 체력을 가진 식물 몬스터 생성.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금(金) : 알 수 없음 토(土) : 독 속성 몬스터에게 추가 데미지 10프로, 그 독을 흡수하여 다시 토의 기운을 불어넣을 때, 독을 간직한 채로 발동한다. 1회 사용가능.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천(天) : 언데드 / 악마 몬스터 공격 시 5프로확률로 절명 시키며 10프로 확률로 치명타, 빛의 보호로 인해 일시적인 방어력이 증가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4. 원소 친화력(패시브) - 4원소의 조화를 깨우친다. 화(火), 수(水), 목(木), 토(土)의 원소와 친화력이 증가하여 각각 원소의 추가 포인트+2 증가, 탄력에 따라 원소의 조화가 증가, 지능, 정신력에 따라 추가 포인트 증가한다. 5. 심연의 눈(Abyss The Eye) (액티브) - 진실을 꿰뚫어 보는 미카엘(Michael)의 오른쪽 눈동자. 죽음의 천사이자 대천사인 그는 ‘영원한 빛(Arc Eternity Seraph)’으로 인간의 혼을 거두는 자이다. 그 눈은 모든 진실과 자신의 의지를 발현 시킨다. 심연의 눈을 발동시킬 경우 지능, 정신력, 탄력 300프로 증가, 모든 속성 포인트가 50증가, 상대를 바라볼시 권능이 발현되며 상대의 진실을 볼 수 있다. 지속시간 3분, 대기시간 24시간 지속되며 12시간 동안 스태미나가 최하로 떨어진다. 6. 더블스펠 (액티브) - 전투법사의 고유스킬. 전투로서 지식을 깨우친 마법사는 속성을 합치는 방식을 고안해 강한 마법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각 속성을 결합해 마법스킬을 창조한다. 각각 속성 10포인트 이상 올려야 결합이 가능하고 속성 포인트가 높으면 높을수록 스킬의 결합이 강해진다. 지능과 정신력이 높을수록 속성 결합 성공여부가 커지며 조합 개수가 늘어난다. 단, 조합개수가 많을수록 피드백 확률 증가, 하루에 한 번 조합 가능, 조합 실패 시 1시간 동안 지능, 정신력 50프로하락. 눈을 부릅뜨고 읽고 또 읽었다. 저 사기적인 스킬은 무엇인가. 내 고유스킬인 ‘심연의 눈’이 진짜 스킬이 되어 눈앞에 아른거리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시전시간이 3분에 대기시간이 24시간이고 지속시간이 끝나면 스태미나가 12시간동안 최하로 떨어진다고 하지만 지능, 정신력, 탄력이 300프로 상승에 모든 속성이 50증가 되고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권능이 발현된다는 말이 그 많은 단점들을 충분히 감싸 안고도 남았다. “일명 필살기 뭐 비슷한 건가? 그보다도 이거 잘하면 되겠는데?” ‘심연의 눈’과 ‘더블스펠’을 보며 나는 짓궂은 미소를 만들었다. 아마 개구쟁이의 그 모습과 같을 것이었다.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스킬이 랜덤하게 생긴다고 그랬지?” 내가 힐러로 전향하기 위해서는 우선 필수적인 스킬인 ‘힐’이 필요했다. 힐이 만들어지는 원소는 수(水), 목(木), 천(天) 정도일 것 같은데 한 번씩 각각 조합하자니 이미 스킬창이 6개나 찬 나로서는 엄청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단순히 조합해서 치료스킬이 생기기나 할까?” 내가 전에 알기로는 아직까지 치료하는 스킬 자체가 없는 걸로 알고 있다. 오죽했으면 사제들이 천대받고 뒤에서 빛의 화살이나 날리며 게임하겠는가. “에라이, 셋 다 섞어보면 뭔가 답이 나오겠지, ‘더블스펠’ 발동.” <‘더블스펠’ 발동, 원소를 지정하여 주십시오.> “수(水), 목(木), 천(天)!” <지능, 정신력이 부족합니다. 피드백 확률 93프로 시전 하시겠습니까?> “허허, 취소.” 딸랑 6프로 줄어든 거냐? 이러니 다들 속성 조합은커녕 원소 기본 마법만 쓰고 앉아 있지. 게임을 만든 작자도 참 대책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 최고 렙이 50대니까 그 렙의 모든 포인트를 지능과 정신력에 투자해야지 3가지 속성을 겨우 합성시킬 수 있을 것이고 결국 그 렙이 아니면 캐스터 계열들은 두 가지 속성 마법으로 살아가라 이 말이 아닌가 말이다. “아니지, 포인트를 지능, 정신력뿐만 아니라 원소에도 각각 10포인트를 주어야 하니 더 막막하겠네. ‘더블스펠’이 전투법사의 고유 스킬이라 했으니 전투법사만 그런 건가?” 갑자기 이 직업이 어렵게 돌아 간다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직업에 대하여 회의감을 느끼고 있는 그때, 저 동굴 너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오기 시작했다. “인간들이다, 인간이 쳐들어왔다!” “인간들이다, 죽여라, 죽여라!” “케에에엑!” 고블린들이 지르는 소리로 보아 어느 파티가 이 동굴을 공략하러 온 모양이었다. 비명소리도 들리는 거 보니까 이미 전투가 시작된 모양인데. 순간 작은 호기심이 잃었다.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싸매고 있던 나에게 청량제 역할을 제공한 그들이 누군지 문득 궁금했던 것이다. 싸움구경이니, 불구경이니 좋아라하는 작자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던 나로선 절대! 그런 이유로 가는 게 아니다, 절대로. 히히히. 무작정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걸어가자 두세 번 길을 잃은 것 빼고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치열한 접전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 저 녀석은?” 동굴너머로 얼굴만 배꼼 내밀어 살펴보자 엄청난 크기에 투 핸드 소드(Two Hand Sword)를 휘두르며 저돌적으로 공격하는 한 인물이 보였다. 그놈이다. 내 등을 사정없이 발로 걷어찬 그놈. 나를 처음으로 죽였던 그놈. 내가 힐러의 사령관이 되어주겠다 다짐하게 만든 그놈. 그러고 보니 그놈 뒤에서 열심히 보조하고 있는 궁수도, 법사도, 할버드(Halberd)를 든 것으로 보아 전사 같은 놈도 그때 보았던 놈들이었단 것을 깨달았다. 그 밖에 두 명이 더 추가되어 있었는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다정다감하게 웃으며 얘기를 나누는 걸로 보아 친구들인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때 그 여성사제는 보이지 않았다. “우하하하, 오늘 내가 이 동굴을 접수해주마!” “기태야, 정말 여기 히든 몬스터가 있어?” 그놈이 처음 미친 듯이 웃으며 말했고 두 번째 물음은 내가 모르는 세 명중 밝은 갈색 로브를 입고 있는 한 남자가 말한 것이었다. “정말 이라니까? 여기 고블린 로드라고 히든 보스 몬스터가 있어.” “전에 기태하고 내가 봤었는데 이 할버드로 공격했다가 된통 당했었지.” “우철, 웃기지마. 그때 거의 다 잡았었는데 그 사제 년이 방해하는 바람에 당한 거잖아. 그때만 생각하면… 으라 차!” “키에에엑!” 그놈이 화풀이로 내지른 투 핸드 소드에 애꿎은 고블린이 희생 되었다. 그놈과 할버드를 든 전사의 말을 듣다보니 이제야 모든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그랬던 거군. 그래서 고블린 로드가 상처 입었고, 그 사제가 욕먹고 있었고, 나를 죽였던 거냐? 단순히 히든 몬스터를 못 잡았다란 화풀이로 나를 죽였던 것이냐? “이거 재미있겠는데.” 알아버린 이상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나는 먼지가 껴서 더러워진 상아색 로브를 정돈하고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천천히 동굴을 돌아 나왔다. 물론 그 많은 고블린들이 싸우고 있는 뒤쪽 안전지대에서 멈춰 서는 걸 잊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힘이 없어서 너희들이 방패막이가 좀 되어 주어야겠다. “나, 나왔다!” “으잉? 저건 고블린 로드가 아닌데.” 짠하고 등장한 나를 보며 모두 혼란스러운 듯 한 표정이었다. 내게 등을 보이고 있던 고블린들은 그제야 나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러댔다. “타데, 타데 왔다!” “타데, 타데 우리 친구다!” 그놈은 고블린들의 외침을 듣고 고개를 갸웃 거렸다. “타데? 이벤트성 몬스터인가? 저거 잡으면 아이템 좀 주겠는데.”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겨우겨우 참았지만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 까진 막을 수 없었다. 이 게임은 현실을 최대로 반영하다보니 모든 생물에는 머리위에 아이디 같은 표시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오해하는 것이다. 이거 연극을 바란다면야 응당 따라주는 게 예의겠지? 나는 짐짓 가래 낀 음침한 목소리를 만들어 내며 저 놈들에게 외쳤다. “나의 이름은 고블린 조련사 타데, 물러나라, 인간들이여.” 이게 통할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너무 잘 통한 것 같았다. “오오, 이벤트 몬스터다!” “아싸, 웬 떡이냐!” “족쳐!” 내가 고스란히 죽어줄쏘냐. 흥이다 이놈들… 으힉! - 슈욱, 팅! 내 머리 옆으로 화살 하나가 슝하고 지나가 동굴 벽에 맞아 튕겨 나갔다. 이거 방심하다 헤드 샷 당할 뻔 했다.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가만있을 수 없지. “나를 화나게 하지마라!” <‘침묵의 절규’ 발동.> <‘침묵의 절규’의 숙련도가 3 상승했습니다.> <‘서쪽동굴 고블린’의 평판이 약간 하락했습니다.> “우왁! 몸이 안 움… 으악!” 스턴 맛이 어떠냐, 이놈아. 그놈이 순간 움찔하다 고블린의 몽둥이에 맞아 뒤로 나자빠졌다. 좀 더 고블린들이 힘써주길 바랬지만 저놈들뿐만 아니라 고블린들 까지 경각심을 줘서 움직임이 둔해, 추가 공격은 못한 듯했다. “저 타데라는 몬스터 좀 강한 모양인데.” “이런 우라질! 뒤에서 꼬물거리지 말고 이리 나와!” 타데가 아니라, 타테야! 하고 막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저놈도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걸로 보아 그놈 꽤나 열 받았나 보다. 하지만 어쩌니, 나는 주특기가 보조라서. 자, 오랜만에 내 진짜 주특기 좀 발휘해볼까? 나는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돌아보았다. 지형지물 숙지완료, 내게 타격 입힐만한 것은 화살이나 마법, 거리계산 완료, 그 밖에 특이사항으로는 바닥에 작은 돌멩이 몇 개와 고블린들의 무기를 투척할 위험이 있음, 확인 완료. 나는 주위 모든 공간을 장악한다. “‘무기속성 주입’ 발동, 수(水)!” <‘무기속성 주입’의 숙련도가 2 상승했습니다.> 수많은 고블린들 중, 그놈을 공격하는, 그것도 히트가 가능한 고블린에게 절묘한 타이밍을 잡아 걸어주었다. “우왁, 이게 뭐야!” 그놈은 고블린들의 공격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어느 정도는 그냥 맞아주며 투 핸드 소드를 마구 휘두르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자신의 몸이 둔해지자 당황했다. “야! 저 타데라는 몬스터 좀 어떻게 해봐! 이따위 고블린들한테 내가 당해야겠냐?” “걱정 마, 더블 스크류!” “빛의 화살!” “파이어 볼!” 여러 가지 마법과 화살이 날아왔지만 이미 예상한 나는, 아까 숨어있던 곳으로 들어가 가볍게 공격들을 피했다. “뭐 저런 몬스터가 다 있어! 저거 유저 아냐?” “나도 황당하지만 유저는 아니다. 유저라면 고블린들이 먼저 공격했겠지.”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약은 몬스터가 세상에 어디 있어!” 여기 있다, 자식아. 속으로 욕을 곱씹던 나는 다시 숨어있던 곳에서 나와 마법을 시전 했다. “빛의 화살!” “기태야, 피해!” “으악!” - 펑! 명중이다. 고블린에게 신경 쓰던 그놈의 가슴에 정확히 매다 꽂았다. 빛이 사방으로 비산하자 잠시 모두 행동을 멈추고 그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기태야, 괘, 괜찮냐?” “…….” 그놈은 멍하니 서 있었는데 꼭 구겨진 휴지조각마냥 얼굴을 찌푸리고 자신의 가슴을 볼 뿐이었다. 내 완벽한 공격에 넋이 나갔군 그래. “가슴이 매우…….” “매우!” “…안 아파.” “…응?” “꼭, 치기어린 저렙놈한테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야.” “…….” …치기어린 저렙이라 죄송합니다. “마, 마법이 약해 졌구나. 내가 힘만 온전했더라면…….” “…치졸한 변명 같다는 생각은 나뿐인가?” “기태야, 몬스터가 설마 거짓말을 하겠니?” “그래 맞아.”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거짓말 하고 치졸한 변명을 뱉어서. “인간들이여 기다리거라. 내 진정한 힘을 보여 주겠다.” 그리고 난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 어우, 낯 뜨거워. 내 레벨이 20 인지라 그냥 속성마법은 아직 약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도망 나오긴 했는데 막상 자리를 피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타데, 타데 뭐하는가.” 갑작스런 가래 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나만한 덩치에 비대한 고블린이 양손에 각각 한손도끼를 파지한 채 호기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고블린 로드였다. “당신은 여기 어쩐 일로?” “타데, 타데 우리 서쪽동굴 고블린들 약하지 않다. 저 인간 놈들 죽이러 간다.” 그럼 진정한 보스 등장인가. 이거 저 인간들만 좋은 꼴 보겠는데… 그냥 확, 이 로드만 납치해버려? 그 생각은 바로 포기 했다. 저번 ‘심연의 눈’으로 보았을 때 나보다 결코 약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그놈들만 좋게 만들 수 없었기에 난 모험을 걸어보기로 결정했다. “나도 같이 가자!” “타데, 타데 환영이다.” <퀘스트 ‘고블린 로드를 지켜라’가 발동 되었습니다.> 이날 나는 또 하나의 퀘스트를 받을 수 있었다. 고블린 로드와 나는 다시 아까의 접전 장소로 돌아왔다. 내가 잠깐 없던 사이 방어하던 고블린 들의 숫자가 눈의 띄게 줄어들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놈들, 내 방해가 없으니 물 만난 물고기처럼 거의 학살 한 모양이었다. “야야, 타데라는 몬스터 또 나왔다.” “이번엔 고블린 로드도 같이 있어!” “이거 대박이잖아? 아자자, 돌진!” 저 놈들 전부 아이템에 눈이 멀어 우리에게 불을 키고 달려드는군. 나는 자연스레 뒤로 빠지고 고블린 로드가 앞으로 나섰다. “나는 에타브레! 너희들, 죽인다, 게게겔!” 에타브레라는 고블린 로드는(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이 놈 이름도 몰랐다.)쌍 도끼를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파워가 만만치 않은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 핸드 소드를 든 그놈은 멋들어지게 막아내고 있었다. “나도 가세한다, 파이크 어택!” “뎀딜하면 나지, 쇼트 소드 어택!” 할버드를 든 자와 쇼트 소드(Short Sword)를 역수로 든 자까지 가세하자 에타브레가 천천히 밀리기 시작했다. 주위 고블린 들은 화살들과 마법 때문에 도와줄 여건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럼 내가 나서야겠지? “‘무기속성 주입’ 발동, 천(天), 수(水), 목(木)!” <‘무기속성 주입의 숙련도가 6 상승했습니다.> 천속성은 에타브레에게 걸어 방어력을 높이고, 수속성은 가장 타격을 많이 주고 있는 쇼트 소드를 든 자에게 걸었으며, 마지막 목속성은 그놈과 할버드에게 각각 걸었다. “이야, 쇼트 소드에 푸른빛이 어렸어. 좋아, 난도질!” “크워워웡!” 엄청난 빠르기다. 쇼트 소드를 든 자는 상처를 낼 때마다 그 곳에 얼음 알갱이가 맺히기 시작했고 에타브레도 당황했는지 연신 뒤로 밀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녹색 빛이다! 강격, 폭격, 중격!” “나도 간다, 차징, 스크류 파이크!” 셋이서 엄청난 공격을 퍼 붇자 에타브레의 비명소리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수없이 얼음 알갱이가 맺히고 깨지기를 반복, 대략 3분 동안 끝없이 공격했는데 에타브레가 쓰러지지 않자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들의 표정이 서서히 바뀌어 가는 걸 볼 수 있었다. “헉, 헉. 저 트롤 같은 재생력은 뭐야?” “큰일이다. 나 스태미나가 바닥이야.” 셋은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저 도둑같이 생긴 놈은 제일 신나게 날뛰더니 스태미나까지 바닥났나 보다. “이거 혹시 저 타데라는 놈이 치료해주는 거 아냐?” 호오, 그나마 셋 중에 할버드가 가장 났구나. 그놈들이 쏘아보는 시선을 담담히 받으며 나는 말했다.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있는 한, 에타브레를 죽일 수 없다.” “역시!” “말도 안 돼. 아직까지 나오지 않은 치료스킬이 이런 곳에서 등장한단 말야?” 나는 너무도 웃겼지만 이를 꽉 물고 참아야만 했다. 어제 발견한 수(水), 목(木) 조합이 의외에 장소에서 꽤나 유용하게 써먹힐 줄이야. 저놈들은 자신들로 인하여 치료되고 있다는 사실을 죽었다 깨나도 모를 것이었다. “혹시, 검에 맺힌 빛 때문에 그런 거 아냐?” “그럴지도 몰라. 이제 보니 ‘무기속성 주입’ 같아 보이는데.” …죽었다 깨어나면 알겠군. “죽인다, 죽인다, 게게게겔!” “욱! 스태미나가… 야! 좀 도와봐!” 드디어 에타브레가 반격하기 시작했다. 스태미나가 하락한 근접 캐릭 세 명은 갑작스런 반격에 힘겹게 방어하기 시작했고 상황이 불리해지자 뒤에서 보조하고 있던 세 명이 고블린들을 무시하고 도와주려 했다. 하지만 어림없지! “끼어들지 마라!” <‘침묵의 절규’ 발동.> <‘침묵의 절규’의 숙련도가 2 상승했습니다.> <‘서쪽동굴 고블린’의 평판이 약간 하락했습니다.> “파이어 보… 억!” “길호야!” “피드백 현상이야. 젠장, 하필 마법을 쓰는 타이밍에… 길호야 괜찮아?” 의외에 결과다. 2분 대기시간이 풀려서 다시 날린 ‘침묵의 절규’가 스턴효과로 인해 마법사에게 피드백 효과를 준 것이었다. 이번 공격으로 인해 마법사의 단점을 알아내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나도 마법 쓸 때 공격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겠는 걸. 대기시간을 기다리며 다시 ‘침묵의 절규’를 사용하려고 목을 가다듬고 있을 때 기계음이 울려왔다. 큰일이다, 스킬을 마구 난사하는 게 아니었어! 이 게임은 이 기능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편하게 자신의 체력과 마나를 숫자로 환산해서 알려 주면 얼마나 좋았을까. 괜히 현실과 비슷하게 만든답시고 감으로 모든 걸 해야 한다는 얼토당토 하지 않은 시스템을 도입하니 내가 짜증을 안 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컥!” “주인아!” 스태미나가 떨어져 힘들게 피하고 있던 도적놈이 드디어 에타브레의 도끼에 상처를 입었다. 왼쪽 어깨에서부터 가슴까지 푹 박혀 들어간 도끼가 매우 히스테리한 광경을 연출시켰지만 피가 뿜어져 나오는 그래픽은 없어서 그나마 참을 만 했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어이구, 이게 웬 의도치 않은 횡제냐. PK를 하며 경험치를 올리는 다른 여타 게임도 여럿 해봤지만 이 게임도 이런 시스템이 도입되어 있는 줄은 몰랐다. 나도 참… 이 아펜하르트란 게임에 대해 알고 있는 게 하나도 없구나. 이담에 경험치에 관한 것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에헤야, 경사 났네. 그 와중에도 또 다시 레벨업 했다. 점차 회색으로 변하는 할버드 놈이 조금 안쓰럽기도 하지만 너무 쉽게 올린 레벨업이 너무 신나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인걸. 나는 속으로나마 에타브레를 열심히 응원했다. “으… 안 되겠다. 튀자!” “그래, 아무래도 다음을 기약 하는 게 좋겠어. 나도 화살 거의 앵꼬야.” “그 전에 길호 좀 누가 업어봐. 피드백 때문에 기절 했잖아. 으익, 빛의 화살!” 안되려니까 도망가시겠다? 요놈들아 내가 다 듣고 있는 줄은 모를 거다. “인간들이 도망가려 한다, 막아라!” <‘침묵의 절규’ 발동.> <‘침묵의 절규’의 숙련도가 2 상승했습니다.> <‘서쪽동굴 고블린’의 평판이 약간 하락했습니다.> <피드백 되었습니다. 스태미나와 MP가 하락하였습니다.> <스태미나가 떨어졌습니다. 모든 기능이 최하로 하락하며 컨디션 및 체력이 일정한 시간으로 하락 합니다.> “쿨럭!” 속이 뒤집힌 것 같은 충격이 엄습했다. 이놈의 패시브 스킬! 의도하지 않았는데 스킬이 튀어나와 버렸다. 빌어먹을, 소리만 질렀다하면 튀어나오니 마나 낭비를 따지자면 득보다 실이 더 크지 않은가. 그래도 저 놈들이 도망가는 걸 막을 순 있었다. 내 말에 고블린 들이 도망가는 입구를 막아버렸던 것이었다. “크아아악! 타데 죽인다!” 뭐, 뭐야. 에타브레를 상대하고 있던 그놈이 갑자기 물불 안 가리고 나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저 붉어진 눈은 설마! 버서커에 걸린 건가? 맙소사! 왜 하필 지금 걸릴 건 뭐야! 도망가려 했지만 도통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 대로면 죽는다. 투 핸드 소드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나는 그 모습을 허무하게 바라보아야만 했다. 저 놈한테 또 죽는 건가. <레벨업 하셨습니다.> 눈을 질끈 감고 잠시 현실을 도피하고 있었는데 다시 한 번 레벨업에 눈을 살짝 떠 보았다. “힉!” 아직도 투 핸드 소드를 치켜 올린 상태 그대로 여서 화들짝 놀랐는데 점차 회색으로 물들어가, 겨우 안도의 한 숨을 내 쉴 수 있었다. 버서커 모드의 특성상 아마 MP가 바닥난 것이겠지. 정말 아슬아슬 했어. “기태마저 당해버렸어!” “도망가야… 억!” 리더가 당하니 많이 혼란스러운가 보다. 고블린들에게 당할 정도니 말 다한 거겠지. <레벨업 하셨습니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결국 3렙을 더 했고 그놈들은 이 동굴을 한 명도 살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고블린 로드를 지켜라’ 퀘스트를 완료 하셨습니다. 보상으로 10실버를 획득하셨습니다.> <‘서쪽동굴 고블린’의 평판이 우호적이 되었습니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이번일로 대체 몇 렙을 한 거야? 무려 10렙이다. 거의 폭렙을 넘어 사기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인 것이었다. 이정도면 아까 생각한 그것을 한 번 시도 해봐도 될 것 같은데 되던 안 되던 한 번 해보고 그만 오프 해야겠다. “타데, 타데 고맙… 타데?” 빨리 실험하고 싶어, 급한 마음에 어느 정도 스태미나가 회복되자마자 냅다 달렸는데 등 뒤로 에타브레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래봐야 뻔한 인사치례겠지. 가볍게 무시해주었다. “하아, 하아. 아이고, 힘들다. 좋아, 숨 좀 돌리고… 자아! 시작해볼까? 열려라, 마음의 문이여.” 성별 여 이름 예쁜이 종족 인간 나이 23세 직업 전투법사 Level 30 소속 - 칭호 미소천사 힘 5 월(月) 2 민첩 4 암(暗) 1 체력 3 화(火) 11+3 지능 27 수(水) 19+3 정신력 27 목(木) 21+3 행운 3 금(金) 2 탄력 5 토(土) 19+3 방어 2 천(天) 21 종족특성 : 없음 칭호특성 : 없음 직업특성 : 피드백 확률 5프로감소 포인트 : 78 스킬 1. 매혹 <숙련도 65/100> 6. 더블스펠 <숙련도 없음.> 2. 침묵의 절규 <숙련도 34/100> 7. 3. 무기속성 주입 <숙련도 17/100> 8. 4. 원소친화력 <숙련도 없음> 9. 5. 심연의 눈 <숙련도 16/100> 10. 아까 나 혼자 있었던 안락한 곳으로 돌아와 창을 열어 보았다. 대략 10렙은 거의 폭렙 해버려 레벨만 30에 도달했고 그로인해 추가 포인트 78이 주어졌다. 그 밖에도 보너스 포인트가 여러 곳에 많이 주어졌는지 속성 란도 조금 변한 것 같았다. 힘, 민첩, 탄력도 조금 올라가 싱글벙글 좋기만 했다. “지능 39, 정신력 39 주입. ‘더블스펠’ 발동, 수(水), 목(木), 천(天)!” <지능, 정신력이 부족합니다. 피드백 확률 79프로, 시전하시겠습니까?> 역시나. 여기까지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 “‘심연의 눈’ 발동.” <‘심연의 눈’ 발동.> <‘심연의 눈’의 숙련도가 15 상승했습니다.> 주위가 느려지는 느낌과 함께 온 몸에 활력이 돋는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면 뭐든지 가능할 것 같다. “‘더블스펠’ 발동, 수(水), 목(木), 천(天)!” <피드백 확률 32프로, 시전 하시겠습니까?> 심연의 눈을 시전 했음에도 불구하고 피드백 확률이 32프로인 것에 너무도 놀라버렸다. 내가 성급했던 걸까. 취소하고 다음을 기약해볼까 잠깐 생각도 해봤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심연의 눈 스킬이 너무도 아깝기 때문에 모험을 걸어 보기로 결심했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가볍게 숨을 고르고… 자아 간다! “시전!” 시전이란 외침과 동시에 각각 녹색, 푸른색, 흰색의 손바닥 만 한 구가 눈앞에 생성되어 내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대략 자동차가 기어를 바꾸며 천천히 속도를 올리는 것과 같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피드백 되었습니다. 스태미나와 MP가 하락하였습니다.> 무언가 몸속에 있던 충만한 기운이 급속도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엄청난 무력감이 온 몸에 엄습했다. 그 속성구들은 아직도 돌고만 있는데 이젠 서 있을 기력조차 피드백으로 빼앗기고 있었다. 이거 실패인가. <스태미나가 떨어졌습니다. 모든 기능이 최하로 하락하며 컨디션 및 체력이 일정한 시간으로 하락 합니다.>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숨이 벅차고 영상이 점점 흐려진다. 하하,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이게임 만든 작자, 정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머릿속을 파헤쳐 보고싶… 억! 한계다. 그때 플래시 터지듯 빛이 나를 중심으로 시작해 동굴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더블스펠’ 결합을 성공 하셨습니다.> <‘더블스펠’ 스킬이 업 되었습니다. 스킬명이 ‘트리플스펠’로 바뀝니다.> <‘태초의 재생’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전투법사’에서 ‘드루이드 계승자’로 직업이 바뀌셨습니다.> “거참… 더럽게 절묘한 타이밍이네.” 완전히 뻗은 나는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힘이 하나도 없는 걸로 보아 아마 실낱같은 MP를 붙잡고 살아남은 것이리라. “열려라, 나의 잠재된 힘이여.” 덜덜 떨리는 팔을 겨우 가슴으로 모아 포즈를 취했다. 이놈의 포즈, 정말 꼭 해야 되는 거야? 누워서도 될까 모르겠지만 일어설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임했다. 1. 매혹(패시브) - 간혹 상대를 유혹 시킨다. 매우 강력한 미모만이 습득 할 수 있는 고유 스킬. 2. 침묵의 절규(패시브) - ‘고성방가’, ‘침묵의 웃음’에서 변형된 상태. 목소리가 닿는 모든 생명체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고 직접 당한 자는 3초간 스턴 상태를 주며 5프로 확률로 버서커 상태가 된다. 단, ‘침묵의 절규’ 발동 시, 약간의 스태미나와 SP가 하락하며 2분의 대기시간이 있다. 수가 많아질수록 하락하는 수치도 증가된다. 3. 무기속성 주입(액티브) - 8개 속성 중 수(水), 목(木), 토(土), 천(天)만을 주입시킬 수 있으며 오직 무기에만 속성 주입이 가능하다. 시간은 3분 동안 유지되며 지능, 정신력, 탄력이 높을수록 시간과 능력이 올라간다. 월(月) : 알 수 없음 암(暗) : 알 수 없음 화(火) : 알 수 없음 수(水) : 인간형 몬스터에게 10프로 확률로 결빙효과가 주어지며 매 공격 시 상처부위는 결빙되어 스태미나가 하락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목(木) : 수(水)속성 몬스터에게 공격 시 자연의 기운이 깃들어 스태미나 및 체력이 흡수된다. 몬스터가 죽을 경우 흡수한 체력을 가진 식물 몬스터 생성.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금(金) : 알 수 없음 토(土) : 독 속성 몬스터에게 추가 데미지 10프로, 그 독을 흡수하여 다시 토의 기운을 불어넣을 때, 독을 간직한 채로 발동한다. 1회 사용가능.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천(天) : 언데드 / 악마 몬스터 공격 시 5프로 확률로 절명 시키며 10프로 확률로 치명타, 빛의 보호로 인해 일시적인 방어력이 증가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4. 원소 친화력(패시브) - 4원소의 조화를 깨우친다. 화(火), 수(水), 목(木), 토(土)의 원소와 친화력이 증가하여 각각 원소의 추가 포인트+2 증가, 탄력에 따라 원소의 조화가 증가, 지능, 정신력에 따라 추가 포인트 증가한다. 5. 심연의 눈(Abyss The Eye) (액티브) - 진실을 꿰뚫어 보는 미카엘(Michael)의 오른쪽 눈동자. 죽음의 천사이자 대천사인 그는 ‘영원한 빛(Arc Eternity Seraph)’으로 인간의 혼을 거두는 자이다. 그 눈은 모든 진실과 자신의 의지를 발현 시킨다. 심연의 눈을 발동시킬 경우 지능, 정신력, 탄력 300프로 증가, 모든 속성 포인트가 50증가, 상대를 바라볼시 권능이 발현되며 상대의 진실을 볼 수 있다. 지속시간 3분, 대기시간 24시간 지속되며 12시간 동안 스태미나가 최하로 떨어진다. 6. 트리플스펠 (액티브) - 전투법사의 고유스킬. 전투로서 지식을 깨우친 마법사는 속성을 합치는 방식을 고안해 강한 마법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각 속성을 결합해 마법스킬을 창조한다. 각각 속성 10포인트 이상 올려야 결합이 가능하고 속성 포인트가 높으면 높을수록 스킬의 결합이 강해진다. 지능과 정신력이 높을수록 속성 결합 성공여부가 커지며 조합 개수가 늘어난다. 단, 조합개수가 많을수록 피드백 확률 증가, 하루에 한 번 조합 가능, 조합 실패 시 1시간 동안 지능, 정신력 50프로하락. 7. 태초의 재생(beginning of the world regenera-tion power) (액티브) - 태초, 모든 자연의 조율자로 알려진 드루이드의 마법으로 훗날 숲을 숭배하던 위치들에 의해 마법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게 된다. 태초 드루이드의 재생은 위치의 재생과는 다르게 더욱 순수한 자연을 담고 있으며 그 힘 또한 강하다. 기본 재생의 비해 20프로 더 회복하며 마나소모량이 10프로 줄어든다. 스킬 사용 시, 모든 생명체는 MP, 스태미나가 회복된다. 시전자의 SP 소모량에 따라 회복되는 MP, 스태미나가 달라지며 작게는 1명 최대 10명까지 동시 회복 가능.(숙련도에 따라 동시회복 최대 수치가 달라짐) 숲 속성 생명체에게 시전 시, 그 생명체는 자라거나 진화가능. “크헤, 크크크, 크헤헤헤헤!” 나왔다, 드디어 나오고야 말았다. 이 날은 게임에 있어 최초로 나온 치료 스킬이었으며 나에게 있어 힐러의 사령관으로 임하는데 첫 발을 내딛는 계기가 되었고, 고블린들에게 있어 인간도 고블린 같은 웃음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 날이 되었다. <접속을 나가시겠습니까?> <‘아펜하르트’ 접속을 해제 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아펜하르트를 시작한지 벌써 나흘째, 일요일을 이용하여 여러 정보들을 섭렵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게임을 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심연의 눈’ 스킬의 부작용으로 어차피 12시간 동안은 스태미나가 최하로 떨어져 있을 테니 이참에 궁금했던 것들을 찾아본 것이었다. 가장 궁금했었던 경험치에 관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는데 경험치는 몬스터 사냥만이 아니라 요리, 치료, 그림, 문학, 독서, 낚시 등등 어떤 것이든 경험만 하면 그에 따른 부가 경험치를 준다는 것이었다. 막말로 말해 구걸하든 나그네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든, 내가 경험했다고 뇌파가 인식하면 그것이 레벨업을 도와준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 밖에도 PK 하거나 퀘스트를 완료하거나 명성을 얻어 유명해저도 경험치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또, 새로운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숙련도에 관한 것이었다. 스킬 숙련도는 그 스킬을 사용하고 효용성이 크면 숙련도를 얻게 되는데 높아질수록 스킬의 힘이 강해지고 숙련도가 100, 풀로 찬 상태에서 특정한 조건이 만족된다면 스킬이 업그레이드됨과 동시에 명칭 또한 바뀐다고 한다. 그래서 내 ‘고성방가’가 지금 ‘침묵의 절규’로 바뀐 것도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밖에 숙련도는 아이템에도 적용되어 있었는데 그건 스킬과 조금 다르게 처음 아이템을 착용하면 그 아이템의 본 능력을 10프로밖에 사용 못하고 숙련도가 100이 되어야 100프로 다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평소 쓰던 아이템을 쓰다 더 좋은 게 생기면 바꿔 버리는 게임성 짙은 방법을 애초에 쓰지 못하게 막아 버린 것과도 같았다. 나 역시 이 시스템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평생 동안 사용한 검이 좋은 거지, 좀 더 날카로운 검이 있다고 그것이 바로 좋아질 리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걸 또 1, 2년 사용하고 익숙해져야 진짜 좋아지는 거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외모에 관해서도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 게임 특성상 시작할 때 본 얼굴과 몸매를 그대로 스캔해 게임에 적용시키기 때문에 변용이 불가능 했는데 다른 것으로 약간의 변용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상점에서 머리 염색제로 염색할 수 있고 가면이나 피어싱, 얼굴문신 등으로 디자인을 할 수도 있다. 더불어 스테이터스에서 올리는 능력에 비례해 게임 상에서 내적으로 분위기가 나타난다고 하니 누나의 캐릭터를 숨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피드백에 관한 정보였는데 피드백은 SP를 사용하는 모든 생명체에게 해당하는 말로서 스킬이 실패하였을 경우나 시전 중, 자의나 타의에 의해서 취소되었을 경우 발생한다고 나와 있었다. 시전 실패한 마법의 마나 소모량에 200프로에 해당하는 SP가 소멸하며 스킬의 강도에 따라 즉사나 스태미나 및, MP도 같이 소멸 할 수 있다 나와 있는데 정신력이 높을수록 확률이 감소한다고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내 포인트를 정신력에만 투자할 걸 그것도 모르고 객기 부리다 된통 고생만 했으니… 이래서 정보는 필수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아, 그리고 이리저리 게시판을 돌아다니다 찾은 황당한 정보도 있었다. 바로 내 공식 팬클럽인(눈팅 팬클럽이겠지만)미소천사 기사단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는데 그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게다가 이젠 세력을 키우려고 난리도 아닌 모양이었다. 내일 오후 7시에 실버크로스라는 기사단과 기사대전을 벌인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시스템인지 몰라 이 정보도 어쩔 수 없이 찾아보게 되었다. 기사단은 그 명성에 따라 단원 수를 늘릴 수 있으며 길드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어 커뮤니티를 활성화시킨 것과도 같은 시스템이었는데, 저 기사대전 이란 게 엄청난 명예와 경험치를 준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죽음 페널티도 없을뿐더러 승리한 기사단은 패한 기사단의 로고가 깃든 깃발을 빼앗거나 그에 비례하는 보상을 요구해 합의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합의를 못해 깃발을 빼앗긴다면 그 기사단은 해체되며 한 달간 기사단을 만들거나 다른 기사단에 가입할 수 없게 된다고 했다. 이 정도면 꽤나 재미있는 시스템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 달 뒤에 대대적인 업데이트와 함께 정식 서비스를 오픈 한다고 했다. 한 달 이용액은 대략 십만 원. 이 게임이 만들어지고 오픈베타를 시작한지 이제 겨우 일주일반이 되가는데 얼마 안 돼서 돈을 받는 다는 건 완전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 그 회사의 방침도 이해가 가긴 했다. 하지만 이건 나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는 말이었다. 돈이야 어떻게든 하면 문제 될게 없다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내가 미성년자란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 나는 누나 아이디를 도용하고 있고 대한민국 사이버 범죄에 해당하는 해킹에다, 여성 몸이다 보니 간접 사이버 성희롱과 기타 자질구레한 것들까지 두루 겹쳐서 돈을 내기 시작하면 분명 실명제로 인해 죄다 걸리게 될 터인데 어찌 막막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어쩌면 나에게 남은 시간은 한 달 까지 일지도 몰랐다. “하아.” 그 답답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뭔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꼭 해탈하고 싶어 고민하는 스님같이.” “내버려두셔. 그보다도 벌써 날이 어두워지는데 엄만 왜 이리 안와.” 정보를 뒤지다 말고 엄마가 온다는 말에 부랴부랴 게임방에서 뛰쳐나와 벌써 한 시간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내 입에선 뾰족한 반응이 튀어 나올 수밖에. “야, 삐졌냐?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게임중독증에 걸린 걸 안쓰럽게 생각해서 구재해줬더니 이 누나를 이해하지 못할망정 아주 새 부리마냥 입이 튀어 나왔구나?” “구재한 게 아니라 개처럼 끌고 온 거겠지.” “그러게 누가 안가고 거기서 버티래?” “5분만 더 하려고 그랬어. 중요한 정보가 있었단 말야.” “그게 게임 중독자의 초기증상이란 사실을 알까 몰라.” GG. 풀어서 Good Game. 그 말발에 내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사옵니다. 그 말 실력이 어디 가오리까. “그나저나 정말 늦으시는데. 전화라도 해볼까.” 아주 잠깐 눈팅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우리 가족은 엄마, 누나, 나로 세 명. 지금 우리는 한빛 여행사 관광 안내역을 직업으로 가지고 계신 엄마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엄마는 내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이후,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외국을 나가는 일이라 일주일에 많아야 두 번 정도 볼 수 있는 정도였다. 이젠 그것도 익숙해 매번 올 때마다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리곤 하는 게 일상생활이 되어 버렸다. 생활력 강하신 우리 엄마가 대단하기도 하지만 나는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엄마보다 누나한테 업혀 자랐으며 전화상으로 매번 통화한다고는 하지만 얼굴을 맞대고 얘기 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엄마가 나를 심하게 간섭하고 품안에 두려 하는 게 못 마땅하기도 했다. 이런 불효자식 이라 생각지 말아라. 나도 저게 다 사랑해서 그렇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으니까. 단지 정도가 너무 심해서 그렇다는 거지. “어, 응. 기찬이도 있어. 다 왔다고? 알았어, 응.” 전화하는 걸 들어보니 거의 다 온 모양이었다. “어디래?” “요 앞이야, 마중 나가자.” “무슨 마중이야, 안 갈래.” 눈팅의 양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저놈의 귀차니즘 병 또 도진다.” “저놈의 히스테리 병 또 터지나?” “뭐 인마?” 나는 재빠르게 거실을 튀어 나갔다. 분명 성난 도깨비처럼 눈팅이 뿔을 세우고 뒤 쫓아 오고 있을 것이었다. “엄마! 여기야, 여기!” 저 멀리 가로등 불빛에 보이는 작은 실루엣은 무언가 잔뜩 들고 있는 걸로 보아 엄마라는 것을 직감했다. “어이구, 내 강아지. 마중 나와 있었어?” - 쾅! “야, 이기찬! 너 죽었…….” 힘차게 문을 박차고 나온 우리 눈팅은 주먹을 들어 올린 그 자세로 굳었다. “소연아! 너 또 동생 괴롭히고 있었지!” 이젠 땀까지 삐질 흘렸다. 에휴, 안쓰러워라. “아하하… 아니야, 엄마. 그냥 단지… 그래, 귀여워서 그런 거야.” 무안하게 변한 주먹을 그대로 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임기응변, 할리우드 감이군. “나오면서 나 죽인다고 한 게 누구… 우웁!” “아이, 착한 내 동생, 어서 들어가자. 엄마도 어서 들어와. 어휴, 무슨 물건을 이리도 많이 싸왔어?” …저기, 질식사 시킬 작정이 아니라면 최소 코는 막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누님? 하지만 나의 그 작은 바람은 집안에 들어가 내 얼굴이 창백해질 때까지 알지 못했다는 걸 조심히 말해본다. “어머, 맛있구나. 이젠 애미보다 실력이 더 뛰어난 걸.” “헤헤, 별거 아냐.” 쑥스러운 듯 발개진 볼을 붉히며 눈팅의 애교부리는 장면을 보는 건 오로지 엄마가 있을 때뿐이었다. 이럴 때 눈팅은 영락없이 부모한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어린애의 모습과도 같았다. “기찬아, 너도 이것도 좀 먹어보렴. 그렇게 안 먹으니 만날 살이 빠지지.” “먹고 있습니다요.” 이런 말을 들으면 왜 나는 반항 끼 다분한 말투가 되어 버리는 걸까. 나도 모르게 욱해버렸다. “제 때문에 안 그래도 속상하다니까. 입이 고급이라 만날 밥도 안 먹고 피곤해 죽겠어.” 눈팅의 푸념 섞인 말이 들려왔다. 아마 속에 담아 두고 있던 말이겠지. 괜스레 씁쓸하다. “에휴, 다 애미가 있었어야 하는 건데.”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이 암울한 분위기. 언제나 이 집에 감도는 어두운 공기. 잊고 있다가도 이따금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이 공기는 절대 없어지지 않아서 신경질이 날 정도로 나는 이 집 구석이 싫다. “아! 엄마, 나 새로운 직장에 취직했어.” 눈팅도 이 분위기가 싫은 걸까. 바꿔보려 하는 노력이 다분히 보였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인가 뭔가 다니던 회사는 어쩌구?” “그 회사에서 추천 받았는데 월급도 높고, 편한 것 같았거든. 게임회사인데 3D MAX하고 마야를 이용해 아이템을 초기 디자인 하는 거라 그다지 부담도 없어.” 엄마는 기뻐하고 있었지만 부모는 다 그런 걸까. 다른 한 편으로 수심을 지우지 못하셨다. “잘 되었구나. 그래도 일보다 시집갈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니?” “아직 생각 없어. 결혼까지 하기에 남자 친구도 조금 못 마땅하고.” 그 말을 태식 형이 들었다면 아마 땅을 치고 통곡 했을 거다. “그래, 기찬이는 생각해둔 대학이라도 있니?” 화살이 드디어 나에게 향했다. “아직,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서.” 엄마는 작게 한숨을 폭 내쉬셨다. “걱정이구나. 너희 누나처럼 재수하면 많이 힘들 텐데.” “걱정하지 마, 아직 2년이나 남았고 뭐 정 안되면 지방 전문대라도 갈 생각이니까.” 근심이 가득한 엄마의 저 표정은 정말이지 익숙하지가 않았다. 내 숟가락이 애꿎은 김치찌개만 못살게 뒤척거렸다. 그날은 그렇게 즐겁지도, 슬프지도 않게 보내게 되었다.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이미 중독되어 버린 ‘아펜하르트’에 바로 접속 했다. 씻지도 않고 교복도 벗지 않아 누나가 더러운 무엇을 피하듯 행동했다는 사실만 아니면 그다지 특별한건 없었다. 아, 엄마는 내가 학교 갈 때 다시 일하러 가셔서 배웅도 못 해드렸는데 매번 있는 일이라 그다지 신경 쓰이진 않았다. “나도 이젠 여길 떠나볼까.” 어두침침한 동굴 내부를 휘휘 둘러보다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타데, 타데. 간다, 간다.” “타데, 타데 따라와라. 로드, 줄게 있다.” 여기 지리도 모르는데 어차피 고블린들의 안내를 받아야 하는 처지 인지라 겸사겸사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고블린 로드인 에타브레가 있는 곳은 멀지 않아서 곧 도착 할 수 있었다. 그곳은 언제나와 같이 소란스럽고 산만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라앉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타데, 타데 왔는가.” 나는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우리 서쪽동굴 고블린의 은혜다. 보답한다, 받아라.” 에타브레는 그 우둘투둘한 손을 내밀었는데 그 안에는 녹색의 작은 잎사귀가 3장 쥐어져있었다. 나는 주춤주춤 그것을 받아 들었다. “타데, 타데 우정 잊지 않는다. 서쪽 고블린의 친구다.” 에타브레는 그 두터운 입술을 벌리며 활짝 웃어 보였다. 괜스레 나도 미소 짓게 된다. “고마워.” <‘매혹’의 숙련도가 10 상승했습니다.> 오랜만에 발동하는 ‘매혹’ 그만큼 나의 미소는 진실이었단 증거겠지. 그래도 인마, 고블린 주제에 얼굴은 붉히지 마라. 한 대 때려주고 싶어진다. 고블린들의 호위를 받으며 고블린 동굴을 빠져나온 후, 드디어 동물들이 있는 녹색초원에 도착했다. 저 멀리 보이는 아페타 마을이 겨우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몇 달간 떠나 있다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제 다 왔으니 슬슬 이 잎사귀 좀 살펴볼까? 확인.” -마법 깃든 루시아니안 잎사귀 (희귀) 고대 고블린은 페어리의 힘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어 루시아니안 잎사귀에 마법을 저장했다고 한다. 그들의 힘은 숲에 기운이지만 페어리와는 또 다르다. 소모성 장착 아이템. 머리, 몸, 등 부분에 장착할 수 있으며 장착 시 목속성 포인트+5, SP+50, 치료마법 시전 시 치유 량이 +150증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한테 꼭 어울리는 아이템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럼 이번엔 그걸 사용해볼까? ‘태초의 재생’ 발동.” <‘태초의 재생’ 발동, 목표를 생각해주십시오.> 30m 거리에 있는 한 초보유저가 열심히 사슴 한 마리를 단검으로 공격하고 있었는데 죽기 적전에 달한 사슴을 주시해보았다. <‘태초의 재생’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뭐야 이거. 버그인가?” 눈 깜짝 할 새에 사슴이 완쾌해버렸다. 아주 잠깐 녹색 빛이 상처 부위에 반짝 거린 것 빼고는 그리 특별한 게 없었는데 덕분에 그 초보유저가 버그로 착각한 것이었다. “우와, 그다지 마나를 사용한 것도 아닌데 완전히 치료되어 버렸잖아? 역시 치유량 20프로 증가에 마나소모 10프로 감소가 크긴 크구나.” 이 엄청난 스킬을 어떻게 이용할까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파티를 이루어 이제 보조로 전향 할까? 그러면 분명 레벨업은 빠르고 편하게 올릴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다른 여타 게임과 똑같이 퍼다 주기만하는 힐러에 불과했다. 내가 원하는 건 명예와 지휘다. 뒤가 아니라 앞에서 명령하는 사령관이었다. “그럼 내가 가야할 길은 하나뿐이잖아.” 명예와 지휘를, 그리고 렙까지 동시에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했다. 허나 그건 남자로서 자존심이 무진장 상하는 것이고 어찌 보면 그건 진정한 내가 아닐지도 몰랐다. “하긴 애초에 눈팅 아이디를 도용한 순간부터 나라는 존재는 없었잖아.” 게임 상에서 또 다른 분신을 만들뿐 굳이 나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게임을 즐기는데 필요한 조건이라는 걸 오래전에 깨우쳤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나를 찾으려 한 것일까. 마음을 결정한 나는 후드를 푹 눌러쓰고 빠르게 마을로 입성했다. 7시가 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연기하기 위한 변장이 필요했기 때문에 급하게 행동한 것이었다. 분수대가 있는 중앙 광장은 여전히 많은 사랑들로 북적거렸다. 나는 그 중에서도 노점상을 하고 있는 유저들을 살펴보았다. “바스타드 소드 팔아요! 무개가 상점보다 더 가볍습니다!” “사슴 가죽 삽니다, 개당 1쿠퍼!” “염색약 팝니다! 바르는 얼굴 문신향료도 있어요!” 내가 바라던 상은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 상인에게 다가가 돗자리에 진열된 물건들을 이것저것 살펴보며 물었다. “이 금빛 염색약은 얼마 인가요? 하늘색 얼굴 문신향료도요.” 오랜만에 만들어 내는 눈팅의 목소리. 그 상인은 내 얼굴이 몹시도 궁금한지 연신 흘끔 거리다 결국 포기하고 질문에 답해주었다. “금빛은 만들기도 어렵고 선호하는 색이라 많이 비쌉니다. 그래도 아름다운 여성분이시니 5실버만 받겠습니다. 그에 비해 하늘색 얼굴 문신향료는 흔한 편이니 1실버만 받도록 하죠.” “그래요? 비싸네…….” 내 수중에 있는 돈은 20실버. 퀘스트를 완료해서 얻은 돈이었다. 현재에 나로서 물건들의 시세를 전혀 몰랐지만 무턱대고 사기엔 조금 껄끄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어 흥정하기 위해 말끝을 흐린 것이었다. “저는 정당한 가격을 제시한 겁니다. 정 의심이 되거든 다른 곳도 둘러보세요.” 저렇게 말하는 유저는 완전히 배짱을 튕기는 부류거나 진실을 말한 것, 둘 중 하나일 것이었다. “그래도 조금만 깎아 주실 수 없나요?” 그리고 포인트로 후드를 벋고 살짝 눈웃음친다. 나… 너무 이 캐릭터에 익숙해져 버렸어. 왠지 모르게 순정을 잃어버린 기분이야. <‘매혹’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하하, 이거 정말 미인이셨군요. 까짓 거 두 개 합쳐 4실버에 드리죠.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사 가세요. 오늘 개안을 시켜준 보답입니다.” 역시 상인이랄까? 상대를 기분 좋게 하는 처세술을 잘 사용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눈웃음 지었다. “고마워요, 상인님.” <‘매혹’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어, 어흠. 이거 제가 다 쑥스럽네요. 혹시 성함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예쁜… 이 아니라… 그래, 후후. 미소천사랍니다.” 예쁜이라 하기엔 너무 웃긴 아이디라 조금 뭐해서 그냥 명예 호칭인 미소천사라 말해버렸다. 상인은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 하다 그냥 피식 웃고 말했다. “나도 참,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명예랭킹 10위에 미소천사가 이런 곳에 올 리 없잖아. 죄송합니다, 천사님. 정말 미소가 천사 같습니다, 하하하!” “그럼, 수고하세요.” 내심 놀라버렸다. 명예랭킹이라 별거 아닌 줄 알고 그냥 말 한 건데 한 번에 생각해낸걸 보면 이것도 꽤나 유명하다는 말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허겁지겁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염색약과 문신은 획득했고… 이젠 옷인가?” 이 누런 천 옷으로는 내가 생각한 것을 행할 수 없었기에 오랜만에 멘히버 아이템 가게에 들렀다. “어서 오세요… 어이구, 이게 누구십니까.” “그 동안 별일 없으셨어요?” 멘히버씨는 양 허리에 손을 대고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하하하! 저야 항상 여기에 있는데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래,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실크로 만든 옷하고 백색의 망토, 그리고 머리에 쓸 액세서리가 필요해요.” “실크라… 그건 꽤나 비쌀 텐데요. 망토야 싸게 줄 수는 있지만 액세서리도 어찌어찌하면… 일단 기다려 보세요, 내 한 번 찾아보죠.” 멘히버씨는 쪽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그동안 진열된 물건들을 구경했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 일단 이것저것 골라왔는데 그 전에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이번에도 돈이 없습니까?” 갑자기 표정을 굳히고 내 눈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속일까 생각도 했지만 저 눈을 보니 그러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말았다. “16실버가 있어요. 제 전 재산이죠.” “그렇군요. 눈을 보니 거짓이 아니란 걸 알겠습니다.” <‘멘히버 아이템 가게’의 호의도가 많이 올랐습니다.> <‘멘히버 아이템 가게’의 상태가 매우 우호적이 되었습니다.> <‘아페타 마을’의 호의도가 조금 올랐습니다.> 기계음을 듣다 문득 거짓말을 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해보았는데 지금까지 쌓아온 평판이 무효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 여겨졌고 순간 오싹한 기분이 감돌았다. “그 정도 돈이면 최고급으로 줄 수 있습니다. 레몬 빛 실크 드레스와 백호가죽 망토, 그리고 미스트레스 티아라 라고 하죠.” 상큼한 색상의 레몬 빛 실크 드레스는 위로는 가슴의 굴곡을 그대로 살려주고 있었고 치마 부분에 하늘거리는 레이스가 달려있어 신비함을 잘 그려내고 있었다. 거기에 백호가죽 망토는 검은 줄무늬가 의외로 잘 빠져나와 드레스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입고 보니 서로 상호 조화해 더욱더 맵시가 살아났다. 게다가 저 티아라는 전체적으로 금으로 만들어 졌는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중앙에 박혀있는 커다란 호박색 보석 하나가 빛을 반사시켜 경의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티아라는 사실 도금입니다. 그래도 저 호박색의 돌은 미스트레스의 힘이 담긴 꿀 석이라 저것만 해도 20실버는 거뜬히 넘어 갈 거예요.” 실버가 아니라 골드로 계산 되어야 하는 물건이란 걸 직감했다. 이건 너무 부담되는 아이템들이다. 아무리 철면피를 하고 있다지만 저리 아무 거리낌 없이 물건을 내 놓는 NPC를 어떻게 우려먹는단 말인가. …하지만 계속 손이 물건들 쪽으로 향하고 말았다. “부담되는 표정 지을 필요 없습니다. 공짜가 아니니까.” “…네?” “어흠, 빚으로 달아 두겠단 뜻입니다. 다음에 언제든지 여유 있을 때 갚으십시오.” 그리고 눈을 찡긋 하는 멘히버씨. 이건 아마도 평판 때문에 가능한 것이리라. 저렇게 까지 나에게 물건을 주려 하는데 더 이상의 겸손은 멘히버씨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겠지. “고마워요, 멘히버씨.” <‘매혹’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이봐요, 너무 헤벌쭉 웃는 거 아닙니까? 침도 좀 닦으시고. 그나저나 내가 너무 헤픈 건가? 뭐 이리 ‘매혹’이 자주 떠? 내가 하고 다니는 행동을 유심히 생각하며 내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았다. 하지만 전혀 명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남자이기 때문이었다. - 레몬 빛 실크 드레스 (고급) 숙련도 1/100 레몬 염료로 염색한 드레스. 여성용이며 누에라는 벌래가 내뿜는 실로 만들어 매우 가볍고 부드럽다. 마법적 방어력에 뛰어나며 아름답고 신비함을 만들어 주어 파티나 연회 때 어울리는 옷이다. 피드백 확률 5프로 감소, 마법극대화 2프로 증가, 마법 방어력 +150, 내면적으로 신비함을 만든다. - 백호 가죽 망토 (고급) 숙련도 1/100 동방에서 네 방위의 신으로 불리는 숲의 제왕으로서 백호는 바람을 이끄는데 특별한 힘이 있다. 바람을 막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어느 정도 추위도 막아준다. 바람 마법 저항력 30프로 증가, 목속성 마법 극대화 5프로 증가. - 미스트레스 티아라 (희귀) 숙련도 1/100 벌들의 여왕이라 불리 우는 미스트레스는 이그드라실의 꿀을 압축시켜 마법능력을 부여 하였다. 그 꿀 석을 이용하여 만든 여성용 왕관은 착용 자에게 신비감을 부른다. 용매가 필요한 마법사용 시 소모성 재료에 한하여 꿀 석이 대신 충족시켜준다. 단, 숙련도 수치 100 필요하며 10회 후 파괴된다. 벌들의 공격을 받지 않는다. 내면적으로 신비함을 만든다. 아이템을 확인하며 중앙광장에서 갈대들이 한창 자라고 있는 북쪽평원으로 올라갔다. 여기서 좀 더 올라가면 모래평원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미소천사 기사단과 실버크로스 기사단이 기사대전을 벌인다고 했다. 나는 바로 그곳으로 가려는 것이었다. 이쯤이면 모두 어느 정도 눈치 챘으리라 생각된다. 그렇다, 나는 미소천사 기사단을 도와주고 미소천사란 명예를 올릴 작정이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내가 정말 미소천사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에 맞는 옷을 구입하고, 포토샾으로 내 머리를 금빛으로 만들어 버린 작자 때문에 부득이하게 머리를 바뀌기 위해 염색약을 구입한 것이었다. - 금 빛 염색약 (일반) 금빛을 내는 신기한 염색약, 머리에 바르면 색이 물들 것 같다. 사용횟수 1회, 지우기 위해선 성수가 필요. - 하늘색 얼굴 문신 염료 (일반) 하늘색 띤 염료, 얼굴에 묻히면 색이 스며들 것 같다. 사용횟수 1회, 지우기 위해선 성수가 필요. 유리 앰플에 담겨있는 금 빛 염색약을 머리에 부었다. 끈적거리고 찝찝한 느낌일줄 알았는데 그냥 바로 머리칼에 스며들어 찬란한 금발을 만들어 내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좋아, 그럼 이젠 염료를 바르기만 하면 되겠구나. 내가 이 염료를 가져온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내 본 얼굴을 가리기 위해, 둘은 ‘오! 나의여신님’에서 나오는 베르단디처럼 얼굴에 문신을 해, 신비롭게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만화 캐릭터가 문신을 어떤 모양으로 하고 있었더라. 이마였던 거는 확실한데… 물방울이었나? 세모였나? 에라이 모르겠다, 대충찍자. 나무로 만든 작은 통속에 들어있던 염료를 살짝 찍어 미간 약간 위쪽에다 묻히기 시작했다. 거울이 없어 정교한 작품을 그릴 순 없었지만 대충 신비감을 조성할 것이었다. “좋아, 치장은 끝났고 이젠 옷인가?” 인벤토리 안에서 전에 고블린 로드 에타브레에게 입수한 ‘마법 깃든 루시아니안 잎사귀’를 3장 다 꺼냈다. 이것들을 오늘 얻은 드레스와, 망토, 티아라에 부착할 생각이었다. 먼저 가볍게 드레스에 잎사귀를 가져다 대어 보았다. <‘레몬 빛 실크 드레스’의 ‘마법 깃든 루시아니안 잎사귀’를 장착 시키시겠습니까? 한 번 장착 된 아이템은 분리 하실 수 없습니다.> “장착.” <‘레몬 빛 실크 드레스’의 ‘마법 깃든 루시아니안 잎사귀’를 장착하여 ‘은은한 녹 빛을 발하는 레몬 빛 실크 드레스’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그냥 보아도 매우 신비함 가득한 드레스였는데 그 드레스 자체에서 녹색의 빛을 발하기 시작해 너무도 아름다워졌다. 나는 비록 남자였지만 그걸 너무도 입고 싶었고 어째서인지 그것을 입은 예쁜 내 모습이 상상되어 마냥 기쁘기 그지없었다. 꼭, 정말 여성 캐릭터를 키워서 멋진 아이템을 착용시킨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게임광인가 보다. - 은은한 녹 빛을 발하는 레몬 빛 실크 드레스 (고급) 숙련도 1/100 레몬 염료로 염색한 드레스. 여성용이며 누에라는 벌래가 내뿜는 실로 만들어 매우 가볍고 부드럽다. 마법적 방어력에 뛰어나며 아름답고 신비함을 만들어 주어 파티나 연회 때 어울리는 옷이다. 피드백 확률 5프로 감소, 마법극대화 2프로 증가, 마법 방어력 +150, 내면적으로 신비함을 만든다. 루시아니안 나뭇잎이 스며들었다. 목속성 포인트+5, SP+50, 치료마법 시전 시 치유량이 +150증가. - 은은한 녹 빛을 발하는 백호 가죽 망토 (고급) 숙련도 1/100 동방에서 네 방위의 신으로 불리는 숲의 제왕으로서 백호는 바람을 이끄는데 특별한 힘이 있다. 바람을 막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어느 정도 추위도 막아준다. 바람 마법 저항력 30프로 증가, 목속성 마법 극대화 5프로증가. 루시아니안 나뭇잎이 스며들었다. 목속성 포인트+5, SP+50, 치료마법 시전 시 치유량이 +150증가. - 은은한 녹 빛을 발하는 미스트레스 티아라 (희귀) 숙련도 1/100 벌들의 여왕이라 불리 우는 미스트레스는 이그드라실의 꿀을 압축시켜 마법능력을 부여 하였다. 그 꿀 석을 이용하여 만든 여성용 왕관은 착용 자에게 신비감을 부른다. 용매가 필요한 마법사용 시 소모성 재료에 한하여 꿀 석이 대신 충족시켜준다. 단, 숙련도 수치 100 필요하며 10회 후 파괴된다. 벌들의 공격을 받지 않는다. 내면적으로 신비함을 만든다. 루시아니안 나뭇잎이 스며들었다. 목속성 포인트+5, SP+50, 치료마법 시전 시 치유량이 +150증가. 잎사귀를 전부 장착시킨 나는 그 아이템들을 전부 착용하고 어깨를 조금 풀어 준 뒤, 앞을 보았다. “이제 준비 완료! 그럼 모래평원으로 가볼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관계로 걸음을 급하게 이끌었다. 자, 가자! 모래평원에 진입하자 엄청난 유저들 숫자에 경악했다. 싸우는 자들은 기껏해야 둘 다 합쳐 백 명 정도 되는데 비해 구경하는 자들이 대충 열 배는 더 많아 보이니 역시 한국 사람은 싸움구경 하면 사족을 못 쓰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저게 미소천사 기사단인가.” 서로 대치하고 있는 두 세력 중에 좌측 기사단이 미소천사 기사단 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법한 분홍색의 휘장을 입고 있었으며 가슴과 그들이 들고 있는 깃발에는 날개달린 빨간 하트로고가 선명하게 양각되어 있었으니 저게 무슨 뜻인지 모르면 바보 아니겠는가. …미치도록 도망가고 싶어졌다. 은빛 휘장에 십자가 로고가 양각된 저 우측 기사단이 미소천사 기사단이었음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구경하고 있는 대중사이에 껴서 잠시 저들의 행동을 지켜보기로 했다. 결코 부담 돼서 나서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게 절대로 아니다. “이제 곧 일곱 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쯤에서 패배를 시인하는 게 어때?” “웃기지 마라, 너희야 말로 미소천사님을 모욕한 대가를 치러야할 것이다!” 미소천사 기사단을 이끄는 자인지 가장 앞에서 분홍 휘장이 덮인 가슴을 탕탕 치며 호기롭게 외쳤다. “조금 웃기지 않냐? 실제로 존재할지 안할지도 모를 유저를 레이디로 모신다는 게? 내가 보기엔 그때 그 동영상도 분명 포토샾이었을 거다.” …정답이다. 그 기사는 온통 은 빛 일색인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놀랍게도 풀 플레이트 메일(Full Plate Mail)이었다.) 머리도 은색으로 염색한데다가 얼굴도 다부지게 생겨서 정말 강해 보이는 자였다. 그에 비해 우리 쪽은 그나마 무난한 검정색 플레이트 메일(Plate Mail)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그놈의 분홍색 가슴휘장이 강한 이미지를 다 버려놓고 있었다. “시작부터 불안하네. 저기요, 과연 어느 기사단이 이길까요?” 나는 많은 관중들 중 한 명을 대충 붙잡아 물어 보았다. 쇼트 보(Short Bow)를 들고 있는 걸로 보아 궁수나 레인저 같아 보였다. “그야 물론 실버크로스… 어헉!” <‘매혹’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이젠 눈만 마주쳐도 발동이냐? 이 모습으로 오래 지내기는 글렀군. “다, 당신은 누구…….” 그 궁수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막으며 말을 막았다. <‘매혹’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실버크로스 기사단이 이긴다고요? 어째서죠?” “그, 그야 PK로 유명한 실버크로스 기사단에 비해 일반 팬클럽인 미소천사 기사단이 이길 리 없죠. 보세요, 이미 진영에서부터 차이가 나잖아요.” 확실히 궁수 말 대로였다. 실버크로스 기사단은 꼭 군대처럼 오와 열을 맞춰 싸울 준비를 하는데 반해 미소천사 기사단은 우왕좌왕, 잡담하는 무리도 있고, 왔다갔다 정말 게임 상에서 많이 보일 전형적인 자세를 고수하고 있었다. “휴,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저, 저기 누구신지……!” 나는 궁수에게 꾸벅 짧게 인사하고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이런 곳에서 발목 잡히면 오도 가도 못하게 될 테니 처한 행동이었다. “시작한다!” 어느 관중의 외침과 함께 드디어 전투가 벌어졌다. 시작은 실버크로스 기사단에서 시작했다. 진형을 유지한 채 모두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자 미소천사 기사단도 부랴부랴 화살과 마법을 날리기 시작했다. 열 명 남짓이 날리는 데도 불구하고 하늘이 알록달록한 색으로 물들었다. “방패 병!” 아까 앞에 있던 은발머리의 유저가 언제 이동했는지 뒤에서 우렁차게 외쳐댔다. 매우 지휘관다운 행동이었다. 앞에서 지휘하는 대장은 병사의 사기를 높이지만 뒤에서 지휘하는 대장은 병사의 능력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앞과 뒤를 잘 활용하는 저자는 그것을 잘 아는 것이었다. 직사각형의 커다란 방패를 든 유저들이 맨 앞으로 나섰다. 저건 과거 로마 병이 사용한 방패로서 타워 실드(Tower Shield)라고 하는데 현실에서도 투석 공격이나 땅에 세워 진지 구축용으로도 쓰인 유명한 방패였다. 나야 판타지물이나 역사책을 많이 읽은 덕분에 잘 알고 있는 것이지만. 저 방패라면 아마도 모든 장거리공격은 쉽게 무효가 될 것이었다. 내 예상대로 모든 마법과 화살은 속절없이 타워 실드에 막히고 말았다. “대장! 우리도 공격하자! 꿀릴게 뭐있어!” “저것들 한 주먹이면 되는데!” “야! 조용히 하고 내 말 좀 들어봐, 시끄러워!” 벌써 혼란에 내분이냐? 가지가지 해라, 이것들아. 도저히 못 봐주겠다. 결국 돌진하기로 마음먹었는지 미소천사 기사단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실버크로스 기사단도 방패 병을 물리고 강해보이는 기사유저들이 앞으로 나왔다. “우와와, 돌진해라!” “돌격, 돌겨억!” 이 대로면 백전백패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태라는 말도 못 들어봤나? 볼 것 없이 달려들면 어떻게 해! 지금까지 힐러로 게임을 하며 수많은 전쟁과 팀플을 경험한 나로선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두 세력은 맞부딪쳤다. 선공은 실버크로스 기사단의 두 번째 줄에 숨어 있던 창병들의 공격이었다. “파이크 스피어!” “스크류 어택!” “우와악!” “어억!” 달려오던 그대로 꼬챙이 꿰이듯 즉사하는 유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사태를 파악하고 검은 플레이트 메일의 대장이 유저들을 뒤로 돌렸으나 이미 상태는 심각했다. “저들이 빠진다! 화살, 마법공격!” 모두 예상했던 것일까. 도망가는 유저 등으로 날아 꽂히는 화살과 마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미소천사 기사단. 간단한 전략이었지만 미소천사 기사단에게 있어선 유저 삼분의 일이 죽어버린지라 무시무시한 전략으로 각인 되었을 것이었다. “으으… 스태미나가.” “나는 MP가 거의 바닥이야.” 그나마 살아남은 유저들도 다친 자들이 태반이었다. 얼핏 보기에 서른 명 정도 남았는데 적은 그에 배는 더 많아 보이니 이미 승부는 결정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오합지졸들을 이끌고 이길 수 있을까.” 한 숨이 절로 나왔다. 실버크로스 기사단은 이제 마무리 지을 셈인지 쐐기형태의 가장 적합한 돌진형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 마무리 지어 볼까. 모두 돌겨…….” “스토오오오오옵!” <‘침묵의 절규’ 발동.> <‘침묵의 절규’의 숙련도가 3 상승했습니다.> 순간 주위가 고요해졌다. 기사단들뿐만 아니라 관중들 까지 모두 행동을 멈춘 것이었다. 등에 땀이 삐질 흘렀다. 이거 엄청 부담스러워 졌잖아. 그래도 일단 말을 내 뱉은 지라 관중들 틈에서 나와 싸우는 장소로 천천히 걸어갔다. 어째서 인지 관중들이 물 갈라지듯 길을 터주어 속으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넌 누군데 신성한 기사대전에 끼어드나!” 은발머리가 매우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이미 둘러매던 망토를 풀은 상태라 그 유저에게 유럽 레이디의 인사처럼 치마를 살짝 올리고 가볍게 몸을 내렸다 올린 다음 살포기 미소를 던졌다. “미안해요, 하지만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요.” <‘매혹’의 숙련도가 10 상승했습니다.> 간드러지는 내 조용한 목소리에 모두 넋을 놓았다. 턱 빠지겠다, 이것들아. “여, 여신이다.” “세상에 저런 유저가 실제로 있을 수 있다니.” “나 저거 어디선가 본거 같아. 어디더라… 아, 아!” 관중들의 웅성거림을 들으며 나는 말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저는 명예랭킹 10위에 미소천사란 호칭을 가지고 있는 유저입니다.” “와!” “미소천사다!” “맙소사, 나 닭살 돋았어!” “누나! 저 싸인 좀여!” 이번 대부분의 말은 미소천사 기사단의 외침이었다. 관중들과 실버크로스 기사단은 마냥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다, 당신이 여기는 왜!” 은발머리가 숨이 턱턱 막히는지 힘겹게 말했다. 자,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처음에는 조용히 구경만 하려고 했어요. 말마 따라 신성한 기사대전을 보고 싶었죠. 하지만 이건 정당한 대결이 아니라 학살이더군요.” “저들이 약했을 뿐이다. 애초에 덤빈 저들의 잘못이지 왜 우리한테 죄를 떠넘기는 것이냐!”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물불 안 가리고 덤비는 이유는 두 가지 뿐이죠. 바보이거나 핍박 받았거나.” 후자가 당연할 테지만 어째서 왜, 전자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일까. “핍박한적 없다!” “웃기지마! 우리 팬 카페에 대놓고 미소천사님을 욕했지 않느냐!” “그, 그건!” 대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성공이다. 찍었던 건데 얼추 맞아 떨어져서 다행이었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기사대전을 취소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나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저들은 나를 제 삼자로 생각하지 않으니 미소천사 기사단의 자격으로서 이 대전을 참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 져가는 기사단에 들어가겠다고?” “저건 죽으러 가는 거 아냐?” 내 말은 파문처럼 번져나가 웅성거림을 이끌어냈다. 은발머리는 미친 듯이 웃으며 말했다. “뭐? 기사대전에 참가 하겠다고? 크하하! 너 혼자 들어가 봐야 아무소용 없다!” 과연 그럴까. “‘태초의 재생’ 발동.” <‘태초의 재생’ 발동, 목표를 생각해주십시오.> 나는 미소천사 기사단이 있는 곳을 향하여 팔을 흩뿌렸다. 그러자 그때 사슴에게 했던 것과는 달리 손바닥을 중심으로 녹색 빛이 퍼져나가 힘겹게 서 있던 유저 열 명에게 스며들었다. <‘태초의 재생’의 숙련도가 3 상승했습니다.> “어, 어!” “힐이다!” “MP가 회복 됐어!” “엄청나다! 스태미나가 최하였는데 거의 다 차 버렸어!” SP가 많이 써지는 거 아닐까 내심 걱정했는데 거의 아무이상 없는 걸로 보아 아직 10프로 효능만 줄 텐데도 아이템 덕을 많이 본 것 같았다. 은발 머리는 경악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치, 치료스킬 이라니! 그럼 천사족 이라는 그 루머가 가짜가 아니라 진짜였어?” …루머 맞는데요. 이제 나는 거의 전설이 된 것 마냥 미소천사 기사단은 나를 우러러 보았다. “아― 저분의 하나뿐인 기사가 되고파.” “누님, 사랑해요!” “자식들아 넘보지 마! 누님은 우리 모두의 사랑이야!” …우러러 보는 게 아니라 단순히 멍청이에 광신도였다. 나는 미소천사 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어쩌질 못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했다. “미소천사 기사단 대장님 있나요?” “네, 넵!” 군기가 바짝 든 군인 같아서 속으로 웃겨 쓰러질 것 같았는데 간신히 참고 연기에 몰두했다. “좋아요, 대장님. 지금부터 지휘권을 잠시 넘겨받을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은 선택이겠지만 부탁드려요.” “무슨 부탁입니까? 저놈은 무시해도 되요!” “전 누님의 종입니다!” “사랑해요!” 정말 지방방송 심하네. 검은 플레이트 메일의 대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마지못해 말했다. “저렇게 난리들인데 제가 죽기 싫어서라도 넘겨드려야죠.” “고마워요.”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고맙다고 인사 하려다 어정쩡하게 멈췄다. 저 진중한 표정으로 보아 심각한 내용일 것이란 걸 직감했다. 대장은 말했다. “싸인 좀 부탁합니다. 아, 제 이름이 김성찬 인데요. 날짜하고 제 이름도 좀… 우억!” “나가 죽어라, 자식아! 대장 직을 싸인 으로 거래 하냐? 밟아!” “나도 싸인 을 못 받았는데 어딜 먼저 가로채려해!” - 퍽, 팍, 빠직! 대장은 부하들에게 비 오는 날에 먼지나 게 맞는 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밟혔다. “자자! 그만들 하세요.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저들이 지금 혼란스러워서 가만히 있지만 곧 이성을 되찾고 돌격해올 거예요. 저희도 어서 막을 작전을 짜야 해요!” 모두 행동을 멈추고 내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중 몇 명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넘어가겠다. “방어력과 체력에는 자신 있다 생각하시는 분 열 명만 나오시겠어요?” “전 이미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당신이 바라신다면…….” “자폭조라도 기꺼이 불사르겠습니다!” 죄다 앞으로 나서는 통에 처음 나온 열 명 빼고 전부 돌려보내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었다. 이거 너무 따라도 난감한데. “지금부터 앞에 나오신 분들은 선봉에 서실 거예요. 혹시 이순신 장군의 해전 술인 학익진을 아시나요?” “그건 아마 거북선을 중앙으로 하여 학의 날개처럼 넓게 포위하는 전술로 기억하는데 아닌가요?” 학익진을 설명한 유저에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이에요.” “야이 자식아! 관심 받으니까 좋냐?” “벌어진 입, 안 다물래?” 다시 소란이 벌어져서 손뼉을 쳐 주목하게 만들었다. 휴, 이것도 은근히 힘드네. “저분이 말한 대로 여러분은 넓게 포진해 적을 에워쌀 거예요.” “하지만 그건 거북선처럼 굳건한 방어가 되어야지만 가능한 전술 아닌가요? 게다가 거북선에서 유황연기를 만들어 시아를 차단하므로 수전에서 가능했던 것인데.” “이 새끼가 어디서 토를 달어!” “너 죽었어, 따라와 이 새끼야.” “그만 하세요. 저쪽에서 돌격 준비를 하기 시작했어요. 급하니 대형을 정리하도록 하죠. 그리고 아까 이님 말씀대로 굳건한 방어가 필요합니다. 그건 제가 해결하죠. 모두 절 믿을 수 있나요?” “전 죽어도 믿습니다!” “믿지 않는 놈은 제가 죽이겠습니다!” “미소천사 기사단이여 영원 하라!” 사기는 거의 극을 달리는 것 같아서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난 열 명의 이미지를 일일이 살펴봐 외워 두었다. ‘태초의 재생’, 오늘 너의 활약을 기대해보겠다. 우리 인원이 서른 명뿐이라 대형은 빠르게 정리 되었다. 가장 수가 많은 전사가 앞으로 나섰고 아까 뽑은 열 명은 각각 방패를 들고 넓게 포진했다. 그리고 다섯 명 남은 마법사들은 나와 함께 전사들 뒤로 빠졌다. “제가 마법사 분들을 부른 건 이번 싸움의 승패를 좌우하기 때문이에요. 혹시 범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나요?” 한 검정색 일색의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대표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거의 필살기 수준의 범위 마법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마법사를 선택한 유저는 다 알겠지만 스킬만 얻기는 쉽죠. 하지만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스펠시간이 1분정도 걸릴 뿐만 아니라 마나가 많이 들어가 지금 제 렙으로는 성공확률이 20프로도 안 됩니다. 전에 한 번 사용해봤는데 피드백 때문에 사용도 못하고 죽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건 아마 우리 모두 비슷할 겁니다.” 그 말이 맞는지 듣고 있던 마법사 세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님은 그렇지 않나요?” 허름한 후드를 푹 눌러 쓴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 유저였다. 내가 지적하자 어깨를 심하게 움찔 거렸다. “아, 저기, 그러니까… 저는 범위마법이… 없어요.” 목소리가 얇은 걸로 보아 여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럴 수가, 나한테 여성 팬도 있었던 거야? 남자로서 왠지 모르게 무지 행복했다. 이 여자가 같은 여자를 좋아한다면 조금 심각하겠지만. “뭐야. 마법사가 범위마법도 없어?” “없으면 자폭이라도 해버려!” “저거 마법사 아닌 거 아냐? 후드 좀 벋어봐.” 마법사 4명이 쏘아대자 더 움츠러드는 여성. 나는 그 여성을 등 뒤로 이끌고 마법사들에게 일갈했다. “이봐요, 이 게임에는 정론이 없습니다! 범위마법이 있는 자가 있다면 없는 자도 있는 거예요. 그런 걸로 사람을 핍박할 자격 없습니다! 지금 적이 올 준비를 하는데 시작 전부터 어긋난다면 매우 실망할 겁니다. 범위 마법은 제가 적어도 피드백으로 죽지 않게끔 도와드릴 테니까, 대기하세요.” “아, 네!” 마법사 4명이 내가 가리킨 곳으로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물러났다. 조금 안쓰럽기도 했지만 하나 뿐이 없는 여성 팬이다. 아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자, 이제 곧 시작이다. 저 멀리 실버크로스 기사단을 응시하며 한껏 긴장감을 즐겼다. “저기…….” “네?” 아직까지 내 등 뒤에 있었던가?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 죄송해요. 레이디 앞에서 실례를 저질렀군요.” “아… 풋, 미소천사님 말투가 남자 같아요.”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실수다, 지금 나는 여자였지. “아하하… 농담이에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저기… 전… 아, 아니에요. 아까 고마웠습니다.” 그 여성은 90도 각도로 허리를 숙여 고마움을 표한 뒤,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무슨 말을 하려한 것일까 의문이 들었지만 실버크로스 기사단이 돌격해 와서 금세 잊어버리고 말았다. “공격하라! 실버크로스 기사단의 힘을 보여주자!” “와아아아아아!” 대략 예순 명가량이 돌격하는 모습은 장관을 연출시켰다. 맨 앞에서 창대를 꼬나 쥔 유저들은 죽음도 불사를 작정인지 달려가는 몸짓엔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 쪽도 이젠 만만치 않았다. 두 배나 많은 적들이 돌격해 오는 모습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빨리 오라 손짓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 광신도 같은 표정만 아니었더라면 퍽, 봐줄 만 할 텐데. “‘태초의 재생’ 발동.” <‘태초의 재생’의 숙련도가 2 상승했습니다.> 두 세력이 부딪친 순간, 학의 날개처럼 펼친 유저 열 명에게 상황에 맞게 ‘태초의 재생’을 시전 시켰다. 나 혼자서 백 명가량을 전부 시아에 둔 적도 있었는데 열 명쯤이야. 오랜만에 힐러로서의 피가 끓었다. “뭐, 뭐야. 이놈 트롤 같아! 베었는데 바로 치료 되어버려!” “나, 나도… 우왁!” 상대가 다친 다음 치료하는 건 범인이나 하는 짓이다. 나는 다칠 타이밍, 다치는 정도, 다치는 부위까지 모든 걸 생각 하에 두었다. 지금은 진짜 스킬로 만들어 졌지만 사실 이건 내 고유의 스킬인 ‘심연의 눈’. 지금까지 나를 모든 게임에 힐러 랭킹 1위에 있게 해준 스킬이며 타테라는 힐러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던 기술이었다. “엄청난 컨트롤이다!” “난 지금까지 여러 게임을 해봤지만 저런 힐러는 처음 봐!” 사방으로 눈을 돌리며 나는 외쳤다. “열 분, 조금만 더 버티세요! 나머지는 포위에 들어갑니다!” 펼쳐진 학의 날개가 천천히 적들을 감싸 안기 시작했다. 적들은 죽지 않는 열 명 때문에 속절없이 포위되기 시작했다. “포위를 뚫어야 한다! 다시 쐐기형으로 만들어 돌격하라!”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이젠 멀티 컨트롤을 할 때가 온 것이었다. 적의 힘이 집중되는 곳만 나의 힐을 집중 시켰다. 계속 뚫릴 듯 하다 실버크로스 기사단만 죽어나고 다시 막혀 버리니 적도 속 꽤나 탈 것이었다. “대장님, 포위당했습니다!” “젠장, 모두 저 미소천사 때문이다! 마법사들과 궁수들은 저 미소천사를 노려라!” 조금 생각이 있는 자라면 당연히 나를 노리겠지. 하지만 이 먼 거리를 맞추기가 쉬울까? 유도탄이 아닌 한 힘들 것이었다. “컨트롤 샷!” “매직 미사일!” 망할! 유도탄이 있었어! 혹시 라는 놈에게 제대로 발등 찍힘 셈이다. 스킬 사용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던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멍하니 화살과 마법공격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 퍼버벙! 티팅! 그때 내 앞에 생긴 빛의 방패가 공격들을 막아 내었다. “콜록!” 그리고 공격을 막아 낸 직후, 후드를 눌러쓴 여성유저가 무릎을 땅에 짚고 피를 토했다. “괜찮아요?” “…단순한 피드백이니 전 신경 쓰시지 마시고 전방이요!” “…젠장! ‘태초의 재생’ 발동!” 나도 아직 멀었다. 이런 것 하나 예상 못하고 막지 못하다니. 스킬로 보아 사제일 것 같은 여성유저에게 도움을 받고 말았다. 나기찬, 너도 아직 멀었구나. 더 강해져야겠다. 나를 채찍질하며 더더욱 치료에 집중했다. 그러기를 5분, 드디어 완벽한 포위진을 구축하여 적을 가운데 가두기를 성공했다. 그동안 다시 마법과 화살이 날아올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우리 기사단이 마법사들과 궁수들만 집중적으로 공격해 잘 차단해주어 너무 고마웠다. “지금입니다, 범위공격 마법이요!” “미소천사님! 거리가 멀어서 조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잘못하다간 우리 편도 휩쓸려요!” 아차 싶었다. 사정거리에 대해서 적들뿐만 아니라 우리 쪽도 방해 받는다는 걸 잊은 것이었다. 결국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해결 될 문제인가. “제가 할게요! 아니, 제가 할래요!” 그 여성유저였다. 그 유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붙들고 서 있었는데 완고하게 내 앞으로 나섰다. “제 ‘디바인 마크’라면 마법을 집중시킬 수 있는 징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서있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데…….” “할 수 있어요!” 그 여성은 소리를 빽 질렀다. 어째서 저렇게 까지 하는 것일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쳇, 좋아요. 한 번 해보죠. 모두 범위마법 준비 하세요!” 내 명령에 4명의 마법사는 각자 스펠을 외우기 시작했다. 여성은 소리 지른 게 미안한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했다. “소리 지른 거 미안해요. 하지만 언니라면 이해해주리라 생각해요. 저도 힐러의 룰과 자부심은 지키기로 했거든요.” 머리에 번개가 친 것 같았다. 저, 저 유저는……! “으윽, 피드백이!” “으아악!” 생각을 일단 접어야 했다. 지금은 저 마법사들의 피드백부터 막아야 할 때다. “‘심연의 눈’ 발동, ‘태초의 재생’ 발동, 최대치다!” <‘심연의 눈’ 발동.> <‘심연의 눈’의 숙련도가 15 상승했습니다.> <‘태초의 재생’ 발동.> <‘태초의 재생’의 숙련도가 5 상승했습니다.> 거의 비어있던 SP가 충만해지는 느낌과 머리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들이 느려 보였다. 유저도, 소리도, 일렁이는 모래바람 까지도. 내 손 끝에서 뻗어 나가는 녹색 빛이 4명의 마법사를 감싸 안았다. 즉사만 하지 않는다면 피드백 현상은 SP를 소멸 시키고 뒤이어 MP와 스태미나를 소멸 시킬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태초의 재생’으로 충당 시키려는 생각이었다. “쿨럭, 이, 이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잖아.” 네 명의 스킬은 내 예상을 훨씬 뛰어 넘었다. 내 SP가 ‘심연의 눈’을 써서 300프로로 불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고갈된 느낌을 받을 정도니 말 다한 것이었다. 올 것이 왔다. 조금만 더 버텨라! 참아라, 참는 거다! <스태미나가 떨어졌습니다. MP로 대체 합니다.> MP가 떨어진다는 경고음이 울리는 그때 모든 마법사들이 스펠을 멈췄다. “스펠 완료!” “미소천사님 덕분에 오늘 이걸 처음 써 보게 되네요!” 나는 다리에 힘이 없어 옆으로 쓰러지며 힘겹게 외쳤다. “이제 사제님 차례에요…….” 내 말에 그 여성은 몸을 가리던 로브를 벋어 던지고 경건한 자세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저 뒷모습… 역시인가. “카오스에서 갈라진 태초의 어머니 가이아시여, 어머니를 상징하는 물건은 땅, 땅은 곧 성표 이니라. 발동하라, 디바인 마크(Divine Mark)!” 실버크로스 기사단 중심에서 한 줄기의 빛이 솟구쳐 올랐다. 그걸 본 마법사 들은 그 빛을 향해 마법을 발동 시켰다. “스톰 파이어(Storm Fiery)!” “프로즌 스톰(Frozen Storm)!” “라이트닝(Lightning)!” “어스퀘이크(Earthquake)!” - 우르르릉!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땅이 갈라지고 불을 머금은 돌풍과 얼음을 머금은 돌풍이 서로 힘을 겨루었으며 그 주위로 번쩍하는 전류가 사방을 휩쓸었다. “으아악! 살려줘!” “파, 팔이!” “크아아아아아악!”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초토화였다. 사방으로 흩어지며 마법 사정거리를 피하고자 하는 유저도 있었으나 우리 기사단이 포위한 채 절대 진형을 풀지 않아 진퇴양난의 상황일 뿐이었다. “헤헤, 이정도면… 콜록! 저도 힐러의 권위를 조금 새운 거겠죠?” 이 여성,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내 옆에 쓰러져 있는 주제에 권위를 운운하고 있다. 나는 말없이 ‘태초의 재생’을 시전 했다. <‘태초의 재생’의 숙련도가 1상승했습니다.> <피드백 현상이 잃어 납니다. MP가 소실됩니다.> “으윽!” 젠장, 무진장 아프다. “어, 언니! 왜 제게……!” “바보 같은 사제님아. 그 얼굴로 권위 운운하니 제가 봐 줄 수가 없잖아요.” “…고마워요. 저번에도 겸사겸사.” “겸사겸사 라는 말이 상당히 거슬리는데요?” “…그럼 이것저것.”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헤헤헤.” “킥킥킥.” 우리가 잡담을 하는 동안에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실버크로스 기사단은 그 은발머리 대장과 다섯 명 정도 살아남았을 뿐이었고 전부 궤멸 되어 버려 이미 대결이라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끝났다고 말한 것이다. 아직 쓰지 못할 범위 마법을 편법으로나마 사용하게 되었다지만 그건 정말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해내었다. 그 날은 미소천사 기사단의 데뷔전을 이끌고 ‘아펜하르트’ 게임에서 나의 명성을 퍼트리는 계기가 된 날 이기도 했다. 다음날 나는 어제 있었던 일로 아침부터 엄청난 고민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생각한 정도를 뛰어 넘어 어마어마한 소문을 불러 일으켜 내 명예랭킹이 5위로 껑충 뛰었을 뿐만 아니라 미소천사 기사단에 가입하려고 하는 유저로 팬 카페 홈페이지가 마비가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뿐이랴, 그날의 일들이 동영상으로 만들어져 ‘아펜하르트’ 홈페이지 조회 수 1위를 차지하였고 나에 대한 궁금함과 호기심 때문에 온통 여기저기 글들과 토론으로 끝없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유명해져서 좋은 거 아냐? 자랑하냐?’라고 생각하는 인간이 있다면 내 심정이 되어보라 말하고 싶다. 이런 동영상이 누나의 눈에 들어가고 그 친구들 눈에 뜨이기만 해도 내 인생 종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조금 말도 안 되지만 막말로 어떤 한 해커가 내 정보를 해킹해서 경찰에 넘긴다면 철창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놈의 팬 카페, 모두 하나같이 남정네들인데 좋아서 무엇을 할 것이며 만약 정모라도 하자 한다면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나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왔다. “내가 미쳤지. 그놈의 렙과 명예에 눈이 멀어서.” 그때의 기사대전은 엄청난 경험치로 돌아와 무려 10렙업이나 껑충 뛰어, 벌써 40렙이다. 기사대전이 끝나면 이긴 기사단은 이긴 기여도를 누가 제일 많이 했는지 비밀투표가 시작돼, 1위부터 순서대로 경험치가 주어지는데 만장일치로 나를 선택한 것이었다. 더불어 구경하던 관중들도 그때의 내 모습을 보고 이날의 명예점수를 모두 나에게 주어서 5위까지 오른 거고 말이다. 덕분에 이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이걸 웃어야하나 울어야 하나. 볼일보고 뒤처리를 안 한 그런 찝찝한 기분으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두컴컴하고 집 특유의 퀴퀴한 냄새를 맡으며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요새 눈팅은 새로운 게임회사에 취직한 이후부터 조금 바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바로 게임을 시작하려고 내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지금 들어가 봐야 머리만 아플 게 뻔했기 때문에 관두고 의미 없는 손짓으로 TV를 켰다. 스포츠, 바둑, 만화, 연애프로그램 전부다 흥미를 끌지 못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계속 서있기도 뭐해서 소파에 앉았다. 엉덩이에서부터 느껴지는 차가운 한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와 뜨거운 머리를 식혀서 기분이 퍽 나쁘진 않았다. 리모컨으로 기계처럼 채널을 돌리다 어느 한 지점에서 손가락이 멈추었다. TV에서는 한창 ‘아펜하르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이제 대한민국의 대표 게임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성장한 ‘아펜하르트’에 대해 설명을 드렸는데요. 재필씨, 오늘의 핫이슈가 그렇게 재미있다면서요?} {물론이죠,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어제 ‘미소천사 등장, 그리고 전쟁’이란 제목으로 동영상을 보내주신 ‘인생뭐있나’님의 게임 영상인데요. 정말 깜짝 놀랄 만큼 새로운 정보가 많았습니다. 백문의 불여일견이겠죠? 직접 보시죠!} “서, 설마!” TV영상이 보여주는 건 내가 잘 아는 장소였다. 사방에서 모래먼지가 일렁이고 있고, 수많은 관중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으며, 두 기사단이 대치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 상황에서 레몬 빛 드레스를 입고 검은 줄무늬가 들어간 백색의 망토를 펄럭이며 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자가 있었다. 천천히 클로즈 업 되는 화면이 금발을 휘날리며 걸어가는 여성을 정면으로 보여주는 순간 그 여성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나 이거 참…….” 말문이 막혀 감탄사만 절로 나왔다. {저 유저가 이번에 명예랭킹 5위로 오른 그 화재의 ‘미소천사’란 유저 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이번에 최초로 치료스킬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 유저이기도 한데요. 아, 여기 이 장면입니다.} 그때 영상은 마침 내가 미소천사 기사단 열 명에게 ‘태초의 재생’을 사용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보세요, 거의 딜레이 없이 발동된 저 스킬이 열 명 이상 한꺼번에 치료해버렸습니다. 그러고도 아무렇지 않은 저 자세를 보면 렙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는 장면이 아닐까 합니다.} {재필씨, 그럼 지금 최고 레벨인 68의 ‘용병왕 애디’유저 보다 높다는 말씀 인가요?} {쥬리씨, 그건 너무 성급한 생각이 아닐까요?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보고 있습니다.} 이제 영상은 본격적으로 전쟁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저기 검을 부딪치는 전사들과 시끄러운 소음들이 상황이 급박하고 흥분이 넘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렇게 마지막 영상으로 넘어가 포위당한 기사단이 범위마법에 폭사당하는 장면이 나왔다. 여기저기 번쩍거리는 빛들과 사방으로 퍼지는 굉음이 꼭, 신이 강림하여 모든 게 허무해져 버리는 그런 느낌을 안겨 주었다. {재필씨, 이건 정말 무시무시하네요. 이런 마법은 밸런스에 어긋나지 않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쥬리씨. 사실 범위 마법은 스킬을 얻기는 쉽지만 사용하질 못하게 만들었어요. 적어도 60레벨동안 지능과 정신력에 포인트를 투자하지 않으면 피드백에 걸리게끔 만들어 놓은 거죠.} {그럼 저들이 전부 60레벨 이상의 유저였나요?} {저 범위 마법을 사용한 유저들은 동영상을 조사 해본 결과 30에서 40레벨이었다는 걸로 확인 되었습니다.} {어머, 그럼 대체 어떻게 저런 마법을 썼다는 건가요?} {여기서 미소천사 유저의 치료스킬이 빛을 발한 겁니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든 피드백 효과를 무한 힐로 충당해버리니 저런 밸런스가 어긋난 공격이 가능했던 거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놀랍군요. 그렇게 되면 힐이라는 것이 치료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방법에 사용 될 수도 있겠는 걸요?} {그래서 지금까지 치료스킬이 나오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겠죠. 평균레벨이 60에서 70대가 되 있을 때 치료스킬이 나오게끔 계획 했지만 의도치 않게 너무 빨리 나온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만큼 폭풍을 몰고 다니는 유저라 이 말씀이시죠?} {폭풍의 눈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너무 시간이 빨리 지나가 버렸네요. 이상 금일의 핫이슈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감사합니다!} 내 머리가 새하얗게 탈색돼 한동안 TV만 응시한 채 멍하니 있었다. 폭풍을 몰고 다닌다고? 그래, 몰고 와 버렸다. 인생 종치는 죽음의 폭풍을. 방송매체까지 눈팅의 얼굴이 팔렸으니 이젠 걸리지 않는 게 더 신기한 일일 것이었다. “아하하하하…….” 허탈한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그냥 이 게임을 접고 눈팅한테 무릎 꿇고 사과할까? 설마 그래도 하나 뿐이 없는 동생인데 죽이기야 하겠어? …진짜 죽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편지 한 장 남기고 확, 가출 해버려? 편지 타이틀은 ‘절 찾지 마세요’로 하는 게 좋겠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늘어놓다 결국 다 포기하고 흐느적흐느적 걸어가 캡슐에 몸을 맡겼다. 그래, 현실도피다. 지금 나는 아무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접속되었습니다, 즐거운 시간되십시오.] 그날따라 기계음을 들으며 가 수면을 취하는 내가 너무 우울해보였다. 내가 모래평원에 모습을 드러내자 각자 길을 가고 있던 유저들 중 하나가 나를 알아보았다. “어? 저분, 미소천사 아니야?” “누구? 어라, 정말 비슷하네.” 잘못하다 파리 꼬이게 생겼다. 나는 잽싸게 전부터 입었었던 일반셋트 옷으로 갈아입었다. - 한손 나무 지팡이 (일반) 숙련도 30/100 초보 유저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지팡이. 직접 공격하거나 마법을 사용할 때 정신집중의 도움을 준다. 변형은 최대 3번까지 가능하며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사용이 편안해진다. - 천 로브 (일반) 숙련도 47/100 초보 유저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천 로브. 추위를 어느 정도 막아 줌. 변형은 최대 3번까지 가능하며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사용이 편안해진다. - 가죽 상의 (일반) 숙련도 51/100 초보 유저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가죽 상의. 추위를 어느 정도 막아 주며 충격도 어느 정도 흡수해준다. 변형은 최대 3번까지 가능하며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사용이 편안해진다. - 가죽 바지 (일반) 숙련도 46/100 초보 유저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가죽 바지. 추위를 어느 정도 막아 주며 충격도 어느 정도 흡수해준다. 변형은 최대 3번까지 가능하며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사용이 편안해진다. - 가죽 신발 (일반) 숙련도 76/100 초보 유저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가죽 신발. 추위를 어느 정도 막아 주며 충격도 어느 정도 흡수해준다. 변형은 최대 3번까지 가능하며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사용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그 행동은 유저들에게 더욱 의심을 사고야 말았다. “저기요, 미소천사님 맞으시죠?” “싸인 좀 부탁해요!” “저 힐 한방만 주실 수 없나요?” 몇 발자국 옮기지도 못하고 결국 붙들리고야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을로 직행하는 텔레포트 스크롤을 미리 한두 장 사두는 건데. 후회심이 마구 밀려들었다. 그냥 로그오프 할까 하는 생각을 할 때 누군가가 내 손목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 “태식이 형?” 격분해서 올려다보니 오뚝한 코, 각진 이목구비가 매우 인상적인 갈색머리의 사내가 화난 표정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전부 꺼져라.” 딱딱 끊어지는 말투. 저렇게 화난 태식이 형은 처음 보았다. “너, 넌 누군데 우리들 보고 가라 말라야?” “나? ‘화이어 블레이드.’” - 화르르르륵! 태식이 형은 눈을 정면에 고정한 채 검을 뽑아 천천히 스펠을 외웠다. 그러자 거대한 불길이 검에서 솟아올랐는데 그 불길이 2미터나 늘어나서 보는 나까지 오금이 저려왔다. “래, 랭킹 7위에 미지의 마검사다!” 한 유저의 외침에 태식이 형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8위로 밀려 났지만.” …왜 자꾸만 내가 움츠러드는 걸까. “미, 미지의 마검사라 해도 우리들을 막을 권리는 없다!” 아까 딴죽 걸던 그 유저다. 저 유저 은근히 용감하네. “권리… 라고 했나? 권리라면 있다.” 그리고 나에게 천천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눈감은 모습도 과연 멋지… 응? 잠깐, 형? 이게 무슨……! “…….” “…….” “…….” 아… 음… 나… 에… 어……. “우린 이런 사이다.” 머리가 포맷되어 버린 것 마냥 새하얗게 변한 나를 이끌고 유저들 사이를 빠져 나갔다. 잡힌 손목이 몹시 저려왔다. 유저들이 없는 한적한 숲으로 이끌린 그가 손목을 놓지 않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놔.” “응?” “손 놓으라고 이 개망나니 후레자식아! 이런 미친 해삼, 멍게, 성게, 말미잘 같은 우라질레이션 뷁 같은 인간 말종……!” 태식이 형은 표정을 단단히 굳히고 검을 내 목에 가져다 대었다. “그쯤이면 많이 먹었다.” “이… 이…….” 당황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 억울하고 복받쳐서 눈물이 다 나오려 했다. 내 순정이, 내 첫 키스가! “넌, 누구냐.” 두둥! 하고 내 머릿속에서 소리가 울렸다. 드, 들켰구나! 순간 내 몸은 조각상이 되어 버렸다. “말해. 어떻게 소연 몸을 사용하고 있지? 해커인가?”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입이 벌어지지 않아 급하게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왜 소연이의 아이디를 도용하고 있지? 목적이 뭐야? 마음 같아서는 수백 번 죽이고 싶지만…….” “…저에요, 형.” “응?” “저요, 기찬이.” 더 이상 속일 수 없어 내 본래 목소리로 말했다. 태식 형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찬이라고? 어째서 네가…….” “휴, 어쩌다 그렇게 되었어요.” “어, 언제부터 들어 온 거야.” “저번에 형이 도와 줄 때부터.” “…….” “…….” “허, 맙소사. 그럼 그때 무진장 귀엽다고 느낀 나는 뭐야. 설마 내가 그런 쪽에도 관심을 가진다는 거야?” …귀여운 짓한 저도 상당히 제 정체성의 의심이 가거든요? “도저히 못 믿겠어. 증거를 대라!” “증거요? 제 가족구성이나 아니면…….” “벋어봐. 남자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벋을 수 있겠지. 하물며 내가 아는 기찬이면…….” “나가죽어. 개망나니 자식아! 기찬이가 뭐? 그래도 내 누난데 욕보이란 말이냐?” 순간 짜증이 잃어 태식 형의 정강이를 축구공 보듯 뻥 차버렸다. 정강이를 부여잡고 낑낑대던 태식 형이 손을 뻗어 견제하며 충혈 된 눈으로 말했다. “농담이야, 인마. 아야야, 이 녀석 성깔 있네.” “그러게 누가 얼토당토 하지 않는 말을 하래요?” “그렇다고 내 다리가 무슨 축구공인줄 아냐? 거침없이 뻥 차버리게.” 오, 정답이다. “그보다 어쩔 거야.” “뭘요.” 내 말투가 당연히 곱게 나올 리 만무했다. 태식 형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 지금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거 알긴 하냐? 소연이한테 말도 안했지? 네 명예가 너무 커서 유저들한테 걸리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인식하고 있긴 하냐?” “…알고 있어요.” “그럼 당장 그만둬, 이 짓.” 그래, 사실 진작 그만 두었어야 했다.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그만하고 손을 놓았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싫어요.” 태식 형은 이마를 찌푸렸다. “왜.” 왜. 나에게 자문해보았다. 이 게임에 중독되고 재미에 푹 빠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나는 진즉에 그만 두었을 것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이 게임은 하나의 자존심과도 같았다. ‘아펜하르트’가 나에게 부여한 목표가 자꾸만 내 발목을 붙드는 것이었다. “치기어린 게임 마니아의 애 같은 생각 일지도 몰라요. 저는 지금까지 게임에 제 인생의 반을 투자 하면서 힐러에 대해 어느 정도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요, 우습겠죠. 하지만 저는 진지했어요. 제가 유일하게 잘하는 것이었고 그만큼 제겐 전부였어요.” 태식 형은 답답한 듯 말했다. “치기어린 건 맞네. 게임을 현실과 혼동하지 마. 네 인생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어.” 그래, 이건 걸림돌이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두면 나는 답답함에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만둘 수가 없다. “형, 힐러란 무엇일까요. 나는 왜 힐러를 고수했나요. 여기라면 제 의문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래서 놓을 수가 없었어요. 아니, 놓지 않을 거예요!” 내가 봐도 유치하다는 거 잘 안다. 너무 게임 마니아 틱 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유치한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주길 바랐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이해해주길 바랐다. “기찬이, 너…….”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말문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입을 몇 번 달싹이다 결국 한숨을 내쉬는 형. “휴우, 그래 알았다. 그 말 더 이상 꺼내지 않으마.” “형…….” “내참, 말썽꾸러기 딸을 독립시키는 아버지 같은 기분을 내가 왜 느껴야 하는 건지.” …딸 이라는 말이 상당히 거슬립니다만. “대신 조건이 있다.” 난 고개를 들어 태식 형의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네가 원하는 답을 찾을 때까지, 그리고 게임을 그만둘 때까지 내가 보호자 역할을 한다. 그래야 만약을 대비해 내가 증인이 되어줄 수 있을 테니까. 그래, 미소천사 기사단에 가입해라. 나도 그 기사단에 가입할 테니까. 그리고 이거.” 무언가 휙 하고 나에게 던졌다. 그건 작은 유리구슬 같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하는 투명한 구슬이었다. “이건?” “통신구슬이다. 여기서는 기본 귓속말 기능이 없고 그와 비슷하게 사용하는 통신구슬이 있지. 너, 친구도 없어서 이런 기능도 몰랐지?” 태식 형은 또 하나의 구슬을 꺼내 내가 들고 있는 구슬에다 살짝 부딪혔다. 찡하는 소리가 매우 맑아서 듣기 좋았다. <‘통신구슬’ 등록 란에 ‘멋쟁이’님이 입력되었습니다.> “저번에 주려 했던 건데 급한 일 때문에 깜빡 잊었지 뭐야. 덕분에 너 찾느라 죽을 고생했지만. 싼 거니까 부담 가지지마.” 그렇구나. 귓속말을 사용할 필요성을 못 느껴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역시 현실을 최대한 반영한다는 건가. 하긴, 그냥 귓속말이 된다면 말이 안 되는 거겠지. 무협의 전음도 아니고. “그럼 내가 말한 대로 기사단에 가입해라. 그래야 너의 행방을 알 수 있으니까. 나는 바빠서 이만 나가봐야겠다.” 명령에 곧이곧대로 따르는 건 기분 나빴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언제부터 제가 누나가 아니란 걸 알았어요?” “게임의 게 자도 모르는 소연이가 이렇게 유명인사가 되었으니 당연히 의심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 게다가 결정적으로 아까 내가 손목을 붙잡을 때 ‘태식이 형’이라고 했었잖아. 그때 딱 너라는 걸 알아봤지. 아, 늦었다. 그럼 먼저 간다!” 그렇구나. 눈팅을 잘 아는 형이 모를 리가 없었겠지. 그런데 내가 그때 태식 형이라 말했었나? 그런가 보지 뭐… 잠깐, 그럼 처음부터 나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소리 아니야? 순간 그때 그 접촉 사건부터 위협했던 것까지 영상으로 새록새록 떠올랐다. “카악! 망할 놈의 자식이 그럼, 전부 알고 한 행동이었어? 이런 우라질!” 나는 한동안 아무도 없는 허공에다 ‘침묵의 절규’ 스킬을 마구 난사하게 되었다. “에잇, 빌어먹을, 늬미럴, 젠장할!” 내가 이렇게 욕을 많이 한 적이 또 있을까? 그만해야지 생각해도 속에서 무언가 부글대는데 그것을 입 밖으로 끄집어내니 욕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나는 욕쟁이가 아니야. 그럼, 그렇고말고. 바닥에 널려있는 돌멩이를 툭툭 차며 걸어 가다보니 어느새 아페타 마을에 도착하였다. 이제 이 마을은 초보자들에게 있어서 시작하기 좋은 마을로 지명도가 꽤나 높아졌다. 평소에도 다른 초보자 마을에 비해 좋은 곳으로 정평이 나 있었는데 이번 사건으로 아페타 마을을 광고하게 되었고, 미소천사 기사단도 이번계기로 이곳에 기사단 본토 건물을 지어 버려서 가입하기 위한 유저들이 이곳을 끊임없이 찾기 시작한 것이었다. 도시에 버금가는 인원이 마을에 들어차니 인원이 많으면 그만큼 상업도 발전하게 될 테고 그리고 도시는 부를 축적하게 되어 발전을 하게 되겠지. 아직은 작디작은 마을에 불과 하지만 훗날엔 도시가 되고 왕국이 되고 제국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게임을 할리 없겠지만.” 나는 이 게임을 오래하지 못할 것이었다. 시작부터 어긋났던 게임이고 그 어긋난 시작이 이젠 무너지려 하는지라 오래 버텨서 무얼 하겠는가.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비록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그래서 이렇게 걸어가고 있고 지금까지 재미를 맛보았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혼자서 무슨 궁상이냐.”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지웠다. 아무렴 어떠하겠는가. 나는 지금을 즐기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일단 미소천사 기사단을 찾는 게 우선이겠지. “저기요, 말씀 좀 묻겠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일단 위치를 알기 위해 후드를 눌러쓰고 본래 내 말투를 써서 한 유저에게 말을 걸었다. 그자는 친절한 인상이 꽤나 마음에 드는 유저였다. 옷차림이 초보자 때 주어지는 천 옷이었는데 그걸로 보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것 같아 보였다. “여기 미소천사 기사단 건물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아, 님도 그곳에 가입하려고 그러신가요?” 일단 그럴 참이라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를 따라오시면 되요. 저도 그곳에 가입하려고 가던 참이거든요.” “그러세요? 제가 운이 좋았네요. 감사합니다.” 이 유저도 기사단에 가입하려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 동안 동행하게 되었다. “실례되는 말일지 모르겠으나 로브를 보니 마법사 분 같은데 미소천사 기사단에 왜 가입하시는 건가요? 더 좋은 마법사 위주의 륀 기사단도 있는데 곤란하시면 말씀 안 하셔도 되요.” 난 조심히 그 유저의 표정을 살폈다. 궁금한 호기심으로 말한 것이었다면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겠지만 날 걱정하고 도와주려하는 눈빛에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사실 저는 마법사가 아니라 힐러입니다. 조금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기사단에 들어야 하거든요.” “아, 그런가요? 힐러라면 다들 동경할 랭킹 5위의 미소천사님이 있는 곳이니 님이라면 여기가 좋을 수도 있겠군요.” 뭐라 말하기 어려워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한 동안 걷기만 했다. “님은 왜 미소천사 기사단에 들어가려 하나요?” 조용한 정적을 참기 힘들어 먼저 깨트린 건 나였다. 그 유저는 잠깐 나를 바라보다 이내 다시 앞을 보았다. “저 보기에 완전 초보자 같죠?” “아니, 꼭 그렇다기 보단.” 윽, 가슴이 찔렸다. “당황하는 기분도 다 이해해요. 저 같아도 오해할 텐데요. 저는 사기 맞아서 이렇게 되었어요. 사람을 너무 믿는 타입이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죠.” 나란히 걷고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유저를 보았다. “저는 게임과 성격이 맞지 않는가 봐요. 그저 즐기고 싶은 마음인데 그것만으론 안 되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만 게임을 접으려 했죠.” 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기분 왠지 이해가 간다. 나 역시 느꼈던 기분이니까. “그런데 어제 모래평원에서 한 유저를 보게 되었어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했던 모습, 불리한 상황인데도 떳떳하게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모습, 그리고 이기는 모습을요.” “끄응…….”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아 신음소리만 뱉고 말았다. “그래서 저도 다시 한 번 도전해보려고요. 왠지 그 기사단이라면 다시 게임을 즐길 수 있을 거 같아요. 하하,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우습죠?” “우습지 않아요.”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걸어만 갔다. 그렇다, 결코 우습지 않다. 그동안 힐러를 하며 사람을 도와주고 게임을 즐겼던 나로서는 당연한 말이었다. 웃어야 할 부류는 오히려 게임을 상업화하고 오로지 최고를 위해 달리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사기도 서슴지 않는 놈들이었다. 나는 왜 힐러에 대해 의문을 품었는가. 왜 그 좋아했던 무협게임을 접었던가. 왜 힐러의 사령관이 되려 했는가! 힐러를 몰라주는 무지한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니다. 그런 건 어찌 되어도 상관없었다. 그건 단지 일부에 불과할 뿐 나의 전부는 아니다. “저기요?” 내가 갑자기 멈춰 서자 당황했는지 조심히 물어보는 유저. 나는 의식을 되찾고 고개를 들었다. “힐러란 무엇일까요?” “…네?” 내가 한동안 심취했던 명제, 지금까지 답을 찾지 못했던 명제. “저는 지금까지 힐러는 도와주는 자, 나눠주는 자, 보조하는 자, 싸움을 싫어하는 자, 즐기는 자, 착한 자 등등 수많은 답을 찾았었어요. 하지만 전부 잘못 된 답이었어요. 아니, 답 자체를 벗어 난거죠.” “그럼 무엇인가요?” “힐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거였어요! 명제 자체가 잘못 되었던 거죠. 힐러는 남이 아니라 저에요. 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죠. 그러니 힐러는 제가 마음먹기에 달린 거예요. 이거 참, 그것을 이제 깨우치다니. 나는 힐러란 고정관념을 가지고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던 거야. 뒤에 있든 앞에 있든 그게 무슨 소용이람. 그냥 생각대로 하면 되는 걸. 킥킥!” 정말 미칠 듯이 웃겨서 배를 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나를 우는 걸로 착각했는지 저 유저는 걱정의 말을 던졌다. “괜찮아요?” “그럼요. 저는 괜찮아요. 아니, 홀가분할 정도인데요? 자, 이제 가던 길이나 가죠. 게임을 즐겨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 게임은 즐겨야 한다. 그 게임에 의미를 부여하면 그건 더 이상 게임이 되지 않는 것이니까. 그 유저는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가 자꾸 보채자 어쩔 수 없다는 듯 걸음을 때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통성명이나 나눠요. 아이디는 예쁜이지만 개인적으로 타테라고 합니다, 자요.” 나는 통신구슬을 엄지와 검지로 잡아 내밀었다. “타테란 말, 많이 들어 봤어요. 여러 게임 힐러랭킹 1위의 이름인데 본 따서 지은 모양이죠? 저는 조이라고 합니다.” 조이라는 유저는 미소 지으며 주머니에서 구슬을 꺼내 내 구슬에 마주쳤다. - 찡. <‘통신구슬’ 등록란에 ‘어둠의조이’님이 입력되었습니다.> 우리는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아있는 통성명을 주고받았다. 비록 서로 이름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드디어 그 익숙한 날개 달린 하트로고를 볼 수 있었다. 그 로고는 한 저택 지붕에 매달려 펄럭펄럭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는데 왜 이리 창피한 걸까. “이거 줄이 꽤나 많은데요?” “그럴 수밖에요. 한창 뜨는 기사단인데 조금 기다리죠.” 줄이 무슨 지렁이를 연상케 할 정도로 죽 늘어서 있었다. 적어도 30분은 걸리겠는걸. 이참에 오랜만에 내 정보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열려라, 마음의 문이여.” 성별 여 이름 예쁜이 종족 인간 나이 23세 직업 드루이드 계승자 Level 40 소속 - 칭호 미소천사 힘 6 월(月) 3 민첩 5 암(暗) 2 체력 6 화(火) 12+3 지능 68 수(水) 19+3 정신력 67 목(木) 22+3 행운 3 금(金) 5 탄력 10 토(土) 29+3 방어 2 천(天) 23 종족특성 : 없음 칭호특성 : 없음 직업특성 : 숲 속에서는 마법 공격력 10%상승, 피드백 10% 감소 포인트 : 89 스킬 1. 매혹 <숙련도 90/100> 6. 트리플스펠 <숙련도 없음.> 2. 침묵의 절규 <숙련도 37/100> 7. 태초의 재생 <숙련도 13/100> 3. 무기속성 주입 <숙련도 17/100> 8. 4. 원소친화력 <숙련도 없음> 9. 5. 심연의 눈 <숙련도 46/100> 10. 40레벨이 되니 추가 포인트만 89가 주어졌다. 직업 특성란을 보니 드루이드 계승자가 되면서 바뀐 걸 볼 수 있었는데 숲 속에서는 마법 공격력이 10% 증가에 피드백 확률 10% 감소라는 글을 보니 이것도 용도에 따라 꽤나 쓸모가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일단 포인트를 20이 안된 원소에다 각각 20이 되도록 주입했다. 월(月)에 17포인트, 암(暗)에 18포인트, 화(火)에 5포인트, 금(金)에 15포인트가 소모되었다. <‘무기속성 주입’ 스킬이 업 되었습니다.> <‘무기속성 주입’ 스킬이 업 되었습니다.> <‘무기속성 주입’ 스킬이 업 되었습니다.> <‘무기속성 주입’ 스킬이 업 되었습니다.> <‘원소친화력’ 스킬이 업 되었습니다. 스킬명이 ‘올 원소친화력’으로 바뀝니다.> 4. 올 원소 친화력(패시브) - 8원소의 조화를 깨우친다. 월(月), 암(暗), 화(火), 수(水), 목(木), 금(金), 토(土), 천(天)의 원소와 친화력이 증가하여 각각 원소의 추가 포인트+10 증가, 원소 친화력으로 인해 피드백 확률 10% 감소된다. 지능, 정신력에 따라 추가 포인트 증가한다. 모든 원소를 올리니 의외로 스킬이 변했다. 그동안 화(火), 수(水), 목(木), 토(土) 4개만 능력을 올려 주던 이 스킬이 모든 원소를 올려주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친화력으로 인한 피드백 10% 감소는 정말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내심 기쁨을 주체 못하면서 무기속성 주입도 보았다. 3. 무기속성 주입(액티브) - 8개 모든 속성을 주입시킬 수 있으며 오직 무기에만 속성 주입이 가능하다. 시간은 3분 동안 유지되며 지능, 정신력, 탄력이 높을수록 시간과 능력이 올라간다. 월(月) : 몬스터 자아의 문으로 사용된 륀(달)의 기운으로 월 속성 몬스터에게 공격 시 MP 재생효과 20%증가, 자아를 심는다. 그밖에 몬스터 공격 시 재생효과 20% 감소.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암(暗) : 빛족 / 천족 공격 시 5%확률로 절명 시키며 10% 확률로 치명타, 암의 보호로 인해 피드백 확률 10% 감소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화(火) : 식물형 공격 시 5%확률로 절명 시키며, 그밖에는 초당 20의 지속 데미지를 준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수(水) : 인간형 몬스터에게 10% 확률로 결빙효과가 주어지며 매 공격 시 상처부위는 결빙되어 스태미나가 하락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목(木) : 수(水)속성 몬스터에게 공격 시 자연의 기운이 깃들어 스태미나 및 체력이 흡수된다. 몬스터가 죽을 경우 흡수한 체력을 가진 식물 몬스터 생성.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금(金) : 강철화 시켜 방어력이 10%증가, 이동속도 15%저하.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토(土) : 독 속성 몬스터에게 추가 데미지 10%, 그 독을 흡수하여 다시 토의 기운을 불어넣을 때, 독을 간직한 채로 발동한다. 1회 사용가능.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천(天) : 언데드 / 악마 몬스터 공격 시 5%확률로 절명 시키며 10% 확률로 치명타, 빛의 보호로 인해 일시적인 방어력이 증가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저 암(暗)속성에 눈이 들어왔다. 피드백 확률 10% 저하? 나는 드루이드 계승자이기 때문에 기본 10%저하에 올 원소 친화력으로 10%저하, 레몬빛 드레스로 인한 피드백 5%저하. 저 것까지 합치면 총 35%나 저하되는 것이었다. 이거 저하량을 좀만 더 늘리면 올 속성도 결합할 수 있겠는데?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지만 왠지 될 것도 같아 보였다. 그렇게 잡다한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우리차례까지 오게 되었다. 그동안 어떤 유저는 환호성을 지르고, 어떤 유저는 우울한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 뒤를 스쳐 지나갔는데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테스트 하는 건지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우리 앞에 있던 유저들이 테스트 받는 장면을 구경할 수 있었다. “강격!” - 챙! “강격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면 아쉽지만 탈락입니다.” “헉, 헉. 당신이 너무 강한 것 아닙니까?” “저는 미소천사 기사단에서 중간밖에 안 됩니다. 다음!” 탈락하는 유저를 구경하며 우리는 카운터로 다가갔다. 이거 조금 걱정 되는데? “직업을 말씀해주세요.” “사제하고 음…….” “궁수입니다.” 내가 잠시 머뭇대자 조이님이 미소 지으며 내 말을 이었다. 카운터에 있는 유저는 몹시 피곤한 인상을 하고 있었는데 거의 기계처럼 말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미소천사 기사단은 팬클럽과 친목을 위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일단 이 종이를 각자 읽어 보시고 동의 하신다면 사인해주시기 바랍니다.” - 계약서. 일단 사인을 하면 절대 번복이 불가능하다. 1. 하나, 자신은 절대 미소천사님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며 따를 것이다. 2. 둘, 미소천사님을 제외한 미소천사 기사단 상호간에는 명령이나 지시 간섭을 금지한다. 3. 셋, 어떠한 경우에도 같은 기사단 내에 싸움이나 가혹행위를 금지한다. 4. 넷, 미소천사님에게 언어적, 신체적,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등 성 문란 행위를 금지한다. 5. 다섯, 상호간에 폭언, 욕설, 인격모독 등 일체의 언어폭력을 금지한다. 이를 위반 시, 어떠한 처벌도 감수할 것이며 계정삭제도 인정한다. 이를 동의하십니까? 죄다 미소천사냐? 너무 난감해 내가 볼을 씰룩이자 카운터에 있던 유저가 실눈을 뜨며 나를 째려보았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사인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이님도 나와 같이 사인을 끝마친 상태였다. “그럼 최종적으로 능력평가 테스트를 보셔야 합니다. 저의 기사단도 최종 인원이 500명으로 한정되어 있어 부득이 하게도 적절한 능력이 없으면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제는 오른쪽 모퉁이를 돌아 두 번째 방으로 들어가시면 되고, 궁수는 저택이 아니라 뒤편 야외 공터에서 테스트를 보니 지금 출발하셔서 인정을 받고 오시기 바랍니다.” 이 유저… NPC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기계처럼 억양 없이 말하니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일단 우리는 카운터에서 헤어져야 했다. 테스트라. 내가 굳이 받지 않아도 얼굴만 보여주면 모든 게 일사불란하게 해결 되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내가 만약 미소천사란 사실을 밝혔다고 치자. 그럼 아마 주위에서 난리가 날 테고, 소문날 테고, 눈팅한테 알려질 텐데… 뭐, 이건 아니라 할지라도 자유 시간을 그만큼 빼앗길 것이 분명하니 그냥 속이고 타테로서 가입할 생각이었다. “모퉁이를 돌아 두 번째 방이랬지?” 나무로 만들어진 문을 열고 들어갔다. 끼이익 하는 소리가 옛날 시대의 풍경을 그대로 들려주는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사제 테스트를 심사할 아타셰라고 합니다.” “어라?” “네?” “아, 아닙니다.”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저 사제님이 이곳 심사를 맡았구나. 내가 후드를 눌러쓰고 평소 내 목소리를 내고 있어서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거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하는데? “그럼 지금부터…….” “그런데 사제님은 왜 이 기사단에 가입하셨어요? 여기는 팬클럽 위주인 기사단이라는데.” “아, 그건… 사적인 질문은 사절 합니다.” 조금 생각하는 듯 하다 살짝 뚱한 표정을 짓는데 검은 단발머리와 어울려 무척이나 귀여워 보였다. “혹시… 여성을 좋아해요?” “그렇지 않아요!” 그녀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부류는 아닌 것 같았다. “저는 그 분을 존경해서 들어온 것뿐이에요. 그럼 시작합니다. 사제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 제가 직접 보고 판단합니다.” “존경이요? 제가 보기에는 얼굴만 예쁘장하지 바보 같아 보이던데.” “그 분을 모욕하지 말아요! 정말, 자꾸 이러면… 저는…….” 아니, 왜 울먹이는데! 잠깐,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그만하죠, 그만할게요. 그러니 그만 좀… 뚝!” 그녀는 볼을 살짝 부풀리고 아이같이 손과 팔을 이용해서 눈가를 비벼 맺힌 눈물을 지웠다. 툭 튀어 나온 입술을 보니 많이 삐진 모양이었다. “이보세요. 지금 몇 살인데 아이처럼 울어요? 어이구, 단단히 삐졌네.” “안 삐졌어요!” 빽 소리 지르는 거 봐라. 저게 삐진 거 아님 뭐람? 진작 알아봤지만 은근히 고집도 세다. 그녀는 약간 홍조된 볼로 앙칼지게 말했다. “정말 너무 하시네요. 당신은 계약서 규칙 위반으로 탈락입니다.” “에… 정말이요?” “네.” “후회 하실 텐데.” “후회 안 해요!” “당신을 좋아하는 데도요?” “좋아하지 않아… 네?” “농담입니다.” “…이익!” 저 화난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자꾸만 놀리고 말았다. 미치겠다, 이거 취미 들릴 거 같아. “당장 나가세요, 꼴도 보기 싫어요!” “정말 삐졌나 보네. 너무 감정을 앞세워서 테스트 하는 거 아니에요?” “이이이익… 으아아앙!” 결국 자기화에 못 이겨 터져 버렸나 보다.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파묻고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관이 따로 없었다. 조금 미안하네. 눈팅한테 단련된 말발이라 너무 강했던 모양이었다. “알았어요,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다가오지 말아요! 저리가요!” 내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거세게 뿌리치며 다시 울었다. 정말 심하게 삐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흐흠! 아아, 좋아. 그렇게 울면 힐러의 권위가 서겠어요?” 목을 가다듬고 눈팅의 목소리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자 눈물이 가득 맺힌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드는 그녀. 그 모습이 꼭 햄스터 같아 꽉 안아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으나 꾹 참았다. “어… 언니?” “그래요, 우리 울보 사제님. 실컷 우셨어요?” “아… 아…….” 급속도로 새빨개지는 모습이 날 폭소시키기에 충분한 효력을 발휘했다. 홍당무다 홍당무. 맙소사, 귀까지 빨개졌어! “으, 킥킥! 푸킷! 크큭큭큭!” 어떻게든 웃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입을 꽉 막았지만 그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건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아이고, 배꼽 빠진다. 살려줘! 으허억! “…그렇다고 바닥을 뒹굴면서까지 웃을 필요는 없잖아요.” “아, 알았어요. 미안… 크키킷, 크키키킥!” 겨우겨우 자제하고 이성을 찾으려 했는데 샐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보니 다시금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이제… 그만 살려줘, 헥헥, 숨 못 쉬겠어! ‘게임어, 웃다가 질식사 함.’이라는 내용이 ‘아펜하르트’ 홈페이지 타이틀에 올라오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억지로 이성을 붙잡아야 했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그 목소리. 완전히 속아 버렸어요.” 나는 후드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그동안 후드 안에 감춰져있던 금발머리가 밖으로 나와 찰랑 거렸다. “저를 감추기 위한 작은 수단이죠. 그보다 사제님은 어쩌다 이런 곳에서 심사를?” “아타셰. 아니, 임한나, 한나라고 불러줘요.” “아, 뭐……."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간절히 바라는 것 같아서 내가 다 무안했다. “그때 동영상 이후로 저도 조금 유명해졌거든요. 그리고 저 열일곱살 밖에 안 돼요. 말 놓으세요.” 열일곱살? 그럼 나처럼 동갑이 아닌가. “어라? 만 20세 이상만 게임이 가능할 텐데 어떻게 하셨죠?” 내가 무언가 실수라도 한 걸까? 그녀의 얼굴이 잠깐 어두워졌다. “조금 사정이 있어요. 그보다 말 놓으시라니까요.” “저는 이대로가 편하네요.” 동갑내기 여자애가 나한테 말을 높이는데 내가 말을 놓을 수 있을 턱이 없지. 나는 그렇게 철판이 되진 못 한다고. “아… 하긴, 미안해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제가 부담을 드렸네요.” 점점 수그러드는 목소리. 이봐, 나는 그런 뜻이 아니야. “…그래도 제가 언니라고 부르는 건 괜찮죠? 제발 허락해주세요.” 우울해하는 표정 속에서 작은 기대심이 엿보였다. 나는 정말 여동생 같은 거 어려운데… 이거 참. “나소연.” “…네?” 주눅 들어 푹 꺼진 양 어깨를 잡았다. 움찔하는 기색은 있었으나 거부하진 않았다. 나는 그 상태로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나이 스물세살, 이제부터 소연 언니라고 불러. 그럼 되었지?” “네!” 볼을 붉히며 활짝 웃는 모습이 머리를 마구 헤집고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충동을 일으켰다. 이 여자… 여러모로 위험하다. 태식 형과는 또 다르게 말이다. 그나저나 누님, 죄송합니다. 그만 팔아버렸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렇게 안하면 자살할 것만 같았는데. 누님도 동생이 살인자 되는 건 원치 않을 거 아니에요, 그렇죠? 눈팅의 정보를 팔아버린 잘못을 스스로 합리화 시키며 나는 그녀에게 질문했다. “아까질문 다시해도 될까? 왜 이 기사단에 들어 온 거야? 혹시 정말 나 때문에?” 다시금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소연언니, 그만 좀 놀리세요. 그보다 너무 덥지 않아요? 일단 나가고 싶은데.” 당신 체온만 한 없이 올라간 것이거든요? 이 말이 입 안에 맴돌았으나 그냥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그래, 그럼. 그런데 그 소연언니라는 말… 너무 듣기 쑥스럽다.” 나는 그 말을 조금 자제해달라는 뜻을 돌려 말한 건데 이 여자는 다분히 오해한 것 같았다. “에헷, 소연언니라 몇 번이고 불러드릴 수 있어요. 나가요, 소연언니.” 그녀는 갑자기 내 팔에 자신의 팔을 두르고 끌고 나갔다. 어, 잠깐. 이봐요, 너무 무방비한 거 아니야? 허나 그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 때문에 도저히 팔을 뿌리칠 수 없었다. 내가 미쳤나봐! 이건 정말 위험해! “아, 그런데 저기…….” “한나!” “그래, 한나야. 나 합격은 된 거야?” 그녀는 ‘당연한 말을 왜 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이죠. 소연언니가 탈락이라면 이 기사단에 합격할 자는 아무도 없을 걸요?” 이 여자, 왜 이렇게 밝아졌지? 정말 여자의 성격은 모르겠다. 나는 그녀와 함께 다시금 카운터로 걸어갔다. 그러자 조이님이 먼저 테스트를 끝낸 모양인지 카운터에서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타테님, 합격 하셨나요?” “네, 어떻게든 합격 했네요. 조이님은?” “저도 다행히 저쪽에서 활을 빌려줘 합격은 했습니다만… 어째 목소리가 바뀐 것 같습니다?” “아하하, 일단 나가서 설명해드릴게요.” 나는 얼른 합격여부를 카운터의 기계 같은 유저에게 밝히고 밖으로 나왔다. <‘미소천사 기사단’에 입단 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미소천사 기사단 휘장’이 주어집니다.> 입단이 됨과 동시에 그 보기 몹시 창피한 휘장이 겉옷에 자동적으로 입혀졌다. 몇 번 벗어보려고도 시도 했지만 겉옷에 딱 달라붙어서 기사단을 탈퇴하지 않는 한 벗긴 힘들어 보였다. 우리 세 명은 미소천사 기사단 저택을 나와 한동안 나란히 걸었다. 나도 딱히 뭐라 말할지 생각나지 않았고 둘도 나와 그리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에… 뭐, 일단 소개 할게요. 여기는 제가 초보 때 우연히 알게 된 아타셰이고, 이 분은 오늘 알게 된 조이님이셔. 서로 인사 나눠.” “안녕하세요, 아타셰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 우연히 타테님을 만나 인연을 나눈 조이라고 해요.” “타테? 소연언니 닉네임 인가요? 남자 이름 같은데…….” “아하하… 아무렴 어때. 이쯤이면 되겠다.” 드디어 인적이 뜸한 곳으로 들어선 것 같다. 나는 다시 한 번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주위를 둘러본 뒤, 후드를 벋었다. “어, 당신은!” 조이님이 몹시도 놀란 모양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가 다시 시퍼렇게 변했다. 아마 아까 나를 만나 했던 얘기가 떠오른 것이리라. “아, 이런… 내가 당사자 앞에서 대체 무슨 얘기를.” “죄송해요. 일부러 속이려 그랬던 건 아니에요.” 조이님은 나를 흘끔 쳐다보다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는 이유를 잘 알고 있으니 이거 뭐라 말을 할 수가 없는걸요. 알겠습니다, 넘어가도록 하죠.” 조금 더 질질 끌줄 알았는데 의외로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 내가 더 놀랐다. “이해해요?” “그럼요, 인기인은 항상 가는 길이 불편할 뿐이니까요. 저도 일단 사과드립니다. 다시 저를 소개하죠. 타테님 덕분에 명예랭킹 6위로 밀려난 호칭 일발필중, 레인저 어둠의조이 라고 합니다.” 이번엔 나하고 한나가 놀라 버렸다. 조이라는 닉네임이 왜 낯 익은가 했더니만 그렇구나, 내가 랭킹 5위가 되기 전 랭킹 5위인 유저였어! “상위권 랭커 두 분을 한꺼번에 보니 매우 신비롭네요.” 우리 둘의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꼭 박물관에 전시된 조형이 된 기분이었다. “이젠 랭커라 말하기도 조금 부끄럽습니다. 보시다시피 이젠 가진 게 하나도 없어서요.” 조이님은 정말 부끄러운지 우리들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네? 가진 게 없다니요… 아, 제가 실수한 건가요?” 분위기가 어두워지자 한나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실수하신 거 아니니 그런 표정 지으시지 않아도 됩니다. 예전에 제 실수로 사기당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되었죠.” 미소 짓고 있지만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그 괴리감이 몹시도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에잇, 우울한 기분 떨쳐 버리고 우리 사냥이나 가죠! 없으면 다시 모으면 되고, 사기당하면 복수하면 되고, 무기 없으면 아이템가게 가면되고, 생각대로 하면 되는 거죠!” “…그거 어디서 많이 듣던 말 같은데요?” “언니! 저 그거 알아요. CF에 한창 유행했던 생각대로… 으읍!” 나는 황급히 그녀의 입을 막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둘을 내가 잘 아는 멘히버 아이템가게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간단한 아이템을 맞춰 주었는데(물론 나는 돈이 없어서 한나가 냈다) 조이님은 자신에게 맞는 활은 이것뿐이라며 나무로 된 롱 보(Long Bow)와 가벼운 가죽 갑옷인 라이트 레더(Light Leather)를 집었다. 매우 싼 것임에도 불구하고 훗날 이 은혜를 꼭 갚겠다며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말에 인간의 정이 담뿍 느껴져 훈훈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장비를 챙긴 우리는 각자 하나씩 텔레포트 스크롤을 챙기고(이것도 한나가 지출했다. 정말 우울할 정도로 우리 둘은 가난했다. 여자애한테 손을 벌리다니 창피하기 그지없었다) 녹색 초원 필드로 나왔다. “그런데 여기 지리 잘 아시는 분 있어요? 나는 필드 경험이 거의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저도 소연언니와 별반 다르지 않은걸요. 필드 기필증이 있어서…….” 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그때 때린 따귀가 조금 미안해졌다. “그럼 제가 안내하죠. 레인저다 보니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녀 봤거든요.” 시작부터 막히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점점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역시 게임은 모험하고 몬스터를 무찌르며 즐겨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나는 지금까지 게임의 가장 재미있는 것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제 힐러에 운운하지 않고 즐기기로 결심했으니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지만 후회되지 않도록 행복을 느껴야겠지. 녹색 초원을 지나 좀 더 걸어가니 내가 잘 아는 서쪽 고블린 지대가 나왔다. “여기서부터 조금 긴장 하셔야 할 겁니다. 고블린들이 그리 강하지는 않지만, 수가 많거든요.” 둘은 주위를 경계하며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뒷짐 지고 앞질러 나갔을 뿐이었다. “어, 타테님! 위험…….” “언니! 그렇게 가면…….” “여~ 잘들 있었어?” “타데, 타데 오랜만이다. 환영한다.” “타데, 타데 친구다, 동지다.” 고블린들과 얘기 나누는 나를 보며 둘 다 석상이 된 듯 뻗은 손 그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아타셰님, 제 눈이 잘못 된 건 아니죠?” “아마…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둘이서 궁상맞게 무슨 얘기를 그리 속닥거려요? 위험하지 않으니까 이리와요.” 고블린 지대에서 이처럼 작은 해프닝이 벌어졌고 우리들은 고블린 들의 호위를 받으며 편하게 다음지역으로 갈 수 있었다. “타테님은 정말 특이하신 거 같아요. 다들 몬스터로 보는 고블린과 어떻게 친구가 될 생각을 하셨죠?” “키킥, 언니 너무 재미있어요.” 고블린에게 얕보여서 먹이가 될 뻔했는데 우연찮게 퀘스트를 얻어 친구가 되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여기서 부터는 ‘고요의 숲’이라 불리는 곳이에요. 대부분 곤충류 몬스터가 서식하며 간혹, 포레스트 웜이 나오는 곳이죠.” “곤충이요?” 그녀의 표정이 사색되었다. 역시 어떤 여자든 곤충은 질색하는 모양이었다. “귀엽겠다. 어서가요, 조이님.” …예외도 있는 모양이다. “잠시 만요, 들어가기 전에.” 입구에 웅장하게 서 있는 나무에 다가가 화살촉으로 나무줄기에 상처를 내었다. 그러자 우윳빛 액이 흘러 나왔는데 조이님은 그걸 온몸에 찍어 바르기 시작했다. “어서 바르세요. 곤충 기피제입니다. 여기는 몬스터로 분류되는 큰 곤충뿐만 아니라 진짜 작은 곤충도 있으니 이 수액을 바르지 않으면 10분도 버티지 못해요. 지속시간이 1시간이니 여기서 즐기기엔 충분할 겁니다.” 그제야 그의 의도를 알고 우리 둘도 그 수액을 찍어 바르기 시작했다. 소나무 송진 같은 쓴 향내가 온몸에서 퍼져 나왔다. “냄새가 심하네요.” 살짝 찌푸린 얼굴로 코를 막는 한나의 모습이 투정부리는 어린아이 같아 양 볼을 잡아당겨 주고 싶었지만 그 충동을 가까스로 참았다. 내가 점점 미쳐가나 봐…….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우리는 고요의 숲 안쪽으로 진입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사방이 울창한 나무로 뒤덮여져 있어 햇빛이 땅까지 닫지 못해, 음침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는데 새 우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아, 왜 고요의 숲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갔다. 주위를 둘러보며 걸어 간지 10분이 지나자 조이님이 다시금 우리를 멈춰 세웠다. “100m 뒤에 드래곤플라이가 있군요. 중형 몬스터 인데 특기가 적을 들고 하늘 높이 올라가 떨어트리는 것이니 잡히지 않게 조심하세요.” “그게… 보여요?” 나무로 빽빽하게 막혀 있는 숲에서 100m 밖에 있는 몬스터를 본다는 게 과연 쉬운 일일까? 나는 10m 뒤에 있는 것도 분간이 안 되는데 말이다. 새삼 랭커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이 활 숙련도가 1이라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먼저 선공해보겠습니다.” “이… 거리에서요?” 말 그대로 황당해서 입술을 씰룩였고 조이님은 그저 미소로 답하며 등에 매단 롱 보를 꺼내 화살을 메겼다. “풍향확인 완료, 습도확인 완료, 조준 완료, 스크류 엔드 일루젼 매직 샷!” - 슈파아아아앙! 스노우보드 타는 것처럼 일자로 다리를 넓게 벌려 큰 충격에 대비하는 자세를 취하고 롱 보를 세로로 드는 게 아니라 가로로 든 채 활 줄을 끊어 버릴 것처럼 팽팽히 당기다 놓았다. 그 화살의 힘이 얼마나 센지 빛이 번쩍하며 반탄력에 두 걸음이나 뒷걸음질 치는 걸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키에에에에엑!” 나뭇잎들이 흔들릴 정도로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말 맞힌 모양이었다. “이런, 정수리를 맞추려 했는데 눈에 맞고 말았네요. 조심하세요, 옵니다!” 거기다 조준까지 했어? 숙련도 1의 단순한 나무 활로? …이 게임은 벌써부터 괴물들이 난무한 것 아닐까. 저 멀리서부터 나뭇가지가 우지직 우지직 부서지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등에 곤충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소름이 자르르 돋았다. 그에 반해 내 표정은 웃고 있었다. 아드레날린이 마구 솟기 시작했다. 몬스터를 제대로 공략하는 것은 처음이니만큼 가슴이 자꾸 날뛰었다. “키이이익!” “나왔다!”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 콰앙! 무언가 확, 풀숲을 헤치고 튀어나오자 그녀가 거의 본능적으로 두 손을 뻗어 방어마법을 시전 시켰다. 거대한 빛의 방패가 발현되자 그곳에 무언가가 크게 부딪혔는데 그것은 TV브라운관처럼 체크무늬로 된 수백 개의 눈을 번뜩거리는 잠자리였다. “키엑, 크에엑!” 한쪽 눈이 화살 때문에 진녹색 피를 뚝뚝 흘리는데도 불구하고 녀석은 톱처럼 좌우로 나 있는 이빨을 운동시키며 우리들을 노려보았다. 무진장 화난 모양이었다. “으… 으…….” 한나가 한 번 방어한 것만으로 한계에 부딪힌 모양이었다. ‘태초의 재생’을 써주려 했으나 놈이 달려들어 어쩔 수 없이 다른 주문을 외웠다. “젠장, 빛의 화살!” - 펑! 잠시라도 시간을 벌 셈이었지만 가볍게 꼬리로 처내 버리는 것을 보니 내 공격 마법은 어림도 없는 것 같았다. “제가 갑니다, 스턴 샷!” - 슈웅 콰쾅! 언제 나무위로 올라갔던 걸까. 까마득히 위에서 정확하게 정수리로 화살이 떨어졌고 그 화살은 관통하는 대신 해머로 두드리는 것처럼 터져나갔다. 둔탁한 충격에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 드래곤플라이는 혼란스러운지 날개를 퍼덕였지만 재차 날지 못했다. 붕붕 거리는 소리가 굉장히 소름끼쳤다. “지금이에요!” “언니, 부탁할게요. 빛의 화살!” 그녀가 뻗은 손에 엄청난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게… 빛의 화살 이라고? “태, 태초의 재생!” 멍하니 있다 한나의 괴로워하는 표정을 보고 깜짝 놀라 태초의 재생을 시전 했다. 기본마법에 피드백 현상이라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이란 말인가. - 꽈과과과광! 내가 날린 빛의 화살보다 최소 3배는 더 커 보이는 빛의 화살이(빛의 창이라 해도 될 것 같았다) 드래곤플라이 입 쪽으로 날아가 터졌다. 그러자 드래곤플라이의 얼굴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고 얼굴을 잃은 몸뚱이가 한동안 발버둥 거리다 이내 부르르하며 생명을 멈추었다. “하아, 하아.” “…….” 아니, 스텟을 어떻게 올렸기에 일반 속성 마법이 저럴까.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지만 기뻐했고 그 모습을 보자 잠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너무 약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파도치듯 밀려왔다. “아타셰님, 어떻게 그런 공격력을…….” 그래도 나만 놀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조이님도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었으니까. 이보쇼, 입에 벌래 들어가겄수.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다들 무안하게 왜 그러세요. 전 게임을 잘 할 줄 몰라서 그냥 포인트가 생길 때마다 천속성에 올렸을 뿐이에요.” “…몇 렙인데?” “저번 기사대전 때문에 48이 되었네요?” 그러니까 말인 즉, 지능, 정신력, 체력 같은 필수 스텟을 죄다 무시하고 오로지 천 속성에만 48렙을 투자 했다는 말인데… 내가 30에서 40되는데 87포인트를 얻었으니 어림잡아 빛속성만 300포인트가 넘는다는 말인가? …정말 대책 없이 무서운 여자였다. “그래서 마법을 두 번 쓰고 그렇게 지치신 거군요. 하나하나가 필살기 수준 이겠는걸요?” “단점이 더 많아요. 아까도 소연언니가 아니었으면 피드백 당해서 더 크게 다쳤을 거예요. 덕분에 살았어요, 언니.” 요즘 여자들에게서 보기 힘든… 그래, 숨김이 없는 그런 미소를 지었다. 아, 이런. 너무 뚫어져라 본 모양이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한나 너, ‘매혹’ 배웠지?” “그게 뭐예요?” …내 예상이 틀렸다면 아무래도 내가 미친 게 분명해. 그날은 내 생의 최고로 우울한 날이었다. 나름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고요의 숲에서 나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조이님과 한나가 몬스터들을 처리하며 나아갔기 때문이었다. 나는 단지 간혹 ‘태초의 재생’을 날려 주었을 뿐이었다. 그냥 걸어 다니는 포션이구만. 다음날 화요일, 평소와 같은 수업을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어제 오랫동안 게임을 해서인지 컨디션을 조절 못해 여태껏 늘어지게 꿈나라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날 깨워, 점심시간까지 잠으로 건너뛰는 사태는 다행히 벌어지지 않았다. “너 어제 뭘 했기에 오전 내내 잠만 자냐? 설마…이거?” 상천이는(오랜만에 나왔다고 까먹지 말길 바란다. 이놈은 내 학교에서 유일하게 알고 지내는 친구 녀석이기도 하다)손을 무언가 잡은 것처럼 동그랗게 말아 쥐고 앞뒤로 흔들었다. “여기는 남고가 아니란 걸 명심하길 바란다.” 그제야 뒤에 여자애들이 자신을 보고 있단 걸 깨달아 그 율동하던 손을 멈추고 헛기침으로 상황을 흩트려 놓았다. “반 농담 식으로 말한 거지만 너, 사실 집에서 다른 게임하고 있지?” 나도 모르게 움찔해버렸다. 나는 정말 남 속이는데 재주가 없는 모양이었다. “친구라는 놈이 혼자서만 재미보고…같이 좀 하자. 무슨 게임하는데?” 이런 놈한테 속여 봐야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나는 어깨를 으슥하고 말했다. “전에 네가 말한 그 게임.” “전에 말한 거라면…설마!” 나는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에 말한 그 패키지 게임을 드디어 구했단 말이냐?” “아펜하르트다, 이 멍청아!” 순간 짜증이 일어나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 버렸다. “다른 게임이면 다른 거지. 왜 귀 따갑게 소리를 지르고 난리람. 아펜하르트면 만 20세 이상 할 수 있는 게임 아냐? 그걸 네가 어떻게 해. 해킹이라도 했냐?” “아하하…….” 완벽한 정답이었다. “…진짜냐?” “……….” 상천이가 나에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나 미친 거 아니니까 그런 행동 안 취해도 되거든?” “그럼 그게 미친 거 아님 뭐냐? 빨간 줄 한 번 긋고 싶어 시도해본 호기심이냐? 아니면 그런 걸 즐기는 사디스트냐?” 아니, 표현을 해도 꼭. “지 같은 상상만 해요.” 정말 안타까운 마음에 가볍게 혀를 찼다. 음, 이 표현은 좀 아닌가? “그런데 그 게임 빨리 접는 게 좋을 거 같다. 내가 정말 배가 아파서 그러는 게 아니고 조금 이상하거든.” 배가 아픈 게 정답 일듯 합니다만? “나도 처음엔 너무 잘 만든 게임이라 엄청 기대하고 졸업하면 바로 하려 했는데 뇌파이상으로 죽은 사람 1위로 꼽혀서 못하겠더라. 만든 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너무하지 않냐? 벌써 열 명이 넘게 죽었단 말야. 그거 꼭 게임으로 마루타 시험 하는 느낌이던데?” “게임으로 죽은 사람이 어디 한 둘이냐? 전부 자기 자신을 컨트롤 못해서 그런 거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처음 ‘심연의 눈’ 스킬을 사용하고 게임에서 나왔을 때 머리가 지끈거렸었던 그날이 떠올랐다. “난 그런 게임 무서워서 못 하겠다. 너도 어서 접어라. 괜히 경찰에 붙들리지나 말고.” “안 그래도 한 달 밖에 못해.” 그렇다. 유료화 되는 한 달 후가 내 마지막 날이 될 것이었다. 내 계정이 아니기 때문에 유료화 신청도 못할 테니까. 그동안 뇌파이상으로 죽은 사람은 많았다. 암, 교통사고, 그 다음으로 게임사망률이 높았으니 어느 정도인지 대략 예상이 가지 않겠는가. 하지만 몇 날 며칠 밤새며 하던 사람이나, 노약자가 대부분이었고 건강한 뇌를 가진 우리또래는 죽는 일이 거의 전무 했었다. 그래서 탄압받지 않고 지금까지 뇌파인식 게임이 명맥을 유지해온 것이겠지. 물론 재미있다는 이유도 한몫했다. 술, 흡연이 나쁘다는 걸 알고도 즐기는 것과 같이, 뇌에 나쁜 영향을 끼칠지 알면서도 뇌파인식 게임을 즐기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왜 뇌파인식 게임을 국가는 막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경고는 있지만 게임제약에 대한 뚜렷한 법 같은 건 크게 만들지 않은 게 문제였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장애인들은 뇌가 불안정 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삶을 갈구하기 때문에 더 이런 게임에 집착하고 있었다. 현실을 도피하고 상상의 세계에서 자기만의 이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현실보다 게임 안에 생활이 더 커지고 늘어나서 결국엔 뇌 과부하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뇌파인식 게임. 한때는 다운증후군 환자가 게임을 하다 현실과 게임을 혼동해버려 같은 병실에 있는 십여 명의 환자들을 식칼로 난도질한 사건이 있었다. 그 다운증후군 환자도 이틀 뒤, 뇌 정지로 사망했는데 그런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두 자연스럽게 뇌파인식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 중엔 나도 포함 되겠지만.” 비록 흡연한 적은 없지만 게임이란 정말 흡연하는 것과 똑같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점점 몸에 나빠지는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을 즐기기 위해 나는 게임에 접속했다. 아이러니 하지만 그게 정답이 아닐까? 집에 돌아와 가볍게 샤워를 했다. 오늘도 누난 바쁜 모양이었다. 식탁에 오늘도 늦을 거 같다는 짧은 내용의 쪽지가 있을 뿐이었으니까. 나도 어쩌면 우울한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게임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조용하고 어둡고 음침한 이곳보다 활기 있고 살아있으며 즐길 수 있는 게임이 훨씬 나으니까, 하지만 깊이 생각하길 관뒀다. 언제나 그래왔잖아? 그게 정말이라 생각하면 무서우니까. 억지로 나를 위로해보았다. [입력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나소연님. ‘아펜하르트’에 접속하시겠습니까?] [접속되었습니다. 즐거운 시간되십시오.] 오늘도 나는 게임 속으로 감정을 도피시켰다. 어제 고요의 숲에서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용하고 로그오프 해서 그런지, 접속하니 언제나 보아온 넓은 중앙 광장이 보였다. 처음 볼 때보다 사람들이 몇 배가량 불어서 북적대는 광장에 모습이 꼭 시장바닥을 연상케 했다. <‘아타셰’님이 통신구슬 연락을 취합니다.> {언니 오셨네요? 어제 잘 주무셨어요?} 주머니에 넣어놓은 통신 구슬이 반짝였다. 어제 헤어지기 전에 한나가 통신 구슬을 수줍게 내밀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통신 구슬을 입가에 대고 말했다. 이게 맞나 모르겠네. “응, 한나도…잘 잤어?” 나는 아직도 이 말투가 무지 어색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가 조금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요. 언니, 저 먹을 거 안 사주실래요?} “뭐?” {뭘 그렇게 놀라세요. 어제 몬스터 잡고 나온 것들만 팔아도 어느 정도 돈은 될 텐데.} …아 그런 뜻이었구나. “그래, 뭐…나도 먹어야 하니까. 어딘데?” {‘만남이 있는 음식가게’인데 휘장에 손을 올리고 ‘아타셰가 있는 곳’이라 말하면 제가 있는 장소가 자연스럽게 생각 날거에요.} 그런 기능이 있었던가? 한나가 시킨 대로 한 번 시도해보았다. “아타셰가 있는 곳.” 그러자 뭐랄까. 자주 가본 장소가 문득 떠오르는 것처럼 그녀가 있는 장소가 떠올랐다. 여기서 동남쪽인가? 그래서 태식 형이 같은 기사단에 입단하자 한 거구나. 휘장만 있으면 쉽게 찾을 수 있을 테니까. 한나가 있는 곳은 멀지 않아 곧 도착할 수 있었다. 저 멀리 한 손은 뒷짐 진 채 팔을 높이 들어 마구 흔들고 있었다. 나도 손을 살짝 흔들며 화답해주었다. “소연언니 배고프죠? 여기 가게가 되게 맛있어요.” 그녀의 표정은 숨김없이 매우 다양했고 솔직했다. 요즘 여자들에겐 찾기 힘든 모습. 나도 모르게 미소 짓고 말았다. “왜 그러세요?” 양 손을 뒤로 깍지 껴 허리를 숙여 내 얼굴을 살피는 그녀.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매혹’ 스킬이 있는 게 분명해. 창피해진 나는 거의 떠밀듯이 한나를 이끌어 ‘만남이 있는 음식가게’로 들어갔다. 의아해하는 그녀의 표정이 언뜻 보였으나 모른 체했다. 안에는 몇몇의 유저가 두런두런 각자 얘기를 하고 있었을 뿐이라 대체로 한산해서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었다. 우리가 창가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자 메뉴판을 든 메이드 복의 여성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무엇을 시키시겠습니까?” “저는 레몬파이! 언니는 무엇으로?” “생선만 아니라면 뭐든지 다.” “그럼 닭 가슴살 샐러드로 주세요. 음료수는 전 레몬 에이드. 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몬파이, 닭 가슴살샐러드, 레몬에이드, 소다를 고르셨습니다. 맞습니까?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메이드 여성은 메뉴판을 들고 토끼같이 총총 사라졌다. 시선이 자꾸 아래로 내려가는 걸 억지로 참느라 무진 애썼다는 건 넘어가도록 하자. “레몬 좋아하나 봐?” “헤, 신건 뭐든지 다요!” 정말 행복한 표정을 지어서 덩달아 나도 행복해졌다. <‘매혹’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언니의 눈웃음을 보니 제가 더 쑥스럽네요.” 갑자기 살짝 붉어진 볼을 손으로 식히며 나를 흘끔 거렸다. 이봐요, 지금 내 모습은 여자거든요? 백합 같은 행동은 취하지 말아 줬으면 싶은데 말이에요. 우리는 음식을 다 먹고 아페타 마을 밖으로 나와 잠시 성벽 주위를 걸었다. 내가 왜 걷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나가 때 써서 마지못해 나왔는지라 처음엔 지겹기만 했는데 바람이 풀에 스치는 소리와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느끼는 이 여유로움이 차츰 걸어 다니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저는 걷는 게 좋아요.” 그녀는 시선을 발아래 두고 한발 한발 집중해서 내딛고 있었다. “이렇게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내딛을 수 있다는 즐거움은 언니는 모를 거예요.” 앞에 있는 작은 돌멩이를 가볍게 찬 뒤, 뒤돌아 나를 보았다. 햇살에 반사되는 그녀의 검은 단발머리가 매우 아름답다는 느낌을 안겨주었다. “여기서 있었던 일, 기억나요?” 그녀가 서 있는 곳은 녹색 초원. 내가 한나를 때리고 힐러의 사령관이 되리라 다짐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때 일은 미안해.” “으응, 미안해하지 마세요.” 한나는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이 사뭇 진지했다. “저는 힐러란 걸 잘 몰라요. 이 게임을 시작한 이유도 단순히 걷고 싶었을 뿐이고 풍경을 감상하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애초에 저는 게임과 어울리지 않죠. 하지만 언니는 진지했어요. 정말 게임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죠. 그래서 내 행동에 대해 후회가 많아요.”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작은 입술을 다시 열었다. “그때 언니가 죽은 다음 어떻게 되었는지 아세요? 욕이라도 하며 한바탕 싸우고 싶었는데 왠지 눈물만 나오더라고요. 언니 옆에 있던 그 마법사 분도 싸우셨는데 저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어요. 신기하죠? 단지 게임일 뿐인데 그런데…왜 감정이 북받쳐 오는 거죠?” 그녀의 입이 일그러지고 볼이 씰룩 거렸다. 아마 울음을 참고 있는 것이리라. “당장에라도 그만두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대로는 싫었어요. 다시 한 번 언니를 만나고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죠. 게임이 무엇일까요. 왜 제 가슴을 아프게 해요?” 그녀는 가슴을 부여잡고 나에게 호소했다. 나는 억지로 쥐어짜며 말을 뱉었다. “게임…그만둬도 아무도 뭐라 안 해.” 어쩌면 비수를 꽂는 말을 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이렇게 아름다운걸요. 이렇게 즐거운걸요. 그걸 알려준 건 언니잖아요.” 그녀는 나에게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내 손을 꼭 잡았다. “게임이라는 것을 해볼 거예요. 졸리고 지루하기도 하지만 해보려고요. 언니가 가려는 곳을 저도 뒤 좇아 가보려고요!” 정말 활짝 미소 지었다. 모든 걸 다 가진 듯이 너무도 행복해 보이는 그런 미소를. “안 돼.”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 걸었다. 그렇다, 안 된다. 그럴 수 없다. “뒤 좇아 오면…네가 안 보이잖아.” 지금 내 표정은 아마…무척이나 민망하거나 화끈거리고 있지 않을까? 아, 덥다. 한나가 종종걸음으로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렸으나 도저히 뒤돌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언니, 아까 그 말 너무 로맨틱 했어요. 저 좀 봐요, 히히.” 내가 미쳤지. 그것도 단단히 미쳤지. 이 입이 방정이야, 만날 요 입이. 요 입이! “그 말 잊어줘. 내가 실언했던 거야.” “그럴 수 없어요. 벌써 추억이 되 버렸는걸요? 언니는 너무 아름다우신데 지금은 귀엽기까지 해요. 남자한테 많이 사랑 받으시겠는데요?” 별로 사랑 받고 싶지 않습니다만. 내 시큰둥한 반응에 한나는 내 눈치를 보았다. 우리는 지금 나란히 팔짱을 끼고 걷고 있는 중이었다. 아, 절대 내가 낀 것이 아니다. 그녀가 먼저 내 팔을 붙잡은 것이었다. 그러니 난 잘못 없다. “언니는 어디 사세요?” “서울.” “무슨 일 하시는 데요?” “컴퓨터로 여러 가지 디자인 하는 일.” “독녀세요?” “남동생 한 명 있어.” 우리는 걷는 동안 그러한 질문과 답변형식의 재미없는 얘기를 지속했다. 그런데 그녀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걸까. 연신 생글거리는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언니는 저 안 궁금해요?” “물어 봐도 돼?” “조금 어렵지만 언니라면 답해줄 수 있어요.” “그럼 됐어.” 한나는 기찬이인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고 소연이라는 누나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물어 볼 수 없다. 그런데 저 여자는 왜 입을 삐죽 내미는 거지? “너무 저한테 관심 없는 거 아닌가요?” 뾰로통한 저 표정, 그녀의 ‘매혹’숙련도를 또 올려주는 구나. “관심 없는 게 아니라 존중해주는 거야. 어쩔 수 없이 가 아니라 말하고 싶다 생각할 때 알려줘.” “…언니는 참 의지가 되요. 언니가 남자였다면 반했을 거예요.” “정말?”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 난 벌어진 입을 억지로 다물었다. 순간 이성을 잃었군. 안 되겠다. 자제, 자제. “저…이만 가봐야겠어요.” “응.” “이 시간에는 저녁 먹어야 하거든요.” “응.” “언니 너무 무뚝뚝한 거 아니에요?” “응.” “……….” “……….”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람. 그녀는 일그러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어깨를 들썩였다. “언니…풋, 너무 킥킥, 재미있어요!” 난 왜 제 앞에선 너무도 멍청해지는 걸까. 지금 내가 내 기분을 모르겠다. 그녀는 그로부터 1분정도 더 걷다가 로그오프 했다. 내 팔에는 아직도 그녀의 따스한 온기가 맴 돌았다. 아 아쉬움, 이 미련, 이 행복…설마 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한 점 없이 뻥 뚫린 하늘이 내 마음까지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지금 나는 아무도 없는 한적한 숲으로 들어왔다. 전부터 생각한 나만의 스킬을 만들 생각인 것이었다. 드루이드 계승자 직업 효능은 ‘숲 속에서는 마법 공격력 10프로 상승, 피드백 10프로 감소이다. 나는 피드백 10프로 감소 효과를 얻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열려라, 마음의 문이여.” 성별 여 이름 예쁜이 종족 인간 나이 23세 직업 드루이드 계승자 Level 43 소속 미소천사 기사단 칭호 미소천사 힘 6 월(月) 20+10 민첩 5 암(暗) 20+10 체력 6 화(火) 17+10 지능 68 수(水) 19+10 정신력 67 목(木) 22+10 행운 6 금(金) 20+10 탄력 10 토(土) 29+10 방어 3 천(天) 23+10 종족특성 : 없음 칭호특성 : 없음 직업특성 : 숲 속에서는 마법 공격력 10%상승, 피드백 10% 감소 포인트 : 51 스킬 1. 매혹 <숙련도 91/100> 6. 트리플스펠 <숙련도 없음.> 2. 침묵의 절규 <숙련도 37/100> 7. 태초의 재생 <숙련도 36/100> 3. 무기속성 주입 <숙련도 17/100> 8. 4. 올 원소친화력 <숙련도 없음> 9. 5. 심연의 눈 <숙련도 46/100> 10. 지금 내가 하려는 짓은 매우 파격적 이면서도 무식한 짓일지도 몰랐다. 바로 올 속성을 다 결합하려는 것이니 말이다. 일단 모든 포인트를 정신력에 투자했다. 지금 내 피드백 저항 퍼센트는 드루이드 계승자 10프로, 올 원소친화력 10프로, 레몬빛 실크 드레스 5프로, 암 속성 무기부여 10프로 그래서 총 35프로 감소인 상태이다. 여기에 심연의 눈만 발동 시키면 결코 꿈이 아닐지도 몰랐다. “‘무기속성 주입’ 발동, 암!” 암(暗) : 빛족 / 천족 공격 시 5%확률로 절명 시키며 10% 확률로 치명타, 암의 보호로 인해 피드백 확률 10% 감소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피드백 10프로 감소시켜주는 속성부여를 내 지팡이에 걸었다. 흐릿한 어두운 안개가 내 지팡이 주위를 감싸 안았다. 이젠 옷을 바꿔 입을 차례였다. 로브를 벗고 미소천사로 활동한 드레스 셋트를 착용했다. - 은은한 녹 빛을 발하는 레몬 빛 실크 드레스 (고급) 숙련도 38/100 레몬 염료로 염색한 드레스. 여성용이며 누에라는 벌래가 내뿜는 실로 만들어 매우 가볍고 부드럽다. 마법적 방어력에 뛰어나며 아름답고 신비함을 만들어 주어 파티나 연회 때 어울리는 옷이다. 피드백 확률 5프로 감소, 마법극대화 2프로 증가, 마법 방어력 +150, 내면적으로 신비함을 만든다. 루시아니안 나뭇잎이 스며들었다. 목속성 포인트+5, SP+50, 치료마법 시전 시 치유량이 +150증가. - 은은한 녹 빛을 발하는 백호 가죽 망토 (고급) 숙련도 35/100 동방에서 네 방위의 신으로 불리는 숲의 제왕으로서 백호는 바람을 이끄는데 특별한 힘이 있다. 바람을 막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어느 정도 추위도 막아준다. 바람 마법 저항력 30프로 증가, 목속성 마법 극대화 5프로 증가. 루시아니안 나뭇잎이 스며들었다. 목속성 포인트+5, SP+50, 치료마법 시전 시 치유량이 +150증가. - 은은한 녹 빛을 발하는 미스트레스 티아라 (희귀) 숙련도 34/100 벌들의 여왕이라 불리 우는 미스트레스는 이그드라실의 꿀을 압축시켜 마법능력을 부여 하였다. 그 꿀 석을 이용하여 만든 여성용 왕관은 착용 자에게 신비감을 부른다. 용매가 필요한 마법사용 시 소모성 재료에 한하여 꿀 석이 대신 충족시켜준다. 단, 숙련도 수치 100 필요하며 10회 후 파괴된다. 벌들의 공격을 받지 않는다. 내면적으로 신비함을 만든다. 루시아니안 나뭇잎이 스며들었다. 목속성 포인트+5, SP+50, 치료마법 시전 시 치유량이 +150증가. 비록 숙련도가 삼분의 일밖에 되지 않아 능력치가 많이 떨어지긴 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해보는 수밖에는. “좋아, 준비완료. 간다! ‘트리플스펠’ 발동, 올 속성!” <지능, 정신력이 부족 합니다. 피드백 확률 99, 9989, 시전하시겠습니까?> 지능, 정신력만 68, 118 인데도 거의 100프로 가깝게 피드백 이라니 역시 무모한 짓이었다. 하지만. “그래야 재미있지! ‘심연의 눈’ 발동! ‘트리플스펠’ 발동, 올 속성!” <‘심연의 눈’의 숙련도가 15 상승했습니다.> 지금 내 지능과 정신력은 300프로 올라가서 204, 354 이다. 지능은 모르겠지만 정신력만큼은 아마 전 게임 유저들 중에 손가락으로 꼽힐 것이고 적어도 100렙 이상은 올려야 넘볼 수 있는 수치가 아닐까 싶었다. <지능, 정신력이 부족 합니다. 피드백 확률 88프로, 시전하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률은 반도 못 미쳤다. 슬며시 승부사의 미소가 지어졌다. “시전!” 전과 다르게 8개의 작은 구가 허공에 떠올랐다. 크기는 대부분 비슷했으나 포인트가 가장 많은 목(木), 토(土), 천(天) 속성이 그나마 가장 커 보였다. 그 구들이 내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주위에 엄청난 기운이 요동치고 사방이 번쩍 거렸다. - 콰르릉, 빠지지지지지지직! 공간이 갈라지는 듯 한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그 구들 주위로 찌릿한 전류가 방전되기 시작했고 그와 비례하여 내 SP는 어디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쭉쭉 빠져 나갔다. “으아아아아아악!” 구들의 속도는 이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 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결국 저 경고음이 뜨고야 말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서 미칠 것만 같았다. <스태미나가 떨어졌습니다. MP로 대체합니다.> 머리가 끊어질 것 같아 아프다. 억지로 참으려고 이를 악 물었지만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제 구들은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어둠이 내 주위에 나타났다. 그것은 끝없이 펼쳐진 우주. 그래, 별 하나 없는 공허의 우주. <결합 실패. 피드백 현상이 잃어납니다. MP가 소실됩니다.> <‘예쁜이’님은 기절 하셨습니다.> <건강 경보가 작동 되었습니다. 접속이 강제로 종료됩니다.> <‘아펜하르트’접속을 해제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29일전. - 띠. 띠. 띠. 일정한 기계음 소리와 병원 특유의 무거운 냄새가 내 코와 귀를 자극했다. 뒤이어 머리의 통증이 급속도로 내 몸을 좀먹어 왔고 갑작스런 통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아 윽.” 성대에서 새어나오는 쉰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내 귀를 자극했다. 나는 분명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기찬아, 기찬아!” 날카로운 목소리가 시아의 사각 너머에서 들려왔다. 몽롱한 시선으로 천장에 상아 빛 텍스를 보고 있던 나는 무의식 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 마?”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얼굴이 온통 마스카라로 뒤범벅이었고 오른쪽 인공 눈썹이 눈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은 내가 알고 있던 매사에 철저하고 흐트러짐 없는 엄마의 모습이 아니어서 내 의문은 더욱 가중대어 왔다. “왜… 울어?” 힘겹게 뱉어낸 내 물음에 엄마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단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누나는……?” 자꾸 목이 잠겨 말하기 힘들었지만 말하지 않는다면 이질적인 분위기에 빠져 들것만 같아서 억지로 성대를 놀렸다. - 덜컹. “엄마, 기찬이는… 기, 기찬아!” 왜 다들 호들갑일까. 나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데. “괜찮은 거야? 너, 어제 꼬박 기절해있었던 거 알아?” “기절?” 혈관이 요동쳤다. 핏줄을 타고 오르는 백혈구들이 내 머리를 자꾸만 강타하는 기분. “그것 때문에 엄마도 LA에서 바로 날아오셨단 말야!” “그만 하거라. 그래, 머리는 괜찮은 거니?” 엄마의 손길이 내 머리에서 느껴졌다. 부드러운 손길 때문인지 처음보다 많이 괜찮아 진거 같았다. “의사 선생님이 단순한 뇌 쇼크라고 하더구나. 이 정도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단다.” 나는 어제 게임을 하다 기절했었다. 그게 게임 상이 아니라 정말 기절했다는 건가? 그럼 내가 뇌파이상으로 입원한 거야? 갑자기 어제 상천이가 말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뇌파이상으로 죽은 사람 1위로 꼽혔어.” “만든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너무하지 않냐? 벌써 10명이 넘게 죽었단 말야.” “게임으로 마루타 시험 당하는 기분이지 않냐?” 설마 내가 뇌파이상에 걸릴 줄이야. 전혀 현실감이 없어 웃음만 나왔다. “이제 그 뇌파인식 게임은 금지다.” “네?” 청천벽력 같은 말이 들렸다.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완고한 표정의 엄마가 보였다. “싫어.” “안 돼.” “엄마!” “안 된다면 안 돼!” 저렇게 화난 엄마는 처음 보았다. 나는 도와달라는 표정으로 누나를 보았지만 누나는 알 수 없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내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엄마, 일단 기찬이 대리고 병원을 나가자. 움직일 수 있겠어?” “…응.” 나는 약한 뇌 쇼크로 진단을 마치고 병원을 나올 수 있었다. 길을 걷는 동안 우리 가족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단지 간혹 걱정스런 표정으로 엄마가 나를 흘낏 쳐다보았을 뿐. 큰길을 지나 쌩쌩 지나가는 차도에 도착했다. 이대로 가면 나는 게임을 영영 못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엄마를 설득하기로 결심했다. “엄마, 그 게임 말인데…….” “안 돼.” “엄마, 제발! 나 게임 없으면 못 사는 거 알잖아. 적어도 한 달 까지는 하게 해 줘!” 엄마는 충혈 된 눈으로 울먹이며 나를 째려봐 내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애미도 너 없으면 못살아! 내가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왔는데, 애미도 여행사 일 그만 둘 테니까 너도 게임 그만둬. 그러면 되지 않니? 응? 기찬아.” “…….” 나 때문에 몇 십 년 동안 자리 잡은 일을 그만둔다 말했다. 그렇게 까지 나오는데 내가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 애절한 사랑이 너무도 잘 느껴져 가슴이 아플 뿐이었다. “엄마, 그만해. 기찬이도 그쯤하면 알아들었을 거야. 지금 일하던 도중에 그냥 온 거잖아. 어서 가봐야지. 기찬이는 위험한 짓 하지 못하게 내가 잘 감시 할 테니까. 그러니까, 그만하자.” 누나는 택시를 붙잡고 뒷좌석을 열어 엄마를 재촉했다. 엄마는 마지못해 탑승하다 좌석에 엉거주춤 앉아서 근심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많은 생각이 교차하시는지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한 달이다.” “엄마…….” “약속해줄 거지? 한 달이야. 알겠니?” “…응.” 택시가 부르릉 소리를 내며 자리를 빠져 나갔다. 내가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자 누나가 살며시 내 손을 잡았다. “엄마는 정말 너를 사랑하고 계셔.” 자꾸 목이 메어와 성대가 심하게 떨렸다. 누나는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우리 동생, 그만 마음을 열어도 되잖아. 이렇게 괴로워 할 바에야.” 누나의 품은 너무나 따뜻했다. 그리고 너무나 안심이 되었다. 누나는 나 때문에 오늘하루 일을 쉰 참이라 같이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맛난 음식을 해주었다. 나는 밖에서 있었던 일도 있고 해서 안절부절 하루 종일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나도 개인적으로 네가 게임을 그만 두었으면 해.” 라고 말하던 누나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지금 이렇게 하고 있는 건 무엇 때문일까. 게임? 우리가족은 이걸 살인도구로 인식하고 있다. 그럼 이건 나에게 있어서 무엇일까. 추억? 도피? 또 다른 나의 세계? 전부 아니다. 나에게 있어서 이건 현재 살아가는 삶이다. 진행형인 것이다. 이것도 내 인생이고 내 삶의 일부다. 이건 상상속의 가상공간이 아니라 내 현실에 녹아들어 있는 진실과도 같았다. “삼천포로 빠져 드는군.”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제 기절해서인지 내가 있는 장소는 그때 스펠을 결합했던 숲이었는데 접속하자 그곳에 누워있는 채로 시작되어, 한동안 하늘을 보며 생각했던 것이었다. “이제 명확하게 한 달이 마지막이 되는 건가.” 근심어린 표정을 하던 그때의 엄마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엄마는 너를 사랑하고 계셔.” “그만 마음을 열어도 되잖아. 이렇게 괴로워 할 바에야.” 그리고 누나의 말이 머리에 울렸다. 아버지는 내 손으로 죽였다. 경찰관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부서진 장난감을 끝까지 들고 있었다고 했다. 내가 불렀기 때문에, 내가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엄마를 보지 못했다. 벽을 쌓고 있었다. 나는 엄마를 한 없이 사랑한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하지만 계속 거리를 두게 되어 버렸다. 응석을 부릴 수 없었다. 다가가면 안 되었다. 어린 나는 그날로 어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 정말! 머리만 더 아프잖아. 그만하자, 영양가 없는 생각해서 뭐하겠어.” 주머니에서 작고 검은 구슬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어딘지 모르게 구슬 안에서 검은 무언가가 한 없이 나선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 불완전한 공허의 구슬 (유니크) 공허로 가득한 기운이 느껴진다. 하지만 매우 불완전 하다. 이 구슬은 게임 상에 접속하자 옆에 떨어져 있던 것이었다. 그때 올 속성 결합을 실패했는데 그로인해 이것이 생성된 것 같았다. 어디에 쓰이는지 전혀 알 순 없었지만 흑진주처럼 매우 아름다워서 가지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멋쟁이’님이 통신구슬 연락을 취합니다.> 그때 태식 형한테서 연락이 왔다. {어디냐? 형 지금 기사단 입단 완료했다. 숲이네, 그곳엔 왜?} 주머니에서 통신구슬을 꺼내 답했다. “그냥 스킬 연구 좀 하고 있었어요. 왜요?” {말했었잖아, 같이 다니자고. 기다려 금방 갈게.} 뭐라 말하기도 귀찮고 움직이기도 싫었던 나는 다시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태식 형이 와서 내 발치를 툭툭 찼다. “그만 차요. 알고 있으니까.” “되게 무뚝뚝하네. 소연이 얼굴로 그렇게 말하니 되게 밉상이다.” “그럼 이렇게 누나 목소리로 낼까요? 사랑해요, 태식씨.” <‘매혹’의 숙련도가 3 상승했습니다.> “…젠장, 매혹 숙련도 올랐지?” “풋, 푸하하하하하하하!” 붉게 물든 형의 모습을 보니 폭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네가 찾던 답은 아직도 못 찾았냐?” 태식 형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럴 때 보면 정말 어른스럽다. “아, 그게… 제가 만족한 만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어차피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유료화 되는 날 그만 둘 거예요…….” “그래? 잘 됐다. 하지만 형 마음으로는 당장에라도 그만두게 하고 싶다.” 나는 물끄러미 태식 형을 올려다보았다. 형의 시선은 어딘지 모를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형이 게임 프로그래머인건 알고 있냐?” “당연히 모르죠.” 내 즉답에 형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뭐, 알고 있었다만 네 누나의 남친인데 관심이 너무 없구나?” “뭔 얘기가 하고 싶은 거예요?” 태식 형은 포기했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이고 말했다. “게임 프로그래머로서 얘기하는 건데 이 게임 상당히 위험해.” 태식 형은 딱 잘라 말했다. 이 게임은 위험하다고. “이렇게 완벽한 게임이 말이에요?” “그래, 완벽해서 문제지. 뇌파인식 게임의 완성도는 현실과 얼마나 가깝냐로 따져. 뇌파인식 결합도가 보통 50프로만 되도 현실처럼 느끼지. 헌데 이 게임은 그것을 월등히 뛰어 넘었어. 적어도 80프로 이상은 될 거야.” “그게 어쨌는데요.” 태식 형은 지극히 직장인의 사무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매우 피곤해보였다. “잘 생각해봐. 사람은 현실에 가깝게 다가온 것일수록 진짜 현실과 혼동이 생겨버려. 즉, 현실이 게임이 되어버리는 거지. 간단히 말해, 미친다는 소리야. 이 게임은 모든 걸 뇌파로 서버가 돌아가게끔 만들어졌어. 기본초안은 만들었으되, 지금 이끌고 있는 미래는 모두 우리 유저들의 뇌파로 인해 만들어 지는 거지. 이해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태식 형은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를 들어서 여기 스킬은 우리 행동과 신념, 생각들로 인해 생성 되. 이게 쉬운 일 같지만 유저의 모든 뇌파를 통제해야 하는 일이라 실상 불가능 하다고 봐야 해. 하지만 여기는 가능하지. 왜 그럴까?” 나는 잠깐 고민하다 말했다. “그게 우리 뇌파로 서버를 돌리기 때문이라는 말이에요?” “그래, 정답이야. 다른 게임처럼 뇌파를 통제 하는 게 아니라 여기는 뇌파를 자유롭게 풀어줘. 어찌 보면 막나가는 게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자율성은 게임을 현실감 있게 만들지. 스킬뿐만이 아니야. 몬스터, NPC, 아이템 그 모든 것들이 뇌파로 인해 생성되고 돌아가.” 문득 내 ‘심연의 눈’이 스킬화 된 게 생각났다. 그래서 태식 형의 말이 조금은 이해가 가기도 했다. “그렇게 뇌파로 돌아가는 이 게임은 현실을 토대로 반응하기 때문에 매우 현실적이게 돌아가지. 보기에는 좋은 시스템이지만 사실은 미친 짓이야. 기찬이 너, 이 게임이 뇌파이상으로 죽은 자 1위로 일주일 만에 등극한 거 알아?” 상천이한테 들었기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뇌파이상? 하, 웃기지 말라고 그래. 전부 살해당한거야!” “살해요?” 흥분한 태식 형이 격앙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래, 살해. 너, 그 말 들어 본적 있어? 뇌가 죽었다고 인식하면 정말 죽어버린다는 거. 최면술로 뇌에 암시를 걸어 손이 불탄다고 하면 실제론 불타지 않는데 그 손에 물집이 잡히는 그런 이야기 말야.” 한때 TV에서 최면술 프로그램이 인기 있을 때 보았던 내용인지라 다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거랑 똑같아. 뇌파인식으로 돌아가는 게임이라 뇌가 현실처럼 반응해버려. 만약 유저가, 게임 상에서 죽는다가 아니라 정말 죽는다 인식해버리면 그땐 정말 죽고 만다.” 내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처음 고블린을 치료해주며 기절할 때는 게임 상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 머리는 아팠지만 괜찮았었다. 하지만 이번에 기절할 땐 확실히 정말 기절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입원했다. 뇌가 기절했다 인식했기 때문에 정말 기절한 것이었다. “그럼 막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심증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게임을 하며 조사하는 거다. 전부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만 알아둬. 아직 이 ‘아펜하르트’회사의 의도를 모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알려 줄 수 없다.” “그런 얘기를 저에게 왜 하는 거예요.” 태식 형은 담배를 피우고 싶은지 손을 자꾸 주머니 쪽으로 가져가다 한숨을 쉬었다. “소연이한테 들었거든. 너 쓰러졌다면서.” “…아셨군요.” 태식 형은 나의 눈치를 잠깐 보는 듯 하다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래, 너한테는 너무 위험해. 그러니까 당장 그만둬… 에잇,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담.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 짓지 마라. 게다가 넌 범죄잖아?” “싫어요.” 난 딱 잘라 거절했다. “너, 내말 모두 귓등으로 들었…….” “알아요! 하지만 그만둘 수 없어요. 아니, 그만두지 않을 거예요.” 내 말에 형은 안 그래도 피곤한 표정이 더 피곤해졌다. “너, 맞아야 정신 차릴래?” “이 가냘픈 소녀를 때리시게요?” <‘매혹’의 숙련도가 3 상승했습니다.> “아… 제길, 알았으니까 다신 그딴 표정 짓지 마라. 진짜 소연이한테 볼 수 없는 모습을 보니까 적응 안 되잖아.” 형은 진심으로 말했다. 이거 은근히 재미있다. “이유가 뭐냐?” “뭘요?” “이 게임에 그렇게 집착하는 이유.” 순간 한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머리를 휙휙 털어 생각을 지웠다. “글쎄요…….” “…장난 하냐?” 하지만 정말 나도 알 수 없었다. 엄마와 누나가 말리는데도 이렇게 게임하는 이유를. 잘못하면 죽어 버리는 데도 게임하는 이유를. 유료화 되는 날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왠지 아쉬웠을 뿐이었다. 게임이? 정든 캐릭터가? 뭔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좀 더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그런 아쉬움… 나는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타셰’님이 통신구슬 연락을 취합니다.> 어? 뭐? 잠깐, 진정해. 손으로 꽉 잡으면 안 들릴 거야. {어… 뭐하세… 금… 있어요…….} “야, 무슨 소리 안 들리냐? 통신구슬 같은데.” “별거 아니에요.” 나는 더욱 통신구슬을 꽉 쥐었다. “어, 저기 UFO가!” …안 속는 답니다. - 퍽! “억!” 순간 태식 형이 내 무릎을 차버려 몸이 뒤로 꺾였다. 그때 타이밍을 이용하여 유유히 손 안에든 통신구슬을 빼앗았다. 저런 악마! 말로 안 되니 몸을 쓰냐? {언니, 소연언니? 안 들려요?} 결국에 듣고야 말았다. 매우 의미심장한 미소를 씩 하고 짓는 저 표정을 보니 내 치부를 들킨 것 마냥 상실감이 엄습했다. “어떤 관계?” “관심 끄세요.” “직접 물어보면 되겠지. 아아, 여보세…….” “이리 줘요!” 내가 손을 뻗었으나 너무도 가볍게 피해버렸다. 으으, 미꾸라지 같은! “영차, 네가 날 잡기에 100년은 이르단다, 아가야.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소연이 남자친구인 황태식 이라고 합니다. 당신은 누구시죠?” “으아아아악! 내놔!” 내가 잡으려고 이리저리 쫓아다녔건만 저 재수 없는 놈은 요리조리 잘도 피했다. {어, 아, 아… 아! 저는 임한나라고 해요. 죄송해요. 제가 방해한 것 같네요, 그럼.} “어? 끊어 버렸네?” “젠장!” 나는 씩씩 거리며 멍하니 멈춰선 태식 형 손에 있는 통신구슬을 낚아챘다. “네 이거냐?”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태식이 형. 어른이 참 값싸게도 논다. 나는 무시하고 급하게 통신구슬로 한나에게 연락을 취했다. “한나야? 아까 그거 그냥 아는 오빠가 장난 친 거야. 어디야? 지금 갈게.” “호오.” 내 옆에서 싱글벙글 참 즐겁게도 구경하는군. 면상을 콱 밟아 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아니 밟을까? {아, 그런 거였어요?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언니라면 남자친구가 한 두 명 정도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보여서 그만.} …그 한 두 명 정도라는 계산은 어디서 나온 통계인지. “그렇지. 소연이라면 한 두 명 정도는 있을 법도 하지.” 당신이 인정해버리면 어찌하자는 말 입니까! “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남자친구는커녕 여자 친구도 없… 아니, 그건 꼭 그렇지만도… 하지만, 아, 몰라! 알았으니까 이라와, 지금. 알았지? 끊는다!” {어, 언니? 제 말은 들으…….} 나는 다 듣지도 않고 통신구슬을 주머니에 콱 쑤셔 박았다. “헤에…….” 재미있는 무언가를 찾은 듯 한 저 해맑은 표정 정말 짓뭉개고 싶다. “형이 해준 말 알아들었으니까, 그만 하세요.” “싫은데?” “그거 사생활 침해하는 거 아세요?” “나는 지금 널 보호하고 있는 중이야.” “그건 직권남용이라는 거 아세요?” “잘 알지, 넌 범죄자고.” “정말! 한마디도 지지 않아!” “네 누나랑 같이 지내면 자연스럽게 늘거든.” “이이익……!” 결국 내가 포기해버렸다. 저 남자도 독종이야. 애인끼리는 닮아 간다더니 그 말이 아주 딱이다, 딱이야. “이것 때문이었냐?” “뭘요.” 완전 토라져서 팔짱낀 채 태식 형 얼굴을 보지도 않았다. <‘매혹’의 숙련도가 3 상승했습니다.> <‘매혹’의 숙련도가 Full 되었습니다.> “제발, 그만해. 그 표정은 못 견디겠다.” …이 인간, 정말 변탠가. 그런데 매혹 숙련도가 Full이다? 어느새 100을 다 채운 모양이었다. 그런데 스킬이 변경되지 않은 것 보니 아직 큰 스킬계기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태식 형은 기분을 추스르고 다시 말했다. “저 한나라는 애 때문에 그만 못 두는 거냐고.” “아, 아니에요!” “…이봐,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열 좀 가라 안치지?” 나는 황급히 태식 형의 시선을 피했다. 아, 너무 민망한걸. “나참, 코흘리개가 사랑도 다 하고. 진작 그렇게 말했으면 좋았잖아?” “아니라니까!” “그래, 그래, 알았어, 알았어.” 두 번씩 반복해서 답하니 왠지 더 화났다. 분명 어린애 취급당하고 있어! “어차피 유료화까지니까, 더 이상 그만두라 하지 않으마. 대신 조건이 있다.” “또요?” 만날 이 인간은 조건을 붙였다. 그게 취미인가 심히 고민해보았다. “별거 아냐. 내가 했던 말 비밀로 하고, 게임하다 조금 이상한 사항을 발견할 때 살짝 보고만 해주면 되는 거야. 간단하지?” 매우 형식적인 정도라 별 말없이 수긍했다. 어차피 그렇게 할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건 짚고 넘어가야 했다. “형, 오해하지 말아요. 한나 때문에 이런 거 아니에요. 문득 생각은 났지만 에, 그렇지만… 그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내가 말하는 거지만 너무 낯 뜨거워서 마지막엔 목소리가 기어갔다. 그때 태식 형이 나를 확 끌어안았다. “우왁!” “더 이상은 못 참겠어! 너 같은 여동생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거칠 것 없이 그 인간의 명치에 주먹을 지른 일은 넘어가도록 하겠다. “으왁, 뭔 박쥐들이 이렇게 많아! 위험해! ‘화이어 블레이드’!” “꺅,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소연언니, 어서 이리로!” “제, 젠장, 이게 전부 태식이 오빠 때문이잖아!” “이런 게 튀어나올 줄 이크, 알았냐?” “다들 이름을 부르니까 저만 소외당한 것 같네요. 제 이름은 강현빈입니다. 앞으로 이름으로…….” “지금 그런 걸 말할 때 입니까!” “오빠, 지금 그런 걸 말할 때가 아니잖아요!” “전 태식이라고 불러 주… 으악, 알았어, 그만해. 소연아 그 표정은 조금 못 견디겠다.” 거의 난장판이 돼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이런 곳에 오게 된 거람. 한 시간 전으로 돌려보자. 태식 형하고 나는 한 동안 숲속에서 한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실상은 나는 기다린 게 맞지만 형은 내 축객에 꿋꿋이 버티고 있다 말해야 맞을 것이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도망가면 네 누나한테 이른다.” “…무슨 초딩도 아니고 일러요? 쳇.” 아무래도 도망은 불가능 할 것 같았다. 결국 저 멀리 한나가 오는 게 보여서 다 포기해야만 했다. 그 옆에 또 한 명 누군가가 있었는데 자신의 몸만 한 롱 보를 매고 있었… 잉? 조이님이잖아? “오랜만이에요, 타테님.” “아, 오랜만이네요, 조이님. 그런데 어떻게 같이 오신 거죠?” “언니, 제가 통신구슬로 말했었잖아요. 조이님하고 같이 있다고.” 그래 분명히 들었지, 내 손이. “아, 아, 그래, 기억났다. 아하하…….” “그보다 타테님 옆에 있는 분은… 애인?” “아니라니까요!” “우와, 생각도 안하고 부정당하니까 조금충격.” 태식 형은 우울한 표정을 만들어 내고 있었지만 눈이 웃고 있어서 한껏 째려봐 주었다. “알았어, 이것아. 저는 호칭 미지의 마검사, 멋쟁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호칭까지 말한 거 보니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 한 게 분명했다. 우쭐거리는 태도도 그렇고. 하지만 이를 어쩌나. 상대는 당신보다 한 수 위인데. “명예랭킹 8위, 미지의 마검사 이셨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일발필중의 어둠의조이라고 합니다.” “예? 그럼 랭킹 6위?” 조이님이 그 예의바른 미소로 악수를 청했고 태식 형은 당황 하면서도 악수를 받았다. “이거 참, 랭커 보는 게 이렇게 쉬운 거였나?” 태식 형은 허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한나도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연언니 주위로 랭커들이 모이는 것 같아요. 음, 꼭 더러운 곳에 필연적으로 꼬이는 귀여운 벌레들처럼.” …그 예가 무진장 마음에 안 듭니다만. “그럼 내가 소연이를 찾아다니는 벌레란 말 입니까?” “귀여워요, 벌레.” “아니, 그게 아니라.” 한나의 사차원적인 생각은 태식 형조차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하하, 멋쟁이님 그만하세요. 그냥 꽃을 찾아온 벌이라 우회해서 생각하면 되죠. 이렇게 예쁘신 타테님을 찾아온다는데 뭔들 못 하겠어요.” 조이님은 상대의 기분을 풀 수 있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 예의바름 때문에 나도 친구가 될 수 있었고 말이다. “그래… 뭐 그렇다면야. 그럼 이 어색한 호칭부터 점검하자. 한나라고 했던가요? 내가 한참 오빠 같으니까 말 놓을게. 괜찮지?” 한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연언니도 오빠라고 부르시니까 저도 그렇게 부를게요. 괜찮죠, 태식오빠?” 아주 죽이 척척 들어맞는다. 그냥 아주 사귀어라, 이것들아. 저 인간 흐뭇한 저 표정 봐라. 정강이를 또 차버릴까? “그럼 그쪽, 조이님은 혹시 나이가…….” “스물여덟입니다.” “어라, 한 살 더 많으시네요. 형이라 부를게요.” “아뇨, 영 어색해서… 저는 이대로가 편합니다. 이거 미안하네요.” 우리와 거리를 두고 싶어 이러는 게 아니라 정말 그대로가 편해서 하는 말인 거 같았다. 태식 형도 그걸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모두에게 말했다. “자 그럼 호칭도 점검 했겠다. 우리 얼굴도 익힐 겸 몬스터나 잡으러 갈까?” 거의 암묵적으로 실질적인 리더가 된 태식 형이 건의하자 모두 별다른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어디 가게요.” “랭커 세 명에 홍일점도 있겠다. ‘암흑의 탑’으로 갈까?” “에… 소연언니도 있는데 홍일점이라뇨?” “얘는 얼굴만 여자지, 속이 남… 으읍!” “하하, 이 오빠가 조금 실성한 것 같네. 무시해, 무시.” “으으읍, 으읍, 으크윽!” 그래, 숨구멍은 죄다 막았다. “‘암흑의 탑’이라면, 50레벨 이상 열 명이 모여도 초입밖에 가지 못한 곳 아닌가요?” “푸하! 날 죽일 셈이냐! 으흠흠, 어쭙잖은 열 명 보다 일당백인 네 명이 훨씬 낫잖아요?” 우리를 언제 봤다고 일당백이라 단정 짓는 건데? “음… 그건 그렇다고 쳐도 그곳은 어둠의 안개 때문에 한 치의 앞도 보지 못 할 거예요.” “그렇구나, 그 생각을 못했네. 그럼 다른 곳이 어디…….” “저기…….” 한나가 살짝 손을 들자 모두 이목이 집중 되었다. 한 순간 주목 받으니 쑥스러운 건가. 우물쭈물 하는 게 사진 찍어 두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일단 스크린 샷 한방, 아무도 모르게 찍어두자. “그건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천속성에만 스텟을 올리다보니 빛을 몸에서부터 퍼져 나오게 할 수 있거든요.” “에… 그럼 해결 된 건가.” “아무래도 해결 된 거 같네요. 멋쟁이님.” “그런 거 같네요. 태식이 오빠.” “그렇지?” “그렇죠.” “응.” 이렇게 우리들은 어정쩡하게 갈 길이 정해졌다. 이 즉흥적이고 무모한 짓을 내가 왜 승낙한 걸까.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태식 형에게 니킥을 먹이고 한나가 그 말을 못 꺼내도록 키스를… 이건 좀 아닌가. 어쨌든 어떻게 하던 가 막았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시간을 되돌려 줘!” “야! 망상할 시간 있으면 힐이나 줘!” “이 멍텅구리 무늬만 마검사! ‘태초의 재생’ 발동!” “억, 그 말은 좀 충격. 검 막!” “폭 시!” 불을 머금은 검이 사방으로 휘둘러지자 엄청난 불길이 휘몰아 쳤고 조이님이(이제 현빈 형이라 불러야 할지 조금 망설여진다.) 한꺼번에 4개의 화살을 재어 하늘로 쏘아 올리자 그 화살들이 박쥐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펑 하고 터져버렸다. 폭발의 위력은 강하지 않았으나 화살 파편이 비산하여 검 막에 의해 불에 타거나 난자된 박쥐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쥐들은 검은 물결이 이는 것처럼 많았지만 말이다. “모두 이리오세요! 안전지대 만듭니다! 카오스에서 갈라진 태초의 어머니 가이아시여, 어머니를 상징하는 물건은 땅, 땅은 곧 성표 이니라. 발동하라, 디바인 마크(Divine Mark)!” 한나를 중심으로 둥근 원 형의 빛이 하늘로 뻗어 올랐다. 박쥐들은 왠지 저 빛을 꺼리는 것처럼 다가오지 않고 주위를 맴 돌았다. “휴우, 한 숨 돌렸다. 이런 곳에서 디바인 마크를 보다니 놀라운 걸? 한나는 고위사제였구나.” “언니에 비하면 아직 한참 모자라요. 이것도 5분 정도밖에 못 버틸 거예요.” “아니야, 그 정도면 충분해.” 태식 형이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고 한나는 겸손하게 받았다. 나는 짜증이 솟구쳤다. “그마안!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 이제 오도 가도 못하게 사방이 막혔는데 어쩔 거예요!” 사이좋은 둘의 대화를 가로 막으며 짜증이 물씬 밴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렇게 신경질이야?” “그러게요. 어디 편찮으세요? 설마…….” 한나의 뒷말이 몹시 두려운 건 왜 일까. “생…….” “왁, 왁, 우와악, 아아아악!” 내 느낌은 적중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내가 다 부끄럽잖아. 여긴 전부 남자들뿐이라고! “어, 그러고 보니…….” “뭐가 그러고 보니 입니까!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현빈 형은 내 말에 씨익 한 번 미소 지어 주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아니, 그게 아니라. 박쥐들이 도망간다고요.” “…….” “어? 정말이네요, 언니?” “풋,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젠장 거짓말 안하고 진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 “하악, 하악. 제발 나 좀 살려줘. 어큭, 죽을 거 같… 풋!” 저 진상, 정말 묻어 버리고 싶었다. 그때 현빈 형이 내게 아무도 몰래 살짝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알았어요, 소연씨. 제가 한나씨랑 다닐 테니까 화 그만 풀고 둘이 어울리세요.” “…네?” 뭔가 오해하고 있어. 그것도 심하게 오해하고 있어! “그런데 이상하네요. 왜 박쥐들이 도망간 거죠?” “하하… 아마 저것 때문이 아닐까?” 한나의 의문에 사색이 된 표정으로 답한 건 태식 형이었다. 형이 가리킨 손가락을 타고 그 너머를 보자 나 역시 가볍게 사색이 되었다. 태식 형이 말했다. “지, 집체 만한데?” 현빈 형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왠지 강해보이는 거북이네요.” 매우 아쉽다는 듯 말하는 이도 있었다. “뼈만 앙상하니… 살아 있는 거면 조금 귀여웠을 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 말들을 압축해서 외쳤다. “튀어!” 정말 여기 온 내가 증오스럽다. “헉, 헉. 저건 지치지도 않나. 이제 갈 때도 됐잖아?” 태식 형이 혀를 내두르며 말하자 현빈 형이 말을 받았다. “저건 둠 터틀이라 하는데 집요하고 사나운 놈으로 악명이 높죠. 언데드과로 이 지대에 서식하는 히든 몬스터에요.” “현빈이 오빠는 모르는 게 없네요? 만물박사 같아.” 한나가 칭찬하자 현빈 형은 쑥스러운 듯 앞머리를 매 만졌다. 그의 코발트 블루색의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이거 괜히 이름으로 부르자 했나 봐요. 정말 쑥스러운 걸요?” “헤헤, 계속 불러 드릴 수 있어요, 현빈 오빠.” “으아악! 그만 노닥거리고 저것 좀 처리해 봐요!” 왜 자꾸만 신경질이 나는 걸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젠 왜 자꾸 성질이래. 진짜 생리 하냐?” “안 해요!” 이러다 나, 재명에 못 사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분명 화병에 걸릴 거야. “제가 한 번 해보죠. 조준완료. 목표완료. 관통 샷!” - 팅! 분명 굉장히 강한 기세로 날아갔었다. 파공음이 들릴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게 너무도 가볍게 튕겨 나갔다.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기스조차 없다. “하하… 그냥 도망가는 게 낫겠어요.” 그리고 다시 달려 도망가는 현빈 형. 나 역시 포기하게 만든 계기를 준 한 방이었다. - 쿠어어어어어엉! “맙소사, 브레스도 뿜잖아!” 태식 형이 질린 듯이 말했다. “후훗, 제가 쏜 것 때문에 화난 모양인데요?” 현빈 형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어댔다. “지금 웃을 때 입니까? 피해요!” 나는 일갈했고 말이다. -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사방이 얼어붙었다. 나무도, 땅도, 안개도 전부다. 우리 모두 흩어져서 피한 상태라 다들 범위에서 벋어 날 순 있었는데 덕분에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멋쟁이’님이 통신구슬 전체 연락을 취합니다.> {전부 괜찮아?} 나는 재빨리 구슬을 주머니에서 빼내 말했다. “전 그럭저럭!” {언니, 다행이네요. 저도 괜찮아요.} {전, 나무위로 올라가서 살았습니다.} 통신구슬에서 모두의 목소리가 들려 신기했다. 이런 기능도 있었구나. 완전 채팅 방이네. 모두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태식 형이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도망가면 결국 스태미나가 떨어져 죽을 거야. 우리, 무라도 썰어 보는 게 어때?}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피해도 힘든데 아이스 브레스까지 난사하면 살아날 방도가 없기 때문이었다. - 우르르르……. 둠 터틀이라는 놈이 우리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점점 초조해지는데? 태식 형이 재차 말했다. {현빈이 형, 혹시 둠 터틀 약점 같은데 알아요?} {아, 네. 이마 한 가운데만 파괴되면 어떤 언데드 들이건 즉사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둠터틀도 다르진 않을 거예요. 문제는 그 뼈 강도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이지만.} 어마어마하지. 강력한 화살이 흠집도 안내고 튕겨 냈으니까. {필살기 같은 걸로 먹인다면?} {랭킹에 속한 분들이라는 걸 감안한다 해도 50프로도 안 될 거 같은데요?} {그럼 다들 필살기로 한꺼번에 노린다면?}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해보죠. 지금부터 작전에 들어간다!} 태식 형이 말한 작전은 조금은 무모하고 조금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드는 작전이었다. 그래, 적어도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어보였다. “후우, 한 번 어울려 보자, 거북아!” - 쿠우우우우우웅! 엄청난 포효에도 굳건히 버티는 다리, 그 등, 태식 형… 조금 듬직했다. “젠장, 아무래도 작전을 다시 짜야 하는 게 아닐까? 좀 무섭다.” 그 말 다 취소다. 현빈 형은 한나에게 조심히 접근하기 시작했고 나는 둠 터틀 머리가 보이는 곳에 숨어 있었다. 작전은 간단했다. 둠 터틀의 머리를 숙이게 만든 다음, 한꺼번에 이마를 공격하는 것. 문제는 어떻게 머리를 숙이게 만드느냐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선 나무 위에 있던 현빈 형이 풀숲에 웅크리고 있는 한나에게로 가야만 했다. 그때까지 태식 형이 잘 버텨줘야 하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 쿠우우우우우우우! “우왁, 이놈! 뭐, 이리! 무식해!” 거침없이 발로 밟으려 하는 둠 터틀도 황당하지만 그걸 죄다 피하는 태식 형도 황당했다. - 쿠어어어어엉! 자신의 발 사이를 쥐처럼 왔다 갔다 하니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이거 힘들어 보이는데? “거북아, 날 너무 얕봤어! 블레이즈 댄스!” 갑자기 태식 형의 발이 불타기 시작해 깜짝 놀랐으나 그것이 스킬이라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저거 멋진데? 속도가 아까보다 몇 배는 빨라진 것 같아 보였다. 게다가 형이 지나간 자리마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길이 만들어져 점점 땅이 불타올랐다. 둠터틀 같은 거대한 놈이 아니었다면 발 디딜 곳이 없었을 것이었다. “이거 오래 못가! 아직 멀었어?” 급속도로 지쳐하는 태식 형의 모습이 여기까지 보일 정도였다. 나 역시 초조해져서 현진 형과 한나를 보챘다. “좋아, 완성입니다!” “현빈 오빠, 날리세요!” 둠 터틀의 머리를 숙이게 만드는 작전은 한나의 디바인 마크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한나 말에 따르면 디바인 마크는 땅엔 바로 실현 되지만 어떤 매개체에 신의 가호를 불어 넣는다면 그곳에도 디바인 마크가 생성이 가능하다고했다. 즉, 우리는 그 매개체를 화살로 만드는 것이었다. “멀티 컨트롤 샷!” 현빈 형이 멋지게 하늘로 화살을 쏘아 올렸다. 그 목표는 둠 터틀의 머리 위! “카오스에서 갈라진 태초의 어머니 가이아시여, 어머니를 상징하는 물건은 땅, 땅은 곧 성표 이니라. 발동하라, 디바인 마크(Divine Mark)!” - 쿠워워웡! 머리위에 갑작스럽게 디바인 마크가 발현되자 둠 터틀은 황급히 머리를 아래로 숙였다. “지금이다! 총 공격! 화이어 블레이드!” “풍향확인 완료, 습도확인 완료, 조준 완료, 매직 컨트롤 스크류 샷!” “빛의 화살!” “태초의 재생!” <‘태초의 재생’의 숙련도가 5 상승했습니다.> 다들 온 힘을 다 한 것 같아 보였다. 나는 단지 한나가 빛의 화살을 쏠 때 잠깐 도와주었을 뿐이었다. - 꽈과과과과과광! 엄청난 후폭풍에 나는 몇 발짝 뒤로 물러서야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놈의 머리는 아마 가루가 되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하…….” 하지만 태식 형이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한 쪽 볼을 씰룩 거리는 걸로 보아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그 너머 짙게 깔린 모래 폭풍에서 빨간 불 빛 한 쌍이 반짝 거렸다. “저 녀석은… 진짜 괴물이군요.” 현빈 형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도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 쿠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맙소사, 또 브레스다!” “으아아아악!” 아차 싶었다. 내가 결코 빠른 타입이 아닌지라 열심히 피하려고 뛰긴 했으나 한쪽 발이 브레스에 적중당한 것이었다. 시리다 못해 뜨거운 이 아픔이 ‘태초의 재생’을 시전조차 못하게 만들었다. 어기적어기적 필사적으로 기어갔으나 둠 터틀은 그 특유의 핏빛 같은 눈을 번뜩이며 다시 한 번 숨을 몰아넣었다. “하하, 한 방 더 인가.” 아무래도 이건 무리라 생각되었다. 나는 두 팔을 축 늘어트린 채 허망하게 새하얀 브레스를 바라보았다. “언니, 피해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를 거세게 밀어버린 한나는 대신 브레스를 뒤집어썼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무, 무슨……!” 서리되어 얼어버린 땅과 새하얗게 변해 부스스 깨지는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한나의 존재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단지 게임일 뿐이었다. 여기서 죽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고 반대로 죽이는 것 또한 별 생각 없이 행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죽었다. 나대신 죽어버렸다. “뭐해, 어서 피해!” - 쿠워워워워워워! 둠 터틀이 목을 길게 빼고 포효했고 핏빛의 눈동자가 나를 주시했다. 아버지는 이제 내 전화에 답하시지 못했다. 내 생일날 어린아이의 응석을 받아 주려고 부산에서 올라오시다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 쿵, 쿵. 땅이 진동했고 사방에 얼음알갱이가 내 마음처럼 깨져나갔다. 둠 터틀은 천천히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랑한다, 기찬아. 열 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아버지의 유언장이 되어버린 글. 갈기갈기 부서져버린 장난감, 그리고 검붉어져버린 카드 글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절대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만이 견딜 수 있을 거 같았다. 다들 내 잘못이 아니라고 다독였지만 전부 내 탓이었다.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엄마와 누나는 울었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살리지 못했지만 게임에서는 그것이 가능했다. 그때부터 나는 게임을 시작하였다. 단순한 현실도피였을지도 몰랐다. 게임 캐릭터에게 대리만족을 느꼈던 것일지도 몰랐다. 둠 터틀이 발을 들어 올렸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 마음을 잠식해갔다. “정신 차려!” - 쿵! 태식 형이 어느새 다가와 나를 붙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또, 도움을 받고 말았다. 도움. 더 이상 도움받기 원치 않았다. 나를 신경써주지 않길 바랐다. 나에게 신경 쓰면 다른 사람이 불행해 진다. 그래서 나에게 상관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힐러를 택했었다. 도움받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차라리 도움을 주는 위치에 섰었다. ‘나는 죽으면 그뿐이다. 허나 나 때문에 죽는 건 거절한다!’ 그렇게 생각했던 나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망각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고 말았다. 태식 형을 뿌리쳤다. “날 도와주지 마!” 태식 형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너, 왜 패닉 상태인거야? 그 한나라는 애 때문이야?” “날 그냥 내버려 둬!” 태식 형은 눈살을 찌푸리며 한마디 하려다가 이내 체념한 듯 허탈하게 말했다. “어차피 게임이니 죽어봐야 그뿐이겠지. 나까지 진지해지긴 싫다. 그랬다간 뇌파가 진짜라고 인식할 거 같거든.” 태식 형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저 멀리서 둠 터틀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말야… 게임이기 이전에 사내대장부가 여자한테 구원 받았는데 그러고 있는 건 개인적으로 꼴불견이라 생각한다. 게다가 너는 힐러잖아? 힐러라면 다른 유저를 사랑으로 보듬어 주어야지 먼저 죽는다니 말이나 돼? 내가 보기엔 너, 힐러를 알려면 아직 먼 것 같다. 휴우, 지금 상황에서 내가 뭔 얘기를 하는 건지. 현빈 형, 저희 먼저 갑니다. 도망가세요.” 태식 형은 마지막으로 통신구슬을 꺼내 현빈 형에게 연결하고 다시 집어넣었다. 그렇다. 나는 꼴불견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도피의 연속이었고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서 그런 생각들을 지우고 살아왔었다. 내가 무슨 힐러인가. 사랑으로 보듬어 주지도 못하는 나약한 도망자일 뿐이었다. 사랑받고 싶어서, 관심 받고 싶어서 힐러로서 관심을 표현했던 것이었다. “젠장!” 가슴에 무언가 콱 막혀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게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사랑받고 싶었다는 것이, 관심 받고 싶었다는 것이 그리도 잘못된 것인가? 나는 언제나 마음속으로 감춰두고 살아야했다. 현실에서는 어른이 되어야했으므로 게임에서 만큼은 응석부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 소박한 마음이 잘못이란 말인가! 나는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다. 굳어버린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이 가슴이 나를 나락으로 내몰았으니까. 사랑도 주고 싶었다. 하지만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런 내가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던 방법은 오직 이거 하나 뿐이었다. 태식 형 앞으로 나가서 두 팔을 뻗었다. 다리가 욱신거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눈물이 눈가에 맺혔다. “내게 힐러란… 관심의 표현이었으니까.” 태식 형이 놀라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무슨 말이야?” “이게 나야. 나는 이것으로밖에 말하지 못해! 그러니까, 모두를 살리겠어! 더 이상 누구든 죽게 하지 않아, 나는 힐러다. 힐러 타테다!”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았다. 나에게 힐러란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의 감정이었다. 관심 받고 싶어 하는 감정, 관심주고 싶어 하던 감정, 그것을 게임에서 배신당했으니 내 주체성을 잃어버렸던 것이었다. 게임이었지만 나한테는 현실과 같았다. 내 마음이 결코 가짜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 그래서 나는 가슴이 아팠던 거야. 나는 진심으로 대했는데 그 마음이 나만 진실이었기 때문에… 다른 유저들은 목적을 우선시하며 게임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주르륵 눈물이 볼가에 스쳐지나갔다.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치료사의 깨달음’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매혹’스킬이 업 되었습니다. 스킬명이 ‘천상의 매혹’으로 바뀝니다.> <‘드루이드 계승자’에서 ‘일루미네이터’로 직업이 바뀝니다.> 둠 터틀이 입을 벌렸다. 입 안쪽으로 앙상한 목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팔을 벌리고 눈을 감는 게 전부일 뿐. 허나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내가 살아온 삶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여기서 죽는다하더라도 팔을 내리지 않으리라. “세상조차 가르는 필멸의 화살(Arrow of Mortality)!” - 콰콰콰콰콰콰콰콰콰! 검붉은 색의 화살이 차가운 안개를 뚫고 날아가 둠 터틀 관자놀이에 적중했다. - 콰과과과과광! 한 발의 화살이었는데 연속으로 데미지를 준 건지 여러 번의 폭발음이 들렸고 둠 터틀의 머리가 휙 하고 꺾였을 뿐만 아니라 몸까지 들썩일 정도였다. - 쿠워워워웡! 하지만 그 머리는 도대체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 겉으로 보기에는 금조차 나있지 않아 희망조차 갖지 못하게 만들었다. “헉, 헉. 이걸로도 안 된단 말인가. 어서 도망가세요!” 현빈 형이 왼쪽 나무 위에서 한 말이었다. 지쳤는지 나무등치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태식 형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놈 다리가 이 모양이라 무리일 거 같네요.” 그리곤 내 머리를 헤집으며 앞으로 나셨다. 형의 등은 나보다도 컸으며 매우 단단해 보였다. “현실도 아닌데 구차하게 살아서 뭐하겠냐. 한나의 복수 때문이라도 저놈은 꼭 잡아야겠다. 타올라라, 몸이여. 불살라라, 마음이여! 인화(人火)!” 태식 형의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불길이 넘실거렸다. 그건 한마디로 하나의 불덩이. 잘은 모르겠지만 마지막 숨겨둔 한 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정도의 마나유동으로 보아 MP와 스태미나까지 모두 소모하고 있는 것 같군요.” 거북이에게 달려 나간 태식 형 뒤로 현빈 형이 지원사격을 하기 전에 나에게 와서 한 말이었다. 저 둘은 죽을 각오… 아니, 이미 목숨을 던지고 싸움에 임했다는 것이었다. - 쿠워워워워워워워워! 사방이 불길에 화끈거렸고 화살이 바람을 갈랐다. 저렇게 기를 쓰며 둠 터틀 한 마리에게 애를 쓰니 어쩐지 웃기기까지 했다. 저따위가 무엇이기에 내 안 좋은 추억을 끄집어내고 명예 랭커 세 명이 죽음을 각오하게 하는 것인가. 태식 형의 말이 떠올랐다. “어차피 게임이니 죽어봐야 그뿐이겠지. 나까지 진지해지긴 싫다.” “현실도 아닌데 구차하게 살아서 뭐하겠냐.” 나는 게임을 현실과 같이 치부했지만 그럼에도 게임은 게임일 뿐이었다. 나는 그걸 현실로 보지 말고 게임이라는 룰 안에서 현실을 찾으면 되는 것이었다. 게임에서는 죽을 수도 있다. 최선을 다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었다. 현실에선 목숨이 하나뿐이기 때문에 아버진 살아 돌아올 수 없었지만 여기서는 언제든지 부활할 수 있지 않은가. “나 혼자 진지했던 건가. 그래, 한나의 복수는 해야지. 이것에 내 모든 것을 건다. ‘심연의 눈’ 발동!” <‘심연의 눈’ 발동.> <‘심연의 눈’의 숙련도가 15 상승했습니다.> - 암흑의 탑, 둠 터틀(희든 보스 몬스터) 종족 : 언데드 속성 : 암(暗), 수(水) 크기 : 특 대형 M P : 615,000 / 1,350,000 S P : 21000 / 50,000 암흑의 탑 수장, 베르제브브에 의해 만들어진 초 대형급 언데드 몬스터인 둠 터틀은 항상 탑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지금까지 인간을 죽인 숫자만 해도 무려 삼천 명 이상이며 그 강력한 방어력은 무적을 자랑한다. 그런 둠 터틀에게 유일한 약점은 쇄골에 붙어있는 목뼈. 거대한 머리를 지탱하는 중요한 부위가 현재 많이 부식된 상태다. 심연의 눈을 발동한 순간 둠 터틀의 모든 정보가 머릿속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 녀석, 무적인 줄 알았는데 나름 MP가 떨어진 상태일 뿐만 아니라 약점까지 가지고 있었다. 내 정신은 자연스럽게 내 몸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은, 거의 무의식적으로였다. “열려라, 잠재된 힘이여.” 1. 천상의 매혹(패시브) - 미소는 천상의 미소이며 목소리는 가희 천사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지어다. 매력 대폭증가, 인덕 대폭증가, 카리스마 대폭증가, 모든 자가 업신여기지 못하며 우러러 보리라. 2. 침묵의 절규(패시브) - ‘고성방가’, ‘침묵의 웃음’에서 변형된 상태. 목소리가 닿는 모든 생명체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고 직접 당한 자는 3초간 스턴 상태를 주며 5% 확률로 버서커 상태가 된다. 단, ‘침묵의 절규’ 발동 시, 약간의 스태미나와 SP가 하락하며 2분의 대기시간이 있다. 수가 많아질수록 하락하는 수치도 증가된다. 3. 무기속성 주입(액티브) - 8개 모든 속성을 주입시킬 수 있으며 오직 무기에만 속성 주입이 가능하다. 시간은 3분 동안 유지되며 지능, 정신력, 탄력이 높을수록 시간과 능력이 올라간다. 월(月) : 몬스터 자아의 문으로 사용된 륀(달)의 기운으로 월 속성 몬스터에게 공격 시 MP 재생효과 20%증가, 자아를 심는다. 그밖에 몬스터 공격 시 재생효과 20% 감소.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암(暗) : 빛족 / 천족 공격 시 5%확률로 절명 시키며 10% 확률로 치명타, 암의 보호로 인해 피드백 확률 10% 감소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화(火) : 식물형 공격 시 5%확률로 절명 시키며, 그밖에는 초당 20의 지속 데미지를 준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수(水) : 인간형 몬스터에게 10% 확률로 결빙효과가 주어지며 매 공격 시 상처부위는 결빙되어 스태미나가 하락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목(木) : 수(水)속성 몬스터에게 공격 시 자연의 기운이 깃들어 스태미나 및 체력이 흡수된다. 몬스터가 죽을 경우 흡수한 체력을 가진 식물 몬스터 생성.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금(金) : 강철화 시켜 방어력이 10%증가, 이동속도 15%저하.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토(土) : 독 속성 몬스터에게 추가 데미지 10%, 그 독을 흡수하여 다시 토의 기운을 불어넣을 때, 독을 간직한 채로 발동한다. 1회 사용가능.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천(天) : 언데드 / 악마 몬스터 공격 시 5%확률로 절명 시키며 10% 확률로 치명타, 빛의 보호로 인해 일시적인 방어력이 증가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4. 올 원소 친화력(패시브) - 8원소의 조화를 깨우친다. 월(月), 암(暗), 화(火), 수(水), 목(木), 금(金), 토(土), 천(天)의 원소와 친화력이 증가하여 각각 원소의 추가 포인트+10 증가, 원소 친화력으로 인해 피드백 확률 10% 감소된다. 탄력에 따라 원소의 조화가 증가, 지능, 정신력에 따라 추가 포인트 증가한다. 5. 심연의 눈(Abyss The Eye) (액티브) - 진실을 꿰뚫어 보는 미카엘(Michael)의 오른쪽 눈동자. 죽음의 천사이자 대천사인 그는 ‘영원한 빛(Arc Eternity Seraph)’으로 인간의 혼을 거두는 자이다. 그 눈은 모든 진실과 자신의 의지를 발현 시킨다. 심연의 눈을 발동시킬 경우 지능, 정신력, 탄력 300% 증가, 모든 속성 포인트가 50증가, 상대를 바라볼시 권능이 발현되며 상대의 진실을 볼 수 있다. 지속시간 3분, 대기시간 24시간 지속되며 12시간 동안 스태미나 최하로 떨어진다. 6. 트리플스펠 (액티브) - 전투법사의 고유스킬. 전투로서 지식을 깨우친 마법사는 속성을 합치는 방식을 고안해 강한 마법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각 속성을 결합해 마법스킬을 창조한다. 각각 속성 10포인트 이상 올려야 결합이 가능하고 속성 포인트가 높으면 높을수록 스킬의 결합이 강해진다. 지능과 정신력이 높을수록 속성 결합 성공여부가 커지며 조합 개수가 늘어난다. 단, 조합개수가 많을수록 피드백 확률 증가, 하루에 한 번 조합 가능, 조합 실패 시 1시간 동안 지능, 정신력 50%하락. 7. 태초의 재생(Beginning of the World Regenera-tion Power) (액티브) - 태초, 모든 자연의 조율자로 알려진 드루이드의 마법으로 훗날 숲을 숭배하던 위치들에 의해 마법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게 된다. 태초 드루이드의 재생은 위치의 재생과는 다르게 더욱 순수한 자연을 담고 있으며 그 힘 또한 강하다. 기본 재생의 비해 20% 더 회복하며 마나소모량이 10% 줄어든다. 스킬 사용 시, 모든 생명체는 MP, 스태미나가 회복된다. 시전자의 SP 소모량에 따라 회복되는 MP, 스태미나가 달라지며 작게는 1명 최대 10명까지 동시 회복 가능.(숙련도에 따라 동시회복 최대 수치가 달라짐) 숲 속성 생명체에게 시전 시, 그 생명체는 자라거나 진화가능. 8. 치료사의 깨달음(패시브, 액티브) - 호메오스타시스. 생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조건은 먹고, 자고, 대사하는 것이다. 각득(覺得), 개오(開悟), 영해(領海), 회오(悔悟), 회유(誨諭), 각성(覺醒), 경성(警醒), 효오(曉悟)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깨달음이니 희생의 길을 선택한 그대는 그 이상을 관철시켜라. 모든 치료스킬 20% 능력 증가. 보조스킬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사용가능.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발동 시 술자를 중심으로 반경 100m 안에 있는 모든 아군은 모든 능력치+20 증가, 피드백 확률 10% 감소, 방어력 20% 증가, 이동속도 20% 증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아군의 기술, 마법 숙련도가 100으로 고정된다. 단, 생명의 희생을 받고 있는 자 중 한 명이라도 사망할 시, 술자는 피드백당해 즉사한다. 주문 : 땅은 대지의 양기, (왼손을 아래로 향해 땅을 향한다) 하늘은 광활함의 천기, (오른손을 위로 향해 하늘을 향한다) 가운데 서있는 우리는 영원의 우주이니(두 손을 크게 원으로 돌려 가슴으로 모은다)나의 존엄성을 바쳐, 나의 신념을 바쳐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가 되리라. ‘생명의 희생’(가슴으로 모았던 손을 교차시키며 빛을 분산시킨다) 내가 깨달은 것이 스킬로 화하였다. 내게 너무도 어울리는 스킬이며 나만이 쓸 수 있는 스킬 같아 보였다. 내가 죽는 건 상관없다. 허나 내 동료가 죽는 건 용납 못한다. 내가 죽기 싫으면 전부 살리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주문을 외웠다. “땅은 대지의 양기.” 왼손을 바닥 쪽으로 향하며 말한 뒤. “하늘은 광활함의 천기.” 오른손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을 향했다. “가운데 서있는 우리는 영원의 우주이니.” 천천히, 하지만 자연스럽게 두 손은 포물선을 그리며 결국 가슴으로 가져갔다. 경건한 마음으로 눈을 감은 나는 어쩐지 가슴이 따뜻하다는 걸 느꼈다. - 웅웅웅웅. 작은 빛의 입자가 내 손안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둠 터틀은 태식 형과 현빈 형을 상대하느라 분주했다. 나는 눈을 번쩍 뜨며 외쳤다. “나의 존엄성을 바쳐, 나의 신념을 바쳐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가 되리라.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모았던 두 손을 빠르게 교차시키며 주문을 외우자 빛은 작은 알갱이가 되어 사방으로 분산되기 시작했다. 꼭, 수많은 반딧불들이 유유히 떠다니는 듯 한 기분이었다. 그 빛들은 세상을 떠돌다 이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바닥은 나를 중심으로 기이한 원형의 문양을 만들어 내었다. “뭐, 뭐지. 이 힘은?” “몸이… 가벼워 졌는데요?” “제가 보조합니다! 모든 기술, 마법 숙련도가 꽉 찼을 거예요, 피드백 걱정하지 말고 맘껏 공격하세요! 제가… 절대 죽게 만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둘은 멍하니 있다 둠 터틀의 발길질을 간신히 피하는 일이 벌어졌었다. 태식 형이 말했다. “킥킥, 좋다! 그래야 전 게임 힐러랭킹 1위의 타테답지! 숙련도가 꽉 찼다면 ‘아펜하르트’ 게임에서 최초로 이 기술을 쓰는 자가 될 거다! 믿는다, 오러소드!” “뭐, 뭐요? 오러소드? 태, 태초의 재생!” <‘태초의 재생’의 숙련도가 3 상승했습니다.> SP가 쭉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오러소드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이란 말인가. 전에 듣기로는 레벨 100때가 되어도 쓰기 힘들 거라는 오러소드를 저 인간이 지른 것이었다. 아무리 모든 숙련도가 100이라 해도 그렇지, 레벨 50밖에 안 되는 주제에 뭘 믿고 저런 짓을… 으아아, 내 SP가 마구 사라지는 구나! 그때 현빈 형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럼… 전 게임 힐러 랭킹 1위의 타테가 님이었던 건가요? 무지 존경했었는데 여자였던 거야? 하하, 이거 정말 재미있군요. 그럼 저도 지를 테니 믿습니다!”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현빈 형이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고정시킨 채 화살을 재었다. “암속성 결합, 증폭.” 화살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건 아까 필멸의 화살이라 부르며 날렸던 화살과 같은 색인 걸로 보아 아까 그 기술을 다시 쓰려는 듯 보였다. 내가 생각한 것이 맞았을까? 현빈 형은 나를 슬쩍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끄덕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응? 무슨 뜻이지? “월속성 결합, 증폭! 화속성 결합, 증폭! 수속성 결합, 증폭!” “뭐, 뭐야! 태초의 재생!” 으어억! 엄청난 기운이 화살촉에 맺히기 시작했다. 오색빛깔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고 나의 마나는 한 없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목속성 결합, 증폭!” 아, 아직도 끝나지 않은 거였어? 나는 둘째 치고 현빈 형도 땀을 비 내리듯 쏟는 걸로 보아 많이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분명 엄청 무리하고 있는 것이리라.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현빈 형만 서포터 했다면 이러진 않을 것인데 저놈의 망나니 자식이 오러소드는 쓰고 있는지라 내 마나가 양쪽으로 빠져나가다 결국 한계에 부딪친 것이었다. “금속성 결합, 크윽! 증포오오오옥!” <스태미나가 떨어졌습니다. MP로 대체합니다.> “나, 나 죽어요!” “헉, 헉. 도움을 받고도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네요. 모든 속성을 결합, 증폭 하려했는데 역시 힘드네요.” 뭘 믿고 그걸 다 결합 하려 했단 말입니까! 아무리 내가 죽게 만들지 않게 한다 했지만 도가 지나치지 않습니까! “일단 결합은 하긴 했는데 이거 너무 황당한 화살을 만들어 버렸는데요? 날리는 순간 반탄력에 어디까지 날아갈지 저도 모르겠는데.” 그러게 그걸 왜 만들었답니까. 현빈 형은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활줄을 당기는 것만 해도 많이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외쳤다. “턱, 턱을 노리세요!” “…머리 아니에요?” “턱이에요!” 그러는 와중에도 내 MP는 쭉쭉 빨려나가고 있었다. 젠장맞을, 오러소드좀 그만 풀어달란 말이야! “좋습니다, 갑니다! 세상조차 가르는 필멸의 화살(Arrow of Mortality)!” - 투확!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반탄력이 조금 줄어들까 하여 내가 등을 받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둘은 뒤로 튕겨나가 대굴대굴 굴러버렸다. 으헉, 진짜 죽겠다! 하지만 지금 태초의 재생을 끊어버리면 안 되었다.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더! 화살은 토마호크 미사일처럼 바닥의 바짝 붙어 모든 얼음들을 박살내며 날아갔다. 그 황당한 힘은 아까 쏘았던 필멸의 화살과는 천양지차였다. 이거라면 둠 터틀의 머리도 그냥 박살낼 것 같았다. 화살은 둠 터틀이 있는 곳에서 위로 솟구쳤다. 태식 형은 어마어마한 힘에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 콰콰콰콰콰쾅! 정확히 턱에 명중했다. 때마침 브레스를 날리려 하던 둠 터틀은 턱이 들려져 하늘을 향해 브레스를 뿜게 되었다. “지금이에요, 쇄골 바로 위에 목뼈! 어서가요!” 지금 한 방 만으로도 목뼈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분명 목이 박살났으리라. 허나 예상대로 둠 터틀은 아직 살아있었고 보험 들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노렸던 것은 턱이 들려져 완전히 노출되는 목뼈! 태식 형은 역시 눈치 빠르게 오러소드를 꽉 그러쥐고선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타올라라, 몸이여. 불살라라, 마음이여! 인화(人火)! 이야아아아아아아앗!” 번쩍 하며 태식 형의 신형이 위로 솟구쳤다. 빗살과도 같은 속도. 푸른빛의 오러소드는 그에 반응하듯 더욱 푸르스름하게 빛을 발했다. - 스겅! 일도양단.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그 힘은 그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했다. 거슬리는 것 없이 자연스럽게 내려오는 태식 형의 모습은 진정한 검사의 모습과도 같았다. 경직된 둠 터틀은 한 박자 늦게 목이 몸에서 분리 되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 쿠쿵!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아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 “후후후후후훗.” 그 날 우리들은 범접치 못할 것을 잡아 복수를 성공한 날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알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대사건이 되어서 TV방송국에서 250레벨의 둠 터틀을 잡은 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는 사실이었다.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28일전. “기찬이 너가 웬일이야? 아버지 묘에 다 가자 그러고.” “글쎄…….” 누나는 흥미 없는 내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턱을 괴고 창밖을 보고 있으려니 작은 창 너머로 풍경들이 쉴 새 없이 바뀌고 있었다. 지금은 금요일 오후. 학교를 일찍 마친 나는 전화를 걸어 누나에게 같이 가자 부탁했다. “그나저나 오랜만이네. 동생하고 이곳에 같이 가는 것도.” “누나.” “어?” 과거를 회상하던 누나는 내 말에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말야… 후회는 없으셨을까?” 뜬금없는 내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누나는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만졌다. “아직까지 그 고민이야? 네 잘못이 아니니까 이제 그만해.” 평소에는 누가 머리를 만지면 짜증이 났었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나는 고민 안하는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봐.” 누나는 쓰다듬던 손을 내려 내 손을 잡았다. “무슨 일 있었어?” “그게… 다 왔다.” 어느새 차는 우리가 갈 장소에 도착했다. 사실 뭐라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둘러댄 말이기도 했지만 누나는 그냥 넘어가 주었다. 양복을 차려입어 무척 어른스러워 보이는 누나는 아버지가 잠들어계신 자리에서 정종을 뿌렸다. 향긋한 향내가 내 코끝을 스쳐지나갔다. “아빠, 저 소연이에요. 기억나세요? 오늘은 기찬이하고 같이 왔어요. 많이 자랐죠?” 누나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나는 말없이 종이컵을 내밀었다.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종을 따라주었다. “아버지… 저 기찬이에요.” 한 번 두 번 손을 휘저을 때마다 술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내 감정은 조금씩 커져갔다. “죄송해요…….” 목이매여 말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많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막상 말하려 하니 도무지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사랑해요.” 끅끅거리다 결국 내가 말한 건 이 말 하나였다. 누나는 결국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참지 못하겠던지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나 역시 제어가 풀려버려 눈물이 쏟아져 나와 애꿎은 종이컵만 구겼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가슴이 사무치도록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저를 사랑해주셔서. 나는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툭툭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가 내 눈물을 받아 주시는 것 같아 보였다. “기찬아, 너 꽤 어른스러워 졌다?” “그래? 거기 물 좀.” “여기. 정말이야. 듬직해졌어.” “갑자기 왜 그래?” “그러게. 나도 모르겠다. 야, 천천히 먹어. 옷에 다 묻겠다.” 엑? 자장면이 튀면 지우기도 힘든데. 옷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다행히 묻진 않은 모양이군.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으음, 별 생각 없었는데. 왜?” “할 거 없으면 누나랑 놀아주라.” 눈을 반짝거리는 게 뭔가 목적이 있어보였다. 이거 몹시도 불안한데. “태식이 형 있잖아.” “몰라! 그놈 만날 게임만해서 질릴 거 같아.” 태식 형… 당신 조금 위험한 것 같습니다? “어디 가려고?” “으음, 놀이공원!”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누님. “불쾌하다는 표정은 집어치워 줄래, 동생아?” 나는 조용히 다시 자장면을 먹었다. “휴우, 오늘 기분도 우중충해서 그냥 해본 말이야. 엄마한테 전화해볼까?” “한창 바쁠 때인데?” 누나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일하고 있겠네. 에휴, 집에나 갈까.” 꺼억, 아, 맛있게 먹었다. 휴지로 입술을 쓱 문지르며 말했다. “누나, 오늘은 일 별로 안 바쁜가보네?” “아아, 오늘은 하루 쉰다고 했어.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골치가 다 아프다.” “왜 숴?” 누나는 말을 하려다 이내 귀찮다는 듯 턱을 괴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런 게 있다. 그보다 너 게임하는데 머리 안 아파?” “걱정하지 마. 그때는 조금 특별한 날이었던 거니까.” 누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했다. “특별한 날이 또 없으라는 법은 없겠네.” 나는 누나의 시선을 피해 물을 들이켰다. 거 시원하네. “무슨 게임이야, 그거.” 순간 움찔해버렸다. 아하하, 잔에 든 물이 출렁거렸다. 그만 좀 떨어라 내 손아! “전에 했던 거 있잖아, 무림일대기. 그거 다시하고 있거든.” “그래?” 누나는 물을 마시면서도 눈을 나에게서 때지 않았다. 이거 부담스러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뭐 감추는 거 있지?” “무, 무슨 말이야!” “흐흥~ 거짓말할 때 코 벌름거리는 거하고, 시선피하는 게 제대로 보이는데?” 이놈의 눈팅은 나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그건 누나도 마찬가지잖아!” “어머? 내가 뭘?” “일하는 것도 말 안 해주고 말야.” “그건, 그거야…….” 누나가 당황한 모습은 오랜만에 보았다. 내가 정곡을 찌른 건가? 나 역시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속이는 거 있구나?” “그건, 에휴… 내가 널 속여서 뭘 하겠냐. 엄마한테는 비밀이다? 사실 누나 게임회사 들어간 건 알지?”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아이템 디자인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아펜하르트’라는 게임 도우미로 일하고 있어. 게임에 접속해서 이벤트를 열거나 버그가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는 역할이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뇌파게임에 항상 접속해 있지.” “정말?” 놀랐다. GM이란 건 둘째 치고 ‘아펜하르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랐다. “그래서 전에 네가 다쳤을 때 내가 못 말린 이유도 있었어. 엄마한테 너무 죄스럽더라. 어서 그만둬야지 원.” 내가 지금까지 누나 아이디로 하면서 들키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GM이라면 특정 아이피를 사용해 접속해야하기 때문에 누나 본 계정으로 전혀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리라. 하지만 이거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지금까지 같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누나 아이디로 설치고 다닌다면 필연적으로 누나의 눈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뜻이기도 했다. “제, 젠장.” “응?” “아, 아냐.” 이거 한 달은커녕 일주일도 못 버티게 생겼다. 이제야 본격적으로 할 마음이 들었는데 이렇게 되면 나는 일을 저지르지 못하지 않은가 말이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뭔가 하나가 풀리면 꼭 다른 게 막혀버렸다. 나 저주라도 걸린 건가?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뭘 그리 멍하니 생각해?” “태식 형은 누나를 사랑한다고.” “뭐?” 되는대로 말을 지껄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부터 나의 목표는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하는 것이 되었다. 나의 비밀은 대충 얼버무리고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곤욕을 치렀다는 건 진정으로 넘어가고 싶다. 아직도 등에 땀이 후줄근할 정도니까. [접속되었습니다, 즐거운 시간되십시오.] 나는 천천히 가수면 상태에 빠져 들었다. <아펜하르트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예쁜이’님 시작 포인트로 이동합니다.> 세상이 밝아지자 제일 먼저 본 것은 세차게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는 분수대였다.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각의 개성 있는 옷을 입고 무엇이 그리 급한 건지 돌아다니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후드를 푹 눌러쓰고 일단 자리를 피하려했다. “야, 그거 들었어?” “뭐가?” “다음 주에 대대적인 업데이트에 들어간다잖아.” 귀가 솔깃해지는 소리를 듣게 되어 고개를 돌려보았다. 지팡이를 들고 있는 두 남자가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아직 초보자의 옷을 벗지 않은 걸로 보아 레벨이 그다지 높은 것 같진 않아보였다. “저 게시판에 다음 주 업데이트 목록이 적혀있어. 한 번 가봐.” “그래? 땡큐!” 신나게 달려가는 유저의 뒤를 조심히 따라갔다. 게시판? 그런 것이 있었던가? 분수대에서 북쪽으로 올라가자 거대한 나무판자가 있었는데 여기저기 파피루스 종이가 더덕더덕 붙어있었다. 그래도 글은 한국어라 보는데 큰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단지 워낙 유저들이 많아 가까이 다가가기가 힘들었을 뿐. “어허!” “둠 터틀이 잡혔다고?” “이야, 용자대전 재미있어 지겠는데?” “이것 봐, 이젠 죽는 것도 맘껏 못하겠는데?” 유저들의 말들을 듣자니 몹시 궁금해졌지만 도무지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잠깐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아타셰’님이 통신구슬 연락을 취합니다.> {언니 오셨네요?} “아, 한나야! 괜찮아? 죽은 다음 아무 일 없었어?” 아펜하르트에서 죽는 다는 것은 뇌파의 인식정도에 따라 크게 위험할 수도 있었다. 당연히 걱정되어 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한나는 의문을 내비췄다. {저야 죽는 건 익숙한걸요? 신경 쓰지 마세요.} “뭐… 그럼 다행이고.”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보다 어서 이리오세요.} “응? 어디?” {앞에, 앞에!} 구슬을 보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게시판 쪽에서 방방 뛰며 손을 흔드는 한나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사람도 많은데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게. 내가 다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도 한나 덕분에 어렵사리 게시판 쪽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한나는 뭐가 그리 좋은지 흥분된 표정으로 게시판을 가리켰다. “결국 잡았죠? 여기 게시판 보니까 어제 둠 터틀이 잡혔다고 했는데 정말 대단해… 으읍!” 주위에서 느껴지는 눈총을 느끼고 황급히 한나의 입을 막았다. 위험해, 위험해! 시작부터 조용히 게임하겠다는 나의 다짐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아하하, 누가 잡았는지 몰라도 정말 대단하네. 그렇지, 한나야?” 식은땀을 흘리며 한나에게 윙크했다. 한나는 그제야 주위의 상황을 의식하고 땀을 삐질 흘렸다. “그, 그러네요. 누, 누가 잡았을까나~” 자네도 퍽이나 거짓말을 못하는구먼. 너무 오버하면 더 눈에 띄지 않겠나. “이상하다. 내가 잘못 들었나? 분명 둠 터틀을 잡았다고…….” “에이, 신경 쓰지 마. 괜한 헛소리일거야.” “그렇겠지? 초보자처럼 보이는데 250레벨 때의 둠 터틀을 잡을 리가 없지.” 한나와 나는 뻘줌하게 시선을 게시판으로 돌려야만했다. 1. 암흑의 탑, 베르제브브의 오른팔인 둠 터틀이 잡혔다! 어제 PM 23:45 경, 250레벨 희든 보스 몬스터 둠 터틀이 유저의 손에 한줌의 뼈가 되었다! 화가 난 마왕 베르제브브는 현재 자신의 수하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이유는 둠 터틀의 복수를 하기위해서! 그리고 인간들을 멸살하기 위해서! 둠 터틀이 잡히는 순간 발동되는 이 이벤트는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 암흑의 군단이 쳐들어올 시기는 대략 어림잡아 이주일 후. 유저들은 경각심을 가지고 수련의 몰두해야 할 것이다. 2. 암흑의 마왕을 막기 위해 용자들을 선발한다! 점점 모여 가는 암흑의 군단을 보고 심각성을 느낀 모르핀 제국은 다섯 명의 용자들을 선발하려 한다. 다섯 명인 이유는 고대의 예언에서 마왕을 저지할 수는 다섯 명이라 명명한 것을 철썩 같이 믿고 있기 때문! 다음 주 금요일 업데이트 전까지 다섯 명씩의 파티를 짜서 용자대전을 접수하면 토너먼트 식으로 대전을 할 자격이 주어진다! 그대, 영웅이 되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모르핀 제국으로 오라! 3. 이제 사망하면 그만큼 페널티도 크다고? 이제 아펜하르트 유저들은 레벨 100대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과연 레벨 100 되는 것이 쉬운 일일까? 이제부터는 눈에 불을 켜고 살기위해 발버둥 쳐야 할 것이다! 레벨 80대 이후, 사망 시 무조건 1레벨다운, 능력치 5% 하락, 24시간의 접속불가에 처하며, 레벨 100을 넘을 시 페널티 효과는 없으되 다섯 번의 라이프가 부여된다. 즉, 다섯 번 죽게 되면 그 계정은 삭제. 처음부터 다시 키워야 할 것이다. 현실 같은 게임을 원하는가? 죽는다는 것을 심각하게 여겨 보아라, 현실이 어떤 건지 똑똑히 느끼게 될 것이다. 4. 유저들의 바람에 따라 명예랭킹이 대폭 업그레이드된다. 그동안 명예랭킹이 유저 간에 명예만 부여될 뿐 실질적인 이익이 없다는 건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명예랭커 1위부터 100위는 기사단을 개설 시 기본 300명에서 최대 1,000명까지 기사를 받는 수가 대폭 증가한다. 단, 기본 유저들도 300명으로 한계수가 증가된다. 1위부터 10위까지는 ‘전장의 지휘관’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스킬을 사용할 경우 자신을 포함한 주위 50m 간격에 포함된 기사단은 모든 능력치 5%~15% 상승(1위는 15%, 10위는 5% 식으로 떨어진다.)한다. 자신의 길드 로고가 새겨진 깃발을 등 쪽에 매게 된다. 이렇게만 하면 명예랭커가 아닌 유저들을 불만을 품을 것이라 사료된다. 그래서 유저들의 추천 명예 시스템을 폐지하고 기사의 정식대결이란 시스템을 업그레이드 한다! 모든 명예랭커들은 한단계위에 랭커유저와 정식적인 기사대전을 벌일 수 있다. 방법은 자신의 신념을 말한 뒤, 각자 한 명 이상의 증인을 새워두고 있어야지만 대결이 성립 가능하다. 고로, 암습은 인정되지 않는다. 또한 보조위주의 랭커들은 대결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기 때문에 대결방식을 바꾸는 방법이 합당한 조건하에 부여된다. 대결은 자유! 유저들이여, 명예를 바라는가? 자신만의 신념을 세워라! 5. 기사단랭크가 따로 생긴다! 긴장하라, 이젠 개인 명예랭크 뿐만 아니라 기사단랭크가 따로 생길 것이다. 좋은 점? 물론 있다! 랭크가 높을수록 기사단 자체 월급액수가 증가한다. 1위부터 10위까지는 1급 기사단으로서 나라의 기사단으로 입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급 용병으로서 단기간 계약 할 수도 있다. 또한 그 기사단에게 어울리는 수호정령이 주어진다! 수로정령이 필드에 존재 시 행운+10 되며 기사단의 상징이 될 것이다. 명예가 높으면 높을수록 일거리가 들어오며 신뢰가 커질 것이다. 이젠 기사대전을 벌일 시 승리한 기사한 기사단은 명성이 대폭 오를 것이다. 패배한 기사단은 해체되지 않으나 한 달간 기사단활동을 할 수 없으며 기사단 로고가 사라진다. 즉, 처음부터 다시 명성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단, 패배한 기사단은 승리한 기사단을 복수대상으로 자동 입력되어 명분 없이 다시 기사대전을 할 수 있다. 6. 호의도 시스템 역시 업데이트 된다! 지금까지 호의도로 디스카운트하여 물건을 사거나 특정 아이템을 주는 정도로 치부되어 왔었는데 일주일 후부터는 확고한 동맹을 만들 시 동맹부족에게서 부족을 뜻하는 소환구슬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소환구슬에 대해 알고 싶다면 확고한 동맹을 만들어보아라! 7. 성 공략이 가능해졌다! 왕국을 꿈꾸는 자, 제국을 원하는 자. 쿠데타가 될지 혁명이 될지는 그대의 몫! 원한다면 하면 되고 하기 싫으면 반대로 제국 쪽의 기사가 되는 것도 가능하다! 허나 이 세계관에 따라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평생을 따라다닐 하트(heart), 핸드(hand), 헤드(head)가 있어야 할 것! 예언자이자 음유시인이었던 바시나이델이 남긴 말에 의하면 하트는 성의 중심이자 기둥이 될 자이고, 핸드는 검이자 힘이 될 것이고, 헤드는 지식이자 역사가 될 자라 했다. 한 번 맺은 관계는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며 한 명이라도 계정이 삭제 될 시 나머지 둘도 계정이 삭제가 된다. 도원결의를 하겠다면 심각히 고민하길 바란다! 위 사항은 다음 주 금요일, 대대적은 업데이트가 이루어질 예정. “으음, 이거 다음 주부터는 여기저기 유저끼리 싸우겠는데?” 업데이트 내용들이 어찌 보면 거의 전부 전쟁과 싸움을 부추기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게다가 죽는다는 페널티가 크게 증가 되는데 저런 업데이트는 일부러 유저들끼리 죽이기를 원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가 말이다. 그때 한나가 내 어깨를 톡톡 쳐서 이상한 생각을 털어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시간이 거의 다 되가네요. 가요, 언니.” “응? 어딜?” “기사단에서 온 편지 못 보셨어요?” 한나가 내 손을 잡고 게시판에 몰려든 유저들을 비집고 나가려다 한 말이었다. 기사단? 편지? “어제 밤에 온 건데 통신 구슬을 꺼내서 ‘편지확인’이라고 말해 보세요.” 아, 그런 기능이 있었던가? 어쩐지 아까부터 통신구슬이 반짝반짝 거렸는데 편지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편지확인.” - 미소천사 기사단 단장, 미소천사 원빈 안녕하십니까, 기사단장 미소천사 원빈입니다. 다름 아니라 다음 주에 적용될 기사단 업데이트를 보고 우리들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잡기위해 토론을 할 예정입니다. 정모이기도 하니 피치 못할 사정을 제외한 전 인원은 내일 오후 여섯 시까지 저희 기사단 건물 뒤편 뜰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머릿속으로 시간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연산되어 생각난 숫자들. 십오 분 남았네. “언니, 어서가요. 여기 답답해요.” 내가 다 읽은 것을 확인한 한나가 보챘다. 많이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나 역시 갑갑했던지라 한나의 손을 잡고 유저들을 파헤쳐 나가 기사단 건물로 향했다. “응? 왜 그래?” 문득 뒤를 돌아보자 한나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물어본 말이었다. 한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 아니에요! 어서가요!” 갑자기 저만치 달려가 버리는 한나. 멍하니 걷고 있었던지라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뒤늦게 경악했다. 서, 설마. 에이, 그럴 리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눈팅만은 안 돼! “여~ 이제 왔냐?” “아타셰님, 타테님 오셨네요.” 이미 와있던 태식 형과 현빈 형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뜰은 이미 많은 유저들이 모여 있었는데 내가 아는 얼굴들도 얼핏얼핏 보였다. 일단 뜰 가운데 선 자는 원빈이라는 단장이었고, 오른쪽에 옹기종기 모여 잡담하고 있는 열 명은 전에 학익진을 만들어 돌격하던 자들이었다. 아, 뒤편을 보니 마법사 무리가 있었는데 내가 태초의 재생으로 피드백을 막아주어 마법을 발현했었던 자들도 보였다. “어라?” 그 마법사 무리에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 있었다. 어느 곳 하나 특색 없어 평범하기 그지없는 20세 후반의 얼굴에 그 커다란 안경만이 조금 튀게 만들어 주고 있었는데 내가 저런 유저를 알고 있었던가? 에이, 아니겠지. 안경이란 아이템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는걸 뭐. 단장이 말하기 시작해 의문을 접었다. “거의 다 모인 것 같네요. 오늘 못 오신 분들은 나중에 다시 편지로 통보 할 테니 지금은 그냥 시작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를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새로 들어오신 분들도 많으니 다시 소개를…….” “야, 어서 끝내!” “어울리지도 않게 원빈이 뭐냐.” “너 때문에 사냥도 접고 왔단 말야!” 아하하… 여기는 여전하구나. “소연아, 이 기사단 원래 이랬냐?” 태식 형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현빈 형과 한나가 걸렸던지 누나 이름을 말하며 말이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 그저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원빈이란 단장은 땀을 삐질 흘리며 다시 말했다.(그렇게 보였다) “흠흠, 그럼 넘어가고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다음 주에 업데이트 될 내용 중에는 기사단에 관해서도 있었는데요. 기사단랭크가 생긴답니다.” 단장은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열변을 토했다. “다 아는 내용이잖아. 저놈 또 시간 끄네?” “저번에 미소천사님한테 싸인 받으려할 때부터 알아봤어 저놈.” 그 상태로 잠시 굳은 것 같았는데 뭐 넘어가도록 하겠다. “제, 제가 말하려 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수호령! 랭크 1위부터 10위까지는 기사단에 어울리는 수호령이 주어진 답니다!” 단장은 흥분된 말투로 말하다 수호령이란 대목에서 눈빛을 발했다. “그래봐야 행운+10밖에 안 올려주는데 힘들게 얻어서 뭐해?” “제 실성했나보다. 그냥 사냥이나 가자.” 몇몇 유저들이 밖으로 나가려하자 단장이 검을 바닥에 내리꽂으며 외쳤다. “잠깐! 아직 말 다 안했습니다! 게시판 글을 잘 읽어 보세요. 거기에는 ‘기사단에게 어울리는 수호정령이 주어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미소천사 기사단에 어울리는 수호령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야… 천사?” “처, 천… 우오오오오오오!” “설마, 진짜냐!” “그렇습니다! 우리 기사단에게 어울리는 수호령은 천사, 그것도 정말 예쁜 천사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움이요, 그보다 더한 인생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제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미소천사 기사단이여 일어납시다! 우리들의 수호령을 위하여!” “오오오오옷! 수호령을 위하여!” “수호령을 위하여!” “와아아아아아아!” 유저들이 갑자기 열혈이 되기 시작했다. 아, 같은 남자로서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구나. 이런 기사단을 들어오는 게 아니었어. 태식 형과 현빈 형, 한나에게 괜스레 미안해졌다. “오오오옷! 수호령을 위하여!” 태식 형… 당신도 물든 겁니까? “그, 그렇군요. 수호령 재미있겠는데요?” 현빈 형, 얼굴이 살짝 붉어졌습니다만. “꺄악, 어떻게 수호령! 보고 싶어!” 당신은 여자라고! 노골적으로 좋아하지 말란 말이야! 나만 사상이 이상한 걸까? 하는 생각을 진심으로 고민해야했다. “그래서 이제 제가 단장에서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에엑? 어째서?” “원빈이 너… 드디어 사람이 되었구나!” “그게 아니야! 너 정말 계속 막말할… 흠흠, 죄송합니다. 수호령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 랭크가 높아져야 하고 랭크를 높이려면 기사대전을 해야 합니다. 그 전에 저희 기사단 수를 늘려야하니 명예랭크 100위에도 못 드는 제가 단장이 되기보다 더 높은 랭커가 단장이 되면 기사단 수를 늘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한 발짝 물러나겠단 말입니다.” 갑자기 급속도로 유저들이 우울해 하기 시작했다. 아니, 좋은 지적인데 왜 저러지? “우리 단장자리는 미소천사님밖에 없잖아.” “하지만 미소천사님은 그때이후로 보이지도 않는 걸?” “다른 유저가 단장이 된다면 나는 탈퇴할거야.” 바보 같은 추종자들. 겨우 그런 것 때문……. “그럼 언니가 지금 나가서 단장이 되… 우읍!” 헉, 헉. 한나야, 사람 간 떨어지게 아무렇지 않은 폭탄발언은 하지 말아줄래?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혹시라도 누가 들은 유저라도 있을까 주위를 둘러봐야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다들 모였겠다. 이참에 미소천사님이 오실 때까지 임시 단장직을 맡아주실 랭커유저분을 모집합니다. 혹시 지금 맡아보겠다, 생각하는 유저분 있으십니까?” 주위가 조용해졌다. 서로 눈치를 보거나 깊이 생각중이리라. 태식 형이 조용히 말했다. “현빈 형, 맡아볼 생각 있으세요?” 현빈 형은 푸근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조용히 있고 싶은 걸요?” “그럼 너는?” 내게 턱짓하며 물었고 나는 당연히 팔을 교차시켜 부정을 뜻했다. 그럼, 암. 절대 안 되지. 단장되었다가 눈팅 눈에 띄면 어쩌려고. “흠, 그럼 내가할까?” 태식 형이 조금 고민하며 말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 그런 자리에 관심 있었어요?”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누가 뒤에서 손을 쓰지 못할 정도로 커져야 할 필요성이 있어서 말야. 하지만 여기서 그게 잘 될지도 조금 의문이고 고민되는데.” 태식 형은 피곤한 표정으로 깊이 고심했다. 그때 우리 앞쪽에 있던 어떤 전사가 벌떡 일어났다. “우하하, 그건 나밖에 할 수 없겠구먼!” 평소에 헬스를 했을까? 근육이 터져버릴 것 같은 덩치의 사나이가 그와 절대 어울리지 않는 노랑 빛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한 말이었다. 한마디로 비호감이었다. “으음, 한 발 늦었는걸요?” 못 볼걸 봐서 느글거리는 속을 다스리기 위해 태식 형에게 억지로 말했다. 태식 형은 별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헬스인이 말했다. “명예랭킹 38위의 근육맨, ‘나헬스했다’다. 아무래도 내가 제일 랭킹이 높지 않을까 해서 일어났다.” “오오오, 38위?” “이야, 꽤 높잖아?” “난 언제 100위 안에 들어가 보냐.” 주위 유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억지로 숨을 참고 있었고 말이다. 푸풉! 근육맨이란다. 나헬스했다란…푸후훕! “오오, 38위였군요. 그런 분이 우리 기사단에 들어와 있었다니 원빈, 감격했습니다! 그럼 잠깐 보류하고. 38위보다 높은 분은 없으십니까? 없으시면 나헬스했다님이 잠시 동안 단장자리를 지키게 됩니다. 아무도 없나요?”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원빈단장은 검을 뽑으며 말했다. “결정! 그럼 이제부터 미소천사님이 기사단에 단장이 되기 전까지 나핼스했다님이 단장직을 맡아주시겠습니다. 모두 박수!” “와아아.” “축하해요.” “멋지다.” 다들 말에 힘이 없어보였다. 할 사람이 없어서 그냥 대충 맞춰주는 것이리라. 나 역시 성의 없게 박수쳤다. 그냥 태식 형이 단장이되면 더 마음 편했을 텐데. 뭐, 어쩔 수 없지. 허나 그날부터 우리들의 불행은 시작이었다. “놔! 내 저 근육덩어리를 오늘 안 죽이면 게임 접는다! 이거 안 놔? 놓으란 말야!” “멋쟁이님, 진정하세요!” “태식이 오빠, 진정해요!” 목에 핏대를 세우고 흥분한 태식 형은 현빈 형과 한나가 말리는 바람에 이를 부드득 갈았고 나는 지쳐서 단지 한숨만 쉬었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원빈이라는 전 단장도 이미 포기한 듯 방관적이었고 다른 유저들은 몰래 빠져나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왜 이런 상태가 되었을까. 모두들 의문이 들 것이다. 아니, 이미 예상한 자들도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단장의 취임을 축하하기도 할 겸 가볍게 단체로 사냥을 나갔었다. 하나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우리의 생각 많으신 나핼스했다 단장은 머리도 근육으로 만든 것인지 오로지 돌격밖에 할 줄 몰랐고 주위를 살피지도 않고 앞으로만 나가다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나마 렙이 적고 우리 기사단의 인원수가 워낙 많아서 간신히 지금까지 살고 있었지만 그건 순전히 내가 몰래 힐을 주었고 태식 형과 현빈 형이 알게 모르게 탱커 역할과 딜러 역할을 해주어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에 부딪쳤고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태식 형은 이번에는 킬러비들에게 둘러싸이자 결국 터져버린 것이었다. 킬러비는 고대 고목에 집터를 만들어 여왕킬러비를 중심으로 집단으로 살고 있는 벌과에 속한 곤충이었다. 놀 무리를 잡기위해 돌격을 강행하던 미소천사 기사단은 전에 드래곤플라이를 잡았던 숲 지형까지 들어오게 되었는데 나무송진을 이용한 곤충 기피제를 몸에 바르지도 않고 들어온 우리들은 킬러비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렇게 흥분한 킬러비들이 주위를 둘러싸게 된 것이었다. “그나저나 이번 건 조금 어렵겠는데요?” 그동안 말없이 미소 짓고 있었던 현빈 형조차 눈을 가늘게 뜨며 남은 화살수를 점검했다. 내가보기에도 이건 죽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스쳐지나갔다. 하늘을 뒤덮고 있는 숫자는 둘째 치고 하나하나 치명적인 침을 가지고 있을 텐데. 아무리 힐러가 있다해도… 아니, 힐러의 신이 온다할지라도 전부 살리기는 불가능할 것이었다. 적어도 우리들은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멀리 떨어져있던 한나와 태식 형을 불렀다. “한나야, 태식 오빠! 이리 오세요!” 한참 태식 형을 말리고 있던 한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태식 형을 끌고 왔고 태식 형은 연신 욕설을 내뱉으며 우리 쪽으로 끌려왔다. “아하하하! 이딴 벌쯤이야! 모두 돌격준비! 기사단의 힘을 보여주자!” “뭐, 뭐?” “이런 미친…….” “하늘을 날아다니는 벌들한테 돌격하라니 말도 안 되는……!” “아, 여기 오는 게 아니었는데 미소천사님 보겠답시고 내가 미쳤지!” 대다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한탄했지만 어쩌겠는가, 단장이 시키는데 하라면 해야지. 무겁게 검을 치켜들며 쐐기진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이건 죽으러 용암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것이 뭐있겠는가. 부글거리는 심정이 성대까지 차오른 게 터지려던 순간. “더… 참아.” “…뭐라고요?”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부들부들 떨던 태식 형이 말을 씹듯이 뱉다 핏발선 눈을 번뜩이며 검을 잡았다. 우리들은 모두 태식 형 몸 주위에 피어올라가는 불길한 오로라를 느껴 한 걸음씩 물러났다. “더 이상은 못참아아아아아아! ‘화이어 블레이드!’” 기사단 중앙에서 갑작스레 불꽃이 터지자 모두들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돌격하려던 헬스인 역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헉! 저 불타는 검은 뭐야!” “자, 잠깐. 불타는 검? 그건…….” “미, 미지의 마검사!” “명예랭커 8위! 미지의 마검사다!” 다들 태식 형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한걸음씩 물러났다. 어째서 기사단 중심에 저런 인물이 있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 것이리라. 나와 현빈 형, 한나는 드디어 터졌구나 하며 한숨을 쉴 뿐이었다. 태식 형은 천천히 한걸음씩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 형이 지나가는 곳마다 자연스럽게 길이 터졌고 터진 길 끝에는 헬스인이 서있었다. “야, 근육덩어리.” “뭐, 뭐야? 당신이 여기는 왜 있는 거지?” 태식 형은 그 말에 피식 미소 지으며 가슴을 툭툭 쳤다. 그곳에는 미소천사 기사단을 증명하는 날개달린 빨간 하트로고가 선명하게 양각되어 있는 휘장이 있었다. 즉, 자신 역시 미소천사 기사단이란 것을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다, 당신도 우리 기사단이었단 말야? 허허… 헉!” 허탈하게 웃던 헬스인은 한순간 목에 대어진 검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눈앞에 불타는 검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으니 나라도 말문이 막혔을 것이다. “지금 당장 씹어 삼키고 싶지만… 일단 저것들부터 처리하고 보자. 으드득.” 마지막에 이빨을 가는 소리에 사색이 된 헬스인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그 덩치에 다리 풀린 모습이라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풋!” 나도 모르게 웃음이 삐져나왔고 주위가 조용했던지라 모두들 이번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거 참 무안하게. 나는 그저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모두 원진 형으로 뭉친다! 방패 있는 기사는 맨 앞에 서고 정 가운데는 마법사들과 궁수들 뭉쳐서 파이어볼, 폭시 준비!” 태식 형이 헬스인에게 눈을 때고 기사단을 향해 외쳤다. 기사단들은 그 카리스마에 순간 ‘넵!’하며 움직이려 했다. “야, 야! 단장은 나야! 내 명령을 들어! 돌격 준비!” 멍하니 앉아있던 헬스인은 그제야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것을 느끼고 벌떡 일어서 성질부렸고 기사단들은 어찌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게 되었다. 결국 어찌해야하나 모두들 전 단장인 원빈을 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못 미더워도 그동안 원빈 전 단장을 따라다닌 이유가 분명히 있었겠지. 원빈단장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더니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투표에 들어갑니다! 근육맨, 나헬스했다님의 명령을 따르고 싶은 자는 오른쪽에 돌격대형으로! 미지의 마검사, 멋쟁이님을 따를 자는 왼쪽에 원진 형으로 뭉치기 바랍니다!” 전 단장은 노련했다. 그렇게 말하면 당연히 전부 태식 형의 진으로 할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지금까지 헬스인이 보여준 것도 그렇고 지금도 죽으러가는 돌격대형을 할 자가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그에 반해 태식 형은 괴물들만 뭉쳐있다는 명예랭크 10위안에 들어갈뿐더러 뭔가 마음에 드는 전략을 말하니 다들 왼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나, 나는 단장이야! 내 말을 들어!” 모두 왼쪽으로 모여 원진 형으로 진형을 만들자 헬스인이 펄쩍뛰며 노발대발했다. 그 모습을 보던 태식 형은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한껏 비웃었다. “네 능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소리겠지.” 한마디 톡 쏘고 지나가는 태식 형의 말에 헬스인은 굳은 체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아하하, 속이다 후련하네요.” “헬스했다님 불쌍해요.” 현빈 형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고 한나가 혼자 좌절모드에 들어간 헬스인을 힐끗 보며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에게 다가온 태식 형은 크게 콧바람을 뿌리며 말했다. “흥! 나도 웬만하면 참으려했어. 단장이라는 입장을 고려하고 존중하려했는데 저놈은 단장으로서 자격미달이야. 지 좋은 것만 하려고 기사단을 말아먹는 놈이 무슨 단장을 하겠다고 지랄… 흠흠, 숙녀 앞에서 내가 말이 험했군. 어쨌든 저놈은 아니야.” 평소 차분하며 욕을 잘하지 않는 태식 형이 욕설을 뱉을 때부터 얼마나 흥분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 정도로 저 헬스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문제는 저 많은 수의 킬러비들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현빈 형은 하늘을 지그시 바라보다 의문이 들었는지 우리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킬러비들이 공격을 안 하는데요? 저렇게 많은 수면 선제공격을 할만도 할 텐데.” 그러고 보니 그랬다. 지금까지 작은 소란에도 불구하고 단 한 마리에 킬러비도 공격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건 우리들 생각만이 아니었던지 원진 형을 만들던 기사단들도 의문을 가지며 저마다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뭔가 오지 못할 무언가라도 있… 응?” 이마를 매만지며 생각하던 나는 순간 머리에 걸리는 금속재질에 손을 멈추었다. 이건 미스트레스 티아라다. 현재 숙련도를 높이기 위해서 다른 건 몰라도 티아라만은 착용하고 다녔었는데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 그럼 이것 때문이었나? 이 티아라의 옵션은 분명……. - 은은한 녹 빛을 발하는 미스트레스 티아라 (희귀) 숙련도 57/100 벌들의 여왕이라 불리 우는 미스트레스는 이그드라실의 꿀을 압축시켜 마법능력을 부여 하였다. 그 꿀 석을 이용하여 만든 여성용 왕관은 착용 자에게 신비감을 부른다. 용매가 필요한 마법사용 시 소모성 재료에 한하여 꿀 석이 대신 충족시켜준다. 단, 숙련도 수치 100 필요하며 10회 후 파괴된다. 벌들의 공격을 받지 않는다. 내면적으로 신비함을 만든다. 루시아니안 나뭇잎이 스며들었다. 목속성 포인트+5, SP+50, 치료마법 시전 시 치유량이 +150증가. 아하하, 이것이었구나. ‘벌들의 공격을 받지 않는다’라는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만능은 아닐 거라 생각이 들었다. 선재공격만 하지 않을 뿐이지 상대가 먼저 공격한다면 이것도 무용지물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공격만 하지 않는다면 무사히 넘어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공격 안할 때 숲을 빠져나갈 수 있… 아, 안 돼!” “파이어볼!” 벌들이 공격을 하지 않자 원진 형 가운데서 의문을 가진 마법사가 가볍게 던진 파이어볼. 아마 딴에는 자신이 공격해도 킬러비들이 공격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겠지. 파이어볼은 가볍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킬러비 무리 가운데 펑하고 작은 불꽃을 퍼트렸다. 하지만 그 한발이 킬러비 무리들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신호탄이 되어 킬러비들이 공격성을 띄게 만든 계기가 되고 말았다. - 끼키키키키키키키! 소름끼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붕붕거리는 소리가 마치 ‘나 흥분했소’라는 말처럼 들려왔다. “앞에 기사단은 방패방어! 뒤에 기사들은 검진방어! 가운데 뭉친 마법사, 궁수들은 파이어볼, 폭시준비― 발사!” 벌들의 움직임을 보고 이제 올 것이라 느낀 태식 형은 검을 가로로 그으며 명령했고 기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명령에 따랐다. 아, 헬스인은 예외였다는 것을 말해두는 바이다. “파이어볼!” “폭시!” 하늘을 수놓는 불꽃과 화살들이 공중에서 터져나갔다. 화살의 파편들이 킬러비들의 날개를 찢고 불꽃들이 몸을 태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킬러비의 숫자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크윽!” “쏘였어!” 앞에서 굳건히 방패를 들고 있던 기사들이 저마다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앞을 막아도 날아다니는 작은 벌인지라 그 틈새로 들어와 공격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도 몰래 주문을 외웠다. “태초의 재생.” 내가 손을 흩뿌렸고 녹색의 작은 빛은 신음을 흘리는 기사들에게 따뜻한 안식을 부여하였다. “그래도 좀 살 것 같군. 내가 언제 이렇게 체력이 늘었나?” “아까 전부터 생각한 건데 힐을 받는 느낌이야.” “나, 나도!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구나!” MP, SP가 눈에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나였다. 미소천사 기사단은 점점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한없이 몰려드는 킬러비들은 그렇게나 죽였건만 사라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더 공격성이 짙어져있었다. 태식 형은 이미 본인의 정체를 밝혔는지라 맘껏 스킬을 난사하며 분발하고 있었지만 나와 현빈 형은 그렇지 않아 쩔쩔매고 있었다. “이것들아! 끝까지 안 나설 거냐!” 보다 못한 태식 형이 땀을 뻘뻘 흘리며 소리 질렀고 다들 의문을 가졌지만 그 말이 우리에게 한 말인 줄 알았기 때문에 나와 현빈 형은 움찔거렸다. 현빈 형이 주위를 둘러보다 안 되겠던지 화살 네 개를 손 마디마디에 껴서 활을 먹였다. “아무래도 여기선 실력을 숨기고 지나갈 수 없을 것 같네요. 타테님만 믿습니다.” 그리고 짓궂게 미소 짓는 현빈 형. 서, 설마 그걸 쓰려고? “암속성 결합, 증폭!” “또 그겁니까! 태초의 재생!” 화살 하나였다면 나는 조용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손가락 마디마디에 있는 화살은 무려 네 개. 그곳에 뭉쳐지는 암흑의 기운은 척보아도 엄청난 SP가 소모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속성 하나만 더 결합해도 될 것…….” “그냥 쏴요!” 내가 중간에 말을 자르자 현빈 형은 매우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화살을 공중으로 향했다. 이 인간 맛들인 게 분명해. “세상조차 가르는 필멸의 화살(Mortality of Arrow)! 컨트롤 폭시!” 암흑을 머금은 화살 네 개는 하늘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꼭 부메랑처럼 말이다. 그 화살을 보며 유저들은 저마다 놀라기 일쑤였다. “아, 암흑을 머금은 화살?” “저건 분명…….” “일발필중의 어둠의조이다!” “뭐? 명예랭커 6위의 어둠의조이?” 저마다 경악하고 있을 때 선회하던 화살이 일순간 폭발했다. 그 여파는 엄청나 꼭 검은색의 불꽃놀이를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다들 행동을 멈출 정도의 화려한 불꽃이었다. “헉, 헉. 이것들이… 진작 나설 것이지.” 숨을 헐떡이던 태식 형은 땀을 훔치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봐요, 잠깐. 그 눈빛은 뭔가요. 저한테 뭘 바라는 건가요. 저는 아무 힘도 없단 말입니다! “타올라라, 몸이여. 불살라라, 마음이여! 인화(人火)!” “젠자아아아아앙! 태초의 재생!” 그 지친상태에서 거침없이 발현한 저 기술. 아마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소비하여 엄청난 힘을 끌어올리는 것이리라. 그래, 나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아니, 아낌없이 주는 마나포션이다. 거의 울며 겨자 먹기로 주문을 외울 수밖에 없었다. 다른 기사단들은 이제 멍하니 입만 벌릴 뿐이었다. 사람 몸이 불타고 있는데 어찌 놀랍지 아니하겠는가. 물론 현실이 아닌 게임이지만 처음 보는 기술이었기 때문에 놀라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머, 멋지다!” “남자의 로망이다!” “진정한 남자다!” 순간 발이 삐끗했다. 저게 무슨 남자의 로망인가. 그냥 체력을 올리기 위해 미친 듯이 생명을 불사르는 짓이 아닌가. 하지만 검을 쥐고 있는 기사들은 저마다 검을 꽉 꼬나 쥐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하아… 여하튼, 기사들이란.” “네?” 혼잣말을 들은 한나가 의문을 표했고 나는 단지 고개를 저었을 뿐이었다. “으리야!” 태식 형은 온몸을 이용해서 킬러비를 잡기 시작했다. 온몸이 불이라서 그런지 킬러비들은 태식 형에게 다가오지조차 못했고 태식 형은 그 빠른 발을 이용해 여기저기 검을 휘두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감격한 기사들은 저마다 검을 쥐고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덤벼라 이것들아! 폭격!” “나도 나간다! 강경!” “우와아아아아아!” 저런 미친! 마구 달려 나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다들 눈에는 이채가 서렸다. 여기가 무슨 70년대 열혈시대인줄 아나! 석양을 향해 바다로 뛰어드는 모습이 상상되었지만 머리를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이제 타테님이 나설 차례 같은데요?” 현빈 형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한 말이었다. 사실 저는 그냥 저들이 죽기를 바라는데요? 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더 이상 내 앞에서 죽이지 않는다고 맹세한지가 언제라고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자꾸 그 생각이 앞으로 나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고민되었다. 여기서 내가 나선다면 다들 내가 미소천사란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그럼 꼼짝없이 내가 단장이 되어야 할 판이었다. 그래, 단장이 되는 건 뭐 좋다 이거야. 몇몇 지인들만 알리고 철저히 숨기면 그만이니깐. 하지만 이렇게 전 기사단이 내 정체를 알아버린다면 소문이 어떻게 날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고민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언니?” 한나가 나를 불렀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참기위해 한나를 보았는데 순간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그거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후훗, 좋아. 그럼 내 능력을 보여주지.” 내 얼굴은 지금 악마의 미소가 지어져 있을 것이다. “한나야, 언니가 아~주 작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지 않으련?” “…정중히 사양하면 안 될까요, 언니?” “작은 부탁하나 들어주기 싫다는 거야? 흑흑, 실망이야.” “만화책에서나 볼 수 있는 이상한 울음소리를 들어보니 더 하기 싫어져요.” “…….” 한나는 의외로 눈치가 빨랐다.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없지. “어, 언니? 꺅!” “이리와! 엄한 짓 안 해!” “언니 변태 같아요!” 젠장,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알리고 말았군. 나는 한나를 구석으로 끌고 가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서, 설마. 아무리 그래도 이건 꺅!” “걱정 마, 별거 아냐.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 “전 이런 거 잘 못해요. 어, 언니!” “힘내! 믿을게! 역시 한나밖에 없어!” 한나는 울먹이며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단지 두건을 푹 눌러쓰고 외면할 뿐이었다. 결국 포기했는지 고개를 푹 숙이는 한나였다. “그럼 시작한다?” 한나는 울먹이며 내가 준 아이템들을 받아 착용하면서도 무언가 계속 호소했지만 나는 무시하고 언지손가락을 새워주었다. 그리고 한나에게 조용히 뒤에서 말했다. “‘무기속성 주입’발동, 금.” “무기소, 속성 주입, 발동. 뭐라고요?” “‘무기속성 주입’발동, 금이라고!” 한나는 움찔하며 더 울먹였다. 이런 이런, 흥분했다. 짜증을 급히 지우고 한나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미안, 미안. 정말 짜증난 게 아니라 정신 차리라고 한 거야. 아하하! 그러니 큰 소리로 해야 한다? 다시 가자!” “…정말 짜증낸 것 같았… 휴우, 알겠어요. 할게요.” 작아진 내 눈을 보고 결국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트리는 한나. “무기속성 주입 발동, 금.” “무기속성 주입 발동, 금!” 한나는 눈을 꽉 감고 크게 외쳤고 그 소리는 방패를 들고 있는 기사들에게까지 들렸는지 몇몇이 한나를 보았다. 나는 한나의 외침에 맞춰 조용히 말했다. “‘심연의 눈’ 발동.” <‘심연의 눈’의 숙련도가 15 상승했습니다.> 주위를 돌던 시간은 천천히 나에게 머물고 나는 시간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공간을 지배하고 시간을 통제하며 세상은 나에게 머물게 만들었다. 킬러비의 날갯짓까지 보일정도인 동체시력, 내 몸 안에 들끓기 시작하는 무한한 힘이 무엇이든 가능하게 만들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무기속성 주입’ 발동 금(金).” <‘무기속성 주입’의 숙련도가 10 상승했습니다.> 금(金) : 강철화 시켜 방어력이 10%증가, 이동속도 15%저하.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무기속성 주입을 사용하기 전에 심연의 눈을 사용한 이유가 있다. 그건 무모할지도 모르겠지만 무기속성 주입을 여기 있는 기사단 전 인원에게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인원수는 대략 150명. 마나가 적게 드는 스킬 이였지만 수가 워낙에 많아서 사용한 것이었다. “쿨럭!” 한 움큼 피를 토했다. 역시 조금 무리했나? 한나가 놀라 바라보았고 나는 급히 손을 저으며 다시 전방을 보게 만들었다. “어, 어? 검에 은빛이!” “나, 나도!” “이건 무기속성 주입 아냐?” “말도 안 돼! 우리 전부를 무기속성 주입 했다고? 대체 누가!” 모든 기사단들의 검이 은빛으로 은은히 빛나기 시작하자 다들 경악하기 시작했다. 특히 마법사들은 그 놀람이 한층 더했다. 무기속성 주입에 대해 잘 아는 그들이었기 때문에 이 인원들을 전부 속성 부여하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나는 조용히 한나에게 말했다. “지금이 망토 벗고 이렇게 외쳐. ‘미소천사인 제가 보조합니다. 모두 공격하세요.’” “정말 그 쑥스러운 말을 해야해… 하아.” 단호한 내 표정을 보고 결국 다시 한숨 쉬는 한나. 귀까지 붉어진 얼굴을 힘겹게 들며 다시 눈을 꽉 감은 채 망토를 내 던지며 외쳤다. “미, 미소천사인 제가 보, 보조합니다아아아― 모두 공격하세요오오오…….” 뚝뚝 끊어지는 말투로 소리 지르던 한나는 결국 마지막 말에서 기어들어가고 말았다. 아이고, 그게 뭐가 쑥스럽다고 저러는 것인가. 나라면 당당히 말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게 그렇게 말하기 어려운건가? “미, 미소천사님?” “미소천사님이다!” “우오오오오오오오!” “…그런데 왜 두건을?” “키도 조금 작은 것 같고…….” 한나와 나는 동시에 움찔했다. 지금 한나의 모습은 미소천사 전용 삼단셋트를 착용하고 머리 쪽만 두건과 후드로 가린 상태였는데 당연히 저런 말이 들려올만했다. 당황한 한나가 내 쪽을 슬쩍 보았고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사정이 생겨서 그랬다고 말해.” “사, 사정이 생겨서 그랬다아아―.” 말 늘어트리지 말아주세요, 한나님. “사정? 무슨 일이?” “설마 얼굴에 무슨 봉변이라도!” “얼굴에 화상을 입어서 그랬다고 말해.” “어, 얼굴에 화상을 입어서 그랬다고 아니, 그랬다!” 아이고, 골이야. 나는 이마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화상!” “맙소사! 언제 그런 겁니까!” “우리들의 우상이! 맙소사!” “거참 시끄럽네, 저것들.” “거, 거참 시끄럽네, 저것… 읍!” 혼잣말하다 깜짝 놀라 한나의 입을 막았다. 이보세요, 그건 따라하라고 말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 “…….” “…나만 그런 생각 한건 아니지?” “…아마도?” 킬러비를 상대하고 있던 기사들이 다들 눈을 가늘게 뜨고 나와 한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하하, 등줄기에 킬러비 한 마리가 들어간 것처럼 소름이 자르르 돋았다. “이것들아! 놀고 있을 때냐! 그럴 시간에 킬러비 한 마리라도 하앗! 잡아!” 보다 못한 태식 형이 소리 질렀고 그제야 정신 차린 기사들이 다시 킬러비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늘게 뜬 눈을 지우진 않았다. “푸큿, 풋! 제발… 살려주세… 풉!” “현빈 오빠, 죽을 거 같이 참을 바엔 그냥 크게 웃으세요. 젠장.” “끅, 끅!” 웃는 게 너무도 미안했던지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게 눈에 보였지만 도저히 통제가 안 되나보다. 그러다 숨 넘어가것수. “나, 나는 순정을 잃었어!” 한나는 자신의 무르팍에 얼굴을 묻으며 절규했다. 이봐요, 아가씨. 그 정도로 순정을 잃을 정도면 눈팅 몸으로 게임하고 있는 저는 뭐가 되는 거랍니까? 그런 건 맘 편히 버리는 게 속 편하… 하아, 그런 생각하고 있는 나도 참 불쌍하구나. 나도 갑자기 우울해져서 한나와 같이 무르팍에 얼굴을 묻었다. 현빈 형은 우리들의 그런 모습을 보더니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땅을 북북 긁기 시작했다. “미소천사님이 화상이라니! 안되에에에에!” 유일하게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는 자가 있었으니 그게 누구 인고하니 온통 근육으로 똘똘 뭉친 헬스인 이었다. 저놈은 정말 뇌까지 근육으로 이루어진 게 분명해. 괜히 앞으로 나서려다 한숨만 쉬는 계기가 된 날이었다.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27일전. “하아, 토요일인데도 학교를 나와야 하다니.” 상천이 녀석이 옆에서 쫑알거렸지만 나는 그저 멍하니 창밖을 보며 외면했다. 넓은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호루라기를 불며 체조를 시키는 교사, 나무에 옹기종기 모여 깃털을 정리하는 비둘기들.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오늘 일찍 끝날 텐데. 뭐 할 거냐?” “아펜하르트.” 내 입에서는 당연한 말이 흘러나왔다. 상천이는 그 말에 인상을 구겼지만. “아직도 하냐? 치사하게! 같이 좀 놀자!” “너도 해라?” 상천이는 흠칫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이 인간이 은근슬쩍 공범 만들려 하네?” 나는 입맛을 다셨다. “쯧, 아쉽군.” “킥킥.” “큭큭.” 우리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었다. 상천이 녀석과 나는 이런 사이였다. 농담을 농담으로 주고받는 사이? 음, 그만큼 서로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겠지. 상천이가 웃다 말했다. “오랜만에 같이 ‘무림일대기’나 하자.” 갑자기 꺼낸 말에 나는 표정을 굳혔다. “이제 와서 거길 어떻게 들어가.” “야, 오랜만에 친구 랑도 좀 어울려 줘라. 추억도 되새길 겸 보스 몹이나 한 탐 뛰자.” “말도 없이 접어서 접속하는 동시에 귓말 작살일걸?” “화선녀님 아니면 너한테 귓말 할 사람도 없을걸. 내가 알기로는 문도 해체되고 전에 했던 랭커들도 다 접었다는데? 회선녀님도 있으려나 모르겠다.” “흠, 그래?” 문득 추억이 떠올랐다. 회선녀님은 화산파, 매화십이수 검법을 사용한 쾌검술 달인이었는데 팽가, 힘 중심인 도를 사용한 상천이 녀석과 어울려 우리 셋은 곧잘 다니곤 했었다. “화선녀님이 너 되게 좋아했잖아. 전에 기억 나냐? 우리가 랭커에 들 기전 그분이 랭커 6위 때의 일. 힐러 랭킹 18위의 치료사가 자기 파티로 오라고 권유했는데 ‘내 뒤를 맞길 자는 타테밖에 없다’하며 거절했잖아. 그때 얼마나 웃기던지!” 상천이는 당시 화선녀님의 행동과 말투를 흉내 내며 상기시켰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었지. 물론 나는 그 일을 보답하기라도 하듯 당당히 힐러 랭킹 1위를 차지했었고 말이다. 그분은 지금 무얼 하고 있으려나. “한 번 찾아볼까? 아직도 하고 있는지.” “아서라. 할 얘기도 없어.” “흐응~” 녀석이 묘한 미소를 흘렸다. 나는 왠지 모를 불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안한다니까 자꾸 그러네!” “내가 쏜다니까? 이미 여기까지 왔잖아!” “내가 온 거냐? 네가 끌고 온 거지.” “어쨌든, 오면 끝이야. 여기, 캡슐 두 개요.” “감사합니다. 오른쪽 끝에 23, 24번 캡슐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상천이가 필사적으로 끌고 간 덕분에 나는 결국 캡슐에 눕게 되었다. [메인 프로그램 작동. 실행시킬 프로그램을 부르십시오.] “아펜하…….”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나온 말을 꿀꺽 삼켰다. [오류. 잘못 부르셨거나, 있는 게임이 아닙니다.] “하아, 무림일대기.” [‘무림일대기’실행합니다. 아이디 및 비밀번호를 음성으로 입력해주십시오.] “아이디 타테, 비밀번호 G548593.” 항상 사용하던 아이디와 비밀번호였는데 이 말도 조금 어색했다. 사용하지 않은지 몇 달이나 되었다고 이런담. […입력되었습니다. 홍채인식을 합니다.] 집과는 다르게 센서가 내 동공을 빠르게 지나갔다. 눈이 시리지 않아서 새삼 부러웠다. [입력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타테님. ‘무림일대기’에 접속하시겠습니까?] “접속.” [접속되었습니다, 즐거운 시간되십시오.] 꿈속을 들어가는 것처럼 내 의식은 천천히 또 하나의 공간으로 스며들어가기 시작했다. <창천을 향한 그대는 그 한 발을 내딛었다. 오라, 그리고 걸어가라.> 웅장한 울림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저 음성. 한때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자주 들었었는데 지금은 이것도 추억의 한 일부일 뿐이었다. 어지러움이 가시자 도포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과 복잡한 시장거리, 동양적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사천에서 그만 두었나?” 여기는 사천 시장거리였다. 간혹 귀한 아이템도 파는 곳이었기 때문에 한창 할 때는 자주 오곤 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서있으려니 혼자 동떨어진 기분이 들어서 씁쓸했다. “묵도야, 오랜만이구나!” 언제 옆으로 왔는지 상천이 녀석이 큼지막한 묵색 도를 얼굴로 부비며 오래된 친구를 만나 감격했다는 듯이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여기서 나오는 상천이는 덩치를 키우고 붉은 머리를 짧게 잘라 스포츠형으로 만든 모습이었다. 내공보다 외공을 중시한 캐릭터였는데 평소의 무식함과 너무도 잘 어울려 내가 칭찬해준 유일한 캐릭터이기도 했다. “이야, 흰색 도포에 학사모차림 오랜만에 보는데?” 나의 모습은 말 그대로 학자풍의 샌님처럼 보였는데 이래봬도 치료술과 내공위주의 공력을 길러 엄연히 무림인이었다. 공격무공을 배우지 않아서 그렇지 내공만도 이 갑자에 달했다. “으흠, 어디보자. 역시 우리 수이문(數理門)은 해체가 되어있네. 그래도 아는 형님들이 많아서 좋았었는데.” 상천이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많이 계산하고 모든 이들을 다스리자는 뜻에서 만들어진 수이문은 나와 상천이가 들어간 문이었다. 최고로 번창할 때는 제일의 문으로 통했었는데 나와 상천이가 빠지고 게임의 경향이 아펜하르트로 넘어가면서 서서히 사람들이 빠져나가 지금은 휑하니 공터가 되어있었다. “어라? 야야! 있다 있어!” “응?” 상천이가 멍하니 머릿속으로 친구목록을 보다 흥분해 외쳤고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의문을 가졌다. “화선녀님 말야! 아직 무림일대기 하고 있어!” 기뻐해야 하는데 나는 왜 이리 어색할까? “그냥 모른 척 하자. 괜히 할 말도 없… 야!” “화선녀님 하이요~ 오랜만이에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자식이 커다란 채팅창을 띄우며 나를 끌어들인 채 화선녀님을 불렀다. 당황한 나는 어색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 어라?} 채팅창 너머에서도 당황한 듯 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얇으면서도 터프한 목소리. 내가 아는 화선녀님이 분명했다. {이, 이게 누구야! 이 꼬맹이! 이제야 접속한 거냐?} 화선녀님은 짐짓 화를 냈지만 그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묻어났다. 상천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기찬이 녀석도 대리고 왔어요.” {…타테도? 너 거기 있어?} “오랜만이에요, 화선녀님.” {오랜만이다… 이제 괜찮아?} 화선녀님도 100인중 한 명에 속했었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조심히 물어보는 거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화선녀님은 볼 수 없었겠지만. “네, 이젠 괜찮아요.” {그럼, 돌아온 거야? 반갑다, 너희들! 오늘 정말 기쁜 날인데?} “…….” “…….” 우리 둘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말을 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나는 게임을 접고 다른 게임을 하는지라 실상 접은 것과도 같았고 상천이도 내가 접었기 때문에 흥미를 잃었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우리 둘은 오늘 가볍게 추억을 되새기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던가. 우리들이 말없이 있자 화선녀님이 말했다. {…아니냐?} 우리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 어쨌든 이리와라. 얼굴이나 보자.} <파티신청이 왔습니다. ‘홍두오공 처치’파티에 들어오시겠습니까?> 화선녀님의 목소리와 동시에 파티신청을 알리는 음성이 들렸다. 이곳의 파티시스템은 파티에 들어간 순간 파티장이 있는 곳으로 강제 소환이 가능했는데 우리를 소환하기 위해 신청한 게 분명했다. 그런데 홍두오공 처치라니… 뭔가 낚이는 기분인걸. “승낙.” <파티에 가입하셨습니다. 파티장이 있는 장소로 소환됩니다. 5, 4, 3, 2, 1.> 온몸이 빛에 감싸였고 눈앞이 빛 때문에 분간이 안 될 쯤에 몸이 붕하고 뜨는 기분이 들었다. 빛이 거쳐 다시 사물을 분간할 수 있게 되자 아까 있었던 시장 한복판이 아니라 바위들이 듬성듬성 보이는 숲으로 들어와 있었다. “반갑다, 녀석들아!” 누군가가 우리 둘을 꼭 껴안았다. 물론 덩치가 산만한 녀석 때문에 껴안기 보다는 가슴에 파고든 형태가 되어버렸지만 일단 화선녀님은 액션을 보여줄 정도로 반가움을 표했다. 큼지막한 가슴이 내 눈앞에 보여 시선을 피하며 당황했지만 뭐 별거 아니니 오랜만에 넘어가도록 하겠다. 화선녀님은 화산파 답게 온통 붉은색 도포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의상을 많이 따라했는지 가슴이 폭 파여 있었던지라 가슴의 굴국이 그대로 보였고 그 육감적인 몸매가 갈색의 머리칼과 어울려 한껏 섹시함을 연출하고 있었다. “화선녀님, 잘 지내셨어요?” “나야 항상 즐기잖아. 이제 이 게임에서도 랭크 3위다.” “헉!” “허억!” 나와 상천이는 동시에 입을 딱 벌렸다. 이곳은 오래된 게임인지라 랭크 올리기가 하늘의 별따기와도 같았다. 나야 본 랭크도 아니고 힐러 랭크였기 때문에 어렵사리 1위를 차지할 수 있었지. 본 랭크에서는 기본 100위에도 들지 못하는 평범한 놈일 뿐이었다. 상천이도 그렇게 열심히 했건만 78위 정도에 머물렀으니 말 다했지. 그런 랭크를 3위에 속했다고 화선녀님이 말했다. 그러니 우리들이 입을 딱 벌린 것이었다. “그럼 이제 검황(劍皇)이라 불러야 하나요?” “우훗, 다른 유저들은 나를 화산검황이라 부르지. 어때, 부럽지?” 손을 허리춤에 올리며 귀엽게 장난하는 화선녀님을 보자니 대단한일이 너무도 가벼워져서 그냥 웃음만 나왔다. “화산검황님! 아직 멀었습니까?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 멀리 누군가가 급한 듯 외쳤다. 상천이와 나는 의문의 눈빛을 화선녀님에게 보냈고 화선녀님은 우리 둘에게 윙크하며 각각 팔을 잡았다. “같이 한 탐 가자!” “서, 설마 홍두오공?” 혹시나 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옴을 느끼고 더듬거렸고 화선녀님은 정말 붉은색과 어울릴 정도로 화려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응!” “저희는 잠깐 놀러온 거라…….” 내가 얼버무렸지만 상천이 자식이 화선녀님의 손을 마주잡으며 눈을 빛냈다. “가요, 가요! 심심했는데 잘됐네! 기찬아, 한 탐 뛰자! 오랜만이잖아.” 게임에 목말랐나, 이것이. 한숨이 나왔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셋이서 뭉친 터라 추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뭐, 조금은 상관없겠지.” “오오! 웬일이냐. 네가 굽힐 줄도 알고?” “난 원래 융통성 있었거든?” “네 고지식함에 나까지 게임 접은 거였거든?” “…….” 사실 그것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없는 나였다. “킥킥킥!” 화선녀님이 눈가를 훔치며 웃었다. “아, 오랜만에 웃어보네. 타테야, 누나가 너희랑 오랜만에 같이 놀아보자고 생각해서 같이 뛰자 생각한 것도 있지만…….” 말끝을 흐리다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나에겐 아직도 내 뒤를 맞길 만한 치료사는 너밖에 없기 때문에 믿어서 말한 거야.” “…….” “…….” 상천이와 나는 진지한 화선녀님의 말을 듣고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칫, 나만 외톨이네 둘이 사귀어라 그냥.” 상천이의 작은 말에 누나와 나는 휘청 거렸다. 그런 말이 아니란 말인 거 알잖아 이놈아! 어라? 화선녀님, 왜 얼굴을 붉히시는 겁니까!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아, 이제야 오셨… 그 뒤에 계시는 분들은?” “내 친구인 분들이다. 같이 다닐 거다.” 청색 도복을 입고 있는 남자는 미미하게 아미를 찌푸리며 우리들을 슬쩍 본 뒤 시선을 감추고 다시 말했다. “처음 보는 유저랑 같이 한다는 건 좀…….” 그 말에 화선녀님은 표정을 굳히며 차갑게 말했다. “그럼 나도 같이 탈퇴하지.” “아, 아닙니다. 같이 가도록하죠.” 청색 도포를 입은 사람 뒤에는 열댓 명의 유저들이 있었는데 화선녀님의 말에 모두 움찔거리다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홍두오공은 보스중에서도 꽤나 강한 축에 속했고 랭커 3위에 유저가 빠진다는 건 그만큼 타격이 크기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화선녀님, 인상 푸세요. 이 녀석은 팽가의 도를 쓰고 있고 저는 치료사니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입니다.” “흥, 주제에 사람을 가리니 화가 안 나야 말이지. 하지만 타테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나는 화선녀님에게 살짝 미소 지었고 화선녀님은 정말 나 때문에 봐준다는 듯이 고개를 팩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 청색 도포를 입은 유저를 포함한 열댓 명의 유저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모습은 매우 익숙했다. 화선녀님은 다른 유저들에게 항상 차갑고 냉혈한모습만 보이는데 반해 우리들에게는 친근하게만 대해주니 이런 일이 부지기수였던 것이다. “흠흠, 치료사라니 저랑 같은 길을 걷고 있군요. 뭐, 이렇게 되었으니 일단 반갑습니다. 저는 무당파의 주현이라 합니다.” “하북 팽가의 팽천입니다.” “아, 저는 타테입니다. 소속 문파는… 없군요.” “뭐? 소속 문파가 없어?” “그럼 저거 무늬만 치료사 아냐?” “힐러 랭킹 8위인 주현님과 비교되겠는데?” “킥킥킥!” 뒤에서 말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화선녀님이 이를 갈며 나서려했지만 내가 살며시 어깨를 잡아 말렸고 상천이 역시 내 굳은 표정을 보고 나서려다 도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팩 꺾었다. 주현이란 자는 짐짓 모른척하며 나에게 악수를 청했는데 그의 표정이 은은히 비웃고 있어 나를 불타게 만들었다. “소속 문파가 없다니 안타깝군요. 하지만 제가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뒤에서 간간히 팽천님이나 보조나 해 주십시오. 자, 여러분 갑시다! 저 동굴 안에 홍두오공이 잠들어 있으니 마무리 해야죠!” “오오오옷!” “가자!” 저들은 패기 있게 소리 지르며 우르르 동굴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화선녀님은 손을 부르르 떨다 나를 보았다. “저것들이 감히 팽천과 타테를 욕해… 헉?” 화선녀님이 나와 상천이를 보다 놀라서 한걸음 물러섰다. “기찬아, 우리가 이렇게 무시당한 적이 있었냐?” “물론 있었지.” “그럴 때마다 어떻게 했더라?” “물론 밟아줬지.” “으흐흐.” “흐흐흐.” 우리 둘은 웃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타오를 듯 한 눈으로 동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선녀님은 볼을 씰룩이다 한숨 쉬었다. “무당파에서 단단히 잘못 건드렸군.” 화선녀님의 말을 들으며 우리들은 더 음험하게 웃었을 뿐이었다. “여기입니다, 이곳부터가 홍두오공의 영역이니 다들 주의하세요.” 주현은 앞섶을 꽉 여민 후, 무당파 식솔 세 명을 앞세워 삼재진(三才陣)을 형성하게 했다. 삼재진은 천지인, 삼재를 이용해 세 사람이 힘을 합쳐 상대를 공격하는 진법의 한 가지 인데 같은 크기의 한 사람을 공격하는 진이지 홍두오공처럼 거대한 괴물에게는 하등 소용없는 진이기도 했다. 진이면 모든지 다 좋다 생각하는 주현을 보며 혀를 찼다. “왜 그래?” 상천이가 내 혀 차는 소리를 듣고 의문을 표했고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같은 힐러를 추구하는 자라면 뒤에서 최대한의 진법을 만들고 전략을 분석하며 유리한 길로 이끌지는 못할망정 믿을 게 자기 식솔들이라고 무당파만 앞세운 채 나머지는 뒤로 물리게 한 자체부터가 실격이었다. 나라면 가장 앞에 있어도 당하지 않을 강한 유저나 방어위주의 유저를 앞세웠을 것이었다. “불길한데.” 화선녀님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화선녀님의 직감은 대체로 뛰어난 편이었다. 덕분에 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나와 상천이는 그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세를 낮추고 온몸을 긴장시켰다. - 펑! “으아아악!” “파, 팔이!” “나왔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동굴의 벽을 뚫고 나온 것이었다. 돌무더기에 팔이 깔린 유저도 있었고 완전히 묻혀 로그아웃 당한 유저들도 있었다. 우리들은 붉은 눈을 번뜩이며 노려보는 존재를 보았다. 동굴 전체를 한 바퀴 휙 감아도 벽 너머의 꼬리가 보이지 않는 기다란 몸체. 입에서는 연신 독 연기를 뿜으며 우리를 경계하였고 발마다 날카로운 발톱이 샤킹샤킹 소리를 내며 위협했다. “저, 저놈의 지네가!” 앞에 있었던지라 당하지 않았던 주현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지금 한방에 너무 많은 유저가 로그아웃 당했기 때문이었다. “하앗!” “받아라!” “이얏!” 삼재진을 형성하던 무당파 세 명이 검기를 만들고 달려들었다. 모두들 그 검들이 홍두오공의 표피를 뚫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건, 아니야.” “응?” 화선녀님이 내 말을 들었는지 나를 돌아보았고 그와 동시에 무당파 세 명의 검들이 표피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 티티팅! “억!” “뭐, 뭐야!” “홍두오공이 이렇게 강했나?” 역시 예상대로였다. 보통의 홍두오공이였다면 표피를 갈가리 찢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서있는 홍두오공은 나조차도 처음 볼 정도의 크기였으며 그 기세가 사뭇 달라보였다. 적어도 몇 천 년은 더 오래 산 놈인 것이다. “말도 안 돼! 어떻게 홍두오공 따위가 검기를 막는단 말야!” 주현은 입을 쩍 벌리며 패닉상태에 들어갔다. 검기를 막을 정도라면 검강을 사용하는 유저들로 파티를 구성하던가, 아니면 지금의 족히 세 배는 더 많이 끓고 왔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빨리 후회해 봐야 늦은 건 늦은 거다. 주위를 둘러보며 ‘심연의 눈’을 발동시켰다. 이건 스킬 따위가 아니다. 그동안 수많은 힐러를 하며 얻어낸 나만의 깨달음과도 같다. “드디어 발동했나? 그럼 이제 걱정 없겠군.” “너무 늦잖아 인마.” 화선녀님과 상천이가 살짝 긴장을 풀며 나에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내가 진지하게 임한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었다. 현재 우리들은 두 패로 갈라져있다. 화선녀님과 상천이를 포함한 유저 여덟 명. 반대편은 주현과 무당파 세 명이 서 있다. 미덥지는 못하지만 홍두오공을 포위한 상태이기도 했다. 그밖에 로그아웃 당한 유저는 네 명. 치료가 필요한 유저가 한 명. 치료를 한다면 우리 쪽에 지원군이 한 명 더 생긴다는 말이겠군. 일단 더 생각하기 이전에 손이 먼저 앞으로 나갔다. “혈점, 응급치료!” 원통에서 작은 금침을 꺼내 하나하나 유저에게로 던졌다. 침들은 정확히 팔꿈치의 곡지, 소해, 양지 순으로 기의 터널이 통과하게끔 짚어졌다. 그리고 팔꿈치아래의 극혈(隙穴)에 해당하는 부위를 짚었는데 평소에 짚으면 안 되는 곳이지만 지금처럼 통증이 극심할 때는 대폭 완화시켜주는 효과를 볼 수 있어서 자주 애용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 같은 지식은 내가 한의원 공부를 했다거나 따로 독파해서 알고 있는 게 아니다. 게임을 집중하며 하다 보니 자연스레 터득했다고나 할까? 이 같은 나도 사실 범인에 불과했다. “어, 어! 통증이 사라지고 있어!” 아픈 팔을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하던 유저는 팔을 슬쩍 돌려보더니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 키리리리릭! 그 모습을 홍두오공도 보고 있었던 것일까. 흥분한 놈이 독 연기를 뿜었고 우리들은 그저 자기 몸만 챙기는데 급급해 뒤로 빠지는 게 전부였는데 화선녀님이 유일하게 다친 유저를 끌어안고 뒤로 빠지는데 성공했다. 저 속도는 여전하군. “고, 고맙습니다.” “칫, 고맙다는 인사는 타테에게나 해.” 화선녀님은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이 유저를 떨어뜨려버렸고 팔이 다친 유저는 엉거주춤 서있다 나에게 꾸벅 인사했다. “대단한 치료술이네요. 님 같은 분은 처음 봐요. 어떻게 침을 허공에 날려서 짚을 수가 있는 거죠? 그 기술은 마치…….” 유저가 갑자기 나를 유심히 관찰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우리들은 모두 그 유저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홍두오공이 독 연기를 피한 우리들을 보고 화냈기 때문이다. “젠장, 옵니다.” 나는 말을 씹어뱉었다. 그와 동시에 홍두오공이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심연의 눈’을 발동시켰다. 우리들 중에 유일하게 검강을 사용하는 유저는 딱 두 명. 하지만 저렇게 정면으로 우리를 노리고 있는 홍두오공에게 검격을 먹이기란 쉽지 않을 일이다. 그렇다면 저 무당파 인들이 시선을 끌어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거기! 넋 놓고 보고만 있을 셈입니까? 홍두오공이 저희를 보고 있을 때 공격하란 말입니다!” “하, 하지만 검기도 먹히지 않는 상대를 무슨 수로!” 주현이 몸을 덜덜 떨며 변명했고 나는 결국 터져버렸다. “내부에 타격을 주는 장법이 있잖아! 이 무늬만 치료사야!” 홍두오공이 할퀴는 발을 간신히 피하며 외쳤다. 그 모습을 보던 모든 유저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힐러 랭킹 8위인 주현님에게 무, 무늬만 치료사라니…….” “허허허…….” “풋!” “아, 통쾌하다!” 모두들 어벙해져 있는 가운데 유일하게 폭소하며 엄지를 추켜세우는 화선녀님과 상천이가 있었다. “이, 이익! 장법을 사용해라!” 주현은 터질듯이 얼굴을 붉힌 채 명령했고 무당파 세 명은 검을 집어넣으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십단금(十段錦)!” “팔괘장(八卦掌)!” “진산장(震山掌)!” - 퍼퍼펑! 푸른 검기를 머금은 장이 홍두오공의 등을 후려쳤다. 그건 심한 타격을 주었던지 홍두오공이 뒤를 홱 돌아보았고 기회는 이때가 싶은 내가 모든 금침을 손에 쥐고 외쳤다. “태천진법(太天陣法)!” 사방으로 던진 금침들은 정확히 동굴에 흐르는 수맥을 짚어내었다. 그러면 한 순간 모든 수맥에 흐르던 기가 한 곳에 응축되는데 그 응축된 기를 이용하기 위해 화선녀님과 상천이의 백회혈(白會穴), 일명 삼양(三陽), 오회(五會), 천만(大滿)이라고도 하는 곳인데 그곳에 금침을 짚었다. 백회혈은 모든 기를 최우선으로 받아들이는 곳이기 때문에 그곳을 짚으며 응축된 기를 유통시키면 한 순간이나마 강해질 수 있다. 판타지에서 따지자면 뭐, 블레싱 정도가 아닐까싶다. “태천진법!” 수맥을 정확히 짚어야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이렇게 어두운 동굴이라면 말 다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걸 알아본 주현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용하기 그리 어렵다는 태천진법을 가볍게 사용하는 치료사가 과연 몇이나 될까? 경악한 건 주현뿐만이 아니었다. “금침을 이용한 허공 치료, 가볍게 수맥을 짚는 정확함!” “저, 저거 본적 있어! 저건 유일하게 그 분밖에 하지 못하는 거잖아!” “전 힐러 랭킹 1위의 타테!” “뭐? 말도 안 돼! 몇 달간 잠적한 유저가 이제 와서 보일리가!” “하, 하지만 아무리 봐도…….” 유저들이 웅성거릴 때 상천이와 화선녀님은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하다 스릉, 검과 도를 꺼냈다. “이거, 오랜만인데?” “역시 타테라니까.” 어마어마한 힘이 느껴졌다. 역시 저 둘이 뭉치면 나는 아무걱정도 없었다. 알아서 잘 해결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럼, 힐러 랭킹 1위의 타테와 함께 있는 하북팽가의 저 분은…….”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 철혈묵도(鐵血墨刀)의 팽천!” 유저들의 외침과 동시에 화선녀님과 상천이는 한 자 가량의 검강을 일으켰다. “거, 검강이다!” “그럼 진짜!” “우와아아아아아!” 다 죽었다고 생각한 유저들이 길이 보이자 환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대로 구겨진 휴지조각처럼 찌푸리는 주현이 있었다. “갑니다, 화선녀님!” “얼마든지.”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 백호도간(白虎跳澗)!” “매화삼십육신검형(梅花三十六神劍形), 제 4식 낙화(落華)!” 상천이는 호랑이가 뛰어올라 적에게 돌진하는 것처럼 패도적인 기세를 뿜어내며 검을 그었고 화선녀님은 무수한 매화꽃잎이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하늘하늘한 유와 강의 기운을 넣어 홍두오공의 머리를 노렸다. 그 힘들은 사뭇 강대하여 유저들조차 한 발씩 물러날 정도였다. - 콰콰콰콰쾅! 좁은 동굴이었기 때문에 귀가 멍멍할 정도로 폭발의 여파가 대단했다. 나는 윙 거리는 귀를 틀어막은 채 멍하니 있는 유저들에게 외쳤다. “이정도로 죽을 홍두오공이 아닙니다! 표피가 깨진 얼굴을 노리세요!” 내가 이렇게 외친 이유는 기대했던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표피와 부딪쳐 깨지는 폭음이 아니라 스릉 갈라지는 싸늘한 검 소리를 기대했었는데 그러니 조바심이 잃어 외쳤던 것이다. “가, 가자!” “홍두오공을 잡자!” “이야아아아앗!” 내 외침에 정신을 차린 유저들이 저마다 외치며 홍두오공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단 한 발이었지만 지쳐버린 화선녀님과 상천이는 나에게 로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그렇지. 이 좁은 공간에서 백호도간을 쓸건 뭐니?” 화선녀님이 쌜쭉거리며 말했고 상천이가 어이없다는 듯이 반박했다. “아니, 그건 화선녀님도 마찬가지잖아요. 낙화는 다수를 사용하라고 있는 기술이지 무식하게 홍두오공을 잡으라있는 기술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머? 그래도 나 아니었음 표피를 갈가리 찢지 못했을 걸?” “제 백호도간으로 그 단단하다는 머리를 금가게 만들어 가능했던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누님한테 따지겠다는 거니?” “…뭐 그건 아니지만.” “풋!” 둘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야! 넌 왜 웃어?” “타테야, 오랜만에 맞고 싶구나?” 도끼눈을 한 두 유저가 나를 보았고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이렇게 둘이 말싸움하는 것도 오랜만이고 저기 어느 유저 밟아준 것도 오랜만이고.” 내가 가리키는 턱짓을 따라 시선을 이동한 화선녀님과 상천이는 구석에 주저앉아 멍하니 우리를 보고 있는 주현을 보게 되었다. “킥킥, 정말 그러네?” “내 장담하건데 저놈은 힐러접는다.” 화선녀님과 상천이가 한 마디씩 했고 나는 그 유저가 아까 전에 했던 말을 상기하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제가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뒤에서 간간히 팽천님이나 보조나 해 주십시오.” “…풋!” “퍽이나 괜찮았다! 푸하하하하!” “큭큭큭큭!” 우리 셋은 동굴이 다 울리도록 크게 웃어젖혔고 홍두오공을 잡고 내단을 빼기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유저들이 놀라 돌아 본 하루가 되었다.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26일전. 하늘은 더없이 맑다. 습도도 높지 않아 땀도 나지 않고 무엇보다 이렇게 시원한 카페에 앉아 있으려니 덥지 않아 참 좋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가뜩이나 시간도 없는데 이틀째 게임을 못한다는 거겠지, 하아.” “그래도 예쁜 누님이 얼굴 좀 보자는데 마다하면 남자가 아니지!” 코를 벌름거리며 남자 운운하는 상천이를 보니 아쉬운 점이 하나 더 늘었다. “어차피 게임하면 나 남자 아니니까 그냥 게임하면 안 되냐?” “게임해라. 내가 화선녀님 만나면 그대로 고할 테니까. 누구누구는 해킹해서 시작한 게임 때문에 약속도 저버리고 캡슐에 누웠다고.” “기대도 안했다, 인마.” 이미 체념한 상태라 별 감흥도 오지 않았다. 그저 다시 턱을 괴고 강화 유리로 만들어진 벽 너머 밖을 볼뿐. “그런데 꽤나 늦네.” 내 작은 푸념에 상천이가 혀를 차며 말했다. “인마, 원래 예쁜 여자일수록 늦는 법이야. 아직 10분밖에 안 지났잖아.” “그건 어느 나라, 어느 법이냐? 게다가 무림일대기는 얼굴변형 가능하잖아. 그 이미지의 화선녀님이 아닐 거다.” “아니야, 그 목소리만 들어도 나는 알 수 있어. 절대 평범한 여자의 목소리가 아니야. 내 안테나는 200% 정확하다니까?” “더듬이겠지.” 순간 상천이 머리에 더듬이를 씌운 이미지가 떠올라 조금 웃겼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개미랑 닮았네? “분명 어딘가 특이할거야. 요즘 여자가 게임해서 랭킹 3위까지 가는 거 본적 있냐? 아니, 그전에 게임하는 것만 해도 이미 특이하잖아?” “특이하다면 저런 사람처럼?” 나는 피식 웃으며 유리벽 너머에 두두두두 소리를 내며 멈추는 한 바이크를 턱짓했다. 온통 검은 가죽일색의 옷을 입고 커피색의 헬멧을 쓰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저렇게 큰 바이크는 오늘 처음 보았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우와! 저거 알원이잖아!” “알원?” 바이크에 대해 아는 게 없었던 나는 눈을 반짝이는 녀석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녀석은 흥분했는지 유리벽에 찰싹 붙어 구경하기 여념이 없었다. “저거 1000cc중에서는 동급 최강이라고 알고 있는 기종인데 이런 곳에서 보다니!” “그 1000cc는 뭔데.” 내 귀찮은 물음에 녀석이 나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돌아보았다. “cc 몰라? 엔진 용량 말하는 거 아냐. 지, 진짜 몰랐냐?” “다른 것에 별 관심이 없어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1000cc라면 소형차도 수용할 만큼 큰 용량이야. 게다가 알원이라면… 뭐 너한테 설명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냐. 그 귀는 게임 빼곤 다 흘려듣는데.” 나에 대해 이제 좀 이해한 모양이군. 나는 흐뭇하게 물 잔을 들어 마셨다. “그런데 저 바이크 탄 사람… 아는 사람이냐?” “풉!” 상천이가 땀을 삐질 흘리며 옆을 보았고 다는 그 시선을 좇다가 그만 물을 뿜고 말았다. 그 알원이란 바이크를 타고 온 사람이 커피색 헬멧을 쓴 채 우리 테이블 옆에 딱 서있었던 것이었다. 상천이와 나는 잠시 눈빛을 교환했다. 우리가 뭐 잘못한 거 있었나? 네가 계속 쳐다보니까 그런 거 아냐! 그것도 죄냐? 등등 수많은 대화가 눈빛만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짠! 놀랐지!” “헉!” “어헉!” 정말 놀라고 말았다. 그 사람이 헬멧을 벗기에 우릴 해코지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으로 가득할 때였으니까. “화선녀님?” 상천이와 나는 이구동성으로 외쳤고 그 여성은 엄지를 추켜들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정답!” “…….” “…….” 그 터프한 모습이 몹시도 아름다워 나는 잠시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상천이도 대충 비슷한 기분이 아닐까 싶다. 화선녀님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감상하자면 검정색 가죽옷이 타이트하게 달라붙어 온몸의 굴곡이 그대로 나타나 완벽한 S라인을 그리고 있었고 머리는 붉은색으로 염색한 상태였는데 매우 가늘어서 고개를 흔들 때마다 찰랑거렸다. 게다가 얼굴은 게임하고 똑같았다. 완전히 똑같았다. 전혀 변형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까지 숙녀를 세워둘 참이야?” “아! 여기 앉으세요!” 가장자리에 앉아있던 우리들은 헐레벌떡 자리를 내주며 또 다시 이구동성으로 말해버렸고 그 모습을 보던 화선녀님이 풋 하고 작게 웃었다. “너희들, 설마 긴장했니?” “…….” “…….” 이렇게 정신 못 차린 적은 오랜만에 느낀 것 같았다. 음? 그런데 내가 이런 기분을 또 느낀 적이 있었던가? 그게 언제지. 잠시 딴생각이 드는 찰나에 화선녀님이 상천이 옆에 앉으며 바이크용 장갑을 벗은 후 양손을 각각 우리들에게 내밀었다. “아무튼 반가워. 상천아, 기찬아.” “으흠, 반가워요. 화선녀님.” “반갑습니다, 화선녀님.” 화선녀님 답다고 할까? 한꺼번에 인사해버리는 저 특이한 모습에 우리들은 조금 긴장을 풀며 악수에 응했다. 우리가 한쪽 씩 다 손을 잡아버리는 바람에 조금 특이한 모양세가 되었지만 나름 나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 이름도 모르지? 나야 너희들이 이름으로 대화하니까 자연스럽게 외웠다지만 서로 통성명은 안했잖아?” 상천이 녀석은 아직도 넋이 빠져있어는 상태인지라 어쩔 수 없이 내가 말했다. “그렇긴 하죠. 항상 게임명칭으로만 불렀으니까.” 하지만 그건 화선녀님이 선을 그었던 것이었다. 우리들이야 화선녀님 앞에서 서로 이름을 불렀을 정도로 항상 문을 열어놓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게임명칭으로 불렀던 것은 화선녀님이었다. 종업원이 놓고 간 물 잔을 빙빙 돌리며 잠시 뜸들이던 화선녀님은 이내 결심했는지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게임에 그다지 현실을 부여하고 싶지 않았거든. 가상은 가상으로서 즐기고 싶었어. 그래서 나는 화선녀였고 기찬이는 타테로서, 상천이는 팽천이로서 대했던 거야.”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어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말이 없자 상천이이가 대뜸 의문을 말했다. “그럼 여기 왜 나오라고 하신 거예요?” 화선녀님의 표정이 미미하게 어두워졌고 나는 상천이 자식을 째려보았다. 저놈은 역시 눈치가 제로다. “글쎄… 왜 그럴까?” 그걸 우리에게 물어본들 누가 알리오. 그렇게 귀여운 표정으로 농담은 하지 말아주셨음 합니다만. 화선녀님은 상황을 넘어가고 싶었던지 핸드폰을 꺼내들고 어딘가 전화하기 시작했다. “어, 나다. 응. 지금 이리로. 응, 그래. 바이크는 알아서 처리해.” 너무도 간단한 말들이라 상황을 유추하기 어려웠지만 곧 핸드폰을 끊어서 의문을 접었다. 화선녀님은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켜더니 말했다. “여기 자리 너무 불편하다. 이동하자, 따라와.” “네? 어디로?” “우리집!” 싱긋 미소 지으며 말하는 화선녀님의 모습은 눈팅에게 단련된 나도 멍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렇게 끌려나온 상천이와 나는 대로 한복판에 서 있는 벤츠를 또 다시 멍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그리고 도련님들.”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검정양복의 남자가 한 말이었다. 여기 왜 벤츠가 있는 것이며 우리들은 왜 인사를 받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는 화선녀님을 보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모든 의문을 담아 우리들은 화선녀님을 보았다. “너희 어디 아파?” 단지 아픈 것으로 치부해버렸다는 게 문제지. “상천아, 나 오늘 한 달 치 놀랄 것을 오늘 다 하는 기분이다.” “나는 이제 놀라는 것을 떠나 덤덤해지기 시작한다.” 이런 집은 만화에나 있는 그런 집인 줄 알았다. 거대한 철문이 열리고 그 안에 들어가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원이 펼쳐져있고 그곳을 지나면 백마 탄 왕자가 반기는… 건 아니겠고. 으리으리한 궁전 같은 저택이 우리를 기다리는 그런 곳 말이다. 그것이 이젠 현실이 되어 내 눈앞에 있다는 게 문제지. “머, 멈췄다?” “내려도 되는 건가?” 상천이자식과 이렇게 마음이 맞아보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이놈의 발이 도무지 떨어져야 말이지. 상천이라도 없었으면 아마 후들후들 떨고 있을지도 몰랐다. “뭐해? 어서 내려.” 이미 차문을 열고 내린 화선녀님이 차안에서 속닥이는 우리들을 보고 한 말이었다. 우리들은 동시에 움찔하며 후다닥 차에서 내렸다. …젠장, 덤앤더머 같잖아. “오셨습니까, 아가씨.” “응, 아버님은?” “응접실에 계십니다. 오, 저분들이.” 콧수염을 깔끔하게 기른 검은 양복의 할아버지가 우리들을 보며 한 말이었다. “저거… 내가 생각한 그런 분이 맞겠지?” “음… 아마도?” 내 말에 상천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래 딱 봐도 저분 이미지는 그 직업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만화책에서나 접할 수 있던, 더욱이 한국에는 절대 없을 거라 생각했던 집사라는 분이! “허허허, 반갑습니다. 저는 한효준이라 합니다. 그냥 한집사라고 불러주시면 부르시는데 그리 불편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임상천입니다.” “저는 나기찬입니다.” 어색하게 인사한 우리들이 할 말이 없어 그냥 서있자 한집사라는 분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우리들의 양 어깨를 꽉 잡았다. “허허허! 우리 대환기업의 정식 약혼자분들이시니 그리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 어서 들어가시죠.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여기가 대환기업의 회장집이구나. 어쩐지 참 으리으리… 잠깐, 뭐? “예에에에에에에에?” “약혼자아아아아아?” 나와 상천이는 동시에 화선녀님을 보았다. 얼굴을 붉히며 급히 어디론가 피해 들어가는 화선녀님. 이건, 무슨 상황?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냐아아아아아! 정정해야겠다. 한 달 놀랄게 아니라 1년 놀랄 걸 여기서 다 하는 기분이었다. 밟기에 거북할 정도로 화려한 풍경이 그려진 태피스트리가 바닥에 깔려있었고 천장에는 호화찬란한 샹들리에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치형의 창을 통해 쏟아지듯 떨어지는 빗살을 보고 있자니 여기가 천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내 몸만 한 벽걸이 TV와 무슨 재질로 만든 건지 푹신하다 못해 파고들 정도로 유동이 심한 소파 같은 것들이 있어서 여기가 현실세계구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짤그락. 식탁에는 척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과자들과 과일이 간단하게 차려져 있었는데 한복을 입고 있는 가정부(정말 예뻤다)가 홍차를 놓고 나갔다. “이분들인가.” “예, 아버님.” 이분들이냐 말한 사람은 계량한복을 차려입은 백발의 할아버지였는데 그 한복이 몹시도 어울려 상투 틀고 갓만 쓴다면 조선시대 양반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 옆에 아버님이라 말한 사람은 희끗희끗 새치가 보이긴 했지만 아직 젊어 보였는데 이분 또한 얼마나 특이한지 흰색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구두도 백구두에다 이빨까지 새하얘서 온통 번쩍번쩍 빛을 발했다. 그래서 상천이와 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시선을 내리 깔 수밖에 없었다. 젠장, 가시방석도 특대 사이즈가 따로 없겠다.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 분들에게 너무 난처하게 만든 모양이로군. 내 말주변이 없어서 그러니 개의치 말고 편안히 있으시게.” 한복할아버지의 말투는 느리면서도 또박또박 발음이 정확했다. 그럼에도 우리들이 불편해하자 백정장의 아저씨가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손님이 그러고 있으면 주인인 아버님이 난처해하질 않겠나. 자네들은 노인공경도 모르는가?” “예끼, 이놈아. 노인공경은 이제 너도 들어야할 말이지 않느냐.” “아버님, 저는 아직 펄펄 합니다. 하하하!” 분위기를 풀려고 다분히 노력하는 모습에 더 난감했지만 일단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홍차를 두 손으로 들며 말했다. 이거 지진이라도 일어났나, 홍차가 왜 이리 떨린담. “저기… 실례합니다만 아까 야, 약혼자… 분들이라고 들었었는데…….” 갑자기 굳어진 두 분의 표정 때문에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상천이가 핏기가신 얼굴로 나를 힐난했다. “미친놈, 금지단어를 꺼내면 어떻게.” “까닥 하단 여기서 발목 잡히게 생겼는데 그럼 어쩌라고.” “발목 잡히기 전에 뼈를 묻게 생겼잖아.” 녀석과 작은 목소리로 티격태격 할 때 백정장 아저씨가 무겁게 말했다. “내 딸을…….” 진지한 말 흐림에 우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잘 부탁하네.” “컥!” “어헉! 아 뜨거!” 우리들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고 그러다 나는 실수로 홍차를 엎지르고 말았다. “아버님, 제 손님에게 오해할만한 발언은 하지 마시겠어요?” 다소곳이 들러온 한복차림의 화선녀님이 싱긋 웃으며 백정장 아저씨의 뒤통수를 퍽 소리 나게 때렸다. 과장한 말이 아니다. 정말 퍽 소리가 났다. “크으윽…….” 그 아픔 잘 알죠. 눈팅한테 자주 맞아본 저는 이해합니다! 화선녀님의 모습은 말도 못할 정도로 도도함을 그려내고 있었다. 꼭 조선 양반의 아씨처럼 말이다. 저 붉은 머리가 간신히 현실인물임을 알려주고 있어 망정이지 까닥했다간 누군지도 못 알아볼 뻔했다. 그런 화선녀님이 자연스럽게 나에게 다가와 손수건으로 무릎을 닦아주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에게 정말 미안하구나. 역시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어.” “소, 손녀가 미안하다는 말을 하다니!” “아버님, 역시 제 눈이 틀리지 않았…….” “이게 다 두 분 때문이잖아요!” 소곤거리는 두 어르신 말에 핏대 새우던 화선녀님이 결국 빽 소리 질렀다. “지인이라고 벌써부터 차별대우라니… 험험.” “딸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는 말이 왜 그런지 알겠… 크흠!” 화선녀님이 눈살을 찌푸리자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두 어르신. 상천이와 나는 서로 마주보며 지금 생각난 단어를 말했다. “팔불출이네.” “팔불출이군.” 지금까지 생각한 이미지가 180도 바뀌어 버린 두 어르신이었다. 화선녀님은 지쳤는지 한숨을 폭 쉬며 두 어르신을 외면하고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우리에게 말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대환기업 이 씨 가문의 장녀이자 외동딸인 이정화라합니다.” 조용하면서도 매우 정중히 고개 숙여 자기 소개하는 화선녀님의 예의바른 모습은 우리들을 일어서게 만들었다. “이쪽은 제 할아버지이자 대환기업의 회장이시고, 그 옆에는 제 아버지, 대환기업의 부회장입니다.” “크흠, 이창동이라 하네. 반갑네.” “이선빈이라 하네. 반갑네.” “나기찬입니다, 반갑습니다.” “임상천이라 합니다, 저도 반갑습니다.” 얼결에 인사하게 되었다. 화선녀님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말을 놓았다. “지금까지 속이고 있는 것 같아 많이 미안했어.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아, 앉아, 앉아. 얘기가 조금 길어질 거 같으니까.” 나는 엉거주춤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며 말했다. “저는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돼요.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거죠?” “그건…….” “그건 내가 말하지.” 화선녀님의 아버지인 이선빈부회장님이 말을 가로챘다. “얘기를 하기 이전에 자네들은 무림일대기란 게임을 하고 있지 않나?” 하고 있다기보다 했었다가 맞겠지만 일단 상천이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선빈부회장님은 만족했는지 다시 말했다. “나는 내 딸에게 무림일대기란 게임을 추천했다네. 사교성이 전혀 없어서 이대로라면 혼약은커녕 대환기업 역사상 처음으로 독신녀가 나올 거 같아서 말이지.” “사교성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관심이 없을 뿐이지.” 화선녀님이 정정했다. 우리들은 부회장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게임 상에서도 우리 말고는 그 누구와도 친하게 대하는 걸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흠흠, 그렇다고 치고. 어쨌든 무림일대기란 게임을 시작하며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네. 바로 자네들을 만나게 된 것이지. 아버님과 나는 그대들이 어떻게 지내왔는지 쭉 지켜보았네.” 뭔지 모를 한기가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음흉한 눈빛을 발하던 부회장님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 예상과 다르게 딸의 마음이 너무 커졌던 거야. 자네들이 게임을 접을 때 딸내미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던지.” “누가 들으면 제가 꼭 울기라도 해서 마음 쓰신 것 같다 생각하겠습니다, 아버님?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가시 돋은 말투로 톡 쏘는 화선녀님은 정말이지 무서웠다. 부회장님은 땀을 훔치며 조심히 말했다. “그렇지, 그렇고말고. 하지만 그 무표정이 화난 것보다 더 무섭다는 걸 아비는 새삼 다시 느꼈단다. 차라리 그냥 지금처럼 화를 내줬으면 덜했을 텐데… 흠흠. 그래, 넘어가지.” 목이 마르셨는지 홍차로 목을 축이셨다. 그러자 지금까지 조용히 앉아있으셨던 이창동회장님이 차분하게 말했다. “어제 손녀가 그리 웃으며 게임하던 모습은 처음 봤네. 자네들은 모르겠네만 어릴 때부터 키워온 나와 아범은 잘 알고 있지.” “그럼… 어제도 몰래 모니터링 하셨다는 말이군요. 할아버님, 아버님?” “크흐흠!” “어허흠!”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져서 당황스러웠다. 여기의 주도권은 화선녀님이 가지고 있구만. 부회장님이 화선녀님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래서 아버님과 나는 자네들을 약혼자후보로 선택하였네. 우리들은 인정했으니 남은 건 자네들 몫인 게야.” “약혼자… 후보요?” “그거… 그냥 지나가다 멋진 남성을 보면 내 딸 후보감이군하며 찍는 뭐 그런 식의 말은 아니겠죠?” 내가 뭔가 이상한 단어를 되짚었고 상천이가 설마 자기가 생각한 이것이 맞을까 풀어놓았다. “맞네.” “역시 젊어서 잘 아는구먼.” “…….” “…….” 나 식탁 뒤집어도 될까? 그럼 애초에 정식약혼자가 아니라 정식 약혼자후보라고 말하면 되는 게 아니었던가. 아니, 약혼이란 단어 자체를 쓸게 아니라 그냥 점 찍힌 상대라고 말하란 말이다. 젠장맞을!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차마 말을 뱉을 수는 없었다. “아하하, 나 완전히 낚였네.” 상천이는 그저 피식 웃으며 떨떠름하게 혼잣말했을 뿐이었다. 이런저런 놀란 일들이 지나가 밤이 되어가자 아직 학생신분인 우리들이 돌아가야 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문 앞까지 바래주겠다는 화선녀… 아니, 이정화누나(이름을 알려주었으니 이제 누나라고 불러라 압박을 주어서 어쩔 수 없이 승낙하고 말았다)는 얇은 가운만 어깨에 걸치고 나왔다. “오늘 너희들을 이렇게 부른 이유는 가족들의 기승도 한몫했지만 사실 나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서였어.” 그냥 카페에서 알려주었으면 될 걸. 일반인인 나는 정화누나의 기분을 알 수 없었다. 정화누나는 거의 보이지 않는 별을 찾아보며 말했다. “이제 보기 힘들겠구나.” 그 말은 아마도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보기 힘들겠지. 상천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기찬이녀석은 아펜하르트 게임하니까 보고 싶으면 그곳으로 오세요. 이놈 해킹해서 하고있… 읍읍!” 미친놈, 해킹이 무슨 너희 집 개 이름이냐! “아펜하르트? 무슨 게임인데?” 정화누나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냥 전통 판타지를 배경으로 만든 게임이에요. 무협과는 틀려서 적응하려면 조금 힘들 거예요.” 결국 한숨 쉬며 말했다. 당연히 상천이 질식사 계획을 멈추지 않은 채로. “아펜하르트라… 그거나…….” “네?” 상천이가 갑자기 살기위해 덤벼드는 바람에 말을 잘 못 들어 되물었고 화선녀님은 고개를 저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몰라도 되네요.” 흠, 내가 아주 중요한 말을 못들은 것 같다는 기분이 해일처럼 밀려오는데. 대문에 다 도착해서 일단 마음 저편으로 쌓아두었다. “다 왔네.” “그럼 저흰 가볼게요. 나오시지 마세요.” “…응.” 정화누나는 단지 고개를 끄덕이며 뒷짐진채 우리를 바라만 보았다. “기찬아, 상천아.” 걸음을 옮기려하던 우리들은 부름에 뒤돌아보았다. 정화누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누나는 너희들이 정말 약혼자였으면 좋겠다.” “컥!” “헉!” 우리들이 심하게 뒷걸음치자 정화누나가 킥킥 거리며 손사래 쳤다. “농담이야, 농담. 어린애들에게 뭔 관심이 있다고.” 저는 심히 놀랐습니다만. “오늘따라 많이 낚이네, 제길.” 상천이가 심장을 만지작거리며 혼잣말했다. 그렇게 헤어진 우리들은 하나같이 다리에 힘이 없어서 흐느적 걸었다. “기찬아, 오늘따라 더 힘들지 않냐?” “말걸 지마. 나 지금 말할 기운도 없어.” “하아.” “하아.” 정말이지 오늘처럼 지친 날은 내 생애 첫 번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25일전. 정겨운 잿빛색깔 뾰족탑들이 듬성듬성 보였고 오늘따라 시원해 보이는 중앙 광장 분수대가 내 기분까지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게 얼마만이냐!” <‘침묵의 절규’ 발동.> <‘침묵의 절규’의 숙련도가 3 상승했습니다.> “이런 미친놈! 이런 곳에서 스킬을 남발하다니!” “아침부터 시끄럽게.” “님아, 매너 좀요!” 예상치 못한 스킬발동에 나는 고개를 숙이고 중앙광장을 빠져나와야했다. 오늘은 일요일. 그동안 못했던 게임을 오늘 다 보상받을 작정으로 아침부터 게임에 접속했다. 역시 아침이라서 그런지 대체로 한산했는데 이 게임은 아침공기까지도 구현한 듯 공기가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열려라, 마음의 문이여.” 가슴에 손을 올리며 정중히 말했다. 이건 정말 오랜만에 하는 포즈인데? 나는 기대를 가지고 상태 창을 보았다. 성별 여 이름 예쁜이 종족 인간 나이 23세 직업 일루미네이터 Level 50 소속 미소천사 기사단 칭호 미소천사 힘 7 월(月) 21+10 민첩 7 암(暗) 21+10 체력 7 화(火) 18+10 지능 71 수(水) 20+10 정신력 120 목(木) 24+10 행운 7 금(金) 21+10 탄력 11 토(土) 29+10 방어 5 천(天) 26+40 종족특성 : 없음 칭호특성 : 없음 직업특성 : 일루미네이터, 풀어서 ‘빛을 밝히는 자.’라고 부른다. 모든 빛속성 마법 30% 저항력을 가지며 5%의 확률로 반사시킨다. 천속성 포인트 +30, 빛이 있는 곳에서는 피드백 확률 10% 저하. 포인트 : 41 스킬 1. 천상의 매혹 <숙련도 1/100> 6. 트리플스펠 <숙련도 없음.> 2. 침묵의 절규 <숙련도 40/100> 7. 태초의 재생 <숙련도 63/100> 3. 무기속성 주입 <숙련도 27/100> 8. 치료사의 깨달음 <숙련도 6/100> 4. 올 원소친화력 <숙련도 없음> 9. 5. 심연의 눈 <숙련도 76/100> 10. 레벨 50을 달성한 상태에 직업이 일루미네이터로 바뀌어있었다. 이것은 둠 터틀을 잡을 때 생긴 것들이다. “일루미네이터라. 빛속성 마법 30% 저항력에다 5% 반사시킨다? 빛의 화살은 이제 내게 위협이 안 되겠군. 천속성 +30에 피드백 10% 저하는… 완전 사기인데.” 직업특성이 이리 좋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어쩐지 저번에 태초의 재생으로 보조할 당시 피드백당해도 뭔가 조금 덜 아팠었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피드백 10%저하를 유심히 보다 다시 한 번 올 속성 결합을 하면 어찌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돼. 내가 미쳤지. 또 그 짓하다간 한 달은 커녕 오늘 접어야할지도 모를 판인데.” 고개를 휘휘 저으며 생각을 털어냈다. “그나저나 레벨 50이라.” 금요일 날 학교 컴퓨터로 명예랭킹을 확인한 결과 1위의 배틀마스터, 용병왕 애디는 이미 100레벨을 넘긴 상태였다. 2위인 스피드사신, 글로리시나만 해도 83레벨이었는데 그에 비해 나는 랭킹 5위면서도 레벨 50정도밖에 안 된다는 건 심각한 문제란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간다면 다음 주 금요일, 업데이트가 되는 순간 나는 랭킹싸움에서 뒤쳐져 어디까지 내려갈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레벨을 올릴 필요가 있겠지.” 레벨. 지금까지 게임이 진화하면서 레벨을 올릴 수 있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만들어졌다. 옛날에는 단순히 몬스터를 잡고 사냥으로 인한 경험치가 레벨로 이어졌는데 점점 진화해 퀘스트로 인한 경험치, 독서하며 얻는 경험치, 생활의 지혜를 터득하며 얻는 경험치, 심지어 PK로 인한 경험치까지 레벨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무궁무진하게 발전되었다. 나는 힐러기 때문에 일단 사냥 경험치는 포기해야했다. 누구랑 같이 다니지 않는 한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퀘스트도 자연스럽게 포기. PK는 아예 불가능하고 독서는 지루해서 패스. 생활의 지혜는 내 맘대로 터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버려야겠군. “…이거 레벨 올리기가 하늘의 별따기잖아.”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나는 레벨을 혼자서 얻은 경우가 한 번도 없었다. 처음에는 이름 모를 마법사를 이용했었고, 그 다음은 고블린들을 이용해서 올렸었다. 기사단을 이용했거나 태식 형을 이용하기도 했지. “천생 누구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겠는데.” 파티에 들어가서 몬스터를 잡는 방법이나 기사대전에 껴들어가 보조를 해주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힐은 사용한다면 내가 미소천사라는 것을 들키게 되니 봉인하고 플레이해야만 했다. “쓸 수 있는 건 기본 속성마법과, 천상의 매혹, 침묵의 절규, 무기속성 주입, 심연의 눈 정도인가.” 치료사의 깨달음은 까닥 하단 내가 죽어버리기 때문에 정말 위험하거나 필요할 때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결정은 느렸지만 행동은 빨랐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움직이고 보았던 것이다. 파티를 모집하는 곳은 아페타 마을 동쪽입구였다. 수많은 유저들이 저마다 팻말을 치켜들며 외치고 있었는데 저 팻말은 나무로 만든 거라 잡화점에서 가볍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양도도 가능해서 대부분은 그냥 팻말이 필요 없는 사람에게 헐값에 사는 식으로 재탕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고요의 숲 초입까지 파티하실 탱커, 보조 구합니다!” “암흑의 탑 가실 공격대 모집합니다!” “삭풍의 북쪽언덕 가실 분 모집합니다! 수속성 50이상은 필수!” “메히튼 왕국 가실 분! 육로로 갑니다!” 세상에나 많기도 했다. 별의별 모집을 다했는데 고요의 숲이나 암흑의 탑 같은 곳은 가보았던 곳이라 후드를 푹 눌러쓰고 삭풍의 북쪽언덕을 광고하는 유저에게 다가갔다. “그 파티 들어갈 수 있나요?” 호리호리한 체격에 자기 몸만 한 검을 등에 매고 있는 유저였다. 그 유저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보아하니 법사 같은데 수속성 50은 되겠죠?” 나는 아직 30이었지만 포인트 20을 주면 그만이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조위주의 법사입니다.” “으흠, 요즘 뜨고 있는 게 마학자타입인데 전투법사로 전향하셨나 봐요?” “히트님, 그냥 가죠. 수속성 50인 유저가 흔한 건 아니잖아요.” “맞아염, 시간도 없고.” 그 유저 옆에 있던 한 여자와 남자였는데 여자는 가슴께가 파인 천 옷을 입고 있었는데 팔뚝만한 푸른 스태프를 쥐고 있어서 마법사 같아 보였다. 그 옆에 있는 남자는……. “크, 크다.” “키 크다고 하지 마!” 남자는 갑자기 도끼눈을 하며 발을 굴렀다. 나는 후드를 더 눌러쓰며 살며시 그 남자를 감상했다. 이거 2미터는 되겠는데. 그 남자의 얼굴을 보자니 내 목이 뻐근해져왔다. 노랑머리로 염색해서 뒤로 꽁지를 한 모양에 온통 검은색 가죽옷을 입고 있었는데 저 모습 어딘가 많이 본 모습이라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뭐 전투법사라니 목속성 주입은 가능하겠죠?” 목속성? 나는 올 속성 다 가능하니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습니다. 이정도면 사냥가기 적당할 듯 한데 그냥 출발하겠습니다. 이미 세 명이 삭풍에 도착했다고 하네요.” 저 호리호리한 검사의 말투가 조금 사람을 무시하는 투여서 기분이 살짝 나빴지만 기술을 봉인하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어 그냥 넘어갔다. 북쪽평원을 지나 모래평원을 한 번 더 지나가면(이곳에서 예전에 실버크로스 기사단과 미소천사기사단이 대결했었다) 삭풍의 북쪽언덕이라는 필드가 나왔다. 이곳은 추운지역이라 옷을 따뜻하게 입고 있어도 한 시간만 있으면 얼어 죽을 정도가 되는데 그래서 수속성 50이상의 유저를 찾았던 것이었다. 이런 것들은 레나라고 소개한 여성마학자가 알려준 말이었다. “춥긴 춥네요.” 수속성에 20을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추워서 몸이 덜덜 떨렸다. 레나님은 그런 나를 보고 내 등을 툭 치며 말했다. “옷도 더 간단하게 입고, 여자인 제가 이러는데 타테님이 추위에 떨고 계시면 되겠어요?”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이상했다. 나만 유난히 떨고 있었던 것이다. 저 검사는 추운지역에 오면서 커다란 붉은 망토를 착용했는데 정말 따뜻해 보였고 2미터의 꽁지머리 남자는 가끔 이상한 물약을 한 모금 섭취하는 것으로 추위를 달래는 듯 보였다. “레나님은 안 추우세요?” 내 의문에 레나님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저는 수속성마학자거든요. 타테님은 무슨속성인가요?” “네? 저는… 천속성이랄까.” 그나마 가장 높은 속성 포인트가 천속성이었기 때문에 그리 말했는데 레나님은 표정을 살짝 굳히며 말했다. “천속성이요? 그런대 수속성도 50이상이구요? 너무 막 키운신거… 아, 미안해요. 하지만 사제도 아니고 천속성은 조금 아이러니하네요.” 속으로 살짝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보통의 전투법사는 어떻게 키우죠?” “음, 요즘 더블스펠 공식이 전부 홈페이지에 공개되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알맞은 공격마법과 방어마법부터 만들고 시작하죠. 그 전까지는 무기속성 주입으로 레벨을 올리는 게 정석이에요. 제가 알기로는 슬슬 세 가지 속성도 결합할 수 있는 레벨대가 되어가기 때문에 기대가 큰 직업 중에 하나로 손꼽히고 있죠. 하지만 아직까지 전투법사중에 유일하게 트리플스펠에 성공한 유저는 명예랭킹 3위의 결계의마도사 루히비드 정도뿐이라 극악의 직업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후훗, 트리플스펠 성공한 유저는 여기에 또 있답니다. 코가 길어질 것 같아서 다시 질문했다. “마학자는 어떻게 키우는데요?” “마학자로 전향은 힘들 텐데요.” “그냥 궁금해서요.” 레나님은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제 말이 아니어도 홈페이지가면 다 설명되어 있을 텐데… 뭐 정 궁금하시다면야. 마학자는 도서관에서부터 시작해요. 지식을 습득하며 경험치를 올리죠. 어느 정도 도달하면 ‘정신집중’스킬을 터득하게 되고 그 다음부터 길이 또다시 나눠지게 되요. 지식을 이용한 연금술사 쪽이 되던가, 아니면 저처럼 한 속성만 파서 한타 싸움이 가능한 마학자가 되는 거죠. 전투법사는 보조위주와 개인공격에 능숙하다면, 마학자는 정신집중으로 증폭효과를 내서 대인 공격하는 스킬위주를 사용하게 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호리호리한 검사가 말했다. “저기 일행들이 보이네요.” 저 멀리 손을 흔들고 있는 유저들을 보았다. “어디서 많이 본 유저들이다?” 커다란 투 핸드 소드를 들고 있는 덩치 큰 유저와 기다란 할버드 창을 꼬나 쥔 유저. 석궁을 들고 있는 유저까지. 어딘가 많이 본 유저들인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사냥하고 있었냐. 기태야?” 호리호리한 유저는 잘 알고 있는 사이인지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잠깐, 기태?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기태라……. “우하하! 여기도 조금 싱겁더군. 더 안쪽으로 들어갈까 하던 차에 왔네.” 저 목소리도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어? 잠깐, 서, 설마! “아아아아아!” 내 손가락질에 기태라는 유저가 나를 보았다. 그 유저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나랑 본적 있나? 어디선가 눈에 익숙한데.” 그놈이다, 그놈! 그놈이었어! 젠장, 저놈과 인연은 정말이지 질기디 질겼다. 내 얼굴은 소태 씹은 것 마냥 거침없이 일그러졌다. 나와 기태라는 검사를 번갈아 보던 호리호리한 검사는 우리쪽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같이 다닐 맴버를 소개할게. 여기는 수속성 마학자인 레나님, 저 노랑머리의 남성분은 연금술사인 하가네님, 이쪽은 전투 법사인데 보조위주인 타테님.” “뭐, 뭐?” “타테!” “타테에에에에?” 기다리고 있던 멤버 세 명은 깜짝 놀라며 동시에 나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그래, 저 음침한 후드! 생각났다!” “고블린 지대의 희든 몬스터, 타테!” “네놈이 왜 여기에!” 살기에 목 언저리가 따끔따끔할 정도였다. 이러다 죽게 생겼군. 나는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지금 목소리까지 똑같으면서 시치미 뗄 생각인가?” “전투법사라면 그때 황당한 무기속성 주입을 사용한 것도 이해가 가는데.” “그놈이 유저였다니… 허참.” 칫, 역시 안 되는 건가. 이미 도망가기도 불가능했고 시치미도 통하지 않으니 더 이상 숨길 이유가 없겠지. “그래서 어쩌라고. PK당했으니 복수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군!” “죽인다아아아아!” 기태가 콧김을 뿜으며 나에게 돌진했다. 너무 빠른 돌진이라 이것저것 볼 것 없이 크게 외쳤다. “멈춰라!” <‘침묵의 절규’ 발동.> <‘침묵의 절규’의 숙련도가 3 상승했습니다.> “어억!” “저, 저 기술 나왔다!” “광범위 스턴!” 내가 발동한 스킬은 저 세 명뿐만 아니라 호리호리한 검사와 레나님, 연금술사까지 놀란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스턴 때문에 멈춰선 기태 놈에게 눈팅 목소리로 말했다. “흥, 이 모습 기억나나?” 내가 후드를 뒤로 넘겼다. 그러자 금발의 머리가 빛의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저… 모습은?” “미, 미소천사다!” “네놈이 어째서?” 궁수와 할버드 검사는 깜짝 놀라 말했지만 유일하게 기태 놈만 사색된 표정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래, 직접 죽인 상대를 모른다면 말이 안 되겠지. “기억났나? 네가 녹색초원이란 필드에서 PK했던 유저가?” “어째서, 미소천사님인 거냐! 그분을 사칭하지 마라!” 순간 내 다리가 휘청했다. 기, 기억 못하는 거냐? “네놈이 나를 죽였잖아! 내가 히, 힐러의 사령관이 되겠다고 말했었잖아!” 부끄럽다 못해 팔뚝에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다. 힐러의 사령관이라니 내가 그때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담. <‘천상의 매혹’의 숙련도가 3 올랐습니다.> “……….” “……….” “…귀여워.” 귀엽다니 지금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냐! 거기 레나님까지 얼굴 붉히시면 어쩌란 말입니까! “아! 기억났다! 사제 한 명 도와주겠답시고 설쳤던 쪼렙!” 기태 놈이 지금 생각났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머리에 핏대가 섰다. 그래, 쪼렙은 쪼렙이지. 근데 어감이 심히 듣기 거슬리거든? 그때 넌 쪼렙아니었냠마! “그래! 그때 내가 먼저 PK 당했고 그래서 나는 너희들에게 복수했을 뿐이야!” “그래서 정당방위라 말하고 싶은 거냐?” 할버드 검사가 이빨을 으드득 갈며 말했다. 저놈은 어지간히 그때 죽었던 게 열받았었나보다. 나는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아니, 단지 단체로 한 명에게 공격한다는 게 정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뿐이야. 뭐, 그것도 좋아. 어디 한 번 덤벼 봐. 명예 랭크 5위의 미소천사란 타이틀이 뭔지 보여주지!” 지금 내가 말한 것은 도박과도 같았다. 보조스킬 위주인 나는 기태 놈은 커녕 저 할버드 검사조차 이기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명예 랭크 10위권에 있는 유저들은 다들 괴물로 알고 있다. 그걸 믿고 승부를 건 것이다. “크윽.” “저 년이…….” “죽인다아아아아아!” 분명 궁수하고 할버드 검사 놈은 통했다. 하지만 나도 예상치 못한 것이 있었는데 그건 저 중에 바보가 한 명 있었다는 것이었다. 미친놈, 네가 할 줄 아는 건 돌진밖에 없는 거냐! “기태야 스톱!” 호리호리한 검사가 내 앞을 막아섰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조금만 늦었어도 나는 두 동강이 났을 게 뻔했으니까. “옛날 일인데 그렇게까지 흥분할 필요 없잖아? PK 한 번 당했다고 너무 열 올리는 거 아냐?” “수환, 네가 그때 없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고블린같은 잡몹들한테 맞아죽어 봤냐!” 할버드 검사가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흥, 그 잡몹들한테 나는 납치까지 당했었거든요? 수환이라는 검사가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나와 이를 갈고 있는 세 명을 번갈아 보았다. “여기서 우리끼리 싸워봐야 이득도 없잖아. 여기까지 온 시간과 파티를 모은 시간도 아깝고. 그냥 휴전하고 오늘은 사냥이나…….” “저년과 파티를 하란 말이냐!” “그건 나도 거절이다.” 할버드 검사가 소리를 꽥 질렀고 궁수가 나에게 살기를 뿌리며 짧게 말했다. 기태 놈은 여전히 돌진할 태세다. 이거 오늘은 운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문제는 저 인거 같으니 제가 빠져 드리죠.” 내가 뒤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려하자 레나님이 내 어깨를 잡으며 막아섰다. “사람이 적어서는 그냥 사냥하기도 힘들어 보이니 저도 그럼 이쯤에서 빠지겠습니다. 하가네, 너는 어쩔 거야?” 하가네 연금술사는 팔짱을 끼더니 말했다. “나도 상관없삼.” 사, 삼? 이놈 초딩인가. 갑자기 세 명이 파티에서 탈퇴할 결심을 하자 수환 검사가 다급히 말했다. “잠깐, 잠깐. 다들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우리 같이 어울려요. 시간 아깝잖아요.” “저년과는 절대 파티 못해!” “나도.” “죽인다아아아아아!” “그렇다는데요?” “역시 힘든 길이 될 거 같네요.” “저들 시끄럽삼.” “우어어어어어어…….” 수환 검사는 중간에 어쩔 줄 몰라 하다 이상한 신음을 뱉었다. 조금 울먹이는 것 같기도 했는데 지금 그런데 신경 쓸 틈이 없었는지라 넘어가도록 하겠다. - 으르르르르르……. “내가 왜 저 년과 같이 있어야 하는 건데!” “그냥 죽을까.” “죽인다아아아아아!” - 으르르르르르……. “정말 커다란 검만큼이나 무식하군.” “수환님, 저들이 협조를 안 한다면 지금이라도 탈퇴를…….” “저 늑대들 귀찮삼.” “우어어어어어어…….” 지금 우리들의 상황이 어떠하냐고? 간단하게 말하면 은빛늑대들에게 포위당했다고나 할까? 물론 처음에는 이런 상황이 오지 않았었다. 우리가 싸우는 그때 단지 몇 마리가 다가왔을 뿐이지. 말싸움에 열중하던 우리들은 그들을 무시했었고 화난 늑대들이 크게 울더니 이렇게 동료들을 끓어왔던 것이다. “이놈의 늑대들 잽싸잖아!” “활만으로는 벅차!” “으리아아아앗!” 왼쪽에 할버드와 궁수, 기태 놈이 서로 뭉쳐서 늑대를 상대하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나와 레나님, 하가네님과 수환 검사가 뭉쳐있었다. 즉, 두 패로 나누어진 상태였던 것이다. “이익, 늑대 좀 막아 봐요! 마법을 못 쓰잖아요!” “이건 물약 낭비삼.” “저 혼자서 어떻게 다 막으란 말입니까!” 레나님과 하가네님이 투덜거렸고 수환 검사가 거의 울 듯 한 표정으로 늑대들을 저지하고 있었다. 분명 한 패로 뭉친다면 그나마 수월하게 막을 수 있을 것이었다. 머리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도무지 몸이 가질 않았다. 저놈들과 같이 합공하라고? 차라리 내가 죽고말지! “타테님… 아니, 미소천사님이라 불러야 하나요? 아무래도 당신이 나서야 할 것 같은데요? 이러다 우리 모두 전멸이에요.” 레나님은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나서서 주도한다면 쉽게 이 상황을 넘어 갈 수 있을 거란 사실을 말이다. 나 역시 전멸한다는 말이 조금 걸렸다. 나는 죽어도 상관없지만 레나님이나 하가네님은 개죽음이 아닌가.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다 크게 외쳤다. “젠장, 모두 뭉쳐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끼리 싸워봐야 득도 없잖아! 일단 이것들부터 처리하자고!” “내가 네 명령을 왜 들어야 하는데!” “흥!” “죽인다아아아아아!” 저것들이 정말……. “내 말을 들어어어어어어!” <‘침묵의 절규’ 발동.> <‘침묵의 절규’의 숙련도가 10 상승했습니다.> “어억!” “큭!” - 깨갱! 순간 엄청난 마나가 빠져나감과 동시에 모두들 일순간 정지했다. 아군적군 다 통하는 스킬이다 보니 마나 낭비가 보통이 아니군. 잠시 정적 된 상황을 이용해 누나의 미소를 따라해 보았다. 정말 화가 났을 때 짓는 웃음, 보고 있는 사람은 핏기가 가실 그런 웃음을. “어서 안 뭉치면 다들 죽입니다?” <‘천상의 매혹’의 숙련도가 10 올랐습니다.> “……….” “……….” “…일단 저것들을 처리하고 보자.” - 커어어어엉……. 내가 미소를 잘못 낸 건가? 다들 얼굴이 빨개진 것 같다? 아니, 늑대들은 왜 나를 보고 있는데? 야, 꼬리 치켜들고 흔들지 마! “휴우, 겨우 뭉쳤군.” 수환 검사가 진이 다 빠졌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자 할버드 검사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저, 절대 일부러 뭉친 게 아냐! 죽기 싫어서 잠깐 휴전 하는 거다!” “누가 리더에요? 명령이나 내려요!” 여기서는 내가 리더가 될 수 없으므로 한 말이었다. 저들이 내 말을 따라주기나 할까? 그럴 리가 없겠지. “리더야…….” “그야 당연히…….” 레나님과 수환 검사가 나를 보았다. 지금 파티 중에서 가장 강한 건 나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역시나 할버드 검사와 궁수, 기태 놈은 이를 으드득 갈았고 말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보조나 할게요. 다른 분이 하세요.” 내가 물러나자 이번엔 할버드하고 궁수, 수환 검사가 기태 놈을 보았다. 그래도 저놈이 가장 강한 거겠지. 머리는 멍청해도 실력은 나도 조금 인정할 정도니까. “그럼 대충 다 때려죽여!” 문제는 지금 저 기태 놈이 흥분해서 분별력이 없다는 게 문제였달 까? 다들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럼 리더할 사람이…….” “그럼 내가 하겠삼.” 지금까지 주머니에서 물약이 얼마나 남았나, 세어보던 하가네님이었다. 우리들은 모두 저 말투 때문에 못미더운 눈빛을 보내며 걱정했지만 하가네님은 볼 거 없다는 듯이 명령하기 시작했다. “이런 건 그냥 대충 하는 거임. 검사들 앞으로 나가서 방패 들고 나머지는 지원사격 및 마법 쓰삼. 그러면 다 되는 거임.” “그게 끝?” 수환 검사가 말했고 하가네님은 귀찮다는 듯이 답했다. “그거 말고 더 필요함? 알아서 생각하길 바람.” 하긴… 지금 멤버에서 명령 내릴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냥 대충 자신이 있을 자리에 고수하고 각자 알아서 잘하면 되는 것이지. 딱히 잘못된 말은 아니었던 지라 모두 엉거주춤 따르기 시작했다. “풋!” 레나님은 그 상황이 웃기던지 입을 가리고 큭큭 거렸다. 그 모습에 다들 얼굴을 붉혔다는 건 넘어가겠다. “쳇, 내키진 않지만 일단 덤벼라 이것들아!” “에잇, 에잇, 다 덤벼!” “휴우.” 할버드 검사와 기태 놈, 수환 검사가 앞으로 나서서 검과 방패를 들었고 우리들은 모두 한 발짝 뒤로 물러서 마법을 준비했다. “레나님 은빛늑대들 속성이 뭔지 아나요?” “월, 수 일 거예요. 무기속성 주입?”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을 외웠다. “‘무기속성 주입’발동, 목(木)!” <‘무기속성 주입’의 숙련도가 5 상승했습니다.> 목(木) : 수(水)속성 몬스터에게 공격 시 자연의 기운이 깃들어 스태미나 및 체력이 흡수된다. 몬스터가 죽을 경우 흡수한 체력을 가진 식물 몬스터 생성.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나는 목속성을 검사들에게 걸어주었다. 짙푸른 녹색의 빛이 검이 아른거렸는데 처음 사용하는 거라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설명으로는 죽을 경우 흡수한 체력을 가진 식물 몬스터가 생성된다고 했었다. 어떤 식물일까? “목속성인가? 그럼 빈이 나오겠군.” 할버드 검사가 말했다. 빈? 나는 레나님에게 다시 물었다. “빈이 뭔가요?” “농담이시죠?” “네?” 내 의문에 레나님은 심히 고민하다 말했다. “명예 랭킹 5위의 미소천사님이 자신의 스킬조차 모른다? 이거 심각한 건데…….” 나는 움찔했다. 하지만 이미 쏟은 물이라 더욱 당당히 말했다. “저는 힐러지 법사가 아니거든요.” “힐러가 법사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게 더 신기… 뭐, 알았어요. 그만 좀 째려봐요. 빈은 저렙 수속성 몬스터를 잡을 때 나오는 몬스터로 나무넝쿨인데, 자신의 안으로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수많은 넝쿨로 감아 체액을 흡수하는…….” “보조 안 할 거냐!” “지금 대화하며 농땡이 피울 때냐!” 힘겹게 늑대들을 막고 있는 검사들이 윽박질렀고 레나님은 몸을 움츠렸다. “나머지는 나중에 설명 드릴게요. 일단 저도 지원 가야겠네요. ‘정신집중’스킬 발동, 수속성 교합, 증폭, 아이스필드(ice field)!” 우리주위를 제외한 반경 50미터의 모든 땅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은빛 늑대들은 수 속성이라 그리 피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땅이 미끄러워서 아까처럼 빠르게 움직이질 못했다. “이거 50미터는 조금 심했나?” …저분도 은근히 괴수였다. “지금이야, 하가네!” 레나님이 소리 지르자 바닥에 이상한 원형을 그리고 있던 하가네님이 박수를 치며 외쳤다. “연성진!” 그리고 두 손을 바닥에 대었는데 어째 많이 본 제스처다? - 쿠쾅! 쿠쾅! 쿠쾅! - 깨갱, 깨개갱! 갑자기 아이스필드의 얼음들이 변형하여 원뿔형으로 삐죽삐죽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늑대들은 영문도 모른 채 배가 뚫려나갔고 앞으로 나간 전사들은 희열했다. “어, 어떻게 한 거죠?” 마법의 변형을 레나님이 한 줄 알고 물어 보았다. 하지만 레나님은 고개를 저었고 하가네님이 코를 치켜들며 말했다. “연성진이삼. 물의형태만 바꾸는 연성은 연금술사에게 쉬운 거인데 내 훗날에 꼭 강철까지 연성해서 강철의연금술사가 될 거임.” “강철…아, 아앗!” 저 노랑 꽁지머리, 검정색일색의 복장, 연금, 그리고 저 큰 키… 는 아니네. 여하튼 어디서 많이 봤나 했더니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가! “아니, 게임에서 왜 코스프레 같은 짓을…….” “오, 이 애니 아삼? 예전에는 유명해서 리메이크까지 나온 대작임.” 그야 내가 초등 학교 때 몇몇 재미있게 보았던 애니중 하나라 잘 알고 있었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코스프레를 왜 하나고요!” “왜 그럼삼? 그러면 안 돼는 거임?”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군. 내 황당한 표정을 눈치 챈 레나님이 그 기분 잘 안다는 듯이 어깨를 토닥였다. “하가네는 원래 저래요. 아펜하르트 세계가 뭐든지 될 수 있다는 자율성 때문에 저런 생각을 하는 유저가 많잖아요. 저번에 보니깐, 드래곤볼 주인공을 재탄생 시킨답시고 에너지파 연습하던 무투가도 보았는걸요?” 황당해서 헛웃음만 흘러나왔다. 이거 너무 자율성 있게 만든 거 아냐? 뭐, 마법사로 시작해 힐러가 된 나도 만만치 않지만. “오, 오. 빈이다!” 전사들이 감탄사를 내질러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얼음 창에 꼬치가 되었던 늑대들이 사라져 있었고 대신 녹색의 넝쿨들이 꿈틀 거렸다.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았지만 상대의 발을 휘감는다면 이동하기 꽤나 불편할 것 같았다. 늑대들은 바닥의 얼음과 빈의 엉김이 특유의 기동성을 살리지 못해 점점 와해되어갔고, 그렇게 되니 전사들에게는 그저 연습용 허수아비와 별반 다를 게 없었기 때문에 처리하는 숫자가 빨라져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늑대들을 거의 다 몰살시켜가는 때였다. <퀘스트 ‘은빛늑대의 우두머리, 하티’가 발동 되었습니다.> “어라?” “퀘스트가…….” “너도냐?” 주변에서 들리는 의문으로 보아 나만 뜬 게 아닌 모양이었다. - 그르르르르르……. “이번엔 얼음 개냐?” “거참, 끝도 없군.” 전사들이 불만을 토하게 만든 상대는 온통얼음으로 이루어진 늑대였다. 퀘스트에서 언급한 그 하티라는 놈일 것이다. 크기만 해도 엎드린 상태가 내 키만 했는데 서면 세 배는 족히 나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놈이 걷는 곳마다 땅이 살얼음 졌는데 빈들은 체력이 약했는지 버티지 못하고 얼어버렸다. “설마…저놈도 둠터틀처럼 아이스브레스를 쏘는 건 아니겠지?” “둠터틀이 아이스브레스도 써요?” 불길한 기분에 말한 걸 들은 레나님이 의문을 표했고 나는 간단히 답했다. “그럽디다.” - 크허헝! 하티는 아이스브레스를 쓰지 않았다. 대신 입에서 뾰족한 얼음을 쏘았다. “으헉!” “피해!” “미소천사님, 실드를!” 그렇지! 나는 힐러다. 그러므로……. “실드가 없어요! 피해요!” “뭐, 뭐라고요? 꺄악!” “힉! 당신 힐러 맞으삼?” 나도 지금 그게 의문이 듭니다만. 전사들은 그나마 체통 있게 무기로 막았지만 무기다운 무기가 없었던 우리들은 다들 뒹굴고 점프하고 정신이 없었다. “크윽!” 할버드 전사가 어깨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그곳에는 얼음이 스치고 지나갔는지 새하얗게 얼어있었다. “젠장, 비켜요!” 얼음 쏘는 게 멈추자 나는 재빨리 그곳으로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큭, 힐러가 어떻게 그 흔하다는 어콜라이트 프로텍션도 없…헉!” 내가 팔에 엉겨 붙은 얼음을 손으로 거칠게 뜯어내는 바람에 그 히스테리 한 광경에 놀라 숨을 삼키는 할버드 전사. 그러게 치료할 때는 닥치고 조용히 있는 게 상책이다, 이놈아. “뭐 이리 무식한…….” “조용히 해. 얼은 곳은 힐이 잘 안 먹힌단 말야. 태초의 재생!” 물론 그냥 스킬을 시전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지만 그런 것 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태초의 재생’의 숙련도가 2 상승했습니다.> 순식간에 치료되는 자신의 팔을 보며 놀란 할버드 검사는 나를 슬쩍 쳐다보더니 틱틱 거렸다. “무늬만 힐러는 아니었던 모양이군.” “샤랍.” 나는 할버드 전사의 입을 말로 막으며 천천히 다가오는 하티를 보았다. 그리고 발밑에 얼었지만 아직 살아있는지 사라지지 않는 빈들까지도. 심연의 눈을 발동시켜 본 것이다. 이거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레나님, 큰 기술 있나요?” “물을 압축시켜 터트리는 마법이 있어요. 하지만 압축하는데 시간이…….” “지금 바로 시작하세요! 태초의 재생!” 시간이 없어 짤막하게 말한 뒤 바로 주문을 외웠다. 전사들도 긴박한 상황임을 알았는지 하티의 앞을 막아서기 시작했다. 내가 태초의 재생을 실행시킨 건 하티 발밑에 얼어있는 빈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 줄이라 믿었다. “어, 어?” “빈이 진화한다!” 내가 태초의 재생을 불어넣자마자 빈들이 갑자기 덩치를 불리기 시작했다. 기태 놈이 진화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이 진짜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다. 엄청난 속도로 SP가 빨려 들어가더니 결국 한계에 도달해버렸다. 더 이상 스킬을 사용한다면 피드백당할 것 같아 끊어버렸다. “어째서 저런…아!” 스킬의 숨겨진 능력이었다. 내가 알기로 이 능력은. 7. 태초의 재생(Beginning of the World Regenera-tion Power) (액티브) - 태초, 모든 자연의 조율자로 알려진 드루이드의 마법으로 훗날 숲을 숭배하던 위치들에 의해 마법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게 된다. 태초 드루이드의 재생은 위치의 재생과는 다르게 더욱 순수한 자연을 담고 있으며 그 힘 또한 강하다. 기본 재생의 비해 20% 더 회복하며 마나소모량이 10% 줄어든다. 스킬 사용 시, 모든 생명체는 MP, 스태미나가 회복된다. 시전자의 SP 소모량에 따라 회복되는 MP, 스태미나가 달라지며 작게는 1명 최대 10명까지 동시 회복 가능.(숙련도에 따라 동시회복 최대 수치가 달라짐) 목속성 생명체에게 시전 시, 그 생명체는 자라거나 진화가능. 목속성 생명체에게 시전 시, 그 생명체는 자라거나 진화가능하다고 명시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 설명과 같이 빈들은 이미 엄청난 속도로 커져버려 하티의 몸을 옭아 맺다. 하티가 얼음 털을 뾰족하게 새워 몸을 방어했지만 워낙에 많은 줄기들이 들러붙어 소용이 없었다. - 크허허허헝! 하티가 발버둥거리다 이내 무릎을 꿇었다. 빈들은 점점 푸른빛을 띄어갔다. 아무래도 하티의 체액을 먹는 것이리라. “이거…우리가 나설 필요도 없겠는데.” 할버드 검사가 한 말이었다. “그러게.” 팽팽히 활줄을 당기던 손을 풀며 말하는 궁수. “박살내주마!” 쓰러져가는 하티에게 돌진하는 기태놈. “휴, 이제 끝인가.” 이제 한숨 돌리겠던지 땀을 훔치는 수환 검사. “전투법사에 힐러, 소환술사까지…다재다능하네요.” 레나님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고. “어쨌든 렙업했음.” 하가네님은 무심히 말했다. “아하하…….” 나는 쓴웃음을 짓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으음.” “왜 그래, 하가네.” 뭔가 골몰히 생각하던 하가네님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레나누님, 이상하게 렙이 오르지 않았어염.” “응? 어라?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뭔가 꺼림칙한 감정이 들었다. 허전하다. 보스몹 같은 하티가 저렇게 쉽게 죽는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순간 퍼뜩 떠오른 게 있어 말했다. “우리 퀘스트 완료 떴었나요?” “어? 그야…….” “난 못들…서, 설마?” - 크허허허헝! 커다란 포효와 함께 바닥이 진동했다. 맙소사, 아직 살아있었어! 어째서 몸체가 녹은 놈이 살아있을 수 있지? “크악!” 수환 검사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의 등 뒤에는 멀쩡한 모습에 하티가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수환아!” “이놈이! 스크류 어택!” “강격!” - 콰직! 챙! 하티는 기태 놈의 강격을 어깨로 막고 찔러 들어오는 할버드를 이빨로 물었다. “어, 어! 우와악!” 하티가 목을 치켜들자 따라 올라가는 할버드 검사. 무기를 놓으면 정말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꽉 잡고 있자 할버드와 함께 팩 날려버렸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르잖아!” 힘, 스피드 전부다 아까와는 차원이 달랐다. 검사 두 명이 당하자 기태 놈이 하티 앞을 막으며 호기롭게 외쳤다. “팔 근력강화, 전사의 다짐, 버서커 모드 발동. 네 이놈, 이것도 어깨로 받나 보자! 흐아아아아아압!” - 쿠쾅! 이번에도 하티가 어깨로 받으려했으나 엄청난 힘을 내포했던지 주르륵 밀려나갔다. - 쿠쾅! 희망을 잡은 기태 놈이 연속으로 검을 휘둘렀으나 이번에는 단단히 방비했는지 이마로 검을 받으며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저 괴물과 당당히 힘을 겨루다니 기태 놈이 얼마나 강한지 새삼 다시 느껴졌다. “압축 준비완료! 하가네!” “네, 누님! 연성진!” 내가 멍하니 있을 동안 이미 둘은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레나님이 물을 압축하고 있었고 하가네님이 연금술사 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준비가 끝났는지 500원 짜리 동전만한 크기의 구를 만든 다음 하가네님을 불렀고, 그러자 하가네님이 작은 철 조각을 품에서 꺼내 연성했다. 그 철 조각은 순식간에 압축된 물을 감싸 쇠구슬처럼 만들었다. “내가 길을 만들지! 스턴샷!” 궁수 또한 지금까지 조용히 활을 재고 있다 기회를 잡아 쏘았다. 화살은 눈 깜짝할 새에 하티의 턱으로 날아가 터져나갔고 일순간 하티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이걸로 끝이다! 연금 합성 마법, 압착의 수환!(compression of water pills)” - 피융! 날카로운 파공성을 울리며 쏘아져나간 수환은 하티의 입 안으로 빨려가듯 들어갔다. - 켕켕! 입안으로 들어간 이물질 때문에 연신 헛기침을 하는 하티에게 레나님이 한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죽어라, 해제!” - 꽈과과과과광! 다이너마이트가 터진 것 같은 폭음이 들리는 동시에 하티의 온 몸이 쪼개지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작았지만 위력만큼은 그 어떠한 마법보다도 월등했다. 레나님은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말했다. “압축된 물에 강철을 씌우면 터질 때 위력이 배가되죠. 꼭, 수류탄 같은 효과랄까요? 어때요, 우리의 합성 마법이.” “정말, 대단해요.” 저 두 분, 랭커 못지않은 실력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누님…아직도 렙업이 안 올랐어염.” “크윽, 대체 퀘스트 완료는 왜 안 뜨는 거야!” 간신히 살아 있었던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화내는 수환 검사. “으으윽, 저건 불사신인가?” 다리를 질질 끌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할버드 검사가 한 말이었다. 하티의 조각난 몸은 처음엔 움찔 거리더니 순식간에 한곳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아까도 이런 식으로 살아난 것이리라. 레나님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도망가는 게 낫겠어요.” 모두들 그 말을 동의하는지 슬금슬금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나 역시 레나님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공략도 모르면서 저런 놈을 잡는 건 불가능…공략? 아아! “미소천사님 왜 멍하니 서있어요?” 레나님이 내가 빠지지 않고 서있자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주문을 외웠다. “‘심연의 눈’ 발동.” <‘심연의 눈’ 발동.> <‘심연의 눈’의 숙련도가 15 상승했습니다.> 주위가 한 없이 느려지며 세상을 통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무안한 감정이 벅차올랐다. 이것을 쓰면 하루를 버리는 결과가 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저놈을 꼭 잡고 말겠다는 승부욕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 삭풍의 북쪽언덕 은빛늑대의 수호신 하티(이벤트 보스몬스터) 종족 : 환수 속성 : 수(水), 풍(風) 크기 : 대형 M P : 815,000 / 1,150,000 S P : 8,000 / 10,000 온몸을 수(水)와 풍(風)의 기운으로 탈태하여 영원한 삶을 살아간다는 하티는 동양의 풍생수와 혈통을 같이한다. 북쪽 은빛늑대의 수호신으로 존재하며 위험에 처할 시 간혹 등장한다. 어떠한 공격도 상처입지 않으며 불로불사라 알려진 존재. 오직 화(火)와 뇌(雷)만이 하티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이거였어!” 온몸이 수와 풍의 기운으로 가득하니 당연히 죽지 않을 수밖에. 레나님이 내 이상상태를 발견했는지 놀라 말했다. “갑자기 엄청난 기운이…미소천사님 대체 무슨짓을…….” 하지만 화와 뇌라니 여기서 마법사는 레나님밖에 없는데 과연 사용할 수 있을까? 내가 레나님의 정보를 궁금해 하는 순간. 성별 : 여 이름 : 레이나 종족 : 인간 나이 : 30 직업 : 수속성 중급 마학자 Level : 72 소속 : 륀 기사단장. 3. 아이스필드(ice field) (액티브) - 바닥의 수분을 극한의 냉기로 얼려 자신의 필드로 만든다. 아이스필드 존재 시 수속성 마법 데미지 10% 증가, 이동속도 20%감소, 가끔 넘어질 위험이 있다. 지능, 탄력에 따라 범위 증가, 정신력에 따라 지속시간 증가. 6. 압착의 수환(compression of water pills) (액티브) - 고밀도로 물을 압축시켜 수압으로 공격하는 마법. 고대 대마법사 하나이안 루히비드가 자주 썼다고 하는 이 기술은 개인을 공격할 때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지능에 따라 물의 양이 증가하고 정신력에 따라 압축률 증가, 탄력에 따라 압축하는 수환 수 증가. 유저의 정보까지 볼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스킬은 비록 이미 선보인 스킬만 보였으나 그것만 하더라도 엄청난 정보유출이 아닐 수 없었다. 응? 그런데……. “레나님 나이가 삼시입…으읍!” “하하하하!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봐요! 지금 하티가 다가오고 있잖아요! 다들 여기 신경 끄고 막아요!” 레나님이 진땀을 흘리며 내 입을 막았다. 나는 손을 살며시 때며 말했다. “아니, 나이가 조금 많은 것 가지고 웬 호들가압…으읍!” 다시 입이 막혀져 심히 괴로웠다. “어떻게 안거죠?” “뭘요?” 내가 시치미 때자 더욱 얼굴을 들이민 레나님. “어·떻·게 안 거냐고요.” “아하하…무슨 소린지 저도 도통…….” - 크허허허허헝! “젠장, 또 쏘기 시작했다!” 할버드 검사가 할버드로 연신 뾰족한 얼음을 쳐내며 외쳤다. 아까 하티에게 던져졌을 때 다리를 다쳤는지 자세가 꽤나 어색해 보였다. “지금 이럴 때가…이힉! 아니에요! 레나님, 하늘에 먹구름을 만들 수 있나요?” “날씨 조종(control weather)은 일반 판타지에서도 8클래스 마법사나 쓰는 마법이라고요!” “도시 전체를 감쌀 먹구름이 아니에요! 그저 번개 한방 나올 정도의 크기면 됩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아 숙련도도 제로고 그걸로 저 하티를 노릴 자신도 없어요! 잘못하단 우리 편이 당할 거예요!” “그건 제가 해결합니다!” 내 자신감 있는 외침에 모두들 한 순간 나를 쳐다보았다. 아까 스킬을 남발해 지쳐버린 기태 놈이 힘겹게 얼음을 막으며 외쳤다. “네놈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 잔머리는 내가 인정한다. 한 번 해봐라!” “흥, 나도 네 성격, 외모…아니, 존재 자체가 마음에 안 들지만 그 힘만큼은 인정한다! 잠시 동안 하티의 발을 묶어봐!” “크하하하하하! 얼마든지! 버서커 모드, 다시 발동이닷!” 발을 크게 구르며 호기 있게 외친 기태 놈이 얼음을 피하며 하티에게 돌진하자 옆에 있었던 두 전사가 나를 흘끔 보더니 한마디씩 했다. “모래평원에서 보여준 네 능력을 선보여 봐라. 그럼 나 역시 너를 믿어보겠다! 창에서 도끼로 태세전환! 이것도 이빨로 막아봐라, 똥강아지!” “당신 때문에 중재하느라 진땀 뺐었지만 그 행동이 잘못한 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발 근력강화, 전사의 다짐, 궁신탄영(弓身彈影)!” 할버드 검사가 할버드를 넓게 잡고 옆으로 늘어트린 채 달렸고 수환 검사는 무협에서나 볼 수 있는 활처럼 튕겨 나가는 기술을 선보였다. - 크허허헝! 하티는 전사들이 접근해 방해하자 쏘아내던 얼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놈들 적어도 허수아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럼 나도 보답해야겠지. 나는 주문을 외웠다. “땅은 대지의 양기.” 왼손을 바닥 쪽으로 향하며 말한 뒤. “하늘은 광활함의 천기.” 오른손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을 향했다. “가운데 서있는 우리는 영원의 우주이니.” 천천히, 하지만 자연스럽게 두 손은 포물선을 그리며 결국 가슴으로 가져갔다. 경건한 마음으로 눈을 감은 나는 익숙한 따스함을 느끼며 작은 빛의 입자가 내 손안에서 머물고 있음을 믿었다. 나는 눈을 번쩍 뜨며 외쳤다. “나의 존엄성을 바쳐, 나의 신념을 바쳐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가 되리라.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모았던 두 손을 빠르게 교차시키며 주문을 외우자 빛은 작은 알갱이가 되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그 빛들은 유유히 세상을 떠돌다 이내 바닥으로 가라앉았고, 바닥은 나를 중심으로 기이한 원형의 문양을 만들어 내었다. “이, 이 힘은?” 레나님이 자신의 몸을 점검하며 놀라했다. 나는 뒤를 보며 외쳤다. “레나님, 마법을 준비하세요. 그리고 거기 궁수님.” “야켄이다.” 정정해 주는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속성결합, 증폭 화살을 쏠 수 있나요?” 야켄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궁수는 마나를 다루는 존재가 아니다. 어쭙잖은 실력으로 결합 증폭시키다간 화살이 견디지 못하고 터져, 피드백만 당할 거다. 그런 화살은 명예랭킹 6위의 어둠의조이밖에 할 수 없는 짓이야.” “아뇨, 해야만 합니다. 결합해야할 속성은 화! 절 믿어보지 않겠습니까?” 화살과 나를 번갈아 보던 야켄은 일순간 눈빛을 발하며 말했다. “이번 한 번 뿐이다.” 야켄이 집중하며 활을 매겼고 레나님은 하늘로 손을 뻗으며 주문을 외웠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 하티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까 SP가 고갈된 상태에서 심연의 눈을 사용했으니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다. 일단 나는 미소천사 전용 아이템 삼종셋트를 착용했다. - 은은한 녹 빛을 발하는 레몬 빛 실크 드레스 (고급) 숙련도 46/100 레몬 염료로 염색한 드레스. 여성용이며 누에라는 벌래가 내뿜는 실로 만들어 매우 가볍고 부드럽다. 마법적 방어력에 뛰어나며 아름답고 신비함을 만들어 주어 파티나 연회 때 어울리는 옷이다. 피드백 확률 5% 감소, 마법극대화 2% 증가, 마법 방어력 +150, 내면적으로 신비함을 만든다. 루시아니안 나뭇잎이 스며들었다. 목속성 포인트+5, SP+50, 치료마법 시전 시 치유량이 +150증가. - 은은한 녹 빛을 발하는 백호 가죽 망토 (고급) 숙련도 47/100 동방에서 네 방위의 신으로 불리는 숲의 제왕으로서 백호는 바람을 이끄는데 특별한 힘이 있다. 바람을 막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어느 정도 추위도 막아준다. 바람 마법 저항력 30%증가, 목속성 마법 극대화 5%증가. 루시아니안 나뭇잎이 스며들었다. 목속성 포인트+5, SP+50, 치료마법 시전 시 치유량이 +150증가. - 은은한 녹 빛을 발하는 미스트레스 티아라 (희귀) 숙련도 58/100 벌들의 여왕이라 불리 우는 미스트레스는 이그드라실의 꿀을 압축시켜 마법능력을 부여 하였다. 그 꿀 석을 이용하여 만든 여성용 왕관은 착용 자에게 신비감을 부른다. 용매가 필요한 마법사용 시 소모성 재료에 한하여 꿀 석이 대신 충족시켜준다. 단, 숙련도 수치 100 필요하며 10회 후 파괴된다. 벌들의 공격을 받지 않는다. 내면적으로 신비함을 만든다. 루시아니안 나뭇잎이 스며들었다. 목속성 포인트+5, SP+50, 치료마법 시전 시 치유량이 +150증가. 비록 아이템 숙련도가 50안팎이라 위력의 반 정도밖에 쓰지 못하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아까보단 나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제대로 버틸 수 있을까? - 휙! “응?” 찰랑거리는 무언가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 얼결에 받아버렸다. 내 손에 잡힌 건 파란색 액이 들어있는 유리병이었다. “50% SP회복을 해주는 포션이에염.” “이걸 왜 제게?” “하루에 한 병밖에 못 마시는 거지만 그만큼 탁월할거에염. 맘 바뀌기 전에 어여 드시길.” 이거라면 모자랐던 마나를 충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번 병을 흔들던 나는 결심이 들자 단숨에 삼켜버렸다. 몸에서 충만한 느낌과 더불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생겨났다. “으윽.” “크으윽.” 레나님과 야켄이 신음을 흘렸다. 피드백에 돌입한 모양이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시야를 넓혀 주위를 통제해야한다. 수는 총 다섯 명.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 보조에 들어갑니다! ‘태초의 재생’ 발동!” <‘태초의 재생’의 숙련도가 3 상승했습니다.> 먼저 레나님과 야켄에게 지속적인 힐을 불어 넣었다. SP를 아껴서 작게, 작게…그러나 신음을 흘리면 조금 강하게. 피드백 대비 힐을 넣는 건 이제 이골이 났다. 전처럼 SP가 고갈되는 상황은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하티의 발을 묶고 있는 전사 세 명에게 맞춤 힐을 주는 것. 크게 다친 곳은 빠르고 강하게, 자잘한 상처는 잠시 무시하다 적당 선에서 힐. SP를 아끼기 위한 최대의 사투가 시작되었다. “님…지금 전부 힐을 컨트롤 하는 거? 괴물이네염.” 잠시 할 게 없었던 하가네님이 컨트롤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나에게 혀를 내두르며 하는 말이었다. 사실 지금 내가 하는 짓은 무모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한눈에 볼 수 있게끔 뭉쳐 있었다면 혼자서도 가능한 컨트롤이었지만 지금처럼 두 무리로 따로 떨어진 상태라면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양쪽을 컨트롤 하지 않는다. 힐이란 어중간하게 주면 탱커가 불안해하기 때문이다. 이 불안요소는 믿음을 저버려 결국 소심해지게 만들고 그 작은 틈은 전멸로 몰고 가게 된다. 힐러를 많이 해본자라면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소수를 버리고 한곳만 집중적으로 마크함으로서 대인을 살린다. 허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결코 오만이 아니다. 나라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완벽한 플레이, 그것이 지금껏 내가 해왔던 플레이였으니까. “내가 원할 때 정확히 치료해주고 있어…….” “이렇게 뒤가 믿음이 가는 건 오랜만인데.” “큭큭, 버서커 모드로 줄어가는 체력을 완벽하게 커버하다니! 이거 웃음밖에 안 나오는군! 흐아압, 폭격!” 내가 말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전사들이 하는 말들은 신경 끊었다. - 빠지직, 쾅! “크어억!” “이, 이런! 태초의 재생!” 야켄님이 화살에 화의 기운을 불어넣는 다는 게 컨트롤이 잘못되었던지 터져버려 나는 황급히 주문을 외워 힐을 크게 주어야만했다. “으윽, 덕분에 살았다. 역시 이건 무모한 짓이었어. 이상하게 모든 숙련도가 100이 되어 있어서 그나마 수월했지만 이 나무화살은 화의 기운과 완전 상극이라 더 힘들어.” 나는 어렵지만 성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야켄의 말을 들어보니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둠 터틀을 잡을 때 여섯 개의 속성을 결합, 증폭해 버린 현빈 형은 얼마나 대단하다는 거야? “연성진!” 하가네님이 품에서 철 조각을 꺼내 연성했다. 모양은 화살! 그렇구나, 강철의 화살이라면 버틸 수 있을지도 몰라! “이걸로 해보삼.” “쯧, 오타쿠 같은 게 재주도 좋구나.” “에드워드는 위대한 거삼.” 내가보기에는 결코 칭찬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하가네님은 코를 높이 들며 만족해했다. - 쿠르르르르릉. 어느 사이에 하늘은 태양을 가리기 시작했다. 비록 커다란 크기는 아니었으나 처음해본 마법을 이렇게 빨리 만들다니. “이제 거의 완성단계에 돌입했어요! 곧 커다란 놈이 하나 떨어질 겁니다!” 레나님이 외치자 야켄이 강철의 화살을 가지고 다시 속성결합을 시작했고 하티를 막고 있던 전사들은 기합을 내지르며 처절하게 버티기 시작했다. - 크허허허헝! 하티가 몸을 뾰족하게 세웠다. 전에 빈들에게 보여주었던 그것이었다. 기태 놈이나 긴 무기를 가지고 있던 할버드 전사는 어렵사리 피했지만 수환 검사는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던 중이라 미처 피하질 못했다. “크아아아악!” 어떻게든 피하겠다고 몸을 틀었지만 허벅지부분이 찔리고 말았다.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걸 기태 놈이 얼음을 파괴해 간신히 떨어트려놓았지만 다친 크기로 보아 전투불능상태라고 오랜 치료사의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렇게 크게 다친 유저에게 폭힐을 주면 안 되었다. SP도 많이 들뿐더러 쇼크 상태라 바로 전투에 끼어들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일단은 자생을 하며 쇼크를 푼 다음 힐이다. 결국 당분간은 저 둘이 버텨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내 마음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헉, 헉. 완료했어요! 덕분에 아홉 번째 스킬은 라이트닝 레인(lightning rain)이 되어버렸네요. 이제 두 개 남아서 아껴두었던 건데…혼자서는 쓰지도 못할 스킬이라니, 흑흑.” 이봐요, 레나님. 지금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우는척하면 어깨라도 토닥여 줄줄 알았습니까? 나는 하가네님에게 말했다. “이제 하가네님이 나서주실 차례에요! 연성진을 사용해서 피뢰침을 만드는 겁니다!” 나의 생각은 이것이었다. 컨트롤 할 수 없는 번개를 한 지점으로 끌고 오게 만드는 방법. 현대에서야 흔히 보는 피뢰침이지만 이런 중세시대는 생각도 못할 아이템이었다. 강철로 뭐든지 변형이 가능한 하가네님이라면 손쉽게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저기…….” 하가네님이 말끝을 흐리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갑자기 불안이 엄습해왔다. “철 조각이 떨어졌는데염.” “네에에에에에에에에?” 뭐 이런 만화 같은 상황이 있단 말인가! “마지막 철 조각을 화살로 연성한 건데…진작 말했음 피뢰침 연성했잖아염.” 내, 내 잘못이란 말이냐아아아아! 너무 쉬운 거라 생각해서 다른 거 신경 쓰느라 말 못했던 것뿐인데 이렇게 큰 문제가 될 줄이야! 내가 죄인이요, 내가 죽을 놈이지! “안 돼, 곧 떨어진단 말이에요!” 레나님이 허둥거렸다. 하늘에서는 우르릉 천둥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천둥소리만큼 좌절했다. “일단 화속성 화살은 만들었는데…어쩔 거냐?” 야켄님도 불안했던 모양인지 나와 하늘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화살! 화살로 번개를 끌어와요!” “젠장! 너무 늦었어!” 내가 말한 것과 동시에 번개가 꽈르릉 소리를 내며 지그재그로 떨어져 내렸고 뒤늦게 날아간 화살은 터무니없이 빠른 번개를 지나쳐 하티의 목에 박혔다. - 크허허허허허허헝! 엄청난 굉음. 미친 듯이 몸부림쳤지만 그걸로 죽지는 않았다. 역시, 번개까지 힘을 합쳐야했다. 하지만 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실패야! 모두 도망쳐!” 작전은 실패했다. 저놈은 불사신이기 때문에 상처는 곧 회복될 것이었다. 나는 주위 빈들에게 태초의 재생을 마구 쏟아 부으며 외쳤지만 워낙 가까이 있었던 전사들은 차마 몸을 빼지 못하고 있었다. 빈들이 하티의 앞을 막아주어서 간신히 몸을 사릴 수 있었다. “젠장, 수환이가 아직!” 쇼크 상태에서 풀려났지만 여전히 발을 움직일 수 없었던 수환 전사는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다. 하티는 화가 났는지 둘러싸인 빈들을 무시하고 수환전사에게 돌진했다. <‘심연의 눈’ 지속시간이 끝났습니다. 대기시간 24시간 지속되며 12시간 동안 스태미나 최하로 떨어집니다.> <스태미나가 떨어졌습니다. MP로 대체 합니다.> 피가 역류했다. 울컥 피를 쏟았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수환검사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 나를 믿고 돌진했던 전사가 죽어버린다. 젠장, 젠장, 젠장!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내가 렙만 더 높았더라면! 후회감만 밀려왔고 나의 나약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우아아아아악!” 하티가 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보이는 하티의 발이 천천히 하강하며 수환검사의 목덜미로 떨어져 내렸다. “블러드 멜로디(blood melody).” 바닥으로 흡수되었던 번개가 갑자기 스파크 일더니 공중으로 끌려올라갔다. 올라가 맺히기 시작한 정점은 한 금발머리여성의 레이피어(Rapier)였다. 송곳처럼 생긴 그 얇은 검은 푸른빛의 스파크를 튕기며 쾌속하고 깔끔하게 하티의 목을 지나갔다. 아무런 거슬림 없는 그 절단은 둠터틀의 목을 가르던 태식 형의 모습과 매우 흡사해보였다. - 그워어어어어……. 힘없이 울던 하티는 천천히 몸이 바람처럼 흩어지듯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그 몸이 완전히 사라지자 홀연히 서있는 금발의 여성. 그녀의 긴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니 저 공간은 여성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퀘스트 ‘은빛늑대의 우두머리, 하티’퀘스트를 완료 하셨습니다. 보상으로 3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다, 당신은…….” 나는 말문이 열리지 않았으나 억지로 입을 열었다. 여성은 잠시 사라져가는 하티를 바라보다 바닥의 무언가를 줍더니 천천히 나에게로 다가왔다. “내가 잡았으니 가져도 되겠나?” 그녀의 손에 있었던 것은 푸른색 작은 구슬이었다. 나는 정신없어 멍하니 있는 바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 짝! 그녀가 말끝을 흐리는 동시에 얼굴에 번개가 친 듯 한 짜릿한 아픔이 전해져왔다. 나, 지금 맞은 거야? 떨리는 손으로 맞은 곳을 가린 채 내가 쳐다보자 그녀의 푸른 눈빛이 가늘어지며 말했다. “너의 오만으로 팀원이 죽을 뻔했다. 그 정도면 싼값이야.” “……….” “당신이 뭔데 미소천사님을 때리는 건가요? 이제 온 당신은 모르겠지만 결코 오만적인 작전은 아니었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 모습이 달갑지 않았는지 레나님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푸른 눈의 그녀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비꼬았다. “미소천사라…같잖은 힐로 랭킹 5위까지 올라간 병아리인가? 잘 들어라. 아무리 좋은 작전이라 한들 결국 실패하면 좋은 작전이 아니다. 아니면 이 시대에서 과정을 논할 셈인가? 항상 그래왔듯이 언제나 결과만이 중요할 뿐이야.” “뭐라고……!” 레나님이 욱해서 한걸음 더 나가려는 걸 내가 팔을 붙잡아 제지했다. 뭐하나 틀린 말이 없었다. 승부욕을 발하지 않고 그냥 도망갔으면 이런 상황도 오지 않았을 것이고 다들 피해가 없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이번 일은 내가 벌인 오만이 되었다. 저 여성은 그것을 꼬집은 것이다. “다 맞아요, 제 실수였습니다.” 내 말이 레나님을 더 화나게 만든 것일까? 레나님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하가네가 남에게 그 아끼는 포션병을 준다는 것은 그만큼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나또한 당신을 인정했어요. 그런데 당신이 그런 표정으로 주눅 들어 있으면 인정한 저희들이 바보 같잖아요!” “나, 나는…….” 말문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작전이 실패했으니 웃으며 실수했어요.’라고 넘어가란 말인가? 한나의 죽음 이후로 나 때문에 죽는다는 건 절대 내 자신이 용납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어떠한 표정을 지어야할지도 모르겠단 말이다! “가죠. 저희가 잘못 본 모양이에염, 누님.” 하가네님의 시선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자꾸만 어깨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억울함? 아니면 화난건가? 아니, 그 무엇도 아니었다. 이 감정은 관심을 준 존재를 저버린 나에 대한 혐오였다. “이익…나는 륀 기사단장 레이나다! 당신! 이름이 뭐야?” “뭐, 뭐?” “륀 기사단!” “대마법기사단의 수장이라고?” 기태 놈의 일행이 놀라했고 푸른 눈의 여성은 피식 웃으며 다시 비꼬았다. “너 따위에게 말할 이름은 없다.” “뭐, 뭐!” “…이름이 뭔가요.” 고개를 푹 숙인 채여서 잘은 몰랐지만 모두들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 묘 앞에서 맹세했었다. 게임에서 더 이상 도피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겠다고. 이미 마음을 정리했지 않은가. 게임을 현실로 보지 말고 게임이라는 룰 안에서 현실을 찾으면 되는 것이라고. 여기서의 나는 사랑에 목마른 기찬이가 아니다! 자존심과 자부심으로 가득한 힐러 타테다! 고개를 들었다.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푸른 눈의 여성을 보았다. “힐러의 자부심을 뭉개버린 당신을 복수하겠습니다. 그리고 인정받도록 하죠.” 그리고 씨익 웃어주었다. 그래, 이 표정이면 되는 거야. <‘천상의 매혹’의 숙련도가 10 올랐습니다.> “……….” “……….” “……….” 다들 말이 없었다. 심지어 계속 비꼬던 푸른 눈의 여성까지도. 레나님이 멍하니 있다 킥킥 거리며 말했다. “킥킥,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미소천사님 최고에염.” 하가네님이 엄지를 추켜들었다. 기태 일당도 어깨를 들썩이는 게 무언가 심히 참고 있는 것 같아보였다. 푸른 눈의 여성이 나를 한동안 쏘아보다 뒤로 획 돌며 작게 말했다. “…글로리시나다. 적어도 소인배는 아닌 모양이군.”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떠나갔다. 뒤돌아서서 그녀의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웃고 있을 것 같아 보였다. “글로리시나…인가.” 언젠가 다시 만날 것 같은 그런 기분. 내가 이름을 읊조리자 주위에서 하나 둘 놀래기 시작했다. “그, 그, 글로리시나!” “명예 랭킹 2위의 스피드사신 글로리시나!” “지, 지금 내가 평생 동안 한 번 보기 어렵다는 순위 1위에 꼽히는 유저를 본거야?” “거참, 명예 랭킹 5위의 미소천사와 륀 기사단 수장, 게다가 이번엔 명예 랭킹 2위인가? 이젠 더 놀랄 일도 없겠군.” 야켄이 마지막에 진정으로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고 기태 일행은 모두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나저나 저 여성이 명예 랭킹 2위라는 건가? 어쩐지 내면에서부터 알 수 없는 강함이 느껴져 평범한 인물은 아니라 생각했건만 명예랭킹 2위였을 줄이야. 그럼 1위는 얼마나 대단한 거야? 나는 랭커들은 얼마나 강할까에 대해서 실없는 상상을 펼쳐나갔다. “저희 팀에 안 들어오실래요?” 기태일행은 혹시나 더 떨어져있는 아이템이 없나 살피러 간 사이 수환 검사가 한 말이었다. “팀이라뇨?” “이번 주 금요일까지 다섯 명의 용자를 뽑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희는 전사 네 명이 모여 있습니다. 거기에 힐러라면…….” “잠깐, 그래서 지금 저보고 저놈 파티에 들어가라 이 말입니까?” 내가 내뻗은 손가락은 기태 놈을 가리키고 있었다. 수환 전사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PK당해서 언짢으시겠죠. 하지만 그건 예전 일이기도 하고 보기보단 저놈들도 착한 놈들입니다. 그리고 이젠 팀원이 거의 정해져서 저희 같은 고렙팀 찾기가 힘들 겁니다. 잘 생각해 보시고…….” 들을 가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손을 들어 제지하고 말했다. “고맙지만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원수와 팀을 떠나서 저는 대외적인 활동을 금하고 있거든요.” 눈팅이 GM인데 모든 GM들과 유저들이 지켜보는 그런 곳을 사서 들어갈 리가 없지 않은가. 죽으러 무덤 파는 짓과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에 나는 거절했다. “칫, 아깝네.” 수환 검사가 내 확고한 답변에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섰다. 뒷말은 작게 말한 거지만 듣게 되었는데 별로 화는 나지 않았다. 수환 검사는 나를 단지 이용하기 위해 권한 것이었고 그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거절한 이유도 있었다. 특별한 사건 때문에 전우애를 조금 다지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저들과 나는 결코 친해질 수 없을 것이다. “음…그럼 우리도 권하기 뭐하겠네요.” 내 뒤에서 수환 검사와 한 얘기를 듣고 있던 레나…아니, 이제 레이나라 불러야 하나? 여하튼 레이나님이 매우 아쉽다는 듯이 한 말이었다. “죄송해요. 지금은 용자대전보다는 어서 빨리 렙을 올리고 싶은 마음뿐이네요.” “지금 렙이 얼마인데요?” 나는 말해야하나 잠시 고민했는데 아까 전에 의도치 않게 보고만 정보가 조금 걸려 말해주기로 했다. “아까 3렙 올라서 53이네요?” “네?” “53이라고요.” “에이, 농담하지 마세요.” “정말인데요?” “……….” 레나님은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하늘을 보며 생각하다 다시 나를 보며 경악했다. “그 렙에 어떻게 그런 스킬들을! 이건 말도 안 되잖아!” 이건 사기라고 외치며 주저앉는 레이나님이었다. “레이나누님은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만나면 원래 저러니 신경쓰지마세염.”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덤덤히 말하는 하가네님이었다. [‘아펜하르트’ 게임에 접속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접속해서 처음으로 느낀 것은 살을 에는 추위였다. 천천히 눈을 뜨자 지극히 현실 같은 광활한 대지. 게임에서 현실을 느끼다니 이 이질감이 몹시도 나를 불쾌하게 만든다. “휴우.” 코끝에 시린 공기가 머물렀다 나간다. 발밑에는 서리진 얼음들이 빠득빠득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지른다. 모든 것이 완벽해서 오히려 나는 이 게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봐야 게임이지.” 게임은 게임다워야 한다. 아무리 현실같이 구현했다 하더라도 사람이 만든 것에 불과하다. 재미를 위한 만족감, 흥분을 유도하는 쾌락, 돈을 벌고자 하는 목적만이 이 세계의 유저를 부를 뿐이다. 필연적으로 존재해야하는 세계가 아닌 만큼, 인기가 떨어진다면 죽은 세계로 변해버리는 건 순식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과 혼동하게 만드는 게임을 나는 혐오한다. 오늘은 삭풍의 북쪽언덕에서 하티가 출몰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뒤에 루트를 이용해서 하티를 조사해본 결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화, 뇌의 속성공격뿐이라 한다. 수없이 까다로운 몬스터를 잡아본 나로선 그 정도는 우습기 그지없다. “돈이 될 만한 아이템이나 주었으면 좋겠군.” 내가 보스몬스터를 사냥하는 유일한 이유는 돈이다. 어느 게임을 하던지 돈을 벌 목적으로 레벨을 키웠을 뿐이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이 현실에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니까.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 집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항상 술에 찌들어 큰 거 한방을 위한 노래를 했고, 어머니는 그 가난과 싸우느라 어떤 일이든 마다않고 하다 인생을 마감했다. 병명은 영양실조와 폐결핵. 7~80년대에나 걸릴법한 어처구니없는 병으로 어머니는 세상을 등졌다. 그 후, 아버지는 새 처를 두었고 어렸던 나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게임을 선택했다. 새어머니는 내가 돈을 쥐어줄 때만 웃어주었다. 그때 만에 나에게 쌀밥을 주었고 인간으로 대접했다. 어린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 믿었다. 돈을 쥐어줄 때마다 나는 사람으로서 존재 할 수 있었다. 돈을 많이 벌수록 행복해 지리라 굳게 믿었다.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었음을 나는 머리가 커지며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이야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고 있지만 아직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나는 게임을 한다. 저 멀리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이 지역에 자주 출몰하는 은빛늑대라 쉽게 유추한다. 잡몹을 잡을 상황이 아니라 멀리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유저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포위당한건가?” 늑대들의 울음소리로 보아 대략 100여 마리 정도. 아무리 잡몹이라지만 둘러싸인다면 결코 쉽게 이기긴 힘들 거라 직감한다. “저들이 강하다면 살 수 있겠지만.” 그대로 발길을 돌린다. 나 역시 목적이 있으니 만큼 이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하면 안 된다. -크허허허허헝! 순간 발이 멈춘다. 여기까지 들릴 정도의 포효소리. 결코 늑대의 것이 아니다. 어쌔신 길드에서는 분명 무언가 몬스터를 대량으로 학살할 때 하티이벤트가 발생한다고 했다. 그것이 은빛늑대였단 말인가? 나는 속도를 높여 소리가 들린 근원지로 달려간다. 내가 근거리까지 접근해 보게 된 광경은 온통 바닥이 얼어붙어 움직이기 불편한 빙판에 하티가 비대하게 커진 빈들에게 둘러싸여 죽어가는 모습이었다. “은신.” 나의 모습을 숨기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본다. 저 빈들은 소환술사가 만든 것일까. 적어도 중, 상급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거…우리가 나설 필요도 없겠는데.” “그러게.” “박살내주마!” 하티를 막고 있던 전사 중 한 명이 달려들어 하티를 마무리한다. “전투법사에 힐러, 소환술사까지…다재다능하네요.” “아하하…….” 마법사로 보이는 푸른 머리의 가슴께가 파인 천 옷을 입고 있는 여성이 먼저 말하고 나와 같은 금발의 여성이 쑥스럽다는 듯이 웃는다. 전투법사에 힐러, 소환술사라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저 빈들은 소환한 게 저 여성인가. 하지만 저것으로 하티는 죽지 않는다. 다들 눈치 못 채고 있지만 내 눈에는 보인다. 하티의 입자가 서서히 모이고 있다는 것을. - 크허허허헝! 저들도 도중에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한 발 늦었다. 하티의 발길질에 한 전사가 쓰러졌고 다들 놀란 표정을 짓는다. 나는 조금 멀리 떨어져 다시 사태를 지켜본다. 저들은 하티를 잡을 줄 모른다. 그럼 지금 내가 나설 필요가 전혀 없다. 저들이 전멸하고 천천히 상대해도 그만이니까. “압축 준비완료! 하가네!” “네, 누님! 연성진!” 푸른 머리의 마법사가 작은 물의 구슬을 시전 한다. 매우 작아서 멋있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내 직감이 저건 위험하다고 말한다. 마법사는 주문을 외운다. “이걸로 끝이다! 연금 합성 마법, 압착의 수환!(compression of water pills)” 압착의 수환이라 명한 저 물의 구슬은 하티의 입으로 들어가 폭발한다. 진정으로 놀랍다. 그래도 이벤트 보스몬스터라 불리는 하티를 단 한방으로 조각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하티는 죽지 않을 것이다. 저것이 일반 다른 보스몬스터라면 그것만으로 끝났겠지만 하티는 다르기 때문이다. 역시 하티의 몸이 다시 합쳐지기 시작한다. 모두들 질렸는지 서서히 뒷걸음질 친다. 그래, 적어도 멍청이들은 아닌 모양이군. 잡지 못할 상대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건 바보 같은 짓이지. 하지만 한 여성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멍하니 서있는 금발의 여성. 아까 빈을 소환했던 여자다. 그 여성은 뭔가 결심했는지 주문을 외운다. “‘심연의 눈’ 발동.” 깜짝 놀라 순간 은신이 풀리는 걸 간신히 막는다. 저 대기 중에 모이는 어마어마한 기운하며 심연의 눈이라 명한 스킬. 게다가 남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볼 수 있다. 저 붉게 빛나는 오른쪽 눈동자를. 저것은 진실을 꿰뚫어 보는 미카엘(Michael)의 오른쪽 눈동자! 큭큭, 나와 같은 유니크 스킬을 여기서 보게 되다니. 너무 황당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 여자는 대체 누구지? 저 심연의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본다. 아마 하티의 약점도 간파할 것이다. 하지만 저들 팀은 화와 뇌의 속성을 쓸 만한 직업이 없다. 아까 압착의 수환을 보니 저 푸른 머리의 마법사는 분명 수속성위주의 마법사임이 분명하다. 그 뒤에 금발꽁지머리를 한 남자는 철판을 변형한 걸로 보아 연금술사가 틀림없다. 그밖에는 전사들…아무리 심연의 눈을 쓰는 소환술사가 있다고 해도 지금의 파티로는 절대 하티를 잡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그때. “땅은 대지의 양기.” “하늘은 광활함의 천기.” “가운데 서있는 우리는 영원의 우주이니.” “나의 존엄성을 바쳐, 나의 신념을 바쳐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가 되리라.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저, 저 유저는 뭐지? 나조차 알 수 없는 스킬을 발동시킨다. 내가 알기로는 주문이 길면 길수록, 게다가 몸짓까지 요구하는 스킬은 적어도 고유 급에서 신 급까지 속하는 걸로 알고 있다. 바닥에 기이한 문양이 사방 100미터까지 넓어진다. 이것을 밟으면 뭔가 이상이 생기지 않을까 흠칫했지만 적군에게 피해를 주는 마법 진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금발의 여성은 주위 일행들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리기 시작한다. 무얼 할 셈이지? 매우 흥미가 돈다. “그럼 보조에 들어갑니다! ‘태초의 재생’ 발동!” 눈이 부릅떠진다. 힐? 힐러란 말인가? 빈들을 조종하고 심연의 눈을 쓰며 알 수없는 광범위 마법 진을 발현시키는 게 힐러였단 말이야? 내가 전혀 모르고 있던 정보가 있었을 줄이야. 지금 현재 힐을 사용한 유저는 천사족이라 말하는 랭킹 5위의 미소천사밖에 없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럼 저 유저가 미소천사였단 말인가. 금발의 여성은 힐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잘 알고 있다. 전사들과 뒤에 마법사까지 보조하는 타이밍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히 SP를 관리하는 능력. 보조만이라면 나조차 뛰어넘을 컨트롤이다. 몸이 덜덜 떨린다. 자꾸만 입 꼬리가 올라간다. 내가 흥분했나? 내가 지금 저 유저에게 흥분을 느낀단 말인가? 하늘에 작은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이것은 분명 푸른 머리의 여성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군, 뇌 구름으로 하티를 노릴 참인가. 하지만 수속성 마법사, 그 정도의 실력으로 보지 않았는데…아! 저것이었나? 바닥의 마법 진은 마법을 사용하게 해주는 보조역할이었나 보다. 저 마법진이 발현한 직후 모든 팀원들의 움직임이 한결 빨라졌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뒤의 궁수는 화속성 결합을 하다 실패했지만 강철의 화살을 받아 다시 결합시키기 시작한다. 저 화속성 화살과 번개라면 하티도 버티지 못하겠지. 재미있는 작전이다. 보면 볼수록 저 금발의 여성에게 관심이 갔다. 엄청난 스킬을 소유하였으며 그걸 뒷받침하는 임기응변. 성격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유저다. “철 조각이 떨어졌는데염.” “네에에에에에에에에?” 갑자기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연금술사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고 금발의 여성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외친다. “안 돼, 곧 떨어진단 말이에요!” 푸른 머리의 여성이 다급하게 외친다. 그런가, 저 번개를 컨트롤 할 수 없었던 거였어. 그걸 컨트롤 하기위해 연금술사에게 무언가 부탁한 모양인데 아무래도 실패한 모양이군. “화살! 화살로 번개를 끌어와요!” “젠장! 너무 늦었어!” 뒤늦게 다른 방법을 강구했지만 조금 늦었다. 나는 이것이 실패로 돌아갈 것임을 직감한다. - 크허허허허허허헝! 화살에 목이 꿰뚫린 하티가 화가 났다. 저 팀은 모두 죽겠군. 처음 생각했던 목적을 상기한다. 저들이 죽고 하티를 잡으면 그만이다. 재미는 있었지만 그건 저들의 운이 없었다는 것이고 결과가 나쁜 이상 모든 작전은 오만으로 결정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검을 뽑는다. 느긋이 기다리다 잡으면 그뿐인데 나는 왜 검을 뽑은 것일까. 금발의 여성을 본다. 같은 여자였지만 그 뛰어난 미모는 나조차도 감탄할 정도다. 그래, 지금 내가 이 검을 뽑은 이유는 재미있는 구경을 시켜준 보답이라 생각하겠다. “댄싱 멜로디(dancing melody), 파트 원(part one).” 춤을 추듯 유유히 접근하는 나는 물결치듯 자연스러웠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보지 못한다. 바닥의 흐름을 본다. 아직 땅에 스며들은 번개의 기운이 남아있다. 피를 머금어 공격하는 이 스킬이라면 저 번개조차도 머금을 수 있을 것이다. “블러드 멜로디(blood melody).” 역시 익숙하지 않은 것인지 번개가 검을 타고 팔목까지 찌릿하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검을 놓지 않는다. 오로지 보이는 것은 하티의 목. 한 번이면 족하다. 일도양단, 그 무엇이라도 가른다! - 그워어어어어……. 하티가 울부짖으며 서서히 사라져간다. 마치 신기루를 보는 듯 한 이 기분은 이곳이 게임이라는 사실을 자각시켜준다. 바닥에 무언가 작은 아이템이 떨어져 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보스몬스터가 준만큼 무언가 돈이 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줍는다. “다, 당신은…….” 고개를 돌리자 금발의 여성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갑자기 호기심이 든다. 나는 슬며시 웃으며 천천히 다가간다. “내가 잡았으니 가져도 되겠나? 그리고…….” - 짝! 거침없이 손을 올려붙인다. 사실 별 의미는 없다. 저 여성에게 잘못은 없고 지금까지 보여준 모든 것들은 결코 잘못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너의 오만으로 팀원을 죽을 뻔했다. 그 정도면 싼값이야.”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다. 내가 친 이유를 타당성 있게 만들어본다. 과연 어떻게 나올까. “당신이 뭔데 미소천사님을 때리는 건가요? 이제 온 당신은 모르겠지만 결코 오만적인 작전은 아니었어요!” 푸른 머리의 여성이 나서서 조금 짜증이 인다. 나는 한층 더 비꼬며 말한다. “미소천사라…같잖은 힐로 랭킹 5위까지 올라간 병아리인가? 잘 들어라. 아무리 좋은 작전이라 한들 결국 실패하면 좋은 작전이 아니다. 아니면 이 시대에서 과정을 논할 셈인가? 항상 그래왔듯이 언제나 결과만이 중요할 뿐이야.” 내가 말하는 건 머리로 듣는다면 타당한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감정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모순에 불과하다. 허나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이 말을 써먹는다. 역시나 화난 푸른 머리 여자는 내게 다가오려 했고 그걸 제지한 유저는 의외로 금발의 여성이었다. “다 맞아요, 제 실수였습니다.” 그 한마디는 매우 크다. 내부분열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는걸. 역시나 상황이 급격하게 어두워졌고 내부에서부터 빠직 금이 가는 듯 보인다. 푸른 머리 여자는 삿대질하며 말했다. “이익…나는 륀 기사단장 레이나다! 당신! 이름이 뭐야?” “뭐, 뭐?” “륀 기사단!” “대마법기사단의 수장이라고?” 조금 놀란다. 륀 기사단의 수장? 상위 기사단 10위권 안에 든다고 하는 대마법기사단 륀은 나 역시 잘 알고 있는 기사단이다. 허나 놀라는 건 그뿐이다. “너 따위에게 말할 이름은 없다.” “뭐, 뭐!” 상대할 가치도 없다 생각해서 대충 말을 끊고 가려했다. 흥미가 급속도로 식는다. 뭔가 재미없어졌다. 아무리 뛰어난 스킬과 머리가 있다한들 저런 재미없는 성격이라면 랭킹 5위의 타이틀이 오히려 과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내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군. “…이름이 뭔가요.”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때는 순간 작게 들린 말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금발의 여성을 본다. “힐러의 자부심을 뭉개버린 당신을 복수하겠습니다. 그리고 인정받도록 하죠.” 내 내면에서부터 알 수 없는 흥분이 몰아쳤다. 저 자신감, 한 대 맞았음에도 웃을 수 있는 포부. 뭐하나 내 기대에 어긋남이 없다. 아니 오히려 생각도 못했다. 나는 복수심에 불타오르며 화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로리시나다. 적어도 소인배는 아닌 모양이군.” 뒤돌아섰다. 나도 모르게 웃는 걸 들킬 거 같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즐겁다. 게임이지만 이렇게 즐거운 적이 또 있을까? 언제나 목적만으로 혼자서 게임해온 나에게 재미있는 동기를 부여해 준 저 금발의 여성에게 감사를 표한다. 어디 가서 뭐라도 잡고 레벨을 올리고 싶어졌다. 그래야만이 저 라이벌을 확실히 이길 수 있을 거 같기 때문이다.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20일전. 하티사건이 있은 지 어느새 5일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5일 동안 학교와 게임을 병행하던 나는 아무생각 없이 렙업에만 몰두했고 그걸 보상받기라도 하듯 10레벨을 올려 63레벨에 도달했다. 아직 랭커치곤 작은 축에 속했지만 전처럼 쉽게 SP가 고갈되는 사태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나저나 오늘은 드디어 많은 업데이트가 이루어진 금요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기분으로 돌아다녔고 나 역시 특별한 게 있을까 하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중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분주했던 건 상인들이었다. “5개 남았습니다! 모르핀 제국 워프 스크롤 팔아요!” “긴급 처분합니다! 모르핀 제국 워프 스크롤 10골드!” 모르핀 제국 워프 스크롤 경쟁이 한창인 상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업데이트에 가장 큰 관심사가 용자의 대전인 만큼 그 주최국이 모르핀 제국이었으니 너도나도 모르핀 제국으로 가려고 아우성이었기 때문이다. “음, 나도 가고 싶기는 한데.” 유저들의 대결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는 충분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딱히 갈 이유가 없었다. 태식 형이나 현빈 형은 저번에 미소천사 기사단에게 정체를 밝힌 후, 이참에 거대한 기사단으로 바꾸겠다고 내정에 힘썼기 때문에 용자대전은 나가지 않았고, 한나는 워낙에 싸우는 것을 싫어하기도 했고 평화주의자여서 그런지 손사래를 치며 다가오는 유저들을 거부하고 다녔었다. “저번에 보니까 레이나님하고 하가네님은 나간다고 하던데.” 하티사건 때 친해진 저들은 알고 보니 륀 기사단의 수장과 그의 친 동생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내가 륀 기사단을 잘 몰랐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었는데 태식 형에게 말하니 현존하는 기사단 중에 제일이라 꼽히는 마법 기사단이며 전 기사단 10위권에 드는 대 기사단을 몰라봤냐는 둥, 동맹을 안 맺고 그걸 그냥 보네냐는 둥 참으로 많은 질책을 받아서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뒤늦게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이번에 용자대전에 출전한다고 했다. 나를 끌어들이기 위해 업데이트 하루 전까지 권유하다 결국 포기했었는데 덕분에 알 고 있는 정보였다. “용자대전이라.” 아펜하르트가 오픈한 뒤로 처음 벌이는 공식 PVP 대전이기도 했고 다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는 자리인지라 나 역시 그 자리에 서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유저로서 당연한 호기심일지도 몰랐다. 그런 당연한 특권을 나는 누리지 못했다. 지금 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도 참여하지 못할 것이었다. “누나를 설득해야하나.” 조금 무섭기는 하지만 누나의 몸을 해킹해서 플레이 하고 있는 것 차체는 그다지 큰 잘못은 아니라고 본다. 아니, 큰 잘못인가? 아니다, 그래도 가족인데 정말 죽이기야 하겠는가? 하지만 이 몸으로 벌써 많은 짓을 저질렀는데? 그래도 누나의 성품은 착하지 않은가. 아니, 조금 괴팍하기도 하지만…젠장, 이러다 끝이 없겠다. 하지만 이 방면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해야겠다. 일단 태식 형한테 도움을 요청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이것부터 해볼까?” 손에 호두알만한 씨앗을 만지작거렸다. 이것은 5일전에 태식 형한테 부탁해서 겨우 구한 씨앗이었다. 다른 판타지에서는 부활의 씨앗이라고도 불리는 위그드라실의 씨앗이다. 여기서는 부활까진 아니더라도 대폭 MP와 스태미나를 올려주는 포션 역할의 씨앗으로 남아있었다. 그런 씨앗을 왜 내가 들고있느냐 하면. “흐흐, 과연 무엇이 자라날까.” 나의 태초의 재생 특성을 이용하여 이 씨앗을 키울 생각을 가진 것이다. 전에 빈을 대폭 자라게 만든 사건이 있은 후, 그동안 여러 가지 실험을 사용해 보았다. 빈은 어디까지 자라게 될까 끝없이 태초의 재생을 주입해보기도 했고, 다른 식물 몬스터에게 시전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일정 크기로 자라던 빈은 내부에서 썩기 시작하더니 바짝 말라버렸고 식물 몬스터 또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면 폭발하거나 빈처럼 말라버리는 식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즉, 자신의 생체 능력을 뛰어 넘을 정도로 재생 시키면 한계에 달아 죽는 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하지만 그 한계가 없는 이 씨앗이라면…….” 이 세계에서는 단 한그루밖에 존재하지 않는 루시아니안 나무의 씨앗인 이것은 북유럽신화에 나오는 세계수 위그드라실(Yggdrasil)을 본떠서 만든 것이라 단정한다. 비록 지금 이 나무가 어디에 존재하는 지조차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세상에는 이 씨앗이 분포되어 있고 돈만 있다면 어렵사리 구할 수 있는 씨앗이기도 했다. 그런 씨앗을 나는 키우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다른 식물과는 다르게 그 한계가 끝이 안 보이는 이 식물은 보통방법으로는 절대 자라지 않기 때문에 그저 일회용 포션용도로 다들 사용하지만 나에게는 태초의 재생이 있었다. 태초, 모든 자연의 조율자로 알려진 드루이드의 마법으로 훗날 숲을 숭배하던 위치들에 의해 마법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게 됐다고 설명되어 있는 이 태초 드루이드 재생은 위치의 재생과는 다르게 더욱 순수한 자연을 담고 있으며 그 힘 또한 강하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이 힘이라면 분명히 이 씨앗도 자라게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재생을 넣어 봐도 이상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단 말이지.” 들고 다니며 틈틈이 태초의 재생을 씨앗에 주입시켜봤지만 전혀 자라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이 상태로 막연히 넣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일까? 역시 땅에 심고 재생을 넣어주어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딱히 터로 잡을 땅이 없으니 원.” 나만의 공간이 전혀 없었던 이유로 지금껏 나는 이 씨앗을 묻을 땅을 찾고 있었다. 여러 곳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딱히 좋아 보이는 땅이나 유저가 뜸한 곳이 없었기 때문에 포기해야하나 고민까지 될 정도였다. 그때 통신구슬에 연락이 왔다. {언니, 어디세요!} 목소리를 들어보니 한나였다. 나는 통신구슬을 입가에 대고 말했다. “광장부근인데? 무슨 일 있어?” {어서 기사단 뜰로 오세요! 태식 오빠하고 현빈 오빠가 싸우려한단 말이에요!} 엥? 싸우다니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나는 피식 웃으며 말도 안 된다고 부정했다. “태식 형은 몰라도 현빈 형은 싸울 분이 아닌데? 작은 트러블이라도 생겼나?” {지금 기사대전을 하려한단 말이에요!} 기사대전?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이다. 이건 분명히. 유저들의 추천 명예 시스템을 폐지하고 기사의 정식대결이란 시스템을 업그레이드 한다! 모든 명예랭커들은 한단계위에 랭커유저와 정식적인 기사대전을 벌일 수 있다. 방법은 자신의 신념을 말한 뒤, 각자 한 명 이상의 증인을 새워두고 있어야지만 대결이 성립 가능하다. 고로, 암습은 인정되지 않는다. 또한 보조위주의 랭커들은 대결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기 때문에 대결방식을 바꾸는 방법이 합당한 조건하에 부여된다. 대결은 자유! 유저들이여, 명예를 바라는가? 자신만의 신념을 세워라! 그래! 업데이트 목록 중에 하나인 걸로 알고 있는 기사대전이었구나. 그런데 그걸 왜 그 둘이 하느냔 말이다!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말인가. 나는 헐레벌떡 미소천사 기사단으로 뛰어가야만 했다. 내가 기사단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기사단 유저들이 두 명의 랭커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이렇게 많은 유저들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말 한마디 안 들리는 조용함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여기에요 언니!” 한나에 부름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갔다. “어, 어, 미소천…타테님이다.” “타테님 오셨군요!” 어느 유저가 실수하려던 것을 나는 째려보며 친히 정정해 주었고 그러자 다른 유저들도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그동안 기사단에서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는 분명히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나의 비밀은 다 알려진 후였고 내가 세간에 밝히기를 꺼려한다는 사실을 알고 태식 형과 현빈 형의 주도아래 공공연한 비밀로 지내왔던 것이다. 그래서 인지 우리 기사단은 10위권의 랭커가 3명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유명하다거나 명성이 자자한 길드 축에는 끼지도 못한 기사단으로 남아있었다. 허나 과연 이 상황이 언제까지 가련지. 내가 한나에게 다가가 싸운다는 두 랭커를 보게 되자 딱히 싸운 다기 보다는 즐겁게 대화하고 있다 생각이 들 정도로 둘만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는 걸 볼 수 있었다. “두 분 싸운다면서요?” “오, 왔냐?” “오셨군요, 타테님.” 친절하게도 답례까지 해주신다.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한나를 돌아보았고 한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우물쭈물 거리며 말했다. “그게 언니가 그동안 렙업에 몰두하셨잖아요. 그때 나온 얘기였어요. 과연 두 분 중 이 기사단에 어울리는 단장이 누구여야하나의 문제로. 현빈 오빠는 당연히 자신이 빠진다고 얘기했는데 태식 오빠가 이번 업데이트 때 랭커간의 대전을 기해 정식으로 대결을 원한다고 하셨지 뭐에요.” “뭐?” 랭커에 대해서 예민한 저 사람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 생각은 들었지만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줄 정도로 자기만 생각하던 사람이었던가? 내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태식 형을 보자 형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번 업데이트로 명예랭커 1위부터 100위는 기사단을 개설 시 기본 300명에서 최대 1,000명까지 기사를 받는 수가 대폭 증가한다고 했다. 슬슬 우리 기사단도 커야할 때가 되었다고 봐. 그래서 지금의 현재 위치를 재점검하기 위해 나는 기사대전을 원한 거다. 현빈 형, 슬슬 구경꾼도 다 모인 듯 하니 시작하죠.” 현빈 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멋쟁이님과 한판 붙어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걸요?” “저는 어느 정도 예상 했는데요? 현빈 형.” 주위를 감싸고 있는 미소천사기사단 전원은 무거운 공기에 침을 꿀꺽 삼켰다. 태식이 형은 검을 천천히 세우며 말했다. “손끝에 맺은 결심은 곧 다짐이 되리라. 이번에 만든 신념인데 그럴듯하죠?” 조이님은 화살을 메기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나는 길이요, 하나는 나의 모든 것이다. 랭킹 6위 일발필중, 어둠의조이. 기사대전을 수락합니다.” 그 둘의 대결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선수필승!” 태식 형은 시작과 동시에 검으로 날아올 화살을 경계하며 달려 나갔다. 그와 동시에 뒤로 백스텝을 밟으며 거침없이 화살을 쏘는 현빈 형. - 티티티티티팅! 짧은 순간 얼마나 많이 쏘았던지 현빈 형의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태식 형은 그런 화살들을 몇 개는 피하고 나머지는 검으로 막으며 여전히 앞으로 달렸다. “헛!” 정면으로만 날아오던 화살들이 갑자기 포물선을 그리며 위, 옆, 때로는 언더핸드처럼 아래에서 날아오기도 했다. 그러자 방향을 가늠할 수 없게 된 태식 형이 헛숨을 삼켰고 걸음을 멈춘 채 분주히 막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 엄청난 검 놀림이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들을 단 한 발도 몸에 허용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미소천사 기사단원들은 모두 허무한 탄성을 내질렀다. “하앗!” 태식 형이 한순간 검을 길게 가로로 긋자 뭉텅 화살이 잘려나갔고 그 타이밍을 노려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깜짝 놀란 현빈 형은 재차 화살을 재려다 손으로 한 뭉텅이 화살을 꺼내 일격을 막아내었다. “허, 화살로 검을 막다니.” 여러 개의 화살을 사선으로 미끄러트려 어렵사리 검을 흘리는데 성공하자 궁수 차림의 기사단원이 넋을 잃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태식 형은 아랑곳 하지 않고 검을 연속으로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현빈 형이 전부 다 검을 피하기 시작했다. 매우 작은 움직임만으로 검을 피하는 현빈 형. 옷자락이 서걱서걱 잘리는데도 불구하고 차분한 눈으로 검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아아앗!” 태식 형이 잠깐의 틈을 발견했는지 기합을 발하며 목 언저리를 향해 빗살 같은 속도로 검을 찔러나갔고, 순간 현빈 형이 눈을 번쩍 뜨며 허리춤에서 화살을 꺼내 아래에서 위로 찔러나갔다. 멈칫. 한 순간 찾아오는 고요한 정적. 손에 땀을 쥔 건 과연 나뿐일까? 내가 침을 한 번 꼴깍 넘기는 시간이 지나자 각자의 목 언저리에 날카로운 무기가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두 괴물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일단…연습게임은 무승부인가요?” “그런 모양이네요, 멋쟁이님.” 천천히 서로 무기를 거두며 일정한 거리를 두는 두 유저. 그들의 걸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사방은 조용했다. “저게…연습게임이라고?” “세상에 저렇게 몸 푸는 유저가 또 있을까?” “……….” “……….” 나를 포함한 주위 모든 미소천사 기사단원들은 어이없음에 말문이 막혔다. 어깨를 몇 번 돌리던 태식 형은 현빈 형을 째려보며 외쳤다. “그럼 다시 갑니다!” “얼마든지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인 현빈 형이 몸을 살짝 낮추며 긴장했다. “블레이즈 댄스!” 드디어 스킬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예전 둠터틀을 잡을 당시 보았던 스킬이었다. 아마도 대폭 스피드를 증폭시켜줄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곳마다 불꽃이 일어 자신만의 필드를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저것이라면 아까와 다르게 더 빨리 접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폭시, 스턴 샷.” - 투, 투앙! 하지만 현빈 형도 아까와 다르게 속사를 포기하고 강한 한 방을 날리기 시작했다. 폭발의 위력과 스턴을 주는 화살 두 개가 공기를 가르며 태식 형에게 날아갔고 태식 형은 가까스로 하나를 피했지만 엄호하듯 날아오는 두 번째 화살은 피하지 못하고 검으로 막아야했다. “큭.” 운 없게도 두 번째 화살이 스턴을 머금은 화살인 모양이었다. 잠시간에 시간을 벌자 현빈 형은 뒤로 멀찍이 물러나며 이번엔 한꺼번에 세 개의 화살을 재었다. “폭시, 스턴, 관통 샷!” - 파앙! 공기가 터져나가는 듯 한 소음이 들렸다. 자신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날 정도의 엄청난 위력을 담은 것이었다. 태식 형은 멍하니 화살들을 바라보고 있다 한순간 씨익 웃으며 손을 뻗었다. “파이어 볼!” “아앗!” “그, 그렇구나!” 순간 손에서 쏘아져 나간 파이어 볼 세 덩이가 화살들과 같이 터져나갔다. 우리들은 모두 탄성을 내질렀다. 모두 지금까지 기사가 궁수를 상대하는 전법을 꾸준히 사용해 태식 형의 직업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마법과 기사의 조합을 성공한 마검사였던 태식 형은 애초에 화살을 막을 방법이 따로 있었다. 허나 지금까지 이것을 보여주지 않았던 이유는 지금같이 한 순간의 방심을 위한 것! 태식 형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달려 나갔다. “크윽, 스턴 샷!” “어림없습니다, 파이어 볼!” 급했던 마음이었을까. 현빈 형은 포물선을 이용하기는커녕 일자로 활을 쏘았고 태식 형은 이젠 한 번 보여준 기술이었으므로 꺼릴 것 없는지 다시 사용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 현빈 형이 웃고 있는 모습을. 순간 화살은 파이어 볼을 피해 태식 형의 어깨로 날아갔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기술. 꼭, 살아있는 듯 한 화살의 움직임에 우리들은 모두 입을 벌렸다. “이런!” 스턴 샷의 위력은 아까 맞아보았던 당사자였기에 잘 알고 있던 태식 형은 눈을 질끈 감으며 충격을 대비했다. 하지만 화살은 허무하게 검에 맞아 튕겨나갔다. “스턴 샷이…아냐?” 태식 형이 멍하니 튕겨나간 화살을 보았고, 현빈 형이 다시 멀찍이 떨어지며 답했다. “…취소 컨트롤 샷.” “……….” “……….” “……….” 흥분을 넘어서 몸이 싸늘하게 식어 감을 느꼈다. 옆에 한나를 슬쩍 보니 한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지 눈을 크게 뜨고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만큼 저들의 두뇌싸움은 일반 유저들의 상식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감추어 두었던 마법적 스킬이나 방심한 척 위장하고 컨트롤 샷을 스턴 샷으로 속여 날린 배짱이나 따지면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승부였다. “랭커의 싸움이 원래 이 정도였어?” “우리 기사단에 엄청난 인물들이 있었구나.” “하하, 이거 렙 올리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 하는데?” “이거 보고 같이 사냥가자.” 하나 둘 허탈한 말로 시작해 기사단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거 속아버렸는데요? 하지만 재미있습니다.” 갑자기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씨익 미소 짓는 태식 형. “오, 저 남자다움, 멋지다!” “저것이 랭킹 8위의 마음가짐인가.” 다들 하나 둘씩 우상을 바라보듯 칭찬하기 일쑤였다. 저 인간…분명 매혹을 발동시킨 게 분명해! “서로 진정한 힘을 발휘하지 않았으니 다시 가야겠죠?” “사실 저는 조금 부담이 됩니다만?” “저는 현빈 형님의 그런 모습이 가장 두렵습니다. 화이어 블레이드.” 태식 형이 드디어 검에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마검사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화이어 블레이드를 꺼내자 기사단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화이어 블레이드다!” “저것이라면 스턴 샷도 무용지물일거야!” 기사단원들의 말을 듣던 현빈 형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검의 힘을 보니까 기사단원들의 말마 따라 스턴 샷은 통하지 않을 거 같네요.” “하지만 이미 생각해 둔 방법이 있겠죠?” “물론이죠. 폭시, 폭시, 폭시!” 이번에는 현빈 형이 먼저 나섰다. 속사로 날린 폭시들이 바닥을 두드렸고 바닥의 모래들과 먼지가 한 대 뒤엉켜 사방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멀찍이 떨어져있던 우리들은 그다지 피해가 없었으나 정작 싸우는 두 유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애타기 시작했다. “확실히 저 방법이라면 천리안이라 부르는 궁수가 유리하겠지.” 예전 현빈 형과 처음 만날 당시 고요의 숲으로 사냥 갔을 때였다. 빽빽이 둘러싸인 나무들 너머 드래곤플라이를 발견하고 정확히 화살을 맞히던 현빈 형의 모습은 궁수의 시야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럴진대 그곳에 비해 이런 근거리 모래층 따위야 현빈 형의 시야를 가리긴 힘들 것이었다. “스턴, 폭시, 스크류, 관통, 컨트롤 샷!” 모래안개 속에서 현빈 형의 외침이 들려왔고, 뒤이어 화살이 쏘아져나가는 소리와 그것들이 검에 막혀 튕겨나가는 소리만이 가득해졌다. “어, 엄청난 속도다.” “마, 말도 안 돼. 저들의 마나는 끝이 없는 건가?” “난, 내 캐릭터에 대한 회의감이 들어.” “젠장, 보이지가 않으니 답답하네!” 한동안 계속되는 저 소리에 기사단원들이 경악하며 한 말이었다. 확실히 슬슬 한계에 도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없이 사용한 현빈 형의 스킬난사는 이미 SP를 고갈시키고도 남을 양이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걸 보면 아마도 여기서 확실한 승부를 보겠다고 다짐한 것이 분명했다. 순간 그때. “타올라라, 몸이여. 불살라라, 마음이여! 인화(人火)!” 갑작스런 돌풍에 모래들이 사방으로 흩날려 사방이 확 트였고, 우리들은 두 유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부, 불타오르고 있어!” “마, 맙소사!” 저 모습은 형의 최고의 스킬이라 생각되는 인화였다. 내가 알기로는 MP를 지속적으로 소비해 짧은 순간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는 스킬로 알고 있는데 최후의 스킬을 지금 사용한 것을 보면 그 정도로 위험했다는 소리일 것이었다. 확실히 태식 형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팔뚝에 박힌 화살이 두 개, 허벅지에도 한 개가 박혀 있었고 몸 여기저기 잔 상처와 찢어진 옷이 나풀거렸다. 모래안개 속에서 엄청난 핀치에 몰렸던 것이리라. 허나 현빈 형도 그리 나은 상황은 아니었다. 한쪽 무릎을 꿇어 숨을 고르지 못하는 걸 보니 SP가 한계에 달아 피드백에 당한 것이 분명했다. “하아, 하아. 여기서 끝을 보려 했는데 실패했군요.” 현빈 형이 매우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고 태식 형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허탈하게 답했다. “헉, 헉. 농담안하고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하아, 하아. 그러려고 쏜 거니까요…그럼 이게 마지막 승부가 되겠군요.” 현빈 형은 숨을 고르면서 무엇을 준비했는지 힘겹게 화살을 태식 형에게 겨누었다. 그 화살은 암흑의 기운을 뿜으며 천천히 활촉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필멸의 화살…….” 내가 읊조리자 기사단원들이 모두 나를 보았다. 피드백 상태에서도 암흑속성 결합을 성공했단 말인가? 야켄은 생명의 희생과 태초의 재생을 받으면서도 실패하던 결합 화살을 SP가 거의 고갈된 상태에서 피드백당하면서도 만들어냈단 말인가? 내 등줄기의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태식 형이 검을 고쳐 잡으며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상태로 저걸 막으라니…괴물입니까, 형님은?” “그 상태로 인화를 쓴 멋쟁이님이 하실 말씀은 아니라고 봅니다만…….” 둘은 지친표정으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진짜 멍청이들이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입매는 웃고 있었다. 이래서 전사들이란…….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행동했다. “세상조차 가르는 필멸의 화살(Arrow of Mortality)!” “인화, 최대치다!” - 콰콰콰콰콰콰콰콰콰! - 화르르르르르르르륵! 암흑을 머금은 화살이 바닥의 모래를 가르며 날아갔고 태식 형의 몸은 완전히 불로 화해 정면으로 부딪쳤다. 진정한 한방승부였다. 여기서 누가 이기느냐가 승패를 좌우할 것이리라. “이아아아아아아앗!” 암흑의 물결과 불꽃의 혀가 서로 뒤엉키는 가운데 태식 형의 외침이 두 힘의 방향을 기울였다. “하아아아아아아앗!” 이미 사라져버린 인화. 온몸이 불에 그슬려 이미 쓰러졌다 해도 하등 이상 할 게 없는 상태였지만 태식 형은 오로지 현빈 형이 있는 곳만을 달려갔다. 마지막 최후의 일격. 이 승리는 태식이 형이 차지한 것이다. 거칠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드는 검. 그 선은 아무런 거슬림 없이 현빈 형의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갈라버렸다. “……….” “……….” 주, 죽였다. 우리들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태식 형조차도 놀라버렸다. “누, 눈빛이 살아있었어. 분명 피할 줄 알았는데……!” 태식 형이 당황해하는 순간 갈라졌던 현빈 형의 모습이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 뒤에서 현빈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쿨럭! 일루젼.” 입가에 피를 토하면서도 현빈 형은 손에든 화살을 태식 형 목 언저리에 가져다 대며 씨익 미소 지었다. “이, 일루젼?” “마, 마법사의 스킬이잖아?” “어, 어떻게!” 나는 잘 몰랐던 스킬이었지만 다른 유저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모두 침을 꿀꺽 삼키며 두 랭커를 보았다. “일루젼이라니…하하, 완전히 당해버렸네요. 제가 졌…….” “…쿨럭! 아쉽게도 이 게임은 제 패배군요…….” - 털썩. 태식 형이 허탈하게 검을 놓으려던 순간, 현빈 형이 쓰러지고 말았다. 완전히 탈진한 모양이었다. 나는 황급히 달려가 두 랭커에게 태초의 재생을 시전 해주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움직이려는 유저가 없었다. 아니,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겠지. 전부 굳은 것이다. 이번 대결을 보고……. “아야야, 온몸이 쑤시네.” “그러게 누가 그런 짓을 하래요?” “하하하.” “현빈 오빠도 웃고 있을 때가 아니거든요?” “네……” “네…….” “킥킥킥.” 거의 죽다 살아난 두 명은 차가운 내 말투에 고개를 푹 숙였고, 그 모습이 너무 웃겼던지 한나가 킥킥 거렸다. 그러게 누가 무식하게 죽자 살자 싸우래? 기사대전이 끝난 후, 거의 쓰러져가던 태식 형이 우리들을 최상층 응접실로 불렀다. 정확히 말하면 그곳까지 한나하고 내가 어깨를 잡고 끌고 갔다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만 일단 말로는 불렀으니 넘어가겠다. 나에게 있어서 이곳은 익숙한 장소였다. 단장의 작업실이기도 했고 응접실대용까지 하고 있는 장소여서 친분이 있었던 우리들은 매일 드나드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뭐 때문이에요?” “응?” 내가 툭하고 묻자 태식 형이 모른척하고 되물었다. 살짝 놀란 표정을 이미 보았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말했다. “괜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란 걸 아니까하는 소리입니다.” 태식 형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짜 애인도 아니면서 어떻게 내 성격을 아냐? 그런 말 말아라. 정말 소연이 같아서 무섭다야.” “네? 정말 소연이라뇨? 꼭, 소연 언니가 가짜라도 되는 말투같…….” “태, 탤런트 말한 거야! 탤런트! 그렇죠, 오빠?” 내가 얼굴을 사정없이 구기며 호응을 원하자 태식 형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쩝, 뭐, 그런 거지.” 저, 저 협조적이지 못한 머저리! 내가 속으로 온갖 욕을 씹고 있자 현빈 형이 한 손을 들어 관심을 집중시켰다. “아무래도 본론으로 가기에 힘들어 보이니 이번 일에 대해선 제가 말하도록 하죠. 멋쟁이님과 제가 기사대전을 하게 된 이유는 길드를 부흥시키기 위한 초석이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초석이요?” 내가 되묻자 태식 형이 턱을 괴고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초석이다. 너 말마따나 내가 미쳤다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스킬들을 다 까발렸겠냐? 전부 다 미래를 위한 거야.”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 기사대전이 기사단을 부흥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거였을까? 어째서 초석이 되는 걸까? “기사단이 크게 되기 위해선 그만큼 강한 구심점이 필요합니다. 저희들은 이번 대결로 증명한 셈이죠.” “왜 그걸 오늘 한 거죠?” 현빈 형은 손가락을 세우며 답했다. “얘기야 전부터 멋쟁이님과 해왔던 거지만 기다린 겁니다. 업데이트를요.” “작은 계기가 필요했어. 우리들이 강함을 보여줄 수 있는 타당한 계기가.” 현빈 형의 말을 듣던 태식 형이 보완했다. 나는 그제야 조금 이해했다. 태식 형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지금도 밖에는 기사단원들이 모여 있겠지? 그럼 모두 나가자. 아직 끝이 아니야.” “뭐 하려고요?” “따라 와보면 알아.” 태식 형은 일방적으로 말하고 나가버렸다. 현빈 형은 뭔가 알고 있는 듯 미미한 미소를 그리며 따라 나갔고 영문을 모르던 한나와 나만 무겁게 발을 옮겼을 뿐이었다. “다시 나오셨다!” “오오오!” 뜰로 나가자 확연히 틀려진 분위기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뭐랄까, 다들 눈빛이 초롱초롱하다고나 할까? 전에는 여타 다른 게임에서 볼 수 있는 자유분방한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어미닭을 찾은 병아리들이 하나둘 종종거리며 따라오는 듯 한 모습이었다. “모두 이렇게 기다려줘서 고맙다. 이번 기사대전으로 인해 나는 명예랭크 6위가 되었다.” “오오오오오! 축하드립니다, 단장님!” 모두들 대단하다며, 축하의 박수를 쳤고 한동안 가만있던 태식 형이 슬슬 잦아질 무렵, 손을 들며 다시 집중시켰다. “하지만 기사대전을 위해 이렇게 모두를 소집한 게 아니다.” 기사단원 전체가 의문이 생긴 듯 여기저기 웅성거렸고 태식 형은 재차 말했다. “슬슬 꼭꼭 숨기던 날개를 펼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들은 지금까지 랭커를 숨기고 팬클럽으로 성장해왔다. 허나 이번 업데이트를 계기로 드러낼 때가 온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 기사단이 엄청난 기사단이라고 말해도 되는 건가?” “오오, 미소천사님이 우리 기사단에 있다고 말해도 되는 거야?” “답답해 죽는 줄 알았었는데 잘됐네.” 그동안 참아온 당신들이 참으로 대단 하십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후드를 더욱 푹 눌러썼다. 그때 기사단원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저 사람은 전 단장이었던 사람이다. 아, 그래. 원빈이라고 했지. “저희는 미소천사님을 따르는 팬클럽입니다. 애초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전투기사단으로 만들려는 겁니까?”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공식적으로 태식 형은 미소천사 즉, 내가 단장이 되기 전까지 맡기로 계약했던 임시 단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태식 형은 엄청난 랭커의 유저였고, 내가 기사단 단장 직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암묵적으로 태식 형이 정식단장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기사단이 미소천사 팬클럽이었단 사실은 어영부영 넘어갈 리 없었다. 태식 형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물론 미소천사 팬클럽기사단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씨익 미소 지으며 재차 말했다. “하지만 이런 결정은 내 독단으로 한 게 아니다. 여기, 미소천사의 의견이라면?” 태식 형 뒤에서 멍하니 듣고 있던 나는 순간 내 쪽을 향한 손가락에 경악했다. “네에에에에에?” 난 분명 모르는 일이다. 아니 생각한 적도 없다. 그런데 미쳤다고 내가 그런 말을 할까. “네 진실 다 까발린다?” “……….” 나에게 소곤 말하는 태식 형. 나야 입술만 잘근잘근 씹을 수밖에. 태식 형은 그런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던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기사단원들에게 말했다. “여기, 미소천사 타테는 팬클럽이 더욱 커다랗게 부흥하길 원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방관일색이었던 타테는 사실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뜻을 저버릴 것인가!” “그, 그런 깊은 생각이!” “사랑해요, 미소천사님!” 깊이 생각한적 없거든요? 게다가 남자에게도 관심 없습니다. 못들은 걸로 하죠. 원빈 전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했다. “기사단이 부흥하길 꺼릴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안이 있습니까?” 태식 형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답했다. “그 구체적인 방안을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이번 업데이트에서는 명예랭커 1위부터 100위는 기사단을 개설 시 기본 300명에서 최대 1,000명까지 기사를 받는 수가 대폭 증가한다고 했다. 지금 우리 최고의 랭커는 몇 위지?” “그야…….” “멋쟁이단장님이 6위고 미소천사님이 단장이라면 5위?” “그, 그럼 적어도 900명 까지 기사를 확보할 수 있다는 거야?” “지금 100명이니까…몇 배로 불어나는 거야? 허허.” 생각지 못한 부분에 놀라 기사단원들은 모두 탄성했고 태식 형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 우리 기사단은 충분히 발전할 큰 그릇을 가지고 있다. 이제 그곳에 물을 채울 때인 것이다.” 원빈 전단장이 다시 손을 들었다. “제가 단장을 해봐서 하는 말입니다만 100명도 모으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800명을 무슨 수로 다 모을 겁니까?” 태식 형은 그 역시 생각해둔 게 있었던 모양인지 바로 답했다. “오늘부로 무한 기사단대전을 시작하면 된다. 그럼 기사단랭크가 오를 것이고 명성을 쌓는 동시에 그만큼 단원수도 증가하겠지. 더불어 1위부터 10위 이내에 들게 되면 너희들이 원하던 수호정령을 얻을 수 있지 않나?” “마, 맞다! 수호정령!” “그러고 보니 까먹고 있었네?” “천사는 꼭 얻어야지!” “난 찬성! 찬성! 무조건 찬성!” “미소천사님 사랑해요!” 마지막에 연설취지에 맞지 않은 말이 들리긴 했으나 시답지 않은 말이니 넘어가도록 하겠다. 태식 형은 이제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모두를 죽 훑어보다 우리들을 옆에 세웠다. 뭔가 불안하다. 심히 불안했다. 내 이런 예감은 꼭 들어맞아서 몹시도 불편했다. “기사단대전을 하기 위해서 이제 병단을 나누겠다. 병단은 세 개. 각각의 병단 단장은 나하고, 랭커 8위의 일발필중 어둠의조이, 그리고 랭커 5위의 타테가 맡기로 한다.” “내가 미쳤냐아아아아!” 내가 소리 지르자 순간 사방이 조용해졌다. 소리를 너무 크게 지른 것에 대해 급 후회감이 몰려왔으나 이미 저질렀으니 할 수 없었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었다. “왜 병단을 나누는데! 아니, 그 이전에 내가 왜 그 병단의 단장이 되어야 하는데!” “1위부터 10위까지는 ‘전장의 지휘관’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거 모르냐? 그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유저가 3명이나 있는데 써먹어야 이득 아냐?” 본적 있는 내용이었다. 내가 알기로 그 스킬은 분명, 사용할 경우 자신을 포함한 주위 50미터 간격에 포함된 기사단은 모든 능력치 5%~15% 상승한다고 했었다. 그러니 당연 각각의 병단을 만들어 쉽게 이용하는 편이 이득이기는 했다. 머리는 이해가 갔다. 하지만 여건이 따라가질 못한단 말이다! “안 해, 못해, 절대 안 해!” 내 단호한 거절에 태식 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외로 쉽게 포기했다. “그럴 줄 알았다. 어차피 너는 기사단대전에도 안 나올 거잖아. 네가 맞는 병단은 비밀결사단정도로 숨겨둘 예정이었으니까 일단 이름이라도 달기만 해라. 공식적으로는 나하고 현빈 형이 나설 거다.” “그것도 싫은데?” “한나야, 너에게 깊고 심도 있는 대화를 하고싶어졌…….” “왁왁! 하면 되잖아!” 나는 요즘 왜 이리 당하기만 하는 걸까? 한나가 뭔가 궁금해 하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태식 형에게 작게 말했다. “정말 이름만 다는 거지? 나 절대 안 나설 거다?” “두말하면 소연이지.” 그거 꽤나 무서운 말입니다만. “미소천사님 있잖아…….” “역시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많은 거 같지?” “난 친숙해서 좋은데?” “하지만 신비감이 좀 떨어지지 않나?” “그래도 전 사랑합니다!” 나는 기사단원들이 숙덕거림을 들으며 그날을 마감해야했다. 미소천사 기사단, 훗날 재편성하여 아펜하르트에 이름을 떨칠 엔젤단이 되는 최초의 계기가 이렇게 막장으로 시작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19일전. 다시 돌아온 토요일. 아침부터 나는 게임 상에 접속해 하염없이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오후인가?” 동쪽에서 떠오른 태양이 어느새 내 머리위에 달려있었다. 이놈의 게임은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내 땀으로 땅이 축축할 정도다. 이런 건 굳이 구현하지 않아도 될 텐데. 괜한 불만만 생각하게 만드는 더위였다. “하암, 태초의 재생.” 땅에 태초의 재생을 시전하자 녹색 빛이 천천히 땅으로 스며들었다. 뭔가 SP를 먹긴 하는데 여전히 반응은 없음. 이것도 이제 익숙해져서 별 감흥도 오지 않았다. 내 방법이 잘못된 걸까? 이놈의 씨앗은 아예 자라지 못하게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포기해야하나.” 무심한 땅을 향해 깊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나무 터로 자리 잡은 곳은 우리 기사단 뜰 한 가운데 였다. 무난히 큰데다가 이곳이라면 터치할 자도 없기 때문이다. 어제 비밀결사단 단장으로 취임되는 걸 이용해 이곳에 씨앗을 심어도 된다는 확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여기 틀어박혀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세상에 한그루밖에 없다는 나무가 또 자랄 리가 없지. 내가 너무 황당한 생각을 한 걸지도 모르겠다, 태초의 재생.” 이젠 자포자기 한 마음으로 태초의 재생을 넣어주는 순간이었다. <‘대지의 축복’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엥? 이건 뭐야!” 갑작스런 스킬생성에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스킬이 생성되는 건 오랜만이었다. 더불어 내 얼굴이 구겨진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열려라, 나의 잠재된 힘이여!” 1. 천상의 매혹(패시브) - 미소는 천상의 미소이며 목소리는 가희 천사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지어다. 매력 대폭증가, 인덕 대폭증가, 카리스마 대폭증가, 모든 자가 업신여기지 못하며 우러러 보리라. 2. 침묵의 절규(패시브) - ‘고성방가’, ‘침묵의 웃음’에서 변형된 상태. 목소리가 닿는 모든 생명체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고 직접 당한 자는 3초간 스턴 상태를 주며 5% 확률로 버서커 상태가 된다. 단, ‘침묵의 절규’ 발동 시, 약간의 스태미나와 SP가 하락하며 2분의 대기시간이 있다. 수가 많아질수록 하락하는 수치도 증가된다. 3. 무기속성 주입(액티브) - 8개 모든 속성을 주입시킬 수 있으며 오직 무기에만 속성 주입이 가능하다. 시간은 3분 동안 유지되며 지능, 정신력, 탄력이 높을수록 시간과 능력이 올라간다. 월(月) : 몬스터 자아의 문으로 사용된 륀(달)의 기운으로 월 속성 몬스터에게 공격 시 MP 재생효과 20%증가, 자아를 심는다. 그밖에 몬스터 공격 시 재생효과 20% 감소.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암(暗) : 빛족 / 천족 공격 시 5%확률로 절명 시키며 10% 확률로 치명타, 암의 보호로 인해 피드백 확률 10% 감소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화(火) : 식물형 공격 시 5%확률로 절명 시키며, 그밖에는 초당 20의 지속 데미지를 준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수(水) : 인간형 몬스터에게 10% 확률로 결빙효과가 주어지며 매 공격 시 상처부위는 결빙되어 스태미나가 하락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목(木) : 수(水)속성 몬스터에게 공격 시 자연의 기운이 깃들어 스태미나 및 체력이 흡수된다. 몬스터가 죽을 경우 흡수한 체력을 가진 식물 몬스터 생성.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금(金) : 강철화 시켜 방어력이 10%증가, 이동속도 15%저하.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토(土) : 독 속성 몬스터에게 추가 데미지 10%, 그 독을 흡수하여 다시 토의 기운을 불어넣을 때, 독을 간직한 채로 발동한다. 1회 사용가능.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천(天) : 언데드 / 악마 몬스터 공격 시 5%확률로 절명 시키며 10% 확률로 치명타, 빛의 보호로 인해 일시적인 방어력이 증가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4. 올 원소 친화력(패시브) - 8원소의 조화를 깨우친다. 월(月), 암(暗), 화(火), 수(水), 목(木), 금(金), 토(土), 천(天)의 원소와 친화력이 증가하여 각각 원소의 추가 포인트+10 증가, 원소 친화력으로 인해 피드백 확률 10% 감소된다. 탄력에 따라 원소의 조화가 증가, 지능, 정신력에 따라 추가 포인트 증가한다. 5. 심연의 눈(Abyss The Eye) (액티브) - 진실을 꿰뚫어 보는 미카엘(Michael)의 오른쪽 눈동자. 죽음의 천사이자 대천사인 그는 ‘영원한 빛(Arc Eternity Seraph)’으로 인간의 혼을 거두는 자이다. 그 눈은 모든 진실과 자신의 의지를 발현 시킨다. 심연의 눈을 발동시킬 경우 지능, 정신력, 탄력 300% 증가, 모든 속성 포인트가 50증가, 상대를 바라볼시 권능이 발현되며 상대의 진실을 볼 수 있다. 지속시간 3분, 대기시간 24시간 지속되며 12시간 동안 스태미나 최하로 떨어진다. 6. 트리플스펠 (액티브) - 전투법사의 고유스킬. 전투로서 지식을 깨우친 마법사는 속성을 합치는 방식을 고안해 강한 마법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각 속성을 결합해 마법스킬을 창조한다. 각각 속성 10포인트 이상 올려야 결합이 가능하고 속성 포인트가 높으면 높을수록 스킬의 결합이 강해진다. 지능과 정신력이 높을수록 속성 결합 성공여부가 커지며 조합 개수가 늘어난다. 단, 조합개수가 많을수록 피드백 확률 증가, 하루에 한 번 조합 가능, 조합 실패 시 1시간 동안 지능, 정신력 50%하락. 7. 태초의 재생(Beginning of the World Regenera-tion Power) (액티브) - 태초, 모든 자연의 조율자로 알려진 드루이드의 마법으로 훗날 숲을 숭배하던 위치들에 의해 마법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게 된다. 태초 드루이드의 재생은 위치의 재생과는 다르게 더욱 순수한 자연을 담고 있으며 그 힘 또한 강하다. 기본 재생의 비해 20% 더 회복하며 마나소모량이 10% 줄어든다. 스킬 사용 시, 모든 생명체는 MP, 스태미나가 회복된다. 시전자의 SP 소모량에 따라 회복되는 MP, 스태미나가 달라지며 작게는 1명 최대 10명까지 동시 회복 가능.(숙련도에 따라 동시회복 최대 수치가 달라짐) 목속성 생명체에게 시전 시, 그 생명체는 자라거나 진화가능. 8. 치료사의 깨달음(패시브, 액티브) - 호메오스타시스. 생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조건은 먹고, 자고, 대사하는 것이다. 각득(覺得), 개오(開悟), 영해(領海), 회오(悔悟), 회유(誨諭), 각성(覺醒), 경성(警醒), 효오(曉悟)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깨달음이니 희생의 길을 선택한 그대는 그 이상을 관철시켜라. 모든 치료스킬 20% 능력 증가. 보조스킬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사용가능.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발동 시 술자를 중심으로 반경 100m 안에 있는 모든 아군은 모든 능력치+20 증가, 피드백 확률 10% 감소, 방어력 20% 증가, 이동속도 20% 증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아군의 기술, 마법 숙련도가 100으로 고정된다. 단, 생명의 희생을 받고 있는 자 중 한 명이라도 사망할 시, 술자는 피드백당해 즉사한다. 주문 : 땅은 대지의 양기, (왼손을 아래로 향해 땅을 향한다) 하늘은 광활함의 천기, (오른손을 위로 향해 하늘을 향한다) 가운데 서있는 우리는 영원의 우주이니(두 손을 크게 원으로 돌려 가슴으로 모은다)나의 존엄성을 바쳐, 나의 신념을 바쳐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가 되리라. ‘생명의 희생’(가슴으로 모았던 손을 교차시키며 빛을 분산시킨다) 9. 대지의 축복(패시브) - 지속적으로 땅에 힘을 불어넣어 주면 가이아 여신이 축복한다. 남성 호르몬을 자극시켜 MP, 스태미나, SP 회복속도가 3%증가한다. 근력 10 증가. 나름 나쁘지 않았지만 두 개 남은 스킬 창에 이런 스킬이 하나 먹어버리다니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운 내 스킬. 갈수록 잡캐릭이 되어가는구나. 심히 우울해졌다. <‘아타셰’님이 통신구슬 연락을 취합니다.> {언니 아직도 기사단 뜰이세요?} 순간 들려온 소리에 나는 무거운 손으로 구슬을 꺼내들었다. “아아, 그렇지 뭐.” {무슨 일 있으세요? 목소리에 힘이 없어요.} 내가 그렇게 티냈나? 나는 고개를 휘저어 기분을 털어내고 말했다. “별거 아니야. 왜?” {아, 지금 저희 기사단이 또 기사단대전에서 승리했다고요.} “무슨 기사단인데?” {이번엔 파이널 기사단이라던데.} 무슨 기사단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로서 벌써 10연승에 들어갔다는 걸 뜻했다. 태식 형과 현빈 형을 필두로 무한 기사단대전을 시작한 미소천사 기사단은 황당할 정도로 연승을 거두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여기는 난리도 아니에요. 가입하겠다고 몰려오는 유저투성이라니까요. 저희 병단도 사람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아아, 절대 안 받을 거야. 우리 병단은 두 명으로 충분해.” 지금 우리 병단은 이름도 없을뿐더러 단원도 한나와 나 이렇게 둘뿐이었다. 그냥 무늬만 있는 병단에 불과했다. {계속 거기 있을 건가요? 그럼 저도 지금 그리 갈게요.} “음, 뭐…물이나 한잔 가져와줘.” 나는 땅바닥에 벌러덩 누워 말했다. 오전 내내 쭈그리고 앉아 스킬만 써댔으니 피곤하고 지쳐버린 것이었다. 한동안 누워서 몽롱한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자 저 멀리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언니, 여기서 주무시면 열사병 걸려요.” “게임에서 열사병 걸린 유저는 처음 들어본다.” 농담 같은 말을 진지하게 뱉는 한나를 보자 더 웃기기만 했다. 나는 일어나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물은?” “여기…에, 에에엑?” ‘여기에에에엑’은 무슨 언어인가. 뭐라도 잘못 먹은 걸까? “갑자기 왜 놀라고 그…….” 손에 든 물 컵을 받기위해 다가가자 한나가 급속도로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황당한 시선으로 내가 다시 한걸음을 내딛자 똑같이 한걸음 뒤로 빠지는 그녀.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 아니겠지?” “어, 언니, 터, 턱이.” 내 턱에 뭐라도 묻었나? 아, 하도 더워서 후드를 벗은 상태였는데 얼굴이 탔을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게임에서 살이 타기도 할까? “수, 수, 수, 수!” “수 뭐.” 얼굴까지 새빨개진 한나가 말문이 막히는지 연신 수수거리다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우당탕 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 소란스레 들리더니 곧 무언가 손에 들고 다시 나타났는데 나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거울?” 손에 들고 있었던 것은 작은 손거울이었다. 기사단 건물에 저런 것도 있었네? 용케 찾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한나가 그 거울을 내게 비춰보였다. 음, 예쁘장한 눈팅이군. 역시 미모 하나는 인정해야 한다니까. 수염도 참으로 멋들어지고…뭐, 뭐? 수, 수, 수, 수! “수염이 여기 왜 붙어있는 거야!” “그러니까요!” 아니 당신이 왜 더 성질이십니까? 깜짝 놀랐잖…이 아니잖아!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냐! “아침만 해도 없었던 수염이 왜 생기는 거야!” “남자도 아니고 보기 흉하게 덥수룩한 수염이 나셨어요! 속상해 정말!” 그러니까 왜 당신이 속상해 하는 거냐고. 순간 무언가가 퍼뜩 떠올랐다. “서, 설마! 열려라, 나의 잠재된 힘이여!” 9. 대지의 축복(패시브) - 지속적으로 땅에 힘을 불어넣어 주면 가이아 여신이 축복한다. 남성 호르몬을 자극시켜 MP, 스태미나, SP 회복속도가 3%증가한다. 근력 10 증가. 남성 호르몬을 자극시켜……. 남성 호르몬을 자극시켜……. 남성 호르몬을 자극시켜……. 머리에서 자꾸만 저 단어가 약 올리듯 울려 퍼졌다. 아아, 난 게임하지 말라는 신의계시다. 이건 나보고 볼 거 없이 접으라는 뜻인 것이다. 그렇군요. 남은 19일 집에서 효자노릇하며 훌륭히 살라는 심도 있는 깊은 뜻이……. “어, 언니! 해탈하지 마세요!” 이것이 우화등선이란 것일까. 몸이 가볍고 빛이 나를 이끄는 것 같은 편안한 기분…각설하고 나는 눈을 퍼뜩 떴다. “용자대전! 용자대전에서 우승해야만 해!”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우승해야 해! 그래서 스킬을 지워야 해!” 횡설수설 나는 정신이 없었다. 용자대전에 우승 상품 중 하나가 분명 스킬하나를 취소시켜주는 것이라고 레이나님한테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 방법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여자로 플레이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수염 난 여자라니! 이 모습을 눈팅에게 들켰다가는 자기 얼굴로 무슨 장난을 치고 다니는 거냐며 아버지 무덤 옆에 나란히 묻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전에 내가 게임을 접겠지만. “절대로 우승 해야 해! 못하면 접겠어!” “저… 언니, 이미 접수신청은 끝났잖아요.” 나는 좌절한 표정으로 한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한나야, 그래도 예전에 네가 그리 좋아하던 언니야. 수염 조금 났기로서니 무섭다는 표정으로 물러나진 말아줄래? “나 어떻게해에에에에에에!” 갈수록 게임이 어려워지는 나였다. “하아.” 생각할수록 한숨만 나왔다. 수염이 나는 스킬을 획득한 이후, 바로 접속 해제하고 게임방에서 이 스킬을 풀 수 있는 정보를 찾아보았다. 보기보다 ‘대지의 축복’이란 스킬은 유명했는데 스킬 획득 조건이 흙이 있는 땅에 물이나, 영양분을 3시간이상 주게 될 경우 받는 스킬이라고 했다. 그것도 확률적이고 딱 3시간이 되었다고 얻어지는 스킬도 아니어서 보통은 절대 우연히 얻어지는 스킬이 아니라고 하는데 반나절이나 태초의 재생을 쏟아 붓고 있었으니 스킬을 얻지 못할 리가 없었던 거였다. 문제는 이 스킬의 단점인 남성호르몬을 자극시켜주는 데 있다. 남자가 얻는다면 오히려 반가운 능력이겠지만 나처럼 여자캐릭터가 걸리면 가볍게 머리카락부터 겨드랑이, 근육이 붙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나야 바로 티가 나는 수염이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는 게 정보를 뒤지다 보니 어떤 여자는 겨드랑에서 수북한 털과 냄새가 진동해 그냥 다시 키웠다는 사람도 있었다. 심하면 가슴 털도 난다는데 더 할 말이 뭐 있겠는가. “정말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차피 19일 남은 거 그냥 가면 쓰고 즐길까? 지금까지 후드 쓰고 다녔을 정도인데 남장하고 다니는 것도 꽤나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눈팅 얼굴로 게임하는 것도 재미있었는데.” 누나의 얼굴이 워낙에 예뻐서 그런지 남자로서는 느끼지 못하는 희열을 가끔 느끼곤 했었다. 뭐랄까, 여성만이 느낄 수 있는 자신감? 모두의 시선을 가로챌 수 있는 미모를 이용하고 매혹하여 제 3자의 입장으로 웃고 즐길 수 있었던 기분? 처음에는 이런 내가 변태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나는 남자라는 마음을 자각하고 있었고 항상 이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생활도 지금은 익숙해져 버렸다. 물론, 모두에게 거짓말하고 있는 거라 미안한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나를 너무도 따르는 한나라거나, 한없이 믿어주는 현빈 형. 그밖에도 나에게 관심을 주었던 레이나님과 하가네님까지 나는 전부 속이고 게임을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진실을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나를 변태로 알고 지금까지 잘도 속였다 말하며 떠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남부끄러울 정도로 여자 흉내 내며 즐겼던 것은 사실이니까…….”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처음에는 그저 캐릭터가 여자였으니까 여자 흉내를 낼 뿐이었는데 그것이 커지고 커져서 지금은 누나의 목소리가 내는 것이 더 익숙해 져버렸다. 오빠나 언니라고 부르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어느새 게임 상에서 정말 여자가 되었던 것이다. 집에 도착했다. 언제나 우중충한 기분을 느끼던 집도 지금에 와서는 편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아버지의 마음을 확실히 정리하자 내 마음의 공간도 넓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편안하게 누나의 캐릭터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나왔어.” 엄마는 주말이 여행사 일하기 가장 바쁜 때여서 지금도 힘들게 일하고 있을 것이다. 누나도 최근 업데이트 때문에 GM도 많이 바쁠 거라 예상했다. “어, 왔어?” “어라? 누나가 웬일이야, 회사는?” “잠깐 놓고 온 게 있어서 가지러 들렀는데 네가 없기에 잠깐 기다리고 있었지.” 누나는 바빴을 텐데 내가 집에 없는 걸 보고 지금까지 기다린 게 분명했다. 누나는 투덜대며 말했다. “에이, 핸드폰 하나 사주든가 해야지. 일단 너 봤으니 됐다. 누나 바빠서 먼저 갈게.” “괜히 그런데 돈 쓰지 마. 별로 필요도 없고.” 누나는 급히 나가려다 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냈다. “네 주위사람이 불편한 거야. 나도 핸드폰 없으면 얼마나 편한데. 그런데 어디 갔었어?” “게임방.” 누나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구두를 신기 시작했다. “아, 바쁘다 바빠. 그놈의 업데이트는 왜 해가지고 사람 힘들게 만드는 거야?” 누나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투덜거렸다. 나는 왠지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저…누나.” “응? 왜 그래? 빨리 말해, 나 바빠.” 입술이 쩍쩍 말라갔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침을 삼켰다. 땀 한 방울이 턱 선을 타고 또르륵 떨어졌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말이야.” “나에게 억하심정 없으면 질질 끄는 짓은 하지 말아줄래, 동생아?” 역시 눈팅의 포스는 장난이 아니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누가…누나 얼굴에 수염을 생기게 만들었다고 하면 그 사람을 어떻게 할 거야?” 젠장, 이 말이 아니야. 이 말이 아니라고! 속으로 절규를 할 때 누나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죽인다.” “……….” 나는 더 이상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눈팅에게 고백하려던 작전이 무효로 돌아가자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이대로 19일을 버티며 즐길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시간을 최대한 여자로서 즐기자 결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 보면 나는 이미 이 캐릭터에게 애정이 싹튼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그, 그래서 이제 와서 껴달라고요?” “부탁해요.” “푸하하하하! 님, 너무 웃겨염!” “깎아는 봤어요?” “도로 자라더군요.” “푸헤헤헤헤헤헤! 아놔, 도로 자란데!” “하가네, 조용히 좀 해!” “그만 좀 웃어요!” 진지하게 대화하던 나와 레이나님이 동시에 호통 쳤다. 하지만 하가네님은 땅바닥을 치며 끅끅 거렸을 뿐이었고 결국 나와 레이나님이 고개를 저으며 하가네님의 존재를 무시하는데 이르렀다. “미안하지만 이미 다섯 명이 모인 상태라서 도와주기가 힘들어요. 게다가 이미 접수한 인원을 바꾸는 것도 허용되지 않아서 여러모로 불가능해요.” “킥킥킥, 아, 헥헥, 웃다 쓰러지겠음. 누님, 그거 그님 대신이면 가능하지 않을까염?” “그님? 아아, 탈영병? 흐음, 좋아!” 레이나님이 잠시 고민하다 결정했는지 내 손을 붙잡았다. 탈영병? 잘 모르겠지만 나 역시 레이나님의 손을 마주 잡았다. 뭔지 몰라도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남자목소리 연기할 수 있나요?” “일단은 네. 그런데 무슨?” “그럼 따라와요!” 레이나님이 내 손을 잡은 채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륀 기사단 내부 건물을 여기저기 끌려 다니던 나는 어딘가 앞에서 멈춰져서 그제야 주위를 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이곳은?” 레이나님이 데리고 간 곳은 잡다한 아이템들이 정리정돈 되어있는 작은 독방이었다. “우리 기사단 창고예요.” “이런 곳도 있군요?” “네? 미소천사 기사단에는 창고도 없나요?” 내가 찾아보지 않아 모르겠으므로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레이나님은 싱겁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여기 어딘가 놔둘 텐데…아! 찾았다!” 레이나님 손에 들린 것은 천으로 만든 무엇이었는데 흰색바탕의 검은 줄무늬가 그어져있었고 눈 쪽과 입 쪽에 유연한 곡선으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것은……. “타, 타이거 복면? 그것도 백호라니…서, 설마.” “정답!” “……….” 나는 두말없이 밖으로 나가려했고 레이나님이 당황해서 내 앞을 가로 막았다. “어쩔 수 없어요. 영병이가 즐겨 쓰는 거라 이걸 쓰지 않으면 우리 멤버로 보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이런 걸 쓰는 변태가 있었던 겁니까?” “프로레슬링을 따라한 거라는데요?” 내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걸 굳이 써야 한단 말인가! 내가 계속 머뭇거리자 레이나님이 한 숨을 쉬며 말했다. “미소천사님, 지금 복면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제가 알기로 ‘대지의 축복’스킬은 남성호르몬 자극하여 페널티를 부여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보통 남성호르몬이 늘어난다고 해서 갑작스레 수염이 난다거나 하지 않잖아요. 이 스킬이 가지고 있는 무조건적인 랜덤 페널티가 부여된 거라고요. 평생 수염 난 채로 게임하지 않으실 거라면 어서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아니, 어떻게 현실성을 따라간다는 게임이 이런 게임성 짙은 페널티를 만들었답니까?” 이런 말도 안 돼는 설정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이래서는 유저들이 다 떠나가지 않겠는가 말이다. 레이나님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유저의 편의만을 위한 게임이 아닌 무조건적인 랜덤상황이야말로 진정한 현실을 부여한 겁니다. 그런 것 때문에 떠나가는 유저도 많았지만 알 수 없는 상황이 신비감을 불러 유저들이 더 많이 몰려오고 있는 추세에요. 의도한 건진 모르겠지만 게임시장에서는 성공한 거죠. 잘 생각해보세요. 완전한 랜덤으로 얻어지는 스킬이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캐릭터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정복감이 들지 않나요? 스킬은 무궁무진하고 얼마든지 자기 생각대로 키울 수 있다는 장점과 잘못 얻으면 지우고 다시 키워야하는 극단적인 모습조차 저희 같은 유저들에게는 재미를 부여하고 있으니까요.” 레이나님이 거창하게 설명했지만 나 역시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내가 그랬으니까. 다른 게임과 다르게 자기만의 스킬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나를 매료시켰고 그런 세계 속에서 내가 꿈꾸던 힐러를 만들자는 목표 감이 더 커지게 만들었었다. 그러니 이렇게 막장으로 한다 해도 유저들이 불만 없이 수긍하고 게임을 하는 것이겠지. “휴, 그런데 이걸 쓰면 제가 레이나님 구성원에 낄 수 있는 거예요?” “이걸 즐겨 쓰던 탈영병이라는 유저가 있어요. 지금 아마 한창 훈련 받고 있을 겁니다.” “훈련이요?” “군인이거든요.” “에엑?” 군인도 이런 게임을 할 수 있었던가? 황당한 마음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레이나님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처음에는 깜짝 놀랐어요. 영병이는 싸이버대전방에 들어가서 몰래 이걸 한다고 하더군요.” “싸이버대전방? 원래는 뭐하는 곳인데요?” “FPS게임으로 가상 대전을 한다던데…저도 잘은 모르겠네요. 여하튼, 그런 이유 때문에 영병이가 도중에 나가야하는 급박한 상황이 올지 모르니 다른 유저가 오면 언제든지 교체해 달라고 했었어요.” 나는 넘겨받은 복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럴 거면 곱게 넘겨주지. 복면까지 넘겨줄게 뭐람. “어차피 얼굴 가릴 거 아니었어요? 난 잘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후드만 쓸 생각이었다. 적어도 무난한 가면을 착용했겠지. 이런 생뚱맞은 복면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복면을 써 전신 거울을 보았다. 백호 복면 뒤로 금발이 넘실거렸고 입부위에는 여전히 턱수염이 부분부분 검게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얼굴 조막만하니 한마디로 완전 이상했다. “…풋!” “…웃지마요.” 나는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맘 편히 내 본래 목소리를 사용했다. 확실히 이 목소리가 편하긴 편하군. 레이나님은 웃다가 깜짝 놀라했다. “목소리는 완벽하네요? 남자답고 귀엽네. 목소리가 그러니 그나마 많이 봐줄만 하네요.” 당신이 봐줘도 하나도 안 기쁩니다. “아, 우울해.” 가면을 벗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러고 그 많은 유저들이 구경하는 대회에 나가야 한다니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란 말인가. 까닥하다 들키면 그날로 나는 접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여기서 다짐한다. 절대 들키지 않겠다. 들키면 나는 무조건 접을 테니까! “다음 대회 일정은 내일 오후 1시까지 나오시면 됩니다. 여기, 이 스크롤을 찢으면 우리가 있는 대기실로 이동될 거예요. 그럼, 그때 뵙죠. 백호 복면씨?” 즐겼어, 분명 마지막에 말하며 즐겼어! 나는 비참한 기분으로 복면을 들고 륀 기사단 건물을 나와야만 했다. “다 너 때문이야!” - 콱콱! “너만 없었어도 나는 이렇게 되지 않았어!” - 콱콱! “헉, 헉, 헉.” 아무리 밝아도 묵묵부답인 땅. 애꿎은 내 신발만 더럽혀졌다. 이놈의 씨앗은 도대체 자라날 기미는커녕, 떡잎조차 보이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아무래도 잘못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오기가 생겼다. 좋아, 내가 기필코 너를 탄생시키고 말겠어! “언니…화 풀렸어요?” 내 히스테리에 질려서 멀찍이 바라보고 있던 한나가 조심히 다가오며 말했고, 나는 여전히 땅만을 바라본 채 말했다. “가자.” “어, 어디를요?” “도서관.” “저 지금 급한 용무가…….” “따라와!” “네에에에에에에…….” 길게 늘어지는 한나의 말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아무래도 자료를 찾아봐야겠다. 이놈의 씨앗을 탄생시키기 위한 자료를 말이다. “어서 오십시오. 이곳은 마학자분들의 기초를 책임지는 마학자의 탑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안경 낀 소녀 NPC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여기는 마학자들이 처음 레벨을 올리는 지식 도서관이었다. 하지만 열린 공간이라 누구나 드나들 수 있게끔 만든 곳이어서 유저들이 나처럼 정보를 찾으러 들리거나 레벨을 올리기 위해 찾아오기도 하였다. 나는 후드를 푹 눌러쓴 채 말했다. “식물 백과사전.” “식물에 관해서라면 오른쪽 A열 세 번째 칸부터 다섯 번째 칸까지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만 까닥 숙이고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한나는 그런 나를 보고 한숨을 폭 내쉬는 것 같았는데 그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므로 넘어가겠다. A열 세 번째 칸에 들어가자 무수한 식물관련 서적이 질서정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열대지방 식물몬스터 100가지’, ‘활엽수 식물 종류’, ‘식물 조리 25선’젠장, 이러다가 끝이 없겠는데. 한나야! 너는 다섯 번째 칸부터 찾아!” “저기…언니?” “응?” 한나가 난감하다는 듯이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말했다. “뭘 찾아야 하는지는 말해주어야죠오오오…….” “루시아니안 나무, 위그드라실에 관해서라면 전부 다!” 한나는 애처로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다 이내 포기하고 무겁게 발걸음을 때었다. 제 자꾸 왜 저러지? 그렇게 시간이 흘러 우리들은 몇 권의 책을 찾을 수 있었다. “‘나무의 힘. 위그드라실 발췌’, ‘루시아니안 잎사귀 획득 조건’, ‘루시아니안 나무에 살고 있는 페어리들’, ‘루시아니안 나무 탄생신화.’인가.” 가장 눈에 띄는 건 ‘루시아니안 나무 탄생신화’였다. “저기…언니. 저 지금 많이 급해서 이만 가봐야…….” “너는 이거 읽어보고 루시아니안 나무에 대해 뭔가 좋은 정보가 있으면 말해…뭐?” “아니에요오오오오…….” 뭔가 들었던 거 같은데 일단 급하니 나중에 생각해보자. 나는 ‘루시아니안 나무 탄생신화’의 첫 장을 펼쳐 보았다. [ - 루시아니안 나무 탄생신화 - 저자 알랭 S 바시나이델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트, 핸드, 헤드가 존재하기 이전, 태양을 숭배하는 당시에 존재하던 나무를 소개하기 이전에 이것을 읽는 자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다. 이 세상은 아직도 이 세상 그대로 남아있는가? 여전히 대륙은 혼란스럽고 사람들이 불안해하지는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통탄할 것이리라.] “시작하기도 전에 무슨 놈의 통탄이야.” 나는 거침없이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그곳부터는 여러 가지 나무들과 잡다한 지식들이 깔려있었고 대충 훑어보며 넘어가니 드디어 루시아니안 나무에 대해 소개하는 글이 보였다. [ 태양을 숭배하던 드루이드, 위치들이 세상을 조율할 때, 이 나무는 대륙을 지탱하는 중심 추 같은 역할을 했다고 전해져 왔다. 세상에 단 한그루뿐이며 그 크기와 자태는 여느 나무와는 견주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전해지기도 했는데, 잎이 활엽수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푸른빛을 자랑하기도 해서 그것을 기려 ‘해의 나무’라 칭하길 꺼려하지 않았다. 이 나무뿌리 주위에 생성된 숲은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고 밤에도 알 수 없는 미미한 빛을 흩뿌려 길잡이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이곳을 ‘하트의 길’이라 칭하고 있다. 이곳을 본받아 멋진 하트가 되라는 의미이다. 빛의 정체는 페어리의 빛임을 아는 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루시아니안 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모두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루시아니안 나무숲에 들어가면 제정신으로 나오지 못하고 다들 멍하니 백치가 되어 나와, 숲의 기억을 잊어버린다. 허나 자비가 있는지 나올 때, 주머니에 루시아니안 열매 한 개를 들고 나오는데 복용하면 숲의 기억 말고는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열매는 그 정도로 만병통치의 효능이 있는 것이다. 열매 하나를 얻으려면 사람 하나 백치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해의 나무’라…….” 설명은 거창했으나 내가 바라던 정보는 딱히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저 단어만 자꾸 머리에 맴돌았다. “이거 잘하면 되지 않을까? 한나야 다시 뜰로 가…왜 그래?” 한나는 그야말로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내가 물어보자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저, 저기. 화…….” “화?” “화장실…….” “……….” 내가 멍하니 있자 한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인 채 접속을 해제했다. “한나야, 이곳에다 써주라.” “정말 이걸로 될까요?” 작은 해프닝이 끝나고 다시 뜰로 돌아온 우리들은 본격적인 작전에 돌입하기로 하였다. 한나는 의심쩍은 눈빛으로 망설였지만 내 단호한 말에 할 수없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카오스에서 갈라진 태초의 어머니 가이아시여, 어머니를 상징하는 물건은 땅, 땅은 곧 성표 이니라. 발동하라, 디바인 마크(Divine Mark)!” 씨앗을 심은 부위에 빛이 한가득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유심히 땅을 관찰했다. “어머머, 땅이 조금 움직였어요!” “응, 나도 봤어.” 아주 조금이지만 물고기가 입질하는 것처럼 살짝 움찔거렸다. 결국 이게 답이었던 것이었다. ‘해의 나무’라 불리던 루시아니안 나무는 양분보다 빛을 더 중요시한단 거겠지. 『…마, …힘 모…….』 한순간 머리를 울리는 맑은 목소리. 나는 눌라 두리번거렸고 한나역시 나와 같은 행동을 취했다. 힘 모? “힘이 모자란대요. 이게 무슨 소리죠?” 한나가 제대로 들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땅을 바라보았다. “설마 씨앗이 말한 거야? 그렇다면 답은 이것밖에 없잖아. 심연의 눈 발동!” <‘심연의 눈’ 발동.> <‘심연의 눈’의 숙련도가 9 상승했습니다.> <‘심연의 눈’의 숙련도가 Full 되었습니다.> 어차피 시합은 내일이었으니 12시간동안 최하로 떨어지는 스태미나 페널티는 걱정하지 않아 사용한 것인데 놀랍게도 벌써 숙련도가 꽉 찼음을 알게 되었다. 심연의 눈이 변형된 다라.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일단 나는 정신을 집중하여 땅을 바라보았다. - 변태중인 루시아니안(위그드라실) 씨앗 종족 : 식물, 정령 속성 : 천(天), 목(木), 풍(風), 토(土) 크기 : 소형 M P : 1 / 1 S P : 1 / 1 땅의 어머니인 가이아 여신의 축복을 받아 루시아니안 씨앗에 의지가 생겨났다. 하지만 아직 태어나기에는 힘이 워낙에 부족한 상태. 1톤의 성수를 부어주거나 그에 대등한 힘을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1톤의 성수?” 내가 알기로 이 세계에서 성수는 고급 물약에 속하는 걸로 알고 있다. 포션이란 것이 워낙에 비싸다 보니 한 달간 수도원에서 정제한 물을 물약대신으로 쓰고 있었는데 생산되는 양이 워낙에 소량이기도 해서 잘 사용하지 않는 물약이었다. 그런데 그런 성수를 1톤이나 부어주라고?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하겠는가. 나에겐 그보다 더 특효의 방법이 있으니 문제는 없었다. “‘태초의 재생’ 발동!” <‘태초의 재생’의 숙련도가 5 상승했습니다.> <‘태초의 재생’의 숙련도가 Full 되었습니다.> 태초의 재생까지 숙련도가 꽉 차버렸다. 내가 알기로는 숙련도가 많이 남아있었던 걸로 생각했는데 언제? 아아,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부터 이 씨앗 때문에 시전 했던 게 많이 숙련도를 올렸던 모양이었다. 일단 나는 땅 속으로 힘을 불어넣으며 미소천사용 삼종셋트를 착용하였다. 이로서 나의 최고의 상태가 만들어졌다. 태초의 재생이 기본 재생의 비해 20% 더 회복하며 마나소모량이 10% 줄어든다고 할 뿐만 아니라 지능과 정신력만 하더라도 심연의 눈으로 불어나 213, 360이었고 치료사의 깨달음으로 모든 치료스킬 20% 능력 증가에 아이템으로 치유량+450까지 불어난 상태였다. 이정도면 나는 사기급의 힐을 시전 할 수 있게 된다는 걸 뜻하기도 했다. “그런데…아무반응도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씨앗은 내 SP만 쭉쭉 빨아먹고 변화가 전혀 없었다. 느낌으로 보건데 이거 아슬아슬할 거란 생각이 들어 나는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땅은 대지의 양기, 하늘은 광활함의 천기, 가운데 서있는 우리는 영원의 우주이니 나의 존엄성을 바쳐, 나의 신념을 바쳐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가 되리라.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비록 나는 기술 및 마법 숙련도가 100으로 오르지 않지만 모든 능력치+20 증가, 피드백 확률 10% 감소, 방어력 20% 증가, 이동속도 20% 증가는 받을 수 있었다. 지금 심연의 눈을 사용한 상태이니 모든 능력치가 전부 60으로 오를 것이고 이것이 고갈되는 내 SP를 충당하여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 힘에 답변하듯 땅이 다시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게 튀어나오려고 이렇게 사람을 고생시키는 건가. 나는 기대를 최대한 감추고 땅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움찔움찔. 점점 진동하는 타임이 잦아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엄청난 빛을 폭사했다. 깜짝 놀란 나와 한나는 손으로 빛을 가리며 한걸음씩 물러났고 점차 빛이 사그라지자 다시 땅을 보았다. “으음…이건?” “새싹이네요?” 뭔가 많이 허탈해졌다. 기껏 내 하루를 다 투자하고 최대의 힘을 발휘해 탄생시켰더니만 나온 게 고작 새싹이라니. 이게 루시아니안 나무라고? 그럴 리가 없겠지. 이건 갓난아기에 불과할 것이었다. “설마 이게 크게 자라려면 천년을 기다려야 한다거나 하는 거 아냐? 그렇다면 지금 지근지근 밝아버리겠어.” 『에엑? 살려줘요, 엄마.』 “우왁!” “어머?” 한나와 내가 동시에 깜짝 놀라버렸다. 아까 머리에 울리던 그 목소리였다. 우리는 새싹을 보았으나 특별한 움직임이 없어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위에요, 위.』 “어머머?” “저, 정령?” 우리가 고개를 들자 머리위에는 녹색의 빛을 은은히 발하는 손바닥만 한 여성형체의 정령이 둥둥 떠 있었다. 『엄마!』 한나 머리 위를 한 바퀴 뱅 돌며 익살스레 외쳤고, 뒤이어 내 머리 위를 빙글 돌더니 말했다. 『엄…마?』 “그 의문형은 무슨 뜻이냐?” 내 머리에 힘줄을 돋게 만든 정령은 전체적으로 요정을 연상케 했는데 잠자리 같은 날개가 없는 대신 유령처럼 기이한 녹색 빛의 꼬리잔상을 만들며 날아다녔다. 하늘거리는 짧은 녹색단발의 머리는 익살스런 얼굴과 매우 어울려 전체적으로 귀엽기 그지없었다. 그 정령은 말했다. 『하지만 수염이…….』 “그럼 아빠라고 부르던가!” 문제는 자꾸만 내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저 정령이 나에겐 전혀 귀엽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리 온.” 한나가 갑자기 손짓하며 정령을 부르자 정령이 한나의 품 안으로 쏙 들어갔다. 한나는 그런 정령을 두 팔로 껴안더니 나에게 말했다. “왜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성질이세요. 많이 놀랐지, 이그레시아.” 언제 이름까지 지어준 사이가 된 겁니까 두 분은. 나는 지끈거리는 미간을 누르며 말했다. “야, 정령. 너에 대한 소개가 없잖아. 그리고 우리 둘 다 엄마가 뭐냐?” 정령은 나와 한나를 몇 번 돌아보더니 말하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엄마. 제 이름은 지금 만들어져서 이그레시아! 그리고 정령? 이름이 두 개네요? 하지만 다들 루시아니안이라 불러요. 이 모습은 제 정신을 구체화한 거죠. 지금 저를 탄생시킨 부모님이 두 분이시니 저에게는 두 분 다 엄마에요, 히히.』 “어, 어떻게! 너무 귀여워!” 『그, 그렇게 꽉 누르면…….』 한나양, 아주 정령 한 마리 잡겠수다. 나는 한나 품 안에서 꼬물거리는 정령을 구제해 주기 위해 질문했다. “그래서 이렇게 나온 이유가 뭐야?” 내가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하자 정령이 아차 싶은 표정으로 한나 품에서 벗어나 내게 다가왔다. 『잠시 잊을 뻔했어요. 엄마, 저 엄말 따라가도 될까요?』 “따라오고 자시고 일단 그 칭호부터 바꾸자.” 『큰 엄마?』 “그 엄마가 문제다, 그 엄마가! 주인님이라고 해!” 혈압이 머리끝까지 솟았다. 이대로 가다 쓰러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힝, 엄마를 왜 주인님이라고 해요.』 “난 너 같은 아이 난적 없거든.” 게다가 남자거든. 『나 태어난 거 맞는데. 엄마 맞는데…….』 “어쨌든!” 『네에…….』 좋아, 일단 호칭은 정리가 되었고. “그럼, 다음. 왜 나를 따라오려 하지?” 『엄마…주인님에게서 빛의 기운이 강해서요.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양분이 되요. 제가 자랄 수 있는 거름이라고 해야 할까요? 방해는 안 될게요. 저 이래봬도 능력 있어요!』 그 작은 주먹을 꽉 쥐어봐야 별 감흥이 없거든요? 그나저나 내가 일루미네이터란 직업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 눈에 뜨일 텐데 널 어떻게 대리고 다니냐. 거추장스러워.” 『거, 거추장…….』 정령은 주제에 좌절했는지 고개를 푹 숙이다 이내 회복하고 말했다. 『걱정 마세요! 다른 사람들에게 저는 보이지 않을 거예요. 지금 정신이 이어진 분은 두 엄마밖…엄마하고 주인님밖에 없으니까요!』 호오, 눈치는 빠른 모양이었다. 내 째려보는 것만으로도 말을 계속 정정하니 말이다. “그래도 거추장스럽잖아. 애하나 딸린 기분이겠네.” 『저 애 맞아요! 아니, 그게 아니고 아직은 약하지만 조만간 큰 능력이 생길 거예요!』 “호오, 그래?” 내가 빈정대자 정령은 힝 거리며 우울해했고 그걸 보다 못한 한나가 말했다. “왜 자꾸 착한 이그레시아를 괴롭혀요! 정말 딸 하나 생긴 기분이라 좋기만 한데.” 이봐요, 아가씨. 결혼이나 하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죠. 내가 이렇게 짜증을 부리는 이유는 사실 많이 실망해서였다. 나는 거대한 루시아니안 나무가 내 앞을 막아주는 방패처럼 골렘 비스무리하게 키우려했었다. 하지만 이런 새싹과 조그만 정령이라니. 힐러인 내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다가 한나의 사랑까지 독차지하고 있으니 짜증이 안 나겠느냔 말이다. 물론 전자 때문에 더 화가 난 것이다. 절대 후자가 더 크지 않다. 절대! “이그레시아는 무슨 능력이 있는데?” 정령은 한나가 묻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 있게 말했다. 『아직 없어요! 배워야 해요!』 “……….” “…뭐야, 무능력하네.” 한나까지 말문이 막혔고 내가 비꼬자 정령이 울먹였다. 『힝, 이제 막 태어난 제가 무슨 능력이 있겠어요. 조금 더 자라면 생길 거예요!』 “그, 그래?” “어련히 생기겠어. 한 천년 후쯤?” 『아, 아니에요! 힘이 조금 모일 때 까지만 기다리면…주인님의 힘만 빌리면 지금 당장도 쓸 수 있어요!』 “그래? 얼마든지 빌리고 한 번 해봐.” 아직 심연의 눈을 쓴지 3분도 지나지 않았겠다. 생명의 희생도 발동중이겠다. 나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팔짱낀 채 정령을 약 올렸다. 정령은 내 말에 눈을 빛내며 좋아라 SP를 가져가기 시작했다. 『아직 배운 게 없어서 그냥 제 힘을 밖으로 쏘아볼게요!』 “얼마든…어, 어어? 야, 야, 자, 잠깐!” <스태미나가 떨어졌습니다. 모든 기능이 최하로 하락하며 컨디션 및 체력이 일정한 시간으로 하락 합니다.> 이런, 미친! 갑작스런 SP고갈과 함께 피드백 되어 피를 한 움큼 토했고 정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어지러운 눈으로 정령을 보자 정령이 펼친 손앞에는 내 몸만 한 빛의 구체가 스파크를 일며 뭉쳐 있었다. 마, 맙소사. 저런 어마어마한 것을 그냥 만든 거야? 일순간에? 단지 저거 하나로 내 마나와 스태미나까지 전부 고갈되었다고?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정신을 경악 때문에 놓아버리고 말았다. 한나가 놀라 외치는 소리와 무언가 펑하고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게임에서 강제적으로 튕기는 바람에 볼 수 없었다. <‘예쁜이’님은 기절 하셨습니다.> <건강 경보가 작동 되었습니다. 접속이 강제로 종료됩니다.> <‘아펜하르트’접속을 해제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18일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하늘만 놓고 따져본다면 여기가 게임세계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정말 맑구나. 눈을 때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주인님, 현실도피하지 말아요!』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러고 보니 밥 먹을 시간인가. 고등어 조림이라 하더라도 오늘은 기필코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 앞!』 “우왁!” 한줄기 빛처럼 쏘아진 화살이 후드 끝을 살짝 베고 지나갔다. “칫, 스나이핑 실패.” 저 멀리 장궁을 들고 있던 유저가 안타까워했다. 눈먼 화살인 줄 알았는데 제대로 나를 노렸던 모양이었다. “타테, 정신 차려요! 지금 시합중이에요!” 보다 못한 레이나님이 질타했다. 아까부터 멍하니 있는 내 모습을 보고 한 말이 분명했다. “하지만…휴.” 답답한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었다. “좋아요, 모두들!” 갑자기 내 외침에 돌아보는 우리 팀원 네 명.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파이팅!” 어라? 순간 나빼고 적 팀까지 아홉 명, 전부 넘어지는 것 같았는데. 에이, 맞추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겠지. “지금 장난 하냐!” “풋, 저 분, 처음 볼 때부터 예상했지만 재미있을 줄 알았어.” 검은 톤의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는 깍두기 머리의 검사가 온갖 인상을 쓰며 외쳤고, 붉은빛의 로브를 입고 있는 법사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저 유저들은 오늘 용자대전 때문에 처음 만나게 된 팀원이었다. “역시 알지도 못하는 놈을 영병이 대신 받은 게 실수였어!” 저놈의 검사는 철패라고 하는데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뺐다면서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후훗, 원래 유머러스한 사람이 있어야 게임이 재미있어 지는 법이죠!” 언제나 실실 웃고 있어서인지 만사가 포지티브처럼 보이는 붉은 로브의 법사가 나에게 엄지를 추켜세우며 한 말이었다. 나는 당연히 같이 엄지를 세워줄 뿐이었다. “하아아, 어서 끝내야겠군요. ‘정신집중’스킬 발동, 수속성 교합, 증폭, 아이스필드(ice field)!” 레이나님이 머리를 가로저으며 골머리를 앓다 결국 마법을 시전 시켰다. {아, 나왔습니다! 륀 용사단의 수장 레이나의 18번 스킬, 아이스 필드!} “와아아아아아아아!” 어디선가 저 멀리 해설자의 말이 울려 퍼졌고 관중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해설자가 다시 말했다. {그럼, 나오나요, 나오나요!} “제, 젠장 막아! 저 연금술사를 막아!” “어림없다!” 적 팀이 하가네님에게 돌진하려했지만 철패라는 검사가 거대한 방패를 휘두르며 막아섰다. 나에게 비꼬는 말투는 거슬렸지만 적을 막는 저 능력만큼은 내가 인정할 정도로 대단했다. “연성진!” {나왔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 결국 하가네님의 연금이 터지고 말았다. 사방에서 솟아오르는 원뿔형 얼음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라 적 팀은 막기 급급해했고 그럴수록 관중들의 환호성은 더욱 커져만 갔다. “후후후, 관중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저도 동참해야겠군요. ‘정신집중’스킬 발동, 화속성 교합, 화이어볼, 무한 연타!” - 퍼버버버버버버버버벙! {화염의 마학자, 불사조! 마지막 일격, 연사 파이어볼이 경기장을 메웁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마법들의 난무였다. 아래에서는 얼음들이, 공중에는 화염이. 내가 저기 있었더라면 이미 잘 익은 고기가 되어 얼음꼬챙이에 먹기 좋게 꿰어 있었을지도 몰랐다. 한바탕 마법들이 휩쓸고 지나가자 그 자리는 다섯 명의 유저가 누워있을 뿐이었다. {가, 강합니다! 륀 용사단! 탈영병 선수가 놀고 있었음에도 단 네 명이서 극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건 강한자의 여유인가요? 아니면 너희 따위는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는 제스처 인가요! 어쨌든, 륀 용사단. 8강 진출!} “와아아아아아아!” 다른 건 다 좋은데 나는 걸고넘어지지 말란 말이다, 젠장. 이 타이거 복면이 아니었다면 내 붉어진 얼굴을 속속들이 다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주인님, 왜 공격 안하세요?』 “하아.” 또 다시 한숨이 나왔고 허무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공격이라…나는 오늘 용자대전을 하기 전, 잠깐 게임방에서 정보를 검색했었다. 그리고 알아낸 사실은 단지 이것 하나. - 용자대전 16강 대결부터는 게임 홍보를 위한 동영상으로 제작되며 결승 우승자에게는 용자칭호와 함께 모르핀 제국 수도 중앙에 동상으로 세워질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모든 것이 동영상으로 제작된단다. 당연히 내 음성도 녹음될 것이고, 이 모습, 스킬, 그 외 모든 것들이 일거수일투족 낱낱이 파헤쳐질 것이다. 게다가 동상이란다. 지금 내 모습을 광고하고 다니란 거냐? 그런데 싸우라고? 이 수염 지우려다 눈팅한테 들켜 초상 치를 거 같은데 지금 장난 하냐! 게다가 이 모습으로 동상? 아주 그냥 게임 접으라 말만 해다오. 지금이라도 캡슐 봉인할 자신 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이렇게 방관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면 륀 용사단은 매우 강한 축에 속했었다는 것이었다. 계속 뒤에서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도 무난하게 8강 상대도 이겨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4강에서 시작되었다. “소환, 가르데브!” - 수우우우……. 화염의 숨결을 뱉으며 나타난 고릴라형의 소환수 가르데브. 나는 소환수란 직업을 4강에서 처음 보았다. 가르데브는 혼자 철패를 상대하였고 당황한 철패가 방패로 연신 가르데브의 주먹질을 막으며 소리쳤다. “이젠 나 혼자서 버겁다! 알아서들 피해!” {아아아! 비술 용사단의 소환수 가르데브, 강합니다! 역시 4강! 과연 륀 용사단, 지금까지 이어온 4:5 대결이 깨지는 걸까요? 검사 혼자 다섯 명을 막기 버거워 보입니다!} “흥, 너희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4강까지 네 명이서 싸울 참이었다면 지금 접는 게 좋을 거다.” “거기, 웃긴 복면. 지금까지 잘도 거들먹거렸겠다!” “죽여주마!” 적 팀 네 명이 우리들을 한 명씩 맡으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하가네님과 레이나님은 서로 붙어 다니며 둘을 상대하기 시작했고 불사조님은 급히 날아온 화살을 피하느라 나와 멀리 떨어져 버렸다. 결국 나는 혼자가 되어버렸다. “네 상대는 나다!” “이런, 미친!” 오지 마, 왜 나한테 오는 거야? 내가 그리 맛있어 보이냐, 이 검사나부랭이…이힉!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검격. 나는 목이 무사한지보다 복면이 찢어지지 않았나부터 검사했다. “오호, 그리 복면이 신경 쓰이나? 좋아, 내 손수 벗겨주지!” “젠장, 너 변태냐!” “그런 걸 쓰고 용자대전에 나오는 네가 더 변태 같다는 생각은 안 드냐?”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는 검사. 속으로 찔끔했지만 자의로 쓴게 아니었기 때문에 넘어갈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힉! 무기도 없는, 우왁! 사람한테 너무한 거 아냐!” 바닥을 구르고,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점프도 뛰는 등 어떻게든 피하며 외쳤다. “요리조리 잘도 피하는 구나! 그럼 이건 어떠냐! 바람의 댄스!” 검사가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이렇게 발을 놀리기 시작하면 같은 검사가 아닌 한 그 속도를 따라가기란 불가능했다. 물론 전에 태식 형의 블레이즈 댄스를 피하던 현빈 형 같은 궁수가 있긴 했지만 그야 천리안의 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나는 힘, 민첩 쪽까지 완전히 최하여서 지금까지 요행으로 간신히 피한 상태인데 어떻게 저 속도를 따라가란 말인가! “어, 어, 억!” 『위험……!』 눈앞에서 사라지는 검사. 한 발짝 뒷걸음치는 사이 이미 옆에서 나타나 무릎을 걸어 넘어트리고 그 위에 올라탔다. 완벽히 마운트포지션을 내주게 된 것이다. “이거 힘, 민첩쪽은 완전히 꽝이잖아? 법사계열인가?” {탈영병 선수! 핀치입니다. 그것도 대 핀치! 다른 선수들은 지금 도와주지 못하고 있어요!} 해설자의 말을 들으며 여유 부리던 검사는 입을 말아 올리며 나를 비꼬았다. “그렇다는데 어쩌나.” “이이익!” 지금 나는 마운트포지션을 당했다는 것이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부끄러워서 화가 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녀석의 엉덩이가 지금……. “그런데 어째, 왜 이리 폭신폭신 하지?” “당장 떨어져!” 아무리 내 몸이 아니라지만 누나를 욕보이게 할 수 없지 않은가! “왜 화를 내고 난리야. 어쨌든, 그 아끼던 얼굴 좀 보자, 으흐흐.” 즐기고 있어. 마지막 저 웃음과 표정이 그걸 말하고 있어! “음, 어떻게 묶은 거야? 잘 벗겨지지도 않…아, 이렇게 하는 거군. 그런데…어라? 이건…….” “정령아, 공격해!” 녀석이 내 얼굴을 벗기려는 동시에 나는 크게 외쳤다. 『예썰!』 - 푸화아아아아악! <스태미나가 떨어졌습니다. 모든 기능이 최하로 하락하며 컨디션 및 체력이 일정한 시간으로 하락 합니다.> 아무리 공격하랬다고 해도 그렇지, 그리 무식하게 공격할 필요는 없었잖아. “너, 너, 너는…여, 여, 으, 으아아아아악!” - 펑! 빛의 입자가 사방으로 퍼지며 검사가 저 멀리 관중석까지 날아갔다. 그 정도로 파괴력은 없지만 밀어내는 파워만큼은 대단했던 것이었다. 검사가 날아가 장외로 떨어지자 해설자를 포함해 관중들까지 꿀이라도 먹은 듯 말을 못했다. {대, 대단합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주문하나 없이 검사, 팜 선수를 관중석까지 날려 보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어, 얼굴이!} 빛의 입자가 사리지자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관중들과 해설자는 침을 꿀꺽 삼키며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검사 놈이 가지고 있던 복면을 빼앗아 다시 쓰고 있는 중이었다. {칫, 안 보이는군요.} 안타까워했어, 분명 안타까워했어! 저 해설자놈! “여, 여, 여…여어…….” 관중석에서 부들거리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던 검사는 결국 말을 끝맺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여어는 대체 뭘까요!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경악한 걸까요? 더욱 궁금해지는 탈영병 선수! 결승에서는 꼭 복면이 벗겨지길 기원해 봅니다!} 그딴 거 기원하지 마! 나는 해설자를 속으로 으드득 갈아먹으며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다들 하나하나 적 팀을 무찌르기 시작했고 결국 이번에도 승리는 우리 륀 용사단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다음날 벌어질 결승에 우리 팀이 올라서게 되었다.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17일전. 내가 믿을 건 이 정령의 한방공격밖에 없었다. 만약 내 고유 스킬을 사용해버린다면 복면 쓴 탈영병이란 선수가 미소천사임이 발각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부정행위로 경기에서 자동 탈락될 뿐만 아니라 GM측에서 미소천사가 누구인지 조사에 들어가 바로 눈팅에게 들키게 된다는 것을 뜻했다. 4강에서야 요행으로 한방에 성공해 간신히 도망갈 수 있었으나 결승에서 또 그런 요행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런데 의외로 결승까지 쉽게 올라갔네요?” “그럴 수밖에요.” “네?” 내 의문을 가지고 당연하다 말하는 레이나님의 말이 더한 의문이 되어 돌아왔다. 지금 레이나님과 나는 곧 시작할 결승전을 기다리기 위해 대기실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나머지는 좀이 쑤신다며 구경이나 할 겸 밖으로 나간 상태라 이렇게 둘이서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레이나님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어느 정도 미소천사님의 성격이 파악돼서 별로 놀랍지도 않네요. 용자대전에 강한 상대가 없는 이유는 지금 전부 미소천사 기사단 때문이에요. 아무리 몰라도 그렇지, 자신의 기사단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데 관심 좀 가지세요.” “네에?” 이곳에 강한상대가 없는 것이 왜 미소천사 기사단 때문이란 말인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금도 기사대전에서 압승을 거두고 있는 미소천사 기사단이 전 기사단을 경계하게 만들었어요. 용자대전에서 발목 잡힐 때 기사단이 망할 수도 있으니 전부 기권하고 기사단 재정비에 들어간 거죠.” 레이나님의 말대로라면 무한기사대전을 한다는 작전이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었다는 것을 뜻했다. 어쩐지 지금까지 태식 형이나 현빈 형한테 연락이 없었던 것도 이해가 갔다. 그 정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겠지. 그래서 이곳에 랭커가 없었던 거였다. 결승전까지 너무도 쉽게 올라온 이유가 그거였군. 하지만……. “단 하나의 기사단으로 모든 기사단이 경계를 한다는 건 조금 억지스러운데요?” “그건 제가 묻고 싶은걸요. 도대체 어떤 기사단을 만들었기에 단장인 미소천사가 없음에도 이리 강할 수가 있는 거죠? 벌써 30연승을 넘어갔어요. 단 10연승 만에 엄청난 인지도를 얻어 단원수가 다섯 배 이상 불어버리더군요. 그 기사단에는 대체 누가 있는 거죠?” 눈을 가늘게 뜨고 말하는 레이나님. 그야 랭커6, 8위가 있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겠지만. 나는 이걸 말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차피 곧 저희 수색조가 알아낼 테니까 상관은 없어요. 그보다 제게 중요한건.” 레이나님이 갑자기 한 발짝 다가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미소천사 기사단이 저희 륀 기사단과 기사대전을 할 것인가가 중요한 거겠죠.” 레이나님의 눈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대답여하에 따라 행동을 취할 생각인 것이다. 지금 미소천사 기사단이 어떻게 나갈지 몰라 확답을 하기는 어려웠으나 나는 이것만은 말해줄 수 있었다. “적어도 난, 친분이 있는 사람을 죽게 만드는 일은 없을 겁니다.” 같이 똑바로 마주보았다. 이것은 심리싸움이기도 했다. 눈에 망설임이 있는가. 거짓을 하고 있는가. 모든 것은 눈동자의 흔들림으로 판단하기 마련이다. 이럴 때일수록 나는 눈을 차분하게 만들고 상황을 지켜보아야했다. 한동안 내 눈을 바라보던 레이나님이 한순간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전 그래서 미소천사님을 좋아해요. 저희도 미소천사 기사단과 싸울 생각이 없으니 이참에 동맹하죠?” 내밀어진 손. 저 손을 마주잡으면 륀 기사단과 동맹이 이루어질 것이었다. 지금 내가 정식적인 단장에 있지 않은지라 잡아도 동맹이 되진 않겠지만 약속을 한 셈이 되는 것이다. 왠지 지금까지 말들이 이것을 위한 포석이란 생각이 들어 피식 웃고 말았다. “좋아요. 아직 제가 정식 단장에 오르지 않아 이 자리에서 동맹을 체결할 수 없겠지만 일단은 약속드리죠.” 나는 레이나님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로서 미소천사 기사단과 이번 업데이트로 기사단 랭킹 8위로 확실히 자리 잡은 륀 기사단은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런데 이렇게 될 줄 알고 륀 기사단은 용사대전에 기권하지 않은 건가요?” 넌지시 떠보았다. 내 의향을 눈치 챈 레이나님이 짓궂게 웃으며 답했다. “일단 하가네가 절실히 필요한 아이템을 우승 상품으로 내놓은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미소천사님이 부탁하셨잖아요?” 감격했다. 나 때문이라고 말해주는 레이나님의 말이 너무도 고마웠다. 내 수염이 그리도 안타까웠나보다. “여기 인질이 있는데 미소천사 기사단이 미쳤다고 쳐들어오겠어요?” “이, 인질이었던 겁니까?” 레이나님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나는 고마웠던 마음이 다시 내면 깊숙이 쏙 사라지고 말았다. “헉! 이게 무슨 일이야! 안 떨어져?” “후후, 불륜이라. 수장 나이가 조금 많다는 빼면 그리 나쁘지 않겠는데요?” “어라? 레, 레이나 누님. 여러 의미로 그건 범죄에염.” 나는 보았다. 레이나님의 이마에서 힘줄이 붉어져 나오는 것을. “호호호, 사조씨. 나이가 어떻다고요? 하가네, 여러 의미로란 무슨 의미니?” 레이나님 눈앞에서 물이 천천히 압축되기 시작했다. 물이 점점 줄어들수록 나를 포함한 세 명의 안색도 점차 변해갔다. “도, 도망가!” “누, 누님, 진정해염!” “후훗, 이거 터져나가겠는 걸요?” “사조님, 지금 웃을 땝니까!” “압착의 수환(water pills of compression)!” 그때 우리들은 정말 죽을 뻔했다는 것을 이참에 말해두겠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왼쪽, 글로리아 용사단의 수장 바텐더 외 네 명! 오른쪽, 륀 용사단의 수장 레이나 외 네 명!} “와아아아아아아!” {그런데 오른쪽 팀은 어디서 몬스터라도 잡고 온 걸까요? 몰골이 말이 아니네요.} 해설자가 말한 대로 우리들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온몸이 흠뻑 젖었을 뿐만 아니라 옷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있었고 마지막에 불사조님이 방어한답시고 불꽃을 터트려 머리까지 그을린 상태였다. 레이나님은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살짝 흘겨보다 팩 고개를 틀었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이거 시작하기 전부터 상황이 심각합니다! 그래도 일단 끝을 보아야겠죠? 자, 암흑의 마왕 베르제브브를 막기 위해 선발되는 다섯 명의 용사는 과연 어느 팀이 될 것인가! 모르핀 제국, 용사대전. 그 마지막 대결을 시작합니다!} - 펑! 거대한 폭죽이 터지며 대결의 시작을 알렸다. 우리들은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앞으로 나선 것은 거대한 방패를 들고 있는 철패뿐이었다. “와라!” 우직하게 서있는 철패의 모습은 그야말로 철벽을 연상시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적 팀의 한 검사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네놈은 내가 맡지.” {륀 용사단의 우직한 철벽, 철패 선수를 상대하기 위해 글로리아 용사단의 대지의 기사라 불리는 가이안 선수가 나섰습니다!} 가이안이라 불린 검사는 온몸이 구리 빛으로 탄탄하게 생긴 피부를 자랑했다. 그리고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머리도 민둥 대머리라 어찌 보면 용병을 연상시켰는데 크기만큼은 철패 녀석과 별반 다를 게 없어보였다. “네놈 혼자 나를 상대하기에 역부족일 거 같은데?” 거대한 방패를 옆으로 세우며 으스대는 철패 녀석. 가이안 검사는 말없이 소드 벨트(Sword belt)에 메여져 있던 두 개의 검을 꺼내들었다. “희한한 검을 들고 있군요.” 레이나님이 한 말이었다. 나는 검 두 개를 유심히 보았다. 오른손에 든 검은 잘 모르겠지만 왼 손에 든 검은 내가 아는 검이었다. 망고슈(Main-gauche)라는 검인데 내가 알기로는 화포의 발달로 인해 생겨난 무기로 방어를 담당하는 용도로 쓰였기 때문에 가드가 크고 둥글다는 게 특점인 검이었다. “쌍검사인가? 무지 특이한 검을 들고 다니는군.” 철패 녀석은 별 특색 없는 거대한 방패를 추켜들며 외치자 가이안 검사가 비웃었다. “네 녀석같이 대장간에서 대충 만든 무식한 방패와는 혈통이 다른 검이다. 이 녀석을 망고슈, 그리고 이것을 소선 파타(Sosun patta)라 부른다.” 오른손을 높이 들며 자랑하는 검을 소선 파타라 불렀다. 눈여겨보자 칼끝이 칼 등이 아닌 칼날 방향으로 완만하게 굽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 외날 검이었는데 검이라기 보단 도라고 해야 맞을 것 같아 보였다. “이 검은 산스크리트어로 ‘백합 꽃잎’이라 불리지.” 가이안 검사가 소선 파타를 가로 휘두르며 말했다. 철패 녀석은 그 모습을 말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그런데 저런 검 하나로 뭐 저리 으스대죠?” “혈통 있는 검은 이 게임세계에서 희귀, 즉, 유니크급으로 취급받고 있기 때문이죠.” 내 의문을 레이나님이 간단히 풀어주었다. 유니크급이라. 그런 검을 두 개나 가지고 있었으니 철패 녀석이 긴장하고 있을 수밖에. “그 조잡한 방패, 이 검으로 부셔주마! 흐아아아압!” 대결이 시작되었다. 철패 녀석과 가이안 검사의 양상으로 보아 다른 적을 막아주기란 기대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우리 팀은 전부 적들이 몰아쳐올 공격에 대비해 한껏 긴장했다. “…오지 않아?” 레이나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적들을 보았다. 확실히 상대팀은 다가 올 생각을 하지 않는 듯 보였다. 이거 긴장한 우리들만 바보 된 꼴이었다. “훗, 이건 일대일 대결을 하자는 뜻이거나 아니면 여유겠죠.” 항상 포지티브인 불사조님조차 가늘게 웃던 눈이 조금 찌푸려졌다. “어디 마법을 난사해도 저렇게 서 있을 수 있나 보죠. 파이어보…….” “스톱.” 레이나님이 불사조님의 마법시전을 중지시켰다. 나와 하가네님, 불사조님은 의문을 가지고 레이나님을 보았다. “적이 저렇게 나온다면 더 확실히 복수해 주는 방법이 있지.” “누님, 어떤?” “철패가 이기는 거.” 레이나님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다 모두 한창 싸우고 있는 철패를 보았다. “이길 수 있을까요?” 내가 떫은 표정으로 말했고. “후훗, 마법시전 취소하는 바람에 조금 피드백 당해버렸네요.” 입가에 한줄기 선혈을 흘리며 웃는 불사조님. “난 철패님을 모르겠으니 패스하겠삼.”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뒤로 빠지는 하가네님. “믿어봐. 철패는 저런 상대에게 절대 지지 않아. 호호호호호!”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지 눈에 불을 켜고 마녀처럼 웃는 레이나님. 저건 분명 화나서 오기 부리는 거다. 오기부리는 게 분명해! 그렇게 결국 가이안 검사와 철패 녀석의 일대일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 쾅, 쾅! {엄청난 파상공격을 펼치고 있는 가이안 선수! 철패 선수 대 핀치 입니다!} “헉, 헉. 언제까지 막고만 있을 거냐!” “……….” 말없이 굳건하게 방어에 일념 하는 철패 녀석. 아까부터 끊임없는 쌍검난무에 연신 뒤로 밀리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어가 뚫리진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가이안 검사가 짜증을 낼 수밖에. “이놈의 조잡한 방패, 얼마나 철판을 덧대었으면 깨지지도 않는 거냐!” “…미안하지만 이건 깨지지 않아.” 처음으로 말문을 열은 철패 녀석. 방패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얼굴을 들었는데 웃고 있었다. “슬슬 시작해 볼까? 실드 차지!” - 쾅! {아앗! 철패 선수! 드디어 공격에 나섭니다!} 어깨 힘을 이용하여 방패를 앞으로 밀어버려 상대를 무참히 가격해 버리는 철패 녀석. 가이안 검사는 순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버렸다. “무, 무슨 힘이 이렇게……!” 같은 덩치였지만 힘은 틀렸던 모양이었다. 눈을 부릅뜨며 놀라는 가이안 검사의 표정을 보고 유추한 것이다. 그동안 웅크리고 있던 지라 조금 힘들었던 모양인지 몸을 쭉 펴며 한결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짓는 철패 녀석. “혹시 이지스 방패란 말을 들어봤나?” “그리스 로마 시대에 등장하는 무적의 방패가 아니냐. 설마 그 방패가?” 철패 녀석이 놀란 가이안 검사의 표정을 보고 크게 웃어젖혔다. “으하하! 이 방패가 무슨 신급 아이템이라도 되겠나? 내 직업이 이지스다.” 철패 녀석이 가슴을 탕탕 치며 다시 말했다. “네가 유니크 아이템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내가 유니크다!” “그, 그런!” 가이안 검사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던 철패 녀석보다도 레이나님이 더 통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은근히 저 분 무섭다. “호호호, 이지스란 직업 특성은 자신이 들고 있는 모든 방패능력이 1.5배 상승, 게다가 절대 부셔지지 않는다죠. 철패가 드는 모든 방패는 다 유니크랍니다!” “누, 누님이 히스테리 부기고 있다능.” “후후, 역시 레이나님도 재미있다니까요.” “허허, 레이나님의 이미지가 다시 그려지고 있어.” 정말로 허탈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흥, 그딴 직업 하나로 나를 이길 수 있을 거 같으냐? 대지의 힘!” 가이안 검사가 크게 발을 구르며 소리치자 몸 색깔이 점점 흙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나왔습니다! 대지의 검사 가이안 선수의 18번, 대지의 힘!} “우오오오오오오!” 가이안 검사가 쿵쿵 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무거웠으면 땅의 진동이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 쾅! 다시 부딪힌 두 유저. 이번에는 철패 녀석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크하하! 그 정도 힘으로 버틸 수 있을 거 같으냐!” 연신 쌍검을 휘두르며 다시 압박을 가하는 가이안 검사. 훙훙 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저 하나하나의 파워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큭, 이놈, 힘만 무식하게, 으윽!” 굳건하게 앞을 방어하던 방패가 드디어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때론 옆으로, 어떨 때는 위로 튕겨 올라갔지만 간신히 제자리를 찾았다. 그걸 보고 있던 우리들의 가슴이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이거 방어만 하면 안 될 거 같은데요?” 내가 마지못해 한 말이었다. 레이나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야 할 걸요.” “기다려요?” “지금 몇 분 지났죠?” “한 10분?” 레이나님은 내 대답에 작은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럼 이제 슬슬 발동되겠군요.” “무…슨?” 내가 의문을 말하는 동시에 철패 녀석의 몸에서 황금빛 빛이 퍼져 나왔다. “이지스, 황금의 인 발동!” 갑자기 철패 녀석의 몸이 1.5배 커졌다. 게다가 오히려 다시 가이안 검사를 힘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갑자기 어찌된 상황이지? “10분 동안 상대의 공격을 막으면 발동하는 조건 스킬이죠. 단 1분이지만 모든 능력치가 상승해요. 게다가 마법 면역이란 강점이 있죠.” “어떠한 것도요?” “물론 드래곤 브레스 같은 무식한 마법에는 죽지 않을까요?” 레이나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능력은 엄청나지 않은가. 10분 동안 막기만 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긴 하지만 잘만 사용하면 지금처럼 한 순간에 역전할 수 있는 찬스가 될 수도 있는 기술이었다. “으허헉!” 망고슈와 소선 파타를 앞세워 방패를 대항했지만 마구 휘둘러지는 방패 힘을 못 이기고 결국 검을 놓치고 마는 가이안 검사. 지금이 기회라 생각한 철패 녀석이 외쳤다. “지금이다! 쉴드 슛터!” 철패 녀석이 그 무식한 힘을 이용해 방패를 가이안 검사에게 날려버렸다. 휭휭 돌며 날아가는 거대한 방패. 이걸 피하기란 매우 힘들어 보였다. “어림없다!” “매, 매트릭스다!” 내가 황당해 외친 말이었다. 간발의 순간 정말 몸에 어울리지 않게 가이안 검사가 허리를 뒤로 확 꺾어 방패를 피한 것이었다. “헉, 헉. 방패를 던진 건 너의 실수다! 으하하하하?” 철패 녀석이 손가락을 흔들며 쯧쯧 거리자 뭔가 상황이 이상하다 느낀 가이안 검사. 철패 녀석이 방패를 던져 뻐근해진 팔을 돌리며 말했다. “방패사가 방패를 버릴 리가 없지. 내가 이 스킬을 얻기 위해 방패를 얼마나 던져댔는데 말야.” “뭐, 뭐? 서, 설마…으, 으아아악!” - 퍽! 되돌아온 방패가 거침없이 가이안 검사의 등을 가격해버렸다. 대지의 힘이 풀리며 쓰러지는 가이안 검사. 이번 승리는 이렇게 철패 녀석이 가져가게 되었다. “어떠냐, 쉴드 부메랑 맛이.” {아아, 가이안 검사 그로기 상태! 이번 일대일 승부는 륀 용사단이 차지하게 된 거 같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 황금의 인이 풀린 철패 녀석은 지쳤는지 숨을 몰아쉬며 우리에게 돌아왔고 레이나님은 어떠냐는 표정으로 적 팀을 바라보았다. 이로서 5:4가 되었다. 거드름 피울 상황이 뒤바뀌었다는 것을 뜻했다. {아 글로리아 용사단 과연 어떻게 나올지…아 나왔습니다. 아펜하르트의 유일한 힐러, 미소천사!} “응?” “어라?” “이건 뭥미?” 나와 레이나님, 하가네님까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어처구니없어했다. 해설자가 말한 상대는 금발 곱슬머리를 하고 있는 작은 소녀였는데 온통 백색의 사제복을 입고 있어 별로 눈에 튀지 않는 유저였었다. 그 유저는 천천히 가이안 검사에게 다가가 주문을 외웠다. “세상의 어머니, 가이아 여신님의 힘은 땅, 땅은 곧 생명이리라. 큐어(cure)” {나왔습니다, 힐! 가이안 선수, 천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짜 힐이었다. 백색의 빛이 천천히 가이안 검사에게 스며들었고 그러자 눈에 띄게 회복되는 등. “어어어?” “우와아! 진짜 미소천사님이야?” 철패 녀석하고 불사조님이 놀란 표정으로 금발머리의 작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저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다. 힐을 또 쓰는 자가 있었어? 하긴 내가 힐을 쓴지 시간이 꽤나 지난 상태였다. 지금쯤이면 다른 유저도 힐을 쓰지 못하리란 법도 없지 않겠는가. 단지 이런 자리에서 알지도 못하는 유저가 나를 사칭하며 힐을 쓴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을 뿐이었다. “미, 미소천사님은 분명 엄청 예쁘다고 들었는데…저런 어린애란 정보는 몰랐단 말이다! 팬이었는데, 으으윽!” 철패 녀석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엎드렸고 그 모습을 보던 레이나님이 작게 말했다. “차라리 어린 게 낳지. 수염 난 여자를 보…우읍!” “아하하, 지금 그런 걸 말할 때가 아니잖아요.” 그렇다, 간신히 막았다. “으으읍, 휴우. 하긴 그렇지. 여하튼, 이로서 불리해진 건 우리인가? 저쪽은 다시 완쾌되었고 우리 쪽은 지쳐버렸으니.” “후후, 아무래도 노린 것 같군요. 이런 상황이 올 줄 알고. 힐러가 있다면 어떻게 해도 유리해질게 뻔 하니 말예요.” 레이나님의 말을 받은 불사조님이 한 말이었다. 철패 녀석은 여전히 좌절모드에 들어가 있었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서있을 뿐이었다. “저쪽은 사칭하는데 천사님은 어찌할 생각임?” 뭔가 생각하던 하가네님이 나에게 한 말이었다. 저쪽이 사칭한다 해도 사실 나에겐 별 뾰족한 방법이 없어 어깨를 으쓱했다. “어? 저기서 뭐라 말하려는 거 같다.” 레이나님이 적 팀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역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발 머리의 소녀는 많이 부끄러운지 치마를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는 상태였는데 얼굴까지 붉어진 것을 보면 꽤나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아이 같았다. “저, 저는! 미소천사님입니다! 제, 제가 당신들을 용서치…않겠습니다아!” 순간 조용해지는 관중석. 게다가 우리들. 처음으로 말을 꺼낸 건 철패 녀석이었다. “귀, 귀여워.” {귀, 귀엽습니다! 맙소사, 저까지 닭살이 돋았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해설자가 뒤이어 소리 질렀고 관중석에서 발한 엄청난 환성이 장내를 가득 메웠다. “후후…순간 껴안아주고 싶어져서 놀랐습니다.” 불사조님 웃으며 그런 소리하시면 로리콘으로 보입니다. “킥킥,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쩔 거예요?” “이거 상황이 갈수록 웃겨지삼! 키키키키.” 못 참겠다는 듯이 바닥에 쓰러져 웃는 두 유저. “하아아.” 요즘 따라 머리가 지끈거리는 일도 많아지는구나. 『주인님, 그런데 저 힐러 우는 것 같은데요?』 “응?” 정령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으나 너무 멀어 나에겐 보이지 않았다. “저기서 말하는 소리도 들려?” 『음, ‘잘했어, 그렇게 하면 되’, ‘그렇게 존경하던 미소천사가 된 거야 너는’ 으음, 또 뭐더라. ‘뚝 안 그쳐? 안 그러면 그동안 사칭하고 있었다는 걸 다 불어버릴 거야!’네요?』 “그래?” 말인즉슨, 저 소녀는 지금 이용당하고 있다는 말이렷다? “레이나님.” “크흑흑, 네?” 여태까지 웃고 있었던 겁니까? 배꼽 빠지겠수다. “슬슬 공격하죠.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예요?” “흠흠, 뭐 장난은 여기까지 해야겠네요. 자, 이제 저희 방식대로 가죠. 더 이상 저들에게 이끌릴 필요는 없겠죠? ‘정신집중’스킬 발동, 수속성 교합, 증폭, 아이스필드(ice field)!” 주문과 동시에 바닥이 쩌저적 얼어붙었다. 얼음은 급속도로 적 팀까지 뻗어나갔다. {륀 용사단, 드디어 승부에 나섰습니다! 레이나 선수의 아이스필드!} “디스펄스(disperse)” 적 팀의 마법사가 지팡이를 내리 꽂으며 외쳤다. 그러자 순간 바닥을 침투하던 얼음파편이 빛이 분산되는 것처럼 깨져나갔다. “주문해제? 피드백이 심할 텐데? 아아, 힐러!” 억지로 상대의 마법을 해제하는 짓은 피드백을 불러일으키는 짓이라 알고 있었다. 레이나님도 그걸 말하려다 순간 아차 하는 심정으로 힐러를 가리켰다. “힐러라면 피드백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내가 자주 했던 짓이어서 잘 알고 있었다. 피드백은 자신의 스태미나와 MP를 소모시킨다. 그러니 옆에 힐러가 있다면 죽을 걱정이 없기 때문에 마음껏 마법을 시전 시킬 수가 있는 것이었다. 내가 쓸 때는 그렇게 좋던 방법이 적이 쓰는걸 보니 굉장히 껄끄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정신집중’스킬 발동, 화속성 교합, 파이어볼, 무한 연타!” - 퍼버버버버버버버버벙! 이렇게 많은 마법이 날아간다면 디스펠 만으로는 막기 어려울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적 편인 궁수가 나섰다. “컨트롤 요격 샷!” - 콰콰콰콰콰쾅! 대부분의 파이어볼이 공중에서 화살에 요격 당했고 겨우 날아온 몇몇 개의 불덩이는 가이안 검사의 칼질에 속절없이 꺼져나갔다. “우리에 대한 조사를 철저히 한 모양이네.” 코웃음 치며 말하는 레이나님. 방어 면에서는 정말 완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후훗, 그럼 이제 이 방법은 쓰면 안 되겠군요.” 불사조님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그 안에 보이는 붉은 눈동자. 뭔가 분위기가 무거워 졌다 “주문에 들어가겠습니다. 백업 부탁드립니다.” “나 역시 주문에 들어갈게. 하가네 부탁해.” 두 명의 마학자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지만 하가네님은 익숙한지 앞으로 나서며 모든 강철조각을 꺼내들었다. “연성진!” - 콰콰콰콰콰! 강철의 벽이 완전히 우리와 적들의 공간을 나눠버렸다. 높이로 보아 뛰어 넘어오기는 불가능해보였다. “하지만 이리 얇은 벽으로는 쉽게 뚫릴 거 같은데.” “쯧쯧, 이건 벽이 아니에염.” 내 예상을 듣고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하는 하가네님. 그러고 보니 뭔가 손잡이 같은 게 보였다. 서, 설마 저건! “너희는 절대 이걸 못 뚫을 거다! 내가 잡는 건 죄다 무적의 방패가 되거든!” 바, 방패였던 거야? 정말 사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되면 아무도 뚫지 못하지 않겠는가. - 콰쾅! 퍼펑! 쿵쿵! 방패벽 너머 무수히 두들기는 소리와 마법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으나 무용지물이었다. 적들도 당황했겠지. 이렇게 얇은 철벽이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으으으으으윽!” 하지만 그만큼 철패 녀석도 데미지를 받는 것 같았다. 절대 무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철패 녀석이 떨어져나갔고 쉽게 방패 벽이 부셔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 정도 시간만 벌어도 충분했겠지. 이미 불사조님과 레이나님이 주문을 완성시킨 것 같았으니까. “완성. 합작마법, 압착의 수환(water pills of compression) 연타!” 레이나님 주변에 무수한 물 구슬이 모여 있었다. 하나하나 어마어마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압착의 수환이 저렇게나 많다니 저 파괴력을 직접 보았던 나였기에 저것이 얼마나 강력한 마법인지 너무도 잘 알 수가 있었다. {아, 압착의 수환이 무수히 많습니다! 전부 하나하나 필살기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수환! 많아요, 너무도 많아요!} 땀을 비 오듯 쏟는 레이나님과 불사조님. 레이나님이 천천히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것도 한 번 막아봐라, 발사!” - 투두두두두두두두두! 총기를 쏘아내듯 날아가는 수환들이 순식간에 적진으로 들어갔다. “마, 막아라!” “디스펄스(disperse)” “컨트롤 요격 샷!” “흐아아아아앗!” “세, 세상의 어머니, 가이아 여신님의 힘은 땅, 땅은 곧 생명…꺄악!” “제대로 해! 우왁!” “어서, 힐, 힐을!” 검사 두 명이 앞으로 나서서 간신히 수환을 막아내었지만 근거리에서 터져나가는 바람에 갑옷이 성한대가 없었고 궁수의 화살로는 수환 하나도 요격하기 힘들어 보였다. 간신히 주문 해제로 몇몇 개를 무효로 돌리고 있었지만 연신 피를 흘리고 있는 걸로 보아 마법사역시 한계에 부딪힌 듯 보였다. 그런 파티 전부를 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소녀. 갑자기 미친 듯이 짜증이 샘솟았다. 힐러에게 힐을 받기 이전에 힐러를 지켜주란 말이야! 힐러가 수환에 노출되어 있는데 어떻게 힐을 하라는 거야! 그럴 때는 힐을 믿고 주문 해제보단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란 말이야, 마법사! 궁수, 너도 요격하기 힘들면 힐러를 막아주어야 할 것 아니야! 지금 힐러한테만 뭐라 말할 때냐! “…춰요.” 내 말은 적들의 소리와 관중들 함성에 묻혀버렸다. 몸속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었다. 다른 건 몰라도 힐러가 관여된 일은 언제나 이성을 잃게 돼 버렸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한나를 처음 만났을 때 말이다. 지금 내 이성은 참으로 말하고 있는데 자꾸만 욱욱 거리는 가슴이 튀어나오려 했다. “똑바로 해!” “역시 꼬맹이를 믿는 게 아니었어!” “헉, 헉. 젠장, 죽게 생겼잖아!” “하아, 하아. 큐, 큐어(cure)! 하아, 하아.” 지쳐 쓰러져가는 소녀를 보는 순간, 결국 나는 터져 버렸다. “전부 멈춰어어어어어!” <‘침묵의 절규’ 발동.> <‘침묵의 절규’의 숙련도가 10 상승했습니다.> “어억!” “큭!” 내가 지른 소리에 수환들이 전부 소멸해 버렸고 레이나님이 순간 피드백으로 피를 토했다. 불사조님 역시 연타를 컨트롤 하느라 순간 비틀거렸고 적들과 관중들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무슨……?” 레이나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답변대신 주문을 외웠다. “‘태초의 재생’ 발동.” 손끝에서부터 퍼져 나온 녹색 빛이 레이나님을 감싸 안았다. 그 모습을 본 모든 유저는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히, 힐입니다! 미소천사 말고도 힐을 쓰는 자가 또 있었습니다!} 해설자와 관중들은 아직 진실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적 팀은 모두 알고 있을 테지. “마, 맙소사. 진짜 미소천사야?” “그럼 저 복면은 얼굴을 가리기 위한 위장이었어?” 웅성거리기 시작한 적 팀. 금발의 작은 소녀는 피드백이 심했던지 얼굴을 연신 찌푸렸지만 눈만큼은 나를 때지 않았다. 나는 다시 주문을 시전 했다. “‘태초의 재생’ 발동.” 힐의 방향은 우리 편이 아니라 적 팀의 힐러. 치유되는 자신의 몸을 보며 놀라하는 소녀에게 나는 말했다. “너, 힐러 접어라.” “……!” 소녀가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며 계속 말했다. “도저히 못 봐주겠다. 힐러로서 가장 기본이 되는 팀원 선택조차 못하고 있는 네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울화통이 터져서 내가 미쳐버릴 것만 같단 말이다!” 말하다보니 정말 화가나버려 결국 소리 지르고 말았다. 그런 나를 반박한 것은 소녀가 아니라 적 팀원들이었다. “뭐? 기본이 되는 팀 선택? 네가 뭔데 막말이야!” “복면이나 쓰고 다니는 주제에 누구를 가르치려들어!” “흥, 뒤가 켕긴 게 분명해!” 내가 복면을 못 벗을 줄 알고 그리 말한 거 같은데 나를 너무 얕봤어! “그러면 내가 못 벗을 줄 알…이거 놔요!” “릴렉스, 릴렉스! 그 수염을 온 천하에 공개할 셈이에요?” “이익…….”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차마 벗지 못하는 이 억울함. 나를 막아준 레이나님이 고마웠지만 그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거봐! 역시 못 벗잖아!” “그런 주제에 말이야!” 머리에서 무언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덤벼.” 복면 안에서 내 입술이 씰룩거리고 있었다. 경직된 내 얼굴 그걸 봤으면 다들 한 걸음 물러났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계속 말했다. “다 덤벼! 누가 미소천사에 어울리는지 이참에 가려주겠어!” “그러면 못 덤빌 줄 알고!” “내가 죽여주마!” 적들이 달려들 것 같아서 우리 팀도 한걸음씩 앞으로 나섰다. “네 상대는 나야!” “어딜 달려들려 들어!” 모두들 흥분해서 다시 싸우려는 일촉즉발의 상황, 바로 그때. “으흑, 윽,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앙!” 장내를 가득 메우는 울음소리가 모두를 멈춰 세웠다. 모두들 우는 쪽으로 눈을 돌렸고 그곳에는 금발의 소녀가 주저앉아 처연하게 울고 있었다. “히끅, 나는 하기 싫었는데, 히끅! 미움만 받고, 히끅! 흐아아아아아앙!” “뚝!” “울지 마!” 적 팀이 당황해서 소녀를 달랬고 소녀는 그런 팀을 한껏 노려보다 다시 울었다. “히끅, 미소천사님이 나보고 힐러 하지 말래! 전부 다 당신들 책임이야! 흐아아아앙!” “계속 울면 네 정체 전부 까발린다!” 가이안 검사가 최후의 수단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건 더 독이 되어 돌아왔으니. “말해! 말해! 미소천사님이 저기 있는데 더 이상 뭘 연기하란 말야! 나 안 해! 안 할 거야!” 그 소리가 우리들을 포함해서 관중들까지 모두 들었다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말하면서 소녀가 손가락질로 나를 손수 찍어주는 센스를 범하고 말았다. “네, 네가 미, 미소천사 였…던 겁니까?” 이봐요, 철패님. 갑자기 존대해봐야 그 이미지 안 변하거든요? “후훗, 역시나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그 얼굴 좀 구경해도 될까요?” 웃으면서 슬며시 복면 벗기려 들지 마세요, 불사조님. “에휴, 난리 났네.” “킥킥, 여기서 가면 벗겨지면 정말 스펙터클 대 반전이겠삼.” 레이나님은 지친 듯이 어깨를 늘어트렸고 하가네님은 배를 부여잡고 절대 벌어지지 않을 상상을 하고 있었다. {미, 미소천사가 다른 사람이었던 겁니까! 이거 놀랍습니다! 미소천사로 알고 있던 선수가 진짜 미소천사라 지목한 인물은 다름 아닌 탈영병 선수!} “……….” “……….” 관중들이 꿀 먹은 벙어리마냥 말을 못했다. 매치가 안 될 테지. 복면 쓴 괴한을 미소천사라 말하고 있으니 말이야. 소녀가 우는 걸 멈추고 갑자기 일어섰다. 다시 주목되는 소녀. 소녀는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나 기권할래!” “으아아악!” “손 내려!” “이런, 미친!” 적 팀원들이 경악했지만 이미 한 발 늦은 상태였다. {기, 기권입니다! 팀 대결이기 때문에 한 명의 기권은 팀의 기권으로 이어집니다!} “기권 안합니다!” “반대, 반대!” “아직 싸울 수 있어!” 하지만 소녀는 여전히 손을 내리고 있지 않았다. “기권!” “으아아아악!” “제발!” “스무 살 주제에 왜이리. 어린애처럼 굴어!” {여전히 손을 내리지 않고 있는 미소천사 선수! 심판의 판정은…손을 들었습니다! 기권을 받아들였어요! 기권 패입니다! 글로리아 용사단 기권 패!} “와아아아아아아아!” 갑작스런 상황에 우리팀원들은 모두들 멍하니 적 팀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게 무슨 결승이란 말인가. 앙탈 부리는 어린애를 달래는 것만 보다 끝난 듯 한 기분이었다. 어찌되었든 우리 팀은 그렇게 우승할 수 있게 되었다. “나, 모르핀 제국의 황제. 라프사 에우리스 폰 가르레시아는 발탁된 다섯 용사들의 기원을 칭하며 제국의 위상을 높여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아니한다. 짐은 그대들에게 약속한 상을 내려주노라.” <모르핀 제국, 용사대전을 우승하였습니다. 보상으로 ‘무속성 현자의 돌’을 획득하였습니다. 추가 보상으로 ‘망각의 물약'을 획득하였습니다.> <‘모르핀 제국’의 호의도가 많이 올랐습니다.> <‘모르핀 제국’의 상태가 우호적이 되었습니다.> <‘모르핀 제국’에서 용사 칭호를 얻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아이템들을 얻은 동시에 레벨이 대폭 늘어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현자의 돌은 단 한 개만 주어졌지만 망각의 물약은 각자 모두에게 하나씩 주어졌다. 이것이 스킬을 지울 수 있는 아이템이 분명했다. - 망각의 물약 (영웅) 망각의 강, 증오의 강이라 불리는 ‘스튁스 강’에서 떠온 물을 만분의 일로 희석시켜 만든 물약이라 전해진다. 물약의 정체는 아무도 알 수 없으나 그 물약을 마신 자가 무언가 한 가지를 망각하게 된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사용횟수 1회. 이거다, 이것만 있으면 나는 수염을 지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복면만 아니었으면 지금 당장 물약을 복용했을 텐데. 아쉽기 그지없었다. “드, 드디어! 얻었답! 현자의 돌!” 하가네님이 환호성을 질렀다. 눈빛이 초롱초롱 한 게 저렇게 기뻐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게 무슨 아이템이에요?” 현자의 돌이라는 아이템 명만으로도 연금술사에겐 중요한 것이라 생각이 들었지만 자세히는 몰라 물어보았다. “이거여? 과거 연금술사들은 자연계의 모든 물체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으며, 생명체는 물론 광물에도 완전하고 본질적인 정령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시금석’ 혹은 ‘투사분말’ 또는 이 ‘현자의 돌’이라 불렀어염. 그 정령은 모든 물질을 자신의 성질로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믿었는데, 만일 금의 정령을 가진 ‘현자의 돌’이 있다면 모든 사물을 금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게 되는거에염. 그래서…….” “요점만 말해 주시겠어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말을 잘라야만 했다. 하가네님은 뭔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다 다시 말했다. “즉, 이건 무속성이기 때문에 이곳에 강철의 정령만 주입시킨다면 매개체 없이 모든 것을 강철로 만들 수 있게 되는 거에염. 지금처럼 강철조각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진다는 소리임.” “호오.” 그래서 그렇게 탐냈던 거구나. 그렇다면 이제부터 연성을 할 때 한계치가 없게 되는 건가? 정말 연금술사에겐 꿀 같은 아이템이 아닐 수 없었다. <‘GM예쁜이’님이 통신구슬 전체 연락을 취합니다.> 갑자기 통신구슬에서 전체 연락이 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렸다. GM이다. 게다가 예쁜이란다. 나는 멍청이가 아니었으므로 저것이 누군지 유추하기 어렵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GM 명칭, 예쁜이라고 합니다. 이번 용자대전에 우승하신 륀 용사단 다섯 용자님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어라?” “엥? 미소천사님 목소리랑 비슷하삼?” 레이나님과 하가네님이 순간 통신구슬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럴 수밖에. 내가 연기하는 목소리의 원본이 되는 소리가 저 목소리이니 말이다. {다름이 아니라 모르핀 제국 수도 중앙에 세워질 동상을 제작하기 위해 몸 스캔을 진행하려합니다. 혹시 넣고 싶은 포즈나 아이템이 있다면 지금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동상 때문에 연락한 거구나. 그렇다면 다행…이 아니잖아! 잠깐! 몸 스캔이라고? 지금 몸 스캔이라고 했어? “동상 제작을 거부합니다! 저는 원치 않아요!” {…이상하다, 어디선가 많이 듣던 목소리인데. 아, 죄송합니다. 동상제작을 원치 않다고요? 그 복면 때문인 거 같은데 얼굴공개를 원치 않다면 그냥 쓰신 채로 제작도 가능합니다만.} 목소리를 많이 깔아 변형시켰음에도 의심하는거보니 역시나 우리 눈팅이었다. 지금 내 다리는 심히 떨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그래도 안 돼요!” 얼굴이 문제가 아니었다. 몸 스캔을 하면 GM측에서는 분명 다 알 것이 아니겠는가. 이 몸이 눈팅 몸이라는 것을! {뭐, 정 원치 않다면 동상은 임의적으로 만들고 이름만 등록하도록 하겠습…….} “에이 뭐 그런 걸로 빼고 그래? 미소천사라면 예쁠 거 아냐? 그냥 밝혀버려!” - 휙! “……….” “……….” “……….” “……쿨럭.” 철패 녀석이 한 손에 백호 복면을 든 채로 굳었고, 레이나님과 하가네님은 그걸 막으려고 철패 녀석을 잡으려하다 굳었으며, 불사조님은 눈이 나만큼 커져 입을 쩍 벌린 채 굳어있다 기침을 뱉었다. 나는 차려 자세로 그저 서있었는데 이상하게 그 덥수룩한 수염이 푸들푸들 떨렸다. {어, 어, 어, 어, 어, 어…….} 혹시 통신구슬이라 보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심조차 무색해질 정도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대로 해탈해 승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얼굴이 이게 뭐야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재빨리 접속을 해제해 버렸다. 잘 가라, 게임이여. 그동안 고마웠다, 아펜하르트여. <접속을 해제하시겠습니까?> <‘아펜하르트’ 접속을 해제 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찌륵찌륵,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노을 속에서 들리는 소리가 내 마음을 저편으로 이끌어주었다. 이른 오후에 접속을 해제한 나는 그저 멍하니 천정만 바라보다 보니 어느덧 밤이 되어버렸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시계를 보았다. 7시 30분. 째깍째깍 초침이 움직일 때마다 내 이마에서도 식은땀이 움직였다. 30분 후면 그분이 강림하신다. 나는 다시 팬을 쥐어 보았다. - 절 찾지 마세요. 저는 오늘부로 집을……. “에이씨, 젠장!” 글이 적힌 노트 종이를 북 찢어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이것도 벌써 수십 번째.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적막한 상황을 타개해 볼까하는 마음으로 오후 세 시쯤에 TV를 켰었는데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생각을 정리할 겸, 무심히 TV쪽으로 눈을 돌렸다. {재필씨, 오늘이 결승전을 마무리 한 상태죠?} {쥬리씨, 이번 결승 동영상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질걸요?} {이번 핫이슈가 그렇게나 재미있나요?} {후훗, 미소천사 팬인 쥬리씨가 이걸 보게 된다면 정말 놀라실 겁니다!} {어머머? 글로리아 용사단의 미소천사님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번지수가 틀려요.} {그게, 정말 나왔었단 말입니다, 진정한 미소천사가! 일단 한 번 보시죠!} “뭐, 뭐?” 게슴츠레 보고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갑작스레 나온 저 인간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관중들을 훑고 지나가는 카메라가 드넓은 경기장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다섯 명씩 열 명의 유저들이 서로 대치하며 북과 남쪽에 서 있었는데 그들 중 두 명이 중앙에 두 명이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가이안 검사와 철패 녀석이었다. {이 둘의 대결만 해도 현재 유저들의 실력을 알 수 있을 만큼 대단한 대결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머머, 쌍검을 휘두르는 검사도 대단하지만 그걸 막는 방패사도 대단하네요!} {여기서 방패사의 직업이 이지스라고 밝혔는데요. 알아본 결과 히든직업 축에서도 상급에 속한 직업이란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일단 더 보시죠.} 장면은 넘어가 철패 녀석이 가이안 검사를 이기고 금발의 소녀가 힐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 이 유저가 아이디 미소천사인 분이죠?} {하하, 이분 또한 미소천사 팬이기 때문에 아이디를 미소천사로 만들고 기어코 힐을 탄생시킨 유저로 알고 있습니다. 모두 제2의 미소천사라 불릴 만큼 예쁜 유저이기도 한데…아, 여기입니다!} 화면은 어느새 방패 벽이 뚫리고 합작마법이 발현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타, 타이거 복면을 한 자가 힐을?} {쥬리씨, 놀라셨죠? 저 키와 미소천사와 똑같은 복장. 복면만 빼면 누구라도 미소천사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네요. 저 카리스마조차도 매우 닮았는데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첫눈에 미소천사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죠. 하지만 지금까지 기사대전 이후로 모습을 감춘 미소천사가 이곳에 다시 나타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재필씨, 제가 팬이라서 이런 말 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게임 상의 한 유저일 뿐인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하하, 그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미소천사 기사단의 행보를 알고 계시나요?} {미소천사 기사단이요? 그 팬클럽 기사단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 역시 가입하고 있는데요?} {인터넷 팬클럽 사이트뿐만 아니라 게임 상에서 활동하는 미소천사 기사단은 이번 업데이트를 기하여 연전연승으로 랭킹을 올리고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덕분에 용자대전을 참여하던 고위랭커들이 전부 기권하고 기사단 재정비에 들어가게 되었죠.} {그렇다는 말은…….} {그렇습니다. 이건 미소천사의 계략입니다. 저는 삼국지에서 나오는 제갈공명의 재림 인 것 같아 소름이 다 돋았다니까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재필씨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닌가요?} {하하하! 이거 들켜버렸네요. 저도 사실 미소천사 팬이거든요. 아, 너무 시간이 빨리 지나가 버렸네요. 이상 금일의 핫이슈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감사합니다!} “휴우!”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래도 다행히 정말 핫이슈가 되는 그 장면이 없었다. 복면이 벗겨진 그 장면이 말이다. 만약 그때 미소천사 모습이 방송에 공개되었다면 팬클럽이 안티팬클럽으로 바뀔지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누나가 막은 걸까?” 그 장면이 공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어딘가에서 막았다는 것을 뜻했다. 하긴, 워낙에 순간적인 일이기도 했고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관중들은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 정도라면 GM인 누나가 은폐하기 어렵지 않았을 테지. - 덜커덩! 순간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오, 올 것이 왔다. 지금 이 시간에 문이 열린다는 건 그분이 강림한다는 것밖에 없었다. 굳어진 목을 억지로 돌리며 씰룩이는 볼을 감춘 채 억지로 웃어보았다. “누, 누나 왔어?” “응.” 초췌한 모습으로 내가 앉아있는 소파 옆에 가방을 던져 순간 흠칫하고 피해버렸다. “왜 놀라고 그래?”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보는 누나. “조, 조건반사라고나 할까.” “흐응~” 그렇게 사람 피 말릴 바엔 차라리 그냥 대놓고 패줘! “잠깐만 씻고, 밥 해줄게. 조금만 기다려.” 누나는 축 늘어진 어깨로 무겁게 방으로 들어갔다. 자, 잠깐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왜 아무 말도 없는 거야? 꼭 모르는 사람 같잖…아! 설마 모르는 건가? 그, 그럴지도 몰라. 미소천사가 게임 상에서 발견되었을 뿐이지 그게 나인지는 모르잖아? 다른 해커라고 생각한 게 분명해! 그래, 그럴 거야! 갑자기 구원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늘이시여, 어린양을 어여삐 여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무릎 꿇고 하늘을 찬양하였다. “맛있냐?” “응, 꿀맛이야!” 속을 훌훌 털어내자 밥도 맛있었다. 오늘은 고등어조림도 맘껏 먹을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었다. “휴.” 누나의 한숨에 손이 멈칫하는 나. 힐끔 누나를 보자 젓가락으로 애꿎은 반찬만 휘젓고 있었다. “무슨 일…있어?” “그게 말이지. 오늘 내 아이디를 해킹한 유저가 있어서 회사에서 처리하느라…왜 그래? 너 자꾸 놀란다?” “오늘따라 조건반사가, 아하하하하!” “그래? 그래서 해킹한 유저를 조사하고 있는데 조만간 잡힐 거 같아. 내 기필코 철장 행을…왜 손을 떨고 그래.” 이놈의 손이 미쳤나, 멈춰, 멈추란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 해커는 해킹 프로그램을 쓰지 않았데. 그럼 내 목소리를 알고 있고 비슷하게 흉내 내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건데…….” “그, 그래?” 눈팅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숟가락에 떠올려진 국이 자꾸만 입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소멸되었다. “아! 그러고 보니 기찬아, 너 나하고 홍채가 똑같지 않니? 그것 때문에 신문에 나고 그랬잖아. 참 신기하단 말이야.” “그, 그렇지.” 퐁당퐁당 땀이 국으로 떨어져 싱겁던 국이 이젠 몹시 짜다. “기찬아, 맛있게 먹어.” “으, 응?”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싱긋 웃는 누나의 모습은 그야말로 악마의 미소와 다를 게 없었다. 누나는 뚝뚝 끊어지는 말투로 작게 말했다. “최후의 만찬이니까.” “풉!” 입속으로 들어가던 물을 뿜는 것과 동시에 내 무릎은 황급히 땅으로 떨어져야만 했다. “미안해, 누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오냐오냐 길렀더니 네가 감히 발등을 찍어?” “그, 그게 아니라.” “어디서 말대꾸야? 정말 실망이다. 어떻게 네가, 네가!” “우와악! 유리컵 놔! 동생 죽일 셈…어허헉!” 귓가로 스쳐지나가는 유리컵.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 진심으로 날 죽이려했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누나 몸으로 게임한 건 정말 미안한데…….” “어떻게 내 얼굴을 가지고 그런 장난을 칠 수가 있어? 타이거 복면? 수염? 전에는 무슨 짓을 한 거야 대체!” 씩씩 거리는 누나. 그런데 어째 논점이 벗어났다? “저기…누나. 그 수염은 아무도 몰라. 장난치려던 것도 아니고. 그 복면은 수염을 가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착용한 거야. 그 수염을 지우기 위해 용자대전에 참여했던 거라구.” “그나마 다행이구나. 그래서 그걸로 용서라도 받을 셈이니? 참 인생 편히 사는구나? 전에 어른이 좀 되었나 싶었더만 아직도 철부지 어린애였어!” 아직도 씩씩 거리고 있지만 아까보다는 화가 풀린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되었다. “누나 수염 다 지워지는 아이템을 얻었어! 이젠 그런 실수 없을 거야!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면 나를 화 풀릴 만큼 맘껏 때려도 좋아!” 나는 그 말을 몹시 후회해야만 했다. 보통의 누나였다면 그쯤에서 화가 풀렸을 테지. 허나 우리 눈팅이란 존재를 얕보았으니. 정말 미치도록 팰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으으으윽.” 눈이 팅팅 붓고 몸이 쑤시지 않은 곳이 없었다. 결국 누나에게 게임 금지라는 최후통첩을 선고받고 말았다. 그건 몸이 아픈 것보다도 더한 고통이었다. 하긴,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막상 직접 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보니 가슴이 쓰리고 너무도 아팠다. 결국, 이렇게 나의 게임은 끝이 나고 만 것이다. 힘겹게 고개를 틀어 오래된 캡슐을 보았다. 최근에는 거의 살다시피 한 나의 또 하나의 공간. 이제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니 괜스레 쓸쓸함이 몰려왔다. 속이며 한 게임이지만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웃을 수 있었던 나만의 공간. 내 모습을 보며 간혹 눈팅인 줄 알고 놀라는 멋쟁이, 태식 형.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항상 미소 지으며 매너 있던 어둠의조이, 형빈 형, 륀 기사단의 수장이자 항상 모두를 이끌던 레이나님, 채팅 용어를 쓰며 초딩 같이 행동하는 하가네님, 용자대전에서 만났던 불사조님과 철패 녀석, 악연이 끊이지 않았던 기태 녀석과 그의 일당들, 귀찮기만 했던 정령 녀석, 그리고…항상 언니하며 귀엽게 눈웃음치던 아타셰, 한나. “아, 궁상맞게…….” 눈 맞은 대가 많이 아팠던 건가?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이게 뭐람.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눈가를 비비며 지웠지만 자꾸만 눈은 물로 젖어만 갔다. “으흑, 으흑!” 아무래도 나는 정말 이 게임을 좋아했나 보다.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14일전. “소연씨, 용자대전 동상 건에 대해 완료 지었나?” “아, 죄송합니다, 팀장님. 아직 디자인적으로 완료를 못 지어서…….” “언제까지 질질 끌고 갈 거야? 모레후면 베르제브브의 침공이 시작될 텐데. 마왕이 다 부시고 난 후에 만들 셈이야?” “오늘 이내로 완료 짓겠습니다.” “에잉, 어서 완료지어!” “네!” 저 씹어 먹을 팀장, 왜 나한테만 난리인지. 자리에 돌아와 의자에 파묻듯 앉는다. 입맛이 몹시 쓰다. 문득 2년 전에 끊었던 담배생각이 난다. “하아.” 여전히 컴퓨터에 적혀있는 즐비한 글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러다가 또 하루 종일 멍 때릴 거 같아 기분도 전환시킬 겸 우산을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간다. 밖은 주륵주륵 비가 내리고 있다. 듣기만 하면 참으로 좋은 비지만 이렇게 밖으로 나가면 짜증만 일어난다. 우산을 든 채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자판기 투입구로 집어넣는다. 또르륵 소리가 지나가자 환히 빛나는 음료 목록들. 사과 향 음료를 선택한 나는 허리를 굽혀 음료를 꺼내 든다. “후우.” 자꾸만 한숨이 흘러나온다. 벌써 사흘째다. 나하고 말 한마디 안하고 묵묵히 학교생활을 하는 그 녀석의 모습을 본지도 말이다. - 띠, 띠띠, 띠리리리띠디……. 카트라이더라는 게임의 주제곡이 주머니에서 흘러나와 깜짝 놀라고 만다. 내가 어렸을 적에 열심히 했던 게임이라 지금도 추억을 기억하기 위해 저장한 핸드폰 벨소리였는데 이렇게 우울한 기분으로 밝은 벨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그다지 좋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어깨와 볼로 우산을 고정시키고 핸드폰을 꺼내 든다. “태식이 오빠?” {응, 소연이냐? 아직도 그대로야?} “뭐…응.”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더 심한 모양이네.} “이제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게 오빠가 전에 미리 알려줬으면 좋았잖아!” {야, 야. 화내지 마. 그때는 기찬이가 얼마나 확고했었는데.} “하아, 내가 몰 믿고 저런 남자와 사귀는지.” {아하하…가슴이 쓰리다. 그나저나 소연아, 아직도 그 회사 다녀?} “그 말은 그만해. 나 백수 되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으니까.” {…정말 오빠 말 안 들을래?} “이런 회사가 뭐가 위험하다고 정말! 비까지 오고, 발목도 젖어버렸잖아! 지금 나한테 시비 걸어? 음료수도 한 모금 못 마시고 있다고! 아아악, 짜증나!” {지, 진정해. 알았어, 오빠가 잘못…소연아? 소연…….} 뚝 끊어버린다. 마음 같아서는 핸드폰을 확 던져버리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대신 음료수 캔을 던져 버린다. 정말 오늘은 더 마음에 들지 않은 하루다. 어두컴컴해진 밤을 걸어 집에 도착한 나는 제일먼저 기찬이가 와있나 신발을 확인해 본다. 하지만 오늘은 신발조차 보이지 않는 거 보니 아직 집에 들어오지도 않은 모양이다. 다시 한숨이 나온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나돌아 다니지 않는 아이인데……. 일단 샤워부터 하고 생각하자. 백을 소파에 집어 던지고 옷가지 역시 소파에 집어 던진다. 기찬이가 있을 때야 조금 조심하긴 하지만 아무도 없는데 거실에서 옷을 벗든 뭘 하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런 자유를 만끽하며 혼자 사는 것을 항상 꿈꿔왔는데 오늘따라 이런 짓이 더 쓸쓸하다.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니 그나마 나빴던 기분이 풀어진다. 수증기로 천정이 방울져 맺어있는 물방울을 한동안 바라본다. “내가 잘못한 걸까?” 좁은 공간은 메아리쳐 울려왔고 나는 별 감흥 없이 머리를 욕조 물에 담가버린다. 정말이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혼자서 깨작깨작 젓가락만 놀리다 이내 자리를 일어난다. 별로 밥 생각도 나지 않는다. 시계를 보니 작은 시침이 9자를 가리키고 있다. 아직까지 들어오지 않는 걸로 보아 상천이라는 친구 집에서 자고 올 모양이다. “괘씸한 녀석, 누구는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데 감히 전화한통도 안 해? 어디 들어오기만 해봐라!” 주먹을 꽉 쥐며 말했지만 이내 힘없이 풀어버린다. 내가 대체 뭐하고 있는 건지…방에 들어가려 걸음을 옮기는 도중에 문득 기찬이 방이 보인다. 힘없이 발걸음을 옮겨 기찬이 방문을 열어본다. 그곳에는 작은 침대와 그 옆에 반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캡슐하나. 우측 모서리에 책상 하나와 책장에 꽂혀있는 몇몇 가지 책이 전부인 녀석의 방이다. 별 특색 없는 방을 보니 그동안 얼마나 심심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하긴, 아마도 항상 저 캡슐에 누워 게임을 즐겼겠지. 그런 게임을 내가 막아버렸지만……. 내가 히스테리 부린 이유도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이건 녀석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내 몸 하나 쓴다고 친누나가 동생한테 무슨 혐오감을 느끼고 성추행을 운운하겠는가. 허나 하고 있는 것이 친 가족이라 하더라도 범죄는 범죄. 형사 처분을 받을만한 중범죄다. 게다가 이 게임으로 기절한 사건까지 더하면…누나로선 미래를 위해 막을 수밖에 없는 거다. 캡슐을 조심히 열어본다. 그동안 관리도 안한 건지 퀴퀴한 땀 냄새가 묻어 나온다. 하지만 그다지 더럽게 느껴지진 않는다. 항상 맡아온 동생의 냄새니까. 조심히 캡슐에 누워본다. 어렵지 않게 착석되는 작은 공간. 회사 캡슐과는 차원이 다르게 좁았지만 동생은 항상 이것을 써왔겠지. “뭐야, 궁상맞게. 그 녀석 때문에 내가 감상적일 필요는 없잖아?” 다시금 짜증이 뭉글뭉글 솟아오른다. 나기찬 들어오기만 해봐라. 웃을 때까지 패주리라. - 지잉. 캡슐뚜껑이 닫쳐서 살짝 놀란다. 이놈의 구식 캡슐은 주인의 마음과 상관없이 움직인다. 이렇게 열악한 캡슐인줄 알았으면 진작 바꿔줄걸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쳐간다. [메인 프로그램 작동. 실행시킬 프로그램을 부르십시오.] “실행시킬 프로그램이라…아펜하르트.” [오류. 잘못 부르셨거나, 있는 게임이 아닙니다.] 이 캡슐은 나를 약 올리는 게 아닐까? 이정도도 이해 못할 만큼 인공지능 적이지 못하단 말이야? “아펜하르트.” [‘아펜하르트’실행합니다. 아이디 및 비밀번호를 음성으로 입력해주십시오.] 그러고 보면 녀석도 참 용하다. 어떻게 내 목소리를 흉내 내서 이곳을 패스했을까. 그렇게나 이 게임이 하고 싶었던 걸까? 예전에 아펜하르트 얘기를 해주자 신나게 밥 먹던 기억이 떠오른다. “풋, 그때는 무척이나 귀여웠는데.” [오류. 잘못 부르셨거나, 있는 아이디가 아닙니다.] 이 캡슐 조만간 바꾼다. “아이디 나소연, 비밀번호 예쁜이?” 한동안 들어가 보지 않아서 이 비밀번호가 맞나 모르겠다. 언제나 비밀번호를 통합해서 쓰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입력되었습니다. 홍채인식을 합니다.] 홍채를 인식하는 센서가 내 동공을 파고들어 몹시 아파왔다. 이거 뭐지? 기계주제에 나를 실명시킬 셈인가? 아주 가지가지 한다. [입력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나소연님. ‘아펜하르트’에 접속하시겠습니까?] “접속.” [접속되었습니다, 즐거운 시간되십시오.] 나는 동생이 항상 사용하는 캡슐 안에서 가수면 상태에 빠져 든다. <아펜하르트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예쁜이’님 시작 포인트로 이동합니다.> 빛 속에서 눈을 뜨지 못한다. 하지만 곧 그 빛은 사라졌고 눈을 뜨게 된 나는 주위를 둘러 볼 수 있게 된다. “경기장인가.” 사방은 텅 빈 관중석이 둘러싸여져 있고 자신의 발아래에는 널따란 경기장이 펼쳐 있다. 순간 웃음이 세어 나온다. “참 비극적이지, 어떻게 이런 곳에서 들킬 수가 있냐.” 바보 같은 동생을 향하여 한껏 비웃어 본다. 나도 그때는 깜짝 놀랐다. 그 유명하던 미소천사가 동생이었을 줄이야. 그리고 그 캐릭터가 나였을 줄이야. 그보다 더 놀란 것은……. “아! 이놈의 턱수염!” 생각해 보니 아직 지우지 않은 상태다. 동생이 말한 대로라면 아이템을 구해놓아서 지우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 아이템은 무엇일까? 일단 인벤토리 역할을 하는 주머니를 뒤져 아이템들을 꺼내 본다. - 은은한 녹 빛을 발하는 레몬 빛 실크 드레스 (고급) 숙련도 76/100 레몬 염료로 염색한 드레스. 여성용이며 누에라는 벌래가 내뿜는 실로 만들어 매우 가볍고 부드럽다. 마법적 방어력에 뛰어나며 아름답고 신비함을 만들어 주어 파티나 연회 때 어울리는 옷이다. 피드백 확률 5% 감소, 마법극대화 2% 증가, 마법 방어력 +150, 내면적으로 신비함을 만든다. 루시아니안 나뭇잎이 스며들었다. 목속성 포인트+5, SP+50, 치료마법 시전 시 치유량이 +150증가. - 은은한 녹 빛을 발하는 백호 가죽 망토 (고급) 숙련도 75/100 동방에서 네 방위의 신으로 불리는 숲의 제왕으로서 백호는 바람을 이끄는데 특별한 힘이 있다. 바람을 막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어느 정도 추위도 막아준다. 바람 마법 저항력 30%증가, 목속성 마법 극대화 5%증가. 루시아니안 나뭇잎이 스며들었다. 목속성 포인트+5, SP+50, 치료마법 시전 시 치유량이 +150증가. - 은은한 녹 빛을 발하는 미스트레스 티아라 (희귀) 숙련도 74/100 벌들의 여왕이라 불리 우는 미스트레스는 위그드라실의 꿀을 압축시켜 마법능력을 부여 하였다. 그 꿀 석을 이용하여 만든 여성용 왕관은 착용 자에게 신비감을 부른다. 용매가 필요한 마법사용 시 소모성 재료에 한하여 꿀 석이 대신 충족시켜준다. 단, 숙련도 수치 100 필요하며 10회 후 파괴된다. 벌들의 공격을 받지 않는다. 내면적으로 신비함을 만든다. 루시아니안 나뭇잎이 스며들었다. 목속성 포인트+5, SP+50, 치료마법 시전 시 치유량이 +150증가. “이 드레스는 뭐야? 완전 공주님이구만. 이 녀석 지금까지 이 캐릭터를 어떻게 써온 거야!” 하지만 기분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나름 예뻐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 입고 있는 평범한 초보 가죽옷보다야 이게 낳겠지. 나는 일단 옷부터 바꿔 입고 다시 주머니에서 아이템을 꺼낸다. - 불완전한 공허의 구슬 (유니크) 공허로 가득한 기운이 느껴진다. 하지만 매우 불완전 하다. - 둠터틀의 심장 (유니크) 암흑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매우 불완전 하다. - 통신구슬 (일반) 통신을 할 수 있는 구슬. 목록을 열면 접속 자를 확인할 수 있고 구슬끼리 맞대면 친구로 입력된다. - 망각의 물약 (영웅) 망각의 강, 증오의 강이라 불리는 ‘스튁스 강’에서 떠온 물을 만분의 일로 희석시켜 만든 물약이라 전해진다. 물약의 정체는 아무도 알 수 없으나 그 물약을 마신 자가 무언가 한 가지를 망각하게 된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사용횟수 1회. 불완전한 공허의 구슬은 모르겠으니 일단 넘어가고 두 번째 꺼낸 둠터틀의 심장을 유심히 본다. 이 아이템이 왜 여기 있는 걸까? 둠터틀을 잡아야만 나온다는 유니크 아이템이 말이다. “설마, 둠터틀을 잡은 게 이 녀석이야?” 얼마나 황당한 캐릭터를 키웠기에 둠터틀을 잡고 다닌단 말인가. 일단 넘어가고 나머지 아이템을 살펴본다. “통신구슬은 당연히 아니겠고 그럼 이 망각의 물약이 그 약이란 건데…그럼 수염이 스킬 때문에 만들어 졌다는 건가? 열려라, 잠재 된 힘이여.” 1. 천상의 매혹(패시브) - 미소는 천상의 미소이며 목소리는 가희 천사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지어다. 매력 대폭증가, 인덕 대폭증가, 카리스마 대폭증가, 모든 자가 업신여기지 못하며 우러러 보리라. 2. 침묵의 절규(패시브) - ‘고성방가’, ‘침묵의 웃음’에서 변형된 상태. 목소리가 닿는 모든 생명체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고 직접 당한 자는 3초간 스턴 상태를 주며 5% 확률로 버서커 상태가 된다. 단, ‘침묵의 절규’ 발동 시, 약간의 스태미나와 SP가 하락하며 2분의 대기시간이 있다. 수가 많아질수록 하락하는 수치도 증가된다. 3. 무기속성 주입(액티브) - 8개 모든 속성을 주입시킬 수 있으며 오직 무기에만 속성 주입이 가능하다. 시간은 3분 동안 유지되며 지능, 정신력, 탄력이 높을수록 시간과 능력이 올라간다. 월(月) : 몬스터 자아의 문으로 사용된 륀(달)의 기운으로 월 속성 몬스터에게 공격 시 MP 재생효과 20%증가, 자아를 심는다. 그밖에 몬스터 공격 시 재생효과 20% 감소.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암(暗) : 빛족 / 천족 공격 시 5%확률로 절명 시키며 10% 확률로 치명타, 암의 보호로 인해 피드백 확률 10% 감소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화(火) : 식물형 공격 시 5%확률로 절명 시키며, 그밖에는 초당 20의 지속 데미지를 준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수(水) : 인간형 몬스터에게 10% 확률로 결빙효과가 주어지며 매 공격 시 상처부위는 결빙되어 스태미나가 하락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목(木) : 수(水)속성 몬스터에게 공격 시 자연의 기운이 깃들어 스태미나 및 체력이 흡수된다. 몬스터가 죽을 경우 흡수한 체력을 가진 식물 몬스터 생성.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금(金) : 강철화 시켜 방어력이 10%증가, 이동속도 15%저하.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토(土) : 독 속성 몬스터에게 추가 데미지 10%, 그 독을 흡수하여 다시 토의 기운을 불어넣을 때, 독을 간직한 채로 발동한다. 1회 사용가능.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천(天) : 언데드 / 악마 몬스터 공격 시 5%확률로 절명 시키며 10% 확률로 치명타, 빛의 보호로 인해 일시적인 방어력이 증가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4. 올 원소 친화력(패시브) - 8원소의 조화를 깨우친다. 월(月), 암(暗), 화(火), 수(水), 목(木), 금(金), 토(土), 천(天)의 원소와 친화력이 증가하여 각각 원소의 추가 포인트+10 증가, 원소 친화력으로 인해 피드백 확률 10% 감소된다. 탄력에 따라 원소의 조화가 증가, 지능, 정신력에 따라 추가 포인트 증가한다. 5. 심연의 눈(Abyss The Eye) (액티브) - 진실을 꿰뚫어 보는 미카엘(Michael)의 오른쪽 눈동자. 죽음의 천사이자 대천사인 그는 ‘영원한 빛(Arc Eternity Seraph)’으로 인간의 혼을 거두는 자이다. 그 눈은 모든 진실과 자신의 의지를 발현 시킨다. 심연의 눈을 발동시킬 경우 지능, 정신력, 탄력 300% 증가, 모든 속성 포인트가 50증가, 상대를 바라볼시 권능이 발현되며 상대의 진실을 볼 수 있다. 지속시간 3분, 대기시간 24시간 지속되며 12시간 동안 스태미나 최하로 떨어진다. 6. 트리플스펠 (액티브) - 전투법사의 고유스킬. 전투로서 지식을 깨우친 마법사는 속성을 합치는 방식을 고안해 강한 마법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각 속성을 결합해 마법스킬을 창조한다. 각각 속성 10포인트 이상 올려야 결합이 가능하고 속성 포인트가 높으면 높을수록 스킬의 결합이 강해진다. 지능과 정신력이 높을수록 속성 결합 성공여부가 커지며 조합 개수가 늘어난다. 단, 조합개수가 많을수록 피드백 확률 증가, 하루에 한 번 조합 가능, 조합 실패 시 1시간 동안 지능, 정신력 50%하락. 7. 태초의 재생(Beginning of the World Regenera-tion Power) (액티브) - 태초, 모든 자연의 조율자로 알려진 드루이드의 마법으로 훗날 숲을 숭배하던 위치들에 의해 마법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게 된다. 태초 드루이드의 재생은 위치의 재생과는 다르게 더욱 순수한 자연을 담고 있으며 그 힘 또한 강하다. 기본 재생의 비해 20% 더 회복하며 마나소모량이 10% 줄어든다. 스킬 사용 시, 모든 생명체는 MP, 스태미나가 회복된다. 시전자의 SP 소모량에 따라 회복되는 MP, 스태미나가 달라지며 작게는 1명 최대 10명까지 동시 회복 가능.(숙련도에 따라 동시회복 최대 수치가 달라짐) 목속성 생명체에게 시전 시, 그 생명체는 자라거나 진화가능. 8. 치료사의 깨달음(패시브, 액티브) - 호메오스타시스. 생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조건은 먹고, 자고, 대사하는 것이다. 각득(覺得), 개오(開悟), 영해(領海), 회오(悔悟), 회유(誨諭), 각성(覺醒), 경성(警醒), 효오(曉悟)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깨달음이니 희생의 길을 선택한 그대는 그 이상을 관철시켜라. 모든 치료스킬 20% 능력 증가. 보조스킬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사용가능.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발동 시 술자를 중심으로 반경 100m 안에 있는 모든 아군은 모든 능력치+20 증가, 피드백 확률 10% 감소, 방어력 20% 증가, 이동속도 20% 증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아군의 기술, 마법 숙련도가 100으로 고정된다. 단, 생명의 희생을 받고 있는 자 중 한 명이라도 사망할 시, 술자는 피드백당해 즉사한다. 주문 : 땅은 대지의 양기, (왼손을 아래로 향해 땅을 향한다) 하늘은 광활함의 천기, (오른손을 위로 향해 하늘을 향한다) 가운데 서있는 우리는 영원의 우주이니(두 손을 크게 원으로 돌려 가슴으로 모은다)나의 존엄성을 바쳐, 나의 신념을 바쳐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가 되리라. ‘생명의 희생’(가슴으로 모았던 손을 교차시키며 빛을 분산시킨다) 9. 대지의 축복(패시브) - 지속적으로 땅에 힘을 불어넣어 주면 가이아 여신이 축복한다. 남성 호르몬을 자극시켜 MP, 스태미나, SP 회복속도가 3%증가한다. 근력 10 증가. “이, 이게다 무슨 스킬이야!”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 스킬목록이다. 마법사인 것 같으면서도, 치료스킬이 있지 않나. 치료사의 깨달음? 주문까지 있는 걸로 보아 희귀 스킬 같은데. 심연의 눈? 아주 대천사까지 거론되고 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미소천사라 불린 캐릭터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아주 이걸로 잘도 가지고 논 모양이다. “일단 저 대지의 축복이 문제인거 같네.” 다른 것은 건들 엄두도 나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대지의 축복이란 스킬이 눈에 거슬린다. 남성호르몬을 자극한다는 대서 확신을 얻기는 했어도 말이다. 분명 엉뚱한 장난을 하다 생성된 게 분명할 테지. 나는 가볍게 망각의 물약을 마신다. <삭제할 스킬을 말씀해 주십시오.> “대지의 축복.” <스킬이 삭제되었습니다. 대지의 축복으로 받던 능력과 페널티가 사라집니다.> 턱을 슬며시 만져본다. 말끔해진 매끈한 턱. 지금 있는 털은 깎아야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다행히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듯하다. “그럼, 이 녀석이 얼마나 황당한 캐릭터를 키웠는지 봐야겠지? 열려라, 마음의 문이여.” 성별 여 이름 예쁜이 종족 인간 나이 23세 직업 일루미네이터 Level 68 소속 - 미소천사 기사단 칭호 - 미소천사, 용사 힘 15 월(月) 25+10 민첩 14 암(暗) 27+10 체력 13 화(火) 24+10 지능 77 수(水) 28+10 정신력 129 목(木) 31+10 행운 15 금(金) 29+10 탄력 20 토(土) 35+10 방어 15 천(天) 37+40 종족특성 : 없음 칭호특성 : 용사, 모르핀 제국에서 얻은 칭호이다. 인내심과 행운이 깃든다. 행운+10, 피드백 확률 5% 저하. 직업특성 : 일루미네이터, 풀어서 ‘빛을 밝히는 자.’라고 부른다. 모든 빛속성 마법 30% 저항력을 가지며 5%의 확률로 반사시킨다. 천속성 포인트 +30, 빛이 있는 곳에서는 피드백 확률 10% 저하. 포인트 : 125 스킬 1. 천상의 매혹 <숙련도 24/100> 6. 트리플스펠<숙련도 없음.> 2. 침묵의 절규 <숙련도 63/100> 7. 태초의 재생 <숙련도 Full> 3. 무기속성 주입 <숙련도 32/100> 8. 치료사의 깨달음 <숙련도 16/100> 4. 올 원소 친화력 <숙련도 없음> 9. 5. 심연의 눈 <숙련도 Full> 10. “일루미네이터?” 빛을 밝히는 자라. 정말이지 동생에게 어울리는 직업이 아닐 수 없다. 항상 어떤 게임이든 힐러만을 고수해온 동생에게는 빛을 밝히는 자가 어울리지 그럼. 나라면 반대겠지만. 레벨이 68렙인 거 보니 꽤나 열심히 한 모양이다. “나름 잘 키워는 놨네.” 게임에 그다지 흥미가 없어 별 감흥이 없었지만 그래도 내 캐릭터가 잘 커있다고 생각하니 흡족하지 않을 수 없다. 잠시 음음 거리며 캐릭터를 살펴보고 있을 즈음. <‘아타셰’님이 통신구슬 연락을 취합니다.> {언니? 언니에요? 왜 사흘이나 접속하지 않으셨어요! 걱정했는데, 그만두는 줄 알고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 했는데요…으흑!} 얜, 누구지? “저기 미안한데 나는…….” {일단 만나서 얘기해요. 말씀드릴 것도 많아요.} “그러니까…….” {어서 오세요. 무슨 일인지 다 들어야 겠…….} “성격테스트 하는게 아니라면 말 자르지 말아줄래요?” {…화 나셨어요?} 에구, 나도 모르게 또 터져 버렸군. 미간을 누르며 머리를 식힌다. “휴, 어디에요?” {어색하게 존대세요. 그리고 제가 있는 곳은 같은 길드라 쉽게 알 수 있잖아요.} 일단 만나서 제대로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에 통신 구슬을 그냥 끊어버린다. “여기에요, 언니!” 백색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검은 단발머리의 작은 소녀가 손을 마구 흔들며 반가워한다. 음, 꽤나 귀엽게 생겨서 조금 소름이 돋는다. 자중하자, 자중. 하여튼 귀여운 것만 보면 항상 몸이 먼저 반응을 해버리니…나는 어색하게 손을 들다 금세 내린다. “안색이 나빠 보여요, 어디 아프세요?” 걱정스럽게 아래에서 위로 살펴보는 여자아이. 내 동생 또래쯤 되어 보이는데 나도 모르게 올라가려는 손을 다른 손으로 부여잡는다. 꼬집고 싶어, 아아, 머리 헤집고 싶어! 『주인님, 저도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요!』 갑자기 여자아이 등 뒤에서 튀어나오는 인형. 아니, 정령인가? 『응? 갑자기 움직임이 없으시네?』 정령이 여자아이 주위를 빙그르 돌며 내 상태를 살피기 시작한다. 나는 말없이 손을 까닥인다. 『오라고요?』 정령이 조심이 나에게 다가온다. 지근거리까지 도달하자 나는 재빨리 정령을 양팔로 감싸 안아 버린다. 『컥, 컥! 주, 주인님?』 “언니.” 『…언, 니?』 돼지 꼬리처럼 죽 늘어진 녹색 빛의 꼬리잔상이 너무도 귀엽다. 녹색단발머리조차 산뜻해서 마음에 든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폭신하다, 꼬물거리는 게 너무 귀엽다. 아, 게임에 들어오길 정말 잘했어! “…언니 성격이 많이 변한 것 같아.” 『전에는 절대 엄마라 하지 말라 하시더니…….』 주위에 말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것보다 녀석은 항상 이러고 놀았단 말인가? 부러운 놈! 아, 그래, 이제부터 너의 이름은 셰리다. 얼마나 귀여운가, 셰리! “아, 3일전부터 저희 기사단에 입단하고 싶다는 분이 있어요. 그것 때문에 이곳에 오라고 한 거예요. 이리 오세요, 미소천사님.” “응?” 미소천사? 그건 이 캐릭터가 아니었던가? 호기심으로 여자아이가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치렁치렁하게 웨이브진 금발의 작은 소녀가 아장아장 왼쪽 발을 디딜 때 왼쪽 팔을 뻗는 경직된 자세로 걸어오고 있다. “…갖고 싶어.” 나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와 급속도로 입을 막는다. 혹시 들은 사람이 없겠……. 『저기, 갖고 싶다뇨?』 셰리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말을 건다. 더욱 세게 껴안는 걸로 대충 넘어가야겠다. “아, 안녕하세요. 저, 저, 저, 저, 저는……!” 다시 나는 작게 손을 까닥인다. 뭔가 눈치 챈 단발의 여자아이가 혐오스럽다는 듯이 한걸음 물러났고 금발의 작은 소녀는 입을 세모로 만들며 갸우뚱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우, 우읍! 저, 저, 저, 저, 저기!” 셰리를 안고 있어서 두 팔로 껴안기는 무리였고 대신 한 팔에 각각 한 개씩 껴안는 걸로 만족해야겠다. “내, 내가 알던 언니가 아냐.” 저 단발여자애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군. 저 아이도 껴안고 싶지만 손이 없는 관계로 참는다. 아, 오늘은 너무도 행복한 하루다. “이번에 기사단 자체가 너무 많이 변했어요. 저희 병단만 언니하고 저 뿐이라고요.” “응, 계속해.” 『악악, 아파요!』 “그래서 미소천사님을 저희 병단으로 받고 다른 기사들도 초빙을 시작해야…듣고 계세요?” “응.” “저, 저, 저, 저, 그렇게 머리카락을 만져 버리면…아앙!” 그깟 머리 좀 만졌다고 왜 이리 앙탈이람. 셰리 녀석은 내 품에서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 거리는데 귀여워서 더욱 놔주기 싫어진다. 한나라 말한 아이는 한숨을 폭 내쉬었는데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이번만 못 본 척 해준다. “언니,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울먹이며 열심히 설명하는 한나. 뭔지 몰라 귀찮아서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수 없을 거 같다. “알았어, 그러니까 한나양 말은 태식 오빠나 현빈이라는 오빠처럼 우리도 병단을 받자는 거지? 그거라면 쉽게 해결하겠네, 따라와.” “어, 어디 가세요!” 그런 거야 그냥 태식 오빠 붙잡고 몇 명 이쪽으로 붙여달라면 그만이다. 이렇게 간단한 걸 왜 저리 난리람. 그런 생각을 하며 한나의 손을 붙잡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다 멈춰 선다. “그런데 태식 오빠가 어디에 있지?” “…에휴.” 아주 조금 쑥스럽다. 한나는 나를 이끌고 건물 위로 올라가 어느 널따란 방으로 안내한다. 아직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서 들리는 수많은 웅성거림을 보아 꽤나 사람이 많아 보인다. “태식 오빠, 언니 왔어요.” 한나가 문을 열고 안에 기별을 넣는다. 단상위에 올라가 이리저리 토론하고 있던 태식 오빠는 그 소식에 제법 진중해 보였던 표정을 풀고 나를 본다. 그런 모습은 나랑 만날 때 보여줄 것이지. “오오, 살아왔구나!” 몹시도 반가워하는 표정에 순간 이마에 핏대가 선다. “살아와요? 누가 죽이기라도 하나요?” “그야, 소연이라면…자, 잠깐. 서, 서, 설마. 소, 소, 소, 소, 소, 소.” 손가락질하며 손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 봐라. 수전증이라도 걸린 모양이다. “제가 소로 보여요? 아주 죽고 싶은 모양이군요?” <‘천상의 매혹’의 숙련도가 5 올랐습니다.> 나는 아주 살포시 웃어준다. 작고, 임팩트 있게. 무슨 기계음이 들리긴 했지만 태식 오빠가 팍 하고 사라져 버려서 금세 잊어진다. 접속해제라…칫, 이 인간 도망갔군. “……….” “……….” “…무섭다.” 조용한 가운데 작게 들린 ‘무섭다’란 단어. 내 눈이 그 유저를 향해 확 돌아간다. “뭐요?” “…히끅!” 나는 한 유저한테 말했을 뿐인데 왜 다들 사색이 되는 건데? 『힝, 우리 주인님 안 같아.』 내 품안에서 벌벌 떠는 셰리를 보고 다시 한숨이 나온다. 또 다시 질러버린 모양이다. 이게 말썽이다. 이놈의 욱하는 성질. 나는 그렇지 않은데 이것 때문에 주위에서 다들 나를 무서워하기만 한다. 동생마저도……. “죄송해요, 제가 말을 험하게 한 모양이네요.” 유저들이 모두 한 걸음 물러난다. “피하지 않아도 되요. 제가 조금 욱하는 성질이…….” 또다시 한 걸음 물러나는 유저들. “…스톱.” 어깨가 부들부들 떨린다. 왜 내 말을 믿지 않는 거야? 어째서 다들 나를 무서워 하는 거야? 나는 결코 무서운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왜 다들 나를 그런 여자로 만들어! “모두 닥치고 이리와! 미소천사 팬클럽인 주제에 미소천사를 피해? 그러고도 팬클럽이라 말할 수 있어? 아아, 나도 몰라! 마음대로 해버려!” <‘침묵의 절규’ 발동.> <‘침묵의 절규’의 숙련도가 10 상승했습니다.> 이 시끄러운 기계음은 뭐야! 정말이지 게임도, 기찬이 녀석도 전부 싫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나를 붙잡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 당연하겠지. 누가 이런 여자 좋다고. 게임하늘의 밖은 덥기 그지없다. 덕분에 내 마음은 덥다 못해 녹아내릴 듯이 짜증난다. 내 뒤에 계속 따라오는 저 여자까지 포함해서. “그만 좀 쫓아오지? 불쾌하거든?” 뒤돌아보자 한나가 헉헉 대며 멈춰 선다. “언니, 집에 안 좋은 일 있었어요?” “왜, 내가 화풀이하는 걸로 보여?” “아니, 평소와는 달라서…….” “내가 평소에 어떻다고 그러는 거야!” 화가 난다. 화가 나서 뭐라도 집어 던지고 싶다. 정말이지, 정말이지……. “킥킥킥.” 순간 몸이 굳었다. 우, 웃어? 지금 웃고 있는 거야? “언니 오랜만에 봐요. 그 모습.” “오랜만에…보다니?” 한나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배를 부여잡고 눈물을 훔치다 말한다. “저 따귀 때릴 때 생각나네요.” “따귀?” “기억 안 나세요? 저랑 처음 만날 때 말에요.” 기찬이가 따귀를 때려? 여자한테? 이 아이는 대체 누구일까. 기찬이와 어떤 사이일까?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데?” 내 눈치를 살피던 한나는 조심히 말한다. “이제 진정되셨어요? 그럼, 그 전에…이제 누구인지 알려주시지 않겠어요?” “…알고 있었어?” 한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그 미소는 거짓이 없어서 정말 난감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렴풋이 의심은 했는데 제 손을 잡을 때 확정지었어요. 제가 아는 언니는 아무렇지 않게 제 손을 잡지 않았거든요.” 한나는 나를 힐끔힐끔 보며 어색하게 눈치를 살핀다. 그런가, 기찬이라면 여자한테 막 손잡을 녀석이 아니지. “그럼 이제 말씀해 주시겠어요? 혹시…해커에요?” 그렇게 보지 않는 것 같지만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말투다. 나는 조금 생각하다 말한다. “녀석은…내 동생이야. 어떻게 하다 보니 몰래 들어오게 된 거고.” “역시나, 어쩐지 언니랑 성격이 비슷하다 생각했어요.” “비슷해? 처음 듣는 얘긴걸?” 한나는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 고개를 젓는다. “으응, 아니에요. 역시 비슷한걸요? 그 욱하는 성격, 사람을 바라보는 눈, 그리고 그 마음까지. 틀린 점도 많지만 닮은 점도 많아 보여요.” 이애는 신비롭다. 그 맑은 눈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거짓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듣고 보니 조금 이상하다. 설마? “너, 동생이랑 사귀어?” “네, 네에? 무, 무슨 소리에요! 여, 여자끼리 사귀다니!” 아, 그렇지. 여기서 동생이 남자라 까발리고 다닐 리가 없겠지. 그런데 뭐 저리 당황한담. “너, 행동 되게 귀엽다?” “어, 언니!” 붉게 상기된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다. 아직도 하늘에서는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다. 푹푹 찌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나는 한나의 손을 끌고 그늘진 나무로 이동한다. 그곳에 어깨를 기대 축 늘어트리니 그나마 조금 편해졌다. “동생이랑 싸웠어. 벌써 사흘째 말 한마디 안했지. 내가 잘못한 걸까?” 한나는 내 얼굴을 살피더니 말한다. “왜 싸우셨는데요?” “게임 하지 말라고 했거든.” 한나는 내 말을 듣고는 나무 둥치에 앉아 하늘을 본다. 표정을 보니 답을 알겠다는 표정이다. “그건 조금 심했네요.” “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어. 이게 최선이었단 말야.” “하지만 그 모든 걸 감안하고 게임했던 거잖아요.” 한나의 얼굴을 본다. 그 단발머리 아이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다. “저 역시 누군가가 게임을 막는다면 화낼 거예요. 그게 비록 인생을 망치는 길이 될 지라도요.” “알고도 한다고? 그건 중독이라서…….” “중독이 아니에요. 그 사람에게는 이 세계가 그만큼 중요해서에요. 현실과 같이 이 게임도 인생 중 일부인거죠.” 무엇을 믿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의문으로 가득 찬 시선을 느낀 건지 한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말한다. “저는 다리를 쓸 수 없어요. 어릴 때 사고죠. 아버지는 그런 나를 위해 이 게임을 만들었어요. 지금은 테스트 중이라고 말하는데 한 번 해보겠냐는 권유로 이렇게 하고 있는 거죠. 비록 게임에서 뿐이라지만 이렇게 앉아 다리를 흔드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요. 그런 저에게 게임을 그만두라고 말하실 수 있으세요?” “……….” 한나의 흔드는 다리를 본다. 힘든 율동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해말게 웃고 있는 아이. 그런 아이에게 게임을 그만두라 말할 수 있을 턱이 없지.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고 한나는 싱긋 웃는다. “소연언니도 저와 같을 거예요. 제가 아는 소연언니는 저보다도 게임에 대해 정이 깊으세요. 게임 때문에 화내고, 웃고, 즐기시는 분이죠. 저는 그런 소연언니를 좋아해서 지금껏 따라다니고 있는걸요. 그런데 게임을 그만두게 하다뇨. 좀 더 다른 방향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작은 바람이 분다. 염색된 금빛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려 작은 호선을 그린다. 동생은 이 바람을 좋아했을까? 이렇게 시원한 기분을 현실과 같이 치부했을까? 더 이상 뭐가 좋은 건지 알 수 없어졌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잘한 게 아니란 사실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한나야.” “네?” “동생을 좋아해줘서 고맙다.” “에…네?” “그 마음 변치 말라고.” “으음, 네.” 나는 마음 편히 미소 짓는다. 무슨 소리 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다. 나는 접속을 해제하려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천상의 매혹’의 숙련도가 5 올랐습니다.> 또다시 알려오는 기계음. 의문이들 무렵, 건물 창밖에서 수많은 유저들이 눈물을 훔치며 나에게 외쳐댄다. “미안해요, 미소천사님!” “저는 무서워도 당신뿐입니다!” “그 어른스런 미소조차도 사랑합니다!” “당신은 내꺼…으악!” “저분이 왜 네 거야! 더 맞아!” “사, 살려!” 뭔가 위가 많이 시끄럽다. 고개가 절로 저어진다. 하지만 그런 내 얼굴에 미소가 감긴다. “그 녀석이 왜 게임을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네.” “언니도 이참에 게임을 좀 해보세요.” 한나가 나를 보며 권유한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살짝 저어 거절한다. GM은 유저로서 게임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 당신들! 다음에 또 날 피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윽박지르는 것과 달리 표정은 웃는다.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담으로 한 말이다. 이렇게 웃어본 적이 얼마만일까. 사회에 찌들려 살고 있는 내게도 이런 게임이라면 학교생활 했던 것처럼 과거로 돌아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천상의 매혹’의 숙련도가 30 올랐습니다.> “저, 저건 위험해!” “나, 지금 가슴 떨렸어.” “나, 난, 위험순위를 이미 넘었……!” “야! 코피 흘린다!” “으 녀석 쓰러졌어! 들것 가져와 들것!”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지만 나는 그 전에 접속을 해제해서 알 수가 없었다. 훗날 동생이 이 사건 때문에 골치 아팠다는 사실은 나는 영원히 알 수 없었던 것도 포함해서.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13일전. “하아.” 하늘은 몹시 푸르렀다. 턱을 괴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이 짓도 꽤나 할만 했다. “한동안 잘 지내는가 싶더니, 나기찬! 수업 좀 들어!” 언제나와 같이 얼굴을 붉히며 두 팔을 퍼덕 거리는 여담임의 모습이 안 봐도 눈에 선했다. 나는 오늘도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샘, 게임이란 건 도대체 뭘까요?” “제발 부탁이다, 기찬아. 이제 그만 게임중독에서 빠져나오렴.” 이거 가만히 있다가는 내손을 붙잡고 무릎이라도 꿇을 태세다. 그래서 나는 다시 먼 산을 보았다. “너, 너 정말 나기찬!” - 딩동댕동~ 이쯤에서 종이 울릴 거란 사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심연의 눈’스킬을 발동시키면 그것쯤이야 시계를 보지 않고도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니까. 물론 아직까지 그걸 모르는 담임은 단지 운이 좋은 놈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데자뷰 현상이 느껴지네.” 곰곰이 생각해보다 포기했다. 한두 번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겠지. 그럼 다음에는……. “기찬아, 화선녀님이 있잖아.” “역시.” “응?” 눈을 감고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자 의문을 갖는 상천이 녀석. 이상한 놈 소리 듣고 싶지 않았으므로 금세 표정을 풀고 말했다. “아니야. 그런데 화선녀님이 뭐?” “어, 응! 화선녀님, 무림일대기 접은 거 같아.” 게임아이디로 화선녀, 이름은 이정화 누나다. 대환기업 이 씨 가문의 장녀이자 외동딸인데 누나의 가족 분들이 워낙에 특이해서 우리들은 예비 약혼자가 되어있는 상태였다. 정화누나는 그냥 무시하라는 투로 넘어가고 있지만 그 거대한 기업의 약혼자라니. 남들이 들으면 부러워서 혀 깨물고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야, 농담하지 마. 그 누나는 게임에 목숨 건 사람이야.” “정말이래도? 내가 어제 심심해서 잠깐 무림일대기 들어가 봤는데, 우리가 저번에 만난 이후로 지금까지 접속하지 않았다고 유저들이 그러더라.” “그래? 그럼 뭔가 사정이 있겠지.” 작은 일이라 생각해서 별 감흥은 오지 않았다. 큰 사고였다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뭔가 실렸을 테니 말이다. 대환기업 사장의 딸 누구누구가 무슨 일을 당해서 어쩌고저쩌고 라고. “그래도 랭킹 1위를 바라보는 분인데. 아깝네, 그 캐릭 내가 했으면 돈 좀 쓸어 모았을 텐데.” 결국 이 녀석도 화선녀님이 걱정된 게 아니라 그 캐릭이 아까워서 저런 말을 한 것이었다. 나라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리 없겠지만. “하아, 무림일대기나 다시 할까.” 다시 턱을 괴고 창밖을 보았다. 답답해서 한 말이었는데 상천이가 답했다. “아펜하르트는 어쩌고.” 슬쩍 상천이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숨. “무슨 일 있었냐?” “들켰거든.” 상천이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생각하다 알았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아! 너 딸 치다가 누나한테 들켰…컥!” 다 듣기 거북해서 녀석의 목젖에다가 촙을 날렸다. “켁, 켁! 죽겠네. 너 은근히 인정사정없다? 그럼 뭐가 들켰는데.” 연신 목을 매만지며 눈물을 흘리는 상천이 녀석. 나는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아펜하르트. 누나 아이디로 게임한 거 들켰어.” “어헉!” 놀랄 만 할 거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용케 살아있었네?” “그날 정말 죽을 뻔했다. 지금이야 게임 못해 금단증상이 일어나고 있지만.” “빌어보지 그랬어.” “나흘째 묵비권 시위 중이야. 하지만 이제 그만두려고. 이런 게 통할 리가 없으니까.” 내가 표정을 구기며 말하자 상천이 녀석이 이해한다는 듯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용쓴다. 그래, 이참에 같이 무림일대기나 하자.” 집에 들어가 오늘은 무림일대기나 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하다가는 애타 죽을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은 학교와 멀지 않아 통학하기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버스나 지하철은 타본 적도 없었고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친구들은 몹시 부러워했었다. 하지만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MP3나 PSP를 여유 있게 듣거나 볼 시간도 없었고 만화책 따위도 마찬가지 여서 엄마나 눈팅이 휴대기기를 사주지 않았다. 더 나아가 깊게 생각할 여유도 없었고 항상 빠듯하게 다니느라 아침마다 달리는데 지쳐버리기 일쑤였으니 나에게는 결코 좋다고만은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집에 빨리 돌아오니 게임하기는 좋았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한창 게임에 빠져있을 때는 학교종이 치자마자 달려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게임했었으니까. 한두 시간 늦게 들어온 상천이 녀석이 그새 벌어진 경험치를 보며 몹시 부러워했었더랬지. “참 게임도 많이 했구나.” 그러고 보면 참 많은 게임들이 나와함께 해왔다. 이스, 시하르, 아르카디아 연대기, 어나더월드, 무림일대기를 지나 아펜하르트까지. 신기하게도 이 게임들을 하며 즐거웠던 추억이나 충격, 화났던 일까지 전부 기억에 남아있었다. 지금은 추억이 되어 잠 잘 때나 가끔 생각나는 것들이지만.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비록 좁고 작은 단독주택에 불과하지만 대문 앞에는 작은 화단도 있었고 내 허리만큼 오는 울타리도 있어서 나름 운치 있게 생긴 집이었다. 예전에는 우중충하고 무겁게만 보여 답답하기 그지없었는데 지금은 엄마대신 화단에 물도 뿌리는 등 조금은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대문을 열고 작게 외쳤다. “다녀왔습니다.” 아마 엄마는 여행사 일하기 바빠 오늘도 집에는 없을 것이었다. 누나도 회사일 때문에 아직 올 시간이 아니었으므로 아무도 없을 테지만 그냥 말해보았다. 일본에서는 누가 있든 없든 무조건 말한다는데 그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신발을 대충 벗어 놓고 땀에 찌든 교복을 벗어 내 방에 있는 옷걸이에 걸었다. 역시 7월의 여름은 덥기 그지없구나. 이틀 전인가 누나가 바캉스가자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그럴 기분이 아니라 싫다고 짧게 말했던 기억이 났다. 오늘 누나가 오면 한 번 냇가나 가자고 해 볼까. “일단 씻고 보…응?” 내 방에 꾸깃꾸깃 접힌 종이쪽지가 놓여 있었다. 이상하다, 밥 먹으라는 내용의 쪽지는 보통 거실 식탁위에 있기 마련인데. 게다가 긴 내용인지 접힌 두께가 상당했다. 설마,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이곳에 다 토해논거 아닐까?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이렇게 몇 겹을 접어놓은 걸로 보아 화내며 온힘을 다 쓴 게 분명해! 셜록홈즈 저리 가라할 추리를 하며 조심히 쪽지를 펼쳐 보았다. 젠장, 그 힘들다는 여덟 겹이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결국 다 펼쳐 침을 꿀꺽 삼키고 내용을 보았다. [ to 동생에게. 동생님아, 언제까지 꽁해있을래? 계속 그렇게 지내니 이 누나가 속상하잖니. 그래, 네가 이겼다. 이 누나가 이번엔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 그러니 이제 그만 상심해라. 누나는 네가 게임하는 게 걱정되어 그만두게 한 거야. 하지만 엄마가 정해준 시간이 있는데 내가 막기도 뭐해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래, 한 번 원 없이 게임해봐. 한창 놀 때인데 막기도 그렇다. 그래도 엄마와 한 약속은 지켜야 한다? 이제 2주일도 안 남았어. 그때도 이렇게 행동하면 정말 화낼 거야, 알았지?] “누, 누나…….” 으윽, 눈물이 나올 거 같아 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 훈훈하구나. 이게 사는 것이구나.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린 느낌이었다. 아직 전부 읽지 않아 다시 편지로 눈을 내렸다. [단, 조건이 있어. 내 얼굴인 만큼 전처럼 욕보이는 짓은 절대 하지 말 것! 또 수염 기르고 이상한 복면 썼다간 너도 하굣길에 복면 쓰게 만들 줄 알아! 그리고 혹시나 내 몸으로 이상한 짓하는 건 아니겠지? 혹시나 그런 짓 하고 싶으면 엄한 근친상간 같은 짓 하지 말고 얌전히 책잡아라. 알았지?] “아, 안 잡아! 아, 아니, 그 전에 그런 글을 왜 편지에다 남겨놓은 거야!” 분명 내 얼굴은 심히 붉혀져 있을 것이었다. 눈팅한테 그런 소리를 들으니 참 기분 묘하네. 나는 맨 밑에 마지막 한줄 적혀 있는 글을 읽었다. [ps - 한나한테 고마워해라.] “하, 한나라니. 설마 게임에 들어갔던 거야?” 물론 누나 아이디니 누나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GM인 누나가 들어갈리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충격을 먹고 말았다. 맙소사, 설마 전부 들킨 거 아냐? 한나가 나에 대해 알아버렸다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막막해져 왔다. 미소천사 기사단인원들은 나를 보고 얼마나 혐오하는 표정을 지을까. 레이나님은 분명 수환을 만들 테고 하가네님은 미친 듯이 웃을 것이었다. 이거 다 풀린 줄 알았더니 다른 의미로 게임을 못하게 만든 거 아냐! “으아아아아! 정말 누나아아아아아아!” 한동안 절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접속되었습니다, 즐거운 시간되십시오.] <아펜하르트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예쁜이’님 시작 포인트로 이동합니다.> 미친 듯이 고민해봐야 지금 상황을 정확히 몰랐기에 아무 소용없어서 나는 게임에 접속했다. 빛에 감싸이자마자 나는 눈을 감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되든 안 되든 진정하고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이었다. “휴우, 자 시작해 볼까.”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고 그늘 때문인지 더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나무그늘에서 접속을 해제한 건가? 앞을 보자 미소천사 기사단 건물이 보였다. 결국 저곳까지 들어갔다 나와 이곳에서 접속을 해제한 것 같았다. 내가 그린 최악의 시나리오가 머릿속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언니 오셨네요?” “히익!” 발밑에서 소리가 들려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지금 내 모습은 매우 우스꽝스러울 것이었다. “킥킥, 왜 그리 놀라고 그러세요.” 『성격 참 다양하네요. 어제는 그렇게나 무섭더니.』 한나였다. 입을 가리며 웃고 있었다. 한나 어깨에 올라타 쉬고 있던 정령 녀석은 나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고 있었고 말이다. “어,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음, 한 시간 전부터요. 접속했는데 그냥 편해서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 그 다리 흔들며 노는 게 그렇게나 재미있을까? 나로서는 시간 아까워 생각도 못할 짓이었다. “그런데…동생이에요, 언니에요?” 심하게 움찔하는 나. 침이 꿀꺽 삼켜졌다. 역시, 전부 알 고 있었어. 이미 피할 곳은 한군데도 없었던 거야! “그동안 숨겨서 미, 미안해! 아니, 미안합니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나왔다. 도저히 숙인 허리를 필 자신도 없었고 감은 눈을 뜰 자신도 없었다. 잠시간에 침묵이 왔고 무섭던 정적을 깨고 드디어 한나가 말했다. “갑자기 왜 존대세요? 말투 보니까 소연언니같은데. 설마 또 다른 분?” 이게 무슨 소리일까. 잠시 허리를 숙인 채 생각해 보았다. “저기…….” “어제 소연언니, 언니라는 분이 오셨었어요. 정말 재미있었는데. 그런데 어떻게 한 캐릭터를 두 분 이서 할 수 있었던 거죠? 그때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참 신기하네.” 나를 소연언니라 지칭했다. 즉, 아직은 남자란 사실을 들키지 않았다는 건가? 나는 조심히 말했다. “호, 홍채가 같거든. 조금 특이하지. 그런데 별일 없었어?” “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그러고 보니 그때 그 언니 이름도 안 물어봤네.” “트, 특별히 몰라도 돼! 워낙에 게임을 싫어하는 사람이거든.” “그래도 이름은 알아두는 게 예의죠, 알려주세요.” “수, 수연이야! 수연! 아하하하하!” “왜 그리 땀을 흘리고 그러세요.” 땀을 안 흘릴 수가 없지 않겠냐. 이렇게나 찔리는 걸. “웃차.” 갑자기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는 한나. 나는 경찰을 본 도둑마냥 한걸음 물러났다. “왜 피하고 그러세요. 그보다 어제 한 얘기 다시 해드려야겠네요.” “뭐, 뭔데?” “최근에 저희 기사단이 너무 커나갔잖아요. 이제 반발이 되서 돌아올 때가 되었다고 태식 오빠가 그랬어요. 저희 단도 인원수를 받으라 하셨단 말이에요.” 한나는 정말 귀찮은 걸 떠 맡았다는 듯이 말했다. 하긴 무차별적인 기사대전을 통해 인원을 확보하고 명성을 올렸으니 랭커에 있는 기사단들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겠지. “하지만 우리 단을 키웠다가는 내 얼굴이…….” 잠깐, 이제 아무 상관없게 되었잖아? 얼굴이 팔리든 아니든 뭐 어떤가. 당사자가 게임하라 허락해준 판에 말이다. 이제는 정말 숨기며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미소천사란 얼굴도 이미 팔렸겠다. 랭킹을 1위로 올리든, 기사단을 키워서 TV방송을 타던 꺼릴게 없어진 것이었다. 이렇게 후드 쓰고 다닐 필요도…유저들한테 둘러싸이게 될 테니 그건 일단 보류인가. “뭘 그리 골똘하게 생각하세요?” “아니야, 그럼 지금 우리 단이 한나하고 나뿐이니까. 둘이 나눠서 단을 모아보자.” “그게 한명 더 있어요.” “응? 내가 받은 적 있었나?” 내 물음에 한나가 혀를 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언니분이 얼떨결에 받으셨어요. 미소천사님을.” “내가 나를 받아?” “아뇨, 호칭 미소천사 말고 아이디 미소천사님이요.”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직도 몰라 하자 한나가 통신 구슬을 꺼내며 누군가를 연결했다. “아, 미소천사님! 언니 왔어요. 지금 이리로 오실 수 있으세요?” {정말요? 지금 그리 갈게요.} 이상하다 어디서 들었던 목소리다. 기억이 날듯 말듯하네. “그래요, 어서 오세요.” 한나는 간단하기 통신을 끊고 나에게 웃어보였다. “지금 오신 다네요. 일단 만나서 얘기 나누세요.” “뭐, 응.” 머리를 긁적이며 마지못해 답했다. 그나저나 이제 한 달 되기 13일 남은 걸로 알고 있다. 유료화 되기 13일 남았으니 정확할 것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이제 나를 막을 것도 없겠다, 마음껏 플레이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내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동안 사용 못한 미모와 힐러의 힘을 대놓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생각만하고 하지 못했던 것들을 전부 다 해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지은 미소였다. “저, 저, 저, 저, 안녕하세요.” 웨이브 진 금발머리의 인형같이 작은 소녀. 이 유저는 용자대전에서 만났던 힐러가 분명했다. 그때 때 쓰며 울던 모습이 아직까지 인상 깊어 잊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리 말을 더듬지? 그때도 순진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리 심하지는 않았는데. “저기…왜 피하세요?” 내가 한발 다가가자 한발 물러나는 금발의 소녀. 한나는 뭔가 알고 있는지 연신 웃음을 참느라 힘겨워 보였다. “풋, 그, 그게, 킥킥, 수연 언니가.” “하아, 그런 건가.”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감쌌다. 이것도 눈팅 짓인가? 도대체 저런 소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여하튼, 안녕하세요. 타테라고 합니다.” 내가 내민 손을 고양이처럼 경계하며 보던 소녀가 의문이 있는지 입을 세모로 만들었다. “저, 저기. 인사는…어제 했었는데…….” 아, 누나랑 이미 했겠구나. 다시 설명하기도 그래서 그냥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제대로 소개 안한 거 같아서요.” 그리고 싱긋 미소. 누나에게 미안하기 그지없지만 대충 넘어가기에는 이것만한 것도 없었기 때문에 요즘 자주 애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천상의 매혹’의 숙련도가 1 올랐습니다.> 어라? 이분 왜 이리 얼굴이 빨개졌다니. 그리고 한나야, 너는 왜 멍 때리고 있니. “언니, 지금 느낀 건데요.” “응?” 한나가 갑자기 내게 다가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가,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고 난리야! “어제 수연언니를 보고 느낀 건데. 소연언니랑 같은 캐릭터인데도 너무 달라요.” “뭐, 뭐가?” 한나는 정말 심각한지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미소요. 어제의 수연언니는 화사한 여성의 꽃 같은 미소라면…오늘 소연언니에게는 뭐랄까. 레몬 같은 상큼한? 으음, 뭐라 표현하지 못하겠네요. 그래도 어제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오늘은 왜 제 마음이 이렇게 설레죠?” 이보세요, 당신은 지금 대놓고 여성에게 반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거든요? 갑자기 누군가 드레스 자락을 잡아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소녀가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고 있었다. 뭐, 뭐요? 지금 당신도 나에게 반했다고 말하고 싶은 게요? “이, 이것 좀 놔주시겠어요?” 불편하다. 이거 굉장히 불편하다. 꼭 드레스자락에 무거운 추를 매단 느낌이다. 하지만 그 소녀는 손을 놓기는 커녕 고개를 푹 숙인 채 뭐라 중얼거렸다. “전, 미소천사…나이 스무 살이에요.” 아, 자기소개하려 한 거구나. 참 타이밍 빠르시…잠깐, 뭐? “스, 스무 살이요?” 되묻는 내 말에 볼을 잔뜩 부풀린 소녀, 아, 아니, 여성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맞아요, 미소천사님은 저보다 언니에요. 저도 처음에 얼마나 놀랐는데요.” 완전히 말뚝을 박아버리는 한나의 말에 나는 멍하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하하…아무리 봐도 어린애…….” “어린애 아니에요!” 힉, 아이고 깜짝이야.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난리람. 이게 어딜 봐서 스무 살이냐고! 아무리 봐도 치기어린 어린애가 떼쓰는 거잖아! “저, 저는 어린애처럼 생겼고, 그리고, 성격도 그래서, 미소천사님을 존경했어요. 강하고, 어른스러워서, 그래서, 저도 따라 해보려고 그런 거란 말에요!” “왁왁, 알았어요! 울지 마세요! 그만, 뚝!” 경기 때 일이 생각나 황급히 그녀의 눈물을 소매로 훔쳐 주었다. 한껏 부풀린 볼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아 불안했다. “그래도 미소천사 언니, 대단해요. 소연 언니 다음으로 힐 스킬을 발견해낸 유저잖아요. 우리 단에 이 같은 분이 또 어디 있다고. 그보다 빨리 정하세요. 어제는 수연언니가 대충 넘어가서 아직 정식으로 우리 단도 아니란 말이에요.” 생각해보니 한나 말대로 대단하긴 했다. 내가 처음 본 또 하나의 힐러. 단지 내가 부러워서 선택했던 캐릭터로 이정도 까지 올라간 것을 보면 게임 센스가 분명 대단하다는 걸 뜻했다. 하지만. “분명, 우리 단에 미소천사님같은 분이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 그런데 너무 보조에 치중되어있는 거 아닐까.” 한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봐야 이제 세 명인걸요? 게다가 언니가 가장 자신 있는 게 힐러고. 우리들도 보조겠다. 그냥 이참에 보조위주 단으로 만드는 건 어떠세요?” “에이, 세상에 그런 단이 어디있…잠깐만.” 보조단?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던 단은 상대 기사단을 무찌를 만한 힘을 가진 단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통솔할 자신도 없었고 얼마나 잘 키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럴 바에야 내 전문 분야 쪽으로 특화된 단을 만든다면? 물론 기사대전 같은 짓은 할 수 없겠지만 다른 기사대전에 도와줄 수도 있고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는 유저들을 도와줘서 급속도로 명성을 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대를 죽이며 얻는 명성보다 치료해 줘서 감동받게 하는 명성이 더 클 테니 잘만 짜인다면 우리 단은 대단히 클 수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미소천사 기사단은 이미 싸움에 특화된 단이 두 개나 있지 않은가. 나까지 공격위주로 해봐야 별 도움이 안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거 재미있겠는데. 미소천사님, 죄송하지만…….” “주리아.” 또랑또랑한 눈으로 올려다보니 마음속에서부터 느껴지는 부담스러움. 설마 이름을 불러달라는 건가? 주리아? 별명인가? “어, 엄마가 미국인이에요. 한국이름은 김주리인데 전 미국이름이 더 좋아요. 그러니까, 그래서, 말 놔요.” 아무리 봐도 이분이 나보다 누나라고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부담스러우니까 그 눈빛 좀 제발 거둬줘. “그, 그래, 주리아. 혹시 힐 스킬을 어떻게 배웠는지 알려줄 수 있어?” “언니, 그건 실례가 아닐까요?” 한나가 주리아의 눈치를 보며 말했고 나 역시 무리한 부탁인지 알고 있었으므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저 미소천사 기사단에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주리아는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나는 그 말에 표정을 굳혔다. 단에 들어오는 조건으로 무언가 부탁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잘 들어, 주리아. 지금 내가 한 말은 그냥 한 말이었고 대답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나는 이미 우리 단에 가입되어 있는 상대를 내쫓을 만큼 가혹한 사람도 아니야. 그러니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화낼 거야.” 허리를 굽혀 눈을 마주보았다. 주리아의 푸른색 눈동자가 유난히도 밝아 보였다. “맞아요, 주리아언니. 소연언니는 그런 분이 아니에요. 방금 그 말은 저도 화날 뻔했어요.” 한나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내 기분을 이해해주는 한나가 참으로 고마웠다. 주리아는 나와 한나를 번갈아 보다 밝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제가 생각했던 미소천사님이에요! 어제는 무지 무서웠는데…역시 여기 오길 잘했어요!” 손을 활짝 피고 휙휙 돌리며 기뻐하는 주리아를 보자 내 마음까지 덩달아 편해졌다. 한나 역시 흐뭇하게 주리아를 보다 나에게 말했다. “그런데 언니. 왜 힐 스킬에 대해 물어봤어요?” 말 못할 이야기는 아니어서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간단히 답했다. “보조단으로 가기 위해서는 필수로 필요한 게 힐이잖아. 그런데 내 힐 스킬은 워낙에 일반유저가 배우기 힘든 조건이라 무리여서 혹시나 하고 주리아한테 물어 본거야. 하지만 그냥 관두려고. 역시 이런 걸 대뜸 물어본 게 실수지.” 한나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주리아를 보았다. 그러자 주리아가 한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말했다. “이미 한 명 알려준 상태인데 그런 이유라면 못 알려줄 것도 없어요.” 활짝 웃으며 말하는 주리아. 한 명을 알려주다니 의문스런 표정으로 한나를 보자 한나가 갑자기 주문을 외웠다. “세상의 어머니, 가이아 여신님의 힘은 땅, 땅은 곧 생명이리라. 큐어(cure)” “어어어?” 한나의 손에서 은은한 빛이 퍼져 나와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한나도 힐 스킬을 배웠단 말이야? “어, 언제?” 내가 멍하니 말하자 한나가 킥킥 거리며 말했다. “언니의 그런 모습 재미있어요. 에이, 그렇다고 바로 그렇게 굳을 건 없잖아요? 음, 이 스킬은 가이아 여신님을 믿는 사제라면 누구라도 간단한 조건으로 배울 수 있는 스킬이었어요. 저도 주리아 언니한테 배웠는걸요.” 내 눈이 주리아를 향하자 주리아가 작은 손가락을 귀엽게 세우며 말했다. “조건은 간단해요. 여신님의 성역에 손을 얹고 간단히 힐을 염원하면 되죠.” “성역? 그곳이 어딘데?” 내 물음에 한나하고 주리아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더니 동시에 미소 지으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카오스에서 갈라진 태초의 어머니 가이아시여, 어머니를 상징하는 물건은 땅, 땅은 곧 성표 이니라. 발동하라, 디바인 마크(Divine Mark)!” 우리가 있던 나무주위는 순식간에 두 개의 빛으로 사방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예쁘장한 유저 세 명을 보기위해 기웃거리는 유저들이 갑작스런 빛에 놀라 다들 몇 걸음 물러나 웅성대기 시작했다. “이건 디바인 마크 아니야? 그럼 이게?” “네, 가이아 여신님의 성역이죠. 주리아언니는 제가 디바인 마크를 배운 걸 알아서 알려줬어요.” 한나의 말을 받아 이번엔 주리아가 말했다. “디바인 마크를 배우기 위해선 진실한 게임의 즐거움, 그리고 절실한 믿음이 필요해요. 디바인 마크 스킬을 배운 자 중에는 못된 사람이 없죠. 그래서 한나한테는 알려 줬어요.” “그렇다는 말은…….” 한나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디바인 마크를 배운 유저들만 추려서 저희 단에 가입시키면 걱정 없을 거예요.” 내가 속으로 걱정하고 있던 부분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사실 이번에 잘못하면 힐이란 스킬이 게임 전체로 퍼져 나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디바인 스킬을 배운다는 조건이 참된 믿음이라면 우리 단에 가입시키고 조건을 부여하는 것만으로도 배반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나가 웃은 이유는 그것 때문이리라. “이거 의도치 않게 재미있겠는데?” “하지만 어떻게 300명 가까운 유저들을 모을 거예요?” “그건 생각해 둔 게 있어, 킥킥!” 내 눈이 활처럼 휘었다. 한나는 무슨 여자답지 않은 표정이냐며 표정을 살짝 찌푸렸고 주리아는 신기한 동물 보듯 나를 관찰했다. “그럼, 이제 저희 단을 뭐라고 부르실 거예요?” 한나의 말을 듣고 나는 나뭇가지 위에서 연신 졸고 있던 정령이를 어깨에 올리고 나무그늘에서 나와 뜨거운 태양을 보았다. 그 이름은 이미 정해 두었다. 누가 들어도 보조단이나, 힐러위주의 단이라 생각하고 내가 들어가 있을 것 같은 이름! “자, 엔젤단 출동이다!” 나는 힘차게 손을 들고 말했다. 그래, 이제 시작이다. 마음껏 플레이할 수 있는 날, 거침없는 나의 첫걸음을 땐 날이었다. 『우웅, 얘기 다 끝난거에요?』 아무것도 모르던 정령이가 머리위에 물음표를 띄우자 우리 셋은 맘껏 웃을 수 있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더 즐거웠다. 내가 한나와 주리아를 이끌고 찾아간 곳은 중앙 분수대 북쪽위에 있는 게시판이었다. 이곳에 운영진이 공문을 올리기도 하지만 유저들 간의 자유 게시판용으로 사용해서 나름 복합적인 나무판자라 할 수 있었다. 수많은 파피루스들이 더덕더덕 붙어서 보기 힘들어 보이는데 컴퓨터처럼 자신이 원하는 정보들만 생각만으로 부를 수 있어, 일일이 클릭이 필요 없는지라 속독이 되는 사람에겐 더 편했다. 그것보다도 문제는 우리가 게시판으로 올라올 쯤엔 이미 많은 유저들이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 혼자만 해도 부담스러워서 후드를 쓰고 다녔을 정도였는데 나를 포함해서 저 둘까지 딸려있으니 유저들이 모이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겠지. “하아, 전부 후드라도 쓰고 올 걸 그랬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이미 늦은 것. 유저들에게 둘러싸이기 전에 걸음을 빨리하는 게 최선책이었다. “게시판에서 무엇을 찾으시게요?” 기분이 날카로운지 한나가 삐죽삐죽 주위를 둘러보며 나에게 말했다. 그래도 나는 어느 정도 익숙했기 때문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기사 대전 정보.” 내 말에 한나와 주리아는 서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지만 정확한 답변대신 게시판에 내가 원하는 정보를 훑어보았다. [ 피닉스 기사단 모집. 불구자가 아닌 건장한 유저라면 누구든 환영. 하지만 초보자는 죄송. 여성은 초보자도 대 환영! 오실 곳, 남쪽 대로변을 지나 모르핀 제국 남서쪽 위치.] [급 정보! 인터 기사단 VS 한니발 기사단 오늘 아홉 시 정각에 인터 기사단이 메히튼 왕국에 위치한 한니발 기사단 본기지 점령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최후 수성에 들어간 한니발 기사단! 오늘 아무래도 이름이 지워지지 않을까 싶네요. 덕분에 용병일하는 저희들은 먹을 게 생겨나겠지만. 지금 인터 기사단과 한니발 기사단에서 용병들을 모집한답니다. 물론 제시한 돈이 많은 쪽은 한니발인데 죽으러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네요.] [미소천사 기사단 어디까지 뜰 것인가! 아페타 마을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미소천사 기사단을 주시하라! 지금까지 알려진 랭킹 5위의 미소천사가 있는 미소천사 기사단에 랭킹 6위, 미지의 마검사 멋쟁이와 8위, 일발필중 어둠의조이가 소속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 현재 아페타 마을을 넘어서 인근 피욤 마을, 사리퍼드 마을, 하칸 마을을 모두 정리한 상태며 곧 모르핀 제국의 국경선까지 넘어갈 것으로 예상! 아니 무차별 진격을 막아 줄 륀 기사단은 왜 저지를 하지 않는 거야? 같은 마을에 있으면서 이렇게 방관하는 처세라니 륀 기사단도 허명인 거 같다. 역시 믿을 건 모르핀 제국에 있는 레드드래곤 기사단과, 페어리 기사단뿐인가?] [더원 기사단의 용병왕 애디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가. 이제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기사랭킹 1위의 더원 기사단, 랭킹 1위 용병왕 애디. 이제 이 기사단을 막을 단체는 아무도 없어 보인다. 명실 공히 최강의 유저. 레벨 100대를 넘어선 그는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가.] 단지 기사단하나 생각했을 뿐인데 별의별 정보들이 다 보여서 하나하나 읽는대도 시간이 꽤나 소비되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몇몇까지를 추려보자면 우리 기사단의 행적과, 인터 기사단과 한니발 기사단 대결정보였다. “흐음.” “언니, 뭘 그리 집중하면서 보세요?” 내가 열람한 정보는 다른 유저가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한나가 궁금해 한 것이었다. 나는 이참에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혹시 용병에 대해 알아?” “용병이요?” 한나가 되물어왔다. 음, 한나는 나보다 더 게임 정보에 관심이 없을 테니 모를라나? 주리아를 보자 그녀는 조금 생각하더니 말했다. “기사대전에 활성화돼서 유저들끼리 임의적으로 만든 시스템으로 알고 있어요.” “오, 주리아는 좀 알고 있구나! 그래서?” “그, 그러니까. 용병들은, 그러니까, 아우…….” “언니, 좀 떨어져요. 부끄러워하잖아요.” 아, 나도 모르게 너무 다가간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리 부끄러울 상황이 아니잖아? “저 작은 금발소녀, 귀여워!” “이, 인형 같아!” “그래도 저기 모델 같은 금발머리가 최고지!” “난 저 단발머리 사제도 좋은데?” 참, 잡음도 많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유저들을 무시하고 주리아를 마주보았다. 주리아는 쭈뼛거리며 내 눈을 피하다 자신의 소매를 꽉 쥐며 말했다. “그러니까! 랭커에 따라 기사단 단원 수가 다르다보니 그걸 충족시키기 위해 용병 시스템을 만들어 계약직으로 기사단을 도와주는 용병유저가 생겨났어요.” “그 용병이란 직업은 아무나 가능해?” “그게, 저기, 기사단에 포함된 유저는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시스템상 다른 기사단이 도와준다고 인식해서 대결 자체가 성립이 안 되거든요.” “호오.” 내 눈이 가늘어졌다. 주리아는 흠칫하며 한걸음 물러났고 한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몸을 떨었다. “하아, 언니가 저런 표정 지으면 나는 항상 득보단 실이 많던데.” “무슨 소리야. 내가 뭐 잡아먹기라도 하디?” “그때 저한테 미소천사 연기 시킨 것만 해도…하아, 설마 그런 거 또 시키는 건 아니겠죠?” “자, 이제 가자!” “어, 언니! 대답은 해주세요!” 나는 거침없이 뭉쳐있는 유저들을 가로질러갔다. 유저들은 내가 다가오자 물결이 갈라지듯 좌우로 쫙 나눠졌다. 문제는 이제 메히튼 왕국으로 가는 길이었다. 거리가 꽤나 멀기 때문에 우리들만으로는 걸어가기엔 턱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가는 곳은 같이 갈만한 파티에 들어가는 것. 내가 알기로는 장거리 여행을 가기위해 팻말을 들고 인원을 모을 팀이 다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전에 가보았던 아페타 마을 동쪽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역시나 수많은 유저들이 저마다 팻말을 치켜들고 고래고래 외치는 등 부산하기 그지없었다. 여러 가지 파티모집을 살펴보던 나는 한쪽에 눈길이 멈췄다. “메히튼 왕국 가실 분! 다섯 명만 더 받고 육로로 출발합니다!” 이미 거의 인원인 찬 상태인지 주위에는 유저들이 바글거렸다. 나는 한나와 주리아를 이끌고 광고하고 있던 노랑머리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저희 세 명 포함이요!” 그리고 한 번 싱긋 눈웃음. 대부분 남자라면 말보단 이기 한방이 더 특효 있었다. 이젠 숨길 것도 없겠다. 가릴 것도 없겠다. 대놓고 미모를 살리는 나였다. <‘천상의 매혹’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세, 세 명 포함이요!” 광고하고 있던 노랑머리 마법사가 뒤에 웅성거리고 있는 유저들에게 말했고 그러자 수많은 유저들이 우리들을 보았다. “어라? 저 유저 어디서 많이 본 유저다?” “저, 저, 저, 미소천사아냐?” “저 금발에 하늘색 얼굴 염색…정말, 정말!” 나를 알아보는 유저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굳이 대꾸해줄 마음이 없어서 가타부타 말없이 한나와 주리아를 이끌고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사실 이렇게 번거로운 짓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스크롤을 하나 구입해서 날아가면 그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메히튼 왕국이 거리가 워낙에 멀어 스크롤 값이 장난 아니었다는 이유도 있었고 지금 우리들은 명성을 높이기 것과 엔젤단 단원을 모으기 위한 작업이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알려줄 때도 되지 않았어요?” 한나가 턱을 괴고 한 말이었다. 주리아도 궁금했는지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팔짱을 끼고 둘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들은 메히튼 왕국으로 가서 한니발 기사단을 용병으로서 도와줄 거야. 아홉 시부터 시작이라고 하니까 빠듯하지만 도착할 수 있겠지.” “용병으로서 참전해 명성을 쌓자는 말인가요? 의도는 좋은데 너무 시간이 지체되지 않을까요? 그냥 스크롤을 써서 가는 것이 빠를 거 같은데.” 한나의 말은 이미 예상했던 것이었기에 나는 쉽게 답했다. “지금 이것도 명성을 쌓을 좋은 기회이기도 해. 우리들의 행적정보와 명성을 지금 100명 가까이 모인 수많은 유저들이 알려 줄 테고 금세 많은 유저들이 주시할 테니까.” 다른 왕국이나 제국을 도보로 걸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몬스터가 있는 산맥이나 평원을 지나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작은 파티라면 그만큼 시간이 지체되니 이렇게 많은 유저들이 모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길을 선택했다. 이정도 숫자라면 우리가 메히튼 왕국에 도착하는 순간 우리에 대해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테고 그만큼 예의주시하게 될 것이었다. 명성을 쌓기에는 최적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하, 하지만 저희는 기사단에 포함되어 있어서 용병을 하기에는 무리일 것 같은데요.” 주리아가 짚은 점은 정곡이었다. 하지만 그거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건 우리가 기사단을 탈퇴하면 되잖아? 미소천사 기사단 탈퇴.” <‘미소천사 기사단’을 탈퇴 하시겠습니까?> <‘미소천사 기사단’을 탈퇴 하셨습니다. ‘미소천사 기사단 휘장’이 파기 됩니다.> 내 간단한 행동에 한나와 주리아는 입을 쩍 벌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명색의 비공식 기사단 단장이 그리 쉽게 탈퇴하다니.” “정식으로 입단하자마자 탈퇴해야하다니, 흑.” 둘은 뭔가 불만이 많은 듯 보였지만 어쩔 수 없이 내 말을 들어야만 했다. 그래도 우리 단의 멤버니까 말이다. 기사단이야 이번일이 끝나고 태식 형한테 다시 들어가게 해달라면 그뿐일 테니 걱정 없었다. “저기…….” 기사단을 탈퇴하여 훌쩍거리던 주리아를 말리던 나는 부름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까 광고하였던 노랑머리 마법사가 서 있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명예 랭킹 5위의 미소천사님이신가요?”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는 마법사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런 건 왜 물어보시죠?” 그 마법사는 내가 화난 줄 알고 화들짝 놀래며 손을 휘저었다. “아니, 아니, 다름이 아니라 뒤에 유저들이 하도 웅성거려서 궁금하기도 하고, 통제도 잘 안돼서 드리는 말입니다.” 확실히 마법사가 가리킨 뒤쪽은 우리들을 연신 힐끔거리느라 난리도 아니었다. 이래서는 출발하기도 버겁겠군. 하지만 내 잘못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미소천사라면 문제될 게 있나요?” “언니. 뻔뻔스러워요.” “저거야말로 내가 배우고 싶은 철판이야…….” 지방방송은 조금 조용히 해주겠습니까? “아하하, 그, 그렇죠. 문제될 건 없죠.” 뭐라 할 말이 없었던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는 마법사. 뒤돌아 가는 모습이 매우 어색해 보였다. “그럼 출발합니다! 소요시간은 세 시간으로 잡고 있습니다. 일사불란하게만 움직인다면 더 단축할 수도 있으니 통제에 잘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출발!” “오오오오오옷!” “간다, 우리도 슬슬 일어나자.” 한나와 주리아는 뭔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지만 가볍게 모른 채했다. 처음으로 가는 메히튼 왕국. 그곳에 우리들의 이름을 새기는 첫걸음이기도 했다. 메히튼 왕국으로 가려면 북쪽평원, 모래평원이라고 불리는 곳을 지나 켈타스 제국과 모르핀 제국의 경계라 알려져 있는 위치의 산맥을 넘어가야만 하였다. 지금 내가 있는 아페타 마을은 모르핀 제국에 속한 마을이었고 메히튼 왕국은 겔타스 제국 쪽에 속한 왕국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지금까지 모르핀 제국 주위만 다녀서 처음으로 다른 지역을 구경하게 되는 일이기도 하였다. “여기까지 잘 오셨습니다. 이제부터 위치의 산맥을 들어가게 되니 모두들 조심하시고 경험치를 얻고 싶은 분은 앞으로 나서기 바랍니다. 편히 따라오실 분은 방해하지 마시고 뒤에서 멀찍이 따라오세요!” 노랑머리 마법사가 하는 말에 앞으로 나서는 자들과 뒤로 빠지는 무리가 생겨났다. 우리일행은 적당히 중간쯤에 섰다. 어떤 몬스터가 나오는지, 그걸 어떻게 사냥하는지도 궁금해서 내가 적당히 서고 한나와 주리아는 아무생각 없이 내 옆에 선 것이었다. 적당히 위치가 정리되자 노랑머리 마법사는 출발을 외쳤다. 그러자 100명가량의 유저들은 위치의 산맥이라 불리는 곳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곳, 위치의 산맥이라 불리는 산맥은 예전에는 100명의 인원수로는 턱도 없을 정도로 험한 지대였다. 레벨 100대의 몬스터가 뜬금없이 나오기도 하고 미로처럼 생긴 산맥 때문에 길을 잃어버리는 것쯤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곳이 이곳이었다. 한때 이 산맥에는 위치들이 만들어 놓은 던젼이 있을 거라고 탐험가, 레인저들이 자주 찾아다니는 유명소중 하나였는데 아직까지 별다른 게 발견되지 않자 이젠 발길이 뜸한 곳이 되었다. 지금이야 유저들 중에도 레벨 100대가 넘은 유저도 있고 다들 레벨 평준화가 높아졌기 때문에 예전처럼 100명을 모아 가긴하지만 대부분이 쉬어도 넘어갈 만큼 별거 아닌 산맥이 되어버렸다. 그럼 인원수를 줄여서 소수로 넘어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문제는 강해졌다가 아니라 많은 수를 움직임으로서 몬스터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힘을 만들 수 있다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하겠다. 이 산맥의 몬스터는 대부분 소수가 아니라 다수로 다녔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강해도 소수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다수로 우리가 다닌다면 몬스터들이 피할 것이고 간혹 눈먼 몬스터들이 발견되어 척살당할 뿐이었다. 이렇게 편히 넘어 갈 수 있는데 굳이 소수로 가려 하겠는가. “언니, 오랜만에 깊이 고심하시네요?” “응? 아아, 그런가.” 내가 레벨을 높일 목적만 아니었다면 진작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모르핀 제국 쪽도 모르는 곳이 많았지만 다른 곳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었겠는가. “그보다 여기는 마음이 편해지게 만드는 곳이네요.” 한나는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나무들을 감상하며 걷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나는 우리 같은 유저들과는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경험치에 목말라 하며 여기 어딘가 던젼이 없을까, 숨겨진 아이템이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눈에 힘주며 다니는 우리들과는 다르게 한나는 언제나 여유 있게 편한 마음으로 산책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어 그때 반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아, 아니, 말을 잘못했다. 그때부터 눈에 띄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어라? 얼굴이 빨개졌어요.” “더, 덥네? 아하하하!” 『시원 한데 무슨 소리…힉!』 한나 어깨에 앉아있던 정령이를 낚아채려다 녀석이 알아채고 등 뒤로 도망갔다. 제길, 잽싼 놈. “그런데 언니, 이곳을 왜 위치의 산맥이라 불리나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위치라는 말을 내 스킬에서도 볼 수 있었고 전에 정령이 녀석을 깨우기 위해서 도서관에 갔을 때 얼핏 보았던 기억이 있지만 이곳을 왜 위치의 산맥이라 불리는지 알 수 없었다. 7. 태초의 재생(World Regenera-tion Power of the Beginning) (액티브) - 태초, 모든 자연의 조율자로 알려진 드루이드의 마법으로 훗날 숲을 숭배하던 위치들에 의해 마법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게 된다. 태초 드루이드의 재생은 위치의 재생과는 다르게 더욱 순수한 자연을 담고 있으며 그 힘 또한 강하다…(중략) [ - 루시아니안 나무 탄생신화 - 저자 알랭 S 바시나이델 태양을 숭배하던 드루이드, 위치들이 세상을 조율할 때, 이 나무는 대륙을 지탱하는 중심 추 같은 역할을 했다고 전해져 왔다. 세상에 단 한그루뿐이며…(중략) “그건 아마 이 산맥에 루시아니안 나무가 존재할 가능성이 가장 커서 지은 이름이라 알고 있어.” 나와 한나의 의문을 답해준 자는 조용히 듣고만 있던 주리아였다. 우리들은 모두 주리아를 보았다. 주리아는 의외로 아는 지식이 많아 조금 놀랐다. “저, 저기, 그렇게 보시면…아웅.” 고개를 푹 숙이는 주리아. 아직도 집중되는 시선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라도 말해야하나? “주리아는 아는 게 많네? 어떻게 안 거야?” “제가 미소천사로 캐릭터 바꾸기 전에 탐험가를 선택했거든요.” 캐릭터를 재 스캔해서 바꾼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내가 유명해진 다음에 시작했다기에 는 너무도 폭넓은 지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탐험가라니. 나와 한나의 놀란 시선에 주리아는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긁적였다. 붉어진 얼굴이 몹시 귀엽다. “저는 몬스터를 잡고 레벨을 키우기 보다는 여기저기 명소를 구경하는 게 더 좋았거든요. 그래서 잡다한 지식이 조금 있어요. 이 산맥도 세 번째 넘어가는 거니 소문이야 많이 접할 수 있었죠.” “주리아 언니, 저랑 똑같네요! 저도 몬스터 잡기는 질색이거든요.” 한나가 반색하며 주리아의 손을 잡았다. 주리아는 멍한 표정으로 한나를 보았다. “안 놀라네? 보통은 특이하다고 말하던데.” 나는 고양이처럼 올려다보는 주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차, 순간 주리아가 나보다 나이 많다는 것을 잊었다. 이미 올린 손을 내리기도 뭐해서 더 세게 머리를 해 짚으며 말했다. “힐러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이유가 있는 법이야. 주리아도 그래서 바꾼 거 아냐?” “히익, 하, 하지 마세요! 우우우, 머리가, 머리가.” 내가 손을 거두자 주리아는 고양이처럼 꼼지락꼼지락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물론 이 직업도 몬스터를 잡지 않아 거부감이 없었기도 하지만…저는, 그보다는!” 그리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 뭐야 저 눈빛은! “이상하다, 왜 이런 상황에서 내가 질투심 같은 감정이 느껴지는 거야?” 한나는 나와 주리아를 번갈아 보며 고심하다 한 말이었다. 나는 단지 둘을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갔을 뿐이었다. 그건 내가 할 말이란다, 한나야. 나는 남자인데 왜 백합물 비스무리하게 진행되는 것 같은 감정이 느껴지느냔 말이다! “나왔다! 멘티스(mantis)다!”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고 우리들은 전방을 주시했다. 그곳에는 숲 속에서 연신 갈고리 손을 가로로 휘두르며 나타난 열 마리 가량의 곤충 몬스터, 멘티스가 등에 날개를 활짝 펼쳐 우리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우와아아아, 공격이다!” “한 마리는 내꺼야!” “다 몰살시켜주마, 윈드 커터!” 이건 전략이고 뭐고 필요 없는 싸움이었다. 수십 명의 유저들이 다구리 하는데 뭐가 필요하겠는가. 멘티스들이 갈고리 손을 휘두르며 저항해 보았지만 곧 온몸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경험치에 목마른 하이에나 같네요.” 한나가 혐오하며 말했다. 하이에나라, 예가 참 적절해보였다. 우리들은 정리 되고 어서 이곳을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하지만 그곳에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레, 레어 아이템이다!” “응? 이건! 곤충의 노래피리잖아!” “대, 대박이다!” 웅성거리는 앞의 무리들. 들리는 소리로 보아 좋은 아이템이라도 나온 모양이었다. 나와 한나는 별 표정이 없었고 주리아만 경악했다. “크, 큰일 났어요. 어, 어, 어, 어, 언니.” 아직까지도 언니라 부르기 어색했던 모양이었다. 속으로 무진장 웃겼지만 아닌 척 물어보았다. “뭐가 큰일이야?” “곤충의 노래피리요. 레어 아이템 축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아이템이에요. 중, 고렙 곤충 몬스터를 잡으면 극악의 확률로 나온다는 아이템인데 현재 가격만 100골드를 넘어가는 고가의 아이템이에요.” 나는 그 말만 들어도 왜 최악의 상황인지 눈치 챌 수 있었지만 게임을 모르는 한나는 아직도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오히려 좋아해야할 문제 아닌가요? 왜 최악이죠?” 그래, 보통은 좋아할 문제지. 하지만 지금같이 통제가 안 되는 막장 파티라면 얘기가 달라진단 말이다.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즘 내가 예상했던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야! 내가 먼저 죽였어!” “파티로 사냥 왔는데 니꺼내꺼가 어디 있어! 나눠 가져야지!” “결정타 먹인 사람이 난대 무슨 소리야, 이건 내꺼야!” “저기, 일단 통제에 따라주세요! 아이템이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시끄러! 이건 내꺼야!” “그건 나야말로…….” 노랑머리 마법사가 중간에 통제해 보지만 이미 상황은 번질 때로 번져 난투극이 벌어질 상황까지 도달해 있었다. 한나는 그제야 어이없는 표정으로 앞에 유저들을 보았다. “게임의 아이템이 뭐라고 저리 탐욕적이람. 같은 사람이란 게 부끄럽네요.”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거두는 한나. 왠지 내가 다 부끄러웠다. 주리아는 씁쓸한 표정으로 한나를 보았다. “아무래도 상황이 종료되기에는 좀 걸릴 것 같은데?” “그럼 언니가 정리해 주면 되잖아요.” 한나가 나를 보며 한 말이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하자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건 언니가 전문이잖아요. 전에 실버크로스 기사단과 미소천사 기사단이 싸울 때, 통제하시는 것 보니까 잘 하시던데요? 게다가 어차피 우리들은 명성을 높일 목적이 있잖아요. 지금이 기회라 생각되는데…….” “저도, 저도 TV에서 봤어요! 그때는 정말 너무 황홀했어요!” 과거를 회상하는지 두 손을 꼭 맞잡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보는 주리아. 좋아, 이렇게 된 이상! “그럼 내가 나서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오오, 언니, 멋져요!” “꺄아악!” “…그런데.” 내가 말을 늘어트리자 반짝반짝한 눈으로 보는 두 소녀.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내 눈에 두 소녀가 넘어진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승부다!” “뭐? 그래, 좋다! 덤벼봐 이 자식아!” “저기 파티끼리 싸우시지 마시고 제 말 좀 들어주…….” “속사, 스턴샷!” “쾌검, 쾌격!” “윈드 커터!” “파이어 볼!” - 핑핑! 스샥! 콰콰쾅! 이미 전방은 최악의 상황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금 우리끼리 이렇게 장난치고 있을 때가 아닌 듯 싶었다. 이러다가 파티가 내부분열로 해체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좋은 생각이 났다, 흐흐흐.” 순간 치고 박는 유저들을 보며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주리아는 이런 내 표정을 몰랐으므로 궁금해 하고 말았지만 한나는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저기, 설마, 언니?” “가자, 우리 엔젤단을 공개적으로 알려줄 때다!” “하아, 그럴 거 같았어.” “한나야 지금 한숨 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저기 유저들이 많이 다쳤잖아. 그냥 내비 둘 거야? 주리아도 어서 가자!” “네에에에에에에에…….” 뭔가 불만이 많지만 어쩔 수 없을 때 나오는 한나의 늘어지는 말투를 못들은 척 하며 나는 두 소녀의 손을 각각 하나씩 잡으며 앞으로 나갔다. 우리들이 앞으로 나섰지만 유저들은 아이템에 눈이 멀어 모두 우리 셋을 보지 못했다. 나는 한나를 왼쪽 멀리, 주리아를 오른쪽 멀리 세우고 엄지를 추켜세워 시작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주리아는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을 몰라 했고 한나는 깊게 한 숨을 쉬었다는 것은 작은 일이었으므로 대충 넘어가겠다. 곧 둘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카오스에서 갈라진 태초의 어머니 가이아시여, 어머니를 상징하는 물건은 땅, 땅은 곧 성표 이니라. 발동하라, 디바인 마크(Divine Mark)!” “어헉! 저게 뭐야!” “까, 깜짝이야!” 유저들이 순간 일어난 빛의 기둥을 보고 그곳으로 눈을 돌렸다. 디바인 마크의 특성은 찬란한 빛. 보통은 암흑속성 몬스터나 언데드 몬스터를 기피시키는 역할로 쓰이지만 지금은 이렇게 스포트라이트 빛처럼 집중받기위해 사용하였다. 지금 자기 발밑에 써서 집중 받고 있는 한나와 주리아의 기분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라면 이미 쥐구멍에 들어갔다. 한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손가락을 척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더 이상 싸움은 하지 마세요오오오오.” 뒤이어 오른쪽에 있던 주리아가 눈을 꼭 감고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쥔 채 이어 말했다. “그,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에, 에, 에, 에, 엔젤단이 용서하지 않겠다!” “……….” “……….” “……….” 완전히 조용해진 산맥. 돌이라도 된 듯 멍하니 서있는 유저들. 너무 부끄러워서 나도 모르게 얼굴을 가리고 만 나. 미, 미안하다, 얘들아. 이정도로 부끄러울 줄은 몰랐어. 나를 죽여줘, 내가 죄인이야. 그러니 나는 이정도쯤에서 빠지면 안 될까? 좌우에서 느껴지는 무안한 살기를 내 육감이 감지했다. 등줄기에 땀이 흘러 몹시 근질근질했다. “언니만 쏙 빠지려고요?” “주, 주,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워…….” 한나와 주리아는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주문을 외웠다. “카오스에서 갈라진 태초의 어머니 가이아시여, 어머니를 상징하는 물건은 땅, 땅은 곧 성표 이니라. 발동하라, 디바인 마크(Divine Mark)!” “자, 자, 잠깐! 그러지…….” - 푸화아악! 젠장, 진즉에 도망갈걸. 내가 후회를 하는 순간, 내 발밑에서 빛이 폭사하듯 감싸졌다. 덕분에 100명가량의 유저들을 전부 주시시켜버렸고 나 역시 한나와 주리아처럼 얼굴이 벌겋게 익어버렸다. “저…….” 순간 할 말을 잊어버렸다. 원래는 철판 깔고 게임하는 게 내 주특기인데 양 옆에서 몸을 배배꼬고 있으니 덩달아 나까지 쑥스러워진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즈음 입을 벌리고 있던 유저들 중 몇 명이 말했다. “미, 미소천사아냐?” “출발하기 전부터 의심은 했지만 저 카리스마, 저 무대매너! 그래, 미소천사 맞아!” “오오오, 미소천사님!” 이, 이거 나는 잘하면 그냥 넘어가겠는데? 무대매너라는 말이 살짝 거슬리긴 했지만 유저들이 나를 알아봐주니 솔직히 부끄러움이 어느 정도 가셨다. “치잇, 유명해서 혼자 벗어나다니.” “…약았어.” 한나야…너무 아쉬워하는 거 아니니? 주리아, 지금 약았다는 소리를 들은 거 같은데 잘못들은 거지, 그렇지? 엄지손톱을 깨물며 나를 째려보는 두 사제를 무시하고 나는 유저들을 보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거 슬슬 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모두, 싸움을 멈추세요. 다친 유저들의 참담한 모습을 보니 제가 견딜 수가 없군요.” 그리고 가볍게 눈물을 훔치는 척 했다. 이건 처음으로 써보는 기술인데 너무 어색해서 내 팔에 닭살이 돋은 것도 몰랐다. “지, 진정한 천사다.” “싸, 싸우지 마! 싸우면 다 죽여 버리겠어!” “명예랭커 5위의 말씀이다! 전부 따라!” 이거 좀 먹혔는데?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한나와 주리아에게 나는 살짝 혀를 내밀었다. 이런 게 연기라는 거다, 우하하하하! “지금까지 나는 속고 살아왔는지도 몰라…….” “한나야, 왠지 나 꼭두각시인형 된 기분이야. 기분 나빠.” 너무 노골적으로 불만을 말하는 거 아닙니까, 두 분? 어쨌든, 얼굴만 예쁘면 무엇이든지 다 용서가 된다는 말이 어떤 건지 잘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저, 저기.” 코가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고 있는 그때, 노랑머리의 마법사가 나에게 다가왔다. 파티장이 나에게 무슨 볼일이지? 일단 나는 그 유저의 눈을 마주쳤다. <‘천상의 매혹’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설마 고백하는 거 아냐? “미소천사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네?” 어, 어이. 이봐, 당신 얼굴 붉어졌어! 아니, 그보다 난 남자란 말이야! “부디, 저희 파티의 리더가 되어 주십시오!” “절대, 안 돼! 내가 미쳤…네? 리더요?” “네! 이 많은 인원을 통솔할 수 있는 분은 미소천사님 밖에 없습…어디 아프세요? 얼굴이 몹시 빨간데…….” “흠흠, 아, 요즘 많이 덥다보니.” “덥기는, 저것도 연기겠지.” “이상한 상상을 한 게 분명해.” 거기, 툴툴거리는 거 다 들리거든? 노랑머리 마법사는 양옆에서 투덜거리는 한나와 주리아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나에게 말했다. “친한 사이 같았는데 무슨 원한 산일 있으셨나요?” “아, 아하하하하하…….” 웃으며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정답이거든. “뭐, 어쨌든, 저희 파티의 리더가 되어주세요. 제가 통솔하기에는 지휘가 많이 낮네요. 아까 한순간에 유저를 이끌던 모습을 보고 확신했습니다. 출발하기 전에도 이 말을 하려했는데 왠지 피하시는 거 같아 말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오니 아무래도 말해야 할 것 같아서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확실히 엔젤단의 명성을 올리기 위해서라도 이곳의 리더를 맞는다면 더 눈에 띌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문제가 또 없는 건 아니었다. “전 초행길이라 이끌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는데요.” “그거라면 제가 옆에서 보조하겠습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주먹을 쥐는 노랑머리 마법사. 너, 너무 기대하는 거 아냐? “그렇다는데, 한나, 주리아?” 양옆을 보며 의견을 뭇자 두 사제는 서로 짜기라도 한 건지 고개를 팩 돌리며 말했다. “아까는 그냥 강제적이더니. 이제 와서 의견을 물어봤자 늦었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저런 분일 줄은 몰랐는데. 그냥 아까처럼 멋대로 하면 될 걸.” “아하, 아하, 아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뭐라 할 말이 없어서 나는 웃었고 노랑머리 마법사는 내가 웃자 예의상 같이 웃어 주었다. 갑자기 무진장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두 사제가 외면한 상태에서 나는 결국 리더 건을 수락해 버렸다. 그럼 이제 다른 문제를 막아야할 때가 왔다. 우리들 때문에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지만 바닥에 떨어져있는 아이템을 힐끔힐끔 곁눈질하는 유저들을 처리하는 일이 남은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아이템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것을 주우며 말했다. “이 아이템은 제가 잠시 맡아 두도록 하겠습니다.” “에엑?”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역시나 웅성대는 유저들. 이런 걸 처리하는 방식은 쉽지. “이 아이템은 메히튼 왕국에 도착할 때 다시 꺼낼 겁니다. 그때 이 아이템을 받게 되는 유저는 파티에서 가장 기여도를 많이 얻은 유저가 될 것이니 전부 열심히 임해주세요?” 눈을 찡긋 해보였다. 이러다 나 맛들이겠다. 너무 재미있어, 이런 짓. <‘천상의 매혹’의 숙련도가 3 상승했습니다.> “…음, 뭐 그렇다면야.” “열심히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인가?” “…괜찮네.” 게임을 많이 하다보면 알맞게 넘어가는 방법을 자연스레 터득하게 된다고. 나의 코는 다시 하늘로 찌를 듯이 올라가려했다. “야, 얄미워!” “우우…….” 한나, 주리아. 너희들, 이제 그만 화 좀 풀지 그러니 정말. 어찌되었든, 메히튼 왕국으로 가는 우리 파티는 그렇게 상황을 종결시키고 다시 위치의 산맥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위치의 산맥은 가로로 길게 늘어진 산맥이기 때문에 북쪽으로만 전진하면 조금은 험난하지만 가장 빠르게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고 노이슈반스탕이라 소개한 노랑머리 마법사가 말했다. 그가 말하길 메히튼 왕국으로 가는 길은 그다지 높지 않은 곳을 지나간다고 했다. 덕분에 몬스터도 많긴 했지만 이렇게 유저들만 많이 이끈다면 어렵지 않게 지나갈 수 있으니 가장 좋은 길이라 말했다. 내가 알고 있던 내용이라 그다지 귀담아 듣진 않았는데 이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전진하면 너무 험난한 산맥 때문에 아무리 많은 유저들이 있다 하더라도 넘어가긴 불가능하다는 그 다음 말이 의외의 정보라 이 산맥에 대해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리더가 된 덕분에 한나와 주리아, 노이슈반스탕과 내가 맨 앞에 서서 앞으로 나가고 있었고 나머지 유저들이 저마다 끼리끼리 어울리며 난잡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름 전진은 빨랐다. 아무리 막장 파티라 하더라도 이 수를 무시하기에는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작은 무리의 몬스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아 몰살당했고 많은 수의 몬스터들은 아예 길을 피한다고 하니 만날 일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산맥을 거의 다 넘어 마지막 코스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 구름다리만 건너면 메히튼 왕국으로 가는 오솔길이 보일 겁니다.” 노이슈반스탕님이 저 멀리 구름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유저들도 이 구름다리를 알고 있었던지 저마다 ‘이제 다 왔구나’하며 어깨를 푸는 둥 기뻐했다. 하지만 그때 일은 벌어졌다. “근데 저기도 많은 무리가 모여 있는데요?” 구름다리까지 다가가자 한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구름다리 너머를 가리켰다. “저기는…메히튼 왕국의 유저들인 것 같은데요. 그런데…….” 노이슈반스탕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다 말끝을 흐렸다. “이미 건너오는 중이라면 모르겠지만 맞은편에서 전부 서있는데요? 꽤나 안 좋은 예감이 듭니다.” 내가보기에도 확실히 그러했다. 이미 건너오고 있다면 이곳을 지나가는 유저들일 것이고 우리들은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저들은 저곳에서 우리 파티를 기다리는 것처럼 서있었다. “저들도 우리들처럼 먼저 건너오길 기다리는 것 아닌가요?” 구름다리 특성상, 많은 수가 지나가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서로 마주 오기에는 길이 너무도 좁았다. 즉, 한쪽이 먼저 건너고 다른 한쪽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인데. 그래서 한 말이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저들은 모두 무기를 꺼내들고 있군요.” 노이슈반스탕님이 내가 생각한 오류를 짚어내었다. 음, 그렇지. 내가 말한 대로라면 무기를 꺼낼 리가 없겠지.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건너편에서 한 유저가 천천히 걸어왔다. 무슨 일인지는 저 유저가 설명해 주겠지. 우리들은 긴장한 채 유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안녕하신가! 이곳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모르핀 제국의 용자들.” 대부분이 열대 사막지대로 이루어져있는 메히튼 왕국의 지대답게 천으로 몸과 머리 전체를 둘둘 말고 있는 차림을 하고 있는 유저였다. 복면을 한 것처럼 코까지 천으로 덮은 상태라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길게 상처 난 그 눈매가 가늘게 웃고 있어 인상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소개하지. 나는 메히튼 왕국, 슈바리에단의 두령 다덤벼라 부른다.” 가볍게 허리를 숙여 신사답게 인사하는 몸짓이 멋있기보다는 거드름피우는 것 같아 보기 좋지 않았다. 게다가 다덤벼가 뭐냐? 완전 싸우자 아냐? “어헉!” “다, 다덤벼! 명예랭커 10위의 맨손마스터, 다덤벼!” “슈바리에단이라면 메히튼 왕국의 그 악명 떨치는 대산적단!” “제, 젠장!” 내가 얼굴을 찌푸릴 때 유저들은 경악하며 다덤벼라는 유저를 보았다. 그 유저는 매우 만족한다는 듯이 눈웃음치며 말했다. “그래, 우리 단을 알고 있다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군. 그럼 슬슬 우리 쪽도 작업을 해야겠으니 이해해주길 바라. 흠흠, 어제부터 이 구름다리는 우리가 접수했다! 지나가고 싶으면 통행세를 지불하라!” 다덤벼란 유저는 100명가량의 유저들을 보고도 한 치의 떨림도 없이 크게 말했다. 어느 정도 주눅들 줄 알았는데 엄청난 자신감이었다. 역시 랭킹 10위라 이건가? 우리 파티는 어쩔 줄 몰라 하다 한순간 나를 보았다. 집중되는 눈빛을 보고 이상하다 느낀 다덤벼란 유저가 나를 보았다. “음, 꽤나 예쁘군. 당신이 이 파티의 리더인가?” 물어오는 말이 꽤나 시비조였다. 한나와 주리아가 걱정되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런데 말이지, 나는 이런 거 꽤나 익숙해서 말이지. 다른 게임하다보면 이런 유저들과 같이 살다시피 할 정도거든. 나는 손을 가슴으로 가져가며 무서워하듯 말했다.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그리고 초롱초롱 거리는 눈빛.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장난하냐?” 억, 통하지 않을 거란 예상은 했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질린 표정을 지어 조금 상처받았다. 누나, 누나의 외모를 거부 했어 저놈이! 음, 이거 만만치 않은걸? 일단 저 유저의 성격은 대충 파악했고, 이쯤에서 나 역시 저 성격에 맞춰줘야겠지? “뭐, 이정도로는 안되나? 좋아, 그럼 어쩔 수 없지.” 무서워하던 표정을 풀고 당당히 어깨를 폈다. 다덤벼란 유저는 그런 나를 보고 조금 흥미가 생긴 듯 눈을 가늘게 만들었다. “호오, 이거 공주병 걸린 여잔 줄 알았더니 조금 재미있군. 그래, 어쩔 수 없으면 어쩔 거지?” “어쩌긴, 이렇게 해야지.” 한 유저에게서 검을 빼앗아 구름다리를 지탱하던 줄 위에 척하니 올렸다. 내 뒤에 있던 수많은 유저들이 경악해서 나를 보았고 지금까지 진지하게 서있던 노이슈반스탕님 역시 이번엔 놀라했다. “무,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긴, 끊으려는 짓이지.” “이거 막나가는 놈이냐! 그걸 끊으면 너희는 여길 영영 지나가질 못해! 다른 길로는 아무리 유저가 많아도 절대 산맥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나!” “물론 알지. 게다가 네가 떨어져 죽을 거란 것도.” 그리고 씩 웃어주었다. “……….” 다덤벼는 그 말이 진짜인지 내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나야, 포커페이스로 당당히 눈을 마주보았을 뿐이었다. “여자답지 않은 눈빛이군. 큭큭, 크하하하하!” 갑자기 왜 미친 듯이 웃어대는 거야? 다덤벼는 목을 뒤로 젖히며 웃어대다 한순간 웃음을 딱 끊고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우리를 보고도 긴장하나 없다니 보통이 아니군. 너는 누구냐.” 그 말이 나오길 조금 기다렸단다. 나는 다덤벼가 했던 행동과 똑같이 허리를 숙이고 신사처럼 인사하며 말했다. “소개하지. 나는 아페야 마을, 엔젤단의 단장, 미소천사라 부른다.” 으, 이 대목에서 내 본래 말투만 쓰면 딱이었을 텐데. 조금 아쉽지만 그런 대로 넘어갈 수밖에. “미, 미소천사? 랭킹 5위의 그 공주병?” “쿨럭, 공주병이라니!” 이를 드러낸 채 다덤벼 녀석을 째려보았다. 녀석은 놀란 표정이었지만 내 표정을 보고 이내 페이스를 되찾은 듯싶었다.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드는 짓을 서슴없이 하니 공주병이지 아님 뭐야.” “저렇게 말하니 언니가 조금 그런 것 같기도…….” “부정하기 까다롭다고나 할까…….” 거기 두 사제님들은 옹호하지 말아줄래요? 이마에서 핏대가 붉어져 돋나났다. 간신히 꾹꾹 눌러보지만 참는 것도 한계란 게……. “게다가 엔젤단이 뭐야? 작명 센스가 정말 최악이구만.” 툭. 무언가 머리에서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나는 줄이 끊어지는 소리를 동시에 들을 수 있었다. “우, 우와아아악!” 휘청거리는 다리. 아직 끊어지지는 않았다. 나머지 한쪽을 지탱하는 줄도 끊어야 완전히 끊어지겠지. “어헉!” “저, 정말 끊었어!” 뒤에서 유저들이 경악해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었다. 그건 이쪽만이 아닌지 반대편에서도 야단법석을 피우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미, 미쳤냐!” 다덤벼는 세로로 기울어지는 나무판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간신히 오른쪽 줄을 팔로 쥐어 잡고 버티고 있었다. 나는 희미한 미소를 그리며 나머지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줄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척. 나머지 하나 남은 줄을 검으로 슬쩍 가져대며 말했다. “마지막 남기고 싶은 말은?” “아, 악마냐, 너?” “저는 미소천사입니다.” 그리고 정말 양옆에 꽃이 활짝 필 것 같은 화사한 미소를 선사하였다. 그러자 다덤벼는 질린 듯 한 표정으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고 오히려 말한 것은 내 뒤에 두 사제님들이었다. “어, 언니, 사악해요.” “무, 무서워…….” 나는 더 이상 시간 끄는 삼류 악당 같은 짓을 하지 않기 위해서 거침없이 팔을 들었다.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하는 것. 내가 한 행위로 한 유저가 어떠한 고초를 겪을지는 생각하지 말자. 그래. 팔만 내리면 되는 거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그래도 살아남으면 치료해 주지 뭐. 다덤벼는 사색된 표정으로 외쳤다. “너 설마 잘라도 나중에 복귀된다는 생각을 하는 거 아냐? 이 게임은 현실을 최대한 반영한 거라 유저가 새로 만들지 않는 한 복구는 절대 없…우와아아아아아아아악!” 미안하다, 잘랐다. 뭔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아니 못들은 걸로 해야겠다. 나중에 이것 때문에 조금 문제가 생기면 까짓것 웃으며 이렇게 말하지 뭐. ‘몰랐네요, 실수했어요, 에헷!’라고. “큭큭큭큭…….” “……….” “……….” “……….” 어라? 왜 다들 뒤로 피하는 거야. 한나야, 왜 고개를 저으며 정령이를 대리고 피신하는 거지? 주리아, 넌 또 왜 울먹이는 거야? 내가 영문을 모르고 있을 때 갑자기 끊어진 다리 밑에서 큰 외침이 들려왔다. “용문권(龍刎拳)!” - 우지지지지지직! 무언가 엄청난 기세로 올라오고 있었다. 나와 많은 유저들은 고개를 배꼼 내밀어 아래를 보았다. “우라라라라라라라!” “저, 저거 괴물이냐?” 나는 볼을 씰룩이며 절벽 아래를 가리켰고 많은 유저들은 내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덤벼는 지금 절벽을 주먹을 내지르며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 같은데요.” 한나가 한 말이었다. 확실히 절벽은 대단했던지 다덤벼는 점차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절벽에 찰싹 붙어있는 게 고작이었다. “저, 저거 개구리가 따로 없구먼! 아하, 아하하하하하!” 『주인님은 왜 땀을 흥건하게 흘리며 웃고 계신 거죠?』 “그건 언니의 안도한 표정이라 보면 될 거야.” 『오오, 저게 바로 안도한 표정!』 시끄러워 너희들. 그때 다덤벼 녀석이 갑자기 폴짝 뛰었다. 결국 자살하길 선택했구나 싶었는데 심상찮은 외침이 들렸다. “기문 개방! 기공파, 궁극 오의! 에, 네, 르, 기이이이이!” 양손을 모아 옆구리쪽으로 가져가는 제스처, 저거 어디서 많이 본 행동이다? 다덤벼는 손을 앞으로 쭉 내밀며 외쳤다. “파아아아아아아아아아!” - 푸화아아아악! “오오오오오오옷!” “드래곤볼이다!” “저거야 말로 남자의 로망이다!” “벌써 저 에네르기파 스킬을 만든 유저가 있었을 줄이야!” “내가 먼저 만들려던 스킬인데, 제길!” 가공할 빛이 손에서 터져 나와 그 반동으로 위로 튀어 올라가는 다덤벼 녀석. 남자유저들은 저마다 주먹을 꽉 그러쥐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여자유저들은 전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눈빛을 하고 있었고. 아니, 그런데 난 남잔데. 갑자기 조금 우울해졌다. 다덤벼는 우리가 있는 곳까지 날아와 바닥을 데구루루 구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대로 누워있지 않고 흙을 온몸으로 뒤집어 쓴 채 바로 일어나 나를 쏘아보았다. “헉, 너, 너, 헉, 너, 너…….” 숨을 크게 몰아쉬며 말을 못하는 다덤벼. 나는 속으로 찔끔했지만 겉으로는 태평하게 말했다. “대, 대단하군요. 그, 그 절벽에서 살아남다니.” 야, 이놈의 다리야 좀 멈춰라. “제, 제길…….” - 털썩. 다덤벼는 결국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쓰러져버렸다. 아무래도 한계까지 능력을 올려 시스템이 강제적으로 기절모드에 들어가게 한 것일 것이다. 아마 한 시간 동안 들어오지 못하겠지. 나도 기절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기절을 하게 되면 캐릭터가 사라지지는 않는구나. 누가 죽여도 어쩔 수 없겠네. “이, 이걸 어쩌죠?” 노이슈반스탕님이 쓰러져있는 다덤벼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신도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일 테지. 하지만 나에게 문어본들. “휴우, 그냥 끈으로 묶어두고 끌고 다니죠.” 죽이는 게 가장 편한 방법이긴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나는 유저를 살리기 위해 게임하고 있는데 저항도 없는 유저를 자기 편하다고 죽이다니 할 수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저희들 우리 두령을 잡아가다니! 가만두지 않겠다!” “이 사악미소 타락천사!” 저 멀리 끊어진 다리 건너편에서 작게 메아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죽일까?” 내가 한 말을 급히 수정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아, 그나저나 이거 다 도착해서 진로를 급히 바꾸게 되었네요.” 움찔. 노이슈반스탕님이 우울한 듯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이 게임은 불편하게 다리 복구도 안 되는 거람.” 움찔. 한나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음, 아마도 다리를 끊어버릴 무식한 유저가 있을 리 없다 생각한 건 아닐까?” 움찔. 주리아가 나름 생각해 한나에게 답했다. “그래, 미안하다! 다 내 탓이야. 내 잘못이니까, 그만 좀 돌려 말해!”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럽니까?”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요?” “…아직 모를지도.” 저 세 명이 제대로 나를 좌절시켰다. 그래, 미안하다. 그걸 알면서도 욱해서 그랬다. 나는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이다. 지금 우리들은 다리를 건너지 못해 다른 쪽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아직까지 몬스터가 나오진 않았지만 산세가 험해 땀에 옷이 절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투덜거릴 수밖에. “킥킥킥!” 갑자기 한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좌절하고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려 한나를 보았다. “언니 놀리는 것도 은근히 재미있네요. 이제 더 이상 못 참겠어!” 이젠 무릎을 꿇고 아주 대놓고 키득거리고 있었다. 이봐, 당사자 앞에 세워놓고 너무 웃는 거 아냐? 한나가 웃기 시작하자 주리아도 이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힘들게 웃음을 참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아하, 풋!” 한나야, 너무 실없이 웃는 거 아니니? “아하, 아욱, 배야. 처음에는 정말 얄미웠는데 언니가 계속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까 도저히 그만둘 수 없어서, 그만. 후훗! 그렇죠, 주리아 언니?” “나…숨 참느라 괴로워.” 그럼 그만 숨 참고 그냥 웃지 그러니. “하아, 지금까지 놀렸던 거야?” 솔직히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상태가 계속 지속되면 어쩌나 했었으니까. “다리를 자른 건 잘한 게 아니었지만 나름 통쾌했어요. 저 랭커유저도 잡을 수 있었고 말이에요.” “어, 어, 어, 언니, 조금 무서웠지만 저라도 그 상황이라면 잘랐을지도.” 아직도 나한테 언니라 부르기 힘든 건 이해하겠는데 뒷말이 조금 살벌하다? “계속하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언니에게 너무 미안해서 그냥 관둘래요. 헤헤.” 혀를 쏙 내밀며 허리를 숙이는 한나. 크윽, 코가 시큰거리는 구나! “하지만 이제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쪽 지역은 루시아니안 나무가 근접한 지역이라 고렙 몬스터가 출몰하거든요.” “이곳에 루시아니안 나무가요?” 노이슈반스탕님의 말을 듣고 의문을 말했다. 루시아니안 나무라. 내 말을 받은 건 주리아였다. “저, 저기, 그건, 단지 소문일 뿐이에요. 정확히 있다는 정보는 없거든요. 단지 고렙 몬스터가 많이 분포되어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 “흠, 하긴, 뭔가 있을법한 곳일수록 강력한 몬스터를 배치하는 법이니까.” 게임의 법칙은 언제나 그러했다. 신급 아이템이 있는 곳에 1렙 몬스터를 배치하지 않듯이 그만큼 힘들게 전진하게 만드는 게 이 게임의 룰이니까. 『응? 어머니가 있는 곳은 여기가 아닌데.』 순간 나와 한나가 홀연히 날고 있는 정령이를 보았다. 다른 유저 눈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니 나와 한나만 반응한 것이었다. 나는 정령이를 손으로 붙잡고 작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제대로 말해봐.” 『어머니는 여기 없다고요. 좀 더 위로 올라가야 할 텐데?』 “어머니라면 루시아니안 나무를 말하는 거니?” 한나가 슬며시 뒷걸음쳐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말했다. 정령이는 고개를 끄덕하며 다시 말했다. 『네.』 즉, 그 말은 이 정령이는 루시아니안의 존재를 느끼고 안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황당한 놈이 있나. “저기, 주리아. 내가 알기로는 루시아니안 나무를 만지는 유저는 큰 힘을 얻게 된다고 하던데 맞니?” “음, 그렇죠. 열매 하나하나가 만병통치의 효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해의 나무라 부를 만큼 빛을 머금은 나무라 한 번 만지는 것만으로도 빛 속성의 한해 능력을 키울 수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세요?” “그런 중요한 사실을 왜 이제 말하는 거야!” 나는 정령이에게 소리 질렀다. 하지만 주리아가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서며 울먹였다. “안 물어보셨잖아요…….” 『안 물어보셨잖아요.』 순간 정령이와 주리아가 똑같이 말했다. 음, 똑같은 말인데 지금 내가 반응해야 할게 두 가지군. 화내느냐, 달래느냐. 그걸 한꺼번에 하기 위해 나는 정령이를 쥐고 있던 손을 세차기 움켜잡고 크게 원을 돌리며 주리아에게 말했다. “아아, 실수야, 실수. 내가 말을 잘못했어.” 『으어어어어어어어! 사, 살려줘어어어어어어어어!』 정령이가 한 말은 듣지 않기로 다짐했다. “언니, 놔줘요!” 내가 계속 붕붕 돌리고 있자 한나가 내 팔을 붙들며 말했다. 야, 야, 그렇게 들러붙으면 가, 가슴이! 결국 정령이를 빼앗아간 한나가 자신의 가슴팍으로 정령이를 숨기며 나를 째려봤다. “우리 이그레시아를 괴롭히지 말아요!” 『엄마! 으아아아아아앙! 주인님이 나 괴롭혀!』 “아그레시안지, 이그레시안지는 모르겠지만 그놈의 개념은 좀 탑재시켜 줘야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어린애를!” “그놈은 어린 게 아니라 어린 척 하는 거라니까?” 한나와 나는 그렇게 티격태격했다. 문제는 정령이를 볼 수 없었던 유저들이 오해했다는 거였다. “두 분 사랑싸움하세요?” 노이슈반스탕님이 연극을 구경하는 양 우리들을 관찰했고. “두, 둘 다 이상해.” 주리아가 엔젤단에 들어온 걸 과연 잘한 것인가 생각하는 듯, 좌절해했다. “아하, 아하하하.”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고. “나, 나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한나가 붉게 물든 얼굴로 나를 가리키며 변명했다. 이봐, 내가 어떤 사람이기에 손가락질하며 그런 사람이라 말하는 거니. 계속 한숨만 나왔다. 누나한테 정식으로 허락 맡은 첫날부터 이리 꼬이고 트러블만 생기다니 하루만에 10년은 늙은 기분이었다. “휴우, 오늘은 득보다 실이 많은 날인가?” 하늘을 보았다. 아직 여름날이라 해가 떨어지지 않아 밝게 빛나는 푸른색 하늘이 보였다. 푸스스 우는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뭉게구름이 유유히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갑자기 우수에 젖은 표정을 지어도 그 바뀐 이미지는 이제 와서 찾기 힘들걸요?” 아까일은 어영부영 넘어가 다시 산을 올라가고 있던 우리 일행 중 한나가 나에게 슬며시 다가와 한 말이었다. 나는 피식 웃고 하늘을 가리켰다. “참 신기하지 않아? 게임 속에서 만들어진 하늘인데 어찌 이리도 현실과 똑같을까, 하고 말야.” 내 뜬금없는 질문을 듣더니 유심히 나를 보는 한나. 한나는 하늘로 잠깐 시선을 주더니 나에게 말했다. “정말 언니는 알 수가 없어요.” “무슨 소리야?” 느긋하게 하늘을 보던 시선을 돌려 한나를 보았다. 한나는 정령이를 꼭 껴안고 말했다. “어떨 때는 진지하고, 어떨 때는 장난치기 좋아하고, 어떨 때는 유치하고, 거짓말쟁이에, 사악하기까지. 언니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에요?” 한나의 눈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 눈을 보고이자니 진실을 숨기고 있던 내 자신이 너무도 찔려왔다. “저…….”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내가 남자란 걸 말할 수 있을까. 단 한 단어지만 지금까지 만났던 우리들의 시간이 송두리째 깨져버릴 것만 같아 입술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한나는 내 머뭇거림을 보고 홱 돌아서더니 천천히 앞서 걸으며 말했다. “저는 언니를 좋아해요. 지금 걷고 있는 내 자신도, 정령이도, 주리아언니도 좋아하지만 무엇보다도 언니가 최고로 좋아요.” “……….” 한나는 눈에 쏘아 들어가는 빛을 손으로 가리며 재차 말했다. “하지만 그 이상 가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이대로 걸어가고 있어요. 이정도가 가장 좋아요. 저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 주먹이 꽉 움켜쥐어졌다. 한나의 발걸음은 차분히 하나하나 앞으로 율동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뒤로 빙글 돌아 허리를 숙인 채 크게 미소 지었다. “차라리 언니가 남자였으면 좋았을걸.” 그 미소는 나뭇잎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빛보다도 밝았다. 도무지 눈뜨고 정면을 바라볼 수가 없을 정도의 환한 빛. 내 입은 여전히 열릴 줄을 몰랐다. “저기, 그러니까…….” 억지로 입을 열어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말을 흐리는 것 뿐. 한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검은 단발의 머리칼이 빛의 반사되어 흩날렸다. “아까, 하늘이 왜 현실 같냐고 말했었죠? 저희 아버지가 그러는데요, 이 게임은 현실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 현실의 일부를 끌어와 만들어서 그런 거라고 했어요.” 한나는 그 말을 끝으로 앞서 걸어가고 있던 주리아에게로 뛰어갔다. 나는 결국 외치고 말았다. “한나야!” 달려가던 한나가 뒤돌아보았고, 주리아와, 노이슈반스탕님, 그밖에도 몇 명의 파티원이 돌아보았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천천히 풀었다. 그러니 자연히 어깨의 힘도 풀렸다. 어렵지 않아. 내 감정을 숨길 필요가 뭐 있겠어. 그냥 웃으면 돼. 아무 생각 없이 웃어주면 되는 거야. “다음에 진짜 하늘을 같이 보지 않을래?” 눈을 감고 웃으며 말했다. 얼굴을 확인 할 필요도 없었고 딱히 앞을 볼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상의 매혹’의 숙련도가 10 상승했습니다.> “……….” “……….” “…천사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유저들이 멍하니 나를 보았다. “무, 무, 무, 무, 무슨 일이야.” 주리아가 당황해서 나와 한나를 번갈아 보았다. 한나는 그때까지 나를 멍하니 보다 같이 마주 웃어주며 답했다. “네!” 지금은 이런 식으로 넘어 갈 수밖에 없었지만…그래, 훗날에, 정말 우리들이 밖에서 만나게 되는 계기가 있다면 아마도 이 모습일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나는 다시 하늘을 보았다. 그렇게나 무거웠던 가슴이 어느새 사라지고 가볍기만 했다. “우…….” “주리아 언니, 그만 화 풀어요.” “부…….” 보, 볼 터지겠다. 무슨 풍선도 아니고. 나는 외면하고 앞을 보았다. 한나는 그런 나를 살짝 흘겨보며 원망했지만 나는 모른 체했다. “아이참, 정말 별거 아니었다니까요.” “자기들끼리만 비밀얘기 공유하고…나는 버림받고…….” “버, 버림받다뇨! 그런 말씀 마세요!” 한나가 주리아를 달래며 내 치맛자락을 끌어당겼다. 하아, 결국 내가 나서라 이건가. “주리아.” 내 가느다란 눈팅 목소리에 주리아가 표정을 풀고 돌아보았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하고 말했다. “주리아도 같이 보자. 됐지?” “저, 저, 저, 정말요?” 갑자기 활짝 핀 꽃처럼 밝아지는 주리아. 역시나 그 말을 기다렸군. 나는 작은 한숨을 쉬며 다시 걸어갔다. 도대체 그런 게 뭐가 그리 좋은 건지. 역시 여자들은 알 수가 없다니까. - 그워워워워워워! “나, 나왔다!” “오우거다!” 순간 파티 가운데서 두 마리의 오우거가 나타났다. 허리부근을 돌격당해 대열이 흩어져버린 우리 파티는 너나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오우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거, 검이 안 먹혀!” “파이어 볼!” “으악! 이 멍청이 마법사야! 왜 나를 공격해!” “이봐, 방해돼! 저리 비켜!” 맨 앞에서 길을 이끌던 우리들은 한 순간에 몇 명이 죽어나가고 다친 유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우거한테 죽은 유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자기들끼리 눈먼 마법과 검에 당한 상처였다. “아무리 막장 파티라지만 이정도로 심할 줄이야.” 내 고개가 설레설레 저어졌다. 노이슈반스탕님은 조금 찔린 면이 없지 않았던지 얼굴을 붉히다 외쳤다. “대열을 정비하세요! 검사는 앞으로 장거리 유저는 뒤로!” 하지만 그 소리는 오우거의 패도적인 기세에 묻히고 말았다. 나는 주리아에게 물었다. “오우거의 장단점, 공략 법은?” “보통 레벨은 70~80대에요. 피부가 강철처럼 질겨 오러소드를 만드는 80~100대 유저가 아니라면 뚫기 힘들죠. 공략은 마법으로 피부를 약하게 만든 다음 검으로 처리하는 수밖에 없을 거예요.” “좋아, 엔젤단, 첫 출진이다.” 나는 거창하게 말했다. 하지만 둘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슨 세 명밖에 없는데 출진이 뭐에요.” “서, 서, 설마, 또, 그런 거 해야 하나요?” 나는 두 사제를 무시하고 오우거에게 당한 사람들을 치료하러 가려했다. 하지만 그 전에 어느 일단의 무리가 우리를 막아섰다. “저희도 대려가 주세요!” 나는 앞을 막은 자들을 보았다. 남자 두 명과 여자 세 명이었는데 그들은 전부 사제인지 백색의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 중 남자 한 명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클레릭이라 합니다. 저를 포함한 뒤에 네 명은 모두 미소천사님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아까부터 다가가고 싶었는데 말걸 분위기가 아니라 지금까지 몰래 보고 있었습니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엔젤단에 끼워주세요!” 클레릭이란 유저를 포함해 뒤에 네 명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걸 보고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말만 들으면 의도는 좋아보였다. 하지만 지금도 저 앞은 수많은 유저들이 다치고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데 우리 앞을 막아 자기 이익만 추구하고 있지 않은가. 엔젤단에 받아들이기 이전에 사제로서 실격이었다. 나는 작게 미소 짓고 말했다. “좋아요, 그럼 지금부터 테스트에 들어갑니다. 저기 오우거들을 사제로서 처리하세요!” “오우거를 처리하면 되는 겁니까? 좋습니다! 가자 얘들아, 미소천사님께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 클레릭은 네 명의 사제들을 이끌고 오우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한나와 주리아가 아미를 찌푸린 채 나에게 말했다. “언니, 지금…….” “저들은 내가 조금 아는데, 전투사제로 악명이…….” “그만.” 나는 손을 들어 둘의 말을 막았다. “내가 생각한 게 있어. 일단 우리들은 다친 유저들을 치료해 주자.” 들었던 손으로 손가락을 까닥이며 웃었다. 한나와 주리아는 그 모습에 어깨를 으쓱하고 다친 유저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나 역시 달리며 오우거를 향해 달려가는 다섯 명의 사제를 흘겨보았다. 경상 서른 이상, 중상, 스물 이하, 죽은 유저는 열 명 내외로 상황은 의외로 참담했다. 단 두 마리뿐이었지만 옆에서 당했다는 점과 유저들끼리 당황해서 마구 공격한 것이 역시 흠이었다. 가까스로 진영을 점검해 그나마 이 정도였지. 아니었으면 더 죽었을지도 몰랐다.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 콰쾅! 오우거가 중상을 입은 유저들이 있는 곳으로 돌진하는 걸 네 명의 사제가 방어막을 집중시켜 저지했다. 그 사이 마법사들이 공격해 오우거를 몰아내는 식으로 어렵사리 방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인지 사제들의 입가에는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간단했지만 체계적인 방어라니. 나는 누가 이런 명령을 내렸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에텔, 프린, 완미야 시전이 조금 어긋났어! 조금 더 집중해!” 세 명의 사제들을 이끌고 있는 유저는 블루블랙의 머리를 옆으로 넘겨 차분한 모습을 하고 있던 남성이었다. 나는 그곳으로 다가가 말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제가 왔으니…….” “당신! 미소천사면 거드름 피워도 되나? 지금 느긋하게 말할 시간 따윈 없단 말이다! 온다, 준비해!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다시 돌격하는 오우거를 막기 위해 시전 하는 방어막. 이거 한방 먹었는걸. 나도 사제 실격이네. 나를 무시하고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도 꿋꿋이 막고 있는 사제들을 보다 아까 그 사제들을 비교해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간단히 머리를 젓고 한나와 주리아를 불렀다. “한나야, 주리아! 너희들이 이들을 도와줘!” 내 말에 한나와 주리아가 다가왔고 블루블랙의 사제가 힘겹게 오우거를 다시 막 은 뒤 소리 질렀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당신이 직접 여기를 도와줘야지, 지금 약한 사제 두 명 더 포함된다고 이 상황이 달라지냐!” “음, 약한 사제요?” 나는 블루블랙머리 사제에게 되물은 뒤. 다가온 한나와 주리아를 보았다. 둘은 내 표정을 읽은 건지 씩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여줘라, 너희를 무시하는 저 사제들에게 말이야. “세상의 어머니, 가이아 여신님의 힘은 땅, 땅은 곧 생명이리라. 큐어(cure)” “세상의 어머니, 가이아 여신님의 힘은 땅, 땅은 곧 생명이리라. 큐어(cure)” 한나와 주리아의 명료한 외침이 순간 유저들을 정적으로 만들었다. 손에서 뿜어지는 백색의 빛. 그것은 정확히 다섯 명의 사제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 엉망이 된 몸속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 이것은…힐?” 블루블랙머리 사제가 자신의 몸을 감싸는 백색의 빛을 보고 경악한 눈빛을 보였다. 한나는 그 유저에게 천천히 다가가 작게 말했다.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많이 부족한 저지만 지금이라도 참여할게요.” 그리고 싱긋 웃어 보이는 한나. 왠지 블루블랙 머리 사제의 귀가 빨개진 듯 보였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한나야, 너는 천속성에 너무 스텟을 투자해서 지금도 폭힐이 되었어. 힘을 많이 조절하라니까. 안 그러면 금방 지칠 거야.” 블루블랙머리 사제가 당황할 때 말을 가로챈 건 주리아였다. 한나는 주리아에게 활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헤헤, 제 스승님 같아요, 언니!” “스, 스, 스승님이라니! 나는 단지, 힐을 가르쳐줘서 그 의무를…….” “언니, 저기 다시 오는데요?” 한나가 듣다말고 검사들을 뚫고 돌진하는 오우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주리아가 불을 부풀렸다. “다, 다시 방어를!” 블루블랙머리 사제가 급하게 실드를 펼치려했고 그걸 막은 건 주리아였다. “잠깐만요! 저 거대한 힘을 계속 정면으로 막는 건 피드백만 불러일으키는 짓이에요!” “그럼,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딱히 다른 스킬도 없는 사제보고 빛의 화살이라도 쓰란 말입니까?” “거대한 몬스터를 막을 때는 이 방법이 최고죠!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주리아가 주문을 외치자 오우거가 돌진하는 정면이 아닌 발밑에서 순간 실드가 펼쳐졌다. - 쿠억, 그웍, 그웍, 그워어어어억! 순간 달려오던 그대로 발을 가격당한 오우거 자신의 달리던 힘을 막지 못해 몇 번 앞으로 더 달리더니 결국 크게 엎어지고 말았다. “……….” “……….” 다섯 명의 사제뿐만이 아닌 그 주위에 있던 유저들까지도 멍하니 주리아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까지 보다 그만 시선을 거두고 중상을 입은 자들에게 달려갔다. 레인저를 해서 게임센스가 있는 주리아라면 한나와 그 사제들을 이끌고 아마 잘 해나가겠지. “으으으으…….” “팔이, 젠장.” “쿨럭, 쿨럭!” 이미 기절한 유저, 팔이 기억자로 꺾여 신음을 흘리는 유저, 피드백 때문에 연신 피를 토하는 유저 등 정말이지 누가 보더라도 표정을 찌푸릴 만한 상황이었다. 나는 그곳으로 다른 중상자를 옮기던 유저에게 다가가 말했다. “여기 중상자가 모두 몇 명이죠?” “아, 미소천사님!” 멍하니 내 위아래를 훑어보는 유저에게 눈썹을 찌푸리며 재촉하자 유저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미 스무 명을 넘었습니다. 오우거 한 마리는 미소천사님의 그 뭐더라 아! 엔젤단의 두 분과 사제 다섯 분이 막아줘서 그나마 경상만 몇 나오고 있지만 다른 오우거는 방어보단 공격에 치중하고 있는지라 사상자와 중상자가 많이 나오고 있어요.” 아까 그 클레릭이란 사제무리가 처리하러 간 오우거일 것이다. 지금 여기서 멀리 싸우고 있는 모습만 봐도 어떤 상황인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나는 기지개를 쭉 펴고 말했다. “그럼 시작해 볼까나.” 내 혼잣말에 지금 현 상황을 알려준 유저가 입을 벌리며 말했다. “미소천사님의 힐을 구경할 수 있는 건가! 하지만…이 많은 수의 유저들을 혼자서 전부 치료하기엔 무리가…….” 기대 반, 걱정 반인 유저를 무시하고 나는 주문을 외웠다. “태초의 재생!” 미안하지만 나에게 힐을 논하기에는 힐러로 무언가 한 번쯤 이루었을 때 다시 그런 말을 하길 바란다. 내가 누군가. 수많은 게임들을 전전하며 당당히 힐러랭킹 1위를 달려오던 나다. 물론 이 많은 유저들을 전부 완치하기에는 내 마나가 모자랄게 분명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만큼 힐러만의 센스가 있다는 것을 알아두길 바란다. 녹색의 빛은 순간 그물 펼치듯 쫙 흩어져 유저들의 가장 힘들어하는 곳을 중점으로 치료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열 명 치료하기도 힘들었는데 지금 숙련도가 꽉 찬 상태여서 그런지 스무 명도 어렵지 않게 내 품안에 둘 수 있었다. 하긴, 한때는 혼자서 100명도 상대해본 난대 그깟 스무 명이 대수겠는가. 7. 태초의 재생(World Regenera-tion Power of the Beginning) (액티브) - 태초, 모든 자연의 조율자로 알려진 드루이드의 마법으로 훗날 숲을 숭배하던 위치들에 의해 마법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게 된다. 태초 드루이드의 재생은 위치의 재생과는 다르게 더욱 순수한 자연을 담고 있으며 그 힘 또한 강하다. 기본 재생의 비해 20% 더 회복하며 마나소모량이 10% 줄어든다. 스킬 사용 시, 모든 생명체는 MP, 스태미나가 회복된다. 시전자의 SP 소모량에 따라 회복되는 MP, 스태미나가 달라지며 작게는 1명 최대 10명까지 동시 회복 가능.(숙련도에 따라 동시회복 최대 수치가 달라짐) 목속성 생명체에게 시전 시, 그 생명체는 자라거나 진화가능.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게임스킬 심연의 눈이 아닌, 내 마음의 고유스킬 심연의 눈을 발동시켰다. 내 시선에 두고 있는 모든 유저들과 지형지물, 지금의 상황들의 정보를 읽어 들였다. 유저가 가장 아픈 곳, 죽을 것 같은 유저, 경상인데 그냥 누워있는 유저들까지. 내 목적은 완치가 아니다. 단지 죽지 않게 만들어 일어날 수만 있으면 족했다. 완치를 하기 위해선 심연의 눈까지 발동해야 가능하겠지. 하지만 그 페널티로 오늘은 아무것도 못하게 될 테니 이렇게 힐을 하는 것이었다. “괴, 굉장하다.” “단 한 주문으로 모든 유저를 치료하고 있다니.” “이, 이건 말 그대로 치료의 신!” “미소천사라는 말이 허명이 아니었어…….” 이마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거 역시, 심연의 눈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해서 그런지 많이 벅차오는 걸? 빨리 끝내려 했는데 조금 걸릴 것 같았다. 힐을 사용하는 도중에 뒤를 돌아봐 오우거들을 막고 있는 유저들을 보았다.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내가 그곳으로 가도 그다지 쓸모가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믿었다. 한나와 주리아를. 우리 엔젤단을. 안녕하세요? 저는 임한나라고해요. 나라 한의 클 나라는 한문을 써서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지어주셨죠. 하지만 저는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자신이 없답니다. 그래도 나라대신 이렇게 여러분을 이끌게 되어 영광이 아닐 수 없어요. 그러니 아무쪼록 잘 부탁드릴게요! 지금 저는 주리아언니를 따라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징그러운 괴물을 상대하고 있답니다. 아까 들어보니 오우거라고 하던데 이렇게나 아름다운 세상이 오점이 아닐 수 없어요. 저런 것만 없으면 정말 게임이란 것도 괜찮을 텐데 말이죠. “한나야, 옆을 가격해줘!” 주리아언니가 황급히 저에게 말했어요. 아무래도 지금은 다른 생각하기 힘들 것 같네요. 일단 주문을 외우고 다시 생각해보아요.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저는 달려오는 괴물의 어깨부근에 실드를 생성시켜 밀었어요. 조금 힘이 들었지만 괜찮답니다. 다른 사람이 다치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까요. - 그워어어어억! 옆으로 비틀대며 지르는 소리는 아직도 귀에 익숙하지 않은지 지금도 찔끔한답니다. 사실 많이 무서워요. 아무래도 저는 게임에 익숙해지려면 좀 더 간이 커져야 할 것 같네요. “어떻게, 그렇게 큰 실드를……!” 푸른빛의 검정 머리칼을 한 남자가 저에게 놀란 모양이에요. 저는 그 말에 머리를 매만지는 수밖에 없었어요. 게임을 할 줄 몰라 지금까지 천속성에만 스텟을 투자하고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요. 부끄러운 말을 하는 건 소연 언니 한 명으로 족해요. “당신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그 사제는 말도 안 된다는 눈빛으로 주리아언니와 저를 보았어요.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주리아 언니를 보았죠. 하지만 주리아언니도 대답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에요. 서로 눈이 마주쳐 버렸네요. 으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텐데. 이럴 때 소연언니라면 무슨 말을 했을까요? 저는 좋은 말이 떠올라 손뼉을 치며 말했어요. “저희는 단지 미소천사님을 모시는 엔젤단이랍니다.” 순간 다섯 명의 사제들은 저를 멍하니 보았어요. 아무래도 제가 또 부끄러운 말을 해버린 것 같네요. 어쩜 좋담, 주리아언니도 저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어요. 그제야 제 얼굴도 빨개졌답니다. “무, 물들었어.” 추, 충격이에요. 물들었다니, 주리아언니 너무해요! “엔젤단은 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푸른빛의 검정 머리칼 남자가 경악한 표정으로 말했어요. 그럼요, 대단하고말고요. 인원수가 무려 세 명이나 되는걸요. 아, 지금 반어법 쓴 거 아시죠? 그냥 들어버리면 곤란하답니다. “엔젤단은…가, 강하죠.” 주리아언니도 저와 같은 생각인지 시선을 거두며 말을 더듬었어요. 저는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저 멀리 다른 오우거를 상대하고 있는 유저들을 보았답니다. “주리아언니, 저기는 거의 끝나 가는데요?” 지금 보니 저쪽의 오우거는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어요. 내 물음에 주리아언니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네요. 쳇, 알고 있었으면 진작 알려주지 소연언니 같아서 삐질 거 같아요. “그래서 우리들은 방어만 하는 거야. 비록 저쪽은 사상자가 많이 나왔지만 둘 다 방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쪽 오우거만 상대하는 거지. 아까 클레릭이란 사제무리가 방어를 했다면 더 수월했을 텐데.” 주리아언니는 매우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어요. 지금 보니 클레릭이란 사제를 필두로 사제들이 엄청난 공세를 펼치고 있네요. 빛의 화살 같아보였는데 짙은 노랑 빛의 더 커다란 걸로 보아 한 단계 발전된 사제의 공격마법 같아 보여요. “다시 온다, 한나야, 준비해.” 아차, 이거 또 멍하니 있었네요. 주리아언니가 저에게 핀잔을 주네요. 헤헤, 하지만 저는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는걸요? 벌써 두 방이나 프로텍션을 사용한 덕분에 이제 SP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으니 이번에는 조금 물러나 있어야겠어요. “주리아언니, 저는 조금만 쉴게요.” “헉!” “무, 무슨!” “이런 중요할 때!” 다섯 명의 사제들이 입을 딱 벌리고 있네요. 그러다 파리 들어가겠어요. 뭐, 파리는 귀엽지만 그게 입에 들어가는 건 그다지 귀엽지 않을 텐데. “뭐? 아, 그렇구나.” 주리아언니는 제 상태를 알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런데 그 행동에 반응한 건 제가 아니라 다섯 명의 사제들이었답니다. “어, 어떻게 그걸 그냥 넘기는 거지?” “나, 사제에 대한 회의감이 들어.” “난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어.” “도대체 알 수 없는 유저들이야.” 칭찬은…아니겠죠? 주리아언니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주문을 외웠어요.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 크웍! 어, 어라? 다리를 걸려고 실드를 펼쳤는데 괴물이 피하고 말았어요. 엄청난 높이의 점프네요. 이거 설마 핀치인가요? “왁왁!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다섯 명의 사제들이 예의 보여주었던 중첩 실드로 괴물을 공중에서 막아버렸어요. 퉁하고 밀려난 괴물이 다시 자세를 잡았는데 꽤나 성질이 난 모양이에요. 가슴을 탕탕 치며 답답함도 표현하네요. “…실수했네?” “……….” “……….” 주리아언니가 혀를 내밀며 장난스럽게 말하자 모두 어이없는지 말을 못했어요. 이번엔 저도 마찬가지네요. 언니, 조금 경각심을 가져주세요. “어쨌든, 이제 다 끝났으니 괜찮지 않나? 헤헤.” 주리아언니도 조금 쑥스러웠는지 어색하게 웃으셨어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순간 끌어안을 뻔했네요. 이런, 자제해야지. 그래도 나보다 언니인데. 저 멀리 오우거가 쓰러졌어요. 바로 달려오는 네 명의 사제들이 보이네요. 아, 아까 전에 보았던 클레릭이란 사제인 모양이에요. 아마 우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겠죠? “공격하자, 공격!” “찬란한 빛의 광휘, 천벌(天!罰)!” “찬란한 빛의 광휘, 천벌(天!罰)!” 아까 보았던 공격마법이 저 스킬인 모양이에요. 순식간에 모인 노랑 빛의 빛이 주먹을 통해 쏘아져 나가네요. 빛의 화살보다 시전속도도 빠르고 더 강력해요. 마법사와 견줘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힘이네요. 그 빛은 정확히 괴물의 얼굴로 날아가 터졌어요. -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사방의 침을 튀기며 버둥거리는 게 보기 좋지는 않네요. 왜 하필 얼굴이람. 제 눈살이 찌푸려지네요. “빨리 끝내자! 천벌, 천벌, 천벌, 천벌!” “막타는 내꺼다! 천벌, 천벌!” “천벌, 천벌, 천벌!” 괴물은 우리 때문에 지쳐서 그런지 거의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네요. 쳇, 거의 우리가 잡은 건데 도중에 껴들어서 빼앗긴 기분이에요. 뭐, 도와준 건 사실이니까 이런 기분은 그냥 삭혀 둘까 해요. 음, 사제 권위를 버린 건 아니겠죠? 아니면 큰일인데. 소연언니가 분명 화낼 테니까요. - 쿠궁! 괴물이 드디어 쓰러졌어요. 땅까지 울리는 리얼함에 속이 조금 거북하네요. 정말 무언가 죽인 기분이 들어요. 저는 정말 게임에 익숙해지려면 멀었나 봐요. “잡았다! 내가 잡았어!” “크하하하하! 이걸로 시험은 통과다!” “우리도 이제 미소천사님 따라다니면서 유명해질 수 있어!” “이제 우리들도 명성을 키울 수가 있겠구나!” 음, 저 사제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안 드네요. 엔젤단에 들어오고 싶은 이유가 단지 자신의 명성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다 끝냈어?” 어라? 저 얇고 익숙한 목소리. 분명 언니일 거예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언니! 우리 아버지 다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언니! 저는 뒤를 돌아봤어요. 역시나 소연언니네요. “언니!” 제 말에 언니는 손을 흔들어 주었어요. 저도 마주 흔들었죠. 그런데 조금 이상하네요. 언니 뒤에 왜 수많은 유저들이 묘한 표정으로 언니를 보고 있는 거죠? “언니, 또 무슨 짓을 벌이셨어요.” “아하하하하…….” 또 웃으며 얼버무리네요. 이러면 답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내가 그냥 넘어가야지 어쩌겠어요. “아, 미소천사님! 모든 오우거들을 처리했습니다! 그럼 약속대로…….” “탈락.” “감사합…에, 네?” “탈락이라고요.” 언니는 두말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딱 잘라 말했어요. 클레릭이란 유저의 표정이 가관이네요. 붉어졌다 파래졌다 신기해요. “약속했지 않습니까! 분명히 사제로서 처리하면 저희를 받아주시겠다고!” “그렇죠, 분명히 말했죠. 사·제·로·서 처리하라고.” 그리곤 언니는 씩 미소 지으셨어요. 저 표정은 저조차 아직 익숙하지 않아요. 묘한 매력이 저 미소에서는 나타나죠. 이런, 얼굴 붉어지면 안 되는데. “그런데 대체 왜!” 클레릭이란 유저는 아직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에요. 저는 대충 눈치 챘는데 말이죠. 언니가 추구하는 사제는 분명 다른 쪽일 텐데. 언니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어요. “클레릭이라고 했던가요? 이쪽 오우거가 만든 상황과 저쪽 오우거가 만든 상황을 좀 보시겠어요?” 언니는 손가락을 가리켜 일일이 설명하기 시작했어요. “당신들이 처음 맡았던 오우거가 있는 곳은 사상자와 중상자가 지속적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이곳은 경상자 한 명 없이 막고 있었죠. 아직도 이해가 안 갑니까?” “이곳을 막고 있던 사제들과 저희들을 비교하고 싶은 모양이신데, 저희들은 빠르게 처리함으로서 더 심한 상황을 애초에 저지한 것입니다!” “당신들은, 마법사입니까?” 갑작스런 언니의 물음에 클레릭 유저 및 세 명의 사제들은 입을 다물었어요. 착 가라앉은 눈빛이 너무도 무섭네요. 언니는 정말 화난 모양이에요. “당신들이 한 행동과 그런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은 전사와 마법사면 족합니다. 저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사제로서 처리하라고. 당신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 어콜라이트 프로텍션밖에 사용 못하는 다섯 명의 사제들이 당신들보다 훨씬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사기 치지 마! 어콜라이트 프로텍션밖에 사용 못하는 구시대적 방어 사제는 이미 외면 받은 지 오래라구! 현재 추세는 공격형 사제란 말이다!” “그건 누가 정했죠?” 언니의 표정이 너무 가라앉았어요. 처음 만날 때 일이 생각나네요. 그때도 꼭 저런 눈빛을 했었는데. 언니는 이어 말했어요, “다른 유저들이 바라는 타입이 공격형 사제라고 해서 곧이곧대로 따를 셈이야? 그러니 아직까지 힐러가 이 게임에서 천대받는 거잖아! 당신, 잘 들어. 아무리 약하다고 해서 사제의 자부심까지 통째로 버릴 거라면 애초에 직업을 사제로 선택하지 마. 그걸 감안하고 선택하는 게 바로 우리 사제라는 족속이다. 단지 희생하고, 퍼다 주는 나약한 직업이지만 그 안에서 기쁨을 찾는 게 우리들이란 말이다!” 그 말은 조금 와 닫았어요. 저는 사제, 힐러에 대해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이 직업을 선택했다는 대에 후회는 없거든요. “모, 모순이야!” 클레릭이란 유저의 얼굴이 시뻘개졌어요. 언니는 한쪽 입 꼬리를 비틀며 비웃네요. 저 모습은 조금 밉상인걸요? 남자같애. “네가 선택한 길이 얼마나 잘못된 건지 가르쳐주지. 네가 믿는 그 힘으로 여기 어콜라이트 프로텍션을 쓰는 사제를 이겨보겠어?” 무슨 말일까요? 소연언니가 저를 가리키고 있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잠시 생각하다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저, 저요?” 언니가 저를 보고 묘하게 미소 짓고 있네요. 또 저 표정이에요. 무언가 저지를 때 짓는 저 표정. 설마 또 쑥스러운 짓을 시키려는 걸까요? 그런 거라면 이젠 거부할건데. “한나야, 빛의 화살로 상대해 줘.” 언니는 아무래도 진담인 것 같아요. 아까 천벌이란 스킬을 보니 무시무시한 힘이던데 제 빛의 화살이 과연 이길 수 있을까요? “크하하하하! 지금 저 여자한테 대결을 붙이려는 거야? 이 명예랭킹 85위인 나, 클레릭에게 말야?” 저 웃음 조금 거슬리네요. 이거 욱할 거 같아요. 하지만, 그래도, 싸우는 건 질색인데. “너라면 할 수 있어, 어때, 해줄 거지?” 욱, 언니의 저 표정은 감당할 수가 없어요. 이런, 이런. 나 몰라, 어떡해! 표정관리가 안 돼! “으응, 정말 언니도 참.”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어요. 저는 언니한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나 봐요. 조금 우울하네요, 하아. “제가 이길 수 있을까요?” 『엄마! 제가 도와드릴게요. 지금까지 모아놓은 힘을 엄마한테 전이시키면 한 순간 힘이 증폭 될 거예요.』 그동안 포켓 속에서 구경하던 이그레시아가 어느새 빠져나와 제 머리 위를 뱅뱅 도네요. 언니도 그 말을 들었던지 반색하며 말했어요. “다행이다, 사실 조마조마했는데!” “…역시 못 믿었던 거군요?” 언니는 제 시선을 슬쩍 피하네요. 이럴 줄 알았어요. 역시, 언제나 속는 제가 바보죠. 저는 이그레시아를 어깨위에 올리고 앞으로 나왔어요. 클레릭이란 자가 저를 보며 비웃고 있네요. 점점 오기가 생기는 걸요? “정말 할 셈이야? 이거 오늘 기분 잡쳤구만. 이젠 별것도 아닌 게 다 나서고, 내참.” 저 말투 신경에 거슬리네요. 저는 말싸움에 그리 강하지 못해요. 그러니 어쩔 수 있나요? 째려보는 수밖에. “그렇게 보면 어쩔 건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되든 안 되든 일단 시도는 해 봐야겠죠? 제 모든 힘을 실어서 도전해 보겠어요! “이그레시아, 부탁해! 갑니다, 빛의 화사아아아아아아아알!” - 푸화아아아아아아아아악! 순간 속에서 씁쓰름한 맛이 느껴지네요.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저는 이런 기분, 별로랍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만든 빛의 화살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 만들어졌어요. 아마도 이그레시아가 많이 도와준 모양이에요. “무, 무슨 빛의 화살이 이렇게 커! 찬란한 빛의 광휘, 천버…우와아아아아악!” 어라? 노랑 빛의 천벌을 가볍게 소멸시켜버리고 클레릭이란 유저한테 날아가네요? 저도 놀랐어요. 이러다 정말 죽을 것 같아요! 어쩜 좋아! “주리아!”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그때 소연언니가 주리아언니를 불렀고 주리아언니는 예상했다는 듯이 클레릭 유저에게 실드를 펼쳐주네요. - 빠지지지지지직! “꺄아아아아악!” 하지만 빛의 화살은 그 기세가 죽지 않고 실드를 밀어붙이기 시작했어요! 난 몰라, 어떡해. 이정도로 강할지 상상도 못했단 말이에요. “어,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결국 뒤에서 멍하니 있던 사제들까지 실드를 펼쳐줘서 겨우 빛의 화살이 소멸했어요. 후와! 정말 아슬아슬했어요. 잘못했다가는 제가 PK할 뻔했네요. “……….” “……….” “……….” 그런데 주위가 너무도 조용하네요.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걸까요? 다섯 명의 사제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소연언니를 뒤따라오던 유저들마저도 저를 보며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네요. 이런 분위기 쑥스러운데 어떻게 하죠? “설마, 아직까지도 천 속성에만 스텟을 투자하고 있었어?” 소연언니의 물음에 저는 고개를 끄덕였죠. 숫자가 계속 올라가는 재미에 계속 찍고 있는데 제가 많이 잘못한 걸까요? “마, 말도 안 돼! 이거 사기야! 핵이야!” 클레릭 유저가 주저앉은 모습으로 몸을 덜덜 떨며 외쳤어요. “저거야 말로…괴수다.” “저런 사제 처음 봐…….” “사제가 약하다는 말은 다시 수정해야할 것 같아.” “천벌조차 가볍게 소멸시키는 빛의 창이라니. 오늘 별걸 다 보네.” 유저들이 저마다 한마디 하네요. 우, 저는 소연언니처럼 가볍게 넘어가질 못하는 타입이라 저런 집중은 불편해요. 아무래도 잠시 나가있는 게 좋겠어요. “언니,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왜?” 음,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아, 이게 좋겠다. “화장실이요.” 어라? 언니의 얼굴이 빨개졌네요? 처음에는 저도 쑥스러웠지만 지금은 괜찮은데 언니한테는 아직 어색한가 봐요. 일단 저는 나갔다 정리될 쯤에 다시 와야겠어요. <접속을 해제하시겠습니까?> <‘아펜하르트’접속을 해제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푸후!” 몸이 많이 찌뿌드드해요. 아무리 최신식 캡슐이라 하더라도 저에게는 아직 많이 불편하네요. 일단 캡슐 아래 있는 버튼을 눌렀어요. 지금 조금 많이 급하답니다. “부르셨나요, 아가씨.” “아, 유모, 저, 화장실.”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어요. 무슨 제스처냐고요? 당연한 걸 묻고 그러세요. 안아달라는 뜻이죠. 유모는 저를 가볍게 안아 휠체어에 앉혔어요. 저는 급하게 휠체어를 운전했답니다. 정말 급했거든요. “아, 아버지는요?” 급하긴 해도 아버지의 안부는 물어야겠죠? 효녀가 해야 할 당연한 의무거든요. “지금 서재에 계세요. 불러드려요?” “으응, 아니에요. 헤헤.” “아가씨, 게임에서 무슨 좋은 일 있으셨어요? 많이 기뻐 보이네요?” “그래요?” 저는 내가 왜 그럴까 조금 생각하다 피식 웃었어요. 아무래도 그 일밖에 없겠죠? “유모, 언젠가 제가 아는 분을 집에 초대하면 잘해주셔야 해요?” “게임에서 누구 사귀신 분이라도 있으세요?” 유모가 꽤나 많이 놀라하네요. 그럴 거예요, 지금까지 제가 친구를 사귄 적은 없었거든요. 이 다리로 무얼 하겠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분이에요!” 그리고 웃어줬어요. 그러니 유모가 혼란스러워 하네요. 킥킥, 재미있어서 그냥 내버려둘까 해요. 어서 볼일보고 다시 게임이나 들어가야겠어요. 언니가 기다릴게 분명하니 말이죠. 저는 이제 이 게임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지경까지 온 것 같답니다. 어쩌지, 폐인소리 듣는 거 아닌가 몰라. 그래도 저 귀엽게 봐 주실 거죠? 이상한 아이라 생각하면 많이 속상할거에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저는 게임을 그만두지 않을 거랍니다. 왜냐하면…이젠 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사제임에도 법사 못지않은 파괴력, 존경합니다!” “부디 님의 아이디를 알려주세요!” “네? 네에?” 한나가 주리아를 보았다. 주리아는 말없이 한걸음 물러났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님 같은 사제가 알려지지 않았다니!” “사랑합니다!” “네? 네에에에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한나야, 미안하다. 고양이처럼 그렇게 도움을 호소해도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단다. “모른 척 하지 말아요! 전부 언니 때문이잖아요!” 반응하면 안 돼. 그러면 지는 거야. 제길, 조금 움찔 거린 게 마음에 걸리는 군. “어쩜 화내는 것도 귀여워!” “전, 이제부터 당신의 팬입니다!” “으아앙! 싫어요! 그러지 말아요! 전, 소연언니처럼 철판이 못된단 말예욧!” 너무 대놓고 말하니 조금 충격. 주리아양,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 끄덕이지 말아줄래요? “히히…말도 안 돼. 내가 어떻게 저런 여자한테 질 수가. 이건 사기야…….” 나는 슬쩍 클레릭 사제를 보았다. 아직까지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는데 보아하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건 진거죠.” 나는 쐐기를 박아주었다. 클레릭 사제의 고개가 푹 꺾였다. “히히, 키히히히…….” 이미 제정신을 찾기 힘들어 보였음으로 나는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오른쪽을 보니 아까 열심히 둠브를 막던 블루블랙머리의 사제가 나를 보고 있었다. “오빠.” 그 옆에 있는 세 명의 여사제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 사제를 올려보고 있었다. 블루블랙 머리 사제는 손을 살짝 들어 그 셋을 제지한 뒤 나에게 다가왔다. “제가 당신에 대해 오해한 것 같습니다. 일단 사과드리죠.” “무슨 오해요?” 블루블랙머리 사제는 고개 숙인 채 잠시 뜸들이더니 나를 똑바로 올려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당신의 행동. 소문을 종합해보면 꼭 명예를 위해 유저를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기 있는 저 사제들처럼.” 블루블랙머리 사제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아직까지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는 클레릭 사제 무리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솔직한 말로 존경스럽습니다.” 그자는 쑥스러움이나 내 눈치를 전혀 살피고 있지 않았다. 그 정도로 그 말은 진심이라는 말이다. “아이디가 어떻게 되시죠?” “플레이아데스입니다.” “혹시 소속되어 있는 기사단이 있나요?” “아뇨. 그런데 그건 왜…….” “그럼, 저희 엔젤단에 들어오실래요?” 나는 손을 내밀었다. 내 행동에 주리아와 한나를 포함한 주위에 있던 모든 유저들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플레이아데스 사제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다 나를 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숙이고 고심해했다. 결국 고개를 든 표정에는 결연한 남자의 표정이 한껏 들어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내민 내 손에 닿은 건 손이 아니라 머리였다. 황급히 나는 손을 거뒀다. 무안해 어디에 둬야할지 갈피를 못 잡던 손을 결국 등 뒤로 감춤으로서 가릴 수 있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 기쁘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엔젤단이라는 곳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정이 있나보네요.” 내 말투에는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거절당할 줄이야. “저에게는 여동생이 세 명 있습니다.” 플레이아데스 사제는 어깨너머로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그 뒤에는 걱정하는 세 명의 여사제가 있었다. 여동생이었던가. “에스텔, 프린질스스킨, 완전미소라고 하죠. 저는 저 아이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게임을 추천하고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런 내가 빠지면 동생들이 곤란할거에요.” “그렇다면 저 아이들도…….” “그건 제가 곤란합니다. 게임에 대해 모르는 동생들이 엔젤단 같은 곳에 영입되면 오히려 방해만 될 거에요. 저는 단지 셋이서 게임을 즐기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니, 죄송합니다.” 플레이아데스 사제는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성이 어리고, 게다가 여자로 알고 있을 나에게 이렇게 쉽게 고개를 숙이다니. 보면 볼수록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죠…하하하! 이거 참, 처음, 최초로 권유한 말인데 이렇게 깔끔하게 거절당할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플레이아데스 사제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 때문에 더 곤란한 모양이구나. 이러면 안 돼지. 안 돼. “농담이에요. 하지만 친구정도는 되어 주실 수 있죠?” “훗, 물론이죠.” 플레이아데스 사제는 웃으며 통신 구슬을 내밀었다. 그의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시원하고도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미소. 남자인 내가 봐도 멋지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마주 웃어주며 통신 구슬을 부딪쳤다. <‘통신구슬’ 등록 란에 ‘플레이아데스’님이 입력되었습니다.> “반가워요, 플레이아데스씨.” <‘천상의 매혹’의 숙련도가 1 올랐습니다.> “저야말로 반가워요, 예쁜이씨.” 통신구슬로 인하여 내 본 아이디를 안 모양이었다. 그건 눈팅이 만든 거라 결코 닉네임이 아니란 말입니다. 플레이아데스씨! “아쉽겠네요.” “…그러게요.” 『주인님, 슬퍼하지 마세요.』 한나와 주리아, 정령이까지 다가와 나를 위로해 주었다. 이거 내 표정이 그렇게 티가 났던가? “저를 받아 주세요!” “엔젤단에 기사는 영입 안 되나요?” “전 지금 기사단 탈퇴해도 되는데.” 어느새 파티 유저들도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고 있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위로해 준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고마워요, 모두들.” 이래서 나는 게임이 좋다. 허물없이 다가와 단지 즐길 수 있는 게임이 좋다.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게임이 좋다.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나는 사제를 택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천상의 매혹’의 숙련도가 10 올랐습니다.> “어, 언니, 그 무방비한 표정은 조심하세요!” “어, 어, 어쩜 좋아. 난 몰라!” 한나가 당황해서 나를 가렸고 주리아가 새빨개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진짜, 천사다…….” “저 얼굴이 실제 얼굴이라고? 말도 안 돼. 같은 여자지만 너무 예쁘잖아!” “나…정말 반했나봐. 가슴이 떨려.” “사, 사, 사랑합니다!” “야, 나를 어쩔 셈이야?” “글쎄, 어떻게 할까.” “지금 이런 짓이 얼마나 무모한 건지 알고 하는 거냐?” “네 상황이 협박해도 되는 상황인지 알고 하는 거냐?” “이거 말로만 미소천사지 완전 악녀 아냐?” “그래, 너는 다덤벼란 명칭이랑 참 어울려 좋겠다.” “흥, 너처럼 거짓말은 안 하거든?” “나도 이 명칭 내가 만든 게 아니거든?” 저놈이 깨어난 후부터 자꾸 시비를 걸어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시했지만 자꾸 귀에 거슬리는…그래, 꼭 귓가에 파리 한 마리가 앵앵 거리는 그런 기분이었다. 지금 우리들은 아직 위치의 산맥을 벗어나지 못해 열심히 우회해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가뜩이나 덥고 험악한 산새라 짜증나고 있었는데 저놈이 시비를 거니 계속 받아주고 있는 것이었다. “…한나야, 언니 원래 저런 성격이었니?” “주리아 언니, 죄송하지만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음, 진정해야겠다. 그나저나 정말 저놈을 어떻게 해야 할지 슬슬 정해야했다. 이대로 끌고 다녔다가는 내가 먼저 뒷목잡고 쓰러질 것 같았으니까. “한나야, 풀어줘.” “네 명칭을 누가 만들든 그게 무슨 상관…응?” 내가 한나에게 턱짓으로 말하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놈을 풀어 주었다. “이제 됐지?” “…너, 무슨 의도야?” “무슨 의도긴, 너 가라는 의도지. 그러니까, 이제 그만 앵앵대고 가라. 자자, 저희는 다시 가죠.” 놈을 무시하고 뒤돌아 걷자 멍해있는 다덤벼의 모습을 얼핏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속이 다 시원하네. “언니…저분 따라오는데요?” “뭐?” 한나가 볼을 긁으며 한 말에 깜짝 놀라 뒤돌아 봤다. 그러자 엉거주춤 따라오다 흠칫하는 놈을 볼 수 있었다. “너…설마 나한테 반했냐?” “야! 내가 미쳤냐! 여기까지 와서 나 혼자 놔두면 그게 놓아준 거냐? 그냥 죽으란 거지! 그럴 바엔 그냥 나를 데리고 가!” 목까지 빨개져서 꽥꽥 소리 지르니 나를 포함한 인근 유저들까지 귀를 막기 시작했다. 저놈, 원해 저런 성격이었나? “아이고, 골이야.” “킥킥,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지금 보니 재미있는 분이네요.” “야! 거기 단발! 웃지 마!” 놈은 새빨개진 얼굴로 도끼눈을 하며 주먹을 쥐었고 한나는 황급히 입을 가렸다. “하아, 지금 네가 딴 사람 웃는 거 가지고 태클걸때냐? 그래서 이제 우리보고 어쩌라고. 다시 묶어주랴?” “나를 우리 단원이 있는 곳으로 정중히 모셔!” “그래? 그럼 잘 가.” “야!” “아, 진짜! 말이 되는 소리를 하던가! 네가 애냐? 소리 지르면 장땡이게!” “한나야…언니 이마에 핏줄 돋았어.” “에…곧 터지겠는데요? 그런데 장땡이 뭐에요?” “…진심으로 묻는 거니?” 주리아가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고 한나는 정말 의문인지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마 나를 포함하여 모두들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천연이다.’라고. “휴우, 그럼 이렇게 하자. 당신을 오늘 일일 용병으로 고용할게. 우리를 메히튼 왕국에 도착할 때까지야. 어때?” “흥, 슈바리에단의 두령인 나를 일게 용병으로 사용하겠다고?” “그럼 협상 결렬이네, 잘 가.” “자, 잠깐! 그래, 보수는? 보수는 얼마지?” “보수 같은 소리하네. 저 딴에는 도적이라고 아주 눈이 멀었구만? 그래, 정 원한다면 내 입술을 주지!” “오오오옷! 이, 이, 입술!” “저도 할래요. 저도 용병!” “1년 계약도 유효합니다! 제발 써주세요!” 아차, 이곳에는 유저가 많았지. 농담이 조금 격했나? 이렇게 증인이 많으면 나중에 발뺌할 수도 없는데. “키, 키, 키, 키, 키, 키이――!” 주리아양, 당신이 얼굴 붉히며 당황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입니다. 나는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 숙이고 있는 다덤벼를 보았다. 다덤벼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젠장, 무보수로 하겠다.” 어이, 야. 네 성격을 알기에 안심하고 농담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똥씹은 표정으로 말할 건 없잖아! 『주인님, 주인님!』 어떻게든 협상한 우리들은 다시 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주인님, 주인님!』 다덤벼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옆으로 팩 틀었다. 꼴도 보기 싫은 놈. 그놈역시 반대쪽으로 고개를 틀었을 것이다. 『주인님!』 “아 왜 자꾸 불러대!” “난 말 안했어! 왜 시비야?” “당신한테 말한 거 아니니까, 신경 꺼!” 정령이에 의해 다시 싸움이 벌어지자 한나가 떨고 있는 정령이를 꼭 안아주었다. 『흐끅, 엄마! 주인님이, 주인님이!』 “그래, 그래. 울지 마, 울지 마.” 『저는 단지 어머니가 저 산 꼭대기에 있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인데…힝!』 “뭐?” “뭐?” 한나와 내가 동시에 말했다. 『우리 어머니가 계신 곳이 저 산 너머 꼭대기라고요.』 “언니…그 말인.” “루시아니안 나무가 저곳에 있단 말야?” 나는 무심코 말하다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가까이 있던 주리아와 다덤벼 자식이 들은 모양이었다. “지금 무슨……?” “루시아니안 나무라니 뭔 개소리야?” “아하하, 루시아니안 나무를 보고 싶다고. 하하하하!” 둘은 미심쩍은 듯 그들의 시선이 따끔할 정도로 느껴졌지만 모른척했다. “언니, 어쩌실 거예요?” 한나가 조심히 물어왔다. 나는 생각도 할 것 없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의미인지 안 한나는 조금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금세 잊고 정령이를 데리고 놀았다. 나는 저 멀리 산꼭대기를 바라보았다. 저곳에 루시아니안 나무가 있다니 흥미가 돋지 않을 리 없었다. 한 번도 발견하지 못한 나무니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어쩌면 내 힘을 키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히튼 왕국과 정반대 방향일뿐더러 더 깊숙이 들어가는 거라 어떤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이 많은 유저들을 데리고 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물론 나와 한나, 주리아만 갈 수도 있지만 죽음을 사서 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고개를 저었던 것이었다. “야, 노랑머리. 지금 넝쿨 골짜기로 가는 건가?” 그 말이 별로 달갑지 않았는지 노이슈반스탕님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답했다. “그렇습니다만……?” “뭐 돌아가는 길에서 그곳이 가장 빠르고 그나마 안전하긴 하지만 관두는 것이 좋을 텐데?”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던 다덤벼 자식이 노이슈반스탕님에게 시비를 걸고 있었다. 아휴, 저놈은 누구와 싸우지 않으면 입에 가시 돋나? “야! 가는 길 가지고 꼬투리 잡을 시간 있음 용병답게 정찰이나 해주지 않을래?” “나는 용병답게 위험을 알리는 거다. 너야말로 시비 걸지 말아줄래, 악녀씨?” “정찰도 용병다운 일이거든?” “난 몸이 하나거든?” 놈과 나 사이에 불꽃이 튀겼다. 이런 놈한테 지고 싶지 않아 계속 노려보고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녀석이 먼저 눈을 돌렸다. “흥, 너하고 신경전 하고 있을 시간 없다. 좋아, 네 말대로 정찰이나 하고 오지. 그 사이 파소에들한테 모두 죽든가 말든가.” 다덤벼놈은 목 뒤로 깍지 낀 채 설렁설렁 수풀로 사라졌다. 그래, 흥이다! 가다 오우거나 만나라! “파소에…설마!” 뭔가 유심히 생각하던 주리아가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뭔데, 왜 그래?” “큰일 났어요. 지금 우리…들은…그러니까.” “응?” “저기…그러니까.” 말 못할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던가? 도대체 무슨 일이! “언니, 너무 붙으셨어요.” 한나가 내 팔을 잡고 뒤로 끌었다. 아하하, 쑥스러워서 그랬던 겁니까? “휴, 지금 우리들은 파소에들에게 표적이 됐어요.” “표적?” “여기를 보세요.” 주리아는 어느 나무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나무에는 얼핏 보면 그냥 지나칠 만큼 작은 녹색의 액체가 묻어있었다. “파소에들은 타깃으로 잡은 상대를 포위하기 위해 가는 길목을 미리 예상해 이렇게 침샘을 묻혀두는 습성이 있어요. 이 냄새를 맡고 동료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거죠.” “그거 꽤나 지능적인데요?” 지금까지 보아온 몬스터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한나가 의문을 말했다. 주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그게 이 파소에의 무서운 점이야. 각각은 그리 강하지 않지만 지능이 뛰어나서 뭉치면 정말 강하거든.” “그래서 그놈은 예정지를 변경하자는 거였어?” 주리아는 다덤벼가 사라진 숲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거예요. 우선 다른 길로 가야할…….” “이미 늦었어.” 우리들은 모두 말이 들린 숲을 보았다. 그곳에는 다덤벼가 머리에 묻은 낙엽을 털며 걸어오고 있었다. “이미 1km 너머에서도 침샘을 확인했다. 즉, 이미 광범위로 포위당해서 어디로 가도 소용없다는 거지.” 1km 너머의 침샘을 확인했다고? 우리가 얘기를 나눈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말도 안 돼는 소리다.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그 정도로 저놈은 괴물이란 거겠지. “백 명 정도 유저라면 대규모 싸움도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말을 꺼냈지만 지금까지 분위기로 보아 별로 기발한 말은 되지 못할 것 같았다. 역시나인지 다덤벼하고 주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너 말이야. 아까 상대한 멍청한 오우거놈들하고 이놈들을 같이 보지마라. 이 산맥에서 오우거는 먹이사슬 피라미드로 따지면 최하층에서 조금 위 정도일 뿐이다.” 그렇게 강한 오우거가 최하층에서 조금 위하고? “그럼 파소에들은?” “각기라면 오우거와 동급, 혹은 그 아래. 하지만 무리라면 2위다.” “2, 2위!” “정말요?” 나와 한나가 깜짝 놀랐고 주리아는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심히 끄덕였다. “그럼 어서 이 사실을 파티원들에게 알려야…….” “그만둬, 단발머리.” 다덤벼의 제지의 한나는 급히 몸을 움직이려다 멈칫했다. “지금 말해봐야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게다가 파소에놈들은 혼란을 감지하고 일제히 공격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다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한나가 이마를 찌푸렸다. 가만히 있는 우리들을 보고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다덤벼는 그런 한나를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잘 들어, 철부지 아가씨. 이놈들은 단지 인원수만으로 상대할 수 있는 놈들이 아냐.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딱 두 가지뿐이다. 파티원들을 미끼로 내주고 지금 도망가던지, 아니면 이대로 다 죽던지.” 다덤벼는 마지막 말을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한나의 얼굴이 사색되었다. “어떻게…우리만 살아남자니. 그런 잔혹한 말을…….” “성인군자처럼 말 하지 마. 어차피 게임인데 죄책감 가질 필요 없잖아? 죽은 놈은 죽고 살 사람은 사는 게 이 게임 룰이야.” “아니야…….” 한나는 울먹이고 있었다. 그게 게임의 피폐를 알아서 인지, 나약한 자신 때문인지는 알지 못했다. “너, 게임에 너무 열정적인 거 아냐? 여긴 현실이 아냐. 생명을 구해줘 봐야 상대는 말로만 고마워할 걸? 사탕을 줘서 고맙다 말하는 것처럼 말야. 그러니 남을 위해 울어봤자 소용없어. 오히려 피곤할 뿐이다.” “그런…….” “아닌 척 하지 마. 사실은 너도 도망가고 싶을 거 아냐. 게임에서의 감정? 그딴 건 개나 주라고 해. 썩어빠진 십 원짜리 감정 따윈……!” - 짝! 갑작스런 소리에 놀라 나와 주리아, 심지어 저 멀리 이동하던 파티원들까지 뒤돌아봤다. 다덤벼만이 꺾어진 고개 그대로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아, 아…아,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한나는 심하게 떠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도 그녀가 때릴지는 상상도 못할 정도인데 그러는 본인은 오죽하겠는가. 다덤벼는 자신의 볼을 손으로 감싼 채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킥!” 웃었다. 작은 소리였지만 주위에 있던 유저들 중에 못들은 자는 없었다. “…킥킥, 아침부터 일진이 더럽더니만 결국 게임에서까지 따귀라니. 킥킥킥!” 어깨를 들썩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다덤벼가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너, 각오쯤은 해 뒀겠지.” 다덤벼의 눈빛이 일순간 변했고 갑자기 강한 압박이 몰아쳤다. 그것은 놈의 싸늘한 눈빛에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난 몸을 긴장시켰다. 농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다 죽을지도 몰랐다. “세상의 어머니, 가이아 여신님의 힘은 땅, 땅은 곧 생명이리라. 큐어(cure)”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이번에는 한나가 놈 뺨을 향해 힐을 시전 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이건……. “병 주고 약 주고냐?” 다덤벼는 무슨 의미인지 몰라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조금 알 것 같았다. 한나는 저런 애니까. 자신이 상처받아도 남에게 상처 주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 아이니까. “저기, 괜찮으세요?” “다가오지 마!” 걱정하며 다가오는 한나를 제지한 다덤벼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아으,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애꿎은 바닥을 차며 짜증내는 다덤벼. 모습은 웃겼지만 갈라지는 바닥 때문에 웃을 수 없었다. “야, 악녀! 네 주위에는 왜 이상한 애들만 있는 거야? 내참, 게임하다보니 별 희한한일도 다 겪네. 그래서 어쩔 거야? 너도 저쪽에 가서 죽을 셈이야?” “아니.” 나는 간단하게 말했다. 한나와 주리아는 놀라서 날 보았고 다덤벼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봐, 이게 정상이라니까?” 의기양양한 건 좋은데 말은 끝까지 듣지 그러니. 나는 숨을 작게 내쉰 후, 말했다. “전부 살릴 셈이다.” “뭐?” “언니!” 희비가 교차되는 군. “역시 제가 좋아하는 미소천사 언니에요.” 주리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조금 쑥스러운데? “너희들 전부 미쳤어. 정상이 아니야. 파소에들을 너무 얕보는 거 아냐? 지금까지 그놈들의 포위를 뚫고 달아난 파티는 없었다구!” “그럼 우리가 처음으로 달아난 파티가 되겠네.” 내가 너무도 간단히 받아치자 다덤벼놈이 오히려 멍하니 입을 벌릴 뿐이었다. “하, 하하. 뭐, 됐다.” 놈은 피곤한지 열심히 설명하던 손을 축 늘어트렸다. “나 혼자 가면 그만인데 뭐하는 짓인지. 그래, 너희는 죽든지 말든지.” 녀석은 터덜터덜 반대반향으로 걸음을 옮기다 다시 멈추며 말했다. “용병 건은 결렬이군. 그럼.” - 파앙! 놈은 정말 눈 깜짝할 새에 사라져버렸다. 주위에 떠있는 모래바람만이 놈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었다. “크헥, 콜록, 콜록! 얌전히 좀 사라지지 뭐 이리 남기는 게 많아!” 분위기가 어두워 좀 쇄신 좀 하고자 오버 해봤는데 그녀들의 우울한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실패한 모양이었다. “언니…괜히 저 때문에.” “하아, 왠지 그런 말 할 것 같았는데.” 먼지를 덜어내던 손을 살며시 한나 머리위에 올려놓았다. “한나야, 내가 누구지?” “…소연 언니요.” “게임에서는?” “…힐러요?” 한나의 답에 나는 씩 웃었다. “그래, 나는 힐러다. 별로 멋없는 직업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해온 행동, 신념 모두 지금까지 힐러를 하며 얻은 것들이야. 그러니 이것도 내 뜻이란 말이지.” 나는 손 밑에 얹어져있는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한나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모르겠어요. 게임일 뿐이라는 말이 자꾸만 걸리는 걸요. 제가 너무 감정을 앞세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만 들어요.” 듣고 있던 주리아가 한 걸음 다가와 까치발을 하고 힘겹게 손을 들어 한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리아는 말했다. “그건 바꿔 생각하면 쉽지 않을까? 단지 게임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상을 관철시킬 수도 있는 거야. 한 목숨밖에 없는 현실은 실현하기 어렵지만 여기는 아니잖아?” 내가 하려던 말을 주리아가 하니 새삼 다시 보게 되었다. 매우 동안인 얼굴이어서 생각 못했는데 그래도 누님이긴 누님이었나 보다. “그렇군요. 주리아 언니, 게임일 뿐이니까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였어요! 그럼 저는 많이 죽고, 더 많이많이 살릴래요!” “뭐?” “아니, 그건.” 나와 주리아가 동시에 말하다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킥킥, 그런가.” “한나, 귀여워.” 그리고 우리들은 동시에 웃어버렸다. 한나의 활기찬 얼굴을 보니 어찌하든 뭐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뭐라고요?” “파소에라니! 우린 다 죽었어!” “역시 이 길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역시나 이 얘기는 많은 혼란을 가져왔다. 나는 허리를 90도로 꺾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다리를 끊었기 때문에 이런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그, 그런……!” “하긴 다리가 끊어진 것만 아니었음 여기 오지도 않았겠지.” “그런가?” 웅성거림이 더 심해졌다. 곁에 있던 한나와 주리아가 걱정스레 나를 올려보았다. 나는 그 둘에게 걱정 말라는 듯이 작게 웃어주었다. “그래, 당신 때문이야! 당신만 없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다구!” 클레릭의 말이었다. 한나한테 진후로 조용히 숨어 다녔는데 나서는 거 보면 꽤나 내가 싫은 모양이었다. “무슨 소리입니까! 그땐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플레이아데스 사제가 한 말이었다. 적어도 그 행동을 정당했다고 말해주는 건가.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당당히 말했다. “…하지만, 저희는 여기서 살아나갈 겁니다.” “파소에무리 속에서 살아나가겠다고?” “말도 안 돼, 아무리 명예랭커 5위가 있다지만…….” “하지만 저 분과 함께라면 어쩐지 가능할 것도 같아.” “그때 내가 받았던 다중 힐이라면…….” 다시금 주위가 소란스러워 졌다. 그때 플레이아데스 사제가 말했다. “구체적인 해결방안이 있습니까?” 나는 싱긋 웃어주며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어허.” “이런.” “역시.” 갖갖은 탄성이 터졌다. 나는 손을 들어 조용히 시킨 후, 다시 말했다. “그래서 혼란을 가져올 것을 알면서도 모두에게 알린 겁니다. 머리가 하나라면 힘들겠지만 백이라면 이길 수 있습니다. 파소에의 정보, 이 산맥의 정보등 한 곳에 모아 해결방안을 짭시다.” “그렇구나!” “파소에의 정보라면 제가 조금…….” “이 산맥에는 절벽이 있는데…….” 지금 이 순간, 백 명의 머리는 하나가 되었다. “적혈조, 가라!” - 삐익! 거친 가죽옷을 입고 있는 유저의 어깨위에 앉아있던 매가 날아올랐다. “나무들이여, 나는 그대들과 생명을 공유하는 자. 그대들이 보는 것은 내가 보는 것, 내가 보는 것은 당신의 마음!” 녹색 옷 일색의 여성유저는 주문을 외우며 나무에 손을 올리자 주위 나무들이 일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쪽 3km 뒤에 50마리가량 포착!” 천리안을 사용하던 궁수들 쪽에서 들린 말이었다. “적혈조로 확인 결과 동쪽은 30마리 정도에요!” “나무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남쪽이 가장 많네요. 80마리 정도입니다.” “허허.” “160마리인가…….” 여기저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유저들이 말한 정보가 정확하다면 인근에 보이는 무리만 160마리가량 이라는 것인가. 그 뒤에 더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최소가 우리 인원의 두 배 이상이라는 거군. “어서 동쪽을 뚫어야 해요. 서두르죠!” 나는 한창 동쪽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돌을 나르던 유저들에게 외쳤다.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지맥을 조사하던 탐험가 유저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우리가 개척하는 곳은 백 명의 인원을 수용할 만한 크기의 동굴이었다. 조금 의아해 할 것 같다. 왜 동굴을 개척하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말이다. 우리들의 작전은 조금 무모하고 황당할지도 모르겠지만 물을 등지고 진을 친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결사적인 각오로 임하는 작전, 배수진을 사용하려고 동굴을 파는 것이었다. 후퇴할 곳이 없는 동굴이라면 필사적으로 적을 막아야 한다. 살고자 하는 의지는 사기를 높이고 두 배 아니, 세 배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건 과거 전쟁에서도 많이 사용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이해시키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밖에도 적에게 포위당하지 않는다는 점, 투창을 주특기로 사용하는 파소에들의 공격을 애초에 봉인 시킬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어렵지 않게 찬성을 받을 수 있었다. 아, 이참에 녀석들에 대해 알려줘야겠다. 우리들의 정보를 종합하면 파소에들은 자신이 잡은 짐승이나 사람의 해골을 탈로 만들어 쓰고 다니는 인간형 원주민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창술과 민첩함은 평균 50레벨의 창술사와 맞먹는다고 하는데, 항상 무리지어 다니며 무엇보다도 천부적인 전투능력이 있어 위치의 산맥 두 번째로 강한 몬스터라 했다. “그런 몬스터를 뚫고 나간다라.” 동굴은 확실히 천연의 요새와도 같았다. 하지만 반대로 고립된 것이기도 했다. 녀석들의 지능이 뛰어나고 지구전으로 승부해 온다면?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소연언니, 뭔가 잘 안 풀리나요?” 한나는 내 표정을 보고 걱정하는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건 비단 한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괜히 나 때문에 사기를 떨어트린 격이네. 이래서 대장은 언제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라 했던가? 대장 직도 할 만하진 못할 것 같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 우리들은 동굴을 확보할 수 있었고 천천히 진형을 짜기 시작했다. 진형은 조금 특이 했다. 검사들조차도 활을 들게 하여 장거리에 특화된 진형이었는데, 이렇게 오는 곳이 한 곳 뿐인 동굴이라면 파소에의 민첩도 무시하기 때문에 결정한 것이었다. 물론 길이 좁아 우리 쪽도 화살을 쏘기에 부적절하겠지만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것은……. “미소천사님, 녀석들이 옵니다!” “이런, 조금 빨리 나오는 것 아닌가?” “아! 우리들이 동굴에 고립된 줄 알고 나오는 것이구나! 저희도 어서 준비해요!” 체력이 많은 검사들이 가장 앞으로 나서 석궁을 들었다. 하지만 언제라도 검을 꺼낼 수 있도록 검은 허리춤에 매달아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 바로 뒤에 줄을 맞춰 서 있었다. “일렬, 앉아, 일, 이열 일제사격 준비!” 클레릭 사제가 손을 번쩍 들며 말하자 유저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이 방법이 우리들이 고안한 방법. 옛날 일본이 조총으로 조선을 칠 때 사용한 전법으로 제장전하기 힘든 조총을 끊임없이 사용하기 위해 두 줄씩 공격하고 뒤로 빠져 장전하는 방법인 일제사격을 사용했다. 우리는 그것을 응용하여 조총대신 활시위를 매기기 어려운 석궁을 선택한 것이었다. “와, 왔다!” “크아아아아아!” 파소에들은 동굴 안으로 속속들이 몸을 내밀었다. 구릿빛 터질 듯 한 근육에는 천연 색료로 온몸을 문신처럼 만들었으며 갑옷대신 동물의 뼈를 착용하고 있었다. 특히나 해골 탈 안에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는 광기로 가득 차 멀리 있는 나까지 소름 돋게 만들고 있었다. “사격준비, 발사!” - 피슝, 피피피피핑, 투, 투, 투항! 화살들이 동굴 안을 가득 메우는 순간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파소에들은 천장과 벽에 매달려 피해 오고 있는 것이었다. 녀석들의 다리는 무슨 거미라도 된단 말인가? 하지만. “멀티 컨트롤 샷!” “스턴 샷!” 우리 쪽에는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정확히 표적을 노리는 궁수가 있었다. 근접계열이 쓰는 눈먼 화살 속에 감춰져 날아가는 예리한 화살을 판별하기 힘들 것이었다. 역시나 민첩이 뛰어난 파소에들이 하나둘 화살에 맞아 떨어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접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일제히 창을 투척하는 녀석들. 하지만 그 정도는 이미 예상 범위다.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윈드 봄버!” “적혈조 날개바람!” “마인드 컨트롤! 되돌아가라!” 창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스킬들이 무수히 외쳐졌다. 방어막에 튕겨 나가거나, 바람에 의해 옆으로 흘러가거나, 어느 것은 의지를 지배당해 되돌아가는 것도 있었다. “…마이 우타.” “마이 우타!” “마이 우타!” 파소에들이 알 수 없는 말을 외쳐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르륵 동굴 밖으로 사라졌다. “이겼다!” “녀석들이 도망갔다!” “크하하, 역시 내 활솜씨는!” “넌 한발도 못 맞췄잖아?” “으하하하하!” 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아직 좋아하긴 일러요. 적을 몰아냈지만 죽인 수는 겨우 스무 마리 조차 안 돼요. 게다가 제가 예상한 것보다 더 빨리 나갔습니다. 솔직히 이정도로 지능적일 줄은 예상 못했어요.” 그렇다. 이렇게 빨리 후퇴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지금 전투로 최소 50 이상 잡아야 동굴을 뚫은 노력이 성공하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실패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 쿠쿠쿠쿠쿵! “어, 어!” “입구가, 입구가 무너진다!” “젠장, 결국 이거냐.” 내가 생각한 최악의 시나리오가 바로 이것이었다. 동굴 입구를 봉쇄당해 질식사 되는 것. 하지만 그럼으로써 우리에게도 이틀정도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 안에 반대편을 뚫기만 하면……. “근데 조금 덥지 않아?” “찜질방에 온 거 같아. 게임판타지에서 찜질방이라니 먼일이니.” “서, 설마!” 나는 눈을 번쩍 뜨고 막힌 동굴 입구로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후끈함이 물씬 풍겨올 정도로 뜨거웠다. “젠장, 이 녀석들.” “역시 밖에 불을 지폈나요?” 나는 뒤를 돌아봤다. 내 뒤에는 검은 머리칼을 단아하게 뒤로 넘긴 여성이 파피루스로 만든 노트를 한 장 넘기며 나를 보고 있었다. “아마 주위 나무들을 베어 쌓은 뒤, 불을 질렀을 테죠. 이대로라면 하루는 커녕 다섯 시간도 못 버티고 쩌 죽을 겁니다.” 그 여성은 팔짱낀 채 한손으로 뿔테 안경을 쓸어 올렸다. “당신은 누구시죠?” “아, 한량한 시인은 갈대와도 같이. 제갈공녀라고 해요. 미소천사님.” 싱긋 웃는 그녀의 입보다도 나를 관찰하는 날카로운 눈빛이 더 와 닫았다. 왠지 재미있는데? “전 타테라고 합니다. 보지도 않고 나오는 완벽한 판단, 대단하시네요.” “미소천사님의 본명을 듣다니, 이거 좋은 정보를 얻었네요. 그럼, RPG게임마다 힐러 랭킹 1위를 차지한 타테라는 분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알 수 있을까요?” 깜짝 놀랐다. 설마, 타테라는 이름 하나로 그것까지 예측하다니. 아니면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단지 친구일 뿐입니다. 그런데 힐러들의 랭킹 아이디까지 알고 있다니 꽤나 게임을 많이 하셨나 보네요.” “설마요, 단지 유명해서 알고 있을 뿐이랍니다. 일단 성별부터 다르니 조금은 믿어야겠네요.” “그, 그렇죠. 하하하.” “그런 거죠, 호호호.” “…주리아언니. 소연언니가 입만 웃고 있어요.” “못 본거로 하자꾸나.” 너희들 말 다 들리거든? 지금 저 여성과 신경전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참. “일단은…….” “지금 입구를 뚫어버리는 건 추천하고 싶지 않네요.” 제갈공녀는 파피루스 노트에 무언가 끼적이며 다시 말했다. “지금 이 바위 뭉텅이를 밀어봐야 놈들의 창에 꼬챙이가 될 뿐이에요. 승부는 우리가 버티지 못하는 다섯 시간 후. 지금은 어떻게 다섯 시간을 버틸 것인 가죠.” 그녀는 노트에 말한 것을 휘갈겨 쓴 뒤, 그것을 손가락으로 탁 튕기며 말했다. “…당신, 대단한데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전략들은 그동안 힐러로서 팀플을 하며 배우거나 깨우친 것들을 토대로 했다. 하지만 제갈공녀님은 정말 군사처럼 체계적으로 배운 듯 한 느낌이었다. “저기, 제 에어 월이라면 조금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다섯 시간은 무리…….” “혈응조의 바람날개로 뜨거운 공기를 몇 분 동안 몰아낼 수 있습니다!” “전 화염 저항력이 강한데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게 없을까요?” “저라면…….” 제갈공녀님이 제시한 희망에 유저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아직 확실하진 않았지만 저 여성이라면 어느 정도 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외쳤다. “뜨거운 공기를 잠시라도 막을 수 있는 유저는 오른쪽으로 모이세요! 혹시 밖에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유저가 있나요?” 나는 모여 있는 궁수들을 보며 말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즉, 천리안은 멀리 볼 수는 있지만 투시는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제가 할 수 있어요. 바위의 눈을 빌리면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 바위가 뜨겁다는 게 조금…….” 아까 나무들의 눈을 빌리는 기묘한 스킬을 쓰던 여성유저였다. “혈응조, 어깨에 앉아!” - 삐익! 테이머인 듯 거친 가죽 복장을 하고 있는 남성유저의 명령에 붉은 매는 녹색 복장의 여성유저 어께에 올라탔다. “혈응조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화속성이 꽤 증가합니다. 이거라면 어느 정도 버틸 거예요.” 그 자는 엄지를 추켜세우며 말했다. 녹색복장의 여성유저는 감사했는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감사해요, 숲의 은총이 있기를.” 나는 그 둘을 바라보며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뭐랄까, 알아서 잘하니까 나 혼자 괜히 고민했다는 느낌?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상황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소연언니, 저희들은 나설 일이 없네요?” 한나가 히죽 웃으며 농을 던졌고, 주리아는 피식 웃었다. “훗, 과연 그럴까?” 나는 오른쪽에 모여 있는 유저들을 보며 말했다. 한참 조사하고 있던 제갈공녀님이 허겁지겁 다가와 말했다. “전부 모였지만 한 시간도 못 버텨요. 해결방안이 있나요?” 나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치?” “네?” 제갈공녀님은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물었고 한나와 주리아는 한숨을 쉬며 푸념했다. “그러네요.” “저희가 빛을 발할 때가 됐네요.” “그렇지?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제갈공녀님, 다섯 시간은 저희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그러니 그 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 준비 좀 해 주시겠어요?” “그야 생각해 둔건 있지만 아무리 당신이라도 힐을 사용해서 다섯 시간을 버틴다는 건 무리에요. 차라리 시간을 줄이거나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게…….” 나는 이미 오른쪽에 뭉쳐있는 유저들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나에게는 특별한 스킬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능력을 대폭 늘리지만 24시간 쿨타임에 12시간 동안 스태미나가 최하로 떨어지는 딜레마가 있었고 또 하나는. “땅은 대지의 양기.” 왼손을 아래로 향해 땅으로 가져갔다. 누나의 목소리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뭐랄까, 상대를 압도한다고나 할까? 나는 그 소리를 따라하는 입장이라 완벽히 압도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가능했다. “하늘은 광활함의 천기.” 오른손을 위로 향해 하늘로 가져갔다. 내 율동에 유저들이 하나둘 바라보았다. 한나는 이미 아는 스킬인지라 아무렇지 않았지만 주리아는 처음 봐서인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가운데 서있는 우리는 영원의 우주이니.” 두 손을 크게 원으로 돌려 가슴으로 모았다. 내 율동에 레몬 빛 드레스가 팔락 거렸다. 작지만 녹빛이 은은하게 담겨있는 드레스와 내 손에 모여 있는 작은 빛의 입자가 어울려 유저들은 너나 할 것없이 나를 보고있다. 나는 눈을 떴다. “나의 존엄성을 바쳐, 나의 신념을 바쳐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가 되리라.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모았던 두 손을 빠르게 교차시키며 주문을 외우자 빛은 작은 알갱이가 되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그 빛들은 유유히 세상을 떠돌다 이내 바닥으로 가라앉았고, 바닥은 나를 중심으로 기이한 원형의 문양을 만들어 내었다. 내가 힐러란 깨달음으로 얻은 이 스킬. 어쩌면 보조의 궁극이 아닐까 생각되는 이 스킬이 유저 백 명, 전체에게 발동되었다. “어, 어, 어!” “힘이 솟는다!” - 삐익! “혈응조가 어떻게 진화를! 마스터 스킬이 되기 한참 전인데!” 다들 신기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제갈공녀님은 멍하니 나를 보고 있다 노트에 무언가 쓰며 다가왔다. “명예랭킹 5위에 스킬은 힐 뿐만이 아니었군요. 좋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역시 미소천사님은 헤드보다 하트 쪽이군요.” “하트? 심장이요?” 제갈공녀님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말했다. “미소천사님에게는 그 자질이 보여요. 일단 이 상황을 유저들에게 설명해야겠는걸요?” 모든 유저들의 눈이 나를 향하자 말한 것이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유저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자는 스킬 숙련도가 100%로 되었을 겁니다. 지금부터 피드백과 체력은 저희가 보조하니 다들 최대한 마나를 아끼는 식으로 하여 다섯 시간만 버팁시다!” 그리고 제갈공녀님을 보았다. “다섯 시간이라 말했지만 사실은 파소에들이 직접 문을 열 때까지의 시간이죠?” 제갈공녀님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다섯 시간은 예상한 시간이고 더 늦을 수도,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죠. 하지만 분명 녀석들은 다섯 시간 이내로 열겁니다.” “무슨 근거로?” 제갈 공녀님은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내 의문에 답했다. “파소에들은 성격이 은근히 급하거든요.” “큭큭, 그런가요?” 그 얼토당토 하지 않은 근거에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왠지 제갈공녀님이 그렇다고 말하면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늘따라 기분 나쁜 일 투성이다. 그건 아침부터였다. 어제 아펜하르트를 오래했더니 늦잠 자버려 직장상사한테 호되게 혼났을 뿐만 아니라 프레젠테이션에 쓸 서류를 집에 놓고나와 점심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일하는 도중에 커피를 서류에 쏟질 않나, 작업도중 컴퓨터 전원이 나가질 않나. 집에 돌아오니 온 방에 전등이란 전등은 전부 켜있어 전기세 걱정에 치를 떨며 게임에 접속했다. 하도 화나는 통에 단원들을 모아 거하게 한탕하려고 위치산맥 다리작업을 갔더니 별 황당한 년 때문에 기절까지 하고 결국엔 따귀까지 맞았다. “젠장.” “우카, 우카!” “우카, 우카!” 황급히 입을 막고 기척을 죽인다. 지금 나는 노송나무위에 앉아있다. 여기서 아래를 보니 보이는 건 파소에들에 머리통뿐이다. 만약 들켰다가는 여기서 뼈를 묻겠지. 결국 나 혼자 도망가기는 실패했다. 어쌔신 캐릭이 아닌지라 은신이 없어, 이렇게 나무위에 앉아 기척을 죽이고 있다. 가뜩이나 저 바위너머에 그놈들이 있어 파소에들이 더 모이고 있으니 정말이지 오늘 일진은 최악이라 할 수 있다. “그나저나 다섯 시간째인가.” 아직까지 바위너머에서는 감각 무소식이다. 저 정도 바위라면 쉽게 뚫고 나올 텐데 이상한 일이다. 처음 세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는 무슨 작전이려니 생각했다. 허나 그것도 지금에 와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뿐이다. 아마 잘 말린 고기가 되어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어떻게…우리만 살아남자니. 그런 잔혹한 말을…….’ 그 단발머리 여자는 눈빛이 진심이란 걸 말해준다. 요즘 게임에서 보기 힘든 타입. 하지만 그런 자일수록 더 살아남기 힘들 뿐이다. 칫, 갑자기 담배가 땡기는 군. 아싸리 한숨 자고 올까? “투허!” “무카!” 막 나가려는 찰나, 파소에들이 무너진 수많은 바위위에 물을 뿌리기 시작한다. 그러니 쩌적 갈라지는 돌. 돌 틈새로 저 안에 상황이 어찌되었을까 집중해 본다. “없어?” 안에는 아무도 없다. 어떻게 된 거지? 이미 다른 쪽으로 빠져나갔나? 그럴 리가, 파소에들이 눈치 못 챌 리가 없어. 내가 잠시 당황하고 있는 그 순간. “에너지 버스트!” “스톤 에로우, 발칸!” “썬더스톰!”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무수한 대형 마법들이 튀어 나간다. 그제야 흐릿하게 보이는 영상들. “그래, 일루젼이었군!” 하지만 저런 대인용 일루젼이라니. 게다가 광범위 마법을 어떻게 사용한 거야. 유저들의 능력이 벌써 그렇게 커진 건가? 어쨌든 입구에 모여 있던 파소에 무리들은 남김없이 마법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다. “지금입니다, 돌파!” 악녀의 외침이다. 검을 들고 있는 유저들이 일그러진 공간에서 속속들이 튀어나와 길을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무모하다. 그런 식으론 파소에들에게 포위만 당할 거다. “마이 우타!” “우타, 우타!” “우타, 우타!” 역시나 사방에서 창이 날아든다.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그 창을 막기 위해 여기저기 사제들의 방어막이 펼쳐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든 창을 막기엔 무리다. “으악!” “컥!” “젠장, 저희는 놔두고 전진하세요!” 속도가 현저히 느린 법사계열이 뒤로 쳐지기 시작한다. 이래서는 각개격파도 시간문제겠군. “제, 제가 뒤를 막을게요.” 작고 유약한 전사가 뒤쳐진 법사들에게로 달려갔다. 혼자서 이미 포위된 법사들을 지키겠다고? 어불성설이다! “전체 근력강화, 버서커 모드 발동!”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뭐? 전체 근력강화? 전사들은 힘 스텟에 대폭 투자하면 부분적인 근력강화를 할 수 있고 일정량에 올랐을 때 버서커모드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 고 있다. 하지만 전체 근력강화라니! 근력강화 스킬 숙련도가 전부 풀로 되어있지 않다면 시도도 못할 텐데 어떻게 저런 유저가! “확실히, 미소천사님 버프는 대단하네. 성공할 줄이야. 흐아아아아압! 내 이름은 노을바람! 덤벼라! 훗날 광전사가 될 내 먹이는 누구냐!” 전체 근력강화 덕분에 파소에들의 두 배는 커진 덩치가 꼭, 오우거를 연상케 한다. 저런 무식한 놈이 있다니. 하지만 그만큼 몸이 둔해 법사들 전체를 지켜내기는 어려울 듯 보인다. “악몽의 초례, 넝쿨 덫, 홀드, 폴리모프!” 뭉쳐있던 법사들 중에 한 명이 일어나 주문을 외치자 수많은 파소에들이 공포에 질려 몸을 떨거나, 넝쿨들에 묶여 발버둥치고 어느 놈은 돌처럼 굳었으며 아예 네발동물로 변해버리는 녀석도 생겨났다. 하, 무슨 매즈마법이 저렇게나 많아? 10가지 스킬이 전부 매즈마법 아냐? “노을바람님이라고 하셨던가요? 혼자서는 힘들 테니 제가 서포트하죠!” “우하하! 일확천금을 얻은 기분입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죠?” “움직이지마라고 부릅니다. 아이디처럼 제 주특기는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거죠. 노을바람님은 광폭화 쓰기 전 성격하고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신 것 같네요?” “하하하! 전 몸이 커지면 뭐랄까, 자신감이 생기걸랑요! 일단은 저것들을 처리하고 보죠! 강격!” “그러죠, 일단 이것들을 처리한 뒤에…거하게 한 잔 합시다! 악몽의 초례!” 전사와 매즈법사가 뭉치자 떨고 있던 주위마법사들까지 간간히 마법을 날리기 시작한다. 저쪽은 어찌어찌 버틸 것 같네. 하지만 저 악녀가 이끌고 있는 무리는 아직도 전진하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무모하게 어디가는거야!” 욕지거리가 절로 튀어 나온다. 이래서는 어딜 가던 간에 피해가 클 것이다. 이런 바보 같은 작전이……. “혈응조 타겟 온! 찾았다!” “마이 우타라고 짖은 게 너냐아아아아아!” 악녀가 손가락으로 누구를 가리키며 소리 지르자 모두들 방향을 틀어 누군가에게 돌격한다. “무슨 일이지? 마이 우타라고 짖다니 무슨 말…설마! 창을 던질 때 명령하던 대장을 찾았다는 건가!” 심장이 두근거린다. 녀석들은 그 명령한 대장을 찾기 위해 일부러 창을 던지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파소에의 언어는 알아듣기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한 번에…아니다. 아까 동굴 전투에서 파소에들은 분명히 창을 투척했다. 그렇다면 이 명령은 두 번째. 누군가가 그때 들었던 언어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내 말이 사실이라면 그 자는 엄청 냉철하거나 천재가 분명하다. “우타, 무타!” “무타, 무타!” 하지만 대장격인 파소에도 눈치 챈 모양이다. 부하들을 방패로 하고 뒤로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래서는 너무 늦고 만다. 어떻게 할 셈이지, 어찌할 거냐. 악녀! “산개하세요!” “뭐라고!” 지금 뭉쳐있어도 뚫기 힘든 판에 산개한다고? 투척 창을 피하기 위해 밀집을 푼다는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두 배도 넘는 수를 산개해서 싸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잖아! “이 녀석들아 나를 봐라! 나를 잡는다면 질풍이란 이름을 반납하겠다! 발 민첩강화, 몸 경량화, 쾌속 질주!” 산개한 인원 중 붉은 도복을 입고 있는 남자가 소리 지르며 빙 돌아 따로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도발로 지능적인 파소에들이 따라올 리가……. “우타타타!” “우타타타!” “따라가잖아!” 입이 쩍 벌어진다. 저거 파소에들 맞아? 아니다. 이건 저 질풍이라 불린 유저의 능력이다. 자세히 보니 말할 때마다 입술부근이 붉게 빛나고 있어. 저것은 그냥 도발이 아니라 스킬, 도발이었던 거야. 하, 저런 유저도 이 파티에 있었던 건가? 정말 빠르기도 하군. 스피드로만 따지면 나보다 위다. 저런 숨은 인재들이 이 파티에 저렇게나 많았단 말인가? 나는 악녀를 본다. 아마도 이런 능력을 100%이끌어 내는 건 그녀일 테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들은 결코 오합지졸들이 아니다. 아니, 파소에들을 이정도로 몰아넣는 실력이라면 여느 기사단보다도 확실히 뛰어나다. 질풍이란 자가 대부분의 파소에 무리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동안, 악녀무리는 어느새 파소에 대장에게 거의 근접해 갔다.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가슴 떨림에 벌떡 일어섰다. 잘하면…, 잘하면! 파소에무리를 이기는 첫 번째 파티가 여기서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설마 이정도 까지 인줄은 몰랐다. 나는 옆에 제갈공녀님을 보았다. 차분하고 완벽한 판단력. 그리고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는 냉철함까지. ‘마이 우타’라는 말을 유심히 들은 건 그녀뿐일 것이었다. 나는 외쳤다. “시선을 끌어요! 한나, 주리아! 이쪽으로!” “네!” “네.” 나와 한나, 주리아는 뒤로 슬쩍 빠졌다. 지금까지는 앞에서 통솔했지만 이제는 뒤에서 보조할 때니까. “태초의 재생!” “세상의 어머니, 가이아 여신님의 힘은 땅, 땅은 곧 생명이리라. 큐어(cure)” “세상의 어머니, 가이아 여신님의 힘은 땅, 땅은 곧 생명이리라. 큐어(cure)” 지금 남은 숫자는 대략 50명. 산개한 상태였기 때문에 내가 전방위, 한나는 왼쪽, 주리아는 오른쪽을 맡았다. 우리들이 보조에 들어가자 유저들은 그 기세를 살려 빠르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자연의 외침이여, 그대의 목소리여! 모두를 집어삼킬 혼돈의 울음이여! 거목의 울음!” - 우우우우우우― 녹색 옷을 입은 여성이 바닥에 손을 짚으며 주문을 외우자 주위 나무들이 파르르 떨며 울기 시작했다. 그 울음은 우리들에겐 별 피해가 없었지만 파소에들은 저마다 혼란스러운지 전투에 집중을 못하고 있었다. “버서커 모드 할 수 있는 전사들은 모두 앞을 뚫자! 팔 근력 강화, 버서커 모드!” “서포트 가능한 전투법사들은 여기 모여라! ‘무기속성 주입’발동, 수(水).” “그럼 궁수들은 여기다! 스턴샷!” “격투가들을 얕보지 말라구! 발 민첩 강화, 기문 개방!” “에텔, 프린, 완미야 우리도 가자!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분발하는 유저들의 모습을 보니 걱정은 괜한 기우였던 것 같았다. “무슨 생각하나요?” 제갈공녀님이 어느새 내 곁으로 와 한 말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쟁의 승패는 군사의 철저한 전략 속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그것 말고도 한 가지 더 좌우하는 게 있죠. 바로 병사를 믿을 때 나오는 결과. 지금은 그걸 믿을 때가 아닐까요?” 제갈공녀님은 나에게 손가락을 들며 작게 눈웃음 쳤다. 이미 내 생각을 읽은 것인가? 나는 연신 뒷걸음치는 대장 파소에를 보았다. 믿는다. 그래, 나는 유저들을 믿겠다. 그러니 더 도망가라. 우리가 무섭다고 느끼고 더 멀리 피해보란 말이다! “지금이다!” “마무리 지어라! 그게 너희 역할이잖아!” “지금까지 숨어있게 해준 우리들의 공적을 헛되게 하지 마!” 모든 유저들이 허공에 대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 말들은 하나의 바람이었다. 이 상황을 종결시킬 모두의 바람. “은신 해제, 쳇, 말은 쉽지. 모두들 나와, 마무리다!” “은신 해제, 파소에 대장이여, 사신이 왔다.” “은신 해제, 넌 이미 죽어있다.” 이것이 우리들이 생각해 낸 최후의 전략이었다. 모두들 바위에 나올 때부터 어쌔신들은 은신한 채 뒤돌아 갔던 것이었다. 즉,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행동들은 시선 끌기. 애초에 우리들은 모든 것을 저들에게 걸었던 것이었다. “어쌔신 합동기술, 사신의 춤.” 세 명의 어쌔신들이 빙글 돌며 파소에 대장 근처에 있는 무리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파소에 대장이 도망가려 했지만 어쌔신들이 포위하는 게 더 빨랐다. “어딜 가시나.” “이미 죽은 놈이 움직이면 안 돼지.” “공격!” “우카카카카카―!” - 티티티티티티팅! 파소에 대장은 강했다. 세 명의 합공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내었던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울음을 사용한 여성유저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그건 한나와 주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버서커 모드가 풀렸는지 확연히 밀리는 전사진, 궁수는 화살이 거의 떨어져 갔고, 몹을 몰던 붉은 옷의 격투가는 이미 파소에들한테 둘러싸여 간신히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더 시간을 끌면 우리들이 진다. 좀 더 빨리, 좀 더 빨리! “하앗!” “죽어라!” “끈질긴 놈!” “우카카칵!” 여기저기 잔 상처는 주고 있었지만 경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위 파소에 들이 대장 파소에 곁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어쌔신들은 무언가 결단했는지 각자 단검으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피의 맹세.” 손목에서 뿜어지던 피들은 땅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에 붙어 기이한 문양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순간 그들의 분위기가 확연히 바뀌어 갔다. 저건 뭐지? “저들은 자폭할 셈이에요.” 제갈공녀님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피의 맹세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잠재능력을 끌어올리는 어쌔신의 오의죠.” 제갈공녀님은 안경을 벗었다. 그녀의 눈은 안타까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파괴의 일격!” “그림자 격살!” “폭(爆)!” 푸르게 변한 단검이 날아가고, 파소에 대장 그림자가 갑자기 뾰족해져 솟아오르고, 그 부분 바닥이 터져나갔다. “우카!” 파소에 대장은 뛰어올라 치명적인 공격은 피했지만 많은 상처를 입힐 수는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것도 실패에 불과하……. “마무리 져라, 꼬맹아!” “꼬맹이, 너만 믿는다!” “꼬맹이, 처치해버려!” “은신 해제, 자꾸, 꼬맹이, 꼬맹이 부르지 맛!” - 푹! 모든 유저들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대장 파소에가 떠있는 공중 뒤에서 작은 어쌔신이 은신을 풀고 단검으로 등을 찌른 것이었다. 단검은 정확히 가슴을 꿰뚫었는지 대장 파소에는 허물어져 머리부터 땅에 곤두박질쳤다. “우키아…….” “우키아!” “우키아!” “도, 도망간다. 파소에들이 도망간다!” “우아아아아아! 이겼다!” “우와아아아!” 모두 무기를 높이 들고 함성을 질렀다. 제갈공녀님은 안경을 도로 쓰며 말했다. “이것이 승리한 자들의 기쁨이란 거죠. 그보다 미소천사님 드리고 싶은 말이…미소천사님?” 나는 어쌔신들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그들의 몸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며 하나둘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저희는 이미 죽은 목숨. 신경 쓰지 마세요.” “그것보다 이겨서 다행이네요.” “에라이, 나는 은신할 때부터 이럴 거 같았다니까.” 세 명의 어쌔신들은 죽어가면서도 웃고 있었다. “나는 그것보다도.” “그치? 우리만 죽는 게 억울해.” “꼬맹이놈, 얼마나 오래 사나 보자.” “헹, 약한 형들이 잘못이지. 부러우면 나처럼 은신을 잘하던가.” “뭐? 으윽!” “이게 죽으려고, 억!” 죽어가면서도 농담을 하다니 내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나는 주문을 외웠다. “태초의 재생!” 죽어가는 몸에 힐을 넣었다. 하지만 이것은 꼭 밑 빠진 독에 물을 붙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미소천사님 그것보다도 그 생명의 희생인가 하는 스킬부터 취소하세요. 같이 죽을 겁니다.” “그래요, 이건 절대적인 맹세라 한 번 시전하면 살지 못합니다.” “조용히 해요! 전부 살았는데 당신들만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아직까지 나는 생명의 희생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다. 아직 그 스킬이 시전 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증거. 그런데 이 유저들만 내 눈 앞에서 죽어야 하다니. 내가 용납하지 못했다.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발동 시 술자를 중심으로 반경 100m 안에 있는 모든 아군은 모든 능력치+20 증가, 피드백 확률 10% 감소, 방어력 20% 증가, 이동속도 20% 증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아군의 기술, 마법 숙련도가 100으로 고정된다. 단, 생명의 희생을 받고 있는 자 중 한 명이라도 사망할 시, 술자는 피드백당해 즉사한다. “세상의 어머니, 가이아 여신님의 힘은 땅, 땅은 곧 생명이리라. 큐어(cure)” “세상의 어머니, 가이아 여신님의 힘은 땅, 땅은 곧 생명이리라. 큐어(cure)” 한나와 주리아가 나를 도와 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너희들…….” “살리고 싶은 마음은 언니뿐만이 아니에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한나와 주리아가 씨익 웃었고 나는 마주 웃어 주었다. 바닥에 앉아있던 어쌔신들은 멍하니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던 유저들도 전부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래, 일등공신은 너희들이다. 살아!” “죽지마라!” “살아주세요!” 어쌔신들은 몰려드는 유저들을 보며 머리를 긁적이거나 콧잔등을 매만졌다. “…에헷, 어쌔신 캐릭을 해오면서 이렇게 보람된 적은 처음이네.” “이정도면 한 번 죽는 것도 나쁘지 않지.” “만족, 만족.” “당신들 죽는다는 말, 쉽게 하지 마!” 나는 눈을 부릅떴다. 내 모습에 어쌔신들이 찔끔거렸다. 확실히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점점 빠르게 빠져나가는 생명력. 슬슬 우리는 지쳐갔다. 정녕 방법이 없단 말인가. 내 스킬로는 이런 것도 풀지 못하는 거냐! <‘태초의 재생’스킬이 업 되었습니다. 스킬명이 ‘스바르가 마리아’로 바뀝니다.> <‘스바르가 마리아’ 스킬 발동.> 그 순간 내 등 뒤로 무언가 화악하고 나타났다. “저건 뭐야.” “가디언?” 조심히 뒤를 돌아보자 내 등 뒤에는 양손을 깍지 끼고 기도하고 있는 한 수녀가 상반신까지만 소환되어 기도하고 있었다. 그 수녀는 무엇 때문인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신비롭게 보고 있는 순간 그 수녀 입이 천천히 떨어졌다. [행복, 사랑, 그것은 하나의 축복. 고통, 저주, 그것은 하나의 불행.] “이게 무슨 일이지. 열려라, 잠재 된 힘이여!” 1. 천상의 매혹(패시브) - 미소는 천상의 미소이며 목소리는 가희 천사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지어다. 매력 대폭증가, 인덕 대폭증가, 카리스마 대폭증가, 모든 자가 업신여기지 못하며 우러러 보리라. 2. 침묵의 절규(패시브) - ‘고성방가’, ‘침묵의 웃음’에서 변형된 상태. 목소리가 닿는 모든 생명체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고 직접 당한 자는 3초간 스턴 상태를 주며 5% 확률로 버서커 상태가 된다. 단, ‘침묵의 절규’ 발동 시, 약간의 스태미나와 SP가 하락하며 2분의 대기시간이 있다. 수가 많아질수록 하락하는 수치도 증가된다. 3. 무기속성 주입(액티브) - 8개 모든 속성을 주입시킬 수 있으며 오직 무기에만 속성 주입이 가능하다. 시간은 3분 동안 유지되며 지능, 정신력, 탄력이 높을수록 시간과 능력이 올라간다. 월(月) : 몬스터 자아의 문으로 사용된 륀(달)의 기운으로 월 속성 몬스터에게 공격 시 MP 재생효과 20%증가, 자아를 심는다. 그밖에 몬스터 공격 시 재생효과 20% 감소.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암(暗) : 빛족 / 천족 공격 시 5%확률로 절명 시키며 10% 확률로 치명타, 암의 보호로 인해 피드백 확률 10% 감소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화(火) : 식물형 공격 시 5%확률로 절명 시키며, 그밖에는 초당 20의 지속 데미지를 준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수(水) : 인간형 몬스터에게 10% 확률로 결빙효과가 주어지며 매 공격 시 상처부위는 결빙되어 스태미나가 하락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목(木) : 수(水)속성 몬스터에게 공격 시 자연의 기운이 깃들어 스태미나 및 체력이 흡수된다. 몬스터가 죽을 경우 흡수한 체력을 가진 식물 몬스터 생성.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금(金) : 강철화 시켜 방어력이 10%증가, 이동속도 15%저하.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토(土) : 독 속성 몬스터에게 추가 데미지 10%, 그 독을 흡수하여 다시 토의 기운을 불어넣을 때, 독을 간직한 채로 발동한다. 1회 사용가능.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천(天) : 언데드 / 악마 몬스터 공격 시 5%확률로 절명 시키며 10% 확률로 치명타, 빛의 보호로 인해 일시적인 방어력이 증가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4. 올 원소 친화력(패시브) - 8원소의 조화를 깨우친다. 월(月), 암(暗), 화(火), 수(水), 목(木), 금(金), 토(土), 천(天)의 원소와 친화력이 증가하여 각각 원소의 추가 포인트+10 증가, 원소 친화력으로 인해 피드백 확률 10% 감소된다. 탄력에 따라 원소의 조화가 증가, 지능, 정신력에 따라 추가 포인트 증가한다. 5. 심연의 눈(Abyss The Eye) (액티브) - 진실을 꿰뚫어 보는 미카엘(Michael)의 오른쪽 눈동자. 죽음의 천사이자 대천사인 그는 ‘영원한 빛(Arc Eternity Seraph)’으로 인간의 혼을 거두는 자이다. 그 눈은 모든 진실과 자신의 의지를 발현 시킨다. 심연의 눈을 발동시킬 경우 지능, 정신력, 탄력 300% 증가, 모든 속성 포인트가 50증가, 상대를 바라볼시 권능이 발현되며 상대의 진실을 볼 수 있다. 지속시간 3분, 대기시간 24시간 지속되며 12시간 동안 스태미나 최하로 떨어진다. 6. 트리플스펠 (액티브) - 전투법사의 고유스킬. 전투로서 지식을 깨우친 마법사는 속성을 합치는 방식을 고안해 강한 마법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각 속성을 결합해 마법스킬을 창조한다. 각각 속성 10포인트 이상 올려야 결합이 가능하고 속성 포인트가 높으면 높을수록 스킬의 결합이 강해진다. 지능과 정신력이 높을수록 속성 결합 성공여부가 커지며 조합 개수가 늘어난다. 단, 조합개수가 많을수록 피드백 확률 증가, 하루에 한 번 조합 가능, 조합 실패 시 1시간 동안 지능, 정신력 50%하락. 7. 스바르가 마리아(Svarga Maria) (액티브) - ‘태초의 재생’에서 변형된 상태. 자연의 조율자로 알려진 드루이드는 그 근본이 되는 태양을 숭배하였다. 태양, ‘라’라고 불리었으며 기원전 1만 2천년경 아틀란티스에서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태양이 있는 곳은 천당(스바르가)이 존재했으며 그 존재의 사실여부를 인지시킨 인간이 마리아다. 기독교에서는 성모라 불리었으며 성배의 그릇이었고 모든 이들에게 있어 평온과 안식이었다. 그것을 믿고 따른 드루이드와 위치들은 오늘날 여신으로서 추앙받고 있다. 스킬 시전 시, 마리아 혼이 강림. 태초 드루이드의 재생과는 다르게 빛의 근본에 다다라있다. 기본 재생의 비해 40% 더 회복하며 마나소모량이 20% 줄어든다. 스킬 사용 시, 모든 생명체는 MP, 스태미나가 회복된다. 시전자의 SP 소모량에 따라 회복되는 MP, 스태미나가 달라지며 작게는 10명 최대 100명까지 동시 회복 가능.(숙련도에 따라 동시회복 최대 수치가 달라짐) 빛속성 생명체에게 시전 시, 자신보다 아래계급일 경우 잠시 동안 명령을 내릴 수 있음. 성배(聖杯) 사용 가능. 성배는 불로불사를 위해 전해온 영약의 총칭으로 불로초, 소마, 암리타, 천도라고도 불린다. 성배 사용 시, 어떤 것이든 부활가능. 300시간 대기시간을 갖는다.(물의 구슬 결합 시 대기시간 200시간 감소) 성가(sacred song)사용 가능. 발동 시 모든 상태이상 및 저주 해제. 대기시간 30분.(빛의 구슬 결합 시 모든 능력치 +50 증가) 8. 치료사의 깨달음(패시브, 액티브) - 호메오스타시스. 생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조건은 먹고, 자고, 대사하는 것이다. 각득(覺得), 개오(開悟), 영해(領海), 회오(悔悟), 회유(誨諭), 각성(覺醒), 경성(警醒), 효오(曉悟)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깨달음이니 희생의 길을 선택한 그대는 그 이상을 관철시켜라. 모든 치료스킬 20% 능력 증가. 보조스킬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사용가능.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발동 시 술자를 중심으로 반경 100m 안에 있는 모든 아군은 모든 능력치+20 증가, 피드백 확률 10% 감소, 방어력 20% 증가, 이동속도 20% 증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아군의 기술, 마법 숙련도가 100으로 고정된다. 단, 생명의 희생을 받고 있는 자 중 한 명이라도 사망할 시, 술자는 피드백당해 즉사한다. 주문 : 땅은 대지의 양기, (왼손을 아래로 향해 땅을 향한다) 하늘은 광활함의 천기, (오른손을 위로 향해 하늘을 향한다) 가운데 서있는 우리는 영원의 우주이니(두 손을 크게 원으로 돌려 가슴으로 모은다)나의 존엄성을 바쳐, 나의 신념을 바쳐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가 되리라. ‘생명의 희생’(가슴으로 모았던 손을 교차시키며 빛을 분산시킨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스킬이었다. 하지만 이거라면 저 맹세조차도 깰 수 있지 않을까? “성가(sacred song) 발동!” <‘성가’ 스킬 발동.> 주문을 외우자 내 주위의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마리아라고 불리는 가디언이 기도하던 손을 좌우로 쫙 펼치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 노래는 아아아~ 하는 단순한 음일뿐인데도 잔잔하면서도 왠지 슬플 정도의 묘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 “……….” “…아름다운 노래다.” 마리아를 보고 놀란 유저들은 이제 노래의 심취해 눈을 감는 자들까지 생겨났다. 온 몸의 근육이 이완되는 느낌. 꼭 온천에 들어가 인생에 행복을 느끼던 그런 기분이 들었다. “피의 맹세가…….” “사라지고 있어!” “이건 도대체…….” 제갈공녀님은 입을 쩍 벌린 채 멍하니 나를 보다 말했다. “절대 죽음이라는 어쌔신의 피의 맹세를 지우다니 당신은 대체…….” 마리아는 전부 치료 했는지 노래를 멈추고 기도하는 자세로 돌아왔다. 나는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 말했다. “이정도로 스킬이 변형될 줄은 몰랐네요.” “변형이요?” 제갈공녀님은 안경을 고쳐 쓰며 나에게 다가왔다. “설마 지금 변형이란 뜻이 스킬 숙련도가 꽉 차서 진화된 것을 말하는 건가요? 몇 번째 변형이죠?” “그게…첫 번째 입니다만.” 이 분이 갑자기 왜 흥분하신다지. 제갈공녀님은 내 말에 깜짝 놀라며 말했다. “처, 첫 번째요? 그럼 아직 세 번이나 남았다는 말이에요?” “세 번이라뇨?” 무슨 말인지 몰라 나는 물어보았다. 제갈공녀님은 흥분을 가라안치기 위해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다시 말했다. “아펜하르트 게임의 스킬은 열 개 까지 밖에 습득을 못하는 대신 유저의 뇌파상태를 점검, 판단하여 각 스킬당 총 네 번까지 변형이 가능하게 시스템이 짜여있어요.” “그렇군요. 몰랐던 사실이네요.” “그냥 간단히 몰랐다며 넘어갈 일이 아니에요!” 제갈공녀님이 꽥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휴, 스킬에는 각각의 등급이 있어요. D-급부터 SSS+급까지죠. 절대적이라는 피의 맹세까지 치료하는 저주해제스킬은 최소가 S급 이상이어야 해요. 하지만 저주를 해제하고도 아직까지 남아있는 저 가디언을 보니 가디언이 사용하는 스킬이 아직 더 있다는 거겠죠? 그렇다면 적어도 SS급 이상이겠군요.” 제갈공녀님은 이 게임 지식에 관해 빠삭한 것 같았다. 내가 놀란 눈으로 보고 있자 제갈공녀님은 아직도 모자란 듯이 손가락을 들며 재차 말했다. “아직 놀라려면 한 참 멀었어요. 문제는 스킬들이 변형될 때마다 등급이 올라간다는 사실이죠. 단적인 예를 들어 저희 기사단 단장이 네 번 스킬을 변형시켜 SS급까지 스킬을 올렸어요. 하지만 당신은 첫 번째 변형인데 SS급 이상의 스킬이 나와 버렸죠. 결국 그 스킬을 네 번까지 변형 한다면 신의 영역 SSS+가 될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시, 신의 영역!” “그 정도였단 말이야?” “게임 나온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신의 영역이지?” 유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신의 영역이라고? 이 스킬이? 그 정도로 희귀한 스킬이었던 걸까? 나는 말했다. “SS급까지는 쉽게 올리나 보죠? 그렇다면 그리 특별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제갈공녀님은 내 말에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 SS급까지 올린 저희 기사단 단장님의 명칭은 애디. 명예랭킹 1위의 용병왕이란 칭호를 받고 계신 분이죠. 이제 이해가 가시나요? 그 정도로 미소천사님의 스킬은 터무니없어서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전부 재검토해야 할 상황이라고요.” 제갈공녀님은 노트 한 장을 북 찢어 구겨버렸다. 아마 나에 대한 정보였겠지. 나는 등 뒤에 아직도 기도하고 있는 마리아를 보았다. 기본 치료 능력과 성가, 그리고 성배의 스킬을 가지고 있는 가디언. 치료는 둘째 치고 무엇이든지 부활시킨다는 성배의 능력을 말하면 제갈공녀님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왠지 말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갈공녀님은 그럼 더원 기사단 일원인가요?” 제갈공녀님은 내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렇게 된 거 다시 소개하죠. 저는 음유시인이자 군사, 더불어 더원 기사단 소속, 서열 5위이자 헤드로서 활동하는 제갈공녀라 합니다.” “더, 더원 기사단!” “서열 5위!” 유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경악했다. 용병왕 애디가 만들었다던 더원기사단. 명실 공히 현 게임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며, 반증하듯 기사단 랭킹 1위 자리에 앉아있다. 그곳에서 서열 5위나 하는 제갈공녀님은 어느 정도로 능력이 있는지 예상조차 못하겠다.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죠?” 내 말투는 자연스레 날카로워졌다. 지금까지 속이며 이 파티에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이 아닌가. 무슨 의도가 있는 게 분명했다. “휴, 제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시겠어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 때문인가? 내가 아직도 영문을 몰라 하자 제갈공녀님은 살짝 어깨를 들썩이고 다시 말했다. “지금 게시판에 미소천사 기사단의 대해 어떤 식으로 적혀있는지 전혀 모르시나요?” 그거라면 여기 오기 전에 보았었다. 분명……. [아페타 마을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미소천사 기사단을 주시하라! 지금까지 알려진 랭킹 5위의 미소천사가 있는 미소천사 기사단에 랭킹 6위, 미지의 마검사 멋쟁이와 8위, 일발필중 어둠의조이가 소속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 현재 아페타 마을을 넘어서 인근 피욤 마을, 사리퍼드 마을, 하칸 마을을 모두 정리한 상태며 곧 모르핀 제국의 국경선까지 넘어갈 것으로 예상! 아니 무차별 진격을 막아 줄 륀 기사단은 왜 저지를 하지 않는 거야? 같은 마을에 있으면서 이렇게 방관하는 처세라니 륀 기사단도 허명인 거 같다. 역시 믿을 건 모르핀 제국에 있는 레드드래곤 기사단과, 페어리 기사단뿐인가?] 하지만 그것은 분명 일반 유저가 올린 게시 글이었다. 이런 것은 서버에서 말하는 공지와는 다르게 많은 수의 유저들이 볼 수 있지 않아 단순한 종이쪽지로 변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제갈공녀님은 작게 한 숨을 쉬며 말했다. “아마 미소천사 기사단에 대한 유저의 글 중 하나를 본 것 같군요. 그거 아세요? 미소천사 기사단이 지금 기사단 혁명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저희가 조사한 바로는 분명 기사단 랭킹 7위에 속해있는 륀 기사단과 동맹을 맺고 있어요. 덕분에 아페타 마을은 완전히 당신의 기사단이 장악을 한 상태죠. 갑자기 급부상한 미소천사 기사단, 그곳에 속해있는 랭킹 6위, 미지의 마검사 멋쟁이와 8위, 일발필중 어둠의조이. 그런 불덩이 같은 기사단의 수장인 당신을 저희가 조사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그럼 저를 조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건가요?” 제갈공녀님은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렇기도 하지만 조금 틀려요. 저는 애디님의 명을 받고 당신을 등용, 더불어 미소천사 기사단 전부를 흡수하기 위해 왔어요.” 머리에서 둥 하는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 기사단 랭킹 1위의 더원 기사단이 우리 기사단 자체를 포용하겠다고 말하는 것인가? 어째서. 제갈 공녀님은 내 의문스런 표정을 보고 어느 정도 예상했는지 다시 말했다. “더원 기사단의 최종 목적은 아펜하르트 게임의 통일. 기사단 랭킹싸움같은 것에 시간을 소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죠. 보통이라면 미소천사기사단이 일어나기 전에 무참히 박살내야 했지만 그곳은 아직 단원수가 없어서 저희가 포용할 수 있다는 가설을 제시, 결론적으로 그래서 제가 이곳에 오게 된 겁니다.” 말은 이해가 갔지만 가슴에서 짜증이 일기 시작했다. 게임의 통일, 뭐 큰 포부는 좋다 이거야. 그런데 랭킹싸움같은 것에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고? 무참히 박살낼 수도 있지만 단순히 포용이 가능해 이곳으로 왔다고? 그럼 그 랭킹싸움을 하며 죽어가는 유저는 누가 보상해 주는데? 무참히 박살내는 당신들은 무슨 신이라도 된 단 말이냐? “만약, 거절하면 포용하기 전에 내세운 작전으로 들어가는 건가요?” “언니.” “언니.” 한나와 주리아가 걱정스런 얼굴로 내 소매를 꼭 잡았다. 다른 유저들은 갑작스런 상황인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그 순간 제갈공녀님은 진중한 표정을 한 순간 풀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하아~ 이렇게 말하면 당연히 거부반응이 되어 돌아오겠죠. 하지만 그러면 된다니 애디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람. 미소천사님 사과드릴게요. 저라면 온갖 감언이설로 당신을 설득했겠지만 이렇게 말한 것도 명령인지라. 그래도 저를 봐서 저희 쪽으로 오시는 건…….” “거절합니다.” “언니!” “언니!” 내 단호한 말에 한나와 주리아가 깜짝 놀랐다. “저희는 당신들이 가볍게 보는 랭킹싸움에 목숨을 걸고 있는지라. 더불어 저 역시 애디라는 유저의 생각을 몰라 거부반응이 일어나네요.” “하아~ 역시 그럴 거 같았어요. 그래도 일단 당신의 말은 크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제가 어느 정도 설득은 하겠지만 훗날, 더원 기사단과 미소천사기시단의 기사대전은 절대적일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지금 바로는 아니겠지만 분명 힘을 키워 둬야할 거예요.” 나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갈공녀님의 저런 말투는 꼭 우리를 도와주겠단 말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제갈공녀님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미소천사님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같은 여자이면서도 더 예쁘고, 능력도 강하고. 무엇보다도 남을 걱정하는 그 마음이 마음에 듭니다. 응원할게요. 물론 이건 더원 기사단에서는 비밀입니다?” 혀를 살짝 빼물며 말하는 제갈공녀님의 말은 장난스럽지만 농담같이 들리지는 않았다. “거기까지.” - 푹! 제갈공녀님과 나 사이에 한 대의 화살이 깊숙이 꽂혔다. 동굴 위 언덕에서 들린 말이었다. 작지만 힘 있는 여성의 목소리. 나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보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 생머리, 온 몸은 파소에들이 입은 것과 같이 뼈들로 갑옷을 대신하고 있었는데 그 안쪽은 착 달라붙는 옷을 입고 있어 매우 요염해 보였다. 전체적으로 날카롭고 아름다운 이미지. 그래, 흑장미 같았다. “일단 너희에게 경의를 표하지.” 그 여성은 손뼉을 치며 비웃었다. 그 행동에 제갈공녀님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은 누구죠?” “그걸 알아서 뭐하지? 곧 죽을 텐데.” 그 여성은 팔짱낀 채 거드름 피웠다. 그러다 한 팔을 번쩍 들며. “파소에들을 얕보지 마라! 우리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우쿠쿠쿠!” “우쿠쿠쿠!” 사방에서 알 수 없는 외침의 언어가 들려왔다. 샐 수 없을 정도의 파소에들. 지금까지 보았던 파소에들보다도 1.5배 크고 그들은 창이 아니라 거대한 돌도끼를 들고 있었다. “너희가 희희낙락하고 있을 때 이미 상황은 끝났다. 우리 영역을 침범하고서 살아나갈 생각을 했단 말이냐!” “은신 해제, 당신만 죽으면 또 살 것 같은데요?” 순간 그 여성 뒤에서 꼬맹이라 불린 어쌔신이 나타났다. 그의 단검이 빗살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 챙! 하지만 여성은 뒤를 보지도 않은 채 활로 단검을 막았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보지도 않고!” “나를 상대로 은신이 통할 거라 생각했나? 건방진 놈.” 여성은 반 바퀴 돌아 돌려차기로 복부를 가격하려 했다. 하지만 꼬맹이 어쌔신은 그보다 더 빨리 뒤로 몸을 날려 멀찍이 떨어졌다. “흥, 이것도 피하나 보자. 암속성 결합, 증폭.” 무언가 큰 한방을 쏘려는 건지 한쪽 무릎을 꿇고 주문을 외우는 흑장미 여성. 어라? 그런데 저 포즈는 어디선가 많이 봤던 것……. “세상조차 가르는 필멸의 화살(Arrow of Mortality)!” “맙소사, 피해!”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내가 경악하는 동시에 플레이아데스님과 그의 동생들이 실드를 펼쳤다. - 콰콰콰콰콰콰콰콰―! 바닥을 가르며 날아오는 저 화살은 분명 현빈형의 기술과 같았다. 아니, 현빈형 보다도 더 강력한 화살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현빈형의 기술이?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시에 네 개의 실드와 화살이 격돌했다. - 파가가가가가가각! 허무하게 깨지는 세 개의 실드. 네 개째에서 화살이 조금 주춤했지만 결국 그것조차 뚫고 꼬맹이 어쌔신의 심장에 정확히 틀어 박혔다. “쿨럭, 무, 무슨…이런 화살이…….” 꼬맹이 어쌔신은 자신의 가슴을 보며 경악한 채 절명했다. 그와 동시에. <‘생명의 희생’ 스킬이 취소되었습니다.> <피드백 되었습니다. 절명하였습니다.> <접속이 강제로 종료됩니다.> <‘아펜하르트’접속을 해제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 퓨슉― 덜컹! “이런 젠장!” 캡슐을 열자마자 내 입에서 나온 것은 욕지거리였다. 그 필멸의 화살은 분명 현빈형의 주 기술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보았던 스킬보다도 더 강한 필멸의 화살을 쓰는 유저라니. 아니, 유저이기는 할까? 파소에들을 이끄는 유저라, 이벤트 보스인가? 아니지, 잘 생각해보면 유저가 파소에들를 이끌지 못하리란 법도 없겠지. 나 역시 한 때 고블린들을 이끌었으니까. 그럼 도대체. “그 여자는 뭐야!” “니 누나다, 이 자식아.” “어헉!”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온 몸을 뒤틀다 캡슐 뚜껑에 머리를 부딪치고 그 반동에 한 바퀴 빙글 돌아 캡슐 밖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야야야야야…누, 누나 언제부터 있었어?” 누나는 책상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언제? 아마 내가 회사에서 돌아온 후로 주―욱?” 누나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결코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지금까지 같이 살아온 경험으로 말미암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누나의 옷도 정장 그대로였다. 항상 오자마자 샤워를 하는 누나가 그 모든 것을 제치고 여기 앉아있다는 것은? 꿀꺽. 난 오늘 현실에서도 죽음을 맛보게 생겼다. “이젠 내가 질문해도 되겠니? 누구는 며칠 동안 지랄 같은 놈 하나 때문에 고민하며 오늘도 가슴 떨며 들어왔는데, 누구는 사람을 봉으로 보고 오자마자 하루 종일 게임만 처 하고 있더라. 그럼 지금까지 한 행동들은 전부 연기였을까?” “아하하하…누, 누님. 그, 그건 질문이 아니라 심문하는 것 같습니다만.” “어머? 내가 말을 잘못했나보네. 질문이 아니야. 이건 사형선고지.” 누나는 내가 게임에서 천상의 매혹을 쓰는 것 같은 미소를 자연스레 짓고 있었다. 역시 진짜는 따라할 수 없는 건가? 라기 보다! 지금 나 현실 도피 하는 거 맞지? 이럴 때가 아니야, 일단 살고 봐야……. “지금 도망가면 아이디 비밀번호 바꾼다.” 도망가려던 발이 미쳐 두 발짝 때기도 전에 멈추고 말았다. 사우나에 들어간 것 같이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결정해야했다. 지금 사느냐, 아니면 훗날을 기약하느냐. 나의 결정은……. “누나 미안해!” “나기찬, 너 거기 안 서!”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누나는 아이디 비밀번호를 바꾸진 않았다.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12일전. 이벤트를 노려라 다음날 일요일 오후, 나는 아직도 아펜하르트 정보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본격적인 자료조사에 나섰다. 특히 더원 기사단에 대해, 그리고 스킬들과 내가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 컴퓨터로 수많은 유저들의 게시 글과 리플들을 통해 더원 기사단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용병왕 애디를 필두로 뭉쳐있는 더원 기사단. 규모로만 따져도 단원수가 만단위에 이른다고 한다. 어떻게 단원수가 만단위에 있을 수 있을까 조사해보니 랭킹3위, 결계의마도사 루히비드, 랭킹4위, 드래곤소환사 주르르, 랭킹7위, 영웅슬레이어라 불리는 아이디 미공개의 유저가 주종 멤버로 들어가 각각 다른 기사단을 설립, 랭킹 1위부터 100위는 기사단을 개설 시 기본 300명에서 최대 1,000명까지 기사를 받는 수가 대폭 증가한다는 것을 이용하여 단원들을 받고, 그 기사단들이 전부 모인 연합을 더원 기사단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태식형은 미소천사 기사단도 전부 각각의 단을 창설했는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내가 우리 기사단에 대해서도 너무 무감각하게 지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책임지고 확실히 해야겠지. 그밖에 더원 기사단은 동남쪽 지역을 이미 전부 점거한 상태며 현재 계속 영역을 넓히는데 주력 중이이라 쓰여 있다. 이런 기사단을 이기려면 일단 우리 쪽도 단원을 모으는데 힘을 쏟아야했다. 그건 아마 태식형과 현빈형이 알아서 잘 해고 있겠지.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엔젤단을 키우는 것과 내가 강해지는 것. 다음으로 본 것은 내가 강해지기 위한 정보였다. 이번에 얻은 스킬이 스바르가 마리아. 이 스킬은 분명 경악할 정도로 대단했으나 나는 그 스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물의 구슬, 빛의 구슬을 조합하라는 그 말조차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으니 말 다했다고 볼 수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둠터틀의 심장이나 혼돈의 구슬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이것을 중점으로 조사해 보니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구슬이라 지칭하는 것은 전부 몬스터에게서 나오는 것이라 한다. 몬스터는 아이템을 떨어트리기도 하지만 극소수의 확률로 자신의 원동이 되는 구슬도 드랍 하는데 그 구슬은 몬스터의 고유 속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조합아이템이라 한다. 문제는 구슬상의 어떤 능력이 잠재되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까 말했듯이 그 몬스터의 고유 능력을 가지고 있어 잘못하면 저주가 걸리기도 하기 때문에 마구 조합을 하다간 아이템 자체를 버려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런 글을 보니 그때 하티를 잡아서 나왔던 구슬이 무언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참 아이템에 관심을 두지 않았네.” 지금까지 내가 입고 있는 것도 멘히버 아저씨를 매료시켜 얻은 아이템이었다. 그밖에 아이템이란 것은 전무한 상태. 지금까지 모아둔 돈도 어느 정도 있겠다, 다른 아이템들을 구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것도 많구만.” “혼자 뭘 그리 구시렁대? 뭐야, 아직도 아펜하르트 하냐?” “냅두셔.” 상천이의 관심을 절단하고 다시 컴퓨터를 보았다. 지금 내가 와 있는 곳은 학교 근처 게임방이었다. 예전에 무림일대기를 할 때는 수도 없이 들락거리던 곳이었는데 그 게임을 그만둔 이후로 상천이 자식과 여기 오는 것은 참 오랜만 이었다. “나도 아펜하르트나 할까.” 녀석은 무료한지 턱을 괴며 말했다. 나는 그 모습이 예전에 나를 보는 것 같아 한마디 해 주었다. “범죄자 입문을 허락한다.” “내가 너같이 무식한 줄 아냐? 다리 하나 분질러서 장애인 판정받고 게임해도 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게 더 무식한 거 같은데?” “하긴…….” 녀석도 그냥 해본 말인지 다시 한 번 한 숨을 푹 내쉬었다. “너랑 게임해야 뭔가 재미있는데 요즘 보기도 어렵고. 너 말야! 우리 콤비 플레이가 그립지도 않냐?” “그다지 생각해 보지 않아서.” “매정한 놈!” 남자새끼가 울먹이지 마. 아니, 그런 연기하지 마! “너, 기다려라. 내 언젠가 꼭 그 게임에 들어가서 네 누님 흉내 내는 모습을 구경하고 한껏 비웃어 줄 테다!” “그 이전에 내가 게임을 그만 둘 거다.” 전에 어떻게 해킹했냐는 말에 누나의 아이디를 도용해 사용하고 있다 말한 이후로 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가볍게 콧방귀 뀌어주었다. 네놈이 12일안에 들어 올 수 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 어차피 그런 일은 없을 테지만 조금 무섭군. 날이 슬슬 어둑해질 무렵 나는 집에 돌아왔다. 시간을 보니 누나가 오려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가방만 벗어놓고 바로 캡슐로 들어가고 싶지만 또 어제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아 오늘만이라도 누나가 올 때까지 자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참으로 몸이 근질거리는구만. “밥이라도 먹을까.” 어제 있었던 반찬이 뭐더라. 오, 카레다. 이거라면 간편하게 전자레인지에 돌려먹을 수 있겠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카레를 접시에 퍼 담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그나저나 다들 죽었을까.” 어제 내가 죽은 다음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한나와 주리아는? 제갈공녀님은? 수많은 파티원들은? - 띵! 전자레인지에서 접시를 꺼내 식탁위에 놓았다. 게다가 결국 수도인 메히튼 왕국으로 넘어가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엔젤단의 명성을 쌓기 위해 어제 그곳에서 벌어진 인터 기사단과 한니발 기사단의 기사대전에 용병으로서 참가하려했건만 전부 물거품이 돼 버린 것이었다. “아뜨뜨! 너무 데웠나.” 생각 없이 한입 먹었다가 된통 당했다. 물 한잔을 들이켜 혀를 헹궜다. 괜히 마음만 앞섰던 것 같았다. 진작 내 힘부터 키웠으면 좋았을걸. 조금 렙을 올렸다고 우쭐대다 당한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이번에 게임에 접속만 해봐라. 내가 이번에야 말로……. “…나 완전 게임에 중독된 건가?” 생각해보니 밥 먹으면서 까지도 게임생각이라니 참 나답다는 생각도 들지만 너무 단순하게 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 포만감 가득한 배를 두드리며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내 손은 자연스럽게 리모컨을 들고 있었다. “게임채널, 게임채널.” 이제 내 손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게임채널 버튼을 눌렀다. 여기서도 꽤나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문제는 게임이 너무 많이 포괄적이라는 것. 아펜하르트에 대해 방송하고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 업데이트 된 ‘암흑의 군단 침공’ 참으로 대단했죠?} {그럼요, 저는 한시도 눈을 땔 수 없었다니까요?} {하하, 저도 쥬리씨만큼 오늘 정말 멋진 장면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멋진 장면들만 모았으니 감상해 보시죠!} {어머머, 그럼 기대할게요, 재필씨.} “어라? 오늘이 그날이었어?” 예전에 공지로 본 게시판에서 본 기억이 났다. 아마 우리가 둠터틀을 잡은 것 때문에 화가 난 마왕 베르제브브가 유저들을 침공한다고 하던 이벤트였지? 그건 이주일 뒤라고 했으니 이틀 전 , 금요일에 해야 하지 않았나? 아, 유저가 많이 모이는 주말을 노린 거구나. 어제 눈팅과의 사건만 아니었다면 오늘 아침부터 달렸을 텐데 아쉽기 그지없었다. TV영상은 수많은 유저들과 그 배 이상 가는 좀비들의 화려한 격투로 시작을 장식하였다. 아펜하르트에 현존하는 3제국, 6왕국 전체를 상대로 좀비들이 수도를 장악하기 위해 몰려오는 장면은 정말이지 오싹할 정도로 살 떨리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재필씨, 이렇게 많은 수의 몬스터들을 어떻게 다 잡죠?} {좀비란 몬스터는 그다지 강한 몬스터가 아니기 때문에 오늘은 모두 수월하게 막았다고 하네요. 문제는 내일부터입니다.} {내일부터요?} {오늘은 화려한 첫 장식을 위해 작은 이벤트에 불과했고 본격적인 침공은 내일부터라 하네요. 경험치도 세 배로 올라가니 오늘은 다들 좋아하고 있지만 과연 내일도 지금 같은 상황이 될지 의문입니다. 그밖에 이번 침공으로 인한 많은 이벤트를 준비했다고 하니 즐겨주시면 될 것 같네요.} {내일은 정말 더 재미있겠네요.} 경험치 세 배라고? 만약 오늘 나도 좀비사냥에 투입되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아깝다는 생각에 입맛을 다셨다. - 덜컹. “나왔다.” “어, 왔어?” 나는 TV에서 눈을 때고 뒤돌아보았다. 누나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매우 지친 표정으로 터덜터덜 구두를 벗고 있었다. “회사에서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어? 아니…뭐.” 누나는 살짝 내 대답을 회피했다. “이번 이벤트 때문인가?” “어라? 어떻게 알았어?” 그야 빤하지. 지금 아펜하르트에서 가장 중요시 되고 있는 게 이번 이벤트 일거고. 누나가 하는 일이 아펜하르트에 관련된 일이라면 그것밖에 더 있겠는가. “이번 이벤트 때문에 내가 얼마나 쪽팔리는데…뭐 넘어가고 그보다 기찬아.” 누나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무언가 진지하게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말없이 누나를 볼 뿐이었다. “너…내가 다시 게임 그만두라 말하면…화낼 거야?” 나 역시 표정이 굳었다. 화난 게 아니라 귀신을 본 것처럼 깜짝 놀라 안면이 멈춘 것이었다. “에잇! 내가 뭘 생각하는 거람. 실언했다, 어차피 그만두기 이주도 안 남았는데 너무 이기적인 말이었어. 없던 일로 치자. 대신, 약속은 절대로 지키는 거다?” “무슨 일인데?” “별일 아냐. 그냥 단순히 누나의 과잉반응.” 누나는 그렇게 말하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샤워를 할 모양…그래도 그렇지. 개인 프라이버시도 없나, 남정네 앞에서 옷을 휙휙 벗고 난리야! 그래도 인식은 하는 건지 속옷은 입고 가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시답잖은 생각을 털어버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눈팅 눈치 볼 것도 없겠다. 슬슬 시작해 볼까나? “으흐흐흐흐.” 난 정말이지 게임중독자가 다 된 것 같았다. [접속되었습니다, 즐거운 시간되십시오.] <아펜하르트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예쁜이’님 시작 포인트로 이동합니다.> 익숙한 음성을 들으며 나는 빛 무리에 감싸였다. 천천히 눈을 뜨자 아페타 마을 시작 포인트인 중앙 광장이었다. 어제 만약 메히튼 왕국에 도착했더라면 그곳으로 자연스레 시작 포인트가 이동되었을 텐데. 정말이지 그 흑장미 여성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구만. “일단 내가 얼마를 가지고 있더라.” 그동안 렙업하며 얻은 자잘한 잡템을 판돈이 얼마나 있나 보았더니 8골드 28실버가 있었다. 이 게임은 돈 모으기가 하늘의 별 따기구먼. 게임 자체가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그렇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모은 게 10골드조차 안 되다니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이 돈으로 아이템을 사기 전에, 열려라, 마음의 문이여!” 성별 여 이름 예쁜이 종족 인간 나이 23세 직업 일루미네이터 Level 70 소속 없음 칭호 미소천사 힘 18 월(月) 26+10 민첩 17 암(暗) 28+10 체력 15 화(火) 25+10 지능 79 수(水) 29+10 정신력 131 목(木) 32+10 행운 18 금(金) 30+10 탄력 23 토(土) 36+10 방어 18 천(天) 38+40 종족특성 : 없음 칭호특성 : 용사, 모르핀 제국에서 얻은 칭호이다. 인내심과 행운이 깃든다. 행운+10, 피드백 확률 5% 저하. 직업특성 : 일루미네이터, 풀어서 ‘빛을 밝히는 자.’라고 부른다. 모든 빛속성 마법 30% 저항력을 가지며 5%의 확률로 반사시킨다. 천속성 포인트 +30, 빛이 있는 곳에서는 피드백 확률 10% 저하. 포인트 : 145 스킬 1. 천상의 매혹 <숙련도 91/100> 6. 트리플스펠<숙련도 없음.> 2. 침묵의 절규 <숙련도 73/100> 7. 스바르가 마리아 <숙련도 1/100> 3. 무기속성 주입 <숙련도 32/100> 8. 치료사의 깨달음 <숙련도 16/100> 4. 올 원소 친화력 <숙련도 없음> 9. 5. 심연의 눈 <숙련도 Full> 10. 어제 파티에서 2렙이 올라 어느새 70이 되어 있었다. 흠, 이상하다. 천상의 매혹 숙련도가 원래 저리 높았었나? 반 정도 찾을 거라 생각했는데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지금까지 쓰지 않은 포인트를 어디다 올리느냐 인데. “지능? 정신력? 탄력? 으으흠.” 지능은 지식습득, 마나를 받아들이는 한계치, 마나를 뱉어내는 한계치가 증가한다. 정신력은 인내력, 즉사확률, 마나로 인한 피드백 확률과 마법시전 방해의 효과를 줄인다. 탄력은 마나의 조화, 유연성이 높아지며, 마법저항력이 높아지는 걸로 알고 있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 결정을 내렸다. “지능 145 포인트 주입.” 지금 나에게 문제는 바로 마나 량이었다. 현재 조금만 마법을 사용해도 SP가 고갈되는 이 문제점을 보안하기 위해 지능에 올인 한 것이다. 이걸로 조금은 나아지려나? 직접 마나의 양은 볼 수 없어 답답하긴 하지만 잘 되었으리라 믿었다. <‘무기속성 주입’ 스킬 능력이 향상되었습니다. 지속시간 12분 증가.> <‘올 원소 친화력’ 스킬 능력이 향상되었습니다. 추가 포인트 5 증가.> <‘심연의 눈’ 스킬 능력이 향상되었습니다. 지속시간 2분 증가.> 그때 알려오는 수많은 음성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대폭 포인트를 주입하니 몇몇 가지 스킬들의 능력이 향상되었나보다. “이거 시작 좋은데?” 나는 다음으로 인벤토리 역할을 하는 주머니를 뒤져 아이템들을 꺼내었다. - 불완전한 공허의 구슬 (유니크) 공허로 가득한 기운이 느껴진다. 하지만 매우 불완전 하다. - 둠터틀의 심장 (유니크) 암흑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매우 불완전 하다. - 통신구슬 (일반) 통신을 할 수 있는 구슬. 목록을 열면 접속자를 확인할 수 있고 구슬끼리 맞대면 친구로 입력된다. “흠.” 나는 통신 구슬을 도로 집어넣고 나머지 두 개의 구슬을 손 안에서 굴렸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는 구슬이라. 그대로 쓸 것인지 아니면 돈이 많이 들더라도 감정을 해야 하는 건지 고민이 되었다. “이것을 감정하면 아이템은 포기해야 하는 건가.”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쯤. “저기, 혹시 미소천사님 아니신가요?” “네?” 내가 고개를 들자 어떤 여성 유저가 나를 유심히 보더니 맞다 며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맞아! 이 얼굴! 미소천사님 맞죠?” “우와, 정말 미소천사야? 명예 랭킹 5위가 여기는 무슨 일이지?” “나 싸인 받아도 될까 몰라.” 내 안면이 급속도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어제 나는 엔젤단 명성을 올리기 위해 미소천사복장 그대로 플레이 했었지. 그 모습 그대로 중앙 광장에 서 있었으니 유저가 몰리지 않을 리가 없지. “사람 잘못 봤습니다!” 나는 그 자리를 빠르게 지나쳤다. 물론 천 로브를 꺼내 입으면서 말이다. 일단 오랜만에 멘히버씨나 보러가야겠군. “어서 오세요…어이구, 이게 누구십니까.” “오랜만이에요.” “하하,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 뵈니 반갑…응?” 갑자기 멘히버씨가 나를 뚫어지게 보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가슴 쪽을…잉? “그동안 많이 외로우셨나 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요즘 사람이 하도 없어서…으잉?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옷이 너무 해져있어 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해져요?” 나는 로브 안쪽에 입은 드레스를 살펴보며 말했다. 보기에는 평소랑 같은데 멘히버씨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 걸까? “이거, 안되겠군요. 지금까지 제가 드린 아이템들 수리는 몇 번 하셨습니까?” “수리요?” 지금까지 아이템에 내구도란 표시가 없어 그다지 생각하고 있지 않았는데 내구도란 게 존재했었던 걸까? “설마 한 번도 하지 않은 겁니까?” “아하하, 그게 그렇게 되네요?” “어서 전부 줘 보세요!” 멘히버씨는 내 말에 깜짝 놀라며 손을 내밀었다. 결국 아이템을 넘겨받은 멘히버씨는 돋보기로 요리조리 살펴보기 시작하더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손쓰지 못할 정도는 되지 않은 모양이군요. 저기…음, 어라? 내가 지금까지 이름도 모르고 있었나? 많이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이름도 모르고 있었지?” “타테입니다! 타테!” 그 우호도가 내 매혹 때문이란 걸알까 모르겠다마는 무슨 일이 생길까싶어 얼른 이름을 알려주었다. “어, 흠. 그래요, 타테양.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에는 내구도가 있어요. 간혹 신급아이템은 내구도가 없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예외니 넘어가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어떻게 지금까지 몬스터를 잡았습니까?” “그야…….” 나는 지금까지 직접 사냥이라기 보단 뒤에서 보조만 해왔었으니 알 수 있을 리 없지. “아이템의 내구도가 떨어지면 감소하는 수치만큼 능력치도 줄어들고 파괴될 우려가 있습니다. 더구나 너무 많이 해져버리면 고치지도 못하니 다음부터는 주위하세요. 이 아이템들도 조금만 늦었으면 전부 새로 바꿔야했을 겁니다.” “그렇군요. 주의하겠습니다.”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너무 해지면 고치지도 못한다니 오늘 여기 들르지 않았다면 어느 날 갑자기 스트립쇼를 할지도 몰랐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생각만 해도 살이 떨렸다. “일단 이 물건들은 내가 고치도록 하죠. 그런데…타테양은 직업이 마법사 아닙니까?” “왜 그러시죠?” 멘히버씨는 고개를 몇 번 갸웃 거리더니 말했다. “분명 이 은은한 녹빛은…역시, 이 아이템에 루시아니안 나무 잎사귀가 녹아들어있군요. 하지만 루시아니안 나무 잎사귀는 사제 전용일 텐데. 제가 지금까지 타테양을 잘못보고 있었던 건가요?” 멘히버씨가 잘못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시작은 눈팅이 마법사로 했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후천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겠지. “제 직업은 사제, 일루미네이터입니다.” “이, 일루미네이터? 천상의 대행자, 빛을 밝히는 존재란 말입니까? 이거 고위 사제셨군요! 그런데 왜 성표가 없습니까? 그러니 제가 헷갈릴 수밖에요.” “성표요?” “…설마 그것도 모르는 겁니까?” 멘히버씨는 나를 어처구니없는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이거 괜스레 쑥스럽네. “일단 이 물건들은 제가 고치고 있을 테니 사제 신전으로 먼저 가 보셔야 할 것 같군요.” 멘히버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아이템을 유심히 점검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상황에서 뭐라 말하기 그래 일단 밖으로 나왔다. 이거 아이템 사러 왔다가 아이템만 빼앗기고 쫓겨난 기분이네. “흠, 신전이라.” 아페타 마을의 신전은 그리 커다란 신전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변방 마을에 무슨 커다란 신전이 있겠는가. 신전이 있는 게 더 신기할 정도다. 아페타 마을은 처음 시작하는 포인트 지점이기도 해서 편하게 직업들을 선택할 수 있게끔 이렇게 도서관이나 신전이 배치되어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대장간이나, 아이템상점, 용병소개소 등 저런 것들도 직업으로 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전이 어느 쪽이더라.” 내가 알기로는 이곳 신전은 가이아 여신을 믿고 있는 곳인 걸로 알고 있는데 한나역시 이곳 사제라서 나 역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었다. “여긴가.” 전체적으로 대리석을 이용해 만들어진 건물이라 깨끗한 흰 빛을 발하고 있는 이 신전은 창문이 전부 아치모양으로 만들어져 전체적으로 현대의 교회분위기를 풍겨왔다. 문 옆에 있는 가이아여신 조각상 대신 십자가가 있었다면 교회라 불러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었다. “창명의 하늘이 우러러 보는 것처럼.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 풍족한 대지의 여명이 깃들길. 성표를 받으러 왔습니다.” 지금 인사법은 가이아 여신을 믿는 신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인사법이었다. 전에 한나가 나에게 이런 인사를 해서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이 인사를 한 상대를 보았다. 갈색의 사제복을 입고 있는 차분한 인상의 남자 사제였다. 저 갈색은 가이아 여신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해서 나는 어렵지 않게 이 신전의 사제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사제는 내 복장에 살짝 눈길을 주더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성표를 받으러 오셨다고요? 죄송합니다만, 마나를 탐구하는 자에게는 성표를 드릴 수 없습니다.” 나는 내 복장을 보았다. 지금 미소천사 세트를 멘히버씨에게 넘겨준 까닭에 지금 입고 있는 것은 가장 처음에 입었던 옷들. 그러니 당연히 마법사로 오해 받지.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 한손 나무 지팡이 (일반) 숙련도 70/100 초보 유저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지팡이. 직접 공격하거나 마법을 사용할 때 정신집중의 도움을 준다. 변형은 최대 3번까지 가능하며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사용이 편안해진다. - 천 로브 (일반) 숙련도 77/100 초보 유저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천 로브. 추위를 어느 정도 막아 줌. 변형은 최대 3번까지 가능하며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사용이 편안해진다. - 가죽 상의 (일반) 숙련도 71/100 초보 유저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가죽 상의. 추위를 어느 정도 막아 주며 충격도 어느 정도 흡수해준다. 변형은 최대 3번까지 가능하며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사용이 편안해진다. - 가죽 바지 (일반) 숙련도 76/100 초보 유저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가죽 바지. 추위를 어느 정도 막아 주며 충격도 어느 정도 흡수해준다. 변형은 최대 3번까지 가능하며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사용이 편안해진다. - 가죽 신발 (일반) 숙련도 96/100 초보 유저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가죽 신발. 추위를 어느 정도 막아 주며 충격도 어느 정도 흡수해준다. 변형은 최대 3번까지 가능하며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사용이 편안해진다. “복장은 이래도 저는 사제입니다. 시작은 마나를 탐구했으나 지금은 하늘의 파편이 되려 합니다.” 하늘의 파편. 이것은 사제가 되려 함을 말한다. 물론 마나를 탐구하는 자는 마법사를 말하는 것이다. 내 말에 남성 사제는 잠깐 놀랐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평상심을 찾고 말했다. “오, 이런.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하지만 마나를 탐구하는 것 자체가 하늘에 있어서 큰 죄. 성표를 받기 이전에 몸에 정화부터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정화요?” “따라오십시오.” 남성 사제는 그렇게 말하며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신전을 걸어 들어갔다. 의외로 높은 계급의 사제인지 입구에 있던 많은 사제들이 전부 고개를 숙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나는 그 사제를 따라 들어갔는데 주위에 유저들로 보이는 많은 사제들이 나를 흘끗거리며 보고 있었다. “여기에 웬 마법사지?” “아아, 또 사제 스킬을 배우고 싶어 하는 마법사인가.” “그래봤자 정화의 방에서 퇴출당할 텐데 뭘.” “킥킥, 또 한 명의 마법사가 죽겠구나.” “하여튼 개념이 없다니까.” 사제 스킬을 배우고 싶어 하는 마법사? 그들의 얘기를 유심히 들어보니 저런 마법사가 많았던 모양이었다. 하긴 사제 스킬들 중에서도 마법사에게 유용하게 쓰이는 마법이 많기는 했지. 실드라든지, 천벌이라든지 말이다. 흠, 나는 독학으로 사제 스킬을 배웠으니 별 필요는 없겠지만 아마 이 복장을 보고 나 역시 그런 마법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여기입니다.” 남성 사제는 어느 문을 가리키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먼저 들어가라는 뜻인 것 같았다. 나는 조심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주위 아무것도 없고 중앙에 작은 물웅덩이만 있을 뿐이었다. 허나 신기하게도 물웅덩이는 작게 요동치고 있었다. 어디서 기포라도 나오는 걸까? 꼭 목욕탕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 여기서 연출되고 있었다. “이곳은 정화와 예지의 방. 저곳에 들어가면 사제의 몸으로 정화가 될 것입니다. 허나 명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남성 사제는 진중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보았다. “헛된 마음을 품고 들어가면 벌을 받게 됩니다. 또한 마음이 심란하다면 퇴출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자는 나에게 경고를 하고 있었다. 아까 유저들이 한 말이 이것이었던가. “그런 마음이 없다면 들어가도 아무렇지 않다는 뜻입니까?” 사제는 내 말에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모든 뜻은 가이아 여신님이 결정하실 일. 보통은 물이 안정을 찾고 잔잔하게 가라앉을 겁니다. 허나 확실한 답은 없습니다. 그 뜻을 찾는 일이 바로 저희의 임무니까요.”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화와 예지의 방이라고 했던가? 저 사제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수렵하고 뜻을 찾아내는 사제라는 말일 것이었다. “그럼 옷을 벗으십시오.” “그렇군…네?” 내가 방금 말을 잘못 들었나? “정화를 하는데 사기가 물들어간 옷을 입고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전부 벗으십시오.” “아, 아하하. 저, 전부요?” 나는 슬쩍 고개를 내려 나를 보았다.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 그리고 매끈한 다리. 이, 이거 내 몸이 아니라서 그런지 더 부끄러운데. “안 벗으면 안 되는 겁니까?” “안됩니다. 여기는 신전. 부끄러운 감정을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사제의 눈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뭐, NPC니까 그다지 당신 때문에 걱정은 되지 않아. 문제는 나란 말이다! “…원래 옷을 벗을 때 눈을 감고하십니까? 불편하지…….” “안 불편해요!” 젠장, 단추가, 아, 여기 있군. 그래도 속옷이 없으니 벗기는 편하…내가 지금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얼굴이 빨개지셨습니다만.” “더, 더워서 그래요!” “그럼 문이라도 열어둘…….” “하지 맛!” 이곳에 와서 내가 뭔 고생이람. 어떻게든 옷을 벗고 남성 사제가 준 수건을 몸에 둘렀다. 이거라도 있어 다행이지 잘못했으면 영원히 눈을 못 뜰 뻔했다. 지금 이 사실을 눈팅한테 들켰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만 해도 몸이 오싹할 정도였다. “그럼 정화를 시작하십시오.” 발밑에 보글거리는 물을 보고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엉뚱한 마음으로 이곳에 들어가면 벌을 받는다고? 나는 강해지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 그런 것도 엉뚱한 마음이 아닐까? 솔직히 가이아 여신을 믿는 사제가 되고 싶어 이곳에 온 것은 아니잖아. 그런 내가 이곳에 들어가도 괜찮은 걸까? “어서 들어가십시오.” 다시 한 번 재촉하는 사제의 말을 듣고 나는 생각을 접어야만했다. 그래, 어떻게 되었든 일단 들어가고 보자. 정 안되면 스바르가 마리아라도 불러서 치료해버리지 뭐. - 퐁당. 발끝을 담가 보았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저 미지근한 상태. 나는 다시 침을 삼키고 완전히 두 발을 담가버렸다. “아하하, 서, 성공인가?” 잔잔히 가라앉은 물들. 오, 가이아 여신이시여. 정말 감사하나이다. 내 평생 이렇게 고마움을 느낄 줄은 상상도 못했……. - 푸화아아아악! 그 순간 내 발밑을 시작으로 백색의 빛이 물 전체를 지나 방 전체로 번지기 시작했다. 꼭 페인트를 칠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이건!” 남성 사제는 크게 놀랐고 나 역시 크게 놀랐다. 젠장, 그렇게 잘될 리가 없지! “안 되겠다, 스바르가 마리아 발…….” “비, 빛을 밝히는 자의 성역!” 내가 스킬을 외치려하는 동시에 터진 사제의 말이었다. 덕분에 나는 주문을 외우는 도중에 들었던 손을 엉거주춤하게 멈춰버렸다. “이럴 수가! 다, 당신은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벌 받을 때 일어나는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거 죽다 살아난 기분이네. “직업이 마법사가 아니었습니까? 당신은 대체 누구…….” 호오, 이건 내 직업이 나타나는 현상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벌벌 떨 필요가 없겠지. 멘히버씨도 내가 고위급 사제라 했으니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주눅들 필요는 없겠지. “저는 일루미네이터입니다.” 나는 살짝 눈웃음치며 말했다. 사방의 새하얀 빛, 그리고 내 미소가 한데 어울러져 신비함을 만들어 내었다. <‘천상의 매혹’ 발동.> <‘천상의 매혹’의 숙련도가 9 상승했습니다.> <‘천상의 매혹’의 숙련도가 Full이 되었습니다.> <‘천상의 매혹’스킬이 업 되었습니다. 스킬명이 ‘빛의 매력’으로 바뀝니다.> 내 말에 남성 사제는 갑자기 풀썩 엎드렸다. “빛을 걷는 자, 일루미워커가 빛을 밝히는 자, 일루미네이터를 뵈옵니다!” 일루미워커? 빛을 걷는 자? 그 남성 사제는 고개를 숙인 채 계속 말했다. “마왕 침공에 맞춰 이렇게 고귀한 분을 뵙는 것은 분명 가이아 여신님의 깊은 뜻. 저희 아페타 마을 지부, 모든 일루미워커들은 일루미네이터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저 말은 과연 무슨 뜻일까? “저는 단지 성표를 받으러 왔을 뿐인데요?” “일루미네이터의 성표를 그 아래 신도가 줄 수 없는 일입니다. 모르핀 제국 수도에 계신 교황님을 뵈어야할 것입니다.” 뭔가 일이 꼬이는 것 같았다. 교황에게 성표를 받아야 한다고? 에구, 또 언제 모르핀 제국까지 간담. “그보다 성함을 알려주십시오. 저희는 그 성함을 받들어 이 땅에 반석으로 삼아…….” “아니, 아니. 그건 좀 그러네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가로 막았다. 일단 정리할 필요가 있겠는걸.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이 아페타 마을지부의 일루미워커라는 신도들을 거느릴 수 있다는 말인데 정확한 수도 모르겠고, 성표를 받기위해서는 모르핀 제국수도까지 가야하고. 아참, 스킬도 분명 업 되었던데. “하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저만치 놔두고 일단 옷부터 다시 입었다. “일단 다시 멘히버 아저씨에게 가고 나서 모르핀 제국에 가야하는 건가.” “그렇게 수고하실 필요 없습니다.” “응?” 고개를 살짝 들어 내 발밑을 보고 있는 남성 사제가 한 말이었다. “지하에 워프 게이트가 있습니다. 그것을 이용하면 손쉽게 모르핀 제국으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하셔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워프게이트라니, 아페타 마을에는 워프게이트가 전혀 없었다. 작은 마을에 워프게이트가 있는 것도 조금 웃기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곳에 있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해야 할 것이라니? “제가 해야 할 일이요?” “지금 바깥의 상황은 말 그대로 난세. 제국들과 왕국간의 다툼이 끊이질 않고, 부끄럽지만 종교 간에도 많은 갈등이 쌓여있는 상태입니다. 게다가 엎친 대 덮친 격으로 마왕의 침공까지 일어났으니 저희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저희들에게 빛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즉, 길의 방향을 제시해 주라 이겁니까?” 남성 사제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나를 올려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일 뿐. “하아,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저에게 중대한 일을 결정하라는 말입니까?” “저희들은 지금 아무 행동도 취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것이라도 좋으니 말씀을.” 내 말에도 눈빛하나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올려다보는 남성 사제가 부담스러웠다. 이거…알고보니 누가 되었든 간에 단지 기둥이 될 존재가 필요했다는 말이군. 갑자기 짜증이 일어났다. “가죠.” “감사합니다!” 내 말에 남성 사제는 활짝 핀 얼굴로 나를 어딘가 안내하기 시작했다. 남성 사제는 기다란 복도를 지나가며 지속적으로 작은 종을 흔들었는데 그 소리에 많은 사제들이 웅성거리며 우리들의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단지 유저들만 무슨 영문인지 몰라 그 모습을 구경할 뿐이었다. 내가 도착한 곳은 거대한 중앙 홀. 바닥에는 붉은 빛깔에 큼지막한 태피스트리가 깔려 있었고, 사방에 그리스로마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둥근 기둥들이 홀의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남성 사제는 홀 중앙에서 나를 옆에 세우고 크게 말했다. “모든 일루미워커들은 주목하십시오. 저, 아페타 마을지부, 일루미워커의 총 책임자인 가브리스가 오늘 큰 축복을 알려드릴 것입니다.” 그 말에 웅성거림은 더욱 커져만 갔다. 더불어 나를 힐끗힐끗 보는 눈들이 더 많아졌고 말이다. “가브리스님, 요즘같이 어두운 시기에 축복이라뇨. 그리고 그 옆에 계신 분은 누구인지요.” “들으시오. 이분은 저희 지부의 축복을 내리실 빛을 밝히는 자, 일루미네이터입니다.” “이, 일루미네이터!” “그럴 리가. 신이 정한다는 대행자가 어떻게 이런 곳에!” “그게 참말이십니까, 가브리스님!” 가브리스라 불린 사제는 나를 보았다. 내가 나설 차례란 말이군. 나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입니다.” <‘빛의 매력’ 발동.> <‘빛의 매력’의 숙련도가 5 상승했습니다.> <‘빛의 매력’으로 인해 빛의 관련된 자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빛의 매력이란 스킬이 발동해 버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들이 조용해져서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 거짓말이라뇨.” 가브리스 사제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보았다. 나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여전히 웃는 표정 그대로 모두에게 말했다. “말 그대로에요. 농담이었습니다.” “노, 농담이라니! 성스러운 곳에서 무슨 불경스러운 짓을!” “천벌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저를 죽이기라도 하실 겁니까?” “………!” “………!” 나는 한 순간 표정을 궂히고 그들을 보았다. 자기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인형들. NPC라지만 너무 화가 났다. “이런 것조차 확실히 정하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휴우, 가브리스님.” “네, 말씀하십시오.” 가브리스 사제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공손히 말을 받았다. 조금 다시 보게 되는군. 어떠한 상황에도 차분하다는 건가? “오늘 좀비들이 이 마을에도 침공했나요?” “그렇습니다.” “그때 이 지부는 무엇을 했죠?” “그건…….” 내 말을 살짝 회피하는 가브리스 사제. 역시나 내 생각대로구만. 이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야. “당신들이 사제입니까? 밖에는 지금당장 곤란한 지경인데 그걸 잠자코 보기만 했다는 겁니까?” “우리들은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가 없다! 교황님의 명령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야!” “더구나 우리들이 밖으로 나가면 다른 종교 단체가 무력행위로 인지하고 탄압하려 들 것이라서…….” “그래서 마을을 버렸단 말이냐!” <‘침묵의 절규’ 발동.> <‘침묵의 절규’의 숙련도가 10 상승했습니다.> 내 말에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골랐다. 이거 조금 곤란한 걸. 꼭 힐러에 관해서 일이 터지면 주체를 못한단 말이야 나는. “당신들이 지금 말하는 건 핑계에 불과해. 교황의 명령이 뭐며 다른 종교의 눈치를 볼게 뭐야. 지금 당장 이 마을이 위험해서 용병조차 나서서 막고 있는 판국에 가장 나서야할 사제라는 것들이 신전에 처박혀서 뭐하고 있는 짓이냐고! 그렇게나 이끌어줄 존재가 필요했나? 그렇다면 아무나 한 명쯤 나와 이끌었으면 되는 거 아냐!” <명령이 전달되었습니다.> “……….” “……….” “우, 우리는 지금까지 대체 무얼…….” “나, 나는 대체…….”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사제들을 둘러보다 가브리스 사제를 보았다. “가브리스님.” “네, 말씀하십시오.” “교황의 명령이 그렇게 필요했나요? 그분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러고 있었던 건가요?” “저희는 목동을 따르는 작은 양들. 믿음이 크면 클수록 고개를 숙일 뿐입니다.” “그럼 그딴 목동 확 죽어버리라지.” “………!” “………!” “………!” 다시 주위가 조용해 졌다. 으흠, 이건 좀 심했던 걸까. “크흠, 뭐 여하튼, 나 역시 그 목동인지 교황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자를 만나야할 이유가 생겼군요. 워프게이트로 안내해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양들을 이끌지도 않는 그놈의 교황이라는 작자, 얼굴이나 한 번 보자. “다, 당신은 대체!” “누구인겁니까!” 수많은 사제들이 나에게 무언가 갈구하고 있었다.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눈빛. 아직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군. 나는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스바르가 마리아(Svarga Maria) 발동.” <‘스바르가 마리아’ 발동.> 내 주문과 동시에 등 뒤에서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빛은 점점 사람의 형상을 띄기 시작해, 사그라질 쯤은 이미 양손을 깍지 끼고 기도하고 있는 수녀의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 그 수녀는 슬프게 울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행복, 사랑, 그것은 하나의 축복. 고통, 저주, 그것은 하나의 불행.] “……….” “……….” “…여신이다.” “이, 일루미워커, 빛을 발하는 자, 일루미네이터를 뵈옵니다!” “일루미워커, 빛을 발하는 자, 일루미네이터를 뵈옵니다!” “일루미워커, 빛을 발하는 자, 일루미네이터를 뵈옵니다!” 멍하니 나를 보고 있던 사제들이 갑자기 전부 엎드리며 인사하기 시작했다. 나는 수많은 사제들이 엎드려 조금 당황했지만 분위기상 그 기분을 감추고 여유 있는 표정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이 가야할 곳을 정 모르겠다면 내가 방향타가 되어 주겠어요. 아페타 마을 지부, 모든 일루미워커들은 지금 이 순간부터 모든 일은 자신의 소신에 따라 행동한다.” “말씀을 따릅니다!” “말씀을 따릅니다!” “말씀을 따릅니다!” 이제야 뭔가 사제다운 표정들을 하는 걸. 그럼 그래야지. 사제를 단지 직업으로 보는 유저들보다 더 무거운 눈빛을 하고 있어야 진정 신을 따르는 사제라 할 수 있지. “가브리스님, 가죠.” “알겠습니다.” 가브리스 사제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까지 워낙에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어 잘 몰랐지만 의외로 미남이잖아. 게다가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금발의 꽃미남. 큭, 내가 저 정도만 됐어도 한나를…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내가 이동된 곳은 황당하게도 벽돌로 위장한 비밀통로를 지나 미로 같은 길을 한참 내려가 도착한 지하 밀실이었다. 워프게이트가 지하에 있다 고해서 그냥 계단으로 내려갈 줄 알았건만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미 통신 구슬을 통하여 일루미네이터님에 대해 전달하였습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런데 워프게이트는 어디에 있죠?” 사방을 둘러보아도 마법진하나 없는 그냥 평범한 밀실일 뿐이니 물어본 것이었다. “저희는 신을 믿는 양들이기 때문에 사술의 힘을 빌리지 않습니다. 이곳은 저희가 반석으로 삼은 중심부기 때문에 모르핀 제국에 있는 신전에 공명시켜 그곳 반석으로 이동될 것입니다.” 조금 특이한 방법이었다. 반석에서 반석으로 이동한다? 어떻게 이동되는지 조금 궁금했지만 가브리스 사제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해 넘어가기로 했다. “준비되셨습니까? 그럼 이동합니다.” 내 의향을 물어본 가브리스 사제는 끄덕거리는 내 고개를 보자마자 손을 번쩍 들었다. 그 순간 사방에서 빛이 쏟아져 나와 앞을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의 멀미가 생긴 다음, 내가 나타난 곳은 정말이지 끔찍할 정도로 거대한 중앙 홀과 그 주위를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는 사제들의 모습이었다. “반가워요, 일루미네이터이자 모르핀 제국의 용사여.” 나는 뒤돌아보았다. 내 뒤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있는 계단이 보였고 그 맨 위에 가이아 여신이 조각되어있는 지팡이를 들고 있는 여성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색의 머리를 보리모양으로 따서 정갈하게 내려놓았고 그녀의 옷가지 하나하나가 흰색 톤이라 보편적으로 깨끗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게다가 저 예쁜 얼굴에 인자한 표정이라니. 우리눈팅과 맞먹는 미모는 화선녀, 이정화 누나 다음으로 처음…은 아니구나. 그, 누구더라. 글로리시나였던가? 그 여성도 있었군. 여하튼 그 여성들 다음으로 처음이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이런 무례한!” “당장 무릎을 꿇지 못할까!” 그 여성 주위에 있던 수많은 늙은 사제들이 한 말이었다. 이런이런, 설마 내가 생각했던 대로 썩어있는 곳인가? 그때 처음 말 걸었던 백색머리의 여성이 손을 들어 늙은 사제들의 말을 막았다. “시끄럽군요. 제게 찾아온 손님에게 그대야말로 무슨 무례한 짓이죠?” “하, 하지만 교황님!” “그만.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군요.” “으, 크흠!” 이거 생각보다 교황은 썩지 않았잖아? 그런데 참 게임 잘 만들었단 말이야. 정말 사람 같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교황이라 불린 여성이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는 가이아 교단의 교황, 이페르시아 가르혜리 3세입니다. 이르시아라고 불러주세요.” 그러며 내게 살짝 윙크를 지었다. 그 말에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고 주위 늙은 사제들은 경악했다. “교황님!” 하지만 교황은 아주 철저히 무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풋!” 이거 참, 이 교황 정말 마음에 들잖아? “드디어 웃어주네요.” 교황은 내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진심으로 마주 웃어주는 걸 보니 말이다. “인사드리죠. 저는 일루미네이터, 타테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이르시아 교황님.” “저, 저런!” “어떻게 교황님을 그냥 이름으로!” 내 간단한 소개에 이르시아는 잠시 동그라진 눈으로 나를 보더니 재미있다는 듯이 손으로 입을 막고 눈웃음 지었다. 물론 주위에 늙은 사제들은 무시하면서. “저 역시 반가워요, 타테님. 모르핀 제국, 용사 대전에서부터 익히 알고 있었답니다.” 하긴 여기가 모르핀 제국 수도며 교황의 직분을 가지고 있으니 그 대전을 보았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보다 저에게 찾아온 이유가 있다고 아페타 지부에서 그러던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처음에는 따지려고 왔으나 이런 교황이 사제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지 않았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그래도 일단 말은 해야겠지? “지금 마왕 베르제브브 때문에 세상이 많이 혼란을 격고 있어요. 그런데 어째서 사제들에게 마을을 도와주라 명령을 내리지 않는 거죠?” “교황의 방침에 이의를 걸다니!” “무례하다!” 자꾸 무례무례, 참 거슬리구만. 가슴에서 짜증이 조금씩 일어나는 그때, 내 말을 듣고 잠자코 나를 보고 있던 이르시아 교황이 천천히 일어났다. “지금부터 타테님과 단 둘이서 산책을 나갈 것이다. 아무도 따라오지 말라.” “교, 교황님!” “위험하옵니다!” “주신이 보고 있는 이곳에 내가 무엇을 꺼려야하느냐!” “……….” “……….” 이르시아 교황이 싸늘한 눈빛으로 늙은 사제들을 노려보자 모두들 침묵했다. 역시 한 교단의 교황이라는 걸까? 나까지 주눅이 들 정도니 저 교황을 다시 보게 되는군. 이르시아 교황이 나를 이끌고 간 곳은 실내 화원이었다. 그곳은 조금 더웠는데 아마도 꽃들이 자라기 좋은 기온과 습도를 맞추기 위해서 인 듯 했다. “이 꽃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나요?” 난데없이 하나의 꽃을 가리키며 묻는 이르시아 교황.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눈을 돌리니 흰색의 꽃잎이 무수히 달린 작은 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몇 번 본 꽃 같았지만 내가 꽃에 관심이 없어 고개를 저었다. “이 꽃의 이름은 카모밀레. 꽃말은 역경에 굴하지 않는 강인함이죠. 그 옆에 가시 돋은 넝쿨들이 이 꽃을 둘러싸고 있는 게 보이나요?” 확실히 카모밀레라 불린 꽃 주위에 잔가시가 돋은 넝쿨들이 엉겨 붙어 있었다. “이 넝쿨들은 카모밀레 꽃에 기생해 영양분을 섭취하죠. 가을이 되면 결국 카모밀레 꽃은 시들고 대신 넝쿨에서 스피리아 꽃이 피어나요. 그 꽃의 꽃말은 노력.” 이르시아 교황은 스피리아 꽃을 살며시 만지며 말했다. 나는 묵묵히 듣고 있다 말했다. “꽃들이 지금 상황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 내 말에 이르시아 교황은 슬픈 눈빛으로 말했다. “이 카모밀레 꽃이 바로 저희죠.” 그리고 일어서며 다시 말했다. “가이아 교는 무수히 많은 교들에게 억압당하고 있어요. 그건 50년 전부터 지속되어 왔던 것이죠. 그 오랜 세월동안 썩어 들어간 물들은 고일대로 고여 저는 이곳에 있는 물들을 걸러내기도 힘든 실정입니다. 이번에 아페타 지부에도 제 숨결이 닿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기도 하죠.” “50년이라니…도대체 그동안 무얼…….” “신을 믿는 양이긴 하나 그렇지 못한 자도 있는 법입니다. 저의 선대 교황님이 그러셨죠.” 이르시아 교황은 씁쓸한 얼굴로 슬며시 돌려 말했다. 즉, 전대 교황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말하는 것이군. “그래서 저는 신의 대행자이자 빛을 밝히는 자인 일루미네이터, 타테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려 이곳에 왔습니다.” 그녀의 표정은 무언가 결의를 다진 표정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저희 가이아교의 신도들을 이끌어 마왕의 침공을 막아주세요.” <퀘스트 ‘마왕의 침공 막기’가 발동 되었습니다.> 이르시아 교황의 말과 동시에 뜨는 퀘스트 창. 마왕의 침공 막기? 나 혼자서 저게 가능한 말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솔직히 나에겐 버거운 퀘스트였다. 마왕의 침공을 막으라니 분명 엄청난 난이도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말없이 서있자 이르시아 교황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당신의 작은 디딤돌이 되어드릴 것입니다.” “디딤돌이요?” 이르시아 교황은 잠시 하늘을 올려보더니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지금 세상은 어수선한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마왕은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군단을 이끌고 있으며 종교들은 저마다 나누어져 견제하고 있고, 제국과 왕국들은 서로 눈치를 보는 상태입니다. 그럴수록 힘들어지는 건 작은 생활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저는 가이아교의 유지보다 더 큰 것을 보려합니다. 그래서 당신 같은 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이아 교도들을 이끌어 줄 하나의 영웅을.” 나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이아 교는 제가 어떻게든 처신하겠습니다. 그러니 타테님은 마왕의 침공을 막아주세요.” “아무리 그래도 저 혼자서는…….” “성표가 필요하다 하셨죠? 이걸 드리겠습니다.” 이르시아 교황은 품 안에서 황금색 작은 패를 꺼내들었다. 가이아 여신의 문양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는 황금패. 나는 그것을 들고 이르시아 교황을 다시 보았다. “이 황금패는 저의 성표이자 가이아 교를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증표입니다. 어디서든 이 성표를 보여주면 가이아교단을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유심히 성표를 보았다. 이걸 이용해 가이아 교도들을 이끌고 마왕을 막으라는 건가? “휴우, 알겠어요. 제 힘이 닿는대 까지 해보죠.” “감사해요. 그런데…….” 방긋 미소 지으며 고마움을 표하던 이르시아 교황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내 인벤토리 역할을 하는 주머니를 가리켰다.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저주가 걸린 물건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있나요?” “저주받은 물건이요?” 내 인벤토리에는 불완전한 공허의 구슬, 둠터틀의 심장, 통신구슬밖에 없었다. 전부 꺼내 보여주니 이르시아 교황은 세 개의 구슬을 유심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이 두 개의 구슬에서 기이한 힘이 느껴지는군요. 특히 이것은 저 조차 이해하지 못할 기운이 잠재되어 있어요.” 이르시아 교황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불완전한 공허의 구슬이었다. 이건 내가 올 속성 결합에 실패해 생긴 물건. “하지만 이것은 제가 해결 할 수 있는 저주군요.” 두 번째로 가리킨 것은 둠터틀의 심장이었다. “여기에 저주가 걸려있었나요?” “이 저주는 상대를 언데드로 만드는 저주입니다. 다행히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 봉인되어 있는 상태라 다행이군요.” 깜짝 놀랐다. 언데드가 되는 저주? 이것을 그냥 결합해버렸다면 지금 나는 어떠한 상황에 처했을까? 갑자기 등허리가 오싹거렸다. “제가 해결해 드리죠.” 이르시아 교황은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지팡이로 구슬을 톡 건드렸다. 나는 그 모습을 1분 동안 지켜보다 아무행동도 취하지 않는 이르시아 교황을 다시 보며 말했다. “끄, 끝인가요?” “그런데요?” “…무지 간단하군요.” 나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교황의 성표라…….” 이리저리 황금패를 돌려보았다. 누가 조각했는지 너무도 아름다운 곡선의 가이아 여신. 가격이 꽤나 비쌀 것 같아 보였다. “일단 다시 멘히버씨에게 가야겠지?” “돌아가시겠습니까?” 가브리스님이 고개를 숙인 채 한 말이었다. 이르시아 교황에게 퀘스트를 받은 나는 다시 반석을 이용해 아페타 마을 신전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여태껏 기다리고 있었던지 가브리스 사제가 고개 숙인 채 있었는데 내 말에 반응한 것이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야겠네요.” “안내하겠습니다.” 가브리스 사제는 내 말에 즉각 대답했다. 저 사제 뭐랄까…나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깍듯한데? 일루미네이터라 그런 거겠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나는 밖으로 나가는 비밀통로가 보여 일단 생각을 접기로 했다. “일루미워커, 빛을 발하는 자, 일루미네이터를 뵈옵니다!” “일루미워커, 빛을 발하는 자, 일루미네이터를 뵈옵니다!” 가브리스 사제를 따라 밖으로 나가는 와중에도 보이는 족족 사제들이 무릎을 꿇고 인사했다. 절도 있는 행동이 마치 사제들이 아니라 군사들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일루미네이터? 저 유저 뭐지?” “아, 아까 봤어. 저 차림 분명 아까 전에 정화의 방에 들어가던 마법사 아냐?” “아아, 맞아!” “그런데 뭔 일이래? 사제 NPC들이 무릎 꿇고 저렇게 말하는 거 처음 봐.” “고렙유저인가?” 수많은 사제들이 나에 대해 열렬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발, 눈치봐가며 인사해 주세요. 사제님들! 만약 이 후드를 쓰고 있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어쨌든 밖으로 나오는데 성공한 나는 호기심으로 뒤따라온 유저들을 피하기 위해 골목길로 들어서 겨우겨우 따돌릴 수 있었다. “휴우, 아무도 없지?”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아무도 없는 듯 보였다. “그럼 이제 아이템들을 천천히 감상해 보실까나~” 이 성표란 게 얼마나 좋은지. 과연 어느 효과가 있는지. 또, 둠터틀의 심장도 저주가 풀렸으니 뭔가 바뀌었을 것 같기도 하고. 일단 나는 아이템을 살펴보았다. - 가이아교 교황의 성표(유니크) 사제 중에서도 가장 정점인 교황의 성표. 목에 걸거나, 무기에 장착할 수 있다. 지능 +10 정신력 +10 탄력 +10 천속성 +20 피드백 확률 5% 감소 방어 시 10%확률로 마스터급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발동. 가이아교단에게 보여줄 시 가이아교단을 이끌 수 있음.(마왕의 침공 이벤트에 한함.) - 정화 된 둠터틀의 심장 (유니크) 암흑의 기운으로 가득했으나 정화되었음. 가이아교 교황의 축복이 담겨있다. “우와. 이거 장난이 아닌데.” 무슨 장착 아이템이 이정도란 말인가. 게다가 10%확률로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발동? 이건 나에게 꼭 걸맞은 아이템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두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다. 저 장착 아이템들을 사용하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아이템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나는 멘히버 아이템가게를 다시 찾아갔다. “저 왔어요!” “오, 타테양. 마침 수리가 끝났었는데. 받으십시오.” 내가 들어오자마자 멘히버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천사 세트를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그것을 요리조리 살펴보았으나 평소랑 똑같아 별 감흥은 오지 않았다. “이것을 수리하다보니 타테양의 애정이 담뿍 묻어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멘히버씨는 미소천사 세트를 흐뭇한 표정으로 보며 말했다. “아, 그건 그렇고 아직까지 꿀석을 사용하지 않으셨더군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 건가요?” “꿀석이요?” 나에게 꿀석이란 아이템이 있었던가? 내가 의문을 표하자 멘히버씨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말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여기 미스트레스 티아라를 보면 꿀석이 박혀있습니다. 재료를 대신 충족시켜주는 능력이 있죠.” 미스트레스 티아라에 박혀있는 노란색 보석을 유심히 보았다. 확실히 지금까지 눈여겨보지는 않았지만 설명에서 보았던 것 같았다. “뭐, 여하튼 지금까지 이 장비들의 능력을 50%도 받지 못했으나 지금은 100% 능력을 발휘해 줄 겁니다.” “지금까지 50%도 받지 못했다고요?”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숙련도가 부족해 능력을 받지 못했고 나중에는 수리를 하지 않아 받지 못했던 거지요.” “아아! 그랬구나!” 숙련도가 올라가면 아이템의 능력을 100% 끌어내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리를 하지 못해 능력은 언제나 거기서 거기였고 근소한 차이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었다. <‘빛의 매력’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응?” “…으흠!” 아이템에 정신이 팔려있던 나는 갑자기 나타난 스킬 숙력도 상승에 멘히버씨를 보았다. 멘히버씨는 나의 어딘가를 유심히 보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저 붉어진 얼굴, 회피하고자 하는 헛기침. 내 눈은 가늘어졌다. “얼굴.” “어험험!” “가슴?” “크험험!” “설마 그 아래를 본건 아니겠죠?” <‘빛의 매력’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어 험, 쿨럭쿨럭!” 아, 정답이었나 보다. “수, 수리비는 무료입니다.” “호, 그걸로 땡?” 나는 상체를 앞으로 쭉 내밀며 요염한 포즈를 취했다. “어허, 그, 그러시면 안 됩니다.” 안되기는 뭐가 안 돼. 누가 잡아먹기라도 한다니. “이거 감정해 줄 수 있나요?” 나는 이때다 싶어 둠터틀의 심장을 꺼내었다. “이건…고위 몬스터의 구슬이군요.” 한눈에 알아보는 멘히버씨. 나는 기대감에 벅차올랐다. “감정, 가능한가요?” “뭐,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겠죠. 그보다…제 외로움을 달래줄 요량이 아니시라면 조금 떨어져주심이…….” 음, 내가 너무 다가갔나? 재미있다보니 나도 모르게. 으흠, 눈팅한테 걸리지만 않음 뭐 상관없겠지. 상체를 들자 멘히버씨는 둠터틀의 심장을 요리조리 돌리고 현미경으로 조사하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저런 걸로 감정이 되는 걸까?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지켜보았다. “이거…저주받은 물건이었었군요. 하지만…정화되었군요. 으흠? 정화한 분은…교황님? 어허, 축복까지 받았구만.” 그, 그게 보이는 겁니까? 단지 구슬 하나로?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멘히버씨를 보았다. “음, 이 구슬의 속성은 암(暗), 수(水)가 결합되어 있군요. 엄청난 힘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빛의 축복과 암흑의 기운이 맞물려 사용하기 전까지는 어찌될지 모르겠군요. 자, 다 되었습니다.” 멘히버씨는 감정이 끝났는지 나에게 구슬을 돌려주었다. 나는 그 구슬을 받아 바로 살펴보았다. - 정화 된 둠터틀의 심장 (유니크) 암흑의 기운으로 가득했으나 정화되었음. 가이아교 교황의 축복이 담겨있다. 암속성 +30 수속성 +30 심장을 아이템에 장착 시 암흑의 기운이 머문다. 축복으로 인해 장착 시 빛의 기운이 머문다. “암흑의 기운과 빛의 기운이 머문다?” 확실히 장착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을 것 같은 말이었다. 두 개의 기운이 머물 리는 없을 테고 둘 중 하나는 없어진다는 건데. 나에게 암흑의 기운이 머문다면 과연 좋을지도 의문이었다. “하아, 결국 감정해봐야 별 소용없었구만.” 혼자 푸념하며 나는 인벤토리에서 돈을 전부 꺼내었다. “그럼, 마지막.” - 찰랑. 탁자위에 황금색 동전과 은색 동전들을 올려놓았다. 전부 합쳐 8골드 28실버. 나는 방긋방긋 웃으며 멘히버씨를 보았다. “무, 무슨……?” “이걸로 살만한 아이템이 없을까요? 손에 들 만한 걸로요.” 그리고 살짝 윙크해 보였다. <‘빛의 매력’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참, 여자란 존재는 편하단 말이야. “으음, 저 정도 돈이라면 중급 지팡이는 살 수 있겠군요. 으윽, 그런 눈으로 보셔도 최상급 지팡이는 너무 비싸…으으윽!” 내 반짝반짝 공격에 식은땀을 흘리는 멘히버씨. 이 사람은 참 조종하기 쉬워 편하네. “조, 좋습니다. 그럼 이것을 드리죠!” 견디기 힘들었던지 내 눈을 피해 쪽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시간이 지나 매우 아깝다는 표정으로 무언가 큼지막한 보석하나를 들고 나왔다. “지팡이가 아니잖아요.” “지팡이에 주 능력이 되는 원석입니다. 이것을 제조해 나무막대에 끼워 넣으면 그야말로 최상급 지팡이가 되는 것이죠.” “그럼 나머지 재료들까지 구해야 되잖아요.” “이 원석은 오리하르콘. 원석이라곤 하지만 이대로만 해도 시가 10골드는 거뜬히 넘어갈 겁니다. 제가 이것을 드리는 이유는 어떤 속성이든 거부 없이 받아들이는 성질 때문에 드리는 겁니다. 저 둠터틀의 심장까지도 무난하게 받아들이겠죠.” 내가 들고 있는 둠터틀의 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가. 어떤 것이든 거부 없이 받아들인다면 극과극인 빛과 암흑속성 둘 다 받아들일지도 몰랐다. “고마워요. 하지만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없잖아요.” 이건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닌가. “흠, 그렇긴 하죠. 그럼 그냥 중급 지팡이로…….” “아뇨! 그냥 이걸로 할래요!” 이 기막힌 아이템을 버릴 수야 없지. 지금은 비록 사용할 수 없겠지만 언젠가 방법이 생기겠지. “뭐, 일단 고마워요. 멘히버씨.” 말에 하트가 달릴 정도로 깜짝하게 말했다. 남자로서 비위가 조금 상하지만 이정도 쯤이야 서비스로 치지 뭐. <‘빛의 매력’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하하하, 뭐 그 정도 가지고, 으허허허!” 좋텐다. 나는 밖으로 나와 원석을 손에 들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 원석을 제조하기 위해선 일단 함유되어있는 철 성분을 분해하고 지팡이에 끼울 수 있게 모양을 바꿔야한다고 했다. 대장장이를 찾아가야 하나? “어서 오게나!” “이것을 제조해 줄 수 있나요?” 나는 후드를 푹 눌러쓴 채 다짜고짜 대장장이에게 오리하르콘 원석을 보여주며 물었다. 구릿빛 피부에 팔뚝은 근육이 울퉁불퉁한 중년 남성이었는데 풍성한 수염이 강단 있는 인상을 심어줘 자존심 꽤나 있겠구나 싶었다. 그 대장장이는 내가 준 오리하르콘을 유심히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건 드워프라도 힘든 작업이네.” “그렇군요.” 대장간에서는 불가능한 것 같았다. 즉, 이건 드워프를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으려나. “오리하르콘의 모양을 변현시키는 건 어렵지 않네만. 문제는 이 철 성분 분해구먼. 녹지 않는 오리하르콘에 철 성분만을 때어내기란 현재로선 불가능하지.” 대장장이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오리하르콘을 돌려주었다. 철 분해라. 이거 애물단지를 받은 거 아닌지 모르겠다. 일단 밖으로 나와 다시 생각에 들어갔다. 꼭 제조를 하지 않아도 그냥 이대로 사용해도 되지 않을까? 문제는 실패하면 둠터틀의 심장까지 날아갈 위험이 있다는 것인데. 그놈의 철 속성 분해가 문제군…잠깐, 철 속성?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는 황급히 통신 구슬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곧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젠장, 친구등록이 안 되어 있잖아. 직접 가는 수밖에 없나?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아페타 신전으로 달려갔다. “일루미워커, 빛을 발하는 자, 일루미네이터를 뵈옵니다!” “아아, 인사는 됐고, 가브리스님을 불러주세요, 어서!” “네, 네!” 한 NPC사제에게 황급히 명령한 나는 발을 굴리며 기다렸다. 곧이어 달려오는 가브리스 사제가 보였고 나는 마주 달려가 다짜고짜 가브리스 사제를 이끌었다. “저를 다시 모르핀 제국으로 보내주세요! 어서요!” “무, 무슨 일…알겠습니다.” 의아해하다 이내 고개를 숙이며 지하로 나를 이끌었다. 반석을 이용해 빠르게 모르핀 제국 대신전으로 이동한 나는 깜짝 놀란 이르시아 교황에게 가볍게 손인사만하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페타마을에서 모르핀 제국으로 5분도 안 돼 이동한 유저는 아마 나밖에 없을 거야. “여기일 텐데.” 주위를 둘러보다 곧 커다란 탑을 찾을 수 있었다. 그 탑 꼭대기에는 마법사를 상징하는 육각모형의 도형로고가 새겨진 깃발이 보였다. 저것은 펜타그램이라 불리는 도형인데 저 문양은 륀 기사단을 대표하는 로고이기도 했다. 입구 쪽으로 가니 많은 유저들이 들어가고 나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보였다면 대충 이해하겠는데 유저들은 전부 전사계열 쪽이어서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직접 들어가 보기로 결정한 나는 줄서있는 유저들 틈에 끼어들었다. “오늘이야말로 꼭 입단하고 말겠어!” “크으, 그 형님을 어떻게 이기라는 거야!” 줄 서고 있는 수많은 유저들 중에 전사 두 명이 하는 얘기였다. 줄은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고 잠깐의 시간을 기다린 끝에 나를 포함한 열 명 정도의 인원수가 기사단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전부 모였나요? 그럼 기사단 자격시험을 치르겠습니다. 전부 왼쪽 방으로 이동하세요.” 머리를 두 갈래로 딴 귀여운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세월의 풍파라도 거쳐 간 것인지 매우 거친 피부였다. 아,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저기 저는 용무가 있어서 온 것…….” “질문 받을 시간 없습니다. 어서 가세요. 바쁩니다, 바뻐.” 어, 어이, 그래도 내 말은 좀, 이익! 유저들에게 떠밀려 왼쪽 방으로 들어간 나는 당황되기 시작했다. 아니, 애초에 로브를 입고 있는데 전사로 보는 것 자체가 이상하잖아! 그 여성 대체 뭐야? “으하하! 잘 왔다, 제군들! 내가 바로 모르핀 제국, 용사대전에서 우승한 이지스, 철패라고 한다!” “어, 너!” “응?” 상대를 지목하고 있는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 내 입이 분명 푸들푸들 떨리고 있을 것이었다. “나를 아나? 아니, 그런데 로브라니. 마법사? 여기는 전사들 시험하는 곳인데 마법사가 왜 여기를?” “너어어어어! 둔탱이 바보전사!” 나는 후드를 뒤로 휙 넘겼다. 내 눈은 분명히 불타고 있을 것이리라. “어헉! 너, 너, 너, 넌! 수염녀!” “누가 수염녀냐아아아아아아!” <‘침묵의 절규’ 발동.> <‘침묵의 절규’의 숙련도가 10 상승했습니다.> “어어억!” “으으윽!” “뭐, 뭐야 이 스턴은?” 주위 모든 전사들이 당황했다. 젠장, 나에게 공격스킬이 있었어도 저 둔탱이 바보를 통돼지 바비큐로 만들어버렸을…휴우, 자제하자. 이래서는 죽도 밥도 안 돼. “그땐 미안했다! 내가 실수했어! 너의 프라이버시도 모르고 그만! 다음부터는 절대 안 벗길게!” “버, 벗겨?” “뭐, 뭘?” “오해할만한 발언 하지 마! 쌈장에 쌈 싸먹을 놈아!” “어라? 그러고 보니 너 수염이 없다?” “수, 수염?” “그럼 저 예쁘장한 여자가 남자?” “이이이이잇! 죽여 버린다!” 나는 돌진했다. 오로지 철패 놈의 면상에 발차기를 먹여줄 요량으로. 하지만 나는 단지 힘과 민첩에 스텟이 낮을 뿐이었고, 저 놈은 방어에 특화 된 이지스란 직업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요리조리 피하지 마!” “으갹! 살려줘!” 나는 의도치 않게 륀 기사단에서 난동을 부린 마법사 일 인으로 낙인찍히게 되는 사건이기도 했다. “큭, 큭큭!” “아놔, 님아 굿잡여.” 불사조님과 하가네님이 나에게 엄지를 추켜세웠다. 이봐요, 불사조님. 그렇게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힘겹게 웃음을 참지 않아도 되거든요? “아, 이분이 저를 대신해서 용사대전에 나간 미소천사님? 이거, 완전 성격 반전인데 말입니다?” 온통 검은색 복장으로 호랑이 가면을 쓰고 있는 유저였다. 아아, 저 유저가 전에 말했던 탈영병이란 유저인가? 워낙에 아이디가 특이해 외워버려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영병아, 반전은 성격뿐이 아냐. 그때 그 얼굴을 봤어야 한다니까?” “그, 그때 그 얼굴…푸큭! 푸큭!” “아놔, 님, 더 이상은 나도 못참겠…쿠헬헬!” “주, 죽여 버리겠어…뼈를 통째로 씹어 식도에서 마구 굴려주겠어!” “하아아아아. 적당히 해둬, 다들. 여기는 내 집무실이지 놀이터가 아니라구.” 다시 2라운드가 벌어지려는 찰나 레이나님이 모두를 중재했다. 지금 우리들이 있는 곳은 레이나님이 서류 작업하거나 작전을 토론할 때 쓰이는 집무실이었다. 서류더미에 파묻혀 지금까지 일하고 있었던 건지 레이나님은 수척해진 얼굴로 나를 올려보았다. “일단 소개할게요. 여기는 전에 말했던 탈영병. 군인이죠. 아마 조금 있다가 점호할 때니 나가야 할 거에요.” “안녕하십니까, 영병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직접 보게 되서 재미있었지 말입니다.” 익숙지 않은 발음. 말입니다? 뭔 말을 그렇게 길게 늘어트린다지. “저는 미소천사, 타테라고 합니다.” 일단 탈영병님이 내미는 손을 마주잡았다. <‘빛의 매력’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이거, 쑥스럽지 말입니다. 요즘 남자 랑만 지내다보니 여성에게 면역력이 없…….” “말하면서 손 쓰다듬지 말아줄래요?” 내 일침이 탈영병님은 황급히 손을 때었다. 아, 젠장 손에 소름 돋았어. 불쾌해죽겠네. “소개는 뭐 이쯤으로 해두고. 그나저나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어요? 혹시 미소천사 기사단을 대표해서?” “아, 아뇨. 그냥 제 개인적인 일로 찾아왔어요.” “으흠, 뭔데요?” 나는 잠시 뜸들이다 결정하고 하가네님을 보았다. “하가네님, 혹시 보석에 포함되어있는 철성분을 분해할 수 있나요?” “아항, 아이템 문제군여? 물론 이게 있으니 가능해염.” 하가네님은 품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작은 돌을 꺼내었다. 응? 저것은 저번에 용사대전에서 보았던…뭐라고 했더라. 아, 그래. 현자의 돌이었던가? 그런데 그때는 그냥 아무색도 없었건만 지금은 은빛이 나는 게 신기했다. “아름답져? 이거 금속성 정력 주입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염. 더 황홀해해도 되삼.” 하가네님은 현자의 돌을 위로 치켜들었다. 아주 팔 빠지겠습니다만. “무슨 보석이기에 하가네에게? 보통은 대장간에서도 충분히…….” “이것입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오리하르콘 원석을 꺼내었다. 은은한 황금색의 이 원석은 여기 있는 모두를 멍하게 만들 정도의 위력을 담고 있었다. “오리하르콘? 음, 하지만 원석이네염? 이건 확실히 대장간에서는 무리일 듯.” “이야, 오리하르콘 원석을 어디서 구했다지? 저거 녹여서 내 방패에 씌우면 좋겠는데.” “둔탱이 바보전사는 눈독들이지 말아줄래?” “야! 누가 둔탱이야, 둔탱이긴!” “뭐, 그건 부정할 수 없을지도.” “당신은 둔탱이 맞으삼.” “아마 맞지 않을까 하는데 말입니다?” “철패야, 너는 일단 좀 조용히 해 주지 않겠어? 그 행동 자체가 둔한 거니까.” “……….” 다들 긍정하자 철패 녀석은 입을 다물었다. “일단 줘보세염. 내가 해결해 주겠삼.” 나는 밝은 표정으로 오리하르콘 원석을 하가네님에게 넘기려했다. 그때. “잠깐.” 레이나님이 행동을 가로막았다. 내가 레이나님을 올려보자 레이나님은 턱을 쓰다듬으며 짓궂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설마 공짜로 해 달라 하는 건 아니겠죠?” “그, 그게…….” 나도 모르게 땀이 삐질 흘렀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하는 것. 우훗!” 우, 우훗? 역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레이나님이었다. “농담이고 잠깐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이번 마왕침공 때문에 다른 기사단도 난리가 아닌데. 미소천사 기사단은 어찌할 건가요?” “하아, 그거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몰라요. 제가 워낙 기사단에 관심이 없어서.” “네? 어떻게 기사단 수장이 이렇게 자유분방할 수가! 우우, 부러워!” “레이나 누님, 하나도 안 귀엽삼.” “닥쳐줄래?” 레이나님의 일침에 하가네님은 찍소리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그렇지. 내일부터 본격적인 마왕의 침공이 시작된다고 하는데 아무 계획도 몰라요?” “음, 하긴 그렇군요. 이것만 마무리 하고 한 번 기사단에 가봐야겠어요.” “후, 그럼 이것하나만 전달해 주세요. 아페타마을은 아무리 미소천사기사단이 방어를 해도 작은 마을이기 때문에 점령당할 것이라는 것.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저희와 함께 모르핀 제국에서 방어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요.”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과연 내일 어떻게 침공할지 모르겠지만 아페타마을은 대규모 몬스터를 막기에는 부적절할 테니까. 게다가 륀 기사단과 같이 방어를 한다라. 뒤에서 어마어마한 수의 마법사들이 백업을 해준다면 모르핀 제국은 어떤 것이라도 막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있다면 얘기는 조금 다를 것이었다. “일단 이것 하나만 말씀드리죠. 내일 기대하셔도 좋다는 것.” 나는 씽긋 미소 지으며 손가락을 들었다. 전부 내 행동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그 의문을 접었다. 레이나님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뭐 미소천사님이라면 기발한 무언가를 준비 중이겠죠? 사실 그냥 한 말이었어요. 내일 어떻게 될지 지켜보도록 하죠.” 레이나님이 웃었고 나 역시 마주 웃어 주었다. 이것이 유대라는 것일까? 서로 잘 알진 못하지만 그동안 함께해온 시간들이 믿음이란 것을 부여해주었다. “뭐, 끝났심? 그럼 슬슬 나도. 금속성 현자의 돌! 모든 것을 지배해주삼, 연성진!” 하가네님이 현자의 돌을 살짝 던진 다음 손바닥을 부딪쳤다. 그러자 바닥에 놓여있던 오리하르콘 원석이 금색 빛을 발했고 그 안에서 무언가 꾸물꾸물 은색의 물질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이 금속도 조금 아까운데. 미소천사님아 이걸로 뭘 만들거에염?” “아, 지팡이로 생각중이에요.” “그럼 지금 나온 철로 지팡이의 연결부위를 만들면 되겠삼. 하앗!” 하가네님이 기합을 발하자 액체 상태인 은색 물질이 오리하르콘 주위를 감싸며 기이한 문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꼭 넝쿨이 나무를 타 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다. “휴우, 다 됐어염.” “이야, 감사해요!” 오리하르콘은 보석 세공한 것처럼 멋지게 탈바꿈 되어있었다. 새삼 하가네님의 실력을 다시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걸로 지팡이를 만든다고요? 뭐 나쁘지는 않겠지만 오리하르콘 지팡이보다도 정령석 지팡이가 더 좋을 거 같은데.” 레이나님이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러자 철패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러게. 오리하르콘은 무슨 속성이든 받아들이는 성질이 있어서 나의 방패 같은 곳에 좋지. 지팡이로서는 그다지 별 필요가 없을 텐데.” 후훗, 과연 그럴까? 그건 일반적인 상식이고. 나에게는 특별한 장착 아이템들이 있거든. 나는 대충 상황을 끝내고 륀 기사단을 나왔다. 대신전의 반석을 이용해 다시 아페타 마을로 돌아온 나는 오리하르콘 원석을 살펴보았다. - 세공된 오리하르콘(희귀) 순도 99%의 오리하르콘. 신의 보석이라고도 불리기도하며 녹이기 힘들어 순도 높은 오리하르콘을 만지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라 한다. 무엇이든 완벽하게 받아들이는 성질 덕분에 마나를 운용하는데 있어 탁월한 성능을 자랑한다. 마법공격력 +15%증가 마법방어력 +15%증가 지능 +25 정신력 +25 지팡이 머리 부분에 꼭 맞게끔 설계되어 있다. 오리하르콘 옵션을 확인한 나는 인벤토리에서 둠터틀의 심장을 꺼내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떨려왔다.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휴우, 휴우. 좋아, 간다!” 둠터틀의 심장을 천천히 오리하르콘에 가져가 붙였다. <‘세공된 오리하르콘’에 ‘둠터틀의 심장’을 장착 시키시겠습니까? 한 번 장착 된 아이템은 분리 하실 수 없습니다.> “장착.” <‘세공된 오리하르콘’에 ‘둠터틀의 심장’를 장착하여 ‘빛과 어둠의 오리하르콘’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 빛과 어둠의 오리하르콘(유니크) 순도 99%의 오리하르콘에 둠터틀의 심장이 결합된 상태. 마법공격력 +15%증가(암속성, 수속성 공격력 추가 10%증가) 마법방어력 +15%증가(암속성, 수속성 방어력 추가 10%증가) 지능 +25 정신력 +25 암속성 +30 수속성 +30 암흑의 기운이 머문다. 빛의 기운이 머문다. 지팡이 머리 부분에 꼭 맞게끔 설계되어 있다. 아직 완전한 완성이 아니라서 그저 금빛을 띠고 있는 오리하르콘. 과연 지팡이로 완성된다면 어떻게 될지 기대 되었다. 암흑의 기운과 빛의 기운이 머문다는 뜻은 잘 모르겠지만 어마어마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후후. 어쨌든 이제 몸체가 될 것만 구하면 되는 건가?” 왠지 아이템을 만들어 가는 것도 재미있었다. 점점 강해지는 아이템의 매력이 이런 것이구나. 잘못하다간 이것에 빠져들겠는 걸. <‘아타셰’님이 통신구슬 연락을 취합니다.> 그 순간 통신 구슬에서 신호가 왔다. {언니! 있었네요!} “어, 앗!” 생각해보니 내가 죽은 다음에 한나와 주리아에 대해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원래는 처음에 들어오자마자 그 일부터 물어보려했는데 어쩌다보니 아이템 쪽으로 집중해버려서 지금까지 생각 못했던 것이었다. “한나야! 너 지금 어디야? 내가 죽은 후로 어떻게 됐어? 주리아는?” {풋, 한 가지씩 말씀해 주세요.} 내가 잠시 흥분했군. 목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지금 어디야?” {여긴 지금 메히튼 왕국 수도에요.} “그렇구나. 메히튼…뭐어?” 내가 잘못들은 건가? 그래, 내가 잘못 들은 게 분명해. {메히튼 왕국 수도라고요.} …잘못들은 게 아니었던 것 같다. “메히튼 왕국이라니…그럼 그때 도망가는데 성공했단 말이야?” {그게 말이죠…야, 악녀!} 한나가 말하는 도중에 갑자기 끼어드는 저 음성은 누굴까. 불쾌하게 만드는 저 음성, 많이 익숙한 목소린데. {니가 죽어서 이게 뭔 꼴이야! 어서 이 추종자들 전부 대리고 가란말야!} “설마 용병 계약을 파기하고 제멋대로 도망친 비열한 격투가는 아니겠지?” {누가 비열한 격투가야! 나는 어엿한 다덤벼란 이름이…야, 붙지 마! 어이, 어…언니, 죄송해요! 저 분이 너무 제멋대로라…야! 니들이야 말로 남의 영역에 들러붙은 거머리 아냐! 어서 썩 나가란 말야!} 대체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더 이상 내가 껴들 자리가 없어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듣고만 있었다. {휴우, 클레릭 사제 분들이 도와줘서 드디어 제가 장악했어요!} 저기, 그렇게 기뻐할 일입니까? “다덤벼 말은 무슨 소리야?” 나는 짧은 한숨을 내뱉고 말했다. 그러자 통신구슬에서 헤헤거리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한나의 말이 들려왔다. {그게, 어쩌다 살아남은 파티원 분들과 메히튼 왕국으로 들어왔거든요. 저는 딱히 갈 곳이 없어 다덤벼님만 졸졸 따라가고 있었는데 저희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 파티원 분들도 저희를 따라오는지라 결국 슈바리에단 기지에 전부 모이게 되었어요.} 이상하게 잘 설명한 거 같은데 하나도 이해가 안가는 건 무슨 이유일까? 슈바리에단이라면 다덤벼가 다리에서 소개할 때 들었던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저놈의 본기지에 전부 있다는 말인가? “전부라면 모두 몇 명인데?” {사정 때문에 간 분들을 빼, 약 70명 정도 모여 있어요.} 다덤벼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화낼만한 인원이구만. 아니 그 이전에 보통 그놈 성격이라면 절대 들여보내주지 않았을 텐데 어찌된 일이지? “그럼, 그 유저들은 갈길 보내주고 너희는 어서 아페타 마을로 돌아와. 아, 주리아도 거기 있어?” {…네, 저도 여기 있어요. 그런데 어, 어, 언니. 후하. 흠흠, 지금 여기 모여 있는 유저 분들이 전부 엔젤단으로 들어오길 바라는데 어떻게 하죠?} “뭐라고?” 한나의 통신 구슬에서 주리아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너무 황당한 말에 입이 쩍 벌어졌다. {그게, 저기, 어쩌다 보니…….} 주리아양, 당신도 한나에게 물든 겁니까? 어쩌다 보니 70명이 엔젤단에 가입하길 원할 리가 없잖아! “하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건…나중에 제대로 설명할게요. 일단은 이 인원수로 다시 위치의 산맥을 넘어가면 오늘 중으로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도 그렇지. 70명이라니. 한 순간에 엔젤단이 73명으로 늘어난 건가? 하아, 모르겠다. 그건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하고 일단 직접 만나서 사정을 들을게.” {네.} 나는 그렇게 통신구슬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엔젤단 인원수가 갑자기 그렇게 늘어나면 과연 통제가 될까? 아니, 아까 한나 얘기를 들을 때 보니 클레릭 사제일행도 있었던 것 같았는데 내가 권할 때는 거절하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 다시 가입한다는 거람. 머리가 지끈거려 나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지워버렸다. 일단 자세히 그때 일을 들으면 뭔가 알 수 있겠지 뭐. “아, 어쩐지. 정령이녀석이 왜 나한테 안 오나 했네.” 정령이 녀석은 내가 빛의 기운을 더 가지고 있어 자신의 양분을 위해 항상 내가 접속하면 한나곁에서 나에게 오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싶었는데 거리가 워낙에 멀어 오지 못했던 것 같았다. “하긴 평소에도 귀찮기만 했었는데 잘 된 건가.” 잘해주지 못해 조금 미안하기도 했지만 워낙에 정령이란 존재가 익숙지 않아서 말이지. 이젠 완전히 한나의 정령 같아 보이기도 하고 말이야. “아참참. 이럴 때가 아니지.” 기사단에 들른다는 것이 통신구슬 때문에 잠시 잊어버렸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미소천사 기사단을 향해 걸어갔다. “하아, 내일부터 본격적인 마왕의 침공이라니 이곳이 무사할 수나 있을까?” “그러게. 멋쟁이단장님도 무슨 생각이 있겠지만 너무 조용한 거 아닌가.” “흠, 그래도 오늘 멋지지 않았냐? 조이님하고 멋쟁이님이 보여준 합격!” “쩔었지! 전사와 궁수가 그렇게 팀플레이가 된다는 거 처음 알았다니까?” “이제 진리의 팀플레이는 전사와 궁수라고 말해야 할 정도지. 암암.” “그나저나 미소천사단장님은 어딜 가셨는지.” “하아, 그러게. 분명 세 명의 팀플레이는 더 멋질 텐데.” “저 찾으셨나요?” “우왁!” “으어허허헉!” 저 멀리에서 오고 있을 때 얼핏 내 아이디를 말한 거 같았는데. 생선 훔치려던 고양이가 주인한테 들킨 것 마냥 놀란다지. “미, 미소천사 단장님!” “미소천사 단장님이다! 어서 멋쟁이 단장님을 불러!” 나는 단지 손을 들고 있을 뿐인데 두 전사는 눈까지 붉어지며 전투태세를 알리는 것 마냥 신속히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되게 뻘줌하네. “저, 저기. 저 없을 때 무슨 일이라도 있었…….” “야! 나기…아니, 나소연! 너 지금까지 코빼기도 안보이고, 며칠 너 때매 소연이…아니, 니 언니한테 온갖 맘고생 시켜서 나까지 불똥 튀기게 만들고, 기껏 해결됐나 싶었는데 갑자기 기사단을 탈퇴하질 않나,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해쳐먹었던 거야!” 안에서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태식형이 다짜고짜 한 말이었다. 와, 숨넘어가겠다. 이거 쌓인 게 많은 모양인데. “그래서 어쩌라고요.” 무심히 말을 받아내자 갑자기 태식형이 한 걸음 물러났다. “너, 너, 너, 너, 설마 또 소연이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식은땀 흘리며 말까지 더듬었다. 태식형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뭔지 몰랐으므로 작게 어깨를 까닥여줄 뿐이었다. “너, 너. 정체가 뭐야.” “그야, 힐러죠.” “휴우, 아니구나.” 이 인간 대체 뭐야? “오랜만이네요. 타테님.” “아, 현빈 혀…오빠!” 원래는 검정 톤의 머리색이었는데 이번에 염색한 건지 짙푸른 머리를 하고 있는 일발필중 어둠의조이님이었다. 하지만 염색을 했어도 그 친절한 인상은 여전해보였다. 음, 옷차림도 예전 초보자 천 옷, 그대로네. 왜 장비는 맞추지 않는 거지? “그동안 재미있는 일을 많이 겪으신 것 같아 보이네요.” 현빈 형은 푸근히 미소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것이 진정한 형이란 자의 넓은 마음인가. 그 가슴팍에 폭 들어가고 싶었지만 눈팅 몸이라 참았다. “현빈 형! 이런 놈…아니지. 할튼, 이런 애는 너그럽게 봐주면 안 된다니까요!” 그에 비해 저 잔소리 쟁이 태식 형은 정말이지 나이 많은 어른이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하, 뭐 이렇게 찾아왔으니 넘어가죠. 이렇게 밖에 계속 세워두는 것도 예의가 아니잖아요?” “끄응.” 태식 형은 뭔가 불만이 가득했지만 현빈 형의 미소에 대놓고 화를 낼 순 없었던지 쿵쿵거리며 위로 올라갔다. 물론 나는 킥킥거리며 짧게 혀를 내밀어 주었다. “하지만 타테님도 잘하신 거 없어요. 그동안 연락을 안 한 건 다른 사람을 걱정시키는 일이니까요.” 현빈 형의 작은 질책에 나는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2층에 있는 응접실겸 단장의 작업실이기도 한 방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이미 얼굴을 한껏 찌푸린 상태로 앉아있는 태식 형이 보였다. 나와 현빈 형은 피식 웃으며 각자 자리에 착석했다. “아직까지 삐쳐있는 거예요?” “내가 어린애냐. 계속 삐치게.” “그런데 표정이 그게 뭐에요.” “냅둬. 내 맘이야.” “……….” 무슨 어린애 땡강 부리는 것도 아니고. “휴, 멋쟁이님 그 말 할 때가 아니잖아요.” 보다 못한 현빈 형이 고개를 저으며 타일렀다. 태식 형은 그 말에 잠깐 얼굴을 붉히더니 갑자기 정색 하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소연, 아니 기찬아.” “네에, 헉! 미, 미쳤어요?” 나는 깜짝 놀라 현빈 형의 눈치를 보았다. 그런데 현빈 형이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놀라기는커녕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아, 미안미안. 현빈 형한테 전부 말해버렸어.” “…정말이요?” “본의 아니게 듣고 말았네요. 처음에는 타테님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사실에 믿기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행동을 잘 살펴보면 남자가 맞구나 이해하게 되었죠. 그런데 지금도 놀라워요. 어떻게 목소리가 그렇게 예쁠 수 있죠? 변성기는 이미 지났을 텐데.” 내 얼굴에서 갑자기 확하고 열이 났다. 그렇다면 지금 전부 알면서 내 연기를 감상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와, 정말 최악이다. 누나 연기하면서 이렇게 쪽팔린 적은 처음이야! “그럼 이제 연기할 필요는 없겠네요.” “우왁! 깜짝이야. 갑자기 남자말투 쓰지 마! 그 얼굴에 괴리감 느껴져!” “하하, 정말 남자가 맞네요?” 내 바뀐 말투에 화들짝 놀라는 두 사람. 내 눈썹이 나도 모르게 씰룩거렸다. “장난 그만하고 현빈 형한테 왜 제 얘기를 했는지 말해요. 그냥 퍼트린 거라면 용서 안 할 거예요. 그랬다간 눈팅을 이간질해서…….” “그건 좀 봐주라. 안 그래도 사이 나쁜데 너까지 그러면 우린 이혼이다.” “전 아직 결혼 승낙한 적 없거든요?” “알아 모시겠나이다.” 고개를 숙이며 장난치는 태식 형. 현빈 형이 다시 한 숨을 쉬자 태식 형도 지나쳤다 생각했는지 진지하게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기찬아, 내가 전에 했던 얘기 기억하냐? 이 게임의 문제성에 대해.” “그 뇌파인식이 80%이상 될 거라는 이야기요?” 태식 형은 고개를 끄덕였고 현빈 형조차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때 말할 때는 내가 조사 중이라 했지만 지금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뇌파인식율 80% 이상 되어서 아펜하르트 회사가 취할 수 있는 무엇인가에 대해. 그것은…….” 마른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태식 형은 내 행동이 마음에 들었던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했다. “일단 본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뇌파가 뭔지 너는 알고 있냐?” 왜 이렇게 뜸을 들일까. 나는 뇌파에 대해서 아는 데로 설명했다. “뇌파라면 그 사람의 뇌에서 보내는 전극 뭐 아니에요? 그 전극을 이용해서 각기 손이나 발 같은데 명령을 내리거나 감정을 만들기도 하고…아닌가?” “어느 정도는 맞아. 하지만 뇌파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 즉, 파형의 형태가 많다는 거야. 극파, 예파, 다극파 등등이 있는데 어차피 설명해 봐야 너는 모를 테니 대충 넘어가고 간단히 말해 그것들은 각자의 역할과 하는 일들이 달라서 뇌파라고 하나만 생각하면 안 돼.” “그래서요?” “우리 팀은 무수히 많은 파형들 중에 아펜하르트 회사가 발하는 형태를 찾아봤지. 거기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태식 형이 몸을 앞으로 쭉 빼, 나를 쳐다보며 이어 말했다. “아펜하르트 회사는 뇌파를 풀어줘 자유를 주는 것과 동시에 하나의 뇌파를 수집하고 있었어.” “뇌파를 수집해요? 그게 무슨 소리죠?” “뇌파는 전극이야. 게임 상이기 때문에 그 전극을 취할 수 있었던 거지. 바로 캡슐을 통해서 말이야.” 너무 전문적인 말이라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뇌파를 수집한다니. 어디에 쓰려고 그런 걸 수집한단 말인가. 내 마음을 읽었던지 태식 형은 씨익 웃으며 손가락을 세웠다. “나도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어. 솔직히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아. 왜 뇌파를 수집하는지 말이야. 그래서 그 뇌파가 무슨 역할을 하는 뇌파인지 찾아보는데 주력하게 되었지. 그리고 최근에 현빈 형의 도움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현빈 형이요?” 형빈 형을 보았다. 형빈 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뇌파에 관해 학문을 연구하는 친구가 있었거든요. 덕분에 조금은 도움이 되었네요. 아펜하르트 회사에서 수집한 뇌파는 memory뇌파라고 해서 기억을 관장하는 뇌파였어요.” “기억이요? 기억은 뇌에서 하는 일 아닌가요?” 현빈 형은 내 말이 맞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말했다. “맞아요. 보통 모든 기억들은 뇌에서 관장하죠. 하지만 뇌파도 어느 정도 기억을 맡고 있어요. 혹시 옛날에 뇌 말고도 심장이나 눈 등 장기가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설을 들어본 적 있나요?” “아, 네. 영화에서도 자주 언급하던 말이잖아요.” “그것은 장기에 머물던 잔류 memory뇌파가 뇌로 이동되며 발생하는 현상이에요. 방어본능도 뇌가 인식하기 전에 막는 현상이죠? 뇌의 기억보다 더 빠른 뇌파가 기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죠.” “아악! 너무 어려워요. 뭐 대충 그 memory뇌파가 뭔지는 알겠는데 왜 그런 걸 아펜하르트 회사가 수집하는 거예요!” “복제인간이라도 만들 생각인가보지 뭐.” 태식 형은 기도 안 찬다는 듯이 툭하고 말을 내 뱉었다. “복제인간이요?” “memory뇌파는 무수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복제인간? 그 뿐만이 아니야. 만약 그 뇌파를 다른 사람에게 주입하면 어떻게 될까? 이중인격? 그건 단순한 생각이고 엄청난 괴물이 탄생할지도 몰라. 100명분의 방어본능 memory뇌파를 주입시키면 그 사람은 총알도 피할 수 있을 걸?” “네에?” “놀라지 마. 그런 건 별것도 아냐. 아이큐 1000의 미치광이도 탄생될지 모른다. 뭐, 일단 이론상이니까. 보통은 뇌 과부하로 즉사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하기는 일러. 이 게임 상에서 수집한 뇌파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되기 때문이야. 게임에서 유저들이 하는 일은 뭐지?” “레벨 올리기?” “레벨을 왜 올리지?” “그거야 강해지고 싶기 때문이겠죠.” “그래, 맞아. 강해지고 싶기 때문에 싸우고 몹을잡고 레벨을 올리지. 그 판타지성이 완연한 memory뇌파를 현실로 끓어낸다면?” “설마?” “말도 안 돼는 상상이지만 정말 마법도 현실에서 쓸 수 있지 않을까?” “맙소사!” 현실에서 마법을 쓴다고? 여기서 사용하는 스킬을 memory뇌파로 가져가 그대로 쓴단 말이야? 내 황당한 표정을 보고 있던 태식 형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럼 여기서 문제. 마왕의 침공이라는 이벤트를 열어 무수한 유저들을 싸우게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요?” “설마, 아펜하르트 회사는 memory뇌파를 한 번에 취하기 위해서 이벤트를 열었다는 거예요?” “딩동댕.” “그럼 막아야죠!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진정하세요, 타테님.” 현빈 형이 벌떡 일어난 나를 진정시켰고 태식 형은 담배라도 태우고 싶은 표정으로 미간을 매만졌다. “이건 전부 추리일 뿐이라 막을 방법이 없다. 증거가 없는 이상 근거 없는 소리일 뿐이고 혹여 증거가 있다하더라도 그냥 서버유지를 위한 백업 때문에 memory뇌파를 수집하고 있었다고 발표하면 그걸로 땡이기 때문이지. 진짜 그럴 수도 있고 말야.” “그럼 지금까지 한 얘기가 전부 괜한 소리였다는 말이에요?” 왠지 피곤해 졌다. 지금까지 말한 얘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태식 형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표정은 어두웠다. “나도 그냥 아펜하르트 회사가 별 목적 없이 저런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지만 지금도 무수히 뇌파과부하로 죽는 유저들이 생겨나는 판국에 그렇게 착한 회사라 치부하기는 무리라고 본다.” “그럼 지금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잖아요.” “하나 있어. 그래서 너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거고.” 태식형이 내 말을 바로 받았고 현빈 형이 이어 말했다. “이번 이벤트를 이용해서 저희는 더원 기사단을 앞질러 기사단 랭킹 1위로 올라갈 겁니다.” “기사단 랭킹 1위라뇨. 갑자기 왜?” “기찬아, 전에 말했잖아. 아펜하르트 회사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위로 올라가야 할 이유가 있다고. 정점에서 모든 유저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면 아펜하르트 회사는 우리를 건들기 어려워진다는 것. 게다가 반대로 우리 쪽에서 압박이 가능하다는 것.” “압박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래봐야 아무소용 없을 것 같은데. 게다가 어떻게 기사단 랭킹 1위로 올라가게요?” “그건 그래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아, 그 사실에 대해서는 다음에 약속을 잡고 현실에서 말해주마. 그리고 우리가 기사단 랭킹 1위로 올라가기는 간단해. 베르제브브 마왕이 침공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바로 우리가 둠터틀을 잡아서잖아. 그 둠터틀의 심장을 가지고 있으면 그쪽으로 분명 마왕이 온다. 이미 확실하게 조사한 내용이야. 그 둠터틀의 심장을 더원 기사단 쪽에 가지고 간다면? 쉽게 어부지리를 노린다는 거지.” 그렇구나. 어부지리. 간악한 생각이긴 하지만 확실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는……. “저, 둠터틀 심장을 이미 장착해 버렸는데요?” “그렇구나. 장착…뭐어!” 태식 형이 벌떡 일어났다. 더불어 현빈 형도 멍하니 나를 보았다. “그 귀한 걸 장착! 야 인마! 그러게 그거 나 달라고 했잖아! 분명 저주가 걸려있었을 텐데 어떻게 그걸 무식하게 장착하고 난리야!” “하지만 저주를 풀었는걸요?” “그게 어떤 저준데 매듭 풀 듯 풀리는 줄 아냐! 그런 걸 누가 풀어줘!” “교황이요.” 정말 단순히 지팡이를 툭하고 부딪친 것만으로 풀려버렸다죠. 내 말에 태식 형과 현빈 형은 멍하니 나를 보았다. “교, 교황이라니. 언제 교황이란 직분이 뉘 집 개 이름이 된 거지. 하아, 너는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냐.” 태식 형은 골치가 아픈지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럼 방법이 없네요. 처음 생각했던 방법으로 나가죠. 더원기사단과 저희가 싸우는 건 필수불가결이 되었군요.” “하아, 이거 확률적으로 조금 불리한데. 야, 너 기사단 모으긴 했냐? 무책임하게 아직도 한나랑 둘뿐인 건 아니겠지?” 아하하, 원래는 주리아까지 세 명이었다죠. “7, 70명이요! 저도 단원 수 모으느라 힘들었다고요!” “오, 이거 조금 도움이 되겠는 걸? 역시 형은 널 믿었다!” 이거 무진장 찔리는 걸. “그럼 이번 이벤트 동안 우리는 최대한 힘을 키우는데 주력한다. 단원들 레벨을 높여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아페타 마을 쪽으로 오는 몬스터들은 전부 우리 기사단이 장악해야 할 필요성이 있겠지.” “아! 그거 아까 전에 륀 기사단에서 레이나님이 한 말이 있는데 같이 모르핀 제국에서 방어하지 않겠냐는 의견이었어요. 그게 편하지 않을까요?” 문득 생각난 것을 말했지만 태식 형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막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그렇게 해야겠지만 되는데 까진 여기서 방어할거야. 같이 방어를 하면 그만큼 경험치가 줄어들거든. 뭐 일단 그렇게 되었으니까. 내일부터 모든 기사단을 소집시켜라. 이제부터 우리 미소천사 기사단은 타도 더원 기사단을 지향한다.” 태식 형의 마지막 말을 누군가가 들었으면 비웃었을지도 모르겠다. 타도 더원 기사단이라니 말이나 되는 소린가. 하지만 지금 여기 있는 우리 셋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이벤트를 노려라 10편 황태식[뭐지?!?!?] 여름이 지나가고 슬슬 가을이 오는지 사뭇 쌀쌀한 날씨인 월요일 아침. 밤새 뒤척였는지 헝클어져있는 머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담배를 문다. 언제부터인가 아침의 차가운 공기와 담배의 뜨거운 맛이 좋아 일찍 일어나버리게 된 이 습관. 하늘은 아직도 새파랗기만 하다. “후우.” 숨을 뱉자 빠르게 아침과 동화되는 담배연기. 몇 번 같은 행동을 반복하던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후아, 춥다.” 역시 러닝셔츠에 반바지 차림은 조금 심했나. 전기가 통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떤 나는 팔짱낀 채 안으로 들어간다. 내가 기거하는 곳은 작은 자취방이기 때문에 그다지 볼품없다. 이젠 가족이 돼 버린 것처럼 항상 자리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빈 맥주 캔들, 집안과 어울리지 않게 최신 설비로 무장한 컴퓨터. 그 옆에는 캡슐과 작은 침대 하나. 그게 다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시작인가.” 아펜하르트 측에서 이벤트하는 마왕의 침공. 오늘부터 본격적인 서막이 오른다. 시간을 보자 새벽 다섯 시 삼십분을 가리키는 자명종 시계. 이벤트는 정오부터 한다고 했으니 아직 시간은 많이 남은 셈이다. “끄응, 그럼 잠깐 뭐라도 먹을까.” 크게 기지개를 켠 나는 배를 문지르며 냉장고를 연다. 그곳에는 어제 먹다만 치킨과 반쯤 남은 1.5리터짜리 콜라 페트병이 보인다. 오늘 아침은 이거로라도 때울까나. “아참참, 모닝콜.” 나는 핸드폰을 찾아 일번을 꾹 누른다. 그러자 옛날 유행하던 레이싱 게임의 주제곡이 울려 퍼진다. 이걸 뭐라고 했더라. 아, 그래 카트라이더였었지 아마. 그 컬러링이 한동안 계속되다 부재중 알림말로 넘어가는 전화. 역시나 몇 번 더 해야지 일어날 듯싶다. {으응, 땡큐.} 세 번쯤 하자 그제야 전화를 받는 하나뿐인 공주님. 목인 잠긴 말투로 다짜고짜 땡큐라 말하는 센스조차도 너무 사랑스럽다. “다행이네. 오늘은 일찍 받아서.” {우응, 여러모로 아리가또.} 자존심이 강한건지 쑥스러움이 많은 건지 고맙다란 말을 직접 못하고 항상 이렇게 돌려 말하곤 한다. 그것도 나름 귀여워서 나야 뭐 좋지만. {오빠, 나 슬슬 씻을게. 수고해.} “그래…아, 전에 내가 부탁했던 거 오늘 가능하면 부탁해.” {이번 이벤트에 대해서? 뭐, 알았어. 그런데 그 말이 정말이야?} “그건 내가 나중에 말해줄게. 안 그래도 내가 소개시켜 줄 분이 계시거든.” {음, 정말 위험한 걸까. 그럼 역시 기찬이한테 그만두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그전에 나는 너부터 그 회사 그만 두었으면 하는데 말야.” {됐네요. 그럼 끊는다.} 전화가 끊어지자 뚜뚜 거리는 핸드폰은 잠시 동안 바라본다. 뭐, 소연이 덕분에 회사 측의 정보를 많이 입수해서 좋긴 했지만 과연 나는 이대로 내버려둬도 되는 걸까. 갑자기 마음이 내키지 않아 밥생각이 싹 사라졌다. 대신 컴퓨터를 부팅시킨다. 윙 하고 돌아가는 컴퓨터. 익숙한 소리에 나는 자연스레 담배를 문다. - 띠리리링! 전화다, 전화가 왔어요! 전화! 문득 온 전화에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컴퓨터 시간을 보니 열한시 삼십분. 잠깐 뇌파에 대해 조사한다는 게 6시간을 허비해 버린 것 같다. 일단 나는 핸드폰을 든다. “여보세요?” {날세.} “아, 임 박사님.” {그래 어떻게 상의는 끝났나?} “그럭저럭 말은 해 놨어요. 약속만 잡으면 될 것 같습니다.” {알았네. 회사 측에 눈을 피하는 방향으로 주선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짧게 용건을 마치고 전화를 끊는다. 임장순 박사님. 현재 아펜하르트 게임의 최초 설계자이자 뇌파인식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고 계신 분이다. 처음 우리 팀은 이 분을 의심하고 비밀리에 조사를 하던 중, 이미 손을 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는 회사 측 몰래 접근을 시도했다. 그래서 알게 된 사실이 바로 뇌파인식의 위험도. 임 박사님은 이 게임을 만든 것에 대해 많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모든 프로그램은 회사 측으로 넘어간 상태. 그 회사 측에서 오히려 감시를 받고 있는 불쌍한 분이시기도 하다. “후, 슬슬 들어가 볼까.” 입에 걸려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버리고 캡슐에 눕는다. 이 캡슐 시스템이 정말이지 다 마음에 드는데 흡연자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게 불만이다. 게임 상에서도 얼마나 담배가 피고 싶은데 왜 못 피는 건지. 화재위험만 아니라면 그냥 피면서 들어가는 건데 말이야. 나는 말도 안 돼는 푸념으로 투덜거렸지만 오늘도 난 아펜하르트에 접속한다. 이벤트를 노려라 11편 “현재 유저 접속 현황은?” “현재까지 중 최고 접속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검정색 양복 사람들이 어느 밀폐된 공간에서 말을 나누고 있었다. 주위는 거대한 모니터 한 대와 무수히 많은 컴퓨터들. 고가의 장비들인지 처음 보는 기기들 또한 진열되어 있었다. 처음 유저의 접속현황을 물어본 사람은 자신의 까칠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그럼 슬슬 시작하지.” “모니터링 체크 완료. memory뇌파정보 체크 완료. 몬스터 투입 시작하겠습니다.” 선글라스에 올백머리를 한 남성이 컴퓨터에서 여러 가지 기능들을 체크 후 빨간색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거대한 모니터에서 수천, 수만 마리의 언데드 몬스터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것들은 전 제국과 왕국에 똑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해일처럼 생겨난 언데드 몬스터들. 모니터는 각 제국과 왕국, 인근 마을들까지 빠짐없이 유저들을 체크해 나갔다. 모르핀 왕국 수도. 그곳에는 륀 기사단이 다른 기사단과는 다르게 성문 밖에서 진을 치고 해골병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첫 경험치는 우리가 장악하자! 모두 필사적으로 막아!” “레이나 누님,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데염? 이것들을 어떻게 막으라고염.” “하가네, 말할 시간 있으면 철벽이나 만들어! 광범위 마법 준비한다! 철패, 시간 좀!” “오라잇! 하가네, 광범위 철벽방패!” “명령하지 마삼! 금속성 현자의 돌! 모든 것을 지배해주삼, 연성진!” -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긴 노랑머리를 한 갈래로 땋아 등 뒤로 넘긴 유저였는데 검정색 가죽 일색의 복장과 큰 키가 매우 특이한 느낌을 주었다. 그 유저는 소매에서 작은 돌을 던진 다음 손바닥을 마주치자 성벽 앞에 또 다른 성벽이 만들어 진 것처럼 강철로 된 벽이 생겨났다. “좋았어! 이지스의 힘을 보여주마! 우랴랴랴랴랴랴랴랴랴랴!” 강철로 된 벽에 유난히 손잡이처럼 생긴 것을 검은 톤의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는 깍두기 머리의 검사가 잡자 벽이 순간 반짝이더니 무수히 많은 해골병사들을 막기 시작했다. “으허허허허허헉! 뭐 이리 지랄같이 많아!” 하지만 강철벽채로 뒤로 밀리기 시작하는 깍두기 검사. “제가 도와드리죠. ‘정신집중’스킬 발동, 화속성 교합, 파이어볼, 무한 연타!” - 퍼버버버버버버버벙! 여태껏 희미하기 미소 지으며 서있던 깡마른 유저였는데 붉은색 로브를 펄럭이며 강철벽 위에 올라가 마법을 시전하자 무슨 기관총을 쏘듯 사방에서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준비 완료! 하가네, 철패, 불사조 전부 물러나! 발현된다!” 가슴께가 파인 천 옷을 입고 있어 요염하게 생긴 푸른 머리의 여성이었는데 팔뚝만한 크기인 푸른 스태프를 높이 들며 말하자 앞에서 해골병사들을 막고 있던 유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황급히 뒤로 빠졌다. “물의 진리를 깨닫거라! 라이트닝 레인(lightning rain)!” - 우르르르르르릉! 콰콰쾅! 어느새 하늘에는 거대한 먹구름이 뭉쳐있었고 그곳에서는 비대신 무수히 많은 번개다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유저 네 명은 성문 안으로 피신했고 그 주위에는 처절한 싸움이라도 한 것처럼 부셔지거나 타버린 뼈들이 즐비하게 널려있었다. “저게, 륀 기사단의 저력인가…….” “역시 륀 기사단 최상위 멤버들이군. 단 네 명으로 이정도의 힘이라니.” “하지만 그럼에도 해골들이 끝이 없어, 이제부터 우리들이 힘을 발휘할 때다!” “레드드래곤 기사단이여, 모르핀 제국을 지켜라!” “질 수 없지! 페어리 기사단, 전부 사격 준비!” “륀 기사단은 저분들뿐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자! 마법 준비!” 성벽 위에는 이미 많은 수의 유저들이 한가득 모여 있었다. 륀 기사단의 최상위 멤버가 선전했지만 그럼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 해골군단. 모르핀 제국과 언데드 군단의 싸움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메히튼 왕국 수도. 그곳에는 화려한 옷 일색의 뚱뚱한 남성이 성벽위에 있었다. 그 옆에는 무심한 눈길로 저 멀리 몰려오는 해골병사를 보고 있는 붉은 머리의 여성이 팔짱낀 채 서 있었다. “화선녀님, 저것들 처리 가능할까요?” “무리다.” “으음, 화선녀님이 무리라고 하면 이거 승산이 없을 거 같은데…도망갈까요?”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려하는 뚱뚱한 유저를 붉은 머리 여성이 한심하다는 듯이 보다 한숨을 쉬었다. “하아, 명예랭킹 9위씩이나 되는 유저가 이 모양이라니. 이 게임은 정말 랭킹 따기 너무 쉬운 거 아냐?” 푸념 섞인 비꼼에 뚱뚱한 유저는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아하하, 명예랭킹이야 본 랭킹이 아니라 명성만 높으면 올라가는 시스템이고, 또 저는 돈으로 올라간 랭커 아닙니까. 그러니 호칭도 대부죠. 화선녀님이야 실력으로 따지면 이미 랭커겠지만 시작한지 얼마 안 되셔서 명성을 못 쌓은 거 뿐…….” “시끄러, 온다. 변명할 시간 있으면 저기 돈으로 산 애들이나 지휘하라고.” 붉은 머리 유저는 왼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몬스터들이 오든지 말든지 지들끼리 잡담하며 시시덕거리는 한 무리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가죽일색의 옷이라 용병이라기 보단 꼭 산적 같은 생김새였다. “너, 너희들! 돈을 쥐어줬으면 막아야 할 거 아냐!” “아아, 아직 두령이 안 와서.” “다덤벼 형님 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타입이라.” 뚱뚱한 유저의 침 튀기는 하는 말을 대부분 귀를 후벼 파며 흘려들었다. 그에 뚱뚱한 유저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손만 떨 뿐 말을 잊지 못했다. 그에 붉은 머리 여성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 참. 이런 놈을 고용주로 삼으며 머무르고 있다니. 여기 일만 마무리 되면 이곳을 떠야겠군.” 붉은 머리 여성은 머리를 긁적이며 귀찮다는 듯 산적처럼 생긴 일당에게 다가갔다. “어이, 거기 현재 최고 지휘관이 누구냐.” “응? 뭐야?” “예쁘장한데?” “저 여자 지금 영웅 행색 하러 온 건가? 킥킥, 재미있구만.” 산적처럼 생긴 일당들은 저마다 비웃으며 붉은 머리 여자가 무슨 행동을 할지 지켜보았다. “후, 딱히 나오지 않는 거 보니 없는 모양이네. 그럼 귀찮으니 다 덤벼라.” “뭐, 뭐라고?” “니가 무슨 랭커라도 되냐? 형님 같은 말투를 쓰고 난리야!” “보아하니 초보자 티를 못 벗고 있는데 지금 뻥카치냐?” “푸하하하! 뻐, 뻥카. 푸히히히! 염병아, 이번에 대박 터트렸네. 아우 나죽어!” 붉은 머리 여성은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 일순간 눈빛을 바꾸며 지금 웃고 있는 남성에게 일순간 다가와 검을 겨누었다. “일섬(一剡).” 차가운 눈빛으로 검을 겨누고 있자 웃고 있던 사내는 행동이 딱 멈추었다. 단지 붉은 머리만이 바람에 펄럭였을 뿐이었다. “히끅, 다, 당신은 누구요?” “니들이 생각한 그대로. 단지 저 레벨의 기사일 뿐이다.” “그, 그런데 어떻게 그런 움직임이.” “이, 일섬이 뭐야. 듣도 보도 못한 스킬이…….” “내가 그런 것까지 말해줘야 하나? 그보다 네 목숨이 더 중요할 텐데? 선택해라. 죽을 텐가, 싸울 텐가.” 산적처럼 생긴 일당들은 모두 침을 꿀꺽 삼켰다. “용문권(龍刎拳)!” 한순간 들린 외침과 동시에 붉은 머리 여성은 몸을 뒤로 빼었다. 여성이 이미 사라진 장소는 수류탄이라도 터트린 것 같은 자국이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호, 빠른데.” 주먹을 매만지며 말한 유저는 천으로 몸과 머리 전체를 둘둘 말고 있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 유저의 눈에는 칼에 배인 듯 한 상처가 있어 인상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형님!” “형님!” 산적처럼 생긴 일당들이 모두 벌떡 일어나 외쳤으나 상처 있는 유저는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조용, 감히 내 앞에서 몹쓸 꼴을 당하다니. 삼류 잡배가 되어버렸잖아. 저 여잔 뭐지?” “저, 저희도 몰라요. 갑자기 다짜고짜 와서 지휘관이 누구냐며 막 덤비더라니 까요.” 붉은 머리 여성은 자신에게 유리한 말들만 골라하는 유저를 보며 작게 혀를 내둘렀다. 상처 있는 유저는 잠시 변명하는 유저를 보다 붉은 머리 여성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내가 지휘관이다. 무슨 일이냐?” “아아, 밖을 보라고.” “밖? 내 눈에는 해골들밖에 안 보이는 군. 그래서?”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말하는 상처 있는 유저. 붉은 머리 유저는 지쳤다는 듯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저들이나 지휘관이나. 그냥 죽어. 파섬(破剡)!” “우왁!” 강하게 쇄도해 들어오는 검, 아니 일본식 도였다. 상처 있는 유저는 깜짝 놀랐지만 차분히 검을 전부 피하고 오히려 반격해 들어왔다. “칫, 그래도 한가락 한다 이거냐?” 붉은 머리 여성 역시 전부다 피하기 시작했다. 무수히 주고받는 공방. 뚱뚱한 유저와 산적 같은 유저들은 전부 멍하니 그 모습을 보아야만 했다. “어쭈, 내 권을 피해? 이것도 피하나 보자. 호문권(虎刎拳)!” 강하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권격에 이건 피하기 어려웠던지 붉은 머리 여성은 도를 위로 들어 권을 막았다. “큭!” “이것도 막다니. 대단…피드백? 기사면 가장 체력이 좋아야할 몸인데 이거 한방에 피를 토하다니 뭐냐?” “칫, 내가 조금만 일찍 시작했어도 이런 치욕은 안 당했을 텐데. 일월현문(日月現門)오의 천천후섬(天千厚剡)” “뭐, 뭐야. 너 설마 레벨이 낮았어? 우와, 잠깐, 근데 이 파상공격은 뭐야! 기문개방, 권막(拳?)!” 수많은 도들이 춤추듯 상처 있는 유저를 때렸고 그 유저는 하나하나 권으로 처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가 워낙에 많았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개의 칼날. 전부 막기는 힘들어 여기저기 베이긴 했지만 결국 치명적인 상처는 피 할 수 있었다. “헉, 헉. 무슨 이런 스킬이 다 있어. 저렙이 이런 스킬을 구사한다는 얘긴 들어본 적도 없다구!” “이걸로도 안 되는 건가…….” “…너, 정체가 뭐냐.” 멍하니 서있는 상처 난 유저. 붉은 머리 여성은 그저 그 유저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때 뚱뚱한 유저가 헐레벌떡 다가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다, 다덤벼님을 기다리고 있었소! 난 명예랭킹 9위의 대부라 하오. 내가 당신 슈바리에단을 용병으로서 계약했는데 전혀 싸울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일이 이렇게 된 것이오. 그러니 이런 무의미한 싸움은 그만두시오!” “용병계약? 야, 염병. 사실이냐?” “저, 그게, 저기. 형님을 기다리느라 잠시 쉬고있었…….” “병신새끼! 그런 걸 먼저 말하란 말이야! 완전 모르고 있던 나만 병신 됐잖아!” “죄, 죄송합니다, 형님!” “아 씨발, 야! 슈바리에단은 전부 들어라! 우리가 산적이냐? 우린 삼류 산적이 아니다! 슈바리에단은 전부 성문을 나가 적을 맞이한다! 조금이라도 뚫리면 각오들 해!” “예, 두령!” “예, 두령!” “나, 나가서 싸운다고요? 다덤벼님, 저 많은 수를 어떻게 막으려고 합니까! 여기서 싸워야 합니다. 다른 기사단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거란 말입니다!” 뚱뚱한 유저는 당황하며 말했지만 상처 있는 유저는 듣는 채도 안하고 나가며 말했다. “용병으로서 계약한 임무는 확실히 완료하지. 단, 우리 뜻대로 한다! 나가자!” “우오오오오오옷!” “우오오오오오옷!” 조금전만해도 일개 산척처럼 보였던 무리가 전부 질서정연하게 나가니 훈련된 기사 못지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뚱뚱한 유저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고 붉은 머리 여성은 이채 띤 눈빛으로 상처 있는 유저를 보았다. “이 게임도 타테만큼 나름 괜찮은 녀석이 있었네.” “뭐라고요?” “아니, 별거 아냐.” 고개를 갸웃하는 뚱뚱한 유저를 무시한 채 붉은 머리 유저는 다시 성벽 밖을 주시했다. 메히튼 왕국에서 동남쪽 산맥사이를 경계로 하는 켈타스 제국. 그곳에는 기사단 랭킹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더원기사단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여타 다른 제국이나 왕국과 달리 어마어마한 수의 유저들이 성문 밖에서 진을 친 채 저 멀리 몰려오는 해골군사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현재 인원은?” “더원기사단 90%이상이 집결했습니다. 여타 다른 기사단은 성 안에서 대기 중입니다.” 푸른 피부의 근육진 사내가 질문하자 뿔테안경을 낀 여성이 파피루스 노트를 살펴보며 말했다. 그들은 현재 거대한 드레이크 위에서 말을 나누고 있었다. “흠, 그런가.” 푸른 피부의 근육진 사내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그의 등에는 용이라도 때려잡을 듯 한 큰 대검을 차고 있었는데 아무렇지 않게 매고 다니는 걸 보니 힘이 무척이나 셀 것 같아 보였다. “애디님, 그보다 미소천사 기사단 건에 대해서 말인데요.” “공녀,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뭐, 그렇죠…….” 뿔테안경 사이로 살며시 눈치 보던 여성은 파피루스 노트를 접고 무언가 말하려했지만 그 전에 푸른 피부의 유저가 말을 막았다. “주르르, 내려간다.” “네, 단장님.” 주르르라 불린 사내는 녹색일색의 로브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드레이크를 조종하고 있었던 건지 녹색의 지팡이를 몇 번 돌리자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푸른 피부의 유저는 땅에 거의 근접할 때쯤에 뛰어 내렸는데 그 모습을 알아본 더원 기사단 유저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애디님이다!” “단장님이다! 단장님이 직접 선두에 서셨다!” “우오오오오옷!” 푸른 피부의 유저는 전방을 주시한 채 크게 외쳤다. “모두, 들어라! 지금 이런 난관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별것 아닌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우리의 최종 목적은 대륙의 통합! 이곳에서 주춤거릴 시간이 없다! 모두 나를 따르라, 우리는 더원 기사단이다!” 푸른 피부의 유저는 대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 검에서 푸른 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소드 오러다!” “레벨 100이 넘어서야 발현이 가능하다는 소드 오러!” “가자, 단장님을 따르자!” “더원 기사단 돌격!” 한순간의 9천명 가까이 되는 유저들을 하나로 뭉쳐버리는 카리스마. 드레이크 위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뿔테안경의 여성은 긴장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하트의 자질이란 저런 건가.” “훗, 그럴수록 저희가 잘 보필해야죠.” 녹색로브의 유저가 들은 듯 답하자 뿔테안경 여성은 피식 웃으며 노트를 펼쳤다. “물론, 헤드로서의 임무는 철저히 할 거랍니다. 자신의 핸드나 잘 처신하세요, 주르르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두 유저는 농을 주고받으며 화살모양으로 돌격하는 더원기사단을 지켜보았다. 지금까지 왕국과 제국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작은 아페타 마을. 그곳에는 오로지 미소천사 기사단 하나만 홀연히 성문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이거 보기보다 많은데요?” “그래도 막아봐야죠.” 저 멀리 물결처럼 일렁이는 하얀색 파도를 보며 땀을 삐질 흘리는 사내. 짙푸른 머리에 웃고 있는 작은 눈매가 인상적인 유저였으나 초보자용 옷을 입고 있어 그다지 튀지 않아 보였다. 그 유저 말에 반응한 유저는 여자 깨나 울릴 것 같은 외모를 소유하고 있는 자였는데 그 유저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옆을 향해 말했다. “야, 근육맨! 자신 있냐?” “명예랭킹 38위 나헬스했다! 물론 자신 있습니다! 돌격대 맡겨만 주시면 저 뼈를 갈아버리겠습니다!” 노랑머리를 하고 있는 근육질 사내였는데 그 터져버릴 것같이 부푼 가슴을 탕탕 치며 호쾌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 그 유저뿐인지 다른 유저들은 모두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저걸, 어떻게 막아.” “와, 저건 진짜 뼈들의 해일이다.” “보기만 해도 질린다.” 유저들의 기분을 예상한 예쁘장한 유저는 훌쩍 성 밖으로 뛰어 내려가 외쳤다. “그래봐야 게임뿐인데 남자가 쫄면 어떻게 하냐! 이참에 그동안 우리들이 무한 기사대전을 하며 습득한 전술들을 전부 사용해 볼 좋은 기회다! 미소천사 기사단, 돌격단! 우리에겐 무엇뿐인가!” “돌격뿐입니다!” 그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치켜들려던 예쁘장한 검사. 그때. “암속성 결합, 증폭, 화속성 결합, 증폭, 토속성 결합 증폭!” 성벽 위에서 푸른 머리 유저가 화살을 재고 있었다. 그 화살에는 세 가지의 색이 결합되며 어마어마한 공명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세상조차 가르는 필멸의 화살(Arrow of Mortality)!” - 콰과과과과과과과과! 일순간 펑 하고 미사일이라도 날린 것처럼 날아가는 화살. 그 주위에 있는 해골들은 전부 무참히 박살나거나 튕겨져 날아갔다. 멀리서 보면 모세가 바다를 가른 것처럼 두 갈래로 나눠지는 해골군단. 그 모습을 보고 예쁘장한 유저는 자신의 바스타드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곳에서 홍염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길이 열렸다. 모세가 가른 해골바다를 지나가자! 돌격!”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선두에 서서 돌격하는 예쁘장한 유저를 보고 있던 푸른 머리의 유저는 고개를 끄덕인 뒤 뒤돌아 외쳤다. “우리도 돌격단에 뒤처지면 안 되겠죠? 화살은 넉넉히 준비했나요?” “물론입니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하나뿐이죠. 섬멸단, 적을 섬멸합니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옷!”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옷!” 작은 마을에서 보기 힘든 웅장함이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탁탁탁탁,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린 지도 한 시간이 넘었다. 내가 지금 일어날 수만 있었어도 복도를 계속 왕복할지도 모를 불안한 상태였다. 오늘은 아펜하르트가 유료화 되기 11일전 월요일. 덕분에 나는 학교에 나와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하필 중요한 이벤트가 있는 이런 날에 말이지. 미소천사 기사단은 아페타 마을을 잘 막고 있을까? 이미 뚫려버린 건 아니겠지? 아 정말, 저 담탱은 도무지 끝내줄 생각을 안 해! “…그럼, 여기까지. 모두 수고했어. 반장.” “차렷!” 나는 누구보다도 재빠르게 허리를 똑바로 폈다. “경례.” “감사합니다!” 그리고 인사라는 동시에 담임보다도 더 빨리 밖으로 나가는 나. “야! 나기찬! 뭐가 그리 바빠 친구 얼굴도 안 보고 달려 나가기냐!” “니 얼굴에 관심 없다! 나 오늘 바빠서 먼저 간다, 수고!” 상천아, 미안하지만 지금 나는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태란 말이다. 학교를 나와 이제 가을날씨가 다가오는지 사뭇 추운 바람을 뚫고 거리를 지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거리. 차도에는 줄선 차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시간을 체크하며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눈에 보였다. “복제인간이라도 만들 생각인가보지 뭐.” “아이큐 1000의 미치광이도 탄생될지 모른다.” “말도 안 돼는 상상이지만 정말 마법도 현실에서 쓸 수 있지 않을까?” 갑자기 나는 어제 태식 형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런 변함없는 현실을 보고 있자니 태식 형이 말한 비현실이 꼭 머나먼 이야기 같이 들렸다. 사실여부를 떠나 TV너머를 보는 듯 한 감각. 그건 아마 태식 형이 가볍게 꺼낸 이유도 없지 않아 있었겠지만 아펜하르트 회사가 무슨 생각을 하던 나와는 관계없다는 마음이 더 커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분명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내 주위에 피해만 가지 않으면 아무 상관없는데 왜 굳이 내가 나서야 하며 위험해 질수도 있는 일에 껴들어야 하는가. 이기심. 이것은 내 내면 속에 가지고 있는 나쁜 마음일지도 몰랐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게임하며 힐러를 고수하고, 엄마를 울리고, 누나를 걱정하게 만든 모든 일들이 내 이기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나란 존재였다. 누나를 사칭해 여자로 플레이해오면서 혐오감 하나 들지 않은 내 플레이만 봐도 충분히 나란 존재를 알 수 있었다. 지금도 저런 심각한 얘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이벤트가 너무도 하고 싶어 이렇게 달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는 걷는 게 좋아요.” 전에 한나와 내가 걸으며 얘기할 때였다. 그때 한나는 단지 게임에서 걷는 게 좋아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내딛을 수 있다는 즐거움은 언니는 모를 거예요.’라 말하며 웃었더랬지. 정말이지 아기 새같이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아이였다. 그에 반해 나는? 뛰다시피 걷던 걸음을 멈추고 내 손바닥을 보았다. 힘든 일 하나 격지 않아 굳은살조차 없는 새하얀 손바닥. 이런 손바닥으로 아무렇지 않게 그런 애를 속이고 무책임하게 가지고 노는 나. 처음에는 죄책감이라도 들었지만 지금은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마음에 능청스러운 놈이 되어있었다. 여자라는 무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이용했다. 더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지금 나는 또 그런 게임에 들어가려고 뛰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이제 나에게 남은 시간은 11일. 이대로 놀기만 하고 모든 것을 끝낼 것인가? 기사단을 최상위로 만들어 뭐가 좋은데. 정작 나 때문에 게임을 시작한 한나는 11일 후에 혼자 하게 되지 않겠는가. 모든 것을 감추고 이대로 떠난다? 순간 내 몸이 움찔거렸다. 이대로 모든 걸 숨기고 떠난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이제 곧 결단해야할 상황이 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게임이란 것에 정신이 팔려 정작 중요한 문제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다. 한나와 함께한 시간이 너무 많아서 그랬던 것일지도 몰랐다. 한나는 나를 언니로 알고 가깝게 대해서 나도 그렇게만 생각한 것이었다. 정작 나란 존재는 전혀 모르지 않은가. 나는 대체 무엇에 만족하고 그녀를 보아왔던 것인가. “으, 하지만…….” 새하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른쪽 차도에서 수많은 차들이 엔진소리 요란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밝힌단 말인가. 어제 현빈 형이 내 존재의 사실을 알았다고 했을 땐 사실 별 감흥이 오지 않았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생각뿐? 하지만 그 사실을 한나가 알게 된다면? 혐오할까? 아니면 반대로 날 피할까? 지금까지 잘도 속였다고 따귀를 날릴지도.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형빈 형과 비슷할 거 같은데 왜 이런 생각들이 드는 걸까. 그냥 ‘나 사실 남자였어. 미안해.’라고 말하면 될 것을. “그걸 말할 수 있겠냐!” 갑자기 내가 소리 지르니 주위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내 얼굴이 화악 불타올랐다. 그렇게 말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어떻게, 아무리 내가 철면피라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행색을 일삼고 여자말투를 사용했으며 남들을 매혹시키고 다녔다고 말할 수……. “내가 지금까지 그랬다는 사실이 혐오스럽다…….” 쭈그리고 않아 좌절했다. 이제 주위 사람들은 나를 이상한 놈 취급하는지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던 한 아주머니가 나를 멀찍이 피해서 걸어갔다. 저 멀리서 ‘너는 저런 사람이 되면 안 돼.’하는 말이 들리는 것 같기도……. “그나저나 나는 어쩌면 좋아.” 한동안 나는 그렇게 쭈그려 앉아 뒤늦게 생각난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 덜컹. “다녀왔습니다.” 아직 누나가 오기에는 이른 시간. 학교에 있을 때 기분이었으면 교복을 입고 있건 말건 캡슐로 들어갔을 텐데 지금 나는 캡슐을 보기도 겁났다. 결국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이었다. 게임에 들어가 어서 아이템도 완전히 맞추고 싶고, 몬스터도 잡고 싶고, 레벨도 키우고 싶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 라면 절대 한나를 볼 수도, 여자 연기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게 문제였다. 이제 와서 남자에 대해 성찰해 무엇 하겠는가. 그것은 예전에 전부 끝냈지 않은가.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건 게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은 언니인 줄 알고 나를 좋아하는 한나에 대해서였기에 절대 대충 넘어 갈 문제가 아니지 않겠는가. 애초에 나는 이 문제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회피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이런 상황이 올 거란 것쯤은 알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당시 한나와 노는 게, 같이 사냥하고, 엔젤단을 결성해 파티를 맺고, 주리아와 만나고, 모험을 떠나던 모든 것들이 너무 재미있어서…그래서 나는 잊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이대로 11일 동안 맘 편히 놀며 지내다…….” 멍하니 말하다 끝까지 나오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가슴이 쓰렸다. 거짓된 행동으로 11일 동안 만나고 헤어지라고? 모든 게 끝이라고? 나라는 존재도 알리지 못해 언니인 줄 착각하고 11일 후에 게임 상에서 외로워 할 녀석을 내버려두고 나 몰라라 도망가라고? 그렇다면 나라는 놈은 정말 이기적인 놈이다. 말도 못할 정도로 멍청한 이기적인 놈이다! “하지만 절대로 말 할 수 없어! 젠장할!” 나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이 뒤섞여 지금 서있을 자신조차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거실 구석에 쭈그리고 않아 무릎 안에 고개를 파묻을 뿐이었다. 나는 정말 두려울 정도로 그 애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펜하르트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예쁜이’님 시작 포인트로 이동합니다.> 내가 게임에 들어오자마자 느낀 것은 허전함이었다. 중앙 광장은 텅 비어있어 분수대만 요란한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집집마다 문이 꽉 닫쳐있어 음침함까지 더해져 있었다. 저 멀리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왔지만 여기에서보자니 이질적인 느낌만 줄 뿐이었다. “한창 싸우고 있는 것인가.” 아마 저쪽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었다. 열정과 생명 같은 것들이 지배하고 있겠지. 그래서 그쪽으로 가기 꺼려졌다. 지금의 내 기분으론 절대 동화되기는 어려울 것 같았으니까. 엔젤단은 아마 어제 저녁에 도착한다고 했으니 지금쯤 이미 와서 전선에 투입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곳에 분명 한나와 주리아도 있겠지. 나는 분수대로 다가가 물가에 비치는 내 몸을 훑어보았다. 예쁘장한 레몬빛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티아라를 쓰고 있으며 얼굴에는 무슨 애니메이션을 따라해 분장까지 하고 있는 아름다운 여성. 항상 이렇게 하고 다녀서 너무도 익숙한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이런 내 모습이 왜 이리도 어색한 보이는 걸까. 천천히 걸음을 옮겨 함성이 울려 퍼지는 성문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유저들이 구경하고 있었는데 내 모습을 보고 하나 둘 놀란 표정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도 원래는 익숙해야했지만 지금은 너무도 부끄러웠다. 보지 마, 내가 아닌 나를 보며 좋아하지 마! “거기, 근육맨! 너 힘 벌써 다 떨어졌냐! 손이 놀잖아 손이! 어? 타테! 드디어 왔구나. 형이 아니, 오빠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뭐야, 무슨 일 있어?” 내 생기 없는 눈동자를 본 것인지 태식 형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살짝 웃어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아, 내가 어제 괜히 얘기했나보다. 그냥 아무 말 없이 기사단이 1위로 올라가도록 만 도와달라고 할 걸 그랬다. 이렇게 힘들어 할 줄은…….” “형,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야! 여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남자말투를 쓰면……!” 나는 태식 형 가슴팍으로 뛰어들어 얼굴을 묻었다. “그게 아니에요…그게…….” 그리고 형의 옷을 꽉 그러쥐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너…….” 태식 형은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겨우 붙잡고 있던 슬픔을 주체할 수 없을 것만 같아졌다. “나는…나는…….” “소연…언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이 찌르르하고 관통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지금 내가 들은 목소리를 부정하고 싶었다. 내 뒤에 한나가 있었단 사실이 정말이지 믿어지지 않았다. “서, 설마 두 분이서 사귀고 있는 거예요? 전에는 아는 오빠라고만…아, 아니, 그게 꼭 그렇지도 않지만, 그래도, 어, 어.” 못 들었다. 듣지 못했다. 나는 단지 그 사실 하나만으로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안심하고 있었다. 동시에 안심한 내 마음이 너무 혐오스러웠다. “소, 소연아. 일단 떨어져서…….” 태식 형도 조금 당황했는지 일단 나를 때어놓으려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몸이 굳어 옴짝달싹 안하자 더 당황했다. 일단 진정하자. 그래, 진정하는 거야. 평소처럼, 언제 나처럼! “어, 언니?” 아무렇지 않게 뒤돌았다. 마치 지금까지 장난이었다는 듯이. 그리고 내 입에선 다시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안녕, 아, 미안. 이거 쑥스럽다보니 조금 당황했네. 위치의 산맥은 잘 넘어왔어? 주리아는? 아, 저기 있구나. 지금 얘기하고 싶지만 너무 급한 일이 있어서 대신 잘 왔다고 말 좀 해주라. 이런, 늦었다. 먼저 가볼게. 조금 있다가 보자. 태식 오빠도 미안해요. 제가 오늘 조금 기분이 이상하네요. 헤헤, 잠깐 정신 차리고…일단 조금 있다가 봐요!” “소연 언니…….” “소연아…….” 나는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듣기 무서워 접속을 해제해 버렸다. 캡슐 밖으로 나오니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손까지 덜덜 떨리고 머리는 망치에 맞은 것처럼 윙윙거렸다. 여자처럼 잘 말했을까? 혹여 어색하지 않았을까? 수많은 생각이 머리에 교차되었고 나는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떻게, 어떻게.” 게임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도저히 한나를 볼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이런 걸 자각하다니 나란 놈은 대체!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10일전. 다음날 나는 멍하니 학교에 갔고 무엇을 배웠는지도 모르게 학교에서 돌아와 잠깐 자각하니 소파에 걸터앉아있었다. 문득 열려있는 내 방 사이로 캡슐이 보여 황급히 눈을 돌렸다. 지금으로선 내방을 가기조차, 캡슐을 보기조차 겁이 났다. {재필씨, 어제 마왕의 침공 이벤트가 그렇게 대단했다면서요?} {물론이죠! 어제 현재시간으로 정오 때 동시다발적으로 3제국, 6왕국 전체에 언데드몬스터들이 출몰하였습니다. 역시 전에 좀비무리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와 존재들이 나타나 대부분의 왕국들이 무너졌죠.} {왕국들이 무너져요?} {스켈톤 무리들을 필두로 스켈버드와 스컬기마병, 후에는 본맘모스 무리까지 나타나 대부분의 왕국들은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현재 버티고 있는 제국이나 왕국 쪽에 모든 유저들이 이동해 방어를 가담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머머, 그럼 이건 단순히 이벤트를 넘어선 것 같은데요?} {네, 쥬리씨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죠? 제가 생각하기로 이건 꼭…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생각 같습니다.} {처음부터 다시요?} {쥬리씨, 잘 생각해보세요. 아펜하르트가 오픈베타를 시작한지 한 달이 조금 넘은 상태인데 벌써 100레벨에 오른 유저가 속속들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유저들이 너무 강하게 되면 유료화 하기도 전에 게임이 퇴물로 넘어갈 수 있다는 문제가 생기죠. 이미 전부 만 렙인데 누가 돈 주고 게임을 하고 싶어 하겠어요. 그래서 이를 변화주기 위해 레벨을 초기화시키는 회사도 많이 있죠.} {그럼 지금 이건 전부 레벨을 초기화시키기 위한 이벤트라는 건가요?} {확실한 사실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 이벤트를 유저들이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내일이 마지막 날이니 지켜보도록 하죠.} {그렇군요. 내일이 마지막이라니 가슴이 두근두근…….} TV에서 무슨 말들이 오갔지만 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눈만 TV에 고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렇게 눈을 TV에서 때지 못했다. - 덜컹. “나왔어. 어라? 기찬아 네가 웬일이야 거실에서 다보고. 이 누님이 보고 싶었어? 어, 기찬아? 야, 나기찬!”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옆을 보자 누나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대체 언제 온 거야? “누나 왔어?” “무슨 일 있어?” 다짜고짜 묻는 누나. 나는 고개를 가로젓지만 누나는 내게 다가와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음, 일단 열은 없고. 그럼 감기는 아니란 말인데. 이번엔 대체 무슨 고민이야?” 내 목에 팔을 두르고 소파에 앉는 누나. 많이 피곤한지 발을 주무르며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 누나가 자주 하던 행동이었지. 아마 내가 누나보다 키가 작을 때였을 것이다. 지금은 내가 더 커서 목에 팔을 두르면 오히려 내가 부축하는 거 같아서 언제부터인가 누나는 하지 않은 행동이기도 했다. “그 전에…일단 발부터 씻어.” “아하하, 숙녀한테 너무 노골적으로 쑥스럽게 만드는 거 아냐? 여자는 스타킹을 신으면 더 냄새가 밴단 말야. 그 정도는 이해하라고.” 그렇게 말하며 누나는 능청스럽게 소파에서 일어나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어째서인지 누나와 잠깐 있었을 뿐인데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게 누나라는 존재인가? 혈육이라는 것일까? “고마워.” “응? 뭐라고 그랬어?” 욕실에서 고개만 내밀어 물어보는 누나. 나는 살며시 고개를 젓고 말했다. “아니야. 누나, 내가 처음 누나 아이디 해킹한 거 발견했을 때 어땠어?” “수염사건? 그야 당연히 쳐 죽이고 싶었지.” “……….” 역시 누나다. “그런데.” 누나는 갑자기 말을 하다 멈췄다. 그리고 쏴아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한동안 말은 들리지 않았다. “대단하다고도 생각했어.” “뭐?” 물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누나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다시 물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기찬아, 오랜만에 아빠산소에 가지 않을래?” “뭐? 이 시간에?” “응.” “지금 밤인데 지금 가봐야…….” “그래서 갈 거야, 말거야.” “갈래…….” 난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왠지 누나가 씩 웃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즉흥적으로 벌이는 짓이라 누나도 정장을 다시 입고 싶지 않았던지 그냥 가벼운 차림으로 나왔고 나 역시 항상 입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이미 칠흑 같은 밤이 내려앉아 가로등이 없었으면 한치 앞도 보지 못할 정도였다. 누나는 자연스런 동작으로 택시를 잡았고 그렇게 우리는 한 밤중에 아빠 산소에 도착하게 되었다. “아빠, 저 소연이에요. 오랜만이죠? 오늘은 기찬이 녀석도 대리고 왔어요. 전에 본 이후로 처음이죠? 녀석은 아직 미성년자라 혼자 올 능력이 안 되거든요.” 버스를 타고 오면 나 혼자 올 수 있었겠지만 혼자가기 그래서였을 뿐인데 꼭 어린애취급을 해요. “우리가 여기를 언제 왔더라?” “저 저번 주였으니까, 아마 2주하고도 삼사일쯤?” “벌써 보름이나 됐나?” 누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주위 잡초를 조금 뜯어내었다. 나는 그 모습을 그냥 멍하니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는 네가 남자다워 보였는데.” 누나가 피식 웃으며 나를 보았다. 남자답다라. 그때당시 나는 현실을 도피하고 게임을 하고 있던 나 자신에 대해 깨달았던 날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오히려 관심을 받고 싶어 했던 나라는 존재. 그것을 게임이라는 곳에서 만족을 느끼려했던 자신. 그것이 힐러로서 생활했던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게임이 사람을 나쁘게만 만드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 누나는 휘날리는 머리칼을 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누나는 오히려 시원하다는 듯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게임이 나에게 나쁜 영향만을 준 것이 아니다? 자아를 버리고 남자라는 자각조차 없애버린 게임이 결코 나쁘지 많은 않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때는 가슴이 뻥 뚫린 듯 한 기분이었다. 나라는 존재를 알 수 있었고 내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찾은 날이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안개에 가린 것처럼 두루뭉술했다. 게임을 해야 하는 걸까. 만약 한다면 여자로서 계속 연기를 해야 하는 걸까. 지금까지 한 모든 것들이 전부 거짓된 행동으로 해온 것이 아니었을까. “어제 모니터링 하는데 어딜 봐도 너의 모습은 안 보이더라. 오늘도 캡슐에 들어가지 않고. 무슨 고민이야?” 누나는 이미 어느 정도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이렇게 아버지 산소에 나를 데리고 온 걸지도 모르겠다. 게임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누나 아이디로 게임하는 거 누나는 어떻게 생각해?” “……….” 이번에는 아까처럼 바로 말하지 않고 한동안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거리며. “글쎄. 다른 사람이었다면 혐오스럽겠지. 그런데 그게 남동생이다 보니 그냥 아무생각 없어. 너라면…어느 정도는 믿을 수 있으니까.” 마지막말을 하며 콧잔등을 만지는 누나.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매혹에 걸린 듯 한 느낌을 주었다. “아, 몰라! 내가 왜 닭살 돋는 말을 해야 돼! 그보다 왜 그런 걸 묻는 건데?” “누나 아이디로 플레이하는 내 자신이 혐오스러워졌거든.” 말했다. 말해버렸다. 도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누나를 볼 자신이 없었다. “너…….” 누나의 말이 바람처럼 허물어져갔다. 무슨 말이라도 하란 말이야. 이 어색함이 너무 싫었다. “풋.” “………?”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우, 웃는 거냐!” “아하하, 하지만, 그게, 풋! 그래도, 푸흐흣!” 잡초를 쥐어뜯으면서까지 웃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누님. “그걸 어떻게 이제 깨닫나, 둔탱아! 푸하하하하하!” “그만 좀 웃어! 난 심각하단 말이야!” “하아, 하아. 알았어. 난 또 뭐라고. 괜히 걱정했네. 기찬아, 네가 나로 플레이했지만 네 행동, 생각들은 내가 아닌 너로서 플레이했을 거 아냐.” “하지만 그래도, 누나의 미모를 이용한 것도 사실이란 말이야.” “어머, 지금 누나 칭찬해 주는 거니?” “카악!” 자꾸 농담하는 누나를 째려봤다. 누나는 또다시 못 참겠다는 듯이 입을 틀어막다 겨우 진정하고 말했다. “알았어. 진지하게 임해줄게.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하려고. 게임을 그만둘 생각이야?” “모르겠어. 이대로 내가 아는 사람들을 속이는 것도 못하겠단 말이야.” 누나는 나를 슬며시 올려보다 한숨을 쉬었다. “네가 나로 플레이하며 속이는 것보다 이대로 모습을 감추는 게 더 마음 상한다는 사실을 모르겠니? 특히, 한나.” 나는 깜짝 놀라 누나를 보았다. 아참, 그러고 보니 누나도 이 아이디로 들어가 한나랑 무슨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었지. 차마 물어보지는 못해 지금껏 잊어먹고 있었다. “놀라네. 정곡인가. 한나는 네게 진심이던데. 정확히 말하면 나겠지만. 하지만 내가보기에는 네가 맞을 것 같은데.” “무슨 말이야 대체.” “네 마음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단 말이다. 멍충아.” “내…마음?” 누나는 내 가슴을 툭 치며 말했다.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니라 지금껏 대해온 네 마음이잖아. 그것조차 부정하면 어떻게 할 건데?” 중요한 것은 내 마음. 한나는 내 얼굴이 아니라 힐러라는 자부심 때문에 나를 보려했고 좋아하게 되었다. 그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두렵다. “한나라면 이해해 줄 거야. 걔도 많이 아픈 애니까…….” “아퍼?” “춥다, 돌아가자.” 누나는 팔짱을 끼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한동안 그곳에 서서 누나의 말을 곱씹어야만 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이미 많이 늦은 시간이 되었다. 오늘 이벤트도 이미 끝나있을 테니 지금 들어가 봐야 내가 할 것은 없겠지. 무심히 캡슐을 보았다. 어제 조금 있다가 들어간다고 약속해놓고 지금껏 들어가지 않은 상태. 설마 지금까지 기다리지는 않겠지? “그 애라면…….” 기다릴 것이다. 기다릴게 분명했다. 아무리 부정해도 내가 지금껏 보아온 그 애라면 아직까지 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젠장…….” <아펜하르트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예쁜이’님 시작 포인트로 이동합니다.> 내가 접속하자 서있는 곳은 성벽 위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는 한적한 상황. 내 예상이 틀린 걸까?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아타셰’님이 통신구슬 연락을 취합니다.> {언니! 언니에요? 왜 어제 접속한다고 해놓고 안 오셨어요!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저 때문에 마음상한일 있으셨어요? 제가 얼마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요. 지금 어디에요, 당장 그곳으로 갈게요!} 안심하기 무섭게 울리는 한나의 말. 말투에서 울먹이는 느낌이 묻어나왔다. 역시…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미안.” {언니…….}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네, 미안.” {지금 접속했으면 성문이죠? 잠깐만 기다려요!} 그렇게 말하며 한나는 연락을 끊었다. 내가 끊어진 통신 구슬을 언제까지 보고 있었을까. 저 아래에서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는 한나의 모습이 보였다. “언니!” ‘언니’ 그 말에 내 가슴은 더욱 쓰려왔다. 나는 남자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나는 언니일 뿐이었다. 한나는 성벽위로 올라와 손을 들었다 놓기도 하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무는 등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말했다. “미안.” “왜 자꾸 미안이라 말하는 거예요…언니가 저한테 잘못한 거 없어요. 그런데 왜 자꾸…으흑!” 한나의 눈에서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나는 결코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없었다. “그러면 마치…언니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으흑, 싫어요. 그러지 마요, 으흐흑, 그런 말 말아요!” 한나가 내 품안으로 안겼다. 그녀는 손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음에도 내 드레스 자락을 놓지 않았다. 이걸 놓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있는 것일까. 그녀가 품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이 정도였단 말인가.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속이고 있단 말이다. 입술을 으득 씹었다. 비릿한 피 맛이 맴돌았다. “한나야, 만약, 만약에 내가 기회가 된다면…너에게 말할 비밀이 있어. 그러니까…….” 기다려달라는 뒷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10일. 그 안에 과연 나는 말할 수 있을까? <접속을 해제하시겠습니까?> “언니? 언니! 언니이이이이이이이!” <‘아펜하르트’접속을 해제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한나의 울부짖음을 뒤로 한 채 나는 접속을 해제했다.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9일전. 수요일은 아침부터 우중충한 날씨였다. 비비린네가 나는걸로 보아 오후부터 한차례 쏟아질것 같다. 바람에 은행잎이 흩날렸다. 무수히 떨어지는 낙옆들을 보니 내 마음도 왠지 떨어질것만 같아 발걸음을 빨리했다. 학교에 도착해 무료한 수업을 받다보니 투둑투둑 빗방울들이 창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왠지 듣기 좋아 눈을감고 잠시 귀를 기울였다. “언니? 언니! 언니이이이이이이이!” 눈을감자 울부짖는 한나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에 내 눈에도 빗방울이 떨어졌다. “기찬이 너, 우는거니?” “네, 네? 하하, 나 왜이러지. 눈에 뭐가 들어갔나봐요. 하하!” 수업하던 담임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학교에서 무슨 주책이람. 황급히 눈가를 비비고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수업에 열중했다. 그날따라 빌어먹을 날씨까지 내편이 아니었다. “야, 우산있지? 날씨도 우중충한데 게임방이나 가자.” “나 그럴 기분 아니다.” “나도 친구자식 그냥 내버려둘 기분 아니다.” 갑자기 진지하게 말을 뱉는 녀석을 올려보았다. 상천이는 평소와 다르게 몹시 화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틀간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나한테 한마디도 안하는 너란 녀석, 그냥 내버려둬도 시원찮지만 말이다. 그놈의 정이란 게 뭔지 도저히 못 봐주겠단 말이다!” “너…….” “전에는 무림일대기 때문에 우울해해서 아펜하르트 소개시켜줬더니 이번엔 그대로 우울증까지 이동했냐? 아직도 말 못하겠으면 해킹해서라도 아펜하르트 들어갈 거니까 명심해.” 중학교 이후로 전혀 화를 내지 않던 상천이 녀석이 지금 진심으로 화내고 있었다. “킥킥, 나는 항상 주위에 폐만 끼치는 놈이구나.” 입은 웃고 있지만 얼굴전체는 울었다. 정확히는 울고 싶었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만. “너…진심으로 좋아하냐?” 내 고민을 들은 상천이는 놀란 눈빛으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솔직히 지금 감정이 어떤지 몰라 눈썹을 찡그릴 뿐이었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솔직히 그런 감정 잘 몰라. 너도 알잖아, 이런 감정 처음이라는 거.” “휴, 화선녀님이 슬퍼하겠군.” “거기서 화선녀님이 왜 나오냐?” “그냥 해본 말이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모르겠어.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그냥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래, 도망가고 싶다. 이런 머리아픈생각 다 집어치우고 비열하지만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럼 그렇게 해. 네가 상처받을 일이 두려우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겠네.” 상천이는 그렇게 말하며 내 가방을 집어 들어 나에게 넘겼다. “단, 그 여자애를 생각하는 감정보다 상처받을 감정이 더 클 경우에 말이다. 야, 일단 따라 와봐.” 상천이는 그렇게 말하며 교실을 나갔다. 뭐지? 왜 상천이 녀석 따위가 이렇게나 멋져 보이는 거야! 상천이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광화문 광장이었다. 그곳에는 무슨 일인지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리를 만들고 앉아 한 곳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저건 아펜하르트?” 광장 대형스크린에 비추고 있는 것은 한창 마왕 이벤트에 열중하는 게임유저들의 모습이었다. 상천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U채널 게임TV에서 공개방송을 한다고 했거든.” 아펜하르트를 이런 곳에서 볼 수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그 정도로 유명한 건가? 한 달이 조금 넘은 게임이? “오늘 이렇게 광화문에 오신 많은 관중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언제나 아펜하르트에 대해 소개하는 유재필이라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기 옆에 있는 재필 씨와 함께 아펜하르트를 여행하는 초보유저 쥬리라고 합니다! 항상 방송 카메라만 보며 아펜하르트를 소개하다 이렇게 밖으로 나와 직접 얼굴을 맞대고 방송을 하려니 심히 가슴이 떨리네요. 그럼 지금까지 아펜하르트에 대해 상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재필씨?” “네, 오늘 정오부터 시작한 마왕의 침공 마지막 이벤트가 시작되었는데요. 본격적인 시작은 오후 3시부터였습니다. 드디어 마왕, 베르제브브가 등장하게 된 거죠. 이 화면을 보시죠.” 재필이란 방송인이 스크린을 가리키자 그곳에서 무수히 많은 언데드 무리를 이끄는 누군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점점 클로즈업되어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는데 온통 검은색 가죽일색에 산양 같은 뿔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었다. 이것이 아마도 베르제브브가 아닐 듯싶었다. “이 스크린에서 보여주는 악마가 바로 암흑 탑의 주인 베르제브브입니다! 현재로서 사용하는 스킬은 광범위 저주와 검은 매직미사일 정도만 판명되었고 나머지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재필씨, 베르제브브가 나타난 이후로 상황이 조금 바뀐 것 같아 보이는데 유저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베르제브브가 처음으로 등장한 곳은 다름 아닌 모르핀 제국! 그곳을 방어하던 모든 기사단이 거의 괴멸에 가깝게 당했다고 합니다.” 처참하게 무너진 모르핀제국을 비추는 대형 스크린. 그곳에는 분명 륀 기사단이 방어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거의 괴멸에 가깝게 당했다고? 그럼 아페타 마을은 지금 무사할까? 모두 어떻게 된 거지? “강대국이었던 모르핀제국이 아무손도 쓰지 못한 채 무너지자 흩어져있던 유저들이 한곳으로 뭉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라면 각개격파당하니 유저들이 생각해 낸 것이었죠.” “어머? 꼭 전쟁을 보는 것 같네요. 그런데 어떻게 각자 떨어져 있는 유저들이 한 마음이 되어 뭉칠 수가 있는 거죠?” “그건 아마도 기사단 랭킹 1위의 더원 기사단 때문이 아닐까요?” “더원 기사단이요?” “모르핀 제국이 당하자 그 정보를 가장 빨리 취득한 더원 기사단은 기사단원들을 보내 사람들을 뭉치게 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어떻게 인지는 모르겠지만 뛰어난 전략가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지 않을까요? 뭐, 어쨌든 그렇게 해서 지금 현재 오후 5시가 되는 이 시간, 여기 켈타스 제국 인근지역 혈폭의 사막 한가운데 온갖 랭커를 포함하여 수많은 기사단이 전부 집결한 상태 입니다!” 대형스크린은 드디어 현재 상황을 비추었다. 유저들이 이렇게나 많았나 싶을 정도로 빼곡히 들어찬 유저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곳에서 다행히도 륀 기사단의 깃발과 우리 미소천사 기사단의 깃발역시 볼 수 있었다. “정말 많군요! 재필씨, 이렇게 많은 유저라면 막지 못할 게 없을 것 같은데요?” “아마도 두 번 모이기 힘들 유저들이 전부 모여 있다 생각하셔도 될 것 같네요. 하지만 그래서 불안한 요소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연합이 무너지면 두 번 다시 복귀할 수 없을 것이란 것, 그리고 기사단을 통제하고 지휘할 자가 과연 있을까하는 점이죠. 과연 이 많은 유저들을 통제할 자가 있을까요?” “하긴, 대통령이 오지 않는 한 통합될 수는 없겠죠.” “하하, 쥬리씨의 재치 있는 말씀, 재미있네요. 그럼, 이제부터는 저희의 설명 없이 스크린의 볼륨을 높여 유저들의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모여주신 수많은 관중 여러분!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내가 봐도 이렇게 많은 유저들을 통제할 유저가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더원 기사단의 용병왕 애디라면 할 수 있을까? 태식 형이 과연 따를지도 의문이 들지만 일단 스크린을 집중해서 보았다. 스크린에서는 저 멀리 수많은 언데드 물결이 일렁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사막에서 물결이라니 천리안을 가진 궁수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든 광경이 분명했다. 그 장엄한 광경을 넋 나간 채 바라보고 있을 때, 유저들 진형에서 무언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드, 드레이크다!” “어째서 여기에 몬스터가!” “아, 아니야! 저 위에 사람들이 타고 있어! 그렇다면……?” “명예랭커 4위, 드래곤소환사 주르르다!” 명예랭커 4위의 드래곤소환사 주르르. 저 유저는 분명 더원 기사단, 최고 지위에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저런 유저가 왜? 자세히 보니 드레이크에 타고 있는 유저는 주르르라는 유저뿐만이 아니었다. 푸른색 각질 투성인 유저는 모르겠지만 그 옆에 노트를 들고 있는 여성유저까지 있는 것이었다. 어라? 그런데 저 여성은……. “제갈공녀님이잖아.” “아는 사람이라도 있냐?” 내 혼잣말에 상천이 녀석이 반응했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스크린을 주시했다. “들어라! 지금 우리들은 중요한 결전에 임하고 있다. 이곳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선 적절한 판단력을 가진 지휘관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부터 명예 랭커 2위부터 10위까지 각자 부관으로 임명하고 각자 친근 있는 유저들끼리 결합해 언데드를 상대한다!” 푸른 각질의 사내가 한 말이었다. 거대한 대검을 등에 찬 상태였는데 탄탄한 근육질이 꽤나 단단해 보이는 사내였다. “당신은 누군데 최고 지휘관인 듯 행동하시오!” 어디선가 들린 말이었다.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 판별하기는 힘들었지만 푸른 각질의 사내는 어딘가 시선을 주며 대검을 꺼냈다. “오, 오러소드!” “그, 그렇다면!” “나는 더원 기사단의 수장, 배틀마스터, 용병왕, 애디다!” “요, 용병왕 애디!” “명예랭커 1위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명예랭커 1위 타이틀의 힘은 대단한 파장을 불렀다. 대부분의 유저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이미 하나로 뭉친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야, 기찬아. 저 유저가 그렇게 대단하냐?” “나도 실물로 보긴 처음이다. 하지만 소문으로는 대단하다는 것만 알고 있어.” 내 말에 상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크린을 다시 집중했다. - 화르르르르르륵! “억! 부, 불이다!” 유저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갑자기 불꽃이 솟아올랐다. 정확히 보니 누군가 검을 들고 있었고 거기에 불이 붙은 것이었다. 어라? 저건. “자신이 우월자라 생각하며 목소리 높이지 마라!” 태식 형이었다. 홍염의 검을 바닥에 꽂으며 태식 형은 명예랭커 1위를 노려보았다. “…라고 말하면 단합되긴 더 어려울 테니 일단 그 의견에 동참하지.” 그렇게 말하며 씩 웃어보였다. 애디라는 자도 처음으로 무표정한 얼굴에서 웃는 표정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그 둘은 단지 눈을 마주치며 웃었을 뿐이었다. “미소천사 기사단은 들어라! 이곳에서의 싸움이 최종 결전지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좀 어깨에 힘주고 앞을 봐라!” “우오오오오오오…….” “와아아아아아아…….” 미소천사 단원들이 왜 저 모양이지? 하나도 힘이 없는 표정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태식 형은 힘없는 그들의 외침에 이마를 짚었다. “야! 타테는 온다! 꼭 올 거야! 그러니 죽을 상 좀 하지 마!” “하지만…….” “그래도 누님이…….” “왜 그때 나가서 아직까지 안 오는 걸까요?” “무슨 일이 생긴 게 맞대니까!” “집주소만 알았어도 내가 위로해 주는 건데, 크윽!” “야! 괜히 덮치지나 마라!” “내가 변태냐? 덮치긴 뭘 덮쳐!” …나 때문이었냐? “타테? 야, 미소천사 기사단이 네가 속한 기사단이었냐?” 상천이가 의문을 물었고 나는 단지 작게 고개를 끄덕여줌으로서 짧게 긍정했다. 미소천사 단원들의 사기저하는 다른 유저들에게도 많은 피해를 끼쳤다. 가득이나 해일처럼 몰려오는 언데드 군단 때문에 사기가 저하된 상태인데 명예랭커 6위, 8위가 속한 기사단이 저러고 있으니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었다. 태식 형은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 기사단원들을 부추기고 있었지만 영 힘든 모양이었다. “야! 타테, 보고 있냐? 너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 힐러라면…감정 따윈 뒷전으로 넘기란 말이다!” 태식 형은 하늘을 보며 말했다. 그 시선 끝에는 정확히 스크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멋쟁이님, 아무리 그래도 스크린에 대고 말하시는 것은…….” 옆에 있던 현빈 형이 땀을 삐질 흘리며 태식 형의 어깨를 잡았다. 게임 상에서도 대형 스크린이 있는 것인가. 지금 이곳이 관중석처럼 되어 있다는 뜻일지도. 입술을 깨물었다. 게임이 하고 싶다. 저 사람들을 저버리는 짓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손가락 빨며 구경하고 싶지 않았다. “저렇게 부르는데 들어가 보지 그래?” 상천이가 곁눈질하며 말했지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젓고 다시 스크린을 보았다. 언데드 무리가 이제 지척까지 다가왔다. 선두에 있는 언데드는 말을 타고 있는 기사. 데스나이트? 아니다, 좀비같이 살점이 붙어있다. 게다가 온전한 얼굴을 손으로 들고 있었다. 저건, 듀라한이었다. 그 뒤로 스컬 기마군단이 줄지어 따라오고 있었고 그 뒤에는 해골들이 각가지 병장기를 가지고 돌진하고 있었다. 그 수가 너무 많아 여기서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질릴 정도였다. “너, 너무 많아.” “듀라한이라니. 체력으로 따지면 데스나이트보다 강하다고 평가되는 놈 아니야?” “이거 돌파당하는 거 아냐?” 유저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유저들이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적으로 거의 3배가량 차이나는 군세. 철저한 명령 속에 움직이는 언데드 무리와 아무 작전조차 없이 모여 있는 유저들. 냅다 도망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때 앞으로 나선 존재가 있었다. 조용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자는 명예랭커 1위의 용병왕이었다. “더원 기사단 깃발 장착. ‘전장의 지휘관’스킬 발동.” 용병왕은 유려한 필체로 ONE라 쓰여 있는 깃발을 등에 매었다. 저것은 명예랭커 1위부터 10위까지 주어지는 ‘전장의 지휘관’스킬이었다. 전에 업데이트 공지에서 본 기억이 났다. 분명 자신을 포함한 주위 50m 간격에 포함된 기사단은 모든 능력치 5%~15% 상승으로 알고 있다. 명예랭커 1위라면 당연히 15%풀로 작용될 터. 주위 유저들은 사기 적으로 스텟이 올라있을게 분명했다. “배틀 존 생성, 파괴의 의지는 이곳에서 이루어지리라!” 그것만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자신의 대검을 바닥에 내리꽂자 주위 대지가 금빛으로 변하며 그 빛이 유저들에게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무슨 능력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눈을 크게 뜨며 놀라했다. “이, 이건 뭐야. 방어력이 어마어마하게 높아졌어!” “이, 이것이 용병왕의 배틀 존인가! 소문보다 더 대단하다!” 모두 감탄하고 있었다. 용병왕은 앞을 향해 검을 뻗었다. “몬스터들 따위에게 겁먹는다면 전투 직업으로 게임을 시작한 자신에게 창피해해라! 더원기사단은 들어라! 이곳은 중요한 지점이다! 여기서 밀리면 앞은 없다! 나가자, 우리의 실력을 세상에 보여주자!” “우와아아아아아아!” “더원 기사단이여, 영원하라!” “돌겨어어어어억!” 엄청난 함성이었다. 지금 모여 있는 유저들의 거의 반이 검을 위로 치켜들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더원 기사단 유저가 많다는 것이었다. 다른 유저들은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게임에서 너무 열 내는 거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런 눈빛이 아니었다. 진정한 남자의 모습을 보고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이거 선수를 당했군. 야, 너희들 계속 멍하니 있을 거야? 우리의 목표는 저 기사단을 이기는 것이다! 주눅 들지 마라! 우리들에게는 여신이 있다! 그것만 믿고 맹세해라! 우리가 누구냐!” 태식 형이 외쳤다. 그러자 더 소침해져있던 미소천사 기사단원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킥킥, 하긴 일개 팬클럽 기사단일 뿐이었는데 이제 와서 주눅 들어 뭐해.” “애초에 우리는 약자였잖아?” “왠지 실버크로스단이랑 붙었던 적이 생각나는데?” “그때 그분이 진정한 여신이란 걸 알았지.” “그때처럼 또 오실거야. 아니, 분명히 오신다.” “오신다, 오신다.” “오신다! 오신다!” “우오오오오오옷! 그분이 올 때까지 창피한 모습을 보이지 말자!” “우리는 미소천사 기사단이다!” “미소천사 기사단 깃발 장착. ‘전장의 지휘관’스킬 발동! 돌격하라!” 마지막 말은 태식 형이 외친 것이었다. 그 말에 반응한 유저는 더원 기사단원들보단 현저히 적었지만 사기만큼은 그들 못지않았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자꾸만 주먹이 쥐어졌다. 이러고라도 있지 않는다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을 것이 분명하니까. “기문 개방! 기공파, 궁극 오의! 에, 네, 르, 기, 파아아아아아아!” 돌격하는 더원 기사단과 미소천사 기사단을 앞질러 어마어마한 기공파가 먼저 언데드무리를 때렸다. 저, 저건! “너희들만 눈에 튀지 말란 말이다! 쿨럭! 헉, 헉! 여기에는 나도 있다!” “명예랭커 10위 맨손마스터, 다덤벼다!” “어마어마한 기공이다! 에네르기파라니! 남자의 로망이다!” “머, 멋져!” 여, 역시나 놈이었던가. “이야, 멋지다. 에네르기파라니. 저 게임은 저런 것도 쓸 수 있냐?” “그냥 비슷하게 만든 걸 명칭을 에네르기파로 한 것뿐이야.” 내가 한숨을 쉬며 답했지만 상천이는 이미 매료됐는지 이젠 눈까지 반짝거리며 스크린을 주시했다. 이 녀석 이러다 정말 해킹해서 아펜하르트 한다고 하는 거 아냐? “헥, 헥. 슈바리에단도 도, 돌겨어어어억!” “하아, 한발 쓰고 지칠 거면 왜 날리는 건지. 조루도 아니고.” “뭐, 뭐?” “남자의 로망은 참으로 대단하다고요. 가죠, 돌격하라면서요.” “…젠장, 슈바리에 기사단 깃발 장착. ‘전장의 지휘관’스킬 발동! 돌격하자, 나가자!” 다덤벼녀석 옆에 있던 붉은 머리 여성이 한 말이었다. 그런데 왠지 모습이 익숙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라? 저 여성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 상천이 너도냐? 나도 지금 그런 기분이 들었는데.” “에이, 내가 저 게임에서 무슨 아는 얼굴이 있다고. 비슷한 얼굴이 있나보네.” 상천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넘겼다. 나 역시 다시 스크린을 주시했다. 상황은 드디어 돌격하는 더원 기사단과 듀라한 나이트들의 부딪침으로 시작되었다. 그전에 해골궁병에 의한 수많은 화살들이 창공을 뒤덮긴 했지만 마법사들과 사제들의 방어막에 전부 막힌 상태였고 우리 쪽에서 날린 화살들도 별 피해를 주지 못해 지금 돌격이 진정한 시작이라 말한 것이었다. “멈추지 마라! 뚫어라!” 선두에서 대검을 놀리는 용병왕이 외치며 앞을 열었다. 대검은 이미 푸르스름한 오라가 맺혀져있었는데 그 강하다는 체력의 듀라한 조차도 일격을 받아내지 못해 허무하게 스러져갈 정도였다. “우아아아아아아! 용병왕님의 뒤를 따르자!” “저곳으로 붙어!” 더원 기사단뿐만 아니라 뒤따라온 수많은 유저들은 이제 더원 기사단들에게 붙기 시작했다. 이곳이 전장에서는 유리하다 판단한 것이리라. “블레이즈 댄스!” 태식 형도 질 수 없다는 듯이 스킬을 외쳤다. 그의 발에서는 화려한 불꽃이 튀기 시작했고 지나가는 곳은 불의 길이 만들어졌다. 언데드에게 가장 천적은 빛과 불. 태식 형은 언데드에게 있어 천적일지도 몰랐다. “내가 길을 연다! 모두 불의 길을 벗어나지 말고 따라와라!” “마검사님을 따르자!” “이곳이 좋겠어!” 태식 형이 이끄는 미소천사 기사단에도 다른 수많은 기사단들이 합세하기 시작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새삼 다시 봐도 태식 형의 지휘능력은 대단한걸. “용문권(龍刎拳)!” - 꽈지지지직! 땅이 찢어질 듯 한 굉음. 그것이 한 사람의 주먹으로 인해 생긴 소리라면 이해하겠는가? 그것을 다덤벼는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가공할 만치 강한 일격. 주위 해골병사들은 온몸이 바스러져 한줌의 뼈가되었다. “헉, 헉! 이봐! 누구를 찾고 있기에 계속 두리번거리는 거야! 이쪽이나 도와!” “시끄러워.” 붉은 머리의 여성은 이 전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지 자신에게 공격하는 해골만 처리하며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우씨, 계속 그렇게 나올 거야?” “칫, 여기도 없는 건가. 대체 그놈은 어디서 플레이 하는 건지. 알았어, 도와주면 되잖아. 일월현문(日月現門)오의 천천후섬(天千厚剡)!” 붉은 머리 여성의 주위는 수많은 검결로 가득해졌다. 이것은 검의 폭풍. 말 그대로 폭풍이 아닐 수 없었다. - 콰과과과과과과과! “…저 여성은 뭐야?” “랭커? 저 예쁜 모습은 혹시 명예랭커 2위, 글로리시나 아냐?” “아니, 2위는 머리색이 금색이라고 했는데?” “그럼 누구지?” 그 여성 주위에 무참히 바스러진 해골 뼈들을 보며 주위 유저들이 저마다 한 말이었다. 저 검결은 뭐지? 꼭 무협에서 볼 수 있는 검법이 아닌가. “천천후섬? 어디서 많이 본 건데. 어라? 그거 실제 현존하는 가문의 검법 아냐. 으으음? 분명 누구한테 들은 건데. 누구더라. 누구였지?” 갑자기 상천이가 턱을 짚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천천후섬, 천천후섬. 아, 그래. 그건 화선녀님이 화산파가 자신이 배우는 검법이랑 비슷해서 선택했다고 했었는데. 엉? 어어어?” 상천이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다시 스크린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어어어어어어어어어!” “왜 그래?”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상천이는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스크린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 저, 저기 저분은!” 상천이가 말하려는 동시에. “넌 이제부터 화선녀라는 이름 말고 검선녀로 바꿔라. 거참, 이런 검술이 스킬이 아니라니. 이 게임도 다 망했군.” 다덤벼가 투덜거리며 하는 말했던 것이었다. “화, 화선녀님? 저, 정화누나!” 그러고 보니 전에 화선녀님이 무림일대기를 접은 것 같다는 말을 상천이에게서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는 설마 했는데 그 이후로 아펜하르트를 시작했다는 건가? 그래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저 황당한 능력은 무엇이란 말인가.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펜하르트는 현실 스킬도 게임 상에서 어드밴티지가 적용 되냐?” 상천이가 뜬금없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려다 생각을 바꿨다. 생각해보니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내 심연의 눈도 원래는 현실에서나 익힌 감각이 아니었던가. 내가 부정하지 않자 상천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에 무림일대기하며 들었거든. 저 누나 도장 다녀.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도 상위 5위에 들걸? 그때 아마 일월현문이라고 들었는데 아마 그쪽에서 익힌 기술일거야.” 그, 그럼 저게 스킬이 아니고 그냥 본래 가지고 있는 힘이란 말인가? 나는 공기가 물질화돼서 목에 막혀버린 듯 숨 하나 뱉지 못했다. 스크린에서는 유저들이 무참히 해골병사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누가 보면 학살이라 고해도 좋을 만큼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본맘모스가 등장하며 끝이 났다. 어마어마한 체구의 본맘모스. 흠집조차 나지 않는 강대한 뼈와 엄청난 리치를 자랑하는 상아. 그 몬스터가 지나간 자리는 유저고 해골이고 없이 무참히 짓밟힌 흔적뿐이었다. “무식한 괴물이군.” 상천이의 말 그대로였다. 아군이고 적군이고 없이 그야말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괴물. 결국 유저들 중에서도 강한 자들만 남아 소수의 인원으로 본맘모스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많아봐야 피해만 커질 것이 분명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본맘모스는 많지 않았다. 눈으로 셀 수 있는 정도. 서른 마리 전후? 그나마 뿔뿔이 흩어져 있어 다행이었지 이것들이 모여 있었으면 아무도 손쓰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철패, 방어!” “맡겨 둬!” “불사조, 현혹시켜!” “화이어 필라!” “나머지 륀 기사단은 일제 머리를 공격한다! 하가네, 가자! 연금 합성 마법, 압착의 수환(water pills of compression)!” 레이나님이 지휘하는 륀 기사단이었다. 이미 본맘모스 하나를 격퇴시키고 두 마리째 노리는 중이었다. 레이나님의 노련한 지휘가 한껏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했다. “팔 근력강화, 전사의 다짐, 버서커 모드 발동! 이 조무래기야 덤벼라!” 순간 저 멀리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스크린이 천천히 이동하며 방금 말한 상대를 가리키자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나를 처음으로 살해한 놈이며, 내가 힐스킬을 만들기 전에 처참히 복수한 놈이기도 했다. 하티를 잡기위해 잠시 손을 빌리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나와는 악연이 많은 놈. 기태라는 전사였다. “발 근력강화, 전사의 다짐, 궁신탄영(弓身彈影)! 하아아아앗!” “화속성 결합! 받아라, 필멸의 화살(Arrow of Mortality)!” 기태뿐만이 아니었다. 발을 집중적으로 능력이 높인 수환 검사. 전에 내가 도와준 덕분에 화속성 화살을 결합시킨 야켄도 보였다. 지금은 혼자서 쓰는 거 보니 꽤나 많은 연습을 한 모양이었다. “본맘모스 따위야, 파이크 어택!” “뎀딜은 맡겨 줘, 쇼트 소드 어택!” “천벌, 천벌, 천벌!” “파이어 스피어!” 할버드 검사 놈도 있었군. 그밖에도 고블린 동굴에서 보았던 어쌔신, 사제와, 마법사까지 보였다. 다들 그때와 거의 변함없는 모습이었지만 스킬들과 빠른 몸짓을 보니 많이 성장한 듯 보였다. “야, 왜 웃냐?” “어? 내가 웃었어?” “아주 실성한 모습이었다.” 상천이가 한걸음 피하며 말했다. 내가 웃었다? 어째서? 나는 입술을 살짝 매만지다 이내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해봐야 모를 것 같았으니까. 본맘모스 무리를 상대하는 사람들 중에 유난히 튀는 기사단이 보였다. 마치 짜인 시스템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기사단이었는데 기사단원 전체가 은빛의 갑옷을 입고 있어 눈에 확 트였다. “어? 저 기사단은.” “저것도 아는 기사단이냐?” “뭐, 그렇지.” 상천이의 물음에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은빛휘장의 십자가로고. 당연히 알 수밖에. 미소천사 기사단과 처음으로 붙었던 실버크로스 기사단이니까. 은 빛 일색의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던 기사단장. 그 당시 팬클럽이었던 우리 기사단을 비꼬다 제대로 당한 케이스라 볼 수 있었다. 아마 내 치료스킬의 발견이 없었으면 절대 이길 수 없었을 상대. 지금 생각하면 운이 많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만 아니었다면 아마 기사단 랭킹 10위권 안에 들어갈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을 실버크로스 기사단. 그런 기사단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또 웃네, 이놈?” “엉? 아하하.” 게슴츠레 보는 상천이의 시선을 피하며 다시 스크린을 보았다. 뭔가 즐거웠다. 이렇게 오래전에 보았던 사람들을 여기서 다시 보니 너무도 반가웠다. 이 느낌은 아마 추억이 아닐까? “본맘모스들이 너무 활개 치는 군. 루히비드, 칼리! 너희들이 맡아라!” “네, 단장님!” “네, 단장님!” 용병왕이 지시하자 선두에 서던 두 명의 사내가 양좌우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루히비드라 불린 자는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온통 검은색 투성이라 어둡게 보이기 그지없었다. 칼리라 불린 자는 엄청난 체구의 사내였는데 키만 해도 2미터 30은 됨직했다. 게임 상에서 고치는 건 무리일 테니 아마 원래 저 키겠지. 저런 몸이 캡슐에 들어갈지도 의문이 드는데? “비켜라! 여기는 내가 맡는다!” 루히비드라 불린 검은 로브의 사내는 힘겹게 본맘모스를 상대하던 유저들을 뒤로 물리고 혼자서 앞으로 나섰다. 법사계열 같은데 혼자서 상대하겠다고? “루나, 륀, 루네스, 루네디.” 검은 로브의 사내가 본맘모스의 사방을 가리키며 말하자 그곳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난 행한다. 풍화의 결계를.” 푸른색 돌이 박혀있는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꽂자 본맘모스가 서있는 땅 자체가 푸른빛으로 감싸였다. 차갑고도 은은한 광채. 저건 꼭 달빛과도 같았다. - 쿠오오오오오오오오! 빛 안에 있던 본맘모스가 갑자기 괴로워하며 그 빛을 향해 머리를 부딪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빛은 전혀 깨질 듯 한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 쿠어어어어어어……. 본맘모스가 갑자기 부식되기 시작했다. 산성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 이 모습은 자연스런 풍화. 세월이 지나 흙으로 돌아가는 듯 한 모습이었다. “풍화의 결계…당신은!” “명예랭킹 3위, 결계의 마도사 루히비드!” “루히비드님이다!” 주위 유저들이 한 말이었다. 저 유저가 루히비드였단 말인가? 순간 스크린이 루히비드를 지나 아까 오른쪽으로 달렸던 유저를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이미 머리가 잘린 본맘모스가 쓰러져 있었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내려 보는 칼리라는 사람이 서있을 뿐이었다. “명예랭커 7위, 영웅슬레이어!” “실물로 보기는 처음이야.” “지금 봤어? 저 어마어마한 힘. 본맘모스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어.” “저것이 랭킹 7위의 능력인가.” 항상 베일에 감춰져있는 인물. 수많은 랭커를 무찌르고 7위에 오른 인물이기도 했다. 나와 같이 호칭 빼고 전혀 정보를 밝히지 않은 유저이기도 한, 저 영웅슬레이어는 이름이 칼리라는 것을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기찬아, 이 게임이 만들어진지 겨우 한 달하고도 보름정도 지나지 않았냐?” “보름도 안 됐을걸?” “그렇지? 그런데 지금 여기서 구경하고 있으면 왠지 몇 년은 지난 게임처럼 느껴져.” 상천이 말에 나 역시 부정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지금 플레이하는 유저들이 너무도 강한 것이었다. 뇌파인식 결합도, 80%가 넘는 아펜하르트. 그것은 진정한 괴물을 탄생시키는 게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맘모스들이 격퇴 당하자 유저들이 언데드 무리들을 밀기 시작했다. 언데드들이 워낙에 많아서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조금씩 밀고 있었다. 그 장대한 전쟁은 내 마음에 불이라도 짚은 것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그래, 힘내라! 이길 수 있어! 유저들을 얕보지 말란 말이다!” 상천이도 이제 빠져들어 열심히 응원하고 있었다. 상천이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 역시 힘차게 응원하고 있었다. 게임이란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가슴 벅차게 만드는 것이 게임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나 역시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싸우는 저 자리에 서있고 싶었다. “나라면…나라면…….” 나라면 저 상황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수천, 수만의 유저들을 치료하고 있을까? 아니면 지휘하고 있을까. 어떤 것이든 재미있을 것 같았다. 무엇을 하더라도 웃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그대들이 발버둥 쳐도 소용없는 짓이다.} 갑자기 웅장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는 어디서 난 소리인지 잘 몰랐지만 유저들이 하늘을 주시하는 걸로 보아 그곳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 크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저, 저게 뭐야.” “맙소사…….” “어떻게 저런게…….” 순간 유저들이 멍하니 서있다 검을 든 손을 떨어트렸다. 무엇을 본 것일까. 스크린은 천천히 위를 향해 문제의 뭔가를 포착했다. “보, 본드래곤?” 그것은 앙상한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본드래곤이었다. 뼈로 이루어진 날개를 펄럭이며 고고하게 서있는 본드래곤. 살아생전 어떠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어마어마한 크기. 둠터틀과는 상대도 안 될 크기였다. 본드래곤은 유유히 하늘에서 유저들을 굽어보다 크게 숨을 들이켰다. 푸른색 차가운 기운이 한 순간 입 안으로 모여들었다. 저, 저놈 쏠 참이야! “브, 브레스다! 피해라!” “히익, 사, 살려줘!” - 푸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스크린이 한 순간 푸른 서리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 광화문 광장 역시 숨죽인 듯 조용해졌다. 천천히 화면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광화문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침을 삼키며 스크린을 보았다. 바닥은 이미 뜨거운 사막이 아니라 남극을 연상케 했다. 특히 브레스가 집중적으로 포화된 땅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성이 길게 만들어져 있었다. 저곳에 있던 유저들은 이미 로그아웃 당한 상태일 것이었다. 단 한발이었다. 한 마리의 드래곤이 뿜어낸 한 발의 브레스였다. “……….” “……….” “……….”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봐야 옳은 말일 것이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뿐. 아무리 유저가 강하다고는 하나, 드래곤만큼은 아니었다. 비록 완전한 드래곤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손이 떨렸다. 태식 형은 어떻게 된 거지? 현빈 형은? 미소천사 기사단은, 륀 기사단은! “이건 무리야. 애초에 승산이 없었어.” “어떻게 드래곤을 이기란 말야!” 여기저기 검을 떨어트리는 자들이 생겨났다. 이미 완전히 포기한 것이었다. 이번 싸움은 완벽히 유저들의 패배였다. “크윽, 무식한 놈이군.” 두 손으로 검을 잡고 버티고 있는 용병왕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주위에는 무언 가 알 수 없는 녹색 빛이 맴돌고 있었다. 정령?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모습 같은데. “루시아니안의 정령?” 우리 정령이하고 비슷한 모습이었다. 나 말고도 있었던 건가. 루시아니안의 씨앗을 부활시킨 자가. “고맙다, 루시.” 『별말씀을. 그것보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네요. 아버지가 죽을 뻔 하다니 놀라운데요?』 용병왕의 주위를 빙그르 돌며 까르르 웃는 루시아니안의 정령. 용병왕은 바닥의 검을 뽑으며 말했다. “안 되겠군. 검에 깃들어라.” 『네.』 용병왕의 명령하자 검의 힐트로 바뀌는 정령. 검의 일부분이 되었다? 저건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런데 내가 뭔가 간과한 것 같은데. “상천아, 혹시 너도 정령이 보이냐?” “방금 손잡이로 바뀐 녹색 정령 말야?” 보인다? 이 스크린으로는 전부 보이는 건가? 확실히 화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보지 못한 모양인지 여전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끝이 아니다! 포기하지 마라! 여기서 포기하면 다음이란 없다!” “하, 하지만…….” “하늘을 날수도 없는데 어떻게 저런 걸 상대하라고…….” 더원 기사단도 질린 듯 뒷걸음칠 뿐이었다. 용병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패색이 짙어졌음을 예감하였으리라. “흥, 역시 네 기사단은 오합지졸에 불과했군. 더 이상 나설 힘이 없다면 물러나라.” 용병왕의 앞으로 선건 붉은 갑옷의 유저였다. “태식 형.” “태식 형? 네 누나 남친?” 상천이가 물어왔지만 나는 스크린을 주시했다. 태식 형의 뒤는 아직 많이 남은건지 건제한 미소천사 기사단이 저마다 붕대를 감으며 서있었다. “사, 살아있었어.” 안도의 한숨. 다들 많이 다쳤는지 힘겨워보였다. 내가 저곳에 있었다면 하나하나 전부 치료해 주었을 텐데.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네 기사단은 아니란 말이냐?” 용병왕이 미간을 더 찌푸리며 말했다. 태식 형은 갑옷이 여기저기 서리 껴서 보기 흉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자의 얼굴로 뒤돌아 말했다. “야, 너희들 쫄았냐!?” “쫄아요? 어차피 죽을 목숨으로 여기 섰는데 그깟 드래곤 한 마리로 뭘 쫍니까!” “미소천사님은 분명히 오십니다! 오면 저 딴것쯤이야!” “그, 그건 불가능할거 같은데.” “뭐, 어쨌든 죽기 전에 누님 얼굴이라도 보고 죽을 랍니다!” “그렇다는데?” 태식 형이 다시 뒤돌아 한 말이었다. 용병왕은 잠시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 크게 광소했다. “크하하하하! 수는 적지만 그만큼 믿을만한 정예란 말이냐? 확실히 그것에 대해선 내가졌구나. 미소천사라, 그 여성의 존재가 이 정도까지였단 말인가. 이런 유저들이 옆에 있는데 더원 기사단이 이 꼴이란 말이냐!” - 쿠콰콰콰콰콰콰! 용병왕 주위로 광풍이 몰아쳤다. 전부 자세를 낮춰 이 황당한 장면을 보았다. 용병왕의 눈은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가 길을 잘못 들었구나. 한탄스럽다. 이렇게 나약했다니. 더원 기사단이 이렇게나 부끄러웠다니! 덤벼라, 드래곤이든 뭐든 상대해주마!” 하늘을 향해 검을 들었다. 그의 온 몸이 오러가 맺힌 것처럼 푸르게 변해갔다. “파, 파괴의 눈……!” “단장님의 저 눈을 보는 거 처음이야…….” 파괴의 눈? 심연의 눈과 비슷한 건가? 좀 더 생각해보고 싶었지만 드래곤이 입을 열어서 일단 다시 스크린을 보았다. {기세가 대단하구나. 너의 이름이 무엇이더냐.} “내 이름은 하윤권, 이곳에서는 애디라 불리지.” {애디…이름을 들은 보답으로 내가 친히 너에게 브레스를 선사하겠다.} 다시 브레스를 날리겠다고? 계속 쏠 수 있었던 거냐? 저것을 또 한 번 맞는다면 전멸이다. 절대 이길 수 없어! “일루미워커들은 불러라, 가이아 여신님의 찬양을! 들으라, 그 광활한 노래를!”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언데드 군단의 오른쪽에서 들린 말이었다. 그와 동시에 숨을 들이키던 본드래곤 머리에서 수많은 빛의 방패가 생성되어 짓누르기 시작했다. 수많은 빛의 덩어리, 그것은 하나의 기둥이 되어 본드래곤을 떨어트리기에 이르렀다. “뭐, 뭐지?” “저, 저건? 지원이다!” “뭔지 몰라도 지원이 왔다!” 유저들이 좋아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지원? 수천 명의 사람들, 깃발을 보니 가이아 여신이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가이아 교단? 그렇다면 맨 앞에 있는 저 여성은 가이아 교단의 교황, 이페르시아 가르혜리 3세, 이르시아다! {건방진, 신의 졸개들 주제에!} 본드래곤이 그 빛의 기둥을 등에 업고 일어나려했다. 일어나? 수천 명의 기술을 합쳤는데 그래도 일어난단 말인가! “손을 들어라, 켈타스의 하늘은 빛의 궤적을 그리리라!” “찬란한 빛의 광휘, 천벌(天!罰)!” “찬란한 빛의 광휘, 천벌(天!罰)!” “찬란한 빛의 광휘, 천벌(天!罰)!”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번에는 왼쪽이었다. 흰색의 의복을 입고 있는 걸로 보아 저들도 사제들인 것 같았다. 그 수천 명의 사제들이 손을 번쩍 들자 이번에는 수천발의 빛의 번개들이 본드래곤의 몸통을 때려 다시 바닥에 눕혀버렸다. “켈타스 교다!” “켈타스 교단도 지원 왔다!” 유저들의 사기가 점점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켈타스교는 본 적이 없었지만 그 둘, 교단의 힘은 그 정도로 대단했다. 나는 어느새 주먹을 꽉 쥔 상태였다. 그래 힘내라, 할 수 있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닌지 주위 모든 사람들도 주먹을 쥔 채 스크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와주러 왔습니다. 방랑자들이여, 다시 허리를 펴세요!” 이르시아가 황금빛 지팡이를 들며 외쳤다. 그 지팡이는 찬란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주위를 따뜻하게 만드는 힘. 그것이 수십만 명의 유저들을 상대로 펼쳐졌다. “브, 블레스?” “지금 우리들 전부에게 블레스를 시전한거야?” “저 NPC는 뭐지?” 둠터틀의 심장에 걸려있던 저주조차 일순간에 풀어버리는 가공할 힘.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로 강할 줄이야. 놀랍기 그지없었다. “가이아 교단에 뒤처지지 마라! 켈타스 교의 힘을 보여주자! 켈타스님이여, 저에게 힘을 주소서! 그대의 번개는 개벽의 아침을 보여주리니!” 뚱뚱한 할아버지가 한 말이었다. 아마 저 NPC가 켈타스교의 교황이겠지. 그 할아버지는 두 손을 모아 하늘을 향했다. - 꽈르르르르르르르르릉! 천벌의 번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굵은 번개 한 줄기가 정확히 본드래곤의 머리를 강타했다. 힘겹게 머리를 들고 있던 본드래곤은 다시 바닥에 고개를 파묻고 말았다. {이, 이, 신의 졸개들 주제에!} 발버둥 치는 모습이 보였으나 너무도 거대한 몸체 덕분에 더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유저들은 이제 한층 더 희망을 품고 떨어진 검을 하나둘 주워들기 시작했다. {크으윽, 안 되겠군.} 하지만 순간 거대한 몸체가 빛으로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라지는 몸체. 아니, 줄어든다고 해야 하나? 꼭 폴리모프를 보는 듯 한 모습이었다. “베, 베르제브브다.” “본드래곤은 마왕이 변한 거였어!” 사람모양으로 변한 건 칠흑의 날개를 달고 있는 마왕, 베르제브브였다. 몸이 작아지자 방향을 잃은 수많은 번개들이 주위 언데드들을 강타하다 이내 사라졌다. {감히 내가 본모습을 하게 만들었으니 그에 걸맞은 보답을 주어야겠구나. 어둠의 화살!} 수백…아니, 수천으로 불어나는 어마어마한 어둠의 화살. 그것들은 베르제브브 주위에 생성되고 있었다. “저, 저 무식한 화살은 뭐야.” “저런 마왕이 암흑 탑에 숨어있었다고? 왜 멍청한 짓을 하고 있었던 거지? 진즉에 왔으면 이미 세상을 장악했을 텐데.” “허허, 참나. 기가 막혀서.” 유저들은 수만 개로 불어나고 있는 암흑의 화살을 보며 저마다 허탈하게 웃을 뿐이었다. {느끼거라, 나의 힘을. 절망하거라, 암흑을!} 어둠의 화살이 사방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디스펠!” “방어태세!” 유저들과 NPC사제들은 저마다 방어마법을 펼쳤다. 그것으로 처음에는 막는 듯 보였으나 역시 무리인 듯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양과 질이 대단한 마법이었다. “뚜, 뚫린다!” “피해!” “전부 도망가!” “우와아아아아악!” 결국 방어막을 뚫고 산성비처럼 쏟아지는 암흑의 화살들. 바닥에 깔린 얼음알갱이들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유저들의 몸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저, 저건 진짜 괴물이네.” 상천이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내가 저곳에 있었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못했겠지만 내가 있었다면 한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구경하고 있으니 답답한 것이었다. “야, 이제 좀 기분이 나아졌냐?” “무슨 소리야?” “그거 아냐? 너 여기 와서 한나라는 애 생각 한 번도 안하고 집중하고 있었다는 거.”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그러고 보니 나…완전히 이 전쟁에 집중하고 있었다. 비록 답답했지만 즐겁기도 했다. “왜 그런 거지.” 나에게 자문해 보았지만 정답은 찾을 수 없었다. 다시는 게임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다짐했건만 지금은 똥 마린 강아지처럼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캡슐에 들어가 마음껏 플레이 하고 싶었다. 이런 기분은……. “네가 게임을 좋아하는 것일 테지.” 상천이를 보았다. 녀석은 씩 웃으며 내 등을 툭하니 밀었다. “연애 같은 감정은 너에게 어려울지 몰라도 네가 유일하게 잘 아는 감정이 있었잖아. 바로 게임에서 즐기는 것. 역시 이곳에 데리고 오길 잘했다. 가봐, 다들 너를 기다리잖아. 무림일대기 힐러 랭킹 1위, 내가 아는 타테라면 절대로 간다. 무조건 간다!” “…상천아.” “그러니까, 어서 가! 나는 스크린으로 너의 모습을 하나하나 관찰해 줄 테니. 절대로 멋져야 하는 건 당연한 거 알지? 자, 어서 고고!” 상천이가 이번엔 내 등을 힘차게 밀었다. 나는 엉거주춤 멈춰 상천이를 뒤돌아보았지만 녀석은 이미 스크린을 주시하며 나를 외면했다. 나는 잠시 그대로 서있다 보일 듯 말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인근 캡슐 방을 향하여 달렸다. 기분 좋은 바람이 얼굴을 차갑게 식혀주었다. 내가 혐오스럽건 한나가 보기 두렵건 지금은 아무상관 없어졌다. 단지 지금 상황을 즐기고픈 마음뿐. 내가 좋아했던 아펜하르트 게임의 유저로서 어울리면 되는 것이다. 치고, 박고, 싸우고, 치료해주며 그냥 웃고 싶었다.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니 내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타테, 등장하다. “깔깔깔깔! 이 몸의 힘을 보았느냐?” 마왕 베르제브브는 즐거운 일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매우 행복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주위는 원자 폭격이라도 날린 건지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려있어 더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었을 뿐이었다. 이미 모든 것이 초토화. 살아남은 것이 없다고 생각될 정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앞으로 달리는 한 존재가 있었다. 바로 명예랭커 1위인 용병왕 애디였다. “강격.” 힘겹게 막은 건지 여기저기 갑옷에 금이 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나약한 모습을 감추듯 온 몸이 붉은색으로 뒤덮여있는 상태. 그의 눈이 너무도 붉어서 마치 광기에 들린 사람처럼도 보였다. 그 모습을 깔보듯 내려 보던 베르제브브는 여유 있게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혼자서 무얼 하겠다는…윽!” 단순한 전사의 기본 스킬인 강격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뒤로 주르륵 밀려나자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뭐지? 이 힘은.” “폭격.” 시간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한 건지 몸을 한 바퀴 돌려 재차 검을 휘두르는 용병왕 애디. 이번에는 베르제브브도 두 손을 엑스자로 교차시켜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다시 부딪치는 한 유저와 마왕. 하지만 이번에는 애디의 검이 튕겨 나갔다. “잡았다, 놈!” 흐트러진 찰나를 놓칠 베르제브브가 아니었다. 날카로운 손톱을 뻗어 심장을 노리는 마왕. 애디는 숨을 들이키며 허리를 크게 비틀어 간신히 옷깃만 스치는 걸로 상황을 넘어갈 수 있었다. “칫, 그 덩치에 날쌔구나.” “기본스킬로는 어림도 없는 건가.” 자신의 검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상대를 가늠해보는 애디. 베르제브브는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주문을 외웠다. “암흑의 화…….” “간단히 쏘게 해줄 것 같나.” 주문을 외우는 잠깐의 방심을 노렸던 것일까? 애디는 푸르스름하게 오러가 맺힌 대검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당연히 쏘게 해주어야지.” 베었다고 생각한 순간. 베르제브브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말은 애디의 등 뒤에서 들렸다. “이런!” 블링크였다. 아차한 애디가 황급히 몸을 뒤로 돌려 검으로 방어하려 했으나 너무 늦고 말았다. “잘 가라, 어둠의 화살!” “화이어 블레이드!” 중간에 끼어들어 어둠의 화살을 쳐낸 유저가 있었다. 그는 붉은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모델이라도 되는 건지 너무도 멋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베려고 했는데 겨우 튕기는 게 다인가.” 그 자는 화살을 튕겨냈음에도 불구하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너는 또 누구냐!” “나? 너를 상대할 용자, 멋쟁이라고 한다.” 그는 명예랭커 6위, 미지의 마검사 멋쟁이였다. “하아.” 마왕은 무슨 일인지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곧 다시 본연의 마왕으로 되돌아와 손톱을 길게 뽑았다. “잔챙이 한 명이 더 늘어나 봐야 아무 소용없는 일이지.” 순간 다시 사라지는 베르제브브. 이번에는 완전히 예상한 건지 애디와 멋쟁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돌아 검을 휘둘렀다. “칫, 예상 한 건가.” 손톱으로 두 유저의 검을 막은 베르제브브. “똑같은 패턴은 역공을 당할 뿐이다.” “그럼그럼. 게다가 단조롭기까지 한 걸?” 언제부터 이렇게 죽이 척척 맞았을까. 두 유저의 합공은 베르제브브를 뒷걸음치게 만들었다. “블레이즈 댄스!” “파괴의 스텝.” “이, 이, 이!” 발의 불이 붙어 현란하게 움직이는 멋쟁이, 한 걸음 한 걸음이 둔중하게 느껴지는 강한 스텝의 애디가 밀어붙이자 베르제브브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검은 번개가 베르제브브 주위에서 스파크가 잃어나나 싶더니 결국 사방으로 폭사되기 시작했다. “크윽!” “뭐, 뭐야?” 몸이 가벼워서인지 재빠르게 몸을 뒤로 뺀 멋쟁이. 하지만 애디는 스파크에 살짝 몸을 내주고 말았다. “크아아아아악!” 그 스파크는 갑자기 애디 몸에서 불어나 온 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꼭 살아있는 기생충처럼. “루, 루시!” 『이것이 감히 애디님을!』 대검의 손잡이에서 갑자기 녹색 빛이 터져 나와 스파크를 밀어내었다. 애디는 그제야 한숨 돌리겠던지 한쪽 무릎을 꿇고 눈살을 찌푸렸다. “호오, 암흑의 저주를 풀어내다니. 대단한데?” “방심했군.” “아무래도 시간을 끌기엔 너무 위험해.” 그 둘은 무언가 생각한 건지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간 그때. 캡슐 방을 찾은 타테는 드디어 아펜하르트에 접속하게 되었다. 나오자마자 보이는 것은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아페타마을. 탱크라도 지나간 것인지 마을에는 남아있는 게 없었다. 이곳에 있던 NPC들은 전부 어떻게 되었을까. 신전에 있는 가이아 교도들은? 아이템 상점의 멘히버씨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황폐한 바람만이 타테의 머리칼을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혈폭의 사막이라고 했지? 그곳이라면 켈타스 제국인근지역이니 북쪽인가.” 켈타스 제국은 아페타 마을에서 북쪽평원, 모래평원이라고 불리는 곳을 지나 위치의 산맥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야했다. 위치의 산맥을 그대로 넘어가면 메히튼 왕국지역이었기 때문에 가는 길은 타테도 잘 알고 있었다. 갈 길은 결정한 타테는 생각할 것 없이 뛰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착하기 위해. 혈폭의 사막은 최고조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다시 언데드 무리가 돌진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유저들과 NPC 사제들이 방어하고 있었다. 사방이 마법과 화살, 검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앙은 거대한 공터가 생성되어 있었는데 그 주위에는 어째서인지 언데드나 유저들이 접근을 하지 않았다. 바로 마왕의 수많은 마법 때문에 접근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어둠의 화살!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테냐!” 멋쟁이와 애디, 다덤벼까지 껴서 세 명은 요리조리 마왕의 공격을 피하기만 했다. “아직까지 마나를 마구 써대고 있는 것 보니…….” “마나 고갈을 바라긴 힘들 것 하네.” “그러게 그냥 치자고 했잖아!” 애디가 말한 뒤, 멋쟁이가 받았고 다덤벼가 짜증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 셋은 꾸준히 마왕이 쏘는 화살들을 피하고 있었다. “그럼 다음 작전으로 넘어간다!” 지금까지 피하기만 하던 애디가 일순간 화살을 검으로 쳐내며 돌격했다. 흠칫한 베르제브브는 아까 파괴적인 힘을 의식해 두 팔을 교차해 막았고 검을 휘두르려던 애디는 그 모습에 씩 웃으며 검을 바닥에 박았다. “루시 간다! 지술, 풍수!” 대검의 손잡이가 반짝임과 동시에 바닥에 지뢰라도 깔아두었던 것처럼 베르제브브를 향해 폭발했다. 전방 5m가 초토화될 정도의 위력. 그곳에 누가 있더라도 산산이 부셔질 것만 같은 위력이었다. 하지만 베르제브브는 자신의 더러워진 옷을 털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대로 서있었다. “이런이런, 옷만 더러워졌잖아. 왜 이런 무의미한 짓을 계속 하는 거지?” “바로 이걸 위해서지. 루히비드!” “루나, 륀, 루네스, 루네디!” 순간 언데드 무리와 유저들이 싸우는 난잡함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검은 로브의 사내가 튀어나왔다. “난 행한다. 풍화의 결계를!” 베르제브브 주위가 차가운 달빛으로 가득해졌다. “이, 이건? 끼아아아악!”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베르제브브. “루시, 자연의 결계!” 푸른빛이 감싸인 곳에 녹색 빛이 덧씌워지고. “화염의 나라!” 멋쟁이가 검을 땅에 박아 넣자 바닥이 온통 불로 휩싸였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더 소리가 커지는 베르제브브. 삼중으로 펼쳐진 절대의 결계가 베르제브브를 압박했다. “지금이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지금까지 숨어있던 모든 명예랭커들이 튀어나와 최고의 공격을 펼쳤다. “기문 개방! 기공파, 궁극 오의! 에, 네, 르, 기, 파아아아아아!” “주르르가 명한다, 나와라! 드래곤의 숨결!” “우아아아아아아, 스톰 소드!” “모두들 힘내시오, 여기 대부가 힘을 주겠소! 골드파워!” 다덤벼의 기공파를 시작으로 하늘에 있던 주르르가 화염의 숨결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 숨결을 이용해 검을 휘돌려 공격을 배가시킨 칼리였고 최종적으로 골드를 흩뿌리며 모든 위력들을 배가시킨 대부, 레쓰비의 타이밍이 절묘했다. 하지만. “속았지?” 순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비웃으며 양손을 펼치는 베르제브브. 아까 일어났던 검은 스파크들이 광범위하게 펼쳐지며 모든 공격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주위에 있던 모든 명예랭커들에게 스파크를 침투시키는데 성공시켰다. “크아아아아아아악!” “이, 이건 뭐야!” “스파크가 사라지지 않아!” “저주다! 이건 저주의 일종이야!” 바닥을 뒹구는 유저들. 베르제브브는 그 모습을 오연한 태도로 관찰하며 즐거워했다. “숨어있던 것들이 거슬려서 말이지. 방심한척 해줬더니 잘도 기어 나오는구나. 지금 너희들이 맞은 저주는 마계의 번개. 죽을 때까지 떨어지지 않는 지독한 놈이지. 저 붉은 눈이 너무 쉽게 풀어서 다 그런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그건 아닌 것 같군.” 턱을 쓰다듬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랭커들을 관찰하는 베르제브브. 애디는 힘겹게 다시 저주를 풀었지만 다른 유저들은 절망할 뿐이었다. 그때 멋쟁이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크윽, 이정도면 시간을 많이 번 것 아닌가요, 형빈 형?” {쿨럭, 충분합니다. 덕분에 7속성을 결합하는데 성공했어요. 엘리멘탈 에로우라 명명해야 할까요? 아직 미완성이긴 하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그냥 날려요!” 멋쟁이가 크게 소리 질렀다. 그와 동시에 혈폭의 사막 옆 필드인 광사의 언덕 쪽에서 큰 외침이 들렸다. “세상조차 가르는 필멸의 화살(Arrow of Mortality)!” 언덕을 등지고 화살을 날리는 유저. 짙푸른 머리에 초보자 옷 행색. 그는 명예랭커 8위인 일발필중 어둠의조이였다. 사막을 가르다시피 날아오는 화살. 그 화살 주위는 일곱 가지 무지개처럼 기운이 휘돌았다. 그 화살을 쏜 자신조차 감당이 안 되는 화살이었던지 언덕을 등지고 쏘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치나 파고들어갈 정도였다. 물론 입에서는 피드백 때문인지 연신 피를 토하며 말이다. “이, 이건 무슨! 다크 쉴드(dark shield)!” 이번 공격은 무시하지 못하겠는지 암흑의 방패를 시전 하는 베르제브브. 공간조차 왜곡시키며 다가오던 화살은 베르제브브가 시전 한 실드에 부딪쳤다. - 파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각! 사방이 오색빛깔로 불꽃을 튀기는 장면을 보며 주위에 있던 유저들이 모두 멍하니 입을 벌렸다. “무슨 저런 파괴력이…….” “힘으로만 따지면 최강이다…….” “저자가 어둠의조이인가?” 마지막말은 애디가 한 말이었다. 고개를 돌려 저 황당한 화살을 날린 유저를 보았다. 최후의 일격을 날렸던 건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휘청거리는 어둠의조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동자는 아직까지 죽어있지 않았다. “하나는 길이요…하나는 나의 모든 것이다. 뚫어라아아아아아!” 한동안 밀리지도 않고 밀려나지도 않던 대치가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다. 암흑으로 만든 방패가 깨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한낱 인간이!” - 파캉! 뚫렸다. 결국 암흑의 방패가 깨지고 처음과 다르게 기세는 많이 죽었으나 확실히 화살은 베르제브브의 미간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그때 마왕의 검은 스파크가 다시 화살의 기세를 죽였고 그 찰나의 순간을 이용해 고개를 젖혀 가까스로 피해버렸다. “피, 피했어.” “저놈은 진짜 괴물인건가?” 아직까지 검은 스파크를 처리 못해 괴로워하면서도 랭커들은 허탈하게 베르제브브를 지나 저 멀리 언데드무리에 터져 폭발하는 화살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허억, 허억. 이번 건 조금 위험했어. 너희들이 노린 최후의 발악이 이거였나? 하지만 그것도 실패로 끝났…….” “은신해제. 블러드 멜로디(blood melody).” 사라져버린 일곱 색깔의 오라가 스파크 일더니 공중으로 끌려올라갔다. 올라가 맺히기 시작한 정점은 한 금발머리여성의 레이피어. 그녀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건지 이미 오래전에 저주에 걸린 듯 스파크가 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만큼은 너무도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컥!” 등 뒤에서 정확히 심장을 꿰뚫는 레이피어. 한 치의 망설임도, 살기도 배제된 정확한 일격이었다. 그리고 어둠의조이가 힘겹게 모았던 일곱 가지의 기운이 베르제브브 내부에서 폭발했다. “헉, 헉.” 타테는 혈폭의 사막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수많은 함성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 유저가 괴로워하고 마법이 폭사하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까 전에 보니 산 너머로 검은색 스파크로 이루어진 구체까지 보았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점점 초조해졌다. 내가 늦은 게 아닐까? 이미 다들 죽어버린 게 아닐까? 고개를 크게 저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달리는 것뿐이었다. “글로리시나……!” 처음으로 말을 꺼낸 건 용병왕 애디였다. 그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한 자가 애디였으니까. 실력으로만 따지면 자신과 대등한 존재. 과거 자신이 레벨 100대가 되기 전에 한 번 싸워 패배했던 일이 있었다. 물론 그 다음부터는 계속 이겨왔지만. “너, 너, 너는 언제.” 지금 일격을 당한 것보다도 자신이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운 베르제브브였다. 몸에 마계의 번개가 이미 침투한 걸로 보아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럼 그 고통 속에서도 지금까지 숨죽이며 숨어있었다는 건가? “쿨럭.” 무뚝뚝하게 있던 글로리시나는 새하얀 얼굴로 피를 토했다. 그녀도 거의 한계까지 참아왔었던 것이었다. “너의 그 방심을 기다리느라 지쳤다. 그러니, 이제 죽어.” 레이피어를 더 안으로 푹 쑤셔 넣는 글로리시나. 베르제브브는 고개를 번쩍 들며 자신의 가슴께로 나온 검 날을 붙잡았다. 일그러지는 얼굴. 입술사이로 새어나오는 검은 피. 하지만 그녀의 입만큼은 웃고 있었다. “킥킥킥…….” 순간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랭커들. 베르제브브는 덜컥거리는 목으로 고개를 부엉이처럼 180도 돌려 글로리시나를 보았다. 사람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광경이라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심장이 꿰뚫린다고 내가 죽을 것 같나? 오히려 붙잡힌 쪽은 너인 것 같은데.” 레이피어를 꽉 잡고 있는 손. 순간 계속 베르제브브곁에 머물던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글로리시나는 검을 놓고 뒤로 빠지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절망하라, 나약한 자들이여. 울어라, 비참한 존속이여. 나, 암흑 탑의 주인이 희망을 부숴버리리라!” 베르제브브의 몸 전체가 스파크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한 순간의 고요함. 저 모습은 꼭 해일이 일기 전 찾아오는 조용함과도 같았다. “이건…위험하다! 루시! 자연의 결계!” 애디가 가장먼저 눈치 채고 검을 바닥에 박아 넣었다. 그러자 반투명의 방어막이 쳐졌고 그 앞으로 루히비드가 사방결계로 방어막을 덧씌웠다. 주르르는 드레이크를 소모할 요량으로 완전히 드레이크를 최전방에 세웠고 레쓰비는 그 모든 방어막을 두 배로 올리기 위해 골드를 흩뿌린 뒤, 그 뒤에 숨었다. 다른 랭커들은 전부 레쓰비의 뒤를 따라 숨을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혈폭의 사막 전체에 마계의 번개가 시전 되었다. “저, 저건……!” 블랙홀이라도 만들어 진 것인가? 혈폭의 사막이 반구 형태로 검은색 기운이 감싸여졌다. 스파크가 여기까지 튀기는 걸로 보아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예상조차 안 되었다. 타테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이 한 발 늦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쿨럭, 이제…오신건가요?” 언덕 아래에서 들린 말이었다. 타테가 그 아래를 보자 피를 토하며 쓰러져있는 어둠의조이를 볼 수 있었다. “혀, 현빈 형!” “그 얼굴로 남자목소리는 좀 자제를…크윽!” “지금 농담할 때에요? 어떻게 된 거에요! 저 상황!” “별거 없네요. 그냥 마왕이 웃차! 해서 저렇게 되었을 뿐.” 타테는 그 간단한 요약에 기가차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보다 고민은 정리 되셨나요?” 갑자기 진지하게 쳐다보는 어둠의조이. 타테는 뭐라 입을 열려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스바르가 마리아 발동.” <‘스바르가 마리아’ 스킬 발동.> 어둠의조이가 본 것은 또 한명의 여신이었다. 작은 여신의 등 뒤에는 상반신만 보이는 또 한명의 여신. 단지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했다. [행복, 사랑, 그것은 하나의 축복. 고통, 저주, 그것은 하나의 불행.] 그 여신은 자신을 향해 울어주었다. 그 아픔을 이해한다는 듯이, 같이 고통을 나누는 것 같이. 그 여신의 손이 펼쳐지자 피드백으로 온 고통이 씻은 듯이 나아버렸다. “이, 이건…….” 어둠의조이는 멀쩡해진 자신의 몸을 보며 진정으로 놀랐다. 전에도 타테의 힐을 받아보았지만 이정도 까지 없는 것처럼 상처가 사라지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것은 마치 과거로 돌아가 버린 듯 한 기분. 상처를 치료한 게 아니라 되돌려진 기분이었다. 타테는 저 멀리 오연히 서있는 마왕을 주시하며 작게 말했다. “단지 게임이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입니다.” 다시 여성의 목소리로 돌아온 타테. 그렇게 타테는 드레스자락을 펄럭이며 혈폭의 사막으로 들어섰다. 혈폭의 사막은 서리 낀 바닥과 얼음덩어리, 그리고 검은 스파크가 그 주위를 떠돌고 있어, 본래의 형태를 찾아보기란 힘들 정도였다. 왼쪽을 보자 수만 명의 유저들이 전부 땅에 엎어져 괴로워하고 있었고 언데드군단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간 건지 행동을 멈춘 채 서있었다. 그 군단 양 좌우로 켈타스 교단과 가이아 교단 역시 대부분 쓰러져있었는데 아직 멀쩡한 상태인 이르시아 교황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반구의 암흑기운이 터졌던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간신히 버티고 앉아있는 용병왕과 그 뒤로 태식 형, 다덤벼, 용소환사라 불렸던 주르르와 뚱뚱한 중년남자, 용병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만한 검을 들고 있는 칼리라는 영웅 슬레이어, 그리고 달빛의 결계를 쓰던 루히비드란 자가 거의 죽어가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뜬금없이 등장한 나를 멍하니 보고 있어 내가 먼저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 말에 가장먼저 반응한 건 태식 형이었다. “타테…드디어 온 거냐?” 죽을 거 같은 표정으로 힘겹게 웃어주는 태식 형. 그 말에 용병왕이 반응했다. “당신이…미소천사인가?” 타테란 이름은 아마 제갈공녀님한테 들었겠지. 그밖에도 지금 옷차림을 보면 당연히 어느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겠지만. “저 유저가…미소천사?” 용소환사 주르르가 처음 본 내 모습에 놀라하며 말했고. “크윽, 이 상황에서 혼자 등장하다니 배짱하난 좋군.” 영웅슬레이어 칼리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건지 아파하는 건지 모를 얼굴로 말했다. “야, 악녀! 너무 늦었잖아!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나는 거야?” 다덤벼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쏘아댔지만 그래도 반갑다는 느낌이 묻어나왔다. “랭킹 5위의 미소천사인가? 당신이 와도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어.” “랭킹 2위는 이미…….” 결계의마도사 루히비드와 뚱뚱한 중년남성이 씁쓸한 표정으로 오른쪽을 보며 말했다. 나는 천천히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산양 뿔 머리의 여성, 베르제브브가 보였고 그녀의 손톱에는 심장이 관통당해 이미 회색빛으로 물들어있는 랭킹 2위, 스피드사신 글로리시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글로리시나…….” 처음 인상부터가 남달랐던 유저 글로리시나. 아직도 그 이름은 잊지 못하고 있었다. “너의 오만으로 팀원이 죽을 뻔했다. 그 정도면 싼값이야.” “…글로리시나다. 적어도 소인배는 아닌 모양이군.” 첫 만남부터 나에게 뺨을 때린 여성. 내 지휘를 보고 일침을 가했던 차가운 말투. 그때부터 내 마음속 한 구석에는 그녀에 대한 라이벌의식이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녀가 너무도 초라하게 축 늘어져 있었다. 손톱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다리와 그녀의 금빛 머리칼이 외로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을 보니 꽉 쥐어진 주먹을 풀 수 없었다. “놔라.” 내 작은 말에 마왕, 베르제브브는 한쪽눈썹을 찡그렸다. 나는 그저 고양이 같은 마왕의 눈을 같이 쏘아볼 뿐이었다. “뭐, 시체를 가지고 놀 생각은 없으니까.” 베르제브브는 갑자기 손톱을 길게 쭉 늘여 내 미간 앞에다 딱하니 멈추었다. 어째서인지 마왕이 내게 공격하지 않을 거란 느낌을 받아 나 역시 조금도 그 손톱을 피하지 않고 베르제브브를 노려보았다. “호, 내가 공격하지 않을 걸 예상한 건가? 아니면 그냥 배짱인가.” 마왕의 말을 무시한 채 자연스럽게 손톱에 매달린 글로리시나를 안아들었다. 매우 가벼운 몸체. 나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히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요, 아직 접속을 끊으면 안 됩니다.” 과연 내 목소리가 들릴까? 게임에서 죽으면 보통은 강제접속해제 되거나 자연스럽게 자신이 접속을 해제했다. 그래서 지금 나는 플레이어, 여기서 따지면 혼이라고 할까? 그것이 아직 빠져나가지 않았길 바랄 뿐이었다. “내 말을 무시하는 거냐?” 짜증이 한껏 배어있는 목소리로 앙칼지게 말하는 베르제브브. 하지만 나는 여전히 무시하며 천천히 주문을 외웠다. “스바르가 마리아 발동.” <‘스바르가 마리아’ 스킬 발동.>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던 스파크들이 가라앉았다. 폐허가 돼 버린 땅은 지금 막 태어난 여신에게 눈을 때지 못하는 것이다. 기절할 것 같았던 랭커들도 놀란 눈으로 내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성녀는 입을 열었다. [행복, 사랑, 그것은 하나의 축복. 고통, 저주, 그것은 하나의 불행.] “성배(聖杯) 발동.” <‘성배’ 스킬 발동.> 눈물을 흘리던 수녀는 기도하던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자 하나의 작은 태양이 만들어졌다.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따뜻한 태양. 황폐화된 땅과 절대 어울리지 않을 빛의 덩어리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회색빛으로 변한 금발의 여성 몸으로 스며들어갔다. 스바리아 마리아의 또 하나의 스킬 성배(聖杯)가 이곳에서 발현 되었다. <생명이 돌아왔습니다. 혼이 안착되지 않았습니다. 호출을 부릅니다.> <호출을 응답하였습니다. 혼이 안착됩니다.> <5, 4, 3, 2, 1, 혼이 안착되었습니다. 부활하였습니다.> <‘스바르가 마리아’의 숙련도가 5 상승했습니다.> 천천히 눈을 뜨는 글로리시나.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매우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을 테지. 그녀는 이제야 나를 보았는지 더욱 눈이 흔들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한번 씩 웃어 주었다. “이건…대체?” 간신히 입을 여는 글로리시나. 하지만 그녀의 의문보다도 더 놀란 유저들이 있었으니. “사, 사, 사, 살아났어!” “리절렉션?” “내가 지금 이 사실을 믿어야 하나?” “아펜하르트에서 생명을 조율하는 건 내가알기론 현재 전무한 걸로 알고 있는데!” “하지만…직접 눈으로 보았으니…….” “미소천사는 대체 누구야?” 다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여기저기 말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놀란 건 랭커들 뿐만이 아니었다. “시, 신의 사자냐? 그렇구나! 너는 일루미네이터!” 스바르가 마리아를 얻게 된 경위 따위는 몰랐지만 놀란 마왕의 말을 들으니 일루미네이터란 직업과 관계가 되어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여유롭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겠지. “신의 사자라…일루미네이터란 사실은 정답이다.” 내 차가운 말에 베르제브브는 입술을 씰룩였다. 그녀의 송곳니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킥, 킥킥킥! 신의 사자란 말인가? 그렇구나, 천상에서 나를 견제하기 위해 보냈구나. 하지만 너무 늦었다. 우매한 모든 것들은 모두 저주에 침식당해 전부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혼자서 무얼 하겠다는 것이냐!” 베르제브브의 말에 나는 뒤돌아 쓰러져있는 유저들을 보았다. 다들 내 스바르가 마리아를 보며 놀란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숫자만 해도 수만 명. 이를 혼자서 전부 치료하는 건 확실히 무리였다. 하지만. “정령아아아아아아!” <‘침묵의 절규’ 발동.> <‘침묵의 절규’의 숙련도가 7 상승했습니다.> <‘침묵의 절규’의 숙련도가 Full이 되었습니다.> 웅장하게 터지는 목소리. 주위 뼈다귀들은 경직되었고 유저들은 깜짝 놀랐다. 이번에 지능을 대폭 올린 덕분인지 많은 수가 스턴에 걸렸음에도 그다지 마나가 줄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스턴? 광범위 스턴이라니, 이 무슨……!” “저 유저는 대체 뭐지?” 수만 명 유저들이 전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버서커에 걸린 유저들도 있었으나 미소천사 기사단이 막아주어 나에게 피해가 오지는 않았다. “이 정감 가는 목소리!” “오셨어, 오셨다구!” “오, 누님의 저 카리스마! 저는 이미 노예입니다!” “사랑해요!” 버서커 뿐만 아니라 광신도를 만드는 옵션도 있었던가. 『주인님, 주인님!』 광신도들 가운데서 쪼르르 날아오는 녹색 빛이 보였다. 전체적으로 요정을 연상케 하는 녹색의 유령 같은 녀석. 하늘거리는 짧은 녹색 머리는 익살스런 얼굴과 매우 어울려 귀엽기 그지없는 놈이었다. 물론 나는 그다지 관심 없지만. 『엄마가, 엄마가 울어요! 어째요? 갑자기 엄마가 울어요!』 정령이 엄마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한나일 것이다. 차마 나를 보지 못하고 어딘가에 숨어서 울고 있는 것이리라. 가슴이 다시금 쓰려왔다. 내가 나쁜 놈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한나의 생각을 접었다. “정령아, 지팡이로 변형 가능해?” 『에? 그야 되긴 하지만…….』 역시 원래 가능했던 루시아니안 나무의 기술인 듯싶었다. 스크린을 통해 용병왕이 정령을 사용하던 것이 떠올라 혹시나 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럼 이곳에 부탁한다.” 내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빛과 어둠의 오리하르콘. 지팡이의 몸통부분을 정령이가 해결한다면 완전히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 빛과 어둠의 오리하르콘(유니크) 순도 99%의 오리하르콘에 둠터틀의 심장이 결합된 상태. 마법공격력 +15%증가(암속성, 수속성 공격력 추가 10%증가) 마법방어력 +15%증가(암속성, 수속성 방어력 추가 10%증가) 지능 +25 정신력 +25 암속성 +30 수속성 +30 암흑의 기운이 머문다. 빛의 기운이 머문다. 지팡이 머리 부분에 꼭 맞게끔 설계되어 있다. 『하, 하지만 엄마가…….』 “어서!” 내가 화를 내자 정령이가 움찔했고 주위 랭커들이 놀랐다. 정령이는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이내 포기하고 자신을 나무화 시켰다. <루시아니안 나무가 아이템에 안착합니다.> <‘빛과 어둠의 오리하르콘’에 ‘루시아니안 나무’가 안착하여 ‘빛과 어둠의 루시아니안 지팡이’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 빛과 어둠의 루시아니안 지팡이(1등급 유니크) 순도 99%의 오리하르콘에 둠터틀의 심장이 결합된 상태. 거기에 땅의 어머니인 가이아 여신의 축복을 받아 태어난 루시아니안 나무 2세가 안착한 상태다. 루시아니안의 특성인 천(天), 목(木), 풍(風), 토(土)의 기운이 스며들었다. 마법공격력 +25%증가(암, 수, 천, 목, 토, 풍속성의 공격력 추가 10%증가) 마법방어력 +25%증가(암, 수, 천, 목, 토, 풍속성의 방어력 추가 10%증가) 지능 +35 정신력 +35 체력 +15 탄력 +15 행운+40 암속성 +30 수속성 +30 천속성 +30 목속성+30 토석성+30 풍속성(스텟 발견)+30 암흑의 기운이 머문다. 빛의 기운이 머문다. 암흑의 기운과 빛의 기운을 사용 가능. 하지만 서로 충돌하여 제대로 된 기능을 사용 할 수 없다. 루시아니안 나무의 절대 방어 사용가능. 루시아니안 나무의 정령은 의지를 갖고 다가오는 모든 위험을 막을 수 있다. 어마어마한 아이템이 만들어졌다. 무언지 알 수 없는 설명 투성이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의 지팡이. 괜히 정령이한테 화를 내 미안했다. 네 잘못이 아닌데 나는 왜 자꾸 주위에 피해만 끼치는 걸까. 갑자기 우울해져 생각을 지우고 주머니에 남겨두었던 것을 꺼내들었다. - 가이아교 교황의 성표(유니크) 사제 중에서도 가장 정점인 교황의 성표. 목에 걸거나, 무기에 장착할 수 있다. 지능 +10 정신력 +10 탄력 +10 천속성 +20 피드백 확률 5% 감소 방어 시 10%확률로 마스터급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발동. 가이아교단에게 보여줄 시 가이아교단을 이끌 수 있음.(마왕의 침공 이벤트에 한함.) <‘빛과 어둠의 루시아니안 지팡이’에 ‘가이아교 교황의 성표’를 장착 시키시겠습니까? 한 번 장착 된 아이템은 분리 하실 수 없습니다.> <‘빛과 어둠의 루시아니안 지팡이’에 ‘가이아교 교황의 성표’를 장착하여 ‘빛과 어둠의 루시아니안 교황의 지팡이’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 빛과 어둠의 루시아니안 교황의 지팡이(신급. 더 이상 장착 불가.) 순도 99%의 오리하르콘에 둠터틀의 심장이 결합된 상태. 거기에 땅의 어머니인 가이아 여신의 축복을 받아 태어난 루시아니안 나무 2세가 안착한 상태다. 루시아니안의 특성인 천(天), 목(木), 풍(風), 토(土)의 기운이 스며들었다. 하늘이 내려준다는 교황의 성표가 장착되었다. 빛을 머금은 지팡이는 절대의 권세를 가져오리라. 마법공격력 +35%증가(암, 수, 천, 목, 토, 풍속성의 공격력 추가 10%증가) 마법방어력 +35%증가(암, 수, 천, 목, 토, 풍속성의 방어력 추가 10%증가) 빛의 마법 +100% 추가 효과 발동. 빛속성 공격에 대해 80%내성을 가진다. 지능 +45 정신력 +45 체력 +15 탄력 +25 행운+40 암속성 +30 수속성 +30 천속성 +50 목속성+30 토석성+30 풍속성(스텟 발견)+30 피드백 확률 5% 감소 방어 시 10%확률로 마스터급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발동. 가이아교단에게 보여줄 시 가이아교단을 이끌 수 있음.(마왕의 침공 이벤트에 한함.) 암흑의 기운이 머문다. 빛의 기운이 머문다. 암흑의 기운과 빛의 기운을 사용 가능. 빛이 강해짐에 따라 충돌이 사라짐. 암속성을 천속성으로 바꾸는 빛의 형상화 사용가능. 천속성을 암속성으로 바꾸는 암흑 형상화 사용가능. 루시아니안 나무의 절대 방어 사용가능. 루시아니안 나무의 정령은 의지를 갖고 다가오는 모든 위험을 막을 수 있다. 찬란하게 빛나는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그 빛은 유저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언데드들은 이 빛이 싫은지 얼굴을 팔로 가렸고 마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를 얕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는 그 지팡이로 마왕을 겨누며 말했다. 여기서 나, 타테만의 지팡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조금 위험한 지팡이 같다만. 지팡이 하나 들었다고 뭐가 달라지나?” 나는 그냥 말없이 웃어주었다. 이것은 명백한 비웃음. 과연 달라지지 않을까? 나는 조용히 외쳤다. “빛의 형상화 발동.” 지팡이에는 무수한 옵션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빛의 형상화를 눈여겨보았다. 설명으로 보자면 암속성을 천속성으로 전환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과연 어떨지 바로 사용한 것이었다. 지팡이 머리에만 빛나던 빛이 이젠 전체적으로, 그리고 나에게까지 스며들어 온몸이 빛 덩어리가 되었다. 설명과 같다면 지금 나의 천속성은 암속성 71을 합쳐 203일 것이었다. 이정도면 거의 한나와 비슷한 정도의 스텟이 아닐까? 다시 가슴이 답답해져서 바로 생각을 지웠다. “여신이다…….” “아름답다.” 대부분의 유저들이 넋 나간 듯 나를 보고 있었다. 여전히 스파크가 몸을 잠식하는데도 아픈 것조차 잊은 모양이었다. 마왕은 조금 당황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여유 있는 눈이었다. “빛이 조금 강해졌구나. 그래도 아직은 무리…….” 과연 그럴까? 여전히 웃고 있는 나. 나는 오랜만에 이 스킬을 사용했다. “심연의 눈 발동.” <‘심연의 눈’ 발동.> 주위가 한 없이 느려지며 세상을 통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무안한 감정이 벅차올랐다. 지능, 정신력, 탄력 300% 증가, 모든 속성 포인트가 50증가인 이 스킬은 지속시간이 2분 늘어, 현재 5분정도의 시간이 주어졌는데 그 시간이 지나면 12시간 동안 스태미나 최하로 떨어지기 때문에 지금까지 잘 사용하지 않았던 스킬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거침없이 발동시킨 나의 고유 스킬. 가장 처음 얻은 최고의 스킬이자 양날의 칼이기도 한 심연의 눈이 지금 발동되었다. “진실을 꿰뚫어 보는 미카엘의 오른쪽 눈동자…인가.” 글로리시나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 말에 용병왕 애디가 깜짝 놀라 나를 보았다. “미카엘의 오른쪽 눈동자? 그럼 단 세 개밖에 없다는 절대의 눈동자중 하나인가?” 무슨 말일까? 글로리시나는 자조적인 냉소를 지으며 힘겹게 말했다. “미카엘의 오른쪽 눈동자와 나, 가브리엘의 간파의 눈동자. 그리고 너, 루시퍼의 파괴의 눈동자까지…이 자리에 전부 모인 셈이군.” “그걸 어떻게…….” 용병왕은 다시 놀라 글로리시나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주시한 채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간파는 내 전문이거든.” 글로리시나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노려보았다. 화가 나서 노려보는 게 아니라 내 비밀이 무엇인지 간파하고 싶어 보는 듯 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알려고 해도 내가 남자라는 사실은 절대로 모를 것이지만. “인간이 점점 강해질 수 있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마왕의 여유로움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 모습을 원했다. 하지만 더 놀라야 할 걸? 지금부터 내가 전설을 보여주겠다! “스바리아 마리아 성가(sacred song) 발동, 최대치다!” <‘성가’ 스킬 발동.> <‘스바르가 마리아’의 숙련도가 10 상승했습니다.> 주문을 외우자 혈폭의 사막 전체로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모래와 얼음알갱이가 휘돌아 묘한 색체를 띄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마리아는 기도하던 손을 좌우로 쫙 펼치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나는 혈폭의 사막 전체로 저주 해제를 시전 시킨 것이었다. “……….” “……….” “……….” 내 주위 랭커들은 이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식 형조차 사라지는 스파크를 멍하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제일 가깝게 있던 그들이 가장먼저 저주가 해제되었다. 그 뒤로 원형으로 넓게 음악이 퍼져나갔다. 바닥에서 꿈틀대던 스파크도, 쓰러져 고통스러워하는 유저의 몸까지도 모든 것이 정화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는 스바르가 마리아의 치료스킬도 발동시켰다. 정화와 함께 치료되는 몸. 지금 이것이 하나의 희망이 되길 소망했다. 간절히, 그리고 고독하게 나는 눈을 감아 기도했다. “쿨럭!” 역시 버거웠던 걸까? 아무리 아이템과 모든 스킬을 발동시켜 마나를 늘렸다 하더라도 수가 너무 많았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타테!” “이봐, 너!” 내가 피를 토하자 태식 형과 글로리시나가 뛰어왔다. 하지만 나는 손을 내밀어 그들을 제지하고 지속적으로 의식을 집중했다. <스태미나가 떨어졌습니다. 모든 기능이 최하로 하락하며 컨디션 및 체력이 일정한 시간으로 하락합니다.> 결국 체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찢어질듯 아파왔다. 눈을 꽉 감았다. 아파서가 아니었다. 눈을 뜨면 후회할까봐 유저들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내가 쓰러지기 일보직전, 스바리아 마리아가 물먹듯이 갈취하던 마나를 멈추었다. 하하, 성공했구나. 꼭 감던 눈을 뜨고 뒤를 보았다. 그곳에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쓰러진 자는 없었다. 하나하나 경외감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며 서있는 자들뿐. 나는 고개를 돌려 경악하고 있는 마왕에게 말했다. “거봐…얕보지 말랬지?” 그렇게 말하며 나는 정신을 놓았다. <‘예쁜이’님은 기절 하셨습니다.> <건강 경보가 작동 되었습니다. 접속이 강제로 종료됩니다.> <‘아펜하르트’접속을 해제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게임 사정으로 인해 1시간 동안 접속 하실 수 없습니다.] “젠장, 다시!” [게임 사정으로 인해 1시간 동안 접속 하실 수 없습니다.] 고블린 사건이후로 오랜만에 겪어보는 기절상태. 내 캐릭터는 게임 상에 그대로 있을 것이었다. 몇 번 더 캡슐 안에서 접속을 시도하다 포기하고 캡슐 방에 나와 뛰기 시작했다. “헉, 헉.” 다시 도착한 광화문 광장. 그곳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진짜 멋지다!” “미소천사라 했던가? 대단하던걸?” “아펜하르트 나도 한 번 해볼까?” 사람들은 지금 있었던 사건을 화두삼아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살펴보다 어렵지 않게 상천이를 찾을 수 있었다. “헉, 헉. 어떻게 되었냐?” “어? 어라? 기찬이 너는 왜 여기 있냐? 그럼 저 안에 누워있는 미소천사는 뭐야!” 상천이는 갑자기 등장한 나를 보며 경악했다. 이 게임 시스템에 대해 모르니 나올만한 오해였다. “기절했어. 한 시간 동안 접속 못해. 그보다 어떻게 됐어?” “와, 별 희한한 시스템이 다 있네. 지금 너 때문에 난리도 아냐. 마왕이 너를 죽이겠다고 무차별 공격을 하는데 지금 플레이하는 전 유저들이 너를 보호하려고 난리가 났다!” “뭐?” 나는 스크린을 보았다. 그곳에는 다시 시작된 언데드와 유저들의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중앙에는 기절한 나를 업고 있는 태식 형의 모습이 보였다. “신의 사자를 죽여라! 절대로 살려 보내선 안 된다!” 광분한 베르제브브가 암흑 화살을 날리며 명령하고 있었고 포악하게 변한 언데드들이 집중적으로 나를 공격하려했다. 하지만 그 앞은 용병왕 애디와 글로리시나가 막고 있었다. “여긴 내가 막는다. 너는 미지의마검사나 도와라.” 용병왕이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글로리시나는 입술을 비틀며 검을 고쳐 쥐었다. “나에게 명령하지 마라. 댄싱 멜로디(dancing melody), 파트 원(part one).” 춤을 추듯 사라지는 글로리시나. 남아있는 길에는 레이피어의 궤적밖에 없었고 그 사이에 있던 언데드 무리들은 궤적에 따라 몸이 갈라졌다. “흥, 배짱부리긴. 루시, 가자!” 『네!』 검이 푸른 오러를 만들어내었고 그 주위에 녹색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 검에 닿은 모든 것들은 산산조각이 날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이것도 막나 어디보자! 에로우 발칸!” “루나, 륀! 난 행한다! 반사의 결계를!” 검은 로브의 루히비드가 외쳤다. 푸른 결계가 태식 형 앞에 생성되었고 그 방패는 암흑 화살들을 모조리 튕겨내기 시작했다. “크윽! 어서 도망쳐! 빨리!” 하지만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깨져버리는 결계. 결계가 깨지자마자 영웅슬레이어 칼리가 뛰어와 거대한 대검을 바닥에 꽂아 넣었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수많은 화살들을 검으로 버티고 있었다. 아까 반사와는 다르게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태식 형이 조금 더 뒤로 도망갈 수 있었다. “놓치지 않겠다!” 순간 사라지는 베르제브브. 그녀는 태식 형의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 블링크를 사용한 것이었다. “용화일천권(?火日天拳)!” 손톱을 내지르는 베르제브브에게 가장먼저 다가온 자는 다덤벼였다. 가장 빠른 스피드를 자랑하는 만큼 그가 내지르는 권의 속도는 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방해하지 마라!” 손톱의 파워로 밀쳐버리는 베르제브브. 자신의 팔에 권이 박혔음에도 오로지 나를 노리겠다는 일념으로 다덤벼를 지나쳤다. “속사!” 하지만 베르제브브의 가는 길목을 가로막은 것은 수많은 화살들. 정확히 움직일 공간을 차단해버렸다. 저 견고한 화살을 다룰 수 있는 자는 어둠의조이, 형빈 형밖에 없다! “이쪽으로!” 그때 위에서 드래곤소환사, 주르르가 드레이크 위에서 외쳤다. 확실히 하늘로 피해버린다면 더욱 빠르게 도망 갈수 있을 터. 나는 주먹을 꽉 쥐며 성공하길 바랐다. “죽어라!” 태식 형이 드레이크 위로 나를 넘기는 아주 잠깐의 방심이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베르제브브는 눈에서 광선을 뿜었다. 예상이나 했을까? 빛의 속도에 필적하는 빔을 쏠 줄을 말이다. “으윽!” 하지만 예상한 자가 한 명 있었다. 금발을 휘날리며 온몸으로 태식 형을 밀치는 한 명이. 광선은 그녀의 팔뚝을 꿰뚫고도 한참이나 더 날아가 언데드무리에 적중했다. 어마어마한 파괴력. 글로리시나는 한쪽 팔을 축 늘어트린 채 외쳤다. “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태워!” 태식 형이 멍하니 서있자 눈살을 찌푸리며 화내는 글로리시나. 자신의 안위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주르르는 나를 태우고 저 멀리 유저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제길, 뚫어라, 나의 군사들이여! 죽여라, 신의 사자를!” 나를 놓친 게 너무도 분했던지 크게 포효하며 전 군사들이게 명령했다. 그러자 수십만의 언데드 군단이 일제히 돌격하기 시작했고 그 중심은 전부 나를 향한 상태였다. “쉽게 보내줄 성 싶으냐!” “여기 륀 기사단을 뚫고 가봐라!” “더 원 기사단은 절대로 피하지 마라!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 “살려라, 절대 살려야한다!” “누님을 살려! 미소천사 기사단은 전멸해도 살려!” “단장도 아니면서 네가 왜 명령이야! 말 안 해도 살릴 거다!” 모든 유저들은 하나가 되어 언데드 무리들을 막기 시작했다. 대체 왜, 다들 나 하나를 살리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거지? 기껏 살려주었더니 팔은 왜 다치고 난리야! 아니, 그 전에 당신 무슨 병이 들어서 그렇게 잘해주는 거냐고! 손목시계를 보자 이제 20분이 다 되어갔다. 아직도 40분이상이 남은 것이었다. “젠장!” 욕지거리가 자연스럽게 튀어 나왔다. 한 시간이 이렇게나 길었던가? 어서 들어가고 싶었다. 다시 들어가서 제대로 저들과 맞서 싸우고 싶었다. “대, 대단한데. 너 하나로 인해 모든 유저들이 하나가 되었어. 그나저나 너 완전 먼치킨 이던데? 어떻게 수만의 유저들을 전부 치료해 버리냐?” 나는 상천이의 말을 듣고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페널티가 큰 스킬들을 사용했어. 덕분에 지금 이 모양이잖아.” “그래도 지금 저 유저들이 하는 행동은 마치…사령관을 살리는 병사들의 필사적인 모습과도 같은데.” “사령관?” 상천이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모든 유저들이 나 하나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몸을 사리지 않고 몇 배나 되는 언데드들을 막으며 철저히 나를 뒤로 감추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령관이라…내가 아펜하르트를 처음 시작하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나는 강해지겠다. 그래서 앞에 서겠다. 나는 힐러의 사령관이 되어 주겠다!” 라고 했었지 아마. 지금은 너무 쑥스럽고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남이 들으면 쥐구멍에 라도 들어가고 싶을 만큼 오그라들 말이었지만 지금 나는 힐러로서 사령관이 되었다. 지금 그때 한 말이 현실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오줌 마려운 표정을 하고 있다 또 실성한 것처럼 히죽히죽 웃는 이유가 뭐냐? 드디어 돌았냐?” “…실성한 놈한테 죽도록 맞아볼래?” 상천이는 조용히 다시 스크린을 보았다. 상황은 완전히 난전에 들어가 있었다. 서로 앙숙이었던 미소천사 기사단과 실버크로스 기사단이 협공을 하였고 륀 기사단이 공격이 아닌 보조를 하고 있었다. 다른 기사단들은 륀 기사단의 앞을 철저히 막아주기 시작했다. 그 협공은 나만 보며 단순히 달려드는 언데드 군단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이이이이익! 나와라, 스컬 골렘!” 베르제브브가 손을 들자 주위 부셔져있는 뼈들이 한 곳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주위에 널리고 널린 뼈들. 그것은 5미터정도 산처럼 여기저기 쌓이기 시작했고 그것들은 이내 인간의 형상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 그어어어어어어어엉! 난잡하게 뭉친 뼈들의 두 구멍사이로 황금빛의 눈이 번쩍였다. 산 같은 몸체의 골렘. 뼈로 이루어진 골렘이었다. 골렘이 등장하자 다시 밀리기 시작한 유저진형. 본맘모스와는 차원이 다른 크기와 위용에 주눅이 들 정도였다. 다시 시간을 보았다. 이제 30분, 30분만 지나면 어떻게든 들어갈 수 있다! “갈고리를 사용해라! 엎어트려버려!” 레인저들이 갈고리를 던지고 수많은 유저들이 로프를 잡아 당겼다. 한 마리의 골렘이 결국 유저들의 숫자로 인해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골렘은 이제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골렘의 핵이 되는 머리가 유저들에게 닿는 위치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남아있는 골렘들의 숫자는 네 마리! 겨우 한 마리를 무수히 많은 희생을 치러 잡았을 뿐이었다. “마법으로 집중 공격하라! 궁수들도 머리를 노려!” 또 한 마리의 스컬 골렘은 마법과 화살로 겨우 멈춰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세 마리는 유저들을 짓밟으며 나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드레이크 몸통 박치기!” “루네스, 루네디 난 행한다, 복사의 결계를!” 한 마리의 골렘은 주르르의 드레이크와 루히비드가 스컬 골렘을 복사한 건지 만든 달빛으로 이루어진 스컬 골렘이 생겨나 몸통박치기로 멈추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아직 두 마리나 남아있는 상태! “여기서부터는 내 영역이다.” 한 마리 골렘에 용병왕 애디가 떡하니 막아섰다. 그의 눈은 다시 붉은 빛으로 변했고 그의 몸까지 붉은색 기운이 넘실거렸다. “파괴의 눈 발동, 루시, 합동 스킬이다. 파괴의 토네이도!” 온몸을 빙그르 돌며 바닥을 긋는 대검. 바닥이 원으로 갈라지고 그것은 점점 숫자가 늘어 하나의 토네이도가 되었다. 주위 언데드들까지 휩쓸며 나타난 토네이도는 스컬 골렘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각! 뼈와 뼈들이 부딪치는 마찰소리. 사방에 뼈들이 흩어져 꼭 뼈들의 비가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저것을 한 사람이 이루어냈단 말인가? 새삼 용병왕의 대단함을 다시 볼 수 있었다. - 그어어어어어어어어엉! 하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내가 있는 곳 바로 지척까지 와버렸다. 주먹만 뻗으면 닿을 거리. 그 앞을 막은 건 글로리시나였다. “헉, 헉.” 한쪽 팔은 아직도 피가 흘러나와 가죽옷을 적시고 있었고 그녀의 표정은 혈색이 없어 더욱 차갑게 굳어있었다. 대체, 왜 당신이 골렘 앞을 막고 있는 거야! “환자는 비켜서지?” 그 옆으로 다가온 자가 있었다. 붉은 머리의 여성. 화선녀님이었다. “헉, 헉. 시끄러워.” “…그렇게까지 지켜줄 의무가 있나?”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화선녀님. 우아, 저분도 한 카리스마 하는데. 왜 하필 저 두 분이 만나 버린 거야! 글로리시나는 화선녀님을 힐끗 쳐다본 후 숨을 골랐다. “후우. 네게…알려줄 의무는 없을 것 같은데. 그러는 너는 초보자 주제에 이곳에 있는 이유가 뭐냐?” 글로리시나의 말을 듣고 화선녀님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내가 저렙인줄 어떻게 알고 있는 진 모르겠지만 대답은 해주지. 저 여성이 재미있거든. 누구와 꼭 닮아서 말야.” “킥킥, 화선녀님이 지금 말한 건 너인 거 같은데?” 상천이가 웃었고 나는 빨개진 얼굴로 이마를 감쌌다. “그런가? 그럼 계속 재미있어 해라.” “잠깐.” 그대로 화선녀님을 지나쳐가려던 글로리시나는 화선녀님의 제지에 다시 멈춰야만했다. “나는 아직 답을 못 들은 거 같은데?” 골렘이 지척에 있단 말입니다. 지금 주먹 휘두르는 거 안 보입니까? 그런데 그런 말이나 하고 있을 땝니까! “…빚을 졌다. 그뿐이다. 댄싱 멜로디(dancing melody), 파트 투(part two).” “흥, 그런가. 일섬(一剡)!” 하아, 질문을 하는 분이나, 대답하는 분이나. 왠지 저 두 사람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여성은 골렘이 뻗는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공격해 들어갔다. 사람 참 애간장 타게 만드는구만. 이제 20분 남았다. 골렘까지 막았어. 조금만 더 막으면 나 역시 들어가 도와줄 수 있다! “…터져라.” 베르제브브가 뭔가 작게 읊조렸다. 뭐라고 말한 것 같았는데. 터져라? 터져? -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최전방에 있던 언데드들의 몸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자, 자폭? 그곳에 있던 유저들은 영락없이 회색으로 물들어갔다. 공격당하는 순간 터진다? 자신의 군단들을 자폭시킨단 말이야? 이빨을 꽉 깨물었다. 기사가 월등히 많은 유저들에겐 자폭이야말로 최고의 전술임에는 틀림없었다. 이렇게 되면 언데드들을 검으로 막을 수도 없지 않겠는가. “마법으로 상대해! 검사들은 방패를 들어라!” 용병왕이 명령했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전술을 바꾸는 애디. 그자는 정말 차분했다. 존경스러울 만큼. “…일어나라.” 베르제브브가 다시 작게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회색으로 변해있던 수많은 유저들이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어나? 죽어있는 유저들이? 저, 저것은! “조, 좀비다!” “젠장, 캐스터진형까지 좀비들이 일어났어!” “어서 처리해라! 망설이면 밀린다!” 유저진형 사방에서 나타난 좀비들. 유저였을 때의 기동성과 스킬은 사용하지 못했지만 밀집된 지역에 나타나니 유저들은 마법이나 검을 자유롭게 쓰지 못했다. 그사이 언데드 군단은 무작정 밀고 들어와 내가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가이아 교단은 기도하라! 생명의 안식을!” “생명의 안식!” “생명의 안식!” “켈타스 교단은 힘을 내라! 턴 언데드!” “턴 언데드!” “턴 언데드!” 양 좌우에서 주춤거리며 회복하고 있던 교단들은 드디어 다시 도와주기 시작했다. 가이아 교단의 생명의 안식으로 좀비들이 다시 시체로 돌아갔고 켈타스교의 턴 언데드로 나머지 좀비들을 한줌의 흙이 되었다. 유저들 쪽은 좀비들이 해결되자 다시 힘겹게 밀려오는 언데드군단을 막기 시작했다. “크윽, 왜 자꾸 밀리는 거야!” “안 되겠다 본대는 어서 미소천사님을 대리고 더 뒤로 빠져!” 하지만 숫자에서 차이가 나던 것이 드디어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포위당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젠장, 질릴 정도로 많네.” 답답한 마음에 나온 말이었다. 상천이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러게. 근데 너, 아직도 한 시간 안됐냐?” “10분 남았어.” 그래, 10분 남았다. 그래서 이렇게 더 초조한가 보다. 1분 1초가 나에게는 한 시간처럼 느껴질 정도니 말 다했지 뭐. 가이아 교와 켈타스 교단 역시 언데드들 때문에 도움을 주기는 어려워 보였다. 명예랭커들도 스톤골렘을 상대하느라 도움은커녕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는 상황. 잠깐 지금 이 상황에서 마왕이 나선다면? 내 고유스킬 심연의 눈이 발동했다. 핏기가 가셨다. 설마 노린 거야? 이런 상황을? 전부 묶어놓고 활개 칠 수 있을 이 타이밍을? 고개를 번쩍 들고 스크린을 주시했다. 없다! 마왕이 보이지 않아! “마왕을 놓쳤어…전부다 지금 한순간 마왕을 놓친 거야!” 수만 명의 유저들이 지금 이 한 순간으로 마왕의 행적을 놓치고 말았다. 어디로 간 거지? 젠장 답은 이미 나와 있지 않겠는가! “상천아, 나 다시 캡슐 방으로 간다!” “어, 어? 아, 아 그래.” 10분후에 바로 접속하기 위해서 나는 다시 뛰었다. 제발 누구라도 발견해다오. 마왕이 나를 죽이기 전에 누구 한 사람이라도 제발! 나는 불길한 기분을 지우지 못한 채 다시 캡슐 방으로 향했다. “memory뇌파 최고 적합 자는?” “아까까지만 해도 애디유저가 최고 수치를 유지했지만 한순간 예쁜이유저로 변경되었습니다.” 선글라스에 올백머리를 한 남성에 대답에 여기저기 잔 상처가 나 있는 건장한 사내는 자신의 까칠한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미소천사라…우리 프로젝트에 그녀만한 인재는 없을 것 같은데.” “아직 불완전한 요소가 클 것 같지만 제가보기에도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럼 조사에 들어가라. 그리고 파소에들을 투입시켜.” “파소에들까지 말입니까? 유저들이 버티지 못할 텐데요.” “애초에 아펜하르트의 멸망이 목적이 아니었나. 지금 NPC들의 난동을 예상 못했을 뿐이지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아, 왜 NPC들이 열성적으로 이 전선에 투입됐는지는 조사했나?” “네, 조사한 결과 그 찬동자는 미소천사임을 알았습니다.” “또 그녀인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는 상처투성이의 사내. 선글라스의 검정양복 사내는 땀을 뻘뻘 흘리며 바로 말했다. “그녀의 직업은 일루미네이터, 전에 아페타 지부, 가이아 신전에 들어가 적용시켰던 NPC의 마음을 돌렸다고 합니다.” “크흠, 자유도가 너무 높아도 문제가 되는군. 작은 계기가 지금 이정도 까지 온 거란 말인가. 큭큭, 재미있군. NPC들이 어디까지 행동할지 지켜봐주지. 아, 마왕의 인식도는?”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역시 사람의 뇌파를 이용하여 디자인한 덕분에 머리회전과 전략전술에 매우 능합니다. 프로그래밍한 자도 놀랄 정도로 말입니다.” “좋은 사람을 사용한 것 같군. 누군지 아냐?” “서울지부의 여사원인 것 같습니다. 하나, 이상한점이 하나있었습니다.” “뭔가.” “직접 마왕이 되어 플레이 하는 게 아니라 뇌파만 빌려주고 방관하고 있는 상태라는 점입니다.” “흠, 그 여사원이 마왕을 연기하기보다 컴퓨터로 직접 마왕이 되는 게 더 리얼할 테니 나쁘진 않다. 그것에 대해선 별것 아니니 넘어가지.” “네.” 상처투성이의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스크린을 보았다. 그 안에는 여전히 힘겹게 싸우는 유저들의 모습이 보였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여신이 등장한 것처럼 타테가 단비를 뿌려주었지만 그건 잠시 목숨을 연명한 것에 불과했다. 랭커들조차 버겁게 상대하는 스컬 골렘, 여기저기 일어나는 좀비들, 유저들을 포위하는 수많은 언데드 병사들까지 승기는 암흑 탑, 베르제브브에게 자꾸만 기울어져만 갔다. “허억, 허억.” 스컬 골렘을 상대하면서도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은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글로리시나. 그녀의 미간은 한없이 찌푸려져 있었다. “파섬(破剡)! 자꾸 어딜 보는 거야?” 스컬 골렘의 다리를 노린 화선녀. 스컬 골렘이 잠시 주춤거릴 때 한 말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아. 뭐지?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화선녀의 말을 무시하고 하늘을 보며 생각하는 글로리시나. 무언가 자꾸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화선녀와 함께 스컬 골렘을 상대하며 미소천사에게 많이 떨어트려놓은 상태였다. 다른 스컬 골렘들도 그녀를 공격하기에는 턱없이 멀었다. 그렇다면 현재로서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자꾸만 드는 위화감 때문에 몇 번이고 뒤돌아 기절한 미소천사를 확인했다. “괜한 기우겠지.” “뭐?” 혼잣말에 반응한 화선녀. 글로리시나는 다시 차갑게 눈을 가라안치고 레이피어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 시간, 스컬 골렘과 일대일 싸움을 하고 있던 용병왕이 크게 숨을 고르며 말했다. “엄청난 방어력이군.” 자신의 공격을 전부 받아내고도 아직까지 쓰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 단단한 외피 때문에 골렘의 핵을 공격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지만 처음 공격할 때는 거의 부셔질 듯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상처가 치료되고 있는 듯 한 느낌을 주어서 저런 말을 한 것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언데드 무리들은 아까보다 더욱 힘차게 유저들을 몰아넣고 있었다. 아무리 유저의 수가 줄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쉽게 밀렸던가? “무언가 이상해.” 용병왕은 이 알 수 없는 느낌을 찾지 못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스컬 골렘에게는 여전히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가이아 교단, 이르시아 교황은 정보담당 사제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런가, 드디어 온 건가?” “예, 교황님.” “좋다, 조금만 더 버텨라! 서로를 다독여라! 이 전쟁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가이아 교단, 이페르시아 가르혜리 3세 교황님 만세!” “가이아 교단, 이페르시아 가르혜리 3세 교황님 만세!” “교, 교황님!” 모두들 한껏 들떠 만세를 외치는 그때. 다른 쪽을 정찰하던 정보담당 사제가 달려와 부복했다. 푸르게 변한 그의 얼굴을 본 이르시아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보고하라!” “마왕이 사라졌습니다! 또한 혈폭의 사막을 중심으로 언데드존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마왕이 사라졌다? 게다가 언데드존이 확산? 땅이구나! 땅속으로 숨어서 그녀에게로 가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큰일이구나. 용자들의 구심점을 잃게 된다면 한순간의 패배로 연결 될 거야!’ 생각을 마친 이르시아는 황급히 자신이 타고 왔던 말에 올라탔다. 백색의 성마는 투레질을 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교, 교황님!” “교황님!” 수많은 늙은 사제들이 깜짝 놀라 외쳤지만 이미 이르시아 교황은 저 멀리 사라진 후였다. 그때 미소천사 타테의 곁에는 단발의 아리따운 사제가 서있었다. 그녀의 우수의 젖은 눈동자가 매우 슬퍼 보였다. 처음 나타났을 때는 차마 보지 못했다. 자신을 모른 채 할까봐 두려워 옴짝달싹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정령이 떠나갈 때는 모든 것을 잃은 것만 같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게임이 이다지도 슬픈 것이었나? 자신은 무엇 때문에 가슴이 아픈 것인가. “언니…….” 고요히 눈을 감고 언니는 누워있었다. 절대로 죽지 않을 것만 같았던 언니가 지금 내 앞에 쓰러져 눈을 못 뜨고 있었다. 자신은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나야…….” 그 옆에서 역시 마찬가지로 어쩔 줄 모르는 이가 있었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중학생으로 볼 정도의 동안인 얼굴, 혼혈인 주리아였다. “슬퍼하지 마. 너를 버린 자야. 이러는 건…너만 더 괴로울 뿐이야.” “하지만…하지만!”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자신을 만나려하지 않는 건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 한나는 용서라도 빌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잘못을 한지 모르기 때문에 망설이는 것이었다. “언니, 제가 잘못했어요. 일어나요. 뭐라도 할 테니 제발…….” “일어나면 안 되지.” 한나가 누워있는 언니를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닦고 있을 때 언니가 말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언니가 누워있는 땅에서 말이 들렸다. 들썩. 미소천사 옆에 땅이 움찔 거렸다. 두더지가 땅이라도 파는 것 같은 들썩임. 하지만 그곳에서 나온 건 두더지가 아니라 마왕, 베르제브브였다. “………!” “………!” 한나와 주리아는 놀라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저 전방에 있을 베르제브브가 왜 최후방에 나타난 것일까. 이 많은 유저들을 전부 속이고 어떻게! “위험한 싹은 애초에 제거해야하는 것이지.” 베르제브브 눈에서 혈광이 번뜩였다. 동시에 그녀의 뾰족한 손톱이 뻗어 나왔다. - 푹! “하, 한나야!” 하지만 온몸을 이용해 막은 한나. 그녀의 배는 흥건하게 피가 고였고 뚝뚝 떨어진 피가 미소천사의 얼굴을 적셨다. 성인용 게임이라 붉은 피까지도 제대로 연출이 되어 보이는 현상이었다. “쿨럭!” 입에서 한 움큼 피를 토하는 한나.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신의 종 주제에 끝까지 방해하는군!” 귀찮다는 듯이 옆으로 확 밀치는 베르제브브. 한나는 아무 저항도 못하고 사막을 대굴대굴 굴렀다. 그 모습을 보고 만족한 베르제브브는 이번에는 절대로 죽이겠다는 듯이 손톱을 길게 뽑았다.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주리아가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방어막을 시전 시켰다. 한나를 치료해주고 싶었지만 필사적인 한나의 모습을 보고 결국 기절한 미소천사를 보호한 것이었다. “이익!” 하지만 마왕에게 단순한 방패는 장해물이 되지 못했다. 정말 간단하게 깨져버리는 신성방패. “종들이 참으로 집요하구나. 하지만 늦었어.” 피를 토하는 주리아의 모습을 만족한 눈으로 보다 생각할 것 없이 공격하는 마왕, 그때. “머…멈춰……!” 거의 죽어가는 눈동자로 피가 흘러내리는 몸을 질질 끌며 쥐어짜듯 말하는 한나. 황토색 사막이 카펫을 깐 것처럼 일자로 붉게 물들었다. 그 사이 주리아가 입에서 피를 토하면서도 미소천사를 안아 간신히 베르제브브 곁에서 도망 갈 수 있었다. “정말 신경에 거슬리는 종들이구나!” 베르제브브 앞에 뭉치는 검은색 덩어리 다섯 개. 그것들은 점점 화살의 모양을 띠어갔다. “멈춰줘, 제발…그만, 이제 그만해!” 몸을 질질 끌고 다가와 다리를 잡는 한나.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의 손은 힘이 풀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나약해보였다. “거머리 같은!” 거침없이 발로 복부를 가격하는 베르제브브. 피로 물든 자신의 배를 감싸 쥐며 둥글게 몸을 웅크리는 한나. 부들거리는 몸 전체를 보니 고통이 상당한 듯 보였다. “죽여주…….” 암흑 화살을 이용해 한나를 죽이려한 베르제브브. 하지만 그때 움찔거리며 무언가 멍하니 서있었다. 곧 다시 눈의 초점을 찾은 베르제브브는 안타까운 눈으로 한나를 보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내가 할 걸 그랬어.” 어딘가 매우 사람 같은 말투의 베르제브브. 마왕의 모습은 어딘가 신비롭게 보이기까지 했다. 가슴을 쥐며 입술을 꽉 깨물던 베르제브브는 다시 멍하니 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내가 순간 정신을 잃었나? 뭐 상관없겠지. 왠지 미소천사만 죽여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러며 암흑 화살을 전부 미소천사에게 날려버리는 베르제브브. 주리아는 눈을 꼭 감은 채 미소천사를 껴안았다. “블러드 멜로디(blood melody)!” 순간적으로 다가와 암흑 화살을 검으로 흡수하며 막아버린 글로리시나. 그녀는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을 받고 계속 미소천사를 신경 쓰고 있었다. 하지만 스컬 골렘의 공격이 자꾸만 거세져 잠깐 한눈을 팔고 있을 때였다. 하필 그때 나타난 것이었다. 너무도 늦었다. 일단 달렸지만 절망했고 자신을 책망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사제 두 명이 필사적으로 미소천사를 지켰다. 간파의 눈을 이용해보니 아직 저렙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사제는 멋지게 시간을 끌었던 것이었다. “또, 또 방해인가!” 자신의 공격이 자꾸만 저지당하자 짜증내는 베르제브브. 글로리시나는 땀을 흘리며 죽어가는 사제를 보았다. “헉, 헉. 너…….” 하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상처였는데 필사적으로 일어서려는 것이었다. 투둑투둑 피가 바닥을 적셨다.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눈을 피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세상의 어머니, 가이아 여신님의 힘은 땅, 땅은 곧 생명이리라. 큐어(cure)!” 주리아는 이제야 한나에게 힐을 시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치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나. 이미 너무도 늦은 것이었다. “나는…괜찮아요. 그보다 언니는…….” “괜찮아. 그러니까 움직이지 마!” 절대 화내지 않는 주리아 조차 크게 소리 지를 정도였다. 그 정도로 한나의 모습은 참혹했다. 글로리시나는 그녀들의 앞을 막으며 말했다. “헉, 헉. 미소천사를 대리고 피해라.” 굳건한 기사처럼 말하긴 했으나 사실 글로리시나의 상태도 그녀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직까지 팔에 난 상처를 치료하지 못해 서있는 게 고작인 것이었다. 주리아는 그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미소천사를 위해 다들 목숨을 걸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야박하게 누워만 있다. 존경하는 언니였지만 그만큼 배신도 큰 법이다. 왜 언니는 우리들을 버리고 이렇게 말없이 누워만 있는 것인가! “그렇게 죽고 싶다면 다 깡그리 죽여주마!” 베르제브브는 순식간에 수십 개의 암흑 화살을 만들어내었다. 몸에서도 지직 거리는 암흑의 스파크가 만들어졌다. 이번 공격은 여지없이 그녀들을 전부 회색으로 물들게 만들 것이리라. “선언합니다…가이아 여신님의 종, 아타셰가 여기서 선언합니다. 세상의 평화를, 쿨럭! 순화된 안식을! 편화선언(peace declaration)!” 한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그녀의 모습은 고결함이 묻어있었다. 온통 피로 물든 의복,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후들거리는 몸. 하지만 아타셰는 모든 것을 초탈한 모습이었다. “그, 그걸 쓰면!” 주리아는 절망했다. 저 스킬은 위치의 산맥에서 사용한 스킬이었다. 미소천사 가 죽고 나서 모두 전멸 위기에 있을 때 발생한 스킬. 그것을 쓰는 순간 자신의 모든 마나와 생명력을 이용하여 세상에 평화를 선언하는 스킬이었던 걸로 기억했다. 공격불가, 말 그대로 시간을 버는 절대적인 스킬. 하지만 그걸 쓴 자는 기절에 이르게 되는 스킬이기도 했다. 하물며 죽기 직전의 한나의 상태를 감안하면 지금은 목숨을 걸고 쓴 스킬인 것이었다. “고, 공격이 안 돼?” 베르제브브는 당황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든 스킬들이 취소가 돼 버린 것이었다.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포위하고 있던 언데드 병사들도, 무식하게 돌격하던 스컬 골렘들까지도. “뭐지?” “공격이 안 돼!” “파이어 볼! 젠장, 나가지 않아!” 그건 유저들 쪽도 마찬가지였다. 화살을 날리려고 하면 활줄이 당겨지지 않았고 마법은 전혀 발동하지 않았다. 검을 든 손조차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유저들은 이 사태를 만든 곳을 보았다. 그곳에는 온몸을 피로 물들인 채 초연히 무릎 꿇고 기도하는 한 명의 사제가 있을 뿐이었다. “쿨럭, 피해요. 얼마 못 버티니 피해요!” 혈색이 더욱 하얗게 물들어갔다. 이미 한계에 달한 것이었다. 주리아는 이빨을 꽉 깨물었다. 여기서 도망가지 않는다면 한나의 죽음은 무의미해진다. 레인저를 할 때의 익숙해진 상황 판단력으로 주리아는 빠르게 결정을 내리고 미소천사를 안으려했다. 하지만 누워있어야 할 그녀가 없었다. 주리아의 눈에는 일어서 있는 미소천사의 다리만 보였을 뿐이었다. “스바르가 마리아 발동.” [행복, 사랑, 그것은 하나의 축복. 고통, 저주, 그것은 하나의 불행.] 작은 울림이었다. 그 소리는 기도하던 소녀와 베르제브브를 막으며 버티는 금발의 여성, 그리고 피드백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여성을 감싸 안았다. “……….” “……….” “……….” 타테는 주위를 잠시 둘러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지금 상황만으로도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필사적으로 막았겠지, 모두들. 죽는 걸 감수해가며 자신을 지켜준 것이겠지. “미안, 모두들. 그리고…….” 눈을 감인 채 말하다 베르제브브를 보았다. 그녀의 눈은 한없이 불타고 있었다. “너만은 용서 못해.” 타테의 목소리는 글로리시나 조차 움찔 거릴 정도로 차가움이 묻어있었다. 캡슐 방에서 다시 아펜하르트로 들어갔을 땐 이미 너무도 늦은 상태였다. 간신히 서있는 글로리시나, 피드백으로 자기 몸 하나 지키기도 어려운데, 나를 대리고 도망가려 했던 주리아, 그리고 이미 힐조차 먹히지 않을 정도로 나락 끝자락에 앉아 기도하고 있는 한나……. 참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단지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정말 마왕으로 보일 정도였다. 게임으로 생각할 때와 적으로 인식할 때는 분명히 마음가짐이 다르다. 그래서인지 지금 나는 진정으로 화내고 있었다. “간신히 일어난 주제에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나?” 마왕은 내 상태를 훑어보며 비웃었다. 확실히 현재 내 상태는 최악이었다. 심연의 눈 반동으로 스태미나가 최악일 뿐만 아니라 기절에서 간신히 살아난 상태라 체력과 마나도 거의 바닥을 달리는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왠지 저 마왕한테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어, 언…니…….” 한나가 나를 부르다 결국 쓰러졌다. 스바르가 마리아로 인해 간신히 죽을 고비에서 넘어간 모양이었다. “한나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게임이라지만 실감나는 피, 그리고 기절. 심장이 너무 쑤셔서 어느새 내 입술에는 피가 고였다. “왜, 어째서, 이제야 나타나신 거예요!” 주리아가 차마 나를 보지 못하겠는지 땅을 바라보며 화냈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미소천사…….” 글로리시나도 뭐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미간만 찌푸리며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 세 명을 바라보다 말했다. “정령아.” 『……….』 정령이는 지금껏 한나곁에서 아무것도 못했던 자신이 슬펐던지 기절한 한나 주위를 맴돌다 나에게로 왔다. 나는 말없이 지팡이를 들었고 정령이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 빛과 어둠의 루시아니안 교황의 지팡이(신급. 더 이상 장착 불가.) 순도 99%의 오리하르콘에 둠터틀의 심장이 결합된 상태. 거기에 땅의 어머니인 가이아 여신의 축복을 받아 태어난 루시아니안 나무 2세가 안착한 상태다. 루시아니안의 특성인 천(天), 목(木), 풍(風), 토(土)의 기운이 스며들었다. 하늘이 내려준다는 교황의 성표가 장착되었다. 빛을 머금은 지팡이는 절대의 권세를 가져오리라. 마법공격력 +35%증가(암, 수, 천, 목, 토, 풍속성의 공격력 추가 10%증가) 마법방어력 +35%증가(암, 수, 천, 목, 토, 풍속성의 방어력 추가 10%증가) 빛의 마법 +100% 추가 효과 발동. 빛속성 공격에 대해 80%내성을 가진다. 지능 +45 정신력 +45 체력 +15 탄력 +25 행운+40 암속성 +30 수속성 +30 천속성 +50 목속성+30 토석성+30 풍속성(스텟 발견)+30 피드백 확률 5% 감소 방어 시 10%확률로 마스터급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발동. 가이아교단에게 보여줄 시 가이아교단을 이끌 수 있음.(마왕의 침공 이벤트에 한함.) 암흑의 기운이 머문다. 빛의 기운이 머문다. 암흑의 기운과 빛의 기운을 사용 가능. 빛이 강해짐에 따라 충돌이 사라짐. 암속성을 천속성으로 바꾸는 빛의 형상화 사용가능. 천속성을 암속성으로 바꾸는 암흑 형상화 사용가능. 루시아니안 나무의 절대 방어 사용가능. 루시아니안 나무의 정령은 의지를 갖고 다가오는 모든 위험을 막을 수 있다. 남자가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말이든 변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나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지팡이를 들었다. “이기자, 이 전쟁부터 이기고 보자.” 남자인데 여자로 플레이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나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9일 이라는 것. 해야 할 말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앞만 보겠다. 이번 전쟁을 이기는 게 급선무니까. “이제 할 말은 전부 끝났나? 그럼 죽어라. 암흑 화…….” “신의 외침을 들어라! 세상은 평온을 말하리라! 신의 외침(god shout)!” 갑자기 들린 외침에 베르제브브는 아미를 찌푸리며 황급히 귀를 막았다. “이르시아?” 보리모양으로 딴, 백색의 머리를 휘날리는 절세의 미녀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페르시아 가르혜리 3세 교황이었다. “괜찮아요?” “덕분에 살았네요.” 안부를 묻던 이르시아는 내 차분한 말에 잠시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했다. “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 강해지셨군요.” 이르시아는 어머니같은 미소로 나를 칭찬했다. 강해졌다? “마왕의 혼란을 틈타 일단 여기서 벗어나죠!” “여기입니다!” 이르시아는 우리를 이끌려다가 갑자기 들린 말에 위를 올려보았다. 그 순간 내가 서있는 땅이 어두워졌다. 동시에 위에서 아래로 부는 커다란 바람. 하늘을 보자 그곳에는 드레이크 한 마리가 우리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어서요!” 자세히 보니 드레이크 위에서 손을 뻗고 있는 자가 있었다. 얼굴은 매우 평범하지만 녹색의 로브와 지팡이가 독특한 사내. 드래곤소환사 주르르였다. 이르시아는 다시 신의 외침을 사용하여 마왕을 견제한 후, 재빨리 한나를 들어 드레이크 위에 탑승했다. 나는 글로리시나와 주리아를 각각 부축하고 드레이크에 올라탔다. “놓칠 것 같으냐!” 뒤늦게 마왕이 손을 뻗어 암흑 화살을 날렸지만 주르르는 드레이크의 브레스로 치명적인 공격만 막아버리고 웬만한 건 그냥 맞으며 위로 비행했다. 한순간의 판단력으로 실력을 발휘한 주르르. 이자는 강한 소환수 뿐만 아니라 컨트롤도 남다른 건가. “조금만 쉴게요.”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일단 이르시아에게 기대앉았다. 이르시아는 말없이 주문을 외웠다. “가이아 여신님이여, 어린 양에게 안식을.”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는 이르시아. 주문처럼 보였지만 그냥 말하는 거였나? 그런데 어머니의 품속처럼 매우 따스했다. 더불어 몸에 이상도 천천히 나아갔다. “젠장, 쫓아오는군요.” 주르르의 탄식이 들렸다. 눈을 감고 있어 자세한 상황은 몰랐지만 이리저리 몸이 크게 흔들리는 걸로 보아 마왕이 뒤를 쫓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주리아의 외침이 들렸다. 내가 지친 몸을 쉬고 있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포기하고 뒤를 방어해주는 것이리라. “블러드 멜로디(blood melody)!” 글로리시나도 어느 정도 회복한 것인지 레이피어를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마음을 가라안치고 내 고유스킬 심연의 눈을 발동시켜본다. 수많은 게임의 힐러를 전전하며 터득한 나만의 스킬, 심연의 눈. 비록 게임스킬인 심연의 눈은 사용할 수 없었지만 원래 이 스킬은 내 고유의 스킬이었다. 자, 생각해보자.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나로 인해 상황이 바뀌는 것은 무엇이 있는가.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은 빛의 매력, 침묵의 절규, 무기속성 주입, 스바르가 마리아, 치료사의 깨달음까지 총 5개. 남아있는 스킬창은 2개였다. 싸움 도중에 없는 스킬 두 개를 발견하는 방법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희박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숙련도가 꽉 찬 스킬을 변형시키는 건 더 쉬울 테지. 그 스킬들은…침묵의 절규, 심연의 눈인가? 침묵의 절규는 모르겠지만 심연의 눈이 변형된다면 지금 받고 있는 페널티도 사라지지 않을까? 좋아, 그건 넘어가고 일단 지금 해야 할 것은…이것밖에 없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주르르님, 숨겨둔 스킬 있나요?” “숨겨둔 스킬이요? 물론 하나 있긴 하지만 숙련도도 극악일 뿐만 아니라 천문학적인 마나가 들거든요.” “불가능한 건 아니군요. 글로리시나, 전에 어쌔신들을 보니까 피의 맹세라고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사용하는 기술이 있던데 사용 가능한가요?” “피의 광세. 한 단계 더 진화한 형태다.” 얕보지 말라는 투로 말하는 글로리시나. 저렇게 말하는 거 보면 자존심 강한 화선녀님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르시아.”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 말인가요? 제 몸을 정화의 빛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어요.” NPC면서 똑똑한 이르시아.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원하는지 아는 듯 보였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복수에 들어가도록 하죠.”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칫, 오래 걸리는군.” 스컬 골렘은 트롤보다 더한 재생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나도, 그리고 루시도 드디어 한계에 달했다. 『이잇, 뼈다귀 주제에!』 “흥분하지 마라. 최대한 마나를 아껴.” 『네…….』 이대로 계속 스컬 골렘을 상대하면 지휘건 뭐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앞을 막는 것인가. 그녀가 보여준 한수는 확실히 놀랄만했다. 하지만 내가 지휘를 포기할 정도로 지켜주어야 할 대단한 것이었나? 아니, 확실히 놀라웠지만 그 정도로 상황이 바뀌진 않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나 역시 기적을 바라는 건가?” 언제나 포기란 단어는 잊고 살아온 나다. 이것도 하나의 작은 과정이라 치부하고 게임에 응했었다. 하지만 마왕이 나타나고 부터는 생각이 바뀌었다. 아펜하르트 게임 측에서 원하는 건 절대적인 멸망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패배란 단어가 새겨지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나타났다. 지휘고 뭐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여성. 하지만 누구도 하지 못한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녀의 존재는 하나의 기적과도 같았다. 판도라의 상자 맨 끝 바닥에 존재하는 희망이 어떤 것인지 지금에서야 이해가 될 정도였다. 그걸 본 직후, 헤드는 남부 왕국들과 제국들을 포섭하기 위해 떠났다. ‘솔직히 저도 이건 힘들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 미소천사가 보여준 행동으로 상황이 바뀌었죠. 제가 전에 말씀드렸죠? 하트의 의미.’ ‘길을 개척하는 자 말인가?’ ‘네, 애디님은 천부적인 하트의 기질을 가지고 있어요. 길을 개척해 모두를 이끄는 힘이 있죠. 하지만 그 길을 막는 거대한 무엇이 있다면 그 길은 막히고 말아요. 하지만 미소천사는 조금 다르죠. 길을 만들지 않지만 자신이 길이 되어주죠. 막히는 무언가 나타났을 때 조용히 다른 길이 되어 모두를 이끌어요. 그것 또한 하트의 다른 면이 아닐까요? 저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어요. 남부 좀 다녀올게요. 북부 쪽 모르핀제국과 메히튼 왕국의 위험을 알리고 정식적인 군사를 요청하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헤드, 제갈공녀는 떠나갔다. “길이 되는 자라.” 정말 길이 되어 줄까? 나 또한 그 말을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라면 기절에서 일어났을 때 나와는 다른 무언가를 해주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저, 저기 봐!” “하늘에 마법진이 생겨났어!” “뭐지? 그 중심에…드레이크?” “주르르님이다!” 하늘을 보았다. 그곳에는 마왕 베르제브브와 드레이크가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생겨는 빛의 마법진. 무슨 일이 일어나려 하는 것이었다. “땅은 대지의 양기, 하늘은 광활함의 천기, 가운데 서있는 우리는 영원의 우주이니 나의 존엄성을 바쳐, 나의 신념을 바쳐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가 되리라.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이 목소리는?” 미소천사다. 저 목소리는 그녀가 분명했다. “지금이에요, 주르르님!” “불로불사의 능력과 신과 같은 뛰어난 두뇌, 마법의 힘과 강철 같은 피부로 이루어진 자! 루시아니안의 존재 이전에 군림한 자연과 세상의 조율자여! 주르르가 명한다, 나와라! 블랙드래곤, 타브로스!” - 그그그그그그그그……. 하늘이 울었다. 일그러지는 공간은 블랙홀이 만들어진 느낌을 주었다. 그 안에서 번쩍이는 거대한 눈. 파충류의 눈이었다. 드래곤을 소환? 내가 알기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주르르 본인이 이 스킬을 쓰려면 최고 몇 년 후의 일이 될 거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사용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힘이 부친 것 같았다. 소환하기 전에 피드백으로 먼저 죽겠군. 그냥 만용일 뿐인가? “스바르가 마리아 발동!” 그때 미소천사의 외침이 다시 들렸다. 그리고 드레이크 위에서 보이는 거대한 성녀. 역시 미소천사는 깨어났던 거야. 주르르가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이 방법은…그래, 피드백으로 줄어드는 체력을 다신 충족시켜주는 방법이야! 예전 이걸로 초창기 시절에 마법사들이 전체마법을 사용하게 만든 사건이 떠올랐다. 지금 그 방법을 응용해서 주르르에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검은 드래곤의 상반신이 겨우 빠져나왔다. 그 크기는 아까 본드래곤을 맞먹는 크기. 저것이 나오면 어떻게 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큭큭, 재미있군.” 대검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것인가. 이것이 길이 되는 자의 능력인가? 나와는 다른 하트의 재능인가? 눈이 다시 붉어졌다. 힘이 끓어오른다. 투지가 생겨났다. 나는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어마어마한 마나를 잡아먹고 있었다. 아직 상반신뿐인데도 이정도의 마나가 들어갈 줄이야. 생명의 희생과 스바르가 마리아까지 쓰는 중인데 이럴 줄은 몰랐다. 주르르는 대체 어떤 스킬을 익히고 있었던 거야? “드래곤? 내가 소환할 수 있게 놔둘 거 같으냐! 파멸의 공간이여, 어둠이여!” “세상조차 가르는 필멸의 화살(Arrow of Mortality)!” “토네이도 써클!” 마왕이 무언가 커다란 것을 쏘려는 때에 아래에서 압축된 불속성의 화살과 녹색 빛의 토네이도가 마왕을 견제했다. 베르제브브는 마법을 시전하려다 캔슬하고 일단 공격을 막았다. “현빈 형…용병왕 애디.” 아래에서 나를 보는 두 명의 유저. 나는 누구도 듣지 못하게 작게 말하다 다시 주르르를 보았다. “지금입니다!” “이 뚱뚱한 녀석아, 그만 좀 나와라아아아아아아!” 나도 한계가 찾아오는 동시에 주르르가 최대의 힘을 쥐어짜자 드디어 검은색의 몸체가 밖으로 나왔다. 전체적으로 뾰족한 인상의 드래곤. 단단해 보이는 검은 몸체, 길쭉한 꼬리. 블랙드래곤 타브로스였다. {나를 소환한 자는 누구인가.} 땅을 굽어보며 말하는 타브로스. 그 뾰족한 눈동자는 드레이크에 타고 있는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헉, 헉. 나의 이름은 주르르! 내가 너를 소환했다!” {드래곤에게 축복받은 자로군. 좋다, 무엇을 원하는가. 그대의 힘이 미치는 한 나는 행동할 것이다. 허나 루시아니안이 존재함으로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될 나이기 때문에 능력의 한계가 있는 몸. 음, 기껏해야 30초로군.} “30초?” 나는 주르르를 보았다. 주르르도 예상치 못했던 문제인지 머리를 긁적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헉, 헉. 뭐, 짧고 굵게 가야겠네요. 블랙드래곤 타브로스, 너의 권능으로 발현하라! 드래곤브레스!” {이행한다.} 날개를 크게 퍼덕이는 타브로스. 그의 목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크아아아아아아! 현신!” 그 사이 타브로스 앞을 막아선 마왕, 베르제브브. 그녀의 몸에서 암흑의 빛이 감싸기 시작해 점점 크기를 부풀렸다. 뼈로 이루어진 몸체, 얼음처럼 차가운 푸른 눈. 암흑 빛의 나온 건 본드래곤이었다. {악흑 탑에 현신한 마왕인가? 그대는 조율중인 세상을 파괴할 자. 내가 나올 정도로 재미있는 상황이었구나.} {닥쳐라, 도마뱀자식!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될 존재랑 말대답하며 놀 시간 없다! 돌아가 버리거라!} 숨을 들이마시는 본드래곤. 이래서는 먼저 브레스를 뿜을 것 같았다. 타브로스 또한 놀라 숨을 들이켰지만 조금 늦은 상태! 그때 타브로스 머리 위에 누군가 올라왔다. 백색의 의복, 어라? 언제 이르시아가 저곳에? “성스러운 빛이 하늘을 감싸니 모든 부정한 것들이 고통을 호소하리라. 홀리라이트(holy light)!”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녀의 몸에서 빛이 뿜어졌다. 마치 또 하나의 태양이 뜬것 같은 빛. 온몸으로 발현한 빛이 세상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저것이 이르시아 최고의 능력?” 본드래곤 뿐만 아니라 바닥에 있는 수많은 언데드 무리까지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타브로스!” 주르르의 외침과 동시에 타브로스가 마시던 숨을 뿜어내었다. {크롸롸롸롸롸롸롸!} 검붉은 색의 에시드브레스. 그것은 본드래곤을 바닥에 내팽개쳤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언데드 무리까지 녹여버릴 정도의 위용이었다. 사막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꼭 용암처럼 독이 바닥을 녹였다. 본드래곤이 우리에게 뿜었던 것처럼 우리들 역시 언데드무리에게 브레스를 뿜으며 복수를 한 것이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사방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브레스를 쏜 직후 블랙드래곤 타브로스가 사라졌고 그 피드백으로 인해 기절한 주르르였지만 지금 지르는 환호성은 아마 들었을 것이었다. 기절한 그의 얼굴이 웃고 있었으니. 우리들은 드레이크가 사라지자 떨어져 내렸는데 다행히도 이르시아가 무슨 힘이 있었던 건지 손을 흩뿌리자 가벼운 깃털이 된 것처럼 아래로 내려설 수 있었다. 저 멀리 에시드브레스에 가격당한 본드래곤이 보였다. 힘겹게 일어서는 본드래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만세! 졸라 멋지다! 젠장 이게임 진짜 멋져!” “드래곤끼리 싸움하다니 영화 같아!” “봤냐? 드래곤브레스로 똑같이 되갚아 준거? 저 녹은 뼈다귀들을 보라고!” 유저들은 한껏 들떠있었다. 아직 베르제브브가 살아있음에도 말이다. 나는 외쳤다.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정신 차리고 앞을 봐!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침묵의 절규’스킬이 업 되었습니다. 스킬명이 ‘지휘의 외침’으로 바뀝니다.> <‘지휘의 외침’ 발동.> <‘지휘의 외침’의 숙련도가 5 상승하였습니다.> 내 목소리가 갑자기 메아리치듯 울려나왔다. 형용할 수 없는 웅장함. 스킬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두들 적들이 혼란스러울 때 재정비에 들어간다! 체력이 없는 자는 뒤로 빠지고 방패 병은 앞으로! 그리고 거기 켈타스교와 가이아교! 서로 도와주지 못할망정 둘이 따로 노는 건 뭔데? 당장 서로 안 뭉쳐!” <‘빛의 매력’ 발동.> <‘빛의 매력’의 숙련도가 15 상승했습니다.> <‘빛의 매력’으로 인해 빛의 관련된 자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가이아교와 협동하라니 아무리 그래도…….” “하지만 왠지 듣지 않을 수가…….” “크윽, 일단 이 상황을 막는 게 우선이다! 가이아 교를 도와라!” 켈타스측 교황이 명령을 내렸고 모든 켈타스교도들이 언데드들의 혼란을 틈타 가이아교 쪽으로 이동했다. 그건 가이아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지휘의 외침을 살펴볼 수 없었지만 거리가 멀었음에도 들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어어, 저기 봐! 언데드들이 재생하고 있어!” “무, 무슨, 트롤도 아니고!” 유저들의 외침에 나는 정면을 보았다. 그곳에는 완전히 녹아버린 해골들을 제외한 모든 스켈톤들이 재생하고 있었다. 뼈가 재생한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허억, 허억. 저건 크윽, 언데드존 때문이에요.” 이르시아도 지친건지 연신 숨을 고르며 말했다. 언데드존? “헉, 헉. 암흑의 성표를 이 바닥 어딘가에 묻어놓았을 거예요. 아까 베르제브브가 땅 속으로 숨을 때…하아, 하아. 숨겨놓았겠죠. 그것을 파괴하지 않는 한 언데드들은 무한 재생이 될 겁니다.” 그렇다면 그 암흑의 성표를 파괴하지 않는 한 이 싸움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고 결국 우리들이 진다는 말인가? 상황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렇게나 기뻐하던 유저들도 다시 꿀 먹은 듯 조용해졌다. “글로리시나, 당신의 그 특별한 눈으로 발견은 무리인가요?” 글로리시나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내 눈에 특화된 건 생명이 있는 자들뿐이다. 땅속에 있는 물건 따윈, 간파가 불가능해.” 내 심연의 눈이 있었다면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 침묵의 절규처럼 쉽게 스킬이 업된다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선 안 되는 상황이니 이것을 믿을 순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뚫어요. 마왕이 뒤쪽에 있다면 앞을 뚫어야 해요. 답은 앞에 있습니다.” “앞? 이 많은 수를 뚫고 앞으로 가야한다고?” 글로리시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의 금발머리가 조금 흔들렸다. “믿으세요, 앞입니다!” 내가 저 앞을 가리켰다. 글로리시나는 레이피어를 그러쥐었다. “나는 하나의 검. 내가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글로리시나는 앞으로 이동했지만 내 말을 들은 유저들은 저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 많은 언데드들을 뚫고 나가라니. 지금도 이렇게나 밀리는데!” “불가능해, 그런 건…….” “륀 기사단은 들어라! 나 레이나가 명한다, 앞이다! 앞을 뚫어라!” “미소천사 기사단, 모두 들었나!? 단장님이 명하신다! 답은 앞이란다!” “실버크로스 기사단, 앞을 뚫어라!” 유저들이 망설이는 도중에 몇몇 기사단이 앞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약소한 기사단들과 유저들은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 “단장님! 저희는 어떻게 할까요?” “길을 만든다라, 그럼 그 길을 걸어주지! 더원 기사단은 들어라! 앞을 뚫어라!” “애디님의 명을 따라라! 앞이다!” “우와아아아아아!” 가장 많은 수를 가지고 있던 더원 기사단도 앞을 향했다. 그러니 버티고 있는 유저들이 오히려 적어져 나머지 남아있던 유저들도 앞을 향하기 시작했다. “……….” 한나를 업고 있던 주리아가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힘들어 보여 내가 한나를 안으로 했다. “만지지 말아요.” “……….” “저는 언니를…언니를 믿을 수 없어요.” 말하면서도 상처가 큰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주리아. 내가 서글픈 표정을 짓자 차마 나를 보지 못하겠던지 한나를 업은 채로 달려 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못 박힌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우리가 밀리는 이유는 포위를 당해서다. 중간 중간 스컬 골렘들이 강한 자들을 밀고 나머지 언데드 군단이 모든 길목을 막으며 포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왼쪽 부위에 브레스를 날렸으니 그쪽으로 중앙군대가 몰려가 있는 상태. 그렇다면 지금 가장 취약한 곳은 중앙일수밖에 없었다. 이곳을 돌파해서 반대쪽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뒤쪽에 모여 있는 교단과 합세할 수 있겠지. 그 다음부터 다시 진형을 세워야한다. 말이라도 타고 있으면 계속 반전하며 뚫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기동력이 약해 지금은 이것이 최선책인 것이었다. 나는 가장 앞으로 나왔다. 스태미나가 최악인 상태라 체력을 소모하면서까지 달렸는데 어느새 최전방이었던 것이었다. 가슴이 답답해 달렸던 것뿐이었는데 여기까지 왔을 줄이야. 그곳에는 용병왕 애디가 지휘하고 있었다. “미소천사인가?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제대로 된 대화조차 못했군.” 푸른 각질의 사내. 용병왕 애디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다. “그러게요. 서로 소개조차 안했군요.” “딱딱한 건 생략하지. 그보다 무슨 전략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묻는 애디. 나는 저 뒤쪽에 있는 NPC사제들을 가리켰다. “여기를 돌파해서 일단 진형을 정비합니다.” “가장 취약한 중앙을 돌파해 진형을 갖춘다? 나쁘진 않군. 확실히 돌파하지 않았다면 마왕과 언데드들 사이에 죽어가기만 했을 테니.” 간단히 말했을 뿐인데도 모든 걸 알아채는 용병왕. 내가 없었어도 저 자는 나처럼 행동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 작전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한 가지 더 있어요. 우리 편과 적을 확실히 분단시키는 것. 그것이 키워드입니다.” “분단? 흐음.” 용병왕은 거기까진 생각 못하겠는지 턱을 쓰다듬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더 나아갔다. 최전방에서 길을 열겠다는 의지였다. 그렇다. 우리 편과 적을 분단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지 않다면 괜히 우리 편도 죽을지 모르니까. “막아라! 녀석들을 보내지 마라!” 본드래곤의 모습에서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베르제브브는 악을 썼다. 그 명령에 언데드들이 부랴부랴 우리들을 막아왔지만 이미 반정도를 뚫어버린 상태. 막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화이어 블레이드!” “용문권(龍刎拳)!” “일섬(一剡)!” “다 죽여주마아아아아아아!” 수많은 유저들이 스킬을 외치자 우리들은 어렵지 않게 중앙을 돌파해 NPC사제들과 합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들 스태미나가 떨어져 지친상태. 다행히도 마왕이 아직 회복을 못한 듯 언데드 병사들이 움직이지 않아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레이나님! 레이나님 여기 없나요?” 크게 소리 질렀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레이나님이 손을 흔들었다. “여기에요, 여기!” 레이나님이 있는 곳에는 수많은 륀 기사단원들과 불사조, 하가네, 철패, 탈영병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정말 멋졌어요! 전체힐! 게다가 저주까지 전부 풀어버리다니!” “나는 드래곤에서 전율했삼.” 내가 다가오자 모두들 침을 튀겨가며 칭찬했다. 한없이 즐거운 표정. 지금 내 기분과 너무 이질감이 느껴져 나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여러분의 힘이 많이 필요합니다. 특히…철패가요.” “엥? 나?” 뭔가 느낌이 안 좋은지 한발을 뒤로 빼는 철패. “작전명 철패 죽이기입니다.” “에에에에에에에에엑?” “어째서, 나야! 왜 나여야 해!” “닥치고 앞이나 막아!” 철패가 자꾸 반항하자 레이나님이 일침을 놓으셨다. 그러니 어깨까지 축 처지는 철패 녀석. 미안, 너에게 악감정이 있기도 했지만 전쟁을 이기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금부터 10분입니다! 10분 동안 최대로 방어하세요!” 내가 10분이라고 말하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10분만 방어하면 된다는 것인가. 제대로 설명해줘야 했지만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계속 지휘했다. “마리아!” 기도하고 있던 마리아는 손을 뻗어 주위 체력이 없는 유저들을 치료해주기 시작했다. 현재 나는 스태미나가 하나도 없어 움직이기조차 버거운 상태. 아까 돌격할 때 또 무리해서인지 체력도 한계에 달했다. 지금은 간혹 마나가 찰 때마다 간간히 힐 해주는 게 고작이다. 이대로 10분을 버틸 수 있을까? 저 멀리 베르제브브를 보았다. 지금까지 전투로 인해 마왕도 많이 지친 것인지 무릎을 꿇고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스파크의 저주를 다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 아니면 지금 그것을 사용할 마나를 모으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 전에 끝내야 해.” 나는 어서 10분이 지나가길 간절히 기원했다. “크으으윽, 언데드 무리들 점점 더 강해지고 있어!” “내가 스켈레톤따위에게 밀리다니 저놈들 왜 이렇게 강해지는 거야?” “죽지 마! 죽으면 좀비가 된다! 절대로 살아!” 언데드존의 힘으로 언데드 몬스터들은 점점 더 힘이 늘어나고 있었다. 아펜하르트 회사 측은 애초에 밸런스를 고려해 이 이벤트를 만든 것일까? 이것은 꼭 일부러 전멸시키기 위해 만든 것 같지 않은가. “세상의 어머니, 가이아 여신님의 힘은 땅, 땅은 곧 생명이리라. 큐어(cure)!” “세상의 어머니, 가이아 여신님의 힘은 땅, 땅은 곧 생명이리라. 큐어(cure)!” 가이아 교단과 합세해서 바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사제들은 사제끼리가 아니라 다른 유저들과 함께 있을 때 힘을 발휘한다. 저 치료능력이야말로 절대적인 승리의 길이기도 했다. “찬란한 빛의 광휘, 천벌(天!罰)!” “찬란한 빛의 광휘, 천벌(天!罰)!” 그에 반해 켈타스교는 전투사제라는 특별한 스킬만을 취급하는 교단이었다. 많은 유저들이 현재 추구하는 사제가 바로 켈타스 교단 쪽이었다. 전에 누구였더라, 나한테 욕사리 얻어먹었지. 공격만하다 말이야. “10분, 완료! 발동조건 완료!” 철패가 헥헥 거리며 어서 나 좀 살려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최전방에서 혼자 방패 하나로 적을 막고 있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하가네님을 보았다. “하가네님, 준비 됐나요?” “충분히 됐어염!” 좋아, 모든 것이 준비 완료되었다. 나는 숨을 들이쉬어 크게 외쳤다. “모두 떨어져어어어어어어!” <‘지휘의 외침’ 발동.> <‘지휘의 외침’의 숙련도가 10 상승하였습니다.> “어어어억!” “아이고 귀야! 떨어지래!” “피해, 도망가! 무엇인진 몰라도 떨어져!” 유저들이 냅다 도망가기 시작했다. 언데드들도 뒤쫓아 왔지만 상대적으로 걸음이 느려 천천히 거리가 벌어졌다. “지금입니다!” “금속성 현자의 돌! 모든 것을 지배해주삼, 연성지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인!” 빠지지직. 땅이 울었다. 울퉁불퉁 일어나는 모래들. 하가네님의 이마에는 땀이 흥건하게 젖기 시작했다. “길게, 길게, 길게, 길게!” 자신에게 명령하듯이 외치는 하가네님. 공명하는 땅이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다. “뭐, 뭐지?” “땅이 울고 있어.” “자, 자, 자, 잠깐! 우와아아아아아악!” 공명하던 땅에서 순간 강철의 벽이 튀어나왔다. 두께는 무진장 얇았지만 그 길이와 높이는 상상 못할 정도의 크기. 그 벽이 우리와 언데드무리를 나눠버렸다. 양 좌우에는 광사의 언덕 때문에 꽤나 높은 모래언덕이 가로막은 상태라 옆으로도 올 수 없는 상태였다. “헉, 헉. 준비 완료삼!”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가자, 이지스, 황금의 인 발동!” 목을 까닥이며 근육을 풀던 철패 녀석이 주문을 외치자 몸이 1.5배 커졌다. 게다가 그의 몸은 황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저것은 철패의 고유 스킬, 황금의 인이었다. 10분 동안 상대의 공격을 막으면 발동하는 조건 스킬인데 단 1분 동안 유지할 수 있지만 능력치가 상승할 뿐만 아니라 마법 면역이란 강점이 있는 스킬이었다. 게다가 그가 드는 방패는 절대 부셔지지 않는다란 조건, 이것까지 성립하면……. “와라! 다 막아주마!” 철패는 강철벽에 나와 있는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자 벽 전체가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벽이 빛나?” “멋지다!” 유저들은 멍하니 반으로 나눠버린 벽을 바라보았다. “암흑 화살!” 뭔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베르제브브는 쉬는 걸 멈추고 공격에 들어갔다. 하지만 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는 방패. 절대의 방패를 과연 뚫을 수 있을까? “마법이 통하지 않아? 이 무슨! 언데드 병사들이여, 부셔라! 저 벽을 뛰어 넘어라!” 그 정도의 예상은 이미 했다. 물리력으로 부수려하면 철패는 5초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 사제들이 있다면? “세상의 어머니, 가이아 여신님의 힘은 땅, 땅은 곧 생명이리라. 큐어(cure)!” “세상의 어머니, 가이아 여신님의 힘은 땅, 땅은 곧 생명이리라. 큐어(cure)!” 가이아 교단 사제들이 집중적으로 철패를 치료해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패는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역시 그래도 치료보다 공격하는 언데드 무리가 많다는 것이겠지. 그것 또한 생각에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찬란한 빛의 광휘, 천벌(天!罰)!” “찬란한 빛의 광휘, 천벌(天!罰)!” 철패는 마법이 면역이라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 벽은 강철로 이루어진 것. 그 안에 전류를 통과시킨다면? “벽이 전류로 번쩍거려!” “저기 봐! 위로 올라오던 언데드들이 다시 떨어진다!” 전류가 통하는 우리를 만들면 어떠한 동물도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걸 생각해 내었다. 게다가 언데드라면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지. “지금입니다. 가이아 사제님들!” “카오스에서 갈라진 태초의 어머니 가이아시여, 어머니를 상징하는 물건은 땅, 땅은 곧 성표 이니라. 발동하라, 디바인 마크(Divine Mark)!” “카오스에서 갈라진 태초의 어머니 가이아시여, 어머니를 상징하는 물건은 땅, 땅은 곧 성표 이니라. 발동하라, 디바인 마크(Divine Mark)!” 잠시 언데드들이 주춤하고 있을 때 가이아 교단 사제들은 힐을 멈추고 다른 주문을 외웠다. 이것은 언데드, 악마 몬스터에게 치명적인 빛이 되는 디바인 마크. 그것이 강철 벽에다 발동시킨 것이었다. 이로서 언데드들이 벽에 접근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대충 30초. 그 안에 모든 것을 끝내야 했다. 재생조차 불가능한 방법으로. “이제 륀 기사단이 힘써줄 차례에요. 주위에 모든 마법사들은 모으셨죠?” “물론이죠. 이미 주문은 거의 끝이에요. 저 역시 완료했네요.” 레이나님은 엄지를 척 들며 윙크했다. 예전에는 내가 힐을 주어서 사용이 가능했던 광범위 마법. 하지만 이제는 유저들도 레벨이 높아져 힐의 도움이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되었다. “그럼 이제 마무리 짓죠.” 잘 가라, 힘겨운 싸움이었다. 이걸로 완전히 몰살은 어렵겠지만 아마 거의 대부분 몰살은 가능하겠지. 집약된 범위마법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해 보거라. “갑니다!” “아자, 스톤 커……” “메테오 블러스…….” “폭염의 소용돌…….” 수많은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려는 그때. 하늘이 순간 어두워졌다. 짙은 구름이라도 몰려온 걸까? 그때 내 허벅지에 박힌 창대를 시작으로 심장이 꿰뚫린 마법사, 방패를 들었지만 그 방패조차 뚫어버리고 머리를 관통당한 기사. 날쌘 몸으로 열심히 피했지만 결국 온몸의 창대를 박고 죽은 무투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보다 신께 기도드리는 자세로 죽어가는 NPC사제들. 그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이건.” 내 주위에 있던 모든 유저들이 전멸하다시피 회색으로 물들었다. 가장 뒤에 있던 NPC사제들은 전멸이었다. 내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아픔을 모를 정도로 참상이었다. “우쿠쿠쿠!” “우쿠쿠쿠!” 구릿빛 터질 듯 한 근육에는 천연 색료로 온몸을 문신처럼 만들었으며 갑옷대신 동물의 뼈를 착용하고 있는 자들. 위치의 산맥에 서식하는 파소에 들이었다. 그들이 우리 반대쪽에서 기습한 것이었다. “투척 준비!” 가장 선두에서 지휘하는 자가 있었다. 온 몸은 파소에들이 입은 것과 같이 뼈들로 갑옷을 대신하고 있었는데 그 안쪽은 착 달라붙는 옷을 입고 있어 매우 요염해 보이는 여성. 흑장미 여성이었다. “어째서, 왜 저들이.” 침통했다. 왜 저들이 언데드들을 도와주는 것인가. 같은 몬스터라 할지라도 전혀 상반된 종족이 아니었던가. 1분이 지나 철벽은 무너져 내렸다. 철패 녀석은 창에 등이 꿰뚫린 채 이미 회색빛으로 변한 상태다. 그때 다시금 무수한 창들이 날아들었다. 나는 빛을 가리며 쏟아지는 창들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 푸푸푸푸푸푸푸푸푸푹! “쿨럭!” “레이나님!” 내 몸을 감싸 모든 창을 등으로 막은 레이나님. 그녀는 경직된 얼굴로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쳇, 이렇게 멋지게 죽을 줄 알았으면…쿨럭! 멋진 말이라도 조금 연습해 둘걸.” “레이나님!” 그녀는 고개를 조금 젓다 회색빛으로 물들며 쓰러졌다. 손이 덜덜 떨렸다. 기찬아, 진정해. 이건 진짜 죽음이 아니야. 그냥 게임 오버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정신 차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사조님도, 하가네님도 탈영병조차 회색빛으로 물든 채 쓰러져 있었다. 화폭의 그림에서 색이 사라진 느낌. 나만 빼고 주위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젠장, 젠장!” 상황은 완전히 기울어버렸다. 도저히 손쓸 수 없는 상황. 아직 양 좌우로 많은 유저들이 남았지만 이번에는 언데드무리와 파소에들에게 포위당한 상태. NPC사제들은 전부 전멸했고 절대로 필요한 마법단이 전멸했다. 나 역시 스태미나와 무릎의 상처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금 화살이 날아왔다. 다행히 다른 유저들은 앞에 언데드 무리를 막으러 전부 나갔기 때문에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던 나는 이 번건 절대로 막을 수 없다는 직감이 왔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이 정도였던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 푸푸푸푸푸푸푸푸푹! “크헉! 도망가요! 우리가 아는 미소천사는…이런 것에 포기하는 자가 아냐!” “쿨럭, 쿨럭! 이번엔 우리가 대신 죽어줄 차례다!” “저놈의 파소에들은 정말 끈질긴 악연이네!” “얼마든지 쏴봐, 이것들아!” 집중된 공격에 온몸을 꿰뚫린 채로 욕설을 내뱉는 이들. 그들은 위치의 산맥을 건너갈 때 팀이었던, 그리고 지금에 와서 엔젤단이 된 80명의 유저들이었다. “왜 내 앞을 막는 거야! 난 이미 늦었어, 도망가란 말야!” 계속된 투척에 앞에서부터 천천히 쓰러져가는 엔젤단원들. 이건 미친 짓이야. 그냥 자살할 뿐이란 말이다! “지금 당신이 죽으면…정말 질것 같기 때문입니다.” “뭔가 일으켜주겠죠. 제가 엔젤단에 들어간 이유는 그게 재미있어서 이니까.” “내일 다시 접속했을 때, 우리들의 승리로 끝나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전부 쓰러질 때까지. 하나하나 전부 죽을 때까지. 마지막 한명이 히죽 웃으며 나를 밀치는 걸로 엔젤단은 전멸하였다. “……….” 처음으로 눈물이 나왔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단지 게임일 뿐인데, 아무리 그래도 게임인데. “이번엔 우리 차례인가.” “이야, 실버크로스 단과 같이 창받이가 될 줄은 몰랐는걸?”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미소천사 기사단.” “아, 안 돼. 하지 마. 더 이상 그러지마!” “뒤에 있는 놈들은 어서 미소천사를 빼돌려! 앞은…기사답게 마무리 한다.” 창들은 계속 날아왔다. 앞에서는 푹푹, 소름끼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들은 나를 안고 그 창들을 뚫으며 미친 듯이 도망가고 있었다. “아, 아아아…….” 근육맨 나헬스했다가 나를 안고 미친 듯이 뛰다 다리에 창이 박히자 미소천사 원빈 전단장이 이어받아 달렸다. 그 단장조차 죽자 실버크로스 단장이 원빈 전 단장을 걷어차고 나를 안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날아오는 창들의 수는 너무 많았다. 그렇게까지 노력해도 전부 죽을 만큼. “혀, 형님. 저희들이 이곳에 꼭 와야 합니까?” “야, 이 멋진 장면을 놓치라고? 죽는 건 일순간이다! 우리 슈바리에단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폼생폼사!” “이 한 몸 불사질러보자!” “와아아아아아아!” 이번엔 다덤벼를 필두로 슈바리에 기사단이 앞을 막았다. “정말 끈질기구나! 다시 투척준비!” 저 멀리서 흑장미 여성이 외쳤다. 그래, 정말이지 너무나 끈질겼다. 이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하나 때문에 벌써 몇 백 명이 죽은 것인가. 나에게 무엇을 기대고 하나하나 웃으며 죽어가는 것인가. 눈앞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어 앞에 누가 있는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아, 이제 누구라도 상관없어, 이제 그만 멈춰줘. 알았으니까 제발 이제 그만둬! “이제 그만해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영원한 빛’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심연의 눈’스킬이 업 되었습니다. 스킬명이 ‘진실의 눈’으로 바뀝니다.> <‘일루미네이터’에서 ‘진실로 다가선 자’로 직업이 바뀝니다.> 타테, 비상하다 몸이 가벼워졌다. 최악이었던 스태미나가 풀린 것이었다. <‘진실의 눈’ 발동.> 세상이 느려졌다. 모든 상황들이 한 눈에 보일정도로. 나는 내려 보았다. 혈폭의 사막을, 그리고 그 너머 세상을. 다리에 상처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생각할 것도 없이 앞으로 나서 양팔을 펼쳤다. 『주인님!』 <오토스펠,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발동.> 지팡이에서 백색의 방패와 녹색의 기운이 내 주위를 감쌌다. 10% 확률로 발동하는 오토스펠과 정령이가 힘을 써준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작은 내 몸은 슈바리에 기사단 전부를 막아주지 못했다. “크아아아악!” “커어억!” “쿨럭! 젠장, 조질라게 아프네…….” 온몸이 덜덜 떨렸다. 내 주위에 있는 수많은 유저들이 전부 회색빛으로 변했다.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탄식만이 입안에서 맴돌 뿐이다. 눈앞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뭐, 뭐야? 쿨럭! 멀쩡하잖아?” “너, 너!” 창에 배가 뚫려 바닥에 박혀있는 다덤벼. 나는 재빨리 달려가 스바르가 마리아를 불렀다. 하지만 내가 치료하는 것보다도 죽어가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이미 늦은 거 같다. 크윽, 그보다 괜찮냐?” “네 걱정이나 해! 이 바보, 병신, 무식한…젠장, 일어나, 미안하니까. 살아줘, 부탁이야!” “너, 너, 목소리가……?” “그딴 건 알바 없잖아!” 이 상황에서 연기 따위 할 수 있을까보냐. 모든 것들이 다 상관없어졌다. 이제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러니까 제발 살아주길 바랐다. “죽어가니 귀까지 병신이 되는 기분…….” “야, 야, 어이, 야아아아아아아!” 결국 말하다 말고 회색빛으로 변한 다덤벼.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왜 이리도 쉽게 사람들이 죽는 거야? 아니, 죽진 않았어.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플까? “아아아아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들어 올린 다덤벼를 차마 놓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부셔질 듯 한 머리. 그래, 이 느낌은 올 속성을 결합할 때 느끼던 그런 아픔이었다. 정말 기절할 것 같은 아픔. <‘영원한 빛’ 발동.> 갑작스럽게 스킬이 발동했다. 무언가 머리에서 청량감이 몰려들었다. 지끈 거리던 고통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그 느낌이 드는 동시에. -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저, 저 빛의 구슬들은 뭐지?” “죽은 유저들의 몸에서 빛의 구슬들이 나오고 있어!” “저것들이 어디로 가는 거지?” “미소천사다! 미소천사에게 가고 있다!” 알 수 없는 빛의 구슬들이 나에게로 들어왔다. 정확히 내 머리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아악! 젠장! 비겁하게 뒤에서!’ 가장 처음 밀려들어온 느낌은 철패 녀석의 한탄스런 기억이었다. ‘아악, 발동 직전인데!’ ‘조낸 멋진 기술이 발동하려 했는데!’ ‘젠장, 피드백만 아니었어도 저것들을 그냥!’ ‘오오, 신이시여, 정녕 저희를 버리는 것이나이까.’ ‘이것은 시련. 달게 받으리라.’ ‘태양이 보이지 않는구나. 하늘이 가려지는구나.’ 한탄스러워하는 마법사들의 기억과 해탈한 듯 경건한 NPC사제들의 기억. ‘울지마요, 미소천사님. 쓰다듬어주고 싶은데 손이 움직이질 않네.’ 마지막으로는 레이나님의 아쉽다는 기억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걸 마지막으로 한 동안 기억이 멈추었다. 그러다 다시. ‘젠장, 정말 질리도록 쏟아지는구나. 그나저나 나를 기억해주기나 할까? 뭐, 개죽음이면 어떠랴!’ 위치의 산맥을 넘어갈 때 파티장이었던 노랑머리 법사, 노이슈반스탕님의 기억을 시작으로. ‘적혈조가 죽는 건 조금 아쉽구만.’ ‘나무만 있었어도 조금 더 막아줄 텐데. 흑!’ 적혈조란 소환수를 사용하던 거친 가죽옷의 남성유저, 자연을 이용하던 녹색옷의 엘프같은 여성의 기억. ‘당신에게는 많은 빚이 있군요. 진작 엔젤단에 들어가는 건데. 오늘 조금이나마 갚습니다.’ ‘방금 오빠가 미소천사언니 본 거 맞지? 어머머, 설마 러브러브?’ ‘이야, 소름끼치도록 창들이 많네. 이거 맞으면 아플까?’ ‘으엑, 나가고 싶어!’ 엔젤단에 처음으로 권유했던 블루블랙머리의 사제 플레이아데스와 그의 여동생들 에스텔, 프린질스스킨, 완전미소의 기억. ‘미소천사님의 버프를 받고 다시 광전사가 되보고 싶었는데 아쉽구만!’ ‘저 창들은 매즈가 안 될까?’ ‘으아, 아무리 민첩의 어쌔신이라도 이것들을 피하기는 무리겠지?’ ‘꼬맹이는 작아서 좋겠다.’ ‘저놈은 화살도 피할 수 있을지 몰라.’ ‘저 형들…무슨 의미로 나를 보는 걸까? 왠지 오싹하네.’ ‘미소천사님을 위해서…….’ ‘화살 쯤이야…….’ ‘……….’ ‘……….’ 광전사 노을바람, 매즈로 특화시킨 움직이지마, 피의맹세로 몸을 불사르던 세 명의 어쌔신과 파소에 대장에게 최후타를 날렸던 꼬맹이를 시작으로 그 파티에 속했던 대부분의 유저들의 죽기 직전 기억들이 내 머릿속으로 쏟아져내려왔다. 그들의 기억을 전부 흡수하자 다음은 실버크로스 기사단들과 우리 미소천사 기사단의 기억들이 들어왔다. ‘이대로 안아서 게임세상 끝까지 달리고 파라! 아악! 내 다리!’ ‘후훗, 잘 이어받았습니다. 이젠 당신과 저만의 로망스…젠장, 10초도 못 움직였는데!’ ‘이것들은 왜 얼굴이 붉어진 채 죽는 거야? 훗, 우는 건가? 그 모습을 보니 죽는 것도 뭐 나쁘지 않겠군. 우리 실버크로스 기사단을 이겼던 것처럼 당신이라면 여기서도 기적을 발휘하겠지. 그것 때문이라면…게임목숨 따위야’ ‘푸헤헤헤, 우리한테 창받이 시켜놓고 저 혼자 튀려다 꼴좋다! 원빈!’ ‘어, 어라? 실버크로스 단장이 낚아챘어!’ ‘악! 막아야 돼! 창을 막을 때가 아니야! 이러다 빼앗기겠어!’ ‘사랑해요, 미소천사 누님!’ ‘아아, 울고 있는 모습도 너무 아름다워~’ 마지막으로는 슈바리에 기사단과 다덤벼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사악미소 타락천사가 울고 있네. 저 여자는 가시 같을 줄 알았는데…의외로 예쁘잖아?’ ‘아놔, 멋진 건 좋지만 너무 아프잖아!’ ‘저놈의 폼생폼사 좋아하다 이거 몸이 남아나질 않겠군.’ ‘오옷, 두령도 한 발 맞았다! 아싸, 내가 더 오래 살…으헉!’ ‘너, 너, 너, 너, 서, 서, 서, 서, 설마 남자……!’ 미친 듯이 당황한 마지막 다덤벼의 기억을 흡수하자 아까보다도 더 많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내 입술은 한없이 위로 들려있다는 것이었다. “킥킥, 킥킥킥! 바보 같은 것들, 너무 웃기잖아, 웃기고 웃겨서…눈물이 멈추지 않는단 말이다.” 손으로 눈을 가렸다. 축축하게 젖는 손바닥. 그 물들은 너무도 따뜻해서 도저히 땔 수가 없었다. “그래, 너희들의 죽음. 헛되이 쓰지 않을게. 악을 써서라도 이 전쟁 꼭 이겨 줄 테니까! 그러니까, 죽기 전에 딴생각했던 놈들은 목 씻고 기다려!” 마음이 한없이 편해졌다. 나만 너무 진지하게 울었던 것이 억울했다. 그런데도 지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아파 우는 눈물이 아니야. 이건 기뻐서 우는 거야. <1024명의 혼을 거두었습니다. 권능이 발현됩니다.> <미카엘의 날개가 소환됩니다.> “다시 투척준…저, 저게 뭐야!” “우크크르르르르!” “우크크르르르르!” 모든 것들을 내려 보았다. 하늘도, 구름도, 사막도, 유저들도, 마왕 베르제브브까지도. 나는 비상했다. “처, 천사?” “저, 무슨?” “여섯 장의 날개라면…대천사?” “…멋지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여섯 장의 날개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단순한 빛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늘이 드리워진 유저들의 모습을 지워줄 수 있었다. “킥킥, 천사인가.” 처음 시작할 때 천사로 오해받아 미소천사란 호칭을 받으며 게임할 때가 엊그저께 같은데. 지금은 정말 천사가 되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천사로 오해받아 숨어 지내던 저렙이 진짜 천사가 돼서 비상할 줄을. “열려라, 잠재 된 힘이여.” 1. 빛의 매력(패시브) - ‘매혹’, ‘천상의매혹’에서 변형된 상태. 모든 신들의 대행자이자, 빛을 밝히는 존재가 뿜어내는 매력. 신의 대행자를 자처하고 빛을 걷는 모든 자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음. 유저에게 명령을 내릴 시 유저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짐. NPC에게 명령을 내릴 시 자신의 명예에 비례해 확률적으로 선택가능. 2. 지휘의 외침(패시브) - ‘고성방가’, ‘침묵의 웃음’, ‘침묵의 절규’에서 변형된 상태. 목소리가 닿는 적에게는 경각심을 주며 3초간 스턴상태를 유발, 아군에게는 사기를 대폭 상승, 통솔력 300%상상한다. 단, ‘지휘의 외침’ 발동 시, 약간의 스태미나와 SP가 하락하며 2분의 대기시간이 있다. 수가 많아질수록 하락하는 수치도 증가된다. 3. 무기속성 주입(액티브) - 8개 모든 속성을 주입시킬 수 있으며 오직 무기에만 속성 주입이 가능하다. 시간은 15분 동안 유지되며 지능, 정신력, 탄력이 높을수록 시간과 능력이 올라간다. 월(月) : 몬스터 자아의 문으로 사용된 륀(달)의 기운으로 월 속성 몬스터에게 공격 시 MP 재생효과 20%증가, 자아를 심는다. 그밖에 몬스터 공격 시 재생효과 20% 감소.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암(暗) : 빛족 / 천족 공격 시 5%확률로 절명 시키며 10% 확률로 치명타, 암의 보호로 인해 피드백 확률 10% 감소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화(火) : 식물형 공격 시 5%확률로 절명 시키며, 그밖에는 초당 20의 지속 데미지를 준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수(水) : 인간형 몬스터에게 10% 확률로 결빙효과가 주어지며 매 공격 시 상처부위는 결빙되어 스태미나가 하락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목(木) : 수(水)속성 몬스터에게 공격 시 자연의 기운이 깃들어 스태미나 및 체력이 흡수된다. 몬스터가 죽을 경우 흡수한 체력을 가진 식물 몬스터 생성.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금(金) : 강철화 시켜 방어력이 10%증가, 이동속도 15%저하.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토(土) : 독 속성 몬스터에게 추가 데미지 10%, 그 독을 흡수하여 다시 토의 기운을 불어넣을 때, 독을 간직한 채로 발동한다. 1회 사용가능.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천(天) : 언데드 / 악마 몬스터 공격 시 5%확률로 절명 시키며 10% 확률로 치명타, 빛의 보호로 인해 일시적인 방어력이 증가한다.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4. 올 원소 친화력(패시브) - ‘원소 친화력’에서 변형된 상태. 8원소의 조화를 깨우친다. 월(月), 암(暗), 화(火), 수(水), 목(木), 금(金), 토(土), 천(天)의 원소와 친화력이 증가하여 각각 원소의 추가 포인트+15 증가, 원소 친화력으로 인해 피드백 확률 10% 감소된다. 탄력에 따라 원소의 조화가 증가, 지능, 정신력에 따라 추가 포인트 증가한다. 5. 진실의 눈(Abyss The Eye) (액티브) - ‘심연의 눈’에서 변형된 상태. 진실을 꿰뚫어 보는 미카엘(Michael)의 진정한 능력은 모든 진실을 보는 것. 그 눈은 모든 진실과 자신의 의지를 발현 시킨다. 진실의 눈을 발동 시 모든 능력치 400% 증가, 모든 속성 포인트가 400%증가, 세상에 존재하는 진실을 볼 것이다. 지속시간 10분, 대기시간 24시간 지속되며 12시간 동안 스태미나 최하로 떨어진다. 6. 트리플스펠 (액티브) - ‘더블스펠’에서 변형된 상태. 전투법사의 고유스킬. 전투로서 지식을 깨우친 마법사는 속성을 합치는 방식을 고안해 강한 마법을 창조하기에 이른다. 각 속성을 결합해 마법스킬을 창조한다. 각각 속성 10포인트 이상 올려야 결합이 가능하고 속성 포인트가 높으면 높을수록 스킬의 결합이 강해진다. 지능과 정신력이 높을수록 속성 결합 성공여부가 커지며 조합 개수가 늘어난다. 단, 조합개수가 많을수록 피드백 확률 증가, 하루에 한 번 조합 가능, 조합 실패 시 1시간 동안 지능, 정신력 50%하락. 7. 스바르가 마리아(Svarga Maria) (액티브) - ‘태초의 재생’에서 변형된 상태. 자연의 조율자로 알려진 드루이드는 그 근본이 되는 태양을 숭배하였다. 태양, ‘라’라고 불리었으며 기원전 1만 2천년경 아틀란티스에서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태양이 있는 곳은 천당(스바르가)이 존재했으며 그 존재의 사실여부를 인지시킨 인간이 마리아다. 기독교에서는 성모라 불리었으며 성배의 그릇이었고 모든이들에게 있어 평온과 안식이었다. 그것을 믿고 따른 드루이드와 위치들은 오늘날 여신으로서 추앙받고 있다. 스킬 시전 시, 마리아 혼이 강림. 태초 드루이드의 재생과는 다르게 빛의 근본에 다다라있다. 기본 재생의 비해 40% 더 회복하며 마나소모량이 20% 줄어든다. 스킬 사용 시, 모든 생명체는 MP, 스태미나가 회복된다. 시전자의 SP 소모량에 따라 회복되는 MP, 스태미나가 달라지며 작게는 10명 최대 100명까지 동시 회복 가능.(숙련도에 따라 동시회복 최대 수치가 달라짐) 빛속성 생명체에게 시전 시, 자신보다 아래계급일 경우 잠시 동안 명령을 내릴 수 있음. 성배(聖杯) 사용 가능. 성배는 불로불사를 위해 전해온 영약의 총칭으로 불로초, 소마, 암리타, 천도라고도 불린다. 성배 사용 시, 어떤 것이든 부활가능. 300시간 대기시간을 갖는다.(물의 구슬 결합 시 대기시간 200시간 감소) 성가(sacred song)사용 가능. 발동 시 모든 상태이상 및 저주 해제. 대기시간 30분.(빛의 구슬 결합 시 모든 능력치 +50 증가) 8. 치료사의 깨달음(패시브, 액티브) - 호메오스타시스. 생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조건은 먹고, 자고, 대사하는 것이다. 각득(覺得), 개오(開悟), 영해(領海), 회오(悔悟), 회유(誨諭), 각성(覺醒), 경성(警醒), 효오(曉悟)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깨달음이니 희생의 길을 선택한 그대는 그 이상을 관철시켜라. 모든 치료스킬 20% 능력 증가. 보조스킬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사용가능.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발동 시 술자를 중심으로 반경 100m 안에 있는 모든 아군은 모든 능력치+20 증가, 피드백 확률 10% 감소, 방어력 20% 증가, 이동속도 20% 증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아군의 기술, 마법 숙련도가 100으로 고정된다. 단, 생명의 희생을 받고 있는 자 중 한 명이라도 사망할 시, 술자는 피드백당해 즉사한다. 주문 : 땅은 대지의 양기, (왼손을 아래로 향해 땅을 향한다) 하늘은 광활함의 천기, (오른손을 위로 향해 하늘을 향한다) 가운데 서있는 우리는 영원의 우주이니(두 손을 크게 원으로 돌려 가슴으로 모은다)나의 존엄성을 바쳐, 나의 신념을 바쳐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가 되리라. ‘생명의 희생’(가슴으로 모았던 손을 교차시키며 빛을 분산시킨다) 9. 영원한 빛(Arc Eternity Seraph)(액티브) - 진실의 눈을 습득한 자에게 주어지는 유니크 스킬. 진실을 꿰뚫어 보는 미카엘(Michael)은 죽음의 천사이자 대천사의 임무로 ‘영원한 빛(Arc Eternity Seraph)’을 이용해 인간의 혼을 거두는 자이다. 그는 그 혼을 이용하여 모든 진실과 자신의 의지를 발현 시킨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모든 죽음을 거둔다. 그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권능을 일으키리라. 진실의 눈을 발동시켰을 경우에만 사용 가능. 사용 후 300시간 대기시간을 갖는다. 사용 페널티로 기절에 이름, 과도한 사용으로 목숨을 잃을 확률 있음. 발동 시 10분의 지속시간을 가진다. 1명이상 거둘시 - (알려지지 않음) 10명이상 거둘시 - (알려지지 않음) 100명이상 거둘시 - (알려지지 않음) 1000명이상 거둘시 - 미카엘의 날개 소환. 대천사의 칭호인 여섯 장의 날개는 빛을 다스리는 절대자의 날개이다. 빛속성 내성 100%, 모든 빛속성 마법은 반사시킨다. 암흑속성 내성 50%, 암흑속성 마법을 일정확률로 반사시킨다. 비행가능 모든 스킬은 최대 600% 능력 상승. (단, 진실의 눈과는 연개가 안 됨.) 날개 이전 가능. 스킬 능력 +100% 날개를 유저에게 이전 가능. 그에 비례하여 자신의 능력은 떨어짐. 10000명이상 거둘시 - (알려지지 않음) 100000명이상 거둘시 - 알려지지 않음) 바뀐 다른 스킬들은 그냥 넘어가고 이 날개로 인해 생긴 스킬을 중점으로 살펴보았다. 미카엘의 날개. 혼을 1000명 이상 거둘시 발현되는 권능 중 하나인 것을 알 수 있었고 그밖에 다른 권능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일까? 내 스킬 능력들이 현재 600% 상승이라고? 진실의 눈과 연개가 안 된다는 건 조금 아쉬웠지만 그밖에도 나에게는 무식한 스킬이 많았다. 마음 같아서는 하나하나 따져가며 얼마나 내 능력이 올랐는지 알아보고 싶었지만 저 아래에서 노려보는 베르제브브 때문이라도 일단 넘어가야겠지. “하지만 이건 어떨까. ‘무기속성 주입’발동, 천(天)!” <‘무기속성 주입’의 숙련도가 50 상승했습니다.> 오랜만에 시전 하는 무기속성 스킬. 유저들이 많이 줄어있고 내 능력이 한없이 올라간 상태라 마나가 줄어드는 게 거의 안 보일 정도였다. 이 스킬은 다른 좋은 스킬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도태된 스킬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스킬 능력치 600%상승이 되었다면 지금으로선 가장 좋은 스킬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언데드, 악마 몬스터 공격 시 30%확률로 절명 시키며 60% 확률로 치명타가 되니까. 농담안하고 스컬 골렘도 검 몇 번 휘둘러서 잡을 수 있을 정도란 말이다. 보스몹, 이벤트 몹이 아니라면 절대로 강한 스킬…잠깐, 저것들 전부 이벤트 몹은 아니겠지? “이 빛으로 빛나는 검, 뭐지?” “어라? 스컬아머병이 한방에 절명했어!” “여기 봐! 스컬 골렘의 몸이 녹아내려!” 유저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다행히 이벤트 몹은 아닌 모양이었다. “역시, 그때 죽였어야 했어.” 어느새 내 앞에서 박쥐같은 날개를 퍼덕이고 있는 베르제브브. 그녀의 눈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이 자리가 최후의 승부가 되겠구나. 신의 대리자여.” 승부, 하늘을 날 수 있는 자는 지금 나와 베르제브브뿐이었다.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에서 최고의 능력을 가진 두 능력자가 만난 것이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우리 둘을 지켜보고 있고 기사로서는 최고의 명예의 자리가 이 자리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기사나 하는 생각이고. “미안하지만, 힐러의 승부는 이 자리가 아니라서.” 씽긋 웃어주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당황하는 베르제브브. 나는 급속도로 여섯 장의 날개를 이용해 아래로 내려갔다. 내가 가려는 곳은 아까 진실의 눈이 발동된 순간에 땅 속에 보인 암흑의 성표! 일단 이것을 부셔버리는 게 급선무였다. “비겁하게 도망치지 마라!” 등 뒤에서 무수히 날아오는 암흑 화살. 나는 지팡이를 뒤로 뻗어 외쳤다. “정령아!” 『네!』 녹색의 빛이 뻗어 나오며 암흑 화살을 소멸시키거나 튕겨내기 시작했다. 역시, 이 날개로 인하여 암흑속성의 50%내성, 반사의 기능까지 덤으로 있어서 그런지 막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여기다! 스바르가 마리아 발동!” [행복, 사랑, 그것은 하나의 축복. 고통, 저주, 그것은 하나의 불행.] 마리아의 형태도 조금 변형되어 있었다. 평소에는 수녀가 우는 표정으로 기도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전투의 의지를 담아 번쩍 뜨인 눈.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그 주위에는 무수한 빛이 허공에 떠돌고 있었다. 이것이 진정한 마리아의 본모습? 일단 나는 명령했다. “바닥 50m 안에 암흑의 성표에다 힐!” 마리아는 즉각 반응했다. 무수한 빛의 입자가 땅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하더니 무언가 건드리는 느낌이 들었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암흑의 성표라면 암흑속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그것에 빛의 속성을 주입한다면 파괴가 가능하지 않을까란 생각에 시도해본 것인데 다행히 성공한 모양이었다. 이제부터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8분. 이 날개의 능력이 떨어지면 나는 다시 기절상태에 들어갈 것이었다. 그 안에 모든 상황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하다. 베르제브브를 이긴다면 가능하겠지만 저 뒤에 파소에 무리들까지 있어 전쟁은 계속될 거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8분이되기 전까지 최대한 유리하게 만들어주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할 것은…….” 내 능력이 된다면 모든 유저들을 살리고 싶다. 하지만 그건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한 일. 지금 남아있는 마나로 다시 전체 힐을 시전해 줄까? 아니면 능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모색해 볼……. “헉, 헉. 마왕, 마왕을 이기면 되요!” 내 옆에서 들린 말이었다. 이르시아? “곧, 도착해요! 분명히 올 거예요! 그녀들이!” “무슨 말이죠?” “크아아악! 암흑 탑의 수장인 나를 무시하지 마라! 파괴의 별!” 하늘에 손을 뻗고 외치는 베르제브브. 그 순간 하늘에서 무수한 암흑덩어리가 혈폭의 사막 전체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디스펠!” 수많은 유저들이 하늘을 향해 방어를 시전해보지만 상대도 안 되는 강한 암흑의 덩어리들. “젠장, 아직까지 이런 힘이 남아있었어? 마리아! 도와주자!” 지금 하늘을 방어하는 모든 유저들의 정보들이 눈에 보인다. 진실을 보는 눈, 그 힘은 한 순간 힐로 커버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크으으으으윽! 어, 어라?” “힘이 솟는다! 막아, 절대로 막아!” 유저들이 적어져 막는 공간이 적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머지 다른 땅들은 유성이라도 마구 떨어진 것처럼 움푹움푹 파여 있었다. “으으으, 이것들이 잘도! 그럼 이건 어떠냐!” 베르제브브의 몸 전체가 스파크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뭐지? 진실의 눈으로 보아도 어마어마하게 압축된 힘이 느껴졌다. 저 느낌은! 전에 보았던 반구형의 암흑 스파크! 다시 날릴 힘을 벌써 모았던 거야? 저 마왕은 대체 얼마나 강한거야! “모든 만물의 어머니인 태양이여. 세상을 조율하는 딸들이 도착했나이다. 질서를 깨트리는 사악한 무리들을 구원하소서.” “모든 만물의 어머니인 태양이여. 세상을 조율하는 딸들이 도착했나이다. 질서를 깨트리는 사악한 무리들을 구원하소서.” 북동쪽이었다. 그곳에서 노랑 빛의 로브를 입은 여성들이 지팡이를 타고 날아오고 있었다. 그녀들의 망토에는 웅장한 자태의 나무가 태양을 떠받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녀들이 조용히 주문을 외우자 세상이 따스해졌다. “내, 내 마법이 사라져?” 베르제브브는 자신이 시전 하려던 마법이 일순간 소멸되자 놀라워했다. 그때 내 옆으로 다가온 용병왕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저 로고는…위치들? 게임 설정 상 사라졌다고 하는 자들이 어째서?” “제가 불렀어요. 저희 가이아교와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죠. 하지만 반신반의했는데 다행입니다.” 용병왕의 말을 받은 건 이르시아였다. 저것이 위치들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이 게임 세계관이라도 조금 알아볼걸. 저들이 누군지 하나도 모르겠단 말이다. “가이아 교단의 교황이여. 우리가 도착함에 따라 질서를 깨트리는 마법은 사용이 불가능 합니다.” “고맙습니다, 태양의 딸들이여!” 이르시아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그보다 저희는 이곳에 온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우리에게 다가와 지팡이에서 내려온 수십 명의 위치들. 그들은 일순간 나에게서 무릎을 꿇었다. “진실로 다가선 자에게 태양의 딸들이 인사 올립니다.” “진실로 다가선 자에게 태양의 딸들이 인사 올립니다.” 뭐, 뭐지? 이 분위기는? “지, 진실로 다가선 자? 빛을 밝히는 자가 아닌 겁니까?” 이르시아까지 놀라했다.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바뀐 직업으로 인하여 생긴 해프닝 같았다. “베르제브브가 막혀도 우리 파소에들의 공격을 막지 못할 터!” “우크크크크크크!” “우크크크크크크!” 흑장미 여성이 한 말이었다. 그와 동시에 창을 투력하려 하는 파소에 무리들. “모두들 멈추거라! 모르핀 제국이 여기 왔노라!” “메히튼 왕국의 최정예 기사단이 여기 왔다!” 아페타마을이 속해있는 북부 쪽 모르핀 제국과 메히튼 왕국을 시작으로. “켈타스 제국, 왕실소속 골드기사단이 여기 왔노라!” “사하라 제국에서 코끼리 병이 여기 왔다!” “마델린 왕국의 최정예 기마단, 등장이오!” “악의 무리들이 저기 있다! 수피테 왕국은 북을 쳐라!” “티아마트에서 거칠게 살아온 아프수 왕국, 바다 사나이들! 땅이라도 무서울 게 없다!” “그루미어 왕국, 비취아이족은 들어라! 모두 죽어 니블헤임으로 올라가 축제를 벌이자!” “와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 남부 쪽의 수많은 제국과 왕국들의 병사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그 수만 해도 여기 있는 모든 유저들과 언데드병사, 파소에 무리들까지 압도할 정도. 게임 상에 존재하는 3제국 6왕국 전체가 파소에 무리 옆쪽에 모인 것이었다. “이제야 왔군.” 용병왕 애디는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 상황을 유일하게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었다. “제갈공녀가 마왕등장에 벌벌 떨고 있는 제국과 왕국들을 포섭하러 떠나갔었다. 네가 등장해서 모두에게 희망을 준 것을 편집해 가지고 갔던 것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군.” “제갈공녀님이요?” 저 많은 NPC병사들 중에 제갈공녀님을 찾기는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분명히 여기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으리라. 이렇게 되면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마왕은 이제 광범위 마법을 사용 못하고 파소에들도 포위당한 상태. “아, 아직 끝이 아니다! 언데드 병사들이여! 미개한 것들을 죽여라!” 빛속성 무기주입 때문에 어느 정도 선전했지만 월등히 차이나는 언데드와 유저들의 차이로 서서히 밀리는 우리들. “저희들이 도와주러 왔습니다!” “TV에서 지금 난리가 났어요!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비록 생산직이지만 한팔 거들겠습니다!” “미소천사님 사랑해요!” “완전히 존경합니다! 잡템 팔일 있으면 대상인, 제피소에게…억!” “여기까지 장삿속이냐! 도끼나 들어 임마!” “여기까지 와서 돈 아끼는 놈들은 가만두지 않겠다! 생산직을 무시하지 마라!” “검 고쳐드려요! 수리합니다! 물론 공짜!” “흑흑, 약초 드려요! 포션도 있어요! 그런데 돈은 받고 싶습니다!” “저, 적자 생각하니 가슴이…….” “이 전투를 기념으로 내 천지창조 같은 거대한 그림을 그리리라!” “난 미소천사님만 조각할 테야! 절대로 조각하고 말테야!” 언데드 무리 뒤에서 나타난 유저들. 그들은 하나하나 검이 아니라 몽둥이나 도끼, 그밖에 잡다한 물건들을 들고 있었는데 옷차림이 가벼운 걸로 보아 생산직 유저들이었다. 그들까지 온 건가? 전부? 지금 우리들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고? 이로서 언데드 병사들보다 유저들의 숫자도 압도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역시, 한국이다. 한 번 불이 붙으면 절대로 강한 한국이다!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을 텐데 이렇게나 모이다니. 정말이지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상황이 바뀌자 내 생각도 바꿔야만 했다. 지금은 유저들을 유리하게 만들어 줄때가 아니다. 한 명만 잡으면 모든 게 끝난다. 저 마왕 베르제브브만 잡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시간을 보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5분. 그 안에 이겨야 했다. 절대로 이겨야만 했다. 베르제브브도 이젠 상황이 최악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인지한 건지 천천히 하강해 땅으로 내려왔다. 다시 일대일을 하자는 건가? 삼국지에서 일기토가 생각났다.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서 사기와 승패가 갈리는 한판승부. 그런데 자꾸 왜 나한테 그걸 강요하는 거람. “미안하지만 나는 힐러래두. 이 싸움에 걸맞은 자는 따로 있잖아. 그렇지 않아요?” “이런 명예스런 자리를 아무렇지 않게 넘기다니 하여튼 너란 놈도.” 아까 다가와서 내 몸 상태를 훑어보던 태식 형이 한 말이었다. “놈?” 용병왕 애디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고 태식 형은 황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하여튼 저인간은. “헉, 헉. 휴우. 이제 조금 움직일만하군.” 그동안 숨을 고르며 말을 아끼던 글로리시나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재미있구만. 마지막 결전이라.” 입 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지금 상황을 너무도 좋아하는 영웅슬레이어 칼리. “랭커들은 이제 이게 단가?” 결계의마도사 루히비드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어라? 현빈 오빠는요?” 현빈 형이 보이지 않아 태식 형에게 물었다. “아까 파소에 무리가 나타났을 때 뭔지 모르겠지만 그곳으로 뛰어가던데? 너를 구하러 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지금 보기는 어렵다고 봐야하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럼 드디어 최종 결전이네요. 저 위에 스크린으로 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어떤 기분일까요?” “아마 이 사건으로 인해 유저가 대폭 상승하지 않을까?” 태식 형이 말을 받았고. “그딴 건 알 바 없어.” 글로리시나가 귀찮다는 투로 말을 받았다. “저기, 저는 비디오로 리플레이 저장중인데. 아하하, 이 말들 다 녹음 될 거예요.”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는 루히비드. 지금 말들 다 녹음해도 괜찮은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나는 베르제브브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 때문에 죽은 유저들을 위해서라도 꼭 녹음해 주세요. 자, 그럼 슬슬 가 볼까요?” 내 말에 모든 랭커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베르제브브를 보았다. 이제 마지막이다. 최후의 결전이. 내가 해줄 것은 그다지 없었다. 깃발은 랭킹 1위의 용병왕 애디가 시전 중이었고, 무기속성 주입은 베르제브브가 보스 급으로 분류되어 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배틀 존 생성, 파괴의 의지는 이곳에서 이루어지리라!” 시작은 용병왕 애디가 장식하였다. 자신의 대검을 바닥에 내리꽂아 방어력을 대폭 상승시키는 배틀 존을 생성시킨 것이었다. “모두 한 가닥씩 숨겨둔 필살기가 있겠지? 내가 보기에는 지금이 기회라고 보는데?” 태식 형이 나머지 랭커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에 제일먼저 반응한 건 글로리시나였다. “피의 맹세.” 글로리시나가 자신의 레이피어로 손목을 그었다. 그러자 손목에서 뿜어지던 피들은 땅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에 붙어 기이한 문양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는데 거기까지는 어쌔신들이 쓰던 모습을 보았던지라 무슨 스킬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변형 광세!” 몸에 붙은 문양들이 다시 떨어져 검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검붉은 빛으로 빛나는 레이피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울기 시작했다. - 우우우우우우우우웅― “역시 어쌔신인가? 최후의 필살기답게 굉장히 소름끼치는군. 그럼 나도 간다. 타올라라, 몸이여. 불살라라, 마음이여! 인화(人火)!” 태식 형의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불길이 넘실거렸다. 둠터틀과 상대할 때 보았던 태식 형의 필살기. 하지만 그때와는 불길의 색과 크기가 확연히 달랐다. 전에는 밝은 불덩이였다면 지금은 진홍의 불길. 피처럼 새빨간 불꽃들이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삼키려는 듯 날름거렸으니까. “저는 아무래도 이것을 사용해야겠군요.” 루히비드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푸른빛으로 빛나는 작은 조각. “그건 뭐죠?” 내 물음에 루히비드는 아깝다는 듯이 조각을 매만지다 말했다. “달의 파편입니다. 자아의 문으로 사용된 달은 지금에 와서 본기능을 잃어버렸지만 아직 그 힘을 가지고 있는 조각들이 남아있죠. 이게 그것입니다. 그럼, 저의 필살기를 보여드리죠. 루나, 륀, 루네스, 루네디!” 루히비드가 주문을 외우자 밝게 빛나는 달의 조각. “난 행한다. 절대의 공간을!” 그것을 땅에 박아 넣었다. 그러자 그 중심을 시작으로 주위가 풍화의 결계 같은 짙푸른 빛이 흘러넘쳤다. 우리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걸로 보아 해롭지는 않아 보이는데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이 검밖에 없다.” 영웅슬레이어 칼리는 검을 바닥에 꽂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검이 기이한 울음을 뱉어내었다. - 끼이이이이이이잉― 귀곡성 같은 소름끼치는 소리. 그 순간 거대한 대검이 바닥에서 빠져나와 둥둥 뜨기 시작했다. “이기어검술?” 아니다. 여기는 무협이 아니니 그런 검술이 아닐 것이었다. 그렇다면 에고소드? “너도 이 상황이 즐거운가 보구나. 그래, 함께하자. 귀곡마검(鬼!哭魔劍)!” 칼리가 즐거운 듯 외치자 대검이 암흑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진정한 검이 능력을 개방한 것이었다. “재롱은 다 끝났느냐.” 베르제브브가 우리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처음 보았을 때 여유로운 표정이 하나도 묻어있지 않았다. 그 정도로 상황이 급박해진 것이리라. “아, 미안. 내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명색의 힐러인 내가 버프를 하나도 걸어주지 않았는데 시작하려하면 안 되지. “빛의 형상화 발동.” 일단 지팡이의 능력인 빛의 형상화를 발동시켰다. 그러자 지팡이 머리에만 빛나던 빛이 이젠 전체적으로, 그리고 나에게까지 스며들어 온몸이 빛 덩어리가 되었다. 이로서 암속성은 천속성으로 이전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스바르가 마리아!” 이미 꺼내두었던 마리아는 내 외침에 반응하여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모든 랭커들의 몸에 빛이 흘러들어갔다. 이로서 모든 체력은 회복되었을 터. 마지막은. “땅은 대지의 양기, 하늘은 광활함의 천기, 가운데 서있는 우리는 영원의 우주이니 나의 존엄성을 바쳐, 나의 신념을 바쳐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가 되리라.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나를 중심으로 내 주위 100m 공간이 기이한 문양으로 가득해졌다. 이것으로 능력치+20 증가, 피드백 확률 10% 감소, 방어력 20% 증가, 이동속도 20% 증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아군의 기술, 마법 숙련도가 100으로 고정될 것인데. 지금 나는 미카엘의 날개를 달고 있으므로 모든 능력이 600%상승될 터. “몸이 가벼워 졌다?” “귀곡마검이 변형? 이럴 수가 극악의 숙련도가!” “그런가? 루시 역시 힘이 넘친다는군. 힐러의 버프는 역시 남다르다는 건가?” 글로리시나를 시작으로 칼리가 더 커진 마검을 보며 놀라했고 애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인정했다. “자, 준비 완료.” “기다리느라 지쳤다. 하지만 그동안 나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니 너그럽게 넘어가지.” 우리가 준비할 동안 베르제브브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건지 어깨부분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암흑화, 나를 여기까지 몰아세우다니.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는 사실을 일깨워줘서 참으로 고맙구나. 이제부터는 잘근잘근 씹어 주리라. 머리부터 화려하게 터트려 주리라!” 마왕의 어깨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더욱 강하게 피어올랐다. 순간 베르제브브가 사라졌다. 무엇인지 눈치 챈 애디와 태식 형이 뒤로 튀어나가며 외쳤다. “흩어져!” 나는 황급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다른 랭커들도 몸을 뒤로 빼었다. 그 순간 우리들이 있었던 자리에서 베르제브브가 나타났다. 블링크였던 것이다. “흥, 눈치 빠른 것들. 일단 너부터다.” 핏발선 눈으로 튀어나간 곳은 영웅슬레이어 칼리가 도망간 곳이었다. “스톰 소드!” “어림없다!” 칼리가 외치자 탄환처럼 휘돌며 쏘아져나가는 마검. 베르제브브는 그것을 가볍게 손톱으로 쳐내고 더욱 빠르게 달려들었다. “미안하지만 튕기는 것만으로 귀곡마검의 시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길게 포물선을 그리며 다시 베르제브브의 등을 노리는 마검. 역시 에고소드인가.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목표물을 끝까지 쫓았다. “검 주제에 귀찮군!” 베르제브브가 뒤돌아 손을 흩뿌리자 스파크가 생기더니 쫓아오던 마검을 덮쳤다. 그러자 기이한 울음을 뱉어내는 마검.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움찔거릴 뿐 움직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우리들을 무시하면 안 되지. 화이어 블레이드!” “파괴의 눈 발동, 파괴의 강격!” 양쪽에서 베르제브브를 덮치는 애디와 태식 형. 베르제브브는 암흑으로 물든 손을 펼쳐 두 유저의 검을 쉽게 막아버렸다. “쳇, 이정도로는 역시 어림도 없나.” “무식한 힘이군. 파괴의 힘을 잡아버리다니.” “흐아아아아아압!” 그대로 암흑의 기운을 폭사시키는 베르제브브. 그 힘에 멀찌감치 튕겨나간 두 유저는 바닥을 굴렀다. “은신해제, 블러드 멜로디(blood melody)!” 그때 어디 숨어있었던 건지 글로리시나가 쏘아져나간 암흑의 기운을 검으로 끌고 와서 그대로 역이용했다. 내 생명의 희생 스킬 덕분인지 스피드만큼은 눈으로 확인하기도 어려울 정도! “익!” 베르제브브도 이번엔 조금 놀랐는지 급히 목을 틀어 얼굴을 노리던 레이피어를 간신히 피해버렸다. 그럼에도 그녀의 손톱은 정확히 글로리시나의 복부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륀, 변동! 일루젼!” 그동안 달의 파편 쪽에 서있던 루히비드가 갑자기 외쳤고 정확히 복부를 꿰뚫린 글로리시나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사라졌다. “이…건?” 왁!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갑자기 내 쪽에서 등장한 글로리시나. 화들짝 놀라 떨어지는 그녀를 붙잡아야만했다. 날지도 못하는 유저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담! “륀의 힘입니다. 일루젼과 본모습의 교체가 가능해요.” 땀을 훔치며 집중하는 루히비드. 그럼 지금 한 순간에 교체했다는 건가? 그나저나 지금 그녀의 가, 가슴이……. “내려주겠나?” 나는 황급히 붙잡았던지라 현재 찰싹 붙어있는 상태였다. 얼떨결에 안아버렸다고나 할까? 이거 시선을 어디다 둬야할지 모르겠군. 나는 황급히 아래로 하강했다. …그런데 기분이 퍽 나쁘진 않은데? “레즈냐?” “네?” “얼굴이 붉어져서 한 말이다.” “……….” 말하기 이전에 너무 대놓고 물어보는 거 아닙니까? 나는 더욱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확실히 그냥 상대하면 안 되겠구나.” 베르제브브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손톱을 핥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진심으로 상대해 주겠다.” 베르제브브가 핥은 손톱이 붉은 와인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독? “암흑화, 암흑화, 암흑화, 암흑화, 암흑화, 암흑화, 암흑화.” 갑자기 어깨만 피어오르던 암흑의 기운이 자꾸 외칠 때마다 온몸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땅조차 일어날 정도가 되었는데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질리게 만드네. “이건…진짜 괴물이네.” 태식 형도 질렸다는 듯이 한쪽 볼을 씰룩였다. 정말 농담안하고 이런 마왕을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는지 아펜하르트 회사에게 100분 토론을 진행하고 싶을 정도다. “이걸 사용한 상태는 나 역시 부담이 많이 가 오래 버티지 못하겠구나. 그러니…….” 픽하고 사라져버렸다. 내 진실의 눈 시아에서 완벽히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블링크? “…죽어라.” “크헉!” 칼리였다. 칼리의 왼쪽 가슴은 이미 그녀의 손톱이 관통한 상태였다. 모두 보지 못했다. 블링크였다면 잠깐의 시간이 생겨 그 사이 도망갔겠지만 이 번건 아니었다. 정말 눈 깜짝할 순간에 칼리가 당한 것이었다. 즉, 단순히 스피드만으로 다가온 거야! “젠장, 생명의 희생 취…….” 생명의 희생을 취소시키려했다. 나까지 같이 죽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칼리가 쓰러지지 않고 관통당한 상태로 계속 서 있어 취소를 멈추었다. 아직 죽지 않은 것이었다. 베르제브브는 천천히 손톱을 빼었다. 그러니 마치 꼭두각시 인형처럼 어깨와 목을 축 늘어트리는 칼리. 그래도 서있어서 더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떻게 된 거야? “죽음과 삶. 그 경계의 지배자가 나, 베르제브브니라. 너희들 하나 다루지 못하겠느냐?” 베르제브브가 우리를 향해 웃었다. 그녀의 송곳니가 유난히 돋보였다. “카, 칼리 무슨 짓이냐!” 그 순간 칼리가 갑자기 용병왕 애디에게 덤벼들었다. 그의 눈은 이미 초점이 없었다. 좀비라도 된 것처럼 움직임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다. “스톰 소드.” 그의 마검조차 여전히 허공에 둥둥 떠서 명령을 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좀비가 아니야? 이것은 그냥 말 그대로 조종당하고이는 것이 아닌가! “칫!” 칼리의 육탄공격과 생각지 못한 각도에서 날아오는 마검을 검으로 막던 애디는 더 이상 안 되겠던지 반격에 들어갔다. 칼리를 쓰러트리려는 것이었다. “크아아아악!” 순간 아차 싶었다. 마왕의 존재를 잊어버렸던 것이었다. 태식 형과 나, 글로리시나는 황급히 비명이 들린 곳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달의 파편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던 루히비드가 왼쪽 가슴을 꿰뚫린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크으윽, 다, 당했…….”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축 늘어지는 어깨. 그 역시 칼리처럼 힘없는 자세가 되었다. “키키키, 킥킥킥, 키하하하하하하하!” 매우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의 베르제브브.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지? 현혹? 저주? 또 다른 언데드화? 아니, 내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건 아닐 거야. 그렇다고 현혹이라기엔 무언가 다른 느낌이다! 무엇인지 내 진실의 눈이라면 알지 못할 리가 없다. 심연의 눈 때에도 모든 걸 판별했지 않은가! 보여라,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인지! 성별 : 남 이름 : 루히비드 종족 : 인간 나이 : 45 직업 : 달의 의지를 받은 자. Level : 103 소속 : 더원 기사단 자아의 문으로 사용된 달의 의지를 받은 자. 달의 존재를 일깨우기 위해 선택된 자이기도 하다. 죽음과 삶. 그 경계를 지배하는 마왕, 베르제브브로 인해 죽지도, 살지도 않은 자가 되어있는 상태. 이것을 풀기 위해선 상대를 죽여 중간 경계를 풀거나, 마왕 베르제브브를 죽이는 방법밖에 없다. 4. 반사의 결계 (액티브) - 반사를 담당하는 루나와 환상을 담당하는 륀을 이용하여 펼치는 결계. 모든 것을 반사하는 하나의 무언가를 실현시킨다. 의지에 따라 어떤 것이든 반사의 환상을 생성가능. 단, 지속시간 2분, 자신의 지능, 정신력, 탄력과 비례하여 더 강한 힘은 반사 불가능. 주문 : 루나, 륀(동서를 가리키며 각자의 자매를 외친다.)난 행한다. 반사의 결계를(생성시킬 공간에 손을 뻗는다.) 5. 복사의 결계 (액티브) - 복사를 담당하는 루네스와 현상을 담당하는 루네디를 이용하여 펼치는 결계. 어떤 것이든 복사하여 현상이 가능. 단, 육체적인 능력 외 고유능력은 복사가 불가능하다. 주문 : 루네스, 루네디(남북을 가리키며 각자의 자매를 외친다.)난 행한다. 복사의 결계를(복사할 대상을 향해 손을 뻗는다.) 9. 풍화의 결계 (액티브) - 루나, 륀, 루네스, 루네디 달의 네 자매는 시간의 차를 조정할 수 있다고 한다. 반경 25m 결계를 조성. 그 안에 들어간 모든 것들은 급속도로 풍화시킨다. 또한 시간의 벽이기 때문에 물리공격은 통하지 않음. 시간조차 파괴 시킬 절대의 마법이 아닌 한 파괴 불가능. 주문 : 루나, 륀, 루네스, 루네디(동서남북을 가리키며 각자의 자매를 외친다.)난 행한다. 풍화의 결계를(능력의 주가 되는 무언가를 바닥에 고정시킨다.) 10. 절대의 공간 (액티브) - 현 세계의 극소수만 남아있다는 달의 파편을 이용하여 펼치는 절대의 공간. 공간 자체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어떤 것이든 가능하다고 함. 달의 권능을 실현시킨다. 루나 : 반사의 특화. 공간 안에 있는 어떤 것이든 반사가 가능. 륀 : 환상의 특화. 주위 어떤 것이든 환상을 실현시킴. 루네스 : 복사의 특화. 무슨 스킬이든 복사하여 사용가능. 루네디 : 현상의 특화. 주위 어떤 것이든 현상시킨다. 주문 : 루나, 륀, 루네스, 루네디(동서남북을 가리키며 각자의 자매를 외친다.) 난 행한다. 절대의 공간을(달의 파편을 바닥에 고정시킨다.) 역시 현혹도, 저주도 아니었다. 이것은 베르제브브의 고유능력일 것이다. 스바르가 마리아로도 풀지 못하겠지. “다들 현혹이라도 걸린 거야 뭐야?” “이건 현혹이 아니에요. 삶과 죽음의 중간에 머문 존재라고 하네요.” 지금 상황을 알지 못해 짜증내던 태식 형에게 답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내 말에 반응한 건 글로리시나와 마왕이었다. “보았어? 간파의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 유저의 개인정보를 네 눈은 볼 수 있다는 건가?” “호오, 그것을 간파하다니. 역시 대단하구나. 하지만 이미 늦었다. 자, 가거라! 아이들이여!” “귀곡성(鬼!哭聲).” -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마왕의 외침과 동시에 칼리가 반응했다. 그가 검을 휘돌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검에서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크으윽!” “짜증나는 소리군.” 모두가 귀를 막아버릴 정도로 거슬리는 소리. “안 되겠다. 타테, 생명의 희생 취소해! 죽여 버리겠어!” 태식 형이 외쳤다. 확실한 방법은 역시 죽이는 거겠지. 하지만 그거야말로 마왕이 바라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대론 마왕뿐만 아니라 두 명의 랭커도 상대해야했다. 다른 방법이 없는 건가? 마왕을 보았다. 지금 마왕은 웃고 있었다. 표정은 무표정이었지만 태식 형의 말을 듣고 더욱 눈이 웃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 안 돼요. 뭔지 모르겠지만 그건 잘못된 거예요!” 지금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마왕은 죽음도 관장하는 자! 죽인다고 과연 끝일지는 미지수다! 어라? 그러고 보니 베르제브브는 명령만 내릴 뿐 왜 끼어들지 않지? “빛의 화살!” 진실의 눈으로 속성들이 전부 400% 상승하고 암속성이 천속성으로 교체된 상태의 빛의 화살이라면 단순한 기본 스킬일지라도 그 격차가 달랐다. 내가 만들어낸 빛의 화살은 화살이 아니라 하나의 기둥과도 같은 크기였다. 그것을 나는 베르제브브에게 날려버렸다. “루나, 륀. 난 행한다. 반사의 결계를.” 멍한 눈으로 반사의 결계를 만들어 베르제브브를 보호하는 루히비드. 베르제브브는 단지 나를 노려 볼 뿐이었다. “그래, 그런 거야! 너는 움직일 수 없었어!” 움직이지 못한다? 지금 랭커 두 명을 조종하기 때문에? 확실히 아까 온몸에 피어오르는 암흑의 아지랑이조차도 줄어든 상태다. 하지만 점점 다시 원상태로 회복되고 있어. 즉, 힘을 다시 보충하고 있는 거야. 우리들이 루히비드와 칼리를 상대할 동안에 휴식을 취하려는 거였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몰라. 최악의 상황 중에서도 유일한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둘을 막아요!” 한시가 급했다.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저들은 지금 눈치 채지 못하고 있어. 어쩌지, 어떻게 해야 내 말을 전달하지? “간파의 눈 발동.” 글로리시나가 뭔가 이상함을 눈치 챘는지 눈을 한동안 감았다가 떴다. 그녀의 푸른 눈이 더욱 차갑도록 푸른빛을 띠었다. “뭔가 생각이 있겠지? 그런가, 내가 마왕을 상대하면 되나? 그렇다면 애디, 귀곡마검을 막기 위해선 너의 대검이 가장 적절하다. 멋쟁이, 불은 달과 상극일 터. 너라면 루히비드를 견제할 수 있다.”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순간에 읽은 건가? 게다가 가장 적절하게 판단하고 배치까지 한순간에 이루어낸 그녀의 능력이 참으로 대단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타테의 생각이겠지? 그렇다면 루히비드는 내가 맞지!” “칼리와 대결이라. 오랜만이로군.” 긴박한 상황을 눈치 챈 두 유저는 빠르게 칼리와 루히비드를 견제했다. 나에게도 남은 시간은 단지 2분. 지금 기회를 잡지 못하면 베르제브브에게 지고 만다! “후, 은신.” 내 앞에 있던 글로리시나는 마왕을 노리려함인지 사라져버렸다. “잠깐만요!” 하지만 나는 불안했다. 마왕을 단순히 글로리시나가 이길 수 있을까? 아무리 움직이지 못한다고 해도 그 괴물 같은 마왕이다. 절대 쉬울 리가 없어! “믿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리는 글로리시나의 말. “라이벌로서 추한 모습은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글로리시나의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내 앞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믿는다? 상대를 믿는다. 나 참, 그거야 말로 힐러가 추구해야할 덕목이 아니었던가. “빛의 화살 최대 출력!” 다시 커다란 빛의 화살을 만들어 내었다. 그래 믿어보겠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날려보겠어! “키아아아아아아아아!” 공간조차 갈라버릴 정도로 대기를 찢으며 날아가는 빛의 화살. 하지만 베르제브브는 기합과 동시에 손톱을 엑스자로 교차시켜 빛의 화살을 튕겨내었다. 역시 아주 못 움직이는 건 아니었어. 우리를 속이고 있었던 거야. “지금입니다! 글로리시나!” “은신해제, 블러드 멜로디(blood melody)!” 분명히 받아 낼 줄 알았다. 그녀의 기술 중 어떤 것이든 흡수하여 역이용하는 스킬로 내가 날린 빛의 화살을 이용하리라 믿었다. 그래서 나는 베르제브브를 공격했던 것이었다. “계속 같은 수법에 당할 것 같나?” - 푹! 검을 찌르기도 전에 베르제브브의 손톱이 먼저 글로리시나의 목을 관통했다. 부릅뜬 글로리시나의 눈, 반으로 갈라져 떨어지는 얼굴, 그 사이로 낭자하는 피…가 없어? - 푹! “은신해제, 나 역시 계속 같은 수법을 쓰진 않아.” 등에서부터 명치로 튀어나온 레이피어. 그리고 등 뒤에서 다시 나타난 글로리시나.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어, 어떻게. 분명 실체가 느껴졌는데……!” “헉, 헉. 소리를 이끌어내는 멜로디는 하나가 아니다.” “그럴 수가!” “게다가 나도 같은 실수는 하지 않는다.” 글로리시나는 레이피어를 아래로 내려 반으로 갈라버렸다. “끄아아아아아아악!” 가슴부터 하반신까지 갈라진 몸. 검에 깃든 빛의 화살 때문인지 몸 사이로 빛이 퍼져 나왔다. “어, 어라? 몸이 돌아왔어.”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그 순간 칼리와 루히비드의 말이 들렸다.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럼 정말 베르제브브를!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갈기갈기 찢어 죽일 수 있었건만! 큭, 내 혼자가지 않겠다. 기필코 너만이라도……!” 베르제브브의 몸이 녹아내렸다. 슬라임처럼 젤리같이 녹아내리는 살점들.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뼈가 실감을 더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베르제브브는 글로리시나의 팔을 붙잡았다. “아아아아아아악!” 순간 글로리시나의 팔도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몸 자체를 움직이지 못하겠는지 옴짝달싹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글로리시나. 나는 외쳤다. “날개 이전!” <타겟, 글로리시나. 이전시킬 횟수를 정해주십시오.> “전부 다!” <여섯 장 선택 되었습니다. 미카엘의 날개를 이전합니다.> 그녀라면 무언가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글로리시나에게 걸어보았다. 내 등에서 펄럭이던 여섯 장의 날개들이 빠져나와 글로리시나 몸에 흡수되었다. 그러자 새하얗게 빛나는 그녀. 글로리시나는 유독 푸르게 빛나는 눈으로 몸을 한순간에 점검하더니 외쳤다. “기억이 남아있는 곳, 과거를 회상하는 곳, 그곳은 멜로디의 추억이 되리라! 므네모쉬네(mnemosyne)의 선율의 길이 되어라!” 글로리시나가 외치자 주위에 또 다른 글로리시나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세 명…그것은 총 여덟 명까지 불어났다. “헉, 헉. 음악의 아홉 자매, 무사이(mousai). 그만 죽어라!” 여덟 명의 분신들은 제각각 진짜 글로리시나처럼 레이피어를 들고 베르제브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찌르고, 가르고 자르는 등 끝없는 공격이 계속되었다. “끄아아아아아악!” 팔의 압박이 약해졌는지 뿌리치고 재빨리 뒤로 빠지는 글로리시나. 마왕은 온 몸이 완전히 녹아버려 검은 액체만이 부글거렸다. “이, 이겼나?” 루히비드가 땀을 훔치며 말했고 모두들 침을 삼키며 한동안 바닥을 보았다. “움직이지 않는군.” 용병왕이 한동안 바닥을 노려보다 검을 등 뒤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끄, 끝났다!” 태식 형이 그제야 표정을 풀며 좋아했다. “헉, 헉.” 글로리시나는 자세를 낮춘 채 있었는데 천천히 허리를 들었다. “지독한 놈이었어.” 칼리는 둥둥 떠 있는 마검을 손으로 불러들이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휴, 드디어 끝이…아니잖아!” 검은 덩어리가 빠직빠직 스파크를 발생시켰다. 젠장, 실패인가? 내게 남아있는 시간은 이제 30초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집중해서 녹아내린 마왕을 보았다. 지금 무엇이 일어나려하는가! - 암흑의 탑 수장, 베르제브브(유니크 보스 몬스터) 종족 : 마왕 속성 : 암(暗), 수(水) 크기 : 중형 M P : 1 / 11,350,000 S P : 25,000 / 1550,000 죽음과 삶. 그 경계의 지배자라 불리는 마왕 베르제브브는 모든 죽음을 관장하며 때로는 산 자조차 죽음으로 만드는 언데드의 마왕이라고도 불린다. 현재 베르제브브는 마계로 돌아가길 포기하고 자폭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 남은 시간 30초. 범위, 1000km “자, 자폭하려는 거냐!” 경악해서 외쳤다. 이렇게까지 해서 전멸을 시키고 싶었나? 무려 1000km다. 게다가 남은 시간은 30초. 도망가기는 이미 불가능한 상황.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절대로 막아야한다! “들어요! 30초 후면 1000km반경에 달하는 위력적인 폭발이 있을 거예요. 그러면 몰살이라고요! 여기 있는 제국과 왕국의 기사단도 전멸, 유저들은 말할 것도 없어요. 막아야 합니다!” “뭐어?” “그럴 수가!” “말도 안 돼!” 모두들 경악했다. 나라도 거짓말로 치부하고 싶을 정도니 말 다했지. “날개 이전!” 이번엔 날개를 전부 루히비드에게 넘겨주었다. 글로리시나 몸속에 있던 날개들이 루히비드에게 흡수되자 루히비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방어결계는 루히비드님밖에 없잖아요.” “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폭발은 못 막아요!” “그래도 해 봐야죠!” “젠장, 루나, 륀, 루네스, 루네디! 난 행한다! 절대의 결계를!” 루히비드가 외치자 스파크를 뿜어내는 액체덩어리에 반투명한 막이 씌워졌다. “루시! 덮어씌워!” 용병왕이 외치자 녹색 빛의 무언가가 막에 덧씌워졌다. 그래 나도 정령이가 있었지. “정령아! 너도!” 『힝, 나는 죽겠구나.』 정령이의 푸념이 들려왔지만 가볍게 무시해주었다. “귀곡마검, 음파차단!” 그 위에 마검이 휘돌기 시작했다. 글로리시나는 긴장한 채 검을 꽉 그러쥐었다. - 그그그그그그그그― 터, 터진다. 불쾌한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미증유의 힘 때문인지 등골이 싸늘하게 식었다. 제발 막아다오. 제발, 제발! “…자폭 취소.” 터진다, 으아아아아아…아? “……….” “……….” “……….” “…으잉?” 잠잠해진 암흑 덩어리. 나는 그것을 기절하기 전까지 굳은 채 보고있었다. 타테, 낚이다 그날 광화문 광장에서는. “으와아아아아아! 그래, 그거야!” “오오옷! 이제 몬스터들보다 아군이 더 많다!” “이길 수 있어!” “미소천사 파이팅이다!” “엄마, 저 누나 멋져! 쑝카맨보다 더 멋져!” “정말 멋지구나. 어머머! 어떻게, 그래, 그거야! 잘한다!” “기찬아 힘내라! 좋았어! 힐러라면 거기서 빠져야지! 그렇지! 아싸!” TV를 시청하던 사람들은. “여보,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게임채널이에요!” “자, 잠깐만! 지금 중요한 순간이란 말야!” “도대체 뭘 보기에…어머? 예쁜 여성이 싸우네? 어어, 그래! 그렇지!” “엄마, 밥 줘!” “네가 알아서 챙겨먹어!” “힝, 우리 엄마가 변했어!” 캡슐방에서는. “미소천사님! 그렇죠! 와우! 내 혼을 흡수했어!” “아, 뭔가 실타래가 이어진 느낌!” “야! 나도 연결됐어!” “나, 날개다! 날개가 돋았어!” “내 사랑을 받아 승천하셨다! 와아아아아!” “…저기 손님들. 조금만 조용히 좀…….” “시끄러워!” “시끄러워!” “……….” 신문사에서는. “대 특종이다! 내일까지 절대 완성해야 돼! 찍어, 어서 찍으란 말야! 야, 기자들은 다들 잠수탄거야 뭐야? 멋진 장면을 캡처해 오란 말야!” “아이고, 편집장님! 아까 전에 날개가 돋았답니다!” “뭐? 젠장! 수정해! 미소천사 등장이 아니라 천사 등장으로 바꿔!” “편집장님! 조금 전에 아펜하르트 NPC기사들이 전부 등장했다고 합니다! 이 전쟁 이길 거 같아요!” “뭐라고? 다 바꿔! 전부 다 바꿔! 유저들의 승리로 바꾸란 말야아아아아아!” 아펜하르트 홈페이지에서는. (아이디) necal : 와, 완전 대박! 지금 시간만 있었어도 들어가는 건데! (아이디) 나는새됬어 : 새로운 소식입니다! 우리 더원 기사단 애디 단장님이 마왕과 다시 붙기 시작했어요! (아이디) 미소천사 원빈 : 아놔, 죽었어. 미소천사 기사단 죽어서 일루 오신 분 손? (아이디) 미소천사 궁수 : 손! 난 미소천사 누님 얼굴 한 번 봤삼. (아이디) 상처 : 하지만 드라군이 출동한다면? (아이디) 미소천사 궁수 : 드! (아이디) 미소천사 원빈 : 라! (아이디) 난사얌 : 장난방지위원회. (아이디) UP : 아놔, 잼있삼? 장난 그만. (아이디) 미소천살 : 오옷! 지금 TV보세요! 미소천사님이 날개 달았어요! (아이디) 미수천사 : 와, 진짜다. 쩌는데? (아이디) 미소천사 원빈 : 사랑합니다! 누니이이임~~~~ 그날의 사건이 정말 커질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너나 할 것 없이 부둥켜안고 응원했으며 게임을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걸음을 멈추고 뚫어져라 스크린을 보았다. U채널 게임TV에서는 전쟁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해 엄청난 인파와 관심이 집중되자 특별방송으로 완전히 넘겨버렸다. 덕분에 그날 광화문 광장은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스크린의 불이 꺼질 줄 몰랐다고 한다. 그날 재필, 쥬리 두 명의 방송인은 다음날 쓰러졌다는 풍문까지 돌 정도였으니. 하지만 정작 그날의 사태를 전혀 몰랐던 나는 기절한 직후 집으로 돌아와 꿀꿀한 기분으로 잠을 뒤척였다는 것이었다. “뭐지. 갑자기 왜 취소가 된 거야? 도무지 이해가 안가네. 베르제브브의 마음이 바뀌었나? 아! 젠장, 이대로는 잠을 못자겠어!” 너무 흥분해서인지 도무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놈의 아드레날린자식! 퀭한 눈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가 부엌으로 향했다. 물이라도 한잔 마시면 좀 나아지려나? “크, 정신만 더 바짝 드네.” 한 컵을 원샷하니 머리까지 울리는 시원함. 덕분에 그나마 있던 잠까지 내쫓아버렸다. 이대로는 밤샐 것 같군. 내일 학교가야 하는데 이거 참. 시간을 보니 밤 새벽1시가 되가는 중이었다. 아직까지 누나는 오지 않았다. 야근인가? 하긴, 이벤트 때문에 지금 한창 바쁠 테니. - 덜컹. 어라?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나가 왔나보다. “누나왔어?” “…어.” 고개를 배꼼 내밀어 정문을 보니 누나 역시 퀭한 눈으로 흐물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많이 지친 모양이었다. “와, 오늘은 정말 피곤하네. 샤워고 뭐고 그냥 이대로 자고 싶어.” 구두도 안 벗고 그냥 거실에서 쓰러지는 누나. 어이, 이봐. 백은 베고 자는 물건이 아닙니다. “많이 힘들었나보네.” 누나의 머리맡에서 어깨를 쿡쿡 건드리며 말했다. 이거 반응도 없네. 정말 자는 거 아냐? “…기찬아.” “………?” “자폭 취소. 푸큭큭! 킥킥킥킥!” “……….” “케헤헤헤헤헤! 어큭, 쿨럭쿨럭!” 갑자기 광소하며 기침까지 내뱉는 우리의 누님. 어깨를 부들부들 떠는 거 보니 배가 몹시도 아픈 모양이군요. 그런데 내 바지는 좀 놔 주시겠어요? 늘어납니다. “어, 어떻게. 너무 귀여워. 이리와, 내 동생.” “뭐, 뭐야. 떨어져! 우왁! 뭐하는 짓이야!” “난 네가 있어서 정말 행복해. 푸큭, 푸하하하하하하하!” …아무래도 누나가 많이 편찮으신가 보다. 나는 그날 왜 누나가 웃었는지 알지 못한 채 사흘을 보냈다.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6일전. 게임을 접겠다고 마음먹은 지 오늘로서 사흘째 되는 날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금단증세 때문에 수없이 캡슐을 들락날락 반복했었는데 지금은 그나마 조금 참을 만했다. 담배 끊은 사람들이 왜 독하다고 하는지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TV, 게임채널에서는 오늘도 그날의 전쟁을 다룬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질리지도 않나? 이러다 다큐멘터리 하나 찍겠구만. 그날 있었던 아펜하르트의 전쟁이 정말 어마어마한 파장을 불러왔다는 사실을 나는 이틀 전에야 알 수 있었다. 첫 소식은 신문이었다. 천사의 날개를 달고 하늘로 비상한 컷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나온 것이었다. 얼굴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엄청난 소문이 났을 것이었다. 그 다음은 TV였다. 그놈의 U채널은 하루 종일 아펜하르트 찬사로 끝이 없었다. 랭커들의 등장, 그리고 전투. 그동안 베일에 감싸여있던 모든 랭커들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하나 능력들은 나라도 감탄했을 정도니 게임방송에서는 침을 튀겨가며 찬사 할만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상천이한테 들은 얘긴데. 전쟁이 벌어진 날 광화문 거리는 무슨 2002월드컵을 보는 것처럼 축제가 벌어졌다고 했다. 게임을 모르는 사람들도 동화되어 다 같이 좋아하고 마지막 전쟁에서 유저들이 승리하는 순간은 정말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정도일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파장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왜 이리 안 오는 거야?”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학교에 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 신신당부한 누나. 얼마나 중요하기에 학교까지 빠져야하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지금 현재 무료한 표정으로 TV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아, 게임하고 싶다. 젠장. 또 시작인가. “기찬아! 나기찬!” 누나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니 시끄럽게 왜 밖에서 외치고 난리람? 그냥 들어오면 될 것을. 나는 운동화를 신고 대문을 열어 보았다. “여기야, 여기.” 밖에는 너나타로 유명한 쏘나타Ⅲ, 검정색승용차가 있었는데 열린 창문사이로 손을 흔들고 있는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저 차는 태식 형의 애마인데? 그렇다면? “나기찬, 오랜만.” 역시나 운전석 문을 열고 손을 흔드는 태식 형. “뭐야, 지금 둘이 데이트하는데 구경이나 하라고 기다리게 한 거야?” “오, 그것도 좋은 생각인데? 그 전에 일단 타라.” 태식 형은 내 불쾌한 말을 가볍게 받아 넘겼다. “아! 잠깐, 그전에 너 옷차림이 그게 뭐냐?” 나는 께적지근한 기분으로 탑승하려 하는데 저놈의 눈팅이 또다시 태클을 걸었다. “내 옷이 뭐.” “아, 정말 센스 없긴. 하여간 게임만 할 줄 알지. 옷 좀 사 입어라.” 내 옷이 그리 이상한가? 지금 나는 베이지색 면바지와 검정색과 흰색 줄이 들어간 티를 입고 있었다. 아, 면바지가 조금 주글주글해졌네. 그러게 누가 한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래? “그러는 둘은 어디 문상가세요? 웬 정장들이야.” 태식 형의 모습은 그야말로 문상가기 딱 좋을 만큼 검정색 양복 일색이었다. 아, 넥타이는 붉은색으로 세련돼서 그나마 문상은 패스려나? 눈팅은 레이스달린 검정 치마를 입고 무거움을 감추기 위함인지 위는 반대인 흰색개통으로 입은 상태였다. 머리에는 커다란 선글라스가 멋용으로 껴있어서 상큼하게 보였다. 역시 눈팅은 옷 하난 잘 입는단 말이야. “안되겠다. 태식 오빠, 조금만 기다려 이놈 옷 좀 다시 갈아입히고 올게.” 결국 나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들어가자마자 누나는 내 옷을 전부 꺼내더니 하나하나 맞춰보기 시작했다. 아 귀찮아, 대충 아무거나 입으면 되지 어디를 가기에. “오늘은 날씨가 그렇게 춥지 않으니까. 간단히 셔츠하고, 으음, 그래. 너는 귀여운 이미지니 멜빵 해보자. 오, 정장 같은 분위긴데? 그럼 바지도 골덴 쪽으로 어두운 게 어디 없나…아! 너 그 부스스한 머리 좀 어떻게 처리해! 왁스는 삭혀서 먹을 거냐?” 이것이 바로 인형의 기분이로군. 나름 나쁘지 않는…왁! 왜 바지를 벗겨! 헉, 헉. 큰일 날 뻔했다. 하여간 한 치도 방심할 수 없다니까.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나는 겨우 차 안으로 탑승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가는거야?” “좋은 곳.” “……….” 내가 물어볼 때마다 오는 답변이었다. 입이라도 맞춘 건지 둘 다 도무지 말을 해주지 않아 답답했다. 대체 어디를 가는 거야? “기찬아.” 태식 형이 갑자기 운전하다 백미러로 나를 보며 말했다. “왜요?” “파이팅이다.” “네?” “그냥 그렇다고.” “……….” 저 재미있어 죽겠다는 눈을 보니 차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더 확고히 다가왔다. 태식 형이 한 시간이나 차를 몰고 도착한 곳은 어느 거대한 홀이었다. 밖에서 보니 조금 어두운 조명이었는데 천장에 샹들리에가 달려있어 많이 어둡진 않았다. 밑에는 누가 만든 것인지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테이블들이 드문드문 배치되어있었고 중앙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는 태피스트리가 깔려있어 아름다움이 한껏 돋보였다. 마지막으로 태피스트리 끝에는 공연도 할 수 있을만한 거대한 단상이 있어 전체적으로 무진장 비싸보였다. “이런 곳에는 왜?” 누구 어르신의 칠순잔치인가? 아니면 그냥 사치를 부려보겠다고 태식 형이 무리한 건가? 내가 들어가길 꺼려하자 태식 형과 누나가 내 양팔을 붙잡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오니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이야기를 멈추고 우리를 보았다. 왠지 정적 된 분위기. 거봐, 역시 이런데 오는 게 아니라니까! “어, 어, 어!” “설마!” “저 얼굴은…….” “미소천사님!” “누님!” “멋쟁이님도 있어!” “이야! 실물로 보게 되다니 이거 진짜 감격이다!” 어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다들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하는 말들이 왜 다 오타쿠 같은 말투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밖에 강화 유리에서 보았던 것보다도 더 자세히 내부를 볼 수 있었다. 특히 단 상위, 거대한 현수막에 쓰여 있는 글씨가. <경 아펜하르트, 미소천사 기사단 정식 모임. 축> “…컥!” 나는 정말 제대로 낚였다. “누나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머? 안 좋아하네? 깜짝 이벤튼데.” 그 이벤트 두 번했다간 사람 놀래 죽이겠군요. “이거 사실 내가 주선했다.” 태식 형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게임 그만 둔다며. 적어도 추억은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 거기다 이 자리는 너에게 선택권을 주는 자리이기도 해.” “선택권이요?” 내 물음에 태식 형은 그냥 웃었을 뿐이었다. 그때 누나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뭐, 일단 그 미소천사는 내가 연기할거야. 너는 그냥 대외적으로 내 동생일 뿐.” 누나가 내 연기를 해주겠다면 그렇게 부담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친 동생으로 서 평범하게 행동하면 그뿐이니까. 하지만……. “미소천사님! 저 사인 좀 해주세요!” “저, 저도!” “사랑해요!” “모두 조용히 안 해? 나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는구만 누님이 뭐야?” “……….” “……….” …이럴 거 같았단 말입니다. 애초에 연기할 생각은 없던 게 분명하죠? 그냥 우리 집에 가죠. 제발 미소천사 이미지 다 망가트리지 말고 집에 가자고요! 폭탄 같은 눈팅을 대리고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양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우리가 도착한 이유로 홀의 상황은 무르익었다. 저마다 테이블에 앉아 그동안 있었던 아펜하르트 과거 얘기라던가, 군대 얘기들이 주로 오갔고 대부분은 이쪽을 흘끔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소천사 기사단이 팬들이 만든 기사단이기 때문에 온통 남자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니 누나는 홍일점이 되었고 당연히 시선이 모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흠흠, 나소연씨. 저 혹시 아시나요?” “…누구?” 내가 주변상황을 보고 있는 그때, 헬스라도 다닌 건지 온통 울퉁불퉁한 근육질 투성이의 남성이 누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라? 이 사람은? “나헬스했다?” “어라? 너는 누군데 나를 알고 있냐?” 나는 아차 싶어 황급히 입을 막았다. 왜 입 밖으로 말을 해버렸담. 내가 당황하자 옆에 있던 누나가 땀을 삐질 흘리며 말했다. “아, 나헬스했다님이었군요. 제 동생한테 자랑했더니 아는 모양이에요. 호호호호!” “저, 저기. 패, 팬입니다! 그 근육 정말 부럽습니다!” “뭐? 으하하하하! 그래, 그렇단 말이지. 하여튼 내 인기란! 우하하하!” “아하하하하.” “호호호호.” 누나와 나는 입 꼬리만 삐죽 올리고 무성의하게 웃어주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랴, 이것이 최선인 것을. “아, 그보다 멋쟁이 단장님. 저희 돌격단원들은 전부 모였는데 한잔하시죠?” “벌써요? 물론 가야죠. 소연아, 기찬아. 잠깐 다녀올게.” “이거 단장님한테 경어를 들으니 되게 어색하네요.” “저도 그랬는데. 하하하! 게임에서야 상관없지만 보니까 저보다 나이도 많은 거 같은데 막말할 순 없잖아요. 아차차,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어서 가죠.” 태식 형과 나헬스했다님이 원래 저리 친했나? 처음 단장자리로 엄청 싸웠던 걸로 기억하는데. “에휴, 완전 지세상이구만.” 누나는 턱을 괴고 신나게 술을 마시는 태식 형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뱉었다. 나는 그 모습이 조금 부러워 보였다. 아펜하르트 게임 자체가 외모수정을 못하게 막아놔서 대부분 익숙한 얼굴이라 그나마 어색함이 조금 가셨는데 평범하게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니 왠지 혼자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하긴, 애초에 미소천사 기사단과 어울리지 않았으니 그런 걸지도. “누구 보고 싶은 사람 없어? 오늘은 내가 네 역할이니 말해봐.” 누나는 내 그런 마음을 알아챈 건지 은근히 물어보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어 답해주었다. “그다지 친한 사람도 없고.” “하긴, 친한 사람이 있었으면 우리가 찾기도 전에 먼저 왔겠지.” 누나도 긍정하며 다시 턱을 괴고 즐겁게 웃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했다. 친한 사람이라. 갑자기 한나와 주리아가 생각났다. 하지만 둘은 절대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미소천사 기사단과 그다지 터 지낸 것도 아닐뿐더러 무엇보다도 만약 올 수 있는 연결고리가 있다면 그건 내가 돼야 할 텐데 그 내가 배신을 했다고 생각할 테니 올 리가 없지 않겠는가. - 지잉. 그때 밖에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누구지?” “음?”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표했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디서 많이 보았던 사람들 같은데. “저기 죄송한데 여기가 미소천사 기사단 정식모임을 하는 곳…어라? 미소천사님?” “어어? 진짜네? 이야, 아타셰님 보러 왔는데 미소천사님까지 오셨어!” 서, 서, 설마 저들은! “누구냐?” 누나가 살짝 나에게 곁눈질하며 말했다. “엔젤단. 내가 속한 단의 일원들이야.” “뭐냐, 그 작명센스하고는.” 그렇게 말하며 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싱긋 미소 지었다. “다들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별일들 없죠?” “그동안 왜 접속 안하셨어요!” “그 전쟁 때문에 게임에서도 난리가 났는데 정작 본인이 안 들어와서 저희가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어디 아프셨어요? 아니면 정말 게임 접은 거예요?” “저 기억나세요? 저요, 노이슈반스탕!” “저입니다! 플레이아데스! 오늘 동생들도 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왔어요. 그런데 왜 게임은 안 들어오셨던 겁니까?” “와, 언니 정말 예쁘시다.” 속사포였다.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었다. “아하하하…….” 누나도 질렸는지 단지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조금 반가웠다. 어색한 웃음이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하고 정답게 말을 거는 이들을 보니 말이다. 하지만 반가움이 더할수록 현재 내 자신의 외로움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문득 시선을 돌리자 누나를 둘러싸고 있는 엔젤단 제일 뒤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붉은 빛깔 원피스 여성이 눈에 띠었다. 그녀는 키가 너무도 작아 나보다도 어려 보였고 치렁치렁한 금발의 웨이브진 머리와 특이한 푸른 눈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인형처럼도 생겼는데 유난히 눈썹을 찌푸리고 있어 그나마 사람 같아 보였다. “주리…아.” 내가 아는 저런 모습의 여성이라면 한 사람밖에 없었다. 나 다음으로 힐 스킬을 발견한 그녀, 용사대전 결승전에서 만난 그녀, 나를 동경해 레인저에서 사제로 직업을 바꾸고 엔젤단에 두 번째로 가입하게 된 그녀, 지금은 동경대신 상처만이 남아 내 곁을 떠났던 그녀, 주리아였다. 주리아는 마음을 경정했는지 입술을 깨물며 누나 앞으로 나섰다. 누나는 다른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다 주리아를 보았다. “…무슨 염치로 여기 있는 거예요.” “너…는!” 누나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어? 아는 사람이야? 그때 누나가 갑자기 주리아의 머리를 가슴팍으로 끌어와 안아버렸다. 뭐어어어어어어? “그때 너구나! 귀여운 애!” “저, 저, 저, 저, 저, 저, 저, 저어어어어!” 누나 가슴에 마구 얼굴이 비벼지는 주리아. 그 수위가 너무 위험해 다른 사람들은 입을 벌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침은 물론이고 어떤 이는 코피까지 쏟…진 않았고 쏟을 것 같이 얼굴이 붉어졌다. “우왁! 뭐하는 짓이야!” 나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누나를 말렸다. 이 인간, 생각해보니 귀여운걸 보면 사족을 못 썼지. 잊고 있었는데 이런 곳에서 터트릴 줄이야. “헉, 헉, 헉.” 내가 누나와 주리아를 떨어트리자 주리아는 터질 것같이 붉어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왜, 왜, 왜, 왜, 그때 그 버전이야!” 그때 그 버전이라니 그건 무슨 소리입니까? 누나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러다 잡아먹겠수다. 상황이 어떻게 정리 된 건지 엔젤단원들은 뒤편 테이블을 장악해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누나와 나, 그리고 주리아는 한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아, 주리아도 엔젤단원이 있는 곳으로 가려했는데 누나가 그녀의 옷깃을 잡고 놔주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셋이서 한 테이블을 쓰게 된 것이었다. “놔줘요.” “왜?” “전 언니 싫으니까요.” “괜찮아, 나는 좋으니까.” “그, 그, 그, 그런 말을 쉽게 하지 말아요!” “왜, 좋다는 걸 좋다고 하는데.” “……….” 결국 다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여버리는 주리아. 아까부터 이런 상황의 되풀이였다. 보고 있는 내가 다 한숨이 나오는구만. “누나, 놔줘. 저 여성분이 곤란해 하잖아.” “싫어.” “그러려고 온 거 아니잖아.” “…쳇.” 누나가 내 말에 결국 주리아의 옷깃을 놓자 주리아가 멍하니 나를 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제 소개를 안했네요. 누나 동생 나기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는 손을 내밀며 싱긋 웃어주었다. “……….” 하지만 주리아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가볍게 나를 무시했다. “……….” “풋!” 내가 손을 내민 채 어색하게 서있자 누나가 결국 웃어버렸다. 젠장, 기껏 용기 내었더니. “웃지 마.” 나는 내민 손을 거두고 대신 내 앞에 있는 치킨을 잡아 거칠게 뜯어먹었다. 뭐야, 저 쌀쌀맞음은. 내가 미소천사일 때는 귀찮도록 따라오더니! “하여튼 언니는 염치도 없어요. 어떻게 이 자리에 아무렇지 않게 올 수가 있죠? 보기도 거북하니 당장 나가세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주리아. “지가 무슨 전세라도 냈나.” 당연히 내 말은 곱게 나올 리 만무했다. “…뭐라고 하셨죠?” 내 말을 들은 건지 멈칫하는 주리아. 나는 뜯어먹던 치킨을 휘휘 돌리며 말했다. “말 그대로에요. 당신이 이 홀 전체 전세라도 냈나요?” “뭐, 뭐라고요? 당신이 뭘 아는데 막말하죠?” “물론 아는 거야 개뿔도 없지만 지금 당신이 막말하는 건 알겠네요.” 내 말에 주리아는 표정이 더욱 험악하게 찡그려졌다. 물론 나 역시 표정이 굳기는 마찬가지였다. 누나는 단지 맥주만 홀짝일 뿐 별다른 터치는 없었다. “알지도 모르면서 참견하지 말아요!” “그러는 당신은 누나의 마음을 알긴 합니까? 왜 게임에 안 들어오고 남을 상처주고 있는지 아냔 말입니다. 당신이야말로 알지도 못하면서 막말하지 말아주세요. 그거야 말로 염치없는 사람이니까.” “어, 어떻게 당신이 그걸?” “들었어요. 누나의 남동생이 그런 이유를 알면 안 되는 건 아니잖아요.” “…이익! 당신…정말 싫어.”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나를 노려보던 주리아. 결국 뒤돌아 엔젤단이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 조금 화가 나기도 했지만 왠지 가슴이 아팠다. 주리아한테 싫다는 말을 듣자 그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속은 좀 풀려?” 그동안 방관한 자세로 듣고 있던 누나가 나를 흘끔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들고 있던 치킨을 접시위에 힘없이 떨어뜨리며 피식 웃었다. “그냥 그러네.” “그래도 집에서 만날 우울해 하는 것보다 이렇게 화라도 내는 게 좋아.” 누나는 그렇게 말하며 앞에 있던 회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화를 내는 게 좋다라. 하지만 한나를 보면 화라도 낼 수 있을까? 아니, 과연 쳐다보기나 할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슬슬 전부 모인 것 같으니 지금부터 제 1회 미소천사 기사단 정식모임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동안 게임 상에서 쌓였던 불만들, 재미있었던 일들, 전부 이 자리에서 회포하시고 다 같이 즐겁게 돌아갈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태식 형이 단상위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평소 뭘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지만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걸로 보아 저런 자리가 매우 익숙한 듯 보였다. 하긴, 미소천사 기사단 단장을 할 때도 매우 자연스러웠으니까. “그럼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해주시고 우리 미소천사 기사단의 스폰서가 되어주신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이분은 현재 아펜하르트 게임의 최초 설계자이며, 뇌파인식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고 계신 분입니다. 소개합니다, 임장순 박사님입니다.” “우리에게 스폰서가 있었어?” “이야, 이 자리를 전부 마련했다고? 돈이 많은가봐.” “박사라잖아. 그것도 아펜하르트 게임설계자!” “우와아아아아!”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때로는 환호했다. 놀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펜하르트 게임 최초 설계자라고? 태식 형이 팔을 뻗어 가리킨 곳을 보았다. 그곳에는 갈색 빛의 양복을 입고 있는 준수한 외모의 아저씨가 들어오고 있었는데 차분하게 기른 수염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인자한 모습이었다. 그분은 휠체어를 끌며 단상위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그 휠체어에 탄 사람은 딸인 모양이었다. 어디라도 아픈 걸까? 창백하다시피 보일정도로 빛을 못 받은 얼굴과 오랫동안 머리를 자르지 않은 건지 한 갈래로 따 어깨 앞으로 내려놓았는데도 그 머리가 무릎에 닿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여성은 웃고 있었다. 이쪽을 보면서 말이다. 더 웃긴 건 나조차 그 미소가 익숙해서 마주 웃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 땡그랑! “기찬아?”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버렸다. 그때 떨어진 포크와 수저가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 소리보다도 내 머릿속에서 울린 소리는 더욱 요란해 미칠 지경이었다. “한…나?” 한나가 휠체어에 타고 있었다. 어디라도 아픈 걸까?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갸웃거리는 표정으로 한 번 보더니 시선을 다시 누나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다시 짓는 미소. 분명하다. 한나가 분명해. 틀림없어! “…누나, 웃어줘.” “뭐?” “제발 지금은 웃어줘.” “……….” 누나는 그동안 단상도 보지 않은 채 회만 집어먹고 있었는데 내 말에 단상을 보더니 크게 놀랬다. “한나 아니야. 제가 왜 여기에!” 누나가 알고 있다? 아아, 전에 나로 들어왔을 때 알았겠지. 그럼 지금 한나가 등장한 것은 누나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 전부 태식 형이 저지른 일인가. 태식 형을 보았다. 역시나 형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증오스러울 정도로. “이익…선택권을 준다고 한 게 이 뜻이었구나.” 그때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저 형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나가 이 자리에 나올 것임을.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었다. 나는 어차피 외부인 이니까. 그래, 내가 굳이 여기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는……. 그때 태식 형의 눈이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도망갈 거냐.’라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른 채 여기 앉아있으란 말입니까! “걱정하지 마.” 누나가 내 손을 잡아주었다. 누나가 걱정하고 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안치고 주위를 둘러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지금 한창 조용한 상황에서 내가 계속 서있자 시선이 집중된 것이었다. 나는 일단 천천히 다시 앉았다. 하지만 시선은 그녀에게서 도저히 땔 수 없었다. “흠흠, 아무리 반하셔도 그렇게 뚫어져라 보면 레이디에게 실례죠. 아무쪼록 다시 앉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푸하하하하하!” “저 꼬마, 대단한데?” “이야, 젊다, 젊어!” 태식 형이 농담으로 넘어가자 모두들 다시 본래의 분위기로 돌아갔다. 태식 형은 주위를 가라안치고 다시 임박사를 소개했다. “여기 임박사님은 자녀분이 우리 미소천사 기사단의 일원임을 알고 기꺼이 스폰서로서 자리에 임해주셨습니다.” “어?” “저렇게 예쁜 애가 우리 기사단에 있었던가?” 사람들이 의아해하자 태식 형이 씩 웃으며 말했다. “임박사님의 자녀분의 이름은 임한나.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은 아타셰죠.” “뭐!” “그 사제님?” “미소천사님이랑 항상 같이 다니는 단발머리 여자!” “맙소사! 저렇게 예쁜 애였나?” 모두들 경악했다. 하긴 항상 봐온 나도 깜짝 놀랄 정도니 말 다했지. “모두 놀라셨죠? 저도 처음 볼 땐 눈을 수없이 비볐답니다. 뭐, 일단 제 말은 여기까지 하고 임박사님, 한 말씀해 주시죠.” 마이크가 임박사에게로 넘어갔다. 임박사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희미하게 미소 지은 채 말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게임을 즐겨주시고, 그 인연이 닿아 여기까지 오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은 아펜하르트 게임 설계자로서 감사드리는 말입니다. 제가 한 일에 대해 조금이나마 보상을 받은 것 같아 더욱 뿌듯함을 감출 수 없군요. 모두 게임은 재미있으신가요?” “물론이죠!” “최고입니다!” 여기저기 호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임박사는 무엇 때문인지 잠시 슬픈 눈을 하더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음 잊지 말고 영원히 게임에 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물 흘러가듯이 끝맺은 말. 짧아서 더욱 와 닿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임박사는 마이크를 태식 형에게 돌려주려다 피식 웃으며 한나에게 넘겨주었다. 한나가 은근히 마이크를 눈치보고 있던 것을 알아챈 것이었다. “……….” 한나는 마이크를 받아 좋아하면서도 정작 마이크를 든 채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든 마이크가 흔들거렸다. 나 역시 심장이 흔들거렸다. “…저기, 소연언니!” 중대한 결심을 했는지 고개를 번쩍 들며 외치는 한나. 그 말에 누나는 조금 슬픈 눈으로 한나를 보았다. 한나는 갑자기 눈물을 주륵주륵 흘렸다. 감정에 이기지 못하고 쏟아진 것이리라. “반가워요.” 눈물을 흘리면서도 해맑게 웃는 한나. 결국 내 심장은 찢어지고 말았다. “휴, 둘 다 심각했나보네.” 누나는 나와 한나를 번갈아보다 한숨을 쉬며 말했다. 태식 형은 숙연해진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외쳤다. “이거 미소천사와 아타셰간의 러브러브 결성인가요? 저는 개인적으로 백합을 좋아하긴 합니다만 이건 너무 노골적인 것 같지 않나요?” “배, 백합!” “크하하하하하! 둘이라면 나라도 구경하고 싶은데!” “이거 너무 어울리잖아?” “안 돼! 내 사랑 누님을!” 태식 형의 무대매너는 정말 대단했다. 한순간에 자신의 분위기로 바꿔버리는 저 능력. 태식 형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답변을 들을 차례죠? 우리 기사단의 마스코트이자 수장! 소개합니다, 미소천사, 예쁜이 타테!” “뭐어!” “뭐라고요!” 나와 누나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번복하기 힘들 정도로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듣고 기대하며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 물론 내가 나가는 게 아닌지라 놀람은 조금 줄었지만 누나가 무슨 말을 할지 조마조마해 차라리 내가 나가고 싶을 정도로 떨림은 계속되었다. “저, 저, 저게 일부로 벌인 짓이야.” 누나는 이를 으득 씹었다. 태식 형이 누나를 약 올리려고 한 짓이 분명하다 생각한 것이었다. 물론 나 역시 그 말은 인정했다. 태식 형이 저렇게 장난꾸러기처럼 웃고 있는데 믿지 않을 수야 없지. “흥, 좋아. 그 승부 받아주지.” “뭐, 뭐?” 내가 차마 말리기도 전에 누나는 일어나 단상위로 올라가 버렸다. 무슨 짓을 할 셈이야! 제발 그냥 반갑다고만 해줘! 부탁이야, 누나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일단 여러분, 모두 반갑습니다. 처음 올 때 말했어야 했는데 이제야 제대로 소개하네요.” 한 손을 가슴으로 가져가 가리고 정중히 고개 숙여 말하는 누나. 처, 청순가련하다. 연기하기 시작했어! 누나는 한때 연예인을 목표로 연기학원에 다녔었다. 그곳에서도 천재로 인정받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연기를 때려치우고 디자인 쪽 계열로 공부해 이렇게 지금의 누나가 된 것이었다. 그때이후로 연기를 절대 하지 않던 누나가 지금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본론으로 넘어가서…저 역시 한나가 싫지 않아요. 이렇게나 예쁘고, 착하고 안아주고 싶은 애는 드문걸요.” “오오오오옷!” “이, 이거 폭탄선언이야!”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한나는 이미 얼굴이 익어버려 멍하니 누나만 볼 뿐이었다. “하지만…흑! 그런데 어떻게 오빠가 나를 버릴 수 있어?” 순간 지목되는 태식 형. 뜨거운 순간은 한 순간에 차갑게 식어 태식 형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그런 짓 까지…해놓고.” 결국 터지는 누나의 한 말. “그, 그런 짓!” “뭔 짓이야!” “다, 단장님이 어떻게!” “이 쳐 죽일 놈!” 정말 뭐라도 당한 것처럼 누나의 표정은 가녀린 여성의 모습 그대로였다. 태식 형은 한쪽 입술을 씰룩거리며 서있었다. “소연아, 다들 오해하잖아. 나는 너랑 키스밖에…아차.” “키스!” “이 배신자!” “꺼억, 내 믿음이 송두리 째 날아가 버렸어!” “짐승 같은 놈!” 태식 형은 자신이 말하다가 ‘당했구나.’하며 이마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이미 내 뱉어진 말. 모두들 광분하며 당장에라도 단상위로 뛰어 올라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저는 괜찮아요. 이렇게 화내주시는 여러분이 있기에 저는 행복한 걸요?” 한 순간에 다시 침묵시키는 누나의 연기. 저, 저것이야 말로 진정한 천상의 연기미소. 크윽, 내가 저 정도에 반만 따라갔어도 모두들 매혹시킬 자신이 있었을 텐데. 아, 지금 그런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일단 주위를 둘러보자 모두들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한나는 반대로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역시 언니에요. 킥킥, 킥킥킥…….” 하지만 여전히 눈물을 쏟는 한나. 울면서도 웃는 그녀의 모습이 가슴에 사무치도록 와 닿았다. “그럼 연기는 여기까지 하고. 지금부터 모든 사람들하고 한나, 거기 토라져서 이쪽도 안 보는 귀여운 애는 잘 들어.” 갑자기 반말로 돌아와 진지하게 말하는 누나. 누나는 그 순간 내 얼굴을 보았다. 그 의미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못 봐주겠지. 내가 이렇게 답답하게 행동하는 모든 것들을. “이 미소천사라는 타이틀과 나, 그리고…….” 다시 나를 보는 누나. 나는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단지 누나를 보고 있을 뿐. 누나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입을 몇 번 달싹이다 결국 마이크를 내리며 짜증냈다. “아, 정말 속 터져. 내가 왜 이렇게 망설이는 거람. 그딴 거, 그딴 거…….” 마이크라도 던져버릴 기세. 하지만 누나는 마이크를 던지거나 발을 구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눈을 감고 심호흡을 몇 번 할 뿐. “차마 말하지 못하는 비밀 한 가지가 있어. 이 사실은 지금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해. 하지만 이것 때문에 어느 누구도 배신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이것만큼은 말해줄 수 있어. 항상 봐온 나니까.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니까! 그러니까 한나, 너는 울지 마. 항상 웃어주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거기 토라진 애! 언제까지 삐쳐있을 셈이야? 가슴에 못 박지 말고 적당히 하란 말이야!” “……….” “……….” “……….” 순간 정적 된 분위기. 무슨 말인지 아는 사람은 한나와 주리아 뿐이겠지. 나는 항상 누나에게 민폐만 끼치는 구나. 누나는 다시 심호흡을 한 번하고 말했다. “이것도 연기!” “……….” “……….” 갑자기 굳은 표정을 풀며 한쪽 눈썹을 찡긋하는 누나. 대, 대단하다. 정말 여러 의미로 누나는 대단해. “하, 하하. 내가 폭탄을 들어냈구만.” 누나가 돌려준 마이크를 잡으며 말하는 태식 형. 그제야 자신이 한 짓에 대해 후회했다. “자자, 그만 좀 얼어있고 모두 신나게 놀아봅시다!” “짐승.” “변태.” “내려와라.” “…젠장, 아직도 꽁해있냐.” 이제 태식 형이 분위기를 다시 잡긴 불가능해 보였다. “……….” “……….” “난 바보야…왜 그때 소연이를 불러서…크윽!” “음, 이것도 맛있는데? 기찬아, 왜 안 먹어?” “아니, 좀 그냥 입맛이…….” 눈팅의 식성은 참으로 대단하오.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에서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먹을 수가 있는 겁니까? 나는 곁눈질로 양 옆을 보았다. 왼쪽에는 주리아가 팔짱낀 채로 나를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팩 돌린 상태였고, 오른쪽에는 한나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누나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으며, 한나 옆에 있는 태식 형은 우울하게 머리를 감싸 쥐고 좌절모드에 들어가 연신 바보라 외치며 좌절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입맛이 있겠는가?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뛰쳐나가지 않은 게 다행이지. “언니…잘 드시네요?” “아, 미안. 회만 보면 자꾸 손이 가서. 고기보다 좋잖아? 살도 안찌고.” “그런…가요?” 한나는 조금 의아하게 누나를 바라보다 순간 나와 눈이 마주쳤다. “………!” 황급히 고개를 틀어버린 나. 이래서는 나도 주리아와 다를 게 없겠다. “언니, 저 분은?” 한나가 결국 마지못해 누나에게 말하자 누나는 빙긋 웃으며 잡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궁금해졌어? 꽤나 늦네. 그 말 기다리다 배 터져 죽을 뻔했다.” 늦다고 생각하기 전에 그냥 소개시켜 주면 어디가 덧나오? 누님 성격도 참 비정상적이오. 내가 뭐라 생각하는지 모르는 누나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앉아있는 남자는 내 동생, 나기찬. 아직 고1이라서 미성년자야.” “어머, 그럼 저와 동갑이네요? 반가워요, 나기찬씨.” “아, 저야말로…….” 한나는 가식 없는 미소로 손을 내밀었고 얼결에 나는 마주잡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아무 말 없는 거 보니 꽤나 과묵한 분이신거 같아요.” 한나는 내 손을 잡은 채 말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내 얼굴은 홍시처럼 변해갔고 말이다. “과묵하긴. 한나야, 속지 마. 저 애가 과묵하면 세상 사람들은 전부 입을 열고 다니지 않을 걸? 그리고 고1? 나보다 어리잖아? 하여튼 요즘 어린 것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걸고넘어지는 주리아. 이거 공격적인데? “아, 다른 어른이 말하면 몰라도 나보다 어려보이는 그쪽이 그런 말하니 참 설득력 없네요.” “내가 동안처럼 보이는데 뭐 보태준거 있어?” “없죠. 보태주고 싶지도 않지만. 그런데 왜 저한테 반말이세요? 저 알아요?” “내 나이가 지금 20이야. 성인식도 안 치른 녀석한테 존대하고 싶지 않거든?” “자존심 세우기 전에 상대에 대한 존중이란 걸 먼저 배우시죠. 그거 중학교 때도 안 배우는 건데.” “뭐, 뭐, 뭐?” 주리아는 결국 말문이 막혀 얼굴만 붉힌 채 주먹을 꽉 쥐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눈팅에게 단련된 사람이라서 말입니다. 말로 덤비려면 10년은 더 배우고 오시죠. “소연 언니…저 주리아 언니가 저렇게 말하는 거 처음 들어봐요.” “그래? 그런데 너무 흥미진진하지 않니?” “주리아 언니의 다른 모습을 봐서 저도 좋긴 하는데…일단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괜찮아, 저렇게 싸우면서 정드는 법이야.” 거기 두 분. 그런 말은 상대에게 안 들리게 해야하는 거 아닙니까? “…정말 최악이야. 나갈래.” 주리아도 지금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뇨, 제가 일어나죠.” 나 역시 이 자리에 있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주저 없이 일어날 수 있었다. “후―, 내가 왜 이러는 거람.” 밖으로 나오니 입에서 김이 보일 정도로 날씨가 사뭇 쌀쌀했다. 보통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심한 걸. 몇 번 돌멩이를 발로 차고 멍하니 멀리 있는 산을 구경하다보니 금세 질려버렸다. 담배 피는 사람들은 매번 밖에 나와 이런 것을 느끼지 않을까? 시답잖은 생각이 스쳐지나갈 때였다. “뭐하세요?” 뒤에서 윙하는 기계음이 들렸다. 돌아보니 전자동 휠체어를 타고 있는 한나가 보였다. 발밑에는 담요가 덮여있고 아직 이를 것 같은데 목도리까지 한 상태였다. 역시 몸이 많이 나쁜 건가? “우, 날씨가 춥네요.” 한나는 휠체어 이동버튼에서 손을 때고 팔짱낀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행동에 잠시 굳은 내 몸이 풀어졌다. “그러게 왜 험한 밖을 나오세요.” “그래도 저는 밖이 좋은걸요. 몸이 이 모양이라 자주 나오지 못하거든요.”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나는 조심히 물었다. “어디 아프신 건가요?” 내 물음에 한나는 나를 잠시 올려다보더니 시선을 다시 하늘로 가져가며 말했다. “아픈 건 아니에요. 단지 다리가 불편한 거죠. 어릴 때 사고로 척추를 다쳤거든요.” 머리에 둔기라도 맞은 듯 한 충격이 왔다. 다리? 그러고 보니……. “저는 걷는 게 좋아요.” “이렇게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내딛을 수 있다는 즐거움은 언니는 모를 거예요.” 한나와 성벽 주위를 걸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문제였어. “왜 그렇게 놀라세요?” 내 표정을 살피던 한나가 물었다. 나는 재빨리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하늘로 돌렸다. “……….” “……….” 딱히 할 말이 없어진 두 사람. 그 어색함을 벗어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어 보았다. “춥네요.” “네.” “언제 돌아가지. 집 머세요?” “조금요.” “……….” “……….” 다시금 할 말을 잃은 두 사람. 결국 나는 이 말을 하고 말았다. “다리…많이 불편하시죠?” 아, 이 바보! 나는 왜 꺼려하는 질문을 하고 만 거냐! “그렇게 보이세요?” 혼자 질책할 때 한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 의도를 몰라 멀뚱히 한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야 혼자 샤워할 수 없고, 화장실도 매번 사람을 불러야하며, 옷을 입는 것조차 혼자서는 30분도 넘게 걸리죠.” “……….” 그런 불편한 생활을 나는 할 수 있을까? 무엇하나 혼자 하지 못하는 생활을. “하지만 저는 다시 아기가 된 것에 불과해요.” “…아기요?” 내가 의아하게 되묻자 한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지하며 살아가는 게 당연한 아기 말이에요. 저는 언제부터인가 주위에 도움을 당연히 받아들이게 되었죠.” 한나의 표정에는 거짓이 없었다. 매우 순수한 눈빛. 그런가, 게임에서도 보았던 저 눈빛은 아기의 순수함이었던 건가. “예전에는 이 도움들이 불편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행복하기까지 해요. 특히 아빠 품에 안겨 어디론가 이동될 때 그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면 얼마나 기분 좋은데요. 또 샤워할 때 누군가 도와주는 게 처음에는 쑥스러웠지만 지금은 서로 맞댄 따뜻한 기분이 너무너무 좋은걸요. 그런 제가 그렇게 불편해 보이나요?” 나는 어느새 천천히 고개를 젓고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겐 나만의 삶이 있듯이 한나에게는 한나만의 삶이 있다. 이건 누가 불행하냐가 아냐. 누가 더 행복하냐지. “그럼…이제 제가 뭐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뭔데요?” 한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고개를 들고 말했다. “진짜 소연언니는 어디에 있죠?” 쿠쿵. 내 눈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손발이 마비되었고, 주위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무, 무슨.” 당황해서 떨려나오는 입. 한나는 나를 똑바로 올려보며 말했다. “제가 아는 소연언니는 게임에 대해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해요. 하지만 조금 엉뚱하죠. 그래도 남을 배려해주는 분이세요. 또 소연언니는 강한만큼 마음이 여려요. 유리같은분이라 언제 깨질지 불안하죠. 그리고 소연언니는, 소연언니는 생선을 매우 싫어해요. 아무생각 없이 산책하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는 분이세요! 게다가, 게다가, 소연언니는 남의 사소한 것을 잘 살피지 않아요. 그래서 저의 이 다리도 지금까지 모를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 소연언니는, 소연언니는…흑!”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막아버리는 한나. 붉게 충혈 된 눈으로 올려다본 모습에는 간절한 표정이 담겨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계속 놀란 채 서있자 한나는 눈을 훔치며 다시 말했다. “지금 소연언니는 아마 수연언니겠죠. 제 다리 상태를 알고 있는 눈치셨어요. 게다가 수연언니는 회를 무척이나 좋아하시나 봐요.” 착각하고 있다. 한나는 지금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 나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짓말로 지금 상황을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 말은 자꾸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그러니까, 나는……!” “어라? 저를 마중 나와 계신 건가요?” 순간 들려온 말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훤칠한 키에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자연스럽게 옆으로 넘긴 남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현빈…오빠?” 먼저 반응한 건 한나였다. 그러고 보니 현빈 형과 이목구비가 많이 닮았다. “아타셰님은 몰라볼 정도로 예쁜데요? 그런데 왜 휠체어에…어디 아픈 건가요?” “다리가 불편해요. 아, 현빈 오빠는 왜 그렇게 늦으셨어요?” “제가 하는 일이 조금 걸려서 늦었네요. 추우니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죠.” 그렇게 말하며 현빈 형은 자연스럽게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몰기 시작했다. 그러며 멍하니 서있는 나에게 윙크하는 현빈 형.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한동안 굳은 채 서있던 나는 더 추어진 날씨에 결국 다시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안에는 이제 분위기가 무르익어 뭉쳐 게임을 하거나 퀴즈, 술자리 놀이 등 나와는 다르게 즐거운 모습만이 한가득했다. “자 너도 받아라.” 미소천사 원빈 전단장이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던 쪽지를 나에게도 넘겨주었다. 무슨 쪽지지? 얼결에 받은 쪽지를 펴보자 164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전부 받았나요? 흐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과연 3%의 확률은 누가 될 것인가!”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키기 시작했다. 3%? 무슨 말이지? “그럼 왕을 고르겠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으니 간단히 퀴즈를 푼 사람이 왕이 되기로 하죠. 그럼 문제를 내겠습니다! 수학 파이의 46번째 소수점 숫자는?” “야이! 그딴 걸 어떻게 알아!” “개념 있는 문제 좀 부탁합니다!” “최소 문제 낸 사람이 아는 문제를 내야할 거 아냐!” “쉽잖아요? 너무 쉬워서 100단위 소수점을 할까 고민했었는데. 다들 아는 거 아닌가요?” “……….” “…내보내. 저놈 누가 당장 내보네!” “3이네.” 그때 느긋이 웃고 있던 임박사님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모두 황당한 표정으로 박사님을 보았고 그건 원빈 전단장도 마찬가지였다. “차, 참여하시는 겁니까?” “늙었다고 나만 빼긴가?” “아니, 뭐, 하하하! 뭐 좋겠지요! 그럼 왕은 임박사님입니다! 명령은 어느 것이든 좋습니다! 시작하세요!” “그럼 간단한 걸로 할까? 43번은 입고 있는 옷을 딱 3개만 벗게나.” “우왁! 시작부터 강하다!” “근데 확률적으로 남자가 거의 99%걸린다는 게 문제지.” “그건 좀 보기 싫은데…….” “젠장, 나잖아!” 나는 멍하니 43번 지목된 남자가 목도리하고 모자, 겉옷을 벗는 걸 모며 이제 지금 하는 게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가장 무서운 게임이라는 진실게임, 쪽팔려 게임과 일맥상통한다는 왕 게임이었던 것이었다. 그럼 아까 3%를 말했던 건 아마 우리 눈팅과, 한나, 주리아를 말한 것이겠지. “하아.” 그럼 지금 내 번호가 164번이라는 건데. 제발 부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맞춰줄 수 없을 것 같으니까. “그럼 다음 왕을 선택하겠네. 이 동전을 잡은 자가 왕이 되는 거야. 자!” 임박사님은 오백 원짜리 동전을 위로 높이 던져 올렸다. 동전은 샹들리에에 맞아 기학적으로 튕겨 나갔고 모두들 눈이 동전을 좇아갔다. “어라?” 동전은 정확히 누나의 치마위에 떨어졌다. 모두들 처음에는 놀람으로 그리고 점점 굳기 시작하는 얼굴들. 아아, 망했구나. 하필 그게 눈팅한테 가다니. “호―. 나네?” 누나의 미소는 가희 천상의 미소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악마의 미소라고 느껴지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그럼 많은 남성들을 위해 확률을 높여줄게. 6, 14, 27, 38, 49, 57, 66, 81, 99, 145! 햄버거 알겠지? 차례대로 시작!” “여, 열 명이나?”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을 넘나들겠군.” “자, 잔인하다.” “그래도 여성이 걸릴 확률이 높아 진건가?” “근데 왜 다들 남자뿐인 거야!” 온통 남자들만 아홉 명이 나온 상태였다. 어라? 그런데 한 명이 빈다? “145번은 나거든.” 누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와, 왕 본인이 나섰어!” “룰에서 어긋나잖아?” “닥쳐! 내가 아홉 번째란 말야!” “깔아, 빨리 깔아!” 남자들이 눈을 부릅뜨며 겹겹이 산을 쌓기 시작했다. 첫 번째 누운 남성은 얼굴까지 푸르게 변해서 죽을 맛이었고 아홉 번째 남성은 반대로 눕는 만행을 저질렀다. 여덟 번째 남성이 뒤통수를 가격해 다시 원상태로 복귀시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누나와…생각하기도 싫다. “그럼, 간다!” 그런데 그걸 알까. 누나는 상식에서 벗어난 사람이란 걸. 뛰었다. 게다가 무릎이다. 저건 무에타이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광경이었다. “크억!” “어어억!” “켁!” “내, 내 허리! 내 허리!” 아, 불행한 아홉 번째여. 그대의 허리는 평안하신가. 그렇게 왕 게임은 무르익어 수많은 사람들이 왕을 넘겨받고 각가지 재미있는 상황들이 벌어졌다. 그러다 어느 판은 다트점수로 인해 왕을 뽑는 게임이 진행되었는데 올 가운데로 당당히 왕을 차지한 현빈 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기야…….” “어떻게 전부 가운데만!” “게임에서 활만 다루어서 저런 건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럼 나는 이미 검사로서 무사수행 나갔을 거다.” 현빈 형은 너무했다고 생각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거, 제가 이길 수밖에 없을 거예요. 저는 서커스 단원이거든요. 그것도 단검 던지기에 특화된.” “서커스?” “지금 시대에 서커스?” “아! 들어본 적 있어. 지금 월드투어 하는 유명한 서커스단이 있다는 거. 지금 한국에 있을 거야. 그 이름이…….” “푸른 물방울. 그곳이 제가 속한 서커스단입니다.” “아아아아!”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태식 형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인지 별말이 없었지만. “어쩐지, 잘한다 싶었어.” “그곳 실력은 알아주잖아.” “하아, 왜 다트 게임을 해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꽤나 다트게임을 열심히했었나보다. “그럼 저는 이것으로 하죠. 100, 164번은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세요.” 현빈 형은 상황을 빨리 넘기기 위해 재빨리 명령을 내렸다. “오, 여자다! 드디어 여자다!” 당황한 채 단상위로 올라온 사람은 주리아였다. 아아, 드디어 여자구나. “이야, 상대 남자는 좋겠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안 나와?” “야, 누구야? 164번!”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질투하며 화내는 사람들. 164번은 누군지 몰라도 엄청 눈총 받겠…잠깐, 164번? “크악! 나잖아!” 나는 경악해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그러자 주리아 역시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고 다른 사람들 역시 깜짝 놀라 나를 보았다. “너, 너, 너, 너야?” 주리아는 완전히 낙심한 표정으로 나를 손가락질 했다. 이봐요, 저 역시 당신이랑 춤 따위 추기 싫거든요? 나는 어쩔 수 없이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단상위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무겁기 짝이 없었다. “너, 너, 너 따위랑 춤 따위!” “제가 거부하면 어떻게 되나요?” 주리아가 뭐라 말하기 전에 내가 선수 쳐서 원빈 전 단장에게 물었다. 원빈 전 단장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거부 따윈 없다! 게다가 여자다! 여자가 올라왔는데 그냥 내려가겠다는 거냐! 남자라면 무를 뽑아! 칼이라도 썰어!” 흥분하지 마세요. 무로 어떻게 칼을 썹니까. “그렇다는데요?” “……….” 주리아는 아랫입술 깨물면서도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아마 빨리 이 상황이 넘어가기만을 바랄 뿐이겠지. “휴우.” 나 역시 지금 이러고 놀 기분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건 주리아 누님뿐만이 아닙니다. “그럼 실례.” “어, 어, 어, 어, 어!” 나는 주리아의 허리를 잡고 한쪽 손을 잡아 올렸다. 춤 따위는 물론 모른다. 그냥 대충 그럴듯하게 보이면 되겠지. 몇 번 턴하고 스텝을 조금 밟다 금세 손을 놓았다. “……….” 그때까지도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내 행동에 인형처럼 따라온 주리아. 그녀의 얼굴이 타버릴 것처럼 빨갛게 익어있었다. 결국 다리가 풀렸는지 쑥 내려가는 허리. 나는 황급히 주리아의 허리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아, 아, 아, 아, 아.” 주리아의 눈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냥 내 착각인가? “놔, 놔, 놔, 놔줘.” 겨우겨우 말한 그녀의 말에 나는 조심히 주리아를 내려놓았다. 무릎 꿇고 힘이 풀린 듯 축 늘어진 몸. 한동안 그 상태로 멍하니 앉아있다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 이, 이, 이, 히끅, 이, 이 바보야! 으아아아앙!” 울렸다. 그것도 제대로. 설마 용자대전처럼 하루 종일 우는 건 아니겠지? 사람들도 지금 상황에 당황했는지 어쩔 줄 몰라 했다. 원빈 전 단장은 왜 애를 울렸냐며 나를 원망하는 눈길로 보았다. 근데 제가 더 어리거든요? 이 분은 성인이란 말입니다! “하아. 골치 아프네.” 지금 이런 문제나 생각하고 있을 기분이 아니란 말이야. 빨리 내려가고 싶은 마음에 나는 앉아있는 주리아의 허리와 무릎을 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주리아가 가벼워서 가능한 일이었다. “무, 무, 무, 무, 무―!” “미안해요. 그렇게나 저를 싫어할 줄 몰랐네요.” 나는 단상에서 내려오며 그렇게 말했다. “제가 욱한 마음에 실언했던 겁니다. 사실 저는 당신이 좋아요. 절대 싫지 않으니까 마음 푸세요.” “………!” 항상 나를 따르며 좋아하던 주리아. 나를 위해 힐러까지 바꿔가며 미소천사 기사단에 들은 이를 싫어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이런 싸움, 나라도 좋아할 리가 없다. 사과해서 지금 이 상태가 풀어진다면 기꺼이 사과하리라. “응?” 언제부터인가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래를 내려 보니 주리아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귀가 새빨갛게 변해있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많이 화났던 모양이다. 역시 간단히 풀기는 무리인가. 나는 주리아를 의자에 안쳐놓고 내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까지 멍하니 보고 있던 원빈 전 단장은 그제야 마이크를 들었다. “이거 남자다운데? 그건 그렇고 다음 왕은 어떻게 하지?” “1, 2번 키스하세요.” 나는 그냥 적당히 말해버렸다. 딱히 왕을 고를 것도 없이 그냥 한 말이었다. 그런데 내 말은 파문이 되어 순식간에 물결을 만들어내었다. “나, 나왔다! 키스!” “남자끼리라면 최악의 명령이라는 그 말이 그냥 나와 버렸어!” “그런데 왕이 아니잖아!” “뭐 어때! 나는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고!” “누구야, 1, 2번!” “나와라아아아아아아아!” 역시나 아직까지 이 말이 나오지 않아 그런가 싶었는데 역시나 다들 말을 꺼려했던 거로군. 하긴, 나라도 남자끼리 키스하라면…이것도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군. “…이런, 전데요?” “어둠의조이 단장님!” “그럼 나머지 한 사람은?” “…젠장, 나잖아.” “멋쟁이 단장님?” “……….” “……….” “…쿨럭! 나 상상해버렸어.” 다들 슬금슬금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현빈 형과 태식 형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거 진짜 해야 하나요?” “저 역시 이건 좀…….” “거, 거, 거, 거부권은 없습니다! 하지만 거부해 주세요. 제발…….” 원빈 전 단장 역시 이건 보고 싶지 않은지 눈썹을 씰룩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꺄아아아악! 어떻게! 나 떨려!” “언니, 저 너무 기대 되요!” 눈팅과 한나는 아주 죽어라 좋아했다. 어째서 이런 게 좋은 거야?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주리아 역시 힐끔 단상 위를 보고 있는 걸로 보아 싫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럼…….” “할 수없이…….” 그날 나는 눈을 버렸다.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5일전.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5일전 일요일 주말.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멍하니 침대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어제 있었던 일들을 생각했다. 게임상에서도 그랬듯이 밖에서도 여전히 근육을 자랑하는 나헬스했다님. 서커스, 단검 던지기의 명수라는 현빈 형. 주리아와 한나도 너무 예뻐서 눈을 돌리지 못했고, 엔젤단의 사람들도 너무 재미있어서 종일 웃기만 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키……. “젠장, 또 생각났어.”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생각을 지웠다. 그러다 문득 침대 아래 있는 빈 캡슐이 눈에 보였다. 한동안 들어가지 않아 먼지가 쌓이지 않았을까 걱정이 들 정도로 열지 않은 캡슐. 시간상 나흘밖에 안 됐지만 나한테 있어서 억만 겁의 세월을 보낸 것 같아 하는 말이었다. “게임이라.” 몸을 옆으로 뉘여 캡슐을 정면으로 보았다. 이제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5일. 처음에는 시간이 점차 다가올수록 아쉬움만이 가득했었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고작 한 달밖에 주어지지 않은 시간이 너무 짧다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재미있었던 시간이었다. “처음부터 파란만장하게 시작했지.” 순간 웃음이 나왔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누나의 아이디를 해킹해 접속한 미성년자, 더군다나 여자의 몸이라니. 가장 처음 배운 스킬이 매혹에다가 두 번째가 고성방가. 그것들을 가지고 잘도 여기까지 왔다. “매혹 스킬이 대단하긴 했지.” 특히나 매혹스킬은 패시브 스킬이어서 시도 때도 없이 발동되었으며 플레이하던 나는 헤픈 여자가 다 되었었다. 그래도 뭐 나쁜 것만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멘히버 아이템 가게에서 공짜로 물건들을 얻을 수 있었고, 고블린들과 친해질 수도 있었으니. 오히려 좋은 게 더 많았다고 할 수 있었다. “고블린이라. 큭큭, 그놈들 생각해보면 귀여웠지.” 내가 아무리 타테라고 정정해도 타데라 부르던 고블린 놈들. 성질내니 토끼처럼 귀를 푹 숙이며 우울해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때는 혐오스럽기만 했는데. “그때 힐 스킬을 처음 발견했지.” 고블린 로드 에타브레를 치료하기 위해 무기속성주입을 조합하여 처음으로 치료해준 사건, 그리고 전투법사의 고유스킬인 더블스펠을 이용하여 처음으로 태초의 재생을 얻었었다. “더블스펠 조합을 세 개나 해버린 만행을 저지르면서 얻은 스킬이었으니까. 나도 꽤나 무식했지.” 심연의 눈으로 스텟을 뻥튀기하고 더블스펠을 이용하여 세 개의 속성을 합성시켜버린 나. 지금이야 트리플 스펠은 당연시될 정도로 보편화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게임이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나는 거의 혁명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었다. “그때부터 미소천사는 진정한 시작이었지.” 태초의 재생으로 인하여 미소천사 기사단을 구해주는 실버크로스 기사단과의 격돌 사건, 랭커인 태식 형과, 현빈 형, 한나와 함께 250레벨의 둠터틀을 잡아버린 사건, 그때 나는 진정한 힐러의 깨달음을 얻고 게임에 더욱 빠져들게 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무림일대기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니 헛짓만 한 건 아니지.” 무림일대기. 힐러로서 자괴감에 빠져들게 만든 게임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힐러를 왜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래도 여전히 힐러를 고수하는 나 자체를 용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펜하르트를 시작하며 나의 내면을 보게 되었고 힐러로서의 내 감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더 심한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었지.” 누나를 속이며 게임해야한다는 압박감, 그리고 게임하다 기절해 한 달이라는 사형에 처하고만 내 자신. “그때 올 스펠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엄한 짓을 하기 전에 태식 형에서 게임에 대해 조금이나마 들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뇌파인식 80%인 아펜하르트. 그 의도는 모르겠으나 위험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최근에 memory뇌파를 수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memory뇌파, 기억을 관장하는 뇌파라는데 수만 명의 memory뇌파를 한 사람에게 주입시키면 그 사람은 슈퍼맨이 된다는 가설을 제시했었다. 솔직히 너무 비현실적이라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때 얘기한 태식 형과 현빈 형은 너무도 진지해서 아직까지 기억해 두고 있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들은 후에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고 그 이기심에 현재, 이렇게 자괴감에 빠져들어 더 이상 여자로서 플레이 할 수 없는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여성 연기라.” 처음 쉽게 연기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저 게임에서 이걸로 즐기면 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캐릭터에 몸을 빌려 비디오 게임하듯 생각하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가 아는 사람이 많아지고 게임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상대를 만남으로 연기를 할 수 없게 돼 버린 것이었다. 상대는 진심으로 나를 대했으니까. 탈을 쓰고 게임하는 것은 나뿐이었으니까. 더 이상 속일 수 없었다. “네가 나로 플레이했지만 네 행동, 생각들은 내가 아닌 너로서 플레이했을 거 아냐.” “네가 나로 플레이하며 속이는 것보다 이대로 모습을 감추는 게 더 마음 상한다는 사실을 모르겠니?”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니라 지금껏 대해온 네 마음이잖아. 그것조차 부정하면 어떻게 할 건데?”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누나는 내 가슴을 툭 치며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니라 내 마음이라고. 물론 누나의 탈을 쓰고 있긴 했지만 마음까지 누나를 연기한 건 아니었다. 누가 뭐라 해도 그것은 나. 내가 원해서 걸어갔고 지금도, 훗날에도 계속 걸어갈 것이었다. “제가 아는 소연언니는 게임에 대해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해요. 하지만 조금 엉뚱하죠. 그래도 남을 배려해주는 분이세요. 또 소연언니는 강한만큼 마음이 여려요. 유리같은분이라 언제 깨질지 불안하죠. 그리고 소연언니는, 소연언니는 생선을 매우 싫어해요. 아무생각 없이 산책하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는 분이세요! 게다가, 게다가, 소연언니는 남의 사소한 것을 잘 살피지 않아요. 그래서 저의 이 다리도 지금까지 모를 거예요.” 오히려 한나는 나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누나가 옆에 있는데도 단번에 다른 사람이란 것을 알아 챈 한나. 그럼 한나가 바라는 사람은 과연 나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한나가 바라는 것은 내 성격을 가지고 있는 누나. 그게 답이겠지. “그렇게 보이세요?” 지금 내 생각을 부정이라도 한 것처럼 내가 다리가 불편하지 않느냐고 물어볼 때 한나가 했던 답변이 생각났다. “하지만 저는 다시 아기가 된 것에 불과해요.” “의지하며 살아가는 게 당연한 아기 말이에요. 저는 언제부터인가 주위에 도움을 당연히 받아들이게 되었죠.” “예전에는 이 도움들이 불편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행복하기까지 해요. 특히 아빠 품에 안겨 어디론가 이동될 때 그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면 얼마나 기분 좋은데요. 또 샤워할 때 누군가 도와주는 게 처음에는 쑥스러웠지만 지금은 서로 맞댄 따뜻한 기분이 너무너무 좋은걸요. 그런 제가 그렇게 불편해 보이나요?” 조금 주눅들만한 질문조차도 당당히 내 눈을 바라보며 하던 한나의 말. 그 정도로 한나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어떨까? “우유부단에 멍청이, 비밀조차 마음속에 잠가두는 한심한 남자.” 내가 말하는 거지만 참으로 가슴이 죄여왔다. 괜히 기분이 나빠져 침대 위를 몇 번 뒹굴어 보았다. “하아, 나약한 놈이구나.” 형광등이 너무 밝아 팔로 눈을 가렸다. 순식간이 잠기는 어둠. 그 안에서 나는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선택할 것은 두 가지 밖에 없었다. 추억으로 남기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고백하는 것. 지금까지 추억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 더 이상 게임에 접속하지 않고 있었지만 어제 한나를 만난 이후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한나라면 이해해 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한나라면 내가 고백해도 아기처럼 웃어주며 손을 내밀어 줄 거란 기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지금까지 내가 이런 생각하고 있었던 이유는……. “마음 준비 완료.” 고백이란 것을 한 번 시도해 볼까한다. 드디어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오랜만에 캡슐 뚜껑을 열어젖혔다. [‘아펜하르트’실행합니다. 아이디 및 비밀번호를 음성으로 입력해주십시오.] “아이디 나소연, 비밀번호 예쁜이.” […입력되었습니다. 홍채인식을 합니다.] [입력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나소연님. ‘아펜하르트’에 접속하시겠습니까?] “접속.” [접속되었습니다, 즐거운 시간되십시오.] <아펜하르트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예쁜이’님 시작 포인트로 이동합니다.> 끔뻑끔뻑 새로운 세상에 눈을 적응시키니 얼룩진 나뭇결이 눈에 보였다. 뒤이어 폭신한 침대의 감촉이 느껴졌다. 즉, 게임상에서도 나는 누워있었던 것이었다. 나무로 된 천장이 눈에 익숙한 거 보니 이곳은 미소천사 기사단 건물인 것 같다. 아무래도 기절한 후 미소천사 단원들이 이곳으로 이동시킨 모양이었다. “끙차.” 뻐근한 감촉을 풀기위해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니 가뜩이나 큰 가슴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후―하, 후―하. 좋아, 가자.” 몇 번 심호흡으로 다시 마음을 다잡고 문을 열었다. 끼이익― 기름칠을 하지 않은 건지 거친 문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밖으로 나오니 여러 가지 서류를 나르는 유저, 연무장에서 스킬을 연마하는 유저 등 미소천사 기사단의 휘장을 가슴에 장식한 유저들이 저마다 바삐 행동하고 있었다. “어?” “누님?” “이야, 복귀하신 거?” 하지만 그런 유저들도 나를 보자 전부 한달음에 달려왔다. 내가 괜히 방해한 것 아닌가 몰라. “한나는요?” “아타셰요? 아직 접속 안했네요?” “그러게 지금까지 보지 못했으니 조만간 오겠죠.” “그런가요?” 아직 한나는 접속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흠, 그럼 딱히 할 게 없는데. “뭐, 일단 고마워요. 그럼 볼일들 보세요.” “아, 미소천사님. 멋쟁이 단장님한테 한 번 가보세요. 전부터 미소천사님을 많이 찾았었는데.” “예, 들러보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일단 다시 건물 위로 올라갔다. 딱히 할 게 없었으니 태식 형이나 볼 생각이었다. 『주인님! 오랜만이에요!』 그때 어디서 나타난 건지 쪼르르 날아오는 정령이. 한나가 없어서 무지 심심했던 모양이네. “잘 있었어?” 『…이상하다. 주인님 맞아요? 정답게 말하실 분이 아닌데.』 이놈은 잘 대해줘도 뭐라 하네. “그런데 너…모습이 조금 바뀌었다?” 정령이의 모습은 확실히 조금 바뀌어 있었다. 전애는 앳돼 보인 이미지였다면 지금은 조금 성장한 이미지? 크기도 1.5배정도 커져있고 예전에는 날개 없이 유령처럼 긴 꼬리 선을 남기며 날아다녔었는데 지금은 멋들어지게 앙증맞은 천사의 날개를 달고 있었다. 『그동안 저도 조금 성장했어요. 엄마하고, 주인님에게 붙어 다니며 빛의 힘을 흡수한 덕분이죠. 제 본체는 지금 사람 키만큼 컸을걸요. 아, 특히 주인님 지팡이에 들어갔을 때 크게 성장했던 거 같아요.』 “그거 축하할 일이네.” 『헤헤, 주인님한테 칭찬도 듣고 썩 나쁘지 않은데요? 그런데 주인님 오늘따라 매우 차분하시네요?』 “차분해?” 『으음, 뭐랄까. 전에는 어디로 튈지 모를 분이셨는데 지금은 눈빛이 착 내려간 게…무슨 실연이라도?』 NPC주제에 아는 것도 많다. 게다가 어린놈이. 나는 정령이의 말을 무시하고 옥상 응접실 문을 두드렸다. “태식 형, 저에요. 타테.” “어? 뭐라고? 진짜? 드디어 복귀했냐? 이야! 잠깐만!” 어라? 안에서 태식 형이 호들갑떨며 좋아했다. 뭐가 그리도 기쁜 거지? 저렇게 기뻐할만한 일이었던가?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문이 열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얼핏 보니 전부 머리가 길다. 붉은 머리, 금빛 머리, 검은 머리…참으로 다양했다. “언제 저렇게 많은 여성들과 터 지냈어요?” 내 말에 태식형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내비치며 나를 안으로 끌어당겼다. “이게 지금 내 손님처럼 보이냐? 전부 너 때문이라구.” “저요?” 나는 다시 자세히 여성들을 보았다. 어쩐지 많이 익숙한 얼굴들. 어, 어, 어라? “사흘만인가? 꽤나 기다리게 만드는 군.” “나는 뭐 딱히 할 것도 없어서 여기서 차나마시던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정확히 사흘하고도 5시간 26분 째 지나가고 있군요. 시간과 손해를 따지면 더원 기사단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 것과도 같습니다.” 벽에 기대어 팔짱낀 채 차가운 눈길로 나를 보고 있는 금발의 글로리시나, 나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차만 홀짝이는 화선녀님, 그리고 파피루스노트를 끼적이며 연신 불만을 토하는 제갈공녀님까지. 예쁘장한 여성들은 이곳에 전부 모여 있었다. “이분들이 왜 여기?”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태식 형을 보았다. 태식 형은 안 그래도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너한테 볼일이 있는 분들이시란다. 사흘 동안 떠나지 않아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저 어쌔신님은 우리 단원이랑 한 판 붙기까지 했다니까.” “근육질덩어리가 느끼하게 다가와 손봐줬을 뿐이다.” “하아, 어련하시겠어요.” 근육질덩어리라 말하는 순간 나는 왜 나핼스했다님이 떠오르는 걸까. “그래서, 세 분은 왜 저를 찾으셨죠?” “나는……!” “내가……!” “저는……!” 동시에 말하려다 말을 멈추고 서로를 노려보는 세 유저. 이러다 또 무슨 일이 터지겠다. “붉은 머리와 안경잡이는 빠져라. 가장 먼저 온 건 나다.” “그렇게는 못하겠는데? 먼저 온 사람이 질문을 먼저 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저는 더원 기사단을 대표해서 온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이 질문이 아니라 먼저 해야겠네요.” 급속도로 상황이 찌릿찌릿하게 변해갔다. 보다 못한 태식 형이 한발 나서며 말했다. “그러다 기사단 건물 가라앉습니다. 화 좀 누그러트리고…….” “닥쳐라.” “남자가 쫑알쫑알 말이 많네.” “조용히 좀 해주시겠어요?” “……….” “……….” 태식 형과 나는 굳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 그렇다면…….” “정 그렇게 나온다면…….” “방법은…….” “가위바위보!” 각자 검을 뽑으려한 세 사람. 마지막 외침은 내가 한 것이었다. 내 외침에 세 사람은 얼떨결에 각자 손을 내밀고 말았다. 그리고 아차 싶었는지 나를 보는 여성들. “…가위바위보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간파해 내민 작전인가?” 혼자 주먹을 내 한방에 꼴찌로 전략해버린 글로리시나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취약했었군요. 지금 알았답니다. 어쨌든 대충 그렇게 상황이 마무리되어 제갈공녀, 화선녀, 글로리시나의 순의 차례가 선정되었다. 1위와 2위를 가르기 위해 두 사람은 열 번도 넘게 가위 바위 보를 했다는 사실은 별것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겠다. “흠흠, 그럼 저부터 온 목적을 말하죠.” 제갈공녀님은 가볍게 옷매무세를 다듬으며 말했다. “미소천사 기사단, 전부 더원 기사단으로 합류하세요.” 쓸어 올린 안경 너머, 그녀의 눈은 몹시도 진지했다. 태식형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고 나는 묵묵히 제갈공녀님을 보았다. “…라고 말하면 당연히 거부하겠죠?” 슬쩍 나와 태식형을 살펴보는 제갈공녀님. 나는 어깨를 으쓱였고 태식 형은 피식 웃었다. 그 행동의 의미를 안건지 제갈공녀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천사님을 대표해 멋쟁이님, 어둠의조이님까지 전부 포섭합니다. 나머지 기사단원들도 전부 통합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체재를 변형시키진 않을 겁니다. 단지 명목상이라도 더원 기사단 소유, 미소천사 기사단이라고만 확고히 다질 뿐…이란 방침으로 찾아오긴 했지만 응하진 않겠죠. 그래서 지금부터 더원 기사단은 미소천사 기사단과 전쟁을 선포합니다.” 나뿐만이 아니라 관심 없다는 듯이 차를 홀짝이던 화선녀님도, 팔짱낀 채 창밖을 보고 있던 글로리시나도 움찔거렸다. 태식형만이 올 것이 왔다는 듯, 히죽 웃었을 뿐이었다. “흥, 있는 자의 여유인가? 선전포고까지 하러 이곳에 다 오고.” 글로리시나가 비웃었다. 그럼에도 제갈공녀님은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현재 아펜하르트의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아시나요?” 선전포고한 말과 관련이 있는 걸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소천사 기사단은 베르제브브 사건 이후, 엄청난 세력을 불리고 있죠. 어둠의조이님이 따로 떨어져 2세력을 만들 정도로 확연히 불어나고 있습니다. 그게 전부 미소천사님 덕분이죠. 신규 가입하는 유저들은 전부 사제를 선택하고 있고 기존에 다른 직업유저도 사제로 바꿀 정도입니다. 만약 10위의 랭커중 하나를 플레이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은 캐릭터를 고르라는 설문조사결과 랭킹 5위의 미소천사가 무려 45%투표율을 보였습니다. 다른 랭커들이 10%내외라는 것을 보면 얼마나 대단한지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언제 그런 것까지 조사한 걸까. 솔직히 나는 지금 말이 전부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왜 하필 지금 전쟁을 하려는 거죠?” “다른 제국과 왕국들은 베르제브브의 침공 이후 내정에 들어가 있어요. 그것을 기회삼아 저희는 웅크렸던 몸을 피기 시작했죠. 덕분에 켈타스 제국 쪽은 이미 통합이 완료된 상태에요. 이제 모르핀 제국 쪽만 통합하면 북부 쪽은 마무리가 되죠. 이 기회를 잡지 않으면 영원히 남부 쪽은 넘보기 힘들 겁니다. 그러니 모르핀 제국 전체에 전쟁을 선포하는 거죠.” 더원 기사단은 진정으로 게임의 통일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지금 북부에서의 싸움조차도 단지 하나의 과정이라 생각하는 건가. “즉, 지금을 기회삼아 겸사겸사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우리 자체를 부수겠다?” 홀짝 차를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하는 화선녀님. 정곡이었는지 제갈공녀님이 잠시 눈길을 화선녀에게로 돌렸지만 이내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호랑이 새끼가 자라도록 내버려두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니까요. 그래서 다시 말합니다. 저희 기사단으로 복속하시겠습니까?” 어찌 들으면 협박 같아도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근심가득한 눈을 보니 권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태식 형을 보았다. 태식 형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그 안건은 멋쟁이님에게 말해도 되는 것 아니었나요?” “저희는 당신을 진정한 수장으로 인정했습니다.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미소천사 기사단 전원 다 오지 않아도 상관없을 정도로. 그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태식 형이 눈살을 찌푸릴만한 얘기였다. “휴, 하지만 저는 가지 못합니다.” “…결국 전쟁의 길로 가야하나요?” 나는 어깨를 한 번 들먹였다. “아니요, 개인적인 사정입니다. 전 5일후에 접거든요.” “네? 접어요?” “말 그대로 게임을 접는다는 말입니다.” “왜 하필 5일 후에…유료화 패치? 설마 돈을 내실 여건이 안 된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그건 저희 더원 기사단 쪽에서…….” “물론 그것도 있지만 그보다도 개인적인 사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더원 기사단 쪽에 가지 않습니다.” “그럴 수가…….” 그동안 침착함을 유지하던 제갈공녀님도 지금 내 말은 너무 황당했던 건지 차마 말을 잊지 못했다. 그때 화선녀님이 나에게로 다가와 말했다. “게임을 접는다니 조금 섭섭하네. 그 전에 우선 내 의문부터 풀어주지 않겠나?” “뭐죠?” 화선녀님은 내 얼굴을 유심히 보다 차가운 얼굴로 입을 때었다. “타테, 그를 알고 있나?” “………!” “………!” 나는 물론이거니와 태식형조차 이번만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눈을 부릅떴다. 설마 이미 알고 있는 거야? “여기 몇몇 사람들이 당신을 타테라 부르고 있더군. 그 타테란 아이디의 의미를 알고 사용 하냔 말이다.” “……….” “수많은 게임의 힐러랭킹 1위, 타테. 그는 내가 아는 사람이기도 하며 지금도 어딘가에서 이 게임을 즐기고 있겠지. 그런데 그 아이디를 왜 당신이 쓰고 있는지 들어봐야겠어.” “아이디에는 자율성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태식형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일단 막아선 것 같았다. “물론, 모르고 쓰고 있다면 상관 안 해. 허나 너무 이상하잖아. 아펜하르트의 최강의 힐러라는 자가 타테의 아이디를 쓰고 있다니. 우연치고는…그냥 넘어가기 힘든데.” 화선녀, 이정화누나의 눈이 빛났다. 역시 눈치하난 빠르다. 아마 지금 이게 내 본인인줄은 모르겠지만 대충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화선녀님은 내가 고민하는 얼굴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후, 사실 당신을 추궁할 생각 없어. 단지 진짜 타테를 알고 있느냐 아니냐만 알고 싶을 뿐. 좀 더 행운이 닿는다면 그가 있는 위치도. 내가 아는 그라면 분명 이름 날리는 힐러를 하고 있을 테니까, 대충 힐러를 사칭하는 당신이 모르지 않을 거라 생각해.” 정화누나, 앞에 있는 힐러 사칭 자가 바로 저랍니다. 머리가 아파 나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화선녀님. 그 건에 대해서는 있다가 알려드리죠.” “나는 급하다. 지금 얘기해.” “당신이 급할 정도로 저 역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드리는 말입니다.” 나는 똑바로 화선녀님을 보았다. 잠시 묵묵히 서로의 눈을 확인하는 두 유저. 무림일대기 이후로 이런 적은 처음인가? 그때도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아 한동안 서로 노려보며 눈으로 확인할 때가 있었는데. “…닮았어. 어째 서지? 힐러들은 다 저런 건가?” 화선녀님의 눈이 흔들렸다. 물론 닮았겠지. 이 캐릭터는 누나이기 때문에 외모도 어느 정도 닮았고, 그리고 분위기는 완전히 나일 테니까. “얘기 다 끝났나? 이제야 내 차례로군.” 그동안 팔짱낀 채로 벽에 기대, 잠자는 것처럼 눈을 감고 있던 글로리시나가 팔을 풀고 나에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다른 일로 찾아왔지만 지금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할 얘기는…….” - 스르릉. 천천히 레이피어를 뽑는 글로리시나. 그녀의 동작은 정갈하고도 아름다웠다. “랭킹 5위 미소천사에게 정식 기사대전을 신청한다.” “네에에에에에에에?” 오늘따라 놀랄 일만 투성이었다. 아주 다들 작정하고 여기 오신 거였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게임 들어오기 전에 청심환이라도 먹고 오는 건데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힐러에요. 당신 같은 유저를 어떻게 이기란 말입니까? 아니, 그 전에 왜 기사대전을 왜 해야 하는 거죠?” “5일, 그게 너의 남은 시간이라 하지 않았나?” “그거하고 기사대전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너를 라이벌로 생각한 건 나만의 착각인가? 몹시 불쾌하군. 응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이겠다.” 글로리시나의 눈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진짜 저지를 셈이야. 이 여자라면 그러고도 남아! “미안하지만 타테를 죽일 순 없어. 게다가 여기는 우리 기사단의 거점이다. 너무 나대는 거 아닌가?” 태식형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글로리시나의 눈썹이 씰룩였다. 그와 더불어 공기도 점점 무거워져갔다. “그럼 네가 직접 상대해 줄 텐가?” “물론. 안 그래도 랭킹 좀 올리려했는데 마침 잘됐군. 2위 자리, 잘 받아가지.” “흥, 주제를 알거라.” 글로리시나의 레이피어가 움직였다. 태식형의 바스타드 소드도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스톱!” 그 중심에 내가 끼어들었다. 정말 간발의 차였다. 가슴께에 도달한 레이피어와 내 목젖에서 멈춘 바스타드 소드 사이로 뛰어든 것이. “…비켜.” “아끼는 동생 목을 뚫어버리고 싶지 않으니 비켜라.” “휴우, 진정하세요. 건물 내에서 싸울 참인가요? 그리고 이건 기사대전이고 뭐고 없이 그냥 싸우는 것뿐이잖아요.” “그렇군. 그럼 신념을.” “증인은 여기 있는 유저들로 충분하겠고…….” 와, 정말 독하다. “흠, 제가알기로는 보조위주의 랭커들은 대결자체가 성립이 안 되기 때문에 대결방식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고 알고 있는데요?” 제갈공녀님이었다. 내가 제갈공녀님을 보자 윙크하는 그녀. 아직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지만 나를 도와주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흥미가 생겼는지 눈동자만 돌려 말하는 글로리시나. 제갈공녀님은 노트를 펼치더니 무언가 뒤적이기 시작했다. “여기 어딘가 있을 텐데…아! 여기 있군요. 확실히 보조 직업은 1:1 대결은 싸움으로 하지 않는군요. 보통은 5대5 대결을 하거나 아니면 큰 페널티를 부여하고 1대1 대결을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번엔 내가 물었다. “가령…세 번의 공격에도 살아남는다면 보조직업의 승리라던가…….” 그 말은 커다란 파장이 되어 응접실 전체로 퍼져나갔다. “전 이 기사대전 내키지 않아요.” “네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내 기분의 문제다.” “도대체 당신과 왜 싸워야 하는 거죠?” “내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글로리시나는 완고했다. 이거 아무래도 피하긴 무리일 거 같다. 제갈공녀님이 말한 후, 우리들은 전부 연무장으로 나오게 되었다. 덕분에 수많은 미소천사 기사단원들이 구경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연무장을 빽빽하게 둘러싸인 상태에서 글로리시나와 나는 지금 마주한 채 얘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런 대결이 의미가 있나요?” “…의미가 없다면 부여하면 그만이다. 말이 많다. 언제까지 시간 끌 셈이지?” 정말 꽉 막혔어. 이사람, 정말 답답해!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야! 내가 아까부터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단지 나는 한나에게 고백하기 위해 들어왔을 뿐인데 왜 주위에서 나를 내버려두지 않는 걸까. 지금까지 속이고 게임해온 나의 책임? 그런 것이라면 달게 받겠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도 큰 잘못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들 뭐야. 미소천사 기사단과의 대결? 나의 대한 행방? 그리고 결투? 다들 그런 게 중요할 뿐이냐! “…당신들 전부 짜증나.” “……….” “……….” “……….” 내 작은 목소리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그래, 슬슬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왔다. 결투를 원한다면 응해주마. 그냥 콱 죽어버리지 뭐. 하지만 그 전에 당신 면상부터 한 대 날려줘야겠어. “드디어 해볼 마음이 생긴 건가? 좋다.” 글로리시나의 몸에서 바람이 일었다. 감추었던 전투력을 드러낸 것이었다. “우웁, 무슨 힘이.” “이건 멋쟁이 단장님과도 맞먹는 기운인데?” “역시 랭킹 2위란 말인가?” 주위에 유저들도 느낀 것인지 저마다 탄성했다. “내가 걸어온 길에 남겨진 한줄기의 바람은 곧 선율이 되리니. 너의 신념을 말하라.” 신념? 그런 거 생각해 두었을 턱이 없지. 기사대전 자체를 생각하지 않았으니 딱히 생각해 둔 게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신념이라면 나에겐 이것밖에 없지 않겠어? “나는 힐러다.” 그리고 씩 웃어보였다. 그렇다, 내게 신념이라면 이 말밖에 할 말이 없지 않겠는가. <기사대전이 성립되었습니다. 대결을 시작합니다. 5, 4, 3, 2, 1.> “댄싱 멜로디(dancing melody), 파트 원(part one).” “정령아!” 『네!』 춤추듯 다가오는 글로리시나. 나는 재빨리 정령이를 불렀고 정령이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루시아니안 지팡이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내가 지팡이를 꺼낸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순간 사방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신급에 버금가는 이 지팡이의 빛이었던 것이다. “저것이…….” “미소천사님의 위대한 업적을 장식한 지팡이.” “다시 봐도 멋진 아이템이다.” 나는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정령이가 힘을 쓴 건지 녹색의 빛이 앞을 가로막았고 그것은 둥글게 내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진실의 눈’ 발동!” <‘진실의 눈’ 발동.> <‘진실의 눈’의 숙련도가 5 상승했습니다.> 10분간의 기적을 행사할 수 있는 나의 필살기다. 전에 이걸로 루히비드의 모든 정보를 볼 수 있었지. 이것으로 글로리시나의 정보까지 알 수 있다면 막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성별 : 여 이름 : 글로리시나 종족 : 인간 나이 : 29 직업 : 노래를 부르는 사신 Level : 118 소속 : 무 음악은 세상에 역사와 함께 이어져 왔으며 멜로디는 세상과 겹쳐……. “간파의 눈 발동, 차단.” 내게 보이던 정보가 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내가 보고자하는 정보를 가로막았다? 이 무슨! “절대의 눈동자는 너만의 소유물이 아니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글로리시나. 그녀의 검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저 스킬은! “젠장, 스바르가 마리아 발동!” [행복, 사랑, 그것은 하나의 축복. 고통, 저주, 그것은 하나의 불행.] “블러드 멜로디(blood melody).” 내가 스바르가 마리아를 부르는 동시에 글로리시나의 레이피어가 내 심장으로 향했다. 사방으로 정령이가 보호막을 펼쳐준 상황이었지만 역시나 레이피어는 가볍게 뚫고 들어왔다. 아니 오히려 녹색의 빛까지 감싸 역으로 이용했다. 하티랑 싸울 때도, 마왕과 싸울 때도 보았던 스킬. 그래, 저건 그녀만이 쓸수있는 절대적인 카운터 스킬이었다. - 푹! “………!” “………!” “………!” 내 등 뒤에 있는 유저들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올 정도다. 짜릿한 기분이 배꼽에서부터 짜르르 위로 올라갔다. 이것은 전율. 절체절명의 순간 찾아오는 희열이란 녀석일지도 모르겠다. “어떻게…피했지?” 몹시 불쾌하다는 듯 말하는 글로리시나.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어깨가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아아, 정말 아슬아슬했어. 이 스킬이 아니었으면 절대 피할 수 없었겠지. “크윽, 무기속성 주입, 금(金). 마리아를 부른 직후에 당신 무기에 시전 했거든요. 일단 첫 방어는 저의 승리군요. 그러니 이 검 좀 뽑아 주시겠어요?” 금(金) : 강철화 시켜 방어력이 10%증가, 이동속도 15%저하. 보스몹, 이벤트몹 제외 “속도저하!” “그렇구나! 어쩐지 스피드사신의 검이 금빛으로 빛난다 했어!” “보호막을 가볍게 무효 시키고 공격한 스피드사신이나, 그 짧은 시간에 무기속성주입을 생각해 속도를 늦춘 미소천사님이나 모두 대단해!” “엄청난 공방이다. 정말 놀라워.” 다들 주먹을 꽉 쥐며 우리 둘을 보기 시작했다. “아윽!” 글로리시나가 레이피어를 뽑자 불에 지진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물론 가짜통각이겠지만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통각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나는 마리아로 겨우 치료하고서 다시 자세를 잡을 수 있었다. 지금 내 능력들은 400%로 뻥튀기 되어있는데 가슴대신 어깨를 허용하는게 고작이라니. 내가 과연 한 방 날릴 수 있을까? “…무엇 때문이냐.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필사적인거지?” “헉, 헉. 그러는 당신은 어떤데요? 당신이야말로 왜 그렇게 필사적입니까!” “필사적이라고? 내가?” 살짝 커진 눈. 글로리시나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럴 리가. 게임은 단지 게임일 뿐이다. 아무리 현실같이 구현한다 해도 사람이 만든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필사적? 이 게임에 완전히 감정을 몰입했다는 건가?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킥킥, 그런 것을 부정하는 나조차도 꼴사납구나.” 글로리시나의 몸에서 혈광이 피어올랐다. 그것들은 기이한 문양으로 변하며 몸에 안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뜩이는 붉은 눈. 저것은 피의 맹세! “나를 왜 살려준 거지? 그럴 이유가 있었나? 그래, 그것부터가 마음에 걸렸어. 애초에 너와 난 적대관계였다. 그런데 내가 왜, 너에게 다른 감정을 느껴야하지?” 문양은 점점 더 진하게 몸에 안착했다. 아까완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건…정말 죽는다. “살려주는데 다른 이유가 필요하나요?” “뭐?” “저는 살려줄 능력이 있었을 뿐이고 그 앞에 당신이 있었을 뿐입니다. 단지 그뿐이죠.” “…단지 그뿐이다? 킥킥, 그렇구나. 단지 그뿐이라. 좋은 답변이다. 변형 광세!” 몸에 붙은 문양들이 다시 떨어져 검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검붉은 빛으로 빛나는 레이피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울기 시작했다. - 우우우우우우우우웅―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소음. 검이 마치 피를 갈구하는 것 같았다. “은신.” 내가 질린 표정을 하고 있을 때, 글로리시나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렇게 되면 내가 막을 방법은 완전히 전무하다 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은신은 반칙이잖아! 『주인님! 저요, 제가 있는 곳으로!』 다급함을 알리려는 듯 지팡이가 울기 시작했다. 정령이가 있는 곳이라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 - 파르르르― 내 뒤에서 나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을 보자 내 키만 한 나무가 가지를 흔들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이것은! 그 나무가 무엇인지 눈치 챈 순간 나는 생각을 마치기전에 일단 달리고 보았다. 『하아아아아아앗!』 나무에 등을 안착시키자 정령이가 기합을 내질렀다. 그러자 녹빛으로 빛을 발하는 나무. “나무에서 빛이?” “저, 저건?” “저 나무는 최근에 무럭무럭 자라고 있던 나무 아냐?” “나도 봤어! 그냥 나무가 아니었나봐!” 유저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이 나무는 정령이의 본체, 루시아니안의 나무니까. 여하튼 이것으로 내 등 뒤는 안전하다고 할 수 있었다. 양 옆에는 녹색의 빛으로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으니 내가 최선으로 방어해야 하는 곳은 정면! “땅은 대지의 양기, 하늘은 광활함의 천기, 가운데 서있는 우리는 영원의 우주이니. 나의 존엄성을 바쳐, 나의 신념을 바쳐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가 되리라.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내가 생명의 희생을 쓰자 머리 위에 있던 마리아가 눈을 번뜩했다. 스킬숙련도 100%상승으로 인해 힘을 얻은 것이었다. 정령이 또한 힘을 받은 것인지 가지를 뻗어 나를 완전히 가려버렸다. 이것으로 내가 할 일은 전부 다 했다. 와라, 승부다! “은신해제. 블러드 멜로디(blood melody).” “무기속성 주입, 금(金)!” 어디서 나왔는지 볼 시간도 없었다. 나는 은신해제란 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이것을 시전 했다. “………!” 오른쪽에서 스파크가 튀겼다. 그쪽이었나? 아마 이 녹색 빛을 다시 카운터 하려 했겠지. 하지만 저 스킬은 두 가지 이상의 힘을 카운터 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정령이의 보호막을 카운터 하기 전에 무기속성주입으로 카운터 칠 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한 것이었다. “막았다고 생각하나? 하아아아아앗!” - 빠지지지지지지지지직!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정령이가 괴로운 듯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금이 가는 녹색의 결계. 하하, 이게 무슨. 이걸 힘으로 뚫는다고? 나는 현재 사방이 가지들로 둘러싸여있기 때문에 어디로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젠장, 마리아아아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무작정 부르고 보았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언가 알아들은 것인지 양팔을 벌렸다. “결계를 치료해?” 글로리시나가 경악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마리아의 손에서 뻗어 나온 빛은 정확히 정령이가 펼친 결계에 스며들어 원상복귀 시켜버렸기 때문이었다. 숙련도가 높아지면 생기는 기술인가? 유저뿐만 아니라 마법적인 것도 치료해버린단 말이야? 여하튼 덕분에 글로리시나의 힘보다 방어하는 힘이 더 커졌다. 아무래도 이번 건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한 발 뒤로 물러나는 글로리시나.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눈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을 지우지 않았다. “…너를 처음 볼 때 왜 라이벌의식이 들었는지 이제 알 것 같다. 싸우면서 끝없이 성장하는 너의 힘. 그리고 예상을 벋어나는 행동들. 그것이 두려웠던 거겠지.” “그거야 말로 미소천사님의 하트의 재능이죠.” 저 멀리서 제갈공녀님이 말했는데 원체 조용했던지라 그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하트? 게임상에서 말하는 왕의 재목이란 말인가?” 비웃듯 말하는 글로리시나. 왕의 재목? 제갈공녀님이 전에 말했던 하트란 말이 그런 뜻이었나? “길이 되어 세상을 이끄는 것이야말로 미소천사님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재능이죠. 저희가 왜 이 기사단을 포섭하려 하는지 아시겠나요?” “킥킥, 왕의 재능이라. 재미있구나. 너는 정말로 재미있어! 그래서 나는 너를 머릿속에서 지우질 못했던 거야. 좋아한다, 정말로 찢어버리고 싶을 만큼 너를 좋아하는 거야.” 웃는 그녀의 입 사이로 송곳니가 보였다. 이건 마치 좋아하기 때문에 그만큼 증오하는 애증. 그 모습의 근본을 보는 것 같았다. “기억이 남아있는 곳, 과거를 회상하는 곳, 그곳은 멜로디의 추억이 되리라! 므네모쉬네(mnemosyne)의 선율의 길이 되어라!” 저 스킬은 마왕 베르제브브를 상대할 때 보았던 그녀의 필살기.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는지 하나 둘, 그녀의 몸이 나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허상들이 늘어만 갈수록 힘들어하는 그녀들. 결국 여덟 명으로 나뉠 때는 피를 토하며 무릎 꿇었다. “쿨럭! 헉, 헉. 음악의…아홉 자매, 무사이(mousai).” 저 스킬은 미완성이었던 게 분명했다. 마왕과 싸울 땐 내가 힘을 보태줘서 가능했던 거야. 그런 위험부담이 큰 스킬을 억지로 쓸 정도로 나를 이기고 싶었던 걸까. “막아라. 쿨럭! 그렇지 않으면 넌 죽는다. 미친 듯이 발버둥 쳐서 헉, 헉. 막아보란 말이다!” 일순간에 달려오는 아홉 명의 글로리시나. 그녀의 레이피어는 저마다 핏빛으로 내 목을 노려왔다. - 빠지지지지지직! 아까완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힘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정령이도 마리아도 이번 건 막아내기 힘들겠지. 이것이 무너지면 나는 분명히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앞으로 도약했다. 결계를 벗어나자 내 쪽으로 몰려드는 아홉 명의 글로리시나. 나는 그 중 하나에게 주먹을 질렀다. -푸푸푸푸푸푸푸푹! 정확히 여덟 개의 레이피어가 내 몸속으로 박혀들었다. 대신 나는 본체인 그녀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옆으로 목이 꺾인 놀란 표정의 그녀. 진실의 눈 때문인지 그녀의 본체를 구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커흑!” 내 심장, 복부, 다리, 어깨, 그리고 갈비뼈사이까지 박혀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마리아의 힐 때문인지 절명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후두둑 떨어지는 핏덩이를 보니 너무 현실 같아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일까. 혼란스런 눈으로 나를 보는 글로리시나. 나는 쓰디쓴 얼굴로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그냥, 쿨럭! 하아, 하아. 그냥 한 마디 하면 되잖아요. 크윽! 살려줘서…고맙다고.” “나는…….” 핏물이 자꾸 올라와 쉽게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이런 건 대충 구현해도 되건만 정말 죽는 것 같아 이맛살이 다 찌푸려졌다. 나는 그녀의 기분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나에겐 저 여성과 비슷한 누나가 있으니까. 누나도 한 때 자신의 감정표현을 잘하지 못했었다. 항상 나를 괴롭히고, 짜증내고, 툭하면 싫다고 욕하기도 했었지. 하지만 그것이 전부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한 행동들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항상 반대로만 행동하는 걸까. 저렇게 글로리시나처럼 내 마음을 알아 달라 갈구하는 눈빛으로 그런 소리 한들 제대로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타테!” “미소천사님!” “단장님!” 저 멀리서 태식형이 달려왔다. 미소천사 단원들도 전부 달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신경 쓰는 대신 글로리시나의 어깨를 툭하고 쳤다. “나, 나는…….” 글로리시나는 수없이 눈빛이 흔들렸다. 그래, 그 정도면 됐겠지. 내가 할 일은 전부다 끝났다. 세상이 점점 어두워졌다. 졸음이 갑자기 몰려왔다. 죽기 전에 일어나는 현상치고는 진짜 같은데? 서서히 눈이 감겼다. 아아, 오늘 한나한테 사과하려고 접속했는데 결국 이렇게 하루를 버리겠구나. 내일은 고백할 수 있을까? 세상이 점점 어두워졌다. 눈꺼풀이 자꾸만 무거워졌다. 절명이라도 했으면 이런 기분도 몰랐을 텐데. 썩 상쾌하지 않은 기분이구만. 다리가 풀려 쓰러지려하자 태식형이 나를 부축했다. 아아, 역시 형밖에 없다니까. 세상이 점점 어두워졌다. 제갈공녀님, 화선녀님이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정화누나한테 말도 못했네. 그것도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고백할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니 원. 하아, 더 피곤해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자야겠어. 내일, 내일 다시 생각해 보자고. 그리고 세상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4일전 “나대리, 쉬엄쉬엄 해. 그러다 몸이라도 상하면 어쩌려고.” “아닙니다, 실장님.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 이거 역시 NPC부서 엘리트 답구만!” 저 씹어 먹을 실장, 언제부터 내가 엘리트였냐. 어떻게 사람이 저리 바뀔 수 있는 거지? 내가 마왕 역할을 임명받아 뇌파를 빌려주고 플레이한 것이 본사에서 크게 호평 받아 우리 서울지부의 입지가 크게 증가되었다. 그 일로 인해 승진한 전 팀장이었던 실장이 저러는 것이었다. 아우, 내 위만 아니었다면 벌써 밟아버렸을 텐데. “커피라도 타다 드릴까요?” “아, 김 주임님 괜히 저 때문에 그러지 마세요.” “지금은 저보다 높은 직분이니 계속 님자 붙이지 마시라니까요.” “아, 뭐. 익숙지가 않아서.” 그 일로인해 나 역시 한 단계 위로 올라가 대리가 될 수 있었다. 나쁘진 않았지만 그나마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과 어색해진 상황도 있어서 그다지 좋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그보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셨나요?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는데.” “조금 과로했나 봐요. 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나를 걱정해주고 있는 분은 NPC부서의 주임으로 있는 김상희 주임이다. 지금은 내가 이 부서의 대리로 있는지라 나보다 계급이 낮아졌지만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잘 대해주시던 분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님 자를 때지 않고 있었다. 그나저나 내 얼굴이 그렇게 심한가? 얼굴을 매만져보니 까끌한 느낌이 퍽 좋진 않았다. 안 그래도 오늘따라 일손이 잡히지 않는데 정말 과로라도 한 건가? 아무래도 옥상에 올라가 담배라도 한 타임 해야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유난히 추웠다. 이제 크리스마스도 다가올 때라 그런지 더욱 추운 것 같다. 시간을 보니 여덟 시 남짓. 밖에서 집 안을 보니 불은 거실을 제외한 채 모두 꺼져있었다. 이놈 또 게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우리 집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집이었다. 두 평 정도의 작은 정원이 있고 그 주위는 내 키만 한 담벼락이 둘러싸고 있다. 거실에는 베란다처럼 방탄유리로 된 벽이 있어 이곳으로 밖을 보거나 반대로 안을 보곤 했다. 지금은 커튼으로 가려져있어 불이 켜져 있는지 아닌지만 확인 가능할 뿐이지만. 아홉 개 정도의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어보니 꼭 먹구름이라도 깔린 것처럼 어두침침했다. “나왔어.” 구두를 벗으며 외쳤지만 역시나 아무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 녀석, 완전히 빠져든 모양이네. 구두를 벗으니 세상이 바뀐 것 같이 편해졌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런 작은 행복이라도 없으면 아마 일 못했을 거야. 백을 소파위에 던져두고 마이를 벗었다. 일단 샤워부터 하고 밥을 먹어 볼까. 샤워를 마치고 오랜만에 손을 걷어붙였다. 오늘의 요리는 김치찌개! 내 식성 같아선 동태찌개를 먹고 싶지만 이놈의 동생이 생선이라면 질색을 하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었다. 이것이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인가? 나는 절대 혼자 살아야지. 어휴, 결혼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야, 나기찬! 밥 먹어…라고 말해봐야 들릴 리 없나.” 내가 왜 동생 밥 먹이는데 방까지 쳐들어가서 일깨워주어야 한단 말인가. 최신 캡슐 시스템은 밖에서 하는 말도 게임 안에서 메모화 되어 들린다고 하던데. 이번 월급 받으면 하나 장만해 줘야하나. 아, 그래봐야 5일 남았나. - 벌컥. “내 걸림돌아 이제 일어나서 밥 좀 처먹지 않으련? 누님이 매번 찾아와…….” 혼자 구시렁대며 종료스위치를 누르려는데 뭔가 캡슐 안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온통 검은빛으로 물들어있는 캡슐 유리. 원래 푸른빛의 유리였으니 색이 탁해진 거지 검은색의 무언가가 묻은 건 아닐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건 뭐지? 황급히 종료버튼을 누르고 캡슐 뚜껑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찐득한 검붉은 피가 뚜껑에 눌어붙어 껌처럼 죽 늘어났고 그 안에는 입가에 연신 피를 토하며 쓰러져있는 동생이 보였다. “기찬아―!” 내 생에 최고 놀란 일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4일전. - 띠. 띠. 띠. 아직도 기찬이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까지 산소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을래? 얼마나 엄마와 나를 걱정시켜야 속이 풀리니? 뚝뚝, 바지사이로 또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이놈은 참으려하면 할수록 더 비집고 나와서 문제다. 나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소연아…….” 옆에 있던 엄마가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따뜻하지만 조금 떨리는 손. 엄마역시 눈물을 참고 있는 것이었다. “엄마, 미안해…….” 괜스레 죄송스러움이 몰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달 전에 게임하지 말라고 하던 엄마를 말리지 않는 건데. 전부 내가 막은 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니, 적어도 며칠 전에 하지 말라고 확실히 말했다면 이런 일까지 벌어지진 않았을 텐데. 그랬을 텐데! - 똑 똑. 병실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열어보니 의사선생님과 두 명의 간호사. 그리고 그 뒤에는 태식오빠가 서있었다. “울었어?” 화장을 하지 않아 모를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눈이 부은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황급히 눈을 비볐다. 이런 모습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아. “일단 받아.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모님.” “아, 사위 왔는가?” 여전히 오빠를 사위로 알고 있는 엄마. 넉살도 좋지. 장모님이 뭐야? 하지만 지금 화낼 기분도 아니라서 그냥 힘없이 과일바구니만 넘겨받았다. “으음,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나요?” 우리들을 지나쳐 기찬이의 상태를 확인하신 의사선생님은 엄마를 보며 물었다.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떻게 되는 건가요.” “으음, 이건 아무래도 특별한 뇌파이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거 같군요. 알아본 결과 뇌 쪽에 많은 손상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떤 이상으로 올지는 환자가 일어나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턱을 쓰다듬으며 말하는 의사선생님. “윤간호사, 일단 이 환자의 상태를 계속 체크하고 무슨 일 있으면 나를 부르게. 심박은 잘 보고 있겠지?” “네, 선생님.” “이정도 밖에 도움이 되지 않아 죄송합니다.” 엄마는 의사선생님의 말에 답하는 대신 고개를 숙인다. 아마 심적으로도 많이 복잡할 것이었다. 의사선생님이 밖으로 나가고 남아있던 한 간호사가 여러 가지 기기를 체크한 뒤 나가자 적막함이 방 안에 감돌았다. 태식오빠는 잠시 그런 우리 둘을 보다 어렵게 말을 꺼내었다. “심각한 상황에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기찬이의 상태, 제가 알아보면 안 되겠습니까?” “알아보다니 무슨 말인가?” 지친 눈으로 오빠를 올려보는 엄마. 나 역시 무슨 말인지 몰라 오빠를 보았다. “제가 아는 분 중에 뇌파이상에 대해 잘 알고 계신분이 있습니다. 안 그래도 지금 아래 있으신데…….” “설마 임 박사님을 말하는 거야? 현실 같지도 않은 이야기 여기까지 끌고 오지 마! 대체 오빠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무슨 얘기인가 했더니 정식모임 때 들려주었던 말 같았다. 그때의 정식모임은 미소천사 기사단의 모임이 주가 아니었다. 실은 오빠와 임 박사님과의 만남, 그리고 그와 간련된 사람들을 소개시켜주는 자리였던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어쩌다보니 듣게 되었다. memory뇌파와 그로인해 생기는 위험성. 전부 가설일 뿐이지만 꽤나 사실적인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아펜하르트에 취직한 소수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소연아, 정식모임 때 했던 이야기는 진짜야. 너도 어느 정도 긍정했잖아! 지금 그 일 때문에 기찬이가 저런 상태에 빠진 걸지도 모른단 말야!” “왜 하필 기찬이야! 수만,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게임하는데 왜 하필 우리 기찬이냐구!” “그건…나도 몰라. 하지만 지금 그걸 확인하려고…….” “듣기 싫어! 그런 말 할 거면 나가!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소연아!” “너희 둘 다 조용히 하렴.” 엄마였다. 옆을 보니 꽤나 화가 난 상태의 엄마가 보였다. “나 몰래 무슨 얘기가 오간지 모르겠다만 기찬이에게 해가되는 일은 아니리라 믿네.” 오빠를 올려보는 엄마. 태식 오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절대 해가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럼 데리고 오게나.” “엄마!” “너는 조용히 해! 지금 환자가 옆에 있는데 소리를 질러야겠니?” “하지만……!” “어서 데려오게.” “예, 알겠습니다.” “이미 와 있다네.” 그때 문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보인다. 차분하게 기른 수염과 준수한 외모. 모임에서 보았던 임장순 박사님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아주머님. 저는 아드님이 하고 계신 아펜하르트 게임의 최초 설계자를 맡았던 임장순이라고 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임 박사님. 어머니는 게임 설계자라는 말에 벌떡 일어나셨다. “게임 설계자라고요?” “예, 제가 아펜하르트라는 게임을 설계를 맡고 책임을 지던…….” - 짝! 나와 태식 오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누가 손을 쓰기에는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 버린 일. 임 박사님의 고개가 옆으로 치우쳐졌고 손을 올려붙인 엄마는 입술을 꽉 깨물고 계셨다. “당신이…당신이 만든 게임 때문에 우리 기찬이가……!” “…장모님.” “…엄마.” 나는 차마 말을 할 수 없다. 엄마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나 역시 엄마였다면 그렇게 행동했을 거였다. 그래서 태식 오빠한테 화냈던 것일지도 몰랐다. 누구라도 붙잡고 화풀이하지 않는다면 내가 한 잘못 때문에 쓰러질 것만 같았으니까. 임 박사님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화를 내거나, 반대로 사과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냥 똑바로 엄마의 눈을 주시할 뿐이었다. “박사님…….” 태식 오빠가 보다 못해 임 박사님을 불렀다. 그때 임 박사님은 자조적인 미소로 하늘을 보며 말했다. “내가 저지른 일은 이런 것이야.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지. 게임에서와 같이 현실에서도 신이 있다면 나는 이미 지옥에 떨어졌을 거네.” 그리고 임 박사님은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얼마든지 때려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아드님의 상태를 알아보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엄마는 따귀를 때린 손을 잡은 채 말하지 않으셨다. 아니, 못하는 거겠지. 증오와 미안함 때문에. 임 박사님은 그 행동을 허락으로 받아들이고 007가방에서 무언가 꺼내었다. 머리에 쓰는 것같이 링 모양의 기계였는데 처음 보는 기계라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기를 기찬이 머리에 조심스럽게 씌우자 윙윙거리는 기계. 잘못되는 거 아닌가, 조바심이 났다. “역시나 memory뇌파가 하나도 없네.” “…그렇군요.” 침울해하는 임 박사님과 씁쓸한 표정으로 답하는 태식 오빠. memory뇌파가 없다니 무슨 소리일까. “일단 아주머님. 기찬군은 조만간 깨어날 겁니다.” 그 말에 확 밝아진 얼굴로 임 박사님을 보는 엄마. 하지만 뭔가 문제가 있는지 임 박사님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허나, 모든 기억이 사라진 형태가 되겠죠. 간단히 말해 아기가 될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왜 기억이 사라져요!” 임 박사님은 엄마의 말을 들으며 기기를 다시 회수한 후, 답했다. “memory뇌파는 기억을 관장하는 뇌파입니다. 뇌에 직접적인 타격이 아닌지라 기찬군은 일어나겠지만 모든 뇌파가 사라져 처음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아기가 된다는 것이죠.” “들어본 적도 없어요! 속일생각 말아요! 당신들이야말로 지금 사기 치는 거죠!” 엄마는 영문 모를 소리에 광분했고 임 박사님은 그런 상황을 예상한 건지 명암을 하나 주며 말했다. “믿지 못하실 겁니다. 기찬 군이 깨어난 후에 믿게 되면 여기로 찾아오십시오. 지금 시간이 없어서 저는 여기 오래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소연양이라고 했나?” “네.” “동생을 잘 돌봐주게. 이 동생을 정상으로 돌릴 수 있는 건 소연양 뿐이네.” “그게 무슨…….” 그때 태식 오빠가 내 팔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저게 무슨 말일까. 자꾸만 끌려 다니는 것 같은 기분에 몹시 속이 상했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들킬 거 같습니다.” “알겠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태식 오빠와 임 박사님은 병실을 나갔다. 엄마와 나는 그 모습을 멀뚱히 불 뿐이었다. “기찬아, 너는 대체 무슨 일에 휘말린 거니?” 하지만 내 물음은 띠, 띠 거리는 기계음만이 답해줄 뿐이었다. 그날 임 박사님의 말대로 기찬이는 깨어났다. 엄마와 난 눈뜬 것만으로도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정말, 감사드렸다. “기찬아, 밥 먹어.” “아웅?” “응, 그래. 밥.” “까하!” “응, 그래.” “까아하!” “응.” “아?” “응.” “아응.” “응…….” 그날이 내 두 번째 상처받은 날로 기록되었다. 의사선생님 말로는 뇌손상으로 인해 기억상실에 걸렸다고 하는데 임 박사님의 말을 들은 후라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결국 기찬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지금 기찬이의 수발을 드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핸드폰으로 회사에다가는 휴가를 신청했다. 이대로 기찬이가 나아지지 않으면 회사까지 포기할 작정으로 임시적인 휴가를 신청한 것이었다. 엄마는 결국 쓰러지셨다. 아무래도 스트레스와 충격들이 겹쳤던 모양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내가 힘내야지! 기찬아! 목욕하자!” “꺄하!” 티 없이 웃는 모습을 보니 어릴 적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나 놀기 바빠 녀석이 옷자락을 붙잡고 놀아달라는 것도 뿌리쳤었는데. 엄마와 아빠는 만날 기찬이가 여성스럽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뭐, 항상 골목대장이었으니까. “이 녀석 가만히 있어.” 옷을 벗기려는데 자꾸만 딴 짓해서 힘이 들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무거워 진걸까. 나보다도 작았던 녀석이 이렇게 커버리고. 내가 사춘기 때는 기찬이를 많이 괴롭히곤 했었다. 동생이 귀찮기도 했고 그냥 존재 자체가 너무 싫었달 까? 그런데 그 마음들이 사실은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란 걸 깨달았다. 문제는 그 마음을 들키기 싫어서 더 괴롭혔다는 것이겠지. 그때는 녀석이 나만 보면 꼬리만 강아지처럼 수그러들었었는데.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기찬이가 나를 무서워하게 된 일이. “어, 이놈 꽤나 크네.” 너무 오랜만에 봐서인지 갑자기 다 부끄럽다. 의식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눈이 자꾸만 그곳으로 향했다. 내가 뭐하는 짓이람. 혹시 누가 보는 사람은 없겠지?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얘가 게임에 빠져든 이유는 어쩌면 나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 나는 녀석이 많은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땐 내가 어려서, 상처를 보듬어줄 가슴이 없었기 때문에 녀석을 꼭 안아주지 못했다. 그것이 현재까지도 미안함으로 남아 게임을 막지 못한 것이었다. “아웅?” “으으응, 아냐.” 나도 모르게 기찬이의 손을 꽉 잡아버린 모양이었다. 녀석의 눈이 살짝 걱정을 내비쳤다. 너는 옛날부터 그랬지. 자신보다도 항상 내 걱정 한건. “깨끗이 씻자.” “깨그치?” “말할 수 있어? 그래! 깨끗이!” “깨그치!” “응! 깨끗이!” “꺄하! 깨그치!” “응!깨끗이…깨끗…으흐흐흐흑!” “아?” “으흑,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기찬이의 손을 꼭 붙잡고 오열했다. 그동안 감춰두었던 모든 눈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이번만이야. 나, 강해질 거니까. 그러니까…이번만은 모른 척 해줘. “소연아, 엄만 일 그만둘 테니까. 너는 그만 회사 나가봐. 기찬이는 엄마가 돌볼 거야.” “싫어. 기찬이는 내가 돌볼래. 일 그만두기로 이미 결심했어.” “무슨 소리 하는 거니! 한창 젊은 나이에!” “엄마야말로 여행사일 오래했으면서 갑자기 그만두는 이유가 뭐야. 만기는 채워야지.” “너는 젊어. 엄만 이제 다 늙었다. 너까지 망가지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그러니까 소연아, 응?” 심장이 조여 왔다. 너무도 아프다. 주름살 가득한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당장이라도 찢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돌보게 해줘. 그러고 싶어. 엄마, 딸내미의 마지막 부탁이야.” “소연아…….” “당분간은 걱정 없으니까. 엄만 어서 돌아가 봐. 병원도 급하게 온 거잖아.” “이 상황에 무슨 일이 손에 잡히겠니. 엄마도 휴가 신청 넣어뒀다.” 더욱 수척해진 얼굴로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셨다. 하긴 나도 그랬으니. “그래…그럼 엄마, 그 쪽지 줘.” “쪽지라니…설마, 너!” “응, 내가 가볼게. 지금 사실이 된 이상, 한 번은 가봐야 하잖아.” “그건 엄마가……!” “아니, 엄마는 지금 움직일 수도 없잖아. 기찬이나 돌봐줘. 어차피 얘기만 할 거니까 돌아와서 말해줄게.” “……….” 엄마는 한동안 나를 보더니 결국 한숨과 함께 쪽지를 내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고 밖으로 나왔다. 사뭇 쌀쌀한 날씨. 어제는 더 추웠음에도 버틸 만 했는데 오늘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나도 많이 지친 걸까. 이럴 땐 오빠라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소연아.” “…오빠가 무슨 백마 탄 왕자님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내가 바랄 때 짠하고 나타날 수 있는 거지? “일단 타. 춥다.” 차 뒷문을 열고 나를 끌어당기는 오빠. 안은 오래전부터 히터를 튼 것인지 훈훈했다. 갑자기 몸이 따뜻해지니 졸린 걸.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어?” “병실에서 나와 박사님을 대려다준 직후, 바로.” “내가 나올 줄 어떻게 알고 무작정 기다린 거야? 전화라도 하지.” “나올 줄 알았어.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오빠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차를 운전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그렇게 정적을 감싸 안고 질주했다. 그러다 담배를 빼무는 오빠. 그때 순간 백미러 사이로 나를 힐끔 보더니 담뱃갑채로 나에게 내밀었다. “자.” 나는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됐어. 끊었거든.” “뭐? 언제?” “오늘.” “너 담배는 중학교 때부터 피웠었…뭐, 그래. 알았다.” 오빠는 그렇게 말하며 빼어 물던 자신의 담배를 구겨버렸다. 내가 의아한 눈으로 보자 피식 웃으며 말하는 오빠. “나도 오늘부터 끊으련다.” “킥!” “큭큭.” 우리는 그렇게 다시 도로를 질주했다. “여기야?” “응, 다 왔어.” 차가 멈춘 곳은 음침하기 그지없는 뒷골목이었다. 웬 구불구불한 길로 들어오나 했는데 이런 철문 앞이라니. 무슨 비밀기지도 아니고 참. “일단 들어가기 전에 소연아, 마음 단단히 먹어라.” “미안하지만 나는 이미 강해졌어.” 내 눈을 잠시 바라보는 태식 오빠. 오빠는 나에 대해 너무 잘 아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강해지기로 결심했구나. 안심이다, 지금의 너라면 누구도 막을 수 없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이끌고 철문을 두드렸다. “바람은?” “하나다.” 안에서 말이 들리자 바로 답하는 오빠. 암호인가? 정말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광경이었다. 철문은 곧 열렸다. 여기저기 녹슬었음에도 마찰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너무도 고요하고 신비함으로 가득한 것들 투성이었다. 이 안은 얼마나 더 나를 놀라게 할 건지 궁금할 정도네. 안쪽은 지하실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자 외소한 철문과는 다르게 수많은 기기들이 한 가득 있었다. 수천만 원은 할 것 같은 엘시디 모니터와 열 대 가량 되는 컴퓨터. 배배꼬인 전선들이 바닥에 즐비하게 늘어져있었고 한쪽에는 최신식 캡슐도 다섯 대 가량 마련되어있었다. 그 안에는 두 명의 사람이 있었는데 한 명은 아까 문을 열어준 뚱뚱한 인상의 눈이 작은 사람이었고, 또 한 명은 짧은 단발머리에 흰색 가운을 입고 있는 여성이었다. “일단 소개할게. 여기는 뇌파인식 게임의 전문가, 주조철.” “안녕하슈.” “안녕하세요.” 그다지 예의가 묻어있지 않아 나도 비슷하게 행동해주었다. 아무래도 여자에게 그다지 관심 없어하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이쪽은 뇌파 연구가이자 임박사님의 조수였던 민혜리씨.” “반가워요.” “저 역시 반갑습니다.” 목을 살짝 까닥이며 미소 지은 모습이 상큼했다. 이렇게 예쁜 여성이 태식 오빠와 함께 있었다는 건가? 내가 살짝 오빠를 노려보자 오빠는 난감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후후,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남자한테 그다지 관심 없거든요. 그보다 저는 당신에게 오히려 관심이 가는걸요? 이렇게 예쁘다니. 태식 씨가 자랑할 땐 콩깍지려니 했는데 이거 오히려 말이 더 모자란 격이네요.” 민혜리씨라 소개받은 단발머리 여성이 재미있어하는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으음, 그다지 좋지 않은 기분에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잡담은 그쯤하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소연아, 여기 앉아. 지금부터 설명할게. 조철아.” 오빠는 나게 작은 원형 의자 내와 앉혔고 주조철이라 소개받은 뚱뚱한 남자를 불렀다. 주조철씨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어깨를 푼 뒤, 컴퓨터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지금 저 여자의 동생이 memory뇌파를 흡혈 당했다고 했지? 아펜하르트 본 서버 아이피를 추적해 해킹해본 결과 2.45전류로 원자단위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었어. 네가 말했다시피 그 소년의 기절 시간과 뇌파 이동시간을 조합하니 딱 맞아 떨어지더군. 문제는 이미 떠나버린 뇌파를 잡아두거나 다시 생성하기 불가능하단 점이야.” “불가능해? 어째서?” 태식 오빠도 지금 듣는 이야기들은 처음인지 궁금증을 물어보았다. 그 말을 답변해준 사람은 민혜리씨였다. “그 일은 제가 설명하죠. 뇌파는 사람마다 고유 전류가 흐르고 있습니다. 특히 어디에도 머물 수 있는 memory뇌파는 그 전류가 자신과 딱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거부반응을 일으키죠. 심장을 이식받은 사람이 전에 심장을 쓰던 사람의 기억을 기억하는 것도 거부반응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임의적으로 만든 뇌파전류를 다시 주입하면 그 소년은 자신의 기억을 기억해내지만 그건 이미 자신이 아닌 타인의 기억이 돼 버립니다. 즉, 자신을 자신이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죠. 그럼 최고의 방법은 이미 떠나버린 뇌파를 다시 잡아오는 경우인데.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아펜하르트 본사의 역추적 당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지.” 마지막 말은 주조철씨가 말했다. 나는 지금 이야기의 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memory뇌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들었지만 너무 전문가적인 말들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말은 조금 의문이 들었다. “아펜하르트의 역추적을 당한다뇨. 말씀하시는 말투가 꼭 들키면 죽는다는 투로 들리…….” “맞아, 죽어.” 주조철씨는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비웃음 가득한 얼굴. 그는 다시 말했다. “내 동생도 죽었다. 아펜하르트 게임을 해킹하다 들켰다는 이유 하나로. 언론매체에서는 단지 뇌파이상으로 죽었다 할 뿐이지만 나는 알아. 회사 측 사람들이 죽였다는 사실을.” “그게 무슨.” “주조철씨 말이 틀리지 않아요. 소연씨, 만약 이 일로 뛰어든다면 이것하나만은 알고 계셔야 할 거예요. 아펜하르트 회사 쪽은 믿지 않을 것을.” 민혜리씨도 주조철씨의 말을 옹호했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얼마나 아펜하르트 회사가 증오스러우면 거리낌 없이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물론, 나 역시 동생이 뇌파에 관련된 일을 당해서 증오스럽긴 하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믿지는 못해 그나마 덜했는데 저 사람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직도 믿음이 안 가나? 하지만 조만간 알 수 있을 거야. 네 동생의 뇌파를 이용해 무언가 터트릴 것 같으니까.” “터트린다? 알아냈나?” 태식 오빠가 물었다. 주조철씨는 다시 타자를 치며 말했다. “여기 보면 알 수 있어. 지금 보다시피 아펜하르트 회사 측 모든 추적이 불가능하다. 이건 새로운 방화벽이야. 그동안 모든 방화벽을 지우고 최신식으로 바꾸었지. 문제는 왜 하필 지금인가.” “…뭔가 크게 감춰야할 것이 생겼다?” “그래, 게임상에서 뇌파를 직접 흡혈했다는 건 컴퓨터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조금만 알아봐도 쉽게 알 수 있는 문제야. 그 증거는 아마 저 방화벽 안에 있겠지? 그럼 왜 뻔히 위험이 보이는 짓을 한 걸까. 지금까지 그렇게 몰래몰래 일을 진행시켜오던 것들이 말야.” “그렇군, 막바지에 들어온 거야!” 태식 오빠는 책상을 쾅 치며 말했다. 저런 진지한 모습의 오빠는 오랜만에 보았다. “아마도 저 여자의 동생 memory뇌파로 인해 모든 조각이 모인 걸지도 몰라. 어쩌면 지금이 폭풍전야일지도.” 갑자기 싸해진 지하실. 왠지 속에서 짜증이 일어났다. “당신들이 하는 얘기는 전부 상관없어요. 제 동생, 기찬이를 예전으로 돌릴 방법은 있는 건가요? 저는 그 얘기를 하러 온 것뿐이라고요!” “방법은 하나 있어요.” 민혜리씨가 팔짱낀 채 나에게 말했다. 나는 말없이 민혜리씨를 보았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떠나버린 뇌파를 잡아두거나 다시 생성하기 불가능해요. 그럼 방법은 단 하나, 잔류하고 있는 본인의 뇌파를 살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뇌파를 살린다고요? 아까 말을 들어보니 그 memory뇌파라는 게 전부 흡수당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니요, 아직 유일하게 잔류하고 있는 곳이 있어요.” “그게 어디죠?” 민혜리씨는 나를 똑바로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바로 당신의 몸을 스캔한 게임 캐릭터죠.” 그게 무슨 말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내 몸을 스캔한 게임 캐릭터? 그건 기찬이가 그동안 사용했던 미소천사가 아닌가. “그게 무슨 말이죠?” 내 물음에 답한 건 주조철씨였다. “말 그대로다. memory뇌파는 사실 잔류하기 쉬운 성질을 가지고 있어. 보통은 감정을 크게 좌우하는 심장이나, 눈에 안치하곤 하지. 허나, 뇌파인식을 이용한 게임이 나오고 나서 memory뇌파의 잔류는 극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최고의 감정을 좌우하는 것이 캐릭터가 돼 버렸으니까.” “게임이라면 단지 프로그램 아닌가요? 어떻게 그런 곳에 사람의 감정이 머무를 수 있다는 거죠?” 이번 물음은 민혜리씨가 설명했다. “보통의 게임이라면 소연씨말대로 절대 불가능할 겁니다. 허나, 뇌파인식 게임은 뇌파 자체를 사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전류로 사람의 뇌파를 같이 이동시켜 프로그램에 안착시키는 것이 바로 뇌파인식 게임의 기본 틀이니까요. 그것을 악용하는 곳이 아펜하르트 회사죠.” “도무지 모르겠어요. 왜 그런 위험한 게임을 만들고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죠? 무엇 때문에 이런 게임이 나온 거예요!” 내 말에 모두들 씁쓸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태식 오빠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뇌파인식 게임은 욕망의 최종 정점이 아닐까? 늙어서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 하는 욕망들이 뇌파인식 게임의 발단이니까.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또 그것을 점검하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욕구만 채워진다면 손을 내미는 게 인간이잖아.” 인간 본연의 욕망. 지금 당장 편해진다면 훗날을 보지 않고 매달리는 우리들. 한때 그것 때문에 자연을 훼손시켜 지구의 종말을 야기한 적도 있었다. 부랴부랴 막아서 어찌어찌 넘어갔지만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우리들은 다시 그런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런 이야기는 됐어요,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럼 결국 기찬이를 원래대로 돌릴 방법은 무엇이죠?” 민혜리씨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소연씨의 몸을 스캔한 게임 캐릭터에 기찬군의 memory뇌파가 남아있어요. 허나 그 memory뇌파는 매우 불안한 상태죠. 그것을 완전한 형태로 되돌려야 합니다. 그런 다음 기찬군의 몸을 다시 그 캐릭터에 접속시켜 완전한 형태로 만든 memory뇌파를 주입하는 거죠.” “그 memory뇌파라는 것을 완전한 형태로 되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그야 당연히 당신이 들어가야지.” 주조철씨였다. 근데 저 뚱보자식 아까부터 왜 반말이야! 마음 같아선 확 다 엎어버리고 싶지만 기찬이 때문에 참는다. 으드득. “…제가 들어가다니요?” “그 게임 접속방법이 본인의 홍채만 인식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전혀 그 캐릭터를 터치할 수 없어. 그러니 자신이 직접 들어가야지.” “내가 들어가면 그냥 해결이 되는 문제인가요?” “아쉽지만 그건 아니에요.” 그 부분은 조금 어려운 문제인지 민혜리씨는 살짝 인상 썼다. “memory뇌파자체가 아직 정확히 규명된 것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복구가 되는지 저희는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뇌 자체가 하나의 소우주와 같으니까요. 너무 많은 변수 때문에 수학 기호처럼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제 예상으로는 아마 당신이 그 캐릭터에 들어가면 부분부분마다 기찬군의 생각을 비디오처럼 엿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혹은 기찬군이 하던 습관을 따라할지도 모르죠. 그렇게 그 조각들을 하나하나 찾아 다시 경험하면 되는 겁니다.” “그것만으로 되는 건가요?” “그것만이 아냐.” 저 뚱보자식이 다시 껴들었다. 자꾸 거슬리네, 저놈. “그 기억들이 언제 찾아질지도 몰라. 빠르면 한 달. 늦으면 몇 년이 걸리는 문제다. 게다가 아펜하르트 회사에서 memory뇌파를 빼낸 캐릭터가 버젓이 다시 나돌아 다니는데 가만둘 거라 생각해? 당신이 하려하는 건 단순히 게임이 아냐. 뇌파를 이용한 살인이 가능한 곳이다. 정말 살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 “……….” 살해도 가능한 곳. 뇌파인식 게임이야말로 완전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 말하고 있었다. “제가 죽지 않을 방법은 없나요?” 내 말에 민혜리씨가 가운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들었다. “이건 캡슐 전용 USB에요. 이것을 이용해 기찬군의 memory뇌파를 저장시키거나 반대로 당신의 memory뇌파를 백업하는 것이 가능하죠. 이것으로 아펜하르트 회사는 당신의 memory뇌파를 빼버려 살해하는 짓은 불가능할 거예요. 그 부분은 안심해도 좋습니다. 허나 이것은 시험단계 샘플이기 때문에 오래 사용은 불가능합니다. 일주일 후, 교체해야할 거예요. 그 전까지 쉽게 풀려버리면 좋겠지만 그 다음도 생각해 두셔야 할 겁니다.” 나는 USB를 건네받았다. 이것이 기찬이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가. “하지만 하나 더, 저희가 소연씨를 위해 만든 것이 있어요. 이쪽으로 누워보시겠어요?” “네?” 민혜리씨가 가리킨 곳은 어느 한 캡슐 안이었다. “지금부터 소연씨가 가지고 계신 USB안에 memory뇌파를 백업시키고 더불어 게임 안에 저장되어있는 소연씨의 모든 memory뇌파를 활성화 시킬 거예요.” “memory뇌파를 활성화 해요?” 내가 계속 몰라 하자 태식 오빠가 내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간단히 말해 잠재능력을 모두 일깨워준다는 거야. 이 게임은 뇌파인식이 80%를 웃돌고 있지. 그래서 너의 memory뇌파와 게임설정을 100%로 맞춰 저장시키면 게임 안에서 너만의 스킬 같은 건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게 돼. 사람마다 잠재능력은 모두 달라서 얼마나 좋아질지는 모르지만 없는 것보단 낫잖아?” 태식 오빠의 말을 받아 민혜리씨가 이어 말했다. “혹시 다른 게임해본 적 있으세요? 자신이 쓴 주된 능력이 잠재능력으로 남아있겠죠.” 다른 게임을 해본 적이 있을 리 없지. 게임의 게 자도 모르니까. 그래도 내가 해본 것이라면……. 그 일이 나에게 엄청난 일이 되었을 줄은 당시에 상상도 하지 못했다. “후우, memory뇌파라.” 민혜리씨에게 받은 USB를 빙글 돌리며 말했다. “힘든 싸움이 될 거야. 기찬이의 memory뇌파를 타인이 받으면 어떻게 될지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거든. 혹여 머리가 아프다거나 혼란스러움이 찾아오면 바로 접속을 종료해야 돼. 알았지?” 운전하며 말하는 태식 오빠의 말을 시큰둥하게 들었다. 내 memory뇌파 백업을 마친 뒤 밖으로 나온 우리 둘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솔직히 지금 상황이 모두 믿기지 않았다. TV에서나 보던 미스터리 물을 현실로 목격했달 까? memory뇌파의 위험성과 아펜하르트 회사의 악행. 사람을 죽이는 게임 자체도 누가 이런 걸 믿으려 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덤덤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빠.” “응?” “나한테 이렇게 까지 얘기하고 도와주는 이유가 뭐야?” “……….” 솔직히 그것부터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나를 도와주는 것인가. 바보가 들어도 지금 문제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위험부담이 있는 짓을 왜 하는 것인가. 단지 나와 내 동생 때문에. “동생의 문제는 안 됐지만 그건 우리에게도 하나의 기회거든.” “기회?” 태식 오빠는 정면을 똑바로 주시한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가 동생을 원래대로 돌린다면 그건 USB에 고스란히 남게 될 거야. 즉, 발뺌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 그렇구나. 이 USB는 증거자료로도 사용할 생각이었어. “도대체…오빠는 뭐야?” 결국 말하고 말았다. 그동안 오빠에겐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각자의 사정이 있으니까. 나와 이어진 일이 아니라면 말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와 확실히 관련이 있게 되었기 때문에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 국가소속 비밀결사대, memory팀이 내 직업이야.” “그럼 국가에서…….” 오빠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던 건 무엇 때문인지는 알겠지? 허나, 지금은 너도 관계자니 굳이 숨길 필요는 없겠지.” “내가 오빠의 정보를 떠벌일 수도 있다 생각은 안 해?” 오빠는 그 말에 살짝 백미러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그 짧은 말은 많은 이유를 내포하는 듯싶었다.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지금까지 일을 설명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아무래도 자신이 직접 들어봐야겠다고 태식 오빠와 단 둘이 면담하기 시작했고 나는 USB를 가지고 기찬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기찬이는 아기 새처럼 잠들어 있었다. 세상 근심걱정 하나 없는 아기 같은 얼굴. 그 모습을 보니 괜히 나 혼자 고민하는 게 바보같이 느껴졌다. 어차피 동생의 뇌파다. 피가 이어진 친동생의 뇌파인데 아무렴 나에게 피해가 올까. “후하.” 한 번 크게 심호흡하고 USB를 캡슐에 꽂았다. 이제부터 나와 게임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기찬이의 기억들을 되돌리고 아펜하르트 회사의 악행을 전부 밝힌다. 그것이 주된 목적이지만 왠지 모든 것이 허무맹랑해서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정말 게임을 하는 것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일까? 그런 의문을 가진 채 나는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아펜하르트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예쁜이’님 시작 포인트로 이동합니다.> 눈앞의 빛이 번쩍이자 겨울의 현실과는 다르게 이곳의 나무는 풍성한 활엽수 잎들을 흔들고, 바람은 메케한 매연 하나 없이 상쾌함만을 가득 안겨주었다. 그것은 마치 천국에 온 것처럼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느낌. 이것이 지금 뇌파를 이용한 게임의 현실이었다. GM으로 활동하며 망각하고 지내왔던 사실들. 이 풍경들은 전부 프로그램화 된 것으로 전류를 조금 흘려보내 뇌파를 간섭한 것만으로도 이정도의 실감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태식 오빠는 이 모든 것을 욕망의 정점이라 말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세상을 단지 욕망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 기분이 떠올랐다. 가장 처음은 태식 오빠의 꿰임에 넘어가 멋모르고 아이디를 만들었었지. 그때는 모든 것이 불안하고 창피해서 바로 접속을 끊었었지만 훗날, GM으로 다시 들어가 보니 모든 것이 신비롭고 현실과는 다르게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란 걸 알았다. 그것에 반해 임시로 맡은 GM을 정식으로 신청하여 계속 들락거렸었지. 왜 기찬이가 게임을 하며 열광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일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빠져 들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운동장 같은 곳을 빠져나왔다. “어! 미소천사님이다!” “어제는 정말 무지 아쉬웠어요!” “이야, 그 장면 제가 동영상으로 남겨서 사이트에 올려봤는데 지금 핫이슈라고요!” “어? 올린사람이 너였냐? 정말 끝내줬지. 2위와 5위의 랭커싸움!” 나와 같은 휘장을 한 사람들이 때로 몰려왔다. 여기는 여전하군. 그런데 지금 하는 얘기들이 무슨 말일까? 혹시 기찬이의 기억을 되돌려줄 단서가 아닐까? 나는 오버하며 떠드는 사람 중 한 명을 붙잡고 말했다. “지금 얘기 자세히 들려줘.” “……….” “…설마 또 다른 버전?” 단지 멱살을 쥐었을 뿐인데 왜 당황하고 난리람. “글로리시나와의 싸움…그렇군. 그래서 기찬이가 기절을.” “네? 기찬이라뇨?” “아니야.” 의문을 표하는 사람을 간단히 무시하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결국 이야기의 전말은 이러했다. 뜬금없이 나타난 화선녀라는 여자와 제갈공녀. 그리고 글로리시나 라는 여자가 이 기사단을 찾아와 기찬이와 면담을 요청했다. 다른 둘의 내용은 별거 없는 듯 했지만 글로리시나의 목적이 황당무계했다. 정식기사대전? 그래서 힐러와의 말도 안 돼는 대결을 신청해 죽였다는 건가. 이마에 자꾸 힘줄이 튀어나왔다. 감히, 도적 주제에 동생을 건드려? “…화나셨다.” “뭔지 몰라도 무서워.” 사람들이 나에게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자꾸 오버하는 거야? “글로리시나가 있는 곳이 어딘지 혹시 알아?” “그, 그거라면 아마 정문에 서있을 거예요. 그렇지?” “으응, 그 사건이후로 계속 정문에 서 있었으니 아직도 있지 않을까?” “고마워.” 현실에서 이 사람들을 만난 이후로 너무 자연스럽게 하대가 나왔다. 흠, 그만큼 나는 이 사람들을 친하게 보고 있는 건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진짜 무섭다. 이건 완전 다른 사람이잖아?” “천사는 악마도 될 수 있다더니. 그 말이 딱이네.” “그러니까. 나는 미소천사님의 몸에서 스파크가 튀기는 것 같이 보였다니까?” “어라? 너도냐?” “응? 너희도냐? 뭐지? 내 착각 아니었어?” “……….” “……….” “에이, 잘못본 거겠지.” 저 뒤에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조금 들려왔지만 일단 그게 문제는 아니니 가볍게 무시하겠다. 정문으로 나오자 활기차게 호객행위 하는 상인이나 분주히 움직이는 검사 같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글로리시나라면 내가 기억하기론 금발의 예쁘장한 여성으로 알고 있다. 분명 뛰어난 은신의 달인이었지. 당시, 무식하기 그지없는 나를 상대로 등에 검까지 찔렀으니까. 그리고…나를 죽였던 여성이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금발의 여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으음, 타이밍이 안 좋았나? 뺨이라도 갈기려 했는데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어? 미소천사님이다!” “이야, 실물로 보긴 처음이야!” “어제 올라온 뜨끈한 영상 봤어요! 진짜 아쉬웠습니다! 조금만 더 버텼으면 이기는 건데!” 아까 기사단 사람들하고 거의 비슷한 얘기가 흘려들어왔다. 이 캐릭터는 도대체 얼마나 유명한 거야? 어딜 가도 사람이 모이다니. 기찬이가 왜 얼굴을 가리고 다녔는지 알 것 같았다. <‘아타셰’님이 통신구슬 연락을 취합니다.> {언니, 있었군요! 언니!} - 두쿵! 통신구슬에서 한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심장이 덜컹거렸다. 아흑, 눈앞이 핑핑 돌고 몸을 가눌 수가 없다. 갑자기 몸이 왜 이러지? 역시, 기찬이의 memory뇌파와 무슨 관련이 있구나. 어렴풋이 한나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역시나인 순간이었다. 일단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통신구슬을 꺼내었다. “응…오랜만.” “그때 글로리시나도 멋지지 않았냐?” “크윽, 정말 랭킹 2위 다웠다니까?” {언니!} “응, 오랜만이라고.” “정말이지 분신술은! 누구라도 막지 못했을 거야!” “아아, 그래도 거의 막는 거였는데!” {언니!} “그런데 그거 봤어? 마지막에 미소천사님이 죽고.” “아! 완전 아름다웠지. 글로리시나가 끌어안는 모습은 완전 백합세계의 입문하게 된 느낌…….” “시끄러워어어어어―!” 순간 내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모두 한 발짝씩 떨어졌다. 휴, 이제야 좀 조용하네. {…저, 저는, 단지, 그러니까…죄송해요.} 그리고 통신구슬이 뚝 끊어졌다. 으음, 이거 조금 큰 오해가 있는 것 같네. 다시 연락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나는 일단 여기부터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앞을 보았다. “모두 꺼져.” “………?” “………?” “지금 당장 내 앞에서 꺼지란 말이야아아아아―!” - 빠지지지지직! “우왁! 따가워!” “뭐, 뭐야 이 스파크!” “아따따따!” 사람들이 너도나도 도망가기 시작했다. 거리가 뻥 뚫려서 좋긴 한데 이 스파크는 뭐지?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기찬이의 스킬중 하나인가? 뭐 아무렴 어때.” 손에 머물고 있는 익숙한 스파크를 없애 버리고 나는 다시 통신구슬을 입가에 대었다. “한나야, 한나야? 이보세요, 어이. 야!” {……….} “말을 했으면 빨리 받아야 할 거 아냐!” 아 왜 이리도 속이 부글부글거릴까. 현실에서는 그래도 잘 참는 편인데 이 게임만 들어오면 머리가 아파서 자꾸 짜증을 부렸다. 후우, 아무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모양이야. {…저기, 혹시 수연언니세요?} “수연이는 또 누구야. 어쨌거나 당장 기사단 정문으로 와.” {네에…….} 말 늘어트리는 걸보니 뭔가 불만이 있는 듯 들렸지만 뭐라 말하기 귀찮아서 모른척하고 끊어버렸다. “자, 이제 남는 시간동안 무얼 하냐 인데.” 방금 전 가슴이 요동친걸 보아 확실히 민혜리씨의 말처럼 memory뇌파를 되살리는 게 불가능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기찬이가 이걸로 하고 싶어 하던 것을 찾으면 될 터. “기찬이는 이걸로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힐러로서의 정점? 그건 이미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그럼, 역시 한나에게 고백? 가장 유력하나 다른 문제도 찾아봐야겠지. 그럼 무엇이 있을까. “이봐, 너라면 게임에서 뭐가 제일 하고 싶어?” “네?” 누더기 망토를 하고 있는 사람을 붙잡아 물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초보인 듯 보였다. 얼굴도 꽤나 곱상하게 생긴 거 보니 아직 이십대 초반이군. <‘빛의 매력’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저, 저기, 저, 저는!” 응? 이건 또 뭐야. 그건 그렇고 이애는 왜 또 얼굴을 붉히고 난리야. “병이 아니라면 말 더듬지 말고 재깍재깍 말해!” “저, 저라면 세계제일이 되고 싶었을 거예요!” “세계 제일? 어떻게?” “이, 일단 랭킹 1위에 들고 싶었을 겁니다! 지금도 꿈이지만 목표구요!” “랭킹 1위라…그렇구나. 그래, 기찬이도 남자니까 세계정복 같은 꿈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래, 고맙다.” 나는 그 애의 어깨를 툭툭 치며 고마움을 전했다. <‘빛의 매력’의 숙련도가 1 상승했습니다.> “아, 아니에요!” 그 초보 티내는 애는 저 멀리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내가 너무 겁줬나? 그런데 뭐가 이리 자꾸 뜨는 거야? 눈에 거슬리게. 그나저나 랭킹 1위라. 내가 알기로는 정식기사대전을 통해 랭커를 높일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럼 일단 그걸 목표로 게임을 해볼까? 그런데 과연 이 캐릭터로 가능하려나? 힐러로 랭킹 1위라. 뭐 어떻게든 되겠지. “어? 진짜다. 있다있어!” “이야, 진짜 미소천사네? 헛소문이 아니었군!” 저 멀리 반짝거리는 갑옷을 입은 사람 한 명과 상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나에게 다가왔다. 이건 또 뭐야? “흠흠, 동영상은 잘 봤다! 힐러주제에 랭킹 2위에게 덤비다가 깨졌다며?” “크헤헤, 주제를 모르고 덤비니 그 꼴이 나지. 그렇죠? 헤슬러님.” “당연한 사실을 가지고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지! 크하하하!” 오자마자 다짜고짜 반말하는 건 좋다 이거야. 왜 내 앞에서 썩은 입을 벌리고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난리야. “너흰 뭐냐?” “흥, 이분으로 말씀드릴 거 같으면 철혈 기사단의 단장이자, 랭킹 18위에 있으신 분이다! 비록 10위권 내에는 들지 못했지만 그것도 조만간 들 분이시란 말이지!” “어흠!” 개미처럼 기다란 얼굴의 상인 같은 남자가 한 말이었다. 그 말에 우쭐해져 가슴을 벌리고 있는 멋들어진 갑옷의 남자는 지금 보니 베짱이처럼도 생겼다. 아, 진짜 곤충 베짱이가 아니고 동화에서 본 자아도취의 베짱이 말이다. “그래서?” “흠흠! 나는 랭킹 5위의 미소천사와 정식 기사대전을 요청한다!” 내 눈앞에서 손가락질하는 베짱이를 보니 속이 뒤틀렸다. 어디서 나이도 고만고만한 게 손가락질이야! 생각도 할 것 없이 그 손을 비틀었다. “악, 아아악! 뭐야, 이거 놔!” 흠, 힘 적으로 내가 많이 달린지 힘껏 비틀었지만 살짝 꺾인 게 전부였다. 이 캐릭터 너무 허약한데? “이게, 이거 안 놔!” 어, 어라? 베짱이가 힘을 주자 내 몸이 붕 뜨기 시작했다. 지금 손가락 하나로 나를 들어 올렸어? “어디 맛 좀 봐라!” “은신해제, 그녀를 던지면 넌 죽는다.” 그 상태로 나를 던지려한 베짱이. 헌데 그 뒤에서 작은 말소리가 들렸다. 베짱이 등 너머로 살짝 보이는 반짝이는 금발. “너, 너, 넌 랭킹 2위, 스피드사신!” “그, 그, 글로리시나다!”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는 개미와 베짱이. 순간 내 눈이 가늘어졌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꺼져.” “히, 히이이익!” “가, 같이 가요, 헤슬러님!” 글로리시나가 말하기 무섭게 줄행랑치는 두 사람. 정말 빠르기 하나만큼은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 “……….” 서로 아무 말 없이 노려보는 우리 둘. 나는 확실히 화가 난 상태였지만 저 여성의 표정은 영 알 수 없었다. 슬퍼하는 것 같으면서도 고독한 눈빛. 과거 내가 많이 하던 눈과 비슷한걸. “네가…….” 내가 말을 꺼내자 살짝 움찔하는 글로리시나. “내 동생을 죽인 년이냐?”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내 금발과 글로리시나의 금발이 그 바람에 맞춰 휘날렸다. 그 금발 사이에 있는 저 여자의 눈이 놀람으로 커져있었다. “미소천사가…아니야?” 글로리시나는 혼란스런 눈으로 나를 보았다. “너는 누구냐, 해컨가?” 혼란스러움을 가까스로 진정시킨 글로리시나가 내가 물어왔다. 그런데 해커라니 나를 몰로 보고. “나는…….” 내가 입을 때자 다시 입을 다무는 글로리시나. “이 캐릭터 본주다.” “………?” 이해하긴 무리일 테지. 뇌파인식게임의 본주고 나발이고 존재할리 없으니까. 하지만 어쩌다보니 기찬이는 내 몸을 백업한 캐릭터를 사용할 수 있었고 그로인해 나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헛소리.”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있을 만한 찰나의 시간. 내 목에 차가운 검의 촉감이 느껴졌다. 내 말을 거짓으로 판단한 글로리시나가 달려든 것이었다. “그녀는 어디 있나. 대답 여하에 따라 벤다.” “지금 네가 내 목에 검을 가져다댈 입장이냐? 염치도 없…윽!” - 두쿵! 그때 갑자기 다시 심장이 울었다. 서글프고도 안타까운 느낌. 갑자기 내 머릿속에서 글로리시나와 기찬이가 싸울 때의 영상이 필름 보듯 좌르륵 지나갔다. “아아아악!” 그만큼 머리와 심장의 고통까지 심해졌다.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찌릿함. 220볼트 전류가 내 몸을 지나다니는 기분이었다. “괘, 괜찮나? 이봐! 칫!” 내가 괴로워하며 주저앉자, 글로리시나가 나를 업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기사단 건물로 들어가는 여자. 무슨 이유인지 글로리시나가 업으니 그 영상의 의미가 뭔지 알 수 있었다. “으윽, 이건 나? 무슨 말도 안 돼는!” 저 여자와 내 모습은 겹쳐있었다. 적어도 기찬이의 시선은 그러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단장! 단장 있나!” “어? 당신은…어라? 어어! 미소천사님!” “이게 무슨 일이죠!” “나도 모른다. 그보다 빨리 단장을 불러!” 아, 이 여자 왜 이렇게 큰소리야. 냉정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원래 그런 타입이었어? “내려…줘.” 아픔이 천천히 사라져서 한 말이었다. “괜찮나?” 아직도 근심 가득한 얼굴로 목만 돌려 말하는 글로리시나. 어제는 기찬이를 죽여 놓고 지금은 이게 무슨 행동이람? “아아, 괜찮으니까. 내려줘.” 내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하니 그제야 나를 내려놓는 글로리시나. 기찬이의 memory뇌파가 반응한 거보니까 기찬이는 확실히 이 여자에게 무언가 바라는 게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왜 이 여자에게서 내 모습을 겹쳐 보았던 것일까. “아아! 모르겠어! 기찬이는 왜 자신을 죽인 상대에게 나를 겹쳐보는 거……!” 설마 괴롭힘 당한 걸 나로 본 것인가? 그래, 내가 중학교 때 한창 기찬이를 괴롭혔었지. 그래서 자신을 죽인 상대에게 내 모습을 보았던 걸지도 몰라. 그것밖에 더 있겠어? “너, 대체 얼마나 기찬이를 괴롭힌 거야!” “………?” “………?” 글로리시나를 포함해 연무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역시 머리 다리를 다 때면 알아들을 수 없는 건가. “아까부터 기찬이 그러는데. 그자는 누구인가.” “내 동생.” “동생?” “아아, 그래. 지금까지 미소천사로 활동하며 게임해오던 사람의 내 동생 기찬이야. 알아듣겠어?” “…어느 정도는. 하지만 여자치고는 꼭 남자이름 같…….” “남자 맞아.” “………?” “응?” “어?” “내가 잘못 들었나?”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멍청했나. 좀 알아먹으란 말이다! “이 몸을 백업한 게 나고 그걸 플레이 해온 게 남동생 기찬이라고! 너희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미소천사가 내 동생이었단 말이다!” “………?” “……….” “………!” “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내가 한 말은 파문 퍼지 듯 연무장 전체로 번져나갔다. “나,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사, 사랑했었는데. 현실에서도 못한 사랑을 느꼈었는데!” “나 괜히 게임했어. 진짜 괜히 게임했어!” “왜 기찬이란 사람을 여자로 만들지 않으셨나요. 아아, 가이아 여신이시여!” “가이야 여신은 대지의 신이야 이 바부팅아!” 좌절해서 우는 사람, 반대로 광소하며 믿지 않으려는 사람, 괜한 여신을 탓하는 사람까지 각양각색이었다. 나는 그저 태연하게 그 모습들을 구경할 뿐이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아는 그녀…아니 그는 왜 오지 않는 건가.” “쓰러졌어.” “쓰러져?” 쓰러졌다 생각하고 싶었다. 잠시 쓰러져 있다가 다시 깨어나 누나라 불러주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었고 그 사실을 전부 말할 수 는 없었기 때문에 지금은 이렇게밖에 할 말이 없었다. “설마, 나 때문에 뇌파 이상이!” “그래. 아참, 미안한데 까먹은 게 있었다. 당신 때문에 기찬이가 쓰러진 걸지도 몰라. 그러니 나한테 한 대 맞을 이유는 충분하겠지?” 내가 주먹을 매만지며 말했다. “……….” 글로리시나는 일어난 나를 잠시 올려보다 고개를 저었다. “주소를 알려줘. 그건 직접 가서 맞겠다.” “……….” 이번엔 내가 말문이 막혔다. 기찬이가 왜 이 여자에게서 나를 겹쳐보았는지 어느 정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순간 글로리시나는 레이피어를 꺼내 자신의 왼손을 잘라버렸다. 퓨슉하고 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윽, 저런 장면을 눈앞에서 보니 속이 울렁거려. 그래도 쓰러지는 여자를 가만두지 못해 일단 부축했다. “크윽…게임에서는 이걸로 봐주겠나?” “팔을 자르다니…….” “레벨 100대가 넘은 캐릭터를 왜…….” 주위 사람들이 경악한 채 글로리시나를 보았다. 게임상에서 팔정도 자른 거 가지고 왜 저런데. “그깟 팔정도 자른 거 가지고. 호들갑이지?” “그거야 저희 같은 저렙들 입장에서나 그렇죠.” “저희야 100레벨 전이니 죽으면 1레벨다운, 능력치 5%하락하고 그만이지만…….” “글로리시나는 이미 100레벨을 넘은 고수. 다섯 개의 라이프가 주어졌을 거라고요.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자신의 팔을 자른다는 건…….” GM활동하며 들어봤었던 것 같았다. 예전에 레벨 패치가 이루어졌었지. 그럼 저 행위는 엄청난 것이었다. 다섯 개밖에 없는 목숨인데 자신의 팔을 잘라? 내가 알기론 재생은 완전 불가능. 죽는 방법 외엔 다시 돌릴 방법이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빚지는 건 내가 못 참을 뿐이다.” 글로리시나는 작게 실소하며 내 눈을 피했다. “타테! 거기 있냐!” 그때 정문에서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여기선 붉은색으로 염색했지만 그 예쁘장한 얼굴을 내가 몰라볼 리 없지. “왔어?” “지금 내가 온 게 문제인줄 아냐! 얼마나 위험한데 혼자 접속…응? 분위기가 뭐 이리 우중충해.” 그제야 지금의 분위기를 파악한 건지 오빠는 달려오던 발을 급히 멈추었다. “바닥의 이 피는 뭐야. 그리고 둘은 언제 그렇게 친해졌냐?” 응? 친해지다니…악! “당신 왜 나랑 붙어있는 거야?” “…네가 붙잡은 거다.” 그러고 보니 내가 부축했던 것 같기도……. “여하튼,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냐. 기찬이를 되돌리려면…흠흠, 일단 장소를 바꾸자.” “호오, 장소를 바꿔?” “방금 한 말 들었지?” “그럼, 기·찬·이 라고 말한 걸 들었지.” “한 마디로 단장은 전부 알고 있었다?” “어? 어? 어? 뭐, 뭐야.” 갑자기 당황하는 오빠. 이거 내가 밝히는 게 아니었나? 으음, 뭐 어때. 알아서 잘 풀겠지. “오랜만에 몸 좀 풀어야겠네.” “내가 받은 정신적 고통만큼만 보답 받겠습니다, 단장.” “밟아!” “으, 으, 우아아아아아악―!” 그대의 몸의 안부를. 나는 이 캐릭터가 어울릴만한 기도를 간절히 해주었다. “이, 이게 무슨! 조철아! 조철아!” 오빠는 마치 절규하듯 조철씨를 부르짖었다. “불러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상대의 전파를 차단했으니까요.” “젠장! 도망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을 빠져나가! 하아아압!” 태식 오빠는 검을 뽑아들고 진에게 달려들었지만 진은 오빠의 검을 아기 다루듯 손가락으로 튕겨내었다. 명백한 힘의 차이. 작은 희망마저도 빼앗은 모습이었다. “화이어블레이드! 타올라라, 몸이여. 불살라라, 마음이여! 인화(人火)!” 저 모습은 내가 마왕으로 상대할 때 보았던 것이었다. 최후의 보류인 스킬로 알고 있는데 지금 사용하는 걸로 보아 상황이 최악으로 달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스바르가 마리아.” [행복, 사랑, 그것은 하나의 축복. 고통, 저주, 그것은 하나의 불행.] 격앙된 오빠의 기합과 너무도 다른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우리들은 모두 움직일 수 없었다. 상대가 무슨 수를 써서 몸이 경직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의 눈을 믿지 못해 멈춰선 것이었다. “저건……?” “기, 기찬이의 스킬?” “어째서 당신이!” 글로리시나가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손가락질했고 태식 오빠가 달리던 발을 멈추며 확인하듯 물었다. 나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마왕일 때 가장 앞에서 저것을 보며 상대했었으니까. “이 아름다운 모습에 놀라셨나요? 후후, 저 역시 이 미소천사 스킬들에 매료된 상태랍니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나죠.” “스킬은 고유 뇌파에 의해 만들어지는 거라 알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네가 기찬이의 스킬을 사용하는 거냐!” 태식 오빠는 잠시 뒤로 물러나 말했다. 진은 자신의 머리위에 기도하고 있는 마리아의 손을 잠시 쓰다듬고는 말했다. “미소천사, 나기찬의 재능은 다른 유저들과 차원을 달리했습니다. 이런 가디언을 상상하다니 말이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힐러라는 조건하에 만들어진 아홉 개의 스킬들. 무엇하나도 빠짐없이 훌륭한 스킬들이죠. 후후, 물론 황태식님 말대로 인간 고유의 뇌파를 이용하기 때문에 복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허나, 그 고유의 뇌파를 제게 주입했다면 어떨까요.” “인간의 뇌파를 타인에게 주입시킨다. 너희의 프로젝트는 역시 초인을 만드는 것이었어!” “이런,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초인이 되는 것조차 계획에 들어가 있긴 하나 그건 단지 저희가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실험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하아, 자꾸 말이 길어지는군요. 노리는 것이었다면 박수를 쳐드리고 싶은걸요? 허나 다 보인답니다.” “컥!” 진은 자연스럽게 팔을 옆으로 뻗었을 뿐이었다. 나는 의문이 들었지만 잠시 후, 진의 손아귀에 목이 잡힌 글로리시나가 흐릿하게 나타난 것을 보고 저런 행동을 왜 한 건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생각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를 상대로 하지 않았다면 말이죠. 죄송하지만 먼저 죽어주십시오. 곧 다른 사람들도 보내드리겠…….” “진노하라. 태초의 불꽃이여. 현신, 라의 화신!” - 삐이이이이이이이익! 불타고 있던 태식 오빠의 몸이 천천히 무언가 형상을 띄기 시작했다. 얼굴은 새…아니, 매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몸은 이집트의 옷차림을 한 사람의 형상이었다. 문제는 그 모든 모습이 불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압!” 태식 오빠가 진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열기가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의 압도적인 열량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응접실정도는 금방 불살라버릴 정도의 열이었지만 결계 때문인지 단지 방안이 불게 달아오를 뿐이었다. “크윽, 자료에 없는 스킬이군요. 지금까지 숨겨둔 스킬…입니까?” 진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단 한 손으로 태식 오빠의 몸통 박치기를 막고 있었으니까. “너…는 괴물이냐?” 글로리시나가 숨쉬기 괴로운지 눈썹을 찌푸리며 간신히 말했다. “괴물은 미소천사였겠죠. 저는 단지 모든 스킬들의 숙련도를 최고로 키우고 온몸에 둘렀을 뿐입니다. 아, 스텟은 용병왕 애디님의 것을 빌려오긴 했지만 말이죠. 하지만…이건 조금 버겁군요. 그러니 마리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마리아가 두 손을 모아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태식 오빠의 몸이 한순간 원상태로 돌아가 버렸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평온의 정화. 그만 안식을 찾으시지요.” “말도…안 돼.” - 푹!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지금 태식 오빠의 심장 뒤로 삐져나온 저 팔을 말이다. 아, 아아아! “오빠아아아아아아!” “므네모쉬네(mnemosyne)의 선율의 길, 무사이(mousai)! 피의 광세!” 내가 뛰쳐나가려 하는 순간에 글로리시나가 먼저 움직였다. 여덟 개의 분신들이 붉은빛의 검을 빼들고 진의 팔을 노린 것이었다. 진은 수가 너무도 많아 막기보다는 피하는 쪽을 선택했는지 팔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한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녀는 오빠를 껴안아 내게로 도망 왔다. “헉, 헉. 진정해. 아직 죽지 않았어. 너라면…미소천사라면 살릴 수 있어!” 살릴 수 있어? 오빠를 보았다. 정신은 없는 것 같았지만 아직 숨은 쉬고 있었다. 기절모드? 가, 감사합니다, 하느님! “오빠를 살려줘, 스바르가 마리아!” [행복, 사랑, 그것은 하나의 축복. 고통, 저주, 그것은 하나의 불행.] 진의 가디언과 모든 모습이 똑같은 마리아가 내 등 뒤에 나타났다. 내가 소환한 마리아는 바로 오빠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쿨렁쿨렁 올라오던 피가 천천히 멎기 시작했다. “이런, 그리 쉽게 살릴 순 없죠. 마리아, 다시 평온의 정화.” 진이 다시 명령하자 노래하기 시작하는 마리아. 그러자 내가 주입하고 있는 치료마저 정화시켜버리고 말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다들 놀라셨을 겁니다. 처음 보죠? 이것은 스바르가 마리아 스킬이 네 번 변형 되, SSS스킬이 될 때 만들어지는 것이죠.” “너, 너어어어어!” 가지고 놀고 있어. 지금 사람이 죽어 가는데 그 모습을 즐기며 웃고 있어! - 빠직, 빠지지직! “너만은 용서 못해.” - 빠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몸에서 힘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자신감 또한 커져갔다. 허나 반대로 진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베르제브브?” “당장 그 스킬을 거둬. 그렇지 않으면 찢어 죽이겠어!” 말이 험악하게 튀어나왔다. 허나 드러낸 송곳니를 감추지 않았다. 정말 찢어 죽이고 싶었으니까. “하, 하하! 이거 놀랍습니다. 진실의 눈으로 보니 정말 베르제브브군요! 이거 무슨 장치를 해둔 겁니까? 하하, 하하하하!” 하지만 진은 웃었다. 지금 내 모습을 보고도 조금 놀랐을 뿐. 그래, 단지 놀라기만 했을 뿐이었다. “허나, 그 모습을 한 상태론 미소천사의 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모양이군요.” “그게 무슨 말…마리아?” 확실히 진의 말 그대로였다. 내 등 뒤에 있던 마리아가 어느새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베르제브브 모드는 내 고유스킬이기 때문에 기찬이의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건가? 아니면 악마라서 빛의 기술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거야? 어떤 것이 사실이든 나에겐 전혀 달가운 소식이 아니란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럼…당신을 무찌르고 치료하는 수밖에! 어둠의 화살!” “베르제브브는 과거 미소천사에게 깨지지 않았던가요? 빛의 화살.” 진은 가볍게 손을 휘저었고 그곳에서 생긴 수많은 빛의 화살이 내가 던진 어둠의 화살과 맞부딪쳐 상쇄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구경하고만 있지 않았다. 지금 오빠가 죽어가고 있다. 단 한순간에 끝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녀석의 뒷덜미를 잡았다. “블링크?” “끝내자. 마계의 번개!” - 빠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마왕이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발현시켰다. 단 한곳을 중점으로 말이다. 스파크는 뭉치고 뭉쳐 원형의 구체가 되어갔다. 그럼에도 줄기줄기 삐져나가는 스파크들이 응접실의 가구들을 부셔놓았다. 오빠에게 해가 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글로리시나가 곁에 있어 조금 안심이 되었다. “크아아아아…하하, 큭큭,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비명에서 점점 광소로 변해감에 따라 내 머리는 죽여라에서 도망가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무참히 내 마계의 번개를 깨트리는 걸로 끝이 났다. “영원의 빛. 이 스킬까지 사용하게 될 줄이야. 이거 정말 재미있습니다!” 번개를 깨트리고 서 있는 자는 모습이 확연히 바뀌어 있었다. 두 장의 날개가 여섯 장으로 바뀌어 있었고 손에는 찬란한 황금색의 창, 그리고 은빛의 방패. 머리에는 불게 타오르는 왕관을 쓰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실크로 만든 것인지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있었다. “이 날개는 한 번 보셨지요? 그럼 아실 겁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이 무기들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너는…악마냐?” “이런, 보이기에는 천사인데 말이죠. 허나…제가 봐도 천사로 보긴 어렵군요.” - 푹. 차갑게 내 심장을 비집고 들어오는 창. 처음 느꼈던 기분과는 반대로 나는 뜨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천천히 내 몸이 공중으로 붕 뜨기 시작했다. 진이 창을 높이 들어 올린 것이었다. 중력에 의해 더 파고드는 창을 견디지 못해 나는 손으로 창대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으로 끝입니까? 조금 실망스럽지만 별수 없죠. 어? 지금 우시는 겁니까?”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나왔다. 너무 허무했다. 결국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죽어가는 오빠를 살리지 못하고 꼬챙이에 꿰인 듯 처량한 신세가, 동생에게 누나라는 목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아무것도 못한 나 자신에 대해서 너무 화가나 눈물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울지 마!” 옆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는 글로리시나가 화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소년이라면…그 소년이라면 겨우 이런 상황에서 절대 포기하지 않아! 그건 누구보다도 친누나인 네가 잘 알 것 아냐!” 그래, 기찬이라면 겨우 이런데서 울녀석이 아니지. 마왕인 나와 싸웠을 때도 기적을 일으켰던 녀석이니까. 그런데 나는 이게 무슨 꼴이야? “응, 내가 너무 물렀어.” 팔에 힘을 주어 창을 빠져나왔다. 내가 땅으로 내려오자 그 모습을 무심히 보는 진. “아직도 희망이란 것이 남아있습니까?” “기적이란 걸 나도 믿어보려고.” “기적이요? 낭만가의 헛된 망상 같은 말을…응?” 나는 베르제브브에서 다시 원래의 미소천사로 되돌아왔다. 줄어드는 송곳니, 사라지는 날개와 뿔. 힘은 줄어들었지만 어째서인지 마음은 아까보다 더 편해졌다. “큭큭, 이젠 자포자기 하는 겁니까?” 기찬이의 스킬들은 전에 전부 봐두었다. 사용하는 건 조금 어색할지 모르겠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었다. “땅은 대지의 양기, 하늘은 광활함의 천기, 가운데 서있는 우리는 영원의 우주이니 나의 존엄성을 바쳐, 나의 신념을 바쳐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가 되리라.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기적이란 것을 생각하는 순간 떠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이것을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허나 모든 것은 내 마음먹기 나름. 진은 의문스런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리 미소천사의 스킬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베르제브브보다 약할 텐데요?” “진실의 눈. 발동.” 분명 진이 말한 대로 지금 이 상태로는 베르제브브 모드보다도 약할 터였다. “스바르가 마리아.” 허나 생각해 보았다. 이 캐릭터에는 기찬이의 memory뇌파가 남아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 몸을 스캔한 내가 사용하지 못할 턱이 없다. 뇌파 따위는 사실 어떠한지 생각하기도 싫다. 나는 피를 나눈 누나다. 동생이 쓰던 스킬이라면 나라고 쓰지 못할 리가 없어! “푸, 푸하하하하! 무얼 하는가했더니 다시 베르제브브 모드 입니까? 그 악마로 돌아가면 고유뇌파 파장이 틀려져서 미소천사의 스킬을 사용 못한다는 건 아까 겪어봐서 아실 것 아닙…이, 이게 뭐야! 어떻게, 어떻게!” 동생이 이 캐릭터를 어떻게 사용하고 아껴왔는지 이젠 알 것 같았다. 따뜻하고도 안식을 주는 기분을 느끼니 말이다. 내가 너에 대해 잘 알지 못했었던 거 같구나. 나는 악마의 날개를 한 번 펄럭인 뒤 말했다. “마리아, 가자.” [행복, 사랑, 그것은 하나의 축복. 고통, 저주, 그것은 하나의 불행.] 마치 마리아가 대답한 듯 느껴졌다.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3일전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어떻게 타인의 뇌파를 고스란히 이용할 수 있는 거지? 내가 알지 못하는 memory뇌파정보가 더 있다는 말인가!” 잠시 주먹을 쥐었다 펴 보았다. 생생하기 느껴지는 힘. 그 힘에 도취되어 쾌락까지 느껴졌다. “어둠의 화살.” 단 한발의 화살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날렸던 어떠한 화살보다도 강했다. “빛의 화살! 젠장, 빛의 화살, 빛의 화살!” 진은 다시 내 어둠의 화살을 상쇄시키려고 빛의 화살을 쏘았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무참히 빛의 화살을 뚫고 날아가는 어둠의 화살. 결국 두 번이나 더 맞부딪쳐 겨우 상쇄되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있을 수 없는 일이란 말이다!” 진이 창을 나에게 던졌다.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창. 겉보기에도 무시 못 할 정도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챙. 하지만 나는 손을 휘저어 그것을 가볍게 튕겨내었다. “이것이 기찬이와 나의 힘인가.” 창을 튕겨내었음에도 흠조차 나지 않은 내 손톱을 보며 한 말이었다. “너…….” 글로리시나가 멍하니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녀와 오빠를 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진, 네 실수는 말이 많았다는 점이다.” “큭…큭큭, 크하하하하하하하! 감히, 감히 나를, 이 나를 훈계하는 것이냐? 그래봐야 너희들은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해! 그래, 영원히, 평생 그곳에서 살아가란 말이다!” “그렇군, 일단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게 먼저겠어.” 지금이라면 뭐든지 가능할 거 같았다. 지금 나에겐 불가능이란 없어. “현신.” - 빠직, 빠지지지지직!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용 써봐야 소용없어! 소용없단 말이다!” 내 몸 전체가 암흑의 기운으로 감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점 커져 이 좁은 공간이 막을 수 없을 만큼 포화상태가 되었다. 그때부터 힘의 밀고 당기기가 시작되었다. 현신하려는 나의 기운과 결계가 정면으로 맞부딪친 것이었다. - 그그그그그그그그……. 방 전체가 울기 시작했다. 조금 답답했다. 이런 게 알 속에 있는 새끼의 심정일까? 그만 좀 깨져라! - 찌직, 찌지지직! “결계가 깨져? 프로그램으로 짜인 결계를 힘으로 깨부순다고? 하, 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진이 웃는 동시였다. 종이 찢어지듯 금가던 결계가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난 것은. 결계가 깨지자 응접실은 한순간도 버티지 못하고 박살이 나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내 현신한 모습이 미소천사 기사단 상공위에 들어나게 되었다. “뭐, 뭐야? 본드래곤?” “저, 저, 저, 저 모습 본적 있어! 저건!” “베르제브브다!” 바닥을 굽어보자 수많은 유저들과 미소천사 기사단원들이 눈에 보였다. 그 다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뻥 뚫린 하늘이 이렇게 반갑기는 처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정면을 보았다. 혼란스러운 눈으로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진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네가 믿던 결계도 없어졌다. 그리고 글로리시나와 태식 오빠는 이미 접속 종료했어.” “…그런 것 같군요.” “그럼 이제 죽어라.”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의 힘으로 이것을 날린다면 아무리 녀석이라 할지라도 쉽게 막진 못할 터였다. 마을 한 가운데서 날린다는 게 조금 걸렸지만 뭐 어떠한가. 어차피 게임일 뿐인데. “자, 잠깐!” 진이 지친 표정으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지속적으로 숨을 들이마시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런 곳에 브레스를 날릴 셈입니까? 그만두십시오, 제가 졌습니다.” {졌다? 지금 졌다는 말로 끝날 수 있을 것 같아?}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머리로 전달했다. 전에 현신해서 사용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 생소했지만 어렵진 않았다. “더 이상 싸우는 건 무의미 합니다. 저만 손해죠. 지금 당신이 결계를 깬 것만으로도 저희는 타격이 꽤나 심합니다.” {그렇다면 더욱 브레스를 먹여야겠군. 어디 한 번 잘 수습해 봐라!} “거래하죠!” 한껏 토해내려던 기운을 억지로 멈추었다. 윽, 조금 피드백이 일어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리 심하지 않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물었다. {거래?} “당신이 나기찬의 캐릭터로 들어왔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어떻게 들어온지 모르겠지만 원하는 건 나기찬의 memory뇌파. 틀린가요?” 진은 이 캐릭터에 엉킨 실타래를 알지 못하는 듯 했다. 나기찬이란 이름도 단순히 아이피를 조사하다 알아낸 거겠지. 일단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리죠. 그 memory뇌파를요. 이미 저희는 쓸모가 없으니까요. 그 뇌파를 다시 돌려주면 분명 나기찬의 백치상태도 치료할 수 있을 겁니다.” 너무도 좋은 거래였다. 허나 거래란 것은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닐 터. {조건은?} “훗, 이야기가 빨라 좋군요. 대신 저희는 당신의 memory뇌파가 백업된 USB를 원합니다.” “…USB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 “그건 당신의 memory뇌파를 흡혈할 때 입니다. USB로 memory뇌파를 백업하지 않는 한 막을 방법이 없거든요. 그래서 받아들이겠습니까?” 나로서는 너무도 좋은 조건이었다. 저들이 원하는 USB를 준다 해도 나에겐 해가 될 것이 없고 반대로 저들이 가지고 있는 기찬이의 memory뇌파는 너무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왜 USB를 필요로 하느냐는 건데. 내가 생각하는 것을 알았는지 진이 말했다. “호기심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정보의 memory뇌파를 당신이 사용했기 때문이죠. 그것을 연구하려하니 깊게 생각하지 마시지요.” 생각할 것도 없이 좋은 조건이다. 하지만 내키지 않아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내가 소중한 것은 무엇보다도 기찬이다. 저들이 무엇을 할지 나는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멀리 있는 것보다도 가까운 것을 선택하겠어.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약속장소는 내일 미소천사 아이피 주소로 휴대폰을 보내놓겠습니다. 약속장소는 그때 천천히 정하죠. 아, 당연하겠지만 혼자 나오셔야 합니다.”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데 혼자 나올 거 같나?} “아아,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정 의심이 된다면 약속장소를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로 잡으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건전하게 카페에서 만나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 선심 쓴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계획적이었다. 마치 지금의 상황을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럼 나도 조건이 있다.} “…무엇이죠?” {약속장소는 내가 정한다.} “…킥킥, 이거 똑똑하군요. 뭐, 좋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럼 끝인가?} “그런 듯 합니다만?” {그럼 이제 죽어라.} 그동안 삼켜두었던 울분을 모두 토해내었다. 그렇게 진은 사라졌다. 아페타 마을의 절반과 함께.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3일전. 다음날 TV에서는 베르제브브의 재등장과 함께 아페타 마을의 반이 날아가 허무하게 죽은 유저들이 항의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펜하르트 홈페이지를 보니 깜짝 이벤트였다 설명했지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덕분에 지금도 쩔쩔매고 있어 속이 다 시원했다. “건대입구요.” 택시를 잡았다. 내가 잡은 장소는 건대 입구 쪽 자주 가는 나무그늘이란 카페였다. 사방이 트여있어 무슨 수를 쓰기에는 부적절한 곳일뿐더러 그곳에는 아는 사람도 많아 도움을 받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칙칙한 검은빛 휴대폰을 몇 번 돌려보았다. 진이 말한 것처럼 어김없이 우리 집 우체통에 이 휴대폰이 들어있었다. 무슨 기능을 장치해 둔건지 내가 휴대폰을 열자 바로 전화가 왔고 이렇게 약속을 잡은 것이었다. 내 memory뇌파가 백업된 USB는 정장 가슴 안주머니에 잘 넣어두었다. 이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진 않았다. 사실 태식 오빠한테만은 알리고 싶었지만 그날 사건 때문인지 아직까지 깨어나지 않았다는 말에 알리지 않았다. “손님, 다 왔습니다.” 건대입구에 도착했으나 선뜻 밖으로 나가기가 겁났다. 그래, 솔직히 두렵고 무섭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려한 아펜하르트 회사 자체를 상대해야한다. 그것도 혼자서. 너무 무모한 짓을 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괜히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USB가 무사한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이것만이 내가 가지고 있는 무기이자 생명 줄. 정신 차려라, 나소연. 지금부턴 너 자신만 믿어야 돼.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회색빛 하늘을 보니 꽤나 쏟아질 것 같은 날씨였다. 바람에도 비 비린내가 얼핏 풍겨왔다. 날씨만큼이나 내 기분도 우중충했다. 저 앞에 나무그늘이란 간판이 보였다. 지금은 약속시간 10분전. 하지만 왠지 저들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딸랑. “어서 오세요! 어머, 언니, 오랜만이에요.” “응, 오랜만. 별일 없었어?” “별일이야 있겠어요. 그보다 오늘은 조금 특이한 사람들이 왔더라고요. 저기 보세요. 이런 카페에 무슨 칙칙하게 남자들만. 그것도 검정색 정장 일색이라니. 꼭 조폭같…언니?” 나는 나무그늘 종업원, 은미를 지나쳐 그들에게 다가갔다. 현재 보이는 수는 세 명. 그 중 한 명은 앉아있었고 나머지 둘은 뒤에 뒷짐 진 채 서 있었다. 나는 앉아있는 사람 맞은편에 의자를 빼 앉았다. “…나기찬?” “동생의 이름을 왜 내가 들어야 하지?” “…하, 하하. 이거 놀랍군요. 그럼 나기찬의 캐릭터를 해킹한 게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캐릭터를 나기찬이 해킹했던 것입니까? 하하, 하하하하하! 이거 미소천사를 실물로 봐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 제 소개를 하죠. 어제 보았다시피 게임 캐릭터 진, 현실에서는 하진이라 부르지요.” 하진이란 사람은 게임 상과 틀릴게 없는 모습이었다. 본 모습을 숨기기라도 하듯 작게 뜬 눈과 미소를 지우지 않는 포커페이스. 단지 금발에서 머리만 검정색으로 바뀌어 있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사실 조금 특이하다 싶었습니다. 나기찬이란 이름이 남자 같은데 미소천사라니 웃기지 않습니까? 이제야 그 의문이 풀리는 군요. 그럼 당신의 동생이라고 말한 건 남동생?” 나는 별로 대답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본론을 꺼내었다. “memory뇌파는?” “물론 잘 모셔두고 있습니다. USB는?” “글쎄, 네 행동 여부에 따라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총명하시군요. 하지만 저는 애매한 대답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렸다. 어떻게 이렇게 무서울 수가 있는 거지? 저 인간은 분 명 사람을 죽여 본 경험이 있는 거야. 내면을 감추기 위해 손을 테이블 안쪽으로 숨겼다. “거래방식은?” “어려울 것 있겠습니까?” 하진은 그렇게 말하며 턱을 한 번 까닥였다. 그러자 그 뒤에 서 있는 자 중 왼쪽에 있는 사람이 안주머니에서 무언가 슬쩍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그것은 유리샘플이었는데 그 안에 녹색의 액체가 들어있었다. “memory뇌파를 압축시킨 액체입니다. 놀랍죠? 기억이란 허구의 매체를 현실로 끌어 눈에 보이게 만들었으니. 의심은 하지 마십시오. 저는 절대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유리샘플을 잡아 몇 번 돌려보았다. 찰랑거리는 녹색의 액체. 물이라기 보단 끈적끈적한 물엿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럼 그쪽도 주시지요.” “……….” 저쪽에서 먼저 주었다는 것은 확실히 내 쪽이 유리한 거래였다. 하지만 이것이 진짜일까라는 의심을 지울 순 없었다. 여기서 멍청하게 행동하면 안 돼. “이 액체가 기찬이의 기억이란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 “후, 정말 의심이 많은 분이시군요. 좋습니다. 그럼 그 액체를 한 방을 테이블에 떨어트려 보시지요. 단, 명심하셔야 합니다. 한 방울입니다. 그 한 방울도 몇 개월의 기억이니 말입니다.” 그 유리샘플 머리 부분은 주사기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있었다. 이곳으로 스포이트처럼 떨어트리란 말이군. 나는 시킨 대로 샘플의 머리를 기울였다. 그러면서도 상대의 표정을 꾸준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테이블에 떨어트리는 것을 관두었다.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군.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지.” 상대의 여유로운 표정을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하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란 것도 어느 정도 믿을 수 있겠지. “내가 USB를 주면 당신은 나를 죽일 건가?” “……….” 처음으로 하진은 조금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만약 죽이겠다면?” 이번엔 내가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그럼 이것을 없애는 수밖에.” 핸드백에서 USB와 지퍼라이터를 꺼내어 USB를 태우는 시늉을 보여주며 말했다. 하진은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이내 굳은 표정을 풀며 말했다. “후훗, 걱정 마십시오. 저희는 당신을 건들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는 하진. 확실히 이렇게 사람이 많은 번화가라면 무슨 짓을 하는데 많은 제약이 따를 테지. 눈이 많다는 것은 나에게 너무도 이로운 점이었다. 나는 유리샘플을 가슴 안주머니에 넣고 잠시 뜸을 들였다. “언제까지 확인할 셈입니까. 아직도 의심됩니까?” “너희 조직이 어느 정도 규모인지 모르는 이상. 이 의심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데.” “후,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저희 핸드폰을 전부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연락할 수단이 없으니 아무리 조직 규모가 많다 해도 당신을 따라가기는 불가능할 테죠. 아아, 밖에 잠복한 사람이 있다 생각할지 모르니 변장하시고 나가셔도 됩니다. 이참에 아예 저희를 묶어버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러니 어서 내 놓으란 말이야!” 마지막엔 결국 화내며 테이블을 주먹으로 쳐버리는 하진. 더 이상은 무리인가. 할 수 없지. “믿지. 거래는 성립했다.” 나는 테이블에 조심히 USB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이것만 있으면 기찬이를 원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어.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기찬아, 조금만 기다려. “누구 맘대로 나가도 좋다 했습니까?” “무슨 말이지?” “잘도 저를 가지고 놀았으니 이젠 저희가 가지고 놀 차례 아니겠습니까? 사람을 애간장 타게 만들었으니 책임을 지셔야죠.” 내가 USB를 넘긴 후부터 태도, 말투가 이미 바뀌어있었다. 젠장, 아직 내가 모르던 방법이 있었던 건가? 하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선 나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었다. “저희도 이제 볼일이 끝났으니 죽어주시지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네?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저희가 건들지 않는다 말했을 뿐.” “…속였군.” “후후후. 저희는 확실히 당신을 건들지 않습니다.” “그럼 지금 하는 말들은 전부 뭐야!” “이런 거죠.” - 쨍그랑! 이곳은 5층 카페였다. 그런데 강화유리를 깨트리고 나타난 사람들이 있었다. 안전띠하나 없이 맨몸으로 강화유리를 깨고 들어온 자들. 어떻게 들어온 거야, 게다가 어떻게 강화유리를! “뭐, 뭐야? 영화촬영?” “당신들 여길 어떻게 들어온 거야?” “이봐, 뭐라 말이라도…컥!”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한 순간이었다. 들어온 남자들은 총 여덟 명 그 중 한 명이 건장한 남성의 목을 날려버린 것은. 피가 마치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나무로 만들어진 테이블이 붉은색으로 물들어갔다. 마치 현실이 아닌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다리가 풀리고 말았다. 카페는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다. 목청껏 소리 지르다 기절하는 여성, 허겁지겁 밖으로 빠져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종업원은 떨리는 손으로 어딘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와우, 손에 살짝 힘을 준 것뿐인데 목이 날아가다니 이거 최곤데!” “유, 아직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진님, 어떻게 할까요.” “이곳은 위대한 첫 실험장소다. 볼 거 없이 싹 쓸어버려.” ‘쓸어버려’란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지금 그 뜻은 모든 사람들을 죽이라는 명령이야 설마? “미쳤어, 당신들은 전부 미쳤어!” 내 말에 전부 나를 돌아보는 여덟 명. 옷이 전부 검은 정장 일색이라 비슷해 보였지만 그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는 턱수염이 까칠하게 나 있어 그나마 눈에 튀었다. 그자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미쳐? 이것은 사람의 진화를 위한 첫 발걸음이다. 위대한 행위지. 당신은 초능력을 믿나? 만약 믿지 않는다면 잘 봐두도록 해라. 이것이 진화한 사람이라는 거다. 루나, 륀, 루네스, 루네디.” 어딘가 많이 듣던 주문이었다. 그래, 저건 내가 마왕일 때 보았던…설마! “난 행한다. 풍화의 결계를.” 사방이 푸른빛으로 감싸이기 시작했다. 카페 밖을 나가려던 사람들은 갑자기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듯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건 결계의마도사 루히비드의 게임 스킬이잖아! 그걸 어떻게 현실에서 사용한단 말이야! “아악, 아파! 뭐지, 아아아악! 모, 몸이!” “사, 살려줘! 우어어어어어억!” “사, 살려…….” 사람들이 녹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피부가 진흙처럼 녹아내렸다. 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거점을 잃은 눈이 바닥에 떨어…우웁! 우웨에에엑! “음, 이건 나도 보기 조금 그렇군. 아무래도 이 기술은 자제해야겠어.” 마치 실험하는 듯 한 말투. 지금 사람들을 이용해서 생체실험하고 있어. 저들은 전부 제정신이 아니야! “아이고 형님, 저도 재미 좀 봅시다! 타올라라, 몸이여. 불살라라, 마음이여! 인화(人火)! 이야호!” 아까 남성의 목을 날려버린 사내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저건, 저건! 어째서 저자가 오빠의 스킬을! “어떻게, 어떻게, 우웁!” 녹아버린 사람들, 불타오르는 사람들. 매캐한 살타는 냄새에 자꾸만 구역질이 올라왔다. 이미 눈물콧물 범벅이었다. 여기는 지옥이야. 현실이 아니야! “어떻습니까, 저희의 능력이! 큭큭, 크하하하하하! 이 모든 것이 샘플이 된 당신의 동생께 감사드립니다! 이로서 진정한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성대하게 시작하도록 하죠. 건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죽임으로서!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 처음부터 저자는 거래란 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장소도, 시간도 모두 상관없었던 거야. 오히려 내가 약속장소를 이런 곳으로 정해 사람들만 끌어들인 꼴이 되었어. 전부 나 때문에 이곳에 사람들이! 일단 죄책감을 느낄 때가 아니었다. 도망가야 했다. 기필코 이곳을 도망가야 했다. 허나 도무지 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단 한 시간. 너희들의 힘을 어필해라. 물론 경찰, 군대가 오면 무조건적으로 죽인다. 단, 항복하는 군대는 죽이지 말 것. 국가에서 교섭해 올 경우 바로 나에게 연락해라. 이상!” “라져.” “네.” “그럼 다녀오겠슴다!” “이야호! 내가 먼저다!” 여덟 명의 사람들이 전부 왔던 곳으로 다시 나가버렸다. 이빨이 따닥 소리가 날 정도로 심하게 떨렸다. 진심이야, 이자들 진심으로 여기를 초토화시킬 셈이야! “이런, 아직 살아계셨군요. 비녀석도 참. 그냥 결계를 사용할 때 같이 죽여 버리지 남겨둔 이유가 뭐야?” “너희가 원하는 건…세계정복이냐?” “네? 정복이요? 푸핫! 푸하하하하하하! 저희가 무슨 어린애인줄 아십니까? 세계정복이라뇨! 무슨 제가 악마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아, 당신께 특별히 알려드리지요. 저희의 목적은 사람의 진정한 진화. 더불어 또 다른 세상의 탄생. 그곳에 신이 되는 게 제 목적입니다.” “그래봐야 사람이야! 네가 신이 된다고? 그런 말도 안 돼는 말로 사람들을 무참히 죽인단 말이냐!”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신은 의외로 어렵지 않습니다. 정점에만 설 수 있으면 그자는 신이 되죠. 그건 고대부터 이어져온 것입니다. 넘볼 수 없는 오직 하나가 될 때, 그자는 신이 되는 것이죠. 저희 아펜하르트는 memory뇌파의 발견으로 인해 평생 죽지도 않는, 또한 무한의 힘을 가진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거야 말로 지금까지 원하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왕이고 원하던 것입니다. 그것을 저희는 실현시켰단 말입니다!” 저자는 확실히 미쳐 있었다. 힘에 도취되어 신이 되고자하는 광신도일 뿐이었다.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태식 오빠든 국가든 지간에 알려서 막아야했다. 나는 하진을 어깨로 밀치고 뛰었다. 문은 아직도 결계로 막혀있는 상태. 그래서 내가 선택한 곳은. “이보세요,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여기는 5층……!” 뛰었다. 저 아래 나무줄기를 보고. 양손으로 그 나무줄기를 꽉 잡았다. 하지만 내 손아귀 힘이 약했던 걸까. 손바닥의 피부만 벗겨지고 말았다. 안 돼, 죽는다! 나는 일단 머리만 양 팔로 막고 등을 아래로 한 채 두 눈을 꽉 감았다. 가슴 안주머니에 샘플을 지켜야한다는 생각과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한 행동이었다. 제발 아래 무엇이라도 있기를! - 풀썩! 다행이었다. 쓰레기 더미가 있어 가까스로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자꾸 숨이 턱턱 막혔다. 그리고 갈비뼈가 욱신거렸다. 부러진 건가. 고통 때문에 그대로 누워있고 싶었지만 입술을 꽉 깨물고 억지로 일어났다. 도망가야 돼. 이곳에서 벗어나야 돼! “허억, 허억.” 얼마간 도망간 걸까. 하늘에선 이미 비가 죽척죽척 내리고 있었다. 내 머리는 이미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져 눈앞을 가렸고 옷은 여기저기 그을리고 찢어져 있었다. 주위엔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파이어 볼!” 나는 뒤를 보기보다 앞으로 뒹구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자 어김없이 내가 있던 자리에 터져나가는 불덩이. 차갑게 내리는 겨울비에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 모습들이 너무 비현실 같아서 더욱 치가 떨었다. “귀곡마검(鬼!哭魔劍)!” 저 멀리서 쐐액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비를 뚫고 날아오는 화살 같은 소리. 눈앞에 보이는 자동차가 있어 그 뒤로 숨었다. - 파가가가가가가가각! 허나 날아온 무언가는 차의 겉을 자르며 빙글 돌아 정확히 나를 노렸다. 이 검은! 영웅슬레이어, 칼리의 귀곡마검! “아아아악!” 내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검을 피한답시고 허리를 비틀었는데 결국 그 검은 내 어깨를 가르고 지나갔다. 아직 오른팔을 움직일 수 있는 거 보니 심각한 것 아니었지만 이미 내 체력이 한계에 달한지라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허억, 허억.” 바닥에 빗물이 내 피와 섞여 탁해지기 시작했다. 온몸이 뜨겁게 달구어 져 있던 터라 왠지 이 빗방울이 시원했다. 그대로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 키에에에에에에엑! 하늘은 어느 거대한 드래곤같이 생긴 괴물이 입 안에 사람들을 으적으적 씹으며 울부짖고 있었다. 이곳은 진정한 지옥이었다. “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악!” 다시 억지로 다친 팔을 감싸 쥔 채 일어났다.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내 몸이 움직이는 한 절대로 살아나가겠어! “집요하군요. 그렇게 몸부림치는 이유가 뭡니까.” 내 앞을 막은 자가 있었다. 턱수염이 까칠한 사내. 아까 결계의 마도사 스킬을 쓰던 비라는 자였다. 나는 말하는 대신 뒤돌아보았다. 뒤는 어느새 귀곡마검을 쓰던 자와 태식 오빠의 스킬을 쓰던 유라는 자가 가로막고 있었다. “허억, 허억…가장 소중한 자를 위해서…….” “…그 소중한 자 때문에 이렇게 강해진 겁니까?” “당신들은 허억, 허억. 평생 살아도 모를 걸…….” “그런 나약한 마음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럼 죽으십시오. 루나, 륀, 루네스, 루네디.” 비라는 자가 주문을 외우는 동시에 나는 주머니에서 지퍼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모두들 의아해하는 눈. 나는 그것을 옆으로 던지고 최대한 반대편으로 굴렀다. - 화르르르륵! “이런, 젠장!” 내가 지퍼라이터를 던진 곳에는 아까 귀곡마검이 반쯤 부셔버린 자동차가 있었다. 아까부터 그 주위 물웅덩이가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 기름이 새어 나온 것을 안 것이었다. - 콰콰쾅! 섬뜩할 정도로 자동차 파편이 날아왔다. 내 주위에 콘크리트가 부셔질 정도로 날카로운 파편이었다. 내가 다치지 않은 것을 보니 아직 운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허억, 허억.” 상대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지도 않고 달렸다. 일단 차도로 나가면 아직 운전할 수 있는 차가 남아있을 것이다. 포기하긴 아직 일러! “이럴 수가…….”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나도 모르게 철퍽 물웅덩이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나마 참고 있던 아픔도 좌절하는 동시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몰려왔다. 차도는 이미 부셔진 차들만이 가득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 키에에에에에에에에엑! 내 바로 머리 위, 빌딩 꼭대기에서 나를 굽어보는 괴물. 그 그림자에 의해 내 주위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와 동시에 내 희망도 어두워졌다. “기찬아…….” 내 과거가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웃고 있는 기찬이, 누나라 불러 주는 기찬이, 내 손을 꼭 붙잡고 노래하는 기찬이. 피부가 벗겨지고 손톱이 빠져 엉망이 된 내 손을 보았다. 미안해, 이젠 네 손을 잡아 줄 수 없을 거 같아. “여기요! 타요!” 그때였다. 저 멀리서 자동차 경종소리가 들려왔다. 남아있는 차가 있었어?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 그 안에서 어떤 남자가 황급히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아으흑!” 배가 쑤셔 좀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피도 많이 흘렸는지 머리가 핑핑 돈다. 하지만 나는 일어나 달렸다.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달렸다. 저것이 내게 하나 남은 희망의 불꽃이었으니까. - 키에에에에에에에에엑! 괴물도 눈치 챈 건지 날개를 퍼덕이며 비상했다. 발판으로 삼은 빌딩이 허무하게 무너져 천둥소리 같은 굉음이 울렸다. 입 안에서 피 맛이 났다. 무언가 자꾸 꾸역꾸역 올라온 걸 삼키다 처음으로 맛을 본건데 아무래도 피였던 모양이다. “크으윽!” “괘, 괜찮아요?” “다, 달려요, 어서!” 참을 수 없는 복통에 나는 배를 꽉 그러쥐고 외쳤다. 내가 뒷좌석에 몸을 누이자 그 남자는 헐레벌떡 부셔진 차 사이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괴물은 처음에 쫓아오는 듯 하다 골목으로 들어가 잘 보이지 않게 되자 포기한 듯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휴, 이제 한 숨 돌린 것 같네요.” “어, 어서 집으로. 기찬이에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이봐요, 집이 어딘데요!” “이, 이걸 기찬이에게…….” 나는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아 유리샘플을 꺼내었다. 집 주소는 내 지갑을 뒤지면 쉽게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이것부터가 시급했다. 처음 본 남자였지만 제발 부탁합니다. “이것은…memory뇌파 샘플이군요.” “뭐, 뭐……!” - 탕! 잠시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알지 못했다. 단지 단발마의 총성과, 화약 냄새. 그리고 내 배가 참을 수 없이 뜨거워 진 것 빼고. “죄송합니다. 돌려받아야 할 물건이 있었는데 깜빡했지 뭡니까. 그래서 찾으러 왔습니다.” “……….” 입만 뻐끔뻐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모자를 쓰고 있어 몰랐다. 그래, 내 눈이 침침해져서 더 눈치 챌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눈앞에 샘플이 사라져갔다. 내 몸도 점점 차가워져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럼 이제 편히 쉬시지요.” 철퍽, 나는 길 한복판에 버려졌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그나마 고마운 것은 하늘이 내 대신 울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구해주고 싶었는데…….”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밤이 온 건가? 마치 검은 장막이 눈앞에 깔린 것처럼 어두웠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몸이 편할까. 언제 고통들이 전부 사라졌지? 눈앞에 기찬이의 얼굴이 보였다. 마치 천사가 내려온 듯 한 착각이 들었다. “좀 더 먹을 걸 사다주고 싶었는데, 좀 더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는데, 좀 더 동생이라 불러주고 싶었는데…좀 더 네 목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더 이상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억지로 뱉은 마지막 말인데 아무도 듣지 못했다. 적어도, 적어도…기찬이는 들어주길 바랐지만 무리겠지? “으흑, 으흐흑, 으흐흐흐흐흐흑!” 입이 일그러졌다. 눈물은 빗방울이 대신 채워주고 있었다. 이젠 아무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내 목소리조차도. 검은 장막이 귀까지 침범한 것 같았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얼굴에 부딪치는 빗방울의 촉감마저도 사라졌다. 아아, 그게 아니라 비가 그친 건가? “미안…그리고 사랑한다.” 그리고 검은 장막은 내 몸 전체를 감싸 안았다. Maiochiru Yuki no You ni - WHITE ALBUM 걱정하고 있어요. 외로움 잘 타는 당신. 강한 척하지만 제가 더 외로운걸요. 당신과의 추억이 모든 눈처럼 새하얗게 물들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나는 흩날려 조용히 쌓이며 속삭여요. 그 말은 다시 하늘로 올라 반짝이며 떨어지겠죠. 가슴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하루가 지나 이틀. 결국 하루 전 빛도, 물도, 땅도 없는 나락의 어둠. 나라는 존재도, 생각하는 자체도 아무것도 없는 칠흑의 암흑. 그 모든 것들은 회명 했다. 공허의 끝자락을 잡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무엇을 잡아야할지 몰랐다. 무엇을 잡을손조차 없었다. 그런 걸 생각하는 나조차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은 당착에 빠졌다. 뒤틀린 언사, 위착되는 언어. 불일치하는 세상, 이곳은 모순된 공간. 모든 것들이 실조하여 비로소 부조화라는 조화를 낳았다. ‘누나, 어디가?’ ‘친구들이랑 소꿉놀이하기로 했어.’ ‘나도 같이 가!’ ‘넌 남자애잖아! 너희 친구들이랑 놀아!’ ‘싫어! 나도 누나랑 같이 놀 거야!’ 누군가의 기억 파편이었다. 꼬질꼬질한 목 때를 보니 장난기 다분해 보이는 남자애와 크면 꽤나 예뻐질 것 같이 귀여운 여자애의 대화였다. ‘아이참! 넌 왜 만날 나만 따라다녀! 귀찮아 죽겠어!’ ‘나도 누나랑 놀 거야! 놀 거야! 으아아아앙!’ ‘소연아, 동생이 놀아달라잖니. 같이 데리고 가렴.’ ‘정말! 왜 엄만 만날 나보고 기찬이 돌보래! 친구들이랑 놀 때 창피하단 말야!’ 어째서인지 큰 여성이 한마디 하자 귀여운 여자애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싫어하는 모습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남자애는 그와 정 반대로 활짝 웃기 시작했다. ‘그래, 여자아이랑 남자아이랑 같이 놀면 안 되지. 기찬아, 이 아빠가 놀아줄게. 소연이는 친구들이랑 놀거라.’ ‘와! 아빠! 놀다올게요!’ ‘힝…훌쩍.’ 이번엔 성인 남성이 말을 하자 희비가 다시 교차되는 두 아이. 남자애가 매우 서운하단 표정으로 멀어지는 여자애를 보고 있자 왠지 나가면서도 자꾸 뒤돌아보는 여자애. ‘아, 정말! 야! 따라와!’ 결국 여자애는 멀리서 남자애를 불렀다. 결국? 왜 결국이 되는 거지? 부르는데 결국이 필요한가? 내가 한 말을 되씹어 보았다. ‘히히.’ ‘웃지 마! 징그러워.’ ‘히히, 좋다.’ ‘너는 내가 뭐가 좋다고 붙으려 안달이야?’ ‘그냥 누나가 좋은걸?’ ‘이 찰거머리!’ 여자애의 표정은 정말 싫다는 듯이 찌푸려져 있지만 마주잡은 손만큼은 놓지 않았다. 손, 저것은 무엇을 잡은 손일까. 그 어떠한 것보다도 결속 있어 보이는 저 손은 지금 내가 잡아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구해주고 싶었는데.’ 어린 여자애와 비슷한 언성이었다. 하지만 좀 더 맑아지고 또렷한 목소리. ‘좀 더 먹을 걸 사다주고 싶었는데, 좀 더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는데, 좀 더 동생이라 불러주고 싶었는데…좀 더 네 목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지금의 목소리는 울고 있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울고 있었다. 왠지 그렇게 느껴졌다. ‘미안…그리고 사랑한다.’ 서러움에 울고 있었다. 애타게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울었다. 하늘도 울어주었다. 세상 전부가 울고 있었다. “아, 아아아, 아아아아아아!” 힘없이 손을 내밀어 우는 여성의 손을 잡아보았다. 허나 그 손은 잡히지 않았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신기루를 만지려는 것처럼, 영원히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부조리한 세상으로 돌아왔다.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2일전. 회색 콘크리트로 만든 어두침침한 천장이 보였다. 나는 잠시 그 천장을 보며 여운에 잠겼다.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그것은 매우 슬프고도 애통한 꿈이었다. 살며시 손을 들어 내 손등을 보았다. 힘 하나 없을 것 같이 가느다란 손. 나는 이 손으로 무언가 잡고 싶어 했던 것 같았다. “기, 기찬아, 깨어났구나!” 태식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비탄함에 묻혀 도저히 다른 사람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르륵 눈물이 눈가를 지나 베개에 떨어졌다. 한 방울 떨어지니 물고 터지듯 멈추지 않는 눈물. 가슴이 너무 아프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너무 아팠다. “기찬아…….” 천장을 가리며 나타난 얼굴. 태식 형이다. 태식 형의 얼굴은 매우 초췌해져 있었다. 형도 나만큼 아픈 걸까? 그런데 왜 우리가 이렇게 마음이 아파야 하지? “형…누나는?” “……….” 입술을 꽉 다물어 버린 태식 형. 잔잔하게 떨리는 입술이 울음을 참고 있는 듯 보였다. “끄극, 끅! 끅!” 하지만 비집고 나오는 소리가 너무 애처롭게 보였다. 태식 형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좌절할 수 있었다. - 쏴아아― 끼룩, 끼룩. 파도가 부셔지는 소리와 갈매기가 우는 소리들이 한 대 어울려 내 마음을 보듬어 주고 있었다. 밤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더 선명하게 들려 나름 나쁘지 않았다. 지평선 너머에는 하늘과 바다가 뒤바뀌어 교차점이 어딘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둘이 하나가 된 것일까? 나와 다르게 저 둘은 밤이 될 때마다 하나가 되는 걸지도 몰라. 질투가 일었다. 나는 반쪽을 일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글로리시나에게 진 이후로 사흘간 백치가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집안은 덜컥 뒤집어 졌고 나를 치료하기 위해서 누나가 힘쓰다 사고를 당했다고 말했다. 사실 내 귀에 아무정보도 들어오지 않았다. 왠지 알고 싶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게 편했다. 이대로 밤바다나 보다 잠들고 싶었다. 이미 내 가슴은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뚫렸기 때문에. “기찬아…추워. 들어가자.” 태식 형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내 어깨위에 코트를 덮어주었다. 별로 춥지 않은데. 차라리 추위를 느끼고 싶었는데. 나는 멍하니 보이지 않는 바다 너머를 주시했다. 소름 돋을 정도로 어두운 바다, 내 가슴처럼 저곳도 뻥 뚫려있지 않을까? 태식 형이 내 옆으로 와 털썩 주저앉았다. 보지는 않았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소연이는 강했다.”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서로 밤바다를 보다 입을 땐 건 태식 형이었다. “그거 아니? 네가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소연이 정장 안주머니에 있던 USB 때문이었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지만 소연이는 죽으면서까지 그걸 지켜내었다.” 태식 형은 내 대답을 원하지 않는 다는 듯이 모래 한줌을 쥐어 손가락 사이로 떨어트리며 계속 말했다. “세상에서 너를 가장 걱정한 건 네 누나야. 그 마음만 알아주면 돼.” 그렇게 말한 태식 형은 갑자기 몸을 떨기 시작했다. 추워서가 아니었다. 그냥 서러움을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은 내가 나쁜 놈이야! 내가 소연이를 끌어들였어.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내가 병신 같은 놈이라서!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으아아아아아아아아!” 태식 형의 울분은 돌아오지 않는 소리가 되어 저 멀리 바다 사이로 사라졌다. 나는 그것을 단지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나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은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누나와 있었던 일이었다. ‘나왔어.’ ‘어, 왔어? 기다려 금방 씻고 밥 차려 줄게.’ ‘설마, 또 고등어조림? 그거라면 사절!’ ‘야, 엄마가 꼭 너 밥 먹이라고 했단 말야.’ ‘비린내 나잖아, 싫어!’ ‘하여튼, 만날 어린애라니까!’ 내용은 별거 아니었다. 매일 평소 있었던 사건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잠시 나는 행복할 수 있었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멋질 않았다. ‘어? 울어? 야, 무슨 일이야?’ ‘으응, 나도 모르겠어. 왜 눈물이 나오지?’ ‘드디어 미쳤냐?’ ‘우씨! 아니야! 그런데…눈물이, 흑, 멋질 않아.’ ‘으이그, 이 응석받이 자, 이리와.’ 꿈에서 누나는 팔을 벌렸다. 나도 모르게 그 품안으로 안겨버렸다. 너무 쑥스럽고 창피했지만 어째서인지 눈물이 더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아직도 밤바다에 있던 그대로였다. 내가 언제 잠이 든 걸까. 아무래도 태식 형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든 모양이었다. “좋은 꿈이라도 꾼 거야? 처음으로 웃더라…….” 태식 형은 정면을 주시한 채 우울한 눈빛으로 말했다. 좋은 꿈이라. 그래, 너무도 좋은 꿈이었다. 하지만 그 꿈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허탈함만이 가슴속에 새겨져있었다. “많이 생각해 봤는데…기찬아, 너는 잠시 피신해 있다가 사건이 종결되면 어머님을 모시고 한국을 떠나라.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다.”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1일전. 다음날 아침, 어두침침한 지하실에 뚱뚱한 남자와 단발머리에 예쁘장한 여성이 들어왔다. 그들은 태식 형과 잘 아는 사이인지 서로 짧게 인사한 후 나에게 다가왔다. “이 아이가…….” 예쁜 여성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잠시 내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 여자도 대단하군. 하루만에 memory뇌파를 찾아 USB에 저장시키다니. 최소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무슨 말인지 몰라 나는 멀뚱히 뚱뚱한 남자를 보았다. 그러자 태식 형이 나를 가로막듯 뚱뚱한 남자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결과는?” “…쳇. 네 말대로 지원이 완전히 끊겼어. 아니, 반대로 우리를 찾으려고 안달이 났다. 분명 입막음 하려는 것이겠지.” “역시…그들이 노린 건 국가와의 교섭이었나?” “한국은 이미 진흙탕으로 뛰어 들어갔다. 구제할 길이 없다고 젠장! 그딴 힘이 굴복해서 어쩌자는 거야?” 그 둘은 무언가 심오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 사이에 예쁜 여자도 끼어들어 말했다. “아마도 국가 쪽에선 그 힘이 탐났을 겁니다. 단지 이론상으로만 가능했을 땐 어떤 위험이 발생할지 몰라 우리 팀을 만들었지만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힘을 이용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거겠죠.” “다른 주변국가에서 그 힘을 이용하도록 놔둘 거 같아? 잘못하단 세계대전에 일어날지도 몰라! 미친 거지. 빤히 보이는 잘못된 길을 왜 들어가려 하는 거야?” 뚱뚱한 남자가 험하게 말을 뱉었으나 예쁘장한 여자는 차분히 말을 받았다. “다른 대안이 없었던 게 아닐까요? 다들 보셨잖아요. 건대에 일어난 참상을.” “……….” “……….” “이건 반강제적인 교섭이었어요. 협박인 겁니다. 북한과 대치중인 우리나라가 그 힘에 대항했다면 분명…다른 곳에서 찾아오는 침투를 막지 못하겠죠.” “젠장! 다 끝이야. 이젠 방법이 없어!” 세 명은 침울한 표정으로 단지 땅만을 바라보았다. 저들도 많이 슬픈 건가? 울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렇게 보였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네.” “임 박사님?” “박사님!” 뚱뚱한 남자가 놀란 눈으로 문을 보았고 예쁘장한 여성이 깜짝 놀랐지만 뒤이어 반갑다는 듯이 말했다. 저 사람은…분명 한나의 아버지. 그 옆에 휠체어에 탄 여성은 한나인가. “허허, 오랜만이네 혜리양.” “어떻게, 어떻게 여기를 알고 오셨어요?” “내가 불렀어.” 태식 형이었다. 태식 형이 간단히 답하자 임 박사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보충했다. “맞네. 태식 군이 장소를 알려주었지. 사실 건대 사건 이후로 나는 한나와 저택에서 도주했네. 다른 은신처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태식 군과 연락이 닿았지.” “그렇군요. 그런데 박사님, 아까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말한 건 무슨 뜻인가요?” 혜리라 불린 여성이 한말이었다. 임 박사님은 설명하는 대신 코트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건…반지?” “아직 실험중이네만 이것은…….” 더 이상 임 박사님의 말을 듣고 있을 수 없었다. 한나가 조심히 내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다시 뵙네요. 안녕하세요.” “……….” 그동안 한나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수척해진 얼굴엔 아직도 수심이 가시지 않아 보였고 한층 더 말라버린 것 같았다. “아프시죠……?” 한나는 대뜸 내 양 손을 잡아 자신의 무릎위로 올렸다. 덕분에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을 한나에게 기우릴 수밖에 없었다. “한나야, 기찬인…….” 태식 형이 한나의 행동을 보고 뭐라 말하려했지만 한나는 그저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다시 내 눈을 보았다. “그 마음 잘 알아요. 저에게도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니 혼자 울지 말아요. 저로선 많이 부족하더라도 함께 울어줄 수 있어요. 그러니, 그러니…….” 한나는 울었다. 충혈 된 눈과 부푼 눈꺼풀을 보니 지금까지 울었던 것 같았는데도 다시 울고 있었다. 지치고 힘들 텐데, 그녀는 이번엔 나를 위해 울어주고 있었다. “그만해. 지금의 기찬이에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아.” 태식 형이 살며시 한나가 잡은 내 손을 떨어트려 놓았다.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돌아와 편안해진 내 몸. 하지만 어째서 더 불편하게 느껴지는 걸까. “자, 잠깐만요, 싫어요! 일어나요! 내가 아는 당신이 이런 곳에서 주저앉을 리가 없어! 왜 그렇게 넋 나간 듯 있는 거예요! 대답 좀 해봐요! 언니이이이이이이―!” …뭐라고? 처음으로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보았다. 지금 뭐라고? 하지만 이번엔 나와 반대로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떨고 있었다. “언니는 남에게 상처하나 주지 못하는 바보 같은 분이세요.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파요. 왜, 왜 진작 말하지 않은 거예요. 언니를 너무너무 좋아하게 돼서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단 말예요! 으흑, 으흐흐흑!” 뻥 뚫린 가슴에 슬픔의 눈물이 차츰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 눈물은 내가 아닌 한나의 것이었다. 빛도, 물도, 땅도 없는 나락의 어둠. 나라는 존재도, 생각하는 자체도 아무것도 없는 칠흑의 암흑. 그 모든 것들은 회명 했다. 공허의 끝자락을 잡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무엇을 잡아야할지 몰랐다. 무엇을 잡을손조차 없었다. 그런 걸 생각하는 나조차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은 당착에 빠졌다. 뒤틀린 언사, 위착되는 언어. 불일치하는 세상, 이곳은 모순된 공간. 모든 것들이 실조하여 비로소 부조화라는 조화를 낳았다. ‘누나, 어디가?’ ‘친구들이랑 소꿉놀이하기로 했어.’ ‘나도 같이 가!’ ‘넌 남자애잖아! 너희 친구들이랑 놀아!’ ‘싫어! 나도 누나랑 같이 놀 거야!’ 누군가의 기억 파편이었다. 꼬질꼬질한 목 때를 보니 장난기 다분해 보이는 남자애와 크면 꽤나 예뻐질 것 같이 귀여운 여자애의 대화였다. ‘아이참! 넌 왜 만날 나만 따라다녀! 귀찮아 죽겠어!’ ‘나도 누나랑 놀 거야! 놀 거야! 으아아아앙!’ ‘소연아, 동생이 놀아달라잖니. 같이 데리고 가렴.’ ‘정말! 왜 엄만 만날 나보고 기찬이 돌보래! 친구들이랑 놀 때 창피하단 말야!’ 어째서인지 큰 여성이 한마디 하자 귀여운 여자애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싫어하는 모습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남자애는 그와 정 반대로 활짝 웃기 시작했다. ‘그래, 여자아이랑 남자아이랑 같이 놀면 안 되지. 기찬아, 이 아빠가 놀아줄게. 소연이는 친구들이랑 놀거라.’ ‘와! 아빠! 놀다올게요!’ ‘힝…훌쩍.’ 이번엔 성인 남성이 말을 하자 희비가 다시 교차되는 두 아이. 남자애가 매우 서운하단 표정으로 멀어지는 여자애를 보고 있자 왠지 나가면서도 자꾸 뒤돌아보는 여자애. ‘아, 정말! 야! 따라와!’ 결국 여자애는 멀리서 남자애를 불렀다. 결국? 왜 결국이 되는 거지? 부르는데 결국이 필요한가? 내가 한 말을 되씹어 보았다. ‘히히.’ ‘웃지 마! 징그러워.’ ‘히히, 좋다.’ ‘너는 내가 뭐가 좋다고 붙으려 안달이야?’ ‘그냥 누나가 좋은걸?’ ‘이 찰거머리!’ 여자애의 표정은 정말 싫다는 듯이 찌푸려져 있지만 마주잡은 손만큼은 놓지 않았다. 손, 저것은 무엇을 잡은 손일까. 그 어떠한 것보다도 결속 있어 보이는 저 손은 지금 내가 잡아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구해주고 싶었는데.’ 어린 여자애와 비슷한 언성이었다. 하지만 좀 더 맑아지고 또렷한 목소리. ‘좀 더 먹을 걸 사다주고 싶었는데, 좀 더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는데, 좀 더 동생이라 불러주고 싶었는데…좀 더 네 목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지금의 목소리는 울고 있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울고 있었다. 왠지 그렇게 느껴졌다. ‘미안…그리고 사랑한다.’ 서러움에 울고 있었다. 애타게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울었다. 하늘도 울어주었다. 세상 전부가 울고 있었다. “아, 아아아, 아아아아아아!” 힘없이 손을 내밀어 우는 여성의 손을 잡아보았다. 허나 그 손은 잡히지 않았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신기루를 만지려는 것처럼, 영원히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부조리한 세상으로 돌아왔다.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2일전. 회색 콘크리트로 만든 어두침침한 천장이 보였다. 나는 잠시 그 천장을 보며 여운에 잠겼다.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그것은 매우 슬프고도 애통한 꿈이었다. 살며시 손을 들어 내 손등을 보았다. 힘 하나 없을 것 같이 가느다란 손. 나는 이 손으로 무언가 잡고 싶어 했던 것 같았다. “기, 기찬아, 깨어났구나!” 태식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비탄함에 묻혀 도저히 다른 사람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르륵 눈물이 눈가를 지나 베개에 떨어졌다. 한 방울 떨어지니 물고 터지듯 멈추지 않는 눈물. 가슴이 너무 아프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너무 아팠다. “기찬아…….” 천장을 가리며 나타난 얼굴. 태식 형이다. 태식 형의 얼굴은 매우 초췌해져 있었다. 형도 나만큼 아픈 걸까? 그런데 왜 우리가 이렇게 마음이 아파야 하지? “형…누나는?” “……….” 입술을 꽉 다물어 버린 태식 형. 잔잔하게 떨리는 입술이 울음을 참고 있는 듯 보였다. “끄극, 끅! 끅!” 하지만 비집고 나오는 소리가 너무 애처롭게 보였다. 태식 형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좌절할 수 있었다. - 쏴아아― 끼룩, 끼룩. 파도가 부셔지는 소리와 갈매기가 우는 소리들이 한 대 어울려 내 마음을 보듬어 주고 있었다. 밤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더 선명하게 들려 나름 나쁘지 않았다. 지평선 너머에는 하늘과 바다가 뒤바뀌어 교차점이 어딘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둘이 하나가 된 것일까? 나와 다르게 저 둘은 밤이 될 때마다 하나가 되는 걸지도 몰라. 질투가 일었다. 나는 반쪽을 일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글로리시나에게 진 이후로 사흘간 백치가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집안은 덜컥 뒤집어 졌고 나를 치료하기 위해서 누나가 힘쓰다 사고를 당했다고 말했다. 사실 내 귀에 아무정보도 들어오지 않았다. 왠지 알고 싶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게 편했다. 이대로 밤바다나 보다 잠들고 싶었다. 이미 내 가슴은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뚫렸기 때문에. “기찬아…추워. 들어가자.” 태식 형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내 어깨위에 코트를 덮어주었다. 별로 춥지 않은데. 차라리 추위를 느끼고 싶었는데. 나는 멍하니 보이지 않는 바다 너머를 주시했다. 소름 돋을 정도로 어두운 바다, 내 가슴처럼 저곳도 뻥 뚫려있지 않을까? 태식 형이 내 옆으로 와 털썩 주저앉았다. 보지는 않았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소연이는 강했다.”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서로 밤바다를 보다 입을 땐 건 태식 형이었다. “그거 아니? 네가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소연이 정장 안주머니에 있던 USB 때문이었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지만 소연이는 죽으면서까지 그걸 지켜내었다.” 태식 형은 내 대답을 원하지 않는 다는 듯이 모래 한줌을 쥐어 손가락 사이로 떨어트리며 계속 말했다. “세상에서 너를 가장 걱정한 건 네 누나야. 그 마음만 알아주면 돼.” 그렇게 말한 태식 형은 갑자기 몸을 떨기 시작했다. 추워서가 아니었다. 그냥 서러움을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은 내가 나쁜 놈이야! 내가 소연이를 끌어들였어.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내가 병신 같은 놈이라서!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으아아아아아아아아!” 태식 형의 울분은 돌아오지 않는 소리가 되어 저 멀리 바다 사이로 사라졌다. 나는 그것을 단지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나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은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누나와 있었던 일이었다. ‘나왔어.’ ‘어, 왔어? 기다려 금방 씻고 밥 차려 줄게.’ ‘설마, 또 고등어조림? 그거라면 사절!’ ‘야, 엄마가 꼭 너 밥 먹이라고 했단 말야.’ ‘비린내 나잖아, 싫어!’ ‘하여튼, 만날 어린애라니까!’ 내용은 별거 아니었다. 매일 평소 있었던 사건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잠시 나는 행복할 수 있었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멋질 않았다. ‘어? 울어? 야, 무슨 일이야?’ ‘으응, 나도 모르겠어. 왜 눈물이 나오지?’ ‘드디어 미쳤냐?’ ‘우씨! 아니야! 그런데…눈물이, 흑, 멋질 않아.’ ‘으이그, 이 응석받이 자, 이리와.’ 꿈에서 누나는 팔을 벌렸다. 나도 모르게 그 품안으로 안겨버렸다. 너무 쑥스럽고 창피했지만 어째서인지 눈물이 더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아직도 밤바다에 있던 그대로였다. 내가 언제 잠이 든 걸까. 아무래도 태식 형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든 모양이었다. “좋은 꿈이라도 꾼 거야? 처음으로 웃더라…….” 태식 형은 정면을 주시한 채 우울한 눈빛으로 말했다. 좋은 꿈이라. 그래, 너무도 좋은 꿈이었다. 하지만 그 꿈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허탈함만이 가슴속에 새겨져있었다. “많이 생각해 봤는데…기찬아, 너는 잠시 피신해 있다가 사건이 종결되면 어머님을 모시고 한국을 떠나라.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다.”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기 1일전. 다음날 아침, 어두침침한 지하실에 뚱뚱한 남자와 단발머리에 예쁘장한 여성이 들어왔다. 그들은 태식 형과 잘 아는 사이인지 서로 짧게 인사한 후 나에게 다가왔다. “이 아이가…….” 예쁜 여성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잠시 내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 여자도 대단하군. 하루만에 memory뇌파를 찾아 USB에 저장시키다니. 최소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무슨 말인지 몰라 나는 멀뚱히 뚱뚱한 남자를 보았다. 그러자 태식 형이 나를 가로막듯 뚱뚱한 남자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결과는?” “…쳇. 네 말대로 지원이 완전히 끊겼어. 아니, 반대로 우리를 찾으려고 안달이 났다. 분명 입막음 하려는 것이겠지.” “역시…그들이 노린 건 국가와의 교섭이었나?” “한국은 이미 진흙탕으로 뛰어 들어갔다. 구제할 길이 없다고 젠장! 그딴 힘이 굴복해서 어쩌자는 거야?” 그 둘은 무언가 심오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 사이에 예쁜 여자도 끼어들어 말했다. “아마도 국가 쪽에선 그 힘이 탐났을 겁니다. 단지 이론상으로만 가능했을 땐 어떤 위험이 발생할지 몰라 우리 팀을 만들었지만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힘을 이용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거겠죠.” “다른 주변국가에서 그 힘을 이용하도록 놔둘 거 같아? 잘못하단 세계대전에 일어날지도 몰라! 미친 거지. 빤히 보이는 잘못된 길을 왜 들어가려 하는 거야?” 뚱뚱한 남자가 험하게 말을 뱉었으나 예쁘장한 여자는 차분히 말을 받았다. “다른 대안이 없었던 게 아닐까요? 다들 보셨잖아요. 건대에 일어난 참상을.” “……….” “……….” “이건 반강제적인 교섭이었어요. 협박인 겁니다. 북한과 대치중인 우리나라가 그 힘에 대항했다면 분명…다른 곳에서 찾아오는 침투를 막지 못하겠죠.” “젠장! 다 끝이야. 이젠 방법이 없어!” 세 명은 침울한 표정으로 단지 땅만을 바라보았다. 저들도 많이 슬픈 건가? 울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렇게 보였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네.” “임 박사님?” “박사님!” 뚱뚱한 남자가 놀란 눈으로 문을 보았고 예쁘장한 여성이 깜짝 놀랐지만 뒤이어 반갑다는 듯이 말했다. 저 사람은…분명 한나의 아버지. 그 옆에 휠체어에 탄 여성은 한나인가. “허허, 오랜만이네 혜리양.” “어떻게, 어떻게 여기를 알고 오셨어요?” “내가 불렀어.” 태식 형이었다. 태식 형이 간단히 답하자 임 박사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보충했다. “맞네. 태식 군이 장소를 알려주었지. 사실 건대 사건 이후로 나는 한나와 저택에서 도주했네. 다른 은신처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태식 군과 연락이 닿았지.” “그렇군요. 그런데 박사님, 아까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말한 건 무슨 뜻인가요?” 혜리라 불린 여성이 한말이었다. 임 박사님은 설명하는 대신 코트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네주었다. “이건…반지?” “아직 실험중이네만 이것은…….” 더 이상 임 박사님의 말을 듣고 있을 수 없었다. 한나가 조심히 내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다시 뵙네요. 안녕하세요.” “……….” 그동안 한나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수척해진 얼굴엔 아직도 수심이 가시지 않아 보였고 한층 더 말라버린 것 같았다. “아프시죠……?” 한나는 대뜸 내 양 손을 잡아 자신의 무릎위로 올렸다. 덕분에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을 한나에게 기우릴 수밖에 없었다. “한나야, 기찬인…….” 태식 형이 한나의 행동을 보고 뭐라 말하려했지만 한나는 그저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다시 내 눈을 보았다. “그 마음 잘 알아요. 저에게도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니 혼자 울지 말아요. 저로선 많이 부족하더라도 함께 울어줄 수 있어요. 그러니, 그러니…….” 한나는 울었다. 충혈 된 눈과 부푼 눈꺼풀을 보니 지금까지 울었던 것 같았는데도 다시 울고 있었다. 지치고 힘들 텐데, 그녀는 이번엔 나를 위해 울어주고 있었다. “그만해. 지금의 기찬이에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아.” 태식 형이 살며시 한나가 잡은 내 손을 떨어트려 놓았다.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돌아와 편안해진 내 몸. 하지만 어째서 더 불편하게 느껴지는 걸까. “자, 잠깐만요, 싫어요! 일어나요! 내가 아는 당신이 이런 곳에서 주저앉을 리가 없어! 왜 그렇게 넋 나간 듯 있는 거예요! 대답 좀 해봐요! 언니이이이이이이―!” …뭐라고? 처음으로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보았다. 지금 뭐라고? 하지만 이번엔 나와 반대로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떨고 있었다. “언니는 남에게 상처하나 주지 못하는 바보 같은 분이세요.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파요. 왜, 왜 진작 말하지 않은 거예요. 언니를 너무너무 좋아하게 돼서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단 말예요! 으흑, 으흐흐흑!” 뻥 뚫린 가슴에 슬픔의 눈물이 차츰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 눈물은 내가 아닌 한나의 것이었다. “기찬아, 혹시 전에 현빈 형하고 내가 했던 말 기억나? 처음으로 memory뇌파에 대해 설명해 준 것.” 물론 기억하고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위험성에 대해서도 기억나겠구나.” “그때 분명 복제인간이라거나 아이큐 1000의 미치광이가 탄생할 지도 모른다고 했었죠?” 태식 형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뒷주머니에서 신문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 신문에는 ‘초인, 건대학살 사건’이란 대문짝만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것이 이제 가설이 아닌 게 돼버렸다.” “………!” 터무니없는 말에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증거를 손에 들고 있어 어찌해야할지 몰랐다. 그때 임 박사님이 이어 말했다. “그들은 전부 게임스킬을 사용하고 있었네. 즉, 게임상의 memory뇌파를 현실로 가져왔다는 것이 되지.” “말도 안 돼요! 어떻게 게임스킬을 현실로 가져와요! 스킬은 게임 프로그램이잖아요!” “후우, 기찬아, 네 생각은 틀렸어.” 태식 형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아미를 매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임 박사님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기찬군 말대로 보통게임은 스킬 자체를 프로그램화 시켜 그것을 유저가 배우고 사용하지. 허나, 아펜하르트는 다르네. 아펜하르트에서 생성되는 스킬은 전부 어떤 식이지?” “어떤 식이라뇨. 그거야…아!” 아펜하르트 스킬은 특정 NPC에게 배우거나 책을 구입하는 등의 방식이 아니다. 전부다 어떠한 행동으로 인해서, 또는 깨달음으로 인해서 배워지지 않았던가. 즉, 그것은 뇌파의 의한 발생스킬! “이제 짐작이 가는가? 아펜하르트 세계는 전부 유저 개인이 생각하고 그것을 창조시켜 스킬을 만드네. 그래서 스킬마다 고유의 뇌파를 간직하게 되고 다른 사람은 절대 쓸 수 없는 스킬이 되지. 허나 그런 스킬이 너무 많아진다면 뇌 과부하가 일어날지도 모를 위험이 있기 때문에 나는 애초에 설계당시 스킬 한계치를 열 개로 지정했던 거네. 단, 무의미한 스킬을 배울 확률이 많으므로 각 스킬마다 네 번의 변형이 가능하도록 배려했지.” 임 박사님의 말대로 스킬 한계치가 열 개라는 것에 많은 유저들이 불만을 토했었다. 나또한 그랬지 않았던가. 쓸모없는 매혹과 고성방가를 배울 때 이것을 키워야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었을 정도니까. “나는 자신의 뇌파로 만든 스킬 자유도로 인해 더욱 신비롭고 현실적인 게임을 목표로 했었네. 허나, 그런 게임을 만들기 위해선 유저의 뇌파율을 80% 이상 올려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어.” 뇌파율 80%. 태식 형이 이 게임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가장 먼저 꺼낸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었다. 결국 지금에서야 뇌파율 80%이상 설정하지 않는다면 게임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란 걸 알았다. “뇌파율 80%라니. 위험성을 알면서도 그 게임을 만들었다는 겁니까!” 나는 순간 울컥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임 박사님은 잠시 나를 올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나는 그 게임을 폐기, 영구 봉인시켰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폐기했다고? 그런데 왜 그 게임이 버젓이 운영되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봉인 시킨 게임이 운영되게 된 것은 내 탓이 크네.” “박사님! 그건 박사님 탓이 아니에요! 하진 탓이죠!” 혜리씨가 임 박사님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하진? “제대로 설명해 주시겠어요?” 나는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대화는 나만 모르는 것 같았으니까. “…아펜하르트가 운영된 이유는 저와 뇌파연구 동기이자 임 박사님의 조수였던 하진이 배신한 탓입니다.” “배신?” “정확히 두 달 전, 박사님과 저, 하진. 이렇게 세 명은 이 게임연구에 몰두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해가 될 수 있는 게임이란 결론이 서자 박사님은 5년 동안 연구한 게임을 폐기처분 했답니다. 물론 아깝긴 했지만 살해용도로 사용 가능한 이 게임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폐기처분에 수긍했었죠.” “그렇다면 배신이란 말이……!” “네, 하진은 모든 데이터를 백업시키고 연구실을 나간 거예요. 그리고 정확히 3주일 후, 그 게임이 한국에 정식 서비스를 시작했죠.” “그런 범죄행각을 그냥 놔두었단 말입니까!” “물론 신고하려고 했죠! 하지만……!” 혜리씨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그때 임 박사님이 혜리씨의 어깨를 잡으며 재지한 후 말했다. “내가 말하겠네.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용기가 없었던 사람이네.” “박사님!” 혜리씨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임 박사님을 불렀다. 임 박사님은 피곤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내가 무슨 말인지 계속 궁금해 하자 태식 형이 말했다. “인질이 있었어. 그래서 아무손도 쓰지 못했지. 덕분에 임 박사님은 지금까지 거의 저택 밖을 나오지 못했어.” “인질이요?” 또 다시 묻는 내 말에 혜리씨가 답했다. “하진은 철저했어요.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뜻대로 풀리는지 잘 알고 있었죠. 그래서 하진은 저택을 감시하며 편하게 압박했죠. 그것만으로도 박사님은 나오지 못한다는 걸 아니까.” 그렇게 말하며 혜리씨는 옆에 있는 한나를 보았다. 그 순간 나는 어떤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한나는 다리가 불편하다. 그러니 단지 저택을 감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질로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리라. 임 박사님은 그랬기 때문에 아무손도 쓰지 못했던 거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나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정식 서비스가 되는 것을 막았을 것이네. 하지만 단지 돈을 벌 목적으로 저러는 거라 생각한 안일함 때문에 이 지경까지 오고 말았지.” “박사님이 아펜하르트 회사가 돈이 아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나와 연락이 닿을 때 부터였어.” 태식 형이 보충설명 해주었다. 나는 이제야 모든 발단의 시작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 문제는 아무래도 좋아요. 그보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알아, 하지만 지금 말한 내용들이 전부 소연이와 관계되어있으니까 집고 넘어간 거야. 아까 말한 하진, 그 사람이 게임상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했던 진이란 자였으니까.” “그, 그럼 그 하진이란 사람이 우리 누나를!” 태식 형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도 말이 없는 걸로 보아 내 예상은 적중한 모양이었다. 복수심에 나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모든 원흉의 시작이자 누나까지 살해한 미치광이. 어디 있는지 알면 식칼이라도 들고서 찔러버리고 싶을 정도로 악감정이 생겨났다. “그놈이, 그놈이!” “진정해, 기찬아.” “형은 어떻게 진정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놈 때문에 누나가, 누나가!” “하지만 지금으로선 우리에게 아무런 힘도, 방법도 없어.” 형은 단호히 말했다. 그래도 내가 이를 갈며 그대로 서있자 태식 형은 한숨을 내쉬며 현 상황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아펜하르트 회사 측의 게임스킬을 사용하는 여덟 명의 초인이 건대를 휩쓸었어. 그로인해 민간인 사망자 수만 수천이 넘어. 그들을 지키려던 경찰, 군대까지 합하면 족히 만이 넘어가지. 피해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심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어. 결국 국가는 그들과 포섭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걸 바라고 있었을 줄은 몰랐어.” “포섭을 바랬다고요?” “정확한 포섭내용은 나도 몰라. 하지만 현재 아펜하르트를 관찰하던 모든 비밀 단체는 해체되었고 반대로 그들이 추적당하기 시작했어. 국가는 아펜하르트 측에 손을 들어준 셈이지.” “어째서!” “바보냐? 머리 좀 굴려봐. 답은 쉽게 나오잖아. 국가는 초인을 병기로서 인식했다. 즉, 힘으로서 활용하겠단 거지. 그러니 그동안 견제해왔던 세력들이 불필요해졌고 반대로 은폐하기 위해 우리들을 추적하는 중이야. 분명히 입막음 시키려는 거겠지. 이제 알겠냐, 꼬맹이?” 조철씨였다. 저 사람 말이 많이 거친데? 그런데 잠깐 지금 뭐라고? “우리들을 추적이라뇨? 그건 꼭 말하는 투가…….” “그래, 우리들은 대한민국 국가소속 비밀결사대, memory팀이었어. 지금은 해체되었지만.” 나는 멍하니 태식 형을 보았다. 형이? 이게 지금 만화도 아니고 지금 나 가지고 장난하는 건가? 하지만 차츰 그 말이 이해가되었다. 생각해보면 형은 처음부터 아펜하르트를 게임으로서 즐기지 않았었다. 그 위험도를 알고 있었고 어딘가 내가 모르는 표정을 보이곤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국가 비밀결사대라니.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아냐? “믿지 못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지금은 그냥 백수일 뿐이니까. 여하튼, 그러므로 우리들은 현재 아무것도 할 수 없다. UN을 만나 협상하면 또 모르겠지만 현재로선 모든 공항이 폐쇄되었으니까.” “고, 공항이 폐쇄 되요? 그, 그럼 엄만!” “알아보니 뉴질랜드 쪽에 계신다 하더구나. 너에게 안부전해 달라하셨어. 어머닌…아직 소연이에 대해서 모르고 계셔.” “……….” 차라리 잘된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누나에 대해 알게 되면 쓰러지실 게 분명하니까. 차라리 한동안 모른 채 한국에 돌아오시지 못하는 게 나을지도……. “하여튼, 이제 전부 끝이야! 염병, 이럴 줄 알았으면 먹을거나 더 왕창 먹어두는 건데!” “조철군, 허나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라네.” “네?” “뭐라고요?” “박사님, 아까도 그 말씀하시더니…….” 전부 임 박사님을 돌아보았다. 임 박사님은 잠시 호주머니로 손을 넣으시더니 작은 반지 하나를 꺼내 탁자위에 올려놓으셨다. “반지? 그건……?” 혜리씨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일단 설명하기 이전에 다시 한 번 기찬군에게 사과하네.” 그러며 임 박사님은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알지 못하는 사과 따위 받고 싶지 않아 재빨리 물었다. “그게 뭐죠?” “이건 아펜하르트 회사가 memory뇌파를 실험하는 걸 알고 나서부터 시작한 연구네. 결국 소연양이 지켜낸 memory뇌파 USB로 인해 최종 완성되었지. 나는 이것을 wish ring이라 지었네.” “…소망의 링?” 내가 어쭙잖게 답하자 임 박사님이 미소 지었다. “이 반지의 기능은 간단히 말해 자신의 memory뇌파를 저장 할 수 있네. 그 뇌파는 분해 되 사람의 뇌로 들어가 단 몇 분 동안 memory뇌파를 현실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지.” “그, 그 말은!” 태식 형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그래, 이것으로 우리 또한 초인이 될 수 있다네. 허나 아직 실험단계라서 길어야 10분이야.” “하하, 이거 무슨 전대 물도 아니고. 변신하는 건가?” 조철씨가 기가 막힌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것이 있어봐야 이미 늦었지 않습니까.” 태식 형은 처음에 좋아했지만 다시 우울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렇지 않네, 태식 군. 지금 국가는 억지 비슷하게 아펜하르트와 결탁했어. 그럼 우리는 굳이 국가와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이네. 단 하나, 아펜하르트만 상대하면 된다는 것이지.” “하지만 아펜하르트는 이미 많은 초인을 거느리고 있지 않습니까. 무슨 수로 저희가…….” “그들도 만능은 아니라고 보네. memory뇌파는 잠시 사람의 뇌에 머물지만 본인이 아닌 이상 절대 오래 남아있지 않아. 그건 이 wish ring을 만들며 내린 결론이네. 즉, 아펜하르트 회사도 이 wish ring처럼 memory뇌파를 끌어다 주는 무언가가 있네.” “그럼 그것만 파괴한다면!” 태식 형이 다시 반색하며 물었지만 임 박사님은 어렵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하나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네. 아마도 어려운 싸움이 되겠지.” “…그런가요.” 태식 형은 다시 풀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게다가 지금 우리는 자금이 없네. 내 모든 돈을 쓰고도 겨우 이것 하나밖에 만들지 못했어. 일단 무언가 작전을 짜기 위해서는 먼저 자금과 장소가 필요하네. 그것만 해결된다면 어떻게든…….” “크윽, 역시 돈인가.” 조철씨가 얼굴을 찌푸렸고. “확실히 현재로선 아무 방법이 없군요.” 혜리씨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런데 그때 나는 무언가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 돈과 장소라고? 뭔가 왜 쉽게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 아니, 어쩌면 쉬운 일 아닌가. “저기…그거라면 해결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요?” “………!” “………!” “………!” 태식 형, 조철씨, 혜리씨, 임 박사님을 포함해서 멍하니 나만 보고 있던 한나마저도 깜짝 놀라 했다. 이거 너무 성급하게 말을 꺼냈나? “해, 해결 방법이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기찬군.” “제가 아는 사람이 한 명 있어요. 아마, 돈은 많을 거예요.” 내가 하는 말을 도통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의심하는 사람들. 고딩 주제에 알아봐야 누굴 알겠나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여, 여기는 대체…….” 민혜리 씨가 목을 위로 치켜뜬 채 멍하니 말했고. “야, 여, 여기 진짜 네가 아는데 맞아?” 태식 형은 도무지 믿지 못하겠는 표정으로 나를 의심했으며. “아무리 그래도 대환기업이라니. 번지수가 틀린 게 아닌가?” 임박사님 조차도 태식 형 말의 수긍했다. 이 사람들이 정말. 나를 사기꾼으로 보나. 나는 말하는 대신 초인종으로 손을 가져갔다. “어, 어이 자, 잠깐!” “무식한 짓 하지 마!” “기찬 군! 성급하게 그러면!” “힉―!” - 띠―. 아, 통쾌하고도 명쾌한 소리로구나. 말없이 무작정 와 민폐였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머리 위에 있던 감시 카메라가 잠시 살짝 유동했고 그 다음 초인종에 달린 스피커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만, 누구시죠?} 저 목소리는 전에 들어본 적이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그때 집사 아저씨였던 것 같은데. “우와악! 죄송합니다! 저희 일행이 실수로 그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죄송해요!” “사, 사죄드리오, 실수한 것 같소!” “안녕하세요, 한 집사님? 저 기억하세요? 나기찬.” {오오, 이게 누구십니까. 나기찬님 아니십니까.} “……….” “……….” “…진짜였어?” 다들 당황한 표정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니 이 사람들 정말 왜 그러지? 국가 비밀정보요원에, 뇌파 연구가까지 되면서도 이런 거에 놀라나? {이거 제가 미쳐 연락을 받지 못한 모양인데 혹시, 정화아가씨하고 언약이 있으셨나요?} “정화아가씨……?” 갑자기 한나가 언짢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일단 스피커에 대고 말했다. “아, 저기 그게…죄송해요. 사실 제 멋대로 찾아온 거예요.” {이런이런, 저한테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실수한 것 같군요. 약혼자를 곤란하게 만들다니, 집사장 자리를 슬슬 물려주어야겠나 봅니다.} “…야, 야, 야, 약혼자?” “대, 대, 대체 이게 무슨……!” “기찬군…자네는 대체…….” 나 참, 저 집사 아저씨는 아직도 나를 약혼자로 알고 있잖아? 그 말이야 말로 저를 곤란하게 만드는 거라고요! “…약혼자라뇨?” 한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난감해 그냥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하하,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아니에요. 제가 괜한 질문을 한 거 같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기찬 씨.” 기찬 씨란 말이 왠지 너무 딱딱해 멀어진 기분이 들었다. 내가 무슨 큰 실수했나? {아! 이거 너무 문 앞에 세워두었군요.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바로 차를 내가도록 지시해 두겠습니다. 저는 잠시 소식을 전해야겠군요.} 그렇게 말을 마지막으로 스피커는 끊겼고 대신 거대한 철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나저나…….” “정말 아는 곳이었군요?” “쉬펄, 나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 신경 썼더니 더 배고파졌어.” “허, 허허허. 이래서 인생은 살아볼만하다고 하는 것 같네.” 태식 형을 시작으로 민혜리 씨, 주조철 씨, 임박사님이 허탈하게 말했다. 한나는 그저 휠체어에 앉아 무언가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온 우리는 곧 벤츠 한 대가 마중 왔고, 그것을 타고 꼬불꼬불한 정원을 지나 높은 언덕 위로 올라가니 전에 왔었던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 봐도 부담되는 저택이었다. 이런 곳에서 살면 분명 나는 숨 막혀 죽을 거야. “환영합니다, 여러분. 약조가 없어 미처 준비를 못해 시간이 걸릴 듯 합니다. 일단 응접실의 다과를 두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저를 따라오시지요.” 한 집사 아저씨는 여전히 전형적인 집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느다란 몸매, 검은 정장, 그리고 휘어진 콧수염까지 말이다. 우리들은 한 집사 아저씨를 따라 응접실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갑자기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래전부터 준비한 듯 과일과 쿠키 따위에 간식들이 즐비하게 깔려있었다. “많은 걸 준비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나저나 이거 많이 놀랐습니다. 약조 없는 가족상견이라니. 서프라이즈한 면에 이 한 집사, 눈물이 다 나온답니다. 크흑, 어리게만 보였던 아가씨가 벌써 결혼하게 되다니.” “…저기 많이 엇나가셨는데요?” 하지만 내 말은 듣지도 않고 한 집사님은 밖으로 나가버렸다. “자, 그럼 이제 설명 좀 해줄까?” “나도 지금 이야기는 조금 궁금하네만.” 태식 형과 임박사님이 가느다란 눈으로 나를 보았고 민혜리 씨와 주조철 씨는 모른 척 음식을 먹고 있었지만 그 눈만은 역시나 나를 고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나는 나에게 전혀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차를 마시는 한나가 제일 무서운 걸까. “하, 하하하.” 그로부터 대환기업의 부회장이자 정화 누나의 아버님이 오실 때까지 나는 필사적으로 모든 일을 설명해야만 했다는 사실은 큰일이었으니 걸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정말 손짓발짓 해가며 설명했었다. 믿어주지 않아 더 필사적이었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전히 부담되는 흰색 정장을 차려입은 정화 누나의 아버님, 이선빈 부회장은 그동안 우리들의 일과 현재 처해져있는 현실, 그리고 찾아온 목적까지 빠짐없이 얘기했다. 그것은 전부 임박사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발언했고 임박사님은 오직 진실만을 얘기하셨다. 그동안 눈감은 채 차를 홀짝이던 이선빈 부회장은 드디어 차를 내려놓고 처음으로 입을 때었다. “음, 그렇군요. 일단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허나.” 임박사님의 말을 자른 이선빈 부회장. 그분에게서 차가운 눈빛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표정에 내 몸까지 굳어버렸다. “저는 자선사업가가 아닙니다. 엄연히 국가에 소속되어 있지만 개인 기업일 뿐이죠. 그런 저희가 무엇을 믿고 막대한 자금과 위험한 일을 적극 도와주리라 생각하십니까. 얘기를 듣고 보면 딱하다는 생각은 합니다만 지금 상황이 오도록 대비를 못한 당신들의 안일함을 먼저 탓해야할 문제가 아닌가요? 다짜고짜 찾아와 이런 얘기를 들은 건 정화와 친분이 있는 기찬 군이 있어 참겠습니다. 하지만 다시는 보고 싶지 않군요. 한 집사, 이분들을 정중히 바래다주시게.” “예? 아, 예. 부회장님.” 한 집사님은 땀을 삐질 흘리며 말을 더듬었고 이선빈 부회장은 더 할 얘기가 없다는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때. “압니다. 제가 못난 놈이어서 그런 것 알고 있습니다.” “바, 박사님!” “박사님!” 임박사님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를 포함해 모두들 그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염치없는 행동이란 것도, 위험한 일을 끌어들이려는 것도 맞습니다. 지푸라기를 붙잡는 심정으로 이 자리에 왔으나 처음과 달리 지금은 이곳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가 위험하다, 국가가 위험하다 따위의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한 남자로서, 한 사람의 가장으로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도와주십시오!” 박사님은 우리 앞에서 머리를 바닥에 붙이셨다. 바로 옆에 한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행동하셨다. 그 모습에 우리들은 그저 아랫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아빠는 저 때문에 그러셨어요. 제가, 다리가 불편해서…그래서 게임을 만들어 다리를 고쳐주기 위해 애쓰셨어요. 그게 죄인가요? 다 저 때문이에요. 다 저 때문이니까! 제가 못된 애니까…그러니까, 그러니까…….” 한나는 차마 말을 못하고 가슴을 쥔 채 웅크렸다. 임박사님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런 한나를 보았다. “…후, 딸이 있는 가장으로서 그 기분은 이해합니다만. 그렇다면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가족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을.” “……….” 이선빈 부회장님의 말은 모두들 침묵하게 만들었다. 이 일은 대환기업 전체를 위험으로 빠트리는 것이 맞다. 그래서 우리들은 모두 이선빈 부회장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언제부터 우리 가문이 이렇게 나약해졌죠?” 영롱하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정화 누나?” 한참 무슨 운동을 한 것인지 도복차림에 어깨에는 타월을 두르고 있었는데, 머리를 뒤로 질끈 묶어 가느다란 목선이 도드라져 보였다. 정화 누나는 내 부름에 잠시 나를 보았지만 이내 이선빈 부회장을 노려보았다. “이정화. 네가 나설 곳이 아니다.” 착 가라앉은 말투. 팔불출로 알고 있었는데 생각을 바꿔야겠어. 정화 누나도 살짝 놀란 표정을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정의를 관철한 역대 선조님들께 뵐 면목이 없군요. 이렇게 회피하기 위해 일월현문(日月現門)이 존재했나요?” “입닥치거라! 네가 나설 곳이 아니라 했다!” “…그러면 제가 나설 입장이 되면 되겠군요.” 정화 누나의 허리춤에는 하나의 검이 달려있었다. 그것을 뽑아 가로 한 번 그은 뒤, 바닥에 냅다 꽂아버렸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쑥 들어가는 검 날. 저, 저거 진짜 검이야? “오늘 이 자리에서 대환기업의 정식 회장 자리를 물려받겠습니다.” “네, 네, 네가 정녕!”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정화 누나 뒤에서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통쾌하고도 탁 트인 목소리. 우리들은 전부 그곳을 보았다. “정화가 대환기업을 물려받겠다니. 그렇게 설득해도 죽도록 싫어하던 애였는데, 크하하하하하!” “아, 아버님!” 대환기업의 회장이자 정화 누나의 할아버지 이창동 회장이었다. 여전히 정정하신 모습이었는데 정화 누나와 같이 도복을 한 채 뒷짐 지고 서있었다. “선빈아, 네가 졌다. 이렇게 까지 나오면 모든 발언권은 선화한테 있으니 말이다.” “인정하지 못합니다! 정식 절차도 없이 무작정 회장 자리를 줄 것 같습니까?” “내가 주고자 한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 도망갈 것 같으니까.” “아, 아버님까지!” 이선빈 부회장은 말이 막히는지 꺽꺽 거렸다. 저러다 쓰러지겠네. “아버님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이건 아펜하르트뿐만 아닌 국가에 대한 도전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무모한 일로 가문을 종결시키실 작정입니까?” “그건 나도 들어서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말이다, 선빈아.” 이창동 회장은 느릿느릿 움직여 아직까지 무릎 꿇고 있는 임박사님을 일으켜주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사람이 도움을 청하고 있지 않느냐. 그것도 냉철히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옆에 딸이 울고 있었다. 그것까지 못 본 채 나가려했단 말이냐? 이 몹쓸 놈!” “아버님…….” “적어도 네가 이 아이를 위로해 주고 네가 무릎 꿇었다면 너의 마음을 인정해 나 역시 네 의견에 찬성했을 것이다. 허나 너는 나뿐만이 아니라 딸에게까지 실망시켰어. 그 죄를 갚기 위해선 내가 도와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건!” “너야말로 입닥치거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한 남자로서, 딸을 가진 가장으로서 사과하거라!” 그 말에 이선빈 부회장은 초탈한 표정으로 잠시 천장을 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임박사님께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것만으로도 부회장의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 도와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그러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내게 감사할 필요 없네. 감사는 당신 딸에게 하게나.” 이창동 회장이 슬쩍 한나를 보며 말했다. 임박사님은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 숙일 뿐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정확히 얼마의 자금과 장소가 필요한지, 그 계획의 전부를 토론하고 싶네만.” “그래야지요.” 임박사님은 상기된 표정으로 황급히 가방에서 수많은 서류를 꺼내려 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이창동 회장이 제지하며 말했다. “자리가 썩 좋지 않군. 이 얘기는 내 서재에서 하도록 하지. 선빈아, 너도 따라오너라.” “그럼 혜리 양, 조철 군, 태식 군도 같이 가세나. 기찬 군은 미안한데 한나 좀 봐주겠나?” “아, 네.” 얼떨결에 대답하자 모두들 썰물 빠지듯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로인해 응접실은 나하고 한나, 그리고 정화 누나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아, 한집사님도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 “으흠! 그럼 저는 잠시 서재에 차를 내가야하니 좋은 시간 되십시오.” 요즘 집사장은 차도 내간답니까? 분명 도망갔어. 자리가 거북해 냅다 튀었어! - 콩! “아얏!” 멍하니 한집사를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머리를 콩하고 때렸다. 돌아보니 정화 누나가 짓궂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뭘 멍하니 있어? 자리에 앉아, 하고 싶은 말이 많으니까. 아, 그쪽도 이리오세요.” 정화 누나는 한나를 부르며 소파에 앉았다. 행동 하나하나에도 귀품이 넘치는 정화 누나. 이런 누나를 알고 있는 내가 다 신기할 정도다. “정말이지 화려하게 나타나서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구나.” 한동안 말없이 홍차를 들던 정화 누나가 뜬금없이 꺼낸 말이었다. 덕분에 과자를 집던 손이 움찔거렸다. “그, 그게.” “저번에 찾아온 후로 연락하나 없이 코빼기도 못 봤는데 말이야. 염치도 없지.” “그,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아마 완전히 잊고 지내다 급하게 필요하니까 생각나서 찾아온 거겠지. 나는 필요할 때만 찾는 그런 사람이었나?” “……….” 아까 과자를 집으려고 손을 뻗은 자세 그대로 굳어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마에서 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왔다. 저, 정화 누나 진짜 화났다! “정화 누나. 제가 말이죠. 그동안…….” 어떻게든 지금 상황을 변명하기 위해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는데 그 입이 도로 다물려버렸다. 쓸쓸하게 웃고 있는 정화 누나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무 반가워. 그때 그대로인 모습 보니 안심이네.” “…누나.” “상천이는 뭐하고 지내? 건대사건에 휘말리지 않았어? 아! 내가 이번에 아펜하르트 게임 시작해서 이참에 널 찾으려 했는데 힘들더라. 어디서 플레이 하고 있어? 아이디는?” 나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정화 누나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사실 전혀 정화 누나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정신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건 사실 변명일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생각 못하고 있으니까. “정화 누나 미안해요. 저는.” “사과할 거 없어. 어느 정도는 알 것도 같으니까. 저 애, 아펜하르트 사제를 플레이하는 아타셰란 아이지? 아까 남성도 미소천사 기사단의 단장인 멋쟁이란 사람 같고. 그럼…설마 네가 미소천사니?” 정화 누나의 감은 예리했다. 단지 몇 개의 추리만으로 나를 알아버렸으니까. “맞아요. 제가 미소천사였어요.” “…역시나. 타테라고 부르던 것부터 의심은 갔지만…….” 정화 누나는 왜 그렇게까지 속이며 게임한 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미소천사 기사단에서 만날 날, 글로리시나와 대결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털어놨을 거예요.” 나는 솔직히 말했다. 정화 누나에게 속일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조금 걱정이었던 건 모두가 알아버린다는 두려움. 그것이 자꾸 내 발목을 붙잡아 말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특히나 그 두려움의 중심은……. 나는 한나를 슬쩍 보았다. 한나는 나와 정화 누나와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을 셈인지 멀찍이 떨어져 뒤돌아 있었다. “제가 왜 여성으로 플레이 해왔는지 전부 설명해 드릴게요. 한나야, 너도 이리와. 지금 하는 얘기 들어줬으면 좋겠어.” “…저도요?” 한나는 정말 들어도 되겠냐는 듯이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듣지 않으면 안 돼. 아니, 너만은 꼭 들어야 돼. 그때부터 고1이었던 내가 성인용 게임을 어떻게 발견하였는지, 게임에 접속해 일어난 모든 일들과 내가 깨달은 것들까지 처음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나와 정화 누나는 게임에 처음 접속해 일어난 해프닝에 웃기도 했고, 둠터틀을 잡으며 내가 가슴 아팠던 기억을 끄집어내니 울먹이기도 했다. 그동안 사람들을 속여 왔다는 죄책감에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는 덕목에선 한나는 크게 부정했다. 이렇게 하나하나 숨겨왔던 내 마음의 자물쇠를 풀어나가니 속이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나 간단한 것인데 나는 골머리 싸매며 걱정했었던 걸까. 그래서 누나는 이런 내 고민에 웃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짧은 한 달이란 짧은 시간에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었구나.” 정화 누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위로해주었다. 내가 누나얘기를 덤덤하게 하기 시작하자 한 말이었다. “저에게 있어서 한달이란, 게임의 목숨과도 같았으니 더 애착이 갔던 걸지도 몰라요. 그때 이미 미소천사는 제가 돼 버린 거죠. 덕분에 가족에게 민폐만 끼치고 말았어요. 이 게임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접지 못하는 마음, 미움 받으면 안 된다는 압박들이 저를 더 옳아 매버렸죠. 결론적으로 저는 결단력 없는 놈일 뿐이에요.” 계속 덤덤하게 말하는 나에게 갑자기 정화 누나가 내 머리를 끌어안았고 한나가 내 두 손을 꼭 잡아버렸다. “그럴 때는 우는 거야. 설마 그것조차 잊어버린 거야?” “그런 말 말아요. 또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단 말이에요.” 위로해 주는 게 둘 다 서툰 건지 그다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 너무 잘 보여 미소가 지어졌다. “안 울어요.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전부 깨달았으니까요.” 나는 슬쩍 한나에게서 손을 빼내어 정화 누나의 어깨를 잡아 머리를 감싼 팔을 때어놓았다. “깨달아?” 나는 소파에 등을 파묻어 천장을 보았다.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나라는 나약한 사람의 존재. 그걸 알기 때문에 강해질 수 있는 나라는 존재를. 지금이라면 더 위로 도약할 수 있어요. 그래서 죄책감은 잠시 뒤로 미루려고요.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그때가 되면…누나를 위해 울 거예요.” “그럼 너는…….” 정화 누나는 뭔가 말하려다 도중에 멈춰버렸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누나의 복수…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내 일부가 된 게임을 이용하는 녀석들에 대한 증오.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이 더 이상 없었으면 하는 바람. 지금 내가 싸울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입니다.” “결론적으로 지금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말이니?” 나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나라는 나약한 사람의 존재. 그걸 알기 때문에 강해질 수 있는 나라는 존재…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럼 저도 이 일에 동참하겠어요.” 한나가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나와 정화 누나는 동시에 한나를 보았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저 때문이기도 해요. 이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만든 프로젝트였으니까요. 아빠는 말하지 않았지만 다 알고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모른 체했죠. 하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피하지 않겠어요!” “저기…한나라고 했지? 아까 말 들어보니 네 사정도 딱하긴 한데 그건 네 탓이 아니라고 생각해.” 한나는 정화 누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단지 그냥 말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이 다리처럼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때 나 때문이 아니라고 내면에서 부정했을 땐 너무 괴롭고 참기 힘들어서 죽을 것만 같았는데 지금 이렇게 인정해버리니 오히려 홀가분해요. 기찬 씨의 말, 저는 이해할 수 있어요.” 한나는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런 한나를 나는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 저렇게 자신이 판단 할 수 있는 애가 된 거지? 문득 첫 만남 때가 생각났다. 다른 유저들에게 핍박받아도 뭐라 말할 자신이 없어 그저 고개 숙이고 있었던 여자애의 모습이 말이다. “후우, 너희들이 나보다 낫구나. 좋아, 그럼 나도 동참하겠어.” “네?” “어, 언니도요?” 정화 누나는 나와 한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나보다 어린 것들이 더 어른처럼 행세하게 놔둘 수야 없지. 게다가 나는 일월현문(日月現門)의 전통 후계자이자 대환기업의 외동딸, 이정화!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한 파렴치한 녀석들을 그냥 넘어가면 정의란 이름이 울지 않겠어?” 짐짓 정의를 외치는 영웅인양 벌떡 일어나 가슴을 탕탕 치며 말하는 정화 누나. 우리 누나가 옆에 있었으면 정화 누나처럼 똑같이 말했을까? “킥킥, 했어. 분명히 하고도 남아.” “어? 왜 웃어?” “아뇨, 그냥요. 큭큭큭!” 누나를 생각하니 정화 누나가 왜 저런 행동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분명 우리를 달래려고 한 행동이겠지. “자자, 그럼 우리 여기서 맹세하자. 손들 내밀어봐.” 정화 누나는 자신의 손을 앞으로 내밀며 나와 한나를 번갈아 보았다. 우리 둘은 무심결에 손을 내밀었고 그러니 마주 포개어진 세 명의 손바닥. 정화 누나는 힘차게 외쳤다. “우리들은 비록 한 해 한 달 한 날에 태어나지 못했어도 한 해 한 달 한 날에 죽기를 원하니 하늘과 땅의 신령(皇天后土)께서는 굽어 살피리라!” “도원결의…입니까? 지금 상황하고 하나도 안 어울리잖아요.” “그냥 내가 좋아하는 말이야. 그러니까 너희 둘 다 죽으면 안 돼.” 갑자기 진지하게 말하는 정화 누나.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거구나. “뭐, 나름 나쁘지 않네요.” 나는 내민 손바닥으로 두 사람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저도 도와드리겠어요.” 한나가 응답하듯 손을 꼭 마주잡았다. “그래, 조금 힘들지라도 힘내자!” 정화 누나도 손을 꼭 잡으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렇게 우리 셋은 웃었다. 지금이 순간만큼은 모두 복잡한 것 하나 생각 않고 그냥 웃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그쪽도 전부 마무리 된 모양이구나.” “우와악!” “꺄악!” “흡!” 갑자기 들린 태식 형의 말투. 뒤를 보자 어느새 문이 열려있었고 하나 둘 서재로 갔었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허허, 도원결의하는 소리까지 쩌렁쩌렁 울리고, 무슨 얘길 하는 건가?” “설마 정화야, 의형제라도 만든 건 아니겠지? 이 애비는 승낙 못한다.” “조그만 것들이 뭔 할 짓 없어서 저러고 노나.” “조철 씨, 분위기 깨는 소리는 하지 말아 주세요. 나름 귀여운걸요, 뭘.” “……….” “……….” “……….” 귀까지 새빨개진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겠지? “놀리는 건 그만하고. 기찬아, 네가 해줄 일이 하나 생겼다.” “제가…할 일이요?” “그래. 어쩌면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몰라. 그것도 오늘 하루밖에.” “오늘 하루밖에?” 태식 형은 내게 다가와 어깨를 꽉 잡으며 말했다. “오늘이 아펜하르트 유료화 되는 마지막 날이잖아. 그러니까 오늘밖에 할 수 없어.” “그게 뭐죠?” 태식 형은 말했다. 아주 간단하게. “영웅 등용.” 나는 이제 영원히 아펜하르트 게임 속으로 들어갈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진. 영웅 집결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왜 거기 쭈그려 앉아 아까부터 한 숨만 쉬냐?” “……….” 근육질의 사내 나헬스했다는 한창 연무장에서 검 수련을 하고 있었는데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연간 한숨만 쉬고 있는 금발 웨이브 소녀 주리아 때문에 마지못해 말을 건 것이었다. 하지만 주리아는 쳐다보지도 않고 무시했다. 주리아, 한국식 이름으로 김주리인 그녀는 어머니가 미국인이기 때문에 푸른 눈과 찰랑거리는 금발을 가지고 있었다. 게임 상의 아이디는 미소천사. 한때 레인저를 키운 주리아였지만 미소천사를 동경해 아이디와 캐릭터를 바꾸고 새로 키운 것이었다. “왜 둘 다 오지 않는 걸까?” 『저는 버림받은 거 같아요.』 “하아.” 『하아.』 주리아와 정령이, 또 하나의 이름은 이그레시아인 루시아니안의 정령은 크나큰 걱정이 있었다. 최근 들어 들어오지 않는 두 유저 때문이었는데 덕분에 친한 사람이 없는 둘은 연무장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연신 한숨만 쉬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심한 말을 해서 그런가.” 주리아는 정식 모임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너무 좋아하던 언니였기 때문에 실망도 그만큼 컸던지라 막말해버린 자신. 그날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한 상태라 우울함은 더 크기만 했다. “전부 그놈 때문이야!” 사실 주리아는 막말한 자신이 너무 미안해 사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자존심을 긁어놓은 언니의 동생이란 사람 때문에 더 오기가 발동해 한마디 하지 못하고 돌아왔던 것이었다. 그 죄책감이 그녀를 사로잡아 그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접속하지 않았었다. 최근에서야 주리아는 마음을 다잡고 사과할 마음으로 접속했으나 이미 사라져 버린 언니. 더불어 한나도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같이 접속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정령이 또한 두 명의 주인이 접속하지 않아 우울하게 연무장을 돌고 있었는데 마침 주리아가 보여 쪼르르 그녀에게 다가가 지금 이런 상황이 만들어 진 것이었다. 『그놈?』 의문이 든 정령이가 물어보았지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아 연신 한숨만 쉬는 주리아였다. 그러다 갑자기 볼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주리아. 기찬이를 생각하다 그의 품에 안겨버렸던 자신이 떠올랐던 것이었다. “파, 파, 파, 파, 파렴치한 놈!” 주리아는 남자 면역력이 떨어지는 자신이 너무도 싫다고 생각했다. 그 상황에서 거침없이 뺨을 때리고 내려왔으면 되는 일이었는데 왜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가. 그런 바람둥이 같은 자식에게 덥석 안겨 좋은 꼴만 보여준 것이 아니겠는가. “으으윽, 다시 보기만 해봐라!” 주리아는 울분이 끓어 넘쳤다. 그때 두근거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더위를 먹었나?” 나헬스했다는 신기한 동물 보듯 주리아를 보았다. 한숨을 쉬다 갑자기 화를 내지 않나. 그러다 얼굴을 붉히지 않나. 지금은 다시 화내고 있으니 그럴만했다. 『어? 어? 와, 왔다! 오셨다!』 순간 정령이가 튕겨 일어나듯 높이 솟아올랐다. 그걸 볼 수 없는 주리아는 여전히 화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미소천사 언니는 오지 않는 거야!” “응? 나?” 뒤에서 들린 소리였다. 나헬스했다가 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주리아 앞에 있었으니까. 주리아는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어, 어, 어, 어, 어, 어, 어―!” 주리아는 결국 끝까지 대답하지 못한 채 경악했다. “또, 또 쓰러트렸어.” “이게 대체 몇 명 째야?” “대단하다…….” 화려한 갑옷과 로브를 입은 유저들 모두 글로리시나를 향해 한 말이었다. 글로리시나는 레이피어를 늘어트린 채 대기하고 있는 또 한 명의 유저를 바라보았다. “덤벼라.” 글로리시나의 싸늘한 말투가 칠색의 검, 피브르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칫,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거 같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글로리시나에게 주춤한 자신이 너무도 싫었던 걸까? 오만상을 찌푸린 피브르는 칠색의 검이란 호칭을 만들 수 있게 해준 자신의 애검, 절대쌍검을 두 손으로 각각 꼬나 쥐고 달려들었다. 이곳은 켈타스 제국수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한 평원이었는데 몬스터가 없어 수많은 유저들이 서로 실력을 점검하는 장소 즉, 비공식 PVP지역이었다. 오늘은 아펜하르트가 유료화 되기 하루 전이라 더욱 많은 유저들이 마지막을 즐기기 위해 이 자리에 모여들었는데 뜬금없이 나타난 명예랭킹 2위, 글로리시나 덕분에 모두들 구경하는 유저들과 한판 떠보려고 하는 유저들로 바뀐 것이었다. “헉, 헉.” 글로리시나는 숨이 고르지 못한대도 현란한 쌍검을 레이피어로 전부 막아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피브르는 경악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이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유저들을 이겨왔었는가. 자신만 나타나면 명예랭킹 30위 안에 있는 유저조차도 한 수 가르쳐달라 숙이고 들어오게 만드는 유저가 바로 자신이다. 그런 자신이 모든 능력을 개방하여 휘두르는 쌍검을 전부 막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것도 벌써 열다섯 명을 눕혀 힘이 다한 상대가 말이다. “젠장, 젠장, 젠장! 이야아아아아앗!” 화가 난 피브르는 자제심을 잃고 쌍검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오히려 그 예측할 수 없는 검의 방향 때문에 운 좋게도 글로리시나의 옆구리를 스치게 만들 수 있었다. “흡!” 글로리시나는 황급히 백스텝을 밟아 사정권에서 멀찍이 떨어져버렸다. 하지만 이미 스멀스멀 피가 배어나오는 옆구리. 평소 때였다면 막지 못할 리 없는 것이었다. 아니, 검을 휘두르기 전에 이미 끝나있을 상대였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왜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 되어있는 것일까. ‘결국…그녀는 오지 않았어.’ 방금 전까지 글로리시나는 미소천사 기사단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이란 엔젤을 무찌른 이후 종적을 감춰버린 그녀. 그리고 다음날 일어난 건대학살 사건. 왠지 연관된 일이라 직감한 글로리시나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었다. 하지만 결국은 오지 않았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진과 싸울 때도, 그리고 기다리는 오늘까지도 글로리시나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너무 화가 났다. 어머니가 가난과 싸우다 돌아가실 때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녀.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너무 똑같다 생각했다. “킥킥, 킥킥킥!” 글로리시나는 비집고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웃음. 재차 덤비려던 피브르 조차도 멈추게 만드는 그런 웃음이었다. “내가 뭘 하는 짓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글로리시나가 찾은 곳은 결국 이곳. 검이라도 휘두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은 자신 때문에 자연히 이리로 온 것이었다. 그동안 게임은 생활비를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었다. 게임은 단지 게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지 않는다 생각했다. 하지만 미소천사인 그는 그런 자신과 너무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 하나의 자신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 게임에서 죽는 것이 정말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걱정하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글로리시나는 지금까지 자신과 다른 그 모습에 호감이 갔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피의 맹세.” 순간 글로리시나는 자신의 손목을 그어버렸고 그곳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목에서 뿜어지던 피들은 땅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에 붙어 기이한 문양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피의 맹세?” “자, 자살할 셈?” “PVP에서 이 무슨!” 다른 유저들이 너나할 것 없이 경악하기 시작했다. 글로리시나는 이 상태에서 피의 광세로 변형시켜 자살스킬이 아닌 자신만의 스킬로 전환할 수 있었으나 글로리시나는 변형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보지 못하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여기서 죽고 한동안 접속하지 않을 셈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유료화 되는 동시에 대규모 점검으로 당분간 들어오지도 못하는 거…갈기갈기 찢어주마.” 글로리시나의 눈이 광기로 변해갔다. 피브르는 자신이 옆구리를 베어 화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저 화는 글로리시나 바로 자신 때문이었으니까. “항시 싸우지 않으면 좀이라도 쑤시는가보죠?” 은신하려던 글로리시나의 몸이 순간 멈칫거렸다. 한없이 커진 눈동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광기로 번뜩거리던 그녀의 눈이 기쁨과 혼란으로 뒤섞여버렸다. 조심히 뒤돌아보는 글로리시나. 그 뒤에는 천사가 도착해 있었다. “누님, 유료화 되면 정말 접으실 거에염?” “뭐, 나도 나이가 있으니까. 애초에 유료화 되기 전까지만 즐기기로 한 게임이었던 거 너도 알잖아.” “그거야 그렇지만…그냥 계속 같이하면 안 될까염? 한창 재미있게 키우고 있는데.” “봉규야, 이 누님 생각 그만하고 너도 슬슬 취직 걱정이나 해.” 봉규라 불린 유저는 노랑머리로 염색해서 뒤로 꽁지를 한 모양에 온통 검은색 가죽옷을 입고 있었는데 키가 2미터가 넘어 유난히 커다랬다. 그는 바로 륀 기사단의 연금술사, 하가네였다. 그와 얘기하는 유저는 가슴께가 파인 천 옷을 입고 있어 섹시함이 물씬 풍기는 마학자, 레이나였다. 레이나는 지금의 자신이 있게 만든 푸른 스태프, 냉혹의 지팡이를 살짝 휘두르며 말했다. “슬슬 나가자. 모두 기다리잖아.” “하아, 넹.” 요상한 말투로 잠시 푸념한 하가네는 레이나와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그들은 바로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수많은 마법사들이 한 대 뭉쳐 잡담하고 있었는데 레이나와 하가네를 발견하고 반기기 시작했다. “오오, 나오셨다!” “단장님! 오늘도 예쁘십니다!” “아아, 오늘이 마지막이라니!” 유저들도 이미 모두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레이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모두 즐거웠어. 지금까지 미덥지 못한 단장을 따라주느라 고생들 많았다. 다음 단장은 하가네, 불사조 씨가 잘 이끌어 줄 거야. 아, 탈영병이는 모두 알다시피 군인이라 더 이상 못 들어올 거야. 돈을 내지 못하니까.” “안 돼요! 가지 말아요! 단장님!” “이놈의 유료화는 왜 하는 거야!” “아아, 더 이상 그 큰 가슴을 보지 못하는 구나!” 유저들은 모두 슬퍼하면서도 안타까워했다. 그 후자가 분명히 많을 테지만……. 레이나는 그동안 게임하던 자신이 헛일은 아니었구나 생각했다. 지금까지 일궈놓은 업적들, 인연들, 사랑들을 보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 나이도 많으니…….” “결혼 적정기도 넘었을 텐데. 게임만 하면 안 되겠지.” “하긴…더 잡는 게 오히려 독이 될지도 몰라.” 아쉬움으로 넘치던 레이나의 표정이 급속도로 바뀌기 시작했다. 아수라가 강림하면 아마 이런 표정일까? 그녀의 표정은 귀신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금 뭐라고? 나이가 어쩌고 저 째?” “누, 누님.” “피, 피해! 다들 도망가!” 하가네와 불사조는 방금 말한 유저들을 잡아 입을 꿰매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뻔히 히스테리 부릴 말을 왜 꺼내었단 말인가! 둘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이미 멀찍이 도망가고 있었다. 너무도 익숙한 행동이었다. “그래, 유료화 되기 전에 다 죽어보자! 압착의 수환(water pills of compression)!” 작은 물방울들이 광범위로 쏘아져나가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작은 물방울일 뿐이었지만 그 안에 내포된 힘은 포탄과도 같을 정도. 그것을 모를 리 없는 륀 기사단원들은 너나할 것 없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우와악! 진심이야!” “사, 살려줘!” “엄마야!”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그 순간이었다. 사제가 쓸 수 있다던 어콜라이트 프로텍션이 압착의 수환을 막아 내는 것이었다. 레이나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륀 기사단에 사제가 있었던가? 아니 있다손 치더라도 어콜라이트 프로텍션같이 기본 스킬이 자신의 최대 파괴력 스킬을 막아내는 게 말이나 되는 것인가! “으윽, 모, 못 버티겠어요.” “하아, 그러게 그냥 지켜만 보자니까. 마리아, 부탁해.” [행복, 사랑, 그것은 하나의 축복. 고통, 저주, 그것은 하나의 불행.] 냅다 도망가던 하가네와 불사조가 멈추었고 레이나가 스킬을 중지시켰다. 륀 기사단원들 역시 모두 한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그곳에는 손을 모아 기도하는 가디언이 보였다. 성스럽고 고귀한 모습의 가디언, 넋을 잃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 어?” “저분은!” “이야아!” 가디언을 소환한 자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반가움이 물씬 담겨있는 표정으로 한 곳을 보는 유저들, 이성을 잃은 레이나조차도 그곳을 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두, 두령!” “다가오지 마!” 눈가에 길게 상처가 나있어 사나운 인상을 가진 슈바리에단의 두령, 다덤벼는 다가오려는 단원들을 소리 질러 막았다. “아직도 버틸 힘이 남아있나?” - 끼이이이이이이잉― 다덤벼와 대치하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엄청난 체구의 사내였는데 키만 해도 2미터 30은 됨직했다. 그자 주위는 어둠으로 감싸인 검 하나가 휘돌고 있었는데 그 검에서 나는 소리가 소름끼치도록 듣기 거북했다. 그의 이름은 명예랭커 7위, 영웅슬레이어 칼리. 다덤벼는 참으로 일진이 더럽다고 생각했다. 건대에 있는 자신의 회사가 무너져 한순간의 백수가 되질 않나, 유료화 되기 하루 전이라 오늘은 단원들과 크게 한탕 뛰려고 했더니 뜬금없이 멀대같은 놈이 나타나 기사대전을 신청하지 않겠는가. 덕분에 복부에서 찐득한 피의 느낌이 생생히 전달되고 있었다. “젠장,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단지 내 강함을 실험하고 싶을 뿐이다.” 칼리는 무심히 다덤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실 칼리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게임을 접을 생각이어서 한 행동이었다. SL슈론 농구팀에 프로로 활동하는 김주혁은 상대팀 선수와 주먹다짐하여 몇 달간 출장정지를 먹었고 덕분에 잠시 쉴 겸 이 게임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제 출장도 풀리고 다시 예전 체력을 만들어야했기 때문에 접는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도 해볼 겸 랭킹 10위부터 전부 상대할 작정으로 다덤벼를 찾은 것이었다. “후우, 뭐, 좋아. 이참에 랭킹 7위가 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이제부터 긴장해라, 진짜로 간다. 기문 개방.” 격투가의 잠재된 힘이라고 평가받는 기문 개방을 사용한 다덤벼. 그의 몸에선 범접할 수 없는 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기대하지. 가라! 귀곡마검(鬼!哭魔劍)!” 칼리의 귀곡마검이 알기 힘든 궤도로 쇄도해 들어왔다. 다덤벼는 몸을 그대로 두고 눈동자만 돌려 그 검의 잔상을 좇았다. “어, 엄청난 빠르기다.” “세상에 무슨 저런 속도의 검이!” “그걸 피하는 우리 단장님도…….” “괴물이다…….” 귀곡마검의 속도는 범인의 눈으로 절대 좇을 수 없는 스피드였다. 하지만 다덤벼는 우습다는 듯이 작은 움직임으로 검을 모두 피해내고 있었다. “흐압!” 검의 궤도를 전부 읽은 것인지 다덤벼는 피하는 걸 그만두고 검을 손바닥으로 쳐내버렸다. 한순간 주춤거리는 귀곡마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덤벼는 칼리에게 접근해 들어갔다. “받아랏! 용문권(龍刎拳)!” - 꽈과광! 다덤벼와 칼리 주위에 모래가 비산했고 그러자 슈바리에단 단원 전부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모래가 가라앉자 도로 경악하는 단원들. 칼리가 양팔을 교차시켜 다덤벼의 주먹을 막은 것이었다. “어, 어떻게 검사가 격투가의 주먹을 맨손으로 막아!” 다덤벼 조차도 경악했다. 칼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도 격투가 쪽이라서.” “뭐, 뭐?” “하압! 절권!” “젠장! 호문권(虎刎拳)!” 두 유저는 서로 일 권을 질렀고 그 여파로 서로 주르륵 밀려나게 되었다. “격투가가 검을 가지고 다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캐릭터냐?” “흠, 귀곡마검은 우연히 얻게 된 유니크 아이템이라서. 그보다 방심하고 있단 죽을 텐데?” “으응? 으허억!” 다덤벼는 무슨 말인지 의문을 가지다 순간 핏기가신 표정으로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사이로 휙 하고 지나가는 귀곡마검. 흩날리는 머리칼을 보며 진짜 죽을 뻔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다덤벼였다. “이봐, 네 힘이 이 정도였나? 그럼 이만 가볼까 하는데.” 흥미가 떨어진 듯 귀곡마검을 회수하는 칼리. 다덤벼는 순간 어이가 없다 못해 짜증이 이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너, 너, 너…좋아. 보여주마. 최근에 얻은 이 기술을 말이야. 이 몸을 깔본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기폭!” “기, 기폭 했어!” “저지를 셈이야! 두령님 완전히 이성을 잃었어!” “그, 그걸 쓸 셈인가?” 단원들이 모두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칼리는 무언가 온다는 직감이 들어 귀곡마검을 자신의 앞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다덤벼의 몸에서는 무언가 터지는 듯 한 기의 소용돌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제 2차 기폭, 제 3차 기폭!” 기폭 하나가 끝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2차 3차를 부르자 그의 옷이 팽팽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칼리는 처음으로 희열의 미소를 지었다. “큭큭, 내가 왜 영웅슬레이어란 호칭이 붙은 줄 아나? 강한 상대일수록 더욱 강한 게 나이기 때문이다! 와라!” “…제 4차 기폭…쿨럭! 으으으으윽! 제 5차 기포오오오옥!” 머리칼까지 새하얗게 탈색되어 전부 곤두서는 다덤벼. 이젠 바닥에 돌멩이까지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꼭……. “나왔다! 초사이어인!” 단원 중 누군가가 한 말이었다. 어느 만화에 나오는 명칭을 부른 것 같은데 다덤벼의 모습이 꼭 그 모습과 흡사한 모양이었다. 칼리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귀곡마검을 바닥에 꽂고 외쳤다. “부정의 바다여, 메마른 대지여, 혈색의 하늘이여!” 칼리 주위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붉은 기와 녹색의 기가 한 대 어우러져 귀곡마검 주위를 맴돌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우웅 가늘게 떠는 귀곡마검의 힘은 무엇이라도 가를 것 같아 보였다.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압!” “하아아아아아아아아앗!” “일월현문(日月現門)오의 천천후섬(天千厚剡)!” 거대한 기가 서로 맞닥뜨리려는 그 순간 중간을 비집고 들어온 수많은 검들. 둘은 깜짝 놀라 다시 뒤로 떨어져 버렸다. “휴우, 아슬아슬했네.” “너, 너, 넌?” 다덤벼가 눈을 비비고 자신을 막은 상대를 보았다. 상대는 붉은 머리를 길게 기른 여성이었다. “노략질로도 모자라 이젠 명예랭커 사냥도 시작했냐?” 이번엔 다른 쪽에서 들린 말이었다. 다덤벼는 멍하니 옆을 보았다. 그곳에는 마왕침공 이후로 오랜 시간동안 패닉상태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 서있었다. “너, 너, 너, 너, 너, 넌! 변태 녀석!” 다덤벼의 입에서는 그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여자로 알고 있었다가 막바지에 남자란 걸 알아버린 다덤벼. 당연히 변태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겠는가. 그의 사정을 알 리가 없는 다덤벼였기에.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나와! 부탁이야, 수희야!”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남성이 해골 탈을 쓴 무리들을 피해 다니며 외치고 있었다. 그는 어둠의조이, 현빈이었고 무리들은 파소에들이었다. 마왕사건 이후로 사흘간 위치의 산맥을 뒤지고 다녔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현빈은 곧 쓰러져도 이상 할 게 없는 상태였다. “내가 사과할게. 전부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야!” 현빈의 말에 응답한 자가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 생머리의 여성이었는데 전체적으로 날카롭고도 아름다운 이미지라 흑장미를 연상시켰다. 그녀의 이름은 박수희, 파소에 무리를 이끄는 한 명의 유저였다. “수, 수희야.” 현빈은 드디어 만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마주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 그를 노려보던 수희는 등에 매고 있던 거대한 활을 집어 던졌다. 그 활은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는데 한때 현빈의 주 활이었던 스피드스타라는 명칭의 활이었다. “더 이상 네 얼굴 꼴도 보기 싫으니까 이거나 도로 가져가버려.” 현빈은 자신 앞에 떨어진 스피드스타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분명 같은 푸른 물방울서커스단에서 활동할 때만해도 친했던 둘이었는데 말이다. “네 마음…완전히 떠난 거니?” “……….” 현빈은 계속 자신 앞에 있는 활을 주시한 채 말했다. 박수희는 그 말에 사실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아니까. 저 눈치 없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이니까. 그랬기 때문에 더 화나는 자신이었다. “그래, 이제 네 얼굴조차 보기 싫어.” 수희는 자신이 말하고도 가슴이 아파 옴을 느꼈다. 왜 이런 상황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전부 다 눈치 없는 현빈 녀석 때문에 그런 것이라 여기는 수희였다. “알았어. 나도 그만 포기할게.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줘.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아. 너는 결백할거야. 내가 아는 수희라면 절대로 살인 따위는 하지 않아!” 그것이 문제였다. 올곧은 마음의 그는 자신을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다. 차라리 차가운 눈으로 보아주었음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저 흐트러짐 없는 눈 때문에 더 나락으로 빠져든 거라고 생각하는 수희였다. “아니, 내가한 짓이 맞아. 네가 아는 수희는 이미 없어.” “…정말이야?” “그래.” 이번엔 거짓말이 아니었다. 고아원에서 어릴 때부터 같이 의지하며 살아온 두 사람. 그들을 받아 준 곳이 푸른 물방울서커스단이었다. 남자인 현빈은 잡일과 서커스를 배우는 걸로 끝날 수 있었겠지만 여자인 자신은 점점 자라며 요염해지는 이 몸 때문에 단장에게 성폭행당하며 살아야했다. 만약 도망가거나 현빈에게 알리기라도 하면 내쫓을 거라 엄포를 놓았기 때문에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순진해빠진 현빈은 자신의 고충 따위 전혀 모를 것이었다. 왜 단장을 독살하고 서커스단을 떠났는지 말이다. 수희는 차라리 잘된 것이라 생각했다. 현빈은 자신과 다른 빛에서 생활하길 바랐으니까. “어째서, 어째서…….” “이유 따위 필요해? 그냥 죽이고 싶었어. 다른 서커스단원들은 내가 죽였다고 어렴풋이 알고 있는데 왜 너만 믿지 못하는 거야?” “믿지 않아. 믿을 수 없어. 분명 피치 못할 이유가 있는 거야.” 현빈은 활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수희를 노려보았다. “알려줘. 평소에 우울해하던 모습과 관련이 있는 거지, 그렇지?” 아무리 화를 내고 거짓말해도 도무지 믿지 않는 현빈 때문에 수희는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으득 씹었다. 저 집요하고 멍청한 놈 때문에 자꾸만 과거일이 생각나 한 행동이었다. “집어치워. 이제 와서 말해봐야 달라질건 아무것도 없어.” 현빈은 자신의 직감이 맞았다고 확신했다. 수희의 표정을 보니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었다. 과거부터 의심은 들었었다. 수척해진 얼굴의 수희를 볼 때마다 든 생각이었지만 서커스단을 믿고 싶어 회피했던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 행동은 의심하기 싫었던 게 아니라 무관심했던 것이었다. 더 죄악이었단 사실에 지금까지 죄책감에 사로잡혀 수희를 찾아다녔던 것이었다. “수희야, 이 게임 처음 시작할 때 생각 나?” 현빈이 이 게임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수희 때문이었다. 어째서인지 자신을 권유해 같이 게임을 시작한 수희. 그땐 알지 못했다. 자신과 같이 게임을 한 이유가 단장을 독살하고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였던 것임을. 현빈이라면 같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고 증명해 줄 테니까. 수희의 생각은 적중했다. 결론적으로 현빈이 사건 당일 날 수희와 같이 게임했다고 거짓말했었으니까. 그날 이후 수희는 현빈의 모든 아이템을 가져간 뒤 사라졌다. 서커스단을 나와 게임으로 돈을 벌기위해 그런 것이었다. “그때 네가 쓰던 기술, 나 역시 연습했어.” 수희는 현빈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과 같이 있을 때 보여준 스킬은 필멸의 화살밖에 없었으니까. 궁수를 선택하고 활을 잘 다루던 자신이었기에 겨우 얻을 수 있었던 스킬이었다. 그래서 현빈이 연습했다는 말이 조금 믿기지 않았다. 그는 마법사를 선택했었으니까. “한순간도 너를 잊지 않았어. 암속성 결합, 증폭.” 현빈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수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알고 있었으니까. “화속성 결합, 증폭. 수속성 결합, 증폭. 목속성 결합, 증폭. 금속성 결합, 증폭.” 하지만 점차 주문을 외우는 모습을 보며 수희의 눈은 커져만 갔다. 현빈은 천천히 활시위를 메기기 시작했다. 수희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현빈을 보았다. “말도 안 돼, 궁수도 집중력을 사용해 겨우 만드는 화살을 아무렇지 않게 오속성 결합?” 궁수로 선택한 자신도 한계가 사속성이었다. 하지만 현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오속성을 결합해 버린 것이었다. “토속성 결합, 증폭, 천속성 결합…크윽 증폭! 월속성…쿨럭! 결합, 증포오오오오오옥!” 하지만 주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피를 토하면서까지 끝까지 오기부리는 현빈. 수희로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올속성 결합이라니. 대체 어떻게 연습했기에 저것을 결합할 수 있단 말인가. “쿨럭, 네가 그랬지? 내가 이 스킬을 마스터하면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수희는 문득 그런 적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아마도 농담 삼아 뱉어낸 장난 비스무리한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을 녀석은 진지하게 생각했었단 말인가? 수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원이다. 나도 서커스단을 나갈게. 그러니 우리 둘이서 살자.” “지금…뭐라고?” “결혼하자고, 박수희! 세상조차 가르는 필멸의 화살(Arrow of Mortality)!” 현빈이 날린 화살은 창공을 꿰뚫기라도 할 것처럼 구름 저편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수희는 그 화살을 볼 수 없었다. 멍하니 현빈을 보고 있었으니까. “우, 웃기지 마! 내가 왜 너랑 가, 같이 살아야 하는데!” 아까만 해도 차가운 장미의 여성이라면 지금은 풋풋한 소녀 같은 모습의 수희였다. 현빈은 숨을 거칠게 쉬면서도 미소 지었다. “사랑한다, 박수희.” “………!” 이젠 입만 뻥긋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수희. 주위에 있는 파소에들은 모두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거…조금 늦게 올걸 그랬나?” “어, 어떻게 주리아 언니! 저 프러포즈를 봐버렸어요!” “나, 나, 나도 첨이야.” “솔로 염장지르냐! 그런 건 게임 나가서 해!” “당신이나 조용히 해. 주먹만 사용해서 머리도 주먹이 됐나? 잘 풀리는 커플을 왜 건드리고 난리야.” 현빈에겐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들이었다. 하지만 믿기지 않았다. 이곳은 위치의 산맥 깊숙한 곳이었다. 어떻게 저들이 여기를 올 수 있단 말인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뒤돌아보는 현빈이었다. “진짜잖아?” 아무래도 현빈이 들은 소리는 착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찌 반란군들을 막지 못한단 말인가!” “폐하! 반란군의 위세가 맹렬하옵나이다. 황궁 근위병을 전선에 투입시켜야 합니다!” 군사이자 켈타스 제국의 헤드인 모라운 후작이 부복하며 말하자 켈타스 제국의 황제, 미드나인 폰 켈타스의 흰 수염이 부르르 떨었다. “좋다, 허락하겠노라. 그러니 어서 빨리 반란을 진압시켜라!” “명을 받듭니다!” “명을 받듭니다!” 황궁 안에 있는 모든 NPC들이 우렁차게 외쳤다. 그때 그 시간, 황궁까지 거의 도달한 더원 기사단은 연합 맺은 수많은 기사단과 함께 점점 더 황궁 쪽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루네디! 난 행한다. 현상의 결계를!” 더원 기사단의 간부인 결계의마도사 루히비드는 푸른 보석 하나를 던지며 외쳤다. 그 보석은 달의 의지를 받은 자. 즉, 달의 존재를 일깨우기 위해 선택된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달의 파편이었다. 그 달의 파편이 공중으로 날아가며 은은한 푸른빛을 사방에 퍼트리기 시작했고 그 빛을 쬐인 유저들은 몸이 푸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오오오, 갑옷이 더 단단해 졌어!” “세상에 이런 보조가 다 있구나!” “우오오오옷! 나가자! 황제를 죽이자!” 탄력 받은 유저들은 사기가 충만해져 괴성을 질렀다. 그 모습을 하늘 상공, 드레이크 위에서 보고 있는 세 명의 유저가 있었다. 하나는 더원 길드의 핸드란 직책을 가지고 있는 녹색로브의 드래곤소환사 주르르였고, 또 하나는 헤드란 직책을 가진 더원 기사단의 참모이자 군사, 제갈공녀였다. 마지막으로 서 있는 자는 푸른 피부의 사나이, 천상천하 유아독존! 명예랭킹 1위, 용병왕 애디였다. “공녀, 현재 상황은?” 애디의 말에 제갈공녀는 빠르게 파피루스로 만든 노트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 노트는 제갈공녀의 스킬이자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아이템인 현자의 필기첩이라 불리는데 자신이 생각하는 범주 안에 모든 정보들은 퍼센트로 수치화하여 알려줄 뿐만 아니라 군사가 알아야할 덕목인 현재 남아있는 군사의 수, 군량,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까지 전부 알 수 있는 유니크 아이템이었다. “켈타스 지역, 인근 마을은 여전히 잠잠한 상태입니다. 이 상태로 진격한다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30분 안에 89%의 확률로 혁명이 성공합니다.” 89%. 이 수치가 나올 수 있는 이유는 베르제브브 사건 때문에 다친 NPC병사들 때문이었다. 유저들은 죽고 부활하면 그만이지만 NPC들은 죽으면 다시 부활이 불가능하고 다쳐도 회복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로 했다. 덕분에 이런 수치가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89%인가…….” 애디는 제갈공녀의 말을 들으면서도 기뻐하기는커녕 무료하게 하늘만 바라보았다. “결국 그녀는 오지 않았군.” 비록 머리 다리 다 때고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자는 없었다. 제갈공녀는 뿔테안경을 벗고 미간을 살짝 주무르며 말했다. “이 싸움이 끝나면 이제 모르핀 제국이에요. 혁빈 씨가 원치 않아도 보게 되겠죠. 유료화 후에도 접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겠지만…….” “사흘간 접속하지도 않았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이미 접은 거 같은데요.” 주르르도 무언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말에 제갈공녀는 안경을 도로 쓰려다 그만두고 한숨을 쉬었다. “혹시 건대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을까?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크게 다쳤다거나…….” “에이, 설마요.” 주르르는 부정하면서도 걱정하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처음본 건 마왕침공 때 뿐이었지만 눈에 각인 될 정도로 대단했던 그녀. 애디를 보면서 느꼈던 그 희열을 다시금 느끼게 해주었던 미소천사였다. 만약 자신이 애디를 따르지 않았다면 당장 미소천사 기사단에 합류했을 정도로 말이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재미없군. 그들이 저지하러 올 줄 알았는데.” 애디는 팔짱낀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에는 수많은 유저들과 방어하는 NPC들이 한창 싸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애디는 생각했다. 자신이 왜 이런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게임을 시작할 당시에는 모든지 정점에 서고 싶다 생각했을 뿐이었다. 많은 고비를 거치며 강한 상대를 하나하나 무찌르는 기쁨에 더욱 이 게임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같이 게임을 하게 된 이유는 아마 현실에서 약해진 자신의 심장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현실에서 알아주는 파이터로 뒷세계에서는 강철의 카리스마로 통했던 극진가라데의 고수, 강혁빈이 자신이다. 한창 전성기였던 그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심장이상으로 병원을 찾았고, 더 이상 심한 운동을 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아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약해진 자신을 죽이기 위해 수도 없이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제갈공녀, 한혜숙의 도움으로 모든 일들을 무난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고 돈을 마련할 겸 이 게임을 시작한 것이었다. “미소천사야 뭐 그렇다고 해도, 륀 기사단과 미소천사 기사단이 견제하러 오지 않는 것도 이상해요. 아니, 모든 랭커들이 다 어디 사라진 거죠? 후, 뭐 우리야 편히 혁명에 성공해 나쁠 건 없다지만 RPG게임하는 것 같아 재미없네요.” 제갈공녀, 한혜숙은 그동안 쌓인 불만을 전부 토해냈다. 애디는 그런 혜숙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분기한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군.’ 혁빈과 혜숙이 처음 만난 날은 비가 죽척죽척 내리는 여름이었다. 당시 한창 장마철이라 비가 끊이지 않았었는데 칼을 맞아 죽기 직전에 자신을 혜숙이 구해주며 인연이 시작되었다. 당시 혁빈은 이미 약해진 심장 때문에 많은 추격자들에게 시달림 받고 있는 상태였고 그 사실을 알게 된 혜숙은 그녀의 작전으로 인해 우두머리 격들을 서로 싸우게 만들어 약해지게 만든 뒤, 혁빈이 힘으로 괴멸시켜 어부지리를 취했다. 혁빈은 천재적인 그녀의 모습에 감탄하였고 혜숙은 그의 강한 모습에 감탄하였다. 둘은 당연하다시피 연인사이로 발전되었다. 그렇게 모든 일을 마무리한 둘은 평범하게 돈을 벌고 안락한 가정을 꾸리며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천재적인 머리와 강한 힘은 그것을 거부했다. 영웅의 기재를 타고난 그 둘이 어떻게 평범하게 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아펜하르트. 자유도가 높은 게임에서는 그 둘의 능력이 십분 발휘되었다. 모든 일들은 거침이 없었고 걸리는 것은 부셔버렸다. 결국 지금 이 상황까지 오게 되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은 허탈감에 빠진 것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사실 난, 게임을 얕보고 있었어. 지금 느끼는 무료함을 항상 느끼곤 했지. 하지만 같은 지도자의 자질, 하트로서 질투를 느끼게 만든 최초의 사람이 그녀였다. 큭큭, 내가 라이벌로 느낀 사람이 여자라니 조금 웃기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인지 나도 슬슬 이 게임이 질리는군.” “후훗, 라이벌이 사라졌다는 허무함 때문인가요? 이거 질투 나는 걸요?” “당신의 머리는 나로서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에 라이벌이 되지 못해.” “어머? 칭찬인가요?” “인정이지.” “후후훗.” 그 말들을 듣고 있던 주르르는 뚱한 표정으로 속으로 커플지옥 솔로천국을 외치고 있었다. 상황은 유저 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었다. 하지만 천 명의 황실 근위병들이 등장한 이후부터 양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황금색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는 기사들. 말조차 황금갑주를 입고 있는 상태였는데 그들의 힘은 가희 일기당천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막강했다. 그때부터 애디와 주르르, 루비히드가 본격적으로 가세하기 시작했다. “루시, 가자! 파괴의 토네이도!” “루나, 륀, 루네스, 루네디. 난 행한다. 풍화의 결계를!” “드레이크, 브레스! 젠장, 칼리 녀석은 어디로 사라져서 나타나질 않는 거야!” 세 명의 랭커가 뿜는 화력은 저 막강한 황실 근위병들조차 주춤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천 명이나 되는 숫자 앞에선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 “저들이 대장급이다! 반란을 진압하자!” “우아아아아아!” “정면 돌파는 무리다! 공녀, 대책은?” 애디는 빠르게 사태를 판단하고 결론지었다. 제갈공녀는 현자의 필기첩을 재빨리 넘기며 말했다. “이 정도는 예상한 대로입니다! 황실근위병이 나옴에 따라 황실 안은 텅텅 빈 상태. 이곳은 인해전술로 버티고 정예들만 추려 황실 안으로 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냥 이곳을 쓸어버리는 방법도 있으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어서 끝내고 밥이나 먹죠?” 제갈공녀는 마지막 말을 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애디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황실 안으로 기습하는 방법은 이해하지만 이곳을 쓸어버리는 방법은 자신으로서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녀는 무언가 타개책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간단히 포기하고 웃고 있는 제갈공녀의 모습이 기가 막힌 것이었다. “좋아, 루히비드, 주르르! 따라와라! 슬슬 마무리 짓자!” “네!” “네!” 네 명은 빠르게 뒤로 빠져 전쟁 통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황실로 이어지는 비밀통로는 오래전부터 봐두었다. 그들은 거칠 것 없이 달려 나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커다란 하수도. 저곳을 이용하여 황실로 잠입할 작정이었다. 잠시 걸음을 멈춘 네 명은 다시 가자는 애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하수도로 들어갔다. “잠깐, 누군가 있다.” 하수도로 들어가 몇 걸음이나 때었을까. 애디가 팔로 일행을 멈춰 세우며 말했다. 10미터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속에서 애디가 누군가를 본 것이었다. “호, 좋은 눈을 가지고 있군요. 역시 파괴의 눈을 소유한 자인가요?” “…넌 누구냐.” 무언가 여유 있는 목소리. 자신의 파괴의 눈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NPC가 아니었다. 그래서 애디는 물어본 것이었다. “인사드리죠. 저의 이름은 진. 아펜하르트 세계를 창조시킨 운영자죠.” “………!” “………!” “………!” 제갈공녀, 주르르, 루히비드는 두 눈을 부릅떴다. 운영자? 그것도 아펜하르트를 창조시킨 자? 그들은 저 말을 믿어야하나 깊이 고심했다. “운영자가 여긴 무슨 볼일이지? 설마 혁명을 막으려는 건가? 이 게임은 자유도가 높은 걸로 알고 있는데.” “아아, 물론이죠. 막을 생각도, 막을 마음도 없습니다. 제가 여기 온 목적은 바로 당신, 랭킹 1위의 용병왕 애디님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애디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보고 운영자라도 되라는 말인가? 황당함에 찌푸려진 것이었다. “강해지고 싶지 않습니까? 게임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말입니다.” 애디는 더 눈살을 찌푸릴 뿐 말하지 않았다. 진은 짙게 미소 지으며 재차 말했다. “애디…아니, 전설의 파이터, 극진가라데의 강혁빈님. 심장이 약해 심한 운동을 하지 못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저희도 당신을 포섭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조사한 것입니다. 어쨌거나 저희는 당신에게 힘을 줄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예전보다 더욱 큰 힘을 말이죠.” “혁빈 씨.” “알아, 물러나있어.” 혜숙이 걱정스레 다가오자 다시 제지하는 혁빈. “이 심장을 치료라도 해주겠다는 건가?” “치료요? 하하하! 저희는 의사가 아닙니다.” “그럼 무슨 뜻인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짓는 진. 그가 말했다. “건대학살사건을 아시는지요. 방송언론에서는 그냥 미치광이 사람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나와 있으나 사실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은 모두 열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돼!” 다들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진은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했다. “믿으세요. 그 일을 저지른 장본인이 바로 저이니까요.” “………!” “………!” “………!” “………!” 네 명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놀랬다. “저희는 게임상에 존재하던 스킬을 현실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희가 필요한 것은 강한 뇌파를 가진 인재를 찾는 것이지요. 그래서 선택된 사람이 바로 강혁빈님, 당신입니다.” 그렇다. 하진은 강혁빈을 포섭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하진이 하는 일엔 지금까지 걸리는 게 없었다. memory뇌파연구도 순조롭게 성공했고 현실로 불러들이는 연구까지 성공하였다. 어떤 여성 때문에 조금 애먹긴 했지만 결국은 국가까지 포섭하여 자신의 뜻대로 해결되었다. 조금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 여자에게 속아 가짜 USB를 받은 것이랄까? 그거 빼면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사실 강혁빈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강한 뇌파를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현재 자신들을 이길 존재는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초인을 만드는 memory뇌파 수집전달기계, ‘이브’의 한계가 열 명이었기 때문에 더 강한 자를 선택하면 좋을 것 같아 교섭을 시도한 것이었다. 실패해도 상관없었다. 바로 죽이고 다른 인재를 찾으면 그만이니까. 한편 혁빈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지금 저 진이라는 자가 말한 대로라면 분명 쉽게 말할 내용이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수락하지 않는다면 최악의 상황으로 죽이려들지 모른다. 일단 게임은 접속해제하면 그만이었지만 문제는 혁빈, 자신의 정보까지 알고 있다는 것. 집으로 찾아오지 않으리란 법도 없었다. 그렇다면 수락한다? 그것도 문제가 야기된다. 자신은 살 수 있을지언정 나머지 세 명은 어찌한단 말인가. 일단 진의 생각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하필 나지? 강한 자를 찾는 것이라면 내 옆에 있는 자들도 랭커들이다.” “죄송합니다만 저희가 구해놓은 인물들도 있어서요. 지금 필요한 자리는 딱 한자리가 남아있을 뿐입니다. 혁빈님이 포기한다면 순차적으로 권유할 생각이니 너그러이 생각해 주십시오.” “순차적이라…여유롭군요. 그 중요한 얘기를 들어버린 우리들을 어떻게 할 셈이죠?” 제갈공녀, 혜숙이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뭔가 알 수 없는 분위기에 긴장한 탓도 있지만 상대를 깔보는 진이란 자의 눈 때문에 자꾸 불안감이 엄습했던 것이었다. “어떻게 하긴요. 전부 죽어야죠. 너무 돌려 말했나요? 선착순 한 명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이 자리에서 죽을 겁니다.” “뭐?” “젠장, 아까부터 접속해제하려 했는데 해제가 안 돼! 무슨 수를 쓴 거야?” 루히비드가 의문을 말하고 주르르가 당황해했다. 진은 더욱 진하게 미소 지었다. “접속해제는 물론 이 하수도를 빠져나갈 수도 없습니다. 이미 결계가 쳐져있으니까요. 그리고 명심하십시오. 여기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심장마비로 죽는다는 사실을. 그럼 혁빈님, 선택하시죠. 수락입니까? 아니면 거절?” 혁빈은 애초에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고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들어오기 전에 느낀 불안함을 믿고 오지 않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후회해봐야 이미 늦은 것. 혁빈은 천천히 자신의 애검, 이플루시아에 손을 가져갔다. “그 의미는…거절인가요?” “아니, 수락이다. 이검은 내 조건이다. 모두들 살려줘.” “혁빈 씨!” “단장님!” “애디님!” 다들 한마음이라도 된 것처럼 혁빈을 불렀다. 진은 그 모습을 보며 매우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안타깝지만 그 조건을 들어드릴 수가 없군요. 기억을 지우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죠.” “그럼 할 수 없지. 결렬이다! 루시, 파괴의 토네이도!” 혁빈이 이플루시아를 땅이 박아 넣었고 그곳에서 진한 파괴의 힘이 소용돌이치며 앞으로 뻗어나갔다. 그 순간을 예상한 나머지 세 명은 빠르게 뒤로 피신했다. “큭큭, 크하하하하! 이거 요즘 제가 많이 얕보이나 봅니다. 자꾸만 반항하는 자들이 많아지는 걸 보니까요. 영원한 빛, 발동.” 하수도 전체를 파괴시킬 듯 한 파괴의 토네이도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상쇄되었다. 혁빈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스킬이 사라져 그런 게 아니라 진의 모습을 보고 놀란 것이었다. “천사?” “저 모습은…미소천사?” 진의 모습은 확연히 바뀌어 있었다. 등 뒤에는 여섯 장의 날개가 가지런히 접혀있었고 손에는 찬란한 황금색의 창, 그리고 은빛의 방패. 머리에는 불게 타오르는 왕관까지 쓰고 있었다. “네, 맞습니다. 미소천사의 memory뇌파를 사용한 게 바로 저니까요. 그나저나 혁빈님은 거절하셨으니 나머지 세 명에게 기회가 돌아갔습니다. 자,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젠장, 오늘 기분이 별로더라니.” 주르르가 작게 읊조렸다. 루히비드는 말없이 달의 파편을 꺼내들었다. 제갈공녀는 등 뒤에 보이지 않는 벽을 살짝 건드려보며 강도를 측정했다. “아무래도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신 것 같군요. 본보기를 보여드려야할 필요성이 있겠습니다. 그럼 혁빈님, 죽어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진은 황금의 창을 손목의 스냅만으로 던졌다. 하지만 약하게 던진 것치고는 매우 빠른 창의 속도. 그것도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하더니 막바지에 와서는 거의 빛의 잔상만 보일 정도가 되었다. “루시! 자연의 결계!” - 푹! 혜숙의 귀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그 다음으로 본 것은 혁빈의 등 뒤로 튀어나온 날카로운 황금 창이었다. “쿨럭! 어떻게 자연의 결계를 가볍게 뚫…….” “혁빈 씨!” 혜숙은 앞으로 고꾸라지는 혁빈에게 달려갔다. 이미 그의 눈은 초점을 잃은 상태로 무수히 흔들리고 있었다. “자, 이제 아시겠습니까?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요.” “너…너어어어어어!” 제갈공녀가 처음으로 이성을 잃었다. 혁빈과 싸우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았던 그녀가 지금 광분하고 있는 것이었다. “스바르가 마리아!” [행복, 사랑, 그것은 하나의 축복. 고통, 저주, 그것은 하나의 불행.] 진이 외친 말이 아니었다. 그 소리는 제갈공녀 뒤에서 난 소리였으니까. 주르르와 루히비드가 멍하니 옆을 보았다. 그곳에는 금빛의 머리를 휘날리는 아름다운 천사가 강림해 있었다. “사, 살아있어? 어떻게, 네, 네가!” 진이 처음으로 당황했다. 그녀는 분명 자신이 죽였다. 이 손으로 분명히 죽였는데 버젓이 살아 걷고 있었으니 놀랐던 것이었다. 그렇다, 지금 등장한 천사는 아펜하르트 세계의 힐러를 일으킨 장본인이자, 전설이 되어버린 랭킹 5위, 미소천사 타테였다. 그는 말없이 혁빈에게 다가가 상태를 보았다. “다행이야. 아직 죽지 않았어. 마리아!” 그가 외치자 마이아가 손을 뻗었고 그곳에서 빛무리가 흘러나와 다친 혁빈의 배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커헉! 쿨럭쿨럭!” 치료하는 도중에 타테가 창을 뽑아버리자 신음하는 혁빈. “미소…천사?” “접속해제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미 결계를 부셨기 때문에 이젠 걱정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타테는 일어나 진을 노려보았다. “너였구나. 누나를 죽인 장본인이.” 타테는 자신이 지금 살의를 품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말을 듣고 진이 한 번 더 놀랐다. “그 말은 설마, 미소천사 본인! 분명 memory뇌파를 흡혈했는데 어떻게 제정신인거냐! 아니, 그리고 이곳 결계는 어떻게 뚫고 온 거야!” “그 의문은 내가 설명해줘야겠는데?” 저 멀리 어둠속에서 들린 말이었다. 그곳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휘유~ 역시 조철이의 능력은 알아줘야 해. 한 번 보았을 뿐인데 바로 결계해제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다니 말야.” 휘파람을 불며 등장한 랭킹 6위, 미지의마검사 멋쟁이. “memory뇌파가 이렇게 활성화 되어 있었다니…그것도 모르고 저만 쏙 빠졌네요.” “그래서 그게 지금 나 때문이라는 거야?”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하는 랭킹 8위, 일발필중 어둠의조이. 그리고 눈을 흘기며 톡 쏘아댄 건 파소에무리를 이끄는 흑장미 여성, 박수희. “그, 그, 그, 그, 그럼 지금까지 말한 것들이 진짜였단 말야?” “주리아 언니, 믿어달라니까 내말은 듣는 척도 안하고. 흑!” 당황한 표정으로 진에게 손가락질하는 여성과 상처받았다는 듯이 우는 연기를 하는 여성은 엔젤단의 초창기 멤버이자 제 2의 힐러라 불리는 주리아, 아타셰. “이거 저놈만 지금 잡으면 되는 거 아냐?” “정말 네 머리는 주먹으로 이루어져 있냐? 지금 죽여 봐야 아무소용 없잖아.” 손가락을 꺾으며 말한 남자는 랭킹 10위, 맨손마스터 다덤벼. 그 말을 듣고 이마를 짚은 여성은 일월현문(日月現門)의 전통 계승자, 화선녀. “미안, 늦었다.” “미소천사, 일단 물러나. 위험하다.” 주르르와 루히비드에게 사과하는 남자는 랭킹 7위, 영웅슬레이어 칼리. 타테에게 물러나라 말하며 레이피어를 뽑은 여성은 랭킹 2위, 스피드사신 글로리시나였다. 이렇게 마왕침공사건 이후, 거의 대부분의 랭커가 다시 모인 것이었다. “하, 하하. 그렇군. 또 당신들인가요? 역시 그때 죽였어야했는데. 그때의 실수가 천추의 한이 되는군요. 뭐, 좋습니다. 게임상에서 죽이는 건 무리니 곧, 현실에서 죽여 드리겠습니다.” “그 말…….” 타테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살의로 가득한 그의 눈이 분노로 불타올랐다. “그대로 돌려주지.” 지금까지 연기하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본연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놀랐으나 분위기 때문인지 모두 입을 닫았다. 진은 그런 타테를 노려보다 서서히 사라지며 말했다. “그 말, 기대하고 있지요.” 진의 목소리가 좁은 하수도 때문인지 메아리치듯 울렸다. 모두들 그 말을 듣고 자신들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게 모든 랭커들은 한마음이 되는 순간이었다. 대격변 “과연 올까?” 민혜리 씨는 흰색 가운에 손을 푹 쑤셔 넣은 채 하늘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입김이 하늘을 향하다 허무히 사라졌다. “와야 합니다. 아니, 올 거예요.” 나는 사람 한 명 없는 광화문 광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전에 이곳에서 상천이 녀석과 함께 아펜하르트 게임을 스크린으로 구경했던 때가 생각났다. 당시에는 이곳이 가득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었는데. 지금은 사람은커녕 지나가는 자동차 한 대도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게임에 접속한 후,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게임은 유료화가 되는 동시에 무기한 서버가 정지 되었고, 그때부터 아펜하르트 측은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방송, 언론매체에 초인이 실존한다는 사실을 전 세계적으로 알렸고 더 나아가 초인국가의 건설을 도모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로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항쟁과 투쟁으로 맞섰으나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서야 잠잠해졌다. 그 사실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고 결국 한국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한국이 얼마나 바뀌게 될까요?” “저게 사라질 때까지가 아닐까요?” 저 멀리 하나의 탑을 턱으로 가리키며 민혜리 씨가 자조적인 미소를 흘렸다. 저 탑은 근 한 달 만에 완성된 한국에서 가장 높은 탑이었다. 저곳에선 이제 개량된 초인을 배출해내고 있었다. 즉, 생체 실험하는 공개된 연구소라는 것이다. 저 탑만 현재로서 세 개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미 탑에서는 연구가 가동되었는지 하루에도 수십 명씩 개량된 초인을 배출해내고 있었다. “우리들만으로 이길 수 있을까요?” 내 옆, 휠체어에 앉아있던 한나가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에 나와 민혜리 씨는 입을 다문 채 탑을 볼 뿐 아무말도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너무 늦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민혜리 씨는 지친 표정으로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나 역시 절감하고 있었다. 이미 세상은 바뀌어 버렸고 저들의 힘은 강해졌다. 그걸 단지 우리들만으로 막아야한다? 말도 안 돼지. 저들은 한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사람들조차도 집 안에서 숨죽인 채 나오지 않는 것을 봐도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간다는 건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내 손가락에 끼워진 작은 반지를 보았다. 이것은 소망의 반지. 한 달이란 시간동안에 임박사님이 노력해서 만든 최대의 개수는 열 개였다. 사실 더 만들고 싶었으나 초인들의 방해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안건지 대환기업에 있던 우리들이 발각되었고 집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때는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우리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금력을 바탕으로 피신하며 연구를 계속 진행시켜 이렇게 열 개까지 만들어 내었다. 허나 완전히 완성하지 못해 뇌에 부담을 많이 주는지라 지속시간은 고작해야 한 시간. 그것도 일회용일 뿐이다. 그래도 우리들에게 믿을 건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 부르르르릉, 끼이이익! 검은 가죽옷을 입고 블랙계통의 바이크를 타고 오는 이정화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상천이 녀석의 말로는 알원이라는 바이크였지? “주위는 괜찮은 거 같아. 그런데 아직 아무도 안 왔어?” 정화 누나는 주위 정찰을 마치고 우리들에게 물어보았다. 우리들은 딱히 할 말이 없어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슬슬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결국 우리밖에 없나.” 정화 누나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기도 했다. 이렇게 세상이 바뀐 마당에 누가 자살하러 오겠는가. 오지 않아도 책망할 이유도, 그럴 권리도 우리들에게 없었다. 단지 조금 아쉬울 뿐. “기찬 씨, 시간…다 됐어요.” 한나가 머뭇거리며 하는 말에 혜리 씨하고 나는 먼지바람만 부는 쓸쓸한 광장을 보았다. “가죠. 작전을 조금 변경해야겠어요.” 혜리 씨는 냉정히 현재 상황을 판단하고 뒤돌아 걸어갔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더욱 그늘졌다는 것을. 정말 그들은 오지 않는 걸까? - 띠리리리릭, 띠리리리릭. 어디선가 들리는 벨소리에 나도, 한나도, 혜리 씨도, 정화 누나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여기, 이 아래에서 들려요!” 한나가 자신의 발 밑, 나무널빤지를 가리켰다. 나는 황급히 달려가 널빤지를 두들겨 보았다. “속이 비어있어. 에잇!” 나는 널빤지를 발로 내려쳤다. 그러자 쉽게 조각났고, 그 안에 검은 핸드폰 한 대가 들어 있었다. 나는 잠시 그것을 들고 받을지 말지 고민하다 결국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 {세 개의 눈동자 중, 하나다. 나는 누구지?} 남성의 목소리였다. 다짜고짜 수수께끼 같은 말에 나는 입을 열수 없었다. 세 개의 눈동자중 하나? 그게 누구냐고? 잠깐, 세 개의 눈동자? 나는 게임을 생각하다 문득 떠올랐다. 심연의 눈, 간파의 눈, 파괴의 눈은 게임상의 세 개밖에 존재하지 않다는 걸. 심연의 눈은 나고 저 목소리는 남성이니까 답은……. “애디님?” {…다행이군. 급조해서 만든 수수깨끼인데 잘 맞췄다. 미소천사 본인?} “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죠?” {미소천사가 남자라니 선뜻 믿기지 않았는데 이제야 실감하겠군. 아아, 나와 혜숙…그러니까 너희가 아는 제갈공녀하고 몰래 비밀세력을 창설했다. 그래봐야 뒷골목 조폭들이지만 중국과 연줄이 닿아 꽤 부풀려놓은 상태야. 덕분에 우리들은 아펜하르트 측의 감시를 받고 있어서 갈수가 없었어. 그래서 어제 밤, 수하를 시켜 핸드폰을 숨겨 놓았던 거다.} 그랬구나. 자신들이 직접 나서면 우리까지 위험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오지 않은 거구나. {일단 지금 여기서 이 답부터 들려다오. 반지는 완성했나?} 핸드폰 너머에서 애디가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잠시 혜리 씨를 보았고 혜리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비록 열 개밖에 안 되지만 완성은 했어요. 자세한 사항은 직접 만나 얘기하죠.” {좋아, 그럼 직접 만나서 얘기하지. 장소는…….} 애디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차를 준비해놨다고 했다. 우리들은 조금 밝아진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두 명은 확보했네요?” 내가 혜리 씨에게 말하자 그녀는 살짝 미소 지으며 답했다. “아니, 인원수로 따지면 천군만마를 얻었어.” “그럼 나는 필요 없으려나?” 이번엔 우리들 옆에서 들린 말이었다. 모두 핸드폰으로 집중한 상태였기 때문에 바로 옆에 누군가 있었음에도 몰랐던 것이었다. “누구…그, 글로리시나님?” 나는 화들짝 놀랐다. 패딩점퍼에 청바지. 프리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세련된 그녀의 모습에 놀란 것이었다. “네가…미소천사, 기찬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글로리시나는 바람에 나부끼는 검은 생머리를 한 손으로 고정한 채 나에게 다가왔다. “그렇구나, 네가…….” 그녀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박가린. 만나서 반갑다.” 내가 얼떨결에 손을 마주잡자 박가린 누나는 살짝 미소 지었다. 그 모습에 나는 얼굴이 붉어짐을 느껴야했다. 우와, 글로리시나가 미소 짓는 건 처음 봐. “야! 너희 둘, 안 떨어져?”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정화 누나가 어째서인지 화를 냈다. 응? 한나 표정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네? 내가 무언가 실수라도 한 걸까? “너는…참견 쟁이 검사?” “화선녀다! 융통성 없는 여자야!” “그런 말은 처음 듣는군.” “이제 자주 듣게 될 걸?” 둘은 무슨 앙숙관계라도 되는 것처럼 노려보았다. 이거 스파크라도 튈 기세다. 일이 어쨌든 마무리 되었고 우리들은 애디가 말한 장소로 이동해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에 탑승했다. 리무진은 카메라가 있는 도로를 배제하고 좁은 길만을 골라 지나갔다. 아마도 카메라를 의식한 것이겠지. 더 빨리 갈 수도 있었을 텐데 한참이나 돌아 가까스로 회색 시멘트 저택에 도착했다. “모두 실제로 보긴 처음이군요? 반가워요, 한혜숙이라고 합니다. 게임에서는 제갈공녀란 캐릭터를 사용하고 있죠.” “반갑다.” 저택 안에 들어가니 단발머리에 안경 쓴 제갈공녀님이 가장먼저 우리들을 반겼다. 그 뒤로 큼지막한 남자가 짧게 말했는데 얼굴을 유심히 보니 용병왕 애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둘 다 양복차림이어서 뭔가 무거워 보여 괜스레 주눅 들었다. “일단 여기서 접대하기 뭐하니 따라오세요.” 제갈공녀, 한혜숙 씨는 우리를 이끌고 지하로 안내했다. 한 지하 3층까지 내려갔을까. 그 안에는 얼굴에 상처투성이의 깍두기 머리 남자들이 앉아있었다. “저들이 영웅들?” “이거 어린애에 여자 투성이잖아?” “어이, 혁빈. 이거 얘기가 틀린 거 아냐?” 저들이 조폭이란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혁빈이라 불린 애디는 작게 실소하며 말했다. “지금 상태로는 아마 한 명분의 몫도 못하겠지. 하지만 저들이 가져온 반지만 사용할 수 있다면…이 세력을 포기해서라도 저들을 붙잡을 거다.” “뭐, 뭐야?” “저자식이 지금 뭘 믿고!” “그만하세요! 혁빈 씨도 손님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누가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겠네요. 소개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혜숙 씨는 현실에서 우리들을 처음보아 한 말이었다. 그에 가장 연장자인 민혜리 씨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아,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이번 소망의 반지를 담당한 뇌파 연구가, 민혜리라고 합니다. 이쪽은 아펜하르트 설계자, 임장순 박사님의 따님이신 임한나 양, 이쪽은 다들 잘 알고 있는 미소천사, 나기찬 군. 그 옆에는 대환기업의 독녀, 이정화 씨, 그리고 이분은 글로리시나란 캐릭터를 사용하던 박가린 씨.” “반갑습니다, 임한나라고 해요. 게임에서는 아타셰란 사제를 키우고 있었어요.” “반가워요, 누나.” “이정화라고 합니다. 화선녀란 캐릭터를 키우고 있었죠.” “네가 그 안경잡이인가? 그럼 그 옆은 용병왕이겠군. 글로리시나, 박가린이다.” 한혜숙 씨는 우리들은 번갈아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저는 다들 알고 있다시피 제갈공녀란 캐릭터를 플레이 해온 한혜숙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약혼자, 애디란 캐릭명의 강혁빈 씨죠.” 나만 놀랐을까? 둘이 약혼사이였다니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었지만 눈살이 찌푸려지진 않았다. 미소 짓고 있는 둘을 보니 서로 아껴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인원수가 조금 부족하군요? 다른 분은?” “아, 나머지 인원은 저희 아지트에서 대기 중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없는 랭커들은 오늘 오지 않았어요. 아마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듯 하네요.” 민혜리 씨가 조금 우울하게 말했지만 한혜숙 씨가 고개 저으며 미소 지었다. “아뇨, 다 모였어요. 다른 랭커들은 저희가 따로 만나 오늘 나오지 말라 일러두었거든요.” “네?” 민혜리 씨가 무슨말인지 이해 못하고 되물었다. 한혜숙 씨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한 달 전이야 그 장소도 나쁘진 않았겠지만 지금 이렇게 사람이 없는 지경에 와서는 인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적의 추격을 받기 쉬워지니까요. 그래서 일주일 전에 미리 손을 써두었죠. 그 부분에 대해선 죄송합니다. 그쪽에 연락할 방도가 없어 저희가 멋대로 한 일이에요.” “그렇군요. 그 부분에 대해선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겠네요. 저도 조금 걸렸거든요.” 한발 앞서 생각한 사람과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맙다 말하는 사람. 그 두 명의 두뇌는 범인인 나로서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럼, 저희가 생각한 작전과 그쪽에서 생각한 작전을 서로 토론하고 보안하도록 하죠. 이쪽에 앉으세요. 많이 길어질 겁니다.” 한혜숙 씨는 자신의 뒤쪽, 조폭들이 앉아있는 곳을 권했다. 그렇게 우리들은 우락부락한 사람들과 같이 한 자리에 앉아 본격적인 작전을 짜내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마지막 작전을.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죠.” “좋아요. 작전대로만 된다면 일이 재미있어질 것 같군요.” 한혜숙 씨와 민혜리 씨는 서로 만족한 표정으로 손을 마주잡았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렇게 진행할 셈이야? 그 작전은 막무가내를 넘어서 무모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정도라고! “후, 잠시 물이라도 마셔야겠군. 이거 작전이 너무 무서워 실행하기도 전에 내 속이 먼저 타들어가겠어.” “이거 조폭인생 사상 최악의 내일이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구만.” 조폭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인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그들도 나처럼 절대 반대를 외치진 않았다. 무모했지만 그보다 좋은 작전은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그럼 잠시 휴식하죠. 민혜리 씨는 전화로 지금 작전을 전부 팀원들에게 알려주시겠어요? 한 시간 뒤에 다시 모여 최종 점검에 들어갈게요. 혁빈 씨, 할 거 없음 저랑 같이 커피나 사러 갈래요? 이곳은 대접할 잔도 없네요.” “뭐, 그러지.” 한혜숙 씨의 말에 민혜리 씨는 고개를 끄덕인 뒤 밖으로 나갔고, 조폭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뼈마디를 풀며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강혁빈 씨와 한혜숙 씨가 밖으로 나가자 남은 건 나와 한나, 정화 누나와 박가린 누나만 남아있게 되었다. “킥킥, 이거 재미있는 작전이군.” 그동안 조용히 앉아있던 박가린 누나는 모두 나가자 작게 실소하며 말했다. 그 모습에 정화 누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참으로 재미있겠다. 조금만 수가 틀려도 개죽음 당하는 작전인데 웃음이 나와?” “아무것도 못할 바에야 났지 않나?” 가린 누나가 툭 내던진 말에 정화 누나는 반박할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솔직히 아무 가능성도 찾지 못했는데 이런 작전이 나온 게 어디인가. 실패 성공을 떠나 도전해볼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천하태평이군.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지 원.” 푸념하듯 말하는 정화 누나를 보며 나와 한나는 웃었다. 가린 누나는 단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렇게 될지 알면서도 아펜하르트와 적으로 돌아선 대환기업의 독녀가 할 말은 아니라 생각되는데?” “아아, 그때 아버지 말을 새겨들었어야 했는데 내가 콩깍지가 씌었던 거지. 그치, 기찬아?” “네? 저는 왜 부르고 그래요?” “그냥 그렇다고.” “아, 그런 건가?” “킥킥, 언니, 기찬 씨 놀리지 말아요. 킥킥!” 다들 뭐가 좋다고 나를 보며 음흉하게 웃는 거야? 정화 누나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로 해석되는데 이건 아니겠지? 그럼 뭐지? “문득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한나가 말했다. 우리 모두는 한나를 보았다. “아펜하르트가 나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나쁘기만 할까라는 생각이요. 그 게임이 없었으면 이렇게 웃기는커녕 언니들과 기찬 씨조차 모르고 살았겠죠. 그랬다면 정말 제 인생은 불행했을 거예요.” “……….” “……….”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 최종적으로 게임은 악이 되었으나 전부 악은 아니다. 결국. “게임이 악이 아니라 게임을 이용한 사람들이 악이라는 거겠지.” 내 말에 모두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여성들. 그 말을 들은 가린 누나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디가려고?” “담배.” “나도 같이 가.” “너도 피우나?” “너 같은 막장녀 아니거든? 시원한 공기 좀 마시고 싶어서.” 그 말에 가린 누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밖으로 나갔고 정화 누나가 뒤따라 나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나는, 순간 조용한 실내를 깨달았다. 잠깐, 그럼 지금 이 안에는 나와 한나 뿐인 거야? “저, 저기 기찬 씨.” “으, 응?” 왜 갑자기 말이 더듬어질까. 한나와 같이 지낸지도 한 달이 넘었건만 여전히 둘만 있으면 이 상태다. 이런 상황도 손에 꼽을 만큼 없었을 뿐더러 지금 우리 사이가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도 아닌 어색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존댓말 하는 거 보면 말 다했지. “저도 잠시 밖에 좀.” “응? 혼자 돌아다니기 힘들잖아. 같이 가줄게.” “아니에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갑자기 왜 당황하는 거람? 급히 휠체어를 모는 한나. 어, 거기는 턱져있는데. 급하게 몰면……. “꺄악!” “위험해!” 역시나 휠체어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한나만 앞으로 튕겨나갔다. 나는 재빨리 부축했으나 무개가 쏠려 나까지 넘어지고 말았다. “……….” “……….” 가장 처음으로 느낀 건 그녀의 향긋한 머리냄새였다. 그 다음으로 느낀 건 가슴 쪽에 느껴지는 포, 포, 폭신한 감촉. 마지막으로 등 쪽에 느껴지는 찌릿한 통증이었다. 턱 때문에 허리가 꺾이겠네. “미, 미안해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팔을 뻗어 어깨를 일으켰다. 하지만 잠시 그 상태 그대로 또 정적이 감돌았다. 발을 못 쓰니 일어날 수 없던 것이었다. 이거…어째 더 묘한 자세가 되어버렸……. “어, 어, 어 어떡해. 어쩜 좋아.” 우와. 완전히 익었다. 이건 감수준이다. 귀까지 완전히 익어버렸어. 그런데 내 얼굴은 지금 어떠할까. 몹시 더운 걸 봐서 아마 비슷한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윽!” 다시 등에서 욱씬 하고 통증이 느껴졌다. 이거 아무래도 세게 부딪친 것 같은데. 한나는 더욱 어쩔 줄 몰라 허둥거렸다. “괘, 괜찮아요? 다쳤어요? 기찬 씨!” 지금 당신의 무개덕분에 더욱 아프다 말하고 싶었으나 꾹 삼켜버렸다. 대신 다른 말을 해버렸다. “킥킥, 언제까지 존대할거야?” 딱히 할 말이 없어 반농담식으로 말한 건데 급속도로 표정이 굳는 한나.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고자 한 행동이었는데 더 심각하게 만든 건가? “미안해요.” 한나가 한 팔을 내 가슴위에 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내 얼굴을 차마 못 보겠는지 사과하는 것처럼 이마를 내 가슴에 대었다. “동갑이란 걸 알면서도, 내가 알던 사람이 당신이란 걸 알면서도 차마 친구처럼 대할 수가 없어요. 말을 놓는 순간 제 마음속에 있는 언니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아, 아니에요! 기찬 씨를 싫다거나 부정하는 게 아니라 저는 단지, 그러니까…….” 머리가 많이 혼란스럽겠지. 조금 가슴이 아프긴 하지만 내 업보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난다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까? 나는 조심히 팔을 들어 한나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언제고 기다릴게. 나를 나로 보게 되는 날까지.” “기찬 씨…….” 한나의 눈이 촉촉이 젖어 들어갔다. 아, 안 돼. 내 이성이. 자꾸만 내 눈이 그녀의 도톰한 붉은 입술만을 주시하…왁, 왁! 진정하자, 움직일 수 없는 여자를 덮칠 수는 없…하, 한나야. 왜 눈을 감는 거니. 도대체 무슨 의미니? “……….” “……….” 내 가슴에 올려져있는 한나의 손이 덜덜 떨고 있었다. 아니, 내 심장소리 때문에 떨리는 건가? 아니,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일단 고개를 들어볼까? 그럼 자연스럽게…우와아아악! 미, 미쳤어! 나기찬, 지금 이런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저기, 이런 말하기 죄송한데…….” 빙글빙글 돌아가는 내 눈을 바로 잡아주는 말소리. 부끄럽다는 듯이 볼을 붉히며 내 시선을 피하는 한나의 모습이 몹시나…아름다웠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그러니까, 그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이렇게 침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린 날이 살면서 있었을까? 심장까지 더 크게 뛰기 시작했다. “한계에요. 나올 것만 같아요.” 머리에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분해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지금 나, 나, 나, 나, 나, 나오다니 대체 뭐가 나오는데! 내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지 그렇지? 이젠 이성을 도저히 잡을 수 없단 말이다! “화, 화장실 급해요. 이제 못 버틸 거 같다고요!” 그래 나도 이제 못 버틸…으잉? “화, 화장실?” “아우, 부끄러워 죽겠어. 움직일 수 없는 내 다리가 이렇게 불편해보긴 처음이야…….” 한나는 다시 내 가슴에 고개를 파묻으며 말했다. 고맙다, 나 역시 그 다리 때문에 새하얗게 재가 되어 하늘로 승천할 것만 같거든. “킥킥킥, 킥킥, 큭큭큭큭! 쿨럭쿨럭, 킥킥킥!” 갑자기 물고 터진 것처럼 웃음이 쏟아져 나왔다. 내 모습이 너무나 웃겼고 지금 상황도 너무 웃겼다. 한나앞에서 이렇게 웃는 건 실례였지만 입을 손으로 막아도 새어 나오는 웃음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우, 웃지 말아요! 저도 부끄러워서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라고요!” “미, 미안! 너무 킥킥, 한나같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크헤헤헤헤!” 점점 더 새빨개지는 한나의 얼굴. 그 모습에 겨우겨우 참을 만 했던 웃음이 다시 터지고 말았다. 이젠 눈물까지 고였다. 아우, 배 아파. 이러다 질식사할거 같아! “자, 자꾸 웃지 말아요.” 한나의 입술이 뾰족하게 튀어 나왔다. 이러다 삐치겠다. 나는 간신히 웃음을 참고 한나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았다. “이제 내 마음을 확실히 알겠어. 한나야, 나는 너를 조, 조, 조, 조…….” 그래, 말하자.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어. 가자, 기찬아! - 덜컹! “…너희 멜로드라마 찍냐?” “한대 더 피울걸 그랬군.” “……….” “……….” 게슴츠레한 눈으로 우리를 보는 정화 누나, 차가운 눈으로 우리 모습을 감상하는 가린 누나. 지금 한나와 내 자세가 어떤 자세였더라? 아니, 그 생각은 일단 접어두고 일단 이 씰룩이는 볼부터 처리해야하는데. “와, 왔어요?” “그래, 잘 왔다만 더 시간 줄까?” “마지막 돗대다. 빨리 끝내라.” 그리고 누님들은 조심히 문 밖으로 나갔다. 쿵 하는 문소리가 어째 싸늘하게 들릴까. 한나와 나는 그 상태 그대로 문밖을 바라보며 1분간 굳어있었다. 다음날, 한혜숙 씨는 소망의반지에 대해 긴히 할 말이 있다며 강혁빈 씨와 함께 우리 쪽 아지트로 왔다. 우리 쪽 아지트는 대환기업에서 비밀리 운영하고 있던 지하였는데 재해를 대비하여 만든 지하실이라고 했다. 덕분에 비축된 식량과 넉넉한 물 덕분에 몇 달은 나가지 않고도 생활이 가능한 곳이었다. 그곳에 연구를 위한 장비와 주조철 씨를 위한 컴퓨터가 마련되어 있어 지하는 전체적으로 딱딱해 보였다. “그럼 이 반지는 사용 한계가 한 시간이며 일회용이란 말이군요. 게다가 열 개뿐. 맞나요?” 한혜숙 씨 말에 임박사님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그럼 그 한 시간이란 것이 마음에 걸리는 군요. 뇌의 부담감이라면 사람마다 다를 것 같은데 딱 한 시간인 이유가 있나요?” “이 반지를 손가락에 끼면 memory뇌파를 캐치해 인체를 활성화 시키는 전파를 쏘기 시작한다네. 그 전파는 memory뇌파의 물질을 기화시켜 만든 것인데 그 물질 용량이 한 시간이네. 결국 이렇게나 저렇게나 한 시간이란 거지.” “그 용량을 더 크게 만들면 오래 사용할 수 있지 않았나요?” “물론 그렇긴 하네. 하지만 지금까지 시간을 투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 memory뇌파 물질형성 때문이었네. 시간을 더 준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으나 그 전에 대한민국은 완전히 저들 손에 장악당하겠지.” “하긴…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죠.” 한혜숙 씨는 잠시 소망의반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럼 이 반지를 사용해 두 가지 편법을 사용할 수도 있겠군요.” 한혜숙 씨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편법? “먼저 이 반지가 열 개, 즉 열 명밖에 사용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는 것.” “그게 무슨 말이죠?” 태식 형이 이해하지 못하겠는지 되물었다. 그건 모두 같은 생각인지 한혜숙 씨를 보았다. “간단히 말해 반지 하나로 한 사람이 사용하는 게 아니라 한 시간 동안 누구든 돌려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결국 한 명당 하나의 반지가 아닌가요?” “아니죠, 열 명의 선수만 뛸 수 있으나 끝없이 선수 교체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요.” 그렇구나. 열 개밖에 없다는 말에 나 역시 열 명만이라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어. “그리고 두 번째, 한 번 사용하면 끝까지 떨어지는 용량이 아니라 건전지처럼 도중에 멈췄다 다시 사용할 수 있다는 점.” “그렇군요! 그럼 이 한 시간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릴 수도 있겠어요.” 민혜리 씨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응? 나는 살짝 이해가 안 가는데. 내가 민혜리 씨를 바라보자 민혜리 씨가 내게 설명했다. “시간은 확실히 한 시간이지만 중요할 때만 사용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손가락에서 반지를 뺀다. 그것을 반복하는 거지. 그럼 시간을 아껴 더 오래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야.”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게다가 한 가지 더 이점이 있어.” 한혜숙 씨가 반지를 손가락으로 끼며 말했다.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꼭 싸울 때가 아닌 지금부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거야. 그런데 반지를 껴도 아무렇지도 않네요?” “머릿속으로 강하게 염원해보게. 자신이 지금 원하는 모습을. 그 염원과 memory뇌파가 맞으면 반응할 것이네.” 임박사님이 차근차근 설명하자 한혜숙 씨는 아미를 찌푸렸다. “으으음, 어렵네요. 이런 식인가?” 한혜숙 씨가 고개를 갸웃하는 동안에도 나는 반지의 시간이 참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아깝게 왜 지금 사용하는 거람? “조금 몸이 가벼워 졌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어머?” 한혜숙 씨가 말하며 한손으로 책상을 짚었는데 그 책상이 우직하고 금이 갔다. 그 모습에 모두들 꿀이라도 먹은 것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화, 확실히 강해지긴 강해졌나 보군요.” “그런데 왜 반지를 사용한 건가.”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임박사님. 한혜숙 씨는 책상위에 올린 손을 때며 말했다. “몇 가지 실험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실험?” 내가 묻자 한혜숙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memory뇌파를 현실로 끌어온다고 알고 있는데 그럼 조금 모순되는 것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아이템이라던가.” “아!” 생각해 보니 그렇다.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진 아이템들은 현실로 구현화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렇군, 게임상에 존재하던 아이템은 현실로 불러 올 수 없겠지. 하지만 스킬로 만들어진 아이템은 불러올 수 있을 것이네. 이론적으론 말이지.” 임박사님이 설명했지만 현실적으로도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는지 마지막에 이론적으로라는 말을 덧붙여 말했다. “그럼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실험이 되겠군요. 게임에서 사용하던 스킬이 대부분 memory뇌파로 활성화 되어있다 하셨죠? 그럼 게임처럼 스킬을 부르면 되는 건가요?” “으음, 그럴 것이네.” “그럼 해보죠. 소환, 현자의 필기첩.” 한혜숙 씨는 손바닥을 펼쳐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손바닥에는 게임상에서 항상 들고 다니던 파피루스 노트가 퐁 하고 튀어나왔다. “세상에…정말 만들어졌어.” 이번 것은 한혜숙 씨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노트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놀라워했다. “이거 재미있군.” “일단 한 시름 놓은 건가?” 그동안 듣고만 있었던 애디, 강혁빈 씨와 글로리시나, 박가린 누나가 매우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한혜숙 씨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실험을 통해서 물질을 생성하는 게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와요. 하지만 지금부터가 가장 중요해요. 이 현자의 필기첩은 제가 생각하는 범주 안에 모든 정보들은 퍼센트로 수치화하여 알려줄 뿐만 아니라 현재 남아있는 군사의 수, 군량,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까지 전부 알 수 있게 해주는 제 스킬 아이템이죠. 결국 우리가 모르는 내용을 예언하는 셈이기도 해요. memory뇌파는 기억의 뇌파라고 알 고 있는데 과연 예언까지 가능할까요? 이것이 가능하다면 모든 스킬의 딜레마가 없는 것이기도 해요.” “딜레마요?” 한나가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여서 한혜숙 씨를 보았다. “memory뇌파를 활성화시켜 초인을 만든다는 이론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들었던 의문이야. 체력이 강해지는 것이나 작은 물건을 소환하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었어. 하지만 예언이나, 또는 생명을 창조하거나, 다른 공간을 불러온다는 것까지 가능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었다는 생각이 들잖아? 그래서 지금 이 실험이 가장 중요해. 게임에서는 스킬의 페널티가 존재하지만 현실에서는 그것이 없기 때문이지.”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르르님은 드래곤을 소환하는 스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드래곤은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존재, 즉, 생명체이기 때문에 한 말 같았다. 그런데 내 긍정의 표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혜숙 씨는 나를 향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나기찬 군은 아직 정확히 내 말을 이해 못하고 있어. 나는 지금 네 스킬을 가장 염두에 둬서 한 말이라고. 힐러는 기본적으로 치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그건 타인을 소생, 부활시키는 것과도 같은데 지금 내가 하는 실험이 성공하면 기찬 군의 스킬도 사용이 가능하다 결론이 나와. 어떤 의미인지 알겠어? 리절렉션도 페널티 없이 무한으로 사용이 가능하단 말이야. 기찬 군의 그 누나라는 분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아!” “맙소사! 그게 가능해?”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정말 질 수 없는 게임이잖아!” 다들 흥분해 벌떡 일어났다. 나는 머리에 둔기라도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누나를…살릴 수 있어? “그럼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는 게로군.” 화선녀, 정화 누나의 아버지인 이선빈 부회장님이 날카로운 눈으로 한혜숙 씨의 노트를 보았다. 몸이 많이 편찮으셔서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이창동 회장님 대신 자리한 것이었다. 모두 침을 꿀꺽 삼켰다. 모두를 한 번 훑어 본 한혜숙 씨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오오.” “빛나기 시작했어!” “서, 성공인가?” 책이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헉, 헉.” 한혜숙 씨는 이마에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빠르게 노트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잠시 모두 조용히 그 모습만을 지켜보았는지라 사라락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지하실에 가득 울려 퍼졌다. - 탁. 전부 본 것인지 노트를 책상위에 놓아버린 한혜숙 씨. 조마조마한 가운데 임박사님이 대표해서 물어보았다. “성공인가?”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있던 한혜숙 씨는 그 말에 살며시 눈을 뜨며 웃었다. “일단 성공이군요.” “성공이다!” “우린 이제 이겼어!” “우하하하하!” “…하지만.” 뒤늦게 이어진 한혜숙 씨의 말에 모두 일순간 멈췄다. “반만 성공이에요. 지금 제가 사용한 스킬만으로도 머리가 아파 쓰러질 것 같거든요. 하물며 생명 창조나 부활은 어느 정도로 뇌에 부담을 줄까요? 잘못했다간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한마디로 무한으로 사용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어요.” “……….” “……….” “……….” 희망이 급속도로 사라짐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임박사님은 자리에 도로 앉으며 말했다. “그럼 예상했던 이론이 맞아 떨어지는 군. 예언, 생명창조, 부활 같은 신의 영역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네. 사람의 뇌는 아직도 많은 베일에 감싸여 있으니 말이네. memory뇌파도 최근에 발견한 것이지 않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같이 알 수 없는 기묘한 기적들이 뇌에서 이루어진 거라면 평범한 사람도 사용이 가능할거란 생각이 들었네. 하지만 역시 뇌에 부담을 많이 주는 모양이로군.” “결국 범인은 이정도가 한계인가?” 박가린 누나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한혜숙 씨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범인은 저 같은 사람이죠. memory뇌파 게임인 아펜하르트에서 랭커까지 올라간 여러분은 다르지 않을까요? 그리고 지금은 우울해 할 때가 아니에요. 여기를 보세요.” 한혜숙 씨는 척하니 책상위에 놓은 노트를 가리켰다. 그 행동에 모두 노트로 집중했다. “…이건?” “설마 이 군사 도표는?” “맞아요, 제가 생각하고 알아내고자 한건 세 개 탑의 초인들 숫자와 아펜하르트 중심 비밀기지를 예상 탐색 지점이죠. 덤으로 청와대 정보까지요.” “하하, 하하하!” “기존 첩보를 깡그리 무시한 완벽한 정보로군요.” 주조철 씨가 크게 웃었고 그 옆에 있던 태식 형이 킥킥 거리며 말했다. “이로서 모든 준비는 갖춰졌어요. 슬슬 시작하죠. 대기하고 있을 모든 랭커들에게 연락하세요! 통제탑은 여기입니다. 여기 남아계실 분은 민혜리 씨, 주조철 씨, 임장순 박사님과 한나. 나머지는 지금 당장 출발해 주세요. 가장 최우선 목표는 청와대입니다.” 모두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작인가. 하지만 나는 지금 작전보다도 머릿속에는 자꾸 누나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비록 내가 죽을 위험성이 있다 하더라도. “거의 도착했다. 이 산만 넘어가면 청와대 대정원이 보일거야.” 용병왕, 애디. 강혁빈은 넥타이에 달린 작은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허리에 달린 무전기를 보니 소형 마이크를 연결한 모양이었다. {저희도 준비완료 됐어요. 다행이네요. 산길도 사실 안전하지 않은 곳이었는데.} 소형 마이크와 한 세트인 이어폰에서 제갈공녀, 한혜숙의 말이 들렸다. “반지가 쓸 만하더군. 정말 괴물이 된 느낌이야.” 애디는 오른손 약지에 낀 반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까지 올라오며 쓰러트린 사람만 해도 수십 명. 총탄조차 눈에 보이는 마당에 엄폐물이 이렇게 많은 산길에서 피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조폭인원들하고 나눠서 올라갔기 때문에 시선을 분산시켜 그나마 이 정도였지 사실 저는 총소리에 오금이 저렸습니다.” 45세 평범한 가정을 가지고 있는 남자, 안효철은 게임상에서 루히비드란 아이디를 사용하고 있었다. 강혁빈이야 이런 총싸움에도 많이 익숙했기 때문에 가볍다 말했지만 모든 것이 처음인 안효철은 얼굴까지 파래져서 지금도 쓰러질 것만 같아 보였다. {지금쯤이면 아마 모든 군대들이 철통경비에 나섰을 거예요. 게다가 가장 문제가 되는 개량된 초인 스무 명과 오리지널 두 명. 그들을 뚫고 대통령을 포획해야 합니다. 여기서 실패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에요.} “알고 있어.” 애디는 정면을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그 말에 루히비드는 한숨을 쉬었다. “후, 정말 우리 둘이 해낼 수 있을까요?” “그거 아나? 내 약혼녀는 기적을 부르는 사람이야. 게다가 이번엔 또 하나의 기적을 부르는 애가 있지. 나는 그것을 믿어보겠어.” “기적을 부르는 애?” “혹시 자신이 길이 되는 하트를 아나? 그 애라면 분명 길을 개척하리라 믿는다.” “도대체 누구를…….” 루히비드는 말을 하려다 멈춰야만 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청와대 본관 앞, 확 트인 넓은 잔디밭에 엄청난 수의 군대가 포진해있었다. 청와대 푸른 기왓장 위에도 저격병이 엎드려 있었으며 대정원 옆 찻길에는 수십 대의 차가 도열되어 있었다. “이거 어마어마한 환영인사군.”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옵니까?” 루히비드는 지친표정으로 애디를 바라보았다. 저런 배짱 때문에 자신이 게임에서 주군으로 선택한 것은 알고 있을까? 애디는 대환기업 부회장에게서 받은 진검, 일월천검((日月天劍)을 꺼내들었다. “지금 나는, 심장이 아프지 않은 것만으로도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비록 내 애검이 없다 해도 말이지. 가자!” “하아, 현실에서는 제가 더 나이가 많다고요, 애디님.” 소심한 푸념을 내뱉으면서도 루히비드는 애디의 뒤를 좇았다. 한편 그 시간, 대책회의실이라 이름 지은 지하실에는 한혜숙, 임한나, 이정화, 임장순, 주조철, 민혜리가 둥글게 앉아 있었다. “청와대에서는 전투가 시작되었군요.” 현자의 필기첩을 보고 있던 한혜숙, 제갈공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주조철은 그 말을 듣자마자 컴퓨터를 이리저리 조작하더니 말했다. “한군데 빼고 모든 방송국 점령에 성공…아니, 지금 전부 클리어 했어.” {들리나? 쌍현파의 김두식이다. 이쪽은 끝이다.} {큭큭, 쌍현파는 느리구만. 백두파는 오래전에 완료했다.} {닥쳐라, 이쪽 방송국은 워낙에 커서 헤맸을 뿐이야.} “무전기로 잡담은 그만 두시겠어요? 일단 점거 했다니 다행이네요.” 제갈공녀는 남에게도 다 들릴지 모르는 무전기 때문에 안 그래도 조마조마한 상태였는데 그걸 가지고 잡담을 나누는 조폭을 보며 아미를 찌푸렸다. {그런데 이쪽 방송국에서 어느 단체냐 물어보는데 뭐라고 답하지?} “그야 우리는…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정하지 않았네요?” 제갈공녀는 순간 멍하니 있다 피식 웃었다. “이거, 별로 중요하지 않다 생각했더니 우리 팀명도 안정했구만.” “지금 그럴 여유가 없었던 거겠죠. 이참에 정해둘까요?” 주조철이 어처구니없단 표정으로 웃었고, 민혜리가 뒤이어 의견을 내놓았다. “팀명이라, 그냥 더원?” 제갈공녀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지 대충 자신의 기사단 명을 말했다. “그것보단 소망단은 어때요?” “그건 좀 오그라드는데?” 다음으로 민혜리가 제안했으나 주조철이 손을 오그라트리며 말했다. “결사단같은 무난한 걸로 가는 게 어떤가.” “뭐, 그럼 대충 그걸로 가…….” “엔젤단이요! 그게 좋아요!” 임박사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고, 제갈공녀가 대충하자는 듯이 무전기 수화버튼을 눌렀다. 문제는 그때 한나가 크게 말해버린 게 화근이랄까? “그, 그건, 정말 오그라드는데?” “한나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어흠! 그건 나도 좀 쑥스럽구먼.” {큭큭, 엔젤단? 그거 재미있군. 그럼 그렇게 말해두지.} “자, 잠깐!” “아아악!” 뒤늦게 무전기 수화 버튼을 누르고 있다는 걸 눈치 챈 제갈공녀였지만 이미 버스는 떠나간 뒤였다. 잠시 침묵이 감도는 대책회의실. 누가 보면 사람이 죽어 풀죽은 사람들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아, 일단 그 문제는 넘어가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아아, 박가인 씨, 들리나요?” {들린다, 말해라.} 제갈공녀는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은지 무전기를 들어 누군가를 송신했고 글로리시나가 짧은 답변으로 받았다. “그쪽 상황은 어떤가요?” {예상 지점을 탐색하고 있으나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군. 좀 더 찾아봐야겠어.} “기찬 군은 어디를 탐색하고 있죠?” {옆에 같이 있다.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같이 다니고 있으니 걱정 말아라.}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계속 수고해주세요.” 제갈공녀가 무전을 종료하자 글로리시나는 넥타이에서 손을 때고 아무도 없는 자신의 옆을 보았다. “기찬이 몫까지 더 뛰어야하나…….” 글로리시나는 그렇게 말하며 어디에 있을지 모를 아펜하르트 본진을 찾아 다시 걸어갔다. 그 시간, 미소천사, 나기찬은 땀을 뻘뻘 흘리며 어딘가 뛰어가고 있었다. ‘누나, 조금만 기다려. 내가 지금 가니까, 조금만 참아!’ 벌써부터 그들의 작전은 조금씩 틀어지고 있었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다시 돌아와 청와대 대정원. 한차례 접전이 있었는지 부셔진 나무들과 흩뜨려진 흙바닥이 난잡하게 섞여 있었고 바위 뒤에 숨은 애디와 루히비드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윽, 몸은 관통당하지 않지만 복싱선수한테 얻어맞은 것처럼 아픈데요?” 복부에 한 대 총알을 맞은 건지 이맛살을 찌푸리며 농담하는 루히비드. 애디는 웃는 대신 검을 고쳐 잡았다. “이정도면 어떤가. 막을 수 있겠어?” “당연히. 스컬 골렘의 몸통박치기보다 약해요. 못 막을 리가 없죠.” “그렇군, 그럼 가자!” “내가 애디님보다 형이라니까…하아, 갑니다! 루나, 륀, 루네스, 루네디!” 루히비드가 외치자 사방에서 생겨나는 네 개의 달의 파편들. 은은한 빛깔 때문에 보석처럼도 보였다. “단지 소환하는 건데도 머리가…젠장, 제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세요! 갑니다!” 루히비드가 엄폐물로 사용하던 바위를 넘어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포위망을 천천히 좁혀오던 군인들은 깜짝 놀라 외쳤다. “나, 나왔다!” “사격! 쏴라!” “루나, 륀! 난 행한다! 반사의 결계를!” 공중에 붕 떠있는 달의 파편 중 두 개가 빛나며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그 순간 빗발치는 총알들. 하지만 푸른 벽을 때린 총알들이 전부 쏘았던 곳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으악!” “아아아악!” “주, 중지! 사격 중지!” 쏘는 족족 다시 되돌아가는 총알들. 한순간 초토화된 상황에 사단장은 황급히 사격을 중지시켰다. “저들은, 역시 초인이었어. 안 되겠다! 알려라, 이건 우리들이 감당할 문제가 아니야! 초인들을 불러!” 처음 총알을 피하는 저들을 볼 때부터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던 사단장. 하지만 초인들은 출동하거나 배신한 자가 없다는 답변에 그 의심을 접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직접 눈으로 본 바에야 적중에 초인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걸 알까? 조금만 더 공격했다면 루히비드의 결계가 깨져 쉽게 이길 수 있었다는 것을. “크윽! 헉, 헉.” “괜찮나?” “…이대로 달려요. 여기서 지쳤다는 것을 적이 알게 되면 다시 공격할 겁니다. 그전에 어서 본관 안으로!” 지금까지 의기소침했던 루히비드의 모습은 어디를 봐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입가에 피 흘리면서도 이를 악무는 한 남자가 달리고 있었을 뿐. 결국 둘은 본관 앞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검은 옷 일색의 무리가 대정원에 도착했다. “드디어 나왔군, 개량된 초인들.” 애디는 눈을 가늘게 뜨며 검을 고쳐 잡았다. “여기는 제가 맞습니다. 애디님은 어서 대통령을 포획하십시오.” “…헛소리, 혼자서 이곳을 사수하겠다고?” 농담 말라는 듯이 애디가 한 발 앞으로 나왔으나 루히비드가 팔을 뻗어 제지했다. “나이 많은 형님의 말을 한 번 믿어주지 않겠어? 아버지는…강하다구.” 애디는 알 수 있었다. 루히비드는 이 자리에서 죽으려한다는 것을. 지금 여기서 둘 다 개죽음 당할 수는 없었다. 이제 시작이다. 다들 다음 작전을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자신이 버티면 안 된다고 애디는 결론지었다. “…부탁합니다. 안효철 씨.” 애디는 결국 들고 있던 검을 내리고 안쪽으로 달렸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루히비드는 잠시 네 개의 달의 파편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이러면 된 거지?” 루히비드의 머릿속으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십년동안 자신의 반쪽이 되어주었던 아내, 김소라. 일주일 전, 초인 항의 단체에 휩쓸려 어이없이 죽음을 맞이한 자신의 아내였다. 지금은 자신의 딸, 미라만이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 되었다.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루히비드는 생각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큰 것보다 소를 위해서 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건 이기적인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루히비드, 자신은 이곳에 서있었다. 그때의 잘못을 일깨워 주기라도 하듯 상상속의 아내는 웃어주었다. 대정원 쪽에서 검은 옷의 사람들이 손을 뻗었다. 장작 스무 명의 사람들. 그들의 손에는 현실에선 존재할 수 없는 기이한 빛이 뭉쳐지기 시작했다. “그럼 나도 시작해 볼까. 미라야, 부디 이 아빠를 지켜주렴. 루나, 륀, 루네스, 루네디! 가자!” 루히비드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한편, 안으로 들어온 애디는 빠르게 무전을 연락했다. “혜숙, 혜숙! 들어왔다! 대통령이 있는 곳은?” {서, 성공했군요! 일단 2층 집무실로 가야합니다. 그곳에 없다면 고위 관직과 회의하는 집현실, 그와 비슷한 방이 있지만 전부 무시하세요! 아, 잠시 만요!} 무전기가 순간 끊겼다. 뒤이어 다시 무전이 연결되었으나 제갈공녀가 아니었다. {내가 알아냈다. 지금 대통령은 집현실에서 컴퓨터로 어딘가 연결하고 있었어. 허나 내가 차단했다. 안심하고 2층 오른쪽 끝 방으로 가!} 주조철이었다. 그는 한때 대한민국 국가소속 비밀결사대, memory팀에서 모든 컴퓨터를 담당하던 천재 해커였다. 그의 능력이 이곳에서 발현된 것이었다. 애디는 그 무전을 받자마자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누구냐! 억!” 애디는 곳곳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에게 검을 쓸 것도 없이 목을 꺾어버렸다. 반지의 능력 때문에 신체능력이 늘어난 것도 있었지만 원래 애디는 뒷골목에서도 인정받은 천재 파이터. 평범한 사람이 애디를 막을 순 없었다. - 덜컹! “누, 누구요!” “…찾았다.” 애디는 일단 숨을 고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통령 옆에는 현재 보디가드가 두 명. 그 외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아무래도 이곳에 찾아온 초인이 당신인 모양이군.” 현 시대의 대한민국 대통령인 이명박은 가느다란 눈으로 애디를 보았다. “죄송합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이렇게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멈춰라!” “더 다가오면 쏘겠다!” 두 명의 보디가드는 권총을 꺼내들며 애디의 움직임을 막았다. 애디는 그 행동이 가당치도 않는다는 듯 앞으로 걸어갔다. - 탕! 탕! 두 발의 총탄성. 허나 애디는 어느새 보디가드의 뒤로 돌아가 뒤통수를 손날로 쳐내 쓰러트려 버렸다. “이것이…초인의 힘인가.” 처음으로 땀을 흘리는 대통령. 애디는 쓰러지는 보디가드를 보며 말했다. “잠시 신변을 구속하겠습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될 거 같은데?” “그분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분이라서 말이지.” 애디는 깜짝 놀라 자신이 들어왔던 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검은 정장 차림의 두 사람이 서있었다. 애디는 진지하게 검병을 잡았다.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문 앞까지 당도한 자들. 바로 알 수 있었던 것이었다. 오리지널이란 사실을. “헤헹, 꽤나 강해보이는 형씨네? 내 이름은 유! 이쪽은 폐.” “물러나지 않으면…죽는다.” 폐라는 자가 음침하게 말했다. 그 순간 벽 뒤에서 팍하고 튀어나오는 검 한 자루. 애디는 돌아볼 겨를도 없이 옆으로 몸을 틀었다. - 끼이이이이이이잉― 소름끼치는 검 울림. 가시처럼 돋아난 검의 형태. 애디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폐의 손에 들린 검을 보았다. “칼리의 귀곡마검(鬼!哭魔劍)?” “킥킥, 폐형님, 기습실패군요? 그럼 이번엔 내 차례죠? 아자잣! 저놈은 제 몫입니다! 화이어블레이드!” “그, 그 기술은 미지의마검사!” 애디는 도무지 지금 상태를 믿을 수가 없었다. 랭커들의 기술을 쓰는 자? 설마 열 명의 오리지널은 전부 랭커의 기술을 쓰는 자인가? 이 사실을 알려야했다. 생각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하지만 유와 폐의 공격은 이미 시작되었다. “휩쓸어라! 귀곡마검!” “우리야야야얏!” 일월천검을 뽑아 응전했지만 현란히 움직이는 귀곡마검과 정면에서 부딪쳐오는 화이어블레이드 때문에 애디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크헉!” 결국 애디는 가슴에 화상과 함께 저 멀리 튕겨나가 집현실의 벽을 뚫고 나가버렸다. “이런, 너무 싱거운데요? 설마 이정도로 죽진 않겠죠? 화이어 볼!” 먼지 때문에 보이지도 않는 상황에서 유는 파이어볼을 날렸고 더 큰 굉음과 함께 집현실 밖 복도는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확인사살인가? 너도 꽤나 잔인하군.” “헹, 제가 아니었으면 형님이 귀곡마검을 날렸을 거면서. 킥킥!” 유와 폐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곳, 먼지구름너머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헉, 헉. 이거 게임과 다르게 머리가 지끈거려 신경 쓰이는 군.” 애디는 온몸에 피딱지를 더덕더덕 붙인 채 유와 폐를 노려보았다. 가슴에는 화상 때문인지 수많은 물집이 잡혀 있었다. “호, 역시 죽지 않네요? 역시 초인은 대단하다니까.” “고통만 늘어날 뿐이다.” “하지만 이제 그 지끈거림도 익숙해 졌다. 이제 보여주마. 랭커 1위였던 나의 힘을!” “어디 그 알량한 힘을 보여 봐라! 귀곡마검!” 다시 귀곡마검이 총탄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애디는 이제 조금 익숙해 진건지 일월천검으로 귀곡마검을 살짝 비껴 처내버리고 달려드는 유의 가슴을 향해 검을 뻗었다. “우왁!” 유는 깜짝 놀라 황급히 옆으로 빠졌고 그 틈을 노려 폐에게 달려드는 애디. 하지만 어느새 다시 날아온 귀곡마검이 애디의 등을 노려 어쩔 수 없이 옆으로 빠졌다. “칫, 실패인가.” “…지금까지 움직임은 힘을 아껴두었던 건가?” “너희들처럼 마구 힘을 써대면 한계가 금방 찾아오니까.” “이런이런, 그럼 지금 저희는 얕보였던 거네요? 근대 형씨, 아쉽지만 저희는 힘의 한계가 없답니다. 크하하하하!” 유의 말을 듣는 순간 애디의 머리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아까부터 드는 위화감이 바로 이것이었다. 저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머리 아픈 표정을 전혀 짓지 않았어. 애초에 힘들지 않았던 거야. 왜? 답은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을 자각한 애디였다. 그건 루히비드 쪽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저들은 지치지 않는 거야!” 계속 마법을 난사하는 무리들. 그것도 한계가 있으리라 생각한 루히비드였으나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모습을 보며 생각을 바꾸어야 했다. 저들이 지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쓰러지겠다. 죽도 밥도 안 될 거라 생각한 루히비드는. “마법을 거뒀다!” “흥, 눈치 챈 건가?” 결국 결계를 거두는 루히비드였다. “결국 당신은 죽은 목숨이라는 겁니다! 우리얏!” “컥!” 복부에 옆차기를 맞아 다시 날아가 버리는 애디. 후들거리는 팔로 몸을 일으켜 세우려했으나 자신의 머리위에는 이미 귀곡마검이 검 날을 번뜩이며 떠있었다. “여기까지다.” “에잉, 벌써 끝인가. 재미없네.” 폐와 유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애디 앞으로 다가왔다. 폐는 말했다. “너희 조직이 있는 곳을 말해라. 아마 임박사가 관여되어있겠지? 우리 정보로도 곧 찾아낼 테니 괜한 목숨, 살 수 있을 때 답해.” “…큭큭.” “우리가 우습나?” “아니, 내 꼴이 우습군. 큭큭, 크하하하!” “형님, 이놈 맛이 간 거 같은데요?” 유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해도 애디는 그저 웃기만 했다. 폐는 결국 고개를 젓다 싸늘하게 말했다. “별수 없군. 죽어라.” 귀곡마검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애디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루네스, 루네디 난 행한다, 복사의 결계를!” 루히비드는 죽기 살기로 주문을 외웠다. 복사의 결계, 사물을 복사해 똑같은 힘과 같은 형태의 존재를 만들어 내는 것. 일루젼과 다르게 진짜 존재한다는 것에서 많은 차이가 있는 스킬이었다. 그것이 대정원에 있는 스무 명의 초인들을 모두 복사해내었다. “어이어이, 많이 무리하는 거 아냐?” “우리가 봐도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데?” 초인들의 말대로 루히비드 상태는 확실히 심각해보였다. 머리가 아픈지 이마에 손을 가져간 채 헉헉 거리고 있었고 코에서도 끊임없이 코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헉, 헉.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겠어.” 다리를 부들부들 떨면서도 문을 기댄 채 서있는 루히비드.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군인들은 하나 둘 조준하고 있던 총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 “내가 꼭…나쁜 놈 같잖아.” “……….” “……….” 군인들은 모두 측은한 눈길로 루히비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 챙! “귀곡마검을…막았어?” 애디는 일월천검을 들어 귀곡마검을 막아내었다. 방금전만해도 힘에 밀려 튕겨나갔던 자가 단지 한 손만으로 막아낸 것이었다. “지금부터 난, 내 목숨을 버린다. 파괴의 눈 발동! 배틀 존 생성, 파괴의 의지는 이곳에서 이루어지리라!” 귀곡마검을 막은 일월천검이 푸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온 몸도 푸르게 변해갔다. 그리고 바닥은 기이한 문양을 그리며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오러 마스터 애디의 본 능력이 발동된 것이다. “이, 이게 무슨?” “유! 물러나!” 폐는 불길한 기분에 황급히 몸을 뒤로 날렸다. 하지만 애디의 스피드가 더욱 빨랐다. “빠, 빨라!” 폐는 눈을 부릅떴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이었다. 저 정도로 움직이는 건 자신도 불가능, 아니 누구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분명 뇌가 다 타들어갈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저자는 보란 듯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 황당함에 자신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면서도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애디를 보는 폐였다. “폐 형님!” 유는 한순간에 반으로 쪼개진 폐를 보며 몸을 벌벌 떨었다. 저게 사람으로서 가능한 움직임인가? 초인이 되고서도 분명한 한계가 있는 법이건만 저자는 그걸 가볍게 뛰어넘고 있지 않은가. 저 모습을 보며 유는 비형님을 처음 보며 느꼈던 두려움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아, 아하하! 하지만 당신에게도 부담이 되는 모양이지?” 유는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웃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애디의 상태는 머리에 핏줄이 울긋불긋 거릴 뿐만 아니라 코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쿨럭!” 결국 각혈까지 하는 애디. 그럼에도 들고 있던 일월천검을 놓지 않았다. “왜 끝까지 버티는 거야! 쓰러져 쓰러지란 말이야!” 유는 침착함을 잃어버려 마구 검을 휘둘렀다. 애디는 괴로워하면서도 전부 검을 한손으로 막아내었다. “젠장, 젠장! 왜 다 막는 거야! 타올라라, 몸이여. 불살라라, 마음이여! 인화(人火)!” 몸까지 불게 타오르는 유. 애디는 그 모습을 보며 한쪽눈썹을 씰룩였다. “너와 나는 지금 싸우는 마음가짐이 다르다. 게다가…미지의마검사 불은 이렇게 나약하지 않아! 파괴의 토네이도!” 검을 바닥에 박아 넣었다. 그러자 그곳을 중심으로 쩌적 갈라지는 지반. 하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돌들은 붕 뜨기 시작하더니 원형으로 돌기 시작했다. 열 개의 돌에서 수십 개로 수십 개에서 수백 개로 돌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것들은 어느 것이든 분쇄해버릴 것처럼 청와대의 반을 먹고 사라졌다. “…당신은 신이오?” 청와대의 반이 날아가 하늘이 보이는 곳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하는 대통령. 애디는 말하는 대신 무전기를 대통령에게 던지며 쓰러졌다. “다, 당했어? 오리지널이 당했어!” “이 무슨 일이!” “어서 여기를 뚫고 올라가자!” 한차례 토네이도가 청와대를 휩쓴 모습은 개량된 초인들뿐만 아니라 루히비드도 보았다. “역시, 애디님. 멋지게 해내셨군요. 그럼 저도 질 수 없죠.” 루히비드는 저 모습을 보고 오히려 차분해짐을 느꼈다. 분명 애디는 목숨을 버릴 각오로 싸웠을 것이다. 저 정도의 각오로 임하고 있는데 자신만 몸을 사릴 수 없지 않겠는가. 초인들은 일점사하는 식으로 모든 복사의 존재들을 처리했다. 하지만 루히비드도 예상했다는 듯이 숨을 고르며 지켜보았다. “이제 끝이다! 그만 죽어라!” “어서 처리해! 급하다!” “그럼 여기서 문제하나. 아까부터 제 주위를 떠돌던 달의 파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루히비드는 부들거리는 손을 어깨높이까지 들며 질문했다. 무슨 얼토당토하지 않는 소리냐며 다들 올라오려했다. 하지만 계단은 무언가에 막히기라도 한 듯 올라가지 못했다. “이, 이게 뭐지?” “투명한 벽?” “서, 설마!” 그제야 그들은 눈치 챘다. 계단을 중심으로 박혀있는 네 개의 달의 파편을. “루나, 륀, 루네스, 루네디! 난 행한다. 쿨럭! 풍화의 결계를!” 루히비드가 피토하며 손바닥을 펼쳤다. “우와아아아악!” “빠져나가! 비님의 결계를 생각해!” “으아아아아악!” 하지만 그들은 괴로워하면서도 바닥에 박혀있는 달의 파편을 빼내려하고 있었다. 루히비드는 그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파훼할 방법을 알고 있다? 비님의 결계를 생각하라니. 이 결계를 사용하는 존재가 또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루히비드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칫, 이정도로 끝나주길 바랐는데…어쩔 수 없죠. 달의 의지를 받은 자, 루히비드. 난 행한다! 동쪽의 루나!” 왼쪽에 박혀있던 달의 파편이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빛나기 시작했다. 루히비드는 머리에서 찢어질 것 같은 통증에 무릎을 꿇었다. “아아아악! 서쪽의 륀!” 조금만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루히비드는 주문을 멈추지 않았다. 적들이 달의 파편을 부시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나, 남쪽의…쿨럭! 루, 루네스!” 초인들은 주문을 외울 때마다 빛나기 시작하는 달의 파편을 보고 급해지기 시작했다. 무엇을 할지는 모르지만 무서웠다. 마지막 주문을 외우지 못하길 간절히 바랐다. “부, 북…커억!” 루히비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코에서 흘린 피만으로도 옷과 바닥이 흥건할 정도였다. 결국 유지되던 풍화의 결계가 사라져버렸고 두려움에 덜덜 떨었던 초인들은 안도감과 함께 루히비드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모두들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직까지 세 개의 달의 파편이 빛나고 있었다는 것을. “북쪽의…루네디.” 마지막 달의 파편이 빛나기 시작했고 초인들은 사색이 되어 몸이 굳었다. 루히비드는 대자로 누운 상태에서 천천히 하늘을 향해 한 팔을 뻗었다. 하늘에는 자신의 딸, 미라가 웃어주었다. ‘미라야, 미안하다.’ 그리고 누구를 잡으려는 듯 뻗고 있던 손을 콱 오므렸다. “폭!” - 빠지지지지지지지직! 달의 파편이 쪼개져 푸른빛이 사방으로 튀기 시작했고 초인들뿐만 아니라 계단 전체, 그리고 흙더미까지 쪼개고 쪼개 분해시켰다. 결국 운석이라도 떨어진 양 움푹 파인 바닥. 달의 파편을 부시며 사용하는 최종 필살 스킬이 지금 청와대에서 발현되었다. “저들이 진정 인간이란 말인가.” “이건 정상적인 싸움이 아냐.” 멀찌감치 떨어져있던 군인들은 모두 소총을 바닥에 떨어트리며 멍하니 그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청와대는 완전히 초토화 되었다. 대격변(4) “…청와대, 강혁빈 씨와, 안효철 씨. 전투 불능입니다.” 현자의 필기첩을 보고 있던 제갈공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면서도 억지로 말했다. “실패…인가?”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개량된 초인들과 오리지널 두 명도 전투불능이거든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마…….” 차마 말하지 못하겠는지 입을 다무는 제갈공녀. 그녀의 행동에 모두들 침울한 표정으로 현자의 필기첩을 볼 뿐이었다. 그 순간. {치직, 치지직. 당신들은 누군가.} 갑자기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 제갈공녀는 재빨리 무전기를 들었다. “당신은 누구죠?” {…당신들이 투표로 뽑은 대통령이네.} “………!” “………!” 모두들 놀라는 가운데 제갈공녀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대통령이 무전기로 연락을 취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우리 쪽이 성공해서 무전기를 넘긴 것. 전투불능에 빠진 거라면 대통령이 직접 연락을 취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적이 우리의 정보를 알기 위해 대통령을 이용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해질 수 있었다. “저희들이 누군지는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일단 하나만 답해주세요. 당신…아니,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존재합니까?” 제갈공녀는 답변에 따라 행동방침을 바꿀 생각이었다. 잠시 무전기는 조용했다. 제갈공녀 뿐만이 아닌 대기하고 있는 모든 랭커들과 조폭들도 무전기만을 바라보았다. 무전기에서 대통령이 대답했다. {…물론이네. 대통령은 언제나 국민 편에 서있다네.} 제갈공녀는 잠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민혜리 씨, 임박사님은 희망을 담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가장 바랐던 답변입니다. 저희단체는 엔젤단, 초인들을 무찌를 또 하나의 초인군단입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제갈공녀는 엔젤단의 모든 작전들을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무전기로 역추적할지 모를 위험이 있었으나 이젠 상관없었다. 대통령만 설득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문제였으니까. “…그것이 저희들의 작전입니다.” {대담하고도 그 단체만이 할 수 있는 작전이란 것은 잘 알겠네. 하지만 국가는 자네들을 도와줄 수 없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국가에서 도와준다면 적들이 국가에게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제갈공녀는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국가병력을 동결시켜주시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저희가 해결하겠습니다.” 대통령을 포획하려던 이유가 바로 이것에 있었다. 국가는 중립을 선언하여 지금 작전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길 확률이 현저히 늘어나게 되는 것이었다. {중립을 선언하라 이건가. 들었는가, 국방부 장관?} {지지직…예, 대통령 각하.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들었나, 합참의장?} {예, 각자 들었겠지? 참모총장 들?} {흐음, 육군이 가장 피곤할 것 같습니다.} {해군은 대충 말하겠습니다.} {어이, 지금 전투기들 전부 떨어트려!} 여기저기 회선이 마구 연결되면서 늙수그레한 억양의 말들이 마구 들려왔다. 제갈공녀는 잠시 어이없는 표정으로 무전기를 보았다. “다, 다 듣고 있었나 보군요.” {흥, 거기 엔젤단이라고 했나? 국가를 얕보지 말게. 그 초인들에게 세어나가지 않게 무전신호 차단하느라 지금 육군이 얼마나 뛰는지 아나? 작전 같은 건 직접 구두로 하란 말야!} {우리 쪽도 이미 역추적해서 전투기를 띄워놓은 상태였어. 민간인들만 아니었어도 융단폭격세례를 받았을 거다.} 제갈공녀는 능청스레 말하는 늙은이들의 말을 들으며 멍하니 입만 벌렸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곳곳에서 본 회선의 무전기 수신이 들어왔다. {큭큭큭! 크하하하! 내 조폭인생 20년에 이같이 웃긴 적은 처음이다!} {이거 국가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었구만!} {우리가 더 힘내야겠는 걸?} {지금 무전기 말들은 전부 방송국에 전달되었다. 국장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게 되었어! 이제 모든 TV에서는 우리를 주목하게 될 거다!} 제갈공녀의 눈에서는 슬며시 눈물이 맺혔다. 두 영웅이 힘을 내준 덕분에 한걸음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왠지 강혁빈이 보고 싶어지는 제갈공녀였다. “좋아요! 그럼 지금부터 본격적인 작전을 실행합니다!” {드디어, 우리차례인가?} {기다리다 지쳐버리겠군. 어이, 화선녀. 너는 거기서 뭐하냐? 노냐?} “지금 일만 마무리되면 갈 테니까 좀 닥쳐. 머리가 주먹으로 이루어진 네놈에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큭큭, 조철아, 백업 잘 부탁한다.} “오케이, 건투를 빈다, 황태식.” {애디님이 일궈놓은 길, 반듯이 보답하겠어요. 가자, 칼리.} {흥, 드레이크도 소환 못하는 주제에 말은.} 그동안 대기하고 있던 모든 영웅들이 전부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한편, 그 시간 나기찬은 뛰던 몸을 멈춰서고 무전기를 듣고 있었다. “애디님하고 루히비드님이 성공했구나.” 하지만 좋아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입술을 깨무는 기찬. 그들에게 화나서 한 행동이 아니라 이러고 있는 자신 때문에 한 행동이었다. “…돌아갈까?” 하지만 바로 고개를 휘젓고 다시 달렸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해봐야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차피 본진 탐색은 만약을 위해 한 것이었으니 누나를 구하고 돌아간다면 계획에 딱히 차질이 생기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글로리시나, 박가린 누나도 자신을 보낸 것이 아닌가. 결국 지금은 누나를 살린다는 것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그는 다시 아무도 없는 차도를 홀연히 뛰었다. “후, 밖에는 고양이 한 마리 없구만.” 씁쓸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건장한 남성이 있었다. 이자는 한때 아펜하르트를 하며 한 기사단의 단장자리까지 올라갔던 인물이었다. 그 기사단은 실버크로스단. 그렇다, 실버크로스 기사단의 단장, 배천익이었다. “여보, 식사하세요.” “그러지.” 아까 전부터 갑자기 TV가 나오지 않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배천익은 밖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식탁으로 이동했다. “주현아, 너도 어서 와!” “알았어!” 배천익의 아들, 배주현은 요즘 가뜩이나 나가지 못해 심심함을 TV로 달랬었는데 그것조차 나오지 않아 한층 짜증이 난 상태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채널을 돌리던 그는 갑자기 연결된 TV를 보고 활짝 얼굴을 폈다. “아빠! TV나와! 고쳐졌나 봐!” “응? 정말?” “근데, 이게 뭐지? 전 채널이 전부 어떤 아저씨만 보여주는데? 아이씨! 뭐야, 재미없게.” 아들의 신경질에 배천익은 의문을 품고 TV로 다가갔다. TV에서는 지금 막 방송된 건지 한 남자가 목을 가다듬고 있었다. {국민 여러분, 모두 지금 방송을 보며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일단 소개드리자면 저는 아펜하르트의 게임 설계자인 임장순이라고 합니다.} “뭐? 아펜하르트?” 배천익은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TV에 아펜하르트 게임 설계자가 나왔단 말인가. 그것도 모든 채널 통합으로. 남자의 말은 계속되었다. {지금부터 제가 할 말은 초인들의 등장과 엉망이 된 대한민국. 그 모든 계기가 된 사건과 원인을 설명하려합니다. 모든 일의 시작은 하진이란 연구가로 인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뭐, 뭐라고?” 실버크로스 단장, 배천익은 자신이 처음 아펜하르트 게임을 할 당시보다도 더 놀란 눈빛을 지금 보여주었다. 그 정도로 TV에서 말하는 것은 파격적이었다. “하, 하하. 아무리 그래도 믿을 수 있는 말을 해야지.” 하지만 TV를 온전히 믿지 않았다. 그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한 영상에 배천익은 그만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영상은 고공에서 찍은 청와대의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군대가 밀집해있어 무슨 일이 있나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나타난 두 사람을 보고 벌떡 일어난 것이었다. “랭킹 1위, 용병왕 애디? 그럼 저건 랭킹 3위, 결계의마도사 루히비드?” 조금 멀리 있어 구별하기 쉽지 않았지만 유명인인 용병왕 애디의 얼굴을 자신이 모를 리 없다고 배천익은 생각했다. 찍힌 영상을 보니 위성영상을 보여주는 듯싶었다. 그럼 저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마, 말도 안 돼!” 영상에서 두 사람은 분명 게임의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다. 루히비드가 총탄을 튕겨내는 장면을 본 것이었다. 그런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적들도 초인들이 나타남에 따라 안쪽에서 청와대의 반을 부시며 사라진 토네이도, 그리고 수많은 초인들을 한방에 몰살시킨 루히비드의 모습에서는 희열을 감추지 못했다. 배천익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거, 거짓이 아니었어. 전부 사실이야! 여보! 내 핸드폰, 내 핸드폰을 줘!” 배천익은 세상이 뭔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것은 배천익뿐만이 아니었다. “여보세요? 봉규냐? 그래, 나다, 불사조! 지금 TV 봤어? 어서, 레이나 누님에게도 연락해!” “말도 안 돼! 애디 단장님뿐만 아니라 루히비드님까지! 젠장, 더 원 기사단원들 전부 소집시켜! 우리만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 영상은 그것을 넘어 현재의 상황까지 보여주기 시작했다. 각각의 초인 탑을 보여주는 영상들. 조금 흔들리는 걸로 보아 방송국 헬기를 이용하는 듯 했고 그곳에는 각각 두 명의 사람들이 탑을 보고 있었다. “저, 저기 봐! 두령이 어디 있나 했더니 지금 TV에 출현하고 있어! 이거 완전 대사건이야! 근데…그 옆에 있는 건 그 쪼렙 누님 아냐?” “다, 단장님? 저기 봐! 멋쟁이 단장님하고, 어둠의조이 부단장님이 함께 있어! 그, 그럼 설마?” “미소천사 단장님까지 있을지도 몰라! TV는 뭐하고 자빠진 거야! 어서 그 모습을…아차, 잠깐만. 그러고 보니.” “그분 남자잖아! 아아악!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다시 떠올라버렸어!” 웅크리던 대한민국 전체가 조용히 맥동하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이 탑을 어떻게 무너트린담.” 미지의마검사, 황태식은 까마득한 높이에 탑을 올려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곳은 부산에 위치한 초인 탑 근처였다. 하루 종일 차타고 겨우 도착한 황태식과 어둠의조이, 강현빈은 멍하니 탑을 올려보고 있던 것이었다. “흠, 그나저나 자꾸 저 헬기가 눈에 거슬리는데요? 무슨 우리위치를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어둠의조이는 가뜩이나 작은 눈을 더 가늘게 떴다. 그렇게 착한 사람조차도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멋쟁이는 피식 웃으며 옆에 놓여있던 007가방을 들어올렸다. 그 가방 안에 들어있는 것은 플라스틱 폭탄, C4가 들어있었는데 중국 마피아를 통해 조폭들이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이네요? 이제 형하고 같이 싸울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이것이 인연이란 거겠죠.” “그나저나 결혼은 언제하세요?” “억! 아, 안 해요! 당분간,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같은 때에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무척이나 당황한 말투에 멋쟁이는 속으로 한동안 이걸로 놀려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슬슬 가죠. 적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휴, 못 말리겠군요.” 어둠의조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멋쟁이를 뒤따라갔다. 이번엔 대전에 있는 또 하나의 초인 탑 부근. 그곳에는 랭킹 4위, 드래곤소환사 주르르와 랭킹 7위, 영웅슬레이어 칼리가 서있었다. “게임상에서도 설마 했는데 칼리가 SL슈론 농구팀의 김주혁이었다니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 “뭘 그런 걸 다 신경 쓰나?” “하아, KT피리오스 팬인 내가 그 라이벌이라는 SL슈론의 선수와 같은 팀을 하고 있다는 게 황당해서 그런다.” 주르르의 말에 칼리는 눈썹을 살짝 씰룩였다. “그렇게 싫으면 혼자 하던가.” “남자가 삐치기는. 그냥 그렇다고.” “게다가 내가 형이야, 말 좀 높이지?” “그래봐야 한 살 차이구만. 그렇게 대접받고 싶으세요?” “하, 나 원 참.” 이쪽 팀은 어째 많이 티격태격 거리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서울 부근 초인 탑. 그곳에는 랭킹 10위, 맨손마스터 다덤벼와 무림일대기 랭킹 3위였던 일월현문의 전통 후계자, 화선녀가 서있었다. “너 반지는 어쩌고 몸만 왔냐?” “반지는 총 열 개 뿐인 거 몰라?” 무슨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이 말하는 화선녀. 대책회의실에서 제갈공녀가 하나 사용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청와대에 있는 반지를 회수하면 늘어나겠지만 시간이 촉박해 가져오지 못한 상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화선녀는 자신의 검 실력을 믿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사실 화선녀는 이곳이 아니라 기찬이와 함께 있길 바랐다. 그런데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진상녀와 같은 팀을 이루게 되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온 터라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아무리 그래도 초인들의 싸움인데. 정신이 나간 거 아냐?” “흥, 너나 잘하셔.” 화선녀는 코웃음 치며 앞으로 걸어갔다. 다덤벼는 정말 여자들은 이해 못할 종족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영웅들은 세 개의 탑을 무너트릴 준비를 마쳤다. <="" a=""> <="" a=""> <="" a=""> <="" a=""> 대격변(5) “킥킥, 킥킥킥! 킥킥킥킥!” 의자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자는 배를 쥐어 잡고 광대처럼 웃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가면같이도 보이는 얼굴을 보니 지금 웃는 건지 화내고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이자는 모든 일의 원흉이자 세계를 바꾸려하는 절대의 존재, 하진이었다. “저거 봐! 이 얼마나 웃긴 행동이야! 우리를 얼마나 얕보고 있으면 공개적으로 저러겠어? 그렇지 않나, 비?” 하진이 말한 상대는 턱수염이 까칠하게 나 있어 나이가 조금 많이 보이는 사내였다. 그자는 모든 초인들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 비였다. 비는 TV내용이 못마땅한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오리지널이 한 명씩 가있다곤 하지만 그래도 조금 위험하니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흠, 갈 필요 없어.” “탑을 포기하실 생각입니까?” 비의 물음에 하진은 손가락을 옆으로 까닥였다. “막는데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야. 보다 쉬운 방법이 있잖아.” “쉬운 방법?” 하진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의자 깊숙이 허리를 묻었다. “영웅은 언제나 지켜야 할 것이 많은 법이지. 멸, 네가 나서라.” “어떤 걸 하면 되는 겁니까?” “간단해, 인질 확보.” 하진은 더욱 진하게 미소 지었다. 부산에 있는 초인 탑. 개량된 초인들은 이미 건물 밖으로 나와 멋쟁이와 어둠의조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휘유, 이게 몇 명이야.” “눈대중으로만 봐도 50은 넘는 것 같군요.” 둘은 질린 표정으로 초인들을 보았다. “흥, 배짱도 좋아. TV로 광고하며 다가오는데 나잡아줍쇼. 할 줄 알았나?” “그것도 딸랑 두 명이서 뭘 하겠다는 건지.” “어서 처리하자구.” 초인들은 목과 손마디를 꺾으며 멋쟁이와 어둠의조이 곁으로 다가갔다. 점점 둥그렇게 포위당하자 멋쟁이는 주머니에서 소망의반지를 꺼내 오른손 약지에 끼웠다. “현빈 형, 저 먼저 갑니다. 백업 부탁해요! 화이어블레이드!” 멋쟁이는 일월천검((日月天劍)과 한 쌍이라고 불리는 일월현검(日月現劍)꺼내들어 외쳤다. 그러자 검에서 거센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권총을 활대용으로 사용하기는 처음인데…너무 기대하진 마세요.” 어둠의조이 역시 반지를 착용한 후,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앞을 조준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을 보니 권총이 영 미덥지 못한 모양이었다. “초인들의 힘을 보여주자! 모두 전투준비!” “파이어 볼!” “윈드 커터!” “아쿠아!” “빛의 화살!” 게임상의 가장 기본이 되는 수많은 스킬들이 화려하게 하늘을 수놓으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오오옷! 멋쟁이 단장님, 그렇죠! 아앗! 거기서 빠지면 어떻게 해요! 돌격, 돌격!” “이야, 어둠의조이 부단장님 총으로 싸워도 백발백중인데? 어떻게 총으로 활스킬을 쓸 수 있지? 그렇죠! 거기 스턴샷!” “아아악! 단장님, 한 대 맞았어!” “피해요! 피해!” TV앞에 옹기종기 모여 마치 축구 응원하는 것처럼 흥분한 미소천사 기사단원들. 주위에 오징어와 맥주까지 있어 누가 보면 놀러온 것 같아 보일 정도였다. 아니, 저들의 표정을 보니 정말 놀러온 게 맞을지도……. “봉규야! 전화로 한 말이 사실이야?” “허헐, 레이나 누님. 아무리 급해도 그 안경하고 머리띠는 벗으시는 게…….” “어? 아앗! 급하다보니 화장도 않했…젠장, 몰라 몰라!” 무작정 자취하는 하가네 집으로 찾아온 레이나는 자신의 몰골도 무시한 채 TV를 보았다. TV에서는 지금 막 싸우기 시작했는지 고군분투하는 주르르와 칼리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저거 용소환사 주르르? 영웅슬레이어 칼리까지? 이거 거짓말이지?” 수많은 초인들이 마법과 염력을 날리고 있었고 하늘에는 귀곡마검이 날아다녔다. 그 모습을 보며 레이나는 한쪽 볼을 씰룩였다. “그럼 전화로 한 말들이 전부 사실이란 말이야?” 너무 비현실 같은 이야기들. 하지만 생방송으로 직접 보고 있는 판국에 레이나는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저 둘은 왜 저렇게 밀려?” “아까부터 주르르라는 분이 싸우질 않고 있거든요. 보시면 전부 칼리님이 막고 있잖아요.” “그러게. 저 멍청이는 왜 드레이크도 소환하지 않는 거야?” 레이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자신이라면 저딴 놈들 쯤, 한방에 몰살시킬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며 말이다. 하지만 레이나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으니. 영웅들은 뇌 부담으로 인해 큰 스킬을 사용하기 버겁다. 그래서 주르르는 쉽게 드레이크를 소환하지 못하고 번번이 실패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륀 기사단 모두 소집시켜!” “모아서 뭐하게요. 그래봐야 아무것도 못할 텐데.” “그렇다고 이렇게 구경만할 순 없잖아. 저들은 전부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야. 가서 응원이라도 해야겠어!” 레이나는 머리띠를 벗으며 말했다. 그녀의 블루블랙 머리칼이 방 안에 흘러넘쳤다. “우아악! 두령! 힘 좀 써 봐요! 뭐하는 거예요!” “와, 또 날아갔어. 아니, 왜 스킬들을 아끼는 거야? 평소 때처럼 에네르기파라도 날려버리시지!” “아, 붉은 머리 누님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아아, 불안해! 차마 못 보겠어!” 슈바리에단원 중 몇몇은 고개를 틀어 외면했다. “저기 서울이었지? 가서 응원할까?” “자살할 셈이냐? 저기서 죽으면 개죽음만도 못해!” “야! 두령이 고전하고 있는데 우리만 몸 사리면 남자냐? 슈바리에단의 신조가 뭐냐!” “젠장, 그야 폼생폼사지!” “가자!” 슈바리에단 전원은 주먹을 꽉 쥐며 멋지게 일어났다. 하지만 떠는 다리만큼은 아무래도 막지 못하는 것 같았다. -------------------------------------------------- 완결이 거의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장식은 극장판으로 정하였습니다. 현재 지속적으로 글을 쓰는 중이며 전부 완료 후, 수정의 수정을 거듭하여 독자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시간은 대략 2주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약간의 시간오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극장판이라 명한 만큼 후회하지 않는 글 분량으로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마지막인 만큼 여유를 가지고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2주 후, 완결과 함께 후기에서 뵙겠습니다! <극장판 완결> 생명의 바다 上(1) “일섬(一剡)!” “크아악!” 화선녀가 발도하자 마법과 함께 양단되는 초인. 그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눈길을 뒤로한 채 쓰러졌다. “헉, 헉. 너 평범한 사람 맞냐! 용문권(龍刎拳)!” 다덤벼의 옷은 이미 넝마가 돼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니 더 황당했다. 반지를 사용하는 자신조차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일반여자가 저리 강할 수 있단 말인가. “너는 움직임이 너무 커. 그러니 쉽게 지치지! 파섬(破剡)!” 오히려 자신을 가르치는 화선녀. 다덤벼는 이마에 자꾸 핏대가 솟아오름을 느꼈다. “내가 그딴 걸 알까보냐! 호문권(虎刎拳)!” “하아, 백날 설명해봐야 내 입만 아프지.” “뭐야? 네가 무식하게 강한거지, 이 괴력녀야! 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란 말이…위험해!” 화선녀가 아주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상공에서 한줄기의 빛의 번쩍였다. 다덤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화선녀를 밀쳐버렸다. “으윽!” 빛은 다덤벼의 팔을 관통해 바닥까지 뚫고 들어갔다. 깜짝 놀란 화선녀는 바닥에 뚫린 구멍을 보며 멍하니 말했다. “저격?” “크윽, 너답지 않게 방심하고 그러는 거야?” 다덤벼는 웃고 있었지만 억지로 웃고 있다는 것이 화선녀의 눈에도 보일정도였다. 그녀는 재빨리 셔츠를 찢어 다덤벼 팔에 감아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가 셔츠를 넘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크게 다친 모양이야. 젠장! 그러게 왜 나를 감싼 거야!” “그러게. 나도 지금 회의가 드는 중이다.” 다덤벼 자신도 왜 지금 화선녀를 감싼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나마 잠깐 물러난 상태라 다행이었지. 만약 싸우는 중이었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위험한 행동이었다. “칫!” 화선녀는 자신의 애검, 천양화(天楊花)를 곧추세우고 다덤벼의 앞을 막아섰다. “으으윽…어이, 비켜. 너는 총알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보이지도 않잖아.”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게다가 지금 저격…그냥 총이 아냐. 힘이 깃들어 있었다구.” 그렇게 말하며 다덤벼는 힘겹게 일어났다. “힘이 깃들어? 설마!” “그래, 오리지널이지. 누군지 몰라도 꽤나 숨는 걸 좋아하는 놈이군.” 다덤벼는 다친 팔을 살짝 돌리다 안 되겠던지 결국 한숨 쉬고 팔을 도로 내렸다. 화선녀는 그 행동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자신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 생각한 것이었다. “…도망가자. 가망이 없어.” 화선녀는 일단 냉정해지기로 생각했다. 아직도 스무 명가량 남아있는 초인들과 보이지 않는 오리지널이 있는 판국에 다친 상태로 저들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판단되어 한 말이었다. 하지만 다덤벼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도망가? 어디로? 적에게 우리 은신처를 알려줄 셈이야? 게다가 이 많은 숫자를 뚫고 어떻게 도망간다는 거야?” 물론 화선녀역시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럼 불나방처럼 죽으러 뛰어들자 이거야? 그럼 내가 시간을 벌겠어! 너는 그 반지가 있으니 충분히 도망갈 수 있잖아!” 이번엔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말이었으나 다덤벼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여자 등 뒤에 서는 걸 싫어한다.” “이런 돌대가리! 그럼 어쩌자는…….” “그리고, 가망성이 아주 없는 건 아냐.” 다덤벼가 말을 가로채자 화선녀는 비집고나오는 욕설을 억지로 삼켰다. 다덤벼는 그런 그녀를 힐끗 보고 다시 말했다. “요는 저 오리지널과 탑만 부시면 된다는 거 아냐? C4 어디에 뒀냐?” “C4는 왼쪽 바위 뒤에 두었어. 그런데 그건 왜?” 화선녀는 지금 다덤벼의 말이 이해가지 않았다. 탑을 부술 작정인가? 물론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쉽지 않은 게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건물 안에다 그냥 폭파시킨다고 탑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주축이 되는 기둥마다 C4를 하나씩 부착시켜 폭파해야해야만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탑 안을 빙 돌아 전부 설치해야한다는 건데 지금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판국에 어떻게 부술 작정인지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었다. “바위 뒤라. 후, 하. 좋아, 이제 참을 만하네.” “도대체 어떤 어이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아까 총알을 맞을 때 저격병이 대략 어디 있는지 봐뒀어. 그러니 내가…칫, 다시 오는군. 역시 쉴 틈을 주지 않겠다는 건가.” 다시 다가오기 시작하는 초인들을 보며 다덤벼는 혀를 찼다. 화선녀도 다덤벼의 뒷말이 궁금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궁금증을 접고 검을 들었다. 다덤벼는 다시 날아올 총격에 대비했으나 다행히도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분명히 절호의 찬스였을 텐데도 후속공격이 없었다는 것은 연속으로 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 초인이 되어 동체시력이 좋아진 자신조차 겨우 보일 정도의 스피드를 가진 총격이었으니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자신들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만 아니길 다덤벼는 간절히 바랐다. “기문 개방. 으으으으윽!” 격투가의 가장 기본이 되는 기문을 개방한 것에 불과했는데 뇌에 파고드는 통증이 심각했다. 무언가 메스꺼운 것이 속에서부터 올라왔지만 꾹 삼켰다. 단지 기를 이용한 기술을 사용하려 한 것뿐인데 이정도면 차라리 사용하지 말걸 그랬다고 생각하는 다덤벼였다. “잠시만 여길 부탁한다!” “뭐, 뭐? 야! 여자 등 뒤에 서는 거 싫어한다며!” 초인들이 일제히 공격하는 순간 다덤벼는 화선녀에게 앞을 맡긴 채 옆으로 뛰었다. 그는 바위 뒤에 있던 007가방을 들고 빙 돌아 탑으로 달려갔다. 그가 달리는 곳은 저격병이 있을 거라 예상되는 3층 유리벽! 달리면서도 다덤벼는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나 위험한일은 피하기만 했던 자신인데 오늘따라 왜 이리 바보 같은 짓만 골라하는 걸까. 이 말도 안 돼는 팀에 들어와 자살을 방불케 하는 작전을 들고 온 것부터가 문제였다. 언제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건만 무슨 바람이 불어 이 팀에 들어왔을까. 회사가 무너져 백수가 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더 이상 할 수 없는 게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화선녀 앞에서 나약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다고 다덤벼는 생각했다. - 탕! 적도 당황했는지 황급히 총을 쏘았고 그로서 확실히 위치를 알게 된 다덤벼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거기였냐! 권막(拳?)!” 기문을 개방했기 때문에 주먹에서는 희미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그것은 벽이 되어 총알을 막아내었다. 하지만 총알의 힘은 예상보다 더욱 강렬했다. 가뜩이나 다친 팔로 007가방을 들고 있어 한 손밖에 사용하지 못한 상태인지라 파워에 밀리고 만 것이었다. 팔 째 통째로 날아가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우두둑 뼈마디 부러지는 소리와 기하학적으로 꺾이는 손가락을 보며 다덤벼는 이를 악물었다. “크으으으으으으윽!”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격한 고통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앞으로 달릴 수 있었다. 공포조차 사라져 버렸으니까. “이거나 받아라, 개자식아!”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겠다는 생각인지 다덤벼는 총알이 날아온 곳으로 가방을 던져버렸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가락 때문에 가방을 놓칠 뻔했으나 이를 악물고 던져 간신히 원하던 궤도로 날릴 수 있었다. 하지만. - 탕! 곧바로 이어지는 연속된 총격. 그것은 정확히 007가방의 중심부를 꿰뚫었다. -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탑의 모든 유리가 폭풍의 압력으로 인해 터져나갔고 다덤벼는 고막에 이상이 생긴 건지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뒤로 날아가 버렸다. 그나마 초인의 몸이었다는 게 다행이었을까. 재빨리 반대로 달리고 있던 상태라 화력범위에서는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위잉―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다덤벼는 깨진 유리벽 너머,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내를 볼 수 있었다. 그 사내의 손에는 Remington Model 700 P라는 저격 소총이 들려있었다. “야! 제대로 못해? 하앗! 드레이크 따위는 빨리 소환하란 말야!” “우왁! 그게 말처럼 힉! 쉬운 줄 알아! 나한테 마법이나 날아오지 못하게 잘 좀 막아봐!” 주르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며 짜증냈다. 아까 전부터 흐르던 코피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온전히 정신만 집중할 수 있었다면 이미 소환했을 텐데 자꾸만 몰려오는 적들 때문에 시간이 계속 지연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 혼자, 흐앗! 전부 막을 수, 윽! 있을 거 같냐!” 칼리는 속에서 열불이 터졌다. 왜 저런 놈이랑 한 팀이 되었던가. 나이도 어린 게 반말이나 찍찍 해대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짐이 되고 있지 않은가! 물론 다른 매개체를 소환하는 것 자체가 뇌에 엄청난 부담을 준다는 것은 알 고 있었다. 자신도 귀곡마검을 소환 할 때 뇌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었으니까. 하지만 저건 정도가 심했다. 싸우지도 않는 주제에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서있지 않은가. “으아아아아아! 좀 나와라!” 주르르도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스킬이 얼마나 뇌에 부담을 주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드레이크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자신인데 이정도 페널티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소환사따위 하지 말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주르르였다. “거기까지다. 날파리들!” 정말 순식간이었다. 2미터 30, 거구의 칼리를 검의 힘만으로 날려버린 것은. 귀곡마검으로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칼리는 주르르가 있는 곳까지 튕겨 날아간 것이었다. “크윽!” 양팔이 찌릿할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칼리는 재빨리 일어나 상대를 보았다. 상대는 정말 헐크를 방불케 할 정도로 근육이 불끈거렸고 무엇보다도 자신보다 키가 컸다. 2미터 50? 대략 눈대중으로만 보아도 그 정도는 나갈 것 같았다. 칼리는 직감했다. 이놈이 오리지널이란 것을. “크하하하! 내 검을 막다니 날파리치곤 힘 좀 쓰는구나!” 거대한 덩치는 자신의 몸집만한 대검을 들고 껄껄거렸다. 칼리는 그사이 굳은 팔 근육을 풀며 말했다. “네놈, 정체가 뭐냐?” “크하하! 내 이름 따위는 없다. 단지 나를 부르는 명칭은 천!” “천이라. 주제에 명칭은 거창하군. 덤벼라. 칼리, 김주혁이 상대해주마!” 칼리는 검을 공중에 띄우며 호기롭게 외쳤다. 천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거대한 대검을 땅에 박아 넣었다. “크하하하! 용병왕의 memory뇌파를 전송받은 나를 말이더냐! 보여주마! 내 힘을! 배틀 존 생성, 파괴의 의지는 이곳에서 이루어지리라!” 바닥에 박아 넣은 대검에서부터 기이한 문양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방어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준다는 용병왕만의 고유스킬, 배틀 존! 칼리와 주르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단장님의 스킬을!” “그럼 오리지널 열 명은 랭커들의 스킬을 쓰는 자들이었던 거야?” “잡담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흐아아아앗!” 천은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단지 휘둘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힘은 너무 엄청나서 풍압에 모래바람이 일어날 정도였다. “귀, 귀곡마검!” 칼리는 자신이 직접 막기보다 검을 앞으로 쏘아 보낸 채 뒤로 빠지는 것을 선택했다. 주르르는 조금 추했지만 바닥을 뒹굴러 간신히 피했다. - 챙! “검사가 검을 버리다니! 날파리가 날개를 버린 격이로구나!” 귀곡마검은 마치 야구방망이에 맞은 공이 된 것처럼 저 멀리 날아갔고 기회를 잡은 천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천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칼리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천의 품안으로 들어와 어깨를 명치부근에 가져갔다. “이번엔 네가 날아갈 차례다! 파격산!” 다리부터 힘을 끌어와 어깨로 모든 체중을 실어 날려버리는 격투가의 기술을 사용한 칼리. 퉁 하는 소리와 함께 천은 하늘로 붕 떠올라 땅이 처박혔다. “헉! 처, 천님이!” “오리지널이 당하다니!” 뒤에 대기하고 있던 수많은 초인들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칼리는 어깨로 전해져오는 묵직한 느낌에 만족하며 쓰러진 천을 보았다. “아야야, 이거 방심했는걸.” 하지만 천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길가에 잠시 넘어진 사람처럼 일어나 명치를 매만졌다. 칼리와 주르르는 어이없어 중얼거렸다. “생긴 것대로 노는데…….” “저런 곰 같은 자식…….” 칼리는 그래도 바닥에 깔린 배틀 존을 보며 그럴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비록 용병왕과 싸우진 않았지만 배틀 존의 방어력 상승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칼리였기 때문에 수긍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너, 검사가 아니라 격투가 쪽이었냐? 이거 꽤나 놀랐다. 하지만 두 번 방심은 없어! 우아아아아아앗!” 정말 곰처럼 쿵쿵 달려드는 천을 보며 칼리는 어떻게 상대해야할지 막막했다. 맨주먹은 별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 그렇다면 남은 건 귀곡마검! “기문개방. 크으으윽!” 단지 기문만 개방했을 뿐인데 귀곡마검을 소환할 때처럼 아파오는 머리 때문에 하마터면 몰아치는 대검에 두 쪽으로 갈라질 뻔했다. “이 녀석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잽싸구나!” 그래도 기문을 개방한 직후부터 칼리의 움직임은 현저히 달라졌다. 양손에는 아지랑이 같은 미증유의 기운이 머무르기 시작했다. “절권!” 아까전이 퉁이었다면 지금은 펑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파괴력이 다른 공격. 하지만 천도 아까와는 다르게 한 발짝 물러났을 뿐 넘어지거나 날아가지 않았다. “크하하하하! 약해, 약해, 약해, 약해!” 칼리는 거대한 철골을 상대로 싸우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주먹으론 때릴 엄두도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 자꾸만 피하게 되고 결국 몸에 조금씩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파리가 아니라 쥐새끼로구나! 남자답게 덤벼라!” 격앙된 천이 결국 검을 크게 휘둘렀고 그 순간 칼리의 눈이 번쩍였다. 사실 칼리는 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이 자신 앞에서 다시 명치를 들어내길 말이다. “기폭!” 격투가의 비장의 한수라고 알려진 기폭을 시전 하는 칼리.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한 번이 한계였다. 그걸 다섯 번이나 터트린 무식한 놈도 있지만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한 번이 한계인 비장의 기술이었다. 기폭으로 생긴 모든 기를 주먹으로 모아 빠르게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기폭을 시전 한 순간 머리가 찢어질듯이 아파왔지만 잠시 무시하기로 했다. “이것도 막아봐라! 용화일천권(?火日天拳)!” 용의 숨결, 태양의 하늘이라 불리는 권을 내질렀다. 북을 두드린 것 같은 소리가 퍼져나갔다. 천이 입고 있던 정장 등 부분이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펑 터져나갔다. “크윽, 이건 좀 아프군.” 살짝 표정을 찡그리는 천. 하지만 쓰러지거나 뒤로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대검을 버리고 칼리를 껴안아 버렸다. “하지만 내가 의도했던 대로다! 죽어라!” 칼리 등 뒤로 손을 넘겨 깍지 낀 채 압사라도 시킬 것처럼 꽉 조르기 시작했다. 칼리는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 통증에 비명이 절로 나왔다. “크아아아아악! 으큭, 하지만 의도했던 건 너뿐만이 아냐…그 잘난 몸, 이것도 견디나 보자! 귀곡마검!” 아까 튕겨 날아간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던 귀곡마검. 검은 아까 전부터 하늘위로 날다 상공 50킬로미터에서부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정확히 천의 정수리를 향해 말이다. 떨어져 내릴수록 가속도가 붙어 공기마저 일그러트리는지 그그그그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꽈과과과과광! 흙먼지가 화악 피어올랐다. 어느 순간 조이던 힘이 약해져 튕겨나간 칼리는 자신도 검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크으으으윽!” 칼리는 온몸이 쑤시는 것보다도 아까부터 무리한 뇌 부담 때문에 아픈 머리가 더 신경 쓰였다. 입안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고 코에서도 자꾸만 끈적거리는 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칼리는 흙먼지의 중심부를 뚫어져라 보았다. 아직 상대의 상태를 몰랐으니까. 흙먼지가 가라앉아감에 따라 칼리와 주르르의 눈도 커져만 갔다. 미사일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둥글게 패인 자리. 직경 10미터정도였는데 엄청난 파워였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문제는 그 가운데 온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람이 하늘을 향해 팔을 엑스자로 교차시켜 막고 있는 것이었다. “마, 막았어? 그, 그걸?” 칼리는 말까지 더듬을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저건 사람이 아니다. 완전히 괴물이었다. 그 생각은 주르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크으으으윽, 감히, 감히, 쥐새끼 주제에!” 천은 온몸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 때문에 이성을 잃었다. 눈이 점점 붉게 물들어 갔다. 자신으로서도 뇌에 부담이 드는 스킬, 파괴의 눈을 발동시킨 것이었다. “하앗!” “스턴샷!” 한편 부산에 있는 멋쟁이와 어둠의조이는 초인들을 가장 수월하게 상대하고 있었다. “저, 저것들 뭐야!” “어떻게 50명을 상대로 단 둘이서 싸울 수 있는 거냐!” “포위해서 한꺼번에 공격해!” “젠장, 또 포위망을 뚫어버렸어!” 멋쟁이와 어둠의조이 합격은 예상외로 더 강렬했다. 저돌적으로 몰아치는 멋쟁이 때문에 적들은 밀려났고 그것을 막기 위해 돌아 포위하려하면 어김없이 총알이 날아왔다. 화가 난 초인들이 어둠의조이를 공격하려했지만 재빠른 몸놀림으로 자꾸 피해 다니며 시간을 끌었고 그사이 멋쟁이는 더 많은 초인을 베었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어 벌써 반이 쓰러진 상태였다. “비켜! 내가 상대하겠다!” 그동안 팔짱낀 채 구경만 하고 있던 작은 소년이었다. 저자가 오리지널이란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던 멋쟁이와 어둠의조이는 긴장할 때가 온 것임을 느끼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제 나오는 거야? 기다리다 지쳤다.” 멋쟁이는 일월현검으로 소년을 가리키며 도발했다. 소년은 싸움에 많이 익숙하지 않은 건지 쉽게 도발에 걸렸다. “이이익! 너희 같은 놈들에게 우리들이 당할 거 같아!” “흥,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지. 그렇지 않나요, 현빈 형?” “물론, 그리고 긴 쪽은 저희겠지요.” “으으으으으…다 죽여주마! 용문권(龍刎拳)!” <극장판 완결> 생명의 바다 上(2) 하늘에 있는 용이 아귀를 벌리고 땅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내리 꽂는 주먹. 멋쟁이는 깜짝 놀라면서도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다덤벼의 스킬? 너 대체 정체가 뭐냐?” 기습적으로 날린 것인데 가볍게 피한 상대를 보고 갈은 내심 긴장했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닌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나는 랭킹 10위, 맨손마스터의 memory뇌파를 전송받은 갈이다!” 그 순간 멋쟁이와 어둠의조이는 예상할 수 있었다. 오리지널은 전부 랭커의 memory뇌파를 전송받은 자들이란 사실을. “그렇군, 갈이라. 나는 미지의마검사, 멋쟁이. 손끝에 맺은 결심은 곧 다짐이 되리라! 정식으로 기사대전을 신청한다!” “하아, 여기는 게임이 아닙니다.” 멋쟁이의 외침에 어둠의조이가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멋쟁이는 검 손잡이를 가슴팍으로 끌어당겨 자세를 취했다. 검을 잡은 손은 자신의 결심. 소연이를 죽인 자들에 대한 복수와 대한민국을 지키겠다는 결심들이 마음이나 뜻을 굳게 만들어 견고한 다짐이 되었다. 처음에 게임상에서 이 신념을 만들 때만 해도 아무생각 없이 만든 거였는데 지금에 와선 자신과 너무도 어울리는 신념이 아닐까 생각한 멋쟁이였다. “기사도 있는 양 말하지 마! 기문개방!” 갈도 본격적으로 힘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양손에 모이는 아지랑이. “화이어 블레이드! 와라!” 둘 주위에 모래바람이 일 정도로 엄청난 공방이 시작되었다. 주먹으로 검을 튕겨내고 품안으로 들어오는 갈. 하지만 튕긴 검을 추진력삼아 허리를 한 바퀴 돌려 몸통박치기를 피한 직후 재차 검을 휘두르는 멋쟁이. 갈은 다시 그것을 발바닥으로 막으며 도약대삼아 멀찍이 떨어졌다. 말은 길었지만 이 모든 것들은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저것이 오리지널의 힘인가…….” “우리들은 초인이 아니었어.” “그냥 힘 좀 쓰는 인형일 뿐인가…….” 개량된 초인들은 힘의 회의감을 느꼈다. 폭풍이 몰아치듯 대결하는 둘을 보며 자꾸만 어깨가 처졌다. “당신들은 왜 초인이 되셨죠?” 그런 초인들에게 말을 건건 어둠의조이였다. 멋쟁이를 도와줄까 하다 너무 빠른 공방에 마음을 접고 초인들에게 다가간 것이었다. “젠장, 오리지널끼리 싸우는 동안 우리를 노릴 셈이냐! 모두 포위해!” “잠깐만요, 저는 지금 싸울 마음이 없습니다. 잠시 휴전하죠.” 어둠의조이 특유의 눈웃음은 모두를 멍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정말 싸울 마음이 없다는 듯이 양손을 들고 말하는 터라 초인들은 순간 진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거, 거짓말 하지 마! 이 좋은 기회를 놓치려할 리가 없잖아!” “소, 속지 마! 저 얼굴에 낚이지 마!” 가까스로 정신 차린 초인들은 살벌한 눈으로 어둠의조이를 노려보았다. 어둠의조이는 조금 난감하다는 눈으로 어깨를 으쓱이더니 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러면 제 말을 믿어주시겠어요?” “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실은 이번에 저 결혼하게 됐거든요. 축하해주세요.” “……….” “……….” 초인들은 잠시 저게 무슨 말일까 심각하게 고민해야했다. 결혼하는 사람은 총을 버리고 휴전을 요청하는 일이 타당한가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곧, 말도 안 돼는 생각이라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제 조금 진정이 되셨나요?” 어둠의조이는 푸근하게 미소 지으며 초인들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초인들은 긴장이 조금 풀린 건지 어둠의조이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데도 눈치 채지 못했다. “네놈은 정신이 하나 빠진 거 같군.” “심각한 상황에서 농담이라니. 허!” “진지한 내가 바보 같아 졌어.” 어둠의조이는 속으로 결혼은 농담이 아닌데 하며 푸념했다. 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내보이지는 않았다. “당신들은 왜 초인이 되어 이 자리에 서있는지 알고 싶어요. 어째서 우리랑 싸워야 하죠? 당신들도 대한민국 사람이잖아요.” “그야, 우리도 왜 싸워야 하는 진 잘 모르겠지만…….” “나는 대한민국이 강대국으로 바뀔 수 있다는 말에 초인이 된 건데?” “신기하잖아. 사람의 진화. 나는 진화된 사람이야. 보수적인 생각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지!” “그래, 초인 그 자체가 얼마나 대단한 건데 항쟁하며 막는 이유를 모르겠어! 나는 미래를 위해 싸우고 있단 말이야!” 어둠의조이는 초인들이 하는 말을 들으며 잠시 슬픔에 잠겼다. 저들이 하는 말도 일리는 있었다. 사람의 진화, 그 자체에 의의를 두고 싸우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화라는 것을 꼭 해야만 하는 걸까요? 과거 그대로여도 좋지 않을까요? 도대체 왜 초인이 되어야 하는 거죠?” “강함, 신의 범접함! 내가 항상 바라왔던 거야! 게임에서만 느껴야했던 대리만족들을 현실에서 체험할 수 있다는데 왜 못 막아 안달이야?” “나도 슈퍼맨이 꿈이었어! 전부 그렇게 될 수 있다는데 왜 거부하는 거야!” 사람들은 영웅이란 것을 항상 꿈꿔왔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될 수 없으니 게임을 만들고 가상체험하며 대리만족을 느꼈던 걸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둠의조이역시 게임하며 이런 생활이 현실이길 꿈꾸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초인이기 이전에 당신들은 불행했나요? 단지 평화로운 생활이 무료해 자극적인 일을 꿈꾼 게 아닌가요? 진화가 없으면 사람은 행복하지 않나요? 어째서 초인이 되는 게 진화와 관련짓습니까! 그 이상 때문에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 죄책감도 없나요?”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켰을 뿐이야!” “죄책감도 물론 들어! 하지만 미래를 위해서라면!” 옛날부터 사람들은 그래왔다. 자신이 한 행동에 타당성을 주기위해 이유를 만들어 붙이는 것을.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란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끼는 어둠의조이였다. “미래를 위해서라면 더욱 그만 두십시오. 초인들의 삶은 싸움밖에 없을 테니 말입니다.” 어둠의조이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행동에 초인들은 발끈했다. “어째서 싸움밖에 없다는 거야!” “초인이 되면 더 이상 천재지변으로 죽는 일도 없잖아!” “대신 초인끼리 죽이겠죠.” 어둠의조이는 힐끗 한창 싸움중인 멋쟁이와 갈을 보았다. “힘이 늘어나면 그것을 사용하고 싶은 욕심이 늘어납니다. 자신의 강함을 알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그래서 게임에서는 항상 PVP하고 랭킹을 만들어 정해진 순위를 매깁니다. 그게 현실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강자만이 높은 곳을 차지하고 약자는 죽습니다. 지금 싸우고 있는 갈이란 분과 멋쟁이님처럼 전 세계 동시다발적으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해 질것이란 말입니다! 치안? 양육강식만이 남겠죠. 법? 대통령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초인이 되면 욕망이 끝납니까? 다른 진화를 원하지 않을까요? 점점 더 강하게, 강하게, 강하게! 그래서 남는 건 행복입니까? 남는 건 지옥밖에 없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은 정말 꿈과 같단 말입니다!” “……….” “……….” “……….” 초인들은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주위 물건들을 파괴시키며 싸우는 멋쟁이와 갈의 모습을 보기만 했다. 그 사이 흥분을 가라안친 어둠의조이가 다시 말했다. “저는 초인이 되느니 그냥 결혼해 한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남편이 좋습니다. 초인 같은 건 게임만으로 만족합니다. 그게 더 행복하니까요.” “나, 나는…….” “……….” 초인들 중 대부분은 머리를 숙여 깊이 생각했고 몇몇은 머리를 감싸 쥐거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악!” 그때 갈이 멋쟁이 검격에 튕겨나갔다. 주르륵 바닥에 미끄러지는 갈. 그는 힘겹게 일어나며 외쳤다. “너희들도 도와!” 그 말에 초인들은 몹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하나둘 전투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네 이야기 역시 전부 예상일뿐이잖아.” “나는 내 이상을 믿겠어.” 어둠의조이는 슬픈 표정으로 잠시 혼란스러워 하는 그들을 보았다. 결국 자신도 바닥에 놓은 권총을 들며 말했다. “이해할 줄 알았는데…어쩔 수 없죠.” 잠시 멈추었던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한편, 누나를 구하기 위해 서울대학병원, 냉동 시체 안치소로 달리던 나기찬은 언제부터인가 거리의 대형 스크린에서 눈을 때지 못하고 있었다. 스크린 안에서는 고군분투하는 랭커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기찬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발, 다들 무사해줘.” 결국 지금 상황을 외면한 채 다시 달리는 나기찬. 조금만 더 달리면 도착하는 거리였다. 이제 와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기찬은 눈 꽉 감고 달렸던 것이다. 누나, 나소연은 사실 오래전에 절차에 맞춰 장례가 이루어 졌어야 했다. 하지만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가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격변하는 대한민국 때문에 여유가 없어 지금까지 냉동 보관되었던 것이었다. 나기찬은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었다. 아직까지 잠들고 있을 누나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몰래 수도 없이 울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장례를 치르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목숨과 바꿔 다시 살릴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각오였기 때문에 나기찬은 지금 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어, 어째서.” 결국 서울대학병원에 도착한 나기찬. 기쁨에 차 뛰어 들어갈 줄 알았건만 그의 눈은 부정으로 한없이 흔들리기만 했다. 나기찬 앞에 보이는 것은 웅장한 흰색 병원의 모습이 아니라 철골과 돌덩이만이 가득한 폐허였기 때문이었다. 돌덩이엔 눌어붙은 핏자국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고 공룡이라도 밟고 지나간 듯 한 파충류의 발자국이 나있는 곳도 있었다. “이럴 순 없어…이럴 순 없어어어어어!” 나기찬은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마지막 한줄기의 희망이 무너진 느낌일 것이다. 펑펑 쏟아지는 눈물도 닦지 않고 폐허 속을 파헤치는 나기찬. 그의 손톱이 깨지고 갈라져도 그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누나, 누나, 누나아아아아아!” 결국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는 지경까지 가고 말았다. 하지만 반지는 나기찬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왜, 왜야! 왜 초인이 되지 못하는 거야!” 살짝 머리가 지끈거렸을 뿐, 더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반지를 수없이 꼈다 뺐다 반복했다. 그럼에도 반지는 나기찬의 소망을 철저히 파괴했다. “젠자앙!” 결국 나기찬은 반지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가슴 한구석이 찢어질 것같이 아팠다. 하지만 조금씩 진정될수록 그의 가슴은 뻥 뚫린 것처럼 공허함만이 몰려왔다. “으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 생각한 희망들. 하지만 현실은 동화 속 이야기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헛된 꿈속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나기찬은 생각했다. 아니,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이곳으로 달렸다. 죽음을 불사르는 동료들을 외면한 채 이곳으로 왔다. 자신은 아직도 헛된 이상만을 꿈꾸는 작은 소년이었던 것이다. “……….” 바닥에 있는 반지를 조심히 주워들었다. 이것은 외면하고 있던 진실의 결정체. 자신이 바랐던 이상향과 정 반대인 냉혹한 현실을 이제 받아들여야만 했다. 먹먹한 가슴 때문에 도무지 숨을 쉴 수 없었다. 이대로 심장이 멈춰 죽어버렸음 차라리 편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나기찬을 세상은 내버려두지 않았다. - 화르르르르르륵!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의 해일. 마치 붉은 하늘이 땅으로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무엇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그 불꽃들은 한 무더기의 인가를 덮쳐버렸다. 저곳에는 분명 많은 사람들이 숨죽이며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곳은 지옥의 일부분이 된 것처럼 불에 휩싸여있었다. - 쿠워어어어어어어엉! 그런 모습을 보며 마치 즐겁기라도 한 양 포효하는 거대한 드레이크가 마치 감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 주위를 선회했다. “헉, 헉!” 나기찬은 불에 휩싸인 인가로 달렸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화력에 차마 근처까지 다가갈 수 없었다. “으윽.” 완전히 불바다였다. 이정도 화력이라면 살아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지옥이야. 완전히 생지옥이야…….” 그때였다. 기찬이 귀로 슬피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던 것은. 그 소리는 불바다 안쪽이었다. 기찬은 뛰었다. 화끈거리는 열기에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었지만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무작정 뛰었다. “이 근처 콜록! 였던 거 같은데.” 소매로 코와 입을 막고 달리던 기찬은 거리 한복판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 지독한 냄새를 뿌리고 있었는데 이것이 사람 탄내라는 것을 기찬은 처음 알게 되었다. “엄마, 엄마! 으아아아앙!” 등이 완전히 타버려 죽은 시체안쪽에서 들린 말이었다. 그 시체는 무언가 지키기 위해 감싼 듯 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기찬은 서글픈 표정으로 달렸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역시나였다. 시체는 여성이었고 그 안쪽에는 울고 있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아마 시체는 이 아이의 엄마였을 것이고 대신 죽은 것이리라. “엄마, 엄마! 엄마!” 기찬은 시체를 뒤집어 아이를 일으켜주었다. 하지만 아이의 눈에는 오로지 엄마밖에 보이지 않는 건지 시체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크, 크흑!” 결국 참지 못한 기찬은 아이를 꽉 껴안으며 자신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짐에도 그는 이빨의 힘을 풀지 않았다. 이 아이를 보며 다시 누나가 생각난 것이었다. 기찬이 아이를 껴안자 아이는 힘이 풀린 인형처럼 기찬 품안으로 쓰러졌다. 정신이 버티지 못한 것이었다. 기찬은 그런 아이를 안아들며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는 이 지옥의 장본인이 포효하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용서 못해…용서 못해!” 기찬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가슴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용솟음쳤다. 그의 얼굴은 단호함으로 굳어졌다. 그때 기찬이 끼고 있던 반지가 살짝 빛난 건 아무도 몰랐다. “이길 수 있을까요?” 한나는 불안한 듯 손가락으로 휠체어 팔 받침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아직은 몰라. 하지만 이겨야지.” 제갈공녀는 TV에서 눈을 때지 않은 채 답했다. TV에서는 한창 고전중인 랭커들의 모습이 보였다. {지지직…크, 큰일이다!} 갑자기 무전기에서 조폭의 긴박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제갈공녀는 무전기를 들었다. “무슨 일이죠?” {서, 서울 한복판에 괴물이! 지금 당장 NCC 채널로 돌려봐!} 대책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조폭의 말을 듣고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민혜리는 초조한 마음으로 채널을 돌렸다. “이럴…수가.” “인가가…….” “빌어먹을 놈들!” NCC채널에서는 불에 휩싸인 인가를 찍고 있었다. 하늘 상공에는 그 범인으로 보이는 드레이크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왜 아무 책임도 없는 사람들을!” 주조철은 볼 살을 푸들거리며 광분했다. 자기 동생처럼 사람들을 쉽게 죽인 아펜하르트에게 화가 난 것이었다. “아마…인질이겠죠.” 제갈공녀는 TV를 본 순간,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잔인한 생각이지만 자신도 아펜하르트쪽 사람이었다면 분명 이것을 실행했을 테니까. “인질이요?” 한나가 무슨 말이냐며 제갈공녀를 보았다. “우리들은 지켜야 할 것이 많아. 하지만 적은 아니지. 저 행위는 지금 우리보고 모든 행동을 멈추라는 말과도 같아. 사람들에게 반감을 살 행동이라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내가 너무 저들을 얕봤어…….” 제갈공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임박사가 조심히 의견을 말했다. “본진을 탐색 중이던 기찬 군과 가린 양을 보내는 건 어떤가.” 좋은 의견이었지만 제갈공녀도 이미 생각했던 거라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러려고 했어요. 하지만 저 드레이크를 본 순간 불가능하단 결론이 나왔습니다. 아마 우리 쪽에서 인원을 보내도 유유히 하늘저편으로 날아가 다른 곳에서 또 사람들을 죽이겠죠.” “국가에게 전투기를 빌리는 방법은?” 이번엔 주조철이었다. 하지만 제갈공녀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국가에서는 이미 중립을 지키기로 했기 때문에 원조는 어려워요. 게다가 전투기로 와도 드레이크를 잡을 수 있을까요? 민간인 때문에 미사일도 못 쏠 텐데요.” “젠장!” 주조철은 방법이 없다는 것에 화가 났다. 제갈공녀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방법이 없네요. 무시하죠.” “뭐?” “네?” “그게 무슨 말인가?” 모두 설마 하는 표정으로 제갈공녀를 보았다. “우리 작전이 마무리 될 때까지…모르는 걸로 해요. 방법은 그것밖에 없…….” “싫어요!” 한나가 제갈공녀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가슴을 꽉 쥐어짜며 고개를 크게 저었다. “어떻게 뻔히 아는데 죽어갈 사람들을 무시할 수 있어요? 우리들이 왜 싸우고 있는데요!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고 있는데요!” “하지만 방법이 없어. 나도 그러고 싶지 않지만…….” “반지주세요! 제가 갈 거예요! 제가 막으면 되는 거잖아요!” “한나야…….” “여기 기찬 씨가 있었다면 분명 저처럼 행동했을 거예요! 당장 위험에 닥친 사람들을 먼저 구했을 거라고요!” “……….” 제갈공녀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자신까지 가슴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이었다. “자, 잠깐! 저기 봐요! 저 빌딩 옥상!” TV를 주시하던 민혜리는 갑자기 깜짝 놀라 외쳤다. 침울해하던 모든 사람들이 무심코 TV를 보았다. “저, 저건!” “기찬 군?” “아니, 기찬이가 왜 저기에!” “역시 가주었어! 기찬 씨가 가주었어!” 한나가 가슴을 꽉 쥐어짜며 기뻐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한나는 휠체어를 이동시켰다.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어요. 전 기찬 씨에게 가겠어요!” “한나야, 위험해!” 임박사가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말렸다. 하지만 한나는 그런 아버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보내주세요. 지금 가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거 같아요.” “한나야…….” 한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말을 거부했다. 그 정도로 확고히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임박사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말을 못하고 울 듯 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같이 가죠. 저도 더 이상 이곳에서 지켜만 볼 수 없겠어요.” 민혜리였다. 민혜리는 차키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혜리 씨…….” 제갈공녀가 민혜리를 불렀지만 민혜리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러니 지휘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한나는 제가 잘 돌볼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박사님.” 그렇게 둘은 휑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대책회의실의 두 명이 빠졌을 뿐인데도 뭔가 허전함이 풍겨왔다. 제갈공녀는 잠시 두 사람의 빈자리를 둘러보다 무언가 결정했는지 무전기를 들었다. “젠장, 아직도 윙 거려.” 다덤벼는 폭파에 날아간 이후 적이 다가오는 동안 몸을 가누는데 최대한 힘썼다. 저격 총을 들고 있는 적이 거의 지척까지 온 상태였다. 자신에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걸까? 바로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한 다덤벼였다. “야! 괜찮아?” 저격인 보다도 화선녀가 먼저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 다덤벼는 몸을 일으키려다 팔이 움직여지지 않아 포기하고 웃었다. “큭큭, 보다시피.” “웃을 기운은 있나보네. 네가 무식한 소릴 할 때부터 말렸어야 하는 건데.” 화선녀는 다덤벼에게 얘길 하면서도 지척까지 다가온 저격 인에게 눈을 때지 않았다. “조심해, 만만치 않은 놈이다.” 다덤벼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말해줘야 했다. 화선녀도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거기서 지켜보기나 해.” 둘이 조용히 얘기하고 있는 그 사이. 초인들은 저격인, 산에게 다가갔다. “산님! 저희가 처리할 테니 굳이 나서실 필요 없습니다.” “저 여자는 초인도 아니었어요. 그러니 쉽게…억!” 산은 볼것도 없이 주먹으로 초인의 턱을 날려버렸다. “멍청한 녀석! 초인도 아닌 여자를 상대로 그렇게 고전했단 말이냐?” “크윽, 죄송합니다!” “물러나있어라. 내가 처리하지.” 산은 그렇게 말하며 화선녀와 다덤벼에게 다가갔다. “내 물음에 답해라. 무슨 생각으로 이런 무의미한 짓을 벌이는 거지?” “너에게 알려줄 의무는 없는 걸로 아는데?” “의무는 있다. 협박이니까.” 산은 저격 총으로 다덤벼를 겨누며 비웃었다. 화선녀는 짧게 한숨 쉬었다. “내 인생의 걸림돌 같으니라고.” “킥킥킥…아으으으으윽!” 다덤벼는 웃다가 팔이 아픈지 신음을 내뱉었다. 화선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입을 열었다. “우리는 엔젤단. 너희 초인들을 말살할 존재들이다.” “엔젤단? 진짜냐? 무슨 어린애 같은 명칭을.”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건 한나한테 실례라고! 일섬(一剡)!” 기습적인 공격이었다. 빠르게 발도한 검 날은 정확히 산의 목을 향하여 포물선을 그렸다. “어딜!” 하지만 산의 움직임이 더욱 빨랐다. 뒤로 뛰어 간격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재빠르긴 하다만 초인의 움직임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도망갈 셈이냐!” 화선녀가 노린 건 산이 아니었다. 애초에 멀찍이 떨어트려 놓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었다. 화선녀는 발도한 직후, 다덤벼를 껴안아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했다. “저격병에게서 도망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스턴샷!” 화선녀 눈에 총알이 보일 리 없었다. 그래서 산의 말소리를 듣고 뒤도 보지 않은 채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렇게 도망가려던 시도는 어이없게 끝나고 말았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냐? 도망갈 수 있을 리 없잖은가.” “아으윽, 쓰라려. 하지만 성공했으니 뭐 됐나?” “성공?” 화선녀는 쓰라린 어깨 때문에 한쪽 볼을 찌푸리면서도 웃었다. 그녀의 왼손에는 소망의반지가 들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도 초인이다. 이제 봐주지 않겠어!” “반지? 그렇구나! 너희들은 반지로 memory뇌파를 전송받고 있었어!” “알아봐야 늦었어! 파섬(破剡)!” 일월현문(日月現門)의 기술인 파섬은 모든 것을 부순다는 말처럼 파쇄적인 기운이 몰아쳤다. “크윽!” 강대한 기운을 차마 막지 못하겠던지 산은 다시 멀찍이 떨어지는 것을 선택했다. - 펑! 화선녀는 깜짝 놀라버렸다. 검과 부딪힌 바닥이 터져나간 것이었다. 일월현문의 모토를 깨달아 기의 존재를 느낀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으나 자신은 한참이나 미숙한 존재. 결국 반지의 힘이란 것을 알게 된 화선녀는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아펜하르트의 게임을 오래 하지 않아 불안했던 마음이 녹아버린 것이었다. “결국 memory뇌파는 잠재력도 깨워준다는 말인가. 지금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 같아!” “큭, 자만하지 마라! 스턴샷!” “보여!” 화선녀는 날아오는 총알을 검 날로 살짝 비껴 처내었다.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행동. 산은 처음으로 긴장했다. “지금이라면…가능해!” 화선녀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일월현문의 보법인 월보(月步)를 시전 한 것이었다. 마치 달처럼 둥글고 유연하게 움직이는 보법인데 달빛과도 같이 상대의 눈에서 사라지는 기이한 움직임이 특징인 보법이었다. 화선녀는 이 보법 이론은 알고 있었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벽하게 사용한 것이었다. “거기냐!” 빠르게 총구를 옆으로 돌려 쏘는 산. 하지만 총알은 허공을 갈랐다. “잡았다.” 화선녀는 산의 바로 뒤에서 나타났다. 움찔할 정도로 놀란 산. 등줄기가 서늘함을 느끼고 재빨리 앞으로 굴렀다. “피했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화선녀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산은 속이 부글거림을 느꼈다. 여자한테서 장난감취급 당하고 있다 생각했으니까. “나도 봐주지 않겠다!” 스코프에 눈을 가져간 산은 연속으로 두발의 총을 쏘았다. 화선녀는 가볍게 피하고 다시 산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총알은 다시 화선녀의 등 뒤를 노렸다. “뭐, 뭐, 꺄악!” “…매직 컨트롤샷.” 산은 다시 뒤로 멀찍이 떨어지며 탄창을 갈았다. 화선녀는 그 사이 왼쪽어깨를 부여잡고 힘겹게 일어났다. 겨우 피해 치명상은 면했지만 어깨를 맞았던 것이었다. “긴장해라. 이번엔 진짜다. 암속성 결합, 증폭!” 총구에 암흑의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엎드린 채 보고 있던 다덤벼가 경악했다. “저, 저 스킬은! 위험해!” 다덤벼가 소리 질렀지만 산이 쏘는 게 더 빨랐다. “세상조차 가르는 필멸의 화살(Arrow of Mortality)!” - 콰콰콰콰콰콰콰! 바닥의 콘크리트를 갈라버리며 날아오는 암흑의 총알. 화선녀는 위험하단 것을 직감했다. “하아아아아아앗!” 피하기는 글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힘으로 총알을 비껴 처낼 생각으로 천양화를 휘둘렀다. 하지만 화선녀의 어깨가 망가졌기 때문에 총알을 받아낼 힘이 모자랐다. “이, 이정화!” 가장먼저 검이 튕겨 날아갔고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붕 떠 빙그르 돌아 바닥에 떨어졌다. 그럼에도 힘이 소진되지 않아 몇 번이나 더 돈 다음에 겨우 멈춰서는 모습을 보며 다덤벼는 무언가 가슴 저편이 저미는 것을 느꼈다. “너, 너어! 크아아아악!” 다덤벼는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도 목과 한쪽 팔을 이용해 겨우 일어나 주춤거리며 화선녀에게 달려갔다. 화선녀는 기절한 건지 움직이지 않았다. 총알은 복부를 꿰뚫은 건지 등 뒤에 피가 스며나왔고 바닥은 이미 화선녀의 피로 흥건했다. “너, 너, 너어어어어어!” 왜 미친 듯이 화가 나는 걸까. 다덤벼는 참을 수 없어 이를 으득 갈았다. 그는 엎드려, 이빨로 화선녀의 반지를 빼내 아픈 왼쪽 팔을 가까스로 들어 약지에 꼈다. 그때까지도 죽일 듯이 산을 노려보았다.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뭘 하겠다는 거지?” “죽여 버리겠어! 기폭! 제 2차 기폭!” 머리가 터질듯이 아파왔다. 피가 자꾸만 역류했고 코에서는 이미 폭포수처럼 피가 쏟아졌다. “제 3차 기폭! 아아아아아악!” “뭐, 뭐야!” 주위에 부셔진 콘크리트 돌들이 흔들거렸다. 엄청난 압박감. 마치 야수가 먹이를 노리는 듯 한 눈빛을 보고 산은 두려움에 덜덜 떨었다. “스턴, 스턴, 스턴샷!” “하아아아아아아아앗!” 산이 총을 쏘는 것과 동시에 다덤벼가 땅을 박찼다. 박찬 땅이 펑하고 터져나갔다. 총알이 다덤벼의 발에 한 발, 어깨에 한 발이 스치고 마지막으로 볼을 스쳤다. 하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빗살 같은 속도로 돌진하는 다덤벼. “젠장! 암속성 결합, 증폭! 세상조차 가르는 필멸의 화살(Arrow of Mortality)!” “용화일천권(?火日天拳)!” 다시 힘과 힘이 맞부딪쳤다. 카가가각 땅과 공간이 비명을 질렀다. “크헉!” “아아악!” 이번에는 누구랄 것도 없이 둘 다 튕겨 날아갔다. 다덤벼는 다시 화선녀가 있는 곳까지 날아가 옆에 쓰러졌고 산은 피를 토하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아…….” 다덤벼는 손가락하나 까닥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옆을 보니 아직까지 화선녀는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죽는다. 물론 자신도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이대로 같이 죽는 건 사양이었다. 그래서 다덤벼는 허탈한 소리를 내뱉은 것이었다. “저들은 대체…….” “이게 초인들의 싸움이야?” “우리들은 정말 뭐지?” 초인들은 모두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초인을 떠나 발악하며 싸우는 모습에 껴들 엄두가 나지 않은 것이었다. “크으윽, 쿨럭쿨럭!” 초인이 되고부터 이렇게 아픈 적이 있었던가. 산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다 죽어가는 놈한테 이정도로 다치다니 말이다. 저격소총을 지팡이삼아 가까스로 일어난 산은 기필코 죽이리라 다짐하며 쓰러져있는 두 초인을 보았다. 하지만 그때 산의 무전기에서 연락이 왔다. {……….} “네? 큭큭, 크하하하하! 알겠습니다. 하진님.” 산이 광소 하는 동시에 다덤벼에게도 무전이 왔다. {제갈공녀, 한혜숙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갈공녀의 무전을 들으며 다덤벼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한 기분을 느꼈다. 결국 고개를 떨어트리는 다덤벼였다. “이기긴 무리인가…….” 칼리는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단장님의 파괴의 눈까지 베꼈을 줄이야. 자신은 손가락 까닥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허탈감은 더욱 심했다. 하지만 주르르가 쓰러져있는 칼리의 앞을 막아섰다. “큭, 아직 포기하기엔…일러.” “너…….” 주르르의 상태는 매우 심각했다. 셔츠가 붉게 물들 정도로 피범벅이었고 아직도 코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주르르는 웃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아미를 찌푸리면서도 말이다. “네놈은 또 뭐야! 비켜! 저놈을 갈가리 찢어버릴 테다!” 천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우렁차게 소리 질렀다. 주르르는 시끄러운지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아우, 머리아파 죽겠는데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야, 거기서 지켜만 봐. 내가 멋진 걸 보여주지!” 피로 범벅이 된 상태에서 씩 웃는 주르르 모습은 어딘가 무섭기까지 했다. 칼리는 진심으로 저건 바보라고 생각했다. “나와라, 나와라, 나와라! 나의 반이여! 나의 분신이여! 나의 세상이여! 드레이크, 칼리포리스!” 주르르를 중심으로 거대한 원형 마법진이 펼쳐졌다. 그리고 빛이 분사하듯 하늘로 쭉 뻗어 올라갔다. 대낮에 불꽃놀이를 보는 것처럼 주위에 있던 모든 초인들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보았다. - 쿠워어어어어어어엉!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일까? 아니, 그것은 지금 막 소환된 드레이크, 칼리포리스가 낸 울음이었다. 초인들이 서있는 곳은 칼리포리스의 날개로 그늘이 졌다.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땅 전체를 가린 것이었다. “…이제 소환한 거냐? 느린 놈.” “쿨럭쿨럭! 헉, 헉. 야, 칼리포리스가 네 귀곡마검보다 몇 백 배나 큰지 알아?” 둘은 티격태격 말싸움했지만 둘 다 표정이 한결 밝아져 있었다. 천은 자신의 머리위로 날아다니는 드레이크를 보고 헛숨을 들이켰다. “젠장, 이건 반칙이잖아.” 하늘을 나는 괴물과 어떻게 싸울 수 있을까. 천은 그저 드레이크를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칼리포립스 가라! 저 탑을 부셔버…….” 주르르가 명령을 내리려는 찰나. 무전기에서 제갈공녀의 말소리가 들렸다. {제갈공녀, 한혜숙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무전기의 내용을 들은 칼리와 주르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다 결국 무전기든 손을 떨어트렸다. 주르르는 차마 드레이크에게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블레이즈 댄스!” “풍향확인 완료, 습도확인 완료, 조준 완료, 스크류 엔드 일루젼 매직 샷!” 멋쟁이와 어둠의조이는 갈과 초인들을 상대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초인들만 있었다면 수월했을 텐데 갈이 있음으로 해서 조금씩 밀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헉, 헉. 써야하나?” 멋쟁이는 인화(人火)를 써야할지 몹시 고민되었다. 이것을 쓴다면 분명 뇌가 부담될 테고 잘못하면 득보다 실이 많을지도 몰랐기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건 어둠의조이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어둠의조이는 차마 초인들을 죽일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손에 사정을 두고 있어 점점 더 밀리고 있었다. 그때 멋쟁이와 어둠의조이 무전기에서 제갈공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작가 후기. - 후기. 안녕하세요. 어둠의조이입니다. 제가 드디어 장편소설의 완결이란 마침표를 찍고 이렇게 후기까지 남기게 되었네요. 여기까지 읽으신 독자 여러분의 지금 현재 마음이 가장 듣고 싶은 작가입니다. 지금 현재의 표정이 따뜻한 미소이길 작게 소망해봅니다. ‘나는 힐러다.’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은 딱 두 가지입니다. ‘게임이란 게임이기 때문에 즐길 수 있는 거다.’ ‘힐러란 무엇인가.’ 이 마음들이 소설로서 전해졌다면 저는 성공한 것이겠죠. 저는 게임을 좋아합니다. 이 사실은 절대 부정하지 못하죠. 집에서 중독자라고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많이 좋아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게임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돈을 벌 목적으로 게임을 하거나 이기는 목적, 또는 욕설로 인한 스트레스 해소 목적 등등으로 게임을 한다면 이렇게 좋아할 수 있을까요? 게임을 하다보면 많은 걸 느낍니다. 절대로 이겨야한다는 자존심,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로 올라가고 말겠다는 이기심 같은 걸 보면 그분은 정말 게임이 좋아서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게임을 진정 즐기고 있습니까? 이 자리를 빌려 제가 한 가지 고백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이 게임의 설정이 된 모든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쓰기 전에 월드오브워크레프트 통칭 wow를 했습니다. 그곳에서 헬스크림 서버 ‘애디’라는 남성 사제를 키우고 있었죠. 남성사제는 나이가 많이 보이는 아저씨 캐릭입니다. 그런데 제 말투와 이 캐릭터의 생김새가 몹시 어울리는지 어쩌다보니 들게 된 길드 사람들 모두가 저를 아저씨로 인식하더군요. 당시 제 나이 22살, 군대도 가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보니 난감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속였습니다. 길드 사람들이 저보고 애디아저씨, 애디아저씨 하는 말도 듣기 나쁘지 않았고 가까워진 것 같아 그냥 내버려두게 되었죠. 사실 그것부터가 제 이기심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군대를 다녀오고도 저를 기다려준 길드 사람들을 보고 더 이상 이 인연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겠구나하고 자책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얼굴을 들고 길드사람들을 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오프라인 모임에 당연히 껴들 자신도 없었죠. 항상 속여 왔고 지금도 속이고 있습니다. 최근에 이 사실을 고백해야겠다고 wow에 접속한 적이 있었습니다. 2년만이었죠. 그런데 무려 5년이나 익숙하게 지내다 고백하려니 어색해질 거 같아 도무지 안 되더군요. 결국 한 달 동안 길드사람들을 거의 배척한 채 나 홀로 놀다 다시 접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지금 이 소설의 주인공과 무척이나 비슷한 상황이란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네, 이 소설의 경험담은 바로 저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인공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압니다. 말이 길었군요.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이 글로 그동안 속여와 죄송한 형들에게 미안하다 말하고 싶습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동생이 반말한 것들 죄송합니다. 오프라인 저도 정말 가고 싶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속여 죄송합니다. 군대 갈 때 접는다고 했단 말도 죄송합니다. 특히나 ‘프린질시스킨’형에게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자, 고백은 끝났습니다. 너무 개인적인 일이라 제가 다 쑥스럽습니다. 이제 작가로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모두 즐거운 시간 되셨습니까? <극장판 완결> 생명의 바다 下(1)(잘린부분 다시 붙입니다.) {제갈공녀, 한혜숙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현재 많은 민간인이 인질로 잡혀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우리들의 행동을 막으려는 것. 아쉽지만 딱히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뭐, 뭐라고?” 멋쟁이는 지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수많은 민간인이 인질로 잡혀있다? 둘은 초인들과 갈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그때 적들도 송신 왔는지 저마다 움직임을 멈추었다. {거기 기찬 군 들리나요? 당신이 보고 있는 그 드레이크가 계속 인가를 휩쓸 겁니다. 어떻게 그곳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믿을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요. 그러니 어떻게든 처리해 주세요…….} 무전기에서 말하는 제갈공녀는 몹시도 우울한 듯 느껴졌다. 아까 전에 조폭들이 NCC채널을 틀라 무전기가 왔던 게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는 걸 멋쟁이와 어둠의조이는 알 수 있었다. {다른 분들은 잠시 대기합니다. 아니, 도망가세요. 작전실행은 잠시 보류하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멋쟁이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어둠의조이도 차마 말은 하지 않았지만 주먹을 꽉 쥐는 걸로 현재 기분을 표현했다. “너희들은 양심도 없냐! 우리를 막겠다고 민간인을 죽이고 인질로 잡아? 하! 그러고도 정의냐? 진화냐! 너희들은 그저 비열한 놈들이다!” 멋쟁이의 말에 초인들은 주춤거렸다. 하지만 갈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전부 너희가 자초한 거야. 그러게 왜 되지도 않을 짓을 벌인 거야?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죽잖아. 너희 때문이다! 너희가 만든 거야!” 멋쟁이는 주먹을 꽉 쥐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이 죽음을 각오하더라도 저 갈이란 녀석만큼은 죽이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현빈 형?” 자신의 어깨를 잡고 말리는 어둠의조이. 그 손을 뿌리치려한 멋쟁이였지만 그의 싸늘한 표정을 보고 생각을 접었다. “확실히 알겠습니다. 아펜하르트란 회사는 없어져야한다는 것을요. 이젠 손속을 두지 않겠습니다.” 항상 미소를 지우지 않던 어둠의조이였다. 그건 곁에서 항상 봐온 멋쟁이가 더욱 잘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처음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암속성 결합, 증폭. 화속성 결합, 증폭.” 천천히 권총을 들어올렸다. 그 총구에 두 가지 속성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혀, 형! 지금 공격하지 말라고…….” “저는 믿습니다. 기찬 군은…그라면 해낼 거라는 사실을요. 태식 씨는 믿지 않나요?” “…하아, 그야 안 믿을 수가 없죠.” 둠터틀과 대결할 때도, 베르제브브와 대결할 때도 나기찬은 항상 기적을 발휘하였다. 하물며 같이 싸우며 봐온 자신이 그런 나기찬을 믿지 않을 리 없지 않겠는가. “저 역시 절대로 믿어요. 그러니 우리들은 해야 할 일을 하죠. 수속성 결합, 증폭! 목속성 결합…크윽, 증폭!” 권총을 양손으로 잡은 어둠의조이는 순식간에 네 가지 속성을 결합해 버렸다. 총구는 이제 빛으로 모자라 공간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저, 저 파워는 뭐야! 뭘 할 셈이지?” 갈은 지금까지 소심하게 싸워왔던 남자가 갑자기 엄청난 파워를 모으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것을 보니 지금까지는 봐주었단 사실이 아니겠는가. “금속성 결합, 쿨럭! 증포옥! 거기 죽기 싫으면 비키십시오.” 초인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파워를 모으는데 왜 자신들을 비키게 한단 말인가. “서, 설마!” 몇몇은 자신의 뒤에 위치한 탑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어둠의조이를 보았다. “탑을 무너트릴 셈?”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총알로 탑을 무너트린단 말야?”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 파워가 지금 모이고 있었다. 아직도 어둠의조이는 만족하지 못한 것처럼 계속 파워를 모았으니까. “토속성…결합, 즈, 크억! 증폭!” “혀, 형! 위험해요! 그러다 죽어요!” 어둠의조이는 결국 한쪽무릎을 꿇었고 그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겠던지 멋쟁이가 말렸다. 하지만 어둠의조이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아직, 아직 입니다. 이정도 파워로는 탑을 부술 수 없어요. 아직…쿨럭!” 입에서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역시 현실에서 올속성 결합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포기할 순 없었다. 여기서 포기하면 모았던 파워가 한순간에 폭발하게 되고 자신과 멋쟁이는 확실히 죽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막아! 탑이 무너져선 안 돼! 몸으로라도 막아! 절대로 막……!” 갈은 꽥꽥 소리 질렀다. 그런데 초인들이 어둠의조이 공격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건 아냐…민간인까진 아니라고!” “거긴 우리 가족도 있는 곳이야. 하진님은…아니, 그자는 그저 미친놈이야!” “막으려면 혼자 막아! 나는 손때겠어!” “너, 너희들 배반이냐! 배신은 즉결 처형감이다! 뇌에 있는 소형폭탄이 작동한단 말이다!” 소형폭탄? 멋쟁이는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둠의조이는 그쪽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지 자꾸 피토하면서도 속성을 외쳤다. “천소…큭, 속성 결합, 증포오오오옥!” 총구에서 그그그그 하는 소리가 들렸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같이 위태위태한 상황. 초인들은 체념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었고 갈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워, 월…….” 어둠의조이는 머리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며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때 멋쟁이가 그의 허리를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 총을 잡아주며 말했다. “포기하지 마요. 우리들의 모든 것을 건 한발입니다. 성공하세요. 할 수 있어요!” “…그, 그래야죠. 이거 이렇게 안기니 그때 키스할 때가 생각…….” “…그건 좀 잊고 싶은데요.” 어둠의조이는 쓰러질 것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순간 지금이 마지막 모습이 되는 것 아닐까 엄한 생각을 한 멋쟁이였다. “월속성 결합, 결합…결합! 으아아아아아아! 증포오오옥!” -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가각! 어마어마한 파워였다. 총구가 있는 곳은 소형 블랙홀이 생긴 것처럼 수없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멋쟁이는 튕겨나갈 것을 대비해 더욱 꽉 어둠의조이를 잡았다. 둘은 동시에 외쳤다. “세상조차 가르는 필멸의 화살(Arrow of Mortality)!” “세상조차 가르는 필멸의 화살(Arrow of Mortality)!” 그들이 외침과 동시에 갈의 눈에는 커다란 빛을 보았다. 오색빛깔 무지갯빛을. “이건, 말도 안 돼…….” 빛은 갈을 잡아먹고도 모자라 아직도 배고픈지 탑을 향해 날아갔다. 빛이 닿기도 전에 유리들이 전부 터져나갔다. 떨어져있던 초인들도 튕겨나갔다. 콰콰콰콰 땅이 비명을 질렀다. - 콰과과과과과과과광―! 허무하게 탑을 뚫고 지나가는 무지갯빛. 그로도 모자라 그 뒤에 바다까지 가르며 저 멀리 사라졌다. 그 상태로 시간이 정지한 듯 모든 것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뿌리를 통째로 먹힌 탑은 받쳐줄 다리가 없어 먼지가루를 흩뿌리며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하나의 초인 탑이 무너졌다. “뭐?” 글로리시나는 지금 무전기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순간 자신 잘못이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칫!” 글로리시나는 반지의 힘을 개방시켰다. 이젠 본진 조사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기찬이가 죽어버리면 자신에겐 아무 의미도 없어지는 것이니까. 모든 힘을 개방하고 달렸다. 서울대학병원이 있는 곳으로. “휘유, 잘 타오르는구나.” 드레이크위에 앉아있던 멸은 자신이 만든 작품을 감상하며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 불에 타 사라지는 건물들. 그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었다. 하진님은 분명 적들이 아무반응 없을 시, 10분마다 인가를 불사 지르라 명령했다. 이제 다시 10분이 다 되어갔다. 슬슬 다른 곳으로 이동해볼까 생각하고 있던 멸은 어디선가 들리는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응? 저건 뭐지?” 저 멀리 빌딩 꼭대기에서 욕설하며 방방 뛰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멸은 기가 막혀 한동안 그 모습을 보고 있다 고개를 저었다. “죽지 못해 안달난 놈인가?” 멸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자살하고 싶은 게 아니고서야 말이다. “재미있겠는데?” 멸은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휘파람불며 유유히 빌딩으로 선회하여 날아갔다. 하진이 10분마다 인가를 불사르라했지만 조금 늦는다고 설마 뭐라 하겠냐는 가벼운 마음이 수만을 사람들을 살린 결과가 되었다. 기찬은 일단 고층 빌딩으로 올라갔다. 눈에 띄는 곳이 필요했기 때문에 올라간 이유도 있었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이를 구해준 직후, 기찬은 끝없이 생각했다. 평범한 인간이 드레이크를 잡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지를. 소망의반지가 작동되었다면 더 쉽게 해결될 문제였지만 그게 안 되니 한 생각이었다. “야이, 도마뱀자식아!” 기찬은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빌딩 옥상에서 펄쩍펄쩍 뛰며 외쳤다. 다행히 드레이크는 귀가 밝은지 이쪽을 돌아보았고 기찬은 다행스런 기분과 함께 불안감이 엄습했다. “온다.” 드레이크는 유유히 자신 쪽으로 선회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서 보니 그 크기가 더 어마어마했다. 이런 놈을 잡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피하긴 이미 늦었기 때문에 마음을 굳게 먹었다. 기찬은 옥상으로 올라오기 전에 소화전에서 밸브를 개방하고 호스를 가져온 상태였다. 드레이크가 다가오자 재빨리 노즐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 멸은 그 모습을 보고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드레이크의 브레스를 막겠다고 어쭙잖은 걸 들고 온 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정상이 아닐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이, 거기 꼬마. 무슨 생각을 가지고 도발한 거냐?” 기찬은 깜짝 놀랐다. 아래 있을 땐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드레이크 위에 사람이 타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기찬은 더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드레이크는 말로 도발하기 어려워 힘들지도 몰랐는데 사람이라면 더 수월했기 때문이다. “네가 인가를 저 모양으로 만들었냐?” “후훗. 어때, 내 작품이.” “작품? 변태냐! 네 행위에 아주 소름이 끼친다!” “뭐? 아주 죽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죽일 수 있음 죽여 봐, 이 변태야!” “하, 죽고 싶어 안달이구나? 칼리포립스, 브레스!” 드레이크는 주인의 명령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기찬은 노즐을 잡은 상태로 자신이 나왔던 옥상 문 안쪽으로 달렸다. - 콰콰콰콰콰! 드레이크가 숨을 뱉자 시뻘건 불꽃들이 빌딩옥상을 휘감으며 불타올랐다. 기찬은 다행히 문 안쪽에서 밖으로 물을 뿌렸기 때문에 안쪽까지 불이 침투하진 못했다. “그깟 불로 나를 죽일 수 있을 거 같아? 할 수 있으면 한 번 죽여 봐!” 기찬은 뜨겁게 달구어진 돌들을 물로 식히고 밖으로 나왔다. 순간 고열이 급속도로 식으니 엄청난 수증기와 함께 콘크리트가 쩌적 하고 금이 가 무서웠지만 잘 보이지 않는 지금이 기회라 생각한 기찬은 밖으로 다시 나와 외친 것이었다. “그리 죽고 싶다면 죽여주지.” 멸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저런 어린놈한테 놀림 당했다 생각한 것이었다. 드레이크가 빠르게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기찬은 그 모습을 보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목숨을 건 전투가 말이다. “저 저 소년은 뭐야? 우왁! 위험해!” “조마조마해 죽겠네! 왜 드레이크를 건드린 거야!” “미, 미쳤어! 아무리 봐도 저건 미쳤어!” 미소천사 기사단 일행들이 입에 오징어다리를 하나씩 물고 하는 말들이었다. 바닥에는 수많은 캔 맥주들이 굴러다녔고 처음과 달리 더 많은 인원이 모인 상태였다. TV에선 수업이 바닥을 긁으며 지나가는 드레이크를 상대로 물을 뿌려대며 피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그것도 끝나려는 듯 드레이크가 입으로 호스 노즐을 물어뜯어버렸다. 소년의 무기가 없어진 것이었다. “아아, 더 이상 못 보겠어!” “저거 찍는 헬기는 뭐하는 거야! 몸통박치기라도 해버리지 않고!” “끄, 끝이다.” 미소천사 기사단원들은 차마 TV를 못 보겠던지 모두 고개를 피하며 외면했다. 한편, 다른 가정집에 한 소년은 입을 떠억 벌린 채 수저를 놓친 것도 눈치 못 채고 TV를 보고 있었다. “나, 나기찬! 네가 왜 저기 있는 거야!” 수저가 땅바닥에 떨어진 것도 모자라 입에서 밥알까지 튀어 나갔다. 그는 나기찬의 고등학교 친구이며 같이 무림일대기를 해온 임상천이었다. “연락이 끊어진 이후 대체 뭘 하고 다녔던 거냐! 욱, 콜록콜록!” 결국 사례 들려 눈물까지 글썽이는 임상천. 그는 머리를 쥐어짜며 TV앞으로 다가가 뚫어져라 보았다. “위, 위험해! 젠장! 그래, 잘 피했…으아악!” 깜짝 놀랐다가도 안도의 한숨 쉬기를 반복, 결국 조마조마함을 참지 못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미친놈의 자식!” 욕설을 뱉으면서도 상천은 점퍼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집에 부모가 잠깐 나가있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절대 밖으로 나가지 못했을 테니까. “이제 그 자랑하던 물대포도 뿌릴 수 없게 되었는데 어쩔 테냐?” 마치 지금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듯 다음엔 무얼 할지 궁금한 표정을 짓는 멸을 보고 기찬은 이를 뿌득 갈았다. 노즐을 물어 뜯겨 중심을 잡지 못한 호스는 지렁이처럼 마구 꿈틀거리며 물을 분사하고 있었다. 기찬은 그래도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드레이크가 노즐을 물어준 덕분에 온몸에 물을 흠뻑 먹은 상태가 되었으니까. 이제 아래로 내려오게만 준비만하면 되었다. 그것을 하기 위해선 자신이 미끼가 되어야 하는데 문제는 옥상 문으로 가는 길이 조금 멀었다는 것이었다. 기찬은 힐끗 문 쪽과 자신의 위치를 가늠해보았다. 적어도 열 발자국 이상의 거리. 드레이크는 자신의 바로 위에서 날고 있었다. 뛰면 분명 날아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무작정 뛴다는 것은 무리였다. 기찬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당신, 내가 누군지 알아?” “응? 그건 또 무슨 작전이야?” “지금 각 탑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그곳에 관련된 자라면?” “…너는 누구냐.” 적이 진지해졌다. 떡밥을 물은 것이다. 기찬은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척하면서 조금씩 문 쪽으로 이동했다. “그전에 네 이름이 듣고 싶은데?” “하, 곧 죽을 놈이 배짱 있구나. 그래, 나는 드래곤소환사의 memory뇌파를 전송받은 멸이라 한다. 이제 네가 말할 차례다.” “나기찬.” 기찬은 그렇게 말하며 조금 더 문 쪽으로 다가갔다. 이정도면 되었다 생각한 나기찬은 멸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아펜하르트의 랭킹 5위, 미소천사 타테다!” 그리고 문 쪽으로 뛰었다. “뭐? 미소천사? 큭큭, 크하하하하! 네놈이냐? 그 여자의 캐릭터를 하고 있던 동생 놈이? 크하하하…이런 도망이냐!” 멸은 빠르게 브레스를 쏘게 했지만 이미 문 안쪽으로 들어간 후였다. 확실히 이 빌딩 안으로 도망가면 드레이크를 탄 자신으로서는 잡기 불가능했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적도 독안에 든 쥐 꼴이 나겠지만 자신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었으므로 지금 잡는 게 현명하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 없겠지.” 멸은 생각을 바꿔가졌다. 저놈을 죽이는 것보다 더 쉽게 끄집어 낼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공으로 비상한 드레이크는 주위에 브레스를 날리기 시작했다. 마치 빌딩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죽는 걸 보란 듯이 말이었다. 나기찬은 차마 저렇게 행동할 줄은 몰랐는지 경악하고 내려가는 걸 멈췄다. “젠장! 나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죽이겠다는 거냐!” 비열한 행동에 치가 떨렸다. 이러다간 자신이 내려가기도 전에 주위가 불바다가 될 지경이었다. 빌딩 입구도 이미 불타기 시작했다. 나가는 곳도 막은 것이다. 결론은 다시 옥상으로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기찬은 잠시 반지를 보았다. 여전히 반응이 없는 소망의반지. 이것만 작동했다면 이정도로 무력하진 않았을 텐데. 아무리 후회해도 푸념일 뿐이었다. 기찬은 결국 다시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기찬이 옥상으로 올라온 순간 기찬과 멸 눈에 한 인영이 보였다. 엉엉 울고 있는 남자아이. 하도 눈물을 흘려 얼굴에 때가 꼬질꼬질한 상태였다. 기찬은 그 아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이 여기 오기 전에 구한 애였으니까. “피, 피해!” 이미 드레이크가 그 아이를 향해 하강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기찬은 자신의 안일함에 한탄했다. 분명 인적이 드문 집 안에 그냥 놓고 오는 게 아니었다. 또 다른 화재를 걱정해 문을 잠그지 않은 게 바보였다.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아아아!” 기찬은 마치 슬로모션을 보는 것 같았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드레이크를 멍하니 보고 있는 아이. 드레이크의 입에서 붉은 화염이 넘실거렸고 곧 그것은 모든 걸 먹어버리겠다는 듯 토해져 나왔다. 기찬의 눈과 남자아이의 눈은 같은 걸 보았다. 눈동자 가득 채우는 붉은 화염의 바다. 아이는 하늘을 향해 한 손을 뻗었다. 저 옥상에 기찬이를 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화염은 아이를 먹어버렸다. “…아아, 아아아.” 바닥에 부딪쳐 양 옆으로 퍼진 불들은 기세를 멈추지 않고 태울 수 있는 건 뭐든지 태워먹었다. 하지만 그런 건 기찬눈에 보이지 않았다. 검게 탄 사람 같은 작은 모형만이 눈에 들어올 뿐. “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오열했다. 단지 몇 분전에 자기 손으로 끌어안았던 작은 아이다. 엄마를 잃고 세상에 버림받은 이제 믿을 건 자신밖에 없는 아이일 뿐이었다. 이 일이 마무리되면 자신이 거둬 동생처럼 키울 생각이었던 기찬이였기 때문에 그 허탈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꽉 쥐어진 주먹이 순간 반짝거렸다. 몸에서 빠지직 비명을 질렀다. 머리에서 무언가 깨지는 듯 한 소리가 들렸다. 고통에 기절할 것 같으면서도 증오 덕분에 간신히 참고 버틸 수 있었다. 자꾸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건 그냥 눈물이 아니었다. 붉은 눈방울. 피눈물이었다. “용서 못해! 용서 못해에에에에!” - 빠지지지지지지지직! 마치 홀로그램이 몸을 덧씌우듯 기찬이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칼이 자라기 시작하고 색이 금발로 바뀌어 갔다. 얼굴에는 하늘빛 염료가 색칠되어 신비로움을 만들었고 그의 키가 조금씩 자랐다. 옷이 작아져 배꼽이 살짝 보였고 가슴은 이상하게 부풀어 올랐다. 착 달라붙은 청바지가 요염한 각선미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는 진정한 미소천사가 되었다. TV를 보고 있던 대책회의실 사람들은 모두 벌떡 일어났다. “어, 어떻게 기찬군이 미소천사로!” 제갈공녀는 혼란스런 눈으로 TV를 보며 말했다. 이상하게 반지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때부터 이상하단 생각을 하던 차였다. 그런데 갑작스런 트랜스라니. “아무래도 처음에 능력을 사용하지 못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인 것 같네.” 임박사는 몹시 고민하는 표정으로 TV를 보다 기찬이 변신하는 순간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제갈공녀는 어서 설명해달라는 듯 재촉했다. 임박사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기찬 군이 플레이했던 건 그의 누나 몸 스캔을 한 캐릭터였지. 그 캐릭터에 memory뇌파가 굳어버렸던 거네.” “굳어요? 뇌파가 굳기도 하나요?” “말이 그렇다는 뜻이지 실제로 굳었다는 건 아닐세. 간단히 말해 기찬군의 메모리 뇌파가 그 누나의 몸체에 완전히 익숙해져버렸다는 거네. 그래서 기찬군 본인의 몸으로는 전혀 반지가 반응하지 못했던 거야.” “그럼 더 이해가지 않는데요? 반지가 반응하지 않는데 어떻게 변신을 한 거죠? 저건 마치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 같잖아요.” 주조철이었다. 그도 지금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었다. 임박사 역시 정확히는 모르겠는지 깊이 고심하다 말했다. “아마…나소연 양이 기찬군의 memory뇌파를 사용했던 것과 같은 게 아닐까 싶네.” 임박사의 상식으로서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 딱 하나 있었다. 그건 나소연이 게임상에서 진과 싸울 때 기찬이의 memory뇌파와 자신의 memory뇌파를 동시에 사용했던 것. 그건 모두 알고 있던 것이기 때문에 어떤 말인지 이해했다. “그런데 그때 그 상황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거죠?” 제갈공녀는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은지 조심히 물었다. 임박사는 제갈공녀 손에 끼워진 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소망의반지 프로그램 주축이 된 건 소연 양이 플레이한 USB였다는 사실을 잊었나? 피로 이어진 남매의 힘이 지금의 기찬 군을 만든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 하지만 정말 기적이 아닐 수 없어.” 임박사는 촉촉한 눈으로 TV를 보았다. 그 모습에 제갈공녀와 주조철 역시 다시 TV로 고개를 돌렸다. 한편, 이 작전에서 빠진 주리아, 김주리는 양손을 모아 TV를 보고 있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언니…아니, 기찬 씨를 살려주세요!” 김주리는 엄마의 단호한 거절 때문에 작전에 임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 싫었다. 이렇게 TV를 보며 신께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답답히 미칠 지경이었다. “엄마, 저 역시…….” “안 돼!” 금발이 찰랑이는 여성은 푸른 눈을 단호히 뜨고 거절했다. 김주리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다시 TV를 보다 결국 참지 못해 일어났다. “역시 싫어! 난 갈 테야!” 자신의 딸이 이렇게 반항했던 적이 있었던가? 김주리의 엄마, 나탈리는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주리야, 네가 가서 뭘 하겠다는 거니!” “이대로 보기만 했다간 평생 후회할거 같아요. 저보다 어린 사람들이 저러고 있는데 저만 몸 사려서 뭐해요! 보내주세요…엄마, 제 마지막 부탁이에요.” 김주리는 울먹였지만 꾹 참고 의견을 어필했다. 나탈리는 자신의 딸이 이렇게 컸던가하고 잠시 대견함에 뿌듯했지만 그건 곳 슬픔으로 변했다. 김주리의 출장 나갔던 남편, 김상철도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마당에 하나 남은 딸을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탈리는 이제 막을 자신이 없었다. 보내지 않으면 가출을 해서라도 나갈 것 같았으니까. “어쩔 수 없구나. 그럼 엄마도 같이 가자꾸나.” “엄마…….” 기찬이 피눈물을 쏟을 때, 김주리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졌다. 다들 따로 떨어져 있었지만 왠지 하나처럼 보일 정도로……. 멸은 빌딩위에서 번쩍이는 한줄기의 빛을 보았다. 뒤이어 이어지는 검은 스파크들. 빛과 스파크? 누전이라도 된 건가? 갑자기 찾아온 불안감에 천천히 상공으로 드레이크를 이동시켰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금발의 아름다운 여성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름다움과 대조되는 피눈물을 흘리며. 기찬은 너무도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달콤하면서도 몽롱한 기분이었다. 여태껏 자신이 바라왔던 게 이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지금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 아래에서 드레이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제야 몽롱한 꿈속에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 너 때문이었지.” 기찬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빌딩을 뛰어내렸다. 마치 기다리는 것조차 싫다는 듯이 말이다. 바람에 금빛 머리칼이 휘날렸다. 그의 가는 목선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멸은 그 모습을 황홀한 표정으로 올려보았다. 천사다. 그는 진정 그렇게 느꼈다. “영원한 빛 발동.” 다른 스킬도 많았을 텐데 이 말밖에 기찬이는 떠오르지 않았다. 저 아래 숯이 된 아이의 몸에서 자그마한 빛의 구체가 떠올라 기찬이에게로 올라갔다. 그 하나의 빛은 약했지만 세상 어느 것보다도 아름다웠다. ‘엄마 어디 있어? 엄마? 형, 엄마 어디 있어? 아파, 뜨거워. 아파.’ 아이의 고통과 슬픔이 기찬이에게 전해져왔다. 기찬은 참지 못하겠는지 자꾸만 피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제 엄마한테 갈 수 있어. 그러니 울지 마. 아파하지 마.’ 기찬은 그 빛의 구체를 슬며시 껴안으며 생각했다. 구체는 천천히 황금빛으로 물들어 창이 되어갔다. 창으로 변형될수록 기찬은 지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은지 아픔을 호소하기보다도 창으로 변형되는 빛을 보는데 집중했다. 멸은 찬란한 황금빛의 창을 보며 넋이 나간 듯 서있기만 했다. 저 창은 하진님이 애용하는 미카엘의 영혼의 창. 하지만 하진님과는 차원이 다른 아름다움이 묻어있었다.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천사의 창이 아닐까 생각한 멸이었다. 기찬의 몸은 이제 완전히 가속도를 받아 한줄기의 황금빛이 떨어지는 것 같이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도 기찬은 아무 두려움 없이 한 점에만 집중했다. 그것은 드레이크의 몸통. 힘껏 손을 뒤로 젖혀 투척준비를 했다. 그 모습을 본 멸은 황홀감에서 빠져나와 드레이크에게 브레스를 명령했다. “하아아아아아아앗!” 하늘을 향해 뿜어진 불꽃. 그것이 기찬의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기찬은 힘껏 창을 던졌다. 멸은 그때 볼 수 있었다. 붉은 업화의 불꽃을 반으로 가르며 자신에게 떨어지는 한줄기의 황금빛을. 그 빛은 정확히 드레이크의 한쪽 날개를 꿰뚫었다. “이럴 수가…….” 빙그르 돌며 추락하는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드레이크의 피가 하늘을 수놓았고 그것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렇게 천천히 인가 쪽으로 떨어지는 드레이크. 인가에는 수많은 전선들이 마치 그물을 생성한 것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온통 물로 범벅이 된 드레이크는 그 중심으로 떨어져 내렸다. - 빠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매캐한 냄새와 함께 드레이크는 순식간에 타들어갔다. 그 위에 있던 멸과 함께. “……….” “……….” “…누님이었어.” 미소천사 기사단원들은 모두 씹고 있던 오징어가 떨어진 것도 모른 채 멍하니 TV를 주시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았음에도 아무도 없는 것처럼 정적이 감돌았다. “저, 저 애가 미소천사누님이었어!” “봐, 봤어? 저 기적을 일으킬 분은 누님밖에 없잖아!” “아아, 나 지금 소름 돋아!” “더 이상 못 참겠어! 나 저기로 갈래!” “나, 나도 같이 가!” 정적도 아주 잠시. 순식간에 광란의 도가니로 뒤바뀌었다. 그들에게 이제 미소천사가 남자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언제나 기적을 일으키는 영웅, 자신들이 아는 그 존재가 저곳에 있었다. 그것 하나만으로 참을 수 없는 감동이 몰아친 것이었다. 그들은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 성공이야!” “짜식, 녀석이 해냈어!” “기찬 군, 진정 기적을 부르는 아이군요.” 임박사, 주조철, 제갈공녀는 뛸 듯이 기뻐하고 있었다. 제갈공녀는 감동에 눈물을 훔치며 다시 말했다. “정말 해낼 줄은 몰랐어요. 그 아이야말로 하트에 어울리는 존재였어요.” “하트? 설마 게임 고대문서를 읽었나?” 임박사가 살짝 놀란 눈으로 제갈공녀를 보았다. 제갈공녀는 조금의아해하다 임박사가 게임설계자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제일 좋아했던 설정이 그거에요. 하트, 헤드, 핸드의 의미, 그리고 희대의 영웅 바시나이델.” 제갈공녀는 책 읽는 걸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게임상에서도 도서관에 들러붙어 책을 읽는데 열중했던 그녀였다. 그러던 어느 날 먼지로 뒤덮인 희귀한 책을 찾을 수 있었고 그곳에 하트, 헤드, 핸드의 대한 글을 읽게 된 것이었다. 임박사는 추억을 상상하듯 TV를 주시하며 말했다. “알랭 사 바시나이델은 실제로 있었던 인물이라는 설이 있네. 가장 피폐한 시대인 영국의 음유시인으로 말이네.” “실제로요?” “당시 마녀사냥과 역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노래라는 기쁨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한 천사로 알고 있지. 그는 천문학자이기도 했네. 별을 보며 미래를 점지하고 영웅이라 불리는 세 개의 별을 구별하여 하트, 핸드, 헤드란 명칭을 붙였지. 그 별이 지금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세상이 절망으로 가득했을 때 나타나는 영웅들을 그 별로 지칭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 “훗, 그럼 하트는 나왔으니 헤드와 핸드만 나오면 되겠군요?” 제갈공녀는 농담 삼아 말했고 임박사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신을 믿지 않는 주조철은 시큰둥하게 듣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TV좀 보세요!” 임박사와 제갈공녀가 TV를 보았다. 그곳에는 조용히 맥동하던 대한민국이 화산 분출하듯 터지고 있었다. “멸이 당하다니!” - 쾅! 탑 하나가 무너져도 여유 부리던 하진이 처음으로 화내었다. 지금 방금 TV에서 드레이크가 죽는 모습을 본 것이었다. 그것을 같이 보고 있던 비는 담담히 말했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후, 별수 없지. 비 당신이 처리…….” 하진이 명령을 내리기 직전, 한 초인이 지친 듯 뛰어와 말했다. “크, 큰일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전체에서 이동하는 생명반응이 포착되었습니다!” “뭐? 그게 무슨…….” 다시 하진이 말하려는 도중에 TV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대한민국 전체에서 모든 민간인들이 들고 일어난 모습을 찍고 있는 것이었다. “하, 하하.” 저들이 TV를 공략한 이유는 하진역시 알고 있었다. 민심을 사서 찬동에 동참시키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불가능하단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두었다. 사람 자체가 개인적인 생각이 강해 죽음을 불사르는 자가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처음 등장해 몇 백 명 죽인 것뿐인데도 조용하게 가라앉았지 않았던가. 그런 그들이 무엇 때문에 밖으로 나오고 있단 말인가. “미소천사인가…….” 갑작스런 심경의 변화를 꼽자니 생각나는 건 방금 있었던 일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미소천사. 한때 게임상에서 기적을 보여줘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든 장본인. 지금 보여준 기적으로 인해 희망을 주고만 것이었다. “킥킥, 킥킥킥킥!” 하진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지금 상황이 황당해 나온 웃음이었다. “아무래도…희망을 밟아줄 필요가 있겠어. 비, 대기하라. 본진을 드러낸다.” “본진을…말입니까?”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원한다면 힘을 보여주겠다. 그러니 올 테면 와봐라. 기적의 희망조차도 철저히 깔아뭉개 버리겠다고 생각한 하진이었다. “큭큭, 쿨럭쿨럭! 어쩌냐? 너희 작전은 이미 실패한 것 같은데.” 다덤벼는 피 묻은 입으로 비웃으며 산을 보았다. 산은 멸이 당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무전기로도 하진님이 철수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이곳을 포기하라 말한 턱에 믿지 않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더 화가 났다. “네 대장도…쿨럭! 철수하라는데 뭐해? 어서가지 않고.” “이이익…….” 자꾸 비꼬는 다덤벼가 눈꼴셨다. 산은 저격 총을 들었다. 하진님이 철수하라 했지만 저들만큼은 죽이고 갈 생각이었다. “그 촐싹대는 입, 다물게 해주마.” 총구에서 빛의 입자가 모이기 시작했다. 기찬이가 드레이크와 상대하는 동안 포박당해 꽁꽁 묶여있던 다덤벼와 화선녀는 죽음을 예감했다. 다덤벼는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 화선녀를 보았다. 왜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 여성을 보는 걸까.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다덤벼였다. “잘 가라.” 저격소총에서 빛이 뿜어지기 직전이었다. 퍽 하는 소리와 동시에 어떤 인물이 다덤벼와 산 사이에 나타난 것은. 그 인물은 여성인 듯 머리가 몹시 길었다. 패딩점퍼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세련된 몸 때문인지 몹시 아름다워 보였다. 다덤벼는 누군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랭킹 2위, 글로리시나라는 것을. “아슬아슬했군.” 글로리시나는 멀리서부터 달려온 건지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제갈공녀의 무전이 온 이후, 글로리시나는 기찬이를 도우기 위해 서울대학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중에 대형 스크린에서 기찬은 미소천사로 변하는 것을 보았고 자신이 아니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결론이 서자 가장 위험한 이곳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었다. 다덤벼가 있는 곳이 가까워서 천만 다행이었지 어둠의조이가 있는 곳인 부산 쪽이었다면 생각도 못할 짓이었다. “너, 너는 누구냐!” 산은 자신이 보지도 못한 사이 등장한 여성에게 경악했다. 자신의 저격 총이 발차기에 저 멀리 날아가 있었다. 저격을 사용하는 사람은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다. 아주 작은 소음조차도 듣는 자신이라 기습에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다가온 것으로도 모자라 저격 총을 발차기로 날려버렸으니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칫, 완전히 만신창이군.” 글로리시나는 산의 말도 무시한 채 떨어져있던 화선녀의 애검, 천양화(天楊花)를 주워 포박한 줄을 끊어버렸다. 글로리시나가 본 둘의 상태는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화선녀는 복부에 총이 관통당한 건지 옷에 밴 피가 살과 엉켜있어 얼마나 방치했는지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저런 화선녀보다도 다덤벼의 상태가 더욱 심각했다는 것이었다. 한쪽 팔은 총알이 관통해 축 처져있었고 다른 팔은 손가락부터 시작해 온전한 뼈가 없을 정도로 꺾여 있었다. “살아있는 게 용하군. 어서 병원에 가야겠어.” “크윽, 나보다도 저 여자나 구해줘. 아까부터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 글로리시나는 순간 기가 막혔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녀석이 누굴 걱정하는 건지. “내 말을 무시 하냐!” 산은 그때까지도 무시하는 글로리시나를 보며 악을 질렀다. 이미 총을 다시 주워온 상태여서 소리를 지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당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빠르게 힘을 모았다. “암속성 결합, 증폭!” “귀찮군.” 둘의 상태를 살피던 글로리시나는 정말 귀찮다는 듯이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천양화가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세상조차 가르는 필멸의 화살(Arrow of Mortality)!” “블러드 멜로디(blood melody).” 그건 정말 일순간이었다. 자신이 쏘아 보낸 암흑 덩어리 자체를 검에 끌어 모아 역으로 돌려보낸 것을 말이다. 자신이 믿었던 최대의 기술이 되돌아오는 것을 보며 산은 의식이 날아갔다. 그의 뇌는 이미 총알에 관통당해 정지했기 때문이었다. “…하, 한방에.” “산님이 단 일격에!” 초인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막강한 둘을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고 오히려 죽음으로까지 몰아넣은 산이었다. 그런 인물을 일격에 죽여 버렸다. 그 경이적인 힘에 초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게임과 다르게 역시 비위 상하는군.” 글로리시나는 속이 울렁거리는지 아미를 찌푸렸다. 그나마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이지 않아 패닉상태가 덜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비위가 상했다. 다덤벼는 그런 글로리시나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버렸다. 산이란 자는 분명 약하지 않은 상대였다. 그런 상대로 마치 어린애 다루듯 죽여 버린 글로리시나라니. 새삼 랭킹 2위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다시 알게 된 다덤벼였다. “크윽!” 다덤벼가 신음하자 글로리시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둘을 안아들었다. 이대로는 병원으로 가도 살리긴 무리일 것 같았다. 그럼 확실히 살릴 수 있는 힐러, 기찬이에게 가는 방법밖엔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글로리시나는 둘을 내려놓고 무전기를 꺼내었다. “야이 자식들아 안 내려와!” “내가 미쳤냐? 내려가게?” 저 아래에서 소리 지르는 천을 보며 주르르는 혀를 빼물었다. 현재 주르르와 칼리는 제갈공녀의 소식을 듣는 동시에 드레이크, 칼리포립스를 타고 상공을 선회하며 시간을 끄는 중이었다. “이제 걸릴 것도 없겠다. 시작해도 되겠는데?” 칼리가 의견을 말했다. 방금 전 무전기로 기찬이가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이제 시간 끌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그렇군. 그럼 우리 오랜만에 그걸 쓸까?” “아아, 그거? 좋지.” 둘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르르는 바로 주문을 외웠다. “주르르가 명한다, 나와라! 드래곤의 숨결!” “가라, 귀곡마검! 스톰 소드!” 드레이크 입에서 불꽃이 터져나갔고 그 주위로 귀곡마검이 휘돌았다. 이것은 베르제브브를 상대하며 사용한 그들의 합동스킬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탑에 부딪쳤다. - 카가가가가가가가각! 불꽃이 탑에 적중하자 주위 모든 유리벽들이 터져나갔다. 그럼에도 불꽃은 사그라지지 않아 마치 드릴로 파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래 있는 초인들과 천은 그 모습을 멀뚱히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넘겨줘야할 것 같습니다. 하진님 명령대로 일단 철수하죠?” “크으으윽! 저놈들 다음에 만나면 죽여 버리겠어!” 천은 초인들과 함께 결국 철수했다. 천천히 무너지는 탑을 바라보며. “형! 현빈 형!” 핏기가 하나도 없는 어둠의조이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둠의조이는 그런 얼굴로 힘겹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거봐요, 역시 성공했죠?” 제갈공녀의 무전을 듣고 한 말이었다. 어둠의조이는 역시 그라면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왠지 그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모든 게 허무해지고 죽고 싶었던 자신에게 다가와 길을 물었던 그때일이 말이다. 그런 작은 만남이 이렇게까지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컥!” “현빈 형!” 속에서 피가 역류했다. 이제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멋쟁이는 떨리는 손으로 어둠의조이 손을 꽉 잡았다. “이거…많이 졸리네요. 태식 씨,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어요?” “……….” 멋쟁이는 예감했다. 지금 하는 말이 유언이라는 것을. 어둠의조이는 마치 하늘에서 누군가를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말했다. “박수희, 그녀를 진정 사랑했다고…그리고 미안하다고 전해주…….” “그래서 어쩌라고.” “……….” “…엉?” 멋쟁이와 어둠의조이는 등 뒤에서 들린 말에 멀뚱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여성이 팔짱낀 채 눈을 가늘게 뜨며 어둠의조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수, 수, 수, 수희?” 어둠의조이는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눈을 끔뻑거렸다. 그렇다. 지금 나타난 여성은 위치의 산맥에서 파소에를 다루는 흑장미 여성, 박수희였다. 그녀는 아까 전부터 부산에 와 둘을 보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던 자신이라 차마 앞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상황이 모두 끝났으니 다가온 것이었다. “일단 거기 너, 반지 좀 잠깐 빌려줘.” 다짜고짜 손을 내미는 박수희. 멋쟁이는 마치 육식동물 앞에 초식동물이 된 것처럼 빠르게 반지를 건네주었다. “이걸 끼면 바로 게임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거지?” “그건 좀 다르지만…뭐 비슷하긴 하죠.” 째려보는 박수희 때문에 말을 바로 고치는 멋쟁이였다. 박수희는 반지를 착용하고 깊게 심호흡한 뒤, 손가락을 놀렸다. “이제프, 하이넬. 푸리스, 미시그라.” 마치 고대 언어를 외우는 듯 한 모습. 그녀가 움직이는 손가락엔 검은 문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허공에 글자를 만드는 모습은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쓰러져가는 어둠의조이조차 멍하니 볼 정도로. “안착.” 마지막 주문을 외우자 글자들은 서서히 어둠의조이 몸에 들러붙기 시작했다. “이, 이건?” “파소에 주문. 넌 이제부터 내 종이야. 아, 한 가지 남았다.” 그렇게 말하며 박수희는 갑자기 어둠의조이 입에 찐하게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 “……….” “…쿨럭!” 가까이 다가와 있던 초인들조차 이번 행동은 부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한 미묘한 감정이 휩싸였다. 여성이 남자에게 종이라며 키스하고 있었다. 남자가 당한다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생각한 초인들이었다. “…이제 상처는 아물었을 거야.” 박수희의 얼굴은 살짝 땀이 배여 있었다. 조금은 지친 것이리라. 어둠의조이는 그 말에 멍한 상태에서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딱히 네가 걱정돼서 온 건 아니야. 그냥 집에 있기 불편했을 뿐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등 돌려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이유는 왜일까. 멋쟁이는 잠시 그렇게 생각하다 풋 하고 웃어버렸다. “현빈 형, 형수님 꽤나…귀여우신데요?” “그렇지?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역시 틀리지 않았…….” “닥쳐, 과부 만들려한 주제에.” 어둠의조이 머리에 탱하고 밤알을 쥐어박는 박수희였다. “그나저나 슬슬 일어나죠. 이곳이 끝났으니 다시 서울로 가야합니다.” 멋쟁이는 갑자기 소연이가 보고 싶어져 생각을 지우기 위해 지금 할 일을 생각했다. 어둠의조이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다 주위에 멀뚱히 서있는 초인들을 보았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같이 가요.” “……….” “……….” 초인들은 그 말에 몹시도 고민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들은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가봐야 이미 늦었어요.” “머지않아 머리에 폭탄이 터질 텐데요 뭘.” “네?” 어둠의조이는 몰랐다는 듯이 놀랬다. 멋쟁이는 역시나 아까 듣지 못했구나 생각했다. 바꿀 수 없는 현실, 그 참혹함을 이제 안 것이었다. “머리 폭탄? 설마!” 어둠의조이 말에 초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들이 초인이 되기 전에 심은 폭탄이죠.” “그러니 당신들은 볼일 보세요. 저희는 이곳에서 TV나 보며 구경하죠.” 그들은 웃고 있었지만 결코 진심으로 기뻐 웃는 건 아닐 거라 어둠의조이는 생각했다. 가슴이 몹시 아파왔다. 저들을 구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아팠다. 하지만 그때였다. “그럼 너희들도 내 종이 되면 되겠네.” “……….” “…네?” 마치 귀찮다는 듯 말하는 박수희. 그녀는 다시 물어보는 초인들에게 짜증내며 말했다. “귀먹었어? 내 종이 되라고. 파소에가 되면 신체가 변형돼서 뇌에 들어있는 폭탄도 제거할 수 있어. 할거야말거야?” “……….” “……….” “…하, 하겠습니다! 저는 종이 되겠습니다!” “저도 할래요. 시켜만 주세요!” 초인들이 갑자기 몹시 밝은 표정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갑자기 침울해진 어둠의조이. 멋쟁이는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형, 왜 침울해 있어요?” “사람들이 살 수 있어 좋아야하는데 그녀의 추종자가 많아진 것 같아 알 수 없는 미묘한 기분이 드네요. 아, 자, 잠깐! 수희야! 설마 파소에를 만든다는 건 아까 내게 했던 것과 같은 것을 저들에게도?” “그야 당연하지. 왜 뻔 한 걸 물어?” 바보 아니냐는 듯 쏴대는 박수희를 보고 어둠의조이는 좌절했다. 멋쟁이는 그 기분 조금 알 것 같기도 해서 어둠의조이 등을 토닥였다. 나기찬은 아직도 가시지 않은 따스한 마음의 여운을 느끼며 잠시 그대로 서있었다. 지금이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 옆에 다 타버린 잿더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할 수 있을까? 형체도 없는 사람에게 부활이 먹힐까? “스바르가 마리아 발동.” [행복, 사랑, 그것은 하나의 축복. 고통, 저주, 그것은 하나의 불행.] 스바르가 마리아를 소환한 것만으로도 머리가 살짝 지끈거림을 느꼈다. 기찬은 자신의 머리위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수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마리아, 부탁할게. 이 아이를 살려줘. 성배(聖杯) 발동.” 눈물을 흘리던 마리아는 기도하던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자 하나의 작은 태양이 만들어졌다.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따뜻한 태양. 하지만 주위에 타오르는 불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순화된 빛의 덩어리. 그것이 천천히 잿더미를 감싸 안았다. 잿더미는 빛으로 인해 아주 잠깐 빛나는 듯 보였다. 하지만 한차례 바람이 불었고 빛은 형체도 남김없이 휩쓸려 사라졌다. 그곳에 남은 것은 대퇴골, 갈비뼈같이 타서 사라지기 어려운 뼛조각만이 남아 기찬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미안, 정말로 미안…….” 살릴 수 없다는 슬픔에 기찬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때 기찬이에게서 무전이 왔다. {기찬아, 들리니? 나다, 가린. 지금 이쪽에 부상이 심각한 자들이 있어. 여긴 서울 초인 탑인데 중간지점에서 만나자. 이쪽으로 올 수 있겠어?} 글로리시나, 박가린이었다. 기찬은 이곳에서 슬픔에 잠겨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수많은 곳에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감정에만 치우쳐 서있으면 안되었다. 기찬은 잠시 뼛조각을 바라보다 눈을 꼭 감고 달렸다. 초인 탑이 있는 곳으로. 하지만 그때 다시 무전이 왔다. {자, 잠깐만요! 가린 씨, 기찬 군, 잠깐만 멈춰 봐요.} 제갈공녀의 목소리였다. 기찬은 달리던 것을 멈추고 무전기를 들었다. “무슨 일이죠?” {지금 모습을 드러냈어요. 아펜하르트 본진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다고요!} 제갈공녀의 모습은 몹시도 흥분한 상태였다. 기찬은 왠지 드디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이…어디죠?” {국회의사당입니다. 그곳 지하가 아펜하르트 본 거점이었어요!} {뭐? 정말이야?} {이거 드디어 마지막인가?} 무전기 너머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말이 들렸다. 기찬은 드디어 누나를 죽인 녀석과 대면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기찬도 무전기를 들었다. “가린 누나. 여기서 얼마 안 걸리니 그곳에서 만나요.” {알았어. 그곳으로 갈게.} 무전기를 끊은 기찬은 어째서인지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금까지 벌인 일들을 보고 일말의 동정 없이 냉정해 질 수 있었다. 하진, 너만은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한 기찬이었다. “하지만 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걸까.” 주조철이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무전을 끊은 제갈공녀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눈을 뜨고 말했다. “그만큼 자신 있다는 말이겠죠. 하지만 그것만이 아닐 거예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마침 잘됐다는 듯이 본진을 알려주었다는 건…무언가 이용할만한 것이 있다는 것 아닐까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나가죠, 저도 국회의사당 쪽으로 가봐야겠어요!” 드디어 제갈공녀도 일어났다. 옆에 있던 주조철과 임박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그밖에 대한민국 전체는 모두 국회의사당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미소천사 기사단원들도, 실버크로스단도, 륀 기사단도, 그밖에 주리아, 임상천, 게임했던 모든 플레이어들은 물론이고 단지 TV만 보고 감복한 사람들까지 전부 다. <극장판 완결> 생명의 바다 下(2)(잘린부분 다시 붙입니다.) 기찬이가 국회의사당에 거의 도착할 때부터 길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찬이를 응원하고 있었다. 기찬이가 지나가는 길목 중앙을 터주는 사람들의 물결. 그 장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힘내! 당신밖에 없어!” “언니! 예뻐요! 대한민국을 구해주세요!” “비열한 악당들을 물리쳐줘!” “드레이크 사건 잘 봤어! 감동받아 나도 여기까지 나왔다구!” 어린이, 청소년, 어른, 노인 할 거 없이 모두 기찬이를 응원했다. 어떤 사람은 울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은 사진 찍기 바빴다. 기찬이는 기쁘기보다도 여기 있으면 위험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저 사람들이 돌아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아 묵묵히 달리기만 했다. 국회의사당 앞마당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걸까. 역시 TV의 힘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와, 왔다!” “저기 드레이크랑 싸운 여성!” “남성이야! 아까 전에 남성이 변신한 거 봤잖아?” “누구든 뭐 어때! 힘내라!” 나기찬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곳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데도 소풍 나온 것처럼 자신을 반기는 사람들을 보고 한 행동이었다. 저 멀리 둥근 지붕의 국회의사당이 보였다. 저곳에 하진이 기다리고 있다. 나기찬은 마음을 굳게 다지고 걸어갔다. “기찬아, 여기야!” 사람들이 터주는 길 사이로 글로리시나가 다가왔다. 그녀 뒤에 들것을 이용해 두 사람이 들려오고 있었는데 그 둘은 다덤벼와 화선녀였다. 나기찬은 보기보다 더 심각한 둘의 상태를 보고 황급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어, 어이. 그 미소천사 모습…오랜만에 본다.” 다덤벼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표정으로 기찬을 맞이했다. 화선녀는 아직까지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이거 도대체 무슨 꼴…정화 누나! 정화 누나! 젠장, 스바르가 마리아 발동!” [행복, 사랑, 그것은 하나의 축복. 고통, 저주, 그것은 하나의 불행.]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되겠다 생각한 기찬은 바로 스바르가 마리아를 소환했다. 기찬의 등 뒤로 기도하는 수녀가 눈물을 흘리며 나타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사진을 찍거나 물러나는 등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이야, 진짜다. 그래픽이 아니라 진짜야!” “천사다…진짜 천사 같아.” “난 이거 본적 있어! 아펜하르트 게임구경할 때 봤던 건데?” “아! 그때 미소천사!”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더욱 커져만 갔다. 기찬은 주위에서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죽어가는 두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우두둑 뼈가 다시 자리를 잡아가고 붕대로 압박한 팔에서 고통이 사그라져갔다. 화선녀의 표정도 아까보다 편안한 표정이었다. “야, 미소천사. 근데 넌 머리 안 아프냐?” 스바르가 마리아를 소환하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보며 다덤벼가 한 말이었다. 기찬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다덤벼는 다시 말했다. “난 그냥 가벼운 스킬만 써도 머리가 깨질 것 같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해서 하는 말이야.” “그래요? 그러고 보니 처음 마리아를 소환할 때 조금 아프긴 했는데 지금은 그냥 그러네요?” “흠, 뭐 잘 된 건가.” 다덤벼는 자신이 생각해봐야 모를게 뻔하니 그냥 넘겨버렸다. “웃차! 아으으으으…….” 다덤벼는 크게 돌려보며 일어났는데 순간 빈혈에 휘청거렸다. 그런 그를 기찬이가 부축하며 말했다. “상처는 치료됐어도 아마 피는 보충이 안 되었을 거예요. 거기서 쉬세요.” “됐어. 내 몸은 내가 잘 안다. 마지막인데 빠질 수 없지.” 다덤벼는 국회의사당 쪽을 보며 말했다. 그때였다. {모두 안녕하십니까?} 사방에서 울리는 목소리. 사람들은 물론이고 기찬이와 글로리시나, 다덤벼까지 깜짝 놀라 두리번거렸다. “저, 저기다! 국회의사당 쪽이야!”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모두 국회의사당 쪽을 보았다.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 모두가 저주해 마지않는 모든 악의 원흉, 하진이 서있었다. 하진은 마이크를 들고 신사처럼 인사하며 말했다. {국회의사당을 찾아주신 모든 관객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세상을 바꿀 어릿광대 하진이라 합니다.} “저놈이야! 저놈 때문에 우리 집사람이!” “끌어내려!” “너 같은 놈, 죽어버려!” 당장이라도 폭동이 일어날 것 같이 사람들이 광분했다. 하진은 그 모습을 느긋이 바라보다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앞마당 중앙에 잔디가 열리기 시작하더니 3미터 가량의 원뿔모양 기계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저건…뭐지?” 순간 기찬은 무지 위험하다고 머리가 경고했다. 엄청난 위화감. 하진이 비쭉 웃는 모습이 보았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기찬은 외쳤다. “가린 누나! 저거 부셔요!” 글로리시나도 불길한 기분에 어찌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기찬이의 외침을 듣는 순간 모든 생각을 정리하고 중앙 기계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한 발 늦었다. 원뿔 꼭짓점에서 녹색 스파크가 튀기기 시작하더니 상공으로 쏘아진 것이었다. 녹색 스파크는 마치 분수대처럼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불투명한 물 막처럼 반구 형태로 앞마당 전부를 가려버렸다. “이 녹색 막은 뭐지? 하앗!” 다덤벼가 주먹으로 툭툭 건드리다 온힘을 다해 막을 때려보았다. 하지만 잠깐 출렁거릴 뿐 튕겨 나온 주먹을 보고 다덤벼는 무시 못 할 막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 이게 뭐야! 나갈 수가 없어!” “아아악! 머리가!” “머리가 깨질 거 같아! 아아악!” 갑자기 앞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머리를 감싸 쥐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 수만 해도 수십, 수백 명이었다. 역병에 걸린 것처럼 여기저기 쓰러지기 시작한 사람들을 보며 나기찬은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감을 느꼈다. “부셔주마! 댄싱 멜로디(dancing melody), 파트 원(part one)!” 춤추듯 유유히 움직이며 수만은 검을 날리는 글로리시나. 하지만 원뿔 기계 주위를 둘러 싼 녹색 막이 검 날을 모두 튕겨내었다. “칫, 모든 힘을 흡수하고 있어!” 물리공격을 전부 막아내는 막이라면 어떤 공격이든 통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글로리시나는 검을 멈추고 하진을 노려보았다. 순간 저 원흉을 죽이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크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하하하!” 하진은 자신의 생각대로인 상황을 내려 보며 미친 듯이 웃었다. “아윽, 아아아아악!” 누워있던 화선녀가 고통스러운지 소리 질렀다. 혈색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고 있었다. 현재 멀쩡히 서있는 자들은 나기찬, 다덤벼, 글로리시나 단 세 명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다덤벼가 화선녀의 상태를 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분통 터트렸다. “아무래도 반지를 착용한 저희들만 이 기운을 피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나기찬은 쓰러진 사람들을 둘러보다 말했다. 조금 전부터 원뿔 기계 끝에 녹색의 물방울이 모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저것이 가장 위험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의 생각을 읽은 건지 하진이 손뼉을 쳐 순순히 긍정했다. “맞습니다, 나기찬 군. 이 녹색 막은 그야말로 물질화 된 memory뇌파 그 자체. 저희는 생명의 샘이라 이름 지었죠. 저 뇌파는 마치 자석처럼 다른 뇌파를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고통 받는 이유도 당연하죠. 하지만 조금 놀랍군요. 여러분은 뇌파를 빼앗기지 않다니…역시 무언가가 당신들의 뇌파를 잡아주고 있군요.” 하진은 여유부리며 지금 일을 설명했다.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모이고 있는 녹색 물방울은 여기 누워있는 사람들의 memory뇌파라는 답이 나왔다. 기찬은 더 심각해진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한편, 설명을 듣고 있던 글로리시나는 천천히 검에 힘을 모았다. 거리가 조금 멀었지만 이정도면 충분히 기습할 자신이 있었다. “멈춰라.” 하지만 글로리시나 앞을 막아선 자가 있었다. 턱수염이 까칠하게 자라있는 사내, 비였다. “여기서 싸워도 나는 상관없다만…주위에 누워있는 사람들이 성치 못할 텐데?” 확실히 비 말대로 바닥은 사람들이 빽빽이 누워있었다. 결투는커녕 뛰기도 힘든 상태였던 것이다. 결국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인질이 된 것과도 같은 결과가 되었다. 기찬은 상황이 심각하단 걸 깨달았다. 단지 자신들 만으로 이 많은 사람들을 피신시키기도 무리일뿐더러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못한다. 정말 꼼짝없이 당했다고 기찬이는 생각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어쩔 셈이야!” 화선녀의 상태를 걱정하던 다덤벼가 하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딱히 어쩔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는 memory뇌파만 빌려 쓰면 족하니까요.” “memory뇌파로 무언가 하려는 거야?” 기찬의 물음에 하진은 솔직히 놀랐다는 표정으로 기찬을 보았다. “역시 그 누나의 그 동생이군요. 상당히 눈치가 빨라요. 맞습니다, 저는 여기 있는 사람들을 제물삼아 세계를 바꿀 겁니다!” “세계를…바꿔?” 글로리시나가 이해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진은 계속 말했다. “당신들이 아는 판타지, 당신들이 아는 무협, 당신들이 아는 초능력자들의 세계들을 말입니다. 사실 그런 세계가 옛날에 만들어졌다면 믿겠습니까?” 하진은 눈살을 찌푸리는 세 명을 보며 웃었다. “켈트, 그리스로마, 북유럽, 힌두, 베다, 수메르, 마야, 아즈텍같이 수많은 신화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기독교나 불교 같은 저마다의 신화뿐만 아니라 아시아에도 일본, 중국, 한국 같은 각 국의 탄생신화조차도 모두 다릅니다. 그런 상상은 어디서 온 것이며 누가 만든 것일까요? 그것들이 전부 거짓이라기엔 최근 들어 근거 자료도 수없이 올라오고 있을뿐더러 가끔 다른 신화인데도 어떤 사건은 맞물리는 현상까지 있어 부정하긴 어렵습니다.” 하진은 생각을 정리하는 듯 눈을 감고 조금 생각하다 다시 말했다. “현재 와서 판타지, 무협, 그밖에 초능력자들의 이야기들. 모든 기원은 신화에서 따온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것들조차 실제 존재하는 근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 말은 모든 것은 애초에 존재했던 게 아니라 사람이 진실로 만들었단 것입니다!” ‘진실이 존재했던 게 아니라 진실로 만들었다고?’ 기찬은 순간 무슨 말인지 곱씹어야했다. “기억, 생각이란 뇌의 정보는 사람으로선 한평생 전부 사용 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 그 힘을 잠깐 사용할 수는 있죠. 자신의 눈에만 생각했던 걸 본다거나 최면술로 인해 몸이 다친다거나하는 것들 말입니다. 허나 그건 개인이 사용할 경우고 같은 것을 수만, 수억 명의 사람이 생각하면 그 기억이란 memory뇌파는 생각했던 걸 존재시킵니다. 결국 뇌파가 존재의 무언가를 만든단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수억 명의 사람들이 같은 걸 생각해 진실을 만들었다 말하고 싶은 건가? 그래서 초능력이나 신화가 실제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확률적으로 수억 명의 사람이 같은 걸 생각는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나?” 글로리시나는 실없는 말이라도 듣는 것처럼 비웃었다. 하진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손가락을 세웠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전 세계를 침몰시키는 사건, 노아의 방주라고 알려진 대홍수로 말이죠.” “대홍수?” 기찬은 순간 생명의 샘과 연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물었다. 하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대홍수, 그것이 실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전 세계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남극 북극의 빙하라도 녹아내렸다면 가능하겠지만 실재로 불가능하죠. 사실 대홍수는 memory뇌파의 홍수입니다. 그것이 대홍수를 만든 것이죠.” “같잖은 소리하지 마! 우리에게 무슨 세뇌를 시키려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속지 않아!” 다덤벼가 발을 구르며 외쳤다. 하진은 서글픈 표정이 되었다. 기찬은 다덤벼를 말리며 물었다. “그때의 대홍수가 그럼 memory뇌파의 홍수였던 거고 그로인해 초능력이나 각기 신화가 탄생했다는 말인가?” “조금 다르지만 대체로 그렇죠.” “그럼 네 말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아. 아까 너는 수억 명의 사람들이 같은 걸 생각해 진실을 만든다고 했는데 홍수가 memory뇌파라면 그것도 수억 명이 생각해야하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럼 가린 누나가 한 말에 전혀 부합되지 않잖아?” “큭큭, 정곡을 찌르시는 군요. 그렇죠, 이 memory뇌파의 홍수를 만든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대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아틀란티스인 이죠.” “아틀란티스인?” “대홍수 이전 크로마뇽인이 있었던 신석기 시대의 존재했다는 꿈의 나라, 아틀란티스 말입니다. 그들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뇌는 모든 것을 창조해내는 ‘상상실존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상…실존능력?” 그 말의 몹시 혼란스러워 하는 나기찬이었다. “그들은 그 능력을 알고 섬에서 빠져나가 각지로 퍼졌습니다. 에덴동산, 헤스페리데스의 나라, 엘리시온의 들판, 알키누스의 나라, 올림포스 등등 전설상의 낙원은 그들이 상상실존능력으로 만든 업적이죠. 고대 그리스인, 페니키아인, 인도인, 스칸디나비아인 들이 숭배하던 신과 여신은 아틀란티스의 왕이나 영웅의 이름들이죠. 아틀란티스인 들은 신이란 최초의 인간이 됨으로서 memory뇌파를 하나로 모으는데 일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계를 이용해 자신들이 만든 업적들을 실제로 존재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초능력이 존재하고 신이 존재하다는 말도 안 돼는 것들을요! 더불어 그들은 자신들이 바란 이상향을 만들기에 이르렀죠. 바로 이것을 이용해 말입니다.” 하진은 여전히 생명의 샘을 모으고 있는 기계를 가리켰다. “아틀란티스의 식민지였던 이집트에서 발견한 지오글리프(geoglyph : 땅그림)엔 이 기계를 나타내는 도면과 사용방법, 그 후에 일어난 일까지 전부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이집트의 신성문자 히에로글리프를 해석해 겨우 알아낸 것입니다. 이 기계는 사람들의 memory뇌파를 자석처럼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았던 memory뇌파를 터트려 대홍수를 일으켜 신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까지요. 전 그것을 찾은 이후,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바로 임장순 박사님 밑으로 들어가 이 연구에 착수했죠. 아펜하르트란 게임은 정말 대단하더군요. 고유의 memory뇌파를 연구하기에 딱 좋은 실험이었어요. 그 모든 것을 도와드린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결국 이렇게 성공했으니 말이죠!” 하진은 두 팔을 활짝 폈다. “아틀란티스인은 이 기계를 이용해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신화를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게 만들고 memory뇌파 홍수를 일으켜 오늘날의 신세계를 탄생시켰습니다. 좀 더 편하게, 무엇이든 가능하게 만드는 이 세계야 말로 그들은 낙원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찬은 다시 생명의 샘을 보았다. 노아의 방주라 불린 대 재난을 다시 일으키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다덤벼는 사색이 돼서 외쳤다. “미친놈! 너는 일류를 다시 전멸시키려는 거냐!” “후, 그건 틀린 생각입니다. 저는 이 세계를 결코 싫어하는 게 아니에요. 굳이 전 인류를 죽이고 신세계를 만들 필요가 없는 거죠. 단지 바랄 뿐입니다. 실제 모든 신과 드래곤을 존재시키고 마법과 기, 초능력까지 존재하게 만드는 겁니다! 옛날에 바라마지않던 상상을 오늘날, 진짜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memory뇌파를 이끌어 잠깐 사용하는 초인 따위가 아닌 진짜를!” 기찬은 하진이 미쳤다고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왜 그런 세계를 만들어야하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희생해서라도 만들 필요가 있냐!” “희생? 제가 바라는 이상향이 된다면 죽은 사람들조차 전부 살릴 것입니다. 죽는 게 아닙니다. 단지 조금 잠자는 것이죠. 이런 제가 악으로 보이십니까? 오히려 미래에는 지구 전체가 낙원이 되어 제가 옳다는 걸 알아줄 테죠. 지금은 그 미래를 향한 작은 도약을 뿐입니다. 그걸 막는 당신들이 오히려 악이란 말입니다!” 지금까지 하진이 한 말들은 녹색 막 밖에 있는 사람들도 TV를 보고 있는 사람들까지 전부 듣고 있었다. “우리들이 악이라고?” 국회의사당에 방금 도착한 제갈공녀가 멍하니 말했다. 모순투성이 말에 순간 어이가 없어서였다. 그녀는 속지 말라며 무전기로 송신하려하는 찰나였다. “사람들이…….” 나기찬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주먹을 꽉 쥔 나기찬이 씹어 말하듯 말을 뱉은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고 외쳤다. “사람들이 무슨 장난감인줄 알아아아아아아!” “……….” “……….” “……….” 혼란스러워하던 사람들도, 우울해하던 사람들까지도 가슴을 시원하게 뻥 뚫어주는 말이었다. 그렇다. 사람은 장난감이 아니다. 그걸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권리 따윈 누구에게도 없다. “네가 불태운 인가도 미래를 위한 희생이었냐! 부모가 타죽어 우는 아이도 미래를 위한 희생이냐! 그런 아이조차 불태워 죽인 게 네가 바라는 미래냐!” 기찬은 참을 수 없는 격한 감정 때문에 자꾸 이를 드러냈다. 잠시 혼란스러워하던 다덤벼도 기찬이 말에 평정을 되찾았다. “그래, 역시 저놈이 악이다!” 마지막으로 말한 다덤벼의 말에 하진은 활짝 핀 팔을 천천히 내리며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해하실 줄 알았는데 역시 제 마음은 아무도 몰라주는군요. 뭐 좋습니다. 당신들 덕분에 일찍 발동시켜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계획은 성공이니까요.” “과연 그럴까?” 다덤벼가 양손을 옆구리 쪽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이것도 튕겨내나 보자. 기문개방! 기폭! 제 2차 기폭, 제 3차 기폭! 쿨럭!” “마리아!” 다덤벼가 피를 토하자 기찬이가 아까부터 소환시켜두었던 마리아를 불렀다. 다덤벼는 조금은 편해진 얼굴로 말했다. “어디 이거나 막아봐라! 에, 네, 르, 기이이이이!” 다덤벼 손에 엄청난 기운이 뭉쳐졌다. 단 한발의 필살기라 불리는 다덤벼 최후의 비기. 게다가 기폭까지 해서 그 능력은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하진은 위험하단 생각에 비를 불렀다. “비! 막아!” 비도 안 좋은 예감에 다덤벼를 막으려했다. 하지만 그의 앞을 막은 건 글로리시나였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셈이냐!” “아니,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면 문제없어!” 글로리시나가 옆차기로 비의 복부를 가격하려했고 비는 양손을 교차시켜 막았다. 하지만 애초에 그게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비는 뒤늦게 알아챘다. 몸이 붕 떠서 국회의사당 지붕 쪽으로 날아갔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다덤벼도 최종적인 주문을 외웠다. “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펄쩍 뛰어 날린 기공파. 그 기 덩어리는 정확히 중앙 기계 쪽으로 날아갔다. “젠장! 영원한 빛 발동!” 하진의 몸이 황금빛으로 변했다. 찬란한 날개가 생기고 손에는 황금 창이 들려있다. 그는 변신하자마자 빠르게 기공파를 막으려 움직였지만 기공파가 중앙 기계에 부딪치는 게 빨랐다. - 퉁! 하진의 우려와는 다르게 그 가공할 파워의 기공파조차도 막아버리는 생명의 샘. 기공파는 옆쪽으로 튕겨나가 앞마당을 막고 있던 생명의 샘을 뚫어버렸다. “마, 막아? 쿨럭! 크으으윽.” 다덤벼는 가볍게 튕겨버린 가공할 방어력에 멍하니 있다 무릎 꿇었다. 자신의 모든 힘을 다 사용해버린 것이었다. “하, 하하. 조금 우려했지만 다행히 막아내었군요. 기계를 감싸고 있는 생명의 샘은 앞마당을 둘러싼 생명의 샘보다 열 배나 농축된 상태입니다. 어설픈 공격은 전부 튕겨내죠.” 하진은 진땀 뺀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중앙 기계를 부시는 방법은 전무하다 할 수 있었다. 기찬은 쓰러져가는 다덤벼와 고통스러워하는 화선녀를 보며 빠르게 자신이 할 일을 생각했다. “차핫!” 기찬은 둘을 양팔에 껴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진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구경했다. “무엇을 할 셈이죠?” “이렇게 하려고!” 기찬은 다덤벼가 뚫어놓은 구멍 사이로 둘을 던져버렸다. 뚫었던 구멍이 다시 작아지기 시작해 한 행동이었다. 구멍은 다행히 둘을 내보내고 닫혀버렸다. “야이 자식아! 이게 대체 무슨 짓…쿨럭쿨럭!” 다덤벼는 기찬이가 한 행동이 못마땅한지 밖에서 생명의 샘을 주먹으로 치다 피토했다. 기찬은 그런 다덤벼를 잠시 바라보다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하진을 노려보았다. “흠, 가뜩이나 승산 없는 싸움에 동료를 버리다니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 말에 기찬은 피식 웃었다. 이유 따윈 없었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들만이라도 살길 바랐다고 말할 그였으니까. 저 멀리 국회의사당 쪽에서 비와 대결을 펼치는 글로리시나의 모습이 보였다. 저곳이라면 여기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겠다고 생각한 기찬은 글로리시나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어서 구급차를!” 제갈공녀는 밖으로 빠져나온 화선녀와 다덤벼를 보고 그쪽으로 달리며 외쳤다. 하지만 다덤벼는 그런 제갈공녀를 제지하고 안쪽에 싸우는 모습을 지긋이 지켜보았다. “젠장, 내게 힘이 더 있었더라면.” 다덤벼는 처음으로 자신의 약함을 한탄했다. 자신이 오히려 방해만 된다니 이 무슨 쪽팔린 일인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는 다덤벼였다. “으으…여긴?” 마침 눈뜬 화선녀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지 눈을 끔뻑거리며 두리번거리다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직 네 몸 성하지 않으니까 누워있어.” 그러자 아래쪽을 흘끔 쳐다보며 말하는 다덤벼. 화선녀는 순간 산과의 대결이 생각나 벌떡 일어나려다 다시 머리를 감싸 쥐며 누웠다. “…너, 네가 날 구해준거야?” “…아니, 미소천사가 구했어.” “기찬이가? 기찬이는 지금 어디에?” “이 녹색 막 안에 있어요.” 가까이 다가온 제갈공녀가 화선녀 말에 대답했다. 화선녀는 그게 무슨 말인지 생각하다 뒤쪽에 있는 반구형태의 녹색 막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이게 뭐야! 이 안에 기찬이가 있다고?” “그래요. 저 안에서 지금 하진이란 자와 싸우고 있…정화 씨!” 화선녀는 제갈공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생명의 샘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역시 생명의 막은 화선녀를 막았고 그녀는 몇 번 막을 차다 왼쪽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어, 없어!” 그리고 그때서야 자신의 검, 천양화가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다덤벼가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랭킹 2위께서 빌려가셨다. 시끄러우니까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봐.” “뭐? 막장녀가?” 화선녀는 그제야 저 멀리 국회의사당 쪽에서 대결을 펼치는 글로리시나와 그쪽으로 달려가는 기찬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막 안에는 그 둘만이 힘겹게 싸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저 둘이서만 싸우고 있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당신들 지금 뭐하는 거야? 저들이 위험하잖아. 그런데 왜 목석같이 서있는 거야!” “시끄럽다 하잖아!” 다덤벼가 소리 질렀다. 설명하려던 제갈공녀도 화선녀도 깜짝 놀라 다덤벼를 보았다. 다덤벼는 이를 꽉 깨문 채 안쪽에서 싸우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나 역시 안에 들어가 싸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야. 하지만 지금 내 상태론 방해만 될 뿐이라서 자존심상해 돌아버릴 지경이라고! 그러니 지금 이렇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잖아.” “너…….” 화선녀는 저렇게 화내는 다덤벼의 모습을 처음 봐 조금 당황했다. “그것만으로도 되요.” 제갈공녀가 다덤벼의 말을 듣고 차분하게 말했다. 화선녀와 다덤벼는 제갈공녀를 보았다. “지금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지켜보는 것밖에 없다면 그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거에요.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 집에서 TV보는 사람들까지 이 모습을 보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아쉽지만 응원하기로 하죠.”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할 테니 우리가 이 막을 깰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네.” 어느새 다가온 임박사님이 다덤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 말에 제갈공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저도 도와드릴게요. 변변치 못하지만 도움을 될 거에요.” “고맙네, 조철 군도 같이 가세나. 한시가 급하네.” “네, 박사님.” 세 명은 컴퓨터와 몇 가지 특이한 장비를 들고 녹색 막 조사에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화선녀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녹색 막 안쪽을 보며 기도했다. ‘제발, 죽지 마.’ 그건 화선녀 뿐만 아니라 이 모습을 보고 있는 전 국민이 하는 생각이기도 했다. “헉, 헉. 와우, 누님! 이것 좀 보세요!” “저 녹색 막은 뭐야?” 2미터의 장신을 살려 저 멀리 내다본 하가네는 손가락을 가리키며 놀랬고 붉은 뿔테안경에 노란 머리띠까지 하고 있는 블루블랙의 머리 여성, 레이나는 폴짝 뛰어 보며 놀랬다. “아무래도 저 막, 되게 불안해.” 여자의 감일지도 몰랐다. 하가네는 잠시 그런 레이나를 보다 또 무언가 발견했는지 얼굴을 활짝 폈다. “어, 저기 사조 형이에요!” “오, 단장님?” “아! 불사조 씨!” 한창 뛰어가고 있던 항상 웃고 있는 듯 한 가는 눈매의 남자, 불사조는 뒤에 있던 둘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말끔하게 정장을 입고 있는 상태였는데 레이나의 프리한 모습을 보고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진정했다. “후후, 단장님의 그 센스 있으신 외출 복장에 감복했습니다.” “그, 그래요?” “그런데 아까부터 왜 존대시죠? 게임상처럼 편하게 말하세요.” “그거야, 게임에선 제가 단장이어서 가능한 거죠. 저보다 나이도 많은데 어떻게 막말해요.” “어라? 제가 알기로는 단장님이 나이가 더 많으신 걸…그, 그렇군요. 제가 몰랐나 봅니다.” 불사조는 순간 목이 죄어오는 살기에 급히 말을 정정했다. 한 발짝 물러나 있던 하가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철패하고 륀 기사단원들은 전부 녹색 막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어서 가죠.” 불사조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레이나는 조금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불사조를 노려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에요, 엄마!” “불안하구나. 정말 꼭 가야겠니?” 나탈리의 손을 꼭 붙잡고 이끌던 주리아는 불안한 나탈리의 말에 이마를 찡그렸다. “여기까지 와서 왜 그래요? 저기 보세요. 이미 사람들도 많이 왔다구요!” “휴, 알았으니까 그만 보채렴.” 나탈리는 생각했다. 소심했던 애가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을까. 자신감을 키워주겠다고 추천해준 게임이 이렇게 애를 망쳐놓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하앗!” 글로리시나는 비가 날린 푸른 마나 덩어리를 천양화로 처내 겨우 막아냈다. 하지만 몹시 힘든지 숨이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사실 저 공격을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피한다면 저 공격은 쓰러져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할 터. 글로리시나는 전부 튕겨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헉, 헉. 비열한 놈.” “싸움엔 비열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기느냐 지느냐 뿐이지. 현상하라, 루네디!” 다시 하나의 기공탄이 쏘아졌다. 글로리시나는 이를 으득 깨물며 외쳤다. “블러드 멜로디(blood melody)!” 글로리시나의 주 카운터 기술이 발동했다. 한순간에 모든 기공탄을 흡수하여 역으로 되돌리는 그녀의 능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능력이 대단한건 그녀뿐이 아니었다. “반사하라, 루나!” 비 주위를 돌고 있던 네 개의 파편중 하나가 앞으로 나오며 빛나기 시작했다. 반사의 특화 된 루나의 파편은 되돌아오던 기공탄을 다시 되돌리고 말았다. “이, 이런!” 자신이 카운터 친 기술을 다시 카운터 칠 줄 몰랐던 글로리시나는 황급히 검을 들어 앞을 막았으나 기공탄의 힘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꽈꽝 하는 폭음이 터지는 순간 그녀는 실오라기 날아가듯 여기저기 옷이 찢겨진 채 날아갔으니까. “가린 누나!” 그때 도착한 기찬이 떨어지는 글로리시나를 받쳤다. “이런, 마리아!” 단 한발이었는데도 상태가 심각했다. 기찬은 정말 자신이 힐러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으윽, 기찬?” 글로리시나는 잠깐 정신을 잃은 듯 멍하니 기찬이에게 안겨있다 화들짝 놀랐다. “…내려주겠어?” 비에게 당해 기절한 것이 화나기보다도 지금 공주님안기를 당하고 있는 게 더 불편한 글로리시나였다. 기찬은 고개를 갸웃하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 내려 준 뒤 말했다. “누나, 보조할게요! 가죠!” 글로리시나는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검을 들었다. 자신이 인정한 힐러가 보조를 한다니 이렇게 든든한 경우가 또 있을까? 글로리시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자신이 상대에게 뒤를 맡기고 싸우다니, 조금은 신기한 마음도 품으면서. “그럼, 간다! 피의 맹세! 으으윽, 변형 광세!” 글로리시나가 천양화로 손목을 그었다. 게임과는 다르게 너무 아팠지만 그럭저럭 버틸 만 했다. 손목에서는 거의 분수처럼 피가 솟아올랐고 기찬이가 질린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 아찔한 광경이었으나 글로리시나는 차분하게 광세를 외쳤다. 그러자 검에 흡수되기 시작하는 피들. 결국 검붉은 빛으로 빛나는 천양화는 비로소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은 양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울기 시작했다. - 우우우우우우우우웅― 기찬은 딱 봐도 지금 글로리시나가 무리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머리가 아픈지 눈을 찌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찬은 이것을 도와주기 위해 주문을 외웠다. “땅은 대지의 양기, 하늘은 광활함의 천기, 가운데 서있는 우리는 영원의 우주이니 나의 존엄성을 바쳐, 나의 신념을 바쳐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가 되리라.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기찬을 중심으로 바닥에 기이한 문양이 만들어졌다. 게임상에서는 스텟이 정해져있어 어떻게 좋은지 알 수 있었으나 현실은 솔직히 모르는 상태였다. 그래도 모든 숙련도가 100% 고정되기 때문에 조금은 스킬을 사용하는데 부담이 덜 되지 않을까 생각한 기찬이었다. “휴, 한결 났군.” 기찬이가 생각한 것이 정답인 것 같았다. 그런데 두 사람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기찬이는 지금도 거의 부담하나 없이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이거 재미있는 구경이 되겠군요. 비, 상대할 수 있겠어?” 언제 다가왔는지 하진이 비 뒤에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미카엘의 날개로 날아온 것이었다. 기찬이와는 다르게 어떤 조건 없이 자신의 스킬을 발동시키는 하진이 가장 위험한 적이었다. 저 여섯 장의 날개만 해도 능력치 600%상승이 아니었던가. 하물며 옷하고, 머리왕관, 창까지 미지의 힘이 가득한 상태다. 아직까지 여유 부려줘서 다행이라 생각한 기찬이었다. “걱정 마시길. 약속했던 대로 금방 끝내겠습니다.” 비는 무표정한 얼굴로 하진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무슨 약속인진 모르겠지만 어디 끝내봐라. 댄싱 멜로디(dancing melody), 파트 투(part two)!” 글로리시나의 가장 빠른 찌르기 공격이 발동됐다. 한줄기의 섬광처럼, 한줄기의 멜로디처럼 움직이는 이 공격은 마치 절정에 달한 음악이 울려 퍼지듯 공격하는 게 관건이었다. “흡!” 게다가 기찬이의 생명의 희생 때문에 숙련도도 완전히 차있는 상태. 그런 그녀의 공격을 쉽게 막을 수 있는 자는 뒤에 있는 하진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비는 급히 목을 꺾었으나 볼에 한줄기 피가 맺혔다. 그때부터 글로리시나의 파상공격이 시작됐다. 같이 댄스라도 추는 것처럼 비의 주위를 돌며 공격하는 글로리시나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비는 네 개의 달의 파편으로 겨우겨우 사방위를 막고 있어 버티는 거였지, 그것이 아니었다면 이미 두 토막으로 잘려 죽었을 것이었다. “비, 힘을 개방해.” 비가 당하는 게 못마땅했던지 하진은 조용히 말했고 그 순간 비의 눈이 확 바뀌었다. “파괴의 눈 발동!” 글로리시나는 깜짝 놀랐다. 아까 산과의 싸움으로 인해 오리지널들은 랭커들의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 이 자는 결계의마도사, 루히비드의 스킬을 사용하는 자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방금 용병왕, 애디의 스킬을 사용한 것이다. 그 잠깐의 놀람은 고수끼리의 대결에서 치명적이었다. “타핫!” 아까부터 등에 착용하고 있던 검을 드디어 빼들었다. 클레이모어라는 양날 검이었는데 무개가 몹시 나가 일반인은 들기도 버거운 검이었다. 그 검이 글로리시나에게 쇄도해 들어왔다. “크윽!” 글로리시나는 천양화로 간신히 막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무개와 힘이 엄청났던지 기찬이가 있는 곳까지 주르륵 밀려버린 글로리시나. 그녀는 손목이 욱신거려 눈살을 찌푸렸다. “애디의 기술까지 사용하다니 이건 대체…….” 기찬 역시 많이 놀란 상태였다. 지금도 여전히 네 개의 달의 파편이 비 주위를 돌고 있었고 그의 눈은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놀랐나? 내 정신이 허용한 용량은 겨우 한 가지가 아냐.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보여주마. 내 힘을! 루나, 륀, 루네스, 루네디! 난 행한다. 절대의 공간을!” 비는 달의 파편들을 손으로 잡아 그대로 땅에 박아 넣었다. 그러자 그 중심을 시작으로 주위가 풍화의 결계 같은 짙푸른 빛이 흘러넘쳤다. 이건 베르제브브를 상대할 때 한 번 사용한 루히비드의 비기였다. 비는 지금 그걸 사용한 것이었다. “배틀 존 생성, 파괴의 의지는 이곳에서 이루어지리라!” 그건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용병왕 애디의 고유 오오라인 배틀 존까지 생성시킨 것이었다. 글로리시나와 기찬이는 요동치는 공기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 놀라긴 일러. 화이어 블레이드! 타올라라, 몸이여. 불살라라, 마음이여! 인화(人火)!” “………!” “맙소사! 대체 몇 가지를 쓰는 거야!” 하나의 스킬만 사용해도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오는 게 정상이었다. 그걸 알고 있던 글로리시나가 말도 못할 정도로 놀라는 것도 이해가 갔다. - 그그그그그그그그그. 온몸이 불타오르는 비의 모습은 꼭 악의 화신으로 보였다. 기찬은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처음으로 한 순간이었다. “그럼…….” 비는 아까 글로리시나가 사용한 댄싱멜로디 파트투를 웃도는 스피드로 글로리시나 등 뒤에 섰다. 문제는 그게 스킬이 아닌 일반 움직임이었다는 것이었다. “죽어라.” 짧은 말이었다. 저 말을 듣는 순간 글로리시나는 등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완전히 뒤를 점령당한 것이었다. “가린 누나!” 기찬이가 외치는 순간 글로리시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크게 굽혔다. 붕 떠진 머리칼이 잘려 바람에 흩날렸다. 만약 기찬이가 이 말을 외치지 않았으면 무슨 상황이 벌어졌을까. 글로리시나는 소름 돋는 기억을 지우고 재빨리 뒤돌아섰다. 사실 기찬이는 머릿속으로 지휘의 외침을 생각해 외친 말이었다. 적군에게 잠깐의 스턴을, 아군에게는 통솔력을. 비가 아주 잠깐 움찔거리지 않았다면, 글로리시나가 조금만 더 당황하고 있었더라면 아마 필시 목이 잘렸을 것이다. “흠, 아무래도 저놈이 방해군.” 비는 글로리시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아주 잠깐 기찬이를 노려보았다. 글로리시나는 비의 생각을 읽고 소리 질렀다. “기찬아 피해!” 하지만 말보다 비의 행동이 더욱 빨랐다. 기찬이에게 달려드는 비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이었다. 뒤늦게 글로리시나가 뒤따라갔지만 한참이나 뒤쳐진 상태. 기찬은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진실의 눈 발동!” 진실을 꿰뚫어 보는 미카엘(Michael)의 오른쪽 눈동자로 알려진 스킬이 발동되었다. 예전 심연의 눈이라면 모르겠지만 모든 진실을 보는 이 눈이라면 적의 공격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었다. ‘왼쪽.’ 기찬이 머리는 처음으로 아파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어떤 스킬을 써도 잠깐 지끈거렸는데 불과했는데 지금은 이 스킬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왔던 것이다. 하지만 기찬이가 생각한 결과는 확실히 들어맞았다. 미래, 예지라고 생각될 만큼 비의 공격이 눈에 보였던 것이었다. “아악!” 하지만 기찬이는 피하지 못했다. 억지로 몸을 오른쪽으로 꺾었지만 눈이 보는 속도를 몸이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는 그 정도만 해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분명 목을 노렸는데 팔을 스치기만 했으니 그럴 만 했다. “피해? 이것도 피하나 보자.” 다시 2차 공격이 감행되었다. 아까 찌르기와는 달리 횡으로 베어 들어왔다. 기찬은 이건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엔 글로리시나가 겨우 따라잡아 기찬이의 앞을 막았다. “아아아아아악!” 천양화를 들어 막았지만 그 힘에 밀려 어깨까지 클레이모어가 파고들었다. 문제는 불까지 머금은 검인지라 팔에서 고기타는 냄새가 풍겨왔고 그 고통을 참지 못해 소리 지른 것이었다. “호, 빠르군. 그새 다가오다니.” 비는 검을 거두며 말했다. 글로리시나는 쓰러질 것 같은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이로서 실력은 완벽하게 차이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거의 손조차 쓰지 못할 정도의 전투차이. 이것을 이기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극장판 완결> 생명의 바다 下(3)(잘린부분 다시 붙입니다.) 한편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며 탄식했다. 화선녀는 자꾸만 안절부절 가만히 서있질 못하고 있었다. “힘내! 미소천사!” “아아! 어떡해!” “불안해서 못 보겠어!” 불안함은 퍼지고 퍼져 구경하는 사람들 마음까지 잠식해 들어갔다. 다덤벼는 아까부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입술에서 피가 배어나오는 것도 모른 채. “이거라면…….” “확실히 물리공격은 통하지 않겠어.” “하지만 아까 기공파로 이곳을 뚫었어요. 그 말은…….” “강한 memory뇌파로 공격해야만 이 막에 구멍을 뚫을 수 있다는 거네!” 생명의 샘을 연구하던 제갈공녀와 주조철, 임박사는 한 가지 비밀을 알아냈는지 셋 다 벌떡 일어났다. 왔다 갔다 하던 화선녀가 반색하며 물었다. “뭔가 알아냈나요?” 제갈공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네, 확실히 이 막은 memory뇌파 그 자체에요. 그러니 물리공격이 통하지 않죠. 허나 memory뇌파로 이루어진 공격은 통한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아까와 같은 기공파를 날린다면 다시 뚫을 수 있어요. 문제는 지금 그런 큰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거겠죠.” “제가 해보겠어요! 천천후섬이라면 어느 정도 가능할거에요!” “아서라, 지금 네 상태로 그런 기술을 쓸 수 있을 거 같아?” 화선녀에게 태클 건건 다덤벼였다. 화선녀는 아까부터 땍땍거리는 다덤벼를 쏘아보았다. “내 상태를 네가 어떻게 알아! 아니 내가 위험하다 해도 해야 할 거 아냐!” “그래, 네가 천천후섬이란 걸 써서 뚫는데 성공했다손 치자. 그래서 어쩔 건데? 지친표정으로 헥헥 대며 도와줄 거야?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다.” 다덤벼는 냉정했다. 아까부터 자신이 화선녀처럼 생각했던지라 이런 답변이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화선녀는 그의 말에 할 말을 찾지 못해 주먹만을 쥐었을 뿐이었다. “그의 말이 맞아요. 다른 랭커들이 오지 않는 한 지금 뚫어봐야 체력만 낭비하는 셈이죠. 조금 더 지켜봐야할 문제…….” 제갈공녀도 다덤벼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가로막는 자가 있었다. “그거 지금 내가 옴으로서 해결되는 일인가?” “저도 있으니 우리겠죠.” 제갈공녀의 등 뒤에서 들린 두 사람의 목소리. 화선녀와 다덤벼는 눈을 크게 떴고 제갈공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일월현문(日月現門)오의 천천후섬(天千厚剡)!” - 콰과과과과광! “음?” “이게 무슨 소리죠?” 비와 하진이 폭음을 듣고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저 멀리 막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들어와 빠르게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저자는……!” “역시 살아있을 줄 알았어!” 글로리시나와 기찬이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자는 그런 둘의 마음에 보답하듯 검을 휘둘렀다. “거기서 떨어져라! 파괴의 토네이도!” 일월천검(日月天劍)을 가로로 휘두르자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바람은 곳 소용돌이가 되어 비와 하진을 향해 날아갔다. 이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뿐이 없었다. 아펜하르트의 명예랭킹 1위, 용병왕 애디. 그가 이곳에 온 것이었다. 글로리시나는 토네이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기찬이의 허리를 잡고 애디가 서있는 자리로 빠졌다. “멀쩡하군. 게다가 파워업?” 글로리시나는 기찬이에게 치료받아 겨우 괜찮아진 팔을 휘두르며 애디에게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은 애디 뒤에 있던 루히비드가 답했다. “맞아요. 처음에는 정말 죽는 줄로만 알았죠. 머리가 녹아버리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한숨자고 일어나니 한결 편하더군요. 임박사님이 그러던데 memory뇌파를 머리가 인식하는 시간이 걸려서 그런대나 뭐래나.” 루히비드는 장난치 듯 말했고 애디는 단지 고개를 끄덕였다. 기찬이는 놀라 말했다. “그럼 심한 스킬을 써도 죽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래, 단 너무 강한 스킬을 쓰면 뇌가 잠시 쉬어야해. 즉, 잠을 잔다는 거지. 이러나저러나 싸울 땐 치명적이라구.” “흠, 아무래도 말은 이쯤 해야 할 거 같다.” 애디가 정면을 보며 말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국회의사당 건물을 보았다. 그곳에 먼지가 걷히자 멀쩡한 모습의 비와 하진이 서있었다. “이런, 먼지만 옴팡 뒤집어썼군요. 이런 불청객은 원치 않은데 말이죠.” 하진은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말했다. 기찬이는 지금 이쪽의 둘보다 중앙의 원뿔 기계가 더 신경 쓰였다. 기계 꼭짓점에 모이던 물방울은 이제 사람만한 크기가 되어갔다. 더군다나 쓰러진 사람들은 이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시간을 더 끓다간 죽을지도 몰랐기 때문에 기계를 어떻게 든 처리하는 게 급선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진과 비가 가만히 있지 않을 터, 이곳에서 벗어나면 누워있는 사람들이 다치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들을 묶어놓던지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방법 외엔 없다고 결론지은 기찬이였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저 비라는 자만해도 버거울 정도인데 뒤에 구경만 하고 있는 하진까지 이겨야하는 상황. 비록 기찬이 쪽이 수는 많았지만 글로리시나도 지친 상태였고 애디와 루히비드역시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점점 초조해지는 기찬이였다. “기찬 씨! 기찬 씨!” 이제야 도착한 한나는 끌어주는 민혜리의 손도 뿌리치고 열심히 팔을 움직여 생명의 샘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애디와 루히비드가 합류한 이후, 다시 전투에 돌입한 상황이었고 그들은 몹시 힘들어하는 상황이었다.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당신은 왜 항상 위험한 상황에 놓이는 거예요!” “한나야…….” 민혜리는 그동안 차 안에서 한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미소천사와 처음 만났던 일부터 실버크로스 기사단과의 싸울 때의 일, 둠터틀을 잡은 일, 엔젤단을 결성하고 위치의 산맥까지 올라갔던 일까지 말이다. 그래서 지금 한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들 기찬이를…아나요?” 멋쩍은 표정으로 다가온 한 남성이 있었다. 나이가 좀 어려보이는 남자였는데 한나가 외친 말을 듣고 가까이 다가온 것이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처음엔 경계했지만 나이가 어려 보여 민혜리는 살갑게 물어보았다. 남성은 예쁜 여성이 자신을 빤히 보자 얼굴을 붉히며 주춤주춤 대답했다. “저, 저는 임상천이라고 합니다. 나기찬의 고등학교 동창이죠.” TV를 보고 허겁지겁 달려온 임상천은 처음으로 기찬이의 지인들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흡! 뭐 이리 빨라!” “크윽!” 비의 공격은 반격은커녕 막기에도 벅찼다. 애디조차 말 한마디 할 여유가 없었고 루히비드는 너무 빠른 스피드에 기공탄 하나 제대로 날리지 못했다. “파괴의 눈 발동!” 애디가 파괴의 눈을 발동시키자 연신 밀리던 것이 드디어 멈춰 섰다. 비는 흥미로운 눈으로 공격하며 말했다. “힘으론 자신 있다 이건가? 하지만 어설퍼! 기문개방!” 비가 네 번째 격투가 기술까지 발동시킨 순간이었다. 버티던 애디의 몸이 저 멀리 튕겨 날아간 것은. “단장님이 날아가?” 루히비드가 넋 나간 표정으로 비를 보았고. “네 번째라…저 녀석은 대체 몇 명의 memory뇌파를 주입받은 거야?” 기찬이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정도 가지고 힘이라 할 수 있겠나! 나를 좀 기쁘게 해달란 말이……!” “은신해제, 이정도면 만족하나?” 글로리시나의 천양화가 비의 등을 찔러 들어갔다. 하지만 그의 등은 무언가에 막혀 저지당했다. “은신이라. 역시 너의 그 힘은 무시 못 하겠군. 귀곡마검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어.” “………!” “………!” 칼리의 주 능력인 귀곡마검까지 복사한 비를 보며 모두 할 말을 잊었다. 이로서 다섯 명의 스킬을 사용한 비였다. “칫, 은신!” “늦었어!” 글로리시나가 다시 뒤로 빠지려했는데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귀곡마검이 글로리시나의 목으로 날아갔다. “루나! 반사의 결계!” 글로리시나와 귀곡마검 중간에 달의 파편 하나가 빛을 뿌렸다. 하지만 귀곡마검의 힘은 그런 방어막을 깨트리고 계속 목표물을 향해 나아갔다. 그래도 그 잠깐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글로리시나는 천양화로 귀곡마검을 막을 수 있었다. “반사의 결계를 저리 간단하게…….” 쉽게 달의 파편이 깨지자 루히비드는 경악했다. 기찬이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저자는 하나가 아니라 다섯 명의 영웅이 모여 있는 것과도 같은 상황이었으니까. “흐아아아아앗!” 글로리시나에게 신경 쓰고 있는 동안 애디가 몸을 추스르고 다시 비에게 덤벼들었다. 비는 클레이모어를 이용해 일월천검에 대항했다. 애디는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이 같은 강자와 싸우는 게 얼마만인가. 예전에 강자만을 찾아다니며 싸움터를 전전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것도 심장에 이상이 생겨 더 이상 못할 줄 알았는데 그때의 희열을 지금 다시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애디는 검에 힘을 주입했다. 그러자 검에 푸르게 덧씌워지는 오러. 애디가 오러소드를 개방한 것이었다. “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일월천검에 연신 뒤로 밀리기 시작한 비.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크하하하! 좋다! 아주 좋아!” 비 역시 클레이모어에 오러를 방출했다. 애디를 제외한 세 명은 다시 놀라기 충분한 수였다. 허나 애디만이 예상했다는 듯 차분하게 맞섰다. 푸른 스파크가 여기저기 조각나 튕겨나갔다. 마치 광선 검을 이용해 싸우는 모습 같았다. 그때 글로리시나가 사이에 껴들었다. “잔챙이는 빠져라!” 비는 귀곡마검을 이용해 글로리시나를 공격했다. 글로리시나는 어쩔 수 없이 귀곡마검을 상대해야했다. “최강이라 부르는 두 명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어…….” 기찬이는 지속적으로 힐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연신 밀리는 두 명을 보며 참담함을 느꼈다. 그때 루히비드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니, 작전대로 되고 있어.” “작전이요?” 기찬이의 물음에 루히비드는 답하는 대신 달의 파편을 여기저기 박아 넣었다. “피하지만 말고 힘을 써봐라!” 비는 아까부터 적당히 싸우는 애디의 모습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래서 비는 더 짜증이 나고 있었다. - 푹! 비 자신의 배로 튀어나온 검 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고 있는 비의 등 뒤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므네모쉬네(mnemosyne)의 선율의 길, 무사이(mousai). 쿨럭! 두 번 실패하지 않아.” “뭐, 뭐?” 글로리시나는 귀곡마검을 상대하고 있을 터였다. 옆을 보니 여전히 귀곡마검을 상대로 애쓰는 글로리시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럼 저건 가짜란 말인가? 비는 황당한 눈길로 글로리시나를 보았다. “컥!” 이번엔 등 뒤로 튀어나오는 검 날. 애디가 앞에서 찌르기를 시도한 것이었다. 비는 눈을 부릅떴다. 애디는 일월천검을 놓고 뒤로 빠지며 외쳤다. “지금이다!” “가린 씨! 피해요! 루나, 륀, 루네스, 루네디! 난 행한다. 풍화의 결계를!” 루히비드의 외침에 글로리시나 자신도 천양화를 놓고 황급히 뒤로 빠졌다. 그때 사방에 박혀있던 달에 파편들이 일제히 푸른 결계를 생성했고 그 가운데 있던 비가 깜짝 놀랐다. “어, 언제! 크아아아아악!” 모든 것을 풍화시킨다는 절대의 결계가 발동했다. 비는 두 개의 검이 박힌 채로 몸을 감싸 쥐기 시작했다. 루히비드는 아직 끝이 아니라는 듯이 외쳤다. “동쪽의 루나! 서쪽의 륀! 남쪽의 루네스! 북쪽의 루네디!” 루히비드는 한쪽 팔을 번쩍 들었다. 펼쳐진 손바닥을 따라 네 개의 달의 파편은 일제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포오오오오옥!” - 빠지지지지지지지직! 달의 파편이 일제히 부셔졌다. 동시에 푸른빛이 불꽃놀이처럼 마구 터지기 시작했고 그 사이에 있던 비는 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엄청난 폭음에 밖에 있는 사람들도 엎드려 귀를 막았을 정도였다. “헉, 헉.” 자신의 최고의 비기라는 이 기술을 하루에 두 번이나 사용한 루히비드는 완전히 지쳐 무릎 꿇었다. 애디와 글로리시나 역시 숨을 몰아쉬며 먼지가 일어난 곳을 주시했다. “크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하하하!” 먼지구름 안에서 광소 하는 외침이 들렸다. 이번엔 기찬이 뿐만 아니라 세 명 모두 참담한 심정으로 먼지구름 안을 보았다. 그 안에는 근육이 부풀고 부풀어 옷이 다 찢겨져 나가 헐크가 예상될 정도의 사람이 오연히 서있었다. 그의 손에는 언제 뽑았는지 천양화와 일월천검이 들려있었다. “…이것마저 통하지 않는 건가?” 글로리시나가 두 팔을 축 늘어트리며 말했고. “이젠 정말 괴물이 됐군.” 애디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 모습까지 하게 만들다니…이건 돌려주지.” 도중의 동작 따윈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애디의 복부와 글로리시나 복부에 각자 하나씩 검이 박혀 들어간 상태만 보았을 뿐. “단장님! 가린 씨!” “다음은…너다.” 역시나 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찬이 눈에는 자신의 옆에 있던 루히비드가 실 끊어진 연처럼 저 멀리 날아가는 것만 볼 수 있었을 뿐. 이젠 주먹을 휘두른 포즈로 서있는 비가 옆에서 기찬이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너희는 애초에 승산이 없었어.” 비의 말에 기찬이는 두려움에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혁빈 씨!” 제갈공녀 역시 지금 상황을 보며 절망했다. 사람의 능력을 이미 뛰어 넘은 것이다. 아까 천천후섬을 사용해 힘이 바닥난 화선녀는 앉아있는 상태로 두 손을 모았다. 이젠 신에게 기도하는 수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젠장!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다덤벼 역시 지금 상황은 절망적이라고 느꼈다. 랭커들의 힘들 모두 쓰는 자라니 저런 괴물을 어떻게 이기란 말인가. 게다가 그 뒤에 있는 하진조차 아직까지 나서고 있지 않지 않은가. “어, 저, 저기 봐! 저게 뭐지?” “새? 아, 아니다! 익룡?” “드, 드래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 제갈공녀와 주조철, 임박사, 화선녀, 다덤벼는 하늘을 보았다. “아아, 왔어! 그들이 왔어!” 제갈공녀의 말에 보답하듯 거대한 새는 크게 울부짖었다. “…그렇게 싸우는데도 지치지 않는 거냐?” 허탈한 마음에 질문한 기찬이는 이미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비는 목을 우두둑 꺾으며 답했다. “정신적인 문제는 저 마더가 커버하니까. 나는 memory뇌파를 담는 그릇일 뿐이다.” 비는 손가락으로 중앙 원뿔 기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신들이 사용하는 반지같이 저 기계가 모든 memory뇌파를 통제한다는 말과 같았다. 하지만 정신까지 커버할 줄이야. 저리 강한 이유를 드디어 알게 된 기찬이였다. “크으윽, 그래서 다른 오리지널들도…정신적인 문제는 없었던 건가…….” 쓰러져있는 애디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말했다. 그가 누운 바닥은 이미 피가 흥건해져있었다. “그래도 이 상태는 조금 많이 부담스럽군. 모든 랭커들의 힘을 각성한 거니까.” 비는 지금 모든 상태를 각성한 것이었다. 랭커 열 명의 힘들을 말이다. 기찬이는 기가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 이쯤에서 대화는 그만두고 슬슬 죽어라.” 여기저기 몸을 점검하던 비는 사람 얼굴만 한 주먹을 들어올렸다. 기찬이의 머리위로 그늘이 졌다. 그 압박감에 기찬이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드레이크, 브레스!” - 카가가가가가가각! 기찬이의 머리위에서 들린 말이었다. 전부 상공을 보았다. 그것에선 드레이크 한 마리가 웅장하게 불꽃을 뿜었고 뻥 뚫린 구멍 사이로 여러 사람이 뛰어내리고 있었다. “암속성 결합, 증폭! 세상조차 가르는 필멸의 화살(Arrow of Mortality)!” “꿰뚫어라! 귀곡마검!” “화이어 볼!” 암흑빛으로 물든 총알과 그 주위를 맴돌며 떨어져 내리는 귀곡마검, 그리고 그 주위에는 화려한 불덩이가 호위한 채 비에게 떨어져 내렸다. 비는 양팔을 교차해 막았지만 힘이 부친 듯 주르륵 밀려나갔다. “태식 형! 현빈 형!” 그들은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기찬이를 가리고 비를 노려보았다. 그 상태로 어둠의조이가 말했다. “조금 늦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태는…….” 어둠의조이는 기찬이의 모습이 나소연의 모습과 같아서 한 말이었다. 멋쟁이는 그 모습을 차마 못 보겠는지 비만을 노려보았다. “후아, 이거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구나.” 뒤늦게 드레이크를 타고 내려온 주르르는 쓰러져있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그들이 이렇게 늦은 이유는 대전에 있던 주르르가 칼리를 태우고 부산에 있을 멋쟁이와 어둠의조이를 데려오기 위해 늦은 것이었다. 하늘을 날아 그나마 이 정도였지 만약 땅으로 왔더라면 생각지도 못할 거리였다. “나기찬! 멍하니 있을 때가 아냐! 네 역할이 뭐냐!” 멋쟁이는 조금 화난 듯 한 말투로 기찬이를 쏘아붙였다. 기찬이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마리아를 불렀다. 지금당장 죽어가는 애디와 글로리시나, 루히비드를 치료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정말 심각하군. 혜숙 씨에게 받은 연락이 결코 과장된 게 아니었어.” 칼리는 그만한 공격에도 멀쩡히 서있는 비를 보며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어둠의조이는 반지가 없어 이곳에 들어오지 못한 박수희가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안도하며 총을 들었다. “그래도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입니다.” “그래요, 지면 모든 게 끝이죠.” 멋쟁이 역시 일월현검을 치켜들며 동의했다. 그들 말에 멋쩍어 진 칼리는 귀곡마검을 불렀다. “기찬아, 지금 상태로는 우리가 와도 힘들 거 같다. 여기선 지금까지 저 녀석을 보아온 너를 믿을 게.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그리고 지휘해라. 우리는 너만 믿고 지금 이곳에 온 거니까.” 멋쟁이는 모든 걸 맡기겠다는 듯이 말했다. 기찬이는 등을 보고 있어 알지 못했지만 옆에 있던 어둠의조이는 멋쟁이가 지금 웃고 있다는 걸 볼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멋쟁이가 새삼 대단하다 느낀 어둠의조이였다. “으아아아! 단장님이 오셨어!” “이거 완전 영화잖아?” “어둠의조이 부단장님 파이팅!” 애디, 기찬이와 글로리시나가 싸울 때 도착한 미소천사 기사단원들은 녹색 막에 찰싹 붙어 구경하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불쾌한 눈빛으로 보았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애디 단장님이 일어나셨어!” “루히비드 부단장님도!” “칼리 부단장님이 오신 거 봤어? 귀곡마검은 역시!” 미소천사 기사단원들과 조금 떨어진 거리, 그곳에는 애디가 이끄는 더 원 기사단원들이 뭉쳐 구경하고 있었다. 그 두 기사단은 서로 응원하다 눈이 마주쳤다. 게임에서는 적이었지만 지금은 서로 뭉친 관계. 두 기사단원은 뭉쳐서 구경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제갈공녀가 있는 쪽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도착했다. “어, 저기 있다! 두령이야!” “그 옆에 붉은 머리 누님도 있어! 두려어어어엉!” 진지하게 구경하고 있던 다덤벼는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들을 들으며 땀을 흘렸다. 설마 싶었다. 움찔거리는 목을 돌려 뒤돌아보니 수십 명의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컥! 너희들?” “…남자들에게 인기 많이 좋겠네.” 화선녀는 안겨올 기세로 달려오는 무리를 바라보며 다덤벼에게 조금 떨어졌다. 자신에게까지 피해가 오지 않기 위한 대책이었다. 다덤벼는 머리가 다시 지끈거리는지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한숨 쉬었다. 실버크로스 기사단은 조금 멀리 떨어져 모인 상태였다. 실버크로스 단장, 배천익은 수백 명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고 말했다. “이렇게 불타오른 적은 게임 빼고 처음인 것 같다. 이렇게 다들 모여주니 진심으로 고맙다.” “단장님 때문이 아니라 그 TV를 보면 누구라도 나오고 싶어질걸요?” “그 남자가 미소천사로 변신할 때는 정말이지 소름이!” “나 그때이후로 밖에 나와서 잘 모르겠는데 지금 어떻게 되고 있어?” “야, 지금 난리도 아냐. 이상한 녹색 막이 생기고 그 안에서 싸우는 중인데 대 핀치라니까?” 배천익 역시 그것을 보고 나온 터라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자신들이 그곳으로 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에서는 일반사람인지라 불가능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답답했다. “그래도 응원이라도 해야지. 우리가 할 건 그것뿐이다. 그곳에 가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 빠질 사람은 지금 빠져라.” “아까 그 하진인가 하는 놈이 하는 말 TV에서 들어보니까 그들이 실패하면 다 죽는 것 같던데요? 어차피 죽을 거 응원이나 할랍니다!” “후, 지금 자고 있을 딸내미가 이 모습을 보면 경악해 쓰러질 텐데.” “야, 난 마누라한테 얼마나 얻어터졌는지 알아?” 그들은 장난스럽게 웃고 떠들었지만 얼굴 어딘가에 근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역시 사람인 이상 죽는 건 무섭다. 그걸 알기 때문에 그들은 더 웃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공포 때문에 발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모두…고맙다.” 배천익은 그런 그들에게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단지 게임에서 시작한 인연들이 지금은 목숨을 내걸고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정. 이 마음은 현실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렇군요. 그럼 그…….” “네?” 임상천은 민혜리에게 한나와 기찬이의 관계를 듣고 무언가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한나는 여전히 막에 찰싹 붙어 울먹이는 중이었다. 저 애였구나. 자신이 치료해주지 못한 힐러의 고충을 전부 치료해준 사람이. 상천이는 그동안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자를 만날 줄이야. 지금도 걱정하는 저 표정을 보니 조금 기찬이가 부러워진 상천이였다. “한나야!” “어, 어, 주리아 언니!” 또 다른 인물이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금발의 조금 이국적인 생김새. 상천이는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기찬…넌 게임에서 여잘 몇 명이나 사귄 거야!” “…네?” 아까부터 이상한 행동만을 하는 상천이를 지켜보던 민혜리는 처음으로 이마에 땀을 흘렸다. “죽기위해 불나방들이 더 모여들었구나.” 비는 여전히 거만한 표정으로 모두를 내려 보았다. 그의 근육이 자꾸만 움찔움찔 거렸다. “언제까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나 보자! 타올라라, 몸이여. 불살라라, 마음이여! 인화(人火)!” 시작은 멋쟁이가 끊었다. 그가 온몸을 불사르며 달려들자 모두들 공격하기 시작했다. “가랏! 귀곡마검!” “스턴 샷!" “드레이크, 날아올랏!” 그 사이 기찬이는 쓰러져있던 애디와 글로리시나, 루히비드를 치료했다. 그들의 상태는 말도 못할 정도였다. 애디와 글로리시나의 뿌리까지 박힌 검을 빼느라 진땀 흘렸고 루히비드는 갈비뼈가 전부 부셔진 건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해 정말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검이 몸을 관통하는 기분은 다시 맛보고 싶지 않은걸.” 글로리시나는 방금 전까지 천양화가 자신의 배에 박혀있었단 사실이 믿기지 않은지 자신의 배를 매만지며 말했다. “저들도…오래 버티진 못할 거다.” 애디는 자신의 고통보다도 지금 사태를 걱정했다. “쿨럭, 쿨럭! 하아, 하아. 정말 죽는 줄 알았네.” 아직도 목이 막히는지 숨을 몰아쉬며 말하는 루히비드를 마지막으로 기찬이는 어떻게 할지 생각했다. ‘비라는 녀석은 모든 정신력이 저 마더라는 기계가 커버해 준다고 했어. 그럼 역시 기계를 부수는 방법밖엔 없나? 하지만 중앙으로 간다면 사람들이…젠장, 방법이 없잖아.’ 기찬이는 손톱을 씹으며 머리를 쥐어짰다. 하지만 도무지 타개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자신을 믿고 맡긴다니 멋쟁이를 저주하는 기찬이였다. ‘저놈이 memory뇌파를 받아들이는 용량이라도 적었으면 무엇이라도 할 텐데 저렇게 강해서야 방법이 없잖…잠깐, 용량? 그래, 지금 상태의 저놈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기찬은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한 방법이기도 했다. 될지 안 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것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기찬이였다. “화이어 블레이드!” “훗, 화이어 블레이드.” 멋쟁이가 불타오르는 일월현검을 휘둘렀지만 비 역시 클레이모어를 붉게 만들어 대적했다. 같은 기술을 이용해 막는 그의 모습만 봐도 한껏 여유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세상조차 가르는 필멸의 화살(Arrow of Mortality)!” 어둠의조이가 그새 두 가지 속성을 결합한 총알을 날렸다. 비는 귀곡마검을 이용했다. “귀곡마검! 필멸의 화살!” 귀곡마검에 어둠의조이와 같은 암속성과 불속성의 힘이 결합되어 날아가기 시작했다. 같은 기술이었지만 어둠의조이와는 차원이 달랐다. 쓰는 딜레마가 거의 없었으니까. “귀곡마검으로 필멸의 화살을 날려?” “저런 무식한 놈…….” 비는 자신의 힘에 만족하며 턱을 쓰다듬다 이내 표정을 굳히고 외쳤다. “이제 장난은 그만두자! 파괴의 토네이도!” 비는 국회의사당만한 크기의 토네이도를 생성시켰다. 그것은 상대하고 있던 세 명에게 날아가지 않았다. 목표는 중앙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비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절대 피하지 않고 막으러 온다는 것을. “제, 젠장! 사람들이! 드레이크 브레스!” “암속성 결합, 증폭. 세상조차 가르는 필멸의 화살(Arrow of Mortality)!” “타올라라, 몸이여. 불살라라, 마음이여! 인화(人火)!” 세 명은 억지로라도 막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겨우 토네이도의 움직임을 막는데 그쳤고 위험하다 생각한 루히비드, 글로리시나, 애디는 자신들도 도와주기 위해 움직이려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앞으로 나간 사람이 있었으니. “마리아!” 기찬이였다. 진실의 눈으로 인해 토네이도의 중심을 꿰뚫어본 기찬이는 억지로 몸을 중앙으로 비집고 들어간 것이었다. 몸이 갈가리 찢겨지는 아픔에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마리아가 끊임없이 몸을 치료하고 있어 버틸 수 있었다. 토네이도의 중심은 그야말로 가장 아늑하고 평온한 공간. 그곳에서 기찬이는 온힘을 발산했다. “하아아아아아아아아앗!” 순간 검은 스파크가 튀었다. 기찬이는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힘에 집중했다. 그 결과, 빛의 힘과 검은 스파크가 어울려 가장 약한 토네이도의 중심을 파괴하니 토네이도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토, 토네이도를 박살내?” 비는 기찬이의 모습을 보고 심장이 덜컹거릴 정도로 놀랐다. 자신의 거의 모든 힘을 집약시킨 한방이었다. 그런데 그걸 맨몸으로 뚫고 들어가 내부에서부터 파괴시키다니 말이나 될법한 소린가. 저 녀석만큼은 무시 못 할 녀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한편 기찬이는 쓰러질 것 같이 아픈 상태인데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표정하나 찌푸리지 않는 등 부단히 노력했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기찬이는 억지로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그 정도밖에 안됐어? 이거 실망인데.” “…뭐?” 기찬이가 한 말은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멋쟁이는 속으로 미친놈이라 생각할 정도니 말 다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 힘이 다라면 나는 결코 너에게 지지 않아! 어디 수없이 토네이도를 날려봐라! 다 막아주마!” “…지금 나보고 약하다 말하는 것이냐? 이 나에게 말이다!” “적어도 당신보다 강한 상대로 싸운 적도 있었어. 당신 따위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강한상대, 비록 게임상의 베르제브브였지만 그걸 알지 못하는 비는 화날게 분명했다. “나보다 강하다? 크큭, 크하하하하! 나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그래, 보여주마! 내 진정한 힘을! 내 모든 힘을 보여주겠다!”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진동에 지진이라도 일어난 기분이 드는 기찬이였다. “아직도 힘을 다 쓰지 않았던 거야?” “이런 미친! 그런 놈을 도발해 어쩌겠다는 거야!” 칼리와 주르르가 기찬이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멋쟁이와 어둠의조이가 그들을 막으며 말했다. “저놈이 그냥 일을 벌일 리 없어. 무언가 생각하고 있다.” “맞아요. 피하지 마세요! 믿어요, 미소천사를!” 그 둘의 말에 글로리시나는 알고 있다는 듯이 한걸음 앞으로 나와 검을 들었을 뿐이었고 애디는 피식 웃으며 팔짱끼고 말했다.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는 놈이 하는 일이다. 길을 개척하는 걸 지켜보자구.” 이젠 바닥이 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지진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비 뒤에 있던 국회의사당은 한쪽모서리가 무너져 내렸다. 기찬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속으론 엄청나게 긴장했다. “헉, 헉. 보이느냐. 이 몸의 힘이! 내 모든 파워가!” 비의 모습은 아까보다도 더 커진 상태였다. 3미터나 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저건 그냥 괴물과도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기찬이는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고맙다! 지금을 기다렸어! 무기속성 주입 발동, 월(月), 암(暗), 화(火), 수(水), 목(木), 금(金), 토(土), 천(天)!” 기찬이는 무기속성 주입을 시전 했다. 뒤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앞에 있는 비에게 말이다. “무, 무슨 짓이냐!” 비는 자신의 클레이모어에 지속적으로 힘을 불어넣는 기찬이를 보며 당황했다. 클레이모어는 화려한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사실 무기속성 주입은 한 속성밖에 주입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그건 게임상의 일이고 현실에서는 페널티가 전혀 없는 상태. 그 힘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뭐하는 짓이야! 적을 도와주고 있잖아?” 주르르는 입을 쩍 벌렸다. 드디어 미쳤구나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애디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거였어!” 애디는 빠르게 기찬이에게 달려갔다. 기찬이는 그러는 사이에도 다시 주문하나를 외쳤다. “땅은 대지의 양기, 하늘은 광활함의 천기, 가운데 서있는 우리는 영원의 우주이니 나의 존엄성을 바쳐, 나의 신념을 바쳐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가 되리라.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이것 역시 비에게 시전 했다. 비는 주르르가 생각한 것과 같은 걸 생각한 건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드디어 미치기 시작했나! 아주 보기 좋구…아악!” 웃던 표정이 급속도로 바뀌었다. 어깨가 쩌적 하고 갈라진 것이었다. 언제 다치기라도 한 것일까? 생각해봤지만 그건 아니었다. 갑자기 옆구리도 도자기처럼 쩌적 갈라지더니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내 몸이! 내 몸이 왜 이런 거야!” “네 몸에 용량이란 게 꽉 차서 그런 거겠지.” 지금까지 고통을 참고 있었던 기찬은 긴장이 풀린 건지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비는 그제야 저 꼬맹이가 왜 도발하고 자신의 풀 파워를 보여 달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은 완전히 속았던 것이었다. “젠장, 지금이라도 힘을 줄이면!” “그렇겐 안 되지!” 애디였다. 애디는 기찬이에게 다가온 순간 일월천검을 바닥에 내리 꽂고 외쳤다. “배틀 존 생성, 파괴의 의지는 이곳에서 이루어지리라!”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배틀 존의 오오라 까지 받은 비는 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괴성을 질렀다. 피가 여기저기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완전히 포화상태인 것이다. “그럼 나도 한팔 거들어야죠! 루나, 륀, 루네스, 루네디! 난 행한다. 절대의 공간을!” 루히비드가 다가와 달의 파편을 박아 넣었다. “내 것도 가져가라! 피의맹세. 변형, 피의 광세!” 글로리시나가 자신의 문양이 된 피의 모든 것들을 비의 클레이모어로 이전시켰다. “나도 한 팔 거들지! 부정의 바다여, 메마른 대지여, 혈색의 하늘이여!” 칼리도 힘을 사용했다. 붉은 기와 녹색의 기가 한 대 어우러져 귀곡마검 주위를 맴돌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귀곡마검은 칼리의 것이 아니라 비의 것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온몸이 터져나가는 모습은 바로 이걸 두고 하는 말일까? 몸이 뚱뚱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 사이로 피가 터져나갔다. 그 모습은 모두가 눈을 피하고픈 장면이었다. “평온의 안식.” 하지만 비의 몸은 터지지 않았다. 아주 작은 외침 하나 때문이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한 빛은 애초에 없었다는 사라졌고 우리들이 주입한 힘들도 민들레 씨앗이 흩날려 사라지듯 세상에 흩뿌려졌다. “이게 무슨…….” “하, 하하…….” 모두 기대하고 있던 일이 한순간의 꿈처럼 사라지자 허탈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뒤에서 구경하던 하진이 드디어 앞으로 나온 것이었다. “커, 커흑! 하진님! 제게 조금만 더 기회를! 이번에야 말로…커흑!” 그래도 다행이랄까 비의 상태는 이미 말도 못할 정도로 참혹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여기저기 피가 빠져나와 바닥을 적셨고 피부도 너덜너덜했다. 하진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비, 너는 실패했어. 우리의 약속은 깨졌다.” “아, 안 돼. 나는 아직 끝이…크아아아아악!” 기찬이를 포함한 모두가 놀랐다. 하진이 거침없이 비의 머리로 손가락을 박아 넣은 것이었다. 그 참혹한 광경은 구토가 나오기 충분했지만 다들 만성이 된 덕분에 겨우 참을 수 있었다. 하진은 박아 넣은 손가락을 밖으로 빼, 작은 칩 하나를 꺼내었다. “그럼 편히 잠들어라, 비.” 하진은 자신의 동료를 죽이고도 아무 감흥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밖에 많은 사람들은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제 모든 놀이는 끝입니다. 대홍수를 일으킬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까요.” 하진은 중앙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제야 모두 눈치 챌 수 있었다. 원뿔 기계 꼭짓점에 크기를 키워나가던 생명의 샘이 이젠 직경 10미터까지 커졌다는 것을. “이제 마지막 실험에 들어가게 됩니다. 세계가 탄생하는 순간을 지켜보도록 하세요.” 하진은 날개를 펼쳐 유유히 하늘을 날아가 중앙으로 이동했다. 기찬이는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건 기찬이뿐만이 아닌지 다들 날아가는 하진만 바라볼 뿐이었다. 하진은 느긋이 중앙 기계로 다가갔다. 그제야 기찬이는 정신을 차렸다. 엄청 위험하다는 걸 감지한 것이었다. “마, 막아요! 하진을 막아요!” 기찬이의 말에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중앙 기계 쪽으로 뛰었지만 이미 하진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칩을 기계에 장착시켰다. “마더, 작동하라!” 하진이 두 손을 활짝 펴고 외쳤다. 그러자 원뿔 기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기찬이는 자꾸만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무엇을 감지했는지 그는 몰랐지만 진실의 눈이 자꾸만 무언가에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뿔 기계 중앙 해치가 열렸다. 그곳에는 무언가 차갑게 열을 식히고 있었는지 차가운 기체가 바닥에 깔려 퍼져나갔다. 기찬은 눈을 부릅떴다. 지금 저 안에 있는 것을 믿을 수 없어했다. 그건 멋쟁이도 마찬가지였다. 그 안에 있는 건 나기찬의 누나 나소연이었으니까. “누, 누나아아아아아!” 나소연은 죽어있는 상태로 이곳에 이동되었던 것이었다. 혈색하나 없이 눈감고 있는 나소연의 모습을 보니 기찬이 눈에서는 눈물이 절로 나왔다. 하진은 그런 나소연을 안아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녀를 중앙 생명의 샘으로 던져버렸다. “무슨 짓이야!” 멋쟁이가 광분해 달려 나갔다. 하지만 그가 하진에게 도착하는 것보다도 중앙 생명의 샘이 요동친 게 더 빨랐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생명의 샘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움찔거리더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하진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아아, 성공이야. 역시 이 여자야말로 노아가 되기 안성맞춤이었어!” “노…아?” 기찬이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되뇌었다. 하진은 미친 듯이 웃으며 말했다. “세계를 바꿀 용량을 가진 자. 과거 노아가 그래왔듯 현세에도 필요한 개척자! 역시 비는 불가능했어요. 이 여성이야말로 노아가 되기 알맞은 인재였어요!” 나소연은 마치 알속에 들어간 생명처럼 몸을 말았다. 기찬이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설마, 설마, 설마! 하는 말만 되뇔 뿐이었다. “저럴 수가…….” “눈을 떴어.” “어찌 저런…….” 눈을 떴다. 나소연이 천천히 눈을 뜬 것이다. 하진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완벽했다. 완벽하게 성공을 이룬 것이었다. “노아여, 눈을 뜨라! 세상을 바꿔, 낙원을 선사하라!”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유리를 깨트릴 것 같이 소름끼치는 소프라노 목소리를 뱉는 나소연. 그녀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검은 피막의 날개가 등에 삐져나왔고 외치는 입 사이로 기다란 송곳니가 자라났다. 머리에는 한 쌍의 뿔이 튀어나왔다. 그 모습은 정말 악마, 그 자체였다. “베르제…브브.” 애디가 한 말은 거기 있던 사람들 모두가 생각한 것이기도 했다. 밖에 있던 사람들은 악마라며 도망가는 사람도 생겨났다. 베르제브브는 고양이같이 가는 눈으로 땅을 굽어보며 생명의 샘을 빠져나와 날았다. “자, 노아여. 시작하세요! 미래의 대홍수를!” 하진은 베르제브브 주위를 날아다니며 외쳤다. 천사와 악마가 같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그 이질적인 모습에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그때. - 푹! 베르제브브의 팔이 하진의 복부를 지나 등에 튀어나왔다. ㄱ자로 꺾인 하진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베르제브브를 보았다. “어, 어째…마, 마리…….” 하진은 마리아를 불렀지만 베르제브브가 마리아의 목을 쥐어 뜯어버린 게 먼저였다. 마리아는 순식간에 소멸 당했고 하진은 눈을 부릅떴다. 베르제브브는 마치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하진 등 뒤로 삐져나온 팔을 끌어당겨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피를 혀로 핥았다. “으, 으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아악!” 밖에 있던 사람들은 대 소란이 일어났다. 그 두려움을 참지 못해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다. 베르제브브는 팔을 털어 하진을 떨어트렸다. 핏빛으로 물든 하진의 날개가 초라해보였다. “현실의 베르제브브라니…….” “하, 하하.” 어이없어 헛웃음만 나오는 주르르와 칼리. 베르제브브는 잠시 그들을 노려보더니 하늘로 떠올랐다. - 퉁! 하지만 반구형태의 막이 베르제브브를 막았고 베르제브브는 그것을 마구 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지능은 없는 건가?” 물리공격이 통하지 않는 막은 베르제브브를 짜증나게 만들기 충분했다. 마구 손톱을 이용해 막을 찢을 듯 공격하던 베르제브브는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사방에 스파크가 튀어나갔다. 그것은 녹색의 구 전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정도의 막강한 힘이었다. 예전 게임에서 혈폭의 사막 전체에 사용한 베르제브브의 마계의 번개였다. “크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바닥에 누워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애디, 주르르, 루히비드, 칼리, 글로리시나, 멋쟁이, 어둠의조이까지 검은 스파크에 노출됐다. 단지 기찬이만이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스파크가 마계의 번개를 상쇄시켜 멀쩡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상황은 처참했다. 녹색의 막은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그 안에 멀쩡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쓰러져있었다. 서있는 자는 기찬이 한 명뿐이었다. “누, 누나.” 기찬이는 손발을 덜덜 떨었다. 무섭거나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 때문이었다. 베르제브브는 그런 기찬을 잠시 내려 보더니 유유히 어디론가 날아가려했다. 기찬이는 덜덜 떠는 입으로 외쳤다. “가지마! 누나아아아아아!” 그의 간절한 바람은 검은 스파크가 되어 하늘로 쏘아졌다. 베르제브브는 멈칫했다. 자신과 같은 기운에 경각심이 든 것이었다. “캬아아아악!” 쏜살같이 내려오는 베르제브브 그녀의 날카로운 손톱이 기찬이의 목을 노렸다. - 카가가가가가각! 기찬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스파크가 베르제브브의 손톱을 막았으나 전부 다는 아니었다. 볼에 생채기가 생기며 뒤로 날아간 기찬이. 그는 힘겹게 일어서며 말했다. “누, 누나. 나야 기찬이. 나 기억 안나? 누나 동생!” “크르르르릉.” 베르제브브는 짐승처럼 울며 기찬이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에 기찬이는 더욱 슬펐다. “기찬아…….” 상천이는 소연에게 공격당하는 기찬이의 모습을 도저히 볼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기찬이를 보아왔던 자신이라 더 안쓰러웠다. 누나만을 보며 누나에게 자랐던 기찬이였기 때문에 자신의 가슴이 자꾸만 아파왔다.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어요.” “어, 어딜 가겠다는 거야!” 아까부터 계속 눈물짓던 한나가 결국 참지 못하고 어디론가 이동하려했다. 그런 그녀를 주리아가 말렸는데 한나는 그런 그녀를 올려보다 고개를 가로 젓고 말했다. “가야만 해요. 기찬 씨가 울고 있어요. 그러니까 가겠어요.” “……….” 주리아는 잡고 있던 휠체어 손잡이를 놓았다. 이애는 그런 아이였다. 남이 아픈 걸 참지 못하는 연약한 아이. 대신 상처 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몸을 내주는 아이였다. 주리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완전히 졌다. 기찬을 생각하는 마음부터가 완전히 진 것이다. 주리아는 울먹이는 대신 활짝 웃었다. “너라면 할 수 있어! 힘내!” “…언니. 네!” 나탈리는 이 어린 두 소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사랑, 때론 애증을 낳고 질투를 낳는 잔인한 것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나탈리는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떠는 주리아의 손을 살짝 잡아주었다. 그런 모습을 모두 보고 있던 상천이는 생각했다. ‘부탁할게. 너라면 지금의 기찬이도 치료할 수 있을 거야.’ 상천이는 힐러에 대해 고심한 기찬이를 치료한 게 당신이라면 지금도 치료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단지 그냥 남자의 감이었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서 한나에게 간절히 기도하는 상천이였다. <극장판 완결> 생명의 바다 下(4)(잘린부분 다시 붙입니다.) 계속 나자빠져도 일어나는 기찬이를 보며 미소천사 기사단원들과 더 원 기사단원들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장난스런 분위기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저 모습을 보고 슬프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소천사님…….” “차마 볼 수 없어. 너무 잔인하잖아!” “일어나지 말아요. 그냥 누워있으란 말야!” 기찬이는 머리로 생각하길 관뒀다. 체력은 이미 떨어진지 오래였다. 그런데 저 멀리 나소연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일어났다. 기찬이는 단지 그것 하나만으로 일어났다. “누…나.” 간절히 무언가를 잡고 싶은 건지 손을 뻗는 나기찬. 베르제브브는 그런 그에게 가차 없이 손톱을 뻗었다. - 빠지지지지직! 하지만 여전히 검은 스파크는 기찬이를 보호했다. 그래서 기찬이는 다시 뒤로 튕겨 날아갔다. “피해! 도망가! 그만 도망가란 말야!” 저 멀리 있던 실버크로스 기사단이 소리 질렀다. 그들은 모두 울고 있었다. 그래도 일어서는 기찬이를 보며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일을 현실에서도 시도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젠장, 이번엔 정말 죽는 거 아냐.” “그러니까 도망가란 말야!” 후들거리는 다리로 기찬이의 앞을 막은 실버크로스 기사단. 그 모습을 본 미소천사 기사단과 더 원 기사단도 앞으로 나섰다. “오, 오줌 쌀거 같아.” “나 진짜 죽는 거야?” 이빨까지 딱딱 거리며 서있는 미소천사 기사단 중 한 명이 말했다. 베르제브브는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손톱을 길게 빼며. “이건 폼생폼사가 아니라 개생개사구나.” “지금 상황에서 웃기지 말아 줘. 나 오줌 쌀 거 같아.” 다덤벼곁에 있던 슈바리에단원들도 앞을 막아섰다. 그나마 사람이 많아 조금 덜 무서웠을 뿐이지 이곳은 게임이 아니었기 때문에 폼을 따질 여유는 하나도 없는 그들이었다. “다 개죽음 당할 거냐! 피해! 가자, 불사조!” “네! 레이나 누님!” “합작마법, 압착의 수환(water pills of compression) 연타!” 레이나 주변에 무수한 물 구슬이 모여 들었다. 그것은 언뜻 보면 그냥 물방울 같이 보이겠지만 사실 그건 엄청나게 압착된 상태였다. 아까 전 화선녀가 천천후섬을 사용했을 때 그곳으로 달려간 레이나는 반지의 힘을 듣고 자신이 착용한 상태였다. 그리고 다덤벼의 반지를 착용한 불사조와 함께 합작마법을 발현한 것이었다. -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압착의 구슬은 일제히 베르제브브에게 날아갔다. 하지만 베르제브브 주위를 둘러싼 암흑의 막이 전부 막아내었다. 베르제브브의 방어마법, 다크 쉴드(dark shield)였다. “조, 조금도 멈춰 세우지 못했어.” 레이나는 최고의 마법을 시전 했지만 단 한발자국도 멈추지 않은 베르제브브를 보며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반지를 빼든 하가네가 재빨리 착용하고 외쳤다. “연성진! 철패 형!” 하가네가 주위 가로등을 변형시켜 베르제브브 주위를 철 막으로 막아버렸다. 륀 기사단과 함께 있었던 철패는 재빨리 튀어나와 불사조의 반지를 넘겨받고 외쳤다. “이지스, 황금의 인 발동!” 철패의 무적의 방어라 불리는 자신의 특기를 사용했다. 페널티 없는 현실이야말로 절대의 방어라 불리기 손색없는 기술을 시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베르제브브는 너무도 간단히 철 막을 찢어버렸다. “아아아아악!” 가장 앞에 있던 철패가 뒤로 날아갔다. 하가네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피토했다. 미소천사 기사단과 더 원 기사단, 실버크로스 기사단, 슈바리에단은 더 다리를 떨며 뒷걸음질 쳤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악!” 스파크가 전 방위로 방출되었다. 기찬이를 막고 있던 기사단원들이 풀썩풀썩 쓰러졌다. 그들을 밟으며 다시 다가오는 베르제브브. 기찬이는 초점 없는 눈으로 그녀를 볼 뿐이었다. “제 5차 기폭! 이거나 먹어라! 에네르기 파아아아아아!” 하가네의 반지를 다시 빼 낀 다덤벼가 코피를 쏟으며 기공파를 쏘았다. 베르제브브의 다크 쉴드가 일렁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하늘로 튕긴 기공파를 보며 다덤벼는 정신을 잃었다. 그 사이 화선녀가 철패의 반지를 착용하고 기찬이의 앞을 막았다. 그녀역시 몹시 지친 상태라 기찬이를 들고 뛰고 싶었지만 그럴 여력이 없었다. “제발, 도망가. 부탁이야. 일월현문(日月現門)오의 천천후섬(天千厚剡)!” 화선녀는 기찬이에게 작게 속사이고 베르제브브에게 뛰어들었다. 자신의 천양화가 없어 지금은 임시로 가져온 목검일 뿐이었지만 기운은 진검 못지않았다. 기찬이의 초점 없는 눈이 몹시 흔들렸다. 베르제브브는 화선녀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다는 듯이 기찬이를 노려보며 팔을 한 번 휘저었을 뿐이었다. 천개의 칼날이라 부르는 천천후섬은 그 한 동작에 모두 상쇄되어 버렸다. “이, 이럴 수가.” 화선녀는 힘이 다 한 듯 베르제브브 옆에 쓰러졌다. “캬아아아아악!” 손톱을 길게 뻗은 베르제브브의 공격을 막은 검이 하나 있었다. “은신해제, 헉, 헉.” 가까스로 막은 자는 천양화를 든 글로리시나였다. 그녀는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지만 부들거리는 팔로 베르제브브의 손톱을 막았다. “소연…네게도 미안하다 사과하고 싶었지만 지금 상태론 무리…쿨럭!” 한 움큼 피를 토하는 글로리시나. 베르제브브가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반대쪽 손톱으로 글로리시나의 심장을 관통한 것이었다. “가, 가린 누나…….” 기찬이의 초점은 더욱 흔들렸다. 베르제브브의 손길에 따라 점점 위로 들려지는 글로리시나. 바닥에 떨어진 천양화가 높은 금속음을 내는 동시에 그녀는 저 멀리 날아가 구석에 처박혔다. “소연아, 이러지 마!” 이번엔 뒤에서 베르제브브를 껴안은 멋쟁이. 그의 표정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캬아아아아악!” 이번엔 베르제브브의 피막 날개가 멋쟁이의 양 팔을 잘라버렸다. 피가 사방으로 튀어나갔고 그 쇼크에 멋쟁이는 눈을 뒤로 까집었다. “태식 형…….” 믿을 수 없는 광경의 연속. 그게 자신의 누나가 한 행동이라는 것에 더 믿기지 않는 기찬이였다. 이제 아무도 막지 못하는 베르제브브의 손톱이 기찬이의 목으로 떨어져 내렸다. 기찬이는 눈을 감았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걸 잊고 싶었다. “선언합니다…가이아 여신님의 종, 아타셰가 여기서 선언합니다. 세상의 평화를, 쿨럭! 순화된 안식을! 편화선언(peace declaration)!” 베르제브브의 손톱이 정확히 기찬이의 목 언저리에서 딱 멈춰 섰다. 그의 목에서 피가 한 방울 맺혀 주르륵 쇠골 쪽으로 떨어졌다. 기찬이는 눈을 떴다. 그의 뒤에는 한나가 손을 모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약하신 분. 정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분이세요, 당신은.” 한나는 지금 서있었다. 다덤벼의 반지를 착용해 서있는 것이었다. 현실에서 자신의 두 발로 서있는 것이 꿈이었던 한나는 지금 그것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눈물만 흘렸다. 부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고정시킨 채 기찬이의 팔을 잡아 뒤로 당겨 자신이 앞에 섰다. 베르제브브는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한나야…….” 기찬이는 울먹였다.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 누나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그 누나를 죽여야 하는가? 죽은 누나를 또 죽이란 말인가! 그래서 기찬이는 자신이 죽으려 했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이젠 관심 없었다. 그냥 이대로 쉬고 싶은 게 전부였다. “울지 말아요.” 한나는 두 손을 기찬이의 양 볼에 가져갔다. 차갑기 그지없는 그녀의 손이 기찬이에게 닿자 움찔거리는 나기찬. 한나는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 입가에 닿는 촉촉한 감촉. 그리고 그녀의 눈물이 기찬이의 입으로 들어가 느껴지는 짭짜름한 맛. 하지만 그녀의 입술은 천천히 기찬이의 입술에서 턱으로 턱에서 가슴으로 떨어졌다. “하, 한나…….” 그녀의 얼굴이 기찬이의 가슴으로 향하자 기찬이는 볼 수 있었다. 무표정한 베르제브브가 바로 뒤에서 팔을 길게 뻗고 있는 것을. 기찬이의 가슴으로 한나의 피가 페인트칠하듯 묻어있었다. 쓰러지는 한나의 허리와 목을 받치자 그녀의 가슴으로 튀어나온 기다란 손톱이 보였다. 아직도 그곳에서는 선혈이 뭉클뭉클 샘솟고 있었다. “아아, 아아아.” 기찬이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그의 눈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그런 그에게 한나는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아아아아아아아!” 한나의 심장이 멈췄다. 맥박이 멈췄다. 숨을 쉬지 않았다. 그리고 미동조차 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 기찬이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 빠직, 빠지지지지지지직! 기찬이 주위에 검은 스파크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의 눈이 고양이처럼 변해갔다. 세상은 또 하나의 베르제브브를 탄생시켰다. “저, 저 모습은 베르제브브…….” 제갈공녀는 무릎 꿇고 허탈하게 기찬이와 베르제브브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젠 두 명의 베르제브브라 말해야했다. 오로지 파괴만을 가지고 있는 두 악마가 치고 박고 싸우고 있다. 그들이 뿜어내는 스파크가 왠지 세계의 멸망을 알리는 번개처럼 보였다. 진정 신은 인류를 버린 게 아닐까 생각한 제갈공녀였다. 꿈을 꾸었다. 내가 거대한 드레이크를 상대로 물을 흩뿌리며 싸웠고 한 아이의 죽음에 힘이 각성한 재미없고도 슬픈 꿈이었다. 꿈을 꾸었다. 녹색의 막 안에서 수많은 동료와 함께 괴물들을 상대로 싸운 꿈이었다. 그들은 강했고 우리는 약했는데도 어째서인지 질 것 같지 않은 싸움이었다. 꿈을 꾸었다. 악마가 태어나 하나둘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는 몹시 가슴 아픈 꿈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앞을 막고 버티다 쓰러졌다. 정화 누나가 내 앞을 막다 쓰러졌고 가린 누나가 심장이 찔린 채 죽어갔다. 태식 형은 양팔이 뽑혀 죽었고 한나는 내 앞에서 미소 지으며 죽었다. 주체가 안 될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가슴이 아팠다.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다. 그것은 악몽이었다. “기찬아! 일어나! 나기찬!” “헉!” 소름이 쫙 돋았다. 벌떡 일어나니 옷에 땀이 흥건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바닥에 캡슐, 작은 책상 하나와 창문. 내 방인 모양이었다. 누나가 나를 내려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뭔 꿈을 꾸었기에 뭔 놈의 소리를 그렇게 질러?” 아무래도 내가 소리까지 지른 모양이었다.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하아, 하아. 휴, 미안. 기분 나쁜 꿈이었어.” “어, 어라? 왜 울어?” “응?” 내가 운다고? 눈가를 훔치니 정말 울고 있었던지 소매에 물기가 묻어나왔다. “어, 어라? 어라라?” 멈추지 않는 눈물. 누나를 올려보니 더 심각해졌다. 누나는 그 모습을 보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미쳤냐?” “뭐가 드디어야! 기대했다는 듯이 말하지 마!” “흠, 그 말 들으니 정상 같기도 하고…정신 차렸으면 나와 밥이나 먹어.” 누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나저나 내가 정말 왜 우는 거지? 감정이 복받쳤나? 흠, 알 수 없는 일이다. 식탁에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고등어조림이 떡하니 중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누나를 노려보았다. “나에게 무슨 감정이 있는지 지금 말해.” “어제 밥을 안 드셨더만? 또 게임하느라 그랬지?” 저놈의 눈팅, 결국 어제 한 게임때문이었구만. 나는 크게 한 숨 쉬고 말했다. “그야 어제는 별로 밥맛도 없었고 그리고 그 게임이…응? 게임이…….” 그 게임이 뭐였지? 어라? 내가 어제 무슨 게임을 했지? “왜 그래?” “아, 아냐.” 나는 밥 먹으며 계속 생각했다. 게임이라. 뭔가 생각이 날 듯도 한…으웩, 이 고등어조림은 진짜 맛없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고민하다 전화기를 잡았다. “야, 상천아 우리 어제 뭐했냐?” {먼 뜬금없는 소리야?} 다짜고짜 물어본 내 말에 역시나 올 듯 한 답변이 들렸다. 내가 게임을 했다면 상천이녀석과 같이 했을 테니 물어본 건데 이 녀석도 아닌가? “아니다, 그냥 궁금해서 전화해 봤다.” {흠, 그래? 그나저나 마음은 정리했냐?} “응? 뭔 마음?” {그놈의 정사대전 때문에 고민하던 힐러. 뭐 그런 말 들으니 정리했나보네. 괜히 걱정했잖아.} “정사…힐러?” {어이, 야. 나기찬? 어이?}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정사대전? 그래, 난 정사대전을 마치고 힐러에 대해 자괴감이 들어 게임에 손을 놓았다. 그런데 어제 게임을 했다고? 내가 왜 게임을 해. 나는 대체 어제 뭘 한 거지? “저기요, 마법사님~” “헉!” “헉, 헉. 마법 수련 때문에 정신집중 상태였는데…하마터면 죽을 뻔했지 않습니까?” 내가 처음만난 마법사가 생각났다. 나는 어째서인지 두 팔로 가슴을 모으고 매우 매혹적인 미소로 그를 대하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매우 친근하게 대했다. 다시 만났을 땐 나를 도와주겠다고 사냥까지 같이 갈 정도니 말 다했다고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초원으로 나왔다. 짙게 깔린 잔디가 온 땅을 메우고 있는 곳이었는데 그곳의 사냥은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나대신 노루를 사냥하고 있었는데 원샷원킬을 할 만큼 수준이 낮은 곳이어서 든 생각일지도 몰랐다. 나는 무료하게 그런 모습을 보다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나는 그녀를 만났다. 백색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검은 단발머리의 작은 소녀. 네 명의 남자들에게 핍박받아 고개 숙이고 있던 모습은 내 짜증을 돋우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아, 아아아.” 내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래, 나는 그녀를 만났다.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실버크로스 기사단과의 대결에서 나에게 권위 운운하며 미소 짓던 사제, 자신은 걷는 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 말한 사제, 둠터틀 브레스에 당하려던 나를 밀쳐 대신 죽어준 사제, 내가 하라는 연기에 몹시 부끄러워하면서도 연기하던 사제, 여자로서 플레이하는 내 자신이 자괴감이 들어 도저히 그녀를 볼 수 없을 때 울었던 사제, 베르제브브와 대결에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나를 지켜주었던 사제, 그리고 내입을 맞추며 죽어갔던 사제……. “기찬아, 뭐해? 아까부터 멍하니.” “크흑, 누나. 누나, 누나아아아아!” “어머! 얘가 왜이래!” 나는 누나를 꽉 껴안았다. 그래, 이건 현실이 아냐. 어떻게 그걸 모두 잊을 수 있겠어. 그 행복했던 일들까지 없었던 걸로 치부할 수 있겠어! 그래도 껴안은 누나를 놓고 싶지 않았다. 이 현실을 가장 바랐던 게 나였으니까. 하지만 진짜 현실을 망각할 순 없었다. “누나, 미안해.” “응?” “…그리고, 정말 사랑해.” “……….” 이건 꿈이다. 이게 현실일리 없다. 내가 처한 현실은 시궁창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곳이 내가 있을 곳이었다. 다시 눈을 떴다. 차디찬 바닥에 누워있는 나. 내 머리위엔 방금까지 껴안고 있었던 누나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피막의 검은 날개를 퍼덕이며. “눈을 떴나요? 큭큭, 쿨럭쿨럭! 제가 모르던 현실이 너무 많군요.” 내 옆에는 하진이 누운 상태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피를 토하면서도 허망하게 나를 보았다. “이로서 알게 되었습니다. 노아는…세계를 멸망시키고 대홍수를 일으킨다는 것을…쿨럭쿨럭! 킥킥킥, 이래서 세계는 재미있지 않습니까? 내 예상을 뛰어넘는 세상이.” “…네가 이루고 싶은 꿈이 이런 거였냐?” 하진은 내 말에 잠시 먼 곳을 바라보듯 하늘을 올려보았다. “꿈…이 세상이 싫었습니다. 배신, 약탈, 시기질투, 모든 것이 불공평한 이 세계가 싫었습니다. 쿨럭쿨럭! 그럴 바엔 그냥 게임이 좋겠다고 생각했죠. 게임 같은 세상, 당신은 이해하지 않습니까?” 게임 같은 세상, 나 역시 한때 바라마지않던 꿈이었다. 언제나 새롭고 신비롭고 모험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말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 꿈에 불과했다. 그런 걸 바란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어디서나 내가 생각하는 세계는 존재한다. 단지 그걸 모르고 있을 뿐. 컴퓨터에 앉아 편하게 하는 게임은 힘들지 않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할 뿐이다. 실재로 게임 같은 세상이 현실에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지옥이지 않을까? “이해해. 그래서 나는 너와 달라.” 몸을 일으켰다. 허리에서 뚜두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진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작게 실소하고는 눈을 감았다. “저는…그래서 실패했나 봅니다…….” 하진의 심장은 운동을 정지했다. 나는 허망한 꿈을 꾼 사나이를 내려 보며 평온한 안식이 되길 기도했다. 정말 천사라도 된 건가? 순간 웃음이 나오는 걸 참고 하늘 위에 누나를 바라보았다. “누나, 이제 편히 쉬게 해줄게.” 나는 한 손을 펼쳤다. 나 역시 누나처럼 변한 것인지 손톱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비, 빛이다…….” “죽은 사람들에게서 혼이 빠져나가고 있어.” 사람들의 상념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슬프고도 애절한 마음들이 차례차례 나를 울렸다. ‘살려줘, 살고 싶어. 살려줘!’ ‘민호야, 나는…….’ ‘여보, 먼저 가오.’ 허망하게 죽은 당신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당신들을 울려서 미안합니다. 작게 빛나는 구슬들이 나에게로 들어왔다. 내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한 명 한 명에게 나는 사과했다. ‘기찬아, 이제 눈을 떠. 부탁이야. 죽지 마.’ ‘너에게도…그리고 기찬이도 사과하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 같았는데…….’ ‘소연아…사랑한다.’ ‘기찬 씨, 당신을, 당신을 진심으로 좋아합니다.’ 정화 누나, 가린 누나, 태식 형, 그리고 한나. 그들의 마음이 애달프게 들려왔다. 정화 누나, 저 죽지 않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가린 누나. 저도 가린 누나에게 사과하고 싶은 게 많아요. 그러니 마음아파하지 말아요. 태식 형, 형이 그 정도로 누나를 좋아할 줄은 몰랐어. 이럴 줄 알았으면 누나하고 더 오래 지낼 수 있게 해주었을 텐데. 그리고 한나야…나도 너를 진심으로 좋아해. - 파아아아아아아아앗! “악마의 날개사이에…….” “천사의 날개가 돋았어.” “…아름답다.” “박사님 저건…….” “아아, 소연 씨의 memory뇌파와 기찬 군의 memory뇌파가 완전히 결합했네. 두 사람의 memory뇌파가 결합하다니 이거야 말로 기적이야.” 나는 날아올랐다. 저 멀리 누나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누나 앞에서 양 팔을 펼쳤다. “이제 그만하자. 다 끝났어.” “캬아아아아아아악!” 내 심장을 뚫고 들어오는 차가운 감촉. 나는 그 상태로 누나를 껴안았다. 누나의 키가 이렇게나 작았던가? 이렇게 어깨가 왜소했던가? 나는 손바닥에 여덟 개의 속성을 생성시켰다. 그 속성들이 서로 맞물리듯 돌기 시작했다. 한때 내가 시도하려다 기절했던 올속성 결합. 게임의 한 달이란 시간이 주어지고 내 인생이 뒤바뀐 계기가 된 일을 지금 나는 다시 하고 있는 것이었다. 속성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돌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하나가 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블랙홀? 아니, 이건 하나의 혼돈, 카오스다. 그 혼돈의 구체를 누나 등으로 가져갔다. - 빠지지지지지지직! 아주 잠깐 다크 쉴드가 가로막았지만 이 힘을 막진 못했다. 결국 누나의 등은 노출되었고 나는 혼돈을 박아 넣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누나가 울었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미안, 누나. 내가 지금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어. 그때 한순간 누나가 나를 보며 웃었다. 마치 누나가 잘했다는 듯이 웃어주었다. 그건 착각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할 시간도 없이 누나의 몸은 분자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껴안은 누나의 몸이 사라졌다. 머리칼부터 손, 다리, 마지막으로 얼굴이 바람처럼 흩날렸다. 나는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하지만 누나가 웃어주었기 때문에 나 역시 억지로 미소 지었다. 그렇게 누나는 사라졌다. 졸리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나를 잠으로 몰아세웠다. 하지만 이대로 잠들 순 없었다. 아직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남았으니까. “마리아, 나와 줘.” [행복, 사랑, 그것은 하나의 축복. 고통, 저주, 그것은 하나의 불행.] 내 말에 답변이라도 한 것처럼 뒤에서 나를 껴안는 마리아. 나는 그녀의 손을 잠깐 잡다 말했다. “성배(聖杯) 발동.” 나를 껴안던 마리아는 양손을 활짝 펼쳐 하늘에 기도했다. 그녀의 간절한 기도를 하늘이 받아주었다. 거대한 빛의 구슬. 죽은 자를 살린다는 성배의 원형이 그녀의 손에 소환되었다. 빛의 구슬은 조각조각 나눠져 눈송이처럼 퍼져나가 쓰러진 사람들에게 하나씩 안착했다. 허망하게 죽은 사람, 아내를 생각하며 죽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은 사람, 사랑하는 이를 위해 지키다 죽은 사람. 그 모든 사람들에게 눈송이는 녹아들어갔다. “아아, 신이여.” “감사합니다.”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무릎 꿇고 기도했다. 죽은 사람들에게서 빛이 퍼져나갔다. 세상에 기적이 퍼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눈을 뜨지 않았다. “아아, 왜 살아나지 않는 거야!” “사람으로선 역시 불가능한 영역이란 말인가…….” 혜숙 씨가 가슴을 쥐어짜며 외쳤다. 임박사님은 털썩 주저앉으며 다 포기한 목소리로 말했다. 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가슴의 고통이 더욱 심해져왔다. 역시 살리는 건 무리인가. 왠지 그럴 거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사용해 본건데 역시나였다. 나로서…아니, 사람으로선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이 모습이 되니 그 사실을 더 잘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날고 있을 힘이 없어 추락했다. 다행히 마리아가 나를 받쳐줘 땅에 안착할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이 없었다. 이렇게 일이 끝나는가. 차라리 비라도 왔으면 좋았을걸. 그때 한줄기의 빛이 둥실 내 눈앞에 나타났다. 아직 성배의 조각이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빛은 천천히 내 주위를 선회하다 어디론가 날아갔다. 내 눈은 그 빛을 좇아 고개를 틀었고 빛은 마더라는 원뿔 기계가 있는 곳에서 사라졌다. memory뇌파 대홍수를 일으켜 세계를 바꾼다는 생명의 샘. 하진은 저것을 이용해 모든 세계를 뒤바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핵심인 노아가 전 인류를 사살하려는 마음을 몰라 자신역시 죽음을 맞이하게 만든 기계. 어찌 보면 모든 원흉은 저 기계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아직 끝이 아니었다. 이 세계를 뒤바꾸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쓰러지고 마는 몸. 도통 내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애썼다. 나기찬.” “…상천아.” 언제 상천이가 와 있었던 걸까. 상천이는 나를 부축했다. 그의 볼에도 눈물자국이 나있는 걸로 보아 나를 위해 울어주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지막 부탁이 될지도 몰라. 저기까지만 나를 대려다 주겠어?” 나는 턱짓으로 중앙 기계를 가리켰다. 상천이는 내 몸 상태를 보고 다시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흑, 으흐흑!” “…주리아.” 금발의 작은 소녀 같은 누나가 흐느끼며 내 반대편 어깨를 들어올렸다. 키가 작아 까치발까지 드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수고하셨어요.” “…수고했네.” “수고했어.” 한혜숙 씨와 임박사님, 주조철 씨가 내 허리를 받쳐 들었다. 임박사님은 저 멀리 쓰러져 있는 한나를 보며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떨었다. 그분의 턱수염이 푸들거리는 걸 보고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상태로 어느 정도 걸었을까. 이렇게나 사람이 많았을까. 하나둘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기계의 거의 도착할 즈음엔 빼곡히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으흑! 힘내!” “당신은 구세주야. 오늘 일을 결코 잊지 않겠어!” “으흐흑, 으흐흐흐흐흑!” “네가 우리를 구원했어! 어깨를 펴!” “네가 진정한 영웅이다, 소년!” “으허어어어엉!” 나도 울고, 상천이도 울고, 주리아도 울고, 한혜숙 씨와 임박사님도 울고, 주위 사람들도 울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기계 위, 생명의 샘을 보았다. 저기까지 갈 힘이 없어 난감했다. 상천이는 내 시선을 따라 올려보더니 말했다. “저리로 가려는 거냐?” “내, 내가 거들게!” “나도 같이 합세!” “나도 도와주겠네!” “들어, 들어!” “모두 모이세요! 들어 올립니다! 하나, 두울, 셋!” “으라차차!” 수많은 사람들의 손으로 들어 올려진 나는 등에 닿는 따스한 손길들을 느끼며 천천히 생명의 샘이 있는 곳으로 옮겨졌다.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 그 감동에 가슴이 아픈 것조차 모를 지경이다. 기계에 타올라 나를 든 남성이 슬픈 듯 말했다. “이렇게나 가볍다니…그런 몸으로…올리겠네!” 남성은 입을 꽉 다물고 나를 위로 올려주었다. 그 위에 있던 사람이 또 나를 잡아 올렸고 그렇게 생명의 샘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었다. “이곳에 넣어주면…되는 건가?” “…네. 부탁드려요.” “부탁할 거 없네. 이미 많은걸 받았으니까.” 남성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생명의 샘 안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생명의 샘 안은 정말 따스했다. 마치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것같이 아늑하고 평온한 느낌. 순간 긴장이 풀렸는지 졸음이 몰려들었다. 자고 싶다.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들고 싶어. 하지만 아래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때문에 결코 쉴 수 없었다. 상천이가 나를 올려보고 있다. 혜숙 씨, 임박사님 조철 씨가 나를 보고 있다. 저 멀리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있는 애디, 루히비드, 주르르, 칼리도 있다. 미소천사 기사단원이 울고 있었고 더 원 기사단이 그들을 토닥이며 나를 보았다. 실버크로스 기사단의 단장이 굳게 다문 입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올려준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잠들 수 없었다. 생명의 샘이 율동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힘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생명의 샘은 나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 것인지. 생명의 샘은 그야말로 바다였다. 태평양보다도 큰, 무엇이라도 받아들이는 생명의 바다였다. 나는 그에게 호소했다. 간절히, 하나의 마음만을 바랐다. 그리고 현세의 대홍수가 일어났다. 3년 후. 일주일 전, 드디어 성인이 된 나는 녀석이 그렇게나 재미있게 플레이해오던 아펜하르트를 시작했다. 이 세계는 정말 잘 만들어져 녀석도 혹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해킹을 해서라도 들어오는 거였는데 말이다. 뭐, 지금 후회해 봐야 늦었지만. 3년 전, 세계는 일주일간 대홍수가 일어났고 그것이 사라진 이후, 어째서인지 모든 것이 원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그거야 말로 하나의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진이 만들어놓은 모든 건물들, 자료들은 애초에 없었다는 듯이 사라졌고 그들로 인해 죽었던 사람들, 건물들은 전부 시간을 역행한 것처럼 돌아와 있었다. 그 기적은 한국을 떠나 전 세계의 사람들이 한국에 찾아올 정도로 대 사건이었다. ‘신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살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말하는 바티칸의 바오로 4세 교황의 말이 생각났다. 그렇다. 우리 인류는 기찬이란 신으로 인해 구원 받을 수 있었다. 그 이후, 아펜하르트 게임은 임박사님이 다시 새롭게 설계하여 6개월 후, 정식으로 다시 오픈했다. 물론 그때와 같은 악행이 없게끔 설계했다고 하니 다들 편히 즐기는 공식 1위의 게임이 되어버렸다. 지금 게임에서는 명실상공 라이벌인 더 원 기사단과 미소천사 기사단의 101번째 기사대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지금 나는 그걸 구경하기 위해 언덕 위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오늘에야 말로 미소천사 기사단을 더 원 기사단으로 합류 시킬 것이다!” “우오오옷! 가자! 칼리포립스!” 칼리 형과 주르르 형은 만날 티격태격하면서도 싸움만 벌어지면 아주 죽이 척척 맞는다. 잘못하단 아주 사귈 기세다. 생각만 해도 오싹거리는군.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제가 있는 한 미소천사 기사단은…….” “현빈 씨, 지금 애가 우는 거 같아. 좀 나가 봐.” “아, 응? 자, 잠깐 지금 중요한…….” “닥치고 안 나갈래?” “…네.” 어둠의조이 형은 이미 애가 둘이나 딸려있는 아빠였다. 아아, 공처가의 현실이여. 나는 수희 누나 같은 사람은 정말 만나지 말아…헉, 흑장미 아주머니가 날 봤어. “좋아! 그 막강 개사기 어둠의조이가 빠졌다! 지금이다! 루나, 륀, 루네스, 루네디! 난 행한다!” 이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나이가 많은 루히비드 아저씨가 하는 말치고는 참 내 또래 같아 어이가 없다. 개사기가 뭐야 개사기가. 3년 전 때만해도 저러진 않았다는데 아내가 살아나고 부터는 저렇게 변했대나 뭐래나. “행하긴 뭘 행해! 야, 발 빠른 네가 막아야할 거 아냐!” “이 여자가 지금 누구한테 명령이야!” 아, 화선녀 누나하고 다덤벼 형도 보였다. 아, 저번에 슈바리에단이 미소천사 기사단으로 합류했다고 했었지? 원래는 절대 합류하지 않을 사람이었는데 화선녀 누나의 압박으로 결국 합류한 것이었다. 응? 왜 저런 압박을 받냐고? 그럴 수밖에. 이제 둘은 남남이 아니니까. 나도 그 소식 들을 땐 무진장 놀랐다. 정말 어울리지 않는 커플 아닌가? 어떻게 둘이 눈이 맞을 수 있지? 지금도 의문이 드는 현실 중 하나였다. “귀찮아, 빨리 끝내자. 댄싱 멜로디(dancing melody) 변형, 결착의 댄스!” “우와아아아악! 사신이 떴다!” “피, 피해! 저기선 도망 가!” 더 원 기사단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너나할 것 없이 도망갔다. 아 글로리시나 누나구나. 저 누나는 가끔 심심할 때마다 용병으로서 기사대전에 참여하곤 했다. 더 원 기사단과 미소천사 기사단이 수없이 등용하려했지만 언제나 프리스타일을 고집한다나 뭐라나. 그래도 정은 미소천사 기사단 쪽에 가있는지 항상 용병으로 올 때면 미소천사 기사단 쪽으로 붙곤 했다. 그나저나 더 원 기사단도 운 나쁘네. 하필 사신이라 불리는 자가 도와주러 왔으니. “왔나! 오늘에야말로 결판을 지어주마!” 아, 애디 아저씨다. 오늘 랭킹 1위와 2위가 한 판 붙는 걸 볼 수 있으려나? “애디님, 잠깐만요! 저쪽으로 가면 중심이 흔들려요. 지금은 자중하세요.” “끄응.” 하지만 그 옆에 있던 제갈공녀 아주머니가 막았다. 쩝, 재미있는 걸 구경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저 두 분은 최근에 결혼으로 골인한 사이였다. 사귄지도 꽤나 되었으면서 결혼은 뭐 저리 늦게 하는지. 파이터라 불리는 애디 아저씨가 제갈공녀 아주머니도 위험에 처할까봐 거절했다고는 하는데 잡혀 사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거라며 푸념한 아주머니의 말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면 저 아저씨는 천상 파이터라니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순식간에 하늘이 밝아졌다. 윽, 눈부셔. 이 빛은! “아, 나, 나왔다.” 양쪽 기사단원들이 일제히 하늘을 보았다. 그곳에는 하나의 천사가 날고 있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천사, 기사단원들은 다시 일제히 외쳤다. “악마가 나왔다!” “젠장 떴어!” “누, 누가 악마냐아아아아아아아!” 분명히 빛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천사였다. 그런데 그녀의 몸에서 뿜어지는 것은 검은 스파크. 더 원 기사단뿐만이 아니라 같은 미소천사 기사단까지도 쓰러트려 버리는 엄청난 힘이었다. 그렇다, 저분은 녀석의 누님인 나소연 누나였다. 그나저나 여, 역시 한 성격하는 분이네. “하아, 너를 끌어들인 게 정말 잘한 건지 아직도 의문이 든다.” 그 아래 있던 태식 형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말했다. 나소연 누나가 살아났을 때 가장 오랫동안 울었던 건 저 태식 형이었다. 살아난 소연 누나를 보자마자 결혼하자 말해 뺨을 맞은 사건이 떠올랐다. 그때 다들 배꼽잡고 웃었었는데. 그런 누나가 기찬이를 생각하며 미소천사를 플레이한지 벌써 3년 째. 이젠 미소천사가 아니라 미소악마로 더 유명해졌지만 속은 매우 착한 누님이기에 분명했다. “하아, 나는 언제 저 사이에 껴들어 갈 수 있을까나.” 괜히 한숨만 나왔다. 내 주위엔 이렇게나 강자가 널렸는데 정작 나는 이게 뭔가 말이다. 아, 어제는 간신히 노루를 잡았다. 동물이라고 얕봤는데 그놈의 저력에 하마터면 접속해제 당할 뻔했다는 건 음, 말하기 부끄럽다. “킥킥, 상천 씨도 어서 레벨을 올리셔야죠.” 내 옆에 있던 한나 씨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해 킥킥 거리며 말했다. 허, 초창기부터 하던 유저가 그때랑 지금이랑 변함없는 모습으로 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되어집니다만? “백날 키워줘도 노루 한 마리에 로그아웃 당하니 제자리일 수밖에.” “제, 제가 언제 로그아웃 당했다고 말하는 겁니까! 당할 뻔했을 뿐이에요, 당할 뻔!” “그거나 저거나.” 주리아 누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래, 내가 누나한테 도움을 좀 많이 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까지 말할 건 없지 않은가! “킥킥, 두 분 사이가 많이 좋아졌어요.” “네? 사이가 좋다고요?” “한나야…네 눈엔 이걸 사이가 좋다고…….” “어? 아닌가요? 주리아 언니는 남자 기피증 있잖아요. 친해진 남자한테만 그나마 덜하다…읍!” 갑자기 주리아 누나 얼굴이 시뻘개 졌다. 어라? 남자 기피증? 그런 게 있었어? 왜 난 몰랐지? 자, 잠깐, 그러다 한나 씨 죽겠어요! “푸하! 어, 언니가 날 살해하려 해요!” “푸풉! 푸하하하하하하!” 완전 미친 듯이 웃어대는구만. 주리아 누난 완전히 시뻘게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상태였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렇게 꼭 붙어 있을 거야?” “네? 아, 왜요?” 한나 씨가 진심으로 무슨 말이냐는 듯 물어왔다. 허, 참나. 저렇게 순진해도 솔로에게 비수를 꽂을 수 있구나. “그만 좀 떨어지라고 두 사람! 나 열불 터지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힉! 상천 씨, 또 폭발했어요!” “킥킥, 쿨럭쿨럭! 킥킥, 아흑!” 어쭈, 이젠 내 모습을 보고 아주 바닥을 긁으신다. 결국 나만 바보라는 것이겠지. 나는 누워 하늘을 보았다. “그래서 생명의 샘에게 바란 이상향이 이거였냐?” 그는 잠시 나를 내려 보더니 나처럼 옆에 누워버렸다. 그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바랐던 건 단 하나였을 뿐이야. 힐러가 되어달라고.” “힐러? 생명의 샘에게?” 그는 피식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사냥이나 가자! 저거 구경하니 몸이 근질근질하다. 조금 있다가 밥먹어야하니까 그전까지 좀 더 키워야겠어!” “허, 방금 전까지도 사냥만 했으면서 뭐가 되려고 만날 사냥이야!” “나? 뭘 새삼스레 당연한 걸 묻냐? 나는…….” 바람이 불었다. 녀석의 말이 끝까지 들리진 않았지만 정말 새삼스레 다시 들을 필요도 없지. 내가 어련하겠냐고 말하자 주리아 누나와 한나 씨가 웃었다. 나는 결린 어깨를 풀고 일어났다. 오늘은 고요의 숲 쪽으로나 가볼까? 한나 씨가 곤충들을 좋아하니 뭐 나쁘지 않겠지. 우리들은 저마다 시시덕거리며 언덕을 내려갔다. 저 멀리 하늘 위로 날아가는 바람이 우리들을 배웅하듯 이렇게 속삭인다. ‘힐러다.’라고. (또 다른 에필로그)4년후 어느날. “후하, 이곳이 그 유명한 미소천사 기사단이 있는 곳이구나!” 머나먼 여행을 떠나 드디어 아페타 제국에 도착했다. 이곳은 최초의 힐러이자 신문에서도 유명한 영웅이 탄생한 곳이라 알고 있다. 역시나 영웅이 탄생한 지역은 달라도 많이 달랐다. 여타 다른 제국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웅장함과 견고함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이런 곳이 처음에는 마을이었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아페타 마을에 들어선 나는 일직선으로 달려 관광명소 1위에 속하는 미소천사 기사단에 도착했다. 크기가 성에 버금갈 정도로 커다랗다. 꼭대기를 보고 있을라치면 목이 아파올 지경이니 말 다했다고 볼 수 있다. “이곳이 그분이 만든 미소천사 기사단…….” 감동의 물결이 목 언저리까지 차올랐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 같은 사람이 꽤나 많은지 멍하니 건물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에구구, 나도 저 사람들처럼 바보처럼 서있었던 건가? 안 돼지, 안 돼! 나는 구경을 목적으로 온 게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기사단원이 서있는 입구 쪽으로 거침없이 발길을 놀렸다. 하지만 위축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이렇게 큰 건물을 본 바에야 사람이 위축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멈춰. 용건을 말해라.” 내가 문 가까이 다가서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나를 가로막는 기사단원. 요즘은 NPC가 경비직원을 맡는데 반해 미소천사 기사단은 여전히 유저들로 하여금 돌아가며 경비를 서고 있다고 했다. 명목상으론 기사단의 자부심을 갖추기 위해서라는데 내가 보기엔 그냥 귀찮아서 이러는 것 같다. “저기, 미소천사 기사단에 들고 싶어서 왔는데요?” “아아, 또 그녀에게 낚여 기사가 되겠다고 자청하는 불쌍한 시주가 왔구먼. 나는 이렇게 초롱초롱한 눈빛의 아이가 우리 기사단에 들어오는 게 가장 안타까워. 크흑!” “울지 말게. 기사단의 실상을 봐 충격 받는 건 어차피 우리가 아니니 말야.”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유저와 토닥이는 유저. 이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왜 신파극이냐고. “저기…그게 무슨 말…….” “아아, 신경 쓰지 말게. 아마 그 신문에서 떠받드는 영웅을 찬양해 여기까지 찾아온 거겠지. 나름 그녀만의 기사가 된다는 둥, 영원히 따르겠다는 둥 굳은 의지를 가지고서 말야.” “그게…잘못된 건가요?” “잘못됐지. 한참 잘못되고말고.” “그래서 우리는 순진한 아이를 보면 안타까워 죽겠…….” “그거 우리 누나가 들으면 아주 곡소리 나겠는걸요?” “곡소리뿐이겠어, 뼈도 못 추릴…허어어어어어어헉!” “타, 타, 타, 타, 타테!” 갑자기 얼굴빛이 새파랗게 변한 두 유저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타테? 처음 듣는 아이디다. 대체 누구지? “미안, 이 형들이 누나한테 반해서 너같이 예쁘장한 남자가 오면 꼭 저렇게 말하곤 해. 그러니까 네가 이해해.” “그, 그럼! 그렇고말고! 우리는 정말 사심이 있어 한 말이야! 그러니까 그분한테는 절대로 비밀이다! 타테, 정말 비밀이야!”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누가 진담인지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타테라는 사람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대체적으로 순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키 작은 남자. 얼굴도 평범해서 그다지 인기는 많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뭐랄까, 기세? 분위기? 잘은 모르겠지만 보통사람과는 다른 뭔가를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특이하네. 내 능력으로도 저 사람이 누군지 잘 구별되지 않아. 대체 누굴까? “그나저나 기사단에 입단하고 싶다고? 그렇다면 들어가자. 나도 어차피 누나한테 볼일이 있었으니까.” “네? 아, 네.” 누나? 이 사람의 누나가 나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나는 알 수 없어 이마를 찌푸린 채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은 대체적으로 한산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낮이라 다들 한창 렙업하고 있으려나? “어? 현빈 형 있었네요?” 그때, 우리 맞은편에서 무수히 많은 책들을 들고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수수하게 웃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인 남성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많이 본 이미지다? “어? 타테님.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그동안 뭐하고 지내셨어요? 아니, 수희 누나가 용케 허락했네요?” “쉿!”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당황하는 수수한 인상의 남자. 타테님이 그 모습을 보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또 몰래 들어온 거예요? 그러다 저희 기사단이 남아나지 않을 거 같은데…….” “한 번 만 봐주세요. 요즘 읽고 싶은 책이 얼마나 많은데 게임엔 들어오지도 못하고. 저도 괴롭습니다.” 현빈이라는 자의 모습을 보니 왠지 처량해 보이는 건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하아, 저번에도 그렇게 사정 봐주다 파소에들 끌고 저희 기사단으로 쳐들어온 거 기억 안 나세요?” 파소에? 설마 지금 위치의 산맥에서 최종 포식자로 알려진 파소에를 말하는 건가? 그것들이 기사단엔 왜 쳐들어온단 말인가. 도무지 지금 하는 얘기가 이해가지 않았다. “하하, 하하하! 그보다 여기는 무슨 일이시죠? 그리고 이분은…….” “아! 맞다. 미처 생각 못했네. 이쪽은 저희 기사단 입단 희망자에요. 그…….” “빛의 강림이에요. 다들 줄여서 빛강이라 부르죠.” “빛의 강림? 아이디가 조금 특이하시네요. 특별한 이유라도?” 내 아이디를 듣고 다들 그런 반응을 보이곤 한다. 현빈이라는 자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힐러를 목표지향하고 있거든요. 제 꿈이 미소천사님처럼 되는 거예요. 일단 그 전에 그분부터 보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래요? 그분이라면 이미 보고있…흠.” 상황이 조금 이해가지 않는 듯 말하다 갑자기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현빈이라는 남자. 그러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아이처럼 얼굴을 활짝 피고 말했다. “아하, 지금 순수한 어린애한테 영웅놀이 하고 싶은 거였어요?” “하아, 현빈 형. 저는 별로 그럴 생각도 없고 해본적도 없습니다. 저도 지금 처음 들은 거라고요.” 대체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자꾸 이해안갈말만 골라하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저기 있잖아. 그 미소천사라는 게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거든?” “네?” “그러니까, 네가 생각하는 미소천사가 금발을 휘날리며 힐러로 활약하는 그런 이미지 맞지?” “네!” “그게 그러니까…하아, 안 되겠다. 도저히 초롱초롱한 눈빛의 아이를 무너트리지 못하겠어. 뭐 곳 알게 될 테니까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겠지. 현빈 형, 태식 형하고 누나는 지금 어디 있나요?” “음? 예쁜이님하고 멋쟁이님이요? 모르셨어요? 오늘 아침부터 더원 기사단하고 회합을 명목으로 떠나갔는데…….” “…네?” “회합을 명목으로…….” “회합을 빙자한 결투겠죠. 아아, 젠장. 결국 헛걸음했잖아. 그 빛강이라고 했나요? 아무래도 지금 이곳에 없는 모양이에요. 이거 죄송하게 됐네요.” “아니요. 저야말로 이렇게까지 신경써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뭐, 시간은 많으니까 다음에 다시 찾아오면 되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나는 급하게 손사래 치며 괜찮다는 의사를 표했다. 하지만 조금 안타깝긴 했다. 드디어 그 미소천사라는 분을 볼 수 있나 싶었는데 별수 없나. 내일 다시 찾아오……. “좋아! 결정했어. 가죠. 제가 여기까지 끌고 온 이상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네? 어디로 가시려는?” “어디긴 어디에요. 더원 기사단이지.” “에엑! 지금 그곳은 적대 기사단 아닌가요? 그곳엘 지금 저희 둘이서 가자고요?” “네.” “죽을 텐데요? 분명히 죽어요!” “걱정 마세요. 든든한 아군도 끌고 갈 테니까. 그렇죠, 현빈 형?” “든든한 아군이 어디 있…서, 설마 지금 저도 가야한다는 말씀? 전 싫습니다. 전 정말 오늘 책만 읽고 다시 애보러 갈 생각…….” “오늘 책 읽은 거 비밀을 간직하고 싶으시다면 오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만?” “……….” 현빈이라는 자는 뭔가 휴지를 씹은 표정으로 얼굴을 구기더니 이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런데 저 분이 든든한 아군이 될 수 있을까? 그 많은 더원 기사단을 상대하는데 저 분 하나만으로 다 해결될 거라고? “저기…다시 생각해 보는 건…….” “자, 출발!” 저 타테님은 정말이지 막무가내로 현빈이라는 자와 나를 끌고 나갔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아까 전에 파소에가 미소천사 기사단에 쳐들어 왔다고 하셨는데…정말이에요?” “으윽, 그 일은 언급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나는 타테님에게 물었는데 현빈이라는 자가 답했다. 뭔가 찔리는 거라도 있는 걸까? 우리는 현재 한창 더원 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지금은 숲속이었는데 이곳만 지나면 더원 기사단이 있는 곳에 도착할 듯싶었다. “킥킥, 흑장미 아주머니가 제대로 한탕 하신 일이었죠. 그날 유선이가 아아, 유선이는 현빈 형 아들이에요. 여하튼 그 애가 아파서 열이 펄펄 끓는데 그것도 모르고 현빈 형은 게임에 접속해있었다죠. 덕분에 빵 터진 아주머니가 병사를 일으킨 거예요. 이 기사단이 사라져야 게임을 그만둘 거 같다고 말이죠. 그날은 정말이지…기사단 역사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죠.”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지금 뭔가 어마어마한 말을 들은 거 같은데……. “지, 지금 흑장미 아주머니라는 분이 설마 파소에를 이끄는 위치의 산맥의 지도자 흑장미 여성을 말하는 건 아니겠죠?” “맞는데요?” 당연한 것을 왜 묻냐는 표정이다. 자, 잠깐. 그 분이 아이가 있어? 유부녀였어? 아니, 그보다 그분과 결혼한 상대가 지금 이 현빈이라는 자야? “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절대자라 알려진 흑장미 여성과 결혼을…….” “아, 제 소개를 아직 안했군요? 저는…잠깐, 슬슬 도착한 거 같네요. 마중이 있는걸요?”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며 정면을 주시하는 현빈이라는 자. 계속 가늘게 눈이 웃고 있어 표정변화는 거의 없었지만 그 행동 하나만으로도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존재감이다. 내 능력이 발동 안 되었는데도 변화가 확연히 보일 정도야. “아, 그러고 보니 거의 도착했었네.” 하지만 타테님은 이런 분위기가 익숙한 듯 유연하게 미소 지으며 정면을 주시했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숲속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리라. 그런데 그런 숲을 뚫고 무언가 보고 있단 거야? 이 사람, 아까부터 거대한 장궁을 등에 매고 있어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궁수인거 같았다. 그래서 눈이 좋은 게 분명해. “이런, 들켜버렸네. 하지만 이미 늦었어.” “너희들은 포위됐다. 지금 미소천사 기사단과 더원 기사단이 항쟁중인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잘도 여기까지 기어왔군?” 역시 더원 기사단이다. 벌써 우리의 존재를 눈치 채고 포위해버렸으니까. 저쪽 기사들 하나하나 전부 존재감이 어마어마했다. 역시 오면 안 되었어. 이런 눈에 띠는 하트마크 휘장 따위 하고 온 것부터가 죄라고! “그럼, 부탁해요.” “하아, 이럴 줄 알고 저를 데려 온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저만 피곤하네요.” 현빈이라는 자는 거대한 은빛 장궁을 꺼내들며 한숨을 쉬었다. 막상 활을 등에서 손으로 가져가니 장궁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어, 어라? 자, 잠깐. 그 은빛의 장궁은…….” “에이, 설마. 그분이 지금 이곳에 있겠어?” “아니야! 내가 알고 있는 저 비열한 눈웃음의 사나이는 한 명밖에 없다고!” “…죄송하지만 제 눈웃음이 비열하다고 말하는 건 실례입니다! 스턴 샷!” 엄청난 빠르기였다. 빠르게 한 바퀴 돌며 화살을 쏘았는데 다섯 명의 전사를 전부 맞춘 것이었다. 궁수에 대해 정확히는 모르지만 상식정도는 알고 있다. 몸을 움직이며 쏘는 화살은 명중률이 현저히 낮아진다는 걸 말이다. 그런데 회전하며 그렇게 빠르게 다섯 발을 쏴? 그걸 전부 명중시켜? “으윽! 이 파워, 이 스피드. 젠장, 호랑이를 건드렸군.” “이런 속도에 명중률을 자랑하는 궁수는 내가 아는 한 한 명밖에 없지. 일발필중, 당신인가?” “네, 비열한 웃음에 일발필중이 저 맞습니다! 풍향확인 완료, 습도확인 완료, 조준 완료, 스크류 엔드 일루젼 매직 샷!” 단 한발을 쏘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빙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마치 유도탄처럼 정확히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화살이라니 믿을 수 있겠는가? 나도 실제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크으으윽, 역시…대단하군.” “…당신을 뵙게 돼서 영광이었소.” “다음엔 좀 더 버텨내고 말겠어…….” 더원 기사다원들은 억울한 기색도 없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쓰러졌다. 회색빛으로 물드는 거 보니 로그아웃 당한 모양이었다. 원샷 5킬? 나는 멍하니 현빈이라는 자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궁수 중에 이정도로 뛰어난 자는 한 명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저자는……. “당신은, 당신은!” “아, 아까 소개하다 말았군요. 다시 인사드립니다. 저는 명예랭킹 7위, 일발필중 어둠의조이라고 합니다.” “여, 역시 어둠의조이님!” 감격이었다. 미소천사 기사단 중에 넘버3라고 알려진 인물. 화살하나로 천지를 꿰뚫고 바다를 가른다는 인물이 바로 저분이었다. 진심으로 상대와 싸운다면 명예랭킹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베일에 휩싸인 자가 저분이기도 했다. “사, 사, 사, 사인 좀 해주세요!” “네?” 막상 사인해달라고 조르긴 했으나 지금 아쉽게도 연필과 노트가 없었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구해놓을걸. “하하하, 이거 저는 사인할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게다가 제 옆에 누가 서있는데요.”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타테님을 곁눈질하는 어둠의조이님. 타테님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추켜세우지 마세요. 자, 가죠. 여기서부터 이럴 정도면 한창 싸우고 있겠네요.” “뭐, 항상 있던 일이니 별로 내키진 않지만 가죠.” 저 둘은 지겹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걸어갔다. 나는 뭔가 감동에 가득 차 두 유저를 뒤따라갔다. 그 감동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도 모른 채. 더원 기사단이 있는 곳에 도착하니 이미 상황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수많은 전사들이 팀을 갈라 밀고 당기며 싸우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온몸을 붉은 갑주로 무장한 예쁘장한 남성유저와 어마어마한 덩치에 푸른 각질이 유독 눈에 띄는 남성유저가 자신의 몸만큼이나 큰 대검과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는 검을 서로 맞대며 싸우고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끝장을 보자! 타올라라, 몸이여. 불살라라, 마음이여! 인화(人火)!” “흥,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루시 간다! 지술, 풍수!” 불꽃의 검을 든 자가 뭐라 외치자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불길이 넘실거렸다. 그 모습은 한마디로 하나의 불덩이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대검을 든 상대도 예상했다는 듯이 뭐라 외쳤고 그 순간 대검의 손잡이가 반짝이는 것과 동시에 바닥에 지뢰라도 깔아두었던 것처럼 전방을 향해 폭발했다. 주위 5m가 초토화될 정도의 위력. 그곳에 누가 있더라도 산산이 부셔질 것만 같은 위력이었다. “그 정도로 나를 이길 수 있을 성 싶냐! 진노하라. 태초의 불꽃이여. 현신, 라의 화신!” 불꽃의 검을 든 자가 뿌연 연기를 헤치고 나타났다. 아까보다도 현저히 큰 불꽃을 몸에 두른 채 말이다. 그 불꽃은 하나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얼굴은 새…아니, 매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몸은 이집트의 옷차림을 한 사람의 형상이었다. 저, 저거 알아! TV에서 본적 있어! 저분은, 저분은! “멋쟁이님이 힘 좀 쓰시려나보네요.” “태식 형,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란 표정이에요.” 내 옆에서 두 사람이 혀를 내둘렀다. 그래, 멋쟁이님이었다. 명예랭킹 5위의 미소천사 기사단 단장, 미지의 마검사 멋쟁이! 그럼 그분과 대등하게 싸우는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하지만 혁빈 형에겐 안 될 텐데요.” “흠, 그렇겠죠. 용병왕 애디님과 대등하게 싸우는 자는 아마 글로리시나님 정도나 되려나요?” “그, 그럼 지금 미지의 마검사 멋쟁이님과 싸우는 자가 명예랭킹 1위의 요, 요, 용병왕 애디님이란 말이에요?” 나는 말까지 더듬거리며 말했다. 둘은 그런 나에게 피식 한 번 웃어주고는 다시 전장을 바라보았다. “역시 이 열기…까닥하단 녹아버리겠군. 하지만 바람으로 날려버리면 그만이다! 파괴의 토네이도!” - 콰콰콰콰콰콰콰콰! “우왁! 단장님! 저희까지 죽일 셈…크어어어어어억!” “그런 기술은 밀집지역에서 쓰지 말란 말이에요!” “젠장! 앞은 불꽃, 뒤는 토네이도냐!” “도, 도망가! 저 둘이 또 불붙었어!” 거대한 불꽃과 토네이도가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그 후폭풍으로 수많은 유저가 날아갔고 말이다. 믿을 수 있겠는가? 저 어마어마한 것을 단 두 명의 유저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지금 당신은 대체 누구 편이에요!” “불장난 할 거면 내가 없는 곳에서나 하란 말야!” 두 사람이 열혈 적으로 임하고 있는 그때, 그 둘의 뒷덜미를 잡은 여성 두 명이 보였다. 용병왕을 잡은 여성은 검은 머리칼을 단아하게 뒤로 넘긴 여성이었는데 뿔테안경과 어울려 꽤나 유식하게 보이는 유저였다. 반대로 미지의 마검사를 잡은 여성은 허리까지 오는 금발의 머리를 한 여성이었는데 그 외모가 무척이나 아름다워 지금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다들 저 여성만 멍하니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 중재자 등장.” “킥킥, 저 둘이라면 충분히 막겠죠.” 타테님하고 어둠의조이님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킥킥거리며 구경했다. 아니, 지금 용병왕하고 미지의 마검사의 대결을 막는다고? 저 여성 둘이? 설마하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기서 결판내지 못하면 저 불덩이 놈에게 계속 치욕을 당할 거다!” “지금 이게 불장난으로 보여? 나는 지금 남자로서 일생일대의 대결을 하는 중이라고!” “당신 덕분에 지금 중앙이 텅 빈 거 안 보여요? 어서 후방으로 안 빠질래요?” “남자로서 일생일대의 죽음을 맛보고 싶어? 당장 안 빠질래?” “끄응.” “…지금 빠지고 있습니다.” “오오오! 역시 제갈공녀님! 군사님 아니었으면 우리들은 뼈도 못 추렸을 거야!” “우리 미소악마님이 불을 꺼트렸다! 만세!” “지금 어떤 새끼가 악마라고 했어!” “미, 미친놈! 기껏 작은 불을 꺼트렸더니 큰불을 지르냐?” “헉, 나도 모르게.” 나는 이제 턱이 빠질 정도가 되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진짜 기사단끼리 대결하는 거 맞나? 내가 보기엔 그냥 노는 거 같은데……. “그나저나 그쪽 남자관수 좀 잘 해주세요. 이거 일일이 제가 나서니 피곤합니다.” “그쪽이야 말로 남편관수 잘 하시죠? 랭커1위라는 자가 이렇게 물불 안 가리니 원.” “뭐라고요? 지금 말 다했어요?” “말 다했는데요? 왜요!” 이젠 여성들끼리 싸울 거 같았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람. “이젠 중재자들끼리 싸우는데요?” “하아, 게임하고부터 누나가 더 난폭해졌어.” 어둠의조이님이 당황하며 말하자 타테님이 유난히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아까부터 누나라고 하시는데 저분이 타테님 누님이신가요?” “네. 한 때는 제 캐릭이기도 했죠.” 타테님은 그렇게 말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건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남자에겐 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 걸까? “오옷, 이게 누구야! 어둠의조이하고 타테아냐? 이런 곳에서 정찰 중이었나?” “이거 대물을 낚았군!” 그 순간 상공에서 외침이 들렸다. 아니 상공에서 말이 들리다니 이게 무슨 상황인가.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저, 저, 저건 뭐야!” 거대한 피막의 날개. 드래곤을 쏙 빼닮은 이목구비. 드레이크였다. 거대한 한 마리의 드레이크가 우리 머리 위를 선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 위에 유저 두 명이 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한 명은 녹색의 로브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그자의 명령으로 드레이크가 움직이는 것 보니 저자가 드레이크를 조종하는 것 같았다. 그 옆에는 정말 황당할 정도로 큰 키의 사람이 서있었다. 2미터 30정도 할까? 농구선수들에게나 볼 수 있음직한 키였다. “이런, 주르르님한테 들켜버렸네요. 타테님, 어쩌죠?” “어쩌긴 뭘 어째요. 도망가야지! 전 칼리님이 더 무섭다고요!” 주르르? 칼리? 서, 설마 저 둘이 명예랭커 4위의 드래곤소환사 주르르님하고 명예랭커 6위, 영웅슬레이어 칼리님이란 말인가! “도망가긴 이미 늦었어! 칼리포립스, 브레스!” - 쿠어어어어어엉! “젠장, 피해!”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드레이크의 입에서 어마어마한 화력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 우리 머리위로 빛나는 투명 방패가 만들어졌다. 이건 분명 사제의 기본 스킬은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하지만 지금 머리위에 있는 어콜라이트 프로텍션은 마법사가 익힌다는 절대방어마법과 버금갈 정도로 단단해 보였다. “헉, 헉. 기찬씨! 오셨으면 말을 하셨어야죠.” 저 산 아래에서 힘겹게 올라오는 여성사제가 보였다. 단발머리의 수수하게 생긴 사제였는데 지금 이분이 드레이크의 브레스를 막은 건가? 아니, 어콜라이트 프로텍션으로 브레스를 막는 게 가능하기나 해? 저거 고위급 마법이랑 비슷한 위력이라고 알고 있는데? “오, 한나야. 여기 있었어? 덕분에 살았다.” “그러게 새로 키우면 기본 방어마법정도는 배우라니까요.” 새침한 표정으로 말하는 여성사제. 타테님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 “한나가 있으니 걱정 없어. 봐봐, 지금도 이렇게 구해줬잖아.” “하아, 정말이지 그 성격은 고치지 않으면 제가 스트레스 받아 죽을 거예요.” 여성사제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퍽 싫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으음, 이거 뭔가 하트 분위기가 그려지는 건 나의 착각일까? 아, 아니. 그 전에 지금 우리 머리위에 드레이크가 날고 있다고요! 그럴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무슨 어콜라이트 프로텍션으로 드레이크의 브레스를 간단히 막아버리냐! 아타셰, 너 천속성을 대체 얼마나 투자한 거야!” 주르르님도 꽤나 화가 난건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나도 그게 의문이었다. 대체 얼마나 천속성에 투자해야 저런 방어가 가능한 거야? “헤헷, 그냥 전부 투자했을 뿐인걸요. 그보다 주르르님, 좀 내려오면 안 될까요? 목 아파요.” “흥이다! 내가 유리한 고지를 포기할 성 싶으냐!” 주르르님이 코웃음 치며 더 높이 날아올랐다. 그런데 지금 저 아타셰라는 분이 뭐라고 한 거지? 전부? 딱 보아도 고렙같아 보이는데 전부 천속성에 투자해? 그게 가능하긴 한 거야? 피드백 따위는 걱정도 하지 않는 건가! “그럼 별수 없죠. 힘으로 내려오게 하는 수밖에. 경고합니다. 지금 내려오지 않으면 낭패를 볼 거예요. 월속성 결합, 증폭, 암속성 결합, 증폭, 화속성 결합, 증폭.” “자, 잠깐. 서, 설마 진짜 할 셈이야? 농담이야. 농담이었다고!” “수속성 결합, 증폭, 목속성 결합, 증폭, 금속성 결합, 증폭!” 갑자기 어둠의조이님의 표정이 진지해지기 시작했고 그걸 본 주르르님이 식은땀을 흘리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어둠의조이님은 계속 주문을 외울 뿐이었다. “젠장, 진짜 할 셈이야! 칼리, 어떻게 좀 해봐!” “…나는 장거리가 전문이 아니다.” “빌어먹을! 칼리포립스, 피해!” “천속성 결합, 증폭! 갑니다! 세상조차 가르는 필멸의 화살(Arrow of Mortality)!” - 콰우우우우우우우웅! 단 한발의 화살이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모습은 하나의 미사일을 보는 듯 했다. 무지개처럼 빛나는 색을 흩뿌리며 공중으로 쏘아진 화살은 정확히 드레이크의 피막날개를 뚫고 천공까지 꿰뚫었다. 드레이크는 몇 번 날개를 퍼덕이는가 싶더니 이내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하, 하하. 이게 진정한 어둠의조이님 실력인가? 파괴력으로 따지면 넘버원이라는 게 바로 저것이란 말인가! “떠, 떠, 떨어진다아아아아아!” “지금이다! 귀곡마검(鬼!哭魔劍)!” - 끼이이이이이이잉― 거대한 덩치의 칼리님이 떨어지는 와중에 등에 매단 검을 뽑아 외쳤다. 그 순간 귀곡성 같은 소름끼치는 소리가 뿜어지며 거대한 대검이 쏜살같이 어둠의조이님을 향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찰나와도 같은 시간. 어둠의조이님도 예상하지 못한 건지 어떠한 방비도 하지 못했다.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급하게 아타셰님이 실드를 시전 했지만 가볍게 깨부수고 날아오는 귀곡마검! 마법적인 힘은 대부분 상쇄시킨다는 검이라는 게 사실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애고소드! 아무리 피해도 죽을 때까지 쫓아간다는 마검이 바로 저것이었어! 아니, 지금 이런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피해요! 오른쪽!” 나는 외쳤다. 어둠의조이님은 지그재그로 날아오는 귀곡마검을 보고 있다 내 말에 무작정 오른쪽으로 뒹굴었다. 그 순간 왼쪽으로 날아가 땅에 박혀버리는 귀곡마검. 휴, 다행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로그아웃 당했을 거야. “…어떻게 왼쪽으로 공격하리란 걸 알았지?” 땅에 무사히 착지한 칼리님이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보았다. “제 특별한 스킬입니다. 그래봐야 별것 아니지만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여기서 내 능력을 자랑할 만한 위치가 못되니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타테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간파했다? 아니, 이건 예언 같은데. 잠깐, 그 스킬능력 좀 말해줄 수 있을까?” “스킬능력이요?” “아, 미안. 쉽게 말해줄 수 있을 리가 없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내게 사과하는 타테님. 아니 굳이 말 못할 것까진 없는데. “심연의 눈이라는 스킬이에요. 그래봐야 힘이 터지는 곳을 미리 보는 정도입니다.” “역시! 네가 미카엘의 왼쪽 눈동자구나!” “네? 그게 무슨…….” 미카엘의 왼쪽 눈동자? 그러고 보니 심연의 눈 스킬 설명에 그런 말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스킬확인하며 놀라는 것도 좋지만…우리의 존재도 좀 신경 써 주시겠어?” 땅에 곤두박질친 드레이크 등에 기댄 채 숨을 고르고 있던 주르르님이 한 말이었다. 칼리님도 그 말에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말이다. “저기, 두 형들. 우리는 싸우러 온 게 아닌데 눈감아 주면 안 될까요?” 타테님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손을 비볐다. 하지만 더원 기사단의 두 랭커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전쟁이 터진 이상 너희를 못 본 채 할 수 없지.” “나는 너희가 어찌되든 상관없다. 하지만 어둠의조이만은 내 귀곡마검과 상대해야한다!” “쳇, 내가 미소천사였으면 다 매혹시키는 건데…….” 타테님이 뭐라 중얼거렸다. 미소천사 뭐라 한 거 같은데……. “이거 칼리님한테 찍히니 부담스러운데요? 하지만 그 승부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까 제가 쏜 화살 때문에 저희의 존재가 저 아래 기사단에게도 알려진 모양이거든요.” 어둠의조이님은 손가락으로 산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산 아래에서 먼지구름이 점점 다가오는 듯한……. “역시 맞았어! 어둠의조이다!” “이런 곳에 매복해 있었구나!” “아타셰와 타테도 있어!” “칼리님하고 주르르님이다! 우리보다 한 발 먼저 오셨구나!” “지켜라! 엔젤단은 전부 타테님을 지켜!” “더원 기사단에 지지마라! 미소천사 기사단 돌진!” “폼 나게 죽어보자! 슈바리에단은 영원 하라!” 나를 포함한 주위 모든 유저가 멍하니 우르르 달려오는 기사단들을 보았다. 그러다 제일먼저 입을 연건 타테님이었다. “무슨 불나방도 아니고…….” 어둠의조이님은 고개를 저으며. “버서커들 같은데요?” 주르르님과 칼리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진정시키지 않으면 저희 밟혀죽겠어요.” 아타셰님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뭐할 셈이지? 지금 혼자서 저 많은 기사들을 막겠다는 건가? 아니, 그런데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여유롭게 서있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지금 나만 이상한거야? 그런 거야? “선언합니다…가이아 여신님의 종, 아타셰가 여기서 선언합니다. 세상의 평화를, 순화된 안식을! 평화선언(peace declaration)!” 세상 모든 것이 빛에 감싸여 멈추었다. 나무도, 풀도, 동물도, 기사단까지 전부 싸움이란 단어를 허락지 않았다. 그저 평온하게, 그저 한가하게 모든 것들을 멈춰 세웠다. “언제 봐도 놀라운 힘이로군. 강제적으로 싸움을 멈추는 스킬이라니…….” 뒤에 서있던 용병왕 애디님이 앞으로 나오며 감탄했다. 나는 랭커 1위가 등장해 놀란 것보다도 지금 힘을 보여준 아타셰님에게 더 놀라고 있었다. 이게 무슨 사기 스킬이란 말인가. 고위급 브레스도 막아버리는 실드를 소환할 뿐만 아니라 이젠 강제로 싸움까지 멈추게 해? 오늘 여러 번 놀라지만 정말 이젠 지칠 정도다. 이러다 턱 빠지겠어. “오랜만이에요, 타테군.” 애디님 뒤에서 살짝 앞으로 나서며 손을 흔드는 여성. 아까 전에 타테님의 누님이시라는 분과 싸웠던 여성이었다. “아, 제갈공녀님. 오랜만이네요. 샛별이는 잘 있나요?” “어머, 누구누구 닮아서 듬직하게 크고 있답니다.” “흠흠!” 샛별? 아무래도 제갈공녀라는 여성의 아이인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애디님이 얼굴을 붉히는 거지? “야! 나기찬! 너 요새 코빼기도 안 보인다? 대체 상천이하고 한나하고 만날 뭐하고 다니는 거야?” 이번엔 오른쪽 미소천사 기사단이 있는 곳에서 들린 말이었다. 붉은색 위주의 장포를 입고 있는 여성이었는데 붉은 머리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잠깐, 저분도 어디선가 많이 봤던 거 같은데. 에이, 설마 명예랭킹 9위의 맨손마스터 다덤벼와 함께 떠오른 샛별 화염의 검은 아니겠지. “아, 정화누나. 그냥 이러저러 캐릭 키우고 있죠. 다덤벼형은 잘 있어요?” “그놈? 말도 마라. 귀찮은 슈바리에단도 나한테 맡겨 버리고 나도는 놈 따위 콱 죽어버리라지. 이럴 줄 알았으면 기찬이 너랑 사귀는 건데.” 지금 다덤벼를 언급한 거 맞지? 설마 지금 내가 생각한 게 정답인거야? 그런 거야? “두, 두령님의 연적이다.” “지금 자신의 반쪽이 보쌈 당하게 생겼는데 두령은 어디 간 거야!” 저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슈바리에단인 것 같았다. “어디를 넘봐요!” 그때 타테님의 팔을 확 끌어당기며 정화라는 자를 째려보는 아타셰님. 정화라는 자는 고깝다는 눈으로 마주 대하며 말했다. “어휴, 뜨겁네. 벌써 품안에 꽁꽁 묶어 놔주질 않으려는 거야?” “그, 그게. 어, 언니!” 화끈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꽥 소리 지른 아타셰님. 타테님도 덩달아 얼굴을 붉힌다. 이거…역시 그런 사이 같지? “잠깐, 그 행위는 내가 용납 못한다.” 그때 나무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맑고 가는 목소리라 여성이란 건 알겠는데 도통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 목소리는…큭큭, 역시 타테가 있으니 당신도 나타나는 건가?” 애디님이 무척이나 즐겁다는 얼굴로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무 위에서 푸스스하는 소리와 함께 아름다운 금발의 생머리가 바람에 휘날리는 걸 볼 수 있었다. 사뿐하게 내려선 여성의 모습은 그 빛나는 금발과 무척이나 어울렸지만 표정만큼은 차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린누나!” 타테님이 반갑게 외쳤다. 가린이라 불린 여성은 한순간 차가운 표정을 풀고 타테님에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랜만.” “그, 그, 글로리시나다!” “사, 사신이야!” “젠장, 역시 타테가 있으니 사신도 따라 온 건가!” 갑자기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사신? 글로리시나? 서, 설마 저분이 명예랭킹 2위의 스피드사신 글로리시나! “우우, 가린 언니. 아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타셰님이 볼을 부풀리며 항변하자 글로리시나님이 꼭 붙어있는 아타셰님을 타테님과 격리시키더니 말했다. “말 그대로다. 나는 너희 둘 사이 인정 못해.” “어헉! 지금 사신이 타테한테 고백했어!” “사, 삼각관계다!” “대 특종이야!” …대 특종이든 삼각관계든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자꾸 타테님에게 일어나고 있느냔 말이다! 아까부터 그랬다. 내가 아는 랭커마다 타테님에게 먼저 말을 걸고 웃는다. 대체 타테님이 누구기에 저 사람 주위에만 이런 상황이 만들어지냔 말이다! 이러다 미소천사님까지 좋아한다 말하는 거 아닐까 모르겠다. “잠깐, 그 전에 나부터 상대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애디님이 대검으로 글로리시나님을 가리키며 말했다. 글로리시나님은 슬쩍 애디님을 보다 고개를 끄덕이고 허리춤에 있던 레이피어를 뽑았다. “언젠가 내야할 결착이라면…지금도 나쁘지 않겠지.” 갑자기 분위기가 차갑게 돌변했다. 랭커1위와 2위의 싸움이다. 누구하나 껴들 자리가 아니란 걸 모두 직감한 것이겠지. “지금쯤 평화선언도 해제되었겠군. 그럼 시작하지. 루시, 가…….” “와라. 댄싱 멜로디(dancing melody) 변형, 결착의 댄…….” “닥치고 멈춰주지 않겠어?” 모두 조금씩 물러나는 가운데 누군가가 둘의 중심으로 파고 들어가 팔짱낀 채 말했다. 아까 제갈공녀님과 싸웠던 여성이었다. 타테님의 누님이라고 했던 그 예쁘장한 여성 말이다. “당신들, 싸울 거면 저 산 아래에서나 싸워. 나는 잠시 동생에게 할 말이 있어서 말야.” “누, 누, 누나.” 타테가 갑자기 무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무슨 찔리는 거라도 있는 걸까? “밥 먹었어, 안 먹었어.” “당연히 먹었지!” “어떤 반찬인데.” “…젠장.” “밥도 안 먹고 게임질 하는 것도 모자라 아주 인기 많구나?” “저기, 그러니까.” “한나 너도. 지금 이런 장난에 어울릴 때야? 기찬이를 봤으면 바로 나한테 보고해야 할 거 아냐!” “…죄송합니다.” 뭔가 막강했다. 전부 움츠러들 정도로. 기사단도 수그러들었고 주위에 있는 모든 랭커들까지 전부 입을 다물었다. 저분이 최강자였구나. 나는 그 사실을 알아버렸다. “어? 뭐하시고 계세요! 와우, 타테아냐! 지금 한 판 붙으려는 거구나! 그럼 나도 빠질 수 없지! 루나, 륀, 루네스, 루네디. 난 행한다!” “자, 잠깐! 루히비드!” “지금 그럴 때가……!” “말려, 루히비드님을 말려!” “풍화의 결계를!” 저 뒤에서 달려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 한 유저. 그 유저를 막기 위해 수많은 기사들이 달렸지만 주문을 외워버리는 게 더 빨랐다. 그 주문을 외우는 동시에 네 개의 푸른 돌이 사방으로 날아가 정확히 타테님과, 아타셰님, 그리고 최강자를 감싸버렸다. 달빛과도 같은 푸른빛. 저 능력은 나도 알고 있다. 명예랭킹 3위의 결계의마도사 루히비드의 18번 마법! - 쿠오오오오오오오오! 결계 안은 엄청난 풍화작용으로 인해 1분도 버티지 못하고 로그아웃당한다고 알려진 마법이 바로 저것이었다.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이미 세 명은……. - 빠지지지지지지지지직! “…망했다.” “결국 터트렸어.” “이제 아무도 못 말려! 도망가!” 풍화의 결계 안에서 갑자기 검정 스파크가 마구 튕기기 시작했다. 그 순간 모두 절규하며 도망가기 시작하는데. 무슨 이변이 생긴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결계가 박살나며 그 안에 검은 피막의 날개를 가진 여성이 의연하게 서있었다. “킥킥, 킥킥킥!” 방금 결계를 행한 루히비드님을 보며 킥킥 웃기 시작한 여성. 그녀의 입 사이로 기다란 송곳니와 한 쌍의 뿔이 유독 눈에 튀었다. 그 모습은 정말 악마, 그 자체였다. “그래, 지금 먼저 공격했지? 그럼 이번엔 내 차롄가?” “저, 저기 누나. 지, 진정…….” “느끼거라, 나의 힘을. 절망하거라, 암흑을!” 악마가 날아올랐다. 그 위에서 몸을 펼치는 순간 마치 발칸 포처럼 어둠의 화살들이 마구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 소연아! 제기랄! 블레이즈 댄스!” “젠장, 파괴의 스텝! 루시 자연의 결계를 발동해라! 지금 당장!” “주르르가 명한다, 나와라! 드래곤의 숨결!” “내가 지금 착각한 거였어? 우왁! 루나, 륀! 난 행한다, 반사의 결계를!” “빌어먹을! 루히비드 당신은 나이도 많으면서 그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귀곡마검, 스톰 소드!” “이쪽으로 피하세요!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나는 아타셰님이 만들어준 방어막 속으로 들어갔다. 타테님과 어둠의조이님도 나와 같이 몸을 피신했다. 하지만 방어막을 때리는 화살의 힘이 어마어마해 아타셰님의 표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으윽, 이이익!” 가까스로 버티는 아타셰님. 다른 유저들도 아타셰님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이거…정말 다 죽일 셈인가본데요?” 어둠의조이님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그러자 타테님이 무언가 결정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아타셰님에게 다가갔다. “이 대로면 정말 다 죽을 거 같으니까. 백업해줄게. 후우, 아직 저렙이라 조금 버거울 것도 같은데 가능할까나. 좋아, 해보자! 스바르가 마리아 발동!” [행복, 사랑, 그것은 하나의 축복. 고통, 저주, 그것은 하나의 불행.] 나는 멍하니 타테님이 소환한 것을 바라보았다. 수녀였다. 양손을 깍지 낀 한 수녀가 상반신까지만 소환되어 기도하고 있었다. 저, 저, 저 스킬은! “미소천사의 스바르가 마리아!” 나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한국의 대사건, 한 테러집단에 의해서 지구가 멸망당할 뻔했을 때 나타난 한 명의 영웅, 미소천사의 18번 스킬이었다. TV에서 보던 그 감동을 지금 나는 게임 속 현실에서 보고 있었다. “호, 벌써 그 단계까지 키운 건가요?” 어둠의조이님이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타테님은 빙긋 웃으며 외쳤다. “성가(sacred song) 발동!” 주문을 외우자 내 주위의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수녀가 기도하던 손을 좌우로 쫙 펼치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 노래는 아아아~ 하는 단순한 음일뿐인데도 잔잔하면서도 왠지 슬플 정도의 묘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 노랫소리는……?” “아아, 그렇군. 타테였어.” “오랜만인 걸?” 열심히 어둠의 화살을 피하던 유저들이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어째서? 지금 이 스킬은 미소천사의 스킬인데 왜 인정하냔 말이야! “대체 당신은 누구…….” “이 녀석,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럼 이것도 막아봐라! 절망하라, 나약한 자들이여. 울어라, 비참한 존속이여!” 내가 타테님에게 궁금증을 물으려는 그때, 악마가 외쳤다. 순간 그녀의 몸 전체가 스파크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한 순간의 고요함. 저 모습은 꼭 해일이 일기 전 찾아오는 조용함과도 같았다. “이건…위험하다! 광범위 스파크야!” “누, 누나. 그건 좀 너무하잖아! 진짜 다 죽일 셈이야?” “이거…혈폭의 사막에서 싸웠을 때가 생각나는군.” “그때의 베르제브브가 차라리 더 온순했을지도…….” 모든 유저들이 한마디씩 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다 끝난 건가? 여기서 다 죽어버리는 거야? “이봐요. 빛강님. 아까 전에 제가 심연의 눈이라 말한 스킬이 맞나요?” “네. 맞아요. 그런데 그건 왜…….” 지금 다 죽기 직전에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하지만 타테님은 무진장 중요한 것인지 계속 말했다. “미카엘의 왼쪽 눈동자. 임박사님이 게임을 다시 설계할 때 안배해둔 스킬이에요. 제가 지금 오른쪽 눈동자를 가지고 있으니 빛강님과 저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말…….” “일단 저만 믿고 따라주세요. 왼쪽 눈도 오른쪽 눈과 같이 필살 발동이 가능할 겁니다! 심연의 눈 발동!” 갑작스레 주문을 외우는 타테님. 심연의 눈? 그 스킬을 얻은 사람이 또 있어? 맙소사! 심연의 눈. 미소천사를 TV에서 본 후, 힐러의 세계에 빠져들면서 얻은 스킬이었다. 수없이 상대를 생각하고 치료하며 상황을 파악하고 다니는 그때, 어느 순간 얻은 스킬이었다. 이 스킬을 얻은 순간 나만의 스킬이란 걸 깨달았었다. 그런데 그 스킬을 가지고 있는 자가 또 있었다니. “시, 심연의 눈 발동!” <‘심연의 눈’ 발동.> <‘심연의 눈’의 숙련도가 9 상승했습니다.> 당황한 상태로 심연의 눈을 발동시켰다. 그런데 평소와는 느낌이 달랐다. 더 힘이 강해진 듯한…그래, 공명이야. 지금 타테님하고 스킬이 공명하고 있어! “이로서 미카엘의 모든 능력이 개방된 거예요. 아마 저처럼 지속시간이 3분이겠죠? 빨리해야겠네요. 땅은 대지의 양기, 하늘은 광활함의 천기, 가운데 서있는 우리는 영원의 우주이니 나의 존엄성을 바쳐, 나의 신념을 바쳐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가 되리라. 생명의 희생(Protect at the Sacrifice of one Life)!” 저, 정말 저 유저는 뭐지? 내가 알기로는 주문이 길면 길수록, 게다가 몸짓까지 요구하는 스킬은 적어도 고유 급에서 신 급까지 속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 스킬을 가볍게 사용하다니…바닥에 기이한 문양이 사방 100미터까지 넓어진다. 이것을 밟으면 뭔가 이상이 생기지 않을까 흠칫했지만 적군에게 피해를 주는 마법 진은 아닌 모양이었다. “헉, 헉. 이제 그것만 발동시키면 되요.” “그, 그것이라뇨?” “영원한 빛. 오늘 최초로 대천사 미카엘을 소환하는 겁니다!” “그, 그게 대체 무슨 말……!” “뭔가 일을 벌이려하네? 하지만 내가 가만 놔둘 거 같아? 어둠의 화살!” “블러드 멜로디(blood melody).” 내가 당황하는 사이에 악마가 어둠의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그 화살은 글로리시나님에게 저지당했다. “가린 너어어! 또 그때처럼 방해하기야?” “미안, 소연. 하지만 지금 기찬이가 뭘 할지 재미있을 것 같거든.” “이익, 하지만 너 하나로 막을 수 없을 거다! 대규모 어둠의 화살!” 이번엔 아까와 같은 대규모 화살이 전부 나와 타테님을 향해 날아왔다. 이번 건 글로리시나님도 막기 버겁다 생각했는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뭘 할지 나도 궁금한 걸. 루시, 자연의 결계!” “칼리포립스 막아!” “루네스, 루네디 난 행한다, 복사의 결계를!” “귀곡마검(鬼!哭魔劍)” “일월현문(日月現門)오의 천천후섬(天千厚剡)!” “천속성 결합, 증폭. 세상조차 가르는 필멸의 화살(Arrow of Mortality)!” “진노하라. 태초의 불꽃이여. 현신, 라의 화신!” “어콜라이트 프로텍션!” 어마어마한 스킬들이 전부 어둠의 화살을 막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 전부 따로 놀던 모든 랭커들이 지금 우리를 지키기 위해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런데 어찌 몸이 떨리지 않겠는가. “지금입니다. 가죠, 제 손을 잡으세요!” “네? 아, 네!” 자신감으로 가득 찬 타테님이 손을 내밀었다. 나도 모르게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그게 자연스러웠다. 왠지 모르게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당신은…당신은 대체 누구죠?” “저요? 말했다시피 타테입니다만?” “당신의 정체 말이에요!” 나는 이 유저가 보통 유저가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아니 그건 첫 만남 때부터 느끼던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천사 기사단을 들락거리는 모습하며 어둠의조이님을 친하게 부르는 모습. 수많은 랭커들이 반갑게 맞아주고 악마를 누님으로 두고 있는 사실까지. 하나하나 상식을 벗어난 존재였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굴까. 타테님은 내 물음에 그저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그 한마디에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찾던 그 분. 꿈에도 바라던 그분이 바로 이분이었다는 걸. “힐러요. 저는 단지 힐러일 뿐입니다. 갑니다, 영원한 빛 발동!” 내 눈앞이 환하게 변했다. 백색의 실크 속을 거니는 느낌. 부드럽게 감싸는 빛을 표현하자면 그렇다.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주위 모든 유저들은 볼 수 있었다. 여섯 장의 날개를 달고 있는 금빛의 천사, 미카엘의 현신을. {쥬리씨, 어제 일어났던 더원 기사단과 미소천사 기사단의 싸움 보셨나요?} {보았고말고요! 정말 대단했어요. 오랜만에 전 랭커들이 전부 모였다죠?} {저는 오랜만에 다시 감동했습니다. 정말이지 미소천사의 부활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어요.} {재필씨, 그나저나 마지막 그 천사는 대체 무엇이었을 까요? 미소천사의 새로는 스킬일까요?} {흠, 제가 조사해본 바로는 이번에 새로 도입된 스킬입니다. 둘이 있어야지만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죠. 서로 실력이 비슷하고, 유니크한 스킬을 서로 보유하고 있어야지만 사용할 수 있는 거라 하네요.} {그럼 미소천사와 버금가는 유저가 탄생했다는 말인가요?} {그건 자세히 모르겠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머 정말 대단…….} 거기까지 지켜보던 나는 TV를 끄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아직도 그때의 감동이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동경하던 모든 유저들을 하루에 전부 보았고 내가 정말 만나길 고대했던 미소천사님까지 볼 수 있었다. 그분이 남자인건 왜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찬찬히 들으면 알 수 있겠지. “그땐 어처구니없었지만 지금은 왜인지 알거 같아.” 왜 싸웠는지,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게 웃겼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다들 게임을 즐기니까 그런 일이 나올 수 있는 거라고. 아펜하르트. 다른 게임과는 너무도 다르게 즐길 수 있는 장소였다. 나는 왠지 전보다 더욱 그 게임에 빠져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아무렴 어떻겠는가. 어서 자자. 자고 내일 일찍 다시 타테님을 만나보자! 그리고 말하는 거야. 나도 당신 같은 힐러가 되고 싶다고. 이번에 ‘남매’란 제목의 글을 조아라에 연재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전에는 글을 어떻게 썼나 하는 마음에 나는힐러다를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지금 다시 보니 어설프고 말도 안 돼는 상황이 너무 많아 피식피식 웃으며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어떤 부분은 ‘내가 이 정도까지 썼단 말이야?’하며 혼자 감탄도 하고 말이죠.(웃음) 그래서 다시 한 번 또 다른 에필로그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진짜 처음에는 초 간단하게 끝내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분량이…커, 커흑! 아참, 주인공 바뀌었다고 이거 연재하는 거 아니니 기대는 하지 마세요;; 아, 이번에 드디어 네이버 웹툰 도전 만화가에 ‘컨트롤’이 연재되기 시작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네이버 도전만화가에 컨트롤 이라 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연재를 시작하는 ‘남매’도 흥미 있으신 분은 놀러와주세요. 그럼 어둠의조이는 이만 물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