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8-08-2001 20:38 Line : 88 Read : 2057 [2]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프롤로그 -------------------------------------------------------------------------------- -------------------------------------------------------------------------------- Ip address : 61.78.221.122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PROLOGUE― 그, 나의 주군이자 마족 서열 3위라는 엄청난 직위를 가진 아이에드님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말도 안돼요! 말도 안된다고요, 아이에드님!" "뭐가 말이 안된다는 거지, 로시엔?" 나의 주군인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정말 순수하게 영문을 모르겠다는 그의 순진무구한 표정을 바라보며 나는 기가막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저런 가증스런 표정을 뽑아낼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거니와 저런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어떻게 저렇게나 자연스럽게,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호기심이 머리를 쳐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곧 [경험]이라는 곳에서 비롯되는 엄청난 자제력 덕택에 간신히, 정말로 간신히 입을 뗄 수 있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말이 되요, 이게?" "그러니까 왜 말이 안 된다는 건지 설명을 해달란 말이야." 그는 태연하게 내 말을 받았다. 나와 같은 마족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따뜻한 보랏빛의 눈동자가 살짝 가늘어지며 나를 향해 웃음을 보내고 있다. 나는 잠시 그의 직책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에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을 느꼈지만 곧 보좌관이자 조언자라는 내 직책을 상기하고는 크게 소리쳤다. "반마족을 키우겠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 안되잖아요! 반마족은 발견하는 즉시 죽여야한다는 마계의 법칙을 모르시는건 아니겠죠?" 순간,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꿈틀했다. 그는 슬쩍 한숨을 내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아아, 그래. 그런 쓸 때 없는 법칙이 있긴 했지. 으이구, 로시엔. 그런 건 좀 잊어버리라구. 너는 다 좋은데 너무 고지식해서 문제야." "쓸 때 없는 법칙? 잊어버리라구요? 아이에드님!! 그것은 마계의 규율 중에서도 최상……" 그러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냉담하게 울렸다. "마족 서열 3위인 내 행동을 규제할만큼 강대한 규율인가?" 순간,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강대한 압박감에 나는 굳어버렸다. 따뜻하다고만 생각해왔던 그의 눈동자가 무섭게 얼어 있었다. 얼음으로 만든 비수같이 날카로운 그 눈빛에 나는 아까와는 다른 종류로 숨이 막힘을 느낄 수 있었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완전무결한 절대자의 눈. 그것은 나의 주군이자 전 마계를 통틀어 서열 3위라는 위치에 올라있는 그만이 뿜어낼 수 있는 압도감이었다. "아이에드님. 전 다만……." 그러나 나의 말을 그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몸을 오른쪽으로 살짝 틀더니 문 바깥쪽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그의 손짓을 신호로 해서, 무엇인가 작은 존재 하나가 문 안으로 쏙하고 달려들어왔다. 그리고 그 존재는 마치 각본처럼 아이에드님의 품 안으로 안겨들었다. 아이에드님은 당장이라도 꽃송이가 채로 흔들려 그 배경을 장식해줄 것 같은 아름다운 표정으로 품에 안긴 그 작은 존재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나는 꿀꺽, 큰 침을 삼키고 내 시야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자세히 그 존재를 훝어보기 시작했다. "헉……!"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이에드님은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어버렸다. "좀 특이한 아이지, 로시엔?" 그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품에 안긴 작은 존재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부비적 부비적…… 마치 애완동물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좀 특이한 아이지, 로시엔' 이라구요? 아이에드님! 정말 미치신 건 아니겠지요? 저 아이, 저 아이의 눈……! 그, 그, 카, 카레나의 눈동자라구요!" "나도 알아." 그는 필사적으로 내뱉는 내가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일축해 버리더니 잠시 눈을 감고 나즉히 입을 열었다. "카레나의 눈동자.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눈. 저주와 피에 복속되어 있는 그들, 가는 곳마다 재앙을 부르리…… 이거 맞나?" "이거 맞나라뇨!!! 아이에드님―!" 나는 정말로 돌 지경이었다. 나의 주군, 나의 주군!! 300년동안이나 함께 있어왔기에 누구보다도 그 괴짜 같은 행동을 잘 이해하는 것은 나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지내왔으면서도 이런 황당한 일로 [얼음마족]이라고 까지 불리는 나를 놀라게 만들 수가 있단 말인가? "더 이상 말하지마라, 로시엔." 아이에드님의 얼굴 위로 잔잔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 분의 입술에 걸린 그것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품은 채로 내게 말했다. "……네가 뭐라고해도 이 아이는 내가 키울테니까." 아이에드님의 팔 안에는, 또롱또롱한 검은색 눈을 치켜뜬채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선 낯선 존재가 안겨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아이에드님. 카레나의 눈동자를 가진 반마족이라니……' 앞으로 불어닥칠 수많은 시련을 떠올리려니, 온 몸 위로 소름이 쫘악 돋아났다. 마계 세이나력 1024년. 마계 지구 #126G헤레카, 나의 주군 아이에드님의 성에서 일어난 너무나도 엄청난 일이었다. 반마족에, 카레나의 눈동자라니! -------------------------------------------------------------------------------- Back : 3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 (written by 카르민) Next : 1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올리면서...^_^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10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September 2001 09:33:42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8-08-2001 20:39 Line : 224 Read : 1801 [3]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 -------------------------------------------------------------------------------- -------------------------------------------------------------------------------- Ip address : 61.78.221.122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제 1장: 소년의 이름은 무엇인가? "후후훗." 거의 매일 매일, 조금도 틀리지 않은 채 반복되는 이 레파토리에는 정말이지 짜증이 날 정도다. 나는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눈썹이 위로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 따라다니는 저 비웃음이 너무 익숙해져서 아무런 감흥도 없다면 웃긴 일일까. 쳇, 하지만 정말로 아무런 감흥도 없다. "……크크크. 어이, 반쪽짜리∼!" 그리고 그 비웃음 뒤에 언제나 따라다니는 저 유치한 대사들. 대체가 세 살박이 꼬마녀석도 안할 짓을 언제까지고 지치지도 않고 하는 저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바로 2시간 전에 먹은 스파게티가 올라오려고 하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넘어오려는 스파게티의 움직임을 간신히 멈췄다. 음식을 버린다는 것은 죄중의 죄가 아닌가? "후훗, 겁먹은건가? 왜 대답을 안하는거지?" 녀석 중에 하나가 아무 말 안하고 서 있는 나를 바라보며 다시 이렇게 말해왔다. 내가 대답을 안 하는게 겁먹어서 안 하는 거라고 생각 하는거냐? 정말 상상력 한 번 풍부하군. 이제는 일일이 대답하는 것도 짜증나서 안하는 것 뿐이다. 나는 조금은 무심한 얼굴로 그 일련의 무리들을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것은 나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 따위 지저분한 놈들과 또 얽혀서 한 판 싸우고 싶은 마음 따위 조금도 없다. "닥치고 비켜." 나는 살짝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그러시나?" 그러나 놈들은 끈질겼다. 그래도 보통 때 같으면 내가 아무 말 없이 무시하며 지나가려 한다면 뒤에서 뭐라고 욕지거리를 내뱉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물러갔던 저 녀석들이 오늘따라 왠일인지 가려는 나를 잡고 늘어지는 것이다. 끈질긴 것들! 네 명의 그 녀석들은 그 자리를 떠나려는 내 앞, 양 옆, 그리고 뒤를 각각 막아섰다. 나는 내 앞을 막아선 그것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하자는 짓거리냐?" 네명의 쓰레기 마족을 보며 나는 이렇게 내뱉었다. 내 좋은 성격은 이런 놈들 앞에선 여지없지 무너져 버린다. 그 누구보다도 괜찮다고 자부할 수 있는 내 성격은 이 따위 놈들 앞에서는 파편조차 남지 않고 산산히 흩어져버리는 것이다. "킥킥킥. 별거 아냐, 반쪽자리야." "……."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녀석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꽤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언제나 나를 괴롭히는 모임에서는 단 한번도 빠지지 않는 그 놈이었다. 하지만 이름 따위는 생각 안 난다. 내가 뭐하려고 들어 갈 여유도 별로 없는 내 머릿속에 이녀석의 이름 따위를 저장해놓는단 말인가? 단지 아름다움의 결정이라고까지 칭해지고, 실제로 천사족과 비교해봐도 월등히 아름다운 마족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비대한 몸집 때문에 나는 이 녀석을 기억하고 있는 것뿐이다. 나의 두 배 정도 될만큼 커다란 몸집을 가지고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살이 떨리는 마족녀석. 이 녀석이 내게 시비를 거는 주범이었다. "네가 요즘 좀 건방지게 보여서 말이야." 뭐가, 이 뚱땡이 자식아. 나를 괴롭힐만큼 시간이 남아돈다면 가서 살이나 빼시지. "그래, 어디서 주워왔는지도 모를 반쪽자리가 얌전히 있는걸로도 봐줄까말깐데 설치고 다닌다면 영 용서가 불가능하지." 뚱땡이 녀석의 말을 받은 것은 내 뒤에 서 있던 녀석이었다. 나는 침묵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그런 내 태도를 오해했는지 녀석들이 킬킬대며 웃었다. "비켜." 나는 내 앞에 있는 뚱땡이를 밀치며 이렇게 말했다. 막 밀치는데, 손이 녀석의 살에 파묻히는 바람에 나는 적잖이 당황해야만 했다. 커억, 뚱뚱하다 뚱뚱하다 했지만 이 정도라니. 정말 살 좀 빼는게 어때, 이 유치한 놈아. "내가 왜 반쪽짜리 녀석의 말을 들어야 하지?" 내 손목을 턱 붙잡으며 뚱땡이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서서히 불쾌해졌다. 그러나 나는 이 좋은 성격으로 끝까지 참아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녀석들의 다음 말은 내 깊디 깊은 인내심의 바닥을 드디어는 들어내고 말았다. "얼굴이 좋아 보이는군. 로시엔이 귀여워 해주나 보지?" 내 오른쪽에 서 있던 녀석이 이렇게 뱉어내는 것을 듣는 순간, 나는 신경 줄 하나가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녀석들 같은 쓰레기들이 결코 건드려서는 안될 부분이었다. "뭐……라고?" 스스로도 내 목소리의 굴곡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내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미련퉁이 자식들은 내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지고 있다는 것도, 내 목소리에 조금씩 분노가 묻어있다는 것도 모르는지 마구마구 짓밟은 다음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치고 그 다음에 천족 녀석들에게 던져주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하는 그 입을 놀렸다. "킥킥킥, 로시엔 뿐만이 아니지. 네 뒤에는 그 아이에드인지 뭔지하는 최고위마족까지 있다며?" 이번에는 몸이 움찔 떨렸다. "최고위마족 주제에 반마족을 싸고 돌다니 말이야…… 분명히 정신이 어떻게 된 녀석이 분명하지." 내 뒤쪽에 있던 녀석이 이렇게 뱉어낸 순간, 나는 내 머릿속에서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던 이성은 그대로 끊어져 버리는 것을 느꼈다. 너희 같은 놈들이…… 감히 로시엔을 비웃어? 너희 같은 놈들이……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 감히 아이에드를 농락해? "……죽어." "뭐?" 갑작스레 뱉어낸 내 낮은 말을 못들었는지, 네명의 쓰레기 녀석이 동시에 되물었다. 나는 이빨을 악물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죽어, 네놈들! 죽엇!!!!" * * * * * * * * * * * * * * * * * "카, 카, 카, 카……" 지독하게 떨리고 있는 목소리에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그새 내 이름도 까먹었냐? 칼레들린이잖아, 칼레들린." "카, 칼레들린님! 대체 그 꼴이 뭡니까!!" 내 꼴?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야만 했다. "옷이 조금 찢어졌나? 헤헤……" "헤헤라니, 헤헤라니요!!!" 로시엔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나는 순간 움찔했다. 로시엔은 내게 그 떨리는 손을 가져왔다. 그 때, 로시엔의 파란 눈동자에 얼핏 뭔가 익숙한 것이 보였다. 허걱. 나는 그것을 본 순간, 그대로 돌이 버렸다. 파란 눈동자에 가득 찬 그 것은 다름 아닌 눈물이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당혹감을 느꼈다. 로시엔의 파란 눈동자에……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눈물이 차오르고 있다. 으윽!! "저, 저기 로시엔……. 남자가 그렇게 펑펑 울어대는 건 별로 좋은 광경이 아닐텐데?" 나는 뭐가 슬픈지 눈물을 뚝뚝 흘려대고 있던 로시엔을 보며 간신히 말을 건넸다. "우흑우흑! 또 시비가 붙으신겁니까? 가엾은 분……. 흑흑…… 훌쩍훌쩍." ……미칠 지경이군. 또 시작됐다. 로시엔의 눈물샘이 터진 것이다. 나는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기분이 더더욱 엉망이 되는 것을 느끼며 가슴을 마구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저기, 로시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남자가 우는 걸 보면서 기분 좋아질 변태는 아니거든? 그만 눈물을 그치는 게 어때?" "부울쌍한 칼레드을리인니임……." 그러나 로시엔은 간절한 내 말을 무시하면서 끝까지 울고 있었다. 나는 결국 푸욱 한숨을 내쉬며 로시엔을 달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 불가능하다. 불가능해. 그 누구가 있어 저 무적의 눈물샘 로시엔을 이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 자가 있다면 그 자를 내가 평생 스승으로 모시겠다. "그래, 울어라 울어!!" 로시엔은 정말 무지막지하게 잘 울었다. 거의 건들기만 하면 울었다. 내가 어렸을적에 어떤 녀석들과 시비가 붙어 조금 다쳐서 들어올때도, 내가 어떤 고위마족에게 조∼금 건방지게 굴었다가 몇 대두들겨 맞아 몇 달동안 앓아누웠을 때도, 정체모를 이상한 음식 먹고 식중독이라던가 하는 병을 일으켜서 몇 일동안 침대 신세를 졌을 때도…… 그 때 모두 로시엔은 끝없이 울었다. 그 모습에서는 마계에서 소문이 자자한 [얼음마족 로시엔]으로서의 면모는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다. 지금도 뚜렷이 증명되고 있지 않는가? 저렇게 꼴사납게 울고 있는 모습이. "오늘 입힌 옷도 엉망이 되었군요…… 흑." 로시엔이 다시 눈물을 찔끔거렸고, 그 말에 나는 새삼 내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로시엔이 울 정도는 아니었으나 좀 처참한 몰골이기는 했다. 로시엔의 주장에 따르면 한 땀 한 땀 정성을 기울여 바느질 했다는(그런 쓸 때 없는 짓은 그만하고 그렇게나 말했음에도) 검은 경장의 옷은 그 단이 모두 뜯어져 나가 있었고 빳빳하게 다림질 되어 꼿꼿하게 서 있던 카라는 엉망진창이 되어 떨어져 나가기 직전이었다. 도대체가 검은색이었는지 회색이었는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모래에 더럽혀진 옷감하며…… 단추는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내 이 잘생긴 얼굴에도 붉은 줄을 그어내리는 상처 몇 개가 뚜렷이 그려져 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검은색의 내 머리카락도 싸움의 결과로 먼지가 끼어 엉망이 되어 있고 입술은 터져 있었다. 한마디로 나는…… 으깨어진 두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길. "……오늘은 누가 싸움을 걸던가요? 제가 시비거는 녀석이 있으면 싸우시지 마시고 저한테 곧장 얘기하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얘기했다간 저번처럼 내게 시비 걸던 놈들 쥐도 새도 모르게 반병신 만들어 놓을 생각이야, 로시엔? "오늘은…… 그 놈들이 참기 힘든 말을 했어." "네? 뭐라고 했기에?" 로시엔은 눈을 깜빡이며 내게 물었다. 나는 다시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네녀석이 나를 귀여워하냐고 물어보던데?" "제가 당신을요? 당연한거 아닙니까? 왜 그런걸로 화를 내시죠?" 로시엔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어왔다. 나는 그의 태도에 그만 한숨을 푹 내쉬어버렸다. "아이에드님이 처음 데려오셨을때는 제가 당신을 탐탁찮게 여겼다는 것을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칼레들린님, 당신은 이제 거의 제 아이와 다름없습니다. 마족인 제가 아이 운운하는 것은 우습지만…… 당신이 어렸을 적 쉬지도 않고 밤새 그린 지도를 치운 것도 저고 옷을 빤 것도 저고 칭얼거리면서 밥달라고 보채는 당신 때문에 요리라는 것을 해야만 했던 것도 저입니다. 게다가 그뿐입니까? 당신 옷을 만든 것도 저고, 당신……" "……그만해." 나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어서 로시엔의 잘라버렸다. 좀 듣기 민망한 부분도 있었지만 확실히 그랬다. 나를 주워 온 아이에드란 녀석보다는 로시엔이 나에게 더 지극한 관심을 보여왔다. 로시엔은 나에게 있어 [유모]같은 존재였다. "그런 제가 당신을 귀여워하는게 잘못된겁니까? 당연히 당신을 귀여워하는거 아닙니까? 왜 그걸로 화를 내신 겁니까?" 로시엔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어조로 끈질기게도 물어왔다. 나는 그런 로시엔을 향해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몰라." 로시엔은 순간적으로 굳어버린 듯 했다. 그러나 곧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문제로군요. 그로부터 12년이나 흘렀는데…… 그런데도 전혀 변한 게 없다는 게 말입니다." 그랬다. 처음에 내가 이곳에 왔을 때가…… 아이에드라는 사기꾼 마족 놈에게 속아서 이 마계로 온 것이 6살 때였고 현재 내가 18이니 정확히 12년째가 되는 셈이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로시엔은 또다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만해라, 로시엔. 한 숨 쉬는 폼이 꼭 아줌마들 같잖아. "아……!" 그 때였다. 푹신푹신한 쇼파에 앉은채로 나와 쓸 때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있던 로시엔이 갑자기 몸을 일으킨 것은. 나는 로시엔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어 있었다. 여태까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던 그 한심한 꼴은 어디서든 찾아볼 수 없었다. 로시엔은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는 기쁨에 가득 찬 얼굴로 외쳤다. "아이에드님이 돌아오는 모양입니다! 공간의 틈새에서 그분의 기척이 느껴지는군요!" 그래? 그 날라리 마족놈, 이제야 돌아온다냐? 기뻐하는 로시엔과는 달리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미치겠군, 그 놈이 돌아오면…… 나는 잠시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뇌를 해야만 했다. 내가 그동안 저질러놓은 일이 너무도 많았기에……. ……뭐, 죽기야 하겠냐? -------------------------------------------------------------------------------- Back : 4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 (written by 카르민) Next : 2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프롤로그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10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September 2001 09:33:57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8-08-2001 20:42 Line : 247 Read : 1548 [4]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 -------------------------------------------------------------------------------- -------------------------------------------------------------------------------- Ip address : 61.78.221.122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푸른 잎새가 내 볼 끝을 스치고 지나 점점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은 퍽이나 아름다웠다. 메마른 바람을 머금은 차가운 잎새들은 남빛의 하늘을 거쳐 땅을 향해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떨어졌다. 이런 말은 좀 우스울지 모르나, 잎새들이 떨어지는 모양은 마치 하늘거리는 여인의 비단옷을 연상시키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떨어지는 잎새 바깥의 풍경으로 보이는 숨막히도록 눈부신 남빛의 하늘 또한 아름다워 보인다. 오늘 따라 하늘이 묘할 정도로 신기한 느낌을 주는군. 오랜만에 올려다보는 하늘이라서 그런가……. 저 하늘이 아름다워 보였다. 맑아 보였다. 이 손을 담아 한 번 씻어 내리고 싶을 정도로 맑았다. 저 곳에 빠져 죽고 싶다고 생각될 정도로, 티없이 맑다. ……제길, 내가 또 무슨 센티멘탈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오시는군요." 나 스스로가 한심해 돌출된 마계 성벽에 걸쳐지듯 자라난 가녀린 나뭇가지로 막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 로시엔의 조금은 격양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들어 로시엔의 눈이 움직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내 시선이 움직이는 그곳에서 바람이 불었다. 메마른 바람이다. 탁할 정도로 메마른 바람. 그 바람을 타고, 마치 당연하다는 듯 내가 방금 전까지 올려다보고 있던 남빛 하늘 위에 고고한 자세로 어떤 마족이 하나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남색이라는 빛깔만 존재하고 있던 하늘 위에 마치 잡티처럼 나타난 그 마족. 그 마족은 적의(赤衣)를 입고 있다. 핏빛같이 새빨간 옷이 그 마족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보랏빛 눈동자를 빛내고, 은발을 길게 휘날리며 그 마족 녀석은 나와 로시엔 쪽으로 천천히 낙하해왔다. 낙하하는 그의 등뒤로 부서져 내릴 듯한 잎새가 흔들거린다. 사정을 모른 채로 얼핏보면 아름다운 모습으로, 또는 신비로운 모습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대로 얼굴이 되는 마족 하나가 고요한 하늘을 등지고 천천히 낙하하는 모습. 그러나 실제 사정을 알면 달라질 것이다. 일부로 천천히 낙하하고 있는 그 녀석의 몸 주위로 미미하게 느껴지는 기운. 녀석은 지금 폼을 재기 위해 마력을 과하게 쓰면서까지 천천히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제길. "제길." 나는 그 마족을 보며 그다지 반갑 잖은 어조로 내뱉었다. 아니, 그다지 반갑잖은게 아니라 나는 정말 반갑지 않았다. 반갑기는 커녕 짜증이 난다는 말이 옳겠다. 평소의 나 답지 않게 남빛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헛소리를 지껄인것도 어쩌면 이 반갑지 않은 감정을 어찌어찌 돌려보려는 내 계산이었는지도 모른다. "제길……, 저 놈 폼 잡기는." 나는 그로데스크한 분위기의 성 쪽으로 자기가 무슨 마왕강림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포즈로 천천히, 정말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그 바보놈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저러고 싶을까? "여어, 칼레들린! 로시엔!" 은발과 보랏빛 눈동자. 그리고 나사 두 개 정도는 충분히 빠지고도 남을 것 같은 바보 같은 표정으로 헤실헤실 웃을 수 있는 마족은 마계 지구 #126G헤레카에서, 아니 마계에서 오직 한 명 뿐이다. 말할 것도 없다, 지금 손을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대며 내려오고 있는 저 놈의 이름은 바로 아이에드. 정말로 긴 시간동안 천천히 낙하해 성벽 가까이에서 성벽에 등을 대고 선 나와 로시엔 곁으로 다가온 아이에드는 방긋 웃으며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로시엔이 희귀한 행동을 한 것은. "주군을 뵙습니다." 로시엔은 아이에드가 땅에 내려서자마자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진지하고도 절도 있는 자세로 격식을 갖춰 인사를 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정중히 인사를 하는 그 모습은 정말이지 가증스러웠다. 방금 전까지 만해도 내 앞에서 눈물을 질질 짜며 당신이 불쌍하니 어쩌니 외쳐대던 그 마족과 지금 저 바보 마족을 향해 살포시 고개를 숙인 채 인사를 하고 있는 이 마족이 동일인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으으, 가증스러운 로시엔! 로시엔은 마치 예절 교과서 한켠에 조그맣게 그려진 그림에서 금방 튀어나온 사람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 굽힌 무릎과 꼿꼿이 세운 허리, 그리고 살포시 숙인 고개가 딱 그런 모습이다. 푸른 눈동자가 가볍게 땅을 향하고, 숙인 흰 목덜미가 눈부시게 빛나는 그 모습은 절도 그 자체. 두 눈 부릅뜨고 내가 저를 보고 있는데 저런 짓을 하다니! 방금 전과는 180。다른 모습의 로시엔은 내게 약간의 소름을 안겨줌과 동시에 머릿속으로는 '두 얼굴의 사나이' 를 연상케 했다. "오, 오랜만이네?" 로시엔이 무릎을 꿇은 채 정중히 예의를 표하고 있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것인지, 아니면 익숙치 못한 이 상황이 당혹스러운 것인지 아이에드는 미간을 찌푸린 채 엉거주춤하게 다리를 펴지도 오므리지도 못한 상태로 서 있었다. "그렇군요. 속하, 너무 오랫동안 주군을 뵙지 못했습니다. 근·석·달·만이군요. 정말 정말 반갑습니다." 석 달이라는 말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며, 로시엔이 방긋 웃었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였다. "아, 그랬나……? 확실히 조금 오래있었군." "그래요, 조오금 오래계셨지요. 근·석·달·간 말입니다." 또 한 번 석달을 강조하는 로시엔. 그 말에는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 당신 죽고 싶으냐 등등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온갖 비난이 들어 있었다. 보통 마족이라면 바르디 바른 예절 뒤에 면사 여인같이 숨겨진 이 날카로운 말에 놀라서 움찔움찔 거렸을테지만, 로시엔의 앞에 있는 자는 로시엔의 무적의 내숭 이중인격과 근 320년을 함께 살아온 최고위 마족, 그 이름도 대단한 아이에드다. 고로, 그는 로시엔의 말을 태연하게 받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 아주 조금 오래 있었지, 하하핫." "아주 좀이요? 아아아, 정말 조오오그으으음이군요." "응, 아주 조금이야." 또다시 태연하게 받는 아이에드. 그의 머리칼 위로 옅은 세이빈의 빛깔이 쏟부어진다. 그의 입가에 그 빛이 매달린다. "아하, 그럼요. 정말 조오오오오오금이시겠죠. 저랑 칼레들린님이 외로움에 밤바다 당신을 찾고 있을 때, 당신은 인간계 임무를 맡는답시고 인간계에 나가셨죠? 임무를 끝낸 것이 벌써 두 달 전으로 알고 있는데, 당신은 임무 수행 뒤에도 어디서 돌다왔는지 아주 늦게 돌아오셨군요. 훗∼. 그 동안 저와 칼레들린님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말해드릴까요? 칼레들린님은 친구들에게 여전히 구타당해서 돌아오시고, 저는 그런 칼레들린님을 붙잡고 힘이 없는 저의 처지를 서러워했답니다." 로시엔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때로는 강인한 투사같은 목소리로, 때로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여인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로시엔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기며 이렇게 외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올라올 것 같다, 로시엔. 제발 그만해둬.] "엥? 로시엔이 힘이 없었나? 내가 알기로는 서열 16위가 로시엔이었던 것 같은데." 아이에드는 전혀 꿀릴 것이 없다는 당당한 어조로 반박했다. "흑흑흑, 그래도 저의 힘은 너무 미약하지요." …컥, 커억. 듣고 있으려니 미치겠군. 나는 유치한 대화를 끝까지 해보겠다는 심산인지 끝까지 말을 주고 받고 있는 두 마족들을 참으며 참으며 바라보다 못하고 결국엔 고함을 질러버리고 말았다. "그만들 좀 할 수 없어?! 먼저 네 놈 아이에드!! 일부로 마력까지 소비해가며 늦게 떨어진다고 멋있을 줄 알았냐? 그리고 로시엔이 이렇게 나오면 그냥 늦게 돌아와서 미안하다고 말하면 될 걸 가지고 대체 왜 그러는거냐! 그리고 로시엔!! 네녀석도 아이에드가 늦게 돌아온게 못마땅하면 차라리 못마땅하다고 말을 해!!!" 나는 말을 해놓고야 깨달았다. 너무나도 잘난 내가, 여태까지 이미지 관리하느라 아주 힘들게 살아왔던 내가 나의 이미지까지 망쳐가면서까지 흥분했다는 것을. "……죄송합니다." "아아, 칼레들린∼" 내가 흥분에 겨운 그 말을 뱉어내기가 무섭게, 로시엔이 발딱 일어서며 사과를 했고, 여태껏 로시엔과 잘도 노닥거리고 있던 아이에드놈이 역시 갑작스레 내 이름을 부르더니 갑작스레 내 쪽으로 방향을 틀어 무서운 속도로 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난 그 끔찍할 정도로 빠른 스피드에 움찔 얼어버렸다. 아이에드는 그러나 내가 움찔하든지 말든지 그대로 내게 돌진해 들어오더니, 곧바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래 그래 미안해. 우리 이쁜∼ 아들! 그동안 잘 지냈어?" "누가 네녀석 아들이야!!" 나는 내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내 머리를 토닥토닥 문지르고 있는 아이에드를 향해 벼락같은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아이에드가 내게서 살짝 떨어지며 빙긋 웃었다. "난 너를 12년이라는 기나긴 시간동안 길러준 양아버지잖아, 칼레들린." 맞는 말이긴 하지만. 반마족이라는 이름으로, 인간과도 마족과도 어울릴 수 없는 나를 데려다가 6살 때부터 자신의 성에서 키워준 것은 분명 아이에드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잊어 버린거야? 흐음∼ 그렇다면 정말 서글프군. 12년 전에 나는 칼레들린이라는 꼬마를 주운 기억이 있는데 그 꼬마는 기억을 못하는 거로군? 로시엔의 반대에 마왕님의 전언, 내 위에 있는 두 보좌관의 명까지 무시해가며 나는 그 꼬마를 키웠는데…… 이제와서 그 꼬마는 나를 모르는 척 하려는 거로군. 난 슬프다." 전혀 슬프지 않은 표정으로, 그리고 목소리 톤의 변화도 전혀 없이 말해봤자 전혀 그 슬프다는 감정이 전해 오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그래서 말하는걸 그만두었다. 대신 아이에드를 지그시 노려볼 뿐이었다. 로시엔이 살짝 웃으며 나와 아이에드 쪽으로 왔다. 그리고 빙긋 웃었다. "후후, 어찌됐든 꽤 오랜만에 다 모인 셈이로군요. 조금 늦으셨지만 일단 환영합니다. 아이에드님." 그렇게 말하는 로시엔의 얼굴에도, 아이에드의 얼굴에도 기쁜 기색이 역력히 피어났다. 하지만, 나는 그런 표정을 절대로 짓지 않았다. 제길, 나는 전혀 기쁘지 않다. 전혀, 정말로 전혀!! "어쨌든 좋군. 석달만의 집이라…… 로시엔, 넌 나를 매도하는데 말이야…… 나도 집에 돌아오고 싶었다구. 그것도 아주 많이 말이지. 아아, 내가 가꾼 이 아름다운 집은 정말로 그리운 곳이었지! 자, 어서 들어가자!" 아이에드는 흥분한 표정으로 나와 로시엔을 떠밀었다. "제가 언제 주군을 매도했다고 그러십니까?" 그런 아이에드에게 떠밀리며, 로시엔은 아이에드의 말 중에서 못마땅하한 듯한 부분을 찾았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왠지 불길하군. "아, 네가 방금전에 나를 갈군 것은 그럼 매도한게 아니었나보구나. 미안하다. 내가 뭘 잘못 판단했나보다." 아이에드는 여전히 나와 로시엔을 밀며 말했다. "아, 물론이지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제가 왜 주군을 갈구겠습니까? 아, 갈구다니…… 이런 상스러운 말을. 흠흠! 제가 어떻게 주군께 그런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일 끝난지가 두 달 전인데 연락 한 번도 없이 저랑 칼레들린님은 저 멀리멀리 날려보내시고 혼자서 룰루룰루 잘 놀다 오신 주군이지 않습니까? 저와 칼레들린이 고통에 몸부림치든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은 주군을 제가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갈군다는 말입니까? 안 그래요?" 처음에 갈군다는 말을 상스럽다고하며 말을 돌렸던 로시엔은 말 마지막에 다시 흥분하여 다시 그 말을 쓰고야 말았다. "아아, 그럼그럼." 아이에드는 여전히 나와 로시엔을 밀고 있다. "그럼요." ……유치하다. 유치해서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 "아아, 그렇지. 로시엔은 절.대. 그럴 리가 없지. 내가 뭘 잘못 생각했었나보다." "당연하죠." 정말이지 한심한 녀석들이다. 방금 전까지 폼 잡으면서 환영한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모습은 지금의 로시엔에게 있지도 않았다. 역시 로시엔은 두 얼굴의 사나이다. 아이에드와 둘이서 주고받던 빙그레∼ 웃음도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대화에 불이 붙자, 그들은 마치 이렇게 말싸움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투닥투닥 거리고 있다. 그래, 놔두자 놔둬. 모름지기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것이라고 했다. 이 때가 아니면 더 싸울 시기도 없을 것이다. 열심히 싸워라. 아니, 잠깐…… 그런데 아이에드랑 로시엔은 몇 살이었더라? 한 1000살 넘었나? ……흠, 그럼 아이는 아닌가. 아, 알게 뭐냐. 정신연령이 아이라면 다른 것은 더 고려해볼 가치도 없다. "어쨌든 들어가자." 아이에드가 방긋 웃으며 말했을때야, 로시엔과 아이에드의 그 유치한 제 2차 말싸움은 멈췄다. 로시엔도 그게 좋다고 생각했는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꼭 들어가야 하는 거냐?"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내뱉었다. 그 말에, 로시엔과 아이에드 둘 모두의 표정이 약간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변했다. "너는 오늘 여기서 밤이라도 세자는 말이냐?" 아이에드가 살짝 눈을 찌푸리며 땅을 가리키곤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나 배고파. 이상한 말 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자, 칼레들린." 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밥은 여기서도 먹을 수 있고…… 난 굳이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엥?" 아이에드는 내 대답에 황당함의 극치를 본 표정으로 나를 주시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한참 후, 아이에드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너……" 아이에드의 미간이 잔뜩 좁혀져 있었다. "……혹시 나 없는 동안 또 사고 쳤냐?" 뜨끔. 심장 한구석에 바늘이라도 꽂아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온 몸에 찌르르 뭔가가 오르는 듯한 느낌을 보며 구원의 눈길을 로시엔에게 보냈다. 그러나 로시엔은 나의 시선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멀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로시엔……. 너한테 기대 한 내가 바보다. "사, 사고라기 보다는. 별로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오늘은 하늘도 참 좋다고 생각되지 않아? 흠, 남빛이로군. 남빛 하늘은 오랜만이잖아? 하늘도 좋은데 밥 정도는 밖에서 먹었으면 좋겠네." 서둘러서 나는 뭐라뭐라 변명했지만 내가 들어도 말도 안되는 변명이었다. 웃기는 일이다. 비록 반쪽이긴 하지만 마족인 내가, [하늘의 색]을 핑계 대고 있다니. 후후, 내가 감성 예민한 사춘기 소녀 마족도 아니고. "……." 마구 얼버무리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계하고자 했던 내 말에 녀석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리고 이윽고 천천히 터져 나온 힘없는 한마디. "역시 사고 쳤구나?" "……."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는 현실이 서글프다. "로시엔, 칼레들린이 무슨 사고를 친 거지?" 아이에드가 로시엔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로시엔은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칼레들린님? 제가 모르는 사이에 사고 치셨습니까?" 로시엔의 말에 아이에드의 얼굴은 더더욱 일그러졌다. 처음에는 녀석의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이, 그 다음에는 보랏빛 눈동자가, 그 다음엔 옅은 보라색의 눈썹이, 마지막으로는 붉은 입술이 찌푸려졌다. "……일단 들어가자." 아이에드는 뭔가 기운 빠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더니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들어가려면 후회할텐데. 나는 입 밖으로 나오려던 이 말을 꾹 눌러 참았다. -------------------------------------------------------------------------------- Back : 5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 (written by 카르민) Next : 3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10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September 2001 09:34:00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9-08-2001 17:55 Line : 246 Read : 1011 [5]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 -------------------------------------------------------------------------------- 롱립스틱의 크리미한 질감과 립글로스의 글로시함을 표현 - 라피네 지오 소프트 립 리퀴드 - 9,000 원 -------------------------------------------------------------------------------- Ip address : 211.220.125.9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녀석은 성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미친 듯이 성을 뒤지고 다녔다. 내가 어디에 사고를 친 것인지, 찾아보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그런 아이에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푹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된 거, 오늘 하루 죽었군. "무슨 일이예요, 칼레들린님? 정말로 사고를 치신겁니까?" 아이에드가 계속 성안을 분주히 돌아다니면서 '이번에는 어디를 건드린거야, 칼레들린?' 이라는 소리를 외치고 다니자 로시엔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나는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음, 그게……"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참 고민했다. 로시엔은 내 대답을 듣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는지, 그냥 피식 웃어버렸다. "가벼운 사고겠지요?" "……응? 응, 아마도." 내 말 뒤에 붙은 '아마도' 라는 단어가 불길했는지, 로시엔은 잠시 황당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런데 대체 뭘 건드리신거죠? 제가 어제 청소할 때만해도 그 어디도 잘못된 곳이 없었는데?" 로시엔의 말에 나는 흠,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그 순간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 약한 녀석은 저 세상으로 보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마구마구 드는 엄청난 비명소리가 들린 것은. "무, 무슨 일입니까, 주군!" 아이에드의 비명소리가 틀림없는 그것을 들은 순간, 로시엔은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크게 아이에드를 불렀다. 로시엔의 얼굴은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이 당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시엔과는 달리 나는 아이에드의 그 비명소리를 듣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내가 저질러 놓은 일을 본다면 당연히 고함을 지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마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가봅시다, 칼레들린님! 대체 무슨 사고를 치셨기에 이런 비명소리가 나오는겁니까!!" ……몰라. 로시엔은 나의 팔을 잡고 비명소리가 나는 곳으로 이끌었다. 나는 그다지 가고 싶지 않았지만 로시엔의 팔 힘이라는 것은 워낙에 엄청나 내가 뿌리칠만한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로시엔은 아이에드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난 곳으로 엄청난 스피드로 뛰고 있었다. 비명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응? 3층?" 막 뛰고 있던 로시엔이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그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표정을 보며 이젠 정말 죽었구나, 라고 느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바로 그 때, 타이밍도 딱 들어맞게 로시엔이 자리에서 정지했다. 그는 어느 지점에서 돌처럼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전까지만해도 분주하게 아이에드 쪽으로 뛰고 있던 그의 발은 바닥에 붙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고 언제나 차분한 푸른색 눈(가끔씩 그 차분한 눈에 눈물을 매달기는 하지만)또한 경악으로 커져 있었다. 그는 못 들을 것을 들은 사람 같았다. 혹은, 너무나 엄청난 것을 갑자기 깨달아 버린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그 상태로 나를 보았다. "서, 설마 칼레들린님?" "……." "아, 아이에드님의 서재를 건드리신겁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성의 3층. 그곳은 아이에드의 서재가 위치한 곳이자, 로시엔조차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어 청소를 하지 않는 곳이었다. 로시엔은 내가 아무 말이 없자, 한참동안 멍하게 굳어 있었다. "으아아아악!!" "아이에드님!!" 비명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퍼진 그 때야 로시엔은 재빨리 달려갔다.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로시엔의 뒤를 따라갔다. 내가 걷고 있는 이 3층 복도가 영원히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도 끝에 그 서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소망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유한이라는 개념을 품은 이상, 모든 것은 그 끝이 있기 마련이다. 복도의 길이는 유한하다. 고로, 복도의 끝은 너무도 쉽게 내게로 다가왔다. 로시엔은 서재 앞에 서자마자 서재의 갈색의 고풍스러운 문이 벌컥 열어 젖혔다. 고대 마족들이 썼던 주문으로 문을 온통 점칠해놓은 그 문이 열리는 순간, 아이에드의 뒷모습이 얼핏 보였다. "으아아아악!! 끄아아아악!!" 서재 안에서 아이에드는 아직도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칼레들린!! 너, 너 대체 무슨 짓을 한거얏!" 녀석은 당황한 듯 했다. 어떻게보면 엄청나게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글세." 나는 아주 심하게 찔리긴 했지만 억지로 말을 받았다. "……너, 너…… 이, 이걸…… 이걸…… 이게 뭔 줄 알고……" 아이에드는 정말 충격받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아이에드의 손에는 자잘하게 파편만이 남아있는 이상한 조각상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난 아이에드의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져 있는 표정을 보며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알아. 약 1200년전에 있었던 천계와의 전쟁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던 너의…… 그, 저…… 무훈을 기리기 위해서 마, 마왕이…… 내, 내린…… 기, 기념비였지." "헉!! 칼레들린님!! 저, 저걸 깨셨단 말입니까?……마, 마왕님이 내리신……" 먼저 와서 문을 열어 젖힌 로시엔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듯 잠시 휘청 거렸고 난 그의 몸을 받아줘야만 했다. 아이에드의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하긴, 화가 안 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마족의 절대 지배자, 마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기념비다. 그런데…… 그런데 그것을 내가 깼으니 얼마나 화가 날지, 아무리 내가 나쁜 놈이라도 알 것 같다. 아니까 더더욱 찔리는군. "이걸 깨다니……" 아이에드는 내가 깨놓고도 치우는 것도 귀찮아서 그대로 놔둔 그 기념비의 파편을 만지며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칼레들린." "응?" 나는 나를 향해 무섭도록 빠르게 고개를 돌린 아이에드의 싸한 보랏빛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조, 좋아.……이, 이게 끝이겠지?" 아이에드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발 이걸로 끝이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이 온 몸을 통해 방출하고 있었다. 난 어색하게 웃으며 녀석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한마디로 던졌다. "글세." "서, 설마 칼레들린님…… 저, 저걸로도 모자라서 또 무슨 일을……?"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질 것만 같은 로시엔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아이에드는 잠시 뚫어지게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마치 거짓말처럼 녀석의 모습이 앞에서 사라졌다. …워프로군. "후우." 고위마족 중 하나인 녀석은 내가 친 또 다른 사고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성을 돌아다니는 것이 분명하다. "칼레들린님." 아이에드가 내 눈앞에서 워프를 통해 사라지자마자 로시엔의 묵직한 부름이 이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눈이 질끈 감겼다. 예상대로, 로시엔의 엄격한 꾸짖음이 내 머리 위로 추상같이 떨어져 내렸다. "서재에는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서재는 아이에드님 개인의 공간입니다!" "미, 미안. 호기심에 그만……." 바로 그 때, 사라졌던 바로 그 장소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아이에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짧은 시간동안 내가 저지른 또 다른 일을 찾아냈는지, 아이에드는 아까 전보다 더욱 초췌한 모습이었다. "너……" 녀석의 은발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내 쪽으로 돌아보자마자 튀어나온 녀석의 고함. "으아아아악! 칼레들린 너 이녀석!!" 저렇게까지 발작을 하다니. "응?" 그래도 난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아이에드의 눈에 어린 원망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내가 몇 백년을 투자해서 수집한 물건을 대체 몇 개나 깨뜨린거지!" "정확히…… 32개." "커억." 아이에드가 아닌 로시엔의 비명소리였다. 로시엔은 철푸덕 주저 앉았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뒤에서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거 산다고 투자한 돈이 얼만데……"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난 다 듣고 말았다. "게다가…… 너, 2층 내 방에 있는 고대 마족에 대한 기록까지 찢어 먹은거냐!" 그러나 아이에드는 로시엔의 그 망발은 못들은 모양이었다. 녀석은 있는 인상 없는 인상 다 긁으며 나를 향해 외쳐댔다. 응, 고대 마족에 대한 기록을 찢어? 내가 그랬던가?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잠시 기억의 바다를 헤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을 생각나지 않았다. 난 그래서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면서 말해주었다. "그랬나? 모르겠어. 그건 생각 안 난다." 갑자기 아이에드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기 시작했다. 더더욱 불안해졌다. 아이에드는 마계에서도 사이코로 통하는 녀석이다. 게다가 상당한 다혈질이다. 특히 저렇게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하면 뭔가 심각하다는 거다. 나는 심한 불안이 온 몸을 엄습하는 것을 느끼며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서재 바닥에 깔린 붉디 붉은 융단이 발에 살짝 밟힌 채로 뒤로 밀려났다. 화려한 천장이 막연한 공포 때문인지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다. "칼레들린님…… 고, 고대 마족에 대한 기록을…… 찢, 찢어……" 뒤에서 거의 넘어질 것 같은 로시엔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걸 신경쓸 틈이 없었다. 아이에드가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기 때문이다. "……후, 후후후! 저번에는 실습 연습을 한답시고 지하 2층에 있던 내 연구실을 마력탄으로 날려먹었어…… 5년전쯤엔 나와 로시엔이 외출하고 없을 때 내가 내 속하들에 대해서 써놓은 기록들을 단지 지저분해 보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구덩이 속에 처넣었지. 그리고 또 몇 년 전쯤엔 내 검을 갖고 나갔다가 잃어버렸지……" 녀석은 큰 충격에 정신이라도 나간 사람처럼 중얼중얼, 저주받은 족속인 좀비처럼 빌빌거리기 시작했다. 난 녀석의 그 말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으며 진지하게 사색에 잠겨들었다. 지하 2층에 있었던 연구실을 반쯤 태워먹었다고? 내가? 아아, 그랬군. 잊고 있었는데. 확실히 그런 눈물겹게 정겹고 아름다운(?) 추억이 있었지. 그 때도 엄청나게 혼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행이도 로시엔이 말려주는 덕에 얻어 맞진 않았지만. 약간 눈에 거슬리고 지저분해 보여서 녀석의 자료들을 태워버린 적도 있었다. 그게 5년전이었나? 그리고 지금보다 조금 참을 성이 없던 시절에는 녀석이 조금 아끼던 은빛의 검을 들고 나가서 나를 놀려먹던 그 재수없는 녀석들의 목을 날리겠다고 난리치다가 결국에는 그 검을 잃어버린 전적도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화려하군. "차, 참으십시오, 아이에드님. 일단 차분히 얘기를 하는 것이……" 충격을 받은 채로 얼어 있던 로시엔은 아이에드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조금 머뭇거리며 이렇게 건넸다. 그러나 이미 아이에드의 상태는 폭주 모드였다. "칼레들린!" 그리고 터져나온 커다란 목소리에, 난 깜짝 놀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에 있던 로시엔 쪽으로 달려가서 그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로시엔 또한 나를 어깨를 꽈악 잡았다. "왜, 왜?" "으아아아아악!" 기괴한 음이 들려오는 것을 보니, 아이에드 녀석이 드디어 발작을 시작하는 모양이다. 요란한 절규와 함께 녀석을 휘감으며 그의 온 몸 주위로 검은빛의 투기가 무섭도록 찬란한 빛을 내며 뿜어져 나왔다. 그것들은 이윽고 아이에드의 주위에서 커다란 하나의 구체가 되더니 다시 미세한 광선으로 변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엔클레이브." 로시엔이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와 로시엔 주위로 투명하지만 검은빛인 막이 생겨났다. 최고위마족이나 칠 수 있는 엔클레이브를 위험의 순간 아슬아슬하게 나와 자신의 주위로 친 로시엔은 후,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아이에드님이…… 흥분하셨군요. 하긴, 흥분하실만 합니다." 미세한 하얀 광선 하나가 나와 로시엔의 주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에드의 화가 폭팔해 마력을 몸이 통제하지 못하는 이런 경우엔 언제나 이런식으로 로시엔의 엔클레이브 뒤에 숨어왔던 나다. 이때에는 좀 치사하더라도 로시엔의 뒤에 피해야 살 수 있다. 아이에드는 강한 녀석이라, 너무 강한 녀석이라 이런 짓이라도 안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내, 내가 좀 심했나?" "내가 좀 심했나? 내가 좀 심했나라구요?? 칼레들린님…… 하아…… 어떻게 서재에는 들어오신겁니까? 그리고 고대 마족 문서는 또 어디서 발견한거구요!! 제가 모르는 사이에 또 성을 돌아다니신겁니까!!" "……미안해."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조금 비굴해져 있었다. 로시엔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로 엔클레이브를 사용해야하는 일은 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고위마족의 상징이라고까지 불리는 강력한 자기 보호 주문인 엔클레이브. 위기의 순간에서 자신을 지키는 거의 최후의 수단으로 쓰는 이 엔클레이브를 그 어느곳보다 안전해야 할 자기 집에서, 그것도 자신의 주군을 막기 위해서 써야 하는 로시엔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채 얼굴을 떨궜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약간의 시간이…… 아니,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나는 느꼈다. "멈추셨습니다." 양미간을 찌푸리며 로시엔이 차분하게 뱉어냈다. 나는 움찔하고 앞을 보았다. 과연, 고개를 돌려 올려본 그곳에는 숨을 헐떡이고 있는 아이에드가 있었다. 충분히 날뛰었는지 그는 숨을 헉헉 몰아쉬고 있었다. 발작은 멈춘 모양이다.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Back : 6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 (written by 카르민) Next : 4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10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September 2001 09:34:13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9-08-2001 18:00 Line : 163 Read : 968 [6]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 -------------------------------------------------------------------------------- -------------------------------------------------------------------------------- Ip address : 211.220.125.9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제 2장: 소년의 벌은 무엇인가? "크하하하하하핫!!!" 환하게 웃는 이, 진심으로 웃는 이는 그 감정을 옆까지 전파시켜 듣는 이까지 즐겁게 만든다고 한다. 쾌활한, 만들어지지 않는 웃음은 상대까지 포근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던가. "……그렇게 웃고 싶어, 로시엔?" 보통때 만약 내가 로시엔의 이 방정맞은 웃음을 들었다면 나는 놀라워하면서 따라 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난 그럴 수 없었다. "그만 웃어." 나는 미친 듯이 웃어젖히고 있는 로시엔을 바라보며 인상을 팍 쓰고 말했다. 내 인상이 무섭긴 무서웠는지, 아니면 내 말의 완벽한 반작용 효과였는지 로시엔은 어느 순간 웃음을 딱하고 멈췄다. 그러나 한참동안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로시엔은 어느 순간 풋,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다음 순간 다시 크게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카하하하하핫!…… 카하하하하!! 아하하하하! 나 죽네, 나 죽어…!" 미친 듯이 웃으며, 로시엔은 아이에드가 떠나버린 그 자리에서 뒹굴거렸다. 아이에드가 날뛰는 바람에 엉망진창이 되버린 서재에는 전혀 안전하지 않은 여러 가지 물건이 있었다. 산산조각 난 꽃병과 크리스탈 조각품등. 그러나 로시엔은 용케도 그런 것에는 하나도 찔리지 않은 채 낄낄대면서 구르고 있었다. "그만 웃어." 나는 다시 한 번 묵직한 목소리로 뱉어냈다. 무게감을 실어서,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한 최대한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로시엔의 반응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하지만 이건 너무 웃기지 않습니까!" "뭐가." 나의 불행이 그렇게 웃기단 말이냐, 로시엔? "하하…… 하지만, 하지만…… 이건 너무나도 아이에드님 다운 벌이라. 후후훗!! 정말 재미있는 벌칙 아닙니까? 전 정말 가슴을 조였다구요. 혹시나 아이에드님이 칼레들린님을…… 아아, 더 이상 말씀드리가 무섭군요." 로시엔은 뭔가 끔찍하다는 것이 떠올랐다는 듯, 머리를 휘휘 저어댔다. 나는 그런 로시엔을 보고 있다가 다시 푹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재미있는 벌? 재미있는 벌이라고? 좀 어렸던 나이에 연구실을 태워먹는 일을 저질렀을 때, 나는 그 벌로 마계서열을 1위부터 300위까지 모조리 외워야 했어." "알고 있습니다. 그다지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닌 당신은 고생을 좀 해야 했었죠." 로시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나는 그다지 동조받고 싶지 않은 내용이 끼여 있는 것을 발견했으나 뭐라고 반박하지는 않았다. "이름도 더럽게 긴 고위마족 300명을 모조리 다 외워야 했단 말이야. 훗, 지금도 잊어버리지 못하고 나는 그 더럽게 긴 이름들을 외우고 있다. 말해볼까? 서열 제 1위의 마족, 카리스에온 나이타에라 세이피안 카미스 나이트 류 레키베리온 브러시안 쿄네마…. 서열 제 2위의 마족 아데키르아 하리에스 드레시칸 피아드 나이트 류 레키베리온 브러시안 카세타 이나이드……. 서열 제 3위의 마족 아이에드 엘버지운 피엘 블러드 아미스 류 아스테리카 리오드 카리나트에스 히메오 카이산……" 나는 내가 들어도 음침한 목소리로 로시엔을 향해 윽박지르듯 한자 한자 끊어가며 내가 외운 마족의 이름을 읊었다. 300명이나 되는, 정말 말할 수도 없이 이름이 긴 이 모든 것을 외우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필설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네네, 그러셨죠. 이제 그만하세요. 정확히 서열 12위인 세이아나님까지 하셨습니다." 내가 정신없이 중얼중얼거리고 있을 때, 로시엔이 내 정신을 일깨우며 한마디했다. 정신을 차리고 로시엔을 보니 로시엔은 만면에 웃음을 띄운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표정을 보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졌다. 그래서 다시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5년전쯤, 좀 지저분해 보이는 기록들을 불에 태웠다고 아이에드 그 놈은 석달동안 내게 음식이라곤 조금도 주지 않았지. 죽을뻔 했어." "마족은 원래 음식을 먹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시끄러워, 토달지마. ……그리고 저번에 검을 갖고 나갔다가 잃어버린 사건. 그 때 그놈이 내린 벌은 더더욱 끔찍했다. 서열 3위인 자신을 상대로 검을 들고 5분을 버틸 것!!! ……3분인가 버티고 다섯달 누운거 알지?" "네. 간호한다고 저도 죽을 맛이었습니다."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로시엔이 씁쓸하게 말했다. "하지만 난 차라리 그 때의 벌칙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든다, 로시엔." "그럴리가요,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 이번 벌칙은 마음 먹기에 따라서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습니다." 로시엔은 나를 위로한답시고 한 말이었지만, 말하고 있는 그의 입가에 물린, 어떻게 지울 수 없는 웃음끼는 내 눈에 똑똑히 박혀 버렸다. "옛날 벌칙을 한꺼번에 모조리 받아도 좋으니 이번 벌칙은 물러달라고…… 그렇게 말하면, 아이에드놈…… 들어줄까?" 나는 조금은 안쓰러운 눈으로 로시엔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로시엔은 냉정했다. "아뇨!" 블러드 아미(Blood Army)를 알고 있는가? 신계, 천계와의 전쟁을 대비해 무섭도록 완벽하게 무장을 갖추고 있는 마계에서도 블러드 아미란 이름을 가진 그 군대만큼 완벽한 군대는 또 없다. 전 차원계를 통합하여 그 악명은 단연 1위를 달리고 있으며, 창시된 이래로 여태껏 그 자리에서 내려온 적은 없었다. 마계 최고의 엘리트들만이 선발되어 그 실력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최강의 부대. 천계에서는 [피의 군대]로, 신계에서는 [인세인 아미(Insane Army- 미치광이 군대)]로, 그리고 마계에서는 [아이에드의 군대]로 각각 불리고 있는 이 군대는. 한마디로 말해…… 마계에서 최강이며, 마계에서 불리고 있는 명칭으로 알 수 있듯이 아이에드가 이끄는 군대다. 아이에드는 마계 서열 3위의 마족. 그 위에 서열 1, 2윈 마왕 보좌관을 제외하고 실질적인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할수도 있는 아이에드이지만 아이에드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다. 자신에게는 블러드 아미가 있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을 하면서 마왕성 거주조차 거부하는 미치광이 싸이코가 바로 아이에드다. 그런 아이에드가 대장으로 있는 부대인만큼, 나는 그들이 정상일 것이라고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다. 아이에드가 어제 저녁 내게 내린 벌은 이러했다―. [나의 부대, 블러드 아미로 들어가라.] 나는 녀석이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곁에 있던 로시엔 역시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뭐, 뭐라고? 너의 군대에?] [그래] [……괘, 괜찮을까? 내가 너의 부대에 들어가도?] [당연히 괜찮다] 아이에드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나는 황당스러웠다. 마왕이 하사한 기념비를 깨고, 고대마족에 대한 기록을 찢어먹었다. 그런데 블러드 아미로 들어가라고? 이건 벌칙이 아니잖아. [말도 안돼. 이게 무슨 벌칙이냐? 블러드 아미는 모든 마족들이 속하기를 선망하는 곳인데 벌칙으로 거기에 들어가라고?] 나는 당황함에 소리를 쳤다. 그 때, 아직까지 화가 안풀렸는지 뚱한 표정으로 있던 아이에드가 한심하다는 듯이 뱉어냈다. [무슨 생각을 하는거냐?] [응?] [너는 내일 블러드 아미로 간다.]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거기에 입대한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단지 가서, 한가지 일을 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그제서야 안심했다. 하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블러드 아미에 입대? 그런 어마어마한 실력자들과 나란히 서 있다가 압박감+스트레스로 일생을 보내느니 차라리 죽는편이 낫지. [그래, 무슨 일인데?] [청소.]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는 아이에드의 말에 또 한 번 당혹스러웠다. [처, 청소?] 청소따윈 해본적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왕비를 깨고, 고대마족에 대한 기록을 찢어먹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벌이라는 것 하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그래, 청소] 나는 별거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아이에드가 나를 용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 때였다. 내 짐작이 완전히 틀어졌다는 것을 아이에드가 증명한 것은. [……부대 전체를 완벽하게 청소하고 돌아와라. 참고로, 참모장이자 청결병이 있었던 카이산이라는 녀석이 전쟁때 죽은 후로부터 우리 부대는 청소라고는 해본 적 없는 부대다. 당연히 매우 더럽다.] 나는 조금 불길해졌다. [……그…… 카이산이라는 마족이 언제 죽었는데?] [정확히 42년전이다.] 벼락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 감상 비평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노란 손수건 흔들면서 기다리고 있으니까..(쿨럭.. 추하..겠죠?) 마니덜 보내주세요. 다음 편 그럼 즐겁게 읽어주세요!! -실실 웃는 카르민 -------------------------------------------------------------------------------- Back : 7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5 (written by 카르민) Next : 5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10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September 2001 09:34:22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9-08-2001 18:01 Line : 272 Read : 1021 [7]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5 -------------------------------------------------------------------------------- -------------------------------------------------------------------------------- Ip address : 211.220.125.9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너…… 이름이 뭐지?" 그 녀석은 매우 독특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6년이란, 정말로 짧은 시간을 살아온 나였긴 했지만 그녀석이 특이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알아서 뭐하게." 나는 나를 향해 궁금 어린 표정으로 묻는 그를 향해 조금은 시건방진 어조로 대답했다. 그 누구도 믿지 않겠다는 어린날의, 고작 여섯 살짜리의 고집이 만들어낸 말이었다. 가슴속에 가득 차 올라 터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어리고 외로웠던 그 때. 사랑받고 싶었던 어린아이의 고집은 그 누구도 믿지 않는 단단한 결정으로 마음 속에 응어리를 만들어냈고, 나는 그렇게 모두로부터 벽을 쌓았다. 그것이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 방법이었다. "……자." "뭐?" 은발에 보라색 눈동자. 마을 사람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자였던 나에게 녀석은 손을 내밀며 웃었다. "같이 가자." 내밀어진 손은 말도 안될 만큼 따뜻했다―. * * * * * * * * * * * "쓸 때 없는 꿈을 꿨군." 나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사기 당한거야." 씁쓸하게 머금어지는 웃음.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오늘따라 날씨는 정말 미치도록 좋았다. * * * * * * * * * * * * * 벅벅벅. 벅벅벅. 벅벅벅. 신경을 묘하게 거스리는 이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역시 입이 근질거려서 한마디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군. "…제길." 결국 나는 이렇게 나지막하게 욕을 뱉어냈다. 아니, 정말 욕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올려다보아지는 하늘에, 날씨는 너무 좋았다. 푸른 무엇인가를 풀어내려 칠한 하늘은 이 곳이 마계라는 사실조차 망각해버릴만큼 아름다웠고 코 끝에 이는 바람도 상쾌했다. 그런데 나는 이 날씨에……. "게으름 부리지 마." 날카로운 목소리. "누가 게으름을 부렸단거냐." 벅벅벅. 벅벅벅. 벅벅벅. 한심한 내 처지. 웃길 정도로 한심한 나 스스로에게 냉소를 보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거기 더럽다. 더 깨끗이 닦아." 나는 내 머리 위로 뭔가 불쾌한 것이 돋아나지나 않았는지 걱정이 될만큼 기분이 나빴다. 지금 내가 닦고 있는 바닥은 물론 무척이나 더러웠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러운 것은 현재 내 기분이다. 10세리하(1세리하- 약 1cm)는 넘게 쌓였을 것 같은 그 엄청난 먼지층과 지저분하기 그지 없는 바닥을 벅벅 닦아 내리면서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새카매진 걸레를 보고 있으려니 미칠 지경이다. 43년전에 블러드 아미에서 유일하게 청결했던 마족 카이산이 죽은 이후로 한 번도 청소한 적이 없다는 아이에드의 말처럼, 블러드 아미 본부대는 정말 말도 안될만큼 더러웠다. "그 쪽도 더럽네." 내가 한참 닦고 있는데, 아이에드가 무심하게 말하며 발로 어딘가를 툭 가르켰다. 그리고 그런 아이에드 놈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리자마자, 가뜩이나 누르고 눌렀던 내 화는 드디어 폭발했다. "제길! 닥쳐, 네 놈 아이에드!" "왜 화를 내는 거지? 화를 내야할 쪽은 나야. 그리고 넌 어제 분명히 벌칙을 받는다고 했잖아?" 아이에드는 여전히 무심한 어조였다. "넌 블러드 아미 본대가 이렇게 넓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어!" "뭐가 넓다는거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아이에드를 콱 쥐어박아서 밟아버리고 싶다고 느꼈다. "……900레티나(레티나-약 10㎡)다. 자그마치 900레티나라고!! 이걸 혼자서 청소하라는 말은 평생 청소만 하다가 늙어 죽으란 말이냐!" 나는 빽하고 고함을 질렀다. 아이에드가 피식 웃었다. "마왕님의 기념비와 고대 마족에 대한 문서." "큭." 치사한 자식. "……내가 얼마나 곤란해질지는 알겠지?" 나는 다음 순간 말없이 걸레질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자조적인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 * * * * * * * * * * * 벅벅벅. 벅벅벅. 벅벅벅. 새벽 6시에 아이에드의 손에 끌려나와, 오후 9시까지 나는 끊임 없이 물을 뿌리고 걸레질을 해야만 했다. 생전 처음 잡아보는 걸레라는 것에 대한 혐오를 느낄 틈도 없이 진행된 일이었다. 물통에 담긴 걸레를 꼭 짜서 바닥을 닦아야 한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청소라는 것은 본디 마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청소가 정 필요하다면 이종족 몇을 쥐도 새도 모르게 데려와 청소를 시키는 수도 있었고 그게 싫다면 '의지' 만으로도 깨끗한 공간을 유지하는 것쯤은 쉬운 일이다. 각성 마족에 한해서 말이지만.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 더럽냔 말이다!!! 도대체가 이렇게 더러운 곳에서 어떻게 숨을 쉬고 살았던 거냐!! 네녀석들이 그러고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존경스러울 뿐이다. 어쩌면 블러드 아미가 그렇게나 유명한 이유는 실력때문이 아니라 그 어떤 악조건에서도 살아남는 강인한 생명력(이렇게 더러운 곳에서도 사는데 어디선들 못살리요!!!)때문이 아닐까. "젠장." 막 4개째의, 이제는 더 이상 소생이 불가능 할 것 같이 더러워진 분홍빛의 걸레를 집어던지며 나는 다시 투덜거렸다. 그래, 다 좋다. 다 좋다고 친다. 그런데…… [오호, 이녀석이 아이에드님의 그 사랑스러운 아들?] [그렇군. 아이에드님 말씀대로 상당히 시건방지게 생겼구만.] [로시엔님에게 길러졌다더니…… 과연.] 도대체가 내가 청소하는 곳까지 와서 웅성거리는 저 할 일 없는 녀석들은 뭐냔 말이다. 나는 열심히 바닥을 닦고 있는 내가 민망하게도 마치 신기한 동물이라도 구경하듯 옹기종기 모여 붙어서 나를 구경(분명히 말하지만 그건 구경이었다!!!)하고 있는 저 많은 마족들을 보면서 온 몸에 분노조각이 떠오르는 듯한 착각에 빠져 들었다. 붉디 붉은, 피를 연상케하는 그 옷은 블러드 아미 군사들만이 입을 수 있는 특별 제복이 틀림없다. 그들의 허리춤에 나란히 차여진 새빨간 몇 자루의 단검도 블러드 아미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미루어볼 때, 나를 보며 쑥덕거리고 있는 저 할 일 더럽게도 없어보이는 마족들은 틀림없는 블러드 아미의 군사들이었다. "아이에드." 나는 물을 뿌리며 아이에드를 불렀다. 서류를 검토하면서도 내가 청소를 잘하나 못하나 감시하고 있던 아이에드가 대답했다. "왜." "네녀석의 부하들이 임무 태만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나는 나를 힐끔거리고 있는 각성 마족 몇몇을 가리켰다. 이리보고 저리보고 돌려봐도 그들은 온 마족들이 부러워마지 않는 블러드 아미의 군사들이 틀림없었다. "블러드 아미에서는 규정된 계율 따위 없다. 그리고 현재 임무따위 있지도 않아. 저녀석들이 너를 힐끔거리는 건 네가 청소를 너무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어서 빡빡 문질러." 아이에드는 너무나도 밉살스럽게 대답했고 나는 결국 오늘 아침 로시엔이 씌워주었던 머릿수건을 다시 눌러쓰고 청소를 하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 * * * * * * * * * * * * * * * * * 그렇게 첫째날이 갔다. 그리고 이튿날. 벅벅벅. 벅벅벅. 벅벅벅. "거기가 더러워." 이젠 아이에드가 나를 감시할 필요 따위도 없었다. 블러드 아미의 군사들은 내가 지나가는 곳마다 나를 환영(?)하며 이것저것을 지시해댔다. 녀석들은 내게 코딱지 반만큼의 도움도 주지 않고 대신 이것저것 주문만 해댔다. 나는 이번만큼 내가 각성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던 적이 없었다. "여기도 더럽네." 나는 인상을 팍팍 찌푸리며 900레티나나 되는 엄청난 청소의 여정을 어제에 이어 또다시 해야만했다. 어제 로시엔이 잘 빨아서 말려둔 머릿수건을 다시 쓴 채로. 그리고 삼일째 되는날. 벅벅벅벅벅벅벅벅벅. 이제는 이놈의 걸레질이라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것과도 친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꽤나 멋진 동작으로 걸레질을 할 수 있었다. 블러드 아미의 본대는 희귀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지상 3층, 지하 4층에 달하는 거대한 건물이 하나 길게 누워 있고, 그 주위로 진을 치듯 들어선 훈련장이 눈에 띈다. 수많은 시간을 단련되어 왔다는 것을 증명하듯, 들어서면서부터 후끈 열기를 전달하는 훈련장을 지나면 거친 군사들의 장소가 있고 그 군사들의 장소 뒤에는 무려 300레티나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의 공터가 있다. 이 공터가 굳이 뭐하는데 쓰이는지 아이에드는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혈흔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마찰이 일어났을 때를 위한 장소인 듯 하다. 그리고 이 공터마저 지나치면, 청소부인 나로서는 정말 난감한 장소에 부딪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지상 3층에 지하 4층에 달하는 그 건물. 그 건물은 블러드 아미 간부들의 사무실 같은 곳인데, 이 곳을 청소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고역이었다. "빌어먹을……. 간부라고 해서 좀 나을 줄 알았더니 훨씬 심하군." 정말이었다. 블러드 아미 간부의 사무실은 그래... 더 이상 말해서 무엇하리.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더럽게 더러웠다. 수십개나 되는 블러드 아미의 간부들의 사무실 하나하나, 그것도 결코 깨끗하지 않은 그 장소를 청소하는 것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엄청난 인내심으로 억지로 이겨내고 있다. 그럼, 나는 의지가 강한 녀석이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제 청소한 간부실이 모두 12. 오늘은 정확히 13번째 마족의 간부실이다. 나는 들어가자마자 거침없이 할 일을 개시했다. 벅벅벅. 거침없이 할 일을 개시했다는 말은 그러니까 걸레질을 시작했다는 말이다. "칼레들린?" 그런데 그렇게 몇분을 걸레질을 했을 때, 나는 내 뒤에서 낭랑하게 퍼지는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나는 걸레를 닦다 말고 들려온 목소리에 살풋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었다. 어느 간부실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처들어와 그저 청소만 묵묵히 하고 나가는 나인지라, 나는 이 방이 누구의 사무실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내 이름을 부른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수고가 많네." 걸레를 닦느라 허리를 숙이고 있는 내 바로 옆에 서서 빙긋 웃는 마족 하나가 보였다. 처음 보는 마족 이었다. "……?" 나는 바닥을 닦으며 묵묵한 눈동자로 녀석을 봤다. 녀석이 웃었다. "아, 난 이 방 주인인 라이메데스라고 해."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사실을 스스로 말한 그 마족은 금발에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석은 선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거의 엎드린 자세로 있는 나를 녀석이 내려보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못내 불쾌했다. "……." 나는 대꾸없이 다시 걸레질을 시작했다. 그 때였다. 나에게 말을 건 그 시덥잖은 마족 녀석의 웃음 소리가 번진 것은. "심심하지?" "……?" 나는 황당했다. "내가 심심하지 않도록 얘기나 하나 해줄까?" 그렇게 말하며 녀석은 다시 한 번 빙긋 웃었다. 나로서는 정말이지 황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이상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녀석이 아이에드의 속하 블러드 아미의 군사중 하나라는 사실이 들자 그 생각은 곧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속편한 생각으로 화해버렸다. 나는 녀석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속으로 약간의 비난을 퍼부은 후, 다시 걸레질에 열중했다. 이상한 놈. 자신을 라이메데스라 소개한 그 마족이 입을 열었다. "흐음, 잘나가는 마족이 하나 있었지. 실력도 끝내줬고, 경력도 화려했어." 약간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녀석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녀석쪽으로 돌아보았다. 안 쪽에 놓여진 책상에 약간 건들거리는 자세로 드러누워 있는 녀석이 보였다. 나는 다시 걸레질에 열중했다. "그를 숭배하는 마족들은 수백, 수천, 수만. 그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전 마계에 하나도 없다. 그는 모든 비각성 마족들의 우상. 지배받기 싫어하고 어딘가에 속하기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각성 마족들조차 지배받고 싶다는 느낌을 들게 만드는 이상한 마족이자 최고의 실력을 가진 대단한 마족." 나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걸레를 꾹 짜니 검정물이 줄줄줄 흘렀다. "정말 대단한 분이지." 조금 대단하긴 하군. 하지만 그래서? 나는 다시 걸레질에 열중했다.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그 분은…… 그 어떤 임무에도 실패하는 일이 없는 냉혈 마족. 그의 유일한 보좌관이자 그가 인정한 유일한 부하 하나와 함께 그의 명성은 조금의 떨어짐도 없이 끝도 없이 올라만 갔다. 그런데…… 그렇게 언제까지나 승승장구 할 것만 같은 그의 명성에 어느날 흠집이 생겼어. 그게…… 정확히 12년 전이었던가?" 벅벅벅. 나는 말라붙어 떨어지지도 않는 먼지를 걸레로 열심히 닦아 냈다. "……참 이상한 일이었지. 그렇게나 대단하신 분이 반마족을 마계에 데려와서 자기가 보호자가 되어 책임지겠다고 말했고, 그 때 마계는 엄청난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여태껏 무심하던 나는 갑작스럽게 걸레질을 하던 손이 움찔하고 떨리는 것을 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나는 구중물이 줄줄 흐르는 걸레를 한 손에 들고 꾸욱 누르며 말했다. 더러운 물이 흘러나와 내 손금을 타고 내렸지만 신경쓰이지 않았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녀석이 피식 웃었다. "별로." 나는 더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정말 모르는거야?" 그녀석이 생긋 웃는 모습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역겨웠다. -------------------------------------------------------------------------------- Back : 8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 (written by 카르민) Next : 6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10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September 2001 09:34:26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30-08-2001 18:00 Line : 198 Read : 790 [8]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 -------------------------------------------------------------------------------- 최고급 광학 3배줌 슈퍼 EBC Fujinon렌즈 탑재 - 후지필름 FP-4700ZOOM - 874,000 원 -------------------------------------------------------------------------------- Ip address : 61.76.191.10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블러드 아미에서의 청소란 것은 단순히 육체적 노동만을 요하는 것이 아니었다. 닦아도 닦아도 사라지지 않는 43년 묶은 먼지층과의 넌더리날 정도로 계속되는 대면과 끝도 없이 늘어선 간부층의 어질러진 방을 치우기전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청소라는 것이 이렇게나 힘든 것인지 몰랐다. "칼레들린님." 한참을 궁시렁 거리던 내 앞에서 어느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시엔의 목소리였다. 그제서야 나는 이곳이 블러드 아미의 본부대가 아니며, 따라서 내가 지금처럼 넵킨을 걸레처럼 쥐어 짜듯 한 손에 들고 있을 필요가 전혀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내 손 힘에 의해 쭈글쭈글해질대로 쭈글쭈글해진 넵킨을 착착 펴서 테이블에 살며시(?), 아니 솔직히 말해 무척 과격하게 거의 쑤셔박듯이 던져놓았다. "왜." 나는 늦게 로시엔의 호명에 답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당연하지." 내 대답에 로시엔의 얼굴에 일순 미소가 머물렀다. "하하, 청소가 힘드신건가요?" 나는 대답없이 내 옆에서 조용히 음식을 먹고 있는(사실은 먹고 있는 게 아니라 입안으로 퍼담고 있는)아이에드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러나 아이에드는 그 이름도 유명한 괴짜 마족이자 낯두껍기로는 마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작자다. "내 얼굴 떼주리?" 내가 보는 의도 따위는 빤히 간파하고 있으면서, 저렇게 가증스럽게 물어오다니. "필요없어." 나는 아이에드가 내 쪽으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미는 것을 냉정하게 치며 거절했고 아이에드는 약간 충격받은 표정으로 내 쪽을 주시했으나 곧 음식을 퍼담는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로시엔에게 시선을 주었다. "청소가 힘드십니까?" 다시 똑같은 질문이 나왔다. "안 힘들었다면 내가 밤마다 침대위를 뒹굴거리며 근육통을 호소할 이유따위는 없었겠지. 설마 매일 밤마다 내 방에서 울려 퍼지는 처절한 비명 소리를 못 들었다는건 아니겠지?" 나는 일부로 목소리를 최대한 울리게 하며 이렇게 물었다. 사실, 블러드 아미에서 청소를 시작한 이후 여태껏 너무 고귀하게 자라온 내 몸은 그것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특히나 밤이 되면 온 몸의 근육이 온갖 소리로 발악을 해대는 지라 나는 밤에 침대에 누운채로 끙끙대며 앓곤 했다. 그 비명은 그것의 장본인인 내가 들어도 처절할 정도였다. 하지만 내 이 처절한 비명소리를, 저 뻔뻔한 아이에드와 이중성격의 극치 로시엔은 여태껏 정말로 완벽하게 무시해 왔다. 치사한 것들. "못들었는데요." 거짓말을 저렇게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일종의 능력이다. 그리고 로시엔은 그 능력의 소유자다. 그 능력의 소유자 앞에서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나는 곧 입을 다물어버렸다. 역시 로시엔과의 말대결에서 이기려면 아이에드 정도의 뻔뻔함을 사수해야한단 말인가. 그럼 나는 평생 로시엔과의 말대결에서는 이길 수 없겠군. "청소가 힘드세요?" 다시 한 번, 이제는 3번째인 로시엔의 그 질문이 들려왔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경쾌하게 웃었다. "웃기지마. 나같이 잘난 녀석이 걸레질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슬플뿐, 청소 따위 일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하하하하하하!!" "아, 예." "웃기지마. 사실은 아파죽겠는 주제에, 꼴에 폼 잡기는." 로시엔은 내 말에 떨떠름하게 대답을 해서 경쾌하게 웃었던 내 기분을 약간 불쾌하게 만들었고 아이에드는 그 약간 불쾌한 기분을 완전히 망쳐놨다. "닥쳐!" "해보겠다는거냐?" 나와 아이에드의 싸움이 막 시작되려는 찰나에, 늘 그렇듯이 그 싸움에 찬 물을 뿌리며 로시엔이 말했다. "……식사 중엔 식사만 하세요." "쳇." 나는 툴툴거리며 다시 음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음식을 약간 우물거리며 씹어 삼키려다 말고 나는 어느 순간 앗, 하는 생각이 들어 로시엔을 불렀다. "로시엔." "네?" 로시엔은 음식을 먹다 말고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로시엔은 전임 블러드 아미. 한때는 전 차원계에 그 악명을 드높였던 블러드 아미의 대원이었다. 왜 그 직위를 걷어차고 아이에드의 집사 노릇 비슷한걸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로시엔은 블러드 아미의 전대원이고, 그래서 블러드 아미에 대해서는 굉장히 자세히 알고 있었다. "오늘 내가…… 이상한 마족을 하나 만났거든?" 나는 오늘 낮에 봤던 그 마족 녀석을 떠올리며 말했다. 로시엔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는 아이에드를 힐끔 보았다. 사실 이 질문은 아이에드에게 하는 편이 빠르겠지만, 저렇게 머리 나쁘고 게다가 성질까지 나쁜 녀석에게 묻고 싶은 생각 따윈 없다. "이름은 라이메데스라고 하던데. 혹시 알아?" "예? 누구라구요??" "누구라고?" 나는 로시엔이 약간 놀란듯한 목소리로 되묻고, 게다가 열심히 먹고 있던 아이에드조차 놀란 듯이 반문하는 바람에 잠시 움찔하는 수 밖에 없었다. 로시엔의 파란 눈동자와 아이에드의 은빛 눈동자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라, 라이메데스." 하나같이 눈에 별이라도 집어 넣었나. 왜 저렇게 반짝이는 거냐, 우웃!! "데스를 말하시는 겁니까?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가 좀 짙은…… 맞습니까?" 로시엔이 조금 당혹스러운 듯이 물었다. 나는 [데스]라는 것이 그 재수 없는 자식 라이메데스의 애칭이며, 로시엔에게 애칭을 들을 정도면 둘의 사이가 꽤나 각별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왠지 심통이 나는 것을 느끼며(질투 따위의 편협한 감정은 결코 아니었다, 맹세코!!!)퉁명스럽게 뱉어냈다. "몰라." "예? 라이메데스라는 이름에, 금발, 초록색 눈동자, 그리고 블러드 아미원이라면 데스밖에 없는데요?" 로시엔은 이해가 안된다는 목소리로 말하더니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맞아. 그녀석밖에 없지." 아이에드가 다시 음식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데스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길래 그에 대해서 묻는거죠?" 로시엔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데스]라는 호칭은 굉장한 무게감으로 내게 다가왔다. 마족은 결코 애칭이라는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원래 마족은 이름이 길면 길수록 대단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마족은 자신이 거쳐 왔던 모든 지위를 이름으로 가진다)애칭 따위로 누군가의 이름을 줄여 부른다는 것은 상당한 모욕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로시엔이 사용하는 애칭은 결코 모욕용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저 [애칭]이었다. 여기서 애칭의 사전적 의미를 한 번 보겠는가? *애칭― 본명 또는 정식의 이름 대신에 친근하게 부르는 이름 이게 분명하다. "영 재수 없는 자식이라 좀 궁금했을 뿐이야."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엥? 데스가요?"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문하는 로시엔을 보면서, 울컥 화가 나는 것을 느꼈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래. 데슨지 레슨지 하는 그 놈이." "아, 뭔가 오해가 있는 사건이 있었나 보네요?" 오오해에? 아하, 그게 오해였나보군. 그랬군, 그랬어! 푸하하하하하하핫!! "데스가 원래 수줍음이 많아서 처음보는 존재에게는 말을 잘 못 거는데…… 그래서 재수없다고 느낀 거로군요?" 커억. 그녀석이 수줍음이 많은거라고?? 아이에드와 맞먹을만큼의 뻔뻔함으로 온 몸을 무장하고 있음이 분명하던데. 으음, 그렇군. 그녀석이 수줍음이 많은거였군? 좋아,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여태껏 다른 마족이라곤 한 번도 만난적이 없는 순박하고 순진한 소년 마족이 되는거다. "데스는 말입니다, 비각성 마족시절부터 주군을 동경해 왔던 마족입니다. 성실한 성격에, 능력도 뛰어나고 거칠기로 유명한 블러드 아미 내에서도 여태껏 단 한번도 누구와도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어요. 게다가 사교성도 좋죠. 그리고, 비각성 마족 시절부터 탁월한 능력을 자랑해서 엘리트원으로서 각성하자마자 블러드 아미원이 됐습니다. 제 생각에, 데스는 그다지 재수 없는 마족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나는 순간 몸의 세포가 움찔하고 굳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오늘 본 그 재수 없는 마족놈을 굉장히 감싸고 돌고 있는 로시엔에 대한 짜증같은 단순한 감정이 결코 아니었다. "……잠깐만, 로시엔." "네?" "네 말에서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어." "어디가요?" 로시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왔다. "저기…… 네 말속에 등장한 그…… 저…… '주군'이라면 분명히…… 그…… 저, 아이에드겠지?" "당연한 말씀입니다." 로시엔은 갑자기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12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로시엔의 모습을 쭉 봐왔던 나인지라 나는 새삼 느꼈을 뿐이다. 역시 로시엔은 이중 성격 마족이다, 라는. "……그럼, 그 라이메데스라는 마족은…… 저기…… 아이에드를 저기……" "데스가 아이에드님을 동경하고 있다는 말을 그렇게 더듬거리면서 하시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로시엔은 정확히 내 폐부를 찌르며 말했고, 난 내 의도를 완벽히 간파당한채 한숨을 내쉬는 수 밖에 없었다. "……알았다." "예?" "그 라이메데슨가 데슨가 하는 그 마족놈은…… 분명히 정신이 어떻게 된 녀석이 분명해."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여전히 음식을 긁어대고 있던 아이에드도 말을 뱉어냈던 나도 아니었다. "……예?" 로시엔의 반응이 침묵을 깼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이에드를 동경할 리가 없잖아." "……." 로시엔과 아이에드가 깊이깊이 뿜어내는 한숨을 바라보며 내가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내 말이 틀리냐?" 대답이 없는걸보니, 내 말이 맞다는 것을 다들 인정하고 있군 그래. 움하하하하핫!!! -------------------------------------------------------------------------------- Back : 9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 (written by 카르민) Next : 7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5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10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September 2001 09:34:30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30-08-2001 18:02 Line : 200 Read : 746 [9]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 -------------------------------------------------------------------------------- 지친 피부를 위한 선물 - 건성용 - 라네즈 리차징 크림 - 13,500 원 -------------------------------------------------------------------------------- Ip address : 61.76.191.10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청소생활은 꽤나 고됐다. 그리고 그 라이메데스라는 이름의 마족이 내 고된 청소 생활을 주도하는 녀석이었다. 로시엔이 칭찬했던 녀석, 그리고 아이에드를 [동경]하는 말도 안되는 짓을 하고 있는 이 라이메데스라는 이름의 마족에게 나는 일말의 동정을 느꼈고, 그래서 되도록 잘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라이메데스라는 마족놈은 나의 그런 따뜻하고 감동적이고 눈물날 것 같은 고마운 성의를 발로 지근지근 밟아 300층 높이의 마왕성에서 떨어뜨리고 난 뒤 다시 발로 지근지근 밟는 아주아∼주 착한 모습을 보였다. "당신, 아이에드를 동경한다며?" 좀 처참한 몰골이기는 했다. 더 이상 자신이 만들어준 옷이 먼지 때문에 더러워지는 것을 볼 수 없다하여 부득부득 우겨서 앞치마를 내게 둘린 로시엔 때문에 나는 녀석에게 말을 걸 그 때 정말 희귀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선 붉은 앞치마에 붉은 머릿수건. 손에는 대 걸레 하나와 보통 걸레 하나. 앞치마 주머니에는 마른 수건 두장.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는 수세미 3개. 마무리로 양손에는 물통이. (하나는 걸레를 빨 물통이고 다른 하나는 빨아놓은 걸레를 헹굴 용이었다.) 좀 쪽팔리는 일이지만 나는 그런 몰골로 라이메데스에게 물었고, 라이메데스는 대답했다. "푸하하하하핫! 오늘은 더 거창하시군 그래, 앞치마까지 골라입고!!" 다만 그 대답이라는 것이 내가 물었던 것의 대답이 아닌 것이 문제였다. "닥쳐." "싫어."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대답하더니, 난데 없이 말했다. "그래." 나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뭐가 그래라는거지? 나는 한참을 생각한 끝에야, 녀석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녀석의 말은 그러니까 이것이었다. [그래. 나는 아이에드님을 동경한다] 나는 그 대답을 로시엔이 아니라 본인에게 실제로 확인하자 다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이 현실같지 않은 현실을 원망하며 내가 닦고 있던 복도 바닥을 다시 닦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이 빌어먹을 놈의 자식이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일을 저지른 것이. "퉤 !" 나는 순간, 내가 뭘 보고 있는지 잊어버렸다. "퉤 !" 또 한 번 사고가 정지했다. 녀석이 무슨 행위를 했는지조차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굳어 버렸다. 녀석은 내가 닦고 있던 복도에 침을 뱉은 것이다. 녀석은 얼빠진 표정으로 뱉어내진 침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나를 향해 피식 웃더니 반대쪽 복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망연자실하게 굳어 있었고, 약 10분이 지나서야 고함을 칠 수 있었다. "거기 안서!!!" 녀석의 방해공작은 그날부터 계시 되었다. 유치할 정도로 녀석의 방해공작은 단순했다. 예를 들자면, 걸레를 빨아야 할 물과 걸레를 헹궈야 할 물을 담구어 놓은 양동이의 위치를 슬쩍 바꿔 놓는다던가, 내가 닦고 있는 곳에서 일부러 얼쩡거려서 내 신경을 벅벅 긁어 놓는 것이라던가, 흙투성이의 모습으로 내가 청소하고 있는 곳으로 부다닷 달려와서 바닥에 부비적거리는 거라던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유치했다. "도대체 뭐하자는 짓이냐!!" 나는 결국 그녀석의 괴행각을 참지 못하고 어느날은 녀석에게 외쳐버리고 말았다. 녀석은 의외로 싱긋 웃으며 내 말을 받았다. "오늘은 머릿수건이 노란 꽃모양이구나." ……그따위 말을 듣고 싶은게 아니었다. 나는 다시 목청을 돋우어 소리쳤다. "닥치고 말해!! 대체 나를 방해하는 이유가 뭐야? 앙?" 내 고함소리가 무서웠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녀석은 갑자기 인상을 팍 쓰더니, 곧 낮은 어조로 씹어뱉듯이 말했다. "……너말이다." 나는 이제야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차례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라이메데스를 빤히 보았다. 그리고 라이메데스의 입가에 매달린 것을 본 순간, 나는 내가 뭔가 헛것을 보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라이메데스의 입가에 매인 것은 아이에드 특유의 그 비릿한 미소였다!! "아이에드님이 너를 얼마나 관심있기 지켜보고 계신지 느껴본 적 있나?" 뭔가 씁쓸해보이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로시엔과 마찬가지로 이 녀석에게도 별로 감흥이 오질 않는군. 그렇게 유치한 짓을 저질러놓고 이제와서 폼 잡는다고 멋있어 보일 줄 아냐? "알게뭐야." 나는 녀석의 말을 이렇게 받아주었다. 순간, 녀석의 미간이 움찔하고 약간 떨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 분에게 너는 자식 같은 존재지." 확실히 아버지 어쩌고 하는 소리를 즐기긴 하지, 그 바보같은 자식은. "그런데? 그게 내 청소를 방해하는 이유랑 무슨 상관이지!!" 상황을 모르는 자가 보기엔 내가 청소 못해서 안달난 귀신이라도 붙었는 줄 알겠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야." "대체 뭐가!!" "……네가." 나는 녀석의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이 해괴망칙한 논리를 듣고도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는 나를 보았고, 청소가 완전히 끝났기까지 2주일이라는 시간동안 나는 녀석의 온갖 방해공작에 시달려야만 했다. "네가 마음에 안들어, 그 뿐이야."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의 마족놈은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었다. ◎제 3장: 소년의 고백과 운명. [나는 네놈이 싫어. 겨우 그분께 흠집밖에 안 되는 주제에……] 집에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에서 되풀이되는 그 말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라이메데스라는 녀석의 그 비웃음 가득한, 조롱 어린 그 목소리는 내 귓가에서 윙윙 거리고 있었다. [흠집] 체엣! 그래, 나 흠집이다, 어쩔래??? …라고 말할 줄 알았냐!! 이 잘난 몸 어디가 흠집이라는거냐, 앙?? 나는 잠시 발악하다 말고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곤 팔을 들어 그것을 꼼꼼히 보고, 다리를 들어서 또 한 번 그것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 몸 전체를 죽 한 번 훑어보았다. 하지만 어딜 보더라도 내가 흠집이라고 불릴만한 소지는 전혀 없다. 일단, 나는 8등신의 늘씬한 몸매의 소유자다. 흑해같이 검은 두 눈에 새까맣게 긴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찰랑거리고, 피부는 엄청나게 하얗다. 어디를 봐도 나는 완벽한 미소년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내게 감히…… 흠집이라니!! "쳇." 나는 가만히 한 숨을 내쉬었다. ……스스로를 위로한답시고 이런 억지 생각을 해봤자 전혀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던 탓이다. 솔직히, 나 정도의 얼굴은 마계에 널리고 널렸고(마족은 미의 결정체라고 했던가…… 인정하기 싫지만 나를 괴롭히던 놈들도 그 뚱땡이 놈 빼고는 다들 곱상하다)또 100만번 나를 불쌍하게 여겨준 마왕이 나를 세계 최강 미남으로 만들어 준다고해도 얼굴만 반반해서는 아무 곳에도 소용없다. 무엇이 바뀐다 해도 어차피 나는 반마족이고, 그 사실은 나에게 아이에드의 짐이기를 강요할 수 밖에 없는거니까. * * * * * * * * "오늘이 마지막인가?" 라이메데스 녀석이 웃고 있었다. "그래." 나는 오늘만큼은 저녀석과도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나는 기분이 좋았었다. 그래. 오늘이 드디어 마지막인 것이다. 잘가라, 걸레여. 다시는 너같은 지긋지긋한 놈과는 만나고 싶지 않다. 잘가라, 빌어먹을 수세미! 내가 다시 너를 보면 마족이 아니다. 그리고 영원히 잘가라, 노란 머릿수건과 앞치마!! 내가 다시 너를 두르면 아이에드를 아버지라고 부른다!!(이건 취소하고 싶다.) "그렇군, 오늘이 정말로 끝이란 말이지?" 라이메데스가 힐끔, 싱글벙글 기분이 좋아있는 나를 곁눈질로 보았다. 나는 오늘도 여전히 좀 촌스러운 앞치마에 머릿수건, 걸레 2개에 수세미 3개를 처량한 모습으로 들고 있는 나를 저다지도 유심히 보고 있는 라이메데스에게 일종의 분노를 느꼈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는거야?" 내가 퉁명스럽게 물었을 때였다. 라이메데스가 갑자기 두 손을 깍지껴 머리 뒤로 돌리더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발언을 했다. "……마지막인데 내가 도와줄까?" 나는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 유치한 짓으로 나를 괴롭혔던 녀석이 저런 말을 하다니! "엥?" 나는 얼이 빠져 녀석을 바라보며 이상한 목소리를 냈다. 녀석이 히죽 웃었다. "……노골적으로 기뻐하지마라. 농담이었다." 빌어먹을 자식!! 나는 내가 당했다는 사실에 기뻐서 히죽거리고 있는 저 라이메데스에게 욕을 한바탕 하고 싶었지만 억눌러 참았다. 그래, 그래. 참아야 한다. 그래야지 나답지. 그 싸가지 없는 녀석들이 반쪽짜리 어쩌고 할 때도 잘 참아왔던 나다. 참아야 한다. "어쨌든 당분간 볼 일은 없겠군." 그렇게 말한 라이메데스 녀석이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내밀어진 손은 의외로 거칠었다. 곱상한 녀석의 얼굴과는 달리, 그 손은 뭔가 열심히 훈련을 한 듯한 흔적으로 가득했다. 투박하다는 느낌마저 드는 그 손을 보며,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저 손이 뭘 의미하는 걸까? 이상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나를 보던 라이메데스는 피식 웃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내 오른손을 척, 하고 잡았다. 내가 황당함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쳐다보자 녀석이 다시 피식 웃었다. 녀석은 갑자기 내가 들고 있던 걸레를 슥 하고 빼냈다. 그리고 내 오른손을 자신의 오른손 안에 넣었다. "그럼, 일단은 악수라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입을 뻐끔뻐끔하며 녀석을 보았다. 녀석은 내 표정을 보면서 즐기는 기색이 다분했지만 나는 내 얼굴에서 그 바보같은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라이메데스는 그런 나를 보며 머리를 살짝 긁적였다. 곧,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황당함으로 얼어 있는 내 앞에서…… "퇘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녀석은 얼어 있는 내 뒤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반대쪽 복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주 느릿느릿, 여유 있는 발걸음이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리고 외칠 수 있었다. "이녀석!!!!! 결국 이걸 노리고 한 짓이었냐!!! 이 침 당장에 못 닦아???" -------------------------------------------------------------------------------- Back : 10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 (written by 카르민) Next : 8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10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September 2001 09:34:33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30-08-2001 18:03 Line : 218 Read : 787 [10]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 -------------------------------------------------------------------------------- -------------------------------------------------------------------------------- Ip address : 61.76.191.10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로시엔." 나의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희열로 떨리고 있었다. 나의 18년 생에 이렇게나 긴장되는 순간이 있었던가!! 나는 로시엔의 어깨에 내 양손을 턱, 하고 올렸다. "예?"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이 의아했던지, 로시엔이 조금 놀란 목소리로 얼빠진 소리를 냈다. "……기뻐." 정말로 기쁘다. "예????" 내가 생각해도 밑도 끝도 없는 이 말에 로시엔은 더더욱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오늘로 끝났다." 나는 다시 부르르 떨리는 내 몸을 추스르며 말했다. "예? 아……" 로시엔은 내 말을 이해했는지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끝났다고∼!!!!!!!!!" 로시엔은 너무나 기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펄쩍 펄쩍 뛸 뻔 했던 나의 뒷덜미를 가만히 잡았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예, 아이에드님께 들었습니다. 오늘쯤 끝날 거라고 하시더군요." 뭔가 불길하다. "……그런데 어쩌죠?" 로시엔이 빙긋 웃는 모습은 아주 부드러워 보인다. 마족의 웃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오늘따라 이 미소가 이다지도 사악해 보이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왜." 그 불길한 미소의 의미는 뭐냐. "저도 대청소가 하고 싶어요. 오늘쯤이 좋을 것 같은데. 당연히 도와주실거죠?" 생긋 하고 웃는 로시엔의 얼굴은 그 어떤 존재의 얼굴보다 잔인했다. 나는 희미하게 웃음 짓는 로시엔을 보며 입술 근육이 경직하며 부들부들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꼭 그래야 돼?" "칼레들린님." "어, 엉?" 로시엔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꼭 그래야 합니다." * * * * * * "다 좋아." 뭐가 다 좋다는 거냐, 아이에드. "다 좋다고." 그러니까 뭐가. "오랜만에 그 냄새나는 녀석들이랑 떨어져 있는 것도 아주 좋고……" 그 냄새나는 녀석들이라는 것은 블러드 아미를 말하는 것이겠지. 당장에 블러드 아미로 달려가서 확 일러 바치고 싶은 말을 하는군, 아이에드. "그리고 오늘 하루 성에서 조용히 지내려 했던 나의 계획을 완전히 깔아뭉갠 로시엔을 용서해줄 의향도 나는 충분히 갖고 있어." 용서해줄 의향을 갖고 있다면서 저렇게 바득바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가는 이유가 심히 궁금하군. "그래, 오늘은 칼레들린이랑 재미있는 놀이라도 할 셈이었지만 그걸 망쳐놓은 너를을 용서해 줄 의향을 나는 갖고 있다는 말이다, 로시엔." 나하고 재미있는 놀이? 나는 아이에드의 말속에 숨어 있는 그 문장을 찾고 잠시 치를 떨었다. 그 재미있는 놀이라는 것이 서열 3위인 너를 대상으로 5분 버티기라는 어렵다 못해 끔찍하고 끔찍하다 못해 짜증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당장 네 놈의 면상을 '이 걸' 로 강타해 버리겠다. "그만하세요, 아이에드님. 아까부터 불평이 많으시군요." 로시엔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로시엔의 파란 눈동자가 살짝 가늘어지며 포물선을 만들어냈다. 저 웃음은 그 누구도 감히 반항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새삼스럽지만 한마디 해야겠다. "이중성격 마족. 마음과 얼굴이 따로 놀아." "예?" 로시엔인 내가 살짝 중얼거리자 의아한 듯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별 말 안 했어." 로시엔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하던 일에 열중했다. 그러자 아이에드가 또 시비를 걸어왔다. "나는 용서해줄 수 있어, 로시엔. 여기까지는 충분히 용서해줄 수가 있다고." "네, 그럼 전부 용서하세요." 로시엔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아이에드의 표정은 도저히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버렸다. "……이봐, 로시엔." "예?" "300년도 더 전이다, 네가 내게 충성을 바치기로 한 것은." 갑작스럽게 묵직하게 깔리는 아이에드를 보고 있자니 손에 들고 있는 이걸 또다시 던지고 싶어지는군. 이 물건의 이름이 아마 걸레였던가? 거무튀튀한 이 색깔에, 적당히 물기를 머금어 풍기는 이 지독한 냄새는 분명히 자신이 걸레임을 입증하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아이에드에게 던지고 싶은 강인한 욕구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 이번만은 참고 한 번만 더 저렇게 폼잡고 무겁게 말하면 입 안에 넣어버리자. "네, 그렇죠." 그러나 로시엔은 아이에드의 분위기가 심각해지든 말든, 내가 아이에드에게 걸레를 던지고 싶어하든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자신이 하는 일에 열중할 뿐이다. 참으로 로시엔다운 태도다. "……좀 주의 깊게 들어, 로시엔." "충분히 주의 깊게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하지만 내가 봐도 전혀 주의 깊게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은데, 로시엔. "주군인 내게 이런걸 시켜도 되는거라고 생각하는거냐, 로시엔?" 그런 로시엔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난데없이 아이에드가 고함을 빽 질렀다. 그 갑작스러운 반응에 나는 움찔 놀라 반사적으로 앞에 있던 크리스탈잔을 치고 말았다. "으엣!!" 내 입에서 거의 무의식중에 비명이 튀어나왔다. 앗하는 사이에 그 떨어지면 반드시 깨질 것 같은 크리스탈잔은 바닥으로 직행해버렸다. 그런데 그 찰나의 순간,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 잔은 떨어지지 않았다. "조심하십시오." 로시엔이었다. 로시엔은 살짝 웃으며 다시 자신의 하던 일을 시작했다.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떨어지기 직전이었던 크리스탈잔은 마치 생명을 가진 존재처럼 서서히 부유를 하더니, 원래 있던 자리에 정확히 섰다. 로시엔은 자신의 의지를 이용해서 떨어지려던 물체를 공기중에 붙들어 놓았고, 생명이 있는 물체처럼 움직여 보이기도 했다. 고위마족의 [의지]는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 밖에 안 드는군. "……로시엔." 아이에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거운 목소리였다. 나는 아이에드의 입에 이걸 정말로 집어넣어야 하나 말아야하는 심도 깊은 고찰에 빠졌다. 로시엔은 살풋 웃으며 아이에드의 호명에 답했다. "네?" "궁금한게 있다." "예, 말씀하십시오." "너는 고위마족이지?" "예. 정확히 1069년 전에 [고위마족]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1069년. 많이도 살았구나, 로시엔. 그렇게나 많이 나이를 먹고도 아이에드와 노닥거릴 수가 있다니…… 존경스럽다. "그렇지? 역시 그런거였지?" "예." "그리고 나도 분명히 고위마족이고 말이야." 아이에드의 심각하다 못해 묵직한 목소리에 로시엔은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불경스러운 일을 저질렀다. "그렇지요. 당신은 서열 3위, 최고위 마족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데' 라니요?" "왜 우리가 청소를 해야하는건데?" 아이에드의 표정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글이 빼곡이 써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왜 걸레가 들려 있어야 하는지, 왜 자신이 내가 저번에 블러드 아미 청소때 썼던 그 노란 꽃무니 머릿수건을 써야만 하는지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그것은." 로시엔은 살풋 웃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왜 당연한 일이냐고!! 저 물컵이 떨어지는 것을 막듯, 의지력 하나로 우리는 충분히 이 성 전체를 깨끗이 할 수 있잖아!!" 발악하듯 외치는 아이에드. 그럼 묻겠는데, 이봐. ……내게 블러드 아미의 청소를 시킨 것에 대해선 지금쯤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 "물론이죠. 의지로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로시엔은 다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말을 하고 있는 도중에도 물기를 머금은 작은 수건으로 찬장 구석구석을 꼼꼼히, 정말로 꼼꼼히 훔치고 있었다. 역시 결벽증이 있어, 로시엔. "……이유를 말해." 아이에드의 묵직하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 때서야 로시엔은 진실을 말했다. "이유는 없습니다." "엑?" 이 엄청난 발언에 아이에드의 입이 딱 벌어졌다. 나 또한 황당의 눈빛으로 로시엔을 보았다. 로시엔은 말했다. "단지 말입니다." "단지?" "단지?" 나와 아이에드가 동시에 물었다. 로시엔이 피식 웃었다. "단지 말입니다……." 그는 일부로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나와 아이에드는 이빨을 부득부득 갈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 Back : 11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 (written by 카르민) Next : 9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10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September 2001 09:34:38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31-08-2001 19:07 Line : 225 Read : 610 [11]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 -------------------------------------------------------------------------------- -------------------------------------------------------------------------------- Ip address : 61.78.222.2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그저, 오랜만에 이 앞치마를 입어보고 싶었다고 할까요?" 긴장하고 긴장했던 나와 아이에드의 기대를 박살내며, 로시엔은 너무나 가벼운 어조로 말하곤 로시엔 자신이 입고 있는 새하얀 앞치마를 가리켰다. 그것은 청소를 할 때만 입는 앞치마로, 더러워야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먼지 한 톨도 묻어 있지 않았다. "로시엔." 로시엔의 이 어처구니 없는 대답에 아이에드의 목소리는 더더욱 깊게 깔렸다. 나는 다시 걸레를 보며 심오한 고찰에 빠져야만 했다. "왜 그러십니까?" "…하나 묻겠는데." "물으십시오." "이유가 정말 그것 뿐이냐?" "아뇨." 휘청. 나와 아이에드는 이 뜻밖의 대답에 동시에 휘청거렸다. 나는 휘청거리느라 다시 그 크리스탈 잔을 깰 뻔 했으나, 간신히 떨어지기 직전에 손으로 받을 수 있었다. 로시엔은 그런 나를 보며 살짝 웃어준다음 다시 말했다. "이 수건도 한 번 써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로시엔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그의 파란 머리카락을 살짝 가리우며, 역시 흰빛의 머릿수건이 있었다. "……." "……." 나와 아이에드는 동시에 깊은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역시나 로시엔이었다. "그럼 즐거운 마음으로 계속 청소를 해볼까요?" 전혀 즐겁지 않은, 침묵에 가득 쌓인 우울한 청소는 오후 늦게 끝났다. * * * * * * * * * * * * * * * * * * * * "피곤해." 아이에드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동의했다. "……네 놈 말에 맞장구쳐야 한다는 게 슬프지만, 나도 마찬가지야." "오랜만에 아들이랑 이야기가 통한다니 기쁘군." "……닥쳐." "왜, 아들?" 아이에드의 보랏빛 눈동자가 빛났다. 녀석은 웃고 있었다. 최고위마족 주제에, 게다가 서열 3위인 주제에 오늘 하루 종일 로시엔의 말도 안되는 이유에 휘둘러 청소를 해야했던 아이에드는 상당히 지친 눈치였다. 나 또한 지쳐야 정상이지만, 내가 누군가!! 나는 그 이름도 유명한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 나의 강인한 체력은 이런 시련 따위 가볍게 이기고 말았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블러드 아미에서 죽도록 청소를 한 보람이라는 것이 맞겠군. "칼레들린." 내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아이에드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최근에 어때?" "뭐가." 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이에드는 다시 쿡, 하고 웃었다. "시침떼지말고." 나는 아이에드의 말에 잠시 침묵했다. 그렇게 한참후, 나는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성 밖의 하늘은 역시 맑았다. 늦은 오후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메카니라이시(메카니라이시― 제 12대 마왕 메카니라이시타이라의 이름에서 따온 별칭. 마왕 중 유일한 여제(女帝)의 머리카락은 깊은 남빛이었는데, 126G헤레카의 저녁 하늘의 빛이 그 빛깔과 비슷하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가 오늘 따라 더 눈에 띄는군. "……상관하지마." 나는 최대한 냉정하게 뱉어냈다. 순간, 아이에드의 얼굴 위로 뭔가 씁쓸한 것이 스쳤다. "칼레들린." "뭐냐?" "……너는 싫어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다. 12년전의 그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너를 아주 아끼고 있다는 것이고 너를 아들처럼 여기고 있다는 거다." 닭살 돋는 소리 주절주절 잘도 늘어 놓는군. "그래서?" "그래서긴 뭐가 그래서야. 요즘 어떤지, 솔직하게 말해봐." "전혀 달라진 것이 없지." 나는 그제서야 솔직하게,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털어 놓았다. 아이에드는 내 말에 푹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은 내 느낌 때문인지, 조금은 슬프게 보였다. "유치한 마족놈들. 하지만 걱정마라. 네가 각성을 하고나면, 너를 반마족이랍시고 업신 여기는 그녀석들을 충분히 망가뜨려 놓을 수 있을테니까." 말하는 아이에드의 눈빛이 차갑다. 이럴때만은 미치광이 마족이란별명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반 병신 만들어 놓을 수도 있고, 내 소중한 아들을 괴롭히는 그런 자식들 따위." 아이에드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눈에는 아까 같은 차가움은 없다. "됐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가볍게 기댔다. 그리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언제나 반복되는 질문이 있다면, 방금전과 같은 질문이다. 언제나 물어보곤 한다, 아이에드는. [최근엔 어때?] 그 물음 속엔 깊은 뜻이 박혀 있다. '요즘도 그 쓰레기들이 괴롭히나?' 그리고 언제나 변함없는 나의 대답. [달라진 것 따윈 없어.] "차 가져 왔습니다." 나의 상념을 흔들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들었고, 그 곳에서 웃고 있는 로시엔을 발견했다. 나와 아이에드를 근 5시간동안 청소라는 막노동에 집어넣고 랄라랄라 룰루룰루 즐거워하며 청소를 했던 로시엔은 단정한 검은 옷을 입은 채로 두 손에 뭔가를 잔뜩 바치고 있었다. 기다란 모양의 주전자와 둥근 컵이 보였다. "……." 아이에드는 말없이 내밀어지는 찻잔을 건네받았다. 나는 애초에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나는 차를 싫어한다. 이유? 그 따위건 없다. 그냥 싫은거다. "써서 마시기 싫다고 한 것이 어언 7년. 처음 차를 드신 그 때부터, 지금까지 차라면 기겁을 하셨죠?" 로시엔이 자리에 앉았다. 로시엔은 웃고 있었다. "그때가 그러니까…… 음, 당신이 12살 때였냐? 차를 끓여 왔더니 한 모금 마시고 혀가 완전히 데인 채로, 방바닥에 데굴데굴 구르고 계셨지요. 그것이 차를 못마시게 된 원인인 듯 싶네요?" "……." 나는 침묵을 지켰다. 나는 로시엔의 말에 확실한 반박을 해주기 위해서 그 찻잔으로 손을 뻗으려 했다. 그러나 나는 포기했다. 그 어린날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 제길. 나는 어린 시절 차를 마시다 혀를 데인 이후로 다시는 차를 마시지 못하고 있다. 창피한 일인 줄은 알지만 어쩔 수가 없다. "시끄러워." 나는 다시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쪼르르, 주전자에서 물을 따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화롭군. 평화라는 감정은 마족이 그다지 원하지 않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반쪽짜리고, 그래서 이런 감정을 좋아한다. 이중성격의, 가만히 있으면 티가 나지 않지만 사이코 기질이 다분한 유모격 로시엔과 역시 사이코 기질이 다분한 자칭 나의 아버지라 주장하는 아이에드. 인정하긴 싫다. 정말 싫지만…… 오늘 따라 또 감상적으로 변하고 있다. 센티해진다. 입술이 벌어진다. "고마워." 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내가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12년전부터 지금까지, 가슴 속에 누르고 누른 채로 한 번도 전한 적은 없었던 진심. 하지만 반드시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네?" "뭐라고?" 아이에드와 로시엔이 동시에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게다가 아이에드는 오버를 하고 있었다. 녀석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곧 고함을 질렀다. "안 돼∼!! 칼레들린이 이상해졌어!!" "……닥쳐." 나는 일어서서 날뛰려는 아이에드의 발을 꾹 눌러 주었다. 아이에드는 곧 조용해졌다. "저도 당신께 감사드리고 싶네요. 저와 아이에드의 옆에 있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큰 위안입니다." 그 때, 은은한 로시엔의 말이 들려왔다. 나는 쑥스러움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에드는 헷, 하고 웃었다. "아이에드님!!!!!" 그 순간이었다. 나란히 둘러앉은 우리 셋이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무슨 소리지?" 갑작스럽게 들려온 그 [아이에드님]이라는 호칭에 아이에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로시엔 역시 당황한 눈치로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정작 놀란 것은 나였다. "어라, 이 목소리?" 로시엔과 아이에드가 나를 보았다. 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라이메데스라는 놈의 목소리네?" "아이에드님!!!!!!!" 내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다시 아이에드를 찾는 막강 아이에드 팬인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자, 아이에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라이메데스 목소리가 맞군. 그런데 왠일이지?" 아이에드의 오른쪽 눈썹이 살풋 찡그려졌다. 녀석은 천천히 일어났다. 로시엔 역시 조금 기분이 상한 듯, 천천히 일어섰다. "……주군의 부름도 없이 함부로 이 곳을 방문하다니…… 데스 같이 예의 범절 그 자체인 이가 왠일이죠? 알 수 없는 일이군요." 로시엔의 나즉한 말투가 들려왔다. 나는 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일인가." 그 때, 아이에드가 거의 한숨을 쉬듯이 뱉어냈다. 나는 뭔가 불행을 예감했다. "……급한 일인가 보군요." "아이에드님!! 어디 계십니까!! 데스입니다!!" 말 안해도 여기 있는 마족 다 알고 있다. "어쨌든 가봐. 저 멍청이는 언제까지 고함을 지를 셈이지?" 나는 이렇게 뱉어냈다. 내 의견이 옳다고 느꼈는지, 아이에드와 로시엔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보았다. 로시엔의 얼굴에도, 아이에드의 얼굴에도 깊게 드리워진 것. 그것은 무엇인가를 예감한 자의 얼굴이었다. 나는 더욱 불안해졌다. * * * * * * * * * * * * * * * * * * * * ……누군가가 말했다고 한다. [평화]나 [행복]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다. 그리고…… 평화 뒤에는 격정이, 행복 뒤에는 흐릿한 불행이 기다린다, 라고. 그리고 옛성헌은 단 한 번도 틀린적이 없다. 늘 그런 것이다. 인간의 신 중에는 디모세이라는 이름의, 운명의 신을 비튼다는 존재가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마족에게는 운명이란 것이 없다. 하지만 나는 반마족이고 인간의 피도 반쯤 섞여 있다. 그렇다면 그 날 있었던 일은 역시 내가 인간이기에, 디모세이라는 이름의 신이 장난을 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반쪽짜리 인간에게 디모세이라는 이름의 신은 운명의 실을 걸었다..... -------------------------------------------------------------------------------- Back : 12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 (written by 카르민) Next : 10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10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September 2001 09:34:42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31-08-2001 19:10 Line : 181 Read : 586 [12]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 -------------------------------------------------------------------------------- -------------------------------------------------------------------------------- Ip address : 61.78.222.2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헉!! 허억, 아…… 아이에드님." 언제나 그 특유의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놀리며 유치한 짓거리(굳이 구체적인 예를 들라고 한다면 좀 기억하긴 싫은 일이긴 하지만…… 바닥에 침을 뱉으며 그걸 닦는 나를 유쾌한 눈으로 보는 기괴한 행동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를 일삼아 왔던 라이메데스 놈의 숨결은 이상할 정도로 가빠져 있었다. 비록 그 마음 속은 사악한 것으로 난잡하기 그지없다 하더라도 겉모습만큼은 언제나 단정했던 녀석답지 않게 상당히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어깨 정도에서 나부끼던, 부드러워 보이던 금발은(머리를 몇 일에 한번씩 감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온통 땀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고, 땀은 하얀 턱을 타고 점점이 흘러내려 녀석이 무척 지친 상태라는 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흠, 나를 놀려먹는 것을 즐기던 저 녀석이 저렇게 꾀죄죄한 몰골이니 상당히 유쾌하긴 하다만…… 무슨 일로 저런 꼴사나운 모습으로 있는 거지? 나는 아직도 상반신을 완전히 굽힌 채 헉헉대고 있는 라이메데스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일입니까, 데스." "아, 로, 로시엔……님." 나나 아이에드보다 한 발 먼저 라이메데스 앞으로 간 로시엔은 약간은 엄격한 얼굴로 라이메데스에게 말을 걸었고 라이메데스는 여전히 숨을 헐떡이며 로시엔을 보았다. 라이메데스의 지친 얼굴을 한 번 본 로시엔은 조금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동안의 친분을 고려해서 오늘은 이 정도로 해두겠지만 다음부터는 이런 시간, 예고도 없이…… 그것도 그렇게 숨을 헐떡이는 모습으로 찾아오는 경우는 없었으면 합니다. 개인적인 시간을 방해받는 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불쾌하군요." 커억. 나는 로시엔의 그 차갑다 못해 얼음 같은 말투에 움찔했다. 라이메데스를 [데스]라고 부를 정도면 꽤나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나 싸늘한 말투라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히히덕거리던 주제에 저런 표정이라니. 역시 이! 중! 성! 격! "로시엔님, 죄송…… 헉…… 합니다…… 하…… 헉…… 지만 급한…… 헉헉…… 저, 전갈이라…… 후욱……" 라이메데스는 다시 거친 숨을 뱉어내며 억지로 말을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시엔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버렸고, 나는 웃음이 치미는걸 억지로 참아야만 했다. 지금 저렇게 헉헉대고 있는 라이메데스의 말을 정리하자면, [로시엔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한 전갈이라.] 이거 맞나? 중간중간의 저 헉헉대는 숨소리 때문에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겠군. 저 꼴이 될만큼 급한 일이었다면 공간이동이나 공간 왜곡 같은 걸 이용해 간단하게 성으로 들어올 수도 있었을텐데 왜 저렇게 땀 뻘뻘 흘리면서 추하게 달려 온 거야? "헉, 헉헉……" ……계속 보고 있자니 진짜 추하게 보이네. "로시엔……님. 하여튼…… 헉헉…… 죄송합니다." 라이메데스의 조금 긴장한 듯한 얼굴에서 다시 한 번 땀이 흘렀다. 라이메데스의 얼굴은 그야말로 미안함의 극치였다. 로시엔과 라이메데스의 대화를 잠시 보고 섰던 아이에드는 흠, 하고 낮게 뱉어내더니 녀석들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알았으니 그만하고 용건을 말해라, 데스. 그렇게 숨만 몰아쉬고 있으면 무슨 일인지 모르지 않나. 급한 일인 것 같은데." 아이에드가 살짝 인상을 긁으며 말하자 라이메데스는 송구스럽다는 표현을 온몸으로 했다. 녀석은 몸을 살짝 앞으로 숙이며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말했다.(커억!! 그렇게까지 아이에드가 좋다는 표현을 온 몸으로 해야한단 말이냐!!) "죄, 죄송…… 헉헉…… 죄송합니다." 라이메데스는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똑바로 들더니 잠시 동안 숨을 골랐다. 나는 멀찍이 녀석을 지켜보았고, 아이에드와 로시엔은 라이메데스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팔짱을 낀 채로 있었다. 한참 후, 라이메데스가 입을 열었다. "실은 방금전에, 마왕성으로부터의 전갈이 왔었습니다." "마왕성?!" "마왕성이라고 하셨습니까?" "엥?" 처음의 것이 아이에드, 두 번째 것이 로시엔, 마지막 것이 나였다. "네, 마왕성이요." 아이에드와 로시엔, 그리고 나의 지나친 반응(고함을 빽 지르며 놀란 듯한 표현을 온 몸으로 보여준 것)이 조금 부담스러웠는지 라이메데스가 한 발 물러서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우리 네 마족 사이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사이에서 고고한 세이빈만이 머리 위에 뜬 채로 홀로 빛나고 있었다. 몇 일 전 아이에드가 돌아오던 그 날처럼, 세이빈의 빛깔은 청명했다. 그 빛깔은 자애로운 푸른빛을 띈 채로 모두의 머리카락에 매달렸다. 천천히, 천천히, 바람결에 포물선을 흩날리면서 모두의 머리카락이 세이빈의 축복을 받으며 흔들린다.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잠시의 침묵을 깬 것은 늘 그렇듯이 로시엔이었다. 로시엔은 싱긋 웃으며 뒤에 있던 아이에드를 돌아보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네요, 아이에드님. 어쩌죠?" "끄응." 순간, 아이에드가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역시 이 둘이 이 갑작스러운 '마왕성으로부터의 호출' 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 설명을 촉구하는 눈빛을 마구마구 보냈다. 그러나 이 둘은 무엇인가를 무시하는데에 한해서만은 권위적인 위치를 차지한, 그 이름도 대단한 뻔뻔돌이 마족들이었다. 그들은 허허허, 하하하, 자기네들 끼리만 이상한 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무시했고 결국 나는 직접 입으로 묻는 수 밖에 없었다. "……마왕이 왜 부르는건데?" 단도직입적으로 아이에드를 향해 물었다. 나로서는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시간에 라이메데스가 난데없이 튀어나와 '아이에드님!!'하고 외쳐댄 것으로 보아 꽤나 급한 전갈이 틀림없는데, 저녀석들은 마치 전갈의 내용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별 일 아니야. 뭐, 언제나 이 맘쯤 되면 마왕성에 갈 일이 생기지." 아이에드가 나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것은 진짜 웃음이었다. 그러나 난 그 웃음에 속을만큼 무르지 않다. 누가 뭐래도 아이에드는 뻔뻔돌이 마족이니까. 나는 인상을 썼다. "왜 마왕성에서 너희를 부르는거지, 로시엔?" 그러나 아이에드의 대답이 아무리 거짓말이란 걸 알고 있다고는 해도 아이에드 같이 초강도의 강철 얼굴을 가진 녀석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고해서 정답이 나올리는 없는법, 나는 결국 로시엔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로시엔 역시 웃었다. "별 일 아닙니다, 칼레들린님. 가끔씩…… 왜, 그거 있잖습니까. 3년에 한 번씩 부르는. 블러드 아미의 현황을 보고하러 마왕성에 직접 가야 하는 시기. 지금이 그런 시기입니다." 로시엔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로시엔의 성질 역시 파악하고 있다. 로시엔은 거짓말을 아주아주 능숙하게 할 수 있는 녀석이지만 대신 거짓말을 할 때면 파란색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가 작아지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지금 그 버릇이 십분 발휘되고 있다. 내가 로시엔의 이 특이하다면 특이하달 수 있는 버릇을 알게 된 것은 7살 때, 내가 로시엔이 소중하게 여기던 인간계 물품인 도자기를 하나 깼을 때부터였다. 그때도 로시엔은 저런 식으로 웃으며 [괜찮습니다]라고 했지만 그 파란색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가 작아지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봤었다. 그리고 그것이 미심쩍어 그날부터 유심히 유심히 관찰해본 결과, 로시엔은 거짓말을 할 때 항상 그런 반응이 나타난다는 것을 영악하고 똑똑한 나는 파악해 낼 수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경험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내가 바본줄 아냐, 로시엔? 겨우 그 딴 일로 이 시간에 저 라이메데스 놈이 저렇게 추하게 땀 뻘뻘 흘리면서 튀어나왔을 리가 없잖아." "누가 추해!!" 여태까지 얌전히 우리 셋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라이메데스는 내 말을 듣고 발끈한채 외쳤지만 곧 그는 로시엔의 싸늘한 눈초리 공격 한 방에 조용해졌고 더불어 아이에드의 쏘는 듯한 눈빛에 완전히 고개를 숙인채 나만 미워해…… 라는 동작을 취하는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나만 미워해, 같은 건 내가 느낀 것이지 그가 직접 입 밖으로 낸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얘기해봐. 마왕성에서 왜 갑자기 호출한거지? 급한 건가본데." 나는 다시 로시엔에게 물었다. 아무리 물어도 아이에드는 결국 거짓말을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로시엔은 힘 없이 웃었다. "정말로 별 것 아닌 일입니다, 칼레들린님." 하지만 로시엔의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나는 느꼈다. ……절대로, 절대로 별 일 아닌게 아니다. 심각한 일이다. 피부가 느끼고 있다. 온 몸이 느끼고 있다. 무슨 일……? 나는 어차피 이런 치사한 녀석들이 진실을 말해줄 것 같지 않다고 판단하고, 혼자서 고심하기 시작했다. 최근 있었던 일을 꼼꼼히, 그리고 최대한 세세하게 하나하나 나는 정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나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결론에 도달함과 동시에, 나는 머릿속이 멍하게 비어버림을 느꼈다. "설마, 로시엔……?" 내가 12년 이라는 세월을 이곳, 마계에서 살면서 나는 제정신이 아닌 날이 꽤나 많았다. 나를 차별하는 각성 마족들의 태도에 흥분한 적도 많았고, 철저하게 나를 짓밟았던 비각성 마족들의 태도에 화가 나서 모든 것을 때려 엎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날뛰었었던 그 때도 내 안에서는 일말의 이성이라는 것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과연 이 순간의 내 머릿속에도 이성이란 것이 남아 있을까? "설마…… 마왕성으로부터의 호출. 내, 내가…… 찢어버린…… 고대 마족의문서 때문…… 에…… 부르는 거냐?"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착 깔려져 있었다. 나는 불안했다. 내가 말한 것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고대 마족은, 현재의 마족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엄청난 힘을 소유한 자들이라고 했고 그들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그들이 남긴 모든 것이 현 마족들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들에 대한 자료가 희박한 지금, 그 자료 중 하나를 분실했다는 것은 막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 자료를 분실한 것은 나란 말이다!! "무슨 소리냐?" 내가 이렇게 외쳐놓고 불안함에 떨고 있을 때, 내 어깨에 무엇인가가 조용히 손을 올렸다. 아이에드였다. 나는 돌아보았다. "고대 마족의 문서…… 내가 찢어버렸잖아. 그 때는 다들 장난으로 넘어갔지만…… 사실은 그게 엄청 중요한 거라서…… 그래서 마왕이 부르는거 아냐?" "그런거 아니다." 내가 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에드가 말했다. 나는 로시엔을 휙 돌아 보았다. 로시엔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게 아닙니다, 당신의 실수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파란 눈동자가 강렬한 무엇인가를 담고 있었다. 나는 힘이 쑥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야? 정말 그것 때문에 부르는거 아니지?" "내가 거짓말 하는거 봤냐?" 아이에드가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마주하며 묵직하게 물어왔다. "지난 12년동안 질리도록 봤다." "……그 때는 분위기에 이끌려서 못봤다고 해야하는거다, 아들아." 아이에드는 한숨을 쉬듯 말하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멍하니 우리 셋의 대화를 듣고 있던 라이메데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라이메데스 녀석은 조금 상기된 얼굴로 아이에드를 보고 있었다. "듣겠다." "네?" 아이에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라이메데스가 되물었다. 아이에드는 자신이 말한 듣겠다, 라는 단어가 아무래도 부족한 설명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말을 덧붙였다. "마왕님이 보내셨다는 그 전갈을 듣겠다는 말이다." -------------------------------------------------------------------------------- Back : 13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 (written by 카르민) Next : 11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10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September 2001 09:34:45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31-08-2001 19:10 Line : 177 Read : 559 [13]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 -------------------------------------------------------------------------------- -------------------------------------------------------------------------------- Ip address : 61.78.222.2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마왕님이 보내셨다는 그 전갈을 듣겠다는 말이다." "아, 아 예." 라이메데스는 뒤통수를 긁으며 멋쩍어 했다. 아이에드는 잠시 험험,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왕님의 전갈, 나 아이에드 엘버지운 피엘 블러드 아미스 류 아스테리카 리오드 카리나트에스 히메오 카이산 페이디스 듀라인 그레이시드 인테이느 아미스 류 나이느에스 세리오니에이트 카리온 나이트 유라이시스…… 그만해도 되겠지?" 한참 자신의 이름을 줄줄줄 읊어 대고 있던 아이에드는 어느 순간 숨이 막혔는지 이렇게 말하며 로시엔을 보았다. 로시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칙적으로, 마왕의 앞 혹은 마왕의 전갈을 받을 때는 나 누구누구누구씨, 이것을 보겠다…… 나 누구누구씨 마왕을 뵙습니다…… 어쩌구저저쩌구 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아이에드처럼 이름이 엄청나게 긴 마족은 그 절차를 자기 마음대로 사탕과 바꿔먹기도 하는 것이다. "……사설이 길었군. 하여튼 현재의 블러드 아미스 류인 나, 아이에드는 마왕님의 전갈을 듣겠다." 아이에드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읊어라, 라이메데스." 아이에드가 짧게 말했다. 라이데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치켜 올렸다. 그것은 검은빛의 둥근 구체였다. 라이메데스는 그것을 공중으로 띄우더니 천천히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서열 제 3위 마족, 블러드 아미스 류 아이에드와 서열 제 16위 마족 아이시 사일런트 로시엔에게 전한다. 이 전갈을 받는 즉시 마왕성으로 출두하라." "엑? 로시엔도?" 라이메데스가 한참 진지한 얼굴로 묻는데, 아이에드는 완전히 초를 치며 이렇게 외치며 로시엔 쪽으로 휙 돌아보았다. 로시엔 역시 약간 놀란 얼굴이었다. "저도 가는겁니까?" "아이시 사일런트 로시엔님은 당신 뿐입니다, 로시엔님." 라이메데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렇게 말했고 로시엔은 수긍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스 사일런트. 그것이 로시엔의 유일한 별칭이던가. "이 전갈을 듣는 즉시 오지 않아 만약 내가 정한 시간에 1초라도 늦는다면……" 1초라도 늦는다면, 까지 읽던 라이메데스는 더 이상 읽지 못하고 머뭇머뭇거렸다. 그는 한참 그 둥근 것을 보며 비적비적 거렸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이에드는 피식 웃었다. "그만 읽어라, 라이메데스. 무슨 내용인지는 충분히 알았다." "예, 옙!" 라이메데스는 완전히 굳은 채로 대답했다. 뻣뻣한 나무 토막같은 표정. 정말 완벽하군, 라이메데스. 네녀석은 정말이지…… 구제 불능의 아이에드 팬이었군, 그래. "어쩌지, 로시엔?" 아이에드가 로시엔을 바라보고 웃으며 물었다. 로시엔은 가볍게 부복하며 말했다. "주군이 가는 곳은 곧 제가 가는 곳, 마왕께서 하시는 말은 그대로 법. 그대로 따라야지요." "아아, 당연한 이야기를 물었나? 하지만 그러면 칼레들린이 혼자 성에 남게 되는걸." 아이에드는 약간 걱정어린 목소리로 말하더니 나를 보았다. "칼레들린." "왜?" 나는 아이에드를 보았다. 그리고 순간, 타이밍도 절묘하게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언제나 그렇다. 녀석이 폼을 재고 있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바람이 분다. 이것도 마력의 운용에 의해 생긴 현상일까?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군. 미미한 흔적의 마력조차 주변에서 느껴지지 않는걸보면. "……아무래도 나와 로시엔, 둘 다 성을 비워야 할 것 같다." "내 귀 멀쩡해. 나를 귀머거리라고 생각하는거냐? 너랑 똑같이 들을 거 다 들었어, 바보놈." 나는 냉정하게 쏘아주었다. 순간, 아이에드가 약간 상처받은 표정을(그 표정을 보면서 나는 왜 저번, 성에서의 대청소날 그 걸레를 저녀석의 입에 넣어주지 않았나, 하고 깊은 고찰에 빠졌다.)지었다. "흠." 아이에드는 약간의 신음성과 함께 돌아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라이메데스를 보았다. "라이메데스." "류! 말씀하십시오." "전해라, 내가 몇 일동안 군을 비울 것 같다. 부재일 것 같으니, 내 밑의 병사들에게 똑똑히 전하도록." "걱정마십시오." 라이메데스는 듣기만해도 신용이 팍팍 오를 것 같은 목소리로 당차게 외쳤다. 아이에드는 만족스러웠는지 어쨌는지 살풋 고개를 끄덕였다. 로시엔은 그런 라이메데스와 아이에드의 모습을 표정 없는 얼굴로 보고 섰다가 잠시 후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내 앞으로 다가온 로시엔은 내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려놓더니 그 특유의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라는 것이 여느 때와는 조금 틀린 것이, 마치 아이를 혼자 집에 두고 어디론가 외출해야하는 어머니의 표정과 유사했다. 그러고보면…… 조금은 비슷한 상황인가? 아악!!! 아니야!!!! 전혀 비슷한 상황이 아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칼레들린님." 내 어깨에 살풋 양손을 올려놓은 로시엔이 역시 부드러운 어조로 내 이름을 불렀다. "말해." 나는 약간 무뚝뚝하게 말했다. "문 잘 잠그고 주무십시오. 혹시라도 당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은 이들이 습격이라도 한다면 큰일이니까요." "만약 습격하기로 작정하고 쳐들어온다면 문 잠가봤자 마력 덩어리 한 방이면 부숴질텐데?" 내 이 현실적인 대꾸에 로시엔의 양미간이 살풋 좁혀졌다. "……어쨌든 잠그십시오." "그러지 뭐." 나는 그 표정에 못이겨 할 수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밥은 꼭 챙겨서 드십시오." "마족은 밥 안 먹어도 상관없잖아." "그래도 당신은 드셔야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그러면 잔말말고 드십시오, 알겠습니까?" "그러지 뭐." 나는 이번에도 약간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로시엔은 그런 나를 향해 정말로 엄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이건 필수적으로 지켜야 하는 겁니다. 이번엔 절·대·로· 아이에드님의 서재에는 출입금지입니다." "……그, 그래." "그리고……." 이런 식으로 로시엔의 잔소리는 끝도 없이 이어졌고 라이메데스의 얼굴은 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사색에 가까워졌다. [1초라도 늦는다면……] 뒤에 이어질 내용이 꽤 살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렇게 지겹도록 나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던 로시엔은 한참만에 드디어 끝났는지 아이에드 쪽으로 걸어 나갔다. 아이에드의 옆에 선 로시엔은 그의 주군 아이에드에게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워프 공간은 제가 만들겠습니다." "좋을대로." 로시엔은 오른손을 옆으로 좌악 뻗었다. 그와 동시에, 마치 거짓말처럼 그의 손에 이글거리는 검은 무엇인가가 맺혔다. 그 것은 곧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로시엔의 팔 전체를 뒤덮을 만큼 커다란 암흑의 투기가 되어 있었다. 로시엔은 그것을 가볍게 떨구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파지직―. 그리고, 그 것이 떨어지자 정원 한가운데 새까만 원형의 공간이 생겨났다. 그것은 분명, 워프의 공간이었다. 로시엔은 무감각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동안 아무쪼록 몸조심하십시오. 어쩌면 조금은 늦어질지도 모르나…… 빨리 돌아오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저와 아이에드님께 있어서 당신의 존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다는 것을." 굳이 그렇게까지 신경 써 줄 필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로시엔의 진심이 가슴 아플 정도로 전해져 온다. 나는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쳇, 역시 인정하기 싫지만 이 느낌이 바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느낌이잖아. "칼레들린." 로시엔이 왠지 쑥스러워지는 그 말을 남기고 워프의 공간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아이에드가 나를 불렀다. 나는 아이에드 쪽을 보았다. "아버지 다녀오마." "……한 번만 더 그 아버지란 소리를 하면 입을 찢어 버릴테다." 나는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 "훗." 아이에드는 내 독설을 듣고도 피식 웃어 넘겨 버렸다. 그리고, 로시엔의 등을 따라 워프의 공간으로 사라졌다. 나는 멍한 눈초리로 그 모든 과정을 빠짐 없이 보았다. 검은 그것은 로시엔과 아이에드의 몸을 숨기며,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했고 그 검고 허무한 공간의 틈새는 아이에드의 마지막 옷자락이 그곳을 스친 것을 마지막으로 살짝 이지러지더니, 곧 정원으로 와해되었다. "……갔다." 나는 픽, 하고 한숨을 쉬며 웃었다. 그 순간이었다. "……그래, 가셨군." 라이메데스가 조용히 중얼거린 것은. -------------------------------------------------------------------------------- Back : 14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 (written by 카르민) Next : 12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10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September 2001 09:34:49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31-08-2001 19:15 Line : 274 Read : 583 [14]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 -------------------------------------------------------------------------------- -------------------------------------------------------------------------------- Ip address : 61.78.222.2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여태까지와는 사뭇 다른, 그래도 친근함이 묻어 있던 저번의 그것과는 달리 이번 라이메데스의 목소리는 훨씬 더 메말라 있었고 딱딱해져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퍽퍽한 그 목소리에 나는 움찔 심장이 굳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칼레들린." "뭐냐?" 아이에드와 로시엔이 워프의 공간으로 나가자 둘만 남게 된 이 어색하다못해 왠지 헛기침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에서 라이메데스놈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왠지 너무나 어색한 기분에 머리를 버벅였다. 라이메데스는 조금은 씁쓸한 표정으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은 떨리는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별 일 없으시겠지?" 나는 뻔뻔함으로 아이에드를 능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 녀석의 목소리가 떨렸다는 사실에 꽤나 놀라서 녀석을 바라보았다. 초록색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마지못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일 아니라고 했다, 로시엔이." 라이메데스가 피식 웃었다. "로시엔님을 신뢰하고 있나보지?" 전혀.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이 심각하고도 진중한 분위기가 엉망진창으로 변할 것 같아서 자제했다. 나는 그러나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서 그대로 침묵을 고수했다. 라이메데스는 조금은 멍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곧 피식 실소했다. "……나는 역시 네 녀석이 싫어." 그 말은 도대체가 몇 번이나 들었는지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 이제 그만 좀 하라고 외치고 싶을 지경이로군. 그리고, 말한 적은 없지만 나도 네 놈 싫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질투에서 기인한건지도 모른다는…… 조금은 짜증나는 생각이 드는군." 나는 순간 오싹하고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나는 녀석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보았고, 그런 내 표정을 본 라이메데스는 다시 웃었다. "비각성 시절부터…… 나의 유일한 동경의 대상은 블러드 아미스 류…… 아이에드님이었다." 그 말도 귀에 딱지 앉도록 들었다. 제발 좀 집어쳐라, 앙? 크악, 짜증나!!! 아이에드 네녀석은 대체 밖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다니길래 저런 광신도가 나온단 말이냐!? "그리고 나의 목표는 로시엔님. 언젠가 그 분처럼 아이에드님 옆에서 말없이 보좌해드리는 멋진 보좌관이 되고 싶었다." 혹시 그걸 이중성격에 되고 싶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괜찮을까? "……하지만……" 말을 하다말고 라이메데스는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쏘는 듯한 눈길에 잠시 멈칫했다. "몇 백년을 그분들의 곁에 있기 위해 노력한 나보다, 단 10년 남짓을 그분들과 함께 한 너의 존재가 나보다 훨씬 대단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라이메데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순간, 나는 여태까지 블러드 아미에서 열심히 바닥을 닦던 내 앞에서 무심하게 침을 뱉어내던 녀석과 내 앞에서 씁쓸한 어조로 말을 하고 있는 이 녀석이 정말로 동일인물인가, 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어야만 했다. "어쩌면 내 행동들은 다 그런 너에 대한 질투였는지도 몰라." ……그런 표정으로 그런 유쾌하지도 않은 사실을 인정하니까 무섭군. 라이메데스는 멍하니 아이에드와 로시엔이 워프 게이트를 만들고 사라진 정원을 보았다. 그리고 쿡, 하고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네 놈한테 무슨 말을 한 거지…… 아이에드님이 마왕성에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으셨다는 사실에 잠시 이성이 마비라도 됐었나보군……." 라이메데스는 그 말과 함께 조용히 성 바깥으로 돌아섰다. 녀석의 금발이 물결쳤다. 그리고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녀석은, 문득 멈춰섰다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해도 될까?" 언제 네녀석이 그런걸 내 허락맡고 했냐. "해봐." "역시 난 네가 싫어." "……." 끈질긴 녀석.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나도 네녀석 싫어." * * * * * * * * * * * * * * * * 아이에드와 로시엔이 없다―. 이 사실은 처음에는 나를 상당히 기분 좋게 만들어 주었다. 내가 기분이 좋을 수 밖에 없는 이유. 첫째, 이제부터 나를 간섭하는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다는 것이 바로 그 것이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아이에드를 상대로 1분 내지는 3분을 버텨야 한다는 식의 그 지긋지긋하던 훈련도, 로시엔의 잔소리도 없다는 사실에 내심 기뻤다. 그것은 내가 여태까지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자유였다. 6살때 마계에 발을 들인 시점부터, 단 한순간도 아이에드와 로시엔이 동시에 성을 비운 적은 없었다. 자칭 나의 아버지라는 뻔뻔돌이 아이에드나 유모역인 로시엔은 나같은 녀석을 혼자서 성에 남겨두고 어디론가 간다는 사실이 탐탁찮았거나 불안했던 모양이다. 나는 언제나 녀석들과, 혹은 녀석들 중 하나와 함께 있어야 했다. 자유. 그래서 나는 녀석들이 없는 그 시간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달래려고 하고 있다. "……후우."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빌어먹을. 왜 이렇게 불안한지. 왜 이렇게 가슴 한구석이 아프지. 왜 이렇게 코끝이 찡한 건가. 왜 마음 한 구석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지. 왜…… 쓸 때 없이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봐야 하는 건가. 내가 예민해진 건가? 아니면 또 감상적이 된 건가? 빌어먹을, 이런 감정 따윈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쓸 때 없이 센티해지는 것만큼 피곤한 건 없다고. "……제길, 잠이나 자야겠다." 나는 내 방으로 올라가서 문을 닫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로 멍하니 하늘만 본다. 그렇게 시간을 죽여나간다. 그런 허무한 시간들이 채워져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삼일이 가고 사일이 갔다. 그리고 녀석들이 떠난지 정확히 오 일째가 되는 날의 저녁이었다. "룰루룰루∼∼ 그럼 이제 맛을 보실까…… 후룩! ………… 크엑!!!!!" 밥은 제 때에 꼭꼭 챙기라고 당부했던 로시엔의 말을 잊지 않은 착한 나는 나 스스로 끓인 스튜를 한 입 떠먹은 직후 그것을 그대로 뱉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이, 이게…… 음식이더냐?" 보글보글 끓고 있는 작고 둥근 그릇 안의 그 스튜는 나를 유혹하는 빛깔로 농염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 뿐이었다. 빛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어디서 나온건지 정확하게 증명이 되는 순간이다. "……먹을까?" 나는 엉망진창인 그 스튜를 보며 다시 고뇌했다. 나란 녀석은 사소한 일을 갖고도 깊은 사색을 할 수 있는 마족이 아닌가 나는 한 입 맛 본 채 아직도 끓고 있는 스튜를 먹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찰에 빠졌고, 한참만에 그래도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막상 스튜를 먹으려고 다시 스푼을 가져 갔을 때, 나는 내 이마위로 실핏줄이 도드라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빌∼어먹을. 탔잖아!!" 나는 스튜를 식탁으로 옮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깊은 사색이 빠져 있는 동안 그 하얀 스튜가 냄비에 모조리 다 늘어붙어 버린 것이다. 나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 그래도 먹을까?" 나 자신이 비참하긴 하지만. 나는 천천히 스푼을 들어 다시 스튜 속으로 가져 갔다. 샤륵, 하는 부드럽게 스푼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아니라 철퍽, 하는 그다지 듣기에 유쾌하지 않은 소리가 울렸다.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리고, 스푼을 움직였다. 쾅!! 콰――o 두두두두둣!! 콰아아아아앙∼∼!!!! 그런데. 은빛 스푼을 움직이려던 그 순간에 나는 어떤 요란스러운 음색이 귓전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뭔 소리지?" 무엇인가 굉장히 커다란 것이 부스러질 때 나는 소리였다. 이 근방에 아이에드의 성 말고 다른 마족의 거주지가 있었던가……? 아니면…… 저런 소리를 내면서 부서질만한 거대한 건물이라던가. "……그딴게 있을 리가 없지." 나는 조금 생각하다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친 마족으로 소문난 아이에드의 성 반경 몇 세리하 안으로는 그 어떤 건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고로, 저 소리는 이 성에서 난 것이라는 말이 되는데…… 나는 고민했다. 과연 방금전의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일까. 그렇게 잠시 후, 나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에 온 몸을 떨었다. 둔탁한 음. 그것은…… 성문이 부서질 때나 나는 거대한 소리였다. 스튜가 눈에 들어왔지만 그 딴걸 먹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서둘러 성 밖으로 향하는 복도로 뛰기 시작했다. 침입자. 머릿속이 경고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로시엔과 아이에드가 성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나를 해코지하려고 찾아온 세력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원래가 그렇게 유치한 자식들이었으니. 가쁜 내 발걸음이 딱, 딱하고 복도와 마찰음을 냈다. 나는 쉼 없이 뛰다가 복도 한켠에 걸린 검을 발견했다. 붉은 빌로드 천으로 살짝 감싼 채로 벽에 매달려 있는 그것은. 찬란한 은빛의 검. 나는 그것을 서둘러 뽑아 들었다. 일단은 그것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이∼∼ 반쪽짜리!! 어딨냐!!" 그리고, 내가 검을 뽑아듬과 동시에, 나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 말을 들을 수가 있었다. 내지르는 고함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귀가 다 멍멍할 지경이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이 XX같은 자식들!!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오는거야!!!" 입 안으로 쉴 새 없이 욕이 흘러나왔다. 나는 성 안에 있는 곁문을 세게 치고 나갔다. 탁 트인 정원과, 그 정원에 놓인 자그마한 티테이블이 보인다. 그리고 그 정원 한켠에. "반쪽짜리!! 쿡쿡쿡쿡." 나는 이빨을 꽉 깨물었다. 내 앞에서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퍼지고 있다. 아이에드가 좋아하는 인간계 식물들. 인간계 물건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소유하고 싶어하는 아이에드의 정원에는 온통 인간계 식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식물들을 곱게 피어낸 것은 로시엔. 물을 주고, 조금씩 조금씩 식물 잎을 골라내어주며 키워온 화초가 만발한 가운데, 익숙한 웃음이 있었다. 화초를 짓밟는 무법자들의 모습이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오는거냐." "반쪽짜리. 못보는 사이 더 싸가지가 없어졌군."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는 그 익숙한 비웃음. 짜증날 정도로 싫지만 결코 나를 놓치지 않고 따라다니는 그 지겨운 웃음. 그 웃음이다. 녀석들이다. 녀석들. "반쪽짜리." 깊은 곳에서 짜증과 함께 분노가 샘솟아 올랐다. 내 앞에 선 것은 네명의 마족이었다. 저번에 아이에드와 로시엔을 모욕해서 나와 크게 한 판 했던 녀석들. 그리고 그 녀석들의 뒤로, 자그마한 성문이 무너진 채로 잔해를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들의 발 밑으로 뭉그러진 꽃들. "저번에는 잘도 그런 짓을 했겠다, 반쪽짜리놈." 아이에드의 정원에서, 한 마족놈이 이를 갈 듯이 말하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저번일이라 함은, 내가 네녀석들의 그 건방진 말을 참다못해서 한 판 했던 그 일을 말하는건가? 나는 다시 한 번 화가 치밀어옴을 느꼈다. 비겁한 자식들. 하필이면 아이에드와 로시엔이 없는 이 틈을 노려, 성에 난입하다니! "비켜. 너희가 그 더러운 발로 들어올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아두지 그래? ……어서 꺼져." "……건방떨지마." 내가 깊은 목소리로 경고하자 네 명 중 하나가 이빨을 뿌득 갈며 말했다. 나는 얼굴을 완전히 찌푸렸다. "아이에드의 성안에 너희 같은 더러운 놈들을 들일 수 없다. 나를 패고 싶다면 나가서 맞아우지. 이곳은 안 돼." 녀석들은 내 목소리가 낮게 깔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이 말을 하면서 허리에차고 있던 은빛의 검을 뽑아들었기 때문인지. 녀석들이 움찔했다. "나가." 미친 놈들. 간덩이가 부은 녀석들. 여기가 어딘줄은 알고, 그 따위 더러운 발을 옮긴 거냐? "……이 성에는 현재 아이에드와 로시엔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때, 그 네 명의 마족 중 옅은 주홍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마족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입꼬리를 치켜뜨고 웃었다. "그래, 없다." 순간, 녀석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뭐랄까, 여태까지는 조금의 불안이 남아 있었지만 내 말을 듣는 그 순간 그것이 날아가버렸다는 느낌? 녀석은 피식 웃으며 살짝 턱을 앞으로 당겼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푸슛. 약간의 소리와 함께 내 앞으로 흐릿한 잔상이 앞에서 흩날렸다. 나는 그리고 그 순간, 목을 통해 굵은 침이 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너희 놈들?" 목소리까지 떨려 나온다. "건방떨지 말라고 했다, 반쪽짜리. 버릇을 고쳐주마." 내 앞을 처음 가로 막았던 네명의 녀석들의 뒤로,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나타난 것은 마족들이었다. 그런데 그 마족들의 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줄잡아세도…… 20명이 넘는 마족놈. "……무슨 짓이지?" 나는 20명이 넘는 그 마족들이 하나같이 차가운 미소를 입가에 머문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놈들은 진심이다. 이건 많아도 너무 많다. 여태까지 나를 놀려먹는 놈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는 비겁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떼로 몰려다닌 적은 없었는데. "…무슨 속셈이지?" 나는 한발자국 물러서며 비슷한 질문을 다시 했다. 너무나 많아서 마치 무슨 벽 같은 녀석들은 내가 물러서자 한발 한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녀석들의 숨은 거칠었다. 그녀석들은 늘 그랬듯이 나를 둥글게 둘러쌓다. "다 알고 있잖아?" ……몰라. "각오는 되어 있겠지?" 비죽히 웃음을 흘리며, 저 너머에서 한 녀석이 다가왔다. 나는 그녀석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많은 마족놈들 중에서도 눈에 팍 띄는군, 이 뚱땡이 자식. "무슨 각오를 말하는 거지?" 나는 은빛의 검을 곧추세웠다. "……죽을 각오." --------------------------------------------- 뭐랄까요;; 제가 이 글을 천랸에 연재하고 있는데요.. 그쪽 속도에 맞춰서 한 20편을 그냥 올려버릴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는지....헐헐;;; 그렇게 갑자기 올리면 읽기 힘드시지 않을까...중얼중얼.. ..오늘 하루도 그 얼굴에 웃음이 머물기를. -베실베실 카르민으로부터... -------------------------------------------------------------------------------- Back : 15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 (written by 카르민) Next : 13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10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September 2001 09:34:53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31-08-2001 19:17 Line : 245 Read : 676 [15]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 -------------------------------------------------------------------------------- -------------------------------------------------------------------------------- Ip address : 61.78.222.2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빛나는 검들의 합 속에 있었다. 내 오른손에 들린 은빛의 검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을 정도로 용맹하게 휘둘러 지고 있었다. 은빛으로 이지러지는 검날과 그 검날을 마주하는 또다른 검날, 그리고 간간히 틈새를 노려서 던져지는 마력탄의 움직임에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크윽!" 어디선가 날아온 날카로운 검이 복부를 건드렸다. 어지러운 손발이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고, 팔을 끌고, 다리를 부러 뜨릴 것만 같은 힘으로 다가온다. 온 힘이 들어간 검의 빠르기는 통제 불가능. 나는 그러나 다시 이빨을 악 물었다. 이곳은 아이에드의 성. ……이곳으로 들어오지마. "죽여, 이런놈." "퇘!" 나는 침을 뱉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나의 행위가 마치 라이메데스 같다고 생각하며 쓴 웃음을 머금었다. 침에는 고인 피가 함께 섞인채였다. "……죽여." 20명이 넘는 녀석들이 나를 둘러싼채로 한마디씩 내뱉었다. 다수대 소수의 대결에서도 승리라는 것은 기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녀석들은 늘 그래왔으니. 소수가, 한 녀석이 당하는 것이 너희들에게는 기쁨인가. 이런 사디스트놈들! 변태자식들. "누가 너희들같은 변태들한테 죽을 줄 아냐?" 나는 다시 검을 세우며 이를 갈았다. 손에도 심한 검상이 있었다. 다친 것은 나 뿐인가? 모두들 멀쩡하고 나만이 피를 흘리며 서 있다. 나의 온 몸은 지독한 타박상을 입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라곤 단 한군데도 없다. 상처는 피를 머금은채… "반쪽짜리 주제에 고위마족들에게 보호받는다고해서 우쭐하는 꼴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다!" "웃기지마." 요란스러운 외침속에서 나는 그 변태 자식들을 향하여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내가 반쪽짜리면 너희놈들은?" 아직까지 검을 휘두를 약간의 힘은 남아 있었다. 나는 손에 마력을 집중해 검은 구를 하나 만들었다. 그리고 내 등 쪽으로 그것을 날렸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을 맞받아치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나는 검을 방사형으로 휘두르며 물었다. "나 같은 반쪽짜리 하나를 20명이서 상대하는 네 놈들은 쓰레기라는 칭호가 어울리려나? 뭐, 나야 늘 그렇게 불러 왔으니 상관은 없겠지." "닥쳐!!" 녀석들은 내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더더욱 과격하게 공격을 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나름대로 강하다고 믿어 왔던 체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다. 점점 검에 닿인 상흔이 늘어간다. 그리고 그 상흔에 피가 났다. 심할 정도로 피가 났다. 그러나 고통스럽진 않다. 단지 조금……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아플 뿐이다. "죽어! 죽엇!!" 나를 향해 죽으라고 말하며 주먹을 휘둘러오는 녀석들. 온 몸의 뼈, 온 몸의 모든 곳이 철퇴 같은 녀석들의 팔에 의해 꺾여 버릴 것만 같다. "죽여 버렷!!!!!!!!!!!!!!" 요란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뚱땡이 녀석의 얼굴이 보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목소리와 동시에 아릿하게 복부가 아파왔다. 나는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는 가운데에서 그 고통의 흔적을 찾아 살짝 눈을 내리깔아 복부를 보았다. 순간, 나는 얼어버렸다. 내 복부에 꽂힌 검 하나. 뾰족하게 날이 선 그 검은 갈빛을 띄는 단검. "……제길." 낮게 한숨이 뱉어졌다. 땀이 흘러 눈에 스며들었다. 왜…… 내가 이런꼴을 당해야 하는건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녀석들을 향했다. 나는 피가 흐르는 손으로 다시금 검을 잡았다. "헉, 헉헉……" "지독한 자식……" 녀석들이 숨을 몰아쉬고 있다. 적긴 하지만 내 끈질긴 공격을 맞은 몇몇의 녀석들도 있다. 우욱. 아·프·다· 뺨을 타고 내리는 땀조차 상흔을 건드리며 나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툭. 그 순간, 무엇인가가 내 몸을 찼다. 내 등을 후려갈겼다. 엄청난 통증이 엄습해야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아무런 느낌조차 없이…… 나는 맞고는 있지만 맞고 있지 않았다. 아파야 하지만 아프지 않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이제는 이 몸뚱아리에 조금의 힘도 들어가지 않는다. 나약한 육신속에 깃든 것은…… 패배자의 모습인가, 빌어먹을. "……주, 죽은건가?" 그렇게 눕혀진 채로, 얼마를 짓밟혔을까. 나를 신나게 패대기치고 있던 녀석들 중 하나가 흐릿한 목소리로 이렇게 뱉어내는 것을 들었다. 나는 욱씬, 하고 시야가 가리워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비웃는 듯한 뚱땡이 마족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쿡, 하고 웃음이 치밀 것 같았지만 이미 내 몸은 그런 것조차 거부할 정도로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 손가락 끝에 조금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파왔고 눈에 맺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사방이 공허하다. "하지만…… 죽, 죽은 것 같아, 아일레스. 반, 반응이 없는걸." 누군가가 다가와서 내 눈을 까뒤집더니 말했다. 제길, 내 잘난 눈을 저렇게 함부로 까뒤집다니. 내 잘생긴 얼굴에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는거냐!! 남의 이미지를 함부로 망치다니, 내가 일어나면 네 녀석을 먼저 응징해주지. "이, 이것봐. 주, 죽은게 틀림없어. 아일레스! 이 쪽으로 와봐." 너도 필히 응징해주지. 저 놈의 마족은 나를 저세상 날리려고 환장했군. 난 아직 말짱하게 숨을 쉬고 있단 말이다. "뭐?" 아일레스라는 이름은 저 뚱땡이 마족의 것인 모양이었다. 저번에도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뭐 어때. 나는 저따위 이름은 절대로 기억하지 않을 거다. 뚱땡이 마족은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이리저리 쳤다. 흐릿한 시야속에서 그녀석의 주먹만이 움직였다. 역시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맞아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 썩을. "……어떡하지, 아일레스?" 근 20명의 녀석들이 다시 내 쪽으로 몰려들었다. 그 중 한 녀석이 입을 열었다. "아이에드나 로시엔에게 들키면…… 우, 우리는 다 죽을텐데." 그러게 누가 이런짓을 하랬냐, 바보 자식들. 내가 이만큼 터졌다는 것과 너희가 정원을 싸움터로 만들어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걸 아이에드가 안다면 너희는 그 다음날로 생매장이다. "……태우자." 그 때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 엽기성 발언이 튀어나온 것은. 한 녀석이 그렇게 말했고 한참을 나는 멍하게 있었다. 잠시 그 말의 뜻을 알아 듣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나는 곧 그 말의 뜻을 이해해야만 했고, 그 순간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태, 태우자니? 지, 지, 지금 나를 태우겠다 이거냐? "아일레스, 설마?" 뚱땡이 마족의 말은 그의 동지에게도 충격이었는지 녀석들의 목소리조차 가늘게 떨리고 있다. 나는 온몸의 세포가 하나하나 경직하는 것을 느꼈다. "어쩔 수 없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잖아." 진짜 나를 태울 셈은 아니겠지? 어이, 이봐? 아니지? 아닌거지? "하지만 아일레스!"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닥쳐, 너는 미친 마족으로 유명한 아이에드의 손에 죽고 싶은거냐?" 아일레스는 마치 발악하듯 외쳤다. 죽고 싶지 않았다면 나는 왜 건드린건데, 빌어먹을. 그렇게 잠시간 녀석들이 웅성거렸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시간이었다. 나를 태울것인가 말것인가에 대한 찬반토론이라도 하고 있는건가? 나는 손을 꽉 쥐었다. 심장이 바짝바짝 옥죄어 졌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경과했을 때, 녀석들이 저마다 비장한 표정으로 내 쪽으로 걸어왔다. "좋아, 태운다." 내 쪽으로 가장 먼저 다가온 아일레스가 입을 열었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숨을 멈춰버렸다. 완벽하게 터져 버린 입술 사이로 핏줄기가 흘렀다. 점점이 떨어져 내리는 피 속에,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 어지럽게 돌아가는 머릿속에, 이미 곤죽이 되 버린 정신 속에 나는 손을 뻗었다. 안돼,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다. 죽으면 안된다고. "비, 빌어먹…" 내 쪽으로 다가오는 녀석들을 바라보는 내 시야 사이로, 흐릿하게 무엇인가의 잔상이 맺히기 시작했다. 헛것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 환상은 너무나 반가운 종류의 것이었다. 익숙한 얼굴들. 이렇게나 이 녀석들이 보고 싶은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 "로…… 쿨럭…… 시엔……" 미약한 목소리. 내 목소리가 이렇게 작았던가. 이렇게 형편이 없었던가. 이렇게나 죽어가는 목소리라니. 이렇게나 힘이 없는 목소리라니. 제길!!! "흐으……읏." 나는 정말로 내가 죽는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에 빠졌다. 죽을 때가 되면 생전의 일이 흐르듯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간다 했다. 나 역시 그런 것 같았다. 어린시절의 기억. 조금 더 컸을 때의 기억. 그리고 현재의 기억. 모든 것이 흘러간다. 아주 짧은 시간 속으로. 그 시간 속에 파란 머리카락에 파란 눈동자의 마족, 로시엔의 모습이 보인다. 로시엔은 온 몸을 피로 감고 있는 나를 향해 짧게 웃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로시엔이 사라진 그 곳에서 은빛의 마족 하나가 부드럽게 웃고 있다. [같이 가자. 원한다면 네녀석 아버지가 되줄수도 있어.] [내게 아버지따윈 필요없어. 아니, 애초부터 그런건 있지도 않아.] [그럼…… 친구할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덥 잖은 말만 지껄이던 마족놈이 하나 있었다. 녀석의 머리카락은 길었다. 그리고 은빛이다. 눈은 신비한 느낌의 보라색. "어쩔 수 없지, 나도 아직 죽고 싶지 않아. 특히나 그 아이에드라는 마족에겐. 태울 준비해." 한 녀석이 중얼거리더니 내 팔을 잡았고 또 다른 녀석이 내 다리를 잡았다. 욱씬―. 심장이 아팠다.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몇가지의 물음이 떠올랐다. 사실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질문들이었다. 결코 입 밖으로는 낸 적이 없었지만. [왜 내가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하지?] 마음속으로부터 대답이 들려왔다. [네가 반마족이니까.] [왜 나는 아이에드에게 짐이었어?] [네가 반마족이니까.] [로시엔은 왜 때로 나를 보며 그런 슬픈 표정을 지었던거지?] [네가 반마족이니까.] [로시엔이 왜 울어야 했지?] [네가 반마족이니까.] [왜 나는 이렇게까지 고통을 당해야 하는거야?] [네가 반마족이니까.] [왜…… 이렇게 아파해야만 하지?] [……네가……반마족이니까.] 단지, 단지 그 이유뿐이야? 내가 죽는 것이…… 저 녀석들이 나를 이렇게 구타한 것이. 나를 태우려 하는 이유가.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드려는 이유가. 내가 아이에드에게 짐이 되어야 했던 이유가. 내가 로시엔에게 슬픔이 되어야 했던 이유가. 이제 다시는 그 녀석들을 볼 수 없게 될 이유가. 그 이유라는 것이 단지. 내·가·반·마·족·이·기·때·문·에?! 입술이 꾹 깨물어졌다. 그 입술 사이로 스며든 채 울컥 토해지는 핏줄기에 미칠 지경이었다. 희미하게 숨이 가늘어지는 것을 스스로가 느끼며, 내 몸을 안아든 소름끼칠 정도로 싫은 손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저항할 수 없는 고통에 눈을 감았다. 감겨진 눈으로는 꼴사납게도 눈물이 흐른 것 같다. 나는…… 이대로 죽는 건가? ---------------------- 메일보내주신분들께... 축복이.. 있으시기를;;; 그리고 이글을 읽으시는분들도.. 언제나 그 얼굴에 웃음이 머물기를... -별 생각 없는 카르민이.. -------------------------------------------------------------------------------- Back : 16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 (written by 카르민) Next : 14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10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September 2001 09:34:56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1-09-2001 14:47 Line : 240 Read : 462 [16]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 -------------------------------------------------------------------------------- -------------------------------------------------------------------------------- Ip address : 211.197.149.9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제 4장: 아이에드 보다 더한 여자와 그녀의 애완동물(?). 희미한…… 눈가에 어른거리다가 바람에 휘어져 흔적도 없이 흐트러지는, 그런 희미한 영상 하나가 뿌옇게 떠올랐다. 내 눈앞에 있는 것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듯한 느낌의 여인. 그녀는 나를 향해 차가운 웃음을 뱉어냈다. [……귀찮게 됐네.] 차가운 웃음과는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 누구냐……? * * * * * * * * * "헉!" 나는 소스라치게 몸을 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몸을 일으킨 그 순간, 복부에서부터 목부분까지 짜하게 느껴져 오는 강렬한 통증이 내 몸을 휘어 감았다. "으윽." 상상도 할 수 없는, 특히 복부에서 느껴져 오는 온 몸을 압박하고 구속하는 듯한 그 지독한 고통에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마에 맺힌 구슬땀이 머리카락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아, 아프다." 엄청 아프네. 빌어먹을, 썩을. 손 대기가 무서울 정도로 아파왔다.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혹시 내장이라도 튀어나오지 않을까, 라는 고민마저 들 정도였다. 좀 끔찍한 상상이지만 정말 그 정도로 나의 고통은 심했다. "그런데." 한참을 고통에 헉헉대던 나는 어떤 시점에서 정신을 차리곤 거의 반사적으로 한 손을 들었다. 하얗게, 나란히 붙어있는 다섯 개의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순간, 온 몸에 전율이 팟 하고 오르는 듯한 느낌에 잠시 몸을 떨었다. "나, 나…… 나∼ 사, 살아 있는 건가?" 오오옷∼∼∼!! 감사하나이다, 감사하나이다!!! 크하하하하하하핫!!!!! 그러면 그렇지. 나 같이 착하고 바르게 살아온 반마족이 그런 쓰레기들한테 죽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 나는 살아 있는 것이다!!! 나는 가슴으로부터 차오르는 환희와 감동을 맞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아니, 웃으려고 했다. "하하하하하…… 커억!! 콜록! 우욱!" 그러나 큰 웃음을 터뜨리려 몸을 약간 뒤로 젖혔던 나는 다음 순간 완벽하게 꼴사나운 모습을 연출해야만 했다. 몸을 젖힌 바로 그 순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아래에서 분출되듯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쿨럭!! 쿨…… 케엑!! 나는 피를 뱉어냈다. 입술에 매달린 것은 내 안에서 솟아오른 것은 검은 핏덩어리. "피…… 로군." 손을 들어 입가에 가져간 후, 흘러내린 그 피를 스윽하고 닦아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종류의 고통이 오기 시작했다. ……안아픈 곳이 없군. 나는 다시 힘겹게 손가락을 들어 또다른 고통이 전해져 오는 부분에 살짝 갖다 댔다. 그랬더니 완전히 휘어져 30도 방향으로 꺾여있는 늑골이 그대로 느껴졌다. "빌어먹을, 내 예쁜 늑골이……." 나는 한참동안 내 곧은 늑골을 이렇게나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그 놈들을 하나하나 저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얼마 안 있어 내가 이런 쓸 때 없는 생각을 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나는 늘 그렇듯이 상황판단이 분명하고 똑똑한 마족이니까).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은 정리해야겠지." 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곤 주위를 돌아보았다. 나는 맞고 쓰러졌었고, 깨어났다. 그 시간동안의 공백을 설명해주려면 역시 주위를 살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주위를 돌아본다음 멍하게 눈이 굳는 것을 느꼈다. "……뭐, 뭐냐, 이거." 내 눈에 닿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비치는 것이라곤 없는, 완벽한 암흑이었다. 온통 새까만 것,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만이 앞에 존재했다. 새까만 공간.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어둠 속에서 내가 빛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주위는 컴컴한데, 나는 나를 볼 수가 있었다. 오로지 나만이 빛나고 있다는 말이다. "얼레." 나도 모르게 바보 같은 음색이 튀어 나와 버렸다. "……어딘지 모르겠지만 아이에드 녀석의 성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하군. 제길, 몰라." 나는 이 의아하기까지한 공간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다가 고개를 휘저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 몸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음." 내려다보아지는 전신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나는 그 땀을 닦을 셈으로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런데 땀을 닦음과 동시에, 팔에서 무엇인가가 흘러내렸다. 뭐냐, 이게? 나는 흘러내린 조심히 그것을 붙잡았다. 헐렁거리는 흰색의 가벼운 공단 소재 천이 만져졌다. "케엑, 이건 또 뭐야?"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내 가슴을 바라보았다. 뜻밖에도 헐렁거리는 흰색의 가벼운 옷이 나를 덮고 있었다. 자, 자, 자, 자, 잠깐? 분명히 그놈들과 싸웠던 그 때, 나는 로시엔이 만들어준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내가 지금 하얀 옷을 있는 거란 말이냐? 그 말은 그러니까 즉, 누군가가 내 옷을 갈아 입혔다는 말이 되잖은가! "……순결한 내 몸에 어느 자식이." 나는 순간적으로 불끈해서 외쳤다가 곧 그런 나 자신이 바보 같아서 표정을 풀고 말았다. 중요한 것은 그따위 것이 아니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정신을 되돌리려 노력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머릿속의 실타래는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상황을 하나하나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을 끙끙거린 끝에 나는 몇 개의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가설 1. 나는 안 죽었다. 지나가던 어떤 마족 놈이 나를 보고 '어엇, 저런!' 이라면서 튀어와선 구해줬다. 이곳은 나를 구해준 그 어떤 마족의 성이다. "웃기네." 그러나 나는 이 가설을 세움과 동시에 나를 향해 조소를 보내고 말았다. 내가 있었던 곳은 미치광이 마족 아이에드의 성이다. 그 성 앞을 뭐하려고 지나간단 말인가? 특별한 볼 일(전에 라이메데스가 왔을 때처럼 전령을 가져왔다거나)이 없는 한 보통의 마족들은 절·대·로· 아이에드의 성 앞을 지나가지 않는다. 왜냐? 잘은 모르지만 아이에드의 그 더러운 성질머리에서 그런 사태가 기인하지 않았나하고 어렴풋이 추측해본다. 하여튼, 가설 1은 전혀 가능성이 없다. 반경 몇 세리하 안으로는 그 어떤 마족도 아이에드의 성으로는 접근하지 않는다. 게다가 어쩔 수 없이, 정말로 어쩔 수 없이 아이에드의 성 쪽으로 왔다가 내가 두들겨 맞는 걸 봤다고 가정하더라도 나를 구해줄 마족따위 마계에는 없다. 나는 반마족이다. 아이에드나 로시엔을 빼면 대부분이 나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지라, 내가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 즐거워하면 즐거워했지 그것을 말려주진 않을 거다. 그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가설 2!! 나는 사실 천하무적의 자질을 타고났다. 그래서 위기의 상황에 나도 모르게 각성을 했고, 나를 태우려던 녀석들을 물리친 다음 피로에 지쳐 잠이 들었다가 이제야 깨어났다. 지금은 밤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놀고 있네." 자신이 생각한 것을 이다지도 완벽하게 부정한다는 사실만큼 슬픈 일은 없지만, 나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나는 나라는 녀석을 잘 파악하고 있다. 이건 그야말로 헛소리였다. 그럼 가설 3. 사실 나는 죽었다. 그리고 이 가설을 세운 순간, 나는 가뜩이나 땀에 젖었던 몸에 소름이 쫙하고 돋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길." 입 밖으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앞에 2개 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있는 가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녀석들은 분명히 나를 [태운다]고 했고 나는 거기서 정신을 잃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나는 태워졌을 것이고…… 죽었을 것이다. 나는 반마족이다. 마족이라면 소멸시키지 않고 불에 태워지는 것 정도로는 죽지 않겠지만 나는 반마족이다. 타면 당연히 죽는 것이다. "……나 정말 죽은 걸까?" 그래, 내가 정말로 죽은 건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이 하얀 옷은 죽음을 맞이한 영혼에게 예의상 입히는 그런 옷일지도 모른다. 난 이미 죽었고, 그래서 내 영혼을 거두기 위해 온 녀석들이 이런 옷을 입힌 게 아닐까? 사방이 컴컴한 것은 내가 영혼들의 세계에 와 있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가설 3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고, 순간 나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암담함에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싫어!! 절대로 싫어!!! 난 싫어!!!!!!! 아직 죽을 수 없어!!!! 안 돼!!!" 나는 내 옆에서 철렁거리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으며 이렇게 외쳤다. 안 된다. 아직까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아이에드도, 로시엔도 없는 장소에서 불태워져서 죽었다고?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내가 죽었다니. 말도 안 된다고!! 아무리 미남박명이란 말이 있다지만 이런 건 말도 안 돼!!! 잘 생긴 남자를 질투한다는 나쁜놈들!! 너희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감히 내 목숨을…… 「크르르르릉.」 그래, 누군지는 모르지만 방금 대답한 너도 내 생각에 동의하는거지? 그래, 내 말이 맞다고 크르렁거려…… "크앗!!!" 잠시 멍하게 정신을 놓고 있던 나는 그러나, 다음 순간 너무나도 엄청난 것을 본 나머지 입을 떡하고 벌렸다. 나는 내 동공이 혹여 풀리지 않았을까하고 의심해 보았다. 「크르르르르르릉.」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기분과 함께, 나는 온 몸이 가볍게 붕 뜬다고 느꼈다. 너무 당황해서인지 내 눈앞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눈을 부볐다. 부비부비부비. 하지만, 아무리 부비적 거려서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환상이라고 부정해보려 해도 현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 눈은 내 앞에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없는 검은 공간이다. 아니, 방금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던 검은 공간이었다. 「크르르르르르르르……」 그런데…… 저건 뭐냔 말이닷!!!! 「크르릉.」 이상한 소리를 내는 그 생물의 입에는 침이 늘어 붙은 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핏 봐도 나보다 몇 배는 클 것 같은 크기에, 청남빛의 몸을 가진 그 놈은 섬뜩한 비늘을 가졌고 기다란 꼬리는 저 멀리까지 뻗어 있었다. 발톱은 차마 설명하기 끔찍할 정도로 길었다. 그것을 뽑아다가 과일을 깎아 먹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길었다. "도대체 뭐어야아아아아아앗!!" 나는 고함을 빽 지르고 난 뒤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 검은 공간에 눕혀져 있던 내 몸은 심한 상처로 인해 잘 일으켜지지 않았지만 나는 피가 울컥 올라오는 것까지 무시해가며 몸을 일으키는 수 밖에 없었다. 그 괴물이 내 앞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는 대체 어디야!! 크앗!!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난 착하게 살았어, 착하게 살았다고!! 저리 꺼져, 에비에비에비!!!" 나는 나 자신이 생각해도 꼴사나운 자세로 비틀비틀 거리면서 내게 한발자국씩 가까이 다가오는 괴물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그 괴물은 여전히 그러렁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내게로 접근하고 있었다. "야야!! 나는 마족이야, 마족. 너 마물이지? 그런거지? 마물이 마족한테 덤빈다는 건 하극상이야. 자자자, 그만하고 어서 돌아가라, 응?" 나는 마물을 향해 손짓까지 해가며 외쳤다. 그러나 그 마물놈이 내 얘기를 알아들었을 리가 없었다. 그놈은 더더욱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내게 접근하고 있었다. 나는 돌 지경이었다. 나는 그 뚱땡이 마족을 비롯한 수많은 마족들에게 두들겨 맞았었다. 일어나보니 전혀 모르는 곳이었다.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다. 게다가…… 저런 마물까지 나타나서 기분 나쁘게 겔겔대면서 내 쪽으로 오고 있다. ……최악이다. "자자,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응? 내가 다 나으면 너 같은 놈 그냥 한 방에 보내줄…… 아, 아니 이게 아니라…… 캬악!! 그만 와, 이 자식아!! …… 쿨럭." 바로 내 앞까지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접근한 마물을 향해 외치다가 나는 다시 피가 목을 타고 넘어오는 것을 느끼곤 상체를 구부렸다. 나는 바로 그 때, 가뜩이나 어둡던 이 공간이 더더욱 깊은 어둠을 띄면서 나를 덮치는 것을 느꼈다. 거대한 앞발이 들어올려져 있었다. 그것은 나를 향해 막 내려오기 직전이었다. "크악!" 나는 비명을 질렀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 무시무시한 발톱(정말로 과일을 깎아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그 발톱)이 내 몸을 뚫고 지나갈 것 같았다. "그만해, 레이네. 네 애정표현은 너무 과격하다고 내가 그랬지?" 그 순간이었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당장이라도 내 머리통을 후려 갈겨 부숴 버릴 것만 같았던 그 거대한 앞발이 딱하고 멈췄다. 「크릉크릉∼」 그리고 그 마물은 나를 향해서 그러렁 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곧 몸을 휙 돌려버렸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은 어디론가 줄레줄레 가고 있었다. 나는 그 마물을 눈으로 좇았다. 그리고, 마물이 멈춘 곳에서 나는 한 인영을 볼 수 있었다. "누……구?" 속이 훤히 비칠 정도로 투명한 흰빛의 천을 대충 몸에 두른 그 인영은 다가오는 마물을 겁내기는 커녕(참고로 나도 저 마물을 겁낸 건 아니다. 단지, 내 몸이 너무 엉망이어서 전투 불가능이었고…… 험험. 하여튼 그렇다는 말이다.)부드러운 눈길로 그 마물을 보더니 곧 하얀 손을 내밀어 그 것의 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녀는 불타는 듯한 붉은 눈동자와 가느다란 실을 연상케하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붉은 머리카락을 한가닥으로 높게 올려 묶어 쾌활한 인상을 주었다. "……당신 누구야?" 순진하게 물었던 이 때는 알지 못했지……. 그 때 내가 본 것이 아이에드조차 능가할 엄청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 Back : 17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 (written by 카르민) Next : 15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10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September 2001 09:35:00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1-09-2001 14:48 Line : 242 Read : 421 [17]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 -------------------------------------------------------------------------------- -------------------------------------------------------------------------------- Ip address : 211.197.149.9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갑자기 나타나서는 나를 위협하던 마물을 단 한마디로 진정시키고, 자신의 옆으로 불러들여 조용히 손으로 쓰다듬고 있는 그녀는 무척이나 청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당신 누구야?" 그런데 내가 이렇게 뱉어낸 순간, 나라는 존재조차 망각한 듯이 오로지 마물을 향해서만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졌다. 그 표정이 얼마나 끔찍했던지 나는 나도 모르게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누구야? 누구야라고?" 그리고 곧 튀어나온 엄청난 고성. 나는 그 의미 모를 고성에 움찔하고 굳어버렸다. 처음 보는 여성마족이 냅다 고함을 쳤으니 나로서는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그것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 "지금 누구한테 지금 반말을 지껄이고 있는 거야, 이 싸가지 없는 마족 놈아. 다시 묻지 못해?"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쳐들더니 인상을 확 하고 찌푸렸고 나는 멍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이를 대하는 어조로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다, 다시 물으라니?" 내 입에서도 이렇게 넋 나간 듯한 멍청한 소리가 날 수 있구나. 얼떨떨하다 못해 알딸딸한 기분을 느끼면서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순간, 분명 초면인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밝고 경쾌했는지, 지금 이 황당하다못해 당황스러운 상황에 대해서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입술이 나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헤벌쭉. 나는 나를 향해 부드럽게 웃고 있는 그녀를 향해 그야말로 바보 같은 표정으로 따라 웃어줬다. 그런데 내가 웃은 그 순간, 그녀의 인상이 묘하게 찌푸려지기 시작하더니 곧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 것은 조금 전보다 더더욱 끔찍한 형상이었다. 눈이 가늘어질대로 가늘어지고, 입술은 올라갈대로 올라가서 아래위로 들썩들썩 거리고, 미간과 이마에는 온통 힘줄이 돋아나고…… 하여튼 그 모습은 화가 났을 때의 아이에드보다 훨씬 더 끔찍한 모습이었다. "헐." 나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경악의 비명이 튀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내가 그런 자그마한 비명을 지른 순간, 그녀가 손을 뻗더니 그대로 내 멱살을 움켜잡는 것이 아닌가. 거듭 말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여성 마족이! "……한 번만 더 반말을 지껄이면 그 자리에서 소멸 시켜버린다." 뻐끔뻐끔. 그녀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나에게 하대를 했고,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의 내용은 너무나도 거친 것이었다. "각성도 못한 마족 주제에 내게 반말을 쓰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으로 취급해버리고 머리라도 날려버리고 싶지만 걸레가 돼서 여기로 날아온 네녀석을 치료한 시간이 아까워서 살려두는 줄 알아." 그녀는 내 멱살을 올려잡으며 낮게 말했다. 그리고 난 그 말을 들으며 정신이 번쩍 들리는 것을 느꼈다. "자, 잠깐. 당신이, 당신이 나를 살려준거야?" 흐, 흐음, 그렇다는 말은 내가 아까 세웠던 그 가설 1이 맞단 말인가? "……당연하지!!! 나는 네 놈 은인이란 말이다!" 한참을 침묵하더니 다시 버럭, 외치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조금은 감사의 마음을 느꼈다. 그러니까, 지금 처음 보는 내 멱살을 쥐고 흔들고 있는 이 이상한 여자가 나를 구해줬다는 말이구나. "자, 다시 물어." "……?"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다시 물어'라는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순간, 그녀의 미간이 완벽하게 좁혀졌다. "아까 나한테 누구냐고 물었잖아, 이 말미잘 놈아!! 그걸 다시 물으라고!!" 말미잘이 뭔데? ……라고 묻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한 대 맞을 것 같군.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그녀의 말에 따랐다. 어찌됐든 은인이라지 않은가. 은인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 난 다음 상황설명을 요구해도 괜찮을 듯 싶어, 나는 물었다. "이름이 뭔데?" "……." 순간,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그녀의 표정이 이번엔 굳어지기 시작했다. 입가가 살짝 끝으로 치켜 올라가더니 입술이 그곳에서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마물을 어루만지는 손이 사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왠지 불길한 기분에 눈을 깜빡였다. 퍼억!! 그렇게 느낀 그 순간, 나는 머리에서 엄청난 충격이 전해옴을 느낄 수 있었다. 쾅, 하고 내 머리와 맞부딪힌 것은 그녀의 주먹. 그녀의 주먹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셌고 나는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그녀의 주먹이 아팠던거지 절대로 내가 엄살이 심했던 것이 아니다.) 처음보는 여성마족이 나를 때렸다는 사실에 나는 당황하여 한참을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나는 손을 들어 머리에 가져갔다. "캬악!!" 머리에는 동그란 것이 형태를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보았다. "왜 때려!! 당신이 은인이면 다야??" "……한 대 더 맞기 전에 그 말투부터 바꿔. '이름이 뭐예요?'라고 물어보란 말이다! 이 건방진 자식아!!!" 나는 그녀가 씹어뱉듯 한 그 말 한마디에서 많은 것을 파악해 낼 수 있었다. 내 눈 앞에 있는 이 여자는 혼란스러워하는 내게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 또한 이 여자가 매우 성격이 더럽다는 것. 그리고 폭력적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하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정말로 죽여버릴 지도 모른다는 것. 그녀의 눈은 장난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비수 같은 그 눈빛. "그, 그래……요." 조금은 비굴함을 자각하며 나는 그녀를 향해 어설픈 존대말을 구사했다. 이 날 이 때까지 살아오면서 그 누구에게도 존대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나다. 아이에드에게는 물론이고 로시엔에게도 마찬가지이며 그밖에 여러 각성 마족에게도 나는 존대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내 존대말은 내가 생각해도 무척이나 어색했다. "좋아." 그러나 어설프거나 어쨌거나 내가 존대말을 썼다는 사실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이 매우 흐뭇하게 변했다. "자, 다시 물어." "……." 정말이지 황당해서 말이 안나오는군. 이 여자는 대체……? 그래, 더러워서라도 한다 해. "그래…… 요. 당신 이름은 뭐야…… 요?" 뭐야요? 크악!!! 죽어라, 죽어 칼레들린!! "흐음, 진작 그럴 것이지. 좋아." 그러나 [뭐야요]같은 어설픔을 떠나서 웃기기까지 한 그 것을 듣고도 그녀는 더욱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새삼스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여자는 대체 뭐하는 여자인가. 그리고 정말, 나는 어떻게 된 것일까. 죽지 않은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그럼 어떻게 살아남은 걸까. 마지막 질문.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어두컴컴한 공간, 저 여자의 공간이 분명한 이 곳…… 마물이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는 이곳은 대체 어디인가? "……그런데." 내 의문을 산산히 흩트리며 그녀가 말하더니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속에 있던 모든 궁금증을 꺼내서 그녀에게 들이붓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으며 그녀를 보았다. "이번에 뭐야…… 요?" "건방지군, 너." 나는 다시 어안이 벙벙해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벌리고 그것을 뻐끔뻐끔거렸다. 순간, 그녀의 눈꼬리가 기다랗게 치켜올려졌다. "숙네에게 이름을 묻기 전엔 당연히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게 정상 아닌가? 너는 그 정도의 예의도 없단 말이냐?" "……." 커억!!! 지금 나 가지고 장난하는 거지, 당신? 마족이 언제부터 예의를 찾았다는 거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되는 소리를!!!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역시 참을성이 강한 나는 꾹 참고 넘겼다. "칼레들린." "칼레들린? 칼레들린? 흐음, 칼레들린…… 흐으응……." 그르렁거리는 마물을 여전히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그녀가 내 이름을 그렇게 반복하자 나는 온 몸에 닭살이 쭈뼛하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손을 들어 팔을 마구 문질렀다. 한참을 내 이름을 중얼대고 있던 그녀는 어느 순간 흐음,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지만, 기억은 안나는군." 그렇게 말한 그녀는 살짝 입술을 들어올리며 웃었다. "훗, 네 앞에 있는 이 절세미인의 이름이 궁금하다고 했었나?" ……아니, 별로 안 궁금해. 내가 궁금한건 당신의 정체와 왜 내가 이런 곳에 있는지, 여기는 어디인지 하는 거야. 보통 생각이 제대로 박힌 마족이라면 그런걸 먼저 설명해줘야 정상이 아닌가? 아까부터 대체 나하고 농담따먹기를 하고 있는거야? ……라고 말하고 싶지만 역시 참아야겠다. 말했다가는 혹이 하나 더 생길지 모르니까 말이다. 나는 이 잘난 몸에 혹을 두 개나 달고 싶지는 않다. "너의 은인이자 마계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나는 세이아나 아나드리엘 로엔이다. 흔히들 세이아나라고 부르는. 나 같은 미인을 직접 보다니 영광이지?" 나는 여태까지 내가 아주 약간 나르시시즘적인 경향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이젠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절대 나르시시즘적이지 않다. 진정한 나르시즘은 저런 것이다. 그래, 자신을 태연하게 [마계 최고의 미모]라고 말할 수 있는 저것. 그래, 그런것이야. "아아, 그렇군. 당신이 세이아나라고." 나는 머릿속에서 그녀를 살짝 비웃으며 이렇게 생각하고 무심하게 뱉어냈다. 그 순간까지는 나는 그녀의 말의 깊이를 알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그래, 세이아나." 그녀도 나처럼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시간이 약간 경과한 뒤, 내 머릿속에 뭔가 질문이 하나 떠오르는 것을 나는 느낄 수가 있었다. [세이아나라는 이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지 않니?] 그렇군, 왠지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깔끔하게 정리되었을 때, 나는 내 턱이 빠질 정도로 크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것은 그야말로 경·악· "뭐라고!!!!! 당신 이름이 뭐라고????????" "……뒤늦은 반응이군. 이런 반응이 나와야하는데 왜 안 나오나 했지. 세이아나 아나드리엘 로엔." 그녀는 다시금 덤덤하게 뱉어냈다. 그 순간, 내 머리는 백지장이 되버렸다. '내가 왜 여기 있는가?' '저 여자는 누구인가?' '나는 살아있기는 한 건가?' '대체 내가 기절한 시간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등등의 내가 물어야할 질문들은 순식간에 재로 화했고, 내 머릿속은 그대로 공허하게 비어버렸다. "……당신이." 머릿속은 곤죽인데, 입술은 나도 모르게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서열 12위로 최고위 마족 중에 하나이며……" 표정의 변화조차 없는 얼굴로, 만지작만지작 그 보기 싫은 마물을 토닥거리며 그녀는 한자 한자 떨리는 목소리로 뱉어내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미모는 그 어떤 자도 매료시키며……" 그녀는 더 해보라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전 마계를 통틀어 가장 자애로운 성격의 소유자……" 그녀는 매우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부정해버리고 싶었다. 세이아나라는 마족은 최고위 마족 중 유일한 여성으로 전 마계를 통틀어 가장 자애로운 자. 능력뿐만 아니라 미모로도, 그 성품으로도…… 모든 것이 마계 최고인 여성 마족. 그게 말이 되는 거냐? 저 사이코 같은 여자가 그 여자일리가 없잖아!! "그런 세이아나……와 같은 이름을 갖고 있다 이거야?"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며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후훗, 하고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 이름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마족은 없어. 나, 세이아나 아나드리엘 로엔은 오직 마계에서 하나 뿐인 존재. 감히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자는 없다. 네가 말한대로 나는 유일한 여성 최고위 마족. 그리고 마계 최고의 미모와 능력을 겸비했으며 누구에게나 관대하고 자애로운 존재. 호호호호호호호홋!!" 나는 또 한 번 경악했다. "다, 다, 다, 당신이 정말로 그! 세이아나란 말야?" 내 경악에 찬 외침에 그녀가 피식 웃었다. "물론이지. 자아, 그럼 통성명도 끝냈고……" 그녀의 눈이 살짝 감겼다 뜨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목에서 약간은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훗, 이제 상황정리나 해볼까나?" 갑작스럽게 돌변한 태도였다. 여태까지 그 쓸 때 없는 대화는 뭘 의미하는 거였냐!!!!! ……라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변한 태도. 나는 그런 그녀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놀라면서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 Back : 18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6 (written by 카르민) Next : 16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10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September 2001 09:35:04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1-09-2001 14:50 Line : 377 Read : 436 [18]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6 -------------------------------------------------------------------------------- -------------------------------------------------------------------------------- Ip address : 211.197.149.9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훌쩍 훌쩍 훌쩍……] 그래, 이것은 어린 날의 기억이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날의 나는 항상 그렇게 울고 있었다, 정말로 항상. [칼레들린님, 왜 그러세요?] 그리고 내가 울고 있으면 조용히 다가와 나를 감싸 안는 손이 있었다. 그 손은 비록 차갑지만 표면적인 온도만으로 그 손을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 손은 비록 맞닿는 감촉이 차갑긴 하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따뜻한 손이기에. [로시엔……] 나는 우울한 눈으로 로시엔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로시엔의 눈에 떠오른 분노란…… 고작 7살짜리로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강렬한 것이었다. [오늘도…… 오늘도 입니까?」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답했다. [오늘은, 오늘은 절대로 용서 못합니다!! 말리지 마십시오!!!!] 로시엔. [얼음 마족] [침묵의 마족]. 아이시 사일런트(Icy silent). 누구에게나 차갑고, 누구에게나 말을 아낀다. 나와 그의 주군인 아이에드를 제외하면 누구앞에서나 그는 똑같은 모습이었다. 감정 없이 무감각한 듯한 눈을 하고 어떤 마족 앞에서도 결코 표정을 들어내지 않는 완벽한 얼음 인형의 형상. 하지만…… 내 앞에서만큼은 누구보다도 감정이 풍부한 마족이 뵈는 로시엔. 나의 아픔에 같이 아파해주고 나의 기쁨에 같이 아파해주는…… 나의 가족. [말릴 생각 따위 없어.] [그,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군요…… 칼레들린님?] [왜.] 나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대체 이 손은 뭡니까? 마치, '나가지 말아, 로시엔'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이 손은? 지금도 제 손을 꼭 붙잡고서 못 나가게 막고 있잖아요.] […….] 정곡을 찔려버린 나는 얼굴을 붉혔다. 그런 나를 보며 로시엔은 능글맞게 웃었다. 의외로 그런 표정이 잘 어울리는 로시엔이니, 쩝. [……로시엔.] [네?] [있지, 그냥 나가지 말고 '그 책' 이나 읽어줘.] 나는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아끌며 말했고, 순간 그가 피식 웃었다. [오늘도 그런 식으로 넘어가실 겁니까?] [누, 누가 넘어가려고 한다는 거야? 책 안 읽어 줄 거야?] 나는 마음을 들켜버린 듯한 느낌에 버벅대면서 말했다. 그러자 로시엔이 부드럽게 웃음을 흘렸다. [좋아요, 그럼 오늘은 참는 대신, 책을 읽기로 할까요?] [응.] 나는 턱을 괴고 누웠다. 로시엔의 따뜻한 시선이 내게로 느껴져왔다. [오늘은…… 음, 그래요. 저번에 제가 어디까지 해드렸었죠?] [음, 서열 11위의 로데인님까지.] 로시엔이 눈웃음을 지었다. [벌써 그만큼이나 됐나요? 그럼 오늘은 서열 12위의 세이아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로군요.] 그는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하는 내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더니, 가볍게 입술을 움직였다. [세이아나 아나드리엘 로엔…… 이것이 그녀의 이름입니다.] [그녀?] 나는 로시엔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녀'라는 말에 놀라서 되물었다. 마계 서열상, 최고위 마족은 1위부터 12위까지다. 로시엔은 가끔씩 여러 마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서열 순으로 죽 들려주곤 했었다. 마계에서 서열만큼 절대적인 것은 없는 법. 따라서 이름과 서열, 그리고 서열이 높은 자들의 이야기를 외워두는 것을 필수적이다. 로시엔은 나를 위해서 가끔 그런 서열 높은 마족들의 이야기를 해주곤 했는데 그 날은 서열 12위의 마족 세이아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여태까지 단 한번도, 로시엔은 마족들을 지칭할 때 '그녀' 라는 낯선 말을 썼던 적은 없었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호칭은 언제나 '그 분' 이었다. [세이아나…… 라는 마족은 여자야?] 내가 조금 놀란 눈으로 묻자 로시엔이 입술을 살짝 들어올리며 웃었다. [네.] [굉장하다!!] 어린날의 내가 감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여성형의 마족은 매우 적다. 전투!! 전투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남성의 강인한 육체다. 비록 마족의 능력이 육체와는 별개라곤 해도, 그래도 역시 여성형의 마족은 매우 극소수였다. 그런데 서열 12위, 최고위 마족 중에 여성이 있었다니. [예, 굉장한 분이시죠.] 로시엔이 다시 웃으며 책을 내밀었다. 책안의 삽화에서는 꽤나 아름다운 여성 마족이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매우 붉었고 그것은 흘러내리는 잔잔한 폭포처럼 그녀의 발 끝까지 덮고 있었다. 전체적인 이미지는 조용하면서도 청초했다. 그녀는 창백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투명한 피부를 갖고 있었다. [아름다운 분이시죠?] 로시엔은 내가 약간 멍한 표정으로 그림을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이렇게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뭐, 그럭저럭.] 삽화 속의 그녀는 무척이나 부드러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격이 무척 좋은 분이시랍니다.] 마족에게 '성격이 좋다'라는 표현이 과연 알맞은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로시엔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흰 빛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옷을 걸치고, 양 손에는 짧은 두 자루의 단검을 쥐고 있었다. 그 단검은 핏빛으로 내 눈에도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이 단검은?] 핏빛의 단검. 힐트보다 검신까지 모조리 다 핏빛. 싸늘한 저주, 싸늘한 보복을 의미하는 굳어버린 핏빛. 마계에서 오로지 한 군단의 소속만이 가질 수 있는 그 검은. [역시 알아보시네요, 블러드 아미 군사들의 단검입니다.] [엑? 세이아나라는 이 여자가 블러드 아미란 말이야?] [하하하, 아닙니다. 칼레들린님.] 로시엔은 내 머리를 부벼주었다. [한·때· 그랬다는 이야기죠. 서열 12위의 최고위 마족이십니다. 무엇 때문에 블러드 아미에 남아 있겠습니까? 그녀에게는 그녀 고유의 특권이 있지요.] 로시엔의 말처럼 최고위 마족들에겐 고유한 특권이 있다. 마왕의 보좌관 노릇을 하는 서열 1, 2위의 마족을 제외하고 서열 3위부터 10위까지의 마족에게는 각각의 군대가 주어진다. 군대 지휘권을 가지는 이들 중 가장 서열이 높은 아이에드가 거느리는 군대가 블러드 아미. 서열 4위가 거느리는 군대는 피어스 아미, 서열 5위의 마족에게는 나이트 메어라는 이름의 군대, 서열 6위에게는 임프렉션 아미……. 11위와 12위의 최고위 마족에게는 좀 더 특별한 임무가 주어진다고 한다. 어린날의 나는 그 임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그래서 질문했다. [응, 그렇구나. 그럼 그녀는 어떤 특권을 가지고 있는데?] 순간, 로시엔의 잘 풀리던 입이 턱 막혀 버렸다. […… 글세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나 아는게 많은 로시엔에게도 모르는게 있다는 사실에 어린 나는 매우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마족 서열 16위로 모든 것에 정통한 로시엔이 그런 것을 몰랐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어린 시절에는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그럼, 이야기 해줘.] 나는 바닥에 드러누우면서 말했다. 로시엔은 방긋 웃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마족 중에서 가장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잡니다, 부드러워 보인다고 하셨죠? 잘 보셨습니다. 그래서 마족 같지 않은 분위기조차 풍기지만…… 일단 적이라고 판단되는 이들에게 가차없는 자도 바로 이 세이아나님이십니다. 하지만 평소 모습이 너무나 온유하다는 사실만큼은 틀림없죠. 그 분은 언제나 웃는 얼굴에 조용한 말투를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항상 저런 모습이시죠. 자신의 강함에 대해서 자만하지 않는…… 마계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자가 없고,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습니다. 세이아나님은 최고위 마족 내에서도 특별히 꼽히시는 분이시죠. 비록 그 말석(末席)을 차지하고 계신다고는 하지만…… 보통 분들하고는 느낌 자체가 다르신 분입니다. 그녀는 흐르는 물처럼 고고하고, 입김을 불어넣는 바람처럼 부드러운 존재입니다] 그래. 로시엔은 그렇게 말했었다. 여태까지 단 한번도, 그가 이런 식으로 감정이나 자신의 느낌을 섞어서 말하는 경우는 없었다. 온유한 성격. 언제나 웃는 얼굴. 조용한 말투에 고고하고 부드러운 존재. 다른 최고위 마족들과는 느낌부터 드른 존재. ……세이아나 아나드리엘 로엔. * * * * * * * * * * * "상황을 정리해볼까?" 라는 그녀의 한마디와 함께 나와 그녀 사이에서는 드디어 조용한 침묵과 함께 진지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녀는 거의 강압조로 내게 말해왔다. "일단, 너의 이야기부터 듣고 싶군. 어떡하다 그 꼴이 됐었는지 얘기해봐." 나는 냉정한 목소리로 뱉어내는 그녀를 향해 조금은 머뭇거리며 여태까지 있었던 일을 대충 설명 했다. 나는 사실 이 잘난 외모 때문에 왕따다. 그래서 나를 시기하는 무리들에게 몇 대 두들겨 맞았다, 어쩌다가보니 빈사상태까지 갔는데 그런 내가 죽었는지 알고 녀석들이 말했다. [태우자]라고. 하지만 일어나보니까 나는 살아 있는 것 같았고 당신과 저 마물이 보이더라…… 나는 장황하기 그지 없고 동시에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설명해나갔다. 그녀는 내 장황하고도 말 안되는 이야기에 조금도 토를 달지 않고 듣고 있었다. 나는 사실을 토대로 거의 말했지만, 두가지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내가 반마족이라는 사실. 아무래도 마족인 이상(그것도 서열 의식이 강한 최고위 마족이) 반마족을 좋게 생각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아이에드와 로시엔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 "훗." 그런데 나의 눈물겨운 사연을 들은 그녀의 반응은 정말로 기가 막힐 정도로 어이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뭐야?! 이거 바보 자식 아냐? 그런 한심한 자식들한테 맞아 갖고 그 꼴이 되었단 말이야? 이노무 자식아!! 그렇게 형편없는 꼴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라고 그래? 그렇게 한심한 녀석인줄 알았으면 확 죽여버리는걸 잘못했군." 빠직. 나는 머리 위로 힘줄이 솟는 것을 느끼며 순간적으로 고래고래 고참을 쳤다. "당신!! 남의 불행을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가 있어, 앙!? 안됐다거나 하는 말을 할 줄도 모르는 거야? 이거야말로 불쌍한 미소년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스토리 아니냐 이거다!!" "……그래, 안됐구나." 날카롭게 웃으면서(그것도 입꼬리 슬쩍 올려서 비웃음이라는 거 티 다나게) 그런 말 해봤자 진심 아니라는 것만 표시 날 뿐이다. 당신…… 아이에드하고 동급이야. 크으, 로시엔. 어린 날 네가 읽어줬던 그 책의 내용은 모두 엉터리일거야, 그런거지? 나는 이제 믿지 않을거야. 서열 1위의 마족이 엄청나게 섬세한 성격의 마족이라는 것도, 서열 2위의 마족이 아주 아름다운 외모로 제멋대로 하기로 이 마계에서도 최고라는 사실도…… 하여튼 네가 얘기해준건 모조리 안 믿을 거라구!! "이 바보 멍청이 마족놈아." 갑자기 그녀가 나를 툭툭치며 이렇게 말해왔고 나는 또다시 열이 뻗치는 걸 느꼈지만 꾸욱 참았다. "……나는 바보도 아니고 멍청이도 아니다." "호오, 그래? 마족 세계 은어도 모르는 주제에 바보도 아니고 멍청이도 아니라고?" "은……어?" 나는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은어라는 단어에 당황해서 물었다. 순간, 여태까지 내 이야기를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듣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슬쩍 굳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그 마물을 만지고 있던 손을 치우더니 그 손을 자신의 무릎쪽으로 가져갔다. 흘낏 보니 여태까지 끊임없이 그르렁 거리고 있었던 마물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 마물을 한 번 힐끔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궁금한게 많겠지? 여기가 어디인지, 너는 어떻게 살아있는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해줄테니 우선 [태운다]의 뜻이 뭔지 말해봐." "엥……? 당신 바보야? 그런 것도 모르는 거야?" "……바보는 네놈이지. ……죽여버리기 전에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나는 서슬퍼런 그녀의 목소리에 움찔해서 천천히 입술을 움직여 나갔다. "불 붙여서 활활 타게 만드는거." 순간, 그녀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그녀는 등을 꼿꼿히 펴더니 손을 이마에 가져갔다. 곧 터져나온 한숨. "하아아아아. 역시 네놈은 바보로군. 이 바보 멍청이 놈아!!! 한 마족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공간으로부터 이탈시키는 것을 은유적으로 [태운다]라고 표현하잖아!!" "엥?" 나는 그녀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의성어로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녀는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머리를 감싸며 한숨을 내쉬었고 한참만에야 다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마 이렇게 된 것 같군. 녀석들은 너를 죽이지 않고, 나의 공간으로 날렸어. 아니, 굳이 내 공간으로 날리려고 한 건 아니었겠지. 녀석들은 자신의 손을 쓰지 않고 너를 죽이고 싶었던거야. 그래서 너를 아공간으로 날린 거겠지." "에에엥?" 또다시 이해할 수 없다는 표현을 나는 했다. 그러나 그녀도 이번에는 한숨을 내쉰다거나 하는 비생산적인 행위를 하지 않고 곧장 이야기를 해나갔다. "녀석들은 네가 없어지길 바랬겠지." "응, 아마도."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단 말이야, 이 바보 멍청이 마족놈아. ……그러고보니 내가 왜 귀찮게 너한테 이런걸 설명해야하지? ……아아, 몰라. 심심하니까 착한 내가 궁금해 미치는 너를 위해 이야기를 해주는걸로 하지, 뭐." ……당신 마음대로 생각하고 어서 말이나 해. "어쨌든, 그 문제가 뭐냐하면 너를 죽인 게 자신들이라는 증거를 없애야 한다는 거야. 너를 꽤나 아낀다는 고위 마족이 있다고 했지? 만약 그 고위 마족들이 네가 그녀서들 손에 죽었다는 걸 알아봐. 그럼 그녀석들은 그 날로 끝장나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냐?" "일단은." "하여튼 자신들이 죽였다는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면 너라는 존재를 아예 소멸시켜버리는 편이 편하겠지만 비각성 마족으로서는 한 존재를 완벽한 소멸로 몰고 간다는 게 힘들지. 세포하나, 시체 한 점 남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소멸을, 그것도 같은 마족을 상대로 하는건 꽤나 힘에 부치는 일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너를 소멸시키는 동안에 힘의 파장이 주위에 번진다면, 다른 마족의 눈을 피해가는 건 아주 힘든 일이지." "흠?"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를 몰라 계속 의성어만을 이용했다. 그녀는 그런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이야기를 해나갔다. "그래서, 녀석들은 너를 소멸시키지 않고 좀 더 쉬운 방법을 택했다. 그게 바로 [태우는]일인거야." "……?" "그 녀석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너를 소멸시킨다는 번거로운 작업을 피해서, 기절한 너를 어떤 공간으로 강제로 밀어 넣은 거야. 비각성이라곤 해도 20명이나 있었으니 공간의 문 여는 것쯤은 쉬웠겠지." "저기 말이야." 나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뭐냐, 라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좀 쉽게 설명해줄래?" "……." 그녀는 나를 한참동안 빤히 보더니 주먹을 휘둘렀고 나는 내 머리에 새로운 혹이 생겨나는 것을 보며 우울함에 빠져야만 했다. * * * * * * * * * * * * "알겠냐?" "아니." "…………알겠냐?" "아니." "……너 바보냐?" "아니." "……." 그녀는 내게 설명에 설명을 반복했고 그 반복이 5번째 되는 그 때, 나는 그제서야 그녀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설명 중간 중간에 내 머리를 쥐어박는 것을 잊지 않았고 나도 그녀에게 바락바락 대드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찌됐든, 이리저리 하여 나는 생전 처음 보는 '마계 최고 여성'의 사근사근하기 그지 없는(살벌하다고 표현하기조차 무서운)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그녀는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보았다. 뭐냐, 저 눈은. 돌대가리 제자가 어느 날 갑자기 사부인 자신의 말을 100% 알아들을 수 있다고 말했을 때의 눈이 저렇지 않을까. ……비교하자니 불쾌하군. "녀석들은 나를 죽이는 것보다 다른 공간으로 날리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고 판단했다 이거군. 그래서 나를 마계와 조금 떨어진 공간으로 날렸다 이거지? 보통 그 [다른 공간]이라는 건 환수나 마물들이 들끓는 곳이라서 나를 거기로 집어넣으면 당연히 죽을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운좋게 당신이 있는 이 공간으로 왔다는 거. "……내가 그렇게나 많은 단어를 이용해서 말한 것을 너무 짧게 줄였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여튼 이게 맞잖아." "……그래." 그녀는 조금(사실은 이빨을 뿌득뿌득 갈아대고 있었다)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어쨌든 좋아. 한가지 분명한 건 그녀석들이 나를 죽이려고 다른 공간 속에 밀어 넣었는데 운이 좋게 당신이 있는 이 공간으로 온 거고, 당신은 심하게 다친 나를 치료해 줬다는 거니까. 고마워." "별말씀을." 나는 놀랐다. 분명 안하무인의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런 겸손한 면도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나의 생각을 파편조차 남지 않게 깨뜨리며, 그녀가 다시 말했다. "나는 그저 너를 그대로 놔뒀을 뿐인데." "엥?" "흠, 사실은 말이야……. 내가 레이네(그 마물놈의 이름인 것 같다.)에게 밥을 주고 있는데 공간의 문이 열리더니 네녀석이 떨어지더군. 레이네에게 주던 밥이 엉망진창이 돼서 짜증이 났고…… 그래서 네녀석을 확 죽여버리려고 했지만 상태를 보아하니 알아서 죽을 것 같아서 놔뒀지. 그런데 오늘 와보니 네녀석이 일어나 있더군. 나도 황당했어, 호호호호호홋." 나는 굳어버렸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당신은 그냥 나를 가만히 놔둔 뒤에 죽으면 갖다 버릴 셈이었다 이거로군?" "그렇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하는 세이아나. "그게 뭐가 은인이야!!" 나는 고함을 버럭쳤다. "안 죽였으면 은인이지. 별게 은인이냐?" 그녀는 도도한 말투로 말하더니 다시 씨익 웃었다. 나는 그녀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이 여자라면 혹시…… 아이에드와의 말대결에서 이길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본론만 얘기하기로 했다. "……알았어. 다 좋다고. 당신이 은인이든 뭐든 상관없어. 이제 다 이해되고, 다 알았으니까 나를 도로 마계로 보내줘." "안돼." "그래, 안…… 뭐?? 왜?" 나는 그녀가 당연히 '그래'라고 대답할 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가 화들짝 놀라서 다시 물었다. 그녀는 그런 내 모습을 즐기듯이 한 번 보더니, 다시 한 번 빙긋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도 못하거든." -------------------------------------------------------------------------------- Back : 19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7 (written by 카르민) Next : 17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10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September 2001 09:35:09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1-09-2001 14:51 Line : 317 Read : 460 [19]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7 -------------------------------------------------------------------------------- -------------------------------------------------------------------------------- Ip address : 211.197.149.9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무, 무, 무슨 말이야?" 나는 정말 당황했다. 할 수 없다니? 할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말도 안된다. 최고위 마족이라고 했다, 최고위 마족. 최고위 마족씩이나 되면서 마계로 통하는 문 하나 만들지 못한다고? 그건 말이 안 되잖아. "흐음." 세이아나는 내 질문에 대답은 않고 싱긋 웃더니 나를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그녀는 요염하게 손가락을 들어올리더니 자신의 입술 위에 살짝 올렸다. 한참 후에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나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 말이다…… 서열 12위 마족의 임무가 뭔지 알아?" "몰라." 나는 당연한 사실을 묻는 그녀에게 당연한 사실을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 대답에 잠시 넋빠진 표정을 짓더니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서 미안하다, 말미잘 마족." 그녀는 머리에 손을 대고 그것을 휙휙 저어댔고 비록 그 말미잘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결코 좋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그동안의 정황으로 미루어 파악한 나는 발끈했다. "누가 말미잘이야!" "……알았어, 바보 마족아." 마치 '어이구, 사탕 뺏어서 미안하다. 대신 초콜릿도 뺏어줄게.' 같은 어조로 말하고 있는 그녀의 태도에 나는 살짝 화가 났고 그래서 팔짱을 끼고 그녀를 잠시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내 모습은 신경도 쓰지 않고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더니, 한참만에 조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해왔다. "말해도 상관없겠지. 나는 제 3 공간의 수호자. 서열 12위의 임무는 제 3공간의 수호를 맡는 일이다." "그런데?" "……넌 놀라지도 않냐?"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나도 어이없다는 어조로 대답했다. "알아야 놀라지." "……그렇군."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한 어조로 대답하는 그녀의 태도가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녀는 묵직한 어조로 힘을 주어 말했다. "제 3 공간은 인간계 대륙으로 통하는 공간이다." "그렇군. 그런데?" 그녀는 뭔가 이상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한참이나 보더니, 다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미잘 마족,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한 번만 설명할테니 잘 들어라." 그녀는 강렬한 눈빛으로 말하더니 자신의 머리카락을 베베 꼬면서 이야기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제 3 공간은 인간계 대륙 이그라스로 통하는 공간인데…… 각성 마족들이 인간계로 갈 일이 있다면 항상 지나쳐야 하는 공간이야. 또는 인간계 대륙에서 마계로 들어가는 통로기도 하지. 내가 하는 일은 이 제 3공간을 지키는 일인데, 구체적으로 뭐냐 하면…… 인간계에는 괜히 마왕이나 나같은 최고위 마족을 잡아보겠다고 날뛰는 아둔한 인간이 있기 마련이지. 나는 그런 인간들을 죽여버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단으로 인간계로 나가려하는 짜증나는 마족들을 막는 역할도 하지." "……그거랑 나를 마계로 못 보내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내가 말할 때 토달지마, 말미잘." 누가 말미잘이야, 누가!! "각성 마족들은 나의 공간인 이 곳, 제 3공간으로 들어올 때 자신의 힘으로 공간의 문을 열지. 너를 여기로 처넣은 그 놈들은 우연찮게 여기로 널 밀어 넣은 거겠지만…… 하여튼, 제 3공간으로 들어오면 내 허락을 받아 인간계로 내려가는 거야. 내 허락이 불필요한 자는 내 위에 있는 서열 1위부터 11위까지의 마족들. 나머지는 모두 내 허락이 필요해."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나는 계속 빙빙 도는 그녀의 태도에 발끈해서 외쳤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아직도 모르겠냐, 말미잘? 인간계로 통하는 공간은 내 허락만 있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지만 마계는 그렇지 않아. 나는 마계로는 공간의 문을 낼 수 없어. 마계로 나가는 통로는 항상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거다. 그게 규칙이야. 그리고 제 3공간에서 마계로 나가는 통로는 각성 마족만이 만들 수가 있지." "……뭐, 뭐, 야?" "너는 비각성이지?" 세이아나는 깊이 웃었다. 그 웃음은 내게는 너무나도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나는 이빨을 악 물며 외쳤다. "……그럼, 나는 각성해서 나 스스로 마계의 공간을 열 수 있을 때까지 이 공간에서 살아야 한다는 거야? 마녀 같은 당신이랑 둘이서? 말도 안 돼!!" "나도 싫어." 그녀는 내 발악같은 외침에 전혀 꿀리지 않고 쌀쌀맞게 대꾸하더니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잠깐 어루만졌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사르르 바닥에 끌렸다. 그녀는 매혹적인 눈빛으로 내게 제안하듯 말했다. "이건 어때?" 나는 뭐냐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리듯이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인간계로 내려가는건?" "말도 안돼." 나는 그녀의 그 제안이 머리에 접수되자마자 거부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 의견 같은 것은 염두하지도 않은채 계속 말을 이었다. "뭐가 말이 안되지? 너는 언제 각성할지 알 수 없어. 네가 각성해서 스스로 마계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네가 내 공간에 있는 건 절대로 안 될 말이다. 결론은 하나지. 네가 인간계로 가는 수 밖에." 그녀는 살짝 웃으며 나를 보았다. 나는 몸에서 핏기가 싹 가시면서 쭈뼛 서는 듯한 느낌에 몸을 떨었다. "하하하하하하핫! 농담이지? 인간계라니…… 농담이지?" "아니." 그녀는 정확하게 잘라 말했고 나는 억지 웃음마저 가시는 것을 느꼈다. "마족은 외형상으로 인간과 다를 것이 조금도 없어. 아, 인간의 관점에서는 마족이 좀 더 아름다워 보일수도 있겠지만…… 어찌됐든 크게 다를 건 없어. 그러니까 인간들이 너를 마족이라면서 쳐죽일리는 없다는 말이지. 넌 아직 각성 전이니, 인간계로 내려가 봤자 크게 말썽될 것도 없고…… 이렇게 된 이상 인간계 관광이나 하면서 먼 훗날 네가 파괴해야할지도 모를 곳을 봐두는 것도 좋지 않아?" 세이아나는 얼어있는 내게 말해왔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반마족이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반쪽짜리…… 인간. 인간을 만나게 된다고? 마족으로서, 마족으로서 완전히 각성하기 전에 인간을 보게 된다고? 안돼, 그럼 내 존재가 파괴될지도 모른다. 여태껏 나 스스로 내게 세뇌해왔던 말…… [너는 마족이다]…… 그것이 깨져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반쪽 피기는 하지만 어쨌든 인간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인정하게 될까봐…… 두렵다. "싫어, 그건…… 인간계는 싫다." 나는 곤죽이 되는 머리를 억지로 진정시키며 말했다. 내 말에 세이아나의 눈꼬리가 치켜올려졌다. "좋아. 그럼 죽을래?" "뭐라고?" 나는 갑작스러운 협박 같은 그 말에 심장이 덜컹해서 되물었다. 그녀 정도 되는 마족이 빈말로 저런 말을 할리 없지 않은가. "마계로 돌아가는 건 현재 불가능. 내 공간에 너같은 마족이 계속 머무는 건 절대로 싫고 인간계로 가는건 네가 싫다고 하니…… 죽는 수밖에 없잖아?" "……." 세이아나는 침묵하는 나를 보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이봐…… 세이아나. 그거 알아? 당신은 아이에드보다 더 해!!!! * * * * * * * * * * * * * 그녀는 내게 책을 하나 내밀었다. 나는 그 책을 받는 순간 어찔하고 머리가 도는 것을 느꼈다. 「인간들의 삶」 나는 순간 눈 앞에 있는 이 여자의 머리를 해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걸 왜 주는 건데?" "인간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지? 말미잘." "말미잘이라는 말만 빼주면 당신 말에 동의하지." "그럼, 인간계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 주제에 인간계로 내려가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너는 인간계에 가서 인간에 대해서 하나도 모른채로 어설픈 인간 흉내나 내면서 '나 마족이예요. 잡아 먹어줘요.' 할 셈이냐? 각성도 못했으면 얌전히 인간 흉내나 내면서 인간계를 관광해야할 것 아냐, 임마!! 잔말말고 읽어!!" 그녀의 강압적인 눈빛에, 나는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12번이나 정독해야 했다. "제기랄!!! 뭔 인간계야, 인간계가∼!!!!" 그리고 나는 그 두껍고도 두꺼운 책을 읽으면서 또 한 번 발악해야만 했다. * * * * * * * * * * * * * 책을 모두 읽고, 대충 인간계로 내려갈 채비를 한 나를 세이아나가 불렀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따랐다. 세이아나는 내게 인간계로 통하는 공간의 문으로 데려가 준다며 웃었다. 나는 침묵한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뒤를 따른지 조금 뒤 도착한 그 공간의 문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검고, 붉고, 희고……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문양이 어지럽게 그 미스터리를 더하는 모양…… ……이 절대로 아니고. "……이게 공간의 문이냐?" 나는 그 공간의 문을 보고 난 후 하도 어이가 없어 세이아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세이아나는 빙긋 웃었다. "응." "……이거 주전자 모양인데?" "아, 그런가? 몰랐네. 예쁘지 않아? 내가 얼마전에 공간의 문을 조금 뜯어 고쳤지." 그녀는 내 질문에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덧붙이자면 '예쁘지 않아?'라고 묻는 부분에서는 뚜렷한 자긍심이 엿보였다.)대답했고 나는 얼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제 3공간의 문. 그렇게도 중요하다는 그 곳의 통로는 내 말 그대로 주전자 모양이었다. 동그랗고 약간은 큰 주전자 모양. 색깔마저 전형적인 그 누르끼리한 색. "……정말로 여기가 공간의 문이야?" "지금 나를 의심하는거냐?" 세이아나는 내 말에 짜증이 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씁, 하고 숨을 들이켰다. "후우…… 세이아나."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묻기로 했다. "왜?" "정말로…… 나를 마계로 돌려보내 줄 수는 없는 거야? 한 번쯤은 규칙을 어기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나는 최대한 진지하게 물었다. "싫어. 나는 모범적인 마족이다." 누가 모범적인 마족이라고? "……그렇게 딱 잘라 말하지마." 나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 공간의 문으로 걸어나갈 준비를 했다. 세이아나는 그런 나를 보더니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자." "무슨……?" 나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위에 눈을 살짝 뜨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뭔가를 주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의 손 위는 휭하니 비어 있었다. "네가 갖고 왔던 검이다." 그녀가 그렇게 말을 한 그 순간이었다. 놀랍게도 휭하니 비어있던 그녀의 손바닥 위로 뭔가 일렁인다 싶더니 은빛으로 빛나는 검 하나가 슥하니 나타났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손 위에 놓인 그것은 내게도 매우 익숙한 것. 아이에드의 검이었다. 내가 그 쓰레기 마족놈들과 싸우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그 은빛의 검 말이다. 나는 그 쓰레기들과의 싸움에서 함께 했던 그 검을 만나자 약간은 감동을 했다. "……아." 나는 약간의 감탄성과 함께 그녀가 내미는 그 은빛의 검을 받아들였고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런 나를 보더니 말했다. "가져가라, 네거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흠칫했다. 내가 기억하는 이 검은 분명히 온통 은빛이었다. 정말로 오로지 은빛으로만 이루어진…… 그런데…… 힐트 중앙에 박혀 있는 이 이질적인 것은 뭐냐? "……이거 뭐야?" 나는 처음 보는 그것, 힐트 중앙에 박혀있는 샛노란빛의 보석을 가리켰다. 마치 짐승의 눈동자처럼 번뜩이는 그것은 내 기억상에는 결코 없는 물건이었다. 내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세이아나는 그녀는 슬쩍 웃었다. "예쁘냐?" 지금 그런걸 물어본게 아니잖아, 이 사이코 마족아!! ……라고 말했다간 한 대 맞겠지? 나는 현실과 타협하기로 마음 먹고 그 검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당신이 박아 넣은거야?" "응." 그녀는 간단하게 대답하더니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 눈빛은 강렬했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상태로 말했다. "그 보석, 레이네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나는 그 '레이네'라는 이름을 예전에도 들은 적이 있는 걸 깨달았고, 그래서 고함을 쳤다. "엑? 그 마물?" 내 쪽으로 다가오며 그 그르렁 거리던 마물 이름이 레이네 아니던가? 그녀는 내 외침에 기분이 상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마물 따위 아냐, 레이네는. 내 유일한 친구다. 네가 비각성이고 꽤나 재미있는 놈 같아서 레이네를 보호물로 붙이는 거니…… 각성해서 이 게이트로 돌아올 때는 레이네를 꼭 돌려줘야 한다, 알겠냐?" "으, 으응." 나는 노란빛의 그 보석이 지난날의 그 끔찍했던 마물(세이아나는 무슨 애완동물처럼 다루고 있었지만)이라는 것을 알고 잠시 오한이 들었지만 곧 위험할 때 나를 도와줄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말 때문에 잔말없이 허리춤에 그대로 검을 메어 버렸다. 세이아나는 나와 검에 박힌 노란빛의 보석을 한차례 보더니 천천히 턱을 움직였다. 그녀는 턱짓으로 공간 밖으로 나가라는 제스쳐를 취한 것이다. 나는 그 주전자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영 찝찝했지만 그래도 한 발을 내딛었다. 그런데 그 순간, 조용하던 세이아나의 작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어이." 나는 이미 그 문 안으로 한 발이 내딛어져 있었기에 돌아보지는 못하고 대답했다. "왜?" "말 못했는데 말이다, 공간 밖으로 나가면 [체이드 숲]이 있다. 위험한 건 아무것도 없고, 인간도…… 음, 아마 살지 않는 그런 숲일거다. 마계와 통하는 길이니 마기가 잔뜩 끼어 있어 인간들이 살기는 조금 곤란하거든……. 하여튼, 거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인간의 마을이 보일 거야." "밖으로 나가면 숲이라고? 먹을 건 있겠지?" "먹을 거 없는 숲도 봤냐?" "그렇지?" 나는 다시 한 발을 내딛었다. 그 때, 그녀의 목소리가 위에서 차갑게 들려왔다. "신기한 거 가르켜 줄까?" "……?"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순간, 그녀의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오호호호호호홋!! 특이하게도 그 숲에는 먹을거 없다. 진짜 신기하지?" 크에에에에에엑!!!!!!!! 나는 공간속으로 몸을 맡기면서도 세이아나에게 끊임없이 저주를 부어댔다. 그러는 동안에도 주전자 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내 몸은 제멋대로 항해를 시작하고 있었다. 내 몸 전체가 제 2 공간의 연결점이라는 그 곳으로 들어선 순간,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 온 몸을 휘감았다. 뭐랄까……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상하리만치 묘한 느낌이다. 몸이 고통 없이 분해되는 듯한 느낌? 내 세포 하나 하나가 완전히 분해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알아차릴 틈도 없이 자잘하게 깨어진 파편 같은 몸은 내가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는 어느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자력 같은 힘으로 더욱더 깊숙이 빨려 들어가 하얀 빛덩이와 함께 그 공간을 떠났다. ……아주 짧은 시간…… 0.0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불어온 작은 바람이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한 몸을 흔든다고 생각했다. 그 작은 바람소리와 함께 내 몸의 구성인자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그것들은 다시 한덩어리로 합쳐지면서 마침내 하나의 형체를 이루곤 나라는 마족을 만들어냈다. 옅은 빛과 작은 소리들은 이윽고 완전한 나라는 인물을 전혀 다른 공간에 세워 놓았다. "제길, 결국 와버렸군." 나는 눈 앞에 펼쳐진 이상하리만치 낯선 관경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이에드, 그리고 로시엔...." 나는 인간계라고 짐작되는 그 낯선 공간을 바라보며 내가 알고 있는 이들 중 가장 소중한 존재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빨리 돌아올테니... 기다려라." 나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바람은 시원했다. ---------------------------------------- 야호∼;;;; 재... 재미없었죠, 세이아나 이야기;;; 후.. 후훗;;; 하지만 꼭 필요한 부분이라..;;;; 오늘은 좀 피곤하군요.. 필살연참을 부탁하신 분들이 많았는데.. 필살 연참은 일요일로 패스할게요∼ 죄셩;; -------------------------------------------------------------------------------- Next : 18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6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10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September 2001 09:35:14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2-09-2001 18:14 Line : 170 Read : 1127 [20]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8 -------------------------------------------------------------------------------- -------------------------------------------------------------------------------- Ip address : 61.76.191.6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제 5장: 카민(CARMINE-진홍색, 양홍(洋紅)색) "배… 배고프다." 난 내 입 사이로 신음소리처럼 터져나오는 한마디와 함께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제길, 대체 얼마나 이 빌어먹을 숲에서 헤맸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세이아나가 인간계로 나가려면 그 주전자 모양의 게이트에서 곧바로 난 이 체이드 숲을 지나가야만 한다고 듣긴 했지만 설마, 설마 그 숲이란게 이렇게 거대할 줄 누가 알았겠냔 말이다. "제에기랄∼" 난 커다란 소리를 지르며 고픈 배를 손으로 쓰윽 만져보았다. 배가 고파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머리가 노래져 왔고 제대로 숨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여자!! 성격 나쁜 아줌마!!! 뭐가 조금만 걸으면 인간의 마을이 나온다, 라는 거야? 숲이라길래, 그리고 조금만 걸으면 된다길래 나는 당연히 몇 시간만 걸으면 이 빌어먹을 숲의 끝이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완벽한 오산이었다. 세이아나가 말했던 이 체이드 숲은 숲이 아니라 완전히 밀림이었던 것이다. 여기가 어떻게 숲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또다시 세이아나를 원망했다. "캬악!! 세이아나!!! 이 못된 할망구!!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귀띔을 해주던가 먹을 것을 싸주던가 해야할 것 아냐!! 앙?!" 그러나 나의 멋진 목소리는 쩌렁쩌렁한 메아리가 되어 내 주위를 맴돌 뿐이다. 나는 짜증이 머리 위로 솟구쳐 머리카락까지 하늘로 서지 않알까, 라는 쓸 때 없는 상상까지 해가며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여기가 숲이라고? 정말 웃기지도 않아. 숲에 내 키의 20배는 넘어 보이는 나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저건 나무가 아니라 그 자체로 작은 숲이다, 숲!! 그리고 숲에 나무줄기가 끝도 없이 연결 된 것이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숲이 3일 동안 걸어도 그 끝을 볼 수 없을 수 있단 말이냐? ……으으. 끝도 없이 이어진 저 짜증날 정도로 수많은 나무들을 보고 있자니 화가나서 미칠 지경이다. 밥을 먹을 수 있다는 마을로 나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는지, 그렇게나 걸었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반경 몇십 세리하는 거뜬하게 보는 내 시력으로도 아직 마을이 들어오지 않을 정도면, 그래… 어이구, 정말 멀었지. "배고파." 난 상상을 초월하는 허기와 짜증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주먹으로 힘껏 땅을 쳤다. 그래, 다 좋다. 밀림을 숲이라고 가르켜 준 그 책임감이라곤 요만큼도 없는 공간 수호자 세이아나에게 화가나는 것도 참을 수 있고, 말도 안 될 만큼 이 놈의 숲이 넓다는 것도 속 싶은 내가 꾹 참아줄 수 있다. 하지만 정말 환장할 노릇은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세이아나가 최후에 던졌던 그 말 그대로,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평범한 산짐승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최소한 괴물 몬스터나 마물이라도 있었다면 당장에 구워서 한 입에 꿀꺽 했을 텐데, 입에 넣기만 하면 당장에 올릴 것 같은 쓴 식물덩굴밖에는 없다니 이런 최악의 상황이 어디 있단 말이냐! 난 텅텅 비어버린 배를 만져 보고는 막가는 심정으로 아무데나 손을 뻗어 이상하게 생긴 풀을 잡아뜯어 입안에 쑤셔 넣어 보았다. 그러나… "우웩!" 역시… 미칠 만큼 씁쓸한 맛 밖에는 느껴지질 않는구만. "제길, 뭐야! 이 위대하고 고결하고 잘생기고 현명한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님이 이런곳에서 굶어죽을 것 같아!" 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숲을 떠노는 메아리 하나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들리는 건 오로지 쩌렁쩌렁 울리는 멋진 내 목소리뿐, 먹을 것 따위는 없었다. "체엣!" 난 누워 있던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이 체이드 숲인가 밀림인가 뭔가가 생각보다 크다해도계속 걷다보면 인간들의 마을이 나오기는 하겠지. 난 자신에게 용기를 잔뜩 불어준다음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했다. 그런데 그 때! 바스락. …무엇인가의 소리가 들렸다. "후…" 후하하핫! 먹을거다, 먹을거! 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 분명히 먹을게 틀림없다! 난 3일 동안 먹지 못한 나의 배를 억지로 진정시키며 귀를 곤두세웠다. 배에서는 지금 아우성도 그런 아우성이 없었다. 바스락. 다시 풀잎이 스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내 몸은 완전히 흥분 모드였다. 오옷∼∼ 좋아, 좋아! 이 쪽으로 오고 있다. 가뜩이나 배가 고파서 움직이기도 싫은데 이 쪽으로 납셔준다니 정말 고맙군, 나의 식사거리! 감사해, 내가 먹고 난 다음에 뼈는 잘 묻어줄게. 나 같이 멋지고 잘생긴 녀석에게 먹히는 것도 일종의 영광이 되지 않을까? 난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들었다. 세이아나가 박아 넣은 그 노란빛의 보석(……마물 이름이 레이네라고 했던가, 으음.)이 반짝이는…… 은빛의 검. 아이에드의 검. 풀잎 스치는 소리가 조금씩 더 가까이 온다. 난 검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바로 앞의 나뭇잎에 살짝 흔들리는 그 순간, 난 몸을 날렸다. "꺄아아아악!" "에……?" 검을 쥔 양손에 가득 힘을 주고, 먹이감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돌진하던 난 깜짝 놀라 멈춰섰다. 비명소리? 꺄아아악이라니, 그럼 동물이 아니잖아! 그러나 멈춰서려고 발에 제동을 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온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던 나의 몸은 가차없이 고꾸라져 땅에 처박히고 말았다. "으윽." 머리가 땅에 완전히 처박혔다. 나는 땅 속에 처박힌 내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풀려 차마 일어서진 못했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을 뿐이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내 몸은 내 의지에 따라주지 않았다. 아니, 난 너무나도 엄청난 것을 본 나머지 일어설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인간……." 신음처럼 조그맣게 한마디가 내뱉어졌다. 그렇다! 내 몸을 얼려버린 그것의 정체는 바로 인간이었다. 난 무의식적으로 흠칫 뒤로 물러섰다. 인간, 인간이다! "헉!" 난 동그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것' 을 보고는 정말 놀라고 말았다. 일종의 경악이었다. 나는 심장이 멈추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아, 죄송합니다. 저, 저기…… 괜찮으세요?"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묻는 그, 인간이라 짐작되는 것이 입을 열었다. 순간, 내 눈이 빠르게 그 인간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탐색을 시작한지 1분이 지나고 2분이 지나고 3분이 지났을 때, 난 적잖이 실망하고 말았다. 웬걸, 우리 마족과 전혀 다른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세이아나가 건넨 '인간들의 삶'이라는 어느 할 일 없는 마족놈이 지어놓은 책에 그려져 있던 인간들의 모습을 보고서 우리와 비슷하게 생겼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똑같을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머리카락색이나 피부색깔만 다를 뿐, 나머지는 정말 우리 마족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저, 일어나시는게 불편하면…… 응, 도와드릴까요?" 넘어진 나를 바라보며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묻고 있는 이 자그마한 인간은 여자인 듯 했다. 어라? 그런데 이상하군. 세이아나는 체이드 숲은 마기가 세서 인간은 못 산다고 한 것 같은데. "필요 없다." 난 손을 내미는 꼬마를 향해 그렇게 말하고는 발딱 일어섰다. 꼬마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러나 이미 꼬마가 우리들과 비슷하게 생겼단 걸 알게 된 난 꼬마에겐 이미 관심이 없어진 뒤였다. 오히려 나는 꼬마의 손에 들린 조그마한 바구니에 훨씬 더 눈길이 갔다. "저기……" 꼬마가 입을 열었다. "이거… 드시고 싶으세요?" 꼬마는 내가 아까부터 빤히, 아주 빠안히(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 듯 하다)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손에 들린 바구니 안의 빵을 가리켰다. 나는 초인적인 스피드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드세요!" 꼬마는 갑자기 내게 달려오더니 그대로 빵 바구니를 내밀어 내 손에 쥐어줬다. 난 멀뚱한 자세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순간, 구수한 빵 냄새가 내 코를 찔렀다. 나는 보통 인간은 상상할수조차 없는 엄청난 스피드로 바구니 속에서 빵을 꺼내든 다음, 손에 든 그 조그마한 빵을 입으로 쑤셔 넣기 시작했다. "맛있……!" 무의식중에 나온 말을 느끼며 나는 허겁지겁 빵을 베어먹었다. 이 걸 본다면 식사예절이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로시엔은 잔소리를 늘어놓겠지. 눈물이 핑글 돌 것 같군, 제기랄. 로시엔…… 그리고 아이에드. 이렇게 가슴 한 구석이 아픈 이유는 내가 너희놈들을 보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이 절대로 아니다, 알겠냐? "호오호오." 근데, 인간들이 고기나 채소외에 무엇인가를 만들어 먹는 것이 이것 때문인가? 이 부드러운 느낌 말이다. 나는 빵을 야금야금 베어먹으며 입가에 묻은 빵부스러기를 털어냈다. 역시 이상하군, 손에 뭐가 닿을 때 느끼는 감촉이 너무 부드러운건. "냠!" 나는 다시 빵을 한 입 베어먹었다. 꽤 길다란 이 빵 이름이 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부드럽고 바삭한 감촉이 무척이나 기분 좋았다. 한 입 한 입 야금야금거리며 베어먹으며 나는 내가 조금 한심함을 느꼈다. 으음, 빵을 먹는 마족이라니. 하지만 뭐 어때. 맛있으면 끝이지. "냠냠냠냠냠냠냠…… 쩝쩝쩝…… 냠냠쩝…… 꿀꺽." 내가 얼마나 정신 없이 먹었는가에 대해서는 굳이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내 앞에 서 있는 그 조그마한 꼬마는 처음 나를 마주했을 때보다 더더욱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최후의 것까지 다 먹었을 때, 꼬마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짝, 하고 박수를 쳤다. "와앗, 대단해! 우리 오빠보다 더 빨리 먹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어!" 꼬마의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난 바구니를 꼬마에게 들려주며 진지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나직하게 물었다. "더 없어?" 꼬마는 내 말에 잠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꼬마는 잠시 바구니를 만져보더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 먹었어요? 이거… 엄청 많이 들어있었는데?" 너도 3일 동안 굶다가 먹어봐라. 난 입 밖으로 나오려는 이 말을 멈추고 꼬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식량 3일치였는데……" 꼬마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 후, 꼬마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머리를 긁적이고,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뭔가를 결정했는지 그 꼬마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집에 갈래요?" "밥 줄거야?" 내가 해놓고도 참 비참한 말이었지만 하고 싶은 말은 이 것 뿐이었다. 꼬마는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싱긋 웃었다. "응." -------------------------------------------- 바보 칼레들린(...바보라기보단 왕자병일까...)의 인간계 이야기.. 기대해주세요. -------------------------------------------------------------------------------- Back : 21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9 (written by 카르민) Next : 1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7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3382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9th September 2001 15:15:10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2-09-2001 18:15 Line : 249 Read : 1038 [21]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9 -------------------------------------------------------------------------------- -------------------------------------------------------------------------------- Ip address : 61.76.191.6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내 이름은 나스예요. 오빠는요?" 이봐, 이봐. 마음대로 '오빠' 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말라고. [인간들의 삶]이라는 데서 읽은 적이 있다. 오빠라는 호칭은 여자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라는 걸. "칼레들린." 나의 짧은 대답에 나스는 싱긋 웃었다. 내 손을 꼭 붙잡고 아이다운 답답할 정도로 느린 발걸음으로 자신의 집으로 나를 데려가고 있는 이 아이, 이름은 나스다. "아아, 칼레들린 오빠군요? 근데, 칼레들린 오빠는 굉장히 잘생긴 것 같아요." "푸하하하하하핫…… 헙." 나는 나스의 말에 흐뭇하게 웃다가 한참 후 나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것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나스는 민망한 표정으로 나를 한참이나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잘생겼다는 건 당연하지." 나는 시선을 저 멀리로 주는 나스를 향해 말했고 순간 나스가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잘생긴건 사실아닌가? 나는 미의 결정체라고 불리는 마족의 일원이란 말이다. "그치만, 우리 오빠가 더 예뻐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나스가 문득 고개를 들더니 나를 보고 밝게 말한 것은. 난 그런 나스의 경쾌한 말투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나 할까? 나보다 좀 낫게 생긴 녀석이 자기 오빠라면, 나보다 더 잘생겼다거나 나보다 더 멋지다거나 하는 말을 쓸 것이지 우리 오빠가 더 '예뻐요' 라니? 인간들은 참 알 수 없는 언어를 구사하는군. 나는 나의 손을 잡고 흔들흔들 앞뒤로 자신의 손을 흔드는 나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스는 나를 바라보고 빙긋 웃더니 묻지도 않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는요, 오빠랑 여기서 단 둘이 살아요. 웅, 저 멀리로 나가면 아저씨 아줌마들이 모여사는 작은 마을이 하나 있지만요…… 숲 깊은 곳에는요,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없거든요." 그렇군. 이 숲에는 이 꼬마랑 이 꼬마의 오빠 외에는 살지 않는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나스나 그 오빠라는 녀석은 좀 특이할 것이 틀림없다. 체이드 숲, 아니…… 숲이 아니라 밀림이 틀림없는(언젠가 각성해서 마계로 돌아가는 그 때, 세이아나를 만난다면 나는 그녀에게 조목조목 따지고 말테다.) 이곳은 마계와 통하는 공간이 위치한 만큼, 마족이 내뿜는 엄청난 마력을 막아주는 구실을 한다고 세이아나가 말한 적이 있지 않은가? 마기도 장난이 아닐텐데 여기서 산다라? "아, 이제 거의 다 왔어요." 나스의 작은 외침에 나는 굉장히 기뻐졌다. 다 왔다는 말은 즉, 음식을 빨리 먹을 수 있다는 얘기잖아, 크하하하하핫. 그러고보면 난 참 운이 좋은 녀석이다. 숲엔 아무것도 먹을게 없었는데 이런 작고 착한 여자아이를 만나다니 말이야. "음?" 그러나, 유쾌한 기분에 막 발걸음을 옮기려 했던 난 다음순간 움찔하고 멈춰서고 말았다. 이 근처에서 강렬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스는 물론 평범한 꼬마이기 때문에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지 앞으로 나가려 했으나, 난 그런 나스의 팔을 내 쪽으로 끌어당긴 다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스는 의문 섞인 표정을 내게 보내왔다. 그런데 그 때, 어떤 목소리가 가만히 울렸다. "이제야 찾았군. 움직이지 마라." 나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 때문에 약간 당황스러워졌다. 나는 곧 나의 날카로운 감각기관을 동원해서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내었다. 약 50세리하 남짓한 거리에서 나와 나의 고마운 밥줄이 되어줄 나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떨거지 같은 인간들의 기운이 느껴져 왔다. 그것은 싸움의 기운이었다. 살기 등등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밥을 좀 늦게 먹게 되었다는 사실에 인상을 팍 썼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인간들끼리의 싸움이라. 한 번쯤 구경하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그래∼!! 역시 나란 녀석은 운이 좋다. 잘생긴 자에게는 언제나 운이 따르기 마련이지. 움하하하하하하하!! 인간계로 나오자마자 인간들의 싸움을 구경하게 되다니, 후후후후훗!! "칼레들린 오빠? 왜 그래요? 난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린 나를 황당한 눈으로 보고 있는 나스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난 슬그머니 오른손을 들어올려 손가락을 둥글게 만 다음 그녀의 이마 쪽으로 가져갔다. 나스는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손가락 끝을 나스의 이마에 살짝 건드렸다. 스륵. 작은 마찰음이 났다. 내 손에는 이미 시전을 끝내놓은 슬립 주문이 걸려 있었다. "어?" 나스는 당황스러운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씨익 웃었다. "카, 칼레들린…… 오빠. 이, 이상해요……" 이상하다고? 이상할 것 없는데. 내가 슬립 주문을 걸어놨으니까 잠이 오는 건 당연하잖아? 너 바보냐? "잠오면 그냥 얌전히 자는 게 자연의 위대한 섭리지."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태연자약하게 지껄였다. 나스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든 듯 눈을 감았다. "……구경하고 올 테니까 내가오면 꼭 밥줘야 돼. 아직도 배고파 죽겠단 말이야." 나는 잠이 든 나스를 풀 섶에 누이고 살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더 가까이 가면 기척이 들킬 것 같은 곳까지 당도했을 때, 나는 적당히 큰 나무를 골라서 그 뒤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땅에 배를 깔고 누웠다. 이렇게 땅바닥에 배를 깔고 눕는 모습을 깔끔쟁이 로시엔이나 잔소리꾼 아이에드가 본다면 난…… 다음 날 하도 잔소리를 많이 들어 귀가 썩은 변사체로 발견될 것이다. 으으으윽, 안 돼. 이런 상상을 하다니…… 너무 끔찍해서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지 않은가!! "나를 잡으러 온 거냐. 여기까지?" 공포스러운 기억을 읽어내는 나의 생각을 가르며 바람을 타고 작은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그러나 나는 작긴 하지만 그 목소리를 아주 정확하고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몸을 뒤집어 똑바로 누운 뒤 손을 턱에 받쳤다. 뭔가 심상찮은 상황이 저 멀리서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힐끗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있는 나스를 보았다. 틀림없이 잠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떻게 싸우지?"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 마족들처럼 마력을 마구잡이로 날리며 싸울까? 아니면 검이라도 휘두를까? 음, 보지 않았으니 제대로 된 가설이 떠오르지 않는군. "이 빌어먹을 놈!! 3년 동안이나 네 녀석을 잡으러 다니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네가 알기나 하는 거냐? 얌전히 죽어!!"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난 고개를 갸웃하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바람을 타고 그들의 목소리가 느껴졌다. …남자 셋에 여자 하나. 남자 셋은 한 편이고, 여자는 혼자다. 나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고 이번엔 땅을 뒹굴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이제 그만 날 좀 놔둬!!!" "웃기지 마라, 1026호!" 그래그래, 어이구어이구, 왜 그러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발 좀 그만하고 싸워라 싸워. 너희는 좋은 주먹 놔두고 왜 말로 싸우는 거냐. "어쩌겠다는 거냐. 정말로 나와 끝까지 싸워보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여자의 말에서 약간의 살기가 묻어 나왔다. 나는 상체를 서서히 일으켜 나무 앞으로 와서 기댔다. 나는 지금 기운을 완전히 숨기고 있으므로 저들이 나를 의식할 가능성 따위는 없으니까. "너를 죽이겠다. 1026호. 원망 따윈 마라." 지독한 살기가 여자의 맞은 편에 선 남자 셋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그들 넷은 모두 얇은 여행복 차림으로 거대한 칼 하나씩을 손에 쥐고 있었다. 꽤 거리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머리카락 색이라던가 얼굴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들 사이에 있는 여자의 머리카락은 유난히도 붉은 빛이라 햇빛에 완연히 반사되어 눈에 무척 잘 띄었고 왠지 아름다워 보이기도 했다. 뭐랄까…… 탐스러운 윤기가 흐르는 신비로운 루비의 붉은 색? 아니, 어떻게 보면 신비롭기는커녕 잔혹하리만큼 끔찍한 살육의 현장에서나 볼 수 있는 피에 젖은 머리카락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여튼 저 머리카락은 묘한 빛깔이다. 세이아나의 불꽃같은 느낌의 붉은 머리카락과는 또 묘하게 다른 그런 색. "쉽게 안 죽을텐데!" 그 붉은 머리칼을 가진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물론, 거리가 있기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고 소리만으로 감지했을 뿐이다. 소리를 들어보니 분명 단검이다. 그러나 저 남자 셋은 장검. 과연 상대가 될까? 쉭! 날카로운 검 세 개가 한꺼번에 여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여자는 가볍게 몸을 점프해 그 칼을 피해냈다. 챙! 그리고 다음 순간 요란하면서도 섬뜩한,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여자는 검이 부딪힘과 동시에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뻗었다. 여자는 몸을 뒤로 뺀 반동을 이용하여 몸을 앞으로 세우고 단검을 높이 쳐들어 남자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순간, 피가 흐르는 육체에 날카로운 금속이 박힐 때 나는 소름끼치는 음색이 스산하게 울렸다. 검의 회전력을 이용하여 단번에 첫 번째 남자를 베어버린 여자는 가뿐하게 몸을 날려 두 남자 쪽으로 달려갔다. 오오, 제법!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위력은 어떤지 모르지만 엄청나게 빠른 공격이었다. "꽤 하잖아?" 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왠지 재밌었다. 어느새 달리는 여자와 남자 둘 사이의 간격이 좁아졌다. 여자가 다시금 공격을 위해 검을 들더니, 순간의 틈을 노려 남자들 중 하나의 오른쪽으로 파고들었다. 챙! 그러나 공격은 실패. 다시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날 뿐이었다. "1026호! 제법이구나!" 감탄하는 소리인가, 비꼬는 소리인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여자는 피식 웃었다. "당신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한꺼번에 둘을 상대하기에 버거울 텐데도 여자는 꽤 여유로운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키가 작은 남자가 검을 들어 단독으로 공격해오자 여자의 단검이 번개처럼 그의 어깨를 향했다. "어, 어느새!" 키 작은 남자는 깜짝 놀라서 소리를 쳤다. 그러나 그는 소리를 지른 것과는 달리 신속하게 상황에 대처했다. 그는 자신의 몸에 칼을 딱 붙인 자세로 양손으로 칼의 끝을 잡고 여자의 단검을 막았다. "어림없지! 네 까짓게 내 공격을 피한다고? 웃기지 말라 그래!" 그 말과 함께 바로 뒤에 온 여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남자의 허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푸욱. 또다시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검의 소리와 함께 혈향이 물씬 풍겨져 나왔다. 순식간에 두 명을 해치운 여자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섰다. 두 명의 남자에게서 튄 피가 그녀의 옷에 어지러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머리카락만은 원래가 붉은 색이라 그런지 피가 튄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핏빛 머리카락은 여전히 윤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여자의 짧은 단도에는 붉은 피가 칠갑 되어 있었다. 여자는 그 피 묻은 단도를 긴장하며면서 올렸다. 남자도 서서히 검을 바로 쥐었다. 그리고. "주피터 윈드." 갑작스럽게 남자의 입에서 음침한 소리가 났다. 마법? 순간 여자를 향해서 대량의 번개바람이 날아들었다. "합!" 여자는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기합소리를 내지르며 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번개바람을 막았다. 그녀의 검은 마검인지 마력을 어느 정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짧은 단검 한 자루만으로 번개바람을 막는 것은 무리인 듯 그녀는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고 여자의 가슴 쪽을 향하여 마법은 미친 듯이 들어왔다. 마법에 의해 여자의 옷은 힘을 견디지 못하고 치직대며 찢어지고 있었고 그 틈새로 남자가 접근했다. 오오, 과연. 굉장한데.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감탄했다. 몇 분이면 끝날까? 한 3분? 그 때까지 좋은 구경할 수 있겠군. 잠깐, 근데… 이 상황이 끝나고 나스가 깨어나면 비릿한 핏내가 피어오르는 이 곳에서 어떻게 벗어난다지? "제기랄. 난 이 꼬마한테 밥을 얻어먹어야 한단 말야! 이거 보고 기절하면 곤란한데." 내가 막 이렇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여자의 커다란 고함 소리가 들려온 것은. "치사하다!" "뭐가?" 그러나 남자는 웃을 뿐이었다. 하긴, 치사할 것 없다. 뭐가 치사한가? 마법으로 공격한다는데 그게 뭐가 문제가 있겠는가. "젠장―!" 여자가 바람을 가르며 남자를 향하여 칼을 들이대었다. 챙! 그러나 남자의 검이 여자의 검을 사뿐히 막았다. 흐음? 여자는 있는 힘을 다하여 몸을 꺾어 상대의 빈틈을 노리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남자의 입에 어려진 차가운 조소. 비웃음이 담긴 저 눈빛. 그것은 자신과는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낮은 경지에 머물고 있는 자를 향해 보내는 경멸의 눈빛이었다. 여자를 죽인다? "그렇게는 안되지." 왜였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여자가 죽을 거라고 예상되자 나도 모르게 재빠르게 달려나갔다. 훗, 아마도 나의 강렬한 기사도 정신이 발휘돼서 그러지 않았나 싶군. 기사도라는게, 여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어리석은 인간 남자들의…… 하여튼 그거 맞나? 맞는지 모르겠군. 에라이, 알게 뭐냐!! 하여튼 내가 갑작스럽게 숨겨왔던 기척을 푸는 바람에 두 녀석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자, 이거나 받아봐라!" 나의 짧고 성의 없는 듯한, 그리고 왠지 내가 들어도 경쾌한 느낌이 팍팍 나는 이 외침과 함께 내 손끝에서 작은 구체가 맺히기 시작했다. 마력 덩어리가 서서히 내 손에서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남자를 향해 날려보냈다. 아주 느릿한 속도로. "제, 제기랄!" 남자는 눈에 띄게 당황한 듯 했다. 그는 날아오는 마력 덩어리를 검으로 막으며 여자의 시선을 피해 나를 노려보았다. "네, 네 놈은 뭐냐?" "지나가는 놈."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여자를 힐끗 보았다. 굳어 있던 여자는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서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자, 잠깐. 치… 치사하다." 남자가 여자를 향하여 낮게 뱉었다. 그러나 여자는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뭐가?" 푹! 내가 쏘아보낸 마력덩어리가 남자의 몸을 묶어두는 동안 틈을 노려 공격한 여자의 검날에 남자의 몸은 꿰뚫렸다. "윽." 낮은 심음 소리가 났고 여자는 아무런 미련 없이 그에게서 자신의 검을 뽑았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아무런 감흥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는 내쪽으로 돌아… 아닛…? "어?" 나는 깜짝 놀랐다. 검을 들고 상대를 처치한 후 나를 보는 여자는 웃옷은 아까전 그 마력에 의한 공격으로 거의 난도질 당해 있었는데… "누군지 모르지만 신세를 졌군." …여자의 옷 사이에는 가슴이… 없었다. 게다가 가까이에서 보니 나이도 무척 어려 보였다. 기껏해야 열 여섯 일곱? 소년… 이다. 이런, 남자를 여자로 착각하다니.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녀석을 쳐다보았다. 녀석은 멍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 Back : 22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0 (written by 카르민) Next : 20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8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3382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9th September 2001 15:15:33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2-09-2001 18:16 Line : 231 Read : 995 [22]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0 -------------------------------------------------------------------------------- -------------------------------------------------------------------------------- Ip address : 61.76.191.6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이름은?" 나는 녀석을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단 어쨌든 태어나서 두 번째로 만난 인간이라는 존재를 눈에 담아두려 애쓰면서 말이다. 그런데, 다시 확인하는 거지만 생긴 건 우리와 정말 다를 게 없군. "…카민," 그 녀석은 상처 입은 오른쪽 어깨를 서서히 감싸쥐곤 나를 조심스럽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아, 근데 저 쪽엔 나스가 누워있는데… 지금 깨워야하나, 말아야하나? 난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난 그 카민이라는 이름이 상당히 그에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카민이라고 한다." 붉은빛의 눈동자. 여자라고 오인 받을 정도로 곱상한 얼굴하며 눈(雪)빛의 새하얀 피부. 선홍빛, 그 녀석의 이미지는 전체적으로 그 것이었다. "그래… 흐음, 카민이라고?" "그러는 그 쪽 이름은 뭐야?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인 모양인데? 아, 구, 구해줘서 고마워." 카민은 눈에서 어느새 의문을 지우고 흥미롭다는 표정을 내게 지어 보였다. 내가 자신을 구해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안전한 상대라고 결론지은 모양이다. 바보, 저 녀석들보다 내가 훨씬 위험한 존재라고. 이름하여 마족이라고 한다. (뭐, 반쯤은 인간피도 섞여 있다만.) 들어는 봤나?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 데몬이다." 나는 나스 때와는 다르게 풀 네임으로 내 이름을 소개하며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생각 없이 말해놓고 움찔했다. 으극, 잊고 있었어. 저 쪽은 인간이라는걸. '데몬(마족)' 이라고 당당히 말해버리면 저 녀석이 기절할지도 모르는데. "이름 한 번 더럽게 길군." 그러나 카민은 내 예상을 깨고 중얼거리듯 그렇게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예상치 못한 반응에 기가 막혀서 입을 헤 벌려버렸다. "바… 바보놈! 난 데몬이라니까!" 난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서?" 카민이 다시 되물었다. 그 바람에 나는 또다시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느낌을 받아버렸다. '그래서?' 라니? "그거 뭐 굉장한 가문 이름이야? 아, 만약 그렇다면 미안. 난 여기서 산지가 꽤 돼서 바깥 사정은 잘 모르거든. 미안미안. 하여튼 고마워. 도와준 이유 따윈 안 물어봐도 되지? 1:3으로 싸우고 있었으니 저쪽이 좀 비겁하게 보여 도와준 거겠지? 내 말이 틀리면 말고." 나에게 [하여튼 고마워]부터의 뒷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카민의 눈동자만큼이나 붉은 입술에서 떨어져 나온 그 바보 같은 말에 이젠 기가 막히다 못해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아니야? 네 이름이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 데몬…… 이라며?" 카민이 자신이 생각해도 뭔가 틀렸다고 생각했는지 약간 긁적이며 자신 없어하는 말투를 구사하는 시점에서, 나는 턱을 떡 벌려버렸다. "왜, 왜 그래? ……지, 진짜 유, 유명한 집안인가보지?" 카민은 약간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생전 처음 만난 우리 둘 사이에 상상을 초월하는 무게를 지닌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색하다 못해 답답한 침묵이 지나간 후,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하하……" "이, 이봐?" "아하하하하! 아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으하하∼ 으하하!" 나는 나도 모르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정말 너무 웃기지 않은가? 어떻게 하면 마족을 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지? 말도 안돼, 정말! 어떤 정신 나간 인간이 '데몬(마족, 악마)'이라는 성을 쓴다더냐? 이 녀석, 제정신 박힌 인간인 건 틀림없는 거냐? "푸하하하핫! 하하하하핫!" 드디어 내가 자제할 수 없을 정도로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이봐. 그만 웃어." "하하하하핫! 푸핫! 푸후∼하하핫!" "그만 웃어." 그렇게 한참을 웃은 끝에, 녀석의 민망한듯한 어조를 끝으로 나는 간신히 웃음을 멈출 수 있었다. 기가 막힌 정점에 도달한 내가 막 녀석을 향해 진실을 말해주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부스스하고 마른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가 바로 내 뒤쪽에서 들려왔다. 이윽고 들려오는 맑은 소녀의 미성. "으음… 어, 카민 오빠?" * * * * * * * * * * * "히잉… 오빠, 이게 뭐야! 다쳤잖아. 피난단 말야." 칭얼거리는 나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칭얼거림의 한 가운데, 이 상황이 못내 이해가 안돼는 머리 나쁜 마족 하나가 머리를 집어 뜯고 있었다. 물론 그 머리 나쁜 마족은 바로 나다. 인정하기는 좀 싫지만. "하핫, 좀 넘어졌어." 카민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으며 말했지만 세상에 그런 말을 믿을 인간이 있을 것 같냐? 넘어졌다고? 넌 넘어질 때마다 그렇게 옷이 찢어지고 전신이 피로 젖어 버리냐? 차라리 몰골이 엉망이 된 채로 막 고향에 온 참전용사가 [미안해요, 여보. 개한테 물렸어.]라고 말하는 걸 믿으면 믿었지 네 말은 못 믿겠다. "오빠도 참, 그러니까 좀 조심해서 다니랬잖아. 한 두 번 이러는 거야?" ……뭐야? 그럼 정말 넘어져서 저렇게 된 적도 있단 말이냐. 나는 기가막혀서 입을 떡 벌렸다. "칠칠치 못하게 정말!" 나스는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며 카민이란 녀석을 마음껏 혼냈다. 왠지 누나가 남동생을 혼내는 광경이나 엄마가 아들을 혼내는 광경이 떠오르는군, 크음. "나스∼∼ 미안." "몰라! 집에 가서 당장 치료해야겠어!" 나스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카민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카민은 일부러 아까 전 지독한 난투전이 일어났던 그곳을 피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나스와 카민이 열심히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한참이나 듣고 난 후,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아까 네가 말하던 오빠가 이녀석이란 말야?" 한참동안이나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네! 우리 오빠, 예쁘죠?" 나스는 카민의 팔에 장난스럽게 매달리며 물었다. 카민은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나스의 금색 머리카락을 살짝 어루만졌다. "나스, 나한테 예쁘다는 말은 안 하기로 했잖아." "헤헷, 그치만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잖아? 난 크면, 꼬옥 오빠랑 결혼할거야!" 뭐, 뭔가 위험성 발언인데? "하하핫." 카민은 싱겁게 웃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집에서 밥을 얻어먹기로 한지라 난 이 둘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차였다. 내가 자신의 은인이라 그런지 카민은 내가 자신들을 따라가는데 아무런 불만도 없어 보였다. 카민은 방금 전에 힘든 싸움을 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활기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민은 나스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나를 향해 내던지듯이 말했다. "근데, 당신 이름이 칼레들린 엘버… 뭐라고 했지?" "칼레들린 엘버 뭐가 아니고,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이다." 나의 짜증스러운 대꾸에 나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칼레들린 오빠, 왜 그렇게 이름이 길어요?" 난 대답을 하지 않고 묵묵히 침묵을 고수했다. 그리고 그 침묵이 끝날무렵 약간을 걸은 끝에 풀 숲 사이에 거의 숨겨지다시피한 작고 아담한 통나무집이 보였다. 아마도 그 곳이 이 이상한 남매의 보금자리인 듯 했다. 내가 통나무집을 바라보며 뭔가 입을 열려는데, 카민이 난데없이 말했다. "좋아, 어찌됐건 이름이 기니까, 칼이라고 부르자." "뭐가?" 나는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이 순진한 어조로 되물었다. "칼이라고." "잠깐. 누가?" "너말야. 그 칼레들린인가 뭔가 하는 이름 너무 길잖아? 애칭으로 내가 지었다. 칼! 멋있지? 이제부터 널 칼이라고 부르겠다는 말이야." 카민은 혼란+ 황당+ 당황+ 기막힘+ 으로 범벅된 내 표정을 완전히 무시하며 피식 웃었다. "뭐…라고? 너 방금 뭐라고 지껄인거냐?" "음? 칼이라는 애칭을 말했을 뿐인데?" "우와, 멋있다. 칼 오빠!" 카민은 뻔뻔스럽게 대꾸했고 심지어 나스까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자, 잠깐. 그게 뭐야? 마음에 안들어. 마족은 이름이 짧을수록 지위가 낮다. 한단계가 올라갈때마다 그 지위를 이름으로 가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이에드를 보면, 그 놈은 무지하게 이름이 길다. 본명은 아이에드 엘버지운 피엘 블러드 아미스 류 아스테리카 리오드 카리나트에스 히메오 카이산…… 아이에드 엘버지운 피엘은 원래의 이름, 블러드 아미스 류는 현재의 직위, 아스테리카는 그 전의 직위, 리오드 카리나트에스는 그 전의 직위, 히메오는 그 전의 직위, 카이산은 그 전의 직위…… 이런 식으로 나가면 정말 끝이 없을 정도로 이어지는 것이다. 난 현재 지위가 없기 때문에 아이에드가 준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 이 내 이름의 전부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이까짓 인간 놈한테 품위 없게도 한 글자 이름인 '칼' 이라고 불려야 한다고? 아무리 지위가 없는 마족이라도 적어도 3음절 이상의 이름을 가지는데…… 한글자 이름이라니!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냔 말이다! "난 칼·레·들·린·엘·버·지·운·피·엘·이다. 내 이름을 축약하는 건 용납 못해." 나는 최대한, 있는 힘껏 눈을 찌푸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물론 눈에는 상대가 얼어죽지 않을 만큼의 냉정함을 싣고. 그런데 이 바보놈은 정말 바보인지, 아니면 내 눈에 느껴지는 살기를 무시하는 건지 뻔뻔스럽게 말했다. "헤에, 그치만 그건 너무 이름이 긴데?" 카민이 투덜거리듯 말하자 나는 머리를 한데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황당함을 넘어서서 분노가 느껴졌다. 난 최후의 수단으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좋다. 내 이름을 굳이 줄이겠다면 난 너를 민이라고 불러버리겠다. 의의 없지?" 그러자 카민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겠지. 고작 두글자 이름을 줄이겠다는 것도 그렇지만 카민이라는 멋진 이름(?)을 민이라고 칭하는것도 마음에 안드는게 당연해. 민이라는 이름은 '원한 때문에 소멸하지 못하는 원귀' 들을 총칭하는 고대어니까 말이다. 큭큭, 어때 할말 없지?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좋아! 그거 멋진데!" 카민이 손가락을 탁 튀겼기 때문이다. "재밌군! 좋아, 날 민이라고 부르든 말든 마음 대로해. 그치만 나도 당신을 꼭 칼이라고 부르겠다." "어이, 어이. 이봐!!" 나는 손을 휙휙 저으며 카민을 불렀다. 그러나 카민은 악마적인 웃음(그건 내가 지어야 할 웃음인데)을 흘릴뿐이었다. "마음대로해." 나는 결국 한숨을 쉬듯 말했다. 어차피 밥만 먹고 헤어질 녀석인데 뭐라고 말하든 상관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알았어, 칼." 카민, 아니 민이 말했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민은… 민?… 잠깐만! 아∼악 닭살!! "이봐." "응?" "그냥 카민이라고 부르마." 내 말에 카민은 잠시 멍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만면에 웃음을 띄웠다. "왜, 닭살 돋냐?" "알면서 묻지마." 나는 나답지 않게 얼굴을 붉혔다. 나는 잠시 잊어버렸던 것이다. 인간들이 사용하는 민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인간들의 삶]이라는 책에 적혀 있는 민의 사전적 의미는 꽤 많았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고대어로 떠도는 망령. 그러나 소수의 닭살 돋는 인간들은 사랑하는 남자를 부를 때 바보 같겠도 이 민이라는 명칭을 쓴다. '민∼'이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내가 저녀석에게 민이라고 부르다니. 우욱, 속이 요동을 치다못해 뒤집히려구 그런다. "칼 오빠, 다왔어요." 그 때, 내 온갖 민망함을 수습하며 나스가 내 팔을 잡아끌곤 말했다. 나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카민은 씩 웃더니 내 어깨를 두어 번 쳤다. "흠. 나와 나스가 이곳에 온 이후로, 우리 둘 외에 누군가가 이 집에 들어온 건 처음이야. 어찌됐든, 환영한단 말을 하고 싶군." 오호? "자, 들어가자고." 카민은 빙긋 웃으며, 정말 계집애처럼 예쁘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쳇, 이제서야 나스가 아까 왜 '우리 오빠가 더 예쁘다.' 고 말했는지 이해가 되는군. -------------------------------- 여기서 끊으면 안되는데.. 쿨럭.. 다음편으로.. 쿨럭쿨럭.. 아아... 줄맞추기 힘드네요..ㅠㅠ -------------------------------------------------------------------------------- Back : 23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1 (written by 카르민) Next : 21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9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338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9th September 2001 15:16:06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2-09-2001 18:17 Line : 297 Read : 951 [23]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1 -------------------------------------------------------------------------------- -------------------------------------------------------------------------------- Ip address : 61.76.191.6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우걱우걱우걱." "냠냠쩝쩝……." 따끈한 수프라는 것이 담긴 접시와, 빵 몇 개, 내가 여태껏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억지로 입에 집어넣었던 이상한 풀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맛있고 싱싱한 채소들이 열심히 나와 카민의 입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대단해." 나스는 정말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나와 카민을 바라보고, 결국엔 이 한 마디와 함께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나스가 뭐라고 해도 나와 카민의 행동을 저지하기엔 커다란 무리가 있었다. 카민과 나는 거의 걸신들린 듯이 접시에 담긴 것을 남김없이, 정말 양념 건더기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치우고 있었다. 정신 없이 스푼을 움직이면서도, 나는 카민이란 녀석에 대하여 약간의 경외심을 가졌다. 계집애처럼 곱상하게 생겨서는 마치 백 년 굶은 통돼지처럼 음식을 먹어대는 모습이라니…… 그건 언밸런스함의 극치를 달리다못해 입이 헤 벌어질 광경이었다. "후아∼∼" 그렇게 따지면 나도 만만치 않다는 것만은 인정한다. 아주아주 잘생긴 나도 지금 카민에 못지 않게 열심히 먹어치우고 있었다. 아마도 나스가 아닌 다른 이들이 나와 카민의 모습을 봤다면 걸귀들이 음식을 먹어치우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3일을 굶는 바람에 배가 엄청 고팠고,(나스가 내게 빵을 줬긴 하지만 그건 너무 적은 양이었다!) 저 카민인가 뭔가 하는 녀석도 방금 전에 그 싸움으로 인해 체력소모가 장난이 아닐테니 굳이 나와 저 녀석을 그렇게 매도할 것까지는 없다고 말해두고 싶다. "잘 먹었습니닷―!!" 얼마나 정신없이 먹었을까. 접시까지 먹어치울 기세를 보이던 카민이 이렇게 말하며 나스를 향해 눈을 찡긋했을 무렵엔, 이미 접시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접시는 모두 반짝반짝, 엄청난 윤택을 내고 있었다. 도무지 방금전에 음식물이 남겼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접시를 혀, 혀로 핥은 것 같다!! "잘 먹었다." 나는 카민이 나스를 향해 진지하게 한 말을 약간 어색한 어조로 따라했다. 음식을 차려준 것은 어쨌든 저 나스라는 꼬마였으니 감사의 말 정도는 해야할 듯 했다. "하, 하나도 안 남았네……" 나스는 그러나 나와 카민의 인사를 들을 정신이 남아있지 않는 듯 했다. 나스는 눈을 크게 뜨고 탁자 위에 놓여진 엄청난 수의 접시들을 바라보며 연신 감탄성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저렇게까지 눈을 부릅뜨는지는 모르겠다만. "하, 하하. 이, 이제 배 찼어요?" 나스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더 있어?" "……아, 아뇨." 아직 배가 안 찼다는 말을 약간 돌려서 하자 어린 나스는 곤란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난 그런 나스를 잠시 바라본 후 무덤덤 하게 말했다. "그럼 됐고." 하긴, 이 정도면 배가 부르긴 했다. 나는 손을 내밀어 바로 앞에 있던 컵을 잡았다. 그리고 한모금 들이켰다. "그런데, 칼?" 나는 갑작스러운 카민의 목소리에 움찔했다. 아니, 카민의 목소리에 움찔한게 아니라 카민이 나를 호명한 것에 대해서. "칼이라고 부르지마!" "아깐 부르라며?" 카민은 내 성난 고함에도 아랑곳않고 방긋 웃으며 말해왔다.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입술을 지그시 깨물어 버렸다. "그런데 칼, 당신 말이야…… 어느쪽에서 왔어?" "뭐?" 어느쪽에서 왔냐니? 뜬금 없이 무슨 소리냐? "아니, 체이드 숲은 그 규모가 엄청 넓어서 크레티아, 세이피안, 이카루, 미코, 이렇게 4나라에 접해 있잖아? 넌 그 중에 어디로 들어왔냐고." 체이드 숲이 나라 4개에 접해있어? 으악, 넓다넓다 했지만 그렇게나 넓었다는 말인가! 세이아나…… 진짜 돌아가는 날에 두고 보자고. 칼을 박박 갈아둬야겠구만 이거. "이보라구, 칼?" 내가 세이아나에 대한 분노로 한참이나 대답 없이 머리를 쥐어뜯자 의아한 카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녀석의 부름에 답해줄 기분이 아니었다. "비밀이라면 말 안 해도 돼. 그러니까 머리 좀 그만 집어 뜯어." 나는 카민의 목소리에 흠칫했다. 그리고 머리를 집어 뜯고 있던 양손을 가만히 펼쳐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 손에 가득 잡힌 엄청난 수의 검은 머리카락을 보고 잠시 황당해 말을 잊었다. 나, 나 탈모증이 있었던가? 왜 이렇게 많이 빠진 거지? "웅, 그럼 칼 오빠는 어디로 가는 길이었어요?" 이번에는 나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이 남매의 질문공세가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몰라." "모른다고? 목적지가 없어요?" 나스가 놀란 듯이 물었다. 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정말? 목적지 없이 체이드 숲에 들어왔다고?" 이번에는 카민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역시 고개를 살짝 끄덕여주었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 빌어먹을 놈들, 정신의 근본부터 썩어빠진 놈들이 나를 세이아나의 공간으로 밀어 넣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 쪽으로 나온 길인데 목적지가 뭐고 있을 리가 없다. 원래부터가 오고 싶지 않은 곳을 떠밀려서 온 것인데 말이야. [인간들의 삶]이라는 책을 읽기는 했지만 인간들의 국가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인간들의 대륙이란 게 얼마나 넓은지, 하나도 아는 게 없는 난데 목적지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다, 당신. 그렇게 안 봤더니…… 그, 그런 거였냐?" 난데없이 카민의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 나는 황당하게도 두서 없이 튀어나온 그 말에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이 인간 놈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저절로 약간 멍청한 표정이 지어져 버렸다. 이익! 표정관리, 표정관리! 내 잘생긴 얼굴이 물론 멀뚱한 표정 좀 짓는다고 엉망이 될리는 없지만 그래도 표정 관리를 해야한다!! "안 돼! 아무리 힘든 일이 있더라도 그런 건 안 된단 말이다!" 이번에는 더 황당했다. 뭐가 힘든 일이고 뭐가 안 된단 말이냐? 이 인간, 혹시 그 짧은 시간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나는 점점 황당한 말만이 튀어나오는 카민을 바라보며 약간의 황당함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니! 당연한 거잖아! 절대로 안 돼! 그런 건 절대로 안 되는 거라고! 절대 안 돼!" 이번에는 더더욱 황당했다. 아니, 황당함을 넘어서 이제는 멍멍하기까지 했다.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저렇게나 열 내면서 하고 있는 카민이란 인물에 대해서는 이젠 황당함을 넘어서 일종의 존경심 같은 것까지 생겼다. 어떻게 상대가 하나도 이해를 못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저렇게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로 얘기를 할 수 있는 거지? 뻔뻔함의 극치인 아이에드도 저 정도는 아니고 일방적인 충고를 잘 하기로 유명한 로시엔도 저 정도는 아니다. "그래요, 칼 오빠! 그런 건 안 되요!" 얘, 얜 또 왜 이러냐? 더더욱 황당한 상황에 직면해 버린 나. 이번에는 나스까지 카민의 편을 들고나섰다. 환장할 노릇은, 난 그들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아듣고 있지 못하고 있는데 그들은 지금 무척이나 진지하다는 거였다. "그래, 안 돼! 칼! 당신 말이야,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안될 말이야. 어떻게 체이드 숲에 목적지도 없이 들어온다니…… 그 말은 즉…… 하여튼 정 마음을 가라앉히기 힘들다면 당신의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한 몇 일간 우리 집에 묶는 게 어떨까? 아니, 꼭 여기에 묶어 가야만 해! 알겠지? 알겠어? 절대로, 절대로 그것만은 안 돼! 그건 신의 섭리를 거스리는 일이자……" 나는 아예 대꾸하지 않기로 했다. 이 인간이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건지 하나도 알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어차피 내가 지금 하나도 못 알아듣고 있다고 말해도 이녀석이 멈출 것 같지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려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처음 만난, 어떻게 보면 나로 인해 목숨을 건진 이녀석이 혼자서 흥분해서 떠드는 것을 초연하게 지켜보았다. "그래요, 칼 오빠! 절대로 안 돼요! 진정될 때까지 우리 집에 묶어요!" 나스도 동조하고 나섰다. 난 이들 남매가 상당히 성격이 막무가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할 일 없는 마족이 지었다는 '인간들의 삶'이라는 책에서 보면 인간들은 남을 불신한다던데 이 인간들은 그렇지 않은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왜 생전 처음 만난 내게 자기 집에서 묶어가라고 난리인 거지? 난 영문을 알 수 없어 카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민의 얼굴은 여전히 빨갛게 상기된 채였다. "알겠지, 알겠지, 칼! 아무리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그런 짓을 하는 건 눈뜨고 볼 수 없어! 우리 집에서 묶어! 이건 명령이야! 알았어?" 카민의 그 말에 이번에는 황당함을 넘어선 기막힘을 느꼈다. 명령? 인간 주제에 마족인 내게 지금 '명령' 이란 단어를 쓰다니. "알았어? 우리 집에서 묶어!!" 카민이 다시 소리를 버럭 쳤다. 난 녀석의 외모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핏빛의 눈동자를 한 번 바라보았다. 어찌됐든, 이 두 남매가 지금 나를 자기 집에 묶게 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는 것 하나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 끝도 없이 이어진 것 같은 체이드 숲을 걸어오느라고 죽을 지경이었는데, 그럼 잠시 쉬어가도록 할까? 어차피 내가 인간세계로 나가서 할 예정 따위는 있지도 않았으니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무엇보다도…… "……밥 줄거야?" 여기에 묶으면 밥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으니까. 얼마나 묶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각성 할 때까지 내도록 여기에 묶으면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괜히 고생하면서 인간계를 돌아다니고 싶은 생각은 애초에 없었으니까. "물론이지!" 카민이 밝게 웃었다. 그리고 녀석의 말을 듣는 순간, 내 입술은 내 뇌가 뭐라고 명령을 내리기 전에 대답을 해버렸다. "좋아." "칼." "빌어먹을." 나는 나를 칼이라고 지칭하는 카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순간, 카민의 머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이라고? 애칭을 지어준 친구한테 너무 하잖아?" "누가 친구고 뭐가 애칭이라는 거냐." 나는 카민의 유들유들한 말투에 발끈해서 외쳤다. 그러나 카민은 별로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잠자리는 편해?" 오히려 화제까지 완전히 전환해 버려 막 화를 내려했던 나를 바보로 만들어버리기까지 한다. 저놈, 의외로 고단수로군. 인간들은 약삭빨라서 말싸움으로 이기려고 하면 안 된다고 한 [인간들의 삶] 제 3장 [충고편]의 2절이 떠오르는군. "빌어먹을, 편하기는!" 정말 불편했다. 대체 뭐란 말인가, 밑에 깔린 이 푹신푹신거리는 이상한 것은! 게다가 몸을 덮는데 쓰라는 이 이불이란 건 또 뭐란 말인가? 불편해 죽을 지경이다. 아까 이불을 내던졌다가 카민에게 한소리를 들은 터라 다시 이불을 내던질 수도 없었다. "아까는 고마웠어." 문득, 카민이 입을 열어 말했다. 난 투덜거림을 멈추고 잠시 시선을 돌려 카민을 보았다. 깜깜한 어둠, 완연한 검은색이 있을 뿐인 공간이었지만 내가 누군가? 난 바로 마족이다! 어둠 따위는 나의 시각을 방해하지 못한다. 어둠을 뚫고, 내 눈은 내가 누워있는 이 침대라는 곳과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에 이불을 깔고 드러누워 있는 카민을 담았다. 카민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뭐가 고마웠다는 거지?" 나는 갑갑함에 소리나지 않게 이불을 슬쩍 밀어내며 물었다. "……시침떼지마. 아까 전에, 네가 나를 구해줬잖아? 네가 아니었으면 죽을 뻔했다고, 그 놈들한테." 카민의 목소리가 약간 진지해졌다. 하지만 난 진지해지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별로." "당신, 꽤나 대단한 마법사지? 아까 나랑 겨루고 있던 사람도 상당한 실력의 마검사였는데." 카민이 다시금 말을 붙여왔다. 나는 피식 실소했다. 사실 마법이고 뭐고 할 것도 없다. 난 마족이다.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내게는 남아도는 힘이 있다. 마법? 그런 귀찮은 것을 배운 적도 없고 앞으로도 배울 생각 없다. 흐흐흐, 마족은 역시 편하다. 내가 한참동안이나 대답이 없자 카민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놈은 그다지 조용한 성격은 아닌 듯 했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아?" "뭐가?" "아까 그 녀석들이 누구인지, 왜 나와 싸웠는지…… 뭐 그런 거." "궁금해야 하는 게 정상이냐?"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은 궁금해하잖아?" 머쓱한 카민의 대꾸가 들려왔다. "난 궁금하지 않아." "그, 그래? 그럼 됐고." 카민이 약간 당황한 말투로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다가 한참 후, 카민이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무엇보다, 나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 "귀찮아서 얘기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 카민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참 재미있는 성격인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그 재미있는 성격을 위해서라도 생명은 함부로 하지마." 뜬금 없이 또 무슨 소린가? 생명은 함부로 하지 말라니? "무슨 소리냐?" 나는 참지 못하고 속에 있는 궁금증을 밖으로 표출했다. 카민이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내 말은 그러니까…… 당신이 하려고 했던 일, 되도록 하지 말라고." "내가 뭘 하려고 했는데?" 대화는 점점 미궁으로 빠진다. 정말 내가 생각해도 한심한 대화가 아닐 수 없다. "……그거 있잖아, 그거." "그거가 뭔데?" "그건 당신이 더 잘 알면서 왜 나한테 그래?" "……" "정말 이럴 거야!! 시침떼지 말란 말이얏!!" 종국에는 고함까지 질러버리는 저 놈. 비록 만난 지는 얼마 안됐지만, 저 놈은 필시 다혈질일거다. 분명히. ……그래. 말을 말자, 말을 말아. 저 놈한테 뭔가 이해가 가능한 얘기를 듣는걸 바라느니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겠다.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깊고 자연스러운 침묵이었다. "칼." 침묵을 깬 것은 또 카민이었다. 난 잠들어 있지 않았기에 곧장 대답했다. "그 따위로 부르지마." 물론 대답의 내용은 그리 다정스럽지 못했지만. "앞으로도 나스에게는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카민이 말했다. "뭘?" "……내가 그 자들과 싸우고 있었다는 거. 나스한텐 절대로 얘기하지마. 절대로." 카민이 작게 대답해왔다. 나는 돌아누웠다. "귀찮아서 안 한다." "그래? 훗, 역시 당신은 재미있는 성격인 것 같아." 카민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눈을 감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말 긴 침묵이 시작되었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 꼼꼼하지 못하게 얼기설기 엮어 놓은 듯한 느낌의 나무 천장이었다. 나는 시선을 돌려 내게 자신의 침대를 내주고 자신은 바닥에서 자고 있는 카민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까 그놈들은 뭐냐?" 나는 카민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려봤다. 혼자서 왠 뒷북이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왠지 갑자기 신경이 쓰였다고나 할까. 마계와 인간계 사이의 공간을 감싸고 있는 체이드 숲에서 다투고 있는 인간들이라, 뭔가 이상하잖아? 나는 힐끗 다시 카민을 보았다. 그러다가 나는 피식, 다시 웃음을 흘렸다. "무슨 상관이람." 그래, 무슨 상관이람. ―훗날, 나는 오늘을 후회하게 된다. 좀 더, 좀 더 자세히 물어볼 것을…… 너에 대한 것을. 네가 슬픔에…… 괴로워하기 전에. 네가 울기 전에. 내가…… 너에게 물어볼 것을. ……너에게 물어볼 것을― -------------------------------------------------------------------------------- Back : 2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2 (written by 카르민) Next : 22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0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3385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9th September 2001 15:16:20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2-09-2001 18:18 Line : 246 Read : 960 [24]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2 -------------------------------------------------------------------------------- 이상적인 피부 각질층 수분 함유량은 15% - 이자녹스 모이스처15 메이크업캐치 클렌징크림 - 15,000 원 -------------------------------------------------------------------------------- Ip address : 61.76.191.6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칼∼" "뭐냐?" 나는 나를 소리쳐 부르는 핏빛 눈동자의 녀석, 카민을 바라보며 약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 이상하기 그지없는 남매의 집에 묶은 지도 어언 3주일이 지났다. 이 둘은 첫 느낌이 그랬듯이 매우 희한한 성격들의 소유자였다. "용기를 내세요!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생명은 소중한 거예요." "포기하면 안 돼! 너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무슨 뜻을 담고 있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하여튼 이런 종류의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도대체가 아무리 똑똑한 나라도 이해할 수가 없는 종류의 말이 아닌가? 하지만 너무나도 머리가 좋은 나는 결국 이들의 말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결국 알아내고 말았다. 확실하진 않지만 용기를 내세요, 라는 말이나 포기하면 안 돼, 라는 말은 아침이나 저녁 인사라고 판단됐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침대에서 일어나거나 잠자리에 누우려고 준비를 할 때마다 이런 말을 하기 때문이다. 인사치고는 약간 이상한 말이긴 하지만 인간들과 마족의 무한한 차이를 감안해보면 그런 묘한 인사를 한다해도 그리 이상할 것까진 없지. "카알∼ 말투가 너무 쌀쌀맞다고 생각하지 않냐?" ……그런데. 그래, 다 좋다고 쳐. 다 좋다고 치자구. 알아듣지도 못할 말 자기네들끼리 하는 거, 그런거 속 좋은 내가 다 이해한단 말이다. 그런데 도대체가 말이야, 이것만은 아무리 들어도 용서가 안된다. 그렇게나 싫다고 했는데 굳이 저렇게 부르는 이유가 뭐란 말이냐. [칼레들린]!!! 이렇게 부르면 입안에 가시라도 돋는 다더냐? "……내 말투가 어디가 어떻단 말이지?." 나는 머릿수건을 뒤집어쓰고(마치 예전에 내가 블러드 아미를 청소했을 때와 같이. 별로 회상하고 싶진 않다만)집안을 청소 하고 있는 카민을 보며 대답했다. 카민은 그런 나를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도와줘." "……뭐?" 나는 내 귀가 잘못되었나 싶어서 되물었다. 그러나 카민은 다시 한 번 살짝 웃더니, 자신이 한 손에 들고 있던 -이상하게 긴, 그리고 그 밑에 걸레가 하나 달린- 것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자." "……." 나는 침묵한 채로 한참을 그 '대걸레' 라고 불리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어서 도와줘." 내가 얼어붙은 채 아무 말이 없자 그녀석의 손이 슥 하고 내밀어졌다. 녀석은 축 내려뜨리고 있는 내 손을 갑자기 꾸욱 잡았다. 나는 주먹을 쥐려고 애썼으나 이 카민이란 놈은 보기와는 달리 힘이 무지하게 셌다. 녀석은 주먹을 쥔 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더니 그 대걸레를 꼭 쥐어주고 다시 웃는다. "……내가 왜 이 걸 잡아야 하는지 얘기 좀 해줄래." 나는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가 말이야!! 얼마전부터 왜 이래? 왜 다들 나한테 청소를 못시켜서 안달이냔 말이야!! 내 곱디곱고 귀하디 귀한 이미지는 어쩌라고 아이에드는 블러드 아미 청소에, 로시엔은 성 청소에, 이 놈은…… 지금 나보고 또오오오 청소하라 이거냐?? "이유? 당연하잖아. 밥값." "……" 쩌억. 나는 입이 딱 벌어지는 것을 느끼며 카민을 보았다. 카민은 그러나 내 표정 따윈 별로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 "밥값은 해야할 거 아냐, 응? 칼?" "……." 나는 [밥 값]이라는 말에 더 이상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할거지?" 카민은 내 옆구리를 살짝 찌르더니 다시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은 무엇인가를 거부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크윽!! 이 놈, 이 놈!! 왜 내 주위엔 다 이렇게 사악으로 무장하고 있는 놈들밖에 없는거지? "그래, 한다." 나는 그 대걸레를 꼭 하고 쥐었다. 밥값이라는 말에 도저히 대항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카민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이끌었다. 나는 약간 당황했다. 도와달라고 하길래 나는 당연히 집안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인간은 밖으로 나가고 있지 않은가? 한참을 총총거리며 걸어가던 카민은 어느 곳에 도착하자 씨익 웃었다.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카민은 그런 나를 잠시 보더니 [그 곳]의 문을 활짝 열었다. "잘 부탁해∼" 쩌억. 이번엔 입이 옆으로 벌어진다. 눈도 튀어나오려고 그런다. "……이게 뭐냐, 카민." "응? 보면 몰라? 화장실이잖아." 이 놈은 양심이 없는 걸까. 카민은 넋이 나가 있는 내 왼손을 잡더니, 또 무엇인가를 쥐어줬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내려다 보는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자, 이건 마른 수건. 대걸레로 닦로 이걸로 한 번 더 닦아줘." ……죽여라. 죽여. "칼 오빠…… 씻을래요?" "……응." 나스는 내게 안쓰럽다는 듯이 물어왔고 나는 비참하고 쓸쓸하게, 그리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그녀의 성의에 답했다. 나스는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카민에게 말했다. "카민 오빠도 참. 칼 오빠가 아무리 청소를 잘하게 생겼어도 그렇지, 그래도 손님인데 어떻게 청소를 시켜?" 처, 청소를 잘하게 생겨? 누가? 내가??!! 푸하하하하핫!!!! ……기가막히면 웃음이 나온다고 한게 누구였지? "하하하하하하핫. 난 별로 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칼이 밥값은 해야한다고 하도 우겨서 말이야." 뿌드드드드드득. 카아아아미이이인. 너에게는 이 이가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단 말이냐. 꾸우우우우우우욱. 카아아아미이이인. 너에게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단 말이냐. 엉!!! 어째서 그렇게 뻔뻔한 거냐, 이 자식아∼∼!!! "응, 그렇구나." 너는 왜 수긍하는 거냐, 나스!! 화장실이라는 곳은 정말로 끔찍했다. 마족에게는 [화장실]이라는 게 필요 없다.(당연한가?) 그래서 나는 인간들이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그 화장실이라는 것에 대해 꽤나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나는 확실히 정리한다. ※나의 정의 1. 화장실: 무조건 더러운 곳. ……크아아아아아악!!!!!! 그게 뭐란 말이냐!!! 그 이상한 것들은!!! 나는 어느 샌가 로시엔의 청결병을 어느 정도 닮아버린 건지도 모른다. 나는 그 냄새나는 화장실을 보는 순간, 거의 미친 듯이 걸레를 휘둘러서 그것들을 닦아냈다. 벅 벅 벅 벅, 문지르고 문지르고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그리고 그것이 거의 거울 같은 광택을 내면서 반짝반짝 빛날 때(내 얼굴까지 비출 정도였으니 내 노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굳이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알리라고 믿는다.)나는 경악해야만 했다. 나는 깨끗해진 화장실을 보면서 내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뿌듯하게 서 있는 것을 발견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놀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청소가 끝나고 난 뒤 깨끗해진 장소를 보면서 흐뭇해하다니!! 이…… 이럴수가. 난 이 정도로 타락해버렸단 말인가? ……라고 생각한 그 순간. 스스로에 대한 충격으로 나는 잠시 정신이 어찔해지는 것을 느꼈고, 내가 열심히 화장실을 닦는데 이용했던 그 기다란 걸레를 밟고 말았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미끌어 졌다. "칼 오빠, 이 쪽으로 들어가면 몸 씻는데 있어요." 나스는 친절히 손가락을 들어 내게 설명해줬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본 내 몰골은 역시 처참했다. 윤기 나고 반짝였던 검은 머리카락은 부스스 산발. 옷은 반쯤 흐트러져서 약간의 섹시미를 더하고 있었고 얼굴은…… 넘어질 때 타일에 찌어서…… 제기랄!!! 멍이라는 게 나 있었다, 빌어먹을!!! "이이이이익!! 카민 네 놈∼ 두고보자고!!!" 나는 나스가 공손히 내미는 수건을 받아들며 카민을 향해 외쳤다. 카민은 그런 나를 향해 오른손을 척 들었다. 그러더니 엄지와 중지를 딱, 마찰시키더니 웃으며 웃었다. "칼, 오늘 반찬은 뭘지 궁금하지 않아? 아하, 내일은 또 뭘까? 나스 음식 솜씨 끝내주지?" "……." 카민이 한 말의 뜻을 파악하지 못할 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다. [흐음? 밥을 먹고 싶지 않은가 보구나?] "……빌어먹을." 그 날 저녁은, 아주 맛있는 스테이크였다. 나는 허겁지겁 먹어치웠고, 생각했다. '오늘 청소는 헛된게 아니었구나.' 그러면서 왠지 나는 내가 카민에게 길들여진다는 느낌에 치를 떨었다. * * * * * * * * * * * "카아아아아아아아알∼∼" 굳이 한 글자인 이름을 저렇게 늘여 부를 바에야, 칼레들린이라고 불러주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은가? 예전에도 말했듯이, 마족에게 애칭이라는 것은 욕이 될 수도 있는 거란 말이다. "……왜." 나는 카민을 향해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스테이크 덕분에 배는 불러오고, 몸은 축 늘어지는게 수면을 취한 시간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녀석이 부르니 몸이 경직하는 느낌이다. 이 놈, 설마 이 시간에 또 밥값 운운하며 뭘 시킬 생각은 아니겠지? "자, 설거지 해줘." "뭐야????" 나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카민을 향해 황당의 어조로 되물었다. 다시 카민이 웃었다. "아? 못 들었어? 설거지." 나는 말 없이 카민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카민은 전혀 꿀림 없이 나를 보았다. "헤에, 왜? 해주기 싫어?" 설거지라니. 설거지라 하면…… [로시엔, 뭐해?] [……보지 마십시오.] [……응?] [보기 흉합니다.] [……손에 끼고 있는 거 뭐야?] […….] [……왜 그걸 끼고 설거지를 하는 건데?] [얼마 전부터 손이 좀 거칠어져서…… 말입니다.] 나는 머릿속에 희뿌옇게 떠오르는 추억 한 자락을 생각해내며 머리가 어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당시 로시엔의 손에 곱게 끼워져 있던 그것은…… ……내 생각엔 아마 고무 장갑이 아니었나하고 생각된다. 그 때의 로시엔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그다지 멋있게 느껴지진 않는다. "네녀석이 하면 되잖아." 나는 속으로 화를 꾸욱 누르며 말했다. "설거지를 나보고 하라고?" 카민은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돼, 난 지금부터 할 일이 있단 말이야." 할 일은 무슨 얼어죽을. "……뭔 할 일."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 뭐가 그런 게 있어야? "너…… 나를 무슨 식모처럼 부려먹을 생각인거냐? 나는 이래뵈도 마……" 나는 이래 뵈도 마족이야, 라고 말하려던 나는 흠칫하고 입을 다물었다. 때맞춰, 카민은 내 말을 잘라줬다. "알아 알아, 당신 유명한 집안 사람인 거.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밥값을 해야 하는 거야, 칼. 그런 사소한 것도 모르면 살아남을 수가 없어, 알겠냐?" 카민은 나를 [유명한 집안 사람]이라고 단정짓듯 말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있었다. "……." 그리고 또다시 밥값 운운하는 카민 앞에, 나는 처절하게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저녁, 나는 아주 먼 옛날의 기억…… 로시엔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고무 장갑을 손에 끼고 설거지를 했다. 원래라면 고무 장갑 따위를 끼고 설거지를 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손이 거칠어지면 별로 안 좋을 거야, 칼." 이라는 한마디에 나는 고무 장갑을 덥석 끼고 말았다. ……내 고운 손이 거칠어지면 안되니까 말이다. 제기랄!! 내 이미지를 돌려줘. -------------------------------------------------------------------------------- Back : 2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3 (written by 카르민) Next : 23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1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3385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9th September 2001 15:16:29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2-09-2001 18:19 Line : 116 Read : 1057 [25]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3 -------------------------------------------------------------------------------- -------------------------------------------------------------------------------- Ip address : 61.76.191.6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나는 시달릴 때로 시달렸다. 모든 것은 밥값이라는 미명아래 일어난 처절한 것들. [청소][빨래][설거지] 나는 내 손을 볼 때마다 처절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주부 습진이라던가 하는 것이 걸려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심각한 고민마저 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오늘이야말로 카민 놈을 아작 내고 말리라!!!!!! 나는 결심을 굳히고 침을 꼴딱 삼켰다. 나스가 잠든 지금 시간이야말로 끝내주는 시간이었다. 나는 카민에게 단단히 따지기로 하고 방문을 빼꼼히 열었다. 그러나 방 안에 카민은 있지 않았다. 항상 나는 침대에서, 녀석은 밑에서 자곤 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녀석이 방에 있지 않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하고 있는 카민이다(새나라의 어린이 어쩌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벌써 1시가 넘었는데 자리에 없다니? "……흠, 뭐라도 먹고 있나." 이런 가설 밖에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카민이 얼마나 먹을 것을 밝히는 지 알 수 있지 않은가. 나는 문을 닫고 부엌 쪽으로 향했다. 과연, 희미한 등잔불이 빛나고 있는 가운데 카민이 앉아 있었다. "……뭘 먹고 있는 거냐." 희미하게 타오르는 촛불 아래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서, 조그마한 잔에 무엇인가를 쪼르르 따르고 그것을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 카민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조금 풀린 것이, 무엇인가 이상해 보인다……? "어, 칼." 카민은 조용한 목소리로 슬쩍 손을 들었다. 그리고 손을 까딱까딱,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녀석을 향해 걸어갔다. 녀석은 내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너도 한 잔 할래?" 카민은 내게 잔을 내밀며 웃었다. 한잔? "한 잔은 무슨 얼어죽을. 그거 먹고 너는 속이 차냐?" 나는 음료수를 아주 작은 잔에 따라서 홀짝거리고 있는 카민의 소심함에 기가 막혀서 외쳤다. 카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호오? 칼, 술 세?" "술……?" 나는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술이라니? 그게 뭐지? 내가 모른다는 눈으로 보자, 카민의 눈이 미묘하게 변했다. 나는 왠지 의심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하하핫, 물론이지." 음료수 비슷한 종류의 것이겠지, 뭐. 카민은 재밌다는 눈으로 웃었다. "좋아. 그럼 너도 좀 마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심하게 마시고 있는 카민과는 달리, 나는 그 음료수가 가득 들어있는 병을 들고 채로 마셨다. 벌컥벌컥벌컥. "어, 어?" 놀란 듯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카민을 보니 왠지 통쾌해졌다. 후훗, 너와는 달리 나는 상당히 대범하다 이 말씀이다. 남자 녀석 주제에 그렇게 홀짝거리면서 마시면 맛있냐? "……웁?" 그런데 다 마시고 병을 탁, 하고 내려놓은 순간,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윽?" 부글부글부글. "……우에?" 속이 끓고 있었다. "카, 카, 카, 칼? 괘, 괘, 괜찮냐?" 카민은 당황한 목소리로 내 옆구리를 푹 찌르며 물어왔으나 그런 것에 답해줄 정신이 내겐 남아있지 않았다. "우우우우욱!!" 속이 요동쳤다. 빙글빙글 머리가 도는 가운데, 속에서 무엇인가가 울컥울컥 거리고 있었다. 혼란해지는 정신에 시야는 희미해졌고 입에서는 비죽비죽 웃음이 흘러나왔다. "헤에." 뭐, 뭐냐, 이 멍청하고 바보 틱한 웃음은. 설마 이거 내가 낸 거냐? 아,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헤에, 카민…… 이거 맛있다. 더 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이렇게 말하며 다시 웃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건 분명 내 웃음이고 내 목소리다. 칼레들린, 이게 무슨 추태냐!!! 정신을…… 정신을 차려야…… "……너, 술 약하구나." 카민은 나를 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끄에, 술? ……딸꾹…… 크에…… 맛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입을 두들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다시 헤에∼ 하고 웃었다. 그러자 카민이 나를 향해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칼, 난 너 같은 사람을 몇 번 본 적 있어." "웅?" 크악!! [웅?]이라니!!! 이게 뭐냐!!! 혀가 꼬이고 있다. 아아, 왜 천장은 돌고 있는 거냐. 그리고 카민, 몰랐는데 너 단세포 동물이었냐? 그 짧은 시간 몇 개로 분열을 했네? 그건 그렇고 술이라고 했던가? 머리가 몽롱해지는게 기분이…… 기분이…… "……술 먹으면 한 동안은 엄청 취하다가 갑자기 난동을 피우는 사람 말이야." "으응?" "……그 전에 자는게 낫겠다, 칼."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픈 가운데, 여러 개로 분열된 카민의 오른손 7개가 한꺼번에 들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내 머리위로 직격 했다. 콰아아아앙!!!!!!! "크엑!!!!!!!" 그 비참한 비명소리…… 내 것이 아니었기를 빈다. ---------------------------------------- 깨달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카르민이라는 이름은 원래.. 카민입니다. carmine...말입니다. 이 소설을 심사받을때 보냈던 제 한멜 닉넴이 카르민이라..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버렸는데요;; ...헐헐;; 왜 이런 얘길 하고 있는건지.. 하여튼 오늘은 좀 많이 올릴 생각이었는데.. 이 정도로 해두는게 신상에 좋을 듯.. 어머님께서 나오라고... 쿨럭;; 그럼..;; -------------------------------------------------------------------------------- Back : 2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4 (written by 카르민) Next : 2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2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3385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9th September 2001 15:16:35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3-09-2001 21:24 Line : 274 Read : 897 [26]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4 -------------------------------------------------------------------------------- -------------------------------------------------------------------------------- Ip address : 211.197.189.14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제 6장: 눈물의 이별과 웃음의 이별전야(離別前夜) "크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속이 부글거리는 것이 돌 것 같았다. 그리고…… 머리도 깨질 듯이 아파왔다. 왜 이렇게 속이 아픈 거지? 내가 어제 저녁을 뭘 했었나? "일어났어?" 한참을 쓰린 속을 부여잡고 있는데, 문이 딸깍 열리더니 카민 녀석이 들어왔다. 나는 멍한 눈으로 카민을 보았다. "카민." "어, 어, 어?" 카민은 깜짝 놀란 듯이 어를 몇 번이나 반복하더니 몸을 스스슥 뒤로 가져가며 문에 딱 붙였다. 나는 그런 그를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너 왜 그래?" "……아, 암것도. 속은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카민의 손에는 뭔가가 들려 있었다. 동그란 사발 그릇 안에 물 같은 것이었는데…… 나는 의아하게 물었다. "아니. 이상하게도 속이 안 좋아.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냐?" 내 질문에 카민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나를 보았다. 그리고, 풋, 하고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곧 이어 나온 그의 한마디. "……생각 안나?" "그러니까 뭐가." "……아니, 암것도 아니다. 이거 마셔." 카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그 사발 그릇을 내밀었고 난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고 홀짝홀짝 마셨다. 단 그것은 몸에 흡수되듯이 빨려 들어왔는데 무척이나 편안하게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런데 칼." 내가 행복한 기분을 느끼며 그것을 마시고 있는데, 난데없이 카민이 나를 불렀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혹시… 뒷골은 안아파?"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안 아파." "아, 그래. 너 의외로 돌머리인가 보다." "……???" 나는 카민의 이 밑도 끝도 없는 말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내 표정을 본 카민은 어설프게 웃었다. "하, 하하핫.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런 표정 짓지마." 나는 왠지 그런 그의 말투에 의심이 되었지만 손에 들린 사발에 담긴 물을 먹느라 곧 그 의구심을 포기했다. 후루룩 후루룩. ……속이 따뜻해지는군. * * * * * * * * * * * * * * * * "칼 오빠, 장작 패주세요." "……." 카민은 나에게 많은 것을 시켰었다. 청소, 빨래, 설거지. 그래도 그 때마다 옆에서 '그러지 마, 오빠' 라며 말리는 나스가 있기에 그나마 서러움을 참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칼 오빠, 응? 장작 패주세요∼" 너까지 이러기냐, 나스!! 장작이라니! 장작이라니이이이이!!! 난 마족이란 말이다! 마족! 마족! 그런데 마족인 내게 장작을 패라니! 이런 드워프 드래곤 잡아먹는 소리가 어딨단 말이냐! 그것도 전혀, 요만큼도, 심지어 눈꼽 만큼도 찔리지 않는지 밝고 순수한 미소를 얼굴 한 가득 머금고 저렇게! "카민한테 시켜." 나는 되도록 차갑게 말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 어린 인간 소녀는 내 차가운 말투 쯤은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대단한 신경의 소유자였다. "안돼요. 카민 오빠는 지금 청소 중이잖아요! 그리고 카민 오빠는 팔 힘이 약해서 장작을 잘 못 팬단 말이예요. 칼 오빠는 카민 오빠의 그 가느다란 팔도 못 봤어요? 카민 오빠가 얼마나 연약한데!" 나스는 또박또박 한자씩 끊어서 자신의 의사를 내게 전달하려 했으나, 나로서는 정말 콧방귀가 절로 나올만한 내용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내가 카민을 처음 만났을 때, 카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몇몇 녀석들과 아주 신나게(?)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카민이 보여준 검술을 미뤄볼 때 그녀석은 연약하기는커녕 무지막지하게 힘이 셀 것이 틀림없다. 아니, 대체 그렇게 잘 싸우는 놈의 어디가 연약하다는 거지? 게다가…… 그렇게 많이도 먹는 놈이 연약하다면 대체 연약하지 않을 놈이 어딨단 말인가? 그녀석은 먹은 것이 모두 어디론가 증발이라도 한단 말인가?(물론 비쩍 마른 그 놈을 볼 때는 어디론가 증발해버린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아무리 허약해빠진 놈이라 해도 카민 정도로만 영양을 섭취하면 몇 일 안가 힘을 주체못해서 바위라도 집어던질 수 있겠다. "웃기지마. 카민이 연약해?" 나는 진심이 담긴 말을 던졌다. 하지만 나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럼요!" "……말도 안 돼." "뭐가 말이 안돼요? 우리 카민 오빠가 얼마나 연약한데! 카민 오빠는 내가 안 지켜주면 당장 그 다음날에라도 다칠 사람이란 말이예요!" 헤? 네가 안 지켜주면? 차암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꽤나 고수처럼 보이던 놈들을 짚단처럼 휙휙 베어버리던 놈을 지켜준다는 녀석이 이렇게 어린 소녀라?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카민이 정말 연약하다고 생각 하냐? 너 같은 꼬마가 지켜줘야 할 정도로?" 난 내 긴 검을 머리카락을 살짝 뒤로 넘기며 말했다. 나스의 볼이 뾰루퉁 해졌다. "흥! 그럼요! 내가 없으면 누가 카민 오빠한테 밥을 해주죠? 내가 없으면 누가 카민 오빠 옷을 만들어주고, 다려줘요? 내가 없으면 누가 종종 다쳐오는 카민 오빠를 치료해주죠? 내가 없으면 누가 카민 오빠랑 놀아주냔 말이예요! 내가 없으면 누가 카민 오빠랑 얘기를 해주죠? 내가 없으면…… 내가 없으면…… 카민 오빠는……" 어, 어라? 나는 깜짝 놀랐다. 무척 흥분한 듯, '내가 없으면' 이라는 말로 시작해 숨도 쉬지 않고 얘기를 하던 나스가 갑자기 숨소리를 낮추더니 고개를 푹 숙여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나스와 카민, 두 남매가 살기에 적당한 통나무집의 나무로 된 바닥에 작은 물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슬보다 작고 반짝이는, 그리고 굉장히 투명한…… 찍어서 맛을 본다면 보통의 물보다 훨씬 짤 것이 틀림없는…… 눈물. "나스?" "내가 없으면…… 내, 내가 없으면…… 우아아아아앙∼∼" 나는 정말 황당했다. 대체 왜 이 눈앞의 꼬마가 우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거니와, 어떻게 하면 잘 얘기하다가 갑자기 표정이 확 바뀌며 눈물을 터뜨릴 수 있는건지 신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내 밥줄이 되고 있는 이 소녀가 울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야, 야? 왜 울어? 울지마!" "으아아아아앙∼ 카민 오빠∼" 나는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하는 나스를 멍한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나스는 꼼짝 않고 앉아서 울기만 했다. 난 하는 수 없이 묵묵히 팔짱을 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실에 놓여있는 흔들의자에 앉았다. 나는 그 작은 꼬마가 우는 모습에서 시선을 돌렸다. 창 밖을 보았다. 체이드 숲, 아니 이 빌어먹을 밀림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흑……" 조금씩 나스의 울먹임이 줄어들었다. 난 그제서야 시선을 돌려 나스를 보았다. 작은 꼬마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왜 갑자기 울고 난리야, 짜증나게!" 아마도 보통의 경우에는 우는 아이를 달래줄 것이다. 하지만, 마계에서 생활하는 동안 마족들의 언어생활에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나는 이런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흐……" 나스는 내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자 다시 눈물을 터뜨릴 준비를 했다. 난 어쩔 수 없이 목소리를 낮추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악! 울지맛!" 물론 말의 내용은 목소리와 상관없다. "……장작 패줄게. 장작 패준다고. 이제 됐지? 그러니까 울지마! 조그만 게 징징대고 있어, 열 받게……" 전혀 다정하지 못한 말을 내뱉으며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스가 약간 당황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난 신경 쓰지 않았다. "……칼 오빠." 주섬주섬 도끼를 찾는 나를 뒤에서 나스가 불렀다. 난 드디어 찾은 도끼를 어깨에 둘렀다. 빌어먹을, 도끼를 어깨에 둘러야한다는 것도 알게 되다니! 아니, 그것보다도 마족이 도끼를 들다니! 이건 마족 전대미문의 황당한 사건이 틀림없다. "왜?" 속으로는 지금 상황에 저주를 퍼부으면서도 나는 나스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서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에는 약간의 짜증이 묻어 있었지만. "칼 오빠…… 있잖아요, 카민 오빠요…… 못가게 해요." "……?" 난 갑작스럽게 나온 나스의 말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나 나스는 그런 나의 반응에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을 뱉어냈다. "카민 오빠는 칼 오빠한테 굉장히 잘해주잖아요. 카민 오빠는 칼 오빠가 많이 마음에 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칼 오빠가 우리 카민 오빠 못 가게 해줘요, 알겠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나스를 다시 보았다. 나스는 다시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나스는 표정을 풀었다. 나는 뒤돌아서 문을 열었다. 빌어먹을, 이집 남매는 어째서 남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지껄이는 거야! 그게 특기라도 된다는 건가? * * * * * * * * * * * * * * * * * * * 퍽!! 쫙. 나스와 카민의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장작을 잔뜩 쌓아 놓은 공간과, 장작을 팰만한 조금은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장작을 팼다. 한 번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나무들은 양옆으로 요란한 소리와 함께 튀어 올랐다. 그런데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난데없이 뒷골이 당기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닌가. 나는 놀라서 한참을 도끼를 휘두르다말고 그것을 놓았다. 아무래도 피곤이 누적되어서 뒷골이 당기는 모양이다. 게다가 머리도 조금…… 어지러운 게 감각이 좀 무디어진 느낌이다. "빌∼어먹을." 그런데 내가 왜 이따위 걸 해야 한단 말이야? 밥 얻어먹는 처지라 해야하는 거라고 말한다면 뭐라고 대꾸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마족이란 말이다.(아, 실수. 난 마족이 아니라 반마족이지.) 나는 도끼를 내려놓고 바닥에 길게 드러누웠다. 숲 전체를 감싸고 있는 푹신한 풀의 감촉이 느껴졌다. 하늘 위로 구름이 제멋대로 흩날리듯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날고 있는 듯한 착각에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이에드와 로시엔의 모습, 세이아나의 모습이 문득 눈앞을 스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조금 짜증나는 얼굴도 살짝 스쳐지나갔다. 라이메데스놈의 모습이었다. "쳇, 나도 마계가 그립긴 하나보군. 그 놈까지 생각이 나다니." 크게 기지개를 켰다. 어깨에서 부드드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나 좀 그만 부려먹어, 카민놈. 이렇게 어깨에서 뼈 소리까지 나잖아." 나는 조그맣게 투덜거린 다음 어깨를 투닥투닥 두드렸다. "오오, 시원하…… 무슨 영감 같군." [시원하다]라고 말하려다 나는 문득 나 자신에 대한 감상을 하곤 고개를 저었다. 내 잘난 이미지가 이렇게까지 망가지다니…… 이건 다 그 남매 때문이다!! 나는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볼까나." 가볍게 발걸음을 움직였다. 장작을 한 무더기 옆구리에 끼고, 도끼는 어깨로 맨 채 나는 흥얼거리며 집을 향해 움직였다. * * * * * * * * * * * * * * * "……무…… 슨?" 잔뜩 장작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 온 나는 입술이 비죽이 들어올려지며 경련하는 것을 느꼈다.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는 손. 옆구리에 끼고 있던 장작은 스르르, 흘러 내려 버렸고 도끼를 쥐고 있던 팔에 힘이 풀려 도끼가 바닥으로 찧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신경 쓰일만큼 이 상황은 여유롭지 못했다. 몸이 가볍게 경련을 일으켰다. 손끝이 정신 없이 떨려왔고,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카민? 나스……?" 바로 방금 전에 도끼를 들고나섰던 카민과 나스의 작고 아담한 오두막집. 환하게 웃고 있던 나스와 그런 나스 옆에서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던 카민. 모든 기억의 파편이 뒤엉킨 그 자리에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변해 있었다. 조그마한 화초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던 집 앞뜰은 무법자가 짓밟은 흔적이 역력하게 들어나 있었다. 아담한 오두막집의 작은 앞문은 뜯겨 나가 있었다. 푸른 물기가 묻어 있던 자리에, 역한 피비린내가 번지고 있다. 붉게, 점점이… 꽃 잎 위로 떨어진 피. 혈향(血香). 나는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얼어붙어 있다 한참만에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나는 급히 집 안으로 뛰어 들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일까? 뭐야? 뭐야? 뭐야?? "카민! 대답해!! 나스―!!" 집 바깥보다, 뛰어 들어간 집 안의 상황은 더더욱 심각했다. 거실 한 구석에서 조용히 흔들거리던, 나스가 앉아서 졸곤 하던, 그리고 아까 전에 내가 앉았었던 그 흔들의자는 부서진 채로 바닥 위를 구르고 있었다. 잘 개어져 있던 옷가지는 엉망진창으로 찢어져 있었고 집 안 구석구석 멀쩡한 곳이라곤 없었다. 혈투라도 벌어졌는지 피는 사방으로 번져 있었고, 비릿한 향은 코끝을 심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카민!!!!" 머리가 복잡해져 오기 시작했다. 내가 장작을 패러 나간 1시간…… 그 시간 동안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단 말인가? 이 정도로 집이 엉망진창이 될 기운이라면 당연히 나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뭔가? 그 짧은 시간, 내 감각조차 피해가면서 누군가가 침입했단 말이야? 이상해, 머리가 어지럽다. 아침부터 좋지 않았던 속이 다시 울컥거린다. 이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지러운 머릿속 때문에, 내 감각이 정말로 많이 무디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카민!!!" 나는 카민의 이름을 부르며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막 뛰는 찰나…… 잘끈. 나는 이상한 감촉이 느껴지는 것을 깨닫고 밑을 보았다. 시체! 내 발밑에 밟힌 것은 검은 옷을 차려입은 한 구의 시체였다. 나는 피가 얼어붙는 듯한 느낌에 떨었다. 군데군데 다른 시체가 눈에 띄었다. 오른쪽 벽에는 입 속에서 피를 게워내며 던져지듯이 걸쳐진 시체가 있었다. 의자 위로 엎어진 채로 산발이 된 머리카락에 피를 매단 시체가 있었다. 나는 정신 없이 달려가 그 시체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칼에 복부를 꿰뚫린 모습으로, 입과 코에서 피를 쏟으면서 시체는 온 구석구석에 퍼져 있었다. 나는 다시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기 시작했다. 부디 이 난장판 속에서…… 제발 그들의, 카민과 나스의 목숨만은 무사하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면서. 이 시체 속에 제발…… 카민과 나스의 얼굴은 없기를 빌면서. "나스! 대답 해 봐!!" 문득 머릿속을 짓눌러 오는 것이 있었다. 그들 남매를 처음 만났을 때, 그 때의 그 녀석들. 카민을 공격해왔던 그 녀석들. 그 녀석들일까? 정체는 모르지만 그녀석들이…… 그녀석들이? 나는 핏방울의 점점 더 커지고, 혈향이 점점 더 짙어지는 안 쪽 방으로 달렸다.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그리고, 보았다. "……이봐? …… 카민? 하하하핫…… 카민!!!!"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스가 얼마 전에 걸어 놓았던 하얀 꽃 화관의 꽃 몇 송이는 피를 머금어 새빨개져 있었다. 가구 사이사이로 튄 피의 자국과 찢겨져 나간 인간의 살점. 그리고…… 방 한구석에 처박히듯 구겨진 모습의 카민이 있었다. 기괴한 모양으로 팔이 꺾여진 카민이 축 늘어진 모습으로. 원래가 하얗던 카민의 피부는 더더욱 새하얘져 있었다. 창백하다못해…… 파리한 안색. 붉디붉은 머리카락이 얼굴 위로 흐트러지듯 내려와 있었다. 그 머리카락빛과 동일하기에 잘 표시는 나지 않지만…… 그의 머리카락 틈 사이사이로 엉켜 붙은 것은 분명 피였다. "카민……, 이봐, 눈 좀 떠봐. 이봐.…… 이봐!! 무슨 일이야!" 나는 손을 뻗어 늘어져 있는 녀석을 정신 없이 흔들었다. 힘없이 감겨진 녀석의 눈동자……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파 왔다. 말 할 수 없이 머리가 혼미해져왔고 미칠 듯한 파동이 몸을 흔들었다. "카민!!!!!! 제기랄!!! 눈뜨란 말이다, 이 자식아!!!!" -------------------------------------------------------------------------------- Back : 2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5 (written by 카르민) Next : 2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3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3386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9th September 2001 15:16:41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3-09-2001 21:25 Line : 326 Read : 902 [27]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5 -------------------------------------------------------------------------------- 관능적이고 우아한 향기 - 버버리 샤워젤 - 22,000 원 -------------------------------------------------------------------------------- Ip address : 211.197.189.14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마족이라면 이 정도 상처는 괜찮다. 어깨에도, 복부에도, 그리고 발목에도 박혀 있는 단검에서 정신 없이 흘러내리는 피. 마족이라면……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다. 자체 치유력에 의해서 몇 일이면 가뿐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전에 내가 그랬듯이. 하지만 인간은 달라. 인간은 다르다. 사소한 상처만으로도 쉽게 죽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한심한 존재가 인간이다. 그런 한심한 존재가 인간이라고!!! "……쿨럭… 칼?" 나는 카민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심장이 옥죄어 오는 것을 느끼며 더더욱 거세게 녀석을 흔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카민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저, 정신이 든 거냐? 안 죽은 거냐?" 카민의 새하얀 안색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녀석의 상처는 무척이나 심했다. 카민의 눈은 막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나, 나스가…… 나스가……" 녀석이 그렇게 한마디하더니 그대로 내 팔 안으로 쓰러져 내렸다. 그 때였다. 뭔가 묵직한 것이 카민의 바로 뒤에서 느껴져 온 것은. 나는 그 뒤쪽으로 천천히 손을 갖다댔다. "……나스?" 무너지듯 쓰러진 카민이 보호하듯 뒤쪽으로 감싸고 있던 것은…… 카민 못지 않게 상처 입은 여리고 작은 소녀였다. * * * * * * * * 미칠 것 같은. 이대로……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은. "……일어나." 제발, 일어나. 카민의 몸 구석구석에 박혀 있던 단검을 모조리 뽑아내고, 나스의 온 몸에 있던 지독한 타박상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치료를 했다. 카민과 나스는 나란히 침대에 누운 채로, 그렇게 있었고 나는 멍하게 녀석들의 옆을 지켜야만 했다. "일어나, 이 빌어먹을 자식아!!!" 나는 카민을 향해 윽박질렀다. 가슴이 매캐해져왔다. "제기랄!! 나스!! 배고파 죽겠어, 배고파 죽겠다고!!! 어서 일어나란 말이야!!!" 반대로 고개를 돌려 나스를 향해 외쳤다. 거친 숨을 뿜어내고 있는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의 안색은 무섭도록 창백했다. 지금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그런…… "……칼." 꿈틀. "……칼."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던 그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오자 나는 무섭게 고개를 들었다. 오른쪽 침대에서 나지막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나는 정신 없이 그 쪽으로 무릎을 이끌었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맑아졌다. "카민? 정신이드냐? 카민?" "……나…… 스는?" 카민의 눈이 힘겹게 떠지더니 그의 입술이 띄엄띄엄 말을 뱉어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후우후우…… 흐읍…… 으윽." 카민은 숨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온 몸에 감겨 있는 붕대 속에서 빛나는 것은 카민빛의 눈동자뿐. 녀석은 누운 채로, 숨을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나스는…… 괜찮……아?" "……아마도."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라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 어리디 어린 소녀가, 온 몸에 지독한 타박상을 입고 지금은 새하얗게 몸이 늘어진 채 네 옆에 누워있어…… 라는 말 따위는 할 수 없었다. 카민의 눈은 너무나도 애처로워 보였다. "어디…… 있어?"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버거워 보인다. 녀석은 내게 간절한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나는 살짝 손가락을 들어 나스를 가리켰다. 순간 녀석의 동공이 엄청나게 확대되었다가 살짝 축소되었다. "……비, 빌어먹을. 빌어먹을…… 으흑……" 카민은 누워있는 나스를 보더니 대뜸 눈물을 흘렸다. ……그런 카민이 완전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녀석이 쓰러진지 7일이 지난 후였다. "나스……. 일어나." 카민은 인형이었다. "일어나, 나스." 반복되는 말만을 하면서, 오로지 나스의 손목만을 부여잡고 있다.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카민의 붉은 눈은 이미 초점이 없어진 상태. 멍하니 뚫린 듯한 동공 사이로 흐르는 것은 그저 눈물. 산발한, 아직도 피가 엉켜 붙어 있는 그 머리카락. "……내가 잘못했어, 나스. 지켜주려고 했는데…… 우흑, 나 때문이야…… 으흑……" 하얀 시트 위에 아직도 파리한 채로 나스가 누워 있었다. 그 날로부터 10여일이 지났다. 하지만, 곧 정신이 들고 몇 일 후엔 침대 위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카민과는 달리(카민의 회복력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빨랐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놀라웠다.)나스는 눈을 뜰 줄을 몰랐다. 그런 나스를 보면서 카민은 멍하게 중얼거리기만 했다. "나스. 일어나." "일어나, 나스." "제발……" 입술이 악 물어졌다. 내가 없는 동안, 싸늘한 시체가 되 버린 그 정체 모를 무리들이 카민과 나스를 습격한 모양이었다. 카민은 나스를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그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카민의 칼에 맞아 죽은 시체 수는 모두 8개. 8:1의 싸움이었다. 나스를 지켜면서 싸워야 했기에 분명히 힘들었을테고, 카민은 온 몸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나스 역시. "……칼, 미안해." 한참 생각하고 있던 나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녀석의 말에 놀랐다. 녀석은 나스의 손을 부여잡은 채로, 나는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궁금할테지? 무슨 일인지…… 나스가 왜 이 지경이 됐는지. 이 집은 왜 이렇게 됐는지. 그 시체는 무엇인지. 네가 집을 비운 그 짧은 시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자들은 뭔지. 대체…… 왜…… 이렇게 됐는지를." 생기라곤 조금도 없는 목소리. "아니." 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카민은 순간 놀란 듯, 등을 곧게 폈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돼." 카민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다시 낮게 흐느꼈다. 녀석의 갸녀린 어깨가 무섭게 떨렸다. * * * * * * * * * * * * * * 스슥. 빌어먹을 놈의 그 침입자들은 끝도 없이 집으로 몰려들었다. 정체도 모를 그 놈들은, 카민과 나스의 그 집으로 끝도 없이…… 나는 베고, 또 베었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납득할 수 없었다. 바로 몇 일전에 만난 인간이다. 인간이다. 그런데…… 왜 나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렇게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거지? 웃기지도 않는군.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상관없다. 제기랄!! 건드리면 다 죽여버릴 줄 알아. "네 놈은 왠 놈이냐!! 1026호는 어디 갔지?!" 1026호…… 카민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걸, 나는 기억해낼 수 있었다. 검이 반짝였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침입자들에 맞서, 오늘 해가 지면 내일, 내일 해가 지면 또 그 다음날…… 지치지도 않고 밀려드는 침입자들에 맞서, 나는 카민과 나스의 앞에 섰다. 정신을 잃은 나스와 눈을 떴지만 정신은 저 먼 곳을 헤매고 있는 카민의 앞에 나는 그렇게 아이에드의 검을 들고 서 있었다. 그렇게 그들의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피범벅이 된 42구의 시체 앞에 서 있었다. * * * * * * * * * * * * * * * * "칼." 카민이 나를 부른 것은, 로시엔이 정성 들여 만든 내 검은 정장이 피로 엉망진창이 되 버린 그 때였다. 시체 썩은 냄새가 너무도 심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진 시점에서 그것을 불태우기 시작한 내 옆으로, 아직도 혼미한 눈동자의 카민이 다가왔다. 녀석은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깨어났어." "뭐?" 갑작스러운 그 말에 놀라서 내가 반문했다. "나스가 깨어났어.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었어. 이제 괜찮을 거야." 나는 고개를 돌렸다. 카민의 입가에 걸려 있어야 하는 것은 웃음이어야 마땅할 것이다. 분명히 웃음이 걸려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 가야겠어." 눈물이다. 웃음이 아니다. 카민의 눈동자 가득 차 오른 것은…… 그래서 볼을 타고 동그랗게 떨어지는 그것은. 눈물이다. "……나스과 헤어져야 할때가 됐어, 칼." 톡톡, 떨어지는 눈물이 땅을 두드렸다. 사정을 모르는 나지만, 가슴이 에이는 듯 했다. 녀석은 그 상태로 웃었다. "여기서 7시간 정도 내려가면…… 이 숲에 있는 유일한 마을이 있어. 그 마을에…… 예전부터 나스를 양녀로 삼고 싶어했던 라데스 가족이 있어. 그래, 거기에 나스를 맡겨야겠어. 그게 제일 좋을 것 같아. 그 집이라면 상처 입은 나스를…… 잘 돌봐주겠지." "……무슨 말을 하는거냐, 카민." 나는 정신 없이 자신의 말을 뱉어내고 있는 카민에게 말했다. 카민은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칼." 카민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웃었다. "……나와 있으면 계속 이런 일이 일어날거야. 나스는 또 다치겠지. 아니면…… 죽을지도 몰라. 그래,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는 카민의 눈동자에 다시 눈물이 어렸다. 녀석은 조용히 내 곁에서 멀어졌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이 서 있었다. [카민 오빠 못 가게 해요. 카민 오빠는 칼 오빠한테 굉장히 잘해주잖아요. 그러니까 칼 오빠가 우리 카민 오빠 못 가게 해줘요, 알겠죠?] 나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앵앵 거렸다. 나스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카민이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자신을 놔두고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상황이 종합되고 있었다. 누군가…… 정체를 모를 무리가 카민을 노리고 있다. 카민은 그들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나스는 카민과 있으면 위험해진다. 그래서…… 카민은 예전부터 나스를 양녀로 삼고 싶어했던 집에 나스를 맡기고…… 어디론가 떠나려 한다 이건가? "……빌어먹을." 날이 밝자 카민은 침대에 누운 나스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그대로 업었다. 그리고 말 없이 숲 바깥쪽을 향해 걸어나갔다. 나는 그런 카민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나스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안색은 여전히 파리했지만 저번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카민에게 말했다. "나스 이리줘라. 너 아직 몸이 낫지 않았어." "아니…… 마지막이야." 한마디했을 뿐이지만 그 속에는 많은 말을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나스를 업는 것…… 마지막이야. 내가 하고 싶어.] 숲 속의 향기가 나와 카민을 감싸고 돌았다. 카민은 말없이 걷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이야, 칼." 카민쪽으로 내 시선이 향했다. "……아주 많은 사람들로부터 쫓기고 있어. 내 죄가 커서 그럴까…… 아무리 도망가도 도망가도 끝까지 쫓아와 내 발목을 잡지." 나직하게 뱉어내는 녀석의 말에는 너무도 기운이 없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스를 만난 것은 내가 한참 쫓기고 있던 그 때…… 부모한테 버려져서 울고 있던 꼬마의 모습을…… 옛날의 나와 너무 닮은 그 모습을… 나는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었어……나는 인간이라곤 거의 살지 않는…… 체이드 숲 깊숙한 곳으로 나스를…… 데리고 와서…… 나스가 커서 언젠가 누군가와 결혼하기 전까지……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 말하는 중간 중간 목소리는 끊어졌다. 녀석의 입술이 깊이 물어졌다. "……하지만 다 틀렸다. 나스와 함께 했던 3년 간의 행복은 이걸로 끝이야. 그녀석들은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나를 따라 올 거야. 하지만 내가 없어진다면 더 이상 나스를 건드리진 않겠지. 그걸로 됐어…… 나스는 진작 놔줘야 했다. 나스를…… 받아드리고 싶다는 집이 생겼던 그 시점에, 그 때…… 그때 놔줘야 했어." "……어디로 갈 거냐?" 나는 나스를 업은 채로, 비틀거리고 있는 카민에게 물었다. 카민은 웃었다. "사람이 많은 곳으로…… 최대한 많은 곳으로. 그래서 나를 찾기 어렵도록. 그래, 수도…… 이카루의 수도가 좋겠군. 수도로 가야겠어. ……수도로." 자신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린 카민은 나를 보았다. "……너는 어쩔 거야? 저번에도 말했지만…… 자살은 절대로 안 돼. 목적지 없이 체이드 숲에 들어온다는 것의 의미가…… 자살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 당신에게 힘든 일이 많았겠지만…… 나도 살고 있어. 당신도 죽지마." "자……살?" 나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핫 하고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랬던 것인가. 이 남매는 내가…… 자살할 거라고 생각했나보군. 그래서 그렇게 자신의 집에 묵으라고 강요하고, 쿡쿡. 그랬군. 역시 인간들은 자기 멋대로 결론 내리기를 좋아한다니까. 그래도 싫지 않은 것은 왜일까. 그런 오해가 없었다면…… 나는 카민과도, 나스와도 시간을 공유할 수 없었겠지. "그래, 자살은 안돼." "……안할거다." 카민이 웃었다. 내 눈을 바라보며, 녀석이 물었다. "그럼, 이제 뭘할거야? 당신…… 유명한 일족인 것 같은데…… 집으로 돌아갈건가?" 아직도 내가 유명한 가문의 일족이라고 생각하다니…… 너란 녀석은. "글세." 생각해둔 것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침묵 속에서 나와 카민은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걷자 자그마한 집 몇채가 모여둔 마을이 보였다. 나는 그 마을이 보이자 멈춰 섰다. 나스와 카민의 이별을, 그것도 한쪽이 잠든 채로 이루어질 그 일방적인 이별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남아있겠다는 표시를 했고 카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을 쪽으로 향했다. 나는 마을 근처 어귀에 있는 나무에 기대앉은 채로 카민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어쩔거냐]라……" 각성을 하기까지, 카민과 나스의 집에 있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돼버렸다. 나스와 카민은 헤어진다. 그리고 카민은 사람이 많은 [수도]로 떠난단다. "어쩔까……" 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 * * * * * * * * * * * * * * * * * 그림자가 어렸다. 카민이었다. 카민의 어깨에는 무엇인가가 잔뜩 들려져 있었다. "……떠난더니 이것저것 주더군." 카민은 물어보지도 않은 것을 말하면서 다시 힘없이 웃었다. "여행 준비를 따로 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다. 그 집엔 이제 가고 싶지 않거든." 씁쓸한 웃음. 바람이 불었다. …… 숲에서 부는 바람이라 차고 시원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살결에 이는 바람에 [아프다]는 느낌이 드는 거지. 카민의 저 표정처럼. 눈물자국이 붙어있는 저 표정처럼. "그럼…… 잘 있어, 칼. 당신은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야.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쫓기는 몸이 아닐 때 말이야.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 나는 침묵했다. 카민은 천천히 돌아섰다. 나는 카민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보고 있었다. "카민!!!" 막 카민의 잔영조차 투명해지려할때, 내 입에서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거의 무의식 적인 외침이었다.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카민이 돌아보았다. "나는 꽤나 강한 놈이다." 마족의 관점에서 말고, 인간의 관점에선. 뱉어놓고 나니 조금 쑥스럽긴 하지만……. 카민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날 고용해라." 카민은 더더욱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인간들의 삶]이라는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용병]이란 것에 대해서. "……너를 쫓아오는 놈한테서 지켜줄 테니까, 날 고용하라 이 말이다!" 순간, 카민의 눈에 떠오른 그 당황함이란. "뭐……?" 나는 말 없이 일어섰다. 그리고 뚜벅뚜벅, 녀석을 향해 걸어갔다. 녀석의 눈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씨익 웃었다. 내 미소를 멍하게 보고 있던 카민이 나를 따라 웃어준 것은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카민은 한참을 멍하게 서 있다가, 몇 분이 지났을 때야 간신히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우리…… 친구인건가?" 카민이 물었다. "아마도." 마족에게 인간 친구란 것은 필요없다. 하지만…… 인간 칼레들린에게는…… 친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런 친구가. 나는 카민의 손을 꽉 쥐었다. "헤헤헤. 그래, 고용비용은 얼마지, 용병씨?" 카민의 눈물자국 위로 환한 웃음이 머금어졌다. 나는 깊게 웃었다. "300만 골드하고 숙식비 모두." "에에에에에에엑!!???" 카민은 기겁하며 악수하고 있던 손을 탁, 하고 놓았고 나는 웃었다. "어허? 나같이 잘생기고 강한 용병을 고용하는데 그것도 못 주겠다 이거냐?" "……고용 안 하면 안되냐?" 웃음소리가 숲 안으로 넓게, 넓게 퍼져 나갔다. -------------------------------- -_-;;; 감상... 비평..... 환영.... 입니다.... -------------------------------------------------------------------------------- Back : 2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6 (written by 카르민) Next : 2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4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3386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9th September 2001 15:16:53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4-09-2001 19:04 Line : 297 Read : 817 [28]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6 -------------------------------------------------------------------------------- -------------------------------------------------------------------------------- Ip address : 61.76.191.19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제 7장: 습격. "히야∼ 날씨 한 번 죽여주는군." 카민이 감탄사를 내질렀다. "뭐가 좋다는 거냐?" 나는 반박했다. 따뜻한 태양빛하며, 눈부신 햇살, 약간 부는 바람에, 아침에 내린 이슬 때문에 물에 젖은 조그마한 잎사귀들 사이에서 나는 향. 이 모든 것들을 총칭하면 한마디로…… 짜·증·난·다· "뭐가 그렇게 싫다는 거야?" 제법 건방지게 두 손을 깍지껴 뒤로 넘기며 묻는 그녀석을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바보 녀석은 내가 [반마족]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 멍청이 같은 녀석! 아무렴 마족인 내가 이런 날씨를 즐길 거라고 생각 하냐? 뭐, 아이에드 같은 특이한 마족 놈은 이런 날씨를 좋아하지만. "그냥 싫어."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붉은 빛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다. 카민. 여자라고 믿을 만큼 곱상한 얼굴 때문에 여러 번 봉변당할 경력이 있을 것 같은 이녀석을 만난지는 겨우 두 달이 조금 넘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일이 있었다. 나스와 헤어지고 난 몇 일 간, 카민은 정말이지 정신이 없던 모습이었지만 몇 일 후엔 제정신을 회복했고 곧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여줬다. 뭐, 가끔 쓸쓸한 표정을 짓곤 하지만. 저 바보놈 한테는 웃는 표정이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우아암∼ 졸려." 카민이 기지개를 크게 켜더니 눈을 부비부비 부벼댔다. "잠 타령은 사절하겠어. 귀찮은 꼬마처럼 투정부리지마." 나는 날카롭게 말했고 나의 퉁명스러운 말에 카민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눈가에 맺힌 졸음의 흔적을 쫓아내지는 못했다. "흐음, 그러고 보니 칼? 너하고 만난 후로 난 네 얘기를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넌 뭐하는 인간이냐? 꽤나 실력 있는 마법사라는건 저번에 확인했고……" 카민이 발을 떼며 물었다. 우지끈, 내 발 밑에 있던 나무 조각이 부서지는 것을 보면서도 카민은 태연자약하게 말을 재촉했다. 이봐이봐, 아직도 모르겠어? 나는 인간이 아니라고. "……궁금하냐?" "그래." "정말로 알고 싶은 거냐?" "응." 카민이 빙글거렸다. 나는 표정을 싹 바꾸고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정말로? 아주 많이 궁금해? 꼭 알아야겠어? 꼭 알아야 된다면 얘기해 주지." 내 말투에는 알면 안 좋을 텐데, 알면 혼날 거야, 알면 후회할걸, 알면 죽어 등등 무수한 협박과 공갈이 들어있었지만 그녀석은 그것을 가볍게 묵살했다. 아마도 이녀석은 눈치가 없든지 바보이든지 그 둘중에 하나임이 틀림없다. "물론 알고 싶지." 카민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생각해보면 나에 대해 궁금한 게 당연할지도. 흐음, 어찌됐든 이 녀석 나의 과거에 대해 듣고 싶은 모양인데? 뭐라고 얘기해줄까? 그 악명 높은 마족의 일원이라고 얘기해 줄까, 아니면 깔끔쟁이 로시엔과 잔소리쟁이 아이에드에게 시달린 이야기를 얘기해줄까, 그것도 아니면……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어느 순간 피식 웃었다. 내가 누구라고 한들 무슨 상관인가. 평생 같이 있을 것도 아니고. "나는 마검사다." 거짓말은 아니잖아? 마족이니까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당연하고, 검도 다룰 줄 아니까 말이야. "헤에!" 카민이 낮게 감탄사를 질렀다. "마검사라! 마검사는 타고나는 능력의 소유자여야 한다던데…… 그런데 마법이랑 검은 누구한테서 배웠어?" 마법은 뭐,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어둠의 속성을 깨워내는 것이니 별로…… 없고. 검은…… "지독한 잔소리쟁이에 바보 같은 놈, 언제나 빙글빙글 웃어대는데다가 집 안에서와 집 바깥에서의 모습이 180도 다른 놈. 느끼한 성격에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다니는 보라색 눈동자에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놈한테서 배웠지." "……참 구체적이군." "그 놈은 성격이 이상해서 날 죽도록 괴롭히기까지 했지!" "흐음, 알만해." 카민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말을 하고 있었기에 난 조금 의아해졌다. "뭐가 알만 하다는 거냐?" 나의 질문에 카민이 빙긋 웃었다. "너 같은 녀석의 성격을 고쳐주려면 당연히 좀 괴롭혀야 됐겠지, 안 그래?" "……." 이녀석의 머리를 베어버릴까? 참아라,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뭐야, 삐진 거야?" "삐진 것 좋아하네." 카민이 내 반응을 곰곰이 살피더니 픽 웃었다. 그는 한참 후에 내 기분이 가라앉을 때를 기다려 말을 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체이드 숲도 벗어난다, 우아∼ 이 숲은 진짜 엄청다니까. 일주일은 걸었는데도 끝이 안나오다니…… 하핫…… 그런데 칼?" "……칼이라고 부르지마." 나는 그나마 유쾌했던 기분이 팍 꺾이는 것을 느끼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나 카민 이 녀석은 역시 엄청나게도 눈치가 없고 바보같은 녀석이었다. "전에 부르라고 했잖아. 남자가 한 입으로 두 말 하기냐?" 나는 카민의 말에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홧김에 숲 속을 굴러다니는 꽤 큰 돌 하나를 걷어찼다. 돌은 엄청난 스피드와 함께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다가 어느지점, 한도를 넘기지 못하고 내 발의 파워를 견디지 못한 채 산산조각 났다. 카민은 으스러진 돌의 파편을 보며 황당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돌을 차서 부순 거야, 지금?" "그냥 찼을 뿐이다." "불만 있으면 말로 해줘." 카민은 한숨쉬듯 말했다. 나는 그의 한숨소리를 들으며 힐끔 주위를 둘러보았다.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왔기 때문이다. 카민은 나의 태도에 의아한 듯 물어왔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녀석의 붉은 머리카락이 앞에 나부꼈다. "……이런." 그렇게 조금 걷는데, 카민이 멈춰서더니 낮게 내뱉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왠지 모를 긴장감이 가득 서린 그 녀석의 하얀 얼굴은 주위를 연신 훑어보고 있었다. 한참만에 나를 올려다본 카민은 서서히 입을 뗐다. "포위 당했어." "뭐?" "…음, 누군지는 모르지만 우리한테 별로 감정이 좋은 것 같진 않아. 살기가 이렇게 진한 걸 보니 말이지. 하하핫, 뭐 그래봤자…… 나한테 감정 있는 녀석들이겠지." 나는 속으로 웃었다. 사실 이 곳에 느껴지는 살기는 처음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난 짐짓 모른 척하며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없는데? 뭐가 있다는 거야?" "……있어. 나는 전직……." 카민은 말을 끝까지 하지 않고 서서히 검을 뽑아들었다. 녀석의 검은, 하얗게 빛나고 있는 한 자루의 단검이었다. 그는 갑자기 검을 들어 자신의 목을 겨냥했고 나는 흠칫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카민은 멈출 기색 없이 자신의 목을 향해 그대로 검을 들이댔다. "뭐하는 거냐!" 나는 그렇게 외치며 카민을 잡으려했다. 그러나 팅, 하는 소리와 함께 카민의 목 언저리에서 튕겨져 나온 흰 실을 보며 나는 몸을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언제 그게 걸린 거지?" 나는 당황하여 소리쳤다. 나 자신도 느끼지 못한 독이 묻은 실을 카민이 정확히 파악하고 끊었다는 데에 대한 상당한 충격도 있었고 그것이 오래 전부터 마치 준비되어 있던 것처럼 걸려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 실은 정확히, 카민의 목에 걸리게끔 맞춰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 카민은 아무 말 없이 끊겨진 실을 놔둔 채 주위를 흘끔 보며 말했다. "……나와. 이런 유치한 장난으로 나를 죽여볼 생각이었다면 그만 포기해." 순간, 수풀 사이로 날렵한 몸 몇 개가 흩어져 내렸다. "흥, 웃기는군." 앙칼진 20대 초반의 여자의 목소리를 선두로 내린 그 여러 명의 그림자를 보고 나는 잠시 당황했다. 하나, 둘…… 크아아∼ 제기랄, 정확히 다섯명이었다. 청년 둘과 소년 하나, 소녀 하나, 그리고 2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여자하나였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1026호, 오랜만이야. 후후훗." 처음에 들렸던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금발을 가볍게 틀어 올린 미인형의 요사스러운 표정의 그녀를 힐끔 본 카민은 나를 보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곤 낮게 말했다. "미안해, 칼." "엥, 뭐가?" 나의 물음에 카민은 곤란한 듯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싸워야겠다." 나는 잠시 그 묵직한 분위기에 당황했다. "…… 도대체 나 하나 때문에 몇 명이 파견된 거지? 카리나 당신까지 있군. 이거 송구스러워 미치겠어. [배신자]를 처단하기 위해서 라지만 이건 좀 많은 인원이 아닌가?" 카민의 목소리가 상대를 향하여 공허하게 울렸다. 금발의 여인은 갑작스레 품속에서 가느다란 검 한 자루를 꺼내더니 카민을 향해 위협적으로 말했다. "귀찮은 것. 나도 여기까지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야. 저번에 파견한 놈들은 네가 다 죽였는지 연락조차 없더군." ……저번에 파견한 놈들이라고하면…… 그건 내가 다 죽인 것 같은데…… 쩝. "그, 그래?" 카민의 어설프게 대꾸하며 나를 보았다. 금발의 여인은 다시 웃었다. "후후후. 상관없어. 어차피 너를 찾아갔던 놈들은 조직 안의 쓰레기. 쓰레기는 언젠가는 처리해야 하는 것이니, 잘됐다고나 할까?" 그녀의 대답에 카민은 인상을 썼다. "쓰레기?" "그럼 쓰레기지. 너보다는 조금 낫지만." 카민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으나 곧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쌀쌀맞게 말했다. "어쨌든 카리나 당신을 만나다니 나도 어지간히 운이 없군." 그 말에 금발의 여인은 픽 웃었다. 분위기로 보건데 그 여자의 이름이 카리나 같았다. 저 둘의 관계따위는 내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분명한건 저 여자가 카민에게 연정을 품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넘쳐흐를 것 같은 살기가…… 죽음이군. 나까지 오싹할 정도라니. "순순히 죽어주시지, 1026호." 카민의 붉은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카리나라는 여자는 그런 카민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더니 청년에게 가벼운 눈짓을 했다. 청년은 로시엔의 그것보다 훨씬 짙은 청빛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정말로 가공할 정도로 엄청났다. 카리나의 말에 청년은 멀찌감치 뒤로 떨어져 나무 위로 몸을 움직였다. 카리나와 그 청년을 제외한 나머지 청년하나와 소년, 소녀가 서서히 거리를 좁히며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쳇, 귀찮아." 나는 그 말과 함께 내 허리춤에서 기다란 검 하나를 뽑아 들었다. 카민은 내가 싸워준다는 것이 의외였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왔다. "칼? 정말 싸우려고?" 나는 그의 말에 귀찮다는 얼굴로 묵묵히 대답했다. "날 이런데 끌어들여 놓고서 하는 말이 그거냐. 내 목숨정도는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라고. 대신 돈 계산은 철저하게!!" 나는 그 말과 함께 뽑혀진 내 은색의 검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순간 꽤 멀리 떨어진 나무 위에 편안히 앉아서 우리를 내려다보던 금발 머리의 여자, 카리나가 몸을 급히 일으키며 놀란 듯이 외쳤다. "그, 그 검은?" 나는 그 의외의 반응에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말했다. "……이거?" 내가 검을 가리키자 카리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애써 지우며 말했다. "어, 어째서 그 검을 네가 가지고 있는 거지?" 나는 그 대답을 위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별로 떠오르는 말이 없던 나는 한참 만에야 힘겹게 대답했다. "내거니까." 순간, 카리나의 얼굴이 망가졌다. "왜 그래, 그 검이 뭔데 그러는 거지?" 어느새 우리를 둘러싼 채 거리를 좁혀드는 3명을 정신 없이 훑어보던 카민은 내 등에 자신의 등을 맞대며 물었다. 나는 픽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누가 준거야." 줬다기보다는…… 급한 마음에 내가 뚬쳐 온거지만. "음." 순간, 날카로운 기염을 토하며 왼쪽에서 소녀가 시퍼런 빛을 띠는 꽤 짧은 창을 든 채로 달려왔다. 나는 그 기척을 느낌과 동시에 나의 검(사실은 이름이 있었던 것 같지만 까먹었다)을 양손으로 감싸쥔 자세로 바로 섰다. 순간 소녀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자세……?" "왜, 멋지냐?" 나는 살짝 몸을 틀며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소녀는 내가 말을 하는 그 틈에 재빠르게 표정을 다시 차갑게 유지한 채 몸을 옮겼고 그녀의 단창과 나의 검이 한 번 맞부딪혔다. 일단 몸을 뒤로 가져간 그녀는 탐색전에 만족한 듯 창을 두 손으로 매만지며 날카로운 말을 남겼다. "정말 엉망이군." "제, 제길 뭐라고!" 생각지도 않은 일격에 나는 화가 난 나머지 검을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소녀는 갑작스러운 나의 스피드에 당황한 듯 창을 재빠르게 앞으로 내밀었다. 검과 창이 마주치기 일보직전, 소녀가 말했다. "자, 자세가……?" 소녀가 당황한 듯 소리쳤다. 나는 씩 웃으며 외쳤다. "깨끗해졌다고?"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녀가 들고 있던 단창(短槍)이 나의 검에 부딪혔다. "큭!" 소녀는 내 검과 부딪히자마자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힘에 의해 멀찌감치 떨어져 나갔고 나는 그녀를 오른손으로 가볍게 밀친 다음, 다음 상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조심해!" 등뒤로 카민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씩 웃었다. 넘어졌던 소녀는 차가운 표정을 유지한 채 묵묵히 일어섰다. 소녀가 일어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옆의 초록머리의 단아한 얼굴을 가진 소년이 앞으로 나서며 허리에서 검 두 개를 꺼내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카민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카민은 갈색 머리의 청년과 한창 눈빛을 마주치며 서로를 탐색하고 있었고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내 앞쪽에 서 있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저런 얇은몸 에서 이런 힘이 나오 는거지?" 일어난 소녀는 당황한 듯이 중얼거리며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잠시 웃었다. 하긴 내 몸이 꽤 마른 편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나는 소녀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둔 채 초록머리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녀의 차가운 표정과는 달리 초록머리의 소년은 빙긋 웃으며 양손에 검을 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너무나도 차갑고 냉혹해서 소녀보다 훨씬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꼬마가 검 들고 설치면 위험해." 난 그 말과 함께 씨익 웃었다. -------------------------------------------------------------------------------- Back : 2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7 (written by 카르민) Next : 2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5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3386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9th September 2001 15:16:58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4-09-2001 19:06 Line : 304 Read : 1686 [29]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7 -------------------------------------------------------------------------------- -------------------------------------------------------------------------------- Ip address : 61.76.191.19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닥쳐." 나의 비웃음과 함께 소년이 양 검을 세운 채 들어왔다. 나의 검과 그의 검이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며 부딪혔다. "제법인데?" 나는 소년을 향해 비웃음 담긴 미소를 흘렸다. 소년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검을 세운 채 그대로 내게 날아들었다. 나는 검을 가볍게 피하며 소년의 어깨를 잡고 뒤로 넘기려 했다. 그러나 그 돌발상황에서 소년은 조금의 당황함도 없이 자신의 어깨를 향하여 검을 움직였고 나는 움찔하며 소년의 허리를 발로 찼다. "컥!" 소년은 바닥에 넘어지며 낮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그는 벌떡 일어섰다. 잠시간 당황한 미소를 흘리던 그는 갑자기 나를 바라보며 또 한번 빙긋 웃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향해 더 진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이봐, 방심하지 마." 그 말과 함께 내 몸이 정반대로 꺾였다. 내가 한 말은 소년이 아닌 나의 빈틈을 노려 공격하려던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린 소녀에게 한 말이었다. 소녀는 내가 자신의 움직임을 눈치챘다는데 대하여 당황한 나머지 흠칫하며 몸을 비켜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나는 왼쪽으로 몸을 살짝 트는 소녀의 유연한 몸놀림에 감탄을 하면서도 나 또한 몸을 틀어 소녀의 어깨에 가볍게 검을 찔러 넣었다. "큭!" 소녀의 어깨에 검이 박힘과 동시에 그녀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나는 찔러 넣었던 검을 부드럽게 뽑아 들었고 순간, 소녀의 어깨에서 붉은 선혈이 솟구쳤다. 소녀는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피가 솟구치는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았고 순간, 나는 뒤에서 살기를 뿜어내는 소년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가볍게 몸을 숙였고 소년의 검은 공기를 베어내며 공중에서 멈추었다. "이런 제길!" 소년은 분한 듯 소리를 질렀으나 소녀에게는 따뜻한 눈빛 한번도 주지 않은 채 나를 향해 다시 검을 날렸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소년의 쌍 검을 막아냈다. 챙! 아까보다도 훨씬 날카로워진 소년의 집중력 탓인지 이번엔 나도 가까스로 소년의 검을 막아냈고 소년은 한 걸음 물러섰다. 내가 몸을 살짝 숙이는 사이 소년이 엄청난 스피드로 달려왔다. 사람이 그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던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몸을 뒤로 눕혔고, 소년의 공중으로 뜬 손에서 검이 뻗쳐 나왔다. 나는 검을 양손으로 잡아 두 개의 쌍검을 동시에 막았다. 가까스로 막긴 했으나 나는 넘어져버렸고, 소년도 갑작스러운 가속도 때문에 그대로 넘어져 버리고 말았다. 소년은 넘어짐과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 봤단 이야기였다. 반면에 나는 소년이 일어남과 동시에 나를 향해 인정사정 없이 검을 휘두르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정신 없이 그의 검을 방어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쌍 검으로 땅에 누워 자신의 공격을 피해 이리저리 꼴사납게 뒹굴고 있는 나를 향해 신나게 검을 휘둘러댔다. 나는 소년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손에 가득 힘을 주어 소년의 검을 쥔 손을 잡았다. 소년은 내 손아귀 힘에 당황했지만 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소년을 내동댕이쳤다. "……컥." 소년은 역시나 땅에 떨어짐과 동시에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나 소년의 입가에는 가느다란 피가 선을 이룬 채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년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소매로 입가를 닦아 내렸지만 아까 내게 받은 충격이 커서인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소년의 목을 향해 검을 댔다. "끝이다." 소년은 쌍 검을 쥐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던지 분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의 목젖에 검을 들이댄 채 빙긋 웃었고 소년은 내 웃음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서 죽여라." 소년은 초록머리칼이 어지럽히고 있는 단아한 얼굴을 든 채 겁먹은 기색 없이 말했다. "좋을 대로." 나는 검을 들어올렸다. 싸늘한 검의 감촉에도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검을 든 손을 소년의 목으로 내리치려던 순간, 나의 등뒤로 싸늘한 촉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싱긋 웃었고 소년의 얼굴이 망가졌다. "제기랄!" 소년의 외침의 뜻을 알았는지 뒤에서 다시 한 번 틈을 노리던 소녀는 풀쩍 내 앞으로 섰다. 아니, 정확히 말해 검을 겨누고 있던 내 앞으로 자신의 창을 들이댔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나는 인상을 쓴 채로 말했다. "귀찮군." 소녀는 얼굴을 덮고 있던 흰 천을 벗은 후였다. 소녀의 얼굴은 소년처럼 단아하진 않은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눈매만은 아름답고도 매서웠다. 나는 소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녀는 내 한숨의 의미를 잘못 받아들였는지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창을 뻗었다. 나는 가볍게 손을 들어올리며 내뱉었다. "노는 건 그만하자고." 소년과 소녀가 움찔했다. 그러나 나는 별로 신 경쓰지 않았다. "……헉." 동시에 낮은 신음소리가 울렸다. 나는 짧게 외쳤다. "그만 꺼져라." 내 검에서 작은 폭팔음과 함께 붉은 잔광이 쏟아져 나온 것은 동시였다. "칼! 괜찮아?"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던 카민이 잠시 몸을 뒤로 움직이며 내게 물었다. 나는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은채 말했다. "괜찮으니까 여기 왔겠지." "그 애들은? 죽이진 않았겠지?" 카민은 재빠르게 내 쪽으로 몸을 옮기며 물어왔다. 힐끗 보니 상당한 난투전이 벌어진 것을 말해주듯 상대도 그렇고 카민도 꽤 지쳐 보였다. 푸른 머리칼의 청년은 매서운 눈초리로 카민을 노려보았지만 카민은 그다지 거기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운이 좋았다면 살았겠지." 그 말에 카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다음 순간 아차, 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는 내 어깨를 툭치며 말했다. "마법을 썼나?"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건 마법이 아니었지만 그런 복잡한 얘기를 해줄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카민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검을 살짝 매만지며 말했다. "끝내고 올테니까 기다려." 그 말과 함께 카민의 몸이 번개처럼 앞으로 튕겨져 올랐다. 나는 약간의 감탄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젠 그만 끝내자!" 카민의 말에 청년은 싸늘한 표정을 유지한채 말했다. "죽어." 순간, 청년의 손에서 검은 빛의 두 개의 투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나는 눈살을 찌푸린채 카민을 향해 외쳤다. "카민, 검기……!" 카민은 그러나 내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겁도 없이 그대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으……!!?" "나도 알고 있으니까 이상한 소리 내지마!!" 달리고 있던 카민이 문득 나를 향해 소리쳤다. 청년의 손에서 피어오르던 검은 그림자가 카민을 향하자 카민이 검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놀랍게도 그의 검에서 한줄기 빛이 토해져 나왔다. 그러나 그 기운은 카민이 만든 검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 그것은 검이 내뿜은 기운이었다. "오우, 마법검?" 나는 약간 감탄하며 그 검을 보았다. 마법검은 청년의 검기가 서린 검을 간단하게 막아냈다. "각오해라!" 카민의 몸이 오른쪽으로 꺾였다. 그것을 예상했다는 듯, 청년의 검도 오른쪽으로 꺾여들어갔다. 그러나 카민의 몸은 순간적인 착시 현상을 일으키듯이 왼쪽으로 꺾였고, 그의 검이 청년의 빈 어깨를 그대로 베어들었다. "……!" 청년은 검이 자신의 어깨를 스치고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방금전 내가 상대했던 소년과는달리 별다른 비명소리 없이 약간 인상을 찌푸린채 뒤로 물러섰다. 카민은 자신의 공격이 어느정도 먹혀 들어간데에 대한 자신감에서인지 긴장이 풀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붉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잠시 빛을 발한다고 생각했을무렵, 그의 몸이 말도 안될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어?" 나는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나의 감각으로도 겨우 잡을수 있을 만큼 카민의 스피드가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미안." 순간적으로 내 귀에 카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 청년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나는 알수 있었다. 다음순간, 어깨를 감싸쥐고 카민의 위치를 파악하려 했던 청년의 뒤로 희미하게 카민의 그림자가 어렸다. 그리고, 카민의 날카로운 단도가 한줄기 흔적을 남기며 청년의 등에 정확히 꽂혔다. "컥!" 카민이 가볍게 검을 뽑고 다시 내게로 몸을 날리자 청년은 등에서 솟구치는 엄청난 양의 피와 함께 비명을 질렀다. 피비린내가 코 끝을 자극했다. 카민의 검에 깊숙이 찔린 탓인지 청년은 힘이 빠져서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빨리 처리 했지?" 카민은 내 앞에 서며 낮고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왠지 모를 아픔이 베어들어가 있었다. 나는 한심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빨리 할 수 있었으면서 왜 빨리 처리를 안했지?" "……응? 그, 그냥." 카민은 변명할 말이 없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그의 붉은 머리칼이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윗쪽으로 옮겼다. 카리나와 흑발 머리의 청년이 인상을 쓴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지지않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카민은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하고 멍청하게 머리를 긁어대고 있었지만 난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카민." 내 부름에 카민이 움찔하며 뒤돌아섰다. 그러다가 내 시선이 그 곳에 박혀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카리나는 내가 맡을게. 넌 다빈을 맡아줘." "다빈?" "저기 검은 머리에 잘생긴 남자……" "왜 내가 저녀석하고 싸워야 되는지 이유를 대보시지." 내 질문에 카민은 상당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내가 둘 다 상대해? 저 사람들 무지 강한데? 거의 최고 실력자란 말이야!" 카민이 자신과 그녀석들을 번갈아가며 가리키면서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흥, 누가 너같은 녀석한테 자살하래? 돈도 받을 거고, 내가 저 여자를 맡아주지." 카민은 나의 말에 상당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금발의 여자, 카리나를 올려다 보았다. 상당히 야한 옷차림의 그녀는 나의 시선과 마주치자마자 요염한 미소를 흘렸다. 나는 잠시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을 느끼며 검집에 넣어놓았던 나의 검을 다시 서서히 꺼내들었다. "어이, 거기 마녀. 어서 내려와서 싸우자고." 나는 카리나를 향해 말했다. 멀리 있었지만 그녀의 눈썹이 꿈틀, 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마녀?" 카리나가 발끈하여 외쳤지만 곧 그녀는 호호호, 하고 기분나쁜 웃음을 흘리며 다빈이라는 흑발머리의 청년의 어깨에 살갑게 손을 올리며 진한 눈매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빈." 카민이 잠시 그리운 듯 이름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의아함을 느꼈으나 그것을 캐물을 시간이 없었기에 얌전히 서 있었다. 그 때, 카리나가 몸을 살짝 일으켰다. "……!" 나는 즉시 검을 바로 잡고 자세를 바로 했다. 카민 또한 자신의 단검을 잡은 채 긴장한 표정으로 다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후후훗." 순간 카리나가 기분 나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다빈을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다빈, 오늘은 그만 가야겠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음." 다빈이란 남자는 별다른 반응 없이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의아함에 눈을 부릅떴다. "뭐라고? 누구 맘대로 그냥 가? 이리 못 와!" 나는 그 말과 함께 재빨리 몸을 공중으로 솟구쳤다. 순간, 카리나가 웃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살풋 돌리며 말했다. "난 '켐 알슈타드'를 가진 너와 싸울만큼 목숨이 많지 않아, 후후훗." "켐…… 알슈타드?" 나는 어디선가 들은 듯한 이름에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다가 결론에 도달한 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검? 켐 알슈타드라고 하는데? 헤? 왜? 갖고 싶어? '아버지'라고 부르면 주지.] [……필요없어.] 그래. 아주 어릴 적, 아이에드가 그렇게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렇다, 이 검의 이름이 켐 알슈타드였다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어! 나는 뭔가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는 것에 대한 감동(?)에 젖었다. 그런데 이 검의 이름을 왜 저녀석이 알고 있는 거지? 나는 그런 생각에 머리가 단숨에 카오스 상태가 되버렸다. 그런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순간, 카리나의 몸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음?" 나는 당황했다. 갑작스럽게 카리나가 사라졌다는 사실보다는 내 눈을 피해 이렇게나 빨리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나의 당황스러움을 비웃기라도 하듯 저 멀리서 카리나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넌 정말 운이 좋아, 카민. 후후, 항상 그랬지." "……."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멀뚱히 카민을 돌아봤다. 카민은 분한 얼굴로 카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뭔가 이상한 느낌에 아직 나무에 있던 다빈을 향해 몸을 움직였으나 카민의 목소리가 나를 저지했다. "그만해, 칼!" "……뭐?" "그냥 보내라고!" 카민이 외쳤다. 나는 당혹스러움에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다빈이란 남자의 몸이 순식간에 점프를 이용한 반동으로 뒷 쪽의 나무로 옮겨졌다. "다음번엔 꼭 죽인다." 뒷 쪽 나무가지에 손을 대고 반쯤 앉은 자세로 안전하게 착지한 다빈이 나즉하게 중얼거리며 카민을 바라보았다. 카민은 안타까움에서인지 분함에서인지 일그러진 얼굴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으나 별다른 말은 없었다. ************************** "……미안." 카민이 나즉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눈동자는 곤란함에 일그러져 있었다. "흐음." 카민은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미안. 아직은…… 얘기를 못하겠어." 카민이 다시 한 번 말했다. 나는 그의 과거에 대해 자세하게 아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다치진 않았나." "응?" 갑작스러운 나의 질문에 카민이 당황한 듯 반문했다. "제길. 다, 다치지 않았냐고 묻잖아."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에 빨개진 채 더듬으며 물었다. 카민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다치지 않았어." 나는 그 말에 휙 뒤를 돌아보았다. 카민이 흠칫했다. 나는 그의 손목을 홱 낚아챘다. 순간, 손목에서 전해지는 고통 때문인지 카민은 얼굴을 찌푸렸다. "……다치지 않았다고?" 나는 카민의 손목을 서서히 풀며 나직이 되물었다. 사실 나는 조금 아까부터 알고 있었다. 카민의 오른쪽 손목이 꽤 깊게 베여 있었다는 걸. "괜찮은데." 카민은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난 치유마법 같은 건 못 해." 카민은 그 말의 뜻을 이해했는지 가뜩이나 마법 때문에 찢겨진 자신의 윗 상의를 가볍게 벗어 던졌다. 그는 자신의 상의를 힐끔 보더니 소매부분을 찢어 자신 있게 천을 상처 부위에 동여매기 시작했다. "어이어이…… 소독 안 해도 되는 거냐?" 나의 질문에 카민은 잠시 움찔했으나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나는 왠지 조금 불안해졌으나 그가 얼굴의 어색한 미소를 자신 있는 표정으로 바꾸는 바람에 별 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저, 저 녀석 말이야…… 왠지 신뢰가 안간단 말이야. 혹시라도 소독도 안된 저 더러운 옷을 상처에 감았다가 곪으면 어쩌려는 거지? ……바보같은 녀석. "엥?" 그 때, 난 왠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배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속이 빈 것 같기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참만에야 그 기분이 뭘 의미하는지 깨달은 난 무거운 표정으로 차분하게 카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걸 나타내는 표시였다. 카민은 웃으며 돌아보다가 나의 살벌한 표정에 움찔하더니 주위를 후다닥 살피곤 내게 물었다. "왜 그래? 또 뭐가 있어?" 난 그의 말에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나 배고파." -------------------------------------------------------------------------------- Back : 30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8 (written by 카르민) Next : 2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6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42607 , Current date and time : Wednesday 3rd October 2001 12:44:23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4-09-2001 19:07 Line : 251 Read : 949 [30]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8 -------------------------------------------------------------------------------- -------------------------------------------------------------------------------- Ip address : 61.76.191.19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왜, 어째서……" 카민은 내 표정을 보더니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나의 날카로운 눈을 피하진 못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내가 이런데서 이런걸 먹어야 하는 거지?" 나는 앞에 놓인 빠짝 말라비틀어진 빵 조각 몇 개와 역시 마른 육포 몇 개, 그리고 물 조금에 인상을 썼다. "먹을거리가 없거든." 정말, 상당히, 무지무지 성의 있는 대답이었기에 나는 더더욱 인상을 구겼다. "먹을 게 왜 없어?" "너무 그렇게 인상 쓰지마. 체이드 숲엔 원래 먹을 게 없다고. 몬스터도 없는데 어디서 먹을 걸 잡아와?" "그래도 잡아와." "……할 수 있으면 네가 잡아와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빵 한조각을 입으로 들이 밀었다. 그리고 난 후부턴 입 속으로 빵을 거의 쑤셔 넣다시피하여 먹었고 카민은 나의 그런 행동을 조금 황당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순전한 내 추측이지만 마치 '왜 음식 투정을 했지?'라고 묻는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카민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 칼, 아까 정말 그 애들 죽지 않았겠지?" 아무리 딱딱한 빵이라도 일단은 다 소화가 되는 나는 말라비틀어진 빵도 나름대로 맛있다는(카민이 들으면 왜 자기를 들볶았냐고 물을 것 같아서 표정으로 나타내진 않았다)생각을 했다. 나는 카민의 질문을 들으며 이번엔 육포에 손을 가져갔다. 빵보다는 덜 딱딱한 육포를 물어뜯어 잘근잘근 씹으며 건성으로 얘기했다. "죽진 않았을걸? 아마 가볍게 튕겨 나갔을거야." 나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카민은 대단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볍게 튕겨 나간 게 어느 정도지?" 나는 그의 질문에 다른 육포를 뜯으며 역시 건성으로 대답했다. "300세리하(1세리하-약 1m) 정도." "뭐, 뭐라고?" 카민은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육포를 뜯고 있는 나를 기가 막히다는 눈초리로 보더니 다시 제자리에 주섬주섬 앉았다. 나는 카민의 그런 반응을 속으로 은근히 즐기며 대답했다. "왜 그래?" "어, 어떻게 인간으로서 300세리하를 '가볍게 튕겨 나갔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거지? 말도 안돼! 그리고 그 정도로 튕겨 나갔다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장담할 수 없잖아!" 난 인간이 아니거든, 이라고 말하면 간단하겠지만 나는 아직은 그것을 밝힐 마음이 없었기에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카민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녀석이 아까 돌을 발로차서 부숴버릴 때 알아봤어야 했어." 나는 한숨을 쉬는 그를 힐끗 보다가 그의 앞에 놓여진 빵을 바라보았다. 카민은 정신적으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딱딱한 빵 두 조각중 한조각만 먹었을 뿐 육포도 먹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슬쩍 손을 뻗어 남은 빵 한조각을 집어 들었고 카민이 눈치채기 전에 증거를 없애야 겠다는 생각에 카민의 빵 한조각을 입안으로 바로 직행시켰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내가 입안으로 빵을 넣은 그 순간, 카민이 재빠르게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나는 놀란 나머지 그 딱딱한 빵 한 조각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후웁!" 나는 눈을 부릅떴다. 컥컥! 목이 가득 막혀왔다. 제길, 그렇게 빨리 알아차릴 줄은 몰랐는데! 카민은 나의 이상한 행동, 즉 가슴을 치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행위를 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크게 웃으며 가슴을 크게 폈다. 다행히 빵조각은 무사히 식도를 타고 내려간 후였다.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였다, 크흑. "왜 그래? 뭣 때문에 놀랐어?" 카민은 나의 행동에 당황한 듯이 외쳤다. 나는 쑥스러움에 머리를 긁적였다. 카민은 자신의 빵조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내게 물었다. "내 빵이 원래 1조각이었나? 2조각씩이었던 것 같은데?" 카민은 빵 부스러기만 남은 자신의 앞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매섭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채 딴청을 피웠고 카민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뻗더니 내 앞에 놓인 육포로 손을 뻗었다! "뭐하는 거야?" 카민이 나의 육포를 내가 뺏기도 전에 입으로 가져갔고 곧 그것을 우무우물 씹더니 삼켜버렸다. 나는 허무감 섞인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카민은 내 반응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비겼지? 뺏어 먹는 육포는 꿀 맛이군." 별다른 대꾸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는 것을 난 그 때 처음 알았다. "쳇." 나는 불량스러운 불만성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외치고는 땅에 드러누웠다. 카민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멈칫하더니 물었다. "덮을 거 아무거나 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 로시엔이 만들어줬던 이 검은 정장은 정말이지 좋은 옷이었다. 보기와는 달리 가볍고 움직이기 편한 것은 물론 적정기온으로 내 몸을 유지시키는 기능까지 하고 있으니. 크크크, 잘난 내 스타일 안 구길 정도로 멋있는 옷이라고 할 수 있지. 나는 차가운 밤 공기가 뺨을 스치는 것을 느끼며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카민은 잠깐 한숨을 내쉬더니 남은 육포를 마저 먹기 시작했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멈춘 것은 그로부터 조금 지나서였다. 육포를 다 먹었는지 카민은 곧 가방을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냈다. 펄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그게 모포인 것 같았다. 카민은 주섬주섬 내 가까이로 와서 모로 누웠다. 카민이 갑자기 내게 물었다. "아직 안 자지?" 나는 누운 상태에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카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 과거에 대해 궁금하지?" "흠." 나의 대답 아닌 대답에 카민은 피식 웃었다. 그녀석은 밀려드는 피로에 피곤한 기색을 보일만한데도 그 하얀 얼굴에 달빛을 받으며 미소는 지우고 있지 않고 있었다. "솔직히 궁금하지?" 카민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아픔과 슬픔이 가득 베어 들어있었다. 나는 잠시 갈등했다. 솔직히 말할까,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말할까.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 있던 카민을 마주보았다. 카민의 덤덤한 붉은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마주치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아니." 나의 대답에 카민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어째서? 넌 정말 이상해. 보통은 궁금해야 하는거 아닌가? 넌 항상 궁금하지 않다고만 하잖아." 어째서냐고? 그렇게 물어보면 또 할말이 없지. 사실은 궁금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얘기를 꺼내면 넌 당연히 아픈 일이 생각날테고, 또 나스가 생각날 거잖아.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무, 물론, 내가 카민을 위해서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험험. 단지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면 잠을 못잘 것이고, 내 상태가 지금 너무 피곤해서 그랬을 뿐이라고. "그냥. 다음에 얘기 하지 뭐." 나의 대답에 카민이 피식 웃었다. 그녀석은 내 기다란 흑색 머리칼을 잠시 바라보더니 얼굴을 돌리며 한마디했다. "……넌 역시 좋은 놈이야." 뭐가 좋은 놈이라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깊이 생각할 시간조차 없이 카민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 * * * * * * * "……피, 피곤해. 피곤해 미치겠어." 카민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피곤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쏘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이 빌어먹을 체이드 숲에서 나가기 위해 걸어가는 5시간 동안 카민이 정말 끝도 없이 뱉은 말이었다. 나는 잠시 짜증이 나서 화가 난 목소리로 외쳤다. "시끄러워!! 좀 닥치란 말이닷!!" "확실히 여기서 나갈 수는 있는 걸까?" 카민이 풀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정말 참고 싶었지만 결국 발끈했다. "닥쳐! 이제 다 왔다니까!" 내 말에 카민은 한숨을 내쉬며 거의 풀린 듯 싶은 다리에 다시 힘을 주었다. 또 얼마나 걸었는지는 모르겠다. 옆에서 카민이 '나가면 당장 말을 사고 말겠어' 라고 이를 뿌득뿌득 갈아대는 것만을 간신히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말이 뭐지? "근데 카민?" "왜?" 카민이 물었다. 나는 땀을 닦으며 수풀 사이로 보이는 풍경에 대해서 말했다. "……오오옷!! 저기 마을." 순간 카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가리킨 풍경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초점을 맞추던 카민은 곧 인상을 쓰며 나를 뒤돌아보았고 그 표정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나는 슬그머니 뒷걸음질까지 쳤다. 곧 카민이 외쳤다. "마을이 어딨다는 거냐!" "어딨기는 저기!" 말하던 나는 흠칫했다. 아차, 그랬다. 내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것과 카민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건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 차이를 잊고 있었다니…… 이건 정말 실수다! 이 똑똑한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허, 험." 나의 헛기침 소리에 카민은 더더욱 힘 빠진 표정을 지었다. 하긴 밤에는 두고 온 나스 생각하느라 제대로 수면을 취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나는 어제 아주아주 편하게 잘 잤다. 카민의 말로는 코까지 골았다고 했다. "가자, 가." 카민은 그 말과 함께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인간들의 시력과 내 시력을 비교 분석한 후 결과를 카민에게 알렸다. "3일 후면 마을이 보일 거야.." 카민은 의아한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카민의 눈빛은 뭔가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기 시작했고 그 눈빛이 어찌나 진지했던지 나는 당혹스러워졌다. 그는 꼼꼼히 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 하얀 얼굴을 내 면상에 들이댔다.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쳤다. 혹시, 혹시 지금의 말실수로 내 정체가 들킨건 아닐까? 나는 간을 졸이며 온갖 인상을 다 쓰고 있는 카민을 바라보았다. 카민은 그 상태 그대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나는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내가 그런 바보 같은 고민을 했는지 자책했다. 그리고 더불어 카민의 판단능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적잖게 의심을 해보게 되었다. ------------------- * * * * * * * * * * * * * 제 8장: 잘 생긴 것도 죄가 된다. "오오오!" 난 인간의 도시라는 것을 본 건 처음이었기에 감탄사부터 나오고 말았다. 카민은 잠시 감동에 젖은 나를 바라보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힘들었을 줄은 몰랐어. 진작 말을 하지…… 불쌍한 것." 순간, 그의 머리와 내 주먹을 나는 왜 번갈아 쳐다 보았던걸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어쨌든 카민은 잔뜩 감격에 젖은 내 표정에 황당하다는 눈길을 보내왔다. 나는 그러나 그 표정에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감탄사를 내질러댔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 때, 카민이 나직하게 말을 걸어왔다. "……이제 끝났냐?" "응." "그럼 뭘할건데?" 나는 카민의 질문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실 체이드 숲에서야 계속 걷기만 하면 되지만, 인간의 도시로 오면 뭘 어떻게 한다는 계획 같은 게 나한테 있을 리가 없었기에 나는 대답 없이 멍청히 서 있었고 카민은 그런 나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식사부터 할까?" "오오!" 나는 그의 질문에 당장에 긍정을 표시했다. 솔직히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다. 그는 픽 웃었고 나는 그의 웃음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맛있는 식당을 찾아 마을을 부지런히 걸어다녔다. 난 생전 처음 보는 여러 가지 광경에 입을 딱 벌리며 다시 감탄사를 쏟아내는데 바빴지만 그 광경들은 시간이 갈수록 익숙해졌고 얼마 안가서는 태평스레 카민과 함께 걸을 수 있었다. 카민은 내게 말했다. "목적지인 수도 에이테르까지는 아마도 한달 정도 걸릴 거야. 도착하면 돈을 지불할게." "숙식비도 네가 제공하는 거, 알지?" "그 정도는 알아." 카민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내게 손짓을 했다. "식사, 여기가 좋지 않을까?" 난 그의 말에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푸른 꿈'…… 이라는 이름의 식당. 식당이름이 뭔 꿈이라냐. 그리고 꿈이 푸르다고? 호오, 웃기는군. 역시 인간들의 어휘는 이상하단 말이야. "마음대로." -------------------------------------------------------------------------------- Back : 31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9 (written by 카르민) Next : 2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7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338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9th September 2001 15:17:11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6-09-2001 21:43 Line : 215 Read : 624 [31]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9 -------------------------------------------------------------------------------- 처진 속눈썹을 멋지게 컬링 - ICS 시스템520 인텐스 컬링업 마스카라 - 15,400 원 -------------------------------------------------------------------------------- Ip address : 61.79.38.79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호오오오오옷." 나는 커다랗게 고함을 내질렀다. 엄청나게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찌르고 있었다. 카민은 그런 나를 보고 씩 웃으며 안 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식당문이 빼곡히 열리는 순간… …나는 귀를 막았다. "넬! 여기 3인분 더 추가!" "크레잎 2인분!" "시끄러워! 여기 와서 직접 받아가! 이런 제길! 바빠 죽겠구만 무슨 주문이야? 아무거나 주는 대로 처먹어!" 무척 시끄러웠다.「인간들의 삶」이라는 책에 따르면, 분명히 식당은 밥을 먹는 곳이지 고함을 지르는 곳이라는 말은 없었다. 게다가 식당 주인은 대부분 친절하게 손님을 맞으며…… "칼, 앉아." 카민은 너무나도 당연스럽다는 듯이 말하곤 그 난잡하고 시끄러운 곳으로 거리낌없이 들어가더니 의자를 빼서 앉았다. 나는 카민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을 보고 이러한 광경이 꽤나 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길, 그 책, '인간들의 삶'이라는 그 책을 지은 게 대체 누구야? 정말이지…… 잡히면 당장에 모가지를 비틀……으, 으음. 진정하자, 진정…… 진정진정. 고결한 내 이미지가 더럽혀지지 않는가. "흠. 칼은 뭐 먹을 거야?" 카민은 잠시 그 난잡한 무리와 음식을 서빙하는 한 소녀를 바라보다가 내게 물었다. 나 또한 음식을 서빙하는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입에 온갖 욕설을 담으며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손님들 대부분이 그러한 소녀에게 아무런 불만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소녀의 입에서 욕설이 나오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먹을 것." 나는 대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카민의 의아한 표정에 난 뭔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뭘 먹을 거냐고." 난 잠시 당황했다. 뭘 먹을 거냐고? 그, 글세…… 난 속으로 온갖 생각을 다한 끝에 한가지 음식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나스가 건네 준, 인간계 게이트로 나온 후 처음 먹은 그 빵을 말이다. 내 배고픔을 다정스럽게 달래주었던 그 빵. 따뜻한 그 빵! 오오, 나의 사랑 그 빵!! ……그만 하자. 나는 문득 나 자신에 대한 한심함을 자각하고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빵에 대해서 카민에게 아주 간략하게 설명했다. "길고…… 바삭바삭하게 부서지는 빵." 그러나 카민은 나의 이러한 대답이 영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짓고 있었다. 어린 아이가 설명한 표현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어 고민하고 있는 어른의 표정이었다면 이해가 갈까? 카민은 정말이지 딱 그런 말로 표현되면 좋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게 뭐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는 듯, 카민이 인상을 잔뜩 그으며 말했다. "……몰라." 그 빵에 대해서는 정말로 모르기에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카민은 한참,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지금, 나보고, 이름도 모르는, 음식을 사오라…… 이 말이냐?" 한음절 한음절 끊어서 저런 말을 할 필요는 없을 텐데 말이야. "……아무거나 시켜." 카민의 표정은 꽤나 살벌했기에 나는 그렇게 말하는 수 밖에 없었다. 카민은 그제서야 씩 하고 웃어보였다. 그리고, 가볍게 박수를 치며 서빙을 하고 있던 여급을 불렀다. "이봐!" 카민은 서빙하는 소녀를 향해 고함을 쳤다. 그러나 워낙 혼잡한 곳이라서 카민의 고함 소리는 그대로 묻혀 버렸다. 소녀도 카민의 목소리는 듣지도 못한 듯, 계속해서 고함을 버럭버럭 질러대며(그 고함의 대부분은 욕이었다.)주문을 받고 있었다. "아무거나 처 먹으랬지! 주제에 어디서 주문이야, 주문이!!!" 귓전을 울리는 커다란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카민을 향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직접 주방에다가 주문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동감이다." 카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어섰다. 그는 뭔가 계속 궁시렁 거리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렇게 혼잡한 곳을 선택한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듯 했다. "역시 웃기는 녀석이야." 난 작게 중얼거리고는 탁자 위에 놓여있는 물을 마시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난 다음 순간 경직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 위로 먼지가 거의 층을 이루며 떠 있었고 컵은 더럽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기가 막히는 식당이군. 뭐? 식당은 음식물을 반입하는 곳이므로 청결해? 흥, 그 인간들의 삶은 계란인가 고구만가를 저술한 마족, 나한테 걸리면 맞아 죽을 줄 알아. 난 속으로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리고 카민이 가져올 음식을 얌전히 기다렸다. "크, 크아아아악!!" 그런데, 갑작스럽게 어디선가 폐부를 찢는 듯한 고통스러운 고함소리가 식당 안을 짜릿하게 울렸다. 나는 그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그 비명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소리가 난 곳을 찾으려 했다. "오오옷!! 싸움이다!!" "구경가자!!" 내가 시선을 돌려가며 그 비명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려고 하는데, 주위에 앉아 술을 홀짝이거나 음식을 먹고 있던 사람들이 이러한 한마디와 함께 벌떡벌떡 일어나더니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난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말이지 할 말을 잃었다. "싸움이다, 싸움!!" "오옷!!" 비명소리가 터지자마자 뭔가 좋은 구경거리라도 난 듯 서둘러 비명소리가 난 쪽으로 뛰어가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신경 끄자." 한참동안 입을 살짝 벌린 자세로 있었던 나는 그 말과 함께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 신경 끄자. 싸움이라는 건 마계에 있을 때부터 지겹게 봤고, 이간들이 싸우는 것도 몇일 전에 봤다. 방금 전에 들려온 것이 분명 싸운 소리긴 했지만, 그런걸 봐서 그다지 좋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음." 직접 싸우는 것도 신물이 날만큼(카민과 나스를 보호하느라 몇 일동안 잠도 못자면서 싸우기만 했다. 정신이 차렸을 때는 온 몸에 핏내가 베어버릴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뭐.)해봤다. 그래, 그래서 나는 인간들이 벌이는 싸움 따위에 관심없다. "어, 어어!! 너무 심한거 아냐?" "그, 그래! 너무 심하다!" 식당 한 켠에서 시작된, 조그마한 고함 소리와 함께 시작된 그 소리는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앉아 카민을 기다렸다. 시선이 슬쩍 돌아갔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싸움이 일어난 듯 시끄러운 곳으로. 아아아앗!! 그러고보니 방금 전에 비명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주방 쪽이었다. 하핫, 그러고보니 카민도 주방 쪽으로 가지 않았던가? 혹시 카민이 멀거니 싸움을 구경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나도 저 쪽으로 가봐야겠다. 나는 경쾌하고 재빠른 동작으로 벌떡 일어나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손을 들이밀어 몸을 집어넣었다.(쉬운 말로 하자면 사람들 사이에 끼여들었다.) "……당신, 방금 전에 뭐라고 그랬어. 다시 한 번 말해보시지." 내가 막 사람들을 밀치면서 앞으로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타이밍도 정확하게 맞춰서, 문득 바로 앞으로부터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콰당!! 내가 고개를 돌리기가 무섭게, 무엇인가 모여 있던 것이 한꺼번에 어그러지는 소리가 터지듯이 새어나왔다. "……다시 한 번 말해보시지." 그리고, 그 소리 뒤에 흘러나온 싸늘한 목소리.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카민?" 정말이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사람들에게 둘러 쌓인 채로 싸움판을 벌인 것은 카민이 아닌가!! 나는 꽤나 당황했다. 들려오는 그 목소리와 얼핏 보이는 저 얼굴은 틀림없이 카민의 것이다. 싸늘하고 냉정하고, 빳빳이 경직되어 있긴 하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 카민놈의 것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더 안쪽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안 그래도 시끄럽던 식당은 완전히 시장바닥처럼 되어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거야, 저 바보놈이?" 사람들이 만들어낸, 둥근 벽 속에서 싸늘하게 뱉어내는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보였다. 보석을 집어넣은 듯 반짝이는 핏빛의 눈동자, 계집애같은 생김생김이 눈에 확하고 들어온다. 그 모습은 틀림없이…… 카민 놈. "…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야?" 언제나 허허실실. 이렇다고 해도 히죽. 저렇다고 해도 히죽 히죽거리던 바보 카민놈의 옆얼굴은 무서우리만치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 놈의 앞에는 피떡이 된 몰골로 처참하게 의자사이에 처박혀진 남자가 하나 있었다. 나는 도대체가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음식을 시키러 간다고 내려갈 땐 언제고, 왜 사람을 쥐어패서 저 꼴로 만들어 놓은 거지? "이봐, 카……" 나는 카민의 이름을 부르려다 말고 싸늘한 냉기가 머문 카민의 눈동자를 보며 움찔했다. 녀석의 얼굴은 전체적으로 얼음 같은 분위기. 도저히 그 헤에∼ 하는 바보음색이나 흘리고 다니는 멍청이의 것으로는 느낄 수가 없다. "몰라서 물어?? 당신은 내게 엄청난 모욕을 줬어!! 이건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당장 아까의 말을 취소해!!"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지만, 카민이 상당히 흥분해 있다는 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슬쩍 옆에 있던 사람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싸우는 건가?" 내 옆에서 팔짱을 낀 채로 사태를 유심히 관망하고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 그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카민을 보고 있었고, 맞고 있는 남자 역시 재밌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니, 대체가 말이야!! 정말이지 이상한 식당이로군. 사람들이 싸움판을 벌여도 말리는 사람이 하나 없질 않나, 기물이 파손되고 있는데도 주인은 낯짝도 안 내밀고. 아까 그 욕쟁이 계집애는 어디로 간거야? "……." 내가 말을 걸자, 카민을 열심히 보고 있던 그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입술을 움직였다. "나도 몰라." ……쿨럭. 마치 다 안다는 표정을 지은 주제에…… 그렇게나 열심히, 뚫어지게 카민놈을 보던 주제에 어떻게 그렇게 쉽게 모른다는 말이 튀어나올 수 있는 거야, 앙? "무, 무슨 말을 취소하라는 거냐?" 내가 당황하든말든, 카민과 그 피떡이 된 사내 사이에서는 여전히 말이 오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시선을 카민 쪽으로 주었다. "아까 당신이 한 말!!" 카민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남자의 얼굴은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미끄러질듯한 표정. 그는 정말이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난…… [미안하지만, 좀 비켜주시겠소 아가씨?]란 말 밖에 하지 않았어!!" 남자는 멍청한 어조로 이렇게 꺼벙하게 뱉어냈다. 순간, 카민의 얼굴 위로 스쳐나간 엄청난 분노를 본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낮게 웃고 말았다. "큭, 큭큭큭……" 여기까지 들으니 상황이 대충 파악이 되는 듯 하다. 나는 다시 씨익하고 웃었다. 음식을 주문하러 카민이 주방으로 갔을 때, 우연히 카민의 앞을 지나가던 저 남자가 카민에게 말을 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좀 비켜주시겠소, 아가씨?' 상황이 대충 연출되니 더더욱 웃음이 치미는군!! 크하하하하하하핫!! 카민놈, 여자같이 생긴 얼굴이라고 놀려 먹는 게 유쾌하긴 하다만 저런 말까지 들을 줄은 몰랐는걸. 쿡쿡쿡, 이걸로 두고두고 놀려먹어야지!! 내가 사악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카민은 계속해서 화를 내고 있었다. 녀석의 붉은 눈동자는 분노로 터질 것만 같았다. "제길!! 바로 그 말을 취소하란 말이다!!" 카민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여차하면 다시 한 번 실력행세라도 할 듯한 분위기. 난 그런 카민을 보며 다시 키득거렸다. "……대체 왜 그 말을 취소해야 하는 건데?" 자신이 건넨 말 한마디 때문에 몇 일간은 침대에 누운 채로 사랑하는 애인 내지는 아내에게 무료 봉사를 받게 될 지경까지 간 남자가 억울하다는 투로 물었다. 옅은 브론드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그는 대충 20살 후반 정도로 볼 수 있는 외모였다. 그런 그를 향해, 카민의 말은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난 남자야." 순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즐거운 분위기로 히히덕 히히덕, 자기네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남자야 얻어터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있던 식당 안의 모든 이들의 움직임이 멈추어 버린 것을. 그리고, 싸늘한 정적과 더불어 침묵이 식당을 강타했다. 사람들은 모두 카민을 뚫어지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말하는 것은 한가지. 「방금전에 내가 잘못 들은 거지?」 ……한심한 것들. 물론 처음 보면 저 얼굴이 조금(…이 아니라 많이)여자 같이 생겼다고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저 얼굴이 남자 거라는 걸 깨닫는 순간 좌절하는 인간, 꽤나 많았을지도. 인간이란 외모나 밝혀대는 한심한 종족이니까.)할 수도 있지만, 계속해서 뚫어지게 보다보면 깨닫게 될 것이다. 카민놈은 분명히 남자다. 가슴도 없고, 무엇보다도 몸 전체에서는 여성의 것과는 조금 다른 기운이 흘러 넘친다. "뭐, 뭐라고?" 싸늘한 정적을 깬 것은 여태까지 흠씬 두들겨 맞고 있던 남자의 발악 같은 한마디였다. 카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자라고!" 카민의 말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 Back : 32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0 (written by 카르민) Next : 30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8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338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9th September 2001 15:17:16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6-09-2001 21:46 Line : 58 Read : 603 [32]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0 -------------------------------------------------------------------------------- -------------------------------------------------------------------------------- Ip address : 61.79.38.79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나, 남자래." "마, 말도 안돼. 잘못 들었어." 카민의 하얀 얼굴, 불타는 듯한 느낌의 핏빛 눈동자, 그리고 불꽃같은 느낌의 머리카락. 그 모든 것은 확실히 여자같다는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저렇게까지 심한 부정을 해서 꼭 카민을 좌절에 빠지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걸까? "하, 하하하핫. 그런데 왜 자네는 나랑 똑같은걸 들었다고 하는 거지?" 내 옆으로 줄줄이 도열해서 두들기는 자와 두드려 맞는 자를(유식한 말로 망치와 모루를)구경하고 잇던 자들은 아직도 헛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음, 최근 귀를 파지 않았더니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거 아닐까? 어디 가서 귀이개나 좀 찾아 와봐." ……집단 거부반응마저 보이는군. 나는 현실을 외면하면서 아직도 카민을 뚫어져라(정말로 뚫어질까봐 걱정된다)바라보고 있는 이 작자들을 보며 한숨을 슬쩍 내쉬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아니면 이 헛소리들을 들었는지 카민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난 남자다. 이카루의 19세 남자이며 어엿한 성인이다. 이제 당신이 나한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달았겠지? 당장 사과해라." 카민은 단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허, 그런데 저녀석이 19살이었나…… 쩝,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았군. 저녀석은 내 나이나 알고 있으려…… 아, 아니 잠깐. 19살? 나는 순간 얼어버렸다. 저 바보 같은 해실해실 녀석이 그럼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말이냐? 말도 안돼!! 인간계는 나이를 굉장히 중요시해서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사람을 대우해 주는게 정석이라고 들었다.(그래서 등장한 것이 내가 너보다 밥공기를 몇 개를 더 비웠는데!!…… 라는 말이었던가.)그것 역시 [인간들의 삶]의 삶에 적혀있던 정보라서 조금 신빙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어찌됐든…… 저 놈이 나보다 한 살이 많단 말인가? 이런, 이럴수가!! 카민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한참을 부들부들 떨며 고민에 잠겼던 나는, 한참만에 입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모른 척 하는거다. ……나이 따위 알게 뭐람, 크하하하하. 내 나이를 밝히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 아닌가? 그래, 다 필요 없다. 앞으로도 모른 척 할거다. 나와 카민은 서로 나이를 모른다!! 바로 그것이다. "사과하지 않는다면 이번에야말로 가만두지 않겠다." 카민의 목소리를 쫙 깔고 말하자 남자는 잠시 주춤했다. 사람들은 갑자기 변한 카민의 분위기에 당황하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홀 내에 자리잡았다. "푸… 푸하하하핫……!!!" 뜻밖에도, 그 긴장감을 깬 것은 두들겨 맞고 있던 남자의 그 큰 웃음소리였다. "뭐지!!" 카민은 그 남자가 갑자기 웃자 당황한 듯 소리쳤다. 나는 흥미가 당겨 그 남자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남자는 우락부락하고 엄청나게 험상궂게 생겼는데, 그래서 나는 내 잘생긴 얼굴을 손으로 살짝 훑으며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가 있었다. "그 얼굴로 남자라고 하면 난 여자겠다." 다음 순간, 남자의 입에서 이 말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바로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말했듯이 남자는 아주 우락부락하고 험상궂게 생겼었는데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돌려 표현을 함으로서 카민에게 자신의 외모에 대한 인식을 너무나도 강하게 심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카민의 얼굴에는 엄청난 분노가 떠올랐다. 그리고…… 카민의 몸에서는 드디어…… "이딴 일로 살기를 뿜냐……" 드디어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 Back : 33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1 (written by 카르민) Next : 31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29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338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9th September 2001 15:17:22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6-09-2001 21:48 Line : 212 Read : 763 [33]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1 -------------------------------------------------------------------------------- -------------------------------------------------------------------------------- Ip address : 61.79.38.79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엄청난 살기가 점점이…… 그야말로 점점이 흘려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살짝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말려야겠구만. 나는 한발자국을 내딛었다. 성질 급한 카민 녀석은 이미 그 말해서는 안될 말을 해버린 우락 부락 맨을 한 손으로 들어올리고 있었다. 카민 녀석의 호리호리한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녀석은 한 손으로 그 우락 부락맨의 멱살을 잡아 간단하게 위로 끌어올렸다. "윽?" "다시 한 번 말해보시지, 아·저·씨·." 카민의 말에 남자는 끅끅거리며 대답했다. "여… 여자 아니야?" 카민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는 듯 남자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우당탕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남자가 다시 한 번 바닥으로 뒹굴었다. "꾸, 꿀꺽." "사, 살벌한… 살벌한 소, 소녀…… 아, 아니아니 소년이로군." "……불쌍한 루덴스 녀석 같으니. 그냥 사과할 것이지, 무식하게 계속 맞고 있냐……" 처음에는 재밌다는 듯이 구경하고 있던 관람객들은 카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살기에 움찔 움찔거리며 한발씩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들을 보며 다시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었다. "원래 저놈이 좀 바보잖아." 말을 들어보니 지금 저기서 두들겨 맞고 있는 자들인 관람객인 이들과 꽤나 친숙한 사이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사람들은 전혀, 정말로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아예 방관하고 있었다. 아니, 즐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째서? 내가 카민을 말려야 하는 것처럼, 당신들도 카민을 말려야 하는게 아닌가? 나는 다시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우욱…" 카민과 나의 거리가 거의 다섯 발자국 정도로 좁혀졌을 때, 내동댕이 쳐진 남자가 비명소리 비슷한 것을 지르더니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카민은 그답지 않게 비웃음을 흘리며 남자의 앞을 지나치려 했다. 그 순간…… 남자가 외쳤다. "이… 계집애가…" "……계집애?" 카민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드디어 폭팔했다. 그렇다고 광분시의 아이에드처럼 날뛰는 형태는 아니었고(만약 그런 짓을 한다면 당장 달려들어 머리를 쳐버릴테다!!)단지 얼굴을 더더욱 찌푸렸을 뿐이다. 그 어두운 미소에는 짙은 광기가 드리워져 있었다. "후… 후후후훗." 카민의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한 붉은 오오라. ……정말…… 접근하기 싫어지는군. "그럼 그 계집애가 좀 혼내드리지." 카민은 그렇게 말하고는 남자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카민에게 얻어터진 이 바보 같은 남자는 꼼짝도 못하고 다가오는 카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카민은 발을 들어 남자의 배를 아주 꾸∼욱 눌렀다. "으윽!!" 남자는 당연하게도 비명을 질렀다. 나는 순간 인상을 썼다. 카민이 조금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카민은 저런 짓을 할 녀석이 아닌데,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그렇게나 강한 콤플렉스가 있었던건가? 나는 다시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었다. "불쌍한 루덴스! 아프냐? 암, 아프겠지. 하지만 참아!!" 바로 뒤에서 다시 떠들어대는 관람객들.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 조금만 참아봐라!!" 나는 떠들어대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경직했다. 도대체가…… 이 식당 안에 있는 인간들은 왜 이렇게나 긴장감이 없는 것이냐!! 카민이 저렇게 미친 듯이 살기를 뿜어대고 있는데…… 설마 그런 것도 못 느끼는거냐!! 아, 아…… 그렇지, 평범한 인간들은 살기라는 것을 느낄 수 없다고 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조금은 느낄텐데? 카민이 얼마나 흥분해 있는지. 카민이 얼마나 미쳐 있는지. 게다가 저렇게 밟히고 있는 놈과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저걸 멀쩡하게 구경하고 있다니! "자아, 마지막 기회야. 사과해." 카민은 꽤나 집착성이 강한 놈인 것 같다. 카민은 남자의 복부 한가운데를 눌러 비명소리도 지르지 못하게 만들었다. 카민은 남자의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보며 무표정하게 다리를 들어올려 얼굴을 쳤다. "이래도 계집애라고 할거냐?" 무섭도록 굳어진 얼굴에선, 내가 아는 카민의 얼굴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쿨럭!" 남자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약간의 피를 토했다. 카민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다시 물었다. "만약 또 그렇다고 대답하면 이번엔……" 나는 카민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줄 깨달았다. 녀석의 눈은 자신의 검집을 향해 있었다. ……성별 한 번 착각했다고 너무 심하게 구는 것 같군, 카민. 뭐, 나도 내 피를 가지고 뭐라고 떠들어대던 마족 녀석들을 보면 지금의 너처럼 흥분하곤 했었다. 너도 혹시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는거냐? 나는 살짝 조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야, 카민. 난 반마족이야. 그건 내가 타고난 피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마족 녀석들로부터 더러운 소리를 들으면서도 참아야 해. 그리고, 카민. 네녀석은 그렇게 생겨 먹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야 해. 태어날 때부터 얼굴이 그렇게 생겨먹은걸 뭐 어쩌라는 말이야? 이미 그렇게 태어난 이상 착각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잖아. 나도 내 잘생긴 얼굴이 때로는 원망스럽지만 이렇게 잘 살고 있단 말이다. "너… 누… 누군지 모르지만 나… 날…… 이렇게나 무식하게 쥐어 팼겠다?" 남자는 [미안합니다.]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쓸 때 없는 고집만을 내세우고 있었다. 카민 놈의 입술에는 비죽이 올라간 웃음이 걸렸다. 녀석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 손은, 정확히 녀석의 목 쪽을 향해 있었다. "그만 두시오!!"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카민을 부른 것은. "대체 뭡니까!!" 카민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채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 시선도 소리가 들린 곳으로 따라갔다. 거기에는 꽤나 잘 차려입은 남자 하나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에……에…… 앗, 씬인가?" 문득 아파 죽겠다는 표정으로 끙끙거리고 있던 그 놈이 말했다. 그러자 씬이라고 불린 남자가 당장에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예, 키세…… 아, 아니 루덴스님. 씬입니다." 나는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에 힐끔 카민을 보았다. 카민은 뭐라도 씹은 표정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나는 2:1이라는 상황에 직면해버린 카민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카민의 시선이 내 쪽으로 돌아왔다. "칼……." 그렇게 그리운 어조로 부르지 마라. 닭살 돋아서 미칠 것 같으니. "바보 놈." 나는 카민을 향해 짧게 중얼거린 다음 몸을 틀었다. 그곳에는 카민을 향해 있는 힘껏 눈을 부라리고 있는 씬이라는 남자와 카민에게 두들겨 맞은 그 놈이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씬이라는 남자가 카민을 향해 고함을 버럭 쳤다. 그 남자의 머리카락은 옅은 회색이었는데 그래서 조금은 묘한 느낌을 주었다. 인간에게는 그다지 많은 빛깔의 머리카락이 나타나지 않는다. 일단, 가장 적은 색은 검은 색이라고 한다. 인간들 중에서는 검은 색의 머리카락을 타고나는 자는 거의 없다. 전 대륙을 다 뒤져도 채 100명이 안될 것이라고 했던가. 적발이나 짙은 금발도 조금은 귀한 편이다. 녹색이나 옅은 금발을 가진 녀석들은 조금 있는 편이다. 가장 흔한 머리빛깔은 갈색과 푸른색, 그리고 녹색. 회색이라는 머리색깔은 조금 특이한 빛깔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다지 귀한 빛깔은 아니지만. ……이상 「인간들의 삶」제 6장 [외모편]에서 발췌한 내용이었다. 하여튼 나는 회색 머리카락의 그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카민은 내 옆에서 분개한 목소리로 그를 향해 외쳤다. "무슨 짓이라니? 저 사람이 나를 모독했다!! 난 사과를 요구했지만 저 작자는 끝까지 사과를 하지 않았어!!" 카민은 지지 않겠다는 듯 고함을 질러댔다. 나는 그런 카민의 머리를 향해 오른쪽 주머를 뻗었다. 빠―악. "헉." 카민은 갑작스럽게 날아온 내 주먹에 인상을 찌푸린 채 눈물을 찔금 거렸다. 그러나 나는 그 녀석을 상관하지 않은 채로 고개를 돌리곤 그 씬이라는 남자와 그 남자의 팔에 부축되어 서 있는 놈을 보았다. "……당신은 또 누굽니까?" 씬이라는 남자는 이번에는 불쾌함의 어조를 내게 보내왔다. 그의 품안에는 그 금발의 남자가 이마가 찢어진 채로 기대 서 있었다. 아마도 넘어질 때 의자의 모퉁이에 충돌해서 이마가 찢어진 모양이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경쾌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 내 이름은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이다." "……예?" "에?" 아무 생각 없이 뱉어낸 말이 엄청난 파장을 가져올 줄이야. 심각했던 분위기는 누군가가 키득, 하고 뱉어낸 실소 속에 묻혀 버렸다. 나는 왜 갑자기 식당 안이 웃음소리로 차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장 기가막힌 것은…… 돌아보니 카민 놈 역시 키득거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제, 제길. 뭐야? 내 이름을 물어본 게 아니었다는 건가? 나는 민망함에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찌됐든 저는 아직 사과를 받지 못했습니다. 사과해." 그런데 막 좋아질 것 같은 이 분위기에 초를 치며, 바로 옆에서 카민의 목소리가 울려져 나왔다. 지독한 놈. 그냥 보낼 것이지. "사과? 이만큼 쥐어 패놓고 또 사과를 받겠다고?" 카민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은 그자는 인상을 있는 대로 없는 대로 다 그어대며 이빨을 세게 악 물었다. "저, 저기, 루덴스님.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그냥 사과를 하십시오." 씬이라는 남자는 다시 공포 분위기로 돌아가는 카민의 표정을 보며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루덴스라고 불린 그 놈은 굴복하지 않았다. "아니! 싫다." "……." 카민은 눈동자는 매서웠다. 녀석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해부할 수 있을 것 같은 눈동자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루덴스라는 놈이 흠칫했다. "그만 좀 해. 배고파 죽겠는데 이 따위 일로 언제까지 시간 잡아 먹을 셈이야?" 나는 결국 이렇게 한마디하며 카민의 어깨를 살짝(아주 조∼금의 힘을 실어서)내려쳤다. 순간, 카민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후후, 나의 입장에서는 살짝 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받는 충격은 살짝이 아닐 것이다. 뭐, 당연한 건가? 나는 웃으면서 내 주먹에 맞아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카민의 어깨를 오른손으로 살짝 감쌌다. 그리고 씬이라는 놈과 루덴스라는 놈을 보았다. "……그만하고 여기서 정리하지. 사과 따윈 필요 없으니 데리고 꺼져라." 내 입에서 나즉한 말이 튀어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씬이라는 녀석이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덴스는 뭔가 억울하다는 듯(아마도 자기가 이렇게나 늘씬하게 두들겨 맞았다는 것이 억울하겠지)카민쪽을 보았다. 카민 역시 뭔가 억울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으나 나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럼, 실례했습니다." 씬은 나와 카민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루덴스의 목덜미를 휙 잡아채고선 질질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사과를 해야할 쪽은 카민이었는데. 나는 사라지는 그 자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왜 보내는 거야? 난 아직 사과를 못 받았다구!!" 카민이 나를 향해 소리치는 말 따위, 나는 무시했다. "쳇, 루덴스라고 했겠다.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지옥을 보여주지!!" 이빨을 가는 카민을 보며, 나는 정말로 어이가 없어졌다. 저놈들을 만날 일이 또 어디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이빨을 가는 거냐? ------------------------ 헉스.. 밑에거... 왜.. 왜 저렇게 짧은거지.. 겨우 줄 58이라니;;; 다시는 이런 일 없을겁니다.. 헉스헉스헉스; 아... 한가지 더;; 감상이나 비평..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 Back : 3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2 (written by 카르민) Next : 32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0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3387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9th September 2001 15:17:27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8-09-2001 21:04 Line : 122 Read : 401 [34]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2 -------------------------------------------------------------------------------- -------------------------------------------------------------------------------- Ip address : 61.76.127.3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카민 놈도 일단은 인간이었다. 인간인 이상 수치심이라는 것은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열심히 그 루덴스라는 녀석을 윽박질렀을 때는 그렇게나 흥분했던 카민이었건만, 루덴스와 그 씬이라는 놈이 식당에서 빠져나가자마자 그 흥분은 바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흥분이 빠져나간 그 자리에는 흥분 대신 수치심이라는 것이 첫날밤의 새색시처럼 얌전히 들어앉아 버렸다. 엄청난 흥분 모드에서 갑자기 정신이 깬 듯, 카민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카민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지그시 마주 봐주었다. 그는 그런 나를 보더니 천천히 얼굴을 붉히기 시작했다. 이제야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는 듯. "……헤이, 화끈하더라." 푸쉬쉬, 하는 소리가 나면서 김이 팍 하고 빠져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카민의 새빨간 얼굴을 향해, 하나둘씩 비수 같은 말들이 내려 꽂히기 시작했다. "루덴스 놈을 그렇게나 쥐어 패다니…… 좀 심한 것 아니었어?" "흐음, 나같아도 착각할만한데…… 고작 그런 일 갖고 사람을……." 나와 카민을 둥글게 둘러싸고 구경을 하고 있던 자들은 하나 둘 자리로 돌아가며 카민을 향해 한마디씩 뱉어냈다. 비록 혼잣말 같이 조그마한 목소리였지만, 나나 카민이나 그런 것을 듣지 못할 정도로 귀가 어둡지는 않다. 카민은 검을 쓰는 사람이기에 감각이 무척 예민하고, 나는 마족이기에 원래 청각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해 있다. "그러게…… 씬 군이 안 왔으면 반 죽일 기세던데."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카민의 얼굴은 빨간 것에서 하얀 것으로 그 색깔을 달리 했다. 녀석의 얼굴은 어느덧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사람들의 툭툭 뱉어낸 말에 카민은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지으며 한발자국 물러서더니 거의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칼. 우리 나가자." 나는 카민의 말에 주변을 한 번 휙 하고 돌아보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웅성거리고 있었고 시선은 여전히 카민과 나에게로 향한 채였다. 나는 내 검은 앞 머리칼 사이로 들어 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싫어."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뭐, 뭐? 카, 칼. 설마 여기서 음식을 먹고 나가자는 말은 아니겠지?" 카민은 기겁을 하며(하지만 사람들이 계속 보고 있기에 평소처럼 그 벼락같은 소리는 지르지 못한 채. 질렀다면 사람들은 또 한 번 경악해야만 했겠지.)내 팔을 잡아끌었다. 나는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뱃가죽이 배에 달라붙었어. 못 나가." "……." 카민으로부터의 대꾸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카민은 얼굴을 푹 숙인 채로 더더욱 내 팔을 꽉 잡고 내 등에 얼굴을 묻었다. "카알, 부끄러워 죽겠어. 쪽팔려서 미치겠다고. 여기서 밥 먹다간 체할 거야!" 나는 카민이 필사적으로 뱉어낸 말에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훗, 믿을 말을 믿으라고 해야지. 아무리 심각한 상황이 와도 너라는 녀석은 절대로 체할 녀석이 아니다. 무쇠를 씹어서 삼킨다고 해도 믿어줄 수 있을 지경인 녀석이, 사람들의 시선 조금 받았다고 해서 체할 것 같으냐? 그럴 리는 절대로 없다. "시선을 좀 받았다고 체한다고? 네녀석이? 믿을 소리를 해야지 신경이라도 쓰이지." "카아아아아아아알." 카민은 내 말에 끝까지 승복을 하지 못하고 몸을 비틀며 내 이름을 불러댔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이 식당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었다. 아까 카민과 그녀석이 박 터지게 싸움하려는 것을(이라기 보다는 카민이 일방적으로 패대기 치는 거였지만)막으려 할 때는 깨닫지 못했었는데 그 사건이 종결되자마자 나는 미칠 듯한 허기를 느껴야만 했다. 긴장했던 근육이 한 순간에 풀어지면서 극심한 피로와 함께 허기가 몰려 왔다고 해야할까. 어쨌든 나는 이 식당에서 나갈 수 없다, 밥을 먹기 전까지는. "오우 오우, 나갈 생각은 없으신가 보네?" "쿡쿡. 그런데 정말로 남자녀석이냐? 곁에 붙잡고 있는 그 녀석은 뭐야?" 나와 카민의 대화에는 간간이 쓸 때 없는 소리들이 끼여들고 있었다. 목소리들은 식당 안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소리의 근원지를 명백히 밝힐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 저 먼 곳에서 말을 던져대고 있었다. 카민의 얼굴은 또 다시 분노와 수치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달구어진 불처럼 붉어진 그 녀석의 얼굴은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휘익∼ 언니, 못 믿겠다. 옷 한 번 벗어봐라, 확인 좀 해보게."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완연한 시비조의 어조이자, 지금의 카민의 성격에 불을 붙이기 딱 좋은 내용의 말이었다. 나와 카민에게서 떨어질 줄을 모르는 시선으로, 사람들은 들려온 그 목소리에 장단을 맞추어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 카민이 한 사람을 메다꽂은 것을 벌써 잊어버린 건지, 아니면 공포를 상실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군중 속에 파묻힌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건지. 사람들은 점점 더 심한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언니!! 어이, 옷 좀 벗어보라니까? 닳는 것도 아니잖아? 진짜 남자라면 못 벗을 건 또 뭐야. 상의만 벗어봐." "그러게, 그러게. 벗어보라니까." 카민을 [언니]라고 부르면서 모욕을 주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상의를 벗으라는 요구마저 하고 있다. 하지만 카민은 아까 처럼 광분해서 날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카민녀석이 인내심을 발휘한 것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꾸―욱. '튀어 나가면 죽어' 화가난채로 식식거리며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눈을 부라리는 카민의 손을 꾸욱, 눌려잡으며 내가 눈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튀어나가도 수백번은 튀어나갔을 것이다. 카민은 얼굴이 달아올라, 이제는 얼굴 빛깔과 머리빛깔의 빛이 비슷해질 지경이었다. 하얀 얼굴빛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피부색과 머리색, 눈 색깔이 마치 세트처럼 딱하고 붉은 빛이다. "……칼, 여기 있다간 또 한 판 할 것 같아. 나가." 카민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해왔으나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나는 땅에 꼿꼿이 선 채로 카민의 말을 그대로 무시했다. 당황한 카민의 목소리가 또렷이 울려왔다. "칼, 카알. 제발 나가자니까. 내가 창피함에 죽어도 좋은 거야? 아니면 내가 여기서 검이라도 뽑길 바라는거야?" "……쓸 때 없는 말 마라. 저런 소리 조금 듣는 다고 해서 창피하게 느낄 필요 전혀 없단 말이다. 옷 좀 벗어보라고? 한 번 벗어봐. 남자 녀석 주제에 옷 한 번 벗는다고 뭐가 달라지냐? 잔 말 말고 밥이나 먹자." 내 말에 카민은 입술을 악 물었다. 뭔가 상당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나는 조용하게 웃으며 그런 카민을 보다가 흠칫했다. 카민의 눈꼬리가 슬며시 치켜 올려진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카민은 싸늘한 눈초리를 했다. 그것은……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쫓아온 습격자들을 베어 넘기던 때 보였던 눈빛. "휘익휘익∼! 어서 벗어보라니까!" "사내자식 아니지?" 군중들의 야유, 아니…… 느끼함이 가득 담긴 고함소리는 점점 더 격해지고 있었다. 우리들이 반응이 없다는 사실 때문인지, 그 목소리는 점점 더 탁해지고 커지고 있다. 나는 그 목소리들을 들으면서 주먹을 살짝 쥐었다가 폈다. "칼." 집단 군중심리(※군중심리: 많은 사람이 모여 무리를 이루었을 때, 각 개인이 이성적 판단력이나 자제력을 잃고 평상시에는 전혀 하지 않을 행동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행동을 무비판적으로 따라 하는,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심리 상태라고 한다. 후훗, 나 유식하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이들을 도끼눈을 한 채로 바라보던 카민이 갑작스레 내 이름을 불렀다. 살짝 그를 돌아보아 주었다. "응?" 카민은 이상하게도 서서히 오른팔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 오른팔은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는데 나는 그런 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어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넋을 잃고 들어올려지는 그의 오른팔을 보고 있을 때, 천천히 움직이던 그것이 갑자기 빠른 속도로 내 목 쪽으로 다가왔다. "흡!!"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경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보다 키가 15레티나 정도는(1레티나- 약 1cm)더 작은 카민이 까치발을 하더니 몸을 엎어 오른손으로 그대로 내 목을 휘어 감았기 때문이다. "컥, 커억!!" 나는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했다. 순간적으로 팔 안쪽으로 굽혀진 목이 콱 하고 조여왔다. 카민의 오른팔이 살짝 앞으로 당겨지자 나는 미칠 지경이었다. 이 여리 여리한 몸에서 나오는 힘이 어찌나 강한지 나는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에 눈물까지 찔끔거려야만 했다. 숨이 막혀왔다. 대, 대체 무슨 짓이야! "쿨, 쿨럭…… 놔, !!" 한 팔로 가뿐하게 내 목을 움켜쥔(졸랐다는 표현이 옳을지도)카민은 내 사그러 들어가는 목소리를 듣더니, 조용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칼." 귓등을 간질이며 카민의 조그마한 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그만 나가자니까." 카민은 내 목을 죈 채로, 나를 끌었다. 당연스러운 일이지만, 나는 질질 끌려가야만 했다. 질∼질…… 질질질질. ------------------------------------------------------------- 이런 곳에서 끊어버리다니.. 훌쩍.. 다음 편으로 가시죠.. 쿨럭쿨럭.. -------------------------------------------------------------------------------- Back : 3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3 (written by 카르민) Next : 33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1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3388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9th September 2001 15:17:32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8-09-2001 21:05 Line : 238 Read : 381 [35]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3 -------------------------------------------------------------------------------- -------------------------------------------------------------------------------- Ip address : 61.76.127.3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햇빛 한 번 좋다." 크게 기지개를 켜며, 앞서나가던 카민이 말했다. 부드럽게 떨어져 내리는 햇살, 푸르른 하늘이 확실히 눈부시다. 당장이라도 조각조각 깨어진 채로 떨어질 것 같은 저 짙푸른 하늘은 조금은 부담스러운 느낌이지만 그래도 파랗게 펼쳐진 저 것이 깨끗해 보인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래, 뭐랄까…… 로시엔의 눈동자색과 닮았구나. 문득, 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저 파란 하늘은 닮아 있다. 내게 있어 정말로 소중한, 몇 안 되는 자들 중 하나와. 다른 이들의 앞에서는 언제나 싸늘하고, 언제나 조용하게 침묵하는 자라 하여 유일한 별칭으로 [아이시 사일런트]라고 불리는 자. 서열 16위라는 굉장한 위치에 올라 있으면서도, 아이에드라는 사이코 마족(거기다가 그 느끼함은 또 얼마나 대단한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암.)의 집사 노릇 비슷한 것을 하고 있는,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는 녀석. [다녀오겠습니다.] 문득, 마지막으로 본 로시엔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왕성으로 가는 워프 게이트를 만들기 위해 힘차게 손을 뻗던 로시엔의 모습이 환영이 되어 머리에 가득 차오른다. 아아…… 다시 센티멘탈 버전으로 돌아가는 모양이군. 나란 놈은 정말이지. 저깟 하늘 한 번 봤다고 또 이 모양이다. 정말이지 한심하다. 하지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구름 사이로 언뜻 비치는 햇살과 마주했다. 파편을 흩날리며 떨어지는 빛의 부서짐은 가늘게 미소를 짓고 있을 때의 아이에드가 풍기는 분위기와 비슷하다. "……칼?" 내가 울적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는지 카민이 조금 의아한 얼굴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의 부름에 여전히 하늘에 시선을 둔 채로 조금은 싸늘하게 대답했다. "왜." 내가 조금 딱딱하게 대답해서일까. 다음에 들려온 카민의 목소리는 조금 불안정한 것이었다. "화가 난 거야?" 카민의 목소리에 나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훗, 화가 났느냐고? "말이라고 하는 거냐."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대체가 배가 등가죽에 붙어서 돌아가실 지경이니 밥을 먹고 가자고 그렇게나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목을 조르는 엄청난 범죄까지 저질러가며 식당 밖으로 끌고 나오다니!! 카민은 내 표정을 한 번 힐끔 살피더니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잖아, 칼. 잘 생각을 해봐. 내가 아무리 낯짝이 두꺼워도 거기서 멀쩡하게 식사를 한다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카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땅을 굴러다니는 돌을 하나 걷어찼다. "너라면 거기서 밥 먹을 수 있어?" "물론이다." 카민은 딱 떨어지는 내 대답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내 말은 어디까지나 진실이었다. 나는 나를 괴롭히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았던 그 밥맛 떨어지는 뚱땡이 마족 놈(그녀석의 이름은 아직도 외우지 않았다. 말했듯이 내 머리에는 이녀석의 이름을 넣을 만큼 넓은 공간 없다.)앞에서도 꿋꿋이 밥을 먹을 수도 있고, 느끼한 소리로 지껄여대는 아이에드의 앞에서도 충분히 식사가 가능했던 몸이다. 어디선들 식사를 못 할 것 같은가. "……너는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못해." 카민은 내 대답이 의외였던듯, 목소리를 점점 더 낮추었다. 나는 다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 하늘이 빙글, 돌아가는 듯한 착각에 나는 잠시 머리를 흔들었다. 만약 마왕성에서의 일이 모두 끝나고 성으로 돌아왔다면 아이에드 그 놈은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당장 인간계로 뛰쳐 내려올지도 모른다. 그 놈은 이상하게도 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참지를 못하는 고질적인 증세를 갖고 있으니. 로시엔 역시…… 평소의 이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날뛰어버릴지도.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 않은가? 내가 한 번 실종되었을 때…… 나는 피식 웃었다. 로시엔은 화를 잘 내는 편은 아니지만, 한 번 화가나면 거의 꼭지가 미쳐 도는 타입이었다. 그가 광분하는 모습은 아이에드조차 질린 표정을 짓게 만들곤 한다. 그래, 예전 '그 날'처럼…… 나는 끊임없이 떠오르는 기억들 속에 몸을 파묻었다. 문득, 웃음이 비죽이 흘러 나왔다. 문득, 그녀석 둘은 다 바보놈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런 생각에…… 쓴 미소가 머금어 진다. 그래, 바보놈들이다. 언제나 나를 위해서 많은 희생을 해온 바보 놈들. 자기네들이 아무리 그렇게 애써봤자 내가 고마워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면서도 전혀 그것에 연연하지 않는 바보놈들이다. 항상 미소를 짓고 있다. 항상 웃고 있다. 상 손을 내밀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언제나 이름만 부르면 달려와 주었다. 그랬던 존재들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나는 눈을 더 가늘게 치켜 떴다. 눈부신 햇살이 나를 마주했다. 마계에서는 볼 수 없는 따가운 햇살이다. "……칼레들린?" 문득, 카민의 조그마한 부름이 뒤흔들리는 상념속을 헤매고 있는 내 정신을 붙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실소했다. "왜." 내가 우수에 젖은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슬픔에 젖은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 감상에 젖어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카민은 왠일로 [칼]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애칭 대신 [칼레들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흐뭇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녀석 역시 나의 이 진지한 표정에 뭔가 심각함을 느끼고 이런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다. "……혹시 속 아파?" 하지만, 곧이어 튀어나온 카민의 말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나는 의아한 생각에 카민을 보았다. 대체 내 어디를 봐서 속이 아파보인다는 건가? 몽롱한 우수에 젖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보았던 내가…… 아파 보인 이유가 뭐냔 말이다. "전혀 안 아파."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런 거야?" 카민은 정말이지 궁금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점점 불쾌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내 표정이 어떤데." "벌레 씹은 것 같아." 나는 순간 울컥했다. "너 벌레 씹어봤냐?" 난 카민을 향해 조금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카민의 얼굴이 지나칠 정도로 일그러져 버렸다. 게다가 표정 역시 현저할 정도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럴 일이 있겠어? 내가 왜 벌레를 먹어!!" "그럼, 벌레 씹는 사람 본 적은 있어?" 나는 자뭇 진지한 표정으로 다른 것을 질문했다. 카민의 표정은 점점 더 황당함으로 치닫고 있었다. "……아니." 나는 그 대답에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먹어 본 적도 본 적도 없으면서 왜 내가 벌레를 씹는 표정을 짓는다고 말하는 거지?" 카민은 침묵했다. * * * * * * * * * * * * ―"일단 시장 안 쪽으로 들어가서 뭐라도 사 먹자. 살 것도 좀 있고."― "총각들!! 거기 가는 예쁜 총각들! 여기 와서 이것 좀 사세요!!" 나와 카민의 발걸음은 시장의 깊숙한 곳으로 향하고 있다. 나는 흥미가 담긴 눈으로 시장이라는 것을 샅샅히 훑어보았다. 인간들의 시장이라는 것에 관해서는 [인간들의 삶]에도 꽤나 자세하게 묘사가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그 감회가 남달랐다. 아까 카민이 혼자서 생쇼를 다한 그 식당의 시끄러움과도 비견될만한 소란스러움이 곳곳에 넘쳐흐르는 곳.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자리를 잡은 노점상인들이 저마다 목청이 떨어져라 소리를 지르며 손님을 끌어드리려 하고 있다. 따가운 햇살을 받아 땀을 비적비적 흘리면서도 손님 하나의 발길에 그들의 표정은 환하게 펴지고 만다. "거기 가는 총각!! 여기 와서 맛 좀 보시구랴.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 시장 안으로 점점 더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나와 카민을 붙잡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장에서는 꽤나 다채로운 냄새가 났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희미한 음식 냄새도 났고, 아이에드의 정원에서 언젠가 맡아본 듯한 꽃향기라는도 은은하게 풍기고 있었다. 조금 고약한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 본 시장이라는 곳은 그래도 괜찮은 이미지로 머리에 기억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총각, 총각! 여기 와서 이거 좀 사가요, 응?" "아줌마!! 새로 나온 옷 있어요. 좀 보고 가세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귀가 멍멍할 지경이다. 카민은 거침없이 시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움직이는 발길마다 많은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이 묻혀 든다. 시끌시끌한 시장 안에서, 사람들의 옷깃과 내 옷깃이 부딪힌다. 북적거리는 시장의 먼지가 코끝으로 스며든다. 나는 그 생기발랄함에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인간들은 참…… 이상한 구석이 있다. 뭐랄까…… 그들은…… 참으로…… "활동적이야." "뭐가?" 갑작스러운 내 한마디에 카민이 물어왔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활동적이다. 음습한 분위기까지는 아니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을 별로 달갑지 않아하는(그렇다고 방구석에 처박혀서 시간을 죽이는 걸 즐긴다는 의미는 아니다.)마족들과는 다르게 인간들은 매우 활발하다. 게다가 풍부한 표정들. 괜히 웃음이 나오는 것은…… 반쯤은 내가 저들과 같은 종류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후, 씁쓸한 생각만 계속 드는군. "그럼, 일단 말을 두 마리 사고……" 카민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에, 식량을 조금 사야겠군…… 나중에는 [세이테르]도 건너야 할 테니까 그것도 좀 준비하고…… 음음, 그리고 칼날도 새로 갈아야겠고…… 살 것 많군. 그러고 보니 옷도 사야겠다." "와아아아아아앗!!!!"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카민녀석이 일방적으로 떠들어댄 것도 대화의 일종이라면)움직이고 있던 때였다. 갑자기, 정말로 갑자기 바로 코앞에서 여러 사람들의 비명소리 같은 것이 터져 나왔다. 뭔가에 깜짝 놀란 듯, 아니면 감탄한 듯, 소란스럽다 못해 시끄러운 시장 안에서도 뚜렷이 울리는 엄청난 크기의 소리였다. 나는 그 엄청난 소리에 모르게 흠칫 멈춰섰다. 카민 역시 갑작스러운 그 비명소리에 놀란 듯, 뚝하고 멈춰 섰다. "우, 우왓!! 또 맞추셨다!!" 거의 발악하는 수준의 성량이었다. 어찌나 그 목소리들이 컸던지, 시장의 소란스러움을 단 번에 뒤집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뭐지?" 카민은 호기심이 동한 듯 그 비명소리가 나온 곳으로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고 나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조금 걷자, 어느 자리 엔가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선 것을 볼 수 있었다. 자그마한 원을 중심으로 그 바깥으로 몇 개의 원을 더 그려내며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구경하는 듯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들은 주위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신이 난 목소리로 뭔가를 떠들어 대고 있었다. "저, 정말이오? 내년엔 내가 정말 부자가 된단 말이오?" 커다란 목소리가 사람들의 동심원 안에서 울려 온다. 정말 귓가를 뚫을 듯 큰 목소리다. 거참, 목청 한 번 크네. 거의 카민과 맞먹을 정도다. 카민과 맞먹을 정도로 엄청난 목소리를 가진 인간은 정말이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칼, 우리 한 번 들어가 보자. 뭘 하길래 저렇게 시끄러운 거지?" 카민은 그 말과 함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더니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예전에도 말했듯이, 이놈은 정말이지 무지막지하게 힘이 세다. 녀석은 사람들을 밀치고 들어갔다. "……그럼, 그럼 나도 하나 물읍시다, 린. 내년엔 나 결혼은 할 수 있소?" 그리고 자리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둥글게 둘러싼 혼란스러운 시장바닥의 한가운데. 주위에는 시끄러운 사람들의 소음과 난잡한 걸음걸이들, 그리고 냄새들이 번지고 있었다. 시장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매우 시끄럽고 소박한 것이다. 물론 서민적인 냄새가 물씬난다. 그런데. 사람들의 틈 사이에 앉아 있는 사람만은 달랐다. 뭐랄까, 그 사람은 이 시장바닥에 서 있기엔 너무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아…… 점술가로군. 점을 보고 있던 중이었나봐. 점이 잘 맞아서 사람들이 고함을 친 것 같군." 카민이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점술가?" 내가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카민이 대답했다. "그래, 사람의 운명을 엿본다는." 나는 카민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앞을 보았다. 사람들 사이에 둘러 쌓인 채로 기괴한 모양의 카드를 섞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얇은 모포 한 장 위에 사뿐이 앉은 그 사람은 소녀라고 보기엔 나이가 많고, 그렇다고 처녀라고 부르기엔 나이가 어려 보이는 자였다. 20살쯤 되었을까. 어깨까지 출렁거리는 실버 브론드의 머리카락과 차분하게 가라앉은 진초록의 눈동자가 공허하게 보였다. 좀 특이한 것은 그녀의 옷차림이었다. 그녀는 둘러지듯 걸쳐진 하얀 터번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 간간이 붉은 구슬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20살 정도로 밖에 보여지지 않는 나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에게서는 왠지 모를 기품이 흐르고 있었다. "……아니오." 실버 브론드 머리카락의 여인은 한참 카드를 뒤적이더니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남자에게 대답했다. 구경을 하고 있던 자들이 모두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핫! 내년에도 장가 못 간단다∼ 불쌍한 칸!" "시끄러, 닥쳐!!" "흐흐흐…… 벌써 29년째 홀로 밤을 지새우고 있는 불쌍한 칸…… 내년에도 달덩이 같은 마누라 얻기는 틀렸구나. 우리 린 님은 단 한번도 틀려본 적이 없으니!" [결혼을 할 수 있나?]라는 질문에 너무나도 단호한 목소리로 점술가라는 여인이 [아니오]라고 대답하자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고 질문을 했던 남자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채로 화를 버럭버럭 냈다. 사람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저기 앉아 있는 여자가 꽤나 점을 잘 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조금 더 앞으로 걸어갔다. 카민도 내 뒤를 종종거리며 따라왔다. 나는 그녀가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위치에 섰다. 점을 본다는 것이 신기해 보였기에, 한 번 가까운데서 구경을 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카드에 손을 대고 있던 그녀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해왔다. "……당신들도 점을 보실 분들인가요." "엣?" 카민은 당황한 목소리를 흘렸고 나 역시 당황했다. 점을 볼 생각 같은 건 없었거니와 또 갑자기 이 여자가 고개를 돌리는 것 때문에 당황하기도 했다. "……." 그 때, 나는 뭔가 묘한 향기가 내 코를 자극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한참 코를 킁킁거리던 끝에야, 그 냄새가 아이에드의 정원에 피어있던 백합의 향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향기의 근원지는…… 점을 보고 있던 그녀였다. "당신들도 점을 보실 분들인가요?" 그녀가 다시 한 번 내 눈을 마주보며 질문을 던졌다. 깊지만 허무한, 그리고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진초록 눈동자가 내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응." -------------------------------------------------------------------------------- Back : 3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4 (written by 카르민) Next : 3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2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3388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9th September 2001 15:17:38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8-09-2001 21:07 Line : 221 Read : 413 [36]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4 -------------------------------------------------------------------------------- -------------------------------------------------------------------------------- Ip address : 61.76.127.3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좋습니다. 한 분이 보시는데 5실버입니다." 그 여자가 나를 보며 무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순간, 고개를 갸웃하며 뭔가 불만섞인 표정을 짓고 있던 카민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5, 5실버요?" 카민의 화들짝 놀란 듯한 목소리가 우습게 보였는지, 그녀를 둥글게 감싼 채로 서 있던 자들이 와하하하핫, 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린에게 점을 보는데 5실버면 싼 거야!" "린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거든!" "그럼 그럼." 사람들은 하나 같이 린이라는 여자의 점괘가 신통하다는데 의견의 합일점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더욱더 흥미가 당기는 것을 느끼며 카민 쪽을 보곤 살짝 웃었다. 그러나 카민은 그런 내 표정을 무시하듯, 고개를 휙휙 저어댔다. "너무 비싸." "시끄러워. 어서 돈 내." 나는 카민의 말을 완벽하게 무시하며 뱉어냈다. 카민의 얼굴 위로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씨익 웃곤 말했다. "나와 이녀석, 둘 다 볼 거다. 10실버면 되지?" "……네." 린이라는 여자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창백하리만치 파리한 얼굴이 보였다. 실버 브론드의 하늘하늘한 머리카락 아래로 드리워진 린의 얼굴은 그다지 예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못생긴 얼굴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평범한 얼굴이었다. 심할 정도로 평범한 얼굴. 저 얼굴은 한 번 보고 난 뒤에는 절대로 기억을 못할 것이다. 왜냐? 너무 평범하니까. 수십, 수백 번을 본다해도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이미지를 형상화 시키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봐, 칼! 네 멋대로……!" 카민은 내가 점을 보는 것을 마음대로 결정해버렸다는 것에 광분한 듯 고함을 질렀지만, 그녀는 이미 조용한 눈빛으로 카드를 펼치곤 그것을 섞고 있었다. 카민은 이를 부득 갈았다. "……제길." 카민은 품속을 뒤적 뒤적거리더니 은색의 돈을 몇 개 꺼냈다. 나는 햇빛에 반사되어 은빛으로 빛나는 그 동그란 것을 보며 감탄했다. 호오, 저게 돈이라는 거로군. 나는 그 돈이라는 것을 뚫어지게 보았다. [인간들의 삶]에 따르면, 인간에게 있어 돈은 매우 귀중한 것이라고 했다. 맛있는 것도, 멋진 것도, 같고 싶은 것은 모두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누가 먼저 보실 건가요?" 거의 존재감이 없는 목소리였다. 외모와 마찬가지로, 이 린이라는 여자는 목소리조차 매우 평범했다. 카민은 가벼운 발걸음을 움직여 린이라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녀가 앉아있는 얇은 모포자락을 카민은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린은 말했다. "앉으세요." 카민은 고개를 끄덕이곤 철푸덕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앉았다. 녀석은 꺼내 놓았던 은빛의 그 돈을 린의 앞에 놓았다. "제가 먼저 보겠습니다." 린이라는 여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관람객들은 사람들은 또랑또랑한 눈동자로 카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 오늘 시선 한 번 많이 받는구만. "……당신의 운명을 엿보고자 합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린이 평범한 어조로 물었다. 카민은 아무 생각 없는 듯한 표정(늘 아무 생각이 없는 녀석이지만)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린은 그런 카민을 보고 있다가 살짝 눈을 감았다. 그리고 5초 가까이 침묵을 지켰다. 사람들은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그런 린을 보고 있었다. "후우, 린이 명상을 하고 있어." "쉿, 쉬잇. 방해하면 안돼. 명상하다고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큰일난다고 하잖아." 사람들이 말을 주거니받거니 하고 있는데, 린이 눈을 가볍게 떴다. 그녀는 천천히 카드를 오른손으로 집어 들었다. 그것을 아주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착각일까? 순간적으로 그 여자의 손이 반짝인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 린은 카민의 손을 카드에 잠시 얹게 하더니 그것을 조용히 섞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 위에 들린 카드는 모두 18장이었다. 린은 매우 묘한 동작으로 카드를 섞어 나갔다. 그리고 그 카드가 골고루 잘 섞였다고 생각될 만큼 카드를 만지작 거린 린은 카드를 섞던 손을 멈추었다. 그녀는 조용히 18장 중 위의 것 3개, 밑의 것 3개 모두 6개를 뽑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시 한 번 섞은 다음, 바닥에 펼쳐놓았다. 일단, 2장을 맨 위에 놓고 그 옆에 두 장을 놓았다. 그리고 맨 밑에도 두 장을 놓았다. 호오, 뭘하려는 거지? 린은 잠시 카민을 살피더니 말했다. "기본적으로 당신의 일생을 크게 세 방향으로 살펴보는 점입니다. 맨 위에 두 장은 당신의 과거를, 그리고 다음 두 장은 당신의 현재 내지는 가까운 미래, 혹은 가까운 과거를, 마지막 두 장은 당신의 먼 미래를 나타냅니다." 그 말과 함께 린은 맨 위에 놓여 있던 카드를 가볍게 뒤집었다. 첫 장에 나타난 것은 매우 기묘한 모양의 남자였는데, 온 몸이 포박당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때, 린이 말했다. "저 쪽으로 가주십시오. 정신이 집중 되질 않습니다." 이, 이런 제길!! 나는 조용히 뱉어내는 그녀의 말에 너무나도 쪽이 팔려 푸다다닥 뒤로 물러섰다. 사람들은 그러나 나를 비웃거나 하지 않았다. 모두들 린의 입술에서 저 카드에 대한 해석으로 어떤 것이 나올지를 기다리느라 내게 관심부터를 보내지 않고 있얶기 때문이다. 린은 카드를 힐끔 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포박 당한 남자」 는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이자 누군가에게 해악을 끼치는 존재. 또는 누군가에게 위협을 받는 존재. 축복 받지 못한 탄생과 고난, 시련, 아픔, 자책을 의미합니다." 순간, 얌전히 보고 있던 카민의 미간이 꿈틀했다. 그는 뭔가 들어서는 안될 것을 들은 사람같은 표정을 짓더니 후욱,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축복받지 못한 탄생과…… 고난? 시련? 아픔? 자책? 뭐야, 왜 하필이면 다 안 좋은 것들 밖에 없는 거지? 내가 의아함을 느끼고 있는데, 다시 카드가 뒤집어졌다. 이번 것은 좀 좋은 카드인 성 싶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애가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에…… 양손 가득 꽃을 들었다. 뭐야, 꼭 나스같이 생겼네. 나는 괜히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분명하다. 이번 카드는 좋은 카드야. "……「소녀」카드는 풍요로움과 사랑, 기쁨, 찬양을 상징합니다." 거봐, 좋은 카드일 줄 알았다니까. 나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당신의 카드는 반대로 뒤집혀 있군요. 빈곤함과 미움, 슬픔, 저주를 상징합니다." 컥, 커억. 나는 린의 입에서 나온 말에 잠시 휘청거렸다. 뭐, 뭐라고? 그럼 저게 좋은 카드가 아니라는 거야? 얼핏 봐도 나스라는 분위기가 물씬 나는 카드가 카민에게 좋은 카드가 아니라니. "맞습니까? 당신의 과거를 한마디로 단정지을 순 없겠지만, 요약할 순 있겠군요. 당신의 과거는 꽤나 「불행」했군요." 카민은 아릿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뭐, 대충은 맞는 듯 하군요." 카민의 말에 린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잠시 카민의 무거운 분위기에 머뭇머뭇거렸으나 곧 와아, 라고 소리를 쳤다. 카민이 [점의 결과가 맞다]고 하자 괜히 또 신이 난 모양이었다. 린은 이어서 옆에 있던 카드를 뒤집었다. [현재]와 [가까운 미래] 혹은 [가까운 과거]를 상징하는 카드라고 했던가. 린은 그 중 한 장을 뒤집었다. 그 다음 카드는 고양이 두 마리가 엉켜 있는 모습이었는데, 한 마리는 검은 고양이고 한 마리는 흰 고양이었다. "「루나」입니다. 가까운 시일에 소중한 사람을 잃거나, 이미 잃었을 수 있습니다. 대신 새 사람을 하나 얻습니다." 나는 린의 말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중한 사람…… 그건 나스를 말하는 것일거고, 새 사람은 나를 말하는 게 아닐까? 카민 역시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것 같네요." "거봐 거봐, 린의 카드는 정확하다니까!" "린이 틀린 적은 한 번도 없지, 암!" 사람들은 또다시 린을 추켜 세워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카민은 머리를 긁적거렸고, 린은 다시 손을 뻗어 카드를 뒤집었다. 이번 것은 검은 얼룩 같은 것이 번져 있는 듯한 카드였는데, 그 검은 얼룩이 기묘한 검 같은 것을 들고 있는 듯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검 위에는 굵은 밧줄이 하나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하여튼 기묘한 카드였다. "……「사신」입니다. 당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일로 인한 인과율로 생명이 위험할 일이 있습니다. 조심하셔야겠군요." "아, 그, 그렇군요." 린은 카민의 어리버리한 말을 듣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 핏기도 없어 보이는 하얀 손을 마지막 두 장의 카드가 있는 [미래 카드]쪽으로 갖다대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카민은 그 손을 저지했다. "아, 잠깐만요." "……?" 린은 의아한 표정으로 카민을 보았다. 카민은 싱긋 웃었다. "나머지 장은 뒤집지 말아요. 필요 없으니까." "네?" 린의, 조금은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카민은 깊게 미소를 베어물었다. "미래까지 카드로 보고 싶진 않거든요." 그 말과 함께 카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당황한 듯 저희들끼리 웅성거렸으나 정작 당사자인 카민과 린은 무덤덤했다. 특히나 린은,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다음 상대를 부르기까지 했다. "……그럼, 다음 분 오세요."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채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그 여자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내가 특별히 운명 같은 것을 믿는 것도 아니었고, 또 반쪽이라고는 하지만 운명이 없는 [마족]이다, 하지만 왠지 흥미로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아까 카민이 앉았던 곳에 앉았다. "……." 린은 아무 말도 없이 카드를 내밀어 내 손을 카드에 얹게 하더니, 곧 아까 전과 같은 과정으로 섞었다. 곧, 여섯장의 카드가 나란히 놓여졌다. 그녀는 [과거란]에 놓여져 있는 한 장을 뒤집었다. 그런데 그 카드를 뒤집은 순간,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움찔했다. 왜, 왜 저러지? 뭐, 뭔가 안 좋은 것이 나온건가? 나는 그녀를 흘끔 흘끔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펴 본 카드를 그대로 팍, 하고 엎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더더구나 당황했다. 구경하던 사람들과 카민도 당황한 표정으로 이 쪽을 주시해왔다. "이봐, 뭐하는 거지? 점을 안 보는건가?" 나는 의아한 목소리로 린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녀에게서 나온 말은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린은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내게 물었다. "다, 당신…… 몇 살이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내 나이를 말하려고 했다. "열……" 하지만 막상 말을 하려는 순간, 나는 퍼뜩 카민의 시선을 느꼈다. 나는 헙,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다물었다. 그래!! 절대로 말하면 안된다. 카민놈이 19이라 하지 않았던가! 으으, 여기서 나이를 밝혀서 내가 저 놈보다 1살 더 어리다는 사실을 광고할 필요는 없다. "……꼭 밝혀야 하나?" 내 질문에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린은 자신이 뒤집어 놓았던 카드를 약간 떨리는 손끝으로 돌려 놓았다. 나는 뒤집혀진 카드를 보면서 조금 놀랐다. 그것은 아까 카민의 카드에도 나왔던 카드였다. 검은 무엇인가가 짓밟혀진 듯한 모습으로 깔려져 있고, 위에는 검 하나. 그리고 검 위에는 커다란 밧줄 하나. "……첫번째 카드는…… 보시다시피「사신」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원래 [과거]에서 사신카드가 나온다면…… 그것도 정면으로 보고 선 사신의 카드가 나오면……" 린은 그 말과 함께 내 눈을 흘끔 보더니 대답했다. "……그 이상 카드 점을 치지 않습니다." "에엑?" 나는 당황함에 고함을 쳤다. --------------------------------------- 안녕하세요∼ 카르민입니다; ㅇ_ㅇ;;; 최근 몸이 안 좋습니다.. 뭐랄까.. 몸살기인가.. 아님... 하여튼 목이 다 잠겨버렸어요. 우흑우흑... 아픕니다. 아파요. 사실은 오늘 5연참 정도 해버릴 생각이었는데...-_-;; 문득 제 걱정을 해주신 분이 생각나네요. 연참을 원하지만 힘드시다면 건강도 생각해서... 뭐연참해주시지 않아도 돼요. 라고 하신분. ^ㅁ^그 마음에 감사를∼ 그리고...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당분간은 연참을 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쿨럭쿨럭... 거기 못믿으시는분.. 정말이라니까요;;; 시험 되면 한동안 못쓰니까.. 그것에 대한 속죄랄까.. 미리 면죄부 마련해놓겠다는 얍쌉한 심보입니다. 그리고.......;;; 제가 요즘 집에 늦게 와서 글이 늦게 업뎃 될 것 같거든요. 토, 일을 제외하면 9시가 넘어서야 업뎃이 될 것 같으니... 참고하시길∼^_^ 그리고.. 시간이 되면 내일 오후 쯤... 몇 편 더 올릴게요. 읽어주시는 여러분 감사하구요.. 감상 or 응원 or비평 멜... 언제나 환영입니다.. 카르민은 굶주려 있어요...ㅠㅁㅠ 언제나 그 얼굴에 웃음이 머물기를.... -허접허접 카르민입니다. -------------------------------------------------------------------------------- Next : 3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3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3388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9th September 2001 15:17:47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9-09-2001 21:10 Line : 240 Read : 840 [37]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5 -------------------------------------------------------------------------------- -------------------------------------------------------------------------------- Ip address : 61.76.127.72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뭐야, 왜 점을 쳐주지 않겠다는 거지?" 내 외침에 린이라는 여자는 조용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나올 수 없는 점괘가 나온 것으로 봐선……제 예지력이 오늘은 다 바닥난 듯 합니다. 정 점을 치고 싶으시다면 내일 다시 오십시오. 저는 언제든 이 자리에 있으니, 언제 오시든 상관없습니다." 린은 그 말과 함께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조금 긴장한 듯한 얼굴로 내 눈을 한 번 힐끔 보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정말이지 기분이 나빠졌다. 제길, 지금 장난 하냐? 뭐하는 짓이야? 뭐? 정면으로 보고선 사신 카드가 과거란에 나오면 점을 안 친다고? 대체 왜!! "허허, 이상한 일이네. 린은 카드 점을 치는 도중에 그만두는 일은 절대 없는 앤데." 사람들은 조용히 카드를 품속에 집어넣는 린을 보며 숙덕거렸다. 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앉아있던 모포를 착착 접더니 보자기 속에 넣어 둘둘 말았다. 정리를 하는 듯 했는데, 사람들은 모두 그런 린을 보며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러게요, 혹시…… 저 사람한테는 카드 점을 쳐주기 싫었던 게 아닐까?" 빠직. 나는 이마에 힘줄이 하나 돋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호오, 그거 가능성 있는 말일세." "예,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뒤에서 사람들의 수근거림은 끊임없이 들려왔고 내 기분은 더더욱 나빠졌다. * * * * * * * * * * * "칼, 기분 좀 풀어." 카민의 말에도 나는 그 어떤 대꾸를 해주지 않았다. 카민은 내가 기분이 잔뜩 상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일정은 내일로 바꾸자고 말해주었다. 나는 정말 오래간만에 카민의 배려에 감사하며 쓰게 웃었다. 우리는 시장에서 돌아와 줄줄이 들어선 여관거리로 갔다. 그리고, 허름하게 늘어선 싸구려 여관동네에서도 가장 초라한 [베루의 여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관집에 들어섰다. 대충 방을 잡은 우리들은 방안에 놓여 있는 침대를 발견하자마자 몸을 누인 채로 잠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카민의 집에서 떠난 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편안한 잠자리였다. 나는 노곤한 몸을 녹이며 생각했다. 내가 있던 마계는 생각해보면 꽤나 편안한 곳이었다고. 그리고 그 밤, 나는 오랜만에 아이에드와 로시엔의 꿈을 꾸었다. 제 9장: 나의 운명은……? "……이상한 꿈을 꿔버렸어." 나는 눈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내 말에 막 세수를 마치고 돌아왔는지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 있던 카민이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꿈인데 그래?" 나는 카민의 말에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하게 대답했다. "……로시엔이 죽는 꿈을 꿨어." "에?" 카민이 의아한 목소리로 묻고 [그게 뭔 말이야?]라고 묻는 듯한 표정을 보내 왔지만, 나는 대답을 할 정신이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아아, 정말이지 이상한 꿈이었다. 나는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이건 정말이지 재수가 없어도 너무 재수가 없는 꿈이었다. 어제 밤의 꿈은…… 이상하게도 불길했고 또 이상하게 생생한 꿈이었다. 깨어나기 직전까지, 꿈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어제밤 꿈에서는 로시엔과 아이에드가 등장했다. 로시엔은 오른편에, 아이에드는 나의 왼편에 서 있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로시엔과 아이에드의 이름을 불렀다. 컴컴한 공간 아래, 둘은 미소짓고 있었다. 내가 막 녀석들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찰나였다. 쾅쾅!! 갑자기 들려온 귀를 찢어버릴 듯한 요란한 굉음과 함께 생전 처음 보는 기다란 창날이 눈앞에 등장했다. 뭐라고 외칠새도 없이 날카로운 그것은 그대로 로시엔의 등뒤를 관통했다. 경악으로 커진 눈동자 사이로, 로시엔은 온 몸에서 엄청난 피보라를 뿜어 냈다. 그리고, 나는 잠에서 깼다. "……." 나는 선명하게 떠오르는 지난 밤 꿈에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아아. 그래, 꿈일 뿐이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회상하고 있는 거지? 나는 오른손을 들어 내 뺨을 찰싹찰싹 때려보았다. 그래, 꿈이야 꿈.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냐구!! 나는 침대에서 가볍게 일어섰다. 그리고 대충 쓸어 넘겼던 내 기다란 머리카락을 꼼꼼히 정리한 다음(아무리 잘생겼더라도 꾸준한 관리는 필수다)얼굴을 씻었다. 카민은 아직도 으아아아아암∼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나는 대충 얼굴을 닦은 후 카민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어이, 우리 어제 거기 가자." 카민은 갑작스러운 내 말에 당황한 듯, 한참만에야 대답해왔다. "에? 아, 어제 그, 시장에?" 나는 카민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카민은 인상을 찌푸리곤 말했다. "이봐, 칼. 분명 그…… 린이라는 여자의 점은 잘 맞는 것 같았지만 말이야……" "잔말 말고 빨리 먹고 나가자." 내 일방적인 어조에, 카민은 조금 화가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 칼. 이건 대체 누가 누구한테 고용 된 거야, 엉?" 카민은 짐짓 화가 난 것을 티내려는 듯 허리에 손을 올리며 거친 어조로 말했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은 내게 전∼ 혀 위협이 되지를 못했다. 나는 입꼬리를 쓰윽 올리며 웃었다. "나는 너한테 용병으로 고용됐고, 너는 나한테 가정부로 고용됐어. 이제 됐냐?" "……." 카민은 한 방 먹었다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녀석을 향해 피식 웃어봐 준 다음 방문을 열었다. 카민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내 뒤를 따라왔다. * * * * * * * * * * 거의 걸신들린 듯이 음식을 먹어치우고(왜 우리는…… 아니아니, 카민은 언제나 음식을 이런 식으로 먹는 걸까.)우리는 시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지런한 이 마을 사람들은 분주한 손놀림으로 다시 하루의 장사를 시작하려고 한다. 나는 그런 그들을 잽싸게 지나치며 그 여자가 어제 앉아서 점을 보던 곳으로 달려갔다. 카민은 한숨을 푸욱 들이 마시면서 어깨에 힘을 쭉 뺀 채 줄레줄레 걸어오고 있었다. "야아야아, 왜 그렇게 힘이 빠져 있어?" "너 같으면 힘이 안 빠져 있겠냐." "……그러니까 왜 힘이 빠져 있냐고." "5실버라는 엄청난 돈을 또 내야 하잖아!!" 버럭하고 고함을 치는 카민을 보면서……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녀석, 의외로 좀생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튀어나온 카민의 말에 나는 조금 놀라야만 했다. "이봐 칼. 5실버라면 말이지 거의 10일치 여관비랑 맞먹는 돈이란 말이야." "에엑?" "……아무리 신통방통한 점이라곤 해도 5실버라면 너무 비싸." 카민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고 나는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하지만, 나로서는 흥미가 당시는 것이 사실이었다. 카민의 과거와 현재를 아주 가볍게 떠올렸던 그 여자. 정말이지 놀랍지 않은가? 게다가…… 게다가 정면으로 보고선 사신 카드가 나오면 그 이상 점을 치지 않는다니? 모든 것이 궁금해진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는 않지만 어제 저녁 꾼 그 꿈도…… "다 왔다, 칼. 저기 있네." 카민은 손을 들어 어제 우리가 서 있었던 그 곳을 가리켰다. [언제든 오십시오]라고 말한 그녀답게, 그녀는 아직 시간이 이름에도 불구하고 꼿꼿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흐음." 나는 조용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직 햇살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녀는 실버 브론드의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내린 채로, 어제 앉았던 그 얇은 모포 자락에 앉아 있었다. 이 여자…… 점 한 번에 5실버를 받는데다가, 그 5실버라는 돈이 10일치 여관비랑 맞먹을 정도라면 점 집 정도는 차릴 돈을 마련했을 텐데…… 왜 저런 모포 자락 위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것일까. 나는 조금 의아한 기분을 느끼며 그녀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과연 점을 잘 보기로 유명한 여자라서 그런 것인지, 그녀의 앞에는 오늘도 손님인 듯 보이는 남자들이 다섯이나 서 있었다. 나는 카민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체에에엣." 카민은 쳇이라는 한마디를 길게, 아주 길게 늘여 자신의 불만을 있는 대로 표현한 다음 품을 뒤적거려 5실버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깊은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휙 낚아챘고, 카민은 사탕을 뺏긴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징그러우니까 그런 표정 짓지마!! 나 정도의 미모가 되야 그런 표정을 지어도 귀엽지!) 나는 총총걸음으로 린 쪽으로 갔다. 그녀는 눈을 차분히 깔고 있었고, 그녀의 앞에는 검은 색 옷을 입은 남자 다섯이 나란히 서 있었다. 나는 다가갔다. "왜 안 내는 거요?" 그런데 이상했다. "……왜 제가 돈을 내야 하는 건가요?" "여기서 장사를 해먹고 있지 않소!! 지금 장난하는 거요?" 아무리 봐도 점을 보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다. 보통 자신의 미래를 보기 위해 치는 점을 보는 사람들이라면 두 눈을 초롱초롱, 기대로 빛낸 채로 점술가의 눈을 바라보기 마련이다. 그리고 말투는 더 없이 조심스럽겠지. 조금이라도 좋은 말을 해주길 바라면서. 하지만, 린의 앞에 서 있는 이 다섯 녀석들은 전혀 그런 분위기를 보이고 있지 않았다. 옷들은 하나 같이 다 검은 색 칠갑이고, 눈은 사납게 번뜩거리고(쿨럭! 난 저렇게 찢어진 눈이 정말로 싫다!)그리고 말투 역시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는 것이…… "저는 제 [예언력]으로 먹고사는 겁니다. 왜 제가 당신들에게 돈을 내야 하는 겁니까." 그리고, 한없이 공허한 저 진초록 눈동자로 무뚝뚝하게 묻고 있는 린에게 있는 인상 없는 인상 다 긋고 있는 걸로 보아…… "자릿세 내라고 협박 중이군." 뒤에서 카민이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휙 소리나게 카민을 돌아보았다. 카민은 씨익 웃었다. "칼은 [유명한 집안 사람]이라고 했으니 저런걸 본적이 없겠구나?" ……이놈, 정말이지 둔한 놈이군. 내가 아무리 귀티 나게 생겼고, 아무리 귀티 나는 행동을 하긴 하지만 설마 아직까지 나를 유명한 집안 사람이라고 단정짓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는데. 네녀석의 둔함에 박수를 보낸다. 카민은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린의 힐끔 바라본 후 설명을 시작했다. "시장에서는 일명 [자릿세]라는 게 있어. 시장은 원래 공통소유고, 당연히 노점 상인들은 이 곳에서 자유롭게 물건을 팔 권리가 있어. 하지만, 가끔 썩은 귀족 나부랭이들이나 근처에 한다하는 깡패 놈들이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대신 돈을 내라고 협박하는 경우가 있어. 시장의 땅은 자기 것이니, 장사를 하려면 허락을 받은 다음 돈을 내라, 이 말이지." 카민의 말에 나는 눈썹이 꿈틀함을 느꼈다. 분명 장사를 할 자유가 있는데, 돈을 내야 한다라? 카민은 피식 웃으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일단 가보자구." 나는 고개를 끄덕거린 후 린 쪽으로 다가갔다. "이게 장난하는 거냐? 여긴 우리 구역이야. 여기서 장사를 하려면 돈을 내야지!! 장사도 잘 된다고 들었는데 고작 10골드를 못 낸단 말이야?"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오자, 주위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상인들은 주섬주섬 짐을 싸더니 먼 곳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카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악질이군. 10골드면 1000실버인데…… 자릿세를 그렇게나……" 카민의 말에 나는 걸음걸이를 크게 해서 그자들의 앞으로 갔다. 카민도 내 뒤를 쪼르르 따라왔다. 차분한 린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점 보러 왔어." 나는 다섯명의 남자들에게 둘러 쌓여 있는 린에게 짧고 간결하게 말했다. 린은 잠시 나를 보는 눈치 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말과 함께 린은 몸을 살짝 일으켰다. 그리고 다섯명의 남자들을 향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저는 돈을 낼 의무가 없으니, 이만 가주시죠. 이카루 법전 어디에도, 시장에서 일을 하는데 자릿세를 내야한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린의 말은 똑바르고,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정확했다. 그러나 다섯명의 이 남자들은 그런 린의 말을 완벽하게 무시했다. "뭐? 의무가 없어?" 한 녀석이 인상을 찌푸리는 것 같더니, 다른 녀석이 발로 린이 얌전히 앉아 있던 모포 자락을 찌익, 하고 찢었다. 더러운 흙이 묻은 신발로 모포 위를 몇 번이나 문질거린다. "돈이 없다면 다른 걸로라도 갚아야 할 거 아냐, 엉!" 쳇, 이놈들은 나를 괴롭혀 대던 그 악질적인 쓰레기 마족들과 동류인 놈들이군.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고 말씀하셔도 드릴 돈은 없습니다." 린이 차분하게 뱉어내자, 한 남자가 내 앞을 슥 지나가더니 린의 하얀 손목을 휙 하고 부여잡았다. 워낙에 창백한 린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그래? 돈이 없다면 딴 것으로 갚아도 돼." "……쓰레기 같은 자식들." 내가 막 주먹을 들려 하는 때였다. 난데없이 카민이 흥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외치더니, 린의 손목을 부여 잡고 있는 놈 쪽으로 재빠르게 파고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퍼억!! 카민의 오른손이 그놈의 복부에서 작렬했다. "쿨럭!" 녀석은 카민의 주먹에서 오는 그 엄청난 통증(카민놈은 그 여리여리한 몸과는 달리 정말 힘이 세다)에 순간적으로 린의 팔목을 놓쳤다. 린은 후다닥 물러났다. 그녀는 조금 인상을 찌푸린 채로 카민을 보았다. 녀석들은 갑자기 등장한 카민이라는 존재에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표정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이 상황 파악 못하는 놈들은 카민 쪽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 하지만 이 번에 달려들었던 녀석들은 카민의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다. 나는 한 번 눈을 쫙하고 내리 깐 후(후후,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어떤 여자도 반해버릴테지. 크캇캇)주먹을 들어올렸다. 나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는 녀석에게 가까이 간 후, 선두에 오던 녀석의 면상을 향해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커억!" 쫙! 나는 그 다음으로 몸을 돌려 다음 녀석의 복부를 발로 걷어찼고, 이윽고 뒤에서 달려오는 놈을 몸을 틀어 살짝 피한 후 허리를 팔꿈치로 강하게 내리쳤다. 녀석은 컥,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축 내려뜨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다음 카민을 보고 씩 웃었다. 카민은 어설프게 따라 웃었다. "이…… 이 새끼가!!" 언어순화 좀 하시지. 나는 내 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는 한 놈을 본 후, 가볍게 몸 전체를 왼쪽으로 꺾었다. 팔꿈치를 있는 힘껏 뒤로 젖힌 다음, 나는 달려오는 놈의 명치에 그것을 그대로 내다 꽂았다. "커억!!" 다른 녀석들은 가볍게 건들여 준 수준이었다면, 이 녀석은 정통으로 맞았다. 녀석은 쿨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윽고 몸을 휘청하더니 땅을 뒹굴었다. 내게 몇 대 맞아서 잠시 땅에 널부러져 있던 놈들은 그 모습을 보더니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명치를 얻어맞은 녀석쪽으로 후다닥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 이봐. 야!! 야!! 괘, 괜찮은 거냐?" "챠린! 챠린!! 이봐!! 정신 좀 차려봐!!" 자신들도 꽤나 아파하는 주제에 그래도 동료하고, 녀석들은 챠린이라는 놈 주위를 둥글게 둘러싼 채로 외쳐대고 있다. 나는 그런 그들을 싸늘한 눈으로 한참 노려보았다. 계속 챠린이라는 놈에게 뭐라고 말을 붙이고 있던 놈들은 내 그 싸늘한 눈을 의식했는지 흠칫하더니 곧 그 놈을 업고 저 멀리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씨익 웃었다. 흐흐흐, 방금전에 나 꽤 멋있지 않았나? -------------------------------------------------------------------------------- Back : 3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6 (written by 카르민) Next : 3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4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30349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15th September 2001 17:21:51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9-09-2001 21:22 Line : 267 Read : 1014 [38]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6 -------------------------------------------------------------------------------- 저렴한 가격, 자연스러운 향취 - 에스쁘아 샤워 퍼퓸 - 13,000 원 -------------------------------------------------------------------------------- Ip address : 61.83.23.12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앉으시죠." "……응?" "앉으시라구요." 나는 조금 당황했다. 방금 같은 상황이었다면, 적어도 정상적인 사람으로서는 이렇게 말해야 옳다. '고맙습니다.' 라고. 하지만 이 린이라는 여자는 고맙다는 말은커녕 놀란 표정도, 심지어는 조금의 감정 변화도 나타나지 않은 채로 태연하게 말을 건넬 뿐이었다. "앉으세요." 카민 역시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주섬주섬 모포 위에 앉았다. 모포자락은 더러웠지만 그런 것은 별로 신경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잠시 그 린이라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마계 같은 경우, 방금 전에 내가 한 행위는 실례가 된다. 자신에게 싸움을 건 녀석을 대신 해치워주는 놈은 [감사의 상대]가 아니라 [짜증의 상대]가 된다. "이 자식아!! 누가 너더러 저 놈 엎으라구 그랬어!! 오늘은 몸 좀 풀어볼까 했는데!! 네가 대신 맞아!!" ……이렇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고 하지 않았던가. [인간들의 삶] 제 22장 3목록 [인간과 마족의 특별한 차이점]란에 보면…… 이런 점도 아주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그게 아니었나? "어제…… 제가 당신을 쫓아내는 셈이 돼서 죄송합니다. 오늘은 똑바로 점을 치기로 하죠." 린은 그 말과 함께 내게 다시 손을 내밀게 했다. 나는 머리를 긁적거린 후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내 손이 닿은 카드를 조심스럽게 섞어 내리기 시작했다. 카민은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점보기 싫다고 한 놈이 누구였더라)그 모습을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카민이 한참을 보고 있는데, 린이 조용히 말했다. "정신 집중이 안됩니다. 그만 좀 보십시오." 쿡쿡쿡. 어제 나와 같은 지적을 받는군. "아, 예, 예." 카민은 얼굴이 벌개져선 린 쪽에서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린은 카드를 골고루 섞은 후 다시 2장씩 나란히 놓았다. 그리고, 과거란의 한 장을 살짝 뒤집었다. "……!" 그런데. 이번에도 이 여자의 반응이 지극히 좋지 않았다. 뭐랄까, 흡사 못볼꼴을 본 사람 같기도 했고, 예상하지 못한 일을 갑작스럽게 겪어 굉장한 쇼크를 받은 사람 같기도 했다. 나는 움찔했다. 서, 설마…… 또, 또 안 좋은 게 나온 건가? "……." 한참을 그런 표정을 짓고 있던 린이 그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입을 연 것은, 내 불안함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던 때였다. "절대로 나와서는 안될 카드가 나왔습니다. 제 예지력이 바닥난 것이 아닌지 또 의심이 되는군요. 손님, 어제와 같은「사신」카드입니다." 린은, 묵묵히 카드를 뒤집었다. 그 카드 안에는 어제 내가 보았던 그 사신이라는 이름의 카드가 들려 있었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린을 보았다. 카민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눈을 똘망 똘망 하게 뜨고 린을 보고 있었다. "[과거란], 그것도 맨 처음 카드에 나오는 카드는 한가지를 의미합니다. 지금 점을 치고 있는 상대의 운명은 이미 끝났다. 즉, 점을 치고 있는 자의 인생이 이미 다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 나와 카민은 하나같이 얼굴에 물음표를 띈채로 그녀를 보았다. 그래, 우리 무식하다. "이미 죽었다는 말입니다." [모르겠으니 설명 좀 해봐요]라는 얼굴을 들이대는 우리를 보면서, 린은 조용히 말했다. "에, 에엣?" 나는 당황한 얼굴로 린을 보았다. 린은 살풋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사신」카드는 과거란 첫 번째 장에서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제가 카드 점을 봐온 것이 정확히 15년째지만, 단 한 번도 이런 경우는 없었습니다." "무, 무슨 말이예요?" 카민 역시 당황한 얼굴로 린을 보았다. 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이 카드가 나오는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운명의 소유자인 당사자가 이미 죽은 경우. 하지만, 당신은 이렇게나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 그럴 리는 없겠군요. 그러면 두 번째가 해당되나요? 18장의 [루네스]카드로는 당신의 운명을 엿볼 수 없는 경우, 첫 장에 사신 카드가 등장합니다." 내 운명을 18장의 카드로는 엿볼 수 없다라? 아, 혹시 그 말은 내게 운명이 없다는 말로 해석해도 되는건가? 그렇잖아. 마족은 운명이 없으니. "……." 린은 한 참 말없이 나를 보았다. 그리고 힐끔 카민 쪽을 돌아 본 그녀는 내게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따라오시겠어요?" "응?" "……18장의 카드로도 점을 칠 수 없는 자, 혹은 조금 더 자세한 운명을 엿보길 원하는 자들을 위해 또다른 카드점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나는 힐끔 카민을 보았다. 카민은 왠일인지 좋을대로 해, 라고 입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건 얼만데요?" 문득 카민이 물었다. 린은 대답했다. "20실버입니다." "으악!!" 카민은 기겁해서 고함을 쳤다. "비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린이 물어왔다. 카민은 거의 발악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린이 차갑게 말했다. "그럼 보지 마세요." "……." "……." 나는 카민을 빤히 보았다. 카민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없지." 나는 베실 웃었다. 카민은 징그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런 나를 때렸다.(이 짜식이!! 내 귀여운 표정을 보고 저런 짓을!!) 그런데 다음 순간, 린이 또 다른 주문을 했다. 정답게 놀고 있는(?)나와 카민을 향해, "그리고, 이 점은 오로지 당사자만이 볼 수 있으니 당신만 저를 따라오셔야 합니다. 동료분은 이 곳에서 기다리세요." 나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에, 엣?" 카민은 기가 막히다는 어조로 엣을 외쳐댔지만, 린은 전혀 동요하지 않은 어조로 내게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따라오세요." * * * * * * * * * * * 린의 집이라는 곳은 꽤나 가까웠다. 그녀는 [점성술사]하면 흔히 연상되는 조금은 기괴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집에서 살고…… ……있지는 않았다. 시장에서 조금만 걸어나가니 알록달록한 색의 지붕을 가진 가옥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이 보였다. 린은 그 중에서는 그나마 좀 깨끗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의 구조는 좀 특이했다. 문을 열자마자 바로 방이 나왔는데, 그 방 안은 그나마 점성술사라는 이미지와 들어 맞는 구석이 있었다. 붉은 천이 길다랗게 천장에서부터 드리워져 있었고 흘러내린 그 천은 부드럽게 방 전체를 감싸듯 걸려 있었다. 그리고 주인 없는 방을 지키며 초가 하나 외롭게 타오르고 있었다. "여기로."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왜 굳이 카민을 떼어놓고 와야했지,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녀의 말을 따라 그녀가 내미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디선가 뭔가를 싸놓은 듯한 커다란 보자기를 들고 나타났다. 의자에 앉자 의자와 바닥이 부딪힌 듯 끼익, 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내 맞은 편에 앉더니 천을 풀렀다. 그 안에는…… 카드가 있었다. 아까 그 18장의 카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양의 카드였다. 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걸 보고 있는데, 그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당신, 어렸을 때 몇 번이나 죽을 뻔했나요." 린의 질문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지면서도 무의적으로 대답했다. "수백번?" 마계에 들어온 후로 수십, 수백번은 죽을 뻔했지, 암. "……농담하지 마세요." 나도 농담이었으면 좋겠네. 린은 천 안에서 나온 카드를 조용히 섞기 시작했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빛나는 카드. 그녀의 하얀 손가락들이 카드를 뒤섞고 있다. 한참을 섞고 있던 그녀가 난데없이 말했다. "이 번에 두번째지만, 당신은 상당히 특이하신 분인 듯 하군요." "에?" 나는 그녀의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관상…… 이라고 해야 하나요? 당신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강렬한 자기 자신감 속에 깃든 나약한 자아.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는데…… 아닌가요?" 나는 뭔가 헙, 하는 기분을 느끼며 대꾸를 하려 했으나 린은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있었다. 그녀는 그 엄청난 카드 중 앞 부분에 있는 카드만 8장을 골라 착착 늘어놓았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한 장의 카드를 휙, 하고 뒤집었다. 전에 카민의 운명을 점쳤던 카드와는 사뭇 다른 모양의 카드였다. 카민을 점봤던 카드의 뒷면은 모두 수수한 갈색에, 두툼한 선이 몇 개 그어져 있는 카드였는데 이 카드는 전체적으로 붉은 빛이 도는 가운데 은은한 은색이 카드 뒷면을 수놓고 있었다. 그런 카드를 섞고 있던 린이 갑작스레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은 정말이지 기묘한 실이 엉켜 있어요." "무슨 말이야?" "……디모세이님의 실이 이렇게나 복잡하게 엉켜 있는 걸 보는 것도 처음입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의아해졌다. 디모세이라면 인간계에서 운명의 신으로 받들여 지고 있는 신이었다. 그의 실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니? "이 카드는 운명의 신이신 디모세이님의 이름을 빌어서 치는 디모세이스 카드(Dimoseice's Card)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뒤집혀진 카드를 보더니 낮게 말했다. "……처음부터 이런 것이 나오다니." 그 말과 함께 그녀는 그 카드를 보여주지 않은 채 다음 장을 휙하고 뒤집었다. 그리고 그 카드를 본 그녀의 얼굴에는 다시 한 번 당혹감이 스쳤다. 린은 그 카드 역시 나에게 보여주지 않은 채로 다음 카드를 뒤집었다. 뭐야!! 지금 장난 하는 거냐!! 대체 왜 아까부터 자기만 보고 한숨을 내쉬는거야!! 내가 막 화를 내려고 하는데, 그녀가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갑작스레 말해왔다. "이 카드로도 잘 보이진 않는군요. 하지만…… 대충 몇 개는 볼 수 있네요. 일단…… 가까운 장래…… 어쩌면 몇 일내…… 아니, 바로 내일이라도…… 아주 반가운 존재를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반가운 존재라니? 나는 내게 있어 반가울 수 있는 존재를 열심히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존재는 거의 없었다. 아이에드나 로시엔놈 정도? 우, 우왓. 아, 아니다. 그 놈들이 와봤자 나는 전혀 반가워하지 않을 거다! ……그, 그런데 정말 아이에드와 로시엔을 말하는 걸까? "그리고……" 린은 다음 카드를 넘기더니 눈썹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문득, 입술을 움직이며 낮게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기묘한 운명.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 저주와 피에 복속 되어 있는 이들이여, 당신들은 가는 곳마다 재앙을 부르리…… 그 눈동자, 파멸을 부르리. 그 눈동자, 멸망을 부르리. 그 눈동자, 아픔을 부르리. 저주와 피에 복속되어 있는 그들." 나는 점을 보다 말고 갑자기 시 같은 것을 중얼거리는 린의 태도에 황당해졌다. "뭐하는거야?" 내가 황당하다는 어조로 묻자, 그녀가 한참만에 그녀가 말했다. "……이 시를 모르시는 겁니까?" "몰라." 내 대답에 린의 얼굴은 또 한 번 일그러졌다. "……기묘하게도 「카레나」의 카드가 나왔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당신의 운명은 대체로 안 좋군요." 엑, 에에에엑? "……글세요, 뭐랄까…… 너무 복잡하게 엉킨 실 때문에…… 그리고 당신의 운명의 실을 엉크려뜨린 존재가 너무나 강하게 느껴져 당신의 실을 잘 볼 수 없습니다만……" 그녀가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대체로 안 좋군요. 아니, 아주 안 좋습니다. 제 평생 이렇게 좋지 않은 운은 처음입니다." 허걱. 허걱허걱허걱!! "나, 난 운명 같은 거 안 믿어." 난 떨떠름한 어조로 뱉어냈다. 그, 그래!! 기본적으로 마족에게는 운명이란 것이 없다. 디모세이라는 존재가 거는 운명이란 실에 매달린 채 마리오네뜨가 되어 평생 웃기지도 않는 연극이나 해대는 인간들과는 다르다. 마족에게는 운명이 없다. 그래, 우하하하하핫!! 마족에게는 운명이 없다, 이거다! 그래그래!! 내겐 운명이란 거 없∼다! "그렇습니까?" 그녀가 방긋 웃었다. 그리고는 살짝 손을 들었다. "하지만, 당신의 운세에도 아주 좋은 것이 보입니다." "헤? 그래그래? 어떤 건데?" 나는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며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순간, 무표정한 얼굴의 그녀가 덤덤하게 뱉어냈다. "운명 같은 거 안 믿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그렇게 좋아하시죠?" "……." 린은 침묵하는 나를 보더니 말없이 살풋 웃었다. "운명의 상대." 그리고, 끊어지듯 한마디했다. "당신에겐 그게 있네요. 어때요, 마음에 드시나요?" 나는 난데없이 나온 그 말에 무덤덤이 대답했다. "그게 뭔데?" "……." ----------------------------------------------- 오후에 업로드 한다는 약속... 지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ㅠㅁㅠ 에헤헤헤헤헤.. 용서해 주세요..(애교로 넘어가려 합니다;;) -------------------------------------------------------------------------------- Back : 3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7 (written by 카르민) Next : 3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5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30349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15th September 2001 17:21:56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1-09-2001 20:34 Line : 153 Read : 920 [39]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7 -------------------------------------------------------------------------------- -------------------------------------------------------------------------------- Ip address : 61.83.23.10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순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식,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가르쳐 드리기 싫은데요?" "……." * * * * * * * * * * * 대체가 말이야…… 돈도 그렇게 많이 받아놓고 왜, 어째서, 무슨 이유로 가르쳐 주기가 싫다는 거야, 앙? 자기가 점 좀 잘 치면 다야? 다야? 다냐고!!! 온갖 투덜거림을 동반한 반 협박에도 린은 입을 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그게 뭐냐니까!!" 라고 계속 귀찮게 굴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얌전히 문을 가르키기 까지 했다. 린의 제스처의 뜻은 단 한가지로밖에 풀이할 수 없다. '나가주세요.' 좋은 말로 나가주세요고, 짧게 줄이면 꺼져! 인 것이다. "제에길! 내가 다시 한 번 점을 보면 미남이 아니닷!!" 나는 린의 집 앞에서 버럭 고함을 치며 씩씩거렸다. 하지만 한참을 그렇게 분노를 터뜨리던 나는 시간이 지나자 남의 집 앞에서 고함을 지르는 내 꼴이 한심스러워졌고, 그래서 묵묵히 발걸음을 옮겨 나가기 시작했다. 카민이 기다리고 있을 그 곳으로. "실례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인적조차 드문 이곳에서 목소리 하나가 튀어들었다. 나즉한 미성, 맑고 투명한 목소리. 하지만 그런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분명 남자라는 확신을 갖게 해주는 음색이 바로 내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린을 찾아온 남자겠지. 시장 쪽에서 오진 않은 걸 보면…… 마을 쪽에서 온건가? 어라, 아까 전에 내가 저기서 고함을 치고 있을 때…… 이 골목으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던가? 나는 갑자기 들려온 그 목소리에 조금의 의아함을 품었으나 곧, 알게 뭔가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발길을 옮겼다. 아, 슬슬 배가 고파오는군. 이제 점심때도 다 되어가는 건가? "실례……합니다?" 하지만 배가 고파, 라고 생각하면서 더욱 발걸음을 재촉하려 했던 나는 뜻을 달성하지 못하고 내 행동을 수정해야만 했다. 다시 한 번,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리는 손이 느껴져 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제서야 그 목소리가 린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나를 불러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엇인가가 얹어져 있는 나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어깨 위에 얹혀진 것은 조금은 거친 손가락이었다. 수많은 검상과 단단한 굳은살로 연결된 그 손은 조심스럽게 내 어깨를 쥐고 있었다. 나는 내 어깨를 두드린 그 손가락을 한참 바라본 후, 시선을 올리며 물었다. "……누구냐?" 그 자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자를 아무 생각 없이 훑어보다가 문득 기분이 불쾌해짐을 느꼈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 지금 어디에 손을 대고 있는 거지? 나는 손을 들어 내 어깨에 놓은 그 손을 탁하는 소리와 함께 쳐냈다. 나를 붙잡았던 그 자의 손은 의외로 매끄럽게 원위치로 떨어져 내렸다. "……." 남자는 내가 자신의 손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왠지 울컥한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이 남자를 도전적인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보려고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난 내 결심을 포기해야 했다. 내 어깨를 두드려댄 이 남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흰색의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었어서,(아, 안 덥냐? 혹시 안 더워?)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굴만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머리카락, 심지어는 옷깃 바깥으로 조금이나마 튀어나와야 할 손이나 발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로브를 푹 뒤집어 쓰고 있는 모습이다.(아니, 덮어쓰고 있다는 표현이 알맞을 것이다. 저기 말이야…… 혹시…… 여름에 땀띠 같은 걸로 고생하지 않아?) "……할 말이 있는건가?" 나는 한마디 대답도 없이 그저 나를 열심히 바라보고 있는 그를 향해 담백한 어조로 물었다. 하얀 로브의 그자는 뚫어질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은 분명 보이지 않았지만, 로브 사이로 느껴져 오는 따가울 정도로 대단한 시선. "……오랜만이군." 문득, 로브 속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조금은 이상하고 어색하게 들렸다. 그런데 나는 그 어조가 왠지 내게 아주…… 아주 익숙하다고 느꼈다. 누구의 목소리지? 나는 그 로브를 다시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아이에드놈이나 로시엔이 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저 목소리는 그 바보 놈들의 목소리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저건 누구의 목소리인 건가? [오랜만이군]이라는 말로 보아서는 전에 나를 만난 적이 있다는 말이다. 익숙하다, 이 목소리.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는 이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이상할 정도로 분명하게, 익숙한 목소리다. 잠깐. 내게 익숙한 목소리? 내게 익숙한 목소리는 별로 없다. 아니, 내가 접촉해 본 존재가 몇 되지 않는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목소리라곤 고작 몇 가지뿐. 그 중에서도 어조가 낯익을 정도로 익숙해져 있는 목소리라면. 뻔뻔돌이 아이에드의 느끼버전 목소리와 로시엔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 카민의 어벙한 목소리, 나스의 톡톡 튀는 듯한 귀여운 목소리, 여왕님 특유의 도도함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세이아나의 목소리, 나를 죽도록 놀려먹던 짜증나는 녀석들의 무수한 목소리, 그리고…… 그,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어떤 그림자가 차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머리 위로 번개라도 지나간듯한 느낌에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이것은 벼락을 맞은 것보다 훨씬 심각한 일이었다. "……."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스피드로 등을 휙하고 돌렸다. 그리고 카민이 기다리고 있을 시장으로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기다려!!" 그런 내 행동이 의외였는지, 뒤에서 버럭 고함을 치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핏 팔을 내려다보았다. 팔에는…… 불행히도 무수한 소름이 돋아 있었다. 나는 점점 더 걸음을 빨리 했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기다리라고!! 이 자식!! 거기 안 서!!!" 아, 안 설 거다! 안 설거다!! 제발, 제발!! 이 놈의 발! 제발 빨리 움직여 달란 말이야! "……칼레들린." 나는 있는 힘껏 앞으로 앞으로 한발자국을 내딛으며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등줄기를 타고 땀이 한 방울 주륵 미끌어 지는 것이 느껴진다. 아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래,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아아,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면…… 저…… 저 말투는…… 뭐, 뭐란 말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목소리는…… 내 기억이 분명하다면!! 분명하다며어어언!! "……거기 서…… 라고 말했을 텐데." 순간이었다. 시장의 소란스러운 광경이 막 들어나려는 시점에서, 눈 앞의 공간이 거짓말처럼 흔들렸다. 옷을 팔고 있던 노점상의 모습을 내 눈앞에서 지워내며, 공간이 살며시 뒤틀렸다. 그것은 곧 그 공간은…… 하얀 로브를 입은 한 존재를 밖으로 분출해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달리고 있던 발을 억지로, 정말 억지로 멈췄다. 손이 꽉 쥐어졌다. 쥐어진 손등 사이로 식은땀이 줄줄줄 흘러내렸다. 하얀 로브 자락이 눈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곧 하얀 로브 속에서, 이죽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누구인지 몰라서 도망갔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녀석은 내 굳어 있는 얼굴을 힐끔 보더니 푹 눌러쓰고 있던 로브의 후드를 휙 하고 걷었다. 나는, 나는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아니, 이미 알고 있었지만 눈 앞에 그의 모습이 나타나자 절망하고 말았다. 심연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이 처절한 느낌. 하얀 로브 속에서 살며시 들어나, 햇빛을 반사하며 비치는 것은 밝은 금발. 그리고…… 반짝반짝, 무슨 보석이라도 품은 듯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 내가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목소리들. 아이에드, 로시엔, 카민, 나스, 나를 못살게 굴었던 쓰레기 마족놈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답을 해 보시지, 칼레들린." 조금 싸늘해진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려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로브 속에서 희미하게 들어 난 그 얼굴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마지막으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목소리는…… "갑자기 귀라도 썩어 버린 거냐?" ……라이메데스. ---------------------------------- 예... 눈치채셨겠지만.. 린이 말하던 [반가운 존재]라는 건 라이메데스놈입니다. .....-_-llllllllll 이런.. 의외로 로시엔과 아이에드의 등장을 기다리시는 분들이 많았군요... [반가운 존재]라면 당연히 로시엔과 아이에드라고 생각하신건가.. 이거...-_-;;;; 쿨럭쿨럭... 그놈들은...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뒤에 등장할겁니다;;; 아악.. 돌이다, 돌! -_-llll왜 이 녀석들이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거지;;; 왜..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거냐구웃!!! ...라... 라이메데스로 참아주세요.. 쿨럭...-_-... 다시 돌덩이가...-_-llll 아아.. 그리고 연참 약속...ㅠㅁㅠ;;; 제.. 제가.. 조.. 좀 많이 아프답니다...=_=;; 아.. 이 궁색한 변명이라니..;; 조금 있다.... 한 편 더 업할지도 모르지.. 푸헐헐...(장난하는거냐;;) 그럼...^^;; -------------------------------------------------------------------------------- Back : 40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8 (written by 카르민) Next : 3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6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30349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15th September 2001 17:21:31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3-09-2001 22:40 Line : 190 Read : 582 [40]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8 -------------------------------------------------------------------------------- 지속적으로 피지를 흡착하여 화장이 잘 받는 피부상태로 가꾸어 줍니다 - 이자녹스 포어미니쉬 오일 프리 파운데이션 - 21,000 원 -------------------------------------------------------------------------------- Ip address : 211.220.15.14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나는 떨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겨우겨우 이 한마디를 던질 수가 있었다. 제, 제길. 진정하란 말이다, 이 놈의 심장!! 이미 내 몸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감과 알 수 없는 종류의 예감이란 것에 의해 부르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내 앞을 턱하고 막아선 채로 실실대고 있는 라이메데스를 향해 있는 힘껏 눈을 부라렸다. 이런 나의 태도에도 라이메데스는 전혀 위축되지 않은 자세로 당당하게 말했다. "왜 일 것 같냐?" 내가 물어봤던 질문을 다시 되돌려주는 짓 따위는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군. "다시 묻겠다. 대체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나는 진지한 어조로 질문했다. 이번 내 질문에, 라이메데스는 뭔가 대답을 하기 곤란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입술을 슬쩍 깨물더니 자신의 금발을 삭하고 쓸어 올리는 라이메데스.(사, 상당히 느끼하군.)그런 녀석의 손가락이 가볍게 넘기고 있는 금빛의 머리카락은 예전처럼 아주 곱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있었다. 예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이 놈 머릿결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군. ……머리 뭘로 감아? 나는 그 고운 머릿결을 보며 문득 입 밖으로 이 말을 낼 뻔했고, 그 순간 내 입을 퍽 하고 틀어막았다. 제길, 이런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하다니! "이봐, 칼레들린." 라이메데스는 쌀쌀맞은 어조로 내 이름을 부르더니 내 쪽으로 한 발 한 발 다가왔다. 나와 녀석의 거리가 거의 1세리하 정도로 좁혀졌을 때였다. 녀석이 피식 웃어보인 것은. "네 질문에 답하기 전에 내 질문에 답해주시지." "……?" 나는 갑작스러운 녀석의 말에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언제 나한테 질문을 했다고 이러는 거냐? 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자, 녀석의 입꼬리가 천천히 치켜올려졌다. 나는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불길해지는 나 자신을 느낄 수가 있었다. 칼레들린!! 대체 왜 그러는거냐!! 자신감을 찾아, 자신감을!! "아까 왜 도망을 간 건지 말해주실까?" 하지만 내가 억지로 불어넣었던 자신감을 다음 순간 튀어나온 라이메데스의 말에 의해 산산히 조각나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 라이메데스의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고, 나는 그 눈을 피할 수 없음을 느꼈다. 나는 한참 차가운 웃음을 짓는 라이메데스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좋다, 말해주지." 라이메데스의 시선이 바로 코 앞에서 느껴지자, 나는 가볍게 숨을 골랐다. 그리고, 최대한 라이메데스의 어투를 흉내내서 말했다. "[나는 네가 싫어]." "……?" 내가 난데없이 뱉어낸 '나는 네가 싫어'라는 말에, 녀석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는 녀석의 그런 표정을 보면서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너는 아이에드님의 짐일 뿐이야.]" "……?" "[너는 그 분 곁에 있을 자격이 없어.]" 그제서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눈치 챈 건지, 라이메데스의 눈썹이 일순 꿈틀했다. "이거……누가 한 말이었더라?" 내 말은 명백하게 녀석을 타킷으로 한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하면서 라이메데스 녀석이 내게 미안한 표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내심 찔리는 표정 정도는 보여 줄 거라고 생각하곤 속으로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라이메데스는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여왔다. 녀석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손바닥을 딱 하고 치더니 빙긋하고 웃었던 것이다. "아아∼ 그거 때문이었어?" ……가증스러운 놈. 그 표정은 대체 뭐란 말이냐!!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인 양 그 실실 쪼개는 얼굴은!! 네 놈이 아이에드를 동경한다 뭐한다 떠들어 대던 것은 아이에드놈의 그 뻔뻔스러운 얼굴을 동경했던 거였냐!! "겨우 그것 때문에 삐져서 날 보자마자 못본 걸 본 듯이 도망갔었단 말이군." 겨, 겨우라고? 후후, 남은 열 불나게 블러드 아미 군사 훈련장이라는 매우 더럽고(세상에 태어나서 별별 볼꼴 못 볼꼴 다 봐왔지만 그렇게까지 끔찍할 정도로 더러운 장소는 본 적이 없다.)넓은 장소를 혼자서 뻘뻘거리며 청소하고 있을 때, 네 놈이 나에게 한 행동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투로군. 침을 퉷, 하고 뱉으면서 얼어붙은 내 표정을 즐기던 네 놈이었잖아!! 생각을 하니 더 뚜렷이 정리되는 과거에, 나는 머리를 지탱하고 있던 무엇인가가 피식 하고 꺼져 버리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녀석을 향해 뭔가를 말해주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입술이 막 벌어지려는 찰나의 순간, 녀석의 입술이 더 먼저 열렸다. "……나는 네가 보고 싶어서 블러드 아미 일도 펑크내고 인간계로 내려왔는데 겨우 그깟 일로 삐져 있었다니, 실망이야." 다음 순간 들려온 라이메데스의 말에, 나는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 * * * * * * * * "뭐, 뭐라고?" 요즘 귀가 안 좋아. 헛소리까지 들리고 있다. 마족의 청각은 비정상적으로 발달해 있다로 로시엔이 몇 번이나 가르켜줬었는데, 그 말도 다 헛소리군. 이렇게까지 멀쩡하게 들려서도 안되고 들릴 수도 없는 말이 들리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넌 말도 못 알아듣는 거냐? 블러드 아미 일 펑크내고 왔다고 했다." 라이메데스는 못 들을 것을 들어버려 하얗게 질린 채로 부들부들 떨어대는 나를 향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그런 라이메데스를 향해 띄엄띄엄,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 앞에 것, 다시 말해봐." "아, 네가 보고 싶어서 왔다는 거?" 녀석은 내 쪽을 바라보면서 살포시 미소를 보내왔다. 나는 그런 라이메데스의 초록색 눈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보았다. 녀석이 내 이 눈동자를 보면서 일말의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면서. 보통 내 눈을 마주보고 선 자들은 내 압도적인 눈(카리스마로 번뜩이고 있지 않은가!!)을 보고나선 한 발자국쯤은 물러서 주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아이에드놈조차 내가 눈을 바짝 들이대고 있으면 눈동자가 흔들리곤 했다. 그 뻔뻔돌이 마족놈조차 양심에 찔리는 행동을 저지른 후 내 눈을 보고 있으면 눈가에 뭔가 이상한 것이 어른어른거리곤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응? 왜 그래?" 도대체가!!! 이 놈은 왜 반응이 없는 거냔 말이다!!! 나는 내 인내심이 점점 더 그 한계를 들어내고 있음을 느꼈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절정에 치달은 짜증을 느낀다. "대체…… 대체 네 놈은 왜 온 거야!! 똑바로 말해. 대체 왜 온 거야, 네놈!!" 내 발악하는 듯한 어조에, 라이메데스의 초록색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다. "……내가 왜 왔겠어?" 그리고 다음 순간 뱉어진 라이메데스의 목소리는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르게 너무나도 차분하고, 어딘지 모르게 싸늘한 구석까지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갑작스레 돌변한 녀석의 태도에 몸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나를 향해 라이메데스가 조용히 조용히 입술을 움직여 나갔다. "……나는 아이에드님의 부대 소속. 아이에드님의 명령 없이는 그 어느 곳으로도 움직일 수 없어. 내가 왜 왔을까?" 라이메데스의 말에는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내가 왜 왔을까?" 라이메데스가 걸친 하얀 로브 사이로 어른어른 거리는 녀석의 금발, 부드럽게 사방으로 흩어지는 그 금색 물결. 한 올 한 올 바람결에 그 몸을 내맡긴 채 춤을 추고 있는 머리카락은 라이메데스의 얼굴 위로 짙은 수심을 들어내고 있었다. "……아이에드가 보냈어?" 나는 그런 라이메데스를 보며 물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찡하게 아파 오는 것을 느낀다. 라이메데스의 눈은 그 입이 대답을 하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녀석의 눈동자는 이미 그래, 라고 낮게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그래, 아이에드님이 보내셨다." 라이메데스가 자신의 미간을 슥슥 건드렸다. "각성 마족이 아닌 이상, 제 3공간을 거쳐 마계로 돌아가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지. 너는 각성을 하기 전에는 절대 마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결론이 되고…… 지금 네 나이가 겨우 18이니 각성을 하려면 적어도 몇 백년의 시간이 필요해. 그 긴 나이동안 너는 성장을 할 것이고, 또 인간들 틈에서는 나름대로 강한 존재로 인정받겠지. 하지만……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각성 전에 신관들을 만나면 네 힘은 무력해진다." 라이메데스는 내 모든 것을 관통해버릴 듯한 깊은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아이에드님은 정말이지 미칠 듯한 마음으로 너를 걱정하시고 계시더군." "……." 순간적으로 아파 오는 심장 때문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짜릿, 하고 아파 온다. 뜨거운 무엇인가가 심장소리와 함께 하나, 둘…… 박자를 맞추어서 느리게 느리게 뛰고 있다가 다시 빨라진다. 미칠 듯이 뛰고 있다. 아파온다. 아파온다. 뜨겁다. 뜨겁다. 많이 뜨겁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타오르는 듯한 통증을 가져오는 심장 부근을 말없이 불끈하고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라이메데스를 올려다보았다. 녀석의 눈 역시 나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녀석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그 눈에서 읽을 수 있었다. 라이메데스의 얼굴에 맺힌 것은 지독하리만치 아픈 슬픔, 뒤돌아 봐주지 않는 자에 대한 약간의 미움, 그리고…… 끊임없이 동경하는 자를 뒤쫓는 자의 고독한 모습. 그 모든 것이 투영되는 자는 내가 아니라 아이에드다. 녀석은 나를 보고 있지만,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내게…… 너를 부탁하셨다." 라이메데스는 그런 씁쓸한 표정을 한 채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자기가…… 직접 오지 않고?" 왜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가 한심하다. 아이에드는 서열 제 3위의 마족이자 블러드 아미의 총수. 모든 마족들의 동경의 대상. 그 이름 하나만으로 차원계를 유린할 수 있는 마계의 강자. 그런 아이에드가 나를 위해서 마계도 제쳐두고 공간으로 빠져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오고…… 싶어하시지. 아주 많이 말이다." 응? "……하지만, 오실 수가 없다." 문득 라이메데스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고 느꼈다. 그것은 어딘지 불안하게 느껴지고, 어딘지 슬픈…… "……왜?"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 라이메데스는 말 없이 한참을 나를 내려다보았다. 녀석의 눈동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분했지만, 여느 때와는 다르게 무섭도록 깊었다. "왜 올 수 없는 건데?" 나는 다시 한 번 물었다. -------------------- 자아... 다음 것으로 go!!! 예요;; 뒤에것에는 공지도 있으니 잘 읽어보시기를! +_+ -------------------------------------------------------------------------------- Back : 41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9 (written by 카르민) Next : 3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7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30349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15th September 2001 17:22:01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3-09-2001 22:44 Line : 121 Read : 673 [41]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9 -------------------------------------------------------------------------------- 비타민과 화이트닝 성분으로 피부에 탄력과 부드러움, 투명함을 제공! - 중복합 - 참존 탑뉴스 지이 에너지 컴플렉스1 - 18,800 원 -------------------------------------------------------------------------------- Ip address : 211.220.15.14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왜 올 수 없는 건데?" 왜 이렇게 묻고 있는 도중에, 어제 꾸었던 그 꿈이 생각나는 거지? 아아, 이상하다. 왜…? 로시엔의 등뒤로 내려꽂히는 그 긴 창이 생각나는 이유는 대체 뭐란 말인가. "……." 라이메데스는 여전히 말없이 나를 한참동안 보았다. 그리고 곧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글세, 나로서도 그 분이 왜 너를 만나러 오지 않는지 알 수 없다. 그렇게나…… 간절한 눈을 하는 그 분은 처음이었는데. 정말이지…… 그것은 [그리움]에 미친 듯한 자의…… 눈이었는데. 걱정에 미친 듯한 존재의 눈이었는데 말이지." 라이메데스는 그 말과 함께 천천히 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왔다. 바람에 나부끼는 로브는 마치 깃발처럼 펄럭여대고 있었다. 허물어지기 일보직전의 표정으로 내 앞에 다가온 라이메데스의 눈이 나와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그러면서…… 왜, 오지 않는 건데?" 이 질문이 얼마나 이기적인 것인가 하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아이에드가 인간계로 내려오기를 바라다니. 하지만 내가 마계로 갈 수 없으니 녀석들이 언젠가는 내려올 것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은 언제나 내 가슴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린이 말한 점괘에서 [반가운 존재]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이에드나 로시엔을 연상한 건지도 모른다. 잠깐, 그러고 보면 말이야. ……설마 린이 말한 [반가운 존재]란게 이 빌어먹을 자식이었단 거야? 나는 지독한 의심과, 그래도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린에 대한 반발로 가슴이 들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라이메데스는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아이에드님은 아직 [마왕성]에 계신다. 그래서 너에게 오지 못하는 것 같다. 마왕성에 계시지 않는다면 블러드 아미고 뭐고 전부 때려치우고 내려오실 기세였으니." "에……?" 나는 라이메데스의 말에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아이에드가 아직까지 마왕성에 있다고? 그건 어째서지? 내가 체이드 숲에 떨어진 뒤로 인간계에 머물렀던 시간만해도 얼마인데, 극도로 마왕성에 머물기를 싫어하는 아이에드가 그 긴 시간동안 마왕성에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 거냐? "마왕성에 머물러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생겼다고 하시더군. 나도 그 필연적인 이유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아이에드님과 로시엔님이 인간계에 오지 못하는 것 하나는 분명해." 나는 라이메데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혼자 인간계로 떨어지는 너를 걱정하시는 두 분의 마음은 굳이 설명 안해도 알 수 있겠지? 너도 느끼고는 있을 것 아닌가. 그 두 분들이 널 얼마나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다. 정말이지 끔찍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아이에드님은 내게 명령을 내리셨고, 로시엔님은 내게 어떤 [물건]을 맡기셨다." 명령? 물건이라고? 문득 라이메데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에드님이 내게 내린 명령…… 아니, 그건 숫제 부탁이었다." 그리고 잠시 숨을 멈춘 라이메데스는 내 발끝에 시선을 맞추었다. "……칼레들린의 옆을 지켜라. 그가 마계로 돌아올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숙연하게 말하는 라이메데스를 차분한 눈으로 바라 보았다. 라이메데스 역시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 둘 사이로 문득 바람이 불어왔다고 생각했다. "……내가 인간계로 혼자 나간 것이 아주 불안했다 이 말이군." 나는 라이메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라이메데스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걱정되서 누군가를 내려보낸 것 까지는 좋은데 말이야……" 나는 라이메데스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왜 하필 네놈이 내려 온 건데!!!!" 그 싸늘한 바람을 받으며 나는 발악했다. ------------------------------------- ------------------------------- 어쩌면 소설보다 더 길 잡담과 공지;;; 아아...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해진 감기... 나는 어느 샌가 폐렴 환자로 친구들에게 격리수용되고 있다... 언제 각혈을 할 지 모른다며 나를 바이러스 취급하는 녀석들... 나는 하나하나 달려가서 그런 녀석들의 코에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내일도 숨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그럼 언젠가... 나의 친구들은 모두 나와 같은 몰골이 되겠지.. 콜록콜록.... 아마도 아주 즐거울거예요...-_-;;; 쿠울럭............ 쿠울럭.............. 철푸덕철푸덕.... 최근 연재속도 급하강!!! 연재 라인은 엄청 낮아짐!! 라인 200 이상은 어디로 간 것인가!! 쿠하하하하하핫..-_-;;; 저도 공부를 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_-;;;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예... 감기죠. 그래서? 감기면 다냐!! 어서 써~!!! 병실에서도 쓰더라!!! 라고 하신다면... 하나 더 핑계가.. =_=.... 뭐..;; 작가놈의 게으름..;; 그래도 토욜이나 일욜쯤엔 한 4연참? 그 정도 할 것 같군요..-_-;;; 그 때는 저도 시간이 비고.. 마감도 얼마 안남았으니 미치도록 써야겠죠...ㅠㅁㅠ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주세요∼∼(쿨럭;) 그리구요∼ 제가 이벤트를 하나 하려 합니다!! 주인공 칼레들린에게 묻는 질문!! 짧아도 좋고 길어도 좋으니까 많이 주시면 주실 수록 좋습니다. 예를 들자면... 음... 1. 칼레들린, 네 별명은 뭐냐? 2. 칼레들린, 너 정말은 아이에드 좋아하지? ...이런거 내시면 됩니다;;; -_-;;; 말투도 존대말, 반말 아무래도 상관없구요~~!! 40회 특집... 맞이... 쿨럭쿨럭..-_-;;; 그럼 담에 뵙겠습니다아!! -------------------------------------------------------------------------------- Next : 40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8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30349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15th September 2001 17:22:08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5-09-2001 23:00 Line : 317 Read : 1036 [42]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0 -------------------------------------------------------------------------------- -------------------------------------------------------------------------------- Ip address : 61.76.31.23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내 발작이 멈출 즈음, 라이메데스 녀석은 묵묵한 포즈로 걷어냈던 하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는 약간의 짜증이 나는 것을 느끼며 더워 보이니 제발 벗으라고 아주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말하는 도중에 주먹도 한 번 보여줬다.)하지만 이 녀석은 내 말을 완벽하게 무시하곤 로브의 후드를 푹 뒤집어 쓴 후 그 단추를 하나하나 잠금으로서 내 말을 맛있게 잘 먹었다는 무언의 표시를 해왔다. 나는 그런 녀석을 향해 주먹을 휘두를까 생각했지만 역시 너무나도 얌전하고 착하며 공손하고 다소곳한, 그리고 인내심이라면 전 차원계를 통틀어 단연 최고일 나는 억지로 참았다. "……인간 동료?" 인간계에서 겪었던 일들을 대충 설명해 보라고 요구하는 라이메데스에게 귀찮기는 하지만 이것저것 설명해주고 있는 내게, 라이메데스는 어느 순간 의아한 어조로 물어왔다. 카민에 대한 대목을 이야기 해주고 있었기에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가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의 질문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라이메데스는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흐응, 인간동료란 말이지……." ……다 좋은데 그 앞에 붙은 '흐응∼' 은 대체 뭐지? * * * * * * * * * * 린이 있던 점 집 앞에서 카민은 묵묵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은 정오를 향해 치닫아 갔었고, 이제는 서쪽으로 자신의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환한 노을이 타오르는 하늘의 모습은 조금 이채로웠다. 뭐랄까, 괜히 또 감상에 빠지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할까. 후후, 그게 아니라면 내 이 센티멘탈 함이 그렇게 보여졌는지도 모르지만. 비록 해가 슬슬 질 정도로 넘어가려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햇살이 뜨겁다. 빛이 살갗을 태울 정도로 내리 쬐는 한가운데에서 카민은 서 있었다. 녀석은 림의 점 집 앞에서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며 나를 기다리고 서 있었는데 그런 그의 행동은 마치, [네놈이 나를 여기 세워놓고 이렇게 늦게 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라고 말없이 시위하는 것 같아서 나는 카민 쪽으로 다가가는 것을 한참동안 망설여야만 했다. "저 녀석이야." 나는 내 뒤를 줄레줄레 따라오는 라이메데스를 향해 가볍게 말해준 후 카민을 향해 발을 움직였다. 가까이에서 본 카민은 또!!!! ……또 무엇인가를 먹고 있었다. 이상하고 둥근 무엇인가였는데, 그것이 맛있었는지 내가 다가가도 고개를 돌리지 조차 않았다. 녀석은 우물우물 양볼에 그것을 터질 듯이 넣은 채로 열심히 구강운동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카민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대, 대, 대체 네놈은 말이다! 왜 항상 무엇인가를 우물거리고 있는 거야!! 네녀석의 뱃가죽에는 대체 뭐가 달라붙어 있는 거냐구!! 나는 발악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지만 라이메데스가 바로 옆에 있음을 감지하고 억지로 참았다. 그래도 여태껏 쌓아온 이미지가 있는데(비록 그 이미지가 노란 머리수건과 앞치마와 블러드 아미부대의 마루바닥을 닦으면서 거의 다 허물어졌다 하더라도. 그래도 내게는 아직 남은 자존심이 있단 말이다. 특히나 이런 원수같은 놈 앞에서 허물어지는 꼴 따위 절대로 보여줄 수 없지 않은가.)그렇게 발악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발악을 하는 대신, 카민을 향해 너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녀석에게 다가갔다.(나 정말 성격 좋다) "뭘 먹어?" "아, 이에 와?(이제 와?)" 내 질문에 카민은 방실 웃으면서 먹고 있던 것을 오른손으로 불쑥 내보였다. 하도 입에 큼지마큼 넣고 있었는지라 발음도 이상하게 샜다. 녀석은 내가 다가오자 우물우물 재빠르게 그것을 씹은 다음 꿀꺽하고 삼켰다. 카민이 먹고 있던 하얗고 둥글둥글한 그것은 카민의 주먹크기만큼이나 컸는데, 한입 베어진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것은 잘게 썰어놓은 풀조각(?)과 고기를 다진 것이었다. "만두야." 카민은 내게 얼른 하나를 내밀며 먹어보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내가 뻗은 손에는 그 만두라는 것이 들어오지 않았다. "흐음." "……." 나는 내 손에 닿기도 전에 휭하고 공중을 날아 라이메데스의 손에 들린 만두를 멍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내 뒤를 줄레줄레 따라왔던 라이메데스는 재미있다는 눈으로 그 만두라는 것을 이리저리 바라보더니 한 입을 깨물었고, 곧 그 것을 샥샥 베어먹었다. 그리고 그대로 삼켜버린다. 나는 내가 먹을 것을 너무나도 당연스럽다는 듯이 채 가서는 아주 느긋하게 꼭꼭 씹어먹는 라이메데스의 태도를 보며 너무 기가 막혀 따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내가 얼빠진 표정으로 라이메데스 놈을 노려보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옆에서 카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 옷깃이 잠시 팽팽해진다고 느꼈다. 내 옷을 잡아당긴 손은 카민의 것이었다. "누, 누,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카민은 뭔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만두를 우물거리는 라이메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만약 전혀 모르는 녀석이 갑자기 나타나 만두를 휙 채가서 우물거렸다면 그녀석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정신이 좀 이상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조금."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민은 그 말에 다시 라이메데스 쪽으로 시선을 돌려 그를 샅샅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라이메데스는 다시 그 후드를 뒤집어쓴 지라,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였고 그래서 카민은 녀석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라이메데스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수상, 그 자체였다. 이런 더운 한낮에 로브를 푹 뒤집어 쓰고 있는 남자가 다짜고짜 만두를 뺏었으니 얼마나 황당할 것인가? "누구야? 설마…… 칼레들린, 너희 집안 사람이야? 너, 유명한 집안 사람이잖아." 카민은 눈을 둥그렇게 뜬 채로 내게 말해왔다. 아아. 그래, 나 마족이라는 아주 유명한 집안 사람이다. 그러니까 제발 그 또랑또랑하게 빛나는 눈은 저리로 좀 치워주겠어? 나는 눈을 빛내며 라이메데스에 대한 설명을 촉구하는 카민의 표정을 보며(대체 저 놈이 만두를 뺏어먹는 엽기적인 장면을 봤으면서도 뭘 기대하는 거냐!!)땀이 한 방울 뒤로 흐르는 것을 느꼈다. "……너랑 무슨 관계야?" 내가 말이 없자 카민이 한 발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섰다. 뒤에서는 아직도 냠냠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찡한 놈. 아직도 먹고 있냐? 「저 인간이 네가 말한 바로 그 인간 동료냐?」 저벅저벅 다가오면서 눈동자를 내 바로 앞에 들이대는 카민을 피하려 뒤로 물러서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머릿속으로 라이메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목소리에 한숨을 푹 들어 마셨다. 「그래.」 '설명을 해봐, 칼!!' 이라고 외치는 듯한 카민의 눈을 억지로 피해가며 나 역시 전음으로 말했다. 그러자 놀랍다는 듯, 라이메데스가 말해왔다. 「너, 의외로 능력이 좋은 녀석이었군. 꽤나 괜찮은걸?」 나는 갑작스러운 녀석의 말에 조금 당황해서 질문을 던졌다. 「무슨 말이야?」 하지만 질문을 던졌던 나는 질문이 끝나자마자 내가 그 질문을 왜 던졌는가 하고 지독하게 후회해야만 했다. 「크하하하하하하핫!! 으핫핫∼∼!!」 전음으로, 녀석의 웃음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으, 으으으윽!! 면전에 대고 던지는 라이메데스의 웃음소리는 물론 끔찍하다. 아니, 끔찍하다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오싹하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부터 직접 울려 퍼지는 것에 비하면 그건 새발의 피다. 「후후후훗. 인간치고는 꽤나 괜찮은 얼굴을 가진 것 같다는 말이다, 네 동료라는 저 녀석. 여자라는 말은 없었잖아?」 나는 순간적으로…… 카민을 피하고 있던 발걸음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몸이 휘청거렸고 무게 중심조차 잡기 힘들었다. 내가 얼마나 심하게 비틀거렸는지, 카민이 어엇하는 소리를 내며 내 몸을 떠받쳐 주었을 지경이었다. 나는 한참 만에야 패닉 상태에서 겨우겨우 빠져나와 라이메데스에게 전음을 보낼 수 있었다. 「……남자야.」 「뭐?」 화들짝 놀란 듯한 음색이 다시 귀에서 들려왔다. 「남자라고.」 그 말에 대한 라이메데스로부터의 대답은 없었다. "칼." 나와 라이메데스 사이의 전음이 끊어진지 한참만에(라이메데스의 분위기는 썰렁해져 있었고 만두는 먹다 말고 손에 휭하니 들려져 있었다.)카민이 내 어깨를 치면서 이름을 불러왔다. "……소개를 해주지 않는다면 인사라도 시켜줘야 할 것 아냐?" 카민은 그 말과 함께 라이메데스 쪽으로 웃으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눈부신 햇살을 받아서 반짝이는 녀석의 핏빛 머리카락은 라이메데세의 하얀 로브와 선명하게 대조되어 이상하리만치 뚜렷하게 보였다. 라이메데스 앞으로 다가간 카민은 싱긋 웃었다. 하지만, 카민의 그 웃는 표정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제 3자인 내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라이메데스가 카민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그렇게 카민을 바라보고 있던 라이메데스가 다시 전음을 보내왔다. 「정말 남자녀석이야?」 ……겨우 그런걸 생각하느라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냐? 크아아아악!! 대체 카민놈의 외모를 갖고 왈가왈부 거는 놈들이 왜 이렇게 많아? 저 얼굴 어디가 여자 같단 말이냐! 딱 보면 알 수 있잖아! 어딜 봐도 남자녀석…… 같진 않군. 나는 카민을 바라보며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나도 처음 봤을 때 저 자식을 여자라고 생각했으니 라이메데스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카민입니다." 라이메데스가 아직도 카민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그 시선을 억지로 피하면서 카민이 민망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라이메데스." 라이메데스는 짧은 어조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더니 다시 카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런데, 남자야?" 쿨럭. 저 놈, 내 말을 끝까지 못 믿고 확인사살까지 하는군!! "……틀림없는 남잡니다." 대답을 하는 카민의 얼굴 위로는 희미한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 불쾌감을 읽고나서 조금 긴장했다. 지난번의 그 [푸른 꿈]이라는 식당에서 자신을 여자로 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성을 잃고 난리를 쳐댔던 카민 놈이다. 나는 카민의 눈을 힐끔 보았다. 녀석의 눈은 억지로 참으려고 노력하는 기색에서인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눈을 보자마자 라이메데스를 향해 엄청난 오로라가 담긴 전음을 보냈다. 「제발 부탁이니 닥치고 있어!!」 「…….」 라이메데스로부터의 대답은 역시 없었다. * * * * * * * * * * * * * "헤에∼ 정말요?" 나는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아니,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지금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란 말인가? "응, 정말이다." 라이메데스는 카민의 반응에 신이 나서 키들키들 웃어대고 있었다. 카민 역시 라이메데스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재밌는지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면서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이거 정말 놀라운데요! 칼레들린이…… 흐음, 그랬단 말이죠?" 카민은 눈을 돌려 나를 보았다. 나는 그 눈을 애써 피하려고 했으나 다음 순간 카민의 말에 내 그런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니까, 자신을 키워준 백작님과 집사장님에게(아이에드와 로시엔은 어느새 백작과 그 집사장이 되어 있었다.) 칼레들린은 아주 건방지게 굴었다∼ 이거죠?" 카민의 말에 라이메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녀석은…… 그 분들의 은혜에 감사하기는커녕!! 아아, 배은망덕하기도 그 분들의 중요한 기밀문서(고대 마족 문서는 어느새 기밀문서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아아, 놀라워라!!)도 찢어버리고, 아주 먼 외국에서 들여온 소중한 꽃들도 짓밟고(인간계에서 굴러다니는 흔한 꽃들은 아주 먼 외국에서 들여온 소중한 꽃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분들게 반말까지 하고 말이야!" 거기까지 들은 나는 결국 버럭 고함을 치고 말았다. "닥쳐!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야!!" 내 발악 같은 외침에도 이 뻔뻔한 마족 놈의 단단한 면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음, 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비롯한 최근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지. 예상외로 이야기가 잘 통하는 상대인데? 재미있지?" 라이메데스는 싱긋 웃으며 카민에게 말했다. 카민 역시 방긋 웃으며 라이메데스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렇군요. 데스님은 정말 이야기를 잘하네요!!" 어느 사이 엔가 카민놈은 라이메데스를 [데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처음에는 라이메데스의 강요 비슷한 것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카민은 이제 아주 자연스럽게 그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라이메데세는 데스라는 이름이 나올때마다 매우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도 그 이름을 부르기를 강요했지만 내가 약 먹고 돌아버리지 않은 이상 그런 황당하고 말이 안 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다. 내가 라이메데스를 데스라고 부르는 날이 온다면 나는 틀림없아이에드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불가늘할거란 소리다. "그럼 그럼." 라이메데스는 정말이지 흐뭇한 얼굴이었다. 카민과 라이메데스의 첫만남은 최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카민이 제일 싫어하는 외모 문제를 걸고 넘어진 라이메데스였으니. 하지만 왠일인지 그 최악의 첫만남은 뜻밖에도 최고의 만남으로 돌변해 있었다. 일단, 대충의 인사를 끝마친 우리는 나와 카민이 묵고 있던 그 초라한 여관으로 돌아온 차였다. 여관으로 들어서자마자 라이메데스는 즐거운 얼굴으로 식당으로 나와 카민을 데리고 갔다. 이젠 거의 저녁에 다달아서인지 식당은 매우 소란스러웠다. 라이메데스는 그 소란 속에서 카민을 향해 어떤 기나긴 이야기를 패.러.디. 해서 들려주었다. 짐작했겠지만 그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였다. 원제: 반마족 칼레들린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 패러디 제목: 어떤 건방진 꼬마 자식의 방탕한 어린 시절. 편집: 라이메데스. 해설: 라이메데스. 등장인물: 칼레들린(어리고 건방진 꼬마 자식으로 등장함), 아이에드(어떤 지방의 아주 잘 사는 백작으로 등장함), 로시엔(그 백작의 집사장으로 등장함). 내용: 내가 들어도 아주 재수 없고 건방진 꼬마의 이야기를 서술형으로 죽 읊고 있음. 나는 속이 터져서 미칠 지경이었다. 더 환장할 노릇은 카민이 그 얘기를 곧이 곧대로 믿고 있다는 말도 안되는 현실이었다. "그러면, 라이메데스님은 그 백작님이 보내신 분이군요?" 라이메데스는 카민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백작님은 이 건방진 꼬마녀석(누가 건방진 꼬마라는 거야! 너 오늘 죽어볼래!!!)을 아주 걱정하고 계시거든. 이 녀석이 돌아올 때까지는 내가 돌봐주는 게 좋겠다면서 나를 보내셨어. 백작님이 제일 신뢰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빙긋이 웃어보이는 라이메데스를 보면서 나는 두 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손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에 지독한 슬픔을 느껴야만 했다. 아아, 때리고 싶어, 때리고 싶어!!! "음…… 그, 그럼 이제부터 저와 라이메데스님, 칼레들린은 함께 다니게 되는 건가요?" 카민이 조금 멋쩍은 어조로 물어왔다. "……글세. 칼레들린이 허락을 해야……" 라이메데스는 말끝을 흐리더니 내 눈치를 힐끔 보았다. 여태까지 실컷 떠들대는 내가 온갖 눈치와 폭력을 행사해도 전혀 흔들리지 않던 녀석이 이제와서 눈치를 보며 내 의견을 운운하다니. 후훗,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군. 우하하하하하하하핫!!! "칼레들린, 어떻게 생각해? 내가 이 일행에 끼는 거. 아아, 물론 나는 네가 싫다면…… 흑흑, 슬프지만 돌아가야하겠지. 아아, 너무 슬퍼." 일행이라고 해봤자 단 둘뿐이고, 어차피 내가 반대해도 쥐도 새도 모르게 줄줄줄 따라올 것이면서(일단 명령을 내린 자가 아이에드인 만큼 저녀석은 죽어도 나를 따라다닐 거다. 아이에드가 죽어라∼ 하면 네! 감사합니다, 라면서 자기 배 푹 찌를 놈이니까.) 꼭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물어보는 이유는 무엇인지 정말 궁금하군. 그것도 저렇게 느끼한 어조로. 왠지 날이갈수록 라이메데스가 아이에드를 닮아간다는 것을 나만의 착각인걸까. 착각이 아니라면 그것은, 내 인간계 생활이 악몽처럼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대로 해." 나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앞에 놓여 있던 물을 들어 벌컥 하고 마셨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라이메데스는 헤벌쭉하고 웃었고 카민 역시 죽이 잘 맞는 라이메데스와 일행이 되었다는 사실이 기쁜지(그 기쁨이 몇 일까지 가는지 한 번 두고보자)실실거리고 있었다. "헤에∼ 그런데 이런 기쁜 자리에 술이 빠지면 안되겠죠?" 카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빙긋 웃었고, 라이메데스가 즐거운 어조로 동조했다. "그렇군. 그럼 술이나 한 잔 마실까?" "술……?"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등장한 그 술이라는 소재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순간, 나는 보았다. 뭔가 신이 난 표정으로 주방으로 주문을 하러 달려나갈 태세였던 카민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진 것은. 그 눈은 뭔가 망각하고 있던 것을 생각해낸 자의 눈이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칼은 술에 약하죠?" 카민이 라이메데스를 쿡 찌르며 말했다. 나는 의아한 기분에 그런 카민에게 물었다. "무슨 말이지? 내가 술에 약하다니?" 내 질문에 카민은 입을 탁 틀어막더니 쿡쿡거리며 웃었다. "쿡쿡쿡. 그럴일이 있지, 칼. 너는 정말이지 [기억이 끊어지는 형]인가 보군. 아아, 그런 눈으로 보지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저렇게 킬킬거리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지 심히 궁금하군. 그리고 기억이 끊어지는 형이라니?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아항∼∼ 그으래에? 칼레들린이이 술에에 약하다아아고오?" 그리고 라이메데스는 왜 저렇게 말을 늘리는 것일까. 왜 심장은 갑자기 벌렁거리기 시작하는 거지? 이건 왠지 너무나도 불길한 일이 온다는 것을 내 몸이 알리고 있는 것 같다. 이상하군. 뭔가 매우 이상한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카민이라고 했던가? 제일 독한 술로 7병만 주문해서 갖고 와." 라이메데스는 거의 명령조에 가까운 그 말과 함께 카민에게 눈을 찡긋 했다. 카민은 살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이녀석들의 모종의 대화를 낱낱이 들으면서 그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는 건지 심각하게 생각해보았지만 마땅히 머릿속에 남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술이라는 단어는 어디선가 들어 본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술이 뭐야?" 나는 카민이 그것을 가지러 나가자마자 라이메데스에게 물었다. 라이메데스는 씩 웃으며 내게 말했다. "아아, 먹으면 조금 기분이 좋아지는 거야. 나한테는 별로 쓸모 없는 것이지만. 너한테는 조금 효과가 있는 물건이겠지." 살짝 입가에 미소를 매달며 천연덕스럽게 웃는 라이메데스의 그 표정을, 나는 의심해야 했었다. 그랬다면…… 그랬다면 그런 치욕스러운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나는 왜 이렇게 의심이 없는 착한 마족인걸까. 아아, 왜 나는 저 느끼한 표정의 라이메데스를 의심하지 않았던 걸까! ---------------------------------------- 하아, 여러분. 토욜의 업뎃입니다.. 지금 시간이.. 에에... 11시로군요..;;; 거의 대부분이 일요일에 읽으실듯.. 아마 토욜 오후에 업뎃하지 않는 저를 죽어라 원망하셨겠죠..ㅠㅁㅠ;; 아아... 이벤트 답멜이 꽤나 많이 와서 행복했습니다~~~^ㅁ^;; 게중엔 저를 너무나 당황하게 만든 멜도 꽤 있었습니다만..-_-;; 헐헐.... 토욜은 2편밖에 못 올리겠지만 길이는 3편보다 더 길듯..-_-;;; 아아... 이런 변명밖에 못하는 제가 슬프군요. 사실은... 오늘... -_-;; 병원과 봉사활동을.. 쿨럭.. 죄.. 죄송합니다.. 담부턴 변명 안하겠습니다.. 예에... 그럼 41편 마저 올리고 이벤트 결과 발표할게요~~^ㅁ^ -------------------------------------------------------------------------------- Back : 43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1 (written by 카르민) Next : 41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39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39752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3rd September 2001 15:02:48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5-09-2001 23:02 Line : 265 Read : 1037 [43]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1 -------------------------------------------------------------------------------- -------------------------------------------------------------------------------- Ip address : 61.76.31.23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제 10장: 술을 먹고 추태를 부리다. 카민이 받아온 그 술이라는 것은 매우 기묘한 빛깔을 띄고 있었다. 하얗고 매우 깨끗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물이 아니라는 느낌만은 강하게 전해져오고 있는 액체. 나는 그 [술]이라는 명칭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라이메데스와 카민은 그 술이라는 것을 보더니 갑자기 나를 향해 씨익 웃었다. 나는 왜 그들이 갑자기 내 얼굴을 보면서 씨익 웃는 것인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어 상당히 불쾌해졌다. "자, 칼레들린. 마셔라. 속이 시원해 질거다." 갑자기 라이메데스가 나를 향해 잔을 한 잔 내밀었다. 녀석이 내민 그 잔은 크기가 꽤나 커서 보통 머그 컵의 약 다섯 배는 될 것 같았다. 나는 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았다. 이 잔에 꽉꽉 채워서 물을 마시면 배가 터져 죽지는 않을지 걱정이로군.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멋있게 마셔 보자구요! 우리 잘 지내봅시다, 데스 형!!" 어느새 호칭은 [데스형]으로까지 버전업이 되어 있었다. 라이메데세는 카민의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눈꼬리를 둥글게 말며 기쁜 듯이 웃었다. 어이, 카민. 너는 저 라이메데스가 대체 몇 살인지 알고 [형]이라는 말을 쓰는 거지?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모자랄 나이를 먹었을텐데 형이라니? 그건 저녀석에겐 너무 과분한 호칭이라고!!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민은 잔을 번쩍하고 높이 쳐 올렸다. 라이메데스는 씨익 웃으면서 그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 둘은 그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나는 왜 저 두녀석이 잔을 공중으로 마주한 후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있는가를 심각하게 고찰했다. 그렇게 한 5분여를 고찰했을까. 카민이 이빨을 부득갈더니 말했다. "카알, 팔 빠지겠다…… 어서…… 잔…… 들어." 난 그제서야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저것은 나를 향해 자신들과 똑같이 하라는 협박과 비슷했다. 나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도대체 술잔을 서로 쳐서 끼긱,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이 뭐가 재밌겠는가?)그 행위를 꼭 해야하나, 라는 생각을 했으나 곧 녀석들이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는 것을 보고 반항하고자 하는 마음을 억지로 접었다. 카민 녀석은 5분 이상 손을 그대로 공중으로 두고 있느라고 팔이 가느다랗게 경련하고 있었다.(라이메데스는 마족이나 팔이 경련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녀석의 팔은 그∼ 냥 무쇠다.) 나는 녀석들이 원하는 대로 조용히 술잔을 들어 그 녀석들이 위로 처들고 있던 잔에 챙, 하고 부딪히게 만들었다. 그때서야 카민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간신히 밑으로 내리며 나를 사정없는 도끼눈으로 노려보았다. 나는 그 눈을 멋지게 받아주…… 지 않고 그냥 시선을 옆으로 내려버렸다. "술이란거, 오랜만이군." 옆에서 라이메데스의 나즉한 음색이 들려왔다. 잔이 기울어졌다. 카민은 왠지 평소보다 몇배 더 반짝이는 눈으로 그 술이라는 것을 마시고 있었다. 그 어떤 음식을 먹을 때보다 즐거워 보이는 저 눈을 보니, 이 술이라는 것이 그렇게 맛있는 것인가? 나는 내 손에 들린 잔을 움직여 입가에 가져가려 했다. 그런데 내가 막 그것을 삼키려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 뭔가 제지하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마시지마! 절대 마시지마아아아앗!! 경고조로 분명하게 머리를 울려오는 그 목소리는 내 것이었다. 나는 설핏 불안해졌다. 머릿속에서 나로부터의 멧세지라니, 왠지 이 술을 마셔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리고 뭔가 희미하긴 하지만…… 옛날에 나…… 이 술이라는 것을 한 번 마셔본 것 같기도 한데. 나는 뭔가 점점 사건이 구체화되는 것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무엇인가가 희미하게 떠오르려고는 하는데, 그 것이 무엇인지는 구체화되지 않으니, 이거야 원. "어라, 칼? 안 마셔?" 어느 새 한잔을 다 비운 카민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칼레들린. 애써 사온 술을 안 마시는 저의가 뭐냐? 혹시 내가 반갑지 않은 거냐?" 당연하잖아! 네놈이 반가울 이유가 뭐가 있겠어!! "내가 반갑지 않더라도 술은 좀 마셔. 술을 마셔야만 끈끈한 동지애가 생기는 거다, 후후." 너 같은 녀석과는 동지애 같은거 만들고 싶지도 않지만…… 쩝. 나는 왠지 나에게 술을 매우 마시게 하고 싶어하는 이들의 간절한 눈을 받고서도 이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내 이 좋은 성격상 매우 실례라고 느꼈다. 아아, 너무나도 예절바르고도 예절 바른 내가 어찌 남이 권하는 것을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때에는 성격이 너무 좋은 나 자신에게도 조금 화가 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얼굴도 잘 생겼는데 성격까지 좋다니. 이건 다른 녀석들에게 너무 미안한 조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놓여진 잔을 들었다. 그리고, 원샷 했다. * * * * * * * * * * * "딸꾹……." 나는, 나는 정말이지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바로 방금 전부터,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이지 기분이 묘했고 끊임없이 이상하다는 생각만이 맴돌았다. 방금 전에 그 잔을 원샷하기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계속 머리 속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게다가 저 술이라는 것을 한 잔 마시고 나니 식당 내부가 싸악 달라 보였다. 조금은 어두칙칙했던 오후의 식당은 지나치리만큼 밝아 보였고, 그러면서도 초점은 흐릿했다. 청소가 되지 않아 지저분해 보였던 식당은 파리가 미끌어질만큼 깨끗하게 보였고, 아까전에는 분명 더러웠던 바닥은 광이 나는 것처럼 깨끗해 보였다. 이상하군, 정말 이상해. 내 눈이 어떻게 된건가? 아아, 게다가 머리는 왜 이렇게 어지러운 거지? "……어, 어이, 칼레들린? ……설마, 벌써 취한 거야?" 내 옆에 앉아있던 라이메데스 녀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어 몽롱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취하…… 다니?" 나는 이번에도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이상한데. 정말 이상한데. 이번에는 혀가 꼬이고 있었다. 이지적인 말투를 자랑하는 내 혀가 꼬이다니? 나는 심히 불길한 무엇인가가 몸을 뒤덮는 것을 느꼈다. 잠깐! 그러고보니 저번에도 정말 이것과 유사한 일이 하나 있었지. 그 때 나는 카민이 권하는 무엇인가를 마셨었고…… 그리고?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저기, 칼은 정말 술에 약해요." 이번에는 카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음." "저번에 말인데요, 저희 집에서 파이아드라는 술을 딱 한 잔 마시더니 바로 뻗었거든요." "후훗." 뭐라고 소리를 쳐대는 건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카민 놈은 신난 듯이 내 얘기를 하고 있고 라이메데스가 그 얘기를 상당히 즐기고 있다는 것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들을 보며 흐릿해진 손끝으로 탁자 위를 슬슬 더듬었다. 손끝에서 둥근 병의 촉감이 느껴져 왔다. 나는 조금 떨리는 손끝으로 그 병을 들어 내 잔에 갖다 부었다. 너무 많이 부었는지 잔에 술은 넘치게 담겼다. 촤륵. 차가운 무엇인가가 식탁보를 적셨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술로 찰랑거리는 잔을 잠시 든 다음, 씨익 웃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괜시리 웃음이 나왔다고 보는 편이 옳을 거이다. "헤에∼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술을 마시기 전에 이렇게 큰 소리로 외쳐놓고 스스로 당황했다. 아니, 내가 방금 전에 뭐라고 한 거지? 설마 방금 전에 그 소리 내가 낸 거였어? "에?" "호오?" "……역시 취했군요." 한 손으로 붙잡고 있으려니 손이 떨려서 나는 두 손으로 잔을 움켜쥔 채로 술을 마셔야만 했다. 내 옆에서는 카민과 라이메데스가 아직도 궁시렁 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대화의 내용을 아주 잘 들을 수는 있었지만, 녀석들의 대화 중간 중간에는 내가 알 수 없는 말들이 종종 끼여 있었다. 대체 그 [취했다]라는 말은 무슨 뜻이지? "우웅." 나는 두 잔을 다 비운 후 잔을 떨궜다. 아아,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나는 팔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면서 잔을 내려놓았다. 아니, 내려놓았다기 보다는 할 수 없이 내려놓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나는 한 잔을 더 마시고 싶었다. "……이 정도였어? 아예 맛이 갔구만. 눈에 초점이 없잖아?" 내 옆에 있던 라이메데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번 말은 잘 들을 수가 없었다. 분명 들리긴 들리는데, 그 어조가 너무나도 흐릿했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경미한 두통일 뿐이었는데 이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앞이 빙글 빙글 돌고 있었다. "……으음?"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라이메데스 놈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순간, 라이메데스의 얼굴이 로시엔의 얼굴로 떡하고 바뀌는 것이 아닌가!! "로, 시…… 엔?" 나는 당황한 얼굴로 라이메데스 쪽으로 손을 뻗으려다가 움찔했다. 잠깐, 라이메데스가 로시엔으로 변하다니? 그게 말이 되는거냐? 나는 뚫어지게 다시 라이메데스가 서 있는 쪽을 보았다. 역시나 그러면 그렇지, 그곳에 있는 것은 역시나 라이메데스였다. 끄응, 뭔가 잘못되긴 한참 잘못되었나보군. 라이메데스를 로시엔으로 잘못 볼 정도라니. "……좀 심하죠?" "좀 심한 게 아닌데. 예전에는 술 마셨을 때 어떻게 처리했나?" "아아, 그냥……" "그냥?" "……한 대 쳤어요." "그렇군. 좋은 방법이었어." 라이메데스는 그 말과 함께 내 쪽으로 오더니 내 몸에 손을 댔다. 나는 거의 반사적인 움직임으로 그 손을 처냈다. 순간, 희미한 라이메데스의 얼굴이 어이없다는 식으로 변했다. "어이, 지금 그 상태로 반항을 해보겠다는 거야?" 라이메데스는 그 말을 한 뒤 내 몸에 다시 손을 댔다. 그리고 나를 아주 거칠고 폭력적으로 일으켜 세웠다.(미소년을 이딴 식으로 대하다니!!) 녀석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나는 그저 무력하게 일어서는 수밖에 없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다리에 힘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나는 흐릿해지는 시야를 막아보려고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라이메데스가 내 옆구리에 팔을 끼워 넣으며 나를 부축했다. "끄앗!! 이 자식…… 이거 놔!!" "……술 취한 주제에 바리바리 대드는 것 하나는 똑같군." 라이메데스가 피식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대체 이게 뭐냐? 술이라는 걸 먹으면 다 이렇게 되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술을 먹어서 다 이렇게 된다면 라이메데스는 왜 저렇게 멀쩡한거지? 만약 라이메데스가 마족이라서 멀쩡한 거라면 카민놈은 왜 저렇게 또 멀쩡한거냐구. 나는 괜히 억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왜인지 모르지만 속에서는 거부반응이 일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구토감이 이는 것을 느꼈다. "욱, 우욱……" 내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자 라이메데스가 당황한 듯 소리쳤다. "으, 으윽? 칼, 칼레들린? 설마 여기서 올리거나 하진 않겠지? 그런거지?" "우웨에에에에엑!!" 다음 순간, 나는 내가 오늘 아침에 먹었던 모든 것을 그대로 게워냈다. 그것은 흐릿한 정신상태에서 저지른 일이었지만, 쪽팔리는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웁스." 카민은 한탄성과 함께 웩웩대고 있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라이메데스는 곤란한 얼굴로 내게서 물러섰고, 카민은 내 등을 살짝 두들겼다. "어이, 칼, 괜찮아?" "우욱…… 나, 나쁜놈…… 수, 술이란게…… 우욱…… 이런거란걸…… 우우우욱! 말해줬…… 쿨럭쿨럭!!" "……미안. 그 술은 좀 효과가 늦게 나타나는 술이야." 카민은 그 이상의 변명은 하지 않고 내 등을 토닥토닥거렸는데 나는 그것이 더 화가났다. 아니, 지금 병 주고 약주는 건가? 실컷 먹여놓고 등만 두들겨주면 다냐 이거야!!! 내가 막 화를 내려는 시점이었다. "여어∼∼ 오랜만이야! 다들 잘 지내고 있었어?" 차라랑, 하고 방울이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드나든 좁은 여관으로 한 사람이 더 들어서는 소리였다. 힐끗 보아진 문이 끼긱하고 열리고는 그 문 사이로 조금은 거친 덩치의 남자가 한 발을 내딛고 있었다. "어, 루덴스? 어라? 이거 정말 루덴스 아냐?" 그 남자의 등장에,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 몇몇이 반가운 어조로 문 쪽을 보았다. 나는 그 루덴스, 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갸웃했다. 그러나 곧 나는 알게 뭐야, 라는 생각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나는 이상한 것을 봐야만 했다.(왜 나는 계속 이상한 것만 보는거야!!)내 등을 두들겨 주었던 카민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매서운 표정을 지으며 문쪽을 향해 휙 하고 돌아서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우오!! 돌아왔다는 소문은 들었어!!! 아앗, 혹시 씬 군도 같이 온 거야?" "루덴스!!" 저녁의 식사를 계속하고 있던 사람들은 벌떡 벌떡 일어나 여관의 출입문 쪽으로 달려갔다. 문은 환하게 열려졌다. 그 문 사이로, 거친 덩치의 남자 말고 또 다른 남자가 성큼 들어섰다. 다음에 들어선 남자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였다. 나는 그 남자 역시 어디선가 본듯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흐릿한 정신 때문인지 그 남자를 어디서 봤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았다. "아앗!! 키세…… 아, 아니 루덴스님!! 잔뜩 취하신 주제에 설마 또 술을 마시려는 거예요? 그만 좀 마셔요, 제발!!! 게다가 몸도 다 안 나으셨잖아요!!" "이봐, 씬. 오늘 같은 날은 실컷 마셔야 돼. 신관도 어제 그 예쁘장한 녀석에게 맞은 상처가 의외로 별 곳 아닌데를 건드린터라 몇일만 푹 쉬면 된다고 했잖아? 하암…… 어서 술이나 한 잔 가져와 봐. 루덴스님께서 술이 고프거든." "크핫!! 루덴스, 이 쪽 자리로 앉아! 술이라면 내가 사지!!!" 유쾌한 소리가 터져 나오고, 여관은 순식간에 분주해졌다. 하지만, 나와 카민의 분위기만큼은 싸늘하게 냉동되었다. 나는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방금전에 저 문을 넘어온 자들이 누구인지. 방금 들어온 손님과 여관에 있는 사람들은 매우 친숙한 사이인 듯 분위기는 금방 화기애애해졌지만 나와 카민의 분위기만큼은 거의 사람 하나를 얼려 죽일 수 있을 만큼 살벌하게 변해가고 있었다.(표정 굳히느라고 속 쓰린데 엄청 고생했다) 후우, 하고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한숨을 내쉬더니 덩치 큰 남자의 뒤를 따라 걸어오기 시작했다. 터벅터벅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린다. "어, 어라, 너, 너는?" 그리고 들려오는, 낯설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익숙한 목소리. 그 목소리는 분명, 그 여관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와 같았다. 머리좋은 내가 그것을 잊어버릴 리가 없지. "……어제의 그 아가씨?" 옅은 브론드 금발의 남자는, 내 기억이 분명하다면 어제 바로 그 식당에서 만났던 그 남자. 게다가 이 남자는, 그날과 마찬가지로 오늘 역시 매우 무식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말을 나오는 대로 막 해버린 것. 아무리 카민을 남자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해도, 저 말을 했다가 또 무슨 꼴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한걸까. 루덴스라고 불렸던 남자, 카민을 여자라고 오해했다가 거의 죽을 때까지 맞았던 저 남자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붕대로 가슴 부분과 팔부분을 칭칭 감고 있는데다가 얼굴은 멍 투성이. 그렇잖아도 울그락 불그락 보기 좋지 않은 모습은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맞은 주제에. 또 카민을 「아가씨」라고 불러서 어쩌자는 거야!!! "……." 역시나, 카민은 외모에 관해서만은 매우 민감한 녀석이었다. "데스 형." 카민은 자연스럽게 라이메데스를 부르더니 나를 들어(나, 나를 들어? 지금 나를 든거야? 으엑, 너 힘이 센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힘이 셌던거냐!!)라이메데스에게 건넸다.(건네다니, 건네다니!! 내가 물건이야!!??) "……잠깐 볼 일 좀 보고 올테니까 칼 좀 부탁해요." "좋을대로." 라이메데스는 호기롭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 카민은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딛었다. "하루만의 재회인가? 아∼ 주 반갑군." 루덴스라는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던 카민녀석의 얼굴 위로 자욱한 웃음이 번져나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석의 허리춤에 잘 걸려 있던 단검이 무서운 속도로 뽑혔다. 혼미한 정신 속에서, 나는 문득 어제 들었던 카민의 목소리가 무섭게 확대되어 들려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쳇, 루덴스라고 했겠다.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지옥을 보여주지!!」 나는 순간 허, 하고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 간단한... 설문조사라고나 할까.. 이거 보는 즉시 보내셔야... 의견이 반영되실겁니다;; 칼레들린, 어디까지 망가뜨려도 좋은가? 의외로 칼레들린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으시더군요.. 후후.. 제가 망가뜨리려는 범위를 과연 허용하실런지..-_-;;; 그럼... 어헐어헐..-_-;;;(사실 칼레들린 좋아하는 친구한테 이러저러해서 이러저렇게 시킬거야~ 라고 하니까... 죽어... 라고 하더군요..-_-;;;) 에엣~ 행복한 밤 되세요!(하지만 아무래도 일욜날 읽으시는 분이 많으실듯..-_-;;) -------------------------------------------------------------------------------- Back : 44 : 에헤~~~ 이벤트 결과예욧!! (written by 카르민) Next : 42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0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39752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3rd September 2001 15:02:59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6-09-2001 23:08 Line : 174 Read : 937 [45]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2 -------------------------------------------------------------------------------- -------------------------------------------------------------------------------- Ip address : 61.78.221.12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여러분... 칼레들린을 망가뜨리기로 했던 저의 계획은...-_-;;; 아주 완벽하게... 거부당했습니다... 쿨럭쿨럭... 에엣... 아직도 칼레들린의 샤프함을 사랑하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믿을 수 없는 현실이지만... -_-;;; 그런 샤프함따위~~~ 날려버릴테닷―!!! ...하고 생각했었는데...-_-;; 10장의 제목도 바꿔야 하는건가.. 이것참;; 쩌업...;; ---------------------------------------- "……의외인걸." 라이메데스가 중얼거리다시피 한 그 작은 목소리는 귓가에서 몇 십 배로 확대되어 내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유린하고 있었다. 평소 때라면 라이메데스의 저 목소리가 매우 작게 들렸을 것이 틀림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조그맣게 중얼거린 녀석의 목소리는 몇 배, 몇 십 배로 확대되서 내 귀에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여운 역시 길었다. 무엇인가가 머릿속과 속에서 끊임없이 울컹거리는 것도, 가뜩이나 좋지 못한 내 몸 상태를엉망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더 지껄여봐." 아파오는 머리도, 참을 수 없을만큼 울렁거리는 속도, 조그마한 목소리가 몇 십배로 확대되어 울리는 상황에도…… 카민의 그 목소리만큼은 또렷하게 머릿속에 울리고 있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카민의 검은 높게 뽑혔다. 뽑혀진 검의 날카롭게 빛나는 검신은 내 몽롱한 눈가에서도 깊게 맺혔고, 살벌한 녀석의 표정은 이상하리만치 푸르스름하게 보였다. "후우후우, 저 녀석이……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얼굴로 열이 오르고 있었다. 아마 내 두 뺨은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숨을 쉴 수 없을만큼 탁한 공기가 나와 라이메데스 주위를 감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카민 쪽으로 시선을 맞추려고 애썼으나, 그 때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목이 밑으로 꺾이는 바람에 나는 심한 고생을 해야만 했다. 갑자기 카민이 검을 뽑아 들이댄 것은 역시 이런 여관에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루덴스라는 녀석은 당황한 표정으로 두 손을 연신 내저었다. "허걱…… 이, 이봐. 방금 이건 실언이었어!! 자, 자아. 그 검, 이제 놓는 게 어떨까?" 루덴스는 이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했는지 카민을 향해 가볍게 두 손을 문지르며 말했다. 얼핏보니 녀석의 안색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하긴, 그럴만도 했다. 우우, 온 몸의 털이 치릇치릇하고 서는 것을 느낄 정도로 녀석의 적의는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카민은 대꾸 없이 검을 자신의 가슴께까지 끌어올렸다. 희미한 날을 반사하는 조명 때문인지 검을 든 카민은 꽤나 근사하게 보였다. "이, 이봐? 정말 그걸로 날 찌를 생각은 아니겠지?" 루덴스는 카민의 그런 행위에 더욱더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휙휙 저어댔지만 이미 흥분한 카민에게 그런 얘기가 통할 리가 없다. 처음 카민을 만났을 때 카민의 검술 실력이 문득 떠올랐다. 꽤나 고수였던 두 녀석을 슥슥 베어버리곤 피식 웃음까지 지었던 카민 놈. 녀석의 싸늘한 표정은 아직도 [에헤∼]라는 웃기지도 않는 웃음을 짓는 카민의 이미지가 짙게 기억되는 지금의 내 머릿속에도 남아있다. 카민은 그 상태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서시 시작했다. 루덴스라는 놈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카민의 입술이 피식 들어올려졌다. "물론 찌를 생각이야." 무, 무서운 놈. 카민의 검은 거의 무방비 상태인 루덴스에게로 무섭게 들어올려졌다. 보아하니 팔 정도를 노린 듯 하다. 뭐, 팔 정도 찔린다고 설마 죽기야 하겠어? "……네 인간동료라는 카민이란 놈은 의외로…… 성격이 터프하군." 라이메데스의 의견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준 나는 다시 카민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카민의 검은 높게 치켜올려 진 후, 막 루덴스 쪽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그만두십시오!!!" 챙캉!!! 그런데, 카민의 검이 미처 루덴스에게 닿기 전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카민의 검을 막는 소리가 하나 있었다 카민은 침묵으로 자신의 검을 막은 존재를 보았다. 카민의 내 뻗은 검을 완벽한 자세로 막은 자는…… 저번에도 루덴스와 카민이 싸우는 것을 막았던 바로 그 씬이라는 녀석이었다. 검을 막은 그 자의 회색의 머리카락이 물결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침을 꼴깍 꼴깍 삼키며 구경을 하고 있다가(분명히 말하지만 구경이었다.)씬이 나타나자 갑자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우오!!! 씬 군이다!!!" "해치워 버려, 씬 군!!!" ……뭘 해치워 버리라는 걸까. 대체,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저기서 구경하는 저 자들은 어째서 루덴스라는 저 놈이 위험해도 전혀 상관하지를 않는 걸까. 그리고 씬이라는 저 녀석이 검을 뽑았다는 사실에 저렇게나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뿐이로군. "무슨 짓입니까. 지금 제정신인 겁니까? 겨우 그 말 했다고 사람을……!" 카민의 검을 서둘러 막은 씬이란 놈이 버럭 고함을 쳤다. 그 자의 검은 흐릿한 시야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단 하나,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광채가 두 눈 가득 차오르기 때문이다. 그 검에 비해 카민의 모습은 매우 흐릿하게 보인다. "검 치워." 카민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위의 사람들은 이제 휫바람을 불고 있었다. "싸워라 싸워!!!" "씬 군!!! 힘 내!!! 루덴스 대신 자네가 싸워야지 어쩌겠어?" "휘이익!!" ……역시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로군. 제 3자의 입장에서는 저렇게 느긋할 수 있는걸까? 저 사람들 역시도 루덴스를 꽤나 잘 아는 사람들 같은데 말이야. 아니면, 그 정도로 저 씬이라는 자를 믿고 있다는 말일까? 그거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흘낏 라이메데스를 올려다보다가 흠칫했다. 라이메데스의 인상이…… 인상이……!!! 너무나도 더∼럽게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저 라이메데스의 인상은 과히 좋지 않았지만 이 번엔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카민이 나를 라이메데스에게 거의 던지다 시피 하고 간 뒤라 나는 라이메데스에게 엉거주춤하게 들려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였기에 로브를 푹 뒤집어쓴 라이메데스의 얼굴도 매우 잘 보였다. 그런데, 그런데 내 눈에 담긴 녀석의 표정은 정말이지 좋지 않았다. 라이메데스는 씬이란 녀석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집중해서, 오로지 그 씬이란 녀석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에는 적지 않은 적의와 함께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호기심이라고 할까? 아니면…… 아아, 뭐지? 저 눈에 맺힌 것은 혹시 누군가가 말하던 그리움이란 종류의 것인가? 조금 애틋한……(우욱, 생각하지 말자. 라이메데스가 애틋한 표정을 짓다니!! 말도 안돼!! 난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거다.) 하여튼 그런 종류의 것이 흐르고 있었다. "라이메데스?" 난 그런 라이메데스를 향해 힘없는 목소리를 냈다. 크윽, 제기랄!!! 이게 무슨 꼴인지. 내 몸은 흐느적흐느적 정말 힘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정말이지 짜증이 나 미치겠구만. 라이메데스는 내 말에 대꾸하지도 않고 계속 그 씬이란 놈을 노려보고 있었다. 녀석의 초록색 눈동자가 무섭게 빛을 발하고 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검, 치우라고 했다." 문득 카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못 치웁니다! 아니, 안 치운다!" 씬이라는 자는 카민을 향해 매서운 어조로 말해놓고 루덴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카민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그으래?" 카민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진다고 생각한 순간, 카민의 몸이 낮춰졌다. "크윽!" 갑자기 낮춰진 카민의 동작에 씬은 당황한 듯 몸을 비켜냈다. 카민은 몸을 슬쩍 오른쪽으로 틀더니 가차없이 씬쪽으로 돌진했다. 치켜올려진 카민의 검이 씬의 오른쪽 옆구리를 향해 파고든 순간, 씬은 거의 본능적으로 터지는 기합성과 함께 그 검을 흘러 보냈다. 자신의 공격을 씬이 쉽게 피해내자 조금은 놀란 듯, 카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씬은 카민을 힐끗 보더니 몸을 뒤로 움직여 나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깊게 한 숨을 내쉬었다. 저 씬이라는 놈은 끼여들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 카민녀석은 저 루덴스라는 놈의 팔 정도를 지근지근 밟아주는 걸로 자신의 화를 삭히려고 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저 씬이란 놈이 끼여들자 카민 놈은…… "너어∼ 잘 걸렸다!! 오늘 한 번 죽어보자!!!!!" 자신의 공격을 흘려낸 루덴스를 향해 감탄의 시선을 보내고 있던 카민의 목소리가 갑자기 크게 울려퍼졌고 나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래, 그런 것이었다. 카민은 지금…… 즐기고 있는 것이다. 씬이라는 놈의 동작은 매우 부드러웠다. 라이메데스마저 호오, 하고 가볍게 감탄을 흘릴 정도니 그 실력이 어떻다고는 설명 안 해도 될 것이라 믿는다.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도 씬이 휘두르는 검의 움직임은 흐르는 물을 연상시킬 정도로 매끈했다. 게다가 자연스럽게 행하는 운신에서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기품마저 흘러 넘쳤다. 카민의 검이 매우 혼잡한 형태로 이리저리 몸 구석구석을 노리며 재빠른 스피드를 혼용하고 있다면 씬의 검술은 마치…… 음, 그래 뭐랄까… 뼈빠지게 수련을 한 녀석들의 검술 같았다. 동작 하나하나에 힘이 실리고, 그리고… 지나치게 화려한 동작. 카민은 그런 씬의 움직임을 보면서 피식 웃고 있었다. "당신!! 지금 대체 왜 웃고 있는 겁니까! 이제 그만 좀 합시다, 이런 말도 안되는 싸움 따위!" 씬이 발을 움직이며 카민의 검을 받으며 소리치자 카민이 냅다 고함을 쳤다. "시끄러워!!" 카민도 검을 다루는 녀석이다. 하지만 체이드 숲을 나선 이후로 그 검일 하루도 뽑힐 날이 없었으니 씬처럼 부드러운 검을 다루는 녀석을 만나자 괜히 호승심이 발휘된 건지도 모른다. 검사가 오랜만에 검을 뽑았을 때 그 상대가 자신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실력을 갖췄다면 검사는 흥분하게 된다. 검을 휘두르는 카민의 표정. 그것은 한마디로…… [신났다]였다. "대충 수준이 비슷한 녀석을 만나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군." 문득 라이메데스가 뱉어낸 말에 나는 동조했다. "……그런데 저 놈은 역시……" 라이메데스는 말을 마저 하지 않고 눈살을 다시 찌푸렸다. 나는 그 다음 말이 궁금해 녀석의 입을 빤히 보았으나 녀석의 다음 말은 튀어나오지 않고 있었다. 라이메데스는 조용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엘프(elf)치곤 좀 허약해" 순간, 나는 얼음 속에 처박혀진 나 자신을 발견했다. -------------------------------------------------------------------------------- Back : 4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3 (written by 카르민) Next : 44 : 에헤~~~ 이벤트 결과예욧!!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39752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3rd September 2001 15:03:05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6-09-2001 23:12 Line : 185 Read : 990 [46]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3 -------------------------------------------------------------------------------- -------------------------------------------------------------------------------- Ip address : 61.78.221.12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에, 에, 엘프?" "그래, 엘프." 더듬는 내가 무안하도록, 라이메데스는 딱 잘라 [엘프]라고 말했고 나는 멍해져 버렸다. 한참동안 구경꾼인 우리 둘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이 감탄사를 내지르고, 식당 한 켠에 놓여있던 의자가 굴러다니고, 식탁이 검을 휘두르기 위한 장소로 변하는 시점에서도 카민은 여전히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 씬이란 놈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카민의 검을 맞받아치고 있었다. "엘프라면 말이야, 라이메데스." "말해봐라." "혹시 귀가 뾰족하고,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일컬어지는 순수의 종족이며 고기 따위는 입에도 대지 않고 술도 절대 안 마시고 숲에서 띵가 띵가 노래 부르 부르면서 동물들이랑 함께 뒹굴거리며 고고한 척 깨끗한 척 혼자 다하면서도 나나 너 같은 마족놈들만 보면 눈꼬리 치켜 뜨며 활이나 쏘는 그 놈들을 말하는 거냐?" "……그런 정보들은 대체 어디서 얻은거지?" "로시엔의 서적에 있던 책을 읽으니 이런 결론이 나오던데." 순간, 라이메데스는 푸웃, 하는 소리와 함께 짧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뭐, 대충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족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거고…… 인간들이라면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 마족의 입장에서는 엘프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존재지만, 인간들에게 있어 엘프는 고귀한 존재다." 고, 고귀한 존재? 로시엔의 서재 한 켠에 있던 엘프란 존재에 대해 내가 느낀 감상은 단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다. 「재수」……라고. "힘 내라, 씬!! 아아, 잘 싸운다!!" 나는 갑자기 튀어나온 응원 비슷한 목소리에 움찔했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목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그 목소리는 아까 까지만 해도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카민에게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고 있던 루덴스놈의 것이었다. 그놈은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양 팔을 흔들어 가며 씬을 응원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이지 기가막히다 못해 코가 막히는 것을 느꼈다. 저 놈은…… 저 놈은 정말 제정신인건가!!! "하아하아……" 카민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앞에 놓여있던 탁자로 성큼 올라섰다. 카민의 단검이 앞으로 겨누어진다. "이제 그만 좀 합시다, 네?" 카민의 숨은 거칠어져 있었고 그 엘프(……)라는(라이메데스의 주장이므로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씬의 얼굴 위로는 낭패감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뭘 그만 좀 하자는 거지?" 카민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눈매로 서 있던 곳에서 밑으로 재빠르게 몸을 날렸다. 카민은 가볍게 찰과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씬은 그다지 다치 곳이 없는 듯 했다. "그만 하자고 했잖아요!! 내가 정말 화를 내길 바라는 겁니까!!" 씬의 눈매가 끝까지 치켜올려지고 있었다. 카민은 그러나 굽히지 않았다. "물론." 씬의 눈이 점점 더 깊어지기 시작했다. "라이메데스." "왜?" "……저 놈, 정말 엘프야?" "확실해." 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라이메데스는 정말 확정적인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저녀석이 엘프라면, 나나 네가 마족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어?" "절대 알아볼 수 없지. 난 마기를 모조리 숨기고 있는 상태고, 너도 힘을 쓰지 않는 한은 마기 따위 분출될 리 없으니까. 아직 각성도 못한 반마족의 마기를 알아차릴만한 존재가 몇이나 되겠어? 일·반·적·으·론· 절대 못 알아보지∼," "흐음." 난 라이메데스의 말을 듣고 조금 안심했다. 나는 발을 살짝 내려놓았다. 라이메데스는 조금 당황한 눈으로 나를 붙잡으려 했으나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녀석의 손을 쳤다. "……저를 화나게 하지 마십시오. 이제 그만 합시다." 씬이란 놈의 목소리는 조금씩 탁해지고 있었다. 나는 카민 쪽으로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겼다. 서로가 치명상을 입히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검이 교환되었던 만큼, 카민의 몸은 아직 깨끗한 상태였다. "그만 해라." 사람들은 내가 검을 휘두르는 두 사람 사이로 끼여들려하자 화들짝 놀라면서도 길을 비켜주었다. 내 목소리는 잔뜩 꼬여 있어 나는 진지한 목소리를 내려 무진장 애를 써야만 했다. "……에, 칼?" 카민은 잔뜩 비틀거리는 걸음걸이의 내가 다가오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았다. 나는 그런 카민을 향해 멋지게 웃어준 후(아아, 너무나 상큼한 미소년의 상큼한 미소였다!) 당황하고 있는 씬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씬이 들고 있는 검 쪽으로 손을 뻗었다. 씬은 순간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흠칫했다. "당……신……?" 씬은 내가 가까이로 다가가자 갑자기 안색이 시퍼렇게 질리더니 미친 듯이 나를 훑어 보았다. 뭐야, 내가 너무 잘생겨서 그런 건가. 씬은 부들거리는 손 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나는 그 사이에, 아주 쉽게 씬의 손에 들린 검의 힐트를 움켜쥘 수 있었다. 씬은 내가 자신의 검을 잡자 그제서야 핫, 하는 소리와 함께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씬을 향해 피식 웃었다. "당신이 먼저 검을 거둬." "칼!!! 방해하지마!!" 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카민놈의 음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난 싹 무시했다. "너도 검 내려." 나는 카민을 향해 말했다. 머리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지만 나는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제길, 내가 다음번에도 또 술을 먹으면 인간도 아니고 마족도 아니고 미남도 아니야!! 이딴 속 울컹거리는 것을 뭐가 좋다고 처먹는거지?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군! 술의 효과라는 것이 뒤늦게 나타난다고 했던 카민의 말처럼, 몸을 움직이자 몽롱한 정도가 더 심해졌다. 하지만 역시 인내심 그 자체이며 의젓하기 짝이 없는 나는 꾹 참으면서 냉정하면서도 근엄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 냉정하고 근엄한 표정을 완전히 무시하며 카민의 말이 들려왔다. "난 싫어." "저도 싫습니다." 내게 검을 잡힌 씬 조차 검에 힘을 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내 이 근엄하고 냉정한 표정을 무시하는 두 사람에게 조금 화가 났다. "좋은…… 말로 할 때 거둬."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있는 힘을 다해 표정관리를 하고 있는 나였는데,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몸의 균형 자체가 휘청, 하고 흔들렸다. 그 바람에 씬의 검을 잡고 있던 손마저 미끌어 졌다. "어, 어, 어?" 씬이 당황한 듯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내 몸을 받치려고 했다. "카, 카, 카, 칼?" 잔뜩 긴장되어 있던 카민도 목소리를 탁하고 풀며 놀란 듯 내 이름을 불러왔다. "우웅……" 아아, 머리가 심하게 어지러웠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이. 다리에 힘이 완전히 풀리면서 균형이 뒤쪽으로 쏠려졌다. 으윽, 이대로 뒤로 넘어지는 건가? "술을 마셨으면 얌전히라도 있어야할 것 아냐, 노란 꽃무늬 앞치마."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멀쩡하게 두 발로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무엇인가 단단한 것이 내 가슴 부분을 지탱하고 서 있었다. 라이메데스. 그런데…… ……누가 노란 꽃무늬 앞치마지? "이제 그만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 들지 않나?" 순간이었다. 나를 받쳐들고 있던 라이메데스의 입에서 조용한 음이 새어져 들어온 것은. "……으, 읏?"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젠 완전히 적의가 생긴 듯, 카민을 향해 검을 곧추 세우고 있던 씬이란 녀석이 검을 툭하고 떨궈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굉장히 놀란 듯, 라이메데스를 향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뭐, 뭐지? "……다, 다, 당신?" 검을 놓쳐버린 듯 당황한 표정으로 라이메데스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씬의 입술에서 심각하게 떨리는 한마디가 새어나왔다. 그런 씬의 태도가 어찌나 진지하고도 무거웠던지, 여태껏 카민과 씬의 그 살벌한(그건 정말 살벌한 거였다)검 대결을 장난처럼 응원하며 즐거워하고 있던 사람들의 분위기마저 굳어버렸다. 나 역시 조금 당황했다. "그렇게까지 발작할 필요는 없을텐데, 시이나." 나를 받쳐든 라이메데스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데, 데, 데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씬의 입에서 더듬더듬 거리면서 삐져 나온 것은. 그것은 라이메데스녀석의…… 그…… 애칭이었다. "응, 데스다." 라이메데스는 그 말을 듣자 피식하고 웃었다. --------------------------- 에-효효효효효;; 님들... 하지 않기로 했었습니다만..제가 변명 비슷한 거 하나 해도 될까요;; 오늘... 도... 라..인...이... 낮...죠... 벌초하고 왔습니다.. 그리고 갔다와선.. 조금 놀다가..-_-;; -_-;;; 4연참이라는 약속은... 토요일 2연. 일요일 2연. 합쳐서 4연참..-_-;;;; 이라는 어이없는 결과가 되버렸군요. 죄송합니다. 원망멜 맘껏 날리십시오........ 그럼...........주말 행복하셨길 빕니다. 아참...-_-;; 퍼가시는 분들을 위해서 제 멜 주소 남길게요^^ carmine21@hanmail.net입니다. 카르민이라고 읽으시면 됩니다.. 원래는 카민이지만..-_-;;; 하핫... 그럼 이만~~ 사라집니다! -------------------------------------------------------------------------------- Back : 4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4 (written by 카르민) Next : 4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2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39752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3rd September 2001 15:03:09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8-09-2001 22:13 Line : 206 Read : 1006 [47]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4 -------------------------------------------------------------------------------- -------------------------------------------------------------------------------- Ip address : 61.76.91.1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나는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속이 또 한 번 요동치는 기분과 함께, 머릿속이 난잡하게 굴러가는 느낌과 함께, 뭔가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이 상황은 무엇인가. 방금 전에 라이메데스는 저 씬이란 녀석을 [엘프]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바로 저 [엘프]라는 녀석이 라이메데스를 알아본 듯, 데스라는 애칭까지 써가면서 라이메데스를 불렀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정말로 머릿속이 어지럽다. "……데스형, 혹시 아는 사람이예요?" 카민 역시 씬이 라이메데스를 아는 척 하는 것이 무척 의외였던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라이메데스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 라이메데스는 피식 웃었다. "아는 사람이라기보단……." 라이메데스의 입꼬리가 살풋 올려졌다. "아는 엘프란 표현이 옳겠지. ……안 그런가, 시이나?" 라이메데스의 어조는 부드러웠고 입가에 맺힌 미소는 뜻밖에도 아주 상큼한 종류의 것이었다. 라이메데스는 정말이지 반가운 존재에게 인사를 하듯 웃으며 말을 건네고 있었다. 하지만 인사를 받아내는 씬의 표정은 별로 밝지 않았다. "…… 정말…… 당신입니까, 데스?" 밝기는커녕, 씬은 당황한 표정으로 비틀비틀 거리고 있었다. 씬의 회색머리카락을 살짝 감추고 있는 머리 위의 두건이 흠칫 흠칫 거리는걸로 봐서는 상당히 긴장한 듯 했다. "뭐야, 씬. 네가 아는 사람이야? ……네가 엘프 라는 걸 알고 있는데." 여태껏 씬 이겨라, 라는 웃기지도 않는 응원이나 해대고 있던 루덴스 놈도 뭔가 이상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은근슬쩍 다가와선 씬을 쿡 찌르며 말했다. 맨 끝의 말은 살며시 흐려서 잘 들리지 않게 만들었지만 나 같은 마족의 비정상적으로 좋은 귀에서 빠져나가는 소리란 있을 수 없다. 씬은 흠칫 놀란 얼굴로 루덴스를 바라보더니 어설프게 웃었다. "……아, 예. 아, 아는 사람입니다. 데스…… 라고 하고…… 12년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사이……죠." 씬은 더듬더듬거리며 말하자, 라이메데스가 피식 웃었다. "자아, 내 얼굴을 봐서라도 이제 그만 검을 거두지 그래, 시이나. 이 쪽은 내 동료인데 말이야." 그 말에 씬의 미간이 꿈틀했다. 그는 갑자기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뚫어질듯한 그 시선에 나는 멈칫했다. 씬의 시선은 무척이나 집요한 면이 있어, 한참동안이나 붙박힌 듯 내게서 떨어져 나가지를 않았다. 뭔가를 탐색하는 듯한 그 눈동자에, 나는 희미한 의식 가운데에서도 약간의 불쾌감을 느꼈다. 우우, 구토감이 다시 올라오는군. 한참이나 나를 살펴보고 있던 씬은 내가 막 다시 구토를 하려는 시점에서 카민 쪽으로 힐끗 시선을 옮겼다. 그는 가볍게 한 숨을 내쉬곤 그대로 검을 회수했다. "당신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너도 집어넣어." 씬이 검을 회수하는 것을 지켜본 라이메데스가 부드러운 어조로 카민에게 말했다. 부드러운 어조라곤 하지만 강압적인 그 말투에, 카민은 잠시 흠칫하더니 선선히 검을 거두어들였다. 카민의 손동작은 매우 흐릿해보였다. 나는 내 의식이 이미 저 나락까지 다달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우, 속이 거북해!! 제길, 뭔가 심각한 상황인 것 같은데…… 어째서 계속 구토감이 올라오는 거야!!! "……어이…… 칼, 안색이 창백하군. 괜찮냐?" 라이메데스가 갑내 옆구리를 푹 찌르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해왔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끄덕이려고 애썼다. "……괜…… 찮…… 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머리가 무겁다. 라이메데스는 놀란 얼굴로 나를 흔들었다. 심하게 시야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어찌할 수 없는 무거운 것이 눈꺼풀을 짓눌렸다. 나는 애써 그것을 극복하려고 했으나 무리였다. 잠의 요정…… 샌드맨이라도 내게 접근한 건가. 이렇게나 쏟아지는 잠이라니. 의식이 멀어진다.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듯한 느낌. 술이란 건 이성을 날리는 도구로서 이용되는 물건이었나. "이봐!! 칼…… 린!!" 희미한 라이메데스의 목소리와, 달려오는 카민의 발소리와, 당황하는 씬의 목소리와, 조금 놀란듯한 루덴스의 목소리가 엉망진창으로 혼재되어 들리는 가운데, 내 눈꺼풀은 점점 더 깊게 덮여졌다. ……기억은 거기서 뚝, 하고 칼로 끊은 듯 끊어졌다. 아아!!! 어째서어어어∼∼ 난 그때 의식의 끈은 놓아버렸던걸까, 어째서!!! * * * * * * * * * ……조금 황당하게도. 눈을 떠 일어나보니 아침이었다. 나는 멍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본 후 엉망진창으로 얽힌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하여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나는 우웅, 하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잤어, 허니∼" "……." 달콤하다못해 닭살이 돋는 듯한 그 목소리에, 나는 순간 경직해버렸다. "……그런 표정 짓지마. 농담이다." 하지만 결코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억지로 억지로 표정을 풀려 애썼다. 마침내 차분한 표정을 되찾은 나는 쏘는 듯한 눈빛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라이메데스는 쑥스러운 표정을 짓고, 내 옆에 서 있었다. 이, 이 자식이!! 남은 방금전에 닭살이 올라 죽을 뻔 했거늘 그게 농담이라고? 나는 방금 전 나를 닭살사(死)시킬 뻔한 라이메데스의 면상을 있는 힘껏 쳐주려 했으나 그 순간 골이 뽀개질 듯이 아파오는 바람에 손을 떨궈야만 했다. "……머리 아프냐?" 내가 손을 들다 말고 머리를 손끝으로 매만지자 라이메데스가 피식 웃으며 물어왔다. 나는 그렇다고 하기엔 자존심이 상했기에 고개를 저었다. "전혀."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라이메데스." 내 작은 부름에 라이메데스는 피식 웃으며 좀 더 내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아침에 본 녀석의 얼굴은 여전히 보기 싫은 종류의 것이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따뜻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뭐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라이메데스. 정말이지 뻔뻔한 자식이다. "……시침떼지말고 똑바로 얘기해. 어제 그…… 씬이라는 엘프……. 너랑 아는 사이였던 것 같던데. ……좀 이상하지만, 갑자기 기억이 툭하고 끊겨 버렸어. 모르겠다. 갑자기 머리가 핑 하고 도는 것 같더니만 의식이 끊겨져 버렸고…… 네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그리고 는 기억이 안 나. 어제,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그리고 그 씬이란 놈은……?" 내 질문에 라이메데스는 피식 웃었다. "한가지씩 질문해. 먼저, 시이나…… 아, 씬이라는 건 시이나의 애칭인 것 같더군. 뭐, 시이나와는…… 솔직히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니야. 생각해봐, 엘프와 마족이 사이가 좋을 수가 있겠어? 12년 전의 [그 날]에도 서로 좋은 인상은 아니었고." "……그 날?" 나는 라이메데스의 말 중에 뭔가 거슬리는 부분을 찾아내곤 물었다. 라이메데스는 그런 내 표정을 보더니 방긋 하고 웃었다. "아아, 신경쓰지 마. 그냥 그런 일이 좀 있었어. 별 것 아닌 일이야." 그냥 그런 일이 좀 있었다고? 별 것 아닌 일 갖고 얼굴 근육이 저렇게 경직하냐? 나는 뭔가 라이메데스의 얼굴에서 심각한 기색을 읽었지만 그것에 대해 내색하지는 않았다. 라이메데스는 그저 웃었다. "그리고 어제 일이라면 걱정 마. 아∼주 잘 해결되었으니까 말이야. 어째서 엘프가 인간과 같이 다니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제 일은 아∼∼ 주 완만하게 수습이 잘 되었어. 다 네 덕택이야." 나는 라이메데스의 어조에서 미묘한 구석을 발견했다. 나 때문에 잘되었다고는 말하고 있는데…… 뭐랄까, 비꼬는 것 같군? "흐음." 난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의외로 몸은 가뿐했다. 그런데, 나는 일어나는 순간 어젯밤의 나와 오늘의 내가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 라?" 귀에 꽂혀 있는 무엇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귀에 무엇인가 이질적인 것이 꽂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엉겁결에 그것을 만졌다. 싸한 감촉이 손끝에서 전해져왔다. 둥근 무엇인가가 손 끝에서 자신의 모습을 전해온다. "뭐지?" "……네가 잠든 틈에 그냥 달아버렸다." 라이메데스가 낮게 읊조렸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녀석을 보았다. 녀석은 피식 웃고 있었다. "내가 어제 말했잖아. 아이에드님은 내게 너의 안전을 맡기셨고, 로시엔님은 내게 어떤 [물건]을 맡기셨다고." "그런데?" "그 물건이라는 게 바로 그거야." 나는 조금 놀라서 귀를 만져보았다. 다시 한 번 느껴져오는 싸한 감촉. "……피어스다." 문득 라이메데스가 말했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녀석을 보았다. "은색이야. 로시엔님이 꼭 전해 주라고 하시더군. 너한테 잘 어울려." "……."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에 있는 거울 앞에 섰다. 내 모습은 어제와 사뭇 달라 보였다. 깨끗해 보이는 흰 피부라던가, 검은 눈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훤칠한 몸매 등 어디를 살펴보아도 내 잘난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반짝하고 빛을 내는 귓가에 꽂힌 원형의 피어스 하나가 내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깟 악세사리 하나 한다고 뭐가 달라진다는 거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야 없겠지만, 이건 좀 달랐다. 귓불에 살곰이 꽂힌 것 하나만으로 나란 존재의 이미지가 한층 차분해진 느낌이랄까, 핸섬해진 느낌이랄까. "맘에 드냐?" 준 건 로시엔이라는데, 마치 자기가 준비해 온 것처럼 생색을 내려는 라이메데스를 보며 나는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내 잘난 외모가 조금 더 빛을 발하는군. 로시엔이 주라고 했단 말이지?" 나는 그 말과 함께 허리까지 길게 뻗어 내린 머리카락을 단숨에 한가닥으로 잡았다. 머리카락이 걷혀나간 귓가가 도드라져 보인다. 그곳에서 은색이 반짝이고 있었다. "멋지군." 나는 스스로를 보며 감탄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내 뒤에서 불쾌한 그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쿡쿡쿡." 갑자기 라이메데스가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나는 심히 당황했다. 그런 나를 향해 라이메데스는 짙은 웃음을 동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뭐냐, 그 웃음은. 내가 멋지지 않다는 거야?" 나는 눈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라이메데스가 고개를 저어댔다. "아아, 그럴 리가. 충분히 멋있어. 하지만 어젠 더 멋있었지." "……?" 나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무슨 말이지? 그러고 보니 기억의 편린이 끊겨진 것이 마음에 걸린다. 내 불안한 표정을 바라보던 라이메데스는 갑자기 빙글, 하고 느끼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녀석은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그 머리카락을 바로 내 앞까지 가져 오더니 빙긋 웃었다. "귀엽기도 했고 말이야." 나는 녀석의 그 한마디에 경직했다. "……나." 나는…… 불안을 넘어선 공포를 느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라이메데스의 입에 걸린 웃음은 지나칠 정도로 짙었다. ---------------------------------------------- 과연 칼레들린이 부린 주정은 무엇일까요... 조금 생각해본 결과... 제가 생각했던 급격 망가짐에서 조금.. 귀여운 망가짐으로 수정을-_-;; 하기로.. 했구요. 우헬헬헬;;; -_-;; 저도 시험기간이 가까워지는군요.. 그래도 설마 연중 하겠습니까? 크핫핫핫핫..-_-llllllll 후우.. 왜 계속 에피소드만 쫓고 있는건지.. 이 부분만 끝나면 이제 본격적인 궤도로 이야기가 들어설듯 하네요^^ 언제나 읽어주시는 여러분들과(^ㅁ^)멜로 응원해주시는 분들(...최근 답멜을 안 보냈죠.. 곧 보내겠습니다.. 답멜 보내는건 나의 취미..-_-;;)감사드립니다. 그럼~~~^^ -------------------------------------------------------------------------------- Back : 4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5 (written by 카르민) Next : 4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3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39752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3rd September 2001 15:03:12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1-09-2001 22:40 Line : 170 Read : 624 [48]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5 -------------------------------------------------------------------------------- -------------------------------------------------------------------------------- Ip address : 211.220.175.14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 "무, 무슨 말이야?" "들을래? 차라리 기억을 못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는데." 라이메데스는 그 말과 함께 비죽이 입술을 올리며 웃었다. 나는 좀 더 세게 뛰는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키려 애쓰며, 천천히 한 자 한 자 뱉어내듯 말했다. "얘기해." 내 허락의 말에 라이메데스는 한 번 더 씨익, 하고 웃은 후…… 그 가증스러운 입술을 떼기 시작했고, 녀석의 말이 가벼운 웃음과 함께 끝났을 때…… 나는 싸한 얼음이 되어 있었다. --------------------------------------------------------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을 패닉의 상태에서 얼마나 허우적거렸는지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라이메데스의 말 한마디 한 마디는 귓가에 닿자마자 잔인한 칼날이 되어 그대로 내 속을 후벼파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납득할 수 없는 말들이 라이메데스의 입에서 한 편의 이야기가 돼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입을 떡 벌리는 수 밖에 없었다. "너 술 먹으면 아무나 잡고 뽀뽀를 하는 타입인 것 같아. 음, 그거 조금 위험한데 말이야." 처음, 라이메데스가 내게 한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마족 최로로 얼음이 되어 버린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잔인한 무엇인가가 내 온 몸을 잠식해들어왔고, 불길한 상상은 그 상태 그대로 머리 속을 가득 메워버렸다. "카민한테 2번, 나한테 1번, 시이나한테 2번." 원래 상상이란 현실을 넘어서, 더욱 강대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법. 내 마음대로의 상상은 이미 머리의 한계를 넘어서 저 멀리로 폭주하고 있었다. 달음질치는 망상의 움직임을 따라가기 벅차다. 미칠 것 같은 상상만이 머리를 채우고, 이제 남은 것은 방망이질치는 요란한 심장의 소리 뿐. "……무슨…… 말이지?" 탁하게 갈라진 내 목소리가 방 안 한가득 울렸다. 말을 하고 있는 도중, 나는 빌고 또 빌었다. 제발, 내가 상상하는 일만은 아니기를. 내가, 내가 설마…… 그런 추한 짓을 했을 리는 없다. 그래, 나 자신을 믿는 거다. 뽀, 뽀뽀라니? 그리고 카민한테 2번, 저 놈한테 1번, 시이나한테 2번이라니? 허허, 왜 계속 이렇게 불길한 생각만이 드는 거야? 아, 말도 안 돼. 샤프하고 날렵하며 잘생기고 잘난 칼레들린!! 왜 갑자기 이렇게 불길한 상상만을 하면서 오돌오돌 떠는 거지? 나는 나 자신에게 될 수 있는 한 온갖 칭찬을 퍼부어줌으로서 오그라들대로 오그라들었던 가슴을 당당히 펴려 애썼다. 그렇게 한참, 평소의 자부심이 내 가슴을 가득 채울 즈음, 라이메데스가 때맞춰 입을 열었다. "네가 뽀뽀를 한 횟수 말이야. 음, 술에 취해선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모조리 다 붙잡고 뽀뽀를 하더군. 너에게 제일 가까이에 있었던 건 나니까 내가 제일 먼저 당했고, 그 다음은 시이나, 그 다음은 카민이었지. 참고로 말하는데 카민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욕을 해대며 바둥바둥 거렸고 나는 뭐, 기분 좋게 받았어. 시이나는 곤란해했지만, 피하지는 않더군. 하여튼 환상적이었어." "……."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그리고 납득할 수 없는, 무엇보다도 기억할 수도 없는 그 말을 들은 나는 입을 뻐끔뻐끔거렸다. 이미 정신은 육체를 반쯤 버린 상태였다. 내 온몸은 패닉의 상태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메데스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 그리고 뽀뽀 타임이 끝난 뒤에는 아주 멋지게 곡도 하나 뽑았지. 죽여줬어, 칼레들린. 네가 음치가 아니었다면 좀 더 즐거 웠을 텐데 말이야. 아, 네가 부른 그 곡, 이카루의 성녀와의 전투에서 죽은 전대 서열 12위의 마족 파스턴님의 추모곡 맞지? 워낙 음정이 이상해서 처음엔 못 알아들었는데 말이야, 한참 들으니까 알겠더군." 멍하게 동공이 풀렸다. 내가…… 이 내가. 누군가를 붙잡고 강제로 뽀뽀를 한 것도 모자라…… 노래를 불렀어? 그것도…… 이카루 성녀에게 당해서 멋지게 골로 가버린 그 멍청한 전대 고위마족 파스턴의 추모곡? 젠장맞을!! 그건 아이에드놈의 애창곡이잖아!!! * * * * * * * * * * * * * * * * 얼마나 패닉상태에 있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자책감으로 인해 다가온 이 엄청난 현실을 납득할 수 없어 멍한 눈으로 시간이 멈춘 듯이 서 있을 뿐이었다. 라이메데스는 그런 나를 보며 사악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는데,. 그 웃음을 보면서도 이상하게 화가나지 않았다. 그만큼 나는 정신이 나가 있었다는 거다. 저놈이 느끼한 웃음을 터뜨리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다니, 정말 놀라운 일 아닌가. 이대로 돌아버린다 해도 신기하지 않을 것 같은 한참의 침묵이 내면에서 흘러넘쳤다. 똑똑…… 똑…… 똑똑똑. 그 발작할 듯한 그 시간의 흐름을 멈춰준 것, 멍하게 풀려져 있던 내 영혼을 그나마 제대로 붙들어 준 것은…… 내가 패닉 상태에서 몇시간을 허우적 거린 후에야 간신히 들려온 가벼운 노크 소리였다. "……누구야." 빙글빙글, 마계에 있었던 시절을 회상하게 만드는 그 느끼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던 라이메데스는 갑자기 늘려온 노크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물었다. 그리고 라이메데스가 그렇게 말한 그 순간, 나는 정신이 반짝하고 돌아옴을 느꼈다. 황당한 일이지만, 그 가벼운 노크 소리 하나가 육체를 이탈했던 혼을 도로 불러들인 셈이다. "……접니다. 데스." 조금은 무거운 어조로 문 밖에서 어눌하게 들려온 그 목소리는…… 내게는 조금 낯선 것이었다. 나는 라이메데스를 흘낏 보았다. 그리고 순간 조금 놀랐다. 방실방실, 그 사악한 면상에 웃음을 머금고 잇던 라이메데스의 옆얼굴이 무섭도록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시이나?" "예." 문 바깥에서 가볍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이나? 그럼 그 씬이라는 녀석인가? "……칼레들린님이 깨어나셨다면 얘기를 좀 나누고 싶어서 왔습니다만." 문득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나는 움찔했다. 흐, 흐읏. 서, 설마…… 설마아아아!! 어제 밤 내가 부렸다는 그 추태에 대해서 따지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에, 에에에에에엑!!! 그러고 보니…… 내, 내가…… 처, 처음 보는 시이나에게 뽀, 뽀뽀를 했다고…… 라이메데스놈이 말했…… 지 않은가. 아아, 아니야, 칼레들린. 그냥 잊어. 아까 라이메데스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모두 잊어. 그래, 그런 건 기억에서 지워 버릴테다. 아아, 그게 아니군. 나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기억하는 것이 없으니. 그래, 그걸로 된거야. 난 아무것도 기억 못하거든? 그걸로 된거라구. 난 아무것도 몰라!!! "들어와." 나는 억지로, 정말 억지로 나 자신을 반 어거지로 설득해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몽땅 모아 북 돋아 준 다음 씬의 출입을 허락했다. 순간, 여관방의 그 남루한 문이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안 쪽으로 밀려 들어왔다. 문의 바깥에 비죽거리며 서 있는 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씬은 기다란 회색 머리카락을 뒤로 늘어뜨린채 좀 곤란한 듯한 모습으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다음 순간, 씬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에, 저…… 수, 술은…… 다 깨셨나요?" 그리고, 씬이 내게 물었다. "……." 씬이 비죽거리며 그렇게 한마디를 하는 순간, 나는 겨우겨우 지탱하고 있던 내 이성이 파샥, 하는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 이성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나는 조금 시간을 들여야했고, 한참만에야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수가 있었다. "……다…… 깼어. 할 말이라도 있는건가?" "예." 씬은 힐끔 라이메데스를 훔쳐보더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왔다. 내가 서 있는 바로 앞까지 온 씬은, 내 얼굴을 한 번 꼼꼼히 보더니 뭔가 말을 꺼내려는 듯, 입을 벌렸다. 하지만 막 목소리를 내려던 씬은 움찔하고 몸을 굳히더니 내 바로 옆에 서 있던 라이메스에게로 무섭게 시선을 돌렸다. "데스!! 당신은 나가주세요." "싫어." 여전히 얼굴에 그 느끼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라이메데스는 간단하게 거절했다. "……칼레들린님께 1:1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데스, 부탁입니다. 나가주십시오." 씬은 그런 라이메데스를 향해 한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제서야 뭔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씬의 얼굴은 그 이상 심각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기 때문에. 힐끗 보니 라이메데스 역시 그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싫다. 내가 왜 나가야 하지?" 라이메데스는 그 한 마디와 함께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걸치고 있던 녀석의 하얀 로브가 펄럭,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깔려 있던 먼지를 피어 올렸다. 하얀 안개의 편린처럼, 먼지가 자욱하게 방안으로 번진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씬이 다시 인상을 썼다. "나가주십시오, 데스!!!" "……싫다고 했어." 라이메데스의 눈이 비죽 올라갔다. 나는 뭔가, 뭔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살이 에는 듯한 느낌에 움찔했다. 살갗이 미세하게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오른쪽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양팔이 움찔움찔,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다. 문득 털이 비죽하고 섰다. "……왜 살기를 뿜고 난리지?" 그 느낌을 받은 순간,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니, 중얼거린 것이 아니라 거의 씹어뱉듯이 그 말이 튀어나왔다. 내 앞에 서 있던 씬의 몸이 순간 움찔하고 비켜났다. "살기∼∼이? 그런 거 뿜은 적 없는데?" 라이메데스 놈은 앉은 채로 뻔뻔스럽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라이메데스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네 놈 나가." "……왜?" 라이메데스는 심히 억울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 느끼한 얼굴에 느끼한 표정을 짓자 정말이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느끼한 모습이 보였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을 억누르며 말했다. "나가라면 나가." "싫어." "……나가." "싫어." 라이메데스는 아예 들어누울 것 같은 포즈를 취하며 빙긋, 다시 웃었다. 나는 손이 퍽, 하고 쥐어지는 것을 느꼈다. "……안 나가면……" "안 나가면?" 라이메데스가 내 말을 냉큼 받았다. "……아이에드하고 로시엔한테 네 험담 늘어놔 버린다……" 순간, 라이메데스의 안면근육이 꿈틀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번 판은 나의 승리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건 너무나 이른 판단이었다. 한참 뭔가 생각하는 눈치였던 라이메데스가 방긋 다시 웃으면서 말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럼, 나 네가 술주정 한 거 얘기해 드려도 돼? 아이에드님하고 로시엔님, 무척 재밌게 들으실거야, 그렇지? 후후, 게다가 내가 칼레들린 너한테 직접 뽀뽀까지 받았다는 거 알면, 두분 기절하실걸?" ……결국 라이메데스는 이 방에 남게 되었다. ----------------------------------------------------------------- 결국... 여기에서 끊어버리다니... 좀 결정적인 곳에서... 끊고 싶어요..ㅠ_ㅠ 그럼.. 담 편으로 가시죠... 쿨러억; -------------------------------------------------------------------------------- Back : 4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6 (written by 카르민) Next : 4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4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39752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3rd September 2001 15:03:15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1-09-2001 22:41 Line : 201 Read : 657 [49]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6 -------------------------------------------------------------------------------- -------------------------------------------------------------------------------- Ip address : 211.220.175.14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시이나는 내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나는 울컥했다. 왜 남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쉬는 거지? 기분 나쁘다고!! "……데스가 있어서 조금 거슬립니다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씬, 아니 시이나라고 했던가. 그는 갑자기 자신의 머리 윗 부분을 가볍게 감싸고 있던 모자를 휙 하고 쳐들었다. 나는 가늘게 눈을 치켜 떴다. 그렇잖아도 눈에 확 띄는 회색의 머리카락이 차랑하며 흘러내린 것과 동시에, 머리 위로 솟아오른 두 쌍의 뾰족한 무엇인가가 보였다. 귀!! 그것은 귀였다. 세상의 조화를, 만물의 조화를, 생물의 조화를…… 세상의 평화를, 만물의 평화를, 생물의 평화를…… 세상의 기쁨을, 만물의 기쁨을, 생물의 기쁨을…… 발걸음을 옮기는 곳곳마다 그 모든 것을 흩뿌려두는 이들의 모습. 발걸음을 옮기는 곳곳마다 동화된 자신을 남겨두는 이들의 모습. 발걸음을 옮기는 곳곳마다 축복을 받은, 신을 닮은 자신의 흔적들을 남겨두는 이들의 모습. 비록 엘프에 대한 기록들을 읽을 때마다 재수 없다고 느끼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이건 또 색다른 맛이 있었다. "보시다시피 전 엘프입니다." 아주 장엄한 표정으로, 시이나가 말했다. 뭔가 굉장한 비밀을 가르켜주는 듯한 어조였다. 그래서 난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알아." "예?" 순간, 시이나 역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해왔다. 나는 더더욱 어이가 없어져 종국엔 피식 웃어버리기까지 했다. "나도 안다고. 네가 엘프인거." "예?? 어, 어떻게요? 와, 완벽하게 감췄다고 생각했는데!!" 화들짝 놀란 듯, 시이나는 갑자기 자신의 귀를 확 하고 감췄다. 정말로 놀란 듯, 그의 눈동자는 화등잔만하게 커져 있었고 그 눈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헛웃음마저 새어나오려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라이메데스에게 들었어." 나는 짧고 간결하게 얘기했다. 순간, 시이나가 다시 한 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나는 주먹을 뻗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눌러야 했다. 어, 어눌한 것!! 내가 간직하고 있던 엘프의 이미지를 여지없이 깨뜨리는군! 하긴, 어제의 일부터 그렇다. 엘프가 검을 들고 다닌다는 얘기는 기록에서 본 적은 없었으니. 엘프하면 딱 활이 생각났는데…… 아닌가? 시이나는 험험, 하고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칼레들린님. 당신께 물을 것이 있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저와 루덴스 님은 잠시 후에 일이 있기 때문에 급히 이 곳을 떠나야 하거든요…… 그래서 그 전에 당신께 묻고 싶은 걸 묻고 가겠습니다." "좋을대로."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훗, 하룻밤 사이 나의 이 빛나는 외모를 보고 엘프조차 내게 관심을 갖게 됐다 이건가? 우우우∼ 너무나 환상적인 일이로군. 나는 훗, 하고 웃어 보였다. 흐흐, 이 시점에서 로시엔에게서 받은 이 은빛의 피어스가 반짝 빛나 준다면 그야말로 환상일텐데. "당신…… 반마족이죠?" "응."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순간, 시이나가 멍한 표정이 돼서 나를 바라보는 바람에 나는 조금 당황해야만 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보지?" "……아, 아니요. 아, 아무것도……" 시이나는 머리를 살짝 긁었다. 어딘지 모르게 모자라 보이는 모습…… 내가 기억하는 엘프의 이미지와는 역시 조금 거리가 있군. 고고하고 순결하다는 그 모습과는…… 조금…… "……지금…… 몇 살이십니까?" 허, 별 사소한 것까지 다 물어보는군. "열 여덟이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지?" 다시 한 번, 시이나의 오른쪽 눈썹이 꿈틀했다. 왜 저러는 거야? 눈썹 들어올리기 놀이라도 하자는 거야 뭐야? "……좀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별다른 의도는 없고…… 아,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물어도 되겠습니까?" "좋을대로." "당신은…… 카레나라는 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카레나]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어딘가에서 들어본 듯도 한데? 어디였더라? 나는 곰곰이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넓고도 깊은 기억의 바다를 헤엄치던 나는 아, 하는 생각이 듬과 동시에 고개를 비스듬하게 들었다. "점 집에서 한 번 들었어." 린이 그랬었지. 카레나의 카드가 나왔다고. 뭐라더라, 굉장히 불행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했던가? "그…… 렇습니까? 거기서 들은게 전부인가요?" "응." 시이나가 나를 뚫어지게, 정말 뚫어지게 바라보는 바람에 나는 아주 무안을 겪어야만 했다. 시이나는 후,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뱉더니 말했다. "……당신은 마계에서 자라셨지요?" "응? 응." "그럼 마계에서……당신의…… 부모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까?" "시이나!!!" 순간이었다. 거의 발악하는 듯한 외침과 함께, 라이메데스가 벌떡 일어섰다. 시이나의 말, [부모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까]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한 구석에 쪼그려 박혀 있던 라이메데스가 무서운 기세로 일어서는 모습이 또렷이 보인다. 그 엄청난 기세에 시이나는 한발자국을 뒤로 가져갔다. 라이메데스는 저벅저벅, 정말이지 굉장한 기세로 시이나 쪽으로 다가왔다. 라이메데스는 지금 당장이라도 시이나의 멱살을 붙잡을 것 같은 기세였다. 막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시이나를 베어버릴 것 같은 그 모습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손을 뻗어 라이메데스를 가볍게 저지했다. "나가고 싶지 않으면 저기 처박혀 있어." "……." 라이메데스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로브 속에 감춰진 초록색의 그 눈동자에는, 뭔가 읽을 수 없는 복잡한 것들이 녹아 들어 가 있었다. 나는 잠시 심란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알았어." 라이메데스는 다시 자리에 털썩하고 앉았다. 난 그 모습을 보면서, 방금전에 시이나가 했던 질문이 머릿속에 또렷이 다시 한 번 새겨지는 것을 느꼈다. ……나의 부모…… 라고? 잠시 머릿속이 어지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면, 나는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서 그렇게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 듯 했다. 조금 웃긴 일이긴 하지만, 나라는 놈은 그랬다. 나라는 존재, 나라는 녀석의 몸, 나라는 녀석의 영혼, 나라는 녀석의 세포 하나하나를 창조해 낸, 그렇기에 [나]라는 존재에겐 절대적일 [부모]라는 존재. 하지만 나는 그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정말이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인간계에 있었던 6년의 시절은 아무리 떠올려 보려 애써도 희미하고 흐릿하게밖에 기억나지 않기에 부모라는 존재에 대한 잔상을 찾는 것은 힘들다. 아니, 힘든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 내게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다섯 살때부터. 버려진 작은 아이의 몸으로, 이곳 저곳을 기어다니던 기억은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다. 물론, 이제는 희미해져 바래질 대로 바래진, 정말로 오래된 기억이긴 하지만. 인정하긴 싫지만, 아이에드나 로시엔이 쳐놓았던 울타리 속에서 너무나도 편안하게 살았기 때문에 나라는 녀석을 만든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없었을 런지도 모른다. 하, 그러고 보면 참 웃긴 일이 아닐 수가 없군. 나는 반마족이니, 부모중 한 쪽은 마족이고 한 쪽은 인간일 테지. 종족이 다른 부모를 두었기에 그 부모가 누구인지 매우 궁금해야 할텐데도, 난 정말이지 단 한번도 부모의 모습을 머리에서 그려본 적이 없었다. ……이상하군. "부모라고 했지?" 나는 시이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시이나의 잿빛 눈동자는 뚫어지게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난 그 눈동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 "당연히 들은 적 없어. 당신이 뭘 모르는 모양인데, 나는 버려졌거든." "……아닙니다." "응?" 나는 갑자기 시이나가 [아닙니다]라고 말하자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이나는 한 발자국 내게로 접근했다. 빛나는 회색의 눈동자, 등 뒤로 길게 늘어진 화이트 그레이의 머리카락, 머리 위로 뾰족하게 돋아났다는 느낌의 귀. 시이나는 책에서 묘사하던 엘프의 모습 그대로, 내게 다가와선 무겁게 말했다. "버려 진 것이…… 아닐…… 겁니다." "거기까지야, 시이나." 시이나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려나오는 그 찰나, 라이메데스가 다시 한 번 벌떡 일어서더니말했다. 시이나는 흠칫하면서 라이메데스를 돌아보았다. 나 역시 라이메데스를 보았다. "그 이상 말하는 건 12년 전 그 때 했던 약속에 위반되는 거야. 알고 있지?" 12년 전 그 때의 약속이라니? 난 내가 모르는 얘기를 무심하게 뱉어낸 라이메데스의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라이메데스의 입에서는 그 이상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예. 그렇군요." 시이나가 고개를 떨구더니 낮게 대답했다. 시이나는 라이메데스에게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마음이 급해 실언을 했습니다." 시이나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겁고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칼레들린님. ……제가 한 말에 신경쓰지 마십시오." "……." 이미 신경 쓸만큼 다 썼는데 뭘 신경쓰지 마라야? 지금 장난하냐? "흐음, 어쨌든 질문은 끝난거지?" 시이나가 기운 없이 목을 축 늘어 뜨리는데, 라이메데스의 밝고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이나는 라이메데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라이메데스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럼 같이 밥이라도 먹을까? 칼, 그리고 시이나. 카민이랑 루덴스라는 그 놈은 일어났으려나 모르겠네." ------------------------------------- ------------------------------------- 음.... 막강 터보 엔진을 달고!!!! .....살고 싶었던... 최강의 연재 속도를 자랑! ...하고 싶었던 카르민입니다. 우할할;; -_-저란 놈은... 정말이지... 이상한 녀석입니다. 오늘은 시험을 쳤더랬죠.. 아.. 모의고사입니다. 중간고사는 아직 2주정도 남았죠. 물론 공부는 안합니다만... 컴퓨터를 그리 오래 못하겠군요. 저도 눈치가 보여서 말이죠;;; 하여튼.... 오늘 시험을 치고 오는 길에... 옛날에 썼던 글이 퍽하고 떠오르더군요. 저는 심각한 다작증이 있어서 수십편 가까이를 썼다 말았다를 반복하곤 했기 때문에(물론 칼레들린 이야기는 도중에 절대로 안 끊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완결 봅니다. 완결 안볼 수가 없죠?;;;)이야기의 모티브는 다양했죠. 그 중에서 [만물상의 수호천사]라는... 매우 허접 하다 못해 쓰레기 같은 소설이 생각나더군요. 그런데 왜인지... 그게 무척 보고 싶더라 이겁니다. 집에 와서 컴퓨터 켜곤 미친 듯이 보고... 내용을 이어서 썼더랬죠. 정신 들고 보니... 헐헐... 거의 100장이더군요..-_-;; 어쩌면... 이것도... 쓸지도... 모... 르... 겠군요.. 물론... 칼레들린을 2권 분량까지 다 써서 원고 넘기고... 한숨 돌리고 나면 말이지만.. 이 놈의 다작증∼∼ 어떻게 좀 해줘!! 크아아아아아악!!!(불 뿜고 있음..-_-;;) 쿨럭... 그리고...^_^;;; 이번편에는 유독 복선이 많군요.... 너무 갑작스럽나..-_-;;; 그럼∼∼ 이만 씁니다!! 행복하시고. 언제나 그 얼굴에 웃음들이 머물기를 바랍니다. -------------------------------------------------------------------------------- Next : 4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5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39752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3rd September 2001 15:03:19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 페이트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앞부분이 연재분 (홀리보드) Total : 18, 1 / 2 pages 전체 (18)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레시아 (10) 이 름 카르민 제 목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7 밑으로 내려와 보니 카민과 루덴스란 놈이 한 탁자에 앉은 채로 밥을 먹고 있었다. 어제 그 난리를 쳐댔던 두 녀석이 나란히 밥을 먹고 있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잠시 기가 막힘을 느꼈으나, 뒤에 서 있던 라이메데스가 한마디 던지고 나자 그 기막힘은 사라졌다. "어제 네가 깽판 치고 난 거 둘이서 수습하다가 오해가 풀린 모양이야. 하루 사이 꽤나 사이가 좋아졌군. 하지만 같이 밥을 먹을 정도로 사이가 좋아졌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라이메데스의 말을 듣고 나자 도저히 그 둘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라이메데스가 내게 들려준 [술 먹고 저지른 추태]는 정말이지 정도가 심각했으니. "아, 칼!" 내가 테이블로 가지 못하고 머뭇 머뭇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카민이 튀겨져 오르듯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머쓱한 기분으로 그의 부름에 응하면서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카민의 옆자리를 힐끗 보니, 루덴스놈이 내 얼굴을 억지로 피하며 웃음을 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정말 너무나 쪽이 팔려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더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낯이 뜨거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식당에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나를 바라보며 자기네들끼리 숙덕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얼굴엔 웃음을 가득 띈 채로. 나는 그 모든 시선을 온 몸으로 받으면서 치가 떨리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당당한 모습을 유지했다. 그래, 내 기억엔 없는 일이다. 기억에 없는 일을 가지고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그럴 필요는 없는 거다. 끊임없는 자기 암시를 통해서, 나는 루덴스와 카민의 옆자리에 앉는 데까지 겨우겨우 성공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계속 킬킬대는 루덴스의 입을 한 대 쳐준 것을 가지고 나를 책망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된다. 사람들의 시선은 뜨거웠지만 나는 그것을 내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감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그것이 나답다. 카민과 루덴스는 식사 중이었기에 그들의 주위엔 먹을 것이 여기저기 많았다. 나는 카민이 먹고 있던 음식 중 아무것이나 하나 집어든 후 시식을 시작했다. 가시처럼 날카로운 시선, 호기심을 동반한 짖궂은 시선 등 수많은 종류의 시선이 여기저기서 날아와 박혔지만 그다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카민과 루덴스, 라이메데스와 시이나 할 것 없이 모두들 나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나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아, 저…… 시이나 씨는…… 엘프라구요?" 내가 앉자마자 음식을 먹기 시작하는 바람에 조용하던 테이블의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면서 카민의 목소리가 최초로 뻗어 올랐다. 나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접시에서 크림빵을 가져다가 한 입 베어 물었다. 그 사이, 시이나가 카민의 질문에 조용하게 대답했다. "예." "헤에, 엘프가 웬일로 이카루에? 듣기로, 엘프는 크레티아의 동쪽에 있는 에디 에이엔의 숲에서 나오지 않는 걸로 아는데요." 카민의 어조는 개인적인 것을 물어 보는 것에 대한 무안함 때문인지 조심스러웠다. "음, 조금 사연이 있어서." 시이나가 자그맣게 말했다. 사연이라고? 로시엔의 서재에 쌓여 있던 그 많고 많은 책 중에서는 여러 가지 종족에 대해 서술한 것이 많았다. 엘프족, 드래곤족, 인간들, 중성족이라는 이네아, 흡혈종족 라디아나, 천족, 심지어는 인간들의 입장에서 서술한 마족에 대한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로시엔의 서재에는 책이 많았다. 그리고 그 서재 한켠에는 아주 자세하게 엘프 족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는 [엘프들의 삶]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 있었다. 솔직히…… 인간들에 대한 책을 읽는다면 나의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이 튀어나올 것 같아 나는 인간에 대한 책은 되도록 읽지 않았다. 대신, 나는 중성족 이네아와 흡혈종족 라디아나, 빛의종족 엘프에 대한 책은 꽤나 많이 읽었다. 특히 엘프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다. 말했듯이 엘프에 대한 이미지는 전체적으로 [재수 없다]였지만, 그럭저럭 흥미로운 내용은 많았다. 현재의 인간계에는 종족들이 확연한 선을 긋고 생활한다고 들었다. 인간은 인간들끼리, 라디아나는 라디아나끼리, 이네아는 이네아끼리. 그들 중 인간의 곁에 마지막까지 머문 종족은 빛의 엘프족이다. 하지만, 엘프들도 몇 백 년 전부터는 크레티아 동령에 있는 에디 에이엔이라는 숲에 모여서 살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특별한 사유가 있는 한, 그들은 그 숲에서 미동을 하지 않는다고 기억한다. "에디 에이엔의 숲에서만 생활한다는 빛의 종족을 뵙게 되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엘프가 이렇게 이 험상궂은 남자랑 다니는 이유는 또 뭐지요? 좀 당황스럽네요." 카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루덴스를 힐끗 바라보았다. "누가 험상궂다는 거야!!! 네놈이 지나치게 곱상한 거야!! 도대체가 그 얼굴로 남자라면 누가 믿는다는 거냐!!" 자신이 험상궂다는 얘기는 결코 좋게 들리지 않는 법, 지목의 대상이 된 루덴스가 버럭 고함을 쳤다. 그러나 카민은 시선을 휙 꺾으면서 그의 말을 냉담하게 무시했다. "네, 시이나님? 대답을 해주세요." 졸지 간에 완벽한 무시를 당한 루덴스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나 나는 주인 잃은 마물 같은 눈을 하는(한마디로 역겹다는 말이다.)그를 아주 가볍게 외면했다. 루덴스는 더더욱 서러운 표정으로 라이메데스를 보았으나 라이메데스는 로브를 쓰고 있었기에 그와는 눈을 마주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 했다. 그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이번에는 시이나를 보았다. 하지만, 시이나는 카민의 질문에 대답해주느라고 루덴스의 시선을 보지 못했더. 결국, 이래저래 루덴스는 모두에게 무시를 당했다. "예, 사실은 모셔갈 분이 있어서 이 곳에 왔습니다." 자신의 일행인 루덴스가 무시를 당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시이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카민의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모셔갈 분?" 엘프가 모셔갈 분이라니? 나는 조금 놀란 얼굴로 시이나를 보았다. 시이나는 피식 웃었다. "아, 제가 모셔 가려는 분은 아닙니다. 여기 있는 루덴스님이 모셔가야 할 분이 있습니다. 저는 루덴스님의 친구로서 함께 온 것일 뿐. 루덴스님은 여행이 처음이라…… 좀 위험할 것 같아 동행했습니다. 제게 있어서는 유일한 인간 친구라 말입니다. 음, 경험하셨다시피 루덴스님은…… 조금…… 바보 같은 면이 있으셔서…… 제가 없으면 언제 죽을지도 모르거든요. 그런 친구를 혼자 덜렁 보낼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바보같은 면이라…… 그, 그렇군. 확실히 그렇게 보이더라. 솔직히 저번 일도, 카민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마디만 했으면 다 해결 됐을 것을 혼자서 난리 피우다가 일이 이 지경까지 온 게 아닌가. "뭐, 뭣이!!! 씬!! 바보 같다니!! 네가 어찌 그런 말을!!" 시이나의 말에 루덴스는 충격을 심하게 받은 표정으로 외쳤지만 다시 한 번 그는 우리 모두로부터 철저히 무시를 당하고 말았다. 인생 불쌍하군. "헤에? 누구를 모셔가려고 왔는데요? 중요한 분이신가요?" 관심이 동한 듯, 카민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라이메데스의 표정은 로브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도 관심이 생긴 듯 테이블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고 있었다. "네. 사실은…… 이건…… 비밀입니다만, 루덴스님은 이카루 사람도 아닙니다. 저는 에디 에이렌 숲에서 자랐고, 루덴스님은 크레티아 분입니다." "에에? 크레티아 사람이라구요?" 카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모르는 이야기가 나왔기에 슬그머니 빠지기로 했다. 뭐, 크레티아 사람 어쩌고하는 걸 보니 어떤 나라를 말하나 보군, 하고 생각하면서. 내가 슬쩍 고개를 떨구는데, 문득 귓가에서 라이메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레들린.」 「……왜.」 나는 갑작스럽게 귓가에서 라이메데스의 목소리가 울리자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 내 귓가에, 피식 하고 웃어버리는 라이메데스의 말이 들린다. 「너도 놀라는 척을 해야지.」 「……왜 내가 놀라는 척을 해야하는데?」 「놀라는 척을 해야 의심을 안 받으니까. 어서 놀라는 척 해.」 나는 갑작스러운 라이메데스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오옷?" "이야!!! 정말로 크레티아에서 왔어요?" 내가 마구 오버해서 외친 순간, 카민 역시 화들짝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루덴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레티아와 이카루는 무역 중단에, 민간교류 중단, 사신 왕래 중단, 기타등등…… 하여튼 장난이 아닌 사인데…… 그런데 어떻게 크레티아에서 이카루로 올 수가 있었죠? 민간인이라도 국경을 넘지 못할텐데요?" "……말씀드렸듯이 모셔갈 분이 있어서…… 제가 엘프라는 걸 이용하니 조금은 수월하게 이카루로 들어올 수가 있었습니다." 시이나는 조용히 말했고 루덴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그에 동조했다. 나는 이들이 뭐라고 궁시렁 거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에 그냥 무조건 아는 듯한 표정을 보여줬다. 아아, 나는 얼마나 똑똑한가!! 이런 것이 바로 삶의 지혜이자 방식인 것이다. "에? 대체 누구길래 크레티아에서, 그것도 엘프를 동반해서 온단 말이죠? 누굴 찾는데요?" 카민은 놀란 듯한 눈으로 물었다. 나 역시 카민을 따라 놀란 표정을 보였다. 제길, 아무리 삶의 지혜라곤 해도 조금 비참하군. 「잘 하고 있어, 칼레들린. 계속 놀라는 척을 해.」 라이메데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의 조언을 상기하고 더더욱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이번에는 시이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칼레들린님? 왜 아까부터 계속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을 짓고 계시는 거죠? 마족인 당신 입장에서는 별로 놀라울 일도 아닐텐데요? 그렇게 인간 대륙 정세에 관심이 많으신겁니까?」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나는 싸하게 얼어붙는 내 심장을 느끼곤 훗훗 하고 낮은 웃음을 지었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시선을 돌려 라이메데스를 노려보았다. 후…… 후훗. 네 놈이 나를 놀려먹어? "음, 저희가 찾는 사람은 한 여성입니다. 본명은 리니아나 에인이지만 자신을 그냥 린이라고 소개 하시는 분이지요. 예언의 여신인 에이테이나의 숨은 성녀라고까지 받들어지는 여성입니다. 이 근방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허겁지겁 온 길이예요. 원래는 어제 그 분을 찾을 계획이었는데, 식당에서 카민님과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러지를 못했죠." 나를 놀려 먹은 라이메데스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빨을 빠득 간 바로 그 때, 시이나의 말이 들렸고 그가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나는 라이메데스에게 뭔가 뾰족한 복수를 해줘야한다는 생각을 망각해 버렸다. "방금 뭐라고 했지? 다시 말해봐." "예? 뭘 말입니까?" "방금 전에 말한 이름, 다시 말해보라고." "에? 리니아나 에텐이요. 흔히 린이라고 불리고. 예언의 여신의 성녀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시이나는 내가 갑자기 테이블에 일어나면서 외치자 깜짝 놀란 표정으로 어눌하게 대답했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말없이 카민 쪽을 바라보았다. 카민 역시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서로 마주보았던 우리는 순간 핫핫, 하고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리자 시이나와 루덴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 눈을 보았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받음과 동시에, 낮게 입술을 뗐다. "……혹시 그 사람…… 은발인가? 나이는 20대 초반쯤으로 보이고?" 나는 정말, 혹시나, 어쩌면, 하고 생각하며 물었다. 그런데 반응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돌아왔다. "예? 예. 그렇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떻게 그걸? ……아아아앗!! 서, 설마 리니아나님을 아시는 겁니까?" "뭐야, 설마 리니아나님을 만난 적이 있는 거야?" 시이나가 갑자기 흥분하며 외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루덴스 역시 뒤질 새라 지나치게 오버를 하면서 벌떡 일어섰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루덴스 같이 엄청난 덩치가 엄청난 오버를 하면서 일어나는 바람에 탁자가 흔들렸고……. 접시에 담겨 있던 빵 하나가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 떨어진 빵은 내가 막 한 입을 베어먹었던 크림빵이었다. 빵이 떨어지는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나는 미간에 잔주름이 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을 들어 루덴스를 바라보았다. 루덴스는 내 눈빛을 받자 움찔하며 뒤로 파다닥 물러섰다. 순간적으로 테이블 내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나는 있는 인상 없는 인상을 다 그으며 조용히 명령했다. "……앉아." 둘은 주섬주섬 앉았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흥분을 해서." "나, 나도 미안." 나는 그들이 내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저…… 저, 그런데…… 이건 좀 중요한 일이라서요. 호, 혹시 리니아나님을 만난 적이 있나요, 칼레들린님?" 내가 미간에 있던 주름을 풀자마자 시이나가 흥분된 목소리로 물어왔다. 저 흥분된 표정을 보니 확 만난 적 없다고 말해버리고 싶어지는군. 후우, 하지만 이 착한 내가 어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정말이지 착한 마음은 피곤하다. "그래." "오, 오오오오옷!!!" 루덴스놈은 다시 흥분해서 일어나다가 카민에게 정강이를 한 대 얻어맞고 씩씩거리며 도로 앉았다. 라이메데스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지 아까부터 한 마디 말도 없이 눈만 둥그렇게 뜨고 앉아 있었다. 곧, 머릿속에서 녀석의 전음이 들려왔다. 「린이 누구야?」 「그런 여자가 있어.」 라이메데스는 음, 하는 반응성에서 그쳤다. 하지만 루덴스나 시이나는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오, 레이넨(엘프들을 굽어본다는 빛의 여신의 이름인 것 같다. 아님 말아라. 내가 알게 뭐냐.)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찾았어요, 루덴스님!!" "그러게!! 제길!! 여태까지 다른 정보 길드들은 하나같이 쓸 때 없는 것만 가르켜 줘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찾아온 거다, 시이나!!!" "우흑흑……" 나는 갑자기 일어나서 자기들끼리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둘을 보며 하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피식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진득한 미소를 지은 채로 그들을 향해 말을 걸어주었다. "왜 그렇게 기뻐하는 거지?" "예? 흐흑, 칼레들린님, 당신은 모르십니다. 저와 루덴스님은 린님을 찾기 위해 그 넘기 어렵다는 이카루의 국경도 넘었 구요(방금 전에는 엘프라는 걸 이용해서 비교적 쉽게 넘었다며!! 왜 한 입으로 두 말하고 난리야!! 네가 그러고도 엘프냐!!!), 또 온갖 허위 정보에 속아서 몇 번이나 헛걸음을 해야만 했습니다. 리니아나님이 이카루에 계신다는 걸 알고 이카루에 온지 석 달이나 됐는데, 그분의 그림자도 못 봤습니다. 이제야, 이제야!! 린님이 어디 계신지 아시는 분이 나타났는데, 어떻게 안 기쁠 수가 있겠어요?" 그, 그러냐? 기쁜 마음을 알겠는데, 그만 흥분하고 얌전히 앉는 게 어떨까? 여기까지 침이 튀는 것이 심히 불쾌하단 말이다. 나는 그렇게 말해 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시이나를 어설픈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번에는 루덴스 놈이 불쑥 끼여들었다. "리니아나님, 어디에 계시지? 이봐, 얘기해 주면 네가 어제 밤에 추태 부린 거 퍼뜨리진 않을게. 앞으로 사는데 아무런 지장 없게 내가 되도록 입을 다물고 살……" 퍼벅!! 루덴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주먹이 어디로 향했는지는 굳이 상기시켜 주지 않더라도 알리라 믿는다. 나는 루덴스의 면상에 멋지게 도장을 하나 찍어준 다음, 가볍게 고개를 들어 시이나를 보았다. "……흐응? 내가 언제 린이 어딨는지 가르켜 준다고 했냐? 오늘 이 동네 한 번 다 뒤져봐. 그럼 린 인가 뭔가하는 여자를 찾을 수 있겠지, 안 그래?" "예?" 시이나는 내 말이 의외였다는 표시를 온 몸으로 했다.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 눈을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리는 것이 아닌가. 루덴스놈은 그것보다 조금 격렬했다. 그 놈은 내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주먹을 꾹 쥐더니 냅다 소리쳤다. "뭐야!!! 알고 있다면 당연히 가르켜 줘야지!! 우리는 그 린이라는 여자를 찾아서 국경을 넘었단 말이다!!" "훗, 웃기지도 않는군. 린을 왜 찾는지도 얘기해주지 않고 무작정 린이 어딨는지 가르켜 달라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는 거냐?" 나는 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카민 역시 같은 생각이라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시이나와 루덴스를 보고 있었다. 문득 카민이 입을 열었다. "린이라는 분은 왜 찾는 거죠? 저희는 저번에 그 분께 한 번 점을 봤습니다. 분명……" 카민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훌륭한 점술가시더군요. 그 분은 왜 찾으십니까?" 카민의 질문에, 시이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시이나는 루덴스를 휙 하고 돌아 바라보았다. 루덴스놈은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더니, 한참만에야 주저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점이 신통하다는 것은 온 대륙의 사람이 알고 있지. 귀족들 사이에서도 리니아나라는 이름은 정말로 유명해." "……그런데?" 새삼스럽게 그런걸 상기시켜 주지 않아도 그 여자가 점 하나는 정말로 잘 본다는 거 나도 알고 있다. 어서 본론이나 말해. "사실은…… 에라이, 이런거 말하면 안되지만…… 뭐, 씬이 아는 사람한테는(나와 씬이 왜 아는 사이라고 생각하는지 심히 궁금했다)말해도 괜찮겠지. 그래, 솔직해 얘기할게. 우리 나라의 어떤 영감탱이가 리니아니라는 여자의 점을 받아보고 싶어해. 이제 됐어?" "……그게 다야?" "응." 루덴스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시이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이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떤 영감님이 린 님의 점을 보고 싶어합니다." "흐응."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인간인지 모르겠지만, 점 한 번 보려고 엘프까지 동원해서 한 나라를 뒤졌단 말이야? 대단하시군. "가르켜 주십시오, 칼레들린님. 리니아나 님은 어디 있습니까?" 시이나의 간절한 눈을 본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말했다. "좋아, 가르켜 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예? 뭔데요?" "뭔데? 말만해. 내가 다 들어주지!!" 시이나와 루덴스는 내가 대답을 해준다는 사실에 잔뜩 흥분해 들떠 있었다. "첫째, 어제 내가 했던 행동을 다 잊어." 그 말에, 시이나와 루덴스의 얼굴이 움찔 굳었다. "그건…… 잊고 싶어도 안 잊혀질 것 같은데요." "동감이야." 그들의 말에 나는 움켜쥐었던 오른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흐응, 린이 어디에 있는지 알 필요가 없다 이거냐?" "아, 아닙니다! 잊죠, 잊을게요!" "나, 나도!! 잊을 수 있어, 암!!" 진작 그렇게 나와야지, 후후후후훗. "칼…… 사악해보여." "동감이다." 카민과 라이메데스가 뭐라고 떠들든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씨익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시이나와 루덴스를 바라본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먹은 밥값은 당신들이 내. 아아, 나 지금 배가 좀 고프거든? 한 10인 분 시켜서 먹어도 괜찮겠지?" * * * * * * * * * * * * * * * * 나는 아주 친절하게 시이나와 루덴스에게 린의 집 주소와 점성술 가게의 위치를 가르켜 주었다.(점성술 가게라고 해봤자 린이 모포 한 장 깔아놓고 점 봐주는 곳이지만) 그 둘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게 가르켜 줘서 고맙다고 말을 했다. 루덴스는 어찌됐든 그 린이라는 여자의 소재지를 알게 돼서 기쁜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날 듯이 여관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시이나는 루덴스처럼 서둘지도 않았고 급하게 여관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그는 갑자기 내 손을 꼭 부여잡으며 말했다. "칼레들린님." "왜?" 나는 회색 머리카락의 엘프가 왜 내 손을 잡으면서 이름을 부르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부름에 응했다. 그런데 시이나가 내 손을 잡은 그 순간 바람소리도 없이 라이메데스가 포로로 달려오더니 내 옆에 떡하고 버티고 서는 게 아닌가. 이 놈이…… 대체 왜 또 끼여드는 거지? "데스? 왜 당신이 또 옆에서는 겁니까? 전 개인적으로 칼레들린님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시이나가 억울하다는 듯이 라이메데스에게 말했지만 라이메데스는 그 뻔뻔한 상면으로 퉁명스럽데 말할 뿐이었다. "그래서? 내 앞에선 말못하겠다는 거야? 웃기지 말고 할 말 있음 해봐. 말은 듣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닌가?" "……." 라이메데스의 뻔뻔한 그 말에 시이나는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라이메데스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습니다. 말로는 당신은 못당하니까. 칼레들린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씀 잘 들으세요." 시이나가 막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히이잉, 하고 뭐나가 이상하게 우지짖는 소리가 나더니 루덴스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이나!! 어서 가자!!" 시이나의 발걸음을 완벽하게 재촉하는 그 목소리에, 시이나는 좀 씁쓸한 눈을 하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을 한 번 어루만졌다.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그런 나를 향해 후후, 하고 짧게 웃어 주었다. "칼레들린님. 당신은 당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나는 갑작스러운 이 질문에 조금 당황했지만, 차분하게 대꾸했다. "나란 놈은 아주 멋지고 잘난 놈이야." 시이나는 내 대답에 처음엔 조금 당황한 표정을 했지만(왜 당황한 표정을 하는 거지? 흠, 원래 종족을 불문하고 너무나 당연한 진실을 들으면 저렇게 당황하기 마련이지.)곧 빙긋 하고 웃어 보였다. 그는 다시 한 번 내 머리를 톡톡하고 쳤다. 보통 때였다면 누군가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 같은 것을 가만히 놔둘 내가 아니었지만, 왠지 올려다보아지는 그의 얼굴이 너무 자애로워 보여서 나는 가만히 있었다. "……당신은 밝군요. 그리고, 순수하십니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시이나를 올려다보았다. 시이나의 회색 눈동자가 내 눈동자와 맞 부딪혔다. 깊이 있는 안개가 넘실거리는 시이나의 눈동자에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복잡 다난한 이야기들이 슬쩍 흐르고 있었다. 나는 시이나가 뭔가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것을 느낀 순간이었다, 라이메데스가 갑작스럽게 한 발을 내밀면서 시이나의 이름을 부른 것은. "시이나." 나는 라이메데스가 또 끼여들려 한다는 것을 알고 녀석을 한 대 치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라이메데스를 치는 것보다 루덴스가 시이나를 부르는 소리가 더 빨랐다. "시이나아아아!! 어서 가자니까!!! 그 사이 리니아나님이 또 사라지면 어떡할거야!!"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시이나는 그 재촉에 후,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부드럽게 흩어지는 회색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회전해서 돌아섰다. "잘 가요, 시이나님." 옆에 서 있던 카민이 작게 인사했다. 시이나는 그런 카민을 향해 미소지었다. "예, 루덴스님 때문에 너무 큰 상처 받지 않으셨길 빕니다. 그리고 다시…… 뵐 수 있길 바랍니다. 칼레들린님, 당신도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돌아서는 시이나의 등을 보며 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왠지는 모르지만, 시이나와는 필연적으로 한 번 더 만나야할 것 같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였을까?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기묘한 울림을 가진 내부의 무엇인가가 그렇다고 외치고 있었다. 시이나와는 한 번 더 만날거야. 필연적으로, 만나야 할 거야. 그 목소리는 무엇이였는지 알 수 없지만, 내 내부에서 외쳐대는 그 것은 매우 강하게 들렸다. ----------------------------------------- 후우... 47편은 라인이 기네요... 거의 2편 분량에 맞먹는다는...-_-;; 자아... 3편 이상 업하겠다는 약속.. 지키죠.. 지키고 말구요;; Total : 18, 1 / 2 pages 전체 (18)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레시아 (10) 이 름 카르민 제 목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8 나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시이나를 보았다. 시이나는 돌아서다 말고 멈칫하더니 나를 보곤 웃었다. "칼레들린님. 당신의 귀에 걸린 피어스가, 당신의 행복을 지켜줄 물건입니다. ……누가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있는 한…… 괜찮겠지요. 부디 소중하게 간직하십시오." 피어스? 피어스라면 로시엔이 준 이 은빛의 피어스를 말하는 건가? 내가 의아한 생각으로 막 피어스를 만지작거리는데, 이번에는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데스, 당신과는 되도록 만나지 않았으면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 한 번은 보겠지요? 안녕히 계십시오." 라이메데스를 향해 말한 시이나는 등을 휙하고 돌려 여관 밖으로 걸어나갔다. 회색의 머리카락이 기다란 포물선을 그렸다. 나는 조금 멍한 눈으로 그런 시이나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런 내 귀에, 라이메데스의 툴툴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쳇, 여자다움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 같으니. 뭐? 되도록 만나지 않았으면 한다고? 나도 네 녀석 안 만나고 싶어! * * * * * * * * * * * * * * * * * * 제 11장: 수도행(首都行) "……정말 시이나가 여자라고?" 슬픔 어린 거울.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지만 당신은 한없이 투명하고 맑아. 내 이 지저분한 손끝이 닿으면 그대로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조각조각 편린을 남기며 흩어질 것 같은 당신은 성스러운 페퍼민트 블루의 찬란한 빛의 편린. 나는 나뭇잎 사이로 간간히 부서져 내리는 햇빛과, 그 햇빛 사이를 환하게 맴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라이메데스를 향해 물었다. 내 옆에서 가만히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던 라이메데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 녀석 여자야." "……데스형, 정말인가요?" "그럼, 내가 너희 둘 가지고 장난칠 녀석으로 보여?" "……응." "그렇게 보이는데요?" 라이메데스는 잠시 말없이 나와 카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의 눈빛에 굴복할 만큼 나와 카민은 무르지 않았다. 나는 쏘는 듯한 눈빛으로 라이메데스를 마주보았고, 카민 역시 투지를 담은 붉은 눈동자를 라이메데스에게 바짝 들이댔다. 결국 항복을 한 쪽은 나나 카민이 아니라 라이메데스였다. 그녀석은 인상을 팍 쓰곤 말했다. "두 녀석하고 한 번에 눈싸움을 하다가 사팔뜨기 되겠군…… 아아!! 그런 의심어린 눈으로 보지 마. 그 녀석은 여자가 틀림없으니까!!" "웃기지마. 입고 있던 옷부터 시작해서, 목소리에, 느낌! 분명 그건 남자였어." 나는 라이메데스를 지그시 노려보며 말했다. 카민 역시 내 의견에 동조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직접 확인까지 해봤다. 물론 그 녀석이 여자, 그것도 가냘픈 엘프치곤 어깨도 넓고 목소리도 걸걸하지만…… 틀림없는 여자야." "하지만 씬 [군]이라고 불렸는데?" "……사정 따윈 내가 알 바 아니지. 하지만 그 녀석은 정말 여자야. 직접 확인도 해봤으니 틀림없다." 라이메데스의 그 말에, 나와 카민은 거의 반사적으로 외쳤다. "……확인요?" "확인?" 우리는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확인이라는 단어에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라이메데스는 갑자기 입을 닫더니 묵묵히 말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라이메데스가 했던 그 [직접 확인]이라는 단어는 한여름의 스콜이 되어 나와 카민의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둘 다 얼굴이 빨개지는 거야!!! 상대는 엘프라고!!!" 종국엔 라이메데스가 큰 소리로 이렇게 뱉어냈다. 나는 언뜻 카민을 보았다. 카민의 얼굴은 정말이지 새빨개져 있었다. 카민도 나를 보았다. 녀석은 나를 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으읏, 설마 내 얼굴도 빨개진건가? 나는 머리카락으로 대충 얼굴을 가렸다. 워낙 긴 검은색의 머리카락이라, 내 조막만한 얼굴은(흐흐흐, 부럽지?)쉽게 가려졌다. 시이나와 루덴스가 린을 찾아 떠난 후, 우리는 다음 날로 그 여관을 떠났다. 카민은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했고 어차피 그 마을에 볼 일도 남아 있지 않던 우리들은 순순히 수긍했다. 처음 마을을 떠나던 날, 카민이 끌고 온 말이라는 것에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발밑이 허전한 느낌이 아직은 어색하긴 했지만. "……그래, 목적지는 이카루의 수도 에이테르라고 했지?" 달그락거리며 달리는 말발굽 소리에 조금 파묻힌 라이메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 왜 에이테르로 가는 거지? 뚜렷한 목적이 있나?" 라이메데스의 질문에 카민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 닙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카민은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체이드 숲에서 녀석을 쫓아왔던 그 일련의 무리를 피해 수도로 향해 가는 길이 아니던가. 목적 같은 것은 없었다. 도피를 목적이라고 한다면…… 겨우 그 정도의 조건을 충족시켜 줄만한 장소.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라이메데스는 더듬더듬 말을 하지 못하는 카민의 말을 일축하고는 씨익 웃으며 나를 보았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라이메데스 놈이 왠일로 괜찮아 보이는 바람에 심히 당황했다. ……카민이 안내하는 대로 말을 달리는 길, 수도로 향하는 쭉 뻗은 길은 편안했다…… 수도인 에이테르에 도착한 것은 우리가 말을 타기 시작한지 20여일만의 일이었다. 이 긴 시간 동안 장거리 여행을 한 우리들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긴 시간을 정말이지 따분하고 또 따분하게 보냈다. 이 이카루라는 나라의 치한이 너무 안정되어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불쑥불쑥 산적무리가 출몰하기도 했고 난데없이 이름도 모를 하급 마물들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들은 정말이지 조금의 출혈도, 시간의 낭비도 없이 움직일 수가 있었다. 하긴, 무슨 일이 일어날 리가 없는 것이다. 왜냐? 당연하지 않은가. 나와 카민의 옆에는 그 위풍도 당당한(……)라이메데스가 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내가 라이메데스를 씹고, 욕하고, 이 놈의 바보 같은 면을 강조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라이메데스가 각성 마족이라는 것이다. '각성마족? 그게 뭐가 어떻다고?' ……라고 생각하는 인간이 모르지만, 일단 각성한 마족에게 인간계의 존재 중 두려울 상대가 있을 것 같은가? 각성 마족에게 인간 따위는 그 어떤 장애도 되지 못한다. 물론, 갓 각성했거나 태어날때부터 체질이 허약한 마족놈들은 신관이나 검을 극성까지 익힌 자에게는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있긴 하다. 하지만, 라이메데스는 갓 각성하지도 않았고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마족놈은 더더구나 아니다. 라이메데스는 마계 최강이라 불리는 블러드 아미원인 것이다. 블러드 아미원은 아무나 되는가?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블러드 아미는 정말이지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다. 아이에드라는 최고위의 미친마족(……)이 이끄는 군대다. 이 군대는 일단 입대의 경쟁률도 살벌하거니와, 전투도 가장 빈번하게 치루는 군대라 입대 후 몇 백년동안 무사하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자랑스러운 일일 정도다. 문제는, 그 쟁쟁한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데다가 아주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은 그 대·단·한· 놈들이 하나 같이 띠벙하다는 데에 있지만, 끄응. 하여튼, 말하고 싶은 요지는…… 라이메데스가 무지하게 강하다는 것이었다. 일단, 이 인간계 내에서는 적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그런 라이메데스와 동행을 했으니, 밤에는 이 놈 불침번 세워 놓으면 몬스터? 그깟 놈들 라이메데스가 눈 한 번 찡그리면 다 복종하기 마련이다. 산적이나 도적들은 라이메데스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어찌된일인지 귀신같은 코(물론 얼굴에 붙어 있는 그 코를 말하는 건 아니다)를 가진 카민놈이 검을 한 번 뽑으면 그걸로 또 끝이 되는 것이다. 나? 나는 당연히 싸우지 않았다. 이 잘난 얼굴에 흠집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검 같은 뽑아 싸운단 말인가? 난 그저 느긋하게 말만 몰면 되는 일이었다. 수도로 가던 중 들렀던 작은 산간 마을에서 산사태가 일어나 커다란 돌무더기가 깔려 있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통행인들이 그것 때문에 어찌할 줄 몰라 쩔쩔매고 있을 때, 라이메데스놈은 거리낌 없이 척척 걸어가 한 손으로 그걸 아주 가볍게 날려버렸다. 나는 라이메데스가 거리낌없이 그 큰 돌을 던지는 걸 보고 카민이 혹시나 의심을 하지 않을까 했으나 카민 놈은 역시 바보였다. "와아, 데스형 진짜 힘세네요!! 우와, 나도 팔 힘은 제법 되는데, 형한테는 상대도 안되겠어요." ……그렇게 탄성을 터뜨리기까지 했으니. 그리고? 그리고는 또 무슨 그리고야. 그 왜엔 더 이상의 장애물은 없었다. 우리들의 수도행은 매우 순조로웠다. 아니, 순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단, 우리들의 여행 중에 순조로웠던 것이 수도행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까. -------------------------- 47편에 비해 너무너 짧은 48편... 우할할할;; pages 전체 (18)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레시아 (10) 이 름 카르민 제 목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49 "야아!!!!" 카민이 커다랗게 탄성을 내질렀다. 녀석의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깃발처럼 휘날렸다. 라이메데스의 로브 자락 역시 바람결을 따라 부드럽게 휘날리며 곡선을 그어내고 있었다. 라이메데스는 아직도, 정말 아직도 그 로브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 로브를 보며 분통이 터지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악!! 정말 그 로브를 계속 입고 싶다면 좀 빨아 입으면 누가 죽기라도 한단 말인가!! 원래 라이메데스가 입고 있던 로브는 하얀색이었다. 그래. 그야말로 새하얀, 반짝반짝 윤이 나는 그런 하얀 색 말이다.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한 그 로브는 매우 청결하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었다. 하지만 20여 일의 수도행이 끝나고 문득 그 로브를 보았을 때, 그것은 말들이 달리는 도중 거칠게 흙을 차낼 때 흩어진 흙먼지에 잔뜩 찌들어버린 꾀죄죄한 로브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 로브를 보면서 실로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미 웬만한 이들은 창피해서라도 걸치지 못할 정도로 지저분한 로브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웬만하면…… 좀…… 빨지 그래?" 언제였던가. 아마도 라이메데스가 불침번을 서고 있던 어느 날 밤이었던 것 같다. 희미하게 비쳐오는 달빛 속에서 너무나 뚜렷이 보이는 흙먼지 자국을 보며, 나는 라이메데스에게 처음으로 충고라는 것을 했다. 하지만 라이메데스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너무나 어이없는 것이었다. "싫어. 그런데 시간낭비하고 싶지 않아." "……." 그 날 이후로도 몇 번인가 저 로브를 빨 것을 종용해왔지만 라이메데스는 결코 빨지 않았다. 나는 그런 라이메데스에게 일종의 존경심을 느꼈다.(반어법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보는 없으리라고 굳게 믿는다. 아주 굳게 믿을 테다.)라이메데스는 그, 바로 그! 꾀죄죄한 로브를 당당히 입은 채로 수도의 거리를 죽하고 훑어보았다. 지난 20여 일간, 이카루라는 나라를 반으로 가르며 흐른다는 테이카 운하와 그 대로를 따라 우리는 말을 타고 달렸었다. 운하 주변에는 꽤나 큰 상점가와 좋은 여관이 많았기에 우리의 행색은 그럭저럭 괜찮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완벽한 오류였다. 수도라는 곳…… 에이테르라고 했던가. 이그라스 대륙에는 통합 일곱 개의 나라가 있는데, 그 중에서 기술과 경제의 나라라 불리는 나라가 바로 이 나라, 이카루다……라고 라이메데스가 가르켜 줬다. 이그라스 대륙에 있는 일곱 개의 나라들은 저마다 특이한 점을 갖고 있었지만, 그걸 일일이 다 외울 만큼 나는 머리가 비어 있지 않았기에 대충 이카루라는 곳의 특성만을 기억했다. 뭐, 이카루의 동남쪽에 있다는 세난이라는 섬은 좀 특이해서 기억해두었지만. "카알, 수도는 역시…… 다르다. 그치?" 카민은 내 옷소매를 지익, 하고 잡아끌었다. 로시엔이 정성 들여 한 땀 한 땀 만들어 주었던 이 검은 색의 옷은 그나마 상태가 양호했지만, 라이메데스와 카민의 꼴은 그야말로 꾀죄죄 그 자체였다. 수도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들은 더더욱 지저분해 보였다. 한 가닥으로 뻗어나간 수도의 길은 꽤나 번들번들하게 닦여 있었다. 흠, 역시 수도라 그럴까? [인간들의 삶] 제 17장 [신분편]에 따르면, 수도에는 신분이 꽤 높다는 귀족이란 놈들이 많이 거주한다고 했으니. 역시 그래서 이렇게 사람들이 잘 차려입고 있는 걸까? 물론 얼핏얼핏 부랑자 같이 보이는 조그마한 꼬마라던가, 너덜너덜한 옷을 입은 녀석들이 보이긴 했다. 하지만, 역시 우리들의…… 아니 아니, 카민이나 라이메데스의 꼴에 비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꽤나 깔끔한 옷맵시를 자랑하고 있었다. 수도에 들어선 순간 느낀 것은 숨이 막힐 정도의 번잡함. 그리고 칼로 재어 맞춘 듯한 사람들의 깨끗함. 여태까지 내가 봤던 인간들의 건물들은 왜 그렇게 낮았던 거지, 라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높고 높게 치솟은 건물들. 간간이 조그마한 공터 같은 게 보이긴 했지만, 수도는 역시 복잡해 보였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거지, 카민?" 나는 카민에게 나직하게 물었다. 카민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 글세. 이, 일단은…… 에에, 수도…… 구경이라도 하는 것이……" 나는 카민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가볍게 발을 옮겼다. 라이메데스와 카민도 내 뒤를 설렁설렁 따라왔디. 그런데, 정말이지 갑작스럽게도…… 나는 걷던 도중에 무엇인가와 딱하고 부딪혔다. 누, 누구냐!! 이 최강의 꽃미모를 자랑하는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님과 부딪힌 엄청나게 운이 좋은 녀석이!! 나는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간 더욱더 당황했다.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꽃 사시겠어요?" 내 앞으로 불쑥 올라온 그것은 놀랍고 황당하게도…… 한 무더기의 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 것을 바라보았다. 어, 어디서 갑자기 꽃이 튀어나온 것인지 궁금해하면서. "……헤에?" 카민은 갑자기 불쑥 솟아오른 그 꽃더미를 얼빠진 소리를 냈다. 나는 조심스럽게 밑을 바라보았다. 꽃을 들고 선 것은 한 명의 소녀였다. 나와 부딪힌 것도 바로 이 소녀인 성 싶었다. 보라색 머리카락에, 반짝이는 보랏빛의 눈동자를 가진 소녀는 방긋 웃고 있었다. 수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옷차림이 무척이나 깨끗한 것과 대조적으로, 그 소녀의 옷은 매우 지저분했다. 그 지저분한 소녀는 꽃을 불쑥 내밀며 방긋 하고 웃었다. 나는 그 소녀의 웃음이 문득…… 나스를 연상케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민을 보았다. 카민은 웃고 있었다. "그래, 그거 다 얼만데?" 카민은 그 꼬마를 보더니 몸을 살짝 낮추곤 방긋하고 웃었다. 안 그래도 계집애 같은 얼굴은, 미소를 띄우자 더더욱 계집애처럼 변했다. 쳇, 역시 이 놈은 꼬마라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 "이, 이거 다요?" 소녀는 화들짝 놀란 어조로 반문했다. 꽃 무더기 속에서 놀란 얼굴이 솟아 올랐다. 카민은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응." 라이메데스는 아무 말 없이 그런 카민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입가에는 조그마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나는 그런 라이메데스를 한 번 본 후에 다시 소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녀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채로 말했다. "10, 10루테요." "그래? 그거 모두 다 줄래?" 카민은 그 말과 함께 품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꽃을 들고 선 그 보랏빛 머리카락의 꼬마의 얼굴 위로는 순간, 확연한 기쁨이 번져 나갔다. 카민은 품을 뒤적여 이상한 동전 하나를 꺼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 그 밝던 꼬마의 얼굴이 살짝 망가졌다. "자, 여기 1실버 있어." "……저…… 저기…… 거, 거스름돈이 없는데요." 꼬마가 기죽은 목소리로 말하자 카민은 다시 피식 웃었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어. 그 꽃값으로 1실버를 낼게. 괜찮지?" 꼬마가 그 말을 듣고 순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카민의 환한 미소를 보고 따라서 활짝 웃었다. 꼬마는 돈을 받아들곤 카민에게 꽃다발을 건네려고 했다. 하지만, 카민은 그 꽃다발을 직접 받지 않았다. "칼, 네가 받아." "……내가?" 나는 멀뚱한 눈으로 그 꽃무더기를 보았다. "응. 어서." 카민은 그 말과 함께 다시 웃었다. 나는 엉겁결에 그 꽃다발을 받았다. 은은한 향기가 천천히 코끝을 자극해왔다. 하얗게 피어난, 마치 방울같은 꽃이었다. 「뮤니아로군.」 「뮤니아?」 「뭐, 인간계에선 흔한 꽃이지……」 라이메데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그 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아이에드의 정원에서 본 듯도 하군. "고맙습니다." 꼬마는 동전을 받아들고 방긋방긋 웃었다. 카민은 그런 꼬마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조그마한 여자아이를 보자마자, 눈이 흔들리는 모습이라니. 아련하게, 무엇인가를 좇는 듯한 눈이라니. 나는 카민의 모습에 왠지 욕지기가 나오면서도 한편으론 마음이 무척 아파옴을 느꼈다. 이런, 이거야말로 제길이다!! 그 꼬마는 신기한 눈으로 몇 번이나 그 은빛의 동전을 들여다보더니 배시시 웃으며 큰 길 쪽으로 달려나갔다. 그 아이가 입고 있는 더러운 하얀색 원피스가 나풀나풀거렸다. 부드럽게 흩날리는 스커트의 곡선을 따라 시선이 움직였다. 카민은 흐뭇한 시선으로 그 아이를 보고 있었다. "자, 가요." 카민이 웃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리곤, 발걸음을 움직였다. 히이이이이이잉!!! 그런데 바로 그 때, 마치 무엇인가에 짜여진 틀처럼…… 마치 예정되었다는 듯이 어디선가 날카로운 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에 거의 반사적으로 시선을 그 쪽으로 주었다. 하지만, 내가 고개를 돌리는 것보다, 차오르는 잔상이 훨씬 더 빨랐다. 히이이이이잉!!!! 요란한 말의 울음소리가 귓전에서 아득하게 퍼지는 것 같다. 저 편에서 말에게 채찍질을 가하고 있는 마부의 움직임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보였다. 순간 심장이 뛰었다. 저 멀리서 달려오는 것은 네 필의 백마였다. 그것은 정말이지 재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질주하는 그 말이 움직임이 시선을 압박해 들어왔다. "헉!!!" 멀찍이 선 채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카민의 깜짝 놀란 듯한 음성이 귀에 설핏 들려왔다. "비켯!!" 히잉, 하고 백마가 달리고 있었고 그 말을 모는 마부가 거칠게 소리를 치고 있었다. 마차의 앞에는 조그마한 꼬마가 하나…… 있다. 보라색 머리카락의 꼬마. 1실버라는 동전을 쥐고 방글 방글 웃어대던 그 꼬마. 그 꼬마는 덜덜 떨고 있었다. 마차는 그 꼬마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저 자리에서, 피한다면 피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달리는 마차였기에 그 어린 나이로서는 너무 당황하고 무서웠던 모양이다. 꼬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부르르 떨기만 하고 있었다. 재빠르게 달려오는 마차. 재빠르게 압박해 들어오는 말. 하얀 백마는 무척이나 빠르게 앞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안 돼!!" 멍하게 풀린 눈으로 나는 마차를 보았다. 마차의 움직임은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마부는 정면에 서 있는 꼬마를 보면서도 말에 가하는 채찍질을 멈추지 않았다. 부딪힌다, 부딪힌다, 부딪힌다. 백마의 움직임이 미칠 듯하다. "이 꼬마 놈!! 비키라고 했잖아!!" "칼!!!" 두 개의 목소리가 섞여서 들려온다. 나는 미친 듯 앞으로 뛰어나갔다. 순간적으로 라이메데스가 흠칫하며 내 쪽으로 달려오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순간 외쳤다. 「……잔말말고 가만히 있어.」 라이메데스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나는 미친 듯이 달렸다. 꼬마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로 움직였다. 말은 바로 앞에 있었다. 깔린다, 깔린다. 치인다, 치인다구. 나는 달려가서, 공포에 젖은 눈동자를 하고 부르르 떨고 있던 그 보랏빛 머리카락의 꼬마를 그대로 품에 안았다. 휘릭!! 어지럽다는 기분을 느꼈을 때, 꼬마는 내 품에 안긴 채로 눈을 꼭 감았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재빠르게 옆으로 굴렀다. 아슬아슬하게 마차의 바퀴살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비켜 피했음에도, 달리는 마차의 움직임은 전혀 멈춤이 없었다. 자욱한 먼지가 일었다. "카, 칼……!! 마차에 부딪힐 뻔했잖아!! 죽고 싶은 거야?" 먼지가 인 곳으로 달려온 것은 카민이었다. 카민이 미친듯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꼬마에게로 생각이 미친 듯 카민의 눈이 커다래졌다. "꼬, 꼬마는? 꼬마는 괜찮아?" 내 멱살을 마구 흔들던 카민은 이번에는 보라색 머리카락의 꼬마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심한 충격이었는지, 그 꼬마는 정신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외상은 없다. 난 그제서야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저 빌어먹을 마차, 당장 멈추게 해."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라이메데스가 내 말을 들었는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 눈에는 띄지 않게, 미세하게 라이메데스의 손에서 마기가 움직였다. 검은 그것은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 마차의 수렛살 사이에 박혔다. 퍼억!! 마차의 수렛살이 휘청, 하고 기울여졌다. 마부가 소리를 쳤다. "제길, 뭐야!!" 나는 이빨이 뿌득 갈리는 것을 느끼며 굴렀던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옷깃에 묻었던 먼지를 털었다. 탈, 탈, 탈. "칼레들린." 내가 마차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있던 라이메데스가 가만히 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난 그의 호명에 대꾸해주지 않았다. 나는 수렛살을 보며 뭐라고 중얼대는 마부를 노려보았다. 마부의 시선이 나와 얽혔다. 순간, 마부가 움찔하더니 냅다 내게 말을 몰던 그 채찍을 휘둘렀다. 휘익! "큭." 마부가 휘두른 그 채찍은 굉장히 강한 속도로 내게 달려와, 피할 틈도 없이 그대로 내 손목을 쳤다. 순간, 나는 그대로 이성이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훗, 후후후후후훗. "……." 나는 천천히,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그 마부 쪽으로 걸었다. 마부의 안색은 내가 다가감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하얗게 질려갔다. 마부는 이를 악 물더니 다시 내게 채찍을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죽기 전에 치워." 그의 채찍은 카민에 의해 저지 당했다. 엄청난 스피드로 마부에게로 달려간 카민은 단검을 그대로 마부의 목 언저리에 들이대며 날카롭게 외쳤다. 마부는 그 서슬 퍼런 기색에 안색이 대번에 퍼렇게 변했다. "이, 이 마차는…… 네, 네페르네 남작님의 마차다!!" "그래서?" 카민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고, 나 역시 그러했다. 나는 마부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내 손이 막 움직이려는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마차의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시선을 돌려 그 곳을 보았다. 마차에서 튀어나온 것은 험상궂게 생긴 놈들. 그 놈들은 마부에게 검을 들이대는 카민을 보더니 그대로 검을 뽑았다. "무슨 짓이냐?" "……." 나는 말없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기세당당하게 외쳤다. "이 마차는 네페르네 남작님의 마차다. 지금은 급한 일이 있어 바쁘시니 당장 길을 비켜라." "……." 나는 라이메데스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나 지금부터 깽판칠거야.」 ---------------------------------------------- 허억.. 일요일에 약속했던 3연참... 쿨럭;; 대신 낼하고 모래... 꼭 업할게요;; Total : 18, 1 / 2 pages 전체 (18)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레시아 (10) 이 름 카르민 제 목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50 「방금 뭐라고?」 「깽판 친다고 했다.」 「……농담이겠지, 설마?」 라이메데스놈이 뭐라고 지껄이든 무시하고, 나는 허리에 손을 가져가 거칠게 검을 뽑았다. 라이메데스놈은 놀란 눈을 하고선 나를 막으려고 했지만, 난 싸늘한 눈으로 그런 놈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네 일은 나를 지켜주는 거라고 하지 않았나? 아이에드가 내 일을 방해하라는 말까지 하던가?」 내 말에 내게 오던 라이메데스의 몸이 움찔하고 굳었다. 그는 그 상태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발을 멈추고 슬쩍 팔짱을 꼈다. 그의 더럽혀진 로브 끝이 조금 흔들렸다. "칼." 미리 검을 뽑고, 마차의 목 언저리에 검을 들이대고 있던 카민이 내 이름을 조그맣게 불렀다. 나는 발도(拔刀)와 동시에 몸을 가뿐하게 낮춘 자세라, 눈만 들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붉은 눈동자와 내 눈이 한 순간, 정확하게 맞부딪혔다. "죽이지는 마." 카민이 가볍게 말했고, 나 역시 가볍게 대꾸했다. "싫어." 제깟 놈들이 뭐라고 저런 주접을 떠는 걸 그냥 놔둬야 한다는 거지? 나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면서 한 발 자국 앞으로 나섰다. 이미 이성의 통제는 불가능하다. 이성? 훗, 이성 같은 것이 남아 있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 달라지는 건 아마 없었을거다. 미쳤다고? ……그래, 미쳤다고 생각해도 좋다. 나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안고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내딛었다. 츠릇, 하고 전해지는 나 자신의 살기에 내 몸조차 떨릴 정도다. 이런 기분을 느껴보는 건 또 오랜만이군. 처음, 여섯 살 때 '내가 잘 키워줄게∼'라는 아이에드의 말에 사기(그건 분명히 사기였다.)당해 마계로 갔을 때, 뚱땡이를 비롯한 많은 놈들의 무수한 괴롭힘에 아직 적응이 되지 않은 그 때, 그 때도 이런 미칠 듯한 살기를 느꼈었지. "칼……?" 카민은 이미 허옇게 질린 마부의 목에 겨누었던 검에 살짝 힘을 빼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너……? ……마, 마법 같은 걸 쓰려는 건 아니겠지?" 카민이 발악하듯 외쳐낸 [마법]이란 말에 검을 뽑았던 두 놈이 흠칫했다. 후우, 왜 그러시지? 내가 마법을 쓴다니까 조금은 놀란 거냐? "……그런 거 쓰고 싶은 기분도 없어." 검으로 베어주지. 하나하나, 하나하나. ……전부―. 베겠다. 나는 눈을 치켜 뜨곤 그 자세에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지면을 박차는 다리가 재빠르게 내 몸을 앞으로 실어 날랐다. 난 될 수 있는 한 빠른 속도로 녀석들을 향해 달려갔다. 바람이 튀는 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몸이 가볍다. 놈들은 놀란 눈으로 나를 보더니, 허둥지둥 검을 들어 내 움직임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검을 끝까지 들어올렸다. 따가운 햇살에 반사되는 검의 표면이 은빛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나는 입 꼬리를 들어올렸다. 죽·여·주·지· "……하지 말라고 했어." 그런데. 하늘을 향해 무섭도록 뻗었던 내 은빛 놈들은 내 최초의 유도대로 놈들의 머리로 날아가지 못했다. 나는 내 검 앞을 가로막은 것을 인상을 찌푸린 채로 바라보았다. 짧은 검 한 자루가 은빛의 검, 켐 알슈타드를 힘겹게 막은 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내 검을 막고 선 카민의 눈동자가 사납게 떨렸다. "……비켜." "눈에 초점이 없어. 그 상태로 검을 휘두르겠다고?" "……비켜." "절대로 안 비킬 거야." "비키라고 했어." "싫어!!" 내 검을 힘겹게 막고 선 카민 놈의 팔목이 심할 정도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난 마족 특유의 엄청난 완력을 써서 카민을 누르려고 했다. 하지만, 이 놈은 밀리지 않았다. 미친 듯이 팔이 떨렸지만, 그래도 밀리지 않는다. "……네 녀석도 베기 전에 비켜." "칼레들린!!!" 내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카민이 높다랗게 내 이름을 외치더니 냅다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 상태로, 바로 뻗어 올라오는 그 손바닥. 찰싹!! "……그렇게 흘러 넘치는 살기로 뭘 하겠다는 거지? 정말 저 자들을 죽이기라도 할거냐? 그럴 거란 말야?" "……." 나는 카민의 공격성 어린 말에 대꾸도 하지 못하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는 검을 들지 않은 왼손을 힘겹게 뻗어 내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보았다. 얼얼한 감촉이 느껴져 왔다. 붉게 타오르는 뺨은…… 방금 전의 그 짜릿한 아픔을 말하고 있었다. "……너……" 나는 입술을 악 물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검을 쥐며 날카롭게 외쳤다. "나랑 죽어보자 이거냐!!" * * * * * * * * * * * * * * "헉, 헉, 헉." "……둘 다 바보냐……?" 나직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나와 카민의 손끝을 잡은 것은…… 내 손에서조차 검을 쥘 힘이 빠질 만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눈부시게 빛나던 금빛 햇살은 그 빛을 어느 정도 거두고, 희미하게 어리는 석양의 그림자가 카민의 얼굴 위로 드리워지고 있다. "……누가 바보야." "전 바보가 아닙니다만."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고 있던 카민은 날카로운 눈을 내게 들이댔고, 난 그런 녀석을 향해 역시 이글거리는 눈을 보냈다. 라이메데스는 픽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갑자기 내 머리카락 위에 손을 올렸다. "그 놈들 아∼까 갔는데. 왜∼ 어째서∼ 칼레들린 씨는 여기서 자기 동료와 열을 내면서 싸우고 있는 걸까∼ 정말이지 궁금하군∼ 룰룰루∼∼" "……." 내 얼굴이 왕창 망가지는 걸 즐기기라도 하는 걸까. 라이메데스놈은 피식피식 웃으면서 웃기지도 않는 노래를 이어나갔다. "이미 갔다고. 이젠 그만하지?" 나는 라이메데스의 손을 탁하고 뿌리쳤다. 카민 놈의 몸이 다시 곧추세워졌다. 내 눈이 날카로워졌다. 카민이 다시 검을 들었다. 나도 검을 들었다. 하지만, 방금 전처럼 그 검이 내 몸을 향해 검이 날아올 것이라는 예상을 완전히 뒤엎으며, 카민은 그 검을 자신의 검집 안으로 돌려놓았다. 나는 의아함에 검을 쥐었던 손에 힘을 뺐다. 순간, 카민이 조용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칼. 귀족이란 원래 그런 족속이다." "……?" "나는 너에게 [참아]라고 말하지는 않았어. 말로 사람을 치일 뻔한 일은 분명 잘못된 일이니까. 팔 다리 하나씩 부러뜨리고 얼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 하나 쯤 만들어 주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이런 일로 목숨을 취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렇게 하면 너도 아까 그 놈들과 똑같은 녀석이 되는 거라고! 아까 그 자식들이 지위로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취급했다면, 넌 힘으로 그들을 누르는 것 밖에 안되잖아!! 그럼 똑같아 지는 거 아닌가!! 넌 그러고 싶은 거야?" 카민의 눈이 불타올랐다. 왜일까. 저 놈이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 나는 이길 수 없어진다. 녀석이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 절대로 이길 수가 없어진다. "……제길!!" 카민의 말을 듣고 섰던 나는 커다랗게 외친 후 오른손에 들려있던 검을 있는 힘을 다해 내던졌다. 팍!! 날카롭게 날이 선 은빛의 켐 알슈타드는 내 손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검처럼 땅 위를 뒹굴지 않았다. 검은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땅 위에 정확히 박혔다. 나는 바닥에 꽂힌 그 검을 보며 한참이나 말없이 서 있었다. * * * * * * * * * * * * * "헤에∼∼ 헤헤헤헤헤!! 오빠들 엄청 강하네요? 나도 싸우는 사람들은 아주 많이 봤지만 이렇게 잘 싸우는 오빠들은 처음 봤어요." 방긋 방긋 방긋. "어∼∼ 빨간 머리에 예쁜 오빠는 많이도 다쳤네요. 이쪽 오빠는 멀쩡한데! 헤에, 그러고 보면 이 쪽 오빠가 더 강한 건가?" 생글 생글 생글. "그런데 왜 둘이서 싸워요? 나를 칠 뻔한 그 나쁜 아저씨들하고 싸워야지!! 오빠들 바보예요?" "……." 나와 카민은 할 말을 잃고 턱을 쩍 벌리고 말았다. 보랏빛 머리카락에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꽃을 팔고 있었던 그 꼬마, 말 앞에서 달아나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그 보랏빛 머리카락의 꼬마는…… "야아∼∼ 에엑, 그런데 내가 준(……카민이 돈주고 산 게 아니더냐?)꽃을 저렇게 팽개쳐 놓다니…… 너무해요!!" 그렇게 외친 그 꼬마는 갑자기 손을 들어 내가 검을 뽑음과 동시에 내팽개쳤던 꽃무더기를 가리켰다. "동료끼리 싸우다니!! 너무 멍청하잖아요!!" "하, 하하하하."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설교하듯 말하는 그 보라색 머리카락의 꼬마를 보며 나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려 버렸고, 카민 역시 벙찐 표정으로 그런 꼬마를 보았다. 라이메데스 역시 조금 놀란 표정이었으나, 후드에 가린 덕에 그것이 보이진 않았다. "……쳇, 오빠들 정말 바보구나? 하긴, 저 빨간 머리카락의 오빠가 나한테 덜렁 1실버 줄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훗, 그렇게 큰 돈을 내고 꽃 한무더기라니, 동정심 많은 오빠라곤 생각했어요." 아까 전의, 그 수줍은 표정은 어디로 간 건가? '거스름돈이 없는데요'라고 난처해하던 소녀다운 모습은 어디로 사라진 건가? ……어디로 간 거냐? 응? 알고 있다면 누가 좀 알려주겠어? 제발!! 좀 알려줘∼∼! "저기, 꼬마야……?" 카민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너무나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꼬마를 불렀다. 꼬마는 빙긋 웃었다. "아, 제 이름은 유키예요. 꼬마가 아니니까, 이름으로 불러 주시겠어요?" 카민과 나는 이제 완전히 할 말을 잃은 채 그 꼬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저…… 너…… 괜찮은 거야? 방금 전에 죽을 뻔했잖아……?" "에? 하지만 안 죽었는걸요, 헤헤헤." "……." "……." 나와 카민이 전형적인 바보(침만 흘리면 그건 완전 바보의 형상이었을거다. 크윽!! 미남인 내가 그런 표정을!!!)의 표정을 지으며 꼬마를 바라보는데 꼬마, 아니 유키는 빙긋 웃더니 말했다. "푸훗, 순진하시긴∼.오빠들은 수도에 처음 오는 사람인가 보군요? 에이테르에선 이 길에서 하루에도 3∼4명은 마차에 치인다구요. 그 중에서 운이 없는 사람은 죽기도 하죠." 그러면서…… 어깨를 슬쩍 들어올리는 유키. "아, 표정이 다들 이상하네요. 왜 그러지? ……아하∼ 제가 아까 꽃 팔 때와는 달라 보여서 그런가요? 웅…… 동정심을 유발해서 꽃을 팔려면 그렇게 연기라도 해야하지 않을까요? 에헤헤, 표정 좀 풀어요." * * * * * * * * * * * * * * * * * * "너, 왜 따라오는 거냐?" "따라간 적 없어요." 그래? 따라온 적이 없다고? 하하∼ 하하∼∼하∼하∼핫. 그럼…… 왜 두 시간째 우리 뒤를 밟고 있는 건지 그 이유를 말해주겠어? 이게 뒤쫓는 게 아니면 대체 뭐라는 거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누군가의 뒤를 살금살금 따라간다. ……이것이 따라간다의 의미가 아니라면…… 대체 뭐라는 거냐!!! 솔직히, 저렇게 작은 여자애가 아까부터 뒤를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던 바보는 우리 일행 중 없었다. 다만, 서로 말하고 있지 않을 뿐이었다. 뭐, 나같은 경우에는 방향이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 여자애는 끝까지, 정말 끝까지 우리 뒤를 쫓아오고 있지 않은가? "……유키, 왜 우리 뒤를 따라오는 거지?" 카민이 갑자기 몸을 틀더니 생긋 웃으면서 무릎을 굽히곤 물었다. 그래, 네 놈 꼬마한테 친절하다. 내가 시큰둥한 눈으로 카민을 보는데, 갑자기 유키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유키를 바라보았다. 유키는 생긋 웃더니, 내 손을 덥썩 잡았다. "이 오빠한테 줄게 있는데 그걸 깜빡 잊고 못 줘서요." "뭔데?" 카민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순간, 유키가 내 손을 휙 잡아당겼다. 나는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내 몸이 유키 쪽으로 팍 쏠린 순간, 무엇이나 가벼운 것이 볼에 닿았다. 쪽! "……." 유키가 내 뺨에 뽀뽀를 함과 동시에, 우리 사이엔 무수한 정적과 함께 침묵이 흘렀다. "……그게…… 칼에게 줄 선물이야?" 카민의 어이없다는 어조가 흘러나온 것은… 한참후의 일이었다. -------------------------------- 열혈소녀 유키 등장..-_-; Total : 18, 1 / 2 pages 전체 (18)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레시아 (10) 이 름 카르민 제 목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51 "응, 그럼 오빠 이름은 데스구, 이 오빠 이름은 카민. 그리고 엄청 멋있고 잘 생기고 너무너무 근사한 이 쪽 오빠 이름은 칼이라구요?" "……왜 칼 앞에는 그렇게 많은 수식어가 붙는 건데?" "웅, 일단 제 목숨을 구해줬으니 칼 오빠는 내 생명의 은인이죠? 그리고 칼 오빤 엄청 엄청 잘 생겼죠, 검도 굉장히 잘 다루니까 엄청 멋있고 잘생기고 너무 근사한 오빠죠∼." "……라는군. 어떡할래, 칼레들린?" 라이메데스는 징글징글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나는 그 놈의 면상을 한 대 강타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누르며 싱긋, 있는 힘을 다해 싱긋하고 웃어주었다. "뭘…… 어떡 하냔 말이야?" "그러니까∼ 저렇게 작은 꼬마의 하트를 훔쳐놓고 설마 나 몰라라 하지는 않겠지? 안 그래?" "……." 카민은 빙글빙글 웃으며 이 상태를 그저 방관하고 있었다.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저 유키라는 애가 나와 한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 것이며, 카민과 라이메데스 사이에서 웃고 있는 건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키라는 그 꼬마는 여전히 웃으면서 음식을 입으로 마구 퍼 넣고 있었다.(안 돼!! 왜…… 왜 저 꼬마마저 아이에드가 하는 식사법을 그대로 따라하냔 말이다!!) 결국 여관 안까지 졸졸졸 따라와 버린 이 꼬마를, 카민과 라이메데스는 그다지 나쁘지 않게 보고 있었다. 아니, 숫제 반기는 듯 하다. 하지만 난…… 미안하지만 이 상태가 전혀 반갑지 않았다. "……흠, 보면 볼수록 나스를 닮았네……" 그 말과 함께, 카민은 힐끗 나를 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옛날부터 나스 결혼식 할 때 신랑감은 내가 직접 고르려고 했었는데…… 나스 신랑감으론 내가 누구누구를 점찍어 놨었지… 후우, 그게 안되면 나스랑 비슷한 사람이랑 그 누구누구를 맺어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설마 방금 그거 내 얘긴 아니겠지? 그런 거지? "쩝쩝쩝…… 그런데 오빠들은 전부 수도행이 처음인거예요?" 입에 음식을 묻힌 채, 유키가 눈을 들어 우리에게 물어왔고 카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헤에, 그럼…… 제가 안내를 해드리는 건 어때요? 어때요? 음…… 나도 여길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오빠들보단 더 잘 알텐데? 응?" 나는 더더욱 당황해졌다. 대체…… 대체 이 꼬마 뭐야? 아무리 자기 목숨을 구해줬다지만……. "흐음……? 유키, 넌 집은 어디냐?" 카민이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돌리듯 물었다. 그런데, 다음에 들려온 유키의 대답이 무척 의외였다. "……에? …… 그런 거 없는데요." 왠지 어두워 보이는 유키의 보랏빛 눈동자. "뭐? 집이 없다고?" "예. 집이 없어요." 금새 시들해지는 그 목소리에, 우리는 조금 당혹스러워졌다. 나는 유키를 바라보았다. 보랏빛의 눈동자. 어딘지 모르게 외로워 보이는 표정하며…… "……그럼 어디서 사는데?" "길에서 자요……." 시들한 목소리로 유키가 눈을 깔고 서글프게 말함과 동시에, 나는 속에서 무엇인가가 크게 울컹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크게 소리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길에서 잔다고? 말도 안 돼!" 내가 갑자기 소리치자 카민도, 유키도 심지어 라이메데스조차 깜짝 놀라서 나를 보았다. 나는 그런 그들을 한 번 죽 훑어본 후, 한 자 한 자 끊어서 말하기 시작했다. "좋아. 내일은 이 꼬마 안내 받아서 수도 구경 한다. 불만 없지?" "……불만 있으면 검 뽑을 거야?" * * * * * * * * * * * * * * * 햇빛이 눈부셨다. 부드럽게 내리쬐는, 그래서 포근하게 몸을 감싸주는 그 햇살은 조용히 창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투명한 유리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햇살은 자연스럽게 나의 아침을 유도했다. "우웅."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지만, 일어날 때마다 들어야 하는 내가 내는 이 이상한 음.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나는 조금 힘들다. 언제나 침대에 일어났을 때는 멍한 표정으로 한참을 있어야 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참 힘들다. 그러고 보니 문득 옛날이 생각난다. 어렸을 때 나는 아이에드와 함께 잠들었었다.(지금으로서는 절대로 상상하고 싶지도,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광경이지만!! 크아아아악!!!) 6살 때, 막 아이에드의 성에 들어 온 그 때에는 로시엔조차 두렵게 생각했었으니 오로지 아이에드의 품안에서만 잠들 수 있었다. 일어날 때 비비적거렸던 건 그때도 마찬가지라, 나는 한참을 침대에 앉은 채로 멍하게 있어야만 했다. 내가 그럴 때면 이 사이코 같은 아이에드놈은 버둥거리는 나를 안고 일어나 손수 세수를 시켜줬다. 그러면 그 때야 나는 제정신이 들곤 했다. "후후." 드문드문 나를 찾아오는 기억들이 나를 실소하게 만든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기지개를 크게 켜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내 정면인 문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나는 그 정면을 보는 순간, 있어서는 안될 것을 보아야만 했다. "……." 쩍. 순간, 너무나 황당해 턱이 벌어졌다. 놀람의 상태를 넘어 경악해 황당함의 비명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입을 벌린 상태로 경직해 버렸다. 내가 누워있던 침대 바로 정면에 서 있는 것. 나와 마찬가지로, 경악한 표정으로 어설프게 입술 끝을 움직이며, 역시 어설프게 웃고 있는금발의 녀석. 침이 흘러내렸을지도 모르는데, 막 잠이 깬 내 표정을 살짝 훔쳐보듯 보고 있는 저……. 멍청하게 눈이 풀려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기지개를 켜기 위해 들어올렸던 팔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었다. 그…… 그 흉한 꼴(일어나자마자 멍청하게 침대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모습. 막 일어났기 때문에 눈곱이 많이 달려 있을 테고…… 지저분한 상상은 그만 하자.)을 저 녀석이 봤단 말인가!! 크아아아아악! 차갑고 고결하게 비춰졌던(꽃무늬 앞치마와 술주정은 잊어줘.) 내 이미지가∼! "……아…… 하하. 칼레들린. 잘…… 잤냐?" "……." 나는 라이메데스가 아침 인사를 건네는데도 그 인사에 답할 수가 없었다. 그저 경직할 뿐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붙어있는 눈곱을 떼어 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라이메데스가 다시 한 번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음." 내 눈이 찢어질 듯 위로 솟는 것을 느꼈는지, 라이메데스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더 잘…… 거냐?" 라이메데스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시했지만 이미 경직하다 못해 돌이 되 버린 나의 정신을 일깨우지는 못했다. 나는 그저, 나의 이 잘난 이미지가 한 순간에 무너졌다는 것과(그것도 눈곱과 침으로 인해 망가졌다는 것에 더더욱 비통함을 느낀다)이제는 저 놈 앞에서 더 이상의 폼을 잡을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 눈물이 날만큼 서글펐다. 크아아아아아악!! 대체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망가지게 된 것일까? 나는 차갑고 멋진, 그리고 아주 당당한 남자였단 말이다. "저기, 그런데……" 내가 복잡다난한 마음을 부여잡으며 고민하고 있을 때, 내 생각의 파편을 조용히 흐트러뜨리며 라이메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라이메데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라이메데스가 조그맣게 말했다. "저 애는 왜 거기서 자는 거지……?" 나는 그녀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드는 것을 느꼈다. 나는 굳은 채로 있었던 팔을 내려 서둘러 눈을 거칠게 부볐다. 내가 누워 있던 침대에는. 베개에 얼굴을 살짝 파묻은 모습으로 잠든…… "헉스." 보랏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내가 누워있었던 베개 한 쪽에 머리를 댄 채로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그거…… 어제 그 꼬마 맞지?" 나조차 경악하고 있는데, 라이메데스가 다시 한 번 물어왔다. 나는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 머리만 긁적였다. 도대체가 변명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한참을 손가락만을 굽혔다 폈다하며 망설였다. "쿡." 그때였다. 나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라이메데스의 태도에 의아해 고개를 들고 보았다. 순간, 라이메데스가 다시 한 번 웃었다. "……정말이지 네녀석이 마음에 들었나보군." 나는 그 말에 그대로 그 자리에 경직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그 계집애를 보았다. 쌔근쌔근 잠든 저 보랏빛 머리카락의 꼬마를 보고 있으니 정말이지 너무 황당했다. 대체…… 어제, 어제 분명히 카민이 따로 방을 잡아주지 않았던가?? 라이메데스는 깊이 웃더니 말했다. "……할 말이라는 건 뭐냐?" 난 너무나도 쑥스럽고 황당하고, 하여튼 그래서 결국 허둥지둥 이렇게 물었다. 라이메데스는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아, 사실은 말이야. 아까 전부터 이 근방에서 시이나의 기척이 느껴진단 말이야?" "뭐? 시이나의?" 나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회색 머리카락의 여자(……라이메데스의 말이 맞다면)그 엘프가 여기에? 왜? 라이메데스는 다시 웃더니 말했다. "그래. 그래서…… 잠깐 나갔다 올까 하는데 괜찮을까?" "좋을 대로 해." 시이나가? 왜? 린을 찾은 후에 바로 루덴스란 놈과 함께 크레티아라는 곳으로 갈 모양이던데…… 왜 이 수도에는 왔다는 거지? 그리고 라이메데스 이 놈…… 시이나의 [기척]이라? 각성을 하고 나면 한 존재의 기척이라는 걸 저렇게 감지해낼 수 있단 건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면 기척을 감지한다는 건 꽤나 힘든 일일텐데? "저녁때까지 돌아올게. 넌 혹 두 개 달고 [인간의 도시]란 걸 한 번 구경해 보라고." 혹 두 개? 하나는 카민일테고…… 다른 하나는 여기 있는 유키를 말하는 건가. "……쿡쿡." 라이메데스는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나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고 그 바람에 나는 다시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유키는 쌔근쌔근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하, 이거 참. 뭐냔 말이다, 이 상황은. "우웅∼∼ 칼 오빠∼∼ 쿡쿡." 갑자기 몸을 뒤집으며 잠꼬대를 하는 유키를 보며 나는 닭살이 와르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크아아아아악!!! 뭐야, 뭐!!! 대체 뭐냐고!!! ---------------------- 끼야호오오오오∼∼ 다음 호부터∼∼ 본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봐, 다음 호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면 여태까지 건 대체 뭐였는데? 앙? ……하고 물으신다면. 할 말이야 없습니다요. 원래 이렇게까지 이 부분을 길게 늘일 생각은 없었는데…… 훌쩍훌쩍. 그럼…… 다음에 뵙지요^_^; Total : 18, 1 / 2 pages 전체 (18)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페이트 (9) 이 름 카르민 제 목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52 제 12장: 신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다시는 내 침대에 들어오지마." "왜요?" 유키는 그 말과 함께 빙긋이 웃으며 오른손으론 내 손을 잡고, 왼손으론 카민의 손을 부여잡았다. "유키는요, 혼자서는 잠을 잘 못 잔단 말이 예요. 웅…… 카민 오빠나 데스 오빠한테 갈까도 생각했지만…… 역시 난 칼 오빠가 좋아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럼 뭐가 문젠데요?" 그러면서 의아한 듯 유키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런 유키와 나의 티격거림을 보고 있던 카민이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핫, 유키! 지금 칼은 쑥스러워 하고 있는 거라고." "누, 누가 쑥스러워한다는 거야!!" "아아, 쑥스러워하는 거예요? 헤헤, 그럴 필요 없는데." 내가 발악하듯이 외치는 것을 무시하면서, 유키가 내 팔을 살짝 잡아끌더니 배시시 웃었다. 그리곤 팔에 볼을 부벼 댄다. 유키는 마치 고양이 같은 태도로 몇 번 내 팔에 볼을 부벼댄 후 헤∼ 하고 웃었다. 동그랗고 붉은 얼굴이 가득한 기쁨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그런 유키를 향해 고개를 세게 내저었다. 하지만 유키는 그런 내 반응에도 굴하지 않고 잡은 내 두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어디로 갈 건지나 말해주면 고맙겠다." 내 말에 유키가 검지 손가락을 입 안에 넣더니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움, 일단은요…… 에이테르의 중앙 광장에 가보지 않으시겠어요? 꽃도 참 예쁘고, 응…… 거기, 정말로 예뻐요. 가끔씩 검투 경기도 열리고." "검투 경기……?" 듣고 있던 카민이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유키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웅. 중앙광장의 검투에서 매주 일요일, 승리한 사람에게는 커다란 화관(花冠)이 주어지는데요, 아주아주 예쁘다구요." 화관? 화관이라면 꽃으로 엮어 만든 관을 말하는 건가? 쳇, 인간들은 정말이지 할 일도 없나보군. 피 흘려가며 검투 경기를 한 후 겨우 화관 따위를 받을 바에야 그 시간에 혼자서 열심히 꽃을 엮어 관 만든 후 머리에 뒤집어쓰는 편이 낫겠다. 생각해봐라. 피 덕지덕지 묻은 모습으로 꽃을 머리에 쓴다고? ……차라리 날 괴롭혔던 그 뚱땡이 마족 머리에 화관을 얌전히 뒤집어 씌워 주는 편이 낫겠군. "네, 화관요. 화관을 받아서 레이디한테 주는 거예요! 그래서 검투에서 우승한 사람은 레이데에게 정식으로 프로포즈도 한다구요. 음, 저번 주에는…… 제 2왕자이신 비켄 워츠 로이드 이카루님이 검투 경기에 오셨어요. 약혼녀하고 같이요. 비켄님이 우승을 하셔서 화관을 받으셨는데요. 웅…… 검투 경기에서 우승 상품으로 받으신 화관을 약혼녀에게 주지 않고 시중을 드는 할머니 하녀에게 주지 뭐예요? 정말이지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화관을 받은 할머니가 전 너무너무너∼무 부러웠어요." "……그 말을 하면서 왜 자꾸 나를 보는 거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유키에게 말했다. 크윽, 이해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군. 정말이지 미치겠다. 나는 순간적으로 아이에드의 뻔뻔함이 부럽다고 생각했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아이에드의 그 뻔뻔함을 부럽다고 생각하다니, 내가 정말 인간계에 와서 망가져도 많이 망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잉∼∼ 카알 오빠아∼∼" 나는 나를 향해 간절한 지어 보이는 유키를 향해 있는 힘껏 이해할 수가 없다는 의사표시를 하려고 무진장 애를 써야만 했다. 내가 한참동안이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유키는 잔뜩 울상이 되어 볼을 잔뜩 부풀렸다. 유키는 인상을 엉망진창으로 우그러뜨리더니, 이번에는 카민을 향해 고개를 휙 돌리곤 방긋 웃어 보였다. "헤헤헤헤∼∼ 카민 오빠∼∼ 카민 오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죠?" "응." 제길!! 내가 간신히 모른다고 해놨는데 네 녀석이 쪽박을 깨면 어쩌자는 거야!! 카민은 연신 즐거운 표정을 지으면서 하나하나 유키의 말을 받아주고 있었는데, 그래서 나는 더욱 어이가 없어졌다. 어째서 카민 저 놈은 어떻게 저렇게 저 꼬마의 말을 가볍게 넘겨 버릴 수가 있는지 신기하기도 했다. 어쩌면 나스와 오랫동안 생활해 왔기 때문에 저렇게 여유로운 건지도 모르지. "헤헤, 카민 오빠. 그럼 갈까요?" "응, 가자." 둘이서 한마디씩 주고받던 놈들이 갑자기 무섭게 고개를 돌렸고 나는 움찔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런 나를 향해, 카민 놈이…… 씨익 하고 잔인한 미소를 보내왔다. 그와 동시에 내 손을 쥐고 있던 유키의 손이 더욱 꽉 조여졌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손 한 번 세게 잡는다고 아프지야 않지만, 이건 기분의 문제였다. "제길…… 가면 될 것 아냐!!" 내가 투덜거리듯이 말하자 카민이 환하게 웃었다. 내 오른손을 움켜쥔 유키도 함박 웃음을 지었다. 유키는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고 달렸고, 카민 역시 그 특유의 에헤헤, 하는 웃음을 지으면서 달렸다. 나는 그런 녀석들의 틈새에서 가만히 한숨을 내쉬는 나를 발견하곤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 고귀한 이미지여! 제발 좀 돌아와 달란 말이야∼!! * * * * * * * * * * * * * * * * * * * "꺄아아아아아아앗!!! 칼 오빠 최고예욧!!! 너무너무 멋있어!!!"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제발 조용히 하고 있어줄래? 나는 바로 내 발 밑에서 꺅꺅하고 소리를 지르며 거의 날뛰고 있는(……)유키를 보며 천천히 검을 고쳐 쥐었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자는 키가 크고 훤칠한 남자였는데 아까 한 번 검을 맞대 본 결과를 토대로 판단하자면, 그럭저럭 검을 다룰 줄 안다고 말해줄 수 있는 녀석이었다. 나는 그의 진지한 눈매를 보며 슬쩍 한 숨을 흘렸다. 대체가, 내가 왜 이런 곳에서 이런 짓을 해야하는 건지 도무지 납득을 할 수가 없는 나였다. 드넓은 공터 가운데에는 창공을 향해 화려하게 물줄기를 뿜어내는 분수대라는 것이 있었다. 그 분수대를 주축으로 수많은 인간계 꽃들이 만발하게 피어 나를 묘한 감성에 젖게 만든다. 나는 한 번 분수대를 바라본 후 가늘게 눈을 치켜 떴다.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암흑이 검 끝에 서렸다. "들어가겠소!!" 나를 상대하고 있던 남자는 그렇게 외침과 동시에 재빨리 내 안쪽으로 쇄도해 들어왔다. 나는 그의 빠른 공격에 스텝을 뒤로 뺀 후 그의 검 윗 부분을 내 검 날으로 슬쩍 쳐서 공격을 흘러 내렸다. 남자는 내가 재빠르게 대항하자 조금 놀란 눈으로 나를 보더니 이번엔 검을 사선 방향으로 틀어 나를 내려치려 했다. 하지만, 그쯤이야. "핫!" ……아이에드놈하고 했던 그 엄청난 지옥의 훈련에 비하면 이것은 어린애 장난만도 못하고, 코딱지 반만큼도 못하다. 나는 길게 뻗어오는 검날 위에 그대로 은빛의 검을 휘둘렀다. 놈은 화들짝 놀라서 뒤로 한발자국 물러섰지만, 바로 그것이 실수였다. 나는 발을 들어 녀석의 복부를 그대로 눌러 찼다. "쿨럭!" 조금 세게(나는 마족이지∼ ……쿠후훗. 무슨 의미인지는 알아서 생각하도록)녀석의 배를 쳐내자, 녀석은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더니 바로 경기장 바닥을 뒹굴었다. 녀석은 다시 검을 들려고 했지만, 나는 발을 들어 그런 그의 오른손을 꾹 밟아버렸다. 그는 크윽, 하는 소리를 내더니 천천히 손에 힘을 뺐다. "……졌습니다." 나는 훗, 하고 고개를 숙이며 짧게 웃었다. 사람들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오기 시작했고, 유키가 다시 시끄러워졌다. 나는 눈을 살짝 치켜뜬 채 손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칼레들린 선수, 승리!" 붉은 깃발이 들어올려졌고, 그 순간 구경을 하고 있던 관람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여기저기서 내 검술 실력과! 미모!!!!!를 칭찬하는 말들이 쏟아지는 것을 들으며 나는 흐뭇하게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분수대 옆에 조그맣게 마련된 검투장 위에 서 있는 나를, 정신 없이 훑고 있는 여러 여자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음하하하하핫! 그래, 내가 좀 잘생겼어야 말이지. 훗훗, 그런 눈으로 보지는 말라고. 난 아직 까진 그다지 여자에게 관심이 없거든? 후후후, 하지만 내 잘난 외모에서 시선을 떼는건 또 불가능한 일일테네…… 후후, 잘생긴 녀석은 이래저래 괴롭단 말이다. 나는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다음 상대를 기다렸다. 검투. 유키와 카민이 억지로 나를 끌고 온 이 곳에서는 바로 그 검술경기라는 것이 행해지고 있었는데, 이건 참 독특한 방식의 경기였다. 도전자를 받아들이는 형태라고 할까.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경기장에 올라가면 B라는 사람이 결투를 신청한다. 그 곳에서 만약 A가 이긴다면 다음엔 C라는 사람이 결투를 신청하고…… 이런 식이다. 그런 식으로 하기 때문에 체력이 딸리는 참가자들은 기회를 노려 거의 끝 부분에 결투를 신청하거나하는 조금 치사한 술수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난 거의 초반부에 여기서 들어와서 결투를 신청했고, 12번을 싸웠지만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마족의 체력과 인간의 체력을 감히 비교할 자가 누구란 말인가? 이런 흐뭇한 상황에서 단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면 그건 카민 놈의 행동이었다. 나는 흐뭇하게 올라갔던 입술선을 비뚜름하게 내렸다. 유키와 함께 히히덕거리며 나를 끌고 온 주제에, 자신은 느긋하게 유키의 옆에서 실실 웃으면서 느긋하게 내 검투를 관람하고 있다니!! 게다가, 게다가 입에 물고 있는 저건 또 뭐냔 말이다!!! 나는 씩씩거리면서 카민놈에게 매서운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역시 카민놈은 바보다. 그 놈은 내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듯,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닌가. 더불어, 응원의 말까지. "힘내∼ 카알." 가늘게 떠지는 녀석의 붉은 눈을 보며 난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다음 도전자, 다음 도전자는 없으십니까?" 검투장에 올라선 사회자가 큰 목소리로 말했으나 선뜻 나서는 자는 없었다. 훗, 당연한 것 아닌가? 감히 누가 나를 노린다는 거지? 우후후후후후후후!! 웃기지도 않는다. 이렇게 잘생긴 내게 검상을 입히고 싶은 마음부터가 들지 않을 뿐 아니라, 이미 내가 여러 차례 보여준 검술 실력 때문이라도 나서는 놈은 없을 거다. 크하하하하핫!!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오로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주목받고 있다는 아찔한 기분에 씨익 하고 미소를 지었다. 발악하는 목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 직후. "꺄악!!! 칼 오빠, 멋져요∼∼." "유, 유키. 조용히 해."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말하고 싶지도 않다. "도전자가 없다면, 오늘의 화관은 칼레들린님께 넘겨도 되겠습니까?" 사회자는 아쉬운 눈으로 이렇게 말하며 주위를 찬찬히 훑었다. 하지만 그래도 도전은 없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검을 검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내가 도전하겠어요." 조금은 가냘픈 미성이 들린 것은. ------------------------------------- 오랜만이죠? ....네에.... 오랜만이라서... 연참할게요오오오... 그런데요... 보드가 좀 느리네요.. 쩝..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봐주세요.. 쿨럭; Total : 18, 1 / 2 pages 전체 (18)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페이트 (9) 이 름 카르민 제 목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53 나는 검투장 위로 올라서는 자를 보며 가볍게 눈을 치켜 뜨곤 피식 웃었다. 검투장 위로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고 있는 자는 굉장히 가느다란 선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라면, 나이대는 10대 후반처럼 보이지만, 그 이미지는 10대 초반의 소년 같은 느낌이랄까. 딱하고 성별을 말할 수 없는, 조금은 특이하게까지 느껴지는 이미지였다. 뭐랄까…… 카민놈을 처음 봤을 때는 여자다!! 라고 생각했다면, 이 쪽은 조금 더 소년틱한 느낌이 강하다고 할까. 부드럽게 물결치는 듯한 청록빛의 머리카락과 하늘색의 눈동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인지 그녀인지, 하여튼 그녀석의 복장은 매우 독특했는데, 나는 어디선가 한 번은 본 것 같은 그 옷차림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그 옷을 어디서 봤는지는 가물가물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괜찮겠죠?" 검이 없는 것을 보면 마법사인 듯 한데, 그 흔하다는 로드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검투장 위에 섰다. 훗∼, 어찌됐든 네가 나한테 도전을 하겠다 이거지? "……아?" 그런데 순간이었다. 내가 활약하는 모습은 바로 옆에서 꼭 봐야겠다며 경기장 바로 코 앞에 나와있던 유키의 입에서 이상한 비명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놀라서 그 쪽을 돌아보다가 움찔했다. 홍조가 피어있던 유키의 얼굴은 꼬마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순수를 머금고 있던 보랏빛의 눈동자는 지나친 두려움을 머금고 있었다. 깜짝 놀란 듯, 한 발자국을 뒤로 가져가는 것조차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런 유키를 보았다. 카민 역시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유키의 손을 잡고 있었다. "유키? 왜 그러니?" 유키의 공포감으로 뒤덮인 눈동자는 어느 한 곳만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난 유키의 시선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천천히 내 시선을 움직였다. 내 눈이 멈춘 곳은…… "흐음…… 다른데 정신 팔 시간이 있는 겁니까?" 바로 내 앞이었다. 이 청록빛 머리카락의 녀석에게, 유키의 시선은 붙박혀 있었다. 내가 유키를 바라보다 한참만에야 돌아보자, 그 녀석은 불쾌하다는 듯 말해왔다. 나는 조금 당황해서 검을 고쳐 쥐었다. 그 자는 입으로 가볍게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더니 손을 뻗어 뭔가를 하려고 했다. 나는 더더욱 검을 바싹 쥐었다. 순간, 나는 느낄 수가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몸을 압도해 오는 무엇! 나는 미친 듯이 몸이 떨림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순간, 무엇인가 이상한 것이 내게 신호를 보내왔다. ―……조심하십시오.― 어디에서 들려온 목소리인지 생각해 볼 겨를조차 없었다. 검신이 부르르 떨렸다. 뭔가 이상했다.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본능적인 두려움이랄까…… 하여튼 그런 것이 느껴지고 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흘끔 유키에게 시선을 주었다. 유키는 여전히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카민의 뒤에 숨어서 하얀 로브를 입은 이 자를 계속해서 훔쳐보고 있었다. 나는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하얀 로브에게 향하는 본능에 가까운 두려움. 그 자는 조용히 뭔가를 중얼거리더니 손가락을 살짝 들어올렸다. 나는 재빨리 눈을 찌푸리고 몸을 낮추었다. 그의 손가락 위로, 하얗고 투명한 무엇인가가 생성되어 있었다. 그다지 강한 기운은 아닌 듯 한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심장이 다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을 낮추고 있는 나를 한 번 보더니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나는 자세를 낮추고 검을 들어 내 앞을 방어했다. 막 그의 손에서 그 하얗고 투명한 것이 떠나려는 시점에…… "잠깐만요!!" 갑자기 잘 지켜보고 있던 사회자가 날 듯이 튀어 올라오더니 그녀석의 앞을 턱하고 막았다. 청록빛 눈동자의 그녀석은 의아한 듯 사회자를 보았다. 그런 녀석을 향해, 사회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검사십니까?" 바, 바보냐. 네 눈엔 손에서 일렁거리는 저 빛의 광구가 보이지도 않는 거냐! "아닙니다만." 그녀석 역시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사회자는 조용한 어조로 말해왔다. "그럼, 마법사십니까?" 바보 아냐!!! 정말 눈이 어떻게 된 거냐? 손에 일렁거리는 빛을 만들 수 있는 건, 마법사 밖에는…… "……아닙니다." 엥? 나는 당황했다. 마법사가 아니라고? 그, 그럼 방금 전에 저 손에 생성되어 있던 건 대체 뭐란 거지? 마법사 외에 손에서 빛을 뿜을 수 있는 존재가 인간 중에 있을 리가 없잖아!! "마법사가 아니라고?" "그렇습니다만." 내 의문 섞인 목소리에, 그녀석이 가볍게 대꾸했다. 나는 더욱더 당황했다. 그럼, 뭐였단 말이지? 방금 전에 그 손에서 뿜어져 나온 흰색의 광구는. 사회자의 입술이 벌어졌다. "……신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청록빛 머리카락의 그녀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뭐……? 신관……? * * * * * * * * * * * * * * * * * * [로시엔.] 나는 나즉한 목소리로 로시엔을 불렀다. [예, 칼레들린님.] 대답을 해오는 착 가라앉은 로시엔의 목소리. [왜…… 저렇게 다친 걸까?] 어린 날의 기억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불쑥불쑥 나를 찾아오곤 한다. 지나치게 센티멘탈한 자신이 그럴 때는 원망스럽다. 돌아갈 때까지는…… 각성해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는 녀석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불쑥불쑥 한 도막의 추억과 함께 다가오는 그 얼굴들. 빌어먹을, 난 그렇게 감성적인 놈이…… 로군. 제길제길, 녀석들 얼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뜨겁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코도 시큰거린다. [블러드 아미의…… 군사들 말입니까?] 언제였을까. 아마 막 12살이 지난 무렵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때 나는 로시엔의 하얀 손에 매달려서, 나는 아이에드와 함께 돌아오고 있는 마족 무리를 보았었다. 위압감을 주는……핏빛의 제복. 빛나는 핏빛의 단검. 그리고 그 선두에 서서 언제나 그렇듯이, 잡티 하나 묻지 않은 모습으로 오고 있는… 은발의 아이에드. [응.] 나는 로시엔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아이에드의 뒤에 있는 저 마족들이 저렇게나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인지. [……가벼운 전쟁이 있었습니다.] [전쟁?]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로시엔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냉냉하게 뱉어냈다. [신관들과의 전쟁입니다.] 신관? 내가 이해할 수 없어서 더더욱 눈을 크게 뜨는데, 로시엔의 말이 이어졌다. [……마족들에게 있어 신성력이라는 것은 치명적인 것입니다, 칼레들린님. 마계 최강이라는 저 블러드 아미들이 왜 저런 꼴이 되었는지…… 지금은…… 아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그저 알아두시면 됩니다. 신관이라는 것과 천족이라는 것들이 몸에 품고 있는 그 빌어먹을 신성력이라는 것들을 말입니다. 몇 일전부터, 신관들과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신관들은…… 신성력이라는 것을 품고 있죠. 마를 품은 존재를 소멸시키는, 우리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힘 말입니다.] [로시엔……?] 무엇이었을까. 로시엔의 그 파란 눈동자에 맺힌 감정은. 아직도,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은 분노였을까? 아니면……. [……죄송합니다, 아아…… 그렇게 겁먹은 표정 하지 마십시오, 칼레들린님…… 후훗…… 그런 표정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 별 거 아닙니다. 다만 한가지만 기억하세요. 신관과 천족들의 신성력이라는 것은…… 당신을, 저를, 그리고 아이에드님을…… 완벽한 소멸로 몰고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될 이유가 생긴다면, 그것은 바로 신성력 때문일 겁니다. 당신의 자체 치유력만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주는 존재는…… 신성을 머금은 존재입니다.] 격양된 로시엔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떨려나오는 로시엔의 목소리. ……블러드 아미를 향해 있는 그의 푸른 눈동자.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가슴속에서도 뭔가,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솟구치고 있었다. 나와 아이에드와 로시엔이……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는, 내가 다시는 따뜻하게 마주 쥔 이 손의 감촉을 느낄 수 없게 만들 수 있는, 그런 힘을 가진 존재들은…… 마족을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들은. ……신관과 천족. * * * * * * * * * * * * * * * * * * 신관…… 이라고. 나는 더욱더 검을 세게 쥐었다. 신관이라고? 신관이라고? 차분하게 뜨인 저자의 하늘색의 눈동자조차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이루 말 할 수 없는, 뭐라고 한마디로 꼬집어 정의 내릴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의 파동이 나를 휘감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더 꼭 깨물면서 검을 심장 쪽으로 당겼다. 그런데. "죄송합니다만, 당신은 경기에 참가할 수 없습니다." 갑자기 사회자가 그 자를 가로막으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바람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는 몸이 앞으로 휘청, 하고 꺾이는 것을 느꼈다. 그 자 역시 당황한 듯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엑?" "여기는 검·투·경기장입니다. 만약 마법사라고 하셔도, 참여하실 수 없는데 신관이라니…… 신관이 검사와 경기를 하겠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그런…… 분명 나는 신관이지만 신관이라고 해서 꼭 기도만 하고 축복만 내리는 건 아닌……" 그 자는 억울하다는 듯 사회자를 향해 말했지만 사회자는 그런 그의 태도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을 불러 그를 경기장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계속해서 뭐라고 버럭버럭 외쳐대고 있었지만 그래도 규정은 규정인지라 그의 말은 깨끗하게 무시당했다. 나는 이 어이없고도 황당한 상황에 적지 않게 놀랐다. 나는 눈을 껌뻑 껌뻑 거리면서 그 신관이라는 놈을 지켜보았다. 한참 녀석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이번엔 고개를 돌려 유키와 카민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유키는 아직도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그 하얀 로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하얀 로브를 보았다. 그 자 역시, 유키를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매서웠는데, 그래서 경기장 위에서 지어보였던 그 환한 미소와는 무척이나 거리가 있어 보였다. 뭐야? 혹시 유키…… 저 녀석과 아는 사이인가? 조금 넋 나간 표정으로 경기장 위에 서 있는데, 갑자기 위에서 무엇인가가 파다닷 하고 뛰어 들어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키가 재빠르게 경기장 위로 올라와 내 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더욱 놀랐다. 가까이에서 본 유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라는 한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함이 있었다. 불안, 공포, 초조…… 이렇게 어린 꼬마가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다양한 표정이 유키의 얼굴 위에 녹아 들어 있었다. 유키는 그렇게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칼…… 오빠? 저…… 기 말인데요, 나…… 그, 그만…… 돌아가고 싶어요. 저기…… 오빠…… 배가…… 아픈데…… 돌아가면 안될까요? 저기…… 싫으시다면…… 나…… 여기서…… 오빠들하고 헤어졌으면 좋겠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신이 나서 뭐라고 뭐라고 날뛰고 있던 이 아이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나는 의아해졌다. 게다가 여기서 헤어졌으면 좋겠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카민 역시 조금 놀란 표정으로 유키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카민이 경기장 위로 훌쩍 뛰어 올랐다. 어제 하루 내내 우리 일행을 어이없도록 만들어버렸던 그 당당하고도 굳센 태도는 어디로 증발한 건지, 유키의 안색은 극도로 창백했다. 유키는 부들부들 떠는 손길로 내 팔을 꼭 움켜쥐었다. 유키의 시선이 다시 움직였다. 나는 그 시선이 움직이는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 나는 다시 한 번 한 녀석의 얼굴과 마주했다. 하얀 로브를 쓰고 있는 신관이란 그 놈이었다. 그 자는 나와 얼굴이 마주치자 조금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그의 눈은 유키를 향해 있었고, 유키의 눈도 그를 향해 있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유키는 사시나무 떨 듯이 떨고 있었다. "왜 그러는 거냐? 아는 놈이야?" "……아, 아니예요…… 그런 게 아니라……" 유키의 입술마저 파랗게 질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막 유키를 향해 무엇인가를 물으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사회자가 앞으로 나서더니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더 이상의 참여자는 없습니까?" 기나긴 침묵. 나는 유키를 내려다보며 침묵이 끊기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침묵은 끊기지 않았고 한참만에 사회자는 손을 들며 외쳤다. "예, 더 이상의 참여자가 없군요. 화관은 당신에게 넘기겠습니다, 칼레들린님." "와아아아아아아앗!!" "오오오오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람들은 탄성을 내지르며 벌떡벌떡 일어섰다. 저 멀리 가깝지만 아릿하게 보이는 곳에서 사람들이 두 손에 무엇인가를 받쳐들고 다가왔다. 나는 그것을 보고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핑크빛의 꽃이 얽혀져 있고 그 위로 파란 잎새가 돋아난 것, 유키가 말하던 화관이라는 것인 모양이다. 그 화관이 내 쪽으로 내려왔다. 사회자는 빙긋 웃으면서 내게 그것을 건넸다. 나는 조금 밋밋한 표정으로 그 화관을 받았다. 그러자, 카민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칼. 기쁜 표정을 지어야지." 하나도 기쁘지 않은데 왜 기쁜 표정을 지어야 한다는 거지? 나는 무덤덤한 태도로 화관을 들고 있다가 주변을 슥하고 훑었다. 그러다가,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 하얀 로브놈이…… 사라졌다? 내 의아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서 휘파람을 불며 외치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상의를 벗어들고 그것을 머리 위로 돌리고 있었는데, 부숭부숭하게 난 가슴털이 그대로 보여(제길, 시력 좋은 것도 죄다!) 나는 매우 민망해졌다. "휘익∼ 화관을 바칠 레이디는 어디 있어?" "휘익 휘익∼∼!" "설마 옆에 있는 그 조그마한 꼬마는 아니겠지?" 화관을 내려다보았다. 경기 시작 전에 들으니, 화관을 받은 후에는 그것을 사랑하는 레이디(……듣다가 닭살 돋아 미치는 줄 알았다.)에게 바치는 것이 관례라고 했던가? 나는 가볍게 웃은 후 하늘 높이 화관을 처 들었다. 사람들이 우오, 하는 탄성을 지르며 그 화관을 보았다. 유키를 얼핏 내려다보았다. 그 하얀 로브가 사라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유키의 그 새파란 안색에는 어느덧 조금의 홍조가 돌아와 있었다. 뭐지? 정말로 유키가…… 저 신관과 아는 사이인가? 신관과 아는 사이라…… 신관과…… 얼핏 내려다보니 유키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그 화관을 보고 있었다. "헤헤헤." 유키가 낮게 웃었다. 어서 머리에 씌워 달라는 듯, 그 보랏빛의 머리를 내 쪽으로 내밀어 보이고 있었다. 나는 픽하고 웃음이 나는 것을 느꼈다. 소리를 지르면서 날 응원하다가, 갑자기 파랗게 질려서 헤어지자고 하다가, 이번에는 웃으면서 화관을 씌워 달라는 제스쳐를 취하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칼, 유키한테 씌워줘." 카민도 내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서며 말했다. 나는 화관을 천천히 들었다. 사람들의 뚫어질 듯한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어, 어, 어?" 처음부터 끝까지 화관의 행로를 지켜보고 있던 유키가 갑자기 놀란 듯이 신음성을 냈고, 카민 역시 나를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도 모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유키의 표정은 압권이었다. "카, 카, 칼 오빠?" 나는 더듬대는 유키를 향해 살짝 웃으며 말했다. "꽃이 잘 어울리는 건 아무래도 너보다는 나일 것 같아서 말이야." 화관은 내 머리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 * * * * * * * * * * * * 아직도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키를 보며 나는 답답해졌지만 그래도 내색하지는 않았다. 나는 결국 머리에 썼었던 화관(……사실 내가 그 화관을 썼던 이유는 마땅히 씌워 줄 사람이 없어서였지, 내가 쓰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니다.)을 도로 벗어 유키에게 씌워 줬지만 유키의 표정은 그래도 풀리지 않았다. 나는 가슴을 마구 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면서 말했다. "이봐, 유키." "……왜요." "준다고. 표정이 왜 그래?" "그래도 사람이 많을 때 오빠가 머리에 씌워준 거랑 같아요? 나는 칼 오빠의 레이디가 되고 싶었다구요!!" "……." 이런 꼬마를 레이디로 삼아? ……됐어, 사양할래. 카민은 칭얼거리는 유키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녀석이 유키를 번쩍 들었다. "꺄아!!" 유키가 소리를 질렀고, 카민은 하하하하핫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유키를 무등 태웠다. 카민의 목에 앉자, 유키의 뾰로통한 표정이 어느 정도 풀렸다. 그리 키가 크지 않고, 체격마저 비실비실한 카민의 목에 유키가 앉아 있는 것이 좀 불안해보였지만 하여튼 시끄럽지 않으니 좋았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카민을 향해 말했다. "넌 꼬마를 잘 돌보는군." "흠, 뭐랄까…… 이 말은 좀 그렇지만 말이야…… 나스도 옛날엔 유키랑 비슷한 분위기였어. 그래서 어떻게 돌보면 되는지 파악했다고 할까?" "……뭐?" 나, 나스가 유키 같은 타입이었다고? "그렇게 노골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은 짓지마." 카민은 하핫, 하고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녀석의 옆얼굴 위로 지는 햇살이 찬찬히 물들어나간다. 빛의 부서짐은 정말이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점점이, 점점이, 또 점점이…… 카민의 하얀 얼굴을 물들여 나가는 그 진다홍의 빛깔. 지는 석양빛에 그대로 노출된 카민의 옆얼굴이 희미하다. 희뿌연 잔광 위로, 유키의 보랏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한참 걷자, 유키가 조용해졌다. 카민은 조심스럽게 목에서 유키를 내리곤 등에 업었다. 카민은 손을 들어 몇 번 유키의 얼굴 위로 휘적거리더니, 문득 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칼.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물어봐." 나는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그런 내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카민이 불쑥 물었다. "지금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는 사람들이 정확히 모두 몇 명이야?" 카민의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하마터면 크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나는 카민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셋." TOTAL : 16, PAGE : 1 / 1, CONNECT : 27 카르민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54 "역시." 내 대답을 들은 카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흐응, 그 중에서 한 명의 기척은 희미한데……. 흠,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살수의 움직임인 것 같아. ……아, 지금은 저 위에 있네." 무심한 얼굴로 말하고 있는 카민의 얼굴은 지극히 평화로워 보였다. 나는 피식 피식, 계속 김빠지는 웃음을 지었고 그런 나를 보며 카민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나한테 볼 일 있는 사람들이겠지? 아아, 젠장. 그 동안 왜 안 보이나 했어." "아까 그 경기장엔 사람이 많았고…… 종국엔 네 녀석이 경기장 위로 올라왔으니…… 널 알아봤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지." 네녀석의 붉은 머리와 그 하얀 면상은 어디서도 눈에 띄니까 말이다. "……그렇겠지? 후우, 유키는 어떻게 할까?" 자신에게 업힌 유키를 힐끔 보면서 카민이 물었다. 난 가볍게 대꾸했다. "나도 몰라." "……칼. 좀 진지해져봐." "난 진지하다." 나와 카민은 길을 돌아 여관 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카민의 얼굴 위로 흘러 내렸던 석양빛은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아니, 태양은 이미 석양의 옅은빛마저 잃어 버렸다. 내 눈길이 닿는 사방마다 천천히 어둠은 뿌려졌고, 그 어둠 속에 수도 에이테르의 거리는 침묵한다. 총총거리는 발소리가 간간히 들려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거리는 조용하다. 샛노랗게 빛나는 9월의 비나룬만이 눈부시게 하늘의 한가운데에서 빛나는 가운데, 질퍽하게 젖는 가벼운 암흑이 이내 익숙해진다. 최고의 장인이 있는 힘을 다해 세심하게 박아 넣은 듯한 은빛 조각조각이 시릴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아아, 제길!!!! 크아아아아악∼ 또 센티멘탈해지고 있잖아아앗!! 이런 건 별로 달갑지 않은데 말이야. 역시 난 긴장이 되면 이상한 생각을 한다니까. 막 여관을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역시, 하고 나는 생각했다. 입가가 살풋 들어올려졌다. 척. 가벼운 소리를 내면서 무엇인가가 가볍게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이미 아까 전부터, 세 명이나 되는 인간들이 나와 카민의 뒤를 줄레줄레 밟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은 눈으로 내 앞을 가로막은 이를 본 순간, 난 움찔하고 굳어버리고 말았다. 각오를 단단히 하면서 여차하면 당장에 그 단검을 뽑아버릴 카민 마저 그 자가 나타나자 깜짝 놀란 듯 몸을 가볍게 떨었다. 우리둘의 긴장은 극에 이르렀다. 제길,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닷! "카……리나?" 카민의 입술이 덜덜 떨리더니 한참만에 한 존재의 이름을 불러냈다. 나도 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 카민의 긴장감이 가득 베인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 여자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호호호호홋!! 오랜만이야, 1026호! 정말이지 뜻밖의 장소에서 만나는군. 그 쪽의 매력적인 검은 머리카락♡ 오∼ 호호호호호호홋!! 켐 알슈타드의 소유자인 당신도∼ 말이야." 금발 머리카락을 요사스럽게 틀어 올린 그녀. 그녀는 체이드 숲에서 나와 카민의 목숨을 노린 적이 있던 금발의 마녀, 카리나였다. 마지막 순간, 내 검의 이름을 알려주고 사라진 그 여자. 그 여자가 틀림없다. 그녀는 내게 찡긋 윙크를 해보였다. "……날 쫓아온 건가? 체이드 숲에서? 여기까지?!"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순식간에 카민의 손이 휙 하고 움직였다. 다음 순간, 나는 카민의 오른손에 들린 짧은 검 한 자루를 볼 수 있었다. 신속한 발도였다. 카민이 검을 들고 날카롭게 외치자, 카리나가 입 꼬리를 들어올리며 웃었다. "호호호호홋!! 뭔가 착각을 하는 가본데, 1026호. 난 물론 널 쫓긴 했지만 오늘은 널 만나로 온 게 아니라구." "뭐……?" 카민은 놀란 듯한 표정을 했다. 나도 순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민을 노리고 온 것이 아니라고? 그럼 저 여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 때 카리나의 뒤에서 무엇인가 희미한 것이 어렸다. 카민은 움찔하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나 역시 가볍게 한 발자국 물러섰다. 카리나의 뒤에서 튀어나온 것은, 남자였다. 검은색으로 몸을 칠갑하고 선 그 자는 라이메데스 못지 않을 정도로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있는 자였는데(도대체가!! 그게 요즘 유행하는 패션이라도 된다는 거야? 오늘 봤던 그 신관도 그렇고…… 왜 다들 저렇게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다니냔 말이다!!), 어딘지 모르게 음침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아까 전의 그 신관에게서도 이상야릇한 기운이 느껴졌었는데, 이 녀석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역시 이상했다. "호호호호호홋!!" 카리나는 오른손을 들어 입을 막더니 소름 돋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런 카리나를 보고 섰다가 검을 뽑았다. 스릉, 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검이 뽑혀져 나왔다. "……저 검은……? 설마?" 뭐, 뭐야. 나는 다음 순간, 뽑혀 나온 내 검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오는 그 검은 로브의 남자를 보며 움찔했다. 아이에드 성 한 구석에 걸려 있던 하찮은 검에 불과한데…… 뭘 저렇게 놀랍다는 목소리를 내는 거냐? "오호호호호호홋!!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당신의 짐작대로, 켐 알슈타드입니다." "이런…… 정말로……? 켐 알슈타드가……."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그 자가 다시 한발자국 성큼, 다가왔다. 이상하게 갈라지는 텁텁한 목소리가 숨을 죄었다. 나는 한 발자국 더 뒤로 물러섰다. "내 검에 무슨 볼 일이지?" 젠장, 대체 무슨 일이야? 카민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고 하더니, 설마 날 찾아온 거였어? 아니, 아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내 날카로운 외침에, 검은 로브는 걸음을 멈추었다. "……켐 알슈타드가 여기에서 굴러다니는 줄은 몰랐군……" "오호홋, 하진! 그 검이 탐나시는 건가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검이 아니잖아요? 당신이 찾는 꼬마가 바로 저기 있는데." 카리나는 그 말과 함께 그 검은 로브에게 윙크를 했다. 그리고, 카리나가 손을 뻗었다. 카리나의 그 손은 유키를 향해 있었다. "……무슨?" 카민 역시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나와 카민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패닉에 빠져 있든 말든 검은 로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녀석이 내 쪽으로 한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녀석이 더 가까이오자, 나는 가뜩이나 긴장을 했던 몸의 신경 하나하나가 비죽비죽 서는 듯한 느낌에 소름이 확 끼침을 느낄 수 있었다. 다가온 검은 로브에서 느껴지는 것은…… 엄청나게 축적된 강렬한 마나? 아니, 그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마기(魔氣)! ……인간은 맞는 건가? 비각성 마족의 그것조차 뛰어넘을 듯한 강렬한 마기가 느껴진다. 그 자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카민의 앞을 막아섰다. 카민이 깜짝 놀란 듯, 뭐라고 했지만 난 녀석의 말을 무시했다. 내가 카민의 앞을 막자 카리나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검은 로브의 뒤에서 비아냥거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하진,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저기 있는 저 붉은 머리카락의 녀석이 제가 요즘 따라다니고 있는 조직의 배신자예요. 처리해 주실래요?" "〈이토미즈〉의 배신자? ……1026호인가?" 검을 로브가 알 수 없는 말을 뱉어냈다. 이토미즈? 그건 또 뭐지? 그것이 카민이 속했다는 그 조직의 이름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사고 회로에 나 자신이 질식할 것 같다. "그래요. 후후, 당신이 기억하고 있을 정도라니…… 1026호가 유명하긴 유명했군요." 언뜻 카민 쪽을 돌아 바라보았다. 하얗게 질린 안색이 종잇장같이 창백하다. "……." 검은 로브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조금 더 묵직한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뭘 노리는 거지?" 그자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더더욱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그리고, 조금의 마기를 방출했다. 내가 마기를 방출하자, 놈은 잠시 놀란 듯 멈칫했고 카민의 몸 역시 살풋 떨렸다. 나는 눈을 더 가늘게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 놈은 내 질문에 답하지도, 그렇다고 멈춰 서지도 않았다. 그 자의 발걸음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나는 내 검을 들어올렸다. 순간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거의 미친 듯한 속도로 그 자의 움직임이 사라졌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속도였다. 마족인 내 시각에조차 잡히지 않을 만큼 재빠른 움직임. 그 자가 바로 내 앞에 와서 섰다.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검을 휘두를 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너무나도 가깝다. 로브 속에서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이빨을 물었다. "오호호홋!! 과연 하진님입니다." 뒤에서 카리나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그 검은 로브가 말했다. "……넌 이만 가라." "예?" 의아한 듯 묻는 카리나. 검은 로브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이만 가보라고 했다." 싸늘하고도 매서운 목소리로, 검은 로브가 말했다. 카리나는 잠시 불평 어린 표정을 지었으나, 곧 표정을 풀곤 나를 지그시 보았다. 그녀는 내 눈을 마주한 채 피식 웃었다. "……그러지요. 어딜 감히 〈이토미즈〉의 흑마법사 하진님께 반항할 수가 있겠습니까?" 흑마법사……? 난 그제서야, 그 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마기의 정체를 눈치챌 수가 있었다. 흑마법사! 흑마법사란 말이지? 카리나는 뒤돌아선 검은 로브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곧, 그녀의 움직임이 바람같이 빨라졌다. 벽을 타고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은 곧 내 시야게서 사라졌다. "당신이 원하는 건 뭐지? 카민인가? 꼬마라고 했던 걸 보면…… 유키? 유키는 왜 노리는 거지?" 검은 로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자가 더욱더 가깝게 다가왔다. 카민이 움찔하며 몸을 비켜냈으나, 그것보단 검은 로브의 손이 훨씬 더 빨랐다. 나와 카민이 뭘 어떻게 할 세도 없었다. 녀석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틀린다 싶더니, 기묘한 발음이 울렸다. "무브먼트(movement)." "……유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믿기 어려운 광경을 보아야만 했다. 카민의 등에 업혀 있던 유키의 몸이 공중으로 둥실 떠올라 있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 모습을 보았다. 보랏빛 꼬마, 유키의 몸은 가볍게 하늘을 날았다. 곧, 유키의 자그마한 몸은 검은 로브의 팔 위에 척하고 떨어졌다. 나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유키는 잠이 든 상태에서도 뭔가 싸늘한 감촉을 느낀 듯 눈을 떴다. 하지만 바르르 떨면서 눈을 떴던 유키는 검은 로브와 눈이 마주치자 공포로 얼굴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그런 유키의 복부를, 검은 로브가 정확히 내려쳤다. "읏!" 가냘픈 소리와 함께 유키의 머리가 축 늘어졌다. 순간, 먼저 폭발한 것은 카민이었다. "유키…!" 카민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고막을 뜯을 듯 울렸다. "가만히 있엇!" 나는 흥분한 나머지 벌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유키를 향해 뛰어오르려는 카민의 어깨를 강제로 잡고 뒤로 내던졌다. 콰당,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카민이 뒤에서 나뒹굴었다. "칼, 뭐 하는 거야!" 원망스러운 외침. "입 닥치고 있어. 유키는 내가 구해주지."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무감각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녀석을 노려보았다. 장신의 몸집인 그의 손에는 새하얗게 늘어진 유키가 정신을 잃은 채 들려있었다. 빠득, 하고 이가 갈렸다. 나는 입술을 악 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 사판이다!! 나도 마법 정도는 쓸 수 있단 말이다!! 그 속성이 암흑이기만 하다면. "레테인!" 나는 손가락을 높이 들어 녀석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마기를 내뿜었다. 나에게 주문의 캐스팅이라던가, 어지러운 도형의 전개는 필요 없다. 내겐 그저 시전어만 있으면 된다. 내 이 재빠른 마법을 피할 수 있는 존재는 적어도 인간계에선 몇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일단, 내 주위에 되도록 강한 결계를 하나 치기로 결심하고 몇 년 전 로시엔에게 배운 적이 있었던 마법 하나를 입으로 중얼거렸다. 「레테인」. 파앗… 챙! 탁하고 검은 기운이 내 몸에서 뿜어져 올랐다. 괴한은 다른 사람을 얼려 버리는 마력의 기운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뭐? ……웃었다고? TOTAL : 16, PAGE : 1 / 1, CONNECT : 27 카르민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55 "루운." 녀석이 늘어진 유키를 안은 채 짧게 외쳤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내가 쳐놓은 봉인 진을 향하여 그 녀석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돌진해 왔다. 설, 설마 그럴 리가 없어.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레테인을 깨는 마법이라면. 적어도 7써클 이상에 해당하는 마력이어야만 한다. 평범한 인간이 깰 수 있을 리가… 없어. 나는 녀석의 외침과 함께 새어나온 붉은 기운의 마력의 어둠을 갈라 먹는 듯 엄청난 양의 마나에 할말을 잃었다. 마치 거대한 한 마리에 레드 드래곤처럼 생긴 불꽃은 기염을 토하며 엄청난 속도로 나의 결계진과 마주쳤다. 레테인의 냉냉하도록 시린 검은색의 빛깔과 생전 처음 보는 마법이 격렬하게 부딪혔다. 날카로운 금속음…? 아니면 두 개의 거대한 힘이 맞부딪히며 서로의 격렬함을 견디지 못해 터져 버리는 끔찍한 소리? 어쨌든 나는 멍할 정도의 거대한 소리를 내뿜으며 충돌하는 두 개의 마법을 멍청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채로. 파샥!!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지금…… 내 봉인진이 파괴된 건가? 이상한 소리와 함께 뭔가 몸을 감싸고 있던 것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인상을 가득 쓴 채로 억지로 버티려고 노력했다. "칼……!"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왜 이렇게 카민의 목소리가…… 나는 카민을 바라보았다. 공포와 슬픔. 걱정…… 당혹……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빛. 왜 그런 표정을…… 나는 문득 내 앞으로 돌진하는 무서울 만큼의 열기를 느끼고 몸을 홱 놀렸다. 순간 엄청난 화염이 코끝을 스쳤다. "……!" 요란한 소리와 함께 뜨거운 몸이 내 전신을 휘감았다. 고통스럽다. 내 몸을 감싼 뜨거운 불길 속에 타들어…… 으윽…… 제길, 무슨 꼴이야 이게. 나는 옷에 붙은 불길을 느끼며 인상을 쓰고 흐려지는 시선 속으로 카민을 바라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맺힌 근심이 나를 죈다. 몸이 부서질 것 같다. 마치 조그마한 유리구슬처럼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 그러다가 갑자기 몸이 납덩어리처럼 무거워진다. 영혼이 녹아드는 느낌. 잔혹한 불길이 내 전신을 휘감아버린다. "칼……!!" 검은 로브의 마법은 내 마법을 완전히 뒤덮고, 결계를 깨뜨린 채로 그대로 나와 충돌했다, 비명. 카민의 목소리가 애절하게 울린다. 바보…… 나는…… 마족이다. 이깟 것 한 번 맞았다고 죽진 않아. 나는 카민을 향해, 오로지 카민을 위해 힘겹게나마, 억지로나마 미소지었다. 나 괜찮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돼. 그러나 나의 입술이 위로 올라가려는 순간, 나의 머리가 옆으로 쓰러지는 것을 나는 불가항력으로 느꼈다. 싫…… 싫다, 안 돼. 쓰러지면…… 안 돼…… 검은 로브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카민은 미친 듯이 다가와 나를 일으켰다. 부스스, 하고 머리카락 몇 올이 타서 떨어져 내렸다. 시야가 희미했다. 검은 로브는 다시 손을 뻗었다. 다시 마법을 쓸 셈인가? 안 돼!! 다시 한 번 마법을 쓴다면 카민은 그대로 그 것에 노출되어 버릴 거다. 안 돼!! 절대로 안 된다. 제기랄! 이럴 때…… 이럴 때는…… 누구를…… 누구를 불러야 하지……? 아, 그, 그래. 라이메데스를…… 라이메데스를…… 부르자. 나는 천천히 신호흡을 했다. 인간계에 있는 이상, 내가 파장을 보내 도와달라고만 한다면 공간을 왜곡하는 일을 저질러서라도 올 놈이다. 그, 그래, 그래. 라이메데스를 부르면 되는 거다. 하지만, 나는 감정의 파동을, 전음을 보낼 수조차 없었다. 심장이 뜯기는 듯 했고 멍한 무엇인가가 몸을 뒤덮고 있었다. 눈꺼풀이 무겁다. 제길, 이런 건 싫어. 의식을 잃고 난 뒤에…… 뭔가가 일어나 버리는 건 싫단 말이다. 왜……? 왜 저놈이 유키를 데려가는 거지? "칼……! 칼!! 칼레들린―!!!" 왜……그렇게 고함을 치고 난리인 거냐, 카민? 문득 올려다본 카민의 붉은 눈동자에 눈물이 맺힌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일까. 카민은 내 옷에 붙은 불을 끄려고 온갖 애를 다 쓰고 있었다. 흑마법사 녀석이 워프의 공간을 만드는 듯, 공간의 한 쪽이 희미하게 일그러져 있다. 그의 눈이 힐끔 나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아팠다. 그 순간, 그가 손을 내밀더니 뭐라고 했다. 파샤샤샤샤샷!! 대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났다. 푸른 무엇인가는 거대한 물줄기로 화하여 나와 카민을 삼켜버릴 듯이 다가왔다. "으윽!!" 카민이 내 앞을 가로막더니 검을 들었다. 하지만…… 소용없어. 7써클 급의 마법사, 아니 그 이상의 마법사인걸. 아직 스무살도 채 되지 않은 카민이 아무리 강하다해도 저걸 막을 수는 없을 거다. 그래, 이대로라면 죽는다. 죽는 것일까? 난…… 이대로 죽는 것일까? 이런 경험을 전에도 해본 적이 있었다. 나 자신이 반마족이라는 사실에 미칠 듯이 분노했던 그 때. 나를 태운다, 라고 했던 녀석들의 그 찢어질 듯한 고함소리와 함께 그 때도 이런 절망을 느꼈었다. 곧, 죽을 것이라는. 이제 죽어버릴 것이라는. 끝이라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힘조차 들어가지 않았던 두 다리가 꼿꼿이 섰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나는 갑자기 들려온 아득한 목소리에 놀라 눈을 멍청하게 떴다. 이 목소리, 저번에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래, 내가 예전에 술을 마시려고 했을 때 막았던 목소리도 이것과 비슷했었고…… 그 신관이란 놈을 만났을 때도 조심하라는 목소리가 내 안에서 울려 나왔었다. 이 목소리도, 그 목소리와 동일하다. 대체 이건 어디서 들려온 목소리지? 내가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나와 카민 쪽으로 휘달리듯 달려오고 있던 그 푸른 물줄기가 거짓말처럼 무엇인가에 의해 가로막혔다. "뭐, 뭐지?" 당황한 듯한 카민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온다. 나도 당황했다. 푸슈슈슈슈슈슛!!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와 함께, 나는 내 손 근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놀라울 정도로 눈부신 빛의 파동을 볼 수가 있었다. 희뿌연 무엇인가가 눈부시게 내 은빛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다 싶더니, 어느덧 연기 같은 것이 내 앞을 턱하니 막아섰다. 나는 더더욱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당황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입을 턱하고 벌려야만 했다. 노란빛의 광채가 사방을 뒤덮을 듯 환하게 번지더니, 그 자리에서…… 사, 사람이? "뭐……지?" 그 흑마법사란 놈도 당황한 목소리로, 워프 공간을 만들다 말고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순간, 내 앞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번째로 뵙는 건가요? 레이네입니다.― "……뭐?" 레, 레, 레이네라면……? 서, 서, 서, 서, 서, 서, 설마?? ---------------------------------------------- 쩝... 갑자기 많은 인물이 등장하게 될 것 같은데.. 쩝...ㅇ_ㅇ;;; 괘.. 괜찮을까...-_-;; TOTAL : 16, PAGE : 1 / 1, CONNECT : 27 카르민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56 안녕하세요, 여러분. 카르민∼입니다^_^ 아하하하하핫…… 셤이…… 셤이 끝났다지요오오오오오!!!! 그 기념으로 필살 연참을 할 생각이었는데…… 오늘은 글발이 안 받는 관계로 그냥 가볍게 3연참 할게요. 크핫핫핫핫핫!! 내키면 페이트도 조금;;; 아핫, 최근에 페이트를 쓰느라고 칼레들린 페이스가 조금 흔들리는 것 같은데 말이죠. 어서 회복을 해야죠! 즐독하시길!!!!! "너, 너어? 서, 설마…… 세, 세이아나의……?" 나는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난 그 존재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때서야 기억이 난 것이다. 내가 인간계로 오기 전 떨어졌었던 그 사이코 여자 마족 세이아나의 공간에서의 일이. 그 때 세이아나는 나를 인간계로 가는 게이트 안으로 처넣으면서(주전자 모양이었지.)내게 말했었다. 내 은빛의 검에 박아 넣은 노란색의 보석이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그 마물 놈이라고. ―예, 맞습니다. 세이아나님이 당신의 검에 붙여준 그 노란색의 보석이 접니다.― 나는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 세이아나는 분명 내 은빛의 검에 박아 놓은 이 노란색의 보석은 위급한 순간 날 구해줄거라고 말했긴 했었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봤던 그 레이네라는 마물은 분명 발이 네 개 달린 괴물이었지, 저렇게 멀쩡한 인간형태가 아니었단 말이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나는 내 앞에 선 그것을 찬찬히 살폈다. 노란빛의 광채가 찬란하게 뿜어져 나온 그 자리에는 마치 거짓말 같이 인간 하나가 서 있다. 길게 늘어뜨린, 웨이브진 노을 빛의 머리카락이 앞에서 남실거린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 손을 들어 천천히 두 눈을 부비적 거렸다. 분명 예전에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에 의하면 그 마물은 정말이지 무섭고 두렵고 끔찍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뭐냔 말이다. 저 멀쩡하고 희여멀건한 모습은!!! 내 앞을 막아서고 있기에 비록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엄청나게 긴 머리카락 아래로 살짝 드러난 하얀 종아리를 보아도 분명 그것은 인간의 모습이었다. 내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되는 말을 들어보아도 저번처럼 크르렁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분명한 [언어]가 들리고 있다. ―후훗∼. 놀라셨군요? 하지만 별 거 아닙니다.― 뭐, 뭐, 뭐가 별 거 아니야!!! 잘 쥐고 있던 검에서 사람 하나가 튀어나왔는데 그게 별 일 아니라면 대체 뭐가 별 일이라는 거냐, 앙!? "카, 칼?" 카민놈 역시 검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 후에 뭔가 뾰롱, 하고 튀어나오자 황당한 목소리를 내며 내 옷깃을 잡아끌었다. 카민의 그 황당한 목소리는 내게 설명을 촉구하고 있었지만 녀석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만한 정신이 내게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멍한 눈으로, 정말 멍한 눈으로 내 앞에 선 그 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지켜보니 저 검은 로브의 놈은 적인 듯 하군요. 제가 처리할 테니 아무 걱정 말고 쉬고 계십시오. [루운]이란 건 꽤나 고위의 마법…… 거기에 당하셨으니 굉장히 고통스러우실 겁니다. 사실은 아까전부터 계속 도와드리고 싶었지만 위급한 상황에 튀어나와야 좀 더 멋있지 싶어 오랫동안 참았습니다.― "뭐……?"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 자식이. 좀 더 멋있지 싶어 오랫동안 참았다고? …… 핫핫, 하하하하핫. 오오, 나 정말 오랜만에 무지 당황해보는군. 우핫핫핫!!! 나는 내 얼굴 표정을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절로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내 하얗고 잘난 얼굴엔 오직 [당황]이라는 글자만 빼곡이 써 있을 거다.(그렇다고 정말 내 얼굴에 글씨로 [당황]이라고 적혀 있는 걸 상상하는 바보 놈은 없을 거라고 믿는다.) 안 되지, 안 돼! 표정 관리, 표정 관리!! 오로지 표정관리만이 살길이다. "……켐 알슈타드에서 인간이 튀어나오다니?" 내가 당황을 머금은 나 자신을 추스르고 있을 때, 유키를 안고 있던 흑마법사 놈이 레이네를 보며 놀란 말투로 중얼거렸다. 레이네는 갑자기 손을 삭하고 벌리더니 말했다. ―나 인간 아닌데.― 레이네는 그 말과 함께 앞으로 풀쩍 뛰어 나갔고 나는 얼빠진 얼굴로 녀석을 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분명 마물이었는데…… 마물이었는데!!! 지금 내 앞으로 뛰어 나가고 있는 녀석은 분명 8등신의 미끈한 몸을 가진 분명한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몸의 굴곡하며…… 분명 인간 여자처럼 보이지 않은가! "검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다니…… 유명한 집안 사람이라서 그런지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칼은." 카민은 레이네가 튀어나가는 것을 한참 보고 있더니 그렇게 말했다. 제길, 이젠 그런 말에 일일이 반응하지도 않을테다. 네녀석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카민! 카민은 지친 얼굴로 내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카민의 몸이 내 몸에 닿이는 순간, 나는 몸이 휘청하고 앞으로 기울여지는 것을 느꼈다. "에, 에엑!! 칼!!" 카민은 내가 몸을 가누지 못하자 당황한 듯 손을 뻗어 내 몸을 부축했다.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부축을 받는다는 사실이 불쾌했지만 손을 뿌리치기도 뭣해서 가만히 있었다. 카민의 부축을 받으며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흑마법사에게 달려가고 있는 레이네가 보였다. 녀석은 손을 치켜들고 있었다. 순간, 노을빛의 머리카락이 뒤로 길게 흩날렸다. 크악!! 이건 말도 안 돼. 그 때의 그 크르렁 마물이 저렇게 예쁜 여자로 변하다니.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된단 말이다!! 세이아나가 아이에드 못지 않은 사이코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저런 희귀한 생물을 애완동물로 삼고 있었다니!! "감히 주인님이 보호를 부탁하신 칼레들린님께 상해를 입히려고 하다니, 용서할 수 없지!" 레이네는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치더니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그런 레이네를 보았다. 흑마법사는 그런 레이네를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당황 따윈 녀석의 얼굴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데에 세이 카레엔." 이상한 언어로 된 마법 시전어가 읊어졌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기묘한 발음이었지만, 출처가 어딘지는 명백하지 않았다. 레이네는 그러나 너무나 자신 있는 태도로 그런 흑마법사를 향해 외쳤다. ―하앗!!― 순간이었다! 흑마법사의 손에서 뭔가 기묘한 암흑이 솟아오르더니, 그것이 곧장 레이네를 향해 돌진했다. 레이네는 여전히 너무나 자신 있는 태도로 그것을 막아서며 한 마디 했다. ―걱정 마십시오, 칼레들린님.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마물한테 보호받는 바에야 그냥 편하게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려는데, 레이네는 너무나도 당당하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너무나도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만 했다. 그건 정말이지 너무나도 놀랍고 경악스럽고 말도 안되는……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엽기적인 광경이었다. "쿠엑!!!" 흑마법사가 뿜은 그 암흑은 레이네가 자신이 있게 뻗은 손이 무색하게도, 레이네의 손이 뭔가를 하기도 전에 재빠르게 그녀의 몸을 관통해버렸다. "쿠에에에에엑! 아악!! 아파∼!!" 그리고, 그 어둠에 그대로 몸을 관통당한 레이네는 그렇게 내지른 비명 소리와 함께 땅을 나뒹굴었다. "……." "……." 카민과 나는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그 모습을 보며 턱을 떡 벌렸다. 나는 팔 부분이 완전히 관통 당한 채로 바닥에 이리저리 뒹굴 거리고 있는 레이네를 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도대체 아까 전부터 그렇게나 폼을 잡더니 이게 뭐냐!! 그게 대체 뭐냔 말이야!!!! 그렇게 자신 있게 손을 뻗더니,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냔 말이다. 세이아나!!! 당신은 역시 초강력 사이코 거짓말쟁이다. 게다가 나한테 한 그 말 역시 거짓말이었어. 그렇지? 내가 위급할 상황에 도와 줄 거라고 하더니만, 이게 대체 뭐지? 저게 지금 나를 도와주는 건가? 핫핫핫!! 세이아나아아!! 당신 나하고 원수졌지? 그런 거지? 그래서 체이드 숲 나올 때도 나한테 빵 한 조각 안 싸줬던 거야. 역시 그런 거였어!! 제길!! "……흠." 흑마법사 녀석 역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땅을 구르고 있는 레이네를 보고 있었다. 침묵의 도가니에서 한참을 뒹굴고 있던 레이네에게서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 직후였다. 갑자기 그녀의 형체가 흐릿해진다 싶더니, 그것은 곧 한줄기의 빛으로 향했다. 샛노란 빛으로. 샛노란 그 빛은 갑자기 섬광이 되어 내 쪽으로 뻗어왔다. 나는 거의 무의식중에 검을 들었다. 그 노란색의 빛이 내 검에 닿였다. 한참 후에 다시 검을 내렸을 때, 나는 다시 내 검 정 중앙에 박힌 노란색의 보석을 볼 수 있었다. "……방금 전에 그게 뭐였을까." 카민은 허무하다는 목소리로 내 옆구리를 푹 찌르며 물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이 진중하고도 무거운 상황에 갑자기 튀어나와 원맨쇼를 하고 들어간 레이네에 대한 궁금증과 황당함, 그리고 어이없음이 점칠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도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역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 짧다... 무지하게 짧다... 아주 짧다...;;; TOTAL : 16, PAGE : 1 / 1, CONNECT : 27 카르민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57 "……." "……." 내가 침묵하는 가운데 나와 카민, 그리고 흑마법사 사이로 무겁디 무거운 침묵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무겁게 침묵이 한참 흐른 뒤에야 멍하게 있던 흑마법사 녀석이 제정신을 차린 듯 손을 들어올렸다.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데이 세이 카레안에 맞고도 소멸되지 않는걸 보면 꽤나 강한 존재였나 보군." 엉? 나는 흑마법사가 중얼거리듯이 한 한마디를 듣고 몸이 곤두섬을 느꼈다. ……저 말은 레이네가 너무너무 형편없이 약해서 진 게 아니라 자신이 너무 강해서 도저히 레이네가 상대가 되지 못했단 말인가? 나는 고개를 들어 흑마법사를 힐끔 보았다. 워프의 공간은 사라진 상태였고, 흑마법사는 눈을 치켜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검은 로브 속에 덮인 그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며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놈의 입꼬리가 들어올려졌다. "후훗. ……1026호, 이토미즈의 배신자." 그리고 다음 순간 흑마법사의 입에서 나즉한 부름이 튀어나왔다. 아직도 내 몸을 부축하고 있던 카민의 몸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죽어라." 나는 눈을 들어 그 놈을 보았다. 그 놈이 썼던 그 이상한 마법, 레테인을 깨뜨리는 그 이상한 마법 때문에 내 몸은 이미 주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부들거리는 움직임으로 섰다. 그리고 조용히, 다시 한 번 전음을 시도했다. 라이메데스를 부르는. 라이메데스. 라이메데스!!! 나는 한참동안 힘겹게 내 목소리를, 감정의 파동을 공기 중에 싣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번에도 실패였다. 전음을 시전할만한 그 작은 의지마저 나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흑마법사의 입이 움직이고 있었다. "……다크……." 나는 그 목소리에 다시 전음을 보내려고 했지만 다급함과 당황함이 뒤범벅이 된 상황이라 그런지 그것은 너무나도 힘들었다. 제길, 너무나 분하다. 내 약함이 이렇게나 원망스러워 본 것은 처음이다. 나란 놈은 대체, 이런 상황에서 라이메데스나 부를 방법 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니! 나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스럽다. 그리고, 그 단 하나의 방법마저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는 나에 대해 혐오감마저 느껴진다. 라이메데스!!! 나는 다시 한 번 온 힘을 다해 라이메데스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 불가능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입술만 악 무는데, 흑마법사 놈이 손을 뻗더니 짧게 외쳤다. "……웨이브."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녀석의 손에서 일렁거리는 미칠 듯한 어둠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녀석이 마지막 시전어를 외치기가 무섭게 나를 살라먹을 듯한 기세로 다가왔다. 문득 머릿속에서 마족에겐 어둠 속성의 공격마법이 통하지 않는다고 말한 로시엔의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완벽한 마족에게 해당하는 이야기. 반마족인 내가 어둠속성의 마법을 받으면? ……보통의 인간들과 똑같은 데미지를 받게 된다. 제길, 저 놈의 흑마법사인가 뭔가 하는 놈은 대체 어떤 놈이길래 레테인을 깨는 마법을 쓰고, 레이네를 한 방에 쓰러뜨리고, 그것도 모자라 이런 격한 어둠을 통하게 하는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지? 이렇게까지 연속으로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인간 중엔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적다고 들었는데. "이익!!" 나는 나를 향해 굉장한 기세로 달려드는, 아가리를 떡 벌리고 선 그 물컹거리는 듯한 마법체를 보며 카민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카민의 조그마한 어깨가 내 두 팔에 들어왔다. 나는 그 자세로 몸을 틀었다. 파가가가가가가각!! 요란한 소리가 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입술이 악 물어지면서 입 안에서 자그마한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칼……?" 놀란 듯, 당황한 듯, 카민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인다. 제기랄!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체이드 숲을 나서면서, 나는 맹세했었다. 나를 배고픔으로부터 구제해 준 나스를 위해서라도 카민 놈에게 반드시 자유를 되찾아 줄 거라고. 그 약속을 지키지도 전에 이 놈이 죽어버리면 곤란하다. 미칠 듯한 고통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해졌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카민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격한 파동이 내 몸을 흔들었다. 멍하게 고개를 젖혀졌다. "칼." 무릎에 힘이 빠졌다. 내 몸이 카민 쪽으로 힘겹게 기울여졌다. 카민의 옷깃을 쥐고 있는 양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런 나를 카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칼." 녀석이 다시 한 번 날 불렀다. "칼!!!" 나는 미친 듯이 내 이름을 부르는 카민을 향해 씨익, 하고 웃어주었다. 힘겨웠지만 있는 노력을 다 기울이니 어떻게든 미소가 만들어졌다. 막 그 미소가 완성되었을 때였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나의 다리 힘은 그대로 나를 놓아버렸다. 카민을 잡고 있던 손의 힘조차 풀렸다. 털썩. 카민의 작은 체구 위에 내가 덮였다. "칼!!!" 카민이 나를 흔들었다. 제기랄, 이 놈은 내 친구다. 하나밖에 없는 내 친구란 말이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그러니까 건드리지 마! 내 친구야. 내 인간 친구다. 반마족 칼레들린으로서가 아닌, 마족 칼레들린으로서도 아닌…… 인간 칼레들린으로서 함께 하는 친구. 카민은 건들리지마. 건드린다면, 지옥까지 쫓아가서 그 몸을 반 토막 내버리겠어. 나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나지막하게 흑마법사 녀석을 향해 마음 속으로 외쳤다. "……우욱. 우욱……" 날 붙잡은 카민의 목소리는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고 의식이 희미해졌다. 나는 문득 짜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제길, 그러고보니 나 얼마 전부터 계속해서 쓰러지고 그러는 군. 짜증나게. 쳇, 세이아나! 당신 말이야, 나한테 여러 가지 거짓말을 했어. 첫째, 레이네가 위급한 상황에서 날 구해줄 거라고 했던 거. 그리고 둘째, 내가 인간의 관점에서는 굉장히 강할 거라고 했던 말. 셋째, 숲에 먹을 것이 풍부하다고 해놓고 막판에 가서 먹을 거 없다고 했던 말. 제길, 마계로 돌아가면…… 마계로 돌아가면 당신부터 찾아갈거야. 그래서…… 단단히 따져야지……. 흐려지는 의식 사이에서도 나는 세이아나에 대한 원망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었다. ------------------------------- 짧아요... 정말 짧습니다.. 죄송해요.. 대신 뒤에 한 편 더 있구요... 내일 좀 더 많은 분량으로 올게요;; 크악... 크악.. 크아악!! TOTAL : 16, PAGE : 1 / 1, CONNECT : 27 카르민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58 가지마. 부탁이야.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는 가지마. 제발…… 왜…… 왜?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어디로 가는 거야? 날 버리지 마!!! 힘들다는 거 알아!! 어리지만 나도 다 안단 말이야!! 제발… 제발 날 버리지 마!! 가지마!! 처연한 미소를 짓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빛나는 은발이다. 아이에드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아이에드의 것보다 색이 더 옅어 자칫하면 윤기가 나는 백발로 오인할 수 있을 정도다. 아름답다. 그리고 익숙하다. "……카인." 그녀가…… 나를 불렀다. 뭐? 나를 불렀다고? 아니야. 내 이름은 카인이 아니잖아? ……뭐지? 하지만…… 저건 분명 나를 부르는 거야. 나를 부르는 게 맞아. 아득한 기억의 파편. 어디에 감춰둔 것이었지? 모르겠어. 그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흔적. 당신은 나를 잘 알고 있어. 그렇지? 나도 당신을 잘 알아. ……그런데…… 당신은 누구야? "미안해……" 그녀가 눈물을 짓는다. 가슴이 아프다. 그런 슬픈 눈을 하면…… 그러면…… 심장이…… 심장이 아프다…… 당신이 그런 눈을 하면…… 나는 미쳐버릴 것 같다. 그, 그런 눈은…… 하지마…… 제발…… 제발 하지 말아요. 제발!!!!! * * * * * * * * * * * * "헉!" 거의 반사적으로 눈이 떠졌다. 짭짤한 액체가 두 뺨에 묻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것을 어루만졌다. 짙은 농도의 그것은 분명 눈물이었다. 나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씁쓸함을 느끼며 그것을 닦았다. 간밤에 내가 무슨 꿈이라도 꿨었나…… 이렇게 눈물까지 흘리고 말이야. 나는 가볍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으윽." 하지만, 그 순간 자각하지 못했던 고통이 나를 휘감았다. 갑작스럽게 몰려온 그 고통은 비록 경미했지만, 내가 일어나는 것을 방해하기에는 충분했다. 몸이 살짝 떨렸다. 구석구석이 아프다. 고통을 느낀 그 순간, 나는 뭔가 내가 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래!!! 나, 나 그 때 정신을 잃었던 건가? 카민이 나를 잡으려 했다. 카민이 운 것 같다. 카민이 나를 향해 손을 뻗은 것 같다. 레이넨가 뭔가 하는 그 이상한 녀석이 튀어나와 생쇼를 하다가 단번에 몸 관통당하고 다시 검 안으로 기어 들어갔었지. 그리고, 유키가 흑마법사에게 잡혔었다……. 그리고 그 뒤? 그 뒤에 뭔가 이상한 일이……? 다시 한 번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누르는 듯한 고통이 왔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더 이상 무엇인가를 생각해선 안 될 것 같다는 이상한 예감이랄까, 하여튼 그런 것이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가슴 부근에 뭔가 낯선 것이 느껴졌다. 바라보니, 그 곳이 엷은 천으로 몇 번이고 단단히 감겨져 있었다. 엥? 붕…… 대인가? 나는 그것을 만져보았다. 탄력 있는 천의 촉감이 느껴졌다. 나는 제정신을 차리려고 있는 힘껏 머리를 흔들었다.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라이메데스에게 전언을 보내려고 있는 힘껏 시도를 하고 있던 그 도중에 그 빌어먹을 흑마법사놈이 썼던 마법에 휩싸였었지. ……그리고? 그 다음부터가 바로 문제였다.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는 것.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걸 보면 누군가가 도와준 것이 분명하다. 라이메데스놈? 그 것이 가장 높은 가능성이긴 한데……. 나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조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역시 기억에 없는 장소였다. 너무나도 낯선 공간. 좁디 좁은 방안에는 하얀 시트를 가진 내가 누워 있는 작은 침대 하나와 식탁, 의자 몇 개, 찬장 등으로 간결하게 꾸며져 있었다. 내가 마구 고개를 휘젓는데, 갑자기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레들린님.― 나는 순간 움찔했다. 그 목소리는 내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레이네?" ―……네에. 저기…… 죄송해요.― 한참만에 녀석이 버벅거리면서 머릿속으로 대답을 해왔다. 나는 내 검을 찾기 시작했다. 침대 머리맡에 검이 놓여 있었다. 그 검에 박힌 노란색의 보석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레이네가 말을 할 때마다 그 보석은 깜빡깜빡거렸다. "뭐가 죄송하다는 거지?" 나는 그 깜빡이는 보석을 보며 물었다. ―저기… 제가 지켜드렸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잖아요.― 호오? 그 뿐만이 아니었지, 아마. 지켜주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그렇게 심각했던 분위기를 한 순간 망치기까지 했었지. 나는 반짝반짝 거리는 그 노란색 보석을 확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역시 참을성과 인내의 대명사이며 이 꽃다운 미모로 전 차원계에서 단연 최고일 나는 억지로 참았다. 그런 내 침묵을 오인했는지, 이 레이넨가 라이넨가 하는 놈이 다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전 노력했어요. 그런데, 상대가 너무 강했다구요. 칼레들린님은 모르시겠지만, 그 정도 힘은 인간 중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힘이거든요. 정말로 엄청났다구요!!! 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그렇게 대단한 힘을 쓰다니 말이예요. 게다가 그 자가 쓴 그 마법, 세이 테에 어쩌고 하는 건 정말 엄청난 마기를 필요로 하는 거구요. 아아∼ 마기 하니까 세이아나님이 생각나네요. 아아아, 그 분이 보고 싶어요, 훌쩍. 세이아나님은 정말 좋은 분이시죠. 아아, 그 분이 뿜어내는 마기만큼 편안한 것은 없다구요. 저는, 세이아나님이……― 나는 처음에는 자기 변명으로 시작되었던 말이 삼천포로 빠져 세이아나의 얘기로 이어지는 것을 들으면서 머리가 울림을 느꼈다. 나는 결국 버럭 고함을 치고 말았다. "닥쳐!!! 거기서 세이아나 얘기가 왜 나와!!" ―아, 그렇군요.― 뭐가 '아, 그렇군요' 야!! 제길, 어쩐지 시끄러운 녀석인 것 같군. 그 동안 내가 잊어버릴만큼 조용하고도 조용하게, 정말이지 조용하게 지내온 주제에 왜 갑자기 수다를 떨어대는 거지? 나는 다시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물었다. "그래, 너는 알겠군. 여기가 어디지? 카민과 유키는? 넌 어제 봤겠지?" 레이네가 대답했다. ―예, 어제 봤어요. 흑흑, 어제 그 빌어먹을 흑마법사 때문에 전 죽을 뻔 했어요. 다행히도 검 안으로 들어와서 몸을 숨겼기에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도저히 내가 바라는 답은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버럭 고함을 쳤다. "누가 네녀석 얘기 하랬어!!" 그런데 순간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이 좁은 문이 벌컥하고 열린 것은. "일어나셨군요." 나는 갑작스러운 그 목소리의 등장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레이네가 박혀 있는 그 은빛의 검을 머리맡에 다시 내려놓았다. 시선을 돌려 문 밖을 보았다. 순간, 나는 너무나도 반가운 것을 발견하곤 고함이라도 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내 눈을 들어온 것은 바로 핏빛의 머리카락이었다. 나는 정신이 확하고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카민……?" "칼!! 정신이 든거야? 이 자식!!" 열려진 문 틈 사이로 거의 발악하는 듯 카민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앞에는 카민 말고도 다른 놈이 하나 서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 놈을 보았다. 좀 자세히 보려는데, 그럴 틈을 주지 않고 갑자기 카민이 무서운 속도로 내 쪽으로 뛰어 들어왔다. 카민은 내가 누워 있는 침대옆에 서더니 내 손을 꼭 쥐었다. "제기랄!! 대체 뭐야!! 네가 그렇게 감싸면 어쩌자는 거야!! 넌 정말로 죽고 싶은거야?!"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 손을 꼭 부여잡은 카민의 새빨간 눈에서 발그레한 뺨을 타고 조용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카민은 한참을 빌어먹을이란 말만 반복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든 그녀석이 냅다 외쳤다. "차차리, 차라리 우리 이쯤에서 헤어질까? 응? 칼? 그 편이 낫겠지? 나와 함께 있으면 넌 계속 그런 꼴을 당하겠지! 제기랄,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어!! 네가 강하다고 생각했고, 또 너와 함께 있으면 도망 다니는 생활도 즐겁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내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어!! 제기랄!!! 그래, 그래!! 제기랄!! 내가, 내가 내일 당장 다른 곳으로 떠날게. 이쯤에서 우리 그만 헤어지자." 카민이 울컥 솟아오르듯 한 그 말에,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이 자식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나를 용병으로 고용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난 처음부터 각오하고 네녀석을 따라온 거란 말이다. 나를 배고픔으로부터 탈출시켜준 나스에게 은혜도 갚고, 내게 처음으로 생긴 [친구]라는 존재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널 따라온거라고, 이 빌어먹을 놈!!! 나 같이 잘생기고 마음도 넓고 너무나도 착한 남자가 인생 최초로 생긴 친구란 놈이 죽든 말든 상관 안하는 놈으로 보였단 말야? "닥쳐! 한 번만 더 그딴 헛소리하면 네 녀석 입 찢어 버릴 줄 알아!!" 나는 카민을 향해 버럭 고함을 쳤다. "……흐음." 그 때, 한 편의 신파극을 완성하기 직전이었던 우리들( "그런말 하지마!!우린 친구잖아!" 입을 찢어버리겠다는 말 다음에 난 나도 모르게 이렇게 뱉어낼 뻔 했었다. 우악!!! 닭살 돋는다. 닭살 돋아!! 크악!! 닭살에 나 오늘 죽을 것 같아!!!!)의 대화를 근절하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 시선이 한 존재에게 닿은 순간, 내 움직임이 턱하고 정지했다. "그렇게 큰 목소리를 내시는 걸 보니 상태는 정상이신 것 같군요. 다행입니다." 생긋하고 웃어 보이는 한 사람이 에 들어왔고 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민을 돌아보았다. 카민은 나를 향해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저 분이 우리를 살려주셨어." 다시 눈이 천천히 돌아갔다. 침이 꿀꺽꿀꺽 넘어갔고 숨이 턱턱턱턱 막혀왔다. 카민은 내게 말했다. "네가 나를 감싸고 그렇게 쓰러졌을 때…… 앞이 깜깜했어. 도대체 뭐가 뭔지 하나도 떠오르지가 않았지. 이제 죽는다는 생각에 나스의 얼굴과 데스형 얼굴, 저 멀리 있던 유키, 내 앞에서 날 감싸준 바보 같은 네녀석…… 그런 것이 보였어. 가슴이 답답했다. 그 흑마법사는 나를 싸늘한 얼굴로 한 번 보더니 다시 마법을 쓰려고 했어. 그런데…… 그 때 저분이 나타나셨어. 정말…… 정말 뭐라고 감사 드릴 길이 없어요. 감사합니다." 카민은 말을 하다말고 문 쪽에 서 있는 그 자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난 표정이 완전히 경직됨을 느끼면서 문 앞에 있는 그 자를 보았다. 어느 순간, 그 자와 내 시선이 딱하고 부딪혔다. 시선이 부딪히자마자 그 녀석이 씩 하고 웃었다. "그렇게까지 감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 것 뿐인 걸요. 카민님이 무사하시고, 저렇게 동료분도 무사하시니 됐습니다." 그렇게 방긋 웃은 그는 매우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한없이 포근한 목소리. 그것은 이른 새벽에 불어오는 한줄기 바람처럼 시원한 맛을 가진, 아주 맑은 목소리였다. 그런 목소리를 가진 그 자는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에세렌 이네아스라고 해요. 우리, 구면이죠?" 하얗게 벌어진 넓직한 옷. 길게 늘어진 듯한 느낌의 옷소매. 부드럽고 따뜻해 뵈는 표정. 어깨까지 남실거리는 청록빛의 머리카락. 나는 그 모든 것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난 그 자를 보며 거의 경기를 일으키는 어조로 외쳤다. "시, 신관!!! 검투장에서 봤던 그 신관!?" 나는 그렇게 발악하듯 외치며 펄쩍 뛰어올랐다. 그 자는 그런 나를 향해 다시 한 번 웃어 보이며 말했다. "예, 에세렌이라고 불러주세요." ------------------------------ 허걱... 게시판이 왜 이렇게 느리답니까;; TOTAL : 16, PAGE : 1 / 1, CONNECT : 27 카르민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59 미,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내가 신관한테 도움을 받았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지!!! 나는 이 황당하고도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도저히 수긍할 수 없어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그런 나를 놀리듯이, 내 검 안에서 레이네가 시키지도 않은 말을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웅, 칼레들린님이 막 쓰러지고 난 다음에 저 신관이란 녀석이 왔어요. 저 신관놈은 뭘 찾는 것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한참만에 칼레들린님과 친구분을 발견한 것 같더군요. 그리고 흑마법사를 향해 막 신성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는데……. 제 생각에 그 건 신성 강화 주문인 홀리 라인이었던 것 같아요.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음…… 그 나쁜 흑마법사 놈은 저 신관이 주문 외우는 것을 보고 공격을 하려고는 했던 것 같은데, 워낙 강한 마법을 많이 써서인지 기운이 많이 떨어진 모양이더군요. 뭐라고 뭐라고 혼자서 지껄이다가 그냥 워프를 내고 도망을 가버렸어요.― 레이네가 머릿속으로 보내온 말은 이해가 되지 않은 상태로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에세렌이라고 소개한 그 신관을 침대에 앉은 채로 올려다보았다. 나풀거리는 이불단 위로, 싱긋 웃고 있는 그 신관이 보였다. 에세렌은 빙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부담 갖지 마시고 쉬세요." 부담 갖지 말고 쉬라고? 신관이 있는 곳에서 부담을 갖지 않고 쉴 수 있는 마족이 몇이나 될 거라고 생각하지? 빛의 기운을 온 몸으로 뿜어내는 [신관]이란 존재 앞에서, 부담을 갖지 말라고? 차라리 죽으라고 말하지 그래. "몇 일 푹 쉬면 안정이 되실 거예요. 아, 저는 빛과 거울의 여신인 마리에나님을 모시는 비천한 종입니다. 이곳은 마리에나님의 신전이구요." 밝게 웃으면서 에세렌이 말을 함과 동시에, 내 온몸이 딱딱하게 경직했다. 이불 위로 놓여진 두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상처입은 당신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좀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신한텐 신성력이 통하지 않아…… 아아, 하지만 이렇게 멀쩡하게 일어나시니 정말 다행이군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한 번 가늘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 신관. 하지만 그 가느다란 미소라는 것은 더 이상 다정하게 느껴지지도, 따뜻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내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은 단 두가지 뿐. 그것은 경멸과 두려움. 혹시 모든 것을 알면서 저렇게 능청스럽게 굴고 있는 것인가, 이 에세렌이라는 녀석은?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 존재할리 없지 않은가!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정체를 가늠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더더욱 경계를 하면서 여차하면 검을 뽑으리라 결심했다. 그렇게 결심하고서 검을 꽉 쥐는데, 시끄럽게도 레이네가 다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칼레들린님? 왜 검을 그렇게 꽉 쥐시는 거죠? 혹시 저 신관을 벨 생각이신가요? 만약 그럴 생각이라면 저는 언제든 도움을 드릴 수 있어요. 저는 누가 뭐라해도 세이아나님의 명을 받아 당신을……― 나는 레이네의 말이 끝나기 전에 매우 부드러운 어조로 매우 부드럽게 말했다. 「닥쳐.」 ―……네.― 레이네는 내 말을 듣자마자 조용해졌다. 검을 쥔 손에 조금씩 땀이 베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 순간 눈을 크게 뜨고 몸을 움츠렸다. 내가 지금 검을 세게 쥐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 멀찍이 서 있던 에세렌이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녀석이 한 발자국씩 한 발자국씩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본능적으로 몸을 바짝 숙였다. 검은 이불 에 파묻고서. 내가 몸을 숙이며 경계자세를 취하자 바로 침대 옆에 선 에세렌이 풋, 하고 작게 웃었다. "경계하지 마세요. 몸 상태만 좀 볼게요." 그 말과 함께 에세렌이라는 이름의 신관은 내 어깨에 손을 댔다. 나는 순간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에 그 손을 탁하고 쳐냈다. 내 심장은 신관에게 내 몸을 만지는 것을 허락했다는 이유 모를 분노 때문인지 거세게 뛰고 있었다. 나는 눈을 치켜 떴다. "난 멀쩡해. 손 대지마라. 지금 당장 나갈테니 비켜." 난 그렇게 말하면서 이불을 휙 걷어내고는 벌떡 일어섰다. 아니, 벌떡 일어서려 했다. "……!!" 하지만, 나는 일어설 수 없었다. 발이 바닥에 닿이는 순간 나는 미간을 가느다랗게 좁히고 도로 침대에 앉아야만 했다.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에세렌을 그런 나를 향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방금 전 자신의 호의가 완벽하게 무시당했다는 불쾌감 따위는 그의 얼굴에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한없이 온화했다.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가 가득한 푸른 물을 담은 것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나는 침묵으로 그런 에세렌을 보았다. 나 자신이 또 한 번 치욕스러워지는 순간이다. 말도 안 돼. 신관에게 목숨을 구제 받다니? 신관에게 이런 식으로 친절과 호의를 받다니? 이건 마족 전대미문의 수치다. "그래. 안정을 취해야해." 카민, 모르면 그냥 얌전히 쭈그리고 앉아 있어라.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민놈이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그 입을 열어 조잘대기 시작했다. "절대로 안정을 취해야 해!! 절대적으로!!!" 카민은 그렇게 외치더니 내 쪽으로 다가와서 몸을 반쯤 일으키고 있는 내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말했듯이, 카민놈의 힘은 매우 세다. "이 자식!!" 놔, 라고 말하려는 순간, 카민은 그대로 나를 떠밀었고 나는 강제적으로 침대 위로 떠밀리고 말았다. 나는 나를 침대로 거의 던지다시피 한 카민을 향해 뭐라고 버럭 고함을 치려고 했지만, 바로 그 순간 카민의 눈에 떠오른 무엇인가를 느끼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좀 쉬어, 칼." 붉은 눈동자 한 가득, 안심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젠 다행이라고,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카민의 눈에 가득찬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후, 하는 한숨소리와 함께 얌전히 누워 버렸다. 카민은 그런 나를 향해 피식 하고 김빠지는 웃음을 짓더니 이불을 끌어올려 나를 덮어주려 했다. [꼬마가 아니라 유키예요.]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카민의 손이 내 턱 끝을 스치려는 그 순간, 아련하게 유키의 목소리가 내 의식의 아득한 저 편에서 들려왔다. 그것은 정말 믿을 수 없게도, 엄청난 감정의 파동을 안고서 갑작스레 내 영혼에 파문을 일으켰다. 카민의 손이 턱까지 이불을 끌어올리는 그 순간 머릿속으로부터 들려온 그 밝은 목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불을 끌어올리고 있는 카민의 손을 세게 밀어내곤 벌떡 일어나 앉았다. 카민은 내가 갑자기 이불을 휙 휘저으며 일어나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한 발 물러섰다. 난 그런 카민을 향해 외쳤다. "그러고보니 유키는!?" 그렇게 뱉어 놓고 나서, 나는 문득 유키에게 너무나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유키를 이렇게나 뒤늦게 떠올리다니. 일어나자마자 유키가 떠올라야 당연했고, 유키의 안부가 걱정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지금에야 생각이 나다니. [화관, 나한테 씌워줘요.] 유키의 영상이 머릿속에 잔뜩 차 올랐다. 비록 만난 지 얼마 안된 아이였지만, 순수하고 맑은 꼬마였다. 그 꼬마를…… 이런, 제길! 난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다! "유키는……" 카민은 나를 보며 입을 움직이다 말고 낮게 고개를 떨궜다. 녀석의 붉은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카민의 뒷말을 듣지 않고도 나머지는 알 수 있었다. 저절로 입술이 슬쩍 물려졌다. 침대 시트를 움켜쥔 손에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시트는 내 손에서 솟아난 땀과 압력에 못 이겨 조금씩 밀려나면서 구겨지기 시작했다. "유키라 함은 유키아 네크로나, 그녀를 말하는 겁니까?" 순간이었다. 에세렌이 나직하게, 그러나 분명한 어조로 천천히 입을 열어 물었다. 나는 그를 휙하고 돌아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예의 그 조용한 미소를 띈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난 그런 에세렌을 향해 급한 어조로 말했다. "유키아 네크로나? 우리와 함께 있던 보라색 머리카락의 꼬마를 말하는 거라면 맞다." 내 말에 에세렌이 깊게 웃었다. "맞군요." 잠깐. 그러고 보니…… 검투장에서 이 자는 유키를 아는 듯 한 분위기를 풍겼었다. 그리고 유키는 이 자를 심하게 두려워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었지. 이 놈은 그런 유키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고……. "에세렌님? 유키와 아시는 사입니까?" 카민은 에세렌을 향해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물었다. 에세렌은 서슬 퍼렇다고 말해도 좋을만한 그런 카민의 표정에 질린 듯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나와 카민을 힐끗 바라본 후 낮게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얘기가 길어질 듯 하군요. 제 얘기를 들으시겠습니까?" 나는 그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금 무거운 얼굴로 갑작스럽게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당신들은 유키아 네크로나…… 아니, 유키라고 부르기로 하죠. 하여튼 그녀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고 계십니까?" 나는 갑작스러운 그 질문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무슨 말이지? 유키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니? 나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유키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짜증스러웠다. 유키에 대한 말을 하필이면 이 신관놈에게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을 에세렌이라고 소개한 이 신관의 입술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다지 많이 알고 있지는 않다." "그렇습니까? 그럼 그녀의 나이가 몇 살인지는 알고 계십니까?" 나는 또 한 번 튀어나온 이 황당한 질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장난 하냐. 여덟 살쯤 되었겠지. 내가 대답이 없자 에세렌이 피식 하고 웃었다. "열 일곱 살입니다." "뭐……!!!" "뭐라고??!!" 나와 카민은 펄쩍 뛰어올랐다. 내가 윽박을 지른 덕분에 겨우 조용해졌던 레이네는 이 때가 기회다 싶었는지 은근슬쩍 끼어들어 떠들기를 시도했다. ―에엑? 겨우 8살로 보이던 꼬마였는데요?― 「닥치고 있어.」 하지만, 나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예에.― 레이네가 다시 조용해지자 나는 심히 안심을 하면서 시선을 돌려 에세렌을 보았다. 나는 에세렌을 보면서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나한테 지금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눈 안 쪽으로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나는 에세렌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에세렌은 내 눈을 바라보더니 잠시 움찔했다. 그리고 하아, 하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에세렌은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전 당신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만큼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전 절대로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뭐? 뭔 말이야?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있는 거랑 네녀석이 거짓말을 안 하는 게 무슨 상관인데? 웃기는 녀석일세. 나는 에세렌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신관, 그 빌어먹을 족속 중 하나인 녀석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난 겉으로 분출되려는 욕지기를 가만히 누르며 그런 에세렌을 바라보았다. "……지금 상황에서 농담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는데." 에세렌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농담을 좋아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태연하게 농담을 할 만큼 어리석진 않습니다." 녀석의 눈은 진지했다. "유키는 꼬마야. 어째서 그런 꼬마가 열일곱이나 먹었다는 거지?" 내 질문에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그가 대답했다. "뱀파이어니까요." "……!!!" 너무나 강한 충격에 나와 카민은 할 말을 잃었다. ----------------------- 헥헥헥. 오타수정도, 문법 수정도 못했습니다. 어설프고 허접하더라도 이해를..^^;; 최근 글이 너무 안 써지는게... 이거 연중이라도 해야하나..(-_-;;) 음... 그 문제는 좀 더 생각해보고... 어찌됐든 즐독하세요^^ 오늘은 2연참이예엽~ TOTAL : 16, PAGE : 1 / 1, CONNECT : 27 카르민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0 "뱀…… 파이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라디아나를 아십니까?" 문득 에세렌이 물어왔다. 나는 조금 불쾌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대답했다. "흡혈종족 라디아나을 말하는 건가?" 내가 라디아나조차 모를만큼 무식하게 보이는 거냐? 내 이 꽃미모를 봐라!! 유식함이 철철철 흘러 넘치는 내 이 꽃미모를 보란 말이다!!! ...흠흠, 흥분했군. "네. 흡혈종족 라디아나를 말하는 겁니다." 내 질문에 에세렌은 공손히 대답해왔다. 라디아나라. 나는 새삼스럽게 로시엔의 서재에 꽂혀 있던 무수한 서적을 떠올렸다. 참, 나도 그러고보면 책을 꽤 많이 읽었단 말야? 얼굴 잘 생긴 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이지적이기까지 하다니 나란 녀석은 정말이지 타인에게 너무나 큰 열등의식을 심어주고 있지나 않은지 걱정이군. 나는 내가 어린 시절 로시엔의 서재에서 읽었던 책의 문구를 떠올렸다. [라디아나. 그들은 인간의 피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존재이자 암흑을 배경 삼아 살아가는 존재이다. 어둠을 살라먹고 생물들의 피를 뽑아 먹어 인간들 사이에서 [어둠의 자식들]로 불리기도 하지만 진정한 [어둠의 족속]인 마족들과는 엄격하게 구분되는 존재. 인간들에 의해 배척받아 먼 옛날부터 어둠의 숲과 침묵의 강 주변에서 살아간다고 하지만, 샅샅이 찾아보면 아직도 인간들이 거주하는 어딘가에 발을 붙이고 사는 라디아나를 발견할 수도 있다. 그 어떤 이성도 한 자리에서 매료시켜버리는 매혹적인 외모로 인간들을 유혹해 생피를 빨아내기에 인간들 사이에서 암적인 존재로 구분되는 그들은....] ...그 뒤에도 뭔가 얘기가 더 있었던 것 같지만, 아쉽게도 내 머리는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기억하는 게 어디란 말인가? 난 천재임이 분명하다. "……지금 유키가 그 종족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흡혈종족 라디아나는 인간들 사이에서 흔히 [뱀파이어]라고도 불리지만,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로시엔의 서적마다 가득가득 쌓여 있어 나를 숨막히게 만들었던 많은 관련 자료를 참고해봐도 알 수 있다. 라디아나는 태어날 때부터 피를 갈구하고 피를 주식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피를 갈구한다는 사실에서는 뱀파이어와 동일하지만, 뱀파이어와는 달리 그들의 생명은 유한하다. 물론 인간들보다는 조금 긴 300년의 세월을 살기는 하지만. 뱀파이어가 저주를 받거나 또 다른 뱀파이어에 의해 탄생되는 존재라고 한다면, 라디아나는 처음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흡혈을 갈망하는 존재다. 뱀파이어와는 또 다른, 흡혈족. "물론 아닙니다. 라디아나는 20세 전후에 성장이 멈추는 종족이니까요. 유키아나 네크로나의 경우에는 여덟살 가량의 모습이니, 당연히 라디아나가 아니죠." 에세렌은 피식 웃었다. "……사정은 설명 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우연히 그녀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알게 된 저희 교단에서는 몇 년 전부터 그녀의 뒤를 밟고 있었습니다. 몇 년 전에 '제가 프리스트' 라는 칭호를 받은 저는, 유키아 네크로나를 쫓으라는 교단의 교시를 받고 3년 전부터 그녀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했죠. 간간히 그녀와 마찰도 했습니다만 그 때마다 번번히 놓치고야 말았습니다. 어제, 당신들을 구할 수도 있었던 것도 검투가 끝난 후에 유키아 네크로나의 뒤를 슬그머니 밟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혼란스러워지는 기분을 억지로 누르며 옆을 보았다. 카민은 입을 멍하게 벌린 채로 에세렌의 얘기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언뜻 봐서는 그저 순수한 소녀에 불과하겠지요. 당신들은 유키아 네크로나의 수법에 그대로 당하신 겁니다. 다른 뱀파이어와는 달리 '젊고 매력적인 여인'으로서의 유혹술을 행할 수 없는 유키아 네크로나는 언제나 당신들에게 했던 것처럼 타인에게 접근해왔습니다. 어린 꼬마의 모습이므로 유혹이란 건 불가능하기에 동정심이나 측은함을 불러 일으키는 작전을 쓰는 겁니다." "……증거도 없이 내게 그런 말을 믿으란 건가?"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에세렌을 올려다보았다. 이 작자는 지금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다. [칼 오빠∼] 그렇게 순수하게 웃었던 꼬마가, 그럴 리가 없다. 뱀파이어라니? 그럴 리가 없다. 절대로! "은인에겐 실례의 말씀입니다만, 저도 칼레들린의 말에 동의합니다. 저도 믿지 않겠습니다." 나와 카민의 말에 신관, 에세렌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제 말은 어디까지나 사실입니다. 혼란스러우실지도 모르겠지만…… 그녀가 뱀파이어가 아니라면 신관인 제가 어째서 그녀를 따라다녔겠습니까?" 말을 마친 에세렌은 내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말했다. "어찌됐든, 조금 쉬십시오. 저녁때쯤 다시 오겠습니다. 조금 있다가 음식이 올 테니 꼭 드시드록 하시구요." 에세렌은 카민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 "카민님, 당신도 저와 함께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 분께는 안정이 필요 합니다." 에세렌의 말에 카민은 머뭇머뭇거리면서 천천히 일어섰다. 녀석의 얼굴에는 방금 전 들었던 그 말의 쇼크가 그대로 스며들어 있었다. 믿건 믿지 않건. 에세렌의 말은 어찌됐든 나와 카민에게는 분명한 충격이었다. "간다, 칼. ……푹 쉬어." 기운이 잔뜩 빠졌다는 것이 역력히 들어나는 나즉한 말과 함께 카민은 에세렌과 함께 방문을 닫고 나갔고, 나는 닫혀진 방문을 보면서 잠시 멍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 * * * * * * * * * * * * * * * * * * ―이거 정말 놀라운 일이네요, 칼레들린님. 그 보라색 머리카락의 꼬마가 뱀파이어였다니.― "헛소리하지마. 그 신관이 분명 거짓말 친 거니까." 나는 내게 다시 떠들어대려는 레이네를 향해 가능한 차갑게 뱉어냈다. 나는 살짝 머리를 쥐었다. 그래, 그건 거짓말이야. 그건 분명 거짓말일거야. 뱀파이어는 웬 뱀파이어란 말이냐? 뱀파이어족 특유의 그 눅눅한 느낌이라던가 하는 것은 유키에게 없었어. 그래, 거짓말이다. 유키는 뱀파이어 따위가 아니다. 만약 뱀파이어였다면, 내 피를 빨기 위해 꽃을 건네고 그렇게 환하게 웃었던 거였다면, 마차에서도 누군가가 구해 줄 거라고 확신하고 피하지 않았던 거였다면. 내 침대에 몰래 들어와 조용히 잠들었던 그 날, 유키가 내 피를 먹지 않았을 리가 없다. 유키는 뱀파이어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유키는 뱀파이어가 아냐. 유키는 뱀파이어가…… "빌어먹을." 나는 신경질적으로 켐 알슈타드, 내 은빛의 검을 휙하고 집어들었다. 특별한 의도가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각을 멈추게 해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케엑!!!― 내가 검을 집어듬과 동시에, 이상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괴상하고도 요란한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면서 밑을 내려다 보니, 내 손이 보석 부분을 꾸욱 누르고 있었다. 뭐야. 예전에도 이 보석 부분을 누른 적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이런 비명을 지른 적이 없었는데. 레이넨가 뭔가 했던 이 녀석, 내 앞에 한 번 모습을 내보이더니 그 다음부터는 아예 막 나오겠다 이거냐? "……야, 너." ―네?― 내가 레이네를 부르자 레이네는 발랄한 목소리로(……때리고 싶어.)대답해왔다.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에서 나와." ―예? 왜요?― "나오라면 나와." 내가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손에 들고 있던 검에 박힌 보석이 순간적으로 밝은 노란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더니, 이윽고 그 곳에서 빛 한 줄기가 튕겨나왔다. 그 빛은 내 바로 앞에서 커다랗게 물결쳤다. 그것이 곧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레이네였다. 노란빛에 살짝 둘러싸인 그녀는 조금 꺼벙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서 있었다. 저번에 만났을 때는 내 앞을 가로막고 웃기지도 않는 주접을 떨어댔던 덕에 뒷모습만 보였던 레이네였기에 나는 이제서야 레이네의 얼굴을 처음으로 볼 수가 있었다. 내 눈을 또랑또랑하게 마주보고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노을 빛의 기다란 머리카락 속에 살짝 드러난 흰 얼굴이 보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숨겨진 눈동자는 깊고 맑았다. 그 눈은... 뭐랄까? 사슴이라고 했던가? 하여튼 그런 생물과 닮은 것도 같았다. 나는 그런 레이네를 보며 여태껏 내가 품고 있었던 질문을 밖으로 뿜어냈다. "……그 모습, 어떻게 된 거지? 저번에 볼 때는 마물이었잖아?" 나는 뭔가 어색한 듯 손가락으로 머리를 베베 꼬고 있는(케엑!! 그게 무슨 짓이냐!! 네가 무슨 수줍은 열 다섯 소녀라도 되는 거냐!!)레이네를 향해 물었다. 레이네는 대수롭지 않다는 어조로 천천히 대답했다. "예, 전 그 때 분명 마물이었죠." "그런데 왜 지금은 인간의 모습인거야?" 내 질문에 레이네는 방긋 웃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비밀인데요?" "……." 내가 말을 말지. 레이네는 내가 입을 다물자 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내 옆으로 다가와서 섰다. 침대에 걸터 앉은 나를 내려다보면서 레이네가 말했다. "저기, 칼레들린님. 다른 볼 일이 없으시다면 다시 저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이 모습으로 있는 건 좀 힘들거든요. 역시 검 안이 편해요. 우웅, 그 안에서는 세이아나님의 기척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가 있거든요." 아이에드의 신봉자 라이메데스도 모자라 세이아나 신봉자까지 만나게 되다니. 나는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 끝마다 아이에드를 찾는 라이메데스도 모자라 말끝마다 세이아나를 찾는 레이네를 보고 있으려니 스트레스가 절로 쌓이는군.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 말세다. "들어 가." 다시 노란빛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그 것을 보고 있었다. 문득, 레이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라이메데스님껜 연락 안하세요?― "음?" ―라이메데스님이 걱정하고 계실거예요. 3일 동안 연락 한 번 안 하셨으니, 오죽 마음이 상하셨을까.― "……쩝." 나를 원망하는 듯한 마지막 말에 나는 입맛을 쩍 다셨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 철저한 아이에드의 신봉자로 아이에드의 절대적인 명령 수행중인 녀석을 내가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사라졌으니, 아이에드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어졌기에 조금 당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천천히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라이메데스를 불렀다. 「라이메데스!!!」 전음은 보내졌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응답이 없었다. 오호? 이 놈 봐라. 전음을 안 받겠다 이거냐? 뭐, 그래. 내가 뭐 어떻게 되도 네놈이랑은 상관없다 이거지? 전음을 받지도 않을 걸 보니, 뭔가 바쁜 일이라도 하고 있나보군. 나는 검을 내려놓고 카민이나 에세렌이 당부했던 것처럼 조금 쉬기로 하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폭신폭신한 천에 닿인 허리가 조금 뻐근하게 느껴졌다. 내가 그 포근함에 취해 막 눈을 감았을 때였다. 「칼레들린!!」 귓가를 찢을 듯이 발악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엄청난 성량에 깜짝 놀란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지만 그 목소리는 기본적으로 귀에서 들려온 것이 아니었기에 나의 그런 행동은 그 어떤 소득도 올리지 못했다. 「칼레들린!! 칼레들린!!! 어이어이!! 방금 그거 너지? 너 맞지? 대답을 해 봐. 너 맞지?」 「……귀 찢어지겠다.」 나는 목소리를 짝 깔고 조용히 전음을 보냈다. 내 목소리가 정신의 파동으로 전해졌다 느껴졌을 때, 그렇게나 시끄럽던 라이메데스의 목소리가 딱하고 멎었다. 「맞군.」 나는 픽하고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라이메데스의 잔뜩 긴장한 목소리가 저 편에서 정신의 파동을 타고 느껴져 오고 있었다. 나는 조금 웃음을 머금은 채로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지만, 내 말은 내 말을 가로 막으며 먼저 튀어나온 라이메데스에 의해서 가로막혔다. 「너 대체 어디 있는 거냐? 인간계에 있다면 네녀석의 기척이 어디선가 느껴져야 할텐데, 도무지 느껴지지가 않아!! 대체 3일 동안 연락도 없이……!」 라이메데스가 또다시 버럭 고함을 치는 바람에 나는 귀를 틀어막을 틈도 없었고 그래서 녀석의 그 큰 목소리를 고스란히 받아야만 했다. 지금 이 순간(라이메데스의 저 커다란 목소리를 온 몸으로 받고 있는 지금 이 순간)나는 [전음]이라는 것에 치명적인 약점을 발견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음을 받는 것을 거부하지 않을 경우, 만약 전음의 시전자가 갑자기 고함을 빽 질러버린다면 전음을 받는 자는 그 성량에 따라 머리가 어떻게 되 버릴 지도 모른다는 것. 머릿속에서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소리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들린다고 생각해봐라. 으윽. 생각만으로 두려워지는군. 「날 잡으려고 환장했군. 조용히 좀 말해.」 난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 깊이 몸을 밀어 넣었다. 편안했다. 「……아, 아, 그렇군. 너무 흥분해서 그만……. 하여튼, 지금 어디냐? 뭔가 일이 있었던 거냐? ……아니, 아니야. 지금 당장 갈 테니까 있는 곳부터 불러.」 나는 라이메데스의 말에 나도 모르게 다시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네 놈이 여길 온다고? 웃기지도 않아서. 정말이지 웃기지도 않는다. 이곳이 어딘지 알아도 온다는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여긴 그 이름도 무서운 [신전]이란 곳인데 말이다. 「[빛과 거울]의 여신인 마리니안가 뭔가 하는 신의 신전이라더군.」 나는 일부로 심드렁한 목소리를 냈다. 순간, 들려오던 라이메데스의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멎더니 그 쪽으로부터 깊은 침묵이 고개를 처들었다. 시커먼 그 침묵은 나와 라이메데스 사이에서 방황했고, 검은 그 것은 우리 둘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었다. 라이메데스의 끝없는 침묵에 나는 조금 유쾌해졌다. 라이메데스의 당황하고 있는 모습이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녀석이 스읍, 하고 크게 숨을 들이 마쉬는 소리가 났다. 마족인 라이메데스. 아무리 마기를 숨기고 있다지만, 신관이 버글버글 거리는 이 곳으로 쳐들어 올만큼 무모한 일을 감행하진 않겠지? 반마족인 나조차도 내가 누워있는 이 곳이 신전이라는 것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과 두려움이 드는데, 마족인 라이메데스는 오죽할까. 「……네가 왜 신전에 있는 거냐.」 라이메데스가 깊게 숨을 들이쉬다말고 갑작스레 전음을 열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어쩌다보니.」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랬군. 어쩐지 네 기운이 어디서도 안 느껴진다 했더니 그 빌어먹을 신관들 틈에 있어서 그랬던 거였군.」 어라? 이상하군. 이번에는 훨씬 더 가라앉고 가라앉은 목소리다. 「다친 데는 없냐?」 나는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크게 다친 곳은 없었지만, 그 흑마도사에게 당한 곳의 상처는 그리 작지 않았다. 나는 등에서 느껴져오는 찌릿한 고통을 느끼면서 대답했다. 「조금.」 내가 그렇게 말하자, 라이메데스가 다시 침묵과 손을 잡기 시작했다. 나는 그 침묵을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하나를 놓고 한참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하지만 이번의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라이메데스가 침묵과 손을 놓고 한참만에 뭐라고 뱉어냈을 때, 나는 너무나도 당황해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라이메데스가 그 말을 한 순간만큼은 고통도,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알았다. 에이테르의 마리니아 신전이라고 했지? 지금 간다.」 「뭐, 뭐라고!?」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입이 멍하게 벌어지면서 기가 턱 막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숨이 막히는 바람에 말조차 새어나오지 않았다. 방금 전에 저 자식이 뭐라고 한 거지? 정말로 돌아버린거냐, 라이메데스!! 여긴, 여긴 신전이란 말이다!!!! 「야!! 야?? 야, 라이메데스!!」 하지만 내 전음에 대한 라이메데스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내게 열어 놓았던 감정의 문이 닫혀 버렸다. 내가 전음을 보냈지만, 녀석은 듣지 않았다. "……이놈이 드디어는 미친 건가. 오긴 뭘 와!!" 나는 두개골이 미친 듯이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 새삼 느낀 것이 있습니다. 라이메데스가... 의외로 인기가 많다는 것. 예전엔 압도적으로 칼레들린이 인기였는데... 최근은 [데스가 제일 좋아요]라는 분도 몇 분 계시고..-_-;; 험험;; 어라? ...그러고보니 60회로군요^ㅁ^ 언제나 응원해주시는 여러분께 눈물로 감사를 드립니다. 으흑흑ㅠ_ㅠ 그리고... 잊으셨을까 말씀드립니다만... 제 멜 주소는 carmine21@hanmail.net. 죠. 우훗... 제가 왜 이 말을 하는 걸까요? 왜일까요?????? .....-_-;;;; ...점점 치졸해지는 카르민이군요... 쿨럭... -------------------------------------------------------------------------------- Name : 제온 Date : 25-10-2001 14:28 Line : 321 Read : 135 [3]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1 -------------------------------------------------------------------------------- -------------------------------------------------------------------------------- Ip address : 211.55.224.4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나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제, 젠장. 이 자식이 어딜 온다는 거야! 정말로 오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멍하게 있던 나는 한참만에야 현실을 직시하고서 다시 머리를 쥐어 뜯기 시작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내 이성은 말하고 있었다. 그 마족놈이 미치지 않은 한 정말로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내 또다른 쪽의 이성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놈은 이미 미쳤을걸?' 나는 침대에 머리를 쿵쿵 박아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지만 내 고결한 이미지를 위해 억지로 참았다. 너무 입술을 많이 물어 뜯어서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올정도가 되었을 때, 레이네가 말했다. ―걱정 되세요? 흐음, 라이메데스님은 아마 정말로 오실 거예요.― 침대에 눕는 것도 완전히 포기하고 불편한 몸으로 방안을 왔다갔다하는 차에 레이네가 그렇게 말하면서 내 신경을 긁자 나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러고도 남으실 분이니까.― 뭐, 뭣이? 나는 레이네가 너무나도 간단하게 뱉어내는 그 말들을 보면서 좀 멍해졌다. 뭐야, 이 말투는 마치…… 라이메데스를 잘 알고 있는 듯한 말투로군? ―신전 습격쯤이야…… 한 번도 했는데 두 번을 못 하겠어요?― 레이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고 난 그 뜻밖의 말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지?" ―원래 도둑질도 처음이 어려운 법이죠. 무엇이든 계속하면 손에 익기 마련이구요. 도둑질이든 뭐든, 일단 과거에 한 번 해본 적이 있다면 훨씬 수월해진다 구요.― 나는 레이네의 말에 얼른 실버 블레이드를 치켜올렸다. 레이네는 내가 갑자기 검을 들자 놀란 듯 눈을(난 그 노란색의 보석을 눈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한 차였다.)깜빡여 대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징그럽다는 생각 외에는 들지 않는 광경이었다. 상상해봐라. 검이 하나 있고, 그 검 중앙에는 보석이 하나 있는데 그 보석에서 불빛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말이다. "무슨 말이야? 그 말은 라이메데스가 전에도 신전을 습격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자세히 말해봐." 내가 협박하듯 말하자 갑자기 그 불빛이 환해졌다. ―제가 말씀드리면 뭐 주실래요?― 점점 뻔뻔해지는군, 이 자식. "……맞고 말할래, 그냥 말할래?" 나는 오른손에 마력을 집중하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녀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녀석은 현재 보석의 상태인 주제에 건방지게도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냥 말할게요.― 진작 그럴 것이지. 나는 살짝 마력을 사방으로 흩었다. 보석이 드문드문 깜빡여대기 시작했다. 필시 뭔가 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꿈뻑대는 그것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자니 눈이 아팠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고 거기에서 고개를 돌리려는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레이네가 빛을 딱하고 멈추더니 말을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12년전에 라이메데스님이……― 쿠쾅!!!! 레이네가 막 말을 시작하려는 찰나였다. 나는 갑자기 들려온 큰소리에 거의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망할!!" 사람이 말을 들을 틈을 안 주는군! 보통의 신전에서 이런 소리가 날 가능성 같은 것은 절대적으로 없었다. 기도문이나 주저리주저리 외워대고 찬송가 따위나 부르며 신성치료 따위나 해대는 놈들의 서식처에서 이런 파괴의 소리가 들릴 일은 없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로지 침묵만을 품고 있던 신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면 그 원인은 뻔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말이죠…….― "됐으니까 다음에!!" 나는 상황파악을 못하고 떠들 준비를 시작하는 레이네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레이네의 보석이 몇 번 깜빡이는가 싶더니 조용해졌다. 나는 왠일로 이놈이 이렇게 얌전히 조용해지는가, 신기하게 느꼈다. 그리고 난 다음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불행한 일이게도, 역시 그 놈은 조용해진 것은 아니었다. ―훌쩍……그래, 난 쓸모 없는 놈이죠…… 하지만 그렇다고해도 제가 기껏 얘기를 해드리려고 했는데 무시를 하시다니…… 너무 하시는군요…… 흑흑.― 나는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하는 레이네를 어이없는 눈길로 바라보다가 검을 바닥에 팽겨치고 보석을 확하고 밟아버렸다. 꺅꺅대는 레이네의 소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나는 내달릴 준비를 했다. 쿠쾅쾅!! 소리가 정말 예사롭지 않다. 단단하고 견고한 무엇인가가 강렬한 파워를 가진 것과 전통으로 마찰했을 때, 견고한 틈이 벌어지면서 나는 그런 소리였다. 흙으로 메꾼 것들이 철저히 부서져 내리고, 열심히 조각한 돌조각들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들. "칼레들린!" 내가 막 문 밖으로 나서려는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카민이 튀어나왔다. 나는 대충 카민이 이쯤에서 튀어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카민은 전속력을 다해 뛰어온 듯 몸에 땀방울이 매달려 있었지만 거친 숨을 뱉어내지는 않았다. 녀석은 내 손을 끌며 말했다. "어서 나가서 피해야할 것 같아, 칼레들린!" 나는 잠시 서늘한 눈으로 카민을 보았다. 지금 상태로 밖으로 나간다면 카민은 어찌됐든 라이메데스와 마주해버리게 되겠지? 그럼 라이메데스놈이 마족이라는 것을 알게 될거고. 그리고 마족이라는 것을 알게되면? "어이, 카민." 나는 내 손을 잡고 서둘러 나가려는 카민을 보며 조용한 어조로 놈의 이름을 불렀다. "왜?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어서 나가야 돼!!" 카민이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말없이 그런 카민을 내려다보았다. 카민은 그때서야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낀 듯이 나를 보았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한 발자국 바깥으로 발을 내딛었다. 카민, 네가 아직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것이 있듯이. 나도 아직 너한테 말해주지 않은 것이 있다. 네가 감추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네가 그것을 보여준다면, 나도 내가 누구인지 가르켜주겠다. 네가 먼저, 라는 조건을 붙이는 건…… 내 유일한 친구라는 엄청난 운을 거머쥔 네녀석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감정도, 너에게서 두려움이 섞인 눈빛을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도 아니야. 그저. 조금은 더, 변함없이 지금과 같은 편안함을 느끼고 싶을 뿐이다. "칼? ……컥!!" 카민이 내 이름을 부른 그 순간, 내 손은 망설임없이 그대로 카민의 복부를 향했다. 카민은 내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한 듯 눈을 부릅떴다. 온 힘을 다해 찔러 넣었기에 내 손은 거의 흉기나 마찬가지였다. 정확히 급소를 노리고 쳤기 때문에 카민의 안색이 단번에 시퍼렇게 변했다. 카민의 떨리는 눈이 나를 보았다. "왜…… 쿨럭……. 칼…… 왜…… 쿨럭……." "잠시 후에 보자." 나는 카민을 향해 짧게 말해놓고는 내가 누워있던 방안으로 녀석을 질질 끌고 갔다. 카민은 그 바르르 떨리는 눈을 꾹 눌러 감은 채 나를 향해 의문 섞인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도대체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이. 나는 그런 카민을 침대에 눕혀놓고는 가차없이 문을 닫았다. 그리고 약간의 마력을 이용해서 문과 벽의 이음새 부분을 없애 버렸다. 몸이 욱씬거리는데도 힘을 썼더니 고통이 한 번 나를 덮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나는 그 둔탁한 소리는 도무지 나를 쉬게 만들어주지 않았다. 쿠콰콰콰콰콰콰콰!! "……미친 놈." 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면서 검을 어깨에 둘러맸다. 레이네가 피식 웃는 소리를 냈다. 나는 그런 레이네의 태도가 불쾌해져서 말했다. "뭐야?" ―아뇨. 말로는 이러니저러니해도 결국 라이메데스님도, 카민님도 모두 신경 쓰고 있으시잖아요, 칼레들린님은. 두 분 다 소중하신 모양이다, 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계속 수다를 떨어대는 레이네의 말을 어쩔 수 없이 들어야만 했다. 그것은 꽤나 고역이었다. 안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 다리 때문에 돌 것 같은데 귀에서는 조잘거림이 들려오다니! ―훗훗, 칼레들린님∼ 전 말이죠, 칼레들린님이 인간계에 올 때부터 계속 같이 있었으니 당신을 지켜볼 기회가 많았죠. 카민님보다, 제가 당신 곁에 오래 있었다는 거, 아세요?― 그래봤자 나한테 말도 건 적도 없고, 나한테 뭐라고 한 적도 없었잖아?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조금 걷자 신전이라고 한 사방의 분위기가 두 눈에 들어왔다. 사방이 뻥 뚫리고, 몇 개의 버팀목들만으로 건물을 유지를 시켜놓은 특이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얗게 가루가 바스라질 것 같은 돌들로 기둥 사이사이를 메꿔 놓았다. 부지런히 뛰고 있으려니 백의를 걸친 이들이 뛰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시종 급한 얼굴로 두 손을 모은 채로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의 흰 로브 자락이 펄럭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몸의 구석구석이 조금씩 아파 왔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쓰며 지체했다간 저 라이메데스놈이 또 무슨 이상한 짓거리를 저지를지 모른다. 조금 더 서둘러야한다. 라이메스놈은 아이에드놈의 명령을 수행중이다. 나를 지키라는. 일단 아이에드가 명령을 내렸다면 죽는 한이 있어도 그 명령을 수행할 것 같은놈이 바로 라이메데스가 아닌가? 으이구, 내가 진짜 제 명에 못 산다 못살아!! 젠장, 나를 말려 죽여라 죽여! 콰콰콰콰콰콰!!! 크하!! 그렇다고 정말 말려 죽일 셈이냐?? 커다란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저 멀리 하늘의 한 가운데에 떠 있는 로브 자락을 발견하고 자리에 멈춰섰다. 더럽혀진 로브자락. 말할 것도 없이 라이메데스놈이었다. 하늘에 서 있는 놈의 크기는 콩알만했지만 나는 마족이다. 그 정도는 능히 볼 수가 있었다. 라이메데스놈의 금발은 바람결에 휘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바람이라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라이메데스가 내뿜고 있는 그 무시무시한 마기에 의해 주위에 소용돌이가 생성되면서 회오리치고 있었던 탓에 바람처럼 느껴졌을 뿐. 나는 검을 단단히 쥐었다. 레이네가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으음. '그 때' 보다 더 흥분해 계시는군요.― 레이네가 뭐라고 떠들기 시작할 것이라는 걸 눈치챈 나는 레이네의 보석을 확 움켜쥐며 말했다. "지금부터 한 마디 할 때마다 그 보석의 일부분이 조금씩 뜯겨 나가는 걸 보게 될 거야. 조용히 해." 내가 차분하게 말하자 레이네가 또 우는 소리를 냈다. ―너무해요!!― "……누가 너무하다는 거지?" ―칼레들린님요!! 왜 나한테만 그렇게 차가워요!!!― 네가 더 너무해. 네 수다를 한시간만 듣고 있으면 웬만한 놈들은 머리가 돌아버릴지도 몰라. 그나마 잘난 나라서 견디고 있는거지. 그리고 내가 왜 너한테만 차갑냐고? 난 원래 쿨한 녀석이야!! "정말 보석 부서지는 거 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 ―…….― 곳곳에서 튀어나온 신관 놈들은 허둥지둥 저 멀리 떠 있는 라이메데스 쪽으로 뛰고 있었다. 한시가 급했다. 저 놈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고위마족이 아닌 이상 이렇게나 많은 신관을 대상으로 싸웠다면 끝장나기 딱 좋았다. 단신으로 신성력을 품은 존재를 상대하는 것은 미친짓이라고!! "헉, 헉!! ……에?" 막 뛰고 있는 도중에, 내 어깨를 가볍게 치는 손이 있어 돌아보았다. 땀에 온통 젖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하얀 로브도 잔뜩 젖어 있었다. 전속력으로 뛰어온 모양이었다. 나는 낯익은 그 얼굴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 녀석은 내가 무시하려고해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끝까지 나를 따라와선 말했다. "헉, 어째서…… 하아하아…… 나오신거죠? 카민님이 가시지…… 하아하아…… 않으셨습니까? 안전한 곳이 저 편에……." 나는 여전히 에세렌을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에세렌은 계속 달려나가려는 내 움직임을 완전히 방해하면서 내 팔을 잡았다. 인상을 쓰면서 바라보는데, 에세렌의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마족이 출현했습니다." 내가 너보다 더 먼저 알았을걸? "……강한 마족인 듯 합니다." 그것도 잘 알지. "피하십시오." 싫어. 나는 에세렌의 말에 한마디도 대꾸해주지 않고 저벅저벅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에세렌은 나를 향해 뭔가 소리치려고 했지만 나는 그가 뭐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성큼성큼 앞으로 나서버렸다. ---------------------------------- 헉... 한 번 줄맞춤을 해봤는데... 이거 생각외로 힘들군요;; -------------------------------------------------------------------------------- Back : 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2 (written by 제온) Next : 2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외전: 라이메데스(2) (written by 제온) -------------------------------------------------------------------------------- -------------------------------------------------------------------------------- Total access : 3768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10th November 2001 22:29:46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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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피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분위기를 보여주기 위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레이네가 핑, 하고 코웃음을 치는 바람에 나는 저 보석을 정말로 부숴야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 한참 고민해야만 했다. ―쩝…… 칼레들린님. 충고하나 할게요. 어차피 그 모습으로 가셔봤자 라이메데스님은 파괴를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한참만에 나를 향해 보낸 비웃음을 멈추고 레이네가 뭔가 말했지만 녀석은 끝까지 말하진 않고 곧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난 그녀석의 뒷 말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라이메데스 쪽으로 향하고 있는 발길을 멈추지는 않았다. 신관들이 가득 모인 장소가 바로 앞에 보였다. 그놈들이 모여있는 공간은 놈들이 뿜어낸 그 하얀빛때문에 무척이나 밝아보였다. 나는 그 하얀빛을 보면서 잠시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어 멈춰 섰다. 숨이 헐거워져오는 것이, 뛰는 동안 상처가 벌어진 모양이다. 쿨럭거리며 올라오는 핏물이 손에 묻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젠장, 그 자체 치유력이라는 것도 있는데 왜 상처가 아물질 않는 거야? "내놔라." 내가 피 때문에 멈춰선 그 때, 라이메데스의 것이 분명한 목소리가 내 귀에 와서 틀어박혔다. "사악한 마족놈!! 대체 뭘 내놓으라는 것인가!!" 그리고 그런 라이메데스놈의 소리를 받는 또다른 자의 목소리. 라이메데스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것은 푸른 무엇인가를 가슴팍에 새긴 노인이었는데, 그가 제일 선두에 서 있는 걸보니 이 교단의 하이 프리스트 같은 직위인 모양이었다. 그의 몸에서 은연중에 느껴지는 그 빌어먹을 신성의 기운을 보니 확실한 것 같다. 그의 주변에 있는 신관들의 몸 주위로는 희뿌연 것이 있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홀리 실드(holy shield)겠지. 마족의 엔클레이브와 비슷한거라고 로시엔이 말해준 적이 있었다. 후훗, 아이에드로부터는 저걸 잔인하게 뚫는 방법도 배웠었지... 나는 피가 새어나오는 가슴을 움켜쥐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라이메데스는 싸늘하고 오만한 눈으로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내가 알던 녀석과는 상당히 달라 보였다. 마계에 있을 때 온갖 유치한 짓을 일삼아 나를 괴롭히고, 또 지금까지는 그저 나를 못 놀려먹어서 안달이었던 놈의 그 싸늘함은 놀라울 정도로 커서,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놈을 한참동안 바라볼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문득, 레이네가 입을 열었다. ―흐음, 저번처럼 하실 생각이신가…….― "뭐?" 갑작스러운 말의 뜻을 이해 못한 내가 고개를 돌리고 묻자 레이네가 피식 웃었다. -― 흐응? 왜요? 지금 제가 어떤 뜻으로 말한건지 궁금하세요?― 알면서 뭘 묻고 그래? 나는 설명을 촉구하는 눈으로 레이네를 보았다. ―훗훗, 하지만 전 얘기하지 않을 거예요. 얘기하면 또 마력탄 날리실 테니까요. 흑흑, 제가 아까부터 얘기하려고 했지만 무시하셨잖아요.. 전 마력탄 맞기 싫어요.― "……." 내가 기운만 조금 더 남아 있었더라도 이걸 콱!! "내놔라." 레이네를 향해 마구 전투욕을 불사르고 있던 나의 한심함을 일깨운 것은 다시 한 번 퍼진 라이메데스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내놔라]? 그거 날 내놓으라는 소리지? 내가 무슨 물건이냐!!! 내놓긴 뭘 내놔!!! 라이메데스를 상대하기 위해서인지 홀리 실버를 치고 있던 신관들 중 한명이 말했다. "사악한 마족!! 이 번에도 성녀를 모독하려는 것인가! 감히 어디 와서 뭘 요구하는 것인가!" 그 자가 발악하듯 외쳤으나 라이메데스는 조용히 말했다. "이번에도 바라는 건 하나 뿐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너희가 더 잘 알 터. 잔말 말고 내놔라." 젠장맞을. 전음 열어 놓고 그냥 얌전히 나를 불러들이면 됐을 건데 왜 난리야, 난리가!! "뭘 내놓으라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신전이 언제부터 마족에게 무엇인가를 넘기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냐!! [그 일] 이후로 우리 교단을 우습게 여기기 시작한 것인가!! 우리 교단은 마족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여신과 성녀의 이름을 걸고!" 하이 프리스트인 듯한 자가 노여움에 가득 쌓인 목소리로 그렇게 외치더니 신성 기도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라이메데스는 싸늘한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교단의 건물이 하나하나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을까." 파파파파파팟!! 요란한 소리와 함께 라이메데스의 손에서 검은 투기가 맺혔다. 스멀거리는 암흑의 기운은 라이메데스의 하얀 손에 맺힌 채로 꿈틀거렸다. 녀석의 입가가 냉소적으로 들어올려졌다. ...저놈도 전투나 파괴를 할 땐 스타일이 확 바뀌는 형인가 보군. 그런데.. 저 자식, 저걸 설마 날릴 생각은 아니겠지? 돌아보니 왼편에선 갈색의 고풍스러운 건물이 이미 절반쯤 파괴되어 있었고 오른편에 있던 건물은 뿌연 먼지에 휩싸여 전복하기 직전이었다. "그게 효과가 없다면... 한 놈 한 놈 끌어올려서 잔인하게 죽어가는 모습이라도 보여줄까, 후후후." 라이메데스가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렸다. 순간 나는 등이 곤두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 잠시간 잊고 있었다. 저 놈은... 블러드 아미 대원이다!!! 전투시 그 누구보다도 미친듯이 피를 갈구하는... 블러드 아미의!! 신관들은 라이메데스가 내뱉듯 한 그 말에 당황한 표정으로 서둘러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 신관이 날카롭게 외쳤다. "세인트 데크리션!" 신관의 외침과 함께 그의 온 몸에서 눈부신 광휘가 피어났다. 하얀 그 것은 그의 온 몸을 덮었는데 대단한 신성이었다. ―……엄청난…… 힘인데요.― 문득 레이네가 중얼거렸다. 나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엄청난 신성력이다! 정말로! "……라이메데스가 상대할 수 있을까?" 나는 피가 철철 흐르는 몸을 지탱하며 물었다. 원래 계획은 라이메데스 앞으로 확 나서서 놈을 데리고 조용히 이 곳을 뜨는 것이었는데 앞에 신관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다가가기가 곤란했다. ―뭘 모르시는군요. 라이메데스님은 블러드 아미의 부총관이라구요! 당연히 상대가 가능하죠.―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레이네가 말했다. ―하지만……. 저 자, 정말 대단한 신성력인데요? 신성(神聖)을 타고난 존재인 것 같군요.― 레이네가 말하고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앞으로 한 걸음 내딛은 자의 머리는…… 청록빛이었다!! 뭐, 뭐야! 저거 에세렌 아냐? "흐음, 저 녀석이 이렇게 강한 신성력의 주인…… 하긴……." 저번에 만났을 때도 무진장 강한 기운을 느끼긴 했었다. 하지만 에세렌이 어떤 기운을 뿜어내든 라이메데스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얼굴로 손을 뻗었다. 에세렌의 몸에서 피어오른 휘황한 광채는 라이메데스 쪽으로 돌진해 온 몸을 휘어 감았다. 하지만 라이메데스에게 치명상을 안겨 주기 이해 날렸을 것이 분명한 빛의 파편이 흩어지고 난 뒤에도, 라이메데스는 표정 하나 변함 없이 멀쩡했다. 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놔라." 신관들은 조금 당황한듯 했지만 곧 그 분위기를 억지로 수습하며 말했다. "도대체 무엇을 내놓으라는 것인가!!" 한 놈이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라이메데스놈은 여전히 차분히 말할 뿐이었다. "그 녀석만 내놔라. 그러면 조용히 사라져주마." "뭘 내놓으라는 건가! 교단의 보검인 성녀의 검을 가져간 것도 모자라서 이번엔 또 뭘 원하는 거냐!" 신관 중 한 놈이 참지 못한 듯 라이메데스에게 성급하게 달려들었다. 신관 몇몇이 깜짝 놀란 듯 그 놈을 잡으려 했지만, 라이메데스의 손이 더 빨랐다. 빛과 같은 움직임! 파샥!! ……움직임의 뒤에는 뭔가 으깨지는 소리가 났다. "내놔라." 라이메데스의 손에서 검은 것이 일렁인다고 생각한 순간, 그것이 그대로 놈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순백의 옷 위로 혈향이 번져 나간다. "같은 꼴이 되고 싶지 않다면…… 내놔라." 조금의 어투 변화도 없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라이메데스를 보았다. 신관 따위는 수십, 수백, 수천을 베어 넘기고 마력탄으로 찢어 죽이고 그 뼈를 부수고 살을 씹어도 그 어떤 감흥도 받지 않는 것이 우리들 마족이다. 아니, 오히려 쾌락에 몸을 떠는 것이 우리 마족들이다. 지금 라이메데스는 감정 없는 눈으로 신관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린!!!" 라이메데스에 의해 완전히 목이 날린 그 녀석을 보고 깜짝 놀란 비명을 지르며 누군가가 달려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순간 움찔했다. 청록색 머리카락이 뒤로 길게 날리고 있었다. 에세렌!! 라이메데스의 손이 그런 에세렌을 향해 차분히 뻗어져 있다. "젠장맞을!! 야, 안 돼!"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그 신관이 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질렀다. 라이메데스는 내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라이메데스의 손에 뭔가 맺혀질 듯 했을 때 나는 손에서 뭔가 굉장한 것이 끓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틈이 없었다. 나는 그대로 미친 듯이 돌진했다. ― 칼레들린님!! 안 돼요!!!! 지금 신관들에게 잘못 닿으면....!!― 레이네가 깜짝 놀란 듯 외쳤다. 그래. 이대로 달려간다면 신관들이 친 실드에 그대로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따위건 아무래도 좋아. 제길맞을, 그런데 내가 왜 지금 뛰고 있는거야? 놈이 나를 살려주었다는 걸 안 이상, 그 원수를 갚기 전에 저 놈이 죽게 놔둘 수는 없어서인가? 아아, 몰라! 나 정말 마음이 좋아서 큰일이다. [그들의 신성력을 조심하십시오.] 로시엔의 당부 조차 귓등으로 흘러가버린다. 그저 본능적으로 다리가 뛰고 있다. 내가 갑자기 나타나 달려오자 신관들은 놀란 표정으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나는 상관않았다. "헉! ...어, 어서 돌아가십시오!!" "사악한 마족입니다!!" 나도 사악한 마족인데? "돌아가십시오!! 어서!!!" 돌아가면 너희가 라이메데스를 이길 수는 있는거냐? "라이메데스!" 신관들의 한 가운데에 둘러 쌓인 채로, 나는 고함을 버럭쳤다. 순간, 에세렌 쪽으로 냉정한 손을 뻗고 있던 라이메데스놈이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보았다. 나와 녀석의 초록색 눈이 마주친 순간, 놈의 손이 스르르 떨어져 내렸다. 녀석은 잠깐 그 자세 그대로 서선 나를 빤히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칼레들린?" "……." 나는 말없이 서 있었다. 신관들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내 주위를 둥글게 감쌌다. 라이메데스는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신관들을 죽 한 번 돌아보았다. 신관들은 내 몸 주위로 점점 더 압박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분명 그것은 애정표현이었지만 나는 가득한 신성력으로 충만된 놈들이 다가오는 것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크엑!! 정말 기쁘지 않단 말이다! 나는 여차하면 검을 휘두를 셈으로 팔을 들었다. 그런 나를 보고 있던 라이메데스가 비교적 안정된 음성으로 말했다. "그 녀석만 건네준다면 돌아간다." 신관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한 번 보더니 더더욱 무서운 눈으로 내 쪽으로 다가와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리 봐도 나를 [보호]하는 것으로 밖에는 안 보이는 그들의 행동이 하도 어이가 없어져서 그들을 밀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손에 닿는 감촉에는 고통이 없었다. [신성력]이라는 것은 마족에게 고통을 준다고 들었는데…… 그것은 단순한 [신성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이 담긴 공격]을 말하는 것이었나? "비켜!! 난 저 놈에게 갈 거다." 하도 나를 조이고 있기에 화가 난 나는 그들을 발로 뻥뻥 차대며 말했다. 하지만 하얀 옷깃을 걸치고 바람불면 그대로 넘어갈 것 같은 비실비실한 신관놈들은 의외로 굳건히 버티면서 더욱더 나를 감쌀 뿐이었다. "당신에게 희생을 강요하진 않습니다! 얌전히 있으십시오!" 신관 중 하나가 크게 외쳤다. 나는 더더욱이나 어이가 없어져서 멍한 얼굴로 라이메데스를 보았고 라이메데스 역시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더니 곧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손에 암흑을 모으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여기 있는 놈들을 다 죽이고라서도 나가겠다는 의지가 놈의 두 눈에 차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의기 충만해 있던 라이메데스의 분위기를 그대로 박살내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니……. "나는 물러서지 않겠다! 네가 아무리 달라고 해도 이 분은 주지 않겠어!!" 그렇게 말하면서 내 앞을 가로막은 존재는 에세렌이었다. 신관들이 빽빽이 들어찬 그곳을 어떻게 용케 기어 들어온 에세렌은 내 팔을 살짝 잡았다. 그리곤 라이메데스를 보며 외쳤다. "너같은 변태마족에겐 절대 주지 않아!!!" 그렇게 에세렌이 외친 그 순간, 나는 너무나도 황당해서 그 자리에서 완전히 얼어버렸다. "변……태 마족?" 그 말을 한참만에야 이해한 듯, 라이메데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고, 때아닌 차가운 바람이 나와 라이메데스 주위에 휘몰아쳤다. 허허, 허허허허허. ---------------------------------------------- 줄맞춤이 더 편하신가요? 편하시다면 앞으로 이렇게 할 생각인데... 리플 달아주세요. -------------------------------------------------------------------------------- Back : 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3 (written by 제온) Next : 3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1 (written by 제온) -------------------------------------------------------------------------------- -------------------------------------------------------------------------------- Total access : 3769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10th November 2001 22:29:56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 Name : 제온 Date : 25-10-2001 14:29 Line : 349 Read : 121 [5]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3 -------------------------------------------------------------------------------- -------------------------------------------------------------------------------- Ip address : 211.55.224.4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라이메데스의 흰 로브 자락은 선선한 햇빛을 받아 그 면모를 마음껏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내가 좀 빨아 입으라고 했거늘……. 라이메데스의 로브는 한 교단의 신전을 습격한 '대단스럽고 무모한' 마족이 입고 있는 옷이라고 보기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꾀죄죄하고 지저분했다 . 그리고 바람에 하늘거리는 더러운 로브 자락 사이로 얼핏얼핏 들어나 보이는 금발. 라이메데스는 바람에 몸을 맡긴 로브 자락을 아무렇게나 방치해 둔 채 뚫어져라 에세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푹 뒤집어쓴 로브 때문에 얼굴 표정이라던가 하는 것이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에세렌을 향한 그 시선이 매섭다는 것 하나는 알 수 있다. 찌르르, 하고 내 팔까지 소름이 돋는 것을 보면. "노려봐서 어쩌겠다는 거지, 이 사악한 마족!!" 갑자기 에세렌이 버럭 고함을 쳤다. "난 절대로 너에게 이분을 넘겨드릴 수 없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분은 지키겠다. 여신 마리에나님과 성녀 이루엔님의 이름을 걸고!!" 에세렌은 라이메데스의 눈길을 당당하게 받아내며 소리 쳤다. 하지만, 소리는 커다랗게 쳤다해도 역시 라이메데스쯤 되는 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감은 대단한 것이라 에세렌의 몸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떨리는 양 주먹을 너무 꼭 쥐어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지 않을까 하고 걱정마저 들 정도였다. 꾹 다물린 입술은 파리하게 보인다. 에세렌의 하늘하늘하고 품이 넓은 흰빛의 신관 옷ㅇ,ㄴ 길게 늘어뜨려져 내 팔목 언저리까지 흘러 내려와 있다. "이「변태마족」!!!" 나는 거듭거듭 '변태'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에세렌을 빤히 바라보았다. 에세렌의 눈에는 투지와 다짐이 들끓고 있었다. 나는 잠시 의아해졌다. 물론 라이메데스놈이 여태까지 내게 보여준 행동이 그리 정상적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마계에서 행해왔던 그 유치한 짓거리도 그랬고, 인간계에서 보여줬던 기타 등등의 행동도 전혀 어른스럽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아니, 어른스럽지 못한 정도가 아니었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지만 저 놈이 변태 마족이라고까지 불릴 여지가 있던가? 단호하게 아니, 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 같은 자리에서 변태 운운할 만큼 라이메데스는 이상한 놈은 아니었다. "대체 왜 내가 변태마족이라는 거지?" 에세렌이 그렇게 소리치고, 신관들이 하나 둘 씩 다시 신성력을 집중할 때쯤, 하늘에 뜬 채였던 라이메데스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뱉어냈다. 그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는 어조였다. 여전히 로브에 푹 덮여 있어서 얼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말하고 있는 그의 표정은 내 머릿속에서 너무나도 완연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황당하다는 어조로 그렇게 물은 라이메데스를 향해, 하이 프리스트은 듯한 작자가 붉어진 얼굴로 버럭 고함을 쳤다. "시치미 떼지 마라, 이 더러운 마족!!" 라이메데스의 로브 자락에서 벗어난 금색 올 몇 개가 바람에 부드럽게 휘어졌다. '더러운 마족'이라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잠깐 몸을 떤다 싶었던 라이메데스의 손이 미미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대지 전체에서 천천히 무형의 반동이 느껴져 오기 시작했다 에세렌은 그런 라이메데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더니 양 팔을 들어 천천히 내 몸을 감싸안았다. 그의 두 팔이 내 몸을 감싸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나는 움찔하며 몸을 틀었다. 그런데 내가 막 그의 몸밖으로 벗어나려는 그 때, 에세렌이 내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가만히 있어주세요, 칼레들린님. 저 마족이 뭐라고 한다 해도 당신을 보내지 않을 겁니다. 저 마족도 결국 '레이디안' 같은 변태마족일 터. 그런 놈에게 당신을 보내지는 않습니다." "……?" '레이디안' 같은 변태마족이라니? 나는 에세렌의 말속에 섞여온 한 존재의 이름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그 레이디안이라는 것이 뭐냐고 물으려는 순간, 그런 내 태도를 오해했는지 에세렌이 갑자기 나를 더욱 꽉 안았다. 그리고 작게 속삭이는 에세렌. "두려워하지 마세요." ……난 네가 더 두렵다. 이거 좀 놔라. 날 질식사시킬 참이냐? 나는 숨을 바짝 죄어오는 에세렌의 손에 켁켁거리면서 빠져 나오려고 애썼지만 에세렌이 워낙 나를 세게 안고 있는 바람에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젠장할!! "잠깐. 지금 너…… [레이디안]이라고 했나?" 내가 에세렌의 품안에서 켁켁대면서 버둥거리고 있을 때, 라이메데스의 떨떠름한 말소리가 들렸다.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에세렌이 대답했다. "그렇다, 마족이여!! 너도 저 레이디안과 같은 목적으로 이 분께 온 것이 아닌가!!" 에세렌이 그렇게 말한 직후였다. 레이네가…… 또…… 떠들기 시작한 것은. ―레이디안? 레이디안이면 서열 87위의 마족, 레이디안 유네샤 크로커스님을 말하는 건가? 으음?― "뭐야? 아는 마족이야?" 보통 때였다면 다시 끼여들기를 시도하는 이 방정맞은 마물을 향해 돌을 던질까말까를 고민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나는 깜빡깜빡 반짝이는 레이네의 노란눈을 내려다보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알다 뿐인가요!! 레이디안님은 세이아나님과 절친한 마족인 걸요.― 사탕을 좋아하는 어린 아이에게 사탕을 물려줬다 해도 이렇게나 즐거운 목소리로 얘기하진 못하리라. 레이네는 내 말에 신이 난 듯 대꾸했고 난 그런 레이네를 향해 피식, 김빠지는 웃음을 던지며 말했다. "……세이아나와 친하다는 걸 보면 그 레이디안인가 뭔가하는 마족도 제정신인 마족은 아니겠군." 나는 세이아나와 절친하다는 말에 단숨에 그렇게 결론을 지었다. 순간, 발끈 했는지 레이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듣고 보니 불쾌하네!!! 칼레들린님, 세이아나님이 뭐가 어떻다고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지금 몰라서 묻는 거냐? 세이아나가 어떤 마족인지는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나? ―쳇!! 레이디안님은 정말로 좋은 분이고, 이상한 마족이 절대로 아니예요. 다만…… 좀 ……이상…… 한 취미가 있는 게 문제일 뿐.― 이상한 취미? 나는 잠시 그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고개를 돌려 노란빛의 보석을 내려다보았다. 한참동안 그 노란빛의 보석은 침묵했다. 미미한 침묵의 기색이 우리들의 주위를 찬찬히 맴돌자 난 조금 조바심이 났고, 그래서 천천히 질문했다. "그 이상한 취미라는게 뭐지?" 천천히, 천천히 보석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미소년 수집벽이 있으세요.― "……." 쿨럭!! 쿨럭쿨럭쿨럭쿨럭쿨럭!!! "미, 미, 미소년 수집벽?" ―....예. 인간계에서 꽤나 유명할 정도지요....― 그, 그러니까 지금 말이야.... 나는 잠시 상황이 정리가 되지 않는 느낌에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레이네가 뭐라고 뭐라고 다시 떠들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그 레이디안이라는 마족의 변호론이었다.) 일단 무시했다. 나는 에세렌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여전히 버둥거리면서도 하나하나 상황을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상황 1. 레이디안이란 마족이 있다. 세이아나의 친구라는 군. 절대 평범한 마족은 아닐거다. 상황 2. 레이디안이라는 이 마족은 미소년 수집이라는 괴상한 취미가 있는, 이른바 [변태마족]이다. 상황 3. 라이메데스는 지금 신전까지 찾아와 나를 데려가려고 하고 있다. 상황 4. 신관들은 지금 라이메데스가 나를 데려가려는 이유가 그 미소년 수집벽이 있다는 레이디안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상황 5. 레이디안이란 마족이 수집하는 것은 미소년이고, 지금 라이메데스가 데려가려고 하는 것은 나다. 결론. 나는 미소년이다. "……이게 아니잖아." 나는 내가 내린 결론에 스스로가 어이없어져서 머리를 살짝 친 다음 다시 결론을 내렸다. 결론. 저들은 오해를 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오해를. 라이메데스가 [미소년 수집벽이 있는 변태마족]이고 그래서 나를 납치하려고 한다는. "잠깐…… 핫, 핫핫핫핫……." 내가 이렇게 어이가 없는데 라이메데스는 어떠할 것인가. 라이메데스는 잠시 머리에 손을 얹고 어이없다는 듯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황당하다는 미소가 그의 입가에 가느다란 포물선과 함께 만들어졌다. 그는 에세렌을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끊어서 거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나를, 레이디안 같은 희한한 취미를 가진 마족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럼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대체 이 분에게 무슨 볼 일 인 거지!! 어제의 일도 네 짓이 아니었던가!! ! 그 사악한 흑마법사를 보낸 것도 당신이었지!!!" 이제 상황은 오해의 강도를 넘어선 상태였다. 신관들은 흑마법사? 라면서 조금 더 긴장을 하기 시작했고 라이메데스는 듣도 보도 못한 그 흑마법사라는 단어가 나온 것에 또 한 번 당황한 듯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고 보니 저 놈이 저렇게 당황하는 걸보는 건 처음 보는군. 에세렌이 사납게 눈을 치켜 뜨며 내 앞을 막아서자 라이메데스는 더더욱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어느 순간 하하, 하고 웃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는 시선을 내게로 향하는 라이메데스의 표정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었겠는가? 있긴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다. "……상당히 불쾌하군. 그 레이디안과 나를 비교하다니." 살짝 미간을 좁히며 말한 라이메데스는 천천히 몸을 낙하해왔다. 흐르는 듯한 바람을 타고 라이메데스의 몸은 천천히 흔들리고 있다. 푸른 숨결이 맞닿은 청량한 공기를 타면서 녀석은 점점 더 지면과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바람을 맞은 신관들은 바짝 긴장해서 내 몸 쪽으로 더더욱 다가왔다. 나는 정말이지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내 뒤에 있던 놈은 나를 바짝 밀었다. 나는 순간 입술을 물었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내 주위를 둘러싸는 바람에 상처가 확하고 눌려서 더 심하게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비릿한 혈향이 조금 번지기 시작했다. 누구보다도 나와 가까이 서 있던 에세렌의 흰 사제복 뒤쪽에 먼저 피가 번졌다. 에세렌은 갑자기 밀려든 피냄새에 놀란 듯 내 쪽으로 고개를 확하고 꺾었다. 그의 눈이 조금 커져 있었다. "칼레들린 ……칼레들린님?" "비켜." 에세렌은 놀란 듯한 표정으로 내 복부를 조금씩 물들이고 있는 피를 보고 있었다. "젠장……. 피 더 흘리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이제 좀 비켜." "칼레들……" "비켜!!!" "……아." 에세렌은 내 갑작스러운 고함소리에 놀란 듯 거의 무의식적으로 한발자국을 비켜섰다. 신관들은 갑자기 내 주변에 균열이 생기자 놀란 듯 저마다 이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나는 에세렌을 한 번 마주보아 준 후 손으로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한발자국씩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놈들은 역시 끈질기게도 내 행보를 방해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교단을 위해서 당신을 희생하게 할 순 없습니다.' ...정말... 미치겠군. 좋다. 이렇게 된 이상……. 챙~!! 요란한 마찰음과 함께 검집에 고이 모셔져 있던 내 검이 빛을 발했다. 은빛 찬란한 광택이 태양빛을 받아 교묘한 빛을 냈다. "거기들, 비켜주실까?" 이젠 무력행사를 해야겠군. ------------------------------------------ 후우....-_-;; ....여러분. 라이메데스... 말인데요. 그녀석... 칼레들린에 대한 이상한 감정 같은 거 없습니다;;; 그저 지켜줘야 하겠다는 감정... 그리고 의무감....뭐 그런거죠;; 헉... 점점 이 칼레들린을 야오이로 몰고 가고 싶어하시는 분들이 느는군요... ...점점 압력도 전달되고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그래도... 허접하지만... 플룻이란게 있다구요....T^T -------------------------------------------------------------------------------- Back : 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4 (written by 제온) Next : 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2 (written by 제온) -------------------------------------------------------------------------------- -------------------------------------------------------------------------------- Total access : 3769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10th November 2001 22:29:58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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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관인 우리가 지켜준다는데… 굳이 저 마족에게 가려는 이유가 뭐냐고!!"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는 신관들은 자기네들끼리 짧게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들은 나름대로 내게 들리지 않도록 애를 쓰며 말을 나누고 있었다. 당연스럽게도 그들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작았다. 하지만. ……난…… 마족이란 말이다. 아무리 작게 중얼거려도 내겐 다 들려!! 귀를 관통해서, 신관들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뚜렷하게 내게로 전달되고 있었는데 들리는 그들의 말은 정말 상상하기 싫은 종류의 것이었다. 사실은 저 소년(저 소년이라는 건 물론 너무나 잘생긴 나를 지칭하는 거겠지?)이 라이메데스라는 마족을 싫어하지 않는 거 아냐? 라는 말을 하는 신관도 있었다. 다른 한 편에서는 교단의 희생을 최소화 하기 위해 자신을 던지는 고귀한 행동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며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저 놈들을 보고 있자니 한마디 하고 싶군. ……냉수 마시고 정신 좀 차려!! 대체, 대체, 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짜증나는 생각을 할 수 있냔 말이다! "젠장. 비…… 켜라." 나는 끊임없이 귓가를 파고드는 그 이상한 목소리들에 더 심한 짜증을 느꼈다. 나는 검을 어느 신관의 목 언저리에 갖다대며 탁하게 외쳤다. 그 바람에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저희들끼리 쑥덕거리던 신관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검을 뽑긴 했지만 설마 그것을 자신들에게 겨눌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들은 내 살벌한 표정을 보고 흠칫하면서 한 발자국을 물러섰다. 나는 그들이 양보한 한발자국 앞으로 내 발을 내딛었다. "대체…… 칼레들린님!! 가지 마십시오!! 어딜 가시는 겁니까!!" 내 뒤에서 에세렌이 외쳐대고 있었다. 난 에세렌의 그 오버성 행동에 푹하고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렇게 오버해대는 에세렌에게 상황을 설명해줄 시간적 여유 따위 내게 없었다. 아마 시간적 여유가 있었더라해도 나는 상황을 설명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쿨럭거리면서 흐르고 있는 복부의 피가 내 걸음을 더욱 재촉한다. ―칼레들린님…… 아까부터…… 피가 너무 많이 납니다.― 그래도 내 걱정을 하긴 하는 것인지 레이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왔다. 나는 여태까지 수다 떠는 거 말고는 전혀 도움을 준 것이 없었던 레이네가 이렇게 염려스러운 한마디를 던지자 조금 감동해서 말했다. "괜찮다." ―괜히 어울리지 않게 폼 잡지 말고 아프시면 아프시다고 하세요.― 하지만, 그 다음 순간 들려온 레이네의 말은 내 감동을 무지막지하게 박살내고 저 멀리로 흩뿌려버렸다. 난 이빨을 부득 갈면서 이 신전에서 나가자말자 이 놈의 보석을 아작내리라고 가슴속으로 깊이 결심했다. 손을 들어 복부를 잡았다. 뜻뜨 미지근한 감촉은 원동력이 되어 나를 움직인다. 신관들은 한 발자국씩만 움직여서 검을 든 내가 나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널찍하게 벌어진 그들의 사제복은 티 하나 묻어 있지 않아 무척이나 깔끔해 보였다. 나는 햇살을 받아 희게 반짝이는 그들의 사제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냉소하고 말았다. 「신관들의 옷은 흰빛이라서 ……피로 물들면 꽤나 보기 좋지.」 저 깨끗한 흰빛의 옷을 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 아이 교육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는 바보 같은 아이에드놈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타고난 성격이 너무나 맑고 투명하고 깨끗하며 주름살 하나 없이 팽팽했던 나.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내가 오늘날 조금, 아주 조금 성격이 나빠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 그 빌어먹을 녀석의 엉터리 교육 때문이었다. 제길! 아무리 제 놈이 마족이라지만 여섯 살짜리 꼬마놈 앞에서 피로 물들면 보기 좋다느니 하면서 살살 웃는 놈이 어딨어! 너무나 순진한 나는 열 두 살 때까지 정말로 신관의 옷에 피가 물들면 보기 좋은 줄로 알고 있었다. 그것이 정말 일반적인 사·실·이고 진·리·인 줄 알고 있었다. 원래 아이란 그런 존재가 아니던가. 의지하는 이를 맹목적으로 믿어버리는 아이 특유의 순진함. 내 순진함에 금이 가게 만들었던 사건은 로시엔과 함께 책을 읽고 있던 도중 내가 불쑥 꺼낸 한마디 말과 함께 시작되었다. 「로시엔, 정말로 그래?」 「뭐가 말입니까?」 로시엔은 갑작스럽게 두서 없이 묻는 내 말에 조금 당황한 듯 반문해왔다. 나는 턱을 괴고 누운채로 뒹굴거리며 말했다. 「그…… 신관들의 옷에 피가 묻어서 새빨갛게 변하면 아주 보기 좋다던데. 그게 정말이야? 너무 예뻐서 그 옷을 입고 싶을 정도라고 하던데.」 나는 순진하게 말하며 로시엔을 올려다보았다. 로시엔은 그런 나를 향해 억지가 다분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한 자 한 자 끊어서 말했다. 「……누가 그러던 가요?」 말은 누가 그러던 가요, 였지만 그 어투는 분명 '어떤 자식이 그 말을 지껄이더냐'에 가까웠다. 나는 로시엔의 그런 반응에 조금 당황해 눈을 껌뻑였다. 「응?」 「누가 그런 얘길 해줬느냐, 이 말입니다.」 로시엔의 목소리는 다시 부드러워져 있었다. 나는 생긋 웃으며 그런 로시엔의 말에 대답했다. 「아이에드가.」 난 그 날, 로시엔의 잔소리를 바가지로 얻어맞고 슬픈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마족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 논하는 아이에드의 웃기지도 않는 주책을 고스란히 들어야만 했었다. 생각하고 보니 정말 우울해지는군. "……." 나는 생각을 멈추고 살짝 머리를 흔든 다음 시선을 올려 하늘을 보았다. 공중에 떠 있는 라이메데스가 보였다. 그는 내가 검을 뽑고 몸을 움직이는 것을 본 직후 곧바로 움직임을 멈춘 듯 했다. 로브 사이로 그의 시선이 번득이는 것이 느껴진다. 그는 비스듬한 시선을 꺾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라이메데스와 신관들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면서 발걸음을 움직여 나갔다. 라이메데스는 자신 쪽으로 걷는 나를 보며 차분하게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런 라이메데스의 차분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저 멀리 있던 누군가가 괴성을 지르더니 다시 앞으로 파다닥 뛰어 나갔다. 그의 그 용기 있는 행동에 자극을 받았는지 그이 옆에 있던 놈들 몇몇도 그 자를 따라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라이메데스를 향해 갑작스럽게 공격을 개시했다. "빌어먹을 마족놈!! 그 태도는 무엇인가!!" "신의 저주가 있을 것이다!!!" 웃기지도 않는, 저주 같지도 않은 저주의 말들과 함께 신관들의 손에서 몇 번의 흰빛이 번쩍였다. 흰빛이 난자하게 주위를 흩트리고, 시각을 방해한다. 난잡한 기도문의 구절이 끝나자마자 뿜어져 나오는 빌어먹을 기운들. 하지만, 뭐라고 뭐라고 떠들며 그 신관들이 아무리 공격을 해도 결국 모든 것이 끝난 자리에 서 있는 것은 티끌하나 묻지 않은 모습의 라이메데스일 뿐이었다. 신관들은 그 어떤 공격에도 치명상은커녕 조그마한 상처도 입지 않는 라이메데스를 보고 곤란을 느낀 듯 입을 악 물었다. 하지만 놈들은 포기하지 않고 재차 공격을 했다. 공격을 받을 때마다 라이메데스의 앞에서는 검은 반투명의 막이 번쩍였는데, 나는 그 검은색의 막이 엔클레이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칼레들린.」 한참 신과들과 투닥거리고 있던 라이메데스의 갑작스러운 전음이 내 귓가를 두드렸다. 나는 여태까지 내가 전음을 보내려고 할 때마다 전음을 고의적으로 막아 두었던 저 놈이 이제야 전음을 열었다는 사실에 일종의 분노를 느끼며 이빨을 빠득 갈았다. 처음부터 전음만 열어놓았어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너, 이 신관들에게 납치 된 것이 아니었나?」 참…… 빨리도 물어보는군. 내가 이 신관들에게 납치돼? 착각도 정도가 있어야지!! 젠장!!! 이래서 모르면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거야!! 너 같이 무식하게 몸이 먼저 행동하는 놈들이 있기에 마계가 발전이 없는 거란 말이다!! 자기 입으로 '비각성, 그것도 반마족이 내뿜는 마기를 알아차릴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다.'라고 말한 주제에…… 네 놈은 그렇게도 머리가 나쁘더냐!! 「……너……. 나가면 죽었어.」 나는 상황 설명대신 내가 제일 하고 싶었던 말을 나즉하게 라이메데스를 향해 뱉어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 발은 천천히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내가 뱉어낸 그 말에 하늘에 옷자락을 맡기고 있던 라이메데스의 몸이 전체적으로 움찔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흠칫했던 녀석은 신관들을 의식한 듯, 곧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녀석은 신관들을 향해 스산한 음색으로 말했다. "……그런 공격으로 내 몸에 상처 하나 입힐 수 있을 것 같은가?" 놀고 있군. 나는 꼴 같지 않게 폼을 재는 라이메데스를 바라보며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는 것을 느꼈다. 「되도 않는 폼 재지 마. ……하여튼 내가 그 쪽으로 갈 때까지 거기서 움직이지마. 더 이상 신전 같은 것도 파괴하지말고. 저 뒤엔 카민도 있단 말이야.」 나는 라이메데스를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움직이지 말 것을 경고했고 놈은 대답대신 가볍게 고겨를 끄덕였다. "알았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방치한 라이메데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조금 더 빨리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관들은 우왕좌왕하면서 패닉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신관들 몇몇이 라이메데스에게 용을 쓰며 덤비고 있는데 라이메데스가 조금의 상처도 입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당황한 모양이었다. 내가 검을 들이대면 이미 라이메데스에게 시선을 빼앗길 대로 빼앗겨 입술이 퍼래저디록 그것을 깨물고 있던 신관들은 주저주저 하면서 길을 터 주었다. 걸음이 바삐 움직였다. 이제 피는 조금씩 베어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줄줄 흐르고 있었다. 손금을 타고 가느다란 핏물이 고인다. 하지만 고통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신관들의 역한 냄새가 진동하는 틈을 지나 라이메데스에게 근접할 무렵, 나는 한 노인과 마주할 수 있었다. 풍겨져 나오는 분위기로 미루어 이 교단의 하이프리스트라고 짐작했던 노신관이었다. 그는 연신 뭔가를 웅엉웅얼거리고 있었는데 내가 검을 들이대며 비키라고 말할 때까지 그 자리에 꼼짝않고 선채로 라이메데스를 향해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붙은 것 같은 그 노신관을 향해 말했다. "비켜." 그는 그제서야 천천히 눈동자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노신관의 얼굴 위로 찬찬한 씁쓸함이 번지는 것이 보였다. "……저희 신관들을 믿지 못하는 거요?" 노신관이 씁쓸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목에 더욱 깊이 검을 들이댔다. "잔말 말고 비켜."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섰다가 천천히 시선을 떨구어 자신의 목 언저리에 내려와 있는 내 검에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헉!!!" 조금 씁쓸하면서도 무력감이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 노신관이 갑자기 버럭 고함을 쳤다. 나는 그의 엄청난 비명성에 당황해 얼른 한 발자국을 뒤로 가져갔다. 뭐, 뭐야. 내가 저를 죽일까봐 저렇게 놀라는 거냐? 라이메데스와 몇몇 신관들의 놀이(아무리 봐도 그건 라이메데스가 즐기고 있는 짧은 놀이거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를 하고 있는 걸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신관들도 갑작스러운 그 비명소리에 놀랐는지 내 쪽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 그건!!" 헉, 하는 심음소리와 함께 한 발자국 물러섰던 노신관의 발악하듯 외치고는 손을 들어 내 어깨를 턱하고 잡았다. 뭐, 뭐, 뭐냐!! 나는 내 어깨로 올라온 그의 쭈글쭈글한 손을 느끼곤 몸을 떨었다. 견딜 수 없는 혐오감에 몸이 반응했다. 그의 몸 전체에서 은은하게 품어져 나오는 신성의 냄새에 질식할 것 같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내 어깨를 잡고 있던 그의 손을 처내고는(감히 누구의 어깨에 손을!!)몸을 휙하고 돌렸다. 그리고 화려한 동작으로 그 신관의 목에 검을 재차 들이댔다. "……뭐하자는 거냐." 노신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멍한 눈으로 나와 자신의 목 언저리를 겨누고 있는 검을 보고 있었다. 그의 얼이 빠진 듯한 모습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가겠다고 했다. 신관이든 뭐든 상관하지 마라. 신의 의지를 대리하는 자라는 명목하에 자유의지조차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러나 이 노인은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마치 못 볼 꼴을 본 자처럼 눈을 크게 뜨더니 어느 순간 커다랗게 소리를 쳤다. "잘못 보지 않았다!! 이, 이 검은……! 이 검은!!!" 그는 갑자기 외처더니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검신을 확 하고 움켜쥐었다. 검 날은 쥐지 않았기에 손엔 베지 않았지만, 충분히 위험한 자세였다. 나는 순간 당황해서 검을 뒤로 휙하고 뺐다. 그 바람에 노신관의 손이 날카로운 단면과 스치면서 약간의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노신관은 그 정도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이상한 감정들을 수반하고 있었다. 「아뿔사! 칼레들린, 어서 검 집어넣어!!」 내가 노신관의 모습에서 어딘지 모르게 이상함을 느낀 터짐과 동시에, 여러 신관들과 노닥거리고 있던 라이메데스가 난데없이 전음으로 커다랗게 소리를 질러왔다. 나는 고막이 터져 버릴 것 같은 그 소리에(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저걸…… 아예 삶아 먹어 버릴 테다.)욕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역시 성격 좋은 나는 억지로 자제하며 물었다. 「왜?」 대신, 나는 마주 고함을 질러 주었다. 그러자 라이메데스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터프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고함을 질렀다. 「어서!! 젠장!!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어서 넣으란 말이다!!!」 당황을 담은 그 목소리는 절박했다. 나는 그런 라이메데스의 반응에 조금 움찔했다. 저 놈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다는게 조금 찜찜하긴 하지만 뭐,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니까 저러는 거겠지. 나는 라이메데스의 진지한 태도에 눌려 노신관의 목에 겨누었던 검을 수거하려고 했다. "……성녀의……검!! 역시 성녀의 검이다!!!" 그러나 나는 검을 수거하지 못했다. 갑자기 외친 그 말과 함께, 노신관이 내 검을 다시 와락 붙잡았기 때문이다. 손을 타고 내리는 피는 상관도 하지 않는 태도였다. ―……이거, 뭐가 좀 이상하군요.― 레이네가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 오늘 중으로 한 편 더 업합니다... -------------------------------------------------------------------------------- Back : 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5 (written by 제온) Next : 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3 (written by 제온) -------------------------------------------------------------------------------- -------------------------------------------------------------------------------- Total access : 3769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10th November 2001 22:30:03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 Name : 제온 Date : 25-10-2001 14:30 Line : 204 Read : 244 [7]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5 -------------------------------------------------------------------------------- -------------------------------------------------------------------------------- Ip address : 211.55.224.4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성녀의 검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지금 내 이 검을 보고 한 말이냐? 나는 내 검의 검신을 붙잡은 채로 벌개진 눈을 빛내는 노신관을 보며 온 몸에 소름이 돋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광기를 머금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칼레들린! 당장 검을 집어넣어라, 당장!!!」 다시 라이메데스의 목소리가 내 귓전을 파고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라이메데스를 올려다보았다. 라이메데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젠장. 이미 늦었군.」 뭐? 라이메데스의 한숨을 내쉬는 듯한 어조에 나는 다시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노인네가 천천히 검을 자신 쪽으로 당기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신관인지라 당연히 팔목 힘이 없고, 나는 마족이기에 팔목 힘이 세다. 당연한 공식 정립. 그는 내 검을 단 1세리하도 잡아당기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검을 잡아당기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노인네는 이상한 광채를 띄는 눈으로 나와 내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갈색으로 번뜩이는 얼굴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의구심과 당황함, 그리고 감탄이 가득히 묻어 있었다. 그는 얼굴에 가느다란 귀기마저 흐르고 있었다. 도저히 아까 전의 그 신성력을 몸에서 뿜어내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 "성녀의 검이라니…… 설마?" 뒤에 있던 신관들 중 하나가 갑자기 외쳤다. 나는 뭔가 상황이 아까보다 훨씬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바로 그 설마다!! 12년 전 더러운 마족의 손에 강탈당했던 그 검이다!! 성녀의 검이다!!!" 노신관이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노신관이 발악하듯 외친 그 말은 주위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뭐라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형식이었던 그들의 목소리는 대번에 높아졌고, 엄청난 흥분이 그들의 목소리 속에 녹아 있었다. 뒤편에 있던 신관놈들은 천천한 걸음으로 다시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아까 전과는 사뭇 달랐다. 아까 전에는 단순히 라이메데스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한 구실로 놈들이 다가왔다면, 이번에는 광기 비슷한 것을 머금은 눈을 하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성녀의 검이야…… 허허허…… 결국 다시 돌아오는군. 암, 그렇고말고. 성녀의 검이 드디어 제자리를 찾는 게야……. 여신의 은총이야……." 노신관은 기분 나쁜 미소를 입에 머금은 채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검을 당기고 있었지만 내겐 다행히도, 그 검은 정말이지 1센티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파바바바박!! 노신관과 내 눈 사이로 강렬한 불꽃이 튀었다. 노신관은 아무리 잡아당겨도 검이 끌려오지 않는 걸 알았는지 이번에는 검을 쥔채로 한 발자국씩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라이메데스는 신경도 쓰고 있지 않았다. 노신관의 시선이 천천히 나를 압박해 들어왔다. 쪼글쪼글한 얼굴이 바로 눈앞에서 비춰진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내 검이 성녀의…… 검이라고?" 나는 내 검에 바짝 힘을 주었다. 그러자 노신관의 손은 간단하게 내 검에서 튕겨져 나갔다. 나는 노신관의 손에서 나온 피가 묻은 은색의 검을 번쩍 들어서 놈의 면상에 들이댔다. 순간, 나와 노신관을 보던 신관들과 노신관의 얼굴에 당혹이 떠올랐다. 노신관이 한 발자국 물러났다. "이 어디가 성녀의 검이라는 거냐?" 아이에드의 성 한 구석에 얌전히 걸려 있던 검일 뿐인데 말이다. 이봐, 마족의 성에 성녀의 검이 걸려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 거야? "틀림없어! 그…… 그 검은!! 켐 알슈타드!! 분명히 성녀의 검이다!!" 나는 움찔했다. 확실히, 이 검의 이름은 켐 알슈타드가 아닌가. 노인네는 홀린 듯한 눈으로 다시 다가오더니 이번에도 내 검을 움켜쥘 듯한 자세를 취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런 노인네의 손을 피했다. 신관들이 하나 둘씩,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성녀의 검……." 뭐, 뭐? 뭐야, 이것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칼레들린!」 저 멀리서 라이메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놈을 보았다. 놈은 내게 저 쪽으로 피하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손에 이글거리는 것이 맺혀 있는 걸 보아하니, 저걸 던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있으니 그러지는 못하고. 그의 눈은 급하다고, 어서 피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젠장!! 피할 곳이 있어야 피할 것이 아닌가!! "성녀의 검이다." 「거기서 나와!」 위험스러운 기운이 하이 프리스트인 듯 보이는 그 노신관의 몸을 뒤덮으며 위압적으로 뻗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바짝 긴장해서 검을 쳐들었다. 「젠장!! 내가 내려가고 말지!!!」 그 말과 함께 라이메데스의 몸이 밑쪽으로 움직였다. 그를 막고 있던 신관 네다섯의 움직임은 라이메데스의 엄청난 힘에 단 번에 떠밀렸다. 그런데. 라이메데스의 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라이메데스의 발이 땅에 닿자마자, 지면에서 요란한 빛의 무리가 일었다. 나는 보았다. 황금색! 부드럽게 지면을 흔들며 지나가는 황금의 빛 위로, 투명한 흰빛이 덧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빛무리가 요란스럽게 훑고 지나간 그 자리에는 거대한 진이 그려져 있다. 나는 놀라서 입을 헤 벌렸다. 저거…… ……봉인진이다. 지면에 발을 댄 라이메데스도 자신이 내려선 곳이 봉인진 바로 위였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인상을 일그러 뜨렸다.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 당황한 것도 같았다. 라이메데스를 상대하고 있던 신관이 비죽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어리석은 마족이여! 네 자신을 너무 과신했구나! 너에게 여럿이서 공격을 가한 주된 목적은 네 눈을 피해 진을 긋기 위해서였다! 하하하하핫!!" 그의 목소리에 라이메데스의 눈이 일그러졌다. 놈은 잠시 눈을 감고 봉인진 한가운데를 보고 있다가 눈을 부릅떴다. 구우우우우우우웅. 그리고 그 소리와 함깨 뭔가 괴상한 것이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신관들은 깜짝 놀란 듯 뒤로 물러섰다. "이, 이럴수가!! 말도 안돼!!" "시, 신력이!" "……봉인진이 흔들린다!!" 봉인진을 지탱하는 것은 신관들의 신성력인 듯. 하지만 라이메데스가 본격적으로 마기를 분출해내자 황금빛이 부드럽게 맴돌고 있던 봉인진은 엉망진창으로 얽히기 시작했다. 라이메데스의 엄청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봉인진이 겉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관들은 입술을 악 깨물고 봉인진을 유지하는데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5분이면 이 봉인진은 깨진다.」 귓가로 라이메데스의 전음이 들려왔다. 「난 신경 쓰지 말고 앞을 봐.」 라이메데스의 말에 나는 움찔하며 시선을 돌렸다. 아직도 그 기괴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노신관의 얼굴이 보인다. 나는 보인진 안에 갖힌 라이메데스 녀석이 조금 걱정되었지만 로브 사이로 얼핏 보여진 미소에 정신을 차리곤 머리를 흔들었다. 노신관은 라이메데스가 어떤 일을 당하든 전혀 상관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눈은 오로지 나, 나, 나를 향해 있었다. 그 어떤 것도 비추지 않을 것 같은 탁해지고 붉어진 그의 갈색 눈동자. 그는 흐릿한 눈동자를 내게 들이대며 말했다. "……그 검을 내게 잠시 보여주겠소?" "싫다면?" 정말로 싫다. 성녀의 검이라고? 웃기지마! 아이에드가 가끔씩 정원에 날뛰는 꽃을 꺾을 때나 애용되곤 하던 이 검이 무슨 성녀의 검이야!! "……그 검을 내게 보여주시오." 이번에는 조금 강압적인 말투였다. "싫어." 내 반복된 거절에 그자의 눈썹이 위로 치켜올려졌다. "……그 검……은 어디에서 구한 건가?" "말해야 할 의무가 있나?" "의무가 있을 거요." 노신관의 눈빛은 험악했다. 그가 천천히 손을 드는 것이 보인다. 나는 그가 신성력을 쓰려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몸의 털이 비죽 섰다. 노신관이 말했다. "그 검은 우리 교단에 있어서 너무나도 소중한 것. 그 검은 분명 우리 교단의 것이다." "이건 내 검이다." "……돌려주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도?" 노신관이 진지한 얼굴로 물어왔다. 협박인가? "칼레들린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내가 봉인진에서 나감과 동시에 이 교단의 건물은 사라질거다." 저 멀리서 라이메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들은 신관들은 다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간간히…… '역시 변태마족이었어.'라는 소리도 들리는 것이 영 기분 나쁘군. 「조심해라. 그리고…… 내가 갈 때까지 그 검은 절대로 넘기지마. 절대로!」 라이메데스의 목소리는 결연했다. -------------------------------------------------------- 후우..... -_-.... 우우우우우우.....-_-; 휘유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ㅇ_ㅇ;; -------------------------------------------------------------------------------- Back : 8 : [삭제공지]아... 안녕하세요...T^T (written by 로차) Next : 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4 (written by 제온) -------------------------------------------------------------------------------- -------------------------------------------------------------------------------- Total access : 3769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10th November 2001 22:30:06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 Name : 제온 Date : 06-11-2001 13:36 Line : 88 Read : 69 [9]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6 -------------------------------------------------------------------------------- -------------------------------------------------------------------------------- Ip address : 210.95.16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나는 검을 바짝 쥐고 노신관을 노려보았다. 울렁거리는 세계 속에 내가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구토감이 치민다. 라이메데스의 말대로 검을 똑바로 고쳐 쥔 나는 신관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 검은 12년 전 마족에게 빼앗겼던 치욕적인 역사가 있는 교단의 보검이다. 어째서 당신이 들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그 검을 넘긴다면 그 검이 어떤 경로를 통해 당신의 손에 들어왔는지 묻지는 않겠다." 하이 프리스트라고 했던 노인네가 근엄하게 말했지만, 나로서는 우습게 들릴 뿐이었다. "웃기네. 결국 나한테서 도둑질하겠다 이거잖아." 나는 차갑게 웃었다. 내가 입 한 가득 조소를 머금기 무섭게, 나를 둘러싸고 있던 신관들의 얼굴이 단체로 벌개졌다. 마치 토마토처럼. 훗, 원래 정곡을 찔리면 그렇게 얼굴이 붉어지기 마련이지. 괜히 찔리니까 얼굴 빨개지는 것 좀 봐. "무슨 말도 안 되는……!" 노신관은 당황한 듯 버럭 고함을 쳤다. 하지만 나로서는 피식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일이었다. 노신관은 인상을 확하고 찌푸리더니 몸을 뒤로 획 돌렸다. 노신관이 몸을 돌리고 내게서 시선을 피함과 동시에, 무엇인가가 뒤에서 한발자국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바짝 긴장해서 몸을 앞으로 뺐다. 으스스한 한기가 등골을 훑고 지나간다. 바람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싸늘한 공기가 입술의 온도를 빼앗는다.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던 손은 진득진득해져 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신관들의 틈 사이를 걸어 들어온 남자들을 보고 있던 내 인상이 천천히, 찌푸려졌다. 새하얗다는 점에선 신관들의 옷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지만, 길게 늘어진 신관들의 옷과는 달리 걸어나온 남자들이 입고 있는 옷은 단정하고 폭도 좁았다. 가슴팍에 달린 것은 금속. 손에 들고 있는 하얀 검. "패러딘……?" 나는 움찔하며 작게 읊조렸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레이네가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꺄악! 이걸 어쩐다죠? 패러딘인가봐요!― 나도 패러딘인 거 알고 있으니까 제발 좀 조용히 해. 나는 천천히 입술을 깨물며 검을 치켜 올렸다. 노신관은 나를 한 번 힐끗 보더니 라이메데스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라이메데스는 차분한 태도로 봉인진 안에 있었는데, 노신관이 다가오자 조금 놀란 듯 했다. 라이메데스의 봉인진을 지탱하고 있던 놈들은 노신관이 다가오자 움찔움찔 떨던 몸을 천천히 뒤로 뺐다. 왜 저러는 거지? 노신관은 천천히 몸을 움직이더니 라이메데스가 갖힌 봉인진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더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뻗었다. "……마리에나여! 거울과 빛의 여신이여! 여기, 그대의 미천한 종이 그대의 은총을 원하나이다! 원하는 곳에 한 줄기 빛을!" 그가 그렇게 외침과 동시에, 무엇인가 강렬한 빛이 라이메데스의 주위를 휘감았다.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라이메데스를 가두고 있던 황금빛의 봉인진 위로 또다른 봉인진이 떠올라 있었다. 은은한 빛을 내는 그것은 은빛으로, 기묘한 모양을 갖고 있다. 「라이메데스!」 나는 버럭 고함을 쳤다. 라이메데스는 이중의 봉인진 안에 갖혀 있었고 괴로운 듯 상체를 천천히 숙이고 있었다. 내가 외치기가 무섭게, 라이메데스로부터 회답이 들려왔다. 「크윽! …… 젠장…… 봉인진이 훨씬 강해졌군…… 하지만…… 20분 이내로 어떻게든 해결을 보고…… 가겠다.」 라이메데스는 그 말과 함께 갑자기 숙였던 상체를 들더니 뒤로 고개를 완전히 젖혔다. 구우우우우웅. 노신관의 몸이 뒤로 휘청하고 꺾여졌지만 그것은 일순간이었다. 노신관은 다시 라이메데스쪽으로 손을 뻗으며 봉인진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의 사제복이 덜덜 떨리는 것이 보인다. "20분……." 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패러딘들이 천천히 검을 뽑는 것이 보였다. "검을 내려놓으시오." "너희들은 검을 뽑는 주제에 나보고는 검을 내려놓으라고? 차라리 순순히 죽으라고 말해보시지?" 나는 빈정대는 어조에 패러딘들은 움찔했다. 그들은 무고한 나에게 검을 들이댄다는 사실이 영 찝찝한지 몸을 틀어대고 있었다. 나는 씩 웃어버렸다. 복부에서 쿨럭거리며 넘치는 피가 내 옷을, 내 발끝을, 땅을 적셔대고 있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 까짓 20분쯤. 얼마든지 상대해주지. 나는 검을 들어올리며 거세게 외쳤다. "이 검은 죽어도 안 준다!" -------------------------------------------------------------------------------- Back : 10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7 (written by 제온) Next : 8 : [삭제공지]아... 안녕하세요...T^T (written by 로차) -------------------------------------------------------------------------------- -------------------------------------------------------------------------------- Total access : 3769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10th November 2001 22:30:08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 Name : 제온 Date : 06-11-2001 13:36 Line : 227 Read : 72 [10]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7 -------------------------------------------------------------------------------- -------------------------------------------------------------------------------- Ip address : 210.95.167.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98) 그들이 뽑아든 검은 정확하게 나를 겨누고 있다. 나는 상체를 천천히 숙였다. 성기사들이 자세를 잡기 시작한다. 나는 레이네에게 속삭였다. "이봐, 레이네." ―에?― 얼이 완전히 빠진 듯한 레이네의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그런 레이네를 향해 아주 밝고 아름다운, 아이들의 성장기에 너무나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저기 있는 저 성기사들의 검이 내게 꽂히면 어떻게 될까?" 내가 레이네에게 말을 하고 있는 도중에도 패러딘들은 천천히 간격을 좁혀오고 있었다. 한참을 생각하는 듯 했던 레이네가 말했다. ―흠? 칼레들린님이 꼬치구이가 되겠지요.― "……." 이게 말을 해도 꼭! 나는 밉살스럽게 말을 던지는 레이네를 보며 부들부들 떨며 생각했다가 다시 입술을 세게 깨물며 검을 꽉 쥐었다. 패러딘들의 검이 나를 향해 압박해들어오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레이네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나는 성기사들의 저 검이 나를 향해 내리꽂히면 내가 완전히 꼬치 구이가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렇게 되면 세이아나가 매우 슬퍼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와 동시에, 내가 꼬치구이가 돼서 쓰러지면 네가 박혀 있는 이 검이 저 패러딘들에게 넘겨진다는 이야기를 아주∼ 부드럽고 소프트한 어조로 얘기해주었다. 좀 줄여서. "내가 죽으면 넌 저 늙어빠진 신관한테 넘어간다." 순간, 내 손에 들린 채로 묵묵히 앞으로 겨누어지기만 했던 검에서 일순 미미한 진동이 일었다. 레이네의 보석이 일순 번뜩거리는 듯 했다.보석으로 꼼지락 꼼지락 거렸다. 나는 그런 레이네를 한 대 쳐 준다음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되길 바라진 않겠지?" ―물론입니다!― 레이네가 발악하듯 외쳤고 나는 다시 레이네를 한 대 쳤다. 하지만 내가 치든말든 레이네는 잔뜩 의지가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제가 도와드리겠어요! 가벼운 마기 정도는 실어드릴 수 있어요.― 이게 그런 능력이 있으면서 여태까지 말을 안 해? 이걸 정말……. 나는 다시 레이네를 한 대 치려다가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짧게 말했다. "실어." ―예.― 간단하고 명료한 말이 우리 사이에 오갔다. 아주 정답게 말을 주고받은 나와 레이네를 보고 있던 패러딘 중 하나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혼자서 중얼거리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놈인가?" 말했듯이 나는 귀가 매우 좋다. "방금 뭐라고 지껄였나!" 나는 그 말과 동시에 검에 힘을 주었다. 순간, 검에 미미한 진동이 인다 싶더니 레이네의 눈에서 노란빛이 뿜어져 나와 검을 천천히 휘감았다. 성기사들은 놀란 듯 어어, 하더니 뒤로 물러섰다. 레이네의 기운이 검을 감쌌다. ―훗, 제가 좀 도움이 될 것 같지요?― 뿌듯하게 말하는 레이네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면서 나는 스텝을 길게 뒤로 뺐다. 지끈지끈 꿈틀꿈틀. 내장이 심하게 요동을 치고 있다. 쿨럭거리는 피의 움직임이 내 시야를 가리고 레이네의 꼼지락거림이 묘하게 신경을 자극한다. 짜증이 날 정도로 하얀 옷을 입은 패러딘들의 은은한 우유빛을 띄는 검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향해 들어왔다. 나는 그들을 보며 외쳤다. "신이라는 걸 모신다는 작자가 이렇게 검을 빼들고 무고한 자를 공격해도 되는건가?" 나는 나같은 미소년에 대한 배려라곤 조금도 없는 이 놈들을 향해 잔뜩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맨 앞에 서 있던 한 놈이 대답했다. "당신이 무고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그럼 내 죄가 뭔데?" 나는 검을 휘둘렀다. 팟, 하는 소리와 함께 노란빛이 일었다. 은은하게 마기를 띈 내 검이 그들이 검과 마찰하자 금속이 긁히는 소리가 아니라 이상하게 튕기는 듯한 소리가 났다. 텅. 검과 검이 마찰해서 이런 이상한 소리가 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내 검은 빛을 뿌리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파공음을 그으며 움직이는 검의 움직임은 너무나 눈부셔서 이상할 정도였다. "교단의 보검을 갖고 있으니!!" 내 검을 받아낸 자가 외쳤다. "……그게 죄명이야?" 참 어이가 없군. 성기사들의 눈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다. 신을 받든다고? 웃기지 마. 인간들을 보호해? 웃기는 소리! 어차피 너희들은 신이란 놈들의 발바닥이나 핥아가며 살아가는 족속일 뿐이잖아. 그리고 언제나 정의라는 이름으로 말도 안되는 짓을 행하지! 번드르르한 겉모습과는 달리 썩을 대로 썩은 주제에! "쳇." 패러딘의 검이 내 쪽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문득 레이네가 말했다. ―칼레들린님.― "왜." 나는 이빨을 꾹 깨물며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울리지 않게 폼 잡지 마시고 검 똑바로 잡으세요. 검 끝이 떨리잖아요.― "……." 하여튼 내가 진지하게 가려고 하면 이렇게 방해를 한단 말이다! 대체 내 고결한 이미지는 어디에 버리라고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부다닷,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 녀석의 검이 내 틈을 노리고 들어왔다.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는 검이 내 볼 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다. "젠장할!" 나는 왼손으로 뺨을 만지고는 버럭 화를 냈다. 하얀 볼 끝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감히 내 얼굴에 상처를 내겠다 이거냐!! ―……얼굴 한 번 긁힌걸 갖고 그렇게 화를 낼 필요……- "시끄러!" 난 세게 검을 휘둘렀다. 휘잉,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검과 검이 마찰했다. 휘어지는 검기를 당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검만 내놓으시오. 저희도 당신을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패러딘 중 하나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만 내놓으면 죽이진 않겠다?" 웃기고 있군. 내가 이 검을 뺏겨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려 세가지나 된단 말이다. 첫째, 이 검은 아이에드의 검이다. 이거 잃어버렸다간 마계에 돌아가서 또 무슨 짓을 해야할지 모른다. 나는 죽어도, 정말 죽어도 블러드 아미 청소 같은 것을 하고 싶지는 않다. 둘째, 이 검에는 세이아나가 준 보석이 붙어있다. 그 성질 더러운 여자가 준, 그것도 꽤나 아끼는 듯 했던 이 걸 잃어버렸다가 무슨 소리를 들으란 말인가. 그 성격 더·러·운·여자한테 무슨 말을 들으라고! 셋째. 이게 무엇보다 큰 이유다. 내가 이거 뺏기기 싫다. "흡!" 갑작스럽게 날아든 하나의 검에 내 복부가 스쳤다. 가뜩이나 울컹거리고 있던 복부에서 분출되듯 피가 묻어 나온다. 울컥, 하고 내가 감추고 있던 피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줄줄줄…… 피가 옷깃을 천천히 적신다. 발끝을 적신다. 땅을 적신다. 오랫동안 비를 받지 못해 잔뜩 메마른 땅이 비를 받아들이듯이, 땅은 내 피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옷깃에 맺혀 있던 핏방울은 점점 크기가 커지면서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땅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검을 내려놓으시오!" "싫어!" 텅! 텅! 맞부딪히는 검의 움직임은 무섭도록 날카로웠다. 나는 급소만을 비키며 정확하게 찔러 들어오는 검의 움직임을 이리저리 피하며 발을 움직였다. 나를 둘러싼 것은 총 여섯명의 성기사. 하나같이 무뚝뚝한 얼굴로 내게 칼질을 해대고 있는 그들의 검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나는 짜증이 남을 느끼면서 검을 위로 들어올렸다. "검만 넘기면 된다지 않소! 아까부터 배에서 피가난다는 것도 모르는 겁니까?" 한 녀석이 크게 고함을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몸을 바짝 숙여 녀석의 안으로 들어 간 다음, 검을 위로 치켜올려 녀석의 턱을 노렸다. 녀석은 움찔해서 뒤로 물러섰다. 내가 마족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이기에 사제들은 공격을 하지 않고 있다. 사제들의 공격은 마족에게는 치명적이지만 인간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만큼, 성기사처럼 물질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자들만이 나를 노리고 있는 듯 하다. 이건 그나마 다행인데……. 녀석들은 그리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지쳐서 검을 떨어뜨릴 순간을 노리는 듯 했다. 하긴, 나처럼 잘생긴 녀석에게 검상을 내고 싶은 마음이 들 리가 없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 꼴에 신을 모시는 입장이랍시고 불필요한 살생을 피한다는 말이 옳겠지? 후우, 몸이 쓰러질 것 같다. 아프다. 죽도록 아프다. 아예 죽여라 죽여! "검만 내놓으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귀가 썩었냐! 귓구멍을 파고 똑똑히 들어, 이 자식아! 안 준다잖아!" 패러딘이란 놈들이 이렇게나 끈질긴 줄은 미처 몰랐다. 녀석들은 화가난 듯 다시 검을 들어 나를 공격했다. 레이네도 이제는 수다를 멈춘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검을 높게 쳐들었다. 오른손이 높게 높게 들어올려진 그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욱씬하고…… 복부가 아팠다. "쿨럭! 우욱!" 입술선을 타고,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선명한 붉은 색을 나는 옷깃으로 닦아냈다. 내 검은 옷은 붉은 자취를 감췄다. 한발자국 물러섰던 내가 다시 고개를 들려했던 순간이었다. ―꺄아악! 칼레들린님!― 레이네의 커다란 비명소리가 귓가를 관통했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내 앞에, 무엇인가 하얗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낙하하는 검의 움직임에 소름이 돋는다. 내 몸을 그대로 두토막낼 듯이 움직이는 하얀 검의 움직임에 숨이 막힌다.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향해 내려오는 그 검을 바라보았다. ―칼레들린님! 피하세……― "이러지 마세요! 그만 두란 말입니다!" 레이네의 요란한 비명소리가 들린 그 찰나의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내 앞을 휙하고 가로막는 존재가 있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보았다. 하얗게 휘날리는 로브 자락과, 그 로브 자락 위로 흩어지는 가느다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눈에 들어왔다. 막 내게 검을 찔러 넣으려 했던 패러딘 중 한놈은 에세렌이 갑자기 끼여들자 놈은 놀란 듯 내밀고 있던 검을 서둘러 거뒀다. 에세렌은 손을 크게 벌려 내 앞을 가로막은 채 고함을 쳤다.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죠! 검은 이 분의 것입니다! 이 검이 설령 교단의 보검인 그 검이 맞다고 해도, 이 검은 저 분의 것입니다! 저 분의 소유라구요!" 에세렌의 커다란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몸을 꼿꼿이 세웠다. "물러서십시오, 제가 프리스트 에세렌." -------------------------------------------------------------------------------- Back : 11 : 외전-라이메데스(1) (written by 제온) Next : 9 :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6 (written by 제온) -------------------------------------------------------------------------------- -------------------------------------------------------------------------------- Total access : 3769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10th November 2001 22:30:11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1-11-2001 18:38 Line : 101 Read : 1160 [10]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8 -------------------------------------------------------------------------------- -------------------------------------------------------------------------------- Ip address : 61.82.237.22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물러설 수 없어요!!" 에세렌은 두 팔을 쫙 벌린 채로 고함을 쳤다. 패러딘들이 주춤했다. 에세렌은 견고한 성처럼 내 앞을 막아섰다. 그의 사제복이 바람을 타고 너울거렸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에세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에세렌은 조금 놀라는 기세로 나를 돌아보았다. "비켜." 나는 내 손에 잡힌 에세렌의 어깨를 그대로 밀어내며 말했다. 에세렌은 깜짝 놀란 듯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런 에세렌을 당당한 눈으로 보았다. 신관에게 한 번도 모자라서 두 번씩이나 도움을 받게 되다니. 정말이지 운이 없다는 말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검을 든 채로 거친 숨을 골라 쉬었다. 그리고 저 편의 봉인진을 보았다. 라이메데스는 로브를 엉망진창으로 휘날리는 채로 봉인진 안에 있었고, 노신관은 꼿꼿이 선 채로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후우, 20분은 멀고도 멀었는지 봉인진은 깨질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라이메데스놈, 혹시 내가 피 흘리고 죽은 후에 나오는 건 아니겠지? "케엑!" 입가에 고였던 피를 게워내면서 나는 에세렌의 앞쪽으로 발을 옮겼다. "칼레들린님." 에세렌은 버럭 고함을 치며 내 어깨를 낚아챘다. 나는 에세렌의 그런 반응에 쿠샨(짜증과 히스테리의 여신)이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애무하고 싶어하는 것을 느꼈다. 젠장, 유식한 표현 집어치우고 간단히 말하자면 짜증이 났다는 말이다. "난 신관따위한테 도움 받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비키라고!!" 과다출혈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피를 쏟고 있으면서도 고함을 치는 바람에, 피는 이제 한바퀴 돌다시피 해서 밖으로 분출되고 있었다. 고함을 치는 순간 의식이 흐릿했다. 비틀비틀 검을 드는 아래로는 피가 흐른다. 에세렌이 내 피를 보고 주춤하고 물러섰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젠장―!! 오늘 너 죽었어!!" 귓가를 찢어발기는 듯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나는 그 목소리에 멈칫했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잔잔하게 느껴졌다. 파문을 일으키기 직전, 고요하게 멈추는 샘처럼 내 시간이 정지했다.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할 것 같은 심장의 고동소리가 뚜렷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다. 피가 흐르고 흘러 나조차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 다시 한 번 그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너 죽고 나 죽는다!" 저 멀리서 달려오는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화가 난 듯 쌕쌕거리며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화가 난 듯 쌕쌕거리며 앞을 막는 신관들을 거의 구타하다시피하면서 내 쪽으로 오고 있는 얼굴은…… "카, 카민님?" 에세렌이 그 얼굴을 보며 잠시 기가 막힌 듯한 목소리를 냈다. 그래, 그 놈은 카민이었다. 카민은 거의 나를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녀석의 붉은 눈은 광기를 머금어 번들번들 거렸고, 달려오는 손에는 검이 한 자루 매달린 채였다. 안광이 번들거리는 놈을 보자 불길해졌고, 놈의 손에 매달린 검을 보니 더더욱 불길해졌다. 저, 저 녀석…… 저 검으로 날 베겠다는……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으로 저렇게 달려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내 예상은 적중하지 않았다. 나를 베어버릴 듯한 기세로 달려오던 카민의 움직임은 내 바로 앞으로 다가온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정지했다. 녀석의 시선은 피가 철철 흐르는 내 복부에 향하는 듯 했다. 그와 동시에 눈빛이 바뀌었다. 카민의 시선이 다음 번 움직인 방향은 나를 막아서고 있는 에세렌 쪽이었다. 시선은 다시 움직였다. 성기사들 쪽이었다. 그리고 카민의 시선이 성기사단으로 향한 그 때, 갑자기 카민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당신들이야? 칼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패러딘들을 향해 버럭 고함을 치는 카민. 카민은 날듯이 내게로 달려와 내 복부의 상처를 몇 번 확인했다. ―꺄악! 카민님이 와버렸네요. 쯧쯧∼ 이를 어쩐다지?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되버렸으니. 어쩔거예요? 이런 상황을 만들어 버렸네~ 후후후후후~~― ……내가 미쳤지. 이 따위 보석이 붙어있는 검을 위해서 이렇게 피를 흘리면서 싸우다니. 그냥 확 이 검을 넘겨버려? 차라리 그 편이 낫겠군!! 카민은 피가 새는 내 복부를 바라보더니 한 번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자신의 단검의 앞쪽으로 손을 옮겼다. 평소 카민은 검을 약간 느슨하게 잡는 버릇이 있었는데, 오늘은 조금 자세가 달랐다. 검을 꽉 쥔 카민의 눈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카민과 에세렌의 눈동자가 부딪힌다 싶었다. "칼한테 무슨 짓을 한겁니까." 에세렌은 놀란 듯 한 걸음을 물러섰다. 성기사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카민의 등장에 당황한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다가, 곧 차분함을 되찾으며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는 알 것 없고. 당신들이 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건가?" 사실 내 복부의 피는 꼭 집어 저 자들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뛰다 보니 저번에 흑마법사에게 당한 상처가 악화되어 터졌고, 움직이다보니 그 상처는 훨씬 더 커졌으며 게다가 검으 조금 흔들다 보니 그 상처가 좀 더 깊어졌을 뿐이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오. 다치기 전에 비키시오." 성기사중 하나가 성급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래? 어찌됐든, 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 당신들이란 건 맞는 거겠지?" 카민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카민이 검을 한 바퀴 돌렸다. 빙그르, 하고 검이 한바퀴 호선을 그린다. 햇빛을 반사해내는 녀석의 검이 앞으로 겨누어졌다. "……죽여버리겠어." -------------------------------------------------------------------------------- Back : 11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9 (written by 카르민) Next : 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7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53027 , Current date and time : Friday 16th November 2001 21:54:09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3-11-2001 23:13 Line : 215 Read : 1006 [11]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9 -------------------------------------------------------------------------------- -------------------------------------------------------------------------------- Ip address : 211.220.124.12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피가 튀고, 튀고, 또 튀고……. 미친 듯이 피가 튀고 있다. 울컥거리며 솟는 피보라를 만드는 것은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계집애 같이 생긴 그 녀석. 카민은 평소와는 다르게 매우 과격하고도 거친 공격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일격 필살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검술. 나는 그 녀석이 휘두르는 검을 보며 놀라고 말았다. 카민의 검에는 지금 거침이 없었다. 나도 한 번 카민과 검을 섞어본 적이 있었고, 그 전에 카민이 누군가와 싸우는 것을 감상한 적도 있었지만, 저렇게까지 가볍게 몸을 움직여가며 싸우는 것은 여제껏 본 적은 없었다. 패러딘들 역시 무지막지한 카민의 검에 당황하고 있었다. 카민은 내 앞을 막아서며 큰소리를 쳤다. "난 당신네들이 편안하게 앉아 기도를 할 때 남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던 인간이다! 지금 나랑 장난을 하는 건가? 좀 빠릿빠릿하게 공격을 해보란 말이다! 그래도 신관이라고 내 몸에 칼은 못 박겠나 보지?" 패러딘들은 카민의 그 거친 음에 당황한 듯 했다. 그러다가 문득 카민이 나를 바라보며 짜증 스럽게 말했다. "칼레들린! 나를 그딴 데에다 가둬놓고 한다는 게 이런 거냐? 너 정말 죽고 싶은 거야? 네 목은 대체 몇 개야! 환자 주제에 대체 뭘 하는 거야? ……전에도 몇 번 생각했지만, 넌 대체 네 목숨이 소중하다는 자각은 있는 거냐? 미래에 네녀석 부인이 될 사람이 누군지, 정말 걱정 된다, 걱정 돼!!" "……어떻게 나왔어?" 나는 카민의 말을 은근슬쩍 흘리며 물었다. 급소를 때린 데다가 마력으로 문의 이음새까지 녹이고 나왔는데…… 대체 무슨 수로 거기서 나온 걸까. "뭘 어떻게 나와! 부수고 나왔지!" 챙캉! 챙캉! 부드럽게 휘어지는 카민의 몸. 이 곳 저 곳 틈새를 노려가며 사람을 유연하게 막아내는 그의 검은 평소 때보다 훨씬 정교했다. 카민의 눈에 번들거리는 것은 무서운 살기. 그런데…… 뭘 부숴? "뭘…… 부쉈다고?" "문!" 난 그 문을 분명 마력으로 이어놓았었다. 게다가 가볍게 마기를 들어부어 그 문이 평소보다 몇 배 더 단단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문을 부쉈다는 것은 즉…… 문의 갈고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문 자체를 파괴했다는 말이…… 되는데 말이야……. "……그, 문을 부쉈다고?" "그래!" "……." 이 놈, 이놈은…… 정말 인간이란 말이냐! 그걸 어떻게 부쉈다는 말이지? "칼레들린! 한마디 해두는데, 절대로 움직이지마. 거기서 움직이면 내가 널 죽여버릴 거다!" 카민이 외쳤다. 훗, 네녀석 정도의 실력으로 나를 벨 수가 있을 것 같냐? 나는 피식 웃으며 건물 뒷 편에 기대섰다. 자체 치유력으로 이제 그만 아물 때도 되었건만, 상처는 더 심해질 뿐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프기만 하다. 나는 카민을 보았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검을 움직이는 카민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사신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나는 쓰게 웃었다. 그러고 보면, 저번에 그 초록팅이 놈이 말하지 않았던가.(우웃. 이걸 어쩐다지……;; 이 부분은 통신판에는 안 나왔던 부분이군요-_-;; 그다지 신경쓰지 마시고, 가볍게 넘겨주시길^^;)카민의 예전 별칭이 「사신의 검날」이었다고. ―칼레들린님!― 바로 그 순간, 레이네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흠칫해서 몸을 들었고, 그 순간 내 앞으로 다가온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패러딘이었다. 힐끗 돌아보니, 카민을 다섯명이 묶어두고 있었고 한 남자만이 내 쪽으로 다가온 듯 했다. 일단 저들의 목적은 내 검이니만큼. "검을 내놓으시오." 평범한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 놈이 말했고 난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예고도 없이 그 자의 검이 나를 향해서 달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비켰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하나의 예고도, 하나의 통찰도 없이 달려온 그 검이 노린 곳은……. "쿨럭!" 뜨거운 무엇인가가 얼굴까지 치솟았다. "……우욱." 「칼레들린!」 ―칼레들린님!― "칼레들린!" "칼레들린님!!" 라이메데스와 레이네, 카민, 그리고 에세렌의 목소리가 각각 들려왔다. 나는 멍한 눈으로 내 복부에 꽂힌 검 한자루를 내려다보았다. 희디흰 광채를 흩뿌리는 검이 내 배에 박힌 채로 미동도 않고 있었다. 패러딘은 굳은 얼굴로 내게 다가오더니, 내 손에서 검을 뺏어들었다. 나는 안간힘을 쓰며 검을 뺏기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러기에 나는 이미 너무 약해져 있었다. "……기회를 놓친 건 당신이오." 기회? 무슨 기회? 내 검을 너에게 줄 기회? 내 물건을 얌전히 상납할 기회? 그런걸 놓쳤다고 지금 내게 말하고 싶은 건가? "……흐으." 내가 생각해도 괴상한 소리가 입가에서 났다. 나는 부들거리는 손을 들어 내 복부에 꽂힌 검을 잡아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뽑아냈다. 기분나쁜 음과 함께 검이 뽑혀져 나왔다. 내 검을 뺏어든 그 놈은 내가 복부에 박힌 검을 뽑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난 그런 놈을 향해 작게 웃어주었다. 내장이 삐져 나올 만큼 큰 상처다. 후우, 혹시 이거…… 몸 뒤편까지 꿰뚫린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프다. 아프지만……. 저 멀리서 카민이 뭐라고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은 내 쪽으로 오고 싶어하는 듯 했지만, 그런 그의 앞을 막고 있는 수많은 성기사단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나는 힘이 없는 다리로 서서 패러딘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웃었다. "검…… 내놔……." 나는 천천히 말했다. "……교, 교단의 보검이오." "……내 검이야. 내놔." 나는 성기사의 검을 든 채로 작게 말했다. "내놔." "교단의……." "내놔." "이건 교단의……." "……내놓으라고 했지!!" 속에서 뭔가 커다란 것이 분출되었다. 레이네가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손을 들어 패러딘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놈은 의외로 간단하게 내 손에 들려서 질질 끌려왔다. 신발 밑으로 스며드는 질퍽한 피냄새에 취한 채로, 나는 으르릉거리듯이 말했다. "내놔." 패러딘은 질린 듯한 눈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나에게 검을 내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천천히 오른손에 들린 검을 들어올렸다. 이렇게 된 이상, 베고라도 도로 찾겠다. 내 검이 천천히 들어올려진 순간이었다. 나는 손을 뒤로 빼서 놈의 뒤통수에 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아직 놈은 눈치채지 못했다. "다온! 조심해라!" 그런데 내 검이 녀석의 머리를 베어버리기 적전, 어디선가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내 앞에 있던 놈이 움찔하고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내 검은 간단하게 빗나갔다. 몸이 휘청, 하고 꺾여들었다. 다온이라 불린 그 놈이 내 어깨를 밀어 뜨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저 깊이 처박혔다. 라이메데스가 파괴한 건물의 잔해가 우르르,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칼레들린님! 칼레들린님! 정신 차려요! 칼레드린님!!― 그래도 내 걱정을 하는지, 레이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민의 목소리도 간간히 들려오는 것 같지만 그건 너무 작게 들린다. 레이네의 목소리만이 또렷하게 귓가에 박히고 있었다. 숨이 막혀온다. "……내, 내 검……." 나는 더듬거리듯이 말했다. 패러딘이 나를 한 번 돌아보는 듯 했지만, 그건 그것일 뿐이었다.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검이 섞이는 소리. 아마도 카민이 다시 검을 들고 싸우기 시작한 것이겠지. 구우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우우웅……. 매캐한 건물의 잔해가 입술 사이로 새어들어왔을 때였다. 기우우우우우웅…… 구우우우우웅……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상한 음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무엇인가가 귓가를 찢는다. 내달리는 어떤 음색에 의해 대지가 비명을 지르고, 찢어발기는 듯한 소음에 귀가 터질 것 가다. 그리고, 그 소리가 들린 사이로는…… 「타임 오버다.」 라이메데스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나는 쿡, 하고 웃었다.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짙은 황금빛과 흰빛이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직후였다. 파샷!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아주 작은 소리로, 마치 작은 새가 가느다란 껍질을 깨고 나올 때 내는 그러한 소리와 비슷했다. 내지는, 신을 신은 채로 거울을 밟을 때 나는 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미세한 소리의 그것은 곧, 커다란 황금의 잔향으로 변했다. "보, 봉인진이……!" "하이 프리스트님의 봉인진이……!" "이럴, 이럴 수가!!" 신관들의 경악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황금의 물결 뒤로 환한 흰빛의 광채가 보였다. ************************ 나는 카민이 있을 법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이메데스가 봉인진에서 벗어나고 있다. 저런 모습을 보고 있는 카민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무리 무디기 짝이 없는 놈이라 해도, 이젠 라이메데스가 마족이라는 사실쯤은 알아챘을거다. 아무리 바보같은 놈이라도,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지금, 저 라이메데스를 보고 있는 카민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잘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유쾌한 종류의 것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이 일이 수습되면, 나는 카민에게 뭐라고 해야하는 것일까. 변명을 해야할까? 나에게 추궁을 해대는 카민에게 뭐라고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까? 그래야 하는 걸까? 역시 알 수가 없다. 만약 한다고 하면, 저 놈은 받아주기는 할까. "……내가 말했을텐데." 내 고민 가득한 생각을 잔잔히 파토내면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미 충고했지 않나." 신관들은 흠칫하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깨어진 봉인진 사이로 흰 로브가 휘날리고 있다. 이미 저 허공으로 치솟은 그 하얀 로브 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싸늘한 말소리뿐이다. 라이메데스는 피식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하고 있었다. "……다쳤군."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내려다보는 라이메데스의 어조는 정말로 차가웠다. "저녀석이 다치면, 내가 어떻게 한다고 했더라?" ----------------------------------------------------------------- 3권은 철저한 검토를 거쳐서 나올 것 같군요. 리메도 할 것 같습니다. 3권이 언제나올지는.. 음..-_-;; 책의 제목이 [반마족 카인]이라 이건지 저건지 헷갈리셨다는 분도 있는데요.. 그 책이 이 글 맞습니다(무슨 말인지;;) 하여튼..-_-;; 자아, 저번에 했던 그 격일연재 약속은... 역시 지켜야겠지요? -------------------------------------------------------------------------------- Back : 12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0 (written by 카르민) Next : 10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8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53027 , Current date and time : Friday 16th November 2001 21:54:11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5-11-2001 23:34 Line : 224 Read : 570 [12]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0 -------------------------------------------------------------------------------- -------------------------------------------------------------------------------- Ip address : 61.78.222.10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아아, 늦었네요. 벌써 11시가 넘었습니다. 하지만.. 어찌됐든 격일 연재는 지켰지 않습니까?^^; 뭐... 내일 보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군요. 으음... 요즘 칼레들린의 각성에 대해 물어보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칼레들린의 연인에 대한 독촉도... 여러분... 슬로리.. 슬로리... 슬로리만이 살 길이죠.. 우무하하하하하..-_-;; 그리고.. 이건 약속하는데.. 주말엔 연참입니다-_-+++ "저녀석이 다치면, 내가 어떻게 한다고 했더라?" 싸늘한 말투 속에 베어진 무게는 엄청났다. 놈은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신관들은 금방 대답을 하지 못하고 움찔하며 한 걸음씩 물러섰다. 나는 아직도 켈룩 대는 내 몸을 주체하기 위해 갖은 힘을 썼다. "우욱…… 미치겠군, 저 자식……" 나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나는 저녀석만 넘기면 조용히 돌아가 주려고 했었다……." 그 말과 함께 천천히, 아주 천천히 라이메데스의 손이 들어올려졌다. 차분한 흰손이 높게 치솟아 오른다. 녀석은 나를 보며 소름끼치도록 환하게 웃었다. 내가 그 웃음을 보며 돋아오른 소름을 주체하지 못하고 뭐라고 외치려는 순간, 라이메데스의 들어올려졌던 손이 파지직, 하고 밑으로 떨궈졌다. 각성 마족의 그 무한한 마력! 라이메데스의 손에서 뻗어난 암흑의 투기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인양 꿈틀꿈틀 거리고 있었다. 엄청난 힘을 간직한 그것을 보면서 나는 잠시 호흡 자체를 멈췄다. 주변으로 엄청난 정전기를 흐트러 뜨리는 라이메데스의 마기는 너무나도 엄청나, 어둠의 속성을 갖고 있는 나조차도 숨이 죄일 정도였다. 믿을 수가 없군! 라이메데스놈이 이정도로 강했나? 물론 블러드 아미의 일원으로서, 로시엔의 칭찬을 받을 만큼 괜찮은 실력을 갖고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살이 떨릴 정도로 강한 마기라니! 프리스트들은 갑작스러운 라이메데스의 태도에 당황한 듯 하나 같이 앞으로 몰려들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라이메데스는 그들이 채 주문을 다 외우기 전에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리며 웃더니 자신의 마력탄을 공중에서 무서운 속도로 날렸다. 콰콰콰콰콰! 대지를 찢어발기는 요란한 소음과 함께 천지가 뒤집힌다. 태초부터 존재해왔던 카오스를 닮은 마족들. 그 마족들이 내뿜는 그 암흑과 침묵의 힘앞에, 인간인 신관들은 경악성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라이메데스의 공격이 맞닿은 곳은…… 우루루루루룽……. 굉음과 함께 무엇인가가 전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로 손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끊임없이 아파 오고 있다. 피가 베어 나올 것 같이, 입술이…… 아프다. 라이메데스는 로브 자락 아래 자신의 표정을 숨긴 채로 미친 듯이 파괴하고 파괴하고, 또 파괴하고 있었다. 쾅쾅쾅!! 오로지 파괴만을 아는 듯,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배제하지 않는 놈의 공격은 오롯이 신관들의 건물을 향해 있었다. 마리에나 신전의 깎아지른 듯한 높은 상아탑에도, 삐죽하게 치솟은 건물에도…… 줄줄이 도열해 있는 모든 이들의 머리카락 위로 먼지가 날리고 있다. 부서지고, 부서지고, 또 부서지고……. 몇 백년의 성력이 머물렀을 이 더러운 성역이 파괴되고 있었다. 라이메데스의 검은 투기가 일렁일 때마다, 신전의 건물들이 듣기 괴로운 굉음을 내며 하나 둘씩 땅 위로 그 잔해를 내던졌다. "이 썩어빠진 마족놈이!!" 하나씩, 둘씩... 성스러운 느낌이 드는 여인을 조각한 조각품이 떨어지고, 탑 하나가 완전히 전복되는 동안 그 모습에 분개한 몇몇이 라이메데스를 향해 달려 들었다. 하지만 라이메데스는 싸한 눈으로 그들을 한 번 훑더니, 그대로 손을 거두어 들였다. 라이메데스는 눈을 들어 녀석을 노려보았다. 믿을 수 없게도, 라이메데스의 손가락에서 핏빛의 구체가 튀어나왔고, 그것은 그대로 신관들을 휘어감았다. 슈걱. 뼈가 갈리고, 피가 튀는 소리가…… 스산하게 울리운다. 라이메데스에게 덤볐던 세명의 신관들의 몸뚱이는 믿을 수 없게도, 산산히 흩뿌려져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 얼굴을 가리고 벌벌 떠는 신관들이 보인다. 나는 피식 냉소했다. 신을 모시는 사제 중에서는 공격용 신성 주문을 배우지 않고, 오로지 기도만으로 세월을 보내는 놈들도 있다고 했었다. 라이메데스의 저 거친 공격에 하얗게 질린 채로 오돌오돌 떨고 있는 놈들도 보인다. 피가 튀고, 살이 튀고, 뼈가 갈리고, 얼굴을 향해 튀는 그 새빨간 피의 냄새에 질식해버릴 것만 같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하지마." 젠장할. "그만두란 말이다. 이 자식아……." 나는 라이메데스를 향해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하곤 비틀비틀 일어섰다. 몸에서 끓어오르는 무엇인가에 속이 뒤집혀 온다. 신관들은 분명 마족과는 상반되는 힘을 가진 존재들, 내게는 분명 더없이 증오스러워야할 존재다. 나는 그들을 미워해야 마땅하고, 그들을 증오해야 마땅하다. 그것은 태초부터 존재해왔던 어둠과 빛의 대립 성질. 대립하지 않을 수 없는 그것들은 끝없는 증오만을 동반한 채로 빛과 어둠 사이를 배회한다. 그 대립의 성질에 따라, 마족은 신성을 품은 존재들을, 신성을 품은 존재들은 마족을 증오한다. 라이메데스가 아무리 저 놈들을 베고 베고 베고 또 벤다 하더라도……. 이 곳에 존재하는 모든 신관들이 새빨간 피로 뒤덮여 고통의 비명을 내지른다 하더라도, 내장의 파편조차 남지 않은 채로 사방에 흩뿌려진다 하더라도, 그렇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그 어떤 감흥이 없어야 한다. 아니, 오히려 쾌락을 느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저들을 증오해야 마땅하다고…… 그렇게 배웠으니까. 하지만……. 나와 같은 모양을 한, 본질은 다르지만 그래도 나와 같은 모습을 한 신관들의 몸이 하나 둘씩, 라이메데스의 마력 앞에서 허무하게 무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역시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이상한 정도가 아니었다. 더러웠다. 그래, 더러웠다. 그래도 반쪽이나마 인간이라 그런 것인가? 젠장할, 돌 지경이다. 울컥울컥 거리는 속의 기운은 더더욱 이상하게 변했다. 라이메데스의 손속은 정말로 잔인하다. 녀석이 던지는 암흑의 공격들은 카민이나 내 쪽을 피해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녀석의 공격이 워낙에 엄청난지라 녀석의 공격을 받은 건물의 잔해는 이 곳 저 곳 할 것 없이 사방으로 튀고 있었다. 나는 피가 흐르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어 문질렀다. 갈리진 입술 끝에 손가락이 닿자 오싹한 기분이 든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디에서 몸을 일으킬 힘이 나왔는지, 나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라이메데스, 멈춰라.」 나는 머릿속으로 라이메데스를 향해 말했다. 온 힘을 짜내서 불렀다. 라이메데스로부터는 한참동안 응답이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고 섰던 내가 짜증이 나려고 할 때가 되어서야,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출 수 없다.」 놈의 대답은 내겐 정말로 의외였다. 「멈출 수가 없다고? 어째서? 난 괜찮다! 마족 주제에 이 정도 맞았다고 안 죽어!」 「나도 안다.」 작게 번지는 라이메데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인상을 구겼다. 미간이 천천히 좁혀지고, 꽉 쥔 두 손 끝에서 피마저 맺혀 버릴 것만 같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다시 머릿속으로 말을 전달했다. 「젠장! 그럼 이제 그만 두란 말이다!!!」 「그럴 수 없다.」 나와 전음을 주고 받고 있는 도중에서도, 라이메데스의 팔은 끊임없는 파괴의 행각을 자행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얼굴로 신관들의 몸을 폭죽처럼 터뜨려대고 있는 라이메데스. 미친 듯이 춤을 추는 마리오네뜨처럼, 신관들의 몸은 라이메데스가 내뿜는 마기에 의해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흐느적거리는 움직임들. 흐느적거리는 그들의 모든 것. 신관들 몇몇은 뒤로 피한 채로, 다시금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신성의 기운들이 라이메데스 쪽으로 금방이라도 뻗쳐 오를 것 같았다. 「이 자식이! 이만큼 했으면 됐다고 하잖아! 그만하고 여기서 나가잔 말이다! 네가 얼마나 잘난 놈인지 모르겠지만, 여기 있는 신관들하고 다 붙어서 이길 수 있어?」 라이메데스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후,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어서 내려오란 말이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아이에드한테 이를 거다!」 스스로가 유치하게 느껴지는군. 이럴 때 아이에드의 이름을 팔아 먹는 내 처지가 정말이지 꼴같잖다. 나는 스스로의 한심함을 마음껏 비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당장 안 내려오면, 네가 내 말 안 듣고 날뛰었다고 이른다고!!」 힘이 없는 자는 말로서 상대를 제압하는 수밖에 없다. 혹은 상대보다 더 강한 자를 끌어와서 협박을 하든가. 그것은 매우 치졸한 방법이지만, 반면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나는 라이메데스의 약점을 누구보다도 깊이 있게 꿰고 있다. 라이메데스의 몸이 순간 멈칫했다. 나는 그것을 보며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라이메데스는 아이에드라는 이름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존재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네가 뭐라고 하든, 난 멈출 수 없다. 내 말을 거부한 신관놈들에게 치명적인 타격도 입히지 못하고 등을 돌린다는 것은 마계 최강 블러드 아미의 부총수로서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라이메데스의 침착한 말투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파괴의 흔적으로 점칠 된 곳에서 라이메데스는 솟아 올라 있고, 그 속에서 녀석의 로브가 춤춘다. "썩어빠진 신관놈들. ……저번에 있었던 신전과 마족의 싸움으로 미루어 마족의 힘을 얕보고 있었던 것 같군…….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명심하시지. ……'그 때' 마족들의 힘이 일순간이나마 밀렸던 것은 이카루 성녀와 일순간이나마 너희를 도운 빌어먹을 신족들의 특별한 가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카루의 성녀도, 신족들의 가호도 없는 지금의 너희들이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차갑게 내뱉은 라이메데스의 말에, 한 신관이 앞으로 튀기듯 나서며 말했다. "웃기지 마라, 마족이여! 신은 언제나 인간과 함께 한다. 특히나, 신께서는 우리들 신관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맞이하시는 분들! '그 때의 전쟁' 에서만 신들의 가호가 부여될 리 없지 않은가!" 그렇게 외친 자를 보며 나는 인상을 구겼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이번에도 에세렌이었다. 젠장맞을,낄 때를 껴야 할 것 아냐!!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에세렌 녀석에게 이미 두 번이나 빚을 졌고, 그래서 그것을 꼭 갚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라이메데스의 앞에 나선 이상, 저녀석이 살아남을 가능성 따위는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다. 나는 씁쓸한 얼굴로 라이메데스를 보았다. 라이메데스의 손이 천천히 들어 올려지는 것이 보였다. "웃기는군." 라이메데스가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에세렌이 갑자기 심장 쪽에 손을 얹더니, 이상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 것은. "dkahfm― zbstmxm― fkqldk― flvp." 나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그 언어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너무나 이상하고도 이상한 언어였다. 라이메데스가 갑자기 확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씹어뱉듯 한마디 했다. "…너, 이네아 족인가." * * * * * * * * * * * * * * * * * * * 최근 연재가 부실하죠? 이러면 안되는데... 다시 성실 연재하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ㅁ^ 사실... 제가 요즘 조금 힘든 일이 있어서. 힘에 부칩니다. 야간 자율학습이라는 것도 있고...^^ 언제나 즐독하시고, 메일 보내주시는 분들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최근엔 거의 답멜 쓸 시간도 없을 지경이라.. 답멜이 조금 늦게 가더라도 기다려주세요. 전 꼭 답멜을 보내는 주의입니다^^ 즐독하셨길 빌면서... 말했듯이, 주말에는 연참입니다~ 우오오! -------------------------------------------------------------------------------- Next : 11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69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53026 , Current date and time : Friday 16th November 2001 21:53:59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1-11-2001 22:55 Line : 184 Read : 812 [13]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1 -------------------------------------------------------------------------------- -------------------------------------------------------------------------------- Ip address : 211.197.189.23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나는 라이메데스의 말에 조금 놀랐다. 이네아 족? 이네아 족이라면…… 그 무성족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네아 족은 특이한 종족이다. 일명 무성족이라고 불리는 그들의 종족적 특성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을 품고 있다. 이네아 족은 인간들과 떨어진 판디에네 섬에서 산다는 말을 들었는데 확실한지 어떤지는 나도 알 수 없다. 내가 가봤나, 어쨌나. 알게 뭐냐. 뭐, 어찌됐든…… 이들은 그 섬에서 그들끼리 모여 살다가, 16세가 되면 인간의 대륙으로 홀로 여정을 떠난다 했다. 그들이 인간의 대륙으로 나오는 단 하나의 이유. 그것은 자신의 '상대'를 찾기 위해서다. 그들은 22세 이전까지는 무성의 몸으로 머문다. 놀랍지 않은가? 무성이라니! 그들은 남자도, 그렇다고 여자도 아닌 몸으로 무려 22년 간을 살아간다. 22년간을 무성으로 살던 그들이 인간 세상에 나와 자신의 결혼 상대를 찾는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자신의 성을 결정하기 위해서다. 만일 그들이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무성이었던 그들의 몸은 변화한다고 한다. (직접 안 봤으니 나도 어떻게 변하는지는 모른다만.) 하여튼 22세까지 무성의 몸이었던 그들은, 정확히 22번째 생일이 되는 날에 완벽한 성(性)을 갖추게 된다고 들었다. 그래서 한 편에는 이네아 족을 '신의 축복을 받은 종족'이라고도 하지만, 이건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22세 이전의 생활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인간은 배타적인 종족이다. 자신과 다르다면 무조건 거부하고 마는. 자신과 다른 자들을 밟는 것은 그들에게 익숙한 일이다. 게다가, 무성이라는 것은 낯설다못해 이질적인 것. 심지어 이네아 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게다가 그들은 22번째 생일을 맞이하기까지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한다면……. 이름 모를 병을 시름시름 앓다가 무성의 상태로 죽는다고 하지. ……그런데, 저 에세렌이 그런 이네아 족이란 말인가? 이네아 족은 분명 '신성을 타고나는 존재' 라는 말을 들을 만큼 신령스러운 이들이라 들었긴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여성이라는 이미지도, 남성이라는 이미지도 강하게 들지 않았던 그이긴 했지만…… 정말로 무성족인 이네아였단 말인가? "rmeodml whdthrwkrk qxkrgkshsl…… dnleogks akfldpskdu, sporp rmeodml gladmf……." 에세렌의 주문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힐끗 고개를 돌렸다. 모든 이들의 시선은 에세렌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이빨을 깨물고 천천히 검을 들어올렸다. 아직까지 내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없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라이메데스가 떠 있는 휭한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는 에세렌에게 접근했다. 패러딘놈이 내 켐 알슈타드를 가져가고 대신 내 복부에 박았었던 검을 천천히 내린 채로 나는 에세렌에게 다가갔다. 에세렌의 바로 뒤에 섰을 때야 신관들이 소리를 질렀다. "제가 프리스트님! 뒤를!" "제가 프리스트 에세렌님!!" 요란한 그 소리에 에세렌의 고개가 천천히 돌려졌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흡!" 나는 에세렌의 뒤에서 목에 검을 겨누었다. 에세렌은 숨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다."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는지 신관들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에세렌은 채 주문을 다 외우지 못하고 벙찐 얼굴을 했다. 라이메데스 역시 얼이 빠진 표정을 했다. "이게 무슨…… 욱!" 에세렌이 말을 하려는 순간 나는 그의 목줄기에 더더욱 검을 가까이 들이댔다. 그의 뽀얀 피부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한 방울 흘렀다. "내가 목을 긋기 전에, 검을 내놔라!" 커다랗게 말하는 한편, 나는 라이메데스를 불렀다. 「라이메데스.」 하지만 라이메데스는 묵묵부답. 젠장할, 평소에는 말이 많기도 많더만 이럴 때만 조용해지는 건 무슨 심보냐? 「두 말 하지 않겠어. 내 말을 들어. 검을 찾으면 그대로 나간다. 신전에 더 이상 손대지 마라.」 라이메데스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나는 못박듯이 말했다. 「……네가 계속 신전을 파괴하느라 여기서 시간을 보낸다면…….」 숨을 골랐다. 「난 과다 출혈로 죽어. ……난 마족인 너와는 틀려.」 라이메데스가 흠칫했다. 나는 다시 검을 깊숙이 에세렌의 목에 들이댔다. 에세렌은 부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았지만 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상처는 물론 아프지만……. 꽃미소년인 내가 여기서, '으윽, 너무 아파서 더 이상 검을 못 들겠어!' 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견디는 김에 끝까지 견뎌 볼 생각이다. 나는 이빨을 악 물고 검을 더 세게 쥐었다. 순간이었다. "제가 프리스트님!!" 찢어질 듯한 신관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검에 힘을 주긴 줬는데…… 너무 세게 쥐어서 내 검이 에세렌의 목안을 파고 들어가 있었다. 피가 투둑,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에세렌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낸다. 나는 에세렌에게 속으로 작게 사과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지금 에세렌의 목에 검을 대지 않았더라면……. 에세렌은 주문을 다 외우기 전에 라이메데스에 의해 갈갈이 찢겨 죽었을 것이다. 나는 저 멀리에서 아직도 성기사단과 대치중인 카민을 보았다. "이 쪽으로 와라, 카민." 카민은 잠시 흔들림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카민을 보며 천천히, 나도 모르게 말했다. "……부탁이다. ……제발……. 이 쪽으로 와라." 절절한 이 목소리가 내 것인가? 나조차도 놀랍다. 이 떨림 가득한 목소리가 정말 내 것일까? 카민의 발걸음이 거짓말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쪽으로, 내 쪽으로……. 에세렌이 으윽, 하는 신음성을 냈다. 나는 에세렌의 목에 더더욱 검을 깊게 들이대며 말했다. "한 번 더 말하지. 내 검을 갖고 와." 저 멀리서 내 검을 들고 있던 성기사는 어쩔 줄 몰라하는 눈빛으로 에세렌을 보았다. 에세렌이 이빨을 악 물었다. 나는 이죽거리듯이 말했다. "저 검이 아무리 소중해도 사람의 목숨보다 소중할까? 신관들이라는 작자가 말이야." 젠장할, 아파 죽겠는데 폼 잡고 말하려니 진짜 힘드는군.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억지로 억지로 말하고 있었다. 걸레를 쥐어짜듯 인내심을 쥐어짜면서 말이다. "……뭐라고 해도 우리는 검을 내놓지 않을 거요." 쭈그렁탱이 노신관이 입을 열었다. "이래도?" 나는 그 말과 함께 에세렌의 목에 더더욱 검을 깊이 갖다댔다. 검끝에서 인정사정없이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다시 에세렌에게 사과했다. 물론 사과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지만……. 이건 내겐 최선의 선택이다. 신관들은 흠칫하면서 몸을 비켜내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어떻게 될까? 한 번만 더 말하겠다. 이 번이 마지막이야! 내 검을 내놔라!" 신관들은 분노로 몸을 떨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세렌의 목에 검이 박힌 채로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노신관은 푸들거리는 얼굴로 에세렌을 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꽉하고 다물어졌다. 핏기가 사라진 그의 얼굴 위로 가느다란 경련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자는 이네아 라고 했지?" 나는 번뜩이는 눈동자로 노신관을 봤다. "……이네아 족은 소수종족! 그들은 그 어떤 종족보다 유대감이 강한 종족이지. 자신의 동족이 살해 당했다는 것을 알면 죽을 때까지 쫓아 처절한 복수를 하기로 유명한 종족이기도 하고 말이야. 내가 여기서 이 자를 죽인다면, 물론 나도 그들의 복수를 받겠지만……. 당신들도 그들의 검을 피할 수는 없을거야." 노신관이 침묵했다. 침묵의 귀퉁이에 서 있는 것은 나란 녀석의 그림자. "……주거라." 성기사가 쭈뼛거리며 다가와 내게 검을 내밀었다. 나는 오른손으로는 에세렌의 목에 검을 겨누고, 왼손으로 그 검을받아들었다. 몸이 아팠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에세렌의 목에 검은 댄 채로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카민이 말 없이 나를 따랐다. "잠깐! 검은 이미 넘겼다! 이제 에세렌을 풀어줘!" 한 신관이 소리쳤다. 흠, 그것도 그렇군. 나는 에세렌의 목에 들이댔던 검을 빼려고 했다. 순간이었다. 「그대로 있어.」 라이메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내가 정말로 이 신전을 파괴하질 않길 바란다면……. 저 이네아를 인질로 잡고 끝까지 나가라. 안전한 곳에 가서 풀어줘도 늦지 않다.」 라이메데스의 충고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느 정도 시점에서 이 자를 풀어주겠다. ……꼭 풀어줄테니 안심해라." ―다시 봐야겠네요, 칼레들린님. 지금 엄청 멋진 거 알아요?― 레이네가 말을 걸어왔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무시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카민은 입술을 꾹 문 채로 내게 짧게 말했다. "……이야기는 나중에 듣지." 지극히 차가워진 말투. 소름이 돋는다. 나는 천천히 몸을 뒤로 움직여나가기 시작했다. 신관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이 프리스트가 이빨을 악 물며 말했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 검을 좇을 것이요. 명심하시오!" "쳇, 그럼 난 죽을 때까지 너에게 넘기지 않을 거다." -------------------------------------------------------------------------------- Back : 1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2 (written by 카르민) Next : 12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0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61020 , Current date and time : Friday 23rd November 2001 21:19:07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1-11-2001 22:56 Line : 259 Read : 874 [14]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2 -------------------------------------------------------------------------------- -------------------------------------------------------------------------------- Ip address : 211.197.189.23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제 14장: 친구라는 이름. "젠장맞을! 이젠 그만 돌아가라니까!" 때는 깊은 밤. 나는 지금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지르고 있다. 버럭버럭. "안 돌아간다 잖아요!!" 그리고 내 뒤통수를 때리는 또 다른 버럭버럭. 정말이지 너무나도 짜증이 나서 내 앞에 있는 저 나무에 머리를 박아 버리고 싶다고 생각될 정도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지로 가누며 다시 외쳤다. "빌어먹을! 지금 당장 돌아가란 소리 안 들려?" "안 돌아 간다니까요!!" 그가 다시 소리를 쳤다. 젠장, 네 목소리 크다 이거냐? 하지만 네 목소리가 아무리 커봤자 카민놈의 그 발악같은 목소리에 익숙해진 내겐 아무 것도 아니다, 이거야! 오히려 너보단 내 목소리가 훨씬 크지!! "돌아갓!!" "안 돌아가요!" "돌아가라잖아!" 내가 크게 소리치며 나무에 주먹을 팍하고 내리 꽂았을 때의 일이었다.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안되는 커다란 목소리가 귓가를 강타한 것은. "안 간대잖아!!" 난 순간 당황했다. 여태껏 꼬박꼬박 존대맛을 써오던 에세렌이 갑자기 반말로 '안 간대잖아'라고 큰 소리로 외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내 뒷통수를 가격하는 그의 커다란 손바닥. "크악!" 갑자기 뒷통수를 가격한 그의 무지막지한 손바닥에 나는 엄살 비슷하게 고함을 질러 버리고 말았다. 뒷통수를 얻어맞은 건 난데, 에세렌은 자신이 핫, 하고 소리를 내며 놀랐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뚫어져라 에세렌을 노려보며 눈을 부릅떴다. 크윽, 너무 눈에 힘을 주니까 눈이 찢어질 것 같이 아프다. "너……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냐?" 나는 봉긋하게 솟아오른 머리 위의 산봉우리(젠장, 은유적인 표현 다 집어치우고 말하자면 혹이다, 혹!!)를 매만지며 버럭 고함을 쳤다. 그러자 에세렌이 나를 향해 어설프게 웃었다. "저……. 괜……찮으세요?" 음하하하하하! 웃음이 난다, 웃음이 나! 어떤 사람을 무지막지하게 패놓고 한참 후에 '괜찮으세요?' 라고 물어보면 그 사람이 '아, 괜찮아요. 머리에 주먹만한 혹이 났지만 전혀, 조금도 아프지 않아요. 신경 끄세요.' 라고 말할 줄 아냐? "……너 같으면 괜찮겠냐?" 나는 이글거리는 눈빛을 에세렌에게 들이대며 물었다. 에세렌은 다시 어설프게 웃었다. "괘, 괜찮을 것 같은데요." 나는 주먹을 들어올리고 그것을 에세렌의 바로 앞에 들이댔다. "호오, 그래? 그럼 너도 한 번 맞아볼래? 그리 아프진 않을건데 말이야." "……아니, 저……." 에세렌은 고개를 푹 숙이고 풀이 죽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시선을 돌렸다. 시간은 흘러, 침묵과 징벌의 여신 세튜아나가 유폐되어 있다는 달이 하늘 위로 고고하게 그 자태를 들어내고 있었다. 희여멀건하게 떠오른 달빛이 침묵 속에 그 몸을 던지고 있다. 귓가에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는 바람의 언어. 다가오는 어수프름한 새벽을 두 팔 벌려 맞이 하려하는 이 곳은 이상하리 만치 조용했다. 그 빌어먹을 신관들의 소굴에서 에세렌을 데리고 탈출한 나는 신관들의 추적을 받으며 달렸다. 어딘가에 매여 있던 말이라는 것을 훔쳐 타고 나와 카민은 부지런히 달렸다. 미친 듯이 달리고 또 달렸던 우리. 말이 지쳐서 휘청거릴 때까지 우리는 달렸고, 그 긴 시간동안 카민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말을 막 달린 탓에 이 곳 지리가 어딘지도 알 수 없다. 대충 어두운 걸 보니 숲 어딘가라고 짐작이 될 뿐이다. 저 라이메데스놈은 지금 보이지 않는다. 신전에서 탈출할 때부터 지금까지, 놈은 내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만약 지금 라이메데스가 내 앞에 보인다면 나는 그 놈의 귀를 마구 물어뜯을지도 모르니, 녀석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상당히 옳은 결정이라고 칭찬해주고 싶다. 아마 그 쓸개빠진 마족놈은 이 어딘가에서 나를 따라오고 있을 거다. 그리고 카민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한 마디 말도 없이 내 뒤만을 묵묵히 따르고 있었다. 카민의 붉은 머리카락 결을 따라 땀방울과 달빛이 흐르고, 그 땀방울과 달빛을 따라 내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긴장과 긴장과 긴장의 감정. 놈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내게 가벼운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나무 밑에 앉은 채로 숨을 고르고 있는 놈의 입술을 조개처럼 꾹 다물어져 있다. "젠장! 그만 돌아가라고 하잖아!" 하지만……. 지금 내게 더더욱이나 미칠 노릇은 따로 있었다.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있어 저 심중을 헤아리기 힘든 카민과의 문제를 매듭짓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서 미칠 지경인데, 이 놈은 또 왜 이런단 말인가? 카민은 나무에 살짝 기댄 채로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환하게 머리 위로 맴도는 달이 비추고 있는 카민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신전에서 나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내게 말을 걸지 않은 카민이다. 신전에서 말을 타고 몇시간이나 달린 끝에 도착한 이 어두컴컴한 숲에 도착할 때까지, 카민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 에세렌을 돌려보내려고 하는 이 시점까지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카민. "싫다니까요! 전 안 돌아갑니다!" "돌아갓!" 정말 미칠 노릇이군. 나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저렇게 말이 없는 카민이, 마치 석고상처럼 굳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카민이……. 신경 쓰여 미칠 지경인데, 이 에세렌이라는 놈이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행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싫어요! 안 돌아 갈 거예요! 죽어도 안 돌아가요!" "……돌아가라고 했어." 이제 어느 정도 신전의 추적을 따돌렸다고 생각하고 에세렌을 돌려보낼 생각이었는데……. 이 놈이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 에세렌에게 이 것 저 것 목숨 건진 적이 많은 데다가 이런 일까지 벌였으니 나는 에세렌에게 상당히 미안스러운 감정을 갖고 있었고, 이젠 고이 보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안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에세렌은 고함을 빽 내질렀다. 이젠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오려고 그런다. 얘 정말 왜 이런다냐? "……한 번만 더 말하지. 돌아가라고 그랬다." "안 돌아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에세렌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고, 내 손에 들려 있던 검의 노란빛이 반짝이며 레이네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헤에, 꽤 재미있는 신관이네요. 칼레들린님이 마족의 일원이라는 걸 아직도 모르는걸까요? 흐음, 이 자……. 이네아 족이라고 했죠? 흐응, 혹시 이 신관이 칼레들린님한테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요? 네?― 나는 내게 말을 거는 레이네를 보며 훗, 하고 웃었다. 훗. 후후후후! 내가…… 내가 이따위 놈을 되찾으려고 그 고생을 했다니. 난 그 때 잠시 미쳤던 것이 틀림없어. 암, 틀림없고 말고. "……안 돌아가려면 여기서 죽어." 난 그 말과 함께 휙 하고 뒤돌아 서서 카민 쪽으로 걸어갔다. 카민은 눈만을 들어 나를 보았다. 나는 손을 뻗어 카민의 어깨를 붙잡고 일으켰다. 카민은 어엇, 하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초연하게 일어섰다. 놈의 눈이 나를 마주한다. "가자." 나는 카민에게 작게 말했다. 카민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작게 입술을 열었다. "……칼." 근 몇 시간만에 벌어진 카민의 입. 언제나 따따따 시끄러웠던 카민의 침묵이 얼마나 버거웠는지……. 아마 설명해도 모를 것이다. "말해." "칼." 다시 이어지는 부름. "말하라니까." "칼." "……." 계속 해서 내 이름을 부르는 카민의 목소리는 탁했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른 후에야 그것이 단순한 호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변한 것이 있을까." "뭐?" 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그의 말에 약간 당황해서 되물었다. 무슨 말이지? "칼. ……넌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특별한 존재인 것 같아. 그렇지?" 마족이 특별한 존재라고 한다면, 그렇지. "……너 뿐만 아니라 데스형도 그렇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백 배, 천 배……. 데스형과 너는……. 훨씬 더, 훨씬 더 특별한 존재인 것 같다." 카민이 잠시 숨을 골랐다. "넌 나를 속인건가?" 지끈, 하고 심장이 아려왔다. 그것은 정말 생전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이렇게 비겁하게 느껴질 줄이야. "그건……." "됐어." 차가운 목소리에 심장마저 얼어붙는 것 같다. 잔뜩 쉬어버린 듯한 그 목소리에 목이 메인다. "카민, 나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나는 입을 열었지만, 내 입은 하나의 변명을 밖으로 표출해내지는 못했다. 카민의 말소리가 내 말을 잘랐기 때문이다. "너는 칼레들린이야. 맞지?" 무슨 말이지? "처음 만났을 때도 칼레들린이었고, 그 후에도 칼레들린이었고…… 나와 같이 다닐 때에도 넌 칼레들린이었지. 그리고, 몇 일 전까지만 해도 칼레들린이었어."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이런 상황에서 철학이라도 하자는 거냐, 카민? 나는 계속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늘어놓는 카민을 뚫어져라 보았다. 순간, 카민의 입술이 열렸다. "하지만…… 겨우 몇 시간 전에 너에 대한 모든 것이 내 안에서 조각났어." ……심장의 고동이 덜컥, 하고 멈췄다. 더 이상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 카민,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 "모든 것이 조각나버렸어." 조잘대던 레이네의 말소리조차 딱하고 끊긴 탓에, 나는 정말이지 썰렁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나는 속으로 레이네가 다시 떠들어 준다면 좋을텐데, 라고 생각했다. 젠장할, 이 숨막히는 침묵이 싫다. 레이네! 네녀석이라도 좋으니 제발 이 시끄러움을 멈춰봐! "칼레들린." 내가 레이네에게 속으로 외치고 있을 때, 다시 카민의 입이 벌어졌다. "……." "칼레들린!" 다시 들려온 부름에 난 천천히 입을 뗐다. "으, 응." "……난 너에 대해서 아주 많이 모른다. 하지만……." 카민이 눈을 들어 똑바로 나를 마주보았다. 그 눈은 언제나처럼 맑고, 따뜻해 보인다. "네가 처음 내밀어주었던 손을, 나는 잡았다." 우지끈, 하고 속에서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네가 처음 나를 살려주고 내밀었던 손을, 나는 잡았어……." 카민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서로를 아는데' 시간이 걸리는 건 당연한 거다." 놈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가 어느 순간 가라앉았다. "너와 나에겐 시간이 부족했던 것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넌, 날 속인게 아니야. 우리에겐 시간이 부족했던 것일 뿐. 서로를 아는데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뿐이지." "……욱." 속에서 무엇인가가... 내려 앉았다. "……몇 시간 전의 너는 내 안에서 조각났지만." 카민이 환히, 정말로 환히 웃었다. 그것은…… 이 상황과는 맞지 않을 정도로 밝았다. "지금 이 순간의 너부터 알아 가면 되는 거라고 생각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진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칼." 카민이 천천히 오른 손을 들어,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내밀어진 그 손을 뚫어져라 보았다. 이런 상황……. 예전에도 한 번……. 나와 카민 사이에 있지 않았던가? "숙식비는 여전히 내가 전담. 대신 용병 고용비는 없어졌음. 친구라는 이름을 가진 흑발의 남자 하나를 고용하려고 하는데…… 괜찮을까?" 하얗게 빛을 발하는 카민의 손을 바라보며 나는 이빨을 꾹 깨물었다. 고개가 천천히 떨구어졌다. 이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그걸 말하기에 내 자존심이 너무 세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고, 고맙다는 말을 다시 하고 싶다. "……." 나는 대답 없이 카민의 내밀어진 손을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올려 카민의 눈을 보았다. 카민 의 눈이 가볍게 가늘어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내밀어진 손을 으스러져라 붙잡으며 외쳤다. "물론이다!" -------------------------------------------------------------------------------- Next : 13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1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61021 , Current date and time : Friday 23rd November 2001 21:19:18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5-11-2001 19:19 Line : 163 Read : 1230 [15]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3 -------------------------------------------------------------------------------- -------------------------------------------------------------------------------- Ip address : 61.79.38.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그런데……." 카민이 자그맣게 말문을 열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한참이나 숲길을 걸은 후의 일이었다. "데스 형은? 아까 신전에서 갑자기 사라졌잖아." 그렇게 날뛰는 라이메데스를 보았음에도, 카민은 라이메데스를 '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젠장할. 그따위 거 몰라. 지 놈도 양심이 있는데, 어떻게 금방 내 앞에 면상을 내밀 수 있겠냐? 분명히 한참 후에 올 거다." 나는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카민은 작게 웃었다. "칼. 하나만 더 묻자." 나는 그렇게 말하는 카민을 빤히 보았다. 생긋 미소짓고 있는 녀석의 얼굴은 평소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에세렌님은 왜 계속 따라오시는 걸까?" 내가 얼어붙었다는 것을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겠지? "뭐……라고?" 으흐흐, 목소리가 떨리는군. 아아, 떨린단 말이다. 그런데 왜 떨리는 거냐? "에세렌님이 왜 계속 따라오시는 거냐구." 나는 침묵했다. ....몰랐다. 모르고 있었다. 나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하나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하……. 하하……." "하하하……." 동그랗게 뜬 한 쌍의 눈동자와 내 아리따운 검은 눈동자가 마주했다.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계속 피식 피식 웃자 에세렌 역시 어설프게 따라 웃더니 가볍게 손을 들어 내게 인사했다. 레이네의 말이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흐응, 역시 칼레들린님한테 관심이 있는 거예요. 틀림없어.― "……한마디만 더하면 널 생매장시킬 거다." 나는 낮게 중얼거려준 후 에세렌을 뚫어져라 보았다. 카민은 표정 없는 얼굴로 에세렌을 보고 있었다. 에세렌은 아까 전부터 계속 우리를 따라왔는지 상당히 지친 눈치였다. 걸음걸이 빠르기로는 나와 카민을 따라오기 힘들었을 거다. 누가 뭐라해도 신관들은 꽤나 편안하게 삶을 영위하는 족속들이니만큼. 거친 숨을 몰아쉬던 에세렌의 눈이 한참 나를 마주했다. "……칼레들린님." "뭐냐." 나는 내 이름을 묵직하게 부르는 에세렌에게 눈을 치켜뜨며 대답해주었다. "저를 데려가십시오! 안 그러면 분명 후회하실 겁니다!" "……널 데리고 가면 후회할 것 같은데." "아니예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는 에세렌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에세렌 역시 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어느 순간, 에세렌이 입술을 꽉 깨물며 소리쳤다. "칼레들린님! 솔직히 말하지요. 저는…… 전……. 당신이 들고 있는 그 검의 내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검은 저희 교단이 모시는 '빛과 거울'의 여신이신 마리에나님의 진정한 종속자라 할 수 있는 이루엔님의 검이오, 혼돈의 검이자 빛의 검입니다! 마족의 육신을 꿰뚫었던 검이자 엘프를 사냥했던 검! 그 하나에 모든 것을 품고 있는 검!!!" 대체…… 뭔 소리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 혼자 신이 나서 뭐라고 뭐라고 해봤자 정작 듣는 사람이 하나도 못 알아들으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나와 카민의 멀뚱한 표정을 보고 나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에세렌은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혼자서 오버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그는 뒷통수를 살짝 긁은 후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전, 그 검을 당신이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계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언하건데 그 검은 위험한 검입니다." "그래서?" 나는 쌀쌀맞은 어투로 물었다. 에세렌을 눈을 크게 홉뜨며 말했다. "그러니까, 저를 데려가셔야 한다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왜 당신을 데려가야 하냐니까." 내 외침에 에세렌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말했다. "아까 말했잖아요." "아까 언제?" 나는 기가막혀 반문했다. "그러니까 지금요." "……장난하냐?" "아니요!" 절대로 장난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는 어조로 에세렌이 냅다 외쳤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곤 카민을 돌아보았다. 카민이 나를 향해 막 고개를 저으려 한 그 때, 에세렌이 갑자기 소리를 쳤다. "그, 그래요! 유키아, 유키아 네크로나의 소재지가 궁금하시지 않아요?" 순간. 나의 움직임이 정지했고, 카민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에세렌을 보았다. 말할 수 없는 고동이 나를 뒤흔든다. 입술이 차갑게 식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나는 손을 들어 짧게 입술을 문질렀다. "……네가 알고 있단 건가?" 에세렌은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로?" "네." 에세렌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보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안다는 거지?" "다 아는 수가 있지요." 에세렌은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어조에서는 가득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단언하듯 말하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나는 한참 에세렌을 보다가 카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민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잠시 머리를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난... 유키가 찾고 싶어, 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다." -------------------------------------------------------------------------------- Back : 1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4 (written by 카르민) Next : 1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2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72188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December 2001 09:43:31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5-11-2001 19:20 Line : 238 Read : 1352 [16]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4 -------------------------------------------------------------------------------- -------------------------------------------------------------------------------- Ip address : 61.79.38.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제 15장: 한 밤의 침입자 "밥." "예?" "밥!!" "예?" "밥!!!!!!" 쪽, 쪽팔려. 나는 얼른 얼굴을 돌려버렸다. 크아아악! 쪽팔려, 쪽팔린다고! "밥 내놓으란 말이다!! 어서 밥을 내놔아아아아∼!" 카민의 발악 같은 외침에 우리가 막 들어섰던 식당 내부가 조용해졌다. 어째서 카민은 식당에 들릴 때마다 이렇게 항상 주목을 받는 것일까.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던 사람들은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하지만 아무리 봐도 겉모습은 소녀인)이 튀어 들어와 밥을 외치자 황당한 얼굴을 했다. 밥을 집어 먹다가 그대로 경직한 모습으로 우리를 보는 인간들도 보이고, 소란스럽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고춧가루가 낀 이빨을 그대로 노출한 채로 우리에게 시선을 보내는 인간들도 보인다. 하여튼, 뭐라고 말 할 것 없이 그 인간들은 모조리 이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밥!" 다시 한 번 카민이 고함을 쳤다.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다고 생각했고, 에세렌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인 듯 처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카민을 외면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카민은 나와 에세렌의 쪽팔림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 오로지 밥. 오로지 밥. 오로지 밥만을 외쳐대고 있었다. 녀석의 눈에는 이미 그 빌어먹을 밥이라는 것 밖에 없었다. "밥. 밥. 밥. 밥. 밥. 밥. 밥. 바아아아아아아압!!!" "……." 훗. 이제 더 이상 할 말도 없다. 자아, 어서 저 멀리 돌아가자. 나는 굳어버린 식당 주인의 멱살을 올려 잡으며 밥을 외치고 있는 카민 녀석에게서 슬그머니 멀어지려고 했지만 바로 그 순간, 카민의 왼손이 나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나는 움찔하고 굳어버렸다. 카민의 입술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나왔다. "흐흐흐. 칼. 어딜 가는 거야. ……같이 즐거운 식사를 해야지. 자아, 밥. 밥. 밥. 어서 밥을 내놓으라구!" 카민의 눈을 이미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 눈은 도저히 인간이 가질만한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저 멀찍이 떨어진 채로 숨을 몰아쉬는 에세렌은 카민의 이런 모습에 도저히 적응이 안되는지 눈을 화등잔만하게 뜨고 있었다. 에세렌은 찔끔거리는 모습으로 내 옆에 서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 카민님……. 이런 성격이셨던가요?" "……3일 굶은 인간은 이렇게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예라고 할 수 있지." "……동감이라고 말씀드릴게요." 신관들을 피하느라 숨어 들어갔던 숲에서 먹을 것이라곤 풀 조각과 간간히 지나가는 야생 동물 뿐이라 우리는 그 숲을 나오는 동안 그깟 말도 안되는 식량으로 연명을 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에 우리가 얼마나 배고픔과 싸워야 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인간이 바로 저기 있는 카민이다. 아아, 두렵다. 두려워. 벌겋게 충혈된 카민의 눈은, 이제 자신이 인간이기를 포기했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 없다. 나는 카민으로부터 가차 없이 시선을 돌려버렸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크윽. 처음 체이드 숲에서 나온 나를 봤던 나스의 기분이 이랬을까? 저 모습은 정말로 추하다. "밥! 밥 내놔!" 거의 괴성을 내지르며 카민은 식탁을 발로 쾅쾅 쳐댔다. 드디어 카민이 쥐고 있던 멱살에서 해방된 주인은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 버렸고, 그 주인과 종업원들이 손에 음식을 들고 올 때까지 카민이 발작은 계속되었다. 나와 에세렌은 차마 카민의 옆에 있을 수가 없어서 서로 모르는 척을 했다. 그리고 음식이 등장했을 때……. 카민은 정말 엽기적인 모습을 보였다. "우오오오! 우오오오오오오옷!" 300년 굶은 통돼지가 먹어도 저렇게 이상한 소리를 내지는 못하리라. 음식이 탁자에 놓여지기가 무섭게 그 곳으로 달려간 카민은 양손을 이용해서 음식을 입에 퍼담았다. 카민의 두 손이 부지런히 움직여 자신의 입안으로 음식을 이동시킨다. 퍼 넣고 퍼 넣고 또 퍼 넣고…… 끝도 없이 카민은 음식을 입안으로 퍼 넣고 있다. 식당은 이제 정적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1000년 묵은 돼지가 환생한 거야……." "걸귀 같군요." 나와 에세렌이 각각 한 말을 들리지도 않는지, 카민은 부지런히 먹어 치우고 있었다. 나는 훗, 하고 웃음을 지으며 카민의 맞은편에 앉았다가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카민이 먹던 음식의 파편이 튀었기 때문이다. 이익, 디러. 에세렌 역시 점잖게 앉았다가 사방으로 튀는 파편을 피하기 위해 애를 쓰는 흔적이 역력했다. 나와 에세렌은 카민의 눈치를 슬그머니 본 후 천천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아무리 굶었다해도 예절 그 자체인 나는 너무나도 예절바른 자세로 음식을 먹는다. 카민이 두 손을 이용해서 게걸게걸 먹는 것에 반해서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너무나도 우아하고 절도 있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 로시엔의 그 엄청난 예절교육에 단련된 내가 아니던가. 하지만 3일을 풀조각으로 연명한 상황에서도 이렇게 우아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은 로시엔의 예절교육 덕택이라기 보단 선천적으로 타고난 나의 우아함의 영향이 더 크다고 볼 수 있겠지. 아아, 나의 우아함이여! 얼굴도 잘나고 성격도 좋고 우아하기까지 하다. 젠장, 나 같이 잘난 놈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작작 먹어." 자아도취에 빠져 있던 나는 철푸덕,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뺨에 튄 커다란 잔해물덕에 폼잡을 분위기가 저 멀리 날아갔음을 깨달았다. 나는 내 뺨에 묻은, 카민의 입에서 나왔음이 분명한 음식의 잔여물을 손으로 집으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악, 불쾌하다! 내 외침에 부지런히 먹고 있던 카민이 눈을 들었다. 그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밥 먹는 거 방해하면 그어버린다!' 어찌 인간이 눈으로 전음을 보낼 수 있겠냐만은, 그 순간만큼은 입을 열지도 않은 카민의 감정을 너무나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너무 또렷해서 닭살이 돋고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저러다 배탈나는 거 아닐까요?" 에세렌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확실히, 저대로 방치하기에 카민 녀석은 너무나 많이 먹고 있었다. 그 양은 아무리 3일 굶었다 치더라도 너무 심한 것이었다. 나는 결국 다시 말했다. "작작 좀 먹어." "……이봐, 칼." 카민이 갑자기 쫙 깔리는 낮은 음으로 날 부르더니 음산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벌써 접시를 아홉 개나 비우고 있다.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길 바라냐." 내 말에 카민은 훗, 하고 웃었다. 놈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놈의 눈빛이 어찌나 진지했는지 순간적으로 저 놈이 갑자기 검을 뽑지나 않을까하고 긴장했을 정도였다. "네 앞에 있는 접시는 몇 개냐." 하지만 카민이 물은 것은 지극히도 간단한 것이었고, 나는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일곱 개." "……지금 겨우 두 개 차이를 갖고 네가 나를 구박하는 거냐? 그럴 자격이 있다고 봐?" "물론이다. 두 개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지." 나와 카민은 말없이 눈을 마주쳤다. 어느 순간 카민이 후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몸을 식탁 위에 엎었다. 그가 가볍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래그래. 이젠 배도 좀 부르고, 그만 먹지 뭐." 그럼 더 먹으려고 그랬냐. 나는 후아, 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식탁에 얼굴을 묻곤 포만감에 행복한 표정을 짓는 카민을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당장이라도 냥냥, 하는 소리를 내며 고양이마냥 테이블에 부비적 거려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은 표정을 카민은 짓고 있었다. 커다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떴다하는 카민의 모습을 보고 있던 식당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시금 귀에 꽂힌다. "끄, 끝난건가?" "9, 9인분을 혼자 먹었어!" 경악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분명 카민의 귀에도 들렸겠지만 카민은 모른척 딴청을 피운다. 나는 피식 웃으며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에세렌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또 한 번 경악했다. 에세렌은 말없이, 정말로 말없이, 아직도 음식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음식을 꼭꼭 씹어 먹고 있는 에세렌. 에세렌은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음식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에세렌이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를. 에세렌의 앞에 쌓인 그 엄청난 접시수! 나는 경악의 눈으로 에세렌을 보았다. 어느 순간, 그런 내 눈을 의식했는지 에세렌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더니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왜 그러시죠?" "……." 어쩐지 앞으로 카민의 돈이 많이 딸릴 거란 예감이 드는군. 나는 한마리의 메뚜기떼가 쓸고 간 것 같은 테이블을 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곤 앞에 있던 과일을 집어 들었다. 까끌까끌하게 생긴 이상한 과일이다, 흰색의. 나는 그 과일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얀 과일을 보니 연상되는 것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하얀 로브. 그리고... 라이메데스. 어째서일까. 왜 라이메데스가 오지 않는 것일까. 나는 더더욱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할, 내가 그 놈 걱정 따위를 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나 늦다니, 뭔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젠장할, 젠장할. -칼레들린님,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레이네가 걱정스럽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걱정은 무슨." 내가 그 녀석 걱정 따위를 할 것 같냐? 나는 과일의 껍질을 벗긴 후 확 하고 깨물었다. 노란 진물이 물씬 흘러나왔다. 나는 그것을 꼭꼭 씹어 먹었다. 순간이었다. 갑자기, 내 등뒤에서 내리 꽂히는 강렬한 무엇인가를 느꼈다. 그것은... 시선. 너무 강렬한 시선이라 순간적으로 등에 구멍이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나는 휙하고 고개를 돌렸다. 무엇인가 이상한 것이었다. 무엇이었지, 그것은? 눈이 가늘게 홉떠졌다. 무엇이었나. 방금 그것은. 너무나 강렬한 시선이라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에, 칼레들린님?" 에세렌의 놀란 듯한 목소리도 무시했다. 나는 눈가를 더더욱 좁혔다. 방금 그것은 분명……. -------------------------------------------------------------------------------- Back : 1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5 (written by 카르민) Next : 1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3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72189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December 2001 09:43:41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6-11-2001 22:00 Line : 195 Read : 1098 [17]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5 -------------------------------------------------------------------------------- -------------------------------------------------------------------------------- Ip address : 61.79.38.11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에, 칼레들린님?" 에세렌의 놀란 듯한 목소리도 무시했다. 나는 눈가를 더더욱 좁혔다. 방금 그것은 분명……. 온 몸을 훑어 내리는 듯한 시선이었다. ―느끼셨나요?― 레이네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네는 흠, 하고 낮은 감탄성을 흘리더니 어느 순간 입을 열어 따따따 거리기 시작했다. ―서쪽으로 30도 돌아보면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칼레들린님과 카민님을 아까부터 뚫어져라 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아, 혹시 제가 박혀 있는 이 검이 너무나 아름다워 이 걸 보려고……― 퍼벅! ―꾸엑!― 나는 레이네를 말없이 밟아준 다음 몸을 일으켰다. 하도 많이 먹어서 물먹은 솜인형처럼 몸을 늘어뜨리고 있던 카민은 숨을 헉헉대며(그러니까 작작 먹으랬지!)눈만 게슴츠레하게 뜨고 나를 보더니 말했다. "어딜 가는 거야?" 에세렌 역시 조금 긴장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왜 그러세요?" 나는 대답 없이 몸을 움직였다. 에세렌과 카민의 시선이 나를 좇았다. 시선이 느껴지는 서쪽으로 30도 방향으로 계속 걷자 드디어 시선의 근원지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그 곳에서 탁하고 멈춰섰다. "어머!" 내가 바로 앞에 서자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란 듯 나즉한 비명소리를 냈다. "뭘 그렇게 놀라지? 아까부터 날 보고 있었지?" 나는 내 앞에 있는 자들을 향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 곳에 있던 것은 여자 둘이었다. 평민이라고 하기엔 조금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자둘. 비슷한 계통의 아이보리빛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들은 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시던 중이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내가 갑자기 일어서서 자기네들 쪽으로 다가가자 깜짝 놀란 듯 흠칫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흐음. 자아, 너희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이거지? "아……." 나는 그들을 한 번 노려보았다. 여자들은 둘 다 갈색 머리카락으로 하나는 단발, 하나는 장발의 소유자였다. 그들은 자매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닮아 있었다. 긴 갈색머리카락의 소녀는 나를 보더니 작은 신음성을 흘렸다. 그녀는 입을 막고 나를 잠시 올려다보았다. "내게 무슨 볼 일이 있어서 본 거냐?" 난 그녀들이 내게 무슨 볼일이 있나 생각하다가 순간 흠칫했다. 혹시... 혹시 내가 마족이라는 것을 알아챈 건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특히나 인간들은 가지기 힘든 새까만 머리카락이라던가 새까만 눈동자, 또는 탈색증이 걸렸나 의심될 만큼 하얀 피부 등을 갖고 있는 나니까……. 무엇보다 이렇게 잘생긴 내가 인간일 리가 없지 않은가! 혹시라도 그것이 아니라면, 카민의 조직에서 보낸 놈들일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니 손이 저절로 검집을 향했다. "왜 나를 보고 있었지?" 난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저어, 저……" 두 명의 소녀는 어쩔 줄 몰라하는 어조로 나를 보며 쩔쩔 맸다. 그녀들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머리카락을 살짝 긁었다. 소녀들은 내 눈치를 한 번 보더니 갑자기 자기네들끼리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기분이 나빠짐을 느끼고 서서히 검집에 힘을 주었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라 막 폭발하려고 하는 시점에서, 갑자기 긴머리카락의 소녀가 후우, 하고 나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내게 말했다. "전……. 아크로아라고 해요. 이 아이는…… 비아티구요." 자신을 아크로아라고 소개한 갈색 장발의 소녀가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단발머리 소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해 보였다. 그러나 난 내가 왜 이들의 인사를 받아야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날 왜 보고 있었냐고 했지 이름을 가르켜 달라고 하지 않았어!" 그러자 아크로아라고 했던 그녀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녀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고, 난 그 시선을 그대로 마주하며 눈을 부라렸다. 시선이 한참 얽혔다고 생각했을 때, 문득 그녀가 훗, 하고 웃었다. "그런건 천천히 해도 늦지 않잖아요. 그 쪽의 이름은 뭐예요?" 아크로아라는 소녀가 영문모를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데, 이번엔 비아티라는 소녀가 내게 물어왔다. 난 또 한 번 어이가 없어졌다. 내가 어이없음에 허허,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로 꺾는데, 비아티라는 소녀가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저희 나쁜 아이들은 아니예요. 성함을 말씀해주세요." 호오, 그럼 나쁜 아이들은 '나 나쁜 아이예요'라고 말한다든? 웃기는군. "성함을 말씀해주실 수는 없으신가요?" 아크로아라는 소녀는 비아티보다 훨씬 정중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내가 이름을 가르켜주고싶다는 마음이 든 것은 아니었다 "없어." "……어째서예요?" 비아티가 물었다. 난 퉁명스레 대답했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내 이름을 말해줄 까닭이 있는 거야? 게다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던 주제에 말이지. 왜 나를 보고 있었던건지부터 어서 말하시지." 두 명의 소녀는 이번에도 잠시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들이 서로를 향해 당황한 표정을 교환한다. "칼?" 그 때,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아니, 어쨌든 그 이상한 애칭 비슷한 것을 부르며 다가왔다. 붉은 머리칼에 핏빛눈동자…… 하여튼, 그녀석이다. 카민은 아직도 온 주변에서 쏠리고 있는 공포의 시선을 무시한 채로 잘도 걸어오고 있었다. 카민은 손에 접시를 두 개 가지고 있었는데 뭔가 꼬불꼬불한 이상한 것이 그 속에 들어있었다. 시뻘겋고 노랗고. 뭐야 저게? 저것도 먹는 건가? 그건 그렇고 이놈…… 여기까지 오는데 저런 것을 들고 오다니. 대체 네놈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 거냐? 해부를 해보고 싶을 지경이다, 정말로! 에세렌 역시 카민의 뒤에 서 있었다. 그는 경계의 눈초리로 아크로아와 비아티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시죠?" 카민은 먹던 것을 탁자 위에 올려놓더니 내 앞에 선 두 소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두 명의 소녀, 자신을 각각 아크로아와 비아티라고 소개했던 그들은 그런 카민을 바라보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아, 가까이에서 보니 정말로 완연한 붉은 빛이군! 그렇지, 언니?" "검은빛도 그렇고 붉은빛도 그렇고 오늘은 흔치 않은 빛깔만 보는걸!" 비아티와 아크로아가 감탄하듯이 말하고는 다시 카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카민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쭈뼛쭈뼛하며 내게 물어왔다. "뭐 하는 사람들이야?" "몰라." 그러나 우리가 자신들을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든 말든 상관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에서인지, 소녀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눈동자 좀 봐! 완전히 핏빛이야! 핏빛!" "이 쪽은 또 어떻고! 완전히 검은 빛이잖아! 난 저렇게 새까만 눈동자는 본 적도 없어." "저기, 저기 말인데요……" 에세렌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그녀들의 대화를 막으려 했지만 소녀들의 대화를 끊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얼굴 선이 부드럽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면서 균형을 잘 이룬 게 너무 곱상하지 않아? 굉장한 미소년인걸! 게다가 저렇게나 하얀 피부!" 비아티가 난데없이 발악같은 움직임으로 카민을 가리키더니 말했다. 카민은 흠칫하며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려달라는 마음이 그의 붉은 두 눈동자에 가득했지만 나도 모르는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리요? "이 쪽은 또 어떻고! 얼음같이 냉정한 분위기! 차갑고 날카로운 얼굴 선하며 무서울 정도로 단아한 얼굴! 완벽히 균형 잡힌 몸매! 그리고 피부색은 이 쪽이 더 하얗다고 생각하지 않아? 완전 백옥인데!" 이번에는 나를 두고 한 말인가? 훗, 물론 내가 잘생기긴 했지만 직접 들으니 무척 쑥스럽군. "게다가, 이 사람을 좀 봐! 키도 크잖……" "이봐요!" 카민은 우리 앞에서 이어지는 이 알 수 없는 대화에 화가 났는지 고함을 쳤다. 두명의 소녀는 흠칫하며 그런 카민을 바라보다가 동시에 얼굴을 붉혔다. 그 중 비아티가 말했다. "역시 예쁘네. 호홋. 역시 언니 눈은 정확하다니까. 그렇게 먼 곳에서 봤는데도 이렇게나 정확하게 짚어 내다니!" "너도, 참. 난 저 쪽에 더 좋다니까." "이봣!" 카민이 더 크게 고함을 쳤다. 그제서야 두 자매로 추정되는 소녀들은 정신을 차렸는지 아, 하는 나지막한 탄성과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곧 그녀들의 얼굴이 천천히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곧, 그녀 중 언니로 추정되는 아크로아가 부끄러운 미소를 만면에 띄운 채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카민을 바라보며 찬찬히 입술을 움직였다.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아름다운 사람만 보면 이렇게 되거든요. 아이참, 이것도 병이라니까." 우리들 사이의 공기가 경직했다. 파직, 파지지직. 공기가 얼어붙어서 그 사이에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천천히 천천히 일어난 그 균열이 나와 카민을 뻣뻣하게 얼리고, 냉동시켰다. 카민은 완전히 경직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에세렌 역시 헤, 하고 입을 벌린 채로 황당한 얼굴을 하고 섰다. 카민은 한참만에 당황한 눈으로 아크로아를 향해 되물었다. "아, 아름다운 사람?" 그의 표정에는 닭살이 돋는다, 라는 의미가 가득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 아크로아라는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예, 아름다운 사람이요! 정말이지 아름다우세요!" 순간, 나와 카민을 스치며 엄청난 한풍이 지나갔다. 허, 허허. 허허허허허허. -------------------------------------------------------------------------------- Back : 1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6 (written by 카르민) Next : 1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4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72189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December 2001 09:43:44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6-11-2001 22:06 Line : 163 Read : 1362 [18]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6 -------------------------------------------------------------------------------- -------------------------------------------------------------------------------- Ip address : 61.79.38.11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제가 당신들을 보고 있었던 이유는……. 당신들이……. 음,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요……. 음, 눈에 확 띄었기 때문입니다.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는 표현이 옳겠지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난 카민과 시선을 한 번 맞부딪혔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나와 카민이 이해할 수 없는 시선을 교환하는 사이 갑작스럽게 또 다른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우리 언니는 화가예요!" 옆에서 당차게 외치는 단발머리 소녀, 비아티의 목소리였다. "에?" 화가? 화가라면…… 에… 그러니까…… 아, 그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카민은 당황한 눈으로 아크로아와 비아티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아크로아는 그런 카민을 바라보다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음. 전 화가인데, 주로 인물화를 그립니다. 최근에 어떤 분이…… 그림을 부탁하셔서... 그걸 그리고 있던 차였는데, 그림의 모델이 두 분 필요해요. 그런데, 두분을 보자마자 전 그대로 필(feel)을 느꼈습니다! 여러분들이야 말로 제가 그토록이나 찾아헤맸던 바로 그 분들! 모델을 부탁드리고 싶은 얼굴이라고 생각해서 계속 보고 있었답니다." 나와 카민이 멍멍한 표정으로 입을 딱 벌리는데 아크로아는 수줍은 듯한 자세로 살짝 웃었다. "그런데, 계속해서 보고 있던 당신이 갑자기 제 자리로 다가와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계속 말을 걸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저어, 이런 말은 갑작스럽지만……. 괜찮으시다면, 제 그림의 모델이 되어 주시겠어요?" 에세렌이 내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와 붙어 섰다. ―캬하하하하하!! 모델이래요, 모델! 크하하하하하하!!― 내 귀에는 아까부터 계속 레이네의 웃음소리가 목소리가 번지고 있어 나는 심히 불쾌해진 차였다. 나는 노란색의 보석을 있는 힘을 다해 꾹 하고 눌러 준 다음 아크로아를 다시 보았다. "저, 아크로아예요. 이 아이는 비아티죠. 그 쪽의 이름을 가르켜 주실 순 없을까요?" 아크로아가 카민과 에세렌을 향해 다시 한 번 자신들의 소개를 했다. 이미 그녀들의 소개를 받았던 나는 멀뚱히 서 있었다. 그런데 순간, 조금은 황당한 얼굴로 저 아크로아라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던 에세렌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아크로아? 아크로아라면…… 혹시 아크로아 릴리스님이십니까?" 에세렌의 질문에 아크로아는 얼굴에 홍조를 띄우더니 대답했다. "예. 제가 아크로아 릴리스예요. 영광인데요. 절 알아보시는 분도 있구요." 순간, 에세렌의 안색이 휙 변했다. 흥분한 것 같기도 하고, 굉장히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에세렌은 나와 카민을 향해 시선을 획 꺾었다. 그는 상당히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칼님! 카민님! 아크로아 릴리스님이시랍니다! 크레티아 최고의 화가라는 그 분! 카민님과 칼님도 알고 계시죠? 2년 전 대륙전체에서 이름난 화가들이 모두 출전했다는「베이세이트」 대회에서 17살 나이, 최연소로……" "몰라." 나는 에세렌이 흥분해서 마구 외치는 말을 툭하고 끊으며 짧게 말했다. 내가 알 턱이 없지 않은가. 내 머리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렇게 세세한 것까진 알지 못한단 말이다. 카민 역시 그 빌어먹을 체이드 숲인가 뭔가에서 한참동안 처박혀서 살았던 탓에, 2년 전의 일 같은 건 알지 못할 거다. 난 모르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 저었고 카민 역시 어깨를 으쓱했다. 에세렌은 또 한 번 당황한 눈으로 나와 카민을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몰라요?" "네." "모른다고 했잖아." 나와 카민의 주저 없는 대답에 에세렌은 순간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더니 아크로아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에세렌은 갑자기 내게로 다가와 말했다. "몰라도 안다고 해야지요! 좀 예의가 있어보세요! 저 분이 얼마나 무안하시겠어요!" 너나 목소리를 줄여. 식당이 쩌렁쩌렁 다 울리는구만.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듣는 편이 훨씬 무안하겠다. 그리고 난 예절 그 자체야, 어디서 감히 그런 망발을! ……라고 말하려다가 나는 포기해버렸다. 카민은 흠, 하고 중얼거리더니 다시 아크로아에게로 시선을 가져갔다. 녀석의 입이 열렸다. "뭐, 어찌됐든…… 이름 정도를 알려주는 것은 그리 힘들 것이 없겠지요. 이름은 카민. 성은 없구요. 이녀석 이름은 무슨 칼레들린…… 뭔데…… 이름이 너무 길어서 생각도 안 납니다. 그냥 칼이라고 부르죠. 그리고 이 분은 에세렌님입니다. 신관이죠." 무슨 칼레들린 뭔데? 그게 지금 소개라고 하는 거냐! ……라고 카민에게 외치고 싶었으나 역시 성질 좋고 인물 좋은 난 꾹 눌러 참았다. "그래요? 그럼 카민님, 부탁 드려도 될까요?" 아크로아가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카민에게 물었고 카민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뭘요?" "말했잖아요. 제 그림의 모델요. 그 옆에 분도 같이." 카민은 곤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영광이지만 저희들은 일이 있어서요. 거절하겠습니다." "……네?" 아크로아는 예상외의 대답이었는지 굉장히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한참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주일…… 일주일만 저희 집에 머무르면서 그림을 그리게 해주시지 않겠어요? 그 이상은 붙잡지 않겠어요. 딱 일주일만요. 당혹스러우시겠지만, 제겐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카민은 의외로 냉정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죄송합니다." 카민의 냉담한 말이 의외였는지, 그리고 그 예쁜 얼굴에서 그렇게 쌀쌀맞은 말투가 튀어나온 것이 놀라웠는지 비아티와 아크로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엔 비아티가 말했다. "그럼 그 쪽의 칼 씨는요?" "관심 없어. 무슨 얼어죽을." "그런…… 그럼, 그럼 5일은요? 5일만요." 아크로아가 애원하는 눈빛으로 카민에게 말했다. 음, 꽤나 절실해 보이는데? 카민이 꽤 예쁘게 생겼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그리고 내가 엄청엄청 잘생기긴 것 역시 너무나 당연하게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굳이 저렇게 까지 해서 모델을 부탁해야 하는 건가? 카민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거절입니다." 아크로아는 실망하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난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볼일 끝났으면 가보지 그래?" 난 그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카민 역시 아크로아와 비아티를 남겨둔 채 일어서려 했다. 에세렌은 뭔가 말을 하고 싶다는 얼굴이었으나 그것을 직접 입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는 흠, 하고 낮게 중얼거린 후 아크로아와 비아티를 향해 생긋 웃곤 일어섰다. 그 때, 아크로아가 외쳤다. "잠깐만요! 가지 말아요! 제 그림의 모델이 되어주세요!" "몇 번이나 말했지만 안……" 카민이 거절하려는 순간이었다. "제발요! 이렇게 부탁할게요!" 비아티가 말했고 아크로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카민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카민은 말했다. 순간, 아크로아가 크게 외쳤다. "저희 집에 머무시는 동안 편하실 거예요! 물론 모델비도 지불할게요! 또 맛있는 음식이라던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돈! 나는 그 말에 눈이 번쩍 뜨임을 느꼈다. 그리고 맛있는 거라니! 난 그녀의 그 마지막 한마디에 곧 주저 없이... "할게!" 라고, 카민이나 에세렌의 의사를 무시한 채 크게 외치고 말았다. ---------------------------------------- 역시 아무 생각 없는 칼 군이라죠^_^; -------------------------------------------------------------------------------- Back : 1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7 (written by 카르민) Next : 1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5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72189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December 2001 09:43:47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2-12-2001 00:00 Line : 210 Read : 239 [19]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7 -------------------------------------------------------------------------------- -------------------------------------------------------------------------------- Ip address : 61.83.23.32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cafe.daum.net/halfdemon 반마족 카인 카페예요.. 이게 언제 생겼지? 왜 난 모르고 있었던거지?;;; 어떤 분이 말씀하셔서 처음 알았습니다, 이것참;; 그런데 왜 운영자님은 카페를 만드시고 제게 통보를 안 해주신건지?;;; 하지만 카페가 생겼다는 사실이 못내 기쁜 카르민이군요-_-;;(나란 인간은 정말이지;) 가입해 주세요!!!+_+(무섭다는...;;) 자아, 그럼 오랜만에 글 한 편 업일까요? 물론 아직 시험은 안 끝났습니다..-_-;; --------------------------------------------- 폭신한 쿠션의 감촉, 화려하게 꾸며진 따뜻한 방안, 불빛이 반짝이는 넓은 홀, 그리고 단정하게 놓여진 의자 두 개와 얌전하게 생긴 갈색머리의 소녀 한 명. 여기까지만 본다면 그 이상 좋은 장소도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맛있는 음식이 나온다는 말까지 들은 상태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겠지. "고개를 좀 더 들어줘요." "……." "아이참, 움직이지 말아요." "……." "음, 손을……. 아, 좋아요. 그대로." 그러나 난 지금 행복감은커녕 내 자신의 한계와 싸우고 있었다. 그것도 거의 막판까지 몰린 한계와 말이다. "……언제…… 끝나?" 난 나를 열심히 쳐다보며 정신 없이 연필로 그림을 그려나가는 갈빛 머리의 소녀에게 물었다. 그러나 갈빛 머리의 소녀, 아크로아는 내 말에 대답할 시간조차 없다는 듯이 부지런히 연필을 놀리더니 한참만에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가만히 있어요!" 하지만 그 대답도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난 정말 기가 막혀 혀를 차는 수 밖에 없었다. 왜 카민이 모델 일이라는 것을 그토록 냉정하고 딱 잘라서 거절했는지 수긍이 갔고 그녀석이 끝까지 거절하지 않은데 대해서 막연한 미움까지도 생기기 시작했다. 제기랄! 뭐가 이렇게 힘들어! 몸을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굳은 듯이 앉아 있으라고? 차라리 죽으라고 하지 그래, 앙!? 생물이 움직이지 않고 어떻게 산다는 거지? 네가 해봐라, 네가 직접! 말도 안 돼! 이건 생태계의 법칙을 어기는 짓이란 말이다! 게다가 뭐? 손을 앞으로 약간 뻗은 자세로 비스듬히 앉아? 하이고, 그걸 어떻게 몇 시간이나 하고 앉았어! 내가 무슨 석고상인줄 알아! 내 몸에 어디 한 번 석고를 발라 보시지!! 난 속으로 온갖 울분을 다 삼키며 내 앞에서 진지한 눈으로 나를 훑어보는 아크로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우선 나부터 스케치, 내가 끝나면 카민을 그린다고 했던 그녀는 정신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놀림은 상당히 빨랐고 민첩했으며 진지했다. 그러나 가만히 미동도 않고 앉아있는 것은 생각 외로 괴로웠고 또 졸린 것은 졸린 것 나름대로 엄청난 고통이었다. "칼레들린님! 하품하지 말아욧!" 내가 언제 하품을 했다고 그래? 시끄러워! "언제 끝나?" 이 질문이 벌써 몇 번째였을까? 아, 이젠 생각도 안 나는군. 카민! 이 빌어먹을 자식! 넌 왜 이런 거라고 얘기해주지 않은 거지? "조금만요, 조금만!" 그 조금만 이라는 말도 얼마나 들었는지 이젠 지겨울 정도다. 아크로아는 정말 열심히 그리고 또 무언가를 그렸다. "……." "……." 크아아아아악! 크아아아아아아악!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들고 있는 팔에는 이제 감각조차 없어졌다. ―쯧쯧. 조금만 참아보세요. 남자가 그 정도의 참을성도 없나요? 여기서 튀어나가면 남자도 아니지. 암, 남자도 아니야. 흐흐흐, 남~자가 아니죠.― 레이네의 저 얄미운 목소리만 아니었더라도 튀어나가도 수 십 번은 튀어나갔을 거다. 빌어먹을, 이 놈의 마물은 날이 가면 갈수록 왜 이렇게 뻔뻔스러워지는 거냐! 요즘에는 아예 나를 갖고 노는군, 놀아. 나는 축 늘어진 얼굴을 하고 아크로아를 보았다. 대체 무엇인가. 2∼3시간이면 끝난다고 한 주제에 지금 뭘하는 거냐고! "……그만…… 하죠." 난 갑자기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에 너무나도 감격했다. 난 벌떡 일어섰다. "크아아악!" 그러나 일어난 그 순간 나는 버럭, 고함을 치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오래 앉아서 요상한 포즈(내게 석고상이 되기를 강요했던 그 요!상!한! 포즈 말이다.)를 취하고 있었던 탓에 다리에 쥐가 났기 때문이다. 난 오만상을 찌푸리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 때, 아크로아가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상해." 뭐가? 난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크로아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인상을 쓰고 있었다. "어려워요. 너무 어려워. 당신의 분위기 표현, 너무 어려워요. ……처음에는 이렇게 어려울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너무 이상하군요. 왜 이렇게 그림이 안 그려지는 건지…… 알 수가 없어요." "몰라. 어쨌든 다 그렸지? 난 간다." 난 그렇게 말하고 아크로아와 단 둘이 있던 방에서 나가려고 걸음을 옮겼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다. "잠깐만요." 갑자기 아크로아가 날 불러 세웠다. 난 흠칫하며 몸을 사렸다. 순간, 아크로아가 살짝 웃더니 말했다. "걱정 말아요. 오늘은 끝났으니까. 잠깐만 이리 와봐요, 칼레들린님." 그녀는 내가 다가오자 한숨을 길게 내쉰 후 자신이 이때껏 그리고 있던 그림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 그림을 보고 내가 한 말은…… "나잖아?" ……였다. "당연하죠. 당신이 모델이잖아요?" 아크로아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고 난 다시 그림 속의 나를 바라보았다. 차갑기 그지없는 인상의 그림 속의 나는 나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아니, 그림 속의 검은 머리칼의 인물, 그것은 아예 또 하나의 나였다. 하지만 왜일까? 왠지…… 흐음, 뭔가 미묘하게 나와 다르다. "이상해 보이죠, 이 그림?" 아크로아가 내게 물어왔고 난 악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크로아는 또 한 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는 갑자기 그림을 그렸던 종이를 펼쳤다. 그걸 본 난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린 것은 그 한 장의 그림이 아니었다. 몇 장…… 아니 정확히 십 몇 장에 달하는 많은 그림들이 종이 곳곳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 그림의 모델들은 하나같이 나, 나라는 인물이었다. 하품하는 모습을 빨리 그린 듯한 것도 있고……. 하여튼 여러 가지 표정이 화폭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게 신기했다. 내가 꽤 흥미 있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아크로아는 말했다. "잘 그려지지 않았어요. 보통은 이것보다 스케치는 훨씬 빨리 끝나는데. 당신이 지겨웠을 거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표현이 안되는 군요. 왜 그런 거죠? 당신의 이미지는 너무 어려워서 말이예요." 쯧, 그런걸 나한테 물어서 뭘 어쩌자는 거야? "뭐 대충 괜찮네. 아무렇게나 그려." 난 나오는 대로 말했고 순간 아크로아의 표정이 현저하게 바뀌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약간 화가 난 듯, 아니, 약간 슬픈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난 그녀의 표정을 담담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전, 당신이라는 인물의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싶어요. 당신이라는 느낌이 잘 나도록 그리고 싶다 구요." "그래? 그럼 잘 그리면 되잖아."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군요." 아크로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이번에는 내게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럼 이만 일행분에게 가보세요. 방은 2층에 오른쪽 맨 끝입니다. 식사는 잠시 후에, 사람을 보내 알리겠어요. 전 정리를 좀 하고 가겠습니다." "좋아." 난 그렇게 대답하고 발걸음을 다시 옮기려다가 다시 멈춰 섰다. "그런데 이봐." "네?" 아크로아는 그림을 정리하다 말고 의아하다는 얼굴로 나를 돌아다보았다. 나는 약간 삐딱한 시선으로 아크로아를 보며 말했다. "대체 그림은 왜 그리는 거지?" 그 말에 문득 아크로아가 피식, 하고 웃었다. "왜일까요. 뭐라고 딱히 꼬집어서 말씀드리기가 곤란한 질문이시군요. 하지만, 이 번 그림은 누군가의 부탁을 받아서 하는 일입니다. 평소에는 그저 제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곤 하죠. 저는 파랗게 펼쳐진 바다와, 햇살과, 숲과, 모녀의 다정한 모습을 그리는 것을 즐깁니다. 하지만 이 번엔 조금 달라요. 어느 날인가, 크레티아 황실측에서 사신이 왔더군요. 그리곤 말하는 거예요. 한 달 이내로 아름다운 소년의 그림을 그려서 보내 달라고." "......" 어디 변태한테 팔아먹을 셈인가. 황실? 그건 인간의 왕과 그 혈족을 일컫는 명칭. 마계로 따지면 마왕과 최고위 마족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래서 저는 몇 달 전부터 모델을 찾아서 헤매고 있었고... 결국은 이 곳 이카루까지 오게 되버렸어요. 하지만 모델을 찾았으니... 이젠 열심히 그려야죠." 생긋하고 웃어보이는 아크로아의 얼굴을 보고 있던 나는 흐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 * * * * * * * * * * * * -------------------------------------------------------------------------------- Back : 20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8 (written by 카르민) Next : 1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6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72189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December 2001 09:43:51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2-12-2001 00:02 Line : 254 Read : 223 [20]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8 -------------------------------------------------------------------------------- -------------------------------------------------------------------------------- Ip address : 61.83.23.32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잘 하고 오셨습니까?" 방에 들어서자마자 에세렌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물었고, 카민이 그 뒤를 이어 물어왔다. "어때? 재밌든?" 재미있기는! 이들이 있는 방에 헐떡헐떡 숨을 몰아쉬며 뛰어 들어온 난(혹시라도 그 빌어먹을 여자가 마음이 변해서 조금만 더 그리죠, 라고 말할까봐 죽도록 뛰었다)빙글거리리며 내게 묻는 카민에게 그렇게 쏘아주고 싶었지만 저렇게 웃는 카민에게 또 막상 그 얘기를 하기는 자존심 상했다. 그저 한마디 해주는 수밖에. "너도 내일 열심히 해봐라." 그것은 일종의 저주였다. 나는 그 말과 동시에 속으로 약간의 웃음을 머금었다. "난 별로 열심히 하고 싶지도 않아, 그런 일은……" 그 말과 함께 카민은 방 한 켠에 있던 침대에 벌렁 누워 버렸다. 붉은 색, 그의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침대에 놓여졌다. 카민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런데…… 이녀석, 말이 좀 이상하다? '그런 일은'이라니. 마치… 예전에 한 번 경험했다는 듯이…… 들리는데? "너, 혹시……" 난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카민을 부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카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운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난 진지한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 "……설마…… 설마 해봤던 거냐." 내 말에, 카민의 표정이 정말 거짓말처럼 현저히 바뀌었다. 빙글빙글 거리고 있던 하얀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진 것은 물론, 입술의 핏기마저 가셨다. 그리고 표정은…… 못 볼 꼴을 보고 만 어느 불쌍한 남자의 얼굴 그대로군. "그, 글세……" 카민은 나로부터 시선을 돌리며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어설프게 대답했다. 나는 그런 그의 태도에 발끈해, 큰 목소리로 매섭게 말했다. "해봤던 거냐고 묻잖아! 똑바로 대답 못해?!" "하, 하하하…… 그, 그랬던가?" 카민은 나의 화가 난 표정을 보면서 띄엄띄엄 말을 더듬었다. 그 녀석의 눈은 '그만 넘어가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카민을 그냥 놔둘 정도로 착한 녀석이 아니다. "해봤던 거냐, 너!!" "그, 그래." "……죽을래?" 나는 카민의 대답이 들려오자마자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에, 에?" 카민의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지체 없이 내 옆구리에 대롱대롱 걸려 있는 검을 스릉, 뽑아 들었다. 차가운 금속음이 귀를 두드렸다. 나는 검을 오른손에 든 채로 조금은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흐……. 그·걸·해봤단 말이지?" "카, 칼. 거, 거, 검은 놓고 말하자?" 카민은 내가 검을 들고 스산한 웃음을 흘리자 당황하며 손을 휘휘 저어댔다. 하지만, 나는 카민의 말을 얌전히 들을 만큼 착한 인격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 나는 그런 마족인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흐흐흐, 하고 내 곱상한 이미지에 맞지 않는 웃음을 터뜨렸다. "모델인가 뭔가 하는 것은 생물이기를 포기하는 짓이더군. 크하하하하하핫!" "하, 하하. 카, 칼. 그, 그래? 마, 많이 힘들었나보지?" 카민은 그 말과 함께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나는 그런 카민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검을 꼬오오오옥 움켜 쥔 채로 카민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내 발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녀석에게로 가까워졌다. 순간, 카민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런데 경험자라는 놈은 아무런 귀뜸도 해주지 않고 말이지. 끝까지 말렸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 어이! 칼…… 저기, 우리말이야…… 저기, 친구지?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그만 좀 다가 올 수 없을까?" 성큼 성큼 성큼. 나는 대답 없이 발만 재촉했다. 수십, 수백 개로 밝혀놓은 초의 밝은 빛을 받아 은빛의 검은 날카롭게 그 잔광을 반사했다. "……." "카, 칼. 있지? 하하, 그러니까…… 칼…… 응, 저기……." 성큼 성큼 성큼. "에, 에헤. 칼. 있잖아, 있잖아…… 이, 있잖아…… 히엑!" 카민은 내가 검을 천천히 들어올리자 깜짝 놀라며 몸을 부들 떨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녀석은 거의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매달린 자신의 단검을 빼들었다. 오호, 네녀석이 지금 내 앞에서 검을 뽑았다 이거냐? 나는 눈을 치켜 떴다. "히엑? 나도 모르게 뽑아버렸네. 도, 도로 넣을 거야. 살기를 느끼면 저절로 몸이…… 으으…… 도로 넣을 거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니까." 카민은 내가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보자 화들짝 놀란 듯 움찔하며 도로 검을 집어넣었다. 그 과정이 얼마나 재빨랐는지, 검을 집어넣다가 찌르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나는 살짝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나는 싸늘한 눈으로 다시 한 번 검을 들어올렸다. ―……칼레들린님. 지금 악당같아 보여요.― 레이네가 뭐라고 하든 이젠 무시한다. 후훗. "으아아아아악!" 내 그 검을 본 카민놈이 자지러지는 비명소리를 냈다. 쩝…… 짜식, 목소리 한 번 크군. 내가 정말로 네 녀석을 베어 버릴 거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이 저택 수십 명을 기절시킬 것 같은 그 엄청난 목소리로 고함을 쳐대고 있는 거냐? ……저 목소리 정면에서 들었다간 사람 여럿 잡겠군. "저, 저기. 그만들 하세요." 에세렌이 내 앞을 막으면서 말했지만, 나는 으흐흐하는 소리를 내면서 계속 검을 들고 나섰다. "으아아악! 카알! 그만 다가오라니까아!" 카민의 커다란 목소리가 저택을 울리듯이 퍼져 나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한참이 지났다고 생각했을 때, 타닥거리는 요란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확실히 카민놈의 목소리는 정말 크긴 큰 것 같다. 그 목소리를 듣고 뭔 일이 생겼나 싶어 누군가가 뛰어오는 모양인걸 보니. 나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후, 서둘러 검을 회수했다. 아니, 회수하려고 했다. "으악!" 나는 검을 서둘러 넣으려고 했다. 나는 검집 안에, 내 이 소중한 검을 도로 넣으려고 했다. 그것뿐이었다. 나는 검을 집어넣으려고 했다. 정말로 그것뿐이다. 나는…… 검을 넣고 싶었었던 것이다. 그것 외의 행위는 그 어느 것도 원하지 않았다. 검만 넣으면 되는 일이었다. "……칼, 괜찮아?" 그런데…… 내 손은 그런 내 마음을 배신했다. 카민은 내 쪽으로 다가오며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물었다. 그는 내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자 내 오른손을 휙 들어올렸다. 내 오른손에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얼굴을 붉혔다. 검을 넣으려고 너무 서둔 나머지…… 잘못해서 내 손을…… 내가 찌르고 말았던 것이다. 크악! 이런 망신이! 카민이 혹시나 그런 진기한 쇼를 연출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그걸 내가 대신 연출하다니. 제, 제길, 쪽팔려! 쪽팔려 죽겠어! "……피 난다." 카민은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내 손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에 걱정이 서려 있었다. 에세렌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손을 휙하고 낚아챘다. 나는 그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 "만지지마." "……예? ……아, 예……." 에세렌은 무안한 듯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난 괜찮다." 나는 최대한 냉담하게 뱉어냈다. ……마족은 상처가 빨리 아문다. 정말로 빨리 아문다. 비록 반쪽짜리라지만, 나는 마족이다. 그래서 내 상처는 거의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낫는단 말이다. 이제 내 정체 쯤은 대충 눈치챘다고 하지만……. 피가 줄줄 흐르던 상처가 몇 분 지나지 않아 깔끔하게 사라져 있는 모습을 본다면…… 역시 유쾌하진 않을 거다. 젠장할, 이미 밝혀졌는데 괜히 사서 걱정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역시 싫은 건 싫은거다. "정말 괜찮아?" 카민은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때맞춰, 고맙게도 문이 벌컥 얼렸다. "괜찮으십니까!?" 커다란 목소리를 동반해서. 나는 시선을 그 쪽으로 꺾었다. 카민의 시선 역시 내 상처에서 향하던 것이, 그 쪽으로 향했다. 나는 손을 얼른 뒤로 감췄다. 이미 상처는 아물고 있었다. 방안으로 들어선 것은 비아티라는, 상당히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녀였다. 아크로아와 함께 우리의 인물을 평가했었던…… 그녀는 당황해서 뛰어온 듯, 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전속력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 붙어 있다. "괜찮습니다." 카민은 그런 비아티를 향해 다정하게 말했다. 비아티는 나와 카민 주위를 싹싹 훑어보았다. "……아, 아까의 그 비명소리는 뭔가요?" 나와 카민의 주위를 훑어본 것도 모자라, 나와 카민의 몸을 다시 한 번 훑는 듯한 시선으로(벼, 변태냐!)훑어보고 있던 비아티가 물었다. 그 대답에 나는 머쓱해졌다.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카민이 가볍게 한 발을 앞으로 내딛더니 입을 열었다 "아아, 사실은요. 여기 있는 칼이 검을 뽑아서 저를 베려고 하지 뭡니까.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질렀어요." ……라는 말 따위를 지껄인다면 오늘 정말로 베어버릴거다, 카민. 나는 카민의 뒷통수에 대고 엄청난 저주의 오로라를 뿜어냈다. 카민은 비아티를 향해 입을 열려다 말고 움찔했다. 그는 내 쪽으로 돌아보았다. 그와 내 눈동자가 부딪혔다. 순간, 녀석의 얼굴에 떠오르는 그 어설픈 표정이란. 녀석은 다시 비아티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아, 비아티양. 죄송합니다. 제가…… 배가 좀 고파서 고함 좀 쳤어요." "예, 예?" 내가 당황해서 콜록거렸을 정도니, 듣고 있던 비아티야 말해야 뭣하겠는가. "예?" 다시 한 번 되묻는 비아티. 카민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에…… 그러니까……. 배고파서 고함 질렀다구요." ".......아, 예. 죄, 죄송합니다..... 식사준비가........ 조금....... 늦었나요?" 비아티는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을 몰랐고, 카민은 자신이 말해놓고 민망한지 머리를 긁어 댔다. 비아티는 그런 카민을 빤히, 아주 빤히 보고 있었다. 카민의 고개는 점점 더 바닥쪽과 가까워져 갔다. 나는 그 틈을 타 얼른 손을 보았다. 관통당한 것도, 깊이 박힌 것도 아니었다. 단지, 살짝 찢어진 것뿐인 상처였다. 마족인 내게는 너무도 가뿐한 상처. 이런 상처가 완전히 낫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상처는 이미 다 아물어져 있었다. 나는 얼른 손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런데 저기 비아티씨, 혹시 천하고 약 좀 주실 수 있나요?" 그 때, 카민이 이렇게 말했다. 순간이었다. 비아티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린 것은. "다, 다, 다치셨나요?" 왜 저렇게 당황하는 거지. 얼굴은 또 무슨 백지장이 따로없구만. "예? 아, 예. 사실은 칼이 검을 닦다가 검날에 베였거든요." 카민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카민…… 너 이제 보니 좋은 놈이었구나. 그렇게 쪽팔리는 사건을 그렇게 덮어주다니. 나는 카민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 내 시선을 받은 카민은 잠시 흠칫했다. 녀석은 뭔가 끔찍한 것을 느낀 듯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해서 나는 심히 불쾌해졌다. 비아티는 카민의 말에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살짝 웃었다. 하긴, 검을 닦다가 베이다니…… 그건 완전 초짜들이나 저지르는 실수가 아닌가. 제길, 그러고보면 저놈이 날 감싸준게 아니었다는거잖아!!! ……물론 검 집어넣다가 손 베었다는 것보단 좀 낫지만. "아, 예, 그렇군요. 그럼 일단 따라오세요. 막 저녁에 완성 되서 부르러 가던 참이었거든요. 가는 길에 드릴게요." "아아아아앗!! 밥이 다 됐다는 건가요?" 카민은 순간 이성을 상실했다. 녀석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한동안 비아티와 에세렌은 패닉 상태에서 허우적 거렸다. 그러나 짧은 기간이나마 이녀석과 생활해왔던 나는 이 큰 목소리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예." 카민의 그 오버성 발언에 비아티의 쩍하고 얼어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쿡 하고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건지…… 이 멍청한 자식은 얼굴을 붉히곤 머리를 긁적거렸다. "헤, 헤헤헤헷." 그리고 터져나오는 웃음. 바보가 자신이 저질러 놓은 일을 덮으려 애쓸 때 쓰는 웃음은 바로 저것일 것이다. 내 말이 틀림없다. "……그만 웃으시고 따라오세요." 비아티는 그런 카민을 향해 말했고 카민은 더더욱 얼굴이 붉어진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쿡, 걸작이야, 걸작! ------------------------------------------------ 어쩐지 반마족의 모든 이벤트는 식사장면에서 나오는 듯.. 쿨럭쿨럭!!! 아아... 그리고 각성의 시기 말인데요. 계속 물어보시는 분이 많군요. 4권 분량쯤 되면 칼이 각성을 할겁니다(얘기해도 되는 건가..-_-;;) 그럼 언제나 즐독.. -------------------------------------------------------------------------------- Next : 1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7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72189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nd December 2001 09:43:54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8-12-2001 22:51 Line : 191 Read : 334 [21]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9 -------------------------------------------------------------------------------- -------------------------------------------------------------------------------- Ip address : 61.82.237.11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야효효효효~~! 드디어 돌아왔습니다, 카르민! 자자자, 이제부터 순풍에 돛을 단 듯한 연재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_<;; 꼭 마감때문이 아니더라도 말이죠. 스토리도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고...^^ 어쩐지 요즘엔 기분이 좋아요. 역시 시험이 끝나서일까요? 후우~ 그것보다는 어서 100회 맞이 이벤트가 하고 싶어져서 어서어서 쓰고 싶다는 표현이 옳겠죠. 아직 21편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100회 이벤트가 하고 싶다니.. 나라는 인간은 정말..-_-;;어이가 없군요. 그럼 오늘 올라갑니다~ * * * * * * * * * * * * * * 비아티가 안내한 식당 내부로 들어선 우리들은 어마어마한 음식들이 차려진 식탁을 보고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정원에서 갓 꺾어온듯한 핑크색의 장미꽃이 수줍은 망울을 보이는 화분이 세로로 긴 식탁의 한 가운데에 놓여있다. 그리고 그 식탁 위로 줄줄이 도열된 이름 모를 수많은 음식들. 로시엔은 음식을 무척이나 잘 만드는 가정적인 마족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그라해도 식탁에 올라오는 반찬수가 4가지를 넘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왜냐하면 로시엔은 가정적인 마족인 동시에 은근히 구두쇠였기 때문이다. 내게 음식을 만들어 먹여주었던 나스 역시 밥을 무척 잘하는 꼬마였다. 하지만 체이드 숲, 그 빌어먹을 숲에서는 풀 한포기 제대로 나는 것이 없어 카민 남매는 자급자족을 해야했기에 역시 식탁에 올라왔던 음식들의 종류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하면... 내가 식탁 위에 줄줄이 도열된 음식들을 보며 감탄하는 것을 보며 굳이 촌스럽다느니 하는 말을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거다. 비아티의 안내를 받아 식탁이 부러지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로 휘황찬란하게 꾸며진 식탁 앞에 도착한 우리들이 음식들을 보며 입을 떡 벌린 채로 가만히 서 있자 먼저 식탁 앞에 와 앉아 있던 아크로아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렇게 서 있지 마시고 앉으세요. 많이들 드시구요." 그 말이 들리자마자 우리들은 냉큼 자리에 앉았다.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감사!" "감사히 먹겠습니다." 카민의 방정맞은 인사 뒤에 에세렌의 차분한 인사가 뒤따랐다. 아크로아의 작은 미소를 끝으로, 조금은 조용한 분위기에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잘 저며진 스테이크와 스파게티가 눈길을 끌어서 난 일단 그것을 먼저 먹기 시작했다. 내가 막 스파게티를 포크로 말아서 입안으로 넣는데, 비아티가 경쾌하게 입을 열었다. "세 분은 동료 여행자이신 것 같군요. 두 분은 검사, 한 분은 신관인 것 같은데... 맞나요?"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나는 대충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비아티가 호기심이 생긴 듯, 음식은 먹지 않고 동그랗게 뜬 눈을 내 쪽으로 향하며 다른 질문을 했다. "세 분의 목적지는 어디인가요?" 그 질문에 나와 카민의 시선은 모두 에세렌 쪽으로 쏠렸다. 사실, '유키'를 찾으러 가야한다는 판단 하에 우리들은 무조건 에세렌의 뒤만을 따르고 있는 실정이었다. "유키가 어디있는데?" 라고 물으면 에세렌은 싱긋 웃으며 대답하곤 했다. "그냥 제 뒤만 따라오세요." 답답하긴 했지만, 북어가 될 정도로 패서 실토하게 만들기엔 나와 카민은 너무 신사적이었다. 우리들 역시 에세렌이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는 알 수 없는 상태라서, 나와 카민은 모두 에세렌의 입술로 시선을 모았다. "예, 저희는 크레티아로 갈 생각입니다." 그 대답에 카민은 흐음, 하는 소리와 함께 먹고 있던 스테이크를 꿀꺽 삼켰다. 그런데... 크레티아로 간다고? "어머? 정말 크레티아로 가시는 건가요? 이거 놀랍네요! 이카루에서 크레티아로 가시려는 분이 있다니……. 그건 좀 힘들지 않나요?" 아크로아가 깜짝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크로아의 그 말에 에세렌이 다시 웃었다. "그래서 세이피안을 걸쳐서 가려고 하지요." "아, 그러시군요." 흐음? 여행경로가 그렇게 된단 말이지? 세이피안을 걸쳐서 크레티아. 그런데... 세이피안은 어디고 크레티아는 어디야? 그렇게 비아티와 아크로아, 에세렌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고, 나와 카민이 부지런히 고개를 써는 가운데 식사시간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접시의 바닥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식사를 마쳤다는 뜻으로 가볍게 입을 닦았다. 내 우아하고 품위있는 식사예절을 카민놈에게도 좀 가르치고 싶군. 나는 카민이 음식을 먹다가 튀긴 모든 잔여물의 흔적들을 보며 고개를 깊이 떨구고 말았다. 그래, 저 놈에게 음식 예절을 가르치느니 차라리 레이네가 영원히 수다를 멈추길 기대하는 편이 낫지. "저기요, 아크로아씨." 음식을 다 먹었는지 물을 한 잔 홀짝이며 카민이 아크로아의 이름을 불렀다. "네? 왜 그러시죠?" 아크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질문하자 카민이 고기를 잘근잘근 씹으며 지나가는 어조로 말했다. "……최근에 뭐 원한 산 일 있어요?" "네?" 그 뜻밖이라면 뜻밖이랄 수 있는 질문에 아크로아가 당황하다는 어조로 되물었다.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카민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물을 홀짝였다. "있어요, 없어요?" "……그, 그건…… 왜 물으시죠?" 비아티가 잔뜩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호오? 정말로 있는 건가? 하긴... 그렇지 않다면... 나는 다시 씩 웃어버렸다. 시선을 돌려 카민 쪽으로 주니, 카민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음이 느껴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조용히 하고 들어요. 메인 디쉬인 스테이크에 독이 있어요." "뭐라구요?" 카민이 태연스럽게 한 그 말 한 마디에 벌컥 뒤집혀진 듯한 식당. 아크로아와 비아티는 이미 반 이상 비어진 스테이크 접시를 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알고 있었다면 어째서 처음부터 말해주지 않았냐는 황당함이 그녀들의 눈에 가득차 있었다. 냠냠냠냠냠. 그 때, 나는 문득 귓가를 울리는 타격음을 듣고 움찔 얼어 버렸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보았다. "냠...냠냠... 네? 왜 그러시죠?" 스테이크를 열심히 썰어서 한 조각 먹고 있던 에세렌은 내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당황한 눈으로 물었다. "....스테이크에 독이 있다고 카민이 말했잖아. 그래도 먹는 거냐?" 내 말에 에세렌이 생긋 웃었다. "예, 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여신의 교리 중에서는 음식을 먹을 때 만드신 분을 생각해 절대로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있어서요……." "……." 여신의 교리 때문에 독이 든 음식까지 먹어 치워야 하는 거냐? 나는 다시 에세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에세렌은 그런 내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차차 포크를 든 손을 내리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포크를 아예 탁자 위에 내려 놓고 후, 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칼레들린님. 저는 특이 체질이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독이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여신의 교리를 따라 음식을 다 비우는 것이 당연한……." "……그래서 더 먹겠다구?" 나는 침중한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에세렌은 그런 나를 향해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나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의 포크를 보며 경악했다. ……무서운 놈!! -...칼레들린님보다, 카민님보다 한 수 위입니다.- 레이네의 작은 소리에 나는 말없이 동조했다. 나는 에세렌이란 인간에 대해서 알려면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와 에세렌이 황당한 대화를 즐기고 있을 동안, 우리들의 만담 분위기와는 달리 아크로아와 비아티의 분위기는 잔뜩 심각해져 있었다. "저, 정말로…… 정말로 고기에 독이 있나요?" 아크로아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카민에게 물었다. 카민은 씩 하고 웃어보였다. "왜요? 못 믿으시겠나요? 우리가 방금 먹은 그 독의 이름은 레세이븐입니다. 세이피안의 로테네에서만 나는 독초이죠. 일단 먹으면 1시간 후에야 화학 작용이 일어나서 이 것을 먹은 사람은 정신을 잃게 되는데,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독이죠." ------------------------------------------------- 다음 편은 내일 올리겠습니다.. 졸리군요^ㅁ^; 데스의 등장... 데스의 등장은... 데스는... 그러니까... 조만간에 등장합니다-_-;; 곧 등장해요. 그러니까 너무 볶지 마시구요-_-;;; 아아... 그리고 3권의 현황은... 3분의 2정도는 썼습니다. 나머지도 틀은 다 잡아놨기 때문에 쓰라고만 한다면 죽을 때까지 써서 빠른 시간 안에 3권이 나올 수도 있지요. 하지만 3권은 정말로 제대로 낼 생각을 하고 있는 카르민입니다. 앞부분은 리메 들어갔구요(;;) 뒷부분도 뜯어 고쳐볼 생각입니다. 통신판의 가벼운 분위기가 좀 줄어들지도 모르고... 어설픈 부분과 말도 안되는 부분을 수정 할 예정이죠(하하;) 뭐... 그렇게되면 출판사에 원고가 좀 늦게 넘겨질지도 모르지만-_-;; 조만간엔 방학도 있고... 4권을 빨리 쓰면 된다고 우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네에, 여러분. 최근 들어선 여러분의 메일을 본 것이 오래전 일인 것 같군요ㅡ_ㅜ 물론 제로스님과 지연님, 은님의 멜은 정기적으로 받고 있지만... 그 외의 분들로부터는 소식이 없습니다.... 슬픕니다..; 물론 제가 그동안 연재 안 한 탓이 크겠지요;; 내일은 그래도 많이 써올 것을 다짐하면서..(써둬야 리메도 하고 수정도하지;;) 라르크의 광신도 카르민, 오늘도 라르크의 노래를 들으면서 말을 줄입니다~ 아, 반마족 카페입니다. 많이 놀러와주세요^_^ cafe.daum.net/halfdemon ★ -------------------------------------------------------------------------------- Next : 20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8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80908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9th December 2001 10:58:59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0-12-2001 19:39 Line : 182 Read : 1217 [22]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0 -------------------------------------------------------------------------------- -------------------------------------------------------------------------------- Ip address : 61.83.23.16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실내에는 텁텁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간간히 쩔그렁거리는 에세렌의 나이프 소리만이 공허하게 맴도는 식탁 위는 완연한 침묵의 흐름 속에 감싸여 있다. "왜 음식 안에 독이 있는 겁니까, 아크로아씨?" 카민은 스테이크를 포크로 꾹 찌르며 물었다. 아크로아는 카민의 질문에도 입술만을 꾹 깨문 채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리 만치 어두운 그녀의 표정을 보는 카민은 진지했다. 그들은 한동안 눈싸움이라도 하는 듯 두 눈을 마주쳤다. 전기가 파파팟, 하고 소리를 내며 튈 것 같은 그들 사이로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하지만. "쩝쩝쩝……. 냠냠냠……." 장엄한 음악이 나와 배경을 장식해도 모자랄판에, 카민과 아크로아의 중요한 대화 뒤에 깔리는 잔잔한 배경음악은 바로 에세렌이 고기를 씹는 소리였다. 에세렌은 이토록이나 진지한 상황에서조차 나이프 소리를 내가며 열심히 고기를 먹고 있었다. 다른 상황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고기를 씹어 삼키는 에세렌의 입을 보며 나는 신관이라는 자들의 이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찰해볼 필요성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역시……. 그 사람들인 걸까?" 에세렌이 뚫어져라 바라보는 내 시선 따위는 상관도 않고 고기를 질겅거리고 있을 때, 아크로아가 문득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나는 시선을 돌려 다시 그녀를 보았다. 아크로아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받치고는 길고 긴 숨을 내뿜고 있었다. 어제 나를 보면서 똑바로 앉으라느니 자세를 바로 하라느니 하던 그 악독한 모습은 환영이었다는 듯, 당장이라도 '지켜줘요∼. 난 너무 연약해.'라는 말을 남발하며 팔을 벌리고 쓰러질 것 같은 연약함이 그녀의 온 몸에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크로아를 보고 있는 비아티 역시 무슨 초상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것 같아, 언니. ……역시, 포기를 모르는 사람들이야." "하아……." 뭔가 중요하고도 심도 깊은 뒷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듯, 말하는 그녀들의 얼굴은 한없이 무겁고 진지해보였다. 나와 카민은 그런 아크로아와 비아티를 주시했다. 아크로아와 비아티는 둘이서 뭐라고 쑥덕거리다가 한참만에야 우리 둘의 시선을 느꼈는지 어느 순간 움찔했다. 나는 움찔하는 아크로아를 향해 피식 웃어보였다. "말 안 해도 알지? 자, 자초지종을 설명해 보실까? 왜 여기에 독이 든 거야?" 내 질문에 아크로아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물었다. "저기……. 꼭 이야기를 들으셔야 겠나요?" 호오? 지금 얘기해주기 싫다 이거지? "우리들이 지금 당장 이 집에서 나가도 좋다면 얘기하지 않아도 돼." 나는 아크로아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내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의미는 이 것이었다. '우리를 그리지 않아도 좋다면 맘대로 해봐.' 아크로아는 내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와 카민을 모델로 삼기 위해 그렇게나 애를 써댔던 그녀인만큼, 내가 이렇게 나가자 상당히 곤란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속사정을 시원스럽게 말하기는 또 곤란한 듯, 한참을 머뭇거리만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짤랑.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가만히 났다. 힐끔 돌아보니, 에세렌이 이제야 스테이크를 다 비웠는지 포크를 내려놓고 있었다. 에세렌은 냅킨을 들어 조용히 입을 닦았다. 우리들은 그런 에세렌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나는 에세렌이 먹어치운 스테이크 접시를 보며 치를 떨었다. 정말……. 징한 놈이다. 파슬리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먹어치워 버렸군. 에세렌은 가볍게 물을 들이키더니 아크로아 쪽을 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아크로아를 향해 말했다. "험험,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저도 다 듣고 있었습니다. 저어, 어떤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신관인 저와 일행들을 믿고 말씀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실컷 고기 다 먹고 그런 말 해봤자……. 폼 안 나는 거 알지? * * * * * * * * * * * * * 폼이 났건 나지 않았건, 에세렌의 그 말에 아크로아는 말할 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정말 성격도 이상하지! 저런 놈의 말에 말할 결심이 생기다니!)아크로아는 가늘다랗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을 들이키곤 말했다. "네, 다 말씀드리지요. 한 달 전쯤이었을까요? 저는 꿈을 꿨습니다. 정말 몽환적인 꿈이었는데……. 거기서 한 여인을 보았지요.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제 평생에 보도 듣도 못한 그런 미인 말입니다. 그래도 화가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세월이 꽤 되었기에, 여러 미인들을 그렸던 접니다. 그런데 꿈에서 보았던 그녀만큼 아름다운 여인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흐음? 얼마나 미인인데?" 나는 잔뜩 흥분한 표정의 아크로아를 보며 물었다. 아크로아는 내 질문에 살포시 웃었다. "설명하기 곤란하군요. 정말 미칠 듯이 머릿속을 맴도는 그런 이미지였습니다. 형상화하기 민망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 새까만 머리카락과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아, 그래요. 마치 칼레들린님처럼 말입니다." "헤에? 칼 정도로 머리가 까맣다고? 칼만큼 머리카락이 까만 사람은 보기 드물 텐데? 원래 까만 머리카락이 보기 드물고 말이야." 카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흠? 내 머리가 좀 까맣긴 까맣지. 카민은 한참동안 내 머리카락을 보고 있다가 다시 아크로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예. 그렇지요. 검은머리는 드뭅니다." 아크로아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 싶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하여튼 저는……. 머릿속에서 맴도는 그 이미지 때문에 몇 일 밤을 지새웠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지요. 몇 일 동안 식음을 거의 전폐하고 그림만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그림을 완성할 수가 있었지요." 아크로아라는 이 여자는 이 대륙에서는 알아주는 그림쟁이라고 했으니, 이 여자가 식음을 전폐하고 그린 그 그림이라는 것은 분명 엄청날 것이다. "그 그림을 모두 완성시킨 저는 크레티아 왕궁으로 그 그림을 선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크레티아 왕궁으로?" 나는 조금 놀라서 물었다. 그러자 아크로아는 살짝 웃었다. "저는 크레티아의 귀족입니다. 미흡한 솜씨이지만, 폐하께서 제 그림을 아껴 주시거든요. 그래서 저 스스로도 만족한 그 그림을 크레티아의 황제께 바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크로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나서 그 그림을 팔라고 하더군요. 자신들의 정체는 밝히지 않고, 얼마를 불러도 좋으니, 그 그림은 꼭 사야 한다고 말했어요." "흠? 그래서 거절했나?" 비아티가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그림을 팔지 않겠다고하니, 그사람들이 그러더군요. 그림을 팔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고 말이예요. 그리고 그 날부터, 뭔가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흐응?" 나는 가볍게 코를 문질렀다. 아크로아와 비아티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크로아는 나를 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사실은 이 것 뿐만이 아니지요. 얼마 전에는 제 방이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기도 했었고, 하녀 두 세 명이 깜쪽 같이 사라지기도 했어요. 그림은 저와 동생이 아는 곳에 숨겨 뒀기 때문에 훔쳐 가지는 못하니까……. 이런 식으로 협박을 하는 것 같아요." "흐음. 그럼 오늘 이 독약도 협박의 일원이라, 이건가?" "그런 것 같네요. 아, 하지만……. 세 분은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이건 저희 문제이고……. 앞으로 세 분이 드실 음식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일게요. 그러니……. 그림은 마저 그리게 해주세요." 아크로아의 말에 나는 흐음,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갸웃했다. 바로 그 때, 에세렌이 뭔가 굉장히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칼레들린님! 이건, 뭔가 굉장한 일인 것 같습니다!" 나도 알아. 왜 갑자기 흥분하고 난리야?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서 내게 외치는 에세렌의 태도에 당황했다. "우리가 돕지요!!" "……왜 우리가 도와야 되는데?" 나는 갑자기 나서는 에세렌의 태도에 황당해서 말했다. 그러자 에세렌이 불타오르는 눈을 한 채로 말했다. "이 분들이 곤란을 겪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곤란을 겪으시는 분들과 만나고, 그 분들의 사정을 알게 된 것이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이건 분명 여신이 저에게 내리신 신탁입니다! 이 일을 해결해야 합니다!" "……너 혼자 해결해." 나는 갑자기 의욕에 불타오르는 에세렌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에세렌이 시선을 휙 꺾어 나를 보더니 눈을 크게 치켜 떴다. "어찌 그런 말씀을! 당신은 성녀의 검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에세렌은 그 말과 함께 내 검을 가리켰다.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내가 이 검을 갖고 있는 것과 이 여자들을 도와주는 건 무슨 상관인데?" 내 말에 에세렌이 눈을 홉떴다. "당연히 상관이 있지요! 그 검은 성녀의 검이니, 당신이 도와줘야 한다니 까요!" 정말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오는군. "……너 지금 나하고 장난치는 거지?" "아니요!" "그럼 왜 내가 도와야 하는 건지 이유를 말하란 말이야!" "말했잖아요! 성녀의 검을 갖고 있으니까 도와야 한다고!" "……." -------------------------------------------------------------------------------- Back : 23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1 (written by 카르민) Next : 21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79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89923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16th December 2001 10:16:39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0-12-2001 22:22 Line : 284 Read : 1483 [23]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1 -------------------------------------------------------------------------------- -------------------------------------------------------------------------------- Ip address : 211.220.124.20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반마족이 드디어 80편이 넘었다..!! 이 감격...T^T(감격할 것도 정말 없군.. 마의 70편대였다... 70편대 갖고 대체 몇 날 몇 일을 질질 끌었던가... 이제 팍팍 진도 좀 나가 볼 란다;;) 우훅우훅~~. 시험은 망치고~! 글이나 쓰자, 글이나!! --------------------------------------------------- 에세렌의 그 말 같지도 않은 궤변은 장장 20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반복되고 반복되고 반복되는 그 악순환을 묵직히 듣다가 듣다가 나는 결국 완전히 지쳐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인내심을 갖고 에세렌의 그 궤변에 항변해 보려고 해도, 에세렌은 너무도 굳건한 장벽이었다. "됐어! 됐다고! 도와 주면 될 것 아냐!" 내 말에 에세렌은 그제야 씨익 웃어 보였는데, 그 미소를 보고 있노라니 도저히 차분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카민은 에세렌의 미소를 보며 발악하는 나를 뒤에서 잡아 말리면서 유키를 찾으러 가는 길은 에세렌만이 알고 있으니, 에세렌이 하자고 하면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고 나를 타일렀다. "칼레들린님.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던 식사를 끝내고(독약을 먹었는데 유쾌할 리가 없지 않은가?)일어서는 나를 향해 아크로아가 그렇게 말하며 웃어보였다. 그렇게 말하는 아크로아의 안색은 눈뜨고 봐주기 민망할 정도로 창백해져 있었는데, 카민의 말로는 그 독약이란 것이 1시간 후에 화학작용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몸이 독의 작용을 감당하지 못해 안색이 초췌해진 것이라고 했다. 백지장처럼 하얘진 그녀의 얼굴을 따라 미세한 땀방울이 호선을 긋고 있었다. "죽진 않는 거지?" 나는 아크로아의 그 창백한 안색을 보며 카민에게 스리슬쩍 물었다. 카민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 * * * * * * * * * *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2층으로 올라와 각장의 방 앞에 선 우리들. 에세렌은 먼저 인사를 꿉벅하더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갈색의 나무를 잘 제련해서 만든 복도 위에는 이제 나와 카민, 이렇게 두 사람의 그림자만이 아련하게 남아 있다. 흔들거리는 횃불의 빛을 그대로 투영해내는 두 개의 그림자가 불빛을 따라 흐늘흐늘 격한 춤을 춘다. 카민은 싱긋 웃으면서 먼저 방에 들어가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나는 그런 카민을 보며 잠시 숨을 멈췄다. 희미한 등잔 아래 빛나는 녀석의 얼굴은 평소와 그다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하지만...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은게 있었는데, 주변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 물어보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이제 둘만 남았으니, 물어도 되겠지? 나는 손가락을 몇 번 꼼지락 거린 후에 카민을 내려다보았다. "이봐, 카민." "음?" 막 자신의 방 문 손잡이에 손가락을 올려 놓고 있던 카민은 내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그의 핏빛 눈동자가 나를 향해 한 번 출렁거렸다가 내려 앉았다. 잠시, 짧고 짧게 차가운 바람이 그의 옷깃을 건들였다. 헐렁한 그의 윗옷이 가볍게 위로 들렸다 가라앉는다. 나는 그런 카민을 지그시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넌 왜 듣지 않는거냐." 내 말에 카민이 잠시 움찔했다. 놈은 어설프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 "무슨 말이야?" "독 말이다, 독. 나는 원래 특이하고 잘난 놈이니 그렇다고 치고……. 이네아 족은 특이한 족이니 에세렌도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너는 왜 독이 통하지 않는 거야? 그리고... 스테이크에 독이 있었다는 것과 독의 종류는 어떻게 안 거냐?" 아까부터 가슴 속에서 무럭무럭 피어나던 그 질문을 나는 참고 있었다. 둘이 남은 지금에서야 튀어 나온 내 질문에 카민은 대답없이 손가락만을 움직여 방문 손잡이를 몇 번이나 만지작거렸다. 뭔가 곤란함이 잔뜩 피어오른 녀석의 옆얼굴이 스리슬쩍 굳어 있는게 보인다. 나와 카민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두운 남의 성 복도 한가운데, 나는 침묵하고 카민도 침묵하는 채로 그렇게 우리 둘 사이로 심술궂은 침묵의 여신이 기다란 옷자락을 드리운다. 한참 계속되는 침묵의 무게에 질식할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카민이 스읍 하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우리 둘 사이에 흐르는 답답한 공기를 와해시키는 듯한 그 기나긴 심호흡에 나는 눈을 들어 녀석을 보았다. 카민은 나를 향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면역이 될 만큼…… 많은 독약을 먹은 적이 있었다." 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카민의 말에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뭐, 그다지 좋지 않은 경험이지만……. '그 조직' 에 있을 때의 일이야. 내가 있었던 조직은 좀 특이한 조직이었거든? ...쿡쿡, 너도 조직에서 나온 사람은 꽤 많이 만나봤잖아? 뭐... 많이 특이한 조직이니... 독을 먹는 것쯤은... 기본이었지. ...어린 시절부터 독에 대한 면역성을 기른답시고 많이 먹었어. 정말로 그 면역성이라는게 생기긴 생겼는지, 극맹독만 아니면 난 독에 당하지 않아. 독에 대한 지식도 그 때 얻었지. 독을 맞고나면... 3일 이내로... 자신이 중화시키거나 해독하지 않으면 안됐거든. 죽지 않으려면 독을 연구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잖아?" 카민은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살짝 가늘어지는 녀석의 눈매에서 나는 왠지 모를 아릿함을 느꼈다. 과거를 더듬어 내리는 녀석의 두 눈에서 가득한 씁쓸함을 읽는다.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 켠을 두드리는 아픔을 읽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무게를 느낀다. "...그래?" "응." 카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나는 어색함에 얼른 문 손잡이에 손을 댔다. 내가 막 문 손잡이를 당기려는데, 뒤에서 카민이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칼. 왜 데스 형은 오지 않는거지?" 이번에는 내가 굳을 차례였다. "모……몰라, 그딴 놈." 퉁명스러운 대답이 내 입가에서 삐져 나왔다. 하지만... 말투는 이렇지만 속으로 가느다랗게 한숨이 쉬어지는 것은 대체 왜인가? 그따위 놈을 걱정하는 거 아니라고 누누히 말했다. 나는 절대로 라이메데스 놈을 걱정하는 게 아니다. 그따위 놈이 몇 일동안 계속해서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 따위를 걱정할만큼 난 그 놈을 좋아하지 않는단 말이다. 그래, 이건 걱정 하는게 아니다. "그럼 잘 자라구, 칼." 내가 스스로를 향해 마구 말을 던지고 있을 때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카민의 방문이 닫혔다. * * * * * * * * * * * * * * * * * * * * * 방에 들어서자 조금은 텁텁한 냄새가 나를 맞이했다. 반듯하게 개인 침대의 이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옷을 입은 채 그대로 침대로 뛰어 들었다. 푹신한 침대의 감촉이 몸을 녹인다. 나는 이불을 끌어안고 잠시 숨을 멈췄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후우..." 하지만 쉽게 잠이 들지 않는다. 난 침대에 누운 채로 한참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였다. 창문을 통해 반사되는 달빛이 시리도록 파랗게 비치고 있다. 어른거리는 달빛의 속삭임에 귓가가 간지럽다. 나는 하얀 베개 속에 얼굴을 깊히 묻었다. 그런데 순간, 레이네가 피식,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왜 웃는 거지?" 나는 갑작스러운 그 웃음에 발끈해서 레이네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젠장할. 노이로제에 걸리겠군. 저 빌어먹을 마물이 한번씩 웃을 때마다 나는 지나치게 신경질적이 되곤 한다. 이거야 말로 레이네의 술수에 놀아나는 꼴이 아닌가 싶어서 괜히 기분도 나빠지고, 제기랄. ―별 것 아닙니다, 칼레들린님. 최근 들어서 잠을 잘 못 이루시는 군요?― 레이네의 말투는 은연중에 배실거리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나는 심히 불쾌해졌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아뇨. 조금 더 솔직해 지셔도 괜찮다고 말씀 드리고 싶은 것뿐입니다.― 젠장할!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마음을 읽히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단 말이다. 왠지 레이네가 킬킬거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더욱 기분이 나빠진 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검은 머리카락 위로 흰 이불이 푹, 하고 뒤집어씌워진다. ...라이메데스가 오지 않는다. 정말로...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빌어먹을! 누차 말하지만 난 그 놈의 걱정 따위를 하는게 아니다. 그저, 그 놈이 안 보이는게 신경에 거슬릴 뿐이지. 언제나 옆에서 이 것 저 것 느끼한 소리나 지껄여대던 그 놈이 보이지 않으니 뭔가 허전해서 이러는 것 뿐이지, 걱정 따위의 웃기지도 않는 감정 따위는 결코 아니다. 천천히 눈꺼풀이 내려와 내 의식을 덮었다. 오늘은 좀 깊게 잠이 들었으면 좋겠다. "빌어먹을 놈의 자식..." * * * * * * * * * * * * * * * 여긴 어디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가느다랗게 눈을 좁혀도, 시야에 차오르는 것은 아까와 다를 것이 없다.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어둡다. 어둡고 어둡고 어두운 곳. 습기가 가득찬 곳이다. 나는 휙 소리가 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깜깜하다. 아무 것도 없는, 정말로 캄캄한 곳. 위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까맣다. 이상하리 만치 까맣다. 손을 내밀어 허공을 한 번 휘저어 보았다. 하지만 손 끝에 닿는 것은 퀭한 어둠뿐, 그 이상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군. 여긴 대체 어디지? 난 아까 분명 이불을 덮고 잠이 들었었는데……. 그럼 이건 꿈인가? "죽지 말아라, 나의 아이야." 난 갑자기 들려온 이상한 목소리에 몸을 흠칫했다. 뭐지, 방금 전에 그건? 어디서 들린 거지?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어디에서 목소리가 들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뚜렷이 어디로 가야겠다는 생각 없이, 발이 움직인다. "울지 말아라, 나의 아이야." 한참 걷던 나는 어느 순간 흠칫하고 멈춰 섰다. "눈부셔..." 온통 어둠으로 점칠되어 있던 이 곳에서, 거짓말처럼 한 줄기의 빛이 새어들어왔기 때문이다. 어디서 들어왔는지,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그 빛은 갑작스럽게 내 주위를 침공하고 들어와 주변을 온통 빛으로 둘러싸버렸다. 어둠에서 빛으로 변한 주변을 나는 한참동안이나 두리번 거렸다. 내가 그런 두리번거림을 멈춘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나는 몸을 흠칫하고 세웠다. 방금전까지만해도 아무 것도 없던 암흑속에서, 이제는 빛으로 변한 그 곳에서, 갑작스럽게 한 인영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던 무의 공간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그 인영을 보며 나는 입을 크게 벌렸다. "누구……?" 눈을 부비고 보았다. 내 앞에 선 것은 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반사해버릴 것 같은 투명한 은색의 머리카락이 유독 눈에 띈다. 아이에드의 것보다 훨씬 옅은 은빛. 그런데 이상하다. 왠지 낯익은 듯한 느낌의 여자다. 나는 천천히 한 발 한 발 그 여자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 때였다. "흐윽! 가지마! 그 곳으로 가면 죽어! 가지마! 가지마……!" 어디선가 울먹이는 꼬마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곤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주위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방금 전에 목소리가 들렸으니, 이 근처에 울먹이는 꼬마가 있어야 마땅한데 그 어디에도 울먹이는 꼬마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된 거지? "울지 말아라." 갑자기, 앞에서 조용한 음색이 튀어나왔다.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앞을 보았다. 은발의 그녀가 조용히 웃고 있었다. 뽀얀 피부 위로 한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다. 갑자기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그 무엇도 따뜻하게 품어줄 것만 같은 자애로운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가느다란 두 팔로 무엇이든 감싸안을 것 같은 평온한 웃음이 여인의 얼굴에 있다.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어디에선가 또 다시 꼬마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거의 무의식 중에 귀를 막았다. 처절할 정도로 깊은 목소리다. 무의식 중에 귀를 틀어막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만큼 깊은 울림을 가진 목소리. 이상하리만치.... 아프게 들리는 목소리. "울지 말아라, 얘야……." 은발의 여인이 조용히 말한다.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젠장할! 뭐야? 대체 뭐지? "……그 어디에서도 구원받을 수 없겠지……. 나의 아이……." 은발의 여인이 다시 입을 연다. 나는 찌릿, 하고 가슴에 깊은 통증이 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울렁거리는 고통 속에 파묻히는 육체. 찢어질 정도로 입술을 깨물어도 다시 고통이 온다. 그냥 아픈 게 아냐. 이상해. 너무 아파. 당신이... 당신이 울기 때문인가? "나의 아이..." 뭐야? 당신 뭐지? 나... 가슴이 아파. ...당신이야말로 울지마. 나... 아무래도 당신이 울어서 아픈 것 같은데... 이봐, 울지말라니까. 잠깐만. 울지 마. 울지마. 울지 말아줘. 잠깐만. 무척 아파. 정말 엄청나게 아프단 말야. 울지마. 울지마. "저주받은 나의 아이... 그저... 반복되는 고통만이 남아있을... 하지만... 아아..."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불이 붙은 듯이 뜨겁다. 이상하리만치 뜨겁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 * * * * * * * * * * * * 울지마, 젠장! 울지마! 울지 말란 말이다! 울지 말라니까! 울지 말라고 했잖아! 울지말라니까! 울지마!!! 울지... "흐윽…… 욱! 으으윽……. 우욱!" 제, 젠장. 입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나 자신의 울음소리가 너무나도 꼴사나워서 견딜 수가 없다. 하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아. 계속해서 눈물이 흐른다. 끝없이 볼을 타고내리는 눈물의 줄기가 너무나 굵다. 뺨을 타고 내려 도톰한 입술가로 떨어져 내리는 눈물이 뜨겁다. 아프다. 심장이 타들어갈 듯이 아프다. 너무 아프다. 이상하리만치 아프다. 왜 이렇게 아픈 거지? 정말로 너무 아파서 이대로 죽어버릴 것만 같아. "...크윽! 으윽! 우우우욱! 우욱! 아아아악!!!"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다. 너무 아프다. 아파! 아파! 아파!!!! "...악몽을 꾸는 건가?" 으...? "우욱..." 깊은 고통이 목을 메게 한다. 흐릿하게 부어오른 시야 사이로 무엇인가가 맺히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떠보았다. 무엇인가 망막에 희미하게 맺혔다. 하지만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다. 나는 다시 감았다 떴다. 하지만 어둠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울어 눈이 부었기 때문인지 앞을 확인할 수가 없다. "울지마라." 침대 위로 무엇인가가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눈을 깜빡였다. 멍하게 풀린 눈동자 사이로 흰 구체가 부풀어 올랐다 떨어져 내렸다. 무엇인가 따뜻한 것이 머리 위로 닿였다. 땀에 완전히 젖은 듯 축축한 온 몸이 부르르 떨린다. 왠지 모르게 차분해진다. 타는 듯한 가슴의 통증마저 가라앉은 듯한 느낌이 든다. "...괜찮다. 울지마라." 천천히, 등을 두드리는 그 손. 너무 울어서 흐릿한 시야 너머로 무엇인가가 일렁이고 있다. 누구지? "...모든 것을 잊고... 다시... 푹... 자라.... 편하게..." 다시 내 등을 두드리는 그 손. 그 편안함에 힘입어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 오늘은 꿈꾸다 볼 장 다 보는구나-_-;; -------------------------------------------------------------------------------- Back : 2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2 (written by 카르민) Next : 22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0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8992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16th December 2001 10:16:51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6-12-2001 00:35 Line : 170 Read : 227 [24]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2 -------------------------------------------------------------------------------- -------------------------------------------------------------------------------- Ip address : 61.83.23.8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스스로에게 말해봅니다... 제발 체력 이상의 짓은 하지 말라고... 마감이 임박하면 괴물이 되는 작가님들... (예를 들면... 음... 하루에 6연참을 불사하는-_-;;) 내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나는... 몸이 부서질지도 모른다라고 타이르고 있지요-_-;; 그... 그러므로... 차분하게 써야 한다고 나는 나 자신에게 이르고 이르고 또 이르고 있건만. 그렇건만!! 안되는구만-_-.. 쿨럭쿨럭!! 일단 새벽에 두 편 업하고~ 나머지는 오후에 업할게요^ㅁ^ ---------------------------------------------- 아침의 햇살은 나에겐 늘 짜증의 대상이다. 나는 보통의 햇살을 좋아하긴 한다. 내 하얀 피부 위로 미끌어져 내리는 고운 입자의 그것은 때로는 포근하게, 때로는 따사롭게 내 온 몸을 감싸 안아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통의 햇살일 뿐, 나는 이른 아침잠을 깨우는 그 갑작스러운 빛만은 싫다. 게다가 감은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맞이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 아침 햇살일 때는, 정말이지 죽도록 싫다. 검은 눈동자 한 가득 쏟부어지는 그 빛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짜증스러워서 나는 차라리 마계의 해가 낫다는 생각마저 하곤 한다. 마계의 해는 언제나 은은한 느낌이라 가끔은 처진 듯한 인상을 주지만 적어도 인간계의 햇빛처럼 아침의 사람을 깨우는 괴상한 취미 따윈 없으니까. "……젠장할." 오늘 아침은 정말로 최악이었다. 눈을 떠야만 했던 것도 내 의지가 아니라 저 햇빛 때문이었고, 게다가 눈을 떴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느꼈던 건 축축한 베개의 싫을 정도로 눅눅한 감촉이었다. "이거 왜 이렇게 축축해?" 나는 이상할 정도로 젖어버린 그 베게를 보며 투덜거렸다. 우우, 머리가 조금 아프다. 속도 그다지 좋지 않은 게……. 일진이 사납군. 눈앞이 빙글 도는 것 같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약간의 구토감이 속으로부터 치솟아서 나는 잠시 격하게 숨을 몰아쉬어야만 했다. "하아……." 뭔가 허한 느낌이다. 나는 잠시 눈을 뜬 채로 작게 숨을 골랐다. 아크로아가 내어준 자그마한 방.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 하나와 책장 하나, 그리고 책상 하나가 전부인 이 방. 나는 흰색으로 말끔하게 도배된 방 구석구석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방안에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말이야. "……어제…… 네 놈이었지?" 나는 텅 빈 허공을 올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내 소리는 답없이 공허하게 내게로 되돌아온다. 나는 피식 웃으며 허공을 향해 다시 한 번 외쳤다. "어제 그거 네 놈이었지? 지금 내 옆에 있는 거 다 안다. 나와." 그러나 말한 내가 민망하게도 허공으로부터는 묵묵부답.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래, 네놈이 나오지 않겠다 이거냐? 주위를 휙휙 돌아보니 침대 바로 옆에 검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후 그 검 집을 집어 들었다. 은빛의 그 검은 내가 손대기 무섭게 말을 뱉어냈다.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칼레들린님?― 레이네의 소란스러운 인사에 나는 답하지 않았다. ―칼레들린님? 왜 그러시죠?― 레이네의 의아한 듯한 말에도 전혀 아랑곳 않고, 나는 천천히 켐 알슈타드의 힐트를 잡고 검집에서 그것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레이네는 내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검을 뽑아 들자 놀란 듯, 이상한 소리를 냈다. ―끼! 끼루루루룩! 왜 이러세요, 칼레들린님!― 끼루……좀 정상적인 소리는 낼 수 없는 거냐? 나는 무거운 한숨과 함께 다시금 검을 쳐들어 올렸다. 날카롭게 선 검끝이 나를 향해 그 매서운 날을 드리우고 있다. 나는 들어올린 검을 높게 세워 그대로 내 왼 팔 안쪽에 갖다댔다. ―크악! 칼레들린님! 뭐하시는 거예요? 동맥을 끊으실려구요? 그러다 죽어요!― 레이네가 떠들어대는 소리는 정말이지 시끄러웠다. 나는 레이네의 노란 보석을 엄지손가락으로 꾹 압박한 채로 다시 사위를 훑어보았다. 몇 가지 가구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을 몇 번이고 꼼꼼히 훑어보며 나는 천천히 입술을 떼냈다. "너, 지금 나보고 있지?" ―무슨 말씀이예요, 칼레들린님! 지금 여긴 당신과 저 밖에 없다구요!― 이렇게까지해도 대답이 없다. "……나와, 이 자식아." 하지만 여전히 침묵이다. 공허한 바람만이 내 옷깃을 스치울 뿐이다. "그래,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냐?" 나는 입가에 차디찬 웃음을 내건 채로 다시 한 번 사위를 훑은 후 천천히 팔뚝을 걷었다. 옷깃이 걷혀 나간 곳에 내 하얀 살결이 도드라져 있다. 금방이라도 핏줄이 불거질 것 같은 내 하얀 손목. 나는 그 하얀 손목에 검 끝을 갖다댔다. "안 나오면 이대로 그어 버릴 거다." 나는 위협적으로 주위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도 녀석의 목소리는 귓가에 꽂히지 않는다. "그래도 안 나오겠다, 이거지?" 이제 내 인내심도 서서히 한계에 몰리고 있다. 나는 입술을 꾹, 하고 깨물었다. 그리곤 오른손으로 지탱한 검을 조금 더 가까이 가져갔다. 여린 피부 끝에 검의 입술이 닿인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함께, 피부를 파고드는 엷은 고통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검의 단면이 살갗을 파고들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고 입술이 비틀어져 올라간다. "……나와." 검의 단면을 타고 피가 한 방울 흘렀다. 아까운 내 피……! 하지만 이건 저 녀석을 불러들이기 위한 희생양이라고 생각하고 참아야 한다. 붉디붉은 성수(聖水)가 하얀 내 팔뚝을 타고 또르르, 소리를 내며 흐른다. 그래도 반응이 없다. 젠장할, 네 놈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세게 나간다! 콰직! 검 끝을 좀 더 과격하게 움직였다. 이번에는 피부 한 쪽을 깊숙이 파고드는 검날. 그러나 검은 아직 깊은 혈관조차 건드리지 않았다. ―왜 그러시는 거예요, 칼레들린님! 미치셨군요!― 레이네가 외치고 있었지만 나는 그 발악에 대꾸하기보다는 내 검을 앞으로 잡아당기는 쪽을 택했다. "……나오라고 했다." 검을 꽉 쥔 탓인지 피가 손목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입 꼬리를 들어올렸다. "훗……. 내가 배에 칼 박으면 나올 생각인 거냐?" 빌어먹을 놈의 자식. 나는 단단히 결심을 하고 손목에서 검을 떼어 내 양 손으로 붙잡았다. 검의 끝을 복부로 향한 채로, 검을 들어 올린다. 복부에는 아직 채 여물지 않은 복부에는 기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그 젠장할 놈의 흑마법사가 낸 기다란 상처, 신전에서 두 번 세 번 덧대어졌던 상처는 이제 긴 상흔을 남기고 있었다. 난 바로 그 상흔 쪽으로 날카롭게 선 검을 가져갔다. 검에 매달린 레이네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른다. 양 손으로 부여잡은 검을 눈을 부릅뜬 채로 힘껏 내 쪽으로 당긴다. 내 배와 검이 정말로 가까워졌을 때, 그러니까 약 3 세리하 정도의 여유가 남았을 때의 일이었다. 휙! 갑자기 뒤에서 뭔가 큰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 뒤에서 일렁이는 엄청난 존재감을 느꼈다. 나는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내 고개가 젖혀지기 전에, 먼저 내게로 오는 손이 있었다. 다음 순간 느껴진 그 엄청난 고통! "욱!" 내 뒤에 선 녀석은 내가 검을 쥐었던 오른손을 뒤에서 그대로 꺾여 버렸다. 녀석은 내 오른손목을 비틀어질 정도로 세게 낚아챘다. 그것은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순간적으로 고통 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완연한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만을 천천히 뒤로 돌렸다. 완전히 비틀어진 오른손목을 잡고 있는 타인의 손이 보인다. "……드디어 나왔냐." 나는 내 손목을 부여잡은 놈을 보며 작게 말했다. 순간, 놈이 인상을 우그러뜨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젠장할, 누군 이런 미친짓 하고 싶어서 했는 줄 알아, 이 썩을 놈아!" 난 놈의 그 말에 발끈해서 그렇게 외쳤다. "왔으면 얼른얼른 내 앞에 나타나야 될 것 아냐, 이 빌어먹을 자식아! 불러도 안 나오는 네 놈을 부르려면 이 짓 밖에 할 게 없는데 어떡하란 거야! 칼레들린을 지켜라.' 라고 말한 아이에드가 있는데, 내가 자해하는데도 나오지 않으면 그건 네 놈이 아니지! 그 점을 조금 이용했을 뿐이다!" 내 말에 정곡이 찔린 듯, 내 손목을 부여잡았던 그 놈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얀 로브를 걸친 놈은 천천히 손가락을 풀었다. 녀석이 이마를 손으로 감싸쥔다. 이 더러운 로브자락 보는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군. "……어떻게…… 내가 있다는 걸 알았지?" 놈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하얀 로브 속에 감춰진 놈의 얼굴에는 잔뜩 피로한 기색이 가득했다. 난 그런 녀석의 얼굴에 잠시 움찔하는 수밖에. "어제 그거…… 너 아니었냐?" 순간, 라이메데스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기에 난 당황해야만 했다. "어제 그거 라니……? 무슨 말이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라이메데스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녀석의 초록색 눈동자 한 가득 의문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고 난 고개를 갸웃했다.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난 어제 꽤나 불쾌한 꿈을 꾸었다. 그래서 꿈자리에서 크게 한 번 울었고……. 그 뒤에 누군가가 손을 뻗어 나를 달래줬던 것 같은데……. 그거 라이메데스가 아니었나? ------------------------- 이런데서 잘라야 하다니-_-;; -------------------------------------------------------------------------------- Back : 2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이 센티멘탈 83 (written by 카르민) Next : 23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1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8992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16th December 2001 10:16:55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6-12-2001 00:37 Line : 197 Read : 205 [25]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이 센티멘탈 83 -------------------------------------------------------------------------------- -------------------------------------------------------------------------------- Ip address : 61.83.23.8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라이메데스는 후우, 하고 큰 한숨을 들이쉬었다. "그건 그렇고 너,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지?" 라이메데스가 힘없이 웃는다. "……신전에서 힘을 너무 많이 써서……. 잠시…… 가사상태에 들어갔었다……. 추한 몰골을 보이기가 싫어서……. 몸이 원래대로 회복되어서야 돌아오는 길이었어." 나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족에게는 '자체 치유력' 이라는 것과 함께 '가사상태' 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 가사상태라는 것은 자체 치유력으로도 치유가 불가능하거나 자체 치유력보다 조금 더 빠른 시간 내에 육체의 회복을 바라는 경우 사용되는데, 말 그대로 호흡조차 멈춘 채 죽은 듯이 잠만 자는 현상을 가리킨다. 수면을 취하는 동안 마족의 육신은 조금씩 제 힘을 되찾게 된다. 가사상태는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첫 번째는 자의에 의한 현상이고, 두 번째는 몸이 제멋대로 가사상태에 빠져드는 경우다. 전자의 경우에는 '몸이 너무 안 좋아. 난 빨리 나아야 되는데……. 에라이, 가사상태에 들어가야겠다.' 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동면(冬眠)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각성 마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중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지. 후자의 경우는 몸의 의지가 주인의 의식을 지배하는 경우다. 예를 들면, 너무 심한 치명상을 입었을 땐 몸이 알아서 '가사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후자의 가사상태에 걸리게 되면, 30일 이내로 치유가 되지 않을 경우 몸은 자연스럽게 주인의 소멸을 의도한다. 마력이 조금 더 강대한 마족은 30일 보다 좀 더 오래 버티지만. "너, 그 때……. 가사상태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다쳤었단 말이냐?" 난 라이메데스를 보며 물었다. 라이메데스는 훗, 하는 웃음과 함께 내게 씨익 웃어 보였다. "지금 걱정하는 거야?" "……나가 죽어." 내 차가운 말에 라이메데스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하고 두 손을 모으더니 그대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런 라이메데스의 얼굴을 말 없이 한 대 쳐주었다. "그렇게 심하게 다친 건 아니었다. 다만……. 봉인진을 좀 무리하게 깨서 약간의 균열이 왔거든." 나는 내게 한 대 맞아 얼굴을 문질거리는 라이메데스를 한참 말없이 보았다. 하긴……. 말이 안 될 정도로 놈이 강한 힘을 썼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아니, 말이 안 될 '정도로' 강한 힘이 아니었다. 그건 말이 안되는 강한 힘이었다. 라이메데스가 때려부순 신전만 해도 대체 몇 개였단 말인가? 게다가 신관 대 여섯 명이 들러붙어서 만든 봉인진도 부쉈고, 그 쭈그렁탱이 하이 프리스트가 쳤던 봉인도 깨 부쉈던 라이메데스였다. 그 후로도 여러 가지 타격을 입었으니……. 몸이 망가졌다해도 이상할 거 없지. "자체 치유력으로 해결볼 수도 있잖냐." 내 말에 라이메데스가 피식 웃었다. "너한테 끙끙거리는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노란 꽃무늬 앞치마." "……그딴 호칭으로 부르지마라." 내 말에 다시 한 번 웃는 라이메데스놈. 나는 라이메데스놈을 한참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뭘까, 이 느낌은? 빌어먹을, 나 지금 이 놈이 반갑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저기 말이다……." 문득 라이메데스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라이메데스는 내게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사실은, 이대로 네 뒤에서 따라다닐까 생각했다." 그건 절대로 싫다. 그렇게 되면 네녀석은 날 어디까지 쫓아올지 모르는 놈이야! 내가 차라리 모습을 드러내고 쫓아다니는 편이 낫다, 라고 외치려는 순간 라이메데스가 고개를 들더니 나를 빤히 보았다. "……너, 그 신관이랑 같이 다니는 거지?" 헉! 난 순간 굳어버렸다. 그, 그러고보니……. 라이메데스가 없는 사이 우리 일행에 에세렌이 추가되어 있었지 않은가? 마족과 신관은 그야말로 상극! 게다가 라이메데스와 에세렌이라니! 이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라이메데스는 에세렌에게 변태 마족이라는 말도 안 되는 호칭으로 불린 적도 있었던 만큼, 이 둘이 만난다면 그건 정말 기름에 물을 부은 꼴이다. "에…… 어쩌다보니."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라이메데스는 한참 미간을 찌푸피며 곤란한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이봐, 칼레들린." "왜?" "……넌, 마족이다." 순간, 몸이 곧추섰다. 나는 눈을 치켜뜨고 라이메데스를 보았다. 라이메데스는 깊은 한숨과 함께 그런 내 얼굴을 마주 보았다. "마족과 신관은 상극 중의 상극. 대체 너는 그 신관과 같이 다녀서 뭘 어쩔 셈이었지?" "별 다른 뜻은……." 단지 유키를 찾으려고 했을 뿐이야, 라고 말하려는 순간 라이메데스의 말이 이어져 튀어나왔다. "넌 '각성 마족'의 뜻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나? 각성 마족의 뜻은 말 그대로 자신이 '마족'임을 깨닫는 거다. 지독한 파괴 본능에 휩싸여 깨닫는 놈도 있고, 어느 순간 아무 생각 없이 깨닫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도 있지. 하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한가지 공통점은 있다. 그건 바로 자신이 '마족'이라는 것을 확연하게 깨닫는 시점이 바로 각성의 시기라는 거지." 라이메데스는 로브 끝을 살짝 움켜쥔 후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넌 각성하지 않으면 '그분들'에게로 돌아갈 수 없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라이메데스의 그 한마디 말이 내 폐부를 찔렀다. 숨겨두었던 치부를 들킨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오른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라이메데스는 그런 내 행동을 하나하나 뚫어져라 보고 있다가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마족으로서 각성한다……. 그건 즉 네가 마족의 일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이야기. 네가 완벽한 '마족'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이야기다. 네 본능도, 네 감정도, 네 모든 것이……. 마족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바로 각성의 순간이지. 그런데 너는 뭐냐? 한시 빨리 각성을 해야 하는 이 시점에서, 지금의 모습은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나?" 라이메데스의 말이 한치의 빈틈도 없이 내 심장을 찌르고 들어왔다. 웬지 분한 느낌에 라이메데스를 잠시 노려보았다. 라이메데스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넌 지금 전혀 마족 답지 않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내 말에 라이메데스가 다시 진지한 얼굴 표정을 했다. "넌 인간이 아니야." 녀석이 두 손으로 내 어깨를 꾹 눌렀다. 강한 두 손이 내 어깨를 꽉하고 압박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고통에 한 발자국을 물러나려는 순간, 라이메데스가 입술을 움직였다. "엄연한 마족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라이메데스의 눈을 보았다. 흰 로브 속에 숨겨져 있던 놈의 초록색 눈동자가 그대로 내게로 향했다. 차분한 그 초록색 눈동자는 언제나 그렇듯이 밝고 맑다. 내가 라이메데스를 부럽다고 생각하는 것이 딱 두 개 있는데, 그것은 머릿결과 초록색 눈동자의 밝은 빛깔이다. "네가 인간처럼 변하는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 않다. 네가 나와 같은 마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칼레들린." 라이메데스는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말하고는 양손으로 쥔 내 어깨를 다시 한 번 흔들었다. "각성하지 않으면, 마계로는 돌아갈 수 없다." 라이메데스는 그 말과 함께 표정을 굳힌다. "……넌 마족이다, 칼레들린." 다시 한 번 다짐을 주듯이 말하는 라이메데스의 말투는 어찌 보면 내게 하는 것이라기 보단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언제나 실실거리며 느끼한 일면만을 보였던 라이메데스의 진지함에 스스로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라이메데스는 만족한 듯 훗, 하고 웃어 보더니 크게 기지개를 켰다. 순간, 나는 섬광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어 놈을 불렀다. "이봐." "응?" 라이메데스는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라이메데스를 향해 천천히 말했다. "……다……. 좋은데 말이다. 우리 이야기, 논점이 좀 빗나간 것 같지 않아?" 라이메데스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 그렇군." * * * * * * * * * * * * * * * * * * 나는 에세렌과 다닐 수밖에 없게 된 지금의 상황을 라이메데스에게 천천히 설명했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라이메데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래서, 유키를 구하기 위해 그 신관과 동행한다는 거냐?" "그래. 유키를 찾을 때까지만 참아." 라이메데스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지. 난 유키든 뭐든 그다지 신경 안 써." "뭐?" 화들짝 놀란 내 무의식적인 반문에 라이메데스는 나를 빤히 보았다. "더 솔직히 말해볼까? 난 네가 위험한 순간이라면, 카민이 죽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다." "뭐……!" 그 직접적인 말에 당황한 나는 태연한 얼굴을 한 라이메데스의 멱살을 단 번에 움켜쥐었다. 라이메데스놈은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말했다. "……놔라." "다시 말해!" 나름대로 위협적으로 한다고 했건만, 놈에게 이런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닌 듯, 녀석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네가 위험한 순간이라면, 카민이 죽어도 난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라이메데스는 그 말과 함께 그대로 내 손을 팍 하고 쳐냈다. 내 손은 간단하게 놈의 손에 의해 바깥으로 튕겨 나왔다. 라이메데스는 차분한 얼굴로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신관과 함께 다닐 수 없다. 그래, 너라면 또 모르지. 그 녀석은 어쩌면 네가 반마족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수도 있어. 하지만……. 난 달라. 게다가 놈은 내가 신전을 습격한 마족이라는 것도 알고 있으니……." "아니." 난 라이메데스의 말을 짧게 잘랐다. 나는 씩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잊었냐?" "……뭘?" 라이메데스의 반문에 나는 더더욱 깊은 웃음을 지었다. "넌, 그 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얀 로브를 입고 있었다는 걸." ----------------------------------------------------- 공지! 메일주소 바꿨습니다. carmine21@hanmail.net에서 carmine12@hanmail.net으로. 그러니까... 숫자만 바뀐 셈이죠^ㅁ^ 다음부턴 carmine12@hanmail.net으로 메일 보내주세요^ㅁ^ -------------------------------------------------------------------------------- Next : 2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2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8992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16th December 2001 10:16:59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6-12-2001 22:36 Line : 215 Read : 1149 [26]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4 -------------------------------------------------------------------------------- -------------------------------------------------------------------------------- Ip address : 61.76.127.169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방문을 나선 후 하녀의 안내를 받아 이 집의 일층에 있는 응접실로 내려왔을 때는 이미 모든 이들이 모여 앉아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커다란 갈색 원탁 위로 둥글게 둘러앉은 그들은 이미 식어버린 찻잔을 앞에 두고 뭔가 진지한 논의를 벌이고 있었다. 내가 왔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그들은 이야기 속에 몰입해 있었다. 멀찍이서 보니 아크로아아와 비아티는 어제 그 비실비실 했던 모습과는 달리 활기에 가득찬 얼굴이었고, 에세렌역시 어제 그 엽기적인 모습을 보였던 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가진 채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아크로아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에세렌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깔려 있었는데, 그 얼굴은 그야말로 '자비로운 신관'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바꿔 말하자면 마족에게는 찢어발기고 싶은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원탁에서 가장 먼 곳에 앉아 있는 것은 카민이었는데, 녀석 역시 평소의 그 에헤∼ 하는 얼굴을 어디론가 내던지곤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에 동참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흠, 하는 소리와 함께 한발자국 성큼 그들에게로 다가섰다. 내 발걸음 소리가 조금 컸는지, 한발자국을 가볍게 움직였을 뿐인데도 모두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아, 잘 주무셨습니까 칼레들린님?" 이야기의 흐름을 끊으며 아크로아가 벌떡 일어나서 내게 단정하게 인사를 해 보였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는 아크로아를 보며 물었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아, 그것이……." 아크로아가 뭔가 말을 하려고 했을 때, 그녀의 말꼬리를 덥썩 잘라내며 카민이 말했다. "별 거 아니야, 칼. 이분들 일 말인데……. 되도록이면 빨리 해결해드리고 싶어서. 사실은 어제도 좀 좋지 못한 일이 있었거든." "무슨……?" 나는 생각지도 못한 그 말에 조금 놀라서 한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섰다. 내가 의아한 얼굴을 하며 녀석들의 이야기에 동참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차를 마시고 있던 에세렌이 벌떡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에세렌은 나를 보더니 버럭 고함을 쳤다. "잠깐만요, 칼레들린님! 뒤에 그 분은 누구시죠?" 에세렌의 커다란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내 뒤쪽으로 쏠렸다. 그 바람에, 내 뒤에 얌전히 서 있던 녀석도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야만 했다. 언제나 두르고 다녔던 그 갑갑하고도 갑갑한 하얀 로브를 화끈하게 벗어 젖힌(사실은 이거 벗으라고 내가 얼마나 협박을 했는지 모른다. 종국에는 아이에드의 이름까지 나왔으니!) 그는 찬란하게 빛나는 금색 머리카락에 밝은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바로 그 녀석, 라이메데스였다. 그 더럽게 때 탄 하얀 로브를 벗은 탓에 녀석은 평소의 이미지와는 확연하게 달라 보였다. 탁자에 앉아있던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라이메데스의 존재에 당황한 듯, 모두들 입을 벌리고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해주었다. "아... 내 시종이야. 이름은 이데라고 하지." * * * * * * * * * * * * * * * * * * * 「……정말 형편없는 작명센스로군. 이데가 뭐야?」 「그럼 뭘 어떻게 지으란 거냐?」 「라이도 있고 라스도 있고…….」 「시끄러워! 그 순간 생각난 이름이 이데 밖에 없는데 어쩌란 거야?」 나와 라이메데스는 전음으로 한참 투닥거리고 있었다. 라이메데스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자신의 이름을 괴상하게 지은 것을 불평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런 놈을 향해 툭툭 면박을 내던졌다. 로브를 벗은 라이메데스는 지금 어디서도 보기힘든, 정말이지 독특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아래 위 새빨간 핏빛의 경장이 바로 그것인데, 나는 맨 처음 라이메데스가 주저주저 하며 로브를 벗어 젖혔을 때 새삼스레 라이메데스란 녀석에게 감탄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라이메데스가 걸치고 있던 그 핏빛의 경장은 바로 블러드 아미의 단복이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지 않은가? 온 몸을 칭칭 휘어감은 그 하얀 로브 속, 대체 뭘 입고 있는지 남의 궁금증을 유발하게 만들었던 그것이 바로 그 지겹고 지겨운 블러드 아미의 단복이었다니! 나는 핏빛의 단복을 입고 훗, 하고 웃으며 나를 보는 라이메데스를 멀거니 보다가 녀석을 말없이 몇 대 구타했다. 왜 때렸는지 따위는 묻지 마라. 대답하고 싶지도 않다. 라이메데스를 이데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면서 나는 라이메데스에 대해 이 것 저 것 핑계를 댔다. '이데'라는 녀석은 나의 친구이자 시종이라는 설명이 지배적이었는데, 라이메데스는 내가 왜 네 시종이냐고 끊임없이 전음을 보내와서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왜 녀석이 갑자기 나타났냐고 따지듯 묻는 에세렌에겐 내 심부름을 하느라 어딜 갔다왔다고 대충 둘러대 버렸다. 뭔가 잔뜩 의심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가볍게 넘겨버렸다. 반면, 카민은 대충 라이메데스라는 것을 눈치챈 듯 나를 향해 피식피식 웃음을 남발하고 있다. "아, 이 분도 무척이나……." 나와 라이메데스가 자리에 앉은지도 몇 분이 지나, 어느 정도 안정이 잡히자 갑자기 아크로아가 말문을 열었다. 나는 그녀가 다음 순간 할 말을 예상하곤 고개를 숙였다. "저기, 이데님? 혹시 모델 해보실 생각 없어요?" "……전혀." 라이메데스는 빙긋 웃으며 거절했다. 라이메데스의 목소리는 에세렌이 눈치챌 것을 대비해서 그 톤이 조금 낮아져 있었다. 아크로아는 아쉬운 듯 입맛을 쩍 다시곤(입맛은 대체 왜 다시는 거야, 이 여자야!)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우리 사이에 잠시 가벼운 침묵이 흘렀다. 아크로아는 이제 완전히 식어버려 김조차 올라오지 않는 차의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녀는 차를 한모금 마시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넸다. "……사실은 어제, '그 그림' 이 도난 당했어요." "뭐?" 난 그 갑작스러운 말에 깜짝 놀라서 반문했다. 아크로아는 그런 내 반응을 예상한 듯 힘없이 웃음만을 보이곤 다시금 입술을 움직였다. "저와 비아티 밖에 모르는 장소에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저와 비아티가 잠든 사이에 깜쪽 같이 그림이 없어졌어요." 그녀의 얼굴은 정말이지 침울해 보였다. 하긴, 몇 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그린 그림이 도난 당했다면 화가 입장에서는 억울한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는 왠지 모를 동정심을 느끼며 작게 입을 움직였다. "그래, 그림을 어디에 숨겼었는데?" 그녀는 더더욱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침대 밑에요." ……지금까지 못 훔쳐간 게 용하군. 그게 너하고 비아티밖에 모르는 장소냐? 소중한 그림이라면 좀 제대로 된 장소에 숨겨봐!! 하지만 내 마음속의 외침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크로아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필생의 대작인 그 그림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아크로아는 심히 마음이 상했음이 분명하다. 아크로아의 수심 가득한 표정을 보고 있던 에세렌은 갑자기 음, 하는 소리와 함께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알겠습니다! 제가 그 그림을 찾아드리죠!" 뭐? 뭐라고? "네? 어떻게요?" 어이가 없어진 것은 나만이 아닌 듯, 모두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대체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할 것 아닌가? 신관 주제에 도난당한 그림을 찾아준다고? 대체 무슨 제주로? 신에게 기도를 드리면 그 그림이 다시 되돌아오기라도 하는 거냐? "저에게 그림을 찾을 방법이 있습니다." 에세렌은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에세렌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 * * * * * * * * * * * * *** 비아티의 표정은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고, 안색은 파리하기 그지없었다. 두 눈은 크게 확장된 채였고 입술은 멍하니 벌어진 채다. 옆을 보니 카민의 상태도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카민은 눈을 부릅뜬 채로 앞을 보고 있었는데, 입을 어찌나 크게 벌렸는지 그 붉은 입술 사이로 지금이라도 침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라이메데스의 표정은 그리 티가 날 정도로 이상하진 않았지만, 역시 이 상황에 당황한 듯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가 있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셋의 얼굴은 그야말로 '못 볼 꼴을 보고 있는 자의 얼굴' 그대로였다. "불어요." 그리고 그 못볼꼴을 본 자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바로 앞이다. 나 역시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가느다란 한숨에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지금의 상황은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기괴한 것이 분명했고,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결코 볼 수 없는 종류의 것임이 자명했다. "쿨럭!" "좋은 말로 할 때 불어요." 내 눈은 지금 신성을 상징하는 하얀 법사복을 걸친 에세렌 쪽을 행해 있었다. 아아, 너무 당황스러워서 내 이 잘난 입마저 벌어지려고 하는군. 안 돼, 안 돼. 아무리 당황스러워도 입을 벌리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침이 떨어질 위험이 있으니. 내 이미지가 설마 그 침 따위에 굴복되겠냐마는, 그래도 방금 전의 카민처럼 침이 턱선을 질질 타고 내리는 꼴만은 연출하고 싶지 않다. "좋은 말로 할 때 불어요오!" 에세렌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려퍼졌다. 라이메데스는 한참동안 그런 에세렌의 뒷통수를 빤히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내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저녀석, 이네아에……. 신관 아니었던가?" 라이메데스의 어조는 떨떠름했다. 나 역시 떨떠름한 어조로 답했다. "……나도 몰라." "대, 대단하시군요." 비아티 역시 부들거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뱉어냈다. 카민 역시 질세라 한마디 한다. "에세렌님은 분명 신관이 아닌 거야." 하지만 우리들이야 뭐라고 떠들던 자신에게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에세렌은 하던 일을 결코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녀석은 자신의 청록빛 머리칼을 길게 휘날리면서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좋은 말로 할 때 불라고 했습니다! 설마 더 맞고 싶은 겁니까?" 에세렌은 그 말과 함께 오른손을 바닥으로 내리치는 시늉을 했다. 그런 에세렌의 앞에는 어찌나 맞았는지 삶은 두부처럼 된 남자가 널부러져 있었다. 헉헉대던 남자는 자신을 향해 당장이라도 내려올 것 같은 에세렌의 주먹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으아아악! 말할게요, 말할게요, 어둠의 신관님! 제발 죽이지만 마세요!!" 에세렌의 앞에 널부러져 있던 남자는 처절한 목소리로 에세렌에게 말하며 그의 로브 자락에 매달렸다. 에세렌은 그런 남자의 말에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곤 고개만을 갸웃할 뿐이다. "어둠의 신관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저는 빛과 거울의 여신인 마리에나의 종입니다. 어둠의 신관이라니, 당치 않아요." 에세렌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빛과 거울의 여신은 모든 것을 투명하게 비추는 여신. 마리에나 신전의 '빛과 거울'에서 빛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빛이 아니다. 진정한 빛의 여신은 엘프들을 굽어보는 저 레이넨이고, 마리에나 신전에서 말하는 빛은 거울에 투영시키는 어떤 원인을 가리킨다. 마리에나 교단의 원칙은 '받은 대로 비춘다'라고 한다. 말 그대로 거울에 투영시키는 빛이다. 그들은 흔히 거울의 신관 혹은 빛의 신관이라고 불리곤 한다. 빛의 레이넨의 신관들은 광휘의 신관이라 불리고 말이지. 어둠의 신관은……. 뭐더라? 잘 기억이 안 나는군. 절대 내가 머리가 나빠서 그런 건 아니다. 사실 신 같은거 내가 알게 뭐냐. 어찌됐든, 어둠의 신관이 인간들 사이에서 공포의 대상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무슨 신관이라구요?" 에세렌의 앞에 널부러져 있던 남자는 얼떨떨한 눈으로 반문했다. "빛과 거울의 여신인 마리에나의 신관이라구요." 에세렌은 빙긋 웃으며 말했고, 그의 앞에 있던 남자는 입을 떡하고 벌리며 자신이 당황하고 있다는 의사표현을 온 몸으로 했다. "귀, 귀가... 귀가 이상해진 것 같아요! 우아아앙~~" 하긴, 남자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사실, 지금 우리는 매우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오늘 아침, 자신이 그 그림을 찾는 법을 알고 있나고 당당하게 말한 에세렌은 아크로아에게 이 근방에서 가장 큰 도로가 어디있냐고 물었다. 아크로아는 얼떨결에 답해주었고, 에세렌은 아크로아를 향해 '마음이 지치셨을테니 쉬세요. 저와 일행들이 그림을 찾아보겠습니다.' 라고 말하곤 우리를 바깥으로 이끌었다. 우리들은 모두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런 에세렌의 뒤를 따라갔다. 뭔가 상당히 의심이 가게 만드는 에세렌이었다. 솔직히 에세렌과 함께 지낸 시간들이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성격을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짧은 시간은 아니었으니 하는 말인데, 에세렌은 남의 신뢰를 얻어내기엔 상당히 상태가 불량한 신관이 틀림없었다. 물론 날 때부터 불량 신관은 아니었겠지만, 그의 태도는 정말 신뢰라곤 요만큼도 가지 않는 신관 그 자체가 틀림없었다. 어찌됐든 우리들은 모두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에세렌의 뒤를 따랐고, 그곳에서 아주 엽기적인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다. 아크로아에게 편히 쉬라고 말한 탓에 우리를 따라온 것은 비아티였다. 비아티는 우리를 이 근방에서 가장 넓은 대로랍시고 어떤 길로 안내했다. 에세렌은 그 대로 한복판에 나가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갑자기 진자한 얼굴로 카민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해 보였다. 에세렌은 카민에게 뭐라고 속닥거렸고, 카민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세렌은 자신의 품을 뒤적여 커다란 자루를 하나 꺼냈다. 매우 깔끔한 흰색의 그 자루는 뭔가 값진 물건을 넣어야 어울릴 듯, 희번들한 광택을 내고 있었다. 에세렌은 자랑스러운 말투로 그 자루가 여신의 권능이 깃들인 물건이라고 했는데, 나는 도대체가 여신의 권능이 왜 자루 따위에 깃들어 있는지를 한참동안 고찰하고 고찰해야만 했다. 어찌됐든, 에세렌은 그 자루를 어깨에 메고 카민에게 대로를 한바퀴 돌아 마지막에 골목 구석으로 가달라고 말했다. 카민은 뭔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저 불량한 신관도 신관이랍시고 그의 말을 따랐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로를 걸어가기 시작하는 카민을 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내 질문에 에세렌은 그저 웃기만 했다. -------------------------------------------------------------------------------- Back : 2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5 (written by 카르민) Next : 2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이 센티멘탈 83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02171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3rd December 2001 11:45:58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6-12-2001 22:37 Line : 149 Read : 1106 [27]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5 -------------------------------------------------------------------------------- -------------------------------------------------------------------------------- Ip address : 61.76.127.169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대체 무슨 생각이야?" 내 말에 에세렌은 그저 웃어만 보였다. 녀석은 두고보세요, 라고 말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눈에는 가득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나는 더더욱 불길해지기 시작했다. 몇 분이 흘렀을까. 저 멀찍이서 대로를 한바퀴 돈 카민이 돌아오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분명 도보를 걸어나갈 때 카민은 혼자였다. 그 이상한 자루를 둘러멘 채로 도보를 걸어나간 카민은 분명 혼자였단 말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카민은 혼자가 아니었다. 카민의 뒤로는 그에게 거의 밀착해서 따라오는 녀석들이 있었던 것이다. 카민 역시 바보는 아닌지라 자신의 뒤에 붙은 놈들을 눈치채고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카민은 에세렌이 지시한대로 대로의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자, 가십시다!" 에세렌은 카민이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용감하게 외치고는 우리에게 조용히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나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이 일을 에세렌에게 맡기기로 한 이상(뭔가 너무도 미덥지 못했지만 일단 맡기기로 했으니)잔말 않고 그를 따라갔다. 골목으로 접어들때쯤, 비아티가 입을 열었다. "에세렌님!" "왜 그러십니까?" 에세렌이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비아티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상황을 좀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 전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거든요." 비아티의 말에 에세렌은 발걸음을 옮기는 도중,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군요. 사실은 저……. 도둑길드를 찾아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잠시 멈춰서서 에세렌을 한참 보았다. 숨을 헐떡이며 뛰고 있었던 비아티 역시 갑작스럽게 머춰서서 에세렌을 보았다. 에세렌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이 지방의 도둑 길드라면 아크로아님의 그 그림에 대해 전혀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일단 조그마한 정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좋지요. 아까 카민님에게 맡긴 그 자루는 여신의 가호가 깃들인 물건으로(그러니까 왜 자루에 가호가 깃드냔 말이다!)시중에선 꽤나 비싼 값에 팔립니다. 적어도 보는 눈이 있는 자라면 그 물건을 탐내기 마련이지요. 카민님은 생긴 것이 조금 비리비리해 보이니(……카민한테 일러줘 버릴까보다.)많은 이들이 노릴 것입니다. 그 중에서 도둑길드원 하나쯤은 있겠지요." 정말 너무나도 고리타분하면서도 전통적인 수법이로군. 대체 몇 년전의 수법이냐! 그런 작전이 먹힐 것 같아! 나는 그렇게 발악하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에세렌을 따랐다. 에세렌은 여전히 자신감에 가득찬 태도였다. 카민이 들어갔던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한 무리의 인간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뒷골목에서, 카민은 골목의 구석 코너에 완전히 몰려 있었다. 그리고 그런 카민의 주위를 둥글게 싼 남자들이 보인다. 골목 구석에 몰린 카민은 남자들이 다가오자 검을 빼들고는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저것 보십시오! 벌써부터 자루를 뺏으려고 몰려들지 않았습니까?" "……그, 그러냐?" 나는 뭔가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라고 말해주려 했지만 그러기엔 에세렌이 지나치게 흥분해 있었다. 라이메데스는 피식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저 신관의 말대로는 안될 것 같은데 말이야?" 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세렌은 그러나 우리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곤 카민을 둥글게 둘러싼 이들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카민에게 온통 시선을 빼앗기고 있어서 에세렌이 다가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에세렌이 막 카민의 옆을 둥글게 싼 남자 셋에게 손을 뻗으려는 찰나, 남자 중 하나가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빼지 말라구, 이쁜이." 그것은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나와 라이메데스의 청각에는 전혀 장애가 될 것이 없었다. 나는 쿡, 하고 웃어버렸다. 그 남자가 꺼낸 말에 도둑길드원이 접근했다고 생각해서 잔뜩 흥분했던 에세렌은 흠칫하며 멈춰 섰다. 에세렌이 완전히 얼음이 되어 굳었음을 확인한 나는 피식피식 헛웃음을 흘리며 그 곳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카민의 뒤를 줄레줄레 따라왔던 세 명의 남자들은 아직 우리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 카민에게 한발자국 더 가까이 가더니 실실거리며 웃었다. "후우, 예쁜데? 이 곳의 미인이라면 내가 좀 아는데 말이야…… 타지인인가 보지?" 남자 중 하나가 그 말과 함께 손을 뻗어 카민의 얼굴을 만지려고 했다. 순간, 카민의 눈이 위로 치켜올려졌다. 놈의 눈이 가늘어진다. 급한 기울기의 직선을 그린다. 카민의 오른손이 번뜩였다. "……지금 내 앞으로 올라오고 있는 그 손 안 치우면 당신은 평생 불구가 될거다." 카민은 부들거리는 얼굴로 낮게 뱉어냈다. 그렇게 말하는 카민의 손에는 날카로운 잔광의 단검이 들려있었다. 자신이 얼굴을 만지려고 올라온 남자의 손을 정확하게 막으면서 카민이 이빨을 뿌득, 하고 갈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살짝 웃으며 에세렌을 돌아보았다. 에세렌은 하하, 하고 어설프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 "아무래도 이 상황은 네가 설명한 상황하고는 좀 다르다, 그렇지?" "……그, 그렇군요." 에세렌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원래 여자란 적당히 튕기는 맛이 있어야지, 암." 세 남자 중 하나가 그 말과 함께 카민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했다. 카민의 눈꼬리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쳐 올려졌다. 놈의 눈이 올라간 상태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것입 보인다. 이제 한계인 듯, 입술이 위로 올라간 채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 죽었어." 그 다음 순간 카민의 검이 어디로 향했는지, 녀석의 발이 어딜 차냈는지, 녀석의 주먹이 어디에 꽂혔는지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굳이 말이다. 정말이지 그 뒤는 악몽 이었다. 잔뜩 화가 난 카민을 어르고 달랜 에세렌은 다시 한 번 대로를 돌아줄 것을 요청했고, 카민은 이빨을 부득부득 갈아대면서도 결국 그 대로를 네 번이나 돌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가 대로를 네 번 도는 동안 소매치기는커녕 소매치기 그림자도 나오지 않았고, 골목길로 카민을 따라 들어온 것은 카민의 얼굴을 보고 침을 질질 흘리며 들어온 이상한 놈들뿐이었다. "어이, 예쁜데?" 퍽! 퍼벅! 퍼벅퍼벅퍼벅! "빼지 말라고……." 퍼벅! 퍼벅퍼벅퍼벅! 그리고, 카민의 얼굴에 홀려 카민을 줄레줄레 따라왔던 그 쓸개빠진 놈들은 카민의 손에 피떡이 되어 저 멀리로 던져졌다. 에세렌은 카민이 마음껏 패대기치고 밟고 주먹질하는 바람에 완전히 걸레가 되어버린 그 멍청이놈들에게 적당히 신성 치료를 해주면서 '죄송합니다'라고 중얼거렸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사과차원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이 분명했다. 카민은 정말 잔뜩 화가 나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대체 자기가 왜 이딴 짓을 해야 하냐면서, 정 하고 싶으면 나나 라이메데스, 또는 에세렌이 해도 좋지 않냐고 따졌다. 하지만 에세렌은 그런 카민의 의견을 완전히 묵사발 내버렸다. "저는 이 일을 지휘해야하니 할 수 없습니다." 지휘는 무슨 얼어죽을. 그것도 지휘냐!! "그리고 라이메데스님이나 칼레들린님은 뭔가 강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물건을 훔치겠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을 겁니다. 남는 것은 카민님 밖에 없어요." 카민은 뭐라고 외치려고 했으나, 그 순간 비아티의 얼굴을 보고는 입술을 꾹 깨물어 버렸다. 저 녀석은 역시 마음이 약하다니까. 에세렌의 요청에 의해 카민은 그 후로도 대로를 두 번이나 더 돌아야 했고, 7번째가 되어서야 우리는 드디어 제대로 된 인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잔뜩 지쳐서 골목으로 간 카민이 막 골목코너를 도는 순간, 카민을 잽싸게 쫓아왔던 그 놈이 카민의 어깨 부분에 매여 있던 자루를 낚아채서 달아나려 했다. "오예∼ 소매치기입니다!" "……." 에세렌은 좋아서 날뛰었다. 카민 역시 그 지긋지긋한 짓거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뻐서인지 환하게 웃었다. 소매치기는 뒤에서 갑자기 '오예…' 하는 소리가 들려온 데다가 물건을 도둑맞은 카민이 웃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몸을 빼내려 했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어 있었다. "네 놈 도망가면 난 또 이 짓을 해야 한단 말이다아!" 카민은 그 외침과 함께 정말 가공할만한 움직임으로 소매치기의 팔을 양손으로 잡은 다음 그 몸을 뒤로 넘겼다. 뿌득,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팔목이 꺾이는 소리가 났다. "우아아악!" 겨우 자루 하나 훔치려다가 팔목이 부러진 남자는 죽는 소리를 냈다. 에세렌은 얼른 그 곳으로 달려가더니 소매치기를 붙잡고 싱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당황한 듯 눈을 껌뻑거리며 에세렌을 보았다. 나와 라이메데스, 비아티는 천천히 그 곳으로 걸어갔다. 에세렌은 뿌듯한 얼굴로 걸어온 우리를 돌아보았다. 자랑스러움이 완연한 그 얼굴을 우리는 모두 외면했다. 에세렌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요?" "……?" 우리가 모두 의문 섞인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에세렌의 행동이 계시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신관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위대한 신관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신관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벽하게 수정한 유일한 마족... 아니군, 라이메데스와 더불어 신관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벽하게 수정한 두 명의 마족 중 하나가 되었다. -------------------------------------------------------------------------------- Back : 2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6 (written by 카르민) Next : 2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4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02172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3rd December 2001 11:46:08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6-12-2001 22:38 Line : 221 Read : 1331 [28]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6 -------------------------------------------------------------------------------- -------------------------------------------------------------------------------- Ip address : 61.76.127.169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 * * * * * * * * * * "흑흑흑……. 흑흑흑……." "그만 울어." 나는 앞서 나가는 놈의 머리를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내 외침에 그 놈은 우흑, 하는 소리와 함께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나는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평범한 갈색 머리카락을 말총으로 묶은 이 놈은 카민이 들고 있던 그 자루를 노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지막지한 구타를 당하는 정말이지 재수 없는 경험을 했다. 신관도 구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에세렌에게 걸려 무지막지하게 맞았던 이 놈은 눈물을 찔끔거리며 우리를 어떤 곳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나는 그 신성의 자루를 훔치려고 한 이 놈이 단지 좀도둑일 뿐 '도둑 길드'란 것과 아무런 연관이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라이메데스의 말에 따르면, 카민이 들고 있던 그 자루는 정말로 귀중한 것으로(그러니까 왜 하필이면 자루냔 말이다!)그 가치를 알아볼 정도면 꽤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놈일 거라고 했다. "흑흑흑." 한참 걷고 있던 놈이 다시 팔에 얼굴을 묻곤 울음을 터뜨렸다. 난 놈의 허리를 한 대 치면서 말했다. "더 맞고 싶냐?" "아, 아니요…… 하지만…… 흑흑, 제 평생에 신관한테 두들겨 맞을 거라고는…… 흑흑." 놈은 맞았다라는 단순한 사실보다는 신관에게 맞았다는 사실이 더 서러운 목을 놓아 울었다. 하긴, 나도 내 평생 신관한테 두들겨 맞는 인간을 볼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하지만 여긴 신관한테 죽을 뻔한 나도 있다. 그만 울어라. "흐흑……. 여, 여깁니다." 한참을 훌쩍거리던 남자는 어느 지점에서야 드디어 멈춰 섰다. 남자의 말을 듣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올린 순간, 나는 무척이나 당황해야만 했다. 나도 경악했고, 돌아보니 카민과 에세렌 역시 경악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그런 우리를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며 코를 훌쩍거렸다. "아, 안 들어가실 겁니까……?" 남자가 멈춰선 그 곳은……. 「식당」이라는 이름의 식당이었다. * * * * * * * * * * * * "그러지 말고 가르켜 주세요." 「밥! 어서 밥 내놓으란 말이다!! 밥을 내놔아아아아∼!」 「소, 손님. 그러지 마시고 일단 여기에 앉으세요. 밥은 잠시 후에……」 「바아아아아압!」 비아티와 아크로아를 만났던 식당이라는 이름의 식당에서, 카민은 정말로 추한 몰골을 보였었다. 밥을 내놓으라고 악을 바락바락 썼던 것은 물론이요, 한바탕 날뛰면서 주인에게 폭력 행사 비슷한 것까지 했었다. 주인은 굽실굽실거리면서 카민이 내놓으라고 나리를 치는 밥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했었지. "싫습니다." 구부정한 허리의 식당 주인. 카민의 밥 달라는 요청(아니, 협박인가?)에 괴로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밥을 준비했던 그 남자는 지금, 저번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얼굴로 우리에게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카민이 밥 달라고 난리 칠 때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던 그 자는 그 때와는 180도 다르게, 차분한 얼굴로 한 자 한 자 끊어가며 말하고 있었다. "이봐요! 우린 바쁘다구요! 도둑 길드면 도둑 길드답게, 정보를 팔란 말입니다!" 에세렌은 버럭 고함을 쳤다. 그런 에세렌의 앞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갈색 말총머리의 불행한 남자가 있었다. 나는 식당 주인을 향해 버럭버럭 고함을 질러대는 에세렌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머리에 손을 얹었다. 식당이라는 이름의 식당은 사실 이 지방의 도둑 길드였다고 하는군. 그리고, 이 식당의 주인은 옛날에 카민의 식탐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은 전적이 있는 저 아저씨란 말이야. 그렇다면? "죄송하지만, 이 번에는 정보를 팔지 않겠습니다." 이 정보 길드의 마스터가 저 아저씨라는 결론이 나오는 거지. "칼." 카민은 나를 부름과 동시에 피식, 멋쩍은 웃음을 터뜨렸다. 나 역시 그런 카민을 향해 피식 웃음을 지어주었다. "뭐가 문제길래 정보를 팔지 않겠다는 거죠!" 비아티가 버럭 고함을 쳤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았다. 식당이라는 이름의 식당, 카민이 난리 브루스를 췄던 이 곳이 도둑 길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들은 콧물을 훌쩍이며 우리를 안내하는 그 갈색 말총머리의 남자를 따라 식당의 3층으로 올라오게 되었고, 이 곳에서 식당의 주인을 볼 수 있었다. 길드 마스터라는 그 자를 보자마자 비아티는 말했다. '아크로아 릴리스 생애 최고의 그림, 그 그림 지금 어딨어요?' 앞뒤 설명은 하나도 없이 다짜고짜 그렇게 묻는 비아티였다. 식당 주인……. 아니, 길드 마스터는 그런 비아티를 보고 있다가 갑자기 냉담한 얼굴로 말했다. 자신은 정보를 팔지 않겠다고. "이유가 뭡니까!" 비아티의 고함에 전혀 길드 마스터답지 않은 그 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난 이토미즈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소. 그 뿐이오. 이만 돌아가주시오." 길드 마스터는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걸로 이야기는 끝이라는 듯,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문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뭐? 방금 뭐라고 했지?" 난 막 한발자국을 내딛는 그 남자를 향해 버럭 소리를 쳤다. 내 고함소리에 길드 마스터는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껌뻑 였다. 나는 당황해서 몸을 뒤로 빼는 그 자의 멱살을 단박에 낚아챘다. "무, 무슨 짓이오! 이거 놓으시오!" 길드 마스터는 당황한 듯 뱉어냈지만 나는 그의 멱살을 놓아줄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카민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 있는 것을 보인다. "……방금…… 이토미즈라고……" 카민은 멍하니 풀린 얼굴로 띄엄띄엄 뱉어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길드 마스터는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뭐요, 당신? 이토미즈를 아는 거요?" 카민은 답하지 않았다. 나는 잡았던 멱살을 확하고 놓아주었다. 내 팔힘에 의해 위로 들어올려졌던 그의 몸이 바닥에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내렸다. 내가 너무 세게 멱살을 움켜잡았었는지, 길드마스터의 목에는 희미한 손자국마저 나 있었다. 젠장할! 그런데 이번에도 그 이토미즈라는 건가? 대체 뭐냐, 그 이토미즈라는 건! 카민의 옛조직이라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카민에게 독에 대한 내성을 기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독을 투여한 그 빌어먹을 놈의 집단. 내 검을 노리는 집단. 유키를 납치한 집단. 그리고 아크로아가 그린 그림을 강제로 사려고 하는 집단? "……." 카민은 말없이 입술을 꾹 깨물곤 미간을 좁혔다. 그는 뭔가 얘기하고 싶은 듯 입술을 우물거렸지만 정작 그의 입밖으로 튀어나온 단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카민은 후, 하고 가늘게 한숨을 내쉰 후 길드마스터에게 한발자국 가까이 다가섰다. "……그 그림을 가져간 게 분명, 이토미즈인가?" 남자는 대답 없이 카민을 보았다. 대답을 해주지 않겠다는 의지인 듯, 그의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그런 길드 마스터의 눈을 한참 동안 뚫어지게 보고 있던 카민이 피식, 하고 길게 웃었다. 카민은 고개를 돌려 우리를 보더니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오른발을 들어올리더니, 방금 전까지 길드 마스터가 앉아 있었던 그 책상 위에 척하고 내려놓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책상 위로 자신의 다리를 걸쳤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무슨……?" 모두의 의문 섞인 표정을 뒤로 하고, 카민은 천천히 행동을 게시했다. 책상 위에 다리를 얹은 카민은 천천히 양손을 들더니 오른발의 바지단을 잡았다. 그가 걸친 헐렁한 소재의 흰색 바지……. 카민은 갑자기 그 바지를 위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녀석의 다리는 무척이나 가늘어서, 바지를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그 어떤 애로 사항도 생기지 않았다. 녀석은 무덤덤한 얼굴로 바지를 허벅지까지 그대로 끌어올렸다. 길드 마스터는 카민이 난데없이 자신의 앞에서 바지를 위로 끌어올리자 완전히 당황한 듯(얼굴이 붉어진 건 또 무슨 이유냐?)눈을 멀뚱하게 뜨고 있었다. 길드 마스터가 눈을 꿈뻑거리며 카민을 보는데, 카민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봐라." "읏……!" 길드 마스터는 카민의 말에 카민의 다리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갑자기 나즉한 비명성을 냈다. 나도 순간 놀라고 말았다. 카민이 끌어올린 바지 안 쪽으로 무엇인가 이상한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얼른 카민 쪽으로 다가가 바지가 걷혀 올라간 카민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녀석의 다리를 한참 보았다. 카민의 허벅지 쪽에는 괴상한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뜨거운 낙인을 그대로 찍은 그 것. 그것은 무척이나 이상한 모양이었다. 자신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는 이의 모습을 그린 그 낙인은 그러나 목이 없고 다리도 없고 오로지 몸뚱아리만 있는 이상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낙인의 주위로 빙 돌아나가는 글자……. 내 기억이 분명하다면 그 글자는……. "마계의……. 고대문자?" 나는 카민의 그 문자를 보며 당황해서 조그맣게 내뱉었다. 정말 당혹스러웠다. 카민의 다리 위에 새겨진 그 것은, 분명 마계의 문자였다. 원래 마계 고대의 문자라는 것은 고대 마족의 문서에만 기록되는 것이라 구하기는커녕 구경하기도 힘든 것이지만, 아이에드의 서재에는 널릴대로 널려 있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이 고대문서를 몇 개 태워 먹은 적도 있었기 때문에 이 문자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그 문자를 뚫어지게 보고 있을 때, 카민이 바지단을 내렸다. 녀석이 눈을 부릅뜨며 길드 마스터를 보았다. "당신이 도둑 길드의 마스터라면 이 문장이 뭘 의미하는지는 알겠지?" 카민의 말에 길드 마스터는 입술을 꾹 물었다. 그의 눈썹이 부르르 떨었다. "……당신…… 이토미즈였소? 그 문양은……. 이토미즈의……?" 카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도 이토미즈다. 일행들을 찾아오는 길이다. 게다가 내가 없는 사이 그들이 작은 일을 하나 친 것 같은데 말이야. 자, 말해주시지. 이토미즈는 지금 어디 있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전의 그 문양이……. 이토미즈의 문장이라는 건가? 그럼 대체 왜 마계의 고대 문자가 적혀 있는 거지? 어째서? 길드 마스터는 잠시 망설였다. 그는 주저주저하다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 * * * * * * * * * * * * * * "그러니까……. 그 그림은 이미 크레티아로 갔다, 이 말이죠?" 우리가 기다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크로아는 정원에 나와 있었다. 그녀는 우리가 가져다준 소식에 잔뜩 굳은 얼굴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잠시 파리한 입술을 떨었다. 길드 마스터는 말했었다. "후우, 당신이 이토미즈라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실 이토미즈에 관한 것은 잘 아시다시피 이 바닥에서는 극비가 아닙니까?" 카민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만, 나야 극비든 뭐든 그따위 건 모른다. 나는 그저 단 한가지라도 더 듣기 위해 귀를 세웠다. "그림을 가져간 이유는 모릅니다만, 그림을 가져간 이토미즈의 멤버는 1321호와 그 일행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카민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카민은 제외한 모두는 1321호가 뭐야? 라며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길드 마스터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마저 이었다. "이토미즈에게는 국경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크레티아의 국경을 바로 가로질러 들어가, 그 그림을 수도에 있는 '누군가'에게 넘기려고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희도 일이 일인만큼, 자세히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이토미즈가 하는 일인데, 깊히 알려고 하면 좋을 것이 없지요. 하지만 일단 크레티아로 갔으니, 크레티아의 수도 리벤트를 찾아 그 곳 길드 마스터에게 문의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우리에게 대강의 설명을 들은 아크로아는 짧은 한숨성과 함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그 자세로 한참이나 소리 없이 흐느꼈다. 비아티의 말로는, 아크로아가 그 그림을 친자식마냥 소중하게 여겼다고 했으니(그림은 원래 화가들에게는 자식과도 같은 것이란다), 그 그림을 찾을 가능성이 거의 없어진 지금 슬퍼하는 것은 당연했다. 한참이나 소리 죽여 운 아크로아는 머리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 "그럼…… 그럼 제 그림은 이제……." "미안하지만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아크로아님." 에세렌은 마치 자기가 그림을 훔친 양 죄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크로아는 빨갛게 부어오른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수고…… 해주셨습니다." "수고는요, 무슨……." 우리는 다 멋쩍어져 버렸다. 아크로아는 오른손을 들어 조용히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더니, 갑자기 생긋하고 웃어 보였다. 그녀는 난데없이 내 손을 꽉하고 잡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다짐을 주듯 말했다. "하지만……. 그림은 끝까지 그리게 해주실거죠?"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오는데? -------------------------------------------------------------------------------- Back : 2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7 (written by 카르민) Next : 2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5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02172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3rd December 2001 11:46:11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8-12-2001 01:41 Line : 247 Read : 1502 [29]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7 -------------------------------------------------------------------------------- -------------------------------------------------------------------------------- Ip address : 61.83.23.192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이대로 가다간 난 좀비가 되버릴거야...T^T 지금 시간은 새벽 1시 39분... 오후 7시부터 계속해서 수정을 보고 있었습니다... 후후후...=_= 이것이 바로 마감의 힘인가;; ---------------------------------------------- 제 16장: 우리는 세이피안으로 간다! "칼레들린님, 드디어 그림이 완성됐어요. 한 번 보실텐가요?" 아크로아가 가볍게 웃으며 내게 말을 꺼냈다. 나는 살짝 인상을 쓰며 일어섰다. 그래, 그러고보면 이 여자의 집에 머문지도 이제 꽤 된 것 같다. 그림이 완성되었다는 걸로 보니, 여길 떠날 때도 임박했다는 건가? "흐음?" 아크로아는 내게 가볍게 손짓을 해 보였다. 나는 그녀의 손짓을 따라 그녀의 앞에 놓인 이젤 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이젤에 내걸린 그림 앞에 섰다가 조금 놀라고 말았다. 이 여자가 내게 몇 일 동안 요구한 자세는 단 하나였다. 처음에는 손을 들라느니, 몸을 굳히라느니, 우수에 가득 찬 눈을 해 보이라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자세를 요구했던 그녀였지만 한참만에 내게 그런 것이 무리라는 것을 깨달은 듯,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냥 멍하게 허공을 보는 자세를 취해 달라고 말해 왔다. 다른 자세보단 훨씬 쉬운 자세라고 판단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허공을 올려다보는 일을 택했다. 그리고, 지금……. 완성된 이 그림 안에 내 모습이 담겨 있다. 이젤 위에 걸쳐진 그림 안에 있는 나의 모습은 놀랍도록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아크로아라는 여자가 그림쟁이 중에서는 꽤나 대단한 경지에 있다는 것을 익히 들었던 나로서도 놀랄 정도였다. 하얀 종이 위에 그려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입체적인 그 그림은 나라는 녀석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하얀 피부 위로 차분하게 내려온 검은 머리카락은 어깨를 걸쳐 허리까지 그 선을 드리우고 있다.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는 희미한 공허함마저 머금고 있고,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미백의 치아가 조금 드러난다. 팔 정도는 아무렇게나 방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조차 놓치지 않은 이 여자. 아크로아는 내 옷의 팔 주름 선 하나까지 섬세하게 표현해 놓았다. "마음에 드시나요?" 아크로아가 생긋 웃어 보였다.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크로아는 환하게 웃으면서 마지막으로 다시 붓을 들었다. 그녀는 그림 오른쪽 하단에 자그맣게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아크로아 릴리스」. 그렇게 쓴 그녀는 살짝 웃어 보였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칼레들린님." "내가 수고를 하긴 좀 했지." 내 말에 아크로아는 슬쩍 웃어보였다. 나는 그림 앞에서 물러섰다. 아크로아는 그런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다가 말을 꺼냈다. "칼레들린님." "뭐야?" "조금 더……, 조금만 더 머물러 달라는 말을 하면 뻔뻔하다고 생각하시겠죠?" 나는 잠시 말없이 아크로아를 보았다.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는 조금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옷을 툭툭 털었다. "미안하지만, 난 바빠." 내 대답에 아크로아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은 그녀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애처로워 보이는 기색마저 띄고 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웃어보였다. "알고 있습니다. 한 번 해 본 말이었으니 신경은 쓰지 마세요." * * * * * * * * * * 내 그림이 완성된 지 이틀이 지났을 때, 우리는 아크로아의 저택에서 나왔다. 그 날이 카민의 그림이 완성된 날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저택에서 나오는 길에 아크로아는 무거운 자루 하나를 카민에게 건넸다. 난 그것이 돈이라는 것을 깨닫고 카민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카민은 어설프게 웃어보이면서 '알았어, 맛있는 거 사줄게.' 라고 말했다. 쳇, 누가 맛있는 거 사달라고 했냐? "이 걸 드리고 싶은데, 받아주시겠어요?" 게다가 아크로아는 마차까지 준비해주었다. 갈색마가 이끄는 그 마차는 마차 전체가 은은한 고동색이라 어딜 보아도 평범 그 자체였지만 아크로아는 나름대로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굳이 마차 같은 것이 필요 없는 우리들이었으나, 그녀가 주겠다는데 안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에세렌이 티 나게 좋아했다는 말은 꼭 하고 싶군)마차를 받았다. 비아티는 우물쭈물하며 우리에게 잘 가라고 인사했다. "작별의 인사요." 카민이 막 마차에 올랐을 때, 아크로아가 나를 향해 그렇게 말하더니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뜻인 듯, 그녀는 자신의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나는 피식 쓰게 웃었다. 보통 악수라는 것은 헤어짐보다는 만남에 더 많이 쓰이는 것이 아닌가? 손 몇 번 흔드는 것으로 회자정리가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이별이 있기 마련. 그 이별의 슬픔을 고작 손 몇 번 잡고 흔드는 것 갖고 달랠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인간들은 이런 것을 애용한다고 했으니. 어찌됐든 난 아크로아가 내미는 그 손을 마주잡고 몇 번 흔들어 주었다. 내가 훌쩍 마차에 오르는데, 아크로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칼레들린님. 다음에 꼭 한 번 뵐 수 있길 바래요. 혹시라도 시간이 난다면 들려주세요!"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차에 훌쩍 올라탔다. 하지만 마차에 들어서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카민, 에세렌, 라이메데스 모두 마차 안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마저 안에 들어가자, 마차 안의 분위기는 썰렁하게 변했다. 이건 뭔가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마차안에 모두 타면 정작 마차는 누가 모는 거지? 나는 어이가 없어서 인간들을 하나하나 보았다. 그러나 내 눈길을 받고도 녀석들은 마부석으로 가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결국 제일 만만한 녀석을 시키기로 결심하고 라이메데스를 툭툭 쳤다. "이봐." 내가 옆구리를 찌르자 라이메데스 녀석은 뭐냐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네가 말을 몰아야지?" "……왜?" 라이메데스는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되물었고, 나는 그런 라이메데스를 향해 진하게 웃어 주었다. "넌 내 시·종·이잖아?" "……." ******************** 바람이 시원했다. 코끝에서 가볍게 춤을 추다가 귓등을 간질이고, 머리카락을 살짝 흔드는 그 것은 향긋한 풀내음을 머금은 채로 내 가슴에 청량한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바람을 따라 조그맣게 춤을 추는 풀들의 움직임을 따라 향긋한 내음이 번진다. 바람은 하늘거리는 손으로 내 몸을 감싸고 포근하게 안아준다. 무척이나 따뜻한 바람이다. "바람이 좋아요!" 에세렌은 마차의 창문을 휙 하고 열어젖히며 크게 소리를 쳤다. 나는 창문 사이로 밀려들어오는 바람의 숨결을 느끼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크로아! 우우, 그 엄청난 여자의 성을 떠난 지 정확히 3일째다. 우리는 그동안 부지런히 달려, 이카루와 세이피안의 국경 근처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나나 카민이나 둘 다 서로 뭐라고 할 것 없이 상당한 방향치인지라 여행경로는 에세렌과 라이메데스에게 이미 떠맡겨버린 후였다. 라이메데스는 아무 불평 없이 말을 몰고 있었는데, 그의 말모는 솜씨는 생각보다 너무 좋아서 처음에 나는 놀라움의 비명까지 지르고 말았다. 마차가 전혀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승차감이라니! 「라이메데스! 대, 대단하다! 너 대체 왜 이렇게 말을 잘 모는 거냐?」 정말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완벽하게 말을 몰아가는 라이메데스의 솜씨에 감탄한 나는 이렇게 소리쳤다. 「……마차 밑에 깔린 것들 하나하나 마기로 처리해가며 움직이는 내 마음을 네가 알아?」 조용한 그의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나저나, 라이메데스는 꽤나 훌륭하게 '이데' 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에세렌은 라이메데스를 가끔 이상한 눈으로 보곤 했으나 마족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 같지는 않았다. 반면 카민은 이미 옛날에 눈치를 채 불쑥불쑥 데스형이라고 불러, 내게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이럴 땐 샌드위치가 있어야 돼……." 살짝 접혀진 외떡잎식물들이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운치 있는 광경을 보면서 카민이 뱉어낸 소리는 기껏 그것이었다. 나는 운치를 감상하는 눈이라고는 전혀 없는 녀석의 그 무식함에 기가 막혀서 한마디 해주고 말았다. "먹보! 가끔은 좀 센티멘탈해지기도 해보란 말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너무 자주 센티해져서 문제지만. 하지만 내 따끔한 충고에도 카민은 어이없는 대꾸로 응수할 뿐이었다. 녀석은 내 대답에 슬그머니 눈웃음을 치며 내 옆구리를 푹, 하고 찔렀다. "흐흐흐! 그러는 너도 사실은 먹고 싶지?" 내가 말을 말지, 말을 말어. "이제 곧 국경입니다." 창문 밖을 내려다보고 있던 에세렌이 내게 말을 건넸다. 나는 그 말에 호기심이 일어 창문가에 바짝 붙어있는(그 포즈는 거의 나무에 붙어있는 매미의 포즈였다)에세렌의 목덜미를 잡아채 뒤로 던지고 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라서 숨을 헙 하고 들어마셔야 했다. 창밖을 바라보자마자 한 쌍의 눈동자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달리고 있는 마차의 속도가 비슷했던지, 내가 타고 있는 마차 옆쪽에 있던 다른 마차에 있던 사람의 얼굴이 그대로 보였다. 그 자 역시 마차의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친 것은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였는데,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빙긋하고 웃어 보였다. 내가 숨을 들이마신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왜 모르는 얼굴을 보고 웃는 거야? 기분 나쁘네." 나는 얼른 마차의 창문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기분이 나빠진 이유라는 것이 그 자가 나를 보고 웃었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내가 기분이 나빠진 이유는……. 아까 그 갈색 머리의 남자가 무척이나 이상하게 생겼던 데에 있었다. 온 얼굴에 험상궂은 상처가 찍찍 그어져 있어서 아이에드나 로시엔이 봤다면 '가까이에서 놀지 마세요!' 라고 외칠 것이 틀림없을 정도로, 흉터가 많은 얼굴이었다. 히이이이이잉. 어디선가 말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까 그 마차는 먼저 달려나간 듯, 다른 모양의 마차가 옆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주위를 휙휙 둘러보니 몇 대의 마차가 우리와 같은 방향, 그러니까 국경으로 달려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국경을 통과하는 것이 좀 어렵지 않을까요?" 카민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에세렌은 생긋하고 웃었다. "아니예요. 원래 세이피안과 이카루의 관계는 좋은 편이니니까. 302년 전에 맺어졌던 에이테르 조약 이후로 지금까지 죽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국경이 없는 나라라고까지 주변에 불리니, 할 말은 다했다고 보면 되지요."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해버렸다. "그러면 세이피아와 크레티아는? 거기도 넘어가기가 쉽나?" 내 질문에 에세렌은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더니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이카루와 크레티아가 대립국, 세이피안과 이카루가 친밀국이라서 세이피안과 크레티아의 사이는 자연스럽게 소원했습니다. 국경의 경비도 매우 삼엄했고 말이지요. 하지만 최근엔 크레티아의 둘째 왕자와 세이피안 일곱째 공주의 결혼설이 돌고 있는 만큼, 두 왕국 사이에서도 꽤나 많은 사절이 오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흐응, 하고 낮게 중얼거린 후 마차 깊숙이 등을 묻었다. 에세렌은 그런 나를 향해 보충하듯 덧붙였다. "이카루의 시민증만 있다면 누구나 자유롭게 세이피안의 국경을 넘을 수 있으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되요." 나는 흐음, 하고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가 갑자기 어떤 사실을 자각하고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 이카루의 시민증? 난 그딴 거 없는데?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옆을 보았다. 그리고, 허옇게 굳어있는 카민을 발견했다. 카민은 당황한 표정으로 에세렌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전 시민증 같은 거 없는데요?" "엑?" 에세렌은 당황한 듯,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는 하하, 하고 어설프게 웃으며 이번에는 시선을 돌려 나를 보았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더 어설프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런 에세렌을 향해 씩, 하고 웃어 보였다. "나도 없는데." "힉!" 에세렌은 다시 한 번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는 자신의 미간을 문질거리며 한참을 고뇌하는 눈치더니, 갑자기 눈을 돌려 카민과 나를 한차례씩 노려보았다. "대체 뭘 하셨길래 시민증도 못 받으셨단 말입니까?" 에세렌의 추궁하는 듯한 말투에 나는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며 딴청을 피웠고, 카민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에……. 원래 시민증이라는 것은 18살이 되는 해에 나오는 건데……. 저는 18살이 되는 해에 인적이 드문 숲에 있어서 받을 기회가 없었어요." 카민의 말에 에세렌은 더더욱 큰 한숨을 한 번 내쉰 후 마부석을 향해 소리쳤다. "이데님! 당신은요?" "없다." 라이메데스는 당연하다는 듯한 어조로 태연하게 말했다. 에세렌은 자신의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것은 얼굴에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나를 한참동안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뭐, 제까짓 게 노려본다고 해서 이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님이 겁이라도 먹을 것 같은가?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 그래. 에세렌은 한참동안 나를 노려보아도 내가 별 다른 꿀림 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결국 먼저 시선을 내려 버렸다. 그렇게 또 한참동안 마차의 밑바닥을 보며 에세렌은 상념의 바다를 헤엄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점점 더 흘러 마차의 움직임조차 느려졌을 때, 에세렌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할 수 없군요. ……저는 마리에나의 신관인데다가 시민증도 갖고 있으니……. 제가 신분을 보장하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릅니다. 일단 한 번 가보지요." "뭐, 까짓거……. 안되면 밤에 몰래 넘어가면 되고." 내 말에 에세렌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국경을 밤에 몰래 넘어가다니! 좀 상식적인 생각을 하실 수 없어요? 그러다 걸리면 당연히 맞아 죽어요!" "안 걸리면 되지." 나는 태연스럽게 대꾸했고 에세렌은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그의 태도는 마치 '아아! 이런 황당한 사람과 함께 다녀야 하다니!' 라고 말하는 듯해서 나는 매우 불쾌해졌다. 황당하다못해 엽기적인 인간…… 아니, 이네아와 함께 다니는 나도 그리 유쾌하진 않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 -------------------------------------------------------------------------------- Back : 30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8 (written by 카르민) Next : 2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6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02172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3rd December 2001 11:46:13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0-12-2001 02:36 Line : 200 Read : 1160 [30]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8 -------------------------------------------------------------------------------- -------------------------------------------------------------------------------- Ip address : 61.83.23.14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곧 국경이라고 했던 에세렌의 말대로, 10분 정도 마차를 달리자 마차의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는 신분증 검사를 비롯하여 간단한 검문이 이루어진다고 한 에세렌의 말이 맞는건지, 마차의 속도는 국경 근처에 접근할수록 느려져만 갔다. 한참 동안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던 마차는 종국엔 자리에 멈추고 말았다. "우리 차례인 것 같은데?" 카민이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리 마차의 문이 스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우리는 엉거주춤 일어서 마차의 밖을 보았다. 마차 밖에는 푸른색의 유니폼을 걸친 남자가 셋 서 있었다. 이 남자들이 국경 지기인가? 그런데……. 옷들이 참 촌스럽군. 나는 온통 푸른색에 흰색 세로 줄무늬가 간간히 그여 있는 그들의 옷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이지 최악의 디자인을 가진 그 옷을 입은 세 명의 남자들은 마차 안에 있는 우리들을 조금 엄격한 얼굴로 죽하고 훑어보았다. 에세렌은 살짝 웃으며 그런 남자들을 향해 단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부드러운 햇빛이 비치는 날. 따뜻한 마음의 당신에게 언제나 여신의 가호가 깃들길 바……." "신분증은?" 그러나 에세렌이 고어체의 긴 인사를 채 다 끝내기도 전에, 남자들은 인사를 건넨 에세렌이 민망하게도 사무적인 어조로 본론만을 꺼내들었다. 에세렌은 인사 도중에 말이 먹혀 버리자 멋쩍어진 듯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에… 저, 저는 마리에나의 종인 에세렌 이네아스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 명의 남자들은 신분증을 내라, 라고 말한 자신들의 말을 어디론가 흘려버리고 갑자기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에세렌의 태도에 당황한 듯, 조금 황당해진 어조로 물었다. 에세렌은 그런 그들을 향해 가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하하. 지금 이 마차에는 제 일행이 세 분 계신데, 이분들이 모두 신분증을 갖고 오시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신관인 제가 신분을 보장하는 분들이니, 어떻게 좀……." "신분증이 없다는 말인가?" 이번에도 에세렌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남자들이 말했다. 에세렌은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잘라먹는 조금 불쾌해진 듯, 미간을 좁히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신·관·인 제가 신분을 보장합니다." "그러면 국경은 통과할 수 없다." 유독 에세렌이 '신관' 이라는 자신의 직업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이게 바로 공권력 남용인가?)남자들은 전혀 상관없다는 어투로 딱딱하게 말했다. 쳇, 이거 뭐야? 혹시 여길 통과 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 에세렌은 남자들의 차가운 태도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 "아, 비록 일행들이 신분증이 없지만……! 저는 신관입니다." "그래서?" 네가 신관인 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라고 묻는 듯한 남자들의 반문에 에세렌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나는 에세렌의 옆구리를 푹 찌르며 작게 속삭였다. "그냥 밤에 넘어가자." "……당신은 가만히 있어주세요." 에세렌은 내 의견을 조용한 어조로 사뿐히 즈려 밟고는 푸른 옷의 남자들을 향해 진지한 말투로 다시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여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데, 저의 일행은 결코 수상쩍은 분들이 아닙니다. 부탁이니 건너가게 해주세요." 원래, 신관은 자신이 모시는 신의 이름을 운운할 때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는 어째서인지 모르지만(신관이 신의 이름을 걸고 거짓말을 하면 속좁은 신들이 벌을 내리는 걸지도 모르지.)그것은 신관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 중의 하나로, 신관들은 죽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경배하는 신의 이름으로 거짓을 논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보통의 인간들은 신관이, '제가 모시는 신을 걸고 맹세하는데…'라는 식으로 나오면 그가 하는 거의 모든 말을 믿어주기 마련이라 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예외가 있는 법. 우리의 마차 앞에 선 저 파란 옷의 남자들은 에세렌이 하는 그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 태도로 무뚝뚝하게 답할 뿐이었다. "신관이든 뭐든 나와는 상관없지. 어찌됐든 통과는 불가능해." 남자들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에세렌은 얼굴을 붉히며 쩔쩔매다가 파란 옷의 사내들에게 매달리듯 다시 말했다. "어떻게 좀 안 될까요?" "안 돼." 남자는 차갑게 대꾸했다. 젠장, 천천히 성질이 나려고 그런다. "어떻게 좀 해주세요. 안 그러면 여신의 저주가 내릴지도 모릅니다!" 도저히 좋은 말로는 안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에세렌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다. 여, 여신의 저주라고? 정말 너는 네가 모시는 그 여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도매금에 넘겨버리는군. "하하핫! 자신의 신관이 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고 저주를 내리다니, 네가 모신다는 여신은 그렇게나 속이 좁은가?" 남자 셋은 에세렌이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가볍게 그를 비웃기까지 했다. 에세렌의 얼굴이 단숨에 다시 붉어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어찌됐든 국경은 넘을 수 없다. 돌아가서 신분증을 가져오도록." 파란 옷의 남자가 내뱉는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세이피안을 거치지 않으면 크레티아로 가는 방법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했으니 어떻게든 이 국경을 넘어야만 했다. 나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투덜대듯 말했다. "젠장할! 이놈의 국경, 우리가 한번 넘는다고 닳아 없어지기라도 하냐?" 나름대로 작게 말한다고 했는데, 에세렌을 향해 계속 고개를 저어대고 있던 남자 중 하나가 용케 들었는지 인상을 확하고 찌푸리며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뭐라고 했나?" 나는 그의 말투에서 불쾌감을 감지했지만, 사실대로 말해도 내가 꿀릴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 태연스레 대답했다.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닐 테니 그냥 보내달라고 했다." 남자는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참 동안 빤하게 내 얼굴을 노려보았다. 마치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꼼꼼하게 보고 있던 남자는 어느 순간 훗, 하고 기분 나쁘게 웃었다. "아, 저…… 이 친구가 뭘 몰라서 그러는 거니 신경 쓰지 마세요. 저기, 저희가 정말로 급합니다. 어떻게 국경을 넘어갈 수 없을까요?" 카민은 나를 매섭게 노려보는 남자의 앞을 슬그머니 막아서며 조용한 어투로 말을 건넸다. 그러자 파란 옷의 남자는 내게서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카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 급합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카민은 정말로 급한 어조로 말하고 있어서, 남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동요의 기색이 떠올랐다. 좋아, 조금만 더 하면 넘어온다! "그래! 우리 지금 엄청 급하다. 좀 보내줘." 내 말에 남자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가만히 팔짱을 끼곤 손가락을 까딱까딱했다. 남자는 한참동안 우리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조그맣게 입술을 움직여 뭐라고 중얼거리듯 한마디했다. 하지만 남자가 낸 그 말소리는 너무나도 작아서 이 나에게조차 들리지 않았다. 카민 역시 남자의 말이 들리지 않았는지 네? 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파란 옷의 그 남자가 다시 한번 조용하게 말했다. "30골드 정도라면 어떻게 해보지." 나는 남자가 뱉어낸 그 말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가 없어 멀뚱하게 있다가, 한참만에야 의미를 파악하고 기가 막혀서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뭐, 뭐냐? 그러니까 지금……. 돈을 받고 국경을 통과시켜주겠다, 이거냐? "30골드요?" 그러나 놀라는 나와는 달리, 카민은 조금도 어색할 게 없다는 태도로 반문하더니 흐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치 돈을 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태도로(마치 이런 일을 예상한 듯한 그 태연한 태도에 나는 정말 어이가 없어졌다)자신의 하의 호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주머니를 뒤진 돈은 그 30골드라는 액수에 못 미치는 듯,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야, 아크로아가 준 돈이 있잖아." 나는 인상을 찌푸리는 카민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카민은 내 말에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아크로아가 우리들에게 내밀었던 그 커다란 주머니를 자신 쪽으로 잡아당겨 조심스레 풀었다. 그런데 그 주머니의 조임끈을 잡아당기는 순간, 카민의 두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는 것을 나는 본의 아니게 보고 말았다. "아……." 카민은 잠시 짧은 신음성 같은 것을 흘리더니 얼른 주머니를 도로 닫아 버렸다. "왜?" 나는 갑작스러운 카민의 태도에 의문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카민이 어설프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아, 아무것도. 자,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잘 뒤져보면 30골드 정도는……." 카민은 그 말과 함께 갑자기 손을 들어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일단 그는 자신의 상의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하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이 금화 24개였으니, 30골드가 되려면 6골드가 모자라는데, 그만한 돈이 카민의 몸 구석구석에 숨어 있을까? 나는 카민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상의 주머니에는 돈이 조금 들어 있었던 듯, 카민은 상의 주머니에서 2개의 금화와 조금의 은화를 꺼내어 마차 시트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래도 4골드가 모자란다. "그리고 또……." 카민이 이번에는 자신의 옷안으로 손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나는 카민이 갑자기 자신의 상의를 반쯤 들어 보이자 그 영문을 몰라 눈을 껌뻑거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카민의 윗 속옷에 달린 자그마한 주머니를 발견하고 경악해야만 했다. "그, 그게 뭐야?" 나는 카민의 속옷에 달린 주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카민은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비상금 넣어두는 곳." 그 말과 함께 카민은 속옷 주머니를 뒤적거렸고, 그 안에서는 2개의 금화와 20개가 넘는 은화가 나왔다. 카민은 그 돈도 마차 시트에 내려놓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돈을 세어본 결과 아직도 2골드가 모자란다는 걸 깨달은 내가 카민에게 어떡할 거냐고 물으려는 순간, 나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황당스러운 장면에 직면해야만 했다. "으음, 그럼 여길 볼까?" 갑자기 카민이 상체를 구부리더니, 신발을 벗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봐?" 난 카민이 신발을 벗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작게 입술을 뗐다. 하지만 카민은 내 부름에도 답하지 않고, 자신의 갈색신발을 벗더니 양말 쪽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리고 뒤꿈치 쪽의 양말을 살짝 내린 카민은 그 안 쪽으로 자신의 손을 넣었다. 이윽고, 카민의 양말 안에서 슬그머니 나오는 1골드를 바라보며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흠, 정확하게 금화로 30골드로군. 비상금이 다 털렸네." 카민은 혀를 쑥 내밀며 한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온 몸에서 나온 30골드를 두 손에 모아 파란 옷이 남자들에게 건넸다. 그러나 파란 옷의 남자는 카민의 내미는 그 돈을 받지는 않고 카민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볼 뿐이었다. 이 남자는 카민의 '비상금 숨겨 놓는 속옷 주머니'와 '1골드씩 집어넣는 양말을 한 번씩 훑어보더니 허, 하고 혀를 찼다. 그런 남자를 향해 카민이 다시 돈을 내밀었다. "어서 받으세요." 카민의 양말에서 나온 1골드가 유난히 반짝인다고 생각한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파란 옷의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카민이 내미는 돈을 받아 들였다. 그는 주섬주섬 그 돈을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은 다음 잠시 우리를……. 아니, 정확히는 카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곧, 조그마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했다. "통과." ------------------------------------------------------ ------------------------------------------------------ 「날개짓 하는거야. 지금」 누군가 속삭이고 있어 「무릎 아래의 경계선에서 날아가 버리는거야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자유. 녹슨 사슬로 처음부터 우린 구속 따위 받고있지 않았어」 가슴에 가슴에 하늘을 담고서 푸르름의 깊숙히 잠기고 싶어 어디까지나 끝없이 밤하늘을 돌아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요 모든 것들이 타락한다해도 당신만은 어른이 되지 말아줘 그리운 빛으로 이끌어가며 당신은 다정하게 손을 흔드네 친숙한 미래에게도 이별을 고하고 부서져버린 환상을 다시 그려요 -문득 생각나버린 라르크 엔 시엘의 Dive to Blue 중 제가 좋아하는 몇 구절입니다. 가끔씩 써도 될까요?;; -------------------------------------------------------------------------------- Back : 31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9 (written by 카르민) Next : 2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7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02173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3rd December 2001 11:46:16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1-12-2001 00:11 Line : 179 Read : 958 [31]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9 -------------------------------------------------------------------------------- -------------------------------------------------------------------------------- Ip address : 61.82.237.15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반마족 88편에서 라르크의 노래 가사를 썼었는데... 그 가사가 마음에 드셨다면서 가사를 보고 싶다고 한 분이 계셨습니다. 너무너무 기뻤어요^ㅁ^;; 좀 주책스럽지만... 어째 라르크 이야기만 나오면 반쯤 정신이 나가버리니, 이거야 원-_-;; ------------------------------------------------------------- 30골드라는 돈을 받아먹고 나서야 우리에게 국경 통과라는 말을 해준 저 촌스러운 파란 옷의 남자들을 향해, 나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욕을 마음껏 해대고 있었다. "칼." 점점 멀어지는 이카루 국경을 마차 뒤편에 크게 난 창문을 통해 지그시 보던 나는 갑자기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건네는 카민의 태도에 창문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어 들였다. "왜 그래?" 카민은 그렇게 묻는 나를 한참동안 말없이 보고 있다가, 조용히 품을 뒤적여 무엇인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내게로 내밀었다. "이것 좀 봐." 나는 카민이 내민 그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었다. 카민이 내게 건넨 것은 일전에 아크로아가 카민에게 건넸던 갈색의 주머니였다. 꽤나 묵직한 주머니의 무게가 양손으로 전해져 온다. 나는 주머니를 살짝 쓰다듬으며 멀뚱한 표정으로 카민을 보았다. "이 주머니가 왜?" 카민은 대답 없이 손을 움직였다. 그는 내가 양손으로 움켜쥔 그 갈색의 주머니의 한켠에 위치한 줄을 잡아 당겨 주머니의 입구를 천천히 개봉했다. 직, 하는 소리와 함께 주머니 속이 훤하게 들어 났다. 나는 눈을 빼꼼 하게 뜨고 갈색의 주머니 안을 바라보았다. 순간, 나는 내 눈속에 들어온 어떤 광경에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떠야만 했다. 주머니 안에는 당연히 돈이 들어 있어야 마땅했다. 아크로아는 우리들의 모델료로 이 주머니를 주었으니 말이다. 갈색의 주머니, 그 묵직한 무게가 품고 있는 것은 당연히 돈이어야 했다. 하지만, 카민이 손으로 열어젖힌 주머니 속으로 보여진 것은 돈이 아니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바로……. "도, 돌?" 나는 갈색의 주머니 한가득 채워져 있는 묵직한 돌덩어리들을 보며 입을 떡하고 벌렸다. "……아크로아님이 우리를 속였어." 카민이 나즉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순간 눈을 크게 부릅떴다. 뭐, 뭐야……. 그러니까 지금……. 그 여자, 아크로아가……. 우리에게 모델료를 주지 않고……. 모델료 대신 돌멩이를 채워서 줬다, 이 말인가?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몇 번이고 주머니 속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몇 번이나 확인한 나는 아무리 보고 보고 또 보아도 전혀 달라지는 것이 없는 주머니 속을 보며 입술을 악 물었다. 왈칵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른 분노에 내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마부석에 앉은 라이메데스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야! 당장 말머리 돌려! 이카루로 돌아가!" 내 큰 외침에 라이메데스가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뭐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 국경을 어떻게 통과했는데 도로 가자는……." "돌리라면 돌려!" 나는 다시 한 번 크게 소리쳤다. 이미 눈 앞에 뵈는 것이 없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이건 단순히 화가 나는 게 아니다. 분노다. 내가……. 내가 그 일을 얼마나 고생스럽게 했는지를 아는가? 하루에 몇 시간씩 아크로아라는 여자의 뚫어질듯한 시선을 받으면서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았던 내 기분이 아는가? 그 고생고생의 댓가가…… 고작 이까짓 돌멩이라고! 난 이빨을 부득부득 갈아대며 라이메데스에게 계속해서 말머리를 돌리라고 악을 바락바락 썼다. 하지만 라이메데스는 끝까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놈은 말머리를 돌리기는커녕, 말의 속도를 재촉해 나가고 있었다. 나는 더욱더 화가 나서 녀석을 향해 고함을 쳤다. "야! 돌아가잖……!" "칼, 잠깐만! 여기에! 여기에 편지가 있어." 그런데 내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갑자기 옆에서 카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편지라고? 나는 카민의 말이 들려오기가 무섭게 휙하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카민의 손에 들린 그 갈색의 주머니를 휙하고 낚아챘다. 나는 당장에 그 주머니를 마차 시트에 부었다. 투투툭, 하는 소리와 함께 돌멩이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자잔한 돌멩이 사이로 몇 번이고 꼬깃꼬깃하게 접어놓은 하얀색의 종이가 들어왔다. 나는 얼른 그 종이를 들어서 폈다. 그리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칼레들린님. 이 주머니를 열어 돌멩이를 발견하신 후 혹시 '당장 말 머리를 돌려서 그 여자 집으로 돌아갓!' 하고 외치시지는 않았는지요? 아마도 당신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 같은데, 제 짐작이 틀린 가요? 지금쯤 아마 굉장히 화가 나 계시겠죠? 하지만 너무 흥분하시지는 마시고, 제 편지를 끝까지 차분하게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평소 아크로아가 쓰던 말투가 그대로 녹아 있는 편지를 읽고 있자니 속이 한바탕 다시 한 번 더 뒤집혔다. 나는 그러나 억지로 억지로 눌러 참으며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나머지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화를 참느라고 힘이 들어간 양 주먹 때문에 종이가 꾸깃꾸깃해져 있다. 「당신들이 떠나실 때 제가 드린 물건은 모두 3개 였습니다. 이 갈색의 주머니와 커다란 자루 하나, 그리고 마차. 제가 드린 것들 중 하나인 자루에 있는 물건을 확인해보셨나요? 그 자루 안에 든 것은 바로 당신들을 모델로 그린 그림이입니다.」 뭐라고? 나는 아크로아의 편지에 적혀진 내용에 놀라서 얼른 마차 한켠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던 그 커다란 자루를 펴보았다. 그리고, 자루가 풀린 순간 나는 경직해야만 했다. 하얀 나루가 스르르, 내려감과 동시에 동물의 뼈로 깎아지른 커다란 액자의 틀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액자에 끼워져 있는 한 점의 그림도.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한 미소년이 모습이 그려진 그림. 그 것은 분명, 나를 그린 그림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 그림을 확인하고는 다시 한 번 이빨을 갈아댄 후 편지의 나머지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좀 치사한 방법인 것은 알지만, 본의 아니게 이런 방법을 선택하고 말았네요. 당신들에게 부탁드릴 것이 있어 그 그림을 당신들에게 맡깁니다. 제가 그린 두 분의 그림을 크레티아의 황실에 갖다 주세요. 어차피 당신들은 크레티아로 가는 길이라고 했으니, 황실에 들려 그림을 전해주는 일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요? 황실에 그 그림을 갖다드리면 분명 당신들에게 모델비를 충분히 지급할 거예요. 부디 이런 제게 너무 큰 화를 내시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아크로아 릴리스.」 "……." 나는 편지를 모두 읽은 후에도 그 편지를 내려 놓지 못하고 잠시 그 편지를 뚫어져라 보았다. 너무나 황당해서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내가 뚫어지게 그 편지를 보고 있자, 카민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뭐라고 적혀 있어?" 나는 아무 말 없이 편지를 옆으로 건넸고, 카민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곧, 그 편지를 모두 읽은 카민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 마차는 오늘도 달리고 있다. 이카루의 국경을 통과한 이후로 우리는 계속 달리고만 있었다. 정말로 지겨워 미칠 지경이다. 카민놈과 장난을 치는 것도, 라이메데스 놈에게 시비를 거는 것도, 에세렌을 괜히 한 대 치는 것도 이제 너무 많이해서 싫증이 난다. 마차 안에서 앉은 채로 멈춤 없이 계속 달리기만 한다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아악! 갑갑해! 너, 나랑 자리 바꿔!" 너무나도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나, 갑갑한 마차 안에서는 살 수 없는 한 떨기 고귀한 장미와도 같은 난 결국 라이메데스를 향해 고함을 질러 버리고 말았다. 갑갑한 마차에 앉아서 밥 타령을 해대는 카민을 계속해서 봐야하는데다가, 두 손을 모으고 여신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는 에세렌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는 마차 안보다는 차라리 마부석에 앉은 채로 말을 모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나는 라이메데스를 향해 과감히 자리 체인지를 요구했고, 라이메데스는 히죽 웃으며 승낙했다. 하지만, 마부석에 앉아 말을 몬지 10분만에 나는 다시 마차 안으로 굴러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나를 죽일 셈이야?" 카민은 그 말과 함께 그저 조용히 말을 달리게 했을 뿐인 죄 없는 나를 이유도 없이 마구 구타했고, 라이메데스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내가 한 번만 더 너에게 이 채찍을 잡게 한다면 블러드 아미에서 나간다.' 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나를 타박한 것은 에세렌이었다. 그는 나를 마부석에서 강제로 끌어내어 마차 안으로 던져 넣으면서 마차를 몰다가 사람을 심장마비로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당신일 거라며 버럭버럭 고함을 쳤다. 나는 그래서 결국 카민의 구타와 라이메데스의 중얼거림, 그리고 에세렌의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기나긴 설교를 들으며 다시 마차에 처박히는 수밖에 도리가 했다. "으우! 하지만 마차 안은 정말 재미가 없단 말이다!" 나는 투덜거렸다. 정말이었다. 내 평생에 이렇게 따분하고도 따분한 시간은 보내본 적이 없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라도 좀 색다르다면 적어도 지루하지는 않을텐데, 이 세이피안이라는 나라의 경관은 지루하다 못해 따분하며 따분하다못해 졸음이 오는, 그야말로 평범하고 평범하고 평범한 종류의 것이었다. 이카루가 숲이 많은 곳이었던 것에 비해, 이 세이피안은 끝도 없이 펼쳐진 평야를 갖고 있어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끝까지 달려도 황금빛의 곡식 밖에 보이지 않았다. 세이피안의 국민 대다수가 농민이라는 것도 에세렌이 굳이 설명해줄 필요가 없었다. 보이는 게 곡식 밖에 없는데, 그럼 여기서 농사를 짓지 고기를 잡겠냐? "빌어먹을, 정말로 따분한 나라로군……. 이 세이피인이라는 나라……." 나는 마차에 드러누우며 멍하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눈을 감는 순간, 나는 번개 같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어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잠깐만. 세이피안이라고?" 나는 하, 하고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왜 내가 여태까지 그걸 모르고 있었을까. 세이피안, 처음 들은 순간부터 왠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카리스에온 나이타에라 세이피안……." 나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이 나라, 온통 농사 짓는 놈들 밖에 없는 이 세이피안이라는 나라의 국명. 그것은 놀랍게도 서열 제 1위의 마족의 이름 중 하나와 같았다. 마계 서열 제 1위로 마왕의 직속 보좌관 중 하나이며 아이에드 놈보다 더 높은 서열의 최고위 마족(아이에드 정도의 강자를 뛰어넘을 정도면, 대체 이 마족은 얼마나 강한 걸까?), 로시엔의 '최고위 마족에 대한 이야기책' 에서 맨 처음 등장하는 영예를 누렸던 마계의 최강자(물론 마왕은 제외하고). 마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들 중 하나인 그 자의 이름은 카리스에온 나이타에라 세이피안 카미스 나이트 류 레비케리온 브러시안 쿄네마……. 헉헉헉, 하여튼 이런 식이다. 그의 본명이자 초명(初名)은 '카리스에온 나이타에라 세이피안'. 세이피안의 뜻은 마계어로 '잔인한 자'라고 한다. "나라 이름이 잔인한 자라……."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바람결을 따라 출렁이는 금빛 물결들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리 멀리까지 그 자락을 드리우고 있는 곳, 아름답고 따사로운 태양의 신의 축복을 한 몸에 받아 노랗게 영근 열매들이 나무의 가지마다 매달려 있는 곳. 돌아보기에 지겹도록 평온한 경관을 가진 이 나라의 이름이 그래, 마계 서열 제 1위의 마족인 그의 이름과 같은 세이피안이라고? 나는 문득 피식, 웃음이 나는 것을 느꼈다. 이건 꽤 재미있는 발견이었기에, 나는 라이메데스에게도 이야기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해서 녀석에게 전음을 건넸다. 「이봐, 라이메데스. 내가 방금 전에 굉장한 것을 발견했어. 이 나라 이름, 서열 제 1위 마족하고 같다!」 나는 내 말을 들은 라이메데스가 작은 실소 정도를 터뜨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그런 예상은 빗나갔다. 내 말의 다음 순간 들려온 라이메데스의 대답은 작은 실소가 베인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무덤한 기를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여긴 그 분이 세운 나라니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그 어조. 마치 평소의 카민이 밥 세 공기를 비운 후에 '아, 잘 먹었다. 그런데 배가 안 부르네. 한 그릇만 더 먹어도 되지?' 라고 묻는 것과 같이,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그 어투에 나는 잠시 멍하게 굳어버렸다. 더 이상 뭔가를 생각할 수도 없었다. 사고가 그대로 텅 비었다. -------------------------------------------------------------------------------- Back : 32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0 (written by 카르민) Next : 30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8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02173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3rd December 2001 11:46:19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1-12-2001 00:14 Line : 167 Read : 909 [32]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0 -------------------------------------------------------------------------------- -------------------------------------------------------------------------------- Ip address : 61.82.237.15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뭐, 뭐라고? 내가 방금 전에 뭐라고 들은 거지? "칼? 왜 그래?" 카민은 내가 갑자기 눈을 화등잔만하게 뜨고 입을 뻐끔거리자 조금 당황한 듯 내 팔을 툭치며 물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카민의 물음에 답할 정신이 남아 있지가 않았다. "너, 너……? 방금 뭐라고 지껄인 거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전음을 쓰는 것조차 잊어버린 나는 마부석과 이어진 창문을 통해 라이메데스를 향해 조그마한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라이메데스는 살짝 시선을 돌려 나를 보더니 씨익 웃으며 전음으로 답했다. 「나도 얼핏 듣기만 해서 잘 모르는데……. 600년쯤 전인가? 현 서열 1위인 카리스에온, 그 분은 당시 서열 2위로, '어떤 사건' 때문에 마왕님의 노여움을 사 잠시 인간계로 유폐되신 상태였다. 하지만, 말이 유폐지 그건 감금 같은 것은 전혀 아니었어. 마왕님은 단지 카리스에온을 마계로 돌아오지 못하게 했을 뿐, 그 이외의 제약은 하나도 달지 않으셨으니. 마계로 잠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 이외에는 카리스에온에게는 행동을 제한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 분은 인간계에서 짧게 유희를 즐기는 것처럼 행동했지.」 라이메데스는 그 말을 마친 후 피식, 하고 길게 웃었다. 「지금의 너처럼.」 나는 라이메데스가 의도적으로 말을 끊는 것 같아 마부석과 마차 사이에 난 조그마한 창틀 사이로 발을 집어넣어 녀석의 머리를 꾸욱, 눌렀다. 라이메데스는 자신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압박하는 내 발을 조용히 치운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음……. 보통의 마족 같으면 마계에 돌아가지 못한다는 형벌(잘은 모르지만, 이건 치욕적인 벌이라고 한다.)을 받았다면 광분해서 인간계 나라 하나 정도 엎는 건 기본이지만, 그 당시 그 분은 조금 괴짜였기 때문에 인간계에서 그런 '평범한' 일은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마족들은 단 한 번도 해본 적도, 생각한 적도 없는 이상한 일을 하나 하셨지. 내가 장담하는데, 아마 마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 일거다. 심심풀이로 대륙에 나라를 세우는 짓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그것도 마족이 말이야.」 "헉." 나도 모르게 입가에서 조그마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저, 정말 엽기적이군. 뭐라고? 마족 주제에 인간계로 내려와서 뭘 세워? 국가를 세운다는 것은 힘 뿐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인간들의 삶》에서 본적이 있다). 많은 인간들을 모아 자신의 카리스마 아래 복종 시켜야 하고, 정치제도인가 뭔가도 만들어야 하며,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더러운 짓거리도 좀 해야하고, 자기 밑에 사람들에게 적절히 사탕발림 작전과 채찍 작전을 번갈아 가며 사용해서 정국도 안정시켜야 한다. 그런데, 그런 짜증나도록 지겹고 인내심이 필요한 일을 성격 더러운 마족의 일원이 했다고? 그것도 현 서열 1위의 마족이? 자기 뜻대로 안되면 당장 마력 탄부터 날리는 게 일반적인 마족의 성격이잖아! 내 황당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이메데스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분은 꽤나 훌륭하게 인간들 사이에서 왕 노릇을 해내셨다고 하는군. 게다가 결혼까지 인간과 했어. 원래 마계의 불문율은 반마족을 발견하는 즉시 척살이지만……」 라이메데스는 말을 하다가 다시 끊었다. 나는 그런 녀석의 태도에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래, 나도 반마족이니 만큼 반마족을 발견하는 즉시 척살 어쩌고 하는 표현을 하기엔 좀 껄끄럽겠지? 나는 그러나 라이메데스의 허리를 다시 꾹 누르며 말을 재촉했다. 라이메데스는 그런 내 태도에 한참동안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래, 척살이지만 그 분은 자신이 유폐되었던 그 상황에서는 마계의 법을 따를 필요가 없었다고 바락바락 우기셨고, 마왕님은 왜인지 모르지만 그 때만큼 이 번 한 번만, 이라는 말과 함께 넘어가 주셨다고 하지. 그렇게 따지고 보면 세이피안의 황실은 전부 옅으나마 마족의 혈통을 지닌 것이 되는 셈이다. 마족의 피가 점점 엷어져서 인간과 동화되고 있긴 하겠지만……. 세이피안의 2대 황제는 확실한 반마족이었지.」 라이메데스는 더 이상 해줄 말이 없는 듯, 다시 말고삐를 잡고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라이메데스가 한 그 말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로시엔이 가끔씩 읽어줬던 그 책에 따르면, 서열 제 1위의 마족은 결코 그런 황당한 짓(인간계에 내려와서 왕 노릇을 한데다가 인간과 결혼까지 해 애를 낳다니!)을 할 마족이 아니었다. 「아, 서열 1위의 마족이요? 아주아주 섬세한 성격으로 평소엔 무척이나 과묵하고 또한 고상한 분이십니다. 따끔한 일침을 놓기로도 유명한 마족이지요. 하지만 그에 반해 한 번 화가나면 마왕님조차 눈에 두지 않는 타입이기도 합니다. 저와는 그다지 돈독한 관계가 아니지만, 많은 마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계신 분으로, 마왕님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계시는 분이지요.」 로시엔이 해준 서열 제 1위 마족 카리스에온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런데 그 '섬세하고 과묵하고 고상한 마족' 이 뭐가 어쩌고 어쨌다고? 심심풀이로 인간의 나라를 세워? "……로시엔의 이야기는 전부 거짓말이다. 나 같이 순진한 소년에게 어릴 때 그런 엉터리 책을 읽어줘 말도 안되는 환상을 품게 만들다니……. 젠장할, 내가 세이아나 얘기 때부터 알아봤다……."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라이메데스가 킥킥, 하고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도로 자리에 앉아서 다시 로시엔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소년의 순진무구함을 이용해서 있지도 않은 사실을 진실처럼 믿게 만들다니! * * * * * * * * * "이봐, 에세렌." "에…… 예?" 졸고 있었던 모양인지, 에세렌은 내 호명에 꽤 늦게 대답을 해왔다. 나는 몽롱한 눈으로 나를 보는 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 상태로 간다면 크레티아에는 언제쯤 도착하지?" 내 질문에 에세렌은 스읍, 하는 소리와 함께 입가에 흘러내린 침을 오른손으로 닦고(그런 건 손수건으로 좀 닦아, 임마!)눈곱이 잔뜩 끼인 눈을 슥슥 왼손으로 부비며 대답했다. "아함∼. 이 상태면 아무래도 2주일 남짓이 걸릴 듯 싶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2, 2주일? 이렇게 지겨운 마차일을 2주일이나 타고 가야 한다고? 싫다! 그건 절대로 싫어! "뭐, 뭐가 그렇게 오래 걸려?" 나는 에세렌의 답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에세렌은 찢어지게 하품을 하면서(입이나 좀 가리고 해라! 입 냄새가 여기까지 나잖아!)뒤통수를 슬슬 긁었다. "으아암∼. 그게, 세이피안은 길이 좀 구불구불하게 나 있어서 한참을 돌아가야 하거든요. 에……. 글세요. 물론 배를 타고 가면 좀 더 빨리 가긴 가겠지만……." "배를 탄다고?" 나는 에세렌의 한 말을 살짝 고개를 들었다. 여태까지 살아온 시간동안 단 한 번도 배라는 것은 본 적이 없었지만, 《인간들의 삶》제 28장(맞나? 이젠 몇 장이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는군. 그래, 이게 내 기억의 한계다.)'교통 수단' 란에 보면 배에 관해 상당히 자세하게 기술한 부분이 있었다. 나는 그 설명을 읽으면서 배라는 것에 호기심을 품었었다. '마법이나 다른 장치 없이, 물에 둥둥 떠서 앞으로 나가는 집 같이 생긴 것을 배라고 한다. 마계에는 없는 짙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는 배 위에서 주변을 내려다보면 온통 파란 물만 보여 신기한 느낌이 들 것이다.' 인간들의 삶에 나왔던 설명을 떠올리며, 나는 에세렌을 올려다보았다. "그거 타면 얼마나 시간이 단축되는데?" 에세렌은 이번에는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대답했다. "한 5일 정도?" "그럼 배를 타지." 나는 간단하게 말해버렸다. 하지만 내 그런 말에 찬동할 수 없는 듯, 여태껏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카민이 말했다. "그건 곤란해, 칼. 세이피안은 선박비가 매우 비싼 곳이라구." 나는 인상을 그으며 카민을 노려 보았다. "그래서? 배 값 아낀다고 몇 일 동안 이 지긋지긋한 마차에 들러붙어 있으라고?" ********************** 일단 배를 타기로 결정한 우리들은(반대하는 카민놈을 조용해질 때까지 때리고) 길을 살짝 변경해 세이피안 최대의 항구도시라는 미네아로 달리기 시작했다. 3시간을 꼬박 달리자, 사방에 펼쳐져 있던 그 황금 물결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곧 뭔가 짠 냄새와 함께 코끝에서 진득한 내음이 일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내려다보았다가 나도 모르게 커다란 감탄사를 내질러야만 했다. "우오오오!" 생전 처음 보는 커다란 그 배라는 것과, 청명한 바다를 보며 나는 완전히 감동에 젖어 버렸다. 푸르름 속으로 휘어드는 구름 떼와 술사의 비약이라는 느낌마저 들게 만드는 몽롱한 하늘을 배경으로,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망망대해를 보고 있노라니 절로 숨이 막혀 왔다. 인간계에 이렇게나 아름다운 장소가 있었다니! 아아! 난 아무래도 이 바다라는 것을 사랑하게 될 것 같다. 나는 한참동안 바다의 짠 내음을 들이키며 감동에 젖어 있었다. 나의 그 순수하고도 깨끗한 감성을 박살낸 것은 카민의 자그마한 한마디였다. 카민은 마차에서 내려 배표를 끊으러 가는 과정에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돈이 떨어진 것 같은데요." 난 그의 말에 당황해서 하늘을 향해 있던 시선을 멈칫, 하고 굳혀버렸다. 나는 천천히 인상을 쓰며 카민을 돌아보았다. "뭐……. 라고?" 에세렌과 라이메데스 역시 카민이 갑작스럽게 한 그 말 한마디에 당황한 듯, 눈을 부릅뜨고 녀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민은 우리 모두의 든든한 돈줄이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카민은 우리 모두의 든든한 돈줄이 되어 주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카민의 돈이 떨어졌다는 것은 즉, 우리가 완전히 알거지가 됐다는 너무나 기쁘고 행복한 말과 동일한 뜻을 가진 말이었다. 우리들은 모두 싸하게 굳어져 한참동안 카민을 뚫어져라 보았다. "어째서 갑자기……. 돈이 떨어졌단 거죠?" 에세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어조로 추궁하자, 카민이 다시 한 번 깊게 고개를 숙였다. "국경을 통과하면서 일단 30골드라는 거금을 쓴데다가……. 그 동안 우리가 먹은 밥값이 좀 작았어요? 사실은 갑자기가 아니예요. ……하지만 저도 오늘 돈이 딱 떨어져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그건 그랬다. 우리 일행이 좀 많이 먹는 일행이었던가? 그나마 먹는 분야에서는 조금 점잖은 라이메데스(오로지 먹는 것에 한해서 만이다.)를 제외한 두 명, 즉 카민과 에세렌은 먹을 것에 관한 집념만큼은 세상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굉장한 녀석들이 아니었던가. 나? 나는 물론 아니지. 내가 먹어봤자 얼마나 먹는 다고. 이 쭉 빠진 몸매를 유지하는데는 새 모이만큼의 밥만 있으면 된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난 이제 더 이상 마차 따윈 타고 싶지 않다!" 나는 카민을 흔들며 소리쳤다. 그러자 카민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그치만 돈이 없는걸. 팬티 안까지도 샅샅이 뒤져봤지만(대, 대체 그런데는 왜 뒤지는 건데?)1실버도 없어. 배 같은 건 못 타. 당장 오늘 점심부터 굶어야 할 걸?" 우리 모두는 싸한 표정이 되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늘 점심을 굶어야 한다는 말에 에세렌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고, 배를 못 탄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건 나였다. 라이메데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비실비실 웃고 있었다. "팔자." "뭐?" 카민은 내 갑작스러운 말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손을 뻗어, 저 멀리 있는 아크로아의 마차를 가리키며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저거 팔자." -------------------------- 이 16장...인가? 우리는 세이피안으로 간다.. 이 장... 정말... 너무 재미가 없다는-_-;;; -------------------------------------------------------------------------------- Back : 33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1 (written by 카르민) Next : 31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89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02173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3rd December 2001 11:46:23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1-12-2001 00:15 Line : 212 Read : 919 [33]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1 -------------------------------------------------------------------------------- -------------------------------------------------------------------------------- Ip address : 61.82.237.15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 * * * * * * * * * * * "10골드." 기름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돼지는 말했다. 아크로아의 마차를 팔아 배표를 사기로 결정을 내린 우리는 선박장에서 가장 가까운 마차 가게에 들른 터였다. 돈을 벌어서 배만 채웠는지, 볼 거라곤 남산만한 배 밖에 없는 늙은 마차 가게 주인은 우리가 가져간 마차를 휘적휘적 한 번 훑어본 후, 귀찮다는 듯 가격을 불렀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주인이 10골드라고 외치기가 무섭게, 에세렌이 발끈한 어조로 소리를 쳤다. 에세렌은 눈을 부릅뜬 채로 마차 가게 주인을 한참 노려보다가 말했다. "저 마차는 우리 아버지가 정성을 다해 만드신 최고급 중의 최고급입니다! 적어도 20골드는 받아야 되요!" 저 마차를 너희 아버지가 만들었다고? 그래? 그랬니? 내가 알기로는 아크로아가 준 것 같은데. "허? 20골드? 이거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코웃음이라도 치지." 주인은 어이가 없다는 어조로 말하곤 에세렌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에세렌은 주인이 앉아있는 책상을 쾅, 하고 내리치며 살벌한 어조로 말했다. "저 마차가 얼마나 좋은 마차인데 함부로 말하는 겁니까?" "좋은 마차라고? 크기만 클 뿐이지 멋대가리라곤 없고, 아무것도 아닌 저 마차 어디가 좋은 마차라는 거지?" 주인의 비웃음 가득한 그 말에도 에세렌은 굴하지 않고 말했다. "승차감이 끝내주죠!" 주인은 다시 한 번 비웃었다. 그는 훗, 하는 웃음과 함께 디글디글 거리는 눈으로 앞에 있는 마차를 훑어보곤 말했다. "웃기고 있군. 뭐라고 해도 안 속아." 그러자 에세렌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어디 한 번 마차에 한 번 타보시죠. 승차감이 정말로 좋으면, 20골드에 사는 겁니다?" 에세렌의 말에 주인은 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저 마차의 승차감이 좋을 리 없다고 판단했는지 가게 밖으로 휘적휘적 나와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에세렌은 라이메데스에게 말을 몰아달라고 했고, 라이메데스는 마차를 움직였다. 위잉위잉. 정말로 미세한 마기, 신관인 에세렌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그것이 움직인다. 마를 품었으되 품지 않은 것처럼 엷은 무엇인가가 라이메데스의 손에서 빠져 나와 땅을 한 번 훑었다. 마차 바퀴가 굴러갈 곳만 골라서 마기를 적절히 보내 땅을 잘 골라둠으로서 마차가 지나갈 때 흔들거림을 전혀 느낄 수 없도록 만드는 라이메데스의 솜씨는 일품이었다. 마차는 말이 몇 걸음 뛴 후에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가게 주인은 놀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한참동안이나 마차를 훑어보았다. 그는 커다랗게 눈을 뜬 채로 말했다. "어, 어째서 이런 고물이? 마차에 타고 있다는 느낌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가게 주인이 눈을 부릅뜨고 한 말에, 에세렌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승차감 좋지요?... 흐흐흐... 20골드예." 제 18장: 선상(船上)의 레이디 에세렌의 철저한 '값 늘려 받기 작전' 으로 원래라면 10골드에 겨우 팔았을 그 마차를 무려 20골드에 팔아치운 우리들은(저 녀석은 역시 신관이 아니야.)가벼운 발 걸음으로 배 표를 끊어 승선할 수가 있었다. 우리가 타게 된 배는 '케이나 호' 였는데, 크레티아의 수도인 프린체의 이노미아 항구로 곧장 가는 배라고 해서, 우리는 두 말 없이 그 배를 예약했다. 케이나 호의 승선은 늦은 오후에 이루어졌다. 케이나 호는 으리으리한 규모를 자랑하는 굉장히 커다란 배로, 이 배에 승선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은 300명이나 된다고 했다. 푸른빛의, 바다의 그것과 닮은 배의 빛깔을 보고 있던 나는 환호를 피어 올렸다. 수많은 탑승객들과 더불어, 우리는 케이나 호에 승선했다. * * * * * * * * * * * 흔들리는 배 위에서, 나는 여유롭게 바다의 경치를 즐기며 놀았다……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상황은 전혀 여유롭지도, 즐겁지도 못했다. "욱." 나는 입가에서 가느다랗게 뻗어 나온 나 자신의 작은 신음소리를 감지함과 동시에, 재빨리 등을 구부렸다. 그러나, 속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엄청난 구토감을 참기 위해 허리를 구부린 보람도 없이, 나는 다음 순간 추한 모습을 또 한 번 연출해야만 했다. "우욱! 우웩! 우웨엑!"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더러운 이물질들을 바다로 쏟아보내며, 나는 계속해서 속을 게워내고 있었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 없는 이 구토감은 나라는 인물의 한계 상황을 시험하고 있다. "……괜찮아?" 카민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배 갑판에 기댄 채로 속을 게우는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돌려 녀석의 얼굴을 마주한 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돌 지경이다. 이게 대체 몇 일 째지? 항구에서 케이나 호를 탄지 정확히 3분만의 일이었을 것이다. 휘황찬란한 배 위, 물 위를 떠다니는 이 이상한 집 위에서 어린애 마냥 순수하게 기뻐했던 나는(원래 순수한 영혼을 가진 이들은 어린애 같은 거다!)그러나, 3분이 지났을 때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곤 인상을 찌푸려야만 했다. 갑작스럽게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어지러워지며 배속이 그르럭 대는 현상이 바로 그 것이었는데, 마치 예전에 술을 먹었던 때의 느낌과 비슷해서 나는 매우 불쾌해졌다. 라이메데스의 말로는 나의 그런 증상이 그 이름도 치욕스러운 '멀미' 라는 것이라고 단정지어 말했다. 녀석은 덧붙이기를, 원래 생전 처음 배를 타는 촌스러운 녀석들은(그럼 지금 내가 촌스럽다는 거냐!) 다들 이런 것을 한 번쯤 경험해보기 마련이니 꾹 참고 견디면 잠시 후에는 괜찮아 질 거라고 했다. 하지만, 라이메데스의 그 말은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이 배에 탄지 오늘로서 5일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도 속을 게워내고 있었던 거다. "우. 젠장할……. 으욱……." 그 기나긴 시간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계속 속만 게워난 탓에, 내 잘난 얼굴은 너무나도 수척해져 있었다. 나는 매일 아침 힘 없이 일어나 내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며 우울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저, 칼레들린님. 제가 수면 주문을 걸어 드릴 테니 주무시는 게 어떨까요?" 내 오른쪽에서 에세렌은 걱정이 어린 어조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신관의 주문이라면 그것이 수면이든 공격이든 축복이든 다 싫다. "우욱……!" 다시 한 번 발동된 구토감에 내가 막 고개를 숙이던 그 때였다. "자자, 식사시간입니다!" 배 꼭대기에서 선원하나가 큰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것은. 붉은 두건을 꾹 눌러 뒤집어 쓴 선원이 커다란 목소리로 승객들을 향해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제일 먼저 선실내의 식당으로 조르르 달려간 것은 두 말할 것도 나의 일행인 그들, 에세렌과 카민이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괜찮냐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댔던 카민과 에세렌은 '식사시간'이라는 말에 정말 무섭게 반응했다. 바다를 향해 다시 내 안에 담겨져 있던 추한 것들을 토악질 하고 있던 나는 멀어져 가는 그 두 녀석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남이 구토감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단지 밥이라는 한마디 때문에 친구의 정이고 뭐고 다 버리고 가버리는 놈들의 뒷모습은 정말로 괘씸했다. 누구는 배멀민가 뭔가 하는 것 때문에 탈진하기 일보 직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을 것을 위해 친구를 처참하게 내던지는 저 인간들……! 내, 배에서 내리자마자 처절한 응징을……. "우욱!" 나는 다시금 치민 구토감에 고개를 숙였다. 부글부글 끓는 속이 안에서 소용돌이를 만든다. 내가 한참동안이나 배 갑판에 손을 댄 채로 속을 게워내자, 보다못한 레이네가 말을 걸어왔다. 「괜찮으세요?」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젠장……. 안 괜찮아……. 속이…….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아…… 우욱……." 레이네는 가볍게 혀를 찼다. 그녀는 내게 오른편으로 누워보라느니, 왼편으로 누워보라느니,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한 번 마셔보라느니 하면서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기를 권했다. 그렇게 하면 고통이 좀 덜할 거라나? 하지만, 레이네가 시키는 행동을 모두 따라해도(레이네가 말한 동작 중에는 물구나무를 선 채로 발가닥을 이용해 허리 긁기라는 말도 안 되는 자세가 있어서 나를 황당하게 했다.)깨질 듯한 내 머리의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고, 울컹거리는 속은 진정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비틀비틀 배 난간에 기대섰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휘익! 어디선가 가벼운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갑자기 들려온 그 바람소리에 눈을 살짝 떴다. 하지만 볼 끝에는 바람이 일고 있지 않았다. 밑을 내려다보니, 내가 걸친 검은색의 경장 윗옷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윗옷이 바람에 휘날리고 이 두 귀로 바람소리를 들었는데, 정작 볼 끝에 느껴지는 바람은 없었다는 말인가? 다시 말하자면, 바람은 불지 않았는데 내 뒤에서만 바람소리가 났다는 말이 된다. 음? 그게 가능한 건가? 나는 멀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때였다. 「끄악! 칼레들린님!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절 이대로 도둑맞을 셈이예요?」 갑자기 들려온 레이네의 발악하는 듯한 그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참 동안 사방을 살피던 나는 어느 순간, 문득 느꼈다. 내 허리춤이. 너무나. 썰렁하다는 것을. "……뭐, 뭐야?" 「멍청한 칼레들린님! 누군가가 방금 전에 켐 알슈타드를 채 갔다구요! 검을 소매치기 당하다니! 바보!」 레이네의 울먹거림이 섞인 목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방금 전 내 윗옷 정장을 휘날렸던 것의 정체가 바람이 아니라 내 검을 훔친 놈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당황함에 이번에는 주변을 크게 휙휙 돌아보았다. 그러나, 갑판에는 사람이 워낙 바글바글 대고 있어서 대체 누가 내 검을 훔쳐 갔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두 손으로 나팔을 만들고는 사방을 향해 소리쳤다. "레이네에에에엣―! 어디냐아아아앗!" 사람들이 잠시 이상한 사람 바라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그 쪽팔림에 대한 대가로 나는 레이네의 빠른 대답을 들을 수가 있었다. 「칼레들린님 쪽에서 동쪽으로 30도 방향! 거기 뛰고 있는 붉은 망토! 그 놈이예요옷!」 나는 레이네의 말을 따라 얼른 동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돌리자마자, 시력 좋은 내 눈은 뛰고 있는 붉은 색의 망토를 포착해냈다. 내 시선이 조금 더 정밀하게 움직였다. 시야가 확하고 밝아짐과 동시에, 나는 붉은 망토를 입은 놈의 오른손에서 반짝이는 거대한 은색의 잔광을 볼 수가 있었다. "크오오오오오!" 나는 붉은 망토가 들고 있는 그 은색의 검을 본 순간 이성이 그대로 날아감을 느꼈다. 그건 틀림없는 나의 검이었다. 저, 저 빌어먹을 놈의 자식이! 그 검이 어떤 검인 줄이나 알고 가, 감히 저걸 슬쩍한단 말이냐! 남이 아파서 헉헉대고 있는데, 치사하게 그 틈을 노려서 검을 훔쳐? 누군지는 모르지만 걸리기만 하면 넌 죽었어! 나는 결심과 동시에 내 검을 들고 도망가는 붉은 망토를 향해 빠른 속도로 뛰었다. 휭휭, 하는 바람 스치는 소리와 함께 내 앞을 막아서는 사람들을 밀치면서 나는 달려나갔다. "꺄악! 뭐예요?" "꺄악!" 중간 중간에 나와 부딪힌 녀석들이 고함을 쳐댔지만 그런 것쯤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나는 사람들을 세게 밀치면서 붉은 망토를 향해 뛰고, 뛰고 또 뛰었다. 내가 계속해서 녀석의 뒤를 따라 무서운 속도로 달리자, 처음에는 그저 불쾌감의 시선만을 내비쳤던 사람들의 불평어린 목소리도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뭐야! 배에서는 달리지마!" 하지만 그 말도 무시하면서 나는 달렸다. 저 검을 내가 어떻게 사수한 검인데! 저런 시뻘건 망토를 가진 놈한테 빼앗긴단 말인가! "내에에 거어어어어어어엄 내놔아아아앗!" 나는 달리면서 소리를 쳤다. 놈은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움찔했다. 하지만 녀석이 내 눈을 보고 굳어서 그 자리에 멈춰서주길 발한 나의 염원과는 달리, 녀석은 굳기는커녕 위기감을 느낀 듯, 갑자기 더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놈이 어찌나 빨리 뛰는지, 순간적으로 녀석을 사람들의 틈 사이로 놓쳐버릴 뻔 했다. 하지만 이 내가 누구냐! 나는 의지의 칼레들린! 내 꼭 오늘 너를 잡아 지옥이 뭔지 보여주고야 말겠다! "헉헉……." 붉은 망토를 걸친 도둑놈은 한참을 뛰다가 뭔가를 결심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배의 모퉁이를 돌아, 선실로 통하는 계단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다닷, 하는 마찰음이 귓가에 들려왔다.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놈의 속셈은 뻔했다. 갑판 위에서 달리다간 아무래도 눈에 띄기 쉬우니, 비어있는 선실 중 아무 곳에나 들어갈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들어간 선실에서 옷만 갈아입는다면, 그것으로 게임 오버. 내가 본 것은 놈이 입고 있던 붉은 망토 자락뿐이니, 저 놈이 옷을 갈아입는다면 나는 놈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쿡쿡,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보통 사람이고 녀석이 훔친 것이 보통 검일 때의 이야기지. 나는 입가에 기다란 미소를 걸었다. "……넌 이제 독 안에 든 쥐다." -------------------------------------------------------------------------------- Back : 3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2 (written by 카르민) Next : 32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0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02173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3rd December 2001 11:46:28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1-12-2001 00:15 Line : 129 Read : 1115 [34]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2 -------------------------------------------------------------------------------- -------------------------------------------------------------------------------- Ip address : 61.82.237.15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녀석에겐 불행한 일이지만, 녀석을 뒤쫓는 건 보통 사람이 아니라 마족이었고, 녀석이 훔친 것도 보통 검이 아니라 '수다스럽게 말을 해대는 노란 보석이 박힌 검'이었다. 나는 녀석이 뛰어든 선실 쪽으로 힘차게 따라 뛰어 내려갔다. 발 밑에서 탁탁, 소리를 내며 나무와 신발이 마찰하는 소리가 길게 울렸다. 나는 선실 복도에 도착하자마자 크게 외쳤다. "레이네엣! 어디냐아아!" 내 고함 소리에 대한 반응은 무섭도록 빨리 왔다. 내가 소리를 외치기가 무섭게, 선실 문이 하나 벌컥 열리더니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버럭 소리를 쳤던 것이다. "할 일 없으면 닥치고 잠이나 처 자!"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선실의 문이 열렸다. "시끄러워! 여기가 당신 안 방이야? 조용히 좀 하란 말이예요!" 선실 문이 하나둘씩 버럭버럭 열린 사이로 얼굴을 삐죽 내민 승객들은 고함을 지른 나를 향해 험상궂은 얼굴을 있는대로 찌푸린 채 한마디씩 뱉어냈다. 쩝, 내가 바라는 반응은 이런 게 아니었단 말이다. 「칼레들린님! 왼쪽 복도 일곱 번 째!」 다행히도, 사람들의 야유 비슷한 반응이 그쳤을 때, 레이네의 조용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 펴졌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선실을 좍하고 훑었다. 왼쪽, 왼쪽……. 그러니까 밥먹는 손 반대쪽. 좋아, 여기로군. 나는 왼쪽의 복도로 간 다음, 방의 개수를 계단 쪽에서부터 천천히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정확히 일곱까지 센 나는 입술을 위로 치켜올리며 그 문을 확 하고 열어 젖혔다. "꺄아아아아악!" 그런데 문을 염과 동시에, 나는 경직해야만 했다. 내가 연 것은 분명 왼쪽 일곱 번째 문임에 틀림없는데, 그 안에 있는 것은 내가 찾던 그 붉은 망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얼른 문을 쾅, 하고 닫았다. 당황함 때문에 땀이 볼을 타고 흘렀다. 제, 젠장! 방금 전 내가 열었던 그 선실에는 다른 게 아니라 15살 가량의 자그마한 소녀가 옷을 갈아입는 모습이 있었다. 하얀 살결을 완전히 내보인 채로 옷을 갈아입는 소녀가. 으악, 나……. 완전히 변태가 되 버렸잖아! 나는 내게 잘못된 정보를 건넨 레이네를 추궁할 셈으로 녀석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저를 채 부르기도 전에, 레이네의 커다란 목소리가 귓가에서 다시 한 번 메아리쳤다. 「칼레들린님! 뭐하시는 거예요」 뭐? 「문을 열었으면 들어오셔야 지요! 그냥 가버리면 어떡해요!」 엑?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 그럼……? 그렇다면?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까 전 내가 열었던 그 선실 앞으로 다가갔다. 방금 전에 보았던 그 광경이 머릿속에 떠올라서 선실을 여는 데 까지는 꽤나 큰 용기가 필요했다. 내가 주저주저하면서 그 선실 문을 빼곡이 여는데,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선실 안에서 소녀가 고함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 이제 옷은 입고 있는 채였지만, 내가 문을 열자 안에 있던 소녀는 마치 변태 색마 취급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인상을 우그러뜨리며 그런 그녀를 한참동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뭐, 뭐예요? 다, 당장 나가주세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소녀는 꽤나 앳된 티가 묻어 나오는 동글동글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아름답다고 말할만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곱슬곱슬한 물빛의 머리카락과 커다란 사파이어빛 눈동자, 그리고 적당히 탄 갈색의 얼굴은 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통통한 뺨을 가진 이 소녀를 꽤나 귀엽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 간단한 여행자 복을 입고 있는 소녀는 나를 보며 겁에 질린 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서, 선원을 부르겠어요!" 그 때, 레이네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내 속으로 들려왔고, 레이네가 내게 건넨 말에 나는 피식 하고 웃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게 버럭 고함을 치는 소녀를 향해 일부러 입꼬리를 길게 하며 웃어 보였다. 내 웃음이 의외였는지, 두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고 있던 소녀가 멈칫했다. 나는 한발자국 더 소녀 쪽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소녀가 몸을 움찔하고 굳히는 것이 보인다. "서, 선원을 부르겠다구요!" 나는 소녀가 다시 한 번 외치는 그 소리에 묵묵히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래? 어디 한 번 불러보시지?" "뭐, 뭐라구요?" 내가 이런 식으로 나갈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는지,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말을 더듬었다. 나는 더더욱 환하게(꽃미소년의 이 환한 웃음은 때로는 죄악에 가깝지!) 웃으며 소녀에게 한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다. "선원이 온다면 네가 왜 내 검을 갖고 있는 건지 잘 가르쳐 줄 거야. 안 그래? 파랑머리 꼬마." 소녀가 발끈하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뭐라고 하려 했을 때, 나는 선실 오른 켠에 붙어있는 갈색의 벽장으로 재빠르게 달려가 그것을 휙 하고 열어 젖혔다. 역시나, 그 벽장 안에는 내가 찾는 그것이 있었다. 나는 생긋 웃으며 그 것, 내 은빛의 검 켐 알슈타드를 들어 보였다. "자아, 이 검은 아마 내 검인 것 같은데 말이야?" 내 말에 소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켜 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선실에서 뛰쳐나가고 싶어했던 것 같지만, 그녀는 자신의 의지대로 선실 바깥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내가 소녀의 움직임보다 훨씬 빠르게 그녀의 손을 낚아챘기 때문이다. 「히이잉! 무서웠쪄요, 칼레들린님.」 내 오른손에 들린 레이네가 나를 향해 훌쩍이는 목소리, 닭살 돋는 어조로 혀를 꼬아가며 말했다. "……." 나는 보석을 때릴 손이 마땅치 않아서(왼손으로는 소녀의 손을 움켜쥐고 오른손으로는 검을 쥐고 있었으니)대신 이마로 그 보석을 한 대 박았다. 레이네는 꼴딱, 하는 이상한 음 뒤로는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다. 내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 레이네를 허리춤으로 돌려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이거 놔, 이 자식아!" 내게 손목을 잡힌 소녀가 갑자기 그렇게 외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거친 외침에 잠시 어이가 없어져 눈을 둥그렇게 뜨는 수밖에 없었다. 내게 손이 잡힌 물빛 머리칼의 소녀는 잔뜩 화가 난 눈으로 기막힘에 입을 벌리는 나를 향해 숨을 식식 몰아 내쉬며 말했다. "이 손, 놓으라고 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가 있지. 이거야 원 기가 막혀서 말도 안나오는군. 나는 시끄럽게 구는 소녀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한 대 쳐서 기절이라도 시킬 셈으로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막상 소녀의 배를 치려는 순간 난 멈칫하고 말았다. 카민을 비롯한 기타 등등의 남자라면 몰라도, 이렇게 여리여리한 소녀의 복부에 주먹을 찔러 넣어 기절을 시킨다는 것은 남자로서 좀 걸리는 일이었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쉰 후 주먹 대신 가볍게 손가락을 말았다. 그리고 그것을 소녀의 이마로 가져가며 낮게 중얼거렸다. "슬립." 주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가 건 주문이 슬립마법이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소녀가 냅다 고함을 치며 몸을 비비꼬았다. "지금 뭐하는 거야! 이거 슬립 마……. 당장 날 풀어…… 음냐……." 하지만 수면 마법의 효과는 그야말로 최고. 내 팔에 매달려 있던 그 소녀는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내 품에서 간단하게 곯아 떨어져 버렸다. 나는 내 팔 안에서 축하고 늘어지는 소녀를 들어 어깨춤에 둘러맸다. 네가 내 검을 훔치려 했다, 이거지? 너 오늘 나한테 죽었다. 「그런데, 칼레들린님.」 내가 흐흐흐, 하는 소리를 내면서 선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레이네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나는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쥐 죽은 듯 조용했던 레이네가 갑자기 말을 걸자 조금 의아해진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왜?" 「...멀미 안 하세요?」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 글쎄? 그, 그러고 보니 왜... 안 하지?" -------------------------------------------------------------------------------- Back : 3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3 (written by 카르민) Next : 33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1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02173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3rd December 2001 11:46:31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2-12-2001 09:37 Line : 283 Read : 730 [35]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3 -------------------------------------------------------------------------------- -------------------------------------------------------------------------------- Ip address : 211.220.164.6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헤에? 그게 뭐야, 칼?" 내가 소녀를 어깨춤에 둘러메고 선실에 들어갔을 때, 녀석들은 식사를 끝마치고 후식으로 케잌을 먹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내가 구토의 고통과 배고픔의 절망이라는 이중고에 부들부들 떨 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음식을 꾸역꾸역 배속에 처넣은 이 인간들을 말없이 한참동안 노려봐 준 후 내 왼팔에 달랑달랑 매달려 온 그 소녀를 휙하고 멀리 집어던졌다. 소녀는 공중을 날아 내 침대에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정확히 떨어졌다. "여자애잖아?" 카민은 크림이 잔뜩 묻은 얼굴로 놀란 음을 내보이며 눈을 반짝였다. 우리가 이 배에서 얻은 선실은 넓은 것으로 하나였기에, 녀석들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래, 나 놔두고 먹으니 맛있더냐? "누구지?" 라이메데스조차 그 소녀의 정체가 궁금했는지, 호기심을 표시해왔다. 나는 내 검을 툭툭 건들며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걸 훔치려고 했어." "에?" 카민은 놀란 듯 외치고는 침대에 누워있는 소녀를 보았다. 내 슬립 마법의 효과로, 소녀는 아직 색색거리며 곯아떨어져 있었다. 파란색 머리칼을 가진 그 소녀를 한참보고 있던 카민이 머리를 문질렀다. "네 검을 훔쳤다라……. 이 애가? ……흐음, 그래서 어쩔 셈인데?" "어쩌긴 뭘 어째. 이대로 데려다가 크레티아 치안대에 넘겨버릴 거다!" 내 말에 카민은 동정의 눈길로 소녀를 보았다. "그건 좀 그렇지 않아? 아직 어린데 말이야." 그런데 카민이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소녀가 발악하듯 고함을 친 것은. "나 어리지 않아!" 소녀가 갑자기 내지른 그 커다란 고함소리에, 우리들 사이에 잠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잠시 입을 살짝 벌리고 침대에 누워 있는 그 소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혹시 깨어 있었던가, 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 그럼 그 말은 잠꼬대였다는 말이 되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나 절묘하게 잠꼬대를 할 수가 있지? "하, 하하핫." 라이메데스가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런데 라이메데스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 그 순간 , 이번에는 소녀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엉엉…… 나 지금 당장이라도 시집갈 수 있단 말이예요……. 나 어리지 않아요…… 엉엉엉……. 우흑, 키세온님…… 으흑흑……." 두 눈을 꾹 감은 채로 흐느끼는 그 소녀를 보고 있는 우리들 사이로 깊고 깊은 침묵이 계곡이 되어 흘러내렸다. 우리들이 한참 멍한 표정으로 소녀를 보는데, 소녀가 몸을 뒤척이며 다시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소녀는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건지, 듣기만 해도 참 황당한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으엉……." 나는 울먹이는 소녀의 소리에 어이가 없어졌다. 뒤척거리는 소녀를 보고 있던 카민이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확실히 저 애가 네 검을 훔친 게 맞아?" "……그럼 내가 괜히 길가는 애 붙잡아서 왔겠냐?" 나는 불쾌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에세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칼님, 검 같은 걸 훔치기엔 역시 너무 여려 보이는 아이인걸요?" ◇ ◇ ◇ "여긴……. 어디?" "어디긴 어디겠어." 나는 멍한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나 주위를 돌아보는 그 파랑머리 계집애에게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파랑머리 소녀는 순간적으로 내가 누구인지 생각나지 않은 듯,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다가 어느 순간이 되어서야 내가 누구인지 깨달은 듯, 입을 살짝 벌리고 나를 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에 쌍심지를 세운다. "무, 무례한 것!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이런 실례를 범한단 말이냐! 나, 나를 당장 내보내라!" 나는 갑자기 나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치는 그 소녀를 보며 어이가 없어졌다. "남의 물건 도둑질한 주제에 뭐라는 거야?" 나는 그 말과 함께 내 허리춤에 걸린 검을 툭툭하고 처 보였다. 순간, 꼬마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하지만 얼굴이 붉어진 것은 잠시의 일이고, 소녀는 언제 그랬냐는양 고개를 번쩍 들며 소리쳤다. "그, 그건…… 자, 잠시 보고 돌려 줄 생각이었다!" 훗, 그러시겠지. 왜 안 그러시겠어? 나는 믿지 않는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어 보였다. 그러자 소녀가 발끈한 듯 소리쳤다. "당신, 무례하다!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건가! 나는 그 검을 옛날 도서에서 본 것 같아 확인을 하려했을 뿐이다!" 호오? 옛날 도서에서 검을 본 것 같아서 확인하려고 검을 훔·쳤·단· 말이지? 그럼 도둑놈들은 돈을 구·경·하기 위해서 돈을 훔치는 거로구나? "그런 것치고는 너무 빨리 훔치던데 말이야." 나는 빈정거리는 말투로 소녀에게 말했다. 내 그런 태도에 보고 있던 카민이 팔을 슬그머니 잡아당기며 그만 하라는 표시를 보내왔다. 라이메데스는 피식피식 계속해서 웃음만을 흘리고 있었고, 에세렌은 이 상황이 재미있는 듯 나와 소녀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보고 있었다. 오로지 카민, 여자애에게는 언제나 약한 카민만이 소녀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 듯 소녀를 향해 생긋 웃어 보이고 있다. 그 녀석은 소녀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가더니 손을 내밀었다. "안녕? 나는 카민이라고 한다. 너 이름이 뭐니?" 하지만, 카민이 보인 그 호의를 소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 받아들이지 않은 게 다 뭐냐. 호의를 바닥에 버리고 난 뒤 구두굽으로 처절하게 부쉈다는 표현이 옳을 거다. "……난 여자하곤 말 안 해. 넌 저리로 가." 순간적으로 카민의 얼굴이 굳어졌다는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소녀가 내던지듯 한 그 말에, 카민은 갑자기 허리춤에 걸린 자신의 단검에 오른손을 가져가려는 초기 발작의 조짐을 보였고, 나는 그런 카민의 뒤로 가 조용히 녀석의 머리를 쳤다. 카민은 머리에서 느껴지는 알딸딸한 충격에 그제서야 이성을 되찾은 듯 후우, 하는 한숨과 함께 허리춤으로 향하던 손을 원위치로 돌려보냈다. 카민은 못내 억울한 듯, 파란머리 소녀를 향해 싱긋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난……. 난 남자란다." 그러자 소녀는 갑자기 잔뜩 인상을 구기더니 방금 전보다 훨씬 더 카민이 충격 받을 만한 한마디를, 정말로 단호하게도 던졌다. "거짓말!" "크아아아악!" 카민이 다시 발작을 시작하려는 것을 보고 나는 조용히 뒤를 돌아서 녀석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카민은 욱, 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에도 한참 만에야 간신히 이성을 찾았다. 카민을 두 번이나 발작 상태로 몰고 간 소녀는 그러나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는 전혀 모른다는 듯, 우리 일행을 도전적인 눈빛으로 하나하나 훑어보기 시작했다. 먼저 나를 보던 소녀는 당당한 눈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야, 거기 너! 왜 그렇게 눈을 치켜 뜨는 거야? 눈 내려!" "……." 주객이 전도되는 것도 정도가 있다.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다 나는군. 이 꼬마 계집애는 지금 자신이 도둑질을 했기 때문에 나한테 잡혀왔다는 자각도 없는 거냐? 나는 말없이 소녀를 노려보았다. 소녀는 그런 나를 향해 인상을 찌푸리더니 핑,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렸다. 허, 허허. 지금 저거 나한테 코웃음 친 거 맞지? 시선을 돌리던 소녀의 눈빛이 멈춘 것은 라이메데스에게서였다. 라이메데스의 머리카락 쪽으로 소녀의 시선이 움직인 순간, 소녀가 갑자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와아, 금발이다!" 그 외침과 함께 소녀는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라이메데스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나와 카민이 경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소녀는 라이메데스의 금발을 한참동안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올려다보다가 생긋, 하고 웃었다. "당신, 이름이 뭐예요?" 우리는 이 황당하고도 엽기적인…….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말도 안되는 상황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저 능글맞은 라이메데스놈은 이런 사태에도 얼굴 가죽 하나 꿈쩍하지 않으며 피식 웃어 보인다. "라이…… 이데." 라이메데스, 라고 말하려던 라이메데스는 말하는 도중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말을 정정했다. 그러자 소녀가 라이메데스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내 이름은 레니. 이야, 금발은 오랜만에 봐. 나, 기분 좋다." 새침떼기처럼 말한 소녀, 자신을 레니라고 소개한 그 아이는 그 말과 함께 라이메데스의 머릿결을 한 번 어루만지더니 한참만에 우리를 휙 하고 돌아보았다. "당신은 이름이 뭐야?" 그렇게 말하며 에세렌을 턱하고 가르킨다. 에세렌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 듯, 끅끅거리며 대답했다. "끅……에, 에세렌. 끅. 에세렌 이네아스라고 합니다." "거기 빨간 머리 여자, 당신은?" "누가 여자란 거야!" 카민이 다시 발끈하려는 것을 말리기 위해 나는 거의 검까지 뽑을 뻔했다. 한참 만에야 안정을 찾은 카민은 결국 씩씩거리며 밖으로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저 분 이름은 카민입니다." 에세렌이 생긋 웃으며 말해주었다. 그러자 소녀가 이번에는 당당하게 손가락을 펴서 나를 가리킨다. "저 무례한 놈의 이름은?" 누, 누가 뭐하다고? 에세렌은 곤란한 듯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카, 칼레들린님요……." ◇ ◇ ◇ 배에서 생활한지 어언 7일째. 이제 멀미도 멈추었기에 내게는 기분 좋은 일만 남아 있어야 마땅했다. 바다에 구토 같은 것을 하는 일 말고, 파랗게 펼쳐진 이 바다를 감상하는 일 말이다. 그러나…… 구토가 멈춘 현재, 나의 기분은 그다지 좋진 않았다. "야, 너. 그만 가라." 나는 레니라는 소녀에게 나즉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이 소녀를 붙잡았을 때의 계획은 녀석을 잡아다가 그대로 크레티아 치안대에 넘기는 거였지만, 그만 여기서 포기하련다. 따따따 너무나 시끄러운 이 소녀를,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처음에 이 계집애는 분명, 내 검을 훔쳤다는 명목 하에 나에게 붙들려 왔었다. 하지만 지금, 이 소녀는 이제 나한테 자기가 왜 붙잡혀 왔는지도 잊어버린 것 같다. 이 레니라는 소녀는 정말로 황당한 여자애였다. "왜 나한테 네가 가라 마라 하는 거야? 정말 웃기네." 내가 이만 가라, 라고 말하자 그 파랑머리의 녀석, 레니는 코웃음을 픽하고 치며 말했다. 나는 정말이지 기기 막혀 레니에게 고함을 버럭 쳤다. "야! 넌 원래 내 물건을 훔쳐서 여기 온 거잖아! 이제 그만 됐으니 돌아가라구!" 내 소리에 레니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싫어. 배에서 내릴 때까지, 난 여기 있을 거야." 나는 굳었다. 레니는 끈덕지게도 우리를 따라 다녔다. 나는 분명 귀찮다는 표식을 명백하게 했지만, 나의 구박에도 레니는 전혀 게의치 않았다. 녀석은 심지어 식사시간에까지도 우리를 귀찮게 굴었다. 우리 일행이 선실에서 내주는 스테이크를 받아들고 자리에 앉는데, 갑자기 레니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라이메데스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묻는 레니. "나 앉아도 되죠?" 이미 앉아버린 주제에 앉아봐도 되냐고 물어보는 건 대체 무슨 심보지? 나는 무시하기로 결정하고 스테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스테이크를 반쯤 먹었을 때, 레니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내 식사를 멈추게 했다. "에잇, 이게 뭐야! 스테이크가 너무 익었잖아! 이렇게 딱딱하고 맛없는 걸 먹으라니, 정말 너무 하는군. 이런 건 개한테 줘도 안 먹을 거야." "……." 순식간에 '개한테 줘도 안 먹는 스테이크' 를 너무나 맛있게 먹는 녀석들이 되어버린 나와 카민, 에세렌은 움직이던 포크를 뚝 하고 멈추고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레니를 보았다. 레니는 발끈한 표정으로 그런 우리를 보더니 유독 카민과 눈을 마주치며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뭐야? 여자가 노려봐 봤자 아무런 감흥도 없어." "너 정말 오늘 죽어 볼래!" 말해두는데, 카민은 절대 여자에게 저런 말투를 쓰는 놈이 아니다. 카민은 정말로 화가난 듯, 다시 발작을 시작하려는지 벌떡 일어섰다. 그렇잖아도 자신의 외모에 그렇게나 콤플렉스가 많은 카민인데, 최근 들어 레니가 사사건건 걸어대는 시비에 머리카락이 한 움쿰 빠질 만큼 녀석은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나는 먹던 스테이크를 지금이라도 엎을 것 같은 기세를 보이는 카민의 머리를 한 대 내리쳤고, 카민은 한참을 씩씩거리며 레니를 보다가 으윽, 하는 입술 깨무는 소리와 함께 뛰쳐 나가버렸다. 만약 상대가 여자애에,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않았다면 카민은 절대로 참지 않았을 거다. 먹던 밥도 포기하고 나갈 정도면……. 정말로 참기가 힘들었나보군. 에세렌은 카민이 나간 방향을 보며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나가 볼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에세렌은 식당에서 나갔다. 나는 에세렌이 웬일로 밥을 먹다 말고 나가는 거지, 라고 생각했지만 에세렌의 자리를 보던 나는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에세렌의 접시는 이미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쳇, 그러면 그렇지. "칼레들린." 내가 막 스테이크를 먹으려고 한 순간, 라이메데스가 나를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나는 고개를 들어 녀석에게 시선을 맞췄다. 라이메데스가 나를 향해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뒤에 있는 놈이 아까부터 너를 계속 보고 있다." 나는 라이메데스의 말에 흠칫 놀랐지만 서둘러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어떤 눈동자와 마주쳤다. "……?" 어디선가 한 번쯤 본 듯한 얼굴이 보였다. 옅은 푸른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다.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어디서였지? 내가 한참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가 살짝 웃었다. 나는 그 웃음도 어디선가 한 번 본 적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 그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그는 나를 한 번 더 짧게 미소를 보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식당에서 나가 버렸다. ◇ ◇ ◇ 잠이 오지 않았다. "……뭐였지?" 그 푸른색 머리카락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어디선가 한 번 본 듯한 얼굴! 하지만 기억 속이 어두컴컴해서, 잘 떠오르지가 않는다. 나는 한참동안 그 얼굴을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봐도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나는 결국 포기를 하곤 누워 있던 침대에서 일어나 배의 갑판 쪽으로 걸어나왔다. 밤이 깊었다. 달빛이 바다의 표면에 반사되어 은은한 잔광을 반사하는 가운데, 살랑 이는 푸른 물이 춤을 추고 있다. 거대한 물살을 내 가르며 조금씩 자신의 몸을 앞으로 밀어내는 배. 한 밤 중에 배의 갑판에 나와서니, 한결 운치가 있다. 켐 알슈타드도 침대 옆에 끌러두고 밖으로 나온 나는 멍하게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은은한 불빛 사이로 사그러드는 바다의 빛깔이 깊다.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바로 그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처음 듣는 그 낯선 목소리에 경계하며 몸을 돌렸다가 흠칫하고 말았다. 푸른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 남자, 오늘 식당에서 나를 보고 있었던 그 남자였다. "……아아, 한 밤의 바다를 구경하고 있었지. 그러는 당신은?" 내 질문에 남자가 살짝 웃었다. "글세요. 굳이 이유가 있어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달이 매우 좋군요. 달을 구경하러 나왔다고 해둘까요?" 나는 남자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별다른 것은 없는 듯, 남자는 평온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한참동안 공허하리 만치 투명한 눈동자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가 고개를 떨구며 나를 보았다. "그럼 이만." 그렇게 말하고 그가 돌아섰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그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순간 가슴이 욱씬, 하고 아파 와서 나는 잔뜩 눈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남자는 나를 한 번 보다가 스치듯 자그맣게 말했다. "다음에 뵙지요……. 카인." -------------------------------------------------------------------------------- Back : 3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4 (written by 카르민) Next : 3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2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0217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3rd December 2001 11:46:34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2-12-2001 09:38 Line : 245 Read : 697 [36]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4 -------------------------------------------------------------------------------- -------------------------------------------------------------------------------- Ip address : 211.220.164.6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스치듯 지나간 남자가 남긴 한마디에 나는 한참동안 멍한 상태였다. 마치 무슨 마법과도 같은 한마디, '카인'. 그건 뭐야? 마치 누군가의 이름 같은……. "어라, 여기서 뭐해?" 남자가 사라진 곳을 향해 한참동안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가, 정말로 마주하기 싫은 인간과 마주하고 말았다. "밤에 바다를 보고 있는 건가? 보기와는 다르게 꽤나 센티한데?" 파란머리 소녀, 레니는 그 말과 함께 척척척 앞으로 걸어와 내 옆에 와서 섰다. 나는 불쾌감에 얼른 그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내가 발걸음을 옮기기 직전 레니가 작게 입을 움직여 말했다. "당신 말이야……. 당신한테서 냄새가 나." 나는 갑작스러운 레니의 말에 당황해서 얼른 내 옷에 코를 박고 킁킁거려 보고, 공중을 향해 숨을 하, 하고 불어 나 자신의 입 냄새도 한 번 맡아보았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불쾌한 냄새는 감지되지 않았다. "아무 냄새도 안 난다!" "……그런 거 말고." 억울해진 내가 소리를 지르자 레니는 한심스럽다는 듯이 뱉어내더니 갑판에 지그시 기댔다. 레니가 한참동안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뭐, 됐어……. 그만 두지." 레니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 그 말과 함께 배 갑판에 몸을 더더욱 깊이 기댔다. 뱃전에 몸을 부딪쳐 그 방울 하나조차 남기지 않고 부서져 버리는 물과 더불어 철썩, 하는 파도의 큰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멀리 멀리… 저 멀리서부터 바다의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아 나는 그 느낌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일부러 눈을 감았다 떴다. 레니는 한참동안 바다에 시선을 던지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당신은 왜 이 배를 탄 거지? 동료들도 있던데, 뭔가 특별한 일이 있어서 가는 거야?" 나는 굳이 이야기해줄 필요성을 느끼진 않았지만, 물어보는데 무시하는 것도 좀 그렇게 해서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대충 얘기했다. "배는 그냥 타고 싶어서 탔다. 크레티아로 가는 특별한 이유라……. 있긴 있지." 유키. 보라색 머리를 한 그 자그마한 꼬마를, 난 반드시 찾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크레티아로 향하는 유일한 이유다. 레니는 흐응, 하는 소리와 함께 크게 기지개를 켰다. 나는 문득, 그런 레니가 뭔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정말로 '문득' 깨달은 것이었다. 여태까지는 몰랐던 사실, 갑작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궁금증이 있었다. 아무리 많이 봐줘도 기껏 16살 정도로 보이는 레니. 그런 레니가 이런 배에 혼자 있다는 말은 즉, 세이피안에서 혼자서 배를 타 크레티아라는 외국으로 나간다는 말이 아닌가? 이렇게 나이가 어린 소녀가 홀로 외국에? "그러는 너는 왜 크레티아로 가는 배를 타는 거지? 그것도 혼자서." 불쑥 떠오른 생각을 나는 그대로 밖으로 분출했다. 레니는 내 말을 듣자마자 매우 태연자약한 어조로, 가뿐하게 대답했다. "사랑하는 분을 만나기 위해서 사랑의 도피행각중이야." 내가 에누리 없이 불쑥 튀어나온 그 대답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한참만에 그 말의 의미를 드디어 안 나는 순간적으로 흠칫, 하고 굳어 버렸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잠시 레니를 보았다. 눈이 몇 번 꿈뻑거려졌다. 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너 방금 전에 뭐라고 했지?" "사랑하는 분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했다, 왜." 나는 다시 한 번 튀어나온 레니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뭐? 사랑? 기껏해야 15살 정도 될까말까한 주제에……. "너 몇 살이냐?" 내 말에 레니는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열 다섯." "……." 그래요, 열다섯이라구요? 정말로 조숙하시군요, 레니양. 고작 열 다섯 살을 먹은 주제에 사랑하는 분이 무려 외국에 계신다는 말이군요.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혼자서 이 배를 탔다, 이 겁니까? 나는 한참동안 레니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면서 그 얼굴에 묻어 있는 티끌만큼의 거짓이라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나를 보고 있는 레니의 얼굴은 거짓 따위는 담고 있지 않았다. 레니는 목을 부득부득 움직여 보이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없이 녀석을 보고 있다가, 한참만에 입술을 열었다. "그, 그러냐? 그럼 네 상대는 몇 살인데?" 이번에도 전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레니의 입이 벌어졌다. "스물 일곱살." 나는 이번에도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어, 어, 엄청나군. 스, 스물 일곱이라고? 레니가 자신이 열다섯 살이라고 했으니…… 무려 열 두 살이나 차이가 나는 사이다. 나는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간신히 한마디를 뱉어냈다. "그, 그, 그 사람도 네가 좋다냐?" 만약 자신보다 12살이나 어린 이 꼬마를 좋아한다면, 분명 범죄자다. "당연하지." 그러나 레니는 이번에도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레니는 몸을 돌려 바다 쪽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내가 사랑하는 그 분은 아주 아주 멋진 분이야. 이데 님과 같은 금색 머리카락에, 너무나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를 갖고 계셔. 날 만날 때면 언제나 하얀 백합을 한아름씩 꺾어 주시곤 하지. 너무 자상해." "……." 나는 그렇게 말하는 레니를 역시 말 없이 바라보았다. 12살 차이라면 차이가 나도 너무 많이 차이가 나는 커플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어느 순간 레니가 싸늘하게 말했다. "뭐야,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뭐?" 난 갑자기 차가워진 레니의 말에 당황해서 되물었다. 레니는 도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고. 내가 이상하다고." 글세? 확실히 좀 이상한 건 사실이지 않나? 보통의 인간 소녀, 그것도 15살이라는 한참 예민한 나이의 소녀라면 적어도 12살이나 나이가 많은 남자와는 결혼하려 들지 않을 거라는 내 생각은 분명 이상한 건 아닐테지? 레니는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인상을 구겼다. 나는 그런 레니를 향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꼭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는 거 아냐?" 내 말에 레니는 고개를 완강히 저으며 말했다. "나이 따윈 상관없어. 서로의 마음이 중요하지." ……그건 네 생각이고. "나는 그 분을 좋아하고, 그 분도 날 좋아해. 그 걸로 된 거 아냐? 나는 그 분과 나 사이를 방해하는 자는 그 누구든 용서 안 할 거야. '나이' 같은 시답잖은 이유로 나와 그 분 사이를 막는 인간이 있다면 난 그 놈을 그대로 죽여 버릴 거야! 나와 그 분 사이에 '나이' 라는 장벽을 쌓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구!" 레니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족인 경우에 보통의 커플은 나이 차이가 심하게 난다. 3000살이 넘은 마족이 겨우 500살의 마족과 결합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지. 하지만, 나이 차이가 많은 커플들의 탄생은 그들이 마족이기 때문에 가능한 결합이다. 늙지 않는 몸과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는 한은 소멸하지 않는 존재이기에 가능한 것. 인간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빠르게 변모하는, 그리고 쉽사리 추해지고 쉽사리 감정이 식어버리는 이들과 마족은 다르다. "어찌됐든, 나와 그 분 사이를 방해하는 자는 용서할 수 없어. 그게 누구라도." 레니가 작게 중얼거리며 한 말에 나는 음, 하고 중얼거렸다. 그 나름대로의 진심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레니는 한참 밤바다를 보고 섰다가 몸을 돌렸다. 나는 그런 레니의 뒷모습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 그 때는 알지 못했었다. 레니가 말한 그 '사랑하는 분' 이 누구인지. 레니가 너무나 진지한 얼굴로 말한 그 남자가 누구인지. ◇ ◇ ◇ "카인?" 라이메데스는 내 질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뭐냐?" 라이메데스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세, 나도 들어본 적은 없는데? 넌 어디서들은 거야?" "그냥……." 나는 말 끝을 흐렸다. 라이메데스는 나를 빤히 보고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봐, 칼레들린." "어?" "……너, 최근에 꿈 같은 거 꾸지 않아?" "꿈?" 나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난 꿈 같은 건 잘 안 꾼다." ◇ ◇ ◇ 잠시 후면 케이나 호의 목적지였던 크레티아 프린체의 이노미아에 도착하리라는 선원이 보고가 배의 구석구석에 퍼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선실에 널려 있던 짐을 재빠르게 챙기고 갑판으로 뛰어 나갔다. 에세렌은 아크로아가 우리에게 떠맡겼던 그 그림을 담은 기다란 자루를 어깨에 메고 낑낑거리며 우리 뒤를 따라왔다. 배 갑판의 가장 바깥쪽에서 가까워지는 육지를 바라보는 카민은 싱글거리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돼……." 중얼거리는 카민의 얼굴에는 가득한 기쁨이 있었기에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나는 카민이 서 있는 배 갑판의 끝으로 가서 육지 저 너머를 보았다. 카민은 평온한 얼굴로 불어오는 대륙의 바람을 받고 있었다. "어……?" 육지가 점점 더 가까워져서, 마치 손톱처럼 작게 보이던 건물들의 크기가 두 눈에 속속 들어올 때쯤, 나는 무엇인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살짝 입술을 벌렸다. 마족인 내 시력으로 봐야 보일 정도로 먼 거리에 있는 이노미아 항구에 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로 내가 발견한 이상한 것이었다. 그 곳에 선 한 무리의 인간들은 항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들이었다. 항구에 줄을 딱딱 정렬해서 서 있는 그들은 군이었다. 나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어째서인지, 케이나 호가 다가가면 다가갈 수록 그 군대가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물살을 내 가르며 조금씩 항구로 접근하는 케이나 호가 바로 항구 앞까지 접근하자, 크레티아의 군대인 듯 보이는 그것들은 조금 더 심하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어라? 저거 군대 아냐?" 육지에 접근함에 따라 보통의 인간들도 그 군대를 하나 둘 발견하고 있었다. 카민 역시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로 항구에서 대기하듯 서 있는 군대를 보고 있었다. 근데 대체 왜 군대가 항구 따위에 나와 있는 거지? "……혹시……." 그 때, 내 뒤에서 작게 중얼거리듯 말하는 에세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휙 돌리며 그 다음 말을 재촉했다. "혹시?" 내 재촉에 에세렌이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혹시……. 기사들이 단체로 뱃놀이를 한 번 하려고 모두 다 함께……." 나는 한참동안 말없이 에세렌을 노려보았다. 에세렌은 내 눈빛에 찔끔했는지 말을 뚝, 하고 멈추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한 인간의 옆얼굴과 마주했다.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항구 입구에 모여선 군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레니의 얼굴은 진지했다. 레니는 그 군대를 보며 뭐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너무 작은 소리라서, 나조차 들을 수 없었다. 한참동안 항구의 군대를 빤히 보고 있던 레니는 어느 순간, 내 시선을 눈치챈 듯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와 내 시선이 맞부딪힌 것은 그 때였다. 레니는 싱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 동안 재미있었어, 당신. 비록 좀 무례하긴 했지만." 나는 레니의 말에 피식 웃어버렸다. 레니는 내 옆에 서 있던 라이메데스에게 다가가 우아하게 인사를 해 보였다. 그녀는 여태까지의 방방 뜨는 이미지를 과감하게 버린 듯, 라이메데스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당신의 금발은 제가 좋아하는 분의 그것과 비슷해서 무척 좋았답니다." 레니가 좋아한다는 그 27살의 범죄자 놈, 머릿결 하나는 좋은 모양이군. 레니는 차례로 카민과 에세렌에게 인사를 하는 동안,(마지막까지 카민을 놀렸는지 카민이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배는 부두에 그 육중한 몸을 내리고 있었다. 뿌우, 하고 크게 한 번 운 배에서 기다란 사닥다리가 밑으로 내려졌다. 선원들이 양 팔을 크게 휘두르는 가운데,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배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어어?" 그런데, 먼저 배에서 내렸던 사람들을 위에서 보고 있던 우리는 황당스러운 장면을 목격해야만 했다. 항구에 있던 그 군대가 갑자기 우르르 달려오더니, 사닥다리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막아섰을 뿐만이 아니라, 마치 검문이라도 하듯이 사람 하나 하나의 얼굴을 살피기도 했다. "저게 뭐 하는 짓이야?" 당장이라도 육지에 발을 디디고 싶어하는 탑승객들의 속 타는 마음은 아랑곳 않고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는 그 군대의 행각을 보면서 나는 조그맣게 뱉어냈다. 그 때였다. 내 옆에서 가볍게 팔짱을 낀 채로 주위를 관망하듯 바라보고 있던 레니가 발을 움직인 것이. 레니는 밑을 한 번 힐끗 보다가 천천히 사닥다리 근처로 다가갔다. 레니는 일단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가려는 인간들을 손바닥을 제지한 후, 부두 밑에 서 있는 남자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꼴사납군, 크레티아의 기사들이여! 지금 민간인 하나하나를 붙잡아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갑작스럽게 높아진 레니의 말투에 깜짝 놀랐다. 평소 레니의 목소리는 15살다운 앳됨이 가득 묻어 있었는데, 방금 전에 튀어나온 그 목소리에서는 그 앳됨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가득한 위엄? 그래, 위엄이다. 저 작은 파랑머리 소녀의 목소리에서는 위엄이 흐르고 있었다. 레니는 놀란 표정을 짓는 나를 바라보더니 생긋, 하고 웃었다. 레니가 갑자기 손을 위로 치켜 들었다. 부두에 선 그들의 시선이 모조리 레니에게로 쏠렸다. 레니는 그런 군대의 시선을 한참동안 즐기듯 보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런 레니를 올려다보면서, 부두에서 한 남자가 큰 소리로 레니에게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레니는 배 위에서 도도한 어조로 말했다. "나? 아마도 내가 그대들이 찾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은데." 카민과 에세렌은 갑자기 바뀐 레니의 말투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라이메데스의 표정에는 이상 무. 레니는 살짝 웃으며 한 발을 사닥다리 쪽으로 내렸다. 그녀는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사닥다리를 타고 내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내 이름은 이레니아 카슈타 드 세이피안! 대 세이피안 국의 일곱 번째 공주, 현자의 돌을 소유한 이레니아다!" -------------------------------------------------------------------------------- Back : 3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5 (written by 카르민) Next : 3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3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0217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3rd December 2001 11:46:38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2-12-2001 09:49 Line : 95 Read : 764 [37]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5 -------------------------------------------------------------------------------- -------------------------------------------------------------------------------- Ip address : 211.220.164.6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우리 일행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하게 레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당당한 태도로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가던 레니는 어느 순간 몸을 살짝 돌려 배 위에 서 있는 우리들을 향해 피식 혀를 쏙 하고 내밀어 보였다. 그녀가 나를 향해 찡긋, 하고 윙크를 했다. "놀랬어?" 마……. 말이라고 하냐? 말도 안 돼. 저, 저 여자가……. 저 여자가……. 저 여자가……. 고, 고, 공주라고? 세이피안의 일곱째 공주? 대체 뭐야, 그건! 지난밤에 바다를 보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서 왔다느니 하는 건 다 거짓말이었던 거냐? "당신……. 당신이 이레니아 카슈다 드 세이피안님이 틀림없습니까?"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가 마침내 부두에 발을 디딘 레니를 향해 어떤 남자가 물었다. 나는 목을 최대한 길게 빼서 밑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열심히 눈에 담았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레니는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틀림없소, 나는 이레니아 카슈타 드 세이피안." 레니는 그 한마디와 함께 한발자국을 움직여 부두에 선 그 남자들의 틈으로 갔다. 우리는 레니의 뒷모습을 멍하게 보고 있었다. 레니가 앞으로 다가서자, 그녀의 기다란 푸른색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남자들은 레니의 푸른 머리카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가벼운 목례를 했다. 남자 중 하나가 정중한 태도로 레니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입을 열었다. "크레티아 왕국 제 2왕자 키세온님의 약혼녀, 이레니아님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어째서, 혼자서 오셨단 말입니까. 하마터면 저희는 이레니아님의 방문 사실 조차 모를 뻔 했습니다." 레니는 그를 향해 살짝 웃으며 답했다. "나는 격식을 싫어하오." 우리들은 레니를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카민이었다. "가, 가, 가증스러워……." 레니가 일국의 공주였다는 사실보다도 레니의 태도가 180도 돌변한 것이 더 충격인 듯, 카민은 더듬더듬 거리며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에세렌은 지그시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저는 그럼……. 세이피안 황족의 엉덩이를 때린 최초의 신관이 되겠군요?" 라이메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레니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라이메데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라이메데스! 넌 알고 있었지?」 내 질문에 라이메데스가 피식,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시치미 떼지마, 이 자식아! 세이피안의 공주 같으면, 몇 대를 지나면서 묽어졌다고는 해도 어찌됐든 서열 제 1위의 마족 카리스에온의 후예잖아! 마족의 피를 아주 약간이라지만 갖고 있는 여자다! 네가 모를 리가 없어!」 내 말에 정곡이 찔렸는지, 라이메데스는 하하, 하고 어설프게 웃었다. 「아니, 그것이…….」 나는 라이메데스가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더더욱 눈을 세게 부라렸다. 이 놈의 자식이 그래서 레니에겐 나름대로 친절하게 굴었던 거다. 묽든 어쨌든 서열 제 1위의 마족의 피가 섞인 녀석이니! 나는 군대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레니를 보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이지 세상 말세다. 저런 왈가닥에, 남의 물건 훔치기를 예사로 아는 녀석이 일국의 공주였다니……. 내가 막 고개를 흔드는 그 순간이었다. "키세온 왕자님!" 터지듯 나오는 레니의 목소리가 들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반가움으로 가득 넘치는 그 목소리에 아무 생각 없이 그 곳을 본 나는 다음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레니의 앞에 있던 군대가 이 열로 쫙, 하고 갈린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번쩍 번쩍거리는 황금빛의 상하의의 옷, 깔끔하게 디자인된 옅은 감청빛의 망토, 군대가 일렬로 쫙 갈리면서 예를 표하는 걸로 봐서는, 짐작할 수 있는 신분은 하나. 걸어나오고 있는 자는 황족이었다. 한 발 한 발 이레니아의 앞으로 걸아온 그는 이레니아의 앞에서 천천히 멈춰서더니 이레니아의 하얀 손을 살짝 감싸쥐었다. 이레니아의 하얀 손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보고 싶었소, 세이피안의 영롱한 사파이어……. 나의 천사 이레니아." 이레니아의 손에 입을 맞추며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비록 작았지만, 청력의 한계를 최대한 올려놓았던 내게 그 목소리는 지나칠 정도로 크게 전달되었다. 나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어, 어, 어? 저, 저, 저 사람?" 옆에 있던 카민이 깜짝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녀석이 내 팔을 확 잡았다. 그리고, 정말로 경악성이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거……. 저거, 루, 루덴스 아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랬다. 이레니아의 손에 입을 맞추고 있는, 방금 전 이레니아에게 '키세온 왕자' 라 불렸던 그 남자. 그 남자의 얼굴은……. "하, 하하핫……." 몇 달 전에 이카루에서 시이나라는 엘프와 함께 돌아다녔던 그 남자, 점성술사 린을 찾으러 왔다고 한 그 남자, 카민에게 무지막지하게 두드려 맞았던 그 남자의 얼굴과 똑같았다. "……왕자였어?" 옆에서 얼빠진 듯이 중얼거리는 카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반마족 카인 3권... 곧 나올 것 같군요... 이번 권은 양이 좀 많군요.. 하하하-_-;;; 그건 그렇고... 곧 100회네요. 이벤트... 흐흐흐흐흐흐흐..(최근 이것이 글을 쓰게 만드는 원동력이라죠;;) -------------------------------------------------------------------------------- Back : 38 : 3권 삭제 공지... (written by 카르민) Next : 3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4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0217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3rd December 2001 11:46:41 -------------------------------------------------------------------------------- Copyright 1998-2001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6-01-2002 00:24 Line : 245 Read : 1628 [3]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6 -------------------------------------------------------------------------------- -------------------------------------------------------------------------------- Ip address : 61.76.191.13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어... 어떡하지? 12시가 넘어버렸다~! 토요일에 온다고 했는데.. 안절부절.. 일요일이 되버렸어;; --------------------- 제 18장: 그림의 용도? 눈을 떴다 감는다. 천천히 다시 뜬다. 그리고, 도로 감는다. 「……대체 언제까지 눈만 깜빡거릴 거예요?」 나라고 좋아서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단지 눈앞에 보이는 저 것이 진실인지 확인하고 싶었을 따름이지. 나는 내 마음은 모르고 투덜거리듯이 말하는 레이네에게 늘 그렇듯이 매우 다정한 어조로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노란 보석이 참 예쁘군. 조금만 더 떠들면 그 예쁜 모습 반쯤 뽑아 줘야지." 뭐, 레이네는 곧 조용해졌다. 나는 그 침묵을 즐기면서 후욱, 하고 깊게 숨을 한 번 몰아 쉬었다. 심장 부근이 갑갑하게 조여져 온다. 아랫배 부분에서 뜨끈하게 열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져 왔다. 나는 레니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며 기사들 사이로 들어가고 있는 루덴스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보았다. 흠, 세상에 똑같이 생긴 사람이 둘 있다면 나는 저기 가고 있는 저 인간이 루덴스가 아니라고 혼신의 힘을 다해 주장하겠지만, 내 눈을 통해 보이고 있는 저 얼굴은 분명히 옛날 그 루덴스 놈의 얼굴이었고, 레니에게 건네는 말에 묻어나는 목소리가 예전에 비해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느끼해지긴 했지만, 기름 몇 병과 버터 몇 통이면 누구나 저렇게 목소리가 느끼하게 변할지도 모른다. 그래, 내가 모르는 사이 버터를 스푼으로 퍼먹어서 목소리를 느끼하게 변조했을지도 모르잖아? "나의 이레니아, 어찌됐든 오는데 수고 많았소." "아이참, 키세온님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은 수고도 아니예요." 험험. 자기네들의 목소리가 나라는 인물에게 도청 당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레니아와 루덴스는 속닥속닥 열심히 떠들고 있었는데, 계속해서 들려오는 그들의 대화는 나를 정말이지 미치게 만들었다. 사람을 닭으로 만드는 필살의 기술을 익힌 사람들 같달까. 아마 저 두사람이라면, '닭살로 사람 죽이기' 같은 제목을 가진 책을 써도 성공할 거란 생각마저 드는데 말이야. 하트 마크가 이리저리 부지런히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은근슬쩍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는 둥 내 아름다운 두 눈을 썩게 만드는 모든 행동이 눈앞에 적나라하게 보이고 있다. 당장이라도 풀쩍 뛰어내려가서 루덴스의 목덜미를 잡고 "네놈이 정말 왕자였냐?" 라는 질문을 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불행히도 저런 러브러브 파워를 발산하고 있는 녀석들 사이에 불쑥 끼어 들어갈 만큼 나는 예의가 없는 놈이 아니었다. "칼레들린님, 전 어떡하죠?" 문득, 뒤에서 조금 우울한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그 곳에는 쪼그리고 앉아서 두 무릎 사이에 턱을 푹 파묻고 있는 조금 비참한 자세의 에세렌이 있었다. 에세렌은 마치 자폐아처럼 검지로 바닥을 긁고 있었다. "뭐가 어떡하죠야?" "……전 죽었어요. 공주의 엉덩이를 때리다니……." 엉덩이를 때리다니? 대체 레니의 엉덩이는 왜 때렸단 말인가? 정말 이 놈은 신관이면 신관답게 좀 제대로 할 수 없는 거냐? 굳이 레니가 못마땅해 때릴 만한 일이 있었으면, 신관답게! 엄하게 손바닥을 때린다거나 해야지! 엉덩이는 왜 때리는 건데, 대체!! 그런 에세렌의 옆에는 카민이 서 있었다. 카민은 에세렌의 어깨에 차분히 손을 올리며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난 바로 그 공주라는 사람한테 검을 들이댔고……." 카민은 우울함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우중충한 잿빛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가끔씩은 정말로 베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카민의 말 은연중에 오싹한 한기가 피어올랐다가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것이 무의식중에 뿜어낸 녀석의 살기라는 걸 알고 입을 살짝 벌렸다. 이 녀석, 그 동안 괴롭긴 무지하게 괴로웠나 보군. "……카민님, 그럼 이제 우리 죽는 거예요?" 에세렌은 그 자세 그대로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대체……. 자기네들이 레니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죽는다는 얘기까지 하는 거야? "설마요. 레니님은 아까 우리에게 즐겁게 인사를 하고 갔잖아요?" 카민 역시 '죽는다' 라는 말은 오버라고 느껴졌는지 슬쩍 웃었다. 그러나 에세렌은 필사적이었다. 녀석은 카민의 팔을 잡으며 크게 외쳤다. "하지만 황족 모독죄는 사형인데요! 그리고……." "우리는 레니가 황족이라는 걸 몰랐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을거예요." 순간, 얼굴을 두 무릎 사이에 파묻었던 에세렌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우리 모두는 갑작스러운 그의 반응에 흠칫했다. 에세렌은 한 술 더 떠서 벌떡 일어서더니 갑자기 오, 하는 소리를 내며 박수를 짝 쳤다. "호오, 그런 거예요?" "그…… 런 거겠죠." 나는 두 바보들의 대화를 계속 지켜보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져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그런데 내가 고개를 돌린 바로 에세렌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뒤로부터 들려왔다. "그럼 '무지'로 인해 생긴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상한 것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그 말투가 너무나도 조용했다는데에 있었다. 그것은 정말 이상하리만치 조용하고 고요한 말투라서, 지금 이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가라앉은 그 차분한 목소리에 나는 순간적으로 묘한 섬뜩함마저 느꼈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다시 에세렌을 보았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무거워진 말투와는 다르게 에세렌은 평소와 그리 다름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언제나 그렇듯이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칼레들린님의 생각은 어때요? 아무리 우리가 세이피안인이 아니라지만 원래 황족 모독죄는 사형이고, 저희는 황족을 모독한 거나 마찬가지예요.(그래? 내 생각에 우리들이 더 모독을 많이 당한 것 같은데 말야?)하지만 우리는 레니님이 황족이라는 걸 몰랐어요. '죄'라는 것이 '몰랐기 때문에 그랬어' 라는 어설픈 변명 앞에 모두 와해될 수 있는 걸까요?" 나는 왜 갑자기 문제가 이런 식으로 나가는 건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왜 이런 한심한 명제를 가지고 그런 진지한 결론을 도출해 내야 하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도 유식한 내가 대답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무심한 어조로 던지듯 말했다. "너는 만약에, 누가 3일 정도 굶은 네 밥을 뺏어 먹으면 어쩔 건데?" 내 말에, 에세렌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여신의 이름으로." "이름으로?" "죽입니다." "……." 너무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오는군. "너, 너희 여신은 이름으로 살인도 저지를 수 있냐?" 갑자기 이빨을 으득, 하고 갈며 '죽입니다' 라고 말하는 에세렌 때문에 나는 흠칫해서(공포감에 정말로 소름이 돋았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묻고 말았다. "여신이 살인을!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이건 신성모독입니다!" ……신성모독은 혼자 다 하는 주제에 뭐라는 거야? 나는 갑자기 버럭 고함을 치는 에세렌을 잠시 바라보다 그의 발을 꽉, 하고 밟아 준 후 (에세렌은 펄쩍 뛰어 오르며 비명을 질렀다.)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모르고 그랬다면 어쩔래?" 엎드린 자세로 자신의 발을 조물락 대고 있던 에세렌은 아직도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으로 훌쩍거리며 (추하다, 임마! 전에도 말했듯이 눈물을 매달고도 귀여운 건 나뿐이야!)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예요?" "그러니까, 네 밥을 뺏어 먹긴 뺏어 먹었는데 그 밥이 네 건지 모르고 그랬다면." "……그래도 죽입…… 아니, 처단합니다." 죽입니다, 라고 말하려던 것을 처단합니다로 재빨리 바꾸며 에세렌은 말했다. 나는 잠시 이런 신관도 신관이라고 여기며 흐뭇해하고 있을 (더구나 에세렌은 신성을 타고나는 존재라고 했단 말이다!) 그 마리에나라는 여신에 대해 짧게 묵념한 다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거랑 같아." 살짝 몸을 틀어 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무식한 에세렌은 너무나도 유식한 내 말의 뜻을 잠시 파악하지 못해서 멀뚱하게 있다가 한참만에야 이해를 했는지 어느 순간 갑자기 우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말은 내가 사형 당한다는 말이잖아요! 모르고 했다해도 죄는 죄라는 말이니까!!" 나는 에세렌이 울든 말든 이제 상관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내버려두었다. 라이메데스가 빙긋, 웃음을 띄우며 바로 내 곁에 와서 섰다. 그는 내 어깨에 자신의 어깨를 바짝 밀착하며(에비! 저리 가!) 서 있다가 밝게 웃었다. "……칼레들린." "왜." 나는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놈의 얼굴을 보았다. 놈의 초록색 눈동자는 여느 때보다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뭐?" 나는 갑작스러운 그 질문의 답을 이해하지 못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라이메데스는 빙긋, 하고 웃더니 오른손을 들어 갑작스럽게 내 볼을 잡았다. 그리고. ……당겼다. -------------------------------------------------------------------------------- Back : 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7 (written by 카르민) Next : 2 : 고... 공지...ㅡㅜ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0188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12th January 2002 20:39:36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6-01-2002 00:24 Line : 217 Read : 1308 [4]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7 -------------------------------------------------------------------------------- -------------------------------------------------------------------------------- Ip address : 61.76.191.13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나는 잠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을 크게 떴다. 한참만에야 나는 내 볼을 잡고 있는 것이, 그리고 당기고 있는 것이 다른 무엇도 아닌 라이메데스의 손이라는 깨달을 수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악! 지금 무슨 짓이냐! 내가 그 손을 치고 고함을 치려 한 순간, 갑자기 라이메데스가 입을 열었다. "오호∼ 꽤 잘 늘어나는군." 주욱. 볼을 더더욱 세게 늘이며 라이메데스가 웃었기에, 나는 실실 웃으며 놈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 싸늘한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끊어서 말했다. "……너, 죽고 싶냐?" 나는 이빨을 아득, 물며 물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라이메데스가 손을 거두어갔다. 생글 웃으면서. 내가 막 그 놈의 머리를 치려는 순간, 라이메데스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하지만, '몰랐다' 라는 것만큼 확실한 핑계는 없어. 인간은 누구나 무지에 관해서는 관대해지지." 나는 갑자기 튀어나온 그 말의 의미를 얼른 파악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멍하게 있었다. 한참후, 그러니까 라이메데스가 방글방글 웃으며 갑판 위에 손가락을 툭툭 튀길 때까지, 나는 녀석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한참 만에야 라이메데스의 말이 내 의견에 대한 반대 의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정말로 한참 후의 일이었다. "저 사람, 진짜 루덴스겠지?" 내가 막 라이메데스에게 뭐라고 말하려는데, 카민이 옆에서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나는 얼른 카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하고 있는 카민의 눈은 우울해 보였다. "너하고 똑같이 생긴 사람이 대륙에 한 명쯤 있다면, 저 놈이 루덴스가 아닐 수도 있지." "……크으." 카민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자신의 머리를 집어 뜯었다. 한움쿰의 머리카락이 뽑혀 나오는 것을 보며 나는 이 놈을 처음으로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부터 레니한테 시달려서 머리카락이 한 움쿰씩 빠지는 탈모증을 겪고 있지 않았던가. 그 날 이후로 어쩐지 줄어든 것 같은 머리숱을 스스로 잡아뜯다니. 늙어서 머리 빠지는 날 오면 오늘을 얼마나 후회할까? "오는 도중 내내 혼자였소, 이레니아?" 묵직한 목소리가 갑자기 밑에서 들려왔다. 나는 또 다시 밀려오는 닭살에 온 몸을 긁으며 탭댄스를 췄다. 지금 들려오는 저 목소리가 느끼하지 않다고 말하는 인간이 있다면, 나는 그 인간의 귀를 해부할거다. 이윽고 레니가 대답하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아아, 아니예요. 사실 승선할 때까지만 해도 혼자였는데……. 가는 도중 '우연한 일로' 일행 비슷한 사람들이 생겨서 잠시 신세를 지면서 왔어요. 제 정체를 숨겨왔는지라, 지금쯤 조금 놀라셨을 거예요." 호오? '우연'한 일? 그래, 우연이긴 우연이지. 네가 내 검을 훔치면서 시작된 아주 '대단한' 우연 말이야. 그리고 네가 정체를 숨기는 바람에 우리가 조금 놀랐을 거라고 생각해? 에세렌이 지금 내 뒤에서 자신이 사형 당할 거라고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는걸 보면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아주 궁금하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목을 한 번 휘익 뒤로 젖혔다. 「칼레들린. 어쩔 거냐?」 그 때, 라이메데스가 낮게 물어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라이메데스를 보았다.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하고 웃어 보였는데 그 웃음은 평소에 녀석이 짓는 그 느끼한 웃음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방금 전 녀석이 늘어뜨렸던 볼의 얼얼함을 느끼면서 이빨을 부득갈았다. 「뭘 어쩌냐는 말이지?」 「그건 네가 더 잘 알잖아.」 생글, 하고 웃어 보이는 라이메데스의 얼굴 위로는 조그마한 장난기가 맺힌 듯 했다. 녀석의 그런 표정은 에세렌이 우리와 동행하기 시작한 그 시점부터는 보기 힘들었던 종류의 것이었다. 나는 놈의 그런 눈을 잠시 보고 섰다가 쳇, 하고 중얼거린 다음 갑판을 휙 넘었다. 뒤에서 에세렌이 놀란 듯한 소리를 냈기에 나는 크게 외쳤다. "너희들도 따라 내려와!" 나는 그 말과 함께 사다리를 타고 잽싸게 튀어 내려갔다. 탁탁, 하고 사다리에 발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사다리를 내려서서 기사들이 잔뜩 모인 그 틈으로 달려나갔다. 기사들은 내가 갑자기 달려오자 놀란 듯, (내가 좀 잘생겼나? 시선이 모이는 게 당연하잖아!) 검을 뽑아 들려고 했다. 호오, 해보시겠다고? "자, 잠깐, 기사들이여! 그 분은 나의 지인(知人)이다." 기사들의 검이 갑자기 이 무리 안으로 파고 들어온 나를 향해 그 날카로운 잔광을 반사하려 했던 그 순간, 앞에서 레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얼른 검을 뽑으려던 손을 멈췄다. 기사들은 다시 두 열로 나뉘어 좌우로 열을 맞춰 쫙하고 빠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레니가 자박자박 걸어나왔다. ……루덴스의 손을 잡고서. "이 사람이 그대와 함께 동행한……?" 루덴스는 이레니아를 보며 묻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보아하니 나를 향해 우아한 웃음을 지어 보이려고 한 것 같다만……. 물론 그 것이 실패했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 믿는다. 놈은 나를 보는 순간 그대로 표정을 굳혔다. 턱을 쫙 벌렸으며 안색은 시퍼렇게 변했다. "히엑!" 그와 동시에 튀어나온 자그마한 신음성은 더더구나 완벽했다. 내 잘생긴 얼굴을 보고 놀라는 거야 이해해 줄 수 있다만, 너무 오버하는군? 나는 루덴스를 향해 진득하게 한 번 웃었다. "오·랜·만·이·군·요·왕·자·전·하." 바로 그 때, 뒤에서 짧게 끊듯이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덴스의 얼굴이 더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카민은 내 바로 옆에 서서 내 목에 척, 하고 손을 올리더니 생긋 웃었다. "그 여관에서 본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왕·자·전·하?" 왕자전하를 마구마구 강조해가며 카민이 다시 한 번 웃었다. "키세온님, 이들과 아는 사이입니까?" 이레니아가 놀란 어투로 묻자 루덴스는 움찔하며 말했다. "그것이……." "너무너무 잘 아는 사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왕·자·전·하." 베베 꼬인 카민의 말투에, 루덴스는 움찔거렸다. "아아, 그, 그렇군. 오, 오랜만이지?" 단언하건대, 루덴스는 지금 땀을 바가지로 흘리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럼요, 왕·자·전·하. 그러나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다해도 저는 그·날·의 일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카민이 씨익 하고 웃었다. ……사악해 보이는 건 무슨 이유지? "이런 우연이! 잘 됐군요. 이 사람들하고 이대로 헤어지는 게 조금 아쉬웠는데…… 키세온님의 지인이라면……." 이레니아는 그 말과 함께 루덴스를 보았다. 루덴스는 그 눈에 멈칫하더니 하하, 하고 웃었다. 그는 이레니아에게 잠시 가벼운 목례를 해 보이곤 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녀석은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왜 여기 있는 거야?" "……그건 내가 할 말 아닌가? 호오, 왕자님이셨군, 루덴스씨? 이거 정말 너무 놀라워서 말이 안 나온다구." "웃." 나는 은근슬쩍 루덴스의 배에 손가락을 쿡, 하고 찔렀다. "어찌됐든 이건 정말 굉장한 우연이군. 아니, 행운인가?" 루덴스는 후, 하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수배라도 할 참이었는데 말이야." "뭐?" 내가 조금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루덴스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기사들을 한 번 훑어보더니 무척이나 근엄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건 정말로 근엄한 목소리였다. 카민에게 '아가씨' 어쩌고 할 때의 그런 목소리도 아니었고 이레니아에게 하는 그 닭살돋는 목소리도 절대 아니었다. 그건 정말로 근엄한, 근엄한 목소리였다!)말했다. "이 분들을 왕궁으로 모시고 간다!" -------------------------------------------------------------------------------- Back : 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8 (written by 카르민) Next : 3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6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0189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12th January 2002 20:39:52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6-01-2002 00:52 Line : 122 Read : 1311 [5]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8 -------------------------------------------------------------------------------- -------------------------------------------------------------------------------- Ip address : 211.220.15.157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마차 안은 한마디로, 시끄러웠다. 원래 레니와 루덴스 단 둘이서 타고 가기로 되어 있었다는 화려한 마차(창문에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세상에, 그림도 걸려 있었다. 옅은 흰빛이 마차의 바탕색, 옅은 은색으로 그 테두리를 장식하고 있다.) 에 갑자기 나와 카민, 라이메데스 게다가 에세렌까지 끼어 앉았으니 안 시끄럽고 베길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엉덩이 좀 치워!" "젠장! 네 녀석이 제일 엉덩이가 무거우니까 네 녀석 서서 가!" "뭐야!" 특히 카민과 루덴스의 티격거림은 정말 놀라웠다. 카민은 루덴스가 왕자니 이제부터 조심해야겠다느니 하고 말해놓고는, 마차 안에 들어서자마자 격렬한 반 루덴스 감정이 일어난 듯 버럭버럭 고함을 쳐댔다. 그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저면에는 루덴스가 마차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인격이 변했다고 말해도 좋을만큼 태도가 싹 바뀐 것에 있었다. "으헤헤, 이제 살았다. 폼 안 잡아도 되고. 휘유." 마차에 들어서자마자 루덴스가 한 말은 그것이었다. "아아, 살았다. 나도 우아한 척 안 해도 되구." 마차에 들어서자마자 이레니아가 한 말은 또 그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루덴스는 그런 우리를 향해 생글 하고 웃더니 말했다. "뭐, 이래뵈도 왕자라서 폼을 좀 잡아야 되거든. 가끔 이레니아가 오는 날에는 닭살 돋는 연기도 좀 해야하고 말이지. 그렇지, 이니?" "맞아, 키세온님." 이니? 맞아 키세온님? 이니는 이레니아의 또다른 애칭이라고 치고 넘어가자. 그런데 맞아 키세온님은 또 뭐냐? 그 앞뒤 안맞는 어설픈 것은? 맞아요 키세온님이라던가 맞아 키세온 둘 중에 하나로 해!! "그런데, 어떻게 아는 사이?" 이레니아는 신기한 듯 우리에게 말했고,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처음 만났을 때 저놈은 변태 치한으로, 카민에게 아가씨 운운하며 추근거렸지." "내가 언제!!!" 루덴스는 버럭 고함을 쳤고 이레니아는 순간 쇼크를 받은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카민의 무서운 눈빛을 받고나서야 농담이라고 말해주었고, 이레니아의 표정은 그 때가 되서야 펴졌다. "자세한 얘기는 궁에 도착하면 차분히 해보자구." 루덴스가 말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도착이다, 라고 루덴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창문 밖을 내려다보았다. 그 곳에는 꽤나 대단한 규모의 성이 있었다. 흰빛, 온통 흰빛으로 꾸며져 있는 그 성은 두 눈에 다 차지 않을 정도로 높았고, 팔로 다 잴 수 없을 만큼 넓었으며 마주보기엔 너무 빛나고 있었다. 성 자체가 반짝반짝이는 것을 보니 아주 작은 보석을 셀 수 없이 많이 박아 넣었음이 분명하다. "오오!" "대단해요!" 카민과 에세렌이 감탄을 해댔다. 하지만 난 그다지 감탄하지 않았다. 배 같은 거야 뭐,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감탄을 하는게 당연했지만, 저런 성 같은 걸 보고 감탄할만큼 나는 촌스럽지 않다. 무엇보다, 아이에드의 성은 저 것보다 더 컸거든? [블러드 아미에 비하면 좁아.] 라이메데스 역시 태연스럽게 한마디했다. ◇ ◇ ◇ 성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꽤나 이상한 것을 목격했다. 수많은 남자들이 그것이었는데, 그들은 좌우로 검을 휘둘러가며 황궁 정원에서 검연습을 하고 있었다. 보통 이것은 말이 안되는 것 아닌가? 황궁이면 마계로 따지면 마왕성 같은 곳인데 그런 데서 무술을 닦고 있다니. 루덴스는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그 곳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레니아는 도중에 루덴스의 아버지 (뭐, 이 나라 국왕이 되는건가?)에게 인사를 하러 가야한다며 사라져 버렸다. 루덴스는 생긋 웃으며 우리를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그 방은 꽤나 작고 아담했다. 그리고, 방음 장치가 잘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주변을 휙휙 훑어보았다. 물론, 훔쳐 보는 사람 따위는 없었다. 그 방은 완전 범죄의 장소였다. "뭐, 각오는 했겠지?" "뭘?" 나는 방문을 닫아 잠근 루덴스에게 말했고, 루덴스는 눈을 멀뚱하게 뜨며 대꾸했다. 나는 주먹을 몇 번 꺾은 다음, 작게 말했다. "몇 대는 맞아야지, 왕.자.님. 설마 그냥 넘어가려고 했어? 얘기는 맞고 해도 돼." -------------------------------------------------------------------------------- Back : 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9+공지 (written by 카르민) Next : 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7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0189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12th January 2002 20:39:54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6-01-2002 00:53 Line : 312 Read : 1609 [6]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9+공지 -------------------------------------------------------------------------------- -------------------------------------------------------------------------------- Ip address : 211.220.15.157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아니, 잠깐." 루덴스가 질린 표정을 지으며 한발자국 물러섰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난 녀석에게 '죽지 않을 만큼 때린다'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그날 똑똑히 보여주었다. "칼레들린님!!" 보다보다 못했는지 에세렌은 내 팔을 붙잡고 버럭 고함을 쳤다. 내 손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루덴스는 얼른 일어나 부다닷 뒤로 물러섰다. 녀석의 눈 두덩이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어 눈에 무엇인가를 쓴 것처럼 보였다. "놔라!!" "칼레들린님!! 왕자님을 죽이실 생각입니까? 왕자님입니다, 왕자님!!" "나도 알아." 나는 에세렌의 팔을 휙 뿌리쳤다. 「이봐, 칼레들린.」 머릿속으로 라이메데스의 전음이 들려오자, 나는 다시 한 번 짜증이 나서 소리쳤다. 「젠장할! 그러고보니 네 놈! 네 놈은 이 녀석이 왕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 「그럴 리가.」 생글, 웃어 보이는 저 얼굴은 너무나 능글맞아 보여서 당장에 달려가서 밟아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라이메데스는 한참동안 싱글싱글 웃다가 갑자기 말했다. 「아아, 그리고……. 루덴스 말인데, 손으로만 때리면 충격이 덜할 테니 발로도 좀 밟지 그래?」 …사악한 놈. "그만 때려!" 루덴스가 버럭 고함을 쳤다. 녀석은 자신의 가슴을 양팔로 방어하며 깊게 숨을 들이내쉬었다. 그리고 원망에 가득찬 눈으로 말했다. "너무 하잖아, 칼레들린! 날 정말로 죽일 셈인가!" "……더 맞고 싶어?" "아니요." 갑자기 비굴해지는 루덴스의 목소리에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루덴스는 내가 그만 때릴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챘는지 활짝 웃었다. "그건 그렇고 정말 굉장한 우연인데. 이레니아의 일행이었다니……. 난 널 찾아서 전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뭣하면 사람을 풀어서라도 너희들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너희가 찾아와 주는군." "무슨 볼 일이 있었는데 그러지?" 내 질문에 루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차차 얘기로 하지. 그런데 이렇게 쉽게 다시 만날 줄은 몰랐군." "나는 만나고 싶지 않았어." 갑자기 중얼거리듯 들려온 카민의 목소리에, 루덴스는 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더구나 사람 보는 눈이라곤 조금도 없는 네 놈이 왕자라니." 카민이 투덜거리듯이 한 말에, 루덴스는 머리를 휘휘 저었다. 놈은 우리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지만, 아무도 앉지 않았다. 루덴스는 깊고 깊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묻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고보면…… 왜 왕자가 사람을 찾으러 다닌 거지?" 나는 물었다. 녀석과 만났던 그 때, 그러니까 이 놈이 시이나와 다니던 그 때 루덴스는 분명 리니아나라는 여자를 찾고 있었다. 루덴스는 내 질문에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영감탱이가 날 더러 찾아오라고 하는데 어떡하냐? 영감탱이한텐 왕자고 뭐고 없어. 거슬리면 바로 죽어." "……영감탱이?" 나는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루덴스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내 아버님 말이다." "……." 저 녀석이 왕자면 이녀석 아버지는 당연히 국왕이군. 영감탱이라…… 상당히 재미있는 말이야, 으음. "그건 그렇고, 너희들은 여기 웬일이지? 거듭 말하지만, 난 지금 굉장히 놀라고 있다고." 루덴스는 놀랍다는 어조로 말했다. 나는 쳇, 하고 중얼거렸다. "그럴 일이 있다." "아, 잠깐! 그러고보니……." 에세렌은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바닥을 딱 치더니, 주섬주섬 말을 꺼냈다. "그림 말이예요, 그림! 그림, 이분께 드리면 되는 거죠?" "그림?" 나는 의아하게 되물었다가 한참만에 그 뜻을 파악하고 손바닥을 쳤다. 아, 그렇군! 맞다. 아크로아, 그 빌어먹을 여자가 우리에게 그림을 갖다주라고 했었지. "그림이라니?" 루덴스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나는 에세렌이 들고 왔던 짐 중에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나는 네모 반듯한 그 짐을 갖고 와 루데느를 향해 집어 던졌다. 루덴스는 이게 뭐냐? 라는 눈으로 그 자루를 열다가 갑자기 굳었다. "……뭐야, 이게?" 검은 머리칼의 너무나도 아름다운 소년과(나다, 나!) 빨간 머리에 계집애처럼 생긴 소년이 그려진 그림이 나오자, 루덴스는 놀란 듯 물었다. "그림." "나, 나한테 너희 그림을 주는 저의가 뭐지?" 루덴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어조로 말하면서도 그림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어느 순간, 경악한 표정으로 크게 외쳤다. "으억 칼레들린! 이 야시시한 포즈는 뭐냐!" "……닥쳐." 나는 녀석의 입을 지그시 밟았다. 루덴스는 그 그림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림 자체는 대단히 훌륭한 솜씨인 듯 한데……. 아?" 어느 순간, 루덴스는 놀란 듯이 그 그림의 끝부분을 보더니 고함을 쳤다. 그리고 외쳤다. "아크로아 릴리스! 그녀 것이로군?" 루덴스는 손바닥을 딱 쳤다. 그리고 우리들을 보았다. "뭐가 어떻게 된거지?" "……몰라. 지나가던 우리를 다짜고짜 붙잡더니 모델을 해달라고 해서 해줬고, 그 그림은 크레티아 황실이 그려달라고 한 거니까 그걸 황실에 갖다주면 돈을 줄 거라고 했다." 루덴스는 멍하니 그림을 보다가 말했다. "아아, 그래. 얼마 전에 이카루 최고의 화가인 아크로아 릴리스에게 미소년 그림 두 장을 그려달라고……. 이거…… 정말 엄청난 우연이군. …아아, 정말 '디모세이의 장난질' 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 말하던 순간 루덴스는 멈칫했다. 그는 갑자기 그림에 시선을 돌리더니, 그림들을 하나하나 뚫어지게 훑었다. 그리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미소년을 그려달라고 했는데 왜 모델이 너희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미소년이니까." 카민과 내가 동시에 외쳤고, 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루덴스는 한참동안 뭔가 생각하는 눈치더니, 그림을 소중히 감쌌다. 그리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대듯 말했다. "이걸로, 정확히 100점이 모인 셈인가." "뭐가?" 자기딴에는 조용히 한 말이지만, 나한테는 다, 전부 다 들린다. 그는내 갑작스러운 질문에 헛, 하는 헛바람을 들이키더니 생긋 웃었다. "아, 아무 것도 아니다. 혼잣말이다, 혼잣말." 나는 루덴스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흐응, 하는 소리를 냈다. "이봐." "응?" "미소년 그림을 그려오라고 한 저의가 뭐야?" 순간, 루덴스는 굳는 듯 했다. 녀석은 하하, 하고 어설프게 웃으며 나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그건……." "……황실에 남색가라도 있나?" 라이메데스는 무척이나 초연하고도 심드렁한 어조로 물었다. 나는 순간 얼굴이 빨개진 카민과 루덴스를 볼 수 있었다. 루덴스는 험험, 하고 기침을 하더니 외쳤다. "그, 그럴 리가! 내가 알기로, 크레티아 성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남색가는 거의 없다." 호오? '거의' 없다고? "거의 없다라? 그럼 한 명은 있단 건가?" 라이메데스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루덴스는 곤란한 듯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놈은 험험, 하고 몇 번 헛기침을 했다. "그 그림은 뭐하는데 쓸 거지?" 나는 최대한 환하게 생글 웃으며 질문했다. 루덴스는 머리를 슬슬 긁으며 답했다. "……굳이 알 필요가……." "그 그림 모델은 나하고 칼이야. 이상한데 쓴다면……." 스르릉, 하는 소리가 나서 봤더니 카민이 검을 뽑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루덴스는 다시 한 번 히익, 하는 소리를 내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잠시 카민의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입을 열었다. "……선물용이야." "선물용? 거봐! 역시 너, 그런 그림들을 모아서 변태한테 줄 셈이로군……!" 나와 카민이 광분해서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키세온 전하. 폐하께서 찾으시옵니다." 문밖에서 자그마한 소리가 났고, 순간 루덴스는 옳다구나 싶었는지 벌떡 일어섰다. "하하하하. 난 이만 가봐야겠어! 내일 봐, 친구들!" "……치사한 놈." "…내가 왜 치사해?" 루덴스는 그대로 달려 나가버렸다. 놈은 가기전,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내게 말했다. 우리는 이빨을 부득갈며 내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 100회!!! 가 가까워져 오고 있습니다>_< 바로 다음 회로군요. 얼마 전에 100회가 다가오고 있네요∼ 라는 제목의 메일을 받았는데요. 내용이 칼레들린 패러디였습니다. 읽고…… 너무 놀랐습니다-_-;; 칼레들린과 데스의…… 커험……민망하군요(덧, 야오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카페에서 읽은 카민a칼은 너무 충격이었습니다;; 어찌됐든 레인님, 보내주신 것은 아주 재미있게 읽었구요^_^ 음∼ 제가 오늘 왜 이렇게 말을 늘리냐하면. 100회 이벤트으으으으∼를 하려구요; 아직 이벤트를 하기엔 내용의 진전이 없고 중요한 사건들도 별로 나오지 않았기에-_-;;(자랑이냐! 버럭!) 130회로 미룰까∼ 난 원래 13이란 숫자를 좋아하니까∼ 라고 마음대로 생각해버렸던 카르민입니다;; 하지만 역시 100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T_T 그래서 이벤트를 합니다. 마감은 다음 주 금요일까지^_^ 흔하지만, 역시 캐릭터 인기 투표를 할게요(그것말고 생각나는 게 없답니다-_-;;) 1. 베스트 캐릭터(당연히 한명이지요)와 그 이유.(너무 식상하죠?=_=;; 그리고 누가 차지할지도 뻔한……=_=lll) 2. 워스트 캐릭터(역시 한 명입니다)와 그 이유.(아직 진정한 악당의 면모가 나오지 않았지만, 그냥 짜증나는 녀석……을 골라주세요;;;) 3. 커플링……(하지만 여자 캐릭터가 많이 없잖아!! 라고 외치는 당신!! ㅡ_ㅜ죄송합니다. 그리고 의외로 찾아보면 곳곳에 여자들 있습니다T^T)맺어주세요, 어찌돼었든-_-; 베스트 하나, 워스트 하나로! 4. 반마족의 캐릭터들 중에서 제일 이중성격으로 보이는 녀석과 그 이유∼♡(필살 하트 날림-_-;;) 5. 앞으로의 이야기에 대해서 바라는 것이 있거나 카르민에게 할 말이 있으시다면 써주세요^^(물론…… 엔딩은 변하지 않겠지만 중간중간 참고는 할 수 있겠지요^.^;;;) 이 정도로 해둘까요?^_^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_〈 메일이 한통도 안오면 난…… 더러운 낙동강물에 빠질거야……ㅡㅜ carmine12@hanmail.net입니다∼ 마니마니 보내주세요. 쓰는데 몇 분도 안 걸리잖아요ㅡ.ㅜ -------------------------------------------------------------------------------- Back : 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0 (written by 카르민) Next : 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8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0189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12th January 2002 20:39:57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7-01-2002 16:38 Line : 469 Read : 1397 [7]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0 -------------------------------------------------------------------------------- -------------------------------------------------------------------------------- Ip address : 218.146.234.24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100화!! 입니다. 이거이거, 너무 기뻐서 죽을 지경이군요. (설마 정말 기뻐서 죽는다고 생각하시는건=_=;;) 후후후후후후... 이벤트 건은 토요일날 발표할게요. 그런데... 당신...? 당신 말입니다. 왜... 참여를 안 해주시는 거지요?(스산한 목소리) 99회에 공지...를... 읽고...이벤트... 참...여를... ...험험!! 비... 비굴해지고 있어, 안돼!!!(자신에게 외치고 있음;) 칼레들린도 이제 중반에 접어 들고 있고(정말? 정말!-_-;;) 곧 안 있어 굉장히 중요한 사건도 있을 거고.... 제 소원은 제발... 130회 분량 내에서 칼을 각성시키는 겁니다...T_T 그래야 4권 분량 안에서 칼이 각성한다는 약속이 지켜질테니까;; 뭐... 칼의 각성으로 모든 일이 일단락 되는 건 절대로 아니지만~ 우하하하!! ...잡설이 길었군요. 100화, 시작합니다. ------------------------------------------------------------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루덴스는 우리를 찾아 왔다. 루덴스는 어제와 그리 다를 것이 없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군청색을 띄고 있는 기다란 예복이었는데, 나는 그 옷을 보면서 왜 루덴스 같은 추남(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못 생겼거든?)에게 저런 옷을 입혀서 옷감을 낭비하는 걸까, 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옷감 낭비하는 걸로 따지면 루덴스의 옆에 착 달라 붙어서 방 안에 들어온 레니도 만만치 않았다. 레니는 정말이지 배 위에서와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파란색 머리카락은 있는 힘껏 힘을 주어 위로 잡아 당겨 그 모양을 고정시켜 놓고(저 머리한다고 죄 없는 머리카락이 얼마나 뽑혔을까?), 귓가에는 붉은 색의 커다란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화려한 귀걸이를 걸었으며 목덜미에는 번쩍이는 금색의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다. 평범한 여행자 복 같은 것을 자기가 언제 입고 다녔냐고 따지기라도 할 듯한 녀석의 옷차림이란, 과히 감탄을 불러 일으킬 정도였다. 하늘하늘하게 흘러내리는 흰색의 드레스 가득 잔뜩 프릴이 박혀 있었고, 그 곳곳에는 리본도 매달려 있었다. 무엇보다도 대단한 것은 허리라인에서부터 발끝에 이르는 곡선이었다. 그것은 잔뜩 부풀어올라 있어서, 나는 저 드레스를 입고도 문 사이에 끼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박수마저 치고 싶을 정도였다. "호오∼." 카민은 문안으로 들어서는 레니의 모습을 보고 잠시 감탄한 듯 박수를 쳤다. 그러자 레니가 훗, 하고 입 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후훗, 어때? 오늘에야 내 아름다움을 발견한 거야?" "……옷이 아깝다." 하지만 카민은 레니가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같잖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레니는 말할 것도 없이 버럭 화를 냈다. "뭐라고!!" "아, 아이참. 카민님……. 아, 아, 아리따운 숙녀 분께 그리시면 안됩니다. 사, 사과하시죠." 에세렌은 간곡한 어투로 말하곤 카민의 어깨를 투닥거렸다. 힐끔힐끔 레니의 눈치를 보는 걸로 봐서 아직도 자신을 사형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군. 정말 이 녀석은……. 구제불능이라는 말 말고는 설명할 단어가 없군, 그래. 카민은 에세렌의 말대로 레니에게 사과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 듯 고개를 돌린 그 자세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레니는 그런 카민을 노려보며 한참을 씩씩거렸다. 루덴스는 그런 우리를 한참동안 보고 있다가 살짝 웃으며 앞에 놓여 있던 갈색의 의자에 앉았다. 레니도 루덴스의 옆에 살며시 앉았다. "자, 그럼 어제 못 한 이야기를 마저 할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칼레들린. 내가 왜 너를 찾으려고 했냐 하면……." 루덴스의 말에 나는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호오? 너와 내가 나눌 첫 번째 이야기는 그게 아닐텐데?" "에?" 루덴스는 잠시 얼빠진 목소리를 내다가 한참만에야 내 말의 뜻을 깨달았는지 헤헤헤, 하고 바보처럼 웃어버렸다. 나는 녀석이 웃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차갑게 말했다. "……웃지마. 정들어." "정 좀 들어도 되는데." 루덴스는 고개를 똑바로 올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녀석의 턱을 한 대 갈기려다 레니가 나를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너, 이 사람 때리면 나한테 죽어!! 라는 눈이었다.)보고, 억지로 참았다. "닥치고, 아크로아의 그림에 대해서 말해." 나는 그 말과 함께 루덴스를 똑바로 보았다. 루덴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머리를 감싸 쥐었다. 녀석은 뭔가 고민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갑자기 고기를 들어 옆에 앉은 레니를 힐끔 보았다. 나는 계속해서 머뭇거리는 루덴스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그리고, 녀석의 면상 바로 앞에서 아주 예쁘게 살짝 웃어 주었다. "네 약혼녀 앞에서 터지고 싶은 건 아니겠지?" 속삭이듯 작게 말한 그 소리에 루덴스는 잠시 굳었다. 뭐, 석화 됐다는 표현이 옳겠지. 녀석은 뻣뻣한 자세로 고개를 돌려 다시 레니를 보았다. 레니는 동그란 눈으로 그런 루덴스를 보았다. 레니의 푸른 눈동자를 보고 있던 루덴스는 깊은 신음성을 삼켰다. "크으…… 마, 말할게." 진작 그럴 것이지. 나는 루덴스의 어깨에 올려져 있던 손을 치웠다. 루덴스는 머리를 깊게 숙인 다음, 주저주저 하며 입술을 열었다. 녀석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대신, 비밀은 지켜줄 수 있겠지?" "비밀?" "그래, 비밀." 나는 그 비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그러마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덴스는 다른 이들의 얼굴도 둘러 보았다. 카민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에세렌과 라이메데스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덴스는 그제서야 조금 안심을 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미소년 그림을 모았던 이유는……." 루덴스는 후욱, 하고 숨을 몰아쉬더니 진지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나의 조국, 크레티아를 지키기 위해서다." "……." 녀석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나는 순간적으로 화를 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 버렸다. 우리들 사이에는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고, 왜 그런 침묵이 왔는지는 설명을 해 줄 필요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천천히 바닥에까지 깔리기 시작하는 그 어두운 침묵을 깨뜨린 것은... 나였다. 나는 히죽, 입술을 들어 올리며 루덴스를 노려보았다. "……죽을래?" "응?" 루덴스는 내가 한 '죽을래?' 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살짝 떴다. 자기 딴에는 최선을 다해서 설명을 했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는 녀석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조금 더 환하게 웃어 주었다. 내 웃는 얼굴이 너무 예뻐 보였는지 루덴스는 히익, 하는 소리를 냈다. "호오? 미소년 그림이 너희 조국을 지켜준다고?" 루덴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헛소리 작작해." 나도 모르게 이빨이 뿌득, 갈리는 소리가 났다. 레니는 그런 내 태도가 못마땅했는지 뭐라고 외치려 했지만, 그 전에 루덴스에 의해 저지 당했다. 루덴스는 벌떡 일어서려는 레니의 앞을 팔로 가로막은 후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설명이 좀 부족했던 것 같지만, 내 말은 사실이다." 나는 호오, 하는 소리와 함께 뒤를 돌아보았다. "카민! 준비는 돼 있지?"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 카민은 차분하게 대꾸해왔다. "……저 놈 말 끝나는 순간부터 검 뽑아놨다." 나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여 준 후 다시 루덴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루덴스는 자신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오는 카민을 보며 허억, 하는 소리를 냈다. "자, 잠깐!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전부 설명할 테니까 일단 거기서 멈춰!" 카민은 그 말에 다가오다 말고 멈춰 섰다. 나는 루덴스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를 듣고 놀라지는 마라.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이 이야기는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해." "……." 변태한테 그림 주는 거 아니었어? 무슨 무덤까지? 루덴스는 더욱 진중한 얼굴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크레티아는 동령에는 빛의 엘프들이 거주하는 에디 에이렌의 숲이 있고, 서령에는 샤데린 산이 있다. 고대로부터 크레티아의 에디 에이렌 지방은 '풍요의 고장'으로 이름이 높은 곳이었지만, 서령은 그 반대였어. 샤데린 지방은 살기가 무척 힘든 곳으로 유명하지. 척박한 땅에 기후도 매우 안 좋아. 그래도 샤데린 지방에는 그 어려운 자연 환경을 극복하면서 인간들이 모여서 살고 있었다." 있었다? 과거형이로군? "…3년 전까지만 해도." 뭔가 대단한 이야기가 나올 듯한 전개에, 나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루덴스를 보았다. 루덴스는 입술을 지그시 물더니 온갖 폼을 다 잡고 말했다. "그러니까, 악마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야." 나는 갑자기 튀어나온 그 악마라는 단어에 잠시 당황했다. 나는 루덴스의 입을 빤히, 그러니까 아주 빤∼ 히 보았다. 악마? 방금 악마라고 했나? 악마라면 당연히 마족을 말하는 거맞지? 인간들은 우리를 악마라고 부르는 걸 좋아한다고 했으니. "악마라니, 그게 대체 뭐지? 그리고 그거랑 미소년 그림은 대체 무슨 상관이야?" 내 질문은 아마도 여기 있는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차근차근 설명을 하지, 칼레들린." 루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샤데린 산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샤데린 지방은 앞서 말했듯이 그 척박한 기후 때문에 인적이 드문 곳이긴 했지만, 인가가 아예 없는 곳은 아니었다. 샤데린 지방은 사방이 모두 산이라 매우 고립적인 형태이고, 그래서 황실에서는 그 지방에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지. 그런데 어느 날인가, 황실에 거의 다 죽어가는... 뭐, 쉽게 말하면 걸어다니는 시체가 하나 나타났다. 그 놈은 경비원 들에게 딱 두 마디만 하고 죽었다더군. '샤데린……. 악마다.' 라고 말이야." 루덴스는 잠시 숨을 골랐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녀석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나 부려먹기를 밥 먹는 것보다 좋아하는 영감탱이는 그 때도 나한테 일을 떠맡겨 버리더군, 젠장. 그래서 나는 관병을 이끌고 샤데린으로 갔다. 그런데, 가보니 정말 가관이었지. 산을 하나 넘어 샤데린 지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코를 찌른 것이 시체가 썩는 냄새였으니 말이다. 인가(人家)? 그 따위 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지. 당황한 우리는 상황을 보고 받기 위해 잿더미가 된 그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거기에 남아 있는 거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정말 절망적이었지. 결국 포기하고 돌아가려는데, 유네트(자비와 치유의 신이지 아마?)의 신관 중 하나가 회군을 막더군. 아직 샤데린 산에는 가보지 않았으니, 거기도 가야 한다는 거였다." 루덴스는 다시 한 번 길게 호흡했고, 우리는 다음 말이 이어지길 기다리며 루덴스를 뚫어져라 보았다. 루덴스는 한참 만에야, 조금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샤데린 산에서 본 것은「악마」였다." 루덴스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나는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심장 쪽이 불타는 듯한 느낌이 바로 그 것이었다. 나는 잠시 마른침을 삼켰다. 뭐지? 뭔가, 이 느낌은? 뭔가……. 뭔가가 ……. 두근.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라서 몸을 굽혔다. 뭔가 몸이 급격히 굳는 듯한 느낌이었다. 세차게 두근거리는 그 심장소리에 놀란 나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왜 그래, 칼레들린?" 카민이 나를 툭 쳤다. "아, 아무것도." 나는 다시 몸을 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루덴스가 짖궂은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녀석은 내 얼굴을 보며 씩 웃어 보였다. "겁먹은 거냐?" "웃기고 있네." 나는 그런 녀석을 향해 역시 씨익 하고 웃었다. 겁먹긴 누가 겁먹어? 인간이 인간 얘기 듣고 겁먹는 경우 봤냐? "닥치고 말이나 계속해." 나는 루덴스의 입을 지그시 밟으려다 말고(내가 발을 올리려고 하는데 레니가 나를 노려봤단 말이다!)낮게 말했다. 루덴스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정말, 뭐라고 설명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다. 살아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던 샤데린 지방을 헤매던 우리는…….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아마……. 우리를 불러내기 위해 「악마」가 불었던 거겠지. 그건 피리 소리였다." 피리소리? 마족이 '피리 소리' 라고? "갑자기 들려온 피리 소리에 이끌려 우리는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정말로…….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정말로 아름다운 이를 보았다. 지금 생각해도 감탄이 절로 나는 얼굴이었지. 키는 늘씬하게 컸고 병적일 정도로 하얗게 도드라진 얼굴에, 입술은 너무 붉어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지. 내 참, 아직도 이해가 안가는 게, 악마가 그렇게 예쁘게 생겼도 되는…… 우갸갸갸!!" 루덴스는 말을 하다 말고 몸을 뒤틀었다. 레니가 루덴스의 팔을 있는 힘껏 잡아 비틀어 꼬집고 있는 모습이 들어와,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말았다. "크으, 이니……!" "약혼녀 앞에서 다른 것! 을 예쁘다고 말하는 건 안되지요, 키세온님?" 레니는 씩 웃으며 말했는데, 표정이 여간 살벌하지 않았다. 꿀꺽, 하고 양 사방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면 다들 긴장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루덴스는 아하하, 하고 어설프게 웃은 후 그, 그럼 하고 말했다. 레니는 그제서야 루덴스를 비틀어 꼬집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아, 아…… 그, 그래. 얘기나 계속하지. 우리는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우갸갸갸!! 잘못했어, 이레니아! 그……. 험험, 그렇게 생긴 사람이 악마일거라고는 전혀 알지 못하고, 사정을 물으려고 접근했지. 그러자 그 악마가 피리에서 입술을 떼더니, 살짝 웃더군. 그 모습 역시 매우 아름…… 우갸갸갸갸갸갸!!" 레니는 차분한 얼굴로 비명을 지르는 루덴스의 다리를 꼬집고 있었다. 도, 독한 것! "……그 우갸갸갸는 빼고 말을 할 수 없겠나?" 라이메데스가 중얼거리듯 한마디했다. 루덴스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찌됐든 말이다. 그 악마는 우리가 '어찌된 일이지요?' 라고 묻기가 무섭게 공격을 해왔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공격이었고, 우리는 당황해서 반격조차 제대로 할 시간이 없었지. 뭐, 내 생각에는 반격할 정신이 있어도 당해낼 것 같지 않았다만……. 하여튼, 같이 갔던 기사들은 나를 감싸고 대부분 죽어 버렸다. 특히……. 부상자를 위해 데려갔던 신관들은 정말로 잔인하게……. 찢겨죽었어." "으웃." 뒤에서 나지막하게 에세렌이 신음소리를 냈다. 루덴스는 그러나 아랑곳 않고 덤덤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나 덤덤한 그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기사들도 거의 다 죽고, 남아 있는 자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어졌을 때, 악마는 웃으며 말하더군. '저 바보 같은 인간들이 모두 감싸는 걸 보니, 네가 꽤나 높은 놈인가 보군. 너를 살려줄 테니, 나와 계약하지 않겠는가? 뭐, 싫다면 나는 이 나라를 조금씩 조금씩 먹어 치우면 되고.' ……솔직히 그 때 나는 너무 무서웠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겁쟁이라고 말해도 반박할 말 따위도 없어. 나는 필사적으로 그 악마에게 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지. 그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생각도 나지 않아." 일순 나와 루덴스의 눈이 마주쳤다. 놈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내 목숨과 교환하기로 한 그 악마의 조건이라는 게, 정말로…… 황당한 거였다." "……뭔데?" 카민이 성급하게 물었다. 루덴스는 험험, 하고 낮게 헛기침을 하더니 조금 민망한 투로 뱉어냈다. "1년에 한 번씩 자신에게 12명의 미소년을 보내 달라는 것… 이었지, 아마." 다시 한 번 우리들 사이로 젖어드는 정적. 추울 정도로 싸늘한 정적이다. 그 정적은 정말로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카민이 입을 열 때까지. "그…… 래서? 그걸…… 보냈나?" 카민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루덴스가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는, 샤데린 산에서 죽어버린 그 많은 양민과 기사들을 보고도 미소년을 보내지 않을 수 있었을 것 같은가? ……솔직히 말하면, 그 악마에게 달려들어 수만의 목숨을 잃는 것보다……. 1년에 12명의 미소년을 보내는 게 훨씬 나은 일 아닌가." "목숨은 소수와 다수의 경중을 따질 수 없습니다." 뒤에서 에세렌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물론 녀석은 조용히 중얼거렸고, 그걸 들은 것은 나와 라이메데스 밖에 없는 듯 했다. "그 미소년인가 뭔가 하는 것들을 그 악마에게 재물로 줬다, 이 말이냐?" 나는 살짝 인상을 쓰며 물었다. 루덴스는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다치고, 그럼 그림은 왜?" 루덴스는 코끝을 문질렀다. "아니, 그게……. 저번년도에 그 빌어먹을 놈이 그러더군. 미소년을 데려오면 1달에 한 명씩 꼭 죽이게 되는데……. 그러면 남는 게 없어서 좀 허무하다고. 콜렉션을 갖고 싶으니까, 다음부터는 미소년 그림 100점도 부탁해∼. 라고 했다는데 난들 어떡하겠나?" "……." 나는 잠시 루덴스를 빤히 보았다. 참,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는 것은 이럴 때 쓰는 말이 틀림없다. "잠깐." 그 때, 내 뒤에서 라이메데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라이메데스의 표정이 상당히 어두워 보였다. 라이메데스는 루덴스를 빤히 보며 천천히 물었다. "그 악마라는 놈……. 이름이 뭔지 아나?" "그건 왜?" "…내가 일전에 소문으로 들은 어떤 악마와 비슷한 것 같아서 말이다. 혹시 같은 인물인가, 싶어서." 나는 라이메데스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라이메데스의 얼굴은 조금 굳어져 있었다. 루덴스는 라이메데스의 말에 음? 하고 고개를 갸웃하며 한참 생각하는 눈치더니 어느 순간 아! 하고 무릎을 치며 말했다. "아, 맞다. 레이디안. 레이디안 유네…… 뭐라고 하던데? 이름이 빌어먹게도 길어서 다 못외웠지만." 그 순간 가뜩이나 굳었던 라이메데스의 얼굴이 싸하게 창백해지는 것을, 나는 본의 아니게 목격하고 말았다. -------------------------------------------------------------------------------- Back : 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1 (written by 카르민) Next : 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99+공지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0190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12th January 2002 20:40:01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0-01-2002 00:03 Line : 248 Read : 1285 [8]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1 -------------------------------------------------------------------------------- -------------------------------------------------------------------------------- Ip address : 218.146.234.17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레이디안……. 젠장할! 이 빌어먹을 자식이 마족 망신은 또 혼자 다 시키는군. 아이에드님께 그토록 경고를 먹어 놓고도 또! 이따위 짓을 저지르다니!」 「뭐?」 나는 머릿속을 가만히 울려온 라이메데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라이메데스는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입술을 짓이기듯 씹고 있었다. 「레이디안 유네샤 크로커스! 인간계의 역사책에 몇 백 년에 한 번씩은 꼭 등장하는 그 빌어먹을 이름! 마족의 이름에 먹칠만 해대는 놈이지, 젠장! '그 때' 도, '그 때' 도!! 언제나 자기 맘대로만 행동하는 자식! 몇 십 년 전부터 연락이 안 된다 했더니 또 이따위 짓을 하고 있었어!」 말을 하는 라이메데스의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입에서 불을 뿜을 수 있을 것처럼 화를 내는 라이메데스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난 눈만을 빼꼼히 들어 녀석을 빤히 보았다. 잘근잘근 씹히는 녀석의 입술은 핏기가 싹 가셔 있었다. 레이디안이라는 이름은 나도 들어본 적이 있다. 에세렌이 변태 마족 어쩌고 할 때 한 번 언급했던 이름이었으니까. 세이아나의 친구이자 미소년 수집벽이 있는 사이코 마족이라고 했던가? 그 자와 비교되자마자 라이메데스가 벼락같이 화를 내던 기억이 떠올라서 나는 피식 쓴웃음을 지어 버렸다. "아니, 잠깐만요. 지금 레이디안이라고 했습니까?" 뒤에서 조금 놀란 듯한 에세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세렌님, 그 레이디안이라는 자를 아시나요?" 카민이 살짝 눈을 뜨고 한 질문에, 에세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 마다요! 여신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할 마족 중에서도 가장 악독한 마족놈입니다! 몇 십 년에 한 번 꼴로 인간계에 강림해서 수십 명의 미소년을 납치, 감금하는 악질 중이 악질!" 에세렌은 난데없이 버럭 고함을 치고 한참 동안 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루덴스는 그런 에세렌을 보며 조금 놀란 듯 눈을 치켜 떴다. "아니, 그 악마가 정말로 마족이란 말이오? 악마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그건 단지 비유였고, 나는 단지 악독한 마법사라고만……."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 그런 이상한 취미를 가진 데다가, '레이디안' 이라는 이름이라면 분명히…… 그 변태 마족 입니다!" 에세렌은 단정짓듯 말했다. 루덴스는 조금 놀란 듯 한참동안 머뭇거렸다. 모두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응시한다. "아아, 몰라!! 그딴 거!!" 조금 어색한 분위기에서, 카민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녀석은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크러뜨렸다. 붉은 머리카락이 엉망진창으로 위로 솟을 만큼 정신없이 머리를 흐트러 뜨리던 카민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루덴스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루덴스는 붉은 눈을 매섭게 빛나는 카민을 보며 히익,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지만 카민의 손은 그런 루덴스의 어설픈 움직임을 놓칠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녀석은 냅다 루덴스의 멱살을 움켜쥐곤 씨익, 하고 웃었다. 레니가 손을 들어 막을 틈도 없이, 카민의 입이 열렸다. "난 이제 몰라. 마족이든 뭐든 상관없어. 뭐라도 좋으니까, 우리 그림은 빼." 루덴스는 카민의 말에 눈을 부릅뜨더니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건 안 돼! 출발이 바로 3일 후야. 안 그래도 그림이 도착하나 안 하나 조마조마하던 차에! 절대로 안 돼! 못 빼!" 카민의 미간에 가느다란 혈관이 돋아났다. "그래도 빼!" "못 빼!" "빼라고 했다!" "못 빼!" 카민과 루덴스는 한참 동안 서로를 노려보았다. 카민의 붉은 눈은 지금이라도 터져버릴 듯한 기색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후우, 하는 작은 한숨과 함께 터벅터벅 발을 움직였다. 루덴스의 멱살을 잡고 있던 카민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리자, 나는 그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나를 돌아보는 카민을 향해 난 싱긋, 하고 웃어 주었다. "됐어. 그 그림, 가져가게 놔둬." "말도 안 돼……!" 나는 눈을 부라리는 카민의 귀를 얼른 잡아당겼다. 카민이 우앗, 하는 소리를 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녀석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돈을 받아야지, 카민. 우리 이제 거의 빈털터리잖아. 그림을 줘야 돈을 받을 거 아냐? 너, 여기 나가면 굶는 거야. 설마 굶고 싶은 거냐?" 순간, 카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뭐? 구, 굶……."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카민은 말까지 더듬었다. 녀석은 몸을 한 번 크게 떨더니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한참만에 녀석이 으윽,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숙이자 내가 하는 모양을 유심히도 지켜보고 있던 루덴스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루덴스는 내 눈치를 슬슬 보며 카민의 등을 토닥거렸다. "카민. 아무래도 재정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내가 돈은 두둑하게 줄게. 그림, 나한테 넘겨." 카민은 무섭게 고개를 들었다가 흐흐흐, 하고 웃는 루덴스의 눈을 보며 멈칫했다. 카민은 주먹을 꼭 쥐더니 몸을 휙 돌려버렸다. 그러나 더 이상 뭐라고 말하지 않는 걸로 보아, 역시 저 놈은 변태마족의 손에 그림을 넘기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밥을 택한 것 같다. 루덴스는 카민이 제자리에 돌아가 털썩 주저앉자 그제서야 안심한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루덴스는 하하, 하고 크게 한 번 웃은 후 이번에는 나를 보았다. 나는 녀석이 내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 살짝 눈을 치켜 떴다. 그러자 루덴스가 나를 향해 지그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이제 우리 얘기를 해볼까, 칼레들린?" "무슨?" 내가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루덴스는 히죽 하고 웃어 보였다.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리라고 믿는다. 루덴스는 내 어깨에 양손을 올리더니 몇 번 그것을 두드렸다. 내가 불쾌감에 그 손을 치워 내려 하는데, 루덴스가 입을 열었다. "칼레들린한테만 할 비밀 얘기가 있으니 잠깐 밖에 나갔다가 오지." 뭐? 비밀 얘기? 무슨 말이야? 난 네 놈하고 할 비밀 얘기 같은 거 없어. 루덴스는 내가 뭐라고 생각하든 아랑곳 않고 주위를 죽 하고 한 번 훑어보았다. 저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튀어나온 것은 그 직후였다. "네가 칼레들린한테 무슨 비밀 얘기가 할 게 있다는 거지?" "허어? 있으니까 있다고 하지." 루덴스는 그 말과 함께 내 어깨를 슬쩍 밀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지, 칼레들린." 대체 이 놈이 나한테 무슨 비밀 이야기가 있다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들어봐야 나쁠 것은 없지, 라고 생각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덴스는 망설임 없이 걸어나가 문을 벌컥 하고 열었다. 붉은 융단이 깔린 복도가 바로 눈앞에 드러났다. 내가 그 곳으로 한 발을 옮기려는데, 뒤에서 내 움직임을 저지하는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기다려라, 칼레들린." 나는 움찔하며 멈춰 섰다. 돌아보니, 라이메데스가 아까보다 더 인상을 구기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런 놈을 보았다. 루덴스 역시 라이메데스를 한 번 돌아보다가 피식 웃었다. 루덴스는 검지로 라이메데스를 척, 하고 가리키며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이봐. 초면에 반말해서 미안하지만(역시 라이메데스가 로브를 벗으니까 알아보지 못했나보군.),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으니 반말을 하겠다. (아닐텐데, 네가 훨씬 더 나이가 적어. 저 놈은 너의 할아버지에 할아버지에 할아버지……. 젠장, 하여튼 그렇단 말이다!)난 칼레들린 죽이러 가는 것도 아니고, 짧게 얘기만 나누면 된다. 그러니까 쳐 잡아죽일 것 같은 표정은 그만 짓지 그래?" 라이메데스는 루덴스의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라이메데스의 태도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녀석을 향해 조용히 전음을 흘렸다. 「어이.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잠깐 갔다 올 테니까 기다…….」 「싫다.」 하지만 내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라이메데스는 무뚝뚝하게 말꼬리를 잘라 버렸다. 나는 조금 화가나서 인상을 썼다. 「……왜.」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잔뜩 인상을 구긴 라이메데스의 얼굴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녀석은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있는 인상 없는 인상을 다 긋고 있었다. 나는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 「불길한 예감은 무슨 얼어죽을. 무슨 불길한 예감?」 「그건 모르겠지만.」 라이메데스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는 어쩡쩡한 그의 대답은 그냥 무시하기로 하고 문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루덴스는 내가 바깥으로 나오자, 손을 들어 저 먼 복도를 가리키며 바깥쪽으로 가자는 표시를 해왔다. 나는 대체 이 놈이 나한테 무슨 비밀 얘기가 있어서 바깥까지 나가야 하는가 싶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이봐, 칼레들린! 기다려라!" 다시 한 번 뒤에서 라이메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 하고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돌아보니 라이메데스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라이메데스는 내 앞까지 오지는 못했다. 얌전히 뒤에 서 있던 에세렌이 갑자기 그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잠깐만요, 이데씨. 당신이 칼레들린님을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건 좀 과잉반응인 것 같네요. 루덴스님이 이상한 분도 아니고, 잠깐 갔다 오는 건데……." 나는 오랜만에(아니, 처음으로 인가?) 에세렌의 말에 동조했다. 라이메데스의 인상이 싸하게 굳어졌다. 에세렌 쪽으로 향한 라이메데스의 얼굴 표정은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도 없는 한마디를 만들어냈다. '닥쳐.' "……물론 시·종·으로서 칼레들린님을 걱정하는 마음은 모르는 건 아니지만, 너무 그러시면 칼레들린님도 답답하실 겁니다." 에세렌은 그 말과 함께 다시 한 번 생글 웃어 보였다. 라이메데스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고 그런 에세렌을 힐끔 보고 있었다. 녀석이 시선을 돌려 나를 보았다. 「……위험하면 불러.」 「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거냐?」 나는 쏘듯이 한마디 해주고 루덴스와 함께 바깥으로 나섰다. ---------------------------------------------- 조.......졸려서 죽겠습니다.... 한 편 더 있는데... 너무 졸려서... 줄 맞추기도........ 우아....... 내일.... 올릴게요..... 우아아아아암....ㅡㅜ -------------------------------------------------------------------------------- Back : 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2 (written by 카르민) Next : 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0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0190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12th January 2002 20:40:04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1-01-2002 16:42 Line : 297 Read : 850 [9]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2 -------------------------------------------------------------------------------- -------------------------------------------------------------------------------- Ip address : 211.220.125.135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어딜 가는 거냐?" 나는 앞으로 움직이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루덴스를 향해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러나 녀석은 내 질문에는 대답해주지 않고, 그저 묵묵히 발걸음을 움직일 뿐이었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잡았다. 녀석은 우갸갸갸, 하는 이상한 음을 내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내 말 못 들었냐? 어디 가느냐고 물었잖아! 대체 무슨 비밀이야기가 있길래 이렇게 멀리 가는 거지?" 내 말에 루덴스는 머리를 슬슬 긁었다. "칼레들린……. 험험. 사실은 말이지, 난 너 한테 할 말 같은 건 없어." "뭐라고?" 내가 놀라 소리를 지르자 루덴스는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한 번 두드렸다.(내 머리가 북이냐!!)녀석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사실은, 너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너를 찾으려 했던 건 그 사람과 너를 만나게 해주기 위해서야." 나는 그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했다. 무슨 말이지? 나를 찾는 사람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 없어. "꼭 너 혼자 불러 와야 한다고 해서 말이야. 조금만 더 걸으면 된다." 루덴스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누구? 누구라는 거지? 날 만나러 올 사람 따위는 없다." 루덴스는 가볍게 웃어 보일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나는 문득 심장이 세게 두근거림을 느꼈다. 대체 무슨 일이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데, 정말로 날 만나러 올 사람은 없다. 대체 누가 있다는 말이지? 녀석은 정원을 가로질러 나를 인도하고 있었다. 걷고 있는 녀석의 표정은 무척이나 근엄했다. '나 왕자요' 라고 광고하는 듯한 그 표정. 우웩, 그 표정에 나는 아예 기가 질려 버렸다. 카민의 앞에서 벌벌 떨던 그 바보 같은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마주칠 때마다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여오는 인간들(나한테도 같이 인사를 하는 건 무슨 이유지? 흠, 내가 너무 잘 생겨서 그런지 눈도 떼지 못하는군.)의 인사를 도도하게 받아넘기는 모습이 있다. "이봐, 루덴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훑어보아지는 주위는 꽤나 화려해서 나는 그다지 불평을 하지 않았다. 밟 밑에 밟히는 잔디를 따라 돌아가는 황금빛 정원은 아름답기 그지 없다. 성스러운 여인을 위한 하늘의 축복! 더러워진 모든 것을 정화하는 순백의 여신이여! 그대의 이름을 눈(雪)이라 부르리. 그 눈송이를 흩뿌려 둔 듯한 정원의 흰 꽃은 아름답게, 그리고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설화라 불러도 좋을 것 같은 그 이름 모를 꽃 위로는, 옅은 오후의 햇빛이 여린 입김을 불어넣고 있다. 흰 꽃 주위로 빙 돌아나가는 핑크빛의 기다란 꽃송이 역시 아름답기는 매한가지. 삐죽삐죽하게 위로 치솟은 푸른 잎사귀 사이로 수줍은 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그 꽃들의 미소는 나를 유혹이라도 하는 듯 반짝이고 있다. 이미 저물어가는 오후라 새벽의 이슬은 분명 메말라 버렸을 텐데도, 그 꽃들은 여전히 촉촉한 물기에 젖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한없이 싱그러워 보인다. "왜 그러지?" "너, 정말 레니를 좋아하냐?" 나는 꽃에 시선을 주며 물었다. 루덴스는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어느 순간 픽 하고 웃어 버렸다. "그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하고 약혼을 할까?" "그 말은 정략결혼은 아니라는 건가?" 나는 시선을 올려 루덴스를 보았다. 루덴스는 내 눈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루덴스는 한참동안 내 눈을 바라만 볼 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녀석은 나를 꿰뚫어볼 듯한 눈동자로 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침을 삼켰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감정이 녀석의 눈에 떠올라 있음을 나는 감지했다. 녀석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녀석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변했다. "너……." 루덴스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바짝 긴장해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레니한테 관심 있어?" "……." 휘청.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고함을 쳤다. "미쳤냐!!" 나는 우엑, 하고 손에 있는 것을 게워내는 흉내라도 내줄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것은 예의가 아님을 깨닫고(예의의 결정체인 내가 그런 짓이야 할 수 없지.)눈을 크게 떴다. "내 취향은 절대적으로 정상적이야!!" "……이레니아가 방금 그 말을 들었다면 네 두개골을 부쉈을 거야." 루덴스는 짧게 웃었다. 녀석은 그러고는 입술을 다물었다. 놈은 한참동안 뭔가 생각하는 듯 내 질문에 대한 똑바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난 계속해서 앞으로 움직이는 녀석을 따라 발을 움직여 나가면서 녀석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한참만에 움직이던 발이 멈추었을 때야, 녀석의 입술이 열렸다. "들어가 봐, 칼레들린. 난 앞에서 기다리지." "뭐?" 나는 루덴스의 말에 화들짝 놀라 앞을 보았다. 눈 앞에는 그리 높지 않은 탑이 하나 있었다. 녀석은 그 탑을 가리키며 들어가보라는 듯이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보며 물었다. "……대답을 회피하는 거냐? 너, 레니를 좋아하는 게 아니지?" "그럴 리가, 칼레들린. 대답은 나는 물론 그녀를 사랑해, 라고.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일단 들어가라." 나는 루덴스를 잠시 보다가 시선을 돌려 앞을 보았다. 뭐, 그래. 사실은 이레니아를 이 녀석이 사랑하든 말든 그건 나와 큰 상관은 없는 일이다. "...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건가?" 루덴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망설임없이 걸어가서 문을 휙하고 열었다. 사락, 하고 부드럽게 문이 열려 나갔다. 나는 거리낌 없이 들어섰다. 루덴스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런데. 대체, 누가, 날 불렀다는 거지? * * * * * * * * * * * * * * * * * * * 탑 안은 바깥과 마찬가지로 온통 흰색이었다. 나는 악취미, 라고 낮게 중얼거렸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여진 그 탑 안의 계단도 흰색이었고, 벽지도 흰색이었고 난간도 흰색이었으며 작은 창문의 틀 역시 흰색이었다. 나는 주위를 휙휙 돌아보았다. 그러나 넓은 공간은 한 가득 흰색의 침묵뿐이다. 나는 1층에는 방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시선을 위로 올렸다. 아무래도 이 계단 위로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가뿐하게 계단 위로 올라섰다. 기분이 조금 묘했다. 뭐랄까. 나라는 인물이 이 공간과 너무나 이질적이라는 느낌이 들었 달까? 너무나도 깨끗한 이 흰색의 탑 안에 들어오기에 나는 검었다.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이 탑은 희고. 나는 검다. 탑은 그 계단도 희고, 벽지도 희고, 모든 것이 희다. 내 눈동자는 검고, 머리카락도 검고, 마족이라 속성까지도 검지. 하지만 검은 나와 흰 탑의 괴리감을 맛보고 있다곤 해도 나는 탑 위로 올라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올라가자 또 하나의 큰 홀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 홀 역시 하얀색으로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다시 한 층을 올라갔다. 그러나 그 곳 역시 백색의 공간일 뿐이다. "……뭐 하자는 짓이야? 정말 꼭대기에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건가?" 나는 조금 허무하게 중얼거려본 후 다시 위로 올라섰다. 보통 사람이 이런 계단을 올라섰다면 발걸음 소리가 들렸겠지만 나의 우아함은 내 발걸음 소리마저 죽여 놓는다. 가뿐한 스탭을 밟으면서 나는 한 칸 한 칸 계단을 올랐다. 다음 층 역시 빈 공간. "슬슬 짜증이 나는군."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한 층 밖에 안 남은 듯, 계단은 짧아 보였다. 나는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차곡차곡 계단을 올랐을 때, 나는 드디어 내가 찾던 것을 발견하고 푸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문이 보인 것이다. 흰색의 공간에 마치 거짓말처럼 나타난 그 문은 역시 흰빛이었다. 하지만 그 문 옆 선반 위에 놓인 장미꽃이 백색공간의 단조로움을 깨뜨렸다. 핑크빛의 장미꽃. 로시엔이 특히나 정성 들여 가꾸었던 그 꽃. 꽃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던 나는 성큼성큼 앞으로 발을 내딛어 문 앞에 멈춰 섰다. 이 안에는 누가 있을까. 누가 날 찾았단 거지? "후우." 나는 가벼운 한숨소리와 함께 문에 손을 가져갔다. 순간, 바람이 앞쪽으로부터 불어 들어왔다. 눈 안에 비친 공간은 여태까지 이 탑에서 볼 수 있었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색채의 공간이었다. 알록달록한 색채의 공간. 나는 시야를 가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오른손으로 치우려 애쓰며 방안을 돌아보았다. "어서오세요." 순간,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분명 익숙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어디선가, 어디선가 흐릿하게 들어본 듯은 하지만 그다지 낯익지는 않은 목소리. 어디서 들어보았지, 이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바람이 멎어, 시야를 유린하고 있던 머리카락의 움직임이 멎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보았다. 눈 앞에서 살짝 미소 짓고 있는 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너…… 너는……?" ----------------------------------------------- 오늘이 이벤트 마감일입니다^_^ 이것 저것 읽어보면서 충격이 많은 이벤트였습니다-_-;; 결과를 보면 아시겠지만 말입니다.(아아아악!!) 헉헉. 어찌됐든 내일이 이벤트 발표일이니만큼, 오늘 자정까지 오는 메일만을 유효하게 취급하겠습니다. 언제나 사랑해주시고, 다독거려주시고, 독촉해주시고, 채찍질해주시는 여러분들께 감사합니다. 가끔씩은 자책도 하고, 이 것 저 것 다른 글에 바람도 피는(이상한 어휘로군;) 카르민이지만 역시 반마족은 제게 소중하군요. 참고로, 이벤트 결과 발표와 함께 림냥이 써주신 패러디도 올릴 생각입니다. 제목은 knock!knock!knock!(똑! 똑! 똑!)인데요. 정말 재미있습니다(읽고 충격과 함께 감동을;) 오랜만에 아이에드와 로시엔을 보시고 싶은 분들은(그래봤자 한 컷인가;)읽으시기를. 비록 한 컷 뿐이지만, 녀석들의 장난은... 엄청납니다. 칼레들린과 데스에게 그런... 험험; 이정도로 해두지요-_-;; 재밌었어요~~ 패러디 감사합니다, 림냥~♡ 패러디 공모 같은 것은 하지 않았는데, 100회 랍시고 패러디 보내주신 분들. (유리아님, 림님, 체리님, 그리고 카민군님^_^)모두 감사합니다. 카페에서 쓰시는 분들 것도 읽고 있답니다. 역시 감사해요! ㅠ_ㅠ 다음 편은 내일^^ -------------------------------------------------------------------------------- Back : 10 : 100회 이벤트 결과 발표~! (written by 카르민) Next : 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1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0190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12th January 2002 20:40:07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4-01-2002 15:13 Line : 325 Read : 1517 [13]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3 -------------------------------------------------------------------------------- -------------------------------------------------------------------------------- Ip address : 218.146.234.19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나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앞을 보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움직이는 하얀 커튼 아래에서 살풋 미소짓고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환상처럼 몽롱한 이 공간 안에서, 마치 환상처럼 몽롱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하얀 얼굴이 크로즈 업 된다. 거짓말 같이, 마치 거짓말 같이 드러난, 그〈얼굴〉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내 앞에 앉은 그녀가 물어왔다. 나는 홀린 듯한 발걸음으로 한 발자국 그녀를 향해 다가섰다. 무표정한 얼굴 위로 가닥가닥 실처럼 드리워진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은빛 폭포수를 담은 듯한 그 머리채가 햇살을 받아 올올이 빛나고 있다. 하얀 햇살을 그대로 품은 그 머리카락은 왠지 신비로워 보인다.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실로 따뜻해 뵈는 웃음이다. "아니, 모르겠는데. 누구냐?" 나는 환하게 웃어 보이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러자 여태까지 부드러운 웃음으로 나를 마주하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싸하게 굳었다. 그녀는 훗, 하고 가볍게 웃어 보이더니 자그맣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마치 알아보는 것 같은 얼굴로, 참……. 사람을 민망하게 만드시는군요." 그녀의 원망하는 듯한 말투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누구지? 나랑 만난 적이 있었던가?" 분명 낯이 익은 목소리였고, 얼굴이었다. 하지만 기억 속에 형상화는 되지 않는다. 이상하군. 머리 좋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얼굴이라니. 내 말에 그녀의 눈이 단박에 서늘하게 바뀌었다. "네에, 못 알아보시겠죠. 저는 원체가 <평범>한 사람이니까요. 예쁘지도 않고 귀엽지도 않고 깜찍하지도 않으니 못 알아보시는 게 당연하겠지요. 아아, 당연하고 말구요. 너무너무너무 당연해서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군요." 그냥 솔직하게 자신이 누구인줄 못 알아보는 내가 원망스럽다고 말하는 편이 덜 무섭겠군. 눈 치켜 뜨고 이빨 뿌득뿌득 갈고, 손톱으로 탁자 박박 갈아가면서 저렇게 말하면 그 말을 누가 믿겠냐? "……그 손톱 갈아서 날 할퀼 샘이 아니라면 그만 좀 갈지 그래?" "할퀼 생각입니다만." "……." 나는 너무나도 냉철하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벙찐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한참동안이나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은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진초록 눈동자가 보인다. 아주 평범해 보이는 얼굴.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는……. 잠깐? 평범이라고? 나는 순간 아,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맞다! 그 여자다. "혹시……. 저번에 나하고 카민한테 점을 처줬던 그 점성술사인가?" 내 질문에 열심히 손톱을 갈아대고 있던 그녀가 부스스하게 고개를 들었다. 나는 왠지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을 물러섰다. 그녀가 피시식, 김 빠지는 웃음을 지다. "알아봐 주시니……. 너무너무 감사하군요." 정말로 감사하다면 갈고 있는 그 손톱부터 좀 치워줄래? "대체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날 만나고 싶어했다는 사람이 너인가?" 그녀가 누구인지 생각이 나자마자 여러 가지 의문들이 머릿속을 뚫고 들려온다. 린은 내가 해대는 질문을 말없이 듣고 있다가, 어느 순간 조용히……. 아주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일단 앉으세요." 나는 흥,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앞에 앉았다. 린은 나를 한참동안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기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젠장, 사람 얼굴보고 한숨쉬는 버릇은 여전 하구만. "차분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일단, 제가 여기 있는 건 당연하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키세온 님과 레이넨의 사제, 그 엘프님……. 두 분을 저에게로 보낸 건 당신이 아니었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루덴스와 시이나가 이 여자를 찾고 있다고 해서, 입막음을 하는 대가로 이 여자가 어디있는지 가르켜 줬었다. "키세온 님은 저에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이 곳, 크레티아로 와서 국왕 폐하를 만나 달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저는 그 부탁을 받아 들였습니다. 두 가지의 조건을 걸고 말입니다." "두 가지 조건?" 내 질문에 그녀가 가볍게 미소지었다. "첫 번째 조건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두 번째 조건은 바로……. 당신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를 다시 만나게 해 달라는 조건이라고? 어째서? 난 이 여자와 딱 두 번 만난 적이 있었을 뿐이다. 그것도 단지 점을 보기 위해서. 그런데 그런 나를 왜? 한참 생각하던 나는 어느 순간 섬광같이 머릿속을 스치는 어떤 말에 호오, 하는 소리를 냈다. "혹시 나한테 반했어?" 나는 입술을 살짝 드러내며 훗, 하고 웃어 보였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한 번 시원하게 들어올렸다. 내 머리카락이 바람에 한 번 가볍게 물결쳤다. 나는 그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올리며 내 샤프한 눈매를 그녀에게 보냈다. 린은 그런 나를 이상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입술을 열었다. "저, 농담할 기분 아닌데요?" 부르르 떨리는 것 같은 그 목소리에 나는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나 농담하는 거 아닌데?" "……농담이죠?" "아닌데?" "……." 그리고, 침묵. 써, 썰렁하다. 으아아악! 추워! 추워! 춥다구!! 린의 주위에는 휘이이이, 하는 소리마저 날 것 같았다. 린은 잠시 기가막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핫, 하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왠지 놀림을 당한 것 같은 기분에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나한테 반한 게 아니면 왜 날 만나려고 했는데?" 내 질문에 린은 금방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린은 한참동안 입술만 달짝이다가 후욱,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자랑스러운 에이테이나님 앞에, 여신과 형제들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세난 해와 비슈누가 마르고 닳도록 여신님의 보우하사 우리 신전 만세. 디모세이, 키에나, 운명의 줄. 이 카드와 이 예언을 길이 보전하세." 너무나 근엄한 표정, 너무나 근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린의 얼굴은 차라리 장엄했다. 나는 그 근엄한 얼굴에 압도당해 하마터면 '오오! 너무나 멋져!' 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할 뻔 했다. 막 목소리를 내려는 순간에 이성이 통제를 내리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런 말을 했을 지도 모른다. "이상은, 제가 에이테이나 신전에서 처음으로 프리스트의 칭호를 받을 때 행했던 선서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이번에도 굉장히 근엄한 목소리로 가슴을 쫙 펴며 말하는 린. 나는 그런 린의 얼굴을 보면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일부라고? 그, 그럼……. 그런 게 몇 절까지 있는데?" "4절까지 있습니다. 최상의 노래지요." 최상의 노래라고? 이게? 이 딴 게? 이딴 게!!! 나는 린이 조금이라도 자책감을 가지길 바라면서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린은 전혀 꿀릴 게 없다는 눈으로 나를 당당히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노래에는 아주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일단 저희 교단은 아주 자유로운 교단이기 때문에, 예언의 힘을 타고 난 자들끼리의 결속력은 매우 약합니다. 하지만……. 저희 교단에서도 절대적인 교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단 예언의 대가로 돈을 받았을 때에는 그 대가만큼의 결과는 보여 드려야 한다는 겁니다." 린은 그 말과 함께 나를 똑바로 올려 보았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그 날 당신에게 받은 10실버 만큼의 미래를 보여 드리지 않았습니다." "뭐?" 나는 살짝 눈을 크게 뜨고 린을 보았다. 린은 나를 향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당신에게 '운명의 상대'를 운운했었지요. 하지만 당신은 그 이야기도 채 듣지 못하셨습니다. 게다가……. 당신에게는 아직 보지 못한 카드가 세 장이나 남아 있었어요." "그 때는 얘기 안 해주고 왜 지금에서야 얘기해주려는 거야?" 내가 묻자, 린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뭐?" "'그'가 너무나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당신의 운명을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 습니다. '그' 가 떠나고 나면 당신에게 찾아갈 생각이었습니다만, 당신은 너무 빨리 그 지방을 떠나셨더군요." "'그'?……무슨 말이냐?" 내 질문에 린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당신이 아실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아직 아셔셔는 안 될 분야라고 할 수 있지요." 린은 그 말과 함께 품속을 뒤적여 카드를 세 장 꺼냈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에게, 알리지 못한 이야기들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운명의 일부'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 또한 저의 '운명'입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여자? 나는 린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린은 내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이제부터 하는 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 "……그 때, 당신에게 나왔던 점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당신이 피할 수 없는 '숙명' 이라는 것……. '대미래' 예언가들은 한 개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미래의 현상을 '대미래' 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당신의 대미래는 아주 치명적인 영향을 당신에게 끼칠 겁니다. 아니, 끔찍하다고 해도 좋겠지요." 린은 나를 잠시 보다가 어느 순간 움찔했다. "이, 이해가 안 되십니까?" "안 돼." 나는 아주 간결하게 대답해 주었다. "……머리가 나쁘시군요?" "……맞고 싶은 거야?"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훅, 하고 한 번 숨을 들이쉬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자면 저는 그 때 당신에게 예언의 대가로 10실버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에게 그 10실버의 대가만큼의 미래를 보여드리지 못했다, 이 말입니다. 이제 제 말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여신의 교리 중에는 일단 대가를 받은 이상, 그 대가만큼의 미래는 꼭 보여야 한다! 라는 게 있습니다. 저는 그 교리를 지키지 못했고, 그 교리를 지키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께 당신의 미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구요. 제 말 뜻, 이제 이해 했습니까?" "아아, 그런 거였어?" "……그런 거였습니다." 이빨을 뿌득, 갈면서 린이 말했다. 그녀는 후우, 하는 심호흡을 길게 내뿜더니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당신의 미래입니다. 가까운 시일내에……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닥칩니다. 정말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 아마도, 당신은 정말로 소중한 이에게……." 린은 말을 끊고 내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지독한 배신을 당할겁니다." 차갑고 딱딱하게 끊어지는 그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찌르르한 전율이 등골을 타고 올라와 뇌까지 전달되는 느낌이다. 나는 잠시 설명할 수 없는 공포에 몸을 떨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는데에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대체 내가 방금 전에 무슨 말을 들었지? 라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심장이 턱하고 멈추는 것 같았다.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뛰는 심장의 고동 소리에 이대로 미쳐버릴 것만 같다. "……무슨 말이야?" "당신의 미래를 엿보았을 때…… 그렇게 나왔습니다. 운명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을 뿐, 그 이상은 흐릿합니다. 명료한 것은 그 하나뿐, 당신을 배신하는 자가 누구냐라던가 그 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것은 모릅니다." 무슨 말이지? 나를 배신하는 인물이라고? 소중한 이?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의 나열들이었다.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린을 보았다. 어차피 '운명' 이라는 것은 마족과는 상관없는 것들, 이 여자가 하는 말에는 그리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나는 나 스스로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함에도 왜 심장은 이렇게 거세게 뛰는 것인가? "그리고 두번째는, '변화' 입니다. 이 운명을 점쳤던 것이 벌써 석달 전이니, 변화의 시기는 더더욱 가까워져 왔겠지요. 일반인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만큼 커다란 변화의 물결이 곧 당신을 덮칠 겁니다." 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살짝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런 그녀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린은 나를 향해 가볍게 웃어보이더니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녀는 내 눈을 보며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당신의 운명의 상대……. 말입니다. 곧, 찾으실 것 같습니다." "……에?" 나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린은 내게 역시 환하게 웃는 낯으로 말했다. "최후까지 몰린 당신의 운명을 지켜줄 사람, 최후까지 다가갈 당신의 곁에서 가장 헌신적으로 있어 줄 사람, 슬프지만 그렇기에 오래 기억될 이, 아름답지만 그렇기에 슬픈 이. 당신의 '운명의 상대'입니다." 나는 린의 말을 한참동안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말이야? 너 저번에도 이 말 했었지? 운명의 상대가 뭐 어쩌고 저쩌고." "예." "그런데 그게 뭔지 알아야 될 것 아냐!!" "……예? 설마 아직도 그게 뭔지 몰랐다는 말씀입니까?" 크아아아아악! "네가 말을 안 해줬잖아!!" 내 고함소리에 린은 기가막힌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녀는 후우, 하고 긴 한숨을 내쉰 후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운명의 상대…… 당신이 '영원히 사랑하게 될 사람' 말입니다." -------------------------------------------------------------------------------- Back : 1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4 (written by 카르민) Next : 12 : <패러디>knock! knock! knock!(2)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43376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0th January 2002 12:02:44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6-01-2002 18:34 Line : 349 Read : 1185 [14]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4 -------------------------------------------------------------------------------- -------------------------------------------------------------------------------- Ip address : 210.102.156.11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언제까지나, 그러니까 '영원' 토록 어떤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영원이라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조금은 내 생각이 변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퇴색하지 않는 감정이라는 것은 절대 존재할 수 없어. 한 개인이 한 개인을 향한 마음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살아간다? 그 둘이 한 날 한 시에 죽지 않는 한은, 그건 불가능하다. 인간들에게는 망각이라는 게 있으니 더더욱 그러하겠지. 마족에게는 망각이라는 것은 없지만, '소중하다' 고 여겼던 것이 파괴된 그 순간 깨끗하게 그 소중했던 것이 자신의 내부에 존재했던 비중을 잘라버리는 족속들이니, 그들은 인간보다도 더 '영원'을 약속할 수 없게 만드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영원까지 사랑할 수 있는 상대라고? "흥, 웃기고 있네. 내 상대도 마족이라면 모를까, 그건 불가능해." 암암, 불가능하지. 운명 같은 소리하고 있네. "크아아아∼. 기분 더럽네, 제길!" 게다가 배신이 어쩌고 어째? 대체 저 여자는 왜 만날 때마다 내 기분을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는 거야? 처음 만났을 때는 점을 쳐주지 않겠다느니 어쩌느니 했고,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내가 묻는 대답에 꼬박꼬박 말대꾸하면서 재수 없는 말투로 뾰로퉁하게 한다는 소리가 '가르쳐 드리기 싫습니다' 였고, 세 번째 만나서 하는 말이 뭐? 소중한 이에게 배신을 당할 거고, 곧 있으면 변화가 닥칠 거고, 영원히 사랑하게 될 이를 만나? "젠장. 루덴스!!" 나는 흰 탑을 신경질적으로 내려오면서 루덴스를 소리쳐 불렀다. 너무 기분이 더러웠기 때문에 루덴스를 찾아내서 목덜미라도 잡고 흔들어 줄 셈으로 말이다. 루덴스를 몇 대 때리면 기분이 좀 풀릴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루덴스의 이름을 연신 외쳐 불렀다. 꼭대기층에서부터 루덴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해서, 1층에 있는 문을 열 때까지 난 놈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내가 흰 탑의 문을 벌컥 열고 나왔을 때, 나라는 놈을 반긴 것은 루덴스가 아니라 정원에 피어난 무성한 잔디였다. 휘이이이잉∼.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가만히 서 있던 잔디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휙휙 저어가면서 아까 까지만 해도 이 정원에 분명히 서 있었던 그 빌어먹을 루덴스놈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대체가 아무리 찾아봐도 루덴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 자식이 어딜 간 거야?" 나는 이빨을 부득부득 깨물었다. 혹시 내가 저를 잡아서 반쯤 썩어 문드러진 북어로 만들 거라고 입술을 짓이기고 있던 걸 알고 도망간 건가? 나는 팔짱을 끼고 선 채로 한참동안 그 자리에서 녀석을 기다렸다. 그러나, 녀석의 흔적은 역시 보이지 않는다. 그래, 아마도 화장실을 간 거겠지. 그래, 갑자기 급해져서 화장실을 간 거다……. 나는 그렇게 끊임없이 중얼대면서 잠시 정원의 잔디 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더 흘러도 녀석은 오지 않았다. 나는 가볍게 미간을 좁혔다. "뭐야, 큰 건가." 몇 분이 지났을 때, 나는 그렇게 중얼댔다. 또 다시 몇 분이 더 흘렀다. 난 완전히 인상을 구기고 낮게 말했다. "혹시 설사……?" 또다시 몇 분이 흐르자,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졌다. "이……. 자식이 화장실에서 죽었나?" 나는 이빨을 아그극 아그극 깨물면서 슬금슬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위를 삭삭 훑어보면서. 나는 우우, 하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정말이지, 나 같은 미소년을 이런 추운 곳에다 세워 두고 이 빌어먹을 자식이! "으아, 못 참아! 나 혼자 가고 만다!" 나는 결국 참다 못하고 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어디에 있든 그리 먼 곳에 가 있지는 않을 테니 찾아내면 목을 반쯤 비틀어 작살을 내 버리자, 라고 중얼대면서 나는 발걸음을 움직여 나갔다. *************** 내 고귀한 발이 잔디에게 내게 밟히는 영광을 선사한지도 어언 몇 시간이 흘렀다. "어디야, 여기가." 나는 낮게 중얼거리듯 말하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대체 여기가 어딘지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부여잡고 격렬한 뽀뽀를 해 주겠어. 내 이 꽃다운 아름다움에 푹 매료된 채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키스 받게 해 주겠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누가 답 좀 해줘. "여기가 어디야?" 나는 몇 번이고 주위를 돌아보며 중얼거렸지만, 도대체가 답은 나오지가 않았다. 나처럼 귀엽고 깜찍하고 잘 생긴 녀석이 뽀뽀라는 엄청난 것까지 상품으로 걸고 답을 구하는데도, 답이 나올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니! 나는 한참이나 끙끙거려가면서 주위를 훑어보았지만, 그래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 탑에서 나와서 루덴스가 보이지 않는 것에 광분해 혼자 원래 자리를 찾아다닌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이 정원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꽤나 넓었다. 루덴스와 함께 왔을 때는 그리 넓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혼자서 지나다보니 어느새 그것은 미로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헷갈리는 길들을 보여주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내게 어디가 어딘지도 알아볼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 버렸다. "젠장할! 루덴스! 용서할테니까 어서 나와!" 나는 주위에 대고 버럭 고함을 쳤지만, 역시 대답은 없었다. 대체 이 곳을 얼마나 헤맸는지 잘 생각도 나지 않았다. 처음에 발걸음을 옮겼을 때, 난 정말이지 가벼운 기분이었다. 만약 길을 잃는다면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을 걸면 되고, 라는 생각으로 나는 발을 옮기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은 그 직후였다. 본디 왕성이라고 하면, 마계의 마왕성과 같은 곳이니 어딜 가도 사람들로 넘쳐나야 마땅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슬슬 인간들이 하나 둘씩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내가 '헛? 길을 잃었네?' 라고 투덜거릴 무렵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러 버렸다. 「쯧쯧, 칼레들린님. 바보군요? 길을 잃어버렸네요.」 레이네가 떠들기 시작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묻지 마라. 나는 놈을 손톱으로 지그시 눌러주었을 뿐이다. 놈은 끼악끼악, 하는 까마귀 소리를 몇 번 내더니 한참만에야 조용해졌다. 정말이지 시끄러운 놈. "젠장할, 배고프군." 검은 어둠이 앞으로 깔리기 시작했다. 사휘가 천천히 검은색으로 뒤덮여 가는 것을 보아하니 이제 저녁을 먹을 시간도 지났음이 틀림없다. 내 배는 너무도 정직해서, 끊임없이 밥을 달라고 나를 향해 소리를 내보내고 있었다. 사실 라이메데스, 라고 한 번 소리쳐 부르면 모든 것이 해결되겠지만 이 빌어먹을 자존심이라는 것이 또 그 것을 용납하질 않았다. 나는 돌멩이를 툭툭 쳐가면서 다시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초록색의 나무들이 어둠 속에서도 빼곡이 눈에 차는 걸로 보아하니 여기도 정원인 것 같긴 같은데……. 그게 말이 되는 건가? 아무리 정원이 넓다해도 몇 시간을 헤매고 다닐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핫, 칼레들린님!」 갑자기 레이네가 화들짝 놀란 소리를 냈다. 나는 또 이 방정맞은 마물이 무슨 소리를 지껄일까 두려워 녀석을 손가락으로 누르려고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레이네는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버럭 고함을 쳤다. 「누르지 말아요! 저기 사람이 있다는 얘길 하려고 했을 뿐이니까!」 "에?" 나는 레이네의 말에 놀라서 얼른 사방을 훑어보았다. 주위를 몇 번 훑어보던 나는 곧 환하게 웃었다. 저 멀리서 무엇인가 붉은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늘하늘하게 움직이는 그 것은 아마도 횃불인 듯 했다. 갑자기 나타난 그 것들은 꽤나 여러 개로, 저 주변에 사람들이 여럿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었다. 나는 날아갈 듯한 마음으로 그 곳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 일렁거리는 붉은 혀들이 나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다. 「오호호호호홋! 제가 말을 안 했으면 어쩔 뻔했을 까요? 이렇게 착한 저를 칼레들린님은 언제나 밟기만 하시죠. 흑흑, 불쌍한 내 인생! 나는 세이아나님의 품이 그리워. 흐흑, 세이아나님. 당신께 돌아가고 싶어요. 세이아나님…….」 나는 레이네를 퍽, 하고 쳐준 다음 그 불빛 틈으로 달렸다. 저 불빛을 들고 있는 자들은 아마 왕성 경비원들쯤 되겠지. "이봐∼ 여기가 어디냐!" 나는 불빛을 향해 손을 크게 흔들며 소리쳤다. 순간,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던 횃불이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조금 더 그 곳으로 다가가서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이봐, 나 길을 잃어먹었는데 길을……." "찾았다! 이 곳이다!" 엥? 나는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깜짝 놀랐다. 횃불 중 하나가 내 소리에 반응한 듯 한 번 깜빡인 듯 싶더니, 무서운 속도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분명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은 맞는데, 단순히 내게 길을 알려주기 위해 다가오는 것 치고는 좀 빠른…… 듯 싶은데…… 말이야? 나는 내 쪽으로 다가오는 그 불빛들에 놀라서 주춤주춤 한 발자국을 뒤로 물러섰다. 붉은 횃불들이 하나하나, 더더욱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처음 봤을 때 나는 그 횃불들이 그저 서너 개정도 될까, 하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횃불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수십 개로 불어났다. 내가 흠칫흠칫하면서 뒤로 물러서면 설수록, 그 횃불들의 기세는 용맹스러워졌다. 게다가 더더욱 황당스러운 것은, 내가 보았던 횃불은 내 앞쪽에 있는 것들뿐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횃불들이 사방으로 퍼져 있었다. "뭐, 뭐, 뭐야?" 나는 사방으로부터 천천히 내 쪽으로 좁혀드는 횃불들을 보며 경악했다. 무슨 사냥이라도 하는 것같은 기세로 나를 구석으로 모는 그 횃불들을 보면서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횃불들이 나무를 갉아먹으면서 탁탁, 하는 소리를 낸다. 그것들은 한참 만에야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가늘게 눈을 뜨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불빛 아래에 있는 것은 분명 저번에 선박장에서 보았던 그 기사 제복이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나 많이 몰려 온 거지? 난 그저 길을 물어보려 했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올 필요는 없……." 내가 막 외쳤을 때였다. 갑자기 내 옆으로 뭔가 바람 같은 것이 휙 하고 밀려온다 싶더니, 그것이 단박에 내 어깨를 속박해 들어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팔을 비틀었다. 휘릭! 내 어깨를 잡았던 그것이 단번에 뒤로 꺾였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이 내 앞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순간, 불빛들이 전체적으로 한 번 크게 흔들렸다. "대체 뭐하자는 짓거리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말이야. "……건방진 것." 차랑! 차랑! 차라라랑! 갑자기 들려온 건방진 것, 이라는 투덜거림과 함께 앞쪽에서 맑은 금속음이 났다. 나는 움찔했다. 횃불들을 들고 섰던 놈들이 갑자기 허리 춤에 차고 있던 검을 빼어드는 모습이 보인 것이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다만, 일단 너희들이 뺀다면 나도 뺀다! 나는 허리춤에 있던 켐 알슈타드를 가볍게 뽑아 들었다. 레이네는 아직도 세이아나님∼ 하고 칭얼거리고 있다가 내 이빨에 지근지근 깨물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이 상황에 대해 호들갑을 떨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검을 앞으로 겨눈 채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한 번 더 묻겠어. 지금 뭐하자는 짓거리지?" 내가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앞쪽으로부터 그 인간들이 그야말로 개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뒤로 몸을 틀었지만, 녀석들의 검은 상상외로 빨랐다. 놈들의 검이 하나같이 내 팔을 노리고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왼쪽으로 몸을 가져갔다. "젠장할! 똑바로 들어! 너희, 대체 왜 나를 공격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난 이 나라 왕자랑 아는 사이다!' 라고 외치려던 나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놈들이 무지막지하게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일단 살고 보자, 라는 생각으로 검을 부지런히 휘두르기 시작했다. 놈들은 내 움직임을 천천히 앞쪽으로 유도해 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헹, 하고 코웃음을 치면서 놈들의 검을 피해내고 있었다. "이 자식이! 검을 갖고 있었어!" 한 놈이 소리쳤다. "젠장할! 이 놈이……. 잘도 탈옥을 했겠다!" 내 앞에 있던 다른 한 놈도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엥? 하는 소리를 내면서 놈들의 얼굴을 보았다. 지금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무슨 탈옥? 이 녀석들이 단체로 약을 먹고 머리가 좀 어떻게 되기라도 했나? 나는 일단 이 사태가 심각한 오해로 인해 빚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씩 하고 웃었다. 나는 가볍게 검을 밑으로 내리면서 미소지었다. 놈들은 내가 갑자기 검을 내리자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손을 슬쩍 들어보이며 말했다. "이봐, 너희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뭔가 심각한 오해가 있는 것 같단 말이야. 난 그저 길을…… 흡!" 아름다운 평화를 사랑하는 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무엇인가가 굉장한 기세로 들어오더니 그대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깜짝 놀라 그것을 처내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왼손을 휘둘러 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 손 역시 무력하게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칼레들린님! 이런! 약인 모양이예요! 대체……!!」 레이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으으, 하는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보려 애썼다. "흡? 으… 웃…." "흠집을 내서도 안되니 마음껏 두들겨 패지는 못하겠지만……. 반쯤 죽여버리고 싶어, 이따위 놈! 어차피 돈 받고 들어온 주제에 탈옥은 무슨 탈옥이야!"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앵앵거렸다. 나는 입을 틀어막는 하얀 천 조각을 통해 호흡을 하면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애썼다. 나는 대체가, 얼마 전부터 왜 계속 기절하고, 기절하고 기절하는 일밖에 못하는 거지? 젠장할, 정말이지 짜증나 죽겠어. 그리고 이 놈들은 또 뭐야? 젠장! 나는 그저 길을 묻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데 대체 왜……. "으으……."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기묘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오늘은 아마도 3연참 정도 할 것 같습니다..=_=; -------------------------------------------------------------------------------- Back : 1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5 (written by 카르민) Next : 13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3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43378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0th January 2002 12:03:06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6-01-2002 18:57 Line : 213 Read : 1170 [15]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5 -------------------------------------------------------------------------------- -------------------------------------------------------------------------------- Ip address : 210.102.156.11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칼레들린님.」 의식 사이로 가만히 새어 들어오는 목소리는 가득한 걱정스러움을 담고 있었다. 이 목소리…… 레이네인가? 「칼레들린님, 눈 좀 떠보세요, 칼레들린님.」 다시 한 번 들려오는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입술을 지그시 감고 천천히 눈을 떠보려고 했다. 그런데 잘 되지 않는다. 머릿속이 모두 곤죽이 된 것처럼 어질어질하다. 「칼레들린님,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당신은 위대한 마족이니까! 어서 눈 좀 떠봐요.」 겨우 눈 좀 떠보라는 말을 하는데 당신은 할 수 있어요 하고 위대한 마족이 대체 왜 나와? 나는 레이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으으, 하는 소리를 내면서 눈꺼풀을 최대한 위로 들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몸이 움찔움찔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음을 자각하면서 나는 눈을 뜨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막 그런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을 때였을 거다. "어이! 이 녀석 일어난다." "가윈! 이 쪽으로 좀 와 봐요!" 의식이 열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가 아파서 으으, 하는 소리와 함께 눈꺼풀을 열었다. 그리고 드디어 눈꺼풀을 열었을 때, 나는 본의 아니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으아아아아!"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팔을 휘저으며 벌떡 일어섰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들이 너무나도 기괴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바로 초롱초롱한 몇 쌍의 눈! 내가 경악하는 것도 당연했다. 생각해 보라구! 눈을 뜨자마자 왕방울 만한 눈들이 보이면 어떻겠어? "헉, 헉……." 나는 숨을 길게 몰아쉬며 앞을 보았다. 정신을 잃고 있고 누워 있었던 내 얼굴에 바짝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던 놈들은 내가 뒤로 물러서자 씩 하고 웃어 왔다. 놈들은 모두 10명 남짓해 보였는데, 하나 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고 난리야?" 그 중 한 녀석이 피식, 하고 길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움찔해서 몸을 뒤로 빼냈다. 이상하리 만치 닭살이 돋아 올라서 나는 한 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대, 대체? 나는 상황 정리를 할 수가 없어 주위를 무서운 속도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뭔가 굉장히 낯설어 보이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 여기가 어디냐?" "……감옥." 내가 중얼거리듯 한 말에, 누군가가 무섭도록 재빠르게 답을 해왔다. 나는 흠칫해서 대답을 한 놈을 노려 보았다. "어디라고?" 나는 거의 고함을 지르듯이 말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피식, 하고 길게 웃는 소리가 났다. 으아! 정리가 안 돼! 머릿속에서 띵, 하는 이상한 소리마저 날 것 같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정말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네. 내가 이해가 안 가서 머리를 집어 뜯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놈들은 피식 피식 웃어가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흐응, 역시 나와 같은 경우인가?" "너는 어느 지방 출신?" "어찌됐든 다른 녀석이 들어온 걸 보면 슈는 탈옥에 성공한 모양이지?" "정말이지 슈가 성공하다니……. 나도 한 번 해봐?" 갑자기 사방에서 온갖 소리들이 번져 오기 시작해서 나는 당황했다. 나는 팔을 마구잡이로 휘저으며 녀석들의 말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닥쳐, 네 놈들!!" 나는 버럭 고함을 쳤다. 내 고함소리에, 그제서야 자기네들끼리 마구잡이로 떠들고 있던 놈들의 소리가 멎는다 싶었다. 나는 핑글핑글 돌아가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나를 또롱또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눈 앞의 녀석들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이봐들……."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음산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해가 안 가서 머리 집어 뜯고 있는 내게 차분한 설명을 해 줄 착한 인간은 없는 거냐?" ****************** 설명을 좀 부탁해도 될까, 라는 나의 말은 쉽게 받아들여졌다. 우아! 정말 환장일 노릇이게도, 내가 있는 이 곳은 정말로 감옥인 듯 했다. 주위를 훑어보니 한 쪽 면은 철창이고, 나머지 면은 모두 벽이었다. 그리고 내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누워 있던 바닥은 딱딱한 돌덩어리들 천지. 전체적으로 여기는 굉장히 좁은 공간이었는데, 이 좁은 공간 안에 나를 제외하고 정확히 11명의 소년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또롱 또롱한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레이네의 설명에 따르면, 단지 길을 물어보려던 선량한 의도 밖에는 없었던 내 입에 이상한 천 조각을 대서 자기 맘대로 기절을 시킨 그 빌어먹을 놈들이 나를 이 곳으로 질질 끌어와 처넣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이 곳에 들어오자마자 여기에 앉아 있는 이 11명의 소년들은 우르르 몰려와 나의 이 곳 저 곳을 쿡쿡 찔러대면서 내가 깨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흐음, 여기에 있는 애들 중에선 내가 제일 착하니까 내가 설명을 해 주기로 하지. 거기 친구, 이리로 와봐." 이상한 것은, 여기 앉아 있는 이 11명 소년들의 외모였다. 인간들은 분명 그리 아름답지 않은 존재들이 분명한데, 이 녀석들은 웬만한 마족 못지 않은 미모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있는 인간들이 나보다 더 잘났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제 놈들이 아무리 잘 생겨봤자 나에 비하면 아직 발끝도 따라오지 못하지, 암. "나보고 오라 가라 하지말고 네 녀석이 움직여." 나는 내게 말을 걸어 온 놈을 향해 묵직한 어조로 물었다. 내게 말을 건넨 그 녀석은 반들거리는 주홍색 머리카락에 장난기가 넘실대는 귤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 녀석의 외모 역시 무척이나 독특한 것이 아닐 수가 없다. 주홍색의 머리카락에 귤색 눈동자라니? 마족들 이라면 외모가 워낙 각양각색이니(서열 제 2위 마족이 산발한 자주색 머리카락에 레몬빛 눈동자인데 뭔들 없으랴.)그렇다고 쳐도, 인간이 저런 색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소유했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팔짱을 끼며 그 녀석을 또렷이 바라보았다. 그러자 녀석이 씩, 하고 웃더니 몸을 일으켜 내 쪽으로 왔다. 놈은 나를 한 번 죽하고 훑어보더니 호오,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녀석이 흐음 흐음,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뭐, 너도 키엔이나 필트와 비슷한 경우인 것 같군. 이런 경우가 제일 불쌍한데 말이지, 친구." 나는 도대체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서 녀석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결코 내가 머리가 나빠서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 알지? "일단 소개부터 해볼까? 난 가윈이라고 한다. 친구, 너는?" 뭐야, 말 끝마다 친구 친구. 정말 특이한 말버릇이군. "칼레들린." 나는 짧고 간결하게 말했다. 일단 이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괜히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 이라는 이름을 말해서 시간을 잡아먹을 여유가 없다. "좋아, 친구. 그럼 다른 애들도 소개해야겠지? 저기 뒤에 있는 애들. 왼쪽에서부터 미카, 키엔, 필트, 라피, 룬, 마크, 비욘, 엔루, 시르, 프로엔이다." 나는 녀석이 소개하는 인간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지는 않고, 그저 말을 해대는 가윈이라고 소개한 녀석을 빤히 바라봄으로서 녀석의 설명만을 촉구했다. 가윈은 픽, 하고 낮게 웃더니 한참만에 입술을 열었다. "좋아, 친구. 궁금하다면 얘기를 해주는 수밖에 없겠지. 넌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으니 말이다. 일단, 여긴 감옥이다. 보통 이 곳에 끌려오는 경우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빌어먹을 부모들이 팔아 넘긴 경우. 둘째, 굶어 죽는 가족들을 보다 못해서 자진해서 스스로를 파는 경우, 셋째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눈에 띄어서 질질 끌려온 경우. 너 같은 경우는 세 번째라고 볼 수 있지. 뭐, 어찌됐든 결론은 같지. 하나 같이 사지(死地)로 끌려가는 것이니 말이다." 나는 가윈의 입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대체 무슨 말이야?" 가윈이 킥, 하고 낮게 웃으며 어깨를 들어올렸다. "산 재물이 돼서 죽는다는 것에는 어떤 경우든 똑같잖아? 어차피 다 똑같아. 우리는 어차피." 가윈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변태에게 농락 당하다가 죽을 운명이니까." 엑?? -------------------------------------------------------------------------------- Back : 1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6 (written by 카르민) Next : 1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4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43378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0th January 2002 12:03:16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6-01-2002 19:12 Line : 203 Read : 1295 [16]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6 -------------------------------------------------------------------------------- -------------------------------------------------------------------------------- Ip address : 210.102.156.116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가윈의 설명은 그 이후로도 착착 진행되었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녀석이 하는 말을 하나하나 듣고 있었다. 나는, 지금, 상황정리중이다. 일단, 상황 1. 루덴스는 전에 내게 말했었다. "나는 레이디안이라는 변태에게 12명의 미소년을 보내야 해." 상황 2. 루덴스가 갑자기 없어진 이후로, 나는 재수 없는 놈들에게 걸려 이상한 곳에 끌려왔다. 상황 3. 그 이상한 곳은 감옥이고, 그 감옥 안에는 11명의 소년들이 있다.(제 딴에는 조금 생겼다고 생긴. 뭐, 나의 발치에도 못 따라온다고 했던 말은 기억해주길 바라고.)그리고 그 놈들 중 하나가 내게 말했다. "우린 변태에게 농락 당하다가 죽을 운명이다." 자자,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내 명석한 두뇌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이 감옥은 레이디안에게 산 재물로 바쳐질 미소년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라고. 그리고, 가윈의 설명을 토대로 또 다른 상황을 정리를 해보자. 상황 1. 이 감옥에 있는 놈 중에는 슈라는 놈이 있었다. 그리고 이 슈라는 놈은 대륙 전체를 이잡듯 뒤져도 찾기 힘들다는 고귀하디 고귀한 검은머리에 검은 눈(험험험!)을 가진 놈이었다고 한다. 상황 2. 슈라는 놈은 부모님에게 학대당하다가 팔려진 놈으로, 독한 맘을 먹고 이 감옥에서 어제 저녁 탈옥했다고 한다. 상황 3. 슈라는 놈이 탈출한 그 날 밤, 우연히도 흑발흑안을 가진 한 명의 꽃다운 미소년이 그 감옥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참고로, 이 꽃다운 미소년은 그 근처에 우연히, 정말로 우연히 지나가게 된 것뿐이었다. 상황 4. 슈라는 놈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경비원들은 마침 지나가던 그 아름다운 소년을 보고, 흑발흑안이라는 것만 확인, 대번에 엄청난 착각을 해버렸다. 무식한 그 놈들은 "핫! 저 놈이다!" 라고 외치며 달려와서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갔을 뿐인 그 무고한 미소년의 입에 마취약을 그냥 갖다대 버렸다. 상황 5. 그 꽃다운 미소년, 마취약에 결국 기절했다. 그리고 이 감옥 안으로 끌려왔다. 아주 중요한, 정말로 중요한 상황 6. ……그 꽃다운 미소년이 나다. ******************* "……." 나는 잠시 심도 깊은 고찰을 했다. 나는 나를 가엾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가윈을 뚫어져라 보았다. 가윈의 주홍색 머리카락이 어두운 이 곳에서조차 빛나고 있다. 나는 가윈을 잠시 보다말고 훅,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루덴스는 이 나라의 왕자다. 그리고, 난 그 놈이랑 아는 사이니까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만 알리면 곧바로 나갈 수가 있겠지. 나는 살짝 몸을 틀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쇠창살을 두드려 보았다. 창창, 하는 소리가 주먹 부분에서 들려왔다. 나는 손을 들어 그 창살을 몇 번 어루만졌다. 차가운 쇠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느껴져 왔다. 나는 그 창살을 살짝 쥐어 보았다. 이 정도의 금속이 지닌 경도는 나도 파괴할 수 있다. 파리페인 정도의 강도라면 내가 찔러 볼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이 정도는 장난이지. 지금 당장이라도 비틀기만 한다면, 나는 이 창살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봐."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가윈을 불렀다.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가윈이 피식 웃었다. "친구, 가윈이라고 불러." 녀석은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있었다. 주위를 훑어보니 다른 놈들은 자기네들끼리 몸을 딱 붙이고 앉아 잠을 청하고 있었다. 잠을 청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가윈이라는 놈 뿐이다. 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너는 안 자냐?" "별로. 난 원래 밤 생활을 즐겼던 몸이라." 가윈은 피식 웃었다. 가윈은 몸을 뒤로 쭉 빼며 훗, 하고 낮게 웃었다. "밤 생활?" 나는 녀석의 말 중에서 이해하지 못할 말을 찾아내곤 물었다. 그러자 가윈이 하하하핫, 하고 크게 한 번 웃었다. 몸을 뒤로 완전히 젖혀 가며 한 번 웃은 가윈이 손을 들어 브이 자를 만들어 보였다. "꼬맹이는 몰라도 돼. 이건 어른의 생활이거든. 후후후훗!" "……." 나하고 비슷한 또래인 것 같은데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기껏해야 나보다 한 두 살 많이 보이는 구만. 가윈은 씩 웃으며 나를 훑어보았다. "친구. 너, 꽤나 태연하군." "……뭐?" "보통은 이런 데 잡혀오면 보이는 반응은 하나지. '날 돌려보내!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 뭐, 그런 거랄까? 그런데 너는 고개만 숙이고 앉아서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 가면서 상황 1, 상황 2…… 뭐 그런 이해하지 못할 소리만 지껄여 대고 있으니 신기할 수밖에." 가윈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올리면서 자신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런 녀석의 표정은 무엇인가 조금 몽롱해 보이기도 했고, 우수에 젖어 보이기도 했다. 아니, 뭔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가윈은 그런 표정을 한 채로 창살 너머를 보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음을 지으면서 창살에 손가락을 댔다. 그리고, 서서히 손에 힘을 주었다. 뿌드드드득! 순식간에 창살이 부러졌다. 가윈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아니, 너?" 녀석의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나는 그런 놈을 향해 씩, 하고 샤프하게 웃어주었다. "일단 나가지?" ……이렇게 되야 마땅했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악!!" 그런데, 창살에 힘을 주었던 내가 낸 소리는 '일단 나가지?' 같은 가득 겉멋이 든 소리가 아니라 큰 비명성이었다. 나는 손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펄쩍 뛰어 올랐다. 분명히 반으로 휘청, 하고 꺾어야 마땅한 그 놈의 창살이 꼼짝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손을 대자마자 그것이 엄청난 정전기 같은 것을 뿜어냈기 때문이다. "뭐, 뭐, 뭐야?" 나는 창살을 보며 소리쳤다. 그러자 가윈이 하하, 하고 웃었다. "아아, 이 감옥은 특수한 감옥이야. 그러고 보니 말을 안 해줬군. 그 창살은 세게 쥐면 안 돼." "뭐, 뭐라고?" "친구, 잘 들어봐. 우리 정도라면 그냥 보통 감옥에 가둬도 상관없겠지만……. 일단 우리는 '재물' 이니만큼 꽤나 대접을 받는다, 이 말씀이야? 그래서 보통 죄수가 가두어지는 더러운 곳에는 가두지 못하고 여기에 가둬둔 것 같은데……. 탈옥한 슈 녀석의 말로는 300년 전쯤에 만들어진 팔레슈틴 감옥이라고 하더군." "팔레슈틴 감옥? 그게 뭔데?" "마법사 전용 감옥. 최근엔 잡혀온 놈이 없으니, 깨끗하게 비어 있고……. 그래서 우리를 처넣었겠지. 그러고 보면, 슈 녀석도 참 신기하단 말야. 여길 어떻게 나갔을까? 쿡." 가윈은 웃었다. 그 웃음은 실로 순수해보였다. 자조적인 기가 섞인 것도 아니었고, 체념의 기가 섞인 것도 아니었다. 그 미소는 말 그대로, '진짜 미소'. "뭐, 내일이면 출발인가." 가윈은 그 말과 함께 가볍게 엎드려서 후훗, 하고 한 번 더 웃었다. "……뭐라구?" "내일이면 출발이라고." 가윈은 밝게 웃으며 나머지 말을 받았다. "변태에게 가는 날이지." ----------------------------------- 후우~~~~~ 갑자기 왜 연참일까? 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저도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내가 미쳤나? 왜 갑자기 연참을 하고 난리야?" =_=;; -------------------------------------------------------------------------------- Back : 1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7 (written by 카르민) Next : 1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5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43378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0th January 2002 12:03:20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7-01-2002 04:09 Line : 277 Read : 1746 [17]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7 -------------------------------------------------------------------------------- -------------------------------------------------------------------------------- Ip address : 211.220.15.3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내일이면 출발이다, 라? 나는 자리에 앉아서 빙글빙글 미소짓고 있는 가윈을 보았다. 녀석은 날 보고 태연하다고 했지만, 그건 내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이 자리에서 나갈 수 있기 때문에 태연해질 수 있는 거다. (라이메데스! 라고 한마디만 하면 끝이니까.)하지만, 녀석은 나와는 다르다. '정말로 태연한 사람' 은 내가 아니라 바로 이 가윈이라는 놈이다. 다른 놈들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지긴 했지만, 무의식적인 공포는 아직도 남아있는지 수면 중에서도 간간이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디. 그러나 눈을 게슴츠레 뜨고 창살 밖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가윈이란 녀석은? 연신 싱긋 웃어대는 게 상황을 모르고 봤다면 내일 누군가의 생일파티에 초대받기라도 한 사람처럼 보일 정도인데, 저런 인간이 누굴 보고 태연 운운 하는 거야? 「칼레들린님, 무슨 생각 중이세요? 어서 여길 나가야죠.」 레이네가 작게 소리를 냈다. 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대체가 말입니다! 라이메데스 님한테 한 마디만 하면 되잖아요? 그럼 오실 거라구요. 제가 모를 줄 알아요? 라이메데스님 부르기 쪽팔려서 그러시는 거죠? 쯧쯧! 당신은……. 정말 어린앱니까!!」 나는 부들, 하고 떨면서 레이네를 내려다보았다. "한마디만 더하면……." 「보석을 반쯤 뽑아 버릴 테다! 라고 말하시려 구요?」 "……." 레이네는 흥, 하는 소리를 냈지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내 검은 오오라를 발견했는지 더 이상은 뭐라고 하지 않았다. 이제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윈은 창살 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저 멀리에 누워 있던 놈들을 하나하나 발로 차서 깨우기 시작했다. 잠에 빠져 있던 녀석들은 흐으, 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졸린 눈으로 자신들을 발로 차는 가윈의 발에 매달렸다. "가위이이인, 조금만 더 자게 해줘." 누군가가 가윈에게 말했다. 옅은 금색 머리칼을 가진 놈이었다. 그러나 가윈은 그런 놈을 지근지근 밟으면서 기세 좋게 외칠 뿐이었다. "웃기지 말고 어서 일어나! 마지막 아침이 될 지도 모르는데 잠으로 보내고 싶냐?" "……정말이지, 꼭 그런 식으로 말을 해야 해?" 녀석들은 칭얼거리면서도 가윈의 말대로 하나하나 벌떡 벌떡 잘만 일어났다. 나는 녀석들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들이 모두 일어났을 때, 창살 사이로 무엇인가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힐끗 보니 푸른색 제복을 입은 녀석들이 창살 사이로 무엇인가를 밀어 넣고 있었다. 가윈은 다른 녀석들을 깨우다 말고 그 곳으로 다가가 내밀어진 그것들을 하나하나 줍기 시작했다. 가윈은 피식 웃으며 그것들을 품에 안았다. "친구들, 빵이다." 헉? 나는 빵이라는 말에 얼른 일어나서 가윈의 손에 들려 있는 것들 중 하나를 휙, 하고 낚아챘다. 순간 가윈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지만, 어제 점심 저녁을 다 굶었던 나는 이미 녀석의 눈 따위를 신경 써 줄 처지가 아니었다. 아구아구아구 미친 듯이 먹어치우고 있으려니, 다른 녀석들의 시선이 하나 둘 내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뭐, 내 잘난 얼굴 보겠다는데 말릴 수도 없고 말이지. 나는 아랑곳 않고 결국 빵 하나를 순식간에 다 먹어 치웠다. 가윈의 손에 들려 있는 빵이 정확히 12개인 걸로 보니, 한 사람 당 하나씩인 모양이었다. 나는 하나를 더 먹고 싶었지만, 차마 양심이 그러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아아! 마족 주제에 나는 너무 예의가 바르다니까. 녀석들은 내가 빵을 다 먹어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허어, 하는 표정을 거두고 빵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가윈은 빵을 먹지 않는 것이었다. "넌 안 먹냐?" 내가 바라보자, 가윈은 씩 하고 한 번 웃더니 내 앞으로 가뿐한 발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놈은 미소 띈 얼굴로 내게 자기 몫의 빵을 내밀었다. 고소하게 굽힌 빵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내가 뭐냐, 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가윈이 생긋 웃었다. "먹어." "뭐?" "난 별로 생각이 없으니까." 가윈은 그 말과 함께 내 품에 빵을 안기고 돌아 서 버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진지한 얼굴로 상대의 손을 덥썩 붙잡으며 "이런, 이걸 어떻게 받을 수가 있겠어? 너도 아침 굶었잖아! 난 절대로 네 것을 먹을 수 없어! 자, 어서 이걸 먹어! 그리고 오늘도 활기찬 하루를 함께 시작하는 거다!" …라는 말을 했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런 말 안 한다. 내가 미쳤냐? 주는 걸 안 받게. 준다는 거 안 받으면 그것도 실례다. 나는 녀석의 마음이 변할 것을 염려해 얼른 빵의 귀퉁이에 입을 대고 크게 한 입을 깨물었다. 콰악, 하고 빵을 깨무는 소리가 크게 나자 가윈이 나를 한 번 돌아보고 쿡, 하고 웃었다. 가윈은 저 멀리로 가더니 어제 자신이 누워 있던 자리에 앉았다. 흠, 지금에야 느낀 건데……. 이 무리에선 아무래도 가윈이 우두머리 같다. 가윈이 발을 움직일 때마다 녀석들의 시선이 움직이는 걸 보니 말이지. 자리에 앉은 가윈은 무엇인가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나는 빵을 낼름낼름 먹어치우며 녀석을 보았다. 한참 후에 녀석이 손에 무엇인가를 들어올렸다. 「헤에? 류트 아닌가요?」 뭔가 놀랍다는 어조로 레이네가 말했다. 나는 호오, 하는 약간의 감탄성과 함께 가윈 쪽을 보았다. 과연, 어디선가 본 듯 했더니. 인간들의 삶 19장 <인간들의 유희>편 제 12목록, 악기 편에 나왔던 류트가 틀림없는 것 같았다. 금속으로 된 반 음률의 플랫과 다른 악기에 비해 폭이 넓은 지판, 뒤로 구부러져 있는 현감음줄. 마치 예전에 보았던 배 같이 생긴 울림통을 가진 류트라는 이 악기. 엷은 노란색이 섞인 갈색의 그 악기를, 가윈은 가볍게 들어올렸다. 대체 어디서 난 거야? 라고 물어볼 틈도 없이, 녀석이 류트의 현 줄에 가뿐하게 손가락을 갖다 댔다. 호오? 저 녀석, 저런 걸 연주할 줄 아는 건가? "가윈이 류트를 뜯는다!" 한 녀석이 갑자기 소리를 쳤다. "이야아!" "가윈! 가윈! 가윈!" 갑자기 주위에 있던 이 인간들이 흥분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갑자기 엉덩이를 들썩이며 손을 흔들었다. 한 녀석은 휘파람을 분다. 나는 호기심이 동해 가윈 쪽으로 시선을 올렸다. 가윈은 가볍게 브이자를 그려 보인 다음 현 줄을 퉁겼다. 가볍게, 음이 울린다. "헤?" 류트의 소리를 듣고 나는 조금 놀랐다. 류트를 어루만지는 손끝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하다. 음을 하나하나 만들어 내고 있는 가윈의 손은 보석을 쓰다듬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가윈은 한참동안 류트를 뜯다가, 어느 순간 입술을 열어 조용히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빛나는 은빛의 선 위로, 칠흑의 성녀가 춤을 춘다. 죽음으로 향하는 달콤한 길을 안내하는 검은 성녀. 휘두르는 검 끝에서 흔들리는 옅은 은빛. 그대, 우리들의 성녀여. 사랑스럽도록 희지만 또한 검은 여인이여. 그대, 우리들의 성녀여. 슬프지만 아름다운 우리들의 검은 여인이여. 손을 뻗어 흔들리는 곳에 서 있는 것은 새카만 어둠. 은빛의 선율 위로 갈리는 새카만 어둠. 어둠을 가른 성녀의 눈물 위로 번지는 것은 깊은 슬픔. 은빛 선율로 파괴된 어둠의 혈흔으로 피는 것은 그대, 성녀의 슬픔. 그러나 그대의 슬픈 눈물로 피는 것이 우리, 우중들의 환희. 아름다운 성녀여, 그대의 눈물로 우리는 평화를 찾는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전설의 내막은 어둠으로. 아무도 잊지 못하는 전설의 환호는 빛 속으로. 아아, 슬프도다. 그대의 눈은 슬픔에 감기지 않고 있지만 우리의 입술은 그대의 슬픔에 환호하네.」 대체 무슨 뜻을 띄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면서 가윈은 조용히 류트를 뜯고 있었다.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잔뜩 가라앉은 그 노래 덕에 감옥 안 분위기는 대번에 숙연해졌다. 노래가 끝나자 가윈의 주위에서 동그란 원을 그리고 앉아 있던 놈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 했다. 가윈이 류트를 내려놓자 누군가가 소리친다. "가윈! 한 곡 더! 오늘은 왜 늘 처음에 부르던 걸 안 부르는 거야?" 가윈은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아아. '축복 속에 잠들다'?" "응, 그거!"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친다. 그러자 가윈이 류트를 살짝 쓰다듬으며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쿡, 그건 별로. 오늘 같은 날, 그건 별로 부르고 싶지 않다고. 마크, 그 노래의 뜻 정도는 기억해봐." 마크라고 불린 녀석이 고개를 숙이곤 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분위기가 다시 한 번 가라앉았다. 뭐야? '축복 속에 잠들다' 라는 노래가 무슨 뜻을 담고 있길래 저러는 거지? 「그거, 전대 서열 12위 마족 파스턴이 이카루 성녀에게 죽는 장면을 그린 노래예요. 인간 중에 꽤나 유명한 음유시인이 지었다고 하죠.」 문득 조용했던 레이네가 말했다. 나는 헤에? 하는 소리를 내며 내 검을 내려다보았다. 레이네는 그 이상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러려니, 하면서 가볍게 귓잔등으로 넘겼다. 가윈은 그 후로도 몇 곡조를 더 뽑았고, 그 때마다 열렬한 박수 갈채를 받았다. 확실히 굉장히 목소리가 맑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 녀석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깨끗한 목소리다. 잘못하면 계집애 목소리로 착각될 정도로 맑은 목소리랄까. 갑자기 저 멀리서 덜그덕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두들 흠칫했다. 갑자기 철창이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시간 됐다." 한 남자가 묵직하게 말했다. 순간적으로 감옥 안에 무거운, 아주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 하아하아하아하아=_= 정말로 제가 미쳤나 봅니다. 너무너무 잠이 안와서 한다는 것이. 노트 꺼내서 거기다 글 썼습니다;; 그리고... 쓰다말고 달려와서 컴퓨터 치고 있습니다. 오타 난무....... ......일거야. ....수정........ 필히 봐야지; -------------------------------------------------------------------------------- Next : 1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6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43378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0th January 2002 12:03:28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1-01-2002 12:36 Line : 355 Read : 1251 [18]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8 -------------------------------------------------------------------------------- -------------------------------------------------------------------------------- Ip address : 61.251.253.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그러자 방금 까지만 해도 가윈의 류트를 듣고 있던 놈들이 단체로 움찔하는 것이 보인다. "어이, 친구들. 가자." 가윈은 나와 한 번 얼굴을 마주 하더니 피식 미소짓는 낯으로 벌떡 일어서서 주위를 훑었다. 정말, 저 놈의 여유는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궁금하군. 가윈은 소매를 가뿐하게 올려붙이고, 약간은 아쉬운 표정으로 류트를 감옥 바닥에 내려 놓았다. '뭐, 류트와도 안녕이지' 라고 낮게 중얼거리듯 말하는 가윈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넌 무섭지 않은 거냐?" "무섭긴. 나는 이래봬도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가장 더러운 영웅' 이 되는 건데 말이야." 씨익 웃으며 말하는 가윈의 얼굴에는 정말로 두려움 따위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시선을 내리깔아 가윈의 뒤를 보았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나는 이 무신경한 놈 (솔직히 이건 대담하다는 게 아니라 무신경이라고!)과는 달리, 뒤에 앉은 녀석들은 바들바들 떨어대고 있었다. 뭐, 사실은 이 쪽이 좀 더 인간다운 반응이 아닌가? 녀석들은 감옥 벽에 찰싹 달라붙어 서로의 손을 꼭 잡고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흑흑, 저희는 못 나갑니다! 소인들을 데려가시려거든 죽이고 데려가옵소서! 흑흑흑! 변태 따위에게 이 몸을 허락할 수는 없사옵니다! 으흐흐흐흑! 저희들은 순결한 몸이옵니다!' 라고 온 몸으로 시위하는 듯한 자세로, 녀석들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제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건 보인다만, 눈물을 자제하기 위한 노력은 전혀 그 효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녀석들의 눈에는 저마다 무엇인가 뜨거운 것들이 한 방울씩 뜨거운 흐르고 있거든. 가냘픈 턱선을 가로지르는 눈물이 녀석들이 신은 다 닳은 신발 위로 톡톡,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질질 짜지 말고 나왓!" 푸른 제복을 입은 놈들 중 하나가 버럭 고함을 쳤다. 거참, 귀 먹겠군. 「칼레들린님, 대체 무슨 생각이세요? 지금 당장이라도 저를 뽑아들기만 하면 이딴 감옥에서 나가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라구요!」 ……후. 후하하하하하!! 여태까지 왜 안 떠드나 했다. "시끄러워." 「무슨 생각인 거예요, 정말? 진짜 그 변태에게 찾아 가 보기라도 할 셈입니까? 당신은 정말 너무 무책임해요! 카민님이나 데스님, 그 신관이 걱정할 건 생각도 안 하세요?」 "……조용히 해." 나는 레이네에게 낮게 중얼댔다. 「만날 할 말 없으면 조용히 해! 라고 말하는 주제에! 케엑! 더러워요, 더러워! 나도 더러워서 더 이상 잔소리 안 한다구!!!」 더러워서 잔소리 안 한다는 이 빌어먹을 마물의 잔소리가 그로부터 30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는 말은 꼭 하고 싶군, 젠장맞을. "서둘러서 움직여라!" 다시 한 번 버럭, 고함을 치는 놈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커서, 움찔거리면서도 몸을 움직이고 있던 소년들이 전체적으로 한 번 움찔했다. "……젠장, 목소리 줄여." 나는 낮게 이죽거리듯이 말하고 한 발자국을 움직여 바깥으로 나와 섰다. 내 뒤를 따라 가윈이 나왔고, 나머지 놈들도 질질 짜면서 걸어 나왔다. 우리들이 모두 나가자, 푸른 제복의 놈들은 갑자기 품안에서 이상한 줄을 꺼냈다. "뭐야?"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꺼내진 줄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푸른 제복을 입은 그 자식이 나를 잠시 노려보다가, 어느 순간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따―악. 욱, 하는 느낌과 함께 놈의 억센 손에 맞은 내 머리가 순식간에 왼편으로 쏠렸다. "젠장! 언제나 따따따 시끄러운 놈!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만 아니었어도! 네 놈은 살려두지 않았어! 건방지게 탈옥 따위나 해대고!" "……." 나는 입술을 질끈 물고 천천히 시선을 올려 놈을 노려보았다. 내 예쁜 눈을 본 놈은 크게 움찔 한다 싶었지만, 곧 험악한 표정으로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 "이, 이게 어디서 눈을……!" 내 잘 생긴 얼굴이 만들어내는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놈이 냅다 자신의 족발을 들어올렸다. 보아하니 내 복부 정도를 때리고 싶은가본데…… 내가 허락할 줄 알아? 퍼억! 나는 다리를 들어 내 배를 공격하려는 놈의 발목을 재빨리 낚아채 휙 하고 위로 치켜들었다. 놈의 인상이 엉망으로 일그러짐과 동시에, 나는 그 팔을 탁 하고 놓았다. "어, 어엇!!" 놈은 이상한 소리와 함께 오르골 인형처럼 비틀비틀 거리다가 한참 만에야 균형을 잡고 제자리에 섰다. 내가 가벼운 미소와 함께 바라보자, 놈의 인상이 더더욱 가관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입술을 두 어번 씰룩거리던 놈이 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내 쪽으로 달려온다. "씨팔, 지금 이 새끼가!" 다시 한 번 녀석의 그다지 보기 좋지 않은 무 다리가 불쑥 치솟아 올라온다. 나는 인상을 우그러뜨리며 그런 놈의 다리를 다시 한 번 잡아 가차없이 왼쪽으로 비틀었다. 우드드득. "우아아아아아악!!" 마족의 팔 힘이 어느 정도인지 네 놈이 알 턱이 없지. 너 따위 놈이 내 잘난 몸에 상처 하나 입히는 건 참을 수 없다, 이거야. 내 잘난 몸에 상처 하나라도 생기면 뒤로 넘어질 수많은 여인네들을 생각해야 할 것 아냐? 그 여인네들의 분노를 내가 대신 분출해내는 것이니 나를 너무 원망하지는 말라고. "언·어·순·환·해라." 나는 이빨을 지그시 깨물며 내뱉듯 말했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관절이 그대로 어긋나 버렸다. 나는 입술을 슬며시 들어올리며 다시 한 번 차갑게 미소 지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악!" 놈의 비명소리가 복도를 요란스럽게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놈의 안색이 허옇게 질리는 것이 보인다. 뒤를 힐끗 보니, 서너명의 남자들이 서둘러 이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이 쪽을 보자마자 검을 꺼내드는 놈들을 싸하게 한 번 훑어준 다음, 가볍게 내가 비틀고 있었던 놈의 다리를 바깥 쪽으로 처냈다. "크으……!" 비틀린 놈의 신음소리에 검을 빼들고 들어온 놈들이 하나 같이 이빨을 우득, 갈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 이, 이 개…… 개자식이!" 뒹굴고 있던 놈은 어느새 뒤로 끌려나가고, 대신 들어온 놈들 중 하나가 크게 고함을 지르며 주먹을 들어올렸다. 단단해 보이는 그 주먹을 본 나는 가볍게 조소했다. 저따위 주먹이 아무리 빨라 봤자, 내가 피하는 속도보다는 빠를 수 없지. 주먹이 들어온 순간, 나는 몸을 뒤로 빼냈다. 주먹이 바로 앞까지 치고 들어 왔지만, 그래봤자 내 몸에 맞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웃어 보이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었다. 퍼억! "우욱!" 퍼억, 하는 소리가 감옥 안을 찌렁하게 울리는 가운데, 내 눈앞에서 주홍색의 실이 얼핏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눈을 크게 떴다. 주홍색의 그 실이 무엇을 뜻하는 지는, 확인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가윈!" "가윈님!" "가윈 뤼케이너!"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열 명의 소년들이 갑자기 내 앞으로 치고 들어와 배에 주먹을 꽂아 넣은 가윈 쪽으로 달려 들었다. 크게 꺾여 들어간 가윈의 상체가 가볍게 한 번 떨렸다. 저, 저거 바보 아냐? 난 지금 피할 수 있었단 말이야! 머리를 밑으로 향한 채인 가윈이 잠시 숨을 골랐다. 헉, 헉, 헉 하고 힘겹게 내쉬었다 들어 마시는 가윈의 신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가윈! 이봐, 괜찮아?" 누군가의 걱정스러운 음성이 들려온다. 나는 가윈의 뒷켠에 물러 선 채로 10명의 소년들에게 둘러싸인 가윈을 보았다. "……아, 아. 그럼, 괜찮고 말고." 가윈이 피식, 하고 웃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온다. 가윈은 소년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놈은 내 바로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다음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씨익, 하고 길게 한 번 웃었다. "킥, 너……. 진짜 성격 죽인다." "……." 나는 말 없이 그런 녀석을 보았다. 가윈이 키득, 하고 다시 한 번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녀석의 입가에 만들어지는 포물선을 매우 깊었다. "이 새끼들이 작정하고 우리를 놀려!!" 감옥 안으로 들어섰던 놈은 나와 가윈의 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여태까지는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발작을 했다. 큰 목소리와 함께 놈이 나와 가윈 쪽으로 달려왔다. 시퍼렇게 칼을 빼들고 있는 놈 때문인지 한 곳으로 몰려 있던 열 명의 녀석들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선다. 나는 가윈의 앞을 가로막으며 손을 들어 검에 갖다대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그만 둬! 놈들의 몸에 상처 하나라도 냈다간 넌 그 자리에서 죽는다! 내가 없으면 너희들은 다 이 모양인가! 그들은 제물이다! 제물에게 조금의 하차라도 발견된다면 그 자리에서 죽는 것은 너희들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직까지도 모르는가!" 갑자기 뒤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찌렁 찌렁하게 울리는 그 목소리의 톤은 매우 높고 가늘었으며, 동시에 날카로웠다. 뭐, 뭐냐? "……죄, 죄송합니다." 그 목소리에 흠칫했는지, 내게 손찌검을 하려했던 놈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나 경솔했던가, 리튼?" 나는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가운데, 감옥 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하나 보였다. 푸른 제복을 걸쳤다는 점에선 미소년 보호 사상이라곤 조금도 없는 이 시건방진 놈들과 다를 것이 조금도 없었지만, 이 놈들의 짧게 자른 머리와는 완벽하게 대조되는 긴 머리가 허리너머까지 남실대고 있다는 점이 특별했다. 옅은 레몬빛의 머리카락을 차랑거리며 다가온 것은 분명, 여자였다. 그 것도 20대 초반 정도로 추정되는 상당한 미녀. "죄송합니다, 키세리아님." 내 쪽으로 달려들었던 그 시건방진 놈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하다는 말로 끝날 문제가 아니……." 말을 하다말고, 그녀가 움찔했다. 그녀의 눈이 가윈 쪽을 향해 있었다. 가윈은 뭐야, 라는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한 번 들어올렸다 놓으며 흠, 하고 낮게 중얼댔다. 그녀가 몇 번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거기 너." 그녀가 가윈을 가리켰다. 가윈은 순간 놀랐는지 움찔했다. "에? 나 말입니까, 친…… 아니, 레이디?" 능글맞게 웃으며 가윈이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뭐? 더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윈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인지?" "무슨 말씀인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저 놈 끌어내."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인상을 찌푸리자, 가윈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다가온 놈들은 무자비하게 가윈의 팔을 잡았을 뿐이다. "……왜 그러는 거냐." 나는 가윈의 팔을 잡는 놈들의 손을 휙 하고 낚아채며 여자를 향해 사나운 어투로 말했다. "그건 가보면 알 문제지." "……무슨 말이냐." 그녀는 근엄한 얼굴로 내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와 그녀의 눈이 정확하게 맞부딪혔다. "윽?" 그녀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나는 이 여자가 왜 이러나, 싶어서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내 얼굴을 한차례 보더니 입을 아, 하고 벌렸다. 여자가 입술을 질끈 문다. 뭐, 뭐야? . "너…… 눈?" 그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한 마디 뱉어냈다. 내 눈? 내 눈이 좀 예쁘긴 하다만. 그렇게 뚫어지게 볼 것까진 없을 텐데 말이야.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찬찬히 입술을 움직였다. "카, 카레나……?" 에? "카레나……의 눈인가?" --------------------------------------- 늦었지요;; 오늘로부터 몇 일 동안은 고비입니다. 아주 많이 올라갈 수도 있고. 단 한 편도 올라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_=; 되도록이면 전자가 되도록 노력은 하겠지만; 잘 모르겠네요^_^; 에에... 대충대충 올려버려서 죄송합니다; 날림입니다=_=; -------------------------------------------------------------------------------- Back : 1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9 (written by 카르민) Next : 1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7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53879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7th January 2002 11:25:34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1-01-2002 22:39 Line : 437 Read : 1059 [19]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9 -------------------------------------------------------------------------------- -------------------------------------------------------------------------------- Ip address : 61.251.253.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제 19장: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키라오네스 "어딜 가는 거지?" 나는 인상을 쓰며 내 앞쪽에서 걷고 있는 레몬빛 머리칼의 여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걸음을 옮기고 있던 그녀가 차가운 어투로 되물어 왔다. "네가 그런 걸 물어볼 입장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안될 건 또 뭐지?"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힘들었는지, 한참동안 그녀는 침묵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연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후우, 카레나의 후예여. 그대는 어찌하여 이런 곳에서 방황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녀가 꺼낸 말은 내가 예상하고 있었던 것들과는 전혀 상이한 말이었다. "궁금하군. 대체 그대가 왜 그 곳에 있었는지. 카레나의 후예여."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카레나, 라는 단어는 꽤나 많이 들어온 말이었다. 그리 익숙한 단어는 아니었지만, 워낙에 극적인 순간 극적이게 내뱉는 인간들이 많아서 나는 저 말을 몇 번 들어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대체 왜 나를 향해 카레나의 눈이라느니, 카레나의 운명이라느니, 카레나의 후예라는 말을 지껄어지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지만. 내가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자, 그녀는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와중에도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내 평생 '카레나의 눈'을 가진 자를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말이지. 호호호호호! 그대도 참으로 용감한 부모를 두었군." 무슨 뜻이지? 카레나의 눈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긴 했어도 무슨 뜻인지는 몰라. 그런데, 카레나의 눈과 용감한 부모는 대체 무슨 상관인 거지? "카레나의 후예라면…… 그렇겠지?" 대체 뭐가! 내가 질문으로 터져 버릴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입술을 씰룩거리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 레몬빛 머리칼의 여자는 태연스럽게 발을 옮겨나갈 뿐이었다. 나는 이빨을 작게 우득, 하고 갈았다. 바로 그 때, 내 옆에서 줄레줄레 내 뒤를 따라오던 가윈이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작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친구, 카레나의 후예가 뭔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뭐야? 저 여자가 너한테 카레나의 후예라고 그러는데 그게 뭔지도 모르는 거야, 친구?" "몰라." 나는 묵직하게 대답해주고 시선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가윈 놈은 끈질겼다. "뭐가 몰라야, 몰라가! 어서 대답해, 친구!" "……그렇게 궁금하면 저 여자한테 물어봐." 내 말에 가윈은 이잉, 하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너무 매정하군, 친구. 아잉∼." "……." 그 닭스러운 말에 더 이상 대꾸할 가치를 못 느꼈다고 말한다면 내 심정을 이해할 이가 있을까. 주위에 닭을 한 마리씩 달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루덴스와 이레니아 커플에 맞먹는 닭스러움이로다. 나는 나를 향해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해 보이는 가윈 쪽에서 매섭게 시선을 돌리곤 앞에서 걷고 있는 레몬빛 머리칼의 여자를 보았다. ****************** "……저 둘을 묶어라!" "예?" "묶으라지 않는가! 내 확인해 볼 것이 있으니 저 둘을 묶어서 데려 오라!" ******************* 카레나의 눈동자 어쩌고 저쩌고를 반복하면서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술을 부들거리던 그녀는, 그 감옥 안에서 나와 가윈을 향해 다짜고짜 버럭 고함을 쳤다. 내 눈이 예뻐서 마음에 든 거라면 나만 부를 것이지, 가윈은 대체 뭣 때문에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그녀는 우리를 소리쳐 불렀다. 그 여자의 명령에, 뒤에 기립해 있던 남자들 둘이 서둘러 달려왔다. 그들은 나와 가윈의 뒤에 와서 선 다음, 손에 들고 있던 줄로 우리들의 팔목을 재빠르게 휘어 감았다. 저항을 해도 좋겠지만, 저 여자가 말한 그 카레나라는 것의 뜻이 궁금했던 나는 얌전히 있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레이디?" 가윈은 휘적휘적 발을 옮기며 앞에서 걷고 있는 여자를 향해 물었다. 바로 다음 순간 줄에 묶인 그를 끌고 있는 푸른 제복 놈들이 잡아당긴 밧줄에 우욱,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움츠리긴 했지만, 그래도 묻는 가윈의 목소리는 당당했다. "……이름은?" 그러나 가윈의 그 당당한 질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앞서 나가던 여자는 가윈의 질문을 완전히 무시하곤 내 쪽으로 돌아서며 물었을 뿐이다.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 "귀족이었어?" 내가 답을 하기가 무섭게, 가윈이 고개를 휙 돌리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어왔다. 나는 그 상상을 초월하는 느끼함에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고 싶다는 생각마저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래,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이라." 다시 앞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순간 움찔했다. 그녀는 내 쪽을 보고 있었다. 한참동안 내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그녀는 어느 순간 하?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물었다.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 왜 그렇게 감동 먹은 표정이지?" "……내 이름을 한 번 듣고 그대로 불러준 사람이 여태껏 거의 없었다." 그래!! 저 이름이 얼마나 짧은데! 얼마나 짧은데에! 겨우 저걸 부르기 귀찮아서 칼이라고 줄여 부르는 놈들이 태반이었단 말이다! 아니면 칼레들린이거나! 내 말에 그녀가 부드러운 얼굴로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래? 네 이름이 그리 짧은 편은 아닌 것 같군. 나는 '세라' 라고 부르면 된다." "세라?" 나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세라. 왜 그러지?" "아무것도." 사실은……'아무것도' 가 아니었다. 초, 촌스럽단 말이다! 세라라니! 아까 어떤 사람이 부르는 걸 들어보니까 본명은 키세리아라 같은데, 대체 애칭이 그게 뭐야! 그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세라라니, 조금 촌스럽군요.」 레이네는 그렇게 말하고 후후, 하고 웃었다. 그러다가 어느순간 녀석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캬캬캬캬! 뭐,'칼' 보다야 낫지만요.」 "……." 이 놈의 마물을 내가 그냥 확! "……너, 죽고 싶냐?" 「사실을 인정하시죠.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칼과 세라 중에 뭐가 나아요?」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래……. 솔직히……. 칼보다야 세라가 낫다, 크윽! 내가 절망에 구덩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그 때, 바로 옆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러운, 한껏 가다듬은 목소리였다. "저는 가윈입니다, 레이디." "안 물어봤다." 그러나 너무나 부드럽다 못해 닭살스럽고 닭살스럽다 못해 묶어 놓고 때리고 싶은 저 느끼한 말투에도 세라라는 여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대꾸를 한 그녀의 목소리는 냉담하다 못해 찬바람 씽씽 일고 찬바람 씽씽 일다 못해 주위 사람을 동태로 만들어버리는 아주아주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 냉담한 태도에 민망했는지, 가윈의 얼굴이 금새 조금 달아올랐다. 가윈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세라(크악!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촌스럽단 말이다!)를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훌쩍, 하는 소리를 내며 나를 돌아 보았다. 조금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가윈의 얼굴에는 '나 불쌍하지?' 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표정을 유지한 채 나를 향해 말했다. "흐윽, 레이디가 날 미워하는 것 같군, 친구. 그렇지? 흐윽, 난 슬퍼." "……." 나는 잠시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자신의 그 느끼함에 얼어붙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느끼한 포즈(양 손의 집게손가락을 들어 그것으로 볼을 다정스럽게 꼭, 하고 찌르는)를 유지하고 있었다. 「닭살……입니다.」 레이네도 보고 있었는지, 한참동안 침묵한 후에 천천히 말을 걸어 왔다. 나는 내가 아무리 노려봐도 미동도 하지 않는 이 대단한 느끼남을 향해 가차없는 응징을 가했다. 나는 움직이지 못하는 손 대신 발로 놈의 엉덩이를 한 대 쳤다. "악! 왜 때리는 건가, 친구!" 내가 널 왜 때리는지 못 깨닫다니, 너는 인간도 아니다. 나는 날뛰는 가윈을 완전히 무시하고 주위를 힐끗힐끗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시끄럽던 가윈은 세라의 무지막지하게 날카로운 눈빛 공격에 조용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았다. 아직 말간 하늘이 보인다. 희미한 미색의 융단을 깔아 놓은 것 같은 뿌연 우유빛의 하늘이 위로 펼쳐져 있다. 아직도 자신의 자태를 모두 숨기지 못한 달이 가녀리게 그 실루엣만을 걸쳐놓고 있다. 아직 새벽녘이라서 그런지, 돌아보아지는 주위는 인적이 뜸했다. 세라는 한참을 걷다가 멈춰 섰다. 나는 시선을 올렸다. 눈앞에 있는 것은 높게 쌓아 올려진 상아색의 성이었다. 웅장하다고 말하기는 뭣하지만, 나름대로 격조 높게 지어진 건물이었다. 점점이 박혀 올라간 듯한 성 바깥의 계단들이 아름다워 보인다. 성 외곽을 빙 돌아나가는 건물의 외관은 아름다웠다. 앞쪽에 피어난 넝쿨 식물이 3층 정도까지 자신의 몸을 끌어 올려서 그런지 탑에 푸른빛이 더해져 싱그러워 보이기도 한다. 겨울이 오면 차갑게 식어버린 기온이 저 덩굴식물을 마른 갈색으로 변하게 만들지도 모르지만, 그건 내가 볼 것이 아니니 상관은 없는 문제지. 지금 이 순간, 아름답게 보이는 것들을 즐기면 되는 거니까 말이야. 옆에 있는 가윈 역시 이 탑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는지, 낮은 톤으로 휘파람을 한 번 크게 불었다. "휘익∼ 아름다운 탑이로군. 류트가 없다는 게 아쉬워. 있었다면 노래라고 한 곡 뽑았을 텐데." "……네가 노래를 부를 군번이라고 생각하는가." 또 다시 앞서 나가던 세라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그 싸늘한 말투에 가윈은 뾰루퉁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가윈은 쳇, 하고 중얼거리며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너무 진지한 누님이야. 얼굴은 예쁘신데 말이지." "……언제부터 저 여자가 네 누님이 됐냐?" 나는 태연스럽게 세라를 '누님' 이라 칭하는 가윈의 태도에 어이가 없어져서 물었다. 그런데 이 낯짝 두꺼운 놈이 생글, 하고 웃는다. "왜? 부러워?" ……내가 말을 말지. 세라는 거침없는 걸음걸이로 상아색의 궁전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궁 안에 들어서서 우리 쪽을 보았다. 그러자, 우리의 손목을 속박하고 있는 끈을 뒤에서 잡고 서 있던 푸른 제복의 두 놈들 역시 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들어갔다. 미소년 된 입장에서는 매우 쪽팔리는 말이지만, 나는 당연히 질질 끌려갔다. 젠장. 미소년을 이딴 식으로 끌고 다니면 죄 받을 거다, 이 놈들아! 어찌 되었든, 끌려 들어간 상아빛의 궁 안은 전체적으로 푸른빛을 띄고 있었다. 나는 가늘게 눈을 떠 앞서 나가는 세라의 머리카락을 보았다. 커튼 사이로 부서져 들어온 햇빛이 세라의 레몬빛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환하게 빛나고 만든다. 레몬빛 머리카락은 그녀의 엉덩이께를 부드럽게 덮고 있었다. 치렁거리는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올리며, 그녀는 주저 없이 몸을 움직여 나간다. 그 치렁거리는 머리카락을 보며 침을 질질 흘리는 가윈(……좀 닦지 그래?)과 나를 질질 끌고 가고 있는 놈들 역시 걸음을 빨리 하고 있었다. 궁 안은 궁 밖과는 달리 사람이 꽤나 많았다. 시녀복장의 여자들이 세라를 보며 놀란 듯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친구, 누님 말이다." "……친구 빼고, 누님도 빼." "히잉, 그건 내 전매 특허인걸? 안 하면 말할 맛이 안 나." "그럼 말 하지마." 나는 차갑게 쏘아주었고, 녀석은 울먹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뭐, 내가 무시했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만. 우리들의 온갖 주접을 무시하고, 세라는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어느 한 곳에서 우뚝하고 멈춰 섰다. 하얀 문 앞이다. 우리들도 그 하얀 문 앞에 우뚝 멈춰섰다. 반들반들하게 윤까지 나는 그 하얀 문 앞에선 세라는 후우, 하고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들어올려졌다. 똑똑똑. 정확히 세 번 노크를 한 세라가 내 쪽을 힐끔 보았다. 조금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방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똑똑똑. 다시 한 번 손등과 문이 마찰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번에는 힘을 주어서 문을 두드렸는지 똑, 하는 소리가 이상하리 만치 크게 들린다. 하지만 문 안은 여전히 조용하다. 세라는 으음, 하고 낮게 중얼거리더니 가볍게 웃었다. 그런데, 가볍게 웃는 모습인데 어째 좀…… 섬뜩해보이는군? 콰아아앙! 허걱! 나는 순간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무서운 누님이시군." 가윈이 옆에서 중얼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세라는 문 안에서 대답이 없다는 데에 화가 났는지, 아니면 무슨 스트레스 쌓인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손에 무슨 물집이 생겼는지 발로 문을 걷어 차대고 있었다. 레몬빛 머리카락을 차랑대며 후훗 하고 웃고, 푸른빛 제복을 입은 채로 여태껏 폼을 재고 있던 그 모습은 어디다 집어 던졌는지, 그녀는 거의 발광하는 듯한 태도로 문을 두드리고, 아니, 걷어 차고 있었다. 쾅쾅쾅! 쿠콰쾅! "과격…… 하신 누님이야, 하하." 과격? 저게 과격이냐? 저건 무서운 거란 말이다! 그리고 저 시끄러운 소리에도 내다 보지도 않는 방 안의 인간은 대체 누구냐! 발악하고 싶을 정도로 그 시끄러운 소리가 계속되었을 무렵이었다. 드디어 문 안에서 기척이 느껴진 것은. "누……. 구인가?" 바짝 말라비틀어진 목소리가 문안에서 들려왔다. 희미한 그 목소리는, 잔뜩 찌푸려진 오후의 날씨를 연상하게 만들만큼 텁텁하게 들렸다. 막 잠에서 깬 듯한 그 목소리에, 세라는 드디어 발작(그건 발작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저건 절대로, 절대로 노크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을 멈추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다시 한 번 나를 보았다. 나를, 아니, 정확히는 내 눈을 바라보며 그녀가 희미하게 입술을 열었다. "키세리아입니다." "누구라고?" 문 안에서는 조금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세리아입니다." "……네가 여긴 웬일인가?" 다시 한 번 놀란 듯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은 채로, 굳건하게 우리의 앞에 버티고 있다. 세라는 보이지도 않는 방 안 상대에게 예의를 차리는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얀 문을 향해, 세라는 예의 바른 태도로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한참동안 안 쪽의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힐끗 옆을 보니, 가윈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세라와 문을 번갈아 보며 보고 있었다. "보여드리고 싶은 이가 있어서 데려왔습니다." 보여드리고 싶은 이가 있다는 그 말에도, 문 안에서는 제대로 된 대답이 없었다. 하다 못해 문이라도 열어 줘야 할텐데,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문 안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 무심한 상대를 향해, 세라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카레나의 눈동자를 가진 이입니다." 우당탕탕탕! 우당탕! 세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 안에서 뭔가 요란한 소리가 났다. 나는 그 큰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가윈은 다시 한 번 나를 올려다보며 '대답해줘잉∼ 카레나의 눈동자가 뭐야?' 라고 물어왔지만, 나도 모르는 걸 대체 어떻게 안다는 거야, 이 바보 놈아! "뭐, 뭐라고 했지?" 문 안에서 부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레나의 눈을 가진 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라는 차가운 어투로 내뱉듯이 말했다. ------------------------------------------------ 어쩌면...... 당분간 연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쩌면...이거든요?; 기대는... 말아주세요ㅇ_ㅇ; 갑자기 연중을 할...지...도...모...(날아온 짱돌에 사망함;) -------------------------------------------------------------------------------- Back : 20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0 (written by 카르민) Next : 1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8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53880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7th January 2002 11:25:46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2-01-2002 01:09 Line : 186 Read : 1216 [20]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0 -------------------------------------------------------------------------------- -------------------------------------------------------------------------------- Ip address : 61.251.253.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이 인간이 또 돌았나... 싶겠지만=_=;; 3연참입니다; 제가 연참한다 그랬죠~? 부비부비부비~~~>_< -------------------------------------------- 여태까지 침묵을 하고 있었다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몇 번 더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리고 난 후 문이 벌컥 하고 열렸기 때문이다. 문은 활짝, 정말로 활짝 열어 젖혀져 방 안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열린 문 사이에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갈색을 띈 반백의 머리카락과 짙은 적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그는 둥그렇게 커진 눈으로 세라 쪽을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이지? 장난이라면 용서하지 않겠다, 키세리아!" "어찌 제가 감히 당신께 장난을 할 수가 있습니까?" 세라는 허리를 굽히며 그렇게 말하곤 내 쪽을 바라보며 가볍게 손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내 뒤에 서 있던 놈이 줄을 잡아당겼다. 나는 강제로 남자의 앞 쪽으로 끌려갔다. 젠장, 기분 더럽군. 남자의 발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것이 답답했는지, 남자가 거의 명령조로 말했다. "고개를 들어라!" 나는 웃기는군,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이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잘난 얼굴이 보고 싶다는데 말릴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을 풀었다. 나는 이 꽃미모를 실컷 봐라! 라고 속으로 외치며 당당히 고개를 들곤 남자를 보았다. 고개를 드는 나를 보는 남자의 눈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와 나의 눈이 정확하게 마주쳤다. 내 얼굴을 본 그는 순간 입을 떡 벌렸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그는 온 몸으로 경련했다. "……엔카?" "뭐?" 나는 갑자기 튀어나온 그 엔카라는 말에 잔뜩 인상을 썼다. 그러나 그는 내 태도 따위는 아랑곳않고 떨리는 입술을 다시 한 번 열었다. "엔카……. 죽지 않았던가? 엔카! 엔카……! 죽지 않았던 거야? 엔카……!!" 나는 어이가 없어서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이름을 외쳐대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어서 더더욱 황당했다. "엔카……." 남자는 중얼거리더니 손을 뻗어 내 얼굴에 가져오려 했다. 으악, 싫다! 이 잘난 얼굴에 어디 감히 손을! 나는 얼른 한 발자국 물러선 후 냅다 외쳤다. "누가 엔카라는 거야! 내 이름은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이다! 엔카인가 뭔가가 아니라고!" 눈물을 흘리고 있던 남자가 다시 한 번 움찔했다. "……엔카가 아니라고?" "……." 나는 말없이 남자를 보았다. 남자의 눈동자가 한참동안 고동을 치다가 잦아들었다.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그의 적갈색 눈동자는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훅,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나를 보았다. 그는 탐색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어느 순간 핫, 하고 한숨처럼 웃음을 지었다. 그가 하하하하핫, 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린 건 다음 순간이었으리라. "……하, 하! 하하하하하! 피에트! 하핫, 그랬군! 자네가 이겼군! 크하! 하하핫! 자네가 이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구만, 그래! 크하하하하!" 이, 이게 미쳤나? 나는 황당스러움에 움찔거리며 뒤 쪽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당혹스러워 진 것은 비단 나 뿐 만이 아닌지, 젖은 눈으로 문을 부여잡은 채 광소를 터뜨리고 있는 남자를 향해, 온갖 사람들의 당황을 품은 시선이 쏟아지고 있었다. 세라 역시 조금 놀란 눈으로 그런 남자를 한참동안 보고 있다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녀는 나를 향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분께서는 네게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녀는 목소리를 착 갈아 내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리온! 너도 줄을 놓고 이 쪽으로 와라." 그 말과 함께 세라가 완전히 뒤돌아섰다. 내 줄을 잡고 있던 남자는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돌아서는 세라를 향해 뛰어 갔다. "자, 잠깐. 나는?" 가윈이 당황한 듯 세라를 향해 묻는 모습이 보인다. 세라는 그런 가윈을 향해 스산하게 한 번 웃어보였다. 그녀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는 깊었다. "너는 나와 나눌 이야기가 있을 것이 아닌가, 비밀이 많은 자여." 뭔가 찔리는 것이 있는지 가윈이 움찔했다. 가윈은 어느 순간 피식, 하고 웃음을 지은 후 말없이 세라를 향해 움직였다. "흐하하하하하! 크하핫!" 가윈과 세라를 비롯한 인간들이 발걸음을 옮겨 저 복도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도, 이 이상한 남자는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가…….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나? "……하, 하하……." 그러나 무섭도록 오래 지속되었던 그 광소가 잦아든 것은 한 순간이었다. 남자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숨을 낮추기 시작하더니, 거짓말처럼 웃음을 딱 하고 멈추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남자의 눈이 불타고 있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는 후후, 하고 짧게 웃었다. 아까 같은 광소는 아니었고, 조금은 부드러워 보이는 미소다. "그래? 네 양부(養父)나 양모(養母)가 지어준 이름인가?" 나는 순간, 크게 움찔했다. "무슨……. 뜻이지?" "별로. 네 성이 네 아버지와 달라서 그렇게 생각한 것뿐이다." 순간, 몸이 크게 한 번 떨렸다. 세포 하나하나가 숨을 죽인다. 심장 고동 소리가 빨라지기 시작하고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온다. 나는 떨리는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당신……? 아버지를……." 아버지? 내가 방금 전에 '아버지' 라고 했나? 이상해, 이 발음. 너무 이상해. 이상해. 물론 아이에드놈이 내게 항상 반 협박으로 아버지라고 불러봐∼ 라고 말하고 다니긴 했었지. 그래서, 때때로 어쩔 수 없는 경우에 그 발음을 밖으로 낸 적도 있어. 하지만. "……내 아버지를……." 하지만 이상해. 이상해. 이상하다고! 이상해서 이대로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은 생각마저 들어. "당신이……. 내 아버지를 알아?" 헐떡이는 숨소리를 스스로 느낄 수가 있다. 심장이 방망이질 쳐서 견딜 수가 없다. 남자가 나를 향해 희미한 웃음을 보내왔다. "차라도 한 잔 하겠는가?" 그가 짧게 미소지었다. "……내……. 친우의 아들이여." -------------------------------------------------------------------------------- Back : 21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1 (written by 카르민) Next : 1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09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53880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7th January 2002 11:25:54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2-01-2002 01:10 Line : 382 Read : 1137 [21]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1 -------------------------------------------------------------------------------- -------------------------------------------------------------------------------- Ip address : 61.251.253.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머릿속은 정리가 되지 않아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빙글대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나를 방 안으로 맞이했다. 그런데 남자가 나를 맞은 그 방 안은 무척이나……. ……추접스러웠다. 온통 엉망진창! 척 봐도 어려울 것 같은 이상한 문자가 마구 적힌, 읽다가 집어 던진 것처럼 보이는 책이 여기저기 널려 있고 집어 던져 부순 것 같은 화병이 이 곳 저 곳을 뒹굴었으며 그 깨진 화병에 맞은 듯한 거울의 파편도 보이고, 마땅히 침대에 있어야 할 이불이 이상한데 나와 있었다. 심지어, 깨진 술병도 보이는군. "……." 대체 이 남자가 나의 아버지…… 라는 존재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다만. 친구라는 사람이 이렇게 추접스러운 환경에서 사는 걸로 보아…… "깔끔하고 깨끗하고 센티한 나와는 달리 좀 지저분했을지도."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앉게." 뒤쪽으로 묶인 내 줄을 풀어주며 남자가 말했다. 나는 남자가 건넨 말에 기가 막혀서 픽 하고 웃어버렸다. "어디에 앉으란 말이냐?" "거기." 나는 그가 아무렇게나 가리킨 방향을 보며 인상을 썼다. "나보고 거울 파편에 엉덩이가 찔려 죽으란 말인가?" "……아아? 그럼 이 쪽으로 앉지." 남자는 다시 손으로 아무 곳이나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더더욱 어이가 없어졌다. "깨진 꽃병 밟고 다치라고?" 남자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온통 깨진 것들 투성이인 방이 자신도 민망했는지, 그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험험, 평소에는 깨끗한데 왜 내가 어질러 놓고 있을 때 왔는가." "……." "펴, 평소에는 정말로 깨끗하다네." 차라리 카민이 밥을 많이 안 먹겠다고 맹세하는 말을 믿겠다. 남자는 어설프게 웃으며 손을 들어 다른 쪽을 가리켰다. "험험, 그럼 저 쪽에 앉게." "깨진 술병 사이에 앉아서 뭘 어쩌겠다고?" 남자는 내 말에 침묵했다. 남자는 뭔가 어색해진 듯 험험, 하고 크게 기침을 했다. 그의 미간 위로 엷은 줄이 돋아난 것 같기도 했다. 남자는 커험, 하고 다시 한 번 기침을 한 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럼 저 의자 위에 앉게." 나는 그의 말에 흘깃 뒤쪽에 놓여진 의자를 보았다. 다행히도 의자 위에는 파편 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그 의자 쪽을 향해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 나갔다. 워낙 깨진 조각들이 많아서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조심조심 온갖 노력을 기울였더니 간신히 탁자 근처에 닿을 수 있었다. 나는 훅, 하고 크게 숨을 들이쉬며 의자에 앉았다. 탁자 위도 온통 잡동사니였다. "그럼 차나 한 잔 내올 동안 쉬고 있게." 쉬는 것 좋아하네. 온통 깨진 것 투성이인 이 방 바라보고만 있어도 짜증이 날 지경인데 뭘 쉬라는 거야? 그러나 남자는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방 한 쪽으로 들어가서 뭔가를 만지작거리는가 싶더니, 잠시 후 차를 가져왔다. 흰 찻잔을 받친 쟁반을 두 손에 들고서 남자는 종종 걸음으로 내 쪽을 향해 다가 왔다. 차를 들고 있는 그의 얼굴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사뭇 진지해 보이기도 했다. "크아아아아아!" "……." 그 진지함이 차 들고 오다가 발에 찔린 거울 파편 때문에 엉망진창이 되긴 했지만. "……험, 험험." 몸을 비틀어대며 발에 박힌 거울 파편을 꺼낸 남자는 한참동안 온갖 난리를 다 떨어대다가 다시 내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용케 깨지 않은 찻잔을 두 손에 든 채로. 남자는 다가오더니 내가 앉아 있는 의자의 맞은 편에 놓여진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차는 어디에 놓을 거지?" 나는 자리에 앉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 내가 이렇게 묻는 건 당연했다. 탁자 위가 워낙 지저분하다 못해 너저분해서 도저히 찻잔 같은 걸 올릴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책이 수북수북 쌓여 있는데다가 먹다 흘린 것 같은 쿠키 부스러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찢어진 책갈피에…… 하여튼 난리도 아니었다. 몇 세리하는 거뜬히 넘길 것 같은 잡동사니의 두께를 나는 가만히 노려보았다. 남자는 끙, 하고 낮게 신음하더니 다시 일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 것 좀 들고 있게." 다가온 남자는 내게 쟁반을 맡기며 말했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 쟁반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받아들자마자, 남자는 모종의 행동을 결행했다. "허업!" 좌악! "……." 우르르르르르르! 요란한 소리와 함께 탁자 위에 있던 것이 모조리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멍한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자기가 생각해도 멋쩍은지 허허, 하는 낮은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숙이며 머리를 긁었다. 나는 그런 남자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방금 남자가 한 짓은 세라가 아까 방 문을 걷어찬 것과 비견될만한 대단한 성질의 것이었다. 탁자 위에 놓여져 있던 테이블보를 휙, 하고 잡아 빼내서 거기에 올려져 있던 물건을 모조리 땅으로 직행시키다니! 그거 치우기가 귀찮아서 그 딴 짓을 한단 말이냐! 좀 치우고 살아라, 이 인간아! 그러나 내가 자신을 어떻게 보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의지인지, 그는 매우 뿌듯한 표정으로 허리를 펴며 중얼거렸다. "깨끗하군." ……그래, 네 똥 굵다. 남자는 흐뭇한 어조로 말하고는 테이블 보와 테이블 보 위에 놓여 있던 물건들의 희생으로 깨끗해진 탁자 위에 찻잔을 올렸다. 그리고 씨익, 하고 웃어 보이는 이 엽기적인 인간. "자자, 차가 식었겠구만. 마시게."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그런 남자를 보다가 그만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나는 내 앞쪽에 놓여진 찻잔을 보았다. 핑크빛 장미가 한 송이 달라 붙어 있는 그 흰색의 찻잔은 매우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그 찻잔을 입가에 갖다댔다. 그러나 거의 무의식적으로 찻잔을 들어올렸던 나는 어느 순간 움찔 얼어버렸다. "왜, 안 마시나?" "……차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나는 차를 도로 내려 놓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차마 옛날에 차 마시다가 혀 데인 전적이 있어서 차 못 마시게 됐다는 말은 못하겠다. 남자 자존심이 있지, 암. "그래?" 남자는 아쉬운 듯한 어조로 말하곤 자기 혼자 차를 홀짝였다. 그는 피식, 하고 길게 한 번 웃은 후 말했다. "내 이름은 키라오네스라고 한다. 키라, 키오, 키네, 오스. 넷 중에서 아무 것으로나 좋을 데로 불러라." 키라? 키오? 키네? 오스? 굉장한……. 네이밍 센스로군. 세라 못지 않다. 나라면 죽어도 저렇게 부르게 안 놔둔다. "……키라오네스라고 부르겠다." "그러던지." 남자, 아니 키라오네스는 그렇게 말하곤 나를 보았다.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이지…… 엔카를 많이 닮았구만." 나는 그런 그의 태도에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이상한 감정이로군. 이 키라오네스라는 남자가 누군가와 닮은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내 착각인가? 아니면 내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을 아버지란 남자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것인가? "엔카가 내 아버지의 이름인가?" "아니 아니. 엔카는 네 어머니의 이름이다. 정말, 열 아홉 살의 엔카의 모습 그대로군. 으음, 어깨가 조금만 더 좁다면 그대로 엔카다." 나는 조금 놀라서 크게 외쳤다. "당신, 내 어머니도 아는 건가?" "아아, 물론. 네 어머니는 내 첫사랑이다. 너의 아버지와는 친구 사이였고. 정말로 놀랍군. 그 둘이 결혼을 했다, 이 것 아닌가. 후후, 세세(世世)에 남을 일이로다." "……." 그는 놀랍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지만, 나도 놀라는 것이 있었다. 노, 놀랍다고! 말도 안 돼. 이 남자, 척 보아도 50대로 보인단 말이야. 많이 양보해서 50살이라고 치자. 지금 내 나이가 열 여덟인데, 어머니가 나를 스물쯤에 낳았다고 가정하면, 어머니는 많아 봤자 서른 여덟 살이 아닌가? 저 남자와는 열 두 살이나 차이가 난단 말이다. 뭐가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나! "어머니와 아버지는 살아는 있는……." "둘 다 죽었다." 키라오네스는 아주 가볍게 잘라 말했다. "흐응, 그렇군." 뭐, 별다른 감흥은 들지 않는다. 내게 아버지, 라는 것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작아. 어머니 라는 것도 마찬가지. 쪽팔리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내게는……. '가족' 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녀석들이 꽤나 있기 때문에. "그래? 그럼 아버지란 작자 이름이라도 말해봐." 나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키라오네스는 가볍게 한 번 웃은 후 입술을 열었다. "네 아버지의 이름은……." 말을 하다말고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아아, 그러고 보니…… 네 아버지의 본명은 나도 모른다. 후후, 나나 네 엄마난 네 아버지를 피에트라고 불렀지만 말이다. 네 아버지의 이름은 수십 개는 되었으니 본명을 알기는 힘들지. 워낙에도 비밀이 많은 남자였고." 그래? 비밀이 많고 이름이 수십 개라. 아버지 쪽이 마족이었나 보군. 엔카와 피에트. 그것이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름. 순간, 지끈하고 가슴이 아려왔다. 후후, 아서라, 칼레들린. 너 지금 또 센티해지려고 하는 거잖아? 젠장맞을, 참으라고! 아릿한 가슴의 통증을 억지로 억누르면서 나는 귀를 세웠다. "엔카를 단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네가 엔카의 아들이라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을 거야. 넌…… 정말로 엔카를 닮았다. 그 하얀 피부도, 그 붉은 입술도, 그 아름다운 눈매도, 그 가느다란 턱선도, 그 비단 같은 까만 머릿결도." 키라오네스는 멍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쿨럭……. 불, 불쾌하다. 그는 한참동안 뭔가 헤매는 시선으로 나를 보다가 한참만에야 내 불쾌한 눈빛을 눈치챘는지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가 길게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따라 한숨을 내쉬려다가, 어느 순간 번개같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는 것이 있어 움찔했다. 나는 키라오네스를 빤히 노려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잠깐." "뭔가?" 나는 의아하게 묻는 그를 향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어머니와 닮아서 알아봤다니 그렇다 치고. 내 아버지가 누군지는 어떻게 알았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가볍게 실소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거야, 자네가 '카레나의 눈'을 갖고 있으니." "……?" 나는 잠시 이해할 수가 없어 그를 보았다. 순간, 그가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칼레들린이라고 했던가? 아니, 자네……. 설마 모르는 건가?" "무엇을?" "하…… 하하― 하하하핫! 정말로 모르는 것인가?"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몇 번이나 웃다가 어느 순간 웃음을 거둬들였다. 그가 쓰게 미소지은 것은 그 순간이었으리라. "하하, 그래……. 그런 것인가……. 그렇다면 넌, 너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겠군. 아주 조금도. 단편적인 것 까지도. 그렇지?"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키라오네스가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래…….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겠지, 그래." "무슨 뜻이냐?." 나는 자조적인 그의 말에 눈을 치켜 뜨고 물었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 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모르는 편이…… 나을 걸세." 하? "……웃기는군."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대는 놈을 향해 차디차게 말해 준 후 천천히 일어섰다. 키라오네스는 놀란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입 꼬리를 천천히 올리며 그런 그를 향해 웃어주었다. 키라오네스가 움찔하며 나를 본다. 나는 일어선 자세 그대로 손을 허리춤에 가져갔다. 스르릉!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내 흰 손 위로, 은빛의 검이 들려져 나왔다. 아름다운 검신의 은빛을 본 키라오네스가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나는 가벼운 손놀림으로 검을 한 번 휘둘러 그의 목덜미에 들이댔다. "무, 무슨 짓인가!" 그는 깜짝 놀란 듯 몸을 뒤로 가져갔다. 나는 되도록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낮게 말했다. "말해." "……뭐, 뭐라고?" 그가 숨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나는 입 꼬리를 들어 올리며 싸한 말투로 말했다. "말하라고 했다" 나는 그를 향해 더 가까이 검을 가져갔다. 검신이 크게 한 번 흔들린다. "카레나의 눈동자라는 게 대체 뭐냐.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정확히 누구였지?" "검은 치우……." "말을 하면 치우도록 하지." 내 말에 키라오네스가 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 그는 크으,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을 질끈 물었다. "……좋아. 말하겠다." 그는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그의 눈이 다시 한 번 자제를 잃고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그는 한숨을 내쉰 후, 자그맣게 입술을 열어 중얼거리듯 말했다. "카레나의 눈동자라는 것은……." -------------------------------------------------------------------------------- Back : 22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2 (written by 카르민) Next : 20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0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53880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7th January 2002 11:25:57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2-01-2002 01:10 Line : 202 Read : 1635 [22]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2 -------------------------------------------------------------------------------- -------------------------------------------------------------------------------- Ip address : 61.251.253.1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좋다, 말하겠다. 카레나의 눈동자라는 것은……." 그가 입을 떼어냈다. 심장 박동수가 커지기 시작한다. 두― 근 두― 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팔딱이는 근육의 움직임이 더욱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맹렬하게 움직이는 그것의 움직임은 격렬했다. 심장이 팔딱임에 숨마저 멎어버릴 지경이 되었을 때,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바로……. 응?" 쿵쿵쿵! "뭐야?" 나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키라오네스가 말을 이으려는 찰나, 갑자기 방을 향해 요란한 노크 소리, 아니…… 저건 분명 발로 차는 소리인 것 같은데? 어찌됐든, 방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세라가 아까 한 것 못지 않은 커다란 소리. "손님……인가 보군." 그는 나를 한 번 올려다보았다. "검을 거두어주게, 친우의 아들이여. 이 모습을 본다면 자네가 위험해 질 수도 있다네." 쿵쾅쿵쾅!!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칼레들린님, 일단…… 검을 집어넣으시는 편이 좋겠네요.」 내가 망설이고 있는데, 착 가라앉은 레이네의 목소리가 안으로부터 들려왔다. 나는 이 방정스러운 마물이 왜 이제야 말문을 여는 것인지 조금 궁금해졌다. 이 녀석의 성격상, 키라오네스가 등장함과 동시에 방정을 떨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왜 이제야 입을 여는 거지? 드디어 개과천선한건가? 쿵쾅쿵쾅! 쿵쿵쿵쿵! 쿠당탕탕! 두닥!! "……." 대체 어떻게 두드리면 저런 소리가 날 수 있는 거냐? 아예 문을 부스려고 작정을 했구만. 나는 어찌됐든 검을 집어넣기로 마음먹고 검을 안으로 들이려고 했다. 그런데, 순간이었다. "이제 더 이상은 못 참는다!" 갑자기 문 밖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나도 못 참아∼!" 나는 갑작스럽게 귓가를 파고 든 그 큰 목소리에 몸을 움찔했다. "차, 참아!" "참아, 이 빌어먹을 인간들아!" "차, 참으십시오, 제발! 제발!" 이……. 이…… 이 목소리들은?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이 익숙하다 못해서 징그러운 목소리들은 설마? 나는 침을 꼴딱 삼키며 머리 위로 솟아오른 땀을 닦아 냈다. "우아아아아! 이데라고 했지? 제발 참아 줘! 잊지 말란 말야! 이 방 안에 있는 건 바로 이 나라의……" "나와는 상관없어!" 쿠콰콰콰콰! 귓전을 찢을 듯한 요란하고도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인가가 파괴되는 그 커다란 소리는 분명, 방과 복도를 연결해주는 문이 부서졌음을 알리는 명백한 표시였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을 문 쪽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보았다. "……카, 칼레들린?" 잔뜩 쉬어 버린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바로 앞에서 붉은 옷자락이 보인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질끈 물고 있는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 찬다. "엑? 칼레들린님이라구요?" 붉은 옷의 녀석을 밀어내느라 낑낑거리는 숨을 채 감추지 못해 헉헉대는 흰 로브의 녀석역시 너무나 익숙한 얼굴. "칼?" 그리고, 그 흰 로브를 거의 발로 차내며 안으로 들어오는 붉은 머리칼의 놈 역시 너무 익숙하다 못해 징그러운 놈이다. 나는 가볍게 숨을 들어 마시며 손을 들어 머리카락에 갖다댔다. 그리고, 그대로 부볐다. 차랑거리는 머리카락이 내 손끝에서 까끄러운 감촉을 전달한다. 내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쉰 그 순간이었다. "내가 너 때문에 죽을 뻔했다는 건 알아?" 갑자기 무엇인가가 내 멱살을 휙하고 낚아챘다. 나는 놀라서 밑을 바라보았다. 부글부글 불타 오르는 눈을 하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정말로 많이 두들겨 맞았는지, 여기저기가 멍 투성이에 두 눈이 시퍼렇게 부어 오르고 상처가 터지기까지한 모습이 정말로 가관인 남자. "너 때문에 키세온님이 얼마나 맞았는지 네가 알아?!" 그리고, 그 옆에서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씩씩대고 있는 여자 하나. 푸른빛 머리카락에 약간 탄 갈색 얼굴로, 당장이라도 내 팔뚝을 깨물어 뜯을 것 같은 무서운 여자가 있다. 라이메데스, 에세렌, 카민, 루덴스. 그리고 이레니아. 나는 이마에 손을 댄 채로 다시 한 번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니, 대체……." 당황했는지, 내 뒤에 서 있던 키라오네스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서 들려왔다. 키라오네스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한 차례 바라본 후 종종 걸음으로 다가와 이 빌어먹을 놈들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라이메데스, 카민, 에세렌 순으로 얼굴을 훑어 들어가던 그의 시선이 어느 순간 한 점에서 가서 멎었다. 키라오네스가 부드럽게 미소지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오오, 이레니아. 그대도 있구려." 에? 이 영감, 이레니아랑 아는 사이인가? 키라오네스의 아는 척에 레니는 나를 잡아 먹을 것 같은 표정을 풀어냈다. 그녀는 호호, 하고 온갖 내숭 섞인 웃음을 지은 후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호호호. 이렇게 뵙사옵니다, 크레티아의 영원불멸하실 황제이시여. 이 날의 모든 영광이 당신께 베풀어지기를 기원합니다. ……바로 몇 일 전에도 뵈었지만, 오늘 역시 강령한 모습을 뵈오니 기쁘옵니다. 세이피안의 딸이 인사드립니다." 머―엉.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카민은 목을 부여잡고 '어억, 나 죽을 것 같아!' 를 연발하고 있었고 에세렌은 '담백한 것을 줘요!' 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따위 것에 그리 신경을 뺏길 여유가 없었다. 레니의 말 중에서 도저히 그냥 넘기지 못할 말을 발견했기 깨문이다. 대, 대체? 뭐야? 영원불멸하실 황제라고? 누가? 이 인간이? "고맙구려. 그런데…… 대체 무슨 일로……. 이들은 누구인가." 말투가 싹 변한 것은 레니 뿐만이 아니었다. 여태까지만 해도 나를 향해 '엔카랑 똑같아' 라며 훌쩍대던 50대의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 없고, 잔뜩 진지한 남자만이 이 곳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키라오네스의 시선이 레니의 뒤쪽으로 향했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루덴스가 있었다. 잔뜩 얻어맞아서인지 잔뜩 터진 루덴스의 모습에 (거의 삶은 두부였다)키라오네스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루덴스는 머리를 슬슬 긁으며 변명조로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그것이……." 아바마마? 아바마마라고?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더 이상 들어볼 것도 없지 않은가? '크레티아의 영원불멸하실 황제' 에 이어, 왕자인 이 놈이 '아바마마' 라는 말을 지껄인다면! 두 말 할 필요가 없어! 이 놈이 왕 이라는 거잖아!! "……." 나는 황당함에 한참동안 키라오네스를 보는 수밖에 없었다. -------------------------------------------------------------------------------- Next : 21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1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53880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7th January 2002 11:26:00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8-01-2002 05:09 Line : 437 Read : 1299 [23]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3 -------------------------------------------------------------------------------- -------------------------------------------------------------------------------- Ip address : 211.220.15.16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좀 쪽팔리는 일이긴 하지만, 난 녀석들에게 설명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이가 없게도 내가 실수로 감옥에 끌려갔다는 이야기며, 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미소년 룸에 기절해서 질질 붙잡혀 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분노하는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이 나약하고 가녀리며 아름다운 내가 그렇게나 고생을 했다는데도 카민은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고, 라이메데스는 고개를 돌리고 스리슬쩍 웃었으며(다 보인다, 이 자식아!)에세렌은 카민과 같이 굴렀다. "크하하하하! 크핫∼ 으하하하하하!" "……입 꿰매 버리기 전에 닥치는 게 좋아." 내가 이빨을 으드득 갈면서 해댄 소리에도 저 놈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런데 낄낄거리는 그 놈들을 보며 내가 분기탱천해 있을 때, 갑자기 옆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분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이 놈들을 그냥!!" 놀라서 돌아보니, 뜻밖에도 루덴스 놈이 이빨을 부드드득 갈아대고 있었다. 가만히 채소라도 이빨 아래에 갖다 대 두면 잘 갈릴 것도 같은데. "그러니까 뭐야! 네가 이틀동안 돌아오지 않은 건 내 휘하의 놈들이 너를 슈크림인가 뭔가랑 착각해서 거기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이거지?" 눈이 밤송이만 해져서는 따지듯 묻는 루덴스의 얼굴은 굉장했다. 놈은 대답을 하지 않으면 갈아 마셔버리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잘하면 나 치겠다, 이 녀석? "그래." "내 이…… 이 자식들을 그냥! 죽여버리겠어!" 루덴스는 빽 고함을 지르곤 갑자기 문 쪽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무엇 때문인지 잔뜩 화가 나 버린 그 놈의 뒤통수를 황당함이 뒤섞인 시선으로 가만히 보고 있는데, 뒤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게 서라, 아들놈아." 아주 묵직하게 울리는 그 목소리에 놀랐는지 루덴스의 발걸음이 흠칫하고 멈췄다. 루덴스는 부들부들 온 몸을 떨면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녀석의 시선은 키라오네스에게로 가서 멎었다. "……뭡니까, 영감." 잡아 먹어버리겠다는 투로 말하는 루덴스의 어조에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도, 분명 이 나라의 왕임이 틀림없는 남자에 대한 경외감도 담겨 있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바마마' 어쩌고 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껄렁거리는 양아치만이 남아 있다. '뭡니까 영감' 이라니? 누가 들으면 정말 옆집 영감 부르는 줄 알겠네. "허허, 아들 놈 말투 좀 보겠나. 이해하시오들. 저 놈이 어렸을 때부터 가정교육을 좀 못 받아 놔서 저렇게 되었소." 키라오네스는 혀를 쯧쯧 차곤 우리를 빙 돌아보며 말했다. 루덴스는 이빨을 부드득 갈며 우리를 돌아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저 말 믿지 마라. 왕자가 어째서 교육을 못 받겠어? 내 성격이 조금 이상한 건 다 저 영감탱이 때문이야!" "저 아들 놈 말하는 꼴 좀 보겠나." "내거 틀린 말 햇어?" 쩝. 둘은 그렇게 한참이나 티격거리면서 싸워 댔고, 우리들은 아주 느긋하게 그 모습을 구경했다. 뭐, 굳이 말릴 필요성도 못 느끼겠다. 저 모습 어딜 봐서 일국의 황제고, 일국의 왕자냐? 그리고 둘이서 싸워 봤자 그 나물의 그 밥이요, 부전자전이고, 도토리 키제기요 난형난제가 아니냐. 제깟 놈들 둘이서 아무리 저렇게 따따따 시끄럽게 떠들어 봤자지. 서로 깎아 내리는 것 밖에 더 돼? "빌어먹을, 이 영감탱이가! 똑바로 봐요, 영감! 내 얼굴을! 뭐 같아요!" 마구 싸워선 안 되겠다 싶었는지 갑자기 루덴스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키라오네스는 경쾌한 어조로 말했다. "팬더. 꽤 귀엽구나." "……꼭 그렇게 적나라하게 말해야 합니까?" "네 놈이 물어 봤잖아!" 둘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서로 성을 냈다. 그들이 나름대로 진지한 표정들을 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고받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솔직히 만담, 그 이상으론 안 보였다. "아, 젠장. 어찌됐든 내 얼굴이 팬더로 보이는 건 저 놈!" 그렇게 말하면서 루덴스는 검지로 나를 가리켰다. 잘생긴 나는 왜 걸고 넘어져? "바로 저 놈 친구들인 이 놈들!" 그렇게 말하면서 이번에는 카민과 라이메데스, 그리고 에세렌을 죽 가리킨다. "이놈들한테 맞았기 때문이라구요! 이 놈들이 겉보기엔 이렇게 비리비리해도 저 이데란 놈은 무슨 팔에 무쇠 두른 것처럼 엄청난 놈인데다가, 카민 저 녀석은 생긴 건 계집애처럼 생겨서는 힘이 장난 아니고.(카민의 표정을 보아하니 나가면 한 대 더 맞겠다.)무엇보다도 저 신관! 아닌 척 해놓고, 말리는 척 해놓고 자기가 제일 많이 때렸어! 그런데 저 놈들한테 내가 왜 맞았나? 그 건 바로 저기 있는 칼레들린이란 놈이 이틀동안 말없이 실종됐기 때문이고, 또 저 놈이 이틀동안 실종된 이유를 물어보면……." "숨이나 쉬어라." 루덴스가 헉헉대면서 말을 잇는 것을 물끄러미 보면서 키라오네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곤 말했다. 루덴스는 몇 번이나 더 헉헉댄다음 입술을 열었다. "후우후우후우! 그래, 저 놈이 이틀동안 실종된 이유는 '미소년 헌터 (뭐, 뭐냐. 이 이상한 명칭은. 미소년 헌터? 쿨럭이다!)'패거리가 사람을 착각해서 저 놈을 감옥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그 미소년 헌터 패거리들을 잡아서 족쳐야 내 분이 풀리겠다, 이 말입니다!" 루덴스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고 있던 키라오네스가 문득 물었다. "미소년 헌터 패거리라면 그 이상하고 사이한 놈에게 미소년을 바치기 위해 결성된 조직을 말하는 건가?" "그럼 그 거 말고 그런 요상한 이름을 가진 패거리가 어딨겠어요!!" 한치도 지지 않겠다는 듯 루덴스가 다시 고함을 쳤다. 그러자 키라오네스가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소년 헌터 패거리의 단장은 키세리아일텐데. 그래, 키세리아를 팰 생각인가?" 키라오네스의 질문에 루덴스가 헙, 하는 표정을 지었다. 놈은 조금 당황한 듯 몸을 옆으로 슬슬 꼬기 시작했다. "그, 그건……." 몸을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하면서 쩔쩔 매는 루덴스. 키세리아라면 세라를 말하는 거로군. 이 놈, 세라와 아는 사이인가? 하긴, 좀 영 이미지가 아니긴 하지만 일단 국왕이라는 키라오네스에게 직접 날 데려온데다가 국왕이 있는 방에 그렇게나 무식하게 발길질을 해댄 걸 보면…… 그 여자 꽤나 대단한 여자일지도 몰라. "키세리아가 누구예요?" 더듬대는 루덴스를 가만히 보고 있던 레니가 어느 순간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루덴스는 더더욱 당황한 얼굴로 팔을 저었다. "아? 아? 아, 아무도 아니야, 이레니아. 신경쓰지마." 안색이 확 변했구만 아무 것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여·자·이·름· 같은데요, 키세온님?" 목소리가 살짝 갈라진다. 살벌한 것. "하하! 하하하하하하! 시, 신경 쓰지 말라니까! 이레니아." 레니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갑자기 루덴스가 입술을 꾹 깨물며 우우, 하는 소리를 속으로 삼키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이상하게도 얼굴 역시 시퍼렇게 질려 있고. 갑자기 왜 그러나 싶어서 쳐다보니 무서운 저 계집애가 루덴스의 발을 퍽퍽 밟아대고 잇었다. 소리도 내지 않고 말이야. 저 것도 고난도의 기술이야. "키, 키세리아를 때릴 생각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찌됐든 날 이 꼴로 만든 복수는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루덴스의 말에 키라오네스는 피식 웃으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내 아들을 때릴 수 있을 정도면 자네도 꽤 특이한 친구를 뒀나 보군, 그래. 하긴……." 그는 내 쪽으로 손을 가져와 내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카레나의 눈동자를 갖고 있는 자가 평범할 리가 없지, 암." 나는 살짝 인상을 썼다. 막 저 것에 대한 설명을 듣기 직전이었는데, 갑자기 몰아닥친 이 놈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바람에 제대로 설명들은 것은 하나도 없으니, 나로선 짜증나는게 당연했다. "잠깐. 지금……. 지금 뭐라고 했지?"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문득 뭔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 버린 듯이, 약간은 놀란 듯 하고, 약간은 당황한 듯한 라이메데스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채로 울린 건. 에? 이 놈 또 왜 그래? "다시 한 번 말해보시지. 방금 뭐라고 했지?" 라이메데스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라이메데스는 상대가 왕이건 뭐건 전혀 거리낌 없는 태도로 묻고 있었다. 하긴, 마족이 인간에게 격식 따위 지킬 필요 없겠지. 그런데 이상한 것은, 라이메데스가 이런 식으로 나가는데도 키라오네스가 전혀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키라오네스는 그저 재미있다는 눈으로 라이메데스를 한 번 훑더니 흐응, 하고 낮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자네는 알고 있었는가?" 라이메데스는 잠시 말을 하지 않고 뚫어지게 키라오네스를 보았다. 나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알 수가 없어 라이메데스와 키라오네스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뭔가 좀 심상찮다고 느낀, 그 순간이었다. 「……어디까지냐.」 에? 나는 갑자기 머릿속을 타고 울린 목소리에 움찔했다. 「뭐가?」 「어디까지……. 저 인간이 어디까지 말했냐.」 완전히 가라앉은 라이메데스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낮았다. 완전히 가라앉은 그 목소리는 깊고도 깊었으며 평소와는 완벽하게 다른 존재감마저 띄고 있었다. 나는 심지어 소름마저 돋는 것을 느꼈다. 이 녀석이…… 이런 목소리도 낼 수 있었던가? 「무슨…… 뜻이냐?」 「시치미 떼지 말고 얘기해! 저 인간이 어디까지 말했어!!」 빌어먹을, 귓구멍 찢어지겠네. 나는 이빨을 꾹 깨물며 라이메데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라이메데스는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것 같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이 어찌나 매서웠던지, 나는 순간 움찔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공포가 잠시 몸을 잠식한다. 젠장! 내가 저 놈 따위에게서 공포를 느끼다니! 「……아무 것도.」 천천히,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의식이 말을 한다. 「아무 것도? 아직 아무 것도 얘기하지 않았다는 말이냐?」 「그래. 얘기하려는 그 순간에 너희가 들어온 거다.」 내 대답에 라이메데스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녀석이 그 순간 휙 돌아서는 바람에 볼 수가 없었다. 붉은, 피처럼 새빨간 라이메데스의 그 옷은 주인이 갑작스럽게 돌아서는 바람에 춤을 추듯 위로 솟아올랐다 가라앉았다. 녀석은 돌아선 채로 한참 말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라이메데스의 표정이 확 굳어져서인지 방안은 조용해졌다. "어, 어찌됐든 나는 가보겠어." 순식간에 찾아온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며 루덴스가 뒤 돌아섰다. 그가 막 문손잡이를 돌리려는 찰나, 키라오네스가 짧게 외쳤다. "잠깐만 기다려라." 루덴스는 문손잡이에 갖다대었던 손을 빠르게 떼곤 고개를 돌려 키라오네스 쪽으로 돌아 보았다. 힐끔 보니, 키라오네스는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로 루덴스를 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키라오네스가 엄한 말투로 말했다. "생각이 짧군, 아들 놈! 잘 생각해봐라. 지금이 그 미소년 헌터인가 뭔가 하는 요상한 단체를 혼낼 때인지 아닌지!" "뭐?" 루덴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키라오네스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란 말이다, 바보 같은 아들놈아! 원래 소년들을 12명 모아야 한다고 했는데, 칼레들린의 말에 따르면 한 놈이 감옥에서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되잖느냐!" "그게 뭐가 어……. 엑?" 그게 뭐가 어쨌는데, 라고 물어보려는 듯 건방진 표정을 짓고 있던 루덴스의 얼굴은 잠시 후 엉망진창으로 망가졌다. 놈은 크게 뜨여진 눈으로 키라오네스를 보다가, 어느 순간 기괴한 소리를 내며 이빨을 깨물었다. "바보 같은 아들 놈. 실종됐던 칼레들린이 돌아왔다는데 정신이 팔려서 중요한 걸 잊고 있었군.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더냐!" 키라오네스는 혀를 쯧쯧 짧게 차며 말했다. 루덴스는 허어,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나를 보았다. "이, 이봐. 카, 칼레들린?" "뭐야?" "그, 그러니까……. 그 감옥에서, 있던, 그 실종된 인간은……. 아직 못 잡은 거지?" 이 놈이 여태까지 내 말을 어디로 들어 먹은 거야? "당연히 못 잡은 거지!" "그럼! 즉, 11명의 미소년만 있다는 거지?" "그렇겠지." 가윈은 세라가 데리고 갔지만 곧 데리고 올 테니 말이야. 루덴스의 얼굴은 내 대답을 들음과 동시에 허옇게 질렸다. 루덴스는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대며 있다가 어느 순간 매섭게 키라오네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어, 어쩌죠, 아바마마? 그 놈은 12명의 소년 중에 흑발, 적발, 금발, 청발은 꼭 있어야 된다고 말했단 말입니다. 다른 놈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나 흑발은 안 되요! 어쩝니까, 아바마마?" "……이런 순간에만 아바마마냐?" 키라오네스가 인상을 쓰며 묻자, 잔뜩 굳어졌던 루덴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꼭 그렇게 분위기 깨야겠어요? 그럼 영감탱이, 어쩔까요?" 루덴스의 말에 키라오네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출발이 언제라고?"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늦습니다. 원래도 이 녀석들이 하도 칼레들린 찾아야 한다고 난리를 쳐서 아바마마께 맡겨놓고 저는 도망가버릴 생각 이었고 말입니다." "……으, 으으음." 키라오네스는 루덴스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가 말했다. "키세온, 어차피 이번에는 '그 걸'하기로 했으니까 한 사람쯤 모자라도 상관없지 않나." "모르는 소리 마십쇼! 말도 안 된다 구요! 미끼가 완전하지 않으면 물고기는 잡히지 않아요!" 뭐라는 거야 이 놈들? 나는 갑자기 큰 소리로(여태까지도 큰 소리였다만) 떠들기 시작하는 부자(父子)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키라오네스와 루덴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진 것이 얼핏 봐도 엄청나게 심각했다. 한참동안 키라오네스와 루덴스는 서로를 노려본 채 침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키라오네스의 얼굴이 어느 순간 확 하고 펴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갑작스럽게 표정을 풀어내는 키라오네스를 보며 뭔가 불길한 것을 느꼈다. 뭐, 뭔가 심히 불길해. 어서 이 방에서 나가는 편이……. "칼레들린∼ 군." 그러나 내가 방문 쪽으로 한 발자국을 옮기기 전에, 키라오네스가 내 이름을 불렀다. 으, 으으으으윽? 그런데 대체 뭐냐? 칼레들린과 군 사이에 흐르는 저 느끼하디 느끼한 빈 공간은. 더더욱 불안하잖아! 나잇살이나 먹었으면 나이 먹은 만큼 행동을 해! 그 느끼함은 대체가! 루덴스가 누굴 닮아서 느끼하나 했더니 이 영감을 닮아 먹은 거였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가를 아는지 모르는지, 키라오네스는 나를 돌아보며 아주 크게 한 번 미소지었다. "뭐, 뭐야?" 나는 그 순간 키라오네스의 얼굴 한 가득 떠오른 징그러움에 몸서리쳤다. 그러나 키라오네스는 내가 온 몸을 뒤틀며 뒤로 한 발자국씩 물러서는 것을 보면서도 아랑곳 않고 길게 지은 미소를 치우지 않고 있었다. "도와주게나." "……뭘." 나는 불안이 황당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알면서 뭘 그러나." "모르겠는데." "칼∼레들린군." 경쾌하게 노래부르는 듯한 어조로 키라오네스가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움찔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대답하기가 싫다! 누가 저 따위 이상한 목소리를 내는 영감 따위에게 대답 해줄 줄 알고! 나는 부들거리는 이빨을 깨물며 키라오네스를 노려보았다. 키라오네스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런 내게로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어느 순간 눈을 빛내며 내 어깨에 양손을 턱, 하고 올렸다. 그리고 갑자기 한 없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여는 이 영감. "친우의 아들이여." 나는 180도 달라진 이 행동을 보면서 루덴스는 느끼함뿐만 아니라 이중인격적 유전자 역시 이 영감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누구시죠? 전 당신 모르는데요? 이 손 좀 치워 주시죠?" 난 느끼한데다가 이중적이기까지 한 이 영감을 향해 필사적으로 딴 짓을 했다. 그러나 키라오네스는 그런 나의 그런 행동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도와줄 수 없나?" 이, 이 영감이 정말 미쳤나? 뭘 도와줘, 도와주긴! "도와주게!" 으아아아! 어깨에 올려놓은 손에 힘 주지마!! ------------------------- 오랜.... 만이죠?;; -------------------------------------------------------------------------------- Back : 2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4 (written by 카르민) Next : 22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2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71380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2nd February 2002 22:47:10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8-01-2002 05:10 Line : 270 Read : 1390 [24]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4 -------------------------------------------------------------------------------- -------------------------------------------------------------------------------- Ip address : 211.220.15.16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제 20장: 나 미소년 안 해! 나는 팔짱을 끼고 키라오네스를 노려보았다. 루덴스는 자기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지 조금 황당한 얼굴이었고, 나머지 녀석들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키라오네스는 그러나 테이블 보를 휙 빼내어 더러워진 테이블을 청소해 나가는 그 굳세다 못해 더러운 의지로 우리들의 눈빛 공격을 모조리 무효화 시켰다. "들어주게, 친우의 아들이여. 비록 몇몇의 희생이라고는 하나, 일단 꽃다운 나이의 소년들이 잡혀가서 죽는다는 것은 분명 비극이 아닌가. 몇 년간 제물이랍시고 여러 소년들을 그 놈에게 갖다 바쳤어. 이번에는 저번과는 좀 다르네. 이제 얌전히 소년들을 잡아 바치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다, 이 말이야. 나는 발악이든 뭐든 할 생각이고, 이번 '미소년 헌터' 군단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군단은 그 변태를 상대하기 위해 결성된 특별 조직이다." 나는 말을 해 나가는 키라오네스를 삐딱한 시선으로 보았다. "그 미소년이나 밝혀대는 이상한 변태가 간단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그 변태를 안심시키고, 뒤통수를 치려면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제물이 필요해. 자네는 그저, 동행만 해주면 된다네. 혹시라도 일행과 동행하고 싶다면 그래도 좋아. 우리에겐 지금 '흑발'이 필요해. 미소년 헌터 군단은 왕국 최강의 기사들과 마법사로 이루어져 있으니 자네가 다칠 염려는 전혀 없어." 웃기고 있네. 그 왕국 최강의 기사들이란 놈들이 사람 잘못 알아봐서 멀쩡한 나 감옥에 처넣어서 네녀석 아들 저렇게 팬더로 만들어 놓은 건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군 그래. "헛소리 하지마. 거기 가서 그 변태한테 그대로 사로 잡히면 어쩔 건데? 같이 간 그 미소년 헌터인가 뭔가가 만약 다 죽으면 그 땐 어쩔 건데? 앙?" 내 질문에 키라오네스는 움찔했지만 곧 당당한 얼굴로 맞섰다. "그들은 최고의 기사와 마법사. 결코 저번처럼 간단하게 지진 않는다." 호? 꽤나 자신감에 넘치시는군. 상대는 마족이라고. 너희 같은 인간들이 덤벼봤자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다 죽는 거야. 신관이라면 어떻게든 상대를 해 볼 생각쯤은 먹을지 모르지만(생각만이야, 생각만!). 이 근거 없는 자신감, 어디가 근원인지 알 수 없는 오만함은 여느 인간들과 다를 것이 없군. 뭐, 왕이라서 더욱 그런지도 모르지. "됐어!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해도 안 해! 내가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해?" 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키라오네스가 얼른 내 팔을 움켜쥔다. "제발, 부탁이네!" "싫……."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싫어, 라고 말하려 한 그 때였다. 대체 뭘 먹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큰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내 고귀한 귀를 더럽힌 것은!! "가자!" "합시다!" "가야해!" 카민이 눈을 부릅뜨며 달려와 내 멱살을 낚아챈 것을 선두로, 에세렌이 내 옷을 잡고 매달렸고, 레니가 내 다리를 발로 차며 말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그 일에 당황한 내가 뭐라고 할 겨를도 없이, 먼저 튀어나온 카민이 소리쳤다. "이봐, 칼레들린! 가자! 단지 얼굴 좀 반반하다는 이유로 변태에게 잡혀가서 고통받을 그 아이들을 생각해봐! 뭐, 뭔가 진한 동지 의식을 느낀다는 표정으로 말하지 말아주겠어, 카민? 저, 저리로 그 얼굴 좀 치워! 제발! 크악, 눈물은 흘리지 말고! 저리로 꺼지라고! "그 악독한 변태 마족을 물리치러 가는 일이라면 저도 대 찬성입니다! 합시다, 칼레들린님! 합시다, 해요∼! 저번에 말을 들어보니 레이디안이 있는 샤데린 지방이라는데, 유키아 네크로나가 있는 곳은 그 샤데린 지방의 바로 옆 마을이라구요! 얼마나 잘 됐습니까?" 유, 유키가 있는 곳하고 가깝다고? 크, 크윽? 거, 거짓말이지, 너? 내가 너 같은 사이비 신관 말 안 믿는다고 맹세한지 꽤 오래 됐다! "너 때문에 얻어맞은 키세온 님을 봐서라도 해야해!" 이봐, 레니! 넌 제발 좀 가만히 있어 줄래? 난 너무나 신사적이라 여자는 패지 못하지만 지금 상태라면 때릴 수도 있을 것 같거든? 나는 턱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느끼면서 하하하하, 하고 웃었다. 말도 안 된다, 이 인간들아! 대체가 말이야, 지금 누구한테 뭘 요구하는 거야? 나보고 제물 따위나 흉내내라고? 됐어! 내가 그 따위 짓을 할 것 같아?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세 인간들의 눈을 억지로 외면하면서, 나는 라이메데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난 절대 싫다! 그리고, 내가 찬성한다해도 저 너셕이 찬성하지 않을 걸! 그렇지?" 레이디안이라는 마족을 극도로 싫어하는 라이메데스인만큼, 분명 싫다고 말할 거라고 확신하며 나는 라이메데스를 보았다. 그러자 카민이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하긴 이데님이라면……. 반대하시겠지. 칼의 시종이니까." 그럼그럼! 저 놈은 나한테 그런 거 절대로 안 시킨다, 암! 못 시키지. 내 뒤에 막강 아이에드 놈이 있는데 저 놈이 허락하면 그 땐 천지가 개벽하는…… "난 괜찮다." 천지가 개벽하는 날인……데? "뭐?" 내가 잘못들었겠지? "난 괜찮다고." "뭐, 뭐, 뭐라고?" 뭐야 저 놈!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내가 잘못 들은 거지? 그런 거지?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귀를 몇 번이나 후벼보았다. 그러나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라이메데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별로 상관없다고 했다. 가보는 것도 좋겠지." 라이메데스의 표정은 굉장히 안온해 보였다. 나는 속으로 칼을 벅벅 갈면서, 억지로 미소지었다. "하하하하! 싫으면서도 괜찮다고 말할 필요는 없어." "하하하하! 난 별로 싫지 않다!" "하하하하! 괜찮다니까, 싫으면 싫다고 말해!" "하하하하! 싫으면서 괜찮다고 말할 만큼 난 성질이 좋지 않아." "……정말 이딴 식으로 나올래?" "이딴 식으로 나간다." 제길! 정말이지 이 빌어먹을 자식을 확! 「너, 네 놈! 갑자기 왜 이래! 너, 너! 레이디안 싫어하잖아!」 나는 참지 못하고 결국 전음으로 외치고 말았다. 라이메데스는 그러나 아주 태연하게 내 말을 받아 날 더더욱 분통터지게 만들었다. 「그래, 싫어하는 건 사실이다. '그 분' 과 관계 있는 놈이 아니었다면 아주 옛날에 쳐죽였을 정도로 싫어하지.」 '그 분'? 에라이, 모르겠다. 지금은 그 분이고 뭐고 그런 걸 상관할 때가 아니지! 「그런데 왜 괜찮다고 말해서 날 곤란하게 만드는 거냐!」 「별로. 아이에드님이 그토록 경고를 했는데도 또 다시 이런 짓을 되풀이하는 그 놈을 좀 혼내고 싶어져서 말이야. 죽이진 못해도.」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가는 라이메데스를 보며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참동안이나 심호흡을 해야했다. 「그렇게 가고 싶으면 나중에 너 혼자 가! 난 가기 싫어!」 「그럴 수야 없지. 잊었어? 난 널 지켜야 한다는 중대한 임무가 있다.」 무슨 얼어죽을 임무긴 임무야! 임무 태만 주제에! 이 빌어먹을 자식! 내가 너 따위에게 지킴 당하는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는 것도 모르냐? 싫어! 어찌되었든 난 절대로 그 변태의 제물 흉내 따위 안 내! "헤에, 그럼 이데님은 찬성이로군요?" 카, 카민! 입 닫아! 더 이상 말하지마! "그래." 뭐가 그래야! 난 찬성 아냐! 난 몰라! 난 아니란 말이다! "흐으으응, 그럼 이제 칼만 허락하면 되는 건가?" "안 해, 허락 안 해! 죽어도 안 해! 안 한다고!" "호오오오오∼" 씨익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카민을 보며 나는 싸하게 굳는 수밖에 없었다. ------------------------------------- 후우, 후우, 후우. 정말 오랜만인 것 같군요. 말없이... 휴가 다녀왔어요; 죄송합니다. 자, 연참이 시작되었다. 연참은 계속되는가? ……답은 하나. 예! 입니다=_=;; 오늘부터 아마도. 미친 듯한 카르민의 연참 행진을 보실 수 있을 듯 하군요. 아시죠? 카르민이 가끔가다가 하는 미·친·짓· 제가 앓아 눕지 않는 한 그걸 몇 일 연속으로 할 것 같습니다. 비축분이……. 쌓였거든요=_=;; 그리고. 마감도……. 이미 오버 됐고.(먼 산) -------------------------------------------------------------------------------- Back : 2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5 (written by 카르민) Next : 23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3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71382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2nd February 2002 22:47:32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8-01-2002 23:24 Line : 169 Read : 1006 [25]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5 -------------------------------------------------------------------------------- -------------------------------------------------------------------------------- Ip address : 61.78.221.97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5연참은 기본... 잘하면 7연참도 가능한... 오늘 카르민이 미친짓... 잘 감상해주세요..;; 참고로 분량이 너무 많아서 줄 맞춤은 안 했습니다. 띄워 쓰기는 했으니까 읽기에 불편하시진 않으실거예요. 글 읽어주시는 독자분들...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감사드리구요. 이번 연참을 읽고 나서 한 번쯤 수고 했다고 메일이라도 보내주세요^_^; 그럼 이만. --------------------------------------------------- "허락 안 해에에엣∼" "같이 가는 주제에 그런 말 해봤자 소용없는 거 아시면서." 내가 머리를 집어 뜯으며 한 말을 생긋 웃는 얼굴로 누르며 말하는 에세렌의 얼굴 위로는 활기 넘치는 미소가 길게 걸려 있었다. 어차피 유키아 네크로나를 만나려면 지나쳐야 하는 길이 예요, 라는 말로 끝까지 나를 밀어 붙였던 이 무서운 신관 녀석은 아까부터 계속 내 신경을 긁어대면서 줄레줄레 뒤를 따르고 있었다. 키라오네스의 궁에서 벗어나 상아색의 계단을 밟고 내려가면서, 나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루덴스의 팔을 꼭 안고 있는 레니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야, 레니." "뭐야?" 내 부름에 루덴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레니는 찌푸린 얼굴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가득한 불만이 아로새겨진 녀석의 얼굴 표정은 자신의 감정을 내게 피력하기에 충분했다. '나와 키세온님의 다정한 시간을 방해하다니! 너 죽고 싶어?' 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은 그 무서운 표정을 빤히 바라보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가는 거냐?" "그래!"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레니의 얼굴 위로는 뚜렷한 자긍심이 엿보였다. "흥, 가봤자 도움은커녕 짐만 될 거면서." 그런 레니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카민은 옆에서 끊임없이 투덜대고 있었다. 호오, 보아하니 레니가 같이 간다는 거에 대해 상당히 불만인 것 같군, 그래. 카민 제 나름대로는 작게 중얼거린다고 중얼거린 것 같은데, 불행히도 레니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 귀가 나쁘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뭐야! 웃기지 마! 적어도 너보다는 내가 훨씬 도움이 될 거라고!" 카민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짧은 검을 툭툭 쳤다. "말도 안 돼. 너 검은 쓸 줄 아냐?" "검만 쓰면 단 줄 알아? 나는 이 번 일을 도와 주기 위해서 세이피안에서 온 거야! 내가 괜히 여기에 온 건 아니란 말야! 물론 키세온님이 보고 싶어서 승낙했긴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 변태와 싸우기 위해서였다고!" 레니는 분을 이기지 못해서 가슴을 퍽퍽 쳐대며 숨을 색색거렸다. 그러나 늘 그랬듯이 카민은 훗, 하고 웃으며 고개를 돌려버림으로서 그런 레니를 바보로 만드는 고단수의 수법을 썼고 뭐, 레니 녀석은 온갖 발광으로 카민의 머리를 집어 뜯는군. "크아아! 그만 집어 뜯어! 여자라면 좀 조신한 면이 있어봐!" "시끄러워, 요조 숙녀에게 실례야!" 잘들 노는군. 나는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저 둘은 의외로 잘 통할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리며 내가 고개를 돌리는데, 문득 옆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이레니아님은 방해는 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한 에세렌은 상당히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뜻밖의 말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에세렌은 그런 나를 향해 가볍게 한 번 웃어준 후 말을 이었다. "이레니아님이 저번에 그러셨잖아요? '세이피안의 일곱 번째 공주, 현자의 돌을 소유한 이레니아다' 라고." 에세렌은 살짝 미간을 좁히곤 더욱더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현자의 돌이라는 거, 제 예감이 맞다면 아마도……." "아마도?" 나는 뭔가 굉장한 것을 얘기하려는 듯한 에세렌의 분위기에 귀를 쫑긋이 세웠다. 그러자 에세렌이 순식간에 표정을 어설프게 풀어 내며 작게 말했다. "저, 저어. 칼레들린님, 너무 기대하시는 것 같은데요. 저도 그게 뭔지는 잘 모르고, 그냥 좀 대단한 것인 거 같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예요." 뭐, 고개를 돌리는 녀석의 머리를 주먹으로 쳤다고는 굳이 말 안 해도 알겠지. 카민과 레니가 투닥거리는 소리를 반주 삼아 계단을 내려오고, 왔던 길로 한참을 되돌아 들어가니 곧 눈 앞에 넓게 펼쳐진 초록색의 뜰이 나왔다. 몇 번 보지 않았음에도 이젠 이 왕궁의 정원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 저 잔디가 너무 새파란 빛을 띄고 있어서일까? 넓은 왕궁의 뜰에는 중앙을 정점으로 해서 수십 명의 기사들이 서 있었다. 제복을 차려 입은 그들은 표정을 잔뜩 굳히고 있고, 그런 그들 주위로 이상한 로브를 걸친, 조금은 음침해 보이는 인간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선 것이 보인다. "내 저 것들을 그냥!" 여태까지 레니와 팔짱을 끼고 룰루랄라 즐거워하고 있던 루덴스는 막상 기사들이 눈에 보이자 화가 난 듯 이빨을 뿌득 갈아대며 외친 그 말과 함께 무서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로 기사들의 앞에 도착한 그 녀석은 줄을 맞춰 절도 있게 도열해 있는 기사들의 머리를 빤히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오른 손을 들어 사정없이 그들의 머리를 쥐어 박았다. 난데없는 루덴스의 공격에 얌전히 서 있던 그 기사들은 눈을 부릅뜨면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쳇, 역시 상대가 왕자라 그런지 찍소리도 못하는군. 루덴스는 수십 명이나 되는 기사들의 머리를 모두 때린 다음 다시 돌아왔다가 아무래도 한 대만 때린 것으로는 분이 안 풀린 듯 다시 돌아가 한 번 더 때리는 더러운 성질머리를 발휘했다. 숨까지 몰아쉬어 가며 열심히 그들의 머리를 때린 루덴스는 그제야 가슴에 쌓여 있던 분이 풀린 듯 길게 심호흡을 내쉬었다. 보통 이쯤 되면 '왕자전하, 대체 왜 제 머리를 이렇게나 때리시는 겁니까?' 혹은 '제 머리에 무슨 불만이라도?' 같은 말이 나와야 정상인데, 기사 놈들은 꿈쩍 않고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설마 평소에도 이렇게 맞고 사는 건가? 나는 기사들이 선 정원을 죽 하고 한 번 훑어보았다. 기사들의 뒤편에 있는 커다란 마차 다섯 대가 눈에 들어왔다. 종알종알 대는 레니의 말에 따르면, 저 중 두 대는 미소년들이 나눠 탈 마차이고, 한 대는 우리가 탈 마차이며, 다른 한 대에는 100점의 그림이 실려 있고 나머지 한 대는 샤데린 산으로 들어갈 때를 대비해 음식을 쌓아놓은 마차라고 했다. 내가 '그럼 기사나 마법사는 어쩌고?' 이라고 묻자 레니는 사악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호호호홋!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원래 기사들의 다리는 무 다리야." 뭐, 그 무다리라는 것의 의미가 다리가 튼튼하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면 녀석의 말을 옳게 이해했다고 볼 수 있으려나? 걸어간다는 얘기겠지. 그런데 말해주려면 곱게 말해줄 것이지, 꼭 저렇게 웃어야 하나 몰라. "준비는 끝났나?" 여태까지도 기사들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때리고 있었던 주제에, 루덴스는 갑자기 근엄한 얼굴로 돌아와 기사들을 향해 물었다. 실컷 얻어터지고 있던 기사들은 그러나 이 갑작스러운 반응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꼿꼿하게 서 있었다. 하다 못해 얼굴 근육이 경직할 만도 하건만 말이지. 역시 루덴스의 저 이중인격을 녀석들도 알고 있는 건가? "준비가 끝났냐고 묻잖아! 왜 대답이 없어?" "네, 저희는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루덴스의 고함소리에 놀란 듯, 맨 앞에 서 있던 기사가 약간 삐죽거리는 태도로 말을 꺼냈다. 쯧쯧, 그런데 가엾게도 말을 한 그 기사 녀석은 아주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시작한 말을 끝까지 잇지 않고, 말꼬리를 슬그머니 내림으로서 저 성질 더러운 루덴스에게 시비 거리를 제공했다는 것이 바로 그 실수다. "그런데는 무슨 그런데야!" 한 대 더 때리고 싶었던 차에 너 잘 걸렸다,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목소리는 화난 목소리인데 얼굴이 웃고 있잖아!)루덴스는 다시 고함을 쳤다. 그러자 대답을 한 녀석은 움찔하며 한 발자국을 물러서서 조금 떨리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 그것이……. 단장님과 단장님이 데려간 녀석이 아직……." 아, 세라와 가윈 이야기인가? "뭐?" 루덴스는 멈칫했다. 놈은 살짝 인상을 그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늦을 리가 없는데……. 알겠다. 일단은 기다리도록 하지." 그런데 막 녀석이 그렇게 말했을 때, 뒤에서 작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발자국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내 바로 앞에서 딱 하고 멎었다. "아, 저기 오셨습니다." 누군가가 외친 그 말 그대로, 내 앞에는 한 여인과 한 소년의 모습이 있었다. 레몬빛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바람결에 맡긴 채로 걸어 나온 여인, 세라와 그 옆에서 포박 당한 채로 끌려오는 가윈의 얼굴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늦었군, 키세리아. 좋다. 다들 마차에 올라라! 지금 출발하지." "아닙니다! 키세온님,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루데스를 따라 마차에 들어가려는 순간, 다급하게 세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루덴스는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뭐, 저 표정이 여태까지 제일 많이 본 표정이긴 하다만)세라를 돌아보았다. 세라는 가윈을 이끌고 루덴스 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일순, 움직이는 가윈과 내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그 순간 가윈이 나를 향해 씨익,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여느 때와 다름 없어 보이는 여유로운 미소. "무슨 일이지, 키세리아?" 루덴스의 질문에, 세라는 가윈 쪽을 가리키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녀석은 데려갈 수 없습니다." 에? 무슨 말이냐? 왜 가윈 녀석을 데려갈 수 없다는 거지? 필요한 미소년은 모두 12명이라고 했다. 내가 대역을 해 준다고 쳐도, 가윈이 빠지면 또 하나의 미소년이 필요할텐데? "그게 무슨 말이지?" 루덴스가 인상을 쓰면서 한 질문에 세라가 입술을 잘끈잘끈 씹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절대로 데려갈 수 없습니다, 키세온님."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 키세리아. 어서 그 녀석은 저 쪽 마차에 넘기고 너는 마차에 올라!" "그럴 수 없습니다, 키세온님! 제 얘기를 들어 보시면 키세온님도 마음이 변하실 겁니다!" 세라가 주먹을 꽉 쥐며 소리쳤다. 루덴스는 조금 짜증이 난 듯, 세라 쪽으로 걸어가서 가윈의 손을 속박하고 있는 줄을 휙 하고 낚아챘다. 그리고 가윈을 기사들 중 하나에게 떠밀며 소리쳤다. "저 쪽 마차에 실어!"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강제로 다른 기사의 손에 떠넘겨진 가윈의 줄을 휙 하고 낚아채면서 세라가 버럭 고함을 친 것이. "이 녀석은 여자란 말입니다, 왕자 전하!" -------------------------------------------------------------------------------- Back : 2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6 (written by 카르민) Next : 2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4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71382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2nd February 2002 22:47:35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8-01-2002 23:27 Line : 198 Read : 1006 [26]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6 -------------------------------------------------------------------------------- -------------------------------------------------------------------------------- Ip address : 61.78.221.97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뭐, 뭐라고? 나는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말하는 세라의 손은 정확하게 가윈을 향해 있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가윈을 똑바르게 가리키는 세라의 얼굴은 너무나 단호했다. 나는 그 단호한 표정때문에 잠시 동안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한참만에야 이상한 패닉 상태에서 벗어난 나는 세라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미쳤어? 저 가윈 녀석이 여자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세라는 내 질문에 고개를 휙 돌려 내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꽉 하고 굳어졌던 표정이 내 쪽으로 향하면서 조금 느슨하게 풀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세라는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끊는 듯한 딱딱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말 그대로다. 이 녀석은, 여자야." 웅성. 웅성웅성웅성……. 갑자기 모여 있던 사람들 전체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난잡하게 변하고, 순식간에 시끄러워진다. 웅성거리는 인간들의 틈에서, 나는 세라에게 잡혀 있는 가윈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해. 왜 저렇게 태연한 얼굴이냐? 전혀, 조금도 불안이라곤 없어 보이는 가윈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였다. "다들 조용히!" 기사들, 마법사들 할 것 없이 시끄러워지자 안색이 하얗게 변한 루덴스가 벼락같이 큰 소리를 쳤다. 울려 퍼진 루덴스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게도 그 짧은 시간 동안 가득한 위엄으로 충만해져 있어서, 주위는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고 모두는 입을 다물어 버린다. 루덴스는 가윈을 한 번 슥 훑어보고 난 후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일동 제 자리에 정렬해라! 출발하겠다!" 일단 상황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한 건가? 말하는 루덴스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차분해져 있었다. 루덴스는 우리를 향해 얼른 마차에 타라는 제스쳐를 취한 후 다급하게 세라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녀석 데리고 마차에 타!" *********************** 마차 안은 아주 넓었다. 나는 가장 먼저 마차 안에 앉아서 세라와 함께 들어오는 가윈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윈은 감옥 안에서와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얼굴에 희미하게 띈 저 미소도 그렇거니와, 여유 만만해 보이는 그 특유의 표정도. "헤에, 칼레들린은 왜 여기 있는 거지?"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조차 저런 걸 신경 쓸 수 있다니! 네 놈이 인간이야? 진짜 여유로운 놈이로군. 정말이지 세라가 잘못 안 거 아냐? 저런 녀석이 여자일 리가 없잖아!!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은 루덴스 녀석은 조금 심난한 얼굴이었다. 루덴스가 마차에 앉아 마차 문을 세게 닫음과 동시에,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냐, 키세리아." 덜그덕 거리는 소리마저 내지 않고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루덴스는 무거운 얼굴로 세라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가윈의 옆에 앉아 가윈의 손목을 속박하고 있는 줄을 쥔 세라는 루덴스의 질문이 칼 같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답했다. "키세온 전하, 오늘 아침 감옥에 들어갔을 때야 눈치를 챘습니다. 확인 해 본 결과, 여자가 틀림없었습니다." 가윈은 무슨 남의 얘기를 듣는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뭔가 어이가 없어져 그런 녀석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피식 쓴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대체, 이 녀석은 말이야. 뭔가 사람을 너무 어이없어지게 만드는 이상한 놈이야. "어쩌실 겁니까, 키세온 전하." "어쩌긴 뭘 어째! 주황색 머리칼은 꼭 필요하다는 말은 안 했으니, 가는 길에 아무나 미소년을 하나 구하면 돼! 정 안되면 카민 놈도 있고!" "뭐가 어쩌고 어째!" 카민이 벼락 같이 소리를 질렀지만 루덴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을 움직여 나갔다. "젠장,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 한 거냐, 키세리아!" 루덴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레니는 그런 루덴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고정하시어요, 서방님' 하고 말하면 딱 어울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앉았군 그래. 내 바로 옆에 앉은 에세렌은 가윈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고 있었다. 에세렌은 한참동안이나 가윈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어느 순간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이 굉장히 얇군요. 누가 봐도 여성이 확실한 것 같은데 어째서 여태껏 몰랐던 거죠?" "미소년이란 놈들은 다 선이 얇아! 다 그 놈이 그 놈인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봐! 카민 놈만 봐도 저 놈이 어딜 봐서 사내 녀석이야!" "너 오늘 정말 죽을래!" 분명히 심각한 분위기인데, 루덴스가 카민의 얼굴을 걸고넘어지는 바람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다. 저녀석 둘이 투닥거리는 것은 이제 하도 봐서 이젠 지겨울 정도다, 젠장. 나는 루덴스와 카민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다시 가윈 쪽으로 향했다. 가윈은 사람들이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것이 모두 자신에게서 기인했다는 사실 따위는 전혀 모르는 듯한 얼굴로, 그저 여유로운 미소만을 얼굴 가득 머금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미소는 정말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보는 나로서도 짜증이 날 정도였다. "뭐냐, 너." 나는 가윈을 바라보며 입술을 떼어 냈다. 내 쪽으로 가볍게 미소를 보내고 있던 가윈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얼굴 표정만으로도 왜 그러나, 친구? 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나는 더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여자면서……. 왜 이 딴 것에 참가 한 거지?" 내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순식간에 가윈 쪽으로 쏠렸다. 시선이 쏠리자, 가윈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녀석은 지금 당장이라도 박장대소를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의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녀석은 빙긋 웃더니 나를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글세. 재미있기 때문일까?" "……미친 놈." 나도 모르게 거친 소리가 나와 버렸다. 가윈은 그러나 말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나는 짜증스러움에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루덴스 쪽으로 향했다. 가윈의 얼굴을 보고 있던 루덴스는 내가 돌아보자 움찔했다. "너! 이 녀석은 어떻게 할거지?" 루덴스는 이빨을 꾹 물며 대답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왕궁 감옥에 평생 가둬 버릴 거다!" 나는 루덴스의 말을 들으면서 힐끗 가윈을 보았다. 그런데, 평생 가둬 버리겠다는 저 무시무시한 말에도 저 놈의 표정은 무너지지 않는다. 정말이지 속 터져 죽겠군. 내가 계속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어느 순간 가윈이 나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별 이유는 없었어. 나는, 그저 그 녀석을 만나고 싶었을 뿐이니까." "뭐?" "그 변태 놈을 만나고 싶었다구."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한 번 생긋, 웃는 가윈을 보면서 나는 멍한 표정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그 변태를 만나고 싶었다고? 그래서 남장을 한 것이고? 난 정말 알 수가 없어. 이 놈의 생각은 도무지 읽을 수가 없다. "……." 루덴스는 말없이 가윈을 보고 있었다. 녀석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에 가윈에게서 시선을 돌려 우리들을 보았다. 녀석의 입술이 묵직하게 벌어졌다. "마차는 이틀을 그냥 달린다. 오늘부터 내일까지.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쉬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들 알고. 잠도 마차 안에서 잔다. 내일 저녁에는 하백 성주 집에서 묶을 거고, 그 다음 날도 꼬박 달린다." "끔찍하군." 레니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끔찍해도 할 수 없어. 그렇게 달리면 샤데린 지방에 도착한다. 샤데린 산에는 걸어서 올라가는 게 차라리 빠를 테니까, 음식물과 그림을 실은 마차말고는 모두 산 어귀 마을에 놔두고 올라 갈 거다." 흐음, 그럼 산을 올라야 한단 말인가? 나는 마차 등에 기대었다. 길게 한숨이 쉬어진다. 가윈은 여전히 태평스러운 얼굴이다. ***************** 달린다. 달린다. 달린다. 달린다. 달린다. 계속 달린다. 계속 달린다. 달리기만 한다. 죽을 때까지 달린다. 언제 설까, 이 빌어먹을 놈의 마차는? 내가 늙어죽을 때나 서겠지. 빌어먹을! 크아, 햇빛을 받지 않는 장미는 피어날 수 없다는 것도 몰라? 난 장미란 말이다!! "크아아악! 신선한 공기를 줘!!" 내가 발악하듯 고함을 내지르기가 무섭게, 무엇인가가 내 입을 턱, 하고 틀어 막았다. 돌아보니 에세렌이었다. 에세렌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소리를 냈다. "이봐요, 칼레들린님! 카민님이 주무시는데 소리를 지르면 어떡해요? 어제 카민님도 한 숨도 못 잤단 말입니다!" "시끄러워! 갑갑해 죽겠단 말야!" "그럼 수면 주문 외워드릴테니까, 주무세요." "됐어!!" 나는 에세렌의 팔을 휙 뿌리쳤다. 으윽, 정말이지 미칠 지경이다. 마차는 정말로 달리기만 했다. 심지어 음식을 먹을 때도 아주 잠깐 멈추기만 했고, 만들어진 음식은 또 달리는 마차 안에서 먹어야만 했다. 정말이지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밖에서 걸어다니면서 먹는 기사들을 생각해보라면서 카민이 윽박을 지르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제 저녁이 제일 죽을 맛이었다. 저녁이 되니 졸리긴 졸린데, 사람이 하도 많이 앉아 있으니 편안한 자세로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래저래 짜증만 나서 나는 괜히 에세렌을 괴롭히다가 카민에게 맞기까지 했다. 으아아, 기분 나빠 죽겠어! "다 왔어, 칼레들린. 조금만 참아라. 곧 하백이다." 루덴스가 위로하듯 말했고 나는 인상을 그었다. "정말이지?" "그래, 정말이다." 하지만 조금만 참으면 도착한다고 했던 그 하백이라는 곳에 그로부터 다섯 시간이나 지나서야 도착했다는 말을 필히 하고 싶군, 빌어먹을! ******************* 마차는 땅거미가 거뭇거뭇 내려서야 멈춰섰다.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린 난 비틀거리면서 마차에서 빠져 나왔다. 딱딱 도열해 있는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행군 중간에도 열은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 녀석들의 줄은 정말이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나는 시선을 올려 앞을 보았다. 깨끗한 흰색의 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 크진 않은 성이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깔끔해 보였다. 뭐, 왕자가 온다고 해서 눈 빠지게 청소해서 이렇게 깨끗해졌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야. 나는 크게 기지개를 켜면서 자리에 내려섰다. 두두두, 하는 소리와 함께 성과 길 사이에 자그맣게 패여진 강 위로 도개교가 내려왔다. 나는 시선을 돌려 성 쪽을 바라보았다. 바쁜 걸음소리와 함께 도개교 위로 걸어나오는 서 너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 중에서 가운데에 선 노인이 가장 깔끔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나이를 고려해서 그런지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흰색이라 깔끔하기도 한 옷을 입은 그 노인과 나의 시선이 마주친 것은 한 순간이었다. 기사들보다 더 앞쪽에 서서 노인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향해, 노인은 무서은 속도로 달려오더니 다짜고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이런 미천한 몸이 묵는 성에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키세온 전하. 처음 뵌 순간 온 몸에 흘러나오는 기품을 보고 단 번에 알아 뵈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 나는 잠시 어이가 없어져서 그 노인을 뚫어져라 보았다. -------------------------------------------------------------------------------- Back : 2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7 (written by 카르민) Next : 2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5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71382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2nd February 2002 22:47:38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8-01-2002 23:31 Line : 316 Read : 1035 [27]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7 -------------------------------------------------------------------------------- -------------------------------------------------------------------------------- Ip address : 61.78.221.97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노인은 허리를 굽히고 있다가 어느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어쩡쩡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들었다. "상대를 잘못 골랐는데?" "예, 예?" 노인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옆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났다. 노인의 얼굴이 흰 빛을 넘어서 파란 색으로 변한 것은 아마 그 순간이었으리라. "내가 키세온이오만." 루데스는 조금의 불쾌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묵직하게 말했다. 노인의 얼굴은 이제 보라색으로 변한다. "허, 헉! 이, 이런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전하. 이 미천한 몸이 시골에만 살다보니 알아 뵙지를 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전하!" "용서하십시오!" 노인의 뒤에 있던 남자들도 부들부들 떨면서 같이 용서를 빌었다. 루덴스를 그런 그들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소, 하백 경. 그대가 영지에서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소. 내 얼굴을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나도 제 2왕자다보니 그리 알려진 편도 아니고. 괜찮소. 그보다 피곤한데,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소?" "무, 물론이옵니다, 전하! 어서 들어오시옵소서!" 허리를 연신 구부렸다 펴면서 노인은 애걸하듯 말했다. 아아, 이런 모습은 정말 싫다. 나는 살짝 인상을 쓰며 라이메데스를 돌아보았다. 「젠장할, 저런 거 정말 싫어. 권력에 복종하고 아부하는 건 어느 종족이나 같은 건가?」 「할 수 없지 않아? 마족도 서열 앞에서는 완벽하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법. 인간에게 마족의 행동 이상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그 말에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원, 입성한다!" 루덴스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기사들은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도개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열을 다시 맞추기 시작했다. 루덴스는 우리를 향해 먼저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그런 루덴스를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흠, 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저 녀석은 어쩔 거지?" 나는 아직도 세라의 줄에 매여 있는 가윈을 가리키며 물었다. "일단 성주의 감옥에 가둬 놓을 생각이다. 하백 성주!" "예, 예! 전하!" 굽실굽실거리면서 노인이 다가오자, 루덴스는 가윈을 힐끔 가리키며 말했다. "죄인이오. 감옥에 가두어 주실 수 있소?" "그리 하겠습니다!" 하백이란 노인은 자신의 뒤에 서 있던 남자에게 눈짓을 했고, 그 남자들은 얼른 다가와서 가윈의 양팔을 채갔다. 하백은 우리를 안내하는 한 편 우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었는데, 난 그것이 심히 불쾌했다. 젠장, 내가 잘난 건 알지만 그만 좀 쳐다봐라, 이 말이다! 하백은 몇 번이고 우리를 살펴보다가 이번에는 카민의 앞에 가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크레티아 제 2왕자님과 약혼녀 되시는 이레니아 님이십니까?" "……아닙니다만!!" 단 번에 한 옥타브는 높아진 카민의 목소리에 하백이 움찔했다. 나는 키득,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참아 보려고 했지만 무리! "하핫…… 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 "웃지마, 이 자식아!" 카민은 내가 웃자 갑자기 얼굴이 벌개져서는 달려들었다. 뭐, 네 녀석이 검만 몇 백년 닦고 온다면 몰라도, 지금 상태로는 나하고 싸워서 이길 가능성 같은 건 없을걸? "내가 이레니아입니다만." 레니는 상당히 불쾌한 목소리를 내면서 하백의 앞에 섰다. 하백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아, 아, 시, 실수를 했습니다. 늙으면 그저 죽어야……. 오오! 풍문으로만 듣다가 직접 뵈오니 절세미인이라는 말이 어디에 쓰이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이레니아님의 미모는 정말로 뛰어 나십니다!" 쿠, 쿠엑! 이, 입에 침이나 발러, 이 영감아! "카, 칼. 나, 토하고 싶어." 여태까지 나를 공격하고 있던 카민이 갑자기 고꾸라지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나는 말없이 그런 녀석을 일으키며 말을 받았다. "동감이다." 레니는 새초롬한 표정으로 우리를 말없이 한 번 노려본 후 또 다시 내숭의 가면을 뒤집어 쓰고 우아한 발걸음으로 하백에게 인사했다. "말씀 감사하군요, 하백 성주님." "예에. 그건 그렇고 이 분들은……." 영감은 나와 카민, 에세렌, 그리고 라이메데스를 죽 훑어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뭣도 아닌 인간들이 왕자와 공주 옆에 서 있으니 이상하냐? 루덴스가 얼른 말을 받았다. "아아, 궁중의 마법사들이오." "오오, 그렇군요. 그나저나 키세온 전하, 제가 전하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만. 괜찮으시다면 소신과 함께 식사를 하심이……." "아아, 그럽시다." 웃기는군, 이라는 말로 모든 것이 표현될 듯한 녀석들의 그 내숭행각에 치를 떠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우우우, 왕족이라는 것은 다 이 모양인 것인가? 하백은 기쁜 듯 한 번 웃은 후에 성으로 먼저 들어섰다. 그의 뒤를 따르며, 루덴스가 내게 조그맣게 말을 붙여왔다. "칼레들린. 나와 이레니아는 저 노인과 식사를 할 것 같다. 너희들을 마법사라고 소개했는데……. 일단은 저기 저 로브들과 함께 식사를 하도록 해, 알겠지?" "그러지." ***************** 루덴스가 성주와 함께 사라진 이후, 우리는 그 이상한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들과 함께 식당으로 안내되었다. 에세렌은 자신이 마법사로 취급받는 것이 상당히 불쾌하다며 계속 투덜댔고, 카민은 자신이 아까 여자로 취급받은 것, 그것도 하필이면 루덴스의 약혼녀로 지목당한 것에 대해 투덜거림을 넘어서 터덜거리고 있었다. 탁자가 워낙 넓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 곳으로 가서 무엇이든 먹기로 합의를 본 우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일단 스파게티가 보이는 곳으로 가서 앉았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스파게티를 보고 있노라니 절로 군침이 돈다. 나는 얼른 포크를 집어 올려 스파게티를 휘감았다. 내 옆에 앉아 있는 두 명의 검은 로브에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그런데 마법사들은 꼭 저렇게 갑갑해 보이는 로브를 입어야 하는 거냐? 자기들이 못 생겨서 가리려고 입는 거라면 이해를 하겠다만 도저히 저걸 입는 이유를 모르겠단 말야.), 아랑곳 않고 일단 스파게티를 입 안으로 직행시켰다. "후루룩." 오오, 이거 꽤 맛있군 그래? 나는 다시 포크를 가져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뵙는군요." "……?" 나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로 옆에서 들려온 그 목소리의 발생지는 분명 검은 로브 속. 내가 의아한 표정을 하자, 검은 로브의 남자가 피식 웃으면서 자신의 로브를 안 쪽으로 살짝 걷어 보였다. "에?" 나는 작게 소리를 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살짝 웃으며 남자가 말했다. 나는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드러난 그 얼굴은 분명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그 배에서……?" 레니와 만났던 그 배, 케이나 호에서 만났던 푸른 머리칼의 남자. 달빛이 부서지는 배에서, 나를 향해 말을 걸어왔던 그 남자였다. 달빛이 좋아서 구경을 나왔다고 했던. 조금은 신비로운 분위기로 다가와 마지막에는 내게 이상한 말도 남겼던 남자. 그래, 그 게 뭐였더라? '카인' 이고 했었던가? 라이메데스 놈한테도 물어봤지만 모른다고 했었지. "예, 알아봐 주시니 고맙군요. 정말 굉장한 우연입니다, 그렇지요?" 그가 살짝 웃으며 한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 뭐……." 우연? 우연이라고 하기엔 좀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드는데. 우연히 한 번, 배에서 스치듯 만났을 뿐인 남자를 이런 곳에서 딱 마주친다는 것은. 하지만 원래 인간사라는 게 그렇게 억지스럽다고 하니까. "당신, 마법사였어?" "예, 뭐……. 조금." 그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보통 카리스라고 불립니다. 당신도 절 그렇게 불러주시겠습니까?" "아아, 그러지 뭐." 나는 스파게티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카리스, 꽤나 외우기 쉬운 이름이군 그래. 나는 한참 스파게티를 먹다가 어느 순간 생각나는 말이 있어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저번에 네가 내게 했던 말. 그게…… '카인' 이었던가?" 푸른 머리칼의 남자, 카리스는 내 질문에 가볍게 웃었다. "네에. ……카인이라는 말은, 몇 년 전 사라져버린 소국의 언어로 '안녕히' 라는 뜻이 있습니다. 제가 그 망국의 후손인지라, 그 언어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달빛을 바라보는 모습이 어딘지 고독해 보였던 당신에게, 왠지 사라져 버린 왕국의 말을 건네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던 것 뿐입니다. 그 말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카인이 안녕히, 라는 뜻이라. 뭐, 말 되는군.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옆에 앉은 카리스는 음식을 먹는 한 편 간간이 내게 말을 시켜왔다. "저, 당신의 이름은 제게 말씀해주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아아.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 칼레들린이라고 불러." "엘버지운 피엘…… 예." 나는 마구잡이로 음식을 입에 넣고 있다가 어느 순간 어? 하는 기분이 들어서 먹는 것을 중지하고 카리스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보통은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 이라고 말했을 때 '칼레들린' 이라고 한 번 중얼거리는 것이 보통 아닌가? 그런데 이 놈은 내 기본적인 이름보다, 그 뒤의 것을 더 중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말이야. 착각일까? "다시 만나봬서 즐거웠습니다." 먼저 식사를 끝낸 카리스가 정중한 어투로 말하곤 일어섰다. 나는 아아, 하고 중얼거리며 그를 보냈다.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난 한 번 고개를 갸웃한 다음, 다시 스파게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 날 먹은 스파게티는 로시엔이 만들어준 스파게티의 맛과 비슷했다. "그런데 말이지." 난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들의 세계의 망국의 언어라면 나에겐 낯설어야 할텐데... 그 카인이라는 건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단 말야?" *************** 밥을 먹고 나와보니 라이메데스가 문 앞에 삐딱하게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맛있게 먹었어?" "응." 스파게티가 마음에 들어서 기뻤던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리 맛있게 먹었더라도 그렇게 바보 같이 웃지는 마라." "누가 바보 같이 웃었단 거야!" 나는 녀석에게 한 번 소리를 쳐주곤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보니 카민과 에세렌이 같은 자리에 딱 붙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 고기 코너에 있었군. 놈들의 앞에는 불쌍하게 희생된 어느 동물의 뼈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누가 많이 먹나 내기라도 했는지 서로서로 질세라 엄청난 속도로 음식을 퍼담고 있는 녀석들의 눈은 번들번들거리고 있다. 3일 동안 밥을 굶은 사람도 저렇게 먹진 않을 거야, 라고 중얼거리는 주변 마법사들의 놀란 눈을 보면서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마법사 주제에 저렇게나 먹다니! 머릿속은 채우지 않고 위만 채우는 자들인가." 바로 옆에서도 식사를 끝낸 노 마법사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래도 카민과 에세렌은 아랑곳하지 않고 먹을 뿐이었다. 그래, 먹어라 먹어. 먹지 않고 가만히 있는 너희들의 모습은 내가 생각해도 어색하다. 많이, 아주 많이많이 먹어라. 배가 터질 때까지 말이야! "저 둘을 보고 있으면 내 지식이 잘못 되었는지 의심이 된다." 문득 라이메데스가 말했다. "뭐가?" "저 둘은 인간의 위가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은 것 같단 말야. 인간들은 그렇게 상식을 초월하는 이상한 녀석들이지." 나는 피식, 하고 길게 웃어버렸다. 출입구에는 작은 팻말이 있었다. '왼 쪽 복도를 죽 따라 가면 계단이 있습니다. 3층은 마법사 분들이 알아서 사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적힌 그 팻말은 얼핏 보면 조금 건방지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경제적이긴 하군. 일일이 한 사람 한 사람한테 어디로 가세요, 라고 말하는 건 귀찮은 일이니까 말이야. 한참 후에야 지금 당장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배를 한 채로 카민과 에세렌이 걸어나왔다. 녀석들은 포만감에 겨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뒤뚱뒤뚱 대며 걸어나와 우리들 앞에 서서는 연신 호들갑을 떨었다. "아아, 정말 맛있었습니다!" 으악, 마늘 냄새! 에세렌이 입을 염과 동시에 풍겨 나온 마늘 냄새에 나는 한 발자국을 물러섰다. 그러나 에세렌의 입에서 나는 마늘 냄새가 느껴지지도 않는지, 카민은 에세렌을 마주보며 연신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래요! 이 저택의 요리사, 정말 굉장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아!" "아아, 납치해 버리고 싶군요." 이, 이봐, 납치라니! 그게 신관으로서 할 소리냐? 에세렌과 카민은 오도 방정을 떨면서 행복에 겨워했다. 나는 흥, 하는 소리와 함께 뒤쪽으로 물러섰다. 에세렌과 카민은 팻말을 읽어보곤 거의 동시에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아주 환상적인 콤비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군. "많이 먹었더니 배가 부르군요. 어서 가서 자고 싶어요." "나도." 그렇게 먹고 바로 자겠다고? 어이가 없어진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도 이 녀석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정말이지 대단한 녀석들.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발을 움직였다. 에세렌은 와아, 하는 소리를 지르며 먼저 뛰어 나가 버려서 나는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이봐, 칼." 문득, 옆에서 카민이 나를 조그맣게 불렀다. 나는 눈만 힐끗 들어 녀석을 보았다. "왜." "……최근 들어선 아주 평온해. 그렇지?" 나는 갑작스러운 카민의 가라앉은 말투에 조금 긴장했다. 이 녀석이 진지해지면 좀 대하기 곤란하단 말야. 나는 카민의 얼굴을 보았다. 카민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살짝 헝크러 뜨리면서 입술을 벌렸다. 조금 망설인 끝에, 녀석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 놈들 말이야. 나, 포기한 걸까?" 나는 아차, 싶어서 입술을 물었다. 난 잊고 있었는데, 이 녀석은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그 단체. 그 이상한 단체. 그 알 수 없는 단체를. 나는 놈의 옆구리를 푹 하고 찌르며 말했다. "그래도 방심하지 마라." "아아, 방심 따윈 하지 않아. 잠이 들 때도 내 검은 언제나……." 카민은 씨익 웃었다. "머리맡에 풀러 둔다고." 우리들은 걷기 시작했다. 라이메데스는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가 조금은 조심스러운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는지 알아서 떨어져서 걷고 있었다. 저 녀석이 웬일로 저러냐,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카민의 이야기에 계속해서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나 뭔가 불안해." 카민이 갑자기 손을 꽉 쥐었다 놓았다. "뭐가 말이냐." "모르겠어. 뭔가……." 카민은 머리를 흔들었다.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야. 이상하게도, 뭔가가 불안해. 젠장, 왜 이렇게 불안하지? 녀석들의 움직임이 없어졌는데, 이카루에서 나와서 크레티아로 왔는데도! 그런데도 불안해." 카민은 상당히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녀석은 나를 향해 씩, 하고 웃어 버렸다. 놈은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입술을 열었다. "표정 풀어라, 칼." 카민은 한 발 앞서나가며 말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 말은, 나에게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그래서인지, 내게도 카민의 불안이 조금은 전염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카민과 라이메데스가 각각 방을 잡아서 그 안으로 들어설 때 까지도, 나는 약간의 한기 때문에 한참동안 복도에 서 있었다. ------------------------------------------- 죄송합니다. 날림이죠? 연참이라는 게 그렇죠..-_-;; 오늘 올리고 나서 다시 수정을... 보겠습니다. 뒷편도... 아직 많이 남았네요. 후욱후욱~ 힘들어라.. -------------------------------------------------------------------------------- Back : 2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8 (written by 카르민) Next : 2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6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71382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2nd February 2002 22:47:42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8-01-2002 23:37 Line : 261 Read : 1004 [28]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8 -------------------------------------------------------------------------------- -------------------------------------------------------------------------------- Ip address : 61.78.221.97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제 22장: 3류 스토리의 여주인공. 한참 동안의 고생으로 잔뜩 피로했던 나는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편안한 잠자리에도 깊이 잠들지 못했다. 나는 새벽녘에 부스스하게 눈을 뜨고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목말라……." 「물먹어요.」 내가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레이네의 대꾸가 들려왔다. 목마른데 물먹는 것은 당연하거늘, 무슨 대단한 지식을 전수해주는 양 말하는 레이네의 말투는 나를 상당히 황당하게 만들었다. 나는 정신없이 잔 덕에 잔뜩 뭉친 목의 근육을 약간 풀어준 다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방 문을 열었다. 방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엄청난 어둠이었다. 온통 새카맣기만 한 복도를 바라보면서 난 고개를 저어댔다. "물이 어디 있을까?"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러자 레이네가 기다렸다는 듯이 또 대꾸해 온다. 「저요저요! 저택 앞에서 분수대를 봤어요!」 "……나보고 분수대의 물을 먹으라고?" 나는 레이네의 말을 무시하곤 다시 어정어정 걸어나갔다. 한참동안 어둠이 깔린 복도를 걸어나가던 나는 내 검을 내려다보았다. 깜빡이는 불빛의 레이네가 눈에 들어왔고, 난 그런 레이네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봐, 레이네. 그런데 너, 잠은 안 자냐?" "예?" "그렇잖아. 내가 자다말고 새벽에 벌떡 일어나서 '목말라' 라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말대꾸를 한다는 건 넌 자지 않았단 말 아냐?" 「에……에헴! 그거야 당연하죠. 이래봬도 칼레들린님의 보호물이잖아요? 잠을 자지 않고 칼레들린님을 지키는 건 저의 소임이죠!」 그 보호물 이라는 게 내가 마취제에 취해서 끌려가도 검에서 나오지 않는데다가 언제나 따따따 시끄럽게 잔소리하는 것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다고 붉은 머리칼을 가진 성격 더러운 서열 12위의 마족 아줌마에게 말한다면 믿을까 몰라. 「칼레들린님.」 문득 레이네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나는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뭐야?" 「칼레들린님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이 녀석이 또 왜 이래? "너 간밤에 뭘 잘못 먹었나? 「에잉, 다 아시면서!」 나는 애교를 떨 듯 말하는 레이네를 깨끗이 무시하며 걸어나갔다. 새벽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어둡다. 감청빛의 하늘 위로 달빛의 노래가 가만가만 울려온다. 그윽한 달빛의 향기는 그 달빛을 받는 인간을 완전히 감싸 안는 묘한 매력이 있어서, 나는 이 달이라는 것이 마음에 든다. 나는 소리를 죽여 천천히 발걸음을 움직여 나갔다. 「칼레들린님.」 "왜." 나는 인상을 쓰며 작은 목소리로 호명에 답했다. 「지금, 가윈님 만나러 가시는 거죠?」 나는 말없이 내 검을 한 번 더 내려다보았다. 손에 든 보석이 영롱하게 빛났다가 가라앉는다. 「구해 주시려고 그러시죠? 지금 못 구하면 구할 기회가 없을 테니까.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죠? 솔직히 어젯밤에 제대로 잠도 못 자셨죠? 잠 설쳤죠?」 "……시끄러워." 나는 작지만 되도록 위협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키득, 하고 레이네가 한 번 길게 웃었다. 「얼굴 빨개졌네요.」 "시끄럽다고 했어!"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낼 뻔했다. 내가 짜증스럽게 외친 그 말에, 레이네가 곧장 답해왔다. 「칼레들린님은 이런 면이 좋아요.」 "뭐?" 나는 갑작스러운 그 말에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레이네가 씁쓸하게 들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말을 이었다. 「흐음. 제가, 만약에…… 말이예요? 칼레들린님 옆에 완전하게 서 있을 수 있다면, 아마 당신을 굉장히, 지금보다도 더 많이 좋아하게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 세이아나님께 매인 몸. 당신을 좋아한다는 것도 불가능 하겠죠? ……헤헤헤. 뭐, 그런 것이죠.」 이 녀석 정말 왜 이래? 오, 오늘 뭔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너 오늘 뭐 먹었냐?" 「흐음, 저는 아무 것도 먹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몸매를 위해서 그 정도는 해야죠.」 내가 말을 말지, 젠장. 이 녀석에게 계속되는 진지함을 기대하느니 로시엔이 날 보면서 울지 않는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 낫겠다. 나는 가만히 발걸음을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멈칫하고 굳었다. 자그마한 불빛이 움직이는 것이 저 복도 끝에서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손톱만하게 작았던 그 불씨는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누군가가 등을 손에 들고서 순찰을 도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불빛 쪽으로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기요, 칼레들린님.」 "조용히!" 「네, 네에.」 불빛이 더더욱 가까워지자, 나는 굴곡이 있는 복도 벽 안 쪽에 바짝 붙어 섰다. 그것은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그런 대로 훌륭하게 내 몸을 가려주었다. 나는 검을 세로로 바짝 세운 다음, 불빛이 더더욱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 조금 기다리자 불빛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서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얼른 몸을 움직여 불빛을 들고 서 있던 놈의 목을 왼팔로 휘감았다. "으…… 읍!!" 순찰을 돌고 있던 그 놈은 내가 갑자기 목을 휘감고 뒤로 잡아 당기자 숨이 막힌 듯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나는 천천히 녀석의 목에 감았던 팔을 풀어 녀석의 입을 막고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을 위로 올렸다. 내 손에 입이 막힌 놈은 더더욱 이상한 소리를 냈다. 얼어 붙어버린 듯한 자세로 녀석이 눈만을 들어 올려 나를 보았다. "크으…… 으읍!" 나는 녀석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서 조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감옥이 어디냐?" "읍? 으으읍!" "대답해! 성주의 감옥이 어디냐고!!" 작지만 위협적인 목소리라는 것은 매우 내기가 힘든 것이다. 나는 그 목소리를 위해 한참을 노력했지만, 역시 잘 되지 않았다. 젠장, 사람을 협박하는 목소리는 라이메데스가 최고인데 말이지. 나는 천천히 녀석의 입에 들이댔던 손을 치웠다. 녀석의 눈에서 처음으로 안심의 빛이 지나간다 싶었지만, 그 순간은 극히 짧았다. 나는 녀석을 향해 가볍게 웃은 후 내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을 더더욱 위로 들어 올렸다. 경비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되도록 잔인하게 웃기 위해 노력했다. 아아, 정말이지 이 깨끗하고 핸섬한 얼굴로 위험한 표정을 짓는 건 너무 힘들어. 아무리 무서운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해도 워낙 미모가 되니까 다 사랑스러워 보이잖아? 이건 정말 너무 문제라니까. 나는 녀석의 목젖에 언저리에 정확하게 검을 들이댔다. 그러고 보니 나, 요즘 들어서 이런 짓을 정말 많이 하는 것 같군. 착하디 착한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타락했는지, 정말. 나는 검을 바짝 들이댄 채로, 녀석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소리를 지르면 단번에 네 목은 잘린다. 자, 말해보시지. 하백의 감옥은?" 입가를 조심스럽게 떼어주며 내가 한 질문에 경비가 숨을 몇 번 헐떡였다. 놈은 내 눈을 한차례보고 난 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택 아래에 있…… 니다. 서쪽 정원에 지하로 통하는 문이 있어…….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 커억!!" 들을 말은 다 들었다고 생각됨과 동시에, 나는 손을 들어 경비원의 머리를 세게 쳤다. 녀석은 단박에 앞으로 꼬꾸라졌다. 우우, 하는 소리와 함께 온 몸이 늘어져 기절을 해버리는 한심한 이 녀석을 잠시 바라보며 나는 픽, 하는 소리와 함께 웃었다. 「우와! 가끔씩은 일을 잘 해결하기도 하는 군요! 그럼 이제 가윈이라는 사람을 구하러 가야죠!」 나는 방정을 떨어대는 내 검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레이네. 내가 지금 가윈을 만나러 가는 건 녀석을 도와줘서 탈출시키려는 그런 목적이 아니야. 난 단지 여자인 그 녀석이 왜 이런 짓을 했는지 궁금할 뿐이라고. 알겠어? 난 절대로 그 녀석을 도와주려는 착한 마음으로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라고!" 「어련하시겠어요?」 이녀석! 마, 말투가 기분 나빠! 나는 비꼬듯 말하는 레이네를 잠시 노려봐 준 다음 기절한 경비원의 한 쪽 다리를 잡고 질질 끌어 내 방으로 데려갔다. 방안으로 들어간 나는 침대의 시트를 북북 찢어서 녀석의 온 몸을 묶고, 남은 시트를 둘둘 말아 녀석의 입에 물린 후, 창문을 열었다. 여기가 3층이었지? 흐음. 「어쩌시게요? 뛰어 내리실 건가요?」 "그래." 「뼈가 부러지시면 어떡하실 건데요?」 "……산통 깨지 말고 넌 제발 입 좀 다물어!" 난 그 말과 함께 창문틀에 발을 대고 단숨에 밑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아아, 공기가 느껴진다! 창문틀에 발이 닿음과 동시에, 부드러운 공기의 미립자들이 발끝에 모여들어 내 몸을 띄우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내 목덜미를 한 번 쓰다듬는다고 생각했을 때, 바람 속에 섞여 들어온 풀잎이 볼 끝을 살짝 스쳤다. 3층 높이에서 뛰어 내리는 그 짧은 순간 동안, 어두운 새벽이 만들어 놓은 여린 것들이 순식간에 내 몸을 잠식했다. 마력으로 공기의 흐름을 억제해서 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만큼은 마치 내가 자연의 힘을 빌어 바람과 한 몸이 되는 듯한 느낌이었달까. 신경은 온통 바람소리와 동화되어 버린다. 아마도, 지금 내 표정은 부드러울거야. 지금, 아주 기분이 좋거든. 나는 마력의 힘을 빌어 나무가 듬성듬성 들어선 정원에 착지하는 데 성공했다. 후우, 하고 가볍게 숨을 쉬면서 내가 방금 전에 뛰어 내린 방을 한 번 올려다본 나는 낮게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조심하세요, 칼레들린님. 이 저택에는 지금 수 십 명의 기사와 수 명의 마법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지금은 모두 긴장을 풀고 자고 있는 시간이라고. 그 놈들은 노숙을 했으니 더 피곤할 거 아냐? 그리고 기사나 마법사 수십이 덤벼도 나한테는 꼼짝 못 할걸?" 나는 자신만만한 어조로 외쳤다. 그러나 불행히도, 레이네는 내 말에 감히 반항을 했다. 「흥! 여태까지 봐 온 게 있는데 누굴 속이시려고! 거짓말하지 마세요.」 "이게 정말! 내가 매일 검 들고 싸워서 조금, 아주 조금 약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마력 동원해서 싸우면 나도 강하단 말야!" 「예에, 예에. 어련하시겠어요.」 제, 젠장맞을! 나는 새삼스럽게 레이네가 고단수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딛었다. 서쪽이라고 했지? 서쪽…… 근데 서쪽이 어디야? 「서쪽은요, 밥 먹는 손 반대쪽입니다.」 "제, 젠장! 나도 알아!" 바, 밥 먹는 손 반대쪽이면 왼쪽인가…… 이 쪽이로군! 나는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서 달렸다. 과연, 녀석의 말대로 텅텅 비어 있는 정원에서 유달리 많은 사람이 지키고 있는 공간이 보였다. 나는 시각의 한계를 최대한 돋궈서 주위를 휙휙 보았다. 나름대로 위장을 한답시고 했는지 감옥으로 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구멍은 우거진 나무 잎새의 틈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뭐, 그런 건 상관없다. 내 눈이 보통 눈도 아니고 말이야. 「경비원은 모두 열 두 명입니다.」 "내 눈 멀쩡하니까 일일이 말 안 해줘도 돼." 나는 발걸음을 낮게 해서 움직여 나갔다. 열 둘이라……. 소란 피우면 곤란하니까, 몰래 숨어 들어가야 하겠는데. 어쩐다지?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요. 그냥 쳐들어가요!」 내, 내가 너냐? 나는 그렇게 무식한 짓 안 한다. 나는 우거진 풀 숲으로 들어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어쩐다지? 한참동안이나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난 어느 순간 아아! 하고 중얼거리며 이마를 쳤다. 좋아! 괜찮은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나는 씨익 하고 웃으며 검을 들어 레이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레이네에에?" 「카, 칼레들린님? 제 이름은 레이네지 레이네에에가 아닙니다. 그리고 뭔가 불길하니 왠지 흐흐흐, 하는 소리를 낼 것 같은 그런 표정도 좀 거두어 주셨으면 좋겠군요.」 나는 정말로 불길함을 감지했는지 보석 주제에 자그마한 미동마저 보이는 레이네를 보며 생긋생긋 아주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 주었다. 나처럼 예쁜 미소년이 이렇게 예쁘게 웃는데 네 녀석이 반항하면 안되지. 응, 레이네? 「부, 부탁하실 거…… 거라도?」 "응, 부탁할 거 있어." 「여, 역시. 뭐, 뭡니까, 그 부탁이란 건?」 레이네는 체념기가 다분하게 느껴지는 듯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나는 양손으로 레이네의 보석을 따뜻하게 감싸면서 부드러운 말했다. "잠깐만 말이야……." 나는 레이네의 보석에 가만히 내 작전을 속삭였다. 그런데 이 방정맞은 마물은 내 작전을 채 듣기도 전에 버럭 고함을 치는게 아닌가! 「에에에엑? 저보고 검에서 나오라구요?」 "그래그래. 검에서 나와서 저 녀석들 앞에 잠깐만 서 있어 줘. 그러면 돼." 「왜, 왜요? 제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싫어요! 여기서 나가면 너무 춥고, 세이아나님의 마기도 느낄 수 없단 말입니다!」 호오, 이게 반항을 한다 이거지? "흐으응, 너 말이다. 내가 정말 마음만 먹으면 이 노란색 보석 따위 당장이라도 부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사악해요. 칼레들린님! 당신은 너무 사악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너 스스로 나를 '좋은 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너무 해요.」 내가 너무하는 거 이제 알았냐? 호오, 놀라워라. 정말 놀라워서 웃음이 다 나는군. 「흐윽, 그런데……. 정말로 그냥 나가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그럼. 내가 감옥 안으로 들어가면 당장 돌아오면 되잖아, 응?" 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레이네는 한참 망설이는 듯, 그 노란 보석을 깜빡여 대다가 어느 순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 너무 하루에 많이 하는가... 나머지는 내일 올려버릴까.. 에라이, 모르겠다!! 그냥 올려버리자;; -------------------------------------------------------------------------------- Back : 2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9 (written by 카르민) Next : 2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7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71382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2nd February 2002 22:47:46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8-01-2002 23:39 Line : 125 Read : 1080 [29]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9 -------------------------------------------------------------------------------- -------------------------------------------------------------------------------- Ip address : 61.78.221.97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좋았어! 나는 속으로 쾌재를 쳤다. 레이네는 정말이지 잘 해주고 있다. 후후후, 레이네는 검에서 나온 그 때 알몸이란 말이다. 한 밤에 홀연히 나타난 나체의 미녀(성격이야 어찌됐든 웨이브진 노을빛 머리카락을 가진 미녀니까.)라면 여길 지키는 놈들의 시선이 가는 건 당연지사! 나는 힐끔 앞을 보았다. 새벽녘이라곤 하지만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탓에, 어둠이 입혀 주는 옷만으로도 녀석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인데, 레이네가 주의를 끌어주는 덕택에 더더욱 수월했다. 일단 감옥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 안에서 있는 인간들은 바깥으로 빠져나가지만 못하게 만들면 되니까, 내가 어떻게든 처리를 할 수 있을 것이고 말이야. 나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레이네는 훌쩍거리며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칼레들린님 나빠∼'라고 외칠 것 같은 그 녀석은 내가 돌아보자 잡아 먹어버리겠다는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두 손으로 다 쥘 수도 없는 어둠, 내 머리카락과 꼭 닮은 어둠, 내 눈동자와 같은 어둠. 나는 그 어둠 속으로 몸을 움직였다. 보초를 서는 놈들은 이미 다 지나쳐 와서, 이제 감옥으로 통하는 저 커다란 구멍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나는 힐끗 위를 올려다보았다. 홀연히 나타난 레이네를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는 경비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조금 더 다리를 움직였다. 끼이잇! "헉!" 나는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몸을 움직이다가 검이 땅에 긁히면서 끼이,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큼 커서, 나는 순간 호흡마저 멈추고 낮게 엎드려 버렸다. "누구냐! 뭔가가 있는 건가?" 철컹! 검을 뽑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나는 입술을 물면서 눈을 꾹 감았다. 드, 들킨 건가? "거기∼ 오빠들∼" 허걱. 나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끈적끈적한 목소리에 엎드린 채로 굳어버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시선이 돌아간 가운데, 머리카락으로 온 몸을 가린 레이네의 모습이 보였다. 방금 그 목소리를 낸 건, 부, 분명 레이네였다. 오오, 마왕이든 신이든 상관없다! 젠장, 대체 무엇에게 감사를 보내야 할지 알 수가 없지만, 어찌되었든 녀석들의 시선이 단박에 레이네 쪽으로 향했다는 데에 무한한 감사를 금할 길이 없군! 「어서 움직여요, 칼레들린님! 크아아아, 하는 저도 아주 느끼해 죽겠다 구요!!」 레이네의 목소리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재빨리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보다도 더욱 넋이 나가 버린 놈들의 시선을 완벽하게 피하면서 나는 무사히 감옥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크으! 고맙다, 레이네! 그리고 나, 다시는 너한테 이런 짓 시키기 싫다. 온 몸에 닭살이 돋아서 발이 꼬인다! ******************** 감옥 안으로 들어오니 눅진눅진한 공기가 온 몸을 휘어 감았다. 하아, 나 어쩐지 감옥이란 곳과 상당히 인연이 깊어진 것 같군. 주위를 돌아보니 감옥 안에는 경비원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하긴, 바깥에서 이 안으로 접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 못했겠지. 나는 시각과 청각의 한계를 최대한 돋궈서 주위를 훑어보았다. 시각을 너무 돋구면 쉽게 피로해 지긴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내 발자국 소리조차 너무 크게 들려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청력을 돋군 후에 나는 발걸음을 움직여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막 한 발자국을 옮긴 그 때, 내 검에서 이상한 광채가 한 번 뿜어져 나왔다. 놀란 내가 눈을 부릅뜨면서 보는데, 그 빛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나는 이 이상한 일에 당황해서 검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힐트 중앙에 박혀 들어온 노란색의 보석을 보고는 씩 웃어 버렸다. 「으아앙! 저한테 이런 짓을 시키다니, 세이아나님께 일러버릴거예요! 우아아앙!」 "뭐, 수고했다고 해주지." 나는 녀석의 울먹거림에 살짝 웃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한 발자국을 움직였다.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눈을 감고 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려고 했다. 내가 주먹을 꽉 쥔 순간이었다. "저기군." 나는 낮게 중얼거리며 발을 옮겼다. 내 발걸음 소리에 주의하면서 걸어 가보니, 감옥 한 구석에서 몸을 굽힌 채로 잠이 들어 있는 경비복 차림의 남자가 보였다. 꽤나 태평하시군. 나는 피식, 김빠지는 웃음을 한 번 지음 후에 남자의 앞에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한 움직임으로 검을 들어 남자의 목에 가만히 들이댔다. 그래도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고 잘만 자는 남자를 향해, 나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봐." "……으, 으응?" 왠지 장난기가 발동한다. "이봐아∼ 이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는 누구지?" "응, 그, 그건……." 남자는 갑자기 들려온 수수께끼에 묘한 관심을 보이면서 부스스하게 눈을 떠 내 쪽을 보려고 했다. 녀석의 눈이 완전히 뜨인 그 순간, 나와 녀석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입을 크게 벌리며 놈의 몸이 경직했다는 건 두 말 하면 잔소리, 세 말 하면 헛소리겠지. "누, 누, 누구……!" 나는 더듬거리며 말하는 남자의 목 언저리에 거누어진 검신을 손가락을 몇 번 톡톡, 쳐 보이며 웃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고 내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나는 살짝 웃으며 녀석의 목에 좀 더 검을 바짝 들이댔다. 지하라서 그런지 달빛의 출입을 허용하는 공간은 좁다. 나는 들어오는 약간의 달빛에 의지해서 내 모습을 확인하려는 남자를 향해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대답여하에 따라서, 네 목이 지금 당장 여기서 떨어질 수도 있어." "흐으……?" "오늘 들어온, 주황색 머리카락 녀석을 찾아 왔다. 어디 있지?" 내 질문에 녀석이 우물쭈물했다. 나는 더더욱 인상을 구기며 검을 들이댔다. "목이 반쯤 떨어져 너덜너덜해질 지경은 되야 말을 할건가? 참고로 말하면, 앞에서 보초 서고 있던 놈들은 내 손에 다 죽었다!" 그 말을 함과 동시에 레이네가 거짓말쟁이! 라고 외쳐서 머리가 울렸다는 것만 제외하면, 이 말의 효과는 좋았다. 놈은 내가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겁을 집어 먹은 듯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히이익! 왼쪽에서 끝에서 두 번째……. 히이이익!" 말을 끝낸 놈은 내가 검을 높게 쳐드는 것을 보면서 또 한 번 공포에 찬 신음소리를 냈다. 난 검을 최대한 높게 쳐 올린 후에, 검신으로 힘껏 녀석의 머리를 내리쳤다. 까앙! 높은 음색이 한 번 울린 후에, 녀석의 머리가 천천히 밑으로 떨궈졌다. 나는 벌떡 일어나 검을 허리춤으로 거두곤 발걸음을 움직였다. 왼쪽, 왼쪽이라 이거지……. 「왼쪽은 밥 먹는 손 반대쪽이예요, 바보 칼레들린님!」 "크아아! 그 정돈 나도 알아!!" ------------------------------------- 나머지는 내일... 내일이라고 해도 30분 후인가..-_-;; -------------------------------------------------------------------------------- Back : 30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0 (written by 카르민) Next : 2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8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71382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2nd February 2002 22:47:49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9-01-2002 01:22 Line : 332 Read : 1220 [30]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0 -------------------------------------------------------------------------------- -------------------------------------------------------------------------------- Ip address : 61.78.221.97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왼쪽 끝에서 두 번 째의 감옥.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가면서 움직이는데도 잠들지 않은 인간들이 있었는지 내가 지나가는 중간중간, 철창 안에 앉은 놈들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녀석들은 내가 누군가를 구하러 온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챈 듯, 헐떡거리면서 몸을 움직여 철창 가까이로 다가왔다. 녀석들은 철창 사이로 손을 내밀며 나를 보았다. 불결해 보이는 몸과 찢어진 옷가지, 비쩍 말라버린 몸이 내 시선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그들의 거친 숨소리를 무시하며 발걸음을 옮기다는 것은 꽤 고역이었다. 「불쌍하다고 느끼세요?」 "별로." 레이네의 나는 짧게 답했다. 그러자 레이네가 피식, 하고 길게 웃는다. 「그럼 표정 푸세요.」 "시끄러워! 넌 좀 다 안다는 듯한 어조로 말하지마!" 「네에, 네에.」 왼쪽 끝에서 두 번째 철창 앞에서,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오렌지색 눈동자를 본 것은 그 순간이었다. "여어, 친구. 이런 데서 보다니. 흐응, 이거 반갑기보다는 이상하군?" 잠이 들지 않았었는지, 아니면 내가 내려오는 동안에 낸 조그마한 소리를 듣고 깬 것인지 가윈은 철창 가까이에 앉아서 나를 향해 생긋, 웃어 보이고 있었다. 가볍게 웃는 가윈 녀석의 얼굴은 왕궁 감옥에서 보았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난 또 다시 녀석의 그 지나친 여유에 성질이 났지만, 역시 성질을 눌러 참을 수밖에 없는 건가? "……나와." 내 말에 가윈이 눈을 크게 떴다. "친구, 무슨 말이지? "내가 철창을 부술 테니까 나와라, 이 말이다." 내 말에 가윈이 킥, 하고 길게 한 번 웃었다. 이 상황에서 웃는다는 건 분명 비웃는다는 것일텐데, 이상하게도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건 또 무슨 이유지?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녀석의 얼굴 위로는 여전히 얕은 미소가 걸려 있다. "네가 감옥에 왔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뭐?" "뭐랄까, 너는 그 감옥에 들어올 인간이 아닌 것 같았거든." 가윈은 그 말과 함께 크게 기지개를 한 번 켰다. "감옥 안으로 몰래 침입해 들어올 정도면, 네 허리에 걸려 있던 그 검도 장식은 아니었던 모양이고 말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는 가윈을 가만히 보았다. 가윈은 입술을 슬쩍 물며 다시 웃었다. 자기 혼자 여유롭고, 자기 혼자 잘났다고 말하는 것 같은 저 표정.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가윈을 한참 노려보았다. "시간 없어. 부술 테니까 거기서 조금 떨어져 있어." 내 말에도, 철창 바로 앞에 붙어 앉아 있는 가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친구' 라고 불렀기 때문에, 날 위해 와준 거라면, 넌 정말 세상 살기 힘든 녀석이다." 어느 순간 가윈이 입술을 열어 한 그 말에, 나는 움찔했다. 가윈은 검지로 감옥 바닥을 톡톡 튀기면서 잠시 시간을 끌다가 어느 순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가지 않는다." "뭐?" 어이가 없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거겠지. 나는 가지 않는다, 라고 말한 가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윈은 그런 내 얼굴을 한 번 쓱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돌리며 내뱉듯 말했다. "봐야해." "대체 뭘!" "……그 변태 녀석을." "어째서? 그 놈이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내 말에 가윈은 킥, 하고 짧게 웃었다. 녀석의 입꼬리가 비스듬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가윈은 후후, 하고 다시 한 번 웃은 후에 내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전형적인 3류 스토리, 혹시 좋아해?" "뭐?" 나는 갑자기 들려온 그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해서 녀석의 얼굴을 보았다. 가윈은 살짝 눈을 감더니 작게 입술을 움직였다. "엄청나게 진부한, 엄청나게 재미없는, 엄청나게 유치한……. 그런 3류 스토리 말이야." 가윈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내 류트 솜씨 괜찮았지? 나, 한 때는 음유시인이 될까하고도 생각했었는데……. 지금 막 떠오른 3류 스토리가 있어서 말이야. 한 번 들어볼래?" 가윈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고려하지 않는 듯, 그 말과 함께 작게 입술을 움직여 나가기 시작했다. ****************** "오빠! 흐윽! 엄마가……. 엄마가……."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는 작은 손등으로 애써 입을 가리곤 끅끅 소리 죽여 흐느끼고 있었다.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옆구리까지 길게 찢어진 남루한 옷 사이로 질퍽한 피비린내가 풍기고 있다. 소녀의 동그란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은 소녀를 안고 서서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소년의 가슴팍으로 찬찬히 번져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만들어 낸다. "엄마가! 엄마가……!" 소년은 자신의 품안에 얼굴을 묻은 채로 흐느끼는 여동생의 머리카락을 떨리는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소년의 손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소녀의 머리칼을 더듬고 있다. "윈디나, 괜찮아……." 중얼거리는 소년의 목소리는 깊고도 깊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소년의 손이 힘차게 소녀를 끌어안는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채 삼켜내지 못한 슬픔이 안개가 되어 번져 오른다. "윈디나, 울지마, 윈디나……." "으흑! 엄마, 우흐흐흐흐흐흑……." 윈디나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가 13살이 되던 가을,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가 죽었다. 병을 얻은 지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아버지가 명부에 이름을 새긴지 정확히 4년 째 되는 날에 어머니는 가 버렸다. 마을 사람은 그들 남매의 부모가 기일이 같은 것에 놀라워하면서, 분명 아버지가 어머니를 데려 간 것이라고 수근거렸다. 침대에 누워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던 남매의 어머니. 어린 딸과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눈을 부릅뜨고 죽은 그 어머니를 봉양했던 것은 윈디나보다 세 살 위였던 열 여섯의 오빠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이라, 주위 사람들은 어머니가 죽어서 차라리 잘 됐다는 모진 말로 남매를 위로했다. 성대한 장례 따위는 꿈도 못 꾸는 가난한 처지. 소년과 소녀는 눈물을 삼키며 무거워진 시체를 뒷산에 매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윈디나의 오빠는 눈물을 흘리는 윈디나의 목을 가볍게 감싸 안으며 '괜찮아, 오빠가 있잖아.' 라고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처참하게 상처 입은 가슴 위에 약을 바르는 막연한 위로. 눈물 위에서 번지는 그 슬픈 위로. '괜찮아, 오빠. 오빠도 울지마, 내가 있잖아.' 윈디나도 오빠에게 그렇게 말했다. 어린 마음이지만 무너지지 않도록, 남매는 그렇게 서로의 어깨에 기댔다. 윈디나 남매가 살았던 비올리아 마을에서 그들은 꽤나 유명했다. 오빠 쪽이 특히나 더. 딸 가진 마을 사람들이 모두 윈디나의 오빠를 탐냈다. 시원하게 빗어 넘긴 오빠의 주황색 머리카락도 탐냈고 아름다운 오렌지색 눈동자를 탐냈으며 서글서글한 성격과 동생을 위하는 마음을 탐냈다. "그래그래, 산사나무 아래에 사는 그 집 남매 말이야." 마을 어귀를 걸을 때면, 윈디나는 늘 오빠 얘기를 주고받는 마을 어른들을 보며 뿌듯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허어, 거기 첫째가 그렇게 듬직하다며?" "우리 딸 사위감으로 내가 일찌감치 점찍어 뒀지." "크하하하! 자네 딸? 산사나무 첫째가 얼마나 미남인데 그러나? 자네 딸은 온 마을이 다 아는 박색인데 말이야! 하하하하핫!" "뭐야? 자네 말 다했나?" 윈디나는 그런 오빠를 누구보다 좋아했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녀는 오빠를 많이 닮아 있었지만, 닮은 것은 외모뿐이었다. 윈디나 역시 귤색 눈동자와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지만, 천방지축인 면이 있었다. 오빠가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가늘지만 강한 갈대 같은 느낌을 풍기는 데에 반하면, 윈디나는 철없이 어리기만 했다. "오빠, 오빠." "응?" 밤이면 윈디나는 아랫집 홉스네에서 언제나 힘들게 장작지기를 하는 피곤한 오빠의 팔에 매달려서 수다를 떨어댔다. 오빠는 단 한 번도 그런 윈디나에게 짜증을 내 본 적이 없었다. 오빠는 언제나 웃었다. 윈디나의 하얀 뺨을 어루만져 주고, 윈디나의 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빠가 짓는 미소는 16살이 가지고 있다기엔 어딘지 너무 어른스러럽게 느껴졌지만, 윈디나는 그런 웃음조차 좋아했다. 오빠의 팔에 매달려서, 오빠의 냄새를 맡고, 오빠의 눈을 보고, 오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어린 윈디나에게 남겨진 '유일하게 삶을 확인하는 방식' 이었다. "오빠." 윈디나는 오빠의 품에 안겨서 그렇게 오빠를 부른다. 그러면 오빠는 생긋 웃으면서 대꾸한다. "응?" "오빠한테 나미 언니가 프로포즈했다며?" "뭐?" 오빠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졌다. 나미는 윈디나네 뒷집에 사는 크로엔씨의 첫째 딸로, 윈디나의 오빠를 좋아하는 수많은 추종세력들 중 하나였다. "흥흥, 카미한테 다 들었다구. 오빠, 난 나미 언니는 싫어! 오빠 부인은 훨씬, 훨씬, 훠어어얼씬 예뻐야 된다고! 나미 언니는 그리고, 너무 성격이 쌀쌀해!" 윈디나는 그렇게 말하며 오빠를 샐쭉하게 노려본다. 오빠는 피식 웃으면서 윈디나의 머리를 몇 번 부벼 주었다. "윈디나, 오빠는 윈디나 결혼시키기 전엔 장가가지 않을 거니까, 그런 말은 하지마." "응?" "오빠한테는 아직 윈디나가 있으니까. 윈디나가 결혼해서 먼저 오빠 곁을 떠날 때까지는, 가지 않을게." "히잉, 그럼 윈디나도 결혼 안 해." 윈디나의 투정 섞인 말에, 오빠는 웃었다. "그럼, 언제나 함께 있자. 오빠도 장가가지 말고, 윈디나도 시집가지 말고. 언제나, 오빠가 윈디나를 지켜줄게." 오빠는 다정했고, 아버지의 그림자조차 희미한 윈디나는 오빠의 그늘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았다. 윈디나에게 오빠는 삶의 전부였다. 특히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는, 정말이지 윈디나에겐 의지할 자가 오빠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빠는 언제 어느 때나 다정했기에 더더욱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는 윈디나가 잠들 때까지 옆에서 자장가를 불러 주었고, 윈디나가 갖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있다면 도둑질을 제외한 어떤 짓이든 해서 결국 구해 주었다. 윈디나가 만들어주는 음식이라면 아무리 맛이 없어도 다 먹어치웠고(그러다가 식중독이 걸린 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윈디나가 부르는 노래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웃으며 칭찬했다. 하지만 그렇게나 다정한 오빠였건만, 윈디나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무서울 만큼 성격이 변하기도 했다. 오빠는 윈디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여태까지의 모든 이미지를 무너뜨릴 만큼 분노했다. 윈디나가 14살 되던 해였다. 어린 그녀는 옆집에 있던 술주정뱅이 칼슨에게 성추행 당할 뻔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윈디나에게 인간으로서 못할 짓을 하려고 했던 칼슨을 향해, 오빠는 생전 처음으로 윈디나 앞에서 광인의 모습을 보였다. 그 날, 윈디나는 생전 처음으로 오빠가 분노하는 것을 보았다. 오빠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고, 그 칼을 든 오빠는 미친 듯이 달려와 칼슨의 배를 세 번이나 찔렀다. 때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신관에게 구제 받지 않았더라면, 칼슨은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오빠는 윈디나를 사랑했다. "윈디나,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그들 중에서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부모님도 없고, 형제도 없고, 오로지 혼자서만 살아오는 사람도 있어. 윈디나, 그에 비하면 우리는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윈디나에게는 오빠가 있고, 오빠에겐 윈디나가 있으니까. 윈디나하고 오빠 둘 뿐이라도……. 둘이니까 우린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어. 그렇지, 윈디나?" "응, 오빠." 그래, 윈디나는 그 때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했다. ---------------------------- 오늘은 3연참... 허거거걱... 띄워쓰기를 안 했었군요.. 지금 했습니다;; -------------------------------------------------------------------------------- Back : 31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1 (written by 카르민) Next : 2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19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71382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2nd February 2002 22:47:54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9-01-2002 01:23 Line : 281 Read : 1074 [31]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1 -------------------------------------------------------------------------------- -------------------------------------------------------------------------------- Ip address : 61.78.221.97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윈디나가 15살이 되던 여름이었다. 마을마다 방이 나붙었다. 16∼18세 전후의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소년을 내년 초까지 모집한다, 라는 내용이었지만 목숨은 보장하지 못한다……. 라는 대목을 보고 쉽게 지원하는 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물론 100골드라는 돈에 구미가 당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비올리아 마을에서 지원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윈디나는 그 때도 오빠의 사랑 속에서 자랐다. 다른 사람들 못지 않게 행복했다. 오빠는 다른 누구보다도 멋진 사람이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술 먹고 도박하고 여자들을 만날 때, 오빠는 일하고 일하고 일했으며 동생을 돌봤다. 오빠가 아는 것은 일과 윈디나, 그것 두 가지 뿐이었지만 그래도 여자들 사이에서의 오빠의 인기는 여전히 높았다. 오빠는 날이 갈수록 멋있어졌고, 늠름해졌다. 가을이 지나 겨울이 왔다. 마을에 지독한 흉년이 들었다. 가을이 내려준 풍요 따위는 비올리아 마을에 없었다. 무자비한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비올리아 마을은 흉흉했다. 12월을 넘기고 나자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었다. 싸늘한 바람만이 마을을 휘감았다. "배고파, 오빠……." 윈디나는 추위에 덜덜 떨면서 오빠에게 말했다. 오빠에게는 모은 돈이 있었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음식이었다. 먹거리의 값은 몇 배씩 뛰어 올랐고, 지금 상황에 마을에서 음식을 산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오빠는 마을 사람들을 대표해서 옆 마을으로 음식물을 사러가기로 했다. 윈디나는 오빠에게 손을 흔들며 빨리 와, 라고 중얼거렸다. 오빠를 마중하는 그녀의 입술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윈디나는 추위를 이기려고 입술을 혀로 핥았다. 오빠는 어린 윈디나를 남기고 옆 마을로 떠났다. 엄청난 추위가 혼자 남은 윈디나를 덮쳐왔다. 하지만, 추위보다 더 큰 것이 배고픔이었다. 오빠가 남기고 간 식량은 이미 바닥났다. 윈디나는 오돌오돌 떨었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어서, 그녀는 산으로 갔다. 이미 벗겨먹을 것은 다 벗겨 먹어 남아있지도 않은 산이었지만, 역시 산에 올라가면 먹을 것이 조금은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윈디나는 끝까지 산을 탔다. 그리고, 한참동안 헤매던 윈디나의 눈에 띈 것이 있었다. "어?" 붉은 삿갓모양의 이상한 버섯. 탐스러워 보이는 버섯의 빛깔이 그녀를 유혹했다. 어째서……. 겨울에 버섯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겨울에 버섯이 피다니. 보통의 경우, 버섯은 초여름에서 겨울에서 필뿐이다. 지금 버섯이 필 리가 없다. 지금 버섯이 필 리가 없다. 저것은 버섯이 아니야, 버섯이 아니……. 우걱! 하지만, 너무 배가 고파서 버섯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움직임이 제어되질 않았다. 버섯 아니면 어때, 어쨌든 먹고 안 죽으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윈디나는 그것을 먹고 말았다. "오빠……." 배부르게 포식하고 나니 온 몸에서 열기가 올랐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욱, 오빠……." 맛이 괜찮았는데, 굉장히 맛있었는데. 그런데, 갑자기 온 몸에서 느껴지는 이 고통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오빠……."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윈디나는 휘청휘청 발걸음을 옮기면서 산을 내려왔다. 비틀비틀 내려오다가 종국에는 넘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기어서 마을 쪽으로 내려갔다. 윈디나는 자기 집에 밝혀진 불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오빠……." 오빠, 돌아 왔구나. 윈디나는 웃었다. 하지만 아팠다. 아주 많이 아파서 괜히 눈물이 났다. 윈디나는 배를 부여잡고 누웠다. 아니, 쓰러졌다. 더 이상 갈 힘이 남아 있지 않아. 한참이 지나서야 뭔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난다 싶었고, 그 소리를 들으면서 윈디나는 눈을 감았다. "……내, 내 동생은,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어렴풋이 오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끼면서 윈디나는 눈을 떠보려고 했다. 하지만 노력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어두컴컴한 시야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목소리를 내보려고 이번에는 입술을 벌렸다. 그러나 목이 매캐해서 소리를 낼 수가 없다. "진정하게, 가윈." "윈디나가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피터씨, 말씀 좀 해줘요!" '오빠, 나 괜찮아.' 윈디나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목소리는 안에서 빙빙 돌뿐이었다. 바깥으로 빠져 나오는 소리 따위는 없다. "가윈. 진정해, 가윈!" "가윈, 가윈, 가윈! 대체 내 이름만 불러서 어쩌겠다는 거야! 대답을 해! 내 동생 왜 이러는 거야! 잘못 되면, 당신 죽고 나도 죽어!" 쿠당, 하는 소리가 났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오빠가 피터의 멱살을 움켜쥔 것 같았다. 피터는 비올리아 마을의 의사였다. 평소라면 피터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을 오빠지만, 그 날만큼은 아니었다. "진정하고 들어라, 가윈. 윈디나, 네 여동생은…… 독초를…… 크윽……." "독초? 그래? 뭘 먹었는데?" "미시아." "……뭐라고 했지, 방금?" 윈디나는 몸을 움직여 보려고 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목안에 무엇인가 거대한 것이 콱, 하고 막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척이나 불유쾌하다. "미시아." "……말도 안 돼,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라고 해 봐!!" 오빠가 버럭 고함을 쳤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윈디나! 눈 좀 떠봐, 윈디나!" '오빠, 나 괜찮아.' 윈디나는 희미하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말은 나오지 않았고, 눈앞은 더더욱 흐려질 뿐. 윈디나가 다시 의식을 차린 것은 손끝에서 뭔가 따뜻한 감촉을 느꼈을 때. 윈디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오빠 손의 온기라는 것을 눈치챘다. "윈디나……. 걱정하지마……. 오빠가……." 윈디나는 자신의 손을 꾹, 하고 눌러오는 따뜻한 촉감에 속으로 생글, 하고 웃었다. '오빠, 오빠. 목소리가 왜 그래?' "오빠가, 윈디나……. 고쳐줄게. 너…… 너는…… 윈디나……. 흑……." 왜 그래, 라고 묻고 싶었다. 갑작스럽게 오빠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묻어난다. 아니야, 오빠가 울 리가 없어. 오빠는 언제나 웃기만 해. 오빠? 왜 우는 거야? "윈디나. 걱정 마, 윈디나……." 스르르, 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이마에서 무엇인가 부드러운 것이 느껴져 왔다. 아마도 오빠가 뽀뽀 한 것이리라. 잠들기 전에, 언제나 '우리 윈디나, 착하지.' 하고 부드럽게 웃으며 뽀뽀 해주었다. 지금도, 잘 자라고……. 그렇게 인사하는 것이다. 윈디나는 오빠에게 생긋, 웃어보려고 했다. 그리고, 또 다시 찾아온 잠의 여신의 품에 몸을 맡겼다.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윈디나가 처음 본 것은 오빠가 아니라 피터였다. "피터 아저씨? 우리 오빠는?" 힘없이 묻는 윈디나를 향해, 피터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윈디나의 온 몸에 흰색의 이상한 크림을 바르며 낮게 말했다. "오빠는 다시……. 으음, 식료품을 구하러 옆 마을에 갔단다." "뭐? 언제 오는데?" "……한……한 달 후……정도?" "으응, 그런데 왜 피터 아저씨가 여기 있는 거지?" "말괄량이 아가씨, 아직도 모르고 있었구나? 윈디나, 네가 먹었던 건 독초였다." "에?" 윈디나는 화들짝 놀랐다. "괜찮아, 오빠가 약을 사 주고 갔으니까……." "으응." "그래도 빨리 나아야겠지? 자아, 좀 쉬어라." "응." 윈디나는 기다렸다. 독초 때문에 온 몸과 얼굴 위로 돋아났었던 붉은 꽃들이 사라지고, 여린 피부위로 좀먹듯 피어났던 검은 반점도 사라졌다. 윈디나는 완전히 나아 깨끗하고 환해진 얼굴로 오빠를 기다렸다. 다정하고 다정한 우리 가윈 오빠! 어서 와 줘. 윈디나는 이제 다 나았어. 지금 오빠를 기다리고 있어. 윈디나, 오빠를 기다리고 있어. 오빠, 어서 와 줘. 어서 와서 '우리 예쁜 윈디나, 괜찮아?' 라고 그렇게 말해줘. 윈디나가 오빠를 기다리고 있어. "피터 아저씨, 왜 우리 오빠가 오지 않는 거예요?" 정확히 한 달하고도 3일이 지났을 때, 윈디나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 가는 일을 멈추고 피터에게 물었다. 그녀에게 묽은 죽을 주고 있던 피터는 움찔했다. "아―아. 조금……. 늦어지는 모양이지." "으응, 그렇구나. 빨리 왔으면 좋겠다." 윈디나는 또 다시 오빠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아 가면서. -------------------------------------------------------------------------------- Back : 32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2 (written by 카르민) Next : 30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0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71382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2nd February 2002 22:47:57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9-01-2002 01:24 Line : 410 Read : 1460 [32]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2 -------------------------------------------------------------------------------- -------------------------------------------------------------------------------- Ip address : 61.78.221.97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들었어?" "응, 들었어." 윈디나는 피터의 집 정원에 누워서, 손가락을 꼽고 있었다. '이제 정확히 36일째야. 오빠 미워. 내가 그렇게나 아팠는데, 이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니.' "불쌍한 가윈." '어?' 윈디나는 발딱 일어섰다. 오빠가 불쌍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윈디나는 눈을 빼꼼히 들어 말소리가 새어나오는 창문 안 쪽을 보았다. 미리아와 나미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둘 다 오빠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언니들이다. "흑……. 가윈, 불쌍한 가윈……." "이게 다 그 계집애 때문이야! 그렇게나 감싸고돌더니! 동생 때문에 목숨까지 희생해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자기한테는 자기 인생이 있잖아!"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며 윈디나는 숨을 삼켰다. "언제나 가윈한테 짐일 뿐이면서! 정말이지 싫어! 언제나, 매일 같이! 수 십 번을 고백해도 돌아오는 소리는 언제나 '미안해' 뿐이었어! 동생 밖에 모르는 바보! 멍청이!" "동생 약 값 벌려고 자기 몸을 버리다니! 그게 말이 되는 거야?" "바보! 바보!!" '무슨 말이야? 우리 오빠는…' 어렴풋이, 희미한 기억 너머로 오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윈디나. 걱정하지마. 오빠가…… 윈디나……. 고쳐줄게. 윈디나……. 흑……. 걱정마, 윈디나…….」 '오빠……?' 목 언저리가 뜨거워졌다. 윈디나는 한 발을 앞으로 떼어 냈다. 「그럼, 언제나 함께 있자. 오빠도 장가가지 말고, 윈디나도 시집가지 말고.」 "나미 언니?" 쿵, 쿵, 쿵. 갑자기 든 불길한 예감에 심장의 박동소리가 아주 크게 울렸다. 「언제나, 오빠가 윈디나를 지켜줄게.」 쿵, 쿵, 쿵. 무서우리 만치 빠르게 팔딱대는 심장의 움직임에 윈디나는 크게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우리는 둘이니까, 좀 더 행복할 수 있어.」 쿵! 쿵! 쿵쿵쿵! 잘못 들었다. 잘못 들었다. 지금 자신은……. 윈디나는 한 발자국을 더 앞으로 내밀었다. 멍하게 풀린 눈동자 사이로 공허가 흐른다. "미리아 언니." "위, 윈디나?" 눈물을 흘리고 있던 미리아가 힘없는 호명에 놀란 듯, 동그래진 눈으로 돌아보았다. 윈디나는 멍청한 눈으로 걸어가 미리아를 보았다. 초점이 멍하게 풀린 눈으로, 윈디나가 입술을 열었다. "……무슨 말이야?" "윈디나……" "무슨 말이야?" "그, 그……" "무슨 말이야! 오빠가……! 오빠가?" 미리아는 윈디나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쩔쩔 매기만 했다. 윈디나는 고개를 돌리고 파리한 입술로 미리아의 옆에 앉은 나미를 보았다. 윈디나의 등장에 어쩔 줄 몰라하는 미리아와는 달리, 나미는 차가운 얼굴로 어린 윈디나를 보고 있었다. "나미 언니? 말해줘. 오빠는……." 윈디나의 질문에 나미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어느 순간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윈디나가 움찔했다. 작게 한 번 웃은 나미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본 것은 그 순간이었다. 나미의 눈에 매달렸던 눈물이 주룩, 하고 흘러내렸다. 나미는 자신을 바라보는 윈디나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킥…… 그래! 네 오빠가 너 때문에 죽었어! 네가 먹은 독초를 중화시키기 위해선 크레티아에서 단 한 군데에서만 재배되는 아주 귀한 풀이 필요하다더군! 귀족이 아니고서는 한 뿌리도 구할 수 없는!" 윈디나는 멍한 표정으로 나미의 말을 들었다. "너희 오빠는 한 줄기에 몇 십 골드나 하는 그 해독제를 구하기 위해서, 너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어! 가윈이, 가윈이! 너희 오빠가 뭘 했는지 네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모두 다! 모두 다 너 때문이라고!" "그만해, 나미!" 미리아는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으나, 이미 이성의 제어가 완전히 풀려 버린 나미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뭘 그만 하라는 거야! 저 계집애도 알아야 해! 너희 오빠는 왕궁에 몸을 팔았어!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 소문이 파다해! 거기 가면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어! 너희 오빠도 돌아오지 않아! 죽을 거야!!" "……아, 아아." 발에서 힘이 풀려, 윈디나는 스르르 미끄러져 버렸다. 온 몸이 더 이상 떨릴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양팔이 일으키는 경련은 엄청났다. "아아아아……."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이 터졌다. 차라리 지금보다 더 어려서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지금보다 몇 살 더 어려서, 이 현실을 알아듣지 못했더라면! 아니, 차라리 듣지 못했더라면! 피터가 해준 그 거짓말, 먹거리를 사러 갔을 뿐이라는 그 달콤한 거짓말의 효력이 조금이라도 더 유효했더라면! 무섭게 뛰고 있는 심장의 두근거림이 지금 이대로 멈춰버린다면! 차차리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더라면! 그렇게만 된다면!!! 그러나 이해하고 싶지 않은 현실은 이미, 윈디나의 내부에서 완벽하게 이해가 되어버렸다. 이 자리에서 죽고 싶었다. "으으…… 흑!" 「언제나 함께 있자.」 "으아! 오빠! 으흑…… 으아아…… 으아아악! 오빠아아아아!!" 「오빠가, 윈디나를 영원히 지켜줄게.」 미친 듯한 격정이 터지는 가슴 한 구석에서, 아릿하게 울리는 오빠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린다. 가슴에서 파문이, 파문이, 파문이 인다. "거짓말쟁이! 으아아악…… 으아아아아아―! 오빠―! 거짓말쟁이!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둘이니까,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어.」 "으흐흐흑! 우우…… 으아아!" 「윈디나.」 "우아아아아아악!!" 「윈디나.」 윈디나 15살, 가윈 18살의 슬픈 겨울이었다. "……재미없지?" 이야기를 마친 가윈은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윈디나는, 가윈은, 나미는, 피터는, 같은 말을 사용해가면서 이야기를 했던 가윈의 얼굴 위로는 그 어떤 그림자도 비치지 않아서 정말이지 난 녀석이 남의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할 뻔했다. 재미없지, 라고 말한 순간 녀석의 볼 끝으로 타고 내린 그 맑은 것만 아니었더라면. 흐트러진 주홍빛 머리카락이 가린 눈동자에서 무엇인가가 굴러 내리는 것을, 나는 보고 말았다. 또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볼 끝에서 미끄러져 내린 그 하얀 구체는 톡, 하는 소리와 함께 가윈의 무릎에 떨어져 내렸다. "거기에 나오는 윈디나가……."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가윈의 입술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너냐?" 대답이 없다. 그러나, 알고 있다. 때로는 침묵이 그 어떤 말보다 강한 의사를 표현한다는 것을. 가윈. 아니, 윈디나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한 번 웃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친구?" 눈물이 흐르는데, 끊임없이 흐른 그 눈물이 턱 끝을 지나 옷 속에 스며들고 있는데…… 뭐가 아니라는 거냐? 뭐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거냐! "난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구, 친구. 이 바보 같은 이야기의 여주인공은, 혹시라도 오빠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몇 년 동안 수도에 머물러 헤매면서 오빠만을 기다렸다고 하더군. 100골드를 받고 가족을 팔았다는 이들을 맨발로 찾아다니며 만났고, 오빠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그 오빠가 그토록 소중히 여겨줬던 몸조차 열 여섯에 팔기 시작했어. 내가, 아무렴 이 가윈 뤼케이너가……. 그런 바보 같은 일을 할 리는 없잖아?" 차라리 완벽한 거짓말을 해. 아무리 태연하게 말해도, 아무리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려 해도 소용없어. 지금 흐르는 그 눈물은 대체 어떻게 속일 거지? 계속해서 흐르고 흐르고 흐르는 그 눈물은? 내게……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냥 궁금했어. 이 3류 스토리가 만들어질 수 있게 만들어 준 그 변태는 어떤 놈일까. 조금 궁금해진 것 뿐이야. 난 여기에 나오는 여동생이 정말 죽도록 싫어. 그렇게나 어리석어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희생하게 만들었어. 게다가 여동생을 위해 희생하는 이 오빠란 인간은 더 싫어! 동생을 지켜주겠다면서, 혼자서 떠나버리는 그 오빠는 정말이지……." 나는 가만히 녀석을 보았다. 고개를 올린 채로, 표정조차 변하지 않고 있는 녀석이 '울고 있다' 라는 것을 알아보려면 눈을 보아야 한다.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니까. "정말이지…… 최악이야." 말이 나오지 않는다. 카민, 네가 여기에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너라면 이 녀석을 보고 좀 더 가슴이 아팠겠지? 너에겐 나스가 있으니까. 나스도 혹시 이렇게 생각했을까? 무사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조금 더 너란 녀석과 함께 있었으면 하고. 영원히 함께 할 수 있었으면, 그렇게 생각했을까? 지금 이 녀석이 흘리는 눈물과, 옛날에 카민이 흘렸던 눈물의 의미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아이에드나 로시엔이 죽는다고 가정했을 때 내가 느끼는…… 그런 감정과 같을 거다. 나는 물기가 사라져 거칠어진 내 입술을 손가락으로 몇 번 부볐다. 아이에드나 로시엔이 없는……. 마계라. 절대로, 영원히,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 나는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가지 않겠다는 거냐? 지금 가지 않으면 넌 영원히 이런 감옥에서 썩는 거다! 그래도 좋아?" "상관없어!" 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문득, 카민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체이드 숲을 떠나던 날, 내게 말을 건넸던 카민의 얼굴이. 「나스와 함께 했던 3년 간의 행복은 이걸로 끝이야. 녀석들은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나를 따라오겠지. 하지만 내가 없어지면 더 이상 나스를 건드리진 않을 거야. 그래, 그걸로 됐어. 그걸로 됐다.」 왜 모르는 거지? 그렇게 떠나던 카민의 마음은 제 3자인 나조차도 뼈저리게 느꼈는데. 그런데, 당사자 중의 한 명이 다른 한 명의 마음을 조금도 몰라주고 있다니. 윈디나가 나스로, 가윈이 카민으로 보이는 이 상황에서 나를 너무나도 우울해졌다. "가윈이……. 왜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윈디나를 살려 놨다고 생각해냐? ……여동생이 행복하길 바랬을 거다. 자신이 죽어서라도 지켜주고 싶었겠지." "넌 몰라." 내 말에 바로 대답을 해오는 녀석의 태도에, 불끈 화가 치솟았다. "그래, 젠장! 나도 그런 고결한 희생 따윈 몰라! 해본 적 없고, 앞으로도 그따위 걸 할 마음은 없어! 하지만 조금이나마, 조금이라도 알아줄 순 없는 거냐?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발을 움직였던 그 오빠란 녀석의 마음을. 자신이 떠나도 동생이 열심히 살아주길 바랬을 거라곤 생각 안 해? 예쁘게 성장해서 좋은 남자 만나길 바랬을 그 오빠는 생각 안 하는 거야? 귀여운 딸 낳고, 개구쟁이 아들 낳아서 행복하게 살 길 바랬을 가윈은!" 카민은, 나스가 그렇게 살 길 바랬지. "가윈은 그런 걸 바란 게 당연해! 넌 오빠가 최악이라고 했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왜 이름을 '가윈' 이라고 쓰고 있지? 동생이 자신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알기 위해 몸을 팔고, 그것도 모자라서 원수의 얼굴을 보기 위해 자신과 같은 길로 죽으러 온다는 걸 오빠가 안다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죽어버린 오빠가 울 거라는 생각, 안 해봤나?" "넌 몰라!!" 고함을 버럭 지르는 녀석의 목소리에 도저히 감당이 안 될만큼 화가나서,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젠장! 난 몰라!" 나는 벌떡 일어섰다. 고개를 내린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더더욱 성질이 났다. "평생을 감옥에서 썩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젠장, 난 몰라! 모른다고!" 난 고개를 숙인 녀석을 뒤로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 따위 곳에 있기 싫어! 「칼레들린님.」 "젠장, 아무 말도 하지마!" 「……예에.」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달려나갔다. 어째서 모르는 거지? 당연하잖아? 죽은 사람도 좋아서 죽은 건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저는 저 사람의 말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나는 레이네의 조용한 목소리에 인상을 썼다. "뭐라고?" 「뭐랄까요. 칼레들린님, 가만히 생각을 해 보세요.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입니다. 아이에드님이나 로시엔님 두 분 중 한 분이 칼레들린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 한다면 어떠시겠습니까?」 나는 화가 나서 버럭 고함을 쳤다. "그따위 거 묻지마! 아무리 가정이라도 기분 더러워!!" 「아……. 예, 죄송합니다.」 나는 재빨리 걸어가서 들어오는 길에 내가 쳐서 기절시켰던 경비원 놈의 옷을 벗겼다. 기절한 상태라도 내가 옷을 벗기자 그것을 무의식중에 눈치챈 듯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뒤트는 바람에 가뜩이나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난 녀석의 배를 한 대 꽉 밟아 주고 말았다. 경비원 옷으로 갈아입으면서도 복잡한 감정은 지워지지가 않았다. 모든 것이 미쳐 돌아가는 듯한 느낌에 불쾌했다. 기분이 나쁘다, 정말로. '아이에드님이나 로시엔님 두 분 중 한 분이 칼레들린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을 한다면 어떠시겠습니까?' 문득 레이네가 한 질문이 머릿속에서 다시 한 번 들려왔다. 나는 이빨을 악 물며 중얼거렸다. "그 따위 짓을 한다면 죽어버린 그 놈들 쫓아가서 다시 죽여 버릴 거야!!" ------------------------ 비축분 end... 후후후후후후후후=_= 어때요, 저 정말 엄청난 연참 하지 않았나요?;; 헤헤헤헤헤-_-;; -------------------------------------------------------------------------------- Back : 33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3 (written by 카르민) Next : 31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1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71382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2nd February 2002 22:48:00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30-01-2002 08:38 Line : 263 Read : 1205 [33]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3 -------------------------------------------------------------------------------- -------------------------------------------------------------------------------- Ip address : 211.220.15.212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아아, 마감이여, 안녕! 저 드디어 마감했습니다;ㅁ; 여러분들도 내일까진 연참을 보실 수 있으실 듯 합니다(참고로 어제 밤도 다 샜습니다;) -------------------------------- 제 23장 에세렌 이네아스 "알겠냐?" 내 질문에, 침대에 반쯤 드러누운 자세의 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았어." 내가 다짜고짜 쳐들어오는 바람에 잠을 설친 듯, 녀석의 눈은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다. 나는 조금, 그러니까 코딱지 반만큼의 죄책감을 느끼면서 작게 말했다. "내 말대로 해줘." "그건 곤란해." 녀석은 크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나는 인상을 썼다. "해주지 않으면, 나도 안 해." 내 말에 태연하게 하품을 하고 있던 녀석이 살짝 눈을 내리 깔았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올린 녀석은, 갑자기 나를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특히나 얼굴을. 불유쾌하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이봐, 칼레들린." "뭐냐?" 내 투박스러운 대답에 녀석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표정이 왜 그래?" "뭐가!" 젠장! 왜 만나는 인간마다 내 표정이 더럽다고 시비는 걸고 난리야! 짜증나 죽겠네, 진짜! "알았다. 네 말대로 할게." 내 기분이 안 좋아졌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는 녀석이 도로 자리에 드러눕는 것을 보면서 돌아섰다. "……좋다." 막 문을 열려는데, 녀석이 뒤에서 피식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이 앞에서 보초 서던 기사 세 명은 어쨌어?" 나는 문을 열면서 대답했다. "쓰레기통에 갖다버렸다. 왜, 불만이냐?" "하하하핫! 불만은 무슨! 쿡쿡, 쓰레기 통에 버려진 기사들을 주우러 가야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군." 이제, 아침이 온다. **************** 아침 식사를 끝마치고, 우리는 성을 나섰다. 하백이란 늙은이는 끝까지 루덴스의 팔을 부여잡고 뭐라고 뭐라고 말을 해대서 나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대체 저 놈은 뭐라고 지껄여 대는 거냐?" "별 거 아냐. 자기 지역을 좀 개발시키고 싶다, 그거겠지." 루덴스는 태평스럽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마차에 올랐다. 나는 루덴스의 뒤에 대고 연신 고개를 숙이는 하백을 보고 있다가 흐음, 하고 중얼거리며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이 봐." 하백은 내가 부르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3층 맨 왼쪽 여덟 번째 방. 빨리 가서 열어 봐. 숨 막혀 죽을지도 모르거든." "예?" 하백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나는 킥, 하고 미소를 던져 준 다음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는 모두가 앉아 있었다. 가윈 역시 세라의 옆에 앉아 있다. "여어, 친구! 간밤에 잘 잤나?" 생긋 웃으면서 가윈이 내게 말을 건넸다. "호오, 누구누구 씨 때문에 못 잤다는 건 누구누구 씨가 잘 알지 않을까?" 비꼬는 듯한 그 말투에 발끈한 내가 말하자, 가윈은 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빌어먹을 놈의 자식. 내가 저 놈 때문에 아침부터 그 고생 해가며 감옥에 들어간 것도 모자라 루덴스 방 찾아가서 부탁을 했단 말이냐? 성질 나! 성질 난다고! 「고정하세요, 칼레들린님.」 크아아아! 고정은 무슨 고정이야!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가 난 나는 마차 벽에 몇 번이고 머리를 찧었다. ********************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군." 라이메데스가 나를 향해 말해왔다. "별로!" "별로긴 뭐가 별로야. 내가 보기에도 안 좋아 보이는데." "제가 보기에도 영 기분이 아닌 것 같은데요?" 이 놈들이 단체로 왜 이래? "아아, 칼레들린이 기분이 안 좋은 이유는 내가 알고 있지." 저, 저! 루덴스 놈! 무슨 말을 하려고? "헤에, 뭐 때문에 그러는데?" 카민이 호기심이 동한 듯 눈알을 굴리며 물었다. 크윽! 넌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냐, 이 녀석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인간한테 오늘 아침 찾아가서 '부탁' 이라는 걸 했다나 어쨌다나." "……." 내가 말없이 노려보자 루덴스는 히익,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나는 휭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아! 아마도 지금 나, 뾰로통한 표정 짓고 있을 것 같다. 젠장! 그 딴 모습 꼴불견인데! ***************** 마차는 또 지겹게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몇 시간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창 밖만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고개를 돌렸다. 순간. "뭐, 뭐냐?" 노, 놀래라! 이 녀석들 지금 뭐하는 짓들이냐? 하나 같이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내 쪽을 보고 있는 녀석들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 보는 거지?" 난 녀석들의 그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황당해서 몸을 뒤로 빼냈다. 그러자 에세렌이 피식, 하고 길게 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칼레들린님. 칼레들린님이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까…" 에세렌이 말끝을 흐렸다. "분위기가 이상한걸요." "뭐?" "그래. 네가 이상하게 폼 잡고 있으니까 마차 안 공기가 가라앉잖아, 이 자식아! 그래서 네 놈이 언제 말할지 내기하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왜!"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는군. 그렇게나 할 일이 없더냐? 나는 길게 한 번 한숨을 뺀 후에 루덴스를 보며 물었다. "너 말이다. 네 놈은 그래도 왕자니까, 타국의 역사나 문화 같은 것 좀 알고 있겠지?" 루덴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어느 정도는." "그럼 뭐 하나 물어보자." "뭔데?" 호기심이 동한 듯, 루덴스가 턱을 바짝 당겼다. "'카인' 이라는 단어를 '안녕히' 라는 뜻으로 쓰는 건 대체 어느 왕국이냐? 망한 지 얼마 안 된 왕국이라고 하던데." 내 질문에 루덴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세? 난 잘 모르겠는데?" "……네 놈이 그러고도 왕자냐?" 내 말에 루덴스는 민망해진 듯 자신의 머리를 몇 번 긁적였다. 왠지 한심스러워진 내가 막 고개를 돌리려는데, 루덴스의 옆에 앉아 있던 레니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안녕히' 와 '카인'? 그거, 크루엔 왕국의 언어 아냐?" "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레니가 싱긋 웃는다. "맞아, 크루엔 왕국. 키세온 님이 모르는 것도 당연해. 미아 해를 넘어선 아주 먼 동방에 있는 왕국인 데다가, 30여 년 전에 멸망한 왕국이기도 하니까." 동방? 동방이라고? "그럼, 아주 먼 동방에서 멸망한 그 왕국을 넌 어떻게 아는데?" "그거야 내가 동방에 좀 관심이 있으니까 그렇지. 너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텐데? 이카루 성녀와 마족 파스턴." 그거라면 지겹도록 들어서 알고 있긴 하다만. "아아!" 루덴스가 뭔가 안다는 듯이 손바닥을 딱 하고 내리쳤다. "동방 대륙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 크루엔 왕국이었다고 기록은 말하고 있어. 혹독한 추위를 자랑했다지? 동방 대륙에 있는 다섯 개의 나라 중 가장 오랫동안 번영했지만 돌연 나타난 악독한 마족 파스턴의 파괴 행각 때문에 결국엔 망해버렸다고 하잖아? 전설에 의하면, 당시 이카루에서 성녀로 통하던 여인이 고통 받는 동방의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 파스턴의 흉악무도함이 언제 이 곳으로 닥치지 모른다는 사실을 걱정해서 동방으로 건너갔다고 하지. 뭐, 그 뒤는 다 아는 대로 저 유명한 이카루 성녀의 검에 파스턴은 죽었고. 흐음, 내 기억이 분명하다면 그 왕국이 맞을 거야. 문화재가 많은 왕국이기도 하고. 아바마마도 크루엔 왕국엔 이상하리 만치 관심이 많으셔서 난 어렸을 때 크루엔 왕국의 말을 조금 배웠어.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얘길 꺼내는 거지?" 흐음, 파스턴 시대의 왕국이라? 그러고 보면 '이카루 성녀에게 당해서 골로 가버린 파스턴을 위한 추모곡' 이 한 때 마계에서 꽤나 유행했었다. 금지곡 이긴 했지만 아이에드 놈의 애창곡이었지. 음치 주제에 늘 꽥꽥대면서 불러대선 나와 로시엔의 밤잠을 못 이루게 만들었던 그 노래!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에? 나는 문득 들려온 작은 목소리에 놀랐다. 태연스러운 얼굴의 가윈이 보였다. "말했지? 난 음유시인이 되고 싶었다. 어렸을 때, '어떤 사람' 이 나를 위해 옛날 음유시인의 노래가 적힌 이야기를 갖다 줬는데 30년 전 정도의 노래, 특히나 '나이라' 라는 유명한 음유시인이 쓴 곡은 거의가 이카루 성녀와 파스턴에 관한 이야기였다. 음유시인에 따라 파스턴과 이카루 성녀에 대한 해석은 굉장히 다르지. 특히나, 음유시인 나이라가 쓴 곡들은 정말 독창적이다 못해 소름이 돋을 정도야." 그 말과 함께 가윈은 피식, 하고 다시 한 번 웃었다. "'이카루 성녀와 파스턴' 은 겨우 30여 년 전에 존재했어. 그런데 겨우 30여 년이 지났을 뿐인데도, 이카루 성녀를 섬기는 교단은 '파스턴이 죽은 동방' 뿐만 아니라 바로 이 곳에서도 즐비해. 이카루 성녀 이루엔을 섬기는데 가장 열심인 건 저 이카루의 마리에나 교단이라던가?" 순간 에세렌의 발끈한 표정을 본 나는 에세렌의 꼭 쥔 주먹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사실, 이카루의 마리에나 교단이 엄청나다는 것에는 나도 동의한다. 내 검을 보고 성녀의 검이라느니 하면서 달려와서 온갖 난리를 떨어댔던 녀석들이니. "'하나의 우상'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가능하지. 아무리 위대한 자라 해도 말이야. 하지만 이카루 성녀는 달라. 단 30년 만에 교단에서 떠받들 정도의 '성녀'로 추앙 받았다? 좀 이상하지 않아? 대체 왜일까?" 나는 가윈의 이야기에 바짝 정신을 집중했다. 가윈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유야 나한테도 미스터리지만." 쳇, 뭐야. 그 어이없는 대답에 잔뜩 실망한 나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마차는 달리고 달려서, 어느 덧 시간은 저녁 무렵에 근접해 있었다. 마차가 멈춰 섰다. "도착인가?" "아마도." 우리는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넓게 펼쳐진 황무지와, 그 삭막한 황무지와는 완벽하게 대조되는 푸른 산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 지금은 그저... 자고 싶을 뿐................ -------------------------------------------------------------------------------- Back : 3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4 (written by 카르민) Next : 32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2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71382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2nd February 2002 22:48:03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30-01-2002 08:43 Line : 279 Read : 1091 [34]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4 -------------------------------------------------------------------------------- -------------------------------------------------------------------------------- Ip address : 211.220.15.212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이 이상 못 가!" 레니는 버럭 고함을 치더니 갑자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나는 뭔가 어이가 없어져서 그런 레니를 돌아보았고, 레니는 그런 나를 뭐야? 라는 눈으로 올려다봄으로서 내 기분을 아주 더럽게 만들었다. 레니의 표정은 그야말로……. 불한당의 그것과 같았다. 루덴스는 그런 레니를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한 번 보더니 갑자기 오른손을 번쩍 들어 공중에서 크게 한 번 휘저었다. "모두 정지! 오늘은 여기서 쉬겠다!" "네!" 땀 뻘뻘 흘려대면서 움직이던 기사들은 모두 쉬겠다, 라는 말에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다. 불쌍한 기사들. 자기들이 아무리 힘들게 걸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왕자가 자기 약혼녀 때문에 쉬자, 라고 말했다는 걸 알면 얼마나 배신감 느낄까. 저녀석이 하는 행동은 공권력 남용의 극치야. 자기 약혼녀가 힘들어한다고 정지라니! 네 놈은 왕자 자격이 없다고! 어찌됐든 모두는 정말로 휴식을 바랬는지, 당장에 털썩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마족의 체력은 언제나 말하듯이 우습게 볼만한 것이 못 되거든. 나는 주위를 한 번 훑어보았다. 샤데린 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산은 그리 가파르진 않았지만 대신 까마득하게 높았다. 5시간 정도를 쉬지 않고 올랐는데도, 루덴스는 단호한 얼굴로 '일곱시간을 더 올라가야 해.' 라고 말해 레니의 표정을 참담하게 일그러뜨렸다. 저녁 준비를 하느라 저 너머에서 따뜻하게 모닥불이 피워지기 시작했고, 그 주위로 식사 준비를 하는 이들 모두가 둘러앉았다. 나는 그 곳에서 약간 떨어진 나무에 가서 기대 앉았다. 아아, 젠장. 어제 제대로 못 자서 그런가, 졸려 죽겠군. "어이, 이봐!" 내가 막 눈을 감으려는데, 갑자기 루덴스가 나를 향해 고함을 쳤다. 저 자식이 남 자려는데! 나는 눈을 부라리며 루덴스를 봤다가, 오늘 아침에 내가 놈을 찾아가서 귀찮게 굴었던 것을 떠올리곤 크게 부릅떴던 눈을 천천히 내리 깔았다. 하아,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의 이미지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타락했단 말인가. 내가 한숨을 쉬는데, 루덴스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여태까지 너희들에게는 말 안 했었지? 이 산에선 되도록 단독행동은 금지해 줘." "왜." 난 눈을 감으며 건성으로 물었다. 그러자 루덴스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그게 말이다. 그 변태 놈이, '내 예쁜 노리개들을 데려올 너희들을 건드리지 않도록 노력은 하겠지만, 내 귀여운 동생들은 좀 험해서 말이야. 한 뭉치로 다니도록 해. 안 그러면 나도 안전을 책임 못져.'라고 말했거든. 그리고, 저번에 장작 구하러 갔던 놈 하나가 온 몸이 갈갈이 찢겨서 죽었어. 그 꼴 안되려면 조심해야 돼." "귀여운 동생들?" 나는 루덴스의 말 중간에 나온 단어를 새삼스레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루덴스가 훗, 하고 다시 한 번 웃었다. "귀여운 동생? 아아, 그러고 보면 정말 그 악마가 마족이 맞는 것 같군. 그런 걸 동생이라고 한 걸 보면 말이야." "그게 뭔데 그래?" 루덴스는 몸을 부르르, 한 번 떤 다음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몰라. 어찌됐든, 한 뭉치로 다니지 않으면 보도 듣도 못한 이상한 놈들이 튀어나오곤 한단 말이다. 녀석이랑 만나기 전까지는 체력을 아껴둬야 하고. 조심해야 한다, 이 말이다." 「아마 그 '귀여운 동생' 이라는 것은 마물일 겁니다.」 나는 갑자기 머릿속으로 들려온 레이네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세이아나님과 레이디안님이 친하신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그 분' 때문이지만, 어찌되었든 친하신 이유 중 하나가 자기 밑의 마물들을 무척이나 아낀다는 공통점이 때문 일거예요. 세이아나님은 저를 너무너무 아껴주시는 아름다운 분이고 레이디안님 역시 자기 휘하의 마물들을 아주 아끼시는 분이죠. 정말 멋진 분들이라니까.」 나는 뭔가 불길해져서 슬그머니 질문했다. "그럼 그 레이디안이 기르는 마물도 성격이 다 너 같냐?" 「아니! 그럴 리가 없지요. 제가 너무도 조용하고 착한 것에 반해 레이디안님 휘하의 마물들은 거칠고 더럽기 짝이 없다구요!」 "……." 그래, 말을 안 하는 편이 나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바보 멍청이! 밉다, 밉다 하니까 진짜 미운 짓만 골라 하고 있네! 그런 얘길 지금 해주면 어떡해?" 나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커다란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버럭버럭 고함을 치고 있는 카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런 카민의 앞에는 쪼그리고 앉은 루덴스가 있다. "왜 화를 내고 그래?" 루덴스가 의아하다는 듯이 카민에게 물었다. 질문을 받은 카민의 얼굴을 본 나는 조금 놀랐다. 카민의 안색이 조금 나빠 보였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하얀 낫빛, 더 하얗게 변해 카민은 갑자기 발을 들어 루덴스의 어깨를 퍽퍽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이데님하고 에세렌님이 아까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고!" "뭐야?" 나는 깜짝 놀라 기대있던 나무에서 벌떡 일어나 카민을 보았다. "대체 어디로 갔는데?" 카민이 고개를 저으면서 크게 소리 쳤다. "나도 몰라! 어찌됐든 여기 내린 직후부터 보이지 않았다고!" "그 이데라는 사람은 누님과 함께 갔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와 돌아보니, 손목을 속박한 줄로 마차에 꽁꽁 묶여 있는 가윈이 보였다. 아아, 저 태평스러운 얼굴을 보니 또 화가 난다! "누님? 세라와 함께 갔단 말야?" "그래. 누님이 주위를 죽 훑어보더니 '그래도 당신이 제일 팔 힘이 세 보이는군', 이라고 말하곤 데려가 버렸어. 아무래도 내 생각엔 장작을 패러 간 것 같은데?" 놀라운 일이군. '그' 라이메데스가 순순히 세라를 따라 갔다니. 어찌됐든, 라이메데스 녀석은 걱정해 줄 필요도 없지. 아마 마물들은 라이메데스 녀석 주위에 얼쩡거리지도 못할 거다. "그럼 그 둘은 상관없어." 내 대답에 루덴스가 눈을 부릅뜨며 고함을 쳤다. "무슨 말이야? 물론 세라는 강해! 하지만 아무리 강하다 해도 혼자서……." "아아, 됐어! 이데 놈이 함께 갔으니까." 내 말에 루덴스가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놈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잠시 나를 보다가 어느 순간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렇군! 그 녀석, 나를 아주 잘 때렸지. 팔 힘 하나는 장난 아니라고 나도 느꼈긴 했어. 하지만 그래도……." "아아, 됐다 잖아! 여기 있는 놈들이 모조리 덤벼도 그 놈은 못 이겨! 됐냐?" "에?" 루덴스는 또 다시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으나, 내가 담담하게 마주 봐주자 곧 그 표정을 풀면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에세렌은?" 나는 가윈을 보았다. 가윈은 고개를 저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일일이 물어봤지만, 에세렌이 어디로 갔는지 안다는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같이 간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그냥 사라진 건가?" 이런 젠장할! 그 꺼벙한 신관 놈이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제 멋대로 나가 버린 거야? "내가 찾아볼까?" 카민이 조금 걱정스러운 말투로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됐어! 내가 간다." "에?" "너보단 내가 나아." 난 그렇게 말하며 일어섰다. 일단 마물이라면, 내가 비록 반쪽이라곤 해도 마족이라는 것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그럴 리 없겠지만, 무지막지하게 강한 마물이 있어서 힘에 부칠 경우엔 레이네를 불러내면 되는 거고. 같은 마물이니 말이 통하겠지, 뭐. 나는 가뿐하게 주위를 한 번 돌아본 후, 그 사이비 신관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녀석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쳇, 하고 낮게 중얼거린 후 다시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걱정을 담은 시선들이 쏟아졌지만 뭐, 그따위 건 내게 문제도 아니었다. 나는 일단 오른쪽 숲 길로 움직였다. ************** 「왼쪽입니다!」 "젠장!" 레이네의 경고성이 들려옴과 동시에 재빨리 옆으로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면, 놈의 그 날카로운 발톱에 내 아름다운 허리가 부러졌을 지도 모르는 일!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내 검이 공중에 잔광을 뿌렸다. 나는 내 왼쪽에서 급습해 들어온 녀석의 뒤를 노려 들어가, 단 숨에 위에서 아래로 검을 휘둘렀다. 좌악, 하는 소리와 함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심장이 펄떡거리고 있던 존재의 몸뚱이가 두 동강났다. 역하게 번지는 피비린내가 순식간에 주위를 뒤덮었고, 그 지독한 악취와 함께 놈의 몸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피가 내 온 몸으로 튀었다. "젠장, 젠장! 레이네! 저 녀석들 네가 어떻게 좀 할 수 없는 거냐?" 「고, 곤란해요. 저는 세이아나님의 '애증'에서 태어난 마물입니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탐욕'에서 태어난 마물이라구요. 종족이 달라요!」 "어찌됐든 같은 마물이잖아!" 쉬이이익! 다시 한 번 휘두른 켐 알슈타드의 끝에서 은색 빛이 흔들리고 있다. 빌어먹을, 이게 무슨 꼴이람! 에세렌을 찾는답시고 몸을 움직이기가 무섭게, 정말이지 딱 5분 정도 걸었을 뿐인데 이 기괴하게 생긴 마물들이 나타났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이 마물들을 보면서 나는 정말이지 할 말을 잃었다. 탄생시킨 마물을 보면, 그 마족의 정신상태를 알 수 있다는 로시엔의 말이 딱 맞는 것 같군. 이 마물들 생긴 걸 보니, 분명 그 레이디안이라는 마족 제정신이 아니야! 그래, 세이아나와 친구라는데 오죽 하겠어! 「꽤액! 같은 마물이라니요! 불쾌해요, 불쾌하다구요! 애증은 그래도 사랑이라는 토대 아래 태어난 감정이지만, 탐욕은 달라요! 저와 이런 것들을 비교하지 말아줘요!」 "시끄러워!" 북실북실난 갈색 털에 키는 적어도 300 세리하 쯤, 가슴 중앙에 붉은 눈! 그리고 여섯 개도, 여덟 개도 아닌 일곱 개의 팔. 그것이 내 앞으로 지치지도 않고 꾸역꾸역 몰려드는 마물들의 모습이었다.정말이지, 아주 오랜 옛날 세이아나의 집에서 보았던 레이네의 본 모습(발톱으로 과일 깎아 먹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레이네의 본체!)을 아리땁다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로, 놈들의 외모는 심각했다. "흐아아압!" 정말 나로서는 베고, 베고 또 베고 있는데도 전혀 수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검이 한 번 흔들릴 때마다 양 사방으로 터지는 녀석들의 몸과, 그 갈라진 몸 틈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역한 피비린내가 여린 감성을 자랑하는 내 비위를 엉망으로 만든다. 정말 성질 나서 미칠 것 같군! 못 해먹겠다, 젠장! 내가 온 몸을 이용해서 발악을 해대는데도 전혀 줄어들지 않는데, 이런 놈들한테 에세렌같이 꺼벙한 녀석이 걸렸다면 당연히 그 자리에서 죽는 거다. 「그 신관요, 절대로 무사하지 않을 것 같죠?」 "아아, 젠장! 시끄러워!" 「으음, 신성력이라도 쓴다면 모를까. 아아, 그러고 보면 탐욕에서 태어난 마물들은 육체적 인 데미지만 받고 신성력에 의한 공격으론 상처를 입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닥치라고 했다!" 이 놈의 마물은 아예 작정을 하고 내 속을 긁고 있었다. 피 냄새는 아무리 맡아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내가 베고 있는 이 것들과 나는 종족도 다르고, 모습도 다르다. 게다가 이것들이 나보다 하등 하다는 데에는 그 어떤 오류도 없는 진실. 분명, 마물이라는 것은 마족의 감정에 따라 태어나고 소멸하는 것들이니, 마족에게 종속되어 있는 게 분명할지도 모른다. 난 마물 따위를 만들 수 있을 만큼 마력이 넘쳐 끓어오르는 각성 마족은 아니라서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어찌됐든 배운 대로라면 분명, 마물은 내 손에 죽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런 존재인 거다. 하지만 역시 너무 불쾌하다고! 내가 완전한 인간이었다면, 이런 느낌은 받지 않았겠지? 단지 자신들에게 피해를 주면 가차없이 '적' 이라고 구분 지어 버리는 것이 인간들이니까. 그리고 완전한 마족이었다면 인정사정 보지 않고 그냥 한 번에 베어버렸겠지. 하지만 난 마족이기도 하고 인간이기도 하지만 마족이 아니기도 하고 인간이 아니기도 해. 젠장, 모르겠단 말이다! 분명한 건 지금 검을 휘두르면서도 소름끼칠만큼 불쾌하다는 것! 정말로 불쾌해서 참을 수가 없다! "으아아아!" 한참을 베고 또 베어서, 대체 몇 명을 베어 넘겼는지 세는 것조차 잊어 버릴 때가 되어서야 녀석들의 수가 줄어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신 없이 날아오는 일곱 개의 손에 달린 손톱들, 총 35개일 그 손톱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나를 찔러 들어온다. "키에!"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날카로운 발톱이 날아들었다. 나는 그 발톱을 검으로 막고는 왼손으로 양손에 마력을 모았다. 펑! 작은 소리와 함께 마력이 정통으로 마물의 머리에 맞았다. 푸악, 하는 소리와 함께 뇌수가튀어 오른다. 나는 다시 뒤로 펄쩍 뛰어 나간 다음, 검을 크게 한 번 휘둘렀다. 그래도 베는 족족 베어지는 걸 보면 이 녀석들은 하급 마물인 것 같다. 솜씨 좋은 기사 정도만 되어도 이 정도는 너끈하게 벨 수는 있겠지. 하지만 수가 너무 많다. 사이비 신관 녀석, 무사할까? 나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뾰족한 검날이 놈들의 몸을 산산이 헤집는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튀는 피가 입 안으로 들어오는 것만을 절대 싫기 때문에, 아주 꾸욱 깨물었다. "쿠아아아!" 귀를 막고 싶다! 휘둘러지는 검과 마력탄이 정신 없이 날아가 놈들의 몸에 가 박혔다. 나는 몇 번이고 몇 번고 놈들을 찌르면서 앞으로 전진했다. 온 몸에 피가 튀었다. 검은 옷 위로 찬찬히 물들여 나간 마물들의 피냄새는 역했다. "후우, 후우." 발광하듯 휘두르던 켐 알슈타드를 허리춤으로 돌려놓은 것은, 거의 두 시간 가까이나 녀석들을 벤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 「더러워요. 엄청, 무지막지, 너무너무! 진짜 상상을 초월해서 더러워요!」 "……넌 꼭 그렇게 날 긁어야 속이 시원하냐?" 「하지만 피범벅이잖아요!」 아아, 제발 이 마물 좀 누가 데려가. 돈 같은 거 안 받고 그냥 넘길 테니까. "조용히 좀 해!" 「피범벅, 피범벅!」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내 검을 내려다보았다. 빤히 바라보니 그래도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놈은 곧 조용해졌다. 나는 신경을 집중하고 인기척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찾으려는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고 바람 소리와 물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왼 쪽인가? 물소리가 들려오는 곳이. 나는 멀리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철퍽, 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내 몸을 한 번 훑어보았다. 아무래도 이런 꼴로 돌아다니고 싶진 않군. "물 소리가 나는데, 저 쪽으로 가볼까." 「엑? 목욕하시게요? 그 신관은 안 찾고?」 "저 쪽에 가서 찾아도 되잖아. 그리고 아주 빨리 옷만 헹구고 올 거야." 「꺄아아악! 그치만 숙녀 앞에서 목욕을 하려고 하다니, 칼레들린님은 신사가 아니예요!」 하아, 이 마물이 방정 떠는 거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지만 정말이지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안 되는 건 할 수 없군. "너 정말 그러고 싶냐?" 「네.」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나는 투덜거리면서 발을 움직였다. 옷에 묻은 피 냄새가 걷는 내도록 신경에 거슬렸다. 나는 나무와 풀을 살짝 옆으로 치우면서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나는 물의 근원지 앞에 설 수 있었다. 호수. 어찌 보면 남색 같기도, 또 어찌 보면 짙은 녹색 같기도 한 그것은 매우 맑았다. 꽤 만족스러운데? 천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해서 그런지 조금은 음습한 기운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하얀 구름 사이로 조금씩 빛을 뿌리는 달빛이 있어 주위는 무척이나 밝다. 언제나 말하는 거지만, 가뜩이나 센티멘털한 나를 극에 극까지 몰고 가 결국엔 센티의 벼랑 끝으로 밀어버리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저 달이다. 나는 저 달을 볼 때마다 지나치게 센티해진다. 나는 구름 사이로 숨어버린 달을 한참동안 보고 있다가, 호수 안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호수의 푸른색이 내 시야를 채운 순간이었다. "……에세렌?" -------------------------------------------- 메일보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_< 곧 답멜 보낼게요. 그리고 레모나 너무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은 것 같습니다=_= -------------------------------------------------------------------------------- Back : 3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5 (written by 카르민) Next : 33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3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71382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2nd February 2002 22:48:07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30-01-2002 08:49 Line : 273 Read : 1463 [35]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5 -------------------------------------------------------------------------------- -------------------------------------------------------------------------------- Ip address : 211.220.15.212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아니, 이 거 이상한데?" 이 챕터를 읽고 당신은 이렇게 외칠겁니다. "에세렌이 이네아 족이라는 건 이미 칼레들린이 알고 있었잖아!" 라고 외치고 계실 당신. 당신은 아마도 <반마족 카인> 3권을 보시지 않은 분일 겁니다-_-;; 책에서는 조금 바뀌었습니다. 칼레들린은…… 모르는 걸로 되어 있어요오오-_-;; 통신으로만 읽으시는 분들께는 일단 죄송하지만;; 그, 그런 것입니다. 칼레들린은 모르고 있었어요!! (도망간다) ---------------------------------------------------------------------------------- 그것은 정말로 의외의 일이었다. 설마, 라고 생각했는데 호수의 저 끄트머리쯤에 청록색의 머리카락이 보인 것이다. 달빛을 받아서 은은한 빛을 내는 호숫가에 서 있는 녀석의 모습은 마족인 내 눈에 아주 뚜렷이 보인다. 달빛을 받아 그림자가 드리워진 하얀 살결 위로 청록빛의 머리칼이 나풀거리고 있다. 커다란 하늘색의 눈동자가 보인다. "칼레들린님?" 기껏해야 무릎까지 밖에 오지 않는 얕은 곳에서 살짝 허리를 숙이고 있던 에세렌이 내 호명에 고개를 반짝 들었다. 순간, 무릎 위로 드러난 녀석의 온 몸이 그대로 눈 안에 들어왔다. 내 동공이 크게 확장된다고, 나는 그 순간 생각했다. 내 눈동자가 크게 한 번 커지는 것을 보았는지 에세렌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재빨리 호수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하얗게 드러난 에세렌의 등을 가리우는 청록색의 머리카락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나는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한참동안 꼼짝도 하지 못하고,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뒤돌아 선 에세렌의 등이 떨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그리고, 방금 전에 본 그건? 나는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내가……. 잘못 본 거냐?" 내 질문에 에세렌은 한참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요즘 좀 피곤했어. 그래서 내가…… 좀 잘못 본 거냐?" 레이네마저 숨을 죽이는 가운데, 무거운 침묵이 호숫가를 둘러쌌다. 나는 저 멀리에 녀석이 벗어놓은 법복을 물끄러미 보았다. 나처럼 마물의 피를 뒤집어 썼었는지, 하얀 색이었던 그 법복은 붉은 빛을 띄고 있었다. 나는 그 법복을 뚫어져라 바라봄으로서 패닉 상태에 돌입하려는 정신을 추스르려고 했다. "잘못 보신 것이 아닙니다, 칼레들린님." 갑자기 들려온 그 목소리에 나는 움찔했다. 등 쪽을 보이고 섰던 녀석이 살짝 몸을 옆으로 틀었다. 찰랑, 하는 물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온다. 에세렌은 하늘색 눈으로 내 쪽을 보고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보셨으니 이제 더 이상 숨기는 건 무리겠군요." 나는 정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내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분명. "예, 전 이네아 족입니다." *********************** 이네아족. 무성족(無性族) 이네아? 나는 잠시 혼란스러운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래, 로시엔이 서재에서 읽은 적이 있다. 라디아나족에 대한 설명이 빼곡이 들어차 있던 책꽂이 바로 맞은 편에 수북히 쌓여 있던 이네아에 대한 기록들을. 정신적인 면에서는 보통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소수 종족, 이네아. 잡티라곤 없는 새하얀 살결을 비롯,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품위와 매력적인 자태를 과시하는 것이 이네아들의 특징이라고 했다. 특이한 것은, 그들이 타 종족과 완벽하게 대비되는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성(性)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 것.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성별에 따라 자신의 성을 결정한다. 20세 이전에 만난 '사랑하는 사람' 에 따라, 그들은 성별을 결정하는 것이다. 만약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면 여성으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면 남성으로 변하는 것이 바로 이 특이한 종족, 이네아다. 그들은 13세가 되면 성(性)의 결정을 위해 다른 거주지로 옮기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일정한 형태의 학교 같은 곳에서 교육을 받는다. 그럼으로써 자연스러운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사랑을 해서 20세에 자신의 성을 명확하게 결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정확히 20세가 되는 날 새벽, 모종의 의식을 통해 완전한 성을 가진다고 했다. 그러나 20세의 생일 이전에 상대를 찾지 못하면 중성인 상태로 몇 주간을 앓다가 돌연사 한다고 했던가? 너무나 특이하고 이질적인 이 종족성을 일컬어, 어떤 측에서는 '신의 저주' 라 일컫고 어떤 쪽에서는 '신의 축복' 이라고 말하는데, 이네아의 대부분은 자신이 타고난 운명을 저주한다고 들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20세 이전의 그들의 삶이 고통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왜 숨겼어?" 나는 입술을 찬찬히 움직여 말했다. 저 녀석이? 저녀석이, 다른 이도 아니고 바로 저 녀석이 그 이네아였다고? 내 쪽을 보는 에세렌의 하얀 얼굴이 조금씩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그래, 그러고보면 그 이름. 에세렌 '이네아스' 라는 이름도! 왜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까? 마리에나 신전에서 저 녀석이 읊은 그 이상한 신성주문은……. 이네아 어 였다! 어째서? 왜 여태까지 말하지 않았지? "힘듭니다." 내 질문에, 에세렌이 자그맣게 말했다. 나는 그 갑작스러운 말에 깜짝 놀라서 녀석을 보았다. 에세렌은 후, 하고 낮은 한숨을 내쉰 후 다시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주 많이 힘들었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네아 족은 대대로 '신성을 타고나는 존재' 가 많아요. 글세요, 한 편에선 신의 축복이라고 일컬어지는 종족이 이네아기도 하니까." 에세렌은 길게 한 번 웃었다. "제가 태어났을 때, 족장님이 예언을 하셨다는군요. '이 아이는 신성을 타고난 존재다. 그것도 여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엄청난 신성을!' 이라고 말입니다. 솔직히, 어렸을 때는 제가 신성을 타고 난 존재라고 불리거나 제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게 싫었습니다. 그래서…… 방탕한 생활을 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가끔가다 제가 해대는 이상한 행동은 그 시절에 쌓인 걸지도 모릅니다." 에세렌은 잠시 숨을 골랐다. "하지만 13세 때 제가 미트리안을 떠나 들어간 곳은 결국 교단이었습니다. 이네아들의 고향이자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섬, 미트리안. 그 곳에서 지낸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떠난 후에야 알았습니다. 인간세계에 들어와 저는 몇 번이고 좌절했어요!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멸시 당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구요!" 왠지 가슴이 아파. 뭐야, 이건? 묘한 동질감인가. 마족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나와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너. 뭐냐, 울컥거리는 이 마음은. "다른 곳도 아닌 교단이 그런데, 보통 인간들은 어떨까요? 이따위……." 에세렌은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이따위 몸을 가진 저를 좋아해 줄 사람은 없어요! 당신이나 카민님, 이데님한테 만큼은 그런 모멸찬 대접을 받기 싫었습니다! 남들 보는 앞에서는 가식적인 미소로 위하지만, 뒤에서는 있는 말 없는 말 다 지어내 저를 상처 입힌 그 사람들에게 받았던 그 고통을, 당신들한테는 받고 싶지 않았어요! 그대로의 저를 봐주길 바랬다구요!" 나는 말 없이 녀석을 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에세렌은 고개를 떨궜다. 나는 그런 녀석을 한참 보다가, 어느 순간 입술을 열었다. "너." 에세렌은 내 부름 아닌 부름에 멈칫하며 고개를 반쯤 들었다. "만약에 내가, 인간이 아니라면 어쩔 거야?" "예?" 에세렌은 놀란 듯 눈을 부릅뜨고 내 쪽을 보았다. 나는 삐딱한 시선으로 에세렌을 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마족이나 라디아나 같은 종족이면 어쩔 거냐고." 내 질문에 에세렌의 표정이 더더욱 이상하게 변했다. "당신은……. 인간이십니다." 그건 그렇지. 반 쪽만 말이야. "사설 달지 말고. 넌 나를 따라 오겠다고 했어. 그런데 내가 만약 그런 마족이나 라디아나면 어쩔 거냐?" 에세렌은 잠시 망설였다. 한참동안 머뭇거리던 녀석은 내가 짜증스러워질 정도로 오랜 시간을 고민하다가 어느 순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인간이고, 당신이 하시는 말은 어디까지나 '가정' 일 뿐이니까. 하지만……." 에세렌은 말을 끊고 나를 힐끔 보았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당신이 만약 정말로……. 제가 죽도록 싫어하는 마족이라 할지라도." 뭔가 순간 가슴이 뜨끔해진 나는 험험, 하고 낮게 헛기침을 했다. 나는 계속해서 흔들리는 에세렌의 눈을 보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난 별로 널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내가 마족이나 라디아나라도 상관하지 않고 네가 따라오겠다고 말한다면."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네가 이네아든 천사든 인간이든 뭐든 상관하지 않겠어." ****************** 「멋있어요, 칼레들린님! 저 감동했어요.」 이 놈의 마물! 왜 가만히 있나 했다! 나는 옷을 입는 에세렌 쪽을 보지 않으려고 뒤쪽으로 섰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한참이나 들려왔고, 머뭇 머뭇대는 발걸음 소리가 뒤를 이었다. "아아, 젠장! 빨리 좀 해!" "아, 예! 예." 에세렌은 깜짝 놀란 듯 얼른 달려와 내 옆에 섰다. 나는 쳇, 하고 중얼거린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한참 멍하게 서 있던 에세렌은 어느 순간 부다다 달려와 다시 내 옆에 섰다. 나는 주춤주춤 내 눈치를 살피는 에세렌을 힐끗 보았다. "넌 왜 갑자기 호수에서 목욕을 하고 난리야?" "아, 아뇨. 사실은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무리에서 빠졌다가. 이상한 것들을 만났어요. 싸우다보니 피에 젖어 버려서." 에세렌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 녀석, 여전히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본다. "피에 젖어?" "예? 예. 순수한 신성력이 통하지 않아서 육체적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신성을 동원하다보니 피에 젖었습니다. ……저, 저어. 칼레들린님도 젖으신 것 같은데." "그래. 너 찾으러 왔다가 나도 이 꼴 됐다, 왜!" 에세렌은 순간 고개를 푹 떨궜다. "저, 저기. 아, 안 씻어도 되나요?" "됐어. 씻긴 뭘 씻어." 나는 다시 발을 옮겼다. 아까 내가 깨끗이 청소를 해놔서 그런지 더 이상 이상한 놈들이 설치거나 하는 일은 없다. 아아, 정말 다행이군. 피 냄새 풀풀 나는 이 옷 입고 다시 한 번 그 놈들이랑 싸우는 바에야 차라리 미소년임을 포기하고 말겠다. "비밀로 해줄까, 말할까?" 나는 한 발작을 앞으로 내밀면서 내던지듯 말했다. 그러자 에세렌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말씀……. 하셔도 좋습니다." "그래?" 나는 에세렌을 힐끗 보았다. 뭔가 마음이 복잡한 듯, 녀석의 얼굴은 상당히 어두워 보였다. 나는 연신 한숨을 쉬어 대는 에세렌을 향해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 많이 힘들었냐?" 에세렌이 갑자기 멈추어 섰다. 그렇다고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거의 직감적으로, 내 뒤를 따르던 에세렌이 울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에세렌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에세렌은 고개를 푹 숙이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잠시 녀석을 보고 섰다가, 아무 말 없이 녀석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었다. 그다지 잘난 척 하고 싶다거나 위로하고 싶다거나 하는 기분이 든 건 아니었다. 다만, 내 기분이 그렇게 하길 원했고, 내 손이 그렇게 하길 원했다. 내가 어깨를 두 어 번 두드리자 에세렌의 어깨가 잠시 떨렸다. 내가 막 그 어깨에서 손을 떼고 앞으로 움직이려는데, 갑작스럽게 말소리가 들려왔다. "힘들었습니다." 넋두리하듯, 녀석이 말을 이었다. "정말…… 로요. 어떨 때는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그 날 그렇게 막무가내로 칼레들린님을 따라 왔던 데에는, 그 신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일조 했을 겁니다. 왜 나는 이런 몸으로 태어난 겁니까? 라고 마리에나님께 묻는 데에도 지쳐있었으니까. 억울했어요. 괜히, 괜히 말이죠. 몇 년만 참고 기다리면 돼, 라고 스스로에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전 문득 두려워 졌습니다." 에세렌이 고개를 떨궜다. "사랑하는 사람 따위 생기지 않았어. 이 신전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 따윌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럼, 난 이제 죽는 걸까? 그래, 아마도 죽는 거겠지! '의식'을 치를 수도 없을 거다. 무성인 상태로, 이 이상한 몸으로 몇 일을 앓다 죽겠지, 라는 생각이 들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교단을 떠나고 싶어서, 여행을 택했습니다. 마침 교단에서 주목하고 있던 '신비한 힘을 받은 유키아 네크로나'를 쫓아야 하는 사제를 구한다는 말을 나왔고, 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지원했습니다." 에세렌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애써 쫓아다니던 유키아 네크로나는 실종되고……. 제 여행은 막을 내렸습니다. 이젠 1년도 채 남지 않았는데, 아무리 여행을 해도 사랑하는 사람 따위 찾지 못했는데! 전 다시 두려워졌어요. 그런데… 유키아 네크로나가 사라진 자리에 당신과 카민님이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쩌면 제 욕심을 채우고 싶어서 당신에게 같이 가겠다고 떼를 쓴 건지도 모릅니다." "에세렌."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않고 계속해서 말하는 에세렌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아주 침착하고 조용하게 말했다. 에세렌이 말을 멈추었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된다. 나 그런 거 싫어하지 않아." "예? ……아, 예." 에세렌은 뒤통수를 슬슬 긁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서야 이 녀석이 확실히 에세렌 이네아스가 맞군, 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녀석이 너무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뭔가 딴 녀석인 것 같고 말이야. "제 이름, 에세렌 말입니다." 에세렌이 작게 입을 열었다. "원래 이네아들은 이름을 가질 때, 많이 신경을 씁니다. 남자가 되어도, 여자가 되어도 사용할 수 있는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서 부모는 애를 쓰죠. 기본적으로 이네아와 인간이 맺어질 경우 이네아가 태어날 경우는 50%라고 하죠... 저에게도 피비안이 하나 있어요." "피비안?" "아아, 예. 익숙하지 않은 언어지요? 죄송합니다. 저와는 달리 완전한 성을 타고난 여자 형제. 한 쪽은 이네아고, 한 쪽이 인간이면 서로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잖아요? 그래서 이네아들은 여자 형제를 피비안으로 부릅니다. 남자 형제는 리비안이예요." 흐음, 그런 것까지는 몰랐는데. "제 피비안의 이름은 안나. 언젠가 안나가 말해주더군요. '네가 여자가 되면 세렌이라는 이름을 쓰고, 남자가 되면 에렌이라는 이름을 써' 라고. 그 때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아, 내가 안나와는 다르구나.' 라는 것을." 에세렌은 가만히 멈춰 서서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에렌과 세렌이라. 둘 다 꽤나 괜찮은 이름이군. 뭐, 칼레들린보다야 못하지만." 에세렌은 내 말에 가볍게 한 번 웃었다. 에세렌은 느리게 발걸음을 멈추더니, 천천히 두 손을 모았다. 눈을 꼭 감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걸 보니 기도를 하는 모양이다. 으으, 어찌됐든 난 기도는 질색이다! 인상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움직이는데, 에세렌이 뒤에서 중얼거리는 자그마한 기도소리가 문득 귀에 들어왔다. "당신에게…… 마리에나 님의 영원한 축복이 깃들기를……." 아주 먼 훗날에야, 나는 알게 된다. 이 날, 에세렌이 했던 기도의 의미를. ---------------------------------------------------------------------- 배고파요..;_; -------------------------------------------------------------------------------- Back : 3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6 (written by 카르민) Next : 3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4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71382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2nd February 2002 22:48:11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1-02-2002 03:48 Line : 302 Read : 997 [36]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6 -------------------------------------------------------------------------------- -------------------------------------------------------------------------------- Ip address : 211.220.164.12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제 24장: 변태마족 레이디안>> "여기라고?" 나는 주위를 휘휘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루덴스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이 안이다. 그럼 난 먼저 앞에 나가고 있을 테니까, 넌 천천히 와."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 후 다시 앞을 빤히 보았다. 내 키의 일곱 배는 넘을 것 같은 엄청난 크기의 동굴입구가 떡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 끝이 없을 것처럼 깊어 보이는 그 검은 구멍을 보고 있자니 왠지 소름이 돋아서 나는 잠시 팔뚝을 긁었다. 동굴 밖은 매우 황량했다. 바짝 말라비틀어진 풀이 모래바람에 의해 엉망진창으로 유린당하는 모습만이 있을 뿐,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꽃이나 풀잎 같은 건 찾으려 해도 찾아 볼 수가 없다. 루덴스는 맨 선두로 나서려는지 발을 옮겼다. 그런데 녀석은 움직이려다 말고, 갑자기 멈칫하더니 자리에 멈춰섰다. 녀석은 씨익 웃는 얼굴로 돌아보더니 카민을 향해 말했다. "너도 잘 해 달라고, 카민." "……죽일 놈." 내 옆에 서 있던 카민이 이빨을 부득 갈았다. 후후후훗. 그래, 결국엔 그렇게 된 것이다. 카민놈도 나와 같은 제물 대역의 입장이 되고 만 거다. 나한테 하자고 하자고 그 난리를 치더니, 지금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심히 궁금해지는군 그래. "너 정말 죽여버릴거다! 크아아아악!" 카민은 끝도 없이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그런 카민의 손은 질긴 줄로 포박되어 있었다. 뭐, 내 손도 그건 마찬가지. 나와 카민을 비롯해 감옥에서 한 번씩 얼굴을 보았던 녀석들의 손 역시 줄이 묶여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완벽한 연기를 위해서 이런 것쯤은 해야 한다고 루덴스 놈이 바락바락 우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손을 묶는 걸 허락하긴 했다만, 역시 불쾌한 건 어쩔 수가 없군. 나는 힐끗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앞서 나가고 있는 에세렌과 라이메데스를 보았다. 에세렌이 라이메데스에게 뭔가 이야기를 시키고 있는 것 같은데 역시 분위기가 안 좋은 걸로 봐서 라이메데스 녀석이 모조리 다 무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자신의 정체를 들킨 것에 대한 걱정으로 내내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던 에세렌은 녀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마자 박장대소를 터뜨려 나도 웃어 버렸다. 에세렌은 세라와 함께 장작을 해 가지고 들고 돌아온 라이메데스 모습을 보면서 안 어울린다며 한참을 낄낄거렸는데, 그 웃음의 대가로 라이메데스가 던진 장작에 맞고 엎드려야 했다. 나중에 녀석이 징징대며 하는 말을 들어보니 머리에 주먹만한 혹이 났다나 어쨌다나. "야. 이 녀석, 이네아다." 나는 카민과 라이메데스를 조용히 불러 다짜고짜 그렇게 한마디했다. 라이메데스는 내가 그렇게 말을 하자마자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엥? 그래서라니? 그냥 그렇다고." 녀석의 그 쌀쌀맞은 태도(속 좁은 자식, 자기 보고 웃었다고 삐진 게 분명하다.)에 놀란 내가 흠칫거리며 대답하자 녀석은 흥,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리고 가 버렸다. "나 그 놈한테 관심 없으니까. 그 놈이 뭐든 나와는 상관 없어." 라이메데스가 그렇게 가 버리자 나는 뭔가 김이 빠져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버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튀어나온 카민의 질문에 비하면 라이메데스는 무척이나 점잖고 예의 바른 편이었다. "엥? 이네아가 뭔데?" "……." 나는 그때부터 약 두 시간에 걸쳐서 이네아가 어떤 존재인지 카민에게 가르켜 주었고(이 놈은 돌머리냐! 대체 몇 번을 설명해도 못 알아듣다니!) 한참만에야 이해한 듯 카민은 호오,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나서 한다는 소리도 또한 가관이었지. "오, 그거 멋있군!" 멋있군? 멋있군이라고? 지금 그 말이 왜 나오는 거냐! 조금 놀란다거나 그럴 수가! 그럼 왜 여태까지 우리에게 말 안 했지? 같은 말이 나와야 하는 거 아냐?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천천히 질문했다. "그, 그게 다냐? 멋있다, 라는 말로 다야?" 내 질문에 카민은 눈을 새초롬하게 뜨며 반박하듯 말했다. "그럼 또 뭐라고 해야 되는데?" "……."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생각해봤자 나만 답답하지. 가끔씩은 뇌가 이상한 인간도 존재하는 법이다. "후우."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그 순간, 앞부분에 있는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행진은 그리 느리지 않게 진행되었다. 나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뭔가 찜찜하게 느껴져서 한참동안 망설였다. 험험! 말해두는데, 절대로 무서워서 그랬던 건 아니다. "우와!" 에?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갑자기 앞에서 들려온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런데 시력을 극대화해서 선두가 들어간 곳을 본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칼? 왜 그래?" "아무 것도." 그러나 말과는 달리 나는 깜짝 놀란 차였다. 무리가 좀 더 빨리 걷기 시작했고, 이윽고 우리 주변에서도 탄성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우와! 이게 뭐야?" 카민 녀석도 놀란 듯 소리를 질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동굴 안이 너무나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그 풍경들은, 모두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높이가 몇 세리하인지 헤아릴 수도 없을 것 같은 커다란 나무의 잎새들이 길게 뻗어져 올라 있고, 오색찬란한 빛의 꽃들이 빼곡이 차 올라 있다. 가느다란 솜털 같은 것이 하늘에서부터 뻗어져 나와 그 아름다운 공간을 채운다. 심지어는 발 밑에 채이는 돌 조각조차 아름다웠다. 걷다가 신발에 걸리는 것이 있어 땅을 내려다 본 순간 발견한 것이 손톱 만한 자수정이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대단하다!" 잔뜩 군기를 다지고 들어온 기사들이 웅성거렸을 정도니, 나머지 사람들은 말할 필요조차 없지 않은가? "예뻐!" "세상에나!" 동굴 바깥의 그 황량한 공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름다운 공간에 나는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행진이 느려졌다. 발걸음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걸 보니, 다들 멈춰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모양이군. 그런데. "반가워요!" 우리 모두가 웅성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있을 때, 저 끝 쪽에서 맑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지만 또렷하게 들리는 그 목소리에, 주변을 살피던 모두의 순식간에 그 곳으로 돌아섰다. 소리가 들린 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주변을 돌아보면서 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려 했다. "칼! 저기야!" 카민이 갑자기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나는 얼른 카민이 가리키는 방향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 순간 몇 백 세리하는 돼 보이는 커다란 나무 위에 걸터앉아 있는 한 인영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헉!" 짧은 신음성이 한 번씩 주위를 감싸고 돌았다. 나는 까마득하게 높아 보이는 나무 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있는 인영을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크게 떴다. 순간, 작게 보이던 그 인영의 모습이 또렷해졌다.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것은 작은 소녀였다. 그 소녀는 목선 정도까지 오는 단정한 은회색의 머리카락을 나풀대며 웃고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그 소녀가 입고 있는 옷이었다. 검은색 바탕의 수수한 치마와 역시 같은 빛의 웃옷 위에, 가볍게 두른 흰 색 에이프런. 얼핏 봐도 '시녀' 라는 분위기가 물씬 나는 것 같다. "저게 레이디안입니까?" 저 멀리 있던 세라가 옆에 있는 루덴스에게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루덴스는 가볍게 부정했다. "아냐. 저것보다 훨씬 아름…… 우갸갸갸!" 무서운 레니 녀석. 기사들도 다 보고 있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꼬집어 버리다니! "아, 아니다, 세라. 저렇게 어리고 순진하게 생기지 않았다고. 그리고 말했잖아! 레이디안은 남……." 루덴스가 막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그 까마득할 정도로 높은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소녀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앙! 저는 디안이라고 해요. 저의 주인님이 보내셨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 소녀는 발딱 일어섰다. 그 높은 나무 위에서, 그 어떤 안전장치도 없이 폴짝 뛰어 올랐다가 나무 위에 도로 착지하는 소녀의 행동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소녀는 가볍게 허리를 굽히며 꽤나 정중하게 우리를 향해 인사했다. "어째서 직접 오지 않고? 원래는 직접 맞이했지 않나?" 루덴스가 자신을 디안이라 소개한 그 소녀를 향해 고함을 쳤다. 그러자 디안이 환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주인님께서는 '오늘은 너무 사람이 많으니 나오기 싫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뭐야? 다시 무리가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가운데, 나는 뒤돌아 서 있는 루덴스의 뒤통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보지 않아도 저 녀석의 표정이 어떻게 일그러져 있는지는 환하다. 루덴스는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번쩍 들더니 소녀를 향해 소리를 쳤다. "너의 주인에게 할 말이 있다!" 루덴스의 그 말에 디안이 얼굴에 작은 미소를 띄운 채로 살랑살랑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은 만나기 싫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나오기 싫었는걸요? 저기에 있는 저 기사 오빠들은 모두 82분이나 되는 데다가, 마법사님들도 일곱 분이나 되잖아요. 예쁜 오빠들을 데려오기엔 너무 많은 인원이예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디안이 말했다. 나는 순간 '으으, 간파당했군'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한 번 루덴스의 뒤통수를 보았다. 하긴, 여태까지 단촐한 인원으로 다니다가 갑자기 이런 대인원이 움직이면 긴장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나 같아도 안 나오겠다. 루덴스가 대꾸를 못하고 있는 가운데, 디안이 자신의 에이프런에 촘촘히 박혀 들어간 레이스를 만지작거리며 장난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그럼, 이제부터 제 주인님의 말씀을 전할게요." 디안은 가늘게 눈을 뜨더니 생긋, 하고 웃었다. "'기회를 줄 테니 죽고 싶지 않으면 제물만 남기고 돌아가' 라고 하셨어요." "뭐…!!" 다시 한 번 무리 전체가 흔들렸다. 나는 미간을 천천히 좁히고 나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흐음. 역시나 그 놈,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모른다면 그게 더 바보지만. "만약에 돌아가지 않으면……." 디안은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미소년들만 남기고 모두 죽어∼ 라는 말도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그 날로 크레티아는 붕괴, 라는 말도 아주 예쁜 목소리로 말씀하셨구요. 헤헤헤, 우리 주인님도 참 짓궂으시죠?" 소녀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고 웃으며 말했다. 저렇게 웃는 얼굴로 잘도 한 나라의 붕괴 운운하는 군. 루덴스는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디안을 올려다보았다. 디안은 그런 루덴스 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는데 루덴스가 한참동안 말이 없자 답답해진 듯, 자신의 앞치마를 가볍게 들어올리며 허리를 약간 굽혔다. 그리고는 그 자세 그대로, 흥겨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아, 저희 주인님은 인내심이 약하시답니다. 어떡할까요?" -------------------------------------------------------------------------------- Back : 3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7 (written by 카르민) Next : 3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5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71382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2nd February 2002 22:48:13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1-02-2002 03:49 Line : 244 Read : 897 [37]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7 -------------------------------------------------------------------------------- -------------------------------------------------------------------------------- Ip address : 211.220.164.12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가만히 듣고 있던 루덴스가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딛었다. 오, 저 녀석 꽤 베짱이 센걸? 다시 봐야겠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어찌됐든 나는 너의 주인을 만나야겠다. 어디 있는가?" 루덴스는 한 발 앞으로 내딛은 다음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디안이 후후, 하고 소리내어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살짝 눈을 감았다 뜨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디안은 다시 웃었다. 은회색 머리카락이 찰랑찰랑 부드럽게 출렁이고 있다. 디안은 나무에 살짝 기대며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주인님은 세 번까지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이젠 한 번이 남았군요. 어떡하실 거예요? 여기에 계신 분들은 남기고 돌아가실 거예요?" 이번에도 루덴스는 침묵이다. 하지만, 루덴스 녀석은 절대로 이대로 돌아가진 못한다. 당연하잖아? 그럼 나를 버리고 가는 꼴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라이메데스 놈한테 맞아서 목이 부러질 지도 몰라. 과연, 내 예감이 맞아서 루덴스는 크게 팔을 휘두르며 어느 순간 크게 소리쳤다. "젠장! 모두 공격! 일단 저 여자애부터 잡앗!" 녀석의 그 급작스러운 명령에, 녀석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기사들이 우르르 디안이 서 있는 나무쪽으로 달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삐딱한 시선을 올려 나무를 보았다. 디안은 우웅, 하는 작은 소리를 내더니 삐져 나온 잔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막 기사들이 그 큰 나무를 둘러싼 찰나였다. "헤헤, 그럼 이제 경고는 끝이군요." 뭐? "주인님의 명령대로 할 수밖에 없네요." 순간, 나는 너무나도 놀라고 말았다. 그저 평범하게 보이는 그 소녀의 머리카락이 눈 깜짝 할 사이에 엄청나게 길어지더니, 그대로 우리 쪽으로 돌진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길어지고 동시에 풍성해진 그 머리카락은 마치 생명을 가진 것처럼 우리 쪽으로 재빠르게 다가와 나와 카민, 그리고 나머지 소년들의 몸을 그대로 감아 버렸다. "젠장!!" 머리카락은 강한 힘으로 우리를 잡았다. 아니, 그것은 이미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길고, 동시에 밧줄보다 단단한 그 것은 디안이란 소녀의 머리에 붙어 있긴 하지만, 머리카락은 아니다. 이건 절대로 머리카락이 아니… 으윽! "우우욱!" "아아아아아아아악!" "살려줘요!" 앗, 하는 사이에 갑자기 그 머리카락이 우리를 공중으로 휙, 하고 끌어 올렸다. 그 작은 소녀의 머리에서 튀어나온 그 것들은 거짓말처럼 12명이나 되는 소년의 온 몸을 끌어안고 공중으로 띄워 버린 것이다. 나는 너무나도 당황하고 놀라서, 눈만 둥그렇게 뜰 뿐 그 어떤 반항도 할 수 없었다. 당황하지 않았다 해도 손이 묶여 있어 반항할 수 없었을 테지만. "으으!" 강한 힘으로 목을 조여 오는 그 것의 힘은 너무나 강했다. 거의 디안이 서 있는 나무의 높이까지 우리들의 몸이 떠올랐다. 나는 밑을 내려다보았다. 놀라서 턱이 빠져 버린 듯한 모습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는 녀석들의 멍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답답한 얼굴에 짜증이 치민 내가 어떻게 좀 해봐, 라고 고함을 치려는 찰나, 그것의 힘이 더더욱 강해졌다. "크으윽!" "도·망·은·못·가·요·" 한 자 한 자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것이 온 몸을 천천히 조여오기 시작했다. 머리가 어지럽다. 호흡이 압박 당하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기를 쓰며 몸을 틀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디안 쪽을 보았다. 디안이라는 소녀가 피식 웃는 모습을 본 건 아마도 나뿐이었을 거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가 주셔야겠어요!" 의미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차갑게 한 번 웃은 디안이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그녀가 크게 한 번 발을 굴렀다. 에이프런이 휙, 하는 소리와 함께 공중을 날았다. 그리고, 그 순간. 파파파팟!! 요란한 소리와 함께 디안의 손끝에서 무엇인가가 튀어 올랐다. 그것은 엄청난 속도로 공중으로 치솟더니, 그대로 동굴의 천장을 내리쳤다. 쾅쾅쾅! 쿠콰콰콰콰콰콰쾅! 요란한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나는 두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온 몸이 앞으로 휙 하고 쏠리는 듯한 느낌에 난 눈을 도로 뜨는 수밖에 없었다. 무너지기 시작하는 동굴 천장에서 우리를 보호하려는 듯, 몸을 휘어 감은 그것들이 우리를 디안 쪽으로 끌어 당겼다. "켁…… 크으, 뭐가 어떻게 된…… 크윽……." "큭…… 우욱……." 목이 꽉 하고 갑갑해져오고 온 시야가 답답했다. 나는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젠장할, 손이라도 자유로웠다면! 쿠콰콰콰콰쾅! 다시 한 번 요란한 소리가 온 동굴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채 뭐라고 외칠 틈도 없이 동굴의 천장에서 바위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끔찍한 소음을 내며 기사들 틈으로 돌진하는 그 엄청난 돌무더기를, 나는 디안의 머리카락에 꽁꽁 묶인 채로 그저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눈을 멍하게 뜬 순간 갑자기 윙,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엄청난 힘이 밑으로부터 느껴져 왔다. 그 힘의 근원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안도감에 큰 한 숨을 내쉬었다. 라이메데스! 라이메데스 녀석이 친 엔클레이브가 무너지는 천장에서 쏟아진 모든 바위를 튕겨내고 있었다. 으흑, 얼마 만이냐 대체! 저 녀석이 저렇게 쓸만한 구석이 있었다니! 「칼레들린!」 아! 나는 갑자기 머릿속을 울려온 라이메데스의 목소리에, 생전 처음으로 저 놈이 이 세상에 살아 있어도 그리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다. 「라… 케엑, 라이메데스?」 「그래, 나다! 젠장, 정신 집중해! 전음이 끊어지려고 하잖아! 지금 간다! 조금만 참고 있어!」 뭐? 지금 엔클레이브로 떨어지는 돌 막고 있는 주제에 무슨 말이냐? 「뭐야? 네가 오면 거긴!」 「이따위 인간들이야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냐! 마법사들 한 둘은 살겠지!」 젠장맞을. 욕이 절로 튀어나온다. 한 순간이나마 저 놈이 이 세상에 살아 있어도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한 나 자신에게 발길질을! 빌어먹을, 저 놈은 정말이지 제정신인 건가? 「네가 오면 에세렌…… 우욱, 하고 이레니아, 루덴스는 어쩌란 말야?」 「내 알 바 아니라고 했어!」 저 빌어먹을 마족 놈이! 「오지맛! 오는 그 순간 죽여 버릴거다! 오면 진짜로 죽여버릴 거라고!」 떨어지는 돌덩어리의 움직임은 전혀 둔해지지 않았다. 저 자리에서 라이메데스가 엔크레이블 거둔다면? 생각하는 것 만을도 끔찍할 지경이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 라해도, 라이메데스가 치는 엔클레이브와 같은 강대하고도 광범위한 프로텍트는 칠 수 없어! "쿨럭!" 더욱 목이 졸려온다. 젠장할, 정말로 질식사시킬 셈인가? 숨을 못쉬니 괴로워 죽겠어! 「칼레들린님, 조금만 참으세요. 곧 라이메데스님이 구해주실 겁니다.」 젠장할! 안 돼! 저 놈, 정말로 오면 죽여 버릴 거다! 내가오면 죽어, 라고 다시 한 번 외치려는 그 때였을 거다. "아……."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바로 내 앞의 공간이 크게 한 번 뒤틀리는 것이 보였다. 대기층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뒤틀리는 공간의 틈새에서, 익숙한 금빛이 언뜻 비쳤다. 분명 라이메데스의 금발. "너 이놈의 자식!!" 다른 녀석들은 어떡하라고 온 거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지만 그 말을 다 뱉어낼 힘도 없었다. 나는 밑으로 시선을 내리 깔았다. 하지만, 머리카락에 꽁꽁 묶여 버린 몸은 밑을 내려다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공간의 흔들림 끝에, 녀석의 붉은 옷자락이 막 드러났다. 나는 입술을 악 물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워프!" 목소리가, 아주 맑은 목소리가, 소녀의 목소리가. 내 머리카락을 타고 쨍쨍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이 목소리는 분명, 나무 위에 걸터 선 채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 소녀, 디안의 목소리! 쉬익! 디안이 워프를 외칠 거라곤 나도 생각하지 못했으니, 라이메데스 놈도 몰랐음이 분명하다. 공간의 틈새로 몸을 빼내는 라이메데스의 모습이 보였다. 라이메데스는 눈을 부릅뜨고 미친 듯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칼레들리이이이인!" 녀석이 커다란 호명과 함께 뻗어낸 그 손은 내 몸에 닿지 않았다. 녀석의 손끝은 어제 일 때문에 온통 피로 젖어 있던 내 옷에 닿아 어깨부위의 그것을 지익, 하고 약간 찢어냈을 뿐이다. 녀석의 손이 내 옷을 찢은 바로 그 순간. 거짓말처럼 머리가 아팠다. ******************************* -------------------------------------------------------------------------------- Back : 3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8 (written by 카르민) Next : 3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6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71383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2nd February 2002 22:48:16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1-02-2002 03:50 Line : 356 Read : 1151 [38]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8 -------------------------------------------------------------------------------- -------------------------------------------------------------------------------- Ip address : 211.220.164.12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나 또 기절했던 건가?" 몇 번이고 눈꺼풀을 깜빡거리면서 내가 한 말은 그 것이었다. 쳇, 하고 쓴 소리가 뱉어져 나왔다. 나는 최대한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훑어보았다. 정말이지 짜증나 죽겠다. 아아, 나 또 기절한 거야? 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니. 이러다가 기절 대 마왕 같은 거 될까 무섭다, 정말로. "라이메데스놈이 날 잡으려 했고, 실패했고, 그 다음에 머리가 아팠고. ……그리고 기절했군." 나는 마치 나 스스로에게 설명하듯 천천히 중얼거린 후 주위를 휙휙 훑어보다가 경직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핑크빛. 촌스러울 정도로 화사한 핑크 색으로 온통 칠갑을 해 놓은 이 방은, 분명 침실처럼 보였다. 심지어 침대 바로 옆에 빽빽하게 꽂혀 있는 장미꽃조차 핑크 색일 정도로, 모든 것이 핑크빛이었다. 탁자도, 문도, 카펫도, 화병도. 나는 멍한 눈으로 주위를 훑어보다가, 문득 나를 내려다보았다. "젠장." 나는 낮게 투덜거렸다. 로시엔이 만들어줬던 검은 경장의 윗 부분이 부욱, 찢어져 나간 것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머리를 흔들었다. 응? 그런데 뭔가, 어색하다? 나는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뭔가 너무 이상한데. 뭐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빠졌던 나는, 어느 순간 벼락 같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레이네!!" 그래! 이 시끄러운 마물이 떠들지 않고 있어! 나는 깜짝 놀라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정말로 없었다. 마치 거짓말처럼 깜쪽 같이. 누군가가 떼어 버린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내 허리춤을 만져보며 확인했지만, 한 번 없다고 확인된 것이 다시 나타날 리가 만무했다. "레이네! 레이네! 레이네에에엣!" 나는 다시 고함을 쳐서 레이네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레이네로부터의 대답은 역시 없었다. 젠장! 젠장할! 나는 연신 욕을 하면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물론, 레이네가 그 변태놈과 아는 사이라고 했으니 다치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내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자기 맘대로 떨어져 버릴 놈은 아닌데. 적어도 내가 깨어날 때까지는 있어야 하는 거 아냐? 헉! 호, 혹시 그 디안이라는 여자애 머리카락 사이에 엉켜버린 것 아닐까. 나는 한참동안 레이네를 생각하며 손톱을 물어뜯다가, 어느 순간 레이네만을 걱정해야 할 게 아니란 사실을 자각했다. 순간, 심장이 덜컥하는 느낌에 나는 몸을 떨었다. "젠장. 카민 녀석은?" 아니야, 그 놈은 괜찮겠지. 아마도 괜찮을 거야. 내가 괜찮으니까, 같은 상황이었던 그 놈은 무사할거다. 그럼 에세렌이나 이레니아, 가윈, 루덴스는? 그 녀석들은? 세라는? 그 많은 기사들은? 마법사들은, 카리스란 그 녀석은 괜찮겠지. 하지만, 그 정도의 마법사만으로는 그 많은 인원을 안전하게 지킬 수 없었을 거다! "빌어먹을!" 나는 주먹으로 바닥을 내려쳤다.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약간의 고통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라이메데스는 종국에 공간을 뒤틀어 내 쪽으로 왔었으니 그 놈들은 당연히 그 무지막지한 바위에 노출됐었을 거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어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미친 듯이 문손잡이를 당겼다. 그러나,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물고 주변을 훑었다. 문이 안되면 창문이라도! 그러나 창문을 찾기 시작한지 채 몇 초도 되기 전에, 나는 입을 멍하니 벌리고 말았다. "차, 창문이 없어?" 말 그대로, 정말로 창문이 없었다. 온통 벽일 뿐이다. 벽, 벽, 벽! 벽! "젠장할! 젠장할!" 자해하는 기분으로 몇 번이고 벽에 머리를 박은 후에야 나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입술을 꾸욱 깨물면서 나는 애써 밝은 생각을 하려 애썼다. 카민은 무사할 거다, 그리고 그 무리 중엔 원래 마법사가 있었으니 다 구하진 못했어도 피해를 최소화 했을 것이다, 루덴스와 이레니아는 황족이니 기사들이 몸으로라도 지켰을 것이다, 에세렌은 신성을 타고나는 존재라고 했으니 여신의 가호가 깃들어 무사할 것이다, 가윈은 우연히도 가장 강한 마법사의 옆에 서 있어서 그 마법사의 프로텍트 안에 같이 들어갔을 지도 모른다……. "으아아아악!" 나는 그러나 그런 생각들을 계속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어차피 내가 하는 말은 말도 안 되는 것들. 결국 나오는 건 한숨뿐이다. 젠장할! 처음부터 말도 안되는 짓이라는 걸 알았어야지! 상대는 마족이란 말이다! 그런 놈을 인간 따위가 어떻게 상대하려고. 마법사? 마법의 근본종족 중 하나인 마족에게 감히 마법사가 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기사? 기사가 마족에게? 웃기지마. 말도 안되는 소리다. 신관도 한 명 따라오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이길 거라고 생각했을까. 바보 같이! 나는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며 내 머리를 때렸다. 안 돼. 약한 생각하지 마라, 칼레들린. 그 놈들이 무사하건 그렇지 않건 그것을 확인하려면 일단 너란 놈부터 무사해야 할 거 아냐! 그래, 맞다. 나는 크게 한숨을 쉬며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곧 있으면 만날지도 모를 그 변태 놈 일을 생각하자. 그 놈을 만나면 어떻게 할까? 아무래도 나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는 편이 좋겠다. 그래, 제 놈도 마족이면 서열을 중시할 것 아닌가? 나란 놈이 세이아나랑 아는 사이에다가 블러드 아미 총수인 아이에드를 밥으로 삼고 있으며 서열 16위의 로시엔을 보모로 둔 대단한 몸이시다, 라고 말하면 설마 제 놈이 나를 어떻게 하지는 않겠지. "좋아! 그렇게 하는 거다!" "헤이, 고양이! 뭐가 '좋아'란 거야?" "하하하! 그거야 내가 무사할 방법……." "응? 무사할 방법이라고?" "……." 자, 잠깐. 바, 방금 전에? 나는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움찔, 얼어버렸다. "무사할 방법이라니? 까만 털 고양이, 도망갈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던 거야?" 자, 잠깐만? 내가 서 있는 이 방에는 문이 하나 있다. 그런데 그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 아무리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았어. 그리고, 내 머리가 너무 나빠 방금 전에 확인한 사실을 까먹는 돌이 아니라면 원래 이 방에는 창문이 없어. 그러니 결론적으로 출입을 할 수 있는 수단은 저 문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지만, 내가 아는 한 저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또한,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긴 나 혼자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들려온 이 목소리는?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을 천천히 뒤로 돌렸다. 그리고 더더욱 굳어져 버렸다. "흐응, 새로 온 검은 털 고양이는 키가 좀 크군! 저번 건 굉장히 작았는데." 키득, 하고 웃는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와서 나는 턱을 떡 벌렸다. 완전히 굳은 상태로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내 쪽을 똑바르게 응시하고 있는 한 쌍의 눈이 들어온다. 186세리하인 나보다도 한 뼘 이상 커 보이는 큰 키가 유독 눈에 띄었다. 밀실과도 같은 이 공간에 갑자기 나타난, 이 녀석. 이녀석이 바로 그 변태 마족? "뭐, 크든 작든 난 검은 털 고양이가 좋으니까." 훗, 하고 작게 한 번 웃은 후, 그 놈이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길게 뻗은 하얀 팔을 내 쪽으로 살짝 내민 채로, 녀석이 점점 더 다가왔다. 크아악! 난 남자 녀석은 싫어! 저리고 꺼져, 꺼져, 꺼지란 말이다아! 내 쪽으로 저벅저벅 다가오는 녀석의 머리카락은 옅은 윤기가 흐르는 남빛을 띄고 있었다. 그것은 완연한 남빛으로 그 머리카락은 미드나잇 블루빛 눈동자를 살짝 덮고 있었다. 녀석이 이윽고 내 앞에 멈춰섰다. 나는 순간 이익, 하는 마음에 눈을 질끈 감고, 휙 하고 돌아서 버렸다. 돌아선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있는 힘을 다해 큰 소리로 버럭 외쳤다. "내 이름은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 서열 3위의 마족 아이에드 엘버지운 피엘과 같은 성을 가진 걸로 봐서 아이에드랑 무슨 사인지는 알겠지? 서열 16위의 마족 아이시 사일런트 로시엔을 유모로 두고 자랐고, 마족 서열 12위이자 너하고 친구라는 게이트 수호자 세이아나 아나드리엘 로엔과도 아주 아주 친한 사이(말하면서 좀 찔렸다)다! 내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넌 그 날로 죽엇!!" 숨조차 쉬지 않고 버럭버럭 고함을 지른 후, 나는 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하고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쉬면서 나는 다시 천천히 돌아섰다. 그런데, 내가 돌아선 순간 본 것은 '아니? 네가 그렇게 대단한 녀석이라고?' 말하기는커녕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 놈의 얼굴이었다. 아, 아니? 어째서 이렇게 태연하지? "호오, 자기 소개라, 독특하군. 검은 털 고양이, 너 마음에 드는 걸. 하지만 너무 빨라서 이름 말고 뒤에건 아무 것도 안 들렸어, 다시 한 번 해 주실까?" 쿨럭! 그랬던 거냐!! 내가 귀나 좀 열고 살아라, 이 변태 자식아! 하고 외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사라락, 하고 천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난다 싶어 보았더니 녀석의 오른손이 스륵 올라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크아아악! 나는 얼른 한 발자국 물러서서 놈의 징그러운 손을 피했다. 그러자 놈이 흐음, 하고 낮게 중얼거리며 나를 보았다. "이봐, 검은 털 고양이. 아무리 그래봤자 소용없다. 훗, 이 번에 인간 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왔는지는 불 보듯 뻔했지. 하지만 도시 하나 망가뜨리면 또 설설 기는 게 인간들이야. 원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잖아?" "시끄러워!" 나는 고함을 치곤 녀석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약간 시선을 올려 녀석을 올려다보는 순간, 나는 18년 인생 가장 충격적인 것을 목격해야만 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 역시. 나는 나를 보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빤히, 아주 빤히 바라보았다. 가벼운 경련이 온 몸을 스친다. "흐응, 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좋아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검은 눈에 검은 머리카락이로군. 정말 마음에 들어. 검은 털에 검은 눈을 가진 고양이는 도도한 만큼, 가장 길들이는 맛이 강하거든. 쿡쿡. 죽일 때 가장 신나는 것도 검은 눈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녀석들이지." 생긋, 입 꼬리를 올리며 웃은 녀석의 손끝이 올라와 내 볼을 톡톡, 하고 건드렸다. 하지만, 이미 너무 큰 충격에 머리가 완전히 비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던 나로선 그 손을 치워낼 겨를이 없었다. 나는 한참동안 넋 나간 듯 놈의 얼굴을 보았다. 몇 번 내 볼 끝을 건드리던 손이 스르르 내려와, 옷이 찢어져 반쯤 드러난 내 어깨에 닿는 그 순간까지도 난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온 몸의 경련에 심장마저 내려 앉힐 것 같다. "너무 떨지마, 검은 털 고양이. 걱정하지도 말고. 흑발 흑안은 언제나 가장 마지막에 죽었으니까. 뭐, 1년 후에는 너도 죽겠지만." "너!" 녀석이 말을 끝냈을 때야, 나는 입을 열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큰 소리로. 그러나 내가 큰 소리를 내던말던, 이 변태 놈의 태도는 여전히 능글능글했다. "흐응, 이번 고양이는 특이하군. 나한테 말이라도 붙여볼 셈인가? 그래, 어떤 말이라도 좋으니 어디 한 번 말해봐라. 가끔씩은 이런 놈들이 있어서 재밌긴 하지. 킥, 이봐. 검은 털 고양이. 너, 혹시 내가 누군 줄은 알아? 믿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너희들이 흔히 '악마' 라고 부르는 족속이다. 하지만 겁 먹진 마라. 적어도 미소년들한테는 아주 친절하니까. 단, 유통기한이 끝날 때까지." 내 어깨에 올려놓았던 손을 아래위로 움직이며 녀석이 후, 하고 웃곤 나를 보았다. 나는 그런 녀석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녀석의 얼굴이 다시 한 번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또 한 번 몸이 떨림을 느꼈다. 저 얼굴, 저 얼굴, 저 얼굴은. 녀석은 손을 올려 내 머리카락 위에 대고, 몇 번을 토닥였다. "흐음, 그건 그렇고 피부가 정말 좋군. 이대로 찢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아아,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아직은 유통기한에 다가가려면 멀었어." 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갑자기 가슴이 막막해져 오고 울컥, 하고 속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올랐다.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이 아프다고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속에서 흐르는 것들을 주체할 수 없어 한참동안이나 코를 들이마셔야 했다. "응? 왜 우는 거지?" 내가 갑자기 눈물을 쏟아 내는 것이 이상했던지, 녀석이 그렇게 물어왔다. 녀석은 천천히 손을 뻗어, 울고 있는 내 턱에 가져왔다. 슬그머니 턱을 들어올린 녀석의 손이 내 턱을 들어 올렸고, 이윽고 녀석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두근거림이 다시 한 번 내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다. '그리움' 이라는 단어 말고는 쓸 수 있는 말도 없다. 온갖 감정들이 비처럼 내 온 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지끈거리면서 아픈 가슴으로, 나는 눈물을 흐르는 눈으로 녀석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정말로 꼼꼼하게 바라보았다. 무서우리 만치 단정하게 생긴 얼굴이 보인다. 날카로운 턱선과 붉은 입술. 그래,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다. 몇 번을 확인 해도, 이 녀석이 내가 알고 있는 그 녀석과 똑같이 생겼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어! "너…… 너…… 어째서?" 목에서 쉰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째서 네가…… '그 녀석' 하고 똑같이…… 생겨 먹은 거지?"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방망이질치는 가슴의 통증이 아프게 느껴졌다. 내 말에 녀석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에? 하는 소리를 냈다. "무슨 말이지?" 녀석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순간 울컥, 하고 속에서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왜 네 녀석 얼굴이 로시엔하고 똑같냐고, 이 변태 자식아!" -------------------------------------------------------------- 연참끄으으으으으으읕~~~~~~~~~~ 아학아학. 이것이 4권 분량... ...전부는 아니고; 외전이 하나 있습니다. 가윈 뤼케이너(윈디나 오빠)가 어떻게 되었는지 짧게나마 알 수 있는-_- 외전입니다만. 언제 올릴지는...(먼 산) -------------------------------------------------------------------------------- Next : 3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7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71383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2nd February 2002 22:48:19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7-02-2002 19:48 Line : 329 Read : 1299 [5]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9/수정 -------------------------------------------------------------------------------- -------------------------------------------------------------------------------- Ip address : 218.146.139.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제 24장: 변태마족 레이디안Ⅱ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지?" 놈은 약간 떨리는 눈동자를 내게 가져다대면서 물었다. 짙은 빛깔, 오싹하 리 만치 분명한 미드나잇 블루의 눈동자. 새까만 자정의 빛깔을 그대로 퍼 넣은 것 같은 그 눈동자 색을 보면서 나는 잠시 깊은숨을 들이마셔야만 했 다. 점점 더 가까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놈의 머리칼에서 기묘한 향기가 났다. 장미향? 아마도 그렇게 부르면 좋을 듯한 그런 향기가. "로시엔과……. 왜 네 놈 얼굴이 로시엔과 같냐고!" 속에 쌓여 있던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눈 끝을 타고 점점이 떨어지는 물방울의 움직임을 감당할 수가 없어, 나는 계속해서 눈물이 흐르 는 이 빌어먹을 눈만을 원망했다. "로시엔? 너 방금 전에, 로시엔이라고 한 거냐?" "그래, 로시엔! 아이시 사일런트 로시엔! 서열 16위의 마족이자, 아이에드 엘버지운 피엘의 하나뿐인 보좌관!" 목이 턱턱 막혀온다. 숨을 고르기 위해 한 발자국 물러선 나는 녀석의 눈 을 깊이 들여다 보다가 다시 호흡을 멈춰야만 했다. 놈이 눈빛이 조금 이 상하게 변하는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땀 때문에, 발이 미끌거린다. "너… 설마, 마족인가?" 레이디안은 의아함과 황당함이 뒤섞인 듯한 목소리로 내게 질문했다. 나는 후우,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당황하고 있다고 판단하게 만들었던 표정도 잠시, 레이디안은 순식간에 무 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턱에 손을 괴고 흐응, 하는 소리를 냈다. 그 급박스 러운 표정 변화를 보며 나는 눈을 부릅떴다. "말 돌리지마, 이 변태 자식아!" "후후, 난 말 돌리는 게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 갑자기 손가락을 들어 내 꽃 같은 입술을 지그시 누르는 이 놈. 여, 여, 역시 이 놈은……. 벼… 변태다!! "치워, 이 자식아!" 버럭 고함을 치며 손을 휘두르자, 후훗 하는 느끼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으며 살짝 손을 치워낸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런 놈을 노려보았다. "너, 아까 이름이 뭐라고 했지?" 레이디안은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어느 순간 꽤나 진지한 얼굴로 질문했다. 그런데 그 진지한 얼굴이 어찌나 로시엔과 똑같았던지, 나는 하 마터면 '로시엔!' 하고 소리쳐 부를 뻔했다. 다행히도 외치고 싶은 욕구를 꾹 눌러 참아 쪽팔림만은 간신히 면한 나는, 녀석이 모르게 깊은 심호흡을 하면서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 순간, 녀석의 눈썹이 가느다랗게 꿈틀했다. "……서열 3위의 아이에드 엘버지운 피엘과는 무슨 관계?" 레이디안의 목소리는 낮았고, 굉장한 울림을 갖고 있었다. 그렇겠지. 아이 에드란 대단한 자와 같은 성을 쓰는 마족이 흔할 리 없으니까(가 아니라 나 말고는 하나도 없는 건가?). 나는 가득한 경계심을 담고나를 보는 녀석을 지그시 올려보며 대답했다. "그녀석이." "……?" "내 밥이다." "……." 레이디안은 잠시 침묵했다. 뭔가 경직한 얼굴로 아? 하는 얼굴을 하고 있 던 그가 입을 다문 것은 내가 속으로 정확히 10초를 센 후였다. 이거 바보 아냐? 라고 중얼거리며 막 몸을 돌리려던 찰나, 놈이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면 나는 로시엔과 똑같이 생긴 얼굴을 하마터면 외면할 뻔 했다. 어찌됐든, 한참만에 표정을 처음처럼(느끼하고도 능글맞은 표정)돌린 레이디안은 고 개를 끄덕 끄덕거리면서 말했다. "그래그래. 어찌됐든, 아이시 사일런트 로시엔과 내 얼굴이 비슷하다고 그 랬나?" "아니, 똑같다!" 내 답에 레이디안은 흐응,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리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로군. 너, 혹시 내가 왜 그 놈과 얼굴이 똑 같은지 궁금한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생긋 웃는 레이디안의 얼굴에 현기증마저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정말로, 정말로! 이 놈의 웃는 얼굴은 로시엔과 똑같았다. 다만, 로시엔 쪽은 무표정한 얼굴이다가 어느 순간 환하게 웃는 얼굴이 인상적이 라면, 이 쪽은 계속 웃고 있다가 어느 순간 더더욱 밝게 다시 한 번 웃는다 는 점에서 조금 다르달까. 하여튼, 그런 점만 제외한다면 똑같다고 봐도 좋 을 것 같은데. "구, 궁금하다." 정말로 궁금해서 속이 터져 버릴 지경이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로 궁금해?" 사락, 웃는 녀석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닭살이라 나는 잠시 침묵했다. 나는 녀석이 얼굴을 한참동안 보다가 시선을 내려 버렸다. 제, 젠장. "궁금하다잖아, 이 자식아! 똑바로 대답 못해? 너랑 로시엔이랑 무슨 관계 야! 대체 무슨 관계이길래 그렇게 똑같이 생겨먹은 거냐고!" 내 고함소리에 녀석은 흐응,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를 으쓱했다. "그다지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그 얘기를 하면 너무 여린 내 마음이 쉽게 상처를 받을 거거든. 얘기할 수 없어." "……." "호오호오, 못 믿겠다는 표정? 이거야 원. 난 마음이 약해서 말이지. '그 얘기'를 했다간 내 여린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고 말거야." 나는 녀석을 한참동안 빤히 바라보았지만, 녀석은 찔리는 게 없다는 식의 당당함으로 내게 맞서올 뿐이었다. 가, 강적이다, 이 놈! 얼굴 두께만이라 면 아이에드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지도. "대체 너와 로시엔은 어떤 사이지? 가르쳐줘." 내 질문에, 녀석은 피식 웃으며 입 꼬리를 치켜올렸다. "공짜로?" "……." 뭐, 뭐야? 대체 뭘 원하는 건데? "그래서. 뭘 바라는데." 내가 아주 잡아 먹어버리겠다는 눈으로 보는데도, 레이디안은 전혀 아랑곳 않는 얼굴로 생글생글 웃기만 한다. "아주 잠시만 나랑 놀아주면 가르쳐주지." "……뭘 논다는 거냐." 불길해, 불길해. 불길하다고. 우욱, 저 입에 걸린 느끼한 미소 좀 봐! 쿠엑! 제발 담백한 걸 줘! "내기를 하나 하는 건 어때? 오호, 말해놓고 보니 좋군. 그래, 내기에서 네가 이기면 얘기를 해줄게." "만약에… 네가 이기면?" 내 질문에 레이디안이 찡긋, 하고 윙크를 했다. "네가 얌전히 내 검은 털 고양이가 되는 거지." 순간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하! 하하하하? 너! 내가 미쳤는 줄 아냐? 그딴 내기를 하게? 난 그런 내기 안 해! 죽었으 면 죽었지 그런 내기 따위 안 한다고! 검은 털 고양이? 젠장할, 좋아하시네 !! 난 아직까지 사지 멀쩡하고 정신 멀쩡하다! 사나이의 자존심을 걸고, 그 따위 내기 하면 내가 마족이 아니다. "내가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냐?" "호오, 설마 궁금하지 않은 건가?" "시끄러워! 네가 뭐라고 해도 안 통해! 누가 뭐래도 그딴 내기는 안 해!" 그러자 레이디안이 생긋, 웃는다. "후훗. 나와 아이시 사일런트 로시엔의 관계가 너무너무너무 특별한 것이 라도? 나에게서 듣지 않는다면 평생, 아주 평생 들을 수 없는 거라도?" 어쩐지 사나이로서의 다짐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로시엔과 나의 관계가 엄청난 극비라서 오늘 듣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할 지 모른다고 해도? 그래도? 그래도?" "으, 으웃……." 헉! 흐, 흔들리지 마라, 칼레들린!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흔들리면 안 돼 ! "아마 네 주변에 있는 녀석들은 평생 얘기해주지 않을 거야. 이걸로 끝이 라고. 이게 마지막 기회야. 그래도 싫어? 오늘 안 들으면 영원히 끝이야!" "으윽…" "들을 상대는 나랑 로시엔 밖에 없는데, 그 차가운 얼음가면 로시엔이 얘 기해줄 것 같아? 내가 말했지. 이 이야기는 극·비·라고. 너도 알고 있을 지 모르지만, 로시엔은 나랑은 달리 지킬 것은 반드시 지키는 놈이거든. 고 지식할 정도로." 알지, 알아. 내가 왜 몰라? 로시엔은 설사 자기 목숨이 걸린 비밀이라해도 지킬 녀석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비밀은 아무도 모르는 로시엔의 과거와도 관련이 ……." 레이디안이 막 그렇게 말을 꺼낸 순간. 로, 로시엔의 과거? 로시엔의 과거라고? 단지 로시엔의 과거라는 말 한마디에 넘어간 내 의지는. "로시엔의 과거? 한다, 한다! 까짓 내기, 한다고!!" ……사나이로서의 다짐도 꺾어버렸다. "잘 생각했어." 거의 무의식적으로 한다! 라고 외쳤던 내가 퍼뜩 정신을 차린 것은 놈의 눈웃음을 본 직후였다. 사르르,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빙글빙글 웃는 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온 몸으로 경직한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를 알 수 있었다. 녀석의 페이스에 걸려버렸다! 라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 금 와서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 로시엔의 과거! 그리고 로시엔과 똑같이 생겨먹은 변태마족. 이녀석들의 상관관계는, 반드시 들어야겠어! 반드시! "그럼 나랑 내기 하는 거지? 기분 좋은데." "내기 종목은?" 나는 방방 뜨며 좋아하는 레이디안의 발을 꾸욱 밟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녀석은 그러나 내가 발을 밟든 뭘 하든 전혀 아프지 않다는 듯한 얼굴로(하지만 미간에 줄이 가 있군. 후후, 유쾌하다.)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놈은 느끼하게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 다. "후후, 내기 종목은 내가 정하지. 괜찮겠지?" 이 자식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안 돼!" "그래? 그럼 뭘 할건데?" 레이디안은 가소롭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한참 고민하다 크 으, 하는 소리를 냈다. 도저히 생각나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잘난 건 사실이지만 뚜렷하게 뭐 하나 탁! 하고 내세울 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아 아, 몰라! 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흐응, 별로 자신 있는 종목이 없나 보지?" 찌, 찔리는군. "하하하하하! 그, 그럴 리가! 자신 있는 종목이 너무 많아서 고르는데 좀 힘들뿐이다!" "그래? 그런데 왜 이마에서 계속 땀이 흘러?" 나는 레이디안을 빤히 노려보았다. 그러자 레이디안은 손을 휙, 뒤로 넘기면서 짧게 말했다. "됐어. 그냥 내 마음대로 종목을 정하지. 동의하지?" "도, 동의 못한다." "그래? 그럼 네가 종목을 정하라니까." "……." 한참을 생각해봐도 도저히 떠오르지가 않아, 나는 결국 이빨을 우득 물며 항복을 선언하는 수밖에 없었다. 레이디안은 피식, 길게 한 번 웃더니 내게 손을 뻗었다. "좋았어, 칼레들린군. 그럼 이렇게 하지. 일단 세 가지 내기를 하는 거야. 첫 번째 내기 종목은 내가 정하고, 두 번째 내기 종목은 네가 정하고, 세 번째 종목은 적당히 알아서 정하도록하지. 물론, 세 번째 종목까지 갈 필요 도 없이 내가 이기겠지만." 나는 놈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한참동안 녀석을 빤히 노려보다가 결 국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그럼 일단 첫 번째 내기 종목은." 레이디안은 말을 끊었다. 녀석의 입 꼬리가 가늘어졌다. "마족의 자존심을 걸고." 호오? 자존심을 걸고 뭐? "……한 판 싸울까?" "……." 순간,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뭐, 라고?" "그러니까. 몸으로 한 번 부딪혀 보자고." 농담으로 치부하고 하하, 웃으며 넘겨버리기엔 놈의 눈이 너무 진지했다. "아, 아. 저, 저기 말이지……." 나는 입을 열어 이 내기의 부당성을 설명하려고 했다. '이 바보 놈아! 그게 말이 되냐? 난 비각성 마족이란 말이다!' 하 지 만. 퍼억―! "우아아아아악!!" 내 이 말이 나가는 속도보다 저 놈의 주먹이 더 빠른 걸 어쩌랴? -------------------------------------------------------------------------------- Back : 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0 (written by 카르민) Next : 4 : [필독]퍼가시는 분들.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15543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3rd March 2002 11:38:47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8-02-2002 19:25 Line : 276 Read : 1684 [3]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9 -------------------------------------------------------------------------------- -------------------------------------------------------------------------------- Ip address : 203.251.112.21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지?" 놈은 약간 떨리는 눈동자를 내게 가져다대면서 물었다. 짙은 빛깔, 오싹하 리 만치 분명한 미드나잇 블루의 눈동자. 새까만 자정의 빛깔을 그대로 퍼 넣은 것 같은 그 눈동자 색을 보면서 나는 잠시 깊은 숨을 들이마셔야만 했 다. 점점 더 가까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놈의 머리칼에서 기묘한 향기가 났다. 장미향? 아마도 그렇게 부르면 좋을 듯한 그런 향기가. "로시엔과…… 왜 네 놈 얼굴이 로시엔과 같냐고!" 속에 쌓여 있던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눈 끝을 타고 점점이 떨어지는 물방울의 움직임을 감당할 수가 없어, 나는 계속해서 눈물이 흐르 는 이 빌어먹을 눈만을 원망했다. "로시엔? 너 방금 전에, 로시엔이라고 한 거냐?" "그래, 로시엔! 아이시 사일런트 로시엔! 서열 16위의 마족이자, 아이에드 엘버지운 피엘의 하나뿐인 보좌관!" 목이 턱턱 막혀온다. 숨을 고르기 위해 한 발자국 물러선 나는 녀석의 눈 을 깊이 들여다 보다가 다시 호흡을 멈춰야만 했다. 놈이 눈빛이 조금 이 상하게 변하는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발 밑에 맺힌 땀이 미끌거린다. "너… 설마, 마족인가?" 레이디안은 의아함과 황당함이 뒤섞인 듯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나는 후우,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당황했다고 판단하게 만들었던 표정도 잠시, 레이디안은 순식간에 무표정 한 얼굴로 돌아와 턱에 손을 괴고 흐응, 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순간 발끈 해서 소리쳤다. "말 돌리지마, 이 변태 자식아!" "후후, 난 말 돌리는 게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 갑자기 손가락을 들어 내 꽃 같은 입술을 지그시 누르는 이 놈. 역시 이 놈은……. 변태다. "치워, 이 자식아!" 버럭 고함을 치며 손을 휘두르자, 후훗 하는 느끼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으며 살짝 손을 치워낸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런 놈을 잠시 노려보 았다. "너, 아까 이름이 뭐라고 했지?" 레이디안은 꽤나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대답했 다.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 "……서열 3위의 아이에드 엘버지운 피엘과는 무슨 관계?" 레이디안의 목소리는 낮았다. 나는 놈을 지그시 올려보며 대답했다. "내 밥이다." "……." 레이디안은 잠시 침묵했다. 흐음, 하는 소리를 내던 그 놈이 하아, 하고 길게 한숨을 뿜어낸 것은 그리 짧지 않은 시간 뒤였다. 레이디안은 고개를 끄덕 끄덕거리면서 말했다. "아이시 사일런트 로시엔과 내 얼굴이 비슷하다고 그랬나?" "아니, 똑같다!" 내 답에 레이디안은 흐응,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리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로군. 내가 왜 그 놈과 얼굴이 똑같은지 궁 금해?" 그렇게 말하면서 생긋 웃는 레이디안의 얼굴에 나는 현기증마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정말로! 이 놈의 웃는 얼굴은 로시엔과 똑같았다. 다 만, 로시엔 쪽은 무표정한 얼굴이다가 어느 순간 환하게 웃는 얼굴이 인상 적이라면, 이 쪽은 계속 웃고 있다가 어느 순간 환하게 다시 한 번 웃는다 는 점에서 조금 다르달까. 하여튼, 그런 점만 제외한다면 거의 똑같다고 봐 도 좋을 것 같은데. "구, 궁금하다." 정말로 궁금해서 속이 터져 버릴 지경이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로 궁금해?" 사락, 웃는 녀석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닭살이라 나는 잠시 침묵했다. 나는 녀석이 얼굴을 한참동안 보다가 시선을 내려 버렸다. 제, 젠장. "…궁금하다잖아, 이 자식아! 똑바로 대답 못해? 너랑 로시엔이랑 무슨 관 계야! 대체 무슨 관계이길래 그렇게 똑같이 생겨먹은 거냐고!" 내 고함소리에 녀석은 흐응,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를 으쓱했다. "그다지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그 얘기를 하면 너무 여린 내 마음이 쉽게 상처를 받을 거거든. 얘기할 수 없어." "……." "호오호오, 못 믿겠다는 표정? 이거야 원. 난 마음이 약해서 말이지." 나는 녀석을 한참동안 빤히 바라보았지만, 녀석은 찔리는 게 없다는 식의 당당함으로 내게 맞서올 뿐이었다. "가르쳐 줘. 대체 너와 로시엔은 어떤 사이지?" 내 질문에, 녀석은 피식 웃으며 입 꼬리를 치켜올렸다. "그런 사실을 공짜로 가르쳐 줘야 한다고?" "……." 뭐야? 대체 뭘 원하는 거냐? "그래서. 뭘 바라는데." 나는 지그시 놈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자 레이디안은 생글생글 웃는 낯 으로 말했다. "아주 잠시만 즐겁게 놀아보는 건 어떨까?" "……뭘 논다는 거야." 불길해, 불길해. 불길하다고. "내기를 하나 하는 거지. 그 내기에서 네가 이기면 얘기를 해줄게." "……네가 이기면?" 내 질문에 레이디안이 찡긋, 하고 윙크를 했다. "네가 얌전히 내 검은 털 고양이가 되는 거지." 순간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하! 하하하하? 내, 내가 미쳤냐? 그딴 내기를 하게? 난 그런 내기 안 한다. 죽으면 죽었지 그런 내기 안 해. 나는 그런 내기 따위는 절대 하지 않을 거다! 검은 털 고양이 좋아하시네! 난 아직까지 사지 멀쩡하고 정신 멀쩡하 다! "내가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냐?" "호오, 궁금하지 않은 건가?" "어찌됐든 내기 따윈 안 한다고!" 그러자 레이디안이 생긋, 웃는다. "후훗. 나와 아이시 사일런트 로시엔의 관계가 너무너무너무 특별한 것이 라도? 나에게서 듣지 않는다면 평생 들을 수 없는 거라도?" 어쩐지 사나이로서의 다짐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로시엔과 나의 이야기가 너무너무너무 중요해서 오늘 듣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할지 모른다고 해도? 그래도? 그래도?" "으, 으웃……." 헉! 흐, 흔들리지 마라, 칼레들린!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흔들리면 안 돼! "아마 네 주변에 있는 녀석들은 평생 얘기해주지 않을거야. 이걸로 끝이라 고. 이게 마지막 기회야. 그래도 싫어? 오늘 안 들으면 영원히 끝이야!" 레이디안이 막 그렇게 말을 마친순간. "한다." …내 입이 내 의지를 배반했다. "잘 생각했어." 거의 무의식적으로 한다! 라고 외쳤던 내가 퍼뜩 정신을 차린 것은 놈의 눈웃음을 본 직후였다. 사르르,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빙글빙글 웃는 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미쳐버릴 것 같은 닭살이 온 몸을 휘감았고 그래서 나는 아주 긴 시간 동안을 몸을 베베 꼬며 미친 듯 발광해야만 했다. 우, 우오오오오오오! 그래, 나 미쳤다! 나 이딴 내기나 하는 놈이다! 죽으면 죽었지 이런 내기 안 한다고 한 것도 다 취소! 그래그래! 마음껏 떠들어! 나 미쳤어! "내기… 종목은?" 나는 레이디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녀석의 남색 머리카락이 찰랑, 하 고 뒤로 넘어갔다. 놈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뒤로 쓸어 넘기며(아주 느끼함 에 극치를 달리시는군, 그래.) 천천히 말했다. "내기 종목은 내가 정해도 되겠지?" 뭐, 뭔가 불안하군. 정말, 뭔가, 너무너무 불길해. "안 돼!" "그래? 그럼 뭘 할건데?" 레이디안은 가소롭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한참 고민하다 크 으, 하는 소리를 냈다. 도저히 생각나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잘난 건 사실이지만 뚜렷하게 뭐 하나 탁! 하고 내세울 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내 가 좀 잘생긴 건 천하가 다 알고 있겠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잖는가? 아아, 몰라! 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흐응, 자신 있는 종목이 없나 보지?" 찌, 찔리는군. "하하하하하! 그, 그럴 리가! 자신 있는 종목이 너무 많아서 고르는데 좀 힘들뿐이다!" "그래? 그런데 왜 이마에서 계속 땀이 흘러?" 나는 레이디안을 빤히 노려보았다. 그러자 레이디안은 손을 휙, 뒤로 넘기면서 짧게 말했다. "됐어. 그냥 내 마음대로 종목을 정하지. 동의하지?" "도, 동의 못한다." "그래? 그럼 네가 종목을 정하라니까." "……." 한참을 생각해봐도 도저히 떠오르지가 않아, 나는 결국 이빨을 우득물며 항복을 선언하는 수밖에 없었다. 레이디안은 피식, 길게 한 번 웃더니 내게 손을 뻗었다. "좋았어, 칼레들린군. 그럼 이렇게 하지. 일단 세 가지 내기를 하는 거야. 첫 번째 내기 종목은 내가 정하고, 두 번째 내기 종목은 네가 정하고, 세 번째 종목은 적당히 알아서 정하도록하지. 물론, 세 번째 종목까지 갈 필요 도 없이 내가 이기겠지만." 나는 놈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한참동안 녀석을 빤히 노려보다가 결 국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좋아. 그럼 일단 첫 번째 내기 종목은." 레이디안은 말을 끊었다. 녀석의 입꼬리가 가늘어졌다. "마족에겐 좀 쓸모 없는 거지만……. 그래도 누가 인내심이 센가 내기하기 엔 제일 좋은 경기. 역시 그게 좋겠군." 뭐가? 나는 잔뜩 신이 난 것 같은 놈의 얼굴을 조금 불안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는 내 불길한 예감이 너무나 잘맞는다는 것을, 또 한 번 몸으로 깨닫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 "술 마시기! 어때?" "……." ==================================== 어제 말이에요.. 2009로스트 메모리즈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카무라 토오루씨에게.. 반해버렸습니다=_=;; 아아...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 Next : 2 : 아아... 연재 재개하겠습니다..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98802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24th February 2002 20:30:17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7-02-2002 19:49 Line : 230 Read : 1404 [6]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0 -------------------------------------------------------------------------------- -------------------------------------------------------------------------------- Ip address : 218.146.139.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훗, 설명할 것도 없겠지만 첫 번째 내기(내기라고 할 것도 없지만)에서 나 는 어처구니없이, 일방적으로, 단 한방에 패했다. 하지만 내가 너무 약해서 패했다고 생각하면 절대적으로 금물! 갑자기 날아든 공격, 각성마족이 한 번 마음먹고 첫 선방으로 기선 제압하겠답시고 날린 그 것을, 아직 파릇파 릇하기만 한 내가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후훗. 미안하다니까. 난 네가 비각성 마족인 줄 몰랐어." 뭐, 그것도 벌써 일주일 전의 일이다. 갑자기 튀어나온 녀석이 손이 내 옆 구리살을 파고들어 피가 한 동이나 흐르고, 살이 앞뒤로 좌악 찢어진 게 말 이다. 그래도 이 초인적인 육체의 회복능력이 나를 거의 정상으로 돌려놓긴 했지만, 아직 무리가 있다. "……." "아, 아니. 물론 조금의 가능성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지만. 하지 만 이제 괜찮지? 슬슬 두 번째 내기로 넘어가보자." "……." "훗, 삐졌어?" 갑자기 느끼한 웃음을 흘리며 녀석이 킥, 하고 웃었고 나는 그 웃음에 발 끈해서 소리쳤다. "……피를 한 동이나 흘리고 옆구리살이 앞뒤로 다 뚫렸어." "어머어머, 누가 그렇게 잔인한 짓을!" "너잖아, 이 자식아!!" 버럭 고함을 치자, 녀석이 생긋 웃는다. "고함치는 거 보니 이제 다 나았나 보군. 좋아, 슬슬 두 번째 내기 얘길 해볼까? 두 번째 내기는 네가 정하는 거야. 뭐든 자신 있으니까, 불러봐." 자신있는 얼굴로 녀석이 말했고,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쳤다 . 훗, 넌 모른다. 내가 옆구리살이 뚫린 그 날 내가 얼마나 이빨을 물면서 복수를 다짐했는지. 그리고 그 비책 역시 떠올랐다고! 좋아, 너 잘 걸렸다, 이 자식아!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래에? 그럼, 이제 내가 내기 종목을 부를 차례라 이거지?" "서열 89위의 이름은?" "나!" "예, 칼레들린님! 말씀해주세요!" "마리오나 카위스엔 아리스테인 타카타 클락 페이시온 칼렉트……." "예, 정답입니다!" "서열 92위의 이름은?" "나!" "예, 칼레들린님. 말씀해주세요!" "카세루… 카위나… 비바케리아에온 샬락토오스… 아, 미샤온……." "정답입니다!" 으하하하, 아하하하하! 시선을 돌려보니 이런 결과는 생각도 못한 듯, 레이디안의 얼굴에는 당황 이 가득했다. 나는 씨익 웃으며 다시 앞에서 열심히 문제를 내고 있는 마물 (다행히도 저번에 내가 죽어라고 싸왔던 그 마물처럼 흉악하게 생긴 마물이 아니라, 인간형이었다.)을 본 후, 다시 시선을 돌려 레이디안을 보았다. 레이디안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어처구니가 없 다는 말투로 말했다. "이봐, 넌 밥 먹고 이 것만 했나?" "훗! 머리 나쁜 놈은 평생 해도 못 외우는 거지." 내 놀림 가득한 말에 발끈할 만도 하건만, 레이디안은 신경 쓰지 않고 있 었다. 그렇다. 두 번째 내기, 즉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그 내기는 바로!! 그 명칭도 찬란한 <서열 100위 내의 마족들 이름 외우기!> 딴 말로 하면 < 마계를 빛내는 백 명의 위인들>뭐, 그런거랄까. 그런 걸 외우는 거 하면! 또 나! 아니던가. 흑흑흑, 로시엔의 엄청난 구박 속에서, 아이에드의 협박 속에서 서열 100위의 마족 이름을 달달달 외워야 했던 내 서러움을 알 자 누구냐! 그 엄청난 고초 속에서 자란 내가 이걸 까먹을 리 없지 않은가? 아무리 머 리 나쁜 작자라도 하루 온종일 이것만 외다가 볼장 다 봤다면 잊어버릴 리 가 없다. 그래. 100명 중 단지 몇 명의 이름만 더듬거릴 뿐! 우하하하하하! 어차피 이번 시합에서 레이디안 녀석은 처음부터 상대가 안 됐던 거다. "서열 32위의 마족은?" "나! 파리오켈리아 미사오 빈센티안 나이트 류 세키 아미스……." "서열 21위의 마족은?" "나! 루타 파세오니카 타오센 피마고 라이단 시얼 아디온 카리에탄……." 한참동안 나는 레이디안의 마물이 내는 문제를 풀면서 환희에 들떴다. 후 후. 로시엔. 그리고 아이에드. 내가 네놈들한테 처음으로 고마워 해야할 일 이 생겼다. 아아아아! 아이에드 물건 부순 것에 대한 벌으로 달달달 볶아서 외웠던 것이 이다지도 쓸모가 있을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정말이지 눈물 이 날 정도로 감동적이다. "서열 67위의 마족?" "나! 피리오니 키라네스 키리카 라켄엘크 르시도……." 죽을 때까지, 정말이지 서열 1위부터 100위의 순서를 다 외우고 외우고 또 외워야 했던 나는 피를 토하면서 마물이 내는 문제 하나하나를 놓칠 새라 눈을 부릅뜨며 답을 불렀고, 결국 나는 레이디안에게 단 하나의 문제도 뺏 기지 않고 외울 수가 있었다! "축하합니다, 칼레들린님. 당신의 승리입니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다 맞추셨습니다." 문제를 내고 있던 레이디안의 마물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고, 나는 그 순 간 감동에 젖어 벌떡 일어섰다. 오오, 인간 승리… 아니, 마족 승리다! "와아아아! 봤냐? 봤지, 이 변태 자……." 봤냐, 이 변태 자식아! 라고 외치려던 나는 그러나, 소기의 목적 달성에 실패하곤 자리에서 움찔 얼어버리고 말았다. "드르렁∼ 푸우∼ 드르렁∼!" "……." 그리고, 고개 돌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탁자 위에 엎어져서 침 질질 흘리 며 졸고 있는 남색 머리 변태의 모습이었다. "좋아, 세 번째 내기다." 입술을 우득 물면서 내가 한 말에, 레이디안은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였어. 두 번째 내기 결과 말이야." "뭐가 의외란 거야?" "아니, 서열 100위까지의 순서를 그렇게 다 외우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거든. 의외로 머리가 좋은가봐." 의외로라니!! "시끄러워! 세 번째 내기 종목은 어떻게 정할 거지?" 내 말에, 레이디안은 씨익 웃었다. "좋은 수가 있지. 일단, 너와 내가 각각 원하는 종목 두 개를 종이에 써서 통 안에 넣어 두는 거야. 그리고, 누군가 한 명이 종이를 뽑는 거지. 그러 면 공평하고, 좋잖아?"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내가 그리 밑질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 말에, 레이디안은 곧 어디서 났는지 모를(설마 품에 품고 다니는 건가? )종이 네 장과, 펜 두 자루를 가져왔다. 녀석은 펜 한 자루와 종이 두 장을 내게 내밀면서, 원하는 종목을 적으라고 했다. 나는 한참을 끙끙거리다가 한 쪽에는 '꽃 이름 외우기(아이에드 정원에 피어 있는 꽃 중 몇 개는 알고 있으니까.)' 다른 한 쪽에는 '누가 밥을 많이 먹나?'를 썼다. 뭔가 종목이 심히 비참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나마 제일 가능성 있 어 보이는 것이 누가 밥을 많이 먹나? 였기 때문에 나는 간절하게 '밥 많이 먹는 쪽이 이기는 내기' 가 선택되기를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레이디안 은 총총걸음으로 내 쪽으로 다가와, 내가 쓴 종이를 작은 통 안에 담았다. 자신이 쓴 종이 역시 통에 담은 그 녀석은, 통을 마구 흔들어 대더니(그래 봤자 종이 네 개 밖에 없는데 흔들긴 엄청 흔든다.)그 중 하나를 쏙 하고 뽑아 들었다. "뭐냐? 뭐가 뽑혔어?" 긴장된 마음으로 녀석을 향해 묻자, 녀석이 가까이에 다가와서 종이를 하 나하나 편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네 겹으로 접혀 있던 종이가 펴지는 것을 보았다. 제발! 제발 밥 많이 먹기 내기가 되야 하는데! "훗, 내 거로군." "……억!" 레이디안의 말에 나는 움찔 얼어버렸다. 슬쩍 웃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한 대 쳐주고 싶다는 욕구를 간신히 자제하면서, 나는 펼쳐진 종이를 바라보 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입을 딱 벌린 채로 얼어붙어 버렸다. "이거 괜찮겠지? 마족에겐 좀 쓸모 없는 거지만……. 그래도 누가 인내심 이 센가 내기하기엔 제일 좋은 경기. 역시 이게 제일 좋아." 녀석이 뭐라고 나불대도, 녀석이 들고 있는 종이에 적혀 있는 세 글자를 보고 얼어붙은 나는 녀석의 말에 대꾸할 정신도 남아있지 않았다. 녀석의 종이에 적혀 있는 그 말은. "혹시 너도 자신 있는 종목?" 「술내기」 ……였다. -------------------------------------------------------------------------------- Back : 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1 (written by 카르민) Next : 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29/수정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1554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3rd March 2002 11:39:01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7-02-2002 19:50 Line : 112 Read : 1380 [7]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1 -------------------------------------------------------------------------------- -------------------------------------------------------------------------------- Ip address : 218.146.139.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술! 술이란 무엇인가? "야, 술이 대체 뭐냐?" 진지하게 폼 잡고 앉아서 '술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고찰하고 있었던 나 는 그러나, 하나의 정의도 내리지 못한 채 멀뚱하게 고개를 올려 레이디안 을 향해 질문을 하는 어이없는 일을 저질러버렸다. 내가 고개를 돌려 삐딱 하게 바라보자, 여러 개의 공간을 왜곡시킨 이 이상한 저택의 한 구석에 나 를 데려온 장본인인 레이디안이 피식, 하고 가볍게 웃는다. 술이 가득 쌓인 창고랍시고 녀석이 나를 데려온 것은, 역시 다른 공간인 듯 했다. 까맣게 덮인 커튼 아래에 동그란 통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술? 술이란 알코올 성분이 있기 때문에 마시면 취하는 액체. 뭐야, 검은 털 고양이. 너 설마, 아직 한 번도 술을 마셔본 기억이 없는 거야?"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군. 훗! 가소로운 자식. 당연히 그럴 리가 없잖아, 이 빌어먹고 갈아먹고 씹어 먹을 녀석아! 내가 옛날에 술 때문에 라이메데스놈한테 얼마나 당했는지 네 놈 따위가 알아? 빌어먹을!! 내가 정말로 죽을 뻔했단 말이다, 그 때는!! "술 정도는 마셔 봤어!" "그래? 역시……." 살짝 고개를 끄덕인 레이디안이 웃었다. "뭐랄까, 원래 술이라는 건 마족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지. 마족의 몸에는 알코올 따위는 듣지도 않으니, 술은 먹으나마나한 거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문제는, 술을 마시려면 꼭 한자리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거다. 인내심 테 스트하긴 딱 좋아. 마족이 한 자리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해야한다 ! 아아, 정말이지 상상만 해도 저릿저릿하지. 지겨워 죽을 지경이야. …원 래 마족들 사이에서 술이라는 건 인내심 테스트용으로나 이용될까…… 대부 분이 술 따위는 싫어! 라는 반응을 보이지만, 난 꽤나 좋아하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이 술이라는 것만 홀짝이는 것도 꽤 좋아. 게다가, 술은 향기가 좋지." 하, 할 말이 없다. 술이라는 게… 원래 마계에서는 인내심 테스트용이란 말인가? 하지만 아이에드나 로시엔 녀석들은 술이라는 걸 절대로 마시지 않 았는데……. 게다가 <인간들의 삶>이라는 책에도, 술에 대한 건 나온 적이 없었다고! "술 먹기 테스트는 정말 재밌지." 썩을, 뭐가 재밌어? "한 사흘을 한 자리에 죽치고 앉아서 술만 마시고, 둘 중 하나가 자리를 뜰 때까지 그 싸움은 끝나지 않으니까. 술 핑계를 대지만, 결국은 인내심 싸움이야. 후훗, 검은 털 고양이. 안됐지만 이번 내기는 내가 이겼다. 난 여태까지 이거 해서 져본 적이 없다." 그, 그러냐? 난 이거 먹고 이성 날아가 본 적은 있다. 우으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끔찍하다고! "자아, 오늘은 샤운드를 먹어볼까……." 한참동안 무엇인가를 뒤적거리던 놈은 곧 커다란 통 하나와 자그마한 잔 두 개를 들고 웃으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뭔가 소름이 좌악 돋아나는 것을 느끼며 레이디안을 올려다보았다. 레이디안의 방긋 웃는 얼굴을 본 것은 그 직후. 나는 눈앞에 있는 그득한 하얀 액체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자아, 원 샷이다." "……." 잠시 침묵. "……이봐, 안 먹나?" 한참의 침묵이 짜증스러웠는지, 자기 잔에 술을 따르고 그것도 모자라 내 잔에도 술을 따른 녀석이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나는 으음, 하고 중얼 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아, 안 먹어도 되지 않을까?" 내 말에 의아해진 듯, 녀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냐, 그 말은. 안 먹으면 안 먹는 거지, 안 먹어도 되지 않을까, 라니. 너, 설마 이 승부 포기할 셈이냐?" 미쳤냐! 그럼 내가 네놈의 검은털 뭐시긴가라는 걸 해야하는데! 죽어도 그 딴 건 싫엇! "그,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마셔!!" 단호하게 말하는 놈의 눈에는 인정이고 사정이고 없었다. 나는 내 손에 들 어온 술잔을 보며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그래, 까짓 거 한 번 마셔보자. 혹시 알아? 그 동안 술에 대한 면역이라도 생겼을지. 맞다. 대책 없이 저 자식의 검은 털 고양인가 뭔가 하는 닭살 돋는 것이 될 바에야 차라리 먹고 보는 거다! 내가 이길지도 모르잖아! 로시엔과 이 놈이 왜 똑같이 생겼냐 하는 건 반드시 알아야 해!! "이익!!" 마시고 보자! 일단 마시고 보자고!! 나는 입술에 술잔을 갖다대고, 그대로 잔을 거꾸로 들었다. 타는 듯한 갈 증이 목에서부터 흘러, 위까지 싸하게 적시는 것을 느낀다. 눈을 질끈 감았 다. -------------------------------------------------------------------------------- Back : 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2 (written by 카르민) Next : 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0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1554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3rd March 2002 11:39:04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7-02-2002 19:51 Line : 357 Read : 1667 [8]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2 -------------------------------------------------------------------------------- -------------------------------------------------------------------------------- Ip address : 218.146.139.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딸꾹…… 흡…… 히잇!" 아까 전부터 계속 튀어나오고 있는 이 이상한 발음에, 난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딸꾹이며 히잇이며 히끕! 뭐 이런 단어들이 아까부 터 끊임없이 입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절대로 내 의도가 아니었다. 대체, 이런 게 왜 튀어나오는 건데? 응? "이, 이봐." 말없이 앉아 술을 홀짝이던 레이디안 역시 내가 술을 마시며(그 이상한 소 리를 내고 있노라니 온 몸이 상하로 마구 꺾이며 경련을 일으켰다.)몸을 비 틀어대자 놀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씩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을 느낀다. 우우, 저번에도 술이라는 거 마셨을 때 이런 비슷한 경험을 했었는 데. 시야가 흐려진 다음에는… 발음이 꼬이는데……. "우잉……." 허억! 정말이지 발음이 꼬이고 있다. 정신은 그래도 멀쩡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마치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있는 것 같다. "……잠깐만, 너. 설마 취한 거야?" 어이가 없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는 녀석을, 샐쭉한 눈으로 한 번 노려 보아 주었다. "남이야 취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지? 딸꾹―! 우씨… 딸꾹, 마음에… 딸꾹 , 안 들어!" 대체 내가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거야? 잘은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기분이 좋다는 것 하나는 분명한 것 같다. 옛 날, 카민이며 라이메데스와 함께 술을 먹었을 그 때는 속이 빙글빙글 돌아 위 안에 있는 소화물들을 확인하기에 바빴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다. 오 히려 가볍다. 온 몸이 너무너무 가뿐해서, 이대로 양 손을 뻗으면 하늘을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몸 전체가 하나의 깃털 같다. "핫, 취한 거야? 설마? 설마 취한 거야?" "뭐라는 거야… 딸꾹∼." 우우, 하는 소리를 내며 녀석을 노려보자, 녀석이 풋, 하고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푸하하하! 아하하하∼! 얼굴 빨개진 것 좀 봐! 아하하하! 으하하하하핫! 하하∼ 하하하!" 이… 이 자식이 정말! 왜 그렇게 깔깔대면서 웃는 거야? "그, 그만 웃엇! 계속 웃으면… 나아빠아아!" 내가 버럭 고함을 치자, 내 눈앞에 있는 녀석이 갑자기 오른손으로 자신의 입을 턱, 하고 틀어막더니 눈을 가느다랗게 떨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 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뭐가 그렇게 무서운지, 온 몸을 부르르 떨면서 내 쪽을 보지 않으려고 아주 용을 쓴다. "어디 아파?" 내 질문에, 그 탐스러운 남색 머리카락으로 자신의 면상을 가리고 있던 놈 이 키득, 하고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쿡, 쿡쿡. 아, 아니. 괘, 괜찮아." 뭔가 즐거운 일이 있는지, 녀석은 계속 키득거리며 내게 말했다. 나는 그 실실거리는 얼굴에 갑자기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서, 소리를 빽 질렀다. "씨이! 웃지마! 기분 나빠!" "아아, 쿡… 미, 미안. 안 웃을게. 안 웃으면 되지? …풋!" 뭐야. 안 웃으면 되지? 라고 해놓고 왜 갑자기 풋, 하고 웃는 건데? 정말 이지 기분 나쁘단 말이다! "기분 나쁘다고 했잖아. 왜 웃어? 딸꾹…! 후웅, 웃지 말라니까." "쿡, 으. 으으응. 아, 안 웃을게. 킥, 킥킥킥." 이씨, 안 웃는다고 해놓고 저 자식이 계속 웃네. 눈을 부릅뜨는데, 자식이 이상하게도 날 힐끔힐끔 훔쳐보며 다시 웃는다. "하하하하! 보, 보아하니 알겠군. 하, 하하하핫! 아, 아이에드 엘버지운 피엘이 왜 그렇게 싸고돌았는지. 큭큭큭." "뭐? 아이에드?" 멍한 상태에서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이름에 놀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 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아직도 술을 홀짝이고 있던 이 변태 마족 놈이 살짝 눈썹을 내리며 웃는다. "그래, 아이에드 엘버지운 피엘 블러드 아미스 류. 서열 3위의 마족, 원한 다면 마계를 한 손에 쥘 수도 있는 그 대단한 마족 말이다. 그런 그가 왜 그렇게 널 싸고돌았는지, 이제 알 것 같다고. 후훗, 아마도 네가 무진장 귀 여워서 그런 거겠지. 후후, 그도 참 응큼하단 말야." "아이에드가 네놈이랑 같은 줄 알아!?" 꼬이는 혀를 억지로 풀며 버럭 고함을 지르자, 레이디안은 뭔가 자신이 상 처받았다는 얼굴로(나, 나가 죽어라. 제발!!)나를 보며 몸을 베베 꼬았다. "아아, 그렇지, 그렇지. 아이에드 엘버지운 피엘이 나와 같을 리가 없지, 쿡쿡." "딸꾹, 당연하지!" 녀석의 눈을 노려보며 그렇게 말하자, 녀석이 씩 웃는다. "완전히 취했네. 눈이 풀렸어." "안 취했어!!" 뭘 취해? 나 안 취했어? 취한 게 다 뭐야? 나 멀쩡해. 그런데. ……취한다는 게 뭐야? 옛날에 라이메데스랑 카민도 그런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에. 그 단어의 뜻을 알기 위해 나는 한참동안 머리를 굴렸지만, 아무리 생각해 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결국 고개를 갸웃한 것을 마지막으로 '취했다 '의 뜻을 스스로 알아내는 것은 포기하고 말았다. "근데 취한 게 뭐야?" 나는 고개를 돌려 레이디안을 향해 물었다. 뭔가 이상하게 흐릿하게 보이 는 로시엔 판박이 변태가 실실 웃으며 앉아 있는 모습이 흐릿하게 시야에 맺힌다. "우하하하핫! 하하하핫! 하핫! 너… 너, 진짜 재미있는 녀석이다." "뭐라는 거야, 씨이!" 동문서답이라고, 전혀 상관없는 대답이 튀어나온 것에 화가 난 내가 버럭 고함을 치는데, 녀석이 씨익 웃으며 능글맞게 대답했다. "아니, 그냥 귀엽다고." "웃기지마. 누가 귀엽다는 거야, 이 변태야!" "그 와중에도 변태는 빼먹질 않는군." 훗, 하고 웃으며 녀석이 말했다. 나는 으응, 하고 중얼거리며 다시 손을 들어 앞에 있는 걸 조금 마셨다. 내가 잔을 집어 든 순간 레이디안이 어어? 하는 얼굴을 하긴 했지만, 단지 그것 뿐, 녀석은 내게 어떤 제지도 가하지 않았다. 에에, 다행이다. 뺏어 먹으려는 게 아니었구나. "우웅∼." 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지는 것 같은 기분에, 나는 다리를 축 앞으로 뻗고 팔은 뒤로 뺀 채 편하게 기대어 누웠다. 순간, 다시 한 번 가벼운 웃 음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뭐라고 말하는 것도 웃기겠군. 이번 승부는 내 승리야, 검은 털 고양이." 중얼, 녀석이 말했다. 몸이 너무 가벼워서 날아갈 것 같았던 방금 전과는 달리 갑자기 무거워진 몸이 귀찮아서, 나는 네 마음대로 해! 라고 크게 외 쳐버리고 말았다. 그 때 녀석의 얼굴에 뭔가 이상한 미소(훗날 생각하면서 알아 낸 건데, 그것은 분명 사악한 미소였다.)가 맺혔다 순간적으로 사라지 는 것을 보았지만, 그것 역시 너무 피곤해서 무시해버리고 말았다. 후아, 하는 소리를 내면서 나는 술통에 기대앉았다. 몸이 노곤해져왔다. 나는 눈을 빠르게 감았다 뜨면서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있지 있지 있지……." 내가 있지있지, 라는 말만 한참동안 반복하자 지겨워졌는지 레이디안이 뭐 냐, 라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헤에, 하고 웃으며 녀석을 향해 말 했다. "왜… 그 녀석들 날 찾으러 안 오는 거야?" "뭐?" 헤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녀석은 놀랐다는 표시를 온 몸으로 해 보였다. 온 몸으로 정말로 놀랐다는 양, 눈까지 동그랗게 떠가며 녀석이 뭐 ? 라고 반문했다. 나는 입가에 가볍게 미소를 문 후, 방긋 웃으며 녀석의 그 말에 대꾸해 나갔다. "헤헤∼! 그러니까 말이야. 아이에드 엘버지운 피엘, 그 녀석이랑……. 아 이시 사일런트 로시엔, 그 녀석 말이야. 그 녀석들 말야? 왜, 뭣 때문에 날 찾으러 안 오는 거야?" 뭔가 한 마디 해줬음 했는데, 이 변태 녀석은 말이 없었다. 난 대답이 있 고 없고에 신경쓰지 않고, 계속 말을 잇기 시작했다. "우웅, 나도 알고 있어. 그 녀석들 무지 바빠. 딸꾹… 아이에드도 엄청 바 쁘고… 딸꾹, 로시엔도… 엄청, 바빠……. 그치만……." 나는 말을 하다 말고 손가락을 꼭 쥐었다. 뭔가 속에서 울컹,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울컹거리는 것은 처음에는 단순한 고통이었지만 곧 커다란 물 방울의 결정으로 변했고, 그 커다란 물방울의 결정은 단지 내 안에서 머무 르지 않고 바깥으로 튀어나와 나를 바보로 만들었다. "그치만…. 알고 있지만…. 그래도 보고 싶어." 속이 아파. 그래서, 눈물이 나. 눈물이 난 이유는, 단지 속이 아팠기 때문이야. "보고 싶어……." 눈물이 나는 것은, 단지 그 이유뿐. "흐윽, 그 바보놈들이 보고 싶어." 가끔 가다간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다. 심장이 아플 만큼 그리울 때가 있다. 미칠 만큼 그리울 때가 있다. "내가 보고 싶어하는데, 그런데 왜 보러 오지 않아? 훌쩍… 언제나 내가 해달라는 거 다 ∼ 전부 다아 해준다고 했으면서… 그러면서… 거짓말… 흑 ……." 대화를 하고 있는 걸까, 나와 이 변태는? 청자인 레이디안은 아무 말도 하 지 않고, 화자인 나만 죽어라고 떠든다. 그래도, 한마디 대꾸가 없어도, 그 래도 마음이 후련해지는 건 대체 무슨 이유야? "왜 둘 중 누구도, 보러 오지 않아? 아이에드랑 로시엔이랑, 내가 원하는 거면… 뭐든 하는 녀석들이었는데 왜, 왜, 왜, 보러 오지 않아? 나, 내 힘 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아주 조금은, 녀석들이 올 거라고… 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한참동안 흐르는 그 눈물이 부담스러워서, 나는 킁, 하고 코를 들어 마시 며 검은 정장 끝을 눈가에 가져갔다. 쏘옥, 하고 눈물이 스미는 소리가 난 다. 한참동안 눈물을 닦고 있는데, 갑자기 무엇인가 따뜻한 것이 느껴졌다. 볼 끝에 닿는 그 것은 너무 따뜻해서, 나는 그만 그 것을 꼭 잡아 버렸다. "흠, 어리군." 그리고, 그 정체 모를 따뜻한 것이 나를 작게 토닥였다. "보고싶어도, 못 올 사정이 있는 거다." "……훌쩍, 사, 사정? 알아, 나도! 사정… 사정 있다고… 그녀석이 말해줬 어." 내 목소리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이상했나보다. 내가 그렇게 말 하고 고개를 올린 순간, 레이디안이 뭔가 굉장히 놀란 얼굴을 했으니까. 눈 물이 가득 묻은 눈을 들어 변태를 본 순간, 변태의 눈이 상상을 초월할 만 큼 동그래지는 것을 보았다. 이상해, 로시엔하고 똑같은 얼굴로 로시엔과 전혀 다른 표정을 짓는다. 로시엔은 아무리 놀라도, 저런 얼굴은 절대로 하 지 않는데. "피에트? 피에트!?" 내가 눈물을 스윽 닦고 있는데, 눈만큼이나 입도 크게 벌린 녀석이 벼락같 이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의 충격이 어찌나 컸던지, 빙글빙글 정신없이 희 뿌옇던 시야가 갑자기 밝아지는 것 같았다. "……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순간 레이디안이 하, 하고 헛바람이 나는 웃음을 지었다. 내가 시선을 거두지 않고 빤히 보자, 갑자기 하하하! 하고 크게 웃 는다. "이런…… 이런 거였나. 표정 하나에… 사람이 달라 보이는군. 우는 모습 을 보니까 딱 알겠어. 그대로야, 판박이라고." 킥, 하고 웃음 짓는 녀석의 입매가 가늘었다. "이거였나, 아이에드씨? 이 꼬마에게 집착한 이유가……. 이 꼬마에게 그 렇게 헌신적이었던 이유가. 킥, 그런 거였나?" 에?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고개를 한 번 갸웃, 하자 녀석이 피식, 하고 길게 웃는 얼굴이 그대로 드 러났다. 나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쳐서 어질어질했던 머리가 단박에 맑아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 미소가, 녀석이 지은 그 미소가, 너무 나 오싹했기 때문이다. 방금 보였던 그 미소는… 뭔가가 틀려! 전혀 틀렸다. 절대로, 그 얼굴은 로시엔의 얼굴이 아니었다. 왜 로시엔이랑 똑같다고 생각한 거야? 라고 스 스로에게 묻고 싶을 만큼, 그 얼굴은 로시엔과 닮지 않은 얼굴이었다. 레이디안이 짓고 있는 저런 표정의 얼굴, 로시엔은 하지 않는다. 비록 나 와 아이에드 앞이 아닌 다른 곳에선 차갑고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다고 해 도, 로시엔은 그래도 이 녀석처럼 이렇게 오싹한 표정은 짓지 않아. 로시엔 은 무표정하지만 따뜻한 얼굴을 갖고 있지만, 이 녀석은 아니야. 웃고 있지 만 너무 차갑다! 너무 차가워서, 나를 이대로 얼려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 고 있다. "아아, 그런 거였어. 빚을 갚고 있는 거였다, 아이에드 엘버지운 피엘. 그 도도한 양반이… 킥, 그런 거였어. …그런 식으로 갚고 있는 거였군. 후 훗, 로시엔도…… 알고 있나?" 녀석이 너무 환하게 웃고 있어서, 닭살이 아닌 소름이 돋았다. 갑작스럽게 온 몸을 엄습한 추위에 놀라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자, 환하게 웃는 녀석 의 얼굴이 내 쪽을 향해 다가왔다. "너는 어디까지 알고 있나, 까만 털 고양이." 뭐가? 무슨 말하는 거야? "말해봐,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 엘버지운 피엘에 지나치게 강세를 둔다고 생각하면, 내 착각인 건가? 차가 운 공기가, 녀석의 온 몸을 감싸고 있는 그 차가운 공기가 내 마음을 얼어 붙게 만들었다. 술기운이 올랐던 마음과 위와 얼굴도 모두 싸하게 굳었다. 나는 차분하게 가라앉는, 아니, 차갑게 가라앉는 마음을 느끼며 천천히 입 을 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 입술에서 차가운 말이 새어나오자, 레이디안이 웃는다. "아아, 이런! 술이 깼나보군. 자아, 다시 한 잔 마시는 게 좋겠어." 그 말과 함께, 레이디안은 자신이 앞에 놓여있던 술잔을 들어 술을 가득 부었다. 나는 그 술잔을 탁 하고 쳐냈다. 술잔은 챙, 하는 소리와 함께 깨 져 술잔 안에 담겨 있던 술을 그대로 밖으로 분출해냈다. "무슨 말이야? 아이에드가……. 뭐라고? 빚을 갚고 있다니? 무슨 말이야? 피에트, 피에트라면 나도 알아. 그, 그가 나의 아버지지? 그가 마족이지? 그가…" 내 질문에,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던 레이디안이 환하게 웃었다. "술, 많이 깼다. 조금 더 마셔라." 그 말과 함께 이번에는 내 잔을 들어 거기에 술을 붇는 레이디안의 손을 나는 휙, 하고 뿌리쳤다. 이번에도 술잔은 저 멀리로 내던져져, 챙! 하는 소리와 함께 깨져 산산조각, 파편조차 남지 않고 엉망이 되 버렸다. "무슨, 말이야? 너……. 뭔가 알고 있…… 욱!" 채 뭔가 말하기도 전에, 허리에 뭔가 둔탁한 것이 퍽, 하고 들어와 박혔다 .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이익, 하는 소리를 낼 틈도 없이, 허리를 한 번 쳤던 그 것은 그대로 내 복부에 들어와 박혔다. 신음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말을 듣지 않는 고양이는." 의식이 멀어짐에 따라 너무도 멀게, 멀게 들려온 목소리는, 지나치리만큼 낮았다. "목에 줄이 달린다는 걸 명심해." ========================================= 카르민입니다. 일단 4연참으로 문을 여는군요. 후우~~ 기쁩니다;ㅁ;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기대하십시오=_= 연참폭군 카르민이란 별명이 왜 붙었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 Back : 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3 (written by 카르민) Next : 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1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1554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3rd March 2002 11:39:07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8-02-2002 18:01 Line : 238 Read : 1273 [9]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3 -------------------------------------------------------------------------------- -------------------------------------------------------------------------------- Ip address : 61.76.191.2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 ◇ ◇ 환한 햇살이 비쳐온다. 동그랗게 뭉쳐진 채로 뺨 위를 구르는 그 밝은 햇 살은, 돈으로 환산할 수조차 없는 정말로 귀하고 화려한 보석. 반짝이는 그 것이 입술에 와 닿는다. 눈두덩이 위에 가만히 쏟아지는 그 햇살에,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일어나셨어요?" 눈을 뜨자마자 들려온 맑은 미성에 난 멈칫했다. 잔뜩 무거워진 몸이 부들 부들 떨리고 있었다. 귓가에 뭔가가 닿아 앵앵거렸다. 나는 웬일인지 지끈 지끈 아파 오는 이마에 가만히 손을 얹은 후,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몸 을 틀려고 했다. 그러나 막 몸을 돌린 순간, 나는 멈칫하며 몸을 도로 돌려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온 몸이 무엇에 묶인 듯 답답해서 움직일 수가 없었 던 것이다. 축 하고 늘어진 것 같은 몸은 맞지 않는 옷처럼 너무 답답했다. 내가 잔뜩 인상을 쓰는데, 그 맑디맑은 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깨셨으면 어서 일어나서 이거 드세요. 디안이 직접 끓인 스튜예요. 맛있 어요." "……에?" 가만히 시선을 올렸을 때, 나는 맑은 한 쌍의 눈과 마주하곤 멈칫하고 말 았다. 무엇인가가 시야에 동그랗게 들어차 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시선 을 위로 올리자, 낯설지 않은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너, 너는……?"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내 눈앞에 있는 것은 한 소녀였다. 은회색의 머리카락을 찰랑대며 웃고 있 는. 백지 같이 하얀 얼굴에, 순수함 밖에 없는 표정을 가진 그 소녀, 환하 게 웃고 있었다. 검은색의 메이드 복과 하얀 에이프런. "너, 너…… 그, 그 머리카락 괴물!!" "꺄아아아아! 머리카락 괴물이라니! 실례에요!"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마자, 비명소리까지 버럭 질러대며 실례라는 말 을 하는 그 소녀를 향해,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하아? 하는 소리를 내는 것뿐이었다. 내가 아아, 하는 얼굴을 한 채로 자신을 보자, 그제서야 뭔가 자신도 쑥스러움을 느꼈는지 히히, 하고 가볍게 웃어 보인다. "어제요, 주인님이 손님을 이 방으로 모셔다 드리라고 했어요." "……주, 주인님이라면, 그 변태?" 뭔가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그 소 녀가 생긋, 웃는다. "예." 어제 일을 생각해보려고 애썼다. 그런데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냥 머리가 무겁다, 그 정도일까? 뭔가……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시선을 움직였다. 문 앞에서 스튜를 들고 선 디안 의 모습이 보였다. 디안은 총총총 걸음을 옮겨 다가오더니, 내 앞에서 스튜 를 턱 놓았다. "드세요." "아, 나, 나는……." 스튜 같은 건 안 좋아해, 라고 말할 틈도 없이,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안 먹으면 나쁜 어린이에요. 알지요?" "……허걱!" 절대로 나쁜 어린이예요, 하는 유치한말 때문에 내가 허걱 소리까지 내 가 며 그 스튜를 먹은 게 아니었다. 그렇게 말한 순간 디안의 머리가 갑자기 길어져 사방으로 그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데, 그걸 보고도 스튜를 먹지 않는다고? 후후 …됐어. 난 아직 더 살고 싶어. "……그 때, 녀석들……. 어떻게 됐어?" 스튜를 한 스푼 뜨면서 은근슬쩍 디안에게 질문했다. 디안은 내가 스튜를 먹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헤헤, 디안은 몰라요." 모르겠다고? 나는 스튜를 한 스푼 떠서 다시 입 안으로 향했다. 하아, 하고 저절로 한 숨이 뿜어져 나왔다. 한참동안 스튜를 먹던 난, 어느 순간 조금 이상한 것 을 발견하고 움찔했다. 내 쪽에서 약간 비스듬히 서 있던 디안의 목 아래에 새겨져 있는 이상한 문양. "이봐, 그게 뭐지?" "응? 어떤 거요?" 나는 대답대신 턱으로 그녀의 목을 가르켰다. 그러자 디안이 생긋 웃는다 "아아, 이 목걸이요? 디안 보물인데요." "아니, 목걸이말고." 나는 그녀의 목에 새겨진 문신 비슷한 것을 말한 것이었는데, 디안은 내 말을 잘못 알아듣고는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가만히 들어 보이고 있었다. 디안의 목에 그려져 있는 문양이 너무 특이해서 모르고 있었는데, 목의 문 양만큼이나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도 특이한 모양을 갖고 있었다. 굉장히 특색 있는 목걸이랄까. 은색,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목걸이었다. 마법문자, 룬어로 추정되는 글씨가 바탕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 어떤 거요?" "그 목걸이 밑에 있는 이상한 문신 같은 거." 내 말에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디안이 살짝 웃었다. "아아, 이거요?" 그 말과 함께 디안이 이번엔 정확하게 자신의 목 부분에 손가락을 갖다댄 다. 그래, 그것이었다. 굉장히 짙은 푸른색(그 변태 놈의 눈동자 색과 비슷 한 미드나잇 블루빛?)의, 상흔처럼 보이기도 하고 예술작품 중 하나로 보이 기도 하는, 그런 문양이. "아아, 여기 있는 이건요. 주인님이 해주신 거예요. 디안을 편하게 해주시 려고 만들어 주셨어요. 그런데, 디안한테는 소용이 없었어요. 헤헤헤." 무슨 말이야?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녀석, 이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디안을 보았다. 그러 자 디안이 생글생글 웃는다. 스튜를 옆쪽으로 치우고 후우, 하고 낮게 한숨 을 쉬노라니 옆에서 디안이 방글방글 웃는다. "저기, 그러면 이제 오빠도…… 주인님의 '고양이' 중 하나가 된 거죠?" "푸웃! 켈룩! ……쿨럭! 쿨럭쿨럭!" "에이, 다 튀었다." 채 삼키지 않았던 스튜가 파바박 튀었음에도(더, 더러워!) 화가 나지 않은 표정… 아니, 화가 다 뭔가? 생글생글 방글방글 웃는 얼굴로, 에이프런에 튄 스튜를 할짝할짝 핥아먹는 디안을 보면서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대, 대체 뭐냐고!! "뭐가 고양이야, 고양이가!!" 버럭 고함을 치자 오히려 의아한 것은 자신이라는 듯, 이상하게 고개를 갸 웃한다. "으응? 하지만, 이 방은 주인님들의 '고양이 오빠들' 이 있는 방인걸요?" 이상하다는 듯이 말하는 디안의 얼굴은 마치 당연한 사실을 부정당한 자의 그것과 같았다. 나는 뭔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고 분통이 터져서 고함을 쳤다. "누가 그 녀석 고양이라는 거야? 난 분명히…!" "어제 내기에서 내가 이겼으니까, 고양이 맞다." 엑? "아아, 주인님. 오셨어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디안의 뒤에, 살랑대는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레이디안이 보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런 녀석을 바라보았다. 레이디안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이지, 검은 털 고양이? 자자, 첫 번째 내기로 내가 제안했던 격투는 완벽한 나의 승리였어. 그리고 두 번째. 그건 네가 제안했던 거였 지. 서열 외우기. 그런 대결을 제안하는 녀석은 너밖에 없겠지만, 어찌됐든 네가 이겼어. 그리고 세 번째 대결, 술내기였지?" "……." 내가 아무 말 없이 빤히 바라보자, 녀석이 내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했는지 생긋 웃음을 짓는다. 그 얼굴이 너무 짜증나서 한 대 밟아줬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나란 인간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제는 내가 이겼어." "뭔 헛소리야? 어제 분명……." 「딸꾹…… 왜…… 보러 오지 않는 거야?」 「너 바보냐? 보러 오지 않는 게 아니라, 못 오는 거야…….」 막 말을 꺼내려던 나는, 갑자기 생각난 단어들의 조합에 멈칫했다. 완전히 냉동되었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른다. 뻣뻣하게 굳어서 입술만을 뻐끔거 리는데, 레이디안이 환하게 웃었다. "생각났어?" "……." 뻐끔뻐끔 밖에 못하는 얼굴로, 녀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레이 디안이 입가에 밝은 미소를 짓는다. "모른다고 해도 소용없지. 내기는 내기였어. 이젠 자타공인이 검은 털 고 양이다." "누,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 대로지." 활짝 웃는 녀석의 얼굴은 너무 짜증났다. 나는 속으로 킷, 하고 중얼거리 며 주위를 훑어보았다. 턱,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내 손목을 잡았다. 세 게 뿌리치고 몇 대 밟아줬다. "털을 뽑는 재미는 굉장하지. 하지만, 네 털은 뽑고 싶지 않다, 검은 고양 이. 난 고양이를 괴롭히는 것도 좋아하지만……." 몇 대 밟히던 레이디안이 어느 순간,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움찔했다. 목소리 톤이 너무나도, 로시엔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드 는 녀석의 얼굴은 로시엔과 완전히 동일했다. 눈빛 역시 로시엔의 그 것과 같다! 한참동안 그런 녀석을 보고 있노라니, 녀석이 씨익 웃는다. "……길들이는 것도 재미있을지 모르지." 뭘 길들이겠다는 거냐, 이 빌어먹을 자식아! -------------------------------------------------------------------------------- Back : 10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4 (written by 카르민) Next : 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2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1554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3rd March 2002 11:39:09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8-02-2002 18:01 Line : 224 Read : 1242 [10]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4 -------------------------------------------------------------------------------- -------------------------------------------------------------------------------- Ip address : 61.76.191.2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안 먹어요?" "안 먹어." 두 팔을 모으고 무릎위로 얹은 채 눈을 치켜 뜨며 내가 한 말에, 디안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스프와 빵이 나를 유 혹하고 있었지만, 나는 애써 그것들의 유혹을 뿌리치려 애썼다. 디안의 곁 에 서 있던 레이디안은 내 얼굴을 흘낏 바라보며 씩 웃었다. "왜 안 먹어?" "……네 놈의 검은 고양인가 뭔가가 될 바에야 그냥 굶어 죽겠다." "남자답지 못하군. 지면 고양이가 된다고, 너 나랑 약속했어." 나는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녀석 역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이빨을 우득 물며 저 썩을 놈의 자식이!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레이디안의 옆 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자그맣게 울려온다. "저어, 이 분… 이틀 동안 아무 것도 안 드셨어요." "원래 이 녀석은 안 먹어도 상관은 없을 거야." 레이디안은 여전히 시선은 내 쪽으로 고정해둔 채로 딱 자르듯 말했다. "그렇지, 칼레들린? 원래 마족이니까 뭘 먹을 필요는 없지?" "……." 뭘 먹을 필요라고? 그, 글세. 잘 모르겠다. 다만, 3일 동안 굶었을 때 진 짜 죽고 싶을 만큼 배가 고팠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디안, 걱정하지마. 아, 먼저 나가봐."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레이디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디안을 향해 말했고, 디안은 그런 레이디안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예, 주인님."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곧 디안이 바깥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검은색 메이드 복이 가볍게 물결치는 모양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다 시 레이디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레이디안은 웃고 있었다. 로시엔과 다 름없는, 그 얼굴로.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한데, 너? 너와 같이 왔던 녀석들의 안부는 한 번도 안 물어봤지?" 레이디안의 말에 나는 입술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 "흥, 물으면 가르쳐 주기는 할건가?" "……물론, 가르쳐 주진 않겠지." "그럴 거 뻔히 알고 있는데 왜 내가 너한테 가르쳐 달라고 사정을 하겠어? 너 바보 아냐?" 내 말에 레이디안이 으음,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도 그렇군." 그도 그렇군이 아니야, 이 자식아. 나도 묻고 싶지만 꾹 참고 있단 말이다 ! "……너, 대체 어쩔 셈이야? 말했듯이 아이에드 엘버지운 피엘은 내 밥이 고, 아이시 사일런트 로시엔은 내 유모다. 세이아나 아나드리엘 로엔이랑도 아는 사이야!" "뭐?" 순간, 레이디안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오, 이제야 약발이 좀 먹히는 건가? "세이아나랑 아는 사이라고? 네가?" "그래! 그러니까 더 이상 나 건드리지 말고 얌전히 보내!" 내가 소리를 지르자 레이디안이 으음, 하는 소리를 낸다. "……그럴 수야 없지." "뭐야?" "싫다고 했어." 그 말과 함께 레이디안이 피식, 웃는다. "빌어먹을, 어째서?" 내 질문에, 레이디안이 미소지었다. "그냥." ◇ ◇ ◇ "밥 먹어요." "싫어." 이 빌어먹을 장소에 갖힌 지도 어언 4일째다. 저 놈이 주는 밥 따위 안 먹어! 라면서 나는 지금까지 배째! 하는 식으로 나가고 있다. 내가 밥을 거절하자, 디안은 뭔가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한 번 바라보았다. 뭐랄까,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굉장히 안타까운 것 같 기도 했다. 어딘지 모르게 아릿해 보이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던 디안은 힘 없이 자신이 가져온 음식을 그대로 바깥으로 가지고 나갔다. 딸칵, 하는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루에 대 여섯 번씩 디안은 이 방에 들린다. 세 번은 밥을 가져오는 거고, 나머지 시간 때엔 무엇인가 말 을 들려주는 거다. 이 디안이라는 애는 나한테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 중의 대부 분은 저 빌어먹을 놈의 엽기 사이코 레이디안에 대한 것이었다. 자기 이름의 디안은 레이'디안'에서 지어진 거라느니, 레이디안이 생긴 것 과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따뜻한 분이라느니(저 얼굴 어디가 생긴 게 따뜻한 거냐? 로시엔은 차갑게 생겼다는 평을 받는 녀석이었단 말이다! 따뜻한 녀 석들 다 얼어죽었냐?), 사실은 마음에 여리신 분이라느니(아아, 저 녀석이 여리다니. 그럼 난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지는 거울 같이 약한 마음을 가진 녀석이로군.)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나는 그 말같지도 않은 소리들을 들을 때마다 짜증이 났지만, 내가 화를 내려고 할 때마다 그 녀석의 머리가… 그 공포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쳐 웅웅 하는 소리를 내는 지라 화도 낼 수 없었다. "호호호! 우리 주인님, 정말 따뜻한 분이시라니까요." "따뜻한 게 다 얼어죽…… 헉!" 그러나 하고 싶은 말하기도 전에, 난 내 목을 휘감아 버릴 듯한 기세로 방 을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발견하게 된다. 고오오오, 하는 소리와 함께 방안 에 가득 차는 검은 오오라를 발견하면, 난 비참하게도 공포에 찬 목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그럼. 너무 따뜻한 녀석이지. 하, 하하. 너무 따뜻해서 내가 타 죽을 지경이야." "오호호호, 그럼요!" …흐윽. 나 칼레들린, 성격 많이 죽었다 진짜. 나는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자리에 정좌했다. 날 가둬둔 이 방은 항상 잠 겨 있다. 디안이 들어올 시간을 제외하면 말이다. 몇 번씩이나 저 문을 부 수려고 그렇게나 애를 썼는데, 한 번도 부서진 적이 없었다. 아니, 부서지는 것이 다 뭐냐? 흔들린 적조차 없었다. 저 빌어먹을 놈의 문짝! 지 놈이 단단하다고 나한테 자랑하는 거냐 뭐냐!! 「라이메데스. 라이메데스!」 그리고, 문짝을 부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내가 전음으로 이 이름을 불 러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은 이틀 전부터. 아마도 수 십 수 백 수 천 번은 더 불렀을 거다. 「라이메데스! 이 빌어먹을 놈의 자식아! 라이메데스!!」 불러도 대답 없는 너는 처 죽일 놈의 라이메데스! 왜 대답이 없는 거냐고, 갈아 마실 녀석아! 나 굶어 죽는 꼴이 그렇게나 보고 싶냐? "소용없다." 한참동안 속으로 라이메데스를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가벼운 목소 리가 들려와서 움찔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비스듬히 문에 기 대어 서 있는 녀석의 얼굴이 들어왔다. 가벼운 미소를 온 얼굴에 띄우고 있 는 녀석의 표정은 물론, 내게 상당한 짜증을 유발시키기 충분했다. "뭐가 소용없다는 거지?" 인상을 찌푸리면서 묻자, 가볍게 웃는다. "너, 방금 누군가에게 전음을 보내지 않았던가? 멍하니 서서 정신을 잔뜩 집중해서 내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하지만 아무리 해도 안 될걸? 안됐지 만 포기해라. 여기선 전음이 통하지 않아. 차원이 비틀려 있거든." "뭐, 뭐라고?" 나는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질렀다. 차원이 비틀려 있다니? 대체 무슨……? 놀란 나는 생각지도 않는지, 녀석은 생긋 웃으며 말을 잇는다. "원래 내 가장 큰 특기는 남의 '기억' 의 일부를 지우는 일이지만, 차원을 비트는 것 역시 내 특기 중의 하나지. 설명하기 쉽게 말하자면, 이 저택은 그 하나가 전혀 다른 차원으로 떨어져 있다. 정원에 있는 문 하나를 넘어 서면 바로 다른 공간이거든. 전음이라는 건 일단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지 면 전해지지도 않는데, 차원이 달라지면 얘기는 완전히 끝나는 것 아니겠어 ? 여긴 완전히 외부와 차단된 공간이야, 고양이."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입술은 밉살스럽게 위로 올려져 있었다. "이 저택 바깥으로 나간다면 차원의 경계가 사라지니 전음이든 뭐든 다 괜 찮겠지만, 여기선 안 돼. 바깥과의 연락은 절대로 불가능해. 우훗." 레이디안은 그 말과 함께 방긋 웃었다. "도망칠 생각은, 버려." "……빌어먹을 자식." -------------------------------------------------------------------------------- Back : 11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5 (written by 카르민) Next : 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3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1554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3rd March 2002 11:39:16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8-02-2002 18:02 Line : 281 Read : 1223 [11]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5 -------------------------------------------------------------------------------- -------------------------------------------------------------------------------- Ip address : 61.76.191.2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이 골방에 들어 온 지도 벌써 일주일 째. 미칠 듯한 공기가 방 안을 돌고 있었다. 아무리 방안이 예쁘게 꾸며져 있 다 하더라도, 아무리 디안이 끊임없이 얘기를 한다하더라도, 레이디안 그 빌어먹을 놈의 자식이 아무리 내 온 몸에 닭살과 소름을 번갈아 가며 보낸 다하더라도, 지겨운 건 지겨운 거고 나가고 싶은 건 나가고 싶은 거다. 나 는 손을 가볍게 쥐었다. 정말 미치도록 고민했다. 이 방에서 나갈 방법을 말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의 방법을 생각해낸 나는, 많은 시도와 실패를 반 복했다. 방에서 나가기 위한 시도 1. 일단 저 문을 부숴본다. 시도 1의 결과. 내 잘난 발 뼈가 부서졌다, 젠장.(디안한테 걸려서 엄청 쪽팔았다, 으흑.) 결국 실패! 시도 2. 라이메데스를 부른다. 시도 2의 결과. 자존심은 자존심대로 다 상하고 레이디안한테 걸려서 쪽은 또 쪽대로 다 팔았다. 흑흑, 역시 실패! 시도 3. 벽을 부순다. 시도 3의 결과. 주먹 안 부서진 게 천만 다행이었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실패! 시도 4. 레이디안을 설득한다. 시도 4의 결과. 하마터면 고양이로 평생 지내는 것으로 설득 당할 뻔했다. 무, 무서운 놈! 제기랄! 역시 또 실패! "오늘은, 꼭 나간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물건을 쥔 오른손에 힘을 꾹 주었다. 일주일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아서 그런지, 서 있는 것조차 벅찰 정도였다. 머리가 다 어질거린다. 지금하지 않으면 나, 분명히 이 아름다운 외모를 후세에 알리 지 못한 채로 흉하게 굶어죽어 버릴 거야. 그건 너무 서글픈 일이지. 나로 서도 그렇고, 후세 사람도 내 미모를 기리지 못하는 것을 슬퍼할 거다. 젠 장, 헛소리 집어치우고 본론부터 말하자면, 나 오늘은 반드시 여기서 나가 야 한다. "꼭!" 문 옆에 딱 붙어서, 나는 복도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디안이 식사를 챙겨 서 들고 올 시간이다. 나는 양손을 꾹 잡으며 손에 힘을 모았다. 곧, 문을 열고 디안이 온다. 기회는 그때뿐이다. 디안이 문을 여는 때. 그 때가 기회 다. 내 하얀 손가락 안에 잡혀 있는 청동제 조각도 내 긴장을 눈치채고는 함께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왠지 계속 망설여지는 나 자신의 마음을, 나는 계 속 다잡아야만 했다. 제길. 수십 명의 미소년이 새겨진 이 청동상(아주 자기 취미를 적나라하게 표현해 놨구나, 응?)이 나를 향해 빙글 웃음을 보내고 있다. 단단한 이 것 으로 내리치면, 죽지는 않겠지만 많이 다칠 거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검도 없고, 무기가 될 만한 거 라곤 이런 것밖에 없는걸. 똑똑똑! 와, 왔다! 나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바짝 긴장해서 깊게 심호흡을 했다. 손끝에서 바르르 경련이 인다. 문이 열렸다. 동시에, 나는 눈을 딱 감고 청동상을 위 아래로 크게 휘둘렀다. "칼레들…… 악!"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내가 휘두른 청동상에, 깜짝 놀란 듯 먹을 것을 잔뜩 갖고 온 디안이 고함을 지르며 그것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디안이 몸 을 숙인 그 순간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청동상이 디안의 머리를 강타했다. "윽……." 내 공격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듯 뻗쳐오른 은회색의 머리카락은, 한 대 맞자마자 축 늘어져 원래의 길이로 돌아왔다. 디안은 비틀거리는 걸음 걸이로 한 발자국을 내딛은 후, 그대로 음식물이 엉망진창으로 떨어져 있는 그 위에 털썩 하고 떨어져 내렸다. "미안……." 해도 소용없는 사과를 하면서, 나는 나직하게 디안에게 말했다. 작고 여린 디안의 몸이 천천히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얼른 준비해 놓았던, 밧 줄(그래봤자 침대 시트를 꽁꽁 묶은 것에 불과하다)로 디안의 몸을 묶으려 고 했다. 하지만, 내가 그러기 전에 디안이 선수를 쳤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뭐?" 청동제 상에 맞아 자리에 쓰러졌는데도, 용케 의식을 놓지 않았던 모양이 다. 뜻밖에도 디안은 두 눈을 꼭 감고,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디안은 창백한 안색으로, 자그맣게 입을 벌려 가만히 말했다. "제 허리춤에……. 당신의 검…… 갖고 가세요." "디, 디안……?" 갑작스러운 그 말에 놀라서 바라보니, 정말로 내 검― 켐 알슈타드가 거기 에 있었다. 디안의 하얀 에이프런 옆에 거짓말처럼 꼬옥 묶여 있는, 내 검 이. "……가져가세요, 당신 거니까." 약간 풀린 듯한 눈으로 말하는 디안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편안해 보였다. 나는 이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조금 당황하면서도, 일단 디안의 말대로 그 검을 거두어 위로 치켜올렸다. 검집에서 검을 뽑아보니, 조금의 퇴색도 없 는 찬란한 은빛이 가득 두 눈에 찬다. 나는 내 검을 몇 번이고 만지고, 만 지고 만지면서 검에 내 체온을 불어넣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몇 번이고 그 검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한참 만에야 뭔가 너무나 이상한 것을 발견하 고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 검에는, 그 검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노 란 보석이 없었다. "여, 여기 있던 보석은……?" "제가 발견했을 때는…. 검과 보석이 따로 떨어져 있어서… 보석은 주인님 께 드렸답니다." 그 빌어먹을 놈의 자식! "도망가세요." 나는 갑자기 속삭이듯 들려온 그 목소리에 멈칫했다. 거의 흰자위밖에 없 는 눈을 한 채로 웃는 디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 "도망가요. …도망가도 되요." 간절한 눈으로, 너무나도 간절한 눈으로 디안이 말해서 순간 숨이 턱 막혔 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느낌이 한가득 가슴을 메웠다. "안 되요. 오빠는 안 되요. 오빠랑 닮았어……. ……죽으면 안 돼." "뭐?" "……계속 그러다간 죽을 거예요, 죽을 거야. 그 오빠처럼……." 그렇게 말하는 디안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렁그렁하게 맺히는 그 눈 물을 보던 나는, 뭔가 이 소녀에게 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말이지?" "도망가세요……. 나 오늘 사실은…… 오빠 도망치게 해주려고…… 검… 갖고 온 거예요." 아. 예상치 못했던 그 말이 마치 나를 꾸짖는 것 같아서, 그렇게 나를 신경 써 서 날 놔주려고 한 이 애의 머리를 인정 사정없이 청동상으로 내리친 나란 자식의 비겁함과 이기심을 꾸짖는 것 같아서 얼굴에 확 하고 열이 오른다. 디안은 눈가에 힘을 주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제 주머니에… 종이 있어요. 꺼내… 요." 더듬더듬 말하는 디안의 말에 따라, 누워 있는 디안의 치마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따뜻한 주머니 속에서, 빳빳하게 두 번 접힌 종이가 나왔다. 너무 반듯하게 접어서 손이 베일 것 같은 그 종이를 집어 들어 펴보니, 이 것 저 것 복잡하게 무엇인가를 그려 놓은 것이 보였다. "가져가요, 약도예요. 여기…… 의외로 넓어서…… 나가기 쉽지 않아요… …. 게다가, 무서운…… 친구들도 많아요." 무서운 친구들이면, 마물들을 말하는 건가? "제가 그려준 대로 가시면 되요…… 일단, 나가요……. 이대로 있다간, 오 빠도…… 죽을 거죠? 주인님이 죽이지 않는다 해도…… 굶어죽을 거예요." 그래, 그 놈에게 죽는다거나 그 놈 고양이 되는 바에야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 감은 눈썹이 바르르 떨리는 디안의 얼굴이 창백하다. 나는 후, 하고 낮게 한숨을 쉬며 그 약도를 한 번 훑었다. 미안하다, 라는 단 하나의 감정이 속 을 훑고 지나간다. 반쯤 열린 문을 밀었다. 내 뒤에서, 자그맣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잘가요……." ◇ ◇ ◇ 미안하다, 레이네. 너를 그 변태 손에 두고 가서. 하지만, 너… 레이디안과 아는 사이라고 그랬잖아? 친하다고 그랬잖아. 그 러니까 잠시만, 거기에 잠시만 있어줘. 라이메데스 녀석이랑, 카민 녀석이 랑, 에세렌이랑, 모두모두 데리고 다시 올 테니까. "헉, 헉헉……." 정말 최악 중 최악인 취미! 뛰고 있는 이 저택의 광경은 욕밖에 나오지 않는 녀석의 취미생활의 적나 라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주위를 돌아보면 온통 보석이 주렁주렁 싸리잎의 은구슬∼ 이러면서 걸려 있고, 발밑에 밟히는 융단은 무슨 비단을 몇 겹을 깔았는지, 내가 걷고 있 는지 어떤지도 모를 정도였다.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보이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그림들도 그렇거니와, 가장 짜증나는 것은 복도 곳곳에 서 있는 초특급 미소년들의 나체상이었다. 빌어먹을, 미쳐도 곱게 미칠 것이지. 이 게 대체 뭐냐고! 디안이 그려진 지도 그대로 달리고 있어서 그런지, 특별히 내 진로를 방해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탁탁, 하는 소리마저 허용하지 않는 융단덕택 에 복도는 기묘한 침묵 속에 파묻혀 있었다. 나는 입술을 물며 정신 없이 달렸다. 뜻뜻한 피가 입술 언저리에서 솟아올랐다. 그 빌어먹을 놈의 변태마족이 내가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고 지금 당장이라 도 뛰어나올 것 같아서, 열심히 발악하듯 융단을 밟아대고 있는 발이 멈추 지 않았다. 안 그래도 아름답고 연약한 나, 새 모이만큼의 밥으로 연명하며 누구누구 와는 다르게 식사비의 피해를 주지 않는 내가 아니었던가. 그렇잖아도 없는 체력에, 일주일동안 굶었다. 그런 채로 이렇게나 뛰어다니자니, 온 몸에 누적된 피로가 머리끝까지 몰려오는 거다. 약도가 그려진 종이를 손에 꽉 쥐었다. 땀 범벅이 된 종이가 구겨졌다. "됐어, 조금만 더 가면 돼." 드디어 시야에 들어온 현관 입구를 보며 나는 쾌재를 쳤다. 휙, 하고 문을 열어 젖혔더니 그대로 차가운 공기가 뺨을 때린다. 이대로 쭉 걸어가기만 하면, 이 빌어먹을 저택에서 나갈수가 있다. 정원 끝에 있는 아치형의 문만 지나가면, 이 비틀어진 공간이라는 곳에서 도망칠 수 있는 거다. 그 문 밖 으로 나서기만 하면, 라이메데스를 부를 수도 있고, 내 위치가 어디에 있는 지 알려줄 수도 있다. 그렇게만 되면. "…그 놈들 다 찾아야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인영들을 억지로 밀어내며, 스삭거리는 풀을 밟 고 정신 없이 뛰었다. 아아, 드디어 보이기 시작한다. 저 멀리, 디안이 적 은 약도에 나와 있던 대로 상아빛 아치의 다리가. 이제 곧 도착한다, 이제 곧……. "서." 이제 곧, 이 놈의 빌어먹을 저택에서 나갈 수가 있다. "거기 서라." 상아빛 아치 다리 위로, 달이 떴다. 여기는 그 변태자식이 만들어놓은, 이 차원의 공간. 그런데도, 이 이차원의 공간에도 달이 있다. 푸르스름하리 만 치 하얀 달이. 저 아름다운 달, 이 빌어먹을 놈의 변태마족에게 붙잡힌 저 매혹적인 달에게 저주를 풀어낼 수 있는 주문을. 신비로운 저 달빛을 향해 예의를 가득 담아 경배의 키스를. "거기, 서라고 했어." 그 아름다운 달이 고고하게 떠 있는 아래에, 드디어 실물 크기의 커다란 아치형 다리가 보인다. 정원을 가득 막고 있는 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나의 출구. 얼어붙은 꽃이 얼기설기 얽혀 있는 그 곳은, 달빛을 받아서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경고다. 서라." 그리고. 그 달 아래, 그 문 아래, 달보다도 문보다도 더더욱 신비한 모습의 인영이 보인다. 바람을 따라 움직이는, 풀어헤쳐진 그의 머리카락은 짙은 남빛. 머리카락 사이로 얼핏 보이는 녀석의 눈동자는 고혹적인 미드나잇 블루. 그러나, 눈 동자보다도 머리카락보다도… 신비로워 보이는 것은 바로 그 얼굴. 내가 아 는 자와 똑같은 그 얼굴. 무서우리 만치 단정한 그 얼굴. 깎아 내린 선이 날카로운 그 얼굴. 미소지으면 예쁘지만, 굳히면 누구보다도 위압적인 그 얼굴.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한 존재가 아닌, 단지 그 존재와 모습만 같을 뿐인 그 얼굴. 그... 얼굴. -------------------------------------------------------------------------------- Back : 12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6 (written by 카르민) Next : 10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4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1554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3rd March 2002 11:39:20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8-02-2002 18:03 Line : 306 Read : 1227 [12]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6 -------------------------------------------------------------------------------- -------------------------------------------------------------------------------- Ip address : 61.76.191.2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했나?" 화를 내지 않고 씨익, 웃는 얼굴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면 착각인지도 모르 겠군, 빌어먹을. 변태마족놈, 결국 다 알고 있었던 건가? 내가 도망친 것도 다 알고 있었나 ? 썩을. "젠장맞을. 너 대체 왜 그러는 거냐? 나한테 안 좋게 굴어서 너한테 이득 되는 게 뭐가 있어? 안 그래? 그냥 보내줘!" 아치형 다리 밑 문 쪽에서 차갑게 뜬 눈을 번뜩이고 있는 녀석을 향해 버 럭 고함을 쳤지만, 이 미친 사이코는 말을 들을 생각을 안 한다. 오히려, 성큼성큼 다리를 벌려 걸어와 나와의 거리를 줄인다. 저벅저벅, 다가온 녀 석의 입가가 이상하게 비틀려 있다. 헉, 하고 헛바람을 들이키는 내 앞에 선 레이디안이 한 번 웃었다. "나한테서 도망간다고? 어림없지."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손에서 무엇인가 검은 것이 스멀거렸다. 나는 쳇, 하고 중얼거리며 검을 앞으로 세웠다. 스팟! 강렬한 정전기와 함께, 녀석의 손에 맺혀 있던 검은 그것이 내 쪽을 향해 무섭게 달려들었다. 나는 세웠던 검을 앞으로 내리치면서 그 것을 막아냈다 . 검은 녀석의 마기가 내 검의 은빛과 부딪혀 무(無)로 소멸된다. 내가 공격을 막은 것이 놀랍다는 듯, 레이디안이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녀석은 씨익 하고 한 번 웃더니, 내가 들고 있던 검을 뿌리부 터 검신의 끝까지 깊숙이, 그리고 빨아내듯 깊게 훑어보았다. 나는 그 끈적 끈적한 시선을 피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디안한테 들었어. ……레이네, 네가 데리고 있지?" 내 말에 레이디안이 킥, 하고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그래. 내가 데려갔다. 오랜만에 보니까 아주 반갑더군. 너한테 보 내달라고 소리소리를 치는데……. 안 된다고 그랬더니 잔뜩 화가난 목소리 로 세이아나에게 이를 거라고 고함을 치더군, 후훗." "……어디에 있어?" "지금 그걸 말하고 있을 상황인가?" 위험하다! 갑자기 떠오른 녀석의 미소를 보며, 내가 느낀 감상이었다. 녀석의 입에 매달린 미소는 깊고도 짙어, 소름이 와장창 돋아났다. 레이디안이 가까이로 한 발자국을 더 다가왔다. 나는 온 몸에 털이 설 만큼 긴장해서 검을 곧추 세웠다. 저번에는 너무 방심해서 순식간에 당했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다. 네녀석에게 그렇게 쉽게 당하지 않아. 이번에는 이 검도 있고, 나도 최고로 긴장하고 있으니까! 내가 검을 세우는 모습을 보고 있던 레이디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웃기는군. 너, 그 검이 무슨 검인줄이나 알고 그 검을 갖고 다니는 건가? " 녀석은 그 말을 함과 동시에 한 발자국을 더 앞으로 내밀었다. 녀석의 입 꼬리가 가느다랗게 말려 올라간다. "모든 것의 생성과 파멸을 담은……. 피를 섞고 분노를 섞고 슬픔을 섞어 만든 저주를 타고 난 그 검을, 왜 네가 갖고 있는 거냐?"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있네. 무슨 말이야, 그게?" 생성이 어쩌고 파멸이 어쩌고 피가 어쩌고 하는 이해하지 못할 말을 지껄 이는 놈을 향해(저 사이코 자식이 드디어 맛이 간 거야! 말했듯이 이 검은 로시엔의 주방용 칼이기도 했다니까!)나는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내 반응이 어떻든,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태도로 차분히 말을 이었다. "……네가 들고 있는 그 검에 누가 죽었는지는 아는 건가? ……바로 그 검 을, 네가 들고 있다니. 하하! 정말로 아이러니컬하군. 아아, 아닌가? 훗, 너무 잘 어울린다고 해야 하는 건가?" "대체 뭐라는 거야?" 이해하지 못할 소리만 해대는 녀석의 태도에 발끈한 난 검을 든 손을 살짝 비틀었다. "아아, 아직 넌 알 필요가 없어. 때가 되면 다 알게 되겠지. 자아! 이 쪽 으로 와봐라, 검은 털 고양이." 뭐야, 저 녀석? 새삼 뭐가 검은 털 고양이고 뭐가 이쪽으로 와봐야? 내가 미쳤냐? "안 가!" 내 말에, 더더욱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다. "……마지막 경고다. 저택으로 돌아가라." "싫다!!" 녀석의 눈매가 더 가늘어져서 미드나잇 블루를 더 이상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어디선가 희미한 바람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 게 느낀 그 순간, 왜 갑자기 스치는 바람의 냄새가 나는 걸까, 라는 의문을 들어낼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수십 세리하는 되는 거리를 슥 하고 뛰어넘 어 내 바로 앞을 압박하고 들어온 녀석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너 무 놀라서 숨이 막혔다. 입이 벌어졌다. 크악! 하는 소리를 칠 틈도 없이, 그 손이 다가와, 놀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윽!" 거의 반사적으로 나는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검을 휘두른다, 라는 짧은 순간조차 놓치지 않고 내 바로 앞에 멈춰선 녀석의 손이 크게 한 번 휘저어 졌고, 나는 깜짝 놀라서 몸을 뒤로 뺐다. 순간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손이 내 쪽으로 뻗어져 들어왔다. 손 을 뻗었다? 좋아, 그렇게 나온다면 그 손, 내 마음껏 잘라주지!! 냅다 다가온 손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순간, 녀석이 속삭이듯 말했다. "검으로는, 내 움직임을 못 따라와." "웃기지마!" 휭, 하고 휘두르는 내 검을 레이디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톱으로 말았다. 끼긱, 하는 소리와 함께 손톱이 내 검에 챙! 하고 튕겼다. 거, 검을 단지 손톱으로만 막다니? 내가 아무리 비각성 마족이고 이 녀석이 각성 마족이라 해도 이건 좀 너무했다. 내가 여태까지 각성마족들에게 맞아본 적이 있어서 아는데, 보통의 각성 마족은 이 정도로 강하진 않단 말이다! "너, 너! 대, 대체 정체가 뭐야!" 챙! 다시 한 번 녀석의 손톱과 내 검이 마찰했다. 그 혼잡하고 탁한 음에 눈살 이 찌푸려진다. 녀석의 숨결이 바로 앞에 있었다. 색색, 하고 몰아쉬는 숨 이 가빠서 눈살을 찌푸린다. 날이 선 눈동자가 차갑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 었다. 녀석의 얼굴은 분명 로시엔의 것이었다. 녀석은 로시엔의 눈빛을 하고 있 다. 그리고, 녀석은 로시엔의 코를 갖고 있다. 로시엔의 입술을 가진 녀석 의 얼굴은 분명, 또 다른 로시엔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그의 모든 것은 …… 결코 로시엔이 아니다. 쉬익!!! 날카롭지도, 무디지도 않은 손톱이 내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들어와 내 목 언저리에서 정확하게 멈추었다. 잡생각이 너무 길어서 정신을 집중하 지 못했던 모양이다, 빌어먹을. 침을 삼키며 올려다보니, 내 목에 손톱을 들이댄 녀석의 눈동자는 싸하게 굳어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타오르고 있는 눈동자인지도 모른다. 나는 입술을 열었다. "……죽일 거냐?" 차갑게 묻는 내 입술이 바짝 메말랐음을 느낀다. 물기도 없고, 아무 것도 머금지 않았다.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에, 녀석이 씨익 하고 웃었다. "설마 이 상황에서? 널 죽이지는 않아……." 녀석이 이 자리에서 5세리하 가량만 더 손을 뻗으면, 난 죽는다. 무엇을 원하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차가운 눈동자가 보인다. 가늘어진 눈동자가 초생달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도망간 대가는 치워야지. 난 분명히 마지막까지 경고했지만, 듣 지 않은 건 너야. 네 팔 하나 정도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농담이 아니다. 정말로, 진심이다. "쿡……. 그런 표정 하지 마라. 팔이 잘리면 아프긴 하지만, 죽을 만큼 아 프진 않을 거야. 후후… 네가 나한테 팔을 뺏겼다는 걸 알면 '그 녀석' 이 슬퍼할까?" 그녀석? 그녀석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지? 천천히, 녀석의 팔이 다가왔다. 목덜미에 겨누어져 있던 그 손은, 흐르듯 내려와 내 팔 윗부분에 닿았다. 한 손으론 꼼짝하지 못하도록 내 목을 누르 고, 다른 손으로는 팔 언저리의 살을 뚫고 들어오는 녀석의 손톱이 느껴졌 다. 위쪽 팔 부분이 저릿하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이 강렬한 힘으로 파고 들어왔다. "윽!!" 팔을 찔러온다. "크윽…!" 아픔, 이라는 것 밖에 느끼지 못했다. "……팔 하나는." "우욱…… 으아…… 아아아…… 악―!!!!" 아파! 아파! 아프다고! 썩을 놈! 정말로 찌르다니! 지독한 아픔에 눈이 질끈 감겼다. 핏빛 공포! 정말로 찢어질 것 마냥 아픈 팔에서 흘러내리는 핏빛, 그것에 분명 소름이 끼쳐야 할텐데,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냥 너무 아파서 ……! "큭……." 「도, 와줘」 속으로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이 없다. 「도와줘, 로시엔…….」 대답이 없다. 오히려 내 팔목을 파고든 이 손톱이, 내 팔을 끊을 것 같은 이 팔 힘이 강 해질 뿐이다. 그리고 이 손톱의 주인은 바로 그 로시엔과 같은 얼굴의 소유 자. 눈물이 날 지경이다, 젠장. 「……라이메데스, 빌어먹을……. 하다 못해 네 놈이라도 좋으니까… 도와 줘……!」 입술을 악 물며, 정말이지 더럽고 치사하게스리 라이메데스 이름까지 부른 다. 하지만, 이 고통에서 해방되려면 누구라도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으아아아아아악―! 그만해!!!" 팔이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 환한 달빛이 부서진다. "고양이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지. 움직이면 안 돼." 녀석의 날카로운 손톱이 더 예리하게, 이제는 손톱이 아닌 손날이… 팔 언 저리를 파고 들어온다. 살갗을 뚫는 날카로운 그 것은, 검의 그것보다도 더 날카롭고 예리하다. 잘리는 거야? 잘리는 건가? 이, 이대로……!? "우…… 우우욱!!"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갑자기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살갗에 박아 넣었던 녀석의 손톱이 욱, 하는 짧은 외침과 함께 속 을 파고들었다. 너무나 아파서 비명소리조차 억눌러진다. "우아아악!" 찢어진다! "으아아…… 아?" 그런데. 정말로, 정말로 잘리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팔이 잘린 채로, 이 잘난 얼굴을 한 채로 불구로 살아야 하는 건가? 정말 로? 라는 생각에 온 몸이 부르르 떨렸을 때의 일이었다. 인정 사정없이 이 대로 팔을 관통해버릴 것 같던 녀석의 손톱이 비틀어지듯 들어와, 그대로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지독한 고통은 그대로지만, 어찌됐든 아까부터 팔 안을 파고들던 그 움직 임이 멎었다는 사실에 눈물이 날만큼 감사했다. 아픔 때문에 질끈 감긴 눈을 억지로 떠 레이디안을 보았다. 그리고 그 순 간, 나는 조금 놀라운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레이디안이 잔뜩 얼굴을 찌푸 린 채… 무엇인가 괴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리고, 그런 녀석의 뒤편에서… 갑자기 확하고 이는 피보라. "……거기까지야." 레이디안의 뒤에서, 내 앞에서, 아릿한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들려왔다. 아 스라이 멀리 들리지만, 의외로 가까운 곳인 것 같다. 누구야, 지금 이 목소리는. "그 이상 손대면, 당신이 그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든 용서 안 해. 죽여버 린다……."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가 들린다. "우욱!" 흐릿한 시야 너머로, 그 빌어먹을 자식의 목소리가 들린다. "……정말로 죽여버리기 전에, 손 떼." 입이 절로 벌어졌다. 거짓말인 것 같았다. 환상인 것 같았다. 바람을 맞아 붉은 옷자락이 휘달리고 있다. 꾸욱 다문 붉은 입술과 내가 부러워마지 않는 초록색의 눈동자. 그리고 눈가를 살풋 덮고 있는 금빛의 머리카락까지. 익숙하다못해 지긋지긋하고 지긋지긋하다 못해 그냥 확확 밟 아버리고 싶은 그 모습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라이…… 메데스……?" -------------------------------------------------------------------------------- Back : 13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7 (written by 카르민) Next : 11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5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1554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3rd March 2002 11:39:28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8-02-2002 18:04 Line : 332 Read : 1269 [13]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7 -------------------------------------------------------------------------------- -------------------------------------------------------------------------------- Ip address : 61.76.191.2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제 25장: 충견 라이메데스 VS 변태마족 레이디안. 작게 울리는 목소리로 녀석을 부르며, 나는 레이디안의 손을 억지로 치워 냈다. 팔을 반쯤 파고든 그 손을 치우느라 엄청난 고통과 함께 피가 확, 하 고 사방으로 튀어 미간까지 닿았지만, 그래도 아랑곳 않고 그 손을 치워낸 나는 비틀비틀거리면서도 일어섰다. 휘청 하고 꺾여 들어가는 몸이 앞으로, 뒤로, 끊임없이 휘는 바람에 한참을 서 있기조차 힘들었지만, 결국 이 몸 을 두 다리로 지탱하며 나는 단단히 일어섰다. 내 시야에는 온통 라이메데 스의 얼굴이 차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레이디안." 짧게 중얼거리듯 라이메데스가 말했다.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은 녀석의 목 소리는 분노를 담고 있었다. 큭큭, 하고 웃는 레이디안. 엎드린 채로 내가 손을 뽑아도 가만히 있던 레이디안의 등에는 커다란 상처가 하나 있었다. 레이디안은 몇 번이고 쿡쿡거리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시 선을 돌려 우리 쪽을 보았다.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나. 응? 아이에드의 개. 네녀석 정도는 읽을 수도 없는 공간일텐데." "어떻게 왔든 무슨 상관이지? 중요한 건 그분이 부탁한 저 녀석이 저렇게 있다는 거지. 너… 알고 있었지? 알고서 이런 짓 한 거지?" "후훗." 라이메데스가 뭐라고 하든, 레이디안은 그저 가볍게 웃을 뿐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는 발을 들어 천천히 앞쪽으로 움직였다. 머리가 아팠지만 거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아아, 아쉽군. 정말 대단한 타이밍이었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저 녀석 팔이 날아갔……." "닥쳐!" 버럭 고함을 치는 라이메데스의 얼굴은 어쩐지 평소와 달라 보였다. 안색 도 창백했고, 무엇인가 굉장히 긴장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평소 라이메데 스 특유의 차분함이 없었다. 라이메데스는 비틀거리며 다가온 나를 힐끗 보 았다. 그리고 가차없이 말했다. "……움직일 수 있지?" 작게 말한 목소리에 나는 정말로 자존심이 상해 눈살을 찌푸렸다. "다, 당연하지." "그럼, 가라." 뭐? 나는 갑작스러운 녀석의 말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이메데스는 입술을 지그시 물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 녀석의 눈은, 아까의 레이디 안만큼이나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가라고." "어, 어딜……?" "저기… 문 보이지? 저기로 가는 거다. 뛰어서 가……." "……넌?" 어울리지 않게 진지하게 말하는 녀석을 보면서, 나는 입술 사이로 터져 나 오는 신음소리를 억지로 억지로 막으며 그렇게 물었다. "저 녀석이랑 조금 놀아야지." 씨익, 웃으며 말한 라이메데스가 내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먼저, 가 있어라." 녀석의 진지한 얼굴을 향해, 나는 작게 물었다. "다들…… 무사해?" "그래. 무사하다. 그러니까 넌 일단 가." 무사하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얼른 날 보내려고 애 를 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단지 착각인가? "어딜 도망가려고? 내가 보낼 것 같아?"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뒤에서 착 가라앉은 레이디안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라이메데스가 생긋 웃는다. "보내게 될 걸?"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라이메데스의 손끝이 날카롭게 움직였다. 레이디 안의 손이 라이메데스의 손을 짧게 한 번 쳤고, 그 순간 둘의 움직임이 바 람처럼 희미해졌다. 파앗!!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라이메데스가 선방을 날렸다. 쾅, 하는 소리와 함 께 뭐가 뭔지 보이지도 않지만 윽! 하는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레이디안의 것인 듯 했다. "……아이에드님께 그렇게 혼이 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쾅쾅!!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릴 듯한 소음이 귀를 터질 듯 울린다. 아프게 울리는 그 소리에 돌아버릴 것 같다. "웃기는군, 겨우 아이에드의 개 주제에!!"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분명히 오른쪽에 있었던 녀석들이 왼쪽에 나타났 다. 라이메데스의 눈빛이 차갑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원래는 라이메데스가 저택을 등지고 섰고, 레이디안은 문 쪽을 등지고 섰었는데, 어느새 둘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라이메데스는 문을 향해 손을 뻗어, 싸늘한 얼굴로 손에서 어둠을 만들어냈다. 쿠콰아아아아아앙!! 짐승의 비명소리가 들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라이메데스의 손에 생겨난 그 것은, 감히 내가 상상할 수도 없으리만치 대단한 어둠이었다. 단단히 응 집된 그 것들을 그대로 품은 녀석의 손이 앞으로 떨구어졌다.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엄청난 것들이 레이디안을 향해 돌진했다. 레이디안이 움찔 한다 싶었다. 녀석은 뒤를 한 번 흘낏보더니 입술을 질끈 물었다. "이 자식! 새파란 애송이 주제에!!" 버럭 고함을 지른 레이디안이 역시 손에 어둠을 모아, 그대로 라이메데스 에게 던졌다. 쿠쾅, 하는 소리와 함께 라이메데스와 레이디안 각각의 어둠 이 부딪혔다. 엄청난 상태로 격돌했던 그것들은 곧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중앙에서 완전하게 소멸되었다. 나는 멍하게 눈을 들어 그런 둘을 보았다. 하얀 달 아래에서, 고고하게 달 위에 뜬 채로 행해지는 두 녀석의 싸움은 말 그대로 환상이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카리스마가 두녀석 모두에게서 뿜어져 나 오고 있었다. 실실이 느끼남 라이메데스의 얼굴은 그야말로 포커페이스, 변 태 레이디안의 얼굴 역시 얼음장. 마치 평소의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망각 한 것 같은 그 둘은, 미친 듯이 어둠으로 서로를 공격했다. 콰콰콰! 쿠콰콰!! 분명히 무너지는 것이 없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던지는 공격은 결국 서로 의 공격에 의해 와해되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귀를 찢을 것 같은 소음이 계속되고 있다. 파공음에 밀려난 것들이 요란 벅적하게 귓가를 유 린한다. "네 녀석 따위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애송이! 각성한지 1000년도 되지 않은 주제에!!" 시끄러운 소리들. 공격하고, 공격하고. 막고, 막고. 서로가 서로를 향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공격해 들어가면, 마치 그 공격을 읽고 있었다는 듯 날 렵하게 대항해나간다. 싸늘한 눈을 빛내며 몸을 축으로 삼아 회전하고, 손 에서 어둠을 뿜어내고, 온 몸으로 사기를 뿜어내면서. 쾅쾅! 우르― 쿠쾅!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미칠 듯한 그 소리의 반동을 견디지 못해서 날아 가는 정원의 모형들과 온갖 화초. 「칼레들린! 안 가고 뭐하는 거야!!」 라이메데스의 고함소리가 귀를 때렸다. 다분히 책망조였다. 「닥쳐. ……방해는 안 될 테니까 걱정말고 공격이나 해.」 왠지 이대로 나가는 것은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는 나였다. 「네가 거기에 있는 것 자체가 방해야! 돌이라도 맞으면 넌 즉사야!」 「시끄럿!」 "우욱!" 나와 대화하느라 정신이 팔렸었는지, 레이디안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버린 라이메데스의 어깨가 휘청, 하고 격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녀석은 아 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입술을 악 다 물고 다시 손을 들었다. 녀석의 몸 바로 앞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것은 검은빛의 엔클레이브! 레 이디안 역시 엔클레이브로 자신을 강력하게 수호하고 있었다. 그래, 너희들 잘났다! 고위 마족만 칠 수 있는 엔클레이브를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치고 서, 녀석들은 재접전에 들어갔다. 그런데, 라이메데스도 고위마족이었던가 ……? 고위마족이라면 서열 100위까지의 마족일텐데. 내가 외우고 있는 100 위 내의 마족 중 라이메데스의 이름은 없었다. "변태! 아이에드님께 건방지게 군 것도, 네가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것도! 만일 로시엔님이 아니었다면, 넌 블러드 아미가 죽여도 당장에 죽였어!" "훗, 아이에드의 개. 스스로가 죽인다는 말은 못하는가? 블러드 아미라?" "닥쳐―!" 서로의 험담을 있는 대로 늘어놓으면서, 다시 공격을 가한다. 찢어지는 소 리가 들린다. 그 뒤로는 또다시 어둠과 어둠의 뒤엉킴이었다. 싸우고 있는 그 녀석들의 움직임은 도저히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파팟, 쾅! 우우웅, 하는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 럼 서로 치고 박는 녀석들. 한참동안 한 덩어리가 되어 싸우던 녀석들의 모습이 다시 시야에 잡힌 것 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보아하니, 라이메데스가 조금 더 실력이 딸리는 모 양이었다. 레이디안의 옷자락이 비교적 깔끔한데 비해, 라이메데스가 그렇 게나 끔찍하게 생각하는 블러드 아미복이 많이 찢겨져 있었다.(저, 저 놈… 싸움 끝난 뒤에 자기 옷보고 발광하는 거 아냐?) 라이메데스의 붉은 옷자락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하얀 달이 비추는 녀 석들의 얼굴이 빛나고 있다. 헉헉, 대면서 숨을 몰아쉬는 둘. 이상한 기분 이다. 마치, 마치… 라이메데스와 로시엔이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그런 기묘한 기분. "하나 묻지, 변태! 칼레들린의 팔을 자르고! 그 후에 어쩔 생각이었나!" 멈춰선 라이메데스가 숨을 고르며 물었다. 녀석은 그렇게 묻는 한편, 전음 으로 '어서 저 문밖으로 나가! 정말 죽고 싶어?' 라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 고 있었다. 물론 나는 무시했다. "글세, 갖고 놀다 죽였을까?" 히죽 웃으며 레이디안이 대답했다. 저, 저런 쳐죽일 놈이! "……너란 자식은……!" 쿠앙, 하는 소리와 함께 여태까지 단지 레이디안과 힘 겨루기를 하고 있을 뿐이던 라이메데스가 저돌적으로 변했다. 고고하게 떠 있던 포즈에서 갑자 기 급강하를 해 레이디안 쪽으로 내려가는 라이메데스의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뒤쪽으로 옮겨지는 것이 보였다. 녀석의 눈동자는 그대로 레이디안을 향해 있었다. 레이디안은 그런 라이메데스를 피하려다가 말고, 몸을 움찔 했다. "피하지 않겠다는 거냐!" 라이메데스가 고함을 질렀다. 녀석이 그대로 밀고 들어왔고, 레이디안이 입술을 꾹 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곧, 굉장한 어둠의 파동이 녀석들 둘을 동시에 덮쳤다. 쿠콰콰콰콰쾅―! 라이메데스가 보낸 어둠의 힘 앞에 완전히 노출된 레이디안의 몸 주변으로 , 어둠이 터지는 것을 보았다. 쿠아아아아앙―!! 그리고, 한참만에 어둠이 걷힌 곳에서는. "내가 가라고 몇 번을 말했어?" 잔뜩 찢어진 블러드 아미복을 입은 라이메데스가 힘겹게 일어서는 모습이 있었다. "……네가, 이긴 거냐?" 녀석의 질문을 무시하고 던진 내 말에 라이메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 는 천천히, 덜렁거리는 팔을 부여잡고 라이메데스 쪽으로 걸어갔다. 라이메 데스는 레이디안의 목 부분에 검은색으로 번들거리는 광구를 하나 띄워놓고 , 그의 복부를 꾹 누른 채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레이디안은 후우, 하고 가볍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라이메데스가… 이겼다. 나는 레이디안의 얼굴을 내려보았다. 레이디안은 차분하게 웃고 있었다. 이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소. 로시엔의 그것을 연상하게 만드는, 그런 차분함. "어쩔 거야?" 나는 라이메데스를 보며 물었다. 라이메데스는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죽일 거다." "……뭐?" 녀석의 한마디에 경악한 내가 외쳐도 라이메데스는 차분한 얼굴을 할 뿐이 다. "죽인다." "로시엔하고 똑같은 얼굴이야! 아직 이 녀석한테 그 이유를 듣지 못했어!" 내 질문에, 라이메데스는 입가를 살짝 틀어 미소를 지었다. "훗, 로시엔님과 얼굴이 같은 이유? 간단해. 마계에서는 아주 자자한 이야 긴데." "에?" 마계에선 아주 자자한 이야기라니? 난 단 한번도 들은 적이 없어. 게다가 저녀석은, 그 이야기는 자기와 로시엔만 아는 거라고 그랬는데. 라이메데스는 레이디안을 노려보며 천천히 입술을 열어 말했다. "너를 죽인다고 해봤자, 로시엔님은 나를 원망하지 않을 거다." "쿡, 오히려 아주 좋아할걸." 레이디안은 넉넉한 미소로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라이메데스가 차갑게 말했다. "그럼, 죽여주지." 그런데, 순간이었다. 쉬이이이익!!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난다 싶어서 고개를 돌려보았더니, 저 멀리서 무 엇인가 희끗한 것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란 난 당장 찢어지기 일 보직전이었던 오른손 대신 왼손에 검을 바꿔치기한 후, 라이메데스의 몸을 휘감을 듯한 기세로 달려오는 그것을 탁 하고 쳐 잘라 내렸다. "그만해요! 우리 주인님 건들지마!" 사락. 내 검에 무엇인가가 잘렸다. 나는 검을 타고내리는 그것을 보면서, 그제서 야 우리 쪽으로 달려오던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간파할 수 있었다. 가늘 게 손가락 끝에서 흩어지는 그 것은, 머리카락이었다. "디안……?" -------------------------------------------------------------------------------- Back : 1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8 (written by 카르민) Next : 12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6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1554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3rd March 2002 11:39:30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28-02-2002 18:05 Line : 288 Read : 1657 [14]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8 -------------------------------------------------------------------------------- -------------------------------------------------------------------------------- Ip address : 61.76.191.23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내 예상이 맞았다. 디안이다. 저 멀리서,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디안이 달려왔다. 청동제 동상에 맞아서 , 결국엔 기절했었을 텐데. 이 두 녀석의 싸우는 소리 때문에 일어났나 보 다. 자기 주인님이 걱정 되서, 그래서, 저렇게 피를 철철 흘리며 뛰어온 건 가? 흘낏 녀석의 머리카락을 보고 난 후 나는 멈칫했다. 원래는 어깨 정도까지 오던 은회색의 머리카락이, 컷트 형식으로 쳐져 있었다. 아까 내가 머리를 자른 탓인 것 같다. 디안은 입술을 악 물고 다가와 벙쪄 있는 라이메데스 의 앞에 섰다. "주인님은 못 건드립니다!" 당돌한 눈빛으로 말하는 디안을 향해, 라이메데스는 차가운 조소를 흘렸다 . "웃기는군, 변태. 어쩌다가 이런 인간 따위에게 서열 87위의 마족이 보호 받게 된 거지?" 보통 때의 라이메데스가 아니었다. 언제나 실실거리는 그 놈은 어디로 갔 는지, 라이메데스의 눈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라이메데스가 말을 이었다. "서열은 87위지만, 실제로 네 힘은 서열 50위권 내의 마족들과 맞먹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 내가 얼마 전부터 고위 마족이라는 칭호를 얻었다고는 하 지만, 사실 마지막 공격을 하기 전에는 당신이 훨씬 우세했지. 안 그래?" 씨익 웃으며 라이메데스가 말했다. 디안은 레이디안의 앞에 선 채로 손을 좍 벌리고 떨고 있었다. 라이메데스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못하는 건지, 디안은 이빨을 꼬옥 물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케시안의 디신테그레이션께서, 겨우 서열 89위인 나에게, 졌다?" 케시안? 나는 라이메데스의 입에서 나온 어떤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케시안. 내 기억이 분명하다면 그것은 분명, 한 마족의 이름이었다. 서열 100위까지 외우는 것도 벅차 죽겠는데, 마계의 역사까지 외울 필요는 없다 고 생각해서 마계 최고위 마족들의 역사연표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은 나였 지만, 그래도 전대 혹은 전 전대 마족 중 눈에 띄는 몇몇 정도는 나도 기억 하고 있었다. 그리고 케시안이라는 마족, 전 전대 서열 2위였던 그 마족은 내 기억 속에서 많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이름이었다. 그는 소멸했다. 세라핌과의 전투에서. 그는 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잔혹한 마족이었다고 했다. 그런 그를 소멸시키기 위해서 여섯 명의 세라핌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 잔혹하 고도 대단한 마족은 그런 세라핌 여섯을 쓱싹쓱싹 무썰기 했다나? 하지만 세라핌 여섯을 모두 죽인 후, 그 자신도 소멸했다고 한다. 하긴, 아무리 최 고의 마족이라 해도 세라핌 여섯을 상대하는 건 미친 짓이다. 그런데, 여섯 을 상대로 이기기까지 했으니, 이 케시안이라는 마족은 비록 죽었을지라도 마계에서는 영웅으로 치부시 되는 거다. 그런데 그 이름이 지금 왜 나오는 거냐? "닥쳐, 애송이!" 내 의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이메데스와 레이디안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 졌다. "케시안의 힘 중 대부분을 로시엔님께 뺏겼다고는 하지만, 당신 역시 강하 지. 막판 공격 때, 당신은 피할 수 있었는데 피하지 않았어." 무슨 말이야? 케시안의 힘을 뺏기다니? 대체 그게 뭔 소린데? 레이디안의 시선이 라이메데스에게 맞닿았다 떨어졌다. "왜 피하지 않았을까?" 라이메데스가 가볍게 한 번 웃었고, 레이디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주, 주인님은 못 건드려요!!" 그들의 모습에서 불안감을 느꼈는지, 갑자기 디안이 소리쳤다. 디안은 라 이메데스의 앞을 막아선 채로 그 눈을 빛내고 있었다. "비켜. 벤다." 라이메데스의 말에 디안은 어깨를 움찔했지만 그래도 비켜서진 않았다. "내가 죽기 전까진 안 돼요! 주인님은 안 돼요!" 디안의 외침을 무시하고, 라이메데스가 한 발을 움직였다. 「라이메데스, 저 애는 건드리지마.」 조그맣게 전음을 보냈는데도, 라이메데스는 내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태연작작하게 발을 옮길 뿐이었다. 한참동안 발을 옮기고 있던 라이메데스 가 문득 걸음걸이를 멈추고 디안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럼, 널 먼저 죽여야 하는 건가?" 이, 이자식이!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나는 깜짝 놀라 디안 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조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레이디안이 힘겹게 손을 뻗어 디안을 밀어냈다. 디안은 휘청, 하고 몸이 흔들려 저 멀리에 넘어졌다. 레이디안은 그런 디안을 한 번 보고 난 후, 라이메데스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애는 상관없다. 건드리지마." "주, 주인님." 라이메데스는 그 말에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래? 아까 네가 내 공격을 피하지 않은 이유는 저 꼬마 때문이었나?" 아. 라이메데스의 한 마디에, 나는 뭔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제야 알겠다. 처음부터, 레이디안은 공격을 하려다말고 움찔움찔 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공격 때, 충분히 피할 수 있었는데도 피하 지 않았었다. 라이메데스가 공격 했을 때, 레이디안은 저택을 등지고 있었 다. 만약 거기서 레이디안이 피했다면, 라이메데스의 공격에 저 저택은 완 전히 박살이 났겠지. 그리고, 저 저택에 있는 모든 것도 부서졌을 것이다. 저 안에 있던 디안도. …살아남지는 못했겠지. 나는 새삼 레이디안을 보았다. 이 녀석 의외로 괜찮은 구석이 있었잖아,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놈을 보는데, 저 멀리로 넘어져 있던 디안이 다시 달려와 레이디안의 앞을 가로막았다. 라이메데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디안, 그만해. 괜찮아. 내가 못 죽이게 할테니까……." 나는 너무 안타까워서 그렇게 말했다. 디안의 정수리 부분부터 무섭게 솟 구치고 있는 피가 내 몸을 싸하게 굳혀버릴 지경이었다. 계속 흐르다가, 결 국엔 얼굴에 말라 붙어버린 그 피는 내게 '너 때문이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심장이 다 철렁할 지경이었다. "잘 들어라, 변태. 아이에드님은 언제나 참아주고 계셨다. 원래라면 그 분 성격에 너는 죽어도 한참 전에 죽었겠지만 그 분은 죽이지 않으셨다. 너와 로시엔님이 '같은 본질' 이라는 것, 그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말이야." 같은 본질? 그게 무슨 말이야? 뭐, 나중이 되면 꼬치꼬치 캐물으면 되니까 일단은 넘어가주자. "……." 레이디안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라이메데스를 덤덤히 바라볼 뿐이었다. 라이메데스는 차갑게 눈을 들어 말을 이었다. "네 녀석을 죽이려고 했지만, 칼레들린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참지. 지금 돌아가겠어. 만약 막는다면, 이번에야말로 죽여버리겠다." 아예 날 애 취급하는구나, 이 자식아. 레이디안은 대답이 없었다. 라이메데스는 한참동안 그런 레이디안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해 작게 말했다. "가자, 칼레들린. 다들 기다리고 있다." "카민도……?" 그 녀석은 나랑 같이 잡혔을 텐데? "카민도 같이 기다리고 있다. 이 저택에 있던 건 너 하나였어." 에에? 놀라움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라이메데스가 약간 지친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단, 나가자. 나가서 설명 다 해줄게. 아아, 너 팔도 치료해야겠군. 네 가 이 꼴로 돌아다닌다는 거 알면, 아이에드 님이 날 미워하실 거야." 당장에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라이메데스가 말했다. "아아, 그래. 일단 설명은 나가서 들을게" 그다지 나쁠 것 없겠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난 라이메데스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라이메데스, 아까부터 정말 궁금한 게 하나 있었는데." 난 라이메데스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에드가 누구야?" ======================================================== "아이에드가 누구야?" 라니..... ...주인공 녀석, 미쳤나? 왜 갑자기 비련의 기억상실 증 흉내를 내고 그래?;;; 라고 느끼시는 분~?;; 험험-_-; 뭐... 대충 눈치채신 분도 있지만. 그렇게 된 겁니다. 아시겠죠? 그렇게 된거라구요. 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구요?;; 으음... 원래 이 밑에 잡담은. 따로 만들어서 위로 올려놨었는데ㅠㅁㅠ 뭔가 민망해서 여기 밑에다 붙여요..ㅠ_ㅠ 어찌됐든 잡담... 잡담잡담 카르민입니다ㅡ_ㅡ 아니, 저 녀석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하고 경직해 계신 거기 당신, 긴장푸시구요-_-;; 아아, 이틀 사이에 또다시 열 편이 올라가고 말았습니다. 와아~ 연참폭군이라 불러주세요~~~ ...이게 아니고-_-; 아직도 분량은 많이 남아... 거의 40p정도가 쌓여있습니다. 즉. 무려. 10연참도 가능하다는. 무서운 결론이 나옵니다-_- 이걸... 천천히 한 편 한 편씩 올릴까... 아니면.... 그냥 막 몰아서~~~ 내일 다 올려버릴까~~ 이런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는 카르민입니다. 흐음... 제가 이 이야기를 왜 꺼내냐 하면. 왜 꺼냈을까요?;;; 사실... 요즘 <직접연재 작가들의 이야기>에 안 들어가집니다ㅠㅁㅠ 카르민은 거기에서 매일같이 떠들고 놀고 뒹굴던 인간이라. 거기에 잡담을 못하니 가슴에 울분이 쌓여 터져버릴 것 같았던 겁니다! ...이게 아닌데-_-;;; 어찌되었든. 제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말입니다! 최근 G.B에 완전히 빠져버렸다는 것!! 이것이었습니다!!(당신, 정말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거야? 그런거야?;;) 아아~~ 너무 멋있어요, 닥터 자칼ㅠ_ㅠ 당신도 좋아, 현의 카즈키씨~~~ㅠㅁㅠ 반군, 당신 내 타입이야~~~///// 끼야~~~ 긴지씨도 넘 귀여워~~~~ 어떡해~~~~ ...이러면서 소설은 안 쓰고 겟백만 죽어라고 보고 있습니다; 고로... 이번 연참 행진 끝나면... 잠적할지도+_+;; 네에. 뭐... 하지만 마감도 오고 있고...=_=... 담당님 독촉은 무섭고........-_- 여러분들은 아마. ................미친 녀석의 연참행진을 보시게 될 지도 모릅니다;; 뭐... 그렇다는 얘기예요^ㅁ^ 읽어주시는 독자분들. 감상 보내주시는 독자분들. 사랑하구요ㅠㅁㅠ 메일 보내주셨던 당신....... 저... 이름 외우고 있습니다..... 보내신 이름 그대로... 계속 보내주세요... 그럼.. (결국 당신, 하고 싶었던 얘기가 뭔데?;;) -------------------------------------------------------------------------------- Back : 1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9 (written by 카르민) Next : 13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7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1554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3rd March 2002 11:39:33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1-03-2002 22:36 Line : 425 Read : 1054 [15]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9 -------------------------------------------------------------------------------- -------------------------------------------------------------------------------- Ip address : 61.78.221.13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제 26장: 목걸이와 과거 "아이에드가 누구야?" "뭐, 라고……?" 막 한 발자국을 아치 형 다리 밑 문 밖으로 내딛는 시점에서 내가 한 그 말 한마디에, 라이메데스의 얼굴색이 완전히 흐려지는 것이 보였다. 새하얗 게 질린 얼굴의 라이메데스는, 그야말로 '못 들을 것을 들은 얼굴' 을 하고 있었다.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녀석의 얼굴을 본 것을 마지막으로, 내 다 리가 완전히 그 아치형 다리 밑을 지났다. 이이이잉. 어디선가 낮은 바람소리가 들렸다. 잠시 눈앞이 흐려졌다. 그 순간에도, 라이메데스의 눈은 내 얼굴에 붙은 채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나는 보았 다. 라이메데스의 눈빛이 사람 하나는 때려죽이고도 남을 정도로 사나워져 있는 것을.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살인을 저지를 것 같은 빛을 띄고 있는 것을. 한참 후, 시야가 명백하게 밝아졌을 때, 나는 아까보다 더욱 사나워진 얼 굴의 라이메데스를 발견하고 움찔했다. "……저 쳐죽일 자식이……." 녀석의 얼굴 전체가 '화났다' 혹은 '분노했다' 라고 말하고 있었다. 녀석 의 초록색 눈동자에 짙은 안개가 끼어 있다. 심상찮은 녀석의 표정에 불길 한 느낌이 들어 왜 그래? 라고 물으려고 했을 때였다. "카아아아아알∼!" 허, 헉? "흐윽, 무사하셨군요∼" 허, 허어어억? "여어, 친구. 용케 무사했네." 허, 헐? "흥, 멍청이는 쉽게 죽지도 않는다구." 이, 이봐, 레니.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닌걸? 정말로……. 녀석들이 있었다. 바로 앞에 카민이 있었다. 에세렌이 있었다. 가윈… 아니, 윈디나가 있었 다. 레니가 있었다. "어, 어떻게 무사한 거냐? 루덴스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로 달려와 엉겨붙는 녀석들을 향해 물었다.( 너, 너희가 동물이냐?) 내 말에 레니가 흥, 하고 고개를 돌린다. "키세온님은 군사들을 이끌고 먼저 돌아가셨어. 일단 황실에 보고할 일도 있고……. 그 수많은 병사들을 언제까지 여기에 배치해 둘 순 없잖아? 우리 야 네가 돌아올 때까지 남아있기로 했었지만." 레니의 말에 나는 으응, 하고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레이디안과 함 께 있었던 시간만 해도 2주일이 훨씬 넘었으니 당연했다. "동굴이 무너져 내릴 때는 어떻게 무사했어?" 녀석들의 얼굴에 하나 같이 상처라곤 없는 것을 보며 내가 한 질문에, 이 번에는 에세렌이 대답을 해온다. "아아, 그건." 에세렌은 조용한 어조로 입술을 열었다. "그게…. 동굴이 무너졌을 때, 바위가 사방에서 떨어지고 난리도 아니었잖 아요. 일단 급한 마음에 있는 대로 신성력을 끌어 모아 홀리 실드를 쳐 사 람들을 보호하려고 노력은 했는데……. 힘이 딸려 곁에 있던 몇몇 분 밖에 보호하지 못했어요. 바위가 떨어지고, 이제 다 끝났다 싶었는데……. 바로 그 때 '그 분' 이 다른 사람들을……." 그 분? 막 긴장해서 다음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는 순간이었다. "……칼레들린." 묵직하게, 라이메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녀석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잔뜩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아까 했던 말……. 다시 해봐라." 나는 허어? 하는 소리를 내며 녀석을 보았다. "무슨 말을?" "저 문밖으로 나오면서 했던 말." "뭐? 아, 아이에드가 누구냐고 물은 거?" 순간이었다. 안 그래도 사나웠던 녀석의 눈빛이 더더욱 심할 정도로 비틀어진 것은. 말 그대로, 한 순간에 녀석의 눈빛이, 확 하고……. 돌· 아· 버· 렸· 다. "저 놈의 자식이!" "왜, 왜 그래요?" 갑자기 버럭 고함을 치는 라이메데스의 반응에 놀란 듯, 다른 사람들이 눈 을 부릅뜨며 물어왔다. 라이메데스는 그러나 누가 질문을 했든말든 대답해 줄 마음이 없는지, 휙 하고 돌아서서 다시 한 번 내게 고함을 칠 뿐이었다. "칼레들린! 너! 저 녀석 앞에서 의식을 잃은 적 있어?" 의식을 잃은 적? 세, 셀 수 없이 많을 텐데? 일단 처음에 쓰러졌을 때도 그랬고, 첫 번째 내기 때 한 대 맞고도 그랬고, 술 마시고도 쓰러졌고, 그 방에서 잠든 적만 해도 수십번이었으니. "응." "제길, 그 때 당했나……. 이 자식이……. 아무리 봐주려고 해도 봐줄 수 없게 만드는군. 다시 가서 죽여버리겠어! 그 얼굴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전부 찢어놔주지!" 스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외친 녀석은, 갑자기 뭔가에 홀린듯한 움직임 으로 내 팔을 휙 하고 잡아당겼다. 엑? 하는 소리를 내고 녀석을 보는데, 갑자기 녀석이 내 목을 턱 하고 움켜쥐었다. "큭?" 이, 이 자식이! 내 목을 졸라 죽일 셈이냐! 하고 외치려던 것도 잠시, 뭔가 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라이메데스가 얼굴을 내 목 근처에 들이댄 채로 아주 유심히, 꼼꼼히 내 목 주위를 돌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뭐 하는 짓이야? 너도 변태한테 옮았냐?" 고함을 버럭 지르는데, 라이메데스가 작게 입술을 움직였다. "……누구, 거울 있는 인간." 갑작스러운 그 주문에 답하는 인간은 전무. 하긴, 마치 '대답해! 대답해! 대답 안 하면 죽여버리겠어! 앙? 대답 안 해 ? 너부터 죽을래?' 라는 목소리로 스산하게 말하고 있는데, 저기에 대답할 용기가 생기는 게 이상하다. 한참동안 사람들이 조용하자 더더욱 화가 난 듯, 싸가지만땅 라이메데스가 다시 고함을 친다. "거울 있는 인간 당장 못 나와? 옷 뒤져서 나오면 죽여 버릴 거다!!" 헉, 허억. 라이메데스, 너 언제부터 이렇게 유치해졌냐? "나…… 갖고 있는데요." 라이메데스가 뒤져서 나오면 죽여 버릴 거다, 라고 말한 것에 상당히 겁먹 은 듯, 레니가 주저주저, 삐죽거리며 다가와 라이메데스에게 작은 거울을 하나 내밀었다. 꼴에 여자라고 레니녀석, 거울을 갖고 다니는군. 호오, 놀 라워라. 그런데 라이메데스 이 녀석은 왜 갑자기 거울을 찾고 난리지? 그 거울 어디에 쓸 건데? 라고 물어보려는 순간이었다. 라이메데스가 레니 에게서 받은 그 거울을 척, 하고 위로 들더니 그대로 내게 건네 쥐어줬다. "……거기, 네 뒷덜미 부분. 머리카락 걷고 봐." 뭐냐. 대체. 대체 이 녀석이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해야할 것 같아서(어쩐지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맞아 죽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천천히 목덜미에 드리워져 있는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그리고, 내가 경악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에, 이건? 내 목에서 내가 발견해낸 것은… 뚜렷한, 무슨 문신 같은 '문양' 이었다. 미드나잇 블루의, 아름다운 문신 같은 그 것. 불꽃같기도 하고, 물방울 같 기도 하고, 잔뜩 가라앉은 다른 무엇 같기도 한. 내 피부 위에 그려진 그 것은 뚜렷한 하나의 표식이었다. 이거, 일전에 디안의 목에서 발견한 것과 똑같은…? "……기억을 지운 거야." 입술을 질끈 물어뜯으며 녀석이 말했다. 나는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녀석 을 보았다. 녀석은 이빨을 우드득 우드득 갈며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의 특기다. '기억을 지우는 일'." "기억을 지운다고?" 그, 그러고 보니… 레이디안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가장 큰 특기가 바로 기억을 지우는 일이라고. "케시안 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능력…. 기억을 하나 지울 때마다, 목 주위 에 이런 문양이 나타난다. 너에게서 '아이에드님' 에 대한 기억을 지운 거 다, 그 죽일 자식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양 주먹을 꾸욱 쥐며 라이메데스가 한 그 말에, 나는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뭐야. 그러니까, 상황정리를 해보자면……. 상황 1. 원래 저 레이디안이란 녀석은 '기억 지우기' 가 특기인 녀석이다. 상황 2. 그 기억 지우기를 하면 몸에 이상한 형태의 '문신' 이 나타난다. 상황 3. 난 문신이 나타났다. 그리고 난 아이에드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다. 결론. 녀석이 '아이에드' 란 자에 대한 내 기억을 지웠다. 또 다른 상황 1. 디안의 목에도 나와 같은 문양이 있었다. 또 다른 상황 2. 그 문양은 기억을 지우면 나타나는 문양이다. 결론. 디안도, 레이디안에 의해 지워진 기억이 있다. "가자." 살짝 입술을 물면서 라이메데스가 내 팔을 턱 잡았다. 녀석이 너무 지나치 게 흥분한 것 같아서 조금만 더 기다려봐, 라고 외치려고 했던 나는 그러나 기다려야 '기' 자도 입밖으로 뱉지 못하고 멈칫하고 말았다. 라이메데스가 입술을 우드드드득 깨물며 살벌한 눈을 들어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온 몸 으로 살기를 뿜어내는 녀석에게서 느낀 감상은 한마디로 '허걱! 살인나겠다 !' 였다. 녀석의 눈은 벌겋게 충혈된 채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기억이 지워진 나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데, 이 녀석이 나보다 수천 배는 흥분한 느 낌이다. "아까 그 공간에서 여기로 나오는덴 문 하나만 지나가면 되지만, 여기서 그 공간으로 가는 방법은 복잡해. 내 옷, 꽉 잡고 있어라."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정말 내 목을 졸라서 기절시킨 후에라도 데려갈 것 같으니, 일단 말은 듣는다만 영 분위기가 살벌하군. 짚고 넘어갈 건 짚고 넘어가자. "그런데 너. 레이디안 어떻게 할 건데?" "이번에야말로 진짜 죽인다." 우득, 하는 타격음이 죽인다, 라는 말의 뒤를 이었다. 나는 허, 하는 눈으 로 라이메데스를 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설마하니 로시엔하고 같 은 얼굴인데 죽이진 못하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다른 녀석들이 서 있는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 둘 이 하는 얘기를 빤히 보고 있는 녀석들의 얼굴(도저히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를 못하겠으니까 설명 좀 해줄래요? 라는 표정을 하고서, 말똥말똥한 눈을 빛내고 있는 바보 놈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와서 나는 싱긋, 이 아름 다운 얼굴이 알맞은 아주 아주 아름답고 싱그러운 웃음을 흘려주며 말했다. "잠깐만 갔다올게. 기다리고 있어." 내 말에, 카민과 에세렌이 단박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어딜?" "어디를요?" 정말이지 바보콤비라는 별명을 지어주고 싶은 녀석들이다. 얼굴 표정도 꼭 뭐 씹은 것처럼 똑같이 해서는, 둘 다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바보든 어쨌든 나는 날 걱정하고 있다고 온 몸으로 말하는 이 두 녀석을 보며 뭔가 찡한 감동이 밀려옴을 느꼈다. 나 칼레들린, 인생 헛살지 않았구나 싶어서 그런 녀석들을 바라보는 눈에 힘을 준 그 순간. "바보는 다치지도 않으니까 걱정하지마." …싸가지 없는 레니계집애가 남 감동 받는데 끼어 든었다. "바보라서 미안하군, 꼬·마·" 훗, 하고 웃으며 녀석의 말을 받자, 레니가 잔뜩 화난 얼굴을 하며 부다닷 내 쪽으로 뛰어왔다. 난 씩 웃으며 달려오는 녀석을 피하려 했다. 그런데, 달려온 녀석이 갑자기 내 팔을 꽉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아윽!" "어, 왜, 왜 그래?" 단지 평소처럼 내 팔을 잡고 '너 죽는다' 같은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은데 … 문제는 평소와는 다른 내 팔이었다. 왼손으로 꽉 지탱하고 있을 때는 상 처가 벌어지든 어쨌든 괜찮았는데, 녀석이 건드리자마자 갑자기 피가 콱 튀 면서 엄청 아파왔다. 내 반응에 놀란 듯, 레니는 갑자기 얼굴이 굳어서 내 팔을 잡았던 손에 힘을 풀었다. "이, 이게 뭐야, 왕싸가지? 너, 팔이 왜 그래?" 아, 빌어먹을. 당기지마. 아, 아파! 눈살을 찌푸리면서 막 팔을 빼려는데, 갑자기 저 너머에서 에세렌이 뛰어 들어왔다. "뭐, 뭡니까!? ……앗?!" "윽……." 에세렌이 레니의 팔을 탁 하고 쳐내더니 자신이 내 팔을 잡았다. 내 팔을 몇 번 훑어보던 녀석의 눈에 금방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히는 것이 보였다 .(허걱! 돌팔이 신관, 고개 저리로 돌려!) 조심스럽게 팔을 잡은 에세렌은 몇 번이고 꼼꼼하게 내 팔을 보더니, 어느 순간 크게 소리쳤다. "이게 뭡니까, 칼레들린님!" "우악! 아파! 잡아당기지마!!" 갑자기 팔을 잡아당기는 녀석의 태도에 놀란 내가 팔을 잡아 빼려고 했지 만, 이미 늦어 있었다. 에세렌이 갑자기 눈을 꾹 감더니, 갑자기 주문을 외 우려고 하는 게 아닌가! "우아아아악, 그만둬! 이 돌팔이 신관아!!" 퍼억! 하고 왼손으로 녀석의 팔을 쳐냈더니, 뭔가 상처받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도, 돌팔이 신관이라니요, 칼레들린님? 흐윽, 상처받았어요." 뭐, 뭐냐 그 얼굴은? 갑자기 두 손을 입가에 모으고 울먹울먹하는 얼굴을 하는 에세렌을 향해, 나는 다시 고함을 질렀다. "상처고 뭐고 집어치워! 신성치료 따위 안 받는다니까!" "하, 하지만 그 상처… 빨리 치료해야 되요." "됐어! 됐다잖아!" 나는 조심스럽게 팔을 흔들며 말했다. 에세렌은 뭔가 불안한 듯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에세렌을 향해 끊임없이 괜찮다니까! 라고 소 리를 질렀다. 에세렌은 끝까지 나에게 신성치료를 해주겠다고 했지만(나, 날 아예 죽일 셈이냐?) 난 그 말을 무시하려 애쓰며 라이메데스 쪽에 가서 섰다. 라이메데스는 내 팔을 흘끗 한 번 보며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벌 렸지만, 그대로 그것을 다물어버렸다. 난 뭐냐 싶었지만 캐묻는 것도 그렇고해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리고 라 이메데스의 옷깃을 잡았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잠깐만." 뒤로부터,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돌아보았더니, 주황색 머리카락의 그 녀석, 가윈… 아니, 윈디나가 보였다. "뭐지?" 라이메데스가 인상을 쓴다. "변태에게 가는 건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녀석이 질문했고,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 다. "그런데." "……나도 데려가." "뭐?" 나는 버럭 고함을 쳤다. 그러자 그가 내 쪽으로 저벅저벅 다가오기 시작했 다. 내가 살짝 한 발을 뒤로 물러서는데, 녀석이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내게 들이대며 짧게 한마디했다. "데려가." 녀석의 결연한 눈동자가 부들, 떨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아아, 하고 중얼 거리며 녀석을 보았다. 녀석의 눈동자는 너무나 확고한 의지를 담고 있어서 보는 내가 무서울 지경이었다. "음." 녀석의 얼굴을 보았다. 라이메데스가 안 돼, 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 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허락에, 녀석은 떨리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가만히 라이메데스를 올려다보았다. 라이메데스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 더니 우리들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옷이나 잡아라." 라이메데스가 작게, 전음으로 말해왔다. 「그 놈 찢어죽는 꼴을 그렇게 보고 싶다면, 데려가 주는 것도 나쁘진 않 겠지.」 라, 라이메데스. 아… 아주 막나가는구나, 너. ------------------------------------- 왠지 라인이 엄청 길 것 같은데..?;; -------------------------------------------------------------------------------- Back : 1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0 (written by 카르민) Next : 1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8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1554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3rd March 2002 11:39:36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1-03-2002 22:37 Line : 292 Read : 1018 [16]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0 -------------------------------------------------------------------------------- -------------------------------------------------------------------------------- Ip address : 61.78.221.13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 ◇ ◇ 후욱, 하고 순식간에 다시 시야가 흐려졌다. 시야가 다시 밝아졌을 때는, 내 발이 이미 아까의 그 정원의 밟고 있었다. 고고한 달빛이 얼굴 위로 떨 어지는, 바람이 불어 가볍게 잔디를 훑고 지나가는, 아까의 그 정원에. 라이메데스는 붉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조금 오랜 시간동안. 처음엔 이 녀석이 꼴같잖게 왜 하늘을 감상하고 난리야? 갑자기 폼 재는 거야 뭐야?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나는 녀석의 그 행위가 단지 나처럼 우아하게 하늘빛을 바라보며 감상에 빠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화가 나서 터져 버릴 것 같은 마음을 진정시키는 행위' 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식식 숨을 몰아쉬는 녀석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뭔지 모를 오싹함에 한 발 물러서는데, 갑자기 라이메데스가 시선 을 내려 레이디안의 성 쪽으로 향했다. 녀석은 천천히 손을 올리더니 버럭 고함을 쳤다. "변태―! 나와! 죽여버린다!" 콰콰콰콰콰콰콰쾅―! 그 말과 함께 인정 사정없이 라이메데스의 손에서 아까와 같은 어둠이 뻗 쳐 나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 있던 저택에서 큰 균열이 일었 다. 라이메데스는 아랑곳않고 다시 한 번 손을 암흑을 모아 던졌고, 그 것 은 그대로 다시 한 번 성에 부딪혔다. 어둠에 부딪히고 또 한 번 부딪힌 파 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정신없이 튀는 저택의 파편은 나나 윈디나 에게는 맞지 않았다. 이 주도면밀한 자식이 언제 준비해 두었는지 벌써 엔 클레이브까지 우리 주위에 쳐놓았기 때문이다. 「미, 미친 자식! 이게 무슨 짓이야? 여긴 윈디나도 있단 말이다!」 콰콰쾅! 허, 허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저 멀리에 있는 저택에 반쯤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 완전히 경악한 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놀란 눈을 들어 그런 녀석 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라이메데스는 입꼬리를 가볍게 올린 채 우후, 하 고 웃으며(네놈이 무슨 마왕이라도 되냐! 그 사악한 웃음은 또 뭐야!) 끊임 없이 쳐부수고 있었다. 나는 내 옆에 있는 윈디나의 눈치를 보기 위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건 또 웬일인가? 경악하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할 이 녀석은 너무나 태연하고도 태연한 얼굴,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훗' 하고 웃어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내게 보였던 그 여유작작한 얼굴 그 대로! 저, 저 놈의 눈은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저런걸 보고도 놀라지 않을 수가 있는 거지? 「그 녀석 눈치보지마. 너 없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한테는 내가 '마법사' 라고 해뒀다. 그럼 된 거 아닌가?」 「빌어먹을! 마법사는 무슨 젠장할 놈의 마법사라는 거냐? 얼어죽을, 마법 사 같은 소리하고 있네! 마법사가 주문 시전도 없이 이렇게 싸우는 거 봤어 ? 봤어? 봤냐고! 그리고! 너 정도의 실력을 가진 인간 마법사가 존재한다는 게 말이나 돼!?」 「훗. 저 인간은 마법사에 대해 자세히 모를테니 괜찮아.」 머, 멋대로 다 해먹어라, 자식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고려도 하지 않는지, 내게 가볍게 던진 그 말과 함께 라이메데스의 팔이 다시 한 번 거칠게 움직였다. 저런 식으로 나가다간 저택이 다 박살난단 말이야, 이 빌어먹을 자식아! "남의 집에 너무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나, 꼬마?" 라이메데스가 한 번 더 팔을 들었을 때, 저 멀리서 아릿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 하는 사이에, 갑자기 바로 앞의 공간이 일그러지듯 한 번 비틀렸 다. 그리고 그 뒤틀린 공간은 곧, 남빛 머리카락을 가진 한 재수 없는 녀 석을 하나를 토해냈다. "레이디안! 이 자식! 죽여버린다!!" 레이디안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라이메데스가 버럭 고함을 쳤다. 레이디안 은 언제 갈아입었는지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그, 그 사이에 옷을 갈아입고 머리도 감았나보다. 왜 저렇게 깨끗하냐?)입가에는 전과 마찬가지로 가벼운 웃음기마저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레이디안의 뒤에는, 그의 옷깃을 가만히 감싸쥐고 있는 디안이 있었다. 디안은 조금 겁먹은 듯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에 나는 뭔 가 또다시 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디안의 머리에는 아까와는 달리 붕대 같은 것이 감겨 있어서 그나마 낫긴 했지만, 그래도 바라보기 미안했다. 나는 디안에게 가볍게 손을 뻗으며 일단 이 쪽으로 와, 라고 말했다. 그러 나 디안은 고개를 살레살레 저을 뿐이다. 마치, 자기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다시 올 줄 알았지." 레이디안이 피식 웃었다. "'다시 올 줄 알았지'? 너 이자식,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네 놈의 몸을 갈가리 찢어 버리기 전에 어서 이녀석 기억을 돌려놔!" 라이메데스가 버럭 고함을 쳤다. 이, 이 녀석 설마 저 말 진심이야? 레이디안은 라이메데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흥, 칼레들린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네가 왜 흥분하지?" 으으, 저 느끼한 눈빛! 치워, 이 자식아! "그건 칼레들린이 '그 분' 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지! 칼레들린에게서 아이 에드님의 존재를 지운다는 건, 이 녀석의 존재 일부를 부정하는 거나 마찬 가지야! 정말 악취미다, 레이디안!! 왜, 칼레들린에게서 하필이면 '아이에 드님' 을 지운 거지? 말로 할 때 당장 원래대로 돌려놔! 지금 당장이라도 네 녀석을……!" 말을 하다 말고 녀석의 주위에 엄청난 검은색의 막이 파락, 돋아났다 사라 졌다. 저, 저거 혹시 말로만 듣던 퓨리부스(fury booth)인가? 천사가 극도로 흥 분했을 때 온 몸으로 빛을 뿜어내는 것과 같이, 마족은 흥분하면 온 몸으로 검은빛의 사기를 뿜어낸다. 정말로 극도로 흥분했을 때 말이다. 그리고, 저 상태에서 조금만 더 지나면… ……이따위 공간쯤은 가뿐히 넘길만한 대단한 마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다. 어, 엄청 흥분하는 군, 이 녀석. '아이에드' 란 자가 나한테 그렇게 중요 한 존재였나? 하지만 정말로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데. "기억을 돌려놓으라? ……훗, 싫다면?" "……긴 말 안 한다. 찢는다고 했다." 라이메데스의 짧은 말에, 레이디안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칼레들린에게는 이미 '망각' 의 인(印)을 찍었다. 한 번 찍은 낙인을 지 우는 건 불가능하지. 나는 '지우는 일' 은 할 수 있어도 '되돌리는 일' 은 못하거든." "이, 이……." 갑자기 라이메데스 주위의 퓨리부스가 몇 배로 더 증폭되었다. 그 모습은 괴기스럽다못해 공포스러워서 나는 윈디나를 잡고서 한 발자국 물러서는 수 밖에 없었다. 윈디나의 어깨를 쥐고 뒤로 당기자, 이 녀석 역시 바짝 얼어 붙은 상태라 쉽게 내 쪽으로 끌려왔다. 라이메데스는 치켜 뜬눈으로 씹어뱉 듯 천천히 말했다. "이, 이런 식으로…… 아이에드 님께 복수하는 거냐?" 아이에드에게 복수?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아아, 그래. 아이에드가 저 녀석을 꽤 아끼고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 덤 으로 로시엔의 기억도 지워볼까 하다가 그건 관뒀지." 씨익, 하고 웃는 얼굴이 어쩐지 즐거워 보인다. 어쩐지, 조금 화가 나는군. "……방법을 말해라. 이 녀석이 다시 아이에드님을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을 !" "방법? 죽기 전이 되면 혹시 생각날까?" "네, 네놈을……." 라이메데스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위, 위험하다! 들은 대로라면, 퓨리 부스가 한도 내로 커져 마기를 뿜고나면… 그 다음으론 포, 폭주를 한다고 ……. "……이건 주인님이 잘못하신 거예요." 그런데 바로 그 때. 어디선가 아주 작게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바라보니 , 레이디안의 옷깃을 가만히 잡고 있는 디안이 보였다. 여태까지 여유만만 한 표정이었던 레이디안은 갑작스러운 그 말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 고 뒤를 돌아보았다. "주인님이 잘못하셨어요……. 안 되요, 그런 거." "디안?" "편해지는 것보다 기억하는 게… 더 좋아요, 주인님……."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작게 속삭이는 디안의 말에 레이 디안의 어깨가 움찔, 하고 크게 떨렸다. "주인님이 잘못하셨어요." 낮은 디안의 목소리에 레이디안의 눈동자가 아래위로 크게 흔들렸다. 레이 디안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디안만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널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저 인간 꼬마도 잘못했다고 하는군. 자, 어서 말 해. 어떻게 하면 돌릴 수 있지?" 이상하게 주위를 감아버린 침묵을 깬 것은 라이메데스의 목소리였다. 나는 흘끗 라이메데스의 얼굴을 보고 또 한 번 굳어버렸다. 싸하게 비틀어진 입 꼬리를 위로 치켜올린 녀석 눈동자의 흰자위가 완전히 붉게 변한 것이 보였 다. "……." 레이디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해!!" 콰콰콰콰콰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라이메데스가 레이디안에게로 덤벼들었다. 레이디안은 입술을 질끈 물더니 디안을 다시 저 멀리로 밀쳤다. 디안은 아까와 마찬가 지로 정원 한구석에 힘없이 뒹굴었다. 레이디안은 입술을 꾹 물며 소리쳤다 . "디안! 피해라!" 디안은 멍한 눈으로 그런 레이디안을 보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들어 저 멀리에 떠 있는 라이메데스를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저 놈. 지금. 완전히 미쳤어. 쿠우우우웅―! 두 녀석이 얽히고 섥혀 아까와 마찬가지로 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까 와는 달리 라이메데스가 거의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고, 레이디안은 막기 에 급급한 것 같았다. 하긴 당연한 게, 레이디안은 아까 전 라이메데스 때 문에 꽤나 크게 다친 데다가, 라이메데스놈이 너무 흥분해서 앞뒤 안 가리 고 공격을 하고 있지 않은가? 녀석들이 싸우는 바람에 생겨난 마찰바람이 사정없이 내 뺨을 때렸다. 녀 석들이 뿜는 모든 것들이 바람으로 화해 나와 윈디나, 디안 쪽으로 몰고 들 어왔다. 나는 녀석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다말고 시선을 떨구었다. 슬쩍 바라보니, 디안은 멍한 눈으로 두 녀석이 싸우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는 디안에게 가 만히 말을 붙였다. "디안, 괜찮아?" "나, 난 괜찮아요. 그, 그런데 우리 주인님이……." "걱정마. 죽이지 못하게 할 테니까." 저 놈 상태를 봐서 막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만. "저게, 그 변태야?" 문득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윈디나가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녀 석은 차분한 눈을 하고 있었다. 눈동자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고, 목소 리 역시 매우 태연했다. 작게 응, 하고 대답해주었더니 흐응, 하는 소리를 내며 가볍게 고개를 끄 덕인다. 뭔가 분통을 터뜨린다거나 소리를 친다거나 욕을 하는 것이 당연한 데, 그런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게도 씨익 웃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보인다 . "잘생겼네." 허억! 이런 반응이 나올 줄은 전혀 몰랐기에, 나는 완전히 당황해버렸다. 가볍게 웃으면서 잘생겼네, 라고 말하는 윈디나의 얼굴은 티 없이 맑았다. 나는 뭔가 내가 헛것을 보고 있나 싶어서 윈디나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아직도 퍼억! 턱! 욱, 하는 타격음이 새어나오고 있는 저 두 녀석들의 싸 움은 완전히 무시한 채 윈디나만 뚫어져라 바라보노라니, 한참만에 윈디나 가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오빠보단 못하지만." 뭘까, 지금의 이 웃음은. 왜 웃는 걸까? "너, 뭘 바라는 거야?" 나는 작게 물었다. 그러자 윈디나가 고개를 들어 내 눈과 마주했다. "저 사람이 해주고 있잖아. '죽여주고' 있잖아." -------------------------------------------------------------------------------- Back : 1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1 (written by 카르민) Next : 1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39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1554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3rd March 2002 11:39:40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1-03-2002 22:38 Line : 393 Read : 1016 [17]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1 -------------------------------------------------------------------------------- -------------------------------------------------------------------------------- Ip address : 61.78.221.13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저 사람이 해주고 있잖아. '죽여주고' 있잖아." 아. 얼른 고개를 돌렸더니, 어느샌가 싸움이 끝났던 모양이다. 컥, 하고 피를 토해내는 레이디안이 보였고, 그 사이로 레이디안의 목을 잡고 있는 라이메 데스가 보였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을 한 라이메데스는 레이디안의 목 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뭐라고 윽박을 지르고 있었다. "주인님!"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디안이 먼저 뛰어나갔다. 나 역시 얼른 뛰어가 , 레이디안의 목을 조르고 있는 라이메데스를 뒤에서 확 하고 잡아당겼다. 그러나 라이메데스는 내가 아무리 세게 잡아 당겨도 꼼짝하지 않았다. 레이 디안의 목을 꾹 잡은 채 꿈쩍도 않고 있을 뿐이었다. "그만해, 라이메데스!" "……놔." "그만하랬지!" "……찢어 버릴 거다." 으득, 하고 이빨을 가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나는 쳇, 하고 중얼거린 후 왼손으로 허리춤에 들려있던 검을 가만히 꺼냈다. 그리고, 라이메데스 녀석의 목덜미에 들이댔다. "……그만 하라고 했어." 내가 변태를 위해서 이런 짓까지 하게 되다니. 하지만 이건 다 디안을 위해서지, 결코 변태놈을 위해서가 아니다. 뭐, 변 태놈이 로시엔과 똑같이 생기지만 않았다면 누가 뭐래도 이런 짓은 하지 않 았겠지만. "……괜찮겠어?" 내 검이 자신의 목에 닿은 순간, 라이메데스가 작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나는 뭐가, 라고 되물었다. 녀석이 입술을 질끈 물며 말을 이었다. "괜찮겠냐고. '아이에드님' 을 잊어버려도, 괜찮겠어?" "……기억해내면 될 거 아냐?" "그런 쉬운 문제가 아니라면? 아이에드님은 네게……. 로시엔님 만큼이나 중요한 분이야. 그래도, 그래도 괜찮아?"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고 나는 말했다. "기억하고 잊어버리고는 내 문제지 네녀석 문제가 아니야. 네가 이렇게 흥 분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내가 괜찮다는데 네가 왜 그래? 게다 가 '내가 지금 기억 못하는 것' 이 '내가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아. 어찌됐든 기억이라는 것은 떠올리기만 하면 되 는 것 아닌가?" 내 말에 라이메데스가 멈칫했다. 녀석은 천천히, 레이디안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을 놓았다. 레이디안은 털썩 소리와 함께 밑으로 떨어졌다. 레이디 안의 목에 선명하게 간 손바닥 자국이 보였다. 거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 었는지, 레이디안은 죽은 듯 누워서 기침소리조차 토하지 못했다. 디안이 욱,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라이메데스는 그 모습을 뚫어져라보면서 또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다. 놀란 나는 얼른 녀석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만 가자." 라이메데스가 멈칫했다. 나는 녀석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가자." 한참만에, 라이메데스가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심난해 보이는 녀석 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한발자국을 움직였다. 그런데, 그 때였다. "……왜 죽이지 않아?" 그 말과 함께 저 멀리에 서 있던 윈디나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엇, 하는 새도 없이 내 옆을 슥하고 지나간 녀석은 라이메데스 때문에 정원에 내팽겨 쳐진 레이디안 쪽으로 다가가더니 매섭게 눈을 빛냈다. 나는 기다려, 라고 말하려다말고 멈칫했다. 내 쪽을 힐끗 본 녀석의 눈가에 맺힌 것을 보았다 . 여유롭게 웃고 있는 얼굴 그대로, 감옥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녀석의 눈에 서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윈디나를 보고 있던 라이메데스가 내 쪽으로 흘낏 시선을 주었다. "저 녀석이 뭘 하는 거지?" "……일단 가만히 놔둬." 나는 작게 말했다. 나는 레이디안이 '내 기억'을 지운 것에 대해 묵인했다. 하지만, 윈디나는 ? 윈디나는 한참을 걸어, 누워 있는 레이디안의 앞에 가서 멈춰 섰다. 바람 이 불어, 윈디나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한 번 훑었다. 윈디나는 시선을 내려 레이디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가만히, 비틀린 웃음이 걸리는 것이 보였다. 여태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차가운 웃음이. "죽였지?" 싸한 바람이 주위를 맴돌고 있다. "우리 오빠…… 네가 죽였지?" 레이디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네가 죽였지!!" 버럭 고함을 치며 갑자기 윈디나가 발을 들어, 누워 있는 레이디안을 사정 없이 밟았다. 욱, 하는 소리를 토해내며 레이디안의 몸이 크게 한 번 흔들 렸다. 평소의 레이디안 정도의 마족이라면 인간의 여자에게 발길질 당하는 것 정도는 벌레에 물린 정도로 취급하겠지만, 라이메데스에게 그렇게 당했 는데 그 상태에서 발길질을 받으면. "욱―!" 몇 대 맞은 레이디안이 휘청한다. 빌어먹을! 두고보려 했더니 도저히 못 보겠다. 젠장할, 저놈이 계속 로시엔으로 보인단 말야! 난 얼른 발을 움직여서 그 쪽으로 다가가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다가가기 도 전에. "그만!" 사정없이 레이디안을 밟고 있던 윈디나의 몸이 휙, 하고 떠밀리는 것이 보 였다. 강한 힘에 의해 떠밀린 윈디나는 휙, 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정원 의 바닥에 넘어져 버렸다. 아아, 이번에도 역시 디안이었다. 레이디안의 몸 을 그 작은 몸으로 휙 하고 덮으면서 디안은 울먹거리고 있었다. "…제발 그만해요, 제발." 작게 속삭이는 디안의 말에, 윈디나가 움찔했다. 디안은 한참동안 훌쩍였 다. 그 작은 몸으로 한참동안 울먹거리기만 하던 디안이, 어느 순간 작은 목소리로 기어 들어가듯 말했다. "언니가……. 언니가 윈디나죠?" "……아?" "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그 말에 깜짝 놀라, 나와 윈디나가 동시에 이상한 음 을 냈다. 어떻게? 어떻게 안 거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디안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나 언니 알아요. 가윈 뤼케이너의…… 여동생이에요. 그렇죠?" "아!!" "……!" 윈디나는 그 말에 놀란 듯 자신의 입을 턱, 하고 틀어막았다. 가윈, 가윈의 동생. 맞아. 저 녀석은 가윈이라는 녀석의 여동생.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알고 있어, 디안? 디안은 여전히 레이디안의 몸을 꼭 끌어안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한 참만에, 그러니까 내 얼굴에 떨어지는 달빛이 농도가 아까보다 훨씬 짙어졌 다고 생각했을 때, 디안이 안고 있던 레이디안의 몸을 가만히 놓았다. 살짝 일어선 디안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윈디나 쪽으로 다가가는 것이 보 였다. 윈디나는 움찔하며 다가오는 디안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그러나 윈디 나의 뒷걸음질보다 디안의 손이 뻗어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휙, 하고 움직인 디안의 손이 윈디나의 손을 움켜쥐었다. 윈디나가 움찔하 며 그 손을 빼내려고 하자, 디안은 잡았던 윈디나의 손을 가만히 놓았다. 한참동안 윈디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디안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려지는 것이 보였다. 곧, 그 손은 디안 자신의 목덜미에 닿았다. 뭘 하나 싶어서 가만히 바라보았더니,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가만히 푸는 모습이 보였다. 저번에 본 적이 있었던 그 은빛이 목걸이. 독특하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목걸이다. 「디안 보물인데요.」 그렇게 말했었지. "언니 거예요." 생글, 디안이 웃는다. 윈디나는 그저 놀란 듯, 동그란 눈을 뜨고 있을 뿐이었다.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주인님한테 말하는 걸 보니 알겠네요. 언니가, 윈디나에요. 맞죠? 대답해줘요." 작은 디안의 목소리에, 윈디나는 떨리는 입술로 아, 하고 낮게 대답했다. 디안은 환하게, 정말로 환하게 한 번 웃으며 윈디나의 오른손 손목을 잡았 다. 그리고, 윈디나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서 손바닥 위에 자신의 목걸이 를 가만히 올려놓았다. "가윈 오빠가 언제나 갖고 있던…… 목걸이예요." 나는 살짝 시선을 돌려 윈디나의 손바닥 위를 보았다. 은색 목걸이를 받아 든 윈디나의 손바닥이 전체적으로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보였다. 모 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윈디나의 눈이 위아래로 크게 흔들렸다. 윈디나는 그 목걸이를 꼭 쥐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한참, 윈디나가 아무 말 않고 그저 목걸이만 쥐고 있자 보고 섰던 디안이 다시 윈디나 쪽으로 다 가왔다. 윈디나가 감았단 눈을 뜨고 디안을 본다. 그러자 디안이, 이번에도 작은 미소를 띈 채로 윈디나의 손을 잡았다. 디안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윈 디나가 목걸이를 쥐고 있는 오른손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가만히 폈다. 윈디 나가 움찔하자, 디안이 안심하라는 듯 작게 웃었다. 윈디나의 손에서 다시 목걸이를 가져온 디안은, 당연하다는 듯이 목걸이의 한 부분을 밀었다. 딸―깍. 목걸이에서 소리가 났다. 갑작스러운 소리 속에서, 목걸이가 반으로 열리는 것이 보였다. 곧 이어 나는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것'을. "아!" 은빛의 목걸이가 젖혀지면서 나온 것은, 작은 초상화였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너무나 좋은 내 눈이 그 초상화를 그대로 눈 안에 담 는다. 목걸이 안에 당연하다는 듯이 들어 있는 그 작은 그림은 한 명의 꼬 마를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섬세하게도, 예쁘게도 그려놓은 그 그림은 윈디나를 꼭 닮아 있었다. "아아…." 윈디나가 작게 신음소리를 흘렸다. 디안은 그런 윈디나를 보고 있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기쁜 목소리로, 조잘거리듯이. "오빠는 언제나 언니 얘길 했어, 정말 언제나……. 언니 얘길 했어. 환하 게 웃으면서 아주 예쁜 여동생이 있다고 말했어요. 질투가 나서 내가 나보 다 예쁘냐고 물어보면……. 언제나 대답을 얼버무렸지만, 헤헤. 가윈 오빠 는, 언니만 생각했어. ……웃을 때는 언니를 생각하면서 웃었어. 울 때도 언니를 생각하면서 울었어. 오빠는…… 오빠는, 그랬어……." 가만히 듣고 있는 윈디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벌어진 눈 사이에서 또르르 , 눈물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아무 말도 않고 그 자리에서 얼어 붙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윈디나 쪽으로 다가갔다. 윈디나는 바르르 떨면서 아무 말 않고 디안을 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윈디나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것을 가만히 잡았다. 윈디나는 내 손을 뿌리 치지 않았다. 나는 후우,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몇 번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윈디나는 그 목걸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오빠…… 가……?" 윈디나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울 때도 언제나 평 소의 표정을 한 채로 울었던 그 녀석이,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미간이 좁 혀졌고 눈가가 움찔했다.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디안은 가만히 그런 윈디 나를 보고 있다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나… 가윈 오빠를 좋아했어요." 에? 갑작스러운 그 말에 놀라서, 나와 윈디나 둘 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디안 은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좋았어요. 아주 많이 좋아했어요. 그래서 오빠가……. 죽었을 때, 많이 슬펐어요." 디안은 말을 계속 이었다. "힘들어서요, 주인님이 '가윈 오빠를 지워' 주셨어요. 그런데…….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요. 아마도, 제가 오빠를… 너무 많이 좋아했나 봐요. 주 인님이 지워 주셨는데도……. 어느 날 갑자기……. 오빠가 생각났어요." 디안이 나를 보며 생긋, 하고 웃었다. 눈물이 맺힌 눈가로, 그렇게 웃고 있었다. "칼레들린 오빠도, 잊어버린 그 분…… 곧 기억해낼 수 있을 거예요. 내가 그랬으니까." 웃는 디안의 얼굴 위로 가만히 슬픔이 번져나갔다. 입술을 악 소리나게 무 는 윈디나의 얼굴이 보였다. 디안은 가만히 돌아서더니 다시 레이디안에 앞 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언니에게도, 오빠가 많이 소중했죠?" 윈디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긴, 대답할 필요조차 없는 질문이다. "나… 너무… 이기적이겠지만… 부탁할게요." 디안이 갑자기 윈디나의 발을 붙잡았다. 윈디나가 움찔했다. 디안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는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작은 소녀가, 울고 있었다. 웃는 표정으로 흐르는 눈물은 마치―. 감옥에서의 윈디나 같 았다. "주인님, 우리 주인님…. 죽이지 말아요. 우리 주인님……. 언니의 오빠만 큼이나…… 디안한테는 소중한 분이에요, 흐윽…… 주인님 죽이지 말아요, 흐윽……." 윈디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디안은 부들부들 떨면서 윈 디나의 발을 잡고 있었다. 온 몸을 떠는 그 애가 너무 가여워서, 그대로 가 서 꼭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가여워서 나까지도 괜히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 제기랄, 내 감상적인 성격을 새삼 원망하면서 괜히 고개를 돌려 먼 하늘 을 보았다. 달은, 그 예쁜 달은, 하얀 미소로 나를 맞고 있었다. 문득, 윈디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소중해?" 작게 말했다. 디안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소중한 것을 짓밟은 그 자가… 소중해?" 윽박지르듯 묻는 윈디나의 눈동자가 일그러져 있었다. 디안은 흑, 하고 흐 느꼈다. "살려줘요. 우리 주인님, 살려줘요. 흑흑……. 제가 주인님 대신 빌게요. 살려줘요. 살려줘요……. 주인님 죽으면, 디안도 죽어요. 디안도, 디안도 죽어요." 울고 있는 디안을 보면서, 윈디나는 할 말을 잃은 듯 멍하게 있었다. 녀석 의 오른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 녀석이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윈 오빠……." 아아. 뭔가 가슴이 아릿했다. 뭔가, 뭔가가 그랬다. 윈디나는 한참동안 떨면서 가윈 오빠, 하고 중얼거리다가 어느 순간 휙 하 고 돌아섰다. 녀석이 내 어깨를 주먹으로 퍽, 하고 쳤다. 고개를 밑으로 내 려뜨린 윈디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욱,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용서하는 게 아냐." 흑, 하고 울먹이는 소리가 다시 난다. "단지 오빠를 알고 있는 사람이 세상에 하나라도 더 있길… 바래서, 그래 서……. 그래서…… 살려 주는 것 뿐이야. …저 썩어빠진 변태가 죽으면 저 아이도 죽는다니까. 그럼 오빠를 기억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또 하나 사라 지니까…. 그러니까… 그것… 뿐이야." 말하는 윈디나의 몸이 휘청, 하고 흔들렸다. 나는 윈디나의 어깨를 오른 팔로 감쌌다. 녀석이 흑, 하고 내 품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가슴팍이 뜨끈 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내 가슴에 완전히 얼굴을 묻은 채로, 녀석이 엉 엉 울었다. 나는 그런 녀석의 팔을 잡은 채, 천천히 뒤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욱, 하 고 우는 녀석의 눈물이 내 어깨를 천천히 적시기 시작했다. 흰 달이 고고하 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달빛을 가득 머금은 윈디나의 머리카락을 바라보 면서 나는 라이메데스 앞에 멈춰섰다. 라이메데스는 뭔가 굉장히 복잡한 얼 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작게 말했다. "라이메데스." 대답 없이, 녀석이 나와 눈을 마주한다. "윈디나 데리고 먼저 가." "……넌?"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1시간 후에 다시 데리러 와." 라이메데스는 웬일로 '싫어! 같이 가!'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녀석에게 울고 있는 윈디나의 손을 건네주었다. 라이메데스는 윈디나의 팔 을 잡은 후, 한참만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아직도 윈디나의 눈물이 묻어 있는 내 어깨를 가만히 잡아보았다. 어쩐지 나도 눈물이 날 것 같았 다, 빌어먹을. -------------------------------------------------------------------------------- Back : 1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2 (written by 카르민) Next : 1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0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1554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3rd March 2002 11:39:43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1-03-2002 22:39 Line : 223 Read : 1051 [18]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2 -------------------------------------------------------------------------------- -------------------------------------------------------------------------------- Ip address : 61.78.221.13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 ◇ ◇ "디안, 잠깐만 자리 좀 비켜줄래?" 아직까지도 레이디안의 위에서 울고 있는 디안을 향해 나는 살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디안은 움찔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녀석을 향해 씩, 하고 웃어주었다. 내가 좀 더 어른이었다면, 디안의 머리카락을 부벼 주면 서 '그만 울어, 괜찮으니까.' 라고 말해줄 수도 있을 텐데, 난 아직까지 그 정도의 어른은 되지 못한다. 그저 눈을 통해 울지 마라, 라고 말해주는 게 전부였다. 디안은 흑, 하고 눈물을 감추며 살짝 일어났다. 그리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자신의 주인의 얼굴을 확인했다. 파리한 얼굴, 온통 피가 튄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조금 아팠다 . 어찌됐든 얼굴은 로시엔과 같은 놈이니까. 한참동안 머뭇거리던 디안은 결국, 조금 다리를 끌며 정원 저 멀리로 걷기 시작했다. 난 아직도 의식을 잃고 있는 레이디안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달을 빤히 바라보며 녀석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흰달빛을, 심술궂은 구름이 가리웠다. 포도주빛의 구름이 환한 달을 반쯤 가리는 것을 멍한 눈으로 보면서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구름이 몇 번 달을 탐닉하고 물러서고를 반복하는 모습을 감상하고 있을 때, 나는 작게 몸을 뒤척이는 레이디안의 소리를 들었다. 가만히 시선을 돌려보니, 녀석의 미드나잇 블루빛 눈동자가 가만히 떠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도로 시선을 돌려 달을 보며 가만히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레이디안." 내 부름에 레이디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흐음, 하고 중얼거리 며 말했다. "왜 지웠냐?" 내 질문에, 레이디안은 후, 하고 신음소리 내듯 웃었다. "네 기억…?" "응." 레이디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녀석은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후, 하고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넌 만약에, 네가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널 잊어버리면 어떨 것 같아?" 내가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날 잊어버린다고? "말이라고 하냐? 슬프겠지." "…아이에드는 널 아꼈다. 그런데, 네가 그를 기억하지 못하면?" "아이에드란 그 자도 슬프겠지." "……그걸 노렸어." 그제서야 이해가 돼서 으음, 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변태녀석, 아이에드인가 뭔가 하는 녀석을 지독하게도 싫어했나 보다. 그런데 그 아이 에드란 녀석이 대체 어쨌길래 이 녀석이 그를 싫어하는 거고, 또 그가 얼마 나 날 아꼈길래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거지? 지금으로선 하나도 모르겠군.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야! 일단 레이네 내놔." "……." 그렇게 말하며 녀석 쪽으로 손을 쫙 뻗었다. 그러나 녀석은 침묵할 뿐, 그 어떤 답도 없었다. 어쭈, 이 녀석 봐라? "야! 내놓으라니까?" "……못 내놔." 힘없이 녀석의 대꾸가 들려왔다. 그 말에 흥분한 나는 벌떡 일어섰다. "뭐? 왜!!" "…레이네가, 세이아나한테 이른 댔어." 헉, 허억!! 나는 기어 들어갈 듯 작게 들려온 레이디안의 목소리에 완전히 경악했다. 아, 아무리 세이아나가 무서운 여자라지만 저런 유치한 이유를 대다니. 정말 어이가 없어서 웃음 밖에 안 나온다. "……내가 못 이르게 할 테니까 내놔." 내 단호한 말에도 레이디안은 한참동안 주저주저할 뿐 쉽게 레이네를 내어 줄 기색을 보이질 않았다. 나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녀석의 멱살을 확 하고 움켜쥐며 말했다. "레이네 안 내놓으면, 내가 직접 가서 세이아나한테 이른다." "자." 말하기가 무섭게, 갑자기 내 손에 노란색의 보석이 들려왔다. 나는 뭔가 어이가 없어서 레이디안을 내려다보았다. 쿡,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 이아나가 그렇게 무섭나? ……무섭긴 무섭지, 끄응. 내 손에 들려온 노란색의 보석을 받아들고, 나는 한참동안 이리저리 관찰 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언제나 반짝반짝, 예쁘게 빛을 내던 그 보 석의 빛깔이 왠지 가라앉아 있었다. 환하게 빛이 나질 않았다. "왜 빛이 나지 않는 거지?" "결빙(結氷)시켜뒀다. ……하도 세이아나한테 이른다고 난리를 치길래. 그 재수 없는 금발 애송이한테 풀어 달라고 해라." 그, 금발 애송이라면 라이메데스를 말하는 거겠지? 어찌됐든 노란색의 보석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한 시간 뒤에 데리러 오 라고 했으니까, 아직은 시간이 많이 남았다. 나는 가만히 턱을 괴고 앉아 다시 하늘을 보았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하늘을 보는 때만큼 마음이 차 분해질 때는 없다.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밝으면 밝은 대로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저 하늘. "들어본 적 있어? '디신테그레이션' 이라는 걸." 응? 갑자기 튀어나온 그 말에 뭔가 싶어서 돌아보니, 누운 채인 레이디안이 씨 익 웃고 있었다. "원래 마족은 여성체가 적기 때문에 동침(同寢)을 통해 생명이 생기는 경 우는 거의 없지." 라이메데스가 올 때까지 할 일도 없으니 그냥 들어보자 싶어서 가만히 있 었다. 레이디안이 말을 이었다. "마족은 마기(魔己) 속에서 태어난다. '소멸한 어떤 마족' 이 남긴 '마기' 를 빌어서 말이야. 소멸한 이유가 신성력 때문이 아니라면, 소멸한 마족이 생전 갖고 있었던 마기는 소멸의 그 순간 사방으로 확 하고 터져 버린다. 그럼, 죽은 마족들이 남긴 마기들이 모이고 모여 새로운 '비각성 마족' 을 만들어내는 거지." 무슨 당연한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는 거야? 그 정도는 당연한 이야기잖아? 이게 나를 바보로 아나. "그런데……. 만, 아니 수만에 하나 그 '평범한 진리'에서 어긋나는 경우 가 생기지." 에? "전 전대 서열 2위의 마족인 케시안이 소멸했을 때." 갑자기 녀석의 말투가 진지해졌고,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아까 전부터 라이메데스가 케시안이라는 이름을 유독 입에 많이 올린 것이 생각났기 때 문이다. "그 때, 마계와 천계 모두가 긴장했다. 케시안은 분명 '소멸' 했는데, 그 가 생전 가지고 있던 마력 덩어리들이 흩어지지 않았거든. 그의 형체는 사 라졌는데, 그가 생전 품고 있던 모든 마력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고스란히, 흩어지지도 않고 남아 있었다." "뭐? 그런 일이 가능해?" 놀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녀석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가능하지 않지. 그래서 모두들 이상한 징조라고 쑥덕거렸다. 대체 그 마력들은 왜 흩어지지 않는 것인가? 설마 저 케시안은 부활할 것인가?, 라고 말이야." 레이디안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시의 마왕은 이 사태에 쑥덕거리는 마계를 진정시키기 위해, 직접 사건 의 모태가 된 '케시안의 소멸의 장소' 로 갔다. 그런데, 더더욱 이상한 일 이 벌어진 것은 그 때였지." 녀석이 킥, 하고 가볍게 웃었다. "마왕이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여태까지 견고하게 한 덩어리 상태를 유지하 고 있던 그 마력이 둘로 갈라진 것이다. 검은 색의 마력덩어리가 두 개로 나뉘어 둥둥 떠 있는 것을 보며 보통의 마족들은 물론이거니와 마왕조차도 경악했다고 하지. 하지만, 더욱 경악할만한 사태가 일어난 것은 그 다음이 었다." 녀석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둘로 나뉘어진 마력이…… '두 개의 케시안' 을 만들어버렸으니까." "뭐? …쿨럭! 쿨럭! 쿨럭쿨럭!" 컥, 하고 목이 막혀서 난 한참동안을 콜록거려야 했다. 아무리 쿨럭거려도 진정이 되지 않아 주먹으로 땅까지 치는데, 갑자기 레이디안이 킥, 하고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무슨 일인지 기침이 뚝 하고 그쳐버렸다. 쪼, 쪽팔려어어어어! "그건 마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고, '역사에 알려진' 마지막 일이었으 니 모두들 경악하는 게 당연했지. 원래라면 산산이 부서져야 마땅한 '죽은 마족'의 마력이 흩어지지 않고, 오히려 두 명의 '새로운 마족'을 만들어 내 다니." 진지한 얼굴로 말하고 있는 레이디안을 향해 너 거짓말하고 있는 거지? 그 치? 라고 말하려던 순간,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무거운 목소 리가 녀석에게서 흘러나왔다. "소멸한 케시안이 남긴 마력… 종국엔 둘로 나뉜 그 마력에서 나온 두 명 의 마족." 낮게, 녀석의 목소리가 깔렸다. "……그것이 나와 로시엔이다." -------------------------------------------------------------------------------- Back : 1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3 (written by 카르민) Next : 1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1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1554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3rd March 2002 11:39:46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1-03-2002 22:42 Line : 293 Read : 1267 [19]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3 -------------------------------------------------------------------------------- -------------------------------------------------------------------------------- Ip address : 61.78.221.131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뭐라고?" 빽 고함을 치며 녀석을 돌아보자 녀석이 훗, 하고 가볍게 웃는 모습이 보 였다. 녀석은 후우,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케시안의 '디신테그레이션'― 즉, 케시안의 분열체. 그게 나와 로시엔이 라고." 너무 놀라서 벌어진 입에서는 뻐끔뻐끔하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너,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나? 로시엔은…… 서열이 1 6위나 되는 마족이다. 그런데 녀석은 이름이 그렇게나 짧아. '아이시 사일 런트 로시엔'. 그것이 이름이자 유일한 별칭이다. 대체 왜 그런 건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나?" "그건……." 확실히 그랬지. 로시엔의 이름은 뭔가 좀 이상하다고, 나는 늘 느끼고 있 었다. 다른 고위 마족들의 이름은 썩어빠지게도 길고도 긴데(그 녀석들 길 다란 이름 반만 잘라서 마물한테 던져주고 싶다고 몇 번이고 투덜거렸을 만 큼), 반면 로시엔의 이름은 너무나도 짧았다. 게다가 원래라면 이름이 첫머리에, 그 다음이 성, 나머지가 직위로 따라붙 는 반면, 로시엔은 '아이시 사일런트' 라는 별칭이 맨 앞에, 그 다음에야 이름이 붙었다. 직위 따위는 이름에 붙지도 않았다. 어린 날, 그 이유가 궁 금해서 로시엔의 앞치마를 붙들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로시엔은 생 긋 웃으며,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칼레들린님, 그거 아세요? 후후, 로시엔이라는 이름은, ****님이 지어주 신 겁니다.」 음? 그 때, 로시엔이 뭐라고 했었지? 갑자기 기억의 한 구석이 희미하다. 「응? 그럼 ****를 만나기 전에 로시엔의 이름은 뭐였는데?」 바보 같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로시엔이 말을 돌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순진한 얼굴로 그렇게 물었었다. 로시엔은 그 때, 아마도 웃었을 거다. 「아이시 사일런트. 혹은… 아이시라고 불렸죠.」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어." 로시엔은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던 로시엔의 이야기를, 저 녀석이 하고 있 다. "나와 로시엔…… 은 '근본이 같은 녀석들'. 우리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멸한 케시안과 똑같았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케 시안' 이 아니었지. 다만, 소멸한 케시안의 마력과, 그의 능력, 성격을 나 누어 물려받았을 뿐. 케시안은 굉장히 차갑고 냉정한 성격이었다더군. 그 성격은 로시엔이 가져갔다. 그리고 그가 갖고 있던 특이한 능력. 그러니까, 기억을 지우는 능력은 내가 가졌지. 전투 능력의 대부분은 어찌된 일인지 로시엔이 훨씬 더 위였지만……. 우리 둘은 생긴 것만은 똑같았어." 훗, 하고 가볍게 녀석이 웃었다. "케시안의 환생이라고 마계는 시끄럽게 떠들어댔지만……. 사실 나와 녀석 은 케시안에 대한 아무런 기억도 갖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보통의 마족' 과 다름이 없었어. 그저, 우리가 생성의 순간부터 '각성' 해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생성의 순간부터 각성?" 놀란 내가 되묻는데,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나 녀석이나, 태어난 그 순간부터 마족으로서 각성해 있었다. 윗서열의 녀석들은, 그것이 또 거슬렸던 모양이지. 케시안은 극도로 차갑고 난폭하 며 또 압도적으로 강했던 마족! 나와 녀석은 단지 그 케시안의 디신테그레 이션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철저하게 마계에서 배척 당했다." 로시엔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마계가 시끄럽게 떠들어댈 정도의 이야기를, 난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 그건 왜지? 로시엔이 나에게 숨겼기 때문인가? "나와 로시엔은 서로를 싫어했다. 너무 똑같아 구역질이 나는 얼굴을 갖고 있다는 점도 그랬지만, 무엇보다도…… 그녀…… 때문에." 갑자기 나온 그녀, 라는 단어에 나는 살짝 반문했다. "그녀라니?" "……세이아나 아나드리엘 로엔." "에? 세이아나가 뭐?" 놀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데, 레이디안이 픽, 하고 웃었다. "검은 털 고양이, 꼬마는 몰라도 된다." "고양이에 꼬마라고? 너 죽을래? 이 상태에서 검으로 긋기만 하면 죽을 녀 석이." 투덜거리듯 중얼거리곤 녀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녀석은 하아, 하고 가 볍게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이었다. "……난 녀석이 정말로 싫었다. 일단, 근본이 같은데도 불구하고 나보다 훨씬 출중한 능력도 싫었고, 그 차갑고 냉담하기 그지없는 녀석과 '같은 근 본' 이라고 불리는 것도 싫었어. 모든 것이 싫었지. 특히나, 그 싸가지 없 는 눈빛이 제일 마음에 안 들었다. 나를―. 완전히 바보로 만드는 눈빛이었 지." 로시엔의 눈빛이 왜? 예쁜 눈이었어. 나를 볼 때면 언제나 따뜻하게 바뀌었던 그 눈은 예쁜 눈 이었다구. "하여튼 녀석과 나는…… 철저하게, 아주 철저하게 마계에서 격리 당했다. " 큭, 하고 녀석이 웃었다. "로시엔 그 녀석은 특히나 나보다 더 강했기 때문에, 제 2공간. 그러니까 …… 천계와의 경계지점인 그 곳으로 끌려갔고, 나는 나대로 죽어라고 고생 했지. ……녀석도 나도 이름 같은 건 갖고 있지 않았다. 그나마 나는 한 때 몸담았던 부대의 상사가 자신의 성을 따서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그 녀석 은 그것마저 없었지." 이름도 없었다고? 로시엔이? "하지만 시간이 흐르니까……. 하나둘씩, 마족들이 그 녀석을 아이시(Icy) 라고 부르기 시작하더군. 시간이 좀 더 흐르자 누군가가 녀석을 아이시 사 일런트(Icy Silent)라고 불렀고……뭐, 자연스럽게 그것이 녀석의 이름이 됐다더군. 잘 어울리는 이름이잖아? 그, 로시엔이라는 이름은… '아이에드' 가 지어 준거라더군." "……아." 그 얘기에 잠시 몸이 굳었다. 나는 눈을 들어 레이디안을 보았다. 그… '아이에드' 가? 그럼 그 때 로시엔이 했던 말은……. 「칼레들린님, 그거 아세요? 후후, 로시엔이라는 제 이름은, 아이에드님이 지어주신 겁니다.」 「응? 그럼 아이에드를 만나기 전에 로시엔의 이름은 뭐였는데?」 「아이시 사일런트. 혹은… 아이시라고 불렸죠.」 음, 하고 고개를 몇 번 끄덕이는데, 레이디안이 계속 말을 이었다. "너, 그건 알아? 직위도 뭐도 갖고 있지 않았던 로시엔이 서열 16위가 되 었던 이유를." "모르는데." "너, 대체 로시엔에 대해 아는 게 뭐지?"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 나는 모른다. 로시엔 녀석은 나에 대해 조목조목 , 내가 모르는 것까지도 알고 있는데, 나는 녀석에 대해 너무 모른다. "……아무런 직위도 없이 그저 제 2공간에서 천족을 죽이는 일만 반복해야 했던 그 놈이 한 번 일을 쳤거든. 언제나 차갑게 자기 할 일만 하던 녀석 이 딱 한 번 폭발했고, 그 일 때문에 서열 16위라는 자리를 얻었지. 원래, 전대 서열 16위의 녀석은 케이드라는 놈이었는데, 그 놈이 나보다 더한 변 태였다더군." "엑?" 이 녀석보다 더한 변태라니? 우오, 생각하기도 싫어! "그 놈이 로시엔한테 찝쩍댔다나." "……." 순간, 난 굳어버렸다. "뭐, 로시엔 놈이 그 녀석을 찢어버렸다더군." 하아? 하는 소리를 내며 녀석을 보자 놈이 킥, 하고 웃었다. "결국 마계의 법칙상, 서열도 그 무엇도 갖고 있지 않았던 그 녀석이 자신 이 죽여버린 놈을 대신해서 서열 16위가 돼버린 거다." "으, 으음." 뭐, 뭔가 너무 엄청난 것을 알아버린 것 같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진정이 되질 않는다. 언제나 한 겹의 망토로 자신을 덧씌우고 있던 로시엔의 이야기를, 다른 이 에게서 들어버렸다. 왠지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알아버린 것 같은, 그런 느 낌. "나와 로시엔의 얼굴이 같은 이유를, 이젠 알겠지?" "……그래." 작게 대답했다. 녀석은 웃었다.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녀석도 말이 없고, 나도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 침묵뿐인데도 전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우리 둘 사이의 침묵 은, 무척이나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그 침묵이 우리 둘 사이에서 한참 배 회했을 때, 어디선가 쉬익 하고 바람소리가 났다. "이봐." 나는 작게 입을 열었다. 레이디안이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디안한테 잘해줘, 알았지?" 그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저 멀리서 붉은 옷자락이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쪽으로 움직이다말고, 가만히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레이디안을 보았다. 아직도 정원에 누워 있는 그 녀석을 향해, 나는 작게 말했다. "이제 미소년 수집 같은 거 안 할거지?" "글세." 이, 이 자식이? "하면 세이아나한테 이른다." "그녀석도 알고 있는데?" 그래서? 지금 나한테 반항하는거냐? "빌어먹을, 어쨌든 하지마." 내 말에, 녀석은 웃기만 했다. 나도 씩, 하고 웃어준 후 라이메데스 쪽으 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뒤에 있는 녀석에게 소리쳤다. "잘 있어라, '로시엔의 형제'!" 녀석이 뒤에서 움찔, 하는 것이 느껴졌다. 형제, 라는 말에 어폐가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녀석을 '로시엔의 형제' 라고 불러주고 싶었다. ------------------------------------------- 드디어 끝났다, 레이디안 파트ㅠㅁㅠ 사실은 여태까지 소설 쓰면서 이 부분이 제일 힘들었습니다(각혈) 괜찮을까? 이게 복선이라는 느낌이 나? 뭐야 뭐야 뭐야?;; 이러면서 엄청...ㅠ_ㅠ 그나저나... 어제 메일이 많이 왔어요>ㅁ<(우오오) 역시 겟백에 대한 영향이 컸어-_-+ 오늘~ 겟백을 다... 사버렸습니다ㅠ_ㅠ 원래... 테니스의 왕자 살려고 모아둔 돈이었는데..ㅠ_ㅠ 겟백 사버리고 말았습니다... 우오오, 용서해, 료마!! .......좀 늦어버렸군요. 어쨌든.. 오늘 5연참인가?(긁적) -------------------------------------------------------------------------------- Next : 1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2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1554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3rd March 2002 11:39:49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4-03-2002 03:12 Line : 196 Read : 1780 [17]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4 -------------------------------------------------------------------------------- -------------------------------------------------------------------------------- Ip address : 218.146.139.82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제 27장: 카리스, 그는 누구인가! "후회하지마." "뭘?" "……저 녀석을 죽이지 않은걸." 아치형의 다리밑을 지나가는 동안, 라이메데스는 나에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눈동자가 잔뜩 가라앉아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후회 안 한다." 라이메데스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더니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나도 살짝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디안이 달려와서 레이디안을 부축하는 모습이 보였다. 자그마한 몸집의 그 소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가만히 웃어 보였다. 나도 살짝 웃었다. 잘 있어, 라고 입으로 디안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한참동안, 레이디안이 디안에게 부축당해 저택안으로 들어갈때까지 그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무렵, 라이메데스가 작게 말했다. "……좀 걷자." "여길?" 정원을 가리키며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떠도, 살짝 고개만 끄덕인다. 나는 녀석에게 '안 어울리게 센티하게 굴지마!' 라고 말해주려다가 움찔했다. 뭔가 너무나도 심난해 보이는 그녀석의 눈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고, 녀석이 가만히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등을 보며 작게 입을 열었다. "어떤 녀석인데?" "뭐가?" "아이에드." "아아." 작게 한숨을 내쉰 라이메데스가 나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그 웃음에 뭔가 불길함을 느낄 새도 없이, 녀석이 입술을 움직였다. "아주아주아주아아아아아∼주우우우우 멋진 분." 그, 그렇게까지 강세를 넣어서 말하지 말아주겠어? "그, 그래?" "응! 내가 단언하는데, 우주 제일의 미남이다." 쿨럭! 그렇게까지? 뭔가 수상쩍은 느낌이 들어서 인상을 살짝 일그러뜨리는데, 녀석의 얼굴 표정이 갑자기 심상찮게 변한다. "뭐냐, 칼레들린! 서, 설마 믿지 않는 거냐?" "아, 아니. 믿지 않는다기 보다는……." 살짝 말꼬리를 흐리자, 갑자기 이마에 돋는 이상한 주름이 보인다. 뿌득,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주먹을 쥐었다. 나는 뭔가 히익, 하는 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은 것을 간신히 멈추며 그런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녀석이 후웁,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잘 들어, 칼레들린." "귓구멍 열어놓고 잘 듣고 있으니까 말하기나 해." 내 쌀쌀맞은 말투에도 아랑곳 않고, 라이메데스가 말했다. "은발에, 보라색 눈동자야." 흐음? "로시엔님이 '영원'을 맹세한 분, 그러니까…… '소멸의 그 날' 까지 함께 하기로 맹세한 분이다." "뭐라고? 로시엔과 소멸의 그 날까지 함께하기로 맹세한 녀석이라고?" 놀라서 눈을 부릅뜨자, 라이메데스가 하아,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정말 미칠 노릇이로군. 진짜 깨끗이도 지워놨네, 저 빌어먹을 놈의 레이디안. 역시 다시가서 죽여버릴까보다." 씁, 하고 낮게 투덜거린 라이메데스는 작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 분은 말이야, 최강의 실력을 가지신 분이야." "흐음." 왠지 들으면 들을수록 수상하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설명을 하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보면서 내가 느낀 감상은 단 하나. 이거 왠지 뻥일 것 같아, 였다. 믿으면 안될 것 같다고 내 온 신경이 외치고 있거든? "그리고!" 놀래라. 왜 갑자기 고함을 치고 난리야? "그리고 뭐?" "……네가, 아버지라고 불렀던 분이야." "뭐야?" 순간적으로 놀라서 넘어질 뻔했다. 간신히 나무를 잡고 균형을 유지하는데, 라이메데스가 빙긋 웃고 있는 것이 보여 온 몸에 닭살이 돋았다. "뭐야? 그 반응은. 설마 못 믿겠다는 거야?" 얼굴에 그렇게까지 드러났던가. 인상을 쓰며 보는데, 녀석이 말을 잇는다. "네가 그 분을 엄청엄청엄청 좋아했어." "정말?" 녀석의 얼굴표정이 능글맞아 보이는 건 무슨 이유지? "언제나 '아버지∼' 라고 말하곤 달려가서 답싹 안기곤 했지." "……내가?" 손가락으로 내 얼굴까지 가르키며 물었다. 녀석이 하는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고, 온 몸의 털이 비쭉비쭉 서면서 '아니야! 저 말은 거짓이야! 절대로 아냐!' 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녀석은 아랑곳 않고 말한다. "그래, 네가." "……거짓말이지?" 순간, 녀석이 뭔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극히 일순간이었고, 작게 경직을 일으키던 녀석의 얼굴은 곧 거짓말처럼 평정을 되찾았다. 녀석은 갑자기 포커페이스로 돌아와 냉정하고 차갑게, 한마디했다. "아니. 진짠데." "……거짓말이지?" 내가 다시 묻자, 녀석은 갑자기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커다란 목소리로 쩌렁쩌렁 울리게 고함을 쳤다. "아니다! 정말이야! 그리고 넌 언제나 아이에드님께 다정하게 말했고, 극진한 존댓말을 썼으며 아주 얌전하게 그 분의 말에 따르곤 했지!" "……." 표정만 봐도 점점 신빙성이 없어진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의 말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아이에드님도 널 엄청 아끼셨어. 진짜야!" "……." 빤히 바라보자, 갑자기 시선을 피한다. 의심스러워서 더더욱 빤히 보는데, 이번엔 슬쩍 시선을 피한다. 나는 씨익 웃으며 물었다. "흐응, 진짜?" "……응." 보아하니… 이 녀석이 했던 말을 전부 거꾸로 이해해야 할 듯 하다. -------------------------------------------------------------------------------- Back : 1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5 (written by 카르민) Next : 1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3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28361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10th March 2002 10:41:24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4-03-2002 03:15 Line : 378 Read : 2199 [18]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5 -------------------------------------------------------------------------------- -------------------------------------------------------------------------------- Ip address : 218.146.139.82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정원을 몇 바퀴 돌고 난 뒤에야, 녀석과 나는 아치형 다리 밑을 지났다. 슈 욱, 하는 가벼운 느낌과 함께 시야가 흐려지고 밝아지고를 거듭했다. 곧, 눈에 들어온 것은 저 먼 하늘을 향해 얼굴을 내고 잠이 들어 있는 녀석들. 흐윽, 시간이 늦어도 모두 오지 않는 나를 기다리느라 눈이 빨개져 안절부 절못하고 있을 거라고 철썩 같이 믿은 나의 의지를 그 녀석들은 완벽하게 배신하고 있었다. 코까지 드러렁 드러렁 곯아가면서 카민 놈은 대 자로 뻗 어 잠들어 있었고, 레니 역시 색색 소리내며 잠들어 있었으며 윈디나 역시 자고 있었다.(윈디나는 울었으니 자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원래 인간은 운 뒤에 잠이 온다고 했으니까.) "아, 칼레들린님!" 흐윽, 그래! 난 외톨이였어, 꽃미남은 원래 고독해! 등등을 반복하며 슬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자그마한 외침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 리에서 에세렌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뭐지 싶어서 보는데, 녀석이 잎사 귀를 잔뜩 붙여놓은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 쪽으로 달 려온 에세렌의 손에는 자그마한 풀잎 몇 개가 들려 있었다. 저걸로 뭘하려 는 거지? 서, 설마 먹으려는 건가?(저 녀석은 무슨 짓을 해도 먹는 것과 관 련되서 생각이 나 버린다.) "아직 안 잤냐?" 하지만 먹기 위해 풀을 뜯었든 어쨌든 아직까지 자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 에 감동해서 그렇게 묻는데, 녀석은 내 말에 대답은 않고 갑자기 손을 뻗어 내 오른팔을 조심스럽게 만져본다. "괜찮으세요?" "아니, 아파죽겠다." 네 녀석 팔 힘이 오죽 세냐? 그 팔로 잡다니 날 죽일 셈이야!! ……같은 말은 양심상 하지 않았다. 녀석은 이리저리 내 팔을 꼼꼼히 살피 더니 선언하듯 말했다. "치료해드릴게요." 허억! 끈질긴 녀석! "됐어, 난 신성치료 따위 받지 않……." "신성치료 말구요." "에?" 갑자기 튀어나온 신성치료 말구요, 라는 말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데 녀석이 내 손을 잡아끈다. "뭐야?" 눈살을 찌푸리기가 무섭게, 녀석이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가서 턱하고 앉혔 다. 돌아보니, 카민 녀석도 그렇고 레니 녀석도 그렇고 윈디나 녀석도… 모 두 자그마한 모포를 밑에 깔고, 그 위에 이불을 덮은 채로 자고 있었다. 보 아하니 에세렌이 나를 앉힌 곳은 자신의 모포 위인 듯 했다. "윗옷, 벗으세요." "내 몸매가 좋긴 하지만 너한테 보여주긴 싫은데." 내 말에 에세렌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장난할 상태 아닌 거 알죠? 빨리 벗으세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녀석의 하늘색 눈동자가 바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윗옷, 벗으세요." "……말했듯이, 돌팔이 신관한테는 치료 안 받아." 내 말에, 에세렌이 흐윽,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너무 하십니다, 칼레들린님! 밥도 안 먹고 칼레들린님을 기다리면서 걱정 을 한 저를 돌팔이 따위로 취급하시다니요!" 나는 그 말에 흥, 하고 콧방귀를 꼈다. "다른 말은 다 믿어도 네가 밥 안 먹고 날 기다렸다는 말은 못 믿어." "아니! 어찌 그런 말을!" 더더욱 상처받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휙 하고 꺾으며 에세렌이 자신의 얼 굴을 감싸쥐었다. 나는 그런 녀석의 얼굴을 똑바로 쏘아보며 한 자 한 자 끊어서 말했다. "네 입에서 마늘 냄새나." "허억!" 내 말에 놀란 듯, 얼른 입을 가려버리는 에세렌을 보면서 나는 뭔가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너, 정말 밥 먹었구나?" "예? 방금 전에 마늘 냄새난다면서요?" 놀란 듯, 눈까지 동그랗게 뜬다. "그냥 해본 소리였는데." "……." 에세렌은 나를 빤히 바라본 후, 훗 하고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고 있는 그의 청록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한참 웃던 녀석은 손에 들려 있던 풀잎 조각을 모포 위에 올려놓더니, 갑자기 자신의 사제 복 안으로 손을 넣었다. "뭐야, 그게." 한참만에 녀석의 손에서 튀어나온 붕대를 보며 난 인상을 썼다. "신성치료 받기 싫으시다면서요." 씨익 웃으면서 그가 말했다. 나는 에? 하는 소리를 내며 그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잎새는 레쉬라고 하는데, 상처 아무는데 도움을 줍니다. 상처에 이것 을 덴 다음에, 그냥 붕대만 감을게요. 그건 괜찮죠?"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윗옷 벗으세요." 순결한 내 몸을 함부로! 흐윽, 싫어! 내 이 새하얀 몸을 다른 사람한테 보 여야 하다니! ……라고 외치기엔 녀석의 눈이 너무 진지해서 그냥 잔말 않고 벗었다.(쳇 , 그래. 나 아무데서나 옷 훌렁훌렁 벗을 수 있다.) 옷을 벗는 순간 옷깃이 상처에 닿아 찌릿 하고 통증이 느껴졌다. 에세렌은 내가 옷을 벗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뭘 봐? 내 몸매가 그렇게 좋아? 훗." 씩 웃으며 말했는데, 내 농담에 넘어오지도 않는다. "이러고 다니신 겁니까?"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 후, 녀석은 갑자기 내 옷을 휙 하고 잡아당겨 옆쪽에 놓았다. 뭐야? 라는 눈으로 바라보자, 녀석이 어디서 났는지모를 부 드러운 헝겊으로 내 어깨부분을 닦기 시작했다. "어윽!" "아, 아프세요?" "…말이라고 하냐?" "참으세요." "……." 그렇게 대답할거면 아프냐고는 왜 물어본 거냐? 하지만 참으세요, 라고 말한 주제에 갑자기 손길이 부드러워졌다. 딱딱하 게 말라붙어 있던 피딱지가 떨어지는 느낌은 나름대로 시원해서, 나는 그저 녀석이 하는 대로 놔두었다. 저 멀리, 까만 융단 위에 빛나는 것들이 보였다. 그 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씩 웃었다. 레이디안의 공간에서 보았던 달빛도 아름답 긴 했었지만, 지금 보이는 저 달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고 느끼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이 달이 훨씬 아름다워, 라는 느낌이 든다. 세튜아나가 유폐되 었다는 저 달이야말로 진정으로 아름다운 달이다. 빌어먹게도 감상적으로, 빌어먹게도 감상적인 달빛을 바라보면서 나는 웃 어버렸다. 문득, 에세렌이 말했다. "죽은 줄 알았습니다." "에?" "그 때……. 그 때…… 죽은 줄 알았습니다, 오직 당신만." 뚝, 하는 소리가 난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녀석의 얼굴을 보려고 한 순간, 녀석이 내 왼쪽 어깨를 턱 하고 붙잡았다. "움직이지 마세요." 아아, 하고 중얼거렸다. 하긴 돌아보려 한 순간 잡혀있던 오른팔이 무진장 아프긴 했었다. 녀석의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칼레들린님이 잡혔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동굴이 무너지고 있었죠. 정말……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있는 신성력 없는 신성력 다 끌 어 모아서 나름대로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애쓰긴 했는데, 그게 잘 되지 않 았어요. 내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 때…… 그 많은 사람들보다……." 문득 녀석의 말이 흐려졌다. 나는 그 뒷말이 궁금했지만 독촉하진 않았다. 사실 그 순간에 '그러고 보니 그 때 어떻게 사람들이 무사했지? 아까 말하 다가 말았잖아.' 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지금 순간에 녀석의 말을 막는 건 좀 그럴 것 같아서 가만히 놔두었다. 에세렌의 말이 가만히 이어진 것은 다음순간이었다. "……당신이 걱정됐습니다." 에? 하는 소리를 낼 틈도 없이, 에세렌이 말을 막았다. "에, 저, 그러니까… 카, 카민님하고 칼레들린님이 걱정됐다구요! 사, 사 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분들이니까. 뭐, 뭔가 이기적이지만…. 역시 저, 신관으로서 자질이 부족할까요?" 낮게 웅얼거리듯 말한 그 말과 함께, 무엇인가 시원한 것이 어깨에 닿았다 . 아까 그 풀잎인 것 같았다. 곧, 어깨가 무엇인가로 단단히 압박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꼼꼼히 붕대를 감는 녀석을 향해 작게 말했다. "저기 말이야. 나, 뭔가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는데." "예? 물어보십시오." "그 때 분명히, 카민도 나랑 같이 디안한테 묶였었는데. 왜 카민은 여기에 있고 나만 레이디안이랑 같이 있었던 거지?" 내 질문에, 에세렌은 으음, 하는 소리를 낸 후 다시 말했다. "음, 그건 저도 약간 이해가 안 되는데요……. 이데님의 말씀에 따르면 원 래 그 변태마족의 거주지가 두 개인 모양입니다. 그 동굴 안 깊숙이 하나가 있고, 나머지 하나는 그…… 저, 공간을 비튼 곳에 있다더군요. 저는 마법 사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카민님을 비롯한 다른 분들은 다 그 동굴 안에 있는 성에 있었습니다. 나중에 모두가 다 같이 동굴을 샅 샅이 뒤졌을 때, 그 성을 발견하곤 카민님을 비롯한 모든 분들을 구출했습 니다." 후욱, 하고 에세렌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런데 그 곳에 칼레들린님은 없더군요." 당연하지. 난 그 때 변태랑 있었으니까. 그럼 그 변태, 나만 자기 공간에 넣어놓고 다른 녀석들은 그 동굴 안에 그대로 놔뒀었단 말인가? 내가 특별 케이스였나보군. 훗, 내가 한 인물하긴 하지. 아아, 난 역시 꽃미남이야! 라고 중얼거리고 있는데, 오랜만에 든 그 행복 한 생각을 방해하면서 에세렌의 말이 끼어들었다. "그 때, 당신이 없는 걸 아신 이데님이." 음? 라이메데스가 뭐? "…날뛰었습니다." 허, 허억. "이데님은 한바탕 날뛰신 후에, 어느 자리에 턱 하고 앉으시더니 몇 일 동 안 눈을 꾹 감고 앉아서 아무 것도 드시지 않고 계셨어요. 정말 오랫동안 그렇게 계셔서 음식이라도 드시라고 했지만, 들은 척도 안 하시더군요." 그거, 혹시 내 기척을 찾는 작업이었나? "기다리던 사람들이 참다 못해서 이제 그만 내려가자, 라고 말하더군요. 카민님은 죽어도 당신을 두고는 못 간다고 버럭버럭 고함을 치셨습니다. 저 도 안 된다고 그랬고……. 이데님은 그러시더군요. '조금만 더 있으면 칼레 들린을 찾을 수 있으니까 남고 싶은 사람만 남고 필요 없는 찌꺼기들은 꺼 져.' 라구요. 루덴스님도 여기 있고 싶어하신 것 같지만, 그 분은 왕자님이 니까 어쩔 수 없이 가셨고……. 키세리아님도 아쉬운 듯한 표정을 하셨지만 , 결국은 루덴스님을 따라 가셨어요." 음, 하는 소리와 함께 에세렌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질문했다. "더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는…… 우욱!" 갑자기 통증이 몰려와 몸을 구부렸다. "아, 아프십니까?" "……말이라고 하나?" "흐윽,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어요." 내 팔에 감고 있던 붕대에 매듭을 지으며 에세렌이 훌쩍거렸다. 난 쳇, 하 고 투덜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때 말이야. 동굴이 무너졌을 때. 그 땐 어떻게 다들 무사했지?" 동굴이 무너졌을 때,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라이메데스 녀석은 그냥 날 구 하러 와버렸고, 동굴 안의 사람들이 무사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이 다 무사했을까. 내 질문에, 에세렌이 갑자기 헛! 하는 소리를 냈다. "맞아요, 맞아요, 맞아요! 아까 그 말을 하다 말았죠! 그쵸?" "……으응." 뭔가 심히 흥분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다고 대답해주었더니 녀석이 갑자기 핏대를 세워가며 말했다. "그 때 동굴에서 떨어지는 돌을 모조리 막아냈던 사람은 그, 검은 로브를 입은 파란 머리카락의 남자분이었어요! 저번에 칼레들린과 함께 그 성에서 밥을 같이 먹었던." 나는 에세렌의 이야기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검은 로브에 파란 머리카락, 게다가 나랑 같이 밥을 먹은 남자라니? "돌이 마구 떨어져 내리고, 제가 허망하게 그것을 지켜보고 있을 때…… 갑자기 제 옆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이런. 어쩔 수 없군요. ' 라고 중얼거리는. 뭔가 유유적적한 목소리라고 생각하면서 돌아본 순간, 전 완전히 경악했습니다." 에세렌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 곳에 있었던 건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였어요! 저와 그의 눈이 일순간 마주쳤는데, 그가 갑자기 저를 향해 생긋 웃더군요. 그가 갑자기 가볍게 손을 뻗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이상한 소 리와 함께 그의 손에서 거대한 무엇인가가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직후 정신을 잃었는데……." 에세렌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일어났을 때는, 모든 일이 끝난 후였어요. 모두들 무사했구요. 모두에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질문해봤지만, 다들 모르겠다고만 하더 군요. 모두 기절을 했었던 모양이에요. 저는 그 남자를 찾으려고 했지만, 그는 사라진 후였어요. 칼레들리님. 그 사람은 대체 누구에요? 칼레들린님 과 얘기를 하는 것을 봤는데, 혹시 아는 사이인가요?" 누구냐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검은 로브에 푸른색 머리카락. 그리고 나와 같이 밥을 먹었던 자라니. 그건, 카리스잖아. 그런데 카리스가 뭘 어떻게 했다고? 말도 안 돼! 카리스가 그렇게나 대단 한 마법사였다고? 아니, 대단한 마법사라 해도 그 많은 사람들 주위에 갑자 기 그렇게 실드를 칠 수 있는 거야? 그리고, 정말로 너무나 대단한 마법사 라 그걸 다 막을 수 있었다고 치자. 그러면 왜 사라진 거지?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카리스. 뭔지는 모르지만, 처음 본 순간부터 어느 부분인가가 묘하게 특이한 남자 라는 느낌이 들긴 했다. 처음에,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었고, 두 번째 보 았을 때는 달빛이 아름답다느니 하는 감상적인 말을 했었다. 그리고 세 번 째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마법사라고 말하며 웃었다. 자신을 카리스라고 불러달라는 말과 함께.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살짝 물었다. 아무래도 라이메데스녀석한테 물어봐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녀석들은 그 순간 다 기 절했다하더라도, 라이메데스 녀석은 그 순간 기절하지 않았겠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에세렌이 말했다. "칼레들린님." "왜?" "……고맙습니다." "뭐가?" 내 반문에, 녀석은 침묵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나는 하, 하고 웃어버렸다. 뭐가 고맙다는 거야, 이 녀석은? 막 일어나려는 순간, 에세렌이 작게 말했다. "무사하셔서, 고맙습니다." ========================================= 카르민입니다; 말했듯이.. 치사하게 한 편씩 한 편씩 올리겠습니다-_-;; 이런 저의 치사함을... .....용서하세요ㅠㅁㅠ -------------------------------------------------------------------------------- Back : 1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6 (written by 카르민) Next : 1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4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28363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10th March 2002 10:41:35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9-03-2002 17:55 Line : 318 Read : 508 [19]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6 -------------------------------------------------------------------------------- -------------------------------------------------------------------------------- Ip address : 61.76.127.15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 ◇ ◇ "솔직히 말해봐, 라이메데스." 에세렌까지 잠든 늦은 시간, 나는 라이메데스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조심 스럽게 그렇게 말했다. 자리에 누운 채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있던 라이메데 스는 내 나지막한 말에 후, 하고 웃으며 돌아보았다. "뭘 말이지?"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눈을 하지만, 저 눈에 속으 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네놈의 표정연기에 속는 것도 한 두 번 이지, 이 자식아. 난 녀석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리스 말이다. 그 자 대체 정체가 뭐야? 넌 알고 있지?" "카리스라니? 그게 누군데?" "……한 대 맞기 전에 빨리 말해." 생글생글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녀석의 얼굴 위로 천천히 이 예쁜 발을 들이대며 말했음에도, 녀석은 흔들리지 않았다. "몰라." "모르긴 뭘 몰라! 너, 봤지? 그 동굴에서, 떨어지는 돌을 다 막았다는 그 녀석!" 라이메데스는 내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아, 봤긴 했지." "뭐가 봤긴 했지야? 네가 알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 버럭 고함을 지르는데, 녀석이 생긋 웃는다. "칼레들린." "왜! 또 말 돌리려고 하는 거지? 내가 네 놈한테 한 두 번 속냐!" "얼굴에 침 튀었어." "……." 매우 불쾌하다는 듯한 얼굴로 내뱉은 그 말과 함께, 녀석이 자신의 볼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스윽,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볼을 닦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울컥 하고 속에서 무엇인가가 솟는다. 우우, 짜증나! 이 내가, 잘 난 이 꽃미남 칼레들린님께서 침까지 튀겨가며 묻고 있는데도 모른척 하고 있는 저 자식의 뻔뻔 면상이라니! 한참동안 노려보고 있으려니 녀석이 씩 웃으며 살그머니 내 눈치를 살핀다 . 순간, 녀석의 눈동자가 좌우로 크게 한 번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놈은 하아, 하는 가벼운 한숨소리와 함께 고개를 위로 치켜들어 시선을 하늘 쪽 으로 향했다. 한참동안 말없이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녀석은 어느 순간 갑자기 입을 열어 말했다. "마족이다." "에? 뭐가?" 한마디 예고도 없이 귓가를 찔러 들어온 그 목소리에, 그 말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 되묻자 녀석이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녀석." "……역시? 그리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답은 아니었다. 나는 입술을 질끈 물며 다음 대답을 촉구했다. 라이메데스는 내 눈동자를 한참 보았다. 녀석의 눈빛이 어찌나 진지했던지 침이 꿀꺽 다 넘어갈 지경이었다. "그리고……." 라이메데스가 뜸을 들이며 나를 보았다. 뭔가 굉장한 날이 나올 것 같은 상황이다! "……그 외엔 나도 몰라." 잔뜩 긴장해서 손가락을 꼭 쥐고 있을 때 녀석이 툭 뱉어낸 그 말에, 나는 갑자기 휘몰아친 차가운 눈보라를 느꼈다.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내 격 렬한 반응을 철저하게 무시하며 돌아눕는 녀석을 향해 오오, 이 자식! 알고 있으면서 거짓말하는 거지! 라고 외치려는 순간(녀석의 머리통을 밟기 위 해 녀석의 머리카락 위로 발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녀석이 내 마음을 어떻 게 알았는지 다시 입술을 움직인다. "강해." "뭐?" 갑자기 튀어나온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다시 물었다. "강한 마족이었다고." "에?" 무슨 말이지? 라이메데스는 돌아누운 그 상태에서, 작게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내 예감이 맞다면 고위마족일지도……." 뭐라고? 고위 마족일수도 있다고? 놀라서 눈을 부릅뜨며 녀석을 보았다. "저, 정말?" "정말." 간단명료하게 말한 라이메데스가 말을 잇는다. "……그 이상은, 나도 몰라." 라이메데스는 정말로 그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나는 아까보다 훨씬 멍한 기분으로 그런 라이메데스를 보는 수밖에 없었다. ◇ ◇ ◇ "그럼 여기서 헤어지는 거지?" 산 아래에 도착하자마자, 레니는 그렇게 말했다. 곱슬곱슬한 물빛 머리카 락을 찰랑찰랑 휘날리며 녀석은 생긋 웃고 있었다. "그래, 속이 다 시원하네. 다신 보지 말자!" 카민이 정말로 기쁜 듯 웃으며 두 손을 휙휙 내저으며 한 말에, 레니가 씨 익, 하고 웃었다. "흐응? '다신 보지 말자' 라고? 그럴 순 없지, 예쁜 레이디. 언젠가 한 번 시간 돼서 세이피안에 들릴 일이 있으면 궁성에 꼭 들려, 알았지? 세이피 안의 궁성에서 프린세스 이레니아의 친구라고 하면 만사가 편하게 풀릴 테 니까." "…누가 예쁜 레이디야?" 레니가 한 말 중에 못마땅한 부분을 발견했는지, 카민의 목소리가 묵직하 게 울렸다. 그리고 의례 그렇듯 그 말이 끝나마자 스릉, 하고 움직이는 검 소리. 그러나 검이 뽑히든 말든 이 사악마녀 꼬마 계집애 레니는 호호호! 하고 크게 한 번 웃을 뿐이었다. 그런 레니의 옆에는 세라가 서 있었다. 내가 바라보자, 세라는 뭔가 심난 한 눈으로 한 번 보더니, 천천히 품을 뒤적여 무엇인가를 꺼냈다. 뭘 하는 거지? 라고 물어보려는 찰나, 세라가 품에서 꺼낸 그 것을 그대로 내 손에 쥐어준다. "이게 뭐야?" "……나중에 펴봐." 그 말과 함께 세라는 시선을 휙 하도 돌려버렸다. 나는 에? 하는 소리를 내며 그 것을 잡았다. 몇 번 접은 듯한 종이였다. 일단 그 것을 바지 주머 니에 집어넣은 나는, 시선을 옮겨 다시 레니 쪽으로 향했다. "루덴스 녀석에게 잘 먹고 잘 살라고 전해. 너도 뭐, 될 수 있으면 행복해 라." "행복?" "그래. 재수 없는 왕자녀석이랑 결혼해서 말이다." 레니는 푸하하하, 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가끔은 마음에 드는 소리도 하는군, 만년 왕싸가지일 줄 알았더니." "사돈 남 말하고 계시네." 내가 한 말에, 레니는 손을 휙 흔들며 말했다. "음, 그럼 정말로 안녕인가? 이건 인사치례가 아니라, 세이피안이 들릴 일 이 있으면 언제든 와. 밥 정도는 먹여 줄 수 있으니까. 알았지?" "죽어도 안 가, 빌어먹을." 카민이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카민이 밥을 준다고해도 안 간다는 말을 하다니! 지금 카민이 하는 모든 말들은 진심의 진심이다. 저렇 게 말한 이상, 카민은 아마 죽어도 안 갈 거다. 레니는 그러나 무적의 최강마녀답게 씹어뱉듯 말하는 카민을 향해 결정타 를 날릴 뿐. "드레스 준비해놓고 기다릴게, 레이디 카민∼! 오호호! 레이디이가 그렇게 너덜한 옷을 입고 다니면 안되지! 안 그래? 하하하!" 스르르르릉! 이번에는 그 어떤 말도 없이 쇠 마찰음이 뒤로부터 뻗어져 나왔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끝까지 뽑힌 카민의 검과, 뽑혀 나온 그 검을 억지로 집어넣 으려고 발광을 하는 에세렌의 얼굴이 보았다. "크아, 참으세요!" 에세렌의 피맺힌 절규를 들으면서, 나는 아직도 웃고 있는 15살이 조숙한 꼬마를 보았다. 변태녀석의 일이 해결되었으니, 레니와 우리들이 헤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 었다. 특히나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오로지 '이 근처에 유키가 있다' 라 는 에세렌의 말 때문이었으니까. 레니는 자기와 함께 크레티아 궁성으로 돌 아가 몇 일을 더 묶으라고 얘기했지만, 나는 그 말을 거절했다. 지금도 충 분히 늦었다. 힐끗 시선을 돌려보니, 우리들 모두와 멀리 떨어져 서 있는 가윈이 보였다 . 그 녀석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차분한 얼굴이었다. 마치 어제 일은 모 두 꿈인 양, 생긋 웃는 눈으로 내 쪽을 보고 있다. 난 천천히 한발자국을 내딛어 그 녀석 쪽으로 내딛었다. "야." "왜 그러나, 친구?" 피시식 웃으며 대답하는 녀석의 말투 역시 변함이 없었다. "너, 레니 따라 궁성에 가라. 그럼 사이비 왕자녀석이 맞아 줄 거다." 갑작스러운 내 말에 왠지 놀라는 눈치라서, 나는 말을 이었다. "루덴스한테 얘기해놨다. 너, 류트 잘 뜯잖아."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음유시인 되고 싶다며." 동그랗다 못해 땡그래진 눈이 무서울 지경이다. "젠장할! 루덴스한테 부탁해서, 류트 잘 뜯으니까 너 궁중에서 음악연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했단 말이다! 그러니까 레니 따라가면 돼!" 그 말에, 가윈의 입술이 가볍게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쑥스러워져 고개를 돌리는데, 갑자기 등에서 퍽, 하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오 오, 하는 작은 감탄사. "후후, 칼. 여기 오는 길에 그렇게 기분이 나빠 보인 이유가 '루덴스한테 이 부탁'을 해서 그런 거였어?" "……."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이번에는 라이메데스가 씨익 웃으며 내 쪽으로 온 다. "과연, 그랬던 거로군. 후훗." "……." 왠지 불안해져서 뒤를 휙 돌아보았더니 아니나다를까, 갑자기 에세렌이 내 쪽으로 온다. "후훗, 그랬군요." "……." 이 자식들이 아주 날 괴롭히려고 작정을 했구만. 녀석들의 능글맞은 시선을 피하려고 애를 쓰며, 나는 시선을 올려 가윈을 보았다. "알았지?" 가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나를 보았다. 녀석의 눈동자가 마구 흔 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가 후욱, 하고 크게 한숨을 들이쉬었다. 무엇인가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짝였다. 비록 언어가 되어 밖으로 튀어나오지 는 않았지만, 나는 녀석이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충분히 알 수 있 었다. 입밖으로 내지 않아도 돼. 한 번쯤은… 네가 제대로 웃는 모습이 보 고 싶어서 한 일일 뿐이니까. 네가 즐겁게 류트 뜯는 모습, 나 다시 한 번 보고 싶었거든. 단지 내 욕심으로 그렇게 한 것 뿐이야. 나는 등을 휙하고 돌려 카민과 라이메데스, 그리고 에세렌 쪽으로 향했다. 카민과 에세렌은 이 이별이 뭔가 아쉬운 듯, 계속 시선을 저 너머로 보내 고 있었다. 등뒤로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진다. 레니와 가윈이 나 를 보고 있는 거겠지. 뭐, 하지만 뒤돌아 보지는 않을 거다. 내가 워낙 잘 생겨서 내 뒷모습이라도 끝까지 눈에 담아두고 싶어하는 녀석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훗, 그래도 꽃미남을 언제까지 자기네들 옆 에 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그야말로 착! 각! 이거든. 나는 가만히 다가가 에세렌의 어깨를 툭툭치며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가자구. 이러다간 정말로 늦겠어. 유키가 있는 곳으로 가야지, 안 그래?" 에세렌은 그 말에 환하게 웃어 보였다. "네에, 절 따라오시면 되요. 부지런히 " 그 웃음이 뭔가 석연 찮게 느껴져 나는 인상을 썼다. "돌팔이 신관. 정말 믿어도 되는 거야?" "네에, 그럼요. 그런데 저, 돌팔이 신관 아닌데요?" 그렇게 말하면서 생글생글 웃는 녀석의 미간에 가 있는 엷은 주름이 보여 서 나는 멈칫했다. 살짝 시선을 내려보니, 화를 참는 듯 자신의 옷을 꽉 잡 고 있는 손이 보였다. 에세렌의 손에 잡힌 사제복은 쭈글쭈글하게 주름이 가 있었다. "에, 에세렌, 그렇게 옷을 꽉 잡는 이유가 뭐지?" 내 질문에 에세렌이 환하게 웃었다. "아뇨. 그저, 이렇게 안 하면 주먹이 나갈 것 같아서요." "……." …저, 정말 내가 이런 신관놈을 믿고 다녀야 하는 건가? -------------------------------------------------------------------------------- Back : 20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7 (written by 카르민) Next : 1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5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28363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10th March 2002 10:41:37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9-03-2002 17:56 Line : 290 Read : 451 [20]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7 -------------------------------------------------------------------------------- -------------------------------------------------------------------------------- Ip address : 61.76.127.15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제 28장: 축제의 밤. "뭐라고? 이 보석이 레이네였다고?" 깜짝 놀란 눈으로 라이메데스가 내게 물었다. 뭐야, 그럼 여태까지 그것도 몰랐다는 거냐? 이거 진짜 바보 아냐? "몰랐냐?" "네가 말해준 적이라도 있어?" 음? 그러고보니 그렇군. 하지만 그 정도는 말 안해도 알았어야지! 나는 쳇, 하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가만히 입을 열었다. "어찌됐든, 이녀석 레이네다." 라이메데스는 내 말에 하하핫, 하고 짧게 웃은 다음 내 손에 들려있던 그 노란 보석을 가만히 들어보였다. 녀석은 그 노란 보석을 몇 번이고 살피며 피시식, 길게 웃어 보였다. "하하, 이게 레이네라니. ……음? 결빙상태인가?" 고개를 다시 한 번 끄덕여 보이자 녀석이 호오,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보석을 살핀다. 난 어쩐지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기쁜 예감에, 라이메 데스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너도 아는 사이냐? 그럼 잘됐군. 너한테 풀어달라고 말하는 걸 잊고 있었 어. 그 결빙 좀 풀어줘." "귀찮아서 하기 싫어." 으음, 그래? 귀찮아서 하기 싫다고? "응, 알았어. 귀찮…… 뭐야?"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게 잘라 말하는 녀석의 말을 무심결에 따 라했던 나는 어느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뭣이라고? 귀찮아? 하기 싫어? "뭐가 귀찮다는 거야?" 자신의 머리를 살짝 만지며 훗, 하고 느끼한 웃음을 지어내는 녀석을 향해 버럭 고함을 치는데, 놈이 그 특유의 심드렁한 눈을 들어 나를 올려다본다 . "결빙이라는 게 쉬운 줄 알아? 특히 해제는 더 어려워. 귀찮아." 녀석의 눈을 가만히 보고 있던 나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쉽고 어렵고가 문제가 아니잖아! 어서 빨리 풀엇! 너도 레이네랑 아는 사 이라며!" 내 말에, 라이메데스가 갑자기 싱긋 웃는다. "내가 그거 해주면, 넌 나한테 뭐 해줄래?" 뭐야? 이 자식이 진짜 미쳤나? 기막힘에 빤히 노려보자, 라이메데스가 피식 웃는다. "호오? 노려보시겠다? 그거, 정말 생각보다 귀찮다구. 결빙을 하는 것은 1 시간이면 되지만, 푸는 것은 수 십 배의 시간을 더 들여야 해. 그 귀찮은 일을 아무런 대가 없이 일부러 해야 한다고?" 능글능글한 말투에 울컥해서 올려다보는데, 씨익 웃으며 결정타를 날리는 놈. "게다가 그 녀석 정도의 고위마족이 한 결빙은 나 정도의 고위마족만 풀 수 있지, 훗." "……." 어억! 나왔다, 궁극의 느끼함! 라이메데스는 자신의 앞머리를 살짝 걷어올리며 느끼한 말투로 말하고 있 었다. "흐음, 내가 이걸 풀어주면 칼레들린은 나한테 뭘 해줄까. 궁금해 죽겠군. " 어윽! 내 진짜 저 자식을 두들겨 패고 싶어서 죽겠다! 저 녀석을 빨래판으 로 삼게만 해준다면 아무리 많은 빨래더미에 묻혀도 좋다. 저 놈이 빨래판 이기만 하다면 빨랫감을 방망이로 퍽퍽 두들겨가며 아주 깨끗하게 빨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쉬운 말로 마구마구 때리고 싶단 말이다, 빌어먹을.) "……뭘 바라는데." 더럽고 치사해도, 힘있는 놈이 요구하면 어쩔 수 없이 들어 줘야하는 것이 약자의 서글픔이다. 내가 약자라는 건 아니지만, 하여튼. "간단해." "그러니까 뭐냐고!" 이 자식이 간단한 조건을 내걸 리가 없다는 생각에 간단해, 라는 말이 더 불안하게 느껴져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녀석이 생긋 웃으며 아무 렇지도 않게 입술을 움직였다. "'데스' 라고 한 번만 불러봐." 그 순간 얼음이 되어버린 나,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 허억! 허어어어어억! 안 돼, 분명히 내가 잘못 들은 거야! "나, 나 요즘 귀가 안 좋다. 다시 말해볼래?" "데스∼ 라고 상냥하게 한 번 불러달라고." "……." 녀석을 빤히 노려보자 녀석이 오? 하는 소리를 낸다. "설마 싫은 거야?" 왠지, 이 녀석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 누군가가 아주 먼 옛날에 한 번 했 던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드는데 말이야. 착각인가? "내가 왜 그래야 되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묻자, 라이메데스가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비튼 다. "싫은 거야, 칼레들린?" 너 같으면 그 따위 것이 좋겠냐, 이 쓸개 빠진 자식아! "싫어! 절대로 싫어! 내가 왜 널 그렇게 불러야 되는거냐!" 내가 버럭 소리치기가 무섭게, 라이메데스가 훗, 하며 또 한 번 자신의 머 리카락을 올린다. "그렇군. 알았어. 그럼 그거말고, 이제부터 전음으로 부를 때마다 무조건 '데스' 라고 부르기." 이게 정말 뭘 잘못 먹었냐? "뭐라는 거야, 너!" "왜? 입 밖으로 내기가 부끄러워서 그런 거 아니었어? 그러니까 전음으로 불러도 된다고 해주잖아. 좋지?" 좋긴 뭐가 좋아! 씨익 눈꼬리 말아 올려가면서 말하는 녀석의 얼굴은 정말 자기가 선심이라 도 쓰는 거라고 말하는 듯해서, 나는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놈의 얼 굴을 빤히 노려 보다 말고 나는 후욱, 하고 숨을 내뿜었다. "타협." "싫어." 샤악 웃으며 나를 보는 그 얼굴은 그야말로 능글능글. "……타협하자니까." "싫다니까." 이, 이 자식이! "타협해! 『인간들의 삶』에도 상거래의 기본은 타협이라고 적혀 있었어!" "인간이 뭘 하든 나와 무슨 상관이지? 난 분명 싫다고 말했다." "해!" "싫어!" 아무리 타협하자고 협박을 해도 절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나도 고집하면 누구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데, 녀석은 나보다 더한 놈이었다. 말싸움 끝에 지쳐 헉헉대고 있노라니, 반짝반짝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 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결국 후욱, 하고 숨을 내쉬고야 말았다. "좋다. 하지만, 전음으로 계속 불러달라는 건 절대로 안 돼!" "뭐? 그럼 직접 '데스' 라고 불러 주려고?" 눈에서 광채 난다, 이 놈아. 표정 관리 좀 해라! 침 흐르겠다! "그래." 대답을 하자마자 라이메데스는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고는 오오, 하는 소 리를 냈다. 나는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끊임없이 용솟음치는 온갖 닭살을 꾸욱 참아내며(크아악! 저 놈의 자식에게 애칭이라니! 너무 과분해!)입술을 벌렸다. "……데……." 천천히 입을 열긴 했는데 빙글빙글 뱅글뱅글 봉글봉글 웃는 녀석의 얼굴이 보이자 입이 더 이상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레이네가 마음에 걸린 너 무나 착한 나는 결국 끝까지 말하고야 말았다. "……스." 그 순간, 녀석의 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약간 굳어진 얼굴로, 녀석이 씩 웃는다. "흐음, 다시! 다정하지가 않아." 뭐, 뭣이라고! "뭐가! 다정하지가 않다는 거냐, 이 빌어먹을 자식!!" 발악에 가까운 내 고함소리에도 라이메데스는 훗 하고 웃을 뿐이다. "다정하지 않은 애칭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 데∼스∼하고 다정스럽게 한 번 불러봐." 나가 죽어라. "죽어도…… 그것만은 못 하겠다." "정말? 정말? 정말?" 호오, 하는 소리를 내며 라이메데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손에 10세리하 정 도 쌓인 먼지를 닦은 걸레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다 못해 4인 분짜리 의 커다란 파이라도 있었으면. 나불나불대는 저 놈 입에 좀 처넣게. "못한다." 내 말에, 라이메데스는 흐음,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럼 좀 힘들겠는데? 언제 마계로 돌아갈지도 모르는 너한테 걸 려서 고생하는 레이네가 참 안 됐군. 결빙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면 몸에 이상현상이 일어난다지." "……." 아, 안 돼, 칼레들린. 안 된단 말이다! 저 말에 흔들리지마! 분명 거짓말 일 거야, 분명! "정말정말 안 됐어." 저, 저 내 눈치 은근슬쩍 살피는 것 좀 봐! 거짓말이라고, 거짓말! "세이아나님은……." 으, 응? 세, 세이아나? 갑자기 들려온 '세이아나' 라는 말에 흠칫한 나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순간 들려온 녀석의 부드러운 목소리. "세이아나님은 레이네를 무척 아꼈는데." 움찔, 하고 온 몸이 떨렸다. "난 결빙을 풀어주고 싶은데, 이상하게 칼레들린이 내 말을 안 듣는단 말 이야." 움찔움찔. "세이아나님, 성격이 조금 더럽지?" 그게 조금 더러운 거냐? 많이 더럽지! "게다가 자기가 아끼는 누군가가 다치면 극도로 흥분하지, 아마?" 그, 그래? "가장 아끼는 존재 중 하나인 레이네가 계속 '결빙' 상태에서 힘들게 있었 다면, 그 분이 대체 어떤 반응을 보이 실까?" 음….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거든? 그만 해줄래? "그 분 성격을 생각해보면, 살아남긴 힘들 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갑자기 정신이 몽롱하게 되어버린 것 같아서, 나는 멍한 기분으로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녀석은 배시시 웃고 있었다. -------------------------------------------------------------------------------- Back : 21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8 (written by 카르민) Next : 1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6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28363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10th March 2002 10:41:40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9-03-2002 17:56 Line : 333 Read : 451 [21]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8 -------------------------------------------------------------------------------- -------------------------------------------------------------------------------- Ip address : 61.76.127.15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칼, 기분이 안 좋아 보여. 무슨 일 있어?" "닥쳐." 그저 작게 말한다고 한 것 뿐인데, 더러워진 기분 덕택에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내 안색을 요모조모 살피고 있던 카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야, 칼. 닥쳐가 아니지. 안색이 너무 창백하다니까?" "닥치라고 했다." 이를 뿌드드득 갈면서 말했는데도 이 녀석의 표정은 변하질 않는다. "칼." "……한마디만 더하면 확 패버리는 수가 있다." 그 말에 그제서야 카민이 조금 흠칫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다. "칼, 근데 진짜로 창백해. 원래도 하얗지만, 지금은 정말 백지 같다고. 에 세렌님, 이 것 좀 봐요!" 카민이 부르기 무섭게, 저 쪽에 있던 에세렌이 파다닥 뛰어왔다. 카민은 척 하고 손가락을 들어 내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칼 얼굴 좀 봐요. 엄청 창백하죠?" "어? 그렇네요. 왜 이렇게 창백하죠?" 그 말과 함께 눈을 동그랗게 뜬 에세렌이 내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기 시작 했다. 둘 다 정말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내 안색이 정말로 그렇게 창백한가? "킥." 저, 저 놈의 자식이! 나는 갑작스레 저 멀리서 들려온 라이메데스의 작은 웃음소리에 발끈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크아, 내 얼굴이 창백한 이유? 뻔한 거 아닌가! 대체 그걸 물어보는 저의가 뭐야? "안되겠어요! 이런 상태로 오늘 그대로 가진 못해요! 마을에 들려서 조금 쉬다가는 게 어때요? 오늘 하루 정도는 안정을 취하고 가죠. 안색이 정말 너무 창백해요." "뭐라는 거야? 그 산에서 내려온 뒤로 겨우 이틀 걸었을 뿐이야. 겨우, 겨 우, 겨우!! 이틀 걸어놓고 쉬자니!" 내 말에, 여태까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에세렌의 얼굴이 눈에 띄 게 굳어졌다. "하지만, 정말로 안색이 창백한 게 보기 안쓰러울 정도인걸요." "으음, 그건 그래." 카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흠, 내 얼굴이 창백하리만치 하얀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갑자기 왜들 저러는 거야? 나는 에세렌을 힐끗 보았다. 뭔가 잔뜩 기대하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신관녀석의 눈은 반짝반짝 무서울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으윽,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와서 한걸음 물러서다말고, 나는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어 떤 생각에 손을 탁 하고 쳤다. "그럼, 뭐해줄래?" "예?" 에세렌이 놀라는 소리를 냈다. 나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마을에 들리면, 넌 나한테 뭐 해줄 건데?" "풋! 하하하하핫!" 그래, 라이메데스! 실컷 웃어라, 이 자식아. 그래, 나 지금 너 흉내내고 있다. 그래서? 에세렌은 내 말에 조금 당황한 듯 에? 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저는 당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요." "시끄러워. 어쨌든 말을 꺼낸 건 너잖아. 내가 마을에 들리면, 넌 나한테 뭐 해줄거냐고." 내가 생각해도 억지라는 건 알지만,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에세렌이 음, 하는 소리와 함께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한 눈치를 보였다. 정말로 그런 걸 진지하게 생각할 줄은 몰랐던 나는 녀석의 반응에 조금 놀랐다. 한참동안 머리에 손을 올려놓고 있던 에세렌은 어느 순간 흠, 하는 소리와 함께 작게 입을 열었다. "이 거 어떻습니까, 칼레들린님? 제가 유키아 네크로나의 위치를 아는 이 유. 그거면 될까요?" 에? 순간 당황했다. 언제나 '유키가 어딨는데? 네가 어떻게 아는데?' 라는 질 문을 던지면 배시시 웃기만 했던 에세렌 녀석이, 갑작스럽게 저런 말을 한 다는 것도 놀라웠거니와 그 얘기를 하는 표정 역시 매우 진지했기 때문이다 . "그거면 될 것 같은데." 나는 발걸음을 약간 재촉하며 말했다. 내 발에 돌멩이가 차여 굴러나간다. 돌멩이가 구르는 모습을 빤히 보고 있을 때, 에세렌이 작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키루사' 와 함께 있을 겁니다." 키루사? 그건 또 뭐야? 에세렌은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유키아 네크로나는 분명 라디아나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는 라 디아나가 아니기도 해요." 무슨 말이야?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에세렌이 후,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뱀파이어가 출몰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저희 교단은 곧바로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곧 범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8살 전후의 보라빛 머리칼소녀, 유키아 네크 로나의 행적을. 그런데 조사과정에서 알게된 것이지만... 놀랍게도, 유키아 네크로나는 원래 '인간' 이었습니다." "뭐? 언제는 라디아나였다며?"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묻자, 에세렌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러니까 이상한 일이지요. 교단의 조사에 의하면, 그녀는 이카루의 국경지대에 살고 있던 네크로나 성의 귀족영애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분명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은 것도 유키아 네크로나, 그녀였습니다. 이상한 일 임에 분명하죠. 분명 인간의 부모 밑에 태어난 그녀가, 어째서 인간의 피를 빨게 되었는가." 에세렌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진실은 곧 밝혀졌습니다. 한 때, 성녀 이루엔님의 초상화를 놓고 세이피 안과 이카루가 크게 다툰 적이 있었습니다. 조금 어이없는 일이지만……. 이루엔님은 원래 전 대륙에서 칭송받는 존재지요. 이루엔님의 초상화는 그 때까지 딱 한 점 남아 있었다는데, 그 그림을 그린 자는 세이피안인이었다 고 합니다. 세이피안은 당연히 세이피안인이 그린 그림이니 자신들이 그 그 림을 손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카루는 입장이 달렸죠. '이카루의 성녀' 라 불리는 이루엔님의 그림은 이카루가 가져가는 게 당연하다고 그렇 게 주장을……. 결국, 두 나라에 가벼운 마찰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국경 지대에 살던 네크로나의 성은 완전히 불타 사라져버렸다는군요." 뭐… 라고? "부모는 타 죽었습니다. 그녀는 홀로 남아 떠돌던 중, 굶주려 있던 라디아나 하나에게 흡혈을 당합니다." "흡혈을? 아니, 잠깐. 라디아나는 다른 뱀파이어족 과는 달라서 흡혈한 상 대는 죽기만 하지, 불사체가 되진 않아." "그렇습니다. 라디아나가 인간을 물 경우, 인간은 그 자리에서 피를 모두 잃고 죽어버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키아 네크로나는 그렇게 되지 않은 그에요. 대체 이유가 무엇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래서 교단에서는 그녀를 일컬어 '신비한 힘을 받은 유키아 네크로나' 라고 하고, 그녀를 쫓는데 주력하고 있었습니다. 그 것이 저희 교단과 키루사가 유키아 네크로나에게 집요하게 집착하는 이유지요." 에세렌은 웃었다. "분명히 말입니다, 라디아나에게 물린 유키아 네크로나는 죽어야 마땅했습 니다. 그러나 죽지 않았지요. 교단은 그 비밀을 얻기 위해 유키아 네크로나 를 산채로 잡아 올 것을 저에게 명령했고, 저는 그녀를 쫓아 온갖 나라를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유키아 네크로나를 노리는 것은 교단과 키루사. 교단 에서는 그녀를 잡지 않았으니, 그녀를 잡아간 것은 당연히 키루사입니다. 유 키아 네크로나와 부딪힐 기회가 많았던 저입니다. 키루사의 거처가 어디라 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잠깐." 카민이 말을 막았다. 에세렌이 에? 하는 표정으로 돌아보자, 카민이 진지한 얼굴로 질문을 했다. "그 키루사라는게 대체 뭔데?" 에세렌은 잠시 망설이는 얼굴을 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한참동안 아아, 하는 소리를 내고 있던 녀석이 어느 순간 후, 하고 가벼운 한숨을 내뿜었다. "유키아 네크로나를 물었던 '라디아나'의 이름 입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에세렌이 말을 이었다. "……흑마법사이기도 하구요." ◇ ◇ ◇ 원래 마을 따위에는 절대로 들리고 싶지 않았지만, 일단 약속은 약속인지 라 마을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난 마을에 들어간 바로 그 순간, 에세렌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을 지독하게 후회했다. "……너희, 혹시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럴리가요!" "멋진걸!" 사람들이 바글바글 들끓고 있었다. 푸른 하늘 위로는 이상한 깃발들이 휘 날리고 있었고, 이상하게 화려해 뵈는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축제, 마을은 완연한 축제의 분위기에 쌓여 있었던 거다. "아니야, 의심이 되는데. 사실 내 안색이 창백하다는 건 핑계고 여기에 축 제를 연다는 걸 알고서 일부러……." "오옷, 저 것 봐요! 닭튀김이닷!" "우오오오! 떡꽂이다!" 나는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사방팔방으로 튀어나가는 에세렌과 카 민의 모습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훗, 그 어떤 암살자들보다 날렵한 움직임으로 사라져버린 그 녀석들의 뒷모습이 그 후로부터 한참동안 보이지 않았다는 아름다운 전설을 그대는 혹시 아는가? 한 두 번 당한 것은 아니다. 저녀석들이 음식을 얼마나 밝히는 것을 구경 하는 일도 하루 이틀이 아니니까. 하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건 없는 거였다. 한참동안 사람들의 틈으로 사라져버린 녀석들의 흔적을 살피고 있는데, 라 이메데스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과연, 보고 있으면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군. 인간이 저렇게 빨리도 달릴 수 있다니, 놀랍다.." 라이메데스의 말에 절대적으로 동감하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기분을 느 끼며 나는 시선을 올렸다. 순간, 라이메데스와 눈이 마주쳤다. 라이메데스 는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내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런데 칼레들린." "뭐냐?" "이제보니 너, 정말로 안색이 창백하다." 이 자식이 지금 장난 하냐? 내가 누구 때문에 그러는데! 네 녀석 때문에 홧병 나서 이러는 거 아냐! 내가, 내가 이 내가! 네녀석을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쇼크로 이렇게 된 게 분명하다! 발끈해서 녀석의 머리라도 한 대 쳐주려고 팔을 들어올린 찰나, 라이메데 스가 입을 열었다. "좀 쉬는 게 좋겠어." 그렇게 말한 라이메데스는 주위를 휙휙 훑어보았다. 보아하니 에세렌과 카 민을 찾는 것 같은데, 그 녀석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지 않은가? 저 많은 사람들 틈에 섞인 그 녀석들을, 그것도 먹을 것을 향해 달려간 녀석들을 대체 어떻게 찾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녀석들은 내가 찾아서 내려갈테니까." 결국 찾는 것을 포기했는지 라이메데스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저기, 저기 여관. 보이지?" 라이메데스는 그 말과 함께 척 하고 손가락을 뻗어 저 멀리에 있는 여관을 가리켰다. 「먹고 가. 자고 가.」 라는 이름의 간판이 너무나도 환상적인 그 여관을 보면서, 나는 허어 하는 소리를 냈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저런 간판을 붙인 걸까? 하는 생각을 하 면서 나는 라이메데스를 보았다. 라이메데스는 생긋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 다. "먼저 가서 쉬고 있어." 솔직히 처음엔 여관 따위에 들어가서 푹 쉬고 싶은 마음 따위 있지도 않았 지만, 여관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다. 단정하 고 깔끔해 보이는 여관의 실내도 마음에 들었거니와, 무엇보다도 여관에 들 어서자마자 어찌된 일인지 졸음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왜 갑자기 졸음이 쏟 아졌는지는 모를 노릇이지만. "어서오세요!" 여관의 급사가 내게 인사했다. 나는 대충 말했다. "아무 방이나. 쉴 수 있는 거면 좋아……." "예, 손님. 2층 오른쪽 일곱 번째 방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준 후 2층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낡은 계단은 삐그덕,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내가 막 다섯 번째 계단을 밟고 섰을 때의 일이었다. "으음, 이거 아무래도 우리가 인연이가 보군요. 여기서 또 뵙네요." 내 뒤에서, 조그맣지만 뚜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는 상관없지, 라고 중얼거리면서 나는 다시 한 발자국을 위로 내딛었다. 하지만 앞으로 내딛 은 그 발에 힘을 준 그 순간, 난 멈칫하고 말았다. 천천히, 시선이 돌아가 기 시작했다. 한 층 위로 내딛었던 발을 다시 밑으로 돌리면서 나는 시선을 꺾어 밑을 보았다. 바로 그 순간. "너……?" 입술 사이에서 낮은 신음소리 같은 것이 기어나왔다. 계단 바로 앞에 위치한 작은 탁자에 앉아 있는 인영이 있다. 검은 로브 사 이로 살짝 삐져 나온 푸른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 홀로 앉아, 잔에 가득 담은 술을 천천히 입가로 가져가고 있는 그의 선명 한 얼굴선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날 거라고는 생각 도 하지 못했던 나였기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아니……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말하기에도 어 색한 세 번째 만남에 내가 인상을 긋는 찰나, 그가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 다. "반갑나요? '우연히도' 세 번이나 만난 것이?" 씩 웃으며 말하는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몸 을 덮쳐왔던 모든 피로가 깨끗이 날아가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그가 앉아 있는 탁자에 의자를 하나 끌어와 앉았다. 웅성거 리는 사람들의 틈에서, 그는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며 미소짓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와 나. '우연히도' 세 번 만난 거냐, 아니면……." 나를 보는 시선을 느끼며, 나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꾸며낸 우연' 으로 세 번 만나게 된 거냐?" -------------------------------------------------------------------------------- Back : 22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9 (written by 카르민) Next : 20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7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28363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10th March 2002 10:41:43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9-03-2002 17:57 Line : 273 Read : 417 [22]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9 -------------------------------------------------------------------------------- -------------------------------------------------------------------------------- Ip address : 61.76.127.15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대답 없이, 그는 씨익 웃기만 했다. 카리스. 내 앞에서 태연히 술을 마시는 이 남자의 이름을 속으로 나직하게 부르며 나는 잠시 숨을 삼켰다. 어색한 침묵이 한바탕 흐른 후, 잔을 내려놓은 카리스가 문득 말했다. "으음, 역시 힘을 쓰지 않을 걸 그랬나요?"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머리 위로 세차게 떨어지던 그 돌들을 치우는 번거로운 작업만 하지 않았 다면 끝까지 '관찰자' 의 입장에 있을 수 있었는데. 아쉽네요. 하지만 저도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으니까." "사정? 관찰자라니……?" 녀석의 말 중에서 거슬리는 부분을 찾은 나는 그 것을 그대로 한 번 읊었 다. 그러나 녀석은 내 중얼거림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을 흘려 버릴 뿐. "음, 이 집 술이 참 맛있습니다. 같이 드실래요?" "너나 실컷 마셔!" 쏘아붙이듯 말하자, 그가 피식 웃었다. "이런, 아쉽군요. 술 마시고 취한 모습은 아주 귀여웠는데 말입니다. 비록 훔쳐본 것이긴 하지만, 훗." "뭐……?" 순간 깜짝 놀라 눈이 부릅떠졌다. 대체 무슨 말이냐, 그게! 술을 먹고 취 한 최근의 기억은 레이디안의 성에서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공간은 분명 레이디안의 공간! 대체 이 녀석이 언제 내가 술마시는 모습을 봤다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어, 나는 그를 바라보는 시선을 좀 더 날카롭 게 만들었다. 내 눈꼬리가 저 끝까지 치켜올려졌다는 것을 자각하며 그를 바라보는데 그가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아아, 실언했군요. 못들은 걸로 해주시겠어요?" 이미 들었는데 뭘 못들은 걸로 해달라는 거냐! 왠지 시야 너머의 녀석이 떨고 있다는 착각을 받았다. 그러나 그 것은 녀 석이 떠는 것이 아니라, 내 눈동자가 떨리는 것이었다. 흔들리는 눈 속에 녹아 들어온 녀석의 모습이 있었다. 나는 입술을 악 물며 녀석을 향해 말했 다. "……마족……이지?" "네." 가차없이 대답한 그가 생긋, 하고 다시 한 번 웃어 보였다. 라이메데스가 해준 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답에 순간적으로 온 몸에 소름이 확 하고 돋아났다. "혹시 고위… 마족?" "당치 않아요. 고위마족이라뇨?" 깜짝 놀란 듯 손까지 휙휙 저어가며 그가 부정했다. 나는 훅, 하고 큰 한 숨을 내신 후 입을 열었다. "본명이 뭐냐? 카리스가 본명은 아니겠지?" 내 질문에 그가 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본명은 밝히기 곤란합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손가락을 뻗어 내 쪽으로 가져왔다. 순간, 검 은 로브 속에 숨겨져 있던 그의 눈이 작게 내깔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입 가에 비스듬한 미소를 베어 문 그가 은은하게 웃었다. "당신에게 빚이 있는 자." 아? "…그렇게 알아두시겠어요?" 입가에 베어 문 그 미소가 어쩐지 익숙하다고, 나는 느꼈다. 무엇인가 아 련한 기가 느껴지는 그의 눈동자를 보면서, 나는 왠지 심장의 박동이 느려 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매우, 편한 느낌이었다. 그 편한 느낌에 도취되 어, 나는 그가 내 머리카락을 슥슥 부빌 때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뭐야?" 검은 머리카락을 부벼오는 섬세한 흰 손가락을 느끼며 내가 한 그 말에, 카리스가 웃었다. "닮았습니다." "뭘? 누구와?" "으음, 그냥. 닮았습니다." 뭐냐, 마치 이야기를 회피하는 것처럼. "많이, 닮았습니다. 특히나……."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잇던 그가 흠, 하는 소리를 내며 말을 끊어버렸다. 왜 그러나 싶어서 그를 보는데, 머리카락을 슥슥 부벼 주고 있던 그 손이( 이상하게도 그 느낌은 너무 따뜻해서,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뻔했다. 나 요 즘에 왜 이러지?)천천히 내려와, 귓가를 덮은 머리카락을 올리는 것이 아닌 가? "뭐하는 거냐?"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는 대답은 하지 않고, 머리카락이 걷혀 올려진 지 점을 뚫어지게 보았다. 한참동안 뚫어질 듯이 나를 보고 있던 그가 킥, 하 고 길게 웃는 모습이 보인다. 음? 혹시 레이디안이 찍었던 목의 문장 때문에 그러는 건가? "이것, 말입니다……." 문득 녀석이 입을 열었다. "누가, 준거죠?" 그 소리와 함께 카리스가 건드린 것은 뜻밖에 목에 선명히 남아있는, 레이 디안이 내게 준 '망각의 문양'이 아니라, 귓가에 꽂혀있는 피어스였다. 나 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귓가에 손을 가져갔다. 둥근 감촉이 느껴진다. 은빛, 은빛의 그것이. "이 피어스 말하는 건가?" "네." 대답하는 카리스는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그 눈빛에 뭔가 찜찜하긴 했지 만, 나는 대답을 했다. "대답하면 알기나 하냐? 로시엔이란 녀석이 준 거다." 내 말에 카리스가 하하하하, 하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이 자식이 왜 사람 기분 나쁘게 갑자기 웃고 그래? "하핫. 제가 설마 그를 모르겠습니까? 마계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자도 있 던가요?" 훗, 하고 한 번 웃어보인 카리스는 다시 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서열 16위의 차갑고 냉정한 얼음마족 아이시 사일런트 로시엔. 후훗, 개 인적으로도 조금 아는 사이이고 말입니다." "뭐? 로시엔하고 하는 사이야?" 깜짝 놀라서 묻자, 녀석이 후후, 하고 웃는 소리를 낸다. "아주―. 조금요." 녀석은 그 말과 함께 천천히 술으로 가득 채워진 술잔을 들이켰다. 나는 카리스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아주 유심히 바라보았다. 레이디안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마족은 술이라는 게 통하지 않는 존재라고 하지 않았던가? 게 다가 술을 마시는 건 인내심 테스트용이라는 말도 했었지. 그렇다는 말은, 이 녀석은 지금 자신에겐 소용도 없는 술을 계속 마시고 있다는 얘긴데. "쿡, 그래요? 그 피어스를 준 게 아이시 사일런트란 말이지요……." 홀짝, 술을 마시다말고 그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녀석의 눈이 아주 짧은 순간 나와 부딪혔다. "재밌군요." 뭐가 재밌는데?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가 작게 입을 열었다. "카인." 카인? 아! 안녕이라고 말하는 건가? "안녕히 계십시오. 다음에 만날 때는 당신의 모습이 조금 달라져 있기를. 뭐,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지만 말입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말을 순간 이해할 수 없어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어…… 엇?" 생긋 웃어 보인 그의 모습이 흐릿해지나 싶었더니,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 이다. 이 한정된 공간 안에서, 아무리 이별의 인사를 던졌다곤 하지만 가면 어딜 가겠냐고 생각한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순식간에 사라진 그의 자리에는 덩그렇게 술잔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거짓말처럼 사라진 그의 흔적은 술병과 잔을 제외하면 찾아볼래야 찾을 수 가 없었다. 그저 놀란 눈을 둥글게 뜨고 있던 나는 갑자기 앗, 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워프…… 였나?" 하지만 아무리 워프라고는 해도, 아무런 말 없이…… 하긴, 그건 의지이니 까. 각성마족쯤 되는 자가, 마음만 먹으면 어디로든 워프 정도 못하겠어? 하지만 꼭 그렇게 나를 놀라게 하고 가야 속이 시원한가? 나는 뭔가 마음이 찜찜해지는 것을 느꼈다. 대체 이 카리스라는 자는 뭔가 ? 마치 내 행동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 그의 태도는 정 말이지 마음에 안 들었다. 게다가, 언제나 내가 혼자 있을때만 스르륵 다가 온다는 것 역시. "저기요." 한참동안 카리스가 앉아있던 의자를 뚫어지게 보고 있던 나를 일깨운 것은 , 뒤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였다. "응?" 돌아보니, 핑크빛 원피스에 새하얀 앞치마를 두른 귀여운 여자아이가 나를 향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뺨에는 발갛게 홍조를 피운 채인 그녀는, 고 개를 살짝 숙인채로 웃고 있었다. 한참동안 저 애가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하고 속으로 생각했던 나는 어느 순간 머릿속을 휙 하고 스치는 것이 있어 멈칫했다. 우, 웃? 이, 이거, 호, 혹시? "저기요…." 내가 똑바로 바라보자, 그녀는 더더욱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역시? 첫눈에 반했다거나 하는 그런 거지? 내가 너무 잘생겨서. 그런 거, 맞지? "음? 부담 갖지 말고 말해봐!!" 눈을 반짝 들고 말했더니, 그녀가 한 발자국을 더 가까이 왔다. "그, 그러니까요……." 알아, 알아. 그러니까 뜸들이지 말고 어서 말……. 두근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그녀의 벌어진 입술을 본 순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술값은 손님이 내는 거죠?" 엥? 갑자기 고개를 반짝 들며 말한 여자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카 리스가 남긴 무수한 수의 술병이 뒹굴고 있었다. 나는 한참동안 그 술병과 술잔을 바라보았다. 하나, 둘, 셋……. 총 17개였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내 앞에 서 있는 여자아이를 보았다. "……." 뭔가, 아주 비참한 자신이 느껴지는군. 후훗. -------------------------------------------------------------------------------- Back : 23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0 (written by 카르민) Next : 21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8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28363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10th March 2002 10:41:45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9-03-2002 17:58 Line : 283 Read : 411 [23]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0 -------------------------------------------------------------------------------- -------------------------------------------------------------------------------- Ip address : 61.76.127.15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나는, 걷고 있다. 나는, 계속 걷고 있다. 나는, 끊임없이 걷고 있다. "이 자식들……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쓰읍,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나는 중얼거렸다. "제길맞을! 빌어먹을! 젠장할!" 그 빌어먹을 놈의 카리스 녀석! 나쁜 놈! 나쁜 녀석! 아아, 정말 짜증난다! "무슨? 그녀석이랑 나는 일행도 아닌데?" 무수하게 어질러져 있는 술병이 뒹구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어설프게 변명 을 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한 채 아까 까지만 해도 분명히 수줍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던 소녀는 아까와는 달리, 무척이 나 대담하게 내게 말대답을 해왔다. "후후후후. 일행이 아니긴요? 아까 같이 술 드셨잖아요. 일행분이 갑자기 보이질 않으니 손님이 계산을 하시는 게 당연하죠." 생긋생긋 웃는 얼굴로 내게 한발자국씩 다가오던 그 여자애가 얼마나 무서 워 보였는지! 나는 펄떡거리는 심장을 안고 그애를 향해 어설프게 웃어 보 였다. "아니, 저기 말이야……. 그게 아니고 난 그저……." "잔말말고 계산하쇼!" 내가 뭐라고 변명을 하려고 하기가 무섭게, 소녀의 표정과 말투가 돌변했 다. 갑자기 내 여리고 여린 어깨를 확 하고 낚아챈 그녀는, 무서운 목소리 로 쏘아붙이듯 그렇게 말했다. 순간 너무 놀란 나는 침을 삼킬 생각조차 하 지 못하고 입을 헤 벌려버렸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으로 그렇게 말한 소녀의 눈동자는 한마디로 공포였다. "아니, 나는 돈이 없……." "돈이 없으면서 술을 먹어욧?" "내가 안 마셨……." "시끄러워요! 돈이 없으면 옷이라도 벗어요!" 뭐, 뭐, 뭐라고? "……뭐라고 했어?" 아니, 이 고귀한 몸에게 요즘 옷벗으라는 요구를 하는 인간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물론 내 몸매가 좋다는 건 나도 인정해. 내 살결 하얗다는 것 도 인정한다니까. 그러니까 보고 싶은 것도 인정하지만 역시 난 함부로 옷 을 벗을 수 없어! "벗어요! 그 옷, 비싸 보이니까 벗으라구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저기, 조금 있으면 우리 일행이 올……." "잔말말고 내놓으라니까요!" 버럭 고함을 치는 소녀의 태도에 나는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결코, 정말이 지 결코! 내가 간이 작거나 베짱이 없거나해서 움찔한 게 아니었다. 단지 소녀가 너무 살벌했을 뿐이다. "아니, 나는……." "못 내놓겠다는 거예요, 지금?" 앙칼지게 쏘아붙이며 소녀가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왔고, 나는 순간 말 할 수 없는 위압감을 느꼈다. 눈동자 한 가득 '돈 내놔' 라고 쓴 그 애는… …. ……내가 만나본 인간 중에서 가장 살벌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리고 얌전히 윗옷을 벗기 시작했다. 소녀는 그제서야 조금 만족한 듯한 얼굴을 했고, 나는 눈물을 머금고 그 옷을 소녀에게 건넸다. 안에 받쳐입고 있던 셔츠가 그나마 나의 쪽팔림을 커버해주는 느낌이라 안 심하고 있을 때, 그 애가 가차없이 말했다. "뭐해요? 더 안 벗고?" "……뭐라고?" 예상하지도, 예상하고 싶지도 않았던 그 말에 황당해서 버럭 고함을 치는 데, 소녀가 더욱 인상을 썼다. "뭐예요? 그럼 안 주겠다구요? 딸랑 이 겉옷으로 끝이라 이거예요? 이걸로 는 모자라요!" 어이가 없었다. 오오! 미치겠다 진짜! "이봐!" 내 부름에 인상을 확 찌푸리며 그 애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인상을 쓰며 입술을 열었다. "그 옷, 맡고 있으면 내가 일행 데리고 올게. 응?" "그렇게 하려면 돈 될만한 거 하나 더 놔두고 가세요. 혹시 안 올 수도 있 으니까. 일행이랑 같이 와서 돈만 지불하면 다 돌려드린다니까요." 지, 지독한 것. 나는 눈물을 머금으며 내 옷을 샅샅이 뒤져 조금이라도 돈이 될 것 같은 것을 찾아보기 시작했지만, 불행히도 내게는 그다지 좋은 물건이라는 게 없 었다. 나란 녀석 자체가 고귀한 몸인데 굳이 비싼 것을 붙이고 다닐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한참동안 '비싼 물건'을 찾던 나는 그래서 결국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 다. 난 눈물을 머금으면서 천천히 검을 뽑았다. 이것말고는 정말이지 맡길 것이 없었던거다. 바지를 벗어서 맡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누가 뭐래도 이 검을 통째로 맡길 수는 없는 법! 이 검 때문에 내 가 어떤 일을 당했는데, 이걸 통째로 줄 수는 없다. 나는 천천히 검 집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런데 순간, 여태까지 온갖 표정으로 나를 핍박하고 있 던 소녀의 인상이 시퍼렇게 질리는 게 아닌가? "사, 살려주세요!" 뭐? 갑작스럽게 돌별한 그 태도에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사람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뭐냐, 밥을 먹었으면 밥값을 내는 게 당연하잖아!" "그런 일 가지고 사람 앞에서 검을 뽑다니!"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마누라가 해주는 밥이나 처먹어!" 나는 한참동안 내가 뽑아든 검을 보았다. 어이가 없어서 이젠 웃음이 나오 는군. 시선을 돌렸더니 언제 나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다는양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날카로운 검의 광채를 두려운 듯한 눈으로 훑어보는 소녀의 눈이 흔들리는 걸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웃어? 저게 웃었어?" 이, 이제 웃는 것 가지고 시비냐? 웃는 것도 죄냐! 웃는 것도 죄냐고! 앙? 버럭 고함을 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 내 쪽 으로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는 몇몇 인간들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하아, 하고 한숨이 나는 것을 느끼며 나는 검을 꼭 쥐었다. 소녀는 눈을 들어 나 를 한 번 보더니,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러지 말아요!" "괜찮아, 네리. 돈은 우리가 받아줄게." "그래그래, 몇 대 두들겨 패면 돈을 뱉겠지." 그 말과 함께 내 쪽으로 더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녀석들을 보면서 나는 끄 응, 하는 소리를 냈다. 정말로 덤벼들 생각인지 저마다 험상궂은 표정이었 다. 역시 인간들은, 흥분을 잘하는 족속. "……자." 나는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끝을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들고 있던 검집을 서둘러 소녀에게 내밀었다. "에?" "그거 맡기면 되지?" 순간, 다가오던 녀석들이 멈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거 잊어버리면 죽어." 나는 나직하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몇몇 녀석 들이 어정쩡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완전한 은빛을 뽐내는 켐 알슈타 드를 가만히 들고 녀석들을 한 번 노려보았다. 그러자 적당히 취기가 오른 듯한 얼굴의 그 녀석들이 후다닥 물러서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그 여관 에서 나올 수가 있었다. 그런데 말이지? "이 자식들 대체 어디 간 거야?" 안 보인단 말이다, 이 녀석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그대로 노출된 온 몸이 으슬으슬 떨려오는데! 어서 저 여 관에 맡겨놓은 겉옷을 찾아 입고 싶어 죽겠는데, 녀석들은 도대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내가 검을 덜렁 덜렁 들고 가는 게 수상쩍어 보였는지 이 사람 저 사람이 나를 흘낏흘낏 훔 쳐보고 있다는 것도 너무 마음에 안 들었다. 온 몸에 열이 확확 오르는 게 느껴진다. 축제, 라. 인간들은 정말 쓸데없는 걸 좋아한다니까, 쳇. 평생 해봐야 도움도 안되는 것을 왜 그리 좋아하는지. 여기저기서 나를 붙잡는 소리가 들린다. 천천히 하늘을 엄습하는 검은빛에 물들어나가는 마을은 아까보다 더더욱 흥겨운 분위기였다. 술을 많이 마셨 는지 새빨간 얼굴로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중년의 아저씨가 보였고, 딸인 듯 보이는 꼬마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걷고 있는 남녀의 모습도 보였다. 흠, 뭐… 나쁘진 않네, 이런 것도. "거기 총각∼ 여기 봐, 여기!" 그렇게 이 곳 저 곳을 기웃거리며 한참 걷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 발목 을 턱 하고 잡으며 말했다. 여태까지 '거기 잘생긴 검은머리 총각' 따위의 명칭으로 나를 부르는 자들은 많았지만, 그래도 발목을 잡는다거나 하는 일 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나는 조금 당황해서 시선을 내렸다. 내 발을 잡 고 있는 것은 쭈글쭈글한 얼굴의 노파였다. 노파는 내가 자신을 바라보자 신이 난 듯,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것 봐, 이거. 이거 예쁘지 않어? 총각, 얼굴 한 번 잘생겼구만!" 내가 잘생긴 건 당연한 거 아냐? 나는 흐뭇한 기분이 들어, 노파가 가리키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 "자아, 이거 사, 응? 내가 싸게 해줄게." 노파가 눈앞에 들이민 것은 조그마한 목걸이였다.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쩝. 예쁘긴 하다만, 대체 남자인 나한테 그걸 보여주면서 사라고 하는 이유 는 뭔지? 게다가 난 돈도 없단 말이다. "돈 없는데." 그렇게 한마디 던졌더니, 노파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는 것이 보인다. 노 파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허억! 무서워!)천천히 말했다. "정말 돈이 없나, 총각?" 내가 돈이 있었으면 그 빌어먹을 여관에다가 옷 벗어 놓고 왔겠어? 앙? "없어." 그렇게 말하고 막 발을 옮기려는 찰나, 내 바지단을 잡고 있던 노파가 갑 자기 팔로 내 다리를, 누구도 잡아본 적이 없는 내 다리! 를 잡았다. 순간 헉하는 기분에 돌아보는데, 노파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서, 섬뜩했다. "정말 없나, 총각?" "……." 이 동네 인간들 전부 왜 이러는 거야! 무서워 죽겠네, 진짜! 부리부리한 눈매를 빛내는 그 노파는 더 이상 노파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바지가 찢어지도록 세게 내 다리를 붙잡고 있는 그 노파를 빤히, 아주 빠 안히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며 크게 외쳤다. "아앗, 저기 엄청 커다란 새가 날아간다!" "뭐?" 깜짝 놀란 듯, 노파가 고개를 돌린 틈을 타서 난 달리려고 했다. 그러나. "……라고 할 줄 알았나, 총각." 허, 허억? 내 계산과는 달리, 노파는 여전히 내 바지를 꼬오옥 잡은 채 싱글싱글 웃 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진 세월의 주름이 노파의 얼굴에 잔잔히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노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총각." 무, 무섭다. 좀 놔줘, 흐윽. 정말로 바지가 찢어질 것 같아서 노파의 힘에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하고 있는데, 노파가 음흉하게 웃으며 말을 던졌다. "애인 있수?" -------------------------------------------------------------------------------- Back : 2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1 (written by 카르민) Next : 22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49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28363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10th March 2002 10:41:48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9-03-2002 17:58 Line : 404 Read : 414 [24]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1 -------------------------------------------------------------------------------- -------------------------------------------------------------------------------- Ip address : 61.76.127.15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왠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별 걸 다 물어보는군.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대답해 줄 의무는 없지,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 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노파가 싱글싱 글 웃으며 갑자기 아까 내게 내밀었던 그 목걸이를 다시 주는 것이 아닌가? "가지게나." "……엑?"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내 눈에, 노파가 훌훌 털고 일어나는 것이 보 였다. 노파는 방금 전까지 내게 '돈 있나?' 라며 물고 늘어졌던 사람이라고 는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거침없는 태도로 벌떡 일어나더니 웃어 보였다. "가지라구." "……." "왜 그렇게 의심어린 눈으로 보누?" 의심어린 눈? 그렇게 표시가 났나? 노파가 웃는다. "총각, 일어서서보니 정말로 자알 생겼구만. 내가 여자라도 소개시켜 줄까 ? 총각보면 처자들이 다 뒤로 넘어갈 것 같은데." 정말로 소개시켜줄 것 같은 눈빛에 멈칫해서 얼른 고개를 저었더니, 노파 가 갑자기 내 손을 턱 하고 잡았다. 그리고는, 내 손목에 그 목걸이를 걸쳐 준다. "애인 있지?" 없는데! 절대로 없는데! …라고 말하려다가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 없다고 말하면 왠지 '손녀 소개 시켜 줄게' 라고 말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멈칫한 나는 하하, 하고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파가 입맛을 쩍 다시며( 대, 대체 왜 입맛을 다시는 건데!)말했다. "그럼 그거 애인 줘." 그 말에, 나는 하? 하는 소리를 내며 팔에 걸린 그 것을 보았다. 반짝이는, 붉은 빛의 무엇인가가 보였다. 내 손에 걸쳐지듯 들린 그 것은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름다운 빛깔에 왠지 나 자신마저 녹아들 것 같 은 느낌이 들어 나도 모르게 입술이 열린다. "예쁘다……." "흠? 별로 비싼 건 아니야." 노파는 그 말과 함께 일어나더니 허리를 손으로 탕탕, 하고 두드렸다. 노 파는 웃는 낯으로 말했다. "수정일세." 수정? 수정이 뭔데? 하긴, 알게 뭐냐. 어찌됐든 그냥 준다는데 안 받을 수도 없고 해서, 나는 그것을 주머니 안 에 집어넣었다. 노파는 허리를 계속해서 두드렸다. 노파의 앞에 진열되어 있던 머리핀이며 방울, 목걸이, 귀걸이 같은 것이 솨르륵, 하는 소리와 함 께 노파의 옆에 있던 대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정리를 끝낸 후 내게 한 번 웃어주더니 저 멀리로 걷기 시작하는 노 파의 등을 보며 잠시 묘한 감상에 젖었다. 뭐야, 정말로 이걸 나한테 주는 건가? 천천히 손에 든 목걸이를 들어올렸다. 예뻤다, 별빛을 가득 함축해서 머금 고 있는 그 자수정이란 것의 빛깔은. 찬란하다거나 화려하다거나 하는 말은 해줄 수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 은― 예쁘다는 것. 정말로. 그것을 든 채로, 나는 걷기 시작했다. 펑―! 응? 펑, 하는 요란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까만 밤하늘 위에 그림이 그려지 는 것이 보였다. 화려한 불꽃이 밤하늘을에서 얼룩처럼 번져나가는 것이 보 였다. 대체 저게 뭐지? 밤하늘을 찬찬히 수놓는 그 것을 가만히 보고 섰던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쪽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맞아. 최근 내가 몸이 좀 많이 안 좋았어. 변태 마족에게 그렇게나 시달렸지, 팔도 찢어질 뻔했지, 게다가 라이메데 스놈 때문에 마음고생도 보통이 아니었지, 카리스란 놈한테 당해서 술값 문 제로 또 마음 고생했지. 그러니까 그 동안의 고생이 축적돼서 갑자기 눈이 나빠졌을 가능성이 조금 , 아주 조금은 있지 않을까? 응? 그렇다고 말해줄 착한 사람 어디 없어? "오오오, 오오! 빠릅니다, 3번 탁자 분! 정말 빠릅니다!" "우와아아아아∼" "인간의 스피드를 이미 오래 전에 초월한 3번 탁자 분! 정말 대단하십니다 !" "오오오∼!" 그래그래. 이 소리도 분명히 환청이야. 그럼, 아무렴 그렇고 말고. 설마하 니, 아무리 카민이 그렇다지만 저런 짓까지 할 리는 없어. 그럼! 그렇고말 고! 하늘에는 여전히 그 아름다운 것이 퍼지고 있는 가운데, 내 눈앞에서는 엽 기적인, 많이 엽기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걱우걱우걱. 후루루루루룩, 쩝쩝. 이와 음식이 부딪혀 낼 수 있는 온갖 소리가 요란스럽게도 울린다. "푸합∼!" "오오, 다 드셨습니다!" 소리의 제공자는 붉은 머리칼을 가진 녀석이다. 저 위쪽에 위치에 있는 단 상에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올라 앉아서, 마구잡이로 음식을 퍼먹고 있는 저 인간같지 않은 녀석 말이다. 내게는 아주 익숙한 얼굴을 가진 그 녀석은 , 바로 앞에 놓여있던 물을 원샷 한 것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 섰다. 녀석이 일어나가기가 무섭게, 그의 옆에 서 있던 콧수염의 남자가 소리를 친다. "예에, 참가번호 46번 카민씨가 결승에 진출하시겠습니다!" 아아, 내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나? 귀도 정상인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면서,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단지 현실에서 짧은 시간 도피하는 것을 바라고 했을 뿐인 그 행동은, 다음 순간 내게 아까보다 더더욱 심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저 쪽 하늘에는, 화려하게 걸린 깃발들 사이에서 유난히도 눈에 띄는 커다 란 천이 하나 있었다. 두 개의 긴 막대기로 고정시킨 그 천에는 검은 색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세기의 대결! 누가 빨리 먹나! 자, 지금 도전하세요! 당신도 할 수 있습 니다!」 그 밑으로 가만히 시선을 내려보니, 조그맣게 쓰인 글자가 보인다. 「우승상품으로 5골드를 드립니다!」 "……." 어이가 없었다. 가만히 다시 시선을 돌려보니 아주 뿌듯한 표정으로 밑을 내려다보고 있는 붉은 머리칼의 그 녀석, 카민이 보였다. 입에 뭔가를 잔뜩 묻히고(입에 붙 어 있는 저거 설마, 뼈인가?), 기쁘다는 듯이 서 있는 그 녀석은 정말로… …. 행복해 보였다. "난 저 녀석에게 30실버! 봤지? 그렇게 엄청나게 쌓여있던 스파게티를 단 세 번 만에 먹는 거!"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목소리에 저절로 몸이 움찔했다. "오오, 켄! 너는 저 붉은 머리카락 아가씨에게 30실버라 이거지?" 쿨럭! 붉은 머리카락 '아가씨'? "그래그래! 엄청나더군! 자네가 오기 전엔 말이야, 엄청난 양의 카레를… …." "난 처음부터 와서 봤는데, 맨 처음엔 자기 얼굴 만한 케이크를 5초만에 다 먹어치우더군! 나 역시도 저 아가씨에게 20실버 걸었다네!" 끊임없이 귓가를 파고드는 소리들을 무시하기 위해 나는 무던히도 애를 써 야했지만 내 노력은 그리 대단한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사방에서 끝도 없 이, 내가 없는 동안 카민이 먹어치웠던 엄청난 음식의 양에 대해 떠들어대 는 것이 들리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귀가 좋은데 그걸 못 듣겠는가? 아직도 뿌듯한 얼굴로 사방을 훑어보고 있는 카민을 보였다. "하지만, 붉은 머리 아가씨의 상대도 만만치 않다고! 사실 난 그 사람한테 걸었지! 40실버 걸었어!" "하긴! 그 사람도 굉장했어, 그렇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속닥거림에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대체 어느 정 도 길래 저 카민과 비교를 당하는 거지? "처음에 시작할 때 그 사람은 치즈케이크를, 무려, 무려 4초만에 먹었던 그 사람 말이야!" "아아, 그 사람! 스파게티를 그냥 마신 사람?" 음? 내가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뭘 마셨다고? "그래그래. 그……." 둥둥둥! 갑자기 들려온 북소리에, 시끄럽던 사람들이 딱 하고 소리를 멈췄다. 내가 경청하고 있던 사람들의 말도 멎어버렸다. 나는 앞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그리고 순간. 나는 아까보다 더 굳었다. "그럼 이제부터 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참가번호 46번 카민씨와 참가번 호 47번 에세렌씨는 이 쪽으로." "그런데 혹시, 저 사람이 신관이야?" 누군가가 뒤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린다. "설마!" "그런데 왜 입고 있는 옷이 법복하고 비슷하게 생겼지?" 아아, 에세렌. 너, 너! 네가 아무리 신성을 타고난 존재라 해도, 이건 네 가 모시는 그 여신이란 작자에 대한 모독이다!! 알아? 아냐고! 나는 카민과 더불어 나란히 무대 위에 서 있는 카민과 에세렌의 모습을 보 고 속으로 무수한 각혈을 일으켰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난리를 피워대도, 그들은 거침이 없었다. "자, 그럼 두 분!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검은 콧수염의 사내가 그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 자가 이 어이없는 대회 의 사회자인 듯 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에세렌이 카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카민님, 포기하시죠?" "에세렌님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내 이 좋은 귀에는 잘도 들어 온다. 싱긋, 싱긋 둘이서 웃어가며 그렇게 말하지 마라. 보는 내가 무섭다, 응? "카민님, 아시지 않습니까? 네? 제가 이길게 뻔한걸요?" "훗, 승부는 봐야 아는 법이죠." 너희 둘, 어디 나가서 나 안다고 하지마. 내 처절한 마음 속의 비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들은 굳건한 얼굴로 자 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 녀석들의 앞에 이윽고 나온 것은. "오오오오오옷!" "호오오∼!!" 식탁 위에 놓여진 음식을 보며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나 또한 완전히 경악해 버렸다. 뭐, 뭐냐? 탁자 위에 살그머니, 곱게도 놓여져 있는 그 것은! "저걸 먹으라고?" ……통째로 구워져 있는, 돼지 한 마리였다. "도전하시겠습니까? 아, 뼈는 드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뼈를 제외 한 나머지는 모두 깨끗이 드셔야 합니다." 사회자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설마, 카민? 설마, 에세렌? 너희들 인간이잖아. 응? 인간이잖아? 너 희들도 생각이 있는데, 설마 그런 걸 먹으려고는 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 뼈는 먹지 않아도 좋다고 했지만, 통째로 구웠으니 내장은 그대로 있을 거 야. 그런데 설마 그걸 먹으려는 거야? 그럴리 없어, 그렇지? 너희, 인간이 잖아! "말이라고 합니까?" "당연히 도전해야죠." ....오늘 부로 저 녀석들은 인간이 아니다. 나는 멍하게 녀석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휙휙 저어버렸다. 그냥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속편하겠어. "그럼 시작!" 사회지가 손을 올렸고, 그 순간부터 둘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건 그야말로 광란! 도저히 눈뜨고 봐줄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나는 휙 하고 돌아섰다. 녀석들이 구운 돼지를 잡고 그대로 와구와구 씹어 먹는 모습은 그야말로 엽기였다. 그 것은 끔찍하고 말고의 문제를 넘어서 서 너무……. ……추했다. 나는 크으, 하고 한숨을 내쉰 후에 천천히 돌아섰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 "왜 여기 있는 거야? 게다가 옷은 왜 그래?" 바로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움찔했다. 올려다보니 역시나, 라이메 데스였다. 나는 라이메데스의 모든 질문을 무시하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혹시 저거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 있었어?" 뭔가 지금이라도 따질 것 같았던 분위기의 라이메데스는 내 질문에 멈칫했 다. "음." "감상이 어때?" "엄청나다는 말 밖에는……." 라이메데스는 후우, 하고 한숨을 쉬며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왜, 안 말렸냐?" 아직도 들려오는 쩝쩝, 아구아구! 하는 소리를 들으며 내가 물었다. 그러 자 라이메데스가 하하, 하고 웃는다. "왜 안 말렸냐고?" 라이메데스는 갑자기 눈을 부릅뜨더니 입술을 꾹 물었다. "……너 같으면, 저걸 말리겠어?" 그 말과 동시에, 라이메데스가 손을 뻗어 카민과 에세렌이 있는 쪽을 가리 켰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미친 듯이, 정말로 '미친 듯이' 돼지를 뜯어먹고 있는 두 걸귀를 보곤 숨을 멈춰버렸다. "네 심정을 알 것 같다." "알아주니 고맙군." 우리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라이메데스는 나를 흘낏 바라보다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쉬고 있으랬는데 왜 돌아다니는 거냐?" 이 자식아, 너 같으면 거기서 쉴 수 있을 것 같냐? "와아아아아∼" 뭐라고 대답을 해야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요란한 고함소리와 함께 박수소리가 들렸다. 귓전을 찢을 듯한 그 엄청난 함성에 놀라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자리에 벌떡 일어서 있는 단상 위의 인영을 발견할 수 있 었다. "하하하하! 제가 이겼습니다, 인정하죠?" 어깨를 좍 펴고, 입가에 묻은 소스는 닦을 생각도 안 하는 청록색 머리카 락의 신관은 흰 법사 복에 온통 음식물을 묻히고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크윽, 발만 먹으면 다 먹는 건데!" 그리고 그런 에세렌의 옆에서 원통하다는 듯한 얼굴로 크으, 하는 소리를 내는 카민이 있었다. 보아하니 에세렌이 이긴 것 같은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에세렌은 당당한 얼굴로 일어나서 주위를 죽 하고 훑어보았는데, 그 눈빛은 정말 뿌듯한 기로 충만해 있어 나는 잠시 어이가 없어졌다. 어찌됐든 크게 한 번 웃은 에세렌은 축 늘어진 카민에게 뭐라고 뭐라고 계속 말을 시켰다. 나는 신이나서 떠드는 에세렌의 얼굴을 멍하니 한 번 바라보고 난 다음 시 선을 돌려버렸다. 라이메데스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돌리 고 있었다. 쪽팔려서라도 저녀석들이랑은 죽어도 아는 척 하지 말아야지, 라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어어, 칼! 이데형!"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반가운 듯 소리치는 카민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이 아닌가? 움찔하고 몸이 떨렸다. 라이메데스가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뛸까?" "뛰자." 그러나 나와 라이메데스가 막 뛰려고 폼을 잡은 그 순간, 나는 내 어깨를 턱 하고 잡는 강인한 손을 느꼈다. 카민이나 에세렌은 분명 단상 위에 있었 으므로 그 사이에 내려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어깨를 잡은 이 손은 대체 뭔가?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가 헉,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저기, 저 사람이 당신을 부른 것 같은데." 남자 하나가 내 어깨를 잡은 채 말하고 있었다. 써, 썩을!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쪽팔려서 도망갈려고 한 거였단 말이야! 화가나서 외치려는 순간, 나는 내 왼쪽 어깨를 턱 하고 죄는 손을 느꼈다. "칼! 봤어? 봤어? 내가 준우승했다?" "……." -------------------------------------------------------------------------------- Back : 2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2 (written by 카르민) Next : 23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0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28363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10th March 2002 10:41:50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9-03-2002 17:59 Line : 169 Read : 422 [25]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2 -------------------------------------------------------------------------------- -------------------------------------------------------------------------------- Ip address : 61.76.127.15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정말이지 미칠 지경이었다. 걷는 길목길목마다 선 사람들이 나를 향해, 정 확히는 카민과 에세렌을 향해 휫바람을 불어대는 통에 나는 정말이지 얼굴 전체로 불을 뿜을 수 있을만큼 창피했다. 빌어먹을! 그런데 이 카민이나 에 세렌이란 녀석들은 자기네들이 지금 얼마나 쪽팔리는 일을 당하고 있는지 모르는 듯, 자신들을 배웅하며 손을 흔드는 녀석들을 향해 무슨 왕이라도 된 것처럼 손까지 살랑살랑 흔들어대고 있었다. 카민에게 돈을 걸었다 어쨌다 했던 녀석들의 표정은 조금 일그러져 있었지 만, 그래도 카민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은 잊지 않고 있었다. 정말로 잘 먹 더라, 나는 무슨 걸귀가 온 줄 알았다, 인간이 그렇게도 먹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대단한 인간들이었다, 아마 지옥 끝까지 가서라도 살아남을 거다 , 좋은 구경했다, 평생 못본 인간들에게 자랑해야지 등등의 말이 속속들이 들려온다. 으아아! 제발, 제발 저런 소리는 안 들리는 대서 해달란 말이다! "칼레들린님, 표정이 왜 그래요?" "이데님, 얼굴이 왜 그래요?" 오오오! 정말이지 모른다는 얼굴로, 걱정스럽게 물어오는 녀석들의 얼굴을 발바닥으로 지근지근 밟아준다음 그 위에서 마구 뛰고 싶다면 내가 이상한 녀석인거냐? 이 바보 같은 녀석들은, 자기네들이 내 옆에 서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쪽 팔리는 일인지 전혀 자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달라붙은 국물소스가 채 빠 지지도 않은 법사복을 그대로 걸쳐 입은 채 룰루랄라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에세렌도 그랬거니와(제가 먹기 대회에서 일등 먹었어요∼ 라고 외치 기도 했다. 언제나 말했지만, 너는 정말이지 신관이 맞는 거냐!), 대체 뭘 어떻게 먹었는지 입가는 물론이고 머리카락까지 음식물이 튄(어, 어떻게 하 면 머리카락에 음식물이 튈 수 있는 건데? 그걸로 묘기 대행진에 한 번 나 가보지 그래?)카민 녀석 역시 같이 다니기엔 매우 쪽팔리는 녀석이 아닐 수 가 없었다. "제발 저리로 떨어져서 걸어." 내가 던진 나지막한 말에, 갑자기 에세렌이 눈을 둥그렇게 뜬다. "예에? 왜요?" 으아아! 모른다는 그 얼굴 저리 치워! 나는 억지로 외면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라이메데스 쪽으로 다가갔다. 카민의 바로 옆에 서서 '제가 이등 했답니다! 사실은 일등 할 수 있었는데! ' 같은 말을 듣고 있던 라이메데스의 안색은 상당히 창백했다. 동변상련의 아픔을 느끼며 나는 녀석에게 작게 말을 걸었다. "……저러고 싶을까." "엄청 즐거워 하는 것 같은데." 라이메데스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푸하하하하! 다음 번에도 제가 반드시 이길 겁니다!" "크하하하! 내가 이길거에요!" 정말로 즐거워하는 것 같다, 저 녀석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고 걷기 시작했다. 아까의 그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카민과 에세렌은 연신 자기네들끼리 좋아서 낄낄대고 있었다. 나와 라이메데스는 되도록 그런 녀석들과 떨어져 걸으려 애쓰며 걸음을 천천히 했다. 한참을 걷다말고, 나는 머리를 긁었다. 아무래도 얘기해야겠지? "이봐." 라이메데스는 대답 없이, 자신을 부른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녀석을 향해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 만났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라이메데스가 가볍게 반문해온다. "뭘?" "카리스. 그러니까…. 저번 레이디안의 동굴에서 모든 돌덩이를 막아냈던 그 마족 말이다." 순간, 라이메데스의 얼굴색이 약간 변했다. "……그 자를 만났다고?" 조금 창백해진 것도 같았고, 어찌 보면 뭔가 불안해하는 것도 같았다. 갑자기 변한 그 표정에 내가 왜 그러냐, 라고 말하려는 찰나 라이메데스가 입술을 질끈 무는 것이 보였다. 녀석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큭, 하 는 소리를 냈다. 녀석은 한참 뭔가를 고민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에세렌과 카민이 고래고래 노래를 소리쳐 부르며 저 멀리 멀어질 때도, 라이메데스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아무말도 않고 서 있기만 했다. "왜 그래?" "칼레들린." "응?" 잔뜩 찌푸린 인상으로 내 이름을 부른 녀석은, 뭔가 굉장히 곤란한 목소리 로 더듬더듬 말했다. "……나, 잠깐 어디 좀 갔다올게." "어딜?" 갑자기 어딜 가겠단 거지? 그 밑도 끝도 없는 말에 황당해져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라이메데스가 후, 하고 공기중에 가볍게 한숨을 터뜨렸다. "좀 늦을지도 모르겠군. 아까 그 여관에 들어가 있어." "대체 어딜 간다는 거냐?" 라이메데스는 피식 웃기만 했다. 녀석은 에세렌과 카민 쪽을 힐끔 보더니 저 멀리로 뛰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말을 던져놓고 뛰는 녀석을 황당함의 시선으로 보는데, 갑자기 자리에서 뚝 하고 멈춰서더니 내 쪽으로 다시 달 려온다. 뭐냐? "칼레들린." 라이메데스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름을 불렀다. 뭐냐? 라고 묻자, 녀석이 입술을 살짝 물며 말했다. "그 검, 잠깐만 나한테 줄 수 있을까." 이 검? 라이메데스가 똑바로 가르킨 것은, 내 검― 켐 알슈타드였다. "왜? 이걸로 뭐하게? 사탕으로 바꿔먹기라도 할 거냐?" 라이메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내 눈만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순간적으로 움찔할 정도였다. 나는 천천히 오른손에 들 고 있던 내 켐 알슈타드를 건네주었다. 라이메데스는 후, 하고 낮은 한숨을 쉰 다음 그 검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럼." 뭐가 그럼이야! 나는 갑자기 다시 저 멀리로 뛰기 시작한 라이메데스의 뒷모습이 완전히 당황해 버렸다. 어, 어이? 라이메데스? 지금 어디 가는건데? 한참동안 저 먼 곳을 향해 뛰던 라이메데스의 뒷모습은 조금의 시간이 지 난 후에 거짓말처럼 내 시야에서 슥 하고 사라졌다. 아무래도 조금 뛰다가 공간 워프를 한 모양이다. 그런데 대체 저녀석 왜 저러는 거야? 이 곳에서 갈 곳이 있기는 어디가 있어? 그리고 내 검을 갑자기 가져가는 건 또 무슨 이유인데? "음? 이데씨가 어디갔죠?" "엥? 어디 갔어?" 고래고래 노래를 소리쳐 부르고 있던 이 한심한 녀석들에게서 질문이 들려 온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 Back : 2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3 (written by 카르민) Next : 24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1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2836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10th March 2002 10:41:53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09-03-2002 17:59 Line : 421 Read : 500 [26]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3 -------------------------------------------------------------------------------- -------------------------------------------------------------------------------- Ip address : 61.76.127.154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제 29장: 예고 없는 변화 "뭐야? 그래서, 그 윗옷하고 검집을 맡겨 놓고 왔다고?" 길에는 아직도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은 바글바글 몰려다니며 즐겁다는 듯 이 떠들어댔고, 그 사이에서 에세렌과 카민은 특히나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 다. "그런 술값을 뒤집어 쓰다니! 안 돼요!" 에세렌이 머리를 잡으며 고통스럽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카민 역시 입 술을 세게 물며 고함을 친다. "맞아, 칼! 뒤집어 쓰다니 말도 안 되지!" 그래? 어디 그 여관의 그 무서운 계집애 얼굴을 보면서도 그런 말 할 수 있는지 궁금하군. 저 쪽에, 두 세 무리의 사람들이 저벅저벅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한 쪽은 다정스럽게 보이는 네 다섯 명의 가족이었고 다른 한 쪽은 일곱 명 정도의 남자들이었다. 키가 제각각인 그들은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었는데, 이 축 제 가운데에서도 조금 살벌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특히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곱 명의 남자들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검은 색의 로브. 새까만 그 로브를 입은 사람은 키가 작은지, 매우 아담한 체구 를 자랑하고 있었다. "음?" 이상했다. 우리 쪽으로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는 녀석들의 얼굴이 너무 인 상적이었다. 아니, 인상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한 얼굴이었 다. 어디서 봤지? 잘 알 수가 없어서 머리를 긁적였다. 아아, 맞다. 카민 녀석에게 물어보면 되겠군. 인간계에 온 이후로 카민놈하곤 늘 같이 있었으니 물어보면 알겠 지. 물론 내가 모르는 걸 저 놈이 알까 의심이 되기는 하지만. "이봐, 카……." 막 카민의 이름을 부르려고 한 순간, 나는 에?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나는 벌써 이만큼 와서 서 있는데, 카민은 어느 지점에선가 딱 하고 굳은 채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완전히 초점을 잃은 눈으로… 아니, 너무 초점 이 뚜렷해서 오히려 초점이 없어 보이는 눈으로, 카민은 또렷이 앞쪽을 향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앞쪽을 보았다. 다정스러워 보이는 가 족들과 아까의 그 일곱명이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카민 쪽으로 다가갔다. 빳빳하게 굳은 인상의 카민 이 보였다. "카민님, 왜 그래요? 소화가 안 되요?" 에세렌은 아무 말 없는 카민의 등을 팡팡 쳐주며 그렇게 말했다. 저렇게 세게 치면 안 아픈 사람도 아프겠다. 나는 힐끗 카민을 보았다. 카민이 천천히 입술을 여는 것이 보였다. "칼, 내가 재미있는 거 가르쳐줄까?"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무슨?" 카민은 천천히 오른손을 들더니 자신의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녀석의 붉은 색 머리카락은 하얀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서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어 느 순간에 움직임을 딱 하고 멈춘 후 제자리로 내려왔다. 카민의 입술이 가 볍게 올려지는 것을 보았다. 킥, 하고 녀석이 가볍게 웃는다. "저기 있는 사람들, 나하고 잘 아는 사람들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카민의 오른손이 들어올려졌다. 그의 손은, 정확하게, 일 곱명의 남자들을 향해 있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카민과 아는 사람? 카민과…… 카민과? "누구죠?" 인상이 확 하고 굳어지는 것을 느낀다. 침을 꿀꺽 삼키며 녀셕의 눈을 보 았더니, 녀석 역시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에세렌도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진지하게 입술을 물고 있었다. 녀석의 하늘 색 눈동자가 매섭게 올려져 있는 것이 보였 다. 단란한 가족 넷이 막 우리의 옆을 지나쳤다. 바로 앞에, 일곱명의 남자들 이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축제랍시고 바글바글 떠드는 가운데에서, 우리들은 여러 사람들을 놓고 그렇게 서 있었다. "아빠! 이거 너무 맛있어!" "오랜만인가?" 무엇인가 달콤한 듯, 입안에 가득 넣고 오물거리며 말하는 여자아이가 낸 소리와, 내 바로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내뱉은 차갑게 목소리가 섞여서 들려 왔다. 나는 찬찬히 그렇게 말한 녀석의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분명히 안 면이 있는 얼굴인데,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른 쪽으로 시 선을 옮겼다. 검은 로브를 쓴 인간은 얼굴이 보이지 않았고, 나머지 인간들 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맨 마지막에 서 있는 녀석을 제외하고는. "초록팅이?"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자 녀석, 일곱 명의 녀석들 중 제 일 끝 쪽에 서 있던 녀석이 눈꼬리를 가볍게 들어 나를 본다. 분명, 그 녀 석이었다. 초록팅이 녀석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역시나 카민의 조직에서 나온 녀석들인가보군. "잘 있었나, 1026호."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을 한 것은 일곱명의 남자들 중 가장 큰 청 발의 남자였다. 나보다 조금, 아주 조금 못한 얼굴이 보였다. 날카로운 얼 굴선을 가진 그는, 카민 쪽을 바라보며 차가운 포커페이스를 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 서 있는 카민 녀석이 몸을 부르르 뜨는 것이 여기까지 느껴져 왔 다. 카민은 조그맣게 입술을 벌려, 확연한 떨림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야……. 다빈." 살짝 웃으며 카민이 말한 그 순간, 나는 내 앞에 있는 남자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맞아! 그 금발 마녀 카리나와 함께 있었던 놈! 체이드 숲에서, 운 좋게도 나와 싸우는 것을 면했던 바로 그 녀석이었다. 냉정하도록 차가운 얼굴로 카민을 향해 다음 번엔 꼭 죽인다, 라고 중얼거렸던 그 재수 없는 녀석 말 이다! "누구에요? 아는 사이에요?" 에세렌이 내게 조그맣게 속삭여왔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천 천히 시선을 내려 바라보니, 카민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 있는 것이 보였 다. 하지만 애써, 입으로는 웃고 있다. 눈으로는 가득한 공포를 말하는 주 제에, 카민의 입은 웃고 있었다. 녀석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한 번 바람에 휘날렸다. 다빈이라는 그 녀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런 곳에서 만다나니, 반갑군." 빌어먹을 자식! 뭐가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반갑군이야? 나랑 카민은 네녀 석 같은 놈 전혀 반갑지 않아! 저리 꺼져! 에비! "그…… 런가?" 카민은 나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사신을 바로 앞에 둔 초라한 인간처 럼, 카민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엄마엄마! 오늘 한 불꽃놀이, 진짜 예뻤어!" "그래? 우리 니아가 마음에 들었다니 엄마도 기쁘다!" 바로 앞에, 엄마의 손을 꼭 붙잡은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지나간다. 갈색 머리카락을 찰랑찰랑 휘날리며 가는 꼬마아이의 머리카락 너머, 차갑게 빛 나는 일곱쌍이 눈동자가 보였다. "나는 그다지, 반갑지 않아." 카민이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청발의 미남, 다빈이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에세렌은 창백하게 질린 인상으로 내 옆구리를 푹 하고 찔렀다. "칼레들린님, 이거 혹시 살깁니까?" 빌어먹을, 그럼 이게 살기지 뭐겠어? 온 몸을 찌르르 하게 감싸오는 살기에 소름이 돋을 지경인데도 불구, 신기 하다는 듯이 '이거 혹시 살깁니까?' 라고 묻는 에세렌 녀석의 말투에 그만 화르륵 화가 올라버려서 나는 하마터면 녀석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을 뻔 했다. 만약 더더욱 강해진 살기에 몸이 반응해버리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시선이 내 얼굴에 닿았다. 바라보니 초록팅이 녀석의 얼굴이 있었다. 내게 두 번씩이나 진 주제에, 훗 하고 웃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초록팅이 녀 석을 보고 있자니 괜히 울컥 하고 화가 났다. "자기∼! 그거 들었어? 새벽에 한 번 더 불꽃 축제를 한 대!" "그래?" "꼭 보자, 알았지?" "알았어, 알았…… 응?" 팔짱을 꼭 낀 닭살 커플이 우리 앞을 지나가다 말고 움찔하며 우리들을 보 았다. 그들이라고 해서 살기라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 할 리는 없었다. 쭈 뼛쭈뼛하며 우리들 사이를 바라보던 그들은 도망치듯 후다닥 저 멀리로 뛰 어가 버렸다. 다시, 싸늘한 침묵이 찾아왔다. 초록팅이 녀석이 입을 열었다 . "그 동안 잘도 피해 다녔어, 1026호." 하하, 하고 웃으며 초록팅이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움찔 하고 카민이 뒤 로 몸을 비켜냈고, 그 순간 나는 녀석의 번뜩이는 눈동자를 보았다. 초록팅 이의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놀랐어. 처음에는 우리가 손댈 수 없는 신전으로 들어가질 않나, 그 다음에는 과감하게 이카루를 버리고 세이피안으로의 도피를 하질 않나…… . 국경에서 스치듯 봤지만 잡을 수도 없었지." 뭐? 국경에서 스치듯 봤다니? 언제? 나는 작게 눈을 깜빡이다가 어느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어 아, 하는 소리 를 냈다. 그러고보니 그 때……. 국경을 넘기 직전에, 기분 나쁜 시선을 하 나 마주했었다. 나를 보며 방긋 웃는 얼굴이 있었지. 마차 밖으로 시선을 냈을 때 보였던 그 시선. 그것이…… 이 녀석이었단 말인가? "배를 탔다길래 이제 다 잡은 고기다 생각했더니 이번에는 왕궁에 들어가 질 않나. 엄청난 수의 기사들과 같이 있질 않나. 나중에는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마족의 동굴로 들어가기까지 하더군." 차가운 목소리로 딱딱하게 뱉어낸 함께 다빈이 성큼성큼 내 쪽으로… 아니 , 카민 쪽으로 다가왔다. 아직도 그들의 뒤에선 소란스럽게 떠들어대고 있 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다빈은 조용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포기할거라고 생각하면 안되지. 배신자 1026호." 카민이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카민의 꼭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무슨 말입니까! 당신들은 누구죠?" 에세렌이 치는 고함소리에 초록팅이가 살짝 우리를 보았다. "야아! 이 거 정말 맛있다!" "헤헤, 미리스. 너 오늘 정말 예쁘다!" 시답잖은 소리를 해가며 우리들의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인간들 속 에서, 초록팅이가 웃으며 말했다. "아아, 신관이신가?" 그 말과 함께 이번에는 에세렌 쪽을 바라본다. 에세렌은 갑자기 버럭 고함 을 쳤다. "정체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대답하지 않으면 여신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에세렌의 말에도 초록팅이는 반응하지 않았다. 모두가 피식피식 웃는 소리 가 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철컹, 하는 소리가 요란하도록 섬뜩하게 울렸 다. 카민의 바로 앞에 서 있던 다빈이 여태까지 조용히 허리춤에 걸려 있던 검에 손가락을 갖다댄 것이다. 나는 바짝 긴장해서 검을 꺼내려다 말고 멈 칫했다. 자, 자, 잠깐! 막 허리춤에 손을 갖고 간 순간, 나는 완전히 경악해버리고 말았다. 맞아! 아까 전에, 하필이면 바로 전에 라이메데스가 그 검을 빌려 갔어! 이 웃기지도 않는 상황에 더 놀랄 틈도 없었다. 다빈의 검이 반쯤 뽑힐 기 세를 보이자, 저 멀리에 서 있던 다른 놈들도 하나하나 검을 뽑기 시작했다 . 빌어먹을! 여긴 에세렌이 있어서 마기 같은 건 못쓴단 말이다. 검도 없는 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 젠장할! "여기선 좀 곤란하지 않을까." 문득,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 쪽으로 쏠렸다. 초록팅이 녀 석이었다. "무슨 소릴. 이 곳이라도 상관없다!" 누군가가 소리치기가 무섭게, 카민이 말을 받았다. "여긴 축제가 벌어지고 있어.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다빈이 검을 거의 다 뽑은 자세에서 그렇게 물었다. 카민이 입술을 꾹 물 었다. "빌어먹을……. 당신이랑 싸우게 된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싸우더라도… …. 조금만……. 마을에서 조금만 떨어진 곳에서 싸우자." "네가 남의 걱정해줄 군번인가? 그 놈의 여유는 여전하군." 다빈이 입꼬리를 비틀며 한 말에, 카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는 주위를 살폈다. 정말로 사람이 많다. 여기서 칼부림이 일어나면 몇 명이 실수로 죽어나갈지 모르는 일인 것이다. 문득, 나와 카민의 눈이 마주쳤다. 내 눈 을 마주한 녀석의 표정이 죽도 못 먹은 것처럼 비실비실해 보여서(아까 그 렇게 먹은 건 다 어디로 보낸 거냐?) 나는 힘차세 한 번 웃어주었다. 걱정 마라. 내가 함께 싸워줄테니까. "칼." 씩 하고 웃는 그 순간, 속삭이듯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갔다올게." "뭐……?" 상상도 못했던 그 말에 나는 버럭 고함을 쳤다. 그 순간 철컹, 하는 소리 와 함께 검집으로 검이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이토미즈의 녀석들 이 모두 검을 검집 안에 놓은 채로 카민 쪽을 보고 있었다. 카민은 피식 웃 으며 내게 말했다. "아아,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빨리 올 테니까."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 거냐?" 카민이 내게로 고개를 숙이며 피식 웃었다. "내 문제다. 네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아." 뭐라는 거야, 이 자식? 미쳤어? 저 녀석들을 상대로? 일곱명이다, 자그마 치! 게다가 저 다빈이란 놈이 뿜고 있는 살기가 보통 인간으로 낼 수 있는 살기라고 생각해? 옛날에 너도 저 인간은 엄청 강하다고 나한테 그랬었잖아 ! "넌 팔도 다쳤고……." 카민이 웃으며 말했다. "……이 곳에서 싸우고 싶지 않다면 작작 하시지." 차가운 목소리에, 나도 카민도 멈칫했다. 돌아보니, 역시 다빈이었다. 카 민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내 쪽을 보았다. 그러더니 하늘을 한차례 본다. 푸우, 하고 다시 한 번 한숨을 토해낸 녀석의 머리 위로 하얀 입김 이 서렸다 사라졌다. 카민은 주먹을 꼭 쥐더니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에세렌씨." "예? 예?" 날 부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에세렌을 부른다. 나와 마찬가지로 당 황했는지, 에세렌은 깜짝 놀란 듯 호명에 답했다. 그 순간, 카민이 짧게 입 술을 열었다. "이 녀석, 잘 부탁해요." "네?" "너 뭐라는…… 크악!" 그것은 정말이지 순식간의 일이었다. 스팟, 하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찰나였다. 녀석의 허리춤에서 어떻게 검이 뽑혔고, 그것이 어떻게 움직였는지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바람 같은 그 움직임은, 완전히 방심해 있던 내 쪽으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왔다. 내 가 본 것은 갑자기 허리춤에 가서 닿던 녀석의 손이 내 다리 쪽에서 멈추었 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직후, 무엇인가 붉은 것이 보였다. "윽……!" 저릿하게 다리가 아파 왔다. 통증이 심해서 어쩔 수 없이 상체를 숙이면서 도, 나는 얼굴만을 들어 카민 녀석을 보았다. 비, 빌어먹을! 남의 다리를 예고도 없이 칼로 푹 찔러놓은 주제에, 그 자식은 웃고 있었다. 저 젠장할 놈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단검이 반짝, 하고 빛을 발한다. 검 끝에 맺혀 있 는 것은 붉은 빛의 석류알 몇 개. "여기 있어." "너, 너어……!" "……에세렌씨." 에세렌을 부른 카민이 웃는 모습이 보인다. "잘 부탁, 합니다." "뭐라는 거야! 에세렌! 잡아! 잡으란 말얏―!!" 놀라서 소리를 쳤다. 일어나려고 한 순간 휘청 거린 몸만 아니었다면 내가 잡았다. 그러나 내 몸은 흉하게 휘어졌을 뿐이다.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에세렌은 내가 소리를 친 뒤에야 정신을 차린 듯 몸을 움찔하며 카민 쪽으 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에세렌이 막 손을 뻗는 순간, 카민이 날렵하게 그 손을 피했다. "카민, 너! 지금 가면 네 놈은……!" 저 멀리서, 일곱명의 남자들이 뒤쪽으로부터 카민을 천천히 포위하고 움직 이는 것이 보였다. 카민은 재빠른 동작으로 훌쩍 앞쪽으로 뛰어나갔다. 그 속도는 정말로 빨랐다. 큭, 하고 숨을 몰아쉬는 순간 카민이 나직하게 말했 다. "나, 그 때 나 자신과 약속했다." 썩을 놈의 자식! 정말 죽고 싶은 거냐? 정말 혼자 갈 거냐고! "네가 나 다신 그 흑마법사에게 죽을 뻔 했던 날." 카민이 싱긋 웃었다. "다시는 널 내 일에 끌어들이지 않겠다고 말이다." 무슨 말이냐, 그게? 그게 무슨 친구란 거냐? 어떤 일에 한해서는 내 접근 을 막아 놓았다, 이거냐? 위험에 빠질 일이 있으면 함께 가지 않고, 안전한 곳에 놔두고 가는 것만이 우정이냐? 그런 것이 우정이야? 너와 내가 친구 라고? 아니야! 지금 이렇게 가는 건 절대……! 녀석은. 시리도록 환하게 웃어 보였다. "다녀올게." ◇ ◇ ◇ 정말 재미없다.... 내가 읽어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왜 이렇게 재미가 없지????????????? ........아직 뒤에 거의 6연참 분량이 남았는데.....(훌쩍) 재미없어 죽겠군요.............. .....수정을 좀 많이 해야겠다...(털썩) -------------------------------------------------------------------------------- Next : 25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2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2836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10th March 2002 10:41:55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0-03-2002 20:42 Line : 256 Read : 1328 [27]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4 -------------------------------------------------------------------------------- -------------------------------------------------------------------------------- Ip address : 211.220.175.10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카르민입니다. 오늘의 연참까지가 5권 분량입니다. 수정 좀 하고...-_- 음...... 그런데........ 마감이 끝나고나면 약간의 잠수~ 를 해야겠군요;; 좀 극악한 곳에서 끊었는데..=_=;; 어떻게 생각하실지... 쿨럭;;;;; 많이 극악할까?;; 아니야.. 괜찮을거야.. 어쨌든.. 오늘 연참 시작하죠; ========================================================= 미친놈. 너 정말로 바보냐?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놈 아냐? 저능아냐? 너 같으면 그 상황에서 날 두고 갈 수 있어? 미친 녀석! 빌어먹을, 이해할 수가 없다. 뭐가 다녀올게, 라는 건데? 그 많은 녀석들을 상대로 네가 어디 검이나 한번 제대로 뽑아 볼 것 같아? 그 상황에서 이 무적 꽃미남 칼레들 린 엘버지운 피엘님의 도움 없이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냐고! 그 녀석 들을 따라가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 지키지도 못할 약속 따위를 하는 이유는 또 뭐야? "큭……." 인정사정 없이 베어 버린 모양이다. 정말로 내가 따라오지 못하게 할 셈이 었는지, 있는 힘껏도 베었다. 그것도 오른쪽 다리가 심하게 베였다. 살점이 너덜너덜했지만 뼈까지 건드린 건 아니다. 제놈이 아무리 힘이 좋다지만 그 상황에서 설마 그렇게까지 힘을 주진 못했겠지. 하지만, 아프긴 더럽게 아프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찢어질 뻔했던 팔보다도 그곳이 더 아팠다. 저릿한 감각과 함께 온몸의 피가 그곳으로 몰리는 듯한 느낌이랄까. 피마 저 줄줄 흐르고 있다. "칼레들린님! 칼레들린님!" 뒤에서는 점점 작아지는 에세렌의 소리가 들린다. 한참 만에 상처를 수습하 고 겨우 설 수 있었을 때, 그러니까― 에세렌이 붕대를 감아 상처를 고정시 켜 주었을 때, 나는 곧바로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저 바보 멍청이에 뇌 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의심스러운 자식을 내가 굳이 살려야 하는 건가, 하는 회의도 들었지만 그래도 내 몸은 뛰기를 원했다. 신관인 에세렌은 나를 따라오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당연하지. 있는 힘껏 뛰고 있는데, 빈약한 체력의 신관 따위가 따라올 수 있을 리가 있어? 쳇, 뭐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내게는 지금 검조차도 없고, 한쪽 팔은 너덜너덜한데다가 그 미친놈이 다리까지 베어 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 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으으, 그래도 계속 생각나는 얼굴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그 쳐죽일 놈의 라이메데스 자식! 이 꼴통 놈! 밉다 밉다 해도 어쩌면 그렇게 미운 짓만 골 라 할 수 있지? 어떻게 하면 딱 그 순간에 검을 달라고 할 수가 있어? 왜 그 순간에 딱하고 사라지냔 말이야! 달리는 내 뺨에 부딪혀 오는 바람은 매우 차가웠다. 숨쉬는 것조차 벅찰 정 도였다. 귓가에서 앵앵, 하고 시끄럽게 울어 대는 바람의 비명은 너무 커서 , 지금 당장이라도 두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였다. 먼 산. 아스라이 시야에 들어오는 먼 산이 있다. 차갑고 서늘하게 입가에 닿는, 저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선들선들 움직이는 눈앞의 그 산이 푸르게만 보인다. 한참 동안 그 산을 바라보며 뛰고 있으려니 갑자기 톡, 하고 뺨에 무엇인가 가 닿았다. 뭐지? 라고 낮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올려다보았다. 아아, 가볍게 뺨에 떨어 진 그것은 빗물이었다. 차갑게 볼에 닿은 그것은 비였다. 한 방울이지만 소 중하게 내 뺨을 감싸고 떨어진 그것은, 분명 빗물이었다. 톡, 톡, 하고 내 까맣고 예쁜 머리카락 위를 미끄럼 타는 작은 빗물들을 맞으며 한참 동안을 뛰었다. 시각, 청각, 후각 할 것 없이 모조리 개방한 상태에서 오로지 카민 녀석의 흔적만을 찾아 뛰었다. 미세하리만치 조그마한 흔적만을 남기며 뛰어갔다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녀석들까지 합하면 여러 놈이 아니던가. 흔적이 야 충분히 남아 있었다. 설마 내가 그것을 못찾겠냐? 챙! 챙! "핫!" 카민. 저 멀리로 아릿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 푸르고 푸른 것, 뺨에 떨어지 고, 무릎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저 빗물을 따라 흐릿하게 어리는 붉은 것이 보인다. 살짝 흩어져 있는 그것은 새빨간 빛이다. 아주 익숙한 빛이다. "칼레들린……."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붉은빛은 카민의 머리카락 색. "왜…… 왜 왔어! 어떻게 왔어, 그 다리를 하고! 죽고 싶어? 돌아가!!" 경악으로 물든 눈을 하고 나를 본다. 난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카민의 온몸은 이미 거의 누더기 수준이었다. 휙 하고 시선을 돌리다가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차가운 눈동자의 다빈, 그였다. 그리고 그런 다빈의 옆에는 왠지 눈길이 가는 검은 로브에 키가 작은 사람이 서 있었다. 카민은 6대 1로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엄청나게 찢어진 그 녀석의 옷 은 심하게 해어져 있었다. 나는 얼른 그 싸움판으로 뛰어들었다. 한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카민 놈의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온다. "미쳤어! 미쳤어, 이 자식아! 이 정도면 나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잖아! 왜 방해를 하고 난리야!" "차라리 죽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라, 빌어먹을 자식아." 그 말과 함께, 내 손이 녀석들의 틈 속에 들어갔다. 손에 모인 검은 기운이 폭발하기도 전에 퍽, 하는 소리를 동반한 검이 내 쪽으로 날아들었다. 가 차 없이 날아든 그 검을 피해 고개를 살짝 뒤로 꺾은 다음, 오른손을 움직 였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에 살짝 떠오른 검은 어둠은 나를 공격하고 있 던 한 녀석의 가슴팍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거친 타격음이 짜릿하게 울렸 다……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빌어먹을 놈의 현실은 그것과는 완전히, 전혀, 180도 달랐다. 나를 향해 달 려온 녀석이 내가 채 마기를 날리기도 전에 인정사정 없이 아까 베인 그 자 리를 차 버렸기 때문이다. 그 어떤 공격도 할 수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는 데, 인정사정 없이 그대로 위에서 찍어 누를 듯한 자세로 녀석이 검을 쳐드 는 것이 보였다.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 이 미친 자식아! 이 꽃미남을 이런 곳에서 죽일 셈이냐? 몸을 옆으로 구르자 끼긱, 하는 작은 마찰음과 함께 땅을 긁은 검이 내 귀 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간발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검을 피해 낸 것에 감사하며 난 얼른 일어섰다. 그리고, 녀석의 복부를 주먹으로 쳤다. 퍼억― 하는 소리가 났고, 나는 씨익 웃으며 녀석을 밀쳐 냈다. 녀석이 비 틀비틀 물러서는 틈을 타서, 나는 한 손에 다시 어둠을 모았다. 이번에는 녀석이 반격할 틈이 없었다. 녀석이 채 자세를 잡기도 전에, 내 손에 있던 마력탄이 작렬했다. 녀석의 가슴팍을 완전히 뚫고 들어가는 마력탄! 숨을 고르고 있는데, 문득 카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 꽤 잘 싸우네." 자, 장난하냐? "미친놈." "킥. 괜히 다리 찔렀네. 그냥 데리고 올걸." "그러니까 네놈이 미친놈이라고!" 버럭 소리를 치며, 방금 죽은 녀석이 떨어뜨린 검을 집어 들고 다음 녀석들 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퍼벅, 하는 낮은 소리와 함께 카민의 뒤통수를 노리고 있던 뒷녀석의 복부를 정확히 꿰뚫었다. 물씬 풍겨 온 피비린내가 짙다. 아악, 젠장! 다리가 너무 아파서 다른 것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 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빨리 끝내고 얼른 돌아가 퍼 잤으면 소원이 없 겠어! 퍼벅! 상대의 몸 안에 박혔던 검을 뽑아내는 동안, 낮은 타격음과 함께 카민이 뒤 로 죽 밀려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애써 그 모습을 외면했다. 싸우는 데 집 중해야 한다, 라고 생각한 순간 굉장히 익숙한 얼굴 하나가 내 앞을 가로막 았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오랜만이군." "초록팅이. 두 번이나 져 놓고 또 도전이냐?" 나는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초록팅이 녀석은 자존심이 상한 듯 흥, 하는 소리를 냈다. 검을 고쳐 쥔 녀석이 히죽, 하고 웃는 것이 보였 다. "이번이 세 번째인가? 너와 내가 검을 맞대는 게." "……지겨워 죽겠군." 투덜거리듯 뱉기가 무섭게, 초록팅이가 검을 들어 나를 찔러 들어온다. . 채쟁!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이 한바탕 스파크를 일으켰다. 나는 녀석을 노려보 았다. 녀석은 입을 꾹 다문 채로 미간을 좁힌 채 나를 찔러 들어오고 있었 다. 나는 재빠르게 검을 틀어 녀석을 비껴 찔렀다. 초록팅이 녀석이 씨익 웃는다. "대단해, 너도, 1026호도. 이토미즈의 손에서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도망 다 녔던 사람은 여태껏 없었다." "흥, 내가 좀 잘났어야지!" 뭐, 말은 이렇게 했어도 우리가 마음먹고 도망다닌 건 결코 아니었다. 운이 좋았을 뿐. 그러고 보니 우리, 정말 운이 좋았던 거잖아? 신전에 들어가 있으면 아무리 이토미즈라 해도 접근할 수 없다. 아크로아의 성에 머물러 있긴 했지만 그 건 잠시였고, 그 후론 또 난데없이 세이피안으로 떠나 버렸지. 배를 탔을 때 만난 건 공주였고, 배에서 내렸을 때 만난 건 사이비 왕자 놈이었다. 파 하하! 그게 이 녀석들의 추적을 피하는 루트라고는 조금도 생각을 못했었다 고! 초록팅이가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우리들이 포기할 거라는 생각은 버려야지! 아마 평생이라도 우리는 1026호를 따라갔을 거다!" 쿨럭! '우리는 평생이라도 레이디를 따라갔을 겁니다!'로 들리는 건 대체 무슨 이유일까? 채쟁! 검과 검이 긁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엔 운이 좋았어." 끼긱, 하는 소리와 함께 내 검과 녀석의 검이 한참을 마주한 채로 떨렸다. 녀석이 씨익 웃는다. "여태껏 종적이 묘연하던 1026호가 마음껏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은 정말로 인상적이었지." 빌어먹을 카민 놈. 네놈이 그렇게까지 음식을 퍼담아 먹지만 않았더라도 이 런 일은 없었잖아! 역시 어딜 가도 먹을 걸 밝히는 놈은 문제라고! 녀석이 씨익 웃는다. "어딜 보는 거지?" 쉬이익! 뒤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칼 소리에 얼른 몸을 숙였다. 하지만 그 순간, 다 리에 무리가 갔는지 그쪽에서 푹―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초록팅 이가 웃은 건 그 순간. "호오, 역시 다리가 약점인가?" 녀석이 다시 검을 휘둘러 온다. 나는 특히 더 많이 베인 왼쪽 다리는 고정 시킨 채로, 오른쪽 다리로 가볍게 돌아 녀석의 목을 찔러 들어갔다. 그러나 무리였다. 녀석의 검은 내 검을 그대로 튕겨 냈고, 내 뒤에서 공격을 하고 있던 녀석의 검만이 내게로 가까이 접근했을 뿐이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 며 그 검을 잡았다. 두 개의 검을 피하는 것은 더더욱이나 장난이 아니었다 . 채앵! 저쪽에서도 검이 마찰하는 소리가 난다. 카민 녀석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 군. 뭐, 제대로 하겠지. 흥, 제대로 하니까 남의 다리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혼자서 잘났다고 갔던 거겠지. 문득, 초록팅이가 말했다. "혹시, 아직도 못 들었어?" 움찔하고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렸더니 능글맞게 웃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보 였다. 녀석이 속삭이듯 말했다. "1026호의 과거." -------------------------------------------------------------------------------- Back : 2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5 (written by 카르민) Next : 26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3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42014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17th March 2002 08:59:53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0-03-2002 20:43 Line : 226 Read : 1210 [28]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5 -------------------------------------------------------------------------------- -------------------------------------------------------------------------------- Ip address : 211.220.175.10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흥, 그런 것에 동요할 줄 알아? 얼른 검을 횡으로 그었다. 순간, 녀석의 입꼬리가 위로 치켜 올려졌다. "바로 동요하는군, 너." 젠장맞을! 심장을 겨냥해서 찔러 들어오는 검을 피했다. 치링,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머리가 다 멍멍했다. 녀석의 검을 피하는 순간, 이번에는 뒤에서 검이 움직였다. 나는 얼른 한 손에 마기를 뭉쳐 그곳으로 보냈다. 쿠악, 하 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초록팅이 녀석에게 검을 휘둘렀다. 초록팅이 녀석의 입꼬리가 가볍게 올려지는 것이 보였다. "이봐." 챙! 챙! 검을 휘두르는데, 느슨해진 팔 때문인지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무식하게도 힘센 에세렌 녀석이 꽁꽁 묶어 놔서 그런지 팔에 통증은 없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라면 힘들다. 초록팅이가 입을 연다. "……나도 한때는, 1026호를 꽤나 좋아했었어." 허억! 순간 놀라서 검 떨어뜨릴 뻔했다. 챙! 하지만 안정감을 찾고, 나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검이 마주치는 소리가 다 시 났다. 나는 녀석의 쓸데없는 소리는 듣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초록팅이 녀석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내게로 검을 흔들어 오고 있었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나는 오른쪽 다리를 축으로 서서 녀석의 공격을 그대로 방어했 다. 뒤쪽에서 공격이 다시 들어와서 간간이 몸을 피하는 건 힘들었지만, 초 록팅이 녀석의 앞에서 물러서지는 않았다. "사신의 검날. 이토미즈를 배신한 지금도, 조직에서는 유명한 이름이지." 킥, 하고 웃으며 다시 한 번 녀석이 움직였다. 차가운 검의 움직임에 소름 이 돋았다. 녀석이 입꼬리를 가볍게 치켜 올리며 다시 웃었다. 내 머리카락 이 바람에 휘날린다. 나는 초록팅이 녀석의 말에 휩쓸리지 않겠다고 생각하 면서 왼발을 뒤로 끌어냈다. 카민 녀석이 인정사정 없이 그어 놓았던 다리 에서 다시 한 번 피가 흘렀다. 빌어먹고 갈아먹고 엎어 버릴 자식! 대체 뭐로 어떻게 그었기에 그토록이나 튼튼한 내 다리가 이렇게까지 말을 안 드는 거냐. 쳇, 인정사정도 봐주지 않고 그냥 긋다니. 네 녀석이 그러고도 내 친구냐, 앙? "과거, 한 번 정한 타깃은 절대 놓치지 않았던 1026호는……." "닥쳐!" 크게 소리치곤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정신이 잘 집중되지 않아서인지 녀석이 내 공격을 쉽게 피한다. "……살인 기구로 훈련받는 이토미즈에서도 뚜렷이 두각을 나타내는 존재. 타고난 암살자라고 '그'가 칭찬할 정도였어." 키기기긱,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맞부딪혀 긁히는 소리가 났다. 원래라면 내 팔힘에 밀려나야 정상인데, 놈이 밀리질 않는다. 팔의 상처 때문일까? 아니면 내 온몸을 지탱하고 있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서일까? 초록팅이 녀석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정면 승부로는 다빈님께 못 미칠지 모르지만……." "……닥치라고 했어." 다시 검을 휘둘렀지만 이번에도 막히고 만다, 빌어먹을. "……단지 암살이라면, 1026호가 더 잘할걸?" 뒤돌아 공격하는 초록팅이에게 재빨리 한 대의 마력탄을 날린 뒤, 그것에 움찔하는 녀석을 향해 있는 힘껏 검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녀석은 훅, 하 고 고개를 돌려 검을 피할 뿐이다. 그리고 다시 행해지는 공격! 나는 옆쪽 에서 휘둘러 오는 초록팅이 녀석의 검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녀석이 입 술을 움직였다. "그림자 속에서 가차 없이 검을 휘두르는 녀석! 그것이 1026호였지!" 무슨 말 하는 거야, 이 자식이? 다시 한 번 휘둘러 오는 검이 싸늘했다. "타고난 암살꾼이라고도 했고, 한때는 대륙의 인사들이 벌벌 떨기도 했어! 괜히 '사신의 검날'이겠어? 정면 승부가 아닌 암살로 따지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녀석이지." 파각! 녀석이 밀고 들어오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내가 들고 있던 검이 동강나 버 렸다. 비, 빌어먹을! "……그 검이 조금 약한가 보지?" 동강난 검을 멀리로 치워 버리는 그 틈을 타, 초록팅이 녀석이 한 발짝씩 가까이 왔다. 나는 젠장할, 하고 낮게 중얼거린 다음 천천히 양손에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채 암흑이 양손에 맺히기도 전에, 녀석의 검이 움 직였다. 그대로 나를 찌를 것 같았던 그 검은 그러나, 내 몸을 뚫고 들어오 지는 못했다. 내 쪽으로 검을 들이댔던 놈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정지한 것이다. 녀석의 전신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어느 순간, 초록팅이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1026호." 나직하게 그렇게 한 번 읊조린 녀석의 배 부분에 무엇인가 이상한 것이 튀 어나와 있었다. 빗물이 녀석의 초록색 머리카락에 맺혔다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초록팅이가 입술을 움직였다. "……1026호……." 천천히, 초록팅이 녀석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보였다. 완전히 뚫 려 버린 놈의 복부에 꽂힌 것은 카민의 검. 삐죽, 하고 솟아오른 카민의 검 은 녀석의 복부를 그대로 꿰뚫고 들어와 있었다. 인간의 몸은 의외로 단단 하다, 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내장을 파고들어 저 복부를 그대로 다 뚫으 려면, 카민은 얼마나 손에 힘을 주었다는 말일까. 초록팅이 녀석은 웃었다. "……102…6…호… 너, 는…… 왜…… 그때……." 녀석의 입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렀다. 퍽, 하고 신속하게 카민의 검이 뽑혀져 나왔다. 피가 튀었다. 초록팅이 녀석의 몸이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 다.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카민이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하아, 하고 가볍 게 숨을 내쉬었다. "……괜찮냐?" "다리 아파 죽겠다. 네놈은 괜찮냐는 말이 나오냐?" 카민이 피식, 하고 길게 웃었다. 나는 녀석의 웃음을 잠시 바라본 후 살며 시 시선을 들었다. 저 멀리서, 이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는 두 명의 녀석이 보인다. 초록팅이 녀석이나 다른 놈들이 쓰러지든 말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던 두 명의 녀석이 온다. 자그마한 체구의 검은 로브가 보이고, 검을 꺼내 드는 다빈이란 놈이 보인다. 다가오는 그 녀석들을 본 카민의 입꼬리가 가볍게 들어 올려지는 것이 보였 다. 녀석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칼레들린." "뭐냐." 작게 투덜거리듯 말하자, 카민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을 잇는다. "나 말이야, 다섯 살 때 '그곳'에 들어갔어." 에? 하는 소리를 내며 녀석을 바라보는데, 카민이 웃으며 말을 잇는다. "……거기선, 죽을 때까지 죽이는 법만 배웠어." 잔뜩 피로 물든 자신의 검을 슥, 하고 옷자락에 닦아 내며 카민이 환한 미 소를 띤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뭘 말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녀 석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파 보였다. 과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카민은 비 수를 삼킨 듯한 얼굴을 한다. 그 모습은 녀석과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고, 무척이나 슬프고 무척이나 아프다. "아아, 정말로……." 입가가 기묘하게 뒤틀린다. "그때의 난, 인간이 되고 싶었어……." 무슨 말이지, 카민? 넌 지금도 인간이고, 그때도 인간이었잖아. 그런데 무 슨?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카민의 목소리는 아련하게 젖어 있었 다. 카민은 웃었다. "난 정말 잘 죽였어. 내가 생각해도 정말 '잘 죽이는' 녀석이었어." 녀석이 검을 바짝 들었다. 저 멀리서, 다빈이란 놈이 검을 꺼내 드는 모습 이 보였다. 카민 쪽으로 다가오는 그의 움직임이 차갑다. 내 쪽으로도 검은 로브를 걸친 조그마한 녀석이 온다. 거리가 매우 가까워졌을 때, 카민의 말이 이어졌다. "……1년 사이 몇백 명을 죽인 적도 있어…….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지 ……." 카민은 창백한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녀석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면 서도, 다가오는 녀석들에게 대비하는 것도 있지 않았다. 초록팅이의 칼은 이미 내 손에 들려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지독한 일을 했어도…… '그 일'만은 도저히 할 수 없었어……." 아아, 하고 중얼거리며 카민은 다시 검을 세웠다. 내 바로 앞에도 검은 로 브가 다가왔다. 카민의 앞에 다빈이 서는 것이 보였다. 다빈이 카민을 향해 검을 들었다. 카민이 입술을 열었다. "다빈, 당신을 상대로 싸우게 될 줄은 몰랐어. 처음 내게 검을 가르쳐 준 것은 당신이었는데." 그 말과 함께, 카민이 몸이 튀어 올랐다. 나는 그곳에서 시선을 돌리고, 검 은 로브를 노려보았다. "핫!" 짧은 기합과 함께 녀석의 검이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오른쪽 어깨를 틀어 그 검을 피했다. 검신에, 카민과 다빈이 얽히는 모습이 반사된다. 나 는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다른 것은 상관없었다. 어찌 됐든, 중요한 건 하나니까. 일단 이기고 보자. 다 이기고 나면 이번에야말로 카민은 나에게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자기의 과거 이야기와, 자신의 치부와 자신의 모든 것을. 그 렇게 되면 우리들은 서로에게 비밀이 없는 떳떳한 친구가 될 수 있는 거다. 너와 나, 모두가 더 이상 한 꺼풀의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서로가 원치 않았던 가면을 벗길 시간이 온다. -------------------------------------------------------------------------------- Back : 2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6 (written by 카르민) Next : 27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4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42015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17th March 2002 09:00:02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0-03-2002 20:44 Line : 95 Read : 1193 [29]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6 -------------------------------------------------------------------------------- -------------------------------------------------------------------------------- Ip address : 211.220.175.10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챙! 검이 맞부딪히는 음이 스산하도록 짜릿하다. 이런 느낌이 좋다고 하면 나를 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 도로 자극적이다. 나는 검을 흔들며 그렇게 생각했다. 살짝 웃음이 머금어 진다. 녀석의 검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밀고, 또 당겼다. 다리에서 흐르는 피가 상처에 닿아 따끔따끔했지만 이제 그런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굳어 가는 피가 느껴졌지만 그것 에도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검은 검끼리 부딪히고, 마음은 마음끼리 부딪힌다. 베고, 찌르고, 밀고, 당기는 데 온 힘을 집중하고 있지만 내 정신은 하나도 그곳에 있지 않다. 집중하고 있는데, 또 다른 것은 그것을 떠나 조금의 관 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살짝 다문 입술이 아프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내 검이 그대로 검은 로브 녀석의 팔을 꿰뚫었다. 녀 석은 컥, 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검은 로브가 흔들렸다. 나는 씨익 웃으며 다시 검을 들었다. 손에 암흑을 모았다. 차갑게 빛나는 암흑이 양손에 모였다. 그것을 그대로 녀석을 향해 날렸다. "윽!" 정통으로 직격했다. 녀석이 그대로 고꾸라지는 것을 본 나는 천천히 발을 옮겨 그곳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짜릿한 모든 것이 검은 로브와 내 주위 를 돌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단번에 베어 버릴 셈으로 검을 높게 높게 그 것을 향해 들었다. 빨리 끝내고, 가서 카민 녀석을 도와줘야겠다. 바람이 분다. 아까부터 계속 바람이 분다. 비가 온다. 아까부터 계속 비가 온다. 비는 굵지 않지만, 몸을 적실 정도는 된다. 겉옷 정장을 벗어 놓고 왔던 탓 에 내 셔츠는 비를 맞아 완전히 상체에 달라붙어 있었다. 거울을 보면 세상 에서 제일 섹시한 남자의 자태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쿡, 하고 문득 웃 음이 나왔다. 지금 내가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어서 베어 버 리고, 카민을 도우러 가야지. 들렸던 검이 내려지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는 그때 알았다. 운명이란 놈은 정말로 잔인한 녀석이라는 것을. 왜 그렇게 잔인한 건가, 그놈은. 디모세이라는 신은 분명 악취미의 노인네일 거다. 왜 그렇게 장난을 좋아하는 건가, 그 갈아먹을 신이란 놈은. 왜 하필이면 그 순간에……. "……." 내 검이 막 검은 로브의 목을 치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센 바람이 불었다. 얼굴을 푹 덮고 있던 검은 로브가 휙 하고 뒤로 넘겨진 것은 그 순간이었 다. 숨겨져 있던 검은 로브의 머리카락이 보인 것도 그 순간이었다. "……아." 인간들은 신의 줄에 매달려 춤을 추는 광대―라고 표현한 녀석은 로시엔이 었던가, 아이에드였던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였던가. 기억이 흐릿하다. 검은 로브가 살짝 뒤로 넘어간 자리에는,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얼굴이 있 었다. 한참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얼굴만을 빤히 보았다. 어 느 순간이 되니 왠지 모르게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 이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분명 내 앞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니까. 그래도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 입술이 달싹여졌다.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말 이 나오지 않았다. 내 앞에 있는 것은 1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키가 조금은 작은 소녀. 가는 몸에 보랏빛 눈동자, 그리고 머리카락이 눈에 띈다. "……유키?" -------------------------------------------------------------------------------- Back : 30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7 (written by 카르민) Next : 28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5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42015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17th March 2002 09:00:05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0-03-2002 20:45 Line : 310 Read : 1226 [30]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7 -------------------------------------------------------------------------------- -------------------------------------------------------------------------------- Ip address : 211.220.175.10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작게, 입술에서 새어 나가는 내 목소리가 탁했다. "유키지……?" 검은 로브 자락이 훌렁 넘어가 있었다. 그 사이로 보라색 머리카락이 나풀댔다. 그 보라색 눈동자도, 그 작은 얼굴 도 모두모두 유키였다. 내게 화관을 씌워 달라고 환히 웃던 그 꼬마였다. 나를 이곳, 크레티아까지 오게 만든, 바로 그 꼬마였다. 조금 변하긴 했다. 아니, 많이 변했다. 그 조그마한 꼬마가, 겨우 여덟 살쯤으로 보이던 꼬마 가 못 본 새 나와 비슷한 또래처럼 훌쩍 커 버렸으니까. 모습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 작 던 꼬마가 그렇게나 커져 있었다. "유키……." 하지만, 변했든 어쨌든 그건 유키였다. 넋이 나간 듯한 느낌이라 한참 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왜? 왜 여기서 만나는 거냐, 유키? 일순 호흡이 곤란해져 왔다. 유키. 그거 알아? 우리, 널 찾아가는 길이었어. 에세렌, 그 이상한 사이비 신관… … 너도 알지? 널 따라다녔다고 했으니까. 그 녀석이 네가 있는 곳을 안다 고 했거든. 네가 그 빌어먹을 흑마법사한테 잡혀갈 때 나란 놈은 아무것도 못한 게 미안해서, 널 찾아가고 있었어. 널 구해 주면서 정의의 사도 따위의 귀찮고 역겨운 역할을 연출할 생각은 없었는데, 뭐랄까…… 그래도, 구해 주고 싶었거든. 유키? 왜 그래? 좀 웃어 봐.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손에 든 그건 뭐야 ? 날카로운 게 보여. 네가 들고 있기엔 너무 날카로운데. 그걸로 날…… 찌 를 거니?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칼―!!" 찢어질 듯한 목소리가 들려와서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차 싶어서 얼른 몸 을 비켜 냈다. 슈웅,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쪽으로 떨어지고 있던 검이 딱 하고 멎었다. 눈을 들어 앞을 보았다. "카민… 유키야." 대답이 없다. 챙챙! 하는 날카로운 검의 마찰음만 녀석의 대답을 대신해서 들려온다. 유키는 차갑게 일어서서 나를 보았다. "유키, 왜 갑자기 이렇게 모습이 변한 거지? 무슨 일이 있었어?" 검을 든 채로 천천히 다가오는 녀석의 얼굴을 보며 나는 뱉어 냈다. 혹시 내가 빨리 오지 않아서 화가 난 거냐? 그런 거야? "……지금은 뭐라 말해도 소용없다. 이미 키루사님과 맹약을 한 몸이니." 문득 탁한 음성이 들려와서 움찔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분명 카민과 지금 검을 섞고 있을 다빈이었다. 창창, 하는 낭랑한 금속의 마찰음이 귓가에 부딪혀 온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유키가 더욱 가까이로 온 다. 나는 유키를 빤히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멈칫했다. 유키의 눈동자가 멍 하니 풀려 있는 것이 보였다. "유키. ……조종당하고 있는 거야? 그런 거지?" 말이 없다. 유키가 더 가까이 다가온다. 차갑게 굳어진 그 눈동자를 보면서 , 나는 잠시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가까이로, 점점 가까이로 다가 오는 유키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다. 하아, 하고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보라색 머리카락이 내 쪽으로 달려온다. 피하려 했지만, 둔해진 다리 때문 에 제대로 피할 수가 없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검이 내 옆구리 를 찔렀다. 작은 키로 내 옆구리를 찌른 그 녀석이 한참만에 검을 떼어놓는 다. 아아, 하고 작은 한숨이 새어져 나왔다. 다른 것은 더 생각할 틈이 없었다. 유키의 검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차분하게 떨어지는 검이, 내 몸을 두 쪽 낼 듯이 다가왔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보았다. 유키의 눈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나는 보았다. 무슨 짓을 당한 걸까, 이 작은 녀석은. 내 몸을 가를 듯 다가오는 검을 휘두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 꼬마는, 그 빌어먹을 흑마법사 놈에게 무슨 일을 당한 걸까. 비어 버린 초점의 눈동자 로, 왜…… 우는 걸까. 유키, 울지 마. 내가 그때 화관을 주지 않은 건 미안했어. 그게 많이 갖고 싶었어? 내가…… 그냥 장난으로 그랬다는 거 알지?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키가 휘두른 검은 조금 있으면 내 머리를 날려 버릴 거다. 지금 베지 않으면, 내가 베인다. 내가 죽는다. 베어야 한 다. 저렇게 울고 있는 녀석을, 내가 베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 으면……. 하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멍한 기분이 든다. 다리가 아프다. 푸―욱. 어디선가 낮은 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가 들렸다. 왠지 기분이 멍했다. 무엇인가가 찔리는 소리가 났다. 멍한 시선을 들었다. 아프지 않았다. 그럼 이 소리는 왜 난 건데? "……정신……차려……." 아아……? 뚜욱. 또다시 빗방울이 떨어졌다. 뺨에 떨어졌다. 아릿한 목소리로, 카민이 말했고 나는 핫, 하고 웃었다. 천천히 입술이 벌 어졌다. "이겼어……?" "아아……. 심장을 찔렀어……. 빈틈 노리는 거 하나는…… 자신 있거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카민이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그런 녀석의 등 뒤로 기다랗게 꽂혀 있는 검을 들고 있는 유키가 있었다. 유키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천천히 카민의 등을 손으로 받쳤다. 그리고, 검을 들어 올렸다 . "유키." 유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민의 등에 꽂아 넣었던 검을 뽑아내려는 것 같 다. "내가…… 편하게, 보내 줄게." 사정없이 떨리는 손끝이 움직였다. 카민의 머리카락 너머로, 유키의 보랏빛 눈동자가 보였다. 나는, 한 번에…… 가차 없이 검을 들었다…….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시선을 떨굴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내 마음은 끝까지 녀석을 보게 했다. "……." "……." 스륵, 하고 카민의 몸이 내 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카민의 등뒤로 천 천히 손을 뻗어, 녀석의 허리에 박혀 있는 검을 천천히 뽑아냈다. 카민이 희미하게 웃었다. 붉은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나는 고개를 숙였다. 카민의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카민이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칼. 이제…… 우리…… 유키를 찾아갈 필요는 없어…… 그렇지……?" "……응……." "이카루로…… 돌아갈까……? 칼……?" "그래……." 녀석의 말도, 내 말도, 지금의 난 대체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저 눈물이 나서. 입술 사이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철맛을 녹일 정도로 짠, 그런 것이 눈가를 적시고 있어서. 내 어깨에 의지한 이 빌어먹을 자식의 너머에는 시선을 주 지도 못했다. 「화관, 나한테 씌워 줘요!」 당차게 그렇게 외쳤던 유키의 보랏빛 눈동자가 아직도 기억난다.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나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카민이 눈물을 흘린다. "……칼." "왜." 낮게, 대답을 해주었다. 착 가라앉은 내 목소리가 정말이지 꼴사납다. "나, 나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천천히 울듯이 말한다. "……그래." 그렇게만 대답해주었다. 그 이상의 대답을 해준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녀석은 등에서, 그리고 곳곳의 찰과상에서, 나 는 다리와 팔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의 피는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아. "……에세렌이 치료해 줄 거야……." 내 낮은 중얼거림에 카민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받 쳐 들고 힘겹게 다리를 옮겼다. 눈이 침침하다. 내가 많이 피곤한가 보다. 시야가 흐리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어진다. 지금 이대로 빨리 돌아가 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정말이지 순간의 일이었다. 저 멀리에, 무엇인가가 비틀비틀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잘못 본 것이라 생각했다. 아까 카민이 말했으니까. '심 장을 꿰뚫었다'라고. 그런데? 비틀비틀 일어선 그 녀석이 나를 향해 무엇인가를 던졌다. 굉장히 빠른 속 도로 날아오고 있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비켜 내려고 했지만, 그것은 이 미 무리였다.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어서, 그걸 어떻게 막는다는 건 불가능 이었다. 완벽한 불가능이었다. 순간, 무엇인가 붉은 것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익숙한 빛이었다. "……." 침묵이 돌았다. 문득, 침묵을 깨면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다빈…… 살아 있었어……? 분명히…… 심장을……." 카민의 목소리였다. "……내 심장은…… 오른쪽에 있다는 거…… 잊었나." 나는 천천히 일어서서, 다빈이란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오른손에 들고 있 던 내 검이 차갑게 위로 올려졌다. 다빈이란 녀석이 나를 보며 피식 미소지 었다. "죽는 길에, 외롭진 않겠군." 무슨 헛소리야. "……1026호도 함께 갈 테니까." 쉬익!! 내 검이 움직였다. 차갑게, 날카롭게, 크게, 호선을 그리면서. 그대로 녀석의 양 가슴을 무섭게 난도질했다. 나 자신도 무슨 마음으로 그 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치도록 빠르게 녀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한참 동안 녀석의 몸을 난도질하고 있던 나는, 후욱 하고 한숨을 들이쉬며 천천 히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에, 카민이 누워 있었다. 나는 천천히 녀석을 향해 움직였다. "일어나." 가까이 다가가기가 왠지 두려워서 약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렇게 말했 다. 그 순간, 카민이 살짝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뭔가 안심이 되어 숨을 크게 몰아쉬려는 순간. "쿨럭―!" 눈앞에서, 검붉은 선혈이 하늘을 향해 무섭도록 거세게 솟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폭포처럼 오르는 그것의 움직임은 소름이 돋을 만큼 격동적이었다. 찢어질 듯 팽팽한 대기가 침묵하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숨을 죽이는 가운데, 눈 앞에 보이는 것이라곤 오로지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빛의 새빨간, 정말로 새빨간 빛깔의 피뿐이었다. "쿨럭! 쿨럭쿨럭쿨럭!" 몸을 뒤집어 하늘을 바라보는 자세로 누운 카민의 입에서, 무엇인가가 끊임 없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지금 뭘 보 고 있는 거지? 한 발짝을 더 다가갔다. 이번에는 뺨에 튀었다. 선혈……은 끊임없이 솟아올라 대지를 적시고, 하늘을 적시고, 내 얼굴로 튀어 온 세상을 새빨간 빛으로 덮어 버렸다. 동맥에 모인 모세 혈관을 자르 면 저만큼 피가 날까? 그럴까? 나는 천천히, 멍하니 시선을 내려 그를 보았 다. "칼." 나를 보며 녀석이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난 조금의 힘도 들어가지 않는 몸을 움직일 수도 없어, 한참 동안 헐떡여야 했다. 천천히, 입이 벌어졌다.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아찔하게 목을 죄기 시작하는 깊은 혈향(血香)에 심장이 아려 왔다. "칼." 움찔, 하고 몸이 경련을 일으킨 것은 한순간이었다. 찢어질 것 같은 마음의 한구석에서, 마치 길 잃은 아이를 부르는 듯한 어조 로, 너무나 상냥하고 다정하게, 누군가가…… 나의 또 다른 이름이 되어 버 린 그것을 부른다. 털썩, 절로 무릎이 꿇렸다. 녀석의 배에…… 깊게도 꽂 혀 있는…… 단검 한 자루가 보였다. 온몸을 뒤틀며 피를 토해 내는, 녀석이 보였다. "……카민?" 작게 부르자 녀석이 훅, 하고 웃는다. "쿡, 왜…… 쿡……쿨럭!" 울컥, 하고 위로 치솟는 새빨간 저것은 대체 무엇일까? 도대체, 붉은 머리 카락을 가진,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을 한 네 얼굴 위로 튀어 오르는 저 새 빨간 것은 무엇일까? 왜, 그렇게 괴로운 눈을 하고 헐떡이는 거냐? 모르겠어, 모르겠어, 모르겠어. 모... 모르겠어... -------------------------------------------------------------------------------- Back : 31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8 (written by 카르민) Next : 29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6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42015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17th March 2002 09:00:08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0-03-2002 20:46 Line : 297 Read : 1289 [31]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8 -------------------------------------------------------------------------------- -------------------------------------------------------------------------------- Ip address : 211.220.175.10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무서웠다. 정말이지 무서워서 벌떡 일어나 저 멀리로 도망가고 싶었다. "카…… 칼……레들린." 심장을 죄어 오는 압박감에 한 발짝 물러난 그 순간. 나지막한 목소리, 공허한 목소리, 귓전을 집어 뜯을 듯 비장한 목소리, 마 음을 부수는 그 처절한 목소리, 바로 그런 목소리가. …내 귀를 스쳤다. "카민……." 거의 무의식적인 반사로, 입에서 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천천히, 다시 시선이 떨궈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눈과 마주한 순간, 난 철저하게 깨달아 버렸다. 이 무서운 현실을. 나는 떨리는 손으로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비명을 막았다. 이유 모를 물방 울들이 눈에서 흘러내려 뺨으로, 그리고 손으로, 마지막으로 옷깃을 타고 내렸다. 떨리는 손으로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억지로 막았다. 찢어지는 마음속에, 찢어질 것 같은 육신을 가진 그가, 나를 향해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칼레들…린. 칼레들린… 엘버지운… 쿨럭… 피엘……." 그가 환하게 웃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이 들어, 순간 호흡마저 멈출 지경이었다. 이 녀석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내 정식 이름을 불러 준 적이 없었다. 심지어 난, 그가 내 이름을 모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왜! 왜 지금… 내 이름을 부르는 거지? 응? 왜? "하지…… 마." 바들바들 떨리는 내 손이 보였다. 내가 이렇게나 나약했어? 왜 이렇게 떨고 있는 거지? 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떨고만 있는 거지? "하지 마라, 카민. 인간은…… 이, 인간은…… 죽기 직전에…… 아, 안 하 던 짓을 한다잖아……. 하, 하지 마. 하지 마라, 카민. ……이러지 마라." 카민은 내 말에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녀석은 그래, 라고 말하지 않 았다. 그저 미소지을 뿐이다. "……빌어먹게도 아프네." 카민은 힘겹게 말하고는 한참을 쿨럭대더니 검붉은 핏덩어리를 왈칵 토해 냈다. 검은 핵 덩어리 같은 그의 살점이 그의 목을 타고 흘러내린다. 나는 나를 잡고는 놓아주지 않는 땅을 조금씩 뒤로 하며 그의 바로 옆까지 걸었 다. 가고 싶지 않아. 가고 싶지 않았다. 핏빛 눈동자가, 계집애 같다고 놀리기만 했던 그 하얀 얼굴이, 붉은 머리카 락이, 그리고 옷이. 모든 것을 통해서…… 자신이 죽어 가고 있……다고 알 리는 그 모습에……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고마웠다, 칼." 하얀 미소, 하얀 웃음, 하얀 추억, 하얀 기억, 하얀 눈물. 카민의 얼굴 위로, 눈물이 타고 흐르는 그의 얼굴 위로 수많은 일들이 한 장의 그림처럼 스쳐 흐른다. 피를 흘려. 이 녀석이 피를 흘려. 너무 많이 흘려. "칼, 내가…… 죽으면……."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빌어먹을 자식아!" 놈의 한마디에, 가슴이 찢겨 나갈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카민, 제발! 제발 이러지 마라. 너는 내가…… 마음을 준…… 첫 번째 인간. 너는, 인간으로서 내 마음을 가장 먼저 받은 사람. 내게 있어서, 영원히 친구라는 이름으로 기억될 너는 …… 절대로 이런 곳에서 죽지 않아. "빌어먹을 놈의 자식! 누가 널더러 저딴 검 대신 맞으라고 그랬어! 너도 알 잖아! 난 너랑 다르다고! 다르단 말이야, 이 자식아!!" 버럭 내지른 고함 소리에 아악, 하고 숨이 끊어질 듯한 통증이 일었다. 환 하게 미소짓는 카민의 얼굴이 들어온 것은 그 직후였다. "헤헤. 미안해하지 마라, 칼. 너……도 옛날에…… 그런 적 있었잖아. 후후 후…… 기억…… 쿨럭…… 나? 우리…… 옛날에…… 너하고 나…… 그 흑마 법사……. 너, 나 대신…… 맞았어……. 그리고, 넌……." 말을 하는 카민의 입가로, 주르륵 무엇인가가 흐르기 시작했다. 멍하니 눈 을 뜬 채 그것을 보고 있던 나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느낌에 버럭 고함 을 쳤다. "다, 닥쳐! 닥치라고, 이 빌어먹을 자식아! 말 그만 하라고! 으흑, 피가… … 으흑……." 꼴사납게도, 눈물이 났다.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났다. 미칠 것 같은 답답함 속에서, 미칠 것 같은 무엇인가가 속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다. "칼, 내가… 죽으면… 있잖아… 나, 나스… 나스한테는… 절대로 비밀인 거 … 아, 알지? ……그, 그리…고… 나, 나스가… 보이는 곳에… 그 숲에… 나, 가고 싶어……. 마지막으로 한 번……. 멀리서 보고 싶어. …힘들지… … 쿨럭, 않다면…… 나, 거기까지 데려가서, 묻어… 줄래?" 이 썩을 놈의 자식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뭐라는 거야, 대체! "그만 해! 그만 하란 말이야! 그만 해! 뭐 하는 거야, 카민? 미쳤냐? 미쳤 어? 여기서 죽을 거야? 꼴같잖게 유언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여기서 안 죽어! 젠장… 눈떠, 새끼야! 여기서 안 죽어! 여기선 못 죽어!" 내 발악 같은 고함에도, 조용한 미소로 응수해 올 뿐이다. 마치,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을 알았다는 듯이 너무나도 초연한 얼굴로. 이 빌어먹을 놈 의 자식은 그렇게, 언제나 저 혼자 늘 태연하다. "죽이지 않아. 죽지 않아. 절대 죽지 않아!" 버럭 고함을 치는 내 앞에서, 이 빌어먹을 놈의 자식이 눈을 감는다. 이젠 포기하라는 듯한 그 미소도, 그 비릿한 웃음도, 그 핏빛 눈동자도! 모든 것 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고함을 쳤다. "죽이지 않아, 절대!!" 발악하듯 외치고 카민의 어깨를 감쌌다. 내게 어깨를 잡힌 카민의 몸이 점 점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와는 반대로 싸늘해져만 가는 피, 피, 피! 하지만 살릴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릴 거다. 누가 뭐라 해도, 죽어도 살린다!! 눈을 감았다. 카민이 피식, 웃는 것이 느껴졌다. 놈은 가만히 눈 을 들어, 나를 보았다. 쓸쓸해 뵈는 그 눈동자는 가득한 아픔을 담고 있었 다. "칼, 포기해라. 이제 그만……. 나는… 쿨럭, 괜찮…으니까… 칼……." "싫어. 싫어. 싫어!!" "떼쓰지 마. 네가… 어린애냐……." 가만히 물어 오는 입매가 일그러져 있다. "우흑, 카민……. 죽지 마라……. 내가……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죽지 마 라……." "뭐라는 거야, 칼레들린……. 쿨럭… 네가 뭘… 잘못했는데… 쿡." "하나밖에 없는 친구야. 넌 내 친구라고!" "……에세렌님도 있고, 이데 형도 있어…." "집어치워! 살아! 죽어도 살아!" 대체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비릿하게 피가 올라온다. 꽉 문 입술에서 배어 나오는 피가 너무 짙다. "괜찮아, 됐어……. 나, 행복하게 죽잖아……." 정말로 행복하다는 듯이 웃는 그 녀석이, 행복이라고는 경험하지도 못했던 그 녀석이 짓는 그 표정이, 죽을 만큼 아픈 지금에도 나를 위해서 미소짓고 있는 이 바보 같은 자식이 너무나도 한심하고 한심해서. 그래서 괜히… 눈 물이 났다. "뭐가 행복해! 일어나! 가자, 에세렌한테 가자." "……헤헷, 칼…… 너, 바보구나…… 에세렌님은…… 쿨럭! 시, 신관이지… … 신……이 아니야. 이 상처는…… 신관도 치료 못해……. 나, 난 분명히 죽어……." 아니야! 그렇지 않아! 에세렌은 신성을 타고난 존재야. 그러니까, 너도 살 릴 수 있어.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있다고! "카민! 가자.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고집, 피우지 마……. 너도 안 된다는 거, 알잖아…." 어깨에 힘을 줘서 일으키자 우욱,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튼다. 갈라진 배 사이에서 흐르는… 붉…은 것을 보며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 하얀 것과 뒤섞여 나오는 그것을 보면서 나는 입술을 악물었다. 아무래도 좋다. 지금은 이 자식만 살릴 거다. 살려서, 이 자식 꼭 나스에게 돌려줄 거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렇게 찾는 나스에게 꼭 돌려줄 거다. 오빠 기다리고 있을 나스에게, 너 꼭 돌려줄 거다. 그러니까 그때까 지는 죽어도 죽으면 안 돼. 힘겹게 양손을 이용해 녀석을 들었다. 지나치리만큼 가벼운 녀석의 몸이 바 로 들어 올려진다. 흐읏, 하는 소리가 절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아, 녀석이… 녀석이 온몸으로 아프다고 말한다. 내 팔에 의지해서, 내 팔 아래로 무참한 피를 흘리면서, 아프다고 한다. 새빨간 피는, 녀석의 내 장과 더불어, 그… 색을 더한다. 소름 끼치는 그 빛깔은, 미친 듯 잔혹하고 미친 듯 참혹해서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다. "……아훅! …윽……!" 녀석을 등에 업자마자, 자지러질 듯한 비명 소리가 귓전을 긁었다. 녀석의 비명 소리는 심장이 멈출 만큼 처절했다. "……참아." "악……! 으아아―!!" "조금만, 참아." 제발! "……큭, 크윽……. 나, 난…… 안 돼, 칼. 그러……니까, 그러니까……." "닥쳐! 시끄러워! 아무 말도 하지 마! 머리가 터질 것 같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빌어먹을!!" 버럭 고함을 지르자, 카민이 움찔하고 몸을 크게 한 번 떨었다. 그리고 다 시 한 번, 내 무릎과 정강이를 스쳐 흐르는 새빨간 피가 보였다. "카민… 많이 힘들어? 조금만 참아. 조금만 참아, 조금만 참아." 입술을 자그맣게, 질근질근 깨물며 그렇게 말했다. "하아……." 등에 업힌 녀석의 신음 소리가 고통에 가득 차 있다. 나는 걸어갔다. 수풀 사이로 물든 피가 소름 끼치게도 짙다. 조금만 더 참아, 라고 중얼거리며 한참을 걸었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녀석을 업은 시점에서는 그렇게 심하게 터져 나오던 신음 소리가, 이제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 것도 그랬고. 녀석이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랬고. 모든 것이. "카민……?" 이상하게도, 조그마한 대답조차 없다. 약간, 아주 조금 불안해져서 다시 말을 걸어 본다. "카민, 왜 말을 하지 않아?" 아아, 이번에도 대답이 없어. "카민…… 그래, 많이 아프면…… 말하지 마라. 그게, 나아……." 응, 말하지 마. 그렇게 말하지 마.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지? 상처도 안 벌 어지고. "카민. 있잖아, 있잖아, 너……. 생각해 봐. 나스 생각해 봐. 막 살고 싶어 지지 않아? 조금만 더 참으면 돼. 나스 생각해 봐." 그래, 그렇게 계속 듣고 있어.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내 얘기 들어줘. "나스는, 너 기다리고 있어. 분명히 기다리고 있어. 그러니까, 죽어도 죽지 마. 알았지? 죽으면 안 되는 거, 너도 알지? 그 녀석이… 나스, 잘 삐친다 는 거, 너도 알지? 응? 알지? 네가 많이 아파서 돌아오면, 그 녀석 엄청 슬 퍼서… 그래서, 너 용서해 주지 않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있잖아, 카민. 있 잖아… 그러니까, 너… 너, 너… 조금만 더 견뎌 줘. 그러면, 에세렌이 너, 아프지 않게 해줄 거야. 너,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카민." 그러니까, 카민? "……카민…… 히, 힘들지? 그래, 나도 알아. 그래, 알아. 말하지 않아도 돼. 그래, 알아. 알아, 알아. 그래…… 그런데, 나…… 아는데……." 나 알고 있는데. 네가 너무 힘들어서, 지금 내 말에 대꾸해 줄 수 없다는 거, 나 알고 있는 데. 그런데 계속 이렇게 바보같이 네게 질문하고 있어. 나 정말 바보 같다, 그렇지? "카민……?" 아주아주 미안한데 말이야 카민. 딱 한마디만 해줄래? 나, 지금 바보같이 너무 불안해서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아. 바보 같은 상상에 뇌까지 엉망진창 곤죽이 되어 버린 것 같아. 그러니까…. …딱 한마디만 해줄래? -------------------------------------------------------------------------------- Back : 32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9 (written by 카르민) Next : 30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7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42015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17th March 2002 09:00:11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0-03-2002 20:46 Line : 301 Read : 2194 [32]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9 -------------------------------------------------------------------------------- -------------------------------------------------------------------------------- Ip address : 211.220.175.108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6.0; Windows NT 5.1) 막 수풀을 지났다. 왠지 더 무겁게 느껴지는 카민의 몸을 잡고, 한참 동안 을 그렇게 걸었다. 희미하게 저 멀리, 축제가 벌어졌던 그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아, 마을이다. 카민, 이제 마을이 보인다. 자아, 봐. 이제 조 금만 더 걸으면 돼. 조금만 더 참으면 돼. 그러면……. "에에, 이거 뭐야?" 막 다가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앞을 막아섰다. 술을 잔뜩 마신 것 같은 녀 석들 몇몇이었다. 나는 공허한 시선을 들어 그 녀석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나 취해 보인다. 녀석 들이 나와 카민의 앞을 막았다. 나는 시선을 들어 올려 그 녀석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녀석들이 피식, 하고 김빠지는 웃음을 지은 것은 아마도 그 순 간이었으리라. "이이∼ 좋은 날에∼ 뭘 하고 오오셨나?" "……비켜." 목이 아파서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카민을 받쳐 든 손에 더욱 힘 을 주었다. 그러자 녀석들이 내 어깨를 툭, 하고 내리친다. "흐흐, 피를 뒤집어썼구만, 아주." 카민, 조금만 더 참으면 되는데. 바로 저기에… 조금만 더 지나가면 되는데. 카민, 조금만 더 참으면… 그러면 되는데…. "비켜, 제발……. 비켜." 목이 아파. 속이 아파. 모든 게 다 아파. 지금이라도 온몸이 다 부서질 것처럼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 비켜. 비켜! 비켜!!! "흐흐흐." 턱! 하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뿌득,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어깨뼈가 어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힘이 센 녀석이다. 단번에 어깨 뼈를 부술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하나도 아프지 않아. "이 뒤에 있는 놈은 뭐야?" 네 명의 녀석들이 나와 카민 주위를 빙 둘러 에워쌌다. 나는 녀석들을 훑어 보았다. 흐릿하다. 아아, 그런 건 상관없어. 제발, 아무래도 좋으니까! 비 켜! "허허, 뭘까." 녀석들 중 하나가 그렇게 말하고는 내 팔을 휙 하고 낚아챘다. 나는 그 손 을 턱 하고 차내며 짧고 간결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이기 전에…… 가라." 가라. 내가 폭발하기 전에. 가라. 내가 미치기 전에. "이게 어디서……?" 한 녀석이 그 말과 함께 내 어깨를 잡고 확 잡아 뺐다. 두 다리로 서 있기 도 힘든 상태였다는 걸 완전히 잊고서 카민을 업었던 나는, 그제야 나도 아 까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많 이 다쳤었는데, 카민이 어떻게 될까 봐 무서워서 카민을 업고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나는 기억해 냈다. 버티기도 힘든 다리였는데, 녀석들이 휙 하 고 잡아당기자… 몸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아!" 손을 뻗었다. 갑작스러운 녀석들의 등장에, 갑작스럽게 내 등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고 나는 손을 뻗었다. 내 손가락 끝과 카민의 손등이 가볍게 한 번 스쳤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뭐라고 표현할 수조차 없는 공포를 느꼈 다. 그래, 그것은 그저 공포였다. 미칠 듯한 공포였다. ……차가웠다. 너무 차가웠다. 카민이… 차가웠다. "아…… 아, 아아……." 카민의 몸이, 그 힘없는 녀석의 몸이, 내게서 떨어져 나간 그 몸이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땅 위에 내리꽂히는 것이 보였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카민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조금의 미동도 없이, 잠잠하게 녀석은 땅 위에 누워 있었다. 아프다고 말하 는 것이 당연한데, 심지어 그런 말도 하지 않는다. 너무 조용해서 소름이 끼친다. 왜 이렇게 조용해? 너, 왜 이렇게 조용한 건데? 연기하지? 지금 연기하는 거지? 왜 거기 그렇게 누워 있어? 왜 그래? 너, 너……. 이제 봤더니 정말 ……. 연기 잘한다……. 다리를 질질 끌면서 다가가 카민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어 쩐지 너무 차가워서 선뜻 업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만히 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새끼 뭐야? 시체 업고 온 거야?" 그 말에, 움찔하고… 온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천천히, 누군가의 손길이 다가왔다. 헉, 하고 깊은 숨이 안으로 들어갔다. 미칠 듯한 파동이 온몸을 잠식한다고 생각했을 때, 누군가가 카민의 손목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그리고 시시하다고 말하는 듯한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말을 던졌다. "이 새끼, 자기도 이렇게 다친 주제에 죽은 새끼 업고 왔어. 이 새끼가 미 쳤나……." 죽은……? 어디에? 어디에? 어디에? "야, 불쌍한데 치워 줘라. 시체 매장하려고 데려왔나 보다. 킥킥킥."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로, 카민을 잡고 있는 내 손을 떼어 낸다. 나는 그저 가만히,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한 채 얼어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보았다. 감겨 있는 눈.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입가에 걸린 미소. 차분하게 얼굴 위로 흩어져 있는 붉은 머리카락. "으……아." 아니야. 아니야. 이게 아니잖아. "……으……윽…… 악…… 읏……." 이게 아니잖아, 카민! "……크……." 입 속에서 괴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그 소리 는, 내 입술을 비집고 나와서 집요하게도 내게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아무 생각도 없이, 머리 속이 텅 비어 버렸다. 메마른 입술께로 툭, 툭, 무 엇인가가 떨어졌다. "……으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악!!"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내 눈물일까? 아님……? "이, 이 자식 뭐야?" 아니,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 온몸에서 뜨거운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온몸이 달아올라 숨조차 쉬기 힘들 지경이 되었을 때, 갑자기 내 몸 안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소름 끼칠 만큼 싫은 무엇인가가 나를 뒤덮었다. 싫어, 라고 반항을 해봤지 만 소용없었다. 어두운 그것은 그대로 나를 삼켜 버렸다. 그리고, 그 어둠 이 절정에 달했을 때 갑자기 귀 언저리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불쾌하리만 치 뜨거워진 그것이 나를 갉아먹을 듯한 기세로 들끓었을 때, 갑자기 귀에 서 무엇인가가 부서졌다. 파―악. 투욱.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그것을 멍한 눈으로 보았다. 아아, 로시엔이 줬다는 그 은빛의 피어스다. 그런데…… 왜 부서진 거야, 지금? 하긴…… 그런 거야, 상관없지. "카민, 가자……." 천천히 다가가서 카민의 몸을 들었다. 가뿐하게 들렸다. 녀석을 양손에 든 채로 걷기 시작했다. "괴, 괴물이다! 가, 갑자기… 가, 갑자기 눈이 붉게 변했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눈에 거슬려. "우, 우아아아아악!!"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떠들던 녀석이 조용해졌다. 그래, 좋다. 이 정적이 차라리 낫다. "괴, 괴물이야! 우아악! 괴물이야!"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아아, 나 지금 빨리 카민을 데리고 가 봐야 해. 그러니까 조용히 좀 해줘, 응?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갑자기 손에서 무엇인가가 불끈, 하고 솟아올랐 다. 원래는 그저 사람들을 비키게 할 셈이었지만, 손끝에 맺힌 새카만 것을 보자 마음이 달라졌다. 나는 카민을 가볍게 든 후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 "조금 더 빨리 가자, 카민……." 그리고, 손을 떨구었다. 콰콰콰콰콰콰콰쾅―! 손끝에서 무엇인가 강렬한 것이 터져 나왔다. 그 이상은 보기 싫어서, 보지 않았다. "끄아아아악! 살려 줘! 살려 줘!" "악마다! 악마다!" "으아아아아아―!" 시끄러워, 너희들 모두. 모두…… 시끄러워. 입술을 악 하고 물었다. 손을 들었다. 화악, 하고 공기 중에 흩어져 있던 모든 암흑이, 숨겨져 있던 그것들이 손에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을 그 시끄러운 것들을 향해 던졌다. "우아……." "아아악……." 소리는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나는 카민을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카민 , 다른 사람들이 다 조용히 해주고 있어. 이제 다 왔어. 아아, 발 밑이 물 컹물컹하다. 이건 왜 이런 걸까? 왜 사람들이 다 내 발 밑에 있는 거지? 하 지만 상관없지? 그렇지? 상관없지? 후후. 근데, 너…… 왜 계속 웃고 있어? 한참 걷다 보니 이상하게 웅덩이가 진 것이 보였다. 붉은 물의 웅덩이였다. 거기에 내 모습이 비쳤다. 조금 이상했다. 카민, 이것 봐. 내 머리카락이 갑자기 길어졌어. 발끝까지 닿을 만큼 길어 졌어. 웃기다. 카민, 이것 봐. 더 이상한 게 있어. 내 눈 좀 봐. "내 눈이…… 붉어, 카민." 보여? 보여? "……눈이 붉어……." 이상하지? 왜 이럴까? "눈이, 붉어……." ================================== 예에, 그런 것입니다. 여기서 끊는 것입니다=_= 여기가 5권의 끝이에요>ㅁ<;; 아아... 5권에는 외전이 하나 붙겠군요;; 로시엔과 아이에드가 만났을 때의 이야기로.. 제목은 <이름의 의미>입니다. 에에=_=;;; 그 외전을 연재하려다가.....;; .......마감이 너무 촉박하여;;;;; 차마 연재를 못했습니다ㅡ_ㅜ; 그리고 삭제...... 연재하고 난 다음 바로 삭제하면 독자분들이 힘드실테니-_-;; 일단 삭제 공지는 천천히 올리겠습니다. 그럼..... 극악연재 연참광인 카르민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아아....-_-;;; 보통의 글쟁이들이 그러하듯;; 마감이 끝났으니 조금~만 쉬겠습니다;;;;;;; 물론 뒷분량은...... 조금 있습니다만^^;; 역시 연참으로 돌아오겠습니다=_= 그럼 이만~;; -------------------------------------------------------------------------------- Next : 31 :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58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242015 , Current date and time : Sunday 17th March 2002 09:00:14 -------------------------------------------------------------------------------- 다른 것은 바라지 않는다고, 나는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오직 네가 살아있어 주길 원한다고 외쳤다. 가슴에 피멍이 맺히지만 그 생채기를 덮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지금 이 곪고 곪은 상처가 터져 버리면 더 이상 나를 감싸줄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되겠지. 알아, 카민? 이것은 어쩌면 나의 마지막인지도 몰라. 너는, 나의 마지막이다. 네 존재가 사라진다면,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없게 될지도 몰라. 그런, 그런 생각이 계속 들어. 한 존재에게 한 존재가 각인된다는 것…… 무섭다, 카민. 너무 무서워. 그게 이렇게나 두려운 것인지 알았다면, 처음부터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나, 알고 있어. 너는 인간이니까 언젠가 죽겠지. 하지만 이런 것은 아니다. 너는 아주 아름다운 여자를 앞에 두고 웃으며 내게 결혼을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해. 나는 너의 아내가 될 여자에게 말하겠지. 저 바보 멍청이에 먹보에 할 줄 아는 거라곤 없는 녀석을 잘 부탁해, 라고. 그러면 너의 아내는 웃으며 말하겠지. 그렇게 하겠다고. 넌 그 여자와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도 내게 보여줘야 해. 나에게 웃어줘야 해. 천천히 늙어 가는 모습도 보여줘야 해. 네가 늙어가는 그 때도, 나는 조금도 늙지 않은 지금의 모습 그대로 너에게 웃으며 말을 거는 거야. '늙은이' 라고 말이야. 그렇게 말해도 너는 웃겠지. 나는 그런 너를 놀리고, 놀리고, 또 놀릴 거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마음이 아프겠지. 너와 내가 다르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깨달아야만 할 테니까. 또 시간이 흐르고 흐르고 흐르면……. 너는 늙고 늙어 인간들이 다 맞이하는 죽음이라는 걸 맞이하겠지. 하지만 그건 인간이 다 맞는 마지막 숙명의 결과잖아. 나는 너의 손을 잡으며 잘 가라고 말해줄 수 있을 거야. 조금 힘들겠지만 그래도 보낼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 죽으면 용서 안 해." 먼 산을 훑는다. 핏빛 시야 너머 무엇인가가 일렁거린다. 손이 축축하다. 다리가 축축하다. 발끝이 축축하다. 볼 끝을 타고 무엇인가가 흐른다. 따뜻하다. 아니, 뜨겁다. 일렁거리던 무엇인가에 천천히 상이 맺히기 시작한다.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카민을 업고 있는 등은 계속 뜨거워만 진다. 다른 것은 생각할 수가 없다. "……죽으면 용서 안 해." 입가가 바짝바짝 마른다. "용서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요?" 조금은 탁한 목소리가 머리에 꽂힌 것은, 내가 카민에게 나즈막하게 중얼거린 그 순간이었다. 발걸음이 멈칫, 했다. 떨리는 발이 나를 멈춰 세웠다. 머리가 핑글, 돌 것처럼 어지러웠다. 손발이 부르르 떨리며 경련을 일으킨다.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뚜룩, 하는 소리와 함께 찬찬히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앞에 누군가가 서 있다. 나를 막고 있다. "비켜."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막는 것이 아니니까. 이런, 이런. 그렇게 살기를 피우시지 마십시오." 나즈막한 목소리. 나즈막한 책망. "상태를 보아하니 저를 알아보는 것도 불가능한 것 같군요. 그렇지요?" "……비켜." "그 말 말고는 할 말이 없는 겁니까? 똑바로 보아주세요. 지금 저는, 당신을 도와주려고 하는 겁니다. 카·인·" 움찔, 하고 몸이 크게 한 번 경련을 일으켰다. 흐려졌던 시야가 조금 밝아짐을 느낀다. 짙은 안개가 낀 듯이 몽롱했던 눈앞에 짙은 안개가 걷혀나감과 동시에, 무엇인가가 손에 잡힐 듯 뚜렷하게 보였다. 푸른색의 무엇인가가 보였다. 푸른색의 무엇인가. "제 생각대로 되긴 된 것 같은데. 이런, 강제 각성이라 그런지 많은 희생이 있었나보죠?" "……."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머리가 아프다. 그저 아프다. "걱정하지 마세요. 책임은, 확실히 질 테니까." 모르겠어.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모르겠어. 난 그저……. "조금, 쉬세요." 그저…… 카민, 이 녀석을 살리고 싶어.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3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61 "……칼…… 으훅…… 칼레들린님……." 목소리.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누구지, 이 목소리는? 아아, 그래. 익 숙한 이 목소리는…… 에세렌. 그 바보 신관 녀석의 목소리군. 나는 가볍게 웃어주려고 했다. 입술 끝을 살짝 말아 올려서, 일단은 자그맣게 미소를 만들어 본다. "칼레들린님! 으으…… 으아아아아앙……." 내가 미소를 짓자, 이 바보 신관 녀석이 크게 울음을 놓는다. 그 모습에 괜히 쓴웃음이 머금어져서, 나는 조그맣게 속삭이듯 입술을 움직였다. "울지마." 다정하게 말해주려고 했는데 의도와는 다르게 목소리가 탁하게 번졌다. 쩍 쩍 갈라지다 못해 그 속에서 무엇인가가 튀어나올 것 같은 이 메마른 목소 리가 정말로 내 목소리인가. 잘 모르겠다. 아, 목말라. 나는 갑자기 몰려오 는 진득한 피로를 느끼며 머리에 손을 얹었다. 머릿속이 진하고 습한 안개 속에 가로막혀 있는 것 같아서, 숨쉬기가 곤란하다. 뭐였지. 뭔가 굉장히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듯한 느낌. "괜찮은 거예요? 정말 괜찮은 거예요?"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상태에서 에세렌이 계속해서 울먹거렸다. 나는 가볍 게 미소지었다. "괜찮아요? 정말로? 정말로?" 갑자기 내 어깨를 끌어안으며 녀석이 되물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 다. 아무 것도 할 힘이 없었다. 온 몸에서 무엇인가가 죽 하고 빠져나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다. 너무 힘이 없어서, 조금의 힘도 남아 있지 않아서, 지금 나를 안고 있는 이 체온에 의지하고 싶을 뿐이다. 차갑고 단단하게 얼어붙어 버린 것 같은 이 몸에 온기를 불어 넣어주는 이 체온에, 지금은 그저 녹아있고 싶다. "……나는, 나는, 괜찮아. 괜찮으니까." 몸을 떠는 에세렌의 어깨를 투닥거리며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에세렌이 끄윽, 하고 낮게 울었다. 그 녀석의 떨리는 어깨를 보며 괜히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뚝, 하고 어깨에 떨어지는 눈물이 느껴진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안 죽어서…… 정말로 다행이에요." "……." 에세렌이 하는 말에 한마디의 대꾸도 해주지 않고, 나는 그저 고스란히 듣 고만 있었다. 갑자기, 에세렌이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몸을 일으켰다. "아, 아. 이데님께 전하고 올게요. 당신이 깨어나셨다고." 그 말과 함께 에세렌은 총총걸음으로 밖으로 달려나갔다. 나는 나풀거리는 에세렌의 흰색 법복을 가만히 보았다. 후우, 하는 소리와 함께 시선을 천 장으로 올렸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머리가 멍해져온다. 여기는 어디 일까? 저번의 그 여관은 아닌 것 같은데. 나무로 얽기섥기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천장이 눈에 띈다. 모르겠어.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걸까? 그것 역시 모르겠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 멍하다. 한참만에, 문이 벌컥 열리며 라이메데스가 들어섰다. 나는 녀석을 향해서 도 조그맣게 웃어 보였다. 라이메데스는 그 자리에 굳은 듯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조그마한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던 녀석은, 한참 만에 야 정신을 차렸는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와 내 바로 앞에 다가와 멈춰 섰 다. 녀석은 입을 꾹 다문 채로 자리에 서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 한마 디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녀석을 올려다만 보았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라이메데스가 입술 끝을 꾹 하고 물더니, 내가 누워 있던 흰 색 침 대 앞에서 쿵, 하고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그 움직임에 놀란 내가 눈 을 둥그렇게 뜨는데, 라이메데스가 자그맣게 입술을 연다. "미안하다." 라이메데스가 내게 던진 첫마디였다. 머리가 어지러운 가운데 들려온 그 말에, 나는 뿌옇게 흐려진 눈동자로 라이메데스를 뚫어지게 보았다. 라이메 데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조그맣게,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다, 나 때문이야."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찌됐든 라이메데스는 그 말과 함께, 천천 히 오른손을 뻗어 내 쪽으로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아." 그것이 내밀어진 순간, 안개같이 자욱하던 머릿속이 깨끗이 닦은 거울같이 청명해지며 환하게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입술이 조금 열렸다. 라 이메데스가 건넨 그 것을, 나는 찬찬히 받아 들었다. 내 손에 들려진 것. 은색의 광택이 무서우리 만치 강하게 맴도는 그 것. 그 것은……. 내 검이 다, 켐 알슈타드. 「칼레들린님.」 조그맣게, 나를 위로하려는 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네였다. 가슴속이 훈훈해 지는 느낌. 내가 한참동안 검을 매만지고 있으려니까, 라이메데스가 묵직한 저음으로 입을 열었다. "에세렌." "네? 네." 뒤에서 에세렌의 잔뜩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잠깐 나가 있어줘." "예." 에세렌의 대꾸 후,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쾅, 하는 자그마한 소리. 라이메데스가 입을 연 건 그 후였다. "칼레들린." 녀석의 부름에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녀석이 입가에 자그맣게 웃 음을 건다. "각성, 축하해." "아." 입에서 신음 같은 한마디가 나왔다. 미친 듯한 파동이 머릿속을 타고 돌았 다. 나는 라이메데스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각성? 내가……? 내가…… 각성?" 더듬더듬 한마디씩 새어 나왔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라이메데스를 보 았다. 라이메데스는 웃었다. 살짝 미소 짓는 그 녀석의 눈동자가 가늘었다. "그래, 축하해." "하, 하, 하하하하……." 갑작스럽게 웃음이 났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느낌에, 그저 웃음이 났다. 라이메데스가 손을 들더니, 내 머리카락 쪽으로 그것을 가져왔다. 녀석이 내 머리카락을 한 번 쓰다듬었다. 나는 시선을 내렸다. 그 순간, 난 침대 끝으로 내려가 흘러 있는 내 검은 색의 머리카락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버렸 다.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헉." 나는 경악해야만 했다. 검은 색의 내 머리카락이. 원래라면 허리 정도에서 멈춰 있어야 할 내 머 리카락이, 엉덩이를 넘고 무릎을 넘어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게 길어져 있 는 것이 아닌가. 라이메데스가 웃었다. "각성, 의 증거랄까. 잘라도 상관없어, 지금은." 라이메데스는 그렇게 말한 뒤에, 가볍게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서,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 그런데, 카민은 어디 있지?" "……." 라이메데스의 얼굴이 얼핏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상하군. 왜 그런 표정이냐, 라이메데스? "내가 각성했다느니 하는 얘기는 그 녀석한테 못해줄 테지만……. 그래도 지금 많이 기쁘니까 그 녀석한테도 한마디쯤은 해주고 싶은데. 어디 있어?" "칼레들린." 저음으로 나를 부른 녀석이, 내 어깨에 놓은 손에 힘을 준다. "그녀석이 안 보이잖아. 제일 먼저 달려왔어야 하는데." 그래, 제일 먼저 달려왔어야지. 내가 제 녀석을 업고 오느라고 얼마나 힘 들었는데. 그러니까 제일 먼저 왔어야지. 나쁜 자식. 무겁기는 더럽게 무겁 더만. "아, 아니지. 나보다 더 많이 다쳤으니까. 지금 어디엔가 누워 있나? 그런 가? 어디에 있어? 내가 가볼게." "……칼레들린." "어디에 있어?" "칼." "어디에……?" "칼레들린." 눈물이. 이상하다. 아아, 눈물이 흐른다. 왜? 흐르지마. 왜 갑자기 흐르는 건데? 바보 같이 왜 갑자기 눈물이 흐르 는 건데? 무엇 때문인데? 응? 왜? 순간, 내 어깨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팔을 느꼈다. "차라리…… 잊을래?" 그 말에, 온 몸이 떨렸다. "그래. 차라리 잊어버릴래, 모든 것을?" 라이메데스는 조그맣게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마. 더 이상 말하지마. 하지마! "인간계에서 있었던 모든 것을 잊어버리면 돼. 지워버리면 돼. 레이디안에 게 지워달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되니까. ……그 녀석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건 죽어도 싫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내 자존심 같은 건……." "죽은 거야?"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죽, 은… 정말로, 정, 정말로… 죽어버린…… 거야?" 묻고 싶지 않아. 이런 질문 따위, 하고 싶지 않아. 하고 싶지 않다고! 묻는 것이 두려워서,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그래서, 그래서 묻지 않았 어. 당장 눈을 떴을 때 가장 묻고 싶었던 건, 가장 알고 싶었던 건 그것이 었는데. 그래도 묻지 않았어. 내가 이 말을 함과 동시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묻지 않았다구!! '너' 라는 이름을 입 밖으로 냄과 동시에,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려 내 목을 조르고 내 모든 것을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릴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기에 말을 하지 않았다. 너무나 무서워서, 당장이라도 네가 달려올 거라고 억지로 나 자신에게 주입시키듯 말했다. 네가 살아있을 거라고 억지 로, 억지로 나 자신에게 세뇌시켰어. 그렇게 하면 네가 거짓말처럼 웃으면 서 달려올 지도 모른다고, 그렇다고 생각했으니까. "죽…… 어 버린…… 거야?"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침묵은 내 심장을 집어 뜯는 잔혹한 긍정. "그럴 리가 없잖아. 어딘가에 있을 거야. 어디에 있지? 어디에 있어, 라이 메데스?" "칼레들린……." 아니야. 죽었을 리가 없잖아. 응, 그래. 정말로 죽은 건 아닐 거야. 이 녀 석이 장난치는 거야. "어딘가, 어딘가에 있어. 분명히 있어. 그래, 어딘가에 있다구! 어딘가에 서……." 나는 일어서서 천천히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세상이, 빙빙 돌고 있다. 바 닥이 흔들리고 있다. 심장이 조이듯 아파 온다. 갑자기, 목에서 울컥하면서 무엇인가가 솟아 나왔다. 그것은 곧, 커다란 외침이 되어 내 몸에서 튀어 나왔다. "카민! 카미이이이이인!" 목에 피가 맺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문을 열고 나가 미친 듯이 카민의 이 름을 불렀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 아프다, 왼쪽 가슴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으훅, 우흐흑…. 우흐흐흑…… 으아아아아―! 대답해! 대답하라구! 으아 아아아!" 제발, 제발 부탁이다. 나를 힘들게 하지마. 나를 혼자 두고 가지마. 나를 남겨놓고 가지마. 카민, 네가 있을 곳은 여기잖아. 언젠가 네가 나스에게로 돌아가기 전까지, 너를 지키겠다고 말한 건 나였잖아. 나, 날 거짓말쟁이 로 만들 셈이냐? 응? 대답을 해! 이 바보자식아! 그렇게 죽은 거야? 그렇게 죽어버린 거냐구! "욱…. 윽…… 으흑……." 다리에 갑자기 힘이 풀리면서, 몸이 오른쪽으로 꺾여 들었다. 그 순간이었 다. 뒤에서 무엇인가가 강한 힘으로 옆으로 비틀리는 나를 잡아당긴 것은. 놀란 몸이 휘청함과 동시에, 차분하게, 거짓말처럼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분' 이 데려가셨을 거예요." 조용한 목소리로 가만히 속삭이듯 말한다. 따뜻하게 감은 팔이 포근하게 나를 안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은총을 베푸시는 '그 분' 이 데려가셨을 거예요." 카민. 대답해봐, 카민. 내가 부르고 있잖아. "그러니까, 슬퍼하지 말아요." 카민. 대답해봐, 제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대답해봐! 화내지 않을게. 왜 걱정시켰냐고 윽박지르지 않을게. 그러니까! 볼이 따갑다.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타고, 무엇인가가 슬프게 아프다. 뚝, 뚝. 등에서 뜨거운 것이 느껴진다. 에세렌이 흘린 눈물이 등 쪽으로 묻어나 고 있다. "이제, 행복하실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슬퍼하지 말아요." "행… 복?" 누가? 그 녀석이? 아냐. 행복이라곤 몰랐던 녀석이야. 어디에 있든 정말로 행복하지는 않았을 녀석이야. 나스에게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나스를 편하 게 가슴에 안을 때까지는 행복하지 못할 녀석이야. 난 알아. 난 안다구. 이 제, 이제 그 녀석은 영원히 행복할 수 없는 거야. 나스를 이 땅에 두고 저 혼자 가버릴 테니까. 다시 한 번 안아줄 수 없게 돼버렸으니까. "아주 좋은 곳에서, 많이 행복하실 거예요." 거짓말!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3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61 "……칼…… 으훅…… 칼레들린님……." 목소리.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누구지, 이 목소리는? 아아, 그래. 익 숙한 이 목소리는…… 에세렌. 그 바보 신관 녀석의 목소리군. 나는 가볍게 웃어주려고 했다. 입술 끝을 살짝 말아 올려서, 일단은 자그맣게 미소를 만들어 본다. "칼레들린님! 으으…… 으아아아아앙……." 내가 미소를 짓자, 이 바보 신관 녀석이 크게 울음을 놓는다. 그 모습에 괜히 쓴웃음이 머금어져서, 나는 조그맣게 속삭이듯 입술을 움직였다. "울지마." 다정하게 말해주려고 했는데 의도와는 다르게 목소리가 탁하게 번졌다. 쩍 쩍 갈라지다 못해 그 속에서 무엇인가가 튀어나올 것 같은 이 메마른 목소 리가 정말로 내 목소리인가. 잘 모르겠다. 아, 목말라. 나는 갑자기 몰려오 는 진득한 피로를 느끼며 머리에 손을 얹었다. 머릿속이 진하고 습한 안개 속에 가로막혀 있는 것 같아서, 숨쉬기가 곤란하다. 뭐였지. 뭔가 굉장히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듯한 느낌. "괜찮은 거예요? 정말 괜찮은 거예요?"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상태에서 에세렌이 계속해서 울먹거렸다. 나는 가볍 게 미소지었다. "괜찮아요? 정말로? 정말로?" 갑자기 내 어깨를 끌어안으며 녀석이 되물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 다. 아무 것도 할 힘이 없었다. 온 몸에서 무엇인가가 죽 하고 빠져나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다. 너무 힘이 없어서, 조금의 힘도 남아 있지 않아서, 지금 나를 안고 있는 이 체온에 의지하고 싶을 뿐이다. 차갑고 단단하게 얼어붙어 버린 것 같은 이 몸에 온기를 불어 넣어주는 이 체온에, 지금은 그저 녹아있고 싶다. "……나는, 나는, 괜찮아. 괜찮으니까." 몸을 떠는 에세렌의 어깨를 투닥거리며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에세렌이 끄윽, 하고 낮게 울었다. 그 녀석의 떨리는 어깨를 보며 괜히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뚝, 하고 어깨에 떨어지는 눈물이 느껴진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안 죽어서…… 정말로 다행이에요." "……." 에세렌이 하는 말에 한마디의 대꾸도 해주지 않고, 나는 그저 고스란히 듣 고만 있었다. 갑자기, 에세렌이 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몸을 일으켰다. "아, 아. 이데님께 전하고 올게요. 당신이 깨어나셨다고." 그 말과 함께 에세렌은 총총걸음으로 밖으로 달려나갔다. 나는 나풀거리는 에세렌의 흰색 법복을 가만히 보았다. 후우, 하는 소리와 함께 시선을 천 장으로 올렸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머리가 멍해져온다. 여기는 어디 일까? 저번의 그 여관은 아닌 것 같은데. 나무로 얽기섥기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천장이 눈에 띈다. 모르겠어.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걸까? 그것 역시 모르겠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 멍하다. 한참만에, 문이 벌컥 열리며 라이메데스가 들어섰다. 나는 녀석을 향해서 도 조그맣게 웃어 보였다. 라이메데스는 그 자리에 굳은 듯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조그마한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던 녀석은, 한참 만에 야 정신을 차렸는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와 내 바로 앞에 다가와 멈춰 섰 다. 녀석은 입을 꾹 다문 채로 자리에 서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 한마 디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녀석을 올려다만 보았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라이메데스가 입술 끝을 꾹 하고 물더니, 내가 누워 있던 흰 색 침 대 앞에서 쿵, 하고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그 움직임에 놀란 내가 눈 을 둥그렇게 뜨는데, 라이메데스가 자그맣게 입술을 연다. "미안하다." 라이메데스가 내게 던진 첫마디였다. 머리가 어지러운 가운데 들려온 그 말에, 나는 뿌옇게 흐려진 눈동자로 라이메데스를 뚫어지게 보았다. 라이메 데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조그맣게,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다, 나 때문이야."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찌됐든 라이메데스는 그 말과 함께, 천천 히 오른손을 뻗어 내 쪽으로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아." 그것이 내밀어진 순간, 안개같이 자욱하던 머릿속이 깨끗이 닦은 거울같이 청명해지며 환하게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입술이 조금 열렸다. 라 이메데스가 건넨 그 것을, 나는 찬찬히 받아 들었다. 내 손에 들려진 것. 은색의 광택이 무서우리 만치 강하게 맴도는 그 것. 그 것은……. 내 검이 다, 켐 알슈타드. 「칼레들린님.」 조그맣게, 나를 위로하려는 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네였다. 가슴속이 훈훈해 지는 느낌. 내가 한참동안 검을 매만지고 있으려니까, 라이메데스가 묵직한 저음으로 입을 열었다. "에세렌." "네? 네." 뒤에서 에세렌의 잔뜩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잠깐 나가 있어줘." "예." 에세렌의 대꾸 후,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쾅, 하는 자그마한 소리. 라이메데스가 입을 연 건 그 후였다. "칼레들린." 녀석의 부름에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녀석이 입가에 자그맣게 웃 음을 건다. "각성, 축하해." "아." 입에서 신음 같은 한마디가 나왔다. 미친 듯한 파동이 머릿속을 타고 돌았 다. 나는 라이메데스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각성? 내가……? 내가…… 각성?" 더듬더듬 한마디씩 새어 나왔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라이메데스를 보 았다. 라이메데스는 웃었다. 살짝 미소 짓는 그 녀석의 눈동자가 가늘었다. "그래, 축하해." "하, 하, 하하하하……." 갑작스럽게 웃음이 났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느낌에, 그저 웃음이 났다. 라이메데스가 손을 들더니, 내 머리카락 쪽으로 그것을 가져왔다. 녀석이 내 머리카락을 한 번 쓰다듬었다. 나는 시선을 내렸다. 그 순간, 난 침대 끝으로 내려가 흘러 있는 내 검은 색의 머리카락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버렸 다.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헉." 나는 경악해야만 했다. 검은 색의 내 머리카락이. 원래라면 허리 정도에서 멈춰 있어야 할 내 머 리카락이, 엉덩이를 넘고 무릎을 넘어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게 길어져 있 는 것이 아닌가. 라이메데스가 웃었다. "각성, 의 증거랄까. 잘라도 상관없어, 지금은." 라이메데스는 그렇게 말한 뒤에, 가볍게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서,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 그런데, 카민은 어디 있지?" "……." 라이메데스의 얼굴이 얼핏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상하군. 왜 그런 표정이냐, 라이메데스? "내가 각성했다느니 하는 얘기는 그 녀석한테 못해줄 테지만……. 그래도 지금 많이 기쁘니까 그 녀석한테도 한마디쯤은 해주고 싶은데. 어디 있어?" "칼레들린." 저음으로 나를 부른 녀석이, 내 어깨에 놓은 손에 힘을 준다. "그녀석이 안 보이잖아. 제일 먼저 달려왔어야 하는데." 그래, 제일 먼저 달려왔어야지. 내가 제 녀석을 업고 오느라고 얼마나 힘 들었는데. 그러니까 제일 먼저 왔어야지. 나쁜 자식. 무겁기는 더럽게 무겁 더만. "아, 아니지. 나보다 더 많이 다쳤으니까. 지금 어디엔가 누워 있나? 그런 가? 어디에 있어? 내가 가볼게." "……칼레들린." "어디에 있어?" "칼." "어디에……?" "칼레들린." 눈물이. 이상하다. 아아, 눈물이 흐른다. 왜? 흐르지마. 왜 갑자기 흐르는 건데? 바보 같이 왜 갑자기 눈물이 흐르 는 건데? 무엇 때문인데? 응? 왜? 순간, 내 어깨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팔을 느꼈다. "차라리…… 잊을래?" 그 말에, 온 몸이 떨렸다. "그래. 차라리 잊어버릴래, 모든 것을?" 라이메데스는 조그맣게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마. 더 이상 말하지마. 하지마! "인간계에서 있었던 모든 것을 잊어버리면 돼. 지워버리면 돼. 레이디안에 게 지워달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되니까. ……그 녀석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건 죽어도 싫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내 자존심 같은 건……." "죽은 거야?"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죽, 은… 정말로, 정, 정말로… 죽어버린…… 거야?" 묻고 싶지 않아. 이런 질문 따위, 하고 싶지 않아. 하고 싶지 않다고! 묻는 것이 두려워서,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그래서, 그래서 묻지 않았 어. 당장 눈을 떴을 때 가장 묻고 싶었던 건, 가장 알고 싶었던 건 그것이 었는데. 그래도 묻지 않았어. 내가 이 말을 함과 동시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묻지 않았다구!! '너' 라는 이름을 입 밖으로 냄과 동시에,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려 내 목을 조르고 내 모든 것을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릴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기에 말을 하지 않았다. 너무나 무서워서, 당장이라도 네가 달려올 거라고 억지로 나 자신에게 주입시키듯 말했다. 네가 살아있을 거라고 억지 로, 억지로 나 자신에게 세뇌시켰어. 그렇게 하면 네가 거짓말처럼 웃으면 서 달려올 지도 모른다고, 그렇다고 생각했으니까. "죽…… 어 버린…… 거야?"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침묵은 내 심장을 집어 뜯는 잔혹한 긍정. "그럴 리가 없잖아. 어딘가에 있을 거야. 어디에 있지? 어디에 있어, 라이 메데스?" "칼레들린……." 아니야. 죽었을 리가 없잖아. 응, 그래. 정말로 죽은 건 아닐 거야. 이 녀 석이 장난치는 거야. "어딘가, 어딘가에 있어. 분명히 있어. 그래, 어딘가에 있다구! 어딘가에 서……." 나는 일어서서 천천히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세상이, 빙빙 돌고 있다. 바 닥이 흔들리고 있다. 심장이 조이듯 아파 온다. 갑자기, 목에서 울컥하면서 무엇인가가 솟아 나왔다. 그것은 곧, 커다란 외침이 되어 내 몸에서 튀어 나왔다. "카민! 카미이이이이인!" 목에 피가 맺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문을 열고 나가 미친 듯이 카민의 이 름을 불렀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 아프다, 왼쪽 가슴이.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으훅, 우흐흑…. 우흐흐흑…… 으아아아아―! 대답해! 대답하라구! 으아 아아아!" 제발, 제발 부탁이다. 나를 힘들게 하지마. 나를 혼자 두고 가지마. 나를 남겨놓고 가지마. 카민, 네가 있을 곳은 여기잖아. 언젠가 네가 나스에게로 돌아가기 전까지, 너를 지키겠다고 말한 건 나였잖아. 나, 날 거짓말쟁이 로 만들 셈이냐? 응? 대답을 해! 이 바보자식아! 그렇게 죽은 거야? 그렇게 죽어버린 거냐구! "욱…. 윽…… 으흑……." 다리에 갑자기 힘이 풀리면서, 몸이 오른쪽으로 꺾여 들었다. 그 순간이었 다. 뒤에서 무엇인가가 강한 힘으로 옆으로 비틀리는 나를 잡아당긴 것은. 놀란 몸이 휘청함과 동시에, 차분하게, 거짓말처럼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분' 이 데려가셨을 거예요." 조용한 목소리로 가만히 속삭이듯 말한다. 따뜻하게 감은 팔이 포근하게 나를 안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은총을 베푸시는 '그 분' 이 데려가셨을 거예요." 카민. 대답해봐, 카민. 내가 부르고 있잖아. "그러니까, 슬퍼하지 말아요." 카민. 대답해봐, 제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대답해봐! 화내지 않을게. 왜 걱정시켰냐고 윽박지르지 않을게. 그러니까! 볼이 따갑다.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타고, 무엇인가가 슬프게 아프다. 뚝, 뚝. 등에서 뜨거운 것이 느껴진다. 에세렌이 흘린 눈물이 등 쪽으로 묻어나 고 있다. "이제, 행복하실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슬퍼하지 말아요." "행… 복?" 누가? 그 녀석이? 아냐. 행복이라곤 몰랐던 녀석이야. 어디에 있든 정말로 행복하지는 않았을 녀석이야. 나스에게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나스를 편하 게 가슴에 안을 때까지는 행복하지 못할 녀석이야. 난 알아. 난 안다구. 이 제, 이제 그 녀석은 영원히 행복할 수 없는 거야. 나스를 이 땅에 두고 저 혼자 가버릴 테니까. 다시 한 번 안아줄 수 없게 돼버렸으니까. "아주 좋은 곳에서, 많이 행복하실 거예요." 거짓말!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3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63 "드세요." "……." 하얀 사기 그릇에 담긴 희고 걸죽한 죽을 내밀며, 에세렌이 말했다. 그런 녀석의 얼굴이 그렇게 생각한 탓인지 왠지, 수척해 보인다. "일주일 째 아무 것도 드시지 않고 계셨잖아요. 다행이에요, 정신이 들어 서. 저와 이데님은 둘이서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릅니다. 넋이 나간 분 같았으니까. 한참 뭘 못 드셨으니 분명히 탈이 날 거예요. 오늘은 그냥 아 무 것도 넣지 않고 흰죽을 쒀 왔어요.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드세요." 나는 달그락, 하는 낮은 소리와 함께 내 앞에 가만히 놓이는 흰 죽 그릇에 잠시간 시선을 주다가 다시 천천히 그 시선을 거두어 들였다. 고소한 냄새 가 풍기는 그 흰죽에선 모락모락 김이 오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식욕이 당기지 않았다. 백지 같은 머릿속만이 그 흰죽처럼 멀겋다. "부탁이에요. 조금만 드세요, 네?" 에세렌이 수저를 들며 말했다. 내가 말이 없자, 에세렌은 죽 그릇에 스푼 을 가볍게 넣어서 한 스푼을 떴다. 그것을 내 입가로 가져온 에세렌은, 내 입이 벌어지길 기다리는 듯한 움직임으로 한참동안 그 자세 그대로 정지했 다. 그의 하늘색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며 간절하게 내 쪽을 바라본다. 나는 그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벌렸다. "……안 먹어." "칼레들린님." "안 먹는다." 나는 낮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일주일 동안 음식을 먹기는커녕 물조차 마 시지 못해 바짝바짝 말라 있던 내 입술이, 갑작스럽게 벌어진 입술의 움직 임을 견디지 못하고 조금 찢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비릿한 향이 그런 입술 에서 느껴지지만, 별다른 아픔은 없다. "조그만 드세요. 이러다가 정말 죽는다구요! 어제야 드디어 정신이 드셨나 했더니, 음식을 안 먹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시간이 필요해. 조금만, 조금만 더 이러고 있을 거야." 내 말에 에세렌이 눈을 치켜 떴다. "뭐라도 좋습니다! 일단 음식은 드세요! 시간이 필요하다면 드리겠어요, 하지만! 음식은 드셔야 몸이 상하지 않습니다!" 에세렌이 그렇게 외친 순간,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너도 알잖아―!" 그 순간, 에세렌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그런 에세렌의 놀란 눈 에서 시선을 피하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안 먹어도 난 죽지 않아. 너도, 너도 알잖아." 내 말에, 에세렌이 더더욱 눈을 크게 뜬다. 동그랗게 커진 그 눈동자에 비 친 놀라움을 읽었기에, 나는 갑자기 속에서 치받아 오르는 무엇인가를 견디 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러 버렸다. "알잖아! 인간이 아냐! 난 인간이 아니란 말이다! 먹지 않아도 돼! 너와는 달라―!!" "카, 칼레들린님……!" 모른 척 하지마! 하하! 그렇게 전혀 변한 것 없다는 듯한 얼굴 하지 말란 말이다! 먹으라고? 죽는다고?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니 일단은 먹으라고? 웃기지마! 다 알고 있으면서, 카민이 죽었다는 그 사실 말고는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듯 행동하지마! 다 알고 있으면서 그 것을 가면 뒤로 감 추고 친한 척 하지마! "대체 넌 왜 여기 있는 거지? 이젠 알 거잖아! 가버려! 너 따위 가버리란 말이다! 가라구!!" 크게 확장되어 있던 에세렌의 눈동자에서 뚝, 하고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 다. 그 순간 가슴이 뜨끔, 하고 아팠지만 한 번 입에서 튀어나왔던 말이 도 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닌데. 이렇게 고함 치고 싶은 게 아닌데. 상처 주고 싶은 게 아닌데. 하지만, 멈춰지지가 않는다. 이 슬픔이, 이 분노가, 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카민이 죽어버렸다는 사실 을 완전히 인정해버린 이 상황이 나를 움직인다. 내 모든 행위의 원동력이 되어 나를 아프게 하고 소리치게 하고 저 녀석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게 만 든다. 에세렌은 한참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한 방울 떨어진 눈물만이 그가 내 말을 고스란히 들었다는 유일한 증거로 남아 있다. 침묵하는 그의 입술이 꾹 다물려진 상태로 조금 경련을 일으켰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런 에세 렌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침묵이 우리 둘을 가로 막은지 얼마나 시간이 흘 렀을까. "……." 문득, 에세렌이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그는 내 쪽으로 성큼, 한 발 자국 다가왔다. 나는 흠칫해서 몸을 뒤로 끌었다. 그런 나를 향해, 에세렌 은 소매 끝 쪽을 길게 내더니 그 손을 천천히 내 쪽으로 아니, 정확히는 내 입술 쪽으로 가져왔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의 흰 법 복 끝자락이 내 입술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뭐, 뭐하는 거지?" 꾹, 꾹, 하고 그가 그 흰 옷자락으로 내 입술을 누른다. "피가, 많이 납니다." 조용하게, 에세렌이 입을 열었다. "입술이 바짝 말랐잖아요. 입술을 물로라도 축이고 말을 해야죠. 하여튼 손이 많이 가는 분이십니다." 녀석의 그 무덤하지만 다정한 말투에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어 버렸다. 멍 하게 녀석의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녀석은 내 시선을 느끼지 못하 는 것인지, 내 입술 끝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 말도 나 오지 않고, 어떤 말을 시작할 수도 꺼낼 수도 없다. 그런 나를 대신해, 자 신의 희디흰 법복 끝으로 내 입술을 닦아주던 에세렌이 다시 입술을 연다.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편안한 어조로. "……하하, 긴장하지 마세요. 네, 알고 있습니다." 에세렌이 소매 끝을 내려, 천천히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 손을 쳐 내려야 하는데, 이상하게 손이 마음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그의 흰 손이 내 머리카락을 토닥토닥……. 마……치…… 여느 엄마가 아이에게 하는 것처 럼 그렇게, 나를 토닥인다. "저도, 알아요."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당신이……인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놀란 내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그가 잽싸게 말을 잇는다. "갑자기 길어진 머리칼. 갑자기 바뀐 분위기. 평소에 당신을 감고 있던 대 기(大氣)마저 바뀌어 버렸어요. 당신을 감싸고 있던 모든 것이 변화해 버렸 죠. 하지만…. 사실은 그 전부터, 저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어요." "뭐…?" 무, 슨, 말이야? 내가… 마족이라는 걸, 전부터 알고 있었단 말이야, 그럼? "언제부터였을까요. 그냥, 불현듯. 문득문득. 저는 당신이 보통의 인간과 는 조금 다르다고 느끼곤 했어요. 뭐라고 해야할까? 지나치게 솔직하시고, 그런가 하면 쌀쌀맞을 때도 있고, 여느 때는 무섭게 다정하실 때도 있죠. 정말, 당신의 그 감정들은 보통 인간과 다를 것이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보통의 인간보다 더 깊고, 더 풍부하고, 더 격렬했죠. 하지만, 그래도 그런 느낌 있잖아요. 특별…… 하다는 느낌. 그건 특히…… 레이디안의 동굴에 들어섰을 때 가장 강하게 느껴졌었어요. 그리고…… 처음으로 제가 '이네아' 라고 밝힌 그 순간에도." 에세렌의 미소가 거짓말처럼 차분하고 깊이 있게 부드러워진다. "사실은 당신이 자고 계시는 동안, '라이메데스' 님이 모든 걸 말씀해 주 셨어요." "……'라, 라이메데스'? 에세렌…… 너?!" 라이메데스라니! 너, 그것마저 알아버렸단 말이냐? 그 녀석이, 그 녀석이 바로 '그' 라이메데스라는 걸? "라이메데스님은 저에게 아주 차분하게 말씀하셨어요. 당신과 자신이 '마 족'…… 아니……" 에세렌은 조금 망설이다가 힘겹게 다시 입술을 뗐다. "'악마' 라고 말이에요. 그리고 자신이 바로 마리에나 교단이 철천지원수 처럼 여기는 바로 그 '라이메데스' 라고도 하셨죠. ……'가고 싶으면 빨리 떠나' 라고 그 분이 그러셨어요." 그런데? 그런데 왜 가지 않은 거야? 왜? 넌 신관이잖아…. 그런데 대체 왜? "무서웠어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의 눈빛. 너무 무서워서 숨고 싶을 정도 였죠. 예, 숨기지 않고 다 말할게요. 사실은, 저 떠나려고 했어요. 그냥, 가버려서…… 저 멀리, 저의 고향인 미트리안으로나 돌아가……. 20세 생일 이 되면 그냥 죽어 버릴까 그렇게까지 생각했어요." 에세렌의 미소가 조금 씁쓸하게 바뀌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가기 전에 단 한 번, 작별의 인사를 할 겸해서 당신을 보러 갔었지요. 그런데 그 순간에. 가지 말아야겠다고……. 가서는 안되겠 다고. 그렇게 생각해버렸어요. 창백하게 질린 당신의 안색을 보는 순간에 심장이 덜컥했거든요. 당신의 그 얼굴이 제게 굉장한 원망을 퍼붓는 것 같 았어요. 저, 저요. 제가 처음 '이네아' 라고 밝혔을 때의 당신을 생각했어 요. 당신은… 당신은…… 저에게 그러셨잖아요?" 맑은 하늘빛 눈동자에 슬며시 어리는 것은 작은 이슬. 그의 눈동자에 잠시 맺혔다 사라지는 그 작은 것들이, 나를 당황케 한다. "'내가 마족이나 라디아나라도 상관하지 않고 네가 따라오겠다고 말한다면, 네가 이네아든 천사든 인간이든 뭐든 상관하지 않겠어.' 라고 말이에요. 그 말. 그 말이 선명했죠. 전 그 말을 들은 순간을 기억했고,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어요. 그래요. 당신이 어떤 종족이든, 그런 건 상관없…… 습니다. 물론… 신관들은 거의 모든 마족들을 증오합니다. 마족 역시 마찬가지겠지 요. 하지만 저, 그 순간에만큼은 건방지게도 이렇게 생각했어요." 법복을 나려뜨리며 에세렌이 눈을 들었다. 거기에, 결연히 빛나는 두 개의 사파이어가 있었다. "'신관' 이 '마족'을 증오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마족' 이 '신관'을 경멸하지만 그런 것도 상관없다. ……나는 '신관'이기 이전에 '에세렌 이네 아스'. 그리고 당신은…… 마족…… 이기 이전에 그저 '칼레들린' 이라는 존재일 뿐이라는 걸." 에세렌이 숨을 훅, 하고 들이켰다. "그리고 지금의 저는 신관이 아닌 '에세렌 이네아스' 로써…." 그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칼레들린' 이라는 존재 옆에 남아 있길 원할 뿐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있는거예요." 머릿속이 웅웅대며 울린다. 기억나. 전에도 이런 적이 있어. 그 때 나는 마리에나 교단에서 필사적으 로 도망치고 있었지. 카민이 내가 '마족' 이라는 걸 알게 된 그 날. 나는 나와 카민이 쌓아왔던 모든 것이 부서지고 카민이 날 버리고 떠날 거라 생 각했지. 하지만, 아니었어. 「……이제부터의 너를 알아 가면 되는 거니까」 카민. 너는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남아있겠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어요?" 겹친다. 카민, 너와 겹친다. 심지어 저 하늘색 눈조차 붉게 보인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과거의 잔상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에세렌이 환하게 웃는다. 그 웃음이, 바보처럼 밝아 보여서 나는 나도 모르게 따라 웃을 뻔했다. "자, 그럼 드세요." 에세렌은 다시 죽그릇을 들고 그렇게 말했다. 나는 조용히, 말없이 그 죽 을 받아들였다. 손가락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막 한 스푼을 뜨려는 순간, 에세렌이 작게 속삭였다. "아파할 만큼 아파하고, 그리고 툴툴 털고 일어나는 거예요. 제가 아는 칼 레들린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3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64 꿈을 꾸었다. 긴 꿈이었다. 그 곳에 내가 있었다. 내 바로 옆에 흑발의 여인이 서 있었고, 그 흑발의 여인 옆에는 은발의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둘 다 언젠가 한 번쯤은 보았 음직한 사람들이었다. 어디서 보았었지? 잘 알 수 없지만 얼핏 옛 꿈에서 한 번씩 보았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말이다. 우리 셋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난 정말 바보 같이 웃고 있었다. 헤벌쭉, 하고 말이다. 그 두 여인도 웃고 있었다. 셋 모두 행복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행복한 광경에 시비라도 걸 듯, 무엇인가 작은 균열이 일어나더니 천천히 변화가 일어났다. 흑발의 여 인이 뿌옇게 점점이 내 곁에서 멀어졌고, 은발의 여인 역시 내 옆에서 멀어 졌다. 그렇게 나는 혼자 남았다. 갑자기 지독한 외로움이 몰려들었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오싹한 고독이었다.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지? 한참 후에, 은발을 가진 한 이상한 녀석 하나가 다가왔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고, 오로지 반짝이는 은색의 머리카락만이 보이는 그 녀석은 내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처음엔 그다지 그 손을 잡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아서 빤히 고개만을 올려 녀석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싱긋 웃으며 뭐라뭐라 내 귀에 대고 조근조근 말을 건넨다. 나는 일어섰고, 그 은발의 녀석은 웃으며 나를 어디론가 데려 간다. 그리고, 나는 다시 웃는다. 그런데, 이것도 좀 이상했다. 그 웃음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한참 즐 겁게 웃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나를 질질 끌고 가 어디론가 밀어 뜨려 버렸 다. 나는 힘없이 밀려 넘어졌고, 한참을 나락에 있었다. 그리고 그 나락의 끝자리에 나타난 건, 붉은 머리칼의 녀석이었다. 익숙한 얼굴, 너무도 익숙한 얼굴. 녀석과도 한참 행복하게 웃었다. 그 웃 음은 깊었고, 내가 의식했던 것들 중에서 가장 따뜻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그 웃음 역시 사라져버렸다. 사방이 어두워지면서, 그 붉은 머리칼의 녀석이…… 저 멀리로 가버렸다. 나는 그 갑작스러운 어둠에 완전히 당황했다. 너무 어두워. 어디야, 여기는 어디야? 구, 구해줘! 숨이 막혀! 혼자 두지마! "난 떠나는 게 아니니까 걱정 마라." 갑자기 찾아온 그 새카만 어둠에 겁에 질려서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조 그마한 목소리로 누군가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조 그맣게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그 목소리가 부드러워서 순식간에 안심이 되 어 버렸다. 온 몸으로 짙은 파동이 전해진다. 아, 그녀석이다. "자식, 울지 말라니까." 목소리가 귓가를 가볍게 감싸고 돌아나간다. 눈물이 날 것 같은 따뜻함으 로 심장을 채우는 목소리. "괜찮아. 너한테는 빚이 많았으니까 그 것이 다 없어질 때 까진 떠나지 않 을게." 아냐. 너는 빚 따위 없어. 빚을 지고만 건 나란 말야. "그러니까." 알아. 그래, 안다니까.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아.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울지마." 왜? 왜 그렇게 말하면서 네가 우는 거야? 울지마. 나는 널 죽어도 잊어버리지 않아. 너도 나를 잊지 않을 거잖아? 그걸로 충분해. 너는 나에게 소중한 존재였어. 그래, 네가 어떻게 되든 내 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이나, 너와 나눴던 우정들은 변하지 않을 거니까. "넌 혼자가 아냐." 그래, 맞아. 난 혼자가 아니지. 네가 사라진다고 해서, 내 안의 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내가 사라진다고 해서, 네 안의 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 찢어질 듯한 통증이 언제 사라질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네가 분 명히 내 안에 남아있을 것은 분명해. 친구라는 이름으로, 언제까지나. 그러 니까 슬퍼도 슬프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 아파도 아프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 "너의 곁에는 아직 많은 사람이 남아 있으니까, 너무 아파하진마." 많은, 사람들이라고? "이젠 '너' 로 돌아와. 많이 아파했잖아? 이제 됐어. 괜찮아. 나는 괜찮으 니까." 바보야. 내 걱정은 하지마. 나는 널 기억할거야. 너와 있었던 모든 추억을 기억할거야. 그러니까. 그런 눈은 하지마. 울지마. "더 이상은, 걱정 끼치지마." 녀석이 웃었다, 아주 환하게. 너무 환하게 웃어서. 나는, 너무, 너무나도, ...슬펐다. ◇ ◇ ◇ "날씨 좋네." 나는 라이메데스를 툭, 치며 그렇게 말했다. 라이메데스는 그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그렇지, 에세렌?" 싱긋 웃으며 에세렌 쪽을 보았다. 그러자 에세렌이 입을 살짝 벌리고 나를 돌아본다. 나는 다시 한 번 가볍게 웃어 보였다. "우리, 체이드 숲으로 가자." 내가 갑자기 꺼낸 그 말에, 라이메데스가 멈칫했고 에세렌 역시 몸을 굳혔 다. 나는 천천히 입술을 열어 경쾌하게 말했다. "녀석이 마지막으로 부탁한 거였어. 거기에 묻어주고 싶어." 내 말에 라이메데스가 흠, 하고 낮게 중얼거린다. 그는 내 얼굴을 빤히 바 라보더니 조그맣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묻어주고 나면?" 그 말에 왠지 숨이 멈추는 느낌이었다. 에세렌 역시 숨을 죽이는 듯 했다. "돌아 갈 거야?" 나는 라이메데스의 눈을 보았다. 살짝 흔들리는 그 눈이 바라는 것은 무엇 일까. "……응." 라이메데스는 피식, 하고 작게 웃으며 내 머리카락에 손을 올렸다. 부비적 부비적, 몇 번인가 녀석이 내 머리카락을 부볐다. "이 자식이! 감히 누구 머리에 손을 대는 거냐!" 내가 발끈하자 녀석이 하핫, 하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치운다. "그래, 돌아가자. 그 분들이 있는 곳으로. 그러면 너도……." 라이메데스는 슬며시 말꼬리를 흐리며 몸을 돌렸다. 나는 녀석의 뒷말을 대충 짐작해 볼 수는 있었다. '그러면 너도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너, 괜찮은 거야?" 뒤돌아선 상태에서 라이메데스가 그렇게 물어왔다.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 괜찮아. 괜찮고 말고. "응.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거냐?" "웃기고 있네. 뭐야, 그 걱정된다는 표정은? 괜찮다잖아." 그래. 네가 그랬잖아. 카민이 자기 목숨과 바꿔서 준 생명이다. 함부로 할 수 없지. 나는 그 말과 함께 허리춤에 메여 있던 검 쪽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스 르릉, 소리와 함께 검이 뽑혀 나왔다. 나는 왼손을 들어 기다랗게 내려와 있는 머리카락을 단 채로 잡았다. 순간 라이메데스와 에세렌이 무엇인가 말 을 하려고 했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오른손에 든 검을 움직였다. 사락. 자그마한 소리와 함께 머리카락이 잘려 내려왔다. 나는 잘려져 내려온 머 리카락을 한움쿰 쥐고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아, 아까워." 에세렌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까우면 네 머리에다 갖다 붙여." 나는 그렇게 쏘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에세렌이 으, 그럴 수는 없죠, 라 고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하, 하지만 그러면서도 머리카락을 주섬주섬 모으 는 게, 어쩌면 시도해 볼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군. 그래, 저 녀석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지. 나는 예전처럼 허리 너머에서 찰랑대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뒤로 넘겼 다. 씨익 웃으며 나는 입술을 열었다. "지금 당장 가자." "뭐?" 내 말에 라이메데스가 놀란 듯 되물었다. 나는 쳇, 하고 투덜거리며 말했 다. "귀 썩었냐? 지금 당장 가고 싶다고." ◇ ◇ ◇ 카민을 양손으로 들었다. 무겁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카루까 지 그렇게 먼 길을 이렇게 녀석을 안은 채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내가 헐크도 아니고. 마을에 들러서 마차라도 한 대 사야할 듯 하다. 정신이 없었던 몇 일 간, 묶었던 집에서 빠져 나오며, 나는 뭔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저번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이 집은 낯설었다. 분명 히 나와 카민이 그 마을을 떠나 길을 나섰을 때는 에세렌에게 여관에 있으 라고 한 것 같은데. 여긴 여관이 아니었다. 게다가 굉장히 무성하게 돋아난 풀과 빽빽한 나무하며, 어쩐지 산에 있는 작은 산장인 듯한 느낌이 드는군. "여기, 마을의 여관이 아니었네. 산인가?" "……." "……." 그렇게 말하며 돌아본 순간,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녀석들이 모두 재빨리 눈을 떨궈 나와 시선을 맞추는 것을 피했기 때문이다. 음? 왜 그러는 거지? "일단은 마을 쪽으로 가자. 가서 마차를 사야……." "아, 아뇨! 아니요, 칼레들린님!" "그럴 필요 없다. 바로 가는 편이……." 뭐야? 왜 이래? 나는 갑자기 필사적으로 내 앞을 가로막는 에세렌과 라이메데스의 태도에 당황했다. 뭐하는 거냐, 이 녀석들은.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왜 그래? 마차를 사야 이 녀석을 데려가지." 순간, 에세렌이 거세게 고개를 젓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아니요. 제, 제가 업고 갈게요." "웃기네. 이봐, 네가 아무리 힘이 좋다고 해도 이녀석은 평소보다 몇 배는 무거워." 내 말에 에세렌이 더 세게 고개를 젓는다. "마, 마차는 아랫마을에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래, 저 멀리에 가서 마차를 사서 가는 편이……." 뭐냐. 정말 왜 이래? 왜 마을로 가는 것을 이렇게 저지하는 거지? 「칼레들린님. 저 역시 동감입니다. 마차는 아랫마을로 내려가서 사는 편 이 좋겠어요.」 순간, 뭔가 퍼뜩 머릿속을 스쳤다. 마을로 내려가지 못하게 하는 이유? 아니, 잠깐만. 나, 각성의 순간에 어떻게 했었지? 나, 분명히 굉장히 화가 났었어. 나, 카민이 죽는다고 생각해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흥분했었지.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했더라? 어떻……게 했더라? "……!!!" 안고 있던 카민의 몸을 얼른 에세렌에게로 넘겼다. 움찔하면서도 카민의 몸을 받아드는 에세렌을 뒤로하고, 나는 마구 아래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 다. "칼레들린님―!!" "칼레들린!!" 둘의 찢어질 듯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3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65 둘의 찢어질 듯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 나. 나. 나. 그 때. 발 밑을 구르는 돌멩이 소리가 요란하다. 내려간다, 내려간다, 내려간다. 급하게 경사가 진 비탈길이 그 동안 묶었던 집이 깊은 산 속에 있었다는 것 을 뚜렷하게 증거 한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심할 정도로. 주체가 되지 않 을 정도로 쿵덕거린다. "거기서 칼레들린!" 정신없니 내달리고 있는 내 앞을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가로막 았다. 무성하게 돋아난 푸른 풀잎 사이로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 것은 흰 로 브였다. 라이메데스. 힘겹게 발걸음을 멈추고, 라이메데스를 올려다보았다. 숨이 헐떡거려 목까 지 차 올라 있는 내게, 라이메데스가 조용하게 말했다. "이대로 올라가, 산을 넘어가자. 마을엔 가지마라." 문득 핫, 하고 웃음이 났다. 우스워서. 라이메데스가 내 앞을 가로막고, 내가 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는 이 사실이 너무 웃겨서. "나… 무슨 짓을 했어?" 라이메데스가 움찔 했다. 그의 반응에, 몸이 무엇인가를 의식한다. 갑자기 손끝이 부르르 떨려왔다. 아, 아니야. 나, 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 생각나지 않아. 생각…… 나지 않아. "나… 무슨 짓을 했냐? 무슨 끔찍한 짓을 했길래 이래? 내가…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했어? 말해봐, 말해봐라. 라이메데스." 라이메데스는 입술을 꾹 깨물 뿐 대답하지 않았다. 팔 언저리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라이메데스를 지나쳐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가지마라." 라이메데스가 자신의 옆을 지나는 내 어깨를 오른손으로 잡았다. 녀석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너, 많이 힘든 거 알아. 지금, 억지로 밝은 척 하는 것도 안다. 억지로 웃는 것도 알아." 라이메데스는 잠시 숨을 골랐다. "카민, 죽었고." "……." "네 몸은 네가 전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해졌어. 각성했지. 갑작스러 운 강함에 적응하는 것도 힘들 거야. 나 역시 그랬으니까. 게다가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진 듯한 느낌 역시 강할 거다." "……." "지금도 너 충분히 힘들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보지 말라고?" 목소리가 꽉 잠겨서 쉰 듯한 것이 흘러나왔다. 어깨를 잡은 라이메데스의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간다. 발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나무들이, 풀잎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 것을 손으로 치워내며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인다. 얼마나 움직였을 까. 다시, 라이메데스가 앞을 막아섰다. 녀석의 금발이 앞에서 흔들리고 있 다. 녀석의 눈동자 역시―. 굉장한 혼돈을 담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비켜." 눈가가 시큰시큰거린다. 내가 무슨 짓을 했지? 자아, 저 밑에 내가 해놓은 모든 것이 있다. 내려가서 봐야해. 막지마라. "비켜라, 라이메데스." 나는 라이메데스를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녀석이 막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나는 선수를 쳐 먼저 입을 열었다. "나, 볼거다." "……." "도망치지 말라고 한 건 너였어. 앞으로 나가라고 한 것도 너였다. 힘들어 도 할 수 없어. 볼거다." 라이메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나도 무섭다. 하지만, 봐야한 다. 나는 볼 거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내가 정신이 없을 때,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를. 녀석은 더 이상 나를 막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다시 걸어나간다. 여 느 때와 다름없이 환한 햇살이 비치는 것이, 그제야 느껴졌다. 아, 햇빛을 느낀 게 왠지 오랜만인 듯 하다. 내 검은 머리카락 위로, 내 잘생긴 얼굴 위로 어김없이 떨어지는 아름다운 햇빛. 툭툭, 소리를 내며 턱선을 타고 점 점이 그것이 흐른다. 따뜻하다. 왠지 경쾌한 기분이 드는 햇빛이다. 발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햇빛이 더 강해진다. 앞에 선 녹색의 식물들이 이슬을 떨구며 내가 좀 더 앞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유도한다.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는 식물의 이슬들 을 촘촘히 맞으면서 나는 한 발 한 발을 어김없이 움직였다. 산이라서 그럴까. 녹색의 향내가 가득 차 있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 산을 한참 내려갔다. 하지만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고도가 높은 곳이었나 보다. 많은 것이 보인다. 졸졸졸 물이 흐르는 개천이 있고, 머리 위로 높게 높게 치솟은 삐죽삐죽한 잎의 나무들도 있었다. 파랗게 가로누운 하늘도 보였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나무들의 수가 줄어 들기 시작했다. 스삭 스삭 몸을 부딪쳐 오는 그 나뭇잎들이 현저히 적어진 다. 아. 드디어, 넓게 펼쳐진 공간이 보였다. 마을이었다. 햇빛. 머리카락에서부터 조금씩 크게 펴지면서 온 얼굴을 훑어 내리는 그 햇빛은, 마을 쪽에도 여전히 곱고 곱게 부서지고 있었다. 다시 한 발자국을 움직인다. 이제 완전히 마을이다. 보인다, 마을의 정경이 보인다. "……." 오늘은. 햇빛이. 좋은 날이다. 그래. 햇빛이… 너무… 좋은 날. 잠시 걸으려고 했다. 그런데, 다리에 힘이 풀려서 걸을 수가 없었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끈이 풀린 마리오네뜨처럼 몸이 허물어져 내려 버렸다. "하, 하하, 하.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햇빛이 너무 좋다. 착시현상인 걸까? 어쩌면 착시현상일지도 몰라. 누구 없어? 누구 없어? 착시현상이라고 해줘. 이건 거짓말이라고, 내 앞에 누구 라도 좋으니까 지금 나타나줘. 그래서 이건 거짓말이라고, 내가 보고 있는 건 한 낮의 태양이 만들어 놓은 거짓말이라고 말해줘. 햇빛이 너무 강해서, 내 눈이 이상해져버린 거라고. "하하하하하하―!" 「칼레들린님.」 "하, 하하하하……" 이럴 리가 없다. "흐……으…… 으아아아아아―!!" 거짓말이라고 해! 거짓말이라고 해보라구!! "으아아아아아아!!" 이런 건 거짓말이야! 이런 게 사실일 리가 없어!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으아아아아…… 우아아아아아아아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아아아아!! 지독한 냄새. 아무 것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지는 지독한 악취. 썩고 있다. 썩고 있다. 모두, 모두 썩고 있다. "읏, 으아아아!" 딱딱하게 굳어버린 피들이 보인다. 구더기들이 끓는다. 아무렇게나 방치된, 아무렇게나 버려진, 아무렇게나 엉망이 되 버린. 그래, 그런 것들이 저기 에 있다. 예전에는 걸어다녔을지도 모르지. 예전에는 웃었을지도 몰라. 예 전에는 엄마, 하고 어떤 여자에게 달려가 안겼을지도 몰라. 지금은 고깃덩 어리로 변했지만, 예전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에서 즐겁게 웃으며 행복 하게 있었을지도 몰라. 그래, 아마 그랬을 거야. "내가 한 게……! 으…… 으욱!" 엉망진창이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마치… 괴물이 쓸다간 흔적처럼. 발 이 부르르르 떨렸다. 내, 내가 한 게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비틀비틀 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걸었다. 썩은 시체 위로 버글버글 끓는 벌레들에 구토감이 치밀었다. 시체를 좀 먹는 벌 레들은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며 이 몸 저 몸 할 것 없이 뒹굴고 있다. 발이 심하게 떨려 몇 번을 넘어졌다가 다시 소스라치며 일어났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어져서, 비틀비틀 거리며 한참을 걸었다. 구토감에 돌아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문득, 어떤 것이 시선을 붙잡았다. 자그 마한 인형이었다. 어린 여자아이가 갖고 놀았음직한 작은 인형. 시선을 내 렸다. 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눈이 없는 아이였다. 없어진 눈틈으로 벌레 가 들끓고 있었다. 살을 파먹는 벌레들이 있었다. 엷은 핑크빛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아이였다. 두개골에 파묻히듯 달라붙은 몇 올의 머리카락. 금색 이다. 어쩌면, 아주 탐스러운 금발이었을지도 모른다. "아, 아아아." 내가 한 게 아니야. 그렇지? 이런 거, 내가 했을 리가 없어. 그래, 내, 내 가 이런 걸 했을 리가 없단 말이다. "어떤가요." 움찔. 온 몸이 크게 떨렸다. 뒤에서 들려온, 낭랑한 목소리에. "기분이 어때요?"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입술이 살짝 경련을 일으켰다. 무성한 시체들의 틈에 선 것은 파란색 머리카락의 남자였다. 바로 앞에서 푸른빛의 빳빳한 천 조각이 흔들리고 있었다. 반쯤 공중에 뜬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익숙한 얼굴. "……카리스."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3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66 입술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러자 이름을 불린 그가 씨익, 하 고 미소 짓는다. "네, 반갑습니다." 그는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몸이 떨렸다. 왠지 모르게, 떨렸다. "당신이 각성한 흔적―. 이라고 해둘까요? 그리 보기 나쁘지 않은 광경이 군요. 그렇지요?" 살짝 눈이 가늘어지는 카리스의 얼굴이 보였다. "……내, 내가 한 것, 내, 가……." "당신이 한 것이지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웃으면서 그렇게 말한다. "……아, 아아……." 거짓, 말이라고. 해줘. 거짓말으로라도 좋으니까. 내가 한 게 아니라고, 그렇게. 그렇게 말해줘. 제발. 제발 부탁이니까. "각·성·의·날·에 당신이 한 것입니다." 아, 아아.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저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 아냐. 내가 하지 않았어. 나, 나는 그저……. "사실을 부정하지 마세요. 조금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는 말하실 수 없을 텐데요. 극도로 흥분한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나지 않습니까? 자 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아, 아냐, 나, 나는." 나는, 나는 아냐! 나는……! "잘 생각해보십시오. 잘 생각해 보시라구요." "아, 아아……." 아, 아냐. 아냐! "물론 당신이 이 마을을 혼자서 이렇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열심 히 파괴하고 있을 때, 더 이상 당신이 폭주하면 이 마을이 아니라 이 마을 바깥까지도 그 여파가 미칠 것 같아서 제가 중단했으니까요. 이 마을은 상 당히 고립된 마을이지요. 이 마을 바깥으로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제가 한 번 더 손을 썼습니다." 웃는다. 환하게, 거짓말처럼, 웃는다. 카리스는. 웃는다. 마치 카민이 웃 던 그 것처럼. "이 마을에 움직일 수 있는 자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 산 바깥으로 나 간 자도 아무도 없지요. 귀찮은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제가 손을 썼습 니다. 당신을 위해서요." 사방은, 온통 폐허다. '당신을 위해서요.' 이 모든 것은 나 때문에. 축제의 분위기에 젖어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죽었어. 나에게 돈을 내놓으라 고 윽박 질렀던 그 겁 없던 여관의 여자도, 나에게 목걸이를 건네던 그 노 파도 죽었겠지. 다정스럽게 부모의 손을 잡고 가던 자그마한 여자아이도 죽 었을 거야. 어쩌면 그 날 막 태어난 소중한 생명도 죽었을지 모르지. 그래, 그랬을지도 몰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축제를 즐기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죽었다. 나, 용서받을 수 있어? 나, 는, 용, 서, 받, 을, 수, 있, 어? "왜……. 왜?" 눈물이 흐른다. 주루룩 주루룩…… 눈가를 타고 흐르는 눈물이 아프다. 카 리스는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잊으십시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각성을 했다는 사실. 이 인간의 마을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족에게 있어선 말이지요." "말도 안돼!" 그 순간이었다. 뒤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이런, 오셨나요." 카리스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 저 너머에서 하얀 로브와, 하얀 법복 이 함께 오고 있었다. 라이메데스와 에세렌. 나는 얼른 그 쪽으로 뛰어가려 고 했다. 그런데, 그 때였다. 카리스가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은. "조금 오랜만이지요? 라이메데스님." 무슨? 아는 사이였어? 놀라서 눈을 부릅뜨며 라이메데스 쪽을 돌아보았다. 라이메데스는 그런 카 리스를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군요. 오랜만입니다." 존대? 나는 라이메데스가 존대를 했다는 사실에 조금 당황했다. 라이메데스! 내 가 저번에 물었을 때는 분명히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랬잖아! 모른다 고 했잖아! 고위마족일지도 모른다, 그것뿐이었잖아! 그런데? "아아, 그러게 말입니다." 카민을 안은 상태의 에세렌이 재빨리 다가와 내 옆에 바짝 붙어 섰다. 그 가 내 옷자락에 몸을 기댔다. "이 자도 마족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에세렌은 내 옷을 꼭 붙잡은 채로 입술을 움직 였다. "괜, 괜찮으십니까?" "……." 어떤 뜻으로 물어보는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괜찮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 다. 카리스는 천천히 나와 에세렌 쪽을 보다가, 어느 순간 시선을 멈추었다. 카민 쪽에서 말이다. "이런, '각성' 의 희생자로군요." 쿡, 하고 웃는다. 나는 카리스를 노려보며 에세렌의, 정확히는 카민의 앞 을 막아섰다. 그 순간, 카리스가 더욱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경계하십니까?" "……너, 대체 목적이 뭐야." 그 말에 카리스가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새삼 무슨 말씀이신지." "처음에는 우연처럼, 두 번째는 동료처럼, 세 번째는 친구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네 번째는? 너는 왜 항상 알고 있다는 듯이,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나 는 거지?" 카리스는 웃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라이메데스 쪽을 향했다. "말씀하지 않으셨나 보군요." 라이메데스는 쏘는 듯한 눈매로 카리스를 보고 있었다. 카리스는 나를 보 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그거 아시나요?" 그는 웃었다. "당신의 각성을 종용한 건 접니다." "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 무슨 말이지. 무슨 말일까. 저게 대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알 수 없다. 카리스가 하하하, 하고 크게 한 번 웃었다. "역시 라이메데스님께서는 말씀해주지 않은 것 같군요. 그 날, 저는 이 사 람을 뒤쫓는 자들이 당신들을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카리스는, 에세렌이 힘들게 안고 있는 카민을 눈으로 가리켰다. "기회라고 생각했죠." "무……슨…… 너, 너는 대체……." "저는 당신에 관련된 일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 지요. 인간계에서 있었던 일도 물론입니다. 그 때도 당신을 보고 있던 차였 습니다. 보아하니 뭔가 큰 일이 일어날 것 같더군요. 전 이렇게 생각했죠. 이 인간, 이 카민이라 불리는 이 인간이 크게 다치는 상황이 오거나 당신이 아주 큰 위험에 처한다면, 마족으로서 각성을 하지 않을까, 하구요." 씨익 웃어 보이는 카리스의 얼굴이 희미하게 이지러진다. "그래서, 저는 바로 저 라이메데스님에게 전음으로 말했습니다. '칼레들린 을 각성시키고 싶으면, 잠시간만 칼레들린에게서 떨어져 있어 달라' 고." 모르겠다. 지금 저 남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저 말이 무슨 의 미를 띄는 것인지. "그리고 또 하나 부탁했지요. 당신에게서 '검' 은 받아오라고 말입니다." 카리스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각성한 당신이 폭주 상태일 때 그 검, 켐 알슈타드마저 옆에 있다면, 인 간계의 일부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알겠습니까, 칼레들린님." 카리스가 가볍게 다가왔다. "언제 한 번 말했듯이, 저는 당신에게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명심해 주세요." "헛소리 지껄이지마!" 내가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카리스가 쿡쿡, 하고 소리 죽여 웃었다. 에세 렌이 내 손을 꾹 잡았다. 나는 라이메데스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라이메 데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리스는 가볍게 내 쪽을 지나쳐 라이메데스 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살짝 우리 쪽으로 돌아보며 묻는다. "아, 그런데 어딜 가는 길이죠? 저 사람까지 데리고." "……이, 이카루로 가는 길입니다." 에세렌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카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카루로? 이런, 그건 안될 말씀인데요." "네……?" 에세렌의 놀란 목소리가 울린 그 순간. 휘익! 갑작스러운 소리가 났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막을 시간은 없 었다. "무슨 짓이야!" 눈동자가 뒤집히는 듯한 느낌에 주먹을 꾹 쥐었다. 지금의 이 상황은, 도 저히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그러한 광경. 지금 카리스의 팔 에, 무엇인가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하얗기 그지없는 그 피부가 얼어붙 어 더더욱 창백해 보이는. 붉은 머리카락이 그 차갑게 굳은 피부색 때문에 더 붉게 보이는. 비록 시체이지만, 혼은 없는 상태이지만, 분명히, 분명히, 분명히. "내려놔!" 카민을 내려놔. "내려놓으란 말이다, 이 자식아!" 내 고함소리에도 카리스는 씨익, 하고 웃을 뿐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나 는 피가 흐르는 입술을 더욱 세게 깨물었다. 라이메데스 역시 굉장히 놀란 듯 했다. 에세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크게 벌린 채로 가만히 있었다 . 내가 손을 뻗어 녀석이 몸을 낚아채려 한 순간, 카리스가 둥실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 사람을 내려놓으라구요? 그럴 수 없습니다." 카리스가 다시 웃는다. "당신에겐 이 '시체' 마저도 소중할 테니까. 이용가치가 있죠." "닥쳐!" "이런. 많이 화가 나셨나요? 혹시 이 인간이 죽었을 때 많이 우셨어요? 이 '인간 하나' 죽은 게 그렇게 슬퍼할만한 일입니까?"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내 손에 뽑혀 나온 켐 알슈타드가 마음을 담아 웅웅, 하고 크게 공명한다. 지잉, 하고 울리는 이 소리에 내 귀조차 멍멍할 지경이다. "네놈이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냔 말이다!" 콰앙!! 갑자기 온 몸에서 무엇인가가 뿜어져 나왔다. 커다란 파공음과 함께 온 몸 에서 뿜어져 나온 그 것은 사방으로 찢어지며 검은 색의 기류를 형성해 냈 다. 뭐, 뭐지 이건! "으아아아!" 내 옆에 붙어서있던 에세렌의 몸이 그 검은색 기류에 의해 튕겨 나가 저 멀리로 내팽개쳐졌다. 괜찮은가 싶어 놀라 돌아보자, 에세렌이 발딱 일어서 며 괜찮습니다, 라고 말해온다. "아아, 여태까지와는 다르죠. 갑자기 흥분하시면 안됩니다." 그 말과 함께 카리스가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동시에 나는 머릿속을 강하 게 치고 나가는 어떤 사실에 움찔하고 굳었다. 그래 맞다. 나, 각성했었지. 각성마족은 극도로 흥분했을 때 몸 주변으로 강한 어둠의 기운이 뻗친다. 나는 눈을 들어 카리스를 노려보았다. 온 몸에서 스물스물 한기가 새어 올 라 그 증오가 카리스에게로 향했다. 증오와 한기는 멈출 줄을 모르고 내 안 에서 들끓고 있었다. 내가 눈을 치켜 뜨고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 는지, 카리스가 공중에 뜬 자세 그대로 내 쪽으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 "칼레들린님, 잊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오직 당신을 위해, 당신에게 빚을 갚기 위해 이런 귀찮은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대체 무슨 말이냐! 나는 아무 것도 몰라! 나는 눈을 찌푸렸다. 그러자, 카리스가 다시 한 번 깊게 웃는다. "당신은 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계십니다. 아니, 제가 말 한다해도 지금의 당신은 제 말을 믿지도 않겠죠. 저 역시 '아직은' 가르쳐 드릴 수 없고 말입니다. 시간이 필요하지요. 당신이 스스로 알아야 할 일도 있으니 까." 카리스는 그 말과 함께 빙글, 하고 몸을 돌렸다. 차분한 그의 푸른색 머리 카락이 길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카리스는 한 마디 한 마디 끊어 말했다. "만약 제가, 당신에게 '무조건 제 말을 따라주세요. 그 것이 당신이 행복 해질 길입니다.' 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제 말을 듣지 않으시겠지요?" "……그 입 찢어버리기 전에 닥쳐. 어서 카민을 내놔!" "그럴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미간에 주름이 간다. 나는 발 밑에 힘을 주고 도약했다. 웬일인지, 평소 때보다 백 배는 가벼운 힘으로 몸이 공중에 띄워진다. 나는 카리스와 마주 한 상태에서, 검에 힘을 주었다. 웅웅웅웅. 여태까지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그다지 반응이 없었던 켐 알슈타드에서 또 다시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카리스의 눈썹이 가볍게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이 보인다. "검이 공명을 하는군요. 과연, 자신의 주인이 각성했다는 것을 알아보는 겁니다." 나는 카리스 쪽으로 검을 찔러 들어갔다. 쇄액, 하는 소리를 내며 날아간 그 검을 그러나 카리스는 몸을 트는 것만으로 상쇄시켜 버렸다. 젠장! 나는 양손에 검은 어둠을 모아 카리스 쪽으로 보내고, 그 어둠의 사각으로 재빠 르게 뛰어들었다. 그러나, 나의 그 공격에도 카리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 는다. 놀란 듯한 기색도, 피하려는 움직임도 없다. 내가 바로 앞까지 뛰어 들어가는 상황에서도, 카리스는 몸을 비켜내지 않았다. "……당신은 아직, 무리라구요." 가볍게 귀에 속삭이는 소리가 났다고 생각했을 때, 미풍이 불어온다고 느 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자각했다. 내 몸이 뒤로 밀려나고 있다고. 쿠당탕탕! 이럴 수가! 그 가벼운 미풍에 밀려난 몸이 땅에 처박힌다. 욱, 하는 작은 소리가 튀어 나왔다. 카리스는 위에 선 채로 아직도 미소 짓고 있었다. "저를 우습게 보지 말아주세요. 갓 각성한 당신이 아무리 '그의 후예' 라 고 해도, 저와 상대를 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만약 '그 것' 마저 각성한 다면 아무리 저라 해도 당신을 건드릴 수 없을 테지만 그건 아주 먼 훗날의 일이니까." "이해할 수 없는 소리하지마! 대체 네 녀석의 목적은 뭐야!" 카리스는 내 말에 조금 씁쓸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말했지 않습니까. 당신을 위해…… 그 것 뿐입니다. 때로 제가 가깝게 느 껴지는 것도, 제가 다정하게 느껴지는 것도, 제가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도, 제가 악당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 모든 역할이 당신에게 필요하기 때문입 니다. '당신의 편' 이 얼마 없으니까, 제가 이 모든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지요. 그가 나서 준다면 좋을 텐데." 카리스는 가볍게 다시 말을 이었다. "이카루로 간다구요? 그건 아마 이 사람을 묻어주기 위한 것이겠지요?" 오―싹. 소름이 돋았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그의 말에. "아직은 안됩니다. 제가 이 사람을 데리고 간다면 이카루로 돌아갈 필요는 없겠지요." "뭐……?" "이 시.체.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습니다. 제가 데리고 가면, 당신은 이 사람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저에게 오겠지요. 제가 이 사람을 데 려가는 데에는 큰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당신에게 지금 당장 '저와 함께 갑시다. 저의 말을 들어줘요' 라고 말하는 것이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는 것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이 사람의 시체'를 찾고 싶다면, 저를 찾아 오십시오. 그 곳에서 당신은 많은 진실을 알게 되실 테니까. 이제 각성도 했겠다, 저 쪽 사정도 복잡해졌겠다. 저도 더 이상 참고 있을 수만은 없거 든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머리가 혼란스러워. "그럼 가보겠습니다." "어딜 간다는 거야! 카민을 내려놔―!" 내가 고함을 치자, 카리스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알아주십시오. 모든 것은, 당신과……." 카리스의 얼굴 위로 스치는 저 것은 대체 무엇일까. 뭔가 먼 옛날을 더듬 는 듯 아련해 보이는 저 얼굴은. "당신의 아버지……." 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진다. "……나의 친우였던 그, 피에트를 위해."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 아찔해진다. "에디 에이렌의 숲으로 오십시오. 아이룬의 후계자를 찾으세요. 그럼 다음 에 뵙지요." 스르륵, 하고 그가 흐려진다. 손을 뻗어 그의 허상을 잡으려 했지만 무리 였다. 나는 그 자리에 천천히, 허물어졌다.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3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67 제 33장: 소년 「칼레들린님.」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밤이었다. 아니, 벌레 우는소리가 자욱하게 울리고 있지만 그 소리가 너무 자연스러워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양 착각하게 만 드는 밤이었다. 조그맣게 내부에서 속삭여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검 쪽을 내려다보았다.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노란색의 보석이 눈에 들어온다. 「그만 주무세요. 몇 일간 푹 주무시지 못했잖아요, 네?」 걱정스러운 목소리다. 나를 신경 쓰고 배려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하게 느 껴지지만, 이상하게 전혀 기쁘다거나 하진 않다.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녀석이 왜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지. 쳇, 예전처럼 그렇게 구는 것이 훨씬 너답다. "뭐야, 왜 갑자기 얌전한 척이야?" 「저한테는 억지로 밝으신 척 할 필요 없습니다.」 조용하게 울리는 그 목소리가 내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 같아서,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금의 침묵 후에, 나는 후우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네." 「예?」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나도 미쳤군. 이런걸 이 수다쟁이한테 물어보고 있으니. 하지만, 누구에게 라도 좋으니 묻고 싶었다. 벌레소리만이 다시 감돌았다. 레이네의 목소리는 한참 들리지 않았다. 가 볍지 않은 그 침묵 위로 덮이는 것은 아련한 하늘빛. 도망치듯 빠져 나온 그 핏빛의 마을. 마을을 빠져 나와 에세렌, 라이메데스, 그리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입술을 꾹 깨물며, 나는 길을 걷는 도중에 몇 번이고 다짐했다. 카리스를 꼭 잡아버리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버려서, 그 몸을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산산조각으로 찢어버리겠다고. 지옥 끝까지라 도 쫓아가고 쫓아가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리겠다고.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내 온 몸에서 끓어오른 지독한 감정이었다. 처음에는 카리스에게 향했던 그 것은 곧, 생각도 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 저 이토미즈란 단체에게로 향했다. 카민이 행복할 수 없었던 이유. 카민을 그렇게 죽게 만든 이유. 그 단체에게로 향한 그 감정은, 부 글부글 끓어올라 넘칠 만큼 내 안에서 넘실댔다. 그리고 나는 새삼, 깨달아버렸다. 그래. 이렇게 끝내서는 안돼. 카민의 몸을 찾아서 체이드 숲에 묻어주는 것만으 로는 안된단 말이다. 복수하겠다. 지독하게 복수해야 한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녀석에게 고통을 준 것은 모조리 다 베어서 죽여 버릴 거다. 그래야 한다. 「칼레들린님.」 레이네가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눈을 꾹 감은 채 아무 말도 하 지 않았다. 에디 에이렌의 숲으로 오세요, 라고 말한 카리스의 말에 라이메 데스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에디 에이렌의 숲이라 하면 저 빛의 엘프들의 숲―. '마족이 마족을 그런 곳으로 초대하다니 머리가 돌았나보군' 이라고 라이 메데스는 한정 없이 빈정댔지만, 그에 반해 에세렌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 내고 있었다. '에, 엘프들의 숲이라구요!' 라면서 말이다. 결국 엘프들의 숲이라는 곳의 방향을 아는 것은 우리 일행 중에 라이메데 스밖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라이메데스의 뒤를 따라 줄레줄레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라이메데스는 끝없이 투덜대며 내가 왜 에디 에이렌으로 가 야하는 거냐고 중얼거렸지만 곧 내 싸늘한 눈빛 공격에 항복해 버렸다. 멈춤 없이 오늘 하루 종일 걸었다. 사실은 잠도 자지 않고 계속해서 끝도 없이 걸어가고 싶지만, 에세렌의 지친 표정이, 나를 막아섰다. '당신 옆에 남아 있길 원합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걸까. 에세렌은 이미 저 너머에 뻗어서 잠에 취해 있었다. 으, 으음. 심하게 코 를 골며 이리뒤척 저리뒤척 하는 것이… 상당하군. 라이메데스는 어디로 갔 는지 보이지 않는다. 지금 가는 길이 바른지 어떤지 모르겠으니 미리 갔다 와보겠다고 말을 던진 후 사라져버린 녀석이니까. 「괴롭다는 거 알아요.」 다음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검에서 은은한 노란빛이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곧 그것은 노을빛과 뒤섞 여 여성의 형체를 만들어냈다. "어, 어이?" 싱긋 웃어 보이는 그 것은 분명, 레이네였다. 나는 입을 뻐끔뻐끔 벌리며 갑자기 검에서 팅 하고 튀어나온 레이네를 보았다. 웨, 웬일이냐. 라는 생 각이 들어 녀석을 올려다보는데 녀석이 씨익 하고 웃는다. 나는 흠칫해서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에세렌은 세상 모르고 이리뒹굴 저리뒹굴하며 아주 편하게 잠이 들어 있었 다. 쩝, 산길에서도 저렇게 편안하게 잘 수 있는 신관은 저 녀석밖에 없겠 지. 아주 신이난 표정으로 주무시고 계시는군. 입맛을 짭짭 다시며 더, 더 어, 를 외치고 있는 걸 보니 음식에 파묻힌 꿈이라도 꾸나보다. "일단 저 쪽으로 가서 얘기해요. 저 신관이 깨면 칼레들린님도 곤란하실테 니까." 레이네는 그 말과 함께 내 팔을 잡아끌었다. 녀석의 노을빛 머리카락이 길 게 휘날렸다. 조금 걸어가서 바위에 털썩 걸터앉은 레이네는 조용히 미소를 띄우며 내게 말했다. "칼레들린님." "왜." "…저는." 레이네는 말을 하려다 말고 후우, 하고 숨을 멈췄다. 나는 뭔가 싶어서 녀 석을 바라보았고, 녀석은 흠,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을 떼어냈다. "저는 말이에요, 칼레들린님. 인간계에서는 이런 모습으로 오래 있을 수 없습니다. 어쩌다가 한 번 정도가 고작이에요. 그래서 매일 보석 형태로 있 는 것이고…." 레이네는 눈을 반짝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한 번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군요. 당신 곁에 나란히 서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녀석이 하는 말뜻을 이해할 수 없어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레이 네가 몸을 일으켜 내 어깨를 두 어번 두드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뻗어, 녀석이 내 어깨를 살짝 안아왔다. 곧, 귓가에서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 려왔다. "저라면, 당신을 떠나지 않고 언제까지라도 곁에 있어드릴 수 있을 텐데." "레……이네?"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레이네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고, 그 녀석의 노을빛 머리카락이 바르르 흔들리고 있는 것도 느껴졌으니까. 그런데, 그 때였다. "우웅…… 엑? 칼레들린님?" 헉. 에, 에세렌이 일어났나 보다! 나는 깜짝 놀라서 레이네의 팔을 풀었다. 레이네는 싱긋 하고 웃었다. "그럼 전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 뭐라고 한마디 할 틈도 없이 노란빛과 함께 작아진 레이네가 보석에 들어 와 박혔다. 나는 얼른 검을 옆구리에 차고 에세렌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두리번거리고 있던 에세렌은 내 얼굴을 발견하더니 아, 하는 소리를 내며 털썩 주저앉았다. 엣? 나는 파리하게 질린 에세렌의 얼굴을 보고 조금 놀랐다. "왜 그래?" 내 질문에 에세렌이 얼굴만을 들어서 힘없이 대답한다. "……아, 가, 가신 줄 알고……." "뭐?" 에세렌은 하하, 하고 작게 웃은 후 다시 시선을 떨궜다. "아, 아뇨. 저, 저, 바, 방해일지도 모르니까요. 저, 절 버, 버리고 두 분 이서 가버리신 줄 알았어요." "……." 에세렌은 두 손을 모은 채로 어설픈 웃음을 흘려대고 있었다. 나는 하아,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그런 녀석의 옆에 걸터앉았다. 에세렌은 움찔 하며 옆으로 살짝 비켜났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늘은 새카만 빛을 띄고 있지만, 달이 있어서인지 아직 완전한 어둠에 묻히진 않았다. 나는 언제 보아도 매혹적인 그 달빛을 따라 시선을 돌리며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 다. "나……. 카민이 뭘 바라고 있을지, 생각해봤어." "아." "……내가 많이 슬퍼하고 있길 바랄까? 내가 변하길 바랄까? 내가 무엇인 가 해주길 바랄까?" 하늘에 뜬 별이 총총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날이 밝겠지. "한참 생각했는데……. 녀석은 내가……. 변하지 않길 바란다는 생각이 들 었어. 그녀석이라면, 그냥 나한테 편하게 살아가라고, 그렇게 말할 거라고." "예! 그럴 겁니다! 당연하죠! 당연한 겁니다!" 에세렌은 당장 만세를 할 듯한 포즈로 그렇게 외쳤다. 나는 피식, 웃어버 렸다. "그래, 그럴 거야. 하지만……." 나는 고개를 떨궜다. 그래, 카민. 네가 뭘 바라는지는 알 것 것 같아. 하지만 나는―. 카리스와 이토미즈만은, 산산이 부숴 버릴 거야. 그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지, 카민? 응? ---------------------------------------------------------- 아직 비축분이 남았습니다... 약 20연참 가까이의 분량을 만들었었는데... 방금 전 데이터를 저장하는 과정에서 약 10페이지 정도가 날아갔습니다(2편 분량) 패닉입니다... 오랜만에 돌아와서 실망을 안겨드리진 않았나 걱정이 크군요... 이런.. 너무 오랜만이라 라니안의 비밀번호조차 까먹어버렸습니다ㅠ_ㅠ 성실하겠다는 말은 차마 못하겠군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Comment : 40, Read : 1470, 2002/08/23 Fri 05:09:12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3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68 하지만 나는―. 카리스와 이토미즈만은, 산산이 부숴 버릴 거야. 그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지, 카민? "아?" 굳게 결심을 하며 눈을 감았던 나는, 그러나 그 순간에 바로 눈을 도로 떠 야만 했다. 샤악샤악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바람. 저 너머에서 바람이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그 바람 소리에 섞여 은은하게 비치는 것은 조금 다른 기운. 무엇일까? 무엇인가가 있다. 라이메데스? 아니다, 라이메데스는 아냐. "앞쪽에 무리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상해. 방금 전까지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 는데? 어떻게 된 거지? 몸의 털이 바짝 곤두서서 갑작스레 나타난 무엇인가 를 경계한다. "정말요?" 앞쪽에 무리가 있다는 말에 에세렌이 반색하며 발딱 일어섰다. "야호! 가서 음식을 얻어먹는 게 어때요? 안 그래도 저녁 식사가 부실했는 데요!" "아니, 잠……." 그러나 내 말은 무의미하게 공중으로 흩어졌을 뿐이다. 식사가 부실했는데 요, 라는 말과 함께 에세렌은 성난 말처럼 이미 두두두두 뛰어가 버린 후였 으니 말이다. "……너 잘났다 그래." 한 번 생각해보지도 않고 뛰어가 버리는 에세렌의 뒷모습에 피식 실소하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레이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번번히 생각하는 거지만 말이에요.」 "응?" 「저 신관은 마리에나의 신관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센치오의 신관이라는 편 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잔뜩 심각한 그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센치오? 그게 뭔데?" 「식욕의 신.」 "그, 그런 것도 있냐?" 「인간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확실히 있긴 있어요.」 으, 으음. 그, 그런 것도 있단 말이지. 나는 갑자기 쏟아지는 땀을 살짝 닦으며, 에세렌이 이미 흙먼지 날리며 뛰 어가 버린 길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는 여러 기척. 이상하다. 이렇게 많은 기척을 내가 여태까지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어. 예전의 나도 이 정도 거리의 기척이라면 느꼈는데, 각성한 상태의 내 감각 범위는 예전보다 넓어 졌을 테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 나는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건 분명히 에세렌의 목소리. 나는 얼른 뛰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묻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상당히, 뜻밖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시끄러워!" 남자 여럿이 있었다. 곱상하게 생겨먹은 것이, 척 봐도 귀족가의 자제처럼 허여멀겋다. 흠, 흐음. 하나같이 너무나 잘난 얼굴들이라 짜증이 날 정도 지만, 흥, 아무리 그래봤자 나보단 조금 못하군. "뭐하는 거냐?" 나는 얼른 뛰어가 그렇게 물었다. 에세렌의 옆쪽에 도열해있던 남자 여럿 이 움찔하며 옆으로 비켜난다. 나는 한참동안 그들을 빤히 바라보다가, 에 세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에세렌이 소리를 빽 지 른다. "아니, 칼레들린님! 이 사람들을 보라구요!" 그 말과 함께 에세렌이 손가락을 척 들었다. 그리고 그녀석이 가리킨 곳에 는. "뭐냐, 저건?" 거기에 있는 것은, 마치 사육장에 가둬진 가축 같은 모습의 아이였다. 빽 빽한 나무들로 만든 마차 안에는, 몸을 웅크리고 앉은 아이가 있었다. 나무 틈으로 얼핏 보이는 외모로 추정해보면, 이제야 겨우 15, 6살 정도? "보면 모르냐? 노예다." 남자 여섯명 중 하나가 불쾌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나는 뭔가 상당히 기분 이 나빠져서,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귀가 먹을 만큼 커다란 목 소리가 튀어나온 건 그 때였다. 녀석들은 불쾌한 듯, 고개를 돌리며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뭐라구요! 노예라구요!?" "크흑!" 너무나 엄청난 고성에, 남자들은 물론이고 나마저 귀를 막아야 했다. 크, 크워어어어! 라이메데스도 모자라 이 녀석까지! 누가누가 목소리 큰가 내기 를 해봐라! 크아, 귀먹겠다, 진짜! "방금 노예라고 했습니까?!" 에세렌이 재차 물었다. 남자들은 그제야 귀를 막고 있었던 손을 주섬주섬 떼어내며 차갑게 대꾸했다. "그래, 왜." "저렇게 어린애가 노예라는 겁니까?" "나이 따위는 상관없어." 에세렌은 말도 안돼, 라는 얼굴로 인상을 썼다. 에세렌은 곧, 남자들 사이 를 거쳐 남자 중 한 명이 끌고 가던 자그마한 수레감옥 가까이로 다가갔다. 녀석이 다가가는 동안 남자들이 가만히 있었는가? 물론 그 것은 아니지만, 에세렌은 그 이름도 유명한 폭력신관이 아니던가! '이봐, 이게 무슨 짓이야?' 라는 말과 함께 남자들이 다가올라치면, 에세 렌은 싸늘한 얼굴로 말없이 그들의 얼굴에 주먹을 선사했다. "대, 대체, 너, 너는 뭐냐!" 에세렌의 무지막지한 주먹에 두 명이 나가떨어지자, 나머지 녀석들은 놀란 듯 에세렌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에세렌은 흥,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빳빳이 들더니 매우 자랑스럽고 당당한 어조로 자신있게 외쳤다. "뭐긴 뭡니까! 제 이름은 에세렌 이네아스! 마리에나님의 성스러운 은총을 받고 태어난 교단의 제가 프리스트!" …사람을 패대기치는 주제에 그걸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냐, 너는? 남자들은 말도 안돼! 라는 얼굴로 에세렌을 보다가 저희들끼리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프리스트래!" "말도 안돼! 아까 주먹이 장난이 아니었다고! 넬슨의 주먹도 이 정도는 아 니었는데!" "하지만 저 옷을 봐! 그러고 보니 신관 옷 같기도 해!" 아, 안 들리게 좀 떠들어라. 아주 고함을 치는구나. 에세렌은 그들이 떠드는 틈을 타서 얼른 그 수레 앞에 섰다. 녀석은 고개 를 숙인 상태에서 안에 타고 있는 것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한참을 살 피던 에세렌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버럭 고함을 쳤다. "이봐요! 저 온 몸의 채찍 자국과 상처는 뭡니까?" "흥, 노예에게 채찍질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건가?" 한참 에세렌의 정체(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저게 신관이야 아니야, 를 놓 고 녀석들은 열기어린 토론을 버리고 있는 중이었다)를 놓고 투닥이고 있던 남자 중 하나가 그렇게 외쳤다. "그럼 그게 제대로 된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에세렌이 다시 한 번 버럭 고함을 질렀다. "상관하지 말고 신관이라면 신관답게 갈 길이나 가!" "아니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신관이라도 이렇게 했을 겁니다! 이리도 작 은 아이가 상처받고 있는데 그냥 가면 신관이라 할 수 없지요!" 음, 으음. 넌 이미 신관이라고 할 수 없으니 그냥 지나가도 별 일 없을 듯 한데? ……라고 말하고 싶다만 참아야겠다. 에세렌의 눈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이, 지금 내가 한마디하면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뭐, 내가 나설 필요 따윈 없겠군. 에세렌 녀석, 신관답지 않게 상당히 주 먹도 센 듯 하니(그러고 보면 샤데린 산에선 괴물을 주먹으로 잡았다고도 했던가!)나는 쉬어야겠군.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린 그 순간,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 천천히,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지나쳐온 곳에 는, 아까의 그 수레감옥이 있었다. 아이. 그 안에 있는 것이 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조금씩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굉장히 긴 머리카락이 치렁치렁하게 앞에까지 흘러내려서 엉망진창으로 온 몸을 가리고 있다. 그런 소년의 머리카락은… 확실히, 붉은색이었다. 나는 한참동안 홀린 듯, 그 아이를 보고 있었다. 문득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는 엷은 갈색이었다. 나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러면 그렇지. 붉 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일 리가 없잖아? 안 그래, 칼레들린? 젠장할, 대체 뭘 생각한 건지. "칼레들린님." 한참을 넋을 놓고 있었나보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치는 손을 느끼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에세렌이 숨 을 몰아쉬며 뒤에 서 있었다. "뭐하세요? 그렇게 넋을 잃고. 흐윽, 제가 저녀석들과 싸우든 말든 아예 신경을 안 쓰시는군요." "어차피 이길 거면서." "흑흑, 아니예요! 제가 얼마나 어렵게 이겼는데요!" 이봐, 상처 하나 안 난 얼굴로 하는 말치곤 상당히 신빙성이 없다고. 나는 흘낏 에세렌의 뒤를 보았다. 내가 꼬마에게 넋을 잃고 있는 사이 이 무적신관이 다 해치운 듯, 녀석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에세렌은 랄랄 라, 하고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방금 전까지 신관의 몸으로 사람을 때린 주제에 자책감 같은 건 전혀 없는 듯 했다. 하긴, 자책감을 가지면 그 건 절대 에세렌 이네아스가 아니지.)수레감옥 앞으로 다가갔다. 에세렌은 무릎을 살짝 굽히며 수레 감옥 안에 있는 아이에게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잠깐만 기다려. 곧 꺼내줄게." 퍼억! "……." 나는 에세렌이 손을 휘두르자마자 부서져버린 나무를 한참동안 빤히, 아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 저렇게 쉽게 부서진단 말인가! 에세렌은 한참동안 수레감옥을 열심히 파괴(파괴라는 용어 말고는 적당한 것이 없다)한 다음 안에 앉아 있던 아이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아이는 팔과 다리가 밧줄로 묶여 있었다. 에세렌은 열심히 그 밧줄을 끌러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어디 아픈 데는 없니?"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 에세렌은 그제야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챘는지 일어섰다. 아이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나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얘가 왜 이러죠?" "내가 너무 잘 생겨서 바라보나 보지." "…지금이 농담할 때예요?" 농담 아닌데.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에는 초점이 없어 보였다. 나는 가볍 게 한숨을 내쉬었다. 붉은색. 아니, 붉다기보다는 빨갛다고 해야 옳을 머리 카락. 갑자기 떠오르는 이미지 때문에 심장 언저리부터 시작해서 무엇인가 가 머리끝까지 솟았다 내려앉았다. 시선을 내렸더니, 하얀 피부가 보였다. 구타를 당하면서 튄 것인지, 말라 붙은 갈색의 피가 보이지만, 그 빛깔이 흰 피부를 완전히 가리진 못했다. 꼬마의 작고 동그란 얼굴 위에 나란히 박힌, 동그랗다는 표현보다는 땡그랗 다는 표현이 어울릴 듯한 눈동자. 그 눈동자는 너무 커서, 얼굴의 반을 차지할 듯한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아이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 았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는, 갈색이었잖아? 그런데, 빨간색이었다. 아까 전 수레 감옥에선 분명히 갈색이었는데, 그것은 어둠이 만든 환시라 도 된단 말인가? 이상해. 지금 나를 보고 있는 그 눈은 분명히, 빨간색이었다. 빌어먹을! 갑자기 심 장 언저리가 다시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래, 처음 만났을 때의 카민의 이 미지. 그 녀석은 피에 젖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거든. 잔뜩 경계하는, 그 동그란 눈으로 말이야. 상황은 비슷한데, 아이 자체는 카민과 느낌이 달랐다. 카민은 여자라고 착 각할 만큼 곱상하게 생겨먹어선 나를 경계하는 눈초리로 바라봤던 것에 반 해, 이 열 대여섯 살쯤 되 보이는 자그마한 아이는 곱상하게 생겼긴 해도 한 눈에 척 보아도 '소년' 이라고 알아볼 수가 있는 분위기였다. 큰 눈을 위로 치켜올려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 아이. 새빨간 머리카락이 길게, 거의 발끝까지 내려와 있다. 치렁치렁거리는 그것은 머리카락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길다란 실타래에 가까워 보인다. 한참 그 아이를 보고 있던 나는, 휙 하고 등을 돌렸다. "에? 칼레들린님." "가자." "예? 어째서요? 이 아이를 여기에 놔두고 가자구요?" 놀란 듯 에세렌이 내 소매를 부여잡았다. 나는 살짝 눈을 돌려 에세렌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 애를 데리고 갈 거냐?" "그, 그건 그렇지만. 적어도 마을까지 같이 갈 수는 있잖아요?" "싫어." 그 말과 함께 나는 다시 휙 하고 돌아서 버렸다. 그러자 마치 불만이 있다 는 듯이, 에세렌이 뒤에서 내 옷깃을 꽉 하고 잡아당긴다. 나는 살짝 짜증 이 나서 묵직하게 소리를 냈다. "뭐냐, 에세렌?" 그러나 대답이 없다. 그저 잡고 있는 옷을 더 꼬옥 잡을 뿐이다. "뭐냐구." "……." 계속해서 대답이 없는 에세렌의 태도에, 결국 나는 빽 고함을 지르고 말았 다. "왜 그래! 불만이냐!" "예? 으, 저, 저, 제가 아닌데요." 에? 잔뜩 당황한 에세렌의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 "엑?" 그리고, 나도 모르게 바보 같은 소리가 입에서 나와버렸다. 윽! 이, 이미 지 관리! 이미지관리! 이런 바보 같은 소리내면 안돼! 하지만 내가 당황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 옷을 잡아당긴 것은 에세렌 이 아니라, 꼬마였기 때문이었다. 붉은 눈동자로 나를 보는 그 아이와 정면 으로 시선이 부딪힌 순간 갑자기 심장 언저리가 아팠다. "……져." 그 아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자그마한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 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당황함에 고개를 갸웃하는데, 그 아이가 다시 한 번 입을 연다. "책임져." "에? 뭐라고?" 아이는 동글동글한 눈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갑작스럽게 눈을 스르르 감아버렸다. "앗! 우잇!" 상당히 기괴한 소리를 내며 에세렌이 넘어지는 그 아이를 받쳐 안지 않았 다면, 그 아이는 저 넓은 땅과 격한 포옹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 "……하, 하하." 에세렌은 아이를 안은 상태에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한참동안, 그 자세에서 석화(石化)되어 있었다. Comment : 3, Read : 652, 2002/09/08 Sun 22:45:24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3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69 황당. 당황. 경악. 지금 상황을 딱 세마디로 정의해본다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정의하겠다. 지금, 정말로 엄청나게 황당하다. 나는 에세렌의 품에 안긴 채로 쌔근쌔근, 아주 편하게도 푸우우우욱 잠이 들어버린 그 붉은 머리카락의 꼬마의 잠자 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 왔는지, 라이메데스 녀석은 자리에 앉은 채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 다. "어이, 어디 갔다왔……." 일어서며 말을 하다말고, 라이메데스가 입을 벌린 그대로 딱하고 굳어버렸 다. 녀석은 한참동안 나와 에세렌, 그리고 에세렌의 품에 안긴 그 아이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는데, 그런 녀석의 눈은 심할 정도로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지, 징그럽다. 그 커진 눈 저리 치워! 그 딴 귀여운 표정이 네녀석 의 느끼한 이미지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녀석은 그 눈으로 한참동안 말없이, 에세렌의 품에 안겨 들려온 그 꼬마를 유심히 관찰하다가 어느 순간 툭 하고 내뱉었다. "뭐냐?" 말은 뭐냐, 였지만 뭐, 뭐야! 저게 웬 꼬마냐고! 로 들리는군. 나는 녀석 의 큰 눈동자를 무시하며 자리에 털썩 앉아버렸다. "칼레들린. 저게 뭐냐니까?" 에잇, 젠장. "몰라. 책임지라잖아." "……뭘 책임져?" 퉁명스럽게 뱉어낸 내 말에, 라이메데스는 당황한 나머지 말하는 타이밍마 저 한 박자 놓쳐 버렸다. "내가 알게 뭐냐. 나보고 책임지라면서 픽 쓰러지던데?" "너, 설마 어디서 나 모르는 새에 사고 쳤냐? 나는 조용히 일어서 그 녀석의 몸을 발로 꾸우욱 눌렀다. "그 입, 찢기 전에 닥쳐." 내 큰 목소리에 녀석도 인상을 찌푸리며 버럭 고함을 친다. "그럼 뭘 책임지란 거야?" "악! 두 분 다 조용히 좀 해요! 애가 깨잖아요!" "……." "……." 갑자기 빽하고 들려온 새된 목소리에 나와 라이메데스는 천천히 녀석을 돌 아보았다. 에세렌은 아이를 꼭 안은 채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흥, 웃기 지도 않네. 네 녀석 목소리가 우리보다 몇 백 배는 크다. 헉, 저 큰 소리를 듣고 숨소리 하나 안 흐트러뜨리고 자는 저 꼬마녀석도 대단하군. 라이메데스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에세렌을 한참 보다가 하, 하는 소리를 냈다. "너, 참 많이 컸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에세렌이 움찔하고 어깨를 좁혔다가, 다시 당 당하게 폈다. 순간, 우리들 사이로 갑자기 썰렁한 침묵이 찾아왔다. 그렇게 우리 셋이 잠시 침묵을 지키는데, 라이메데스가 조그맣게 다시 말문을 열 었다. "장난은 그만하고, 이 애는 뭔데?" 에세렌은 그제야 자그마한 목소리로 차근차근하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 다. "흐음. 쓸데없는 짓을 했군." "뭐라구요!" 에세렌은 발끈한 듯 고함을 쳤다. "뭐가 쓸데없는 짓이라는 거예요?" "그럼 그게 쓸데없는 짓이지 뭐야?" 라이메데스는 그 아이를 한참동안 내려보다가 이번에는 내 쪽을 보았다. "여기다 버리고 갈 거지?" "버리다뇨! 이렇게 잠이 든 애를?" 에세렌은 당치 않다는 듯 그 애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며 우 리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그럴 수 없어요! 일단 마을까지 데리고 가요!" "……이젠 명령까지 하냐?" 내가 어이없다는 듯 그렇게 내뱉자 에세렌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여신의 이름으로 절대로 마을까지 데리고 갈 겁니다!" 그래그래, 네 여신을 이럴 때 써야지 언제 쓰겠냐. 참 편리한 여신이라 좋 겠다. 나는 후,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라이메데스를 돌아보았다. 라이메데 스는 굳은 얼굴로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나는 라이메데스를 바라보며 조그 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역시, 그거지?」 내 말에 라이메데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일어나, 잠꾸러기 같으니라고." "……." 으, 뭐라는 거야? "일어나! 해가 중천에 떴다구!" 조용히 해! 시끄럽다고! "어쭈, 안 일어난다 이거지∼" 웁? 웁?! 우우우웁! 나는 코끝을 꽉 하고 압박하는 무엇인가에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푸핫!" "흥." 윽, 눈부셔! 갑작스레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견디지 못하고 얼른 시선을 밑으로 꺾는 내 시야에, 자그마한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아? 발이었다. 자그마한 아이 의 발. 놀라서 얼른 고개를 올리자,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동그란 눈동자가 들어온다. "넌?" 그건,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이었다. 갑자기 어젯밤의 영상이 머리에 선명 하게 떠올랐다. 나는 한참동안 인상을 찌푸리며 꼬마를 보았다. "밥." 그런데 황당하게도, 허리에 손을 척, 하고 올린 상태에서 녀석이 그렇게 당당히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 화, 황당해. 황당하다구! "밥!"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우오오오, 지금 이 상황을 누가 내게 납득좀 시 켜봐! ◇ ◇ ◇ "이름은?" "키르!" "나이는?" "그딴 거 몰라!" "부모님은?" "알게 뭐야!" "왜 여기 있었어?" "어쩌다보니." "어디에 살아?" "아무데나 살아. 에잇, 젠장.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명언도 몰라? 조용히 좀 해!" "……." 마지막 말의 타격이 컸는지, 에세렌은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입 을 꾸욱 다 물어버렸다. 에세렌은 조금 풀린 눈동자로 멍하게 녀석을 보고 있었다. 나와 라이메데스 역시, 조금 당황한 채로 그 녀석을 빤히 내려다보 고 있는 중이다. 양손을 도르레처럼 왔다갔다하면서 열심히 입으로 음식을 퍼담고 있는 녀석의 긴 머리카락이 치렁치렁하게 땅에 끌린다. 녀석은 아주 열심히, 자신의 앞에 쌓여 있는 붉은색의 열매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에세렌은 거의 울 듯한 얼굴로 사라져 가는 그 열매를 보고 있다. 으우, 저거 아침부터 따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라며 울먹대는 에세렌 녀석. 그런 에세렌의 서글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계속 먹어대고 있을 뿐이다. 작은 산 모양으로 쌓여있던 그 열매가 뚝딱뚝딱 낮아진다. "푸하." 다 먹었는지 고개를 든 녀석은 그 똘망똘망한 눈으로 고개를 들며 나를 빤 히 보았다. 크흑, 난 뭘 먹으라고! 를 외치며 씨도 안 남은 열매의 곽을 바 라보며 에세렌. 그런 에세렌을 깡그리 무시한 채로, 꼬마녀석이 고개를 팩 돌리며 한다는 말이 정말 가관이다. "……더럽게 맛없네." "실컷 처먹고 무슨 헛소리야!" 내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녀석이 다시 한 번 흥, 하며 고개를 돌린다. 으, 으우! 으아아악! 거, 검이! 검이 내가 힘도 안 줬는데 알아서 뽑히려 한다! "맛없어. 고기 줘." 가, 가지가지 한다 진짜. "니가 잡아먹어." 나는 그렇게 뱉어놓고 너무 어이가 없어져 벌떡 일어서 버렸다. 에세렌 역 시 황당한 것은 마찬가지인 듯, 어젯밤 저 녀석을 그렇게 열심히 감쌌던 주 제에 오늘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버벅대고 있을 뿐이었다. 내 참. 어이 가 없다없다 하려니 정말 없다. "가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라이메데스 역시 일어섰고, 에세렌도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다. 그런데 내가 막 한 발자국 움직이려는 순간, 덥썩 뒤에서 누가 내 옷을 잡는다. "뭐야?" "……왜 가?"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 또다시 황당의 늪으로 던져지다. 나는 눈을 똘망 똘망하게 빛내며 내 쪽을 바라보는 녀석을 보며 다시 굳었 다. "그럼 안가냐? 너 이 자식 뭐하는 거야? 이거 안 놔?" 내 말에 그녀석이 헤에, 하고 웃는다. "안 놔." "뭘 안 놔!" "책임진다구 그랬잖아!" 뭘 책임져? 누가? 내가? 너를? "크아아악! 내가 언제!" 그러자 꼬마가 내 옷을 잡은 손에 힘을 꼭 준다. 그리고는 라이메데스와 에세렌을 돌아보며 당돌하게 말한다. "얘가 나 책임진다구 그랬지? 응?" "……." "……." 분위기는 한없이, 아주 한없이 썰렁해지고 있었다. ◇ ◇ ◇ "목적지가 어디야?" "에디 에이렌의 숲이란다." 에세렌은 상냥하게 웃으면서 대답해주었다. "엑? 거긴 왜 가는데?" 저 빌어먹을 놈의 꼬마는 화들짝 놀란 듯한 소리를 내며 에세렌을 보았다. 에세렌은 곤란한 듯 웃으며 말한다. "그런데 꼬마야." "꼬마 아니라 키르. 키르다." 당돌한 어조로 꼬마 녀석이 말했고, 에세렌은 당황한 듯 하하, 하는 소리 를 냈다. 나는 아예 저놈의 꼬마를 무시하기로 작정했던 터라 무슨 소리가 들려오든 신경을 쓰질 않았다. 라이메데스는 왜 저 꼬마가 우리 뒤를 줄레 줄레 따라오고 있는지를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지만 내가 그것을 답해 줄 수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젠장, 따라오지마! 하고 소리를 지르면 뭐야? 책임진다며! 를 연발하며 따 라오는 통에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 대체 저 놈의 꼬마는 뭐야! 네가 어떻게 좀 해! 라고 내가 소리를 치 자 에세렌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저, 저기 그럼 다음 마을에 갈 때까 지만 같이 가면 안될까요. 산길은 위험하니까요. 라고 말이다. 라이메데스 와 나는 전혀 탐탁치가 않았다. 특히 라이메데스는 무척이나 싸늘한 눈매로 싫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이 놈의 꼬마가 눈을 매섭게 빛내며 뭐가 싫어? 이 녀석이 나 책임 진다고 했단 말야! 라며 나를 가리키는 바람에, 내가 변명할 틈도 없이 이 녀석은 '마을이 나올 때까지' 잠정적으로 일행이 돼버리고 만 거다. 흑흑, 나도 참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언제나 늘 생각하는 거지만 꽃미 소년은 원래 마음까지 착한 것인가? 아니면 나만 그런 건가? 아, 어찌됐든 이렇게 마음이 물러서야 정말 큰일이야. "그, 그럼 키르. 왜 나한테 반말하니?" 부드러운 어조를 내려고 애는 쓰고 있지만, 저 폭력 신관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음, 상당히 열 받았군. "뭐가. 나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어." 꼬, 꼬마 주제에! "그러니까 몇 살이냐고!" "안 가르쳐줘." 말없이 입을 꾹 닫는 걸 보니, 에세렌은 결국 포기한 듯 했다. 산에서 마을로 가는 길은 상당히 멀어서, 마을까지 하루면 될거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우리는 이틀씩이나 저 꼬마녀석과 같이 걸어다녀야 했다. 그리 고 말할 것도 없이 저 꼬마놈은 일행으로썬 최악에 최악에 최악인 놈이었다. 꼬마녀석(지 말로는 키르라고 한다만)은 엄청나게, 무진장, 심하게 귀찮은 존재였다. 식사 때엔 끊임없이 반찬 투정을 했고(에세렌은 오른손을 부들 부들 떨며 맛없으면 차라리 날줘, 날 달라고! 를 외쳐댔지만 꼬마놈은 못 들은 건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다리가 아프다며 짜증을 냈고 끊임없이 투덜대고 끊임없이 시끄럽게 굴었다. 산길을 걷는 내내 스트레스, 스트레스 스트레스! 정말 엄청난 스트레스 덩어리의 놈이었다. "크아아아! 적당히 해!" 라고 우리 중 누군가가 소리를 칠라치면, 그 동그란 눈으로 나를 보며 한 다는 소리가, "그치만 얘가 책임진댔는걸?" 이었다. 우오오, 내가 안 미치고 베기겠는가! 흑흑, 어찌됐든 꼬마를 만난 후 이틀만에 마을에 도착한 나는 정말 속으로 눈물의 강을 만들며 쾌재를 쳤다. 그래. 이제 끝이다. 영원히 안녕, 이 꼬 마 녀석아. "에디 에이렌까지는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는군." 라이메데스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에세렌은 너무나도 홀가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게요." "기분 좋군." "저두요!" 이녀석들이 이렇게까지 말이 척척 맞았던 때가 또 있었던가. 신기하군. "그럼 안녕, 키르." 에세렌은 뿌듯한 얼굴로 몸을 돌려 키르를 향해 손을 흔들며 그렇게 말했 다. 그런 녀석의 말이 희미하게 '다신 만나지 말자' 로 들렸다면 그건 내 착각이었을까. 그런데 이 키르란 놈은 에세렌이 안녕, 이라고 하자마자 놀 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이 아닌가. "에? 왜?" "응? 뭐가? 이제 헤어져야지?" "왜?" 너무나 황당하다는 얼굴로 왜? 라고 외치는 꼬마놈을 보며 우리 셋은 모두 싸하게 굳어버렸다. 놈은 히, 하고 웃으며 부다닷 달려오더니 내 팔뚝을 덥썩 잡았다. 헉, 뭐, 뭐냐! "왜, 왜 이래?" "왜 이러긴? 나 책임지기로 했잖아." 후, 후훗. 이봐. 나는, 나는 건전하게 살아왔다. 착하고 똑바르게 말이다. 여자 같은 건 건드린 적도 없고 물론 책임질 일 같은 건 한 적도 없다구! 근데 근데 근데! 네녀석은 뭐야? "좋은 말로 할 때 떨어져라." "……싫어, 난 네가 맘에 들었단 말야." 그 말과 함께 녀석이 씨이익, 하고 깊게 한 번 웃었다. 순간 온 몸에 돋아 난 그 엄청난 소름이라니! 헉, 허억! 이, 이거 누가 대패로 좀 밀어줘. "난, 너 싫어." "상관없어. 내가 마음에 들었어." 그 말과 함께 다시 한 번 씩 웃는 그 놈. 순간, 에세렌이 부다닷 달려와서 내 한 팔을 잡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라이메데스 역시 내 어깨를 잡고 뒤로 당겼다. 녀석들이 동시에 잡아당기는 그 엄청난 약력에 나는 키르의 손에서 쉽게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튑시다!" "튀어!" "가잣!" 셋이서 동시에 그렇게 말하고 막 등을 돌렸다. 저 라이메데스 녀석마저 진 지한 얼굴로 도망을 가려는 이 중대한 순간. 그런데, 그런데! 우두두두두둑. 뭐, 뭐, 뭐냐, 이 소리는!! 빈말로라도 절대로 듣기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우드득거리는 소리에 경악한 나는 잠시 상황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부, 분명 에세렌이 입은 건 법사 복이야. 이런 소리는 나지 않지. 우두둑보다는 지지직하는 소리가 날 테니 말이야. 라이메데스녀석은 꾀죄죄한데다가 찢어지기까지 한 더럽기 그지없 는 로브. 녀석 것도 이런 소리가 나며 찢어지는 소재의 옷은 아니지. 그럼 나는? 내 옷은? 천천히 돌아본 순간 나는 완전히 얼어버렸다. 다, 다, 단이 뜯겨져나간 검 은색의 옷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으아아아! 안 그래도 오랜 고생 끝에 엉망이 되어있던 나의 검은색 옷의 단은 완전히 뜯겨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뜯어진 단을 잡고 있는 건 으, 으, 그 놈의 꼬마! "놔, 라." 부글부글, 속에서 끝없는 분노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이라 도 폭발할 것 같은 내 마음을 있는 대로 없는 대로 다 뒤집으며 꼬마녀석은 피식, 하고 웃어 보였을 뿐이다. "싫, 어." "놓으라니까!" 그 말과 함께 온 몸으로 강하게 회전을 해서 녀석을 뿌리치는 순간이었다. "으……." 음? 이, 이건 또 뭐냐! 왜 갑자기 입술 부근에 손을 갖다대더니, 울먹거리 는 모양을 내는 거냐고! 으에엑! 뭐, 뭐하자는 거야!" "으으…… 으으으…… 으으으으…… 우앙!!" 헉. 갑자기 튀어나온 울음소리에 나는 완전히 굳어버렸다. 키르 녀석은 내 눈 을 힐끔 한 번 올려다보더니, 그대로 주저앉아서 다시 한 번 크게 울음을 놓아버렸다. 에세렌이 히익, 하는 소리를 내며 내 바로 뒤에 와서 섰다. 곧 라이메데스 녀석이 땀을 뻘뻘 흘려대며 내 옆에 조심스럽게 와서 섰다. 그리고 우리 셋은, 아주 어이가 없어서 어이가 생길 것 같은 기분을 느끼 며(말이 안 된다고? 지금 말이 안되고 말고 그게 문제냐!)울어대는 녀석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꽤 큰 마을의 시장. 지금의 상황은? 애가 운다. 키르 녀석은 시장 바닥에 앉아서 발을 마구 이리저리 움직이며 울고 있었 다. 너, 너, 너, 대체 뭐하는 거야! "혀, 혀어어엉……." 음? 형? 여기에 형들이 어디에 있는데? "흐윽, 흐윽. 너무해! 혀, 형은 날 버리려는 거지?" 그, 그런 말을 하면서 왜 나를 보는데? 어, 어이! 다가오지 말라고! 이, 이봐! 나는 내 바짓단을 사정없이 붙잡는 키르의 자그마한 손을 뿌리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완강한 힘으로 내 바지를 붙잡은 꼬마놈의 팔힘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라이, 이 자식아! 아예 벗 겨라 벗겨! "이거 못 놔?" "그, 그치만 형아… 내가 놓으면 날 버릴 거잖아……." "누가 네 형이야! 이 망할 꼬마 놈앗!" 그렇게 버럭 고함을 지르고 바짓단을 억지로라도 잡아 빼려고 나는 발을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묵직한 힘이 느껴져 왔다. 살짝 돌아보니 에 세렌이 내 팔 언저리를 가만히 잡고 심각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딱딱하 게 굳은 표정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는 에세렌 녀석. "뭐야? 설마 이 상황에서 배가 고프다거나 하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겠 지?" 녀석이 너무나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저 녀석은 밥 얘기할 때 제일 진지했다)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렇게 물었다. 에세렌은 살짝 고개를 저으 며 조그맣게 입술을 움직였다. "칼레들린님, 주위를 좀 돌아보세요." 음? 주위를? 아무 생각 없이 시선을 살짝 돌렸던 나는 그 자리에서 돌이 되고 말았다. 아주머니 아저씨, 나이 든 할아버지, 자그마한 아이들, 그리고 심지어 지나 가던 개들까지 멈춰서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이 세상 최강의 꽃돌이인 나, 칼 레들린 엘버지운 피엘이 서 있는 이 곳. 훗, 여기서도 나의 아리따운 미모 는 빛을 발하는군 그래. 그렇게 반짝이는 눈으로 보지 말라고. 안 그래도 나는 여기 잠시 동안 있을 예정이…… 으아악! 이게 아니잖아! "뭐, 뭐냐 이 인간들은!" 내가 속닥거리자 에세렌이 고개를 재빨리 저으며 모르겠는데요, 라고 속삭 였다. "흐윽, 흐윽, 혀엉, 혀엉, 나 버리지마. 응?" "이, 이 놈의 자식이! 너 정말로 죽는다!" 그러자 딸꾹, 하고 아주 실감나게 눈물을 삼킨다. 가, 가증스러운 것! "형,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맹세했잖아. 어린 키르 우리가 잘 키울게요, 그렇게 말했잖아. 흑, 흑, 흑. 그런데 그렇게 말해놓고 이렇게 배신하는 거 야? 여기에 나 버리고 가는 거야? 흑, 흐윽…… 형아, 형아. 그러지 마. 그 럼 부모님이 슬퍼하실 거야. 흑흑."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나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지르자, 마치 짜기라도 했는지 사람들의 수근거 림이 한층 더 높아졌다. 난 뭔가, 뭔가 이게 아닌데… 라고 슬슬 느끼기 시 작했다. 이 꼬마 자식이! 키르는 그 때도 오른손으로는 내 상의를 잡고, 왼손으로는 여전히 내 바짓 단을 잡은 채 울먹이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꼬마 자식이 정말 죽어보려고 이러나, 싶어서 막 오른손을 들어 녀석을 때리려는 순간이었다. "저런 몹쓸 인간이!" 갑자기 저 멀리에서 우두두두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엑? 하는 소리를 내며 돌아보는데 헉, 하는 느낌과 함께 갑자기 몸이 공중에 떠버렸다. "이 인간아! 이런 꼬마를 버릴 셈이냐 그래?" 나는, 멱살이, 잡혀 있었다! 정말 이렇게 황당할 수가. 머리에서 샘솟은 땀방울이 천천히 온 몸을 타고 흘러 아주 목욕을 하는 기분이었다. "뭐하는 짓이냐!" 다음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라이메데스가 내 멱살을 잡은 자의 손을 내치긴 했지만 나의 황당함을 사라질 줄을 몰랐다. "이 꼬마는 이렇게 어리잖아! 버릴 셈이냐?" "오지랖도 넓군." 라이메데스는 한숨을 쉬듯 그렇게 뱉어놓고 갑자기 로브를 살짝 흐트러뜨 렸다. 녀석의 몸에서 약한 마기가 흘렀다. 헉, 허억! 이 자식 설마 싸울 셈 은 아니겠지! 다시금 사방을 훑어보는데, 우리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인간들이 하나같 이 곱지 못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듯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 온다. 키르는 지금 상황이 자기 때문에 생긴 매우 아름답고 재미있는 상황 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주제에, 또다시 가련한 척 연기를 하기 시작 했다. "형! 혀엉. 싸우지마. 응? 혀엉, 내가 잘할게. 앞으로도 매일 새벽 여섯시 에 일어나서 물 길어올거고, 형이 하라는 심부름도 다 할게. 그러니까, 그 러니까 나 버리지마… 응? 나 버리지마아! 아저씨, 아저씨도 우리형한테 그 러지 마세요……." 애절하게, 눈에는 방울방울 눈물까지 매달고선 그렇게 외쳐대는 키르녀석. 정말 이걸 갖다가 확! "아니 이런 나쁜 사람들이 있나! 정말 두고두고 못 보겠군." 바로 그 때, 저 멀리에서 한 명의 알 수 없는 아주머니가(……생선을 팔다 가 달려온 것인지 한 손에 생선이 들려 있었는데, 그걸 확 하고 내팽개친 차였다. 무, 무서워! 아까 그 남자보다 백 배는 무섭다!)부다닷 달려왔다. 먼저 내 멱살을 잡았던 남자의 옆에 서서,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삿대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뭔가 일을 벌릴 것 같았던 라이메데스마저 온 몸에서 솔솔 풍겨오는 향기 로운(설마 아직도 반어법을 모르는 바보인 건 아니겠지?)생선 냄새에 슬슬 물러서고 있다. 아주머니는 아직도 내 바짓단을 놓을 줄 모르는 키르를 한 번 바라보더니, 손가락을 높이 세워 우리를 찌를 듯 굴며 고함을 질렀다. "동생을 버리면 쓰나!" "동생 아니다." 내가 고개를 삐딱하게 들며 그렇게 한 말에, 갑자기 그녀가 버럭 고함을 친다. "나이도 얼마 먹지 않은 게 어디서 반말이야 반말이!" 헉. 「인간계의 나이 먹은 여자는 조심해야 한다는 거 알죠?」 레이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그, 그랬냐?」 「그래. 흔히 아줌마라고 불리는 저 사람들은 참 무섭다고 들은 적이 있어 요.」 레이네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뒤로 자근자근 물러섰다. 에세렌이 나와 보 조를 맞춰 뒤로 살짝 물러서면서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여왔다. "칼레들린님. 일단은 여기를 뜨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러다간 몰매 맞을 것 같은데요?" "몰매든 뭐든 좋으니까 저 생선 냄새 좀 어떻게 해줘."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에 그렇게 말했더니, 에세렌이 고개를 끄덕인다. "뭐하는 거야! 그러고도 형제야? 어서어서 챙기지 못해?" "아, 아, 예예." 에세렌은 얼른 키르를 안아 올렸다. 순간, 내 쪽을 바라보며 키르가 씨익 하고 한 번 웃었다. 케, 켐 알슈타드까지 부르르 떨리며 나와 분노를 함께 하고 있었다. 키르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에세렌의 목에 찰싹 매달려서 다시 울기 시작했다. "흐윽, 나 안 버리는 거지?" "……그, 그, 그래. 아, 아, 안 버릴게." 목소리가 떨리고 있고, 주먹이 부들거리고 있군. "그래야지!"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조용히 에세렌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일단, 가자." "……예." 우리는 조용히 움직였다. "애 잘 키워!" 크아아악! 시끄러워, 아줌마! Comment : 3, Read : 594, 2002/09/08 Sun 22:46:40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3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70 "너, 너 대체 왜 이러냐?" "왜 이러긴." 키르가 살짝 웃어 보였다. 싱긋, 하고 웃는 녀석의 치아가 고르게 드러나 반짝이는 붉은 입술 사이에서 부드럽게 빛났다. 꼬마녀석은 분명히, 상당히 귀여운 외모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 내 눈엔 저게 절대로 귀 여워 보이지 않는다. 그저 박박 갈아 마시고 싶은 얼굴일 뿐이지. "이렇게까지 했는데 데려가 줘, 응? 책임진댔잖아." "우리가 어딜 가는 줄 알고!" 내가 버럭 고함을 치자 입가에 매단 웃음을 조금 더 깊게 하며 녀석이 말 했다. "에디 에이렌의 숲이라며?" 도대체가 이 녀석은!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키르를 노려보았다. "내 눈 똑바로 봐봐! 찔리는 거 없어?" 그러나 키르는 찔리는 게 전혀 없다는 얼굴로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 자식아, 정말로 찔리는 것이 없다는 게 말이나 되냐? 나 의 이 심연과도 같은 깊은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봐! 이 맑디맑은 눈을 보면서도 찔리는 게 없다면 그건 말도 안돼! "그 썩은 눈깔을 보면서 내가 뭘 느껴야 하는 건데?" 커헉! 이 호수보다 맑은 눈동자가 뭐가 어떻다고! "이만해둬." 발끈해서 뭐라고 외치려는데, 라이메데스의 목소리가 나를 가로막았다. "너, 장난은 그만둬." 라이메데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렇게 말해도 키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라이메데스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순간, 라이메데스의 초록색 눈동 자에 얼핏 무엇인가가 스쳐지나갔다. 빌어먹을! 그 눈에 스친 건 광기였다. "잠깐, 라이메데스!" 나는 재빨리 라이메데스를 치며 녀석을 불렀다. 녀석은 조금 굳은 눈동자 로 나를 보았다. "일단, 이건 내가 해결할게." 녀석의 눈이 가볍게 가늘어졌다. 나는 하아,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에 에세렌을 보았다. "이봐, 에세렌." "폭력은 안돼요, 칼레들린님! 이 아이는 아직 어리단 말이에요!" 누, 누가 뭐랬냐? 뭐냐 그 눈은! 그 반짝반짝 빛나는 눈 저리로 치우라고! "너는 일단 저기 가서 음식이나 사고 있어. 이 녀석은 처리하고 데리러 갈 게." "예? ……예, 그럴게요." 내 눈에서 뭘 읽었는지, 의아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던 에세렌은 순순히 고 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라이메데스." "뭐냐?" "너도 일단은 저리로 가 있어. 너 있으면 제대로 못할 것 같으니까." 내 말에 라이메데스의 인상이 설핏 굳어졌다. 「너, 확실히 알고 있는 거지?」 라이메데스가 가만히 전음을 보내왔고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 처음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날 바보로 아냐?」 라이메데스는 나를 힐끗 보았다. 뭔가 상당히 못 믿는 듯한 눈초리였다. 「야, 나도 각성했어. 한 번 믿어보라고.」 내 말에 라이메데스는 그제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조금 굳은 듯 한 초록색 눈이 한 번 키르에 맞닿았다 떨어졌다. 싸늘하게 키르 쪽을 노려 보던 녀석은 흰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에세렌이 달려나간 골목으로 살짝 사 라져버렸다. 그리고, 라이메데스마저 사라져버리자 골목에는 나와 키르, 둘만 남았다. 분위기가 가라앉을 만도 하건만, 키르가 가볍게 흥얼거리는 콧노래 때문에 그리 무거워지진 않았다. 키르는 가볍게 뭔지 모를 노래를 중얼거리며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키르를 지그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하지?" 내 묵직한 목소리에 키르가 에에?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한다. 무 슨 말인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말하는 듯한 저 표정. "뭘?" "마족이지?" 키르는 엑? 하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긴 붉은색 머리카락이 찰랑찰랑 흔 들린다. "시치미 떼지마." "에? 무슨 말이야?" 정말 모르겠다는 양, 눈을 동글동글하게 뜨고 있다. 하지만, 속지 않지. "아니라는 거냐?" 나는 씨익 웃으며 녀석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러자 키르가 히잉, 하 는 소리를 낸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 "나와 라이메데스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네가 마족이라는 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녀석이 고개를 갸웃해 보인다. "산 속에서 갑자기 그 많은 사람이 대체 왜 튀어나오는 거냐? 분명 아무런 기척이 없다가 갑자기 나타난 그 여덟 명은 어디서 온 거지? 내 감각에 들 키지 않고 그 정도까지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은 몇 없어. 만약 있다고 하면 그들이 시시하게 너같이 조그마한 꼬마나 팔아먹는 노예상 노릇을 하지는 않겠지. 게다가 너." 나는 녀석을 가만히 보았다. 키르는 에헤? 하는 소리를 냈다. "느낌이 있었다." 카리스와는 다르게, 느껴져 왔었다. 동족이다, 하는 느낌의. "느낌?" 고개를 갸웃하며 그건 증거가 안돼, 라고 말하는 듯한 눈을 하는 녀석을 향해 나는 못을 박듯 한 마디 한 마디 끊어가며 말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하룻밤 사이에 네 몸에 있던 상처들의 위치가 묘 하게 바뀌었거든." 내 말에 키르가 에헤? 하는 소리를 더 크게 냈다. 한참의 침묵 동안, 녀석 은 그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디선가 자 그마한 바람이 불어 녀석의 긴 머리카락을 살풋 어루만졌을 때, 각본처럼 녀석이 하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들켰어 벌써? 쩝, 아쉽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그렇게 말한 녀석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살짝 다가와 얼어버린 내 팔을 툭, 하고 친다. "에에, 인상펴, 인상." "인상펴 좋아하시네. 넌 뭐냐?" 내 말에 키르가 피식 하고 웃는다. "글세? 일단은 네 편." "내 편? 그건 또 무슨 말이지?" 녀석은 윙크를 찡긋, 하곤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런 건 아직 알 필요가 없어." 알 수 없다. 뭔가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모르겠다. "일단 네가 각. 성. 을 했으니까. 편 나누기가 시작된 거지." "무슨 말이야? 젠장할, 난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 내 말에 키르가 후후, 하고 가볍게 웃었다. "그렇지? 전혀 모르겠지?" 녀석이 팔을 깍지껴서 머리 위로 올렸다. "나도 사실은 잘 몰라." "장난 하냐?" "아니." 명쾌하게 대답한 녀석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피식, 웃는다. "자, 봐. 이 머리는 말이야, 네가 붉은 머리에 약하다는 누군가의 말을 듣 고 이렇게 한 거야 내 머리는 원래 이런 색깔이 아냐. 게다가 이 눈동자 색 도 마찬가지지. 얘기를 듣자하니, 네가 붉은 눈과 붉은 머리에 약할 거라더 군." 난 뭔가, 상당히 기분이 나빠졌다. "날 데려가.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을 거야. 혹시 그 신관이 신경 쓰여서 그러는 거야?" 나는 아무 말 않고 녀석을 가만히 보았다. 그러자 녀석이 아하, 하고 손가 락을 탁 튕겼다. "그거라면 걱정하지마. 여태까지처럼 버릇없고 철없는 꼬마처럼 행동할 테 니까." "헛소리 집어치워. 네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어. 정체도 모르는 마족 따위 와 동행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게다가 첫 등장도 그렇게나 시끄러웠던 녀 석을. 에세렌만 없었으면 네녀석은 나와 라이메데스가 진작에 족쳤어." "흐응∼." 녀석이 가볍게 콧소리를 냈다. 붉은색의 눈동자를 가늘게 옆으로 늘어뜨리 며 녀석이 입술을 가볍게 위로 올렸다. "너무하는군. 마족이라는 거 들키지 않기 위해 수하의 녀석들을 부려서 생 쇼까지 한바탕 했는데, 데려가 줄 수 있잖아? 아까 저 냄새나는 인간들 사 이에서도 한 판 쇼를 펼쳤고 말이야." 냄새나는 인간, 이라. "싫다." "정말 싫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녀석이 눈을 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나를 본 녀석이 조금 더 강하게 인상을 썼다. "그럼, 카리스 녀석처럼 나도 스토커 짓 할까?" "뭐라고?"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카리스라는 단어에 나는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알잖아. 카리스. 그 녀석 네가 인간계에 왔을 때부터 쭉 스토커 짓 해온 걸로 아는데." "……너, 카리스를 아는 거냐?" 주먹이 꾹 쥐어진다. 입술을 물며 나는 녀석을 노려보았다. "아? 그다지 좋지 않은 인연이지만." 그 말과 함께 키르가 웃었다. 녀석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말해. 어떤 관계지? 놈은 어떤 녀석이야?" "쿡쿡, 인상이 구겨졌네. 자자, 풀어풀어. 나, 그녀석을 별로 좋아하진 않 지만 그녀석 정체라던가 하는 건 말해줄 수 없어." 녀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때? 내가 그녀석처럼 널 몰래 따라다니며 스토킹 하길 바래?" "죽어도 사양이다." 언제나 바람처럼 나타나 언제나 나를 오싹하게 만들었던 그 녀석, 그녀석 처럼 한다고? 절대적으로 사양이라고 말하고 싶군. 진짜 싫다. "그럼 됐잖아. 나를 데리고 다녀." "그것도 싫어." "……흐응." 녀석이 쳇, 하는 소리를 냈다. 곧 녀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뭘." "나랑 싸우자." "뭐야?" 놀라서 소리를 버럭 지르는데,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그 얼굴로 녀석이 가볍게 손을 들었다 놓는다. "나랑 싸워서 만약에 네가 이기면 내가 물러나 줄게, 아주 깨끗이. 카리스 녀석처럼 스토킹하는 것도 안 해." "내가 지면?" "따라 다니는 거지." 그 말과 함께 녀석이 피시식, 김빠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짜증이 머 리끝까지 솟는 것을 느꼈다. 젠장, 이건 대체 뭐하자는 짓인지 모르겠군. 대체 내가 왜, 왜 이런 녀석하고! "좋다." 하지만 녀석과의 동행도, 카리스 같은 스토커 짓도 절대적으로 사양이다! "그래? 좋았어! 그럼 어디에서 싸울까나?" 녀석은 장난스레 눈을 빛내며 손을 비벼댔다. 어째, 굉장히 좋아한다는 느 낌인 건 내 착각인건가? "일단은 저쯤이 좋겠다. 너, 사람들이 다치는 건 원하지 않지?" 그 말과 함께 녀석이 내 손을 덥썩 잡았다. 그리고 가증스럽게도, 방긋 웃 으며 말한다. "자아. 그럼 가볼까요, 형?" 내 이 놈을 그냥 확! Comment : 3, Read : 600, 2002/09/08 Sun 22:48:39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2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71 키르 녀석은 허리에 양 손을 올린 채로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녀석의 뒤로, 푸른 잎사귀가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다. 골목에서 벗어 난 녀석이 내 손을 잡고 끌고 간 곳은 조그마한 동산의 위였다. 우리가 여태까지 지나쳐 온 저 산맥의 높은 산 중의 일부가 아닌, 마을에 딸린 아주 조그마한 동산. 스삭스삭 소리와 함께 바람에 몸을 부대끼며 풀 잎이 노래를 부른다. "자아, 누가 선방일까?" 배실배실 웃으며 녀석이 한 말에, 나는 검을 꺼내들기 위해 자세를 취했다. 「칼레들린! 너 지금 어디야?」 허억! 이, 이, 이익! 하, 하마터면 칼에 베일 뻔했다! 검을 뽑는 순간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우렁찬 라이메데스의 목소 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울리는 바람에 깜짝 놀란 나는 검을 뽑고 있던 그 자세 그대로 멈칫하고 말았다. 으이구, 이 자식아! 내가 그렇게나 전음 보 낼 때 귀 찢어지겠다고 말을 했건만! 「조용히 좀 말해. 나, 지금 녀석과 싸우려고 하는 중이다.」 「뭐야? 돌았어?」 빽 고함을 지르는 라이메데스에게 화가 나서, 나 역시 버럭 고함을 쳤다. 「닥쳐!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걸 어쩌라고!」 「기다려라. 지금 갈게.」 이 자식이 또 끼여들려고! 「됐어! 그럼 내가 진단 말이다!」 「뭐야? 야! 칼레들린! 이봐, 칼…….」 나는 라이메데스가 보낸 전음을 일방적으로 툭, 하고 끊어버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하, 하는 맑고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뭐냐 싶어 눈살을 찌푸리는데 녀석이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편다. "블러드아미의 부총관이 전음이라도 보냈나보지?" "……." "그 녀석, 꽤나 재미있는 녀석이야. 그렇지?" 정말 기분이 묘하다. 이 마족 녀석. 꼬마의 모습이지만 전혀 꼬마 같진 않다. 물론 뒤를 줄레줄레 따라다니면 서 귀찮게 굴 때는 꼬마 같다고 느끼긴 했지만 그건 정말 잠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른 같은 느낌이드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또 절대로 아니다. 뭐라고 해야 옳을까, 이 녀석을? 잘 모르겠다. 하여튼 분명한 건 꼬마이면 서도 꼬마가 아닌 것 같고, 어른인 듯 하면서도 어른이 아닌 것 같다는 것. 이상한, 정말 묘한 느낌. "저 블러드 아미 부총관은 상당히 상대하기가 곤란한 걸로 알고 있어. 기 척을 알아차리면 곤란하니까 내가 공간의 결계를 칠게. 괜찮지?"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휘익, 하는 소리가 나더니 곧 녀석과 내가 서 있 던 동산 위에 검은 무형의 무엇인가가 생겨났다. 순간, 전혀 다른 공간에 서 있는 듯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 정도의 공간을 치려면 상당한 능력이 허비될텐데? "이런걸 치고 하면 네 힘이 뺏기지 않나?" "일단은 내가 한 수 접어준 걸로 하자. 조금 봐준다고 해도 승패에는 관련 이 없을 테니." "흥, 대단한 자신감이군." 나는 차게 냉소한 뒤, 아까 라이메데스의 시끄러운 전음으로 말미암아 뽑 지 못했던 검을 천천히 다시 뽑아내기 시작했다. 웅, 웅, 우웅우우우. 웅웅웅웅웅웅……. 검이, 켐 알슈타드가 정말 무섭게 공명을 했다. 나는 놀라서 그 검을 바라 보았다. 심할 정도로 흔들리고 있는 이 검. 뭐지? 이렇게까지 심하게 흔들 린 적은 없었는데. 인상을 찌푸리며 흔들리는 검의 힐트를 세게 잡는데 키 르가 휘익, 하고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오, 켐 알슈타드지? 오랜만인걸?" 녀석이 눈을 찡긋 했다. 그 순간이었다. 안 그래도 심하게 흔들리던 검의 움직임이 더욱 결렬해진 것이. 정말 감당이 불가능할 정도로. 「우, 우욱.」 검에 매달린 채일 레이네가 고통에 겨운지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나는 검을 똑바로 세우려고 노력했지만, 무리였다. 레이네가 소리를 쳤다. 「칼레들린님! 켐 알슈타드가 이상해요!」 내, 내가 바보냐, 저능아냐. 지금 온 몸이 흔들리고 있는데 설마 그것도 못 느낄 것 같아? "으욱, 어째야 하는 건데?" 내가 조그맣게 묻자 레이네가 빽 고함을 지른다. 「그걸 알면 제가 가만히 있겠어요?」 그래, 너 잘났다. 모르면 그냥 입이나 다물고 있지 그랬냐. 켐 알슈타드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장난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던 키르 가 조롱하듯 입을 열었다. "그 검이 왜 그렇게 난리를 치는 줄 알아?" 뭐? "내가 반가워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돌아오고 싶어하는 거라든가. 그 검, 처음 소유주가 나였거든." "뭐라고?" 놀라서 고함을 빽 지르자 녀석이 척, 하고 손을 든다. "뭐, 그거야 아무래도 좋아. 어서 시작해보자. 자아, 그만그만. 너도 진정 하고." 녀석이 내 쪽을 바라보며 슬쩍 던진 그 말에, 거짓말처럼 검의 떨림이 멎 었다. 저, 정말인 거냐? 이 검의 처음 소유자가 저 녀석이었다는 게? 키르는 하하, 하고 웃었다. "아마 내 곁을 떠나서 한참동안 심심했을 거야, 그 검도." 그 말과 함께 녀석이 다시 한 번 웃었다. "자자, 덤벼 보라구. 카. 인. 씨." "……카인?" 갑작스럽게 들린 그 단어에 움찔한 순간, 키르의 몸이 휭, 하는 소리와 함 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깜짝 놀란 나는 재빨리 주변으로 정신을 분산 시켰지만, 녀석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검을 사방으로 휙, 하고 정신없이 휘둘렀다. 하지만 무엇인가 맞는 감촉은 전혀 없었다. 휘식, 하는 소리마저 나지 않는다. "헤에?" 멍하게 서 있을 때 갑자기 귓가를 파고든 목소리에, 나는 재빨리 몸을 틀 어 검을 들이댔다. 그러나 역시 검에 맞닿는 감촉은 없었다. 쉬익, 하는 소 리가 거칠게 한 번 나더니 곧 내 쪽으로 밀고 들어온다. "이런이런, 너무 느리잖아?" 핑,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그 것이 내 팔 언저리를 잡았 다. 나는 왼손으로 재빨리 마력을 모은 후에, 그것을 내리쳤다. 하지만. 내 가 내리침과 동시에,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이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 린다. 뭐, 뭐냐! 「가, 강한 마족입니다.」 레이네가 중얼거리듯 그렇게 말해왔다. 안다. 너 정말 나를 바보 멍청이 얼간이로 아는 거냐? "실망시키지마, 카인." 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다시 한 번 녀석이 내 쪽을 공격해 들어왔 다. 나는 검을 들어 내 쪽을 파고드는 그 것을 재빠르게 갈랐다. 쾅쾅, 하 는 소리와 함께 내 켐 알슈타드가 그 공격을 가볍게 무위로 돌린다. 후우, 하고 한숨을 몰아쉬는데, 그 순간 귓가에 꽂히는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 놀라서 사방을 훑어도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문득 위를 올려다 본 순간, 키르의 모습이 갑작스레 그 곳에서 드러났다. 붉은 머리카락이 커 다란 물결을 이룬다. 녀석은 빙글빙글 몸을 돌리며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군. 카인, 카인. 대체 그 카인이란 게 뭐야?" "엑?" 그 순간, 믿을 수 없게도 완벽하게만 보였던 녀석에게서 빈틈이 보였다. 뭐냐 싶었지만 일단 온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나는 얼른 몸을 세운 후 높이 점프했다. 녀석과의 거리가 비약적으로 가까워짐과 동시에, 검을 휘둘러 녀석의 팔을 찔렀다. 순간 녀석이 움찔, 하고 몸을 튕겨 냈지만 때는 늦어 있었다. 검은 이미 녀석의 팔 한 부분을 찌르고 튀어나온 후. 나는 녀석이 박혀 들어간 검을 뽑기 전에, 깊이 들어간 검을 재빨리 위로 올려 녀석의 상처를 더 크게 한 후, 그대로 비틀었다. 파박,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물씬 튀었다. 나는 얼른 검을 뽑아 훌쩍 뒤로 물러섰다. 키르의 표정을 살피는데, 녀석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다. "크아아아! 아파 죽겠어!" 녀석이 상체를 숙였다. 나는 다시 한 번 검을 들어서 그런 녀석을 찌르려 했다. "……라고 말하길 바란 건 아니겠지, 설마?" 헉. 검을 들고 녀석을 찌르려 했던 나는 그 자세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녀석 은 내게 찔린 팔을 가볍게 들어 혀로 한 번 핥았다. 그 순간, 무섭도록 빠 르게 녀석의 상처가 아물어 버렸다. 말도 안돼! 마족이라고 해서 저렇게까 지 빨리 상처가 낫는 건 아니란 말이다! 괴물이냐, 이 녀석은? "흥. 괴물이라고 생각했지, 방금?" 씨익 웃으며 키르가 한 팔을 내밀었다. 나는 재빨리 방어 자세를 취했다. 녀석은 웃는 표정 그대로 가볍게 입술을 떼어냈다. "대단해, 대단해. 설마 네가 '카인' 이라는 이름마저 모를 거라고는 생각 하지 못해서 순간 당황했다니까. 너도 정말 엄청난 보디가드를 갖고 있군." "뭐?" "저 라이메데스 말이다. 네게 오는 정보를 아주 완벽하게 차단시키고 있었 던 것 같은데? 멋져, 멋지다구. 큭큭큭." 뭐라는 거야?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들었다. 순간,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확 하 고 키르의 모습이 가까워졌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움직임. 저 멀리에 있 던 녀석의 눈동자가 갑자기 내 앞으로 확, 하고 가까워졌다 순간 숨이 멈추 는 듯 해서 나는 헉, 하고 호흡을 멈춰버렸다. 바로 앞에 다가온 녀석의 눈동자가 싸늘하다. 녀석이 입술을 비틀어 올렸 다. "그럼 일단, 조금만 힘을 쓰도록 해볼까?" 퍽! "컥!" 어디를 맞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맞았다. 공격당한 부분에서는 피 조차 흐르지 않았다. 아팠다. 그리고 다음 공격, 피하거나 막기는커녕 당했 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빨랐다. 무서울 정도로. 마치, 이, 건……. "헉!" 옛날에, 누군가와 한 번 이런 식으로, 이렇게 강한 놈이랑 싸웠던 것 같기 도 하다. 으, 하지만 누구였지? 모르겠어. 욱, 아파! 몸을 틀었다. 순간, 녀석이 저 멀리에서 다시 휭, 하고 나타났 다. "에이, 뭐야? 카. 인. 너 너무 심하잖아? 보통의 각성마족 만큼도 안되겠 네." "……닥, 쳐." 온 몸이 아팠다. 하지만 기묘하게 급소를 피해가며 때린 덕택에, 일어서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천천히 다시 일어섰더니, 녀석이 반달처럼 가늘어 진 눈매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문득, 그 녀석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근데 너, 정말 닮았구나." "뭐?" 갑작스러운 말에 눈살을 살짝 찌푸리는데, 녀석이 킥, 하고 웃어버린다. "무섭게 닮았네. 이거 이거, 나도 어째 정에 이끌리는걸." 또다시 키르가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는 내게 녀석 이 안심하라고 말하는 듯, 가볍게 손을 들었나 놨다. "카리스나 아이에드가 너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이거겠지?" "무슨……?" "흐음, 가까이에서 보니 더 그렇군. 그러니까, 무섭게 닮았단 말야 내 말 은. 특히 지금 그 표정. 오호, 그 멍한 표정은 더 닮았는데?" 싱글싱글 웃으며 키르가 놀리듯 말했다. 녀석은 내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 리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피에트랑 말야." "뭐? 내 아버지, 말인가?" 내 말에 키르가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아하! 그나마 그건 알고 있어서 다행이네." 이, 이 자식이! "너, 대답해! 내 아버지를 알고 있나? '카인' 은 또 뭐지?" 분명, 레니가 그랬었다. '카인' 은 고대 왕국에서 쓰인 '안녕히' 라는 단 어라고 말이다. 그래, 카리스는 언제나 나에게 그런 인사를 했을 뿐이란 말 이다. 그런데, 뭐냐? "이렇게 하자?" 키르가 쿡쿡 웃으며 한 발자국 다가왔다. "지금부터, 네가 내게 아주 가벼운 상처라도 입힐 수 있다면 '카인' 이 뭔 지 가르쳐줄게." "……좋다." 나는 검을 들고 천천히 일어섰다. 아까보다 훨씬 더 긴장된 몸의 근육이 움찔움찔거리고 있다. 듣고 말겠다. 「칼레들린님, 저 마족…….」 문득, 레이네가 말을 꺼냈다. 「저 마족 어, 어쩌면…….」 "어쩌면?" 「그, 그, 어, 어쩌면…….」 "자아, 한 눈 팔다간 다치지?" "헉!" 재빠르게 앞쪽으로 압박해 들어오는 손가락의 움직임. 검을 휘둘렀지만 역 부족이다. 나는 녀석의 몸을 노리고 앞쪽으로 파고들었지만, 그것 역시 무 리였다. 놈은 요리조리 피하고만 있었다. 녀석이 후우,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이봐, 정말 실망이다. 피에트는 꽤나 강했단 말야. 아들이라면서 그 반의 반도 안되다니!" "닥쳐! 난 그가 어떤 마족이었는지도 몰라!" "아아, 그랬지. 미안." 전혀 미안하지 않은 투였다. 녀석의 손이 날아온다. 빨라, 빠르다. 왜 이렇게 빠른 거야? 정말 지독할 정도군. 쳇. 나는 요리조리 피해보려고 애썼지만 무리였다. 점점 다가오는 건 녀석의 재빠른 공격. "헉, 헉, 헉……." 나도 모르게 격한 숨을 몰아쉬자 녀석이 흐응, 하는 소리를 냈다. 녀석이 내 앞에 살짝 앉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키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너, 정말 약하구나. 이래서야, 네 편이 되는 건 다시 생각해봐야겠는걸?" 그 말과 함께, 지그시 내 손목을 밟는다. 녀석은 켐 알슈타드를 힐끗 보았 다. "이 검도 너에게 아까워. 나한테 있을 땐 훨씬 더 예쁘게 반짝였다구." "제, 젠장. 그런 거 알게 뭐……." "네가 이렇게 비리비리하니까, 그 인간도 못 지킨 거지." 키르는 흥, 하고 고개를 돌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내뱉듯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들었다. 내 머릿 속에서 무엇인가가 팍,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을. Comment : 2, Read : 597, 2002/09/08 Sun 22:53:55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2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72 "카리스에게 얘기 들었어. 그, 가민이었던가 카빈이었던가?" "……카민이야." "아아, 그래. 그 카민이란 인간. 너 때문에 죽었다지?" 녀석이 밟은 손목 부근이 시큰거리고 있었다. "그 녀석은 바보지. 인간주제에 말이다. 네가 마족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 서도 그런 짓을 하다니.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게 나았을 텐데. 그렇지 않아? 인간이란 그렇게 어리석은 존재. 언제나 오만하고, 가끔은 선심 쓰듯 희 생하지. 그 희생으로 넌 잘 살아달라? 웃기고 있네." 녀석의 입가에 비틀린 웃음이 걸렸다. "인간이란 족속들은 짜증나.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지. 네가 말한 그 녀석도 마찬가지야. 가만히 있었다면 너는 그저 피 좀 흘리는 걸로 끝났을 텐데 말이야. 그 녀석이 괜히 잘난 척 끼여드는 바람에……" "……마." 폭발한다. 아, 머리가 아파. "뭐?" "함부로, 그 입, 놀리지 말라고 했다." "하아? ……욱!" 녀석은 놀란 듯 몸을 떼어냈다. 하지만 이미 내 왼손에서 뿜어져 나온 강 한 마력이 녀석의 얼굴에 작렬한 후였다. 녀석은 당황한 표정으로 재빨리 손을 치워냈다. 나는 녀석의 시야를 마력의 연기가 뒤덮고 있는 틈을 타,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눈동자가 돈 것 같은 이 느낌. 함부로 말하지 마. 인간이 뭐가 어떻다고 했지? 오만해? 그래, 확실히 그래. 오만하다.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서로 뭉쳐 서 아웅다웅 잡아먹겠다고 난리들이지. 계급을 만들고 그 계급의 틀에 박혀 서 노력해도, 노력해도 깨지지 않는 그 틀에서 발버둥쳐. 저희들끼리 잡아 먹고 잡아먹힌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만하기 때문에 그들은 삶을 산다. 어리석어? 그래, 어리석다. 하지만 어리석다의 기준은 대체 어디에 있어? 나 역시 어리석다. 마족은 어리석지 않은가? 자신이 무조건적으로 옳다는 그 엄청난 독단과 독선 속에 빠져 다른 이들은 돌아보지도 않지. 어리석다, 라는 것의 기준조차 찾을 수 없이 모호한데 어떻게 그걸 판별한다는 거냐? 됐어. 그런 건 싫어. 알고 싶지도 않아. 선심 쓰듯 희생? 맞아.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희생' 이라는 것이 '선 심' 으로 되는 거냐? 마족과 인간은 달라. 마족은 자체 치유력으로 웬만한 상처는 곧 치유 할 수도 있어. 하지만 인간은 어때? 인간은 팔 하나로 인생 의 절반을 잃을 수도 있는 족속들이야. 우리에겐 아무 것도 아닌 희생들이 인간들에게는 목숨보다 중요할 수도 있다. 함부로 판단하지마. 함부로 정의하지마. 인간은 네 말처럼 그렇게 쉬운 존 재가 아니야. 카민은 바보가 아니었어. 녀석은 자신의 맹세에 충실했던 거 다. 그래. 인간은 바보가 아냐. 인간은 어리석지 않아. 인간은. 마족이 말 하는 것처럼 그렇게. 그렇게까지 보잘 것 없지는 않아. 그렇게까지, 나약하 진 않아. 그러니까. 나는, 반쪽 짜리 인간이라는 게, 부끄럽지 않다. 반쪽 짜리 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아. "큭!" 녀석이 몸을 비틀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바로 그 순간. "커억!" 분명히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녀석의 손이 예고도 없이 퍽 하고 올라와 그 대로 내 목을 죄었다! "욱!" 컥, 하고 숨이 막혀 온 몸에 힘이 빠졌다. 눈앞이 갑자기 흐릿해지는데, 환영이 보였다. 키르의 눈동자 색이, 분명히 카민의 것처럼 붉은 색이었던 눈이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윽, 화, 환시(幻視)인가? 레, 몬빛? 그러나 내가 본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양,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녀석의 눈동자는 원래대로 붉은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천천히, 한참만에 목을 감았던 손이 놓아졌다. 녀석이 웃었다. "훗. 좋아. 일단 네가 내 얼굴에 상처 내는 건 성공했다. 축하해줄까?" 그렇게 말하며 녀석이 자신의 뺨을 가리킨다. 거기에 자그마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마력탄이 만든 흔적인 듯. "그렇게까지 흥분할 줄은 몰랐는데? 역시 네가 '반쯤 인간' 이라서 그런 거야? 아니면 웃기지도 않는 '친구' 라는 녀석 때문에?" "닥쳐." 입술을 잘끈 물며 한 그 말에, 녀석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그런 녀석의 얼굴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네 얼굴에 상처 냈으니 이제 말해주실까? '카인' 이 뭔지." "흐응, 좋아." 키르는 오만하게 턱을 들었다. "이름이야." "……뭐?" "네 이름이다." 무슨? "웃기지마. 내 이름은 칼레들린……" "그건 아이에드가 지어준 이름이지." 아이에드? 아이에드……. 또, 그 이름이야. 언제나, 언제나 끝까지 따라다니고 있는 그 이름. 그 이름은 어디에서나, 무슨 일과도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생각나지 않아. 레이디안이 지워버린 그 이름. 그게 그렇게나 중요한 존재였던가. 나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고, 라이메데스가 말하긴 했지만, 역시 생각은 나지 않는다. 내가 많이 좋아한 존재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생각나지 않아. "카인은." 키르가 피식 웃었다. "너의 부모가 직접 지은 이름이다." "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다. "하지만 아는 녀석은 얼마 안 되는 이름이지. 너의 아버지 '피에트' 와 너 의 어머니 '엔카' 가 직접 지은." 그래. 엔카와 피에트. "핫핫핫. '피에트' 와 '엔카' 는 역사에 알려진 이름은 아니지만." "뭐? 무슨 말이지?" 갑작스러운 녀석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자 녀석이 손가락을 휙휙 저어댔다. "글세. 그건 말해줄 수 없어. 카리스가 화낼 거거든." 키르는 그 말과 함께 벌떡 일어섰다. "어찌됐든, 이긴 건 나지?" "……엑?" 깜짝 놀라 발악하듯 그렇게 소리침과 동시에, 쿠웅, 하는 굉음과 함께 녀 석의 손이 크게 한 번 휘젓듯 움직였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던 무형이 막들이 스며들 듯 작아지더니 곧 사라져버렸다.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 푸른 잔디가 나타났다. "자아, 그럼 가보자구. 그 신관과 블러드 아미 부총관이 있는 곳으로." 키르가 얌전히 손을 내밀며 싱긋 웃었다. "응? 형." 비, 빌어먹으으을! ◇ ◇ ◇ "칼레들린―!" 아아? 뒤에서 갑자기 난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에세렌과 라이메데스의 얼굴이 보였다. 음. 나를 찾아다녔나? 얼굴이 온통 땀 투성이군. 라이메데스보다 먼저 내 쪽으로 두두두 달려온 에세렌은 나를 꼼꼼히 바라보며 눈을 부릅떴다. "다, 다, 다치셨어요!" "아, 괜찮아." "피, 피, 피나요." "한 두 번이냐?" 에세렌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왜 다치신건데요?" "이 녀석이랑 얘기하는 도중에 이상한 녀석들을 좀 만나서." 젠장할, 거짓말까지 해야하는 건가. 쓰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리는데, 그 순간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라이메데스가 위압적인 눈으로 키르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시선을 밑으로 내리 깔고 있는 라이메데스. "뭐냐, 네놈." 라이메데스가 눈을 부라렸다. 목소리가 가라앉은 게, 아무리 봐도 화가 난 듯 했다. 키르는 그런 라이메데스를 향해 킥, 하고 웃어 보였다. "에이 뭐긴. 난 키르. 귀여운 키르야." "……닥쳐." 라이메데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녀석의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온 위압감 이 주변을 싸하게 굳게 만들었다. 라이메데스의 손이 키르의 목에 닿으려는 바로 그 순간, 키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앗? 그러면 안될 텐데?" "뭐?" 라이메데스가 인상을 쓰며 멈칫하는 틈을 타서, 키르는 재빨리 내 쪽으로 달려왔다. 뭐야, 이거 왜 이래! 라며 팔을 휘저으려는데, 기다렸다는 양 내 팔뚝에 찰싹 매달렸다. "혀엉∼ 형이 나 완전히 책임지기로 했잖아, 그렇지?" 순간, 에세렌과 라이메데스가 있는 인상 없는 인상 다 그으며 나를 노려보 았다. "그게 무슨 말이죠? 완전히 책임지기로 했다니?" "칼레들린." 에세렌과 라이메데스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에 나는 하, 하하 하고 웃으 며 천천히 대답했다. "으, 으음 그, 그게 말이지." 에세렌과 라이메데스가 한 발자국씩 한 발자국씩, 무서운 얼굴로 나를 향 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하, 하하, 하고 어설프게 웃으며 천천히 입술 을 움직였다. "아, 아, 그, 그게, 그렇게 돼버렸어." "……." "……." 분위기는 설명하기 싫을 정도로 험악했다. Comment : 2, Read : 600, 2002/09/08 Sun 22:55:27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2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73 제 34장: 빛의 엘프 "왜요, 왜요, 왜요!" "대체 이유가 뭐야!" 으으, 시끄러워! 너희가 한 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닥쳐, 어찌됐든 데리고 가게 됐어." 난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순간, 라이메데스의 목소리가 발을 잡았다. 「저녀석, 마족인 거 알잖아!」 「그래. 그래도 그렇게 된 걸 어쩌란 거냐?」 나는 라이메데스가 그 이상 뭐라고 뭐라고 떠드는 것을 깨끗하게 씹어 버 렸다. 험험, 어디서 개가 짖나? "혀엉∼" 키르가 내 팔에 찰싹 매달린 채로 씨익 웃고 있었다. 나는 나를 그렇게 때 리고 패대기치고 온갖 난리를 쳐댔던 이녀석의 갑작스러운 친한 척에 온 몸 을 타고 오르는 소름을 느꼈다. 녀석은 웃는 낯 그대로 내게 전음으로 말했 다. 나 귀엽지? 라고. 흥, 미쳤군. 내 눈 아직 썩지 않았다. "여관에 가요!" 키르와 앞으로도 함께 가야한다는 사실에 심한 패닉에 빠졌던 에세렌은 잔 뜩 힘이 빠진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비실비실 몸을 비틀고 있는 녀 석에게 왠지 미안해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자의 쉼터' 라고 적힌, 비교적 평범한 이름의 여관으로 들어가자 맛 있는 냄새가 확 하고 풍겨왔다. 홀에는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 었다. "네 명. 각자 딴 방. 얼마야?" 여관 주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데, 그녀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머어머, 이 꼬마 아까 낮의 그 꼬마 맞죠?" 으, 으으윽. 설마 거기에 있었던 건가? "참 귀여운 꼬마네∼. 그래, 이런 애를 버리려구 했단 말이에요?" 시, 시끄러워! 사정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고! "방. 얼마냐고." 내가 인상을 팍 쓰며 한 그 말에 여관 주인이 호호, 하고 웃었다. "호호호, 동생을 버리려고 하신 분이 여관에 묵을 돈은 있으신가요?" 이 여자가 진짜! "한 분당 3실버예요." "그래?" 나는 고개를 돌리며 에세렌을 보았다. 그러자 에세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 며 어이없다는 어조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예? 왜 저를 보시죠?" "뭐야? 그럼 네가 돈을 내야지 누가 내냐?" "예? 그치만 음식값으로 다 써버렸는데요?" 순간, 정적. "다? 전부 다?" "예. 그 동안 먹는 게 좀 부실했잖아요." 나는 녀석의 머리를 마구 때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번엔 라이메데스를 보았다. 라이메데스는 아주 폼 나는 얼굴로 도도하게 입을 열었다. "없다." 나는 시선을 내려 키르 쪽을 보았다. 그러자 키르가 손가락을 입에 대며 울먹거린다. "흑, 형아. 미안해. 난 돈이 없어. 그, 그치만 나 버리지마." 이걸 콱! 나는 다시 여관주인을 올려다보았다. "돈이 없다는데?" 그러자 그녀가 후후, 하고 웃는다. "어머나∼ 자, 출입문은 저 쪽입니다." 그녀가 출입문을 가리켰다. 으, 으으음.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군. ◇ ◇ ◇ "마을이 있는데. 여관이 있는데. 푹신한 침대랑 이불이랑 베개가 바로 저 기에 있는데." 에세렌은 아주 멋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비록 음정과 박자가 전혀 맞지 않지만. "따뜻한 비프 스테이크와 말랑말랑한 푸딩, 부드러운 스튜, 잘 끓인 차도 한 잔 마시고 싶었는데∼." 흠, 이젠 먹는 얘기로 넘어가는군.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온 몸이 찌뿌드드한 노숙은 정말 싫어요오∼. 포근한 이불에 맛있는 음식∼ 푹 쉴 수 있는 아름다운 여관∼ 바로 그 여관이 저 옆에 있군요. 아아∼ 아름다운 여관, 여관, 여관∼" 아주 시를 써라, 시를 써. "그래. 네가 먹느라고 돈만 다 날려버리지 않았어도 우린 저기 가서 잘 수 도 있었겠지." "흑, 잔인하세요! 어찌 그런 말씀을!" 순식간에 표정을 변화시키며 얼굴을 감싸쥐는 에세렌. 흥, 웃기고 있네. 뭐가 잔인하다야? 에세렌은 끊임없이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노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 긴, 나와 라이메데스, 그리고 키르 같은 경우엔 어차피 마족이다. 어디에 누워서 자도 몸이 찌뿌드드한 일은 없고, 피곤이 누적될 일도 없지 않은가. 불편한 건 어차피 에세렌뿐이란 말이지. 에세렌은 풀섶을 더듬더듬 거려서 열심히 잘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라이메데스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라이메데스, 여기세 에디 에이렌까진 얼마나 더 가야 하지?" "이제부터는 쭉, 산을 따라 갈 거다. 좀 복잡한 길인데……. 한 5일 정도? 그 정도면 충분할 거야." 흐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곤 나는 자리에 누웠다. 확실히 바로 앞이 마을 인데 이런 곳에서 누워야 하는 건 좀 비참하군. ◇ ◇ ◇ 「그런데 넌 바보냐?」 나는 갑작스레 머릿속을 타고 들려온 목소리에 울컥했다. 키르였다. 「뭐야?」 「너, 일단은 마족이잖아. 게다가 얼마 전에 각성했고.」 「그게 뭐!」 내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태연자약한 얼굴로 녀석이 말을 받아왔다. 「워프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아?」 나는 그 말에 순간,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 상태 그대로 동작을 정지했다. 그, 그러고 보니? 마, 맞아. 나 분명히 각성을 했지.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라이메데스 쪽을 바라보았다. "라이메데스." "왜."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얼굴로 라이메데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 각성했지." "그렇지." 라이메데스는 당연하지 않냐는 눈을 하고 있었다. "워프, 할 수 있지?" "그렇지." "……." "……헉." 라이메데스마저 아차, 하는 얼굴이 되자 나는 나무에 머릴 찧고 싶은 충동 을 강하게 느끼며 한참동안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런 빌어먹을! "에세렌." "네?" 에세렌은 에? 하는 얼굴로 내 쪽을 보았다. 나는 녀석의 청록빛 머리카락 을 빤히 보며 입을 열었다. "너, 워프 할 줄 알지?" "예? 예. 당연하지요." 크아아아! 우오오오! 뭐야, 뭐냔 말이다! "하지만 말이야." 라이메데스가 작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에디 에이렌에 가본 적이 없잖아." "그거야 그렇지." "그러니까 워프를 통해서 가는 건 좀 불가능하다. 물론 좌표야 알고 있지 만." "좌표만 알면 갈 수 있잖아요?" 에세렌이 의아한 듯 말했다. 그러자 라이메데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그렇지만, 이 쪽의 칼레들린은 말이야. 여태까지 한 번도 워프란 걸 해본 적이 없거든. 아마 안될걸?" 윽. "그럼 라이메데스님이 우리 모두를 한꺼번에 워프시키는 건 어때요?" "불가능하다. 에디 에이렌은 엘프들의 영역. 그 곳까지 내가 너희들 전부 를 데리고 워프를 하려면 조금 많은 힘이 필요한데, 그럴 경우에 노출될 확 률이 높거든." "흐음. 그럼 그 근처에서 워프한 다음 걸어가면 되잖아요?" "……아하! 그러면 되겠군." "장난 하냐!!" 손바닥을 딱 치며 일부러 이 상황을 모면하려 애쓰는 라이메데스를 향해 버럭 고함을 치자, 녀석이 하, 하하 하고 웃는다. "여태까지 우리가 걸은 건 뭐였냐고!" "헛고생." 키르가 자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우리 모두는 침묵의 도가니로 다이빙했다. ◇ ◇ ◇ "자, 나한테 감사하라구. 내가 아니었으면 무식하게 계속 걸었을 거 아냐?" 키르는 그 말과 함께 히죽히죽거렸다. "시끄러워!" 나는 녀석에게 투덜거렸고. "조용히 해. 내 옷 잡고." 라이메데스의 말에, 나는 손을 뻗어 녀석의 너덜거리는 옷깃을 꼭 붙잡았 다. 다른 녀석들도 라이메데스의 옷깃을 부여잡는다. 쉬익! 바람의 미립자들이 몰려들었다 사그라지고 다시 몰려들었다 사그라짐을 반 복한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아까와는 완전히 달 라진 풍경. 밝은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우거진 나뭇잎이 빽빽하게 공중으 로 치솟아 올라 있다. 빽빽하게 숲을 채운 나무들에게서 물씬, 하고 초록 향이 났다. 아름다운 냄새. 상쾌한 바람이 몸을 휘감고 있었다. "여기는?" "일단은 에디 에이렌에서 2, 3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로 워프 했다." "호오." 에세렌은 신기한 듯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주위는 온통 꽃과 나무들 이었다. 향기가 자욱하게 맴돌고 있다. 달콤한 향기도 느껴지고, 부드러운 향기도 느껴지고, 상큼한 향기도 있다. "기분 나쁘군." 바로 그 때, 인상을 작게 투덜거리는 라이메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뭔가 싶어서 라이메데스 쪽을 돌아보았다. 라이메데스는 저 먼 곳을 바라 보며 살짝 인상을 썼다. "여기부터 에디 에이렌까지는 하루거리인데 벌써부터 이 꽃이 피어 있잖아. 그게 기분 나쁘다고." "이 꽃이 뭐?" 나는 오밀조밀하게 피어 있는 예쁜 꽃을 보며 기분 상해하는 라이메데스의 미적감각에 심히 불만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라이메데스가 쳇,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발자국 앞으로 발을 내딛으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여기 있는 식물들. 몇 개는 천계에 피는 꽃이잖아." 라이메데스의 말에 나는 소복소복 피어난 꽃들을 새삼 훑어보기 시작했다. 오오, 과연! 정말 그랬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했더니, 오른편으로 가지 런히 피어난 꽃들 중 예전, 「천계 식물도감」에서 보았던 것들이 있었다. "그래. 비아니스와 키리엔을 말하는 거지?" 라이메데스는 불쾌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비아니스와 키리엔?" 에세렌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아, 여기 있는 이 꽃과 이 꽃." 나는 손을 뻗어 저 오른쪽에 무더기로 피어 있는 흰색의 꽃들과 우리들 바 로 앞에 핀 핑크빛의 꽃을 가리켰다. 비아니스라는 이름의 흰 꽃은 마치 구 름처럼 뭉게뭉게 피어 있는 듯한 형태였는데, 손으로 만지면 몽실몽실한 촉 감이 느껴질 것 같다. 흠, 책에서 본 것과는 사뭇 느낌이 다른걸. 뭐, 책에서 보는 것과 느낌이 다른 건 비아니스 뿐만이 아니지만. 키리엔이라는 이름의 이 핑크빛 꽃들도 실제로 보는 편이 훨씬 더 좋다. 꽃망울이 매우 자그마한 것이 소담스럽군. 라이메데스가 고개를 위로 들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예전에도 에디 에이렌 주위에는 온통 비아니스와 키리엔이 피어 있었지만 안 온 사이 훨씬 더 불어난 것 같군." 짜증스럽게 뱉어낸 라이메데스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때였 다. 바로 옆에서 에세렌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칼레들린님." "응?" "이 것 봐요." 에세렌이 비아니스를 몇 송이 꺾어 손에 들고 있었다. 그 흰 색 꽃은 녀석 의 손에서… 에에? 바, 반짝인다! 우오, 반짝이고 있어! 나는 눈을 부비며 그것을 빤히 보다가, 침을 꼴깍 삼키며 천천히 그 쪽으로 다가갔다. 신기하 게도, 녀석의 손에 들린 그 흰 꽃은 마치 보석처럼 투명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뭐야, 저녀석은? 설마, 신성을 타고난 존재?」 놀란 목소리가 귓전에 울린 것은 그 때였다. 슬쩍 소리의 근원지를 돌아보 니, 키르가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런, 맹하게 생겨먹어선 꽤나 대단한 녀석이었잖아?」 뭐, 신성을 타고난 존재로 안 보이긴 하지. 나는 쿡, 하고 한 번 웃은 후에 에세렌에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에세렌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자신이 들고 있던 비아니스를 내게 내밀었다. 그런 데 이건 웬일인가. 에세렌에게 들렸을 때와는 달리, 그 꽃은 빛을 내지 않 았다. 그저 흰색을 띄고 있을 뿐. "뭐, 뭐야?" 「너 바보냐?」 또다시 키르의 전음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내가 뭐야? 라고 소리치며 돌아 보자, 키르가 흥, 하는 소리를 낸다. 「비아니스―. 그 꽃은 극도의 신성을 머금은 자들의 손에 닿으면 저런 빛 을 낸다구. 예를 들자면 엘프라던가, 천족, 신족, 그리고 저녀석처럼 '신성 을 타고난 존재' 의 손에 닿으면.」 그런 거였냐. 흠, 그래서 새삼 감탄한 것이로군. "그 꽃은 너 같이 신성을 타고난 존재에게 닿아야 빛을 낸대." 내 말에 우와, 하는 소리를 내며 에세렌이 눈을 반짝반짝 빛낸다. 신기하 다는 양 꽃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에세렌. "그에 비해 마족의 손에 닿으면 녹아버리지. 그 빌어먹을 놈의 꽃은." "에?" 갑작스레 뒤에서 들려온 라이메데스의 말에 에세렌이 말도 안돼, 라는 얼 굴을 하고 라이메데스와 나를 보았다. "하지만 지금 꽃들은 멀쩡한데요? 방금 전에 칼레들린님의 손이 닿았을 때 도 멀쩡했고." "우리들은 지금 마기를 숨긴 상태니까 그렇지." "아, 그렇군요." 에세렌은 흠흠, 하고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시늉을 해 보였 다. "헛소리는 이만하고, 천천히 가보자." "아. 예." 에세렌은 얼른 고개를 끄덕인 후 재빨리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발걸음 을 옮기기 시작했다. 상큼한 향기가 몸을 휘감을 듯 풍겨온다. 문득 라이메 데스가 입을 열었다. "조심하는 게 좋아." "뭐?" "엘프들은 생각보다 그리 친절한 족속이 아니니까. 어쩌면 이 거리에서도 우리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고." "흐음?" 설마 그렇겠냐., 라고 생각해 피식 웃은 순간이었다. 쉬익! 어디선가 날카로운 것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2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74 "피해! 왼쪽이다!" 내 고함소리에 에세렌이 얼른 오른쪽으로 피했고, 라이메데스와 키르는 유 연한 움직임으로 살짝 몸을 틀었다. 곧, 왼쪽에서 날아온 무엇인가가 유연 한 선을 그리며 날아와 정확히 내가 서 있던 자리에 꽂혔다. 나는 천천히 그 것을 뽑아들었다. 뭐냐 이건. 화살인가? "그것 봐. 벌써 눈치챘다니까." 쿡, 하고 라이메데스가 웃었다. 너, 너는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냐! 녀석에게 뭐라고 고함을 치려고 한 순간, 갑자기 여기저기서 무차별적으로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우옷,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피 해내기 여념이 없었다. 나는 이리저리 폴짝폴짝 뛰기도 하고, 몸을 틀기도 하고, 꺾기도 하며 화 살을 피하다가 어느 순간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왜 녀석들에게 선 화살을 피하는 소리가 안 나는 거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녀석들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준 순간, 나는 또 한 번 나의 바보스러움을 절감하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라이메데스는 무덤한 얼굴로 엔클레이브를 친 채였고, 에세렌은 키르를 자 신의 품에 안은 채로 프로텍트를 친 상태였다. 컥, 커억! 저 자식들이! 칠 거면 나한테도 쳐줘야 할 거 아냐! 얼른 녀석들 쪽으로 다가갔더니, 라이메데스가 재빨리 엔클레이브를 거둔 후 나를 끌어당기고, 다시 엔클레이브를 친다. 그 동작이 어찌나 재빨랐던 지 찰나의 순간을 노리고 화살이 날아왔건만, 그 것은 엔클레이브에 튕겨 났을 뿐이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빨리 눈치를 채는 거야?" 내가 투덜대자 라이메데스가 피식 웃는다. "글세. 보초 서는 엘프라도 있었나보지." 화살시위는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뭐, 라이메데스의 엔클레이브는 화살을 쏟아 부어도 멀쩡할 테고(아니, 화살이 다 뭐냐. 무슨 짓을 해도 튼 튼할 거다.) 에세렌 역시 프로텍트를 치고 있는 데 전혀 무리가 없는 듯 했 다. 그렇게 한참동안 화살질을 해대다가, 결국엔 포기했는지 저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참 더럽게 빨리 물어보는군. "이 곳은 우리 엘프족 외에는 그 누구의 출입도 금지된 구역이라는 것을 잊었는가!"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라이메데스를 돌아보았다. "이봐, 엘프가 조화의 종족이라는 건 잘못된 설이었나?" "그렇지 않아. 다만, 인간이라는 종족과의 융해를 싫어할 뿐이지. 마족은 물론이고." 어째서? 하고 물으려다 말고 나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어차피 물어봤 자 라이메데스가 친절히 설명해줄 녀석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으니 말이 다. 그래. 이 녀석은 언제나 내겐 숨기는 것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키르 녀석 이 그랬지. 너도 참 대단한 보디가드를 갖고 있구나. 네게 가는 정보를 전 부 차단한 것 같으니, 라고 했었나? "야! 우리는 그냥 누구를 좀 만나러 왔을 뿐이라고!" 나는 버럭 고함을 쳤다. 그러자 저 멀리에서 소리가 들린다. "누구를?" "아이룬의 후예를 만나러 왔다!" 내 고함소리에 엘프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들의 웅성거림을 한참 듣고 있던 라이메데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간 끝도 없겠군. 실력 행사를 해야겠다." "뭐야, 미쳤냐?" 나는 라이메데스의 머리를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어서 나가라! 지금 나가면 더 이상 공격하지 않겠다."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짜증이 나서 소리를 쳤다. "젠장할! 아이룬의 후예를 만나러 왔다잖아! 만나기 전엔 안 돌아가!" 그 순간이었다. 저 너머로부터 막대한 수의 존재감이 느껴진 것은.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바로 그 순간, 우르르 하고 적지 않은 숫자가 우리 쪽으로 몰려들어왔다. 나는 움찔했다. 어느 샌가, 눈치채지 못하게 엘프들이 몰려 온 모양이다. 대략 20명 정도로 보이는 엘프들이 저마다 무기를 든 채로 우 리 쪽을 반원모양으로 둘러쌓다. "너는 마족인가!" 엘프들 중 하나가 그렇게 소리를 쳤다. 엑, 어떻게 알았지? 싶어서 고개를 갸웃하다가 문득 방금 전 라이메데스가 엔클레이브를 쳤다는 걸 깨달았다. 라이메데스는 엘프들의 질문에 아무런 눈빛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 "그렇다." "여기는 무슨 일인가! 이것은 분명 협정에 어긋난 일이라는 걸 모르는가!" 라이메데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으, 으으으. 분명 기분 나쁘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나도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었단 말이다, 라고 말하는 듯한 라 이메데스의 눈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손에 은근슬쩍 힘이 들어가는 걸 보니, 꽤나 화가 난 듯도 하군. 크으, 라이메데스가 화나면 여기에 있는 이 엘프들이 어떻게 되는 건 문제 도 아니다. 게다가 인정하기는 싫지만 키르 녀석도 나 같은 건 상대가 안될 정도로 강한 마족이고. 우리가 아무 말이 없자, 엘프들 중 몇이 화살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몇몇 은 가볍게 손을 모으고 있었고, 몇몇은 검을 꺼내려고 한다. 에라이 젠장! 대체 뭘 어떡해야 되는 거지? 에디 에이렌의 숲에서 아이룬의 후계자를 만 나라는 그 말을 너무 수월하게 생각했던 건가? "죽이기 전에 물러가라!" "하하하! 너희들 정도로 나를 죽이겠다고?" 엘프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라이메데스가 가볍게 실소했다. 그러자 엘 프들의 분위기가 더더욱 험악해졌다. 그들이 한 발자국씩 한 발자국씩 더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에세렌이 엘프들의 앞으로 뛰어 들어가며 소리를 친 것은. "엘프님들! 일단 얘기를 좀 들어주세요!" 녀석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흠칫하는 엘프들의 앞에서, 에세렌은 앞에 피어 있던 비아니스를 한 송이 뽑아 들었다. 순간, 비아니스가 투명하게 변하는 것을 본 엘프들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아니? 천족이십니까?" 그들의 말에 얼굴이 벌개진 에세렌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그럼 신족?" "아, 아, 아, 아니요! 그, 그럴 리가요!" 에세렌의 말에 그들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럼, 신성을 타고난 존재?" "네!" 에세렌의 단호한 대답에 그들의 미간에 엷은 줄이 갔다. "신성을 타고난 존재가 왜 마족들과?" "어찌됐든 저, 저희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저희는 정말로 아이룬의 후계자 를 찾으러 왔을 뿐입니다! 그 분만 만난다면 바로 돌아 갈 거예요! 이 분들 도 당신들에게 폐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이룬의 후계자를?" 엘프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에세렌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이메데스는 쳇, 하는 소리와 함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었고 키르는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엘프들을 보 고 있을 뿐이었다. 엘프들은 한참동안 쑥덕대다가, 어느 순간 한 명이 에세 렌의 얼굴을 보며 나즈막히 말했다. "대체 그대가 왜 마족과 함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신성을 타고난 존재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단 당신을 믿고, 아 이룬의 후계자를 불러오겠어요." 오오오! 크흑, 에세렌. 너도 쓸 데가 있었구나. 왠지 감동에 젖어 에세렌을 보니, 에세렌 역시 의기양양한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팔짱을 낀 상태에서 그 아이룬의 후계자인지 뭔 지를 기다렸다. 엘프들 스무명은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공격을 할 수 있도록 꼿꼿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기다렸을까. 저 너머에서 빠른 기척이 느껴져 왔다. 저 너 머 언덕에서 여러 개의 그림자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 그림자에서 누군가 가 불쑥 솟아오르더니, 우리 쪽을 향해 크게 소리를 쳤다. "내가 아이룬의 후계자요!" 긴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은 회색. "……아, 너?" "에?" 내가 아이룬의 후계자요, 하고 기세등등하게 외쳤던 그가 나를 발견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핫, 하고 헛웃음이 치미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시이나 아냐?"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2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75 "시이나 아냐?" "시이나님?" 시이나의 뒤에 서 있던 엘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앞에서 잔 뜩 경계하는 자세로 서 있던 엘프들도 순간 놀란 듯, 입을 딱 벌려버렸다. 물론 놀란 것은 그 녀석들뿐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 설마 그 아이룬의 후계자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는 자가 시이나일 줄 이야. 시이나는 한참동안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다가 문득 핫, 하고 웃 음을 터뜨렸다. "아, 아하하. 하하핫. 당신들이셨습니까?" "응." "이런이런. 예, 반갑습니다. 오랜만이에요! 아, 당신일거라고는 정말 생각 도 못했습니다. 이거 정말 놀라운 걸요." 시이나는 서 있던 언덕에서 구르듯 내려오려고 했다. 녀석의 회색 머리카 락이 기다랗게 뒤로 휘날렸다. 하지만 녀석이 막 뛰어내리려는 순간, 뒤에 서 누군가가 그녀석의 팔을 잡았다. "잠깐만요, 시이나님! 저자들 중 일부는 마족이라고……." "알아." "예?" 시이나의 팔을 붙잡은 엘프의 눈이 또다시 동그랗게 커졌다. 시이나는 뒤 에 남겨진 자들은 아랑곳 않고 총총히 내려오더니 우리들 앞에 있던 엘프들 틈을 살짝 빠져 나와 내 바로 앞에 섰다. 한참동안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던 그가 어느 순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그 사이 각성하셨군요?" "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그런데 아이룬의 후계자인가 뭔가가 너였던 거냐?" 시이나는 씨익 웃었다. "예. 뭐, 그렇게 됐습니다. 아, 데스?" "흠." 라이메데스는 시이나를 한 번 바라보고 다시 시선을 돌려버렸다. 시이나는 우리 일행을 이리저리 휙휙 둘러보더니 어느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못 보던 사람들도 보이는군요. 새로 생긴 동료이신 가요?" "응." "음? 그런데 카민님이 안 보이는군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살짝 몸을 비켰다. "아? 왜 그러시죠? 카민님은 어디에?" "죽었어." "예?" 내 대답에, 시이나가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을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경악이 어린 눈으로 시이나가 내 쪽을 보았다. 나는 무덤하게 그런 시이나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시이나는 아,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나 를 보았다. 그가 동그란 눈으로 내게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순간, 나는 그의 말을 덥썩 잘라버렸다. "카리스가 너에게 가보라고 해서 왔다." "예? ……아, 예." 내 표정이나 표정에서 뭘 읽었던 걸까? 시이나는 그 이상 무슨 말은 하지 않았다. 아까 전 시이나가 뛰어내려온 언덕에서부터, 엘프들이 주섬주섬 내 려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엘프들은 무서운 눈으로 우리 주변에 다가와 우 리들을 큰 폭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공격을 감행할 듯, 약간의 살기마저 피워대고 있었다. 시이나는 뒤쪽을 힐끗하고 한 번 본 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들은 어찌됐든 내 손님입니다. 잠시 가만히 있어주세요." "하지만 시이나님! 그들은 마족이 아닙니까?" "마족이기 이전에 저의 손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시이나의 큰 소리에 삽시간에 엘프들이 조용해졌다. 오, 오우. 시이나, 너 의외로 힘있는 엘프였구나. 시이나는 내 쪽을 힐끗 한 번 본 다음 조용하게 한 번 웃어 보였다. 그가 내게 말했다. "확실히 카리스님이 저에게 가보라고 한 것인가요?" "응." 내 말에 시이나는 흠, 하고 웃은 뒤에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무엇 인가 조그마한 것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라고 묻자 시이나가 가볍게 웃는 다. "아마도, 카리스님은 당신에게 이걸 주라고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 같군요." 그 말과 함께 시이나가 품을 뒤적이더니 무엇인가를 꺼내들었다. 자주빛 천으로 감싸진 것이었는데, 그것이 시이나의 손에 들려나오자마자 엘프들이 다시 고함을 쳐대기 시작했다. "시이나님! 그것은!" 에? 뭐길래 저러는 거지? 인상을 찌푸리며 녀석들이 날뛰는 것을 보고 있는데, 시이나가 조용히 다 시 입을 연다. "원래 이 것의 주인은 이 분이십니다. 저는 이 것을 잠시 맡아두고 있었던 것 뿐. 조용히 해주십시오." 시이나의 조용한 목소리는 뜻밖에도 굉장한 위력을 발휘해, 떠들어대고 있 던 엘프들을 순식간에 조용히 시켰다. 나는 시이나가 내민 자줏빛의 그 주 머니를 받아들었다. 그 것을 살짝 열어본 순간, 나는 조금 놀랐다. 거기에 있는 것은 별 특별할 것 없는, 그저 평범하기 그지 없는 돌덩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뭐야?" "……기억의 조각입니다." "에?" "그냥, 가지고 계세요. 언젠가는 알게 되실 겁니다. 엔카의 유품이지요." "뭐야? 엔카라면 날 낳은 어머니잖아!" 그 말에 시이나가 부드럽게 웃었다. "예, 그렇습니다. 소중하게 간직하세요."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느낌과 함께, 천천히 그 주머니를 바지 안에 넣었 다. "그런데 시이나. 카리스는 안내자가 있을 거라고 했는데." 시이나가 핫핫, 하고 웃었다. "안내라자라면, 이미 같이 있지 않습니까?" "뭐?" "당신 뒤에, 저 분 말입니다." 순간, 몸이 피가 굳는 느낌이 들었다. 인상을 확 쓰며 돌아보자, 키르가 히이, 하고 웃어 보인다. 머리 위로 굳게 치솟는 것은 짜증. 크흐, 저 녀석 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군. 쳇, 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키르가 히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이런, 아이룬의 후계자님께서는 내 정체도 알아보시는가?" "못 알아볼 것 없지요." 시이나는 조금 냉담하게 뱉어놓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나에게 무엇이 라 말을 하려는 순간, 나는 그의 뒤에 서 있는 엘프들의 무시무시한 시선을 보고 움찔해버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시이나를 향해 작게 입을 열었다. "이만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아. 그래야 할 것 같군요." 시이나가 씁쓸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녀석에게 가볍게 인사를 해 보인 후, 몸을 돌렸다. 녀석들 역시 내 옆으로 돌아서는데, 갑자기 커다 란 목소리가 우리의 목덜미를 잡았다. "아니, 잠깐만요!" 시이나의 고함소리에 놀라서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본 순간, 나는 시이나 의 놀란 듯한 눈에 멈칫해버렸다. 시이나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은 내 쪽도, 라이메데스 쪽도 아닌 에세렌 쪽이었다. 녀석은 에세렌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당신! 이네아 족입니까?" 움찔, 하고 에세렌이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엘프들이 조용해졌다. 싸늘한 정적이 온 주위를 돌았다. 에세렌은 아? 하는 눈으로 시이나를 보고 있다가 조용히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아. 그, 그렇습니다만." 시이나가 하? 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가볍게 에세렌 쪽으로 다가오더니, 갑자기 에세렌의 이마에 손을 갖다댔다. 에세렌은 몸을 비틀어 거기서 벗어 나려고 했지만, 시이나에게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무리였다. 시이나는 에 세렌의 이마에 놓였던 손을 재빨리 떼어내며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당신. '세이즌의 시기' 에 들어선 것 같아요. 그렇죠?" "아." 세이즌의 시기? 그건 또 뭐냐? 나는 에세렌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시이나가 버럭 고함을 친 것은. "죽고 싶은 겁니까. 당신은?" 에? "아, 아니에요." 에세렌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시이나의 옆으 로 다가갔다. 다가가는 도중에 흘낏 엘프들의 눈치를 보았는데, 이상하게도 엘프들은 아까와는 달리 별다른 말없이 얌전히 거기에 그렇게 서 있었다. 나는 에세렌의 앞을 막아서며 시이나에게 물었다. "무슨 말이야?" "칼레들린님. 동료, 라는 말을 하고 싶으시다면 이 분에게 조금 더 신경을 쓰셔야 하겠습니다." "무슨 뜻이야?" 조금 짜증이 나서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자 시이나가지지 않겠다는 듯 살짝 인상을 그으며 입을 연다. "이 분이 이네아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죠?" "그래." 내가 눈을 치켜 뜨자, 시이나가 눈을 찢을 듯이 위로 올린다. "그럼 이 분이 20세의 생일 날 성을 결정한다는 것도 알시겠군요?" "물론이다." "이 분이 20세 생일 날 성을 결정하지 못하면 중성인 상태로 몇 일 간 앓 다가 죽어버린다는 사실은?" "알아." 나의 연속적인 대답에 시이나의 인상이 더 딱딱해졌다. "그럼, 이 분의 '20세 생일' 이 채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는 건 알고 계십 니까?" 뭐라고?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에세렌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지 는 것이 보여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 시이나는 상당히 화가 난 얼굴로 내게 윽박지르듯 말했다. "이네아에게 있어서 성을 결정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알고 계 십니까! 이네아들은 거의 평생동안 아프지 않지만, '세이즌의 시기' 에 들 어가는 순간부터 몸이 급격히 약해진다는 것도 모르고 계셨죠?" 아. 무, 물론 몰랐다. "세이즌의 시기… 가 뭐야?" 입술을 약간 떨며 내가 한 질문에, 시이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고함을 쳐댔다. "성을 결정하기 전의 일주일간을 말합니다. 열이 심하게 끓어오르고, 헛소 리를 해대기도 하죠. 그 일주일간은 절대적으로 안정입니다." 나는 놀라서 에세렌의 얼굴을 보았다. 뭐야, 에세렌? 그동안 전혀 그런 건 없었잖아? 한 번도 아프다거나 하는 기색 보인 적도 없었다구! 나는 에세렌을 보았다. 에세렌은 인상을 잔뜩 구긴 채로 내 시선을 피하려 고만 하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화가 나서 그런 에세렌의 어깨를 움켜쥐었 다. 에세렌은 윽,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왜 말을 안 한 거야!" 내 고함 소리에 에세렌이 움찔한다. "아, 하, 하지만." 에세렌의 하늘색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바, 방해가 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저 세이즌의 시기인가 뭔가가 와도 나한테 한 마디도 안 했단 말 이냐?" 녀석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녀석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지만, 너무 화가 나서 거기에 신경 써 줄 정신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죽고 싶은 거냐? 너도! 너도 죽고 싶은 거냐고!" "윽." 나는 에세렌의 눈을 한참동안 매섭게 노려보았다. 에세렌은 나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얼른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나는 에세렌에게서 시선을 뗀 후, 시이나와 그 뒤에 줄줄이 서 있는 엘프들 쪽으로 향했다. 엘프들은 내 시 선에 조금 긴장을 하고 있었지만, 아까처럼 살기를 피운다거나 하지는 않았 다. 나는 에세렌의 어깨를 움켜 쥔 상태에서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이 숲에서, 세이즌의 시기가 끝나는 몇 일간만 신세를 질 수는 없나?" 순간, 엘프들 틈에서 큰 소리가 새어나왔다.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엘프들의 숲을 마족 따위에게 내어 줄 것 같은가!" 젠장. 나는 고개를 돌려 시이나를 보았다. 시이나는 곤란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 었다. "카, 칼레들린님. 저, 저는 괜찮습니다. 저는……." 에세렌이 내 옷을 잡으며 고개를 저어댔다. 나는 다시금 차오르는 짜증에 미간을 좁혔다. "옆에 남아 있겠다고 한 건 다 거짓말이었단 거냐?" "예……?" "화내기 전에 입 닫아." 나는 에세렌의 어깨를 움켜쥐었던 손을 놓고 천천히 시이나 쪽으로 다가갔 다. 엘프들은 내가 다가오자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서며 다시 경계를 시작 했다. 나는 엘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는 분명 마족이다. 하지만 반마족이야." 순간, 엘프들이 놀란 듯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말을 이었 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 쪽에 있는 시이나와도 아는 사이다. 너희에게 절대로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거야." 시이나는 하아, 하는 가벼운 한숨소리를 냈다. 나는 다시 소리를 쳤다. "여기 뒤에 있는 내 동료는 너희가 말한 대로 신성을 타고난 존재다. 이녀 석은 이네아야. 세이즌의 시기인가 뭔가를 맞이했다는데, 너희가 일주일만 쉬어갈 수 있도록 해줬으면 좋겠다." "마족은 믿을 수 없어!" 빌어먹을. 욕지기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에세렌은 나에게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곧 내 눈을 바라보곤 얼른 고개를 숙여버린다. 녀석은 입술로 조그맣게 죄송합니다, 라고 중얼거렸다. 흥, 죄송하다고? 뭐가? 뭐 가 죄송한지는 알고 있는 건가? "그럼 잠깐만요." 시이나는 엘프들을 중재하더니 내 쪽을 힐끔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엘프들은 일순간에 조용해지며 우리 쪽을 보았다. "일단, 숲에 들어오는 것은 거기 에세렌님과 칼레들린님으로만 제한하겠습 니다. 나머지 두 분은 안으로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뭐야?" 라이메데스가 인상을 팍 쓰며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키르가 그런 라이메 데스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그것도 안됩니다! 시이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해도, 이 쪽 역시 마족이 아 닙니까!" 그 말에 시이나가 가볍게 웃었다. "아니, 이 분은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분입니다. 이 분에 관한 한은 제 가 모두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저기 계신 저 두 마족은 제가 책임을 질 수 있는 한도를 넘는 분들이지만, 칼레들린님 한 분 정도는 제가 책임을 질 수가 있지요. 게다가, 여러분." 시이나는 말을 하다말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칼레들린님은 엔카의 아들입니다." "뭐라고!" 엘프들에게서 경악성이 튀어나온 건 그 순간이었다. 에, 뭐야? 뭐야? 엘프 들이 이렇게 놀라는 건 또 무슨 경우지? 분명 엔카는 내 어머니의 이름이었 다. 그런데 엘프들이 내 어머니의 이름을 듣고 이렇게나 놀라다니? 아니, 그 전에. 엘프들이 그녀의 이름을 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엘프들이 당황한 목소리로 뭐라고 외쳐대고 있는 동안, 시이나가 고개를 돌려 엘프들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엘프들은 아까 전 시이나에게로 시선 을 집중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모조리 내 쪽으로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으, 으으, 뭐냐 그 눈들은! 시이나는 내 쪽으로 쏠리는 시선을 자신 쪽으로 돌리기 위해 가볍게 박수 를 두 어 번 친 후,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에디 에이렌은 분명 모든 엘프들의 공동소유입니다. 하지만, '아이룬의 탑' 은 저의 소유가 아닙니까? 이 두 분을 '아이룬의 탑' 에 일주일만 모셔 두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아이룬의 탑? 그건 또 뭐지? 엘프들은 저희네 들끼리 숙덕거리다가, 곧 한 녀석이 나서서 말해왔다. "아이룬의 후계자이신 시이나님께서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저 둘 정도는 에 디 에이렌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겠습니다. 조금 찜찜하긴 하지만. 그나저 나, 정말 저기 있는 저 자가 엔카의 아들입니까?" "물론입니다. 허락해 주신 다니 감사하군요." 에세렌은 피식 웃어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분위기를 확 깨는 목소리가 울렸다. "누구 마음대로!" 라이메데스가 버럭 고함을 치며 앞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시이나는 에? 하 는 표정으로 라이메데스를 보았다. 뭐냐, 라이메데스? "누가 칼레들린을 에디 에이렌의 숲에 혼자 보낸다는 거냐?" 뭔 헛소리야? 혼자 가는 거 아냐. 에세렌도 같이 가는 거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엘프들 중에 누군가가 딴 마음을 먹고 칼레들린을 해꼬지라도 하려고 하면 어쩔거냔 말이다! 나도 함께 갈거다." 저, 적당히 좀 해라 이 자식아! "그건 절대 안 될 말입니다." 시이나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라이메데스는 뭐라고? 라고 말 하며 인상을 썼다. 시이나는 내 쪽을 돌아보며 살짝 웃어 보였다. "데스가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저도 곤란합니다." "알고 있다." 나는 라이메데스에게 척척 걸어가 녀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뭐야?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녀석 에게 말했다. "이봐, 라이메데스." "뭐냐." 라이메데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내 말을 받았다. 나는 작게 말했다. "나도, 각성했어." 순간, 녀석이 몸을 살짝 곧추세웠다. 나는 입술을 잘끈 물며 말을 이었다. "더 이상 네가 과보호하지 않아도 된단 말이다. 일주일 정도 에디 에이렌 의 숲에 있는다고 뭐가 달라진다는 거지? 그리고 시이나도 함께 있으니까." "그렇지만……!" 라이메데스가 다시 무엇인가 외치려는 순간에, 나는 못을 박듯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에세렌마저 죽도록 놔두지는 않을 거다." 순간, 라이메데스가 깊이 침묵했다. 무슨 뜻인지 아는 거지? 그래, 카민은 그렇게 보내버렸다. 남은 녀석마저 그딴 식으로 잃을 순 없어.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내 마음대로 해버릴 거란 말이다." 라이메데스의 인상이 굳어졌다. "흐음, 이거 이거 분위기가 이상한데?"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키르가 쏙 끼여들었다. 녀석은 라이메데스의 팔을 살짝 옆으로 잡아 끌며 히, 하고 웃어 보였다. "자자, 금발의 멋진 형. 그 정도로 해두지? 저 쪽 흑발의 미남형도 이젠 더 이상 꼬마가 아니잖아." "닥쳐!" 나와 라이메데스는 동시에 그렇게 뱉어냈다. 키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라이메데스의 눈을 보며 천천히 다시 말했다. "일주일이다. 갔다 오마. 넌 여기에 있어." "……젠장할." 라이메데스는 투덜댔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다시 몸을 돌려, 엘프들 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시이나가 살짝 웃어 보였다. 나는 에세렌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을 뱉었다. "따라와." "예…." 에세렌의 목소리는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엘프들은 웅성거리며 시이나를 따라 들어가는 내 쪽에서 뭐라고 뭐라고 쑥덕댔다. 나는 최대한 그들의 목 소리를 무시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아이룬의 탑은 뭐냐." "아, 에디 에이렌 숲의 가장자리에 있는 제 집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시이나가 살짝 웃었다. 시이나는 엘프들을 슥 하고 한 번 훑어본 다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제들, 먼저 돌아가 계십시오. 제 손님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걱정 마 시고 돌아가십시오." 그 말에, 잔뜩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 엘프들이 발길을 돌려 점점이 흩 어지기 시작했다. 시이나는 잿빛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그들이 흩어 질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어느 순간부터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나와 에세렌이 종종걸음으로 따라가자, 시이나는 커다란 고목 나무 앞에서 멈춰선 뒤 씨익, 하고 웃어 보였다. 그가 고목 나무에 손을 얹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 때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커다란 목소리. "시이나 엘 샤링드!" 라이메데스의 목소리였다. 시이나는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순간, 라이메데 스가 무거운 목소리로 한 마디 한 마디 낮게 뱉어냈다. "칼레들린에게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뭐라고?"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라이메데스를 돌아보았다. 시이나에게서 피식,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그렇게 과보호를 하실 건지. 알겠습니다. 노력해보지요." "쓸데없는 말을 했다간, 에디 에이렌의 숲 따윈 모두 날려 버릴 테니 명심 해." 라이메데스가 스산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말했을 때, 나는 시이나의 눈이 싸늘하게 한 번 올려졌다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시이나 이 녀석도 이런 표정을 짓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미간을 찌푸린 순간, 시이나가 가벼운 목소리로 답했다. "명심하지요." 그 말과 함께 시이나는 뻗은 손을 고목 나무에 가볍게 댄 채 부드럽게 무 엇인가를 입으로 웅엉거렸다. 주문인 듯 했다. 곧, 고목 나무에서 자그마한 빛이 나와 결계의 일부분을 열었다. 시이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두 분, 들어오세요."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2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76 제 35장: 이름이 바뀌다 뭐랄까. "예, 예쁘네요!" 이건 상상이상이다. "하하, 그런가요?" 초록색 넝쿨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차례로 내려와 있다. 부드럽게 하늘에 퍼져 있는 구름도 아까 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형형색색의 꽃이 만발하 게 피어 아름다운 향을 전하고, 뭉게 뭉게 피어오른 듯한 느낌의 나뭇잎들 이 차련하게 흔들리고 있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평화로운 느낌을 더한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주렁주렁 매달란 과일들이 농익어 지금이라도 톡, 떨어 져 내릴 듯 하다. 어딜 보아도 평화롭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부드럽게 흩어 지듯 퍼진 하늘의 석양조차 저 바깥에서보다 훨씬 아름다워 보여서, 나는 정말이지 감탄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에 서고 앉은 엘프들이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경계하는 기색 이 역력해서 조금은 기분이 나빴지만 뭐 어떠랴, 하고 생각하고 가볍게 무 시해버렸다. 그래그래. 저녀석들 역시 내 아리따운 미모를 보고 감탄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뭐. 시이나는 피식 웃으며 우리 쪽을 보았다. 그가 조그맣게 입술을 연다. "아이룬의 탑은 여기서 조금 떨어져 있어요. 좀 복잡한 길로 가야하니까 조심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시이나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의 날렵한 발걸음 을 따라 걷기는 상당히 무리가 있었지만, 나와 에세렌도 나름대로 열심히 그의 뒤를 따랐다. 자그마한 개울이 돌돌돌 흐르는 시냇가를 지나고, 무성 한 풀숲을 지나고, 자그맣게 놓여진 돌다리를 건너면서 우리는 시이나의 뒤 를 따랐다. 가는 내도록 감탄이 그치지 않았다. 빌어먹을, 마계도 이렇게 아름다우면 얼마나 좋을까? 음침한 검은 물이 가끔 흐르고, 안개가 자욱하고, 꽃 같은 것도 보기 힘든 마계는 너무 삭막한데 말이야.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고개를 든 나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정경에 놀라 입을 크게 벌렸다. 부드럽게 호선을 긋는 물줄기를 따라, 저 끝에서 이 끝까지 황금빛의 무엇인가가 출렁대고 있었다. 아름다워. "이것입니다, 아이룬의 탑이란." 시이나가 피식, 웃어 보였다. 나는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돌돌돌 소리를 내고 있는 황금빛의 물. 그 물이 아이룬의 탑이라는 건가? "무슨 말이야?" "아, 이 물 말구요. 여기 있는 이 황금빛의 열매들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이지요." 시이나가 싱긋, 웃어 보였다. "이 황금빛의 열매들은 신성의 열매라고도 불리지요. 이 열매의 이름이 아 이룬입니다. 이 곳의 파수꾼 역할을 제가 하고 있지요. 아, 저기에 있는 작 은 탑이 보이지요? 그것이 아이룬의 탑입니다." 과연, 그 황금빛의 물결 사이에 흰색으로 높지 않게 놓인 자그마한 탑이 보였다. 그리고 그 탑 옆으로, 무엇인가 희미한 것이 하나 보인다. 시이나 는 싱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 탑 바로 옆에 있는 것이 바로 저의 집입니다. 일단은 저기에 들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밖은 상당히 시끄러울 듯 하니, 저는 이야기를 좀 하고 오겠습니다. 일단 칼레들린님, 동료분을 눕히는 것이 좋을 거예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래도 안심이 안됐는지 그가 부드러운 어 조로 타이르듯 말한다. "그리고,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부터 반경 10분 거리 이상으론 나가시지 말아줬으면 좋겠습니다." "뭐, 그러도록 할게." 내 말에 시이나가 가볍게 웃었다. "예. 그럼 저는 잠시 갔다 올 테니 집에 들어가 계십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이나는 에세렌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후, 올 때 보다 훨씬 더 빠르게 날 듯이 뛰어가 버렸다. 시이나가 가고 나자, 나와 에 세렌 사이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나는 에세렌을 잠시 노려보다가, 에세렌 의 파리한 안색을 발견했다. 녀석이 작게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대체 뭐야." "…죄송합니다." "왜 말을 안했어?" "죄송합니다." "너 혼자 아프다가, 확 죽어버릴 작정이었냐?" 에세렌은 입술을 꾹 다물며 손을 꾹 주었다. 아프게 쥔 녀석의 눈이 바르 르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일단 들어가자." 나는 에세렌의 손을 이끌어 그 황금빛의 물결을 지났다. 스삭스삭 소리를 내는 그 황금빛의 물결이 내 몸에 밀려나면서 부드러운 속삭임을 전했다. 마주잡은 에세렌의 손이 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황금의 물결을 지나 시이나의 초라한 집 앞에 도달했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보인 것은 대충 만든 듯한 침대 하나와 탁자 하나가 전부였다. 나는 일단 에세렌을 눕도록 했다. "죄송합니다." 자리에 누우며 에세렌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냉정하 게 뱉었다. "어째서 말해주지 않은 거지?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데!" 내 말에 에세렌이 하아,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흰색 법복을 가볍게 추스리고 난 다음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칼레들린님한테 방해는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왜일까? 왜냐? 왜 나는 지금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고함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는 이유는 대체 뭐지? 왜 저 녀석의 뺨 이라도 냅다 때리고 헛소리 마! 라고 외치고 싶은 걸까. 그렇게 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그리고 사실은, 이 녀석을 이렇게 숲 안으로 데리고 올 필 요도 없었잖아. 사실은, 이 것도 이상해. 이 녀석이 세이즌의 시기를 맞이해서 안정이 필 요하다면, 이 녀석만 에디 에이렌에 맡겨 놓고 나는 라이메데스와 함께 그 카리스 놈을 찾아 훌쩍 가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여기에 있는 거지? 이 녀석과 함께 있을 필요 따윈 이제 없는데. 왜 그런 걸까. "시끄러워. 방해니 뭐니 떠들지마. 네가 죽는 편이 훨씬 방해야. 훨씬 거 슬린다고!" "예. 죄송합니다." 고개를 떨구며 에세렌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순간 조금 더 화가 났다. 뭐가 그렇게 죄송하고 미안하단 말이냐? 아픈 게 미안하단 거냐 아니면 말 을 하지 않은 게 미안하다는 거냐? 네가 아프다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긴 나한테 화를 낼 수도 있는 거 아냐? 젠장! 모르겠다. 나는 그저 이 녀석이… 카민이 죽었을 때 내게 했던 말들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야. 옆에 남아 있겠다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래서 이 러는 거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그저 그것뿐이다. "쉬어." 나는 그렇게 중얼거려 놓고 집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커다랗게 물결치는 황금의 강이 눈에 들어와 가슴에 들어와 박힌다. 그리고 그 황금 의 강 옆으로 흐르는 은빛의 강. 두 개가 차분하게 맞물려 아름답기 그지없 는 정경을 만들어냈다. 시선을 올렸더니, 노을이 진 하늘 위로 흐릿한 붉은 색으로 물들어버린 구 름이 잔잔히 떠가는 것이 보였다. 예쁘군. 아, 이런 곳에 있으니 괜히 잠이 오는 것 같다. 피곤해. 머리를 살짝 흔들어보았다. 나는 살짝 황금빛의 물 결을 벗삼아 땅에 드러누웠다. 기분이 좋다. 조금, 자도 좋을까? ◇ ◇ ◇ "헉, 헉, 헉헉……."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검고 검은 장막이 온 피부를 감싸고 괴롭힌다. 머 리가 어질어질 돌고 있다. "살아남아라! 살아남아!" 거친 목소리가 들린다. 무엇일까? 누구의 목소리일까? "너만은, 너만은 살아남아라! 우리가 사랑했던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네가 증명해줘." 슬픈 목소리가 들린다. 어디서 들리는 걸까?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아. 아, 여기다. 여기야.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 눈에 띈 것은 긴 은발이었다. 치렁거리는 은발을 소유주인 아리따운 여인. 아, 맞아. 나, 이 사람을 본 적이 있어. 어디서 봤지? 그래, 지난 꿈에서 봤었지. 아니, 지난 꿈에서 본 것만이 아냐. 그 전에도 본 것 같아. 이상한 느낌이다. 어디서 보았더라? "카인, 너만은. 너만은……." 아, 이번에는 저 쪽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았다. 흑발의 여 인이 있었다. 아름다웠다. 아, 당신은 또 누구지? 저번에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아, 그래! 맞아! 당신들 둘이 나란히 서 있었어. 그리고 내 가 그 가운데에서 웃고 있었고. 응, 맞아. 그랬었지. 하지만, 뭐지? 계속 머리가 울려. 아냐. 이상해. 그 때 보았던 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 그 전에도 난 당신들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맞지? 그 렇지? 하지만 언제였어? 잘 생각이 나지 않는데. 하지만 분명해. 당신들을 만난 적이 있어. 언제였어? 언제였어? 모르겠다. 생각이 나질 않아. 하지만, 지독하게 그리워. 아프리 만치 그립 다구. 이 찢어질 듯한 가슴의 통증은 뭘 의미하는 거야? 두 사람이 모두 나를 바라본다. 순간, 가슴의 통증이 더 심해졌다. 찢어질 것 같았다. 아, 잠깐만. 기다려봐. 거기에 서봐. 가지마. 대답해줘. 응? 가지 말고 대답해줘. 거기, 잠깐 멈춰봐. 잠깐만, 잠깐만……. ◇ ◇ ◇ "이런데서 자면 감기 들어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 또르륵. 몸을 일으켰더니, 볼끝을 타고 눈물이 내린다. 뭐냐 싶어 얼른 쓱, 하고 닦았다. 아까 꾸었던 꿈이 너무 선명해서 울어 버린 건가, 싶어 멋쩍게 머 리를 긁다말고 고개를 올리는데, 순간 굉장히 당황한 듯한 얼굴의 에세렌이 보였다. "왜, 왜 그러세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에세렌이 그렇게 물었다. 뭘 왜 그래? "이상한 꿈 꿨어." "예?" "별 일 아냐. 왜?" 내 말에 에세렌은 고개를 저었다. 녀석은 한참동안 내 얼굴을 보다가 후우, 하고 무거운 한숨을 내쉰 후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이 녀석이 왜 이러지, 싶어 흐음, 하는 소리를 내다말고 가볍게 눈을 감았다 떴다. 문득, 불쑥 무엇인가가 옆에서 내밀어진다. "이게 뭐야?" "시이나님이 주셨어요." 녀석의 손에 들린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희고 동글동글한 열매였다. 나는 일단 받아들어서 깨물어보았다. 와삭, 하는 소리와 함께 달콤한 과즙 이 입안을 맴돌았다. 흐음, 꽤나 맛있는걸. 오호? 이거 씹을수록 맛있다! "저, 저 말입니다." 와구와구 먹어치우고 있는데, 갑자기 에세렌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하마 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컥, 컥컥…. 뭐라고?" "저… 방해는 아니죠?" 에세렌의 말에 나는 과일을 마저 씹어 넘기며 냉정하게 답했다. "방해야." 에세렌의 얼굴이 확 하고 굳었다. 난 피식 웃으며 손을 들었다. 녀석이 놀 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을 보며, 나는 녀석의 머리를 손으로 마구 헝 크러뜨렸다. 녀석이 엑?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을 들으며 나는 조용히 말했다. "방해지만 버리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마." 에세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은 그 자세 그대로 한참을 있던 에세 렌이 고개를 찬찬히 들었다. 난 손을 거두고 다시 누웠다. 눈을 감기 전에, 에세렌의 얼굴 위로 잔잔한 미소가 흐르는 것을, 나는 보았다. ◇ ◇ ◇ 에세렌은 낮에는 멀쩡하다가 밤만 되면 골골거리며 앓아 누웠다. 시이나는 그것이 세이즌의 시기에 들어서는 이네아들의 전반적인 특징이라고 말했다. 여태까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정말 힘들었을 거라고 말하는 시이나의 표정에는 원망이 가득해서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어? 안 아파?" 그런데, 그 날은 조금 달랐다. 원래 그 시간대에는 침대에 누운 채로 보낼 에세렌이, 희미한 웃음을 입에 건 채로 내가 앉아 있는 바깥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예,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이것 좀 봐봐." 나는 앞에서 날아다니고 있는 반딧불을 바라보며 말했다. 에세렌은 피식 웃었다. "예, 안에서도 봤습니다." 반딧불은 희미하게 넘나드는 도깨비불처럼 아른거렸다. 에세렌은 희미하게 웃음 지으며 조심스럽게 내 옆으로 다가왔다. 새하얀 법사복이 바람결에 부드럽게 휘날리고 있었다. "정말 안 아프냐?" "예. 그리고 밖에 나와보고 싶기도 했구요." 오호? 이 반딧불 때문에 나와보고 싶어졌단 말인가? 보기보다 센티멘탈리 스트였군. "왜? 이 반짝이는 불 때문에?" "푸하하하, 아뇨. 그냥 배가 고파서요." 털썩 내 옆에 주저앉는 에세렌의 양손에는 동그란 주먹밥이 들려있었다. 끙, 그, 그러면 그렇지. 이 녀석에게서 센티멘털리즘을 기대한 내가 바보다. 에세렌은 사브작 사브작 소리를 내며 오른손에 있던 주먹밥을 사각사각, 마치 쥐처럼 파먹기 시작했다. 입가에 잔뜩 밥풀을 묻히고 먹어대는 에세렌은 너무나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어이, 거기 남은 주먹밥 하나만 나 줘' 라고 말했다간 이 아름다 운 밤에 살해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그 주먹밥은 어디서 났어?" "예? 하하하. 그, 그냥……." "그냥?" "시이나씨 부엌에 가서 갖고 왔는데요." "……." 그, 그건 일종의 도둑질이잖아, 이 신관 놈아! 에세렌은 그러나 냠냠 소리를 내며 주먹밥을 계속해서 먹어댈 뿐, 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그래, 끙. 이 녀석을 신관의 범주 에 끼워 맞추는 행위는 이제 그만두자. 그랬다간 내가 견디질 못할 거야. "음, 칼레들린님은 이 불빛 때문에 잠이 오지 않으시는건가요?" 에세렌은 웃었다. 움직이는 반딧불. 그것은 마치 옛날에 보았던, 장작을 연상시켰다. 밤의 어둠을 갈라먹는 반딧불들이 초롱빛으로 은은하게 하늘로 솟구치고 있다. 어디로 가는 걸까, 이 많은 생명들은? 나는 멍한 눈길로 반딧불을 바라보았다. 이 반딧불을 보고 있노라니 인간 들이 어디서 태어나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족들은 인간이란 존재가 그저 저 빌어먹을 신족이라는 놈들이 가지고 놀 다 버리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인간들은 최대한 자신이 삶을 누리고 간다. 노력하고, 치열하게, 열심히. 이 세상 어떤 존재보다도 훨씬 강렬하게 생 명력을 불태우고 죽어나간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건 그들 존재의 마지막 행방. 마족이 죽어서 남기는 것은 결국 어떤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마력덩어리다. 신족은 완전히, 깃털 정도만을 남기고 소멸해버리지. 그렇다면 인간은? 시체가 남는 그 인간은 어디로 가는 거야? 불빛들처럼 사그라질 듯 사그라질 듯 사그라지지 않는 인간이란 존재가 마지막으로 향 하는 곳은 어디야? 시발점도 종착점도 알 수 없다. 알고 싶다. 하하, 어쩌 면 사실 나란 녀석은 그저 카민이 어디로 갔는지를 알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 전체와 연결시키다니, 비약이 심하다. 한참동안 반딧불불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눈이 따갑다거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없다. 그저, 시린, 뭔가의 상처가 그 불길을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로시엔. 왜 이 불빛을 보면서 네가 생 각나는 거지? 카민의 얼굴과 더불어 네 얼굴이 떠오른다. 빌어먹을! 오늘밤엔 달이 너무 하얘서 그런 거다. 그 때문에 조금 감상적 이 된 거야. "칼레들린님?" 조금 걱정스러운 에세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의 하얗고 보드라운 손 가락이 내 얼굴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에세렌을 바라보았다. 하늘빛의 눈동자에 꽉 차 있는 것은 걱정스러움. 깨질 것 같은 유리를 만질 때처럼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녀석은 나를 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하하. 이봐, 나는 그렇게 쉽게 깨지는 유리가 아니니까 그런 눈은 하지 않 아도 된다구. "괜찮지 않음 뭐가 잘못됐겠냐? 상관하지 말고 볼에 묻은 밥풀이나 떼라." "히익!" 에세렌은 기겁을 하며 자신의 뺨에 붙은 밥풀을 얼른 떼어 내서 입에 쏙 넣었다. 그, 그 나는 기지개를 쭉 편 후 천천히 자리에 드러누웠다. 검은색 의 긴 머리카락이 바닥에 차분하게 흩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길기도 하지 이 빌어먹을 머리카락. 정말 확 잘라 버릴까보다. 흠, 그래도 머리카락이 워낙 길어 마치 바닥에 무슨 이불을 깐 듯한 느낌이라 나쁘진 않다.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달의 빛깔이 너무 선명하게 눈 에 들어온다.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저 무수한 불빛들 역시 멈추지 않아 손에 잡힐 듯 하다. 눈을 감았다, 는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는 듯 모든 것 이 또렷하기만 하다. "……주무시는 거예요?" 에세렌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어 내게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대답 하지 않고, 그저 눈을 꾹 감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침묵. 한참의 침묵이 흐른다.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빛만이 더욱 뚜렷하게 느껴진다. 눈을 감은 채로 그것들의 움직임을 읽는다. "정말 주무시는 거예요?" 그 말과 함께 에세렌이 내 옆구리를 푹, 찔렀다. 크아. 뭐하는 거야 이 녀 석! 하지만 옆구리를 찔러오는 녀석의 그 무지막지한 손가락에 크나큰 고통을 느끼면서도 인내심의 대명사이신 이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님께서는 반응 을 보이지 않았다. "주무시는군요." 에세렌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이 조금 꼼지락거리는 지, 녀석 주변의 마른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가볍게 바람이 분다고 생각했다. 에세렌이 앉은 쪽에서 불어온 바람이라, 바람은 에세렌의 법복을 가볍게 흔들었다. 법사복 끝이 내 팔에 맞닿았다. "그, 근데 정말 주무시는 거 맞죠?" 뭐냐? 다음 순간, 에세렌이 내 쪽으로 힐끔 시선을 던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 고 다음 순간, 나는 갑자기 팔 언저리에서 느껴진 엄청난 고통에 하마터면 고함을 빽 지를 뻔했다. 이, 이, 이 자식이! 남의 팔을 꼬집다닛! 그래도 나는 참았다. 그러자 이 번에는 요리조리 건드리며 또 내가 정말 잠들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시작 한다. 무, 무서운 것. 아예 고문을 해라, 앙! "비겁하군요, 저라는 녀석." 후우, 하는 한숨소리와 함께 털썩, 다시 풀섶에 에세렌이 앉는 소리가 들 려왔다. 나는 드디어 이녀석의 이 고문작전이 끝났구나, 라고 생각해 속으 로 무수한 눈물을 흘렸다. 모르긴 몰라도 내 팔엔 엄청난 멍이 들어 있을 거다. "당신이 주무시고 계실 때 이런 말 하는 거, 정말 비겁하다는 걸 압니다." 에? 무슨? 나는 눈을 뜨려다가 말았다. 흐음, 여태까지 하는 행동으로 보 면 내가 자는 걸 기다린게 틀림없다. 그냥 자는 척 하면서 듣는 편이 낫겠 군. 나는 힐끔 에세렌을 보았다. 에세렌은 저 멀리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녀석의 턱선만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저어,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과 만난지도 꽤 오래되었지. 처음에는 정말 지독하게 도 싫었다. 단지 신관, 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오랫동안 머리 속에 박 혀 있던 '신관은 더러운 족속' 이라는 것이 내가 저 녀석을 싫어하는 당위 적 이유가 되어주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옆에 남아있구나, 이 녀석. "저… 저 말이지요……." 에세렌의 목소리 끝이 가볍게 떨렸다. 나는 질질 끄는 녀석의 태도를 참다 못해 벌떡 일어나 녀석의 머리를 손으로 가격하고 싶다는 충동마저 느꼈지 만 꾸욱 참았다. 그, 그래. 나는 참을성의 대명사 칼레들린이 아니던가.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지, 암. "저… 어쩌면……." 에세렌이 후우,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녀석의 청록색 머리카락이 부르르 떨렸다. "어쩌면… 여자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2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77 "어쩌면… 여자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에엑? "그… 래도 괜찮… 겠죠?" 떨리는 어깨. 녀석이 슬그머니 내 쪽을 돌아보며 그렇게 묻는 바람에 나는 서둘러 다시 눈을 감아야 했다. "괜찮, 겠죠?" 에세렌은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뭔가, 이 녀석에게 한마디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천천히 눈을 떴다. "안될 건 없지." "헉!" 내가 몸을 일으키며 느릿하게 한 말에, 에세렌은 완전히 경악한 얼굴로 나 를 돌아보았다. "윽." 나는 에세렌의 얼굴을 보고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엉망진 창이 돼버린 얼굴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천천히 파 랗게 질렸다가 한참 후에는 보랏빛이 되버렸다. 신기하군. 이네아는 저런 얼굴색도 만들 수 있는 건가. "아, 아, 아, 안, 안, 주, 주, 주무셨, 셨, 어요?" 부들부들 떨면서 녀석이 그렇게 물었다. 보라색 안색이 천천히 다시 파란 색으로, 파란색이 다시 하얀색으로, 그 하얀색이 이윽고 붉은빛으로 변했다. 헉. 얼굴에다 누군가가 색칠놀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군. 나는 피식 웃으 며 내 검은머리를 뒤쪽으로 쓸어 넘기려 했다. 윽, 그러나 폼을 잡기 위해 한 그 행위는 실패했다. 머리카락이 너무 길어 엉덩이 밑에 깔려 있던 까닭에 머리가 쓸어 넘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으, 쪽팔려! "그래, 왜 여자가 될지도 모른다는지 물어봐도 돼?" 에세렌의 얼굴이 이번에는, 마치… 카민의 눈동자를 연상시킬 만큼 붉게 변했다. 새빨간 빛이 녀석의 온 얼굴을 덮고 있다. 에세렌은 자신이 얼굴을 무릎 사이에 푸욱 파묻었다. 흰색 법사복이 녀석의 달아오른 볼을 감추려 고 노력해보지만 무리다. 은은한 달빛이 녀석과 나 사이에 맴도는 이 어색한 침묵을 메워 보려는 듯 움직이고 있지만 그것 역시 무리다. 가쁜 숨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녀 석은 한참만에 고개를 들었다. 하늘색 눈동자에 그윽한 달빛이 담겨 있었다. "…이네아는 저주받은 족속이지요?" 한참만에 튀어나온 것은 그런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냐?" 에세렌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희미하게 뻗쳐오는 안개처럼 부드럽게 새어나오는 한숨. "자기가 성을 결정하는 것 말입니다. 그 전에 우린 남자도 여자도 아니니 까 사랑하는 것이 무섭지요. 차라리 평범하게 태어나는 것이 좋을 텐데 말 입니다." "약한 소리하지마. 네가 그렇게 말하면 이 대륙에 있는 꽤나 많은 수의 동 성연애자들이 슬퍼할걸?" 내 말에 에세렌이 킥, 하고 웃었다. 난 녀석이 내 농담에 웃어주었다는 사 실이 조금 기뻐서 녀석의 어깨를 두 어번 두드려주었다. 그러자 에세렌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추워?" "예? 예?" "아니, 떨고 있잖아." "……아, 아, 안 추워요." 에세렌은 얼굴이 발갛게 되서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나는 피식 웃어버렸 다. "그래, 네가 남자가 되든 여자가 되든." 나는 도로 땅에 누웠다. 에세렌의 시선이 나를 좇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거야." 내 말에 에세렌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눈을 가볍게 감았다. 거짓말처럼 잠이 몰려들었다. ◇ ◇ ◇ "에세렌." 에디 에이렌의 숲에 들어온 지 사흘이 지났다. 에세렌과 함께 반딧불을 본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시이나의 말대로 이 곳에서 되도록 움직이지 않고 있으려니, 엘프들이 괜히 와서 시비를 건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굉장히 평화로운 마음으로 시간들을 보낸 셈이었다. 어제 그 일이 있은 뒤 로부터 에세렌은 다시 몸이 아파졌는지 계속 침대에 누워 있었고, 시이나는 잠깐잠깐 들러 그런 에세렌을 돌보아주었다. "야, 에세렌. 일어나 봐." 계속 침대에 누워 있는 에세렌을 위해, 착한 나는 준비해간 것을 살짝 흔 들며 그렇게 말했다. 요 근처에서 잡았던 손바닥 마디 만한 빛나는 벌레. 에세렌에게서 대답이 없자, 나는 천천히 다가가 녀석의 바로 앞에서 벌레를 놓았다. 황금빛 물결의 열매 옆에서 살아서 그런지, 그 벌레 역시 황금빛 으로 빛나고 있었다. "에세렌?" 분명히 신기해하면서 돌아누워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에세렌에게서는 반응 이 없었다. 순간, 덜컥 하고 무엇인가 가슴 언저리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얼른 에세렌을 돌아 눕혔다. "아." 엄청난 열이었다. 비오듯 땀을 쏟고 있었다. 열이 펄펄 끓는 몸은 불덩이 처럼 화끈거렸다. 녀석의 청록색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땀에 흠뻑 젖어 있어 여름에 소나기를 맞은 듯한 몰골을 연상시켰다. 가 여울 정도로 창백한 얼굴 위로 땀이 흐르고 있다. 아파 보여서, 너무 아파 보여서, 차마 뭘 어떻게 해볼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다. 뭔가 이상해. 왜 이러지? 왜 이러는 거야? "에세렌, 에세렌! 일어나봐, 에세렌!"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녀석의 흰색 법복만이 내 손에 의해서 밀려 나갈 뿐, 녀석은 일어나거나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한 참을 가만히 그런 녀석을 내려다보는데, 갑자기 녀석이 한 번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깜짝 놀라서 나는 얼른 녀석의 손목을 꽉 하고 붙잡았다. 순간, 내 온 몸이 떨렸다. "아. 아아." 차, 차가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열이 펄펄 끓던 몸이 어째서 이렇게 차가 운 거야? 참을 수 없는 불안감에, 나는 녀석을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하지 만, 하지만.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 일어나 봐! 일어나 봐, 에 세렌! 에세렌! 계속해서 녀석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어지러웠다. 핑글, 하고 돌 것 같은 이 느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 까. 갑자기 떠오르는 것은 지난날 보았던 카민의 차가운 눈동자. 카민이 차 가운 몸, 그 몸이 떠오르면서 온 몸에서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나는 에세 렌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몸을 떨었다. 뭐냐, 에세렌. 그렇게 발작을 일으켰을 때도 이렇게까지 창백하지 않았잖 아. 왜 이렇게 춥다는 듯이 떨고 있는 거야? 왜 그렇게 아프다는 듯한 얼굴 을 하고 있는 거야 「칼레들린님. 진정하세요. 칼레들린님.」 레이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진정? 진정이라고? 그런 거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지금 이렇게 굳고 있는데. 이렇게 차가운데. 이렇게 싸늘한데. 그런데 진정을 하라고? 모르겠어, 레이네. 레이네. 무, 무서워서…. 쉬익, 하고 노란빛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나는 움찔해서 그 빛을 보았다. 레이네는 피식, 하고 웃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주제에, 녀석은 에세렌 쪽으 로 당연하다는 듯이 걸어가 녀석을 찬찬히 살폈다. 곧, 그가 입술을 살며시 열어 말했다. "괜찮아요. 그저 일시적인 반응일 뿐입니다. 나가 계시는 게 좋을 것 같네 요." 바로 그 때였다. 저 멀리에서부터 급한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레이네는 얼른 다시 빛으로 변해 보석으로 돌아왔다. 문이 벌컥, 하고 열린 건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나는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달려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에, 에세렌이. 에, 에세렌이 이상해." "예? 아, 알겠습니다. 진정하세요!" 시이나? 응, 맞아. 시이나구나. "시이나, 에세렌이, 죽을 것 같아서……." "진정하세요, 칼레들린님! 일단 당신부터 진정하세요!" 녀석이 내 뺨을 한 대 때렸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그제야 세상이 밝아 보이기 시작했다. 아, 멍했던 시야가 갑자기 밝아졌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시이나는 천천히 다가와 에세렌을 조심스럽게 보았다. 그는 에세렌의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칼레들린님." "응?" "나가 계십시오." "어? 어째서?" "나가세요." 조용히 말하는 시이나의 눈빛은 가라앉아 있어서, 더 이상은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시이나에게 그럴게, 라고 말하고 천천히 바깥으로 나 왔다. 무궁무진하게 많은 구름들이 하늘에서 울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한참 그렇게 서 있다가, 천천히 무릎을 안고 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뉘엿뉘엿 해가 지는 것이 보였다. 그 해는 다시 떠올랐다 천천히 다시 졌 다. 그렇게 두 어 번을 더 반복했다. 아,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또 다 시 하루가 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간적인 관념은 전혀 없었다. 그 냥 아, 그렇구나. 라는 것이었다. 찰칵. 그리고. 드디어 문이 열렸다. 그 한순간, 나는 튈 듯이 일어섰다. 멍하던 정신이, 갑자기 온 신경이 그 쪽으로 쏠렸다. 휙, 하고 머리가 돌아갔다. 그리고, 보았다. "칼레들린님." 시이나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그냥 그렇게 있었다. 시이나가 천천히 비켜섰다. 그 러자 그 옆에 선, 하늘색 눈동자의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찰랑거리는 긴 청록색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부드럽게 바람결에 휘날리는 그 머리카락. 에세렌은 웃고 있었다. 천천히, 한 발자국씩 내 앞으로 다가오며 녀석이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인 다. 순간, 심장 부근이 이상하게 따끔거린다고 생각했다. 시이나가 입을 열 었다. "세이즌은 성공했습니다. 하루 정도만 푹 쉬면 내일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에세렌을 천천히 훑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리고 다시 발끝에서 머리까지. 녀석의 청록색 머리카락은, 마치 내가 각성했을 때처럼 길다랗게 자라 찰 랑찰랑 바람과 더불어 춤을 추고 있었다. 여태까지보다 훨씬 더 갸름해진 것 같은 턱선이 보였다. 갸름한 선, 어깨선은 예전보다 더 좁아진 듯 했고, 가늘어진 몸선을 따라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무엇인가가 보였다. 가슴 부분에 패인 약간의 굴곡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을 따라 휘달리는 녀 석의 법복자락이 선명하게 녀석의 몸선을 드러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자가… 된 거야?" 에세렌은 가만히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손만을 가지런히 모 은 채 그대로 있었다. 녀석의 하늘색 눈동자는 또렷이 내 쪽을 향하지 않고, 밑 쪽을 향한 채로 그렇게 있었다. 뭔가 불안한 듯, 긴장한 채로 뻣뻣하 게 굳어 있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에세렌이 놀란 듯 눈을 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반갑다, 세렌." "……아." 에세렌, 아니, 이젠 세렌이 된 그가 놀란 듯한 소리를 냈다. "이, 잊지 않으셨어요?" "그래. 네가 여자가 되면 세렌, 남자가 되면 에렌이라고 부르라고 했다며." 나는 다시 한 번 웃었다. 녀석의 눈에서 주룩, 눈물이 한 방울 흐르는 것 이 눈에 띄었다. 바람이 좋은 날. 유달리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보드랍게 애무하던 날. 에세렌 이네아스가 세렌 이네아스가 된, 그 어느 저녁의 일이었다. ================================================= 사실은 인터넷이 3일 정도 안됐는데... 그동안 글 쓰다보니.... 그냥 완결내서 올려보자.. 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이 들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결국완결냈습니다ㅇㅁㅇ;; 오늘부터 차례차례... 거의 10연참씩 이틀 더 할 것 같습니다...-_-;; ^_^제 컴퓨터의 카인은 이미 완결입니다.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2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78 제 36장 진실 혹은 거짓 시이나의 배웅을 받으며 에디 에이렌의 숲을 나왔다. 이상하게도, 엘프들 은 가는 길에는 굉장히 조용하게 우리를 배웅했다. 게다가, 믿을 수 없게도 그들의 표정에는 조금의 적개심도 보이지가 않았다. "엘프들이 다 미쳤나봐." 내 조용한 중얼거림에 에세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에세렌, 아니, 이젠 세렌이 된 그… 으아아, 아니, 아니지, 그녀(우우, 뭔가 어색해!)와 함께 에디 에이렌의 숲을 지나오며 나는 또다시 센티멘탈의 나락으로 다이빙했다.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이라, 나는 잠시나마 여기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마저 든다. 흠. 미쳤군, 칼레들린. 여긴 엘프들의 숲이라구. 초록 향 물씬 풍기는 에디 에이렌에서 빠져 나오자마자 보인 것은 라이메데스 녀석의 얼굴. "어, 어라? 너 계속 여기에 있었던 거냐?" 나와 에세렌이 에디 에이렌에 들어간 그 순간부터 쭉 거기 있었던 듯, 라이메데스는 평소보다 조금 더 초췌해 보이는 얼굴로 득달같이 달려와 내 앞에 섰다. 녀석은 나와 세렌 쪽을 보다가 어느 순간 헛,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여, 여자가 된 거냐?" 경악에 가까운 목소리로 라이메데스가 물었고, 세렌은 뒷통수를 슬슬 긁으며 고개 를 끄덕였다. "아, 예. 어쩌다보니 그렇게 돼버렸습니다." 세렌의 말에 라이메데스가 이런,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그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스르르 풀려버리고, 곧 그의 얼굴에는 무덤덤한 기만 남았다. 녀석은 조금 쑥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렌을 보며 피식, 웃어버린다. "뭐, 그렇게 된 거군. 할 수 없지." "예." 뭐가 할 수 없지고 뭐가 예야? 녀석들이 하는 양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시선을 돌리다가 문득 굳어버렸다. 우리에게서 이만치 떨어져 있던 키르가 내 쪽을 보며 살풋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안내자라면 저기에 있잖아요?' 그 때 시이나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아 나간다. 빌어먹을. 그러니까 이 자식이 처음부터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데는 그런 목적이 있었단 거잖아. "이제 어디로 가야 되는 거지?"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키르를 향해 삐딱하게 물었다. 그러자 키르가 입가 에 건 미소를 더 짙게 만든다. 녀석은 내 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라이메데스에게로 향했다. 세렌과 라이메데스는 뭔가 할 말이 있었던 듯, 저희네들끼리 열심히 쑥덕대고 있었다. 그런 둘을 빤히 바라보던 키르가 어느 순간 입술을 조금 움직였다. "카리스가, 굉장히 재미있는 쇼를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어." 밑도 끝도 없이 키르가 그렇게 뱉어내자마자, 라이메데스와 세렌이 딱 하 고 굳어 키르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키르가 눈매를 가늘게 늘이며 조그 맣게 중얼거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칼레들린을." 그 말과 함께 키르가 라이메데스와 세렌 쪽에서 시선을 거두어, 내 쪽으로 향했다. 뭐냐 싶어서 녀석을 보는데, 녀석이 내 목에 가볍게 손을 대는 것 이 아닌가. "다시 말하자면, 칼레들린 외에는 초대받지 않았다는 뜻이야." "뭐?" 놀란 내가 버럭 하고 고함을 지른 순간, 라이메데스가 나와 키르 쪽으로 재빨리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키르는 잠시 고개를 돌려 그런 라이메데스를 한 번 보았다. 나는 옆쪽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키르는 라 이메데스를 향해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지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후, 키르 녀석이 입술만을 이용해 라이메데스를 향해 뭐라고 가볍게 오물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라이메데스의 온 몸이 쩍 하고 얼어붙듯 멈춰선 것이. "…뭐, 뭐, 뭐라고?" 멈춰 선 라이메데스의 눈이 크게 확장된 것이 보였다. 뭐지? 방금 무슨 일 이 일어난 거야? 키르는 그런 라이메데스를 보며 다시 한 번 웃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키르를 본 순간, 키르가 내게 자그맣 게 말했다. "그럼, 가 보실까?" 에?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내 목에 손을 댄 키르가 짤막하게 뱉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워프." 이런 젠장! ◇ ◇ ◇ "이, 이 미친놈아! 대체 네 놈은 어디까지 해야 속이 시원하냐? 여긴 어디야!" 나는 아직도 내 목을 잡고 있는 키르의 손을 거칠게 떼어내며 소리쳤다. 그러자 키르가 어깨를 으쓱하며(으아아악! 패고 싶어!) 시침을 뚝 뗀다. "글세, 어디일까?" "빌어먹을, 아까 뭘 한 거지? 대체 뭘 했길래 라이메데스가 그렇게 놀란 거야?" "쿡쿡. 글세?" 키르는 빙글빙글 웃더니 손가락을 가볍게 딱, 하고 튕겼다. "별 말 안 했어. 그저 내 정체에 대해 가볍게 귀띔해 줬다고나 할까." "정체?"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녀석의 말을 한 번 더 되뇌었다. "응." 키르는 피식피식 웃으며 나를 보았다. 녀석이 고개를 살짝 흔든다. "뭐, 지금은 그런 거 신경 쓰지마. 그 전에 일단 주위나 한 번 돌아보는 게 어때?" 녀석이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냐, 이건. 대체 어디로 워프를 한거야? 여긴 뭐야? 응접실인가? 깨끗하게 도배된 방이었다. 벽지는 상아빛으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화려한 모양으로 녹은 초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금색의 촛대가 우아하 기 그지없다. 여기저기에 걸린 화려한 초상화며 도자기, 아름다운 장식품들 이 눈에 띈다. 저 너머에 있는 회색의 커튼만 걷으면 여기가 아주 환하게 보일 듯도 한데, 조금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한참동안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가 녀석을 향해 물었다. "여긴 어디냐?" "글세. 그건 나도 잘 모르고. 내 역할은 여기까지였거든. 일단 여길 둘러 봐. 조금 있으면 나 말고 다른 안내자가 오겠지. 여기부터는 카리스의 완벽 한 '쇼 현장' 이니까. 나는 더 이상 상관하고 싶지도 않고." 피시식 웃으면서 건넨 그 말과 함께 키르가 내 어깨를 툭툭, 하고 쳤다. "그럼 즐겨보라고, 칼레들린. 카리스의 쇼를." ◇ ◇ ◇ 키르가 워프를 통해 사라지자, 이 이상하고 화려한 응접실에는 나 혼자 남 아버렸다. 나는 한참동안 두리번거렸지만 사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카리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제 놈을 만나러 왔을 뿐인데. 사방팔방 을 둘러봐도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누구 있나?" 역시 대답이 없다. 나는 다시 한 번 찬찬히 응접실을 훑어보았다. 그다지 크지 않은 크기의 응접실이었지만, 여러 가지 물건들이 있었다. 나는 일단 커다란 회색의 커튼을 열어 젖혔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회색의 커튼이 가리고 있던 햇빛이 쫙 하고 방안을 비추었다. 그와 동시에, 아까 전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와 박 혔다. 신기하다, 라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웃었다. 커다란 탁자와 그 위에 놓여진 꽃병, 그 안의 꽃들. 저 너머에 걸려 있는 묘한 빛의 장검. 그리 고 군데군데에 장식되어 있는 정체불명의 장식품들. 기묘한 광채를 내고 있 는 은빛과 옥빛의 단검, 회백색의 목걸이, 진주빛의 악세사리들, 그리고… …. "안녕, 미남." 명랑한 목소리가 귀에 꽂힌 건 그 순간이었다. 기척도 없이 나타난 그 목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는데, 그 순간 찰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방 끝 쪽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호호호호호홋, 드디어 온 건가?" 카랑카랑한 웃음소리. 한참동안, 나는 말도 하지 못한 채로 그 자리에 쩍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카, 카리나?" 거기에 당연하다는 듯 나타난 것은 바로, 금발의 여인. "이런이런.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알아보시네? 하긴, 나 같은 미녀 를 쉽게 잊을 수야 없었겠지. 안 그래?" 생긋 웃으며 한 발자국 다가오는 저 여자. 그래. 내가 모를 리 없지 않은가. 그녀는 한 발자국씩 다가와 내 바로 앞에 선 다음, 섹시한 미소를 흘려 보였다. "오랜만이야. 그렇지 않아?" 나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 어떤 예고도 없이 검을 뽑아든 채, 나는 인정사정 없이 그대로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그녀가 놀란 듯 눈을 부릅뜨는 것이 보인다. "이런이런! 너무 급하세요! 그렇게 급해서야……." 그녀의 입술이 휙, 하고 비틀어져 올라갔다. "여자에게 인기 없다구요!" 그녀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검이 쭉 바르게 뽑혀 나왔다. '카리나는 강해.' 언젠가 카민, 네가 말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각성했어. 이런 여자 따위 두렵지 않다! "죽어!" 진심을 담아 내뱉은 그 말과 함께, 세차게 검을 휘둘러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가볍게 발을 뒤로 빼서 나의 공격을 와해시키려 했지만, 이미 그 녀 정도의 속력을 뛰어넘은 지 오래인 내게서 벗어날 리가 만무하다. 그녀 는 가볍게 몸을 틀려고 한 그 순간에 그대로 자신의 몸 라인을 따라 들어온 내 검을 보고 경악한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어, 어느새!" 나는 검을 그대로 꺾어 그녀에게 들이댔다. "큭!" 차가운 검의 감촉이 느껴졌는지, 그녀가 몸을 완전히 옆으로 돌렸다. 한바 퀴 빙그르 돌아 천천히 일어선 카리나가 움찔하며 다시 검을 세웠다. 그래? 다시 한 번 해보겠다 이건가? 하지만 이젠 알았을 텐데. 나는 예전과는 달 라. 나는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예전이라면 그녀 정도의 눈으로 내 움직임을 따라오는 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르나, 지금은 아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내가 다가오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내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야 내 움직임을 읽은 그녀는 재빨리 검을 들어 내 켐 알슈타드를 간신히, 아주 간신히 막았다. 하지만, 그저 막.았.을. 뿐이다. 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내 검을 막아섰던 그녀의 검이 산산조각이 났다. 카리나가 놀란 듯 입을 벌렸다. 나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조금은 즐기며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밑으로 내려그어, 그녀에게로 가져갔다. 그녀의 목 부분에서 정확히 정지한 내 검. 그녀의 눈이 그 검에 가서 멎는다. 나는 천천히 상체를 숙여 그녀의 얼굴 가까이로 가져갔다 일그러진 그녀의 인상을 바라보며 나는 씨익, 하고 웃어 보였다 "다시 인사할까? 정말 오랜만이지?" "훗. 그렇군. 정말 오랜만이야. '카레나'를 가진 당신." 내 인사에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가 다시 태연한 얼굴로 돌아온다. 검이 바로 옆에 겨누어져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여자. 전혀 무서울 것 없다는 담담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며 피식, 웃고 있는 그녀. 두려움이 라던가 하는 것이 일절 없는 그녀의 차분한 눈동자를 보며 나는 조금 열이 받아 버렸다. "빌어먹을. 아까 그 표정은 어디로 간거지? 조금의 겁도 먹지 않는군. 너라는 여자는." "오호호호호홋, 당연한 거 아냐? 이 몸은 미소년을 사랑해서, 미소년의 손 에 죽을 수만 있다면 좋다고 생각한 몸이라고." "웃기네." 나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곤 천천히 그녀의 목 쪽으로 들이밀었다. 그녀 의 하얀 목덜미에 스며든 검이 그녀의 목에서 핏물을 빨아들인다. 검이 목 쪽으로 한참 들어갔을 때야, 카리나의 무덤덤 하던 표정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중얼거린 건 그 순간이었다. "나를 죽이진마. 내가 당신의 안내자거든." "……싫다." 내 담담한 말투에 놀란 듯, 카리나가 눈동자를 크게 뜨며 나를 올려다보았 다. "뭐?" "너는, 반드시, 죽여버리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아주 잔인하게 말이다." 나는 싸하게 한 번 웃었다. 카리나의 입매가 잠시 망가졌다. 그녀가 흥, 하고 웃었다. "성격이 변했어, 당신. 처음 만날 때는 이렇지 않았다구." "……그 때는 내 옆에 있었던 녀석이, 지금은 없으니까." "읏!!" 카리나가 잠시 놀란 듯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눈 동자가 크게 확장된 채로 떨리고 있었다. 나는 입 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 "무서워?" 킥, 하고 웃음이 나왔다. 오른손으론 그녀의 목에 검을 들이밀고, 왼손엔 마력탄을 만든 채로 나는 그녀를 조롱하듯 말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여자였다. 카민을 쓰레기라고 불렀던 여자가. "무섭냐고 묻잖아." 내가 으르렁거리며 물어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순간 화가 난 나는, 그대로 검을 휘둘러버렸다. 퍽! 날카로운 검의 느낌과 함께, 확 하고 뜨거운 무엇인가가 튀었다. 나는 튀 는 그 피를 피하지 않았다. 얼굴이 새빨간 피로 뒤덮였다. 그 피를 그대로 맞 으며, 나는 왼손에 있던 마력탄을 그대로 날렸다. 퍼퍼퍼퍼펑!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조각이 되어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피와 함께 내리는 살점조각들을 보며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엉망진창이 된 시체의 파편에서 언뜻 그녀의 금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칼레들린님.」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린 건 그 순간이었다. 나는 깜빡거리고 있는 노란색 보석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런 건, 칼레들린님 답지 않아요.」 "시끄러워." 나는 씹어뱉듯 그렇게 외치고는 천천히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박자박, 발끝에 닿는 양탄자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알 수 없다. 어찌됐든 커다란 저택 같기도 한데. 나는 일단 방문 쪽으로 다가가 천천히 문손잡이를 돌렸다. 곧, 커다란 복도가 나타났다. 「칼레들린님, 이런 일을 해봤자 당신은…….」 "……이번만." 나는 검을 살짝 들어 레이네가 박힌 노란 보석을 보았다. 무섭게 깜빡여 대고 있던 노란 보석의 움직임이 순간 딱, 하고 멎었다. 나는 그 노란 보석 을 보며 차분하게 용서를 구하듯 중얼거렸다. "딱 이번 한 번만이야."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2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79 "딱 이번 한 번만이야." 날 듯이 뛰어 몸을 날렸다. 바로 저 앞에 사람의 기척이 있었다. 나는 얼 른 그 쪽으로 다가갔다. 앞에 서 있던 남자는, 내가 다가오자 꽤나 빠른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발견하곤 놀란 듯한 눈을 해 보였다. "너는 뭐냐?" "……알 것 없어." 퍼벅,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의 마력탄을 움직였다. 비각성 시절과는 다르 게 조금만 힘을 줘도 무섭도록 모여드는 마력의 힘은 거셌다. 남자는 경악 한 듯 재빨리 검을 뽑아냈지만, 그의 움직임은 늦어도 한참 늦었다. 카리나, 그녀가 이토미즈에서는 상당히 강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 녀조차 단칼에 쳐 없앤 내 앞에서, 이딴 남자는 전혀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퍼버버벙!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살점이 튀어나갔다. 레이네는 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커다란 소리를 들었는지, 갑자기 저 너머에서 많은 사람들이 튀어나오는 소 리가 들렸다. 나는 일단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베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이 곳은 이토미즈가 관계된 곳이 분명하다. 카리나가 있었으니. 그나저나 카리스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를 이 곳으로 오게 한 거지? 몰려든 녀석들은 차가운 인상으로 나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내게는 그저 우습게 보일 뿐. 빠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뼈가 검날에 걸리 는 소리들이 듣기 싫게 울리고 있었다. 몰려들고 몰려들고 몰려드는 녀석들 이 짜증날 정도로 많았지만, 그래도 나는 베고 베고 또 베었다. 이토미즈, 이토미즈, 이토미즈! 너희들 때문이니까. 고통스러운 비명성 한 번 지르게 놔두지 않고, 단 칼에, 단 번에, 그렇게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고 몸을 터뜨려 버렸다. 사방에서 모여들던 그들은 내가 인정 사정없이 그어버리자 조금 주춤하며 물러섰다. 그래도 뛰어드는 사람들의 발걸음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타닥타닥, 가까이 다가서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린다. 좋다. 그렇게 원한다면 이 저택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여주마. 그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안해서, 나는 살아갈 수 없을 거다. 인간의 살은 가볍게 갈린다. 뼈 역시 그리 어렵지 않다. 내 팔 힘은 어차 피 마족의 것이다. 이 검의 성능 역시 그 어떤 것에 비하지 못할 정도. "으아아아아악!"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서글픈 거지? 문득 너무 슬퍼져서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베면 베는 대로 슥슥 베어지는 녀석들. 내 힘으로 직접 하나 씩 하나씩 베고 터뜨리고 있는 이 무력한 녀석들을 보며, 왜 이렇게 슬퍼지 는 거지? 전혀 나아지지 않아, 카민. 슬픔이 줄어들지 않아, 카민. 더 아프고 더 슬퍼져만 가. 왜 그런 거지? 왜 그런 거야? 질문에 대한 답이 없어서, 계속 휘두르기만 했다. 얼마나 휘둘렀는지 모르 겠다. 한참 베다보니 튀어 오르는 뜨거운 피의 감촉조차 더 이상 느낄 수가 없었다. 시야가 온통 붉게만 보였다. 피가 묻을 대로 묻어서 피가 튄다는 느낌좌 없었다. 검을 쥐고 있는 손이 아무런 감정 없이 냉정하게 움직였다. 무한대로 퍼져 있는 사방의 어둠을 모아서 던지는 행위도 자연스러워진다. 「칼레들린님…….」 한참 만에야 작게 속삭이는 레이네의 목소리를 듣고 흠칫 정신을 차렸다. 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시체의 잔해들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단칼에 베어 지거나 터져 버렸으니, 그리 많은 수의 시체가 남아 있지도 않았다. 온통 피, 피, 피다. 나는 잠시 내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사방을 훑어보아도 더 이상 사람이 나 오지 않는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젠 어디로 가야하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켐 알슈타드를 더욱 꼭 쥐며, 나는 사람의 기척을 찾으려 애썼다. 어딘가에 있기는 한 듯 한데, 잘 느껴지지를 띄지를 않는다. 나는 멈춰선 채로, 잠시 사람의 기척을 더듬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느 껴지지 않았다. 음? 그러다가 갑자기 미세하게 무엇인가의 느낌이 전해져왔다. 나는 인상을 찌 푸리며 몸을 돌렸다. 복도 끝! 그래, 확실하다. 복도 끝에서 무엇인가가 다 가오는 것이 느껴지고 있다. 나는 얼른 그 곳으로 달려갔다. 막 사람이 보 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주저 없이 몸을 날렸다. 휘식! 날카로운 검의 소리가 들리자, 다가오던 그 쪽이 움찔하는 듯 했다. 나는 얼른 검을 들이댔다. 이번에도 목을 베어주마! 그런데 막 그대로 힘을 주어 베어버리려는 순간. "안녕하세요?" 너무나도 밝은 그 목소리에, 나는 굳어버렸다. "……." 상대는 생긋, 하고 웃고 있었다. 나는 공중에 뜬 그 자세 그대로 잠시 정 지했다. 몸이 떨어지면 그대로 이 사람을 벨 것 같아, 온 몸에 마력을 잔뜩 줘 한참동안 정지상태로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낙하 시켜 바닥에 내려섰다. "오랜만입니다." 웃는다.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마치 거짓말처럼 서 있는 이 사람이, 웃는다. "하, 하하.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익숙한 얼굴. 아름답지도, 귀엽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얼굴이 지만 이번에는 기억할 수 있다. "글세요, 왜일까요?" 그녀. 이렇게 평범한 얼굴이라 미안하다며 탁자를 갈아댔던 그녀. 점술의 귀재라고 불리는 여자, 리니아나 에텐. 뭐냐? 왜 이 여자가 여기에 있는 거냐? 당황함에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리는데 린이 훗, 하고 웃 어 보였다. 그녀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틈에 뒤쪽을 바라보더 니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피로 난잡한 그 곳에서 시선을 돌린 그녀가 가볍 게 고개를 젓는다. 린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입술을 열어 말했다. "차라도 한 잔 마실까요?" 나는 당황함을 수습하려 애쓰며 얼른 검을 들어 무감정한 린의 목덜미에 겨누었다. 그러나 린은 움찔하는 기색도 없이 그대로 웃으며 내 쪽을 보았 다. "왜 그러십니까? 설마 저를 기억 못하시는 건 아니겠죠?" "대답해봐.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글세요." 샤악, 하고 눈꼬리가 휘어졌다. 린은 가볍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 그녀의 눈매는 매우 차분했는데, 그래서인지 아까부터 거칠게 흥분해 있던 나마저 도 차분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베겠다. 왜 여기에 있는 거냐. 여기는 이토미즈의 본거 지다!" 내 말에 린이 하아, 하고 한숨을 뿜었다. "저는 점성술사입니다. 의뢰인이 있으신 곳이 어디든, 가는 것이 저입니다. 설사 어디에 있든 그것이 죄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차분한 느낌의 린의 설명. 나는 한참동안 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린은 그러나 내 눈빛에 당황하 는 기색 하나 없이 가볍게 발을 들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목에 들이 대어져 있던 검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 듯 사뿐사뿐 왔던 쪽으로 걸어나가던 그녀가 문득 입을 열어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하나, 당신이 잘못 알고 계시는 것이 있습니다." "뭐?" "여기는 이토미즈의 본거지가 아니라, 키루사님의 저택입니다." 순간,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느낌에, 나는 한참동안 몸을 떨었다. "키루사……?" 「이토미즈의 대장입니다. 라디아나이기도 하죠.」 에세렌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부서져나갔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린이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일단은 이 쪽으로 들어오세요, 칼레들린님. 차분히 차를 한 잔 마신 후에 그 분을 만나러 가도 나쁠 것은 없을 듯 싶습니다. 제가 그 분이 있는 곳 을 가르쳐 드리겠어요." ◇ ◇ ◇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린이 안내해서 들어간 방은 깨끗한 흰빛이었다. 그러고 보니 두 번 째로 이 여자를 만났던 크레티아의 왕성에 있었던 탑도 역시 이렇게 흰 색을 하고 있었지. "제가 흰 색을 좋아하거든요."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았는지 린이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쳇, 하고 중얼거리며 방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았다. 린은 차분한 얼굴로 그런 나를 한 번 바라본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차는 무엇으로 하시겠어요?" "난 차 안 마셔." "흐음. 그럼 뭘 마시실 텐가요?" 나는 일호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물!" "……참, 분위기 없으십니다." "보태줬어?" 내 말에 그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곧, 한 컵의 물이 내 쪽으로 내밀었다. 그녀 자신이 든 찻잔에서는 차가 내는 아름다운 향이 나고 있었 다. 맡기 좋은 향으로 미루어 좋은 차인 듯 싶지만. 흥, 차는 모두 맛이 없다 는 것은 분명한 진실인지라 나도 차 줘, 라는 말만을 하지 않았다. 린은 찻 잔에 입술을 갖다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의 예언은 적중 했나요?" "……글세." 내가 말끝을 흐리자, 린이 피식 웃는다. "둔하시긴." "에? 뭐가?" "아닙니다. 일단 물부터 드세요." 그녀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언제나 나를 놀리듯 말하고, 자기가 모든 것 을 다 안다는 듯이 행동을 한다. 젠장맞을. 나는 얼른 물을 원샷하고 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따금씩 찻잔을 기울이고 있다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대충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던진 질문에 린이 피식 웃었다. "카리스라는 분에게." "뭐야?" 갑자기 일어서는 바람에, 탁자에 놓아두었던 빈 물 컵이 와장창 소리를 내 며 땅으로 떨어져, 엉망진창으로 깨져 버렸다. 린은 그러나 여전히 무표정 할 뿐 나의 부주의를 원망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선 자세 그대로 린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린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가볍 게 입을 열었다. "그 분을 너무 원망하지는 마십시오. 그 분의 방식이 조금 잘못되기는 하 였으나, 그 분이 하는 일은 모두 당신을 위해서이니까요." "닥쳐." 이가 우득, 하는 소리를 냈다. 린은 훗, 하고 웃어버렸다. 그러다가 문득, 기습적으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뭐? 내가 바라는 것?" "그렇습니다. 여기까지 오신 데는 목적이 있지 않습니까?" 목적 같은 소리하네. 바라는 것? 흥, 모든 것은 저 빌어먹을 놈의 카리스 가 벌여놓은 일이었다. 그 놈이 여기까지 오게 한 거고, 여기에 있게 한 거 야. "일단 카리스를 만나는 게 가장 큰 목적이다." "그렇습니까?" 린은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차를 가볍게 한 잔 홀짝인 뒤에 아 무렇지도 않게 다시 입술을 떼어내어, 또 다시 그녀 특유의 갑작스러움으로 말을 건넸다. "점 보시겠어요?" "……나 돈 없어." 내 말에 린이 하하, 하고 갑자기 큰 소리로 웃는다. 한 번도 그녀가 저런 식으로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나는 순간 조금 놀랐다. 그녀는 입술을 가볍게 옆으로 늘어뜨리며 웃은 후에 나를 보았다. 차분한 그녀의 눈동자에 무엇인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지금은 돈 같은 거 받지 않아도 좋습니다. 흐음, 그래……. 그건 어떤가 요? 당신의 주머니를 뒤적여 나오는 물건 중에 하나라도 좋아요." "뭐?"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보았다. 아무 것도 없을 거 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것이 잡혀 나왔다. 잘게 접은 종이 쪽지하나, 예쁜 자수정 목걸이 하나, 그리고 시이나에게서 받은 돌 조각이 쌓인 주머니. 그러고 보니…… 이 종이는 세라가 준 것이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군. "이 세 개중에 하나를 달라고? 그럼 이걸 줄게." 나는 자수정 목걸이를 내밀려고 했다. 그 순간, 번개처럼 머릿속에 무엇인 가가 지나갔다. '그럼 그건 애인 줘' 라는 노파의 목소리. 아마도 내가 각 성하던 날 한 마리 벌레처럼 죽었을 노파. 그 노파의 목소리가 환영처럼 가 볍게 번졌다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푸우, 하고 숨을 밖으로 뱉어냈다. "맘 바뀌었다. 줄 건 없어." 내 말에 린이 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요? 그럼 당신의 머리카락 한 올. 그건 어때요?" 순간, 나는 조금 굳었다. "뭐야, 나 좋아해?" 순간, 린은 침묵했다. 한참동안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그녀가 부들부들 떨며 입을 연다. "미쳤습니까." "그럼 내 머리카락은 왜! 역시, 그랬던 거지! 어쩐지 수상하다했어! 딱 한 번 봤을 뿐인 내가 신경 쓰여서 크레티아에까지 가서 나를 찾은 데다가……." "……됐습니다. 그렇게 치기 싫으면 마세요." 린이 냉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앗차, 하는 기분이 들어 그런 린의 팔을 얼른 붙잡았다. "아, 아니. 칠게, 칠게, 칠게!" 내 말에 린이 피식 웃었다. "진작 그러실 일이지요." 자, 자기가 바라고 있었던 거잖아, 이건! 린은 차분한 얼굴로 카드를 꺼내 섞었다. 정말로 내 머리카락 한 올이면 되는 건가 싶어서 머리카락을 뽑아 얌전히 내려놓고 보고 있으려니, 린이 카드를 다 섞었는지 차례로 배열한다. 그녀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한 장만 골라주세요." "그러지." 나는 제일 끝에 있던 카드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내게서 카드를 건네 받아 거침없이 뒤로 넘겼다. 그리고, 곧바로 튀어나온 것은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 "심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뚫어질 듯한 눈동자. "역시, 죽이실 생각입니까?" 나는 그제야 이 여자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빌어먹을,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내고 점을 치라고 했던 건 내 미래를 내 게 가르쳐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지금의 내 마음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서라는 것을. 나는 린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난 다음, 아주 천천히 입을 열 었다. "내 마음이다." "다시 한 번 질문하겠습니다. 죽이실 겁니까?" 진지한 물음이었다. 나는 거짓을 말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 "그렇군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가 말했다. "한 장, 더 넘겨볼까요?" "……뭐?" "그러고 싶네요. 대가는 역시 머리카락 한 올." 그 말과 함께 그녀가 나를 빤히 보았다.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쉰 후 에 아까 선택한 그 카드의 바로 옆에 있던 카드를 그녀에게 건넸다. 린은 조금 굳은 얼굴로 그 카드를 받아들고는 천천히 넘겼다. 그녀의 고운 미간 이 살짝 찌푸려졌다 펴졌다. "칼레들린님." "왜?" "무슨 일이 있어도, 경솔하게 행동하지는 마세요." "뭐?" 무슨 말인가 싶어서 인상을 찌푸리자, 그녀가 씁쓸하게 웃으며 카드를 덮 는다. "아닙니다. 모든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 굴러나가는 수레바퀴를 제가 아무리 멈추려고 해봤자 되지는 않지요.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헛된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알 수 없는 말을 던진 그녀가 다시 한 번 웃는다. "이제 가보세요." "어디로?" 내 질문에 그녀가 자그마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며 대답했다. "키루사님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4층 오른쪽 끝에 있는 방입니다."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2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80 ◇ ◇ ◇ 방을 나와서 뛰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까 전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나왔 던 것들이 생각났다. 목걸이와 돌, 그리고 종이. 키세리아가 주었던 것. '나중에 펴봐.' 그렇게 말했었지. 나는 천천히 잡혀진 종이를 펴기 시작했다. 왜 이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걸까? 「지금이 정말 힘든 상황이면 펴보도록.」 한 번 종이를 펴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종이를 마저 펴 자, 거기에는 아주 깔끔하고 깨끗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레니아님의 현자의 돌.」 뭐냐 이건? 순간 인상을 찌푸리며 그것을 보았다. 이레니아, 즉 레니를 말하는 거군. 레니의 현자의 돌이라니?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그 밑에, 다시 한 줄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당신의 부친이 남긴 것―」 뭐… 라고? 이레니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다. '현자의 돌을 소유한 이레니아다' 라고 레니가 큰 소리를 친 적도 있었고, 에세렌 역시 그 현자의 돌이 그리 평범 한 물건은 아닐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지. 그런데 그 현자의 돌이, 나의 아 버지가 남긴 것이었단 말인가? 끝도 없이 여러 녀석이 언급하고 있는― 그, 피에트의. 나는 종이를 꾸깃, 하고 접은 후에 다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키세리아 가 이런 걸 내게 적어준 의도는 무엇일까? 가보라는 것인가? 찾으라는 것인 가? 문득, 그 순간에 머릿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엔카의 유품입니다.' 맞아. 시이나가 그렇게 말했었지. 나는 새삼 주머니에 들어있는 그 것을 꺼내들었다. 돌조각을 손에 톡, 털었다. 이것은 어머니의 물건. 카리스는 왜 굳이 내게 이 돌을 가지게 만들었을까? 나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데 그 때였다. 화악―. 갑자기 어디선가 알 수 없는 향기가 났다. 뭔가 싶어서 두리번거린 순간, 나는 정말 까무러칠 만큼 놀라버렸다. 그 돌에서, 내가 막 꺼내든 그 돌에서 갑자기 환영인 것처럼 무엇인가가 뿌옇게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한참동안 눈앞에서 일렁거리던 그 것이, 곧 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저 입만 크게 뜬 채로 멍하니 그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인」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 형상이 나를 불렀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에 나는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칼레들린님? 왜 그러세요?」 "레, 레이네. 이, 이 것 좀 봐." 「예? 뭘 보라는 거죠?」 "네, 네 눈엔 안 보이는 거냐?" 나는 그저 눈을 크게 뜬 채로, 앞에 있는 그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물 결치는 검은색의 머리카락. 당당하고 도도한 눈빛의 그녀는 분명, 내 꿈에 서 몇 번인가 등장했던 그 여인이 틀림없었다. 시이나는 분명, 이 돌이 나의 어머니 엔카가 남긴 것이라고 했다. 그럼 지금 보이는 이건? 레이네에겐 보이지 않고 나에게만 보이는 이 사람은? 아, 아? 이, 이 사람이 나의? 이 사람이 나의 어머니였던가.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나 그리운 느낌이 들었던건가. 「잊지 마라, 카인.」 부드럽게 웃는 얼굴의 그녀. 아, 맞아. 분명해. 이 사람이 분명해. 눈물이 날만큼 가슴이 아팠다. 이렇게 아름답게 웃는 얼굴을 보니 확실하다. 확실 히 이 사람이, 나의 어머니다. 「나와 너의 아버지는, 너를 사랑하고 있단다.」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한마디 한 흑발의 여인… 아니, 나의 어머니 엔카 의 모습이 마치 거짓말처럼, 공중에서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찰나의 순간, 마치 한마디 말을 하기 위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느낌. 아, 가지마. 잠깐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칼레들린님?」 내가 눈물을 흘리자 깜짝 놀란 듯 레이네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른 눈물을 훔쳤다. 내 손에는, 돌조각이 산산조각으로 깨진 채로 들려 있 었다. "어머니……." ◇ ◇ ◇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산산조각난 돌 조각의 파편을 으스러져라 움켜쥐며 계속 달렸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하지만 조금 있다가 생각할게요. 지금 내게 중요한 건. '키루사님과 맹약을 한 몸이다.' 유키가 그렇게 된 것도. 카민이 그렇게 된 것도. 모두모두 그 녀석 때문이었지. 「칼레들린님…….」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스럽다고 외치는 듯한 그 목소리에 나는 푹 한숨을 내쉬어버렸다. "걱정하지마." 「그렇지만…….」 말을 다 끝맺지 않고, 레이네가 한숨을 내쉬었다. 뛰었다. 발 밑에서 뒤로 밀려나가는 양탄자의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휙! 4층 맨 끝 방. 이 방까지 오는 동안은 그 어떤 장애도 없었다. 완력에 의 해 급하게 열어 젖혀진 문에서 빛이 비춰 들어왔다. 그리고. "환영합니다." 부드럽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들린 건 그 순간이었다. "네가, 키루사냐?" 내 질문에 창가 쪽에 서 있던 정체불명의 남자 하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 다. 순간, 숨이 멈추는 듯한 느낌에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환한 햇빛을 받고 서 있는 하얀 얼굴이 보였다. 너무 창백해서 인간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그 차가운 안색. 순간 온 몸의 털이 쭈뼛, 하고 섰다. "그렇습니다. 제가 키루사입니다." "정말, 네가 키루사냐?" 부들부들 떨리며 새어나온 입 속의 말에,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습니다." 정말로 온화한 미소였다. 그 어떤 목적도 담지 않은, 아무 것도 없이 공허하게 비어있지만 녹아버릴 듯이 부드러운, 그저 온화하기만 한 미소였다. 상상하고 있었던 것과는 너 무나 달랐다. 차분한 회백색의 눈동자는 아름다운 빛을 뿜고 있었고, 그가 입고 있는 옷들에게선 하나같이 깨끗하고 정갈한 느낌이 났다. 귀족적인 얼굴선과 단아하기 그지없는 눈빛,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얼굴의 표정 등이 모든 것에서 그가 바르게 살아왔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 얼굴을 보자, 검을 뽑기가 망설여졌다. 만나기만 하면 그 상태에서 바로 베어 버릴 거라고 다짐해왔는데,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 사람은 아니야! 이 사람일 리가 없어. 저건 키루사가 아니야! 저렇게 착하게 생긴 녀석일 리가 없어! 그렇게 몸이 외치고 있었다. 게다가 온 몸으로 전해져 오는 느낌. 느낌이 너무나 깨끗했다. 조금의 살심(殺心)도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단 정하고 단정하고 단정했다. 오히려 내가 악당이고, 저자가 천사인 듯한 느 낌이 들었다. "네가, 유키를, 카민을, 그렇게 만든, '그' 키루사란 말이냐?" 내 질문에 그는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금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떨어졌다. 어깨 정도에 단정하게 내려와 있는 머리카락. 그는 천 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렇게 만들었다' 니요? 음, 일단 앉아서 얘기하는 것이 어떠할런지요?" 그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눈을 빛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가 하하, 하고 웃었다. "무엇인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요. 원래부터 유키아 네크로나와 1026호는 저의 종속물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새삼 제가 그들을 어떻게 한다고 해서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이지요?" 순간, 머릿속이 공허하게 비어 버렸다. "뭐?" "유키아 네크로아는 예전, 제가 세이피안과 이카루의 경계를 지나갈 때 살 려주었던 아이지요. 그 아이가 필요하기에 데려온 후, 한 번 더 진정한 맹 약을 했을 뿐입니다. 뭐가 문제가 되는지?" 이상한 것은 다시 한 번 웃으며 그가 말했을 때도, 몸에서 살기가 끓어오 르지 않았다는 것. 녀석의 모든 것은 나를 안정시키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어떤 반항감도 생기지 않았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녀석에게 다가갔 다. 녀석은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 쪽으로 다가와서 앉으십시오. 해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나는 녀석의 말대로 그 쪽으로 다가감과 동시에, 검을 뽑아들었다. 그는 순간 눈썹을 꿈틀했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뽑아든 검 을 그의 목덜미에 차분하게 들이댔다. 그래도 그는 별다른 반응 없이 훗, 하고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그 어떤 동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차분함, 차분함, 차분함. 차분함. 녀석을 따라 나마저도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내리 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녀석은 정말이지 차분하기만 했다. 정말로 '자비로운' 이미지. "앉으세요." 멍한 기분으로 녀석의 말에 따라 자리에 앉을 뻔했던 나는, 어느 순간 벼 락같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어떤 진실에, 눈을 번쩍 떴다. 곧, 입술에 서 버럭 고함이 새어나왔다. "네 놈이, 네 놈이! 카민을 죽였다." 그 말과 함께 나는 앉으려는 자세에서 벗어나 똑바로 선 후, 그에게 다시 금 검을 들이댔다. 차갑게 내밀어진 그 검으로 그를 찌르려는 순간, 그가 가만히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인 그가 부드럽게 입 술을 연다. "아니지요. 제가 죽인 건 아닙니다." "네가 죽게 만들었어! 녀석이 그렇게 슬퍼했던 것도 다 너 때문이야!" "말이 그렇게 되나요?" 조금의 감정변화도 없다. 그저 무덤덤하게 말이 그렇게 되나요? 라고 물은 그가 입술을 가볍게 말아 올리며 작은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갑자기 다리 에 힘이 풀리는 듯한 그 느낌에 머리가 어지러워져 왔다. "으?" "앉으셔서, 얘기를 들어주세요." 뭐, 뭐냐 이건.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울려와서 나는 욱, 하는 소리를 냈다. 「이런! 유혹술이에요!」 엑? 유혹술이라니?! 「저 자는 라디아나예요! 라디아나의 유혹술을 잊으셨어요?」 "비, 빌어먹을. 그건 이성에게만 통하는 거 아니었어?" 「……동성에게도 통해요.」 커헉! 머릿속이 몽롱해져왔다. 그런 나를 향해 키루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앉으세요." 몸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져서, 그가 앉히는 대로 앉고 말았다. 그의 금발 이 내 볼 끝을 살짝 스쳐 지나갔다. 그는 천천히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돌 아가 선 다음, 부드럽게 입술을 열었다. "당신이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카레나의 눈동자를 가진 분이시여." "……뭐?" "만나고 싶었습니다." 부드러운 입매로 그가 내게 말했다. 다시 한 번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듯한 느낌에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키루사는 흠, 하고 웃으며 내게 말 을 시작했다. "얘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자아, 어디부터 얘기해드릴까요? 아, 그게 좋 겠군요. 저는 라디아나죠. 이미 1000년이 넘는 시간동안을 살아왔습니다. 매우 무료했죠." 1000년? 라디아니의 수명은 겨우 300년일텐데? "저는 일족 중에선 조금 약한 편이었지요 유혹술도 조금 형편없는 편이었 고. 언제나 동료들에게도 멸시 당하는 편이기도 했고.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명줄은 정말 길더군요." 훗, 하고 웃어 보인 그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날은 매우 기분이 안 좋은 날이었어요. 인간 사냥에도 실패하고 말이 지요. 우울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이더군요. 누군가 싶어 고개를 올린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여태까지는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외모의 분이셨습니다. 그 분은 저를 보며 환하게 웃 어 보이셨죠. '힘이 필요하다면 내가 주겠다. 대신 내가 필요할 때 내 부탁 을 들어다오.' 라구요." 힘을 주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저는 무슨 뜻인지 몰라 그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곧 알 수 있었습니다. 갑자기 저의 온 몸으로 넘쳐나는 에너지가 느껴졌거든요. 그 분은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들로 작은 단체를 하나 만들어라. 지금의 네 힘이면 충분히 할 수 있다, 라구요." 나는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숨을 헐떡거리며 듣고 있는 것이 고작이 었다. "그래서, 저는 이토미즈를 만든 겁니다. 언젠가는 그 분이 저를 찾아와 이 것 저것 부탁을 해주실 것을 고대하며." 그렇게 말한 그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내 쪽으로 가져왔다. 그가 내 이마에 묻은 땀을 훔쳐주며 상냥하게 말했다. "그 분이 저를 찾으셨을 때를 위해 열심히 갈고 닦는 것도 잊지 않았지요. 조직은 날로 강해져갔고, 저는 그 분이 저를 찾으신 후의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실제로 저를 찾으셨습니다. 몇 번이고 찾 으셨지요. 그 분은 인간이 아니셨습니다. 몇 백년에 한 번씩, 혹은 몇 십 년에 한 번씩. 그는 저에게 이것저것 많은 것을 부탁 하셨으니까요. 언제나 뵐 때마다 그 분은 아름다웠고, 변하지 않으셨어요."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를 보았다. 몇 백년 몇 십 년에 한번씩 부탁을 했다? 외모도 변하지 않은. 그리고 상대에게 특별한 힘을 줄 수 있는 종족―. 마족이다. "그 분의 부탁은 매우 소소한 것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음식이 먹고 싶다, 라던가 이런 꽃씨가 갖고 싶다던가……. 정말로 소소한 것들이 었지만 저는 그분의 부탁을 들어드리며 한없이 기뻤지요. 그런데 어느 날 그 분이 저에게 와서 그러셨던 겁니다. 부탁할 것이 있다고. 저는 물론 무 엇이든지 하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부탁이라고 하셨지만, 저에겐 그 편이 더 좋았지요." 정말로 기뻤는지, 키루사는 희미하지만 감정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분이 부탁하신 것은 두 가지. 첫째는, 물건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저 이카루의 성녀와 관련되는 물건은 모조리 모아달라고 부탁 하시더군요." 그 말과 함께 키루사의 시선이 자신의 뒤쪽으로 돌아섰다. 나는 뭔가 싶어 서 녀석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나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려버렸다. 그림이었다, 거기에 있는 것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 그림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여인은 나체였는데, 그 몸을 가릴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 당당하게 온 몸을 드러낸 채 서 있었다. 기다란 머리카락을 내려뜨린 채로 도도하게 눈을 치 켜 뜬 그녀는 이 세상 무엇도 다 품을 듯한 강인한 눈매와 아름답기 그지없 는 입술선, 그리고 쭉 뻗은 콧날을 갖고 있었다. 누구라도 한 번 보면 마음 을 뺏겨버리고야 말 것 같은 느낌. 아름다운 그녀는 입술을 꼭 문 채로 시 선을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그 림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흠칫했다. 그 그림 이 아름다워서도, 너무나 신비로운 느낌이라서도 아니었다. 이 그림은……. 이 그림은……. 숨이 턱 하고 멈추었다. 그녀였다. 나의 어머니. 엔카. <아크로아 릴리스> 흘리듯 내갈긴 글씨가 그림의 밑 부분에 정확하게 쓰여 있었다. 그 순간 온 몸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에 나는 입술을 물었다. '얼마 전에, 굉장히 아름다운 분을 꿈에서 보았어요.' '흑발이었죠.' '이토미즈가 훔쳐간 것 같은데.' 갑자기 들려온 아크로아의 말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뭐, 뭐지? "저, 저 그림은 뭐야."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키루사가 미소 짓는다. "제가 수집했던 '이카루 성녀와 관련된 물건' 들 중 최고의 것이지요. 이 미 죽어버려 없는 성녀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해서 그린 아크로아 릴리스 의 작품. 저 그림 속의 여자는 '성녀 이루엔'입니다." 성녀 이루엔? 성녀. 성녀, 성녀. 성녀 이루엔???!!!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2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81 머릿속이 어지러워서 잠시 멍하게 비어버렸다. 성녀 이루엔이라니? 성녀 이루엔이라니? 나의 어머니다. 나의 어머니다. 마족 서열 12위의 파스턴을 죽인 성녀 이루엔이 나의 어머니? 무슨 말도 안되는 헛소리냐! 그런데 더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키루사의 말이 이어진다. "둘째는……. '어떤 인간들' 을 죽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뭐, 사실 어려 울 건 없었어요. 물건을 모으는 건 돈만 있으면 되었고, 인간들을 죽여온 건 언제나 의뢰를 받으면 해왔던 것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분이 부탁하 신 '죽여야 할 인간들' 이란 조금 달랐어요. 아, 그러고 보니 당신은 1026 호와 함께 다녔다고 했지요? 그 자는 괜찮은 암살자였습니다. 조직 내에서 는 최고였죠." 후욱, 후욱, 후욱. 숨이 들이마셔진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혼잡하게 돌아나간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진다. 어지럽다. 어지럽다. 어지럽다. 분노감이 치밀어 오른다. "많이 죽여줬으니까. 1026호는. 아, 그러나 저를 배신한 것은 용서할 수가 없었지요." 웃으며 그가 말했다. "제가 많이 아꼈었는데 말이지요." 웃는 그의 얼굴 위에 번지는 것은, 정말로 자비로운 미소. "그래요. 1026호는 제가 많이 아꼈던 아이. 죽어서도 제 곁에 돌아오는 것 이 당연합니다." 나는 그 말과 함께 천천히 일어선 키루사가 벽의 끝으로 가는 것을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키루사는 오른쪽 끄트머리 벽까지 다가간 다음, 그 벽을 가리고 있는 이상한 흰색이 천을 확 하고 걷었다. "……." "죽어서도 살았을 때와 다름없는 시체라. 멋지군요. 저희 라디아나에게 흡 혈 당한 인간들도 이렇게 되진 않는데 말입니다." 카민이 거기에 있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그래,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정신차려. 성녀 이루엔이라니? 그 사람이 너의 어머니일 리가 없잖아. 지금은 앞을 봐. 난 지금 카민의 원수를 갚아주기 위해 여기에 있다. 앞을 봐. 단단히 마음을 먹고, 다시 앞을 보았더니 이번엔 또렷하게 보였다. 하얀 관 같은 것 안에 누운 것은, 카민. 카민의 차가운 안색이 눈에 띄었다. 카민의 자세는 매우 묘했다. 녀석은 선 채로 관 안에 있었는데, 관은 여러 가지 쇠사슬로 꽁꽁 묶여 있었다. 키루사는 카민을, 아니, 정확히는 카민의 시체 앞 에서 나를 돌아보며 다시 한 번 웃었다. 그 웃음이 얼마나 소름끼쳤는지를 굳이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오신 어떤 분이 저에게 돌려줬습니다. 아, 찾아서 다행이지요. 안 그런가요?" 카리스를 말하는 건가. "1026호는 이토미즈의 배신자. 언제든 죽여서 다시 이 곳으로 옮겨 올 생 각이었습니다. 아아, 저 열린 눈동자를 보세요. 새빨간 빛. 지금 당장이라 도 뽑아내고 싶은 빛깔입니다." 키루사의 목소리는 그 어떤 굴곡도 없이 일정했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 게 그의 말에 수긍할 뻔했다. "돌려…줘." 나는 띄엄띄엄 힘들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키루사가 쿡, 하고 낮게 웃 으며 나를 돌아본다. 그의 눈동자에 맺히는 것은 무엇? 아니, 맺히는 것이 없다. 맑기만 한 회백색 눈동자는 심지어 나조차도 비추지 않는다.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을 돌려달라는 말입니까?" 묻고 있지만 이미 알고 있다. 저렇게 잔인한 미소를 지은 채로 나를 바라 보며 쿡쿡 웃는다. 피가 역류한다. 키루사는 한 걸음 한 걸음 카민에게로 걸어가더니,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의, 아름다운 선을 그리는 손가락이 천 천히 카민을 속박한 관에 닿였다. "1026호는 최상이었어요. 그 분이 부탁하신 '죽여야 할 자'를 죽이는 실력 에 있어서 말이에요." 그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정확히는, '카레나' 의 눈을 가진 자를 죽이는 일에 말입니다." 움찔, 하고 몸이 떨렸다. 입술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켜 그를 바라보는데, 그가 눈매를 가볍게 꺾었다. "물론 그는 카레나를 알아보지는 못했지요. 다만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을 뿐." 쿡쿡, 하고 웃으며 키루사가 관의 윗두껑 부분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입술이 바짝 마르는 느낌. "그 분은 저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앞으로 10년간만, 카레나를 가진 이들은 모두 잡아 죽여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참 재미있는 조건이 붙어 있었죠. 모든 카레나를 죽이되, 흑발의 카레나는 건들지마라는 것이 그것이 었죠." 뭐? "대체 왜 그랬을까요?" 웃으며 말한 그가 천천히 관에서 손을 떼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정말 궁금했지요. 저는 요 십 여 년 간 카레나의 눈을 가진 것으로 추정 된 이들은 닥치는 대로 잡아죽였습니다. 카레나의 눈동자는 마법을 익힌 자 들이 구분해 낼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 어렵지는 않은 일이었습니다. 저 는 수많은 카레나를 죽이게 명했지만, 단 한 번도 '흑발을 가진 카레나' 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눈매가, 저 부드러운 눈매가 왜 저렇게 싸늘한 것처럼 느껴지는 거지? "흑발은 드물어요. 정말 보기 힘들죠. 그 중에서도 '카레나' 라니. 제가 수 년 동안 죽였던 카레나는 20명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왜 그 분은 '흑발의 카레나' 는 죽이지 말라고 말했던 걸까요? 흑발의 카레나 같 은 것이 존재할거라고는 저는 생각도 해본 적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있 군요, 당신이. 그 분이 흑발의 카레나만은 건들지 말라고 한 건 아마, 당신 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은데." 온몸에 소름이 확 돋아났다. 그는 웃는 낯 그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은 누구지요? 궁금하군요. 당신은 누구 길래, 그 분이 그런 말을 했 을까요?" 나는 입술을 움직여 천천히 말했다. "그런, 건, 몰라." "그렇습니까?" 그는 부드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1026호의 일행이었다 들었습니다. 유키아 네크로나와도 인연이 있 었지요.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재미? 재미라고? 속에서 울컥, 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카, 리스는, 어디 있냐?" 더듬더듬 묻자, 그가 고개를 갸웃한다. "카리스라니? 그런 이름은 모릅니다." "그, 시체를, 너에게, 준……. 어디, 있지?" "아아, 그 분 말하는 겁니까? 그 분에 대해선 그다지 아는 게 없습니다. 그저 저에게 1026호를 돌려준 것에 대한 감사를 하고 있을 뿐. 그 분이 어 디에 있는지는 전혀 모르죠." 뭐? 안 그래도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대체 뭐지? 이건 대 체 뭐냐? 카리스! 넌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왜 나를 이 자에게 데려다 놓 은 거냐? 무슨 목적이야! 농락 당하는 느낌에 입술을 깨무는데, 키루사가 가볍게 입술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상관이 없는 건가요? 당신과 아이에드 님 말입니다." 아? "참 이상하군요. 저는 필시 당신과 아이에드님이 상관이 있는 거라고 생각 했습니다. 아이에드님이 '흑발의 카레나는 건드리지마' 라고 말한 그 순간 에, 분명 흑발의 카레나를 만나면 그 분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을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지금, 뭐라고 했지? 지금, 뭐라고 했어? "아, 이에드라고……?"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전까지 늘어져 있던 몸이 꼿꼿하게 서버 렸다. 내 반응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예, 아이에드님 입니다. 역시, 당신도 아는 분이십니까?" "그 자가……." 입술이 파랗게 질리는 듯한 느낌이다. 뭐지? 뭐야, 이 기분은? "그 자가, 너에게 힘을 주고 조직을 만들게 한……. 그 녀석이냐?" "그렇습니다만?" 아이에드. "역시, 당신도 아는 분이시군요?"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아 외치는 키루사. 기억이 조각난다. 아이에드. "어떤 분이지요? 아, 정말 저는 행운아로군요."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얽힌다. 아이에드. 기억나지 않아. 나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 아이에드. 그 녀석이야. 아이에드. 그 녀석이 카민을 죽게 만든 거야. 아이에드. 그 녀석이 유키를 그렇게 만든 거야. 아이에드. 그 녀석 때문에, 모든 것이 이렇게 돼버린 거야. 아이에드. 그 녀석 때문에!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2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82 챙캉! 머릿속에서 무엇인가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그 저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 쪽으로 한 발자국씩 다 가오고 있던 키루사가, 내가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깜짝 놀란 듯 몸을 뒤 로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검을 든 채로 천천히 녀석에게로 다가가 며 말했다. "알려줘서 고맙다." "무슨……? 어떻게?" 내 손에 들린 검이 높이 높이 치솟았다. 녀석은 놀란 듯 얼른 뒤쪽으로 몸 을 피했다. 아이에드란 녀석에게 힘을 받아서 그런지, 그 움직임은 보통의 라디아나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을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봤자 결국은 라디아나일 뿐이다. 유혹술과 흡혈을 제외하면 인간과 그다지 다를 것도 없는 라디아나. 나는 검을 뽑은 자세 그대로 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녀석의 회백색 눈이 작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이제는 더 이상 그 눈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 저 순수하고 깨끗하고 단정하게만 보이는 이 자의 외모에 현혹되지 않는다. 그래, 너다. 네가 카민에게 그런 고통을 주었던 녀석이다. 아니, 카민뿐만 이 아니겠지. 카민과 같은 자들은 많이 있었겠지. 자신에게 독약을 투여하 고, 또 자신이 그 독약을 중화시키고. 미친 듯이 헐떡이며 원하지도 않는 살육에 길들여지고, 피가 마르지 않는 검을 보며 제발 인간이 되게 해달라 고 기도하고! 그래, 너 때문이다. 너 때문에 카민은 그렇게 죽은 거야. 피싯! 검이 어지럽게 난무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빠르게, 키루사는 잘 피하고 있 었다. 나는 천천히 왼손에 어둠을 모았다. 여태까지보다 훨씬 더 강한, 여 러 가지 사념들이 뒤엉킨 나만의 마력이 뭉쳐들었다. 비각성 시절보다 수십 수백 수천 배 정도는 강하게 농축된 그것들이 내 손 위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키루사의 눈이 크게 뜨여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거침없이, 내 손에 모여든 그 어둠을 녀석을 향해 던졌다. 퍼―ㅇ. 몸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확, 하고 핏물이 어지럽게 튀었다. 나는 그 핏 물을 옷에 비벼 닦았으며 가볍게 웃었다. 이젠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찌됐 든 카리스를 찾아야 하는데. "킥. 아이에드?" 갑작스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이에드. '멀지 않은 미래, 당신은 배신을 당할 겁니다.' 린은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 배신이라는 게, 이것인가? 아이에드는 원 래 나와는 아버지와 아들 같은 사이었다고 했다. 그러니 이건 배신이라는 거겠지. 잘 모르겠다. 뭐, 상관없는 것인가. 어차피 지금의 나는 아이에드 를 기억하지 못하니. 「아, 아니에요. 아닙니다, 아이에드님은 그럴 분이 아니에요! 칼레들린님!」 레이네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떨어져나갔다. 소용없어, 레이네. 지금의 네 목소리는 내게 어떤 설득력도 갖지 못한다. 그 자가 이토미즈를 실질적으로 만든 존재이든 말든, 지금의 내게는 상관없 어. 그 자 때문에 카민은 그렇게 죽었고, 그 자 때문에 유키가 그렇게 됐어. 게다가 카레나의 눈동자라는 것을 죽여버리라고 말하라고 했던가. 그래,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그것이 다다. 별로 상관없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뛰고 있다. 미친 듯이 뛰고 있다. 만나야 해. 카리스보다 중요한 건 아이에드야. 아이에드를 만나야 해.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치 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가야한다. 기다려라, 아이에드. 진 실을 들으러 가마. ◇ ◇ ◇ 기억이 조각난다. 모든 것이 엉망으로 얽힌다. 남는 것은… 무엇? 어차피 기억이란 허망할 뿐인 조각들.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어느 날 문득 사그라져 버릴지도 모를 파편들. 그러나 가끔씩 생각하곤 해. 그 허망한 조각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값어치가 있고, 얼마나 따뜻한 것인지를. 기억을 잃어버린 자들이란 얼마나 서글픈 것일까. 그 때는 알지 못했어. 내게 있어서 기억이란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그래, 그 때는 정말 몰랐었어. 제 37장 기억의 잔해 "이제야 와?" 키루사를 죽여버린 후, 저택을 엉망으로 만들고 나온 나를 반긴 건 배실배 실 웃는 낯의 키르였다. 가볍게 팔짱을 낀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던 키르는 내가 싸한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자 조금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슬슬 긁었다. 목구멍까지 차 오르는 분노에 녀석을 바라보는 시선에 칼날이 들 어선다. "어때? 카리스의 쇼는? 괜찮았지?" 내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닐텐데, 빙긋 웃는 낯으로 잘도 물어온다. "……카리스 녀석은 어디 있어?" 이를 아득 갈며 내가 씹어뱉는 듯 한 말에 키르가 조금 씁쓸한 미소를 보 였다. "그 자식은 말이야, 나에게도 아무 말도 안 해주는 놈이야. 아마 지금쯤 마계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걸?" "무슨 말이냐, 그건." "그 녀석의 목적은 '너를 만나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너에게 진실을 가 르쳐주는' 데에 있었거든. 그 놈은 원래 능구렁이야. 아마 마계로 가야지만 만날 수 있을 거야." 나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그 자식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여버리겠어."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웃으며 키르가 내 등을 몇 번 쳤다. "결국 찾았군?" 그 말과 함께, 키르는 내가 관 채로 데려온 카민을 내려다보았다. 투명한 유리 속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카민을 빤히 바라보던 키르가 오호, 하 는 소리를 냈다. "얘가 네 연인이었어?" "……남자다." "……" 키르는 잠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나를 올려다보다가 흐음, 하는 소리를 냈 다. 곧 그가 조그맣게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인간 주제에 뭐가 이렇 게 생겨 먹은 거냐, 인간이면 마족보다 훨씬 더 못생겨야 정상 아니냐, 이 게 마족 자존심 구기네, 기타등등 온갖 말을 궁시렁대며 해댄 키르는 한참 만에야 카민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너, 이 시체를 안고 갈 셈이야?" 키르가 고개를 갸웃하며 한 그 질문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체이드 숲으로 간 뒤에 녀석을 묻어 줄거다. 그 후에 떠날 거야." "호오, 그런 것인가?" 키르는 흠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게서 가볍게 몸을 돌리며 경 쾌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만 블러드 아미 부총관에게 가보자. 그녀석 또 잔뜩 흥분해 있을 지도 모르잖아. 네가 에디 에이렌에 있는 동안 내가 그녀석에게 들볶인걸 생각하면 정말 짜증스럽다…… 에?" 한참 말을 이어가던 키르가 뚝 하고 말을 끊었다. 그제서야 자신의 목에 드리워진 날카로운 은빛검의 움직임을 눈치챈 것이다. "뭐냐 이건." 자신의 목 언저리에 정확하게 겨누어진 켐 알슈타드를 검지로 툭툭 두드리 며 녀석은 그렇게 말했다. 켐 알슈타드를 검 취급도 하지 않고, 녀석은 그 것을 살짝 문지르기도 하고, 통통 두드리기도 하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켐 알슈타드가 다시 떨림을 보이려 했다. 하지만 나는 억지로 그 것을 억누르 며 천천히 손에 힘을 주었다. 내 약력 때문인지, 다행히 검은 많이 흔들리 지 않았다. 나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자세 그대로 그렇게 서 있 었다. 키르는 그제서야 내가 장난으로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 달았는지 가볍게 한숨을 포옥 내쉬며 입을 열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대체 뭐냐." "뭐가?" 뻔뻔스럽게도 뭐가? 라며 전혀 모른다는 목소리를 내는군. "모르는 척 하지 마라. 갑자기 주변이 엉망진창이 돼버렸어. 정리가 안돼. 뭘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나는……." 내 말에 키르가 피시식, 웃는다. "나를 베면 답이 나오기라도 해? 갑자기 나를 찌르려고 하면 안되지." 그 말과 함께 키르가 가볍게 중지를 뻗었다. 녀석은 자신의 목에 정확히 드리워져 있는 검을 그 중지로 천천히 밀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녀석을 정 말로 벨 의도는 없었다고는 해도, 나름대로 굉장히 힘을 주고 있었는데, 녀 석이 중지로 가볍게 밀자 검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바깥으로 밀려나가 버 렸다. 톡,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밑 쪽으로 떨어져 내린다. 키르가 피식, 하고 웃는 소리가 났다. "거봐, 어차피 진짜로 찌를 생각도 없었잖아." "……." 키르는 살짝 나를 돌아보며 내 볼을 톡톡, 건드렸다. "자, 대답해봐. 이제 어떻게 할거지?" "……마계로 돌아갈 거다." "그래? 그것 참 잘됐군." 피식 웃으며 녀석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키르를 내려다보았다. 키르는 응? 하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왜 그래?" "……나는, 뭐냐?" 천천히 던진 그 질문에, 녀석이 고개를 갸웃한다. "뭐?" "넌 알고 있어. 그렇지?" 내 말에 키르가 파하하핫, 하고 소리 높여 웃는다. "참 내.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난 뭐냐' 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카레나의 눈동자가 뭐지?" "……." 정곡. 내 말에, 키르의 얼굴에서 웃음이 모두 사라졌다. 싸하게 굳어버린 표정의 그는 그 표정 그대로 나를 한참동안 빤히 보다가, 천천히 인상을 찌푸리곤 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작게 입술을 움직여 속삭이듯 말했다. "나도 가르쳐주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순 없어." 속닥속닥 말한 그녀석이 얄미워서 순간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나의 실력으 로는 그게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키르를 한참동안 보다 말고 가 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카레나의 눈동자라는 게 뭐길래, 당신 정도의 마족이 내 옆에 있는 거야? 그리고 하나 더…….. 이, 이카루의 성녀 이루엔과…… 나, 나는…… 대체, 무슨 관계지?" 키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글세. 어찌됐든 곧 알게 될 거야. 마계로 가면 모든 수수께끼는 풀린다. 네가 좀 힘들어질지도 모르지만, 종지부는 찍어야 하는 거니까. 아, 무슨 뜻인지는 묻지마. 네가 뭐라해도 나는 답해줄 처지가 못 돼." 말을 하는 도중에 아예 내 질문은 받지 않겠다는 말을 달아버린 키르는 내 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어 보였다. 나는 그런 키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조용한 한숨과 함께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너, 대답해봐." 내가 그렇게 말하자 키르는 곤란한 듯,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입술을 살포시 깨무는 그를 잠시 바라만 보고 있던 나는, 한참만 에 그를 향해 마지막으로 못을 박는 듯한 심정으로 말을 건넸다. "서열 제 2위의 마족." 움찔, 하고 키르의 어깨가 떨리는 것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데키르아 하리에스 드레시칸 피아드 나이트 류." "아?" 얼빵한 소리를 내며 키르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말해봐. 왜, 당신 정도의 마족이 이 곳에 있는지를." 키르가 아하? 하는 소리를 냈다. "또 시치미 뗄 생각이라면 집어치워." 냉정하게 뱉어낸 내 말에 키르는 어깨를 으쓱하다가 갑자기 하아, 하고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갑자기 발악하듯 우아아악, 하는 괴성 을 질렀다. "제에에에엔∼자앙! 그것도 벌써 들킨 거야?" 나는 그의 발악을 들으며 소리쳤다. "빌어먹을! 그럼 진짜 네가 서열 2위 마족이란 거야?" "엑?" 내 말을 전혀 예상못했다는 듯, 키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정작 젠장이라고 외치고 싶은 건 나라고! 그냥 한 번 찍어 본 건데 정말 그랬다니!" "뭐야?" 내 말이 끝나자마자 키르가 발악하듯 자기 머리를 집어 뜯었다. "너와 싸웠던 날. 네 눈동자가 갑자기 레몬 색으로 변하는 걸 봤어. 그 때 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지만, 라이메데스에게 네가 전음으로 네 정체 운운 하니까 라이메데스가 팍 하고 굳었던 것. 그걸 보고 불현듯 떠올랐다. 이 녀석. 혹시, 생각보다 더 엄청난 마족이 아닐까, 하고. 그리고 그 순간 에 번뜩 스친 것이 네 눈동자 색이었다." 서열 제 2위의 마족 아데키르아 하리에스 드레시칸 피아드 나이트 류. 마계의 제 2강자. 마왕의 두 보좌관 중의 하나. 제 1차 천마대전의 주인공. 그 어떤 마족보다 호전적이라는 이. 그 독특하다 못해 파격적인 성격으로 전 마계에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 마족. 자주빛 산발한 머리카락과 레몬빛 눈동자를 가졌다고 하는 그. 그러고 보 니 그가 소년 같은 몸을 갖고 있다는 소리도 들은 적이 있었다. 저번에 녀 석은 나에게, '이 머리카락은 네가 붉은 머리에 약하다고 해서 바꾼 거야' 라고 한 적이 있었다. 눈동자 색도 역시 마찬가지였겠지. 키르는 곤란한 얼굴로 아직도 머리를 버벅대고 있었다. "이제 그만하고 본 모습으로 돌아가지 그래?" 조용히 던진 내 말에 키르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곧,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녀석의 모습이 흐릿해진다 싶더니, 녀석의 몸 주위로 잠시 격한 바람이 몰려들었다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녀석이 모습을 확 하고 바뀐 채로 서 있었다. "……." 녀석의 붉고 길었던 머리카락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짤막 한 머리카락이었다. 산발하게 공중으로 뻗쳐 오른 그 머리카락은 자줏빛. 독특한 그 빛깔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붉은 빛을 대체한 것은 짙은 레몬빛 의 눈동자. 마계에서 그 누구보다 독특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서열 제 2 위의 마족. 과연, 그렇군. 모습이 바뀌자 한꺼번에 분위기마저 바뀌어 버린 다. 이런 녀석이 정말로 서열 제 2위의 마족이었단 말인가!(크흑! 로시엔이 읽어줬던 이야기책에서의 서열 제 2위 마족이 얼마나 멋졌는데! 이 자식은, 이 자식은! '혀엉∼' 따위의 말과 함께 같잖은 눈물이나 흘려내며 남을 곤란하게 만드는 녀석이었잖아!) 그래도, 어찌됐든 서열 2위는 서열 2위. 온 몸에서 갑자기 무엇인가가 찌 릿찌릿하고 끓었다. 그러고 보면 나… 서열 2위의 마족과 싸웠었다는 말이 되는군. 후훗, 평생 자랑해먹어야겠다. "이게 내 본모습이다. 훨씬 낫지?" 키르가 고개를 들며 그렇게 말했다. "흥, 나보다 못해." "……." "뭐냐 그 황당하다는 얼굴은. 그럼 설마 네가 나보다 더 잘났다고 생각하 는 건 아니겠지? 이제 잡담 그만하고 워프나 해. 라이메데스 놈 말라죽었을 지도 모르니까." 내 말에 키르가 하, 하핫 하고 짤막하게 웃었다. 녀석은 몇 번이나 피식거 린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게 하지. 역시 너, 마음에 들어." 네 놈 마음에 들어봤자 좋을 것 하나도 없다 이 놈아. ◇ ◇ ◇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1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83 라이메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키르를 빤히 노려보고만 있었고, 세렌 은 눈을 부릅뜨고 키르를 보고 있었다. "왜 갑자기 머리색이 바뀐 거야? 그 눈은 또 뭐고?" 세렌이 놀란 듯 그렇게 말하자, 라이메데스가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은 마족이야." "알아요." 아, 알아? 안다고? 안 그래도 갑자기 외모가 변한 키르 때문에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싶었던 나는 너무도 당연하게 알아요, 하고 대답한 세렌 때문에 당황해버렸 다. 세렌은 어이없다는 듯이 나와 키르, 그리고 라이메데스를 돌아보더니 아하? 하는 소리를 냈다. "뭐예요? 그럼 칼레들린님과 라이메데스님은 여태까지 모르고 계셨습니까?" 쯧쯧, 하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던 세렌이 의기양양하게 말 했다. "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거, 거짓말! 마족인 줄 알았으면 그렇게 주워왔을 리가 없잖아! 어디서 거 짓말이냐! 그러나 내 마음속의 소리가 들리는지 어쨌는지, 세렌은 당연하다는 듯한 눈이다. 관에 든 카민의 시체를 제일 먼저 확인했던 세렌은 제 2의 관심사 인 키르를 향해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와는 달리, 차분한 얼 굴로 내 쪽으로 걸어온 라이메데스는 나를 보며 조용하게 물었다. "카리스는 만났어?" "아니." 이번에도 만나지 못했다. 이 빌어먹을 자식은 어디까지 나를 농락해야 속 이 시원해지는 거지? "그럼 어디로 가는 거지? 이번엔?" "마계." "……그런 거냐." 라이메데스가 잠시 한숨을 쉬듯 말했다. "그럼, 체이드 숲으로 가면 되는 건가?" "응." 짧고 간결하게 대답해놓고,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바람이 시원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가보자구." 나는 고개를 들며 그렇게 말했다. 여느 때와는 조금 달리, 햇빛이 지독히 도 눈부셨다. ◇ ◇ ◇ "체이드 숲요? 어딘지 모르는데요." 세렌이 그렇게 멀뚱하게 말하자, 라이메데스가 잠시 세렌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럼 여기서 헤어지지." "예?" 깜짝 놀란 듯, 세렌이 버럭 고함을 치자 라이메데스가 조금 비스듬한 냉소 를 입에 물며 천천히 말한다. "우리는 이제 마계로 돌아갈 거야. 신관인 너와 언제까지나 같이 있을 순 없잖아?" "아, 그, 그건 그렇지만……." 세렌은 당황한 듯 머리를 버벅거렸다. "저, 저는 칼레들린님하고 같이 가고 싶은데요." 에? 세렌의 말에 놀라 고개를 든 순간, 세렌이 버벅거리며 말했다. "아, 저 뭐라고 해야할까요……. 마계에 계속 사실 것도 아니잖아요, 칼레 들린님은." "……계속 살건데?" 내 말에 세렌이 엑? 하는 얼굴을 했다. "아, 그, 그러면……." 하다 말고 세렌이 말을 뚝 멈추었다. "여기서 헤어져야 한다는 겁니까?"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눈이 걱정으로 가득해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그래서? 네가 마계까지 따라가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못 갈 것도 없어요." 흐, 흐음. 나는 왠지 재미있는데, 라는 생각이 들어 세렌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 득 나는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그래? 그렇다면 좋아." "칼레들린! 제정신이냐!" 라이메데스가 버럭 고함을 쳤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키르와 라이메데스를 돌아보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그럼 가보자." 내 말에 라이메데스가 쳇, 하고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막 녀석 곁으로 모 여들자, 녀석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외쳤다. "워프." ◇ ◇ ◇ "크아아아아!" "왜 워프가 여기로 된 거야!" "드디어 미친 거냐, 라이메데스!" "자, 잠깐만요! 일단들 서봐요! 제가 말하면 어떻게든……." "시끄러워! 네가 말하기 전에 우리는 다 죽을 거다!" 나는 달리고 있다. 무진장 달리고 있다. 계속계속 달리고 있다. 왜 달리냐고? 달리니까 달리지. 내 이 아리따운 미모를 보고 반한 사람들 이 내 뒤에서 마구 달려오고 있냐고? 훗훗. 푸하하하, 물론 그럴 수도 있지. 내 미모를 보고 반한 사람이 여태까지 한 두 명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 지만 그건 여자일 경우의 해당사항이지! 지금 내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것 들은 전부 새까만 남자들이란 말이다. 빌어먹을! 그것도 흰옷을 아래위로 주렁주렁 걸친, 일명 신성사제라 불리는 그 재수 없는 자식들! "우워어어어어!" 신성사제가 내 뒤를 따라오는 이유? 이봐, 물을 걸 물어봐. 그거야 뻔하지 않겠어? 다 내 뒤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저 라이메데스 놈 때문이지. 분명히 우리는 체이드 숲으로 가자고 말했고, 라이메데스는 그 것을 지켜 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래! 분명히 그런 것이다! 그런데 대체 무엇인가! 라이메데스 놈이 워프를 외치고 난 뒤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반짝 뜬 나는 완전히 당황해버렸다. 왜냐고? 체이드 숲에 도착하면 보이는 건 뭐겠는가? 당연히 무성한 나무들과 꽃들이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대체 뭔가 !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것들은. 음? 여기가 어디냐고? 푸하하하하. 맞춰 봐라! 여기가 어딘지! "미친! 아직 워프도 제대로 할 줄 모르냐 네 놈은! 대체 어디로 워프를 한 거냐아!" 내 고함소리를 받아, 뒤따라오던 키르가 짜증스럽다는 어투로 외쳤다. "에잇, 짜증나.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그냥 팍 하고 쓸어버리면 안돼?" "절대 안돼요!" 에세렌은 기겁을 하며 손을 휘저었다. "빌어먹으으을! 왜 하필이면 워프를 해도 여기로 한 거야!!" 오호, 좌측부터 시작해서 좌르륵 늘어선 흰색의 커다란 건물들이 보인다. 후후, 정말 아름다운 건물들이로군. 그래, 정말로 너무너무너무 아름다운 건물들이야! 확 부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젠장할! 시끄러워! 내가 하고 싶어서 했는 줄 알아!" "거기 서라! 이 사악한 마족들아!" 라이메데스가 조그맣게 말을 뱉어내자마자 귓가가 찢어질 듯이 울리는 건 저 사제들의 떽떽거리는 소리. 으으, 정말이지 시끄러워서 죽을 지경이다. 앵앵거리는 소리들에 귀가 터져 나갈 것 같다. "서라, 서!" 크으, 시끄러워! 시끄러워! 너 같으면 서겠냐? 앙?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 봐! 너 같으면 서겠냐고, 너 같으면! "어떻게 좀 해봐요!" 어쭈? 뭘 어떻게 해보라는 거야! "여긴 네가 있던 신전이잖아! 해보려면 네가 어떻게 해봐!" 내가 버럭 고함을 치자, 세렌이 지지 않겠다는 의지에서인지 저도 따라 고 함을 친다. "크아아아∼! 왜 하필이면 워프를 해도 마리에나 신전으로 했냐구요! 저희 형제들이긴 하지만 엄청난 집착을 가진 분들이라구요! 이렇게 된 거 성녀 의 검은 도난 당할 것이 분명해요!" 허억. 나는 얼른 쥐고 있던 켐 알슈타드를 더더욱 꼬오옥 쥐며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지, 진짜 굉장하다.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무리들이 엄청난 흙 먼지를 일으키며 따라오고 있다. 어, 어쩐지 공포감마저 느껴지는군. "어떻게 좀 해봐!" 내 말에 세렌이 발끈해서 소리를 내지른다. "뭘 어떻게 해요!" "이런 젠장! 이렇게 몰려가다간 쉽게 잡힐 거야. 차라리 각자 떨어지는 게 어때?" 나는 녀석들을 돌아보며 그렇게 소리쳤다. "좋았어, 그렇게 하는 게 낫겠군!" 키르가 좋다고 소리를 질렀다. 라이메데스는 뒤에서 뭐라고 궁시렁 대기는 했지만 지은 죄가 있는지라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카민의 시신은 내가 계속 들고 갈게." 아까부터 계속 관을 안고 있던 키르가 그렇게 말했다. "이 중에선 내가 제일 힘이 세니까 내가 들고 가는 편이 나아." 우, 감동이다. 이 녀석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일지도! "그럼 이 녀석들 따돌리고 나중에 체이드 숲에서 만나기로 하지!" "체이드 숲이 좀 넓냐! 거기의 어디서 어떻게 만나?" 일단 왼쪽으로 몸을 틀며 내가 한 말에 키르가 그렇게 소리쳤다. 시끄러워! 네가 지금 나한테 반항하는 거냐? 하여튼 만나자면 만나는 거지 꼭 토를 달아요, 토를! 내가 왼쪽으로 달리자 성검은 저 쪽이다∼를 외치며 내 쪽으로 우르르 달 려오기 시작한다. 우오, 많은 팬을 거느린 인기인 같아서 좋긴 하다만 크아 아! 난 역시 여자가 좋다고! 남자 녀석, 그것도 신성사제 따위가 뒤따라오 는 건 싫어! 나는 왼쪽으로, 왼쪽으로 끊임없이 달리다가, 어느 순간 높이 점프해 신전 2층 난간으로 올라섰다. 사제들이 또 뭐라고 뭐라고 헛소리를 지껄여댔지 만 싸그리 무시하고 난간을 밟은 채 열심히 통통거리며 뛰었다. 에라이, 젠 장! 잘난 칼레들린 이미지 다 망가지는 구만! 2층 난간이 끝나고 다른 신전이 보이자 이번엔 옆 신전의 지붕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사제들이 다시 손가락질을 해대며 내 쪽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여유 만만하지. 헉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나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가 만히 있었다. 오, 조금 어지럽군. 나는 살짝 몸을 돌려 지붕의 반대쪽으로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제들 은 놀란 듯 다시 우르르 뛰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피식 그들을 비웃으며 가 볍게 지붕 밑으로 착지했다. 사제들이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서 신전을 벗어 나야겠다, 고 생각하며 한 발자국을 내딛은 순간. "어?" 입에서 황당함으로 물든, 자그마한 울림이 튀어나왔다. 뭐냐, 하고 생각했 다.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이 보였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이 곳에 있 을 리가 없는 아이인데.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네가? 머리가 살짝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눈언저리에서 불이 인다고 생각했다. 내가 환시를 보고 잇는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앞에 서 있는 것은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 그 소녀도 나와 이렇게 마주친 것이 놀라운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정말로 놀라서, 한참동안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서 있었다. 신관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발이 움 직이지를 않았다.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침묵하고 있는데, 그 아이가 선수를 쳐 먼저 입을 연다. "칼, 레들린 오빠?" 그래, 맞아. 나야. 그런데 왜, 여기에서 만나는 거야? 너무나 갑작스러운 만남이라 준비한 말이 없었다. 아니, 준비한 말이 산더 미 같이 있었다해도 나는 말할 수 없었을 거다. 예전과 전혀 달라진 것 없 는 그 목소리. 낭랑하게 나를 부르는 그 앙증맞은 목소리가 조그맣게 귓가 에서 울린다. 아아, 아아. 왜. 왜?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가슴이 아프다. 너를 여기에서 보게 될 거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어. "나스……." 입가에서 작은 목소리가 나왔다. 어째서야, 나스? 너는 분명히, 그 때…… 카민이, 거기에 맡겼었어. 너를 잘 돌봐 줄 거라고 중얼거리며 그랬었다구. 이 가족들은 우리 나스를 예뻐 했으니까 여기에 맡겨야겠어, 라고 말했단 말이야. 그런데 왜 여기에 있어? 왜 이 신전에 있어? 그것도……. 한 뭉터기의 빨래를 가득 가슴에 안고 있는 나스를 보면서 나는 정말로 할 말이 없어졌다. 햇빛에 반짝이는 갈색 머리카락이, 동그란 그 눈동자가, 내 눈앞에 서 있는 이 작은 소녀가 여지없는 나스임을 말해주고 있건만, 헤 어져 있었던 그 짧은 시간동안에도 아이들은 크는 것인지 못 본 사이에 훨 씬 더 어른스러워진 것 같다. 아픈 곳은 없어 보인다. 카민과 헤어진 그 시 기에는 그렇게나 심하게 앓았었는데. "나스, 왜 여기에, 너는 체이드 숲……." "저기 있다! 저기 있어!" 고함소리가 크게 들린다. 나스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칼레들린 오빠, 뭐가 어떻게 된……." 휘릭. 더 생각할 틈도 없었다. 짧은 바람소리와 함께 홱 하고 나스의 여린 팔목 을 붙잡았다. 나스는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떴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나 스의 팔을 잡은 그 상태 그대로 높이 점프했다. "우!" 나스는 짧은 신음을 뱉고는 내게 그대로 딸려 들어왔다. "저 사악한 마족이!!"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나는 내 품안에 나스를 안아들었다. 뒤에서는 신 성주문이 난잡하게 울리고 있지만 그걸 열심히 들을만한 상황이 아니잖아. "……정말, 칼레들린 오빠예요?" 작게 물어오는 이 소녀. 카민이 남긴, 카민이 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자신의 흔적. 피가 이어지진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카민이 사랑한 아이. 이 아이가 지금 여기에 있다. 카민, 여기에 나스가 있어. 여기에, 바로 여기에. 네가 언제나 걱정했던 나스가, 여기에 있어. "응, 그래. 나 칼레들린 맞아.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 그새 이 잘생긴 얼굴을 벌써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나는 나스의 얼굴을 보았다. 계속해서 영창 되는 신성주문을 피해 이리저 리 달아나며 열심히 뛴다. 입술을 살짝 깨물며 한참을 달리다가, 나는 문득 물었다. "그런데, 왜 신전에 있는 거야?" 내 말에 나스가 고개를 푹 숙인다. "……돌보아주던 분들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뭐?" "……모르겠어요. 어느 날 버섯을 캔 뒤에 집에 돌아왔을 때는……." 나스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나는 심장이 지끈거리는 느낌에 한참 괴로워 했다. 이토미즈? 이토미즈의 짓일까, 이것도 역시? 이가 우드드득 갈리고 있었다. 미칠 듯한 분노의 파동이 몸을 잠식했을 때 나스가 가만히 입을 열 었다. "그건 그렇고. 오빠는요?" 몸이 멈칫, 하고 굳어졌다. "우리, 카민 오빠는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중에선 내가 제일 힘이 세니까 내가 들고 갈게! 라고 말한 키르를 믿을 뿐이다. 만약 그 자식이 카민에게, 아니, 카 민의 관! 에라도 흠집하나 생기게 만든다면 그 면상을 아득바득 갈아 버릴 테다! 나는 잠시 내 품에 안긴 나스를 보았다. 뭐라고 해야하나? 모르겠어. 어쩌 면 이건 굉장한 우연이 아닌가. 라이메데스가 만약 이 곳으로 워프하지 않 았다면 난 이 아이를 발견하지 못했겠지? 카민, 어쩌면 이건 네가 한 짓이 냐? 그래, 너라면 이런 방법을 썼을지도 몰라. 여기에 나스가 있으니까. 이 아이를 돌봐줘,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야? "칼레들린 오빠, 우리… 카민 오빠는요?" 다시 한 번 고개를 들며 한 그 말에, 나는 천천히, 내가 생각해낸 거짓말 중 가장 괜찮은 것을 뱉어냈다. "……음, 사실은 나, 너희 오빠랑 헤어졌어." "에?" "너희 오빠는 지금……. 크레티아에 있어." 내 말에 나스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크레티아에? 거긴 왜요?" "……그건……. 조금 더 강해지기 위해서야." 나스의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로 차 오를 것 같아서, 나는 얼른 덧붙였다. "조금 더 강해져서 널 찾으러 올 거야. 조금만 더 있으면……." 하지만 말을 하다 말고 움찔해버린다. 조금만 더 있으면? 뭐? 무슨 거짓말을 하려고 하는 거냐, 칼레들린.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나스는 금방 시무룩해져버렸다. 나는 조 용히 물었다. "신전은 좋아?" "예? 예. 무척 좋아요." 그래? 빌어먹을, 좋긴 뭐가 좋아! 이렇게 작은애에게 얼마나 일을 시켰으 면 손이 이렇게 거친 거야! 게다가 갖고 있던 그 빨래더미들하며! 대체 신 전에서 아이들에게 뭘 시키는 거냐고! "……나스." "예?" 나는 조용히 나스의 얼굴을 보았다. "……내가, 금방 올게." "에?" "내가, 데리러 올게. 그러니까, 몇 달만 여기에 있어. 내가 데리러 올 테 니까, 기다리고 있어. 카민이랑 약속했거든. 카민이 널 찾아올 때까지는, 내가 너를 돌봐줄 거야." 내 말에 나스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힐끗 뒤를 보았다. 바람 같은 속력 으로 신전의 지붕을 밟으며 와서 그런지, 신관들은 저 멀리에서만 히끗히끗 하게 보일 뿐이었다. 나는 풀이 무성한 신전의 한 구석에 나스를 가만히 내 려놓았다. 나스의 갈색 눈동자는 또렷이 내 쪽을 향한 채다. 나는 가볍게 웃어 보이며 천천히 말했다. "나스, 기다리고 있어. 기다리고 있어. 나, 꼭 돌아올 테니까. 알았지?"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1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84 체이드 숲. 나스를 내려놓고 나는 미친 듯이 뛰었다. 날아갈 수도 있었지만 하지 않았 다. 그냥 뛰었다. 어디가 어딘지 몰라서, 한참을 뛰다가 멈춰서 버렸다. 체 이드 숲? 여기서 한 달은 걸리는 곳인데? 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얼마 나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를 알았다. 나는 피식 내 자신에게 자조를 보낸 다음 워프를 시도했다. 부드러운 바람이 몸을 감싸는 기분 좋은 감촉을 느 끼며 눈을 뜨자, 언제인가 한 번 보았던 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이군." 카민과 처음 만났던 곳이자, 처음 인간계와 만났던 곳. 음, 여전히 잡아먹을 것들이 없는지 궁금하군.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나인 듯, 숲 어디에도 녀석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지나자 용케 내가 있는 곳을 딱 맞춰 세렌이 나타났고, 그 다음은 라이메데스가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투덜대며 등장했다. 키르가 가장 늦었는데, 나는 휘적휘적 걸어온 키르녀석을 딱 일곱 대 패 주었다. "왜 때려!" 버럭 고함을 치는 녀석을 향해 나는 싸늘하게 웃어 보였다. "카민 관에 기스 일곱 개 났다." 키르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훗, 그래, 할 말 없지? 숲은 여전히 울창했다. 동물 한 마리 없다는 이 빌어먹을 놈의 숲. 나는 주위를 가만히 훑어보았다. 이 근처 어딘가에 좋은 곳이 있을 텐데. 사방을 훑다가, 두 그루의 나무가 사이좋게 서 있는 것을 발견한 나는 작 게 웃었다. "내놔." "옛다, 갖고 가라." 키르에게서 카민의 관을 받아서, 그 쪽으로 다가간 나는 조용히 손으로 흙 을 파기 시작했다. 땅에 마력탄을 날린다거나해서 구멍을 팔 수도 있지만,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다. 손으로 팔거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그런 건 상관없어. 천천히 손으로 땅을 파내려 간다. "그걸 언제 다 하시려고 그러세요? 제가 도와드리죠!" 세렌이 법사 복을 걷고 들어와 손으로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굳 은 흙을 퍼내느라 내 손톱에서는 피가 나기 시작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렌 역시 열심히 땅을 파고 있었다. 흥, 재수 없게도 저 잘나빠진 두 마 족은 멀뚱하게 선 채로 우리가 하는 양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아니, 그냥 지켜만 보고 있다면 밉지나 않지. "너 바보냐? 마력탄 한 번 날리면 끝이야!" 키르 녀석의 밥맛없는 말이었고, "이렇게 파나 저렇게 파나 묻는 건 똑같잖아." 무덤덤하고 재수 없는 라이메데스의 말이었다. 뭐, 솔직히 인정하자면 두 녀석의 말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녀석들의 말처럼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는 카민의 무덤이 될 거 다. 정성 들여 주고 싶어. 문득 떠오른다. 처음 카민과 만났을 때가. 카민을 잃을까봐 걱정했던 때도 있었고, 녀석에게서 도움을 받은 때도 있었다. 구박했던 적도 있었고, 구 박 당했던 적도 있었다. 땅을 적당히 판 다음 관을 내려다보았다. 하얗고 파리한 안색의 너. 너에게 체온을 불어넣어 주고싶어지만 무리라는 걸 알고 있다. 이제는 정말 보내야 할 시간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잘 가라, 카민."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잘 가라. 여기에 꽃 한 송이 놓아줄 수 없는 나란 놈을 원망해도 좋다. 하지만 여기엔 꽃이 없는걸. 대 신 자주 올게. 그리고 걱정하지마. 너의 여동생은 내가 아주 잘 돌봐 줄 거 야. 카민, 보고 있니? 나스는 더 예뻐졌어. 기다리고 있어, 카민. 나, 언젠 가… 나스 데리고서 다시 올 테니까. "이제 끝났어?" 한참동안 무덤 앞에 서 있노라니, 키르가 뒤에서 그렇게 물어왔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나는 조용히 말하고 몸을 일으켰다. 키르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서열 제 2위의 마족은 마계와의 경계지점 어디에서든 공간이 통로를 만들 수 있다고 했던가. 녀석은 손을 앞으로 뻗은 상태 그대로 뭐라고 가볍게 중얼거렸다. 파지지지지직―. 요란한 소리가 났다. 나는 라이메데스와 세렌 쪽을 보았다. 녀석들은 마치 내 마음을 안다는 듯이 피식 하고 웃었다. 그리고 우리는 천천히, 공간의 문으로 발을 내딛었다. ◇ ◇ ◇ "세이아나니이이임∼!" "레이네에에∼" 흐, 흐으으음. 눈물의 상봉이군. 나는 있는 힘껏 서로를 껴안는 두 여자(아니, 한 마녀와 한 마물)을 빤히 보고 있었다. "보고 싶었쪄요!" 일부로 혀 짧은소리 내지마! "나도나도!"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주제에 귀여운 목소리 내지 말고! 나는 손에 손을 잡고 폴짝폴짝 뛰는 세이아나와 레이네를 보며 잠시 한숨 을 내쉬었다. 한참동안 안고 보듬고 부비적거리던 그 둘은 한참 만에야 우 리들의 존재를 느끼곤 말을 붙여왔다. "어라? 이게 누구야!" 아름다움의 대명사. 마계 최고의 미녀. 상냥하고 착하기 그지없는 여인. 기타등등 수식어는 너무나 많지만 짜증이 나는 관계로 생략하도록 하겠다. 대체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뻔뻔히도 하고 다녔는지 그저 궁금 할 뿐. "말미잘에 데스에 서열 2위 마족 아데키르아님까지!" 아직도 내가 말미잘이냐! 나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공간 수호자인 그녀, 세이아나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내가 그러자 마자 얼른 입 모양을 우그러뜨리 며 네놈이 정녕 맞아죽고 싶은 게냐? 라고 입술로 오물거리는 세이아나를 보며 얼른 조용히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이 성격 더러운 여자한 테 잘못 걸려서 혼쭐나는 것 보단 훨씬 낫지. 세이아나는 훗, 하고 가볍게 웃는다 싶더니 곧 오오, 하는 탄성과 함께 나를 아래위로 죽 하고 한 번 훑 어보았다. "엄청나군, 칼레들린. 그 사이에 각성했어?" "흥, 마녀. 그래, 각성했다! 어쩔래!" 내 말에 세이아나는 흥, 하는 얼굴이 되어 나를 한참 노려보다가 라이메데 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애 보느라고 수고했다, 데스." "하하하하. 아니에요, 세이아나." 얼라리? 라이메데스와 세이아나, 아는 사이었나? 나는 굉장히 친근하게 말 을 주고받는 라이메데스와 세이아나를 보며 조금 당황스러워 졌다. "여전하군,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도." 바로 그 때, 옆에서 키르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싶어서 돌아본 순간 내가 본 것은, 무섭게 굳어 있는 키르의 레몬색 눈동자였다. 뭐냐, 저 표정은? "별 말씀을, 아데키르아님." 키르의 표정이 상당히 무시무시한 반면, 세이아나는 여전히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저는 오로지 한 녀석만을 보며 삽니다. 그 녀석이 어떤 선택을 하든 전 결국 그 녀석 편인걸요. 다른 건 필요 없습니다.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그 리고 지금의 상황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요. 저는 그저 당신과 데스 와 말미잘이 반가운 것뿐이니까요." 뭐야? 대체 그게 무슨 소리지? 그 녀석? 편이라니? "그런가. 결국 당신이 손을 들어주는 쪽은 그 쪽이란 말이지. 녀석, 든든 하겠군." 키르가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뭐냐 싶어서 키르 녀석을 노려보 았다. 역시, 이상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 거냐? "아니 잠깐만. 다른 건 다 그렇다 치고. 이건 뭐지?" 갑자기 울려온 날카로운 세이아나의 목소리에, 나는 흠칫해서 얼른 세렌의 앞을 막아섰다. 세이아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세렌 쪽을 보고 있었다. "뭐야? 인간은 아니군. 이네아? 게다가… 신관이잖아?" 마지막에 신관이잖아, 를 말할 때 세이아나의 목소리는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 동료다." 내 말에 세이아나가 파하핫, 하고 웃었다. "이봐, 말미잘. 마계에 신관을 데려오다니, 드디어 정신이 어떻게 됐군?" "당신보단 멀쩡해, 마녀." "뭣이!" 세이아나는 화를 내려는 듯 눈을 부릅떴다가 어느 순간 음, 하는 소리와 함께 시선을 돌려 세렌쪽을 노려보았다. 세렌은 그러나 웬일인지, 주눅들지 않고 세이아나를 당당한 눈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대, 대단하군! 서열 12 위의 마족의 눈빛에 쫄지를 않다니! 세렌, 과연! 너는 신성을 타고난 존재 였던 거다! "이 미녀는 누구죠? 진짜 예쁘네요!" 그러나 나는 한참동안 세이아나와 눈싸움을 하고 있던 세렌이 고개를 휙 돌리며 한 그 말에 휘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워! 에세렌! 너는 느껴지지 도 않냐, 신관주제에! 세이아나는 최고위급 마족이란 말이다! 최고위급, 최 고위급! "오호호호, 내가 한미모 하지." 다, 당신도 당신이야, 세이아나! 그렇게 말하고싶어? 가볍게(아니, 무섭게)웃은 세이아나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엔가 얼굴에서 미소를 한순간에 지우며 표정을 굳혔다. "이봐, 말미잘. 설마 이 신관을 마계까지 데리고 가려는 건 아니겠지?" "데려갈 건데?" "미쳤냐? 다른 마족들이 신관을 그냥 둘 것 같아?" "내 옆에 서열 2위가 있는데 제 놈들이 뭐라고 할 거야?" 내 말에 세이아나는 벙찐 얼굴을 했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내 쪽을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소리 높여 웃었다. "오호호호홋! 하지만 무리일걸! 이네아가 공간의 문을 열 수 있을 리가 없 잖아!" "내가 열어주면 돼. 하나 만들어서 이 녀석을 보내고, 그 뒤에 내가 하나 더 만들면 되잖아." 내 말에 세이아나의 얼굴이 더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흥, 하고 고개를 돌 렸다. "당신이랑 말싸움 할 시간이 없어. 여기서 더 지체하고 싶진 않아." 내가 막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세이아나가 조그맣게 입을 연 것은. "조금만 더, 여기에 있는 게 어때?" "뭐?"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내가 고개를 돌리자 세이아나가 후후, 하고 웃었 다. "아니야, 아니야. 실언했어. 그만…… 가봐." 에? 뭐지? 나는 세이아나의 눈에 매달린 어떤 감정을 읽고 조금 놀라버렸다. 뭐라고 해야하나? 표현하기 힘들지만… 그래, 그녀의 눈에 매달린 것은 연민, 슬픔, 걱정… 하여튼 너무나 많은 것들이 혼합되어 있어서 뭐라고 딱 잘라 설명 하기가 곤란했다. 뭔가 있나? 무슨 일 있어? 라고 나도 모르게 물을 뻔했다. 그러나 세이아나의 표정은 언제 그랬냐고 따지기라도 할 듯 재빨리 평소 와 마찬가지로 돌아왔고, 나는 그럼, 하고 중얼거린 다음 몸을 돌릴 수 있 었다. 그런데 몸을 돌린 그 순간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왔다. 그 시 선을 따라 몸을 돌린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레이네의 얼굴이었다. 세이 아나의 옷깃을 꼭 붙잡은 채 내 쪽을 보고 있는 레이네는, 방금 전 세이아 나를 만났을 때 그렇게나 기뻐했던 주제에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있었 다. "레이네." 내가 부른 순간 레이네가 작게 대답했다. "예, 칼레들린님." "…그 동안 고마웠어." 내 말에 레이네가 뚜룩, 하고 눈물을 흘렸다. "이만 가자." 딱 자르듯이 말이 들려온 건 그 순간. 키르녀석이었다. 키르는 세이아나 쪽을 턱 하고 바라보더니 입가에 비스듬한 냉소를 머금었다. "세이아나." "왜 그러시는지요, 아데키르아님." 세이아나는 공손하게, 그러나 말에 가시를 돋궈 그렇게 키르를 불렀다. "그 쪽은 몇 명이냐." 키르의 질문에, 세이아나는 피식 웃었다. "저희 쪽은 다섯 명입니다. 아직 다섯 명은 어디에도 합류하지 않았으니까. 그 쪽은 당신과 '그 분' 뿐인 것 같군요." "……흥."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세이아나와 키르는 열심히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세이아나가 나를 돌아본 것은 그 순간이었다. 세이아나 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내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행복해라, 말미잘." 왜일까? 왜 그 목소리가, 다시는 보지 못할 녀석에게나 하는 말처럼 느껴 진 걸까. "당신도, 마녀." 세이아나는 마녀라는 말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부드럽게 미소지었을뿐. 나는 굉장히 놀랐다. 그 순간의 세이아나가 지은 미소는, 정말로 누구에게 비교를 한다는 것 자체가 미안할 만큼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 글을 올리기 위해 정리를 하려다말고 굳음. 아.. 이렇게 엉망진창이었던가?;;; 피.. 필히 수정이....ㅇㅁㅇ;; 아... 감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ㅠㅠ hokutomin@hanmail.net이에요=_= 감상에 목말라 있는 카르민-_ㅜ...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1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85 제 38장 마계에서 음습한 공기. 뜨겁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후덥지끈한 대기. 밋밋한 느낌의 태양.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는 온기.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인 이 공간 은, 인간계에서 느껴지는 그 어떤 생동감도 없지만 분명 내게는 익숙한 곳 이다. "여기가 마계인가요?" 퍽퍽하고 메마른 땅을 밟으며 세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녀석은 조금 긴 장된 얼굴로 연신 사방을 살피며 오호,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 아무런 성의 없이 라이메데스가 대꾸했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군. 마 계인 건 확실한데. 내가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드디어 오셨나요?" 이 목소리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을 순식간에 간파한 나는 얼른 켐 알슈타드를 빼어들고 뒤를 향해 휭, 하고 베었다. 날카로운 바람소리는 그 러나, 내가 노린 존재를 두 토막으로 가르기는커녕 허공만 베었을 뿐이다. "카리스." 재빨리 돌아서며 이를 부득 갈았다. 역시, 카리스가 거기에 서 있었다. 녀 석은 내가 활활 불태우고 있는 적의를 눈치채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눈치 채지 못한 척 하는 것인지 훗, 하고 웃고 있을 뿐이다. "그래요, 저입니다." "……죽인다." 나는 다시 한 번 이를 부득 갈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런 내 행동에 긴장하기는커녕, 카리스는 그 특유의 여유 로운 웃음을 입에 머금은 채로, 천천히 고개만 젓고 있다. 마치 당신이 저를 해치는 건 무리예요, 라고 말 하는 듯한 얼굴로. 순간 발끈한 내가 검에 힘을 주고 녀석에게 막 쪽으로 도약해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어떤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이봐, 카인. 무리야 무리." 키르의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휙 하고 돌려 그 쪽을 보았다. 무엇이 불만인 것인지, 키르는 잔뜩 불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아 니, 이상했다. 키르가 잔뜩 불퉁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건 내 쪽이 아니었 다. 나는 천천히 키르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키르의 시선이 꽂힌 곳은… …. 카리스 쪽. "역시 아데키르아. 네가 도와줄 줄 알았다." 문득, 카리스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온 몸에 무엇인가가 파츳,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웃기고 있네. 난 널 도와준 게 아냐! 다만 카인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뿐 이지." 잔뜩 삐진 것처럼 툴툴대는 키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지금의 싱황을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상황 1. 키르는 서열 2위의 마족이다. 그는 마왕의 보좌관이며, 마계에서 3번째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직위와 인격이 관계없다는 것은 이미 여러 예들에 의해 증명된 바가 있다. 상황 2. 마계는 서열절대의 공간. 상황 3. 서열이 높은 자들은 낮은 자들에게 당연히 반말을 하지만, 서열이 낮은 자들은 서열이 높은 자에게 절대 반말을 지껄일 수 없다.(조금 특별 한 인격 가진 녀석들 제외) 상황 4. 키르는 서열 2위의 마족이므로 키르에게 반말을 지껄일 수 있는 녀석은 단 두 명뿐이다. 마왕과, 서열 1위의 마족.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온 몸으로 돋아난 것은, 소름. "역시, 당신이……" 소름에 잠식당한 몸이 갑작스럽게 인식해버린 사실로 인해 부들부들 떨리 고 있을 때, 내 바로 뒤에서 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몸이 떨려서 돌 아 불수는 없었지만, 목소리로 미루어 짐작컨대 라이메데스였다. 라이메데 스는 묵직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역시 당신이 서열 1위의 마족인 카리스에온 나이타에라 세이피안 카미스 나이트 류입니까?" 머릿속에 천둥이 치고 있다. 나는 입을 벌린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얼어붙어 있었다. 서열 1위의 마족. 서열 1위? 이레니아가 공 주인 국가, 세이피안. 그 세이피안을 세웠다는 괴짜 마족이자 마왕을 제외 한 모든 마족을 발 아래 두는 마계 최강자. 그 서열 1위의 마족 카리스에온이 바로… 이, 카리스란 말인가? "확실히 이상하긴 했습니다. 당신이 그 날, 레이디안의 동굴에서 사람들 위로 떨어져 내리던 돌을 치워낸 것도. 마족이라면 그런 일을 했을 리도 없 고. 인간에겐 지극히 무관심한 것이 마족이니까. 당신의 그 행위는 당신의 후예인 세이피안의 공주를 위해서였던 겁니까?" 라이메데스는 마치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한 덤덤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가 고 있어서, 나는 심한 배신감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그러나 내가 배신감에 몸을 떨든 말든 라이메데스에 대한 질문의 답은 카리스에게서 부드럽게 흘 러나오고 있었다. "말이 그렇게 되나요? 확실히, 계속 관찰자로 있던 제가 '행동파' 로 바뀐 건 그 일 때문이었죠. 전면에 제가 부곽 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왕 이렇 게 된 거 빨리 해치우고 싶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이쪽 사정도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말입니다. 그래요. 이레니아는 저의 후예이니까, 그녀를 죽일 수는 없죠. 나와 미세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의 자식이니까." 뭐라고 떠드는 건지 모르겠다. 전혀, 모르겠어. "…시끄러워." 마계 서열 1위라느니 하는 거, 나는 몰라. "칼레들린?" 내 이름 부르지마. 너는 닥치고 있어, 키르! "시끄러워!!" 머릿속에서 뭔가 파즉, 하는 소리가 났다는 것을 느낀 후 나는 고함을 지 르며 카리스에게 달려들었다. 카리스는 살짝 한숨을 내쉬는 듯 했는데, 그 런 그의 행위에는 나를 무시하는 역력한 기색이 묻어 있어 나는 더더욱 화 가 났다. 나는 검을 들어, 키르를 공격했을 때보다 훨씬 더 강렬한 움직임 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카리스는 내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상쇄시켜 나간다. 검을 오른 쪽으로 휘두르고 나면 어느 샌가 왼쪽에서 휭 하고 나타나버리고, 위에서 아래로 베면 어느 샌가 내 뒤에서 싸늘한 그의 눈빛이 느껴졌다. 휘두르고, 휘두르고, 휘둘러도 역시 카리스는 내 검에 맞지 않는다. 절대 이길 수 없 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나약한 나. 상대는 서열 1위의 마족이었다.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찢어버리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런데 이렇게 허약하다니! 아무 것도 하지 못하다니! "그만." 얼마나 검을 휘둘렀던가. 나는 내 손목을 잡은 어떤 손에 의해 강제로 움 직임을 멈춰야만 했다. 가늘고 작은 손가락이었다. 키르 녀석의 손가락. 녀 석은 내 눈을 한차례 올려다보더니 가만히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지, 앞 뒤 안 가리는 건 저희 아버지랑 똑같군." 그 말과 함께 키르가 고개를 돌려 카리스 쪽을 보았다. "이제 그만 진실을 말해주지 그래? 응? 이 심술탱이 할아범아." 키르의 말에 카리스가 하,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심술탱이 할아범?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그래, 가르쳐 줄 때가 되긴 했 지." 마른침이 꿀꺽 하고 넘어갔다. 카리스는 내 쪽으로 한 발자국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온 몸에서 살기가 끓어 오른다. 내가 천천히 경계하며 뒤로 물러 서려는데, 키르가 내 손목을 잡은 손가락에 힘을 준다. "이대로 가만히, 칼레들린." 조용한 그 목소리에 담긴 무게 때문에 나는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서열 2 위의 존재감과 압박감은 상상외로 엄청났기 때문이다. 내 바로 코앞까지 다 가온 카리스가 내 앞에서 멈추더니, 내게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듯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그러나 그는 곧 음,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다물었다. "조금 거슬리는군요." 작게 내뱉은 그 말과 함께, 카리스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자욱한 어둠이 나와 카리스를 뒤덮었는 것을 느꼈다. 이 어둠은, 예 전 키르와 싸우던 날 키르가 쳤던 이공간에서 느꼈던 그 것과 똑같은 종류 의 것. "공간을 차단했나?" "방해 받는 건 싫으니까." 그 말과 함께 카리스가 웃어 보였다. 나는 조금 느슨하게 쥐고 있던 검을 다시 힘을 줘서 똑바로 쥐었다. 그러자 카리스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렇게 경계하지 마십시오. 알지 않습니까? 지금의 당신이 저에게 이길 확률은 전무합니다." "닥쳐." 내 차가운 말에 그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정말로 진지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믿어달라고 했지 않습니까. 제가하는 모든 일이 당신을 위한 것임을." 시끄러워. 네 말은 이제 믿지 않아. 너의 그런 헛소리 믿을 만큼, 나는 착 하지 못해.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은 상태에서 내 소중한 것을 파괴한 주 제에, 믿어달라고? 나를 농락한 주제에, 그런 주제에 믿어달라고? 웃기는 소리하고 있네. 나는 여전히 검을 세운 상태로 카리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카리스는, 내 그런 행동이 자신에게는 그 어떤 위협이 되질 못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 여유로운 모습으로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기 시작한다. "아주 먼 옛날에 굉장히 친한……. 세 명의 마족이 있었습니다." 카리스의 목소리는 언젠가처럼, 다시 부드러워져 있었다. 듣는 이를 나른 하게 하는, 포근하게 하는, 그 목소리. 나는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 다. 익숙하기 그지없는 이 목소리. 누군가가 기억하고 있는 듯한 이 목소리.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안돼! 정신차려라, 칼레들린! 내가 마구 고개를 휘젓고 있을 때도, 카리스의 말은 계속되었다. "굉장히 괴팍하고 성질이 더럽지만 실력하나는 괜찮았던 청발의 마족 하나. 겉과 속을 전혀 파악할 수는 없지만 역시 실력하나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았던, 마계에선 사이코라고 불리던 은발의 마족. 마지막으로 마계의 전통을 이어 마왕이 될 수도 있었던, 역시 은발이었던 마족 하나. 그 세 명이 친구였습니다. 아주 절친한, 친구였죠. 마족 주제에 무슨 친구 며 우정이냐고 떠든다면 할 말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분명, 친구였습 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나는 경계를 풀지 않은 상태에서 카리스의 눈을 보려고 애썼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읽었다. 카리스의 눈에 담긴, 절절한 무엇인가를. "세 명 다 특이하기 그지없는 성격이며 실력이며 혈통을 안고 있었지만, 가장 특이했던 건, 마지막으로 말했던 그 두 번째 은발의 마족이었죠." 듣고 싶지 않아.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냐? 난 널 죽이려고 왔을 뿐 이야. 그리고 아이에드를 만나서 대체 왜 카레나를 가진 이를 죽이려고 했 는지 물어보려 하는 것뿐이다. 너의 이야기 따위 듣고 싶은 마음 없어. "아십니까? '디신테 그레이션'을." 순간, 나는 몸이 쭈뼛 서는 느낌에 잠시 놀랐다. 안다. 물론 안다. 로시엔과 레이디안. 그들이지 않는가. 케시안의 디신테 그레이션. 카리스가 쿡, 하고 웃었다. "당신도 알고 있을 겁니다. 로시엔님과 레이디안님이 '케시안의 디신테 그 레이션' 이라는 것을. 그 둘은 마계 역사상 '기록된' 유일무이한 '디신테 그레이션' 이었지요." 카리스는 다음 순간, 입 꼬리를 살짝 틀어 올리며 굉장히 냉소끼 어린 얼 굴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마계에는 그 한 번의 디신테 그레이션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역사 안으로 묻혀 버린, 하나의 디신테 그레이션이 더 있었지요." 뭐야? 로시엔과 레이디안 말고도 또 디신테 그레이션이 있었다고? "몇몇을 제외하곤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만 분명한 사실입니다. 역사에는 기록될 수 없는, 그러한 진실." 두 번의… 디신테 그레이션? 분명 한 번은 로시엔과 레이디안이겠지. 그럼 다른 것은? "현 마왕(魔王) 아키엔." 카리스가 작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카루의 성녀에 의해 소멸한 전 서열 12위의 마족 파스턴." 아? "그 둘이, 한 마족의 디신테 그레이션이었습니다." 머엉.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얼토당토않은 그의 이야기에 나는 잠시 넋이 빠져 버렸다. 잠시 패닉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한참만에야 거기에서 나온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버럭 고함을 쳐버렸다. "뭐야!? 말도 안 돼!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내가 눈을 부릅뜨고 카리스를 바라보는데, 카리스는 표정변화 하나 없이 말을 잇는다. "전대 마왕이었던 하리체인의 디신테 그레이션이었죠."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모른다. 나는 그저 멍하게 카리스가 하는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뭐, 뭐냐, 뭐냐고! "그리고, 제가 아까 말했던 친한 세 명의 마족 중 하나인 '두 번째 은발의 마족'이……." 카리스는 말을 늘였다. "바로 그, 파스턴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카리스가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내 쪽을 보았다. "하지만 '파스턴' 은 공적인 이름이었고, 저를 비롯한 그의 친우들은……. 아니, 거의 모든 이들은 그를 애칭으로 불렀죠. 파스턴― 파괴의 군주라는 이름은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가 않았거든요. 다들 그를 이렇게 불렀죠."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피에트' 라고." 아? 아? 아아아? "무… 슨?" 이 마족이 지금 무슨 말도 안돼는 소리를 하는 것인가! 나의 아버지가… 전대 마왕의 디신테 그레이션이자 성녀에 의해 죽었다는 그란 말인가! 아니 야!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그리고." 카리스가 피식, 하고 웃었다. "당신도, 아시고 계시겠지요? 당신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제가 친절하게 가르쳐 드리지 않았습니까." 입술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고 있던 카리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녀 이루엔." "……." "성녀 이루엔의 원 이름은 엔카. 그녀는 사실 이카루의 성녀가 아니라, 엘프들의 숲인 에디 에이렌에서 나고 자란 여자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둘의 아이." "무슨, 헛소, 리야?" 분명, 성녀 이루엔은 파스턴을 죽였어! 인간계의 역사에서도, 마계의 역사에서도. 사악하기 그지없는 마왕을 죽인 이카루의 성녀, 이루엔. 이건 말도 안돼. 말도 안돼! 말도 안된 다고! "그리고 눈치를 챘겠지만, 파스턴과 친했던 두 명의 친우인 청발의 마족과 은발의 마족은 각각 저와 아이에드입니다." 나는 부들거리는 입술의 떨림을 막기 위해 한참을 애썼지만 무리였다. "거, 거짓말이지? 그럴 리가 없잖아. 나, 나의 어머니가 성녀라고 치더라도……. 그렇더라도……." 내 말에 카리스가 훗, 하고 웃었다. "성녀라, 그런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군요. 그 둘은 서로가 서로를 모르 는 사이에 사랑했습니다. 결국 엔카는 당신을 임신했고―. 인간계의 이야기 는 조금 잘못 알려진 것이 많지요. 인간계에 음유시인의 이야기 중에선 '나 이라' 라는 이가 쓴 노래들이 아마 진실에 가장 가까울 겁니다." 모르겠다. 머,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아. 내가 알고 있는 성녀의 전설은 간단하다. 서열 12위의 마족이었던 파스턴을 이카루의 성녀 이루엔이 베어버린 것. 그리고, 파스턴이 마계에서는 인간여자에게 죽임을 당한 바보라고 취급되었다는 것. 그런데… 그, 그 이루엔과 파스턴이 사랑을 했다고? 그래서, 그래서 나를낳았다고? "거, 거짓말." 내 말에 카리스가 씁쓸한 얼굴을 했다. "카인." "내 이름은 칼레들린이다." 내 단호한 말에 카리스가 훗, 하고 소리를 냈다. "알겠습니다. 그 이름이 마음에 든다시면 얼마든지 그 이름으로 불러들이 지요. 칼레들린님. 받아들이십시오. 제 말은 모두, 진실입니다." 알 수 없다. 진실로 받아들이라고 말해봤자, 이건 타인의 이야기로 간주되 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나는 그저 멍한 눈빛으로 카리스를 보았다. "……잘 들으십시오. 본래 당신을 마계로 데려오면서 아이에드는 마왕께 약속했습니다. 당신에게 절대로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당신을 평범한 마족 내지는… 인간으로 키우겠다고도 약속했죠. 그래서 당신에게 는 아무런 얘기도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겁니다." 나는 그저 멍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당신이 가진 카레나의 눈동자라는 것은." 카리스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신성력을 가진 성녀와, 마족인 피에트의 자식이라는 증거. 신의 힘과 마족의 힘이 한 몸에 깃들었다는, 증거입니다."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1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86 "……거짓말." 언제나 내 눈을 보며 경악했던 많은 인간들은 마법사였다. 내지는, 마법을 연구한 자라던가. 신의 힘과 마족의 힘이 한 몸에 깃들었다고? 카레나의 눈동자라는 것이 그런 것이었다고? 그런, 그런 것이었다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입술은 바짝바짝 말라가고, 힘이 쭉 빠진다. 텅 비어버린 머릿속만이 백지장처럼 하얀데, 속은 울렁거리고 가슴은 답답하다. 엉망진창으로 얽혀버린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서, 나는 순간적으로 토악질이 난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아파서, 속이 아파서, 부정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술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그저, 굳어 있다. "왜 이제… 왜 이제서야 그런걸 가르쳐주는 거지?"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지 그랬어? 모, 르는 게 나았어. 혼란스러워.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세상이, 변동을 일으킨다. 여태까지 진실인 줄 알았던 모든 것이 뒤엎어지고, 저 편에 숨어 있던 진실이 빼꼼 머리를 내민 순간 가슴속에 북받쳐 오른 것은 진실에 대한 엄청난 괴리감. 그리고, 고통. 혼돈. "문제가 발생했으니까요." 카리스가 다시 웃는다. "아시다시피, 마왕에게는 전통 후계자가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소멸의 날' 이 다가왔습니다." 소멸의 날? 그것은 마족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 육체의 자생능력이라던가 하는 것을 모두 떠나서, 마족이 죽는 그 날을 소멸의 날이라 부른다. "후계자가 없는 마왕. 다음 번 마왕은 누가 될 것인가?" 카리스는 여전히, 그 웃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멸의 날이 가까이 왔음을 눈치챈 마왕은 어느 날, 아이에드와 저, 키르, 그리고 로시엔을 마왕성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말했지요. 너희 넷 중 하나에게, 마왕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서열 1, 2, 3위인 저희 외 에 로시엔이 끼여 있었던 이유는 아시겠지요? 그가 전대 서열 1위였던 케시 안의 디신테 그레이션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로시엔이 정말로 마음을 먹 고 싸운다면 저보다 약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까요." 모르겠다. 혼잡하다. 이런 얘기 듣고 싶지 않아. 그만해. "일단, 아데키르아는 거절했습니다. '그런 걸 하면서 빨리 죽고 싶진 않거 든. 마왕이라는 건 순 자기 목숨 깎아먹는 짓거리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 죠. 저 역시 거절했습니다. 저는 원래 마계의 불문율인― 반마족 척살도 지 키지 않은데다가 옛날부터 불문율을 수도 없이 어겼기에 자격이 없다는 것 이 옳겠지요. 결국, 아이에드와 로시엔에게로 짐이 떠맡겨 졌습니다. 아이 에드도 거절했지요. 로시엔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카리스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럼 우리 넷이 아니라면 누가 할 것인가가 문제였지요. 마왕은 결국 우 리 넷을 마왕성에 가두어 놓고 넷이서 다음 번 마왕을 결정하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쿡, 하고 카리스가 웃었다. "그 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소름이 돋는다. 카리스의 웃는 얼굴에서― 갑자기 온 몸으로 소름이 돋는 다. "원래 마왕의 자리는 아키엔의 것이기도 했지만 파스턴, 아니, 피에트의 것이기도 했다. 아키엔에게 후계자가 없다면―마땅히 피에트의 후계자가 마 왕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말도 안돼. 말도 안돼! 정말 고함을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저는 저의 의견을 말했습니다. 아데키르아는 언제나 그렇듯이 아무래도 상관없다, 라고 심드렁하게 말하더군요. 그런데 뜻밖에도 아이에드가 격렬 하게 반대했죠. 마왕을 하면 당신이 불행해진다고 했던가? 그러나 결국 저 는 밀어붙였고 당신을 마왕으로 만들겠다고 의견의 합의를 보는 듯 했습니 다." "누구 마음대로! 미쳤냐!" 마왕은 무슨 놈의 얼어죽을! "그런데." 갑자기 카리스의 눈이 스산하게 변했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입술을 올렸다. "로시엔." 두근. 로시엔, 로시엔. 로시엔. "……아이에드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그 로시엔이 문제였습니다." 쿡, 하고 웃은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전혀 티는 내지 않는 사이에, 로시엔은 결심한 겁니다. 아이에드를 마왕 으로 만들겠다고." "그럼 그를 마왕으로 하면 되잖아?" 내 말에 단번에, 카리스의 눈빛이 변했다. "그럴 수는 없지요." "뭐?" "저는 그 때 이미 결심한 상태였으니까. 당신을 마왕으로 만들겠다고." "뭐야!?" 당황함에 버럭 고함을 치자, 카리스가 부드럽게 웃어 보인다. "당신의 아버지는 저와 아이에드에게 당신을 부탁했습니다. 로시엔이 무슨 생각을 하든, 저에겐 상관없습니다." "필요 없어! 나는 마왕 같은 건!" 내 큰 소리에 카리스가 웃었다. "문제는, 아이에드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니야, 싫어. 말도 안 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 "로시엔은 당신을 죽이려 할겁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냐!" 나는 버럭 고함을 쳤다. 그럴 리가 없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정말입니다. 당신이 살아 있는 한 저는 끝까지 당신을 마왕으로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 할 테고, 그건 로시엔에게 거슬리는 일일 테니까." "그럴 리 없어, 로시엔은……!" 로시엔은 그렇지 않아. 세상에서 가장 착한 로시엔. 나를 위해서 늘 울기만 했던 로시엔. "그래요?" 카리스가 웃었다. "그럼 확인해 보러 가지 않겠습니까?" 무…… 엇을? 무엇을? "과연 제 얘기가 진짜인지 거짓인지, 어디 한 번 확인하러 가봅시다." 그가 웃었다. "마왕성으로 말입니다."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1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87 "칼레들린!" 카리스가 자신의 공간에서 나를 놓아주자마자, 라이메데스와 세렌이 내 쪽 으로 뛰어들어왔다. 나는 기운이 쭉 빠진 듯한 느낌에 한참동안 부들부들 떨고 있다가 그들이 내 몸을 꾹 잡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뭐냐, 칼레들린? 무슨 일이야?" 라이메데스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고개 를 휘저어 그의 손길을 피한 다음 그들의 옆쪽에 나란히 서 있는 키르를 바 라보았다. 키르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곤란하다는 듯 눈빛을 피해버렸다. "나는, 너희의 진위를 모르겠어. 대체 내게서 뭘 바라는 거야? 카리스의 의도는 대체 뭐야?" 키르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묵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카리스가 원하는 건 하나다. 네가 마왕이 되는 것." "뭐야?" "뭐라고?" 키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라이메데스와 세렌이 놀란 듯 소리를 버럭 쳤다. "미쳤군." 나는 바로 쏘아 내뱉었다. 그러자 키르가 피식, 하고 웃는다. "확실히 그래. 인간 여자를 사랑한 피에트의 아들. 네가 마왕의 후계자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런 너를 마왕으로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지." 다행이군, 카리스와는 달리 그나마 이 녀석은 제정신인가보다. "하지만." 키르가 씨익 웃었다. "카리스에온은 엄청난 놈이다. 괜히 서열 1위겠어? 여태까지 그 놈이 결심 했던 것치고 안 된 일은 거의 없었어." 시끄럽군. "카리스가 뭐라고 했지?" "……마왕성으로 가보라고 했다. 다만, 자신은 같이 갈 수 없다고 했어." 내 말에 키르가 으흠, 하는 소리를 냈다. "그렇지. 원래 최후는 후계자들끼리 결정하는 거니까." 작게 중얼거린 키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저 눈만 멀뚱하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나도 같이 갈 수는 없다." 키르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게 말했다. 내가 작게 눈을 좁히자 키르가 웃 는다. "나는 같이 갈 수 없지만, 이 쪽에 있는 두 녀석 정도면 괜찮을 거야. 이 봐, 라이메데스." 키르는 그 말과 함께 라이메데스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라이메데스는 살 짝 인상을 찌푸리며 키르 쪽을 보았다. "이 녀석과 함께 마왕성으로 가보도록해. 거기에……." 키르는 내 쪽으로 돌아보며 묵직하게 말했다. "로시엔과 아이에드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 ◇ ◇ 여기가 마왕성. 나는 라이메데스가 워프해 온 곳에 있는 마왕성을 훑어보며 잠시 몸을 떨 었다. 엄청난 높이. 지상과 지하를 다 합치면 무려 266층이나 된다. 내가 가자, 라고 말하자 라이메데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렌은 마왕성의 엄청난 위용에 놀란 듯 입을 뻐끔거리며 연신 마리에나여, 마리에나여,를 중얼거렸다. 잘 들어보니 마리에나여. 심장 떨어져서 죽는 것만은 싫어요, 라고 중얼거리고 있다. 자식, 하고 녀석의 머리카락을 마구 부벼주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쪽을 보더니 피식 웃어보인다. "너, 후회 안해?" 나는 세렌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신관 주제에 나를 따라 마계까지 온 이 녀석을 보며 내가 그렇게 던진 말에, 세렌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죽어도 후회 안합니다." 왠지,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럼 들어가자." 음침하다, 기분 나쁠 만큼. 원래 마왕성에는 서열 100위 이내의 고위마족 들이 사는 공간이라 북적거릴 만도 한데, 마왕성은 조용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여기저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왕성 안은 바깥의 그 음산 한 분위기와는 달리 꽤나 아늑했다. 그리 나쁘지만은 않군. "꽤나 잘 지은 건물이네요." 세렌이 오오, 하고 감탄을 하자 라이메데스가 매우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하지!" 그,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하다니. 네가 지었냐? "누구 없나?" 나는 사방을 둘러보며 그렇게 외쳤다. 그러나 고요한 침묵일 뿐,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나는 입술을 꾹 물고 한 발자국씩 척척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아무것도 돌아오는 소리는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돌아다녔을 까. "어?" 뭔가 조금 이상한 것이 발끝에서 느껴졌다. 이 음침한, 이 음습함. 불길한 예감에 얼른 한 발자국을 물러서려는 찰나, 갑자기 밑이 푹 하고 가라앉아 버렸다. "으아아악!" 이런 빌어먹을! 늦었다! 떨어진다! "칼레들린!" "칼레들린님―!!" 녀석들의 소리가 커다랗게 울려온다. 몸이, 추락한다. 여, 여기가 어디냐? 다행히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가벼워진 몸으로 사뿐히 착지를 하곤 사 방을 둘러보았다. 아까 그 기운으로 미루어 볼 땐,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나 를 이 곳으로 떨어뜨린 것 같은데. 젠장할, 왜 하필이면 그런 곳에 빠지는 건 항상 나냔 말이다! 한참동안 뭔가 있나 싶어 사방을 훑던 나는 어느 순간 무엇인가를 발견하 고 딱하고 굳어버렸다. 혹시 내가 잘못 봤나 싶어서 눈을 부벼보기 시작했 다. 하지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눈을 부비고 부비고 부벼서 살펴봐도 틀림 없었다. "로시엔……?"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1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88 "로시엔……?" 조그맣게 이름을 불렀다. 떨리는 심장을 안고, 그렇게 조그맣게 불렀다. 그리웠던 얼굴. 언제나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곤 하던 그가 바로 저 앞에 있었다. 나를 키워주고, 사랑해준 최초의 존재. 언제나 나를 따뜻하게 감싸 준 것이 바로 그가 아니던가. 오랜만에, 정말로 오랜만에 만나는 로시엔의 존재감에 나는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나는 천천히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로시엔 쪽으로 다가갔다. 로시엔은 그 냥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로시엔의 푸른색 머리카락에 가려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조금 안타까웠다. 나는 로시엔의 바로 앞까지 걸어 간 다음, 손을 뻗어 로시엔의 품에 안겼다. "로시엔." "칼레들린님…." 언제나와 다를 것 없는 차분한 음성. 그리고 몸을 감아오는 따뜻한 팔. 정 말로 눈물이 날 것 같은 이 따뜻함은, 내게 집으로 돌아왔다, 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여기가 정말로 내 집이 아닌 마왕성이라 해도, 로시엔이 있는 곳이라면 바로 나의 집이다. 로시엔은 나의 고향이고 언제나 내가 돌 아가야 할 최초의 출발선이니까. "로시엔, 나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 로시엔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내 몸을 안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나는 더 더욱 로시엔의 가슴에 얼굴을 깊이 묻었다. 평소대로라면 로시엔이 엉겨붙 어도 크아, 떨어져! 같은 소리나 해댔겠지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시간 이 나를 변화시키기라도 했나보다. 언제나 돌아오고 싶었던 이 곳에서, 로 시엔의 품에 안겨 있는 지금 내가 얼마나 안심하고 있는지, 스스로가 바보 같을 정도로 얼마나 안심하고 있는지. "나, 많은 일을 겪었어." "……그러셨습니까." 부드러운 울림을 가진 로시엔의 목소리가 따뜻하게 귓가를 감싼다. 여전히 나를 꼭 안고 있는 그의 팔이 좋아서 나는 종알종알 말을 떠들어대기 시작 했다. "나, 친구란 걸 사귀었었어. 죽… 어 버리긴 했지만… 정말로, 소중한 녀 석이었어." 로시엔의 팔힘이 조금 더 강해졌다. 나를 위로하려고 하는 것인지, 녀석의 팔이 나를 더 꼬옥 안아준다. "……즐거우, 셨습니까?" 즐거웠냐고?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카민을 만났어. 에세렌도 만났고, 여러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 잃은 것도 있었고 아픈 것도 있었고 미칠 만큼 고통 스러웠던 것도 있었어. 그렇지만, 그렇지만 괜찮아. 그래도 그 시간 하나 하나가 내게는 소중했으니까. "……아마, 그랬던 것 같아." 내 말에 로시엔이 부드럽게 입술을 열었다. "제가 보고 싶지는 않았나요?" 물론, 보고 싶었어. "흥, 당연히 안 보고 싶었어." 나는 메롱, 하고 혀를 내밀다 쏙 집어넣으며 그렇게 말했다. 로시엔이 피 식, 하고 웃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턱을 내 어깨 쪽에 밀착시키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제 아이입니다." "응." "제가 키우고, 제가 사랑해준, 저의, 아이입니다." 로시엔? "알아, 로시엔." 나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잔뜩 가라앉은 로시엔의 목소리는 평소 와는 너무 달라서, 나는 조금 놀랐다. 나는 로시엔의 몸을 내게서 떼어내어 그의 표정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그의 고개를 들어보려고 한 순간, 그가 내 움직임을 조용히 저지했다. "당신이…… 오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아? 나는 갑작스럽게 귀를 두드린, 좀 전과는 전혀 다른 로시엔의 말에 당황했 다. 몸이 순간적으로 흠칫하고 굳어버렸다. 나는 얼른 로시엔에게서 떨어졌 다. 그는 이번에는 나를 잡지 않았다. 나는, 로시엔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 고, 그 순간 놀라서 그 자리에 그대로 떡 하고 굳어버렸다. 얼굴. 얼굴. 무 표정한 얼굴이었다. 내게는 몇 번 보여준 적이 없는, 아니, 정확히는 나를 향해서는 단 한 번도 지어본 적이 없는 무표정한 얼굴. 그의 그 무표정한 얼굴에 온 몸으로 소름이 쫙 하고 돋아났다. "로, 로시엔? 왜, 그러는 거야?" 입술이 살짝 떨림을 느끼며 내가 던진 질문에, 로시엔이 천천히 고개를 숙 였다. 방금 전 나를 포근하게 안아줬던 손이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와 박힌 다. 살짝 경련을 일으키는 그의 몸을 보면서 나는, 나는, 뭔가를 느껴버렸 다. 뭔가, 뭔가 이상해. 이럴 리가 없는데. 로시엔, 고개를 들어봐. 고개를 들어봐. 로시엔. 나는 손을 뻗어 로시엔의 어깨에 갖다댔다. 하지만 로시엔은 내 팔을 잡아 몸을 일으키거나 하지 않는다. 온 몸을 엄습하는 불안감에 떨며, 나는 다 시 한 번 그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렀다. 로시엔, 이라고.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내 호명에 답하지 않았다. "왜… 돌아오신 겁니까." 로, 로시엔? 흐느끼는 듯한 그의 말에, 나는 정말로, 정말로 당황했다. 무슨 뜻이야, 로시엔. 네가 보고 싶었어. 인간계는 멋진 곳이었고, 나에게 많은 것을 주 고 또 빼앗아 가버렸지만, 그래서 어떤 곳보다 아름답다고 말할만한 곳이었 지만, 그래도 마계가 그리웠어. 그건 네가 있었기 때문이야. 로시엔. 왜 돌 아왔냐니? 네 입으로 말했잖아. 나는 너의 아이라고. 그러니 내가 너를 보 고 싶어하는 건 당연하잖아. 아이는 부모의 곁으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하잖 아. 로시엔, 고개를 들어. 나를 봐. 내 눈을 보고 말해. 나 무서워. 응? 어 서 고개를 들어봐, 로시엔. 카리스의 말 같은 건 맞을 리가 없잖아. "……당신이 각성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인간계에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 러면 그 누구도 다칠 일없이, 조용히… 끝날 수 있었을 테니. 그리고 모든 일이 진정되면 한 번씩… 당신을 보러 갈 생각이었습니다." 로시엔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로시엔, 나는 모르겠어. 지금 네가 무 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어. 언제나 내게 마족으로서 강해져야 한 다고 말한 건 너였잖아. 안 그래? 대답해봐, 로시엔. "당신이 오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보고 싶었지만, 그래도 당신이 오지 않 기를 바랬습니다. 제가 데스 편으로 당신에게 드렸던 은빛의 피어스는… 사 실, 당신의 각성을 막고 있던 자그마한 기구였습니다." 은빛의 피어스? 확실히, 이상하다고 잠깐 생각하긴 했었다. 각성의 순간에, 귓가가 심할 정도 뜨거워지면서 귀 언저리에서 팍, 하는 소리가 났었지. 은빛의 피어스가 산산조각이 되어 주변으로 깨어지는 순간 난 그 소리. 각성과 함께 조각이 되어버렸던 그 피어스. "어, 어째서, 로시엔? 모르겠어,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나는 한참을 더듬거렸다. 아, 모, 모르겠어 로 시엔. 그냥 막연한 불안감에 눈물이 날 것 같아. 그런 목소리 내지마. 얼굴 을 보지 않아도, 네가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보지 않아도 나는 지금의 네 표 정을 알 것 같단 말이야. 로시엔, 나 정말 무서워지려고 해. 내 얼굴을 보 고, 내 눈을 보고 또렷하게 한 자 한 자 끊어가며 정확하게 말해줘.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말해줘. "저에게는, 아이에드님이… 전부였습니다." 어느 순간 로시엔이 불쑥 그렇게 말을 꺼냈다. 아이에드. 전혀 생각나지 않는 이름이지만, 그가 로시엔이 소멸의 그 날까지 함께 하기로 맹세한 유 일한 상대라는 것은 라이메데스에게 들은 적이 있다. "당신이 나타나기 전까지, 저의 모든 것은 아이에드님의 것이었습니다. 저 의 목숨은 오로지 주군을 위해서만 존재했습니다. 제가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이에드님 때문이었으니까. 제가 존재로 살아갈 수 있었던 건, 그 분 덕택이었으니까요." 나는 로시엔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로 시엔이 숨조차 쉬지 않고 말을 잇는다. "…그런데 어느 날, 당신이 나타났고, 당신이 제 내부에 있던 아이에드님 의 존재처럼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당신 역시, 저에게는 삶의 의 미가 되어버렸습니다. 너무나 소중한, 너무나 소중한, 삶의 의미가." 로시엔의 어깨가 조금 흔들린다. "하지만 칼레들린님. 저에게……. 저에게는 역시… 당신보다… 그 분이…… 더…… 중요합니다." 더듬더듬, 힘겹게 로시엔이 그렇게 말을 뱉어냈다. 나는 가슴이 찢기는 듯 한 느낌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내가 마왕의 후보래, 로시엔. 아, 아이에드와 더불어 내가 마왕의 후 보래. 설마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로시엔은 말을 하지 않고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 "걱정마, 로시엔. 나 이대로 다시 인간계로 내려갈게. 그리고 다시는 마계 에 오지 않을게. 너를 봤으니까 이제 다시 내려갈게." "……이미, 늦었습니다." 묵직한 목소리로 로시엔이 그렇게 말한 순간,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조각났 다. 두근두근두근, 하고 무섭게 뛰고 있는 심장의 움직임이 폭발할 것만 같 았다. 무서워, 무서워서 나는 한참동안 말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굳어 있었다. "마왕의 후보로 오른 자들은……. 마왕이 되는 한 명만 제외하고는 모두…… 죽어야 합니다. 그를 따르던, 자들과 더불어서." 그, 건, 나도 알고 있어. "……저는, 아이에드님을 죽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로시엔이 말한 순간. 나는 깨달아버렸다. 로시엔이 하고 있는 지금의 말들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로시엔. 로시엔. 마음속으로 수십 번 로시엔을 불렀을 때,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알아버렸다. 알 아, 로시엔. 알고 있어.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미안하다는 얼굴은 하지 않 아도 돼. 괜찮아. 괜찮다구. 내가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거야? 내가, 내가 어 떻게 해주면 되겠어? "아이에드와 나,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하는 거지?" 내 질문에 로시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하는 것만으로도 의사는 충분히 전달된다. "너는, 아이에드가 더 소중한 거고." 로시엔은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저의, 존재 이유이신 분이니까." 그래, 로시엔. "……그렇구나." 나는 한발자국씩 로시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시엔은 점점 더 가 까워지는 내 발걸음 소리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시 선은 똑바로 나를 향한 채인 로시엔. 나는 그를 향해, 조용한 목소리로 차 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좋을 대로 해."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1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89 "……칼레들린님." 조용한 목소리로 나를 한 번 부른 로시엔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너무나 절박한 움직임이다. 알 수 있다. 전혀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듯한 손을 내 쪽으로 뻗고 있지만, 지금 그가 수십 수백 수만 가지 감정이 얽혀서 차마 얼굴로 그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로시엔은 내 바 로 앞까지 한 발자국을 움직여 다가왔다. 나는 그저 가만히, 내 쪽으로 다 가오는 로시엔을 보고만 있었다. 로시엔. 언제나 어린 시절부터 너는 거 자리에 있어주었지. 로시엔. 네 손 에 죽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괜찮아. 나는, 괜찮아. 어린 시절의 나는 너를 보며 자라났다. 어린 시절의 나는 너 없으면 안되 었다. 너는 나에게 사랑을 주었고, 이제는 그 몫을 네가 받아도 괜찮다. 나 에게서 내 목숨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해준다면, 그래. 그래도 괜찮아. 로시엔의 손에서 부욱, 하고 커다란 소리가 났다. 그의 오른손에 잔뜩 몰 려든 마력은 곧 형체를 잡았다. 장창(長槍). 저기에 찔려 죽는 건가. 고통 없이 한 번에 죽을 수 있을 지도 몰라. 나는 문득, 세렌을 떠올렸다. 왜 갑 자기 세렌이 생각났는지는 모르지만 갑작스럽게 문득, 그의 얼굴이 떠올랐 다. 아, 이상하군. 왜 그녀석이 생각나는 거지? 에라이, 알게 뭐냐. 지금 그런 건. 나는 내 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로시엔 쪽으로 시선을 올렸다. 로시엔은 입 술을 꾹 문 채로,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만두십시오! 어? 갑자기 뒤쪽에서 들려온 큰 소리에, 나는 움찔했다. 로시엔은 놀란 기색 없이 그대로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 서 있는 것은… 라이메데스였다. "찾아오셨군요." 피식 한숨을 내쉬며 로시엔이 말하자, 라이메데스가 뒤쪽에서 달려왔다. 그는 내 앞을 정확하게 가로막으며 서서는 로시엔 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짓을 하시려는 겁니까, 로시엔님." 라이메데스의 목소리는 격양되어 있었다. 로시엔에게는 무한한 존경을 표 하는 녀석이었을텐데. 라이메데스의 말에, 로시엔이 차분하게 말했다. "보시다시피, 칼레들린님을 소멸시키려 하던 중이었습니다." "로시엔님!" 라이메데스가 버럭 고함을 쳤다. 곧, 놀랍게도 그의 오른손에 피어오른 마 기가 기다란 검을 한 자루 생성해냈다. 어, 어째서냐 라이메데스? 너, 너 혹시 로시엔과 싸울 생각인거냐? 로시엔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라이메데스. 감정적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라이메데스는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감정적으로 나간 적 없습니다." 라이메데스의 눈 꼬리가 가볍게 올려졌다. 그런 라이메데스를 뚫어져라 바 라보며 로시엔이 입을 연다. "저라고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 말과 함께 로시엔이 눈을 번쩍 치켜올렸다. "칼레들린님은 제 아이입니다! 저, 저 분을 제가…… 어떤 마음으로 이렇 게 보고 있는 것인지는…… 아십니까?" "상관없습니다. 어찌됐든, 로시엔님은 지금 칼레들린을 죽이려고 하잖습니 까!" 잔뜩 높아진 라이메데스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이건 분노? 나는 라이메데 스의 몸에서 쁨어져 나오는 엄청난 기운에 놀라 흠칫했다. "주군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도 바칠 수 있습니다. 제 분신조차… 그 분… 을 위해서라면, 없앨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마족입니다." 단호한 로시엔의 목소리. 그는 라이메데스 뒤쪽에서 어설프게 서 있는 내 쪽을 보며 슬픈 듯한 눈을 해 보였다. "칼레들린님이 소중하지만, 저에게는…… 더욱 소중한, 주군입니다." 아이에드. 로시엔이 나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는 존재. 하지만, 나는 모르겠어. 생각 이 안 난다. 알고 싶지도 않아. 대체 왜 이런 상황이 온 거냐? 라는 질문조 차 지금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왜 하필 로시엔일까. 로시엔이 왜, 나를 죽 여야 하는 거야. 나는 좋아. 나를 길러준 로시엔이 나를 없앤다는 것이 그 리 싫지는 않다. 하지만 나를 죽이고 난 다음에 로시엔은 얼마나 힘들어할 까, 그것이 싫어. 내가 마계로 돌아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상황은 오지 않았 을 거다. "비키십시오, 데스. 아이에드님을 위한… 길입니다. 저의 주군이지만, 당 신의 주군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뱉어낸 로시엔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왔을 때였다. "……저의 주군은 확실히, 아이에드님입니다." 라이메데스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뜻밖의 광경 에 놀라 눈을 부릅떴다.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라이메데스가, 로시엔이라면 뒤로 넘어가는 저 라이메데스가, 로시엔에게 마력으로 생성된 검을 똑바로 겨눈 채로 말을 하 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슬프게 이지러졌다. "저에게는, 지금, 주군보다… 칼레들린이 더, 소중합니다." 라이메데스! 미, 미쳤구나. 주군보다 내가 더 소중하다니! "……그렇습니까." 로시엔, 로시엔. 그런 얼굴 하지마. 그건 네가 아냐. 그 얼굴은… 네가 아냐. "그렇다면, 당신과도… 싸워야 하는 겁니까." 차가운 목소리이지만, 너무나 슬프다. 가라앉다 못해 침전하고 있는 저 목 소리. "……제가 상대가 못된다는 건 알지만." 라이메데스의 조용한 대꾸. "전혀 상대가 못된다는 건 알지만……. 저는, 싸워야 합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라이메데스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의 재빠른 움직임에 의해 뒤로 날려온 로브 자락이 내 뺨을 한 번 스쳤다. 나는 어떤 행위도 할 수 없이 그저 그 자리에 멍하게 서 있었다. 안돼, 싸우지 마라 라이메데스. 로시엔이 얼마나 강한지는 너도 알잖아? 어차피 너 같은 건 상대도 안돼. 라이메데스, 하지마. 하지마. 어차피 안된다구! 너는 이길 수 없잖아! 하지만 내 마음속의 외침을 무시하며 라이메데스는 격렬한 움직임으로 로 시엔의 앞에 뛰어들어가, 자신의 오른손에 들린 검을 휘두르며 무지막지하 게 싸우기 시작했다. 로시엔의 얼굴은 시종 차가웠다. 입이 멍하게 벌어진 다. 이 믿고 싶지 않은 광경 앞에. 라이메데스의 찢어진 흰 로브는, 격렬한 움직임에 의해 몇 번 휘날리다 갈 기갈기 찢겨졌다. 로시엔의 푸른 눈동자는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채 차 갑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내 눈으로 다 볼 수가 없었다. 나 는 각성했는데, 그래도 그 둘의 움직임은 마족의 시선으로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그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그들의 기운 중에서, 라이메 데스가 한참 밀리고 있다는 것 정도만 겨우겨우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무립니다, 데스." 시간이 정지했다. 둘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짧게 말한 로시엔이 멈춰서는 것이 보이고, 천천히 돌아서는 그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로시엔, 아아, 로시엔. 언제나 내게 웃어주던 너의 얼굴에는 이제 차가운 기운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저 멀리에 있는 라이메 데스를 볼 수가 있었다. 엉망진창이 되어 널부러져 있는 녀석의 모습을. 라 이메데스, 그 녀석의 금발은 온통 피에 젖어 있었다. 새빨갛게 물든 그 것 은 지나칠 만큼 자극적인 빛깔이라 나는 숨조차 멈추고 한참동안 녀석의 그 금발을 바라보았다. "죽이지, 않았지? 응?" 압도적인 실력차이가 나는 상대니, 죽이지 않고도 쓰러뜨릴 수 있었을 거 다. 로시엔에게 있어서도 라이메데스는 싸우고 싶지 않았던 존재이니, 죽였 을 리는 없을 거야. "물론입니다." 슬픈 목소리. 그래, 로시엔. 네 마음 알아. 한참 나는 라이메데스를 바라보았다. 이 바보 멍청이 놈아. 어차피 되지도 않을 건데 뭐하려고 덤벼서 그렇게 엉망진창이 되는 거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블러드 아미다.' 같은 말을 자랑스럽게 하면서 열심히 자랑 을 늘어놓는 쪽이 훨씬 더 너다워. 내가 네 주군보다 소중해? 내참, 웃기지 도 않네. 그런 모습, 너에게는 안 어울린다. 로시엔은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쓰러져 있는 라이메 데스를 뒤로 한 채 그의 푸른 눈동자가, 그의 푸른 머리카락이, 그의 차갑 게 굳어진 인상이 다가온다. 그의 차갑게만 보이는 모든 것이 냉정한 칼날 이 되어 내 심장을 후벼파고 있었다. 아프게, 아주 많이 아프게. "칼레들린님." "왜?" "생각나십니까? 당신과 제가 함께 했던 많은 시간을." 물론이다, 로시엔. "……어린 당신과 있어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래요, 이런 시간이 올 거 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카레나의 눈을 가진 당신이라고는 해도, 그런 것은 신경 쓰지도 못할 만큼, 그렇게나 당신을 아꼈습니다." 로시엔. "난 괜찮아." "당신… 은, 제… 아입니다." "로시엔, 난 괜찮아." "……당신은, 저의……." "괜찮으니까." 나는 로시엔을 바라보며 묵직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울지마." 울지마, 로시엔. 네가 우니까 내가 더 아프다. 내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다. 로시엔의 얼음 같은 눈동자에서 흐르고 있는 것은 눈물이었다. 냉정하게 쳐든 창끝은 날카롭게 내 심장 언저리를 향하고 있었다. 표정 없 는 얼굴은 차갑기 그지없었지만, 그 얼굴의, 그 눈 위의, 그 한 줄기. 알 수 있다. 지금 그의 모든 감정을 담고 있는 그 한 줄기. 미칠 것 같은 감정 의 파동을 모조리 감싸안은 그것은, 눈물이다. 그 차갑게 굳어진 얼굴 위로 조그맣게 흐르는. ……눈물. "괜찮아. 어서, 베어." 뚜둑. 뚝, 뚝, 뚝. 차라리 소리 내어 운다면, 이렇게까지 심장이 메어지도록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 날부터 언제나 내 손을 잡아 준 건 너였어. 어린 날부터 맞고 상처받아 돌아오면 그런 나를 안아준 건 너였어.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기억하고 있어, 로시엔. 나는 다 기억하고 있어. 이 모든 감정을 다 안고 죽을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안녕히, 칼레들린님." 기이이이이익! 창이 움직이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그래, 안녕. 안녕히, 로시엔. 이것으로 모든 것은 끝나는 거야. 안녕, 로시엔. 부디 많이 힘들어하지는 마. 안녕히…….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1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90 안녕히…….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온 몸이 따뜻하게 덥혀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 쁘지 않다. 그래, 나쁘지 않아. 괜찮아. "……." 한참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왜, 아프지가 않지? 뭔가 이상한 느낌에,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뭔가, 싶어서 입술이 멍하게 벌어졌다. 말도 안돼, 라고 속에서 커다란 외침에 새어나온다고 생 각했다. 놀란 것은 로시엔도 마찬가지인 듯, 녀석의 눈 역시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로시엔의 창날이 완전히 관통해버린 것은. "어째서!!!" 피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왜, 왜, 왜! "아, 이런. 저, 정통으로 맞아 버렸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무덤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쿨럭,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핏줄기 . "……급한 마음에 뛰어들었는데, 이런." 실수했네, 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조금의 장난기마저 머금고 있 었지만, 지금 이 상태는 장난을 칠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몸을 관통하고 있는 날카로운 창. 그 창을 따라 흐르는 것은 소름끼치는 피. "바보야? 너 정말 바보야?"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아니야, 이럴 리가 없 어.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예, 바보예요. 저는 원래 바보인걸요." 자조 섞인 목소리, 이런 건 너답지 않아. 그의 몸이 휘청, 하고 흔들렸다. "세, 세렌. 세렌? 세렌!"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미쳤어?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다들 돌아 버린 거야? 카민도 그랬고, 너도 그래! 왜 그러는 거야 도대체? 이렇게, 이렇게 대신 맞으면 내가 기뻐할 것 같아? 내가 좋아할 것 같아? 눈 떠 이 자식아! 눈 떠! "칼레들린님……." 자그맣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 언저리가 무너져 내린다. "세렌, 죽지마. 죽지 마라. 죽으면 안돼. 죽어도 죽으면 안돼! 이 자식아! 누가 이따위 짓을 하라고 했어? 미쳤어? 미쳤어? 돌았냐고!" 내 고함소리에 세렌이 후, 하고 웃었다. "……괜찮아요." "비, 빌어먹을. 빌어먹을……." 피가 나는데도.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는데도. 나는 어떻게 해줄 수가 없었 다. 눈물이 났다. 이 무기력한 내가, 이 무기력한 내가. 세렌, 정신차려봐. 정신차려봐. 제발, 제발! 그런 파리한 안색 하지마. 죽지마, 죽지마! 죽지 말라고! 나는 울컥울컥 솟아나는 눈물을 참지 못해서 녀석의 얼굴에 차가 운 눈물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세렌의 손목 언저리에서. 그의 가느다란 손목을 감고 있는, 익숙한 빛깔. 그것을 보고 나는 잠시 놀라 입을 벌려 버렸다. 그의 손목에 감긴 것은 검은색의 얇은 줄. 너무나 익숙한 빛깔의 그것은 분명……. 내, 머리카락이었다. "이네아 족은…… 사랑을 찾았을 때만…… 변화해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세렌이 그렇게 말했다.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떨린다. 이건 거짓말이다. 라고 누군가가 말하고 있다. 그래, 맞아. 이건 거짓말 이야. 이건 정말로 거짓말이야.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었어요. 그러니까 목숨 정도는, 상관 없어요." 웃는 세렌의 입술을 타고 흐르는 것은 피. 붉은 피가 세렌의 입가를 타고 흘렀다.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없다고! 이건 거짓말이다. 나 는 알고 있어. "세렌, 죽지마." 멍하게 중얼거렸다. 나 아직까지 말한 적도 없는데. "……이렇게 모자란 저지만. 저……." 웃었다. 세렌이 웃었다. "먹을 것만 밝히고…… 바보…… 같은 저지만……." 부드러운 미소.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어요." 세계가 무너졌다. 무엇인가가 조각났다. 알 수 없는 감정은 강해져가고 미칠 듯한 파동만이 잠식하는 목이 매캐하 다.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뭐냐, 이 알 수 없는 감정은. 나는 자그 맣게 중얼거리며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아 버렸다. 내가 품에 안은 세렌도 같 이, 주저앉는다. 세렌은 작게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울지 않아도 되요." "흐……." "……알 수 있어요, 칼레들린님." 가볍게 웃으며 녀석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다음 세상에서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다음 세상? 그런 건 없어, 세렌. 나는, 나는 마족이야. 나에게 다음 세상 이란 건 없어. 소멸하면 끝이야. "당신은 나의, 나만의……." 말을 다 끝맺지 못한 그녀가, 쿨럭 하고 피를 토하며 웃었다. "…다시, 분명히 다시, 만날 수 있어요." "세…… 렌." 거짓말이라는 단어는 편한 것이다. 아무 곳에서나 쓸 수 있다면, 더 좋을 텐데. 싸늘하게 굳어진다. 손가락에 묻은 피만이 따뜻한데, 내가 대체 뭘 해야만 하는 걸까? 입술 언저리가 딱딱하게 굳은 채로 떨리고 있었다. 아니, 이건 아니야. 세 렌, 이건 아니야. "……." 뚜벅뚜벅,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로시엔……." 로시엔은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피범벅이 돼버린 세렌을 물 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세렌의 몸을 안았다. 차갑지만, 그래 도 세렌인걸. 이 녀석도 바보야. 바보 멍청이야. 왜 그런 거지? 어차피 나 는 죽을 건데, 죽음의 순간이 조금 더 늦춰 졌을 뿐인데. 그렇지? 로시엔, 대답 좀 해봐. 이 녀석 바보지? "세렌이. 카민처럼. 숨을 쉬지 않아." "……." "……왜, 다들, 죽는 거야?" 거짓말처럼 다들 죽어. 그럴 리가 없는데. 왜, 어째서? 다들, 죽는 거야? "……편하게, 가십시오." 천천히 창이 들어올려졌다. 나는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래, 이대로 눈을 감는다. 이제 창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하 며 입술을 물었다. 세렌, 미안해. 나 너한테 해주지 못한 말이 있었다. 아 마, 아마, 너와 내가 살아도, 그래도 해주지 못할 말이었겠지만. 이제야 알 겠다.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는지를. 높이 쳐들어지는 창을 느꼈다. 떨리고 있는 로시엔의 창을. 그런데, 그런데. 이번에도, 이상했다. 찔러야 하는데, 그대로 내려와서 나를 찔러야 하는데. 내려오지 않는다. 찌르지 않는다. "칼레들린." 내 눈을 뜨게 만든 것은 창의 날카로운 감촉이 아니라, 어떤 이의 묵직한 목소리였다. 들어본 적이 없는 생소한, 목소리. "칼레들린."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나는 뜬 눈을 가만히 좁혀 내 앞의 상대를 보았다. 은발이었다. 찰랑거리는 은발. 그리고 보라색의, 눈동자. 누구일까, 지금 눈앞의 이 녀석은? "아아." 하지만 누구인지는, 사실 중요하지가 않다. "주…… 군." 로시엔. 로시엔이……. "미안하다, 로시엔."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은발의 마족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로 시엔을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그런 로시엔의 뒤로 보인 것은… 커다랗게 뚫 린, 검은색의 구멍. "……주군." 약하게 중얼거리는 로시엔의 목소리가 들린다. 로시엔의 등뒤에 뚫린 검은 색의 구멍에서 나온 피는 길게 이어져, 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은발 마족의 손에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한참동안, 지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어 그저 입만 살짝 벌린 채로 가만히 있었다. "로시엔……."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이 남자는 누구냐? 왜? 왜 로시엔을? 입안에서 수많은 질문이 맴돌아 나간다. "칼레들린, 그런 얼굴 하지마. 로시엔은 죽……." "네놈이, 아이에드냐?" 불쑥 든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순간 녀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슨 말이냐, 칼레들린. 당연하잖아. 그 동안 내 얼굴도 잊어버린 거야?" 나는 천천히 손에 어둠을 모으기 시작했다. 순간, 깜짝 놀란 듯한 아이에드의 얼굴이 보였다. "네놈이……." 나는 아이에드 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네놈 때문에, 다 이렇게 된 거야." 아이에드. 다 너 때문이다. 너만 아니었다면, 로시엔이 내게 창을 겨누는 일 따위는 없었어. 세렌이 죽는 일도 없었어! 죽여버리겠어. 네가 없어지면 모든 것이 조용해지겠지. 지금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겠다. 아이에드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손에 모은 어둠을 들고 녀석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는데, 문득 녀석이 입 가에 작은 미소를 거는 것이 눈에 띄었다. 뭐냐, 그 얼굴은? 갑자기 온몸에 서 끓어오른 힘으로, 나는 검을 든 그대로 아이에드를 찔렀다. 푸―욱. 깊은 소리와 함께 검이 아이에드의 몸에 한 자 이상 들어갔다. 이상하군? 아무런 반항도 없다니. 하지만 뭐 어떠랴. 좋아, 들어갔다. 내가 이긴 거야. 나는 자신감에 차 미소를 지었다. 이제 된 거다. 나는 조금 더 세게 검을 밀어 넣었다. "……칼레들린." 검이 녀석의 몸을 완전히 관통하기 직전,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였다. "칼레들린." 너무 조그맣게 기어 나오는 목소리라서, 처음엔 목소리라는 것조차 몰랐다. 그런데 왜인가. 그 자그마한 목소리를 들은 순간에, 어디선가 파즉파즉 요란한 소리를 내 며 무엇인가가 비상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새가 날아오르는 소리였다. 푸드득푸드득 날개짓을 하며 새가 알을 깨려고 온갖 난동을 피우고 있었다. 잘 되지는 않지만, 새는 힘껏 날개를 휘저으며 날아보려고 애를 쓴다. 그 렇게 얼마나 날개를 휘저었던가. 마침내 새의 날개짓이 그를 얽매고 있던 알을 깬다. 챙 그 랑. 알은 유리로 만들어졌던가? 왜 새가 알을 깨자 들리는 소리는 이런 것인가. 챙그랑, 하고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소리. 알은 유리였던가? 알은 유리였어? "칼레들린." 부서진다. 기억을 얽매고 있던 사슬이 무너져 버린다. 안 돼. 안 돼. 부서지지마, 그 냥, 그냥 이대로! "……칼레들린." 부르지마. 으, 으, 으아아. 부르지마! 한 자나 들어간, 아니, 그 이상 들어간 검 끝에서, 피가 나온다. 뚜둑, 뚜 둑, 떨어지는 붉은 핏줄기가 검날을 미끄럼 타며 내린다. 붉디붉은 피. 천 천히, 시선을 올렸다. 은발. 보라색 눈동자. 언제나 나를 내려다보는 따뜻한 미소. 입가에 비스 듬하게 걸리곤 하던 작은 웃음. 사악하게 열려선 나를 곤란하게 하는 주문 만 뱉어낸 입. 가늘어지면 누구보다 예쁜 눈. 블러드 아미의 총수. 건방진 성격. 도도한 척 하기 좋아하는 녀석. 잘난 척 하는 것도 좋아하는 녀석. 가끔 이상한 장난을 즐기기도 하고. 누구에게나 사랑과 신의를 받고. 마족 답지 않은 마족. 블러디 데몬……. "아, 이에드……?"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1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91 "아, 이에드……?" 속박의 주문이 깨어진다. 입가에 한마디가 튀어나옴과 동시에, 모든 것이 풀려져 자유롭게 머리를 비행하기 시작했다. 왜 하필이면 지금일까? 왜, 왜? "아이에드…… 아, 아이에드……." 내가 지금 찌르고 있는 마족이 누구인지. 지금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이 은발의 마족이 누구인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알고 싶지 않은 이 진실을 거짓말처럼 깨닫는다. 왜 하필이면 지금 순간이야? 왜, 왜 지금! "아, 아, 아……. 우, 우아……." 「칼레들∼린」 「우리 아들……」 「그딴 자식들 다 죽여버릴 테니까 말만해.」 「너를 아들로 생각해.」 「울지마」 「크아! 또 말을 안 듣고!」 「크오오오! 내 꽃! 내 꽃을 이렇게 만들다니!」 「으아아아! 내 서재 돌려놔!」 수많은 목소리들이 귓가를 맴돌아나갔다. 거짓말처럼, 많은 기억들이 스쳐지나간다. 소리들이 귓가에서 부서져나간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아, 아이에드." 으, 우, 우, 우. 으, 으. 아. 아. 으, 으. 아. 아. 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니다. 난 꿈을 꿨던 거다. 모든 것이 다 꿈이었어. 나는 인간계 따위에 내려간 적도 없었고, 나는… 나는… 카민이나 에세렌을 만난 기억도 없어. 레이디안도, 가윈도, 나스도, 이레니아도, 루덴스도, 시이나도, 아크로아 도 몰라. 로, 시엔은 나를 배신한 적이 없어. 나를 찌르려고 한 적이 없어.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아이에드를 기억하고 있었어. 나를 나이게 만드는 가장 큰 존재. 나의… 아버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이… 에드. 몸 속에서 커다란 것이 폭발할 듯 치솟았다. 뜨거웠다. 몸이 끓고 있었다. 갑자기 아파 온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가라앉지 않고 계속해서 펄 펄 끓었다. 이건 거짓말이다. 아이에드가 이렇게 형편없이 당할 리가 없다. 아이에드는 누구보다 강하니까. 이제 다시 일어날 거다. 일어나서 이게 무 슨 짓이냐고, 이제 이런 장난 치지 말라고, 재미없다고 그렇게 말할거다. 아이에드는 강한 녀석이니까, 나같은 녀석의 공격에 쓰러질 만큼 약한 녀석 이 아니니까. 그래, 일어날거야. 일어날거야. 일어날거지? 샤륵. 무엇인가 소리가 났다. 흩어지는 소리였다. 내가 찌른 그의 몸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보인다. 은빛으로 흩어지는 작은 미립자가. 사라락 소리를 내며 하나하나 모든 것이 흩어진다. 다, 흩어진다. 「마족은 소멸 할 때, 마력덩어리만 남기고 흩어져 버리지. 나는 은발이니 까, 혹시 흩어질 때 은색으로 반짝이지 않을까?」 언젠가 장난스럽게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아, 안 돼. 안 돼,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미친 듯이 허우적거려서 흩어지고 있는 그를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되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 가, 가지마. 가지마! "으아아아아아!!" 가지마!!!!!!!!!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1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92 제 39장 바람 "바람은 정지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날고 있을 뿐. 그것의 비행은 그 누구 도 종잡을 수 없다. 시큼시큼한 냄새가 아릿하게 번지는 초저녁의 산딸기 밭에서, 새초롬하게 입을 다문 달빛이 채 여물지 않은 머루 밭에서 바람은 끝도 없이 비행한다. 어느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바람의 날개짓은 황홀 하리 만치 아릿한 것. 채 펼쳐지지 않은 하얀 날개가 겉껍질을 밖으로 내밀 고 속사포처럼 떨려온다. 멈추지 않는 그는 무한의 날개. 정지하지 않는 그 는 무한의 미소. 어디까지 계속되는가, 어디까지든 가지를 뻗치는 무한의 날개짓. 푸르디푸른 하늘만이 인간을 품는 단 하나의 속삭임이 된다. …… 멋진 구절이지 않나요?" 조용하게 말한 그녀가 화사하게 웃어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특히나 '무한의 날개' 라는 표현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 나는 멍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녀의 희디흰 손가락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존재는, 바람이에요." 그녀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존재는, 바람이에요." 한 번 더, 속삭인다. ◇ ◇ ◇ 미친 듯이 날뛰었다. 잘 생각은 나지 않지만. 그렇게까지 가슴이 아파 본 것은 처음이었다. 카 민이 죽었을 때도, 세렌이 내 대신 창을 맞았을 때도, 솔직히 말하면 이 정 도로 아프진 않았다. 나는, 나는 그렇게나, 그렇게나, 그렇게나. 죽을만큼 아팠다. 모든 존재가 하나하나의 세포로 분해되어 날뛰고 있었다. 찢길 듯 아픈 심 장이 터져 피라도 새어나온다면 차라리 나을 듯 했다. 나는 아프지 않았다. 나는 멀쩡했다. 그런데 죽기보다 아팠다. 머리에서는 모든 신경들이 자신 을 죽여달라고 외쳐댔다. 내 손이 해하는 것은 비단 주변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기도 했다. 펄떡대는 심장이 터질 만큼 욱씬 거렸다. 눈에서 흐르는 것이 눈물인지 비인지 이도 저도 아닌지, 그런 것도 몰랐다. 그저 너무나 슬퍼서, 온 몸을 감싸는 지독한 고통에 부르르 떨며 발악하듯 소리만 질러 댔다. 아팠다. 나는, 나는, 나라는 존재는 그 순간에 벌써. 죽. 어. 있. 었. 다. "으, 으우…… 으아아아아아!" 내게 있어 마지막 버팀목이었다. 나는 그저,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철 저하게 이행했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른다. 미쳐 있 었다는 것 밖에는. 터질 듯이 지끈지끈대는 머리가 아팠다. "우, 우, 우우우……." 울었다. 모든 것이 다 터져 나가도록, 그렇게 울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울었던가? 슬프게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울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신이 들었어?" 언제 정신을 잃었는지, 왜 잃었는지, 그런 건 모른다. 그저 어느 순간에 눈을 떴고, 그 때는 주변이 바뀌어 있었다. 귓가를 뚫고 들어온 차분한 목 소리에, 손가락에 꽉 하고 힘이 들어갔다. 부들거리는 눈으로 돌아본 순간 내 두 눈에 가득 찬 것은 키르의 레몬색 눈동자였다. 멍한 눈으로 한참을, 키르를 바라보았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라고 묻기 위해 입술을 열어 보려고 했지만 바짝 말라붙은 입술은 말을 뱉어주지 않았다. 잔뜩 비틀린 시선으로 녀석을 바라보다 천천히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한 달 후가 계승식이다." 믿을 수 없는 현실. 이해할 수 없는 말의 나열. 납득할 수 없어. 이해할 수 없어. 받아들일 수 없어. "마왕의 계승식이다." 입술은 파들파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고 있었다. "네가, 새 마왕이 될 거야." "……." 누가, 그런 게 되고 싶다고 했지? 누가, 이런 상황을 바란다고 했지?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이 그저 축 늘어진 느낌이었다. 뭐라고 고함을 질러 야 하는데, 소리로 튀어나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입술을 열 힘도 없 어서, 나는 그저 멍하게 그 자세 그대로 그렇게 있었다. 내놔. 돌려놔. 살 려놔. 아이에드를 살려놔. 로시엔을 돌려줘. 세렌을 내놔. 그대로, 원래대 로 돌려놔줘. 시간을 거슬러 올라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줘. 나는 아무 것도 필요 없어. 그러니까, 제발. 돌려줘. 하지만, 마음속의 생각과는 달리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내 의지와는 달리,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네 카레나, 각성했어." 다음 순간 조용히 울린 키르의 말에 움찔, 하고 몸이 조금 떨렸다. "널 진정시키느라, 나와 카리스는 죽을 뻔했다. 넌 강한 마왕이 될 거야." "……." 나는 그런 게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정말 한 번도 없었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너희는 나를 인형으로 만들어 내 모든 것을 앗아 버렸다.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내 의지는 어디에 있어? 아니, 내 의지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냐. 나는 대체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거지? 왜? 왜? 왜? "마왕의 후계자가 마왕이 되는 건 당연하다. 아이에드나 로시엔이 죽은 건 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잖아. 너도 마왕이 되어 기쁘지 않은가? 이제 마 계는 네 것이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왜? 왜 내가 죽여야 했어? 왜 나 때문에 죽은 거야? 왜 이렇게 된 건데? 원한 적 없어. 달라고 한 적도 없어. 왜, 왜, 왜, 왜 내가 이렇게 된 건데! 왜! 어째서! 내가 바란 건 한 가지 뿐이었어. 나는 아무 것도 필요 없이, 그저 그 한 가지 만을 원했어. 온기를. 곁에 남아 있을 누군가의 온기를. 단지 그것을, 단지 그것을 원했을 뿐인데. ◇ ◇ ◇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녀, 리니아나가 나를 보며 조그맣게 말해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런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마왕의 계승식? 그런 것을 따를 생각은 추호 도 없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모든 것을,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을 조각조각 내버린 그 녀석들에게 마지막의 내 몸뚱이마저 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마계의 탁한 공기를 마시며 천천히 제 2공간으로 통하는 결계를 열었다. 어떻게 해서 공간을 열 수 있 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너무나 자연스럽게 문은 열렸다. 미친 듯 그 안으 로 뛰어 들어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세이아나의 공간. 그러나, 어쩐 일 인지 제 2공간에는 세이아나가 없었다. 제 2공간은 주인도 없이, 어째서인 지 텅텅 비어 있었다. 나는 도망치듯 인간계로 튀어나왔다. 인간계에 발을 내딛자마자, 차곡차곡 억눌리고 억눌리고 억눌렸던 모든 것이 고함이 되어 터져 나왔다. 체이드 숲, 아무도 없는 그 곳에서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손톱으로 땅을 긁고, 머리를 쥐어뜯고, 칼로 엉망진창으로 자해를 했다. 그러나, 그래도 슬픔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죽지 않았다. 나는, 선명한 붉은 색의 피를 뚝뚝 흘리며 체이드 숲 한 가운데에서 비참한 소리로 울고 있는 한 마리 야수였다. 그리고 그 때 나타난 것이. 그녀, 리니아나였다. 마치 귀신처럼 홀연히 나타난 그녀는, 체이드 숲 바닥에 엎드려 자해의 흔 적으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던 내게 조용히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특별 할 것 없는 얼굴로, 표정 같은 것도 띄우지 않은 채로 그녀는 내게 부드러 운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가실래요?' 구원. 그것은, 구원이었다. 살아도 돼? 나, 이런 나인데, 살아도 되는 거야? "넌 혹시,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거냐." 나는 조용히 리니아나를 올려다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리니아나가 조 용히 웃는다. "그럴리가요. 저는 미래를 아주 조금 엿볼 수 있을 뿐입니다. 제게 그렇게 까지 강대한 예지 능력은 없어요. 저는 그저, 체이드 숲에서 당신을 기다리 고 있었을 뿐인 걸요." 그녀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이제는 그런 것도 생각하기 귀 찮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체이드 숲에서 리니아나가 나를 구원해 준 그 때부터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철저히 마족으로서의 기척을 감추고, 나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리니아나와 동행했다. 뻥 뚫려버린 가슴 때문에 예전과 같은 감동이라던가 감정이라는 것은 전혀 느낄 수 없었지만, 그래 도, 그래도 나는 만족한다. "당신이 저와 함께 한 것도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군요. 앞으로도 이렇게 저와 함께 하실 겁니까?" 눈을 감았다. "……지금의 나에게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잖아." 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린과 함께 떠도는 동안, 나는 딱 한 번 세이피안을 찾았다. 나스를 부탁하 기 위해서였다. 이레니아를 찾아가서, 너는 공주니까 작은 소녀 하나 돌봐 주는 것쯤은 할 수 있겠지? 라는 말로 녀석에게 나스를 부탁했다. 레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근데 싸가지, 너 뭔가 분위기가 변했어, 라고 말 했다. 나는 그저 웃어버렸다. 나는 레니에게 세라가 예전에 말했던 '현자의 돌'을 보여달라고 했었다. 아버지의 기억이 남아있을 그 것을. '카인. 나와 엔카는 정말로, 서로를 사랑했단다.' 어머니의 기억이 남아있던 그 기억의 조각에서 그랬듯이, 현자의 돌은 내 게 아련한 예전의 모습을 담아 보여주었다. 돌에서 희미하게 어린 기억들에 서 은빛의 마족 하나가 솟아나서 내게 차분하게 말을 해주었다. 나는 현자 의 돌에서 불쑥 튀어나온 그 은빛의 마족이 나의 아버지 피에트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곧, 그 은빛의 마족이 내가 예전부터 꿈에서 봐왔던 그 은빛의 여인이라는 걸 알았다. 얼굴이 너무 곱상해서 여자로 착각했었는데, 남자였던 모양이다. '카인. 너를 사랑한다. 나는 후회하지 않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현자의 돌이라는 것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부서져 버 렸다. 순간 눈물이 주루룩 하고 흘렀다. 1년 동안 흘리지 않은 눈물은 그치 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사랑해? 이런 나라도 사랑해요? 아버지라고 여겼던 아이에드, 당신의 친구라는 그도 죽여버린 나 같은걸, 그래도 사랑해요? 나는 그 날 이후로 '나이라' 의 노래를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사실 피에 트와 엔카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사실에 근접한 것은 나이라의 노래다' 라 고 했던 카리스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그 노래들을 찾으면서 깨달은 건데, 나이라라는 음유시인의 이름은 옛날 가윈이 내게 가르쳐준 것과 같은 이름 이었다. 나는 뭔가 우연이로군, 하고 중얼거리며 가사들을 읽어나갔다. 나 이라의 노래들은 하나같이 파격적이었다. 그의 노래는 말하고 있었다. 원래 파스턴과 이루엔은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파스턴은 이루엔이 죽인 것이 아니라, 단지 나중에 자신의 연인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온 성녀라는 것을 알고 사라져준 것뿐이라고. 더 이상은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렇구나… 그랬었나? 하는 생각과 함께 다시 무기력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대로 죽어버릴까, 하는 충동은 하루에 수십 번도 더 일었다. 자해도 수 백 번은 했다. 그럴 때마다 조용히 다가온 린이 아무 말 없이 감싸주었다. 어느 날인가, 손목을 깊이 찔러 피가 멈추지 않고 콸콸콸 솟아나던 날. 린 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 사람의 몫으로, 당신은 살고 계십니다.' 나는 그 날 이후로, 다시는 자해를 하지 않았다. 그래. 이 목숨에는 많은 이들이 있으니까, 이 상태로라도 살아야 해. 살아야 해. 살아야 해. 아무도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모두의 목숨이 내 목숨 하나로 줄 어들어 나와 함께 하고 있으니까. 나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파란 하늘 위로 둥실둥실 떠다니는 구름 들이 보였다. 나는, 린을 부르려고 했다. "……."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제 그만 가자,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입술이 굳어버렸는지 움직이지 않 았다. 한참동안 멍하게, 나는 갑작스럽게 내 앞에 나타난 존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칼레들린." 뭐지, 이 목소리는? 지금 이 목소리는? 지금 이 목소리는? 지금 이 목소리는? 눈앞에 보이고, 귓가에 직접 목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그런데도 믿을 수 가 없어서 나는 눈을 크게 뜬 채로 그 자리에 그렇게 얼어 있었다. 뻣뻣하 게 경직된 입술이 말라비틀어진 것처럼 푸석푸석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칼레들린." 다시 한 번 울린다. 잔잔하기 그지없는 이 목소리. 익숙하기 그지없는, 저 붉은 빛의 옷 위로 둘러진 로브 자락. 금색의 머리카락과, 반짝이는 녹색의 눈동자. "라이메데스……." Total 36 articles, 3 pages/ Now page is 1 View Articles Name 카르민 (hokutomin@hanmail.net) Subject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193(완결) "라이메데스……." "가자." 눈을 크게 뜬 채로 내가 알고 있는 존재의 이름을 조그맣게 부름과 동시에, 라이메데스는 가자, 라고 말했다. 머릿속이 잠시 패닉이 되었던 나는 녀 석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그냥 고개를 멍하게 든 채로 라이메데스를 바라 보고만 있었다. "가자, 칼레들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라이메데스? 나는 네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어. "어디로 가자는 거지?"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1년 동안, 너를 찾아 다녔다. 기척을 모두 지우고 다니는 너를 찾아다니 느라 힘들었어. 돌아가자."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도, 라이메데스를 처음 보는 순간 딱 하고 굳었던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라이메데스. 너는 대체 무 슨 말을 하는 거냐. 내가 대체 어디로 갈 수가 있다는 말이지? 나는 이제 갈 곳이 없어. 가고싶지도 않아. 인간계에, 여기에 있을 거다.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 칼레들린이라는 이름으로 살 수 없는 세상에는, 이제 있고 싶지 않아. 내게서 나를 빼앗아 가버린 그 곳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칼레들린님." 조용한 목소리가 뒤쪽에서 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나는, 내 어깨를 살짝 감싸는 손을 느꼈다. 돌아보니 리니아나였다. 나는 리니아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조그마한 목 소리로 말했다. "저 분은 당신에게 남은, 유일한 존재입니다." 욱씬. 심장부근이 아팠다. "가보세요, 칼레들린님." 욱씬. "……이번 기회를 버리면 아마 당신은 평생토록 혼자일거예요." 욱씬. "솔직해져도 됩니다. 당신은, 충분히 괴로워했으니까요. 행복해져도 괜찮 아요." 욱씬욱씬. 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라이메데스 쪽으로 가져갔다. 그 순간, 라이메데 스가 갑작스레 무릎을 쿵, 하고 꿇었다. 갑작스러운 녀석의 태도에 놀란 내 가 입을 살짝 벌리는 순간, 라이메데스의 예의바른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삼가, 블러드 아미의 총수로 임명된 저, 라이메데스―. 마황자에게 예를 다합니다." "라이메데스……." 힘 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녀석의 숙여진 금발을 가만히 보고 있 었다.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나는 문득, 이상하다고 느꼈다. 고개를 숙인 상태의 라이메데스가 살짝 떨고 있는 것을, 나는 그제야 느꼈다. "같이 가자, 칼레들린." 몸이 떨리는 느낌. 울고… 있어? 울고 있는 거야? "가자, 칼레들린. 마계로 가자.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니까." "뭐……?" 입술이 바짝 말랐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드는 라이메데스를 뚫어져라 바 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든 라이메데스의 눈에 조금의 물기가 묻어있는 것이 보였다. 라이메데스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입술을 열었다. "로시엔님." "아……?" "……로시엔님은 소멸하지 않았어." 순간, 몸에 벼락을 맞은 듯 했다. 온 몸이 부들부들, 잘게 경련을 일으켰 다. "그 분은 최후의 순간에 또 다시 한 번 분열했다. 그 중 하나는 죽어버렸 고 하나는, 남았어. 내가… 내가 발견했다. 그 분은… 또 하나의 로시엔님 이야. 로시엔님으로서의 기억은 하나도 없지만, 분명, 로시엔님이시다." "욱……." 입술을 너무 세게 물어서 피가 났다. 뭐라고 해야 할 수 없이 북받쳐 오르 는 감정을 참기 위해 주먹을 쥐었더니, 주먹을 파고든 손톱 때문에 그 곳에 서 천천히 피가 흘렀다. "또 다른 로시엔님이, 마계에 있다 칼레들린." 죽지 않았어? 로시엔이, 그 로시엔이 정말로 죽지 않은 거야? 응? "그리고." 라이메데스가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맹세할 수 있다. 나는 먼저 가지 않아." 나는 라이메데스를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 면서, 그저 고개를 올리다보니 녀석과 시선이 맞닿았다. "카민, 세렌, 아이에드님, 로시엔님……. 그래, 너는 분명 네가 혼자라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두 너를 남기고 가버렸으니까. 하지만 나는… …. 가지 않아." 심장이 아프다. 타는 것 같다. "맹세한다. 가지 않는다. 두려워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소멸의 그 날 까지…. 너의 곁에, 남아 있으마." 녀석이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자, 칼레들린." 녀석이 미소지었다. 너무나 눈부신,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밝은 미소였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린이 있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입술을 오물거렸다. '당신이 있을 곳은 그 쪽이에요'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밀어진 녀석의 손이 단정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손을 들었다. 수십 번의 자해로 생겨 버린 상처는 마족의 자체 치유력으로도 낫지 않아 뚜렷한 상처를 남기며 내 손목에 남아 있었다. 나는 내 상처가 부끄러워 잠시 머뭇거렸다. "괜찮아." 그 순간에 라이메데스가 조그맣게 내게 속삭였다. 나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멀찍이 손을 뻗었다. 내밀어져 있던 라이메데스의 손이 내 손을 가만히 마주잡았다. "가자." 나는 조그맣게 그렇게 말했다. 햇빛이, 인간계의 그 사랑스러운 햇빛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카르민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외전: 라이메데스 1 훗훗... 훗훗훗...=_=;; 본편이 아닌 외전입니다만.. 월요일이 2권 마감이더군요;; ...오타 수정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리고 하교 후 7시까지 자는 바람에;; 소설 본편을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외전을 올리니... 재밌게 봐주세요~~~ ^_^;; 외전- 라이메데스(Rymedeath) 기억조차 까마득한 옛날부터, 머릿속에 뚜렷이 형상화되지 않는 오랜옛날부터, 나는 그 분 ……아이에드님을 동경했었다. 그 분을 처음 만난 그 순간은 몇 백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내 기억 속에 또렷하고 또렷하게 남아있다는 것만 보아도, 내가 그 분을 얼마나 동경하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내가 그 분을 처음 본 것은 1200년 전 천마대전 직후였다. 그 당시 벌어졌던 천마대전에서 마계는 그다지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세라핌 몇몇을 소멸시키고 천계의 중심부를 유린했다는 뚜렷한 자긍심만은 마계에 퍼질대로 퍼져 있던 때였다. 특히, 가장 마지막까지 천계에 남아 퇴각하는 모든 마족들의 퇴로를 만들어 주었다는 마계 최강의 부대, 블러드 아미가 귀환하는 날은 언제나 음침하던 마계에조차 축제 분위기를 안겨줄 정도였다. 마계지구에 있던 거의 모든 마족들은 블러드 아미의 모습을 보러 바깥으로 나와 있었고, 나 역시 그런 마족들과 다를 바 없었다. 당시 비각성 마족이었던 나는 조금 알던 놈들의 손에 이끌려 바깥으로 끌려 나왔고, 하늘 위를 지나쳐 가는 일련의 무리들을 볼 수가 있었다. "아…… ?" 그리고 나는 그 날,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 하게 될 그 분을 보았다. 어느 정도의 부상을 입은 블러드 아미의 선두에 서서 당당하게 마계로 귀환하는 그 분의 모습, 그 모습을 나는 지금도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상처 입고 피를 흘리며, 자체 치유력 만으로도 치료가 되지 않아 부상 당한 몸을 이끄는 블러드 아미원 사이에서, 고고하고 도도한 자세로 움직이는 은발의 그 마족은 내 눈과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그의 옷은 피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 옷이 조금도 찢어지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그 피는 그 분의 피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그 분의 흰 옷은 새빨간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그 피 중 그 분이 흘린 피는 단 한방울도 없다는 말이 된다. 저 천계와의 전투에서 비린내 나는 천족들의 피를 뒤집어 쓴 채로 마계에 귀환하는 그 당당한 보랏빛 눈동자의 마족. 나는 멍하게 풀린 눈으로 그런 그 분을 보았다. "…제일 앞에서 오는 저 마족은 누구야?" 내 옆에 있던 한 마족이 다른 마족에게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내가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던지고 있던 의문을 대신해서 다른 이에게 표출해준 그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그 곳으로 귀를 기울였다. 질문을 받은 마족놈은 레네스란 놈이었는데, 마계에 관해서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던 놈이었다. 대두분의 비각성마족이 서열이라던가 마계의 위치 같은데 무지했기에 레네스는 이런 때에 꼭 필요한 존재였다. "아니!! 이런, 무식하긴!!! 너희들은 저기 가는 저 분도 모른단 말야? 신계에 투신 리오니아가 있다면 마계에는 아이에드가 있다! 라고까지 칭송받는 저 분을 모르다니, 지금 장난 하는 거냐!! 정말로 모르는 거야??" "응, 몰라." 너무나도 태연하게 대답하는 무식한 비각성 마족들. 불행히도 나 역시 그런 무식한 족속중 하나였다. 레네스는 그런 우리들의 무식함에 박수를 치면서 통곡하다가 우리들에게 몇 대 얻어 맞았고, 머리에 혹이라는 것이 일곱개 이상 생길 무렵 녀석은 항복했다. 녀석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찬찬히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일단, 그 분의 이름은 아이에드 엘버지운 피엘 블러드 아미스 류…… " 녀석은 숨이 찰 때까지 일련의 이름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나는 듣다 듣다 못하고 녀석의 머리통을 한 대 갈기며 외쳤다. " ……이름은 됐으니까 다른 거 불러." 레네스는 잠시 억울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힘에 관해서만은 이 무리들 중 가장 우위를 점하는 내게 녀석은 감히 덤빌 수가 없었고, 그래서 녀석은 투덜거리면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서열은 3위, 냉정하고 냉정한 성격에 조금은 성격이 이상하다는 소문은 있지만…… 그래도 그 실력만큼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다고 들었다. 블러드 아미의 총수로, 천마대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고, 그 전에 있었던 신마대전에는 신족 수백을 단신으로 베어 넘겨 [블러디 데몬]으로 불렸으며……." 길게 이어지는 레네스의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붉은빛의 하늘 위로, 방금 전에 지나간 은발의 마족 하나가 그려지고 있었다. * * * * * * * * * * * * * * * 블러드 아미에 들어가기 위해 나는 장장 450년 동안 오로지 몸을 단련하는 데만 힘썼다. 나와 함께 놀아나던 놈들은 내가 정신이 이상해졌다며 떠들어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날, 천마대전의 종료 후에 도도한 모습으로 하늘을 날아가던 그 분을 본 후로 나의 목표는 정해져 버렸다. -블러드 아미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분의 옆에서 그 분의 인정을 받으며 그 분과 소멸의 그 날까지 함께 한다.- 그것이 나의 목표였고, 내 인생의 전부였다. 나는 블러드 아미 1차 시험에 합격했을 때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수백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제 2차 시험마저 합격했을 때의 내 기분은 필설로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드디어 운명의 그 날이 왔다. 제 3차 시험의 그 날이. * * * * * * * * * * * * * * "뭐야…… 소개서에 이름이 안 적혀 있군. 이름은?" "라, 라, 라, 라이메데스입니다!" 이런 빌어먹을!! 나는 나 자신을 향해서 욕을 해댔다. 정말이지 싫었다. 왜 이렇게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려서 나오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덜덜덜 떨리는 손을 억지로 가누려 애쓰며 내게 이름을 물어본 그 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1차 시험, 2차 시험을 통과한 뒤 주어지는 마지막 시험. 블러드 아미는 1, 2차 시험으로 서로가 죽이고 죽이는 이른 바 살상 시험이라는 것을 치룬다. 미칠듯한 기세로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발악을 하는 1, 2차 시험의 지옥같은 풍경을 뚫고나면 남는 것은 단 하나, 3차 시험. 레네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제 3차 시험은 면접과 비슷한 거라고 했다. 그런데 환장할만한 정보는. 수백년마다 한 번 하는 [블러드 아미원 선발]의 제 3차 시험은 블러드 아미의 총수가 주도한다는 사실. 나는 정말이지 미칠 것 같았다. 몇 백년을 동경해왔던 그 분이 지금 내 앞에 앉은 채로 내 입대면접을 보고 계신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진정되질 않았다. "흐음, 라이메데스라." 그 분, 아이에드님은 무심한 얼굴로 내 소개와 추천이 적힌 서류철을 힐끔 보셨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심장은 더 거세게 뛰었다. 아이에드님은 한참 서류철을 보시더니 한참만에 서류철을 내려놓으며 말하셨다. "우암∼ 졸리는 군. 로시엔, 나머지는 네가 좀 대신 봐라. 뭐가 저렇게 길어?" 음? 나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어 눈을 부릅뜨고 아이에드님을 보았다. 내 의문은 곧 풀렸다. 그 분의 옆에 있는 듯 없는 듯 앉아 있던 마족 하나가 싸늘한 표정으로 책상 위에 놓여있던 서류철을 집어 드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방에 들어온지 10분이 지났는데도 단 한마디도 하고 있지 않아 그 존재조차 몰랐던 마족은 무심한 얼굴로 그 서류철을 들더니 빠른 속도로 그것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푸른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의 그 마족의 얼굴은 얼음이라고 불러도 좋을만큼 차가워보였고 동시에 무표정해보였다. 거의 책 한 권에 달하는 정도의 내 소개서를 훑어보고 있던 그 마족은 한참만에 서류를 책상 위에 올리더니 말했다. "……블러드 아미 시험을 치게 된 경위는?" 나는 아이에드님을 힐끗 보다가 움찔 굳었다. 그 분은 손을 턱에 괸 채로 곤히 잠들어 계셨다. 피에 젖은 채로도 당당했던 그 분의 모습과 곤히 잠들어 계신 그 분의 이미지는 어딘지 매치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런 그 분의 옆에 있고 싶다는 결심 하나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당당히 들고 대답했다. "아이에드님 때문입니다." 내 대답이 예상 외였는지, 아이에드님을 대신해 내 서류철을 맡아보고 있던 그 푸른색 머리카락의 마족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그 표정을 보곤 그 마족이 내게 뭐라고 한 마디 할 줄 알았다. '그게 무슨 뜻이지?' 같은 말을. 하지만, 그 마족은 내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는 싸늘한 눈으로 내게 서류철을 돌려주었다. 나는 멀뚱한 눈으로 그런 그 마족을 보았다. 내가 떯떠름한 얼굴로 그 서류철을 받아들자, 그 마족은 칼같은 얼굴로 내게 차갑게 말했다. "블러드 아미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예?" 어이없게도…… 나는 그 말 한마디와 함께, 그 날 블러드 아미원이 되었다. * * * * * * * * * * * * * * * * * [그 분]의 곁에서 [그 분]처럼……. 내 목표는 그렇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아이에드님의 곁에서 로시엔님같은 존재가 되겠다는 나의 계획은 그다지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로시엔님의 존재는 정말이지 생각 이상으로 엄청났기 때문이다. "아이에드님께 로시엔님의 존재는 어느 정도예요?" 입대한지 몇 백년이 흘렀을 때, 나는 막 전투를 끝내고 난 뒤 돌아오는 길에 나의 직속상관에게 물었다. 군대 안에서 착실히 노력한 덕택에 나는 비교적 빠른 시간내에 꽤나 높은 위치에 앉을 수가 있었다. 블러드 아미 부총수의 보좌관. 그것이 그 때의 내가 맡고 있던 일이었다. "으음…… 뭐랄까…… " 내 질문을 받은 상관은 잠시 고민하는 눈치더니, 한참만에 말했다. "잔소리쟁이 집사장이라는 느낌?" "집사장이요?" 나는 그 의외의 대답에 황당해졌다. 집사장이라니. 게다가 잔소리꾼? 그렇게 말이 없어 보이는 그 분 어디가 잔소리꾼이라는 건가. 그리고, 꽤나 강해보이던 그 분이 아이에드님의 집사장 같은 것만 하고 있을리는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로시엔님 말인데요…… 꽤나 강해보이던데요?" "아아, 서열 16위의 고위마족이거든." 내 상관은 내 질문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 "예에, 서열 16위의 고위마족이요." 나는 그분의 그 아무렇지도 않다는 어조에 동화되어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답할 수가 있었다. "응, 서열 16위의 고위마족." 잠시의 침묵이 흘러서야, 나는 내 상관의 입에서 나온 말의 무게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한 순간, 나는 벼락같은 고함소리를 질렀다. "뭐라구요!! 서열 16위의 고위마족이라구요!!!!" 내가 발악하듯 내지른 고함소리에 내 말상대를 해주고 있던 나의 상관, [향기로운 미소]라는 별명을 얻고 있던 세이아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그래, 서열 16위의 마족. 왜 그렇게 놀라? 내가 좋아하는 마족인데 그 정도도 안 될 줄 알았어?" 세이아나의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찰랑찰랑거렸다. 방금 전 지천사 두셋을 한꺼번에 베어낸 탓에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에는 피가 조금 말라 붙어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에 그리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암." 세이아나는 크게 하품을 하더니 손을 들어 옆에 있던 내 머리카락을 한 번 쓰다듬었다. "머리 만지지 마십시오." 나는 세이아나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린애 취급을 받는 것 같아 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 세이아나의 손길이 싫었다. 세이아나는 그런 내 말에 피식 웃었다. 당시 세이아나는 서열 13위의 마족으로, 블러드 아미의 부총수였다. 흩어지는 불꽃의 머리카락은 모든 블러드 아미원들의 우상이었지. 세이아나를 제외하고는 블러드 아미엔 여자라곤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인기는 정말이지 높았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는 사이코틱한 그녀의 행동이 다른 마족들에게는 [너무나도 고귀하신 모습]으로 비추어지기 일수였고, 심지어는 블러드 아미원 사이에서 [자비롭고 자비롭고 자비로운 분, 봄바람 같이 부드러운 분]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나는 너무나도 기가 막혀 진정한 사실을 온 천하에 알리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조용히 뒤에서 엄습해오는 세이아나의 구타에 밀려 번번히 실패하기 일수였다. "세이아나." 나는 어느 가핏빛 단검을 꺼내서 지천사들의 말라붙은 피를 하얀 천으로 천천히 닦아 내고 있는 세이아나를 불렀다. "왜?" "제가…… 로시엔님처럼 아이에드님께 꼭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러자 세이아나는 피식 웃었다. "지금처럼만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아이에드님이 뒤돌아서 봐 줄거야." 세이아나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말하는 세이아나의 옆 얼굴을 보면서 나는 문득 내가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은 매우 외로워 보였다. 알 마족은 다 아는 사실. 세이아나 아나드리엘 로엔, 블러드 아미원 전체의 동경의 대상인 그녀가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마족에게는 조금 낯선 [사랑]이지만, 그녀는 언제 어디서든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석이 좋아" 라고. 세이아나의 붉은 머리카락이 내 앞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을 보며 나는 말했다. "세이아나." "응?" 세이아나는 나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나는 작게 말했다. "로시엔님도 언젠가는 뒤돌아서 봐 주실 날이 있을 거예요." 세이아나는 피식 웃었다. "넌 말이야, 의외로 상관 비위를 잘 맞춘단 말이야?" "그런가요?" "그래. 로시엔이나 레이네를 제외하면, 네녀석만큼 마음에 드는 놈이 없을 정도야." 세이아나가 피식 웃었다. "……그, 그거…… 영광이군요." "……영광이라면서 그렇게 얼굴 근육이 경직하는 이유는 뭐야?" * * * * * * * * * * 세월은 바람을 타고 흘러갔다. 몇 년이고 몇 년이고 흘러가면서 나는 점점 더 성장했고 점점 더 격렬한 전투를 경험할 수가 있었다. 내 옷에서 피가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자주 전투에 불려 다니던 무렵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세이아나가 말했다. "있지, 데스. 나 블러드 아미를 떠나야 될 것 같다." 나는 내 상관으로서 내가 강해지는데 엄청난 도움을 줬던 그녀가 갑작스럽게 뱉어낸 그 말에 조금 당황했다. "예? 어째서요?" "서열 12위의 마족 파스턴님이 죽었어. 나는 서열 13위니…… 그 분의 자리를 계승해야 할 것 아냐?" 나는 세이아나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조금 파리했다. "제 3공간……을 당신이 맡게 된다는 말인가요?" "그래." "……블러드 아미는?" "오늘부로 그만둘 것 같아." 세이아나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심장이 덜컥 내리 앉는 것 같았다. 세이아나가 떠난다니. 그럴수가. "……있잖아, 데스?" 나를 [데스]라고 부를 수 있는 마족은 한정되어 있었다. 아이에드님과 로시엔님, 그리고 세이아나. 이 세 마족 외에 나를 [데스]라고 부를 수 있는 놈은 당시에는 없었다. "예?" "나, 오늘 마지막으로 그 녀석한테 고백했어." 나는 세이아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말에 등장한 [그녀석]이 로시엔님이라는 것을 모를만큼 나는 무디지 않았다. 그녀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상했던 답이 나왔어. 그녀석은……나보다 아이에드님께 자신의 존재가 더 쓸모있을 것 같다더군. 그 포커 페이스…… 으으, 정말 지긋지긋해. 나같이 예쁜 여자가 그 동안 그렇게나 대쉬를 했는데도 꼼짝 않더니, 그 순간조차도 표정 하나 안 변하지 뭐야? [죄송합니다]. 그게 끝이었어." 세이아나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나는 그런 세이아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봐 주지 않는 존재를 끝까지 좇는다는 점에서, 나와 세이아나는 통하는 면이 있었다. 돌아봐 주지 않는 존재를 향해 [인정]이라는 것을 받고 싶어하는 어린애 같은 나와. 돌아봐 주지 않는 존재를 향해 [사랑]이라는 것을 받고 싶어하는 가여운 세이아나. "후후,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어. 로시엔에게 있어서 [소멸의 그 날]까지 함께 할 존재는 아이에드님 외에는 없다는 걸 말이야." 세이아나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내게 자신의 검을 내밀었다. "세이아나?" "가져라." "……왜…… 이걸 나에게?" 블러드 아미에서 제대할 때, 전임은 후임에게 자신의 지위를 준다는 뜻으로 물건을 하나 건넨다. 그것은 자신이 항상 소유하고 있던 [핏빛의 단검]이다. "그냥. 네녀석이 좋을 것 같아서." 세이아나는 피식 웃었다. 멍한 표정을 짓는 나를 남기고, 세이아나는 그렇게 떠났다. 그녀가 언제나 바라봐주길 바라던 로시엔님의 자취라곤 조금도 없는 외롭고 외로운 제 3공간으로. 내게는 핏빛의 단검만을 남긴 채, 그녀는 그렇게 쓸쓸하게 떠났다. * * * * * * * * * * * * 세이아나가 떠난 후로, 갑작스럽게 후임이 된 나에게 이 것 저 것 시비를 거는 놈들은 많았지만 아이에드님의 한 마디로 그것은 모두 일축되어 버렸다. "세이아나가 임명한 후임이다. 불만 있는 자는 얌전히 내 집무실로 들어와." 그 분의 집무실로 가는 놈은 한 놈도 없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아아, 역시 멋지고도 멋진 아이에드님!!!! ……팔불출이라고 해도 할 말 없다. * * * * * * * * * * * * * * * * 세이아나가 떠난지 정확히 6년이 되는 어느 날이었다. 파리한 얼굴로 나를 향해 달려오는 레네스의 얼굴이 보였다. 비각성 시절부터 이것저것 아는 게 많았던 레네스는 지금은 내 보좌관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녀석은 그 날, 지나치게 헐떡대면서 내게 달려오더니 말했다. "라이메데스님!!" 군대 안에서만큼 위계서열이 칼같이 지켜지는 곳은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상관과 부하의 관계였기에, 그녀석은 언제나 내게 존칭을 썼다. "왜?" 나는 헐레벌떡 뛰어온 녀석을 향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녀석이 대답했다. "아, 아, 아이에드님이…… 인간계로 내려가셨던 아이에드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아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후 내 몸을 대충 훑어보았다. 입고 있던 옷은 깔끔했다. "그래, 당장 가봐야겠군. 지금 어디 계시지?" 레네스는 내가 미소를 띈 채로 말한 그 대답에 갑자기 안색이 시퍼렇게 질리더니 부들부들 떨면서 대답했다. "라, 라이메데스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큰일이 났다구요!!! 아이에드님이 일을 하나 저지르셨어요!! "……?" 나는 의아한 얼굴로 레네스를 보았다. 일이라니? 무슨? "아, 아이에드님이…… 인간계에서 반마족을 하나 데려오셨답니다." "뭐??" "……그리고 그 반마족을 자신이 기르시겠데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 오옷... 양이 많다... 띄워 쓰기로 열 장 분량이라는;; Rymedeath 2편에서 뵈요∼^_^ 카르민 [카인]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외전: 라이메데스(2) 나는 거칠기 짝이 없는 걸음걸이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흘러내린 식은땀이 내 두 눈으로 사정없이 흘러내린다. "……말도 안 돼……. 반마족이라니, 말도 안 돼……." 나는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꼭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닐 거야……. 그 분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일 리가 없어. 그래,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계속 되는 자기 암시에 숨이 막혀왔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그 분의 성 앞에 멈춰섰다. 아이에드님의 성 안으로는 절대 들어가선 안된다고 외친 보좌관의 말이 얼핏 떠올랐지만 다음 순간 나는 그 것을 깨끗하게 무시해버렸다. 머릿속은 빙글빙글 돌고 있다. 나는 후우, 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성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몇 백년간 타인의 손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그 성문에 손을 댄 순간, 끼릭하는 소리를 내면서 그것이 안으로 부드럽게 밀려났다. 나는 잠시 성 안을 살피다가 어느 순간 성문에 짚고 있던 손을 떨구었다. 바로 내 앞에 선 한 존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저 편에서 화단을 손질하고 계신 로시엔님의 모습이 두 눈에 들어온다. "하?" 하하하핫... 황당스럽게도,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유명한 그 분이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띄운 채로 꽃... 꽃에.... 물을 주고 계셨다. 입은 여전히 굳게 다물어져 있었지만 그 모습은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였다. 로시엔님께 화단을 가꾸는 것 같은 별난 취미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나는 조금 어리둥절해졌고 황당해졌다. 아, 아니! 생각을 해보란 말이다. '아이시 사일런트 로시엔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족이 [화단을 가꾸고 있었어요]' .....라고 내가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거짓부렁도 정도가 있는거야." "죽어볼래?" ...기타등등의 협박을 들으면서 나는 바로 그 날로 최고의 거짓말쟁이가 되어 마계에 깔려 있는 로시엔님 지지자들에게 얻어 터지고 말 것이다. 아이에드님의 카리스마에 매료된... 나 같은 자들도 많지만, 로시엔님의 그 싸늘함과 근접할 수 없는 도도함에 매료된 자들도 마계에는 꽤나 많으니 말이다. 나는 그래서... 하여튼 매우 기괴한 표정으로 성 밖에 엉거주춤하게 선 채 꽃에 물을 주고 계신 로시엔님을 바라보았다. "......."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문득 시선이 느껴졌고 나는 몸을 흠칫했다. 그 분의 파란 눈동자가 표정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뭔가를 묻는 듯한 푸른 눈동자가 나를 차갑게 마주하고 있었다. 두 눈에서 폴폴 날리는 냉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화단에 물을 주고 계신 로시엔님의 미간이 가늘게 좁혀진 것이 보인다. 나는 그런 로시엔님께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로시엔님. 저... 류를 뵈로 왔습니다만……."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로시엔님의 입술이 열렸다. "지금은 곤란하다." 그 분의 말은 너무나도 짤막했다. 하지만, 짧은 그 분의 말은 언제나 내 심장을 찌르곤 한다. 그 분의 싸늘한 눈동자는 인정사정이 없다. 세이아나 같은 미인의 유혹도 단 번에 거절하는 저 분의 얼굴에는 언제나 냉막함이 넘쳐흐른다. 그리고 침묵하는 입술. 그래서 저 분이 [아이시 사일런트]라고 불리는 거겠지. "어째서 입니까? 지금 류를 꼭 뵙고 싶습니다만." 내 말에 로시엔님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대꾸했다. "개인적인 시간을 방해하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더한 짜증을 안겨주곤 하지. 그 분은 지금 그 분만의 시간을 갖고 계신다. 방해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 아닌가. 그 분이 부대 안에 있을 때는 너의 류이신 것이 틀림 없지만, 이런 사적인 공간 내에도 너를 위한 류가 될 의무가 그분께는 없다." 로시엔님의 말은 한치의 빈틈도 없이 나를 찔러 들어왔다. 언제나 말이 없기로 유명하신 그 분이 그렇게나 긴 말씀을 하셨다는데에 감탄할 틈도 없이, 나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만 돌아가라." 로시엔님의 말씀에 나는 그 분을 향해 낮게 목례를 하는수밖에 없었다. 그래, 돌아가야겠다... 반마족에 대한 것은 다음 날 물어도 늦지 않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내었다. 로시엔님은 그런 내게서 고개를 돌려 다시 화단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막 성문을 다시 열려 했던 때였다. "핫핫핫핫핫핫!! 이봐, 꼬마!!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야?"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족은 비정상적으로 청각이 발달한 종족. 내 귓가를 뚫고, 목소리는 너무나도 정확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 나는 귀를 세웠다. "핫핫핫핫!!" 밝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가득 메인다. 익숙한 어조. 익숙한…… 익숙한 목소리다. "이봐, 꼬마. 하핫, 눈을 떠보라구. 뭣하면 내가 씻겨주랴?" 나는 문득 입술이 꾹 깨물어짐을 느꼈다. 그것은 분명한 아이에드님의 목소리였다. 나는 타는듯한 갈증을 느끼면서 로시엔님을 바라보았다. 로시엔님은 표정없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가 짧게 말씀하셨다. "돌아가라." * * * * * * * * * * * * * * * 한동안 나는 그 반마족을 보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마계에는 온갖 소문이 다 떠돌았다. 아이에드 엘버지운 피엘 블러드 아미스 류. 그 분은 마왕님의 전언에도, 서열 1, 2위 마족들의 은근한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강한 심지로 그 분은 끝까지 그 반마족을 자신이 기르겠다고 주장하셨다. "후우." 그 때 들었던 아이에드님의 그 웃음소리. 그 속에는 처음듣는 밝음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런 웃음을 그분에게서 이끌어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비볐다. 나는 블러드 아미의 엄연한 간부중 하나가 되어있었지만 그 따위건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 그따위건 의미가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다른 이들의 인정이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오직 하나인데. "잘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줄 손이 필요했다. 그저 은발의 마족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격려의 말 한마디를 해주길 바랬다. 어린애의 치기였을까? 각성도 했고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건만 나는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제발, 돌아봐 주세요. 제발!! 제발, 제발 돌아봐 달란 말입니다!! 제발!! 제발!! 당신이 돌아서 봐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영원한 내 동경의 대상입니다!! 당신이 망가지는 모습은 내가 바라는 내 미래가 망가지는 모습이란 말입니다!! 당신은 완벽한 모습으로 서 있어 주십시오. 그리고, 그리고 ……한 번만 돌아봐주십시오. 그래서 잘 했다, 잘했다 라고 그렇게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다른 건 필요없습니다. 다른 건, 다른 건 필요없습니다. 다른 건 필요없단 말입니다!! 그저…… 그저…… '잘했다' 고…… 그 한마디면……. 그저 단 한 번뿐인 당신의 인정만 있다면, 그렇다면…….」 "제기랄!! 빌어먹을!!" 나도 알고 있다. 이건 어린애 같은 집착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지만... 난 그런 집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시커먼 어둠이 바보같은 나를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시간들을 나는 파괴를 통해 보냈다. 파괴에서 얻은 능천사의 달콤한 혈향은 내게 공포에 가까운 쾌락을 선사했다. * * * * * * * * * * * * * * * * * * * 파괴에 파괴! 위선에 위선! 언제부터인가 가면을 쓰고 누군가를 대하기 시작했다. 방실방실 웃는 모습 뒤로 나를 감추기 시작했다. 더 노력하고 싶었다. 그 분께 조금이라도 성장한 나를 보여드리기 위해. 그 분께 나라는 존재도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그 분의 인정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받고 싶었기에.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이면서 어느 날부터인가, [마족 답지 않게 사교성이 넘친다]라는 말을 들을만큼 내가 스스로의 가면에 익숙해진 어느날. 나는... 정말이지 뜻밖의 인물을 하나 마주하게 됐다. 그것은 정말 우연찮은 만남. 어쩌면 의도되었을지도 모를 만남. 운명의 전환점이 되었던 만남.... 노란 꽃무늬 앞치마에 수건을 푹 눌러쓴 흑발의 마족 하나를.. 나는 마주하게 됐다.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그 녀석은...... * * * * * * * * * * * * * * * * * * "...이 자식이!!!" 커다란 목소리가 앞쪽에서 난다 싶었다.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칼레들린임을 알고 살짝 고개를 들었다. 과연 내 짐작대로 내 앞에는 칼레들린이 서 있었다. 그런데... 그 녀석은 나와 시선이 부딪히자마자 발을 들더니, 그것으로 그대로 내 얼굴을 강타했다. "크악!! 무슨 짓이야!" 나는 내 얼굴을 때린 녀석의 발을 보면서 외쳤다. 그러자 녀석, 칼레들린 엘버지운 피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놈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느끼한 웃음을 짓길래 응징을 했지." ……남이 진지하게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데 이런 짓을 하다니. 나는 내 얼굴을 지그시 밟아 누른 칼레들린을 보며 살짝 미간을 좁혔다. 녀석은 그런 나를 향해 다시 한 번 차가운 웃음을 흘리더니 저 멀리 앉아 있는 카민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녀석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길게 휘날리는 모습이 보인다. "……." 만남 이후로, 그다지 많은 시간이 흐르지도 않았는데…… 아니, 오히려 굉장히 짧은 시간동안만을 나는 저 녀석과 함께 보냈을 뿐이다. 나는 칼레들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저 놈은 나의 상당부분을 변화시킨 것 같다. [칼레들린 곁을 지켜라... 부탁...이다.] 아이에드님이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저 녀석에게 이렇게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을까? 아이에드님의 모습이 내 머릿속으로 얼핏 그려졌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사이로 이번에는 로시엔님의 얼굴이 살짝 떠올랐다. 나는 피식 한숨을 내쉬며 감았던 눈을 도로 떴다. "……로시엔님. 저 이래뵈도 꽤 애를 잘 보거든요? 칼레들린 하나 정도는 어떻게든 보살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저 멀리서 칼레들린이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로시엔님이 내게 부탁했던 그 은빛의 피어스를 단 채로 웃고 있는 녀석의 얼굴은 근심도, 걱정도 묻어 있지 않다. 그 것은 마족이라는 존재는 결코 가질 수 없는, 너무나도 순수함의 모습. "...걱정하지 마십시오, 류." 나는 아득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번에는 아이에드님을 향해 조그맣게 혼자말을 뱉어냈다. 걱정하지 마세요. 류, 당신께 로시엔님이 있는 것처럼…… 좀 귀찮고 시건방진 놈이긴 하지만, 제가 칼레들린의 옆에 있겠습니다. ".....[소멸의 그 날] 까지."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2-01-2002 00:35 Line : 411 Read : 559 [11] <패러디>knock! knock! knock!(1) -------------------------------------------------------------------------------- -------------------------------------------------------------------------------- Ip address : 218.146.234.18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림냥이 써주신 knock! knock! knock! 입니다. 재미있으니 끝까지 읽어보세요^_^ ----------------------------------------- -12시가 지나기 전엔 절대로 돌아와선 안돼! 알겠지? 밤12시다!! - 너무해!!! - 화창한 어느 날에 있었던 일- "으아아악!! 젠장할!! 나가아앗∼ 나가 죽어버렷!!!!" "겨우 그 정도로 흥분하긴…… 내가 네 알몸이라도 봤냐?" 오옷! 유리항아리가 날아옵니다. [와장창!챙강! ] 이런! 5731년 된 도자기가 박살이 났어요. 아∼아까워. "닥쳐! 감히……. 감히……. 나를 농락했겠다∼" 네에. 참으로……. 저 분의 눈초리는 무섭기도 하군요.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을 살짝 아주 사알∼짝 쓸어 넘기는 모양이 이 일대에 파란을 몰고 올 폭풍전야를 연상케 하는군요. 약간 상기된 볼이 발그레…… 아∼ 귀여우셔라! 그에 비하면 그 앞에서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로 '호오……놀라운 걸?' 하는 표정으로 계신 분은 능글맞기 짝이 없습니다. 하얗게 칠해진 두터운 문이 한 쪽만 열린 채 그 사이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이 애처롭군요……. 곧 아작이 날 자신의 운명을 감지했기 때문일까요? "……쿡…… 쿡쿡……. 귀엽던걸? 나름대로?" "……?" "아주 아주 잘 어울리던데……. 혹시 그 방면에 관심 있어?" 앗! 어디선가 천둥이 우르릉거리는군요. 음… 아무래도 그 소리의 근원지는 저 금발머리의 저 분 스팀 위 인 거 같아요. 어두 칙칙한 오로라가 저 분의 주위에 감돌고 있는 걸로 봐서 말이에요. 발그레하니 귀여우시던 안색은 이제 제자리를 찾아들었군요. "죽여버린다. 너 이 자식!" "이봐. 그건 내 거라구. 표절은 나쁜 짓이야." 놀려대는 사람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자 가느다란 검은 머리카락들도 하늘거리며 맞장구를 칩니다. 앗, 저기! 저기 저 분의 손에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기운은! ……아…… 저……. 잠시만요! 제가 아직 구경하고 있으니까 제가 달·아·난· 뒤에 다음을 계속해 주시겠…어…요? ……저……. 제 말이 안 들리시는 가보죠……? 이보세요. 나도…… 맞는다니까아?!! "너도 내 말투 따라하고 있잖아!!" "그런 거에 내가 맞을 거 같아?" 퍼엉! 아아악!!! ……이런 이런. 아까 전의 그 폭발에 휩싸이는 바람에 복도에서 정원으로 튕겨 나오고 말았군요. 조금 삭신이 쑤시긴 하지만 입은 살았으니 다행이네요. 에휴∼ 정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저 사람들이랑 사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거 같아요. 기분 나쁘다 싶으면 마구잡이로 집어던지고 깨부수고 소리지르고. 게다가 오늘처럼 마법까지 날려대니 옆에 있는 저까지 피해를 본 다니까요, 정말! 아참,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루비엘 드 마리쉐라이언가의 무남독녀 라빌린시아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아……. 제 이름이 이상하다구요? 제가 안 지어서 어쩔 수 없어요. 옛날 사람들 작명 솜씨가 다 그 모양이죠. (저희 할아버지가 지어주셨어요.) 그건 그렇고 성이 길다란 걸 보면 아시겠죠? 별 볼일 없긴 하지만 저도 귀족이랍니다. 그 덕택에 집은 무지하게 크죠. 영지도 꽤나 넓은 편이고. 뭐, 자랑이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거예요. 얼굴이 예쁘냐고 물으신다면 솔직히 말해서 예쁘진 않아요. 평범하기 그지없죠. 귀족의 영애 치고 구혼자가 열 명밖에 없으면 인물이 딸린다는 증거가 아니겠어요? 그나마 재산이라도 없었으면……. 아∼ 아찔하군요. 그러고 보니 아직 저 무시무시한 분들이 누구인지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저 분들은 어딘지 수상쩍은, 인간이 아닐 듯한 힘을 지닌, 돈 많은 손님들이랍니다. 얼마 전부터 저희 성에 머물고 계시죠. 지금 와선 후회스러운 일이지만 제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답니다. 그땐 그런 멀쩡한 모습으로 이러리 라곤 생각을 못했었죠. 그런데 손님이 어떻게 남의 성에서 아작을 낸다느니 깨부순다느니 할 수 있냐구요? 당연히 가능하죠! 전 손해배상만 제대로 해 준다면 성을 통채로 날려도 신경 쓰지 않아요. 뭐, 오늘 왕창 깨먹은 도자기들은 값을 따질 수 없는 귀한 것들이지만……. 할 수 없죠. 미안하다고 고개 숙여 사과를 하시는데 뭐라 할 수 있나요. 네? 도자기 값은 받았냐구요?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어떻게 그렇게 공손하게! 정중하게! 사과의 뜻을 표하면서 내미는 보상금을 거절할 수가 있겠어요! 당연히 받아야지!! 전 무척이나 예의가 바르답니다. 에…… 저……. 사실은……음음……. 아까 그 분들 한테는 비밀인데요, 그건 가짜에요. 저 손님들 오신 첫 날에 침대가 반퉁이 되어서 정원에 처 박혔었거든요? 그래서 그 다음 날로 귀중품들은 모조리 할아버지 영지로 옮겼어요. 저 분들은 오래 계실 예정이라고 하셨거든요. 호!호!호! 저 두 분의 성함은 뭐라더라……. 맞아! 칼과 데스라고 했던 것 같아요. 이상하게도 서로 상대편의 입을 막고 대신 가르쳐 주었는데요, 대신 이름을 소개 당한 사람은 굉장히 불쾌한 표정을 짓더라구요. '카아아아아아아아알' 이라던가 '데에에에에에에에스으'하는 식으로 죽죽 늘여 부르면서요. 그 때 얼마나 잡아먹을 듯이 서로 노려보는지……. 저는 잘 모르겠는데 그 이름들을 그렇게 부르면 놀리는 건가요? [ 콰당탕 쿵쾅!……콰직! 탱 더그르르 ] 위층에서 또 소리가 나네요. 짐작이 가시죠? 아마도 내일 있을 궁중무도회 준비중이신 가봐요. 그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거든요. 참……. 요란하기도하지. 저도 준비하러 가야겠어요. 꾸며봤자 거기서 거기인 얼굴이지만 황자 님을 뵈옵는데 평소대로 하고 가면 아버지께 혼나거든요. 그럼 피부를 위해서 자러 가겠습니다! 밤이 적당히 깊었습니다. 무도회의 밤이 말이죠. 오늘은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드레스를 질질 끌고 한 걸음 한 걸음 넘어질락 말락한 구두를 발 밑에 깔고 인형 노릇을 해야하는 고통의 그 날! 축복 받은 자라 일컬어지는 황자님의 21번째 탄신일입니다. 물론 그 분의 생일이라 괴로운 것이 아니라 파티가 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죠. 여하튼 저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 손수 주문하신 최고급 마차를 타고 왕성에 갔습니다. 그……. 칼과 데스라는 손님들께서는 먼저 가겠다며 엄청난 짐을 꾸리고 나가신 후였습니다. 덜컹대는 마차덕택에 엉덩이가 한 고생은 말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문질러대며 짜증을 피울 수는 없는 일. 인상은 있는 데로 찌푸리면서도 꿋꿋이 얌전했었던 저는 무사히 시종장의 호명과 함께 왕성의 홀로 들어섰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심지어 크리스탈 샹들리에에 그 빛을 더욱 강조하는 마법까지 걸어둘 정도인 무도회장은 엄청나게 밝고 화려했습니다. 맛있는 음식들이 눈앞에서 저를 유혹하는군요. 역시 이런 자리엔 최고급 궁정요리가 빠질 수 없겠죠. 그 음식들만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 주었습니다. 발로 툭툭 걷어차서 테이블 밑으로 숨긴 접시들이 더 이상은 안 된다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보내오는군요. 아아∼ 더 먹고싶어……. 눈치가 보여 많이 먹지도 못하고 아쉬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저의 뒤, 홀의 입구 쪽에서 '오∼'하고 감탄사를 빙자한 웅성거림이 있어 얼른 돌아보았습니다. 은은하게 푸른빛이 도는 드레스를 입고서 사뿐사뿐 걸어 들어오는 저 아가씨 때문인가 봅니다. 아……. 아가씨라고 하면 안된 댔는데……. 어쨌든 시간상 저 분이 오늘 오실 손님의 마지막이되겠군요. 놀라움의 감탄사들은 계속 계속 수를 증식해 홀을 가득 메우고 사람들이 점점 그 쪽으로 몰려들어 떠날 줄을 모르길래 저도 얼마나 미인이기에 저러나 싶어 틈을 비집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간신히 비집고 들어간 그 자리에서……. 목을 길게 뽑아들고 그 사람을 보자마자, 제 턱은 스트로 베리 머핀 50개를 한꺼번에 쑤셔 박은 것보다 더 크게 떨어져 내렸답니다. 눈이……. 눈이……. 눈이 부십니다! 오오오오∼!저 고고한 자태! 빛나는 피부! 손대면 녹아 내릴 것 같은 허니블론드! 똑바로 마주치면 금새라도 퐁당 빠져버릴 것 같은 깊고 맑은 푸른 눈동자! 자연이 창조한 가장 아름다운 색의 조화가 그 분에게서 비롯된 모양입니다……! 어디서 저런 미인이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요? 아닛! 이제 보니 그 옆에 한 명이 더 있습니다. 어쩐지 금발의 아가씨를 째려보는 표정을 짓고 두어 걸음 뒤에서 따라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저분도 정말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입니다. 어딘지 화가 난 듯한 도도한 표정이 서려있는 조그마한 얼굴! 까맣고 신비로운 눈동자와 별빛을 머금은 호수처럼 찰랑거리는 길고 곧은 머리카락! 그리고 황금빛의 아가씨보다 더 달콤한 색을 띄는 뽀얀 피부! 새초롬하게 다문 입술은 하얀 피부와 검은 머리칼에 의해 더욱더 붉은빛으로 반짝이는 군요. 오오∼∼실로 천사의 모습입니다……!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지닌 그 두 사람에게 모든 빛이 쏟아져 내리는 듯 밝고도 찬란하게 주변이 빛나고 있습니다. 너무 예찬적인거 아니냐구요? 그럴 리가! 저는 이 장소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객관적으로 말씀드린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오오오오오오오오∼" 라던가, "우와아아아아아아아∼" 또는, "어머어머어머어머어∼∼" 같은 말밖에 못하고 있는데요, 뭘. 그래도 전 제대로 된 문장을 구사하고 있잖아요? 그래도 허풍 같다고요? 그럼 와서 봐요!! 내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직접 확인해 보라구요!! 아..흥분해버렸네. 음음, 진정 해야지……. 장담하건대 오늘 이 무도회의 주연은 황자님이 아니라 저 두 여자 분일 겁니다. 역시……!! 주변에 늘어선 남자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군요. 하긴 그녀들이 지나가는 길 양편으로 사람들이 줄을 짓고 서서 홀의 중앙까지 길이 만들어졌을 정도니까요. 바로 옆에 있는 이 깃털머리 공작님은 제가 눈앞에 손을 흔들어도 멍한 것이 상상의 나래를 너무 넓게 펼친 거 같네요. 이봐요들! 꿈 깨라구요. 저 아가씨들도 분명 황자님의 신부 후보일 텐데 눈독은 들여서 뭘 해요? 하지만 이런 말은 귓가에 가 닿지도 못 하겠네요. 그만큼 저 아가씨들은 아름다우니까. 사람들이 만든 길 사이로 유유히 걸어가며 간혹 다른 사람들을 향해 가벼운 고개 짓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금발의 아가씨는 옅은 미소를 하얀 깃털 부채로 조심스레 가리며 곁에 선 다른 아가씨에게 소곤거립니다. 뾰루퉁하던 검은머리 아가씨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손을 바들바들 떠는군요. 저는 그 아가씨가 저런 엄청난 표정으로 무얼할까 싶어 뚫어져라 쳐다보았습니다. 떨리던 손은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꽈악 움켜쥐고!! 다음 순간, 살짝 들어올립니다. 그리곤 우아하게 걸음을 내딛는군요. 엥? 겨우 저런 일에 손까지 덜다니. 저 아가씨는 굉장히 수줍음이 많은 것이 틀림없어요. 저런 사소한 동작을 함에 있어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저토록 힘들어하니까요. 그런거겠죠? 이제 팡파레가 울리네요. 아마 올 사람은 다 온 모양이예요. 황자님이 모습을 드러낼 기척을 요란스레 내고 있으니. 홀을 가로질러 붉은 융단이 다르륵 굴러 펼쳐지고 왕실악단의 호화로운 연주곡이 울려 퍼집니다.'트뤼크루안' 이라는 외국의 행진곡이군요. 행진곡으로는 드물게 17현 하피실이 사용된 우아한 선율의 곡입니다. 멀리 홀의 끝에서부터 유유히 걸어오는 저 분이 황자님이신가 봅니다. 아직 엄지손톱 만하게 보일 만큼 멀리 계시지만 갈색 머리와 화려하게 빛나는 의상만은 확실히 띄는군요. 옷은 온갖 황금장식으로 뒤덮여 옷이 지닌 본연의 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백성들의 피땀을 쥐어 짜낸 세금이 저런 화려하고 현란한 장식에 사용된 것을 알면 백성들이 굉장히 영광스러워 하겠군요, 그렇죠? 아니……. 아니 아니……. 이런 말도 쓰면 안 된다고 그랬는데……. 자꾸 까먹어서 큰일이에요. 제 말투야 어찌되었건 저 축복 받은 황자님은 말 그대로 축복 받은 차림새 로 홀에 내려서 무도회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모두 저를 위해 이 자리에 와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저한테는 감사하지 않으셔도 돼요. 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말들은 흘려듣는게 좋겠죠? 자, 저는 지금부터 소가 될 테니까 경전이던 망발이던 마음대로 읊으세요. "그럼 제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건배합시다." 술 마시는 거랑 제국의 번영이 무슨 상관인지……. 그 길던 황자님의 말씀이 끝나고 이제는 한 사람한사람 출석 체크할 시간입니다. 그 출석체크란 다름이 아니라 황자님이 홀을 한 번 쭈욱 훑으면 사람들이 저마다 튀어나와서 누구누구가 왔습니다하고 인사드리는 걸 말하는 겁니다. 그 지루한 시간도 끝나자 그제서야 무도회의 시작을 선포하시는 황자님. "여러분, 오늘 이 아름다운 밤을 마음껏 즐겨주시기 바랍니 다. 네에∼ 잘 놀다가겠습니다……. 정말이지 저는 황자님껜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절∼대로 악의 담긴 뜻으로 궁시렁대는게 아니라구요……. 정말,정말,정말로요. 음악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부드러운 춤곡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부터는 남녀가 쌍쌍으로 무리 지어 빙글거리며 홀을 누비는 시간입니다. 저는 춤을 못 추니까 구석에 얌전히 있어야 할 시간이죠. 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군요! 젊은 청년들이 한 곳을 향해 맹렬히 질주하고 있습니다. 나란히 달리는 사람들을 어깨로 밀어 젖히면서 말이죠. 저 사람들이 아까전 홀입구에서 마지막으로 들어선 사람들을 본, 제대로 된 정신상태를 가진 청년들이라면 반드시 그 곳으로 달려가는 것일 겁니다. 그 두분에게로.한바탕 어수성함이 휩쓰고 지나간 자리에는 짝이 없는 숙녀 분들이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며 서 계시네요. 무도회를 주선한 대신들은 물론 황자님마저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아, 아니네요. 황자님은 오히려 호기심이 일어 주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십니다. 걸음걸이도 당당히 그 사랑의 노예들 틈바구니로 끼여든 황자님은 잠시 뒤 무릇 청년들의 따갑다 못해 칼이 되어 날으는 질투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내며 두 미인을 양편에 거느리고 걸어 나오셨습니다. 왼 편에는 긴 머리를 위로 틀어 올려 허리까지 가지런히 내려오도록 만든 허니블론드의 아가씨가, 오른 편에는 그저 그 자체만으로도 어떤 장식도 필요 없는 결 고운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다크 블랙의 아가씨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이제 모두의 관심사는 황자님께서 어떤 아가씨를 만나실 것인가가 아니라 저 두 아가씨 중 어느 분을 선택하실 것이냐가 되었군요. 빙 둘러싼 사람들의 번뜩이는 시선은 황자님께서 춤을 추기 위해 손을 먼저 놓을 아가씨에게로 쏠릴 겁니다. 아∼ 검은머리의 아가씨를 택하셨군요. 남아버린 금발의 아가씨에겐 정말 ―아……. 다른 표현은 충분치가 못해서 어쩔 수 없군요…….―쫙 빼 입은 귀족들이 개! 떼! 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아가씨는 하얀 부채로 입가를 조신하게 가린 채 춤추고 있는 두 사람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부러운 눈빛은 아닌 듯하고. 약간……. 걱정스러운 듯한 눈빛입니다. 굉장히 걱정스러운 모양이지요.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니 말이에요. 그러나 황자님을 빼앗길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온 아가씨가 염려스러운지 아가씨만 쳐다보네요. 물론 이런 건 저의 경이로운 눈썰미만이 감지해낼 수 있는 미묘한 것들이랍니다. 이 아가씨는 왜 다른 아가씨들처럼 질투하지 않는 걸까요? 그만큼 친한 사이일까요? 황자님을 양보할 만큼? 전 잘 모르겠네요.그저 황자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겠죠. 방금 춤곡이 뚝 그쳤습니다. 이제 다른 곡으로 바뀔 건가봐요. 황자님은 파트너를 에스코트하여 금발아가씨 곁에 섰습니다. 약간 발을 절면서요. 흐흠……. 아마 굉장히 열심히 추셨는지 하얗고 갸름한 얼굴이 온통 땀으로 젖어 계셨습니다. 같이 춤을 추셨던 아가씨는 어쩐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금발의 아가씨를 바라보시는 군요. 시선을 마주한 두 아가씨는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무언가를 주고받은 듯 작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뭔가 비밀스런 구석이 있는 아가씨들이군요. 황자님의 얼굴은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 침착해 보입니다. 아쉬운 표정으로 파트너를 바꾸시네요. 흥. 그러고 보면축복받은 사람이란 말이 맞긴 맞군요. 두 명의 미인 사이에서 괴로워 하고있으니 말이에요. 밝고 경쾌한 곡이 홀안에 울려 퍼지고 두 분은 미끄러지듯 완벽한 스텝으로 춤을 춥니다. 오오∼정말 춤을 잘 추는군요. 아까 전의 그 분과는 달리 정말 굉장히 능숙한 솜씨입니다. 주변을 둘러싸고 그 두사람을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 그 경이로운 춤솜씨가 부러운지 턱을 목에 걸고서 바라보고 있네요. 검은머리 아가씨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팔짱을 처억 낀 채 눈을 내리깔 수 있도록 턱을 살짝 치켜들고서요. 그 덕택에 곁에 남자들이 다가서지를 못 하는군요.모두들 삐질 거리며 식은땀만 흘려댑니다. 아이∼∼불. 쌍. 해. 라……! 다른 사람들은 춤도 춰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들러리를 서 있는 시간이 서서히 종결되어 갑니다. 곡이 거의 다 끝났거든요. 황자님의 얼굴은 완전히 꽃이 피었군요! 벌겋게 물든 모습이 아까 전보다 훨씬 심합니다. 음악이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자두 사람은 춤을 멈추고 마주서서 잠시동안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가씨는 제 쪽에서 보면 뒷모습만 보여서 도무지 어떤 표정일지 알 수가 없지만 황자님은 완전히 푹 빠지신 모양입니다. 그녀의 손을 꼭 쥔 채 사람들을 향해 상기된 표정의 황자님이 입을 여셨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말이 나올 것 같죠? "이 자리에 함께 하고 계신 여러분! 저는 드디어 저의 여신이 될 여인을 찾았습니다! 지금 당장 이 아름다운 숙녀와 결혼식을 올릴 테니 축하해 주십시오!" "ㅇ....!" 황자님의 입술이 벙긋거리며 발음하나를 만들고 그 입모양대로 성대를 관통한 그것이 소리가 되어 밖으로 나오려는 바로…… 그 순간! [ 땡∼ 땡∼ 땡∼] 12시 종이 울렸습니다!! -------------------------------------------------------------------------------- Back : 12 : <패러디>knock! knock! knock!(2) (written by 카르민) Next : 10 : 100회 이벤트 결과 발표~!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0190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12th January 2002 20:40:13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 반마족 칼레들린의 센티멘탈 아래 글의 저작권은 작가분께 있으며, 무단 링크나 작자의 허락없이 퍼가는 것을 금합니다. -------------------------------------------------------------------------------- Name : 카르민 Date : 12-01-2002 00:37 Line : 128 Read : 386 [12] <패러디>knock! knock! knock!(2) -------------------------------------------------------------------------------- -------------------------------------------------------------------------------- Ip address : 218.146.234.180 Browser version : Mozilla/4.0 (compatible; MSIE 5.5; Windows 98; Win 9x 4.90) 혼자 서 있던 검은머리 아가씨의 얼굴에 처음으로 화색이 돌고 금발 머리 아가씨는 황자님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갑니다. 한 손에 드레스자락을 아무렇게나 거머쥐고 두 여인은 매우 빠른 속도로 무도회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파라락……. 어디서 새가 활개치는 소리가 들려오는군요. 황자님의 입을 쩌억 벌린 채로 돌이 된 얼굴과……. 사람들의 얼빠진 표정…! 저는 마음껏∼! 그 아름다운 무도회를 즐겼습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뭘요! 다음에 또 머물 일이 있으시면 저희 성으로 와서 묵어 가세요." "아하하. 만약 머물 일이 있다면요." "가자." "그래……. 그럼, 안녕히……." 두분의 손님은 무도회 다음 날 떠나셨습니다. 단단히 삐진 칼이라는 분을 방금 저에게 인사하신 데스라는 분이 달래면서 말이죠. 흐음……. 근데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오셨다는 분들이 어제 무도회에 왜 나타나지 않으신 걸까요? ……혹시, 아세요? ---------------- 뒷 이야기 ------------------- "으윽!! 내가 네놈 때문에 날뛰지만 않았어도!!" 칼레들린은 하도 갈아대서 이제는 남아 있지도 않을 것 같은 이를 또다시 갈아대며 울분을 터트렸다.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 발길에 채이는 것들은 모조리 걷어차며 화풀이를 해댄 통에 그가 걸어온 길 위는 빗자루로 싹싹 쓸어놓은 것 같았다. "내 탓이라고 하지마.아이에드님의 꽃밭으로 몰고 간 건 네 녀석이었다구." "원인제공자는 너였잖아!!내가 이런 꼴을 당한 건 전∼∼ 부 네탓이란 말이다!!" 라이메데스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뭐……. 한 번쯤 겪어서 나쁠 일은 없잖아……?" "쳇! 그거야 그런 취미 있는 너한테나 그렇지! 나 같이 정상적인 마족에게는 아주 불쾌한 일이라고!" 칼레들린이 눈썹을 산 모양으로 일그러뜨리며 마족으로서의 드높은 긍지를 뽐내자 라이메데스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반박했다. "그런 취미 없다니까?!" "흥! 그럼 그 날 미리 드레스 입어보고, 가발을 골라 쓰고 , 거울 앞에서 취했던 그 괴상한 포즈들은 다 뭐지?" 다 안다는 듯한 얼굴을 라이메데스의 얼굴 앞에 바싹 들이대며 칼레들린이 따지고 들었다. "……그……. 그거야, 내가 워낙에 완벽을 추구하다 보니 그런 거 아냐!" 은근히 달구어지는 라이메데스의 하얀 얼굴. "웃기고 있네! 혹시 니가 아이에드한테 시킨 거 아냐? 이런 벌 내리라고?"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더 이상 아니꼬울 수는 없다는 자세로 당당하게 말하는 칼레들린의 태도에 여태껏 잘 달래며 오던 그도 좋지 못한 본 성질을 발휘하려했다. 물론, 속으로만 말이다. "아이에드님을 그렇게 부르다니! 당장 취소해!" "말 돌리긴. 솔직히 시인해. 너 전에도 이런 짓 하면서 돌아 다녔지? 어제 그 넋빠진 놈에게 눈웃음치는 거 보니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던데?" 드디어……. 삐진 여인네의 표본으로 전락하고만 칼레들린. 라이메데스의 머릿속을 순간적으로 한가지 섬광 같은 무언가가 관통했다. "이 자식이……… 아! 잠깐…… 호오? 너, 질투했냐?" "……뭐.…… 뭐야?! 누……. 누…… 누, 누가!!" 극도로 당황한 나머지 버벅거리는 칼레들린을 보며 라이메데스는 감 잡았다는 듯 빙글거리며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쿡쿡. 그럼 그렇지. 암만 그래도 그 황자란 놈이 자기말고 날 선택한 게 기분 나빴던 거야……." "누……누가 말이냐!!!" 능글맞게 웃고있는 라이메데스 앞에서 칼레들린의 얼굴은 발악적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모조리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으니……. "차 더 드시겠어요, 아이에드님?" 청발의 마족은 자신의 앞에서 단정한 자태로 흰 색 찻잔에 담긴 차를 홀짝이는 은발의 마족에게 물었다. 보라색 눈동자가 무척이나 신비로워 보이는 은발의 마족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래. 그건 그렇고 저 둘, 너무 지나치게 여장이 잘 어울리는군. 충고 고마웠어. 로시엔. 정원을 망가 뜨린 벌로는 저만한 게 없을거야. 하하하핫!" 둘은 마주보고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 * * 어때요? 재미있지요? 아아, 림냥, 감사해요!! 그런데... 답멜에선 못 물어봤는데. 왜 제목이 knock! knock! knock!입니까? -------------------------------------------------------------------------------- Next : 11 : <패러디>knock! knock! knock!(1) (written by 카르민) -------------------------------------------------------------------------------- -------------------------------------------------------------------------------- Total access : 130191 , Current date and time : Saturday 12th January 2002 20:40:22 -------------------------------------------------------------------------------- Copyright 1998-2002 HolyNet .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