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1 1. 미친 아가씨의 꿍꿍이 =========================================================================                            변방의 보잘것없는 영지 오를린. 이곳 영주의 차녀 로테가 황궁으로 간다. 미모 하나로 황태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로테는 반드시 제국의 황후가 되고 말겠다는 야심을 다졌다. 이 야심이 그리 허황한 것은 아니었다. 황태자는 로테를 황태자비 후보 자격으로 황궁으로 데려가기로 했고, 그 조건으로 오를린 영지를 이웃 영지와 통합하는 혜택을 내렸으며 오를린 영주의 직위도 높여주는 등 로테를 향한 애정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황태자비 후보를 데려가는 것에 황태자가 저 정도의 공을 들이는데 앞으로 모든 것은 로테의 처세에 달렸으리라. 로테의 야심이 실현되리라 믿는 오를린 일족은 로테의 황궁 행을 환영했다. 단 한 사람, 로테의 쌍둥이 언니인 마리를 제외하고. 마리의 호위 기사인 하이너는 오늘도 마리를 지키고 있었다. 말이 ‘지킨다’이지 그저 남자친구나 된 듯 곁에 서서 말동무를 해주는 것뿐이었다. 하이너는 하품하는 아가씨의 얼굴을 멀뚱히 보았다. 아가씨는 쌍둥이 동생이 출셋길에 오른다 해도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하이너는 특유의 건방지고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아가씨께서는 어째서 로테 아가씨를 배웅하시지 않습니까?” 하품을 마친 마리는 기지개를 켜며 연회장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배웅은 앞날이 밝은 사람에게만 하고 싶은 법이거든.” “예?” 하이너는 아가씨가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배웅은 앞날이 밝은 사람에게만 하고 싶은 법이라. 그렇다면 로테 아가씨의 앞날이 어둡단 말인가? 어쩌면 마리 아가씨는 쌍둥이 동생의 출셋길을 질투하는 건지도? 아, 물론 마리 아가씨가 누구를 질투할 정도로 열등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이 훤히 보이기라도 한 것일까. 마리가 하얗고 고운 손으로 하이너의 탄탄한 엉덩이를 탁 치며 째려보았다. 하이너는 아가씨에게 엉덩이를 맞는 모습이 누구에게 들킨 것은 아닌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인상을 썼다. 마리가 나긋나긋한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구시렁거렸다. “이봐, 하이너. 그렇게 나를 질투쟁이로 보지 마! 난 단지 희미하게나마 앞날을 볼 수 있는 것뿐이니까.” “…….” “그러니까 로테의 앞날은……, 으, 차마 언니로서 말할 수 없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언니가 되셔서 진즉 동생 분을 말리시지 않고요.” “하지만 로테가 원하는 길이니까.” “어이쿠! 그렇죠, 참.” 하이너는 아가씨가 괴상한 소리를 하는 것에 대충 대답했다. 마법이나 연금술에 빠진 아가씨는 이따금 엉뚱한 짓을 했다. 지금 이렇게 미래를 보는 듯 말하는 것도 어쩌면 점성술이라는 신뢰 못할 요술에 빠져서일지도 몰랐다. 갑자기 마리가 하이너의 귓가에다 대고 소곤거렸다. “저기 하이너, 내가 알아둔 비밀클럽이 있는데 놀러 가지 않을래?” “비밀클럽이라니요?” “먹고 마시고 노는 곳이야.” 하이너는 무례하게 코웃음을 쳤다. 이 좁은 영지에서 먹고 마시고 노는 비밀클럽이 있다니. 그런 클럽이 있다면 진즉 알려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술집이군요? 그냥 평범하게 술집이라 하시면 되잖습니까?” “평범하진 않아. 그 집은 마시면 기분 좋아지는 술이 있지. 그것만으로도 특별하지 않아? 따라와. 오늘은 내가 앞장서지.” 원래 술이란 게 마시면 기분 좋아지는 것이 아니었던가? 하이너는 의아해하며 물어보았다. “아가씨께서 쏘시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럼 박봉의 호위 기사가 내란 말씀입니까?” “괜찮아. 내가 술 취한 놈 하나 삥 뜯으면 돼. 어쨌든 마시면 기분 좋아지는 술을 기대하라고.” 하이너는 아가씨가 마술, 연금술, 점성술에 이어 마약에도 흥미를 뻗친다고 걱정하며 뒤따라 나섰다. 어느덧 오후는 지나갔고, 별빛이 아슴푸레하게 밤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 태양이 사월의 노란 마거릿처럼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하이너에겐 닿지 않았다. 하이너가 머무는 방의 햇볕이 완전히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하이너는 무의식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어제 있었던 일이 하나하나 기억났다. 로테 아가씨가 황도로 떠나고, 마리 아가씨와 연회장에 남아 노닥거리며 놀다가, 비밀클럽이라 불리는 술집에……. ‘그래, 태어나서 처음 해본 음주였지.’ 얼떨결에 아가씨의 권유로 술이란 걸 마셔보았다. 평범한 술이 아닌 게 분명했다. 평범한 술이라면 한 모금 마시기가 무섭게 기절을 할 수는 없다. 아가씨께서는 분명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지만, 기분이 좋아질 새도 없이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기억 또한 사라져 불안하기만 했다. 아가씨는 호위 기사에게 괴상한 술을 먹여서 대체 무엇을 하려 했던 걸까. 아니, 이미 뭔가를 하셨을지도. 도무지 그분의 장난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향기가 수상했다. 봄 라일락의 달콤한 향기와 여름 설익은 과일의 새콤한 향기가 반반 섞여 기분을 좋게 했다. 아마도 아가씨의 몸에서 자주 나는 향기가 더욱 진해진다면 이런 향기일 것이다. 자연스럽게 야릇함이 온몸을 감쌌다. 하지만 향기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눈을 뜨고 천장을 마주 했다. 평소 영주 님 저택의 가장 소박한 방에서 잠이 들었는데, 그렇다면 그 소박한 방의 흙 천장이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흙 천장 대신 회칠을 한 새하얀 천장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하이너는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그래도 하얀 천장이었다. ‘내 방이 아니잖아!’ 하이너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사지가 묶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알몸으로. ‘나, 납치?’ 하이너는 급기야 입 밖으로 놀란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맙소사…….”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매일 밤 온몸을 받쳐주던 지푸라기로 만든 투박한 침대의 느낌이 아니었다. 대신 목화솜이 잔뜩 들어간 고급 침구가 등을 부드럽고 폭신폭신하게 안아주고 있었다. 햇볕을 완전히 차단한 커튼도 부자들이나 쓴다는 고급원단이었다. 누구의 방일까. 답은 아가씨의 몸에서 나던 이 향기에 있겠지. 그렇다. 이곳은 바로 마리 아가씨의 방이다.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술에 취해 아가씨의 방에서 잠을 자고, 그것도 모자라 알몸으로 사지가 묶여 있다니. 하이너는 자신이 술에 취해 몹쓸 개처럼 굴지는 않았는지 몹시 두려웠다. 아가씨의 방에 들어온 것도 호위 기사로서의 선을 넘은 짓인데 알몸으로 있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이제 와 말하건대 사실 자신은 정식 호위 기사가 아니었다. 아가씨가 영주님께 ‘하이너를 내 호위 기사로 삼을 거야!’라고 악다구니를 쓰셔서 못 이기는 척 호위 기사로 있지만, 기사 자격도 없고 그저 아가씨의 보모나 다름없는 일을 맡은 하인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이 자리가 과연 어제처럼 아가씨와 노닥거리며 술집에 들러 노는 그런 만만한 자리이기만 한가?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간혹 자신을 질투하는 무리가 수군거리곤 했다. ‘아가씨의 밤 시중이라도 드냐?’, ‘촌구석 영주 딸에게 호위 기사가 웬 말이냐?’, ‘영지 사람들의 세금 도둑!’ 이라고. 그러나 자신은 도리어 그들에게 따지고 싶었다. 아가씨의 밤 시중을 든 적은 없다고! 호위 기사의 일이란 게 당신들 생각처럼 그리 쉽지만은 않다고! 단 사흘만 아가씨의 ‘호위 기사’ 노릇 좀 해보라고! 매달 200 자일(대륙공용 화폐)의 월급을 받는데 그 월급이 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호위 기사 노릇은 힘들다고! 첫째로, 아가씨가 사고를 너무 자주 치기에 그 수습을 하는 것이 성가셨다. 연금술, 마법에 광적으로 빠진 아가씨는 보리밭에 마법진을 그리다가 제 몸에 불을 붙인 적도 있었고, 우물 근처에서 실험하다가 폭발사고를 일으킨 적도 있었으며, 듣도 보도 못한 재료를 모으기 위해 괴물들이 우글대는 소용돌이 산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속을 썩인 적도 있었다. 물론 결정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준 적은 없었다. 보리밭은 남의 소유가 아닌 영주님 소유이며, 폭발 사고가 일어난 우물도 영주 님 소유였으니까. 그렇지만 호위 기사마저 위험에 말려들게 하니 호위 기사의 처지에선 충분히 힘들다고 할만 했다. 가끔 위험수당을 200자일 더 받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을 때가 많았다. 둘째로, 성적으로 ‘자유로운’ 아가씨가 종종 치정 사건의 중심에 서는데, 그걸 일일이 중재하기가 성가셨다. 치정 사건의 인물들은 대부분 아가씨가 주로 활동하는 연금술, 마법 모임의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라는 연구나 실험은 하지 않고 매일 아가씨의 애인이 되기 위해 피의 결투를 해대 영주민들을 불안하게 하고 아가씨의 신변 또한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가씨는 그들과 침대를 공유했을지언정 마음을 공유한 적은 없다고 속 편한 소리를 해댔지만, 자신은 호위 기사로서 그 미친 남자들을 원래의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려 놓아야 했으므로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셋째로, 이건 사심이 담긴 말이 아니라 객관적인 표현인데, 아가씨가 너무 예쁘다. 아가씨의 노을빛 같은 금발과 보석 같은 청록색의 눈을 보고 있으면 할 말을 잊고 멍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녀와 똑같이 생긴 쌍둥이 동생 로테가 미모 하나로 황태자의 마음을 빼앗은 것만 봐도 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굉장한 미모의 아가씨를 하녀인 앤보다 더 지척에서 자주 모신다는 것은, 예쁜 여자에게 눈이 가고 눈이 가길 넘어 손도 닿고 싶어하는 단순한 남자에겐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가씨는 언제나 다른 남자들에게 그러듯 호위 기사에게도 야한 농담을 수시로 던져대고 야릇한 몸 장난을 쳤다. 두터운 신분의 벽이 있고 본능과 마음을 헷갈리지 않겠단 호위 기사로서의 결심 덕분에 하이너는 그 아슬아슬한 시간을 인내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같은 신분에다 아가씨가 조금은 더 진지한 사람이었다면? 아가씨와 자신은 진즉 사고를 쳐도 쳤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리도 성가시고 힘든 호위 기사 노릇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선을 넘은 적이 없는 것에 스스로 대견해하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아가씨의 방에서 잠을 자다니!’ 하이너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고개를 돌리니 아가씨의 초상화가 보였다. 이곳은 아가씨의 방이 확실하다. 왜 알몸으로 사지가 묶여 있는가. 혹시 어젯밤 술을 마시고 무슨 죄를 지어 벌을 받나? 죄라면 어떤 죄? 혹시 자기가 아가씨를… 아가씨를 이렇게 저렇게……. 머릿속에 평생 단 한 번도 그려본 적 없던 음란한 그림들이 폭발적으로 그려졌다. ‘말도 안 돼.’ 지금 소인들이 작은 삽으로 내 뇌수를 파내는 건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머리가 이토록 지끈거릴까. 하이너는 차라리 다시 잠이 들기로 했다. 현실도피의 욕구가 얼마나 강렬한지 삼십 초 만에 잠들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하이너는 가까이에서 들리는 걸음 소리에 눈을 떴다. 아가씨가 손수 유리 대야와 면포를 준비해 침대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하이너는 지하로 꺼져버리고 싶었다. 알몸을 보이는 수치심에 살과 뼈가 떨리는데, 그러면서도 희한하게 아가씨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젠장, 왜 저리 예뻐?’ 언제나 자유롭게 풀어헤친 금빛 기다란 머리카락은 가을보리 밭의 물결을 보는 듯 살랑거렸고, 진한 청록색의 눈동자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바다의 색깔을 상상하게 하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 같은 저 사뿐한 걸음걸이는 또 뭔가! …… 하지만 이런 감상은 어디까지나 사기다. 아가씨가 흑마법이라는 술수로 모든 남자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기 때문에 겪는 증상이라 여기며 하이너는 고개를 돌렸다. 마리는 유리 대야를 곁에 두고 침대에 앉았다. 유리 대야에 든 물의 은은한 향기와 하이너의 몸에서 나는 진한 땀 냄새가 섞이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남자들에게서 맡았던 땀 냄새보다 역하지가 않아 신기했다. 그러나 그녀는 하이너를 놀리는 취미가 있어서 괜한 수모의 말을 툭 던졌다. “으으, 지독한 냄새. 내가 좀 잘 씻고 다니라고 했지?” 그러더니 그녀는 하이너의 얼굴부터 시작해 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목욕 대신 몸을 깨끗이 하는 행위였다. 섬세한 손짓이 목을 지나 굵은 쇄골까지 이어지자, 하이너는 난데없이 가슴에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그는 묶인 몸을 억지로 비틀어대며 침음하였다. “으, 으…!” 마리가 귀여운 생물을 보듯 웃었다. “오오, 하이너! 그런 소리 내니 야한데?”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마리는 대답하지 않고 하이너의 널따란 가슴팍에다 면포를 문질렀다. 면포가 하이너를 야릇하게 자극할 때마다 그는 눈을 세게 감고 입술을 질끈 깨물어버렸다. 당황하는 그와 달리 마리는 청록색 눈을 빛내며 하이너의 늘씬한 몸을 여유롭게 훑고 있었다. 영지 남자 중 하이너만큼 수려한 외모를 가진 남자가 있었던가. 기사 시험을 포기했어도 검 수련을 단 하루도 쉰 적이 없고 먼 동양의 무술 서적도 독학으로 수련하는 터라 근육이 균형 있게 잡혀 있었다. 농번기에 농민들을 자주 돕는 덕분인지 햇볕에 잘 탄 피부색 또한 건강해 보였다. 흔치 않은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는 사람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었고, 또한 여태 단 한 번도 구경한 적 없던 그의 배꼽 아래도……. 꿀꺽! 하고 소리가 났다. 하이너가 기겁했다. “지금 침 삼키셨습니까!” “군침이 돌아버렸나…. 호로록.” “무슨 더러운 짓을! 몸 닦으면서 쓴 물을 퍼마시다니요!” “어머! 내가 그랬나….” “1초 전에 그러셔놓고!” 만담 아닌 만담을 하며 여유를 보이지만, 하이너는 지금 부끄러워서 오를린 강물에 뛰어들고 싶었다. 아가씨의 손길이 몸에 닿을 때부터, 아니, 아가씨의 시선이 몸에 닿을 때부터 몸이 뜨거워 미칠 것 같았다. 혈관을 도는 피가 들끓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분명 어제 술에 장난을 치신 거야!’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이런 수치심의 바다에서 아가씨가 더 큰물을 붓기 시작했다. 아가씨의 오월 싱싱한 나뭇가지 같은 가느다란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칙한 손가락은 호위 기사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꽉 잡고 있었고, 아가씨의 발칙한 눈은 그 끄트머리를 빤히 보고 있었다! “우왓, 하이너. 계속 커지는군.” “감사합…… 아니, 그만 보십시오!” “뭔가가 나오는데?” “기분 탓일 겁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00002 1. 미친 아가씨의 꿍꿍이 =========================================================================                            발기한 물건이 말간 액을 토해내자 마리는 또 다시 하이너를 놀렸다. “저기, 새벽에 침대보를 갈았거든. 그러니 어젯밤처럼 또 오줌 싸면 안 돼. 알았지?” 맙소사. ‘또’ 오줌 싸면 안 된다고? 그럼 어젯밤에 이 침대에서 실례했단 말인가? 하이너는 이런 장소에서 실수하게 한 아가씨를 진심으로 죽이고 싶었다. 미쳐 날뛰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리는 면포에 다시 물을 적셔 하이너의 성기를 정성껏 닦아주었다. 면포의 부드러운 촉감, 그것보다 더 부드러운 손가락의 촉감에 하이너가 으으! 하고 소리를 냈다. “쉬잇, 그런 소리 내면 야하다고 했잖아. 일부러 내는 거야?” 하이너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따져 물었다. “아가씨, 진짜 제게 왜 이러십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마리는 대답 대신 하이너의 묶인 두 다리를 살짝 들어 배설 부위까지 닦았다. 가장 주름이 많은 부위를 거침없이 닦는 손길이 하이너를 너무나 부끄럽게 만들었다. 하이너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침음은 거의 우는 소리에 가까웠다. “흐윽… 대체… 제가 왜 이런…….” 긴장한 주름들이 합심하여 꽉꽉 조이는 것만 같다. 아가씨는 정말이지 너무 하신다. 평소에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고 수컷 특유의 음란한 망상을 해대곤 했어도 늘 망상에 그쳤을 뿐 실행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어찌 된 게 그런 자기와 달리, 아가씨는 아가씨와 호위 기사 사이의 선을 지키는 덴 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직 자신은 육체적으로 순결한 몸인데! 동정에게 이런 기습 공격은 너무 하지 않은가? 어쨌거나 아가씨는 귀족의 신분이니 마음대로 한다 이건가? ‘난 당신의 호위 기사이지, 성 노리개가 아니라고. 진짜 당신이란 아가씨, 미친 아가씨……!’ 하이너는 마리를 노려보았다. 마리는 더러워진 면포를 버리고 새 면포를 물에 적셔 하이너의 허벅지와 다리를 닦기 시작했다. “네 허벅지와 다리가 아주 튼실하구나. 하이너.” “왜 이러시냐 물었습니다!” “흐음, 일종의 테스트랄까?” 하이너가 무슨 테스트냐고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마리가 면포로 하이너의 발가락을 간질이듯 닦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자극받는 건 발가락인데 어찌 된 게 몸에서 가장 주름이 많은 부위가 자극을 받는 듯 꽉꽉 조이기 시작했다. 발가락 사이사이를 오가는 강아지풀 같은 촉감에 하이너는 몹시도 괴로워했다. “으, 제발! 으, 그만! 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자꾸 이러시면 아가씨를 발로 차버릴 수도 있어요!” “그걸 막으려고 네 사지를 묶어두었지요!” 마리는 하이너의 머리부터 발끝을 전부 깨끗이 닦았다. 그러고는 중대 임무를 마치기라도 한 듯 이마를 닦았다. 하이너는 그런 몸짓을 상당히 우스꽝스럽다고 보다가 갑자기 아가씨의 눈빛이 이상하여 긴장했다. 마리의 반투명한 청록색 눈동자가 괴기스러운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우리 귀여운 하이너에게 테스트를 시작해볼까.” 아아, 저런 미소를 뭐라 이름 붙여야 할까. 하이너는 여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가씨의 야릇한 표정을 보았다. 육욕으로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남자의 중심을 향해 있었고, 복숭앗빛으로 발그레한 두 뺨은 남성의 페로몬을 느끼는 듯 잘게 떨렸으며,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사이는 금방이라도 뭔가를 삼킬 것만 같았다. ‘그래, 저건… 저건…… 어떤 창녀도 짓지 못할 음탕한 표정이야!’ 그 순간, 마리가 고개를 숙였다. 면포를 놔버린 그녀는 하이너의 물건을 한입에 삼켰다. “허헉……!” 태어나 처음 겪는 행위에 하이너는 경악했다. 아가씨의 따스하고 축축하고 말랑한 입술, 뱀처럼 야릇하게 감겨오는 혀의 느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자극적이었다! 그리고 물기 어린 야한 소리마저! 사탕 귀신이 사탕을 백 년 만에 먹어도 지금처럼 질척이는 소리는 내지 못할 것이다. 성적으로 방종한 아가씨의 실체를 이런 식으로 체험할 줄이야! 몸 가운데 성기만 분리되어 공중의 꽃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게 과연 무슨 짓이란 말인가. 쾌락의 풀무질 가운데 고개를 든 이성이 그리 물었다. 하이너의 욕정은 물리적으로는 더욱 크기를 키워갔으나, 심리적으로는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그럴수록 마리는 풀무질을 더 해갔다. “으윽, 아, 가, 씨…… 윽…….” 마리는 하이너의 버섯 갓처럼 생긴 그곳을 쭉 빨아들이다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테스트라고.” 어떤 테스트? 마법 테스트? 연금술 테스트? 무엇이든 간에 하이너는 ‘혹시 남자의 체액이란 재료가 필요한 테스트는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물을 수 없었다. 마리가 이번에는 버섯 기둥과 버섯 갓의 사이를 혀끝으로 살살 긁더니 최대한 목 끝까지 넣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딸기 같은 새빨간 혀에 희롱당한 뒤 입술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가 마찰하는 느낌은 하이너를 미치게 했다. “으, 하아, 앗! 아가씨! 읏!” 마리는 마치 하이너를 사정시킬 것처럼 목구멍과 입술을 사용했다. 다른 남자들보다 큰 성기를 목구멍까지 닿게 한 다음 조이기가 영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어려운 만큼 반드시 싸게 하고 말겠다는 오기도 생기는 법이었다. 계획상 지금 사정시킬 생각은 없었지만, 그런 각오로 임해야만 자기가 원하는 모종의 결과를 얻을 수 있기에 마리는 최선을 다했다. ‘윽, 이 녀석은 어째 갈수록 더 커지는 거야…… 힘들어.’ 생리적인 구역질이 나와 눈을 감았다. 그러자 하품할 때처럼 진득한 눈물이 나와 눈이 축축해졌다. 남자는 시각적 자극에 약한 동물이라 했던가. 그 표정을 보는 하이너는 그만 절정이 다가옴을 느꼈다. “으, 아가씨, 이제 더는……!” 하이너의 골반이 튕기려는 그때였다. 마리가 갑자기 레이스 손수건으로 입술을 우아하게 훔치며 행위를 중단했다. “아!” 성기를 감싸던 야릇한 촉감들이 더는 느껴지지 않아 하이너는 애끓는 소리를 흘렸다. 천국의 문 앞까지 갔다가 지옥에 떨어진 느낌이라면 이런 것일까. 하이너는 그녀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건넸다. 도무지 아가씨는 하던 일을 마저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이너는 목소리 대신 성기로 삿대질하며 ‘아아’하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할 수만 있다면 왜 ‘과자’를 줬다가 빼앗느냐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지 않고 그저 눈을 지그시 감을 뿐이었다. 결국, 아가씨의 야한 장난에 넘어가 희롱당한 것일 뿐이리라. 장난치곤 너무나 야했지만. 마리는 거듭 팽창하기만 하고 줄어들 줄 모르는 하이너의 물건을 딱한 듯 보다가 그의 귓가에다 대고 속삭였다. “2부가 기대되지 않아?” “그전에 아가씨를 죽일지도.” “으응?” “다시는 이딴 장난에 휘말리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아가씨의 머리통을 붙잡고 제 것을 물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수컷이기 때문일까. 하이너는 그런 수컷으로 태어난 것을 심히 유감스러워하며 묶인 사지에 힘을 주었다. “얼른 풀어주십시오.” “날 죽이려고?” “그저 혼자 있고 싶을 뿐입니다.” “혼자 있으면 자위하려고?” “글쎄요. 오랜만에 검 날을 좀 손질해야겠습니다만.” 결국엔 아가씨를 죽일 준비를 해야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마리는 하이너의 사지를 자유롭게 풀어주고 그가 입을 새 셔츠와 옷도 주었다. 하이너는 앞으로 다시는 아가씨를 보지 않을 사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속옷과 셔츠를 입었다. 아가씨를 향한 분노가 얼마나 타오르는지 살이 에이고 척추가 다 시큰거릴 정도였다. 옷을 다 입은 그는 아가씨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럼 오늘 밤 뒤통수 조심하십시오.” “앗, 잠깐만! 하이너!” 마리는 방에서 나가려는 하이너의 바지춤을 붙잡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이너의 바지 앞섶은 아직 죽지 않아 불툭 불거져 있었고, 그 밑에서 아가씨가 청록색 보석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뭡니까?” “으응, 그게.” 마리는 조금 전 야릇한 장난에서 미련이 남은 듯 바지 앞섶에다 제 뺨을 비볐다. 하이너는 그런 그녀가 가소로워 냉정하게 뒤돌아섰다. 물론 머릿속에서만. 현실에서 하이너는 분노한 시늉을 하면서 바지 앞섶을 아가씨에게 더욱 들이밀고 있었다. “그렇게 장난하지 마시고 얼른 본론이나 이야기하십시오!” 마리는 이제 뺨 대신 손으로 하이너의 바지춤을 훑었다. 그녀의 부탁은 하이너에게 너무나 뜬금없었다. “소용돌이 산에 가서 드래콘 한 마리를 잡아다 줄래? 아, 물론 흰색이면 좋고.” 소용돌이 산은 오를린 영지 일대에서 괴물들이 득시글거려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게다가 드래콘을 잡아 달라니. 승천하지 못한 드래곤과 유니콘 사이에서 태어난 그 동물은 잘만 길들이면 탈 것으로서 최상이라 할 수 있었으나, 일개 인간이 잡겠다고 덤비기엔 너무나 위험했다.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와 힘 좋은 사람이 팀을 이뤄 덤벼야만 하는 동물이었다. 하이너는 호위 기사가 소용돌이 산에 가서 드래콘을 잡는 그 일이 아가씨가 말하는 ‘테스트’인가 싶어서 코웃음이 나왔다. “아아, 흰색 드래콘 말씀입니까. 그랬죠. 예전부터 아가씨는 흰색을 좋아하셨죠. 하지만 제가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아가씨의 호위 기사이지 애완 동물 배달부가 아닙니다만.” “어머, 우리 사이에 그런 것도 못 해줘?” “해준다 못 해준다는 문제가 아니라 그런 테스트를 이해할 수 없단 말입니다. 무슨 목적의 테스트입니까?” “그건 말해줄 수 없어.” “어째서요?” “말해주면 재미없거든. 아무튼…… 하이너.” 마리는 섭섭한 얼굴로 하이너의 바지춤을 잡았다. 자극을 주어 어떻게든 제 명령을 따르게 하려는 술수임에 분명하다. 하이너는 절대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진짜 장난하나. 자기가 왜 그 위험한 짓을 해야 하는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이런 음탕한 장난을 치는 것이 창녀와 다를 게 뭔가. 원래부터 아가씨에게 정숙함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건 정말 아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소용돌이 산에 가서 드래콘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면 조금이나마 진지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이너는 차갑고 딱딱한 자세로 그녀를 떼어냈다. “왜 이러십니까, 이제 그만 떨어져 주시죠?” “2부가 기대되지 않는 거야?” “흥, 전혀요.” “가는 거야?” 하이너는 대답도 하지 않고 감히 무례하기 짝이 없게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얼른 방으로 가서 칼 날을 갈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그런데 방으로 향해야 할 걸음이 어째서인지 다른 곳으로 가게 된다. ‘젠장! 2부라니!’ 하이너의 몸과 마음은 따로 놀고 있었고, 그의 눈앞에선 아가씨의 분홍빛 입술, 붉은 혀가 아른거렸다. ‘소용돌이 산이 북쪽이던가?’ 00003 1. 미친 아가씨의 꿍꿍이 =========================================================================                            소용돌이 산. 사냥을 나가기엔 싸늘한 날씨였다. 바람은 곧잘 낙엽의 회오리를 만들곤 했다. 여기저기서 괴물들이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고 어린 아이 만한 크기의 벌레들이 회오리에 비틀거리다가 쓸려가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마주하기에는 너무나 무서운 이곳에 하이너는 발을 들였다. 목적은 오직 드래콘을 잡겠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아껴두었던 가죽 경갑으로 무장했다. 그리고 무려 20자일이나 하는 마법 스크롤을 세 개나 챙겨오는 정성까지 들였다. 갖은 수를 다 써서 드래콘을 생포하겠다는 이 열의는 누가 봐도 아가씨가 선사하는 ‘2부’를 기대하는 욕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하이너는 그런 속을 부정했다. 어디까지나 아가씨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는 데 의의를 두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비록 아가씨가 다른 아가씨들처럼 정숙하지 못하고 원하는 걸 얻기 위해 호위 기사에게 선을 넘은 음탕한 짓을 해대지만, 그렇다고 아가씨를 향한 충정에 변함은 없으니까. 아가씨는 은혜로운 분이었다. 자신은 한때 아픈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처지로 인생의 마지막 기사 시험을 놓치고 그저 그런 촌부로 전락해버릴 위기에 처했었는데, 그때 아가씨가 이런 자신을 구제해 호위 기사라는 직업을 주셨다. 매일 박봉이라 투덜거리지만 사실 아가씨에게서 받는 월 200 자일의 급여는 오를린 영지에선 결코 적은 급여가 아니었다. 이 급여 덕분에 동생의 약값도 댈 수 있었고 몇 달 뒤 동생의 장례도 섭섭지 않게 치를 수 있었다. 게다가 아가씨는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살지 말고 영주님의 저택으로 들어오란 배려까지 해주셨다. 그런 고마운 분을 모시면서 나름대로 충정이 생겨 드래콘을 잡아드리려 하는 것이지, 결코 음란한 ‘2부’ 따위나 원한 것은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구라라라아아아에에에에……. 거친 바람 소리에 실려 어디선가 특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구에에에… 구에에에에에……. 어릴 적에 몇 번 들었던 드래콘의 울음소리와 똑같은 소리였다. 다시 한 번 무장을 확인하고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몸을 재빨리 돌렸다. 숨이 찰 정도로 달리니 드래콘을 마주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드래콘 생포 작전의 시작이었다. 하이너는 탄성을 내질렀다. “굉장하군!” 흰색 드래콘이라니! 마치 신이 아가씨를 위해 그 자리에 그것을 놓아준 것 같았다. 새끼 드래곤의 머리에 유니콘의 뿔과 몸체를 가진 드래콘의 모습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위엄을 자랑했다. 성인 남자 세 명은 너끈히 태울 수 있는 만족스러운 크기에 발광 진주조각으로 만들어진 듯 반짝이는 고급스러운 비늘 그리고 루비를 통째로 박아 넣은 것 같은 붉은색 눈동자까지! 하늘을 향해 치솟은 은빛의 뿔은 가장 강하다는 금속 플래티르콘마저 산산조각 낼 듯 강해 보였다. 구에에, 구에에에에……. 그러나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녀석의 이빨은 인간을 한 입에 가루로 만들어버릴 듯 날카로웠고 기다란 꼬리는 한 대 맞으면 뼈가 부서질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세게 출렁이며 위협하고 있었다. 저것을 반드시, 반드시 잡고 만다. 하이너는 가장 먼저 방어막이 형성되는 스크롤을 불태워 자신의 몸을 보호했다. 구에에에…? 구에! 구에! 하이너의 행동을 도발로 본 드래콘이 돌진하기 시작했고, 하이너는 드래콘을 향해 공격력 약화 스크롤을 불 태워 던졌다. *** 십 분이 지났다. 십 분. 인간 남성이 혼자서 드래콘을 잡기에는 너무나 짧고도 위험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하이너는 해냈다. 방어막 스크롤로 제 몸을 보호하고 공격력 약화 스크롤도 드래콘의 야성을 반쯤 잠재운 뒤, 아가씨가 사준 플래티르콘과 은의 합성금속으로 만든 검 마리티오르를 휘둘러 드래콘의 배에 숨은 굴종의 인을 떼어냈다. 드래콘은 제게서 굴종의 인을 가져간 사람에게 종속되지만, 그 굴종의 인이 옮겨가면 종속인 또한 옮겨간다. 하이너는 굴종의 인을 아가씨에게 선물하기 위해 따로 챙겨 두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아껴둔 회복의 스크롤까지 드래콘에게 사용해 상처 하나 없는 말끔한 드래콘으로 만들어 두었다. 오늘 사냥은 도박에 가까웠다. 공격력 약화 스크롤을 쓴 것부터가 그랬다. 인간용인 공격력 약화 스크롤을 인간이 아닌 드래콘에게 사용했었는데 만약 듣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쯤 드래콘의 뿔에 내장에 꿰뚫려 있을지도. ‘위험한 만큼이나 재미있었어.’ 비록 드래콘과 사투를 벌여 뼈마디가 아프고 온몸에 피 묻지 않은 곳이 없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자기 치료야 나중에 하면 되는 거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가씨에게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한 드래콘을 드리는 것이었으니까. 선물이 지저분하면 받는 사람 기분이 좋지 않겠지? “네 주인은 아가씨가 되겠지만, 이름만은 내가 주지. 고생한 대가로 그 정도의 권리는 누려도 되지 않겠나?…… 너는 앞으로 마리아 그로스다.” 마리아. 어째 아가씨의 이름과 닮았다. 암컷인 드래콘에게 제법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하며 하이너는 마리아의 등에 올랐다. 유순해진 마리아는 하이너의 서투른 몰이에도 잘 이동해주었다. *** 사람들이 잠든 시간. 한 무리의 취객이 마을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가난한 영지라 사람들이 술을 사먹는 일도 그다지 자주 볼 수 없는 이곳에서 취객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은 낯설었다. 이는 로테의 황궁 행으로 축하 분위기가 이어진 덕분이었다. 취객들은 드래콘을 타고 산에서 내려오는 하이너를 보고 수군거렸다. “맙소사! 저거 드래콘 아니야? 내 평생 드래콘을 두 번 보게 되는군.” “뭐야, 하이너가 잡은 거야? 설마 로테 아가씨가 황궁에 간 걸 축하한다고 저걸 잡은 건가?” “영주님께서 워낙 따님 사랑이 지극하시니 하이너에게 그런 일을 맡길 수도 있겠군.” “그런데 정말 대단하네. 혼자 힘으로 저걸 잡은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러게. 정말 이런 시골 영지에서 그냥 썩기엔 아까운 젊은이야. 제 동생이 아프지만 않았다면 진즉 황도의 기사가 되어 오를린의 명성을 드높였을 텐데.” *** 하이너는 아가씨의 방으로 갔다. 영주님 내외와 대부분의 하인이 로테의 배웅을 갔기에 아가씨의 방에 드나드는 것은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리는 잠자는 대신 책을 읽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호위 기사가 드래콘 사냥에 성공하여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확신하는 모습이었다. 예상대로 하이너가 오자, 마리는 읽던 책을 덮고 그에게 안길 듯 돌진했다. 하이너는 놀라서 뒷걸음쳤다. “경망스럽군요. 숙녀분께서 이렇게 뛰는 모습이란.” “생각보다 일찍 오네!” “그거, 잡아왔습니다. 마구간에 있어요. 타보시려거든 그때 굴종의 인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하이너는 드래콘을 잡아왔단 소식만 알리고 자러 가려고 했다. 그러자 마리가 그를 잡았다. “함께 가서 보지 않아?”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그야 내가 기뻐하는 모습이 네게 참된 보람을 주니까?” 하이너는 무례하게 인상을 구겼다. “아가씨는 가끔 약을 드셔야 할 때가 있는 것 같군요.” 홱 돌아서는 하이너의 뒷모습에서 마리는 그가 삐쳤다는 걸 느꼈다. 하기야 성기로 장난을 치는 것도 심했고 무시무시한 생물을 잡아오라고 명령조의 부탁을 한 것도 심했으리라.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호위 기사의 휴식 시간을 그다지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전에 약속한 일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느다란 두 팔을 뻗어 하이너의 몸을 도로 홱 돌렸다. “하이너.” “예.” “따라오라면 따라와.” 그렇게 하이너는 마리에게 질질 끌려 마구간으로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다. 잠에서 깨어나 물을 마시러 나온 하녀 앤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영주 님 내외께서 안 계시니 망정이지. 제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지만, 이 밤중에 저렇게 찰싹 붙어 어디론가 가시다니. 아가씨는 정말 못 말린다니까.’ *** 마구간지기는 술에 취해 깊은 잠이 들어 있었다. 마리는 마구간지기의 옆에서 랜턴을 잠시 빌렸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마구간 안으로 들어섰다. 불빛을 앞세워 먼저 가는 것은 하이너가 해야 할 일이지만, 지금 그는 삐쳐있어서 그런 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마리가 환성을 질렀다. “이야! 진짜 드래콘이야! 어쩜 이리 멋지지? 나는 오를린에서 최고로 강하고 아름다운 탈 것을 가진 숙녀가 되었어! 이게 다 내가 하이너의 것을 내 사랑스러운 입술로 귀여워해 준 덕분이구나!” 불퉁한 표정의 하이너는 아가씨의 환성에 잔잔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가씨의 말 내용에 다시 표정이 싸늘해지고 말았다. 드래콘을 가지게 된 이유가 호위 기사의 용맹함 덕분이 아니라 자기의 창녀 짓이라 말하는 아가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말이지 아가씨는…….” 하이너가 뭐라고 하든 마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하이너에게 굴종의 인을 얼른 내놓으라고 보챘고, 그것을 받자 풍만한 가슴골 사이에 끼워두었다. 그리고 재빨리 드래콘의 등에 올라탔다. 높다면 높다고 할 수 있는 드래콘의 등을 누군가의 도움도 없이 날랜 짐승처럼 가볍게 오르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하이너는 미처 숙녀의 정숙함이 어쩌고 하는 잔소리를 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마리가 드래콘의 뿔을 만지며 감탄했다. “이 보석 같은 뿔 좀 봐, 이 부드러운 진주알 같은 비늘 좀 느껴보라고! 어쩜 내가 원하는 흰색일까! 어쩜 내가 원하는 체리 빛깔 눈동자 색깔일까! 드래콘의 체온도 정말 따스하군. 좋다. 앞으로 네 이름은….” 아가씨가 드래콘의 이름을 붙이려 하자 하이너는 고집스러운 태도로 알렸다. “마리아 그로스. 제가 붙인 이름입니다. 아가씨에게 작명권은 없어요.” 마리는 순순히 따라주기로 했다. “그래! 네 이름은 마리아 그로스라고 하겠어. 내 이름과 하이너의 성을 조합한 것 같은 느낌이라 마치 우리 둘의 자식 같은 느낌인데!” “농담도 작작하세요.” 얼굴은 붉힌 하이너가 혼내듯 말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우리 둘의 자식’이라는 표현에 쿵쿵거리고 있었다. 마리가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마리아 그로스의 목을 끌어안고 꿈에 젖은 듯 콧노래를 부르다가 천천히 내려왔다. 그리고 하이너의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잔 뜻이었다. 하이너가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손을 잡자, 그녀가 하이너의 손을 끌어 그 손등에 키스하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손등에 키스 받은 하이너의 얼굴이 일순 굳어버렸다. “위험했을 텐데 잡아줘서 고마워. 난 네가 성공할 줄 알았어. 이 정도야 너한텐 우리 아버지와 검 대련을 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 아니겠어?” “과찬입니다.” “잡으면서 많이 다친 것 같은데 내가 보상을 줘야겠지?” 말을 마친 마리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앉았다. 보상이라. 하이너는 ‘2부’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니, 욕망하고 있었다. 물론 신체의 욕망일 뿐 정신의 욕망은 아니었다. 그는 고작 드래콘을 얻기 위해 남자에게 이런 짓을 하려는 아가씨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다. 마치 문제 많은 친동생을 걱정하는 것 같은 감정이었다. 그의 몸과 마음이 이토록 양극단에서 서로 합쳐지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마리는 그의 바지를 내리고 있었다. 2부를 위해서였다. 하이너의 하체에 불이 지펴진 듯 열이 올랐다. “아가씨, 저는 보상 같은 건… 필요 없…….” 하지만 이미 성기가 드러나 있었다. 수풀 가운데 그것은 아가씨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에 반응하듯 뜨거워졌다. 아가씨가 착 가라앉은 진지한 목소리로, 그래서 더 야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나는 약속한 건 지키는 사람이니까.” ============================ 작품 후기 ============================ 앗 윈디님 반갑습니다! 쿠폰 주신 분들도 감사합니다^^ 00004 1. 미친 아가씨의 꿍꿍이 =========================================================================                            “아가씨!” “으흠, 쉬잇.” 축 늘어진 그것은 야성의 냄새를 풍기며 금세 팽창하기 시작했다. 포피가 완전히 까여 꺼떡거리는 살기둥이 징그러운 생물을 연상하게 하는데, 그게 하이너의 귀공자 같은 얼굴과 묘하게 대비되었다. “히야아… 대단해.” 마리는 하이너의 성기를 천천히 입에 담았다. 이런 것을 물고 핥는 것에 비위에 거슬릴 법한데도 맛있는 사탕 먹듯이 굴었다. 그렇게 가지고 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입에 넣어 빨아들인 채로 놓아주질 않았다. 타액 삼키는 소리가 마치 과즙을 빨아들이는 소리 같아 하이너는 소름이 돋았다. ‘젠장! 이딴 약속 따위 누가 지켜달라고 했냐고….’ 등줄기가 짜릿해지고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것만 같았다. 침대에서 이런 일을 벌였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마리의 행위가 도발적이고 빨라서 하이너는 미처 피할 여유도 없었다. “아가씨…….” 하이너가 신음을 흘리며 뒤늦게야 뒷걸음질 치자 마리는 무릎으로 걸으며 바짝 밀착했다. 하이너는 단 한 번도 바다에 가본 적 없어 연체동물의 빨판이 어떤지 잘 모르지만, 아마도 그 촉감이 지금 아가씨가 선사하는 촉감과 비슷할 거로 느꼈다. 기괴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마리는 그의 살기둥 아래 단단해진 살덩이를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서 훑다가 잠시 고개를 뗐다. 그녀는 번들거리는 성기를 진귀한 물건 보듯 찬찬히 훑어보았다. “낮에 핥았을 때보다 냄새가 진해. 사냥하면 수컷들은 호르몬이 더욱 분비되나 봐.” 하이너는 호르몬이라는 낯선 단어의 뜻을 알지 못했다. 오를린 영지의 수많은 젊은이가 그러하듯 교육 수준이 낮고 독서라고는 동양의 무술서 몇 권을 한 게 전부인 그가 호르몬을 알 리 없었다. 대체 호르몬이 무엇일까. 아마도 아가씨가 빠져있는 마법이나 연금술 용어 중 하나일 듯? 어쨌거나 자신은 성기로 뭔가를 분비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저는 아무것도 분비하지 않았습니다만.” “하하, 그래? 이렇게 멀건 액을 흘려대면서 참 뻔뻔하기도.” “…… 읏.” 다시 야한 일이 이어졌다. 마리는 더는 벗길 포피도 없는 데 더 은밀한 살을 갈구했다. 현기증이 일 정도로 강한 자극에 하이너는 순간 참지 못하고 마리의 머리를 두 손으로 꽉 붙잡으려다가, ‘뭐하는 짓이냐, 아가씨께 감히!’ 정신을 차렸다. 그의 두 손은 차마 아가씨의 머리를 잡지 못하고 그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감각을 조율했다. 그런 애쓰는 모습이 마리의 눈에는 너무나 귀엽게만 보였다. “이를 어째… 네 살은 맛을 보면 볼수록 더 욕심이 생겨.” “그런, 그런 음란한 말씀을 하시다니.” “아니, 어쩌면 이 욕심은….” 마리는 말끝을 흐리다가 하이너의 성기 그 끝을 꾹 잡았다. 배시시 웃는 그녀의 볼에 보조개가 패었다. 매력적인 청록색 보석 같은 눈동자가 진실을 말할 때처럼 반짝였다. “내가 처음부터 너를 먹고 싶어 해서 생기는 욕심인지도.” 하이너는 성기가 아닌 심장이 벌떡이는 것을 느꼈다. 처음부터 너를 먹고 싶어 했다니. 그럼 아가씨가 줄곧 호위 기사에게 욕정이 일었단 말인가? 그만큼 호위 기사에게 마음이 있었단 말인가? 아니, 그렇게 마음이 있다면 여태 그 난잡한 이성 관계는 다 무엇인가? 아가씨란 사람을 도무지 알 수 없다. 미묘한 짜증은 성욕을 더욱 부추겼다. 때마침 아가씨의 입술에서 나는 소리가 더할 수 없이 음란해졌다. “욱… 커. 너는 대체…….” “…….” “어쩜 여기로는 이리 솔직한 거야?” “으읏… 젠장!” 하이너는 무의미한 뒷걸음질을 멈춰버리고 두 손으로 감히 아가씨의 머리를 붙잡았다. “하아, 먼저 삼킨 분은 아가씨입니다.” “읍!” 하이너의 크고 기다란 두 손에 속박된 아름다운 금발이 거침없이 흔들렸다. 이 순간 하이너의 눈 아래엔 ‘아가씨’는 없고 쾌락의 순수한 도구만이 있을 뿐이었다. 본능을 이성과 타협하길 그만둔 이상, 사정까지의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례하게도 하이너는 아가씨의 입에 제 것을 토해내고야 말았다. “으윽!…… 하아, 하.” 쾌감의 여운에 도취되어 눈빛을 흐리는 그를 올려다보며 마리는 입술을 닦았다. “후우. 진해, 네 거.” 하이너는 쓰디쓴 웃음을 보였다. 진하다니.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인가? 좋다는 말인가? 어째서 당신은 이토록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는지. 하이너는 선정적으로 보이는 아가씨의 얼굴에 서서히 죄악감을 느끼고야 말았다. 그가 바지춤을 끌어올리며 낮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응?” 누가 보면 갓 짜낸 신선한 우유라도 드신 줄 알 테니까. 하이너는 복잡한 기분이 들어 뒤돌아섰다. 마리가 어깨를 부드럽게 만지며 또 한 번 고마움을 전했다. “마리아 그로스, 고마워.” 하이너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자신은 맹세코, 이러려고 드래콘을 잡아온 게 아니었다. ‘대체 뭘 한 거냐, 네놈은.’ 마구간을 나온 하이너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창밖 하늘에선 무수한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이너는 별빛을 보고 아름답단 생각보다는 허무함이 쏟아져 내리는 걸 느꼈다. *** 마리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그로스를 타는 연습을 시작했다. 위험한 소용돌이 산에 가서 연습하기도 하고, 오를린과 통합된 이웃 영지인 네히트의 야산까지도 연습장으로 삼았다. 이왕이면 평지를 골라서 타도 좋을 텐데 왜 하필 다 산인가. 하이너는 마리가 선택한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마리는 혼자 연습하면 되지 꼭 호위 기사더러 같이 타는 연습을 하자고 했다. 성가셨다. 정말이지 성가셨다. …… 그런데 정말 성가시기만 한 것일까. 드래콘에 마리와 함께 타는 것을 꺼리는 이유를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본다. 첫째로, 사람들의 눈이 신경 쓰인다는 점. 아무리 아가씨의 호위 기사라고는 하나 지켜야 할 선이 있기에 특별히 먼 곳에 가는 것이 아니면 탈 것에 함께 탈 이유가 없었다. 드래콘에 함께 탄 남녀를 보고 영지 사람들이 알 것 같단 눈초리를 하고 아가씨를 연모했던 청년들도 시기심 가득한 분위기를 만들어 불편했다. 둘째로, 춥다는 점. 겨울을 앞둔 계절은 한때 기사를 꿈 꿀 정도로 강한 남자였던 자신을 움츠러들게 할 만큼 냉혹한 바람을 휘둘러대고 있었다. 셋째로, 언제부턴가 자꾸만 등이 아프다는 점. 드래콘 생포를 하면서 다친 건지 아니면 그 전에 술을 마시고 무언가에 부딪친 건지 등 아래 살결이 너무 쓰라렸다. 어지간하면 엄살 부리지 않는 자신이 아가씨에게서 엄살 그만 피우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얼른 이 쓰라림의 원인을 찾고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세 가지 이유로 아가씨와 드래콘에 타는 것이 싫었는데, 또 하나의 싫은 이유가 더 있었다. 아가씨와 밀착하면 지나치게 긴장된다는 점. 가장 난감한 점이었다. 아가씨의 새콤달콤한 향이 등 뒤에서 찬바람을 타고 훅 끼칠 때마다 그날 밤 마구간에서의 경험이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 그 일이 무슨 금기나 된 듯 함구하고 있었지만, 가끔 진지하게 묻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날 장난은 너무 한 것 아니냐고, 혹시 장난이 아닌 건 아니냐고, 설사 장난이라 한다고 해도 앞으로 저를 계속 호위 기사로 두실 수 있느냐고. 그런데 아가씨의 태도는 그날 일을 새까맣게 지운 듯, 평소와 다름없었다. ‘결국엔 살던 대로 살자, 이 말씀인가.’ *** 어느 날이었다. 저택 사람들이 잠든 틈을 타 아가씨가 호위 기사의 방을 찾았다.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아가씨의 한 손에는 수상한 종이뭉치가 있었다. 아가씨는 종이뭉치를 펼쳐 보였다. 낡고 색깔이 바랜 종이에서 나는 건초 같은 냄새에 하이너가 인상을 썼다. “가장 믿을만한 대륙 지도라고 해. 2000 자일이나 주고 샀어.” “자랑 듣고 싶은 기분이 아닙니다만. 고작 그런 낡은 종이 하나에 그런 큰돈을 쓸 바엔 차라리 제 수당을 더 챙겨주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네 수당이라 생각하고 받아.” 하이너는 손에 들어온 지도를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아가씨의 이런 행동은 다른 의미로 보자면 도발이었다. 다 큰 남자가 자는 방에 혼자 이렇게 들어와서 달콤한 향기를 풍기며 들뜬 표정,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재잘대는 것이 어찌 자극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게다가 누가 이런 지도 따위 받고 싶다고 했던가. “오를린 잡화 취급점에서 이 지도를 얼마에 사들일지 참 궁금해지는군요. 아마 반값을 받기도 힘들겠지만, 수당이라 하시니 받겠습니다.” 그러자 마리가 하이너의 등을 쳤다. 그렇잖아도 등이 아픈 하이너는 무례하게도 고함을 지를 뻔했다. 물론 그렇게 해버리면 자신들이 기묘한 관계를 저택 사람들에게 들키는 꼴이라 참아야 했다. “어머! 되팔다니! 이 지도의 정보는 네가 꿰고 있어야 하는 거라고. 대륙 여행을 떠날 때 유용하단 말이야.” “예? 대륙 여행이라니요?” “너와 내가 가야 할 대륙 여행! 짜잔!” 여자의 몸으로 대륙 여행을 꿈꾼단 말인가! 어쩐지 처음부터 이상했다. 드래콘을 잡아달라고 하지 않나, 그것으로 맹연습하지 않나, 며칠 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이국어 의사소통에 관한 책을 얼굴 가리개 삼아 낮잠을 주무시기도 했었지. 그리고 이번에는 평민들은 구경하기도 힘들다는 최고급 정밀지도를 사 오다니. 그 모든 일이 대륙 여행을 위한 준비 작전이었단 말일 터. ‘큰일이군.’ 아가씨께서 혼기도 놓치시고 영지에서 하는 일 역시 시답잖은 난봉일 뿐이라 결국 머리가 어떻게 되셨나 보다. 영주님의 애물단지로 보는 사람들의 시선 역시 힘들었을 테지. 제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깐 귀족 아가씨라 해도 귀족은 귀족. 남들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이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가씨. 무례하다 욕하셔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언제는 안 했어?” “여행 따윈 꿈도 꾸지 마십시오. 아마 이유는 아가씨가 더 잘 아실 겁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만한 분이시라면요. 적. 어. 도.” “흐음, 남자가 이리 배포가 작아?” “아가씨가 도련님으로 태어나셨다면 제 배포는 또 달라지겠지요.” 하이너는 대륙 지도를 옆에 두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러기가 무섭게 마리가 그의 낡은 이불을 바닥으로 치워버렸다. 가느다란 손가락 그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는지 하이너는 기가 찼다. 마리가 씩씩거리며 외쳤다. “그럼 나를 도련님이라 생각…!” “쉬잇!” 하이너는 마리의 목소리를 누군가가 들을세라 그녀의 입을 막았다. 이 시간에 여기서 소리를 지르다가 다른 이들에게 들키면? 아가씨야 제멋대로 사신 분이니 괜찮아도 자신은 아니었다. 그러자 마리는 그의 손을 깨물어버렸다. “으…!” 생각보다 심한 통증에 하이너는 손을 떼 내려고 했다. 하지만 아가씨는 제 말을 막아버린 호위 기사가 괘씸하여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손톱으로 꽉 누르고 있었다. 마치 화가 난 삵 같은 행동에 하이너는 입을 쩍 벌리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느를 드른님으르 승극흐르그(나를 도련님이라 생각하라고)…….” “아가씨는 미치셨습니다.” 하이너는 최대한 정중하게 손을 빼내려고 애썼고, 그 행동이 마리의 눈에는 ‘대륙 여행을 갈 수 없다!’는 고집으로 보였다. 기 싸움이 시작되었다. 손을 빼려는 남자와 손을 물고 놔주지 않으려는 여자의 싸움은 힘으로만 보자면 남자의 승리가 확실한 데도 좀처럼 결판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뒤엉킨 남녀는 어느 순간 이상야릇한 자세가 되어 있었다. 하이너의 손을 깨물고 놔주지 않는 쪽은 마리인데, 누가 보면 하이너가 마리의 입을 억지로 막는 자세였다. 한마디로 하이너가 마리를 덮칠 것 같은 자세였다. “진짜 아가씨라는 사람은…!” 이제 하이너는 손을 곱게 빼려는 생각을 버렸다. 그가 짜증스러운 듯 혀를 차며 손에 힘을 주는 그때였다. 갑자기 마리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뭡니까, 왜 웃어요?” 마리는 하이너의 손가락 사이를 혀로 핥기 시작했다. 붉은 혀가 얇고 촉촉한 촉감을 손가락 곳곳에 점령하고 있었다. 하이너의 검은 눈동자에 혼란이 들이닥쳤다. “……!” 혹시 이건 아이처럼 떼쓰기에 이은 또 다른 수법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괄량이 같이 굴던 아가씨는 온데간데없고 한 마리 요사스러운 여우 하나가 있었다. 그 여우는 뱀 같은 혀로 늑대를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창밖으로 보름달이 떠올라 두 사람 사이를 메우던 어둠이 조금 사라졌다. 마리의 청록색 눈동자가 더욱 요망하게 빛났다. 나른해서 어딘지 모르게 퇴폐적으로 들리는 목소리가 하이너의 정신을 흐리게 했다. “기억나지 않아? 그날 밤.” “……!” “내가 도련님으로 태어났다면 너는 그런 쾌락을 누리지는 못했을 테지. 물론, 앞으로도 말이야.” 그 말은 곧 대륙 여행을 함께 가주기만 한다면 또 다시 그런 은밀한 일들을 기대해도 된단 말인가? 하이너의 본능은 아가씨에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본능일 뿐. 선을 지켜야 한다. “그날 밤 같은 건 기억에서 지웠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기억나게 해주지.” 마리는 흔들리는 하이너의 눈동자를 보며 그의 중지를 한입에 삼켰다. ============================ 작품 후기 ============================ 윈디님에 이어 비안원님도 뭔가 오랜만에 보는 느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0005 1. 미친 아가씨의 꿍꿍이 =========================================================================                            하이너가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부드럽고 축축하고 따뜻한 살덩이가 중지를 오물오물 조이고 있었다. 온몸의 피가 중지로 향하는 것만 같고 손 전체가 점점 녹아 흐를 것만 같았다. 이것은, 이것은 마치 그때를 연상하게 한다. 그날 밤 아가씨의 입에 사정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하얗고 탁한 액을 삼키던 아가씨의 색정적인 눈빛도 떠올랐다. 어느샌가 마리가 하이너의 어깨를 밀쳐 눕히고 있었다. 바람에 쓰러지는 풀잎처럼 호위 기사의 이성도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아마 그날 밤 네 물건… 그 후에도 괴로워했겠지. 답답했을 거야. 아랫도리가 가벼운 녀석들처럼 창녀를 찾지도 못했을 거고 그렇다고 네가 성격이 좋아서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이너의 새까만 눈동자가 번뇌에 휩싸여 있었다. 지금 그는 마리가 하는 말 따위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마리를 향한 육체의 끌림과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아슬아슬한 남자의 시도만이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그날 밤 그 짓.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번에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아가씨는 다른 남자들과도 그런 짓을 즐기신다. 그런 아가씨에게 자기가 무슨 고고한 남자라고 버티려는 것일까. 그냥 해버릴까? “나와 여행을 한다면 그땐 내가 너의 창녀이자 애인이 되어주지.” “창녀라니, 애인이라니요! 누가 그런…!” “기대하렴.” 마리는 하이너의 낡은 셔츠를 여미는 끈을 풀어 내렸다. 두껍고 기다란 목부터 날렵한 쇄골까지 꽃잎처럼 향기로운 입술과 말캉한 혀가 내려앉았다. 그게 몸에 퍼붓는 키스의 시작이란 걸 알아버린 하이너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 “하, 하아.” 마리는 하이너의 셔츠를 풀어헤쳐 그의 몸을 훤히 드러냈다. 언제 봐도 감탄을 자아내는 몸이었다. 목에서 어깨까지 이어지는 근육의 선은 바람에 잘 다듬어진 바위를 보는 듯 단단했고 터질 것 같은 근육질의 가슴팍은 그 속에 태양을 숨겨둔 듯 뜨거운 열기를 전하고 있었다. 게다가 조각 같은 복근 그 아래로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수풀, 그것은 아직 소년티를 완전히 벗지 못한 그의 얼굴과는 대비되어 미묘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런 몸이 이런 시골에 처박혀있는 것은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고 추구하는 예술가들에게 미안한 일이 아닐까? 마리는 두 손을 펼쳐 그 아름다운 몸 곳곳을 훑다가 한순간 탄탄한 가슴팍에 고정했다. 하이너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쿵…… 쿵… 쿵! 빨라지는 박동은 마리를 더욱 거침없게 만들었다. 마리는 진귀한 음식을 앞에 둔 미식가처럼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조금 벌렸다. 입술 사이로 작은 혀가 슬며시 미끄러져 나와 하이너의 왼쪽 가슴을 부드럽게 핥고 지나갔다. 하이너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몸을 튕기고 말았다. 또, 등이 쓰라렸다. ‘젠장! 이럴 때 왜 하필….’ 마리는 그런 그를 야릇한 시선으로 올려다보며 반대 쪽 가슴으로 혀를 옮겼다. 잔뜩 긴장하여 닭살이 오소소 솟아난 젖꼭지가 붉은 혀에 살살 굴려져 단단해졌다. 하이너는 등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쓰라림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가슴에서 전해지는 간지러운 자극이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미치겠군!’ 마리의 입술은 가슴 사이의 옅은 수풀에 이르러 떨어지나 싶다가 탄탄한 복근을 타고 내려와 배꼽에 머물렀다. 어쩜 이리도 배꼽마저 제 주인을 닮아 잘 생겼을까. 마리는 가볍게 배꼽을 꼬집어버렸다. 억센 바지 끈을 풀어 하이너의 성기를 마주했다. 그것을 보고 입맛을 다시는 사람은 마리였는데 정작…. 꿀꺽, 하고 침을 삼킨 쪽은 하이너였다. 마리는 한쪽 눈썹을 치올리며 웃었다. 역시나 너도 기대하는 게 분명하다고 비웃는 듯했다. 그녀의 손이 길쭉하고 굵은 살덩이를 아래위로 부드럽게 훑기 시작했다. 처음엔 귀여운 애완동물의 꼬리를 쓰다듬는 듯 느리다가, 점점 경쾌한 곡을 연주하는 악사의 손처럼 빨라졌다. 그러나 아무리 빨라진다 하더라도 세게 잡진 않았다. 다만 뭉툭한 끄트머리를 슬그머니 압박해줄 뿐이었다. “…… 하아!” 어째서 아가씨는 남자보다 남자의 물건 다루기에 더 능숙할까! 자극적으로 손을 놀리면서도 입술로는 다시 가슴을 맛있는 사탕 찾듯 하는 이 모습을 보라. 분명 여유로운 표정인데도 수컷의 눈으로 보기에는 얼른 절정으로 가버리라는 재촉인 것만 같았다. 하이너는 이 얼굴을 자꾸만 보다간 더 큰 일을 저지를 것 같아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 그날 밤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아가씨가 거침없이 성기를 삼켜버린 것이었다. 쑤욱 빨린 그것은 단단해진 고환을 펌프질하는 아가씨의 손길에 금방이라도 사정을 할 것 같았다…… 하는 순간, 어이없게도 사정은 이미 진행 중이었다. “흐윽!” 완전히 팽창한 성기는 화를 내듯 엄청난 양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우읍!” 마리는 그날 밤보다 더욱 진한 액체가 입 속에 가득 차는 걸 느꼈다. 생각보다 이른 사정이라 조금 놀라서 하이너를 바라보았다. 하이너는 쾌감에 몸부림치다가 영혼이 나간 듯이 한숨을 쉬고 있었다. 마리는 하이너가 뿜어낸 액체를 꿀꺽 삼키며 입술을 훔쳤다. 으음,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나 나올 법한 탄성이 들리자 하이너가 정신을 차리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잘했어. 역시나 그날 밤처럼 빨리 끝냈네.” 그런데 그 말에 하이너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또 아가씨와 이런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후회와 허무함이 몰아치는 와중에, 아가씨가 말한 ‘빨리’라는 단어가 신경을 묘하게 긁기 시작한 것이었다. 바지를 추슬러 올리려던 그의 손이 서서히 멈췄다. 마리는 무슨 지루한 수업이라도 끝낸 듯이 기지개를 켜며 하품했다. “아흐음, 그럼 여행에 관해선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출발은 열흘 후야. 자세한 이야기는 떠나면서 해도 늦지 않지.” 마리는 침대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자 하이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마리는 그 손을 멀뚱히 내려다보았다. 여태 하이너에게 지금처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손을 잡혀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취해서 길바닥에 널브러져 귀족 아가씨의 체면을 깎을 때, 혹은 드래콘에 타는 걸 연습할 때, 혹은 넘어졌을 때나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별일이란 듯 그를 보았다. “왜 그러지, 하이너?” 하이너는 아직도 식지 않는 몸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도 죽지 않는 흥분을 깨닫고 있었다. “이방을 나가시면 안 됩니다.” “으앗!” 순식간에 마리의 몸이 침대에 눕혀졌다. 하이너가 마리 위에 올라탄 자세로 그녀를 뚫어지라 내려다보다가 한 손으로 그녀의 입가를 만졌다. 입가에는 아직 따끈따끈한 액체가 조금 묻어 있었다. 이런 얼굴로 나가긴 어딜 나간단 말인가. 하이너는 제 몸에서 나온 그 액체를 손으로 훑으며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아직 끝이 아니니까요.” “그래?” “기대하라고 하셔놓고 벌써 가시는 건 이르지 않습니까? 저는 아직 부족합니다만.” “이야아.” 마리는 하이너의 한쪽 어깨를 잡고 몸을 일으키며 명령했다. “더 하고 싶다면 이젠 네가 나를 흥분시켜 봐.” “기꺼이.” 하이너는 바지를 모조리 벗어버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의 몸은 여태 마리가 본 그 어느 남자의 몸보다 아름다웠다. 그러나 계속 볼 수 없었다. 갑자기 하이너가 드레스 허리끈을 풀어 그 끈으로 아가씨의 눈을 가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검 수련밖에 할 줄 모르는 이 남자, 애인도 없는 이 남자가 이런 짓을 하자 마리는 속으로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뭐, 못 배워도 타고난 건가?’ 제대로 된 성교를 한다면 제법 능숙한 남자일지도? 그런데 그런 생각은 딱 그때뿐이었다. 여자의 옷, 그것도 귀족 아가씨의 옷이란 걸 단 한 번도 벗겨본 적이 없던 하이너는 드레스 허리끈을 푼 후에는 뭘 해야 할지를 몰랐다. “…….” 여자의 옷이란 대체…! 허리끈만 풀면 다른 부분은 알아서 풀릴 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두 겹의 드레스가 아가씨의 몸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래에서부터 벗기자니 드레스 자락이 너무 풍성하여 거추장스러울 것 같고, 위에서 벗기자니 딱 달라붙는 어깨 부분이 잘 내려올 것 같지 않았다. 정답은 등 뒤에 있는 여러 가닥의 엉킨 끈을 풀면 되는 것이었으나, 하필 그 부분이 레이스 끈으로 되어 있어서 복잡해 보였다. 하이너는 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여자의 드레스는 난공불락의 요새라도 되는가?’ 하이너는 당황하지 않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두 손으로 아가씨의 목을 감쌌다. 아가씨의 목을 잡다니.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일이었다. 하이너는 두 손을 서서히 내려 아가씨의 풍만한 가슴에 머물렀다. 몇 번 부드럽게 쓰다듬자 그것은 생기 있게 부피감을 과시하며 드레스 밖으로 삐져나왔다. 연분홍색의 돌기는 핥고 싶은 꽃잎처럼 매혹적이었다. 하이너는 꽃에 유혹된 나비처럼 그곳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리고 꿀을 빨아내듯 세게 빨아들였다. 아가씨의 살은 아가씨가 뿜어내던 달콤한 향기보다 더 달콤한 맛이었다. “후읏….” 또한 아가씨가 내는 소리마저도. 마리는 하이너의 머리를 끌어안고 천천히 누웠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호위 기사가 자기 가슴을 탐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야한 상황이라 생각했다. 호위 기사는 한쪽 가슴을 단물이 다 빠질 때까지 빨려고 하다가 아가씨의 리드에 다른 쪽 가슴으로 입술을 옮겼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두 개의 살덩이 사이에서 하이너의 조각 같은 얼굴이 거침없이 녹아내려 갔다. ‘젠장, 더는 못 참겠군.’ 하이너는 서서히 고개를 내렸다. 서투른 두 손으로 아가씨의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렸다. 거듭 생각하건대 이 풍성한 드레스를 아래에서 위로 올리는 건 거추장스러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속치마까지 함께 걷었음에도 아직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천들이 몇 개 더 들러붙어 있었다. 허벅지를 딱 달라붙는 반투명한 천, 화려한 레이스 띠와 리본들 등. 그것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도무지 몰랐다. 그래서 급한 대로 방법을 생각해냈다. 기다란 팔을 뻗어 침대 옆 좁은 탁자에서 뭔가를 가져왔다. 그것은 나이프였다. 나이프의 날카로운 머리가 여성의 은밀한 부위를 감싸는 천에 조심스럽게 닿았다. ‘젠장.’ 나이프 다루는 데 있어선 천재란 소리를 들으니 아가씨의 피부에 상처를 낼 일은 없다. 다만 이런 비싼 천 가지를 뜯는 게 미안했다. 아가씨는 2000 자일이나 하는 지도를 덜컥 사버리곤 하지만, 그런 지도를 사는 건 사실 돈만 있으면 되니 간단하다. 하지만 이런 천 가지를 사는 건 이야기가 다르다. 마음에 맞는 디자이너를 찾아야 할 테고, 주문 제작하여 걸리는 시간하며……. “아가씨.” “응?” “…… 다음 달 급여는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리는 그 떨리는 목소리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날카로운 무언가에 의해 속옷이 찢기고, 가장 은밀한 부분이 드러나기 전까진. 00006 1. 미친 아가씨의 꿍꿍이 =========================================================================                            속옷을 이리도 야하게 찢는 취미가 있는 줄 몰랐다. 눈을 가리는 건 제 판타지거나 부끄럽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이 녀석은 어쩌면 침대에서 보통이 아닐지도. ‘취향이 가리고 때리고 괴롭히고 그런 쪽인가? 풉! 동정 같았는데 참 희한한 일이군.’ 어디 얼마나 여자를 잘 흥분시키나 두고 볼 생각이었다. 하이너는 정작 목적을 잊고서 마리의 은밀한 숲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복잡한 레이스와 리본, 반투명한 천이라는 인위적인 것들 밑에 숨어 있던 살결은 자연 그대로였다. 아가씨도 음모가 나는 사람이구나, 아가씨도 점이 있는 보통의 사람…. ‘점이 별 모양?’ 하이너는 금빛 음모에 가려져 자칫 보이지 않을 뻔한 연갈색 작은 점을 보고 놀랐다. 누가 미친 아가씨로 불리는 아가씨 아니랄까 봐, 별나도 이렇게 별날 수가 없다. 삼각형과 역삼각형이 포개진 별 모양. 그것은 보나 마나 아가씨가 빠진 마법이나 괴상한 미신에 의해 새겨진 것이리라. 새끼손톱 크기의 별 문신은 습기를 머금은 연분홍색 살결 표면에서 호흡하듯 부풀어 오르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보면 볼수록 식은땀이 흘렀다. 신비롭고 어려워 보였다. 차라리 동양의 무술서에 적힌 그림 같은 문자를 해석하는 게 이 은밀한 부위를 흥분시키는 것보다는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려워 보이는 것만큼 호기심도 이는 법이었다. 아가씨가 이 은밀한 곳에 향수라도 쓰는지 생각보다 향기로웠다. 머뭇거리다가 손을 가져갔다. 세로로 움푹 팬 살결을 천천히 위아래로 쓰다듬었다. 수련으로 거칠어진 손이 미안할 정도로 아가씨의 살결은 보드랍고 촉촉했다. 너무나 여려서 조심스럽게 만지고 싶었지만, 어째 손이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고 집요해졌다. 계속 그러다 보니 아가씨가 아닌 자기가 흥분할 것 같았다. “읏…….” 은밀한 살결 틈에서 진주알 같은 작은 살덩이가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그 구슬 같은 부위에 손가락이 스치자 마리가 골반을 비틀며 야릇한 소리를 냈다. 하이너의 눈빛에 기묘한 빛이 스쳤다. 소리가 나는 부위라. 그 부위를 계속 만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검지 끝으로 꾹꾹 눌러보았다. 역시나 가장 민감한 부분인지 여태와는 반응이 달랐다. “네 손은 너무 거칠어, 하이너.” 한때는 기사를 꿈꾸었던 청년의 손인지라 거친 게 당연하다. 또 그게 자랑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손은 지금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듯하다. 하는 수 없이 손을 돌려 상대적으로 더 부드러운 손등으로 그곳을 만졌다. 이번에는 마리가 만족스러운 듯 얌전히 있었다. 살결 틈에서 축축한 것이 흘러나와 윤활액으로 삼기에 좋았다. 그 액을 손등에 묻혀 더욱 부드럽고 섬세하게 마리의 진주알을 내몰기 시작했다. “흐읏, 흐잇.” 누가 가르쳐준 것은 아니었다. 어디서 배우고자 한 적도 없었다. 다만 여자의 반응을 길잡이 삼아 열심히 하는 것뿐이었다. 손가락 속도가 빨라지는 것 또한. “아앗!” 이번에는 아가씨가 골반을 비트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들썩이는 반응을 보였다. 진주알이 계속 단단해지는 느낌에 자기도 모르게 손등으로 세게 눌렀더니 그게 큰 실수인 것 같았다. 미안해서 얼른 손을 뗐다. “아프십니까?” “그럴 리가.” “하지만 분명 아가씨 소리가.” “순진하긴, 반대로 생각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반대인데 왜 앓는 소리를 내지? 하면서도 손은 다시 부드러운 손등으로 마리의 진주알을 찾고 있었다. 단단해진 진주알은 더욱 붉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붉은데 계속 자극하면 상처가 나지 않을까? 최대한, 최대한 부드러워야 한다…… 는 생각에 은밀한 살 틈에서 흘러나오는 미끄러운 물을 계속 쓰기로 했다. 마치 흘러나오는 물을 진주의 표면에 퍼 나르듯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렸고 그것을 반복하자 마리가 기분이 좋다는 의사 표시를 확실히 하고 있었다. “읏… 좋아.” 분명 쾌감에 닿기 직전인 짜릿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고 하이너도 짜릿함에 몸을 떨었다. 그러다 갑자기 등이 아픈 걸 또 느꼈다. “하아.” 등이 쓰라린 건 참을 수 있지만, 아가씨의 허벅지가 움직이고 풍만한 가슴이 거친 호흡으로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보니 더는 참지 못할 것 같았다. 괜히 자신의 호흡도 거칠어지고 온몸에 열이 오르고 있었다. “더 좋게 해줘, 하이너.” “아가씨….” 더욱더 부드럽고 더욱더 축축한 것으로 저 진주알을 건드린다면? 하이너는 거침없이 혀끝을 갖다 대었다. “아아!” 그 순간 생소한 맛을 느꼈다. 아가씨가 가느다란 다리를 어쩌지 못해 시트에 비비적거렸다. 키스도 안 해봤는데 여기부터 핥아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미 혀와 함께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타액과 함께 섞여 들어오는 새콤한 맛이 참을 수 없이 야했다. 고귀하신 분의 이곳을 핥고 먹다니! 너무나 야하다 못해 죄악감마저 느꼈다. 잠시 고개를 떼고 보니 아가씨의 살 틈에서 맑은 액체가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아, 하, 하이너….”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싶은 듯이 움찔거리는 틈새. 그것을 홀린 듯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가 두 손을 뻗치고 있었다. 얼른 오라고 보채는 것만 같았다. 한쪽 손으로는 빳빳하기 이를 데 없는 성기를 만지작거리며 다른 쪽 손등으로는 아가씨의 꽃잎을 만졌다. 이 은밀한 틈으로 제 것이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아가씨의 손짓이 그러라고 하지 않은가. 흥분시켜드려야 한다는 의무는 달성한 것 같지만 쉽지 않았다. ‘선을 넘어선 안 된다.’ 이미 한 번 정액을 쏟아낸 성기를 여기 넣어버린다면 임신이 될지도 모른다. 아가씨를 지켜드려야 할 처지가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선을 지킨다는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곤란한 일을 만들지 않는 것. ‘게다가 저렇게 좁아 보이는 것에 내 흉물을 넣을 순 없지, 암…… 없는 거야.’ 애 끓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이너, 하이너…….” 당장은 다시 혀와 입술로 달래드릴 수밖에 없었다. 대신 이번에는 더욱 좋게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숙이고 아가씨의 분홍색 균열을 혀로 갈랐다. 아까보다 진한 여성의 맛에 혀에 힘이 들어갔다. 더할 수 없는 흥분에 자신의 성기를 잡고 흔들었다. 그런데 너무 흥분해서 핥다 보니 그만 입술과 살짝 난 수염의 거친 경계가 진주알에 스쳐버렸다. “읏…! 거칠어!” “죄송합니다.” 호위 기사 노릇을 하면서 이번처럼 고분고분 사과한 적이 있을까. 그만큼 아가씨가 아파 보였다. 그래서 재빨리 아래에서 흘러내리는 애액을 혀끝에 훔쳐 진주알만 살살 달래다가 입술로 조심스럽게 빨아들였다. 반복하니 아가씨가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 읏…… 아아!” 그 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성기를 훑던 제 손도 빨라졌다. 사정할 것 같은 기분이 너무 좋아 사정하고 싶지 않았다. 짐승처럼 마리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아가씨의 목덜미와 가슴을 쉴 새 없이 핥으면서 성기를 차분히 달래었다. 목소리가 이상한 건 아가씨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구를 꾹 참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아가씨… 아가씨…….” 살면서 이다지도 애 끓는 목소리를 내어 본 적 없었다. 간절히 원하는 게 있는 사람처럼 아가씨를 불러댔다. 아가씨라는 ‘호칭’을 부를 때마다 선을 넘어선 안 된다고 자기를 세뇌했다. 자긴 어디까지나 흥분시켜보라고 해서 흥분시켜보는 것뿐이었다. 절대 아가씨의 은밀한 곳에 제 것을 쑤셔 넣고 싶어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입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때 마리가 눈을 가리는 천을 스스로 풀어버렸다. 맑은 청록색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이성은 맑기는커녕 도리어 음탕해졌다. “하이너, 하이너, 얼른…….” 청록색 눈동자가 온몸을 물들일 것만 같았다. 아가씨의 유혹이 짙어질수록 등이 더욱 아파졌다. 이렇게 유혹당하기 싫어 눈을 가렸건만 아무래도 실패 같다. “넣어달란 말이야…….” 하이너는 아가씨의 입에 성기를 넣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성기는 성기로만 들어가야, 성기일 수 있다고 생각, 아니, 욕망했다. *** 한스는 술과 사람과 마법을 좋아하는 약사다. 공식적인 직업은 약사지만, 그는 자기의 진짜 직업이 밀주업자에다 마법사라고 생각했다. 그야 밀주업이 약사보다 돈이 더 되고 마법 연구가 약을 연구하는 일보다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는 자기가 만든 술을 맛본단 핑계로 친구들과 신나게 마셨다. 최근에 영주님의 딸 마리니시네와 거래하여 큰돈을 만졌기에 제법 고급 재료로 술을 만들 수 있었는데, 벌써 그 술이 숙성하여 천상의 맛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렇게 잘 만들어진 술을 오를린 영지뿐 아니라 통합된 네히트 영지까지 팔고 거기서 만진 돈으로 또 만들어서 황도에까지 팔아 사업을 확장하는 게 그의 야망이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그를 보고 종자이자 조수인 루돌프가 헐레벌떡 뛰어와 부축했다. 열두 살밖에 안 된 루돌프에게 스물두 살 한스의 몸은 (한스가 날씬한 편인데도) 부축하기가 무거웠다. 한스는 묵묵히 자기를 부축하는 루돌프를 보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루돌프 언제 커서 나를 번쩍 안으려나.” 루돌프는 ‘마스터가 술을 드시지만 않는다면 제가 이렇게 마스터를 안을 일도 없잖아요?’라고 따지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한스는 루돌프의 몸을 벗어나 작업대에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마스터 한스는 술에 취해 작업대에 앉을 땐 십 분 이내 잠드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담요나 준비해드릴까.’ 루돌프가 그러한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작업대를 둘러보던 한스가 루돌프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루! 이 링클(여러 효과를 내는 마법돌을 두루 일컬어 부르는 말)이 왜 여기에 있지?” 한스가 말하는 약이란 사람의 멜라닌 색소를 서서히 변화시키는 약으로, 범죄자들이나 신변을 감춰야 할 이들이 몰래 찾곤 했다. 한스는 며칠 전 오를린 영주의 장녀인 마리의 부탁으로 그 약을 그녀의 호위 기사의 몸에 몰래 이식하는 일을 부탁받았다. 그런데 그날 중요한 계절성 약재료 수집을 위해 그 일을 루돌프에게 맡겼었고, 루돌프가 무사히 링클을 호위 기사의 몸에 이식했을 거로 생각했는데……. 루돌프는 한스가 내민 링클을 보고 멀뚱거린 표정을 했다. “이 링클이 왜 여기 나와 있죠?” “이런! 맙소사! 왜 여기 나와 있느냐니! 일부러 네가 발견하기 쉬운 곳에 놔두고 간다고 했었잖아! 이건 루돌프 네가 그 호위 기사의 몸에 심었어야 하는 거라고!” 다정하고 유순한 성격의 마스터가 이리도 화가 나서 말하는 것을 본 적 없던 루돌프는 자기가 뭔가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루! 하나만 물을게! 이게 여기 있다면 대체 그 호위 기사의 등에 이식한 건 뭐였어?” 루돌프는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왠지 그림이 더 쉬울 것 같았다. 그래서 연필과 종이를 가져와, 자기가 호위 기사에게 이식했던 링클 조각의 모양을 그려 마스터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한스는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루돌프가 호위 기사에게 이식한 링클은 여태 한스 자신이 사들인 링클 중 최고가를 자랑하는 것으로, 이식하면 인간의 몸이 마치 거대한 드래곤……. *** 그 시각 오를린 영주의 성, 하이너의 방 벽이 산산이 부서졌다. 벽을 깨드리고 나온 것은, 하이너의 등에서 골격을 뻗은 드래곤의 날개였다. 00007 2. 번뇌의 호위 기사 =========================================================================                            “넣어달란 말이야…….” 꿀처럼 달콤한 보챔에 이끌려 자신의 성기를 아가씨의 안에 넣으려 했다. 선을 넘지 않아야 한다고 했으면서도 결국엔 유혹을 이기지 못해 본격적인 성교를 하려는 그 직전, 아가씨가 생글거리며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너, 드디어 눈이 푸른색이야.” ‘드디어’라고? 무슨 뜻인가. 그리고 검은 눈동자를 가진 자기가 갑자기 어떻게 푸른색 눈으로 변한단 말인가? 그런 의구심이 드는 순간, 등이 찢어져 나갈 것만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으아아아아아!” 비명이 터질 정도로 아팠다. 모두가 잠든 이 밤, 마리와 단둘이 있는 이 상황을 들킬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황에서도 눈치 없이 비명이 터질 정도로 커다란 고통이었다. 그그그극, 그그그극 하는 뼈와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등에서 알 수 없는 뭔가가 피부를 뚫고 뻗쳐 나오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글거리던 마리는 이미 벽에 등을 찰싹 붙이고서 호위 기사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하이너, 네 등에서 뼈가 자라고 있어!” “으아아…… 허억, 헉……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윽…!” 어깨뼈가 양쪽으로 증식해 뻗어 나갔다. 마치 뼈가 날개의 형상을 이루는 것 같았다. 온몸의 피부도 부풀어 올라 검회색의 비늘처럼 변했다. 그뿐만 아니라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신음도 점점 사람의 것이 아닌 듯 기괴하게 변했다. “그아아아…… 그아…….” 어째서 사람의 신음이 아닌 드래콘의 울음소리를 낸단 말인가! 소리 또한 어찌나 우렁찬지! 이러다 마구간에 있는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가 짝짓기 하자고 달려들 것만 같았다.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변해간다는 것이었다. 이런 어두운 밤에도 모든 사물의 색채가 더욱 밝아지고 윤곽 또한 더욱 선명해졌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벌레의 실 같은 다리마저도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사물이 변해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시각이 변해간다는 것을. 이런 혼란스러운 때에, 아가씨가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와우! 멋져! 내 호위 기사가 드래곤으로 변하다니!” 그제야 하이너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모든 변화가 곧 자신의 드래곤 화(化)라는 것을. 이 미칠 것 같은 시력과 감각 그 모든 것이 드래곤의 것이었다! 깨닫는 순간 이미 등에서 뻗어 나온 검회색 날개가 방 벽을 거침없이 부수고 있었다. ‘내가 영주님의 저택을 훼손하고 있다니!’ 마리는 이런 난리에도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대륙 지도를 챙기고, 이곳에 올 때 입었던 망토를 챙겨 입었다. “넌 여기 있으면 위험할 것 같아! 이왕 날개도 가진 참에 훨훨 날아 숲으로 도망가자!” 그 모습이 얄미워서 뭐라고 쏘아 붙여주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드래곤의 포효뿐이었다. 그어어… 그어어어……. 드래곤 화로 인해 청각마저 매우 예민하게 발달한 모양이었다. 저택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하이너의 방이야! 누군가 폭탄을 설치했나!” “일단 가보자고!” 마리는 마구 재촉하기 시작했다. “하이너! 꾸물거리긴! 도망을 가야 한다니깐?” 하이너는 뻥 뚫린 벽을 응시했다. 젠장, 들켜서 돌이킬 수 없는 소문에 휩싸이는 것보다야 바보 같은 날갯짓을 하면서 도망가는 게 낫다! 사람들이 하이너 그로스가 드래곤에게 잡아먹혔다고 생각해버리겠지. 하이너는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푸드덕, 푸드덕! 완전히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했기에 날갯짓이 수월했다. 이 와중에 아가씨는 왜 등에 폴짝 올라타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걸리적거립니다만!’ ***오를린 영지 소용돌이 산. 마리와 호위 기사, 아니, 마리와 풋내기(혹은 새끼) 드래곤은 소용돌이 산의 한 가운데 있는 동굴 속 호숫가에 피신했다. 사람 팔뚝만 한 지렁이와 맹독으로 곤충을 녹여 죽이는 거대 거미 그리고 흡혈박쥐가 우글거리는 이곳엔 영지 사람들이 절대 얼씬도 하지 못한다. 영주 님이 이끄는 사병 또한 찾아올 수 없는 곳이다. 하이너는 동굴로 들어오면서부터 서서히 인간화했다. 자기 의지로 인간화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변한 것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몸을 찢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딱 하나 다행인 점이 있었다. 한 번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는 인간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생물들에게 드래곤으로 인식되는 모양이었다. 그가 내뿜는 기(氣)가 강력해서 그들 주변엔 위험한 생물들이 꼬이지 않았다. 즉, 이 동굴은 사람들이나 짐승, 괴물들로부터 가장 안전한 장소란 이야기. “와, 다시 검은 눈동자로 돌아왔네!” 마리의 호들갑에 하이너는 호숫가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온갖 야광 식물, 야광 종유석 덕분에 동굴 안이 환해서 물 표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다행히 이런 인간의 모습을 할 적엔 모든 감각이 인간일 때와 같았다. 시각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모습?’ 어깨를 넘는 기다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 근육질로 뒤덮인 피부 등 모든 것이 분명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한 번 드래곤으로 변해버린 후인지라, 어딘가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등을 만져보았다. 그 커다란 날개가 뻗어 나간 것이 모두 거짓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했다. 마리가 뒤꿈치를 들고 키 큰 하이너의 어깨에 자기 망토를 덮어 주었다. “춥지? 내가 마리아(드래콘)에게 옷을 가져오라고 부탁해놨어. 여기서 하루 묵고 나서 천천히 생각…….” 하이너의 귀에는 아무런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드래곤 화라는 기상천외한 증상을 겪어 넋이 완전히 나가버린 그에게 마리는 찰싹 붙어서 그 단단한 팔에 볼을 비비며 행복한 얼굴을 했다. “마침 잘 됐지 뭐야! 내가 대륙여행을 가려고 결심을 하니 신께서 내 호위 기사인 너를 드래곤으로 만들어주시는구나! 이로써 안전 여행이 가능해졌어! 호호호!” 어째 아가씨의 지나치게 밝은 목소리가 거슬린다. 그제야 하이너는 저택에서 있었던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 성교하기 직전, 아가씨가 했던 말 한마디. ‘너, 드디어 눈이 푸른색이야.’ 하이너는 ‘드디어’라는 말이 줄곧 수상했다. 아가씨는 무얼 기대했기에 ‘드디어’라는 말을 쓴 걸까. 아가씨가 바란 건 뭘까. 얼마 전에 자기가 비밀 클럽이라 부르는 술집에서 정체 모를 술을 마셔서 기절한 것도 아가씨의 꿍꿍이에 있었던 일 아닐까? 이렇게 드래곤 화를 겪은 것 또한? 모든 자초지종을 아가씨에게 묻고 싶었다. 하이너가 무시무시한 안광을 내뿜으며 노려보자 마리는 못 본 척 대륙 지도를 펼쳤다. 그러자 하이너가 지도를 빼앗아 버렸다. “어허! 무례하게 무슨 짓이니?” 하이너는 지도를 돌돌 말아 아가씨의 눈앞에 위협하듯 내밀었다. 마리는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하이너가 두른 망토 사이로 덜렁거리는 물건을 가리키며 ‘어머! 줄어들었네!’하는 너스레를 떠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이너는 한쪽 손으로 제 물건을 슬쩍 가린 뒤 다시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마리를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그의 분노에 반경 500M의 동물과 곤충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하이너의 가느다래진 눈가에 신랄한 미소가 머물렀다. “그 난리 통에도 지도를 챙겨오시다니. 참 여유로우시군요?” “호호… 그랬나아?” “며칠 전부터… 그래, 정확히 아가씨께서 권한 술을 마신 뒤부터였죠. 그때부터 등이 아파 의사를 찾을까 했습니다. 혹시 그날 밤 제 몸에 무슨 짓이라도 하셨습니까?” 마리의 눈동자가 360도 천천히 회전하다가 천장을 향했다. “그날 술 취한 너를 곱게 데려왔지이. 네가 오줌 싸서 그걸 앤(하녀)과 함께 치웠고, 우음, 그게 다야!” 마리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누가 봐도 거짓말하는 얼굴에 하이너가 감히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하이너의 손에서 지도가 와그작 구겨졌다. 마리는 행여나 비싼 지도가 상할까 봐 울상이 되었다. “제가 바보인 줄 아십니까?” 하이너에게 내몰려 점점 구석으로 뒷걸음치던 마리는 어느새 동굴 벽에 닿았다. 하이너는 여전히 망토로 제 중심을 열심히 가리면서, 다른 쪽 손으로는 동굴 벽을 짚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눈동자로 마리를 내려다보며 진실을 요구했다. “아가씨 혼자서 제 몸을 옮기지는 못합니다. 당장 말씀하십시오! 저를 옮긴 사람은 누구이며, 제 몸에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자꾸 다른 소리를 하시면 저도 아가씨를 어찌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마리는 이토록 무섭게 구는 호위 기사를 본 적 없었다. 드래곤으로 변했을 때의 모습이 차라리 더 순해 보인단 생각이 들 정도로 몹시도 사나운 모습이었다. 정말 거짓말이라도 했다간 아가씨고 여자고 뭐고 한 대 맞을 것 같은 느낌에 사실을 말해주기로 했다. “하이너! 나는 있잖아!” 진실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에 하이너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코 너를 드래곤으로 만들려는 생각은 없었어!” “그럼 어째서 제 몸이 이리된 겁니까? 착하게 살아온 죄 없는 호위 기사를 어느 돌팔이 마법사의 불법 실험 대상으로 팔아넘기고 여행 경비라도 받으신 겁니까? 이 지도도 그렇게 산 게 맞겠지요!”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어차피 내가 여행을 떠나면 우리 부모님이 반대하실 게 빤하잖아? 사람들 앞에서 둘러대야 할 말도 있으니 절대 딸아이가 먼저 자진해서 여행을 떠났다고 하진 않으실 거란 말이야.” “그럴 테죠. 아가씨의 여행 욕심 때문에 애꿎은 저만 아가씨에게 대륙 여행을 가자고 후린 몹쓸 호위 기사가 될 테지요.” “그래, 바로 그거야! 네가 곤란해진다고! 그래서 이왕이면 너를 여행에 함께 데려가려 했던 거고, 네히트(오를린과 통합된 주변 영지)까지 갈 동안만이라도 오를린 수색대에 네 모습이 들키지 않게 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수를 썼었어! 그러니까 네 머리 색깔과 눈동자가 서서히 바뀌는 시술만 간단히 받았을 뿐이었다고!” “…….” “네 눈동자가 처음에 푸른색으로 변하니까 그 시술이 성공한 줄 알았는데…….” “…….” “네가 드래곤이 되다니!” 하이너는 세상에서 가장 골 때리는 말썽쟁이를 아가씨로 두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가씨의 사정이야 이해를 하지만, 어찌 됐든 호위 기사의 의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 오만한 행동이 미웠다. 호위 기사는 팔려온 노예도 아니고 엄연히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는 평민인데, 아가씨는 그런 호위 기사에게 마치 노예에게 하는 것보다 더 심한 일을 저질러 버렸다. 마리도 미안함을 느끼고 뒤늦은 후회를 하는지 커다란 청록색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혀서는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자기가 잘못했다고, 그러니 용서하라고 빌 것만 같았으나……. “…… 정말 횡재한 게 아니고 뭐겠어! 내 호위 기사가 지상 최강의 생물로 변할 수 있다니! 감동이야아아!” 꽉 껴안고 방방 뛰는 마리의 모습에선 반성의 모습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방방 뛰는 와중에도 지도를 은근슬쩍 도로 챙겨가는 뻔뻔한 행동이란! 하이너는 신분이고 뭐고 다 모르겠다 하고서 마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동굴 가운데 호숫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꺄악! 뭐하는 거야!” “말썽꾸러기 아가씨는 물에 처박아버리는 편이 낫습니다.” “안 돼! 나 수영복 가지고 오지 않았단 말이야!”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이지…!” 하이너의 단단한 팔은 아가씨의 몸을 성냥개비들 듯 가볍게 휘둘러 호수로 던져버리려 했다. 그런데 한순간, 이토록 깊숙한 동굴 가운데로 차디찬 바람이 불어왔다. 휘이이이잉……. 계절은 이미 겨울이나 마찬가지. 알몸에 망토 하나만 입은 하이너에겐 체온 유지가 절실했다. 아가씨의 몸은 호수에 던져지는 대신. “어맛!” 하이너의 품에 안겼다. 호수에 산 채로 수장되는 건 아닐까 내심 두려웠던 마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이너를 올려다보았다. 하이너는 그런 자신을 보지 말라는 듯 마리의 얼굴을 제 가슴에 더욱 세게 갖다 대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따뜻하군……, 일단은 당신을 난로로 좀 써야겠어.” 마리는 입술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어머나!’라고 외치고 싶었다. 호위 기사의 커다란 손이 뒤통수에 닿았다. 제 주인의 기분과 달리 상냥한 손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만지고 있었다. “…… 그리고 내일 아침이 되면 아가씨는 땔감이 되는 게지요.”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가능하면 내일 또 이 시간에 만나요! 00008 2. 번뇌의 호위 기사 =========================================================================                            오를린 영주의 저택은 초상이라도 치르는 듯 우울한 분위기였다. 세상에 그런 난리가 일어나다니! 호위 기사의 방 벽이 갑자기 부서지질 않나, 그 안에서 드래곤이 뛰쳐나와 보름달을 지나쳐 날아가질 않나! 게다가 그때 드래곤의 등에는 영주의 장녀 마리가 타고 있었다! 저택의 하인들과 오를린 영지민들이 그것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결국, 이 깊은 밤 호위 기사 하이너의 방에 영주의 딸이 함께 있었다는 것, 그들이 같이 밤을 보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하인들은 그들의 관계가 역시나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며 수군거렸다. 어찌 됐든 간에 드래곤 소동 후에 호위 기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택 사람들은 드래곤이 호위 기사를 먹어치워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가씨를 어딘가에 납치해갔다고 생각했다. 영주 내외는 딸이 사라지자 서로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여보, 이를 어째요? 나는 분명 봤어요! 우리 딸은 납치당한 게 아니에요! 드래곤을 타고 가는 그 아이의 모습은 절대 위험에 처한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살판 난 모습이랄까!” “쉿! 나도 봤다오! 그건 누가 봐도 신 나서 죽겠다는 듯한 자세였소!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오……, 우리 아이가 제 호위 기사를 드래곤에게 먹이로 넘기고 드래곤과 여행을 떠난 건 아닐까, 하는. 뭐가 됐든 말조심해야 할 때라오! 만약에 누군가가 우리 딸아이가 드래곤과 결탁했단 소문을 퍼뜨리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이오? 이웃 영지에서 우리 영지를 보고 불충한 음모를 꾸미는 곳이라며 황도에 모함을 해버릴지도 모르오! 그러니까 우리 마리는 납치된 거로 해둬야 하오! 몹쓸 드래곤이 제멋대로 데려간 거로 해둡시다!” “드래곤이 원하는 게 과연 무엇일까요?” “보나 마나 빤하지! 우리 딸의 미모에 반했거나, 아니면 우리 영지가 네히트 영지와 합쳐졌으니 뭔가 얻어갈 게 많아 보였던 게야!” 영주는 마리를 돌려받으려면 드래곤에게 얼마나 많은 보석을 주어야 하는지 속으로 계산했다. 자신에겐 금쪽같은 딸, 영지민들에겐 오를린 여성의 미모를 대표하는 절색의 아가씨라지만, 그 외의 가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존재다. 이미 혼기를 놓친 나이도 그렇고 평소 기행을 자주 일삼아 평판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남자관계가 복잡해 치정사건에 휘말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며 데리고 다니는 호위 기사를 밤 시중으로 쓴다는 돌이킬 수 없는 소문까지 달고 다녔다. 정략결혼의 카드로 쓰기엔 무리에다 그렇다고 다른 장점을 찾아 보려 해도 마땅한 것이 없었다. 학문에 흥미가 있길 하나, 뛰어난 특기가 있길 하나, 저택의 돈만 축내지 않으면 다행인 그런 애물단지였다. 그런 딸을 구하고자 드래곤과 흥정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이 상황. 영주는 아버지로서 생각하기보다 한 영지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생각하기로 했다. ‘오, 마리! 널 구하는 데 10억 자일, 그 이상의 자금은 절대 안 된다. 그것도 영지민들의 원성을 들을 수 있는 액수다. 얘야, 내 사랑하는 딸, 마리…… 이 아비를 탓하지 마라. 이 아비는 드래곤에게 그 이상의 보석을 줄 순 없단다…….’ 영주가 눈물을 훔치고 있을 때, 마리의 하녀인 앤 역시 아가씨의 방에서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앤은 마리가 어릴 적부터 마리의 언니, 친구, 엄마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앤은 온갖 계산을 해야 하는 마리의 부모와는 달리 순수하게 마리를 위해 슬퍼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이고, 아가씨! 드래곤에게 잡혀가시다니…… 이리 가시면 또 언제 저택으로 돌아오실까, 흐흑…….” 한참을 울던 앤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이너의 방으로 갔다. 벽이 완전히 부서진 그곳엔 하녀 하나가 뒷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앤이 보기엔 낯선 모습이었다. ‘우리 집에 저런 밝은 머리 색깔의 하녀가 있었던가? 체구도 상당히 작고…….’ 뒷정리하는 하녀는 갓 열다섯 살은 되어 보일까 말까 한 작은 체구였다. 보름달 아래 빛나는 그 자그마한 하녀의 머리카락은 진줏빛에 길이도 상당히 길었다. 앤은 다가가 말을 걸어보았다. “얘, 너는 누구니?” 그러자 진줏빛 머리칼의 하녀가 뒤돌아보았다. 순간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보고 앤이 뒷걸음치고 말았다. 처음 보는 눈동자 색깔이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이런 야심한 때에 저렇게 악마 같은 선홍빛의 눈을 밝힐 순 없으리라. 게다가 이제 보니 그 하녀는 방을 정리하는 것도 아니었다. 옷가지를 챙기고 있었다. 전부 호위 기사 하이너의 겨울 옷가지였다! 앤은 인간이 아닌 존재를 마주했을 때 느끼는 기이한 공포에 떨면서도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했다. “마, 말을 못하는, 신참인가 보군. 그 옷들은 이제 주인이 없으니, 전부 부, 불 지르면 된다. 불 지르는 장소는 뒤뜰 창고 옆…… 그럼 나는 이만!” 앤이 뒤돌아서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 순간, 앤의 뒤에 있던 자그마한 하녀가 제 등에다 하이너의 옷가지를 끈으로 고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발광하는 몸체의 드래콘으로 변해 하늘을 향해 훨훨 날아갔다. 앤이 다시 뒤돌아보았을 때,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는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바로 그때, 마구간에서 마구간지기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가씨의 드래콘이 없어졌다!” 마리아 그로스가 향한 곳은 소용돌이 산이었다. *** 마리는 하이너의 품에서 바동거리며 떨어졌다. 그리고 하이너의 가슴팍을 치면서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어머! 무섭다! 나를 땔감으로 쓸 거라니!” 하이너는 부지런하게 망토로 주요 부위를 가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돌 바닥에 닿은 궁둥이가 얼음에 닿은 듯 시렸다. 동굴 안으로 쉴 새 없이 바람이 불어와 너무나 추웠고, 그래서 아가씨의 체온을 좀 더 느끼고 싶지만, 아가씨가 저리 떨어지니 애써 다시 안으려는 것도 어색했다. 괜스레 짜증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추우니까 별수가 없잖습니까.” 마리는 하이너의 곁에 찰싹 붙어 앉아 눈빛을 빛냈다. “저기, 하이너? 드래곤으로 변신할 수 있는데 드래곤이 쓰는 고급 마법은 쓸 수 없는 거야? 그런 거 있잖아. 불을 피운다든가, 주변의 공기를 데운다든가, 이 동굴을 궁전으로 만든다든가 하는 거!” 하이너는 불을 피우고 주변의 공기를 데우는 건 고급 마법이 아니라 기초 마법이라고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것은 마법 문외한인 자기가 더 잘 아는데 어째서 마법에 관심이 있는 아가씨가 모르실 수 있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차디찬 농담뿐이었다. “음, 제가 드래곤의 마력을 사용하는 게 가능하다면 아가씨의 몸을 거대 양초로 만들어 불을 붙여보고 싶군요.” “어머! 싫다! 계속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구나?” 하이너는 아시니까 다행이란 듯 픽 웃었다. 갑자기 마리가 하이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런 행동이 도무지 적응되지 않은 하이너는 마리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리의 가느다란 손이 어깨를 타고 올라왔다. “미안해. 인간에서 드래곤으로, 드래곤에서 또 이렇게 인간으로 변신할 때마다 하이너가 아파해서 내 마음이 좀 아프네.” “좀이 아니라 많이 아프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이런 사과, 어울리지 않으니 그만두시지요.” 이런 말을 하는 순간에도 하이너는 드래곤 화를 언제 어디서 겪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동굴 속으로 바람 아닌 다른 존재가 들어왔다. 허공에 둥둥 떠서 우아하게 날갯짓하며 들어오는 그 생물은 바로 드래콘이었다. 마리가 자신의 드래콘을 발견하곤 손뼉을 쳤다. “오, 나의 마리아! 기특한 것! 정말로 하이너의 옷가지와 내 여행 준비물을 가져와 주었구나! 잘했어!” 마리가 드래콘의 등에서 물건들을 내리자 마리아는 한구석으로 걸어가 엎드렸다. 임무를 마치고 조용히 잠을 청하려던 마리아는 문득 주위가 싸늘한 것을 느꼈다. 그래서 주인님과 주인님의 호위 기사를 위해 공기를 따스하게 하는 기초 마법을 사용했다. 올해로 마흔다섯 살인 마리아 그로스는 드래콘의 나이로는 소녀나 다름없고, 그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마법도 기초 마법들뿐이었다. 그런 기초 마법이라 해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제 주인에게 어마어마한 도움이 되고 있었다. 마리가 따스해진 공기를 느끼고 마리아에게 사랑스러운 눈길을 건넸다. “우리 마리아가 마법을 쓰나 봐. 갑자기 하나도 춥지 않고 좋네. 뭐해. 하이너? 얼른 옷 갈아입어.” 마리의 지시에 하이너는 제 옷가지를 들춰서 입을 만한 두꺼운 옷들을 골라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째 아가씨께서 좀처럼 눈을 가리거나 딴 데로 돌아봐주질 않으신다. 은근히 무안했다. 마리가 하이너의 불편한 표정을 대번에 놀렸다. “부끄러운 거야?” “부끄럽지 않습니다.” 하이너는 거짓말을 하곤 아무렇지 않은 몸짓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이미 침대에서 은밀한 행위까지 한 사이에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었다.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된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옷을 다 입은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다가 제 옷가지를 바닥에 폭신하게 펼쳤다. 이렇게 하면 맨바닥보다는 부드러운 잠자리가 만들어진다. 그는 마리에게 누우라 권했다. “여기서 주무시면 될 겁니다.” 마리가 하품하며 대꾸했다. “흐음, 하지만 난 씻어야만 잘 수 있는 걸. 호수에 들어가서 씻을까 해.” 하이너는 한숨을 쉬었다. 동굴 속 호숫가라는 최악의 장소에 와서 씻고 잘 거라 말하는 아가씨의 고집이 터무니없었다. 이런 분이 대륙 여행을 하실 거라니. 여행은 아무나 하는 줄 아는가? “아가씨, 지금 공기가 따뜻해서 착각하시나 본데 호숫물은 공기와는 다르게 차디찹니다. 이런 데서 어떻게 씻습니까?” “하이너는 참, 걱정도 팔자야!” 마리는 마리아가 가져온 물건 중 여행 준비물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내게 다 생각이 있다고.” ‘퍽 좋은 생각이 있겠다.’ 하이너는 비웃으며 마리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곧 마리가 여행 준비물 사이에서 낡은 종이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언뜻 보기엔 싸구려 스크롤 같았다. 마리는 그것을 호숫물 위에다 대고 성냥으로 불을 붙여 태웠다. 그러자 곧 호수 표면이 황금빛으로 반짝이더니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기 시작했다. 호수의 위험한 생물들도 하이너의 드래곤 기운에 놀라 자취를 감춘 지금, 호수는 마치 온천을 보는 것 같았다. ‘여행 준비물로 저런 걸 사뒀단 말인가? 나, 참. 돈을 엄청나게 쓰셨겠군. 그게 아니라면 고작 유효 시간이 10분 정도인 싸구려 스크롤이거나.’ 하이너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마리를 보는데, 갑자기 마리가 드레스를 훌러덩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하이너는 급히 눈을 다른 데로 돌렸다. 발가벗고 호숫물에 들어간 마리가 하이너를 향해 손짓했다. “하이너도 들어와!” 하이너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야생 짐승 같은 저런 성격이 정말 싫었다. 세상에, 함께 씻자니. 그럼 처음부터 옷을 입으란 소린 왜 했는지 따지고 싶었다. “뭐해? 얼른 이리오라고! 시간이 10분밖에 없단 말이야!” “역시나 싸구려 스크롤이었군요.” 하이너가 대꾸하기가 무섭게 마리가 발가벗은 채로 뛰어왔다. 흔들리는 그녀의 가슴을 본 하이너는 코피를 터뜨릴 뻔했다. 마리는 하이너의 옷을 벗기려 했고, 기겁한 하이너는 알아서 벗겠다며 아가씨 먼저 물에 들어가 있으라고 하고 뒤돌아섰다. 나지막이 욕이 흘러나왔다. “젠장…… 그래, 지금 씻어버리지. 뭐.” 하이너는 재빠르게 옷을 벗어 던지고 마리와는 떨어진 곳에 몸을 담갔다. 그러자 마리가 작은 짐승처럼 졸래졸래 따라와서는 동굴 천장을 둘러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반짝이는 종유석들이 아주 아주 예뻐 보였다. “천국은 따로 없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위를 올려다보는 마리와 달리 하이너는 호수 밖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닥에는 짐승의 뼈들이 기괴하게 널려 있었다. 해골의 새까만 동굴을 보니 천국이란 단어가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천국이라…… 글쎄요. 지옥도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만.”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힘든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쪼록 앞으로는 가능하면 일일연재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00009 2. 번뇌의 호위 기사 =========================================================================                            마리는 하이너의 시선을 앗아간 해골을 보았다. 길쭉한 것을 보니 사람의 뼈는 아닌 것 같았다. 듣자 하니 황도의 부유한 자들은 저런 해골에 값비싼 보석을 치장하여 장식물로 쓴다고. 예술품이라 이름 붙여진 그것들은 인간에게 항상 죽음을 기억하게 하거나 삶의 덧없음을 비웃게 하는 용도라고 했다. 마리는 뭐가 됐든 장식물로서 예쁘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동굴 속에 해골이 굴러다니는 것도 보기 드문 아름다움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녀는 하이너에게 가르치듯 말했다. “이런 이런 내 단순한 호위 기사야.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지옥을 생각하다니. 너무 부정적이라니까. 잘생긴 남자가 부정적으로 굴 땐 섹시하게 느껴지지만 그게 계속되면 그 잘생긴 외모가 도리어 질려버린다는 걸 명심해.” “제가 부정적이라고요? 아가씨께서 미칠 듯이 긍정적이란 생각은 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뭐가 남지?” 마리는 물음을 던져놓고 대답엔 관심이 없다는 듯 호수 가운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깊은 곳에 가면 위험할 거라는 걸 알고 얕은 데만 물장구를 치며 돌아다니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지금 그런 행동은 긍정이 아니라 무념이지. 이 아가씨야.’ 하이너는 끓어오르는 속을 삭이며 목과 팔 등을 씻었다. 물속이라 그런지 살갗에 닿는 손의 느낌이 무거웠다. 드래곤화할 때 겪은 고통, 드래곤에서 인간화할 때 겪은 고통이 떠올랐다. 아가씨의 실수 때문에 변신을 겪어야 한단 것은 알았는데 또 언제 어디서 변신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물에 비친 얼굴에서 두려움이 검게 퍼져 갔다. 만약, 아가씨가 대륙 여행을 계획하지만 않으셨더라면……. 짙은 아쉬움이 녹아내린 한숨이 나왔다. “아가씨.” 마리가 하이너에게 물장구를 치며 대답했다. “응?” “여행의 목적이 뭡니까?” “으헤헤.” 마리가 웃기만 하고 대답이 없자 하이너는 더욱 화가 났다. 그는 마리에게 민감한 질문을 무자비하게 쏴대기 시작했다. “혹시 여행을 떠난다는 핑계를 대서라도 영주님의 곁을 떠나고 싶으셨습니까? 혼기도 놓치고 애물단지가 되는 게 싫으셨을 테지요? 같은 나이의 동생분은 황가의 일족이 되고자 떠나는데 당신은 그저 시골에 처박혀 손가락질이나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현실에 배도 아프실 테고요?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이제 아가씨는 대륙을 여행한단 핑계로 저 같은 괴물이나 데리고 다니면서 유유자적 즐기는 게 목적이겠지요? 돈이 떨어지면 저를 내세워 길거리 공연을 해서 구걸을 하실지도 모르겠군요. 어떠십니까, 호위 기사를 괴물로 만든 소감이? 뿌듯하시겠습니다만?” 뼈에 박힌 분노와 모른 척할 수 없는 진지함에 마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청록색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찼다. “너무해… 상처를 주다니. 딱총을 겨눈 못된 아이 같아.” 하이너는 그런 마리의 얼굴이 모두 연기라고 생각했다. “상처를 받은 척하실 뿐이겠지요.” “아니, 나 진짜 상처받았어. 하이너가 한 말, 너무 심해.” “아가씨가 제게 한 짓에 비할까요.” “물론 드래곤으로 만든 건 미안해.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 그저 머리 색깔과 눈동자 색깔만 손 보려 했다고. 아무리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도, 혼기를 놓친 애물단지라는 말은 너무 심하지 않아? 나란 인간을 그저 정략결혼의 도구로만 보는 무례한….” 가슴이 먹먹해진 마리는 하이너의 등을 세게 밀었다. 자그마한 체구 그 어디에 그런 힘이 있을까 감탄이 나올 정도로 센 힘이었다. 몸에 힘을 풀고 있던 하이너는 그대로 물속으로 미끄러져 허우적거려야 했다. “숙녀에게 실례잖아.” 하이너는 자칫 기도로 물이 들어갈 뻔했다. “푸아! 푸! 아, 진짜 진심 아가씨고 뭐고 패버리려 했다.” “뭐라고?” “음,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아무튼…….” 마리는 하이너를 물 밖으로 빼내오며 눈물을 훔쳤다. 하이너는 그녀가 손등으로 훔친 것이 눈물인지 호숫물인지 혹시 눈곱은 아닌지 진심으로 궁금하였다. 마리가 먼 허공을 바라보며 대륙 여행의 진짜 목적을 가르쳐주었다. “사실 난 내 하나뿐인 동생 로테를 구하러 가는 거야.” 하이너는 뜬금없고 가당치도 않다는 듯 물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면포로 제 몸을 닦았다. 제발 아가씨가 허튼소리를 작작하셨으면 했다. “아가씨께서 로테 아가씨를 왜 구해야 합니까? 지금 같아선 로테 아가씨가 아가씨를 좀 어떻게 구제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마리는 하이너의 이죽거림에 어떤 화도 내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내가 언젠가 말했지? 배웅은 앞날이 밝은 사람에게만 하고 싶다고. 로테의 앞날은 어두워.” “황태자비가 되실 분의 앞날이 어둡다니요?” “물론 로테의 야심은 언젠간 실현되고 말겠지. 제국의 황태자비. 이름만 거창한 그 자리에 앉겠지. 하지만 든든한 뒷배가 없는 데다 그저 그런 시골 영지 출신일 뿐인 로테는 종이 인형일 뿐이야. 언젠간 음모에 휘말려 미래의 황제 즉 지금의 황태자 녀석에게 무력하게 목이 잘리고 말 테지. 목이 잘리면서 다시는 황제 너를 위해 헌신하지 않겠다는 둥 말하며 과거 자신의 야심을 헌신으로 포장해대겠지. 마치 수많은 낭만 소설 속 여주인공들처럼! 내가 그 꼴을 보기 싫어 미리 로테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려 하는 거라고. 즉! 반드시 대륙을 정복해 미래의 황제 녀석을 내 발 앞에 무릎 꿇리고 말겠어!” 하이너는 옷을 갈아입으며 폭소했다. “하하하! 으하하하!” 동굴 속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웃음소리는 이내 마리를 가여워하는 염려의 한숨 소리로 바뀌었다. “하하…… 으허허…… 하아. 후우.” 마리가 하이너를 째려보았다. “나를 비웃어?” 옷을 다 갈아입은 하이너는 새 면포를 집어 들고 마리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리의 몸을 면포로 칭칭 감싸기 시작했다. 제 나름 아가씨의 몸에 손 하나 대지 않고 물기를 닦아주는 행위였다. 마리는 누에고치에 쌓인 번데기 꼴이 되어서는 하이너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하이너는 그런 마리를 어린애 보듯 했다. “지금 나를 비웃느냐고!” “하! 어떻게 비웃지 않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 황족 모함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다니! 정말이지 저처럼 입이 무거운 호위 기사를 둔 걸 다행으로 아셔야 할 겁니다. 대부분 아가씨의 그런 언행을 고자질해 한탕 쳐보려는 이들뿐이니까요. 아, 어쩌면 마리아가 내일 아침 그런 짓을 할지도 모르겠군요. 드래콘이란 생물도 나이와 경험에 따라 인간과 비슷해 때론 잇속을 챙기려 든다지요? 어쨌거나 황태자비 후보의 언니 되시는 분이 황족에 조금 전과 같은 망발을 일삼았으니 로테 아가씨의 목이 잘리는 것도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만. 음, 물기가 다 닦였군요. 옷은 알아서 갈아입으시고. 저는 이만 자겠습니다.” 뒤돌아선 하이너는 널찍한 바닥 한곳을 골라서 드러누웠다. 마리는 싸늘한 호위 기사를 내려다보다가 옷이나 갈아입자고 생각했다. ‘아, 참! 피부 관리!’ 그녀는 여행 준비물을 뒤적거려 피부 보습을 위한 식물액을 꺼냈다. 한 통밖에 가져오지 않아 아껴 쓰고 싶었지만 겨울 날씨가 워낙에 건조하여 일단은 전신에 다 골고루 바를 수밖에 없었다. 그 뒤엔 겨울에 입기 좋은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동굴 밖으로 나가 활동을 해도 무리가 없을 그런 털옷인데 예뻐 보인다기보다 곰처럼 둔해 보였다. 시골 영지라지만 나름대로 패션 선두주자였는데 이런 옷을 입어야 한다니 영 내키지 않았다. ‘정신 차려! 마리니시네 루 오를린! 너는 파티에 가는 게 아니라고.’ 옷을 다 입은 마리는 하이너가 미리 깔아둔 천들을 모두 질질 끌고 하이너의 바로 곁에 펼쳐다 놓았다. 이쯤 하면 폭신한 침구가 될 것 같았다. 바로 눕자니 젖은 머리가 거슬렸다. 그래서 여행 준비물을 다시 뒤적거려 싸구려 제습 스크롤을 사용해 머리를 말렸다. ‘흐음, 싸구려 스크롤은 한 달 정도면 바닥나겠군. 그 후에는 마리아의 도움이나 하이너의 드래곤 마력을 기대할 만하려나.’ 호숫물에 드리워진 발열 스크롤의 효과가 다해 주위를 감싸던 황금빛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어두운 건 아니었다. 여전히 종유석과 발광식물들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잠을 자기 적당한 밝기다. 마리는 등 돌린 하이너의 곁에 누워서 문득 마리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날개를 접은 마리아는 고이 잠들어 있었다. 온순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모습이 너무나 정적이라 마치 조각상 같았다. 마리는 기분이 좋았다. ‘저렇게 착하고 순한 아이가 고자질할 리 없어.’ 마리아가 둘러놓은 온기 마법 때문인지 졸음이 빠르게 덮쳤다. “잘 자. 하이너. 나와 여행을 떠나줘서 정말 고마워.” 무거워진 눈꺼풀을 느끼며 마리는 꿈나라로 떠났다. 마리가 잠든 후에도 하이너는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곳에 와서도 목욕에 화장에 스크롤 낭비를 해대는 마리를 보고 이 여행의 미래는 없다고 여겼다. 게다가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괴물로 변해버렸는데 그렇게 된 계기를 만든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이 몹시도 싫었다. 하이너는 마리가 너무나 미웠지만, 너무 밉기 때문에 앞으로도 내버려둘 수 없단 걸 깨달았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 미친 아가씨를 말리겠어.’ 어찌 보면 아가씨는 망상이 지나친지도 모른다. 또한, 가여운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마음을 반쯤 비우고 어떤 기대도 내려놓은 채 호위 기사의 자리에서 아가씨와 함께하는 수밖에 없었다. 쌕, 쌕… 쌕……. 잠든 아가씨의 숨소리가 들렸다. 돌아누워서 아가씨의 뽀얀 얼굴을 바라보았다. 음탕한 짓을 해대던 그 여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해맑은 얼굴이었다. 또한 철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러하니 황족 모함에다 패역한 계획을 겁 없이 세워댔겠지. 미친 아가씨……. 의사 수가 부족한 오를린에선 몰라도 네히트에는 정신병을 고치는 의사가 있다고 했었지……, 그곳에서 아가씨의 정신병을 고쳐야겠다. 또한, 나의 드래곤 화도 어찌 고쳐 보면 될 거다. 모든 걸 제 자리로 돌리고 오를린 영지로 돌아오면 되는 거다. 생각을 마친 하이너는 바로 누워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갑자기 가느다란 무언가가 무릎 위로 올라왔다. 마리의 한쪽 다리였다. 하이너는 성가신 듯 그것을 치워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리가 다리도 모자라 팔까지 하이너의 몸에 겹치기 시작했다. 입을 살짝 벌리고 자는 게 금방이라도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하품하는 아기처럼 귀엽기 짝이 없어서 하이너의 영혼을 앗아가 버렸다. 무심결에 그 입술을 다물게 해주려다 손이 아닌 입술이 먼저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는 그대로 멈췄다. ‘선을 넘을 뻔했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리의 몸 위에 많은 천을 덮어다 주고 멀찍이 떨어져서 잠을 청했다. 그가 어렵사리 잠이 들자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가 눈을 스르륵 떴다. 마리아의 은빛 뿔이 일순 백색으로 빛나더니 그 몸체도 인간화되었다. 마리아 그로스는 마리의 곁에 누웠고, 그러자 마리는 제 곁에 누군가가 온 것을 알아채고 다리와 팔을 조금 전처럼 뻗어보았다. 마리아는 그 손발을 내치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마치 주인님의 충실한 쿠션이 되어주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똑, 똑… 똑……. 종유석의 물방울이 바닥으로 부서져 내렸다. ============================ 작품 후기 ============================ 와 오늘 선작 폭발적... 감사합니다. 00010 3. 꽃은 제단 아래로도 뿌리를 내린다 =========================================================================                            한스는 종자이자 조수인 루돌프를 매우 아꼈다. 오갈 곳 없는 고아 루돌프를 데려와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함께 살면서 주변인들에게서 괜찮은 사람이란 소리를 자주 들었었다. 루돌프의 친형이 있다 해도 한스보다는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주진 못했을 거란 말 또한. 그러나 오늘처럼 루돌프가 대형 사고를 친 날, 한스는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 칭얼거리는 아이가 되고 만다. 제아무리 사람 좋은 한스라 해도 결국에는 감정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루돌프가 고가의 드래곤 링클을 영주 딸의 호위 기사에게 실수로 이식한 것이 화근이었다. 한스는 술이 확 깨는 걸 느끼면서 동시에 어마어마한 분노를 내지르고 있었다. “그게 얼마짜리 링클인지 알아? 약 팔아서 한 푼 두 푼 모아 바친 거야! 그리고 위험한 밀주업에 손을 대면서 번 돈도 모두 들였다고! 어디 그뿐인 줄 아느냐! 내 작위와 드래콘을 팔고 거기다 20억 자일을 바친 거라고! 무려 5년 동안의 개고생도 바쳤지! 이런 젠장, 빌어먹을! 바보 같은 너는 엉뚱한 남자에게 그 비싼 걸 이식하고 만 거다!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거라고!” 죄인 루돌프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링클들이 전부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잘 몰랐다, 링클 이식은 처음이라 실수할 수도 있는데 왜 그리 화를 내느냐, 하는 말 따위는 감히 마스터에게 하지 못했다. 한때는 황도의 대귀족이었다는 마스터가 제 작위를 돈으로 팔고 비싼 드래콘도 판 뒤 그 돈에다가 20억 자일을 추가로 지출해서 구했다는 귀한 물건이지 않은가. 그것을 흘러가는 강물에 버린 셈이나 마찬가지니 그 죗값은 지금 당장 목이 잘려도 치를 수 없으리라. 혈압이 오를 대로 오른 한스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제 멱살을 움켜잡고 흔들었다. 어린 루돌프의 멱살을 잡을 바에야 자기가 죽고 말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아! 드래곤화가 가능한 링클! 구하기 어렵다는 그 링클! 미련을 떨치지 못한 말이 자꾸만 나왔다. “사람에겐 누구나 꿈이 있다지. 내 꿈은 드래곤이 되는 거였다고. 훗날 다 늙어서 인간으로 살아갈 희망이 더는 없어질 때쯤, 그것을 내 몸에 이식해 드래곤의 넓은 날개를 펼치며 대륙을 떠돌 생각이었다고. 그런데 루돌프 네가…….” 열 살이나 어린 루돌프에게 이렇게까지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성이 날아가 버리니 못할 말도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정말이지 옛말 틀린 거 하나 없군.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고 했던가.” 그 순간 루돌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표정 변화는 없는데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과묵하고 성실히 제 할 일을 해서 어른스럽다는 말을 종종 듣지만, 결국에는 고작 열두 살의 소년일 뿐이었다. 자기를 데려와 키워준 사람에게 그와 같은 말을 듣는 것은 못으로 된 밭을 걷는 듯 마음이 아팠다. 한스는 루돌프의 눈물을 보자 으으으! 하고 속 끓는 소리를 냈다. 이성이 날아갔어도 최소한 어린 자에게 베푸는 관용은 조금이나마 남아 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한스는 작업대에 앉았다. 그리고 작업대 선반을 뒤적여 진정제를 찾아 마신 뒤, 자기가 검은 머리 짐승을 거두면 안 된다고 운운했던 말에 대해 변명했다.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원! 그런 얼굴 하지 마라! 네 머리는 검은색이 아니잖니!” 루돌프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검붉은 색의 머리카락이 루돌프의 눈물을 가리고 있었다. 한스는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침실로 가버렸다. 세상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랬다가 네 머리는 검은색이 아니라는 말로 얼버무려? 자기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위로의 말이었다. ‘젠장, 나가 죽어라! 너 따위가 저 애를 거둬 키운 것부터가 오만이었어!’ 한스는 기절하듯 침대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한참 후, 그의 실험실 밖으로 루돌프가 조용히 빠져나왔다. 소년은 최소한의 여행 준비물만 담긴 가방을 메고 그곳을 떠났다. 가출의 목적은 드래곤 링클을 다시 구해 마스터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다. 휘이이잉……. 열두 살 소년이 견디기엔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 로귀하르트 제국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 한쪽에는 푸른 바탕에 하얀 장미를 수놓은 복장의 궁악사들이, 반대쪽에는 흰색 바탕에 붉은 핏방울을 고급스럽게 수놓은 복장의 궁악사들이 나팔을 불고 있었다. 하얀 장미는 고결한 아름다움, 붉은 핏방울은 생명의 고귀함을 의미하는데 이 두 가지 표식은 제국교 로젠플라드를 상징했다. 웅장하고 화려한 나팔 연주가 끝나자 황태자를 보좌하는 소 시종장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야울을 지키는 왕이시자 로젠플라드의 수호자 그리고 제국의 황태자이신 비오르틴 뤼크 피나센토 로귀하르트 전하께서 드십니다.” 다시 한 번 나팔 합주가 이어지고 황태자 비오르틴 뤼크 피나센토 로귀하르트가 금빛 휘장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신부 후보들 앞으로 걸어가는 그의 구두 소리가 나팔 소리에 묻혔다. 궁의 숨막히는 위엄에 짓눌려 황태자의 존재 또한 묻히는 것만 같았다. 총 여덟 명의 황태자 비 후보와 수많은 귀족이 황태자를 향한 예를 취하기 시작했다. “비오르틴 전하를 위하여!” “비오르틴 전하를 위하여!” 이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무리가 있었다. 바로 할데바인 대공의 일족이었다. 거만한 표정의 할데바인 대공이 황태자를 훑듯이 바라보다가 아주 천천히 예를 취한 후에야 그의 일족은 뒤따라서 예를 취했다. 황태자를 향한 충성보다 제 주군의 행동을 그저 의미없이 따라한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러한 결례에도 힘없는 황제는 불쾌한 기색 하나 드러내지 못했으며, 할데바인 대공의 조카인 황후는 제 일족을 만족스러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황태자는 할데바인 대공을 향해 적의 가득한 미소를 흘렸다. 너무나 싸늘하여 시체 빛으로 보이는 황태자의 새하얀 얼굴에선 앞으로 몇 달 동안 신부를 고를 기대나 기쁨의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공허함과 음울함이 가득한 회색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이며 여덟 명의 신부 후보를 훑어보았다. 마치 보기 싫은 서류를 마주하듯 무성의하고 무감한 태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황태자비를 고르는 이 모든 일이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간택전에서 황태자의 의지는 중요치 않았다. 할데바인 대공이 계획한 각본에 따르면 할데바인의 딸이 여주인공-황태자비- 자리를 꿰찰 것이다. 늙고 병든 황제는 그 각본대로 흘러가야만 황실을 지킬 수 있다고 제 후계자에게 일러두었으나, 황태자는 그것에 반대했다. 아직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이 야심만만한 청년은 절대 아버지처럼 나약한 황제가 되기는 싫었다. 그는 신부 후보들을 찬찬히 보다가 할데바인 대공의 딸을 보고 입가를 올렸다. ‘늙은 너구리의 딸답게 역겨운 냄새가 나는군.’ 정작 할데바인의 딸은 황태자의 미소를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전하께서 나를 보고 웃으셔….’ 열여섯,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온 이 여자는 아직 남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들어서 아는 건 있어도 남자란 생물의 본질에 대해선 겪어본 적도 없었고, 지금처럼 황태자와 같은 미색의 남자를 가까이서 본 적도 없었다. 암갈색 물결치는 기다란 곱슬머리를 하나로 단정히 묶은 하얀 피부의 미남, 음울한 회색빛 눈동자는 인위적인 미소 속에서 기묘한 의지를 띠는 보석처럼 보였다. 그 외모에 홀린 듯 할데바인의 딸이 손을 내밀려는 순간이었다. 황태자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좌중은 이제 그가 할데바인의 딸에게 먼저 인사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로테아르카 루 오를린.” 할데바인의 딸을 지나친 황태자는 여덟 명의 신부 후보 중 가장 끝에 서 있는 로테, 즉 오를린 시골 출신의 아가씨 손등에 먼저 키스했다. 그 순간 할데바인 대공의 표정이 굳어버렸고 황후의 표정은 대놓고 일그러졌다. ‘건방진 놈 같으니! 내 저놈을 진즉 황태자 자리에서 내쳐야 했어!’ 황태자는 오를린 출신 아가씨의 손등에서 입술을 천천히 떼며 잔잔하게 웃었다. 어떤 권력도 신경 쓰지 않는단 패기와 알 수 없는 고집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가 오를린의 로테아르카에게 마저 인사말을 전했다. “앞으로 네히트와 함께 번영할 오를린의 모습이 기대되는군요.” 황공한 로테는 할데바인 일족의 따가운 시선도 잊고 다시 한 번 예를 취했다. “황태자 전하. 저희 영지에 신경 써주신 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 아버지는 전하의 의견에 따라 오를린을 발전시켜 제국에 충성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참, 나! 변방이 발전해봐야 변방이지!’ 보다 못한 황후가 부채질을 시작했고 황제가 낮은 기침을 했다. 그제야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로테에게서 단 두 걸음 물러났다. 그것으로 인사가 끝난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첫 춤을 나와 함께 춰주시겠습니까, 레이디?” 관습상 황태자가 그 어떤 여자와도 춤을 춰선 안 되는 이런 연회에서, 황태자는 로테에게 춤을 신청하고 있었다. 장내가 술렁였다. 황실이라는 거대 호수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 연회 기간 동안 궁의 하늘은 마법사들의 재주로 다채롭고도 형형하게 빛날 것이다. 밤 연회를 마치고 야울 궁의 거처로 돌아온 로테는 하녀에게서 머리 손질을 받았다. 원래 배정받은 좁은 거처가 아니라 황태자가 직접 지시한 최고급 거처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했다. 황태자가 할데바인의 딸이 아닌 자신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춤까지 신청하다니! 태어나서 오늘처럼 기쁘고 설레고 무시무시한 긴장을 동시에 경험한 적은 없었다! 수많은 황도의 귀족들에게서 ‘오를린 영주의 딸 로테는 시골 출신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에다 믿을 건 창녀 같은 얼굴뿐’이라는 무시를 받곤 했다. 귀족들만이 그런 소리를 한 게 아니라 어릴 적부터 그런 말을 한 사람은 많았다. 미인에게 따라붙는 질투의 시선이랄까. 사실 처음부터 꿈이 황후였던지라 나름대로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둔 게 있었다. 그래서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황실 사정에 그리 어두운 건 아니었다. 지금 황제 하리트네 뤼크 피나센토 로귀하르트는 전 황후이자 지금 황태자의 어머니가 살아있을 땐 현명하게 제국을 다스렸으나 그녀가 죽고 나서는 할데바인 대공의 조카(현 황후)에게 눈이 멀어 무능력한 인간으로 전락했다. 이제는 할데바인 대공의 꼭두각시에다 늙고 병든 퇴물이란 소리나 듣는 처지였다. 그런 상황에 황태자는 할데바인 대공의 체면을 오늘 정면으로 구겨버리고 말았다. 공공연하게 당신은 내 적이라 선언한 셈이었다. 로테는 그런 남자가 제 남편이 될 거란 사실에 전율했다. 할데바인 대공의 독사 같은 눈빛에 여유로운 미소로 답하던 미청년의 얼굴이 제 가슴에 박혀 새벽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황태자가 힘 있는 자들을 반려로 맞아들이지 않고 시골 출신의 여자를 맞이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어떤 이들과도 결탁하지 않겠다는 결심, 혼자만의 지략으로도 얼마든지 할데바인에 이길 수 있단 강한 의지의 표명이 아닐까? 폭풍처럼 격렬하고 봄꽃처럼 화려한 사랑의 중심에 자신이 있고 자신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니 로테는 이 모든 게 꿈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과연 황태자가 될 만한 재목이야. 야울의 겁 없는 사자라는 별명이 그냥 붙여진 게 아니었어! 오! 마리! 너는 믿을 수 있니? 할데바인의 딸처럼 어리지도 않고 내세울 만한 뒷배 하나 없어도 내가 그의 춤 신청을 받았단다! 네 동생이 제국의 안주인이 될 거란다! 내가 오를린을 떠나던 날 네가 배웅 나오지 않았던 것도 다 이런 미래를 질투했기 때문인 거니? 하하…….’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가. 꿈은 크게 가질수록 좋다고. 그래서 황후의 자리를 바랐다. 어릴 적에 그런 말을 하면 쌍둥이 언니 마리는 코웃음 치며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오, 가여운 로테. 이왕이면 대륙의 주인을 꿈꿔야지, 고작 황후가 다 무엇이니! 그게 바로 여자의 한계란다. 꽃을 따줄 남자만 바라지, 절대 먼저 꽃을 꺾으려 들지 않는 그 안일하고도 게으른 사고! 같은 여자로서 네가 아쉽구나! 하지만 뭐 상관있겠니? 어차피 너는 황후가 되지도 못할 텐데!’ 하지만 언니의 말은 모두 틀렸다. 지금 자신이, 지금 로테아르카 루 오를린이, 황태자의 궁인 야울궁의 가장 좋은 거처에서 향기로운 향초를 피워놓고 하녀의 머리 손질을 받고 있다. 원래라면 할데바인의 딸이 머물러야 할 이곳에서 말이다. 이게 황후가 될 미래가 아니라 대체 무엇을 뜻한단 말인가. 로테의 하녀 렌도 마리의 말을 떠올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리 아가씨는 이런 일을 상상이나 하셨을까요?” “상상했다 해도 제 자존심이 있어서 인정하기 싫었을 테지. 오, 렌. 나는 라일락 향기가 좋아. 그 향수 가져왔어?” “여기 있어요.” “머리와 목에 두루두루 뿌려줘. 물론 끝난 후에 너는 그 향기를 지우도록 해. 그 향기는 내게서만 나야 하니까.” “아무렴요, 아가씨. 아니, 황태자비 전하.” “어머, 렌은! 참! 누가 들을라!” 렌은 마리의 하녀인 앤의 동생이었다. 아가씨 자매와 하녀 자매가 언니파와 동생파로 나뉘어 서로 대립을 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렌은 시골에서 말썽꾸러기 마리 아가씨의 뒤치다꺼리나 평생 하고 살 언니 앤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화려한 궁에서 황태자비의 시녀가 되어 여유롭게 살다가 어느 귀족에게 시집을 갈 테지만, 언니 앤에게 미래란 과연 무엇일까. 그저 그런 촌부의 아낙이 되고 늙고 병들겠지. 렌은 아무쪼록 로테 아가씨가 처세를 잘하여 자기 언니 앤도 궁의 시녀가 되는 날이 오길 바랐다. 렌이 로테의 머리 손질을 마치고 향수도 다 뿌린 후였다. 갑자기 거처 바깥에서 한 남자의 점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울을 지키는 왕이시자 로젠플라드의 수호자 그리고 제국의 황태자이신….” “아, 됐어.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와서 그런 거창한 소개는 필요 없지.” 소개를 끊은 사람은 다름 아닌 황태자였다. “오, 설마! 렌, 조금 전 그 목소리는? 난 몰라!” 황태자 비오르틴 뤼크 피나센토 로귀하르트의 낮고 음울한 목소리를 들은 로테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시간에 황태자가 언질도 없이 올 줄은 몰랐다. 이미 거울에 황태자의 모습이 비쳐 있었다. 로테는 경황이 없어 거울에다 대고 인사를 할 뻔했다. ‘진정해! 진정하라고! 로테아르카!“ 뒤돌아선 그녀가 우아한 태도로 숨을 골랐다. 제 언니 마리와 같이 풍만한 가슴이 호흡에 따라 부풀어 오르고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짙은 라일락 향기가 감돌았다. 차분해진 그녀가 황실 예법에 따라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황태자가 멈추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그의 시종이 먼저 그곳을 나섰고, 뒤따라 렌도 눈치껏 자리를 비웠다. 넓디넓은 공간의 출입문이 시종에 의해 굳게 닫혔다. 그 사이 황태자는 총 세 개로 나 있는 창문을 보았다. 연회에 참여한 이들이 오를린의 딸 로테에 지나친 관심을 보인 탓인지 로테가 모든 커튼을 내려놓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황태자비 후보라. 황태자는 쓴웃음 지었다. ‘궁 생활을 퍽이나 잘해나가겠군.’ 바람 하나 들어오지 않는 밀폐된 공간이란 걸 확인하고 나서야 황태자 아니, 비오르틴은 움직였다. 그가 향한 곳은 소파가 아닌 로테의 침대였다. 숙녀의 침대에 앉아 느긋하게 고개를 젖힌 그가 명령했다. “거추장스러운 건 다 집어치우고 이 앞에 앉아보실까요, 레이디?” 로테의 심장은 긴장 상태를 넘어서 달리기하는 것처럼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00011 3. 꽃은 제단 아래로도 뿌리를 내린다 =========================================================================                            로테는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아래에서 위로 찬찬히 그리고 노골적으로 훑어보는 황태자는 연회장에서의 호의적이고 다감한 태도와는 상당히 거리를 두고 있었다. 마치 눈앞의 여자를 희귀한 짐승 보듯 하는 아이처럼 호기심 가득하고 짓궂은 분위기였다. 그 내면에는 정욕이라는 은밀한 욕구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정욕이 확실하다. ‘나를 그저 창부로 보는 거야?’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고 따질 주제도 되지 않는다. 황태자는 오를린에서 온 초상화 하나만 보고서 초상화 속 주인공을 황태자비 후보에 들이겠다고 선언했다. 네히트를 오를린의 부속 영지로 통합시켜 오를린의 번영에 힘써주기도 했다. 여덟 명의 후보 중에 직접 고른 여자는 오를린의 로테아르카 뿐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도는 지금, 이 남자가 원하는 것을 이뤄주는 게 좋은 것 아닐까. 아마도, 잠자리. 다른 걸 원할 거란 생각은 할 수 없다. 이 남자와 함께 춤을 췄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몸을 줘 버리고, 자신 또한 황태자비가 되면 그만이다. ‘급했나보군. 달랑 초상화 하나만 보고서 그동안 몸이 달아있었단 말인가? 하하. 이거 정말 예쁘게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해야겠어.’ 궁의 모든 눈과 귀와 집중된 이때, 그가 이리 온 것은 분명 파격이고 할데바인 대공에 대한 도발이며 나에 대한 욕망이겠지. 그래. 까짓 격식이 다 무슨 소용이야? 이 남자가 나를 원하는데. 절대로 이 밤을 헛되이 보내선 안 된다……. 로테는 연기의 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황태자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척 최대한 서툴고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련되고 화려한-때론 방탕하단 말이 떠도는- 궁정 여인들의 분위기와는 거리를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덟 명의 후보 중 가장 화려한 외모로 가장 숙맥처럼 구는 게 이 남자에겐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언니와 달라 남성과 교제 한 번 하지 않았어도 이런 식으로 순진함을 꾸미며 유혹할 줄은 알았다. “폐하, 무슨 말씀인지….” 계산하면서 그녀는 떠듬떠듬 말을 이어갔다. “일단 제대로 인사를 다시 하겠습니다. 로테아르카 루 오를린, 황태자 전하를 뵙….” “거추장스러운 건 다 집어치우라고 했지?” 로테는 고개를 숙이는 도중 굳고 말았다. 황태자의 목소리엔 격식과 입장을 내던진 것을 넘어 묘하게 신경질이 묻어나 있었다. 당황하여 살짝 고개를 들어 황태자의 얼굴을 살피는데 그의 음울한 회색 눈이 말하고 있었다. 오라고. 어쩐지 폭압적으로 느껴지는 눈빛에 그만 소름이 돋았다. 이미 계산을 단절해버리고 황태자를 향해 한걸음 내디디고 있었다. 자꾸만 다리가 덜덜 떨렸다. 궁 생활과 황태자란 존재가 낯설어서 그런 것일 뿐이라고 최대한 심장을 안심시키려 애썼다. 그 순간, 팔이 잡아당겨 졌다. “전하!” 로테의 풍성한 잠옷 자락이 사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작은 먼지를 일으켰다. 그 사이 그녀의 호흡은 멈춰버렸다. 단 한 번도 남자의 가슴 위에 얼굴을 파묻어 본 적이 없어 당황한 나머지 바동거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황태자는 이 몸을 가벼운 쿠션쯤으로 여기듯 쉽게 제 몸 위로 올렸다. 호리호리한 체격과 달리 황태자의 힘은 제법 센 편이었다. 너무나 짧은 시간에 이런 자세가 되었지만, 머릿속엔 이미 팟하고 불꽃이 터졌다. ‘시작된 거야! 이 남자와 나의 밤이!’ 그녀는 천천히 황태자의 얼굴과 마주했다. 거친 리드에 겁먹고 놀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순진한 표정을 부러 내세운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이미 황태자는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었다. “이리도 밝은 얼굴로 그런 표정을 지어선 쓰나.” 찰랑거리는 금발이 세상에서 가장 가느다란 실처럼 고왔다. 하늘과 숲의 색을 한데 섞어 번져놓은 듯한 청록색의 눈도 아름다웠다. 낮게 속삭이는 앳된 목소리 또한 어린 날 마주한 꼬마 숙녀를 추억하게 하듯 감미로웠다. 그러나 조금 전부터 풍기는 향기, 그저 달콤하기만 해 머리가 아픈 이 향기만은 왠지 거부감이 들었다. ‘분명 이런 단순한 향기가 아니었는데.’ 황태자의 미간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오를린의 향수는 형편없군.” “저, 전하?” 무섭고도 설레는 명령이 로테에게 떨어졌다. “입 맞춰봐.” 로테는 멀뚱히 황태자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얼른 이 이상한 자세에서 벗어나고 싶단 기분과 아직은 입 맞춰선 곤란하단 계산이 겹치고 있었다. 숙녀의 의도된 머뭇거림을 마주한 황태자는 눈을 일그러뜨렸다. 이런 상황에 와서 얌전한 척도 정도껏 해야 한다. 그런 경고를 건네고 있건만 이 시골 출신 아가씨는 인지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황태자 아니, 비오르틴이 한 손을 뻗어 로테의 뒤통수를 만졌다. 보드라운 비단실 같은 머리카락을 짐승의 갈기처럼 거칠게 움켜잡고 머리를 끌어당겨 거세게 입술을 부딪쳤다. 놀란 로테가 작은 신음을 흘렸다. 이런 식으로 생의 첫 입맞춤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무례하단 소리를 각오하고 황태자의 몸을 살짝 밀쳤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무의미한 저항은 길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오르틴은 피식거렸다. 곧 로테의 뒤통수를 감싼 손을 서서히 아래로 내려 등을 쓰다듬다가 그녀의 몸 전체를 가볍게 침대에 눕혔다. 그 사이 그녀의 입술만 탐했을 뿐 결코 혀를 넣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로테는 굉장히 깊은 입맞춤을 받은 것처럼 정신이 혼미했다. 비오르틴은 그녀의 옆에 앉아 왼손을 까딱였다. 그의 소매 안에서 단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통의 단검보다 훨씬 작은, 하지만 무늬만큼은 그 어떤 것보다 정교하여 인상적인 물건이었다. ‘맙소사! 저걸로 뭘 하려는 거야?’ 흉기를 본 로테의 숨이 멎었다. 이제껏 거짓으로 놀라움을 연기했다면 지금은 진짜로 놀라고 있었다. 황태자는 그녀의 두려움은 안중에도 없는 듯 무표정했다. 갑자기 그가 창문을 보았다.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에선 바람이 절대 통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로테에게로 시선을 내리며 낮은 목소리를 뱉었다. “때론 바람이 더 강한 것 같지 않아?” “…… 예?” “향기를 검으로 벨 수 없는 게 안타까워서 말이지.” 단검 끝이 향한 곳은 그녀의 어깨였다. 트득, 트득 하고 죄 없는 옷감이 찢겼다. 궁에서 입기 위해 비싸게 사들인 옷감으로 공들여 만든 잠옷이었다. 황태자는 마치 이 잠옷이 라일락 향기를 뿜어내는 몹쓸 물건이라 여기는 듯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았다. ‘라일락 향을 싫어하는가? 내일 당장 렌에게 말해 향수를 바꿔야겠어.’ 비오르틴은 로테의 가녀리고 새하얀 어깨를 보았다.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허리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부피감 있는 둔부와 허벅지가 마음에 들었다. 향이 뭐가 어떻든 이 몸만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부부로 오랫동안 지내려면 무엇보다 잠자리가 만족스러워야 한다지. 실제로 그래. 온건한 부부 관계는 어떤 불의도 일으키지 않지. 평범한 가정이든, 황가든. 그리고…….” 반쯤 드러난 여인의 싱싱한 몸은 갓 스무 살이 된 사내의 정욕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너는 몇 번을 안아도 질리지 않을 몸으로 보여. 그것만으로도 내 아내가 되기엔 충분해.” 칼끝은 로테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벗기려 시도했다. 그러다 갑자기 멈추었다. 가장 기대되는 작품은 맨 마지막에 보는 법이었다. 비오르틴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또 다시 왼손을 까딱거렸고 순식간에 그의 소매 사이로 단검이 모습을 감춰버렸다. 로테는 이런 방식으로 옷을 찢어 벗기는 황태자에게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기분 나쁜 공포가 아니라 홀리고 빠져들어 자신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그런 달콤하고 짜릿한 공포였다. 한때 언니가 거칠고 과격한 행동이 멋진 행동인 줄 알고 오해하며 사는 시골 놈팡이들에 관해 수다를 떤 적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그런 남자들이 유치한 얼간이 같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황태자의 이러한 행동은 전혀 한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차갑고 음울한 외모에서 감도는 특유의 매력 때문일까. 아니면 열여섯 어린 나이에 소드마스터와 박빙의 검 승부를 펼쳤단 소문 때문일까. 아니면 황태자란 자리 자체가 주는 위엄 때문일까! ‘뭐가 됐든 상관없어! 아내가 되기 충분하다고 하잖아! 이 간택의 주인공은 결국 나란 말이라고!’ 아찔해진 정신을 다잡고 그녀는 여전히 처연해 보일 정도로 순진함을 내세웠다. “두렵습니다만, 전하께서 그러하시다면 저는 기꺼이….” “네 의견은 필요 없다.” 비오르틴은 로테의 가녀린 어깨로 고개를 숙였다. 보드라운 살결의 담박한 맛을 확인한 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기분 나쁜 라일락 향기보다 몸의 온기가 더 강하게 콧속으로 들어와 좋았다. 꽃향기 따위가 아닌 사람의 냄새를 원했다. 언젠가 오를린에서 본 금발 소녀의 생동감 넘치는 체온을 원했다. 겨드랑이와 가슴이 이어지는 살결에 코를 박고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맞춤보다 훨씬 격정적인 느낌에 로테의 몸은 점점 뜨거워졌다. 어둡지만 미색이 짙은 그의 얼굴, 단정한 입술 사이로 연한 체리 같은 젖꼭지가 모습을 감추자 소름이 돋았다. “전하, 그런 데를… 아!” 비오르틴은 핥으면 핥을수록 단단해지는 과실의 반응을 느끼며 웃었다. 고작 젖꼭지 한 번 문 것 가지고 큰일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놀라는 그녀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과연 오를린의 딸은 훌륭한 배우다. 이 여자가 보이는 반응 그 어디에도 정염을 느낄 줄 아는 여자의 설렘과 기대는 없었다. 한껏 붉힌 얼굴을 떨리는 두 손으로 감싸는 모양새는 누가 봐도 자신이 처녀라 말하는 듯 겁에 질려 있었고 순진해 보였다. 입에 문 작디작고 단단한 과실을 깊이 빨아들이다 빼내고 반대쪽 과실을 노렸다. 젖꼭지를 물고 말하는 비오르틴의 얼굴도 시체 빛에서 점점 열기가 퍼진 붉은색이 되어갔다. “이쪽이 더 빨리 단단해지는군. 알고 있나? 역겨운 꽃냄새를 풍기는 것보다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이 살덩이가 음…… 더 매력적인 거.” “아아, 전하…….” “좀 더 맛봐주지.” 스무 살이라는 나이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오르틴의 목소리는 점잖았고, 그 말은 오만했으며, 표정은 엄중했다. 기묘하게도 그 모든 분위기가 음란함을 만들고 있었다. 포식자 같은 탐욕스러운 혀 놀림과 그에 비해 부드러운 손짓으로 가슴을 수없이 희롱당한 로테는 온몸이 녹진하게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시야가 몽롱해지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두려움과 야릇함에 입 밖으로 자꾸만 이상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아 아랫입술을 한껏 깨물었다. ‘이런 게 남녀의 밤이라니…!’ 가슴 언저리를 전부 맛본 비오르틴은 왼손으로 로테의 가녀린 목을 조일 듯 말 듯 장난을 치며 점점 고개를 내렸다. 흉하게 찢긴 화려한 잠옷이 로테의 몸을 완전히 벗어났다. 수동적인 여인의 옷을 벗기는 것만큼 성가신 건 없다고 생각하며 비오르틴은 그녀의 팬티를 이로 끌어내렸다. “전하! 무슨!” 달아나려는 로테의 골반이 꽉 잡혔다. “쉬이. 여태 느끼던 대로 얌전히 있어주면 좋겠는데.” 비오르틴은 그녀의 팬티를 아예 손으로 벗겨 내렸다. 보기 좋게 살이 오른 허벅지와 가느다란 종아리가 무력하게 떨리기만 했다. 비오르틴은 그녀의 사타구니에 뺨을 비볐다. 뜨거운 물에 몸을 씻고 녹인 지 얼마 되지 않은 살결은 솜털처럼 폭신하고 부드러웠다. 따뜻함을 넘어 뜨겁다 말할 수 있는 체온도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짙은 라일락 향기를 풍기는 상체와 달리 하체가 온전히 사람의 냄새만 내고 있었다. 그 점이 가장 좋았다. 사타구니 안쪽 살을 혀끝으로 지그시 긋다가 키스했다. 다리 이곳저곳에 꽃잎처럼 붉은 흔적을 만들다가 발까지 내려왔다. 백옥처럼 새하얗고 유리처럼 매끄러운 발이었다. 긴 시간의 황도행을 겪었음에도 고단함을 모르는 고운 발이었다. 좁은 발볼을 이와 손으로 마구 깨물고 주무르니 금방이라도 핏물이 번질 듯 붉어졌다. 괴로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 전하… 제발…….” 울 것 같은 얼굴로 이런 일이 익숙지 않다 부르짖는 로테를 볼수록 비오르틴의 깨무는 힘은 과격해졌다. 정욕 가운데 이미 고개를 든 가학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드래콘 설정에 대해선 전개를 통해 보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012 3. 꽃은 제단 아래로도 뿌리를 내린다 =========================================================================                            분명 어린 시절 오를린에서 본 금발 소녀의 성격을 떠올리면 이런 발을 가질 수 없을 진데. 그 소녀는 들짐승처럼 산과 들을 뛰어다니는 걸 좋아했다. 비오르틴은 로테의 여린 발을 터트려버릴 듯 세게 움켜잡고 이죽거렸다. “제발, 뭐? 설마 그렇게 아프단 표정 하면 멈출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얌전히 있어주면 좋겠단 말은 제대로 느끼란 뜻이지. 의미도 없는 반항을 하란 게 아니야.” 그는 천천히 로테의 몸 위로 올라가 바지를 끌어내렸다. 반쯤 발기한 짙은 색의 성기가 나왔다. 우아하고 품격 넘치는 복장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날 것 그대로의 야성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주저 없이 로테의 몸 안으로 가기 위해 꺼떡거렸다. 순결한 그곳은 조금도 젖지 않은 채 붉어 있었다. 침입자를 원치 않는 듯 잔뜩 긴장하여 떨리는 살결을 보는 남자의 하체에 피가 가득 쏠렸다. 그 균열에다 성기의 끝을 수없이 문지르며 감질을 만들었다. 로테는 방사를 모르는 건 아니나 처음이라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의도하지 않아도 몸이 황태자의 흉측한 물건에서 자꾸만 도망가려 했다. “전하! 아직은….” “음? 그렇게 입술을 벌리고 있으면 위험한데.” 마음 같아서는 예쁘기만 하고 아둔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저 입술에다 제 것을 쑤셔 박아 완전히 발기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왠지 그건 궁의 창녀 같은 시녀들에게 하는 행동과 다를 바가 없단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가 크게 보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제 몸을 바치는 창녀와 똑같단 건 사실이나 처음부터 그렇게 대하는 건 자신에게 남은 미미한 측은지심이 용서하지 않았다. “후우, 젖을 줄을 모르는군.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 여자의 몸에 제 씨를 심는 게 목적이다. 그리고 아들이든 딸이든 뭐라도 생기는 게 좋겠지. 어차피 황후가 될 몸이라면 조금 일찍 황손을 가져도 괜찮지 않은가. 역겨운 할데바인 일족이 저들의 종교 로젠플라드를 제국교-그 어떤 생명도 신성하게 여긴다는-로 만들었으니, 국혼 전에 황손이 들어서서 그것이 법도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해도 제 입장에선 떳떳하게 내세울 말이 있었다. ‘로젠플라드의 붉은 핏방울은 생명의 고귀함을 상징한다지 않습니까?’ 라고. 이 여자도 그러한 계산쯤은 할 줄 아는지 거부의 몸짓을 멈추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확실히 처음으로 남자를 받을 여자다웠다. 촌구석에서 스물이란 나이까지 순결을 지켜왔을 것을 생각하면 그저 웃음이 나왔지만, 슬슬 웃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연하디연한 살을 가르고 안을 꿰뚫었다. “…… 아!”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게 들어온 성기에 로테는 고통보다 더 큰 두려움을 느꼈다. 나른히 눈 뜬 황태자는 이 상황이 뭐가 그리 우스운지 픽 웃고 있었다. 로테가 허벅지를 바들바들 떨며 황태자의 등을 가녀린 두 팔로 감쌌다. 당분간은 움직이지 말아달란 부탁이었다. 그러나 비오르틴은 그럴 생각이 없었기에 그녀의 팔에서 벗어났다. 좁은 살을 가득 메우고 곧 허리를 흔들어댈 이쪽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성기를 더욱 깊숙이 박아 넣으며 로테의 신음을 평가했다. “후우, 그렇게 소리 지르면 모두에게 과시하는 꼴이잖아.” 로테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런데도 소리는 계속 나왔다. “으읏… 흐으.” “아, 아직 과시는 아닌가?” 위태로운 권력의 흐름 속에서 아직 확실한 입지를 다지지 못한 자신을 조소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입지란 것도 손이 귀한 황실에서 황손이 생긴다면 단연코 최강이 될 것이었다. 섣부른 상상 속에 빠져서 자기만족을 하는 취미는 없지만 생각만 해도 몸이 고양되고 있었다. 남자를 모르는 살 틈에다 무자비하게 허리 짓을 해나갔다. “흐읍…… 흐, 하!” 로테는 아무리 입술을 세게 깨물어도 터지는 소리에 제 입을 막아버렸다. 그러자 출렁이는 가슴 위로 그림자가 덮쳤다. 열심히 허리를 쳐대는 비오르틴은 두 손으로 로테의 가슴을 아주 잠깐 지그시 압박하다가 손가락을 뻗어 로테의 가느다란 팔뚝을 낚아챘다. 입 가리는 일 따위는 하지 못하게 하는 행위였다. “흐음, 흐. 소리 내도록 해.”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로테는 어딘가 일그러진 황태자의 심사를 느꼈지만, 깊게 파고들고 싶진 않았다. 황태자가 오를린 여자의 몸에 제 씨를 심고자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니 당장은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래를 찢는 듯한 고통도 미래를 생각하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터져 나오는 흐린 신음에서 울먹임이 사라졌다. “후읏, 하!” 로테는 황태자의 얼굴에서 감정은 사라지고 순수하게 욕정만 남았단 걸 느꼈다. 그런 인간과 살을 맞대는 게 왠지 오싹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애정보다 야심이 앞선 관계이지만 로테는 춤을 출 때부터 황태자에게 두근거림을 느끼고 있었기에 황태자의 무감정한 행동에 거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시 가느다란 두 팔을 뻗어 감히 황태자를 안아보았다. 이런 자세를 해야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고, 그것은 아직은 소심하다 할 수 있는 시골 숙녀의 기분을 나름대로 안심시키는 일이었다. 큭, 하고 로테에게 안긴 비오르틴은 웃었다. 원해서 껴안든 그게 아니든 이렇게 밀착하는 것을 보니 더욱 뜨거운 열기가 필요하다 말하는 것 같았다. 기꺼이 아주 뜨겁고 진득한 것을 듬뿍 주입해 배부터 뜨겁게 만들어줄 작정이었다. 그녀의 목을 껴안고 짐승처럼 허리를 흔들었다. 짙은 라일락 향기가 두 사람이 피워내는 열기에 금세 흐려졌다. *** 오를린 영지 소용돌이 산. 새벽까지도 종유석 끄트머리에선 물방울들이 반짝이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똑똑똑 하는 물의 맑은소리에 하이너는 잠에서 깨어났다. 개운한 장소에서 잔 게 아니지만 개운한 느낌이었다. 후각, 시각, 촉각 모든 감각이 인간의 것이니 자는 동안 드래곤화가 멋대로 진행된 적은 없는 듯했다. 아가씨가 누운 곳으로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갔다. 개를 사랑해 마지않는 주인이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개가 잘 자고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행동과 같다고 해야 할까. 주종관계가 뒤바뀐 것 같지만 달리 설명할 말도 없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혼자 누워 있어야 할 아가씨의 곁에 진줏빛 아름다운 머리칼의 소녀도 함께 누워 있었다. 아가씨보다 네다섯 살은 어려 보이는 소녀였다. 아가씨는 그 소녀를 쿠션처럼 대하듯 팔과 다리를 걸치고 잘 자고 있었다. ‘저 여자애는 누구지… 아직도 꿈인가.’ 꿈이라면 어떤 무의식의 반영인지. 혹시 제게 미(美)숙녀와 미(美)소녀를 함께 데리고 대륙 여행을 떠날 욕구가 있었는지 자신에게 물었다. 그러다가 눈을 다시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 분명했다. 이런 위험한 소용돌이 산 동굴에 저런 가녀린 소녀가 올 리 없었다. 아무렴, 아무렴, 하다가 다시 눈을 떴다. 진줏빛 머리칼의 소녀가 보이지 않았다. ‘꿈이었군.’ 일어나서 짐정리를 시작했다. 무려 2000 자일이나 주고 샀다는 비싼 대륙 지도부터 챙기고 옷가지와 싸구려 스크롤, 화장품, 아가씨의 장신구 등을 모아 널따란 면포에 돌돌 말았다. 그리고 대륙 공용 화폐는 덜렁거리는 아가씨에게 맡기는 대신 제 상의 안쪽에 넣었다. 이렇게 하니 훨씬 안심이었다. 잠든 드래콘의 등 위에 짐을 얹으려 올리다가 도로 내려두었다. ‘아직 자는데 무겁게 해선 안 되지.’ 강한 생물이라 짐을 무거워할 것 같진 않지만, 잠을 방해하긴 싫었다. 그래서 그 곁에 두기로 했다. 아직 마리는 포근한 숨소리를 내면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드래곤의 기를 내뿜어 주위 위험한 생물을 물리치는 호위 기사 덕분에 위험하진 않지만 그래도 눈으로 보기에는 으스스하고 기괴한 장소인데, 이런 곳에서 저리 곤히 자는 아가씨의 무신경함이 부럽기를 넘어서 아주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아가씨의 몸 위에 옷가지 몇 개를 덮어주었다. 드래콘이 내뿜는 온기에 충분히 따스하다 하더라도 왠지 그렇게 더 덮어주고 싶었다. 그러자 아가씨가 나른한 숨소리를 내며 애벌레처럼 옷가지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하이너의 입가가 흐뭇하게 올라갔다. ‘정말이지 당신이란 사람이 가진 거라곤 예쁜 금발과 귀여움뿐이군.’ 하이너는 문득 이런 생각이 팔불출 같음을 깨닫곤 헛기침했다. 그러다가 머리 위 종유석을 올려다보았다. 거듭 생각건대 정말 보석처럼 빛나서 아름다운 광물이었다. 그러나 땅에 닿은 모든 것을 꿰뚫을 듯 뾰족한 몸들이 기괴하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툭 떨어져 내려 아가씨의 몸에 상처라도 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아니 들 수 없었다. 절대로 오늘 밤에는 이곳에서 자고 싶진 않았다.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의 곁에 앉아서 아가씨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잠에서 깨어나면 이 동굴을 나가자고 할 생각이었다. *** 마리와 하이너가 드래콘의 등에 올라 소용돌이 산을 빠져나왔을 땐 이미 해가 중천에 걸려 있었다.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는 드래곤에 견줘도 될 만한 빠르기로 네히트로 향했다. 네히트엔 그 지역 주민들이 은광산이라 부르는 광맥 실렌틴이 있는데, 실상 은보다 다른 잡금속이 많이 난다는 소문이 있었다. 네히트가 빈곤한 영지이고 그래서 아무런 힘이 없어 오를린과 통합된 것으로 봤을 때 그 소문은 신빙성이 있었다. 그런 실렌틴에도 나름대로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실렌틴 광맥의 오랜 영혼이라 불리는 광부들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광물을 노리는 잡다한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고용된 저급 마법사들이 바로 거주민들이었다. 이미 그들에게도 오를린 영주 저택의 드래곤 사건이 퍼졌을지도 몰랐다. 마리는 그들의 시선을 괜스레 끄는 걸 꺼려해 마리아 그로스에게 그들의 집단 주거지와는 반대쪽 산에다가 내려달라고 명령했다. 하이너도 그 생각에 이견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 마리의 태도가 이상했다. 오를린 영주 저택을 지나오면서부터 미묘하게 썰렁한 농담과 잡담이 많아졌다. 그리고 웃기지도 않는데 웃음소리를 키웠다. 호위 기사로서 나름대로 오래 일해 봤다고 자부하는 하이너는 아가씨의 그러한 태도가 순전히 아가씨 본인의 마음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 마음이란 가령 후회나 서글픈 감정이 아닐지. “참, 우리 영지 사람들은 대관절 하늘을 올려다볼 줄 모르는군! 대낮에 이렇게 당당히 하늘을 날고 있어도 누구 하나 우리를 발견한 사람이 없어. 아무리 겨울이라고 하지만 너무 집에만 콕 박혀있는 거 아니야? 집에 대체 무슨 꿀을 숨겨놓았을까!” 아가씨가 저러는 이유는 순전히 오를린 영주 저택 곳곳에 드리워진 흰 깃발 때문이었다. 흰 깃발. 그것은 추모를 위한 깃발로 해석할 수 있다. 오를린 영주가 제 딸의 죽음을 널리 알리는 의미였다. 죽지도 않은 사람을 죽었다고 하다니. 하이너는 영주의 입장을 어렴풋하게나마 파악하고 있었다. 영주는 차녀 로테아르카와 같이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아마도 드래곤에게 잡혀가 버린 딸을 구할지 말지 궁금해 하는 영지민들의 시선을 부담스러워 했을 것이다. 거금을 내고 딸을 데려와도 영지 재정을 혹사하는 무능력한 영주로 낙인찍힐 것이고, 그렇다고 드래곤에게 잡혀가 버린 딸의 구출을 나 몰라라 해도 윤리적으로 비정한 아비의 낙인이 찍힐 것이다. 어느 낙인도 원하지 않는 영주는 흰 깃발을 드리워 딸을 죽었다고 알리는 것으로 영지민들의 시선에서 해방된 것이었다. 흰 깃발은 영주의 저택에서만 휘날리는 게 아니었다. 저택 주변 영주민들의 주택에도 상당수 볼 수 있었다. 그 어느 낙인도 찍히지 않은 영주는 영지민들의 동정의 대상이 되어 부담을 덜겠지만, 멀쩡히 살아있는 딸은 어쩌란 말일까. 물론 아가씨가 잘못하긴 했다. 아버지의 저택을 훼손하고 호위 기사를 멋대로 드래곤으로 만들어버렸으니! 그러나 백번 아가씨가 잘못했다 하더라도 아가씨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영주님이 너무한단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식이 길을 벗어나면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 게 부모의 의무이거늘, 사람이 아닌 망자로 만들어버리는 게 대체 뭔가. 귀족이란 작자들은 다 이런가?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인 자신도 섭섭할 지경인데 아가씨는 얼마나 상심하셨을지. 하이너는 한심하고 딱하단 눈으로 마리를 보았다. 그러게 왜 대륙 여행 따위를 꿈꾸었느냐고 질타하는 시선이었다. 마리는 들뜬 척 어딘가로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있었다. 원래부터 얌전한 몸가짐과는 거리가 먼 숙녀였지만, 이런 산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는 것을 보니 쓴웃음이 아니 나올 수 없었다. “아가씨는 뭐가 그리 살판이 납니까?” 마리가 뛰어간 곳은 실렌틴 광산의 유적이라 불리는 크고 널찍한 바위였다. 고대에도 이곳의 광맥이 중하여 많은 의식을 행한 게 분명했다. 마리아 그로스 몸체의 세 배나 되는 널찍한 바위 위에선 무희가 춤을 추는 것도 가능했을 테고 짐승이 제물로 도륙 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마리는 비스듬히 경사진 면을 따라 바위 위에 올라가 드러누웠다. 눈부신 하늘을 보니 자기를 서운하게 한 흰 깃발 생각도 다 잊혔다. 그녀가 하이너를 향해 돌아누우며 말했다. “오늘 밤엔 마리아 그로스의 등에서 하늘을 날며 자는 게 어떨까?” “어딘가에 떨어져 몸이 박살이 나고 싶은 게지요?” “어머! 하이너가 날 떨어지지 않게 잘 잡아주겠지.” “저런. 제가 아가씨를 밀어뜨릴지도 모른단 가능성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으시는군요.” 마리는 부모님께 꾸중을 들은 아이처럼 얼굴을 시무룩하게 만들었다. 하이너는 그 표정이 너무나 아이 같다고 생각했는데, 내심 아가씨의 그런 반응에 작은 쾌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 오늘 밤은 숙소를 정해야겠구나.” 하이너는 실없는 농담을 그만두고 진지하게 대답해주었다. “숙소를 정하려면 여기서 식사를 하면서 쉬다가 오늘 밤중으로 네히트를 지나 바너(장인의 도시)로 가야겠군요.” “나 간식.” “여기 드십시오.” 하이너는 짐을 뒤적거려 마른 빵 하나를 마리에게 주었다. 그리고 물통을 빼내 개울물을 퍼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쯤 되니 자기가 호위 기사인지 하녀 앤인지 혼란스러워졌다. 마리는 마른 빵을 반으로 부서뜨려 하이너에게 내밀었다. 둘은 한참을 말없이 빵을 우물거렸다. 자신의 처지를 되새겨본 마리가 중얼거렸다. “여행 첫날부터 현실을 알아가나 봐.” 하이너는 ‘어련하시겠습니까!’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눈물 콧물 흘리며 딸을 찾아야 할 아버지는 딸이 죽었다고 했으니. 게다가 귀한 음식만 먹고 자라온 아가씨가 마른 빵으로 만족할 리 없었다. 하지만 이 말을 그대로 내뱉으며 이죽거렸다간 제아무리 하하 호호 하는 아가씨라 할지라도 결국 울음을 터트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이너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마리는 우물거리던 빵을 다 삼키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다시 생각해도 마리아 그로스를 타고 자는 건 미친 짓이야.” “… 아무렴, 그렇고말고요.” “마리아를 타고 밤하늘을 날면 낭만을 얻는 대신 다른 걸 포기해야 하지. 씻을 수 없고 피부 관리를 하지도 못해. 옷을 갈아입기도 불편할 테고.” “아무렴, 그렇고말고요.” “게다가 하이너의 씻고 나온 멋진 몸을 감상할 수 없잖아?” “아무렴, 그렇…….” 기계적으로 답하던 하이너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013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평소 농담을 즐기는 분이란 건 알고 있다. 그런데 평소처럼 대충 들을 수가 없다. 요 며칠 성적으로 은밀한 일들이 있었기에 이런 야한 말들이 다른 때보다 유독 사람을 긴장하게 했다. 영지 아낙네들의 시시껄렁하고도 음탕한 농담을 들으면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데 어째서 아가씨의 농담엔 심장이 떨리고 온몸에 열이 오르는 걸까. ‘하여간 소용돌이 산의 천 년 묵은 능구렁이가 들어선 게 분명하다니까.’ 우유도 차도 없이 마른 빵을 먹는 것이 영 견디기 힘든 마리는 식사를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래콘도 제 나름 겨울 헐벗은 나뭇가지를 뜯어먹으며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주인 마리의 눈엔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바너에 가면 내가 맛있는 음식을 사줘야겠군. 유기농 건초라든가….” 하이너는 대놓고 비웃었다. 연금술사들이 만든 인공 비료에 관한 불신 때문에 유기농 농산물이 주목받는 시대이긴 했다. 그러나 장인의 도시 바너는 유기농 건초를 쟁여 상업적으로 다룰 만큼 목축업에 활발한 지역은 아니었다. 동물을 사랑하라 설파하는 백교가 장악한 탓에 육식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각종 채소 요리의 발달로 채식주의자들의 천국이라 불리기도 했다. 사람이 먹을 유기농 채소 같은 것이야 널렸을지 몰라도 가축이 먹을 건초, 그것도 유기농 건초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기초 상식 하나 없는 아가씨가 무식해 보여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열흘이 멀다 하고 가정교사를 뛰쳐나가게 만드신 분이니 어련하겠어.’ 때마침 하늘에서 새하얀 눈꽃의 씨앗이 내리기 시작했다. 진눈깨비를 닮은 하얀 보석들이 대기를 수놓고 있었다. 이맘때면 늘 일어나는 자연 현상이었다. 눈꽃 씨앗들은 낙엽이 썩어가는 땅에 닿는 즉시 뿌리를 내리는데, 그렇게 한 번 뿌리를 내리고 나면 줄기부터 잎, 꽃 모든 게 새하얗게 커갔다. 네히트의 새하얀 겨울 풍경은 모두 눈꽃의 씨앗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이야, 정말 겨울이군. 올해는 겨울이 참 일찍 오는 것 같아.” 아가씨가 손을 뻗어 눈꽃 씨앗의 촉감을 확인했다. 하이너는 눈꽃 씨앗이 땅에 뿌리내리는 순간을 멍하니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낙엽 썩는 땅에만 뿌리내릴 줄 알았던 눈꽃 씨앗이 지금 앉아있는 바위 위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는가. 가느다란 실 같은 뿌리 그 어디에 바위를 뚫어 내리는 힘이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하이너가 빵을 씹으며 그 모습을 관찰하는데 갑자기 마리가 다가왔다. 그녀는 뿌리를 내리는 데 한창인 눈꽃 씨앗을 바위로부터 떼어냈다. “어머, 싫다! 이런 제단 위에서 피어나는 건 좋지 않다고. 사람들 눈에 잘 띄어 쉽게 밟혀버린단 말이야.” 눈꽃 씨앗은 뿌리를 바들바들 떨어댔다. 마리는 그 뿌리를 땅에다 손수 심었다. 가장 볕이 잘 드는 장소였다. 눈꽃도 일단은 식물인지라 볕이 잘 드는 곳에 있어야 빠른 생장이 가능했다. “무럭무럭 자라서 실렌틴을 예쁘게 수놓는 꽃이 되렴.” 하이너는 눈꽃 씨앗에게 다정히 말 거는 아가씨를 보고 씁쓸함을 느꼈다. 왠지 쓸쓸해 보인달까. 하얀 옷을 입은 아가씨의 뒷모습에서 자꾸만 오를린 저택의 흰 깃발이 떠올랐다. 하이너는 식사를 마치고 드래콘 위에 올라탔다. “그동안 아가씨께서 앞에 앉으시길 좋아해서 내버려뒀습니다만, 이제부턴 제가 앞에 타겠습니다. 그게 덜 위험해요.” 그가 손을 내밀자 마리는 그의 손을 잡고 드래콘의 등에 올라탔다. 하이너는 드래콘의 고삐를 쥐고 상체를 숙였다. 마리는 그 모습을 흐뭇한 눈으로 보았다. 오늘따라 호위 기사의 널따란 등이 아버지의 등보다 믿음직해 보였다. “허리 꽉 잡으십시오.” “으응.” 드래콘이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눈꽃 씨앗이 안개처럼 빽빽하게 휘날리는 하늘 위로 그들은 함께 비상했다. 점점 그들의 주위에 하얀 광채가 서렸다. 인간들이 춥지 않도록 드래콘이 온기 마법을 쓰고 있었다. 이윽고 온기에 취한 마리가 하이너의 등에 기대어 잠들었다. 하이너는 등에 숙녀가 아닌 아기를 업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한숨이 끊임없이 나왔다. ‘속 편 하게 주무시는군. 이런 사람이 무슨 대륙 여행에 정복까지 한다고.’ 아가씨는 바보일지도 모른다. 로테 아가씨의 앞날이 어두운 게 아니라, 당신의 앞날이 어두울지도. 만에 하나 이 여행이 실패하게 되는 날이 오면……. 하이너는 불길한 생각을 하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늘에 있는 동생에게 무운을 빌기로 했다. 장인의 도시 바너로 향하는 드래콘의 날갯짓이 점점 빨라졌다. 아슴푸레하게 퍼진 살굿빛 겨울 노을이 눈꽃 씨앗의 고운 바탕이 되어 주었다.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훨훨 날아다니는 그들의 모습은 한 폭의 환상화처럼 아름다웠다.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장인의 도시 바너. 중심지 크래파. 침묵의 장이라 불리는 이름을 반박하듯 시끌벅적한 대(大) 여관. 이 지역은 대륙에서 가장 농업이 발달한 로샤트르트 다음으로 농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북쪽으론 생명의 역광이라 불리는 강줄기가, 서쪽으론 생명의 은혜라 불리는 강줄기가, 동쪽으론 끊임없이 풍부한 금속을 뽑아내는 실렌틴 광산이 있는 덕분에 농업과 공예가 발달했다. 이로 인해 막대한 부를 이루게 되었고 그 경제력은 권력이 되어 바너는 정치적으로도 철저히 중립을 지킬 수 있었다. 즉, 이곳은 할데바인 대공이나 황태자의 입김이 좌지우지하지 못하는 지역이란 걸 뜻했다. 이런 중립적 성격의 지역엔 언제나 정보상과 망명인 들이 바글거리곤 하는 법이었다. 그들에게서 떠도는 정보를 얻기 위해 한 남자가 침묵의 장에 들렀다. 남자는 여행자처럼 챙 넓은 모자와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모자 사이에 드러나는 머리카락은 검은색으로 매우 윤기가 흘렀고, 망토 아래 바지는 짝 달라붙어 늘씬한 각선미를 드러내고 있었다. 만약 취객이 남자의 아름다운 사파이어 빛 눈동자와 남자치곤 지나치게 붉은 입술을 발견한다면 ‘혹시 숙녀가 아니냐’며 껄떡댈지도 모르는 그런 미모였다. 챙 모자의 남자는 특정 정보를 얻기 위해 침묵의 장에 들른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바글대는 곳에 들러 떠도는 이야기 중 솔깃한 것을 건질 겸 식도락을 위해 들른다고 해야 할까. 각종 채소 요리를 앞에 두고 즐기던 그는 바로 곁에서 들리는 시시껄렁한 싸움에 주의를 기울였다. 딱히 궁금해져서가 아니라, 그 싸움 내용이 특이해서 저절로 눈과 귀가 향했다. “어떻게 주인이란 분이 그러실 수 있습니까? 마리아 그로스에게 애정이 있긴 있습니까? 소리도 없이 짐을 챙겨 사라졌는데도 찾을 생각도 않으시다니. 제가 그 위험한 산에서 잡아온 보람이 없군요!” 낮고 굵은 음성, 가벼운 말투, 까칠한 분위기. 그 목소리 주인공의 앳된 외모를 보아하니 십 대 후반의 소년에서 이십 대 청년 사이인 것 같았다.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머리 모양이 제법 잘 어울리는 미청년이었다. 그러나 그 반반한 얼굴이 사정없이 찌푸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그 옆에서 대꾸하는 금발 아가씨의 아둔한 태도 때문인 듯했다. 금발 아가씨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다. “드래콘에게도 사생활이란 게 있잖아? 배설을 하거나 목욕을 하거나 후리고 싶은 수컷 드래콘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설마 마리아 그로스가 도망갈까 봐 걱정하는 거야? 하여간 걱정도 팔자라니까! 내게 굴종의 인이 있는데 그 애가 도망가긴 어딜 가겠어?” “드래콘이 주인에게서 도망갈 일은 없겠지만 그 짐들이 도둑맞을 확률은 매우 높다죠!” “어머, 하이너! 너는 우리 마리아 그로스를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아가씨께서 지나치게 긍정적이란 걸 좀 아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뭐가 남지?” “아주 툭하면 그 소리!” 챙 모자의 남자는 그들의 대화가 지금 먹고 있는 음식들보다 왠지 더 맛있게 느껴졌다. 금발 아가씨는 미청년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숙박계를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빈약한 가슴에 새까만 안경테가 인상적인 소녀가 금발 아가씨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은 하셨습니까?” “예약해야 하나요?” “물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 숙박계를 작성해주세요!” 금발 아가씨는 안경 소녀가 내민 깃털펜을 들고 숙박계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뒤따라간 미청년이 아가씨의 숙박계 작성하는 모습을 보고 심호흡을 하더니 냅다 깃털펜을 빼앗아버렸다. 미청년은 아가씨의 몸을 끌고 와 낮은 소리로 꾸짖었다. “이런 때에 실명을 적는 바보 같은 짓이라니요!” “바보 같은 짓이라니? 내 자취를 남기는 거라고. 이렇게 실명을 적어야 아버지께서 딸이 살아있단 걸 아시지 않겠어?” “영주님께서 아시면 내버려둘 것 같습니까? 여행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오를린으로 붙잡혀 가고 싶으신 게지요? 아가씨는 죽은 사람으로 되어 있어서 붙잡혀 간다고 해도 평생을 없는 사람처럼 갇혀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만!”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어.” “그 자신감이 무모하기 짝이 없고 제가 인정할 수 없다는 게 문제죠.”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싸늘한 말을 뱉은 미청년은 아가씨 대신 숙박계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글씨를 본 아가씨가 박장대소를 하고야 말았다. “꺄르르! 신혼부부! 우리는 신혼부부야!” 아무래도 미청년이 숙박계에 자신들을 부부로 기재한 모양이었다. 미청년이 숙박계를 내밀자 안경 소녀가 찬찬히 훑어보더니 숙박계 내용을 재확인해주었다. “네히트의 와트프라우어 부부시군요! 욕실이 딸린 침대 하나 방! 식사는 내일 아침만 하시면 되고, 마구간은 대형으로 하나! 요금은 총 200자일 되겠습니다!” 금발 아가씨는 외투를 뒤지다가 울상을 지었다. “어맛! 내 돈!” 그러자 미청년이 제 상의 안쪽에서 대륙 공용 화폐를 꺼냈다. 그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금발 아가씨를 아내로 대하듯 말했다. “하여간 칠칠하기는! 당신은 자기 돈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지?” “호호호! 그래서 당신 같은 남자와 결혼한 거 아니겠어?” 금발 아가씨는 능글맞게 대꾸하곤 안경 소녀가 안내한 방으로 올라갔다. 가짜 부부가 확실한 그들이 사라지자 챙 모자의 남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짜 부부의 대화만으로도 그 정체가 파악됐기 때문이었다. 챙 모자의 남자는 여관에 상주해 있는 정보상에게 다가갔다. “음식값을 정보로 계산하고 싶습니다만.” 정보상이 무엇에 관한 정보냐고 물었다. “오를린 영주의 딸에 관한 정보입니다.” 바너 근방 지역-오를린, 네히트-에 관한 정보에 밝은 챙 모자의 남자가 와트프라우어 부부의 진짜 신상을 아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정보상은 냉큼 그 정보를 사겠다고 했고, 챙 모자의 남자는 그렇게 음식값을 대신하고 침묵의 장을 빠져나왔다. “오를린 병사에게 잡히기 싫으면 최대한 바너를 일찍 떠나는 게 좋을 겁니다. 마리니시네 양.” 챙 모자의 남자는 ‘와트프라우어 부부’가 묵는 3층 방을 올려다보며 히죽 웃음 지었다. *** 3층 하이너와 마리가 묵는 방에선 연신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앞날에 대한 긍정도 아니고 낭만도 아니고 설렘도 아닌 바로 돈입니다, 돈! 마른 빵을 살 수 있고 욕실이 있는 방을 구할 수도 있으며 화장품을 살 수 있는 돈! 세상에서 마법 그 이상으로 만능의 힘을 가진 이름! 하여간 아가씨는 진짜… 제가 돈을 따로 챙기지 않았다면 어찌하실 생각이었습니까?” “장신구를 팔았겠지? 너무 그렇게 인상 쓰지 마. 돈이 없으면 일을 해서라도 만들어내면 되잖아? 또 그게 세상 구경하는 재미고.” “아, 예. 그러십니까? 그럼 그 일은 아가씨나 하세요. 저는 아가씨 여행 자금을 대려 노동을 할 정도로 희생정신이 있는 건 아니라서.” “어머, 박하긴.” 마리는 겨울 거센 바람에 지친 몸을 따스한 물에 녹이고 싶어 옷을 훌러덩 벗기 시작했다. 그런 아가씨의 돌발 행동에 하이너는 고개를 딴 데로 돌렸다. 호위 기사 앞에서 함부로 옷을 벗어대는 아가씨의 행동에 놀란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지금은 그런 것에 당황하기보다 아가씨에게 설교해야 할 때였다. “구체적인 계획 같은 건 하나도 없습니까? 솔직해집시다. 대륙 정복을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못 잡으신 게지요?” 마리는 하나 남은 속옷을 벗어 손에 쥐었다. 목욕하면서 세탁도 할 생각이었다. 대륙 정복을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느냐, 라……. “왜 대답을 못 하십니까?” 마리는 욕실 문을 열며 제 나름의 대답을 내놓았다. “끄응, 하이너… 언어는 너무 거대하고 복잡한 것을 포괄적으로 표현하기엔 알량한 수단이라 생각해. 그나저나 목욕물을 아끼고 싶어서 그런데 같이 씻지 않을래?”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륙 지도를 추가했습니다만 별 의미는 없습니다. 적다하 헷갈리지 않으려고 그려본 겁니다. 00014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하이너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마리는 이미 그의 몸을 욕실로 끌고 가고 있었다. ‘젠장, 이렇게 멋대로 할 거면 내 의사는 왜 묻나.’ (신분을 막론하고) 젊은 남녀가 벌거벗고 욕실에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소용돌이 산의 동굴에서와 같은 특수한 환경이 아닌 이런 흔한 여관의 욕실인 이상, 그림은 빤하게 그려진다. 처음엔 당황하겠지, 그 후엔 설렐 테고, 그 후엔 흥분하고, 흥분하고, 거듭 흥분해서 이런저런 음란한 일들이 벌어질 테고……. 하이너는 며칠 전 아가씨가 ‘함께 여행해준다면 창녀이자 애인이 되어준다!’고 한 게 장난이 아니라 진짜인 듯하여 내심 심정적으로(혹은 육체적으로) 동요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늘 그렇듯 새침할 뿐이었다. “비싼 숙박비를 치렀는데 목욕물을 아낄 이유는 없습니다. 아가씨 혼자 씻으시지요?… 맙소사, 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마리는 하이너의 몸을 감싼 두꺼운 옷들을 스스럼없이 벗기고 있었다. 하이너가 그녀의 손을 내치는 것은 일도 아니었지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목욕 시간을 즐기려 하는 해맑은 모습에 더는 거절을 할 수 없었다. 호위 기사의 옷을 다 벗긴 마리는 목욕 의자를 가져와 앉으라고 권했다. “얼른! 오늘은 내가 머리를 감겨 줄게!” 언제나 하녀 앤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남을 씻기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자 하이너는 소꿉놀이를 하는 아이를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기 싫었다. 지금 마리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난감을 손에 넣은 아이처럼 순수하게 들뜨고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이너는 순순히 목욕 의자에 앉아주었다. ‘그래, 나 정도면 목욕 봉사 정도는 받을 자격이 있지. 뭐… 맡겨볼까.’ 욕실 가득 마리의 콧노래가 울려 퍼졌다. “산골짜기 아름다운 새소리, 내 마음 꽃잎 되어 태양 아래 춤추노라, 오! 마르틴…….” 신기하게도 마리의 이슬처럼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는 하이너의 심적(더하여 육체적인) 흥분을 죽이고 있었다. 왜일까. 가사에 나오는 마르틴이라는 이름이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동생의 이름과 우연히 겹쳐서? 하이너는 알 수 없었다. 머리에 물을 붓고 머리카락을 한 가닥 씩 씻어 내리는 나긋나긋한 손짓이 추위에 지친 하이너의 마음을 녹였다. 아픈 동생을 씻겨 준 기억만 있지 누구에게 이런 봉사를 받은 적 없었다. 썩 나쁘지 않단 생각을 하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두피를 휘감는 손길이 노랫소리처럼 경쾌해지기 시작했다. “흐흠… 가끔은 새의 날개 되어…….” 하얀 거품이 진한 민트 향기를 뿜어내며 머리를 감쌌다. 갑자기 아가씨가 노래를 멈추었다. “있잖아, 하이너. 너는 어쩜 이렇게 밤하늘을 실로 잣아 비단으로 만든 것처럼 부드러운 머리칼을 지닐 수 있는 거야?” 하이너는 온몸의 뼈가 흐물흐물 녹을 듯 낯간지러웠다. 가정교사에게서 문학 수업을 들을 땐 잠만 푸지게 잤단 아가씨가 지금과 같은 윤기 나는 표현을 쓰는 것이 우스워 견딜 수 없었다. “그러는 아가씨야말로 호위 기사의 머리칼을 보고 어쩜 그런 비단 같은 아부를 하실 수 있습니까?” “풉, 좋으면서 비꼬긴.” “그야 그렇잖습니까. 아가씨 머리카락이 멧돼지 털처럼 거칠다면 몰라도 그러기는커녕 물결치는 비단과 같은데 도리어 제 머리칼을 보고 칭찬을 하시다니요. 누가 들어도 아부라고 생각할 겁니다.” “오홋, 그런가? 하긴 내 머리칼도 아름답긴 하지.” “머리칼만 아름다운 줄 아십니까.” “…….” “…….”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폭신한 거품 소리만이 어색한 침묵을 메우고 있었다. 마리는 하이너의 머리카락에 헹굼 물을 붓고 잠시 그의 뒤통수를 멍하니 보다가 그의 등을 세게 때리며 웃었다. 하이너는 생각보다 매운 아가씨의 손에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호호호! 이제 보니 완전히 내게 빠져버렸군!” “젠장, 본의 아니게 진심이 나와 버렸다….” “뭐라고?” “예?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이너는 여전히 새침을 떼며 자리에서 일어나 마리의 어깨를 잡았다. 커다란 손은 마리의 어깨를 최대한 부드럽게 움직여 그녀를 목욕 의자에 앉히고 있었다. “이젠 아가씨가 머리를 감을 차례입니다. 제가 해드리죠.” “고마워. 그럼 잘 부탁해.” 하이너는 아가씨의 풍성한 금발에 조심스레 물을 붓고 민트향 세정제를 쭉 짜서 거품을 내기 시작했다. 곧 아가씨의 머리 위에도 상쾌한 향기의 거품이 부풀어 올랐다. 실상 머리가 조막만 하게 작은 것은 두 사람 다 마찬가지였으나, 하이너의 눈에는 마리의 머리만 작아 보였다. 그는 마리의 머리가 너무 작아 인형 같다고 여겼고, 또한 그녀가 백치 같은 뇌를 가진 게 이토록 뇌의 용적이 적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는 손에 힘을 주면 머리가 부서지기라도 할세라 굉장히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마치 그 옛날 아픈 동생의 머리를 감겨줄 때처럼 섬세한 손짓이었다. 한참 후 그는 조심스럽게 마리의 목에 손을 받쳐주었다. “자, 헹궈봅시다. 고개를 뒤로 젖혀보세요. 눈에 물이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아아, 상냥한 하이너 너무 좋아.” ‘젠장, 나답지 않았나.’ 하이너의 얼굴이 부끄러움에 붉어졌다. 그는 마리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헹궜다. 눈을 꼭 감은 채 얌전히 기다리는 마리의 얼굴이 귀여워서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뛰게 한다. 머리칼 색깔과 똑같은 금빛 속눈썹을 보라. 고급 붓처럼 숱이 많고 길이도 매우 길다. 작고 오뚝한 코는 영지 모든 여자가 부러워하는 예쁜 코에다 선홍빛 입술은 야한 농담 따위는 모르는 듯 순결한 꽃잎 같았다. 게다가 추위에 얼었다가 욕실에 들어온 뒤로 달아오른 두 뺨은 한여름 잘 익은 복숭아를 보는 듯 포동포동 귀여워…… 손으로 쭈우우욱 잡아당기고 싶었다. “아얏! 뺨을 꼬집으면 어떻게 해?” “…… 죄송합니다.” 하이너는 제멋대로 움직인 손에 당황하여 황급히 손을 뗐다. 마리가 머리 감는 건 이쯤 하면 됐다고 자리에서 홱 일어나더니 하이너에게서 물바가지를 빼앗았다. 그리고 물을 가득 퍼서 하이너의 몸에다 가득 뿌렸다. “이제 몸을 씻을 차례야!” 갑작스러운 물세례를 맞은 하이너는 눈을 꽉 감았다. 그는 물과 함께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차분히 정리하고 다시 눈을 떴다. 그러더니 마리에게서 물바가지를 빼앗았다. 마리가 복수의 물세례를 받기까진 단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우왓! 으푸푸!” “시원하십니까?” “이렇게 빠르게 물을 붓는 법이 어디 있어!” “여기 있겠지요.” 하이너는 거칠게 물을 퍼부은 것만큼이나 거친 손길로 아가씨의 몸을 씻겨볼까 하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가녀린 목, 늘씬한 빗장뼈, 그 아래로 고운 곡선을 그리는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 밑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아랫배와 황금빛 수풀을 보고서 자제심을 애써 끌어올렸다. 아가씨의 알몸을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코가 다 시큰거릴 정도로-달리 말하면 코피를 터트릴지도 모를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계속 보고 씻기고 하다 보면 돌이킬 수 없는 음란의 나락으로 치 닫을지도 몰랐다. ‘젠장, 애당초 같이 목욕을 하는 게 미친 짓이었다. 스무 살이 되어서 하는 짓은 네 살 먹은 동네 아이들 수준이라니.’ 아무래도 각자 알아서 씻는 게 최선일 것이다… 그는 홱 돌아서 스스로 몸을 씻기 시작했다. 탄탄한 몸 여기저기에 금세 거품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기를 약 몇 십 초. 너무나 조용한 느낌에 그는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장면을 마주하고야 말았다. “아가씨?” 호위 기사의 전라를 지켜본 마리의 한쪽 입꼬리에서 타액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신이 빚어낸 듯 흠잡을 곳 없는 호위 기사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상하다가 넋이 나가고 말았다. 떡 벌어진 역삼각형의 어깨와 탄탄한 등허리, 단단하고 강인한 곡선을 자랑하는 엉덩이와 튼실한 허벅지를 보고 이런 몸을 만들어주신 호위 기사의 부모님에게 찬사를 퍼붓고 눈물을 흘리고 싶을 정도였으나 이상하게도 눈물은 흐르지 않고 팔푼이처럼 침이 흐르고 있었다. “아가씨 그 침은 대체 뭡니까? 젠장, 네히트의 정신과 의사에게 데려간다는 걸 깜빡했어. 이래서야 광녀를 데리고 다니는 꼴이 아닌가….” 대놓고 환자 취급하는 말에 뒤늦게야 정신이 든 그녀는 손등으로 침을 훔쳤다. 그리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자꾸만 눈앞에 호위 기사의 조각 같은 몸이 아른거렸다. 백 번 보아도 흐뭇한 몸이었다. 그녀가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을 손으로 비비며 혼잣말했다. “정말 내 인생의 시각 비타민 같은 존재라니까.” 하이너는 대관절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전부터 생각하는데 아가씨는 종종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사용하신다. 저번에는 남자의 성기를 보고 수컷들의 ‘호르몬’이 어쩐다는 둥 어려운 말을 쓰더니, 이제는 시각 ‘비타민’이란 듣도 보도 못한 말까지 쓰시지 않는가. 워낙에 마법, 연금술, 점성술 등 괴상한 학문에 흥미를 두어 그와 같은 생소한 단어도 괴상한 학문을 하면서 배운 것이겠거니 하고 넘길 수는 있었다. 하지만……. 하이너는 한쪽 눈썹을 몹시도 불만스럽게 꿈틀거렸다. “비타민이고 나발이고 아가씨 진짜 장난하십니까?” “응? 왜애?” “몸을 깨끗이 씻지도 않고 욕조에 들어가시다니요! 너무나 비상식적으로 구셔서 귀족 아가씨인지 거지 아가씨인지 헷갈리는군요.” “어차피 물에 씻는 거라 물에 먼저 들어가는 것뿐인데, 뭐 잘못된 거야?” “잘못되었습니다!” 가난하여 매일 온수 목욕을 하진 못해도 한 번 했다 하면 몸을 깨끗이 씻고 나서 욕조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쯤은 필수로 알고 있는 깨끗한 사나이 하이너는 아가씨의 지금과 같은 행동이 불만스럽기 짝이 없었다. 말로써 아무리 가르쳐 봐야 무의미할 것이다. 그는 말 대신 몸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바로 마리의 몸을 가볍게 들었다. “으앗! 무슨 짓이야!” “글쎄 아직 욕조에 들어가긴 이르단 말입니다! 좀 씻고 들어가시란 말이에요!” “하지만 춥단 말이야! 얼른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고 싶다고!” “애도 아니고 좀 얌전히 계세요! 금방 씻고 욕조로 들어가면 되잖습니까! 조금 추운 거로 이렇게 칭얼거려서야….” “어맛? 하이너! 코피가 흘러!” 남자의 품에 알몸으로 안겨서 바동거리는 아름다운 숙녀의 몸-특히나 흔들리는 양 가슴-은 그 자체로도 굉장한 선정성을 풍기고 있었다. 풍만한 가슴은 알게 모르게 하이너의 혈류를 회오리치게 해 코피, 그것도 쌍코피를 터트려버렸다. “코피… 라뇨…… 제가?” 그의 코에서 흐르는 핏방울이 마리의 몸에도 흐르고 말았다. 그는 황급히 아가씨를 목욕 의자에 내려두고 바가지로 물을 펐다. 아가씨의 몸을 더럽힌 피를 씻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따스하고 풍만한 두 살덩이를 물로 꼼꼼히 씻기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피곤해서 그만.” “아니, 뭐 죄송할 것까지야. 그나저나… 내 가슴 어때?” 하이너의 손이 멈췄다. 마리가 제 가슴살을 두 손으로 받쳐 스스로 점수를 매겼다. “남자를 코피 터뜨릴 정도로 예쁜가? 그렇다면 한 99.9 점? 기준은 미의 여신 플라미네의 가슴을 100점으로 잡고.” 핏물이 씻긴 뽀얀 가슴에서 아름다운 색깔의 젖꼭지가 도드라졌다. 하이너의 코에선 더욱 핏물이 진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젠장, 자기 가슴 자기가 만지면서 높은 점수 매기지 말라고.’ 그 순간이었다. 욱신. 등에 아릿한 느낌이 급습했다. 욱신. 욱신. ‘뭐야, 설마 또……?’ 그는 불현듯 드래곤화를 떠올렸다. 예전에 오를린 저택에서 성적인 흥분이 가장 고양되었을 때 드래곤으로 변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 그는 재빨리 제 몸의 핏물을 씻어내고 욕조로 들어가 몸을 깊숙이 담갔다. 뜨거운 물 속에서 마음을 안정시키며 성적인 유혹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 마리는 하이너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하이너, 갑자기 왜 그래?” “혼자 있고 싶습니다. 나가주세요.” “하이너?” 욱신. “혼자 있고 싶다고 하지 않습니까?” 욱신. 욱신. “그러니까 갑자기 왜….” 욱신. 욱신. 욱신. 하이너는 견딜 수 없는 불안감에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왜냐니요! 또 등이 아프단 말입니다! 빌어먹을 드래곤 날개를 뻗친 그 날 밤처럼요! 다시 말해 이건 위기란 말입니다! 둔한 아가씨께선 아무것도 모르실 테지만!” 마리는 뒤늦게야 눈치챘다. 호위 기사의 마음속에 도사리는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으면서 드래곤으로 변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리라. 게다가 이런 장소에서 드래곤화가 진행되면 여관의 시선을 끄는 것은 물론, 바너 전 지역의 화제가 될 것이었다. 그 소식은 바로 옆 네히트에도 알려질 것이고, 오를린에도 알려질 것이다. 이상하다. 소용돌이 산 동굴에서 함께 벌거벗고 씻을 때만 해도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 모든 근심의 원인은 링클 이식을 모의한 자신에게 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지금은 이유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생각을 멈추고 몸이 이끄는 대로 했다. 지금은 호위 기사에게 안정을 주어야 할 때다. 고통에 떠는 그의 등을 껴안고 한 손으로 그의 눈을 차분히 감겼다. 안정을 취하는 덴 어둠만 한 게 없으리라. 다른 한 손으론 고통에 떨리는 등을 찬찬히 어루만져주었다. 심통 난 아이를 어르는 듯 고운 손길이었다. “쉬이… 흥분하지 말고. 내 손은 약손이라 이렇게 만져주면 더는 아프지 않을 거야.” 지금 아픈 게 문제인가. 하이너는 풍만한 가슴이 등에 닿은 상태에서 이러한 손길을 받는 게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마리를 떼어내려 할 때였다. 고운 노랫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산골짜기 아름다운 새소리, 내 마음 꽃잎 되어 태양 아래 춤추노라. 오, 마르틴. 가끔은 새의 날개 되어 그대 머무는 구름에 스치고 싶구나…….” 조금 전에 부른 노래와는 다르게 경쾌하지 않았다. 강물처럼 느리고 은은했다. 고운 노랫소리는 마르틴이란 가사에 이를 땐 구슬픈 느낌마저 들었다. ‘마르틴….’ 등의 욱신거림이 서서히 멈추었다. ============================ 작품 후기 ============================ 헉... 과분한 서평을 받았습니다. 너구리 님 감사합니다. 힘 내서 완결까지 꾸준히 달리겠습니다. 00015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가사에 두 번이나 등장한 동생의 이름.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지나간 일들이 기억을 서서히 물들였다. 기사 시험을 치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절, 동생의 병을 알게 되었다. 마땅히 간호를 할 사람이 없으니 형인 자신이 해야 했다. 그런 이유로 아쉽게도 시험을 포기해야 했다. 힘든 나날이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빈곤한 집에서 자기가 기사 시험에 합격하는 것만큼 미래의 돌파구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상황을 원망하기도 많이 했다. 가끔은 도망을 가버릴까 하는 못된 생각도 했다. 그러나 동생이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을 땐 자신을 한없이 책망했다. 좀 더 잘해주지 못하고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만 가슴에 사무쳤다. ‘마르틴, 보고 싶구나.’ 아린 추억은 육체의 말초적인 흥분을 죽이고 있었다. 아름답고도 구슬픈 노랫소리는 어느샌가 멈췄다. 고개 숙인 하이너를 안은 마리가 천천히 몸을 떼어냈다. 그녀는 부드럽게 안마를 해주었다. “오늘 하루 많이 피곤했지? 내가 같이 씻으려 했던 건 하이너에게 이런 안마를 해주기 위해서야. 어때? 시원하지? 이래 봬도 손맛이 좋다고. 우리 어머니도 내 안마가 최고라고 자주 말씀해주셨어.” 하이너는 픽하고 비웃었다. “왠지 갑자기 그런 말을 지어낸 느낌입니다만? 안마할 생각 따윈 처음부터 없어 놓고선…… 아아!” 어깨와 목덜미, 척추에 시원함이 번져 하이너는 그만 희미한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애중한 동물을 쓰다듬듯 사근사근한 손놀림은 온수 속에서 큰 효과를 발휘해 그의 몸을 한없이 녹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말랑말랑한 느낌은 바로 아가씨의 젖은 솜 같은 달콤한 목소리! “오늘 정말 수고했어. 돈을 따로 챙겨둔 것도 고맙고 지도를 잃어버리지 않은 것도 고맙고 드래콘 위에서 내가 편히 잘 수 있게 배려해준 것도 고마워. 네 넓은 등이 어떤 쿠션보다도 편안했단다. 정말 네가 없었으면 어찌했나 싶어!” “그런 식으로 늘 의존하려 들지 마세요.” 말은 그렇게 해도 하이너는 기분이 좋았다. 까칠함을 한층 덜어낸 목소리가 나왔다. “제가 없어도 여행을 잘 하시려면 좀 노력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이너는 늙은이 같은 구석이 있다니까.” “아가씨께서 철이 없는 게지요.” 마리는 뾰로통해져선 안마하는 손에 힘을 잔뜩 넣었다. 흡사 하이너의 살을 마구 뜯는 것처럼. 그래 봐야 튼실한 근육질로 피부가 뒤덮인 하이너에겐 조금의 고통도 주지 못 했다. 아가씨께 까칠하게 굴었지만 실은 오늘 해낸 모든 일이 화를 내면서 해야 할 일은 아니다. 원래부터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이라 여겼다. 그렇지 않은가. 명색이 호위 기사다. 아가씨를 지켜야 할 임무가 있다. 그런데 드래곤화를 겪고 드래곤의 기를 내뿜는 덕분에 위험한 소용돌이 산에서 누구 하나 덤벼드는 일이 없었고, 그 안전한 상황은 이 도시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히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그저 존재 자체로도 아가씨를 지키게 된 셈이다. 왠지 노동도 하지 않고 급여를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리티오르(하이너의 검 이름)를 들고 괴물과 싸우거나 불량배로부터 아가씨를 지키는 일을 할 확률이 거의 없다면 돈을 챙기거나 귀중품을 챙기는 일이라도 잘해야 자기 자신에게 떳떳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꼼꼼하게 챙긴 것뿐이었는데 아가씨가 이토록 고맙다 말씀하시고 좋아하시니 자기도 흐뭇했다. 하이너는 나른히 한숨 쉬다가 입가를 올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어째서인지 날카롭게 번뜩였다. “후우, 아가씨.” “응?” “여행, 대륙 정복 기간을 얼마나 잡아두셨습니까? 한두 달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요.” “물론 한두 달로는 불가능하지.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만 현실은 넉넉잡아 몇 년은 걸리겠지?” “현실? 큭… 혹시 저번에 제가 아가씨의 귀한 속옷을 찢어 다음 달 급여는 주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던 거 기억하십니까?” “응응!” “자, 그럼 그 후의 급여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지급할 능력이 없지 않습니까?” 마리는 안마를 그만 멈추고 말았다. “그게….” “그게요?” “끄응! 물론 능력이 있지. 하지만 그 능력을 달성하기까지의 일을 설명하기엔 언어는 너무 알량한 수단….” “변명하지 마십시오!” (비록 변방이긴 하나) 명색이 한 영지 주인의 딸이다. 단 한 번도 먹고 살 걱정이란 걸 해본 적 없는 금수저 아가씨의 물러터진 금전 감각에 하이너는 한심함 그 이상의 분노를 느꼈다. 이젠 등이 욱신거리는 게 아니라 머리 혈관이 욱신거렸다. 거듭 생각해도 이 여행의 미래는 없다고 봐야 한다. 급여를 받을 가능성도 불투명해, 오를린에서 드래곤 소동을 일으키고 나왔으니 혹시나 신분이 노출되어 잡혀가면 무시무시한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르고, 그래서 앞으로 부모님과 동생의 묘소에 가는 것도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평화로운 앞날 같은 것은 절대 꿈꿀 수 없는 도망자의 생활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와 다르게 속이 편한 마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농담했다. “후훗! 그래, 뭐 변명이라고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 하렴! 하지만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뭐가 남지? 우리는 분명 돈 걱정 따윈 하지 않는 행운의 여행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진심으로 살인충동이 드는군요. 아가씨는 미칠 듯한 긍정으로 여행하고 대륙을 정복하는 게 꿈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꿈은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사나이가 대륙 정복의 꿈도 가지지 않다니, 절망적인데?” “사나이가 아니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저 같은 범배는 대개 평범한 꿈을 꾸며 살지요. 노후에 안락하게 머물 수 있는 집과 여유를 보장하는 돈. 플라미네(미의 여신)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들. 이름만 평범한 그 꿈은 실은 현실로 이루기에 적잖은 노력이 든답니다. 혹시 아십니까? 이런 바너와 같은 도시에서 4인 가족이 살기 좋은 집 한 채의 가격이 얼마나 하는지?…… 전혀 모르겠단 표정을 하시는군요. 알아두십시오. 무려 4억 자일에 이릅니다. 월 2000000자일의 급여를 받고 피 끓는 오기로 돈을 약삭빠르게 굴려야만 기적과 같은 확률로 중년쯤에 겨우 그러한 집을 살 수가 있단 말이지요. 종잣돈을 모으려면 지금 이렇게 신분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철부지 아가씨와 여행을 해야 할 게 아니라 당장 막일에 뛰어 들거나 용병 일이라도 해야 합니다만!” 그가 내뿜는 싸늘한 한기에 욕조의 물마저 식어가고 있었다. 마리는 어쩐지 무서워서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하이너는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여행의 미래는 없군요.” 마리는 조바심이 났다. 그의 엉덩이를 잡고 나가지 못하게 말렸다. “글쎄 잘만 하면 대륙을 정복할 수 있대도!” “아가씨 똥이나 드십시오. 그리고 그런 데를 만지시면 성희롱입니다만!” 쏘아붙인 하이너는 욕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냉기가 감도는 욕실에서 마리는 창밖 하늘을 멍하니 보다가 혀를 찼다. “쳇! 생각보다 현실적인 놈이잖아? 꿈 좀 꾸면 어때? 생긴 건 용도 때려잡을 멋진 용사님처럼 생겨선.” 투덜거리는데 갑자기 뇌리에 누군가의 의식이 들어왔다. [주인님. 명령하신 일을 수행했습니다. 드디어 바너의 실세가 사는 곳을 알아냈습니다.]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의 의식이었다. *** 몸을 깨끗이 닦은 하이너는 외출복을 입고 침대에 앉았다. 편한 복장이 아닌 외출복을 입은 이유가 있었다. 만일 무슨 일이 있을 때 대비하기 편했다. 그리고 잡스러운 유혹에 긴장이 풀리는 것을 원치 않아 이런 식의 불편한 복장을 일부러 하여 기분을 다잡고 싶었다. 등은 그리 아프지 않았다. ‘그래도 방심하면 곤란해.’ 두꺼운 복장을 하고 육체를 감춰버리면 마리를 향해 끓어오르는 은밀한 감정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전 욕실에서 정나미 없게 쏘아붙이고 나온 이유도 사실은 그 때문이었다. 냉정한 현실을 운운하며 욕정을 꽉 누르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적어도 이 빌어먹을 욕정 때문에 드래곤으로 변신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잠재울 수 있었다. ‘얼른 머리나 말리고 자고 싶군.’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갑자기 몸에 싸한 느낌이 들더니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젖은 머리가 한순간에 모두 보송보송하게 말려진 것이었다. ‘뭐지? 어째서?’ 단지 머리를 말리고 싶단 생각만으로도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버린 이 상황. 하이너의 뇌리에 어떤 생각이 빠르게 스쳐지나 갔다. ‘설마 드래곤의 마법이 가능하게 된 건가!’ 이렇게 추측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능력을 실험해 볼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보는 게 좋았다. 여관방 구석에 기어 다니는 작은 벌레에게 기절하란 주문도 해보고, 두꺼운 이불이 공중에 뜨라는 주문도 해보았다. 거센 바람이 부는 소리가 거슬려 소리를 차단하라는 주문도 해보았다. 생각을 짜내어 주문을 걸어보았지만, 실현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지친 하이너는 침대에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가 지그시 떴다. 눈 앞을 가리는 보송보송한 머리카락을 응시하다 주문을 걸어보았다. ‘젖어라.’ 촤라락. 머리카락을 타고 차가운 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말라라.’ 머리카락은 다시 보송보송해졌다. 젖은 침대와 바닥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벌레에겐 미안하지만 주문을 응용해야 할 때였다. ‘벌레 속 수분을 가열하라.’ 뽈뽈 기어 다니던 벌레가 순식간에 잿개비로 변했다. 주문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욕조 물이 차갑게 변한 것을 기억해내고 욕실 문을 응시하며 주문을 걸었다. ‘욕조의 수온을 미지근하게 해라.’ 그리고 5초 후. 욕실에서 해맑은 탄성이 들렸다. “이야, 따뜻해! 이 여관은 오를린에선 절대 볼 수 없는 여관이군. 욕조 물이 저절로 바뀌는 시스템이라니! 역시 도시는 달라도 이렇게 다르다니까!” 하이너는 주문의 가능 영역을 파악했다. ‘그렇군. 아직 수분 열기 조절에 그치나 보군. 드래곤으로 치면 헤츨링(새끼 드래곤)이라 할 수 있는가?’ 순간 번개처럼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마법 수준이 고작 수분 열기 조절에 그치는 저급이라 해도 모든 건 응용하기 나름 아닌가? 이걸 잘 쓰면 갑작스러운 드래곤화를 미리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차분히 생각하자, 차분히.’ 드래곤이 무엇인가. 제아무리 날고기는 거대 마법 생물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파충류에 속한다. 즉 냉혈동물이란 말. 온혈동물인 인간에서 냉혈동물인 드래곤으로 변한다, 라……. 그것도 성적인 흥분이 고조되었을 때 변신 현상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그 고조된 시간에 열쇠가 있었다. 혹시 몸이 달아오르면 변하는 건 아닐까? 인간이 성적으로 흥분했을 때 체온은 상승한다. 그리고 성교시에는 제법 많은 열량을 소모하게 된다. 지난 번에 드래곤화가 진행했을 때는 성교 직전, 즉 몸이 뜨거워진 때였다. 만일 그때 체온이 올라가지 않고 도리어 낮아진다면? 주워들은 바로 인간의 체온은 36.5도를 유지한다 했는데 한 35도쯤으로 낮춰버리면 괜찮지 않을까. 인간으로 치자면 저체온 상태에 머물러 있는데 굳이 드래곤 같은 냉혈동물로 변신할 이유가 있을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실험은 해볼 만하다. 물론 저체온증으로 인한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자신 주변의 공기 중 수분만을 가열하여 따스하게 만드는 것은 필수라 할 수 있겠고. 어떻게든 드래곤화를 피하고 싶은 심정은 생각을 거기까지 뻗치고 있었다. 그저 감에 의존한 실험이지만 해보는 게 좋았다. 때마침 다 씻은 마리가 욕실 문을 대차게 열고 나왔다. 수건 한 장만 두른 그녀의 몸을 하이너가 무심결에 보았다. 그러다 그는 눈을 감고 말았다. ‘젠장, 다 벗는 것보다 저렇게 수건으로 가리는 게 더 위험하다고. 벗기고 싶단 말이다.’ 등이 다시 욱신거리는 느낌은 착각일까? 하이너는 재빨리 주문을 걸었다. ‘방안 습기를 후텁지근하게 데우고 내 체온은 35도로 유지하는 게 좋겠군…… 단.’ 그는 뜸을 들이다 혹시나 해서 조건 하나를 더 추가했다. ‘성기만 빼고.’ 그 순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말로 싸늘한 한기가 몸에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또한, 욕실에서 나온 증기가 방안을 따스하게 덥히고 있었다. 소리 없이 격렬한 체온 변화를 겪는 그에게 마리가 다가가 안기며 애교를 부렸다. “이잉, 하이너. 아직도 좀생이처럼 월급 생각하는 거야? 싫다아! 내가 또 마사지해줄 테니까 화 풀어! 그런데 너 몸이 왜 이리 차갑니….” 하이너는 차가워진 몸 중 딱 한 부분-penis-만 급격히 팽창하며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더욱 기적적인 것은 예상한 대로 등이 욱신거리지 않는다는 것! 아가씨가 이토록 밀착해 있는 야릇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화 풀라고, 응? 내가 오늘 밤 마사지로 몸을 제대로 녹여줄게! 으응?” 그는 터질 것 같은 남성을 느끼면서 마리에게 되물었다. “마사지라, 몸을 제대로 녹여준다고 했습니까?…… 진짜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마리는 다가올 폭풍의 밤을 예감하지 못한 채 고개를 세 번이나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감상, 선, 추, 코,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00016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그런데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방안이 수증기가 가득 찬 것처럼 희뿌예지고 있었다. 욕실문을 통해서 나온 수증기가 이토록 안개처럼 희뿌옇고 따스하게 하지는 못할 텐데? 지금 곁에 마법을 사용하는 마리아 그로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체 누가 이런 조화를 부리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하이너, 지금 공기 좀 이상하지 않아?” 공기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자 초보 헤츨링(수분 열기 조절 마법 1급 마스터) 하이너는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기껏 입은 외출복을 한 겹 한 겹 벗어냈다. 결코, 절대, 맹세코 아가씨와의 은밀한 일을 기대해서 벗는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이제부터 받을 마사지를 기대하고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혹시, 만에 하나, 천만분의 일의 확률로 아가씨의 마사지하는 손길이 이상야릇하게 변한다 해도 걱정은 없다. 그런 흥분에 휘말리지 않을 바위 같은 마음가짐이 되어 있고 행여나 아가씨의 손길이 그런 단단한 마음가짐을 부술 듯 음란하게 변한다 해도 뭐 어떤가. 아무리 흥분해도 체온 조절만 잘하면 등이 아프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러면 드래곤으로 변하는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받아보겠습니다. 아가씨의 마사지.” 속옷 한 장만 걸치고서 침대에 엎드린 하이너를 보며 마리는 호오! 하고 작은 탄성을 질렀다. 수증기로 시야가 자욱한 때에 검은 머리카락을 등으로 길게 늘어뜨린 채 탄탄한 뒤태를 보이는 호위 기사의 몸은 여심을 홀리는 매력이 줄줄 흘러넘쳐 혼자 보기 아까웠다. 마리는 그 곁에 앉아 그의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목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는 머리카락이 기적적으로 빨리 마르는 편이구나. 부러워.” “으음.” 마리의 고운 손은 하이너의 넓고 탄탄한 어깨를 부드럽게 마찰하였다. 차갑고 단단한 살이 쇠와 같아 아무리 꾹꾹 눌러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마리는 놀랐다. “어쩜 이리 살이 단단하기도 한지.” 그리고 걱정도 약간 됐다. 이런 단단한 살과 비교해 자기 손길이 약하다고 하더라고 그게 연속적인 자극 즉, 흥분이 된다면…. “등은 어때? 아프지 않아?” 마리는 하이너의 어깨를 마사지 할 때 손을 참새의 종종 뛰는 발처럼 경쾌하게 움직여 두드렸다. 피식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대답이 돌아왔다.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두 손은 양 어깨로 뻗어 팔을 주무르고 팔꿈치를 꽉 죄다가 마지막엔 손등에 머물러 손가락 하나하나를 쭉 잡아 당겨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손바닥을 넓게 펴 골반을 따스하게 주무르고 있었다. “드래콘 위에서 허리가 많이 아팠지?” “뭡니까? 제가 노인도 아닌데. 그 편안한 안장 위에서 아플 리 있겠습니까?” “하지만 잠든 내 등을 받쳐준다고 자세가 불편했을 텐데.” 두 손은 이제 엉덩이를 밀가루 반죽처럼 주물렀다. 속옷에 가려진 튼실한 가죽처럼 구김 없는 살을 힘주어 주무르다 보니 숨이 벅찼다. 그래도 어떻게든 제대로 마사지를 하여 차가운 호위 기사의 몸을 따스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후우, 이제 허벅지를 해볼까!” 마리는 자리를 옮겨 하이너의 한쪽 허벅지를 꽉꽉 주무르길 반복했다. 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방안을 가득 채우는 후텁지근한 수증기 때문인지 이마에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어깨로 땀을 닦아내었다. “허벅지가 너무 커서 하나만 주무르기도 벅차네. 헥헥.” 힘이 부친 아가씨의 숨소리가 귀엽게 들려 하이너는 웃고 말았다. 그런데 다른 쪽 허벅지로 손길이 옮겨갈 때쯤. “헤헥… 헤에… 하아…….” 그 숨소리가 야릇하게 들리는 건 착각일까. 아가씨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본래 여자의 숨소리는 남자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법이었다. 그것도 아가씨와 같은 미녀의 숨소리라면 더욱더. “후우, 하아…….” “아가씨, 부탁드리는데 그 입 좀 다무십시오.” 자꾸 들으니 아랫도리만 열기가 가득 차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나 마리는 그 말을 못들은 듯 종아리로 손길을 옮기고 있었다. “하, 하아… 이 튼실한 종아리 좀 봐.” “제발 그 입 좀… 아아.” 두 손이 종아리를 타고 내려 양 발목을 부드럽게 죄자 하이너는 느른한 숨소리를 뱉으며 만족을 표시했다. 그러나 마사지를 해주는 입장에선 전혀 만족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마리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상해. 전심전력으로 마사지를 해줘도 왜 계속 차가운 거야? 이제 돌아누워 볼래?”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던 하이너는 잠시 당황했다. “아가씨, 그게….” “응?” “돌아눕기가 좀 그렇습니다만.” “어째서?” 하이너는 신체 이상 증상-발기-을 설명하기가 무안하여 끄응 앓았다. 아가씨의 손길에 흥분한 자신을 모른 척, 애꿎은 핑계를 떠올리고 있었다. ‘여행하면서 방광을 비워둘 여유가 없었지. 그 때문일 뿐이다.’ 눈치가 빠른 마리가 그의 등을 찰싹 치며 호호 웃었다. “아이, 뭐. 흥분해서 텐트라도 친 거야? 그 나이엔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같은 나이면서 그런 말을 하는 아가씨의 모습이 하이너는 웃겼다. 마리가 억지로 몸을 돌아 눕히려 하자 하이너는 얼굴을 붉히며 순순히 돌아누워 주었다. 정말 마사지만 밤새도록 충실히 받으려 했는데 눈치 없이 일어선 성기가 야속했다. 그의 ‘텐트’를 본 마리는 히죽 웃으며 농담했다. “호오. 오늘은 네 몸 중에서 이쪽만 드래곤이 되려나.” “놀리지 마십시오!” “어머! 놀리다니? 엄연히 칭찬인 걸.” “누가 그런 칭찬 바란…… 으으.” 마리는 하이너의 몸 위로 올라타면서 목을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잔뜩 긴장한 호위 기사의 얼굴을 바로 위에서 감상하는 게 재미있었다. “마사지하기엔 이런 자세가 편한 것 같아.” “아가씨만 편하면 답니까?” “흐응, 넌 대체 어디가 그렇게 불편한데?” 그런데 갑자기 마리의 몸을 감싼 수건이 힘없이 풀렸다. 그 탓에 그녀의 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몽롱한 수증기 속에서 복숭앗빛을 반짝이는 몹시 아름다운 몸이었다. 금빛 머리칼에서 흘러내린 물이 풍만한 가슴 곡선을 타고 아랫배로 은밀하게 흘러내리는 것도 매혹적이었다. 하이너가 넋을 놓고 본다고 호흡을 멈추었을 때, 마리는 제 몸을 보고 너스레를 떨어댔다. “어머, 몰라! 99.9 점짜리 가슴이 답답하다고 수건을 내쳐버리는군.” 그녀의 엉덩이와 하이너의 배 사이에 경계로 있던 수건 자락도 바닥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뭐지, 이 싸구려 성애 소설 같은 상황 전개는?’ 하이너는 이런 상황을 조소하고 있었으나 하체가 더욱 불끈 솟아오르는 증상에 대해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흔들리는 풍만한 가슴을 보기가 민망하여 고개를 딴 데로 돌리자, 마리는 너무 노골적인가 혼잣말하며 수건을 집어 들었다. 역시 마사지를 하는 동안은 이 아름답고도 매혹적인 몸을 가리는 게 호위 기사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아서 몸을 가릴 생각이었는데…….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불끈불끈 하는 호위 기사의 복근이 그녀의 고간에 은밀한 자극을 가하고 있었다. 그래. 진정한 마사지라면 살과 살이 실오라기 하나 방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순수하게 맞대어져야 좋다. 합리화한 그녀는 수건을 도로 내려버리고 하이너의 턱을 만지작거렸다. 황금빛 아미 아래 청록색 눈동자가 묘한 욕망을 웃음으로 녹여 빛내며 호위 기사를 유혹했다. “이봐아, 하이너.” “예?” “다른 부위를 마사지해보는 건 어떨까?” “…… 다른 부위라니요?” 마리는 하이너의 얼굴로 점점 다가갔다. “가령 이 잘생긴 귓바퀴라든가.” “예?…… 허읏!” 폭신하고 촉촉하게 귀를 감싸는 입술의 감촉이라니! 놀란 하이너는 희미한 신음을 흘렸다. 귓바퀴를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접촉 당하는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살면서 가장 신경 쓰지 않은 부위가 이토록 예민한 줄 누가 알았겠는가. 눈을 지그시 감은 그는 귓바퀴에서 턱, 턱에서 목덜미로 이어지는 입술의 느낌에 허우적거리다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팔을 파르르 떨었다. ‘젠장, 미치겠군.’ 아가씨의 호흡과 접촉이 무슨 마법이나 된 듯 정신을 흩트리고 있었다. ‘잡고 싶다.’ 가녀린 허리를 꽉 잡고 눕힌 뒤 충동이 이끄는 대로 날뛰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리드하는 대로 기다리기만 해도 기회(?)는 올지 모른단 생각에 그저 숨을 고르며 눈을 다시 뜰뿐이었다. 목 여기저기를 새가 모이 쪼듯 키스한 마리는 그와 눈 마주치고선 조금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아아, 말만 차가운 줄 알았더니 어쩜 이 살결마저 차가운 남자. 그런데도 어떻게 여기만 뜨거울 수 있는 거지?” 그녀의 손이 그의 몸에서 유일하게 뜨거운 부분을 속옷째로 쥐고 흔들며 꾸짖듯 물었다. 하이너는 마리가 성기를 장난스럽게 흔들 때마다 곤혹스러웠다. 마치 성기가 몸의 중심 펌프, 즉 심장으로 변한 것만 같았다. 그쪽에서 퍼지는 열기가 다른 몸까지 뜨겁게 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열 조절 주문을 걸어야 했다. ‘절대로 열이 온몸에 퍼져선 안 된다. 그러면 또 등이 아플 테고, 그렇게 되면 그 빌어먹을 드래곤이 될 테지.’ 이런 와중에도 마리는 그의 속을 모르고 거듭 묻고 있었다. “대답해 봐, 응? 어째서 여기만 이렇게 불처럼 뜨거울 수 있는 거야?” “젠장.” “욕?” “아닙니다… 그냥. 살다 보니 거기만 뜨거워지는 날도 오더군요. 그런데 아가씨.” “응?” “마사지는 끝입니까?” 그 말은 마사지를 더 하지 않느냐는 재촉이나 마찬가지였다. 곧 죽어도 더 해달란 보챔을 하지 못하는 하이너는 그런 식으로 마리의 의사를 묻고 있었다. 당연히 마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정도로 마사지가 끝이라니. 그렇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아, 귓바퀴와 목덜미는 너무 예민한 것 같으니 차라리 여길 마사지할까 해.” 마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정작 가장 예민한 부위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가슴, 그것도 가운데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물론 손이 아닌 입술을 사용함은 당연했다. “맙소사, 읏… 그런 곳이 더 예민하단 걸… 아아, 알면서 그러시는 겁니까?” “흐응….” 차디찬 가슴에 닿는 뜨거운 입김은 귓바퀴에 머물렀을 때보다 더욱 강렬하게 하이너의 정신을 흩트렸다. 단단히 힘을 준 혀와 입술이 희미한 색깔의 편평한 돌기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희롱하자 그는 몽환적인 착각에 빠져들었다. 방안을 장악한 수증기가 음란의 요정이 되어 천장을 빙글빙글 돌며 자신을 희롱하는 것 같았다. 어때? 수컷인 네가 이런 때에 흥분하고 발정하지 않고서 배기겠어? 하고 놀리듯. 흐흐흣, 헤헤… 하는 마리의 요정 같은 나른하고 부드러운 웃음소리는 그러한 꿈결 같은 착각에 불을 지피는 셈이었다. “후우, 아가씨….” “더 예민한 데를 마사지해볼까.” 마리는 속옷에 몸을 숨긴 채 위용을 과시하는 남성기로 고개를 내려 그것을 한 손으로 잡고 위아래로 훑었다. 슥, 스윽, 스윽 하는 소리가 감질을 냈다.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자극이라 하이너의 허리는 부들부들 떨리고야 말았다. 거친 숨을 고르며 정욕에 일그러지는 지금 이 표정이 아가씨에게 혹시 놀림감이 되는 건 아닐까? 그는 눈을 꼭 감고 어금니를 꽉 깨물며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가 그러면 그럴수록 마리는 더욱 그를 괴롭히고 싶었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속옷을 끌어내렸다. 물 향을 상큼하게 풍기는 남성기가 단단하게 튕기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한 성기의 끝을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슬슬 문지르며 입술을 댈 듯 가까이 가져갔다. 성기 끝에 맺힌 물방울에 웃음이 나왔다. “또 뭔가를 질질 흘리네, 우리 하이너?” “기분 탓입…….” 하이너는 말을 마저 마치지 못했다.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결국, 아가씨의 입술 속에 성기가 속절없이 삼켜져 버렸다.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남자로서 내기 민망한 신음들뿐이었다. “하읏……!” 마리는 하이너가 흘리는 맑고 투명한 액을 혀끝으로 스으윽 핥았다. 이질적인 맛이 혀 안에 서서히 감돌자 그것을 더 분석해보고 싶단 생각 아니 충동이 일었다. 거침없이 거세게 빨아들였다. 진정한 마사지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 작품 후기 ============================ 캐릭터들의 진도는 굉장히 빠르고 그에 비해 이야기 전체의 전개는 굉장히 느리지만, 이 이야기는 어쨌거나 판타지(+로맨스) 모험물임을 다시 한 번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100편씩 모일 때 이용권 끊어서 보는 것도 좋으실 듯... 00017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마리는 하이너의 두 손을 잡아 제 머리를 붙잡게 했다. 모양새가 묘하다. 구강성교가 마치 남자의 강제로 일어나는 것 같았다. “으읏… 아가씨, 제 손은 왜…….” 제아무리 무례한 기사라고는 하나 이런 자세는 낯설었다. “흐음. 자, 내 머리를 흔들고 싶은 만큼 흔들어 보라고. 네가 좋아하는 감촉에 다다를 때까지. 우읍… 서로 즐기는 마사지가 되어야 하지 않겠어?” 성기를 입에 넣고 굴리면서 지시하는 마리의 모습에 하이너는 더욱 흥분했다. 조막 만한 머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려는 걸 아슬아슬하게 참아 본다. 마음 같아서는 이 금빛 머리를 사정없이 흔들고 싶었다. “신기하네. 고환은 차가운데 여긴 이렇게 뜨겁다니.” 따뜻한 손으론 고환을 쥐어짤 듯 주무르고 반대쪽 손으로는 기둥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마리가 혼잣말했다. 그러다 길게 빼낸 붉은 혓바닥으로 성기를 간질이듯 핥았다. 누운 자세로 그녀를 보는 남자의 기분은 어떨까. 하이너의 눈이 실낱처럼 가늘어졌다. 제 성기의 길이와 두께로 보아 불가능할 거라고 해도 저 목구멍 깊숙이 제 것을 처박아 넣고 싶었다. ‘젠장!’ 아가씨는 제 머리를 마음대로 흔들어대도 된다며 호위 기사를 당황하게 해 놓고선 그 지시에 조금의 이상함과 위험함을 느끼지도 못하는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표정을 보는 데 어째서 얄미운 감정이 생기는 걸까? 아니. 아가씨의 얼굴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라기보다 아예 느긋하고 여유롭게 즐기는 모습이다. 사람이 얼마나 안달 나 있는지도 모르고 정작 자기만 저런 유유자적한 표정이라니! 그런 아가씨가 미워서 아가씨의 머리를 두 손으로 마구 흔들고 움직이며 분풀이하듯 사정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아가씨의 여유로운 표정을 망치기 싫은 이중적인 기분도 들었다. “우읍… 흐읍…… 하아.” 이 아가씨를 어찌한다……. 기다란 황금빛 눈썹을 내리깔며 목구멍 깊숙이 남자의 것을 삼키는 모습이 음탕하고도 우아해 기묘함을 자아냈다. 아름답고 순수한 언어만 읊조릴 것 같은 입술 그 안에선 뱀 같은 혀가 탐욕스럽게 성기를 간질이며 훑고 있었다. “그렇게 게걸스럽게 먹지 마십시오….” 게걸스럽단 표현은 심통에서 나온 것일 뿐, 실은 미식가의 차분한 음미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하리라. 사실, 이런 모습을 보는 게 머리를 마구 흔드는 것보다 은근히 더 흥분되는 편이기도 하다. “으읍. 숫기 없는 사내 같으니. 부끄러워 죽겠단 표정을 하고 그런 말을 하면 더 괴롭히고 싶은 법인데…… 참. 그런데 등 아프지 않아?” “전혀 후우…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만.” “호오. 그렇다면.” 마리는 버섯 갓 같은 성기의 끄트머리를 쭉 빨아 당긴 뒤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하이너가 그만 아아! 하고 아쉬운 소리를 흘릴 뻔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시키는 대로 아가씨의 머리를 흔들 걸 하는 뒤늦은 아쉬움도 들었다. 그 사이 마리는 하이너의 배 위로 올라탔다. “이렇게 촉촉하게 적셨으니 저번에 못했던 걸 해볼까 싶네.” “아니, 아가씨!” 황금빛 수풀에 감춰진 분홍색의 은밀한 균열이 우뚝 선 기둥 같은 남성기 위로 자연스럽게 닿았다. 타액으로 젖은 성기와 음액으로 젖은 성기가 미끌미끌 야한 감촉과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녀가 그대로 주저앉기만 하면 그들의 몸은 하나가 될 것이다. 진정한 성교 직전일지도 모른단 생각에 하이너는 체온 조절 마법이 사라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하아, 하… 아가씨…….” 마리는 하이너의 것을 들일 듯 말 듯 장난치며 물었다. “후후, 이번 마사지는 하이너의 동정을 앗아갈 수도 있을 텐데…… 괜찮겠어?” 하이너는 왠지 퇴폐적으로 느껴지는 마리의 미소를 보고 알아챘다. 지금 아가씨는 동정남의 발정을 쥐락펴락하며 그의 순결함(?)을 앗아가기 직전의 순간을 아주 즐기고 있단 걸. 값싼 표현일진 몰라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능구렁이 색광이 순결한 처녀를 강제로 안으려 할 때 짓는 표정이 바로 지금 아가씨의 표정일 것이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의 동정을 앗아갈 수도 있는데 괜찮겠느냐고요?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 처음만큼은 이런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아니라 진지하고 낭만적인 상황에서 제대로 하고 싶었단 말입니다. 생각을 마친 그는 대답했다. “괜찮지 않….” 그 순간, 마리의 따스한 균열이 하이너의 성기 끝 부분만을 잠시 쑥 삼켰다가 빼냈다. “…않습니… 아아.” “후후후…… 이렇게 삼킬까, 말까?” 마리는 그런 행위를 반복하며 특유의 달콤하고도 상냥한, 그래서 더 유혹적인 목소리로 대답을 재촉했다. “괜찮겠냐고 묻잖니? 우리 귀여운 기사님….” 따스한 체온 속으로 꽉 조여 들어갈 것만 같다가 자꾸만 들어가지 못하는 게 반복되는 상황. 하이너의 정신은 차라리 실신 직전이라 해도 좋을 만큼 혼미했다. “괜… 으읏! 괜찮지 않… 하으! 괜찮지 않습… 아아! 괜찮지 않습니… 헉!…… 괜찮습니다! 괜찮다고요, 젠장!” 과감한 요분질에 패배하고만 하이너는 기사의 탈을 벗어 던지고 무례한 짐승이 되었다. 어금니를 꽉 문 그가 아가씨의 허리를 잡고 그녀의 몸을 콱 내려버렸다.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듯, 더는 남자를 놀리는 요분질 따윈 할 수 없을 거라고 경고하듯. “아앗!” 커다란 성기를 뱃속 깊숙이 들인 마리는 비명 같은 신음을 터뜨렸다. “하아… 생각보다 괜찮군요.” 괜찮단 표현 정도로는 한없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수음할 때의 감촉과는 비교되지 않았다. 아가씨의 입술과 혀로 느낄 때와도 비할 수 없었다. 모든 인간들의 근원지라 할 수 있는 자궁의 입구를 피부로 느끼는 이 느낌은 차라리 전율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오싹한 쾌감이었다. “후읏….” 눈을 지그시 감고서 신의 과육을 오롯이 느끼던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곤 반쯤 쉬어버린 목소리를 뱉었다. “아니, 생각 이상으로…… 좋잖아.” 동시에 그의 허리가 미친 듯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앗! 하이너! 읏! 아아!” 마리의 몸은 쉴 새 없이 흔들리는 그네에 탄 것처럼 올라갔다 내려가길 반복했다. 호위 기사의 차디찬 배 위에서 불꽃처럼 뜨거운 성기에 난도질당하는 느낌이 너무나 아찔하여 숨조차 제대로 쉴 수조차 없었다. 이토록 쾌감에 젖게 하는 난도질이 있었다니! “아아… 너는 어쩜!” 오를린과 네히트 등지에서 여러 남자를 상대해봤지만, 하이너처럼 삽입을 하자마자 찌릿한 쾌감을 안겨주는 남자는 없었다. 이런 것을 두고 아낙네들은 속궁합이 좋다고 말했던가! “하아, 앗…… 네가 이런 보석일 줄 알았지! 앗, 아앙!” 생의 첫 정사에서 보석이란 찬사를 들은 하이너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지금, 지금 뭐라고….” 그가 허리를 튕기는 것을 잠시 멈추자 마리는 스스로 엉덩이를 들썩였다. 제가 뱉은 말도 까맣게 잊고 조금 전의 그 쾌감을 다시 찾으려 안달을 냈다. “흐응, 갑자기 왜 멈추는 거야아… 얼른, 얼른 움직여…….” “아가씨….” “하우읏… 허리를 튕겨 보렴. 그러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단다…… 아아.” 희뿌연 수증기 속에서 하이너는 눈앞이 더욱 흐려지는 걸 느꼈다. 잠시 눈을 꼭 감았다가 부릅떴다. 힘을 준 눈에선 멍한 기운은 사라지고 선정적인 예기(銳氣)가 서려 있었다. 후우, 하고 차분히 숨을 고른 그가 몸을 일으켜 마리의 가녀린 등을 안았다. 그러곤 그녀의 귓가에다 대고 수컷의 그르렁거림이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미칠 것 같다 하셨습니까, 보석이란 말을 이럴 때 쓰시다니요.” 탄탄한 근육질의 가슴과 풍만한 가슴이 드래곤의 냉기와 인간의 온기를 교차하며 밀착했다. 그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가슴을 간질이고 기다란 성기가 안을 찔러오자 마리는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신음을 흘렸다. “흐응, 으응… 보석, 으응….” 하이너는 마리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서 완전히 돌아버린 눈이 되었다. “알겠습니다… 그런 찬사를 듣고 아가씨를 실망시켜드릴 순 없지요.” “어머나!” 마리의 두 다리를 쫙 벌리고서 하이너는 그녀를 밀었다. 이제는 마리가 눕고 하이너가 일어선 정상위 자세가 되었다. 하이너는 전장에서 말을 타고 질주하는 기마병처럼 쉼 없이 움직여댔다. 자지러지는 신음이 수증기처럼 자욱하게 방을 메웠다. *** 실내와 외부의 공기흐름을 차단해주던 오르내리기 창이 열렸다. 그러자 방안을 가득 메우던 뿌연 수증기가 밖으로 퍼져나가고 동시에 차가운 기온도 방으로 들어왔다. 씻고 나온 마리는 은하수로 아름답게 얼룩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은빛의 은하수가 왕관 모습처럼 보였다. “장인의 도시 바너라! 하늘에도 수놓기의 장인이 있나 보네. 오를린에서 별을 볼 때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군. 그나저나…… 으으, 허리야.” 욱신거리는 허리가 주인에게 경고한다. 호위 기사와 두 번만 연속으로 정사를 나눴다간 부서질지도 모른다고. “무서운 녀석.” 마리는 침대에 고이 잠든 하이너를 보고 두려움과 만족이 반반씩 섞인 미소를 지었다. “잠든 모습을 보면 아직 소년 같은데 말이지. 흐음.” 호위 기사 하이너 그로스. 스무 살의 시골 청년. 언제나 검술과 동양 무술에만 미쳐 있어서 그것 외에는-특히나 여자- 모두 돌을 보듯 무심했던 남자. 그런 그가 동정이란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색사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단 사실을 마리는 오늘에서야 확인했다. 타고난 신체 조건과 근성, 힘,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다. 아직 초보라서 약간 소심하고 절정에 이를 때에도 조절하지 못한 미숙함이 있지만, 쏟아 낸 뒤에도 죽지 않고 연속해서 탐해대는 절륜한 체력이 그런 부분을 충분히 보완해주고도 남았다. ‘후후, 그 야한 능력을 숨기느라 얼마나 괴로웠을까.’ 물을 주는 척하며 수면제를 먹여 재웠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몇 번이나 더 몸을 겹치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욕망에 흐려진 사나운 눈빛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마리도 체력과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야 얼마든지 그 욕망에 응해줄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녀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활동하기 편한 단순한 디자인의 원피스를 입고 두꺼운 짐승 가죽으로 만든 망토를 걸쳤다. 그리고 문을 조용히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홀에는 한 무리의 취객이 수다를 떨거나 여자 점원에게 농담을 건네거나 여기저기를 바장이고 있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여관에 처음 올 땐 시끌벅적하고 하이너와 수다를 떤다고 잘 몰랐는데, 이제 보니 여관의 기둥, 계단, 소품, 테이블 그 모든 것이 공예의 도시 물건답게 모양이 특이하고 섬세했다. 특히나 활짝 핀 봄꽃 모양의 샹들리에는 훔쳐가고 싶을 정도였다. 갑자기 솟아오른 물욕을 야심으로 겨우 잠재워 보았다. ‘대륙 정복 후에 다 사야지.’ 마리는 결심을 다지고 여관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마리를 기다리고 있는 한 소녀가 있었다. 밤의 어둠 속에서도 우아한 진줏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과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가진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 바로 드래콘인 마리아 그로스의 인간체였다. 마리는 자신의 종에게 물었다. “그렇게 변한 것을 보니 멀리 가야 할 것 같진 않군.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이 제법 가까운 곳에 있나 봐?”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가 고갯짓하며 앞장서라 지시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하이너가 본다면 아마 놀라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답잖은 농담을 하거나 질펀한 정사를 나눌 때와 달리 명민하고 냉정해 보였기 때문이다. “가보자고.” 대로 한편에 난 구불구불한 사잇길로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이곳 장인 도시 바너의 실세가 머무는 곳이다. ============================ 작품 후기 ============================ 큰 도시 접수의 시작! 00018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로귀하르트 제국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 시각 마법을 드리운 하늘엔 형형색색의 도형들이 꽃들을 피웠고, 궁정 관현악단은 밤낮으로 화려하고 경쾌한 음악을 연주하여 흥을 돋우었다. 연회장에는 언제나 싱싱한 과일과 갓 만든 음식들과 귀한 술들이 가득했고, 가운데 무대에는 늘 재주꾼들의 묘기 부리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화려한 연회 분위기가 싸늘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홀을 채우는 사람 수가 부족했다. 황태자비 간택연회가 한창인 지금 이를 즐기는 사람은 몇몇 무리로 한정되었다. 그중 할데바인 일족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연회장에 모습을 절대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황태자에 대한 반감을 표시했다. 황태자 비오르틴이 오를린의 로테아르카에게 노골적인 호의를 보이고 그녀와 동침하였단 말이 나도는 탓에 할데바인 일족의 콧대가 크게 꺾이고 말았다. 귀족 권력의 핵심인 그들이 조용하니 연회 분위기가 싸늘해진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친 할데바인 영지인 로젠플라드, 로샤타르트, 루앙에서 온 사람들은 이름만 거창하게 황태자비 후보의 일족이라 되어 있지만, 실은 그 핑계로 입궁하여 교역과 정치에서 실익을 취하려는 게 진짜 목적이었다. 적당히 들러리 노릇이나 하면서 먹이를 취해가려던 이들은 저들을 도와줄 할데바인 일족이 연회장에 나오기는커녕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소모적인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사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게 아니면 성격 급한 몇몇 이들끼리 뭉쳐 벌써 영지로 돌아가 버렸다. 결국, 매일 연회장에 등장하는 무리는 비오르틴이 선택한 후보인 로테아르카의 고향 사람들-오를린 일족, 오를린 출신 대상인, 귀족-이 주축을 이루었다. 물론 그들 외에도 두 무리가 더 있었다. 바로 제국이 지배하는 동양의 땅, 식민지 서한. 서한의 일족은 황태자비 자리를 노린 게 아니라 단지 공물의 성격으로 황태자비 후보 몇몇을 데리고 와 있었다. 그리고 ‘짐승들’이라고 비하 받는 불리는 수인족 오슬의 일족도 연회에 자리했다. 그저 궁정 연회의 시끌벅적한 구색 맞추기를 위해 나온다든가 마법 선진화된 황도 문물을 이참에 실컷 즐겨보자 하는 거지 근성으로 나오는 게 대부분이었다. 시골뜨기 오를린 사람들은 황족의 일족이 된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오를린이 바너보다 큰 도시가 될 거야!’, ‘오를린에서도 황실 정예 호위 마법사들이 파견 될 거야!’ 와 같은 뜬구름을 잡는 게 일상이었지만, 오랜 지배 생활을 받아 눈치가 백 단인 서한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황태자를 걱정하고 있었다. 물론 이 걱정은 그저 걱정에 그칠 뿐이었다. 서한인들은 황태자를 위한답시고 직접 나서서 일을 추진한다든가 가령 할데바인에 맞서서 함께 싸워줄 생각은 없었다. 제국의 오랜 식민 지배를 받은 그들은 그저 누구의 편에 붙는 게 좋은가 하는 저울질만 한창이었다. “어젯밤에도 사자(황태자 비오르틴의 별명, 원래는 야울의 겁 없는 사자로 불린다.)가 촌뜨기(로테아르카)의 침소에 들렀다는군. 정말이지 다른 여자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니까.” “그렇잖아도 시녀들이 진정한 황실 로맨스가 꽃 피었다고 수선을 피워댑디다……, 그런데 할데바인 대공이 쥐죽은 듯 조용히 있는 게 이상하지 않소?” “정말 조용히 있는 것일까? 황제가 연회에는 나오지도 않고 매일 로젠플라드 성회에 가서 기도하며 벌벌 떠는 것 좀 보라고. 할데바인이 뒤로는 무슨 협박을 하고 있다는 증거지. 어린 사자에게 자존심을 다쳤는데 대공이 가만히 있을 리가.” “대체 사자는 겁이 없는 건지, 아니면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가 보오?” “푸하. 미인 아내를 얻을 수만 있다면야 그거 자체가 사내의 겁을 앗아가 버리지.” “허, 이보시오. 모르는 소리 마시오. 그런 건 범부에 한해서란 말이지. 사자의 자리는 그리 가볍지 않단 걸 모르오? 힘을 키울 방법을 생각해도 모자랄 시간에 시골 여자에 정신을 놓는 건 한 제국을 다스릴 남자의 그릇이 아니지 않소?” “그럼 제국을 다스릴 그릇이 아닌가 보지. 아, 이런 발언은 좀 위험하군. 그런데 수다는 여기까지 해야겠군. 촌뜨기 중 하나가 우릴 흘겨보고 있어.” 렌은 본의 아니게 서한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촌뜨기 중 하나’로 불리고야 말았다. 그녀는 키득거리는 서한인들에게 괜스레 주눅이 들어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왠지 도망치는 것 같은 이 느낌이 불쾌했다. 자신은 언젠간 황태자비의 시녀가 될 사람인데! ‘제국의 지배나 받는 저열한 족속들이 무례하단 말이지. 감히 날 보고 촌뜨기라고 해?’ 렌은 구시렁거리며 로테아르카의 거처로 갔다. 최근 그곳은 거의 황태자 비오르틴과 로테의 정사의 장이 되어버렸다. 비오르틴은 연회 시작일 이후 거의 매일 밤 로테를 안으러 왔다. 하루의 일과처럼 되어버린 정사에 로테는 그가 단 하루만 오지 않아도 신경이 쓰였다. 무엇이 문제인가, 혹여 자기가 아름답지 못한 구석이 있었던가, 아니면 혹시 무슨 잘못을 하였나 하고 좌불안석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비오르틴이 다음 날 밤에 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손길을 뻗치면 그런 불안감이 다 무엇이냐는 듯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런 아가씨를 볼 때마다 렌은 불안했다. 뒷배가 없는 아가씨는 몸과 미모 그리고 행동으로써만 황태자의 환심을 사야 한다. 그러하니 황태자에게 순종적으로 구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했지만, 때론 이 연회의 마지막에 이르러 황태자비는 결국 로테 아가씨가 아니라 할데바인의 딸이 되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길한 상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훗날 ‘로테아르카는 그저 순종적인 성 노예일 뿐이었다!’라는 말이 떠돌면 아가씨도 아가씨지만 자신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어쩌지? 인간은 참 간사해. 벌써 이 생활에 적응해 버렸어. 정말이지 이 호화로운 궁을 떠나기가 싫어진다니까……. 그 때문이라도 아가씨는 반드시 황족이 되어야만 해!’ 로테의 거처 입구엔 붉은 휘장이 사라져 있었다. 그것은 비오르틴이 정사를 끝내고 제 침소로 돌아갔다는 걸 의미했다. 렌은 안으로 들어가 시중을 들기 위해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주무셔요?” 침대를 가리는 두꺼운 커튼을 조심스럽게 걷자, 아가씨께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는 게 보였다. 오늘은 또 황태자에게 무슨 소리를 들어서 저러시나. 저번처럼 황태자의 잠자리나 언행이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거칠었던가. 추측하며 조심스럽게 아가씨의 어깨를 만졌다. “아가씨?” “에에 으으 아이으…….” “고개를 들고 말씀하셔야 제가 알아듣죠.” 렌이 로테의 몸을 돌려 눕히자 눈물범벅의 얼굴이 드러났다. 로테는 쌍둥이 언니보다 더 친자매 같은 렌을 보고 바로 푸념했다. “으흑, 대체 무슨 향기를 원하는 거냐고, 그 남자는!” 그제야 렌은 로테가 무엇 때문에 우는지 알 것 같았다. 향수. 최근 로테를 가장 괴롭히는 물건이었다. 황태자가 라일락 향수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장미 향수로 바꾼 적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또 팬지 향수로 바꾸었다. 그러나 너무 달콤하기만 할 뿐 상큼한 느낌이 없는 것 같아 운향계 향수로 바꾸었고, 그것을 쓰자 그 다음날 황태자가 침소에 들리지 않았다. 로테는 향수를 또 다시 바꾸었다. 며칠 전엔 상쾌한 향기로 바꿔보자며 박하향을 쓰다가 엊그제에는 성숙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며 중년 노인들이나 쓴다는 온갖 나무 향으로 바꾸어보기까지 했다. 이쯤 되니 렌은 향기가 문제가 아니라 향수를 매일 바꿔대는 로테의 성격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들었다. 하지만 자기가 로테라 한다 해도 황태자의 반응 하나하나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까? 황태자비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 운명이 걸린 중요한 시기에 말이다. 렌은 조심스럽게 권유해 보았다. “한 번쯤은 향수를 쓰지 않으시는 게 어떨까요?” 로테는 그게 말이냐 드래콘이냐 따지는 듯 펄펄 뛰었다. “모르는 소리! 궁의 모든 여자가 뛰어난 장인의 향수를 쓰는데 어떻게 나만 안 쓸 수가 있어?” 렌은 로테가 황도의 유행에 너무 따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아가씨를 보고 있자면 의식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표정이 찌푸리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이상하게 되고 말았다. “뭐지, 렌. 그 표정은?” “그러니까 아가씨. 다들 뛰어난 장인의 향수를 쓰는 건 마찬가지라 이겁니다. 하지만 전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라고요, 지겹지 않을까요? 코도 휴식을 취해야 하는 법인데.”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도 내 생각은 그게 아니야. 전하께서 내가 선택한 향수를 싫어하시는 데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어.” 렌은 로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른 이유라니요?” 로테는 눈물을 훔치며 허공을 보았다. 분명 시선이 허공을 향했으나 그 눈동자는 누구를 노려보는 듯 미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게 있어.” 시중이나 드는 렌과 같은 하녀에겐 해당하는 바 없지만, 각 영지와 주요 인물들, 정치, 경제, 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 식견을 갖춘 로테에겐 향수 하나에 깃든 적들의 유치한 모의가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법이었다. ‘유치한 할데바인 족속들!’ 이 모든 건 그들의 음모다. 본래 궁의 손님이 기존에 소유하던 물건을 가지고 입궁 생활을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궁에서 지내다가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그것을 안으로 들이려 하면 관리인의 감시를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제아무리 장인이 만든 질 좋은 향수가 들어온다고 해도 그것을 도중에 누군가가 바꿔치기하지 않으리란 법이 어디 있을까. 그러니까 궁의 권력을 장악한 할데바인 일족들이 말이다. 자신이 아무리 바너나 로샤타르트의 유명한 장인들의 향수를 주문했다 하여도, 그 향수가 싸구려 향수로 바뀔 수도 있다. 그 향수에 정신을 불안 초조하게 만드는 약이나 육체를 망가뜨리는 약이 섞였을 수도 있었다. 교묘하게 위장해버리면 ‘촌뜨기’ 자신으로서는 대관절 그 간악한 증거를 잡아낼 방도가 없었다. ‘분명 그들의 짓일 거야!’ 이렇다 할 물증이 없다뿐이지 심증은 있다. 궁에 들어온 뒤로 몸이 편해지긴 했으나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 불안 초조하다. 그 어떤 일에도 잘 울지 않다가 오늘처럼 갑자기 눈물을 쏟은 것도 그 증거가 아닌가. 어쩌면 렌의 말대로 밖에서 들여온 향수를 쓰지 않아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향수가 꼭 밖에서 들여와야만 한다는 법이 있나? “향수를 빼앗아.” “예?” “연회장에 가서 주정뱅이 여자들의 향수를 빼앗으란 말이야.” 궁으로 향수를 들여오는 데 문제가 있다면 궁 안에서 향수를 찾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저더러 도둑질하시라는 말씀……?” 로테는 지금 같아선 도둑질을 시켜서라도 황태자가 만족하는 향기를 갖고 싶었다. 출세에 눈이 멀어 미친 거라고? 천만에. 황태자가 향기에 너무 집착하기에 이런 것뿐이었다. 비오르틴은 첫날밤부터 ‘오를린의 향수가 형편없다.’고 말했고, ‘바람이 칼보다 더 강하다.’는 말도 했다. 칼은 향기를 자르지 못하지만 바람은 가능하단 게 그 이유였다. 그 후로도 ‘네 진짜 향기를 내보라.’거나 ‘너와 어울리는 향기를 쓰도록 하라.’거나 ‘원래 쓰던 싸구려 향수라도 좋으니 그걸 써보라.’는 등 향기에 집착하는 말들을 많이 했다. 향수든 무엇이든 그가 신경 쓰는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도 제대로 만족시켜야만 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바보. 표현을 좀 알아들으라고. 적당히 친해진 뒤 빌리는 식으로 하란 말이지. 물론 말이 새어가지 않게 조심해야 하는 건 당연하고. 그게 궁정인의 기본이니까.” 렌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빌리라… 고요?” “그래. 그동안 친해진 여자들이 꽤 생겼다면서? 서한의 동양 정취 가득한 향도 좋고, 오슬의 야생화 향기도 좋아. 뭐든 모아 놔. 개중에 쓸 만한 게 있겠지. 그나저나 공기가 탁하군. 환기하도록 해.” “예, 아가씨.” 렌은 창문을 열었다. 환기를 마치면 잠 시중을 들 생각이었다. 정사로 인해 더러워진 침구를 갈고, 따뜻한 수건으로 아가씨의 몸을 닦고, 아가씨의 헝클어진 머리 손질을 한 뒤, 화장품을 발라주고, 침향을 피워 재우는 등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창문이 열리자 로테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콧물을 훌쩍였다. 하늘에서 소리 없이 터지는 환형의 폭죽이 새까만 밤 바탕에 그 밝기와 색채가 더욱 선명해졌다. 곧 잠 시중을 받으며 자야 할 테지만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황태자를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그렇다. 향기에 집착하는 점도 의아했는데 그것보다 더 궁금증을 일으키는 게 하나 있었다. ‘과거의 나를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군단 말이지….’ 황태자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눈을 하면서도 종종 ‘과거의 너는 어떠했느냐?’고 묻곤 한다. 그럴 때면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당신의 신부가 되기 위해 미모를 더욱 가꾸었고 혹시나 아버지가 황도에 갔다가 돌아오면 궁의 유행에 대해 시시콜콜 묻기 좋아했고, 궁정에서나 춘다는 온갖 춤을 유별나게 연습했으며, 귀족들 간의 권력 다툼을 여러 경로로 공부하며 황태자비로 살아남아야 할 방법을 예습하였다…… 와 같은 속이 훤히 보이는 대답을 할 수는 없잖은가. 그래서 기껏 나온 대답이란 게 산과 들판을 뛰어다니며 심신을 단련했고, 그러다 개구쟁이 소리를 들어서 독서와 악기 연습, 꽃 가꾸기 등에 취미를 붙이게 되었으며, 혼기가 지나고 나서는 영지의 오갈 곳 없는 가여운 아이들을 돌보아주었다는 적당한 거짓말들뿐이었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황태자는 지루해하는 기색이었다.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다른 여자가 아닌 오직 자신에게만 이토록 관심을 둔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노릇 아닌가. “시트를 갈았습니다. 이제 몸을 깨끗이 해야겠어요. 아가씨. 오늘은 날이 추우니 탕 목욕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로테는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렌에게 몸을 맡겼다. 아름다운 몸에 흉한 멍들이 가득 있었다. 렌은 곤란한 얼굴로 한숨 쉬었다. 황태자의 과격한 정사 취향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드레스를 입었을 때도 보이는 목덜미와 같은 부분에는 좀 자중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전하께선 대체 아가씨를 괴롭히시는 거야, 뭐하는 거야? 이건 체면의 문제도 되는데.’ 넓은 방 한쪽엔 수조가 있었다. 언제나 뜨거운 습기를 내뿜어 가습기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식수 외 용도의 물을 공급하는 것으로, 황태자가 직접 내려준 방에만 있는 귀한 시설이었다. 그곳에서 물을 퍼 담아온 렌은 수건을 뜨겁게 적셔 로테의 몸 곳곳을 닦아주었다. “아아, 좋군.” “시원하시지요?” “역시 렌이 최고야.” 신분이나 역할에 관해 큰 지각이 없고 그저 장난치기만을 좋아하는 어릴 적엔 서로의 몸을 닦아주곤 했지만, 열 살 이후부터 로테는 오로지 시중받는 것에만 익숙해졌다. 십 년 이상 몸을 맡겨온 이의 손이다 보니 언제나 편안하고 치유가 되는 느낌이다. 옷을 벗은 그대로 잠이 스륵 들려는 찰나, 갑자기 렌이 연회에서 들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 아가씨?” “…… 응?” “오늘 연회에 포르투바란 작자의 무리가 나타났는데요.” “아, 매일 연회에 나타나 내 험담을 한다는 작자들?” “이런 말씀을 드리긴 좀 그렇지만… 아가씨에 대해, 저기 그러니까 아가씨의 오를린 영지에서의 생활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 로테는 잠이 달아다는 걸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를린의 로테아르카에 대해 험담하길 좋아하는 작자들은 없는 말을 지어내는 데 천재인 수준으로 못된 짓을 일삼아왔다. 이번엔 또 무슨 소문을 퍼뜨렸을까. 백치에 말괄량이에 바람둥이라는 것까진 참았는데……. “나보고 또 뭐라고들 하는데?” “이런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뜸 들이지 마!” “드래곤에 사주하여 쌍둥이 언니를 없애버리고 그 언니 대신 황태자비 후보가 되었다는 가짜 후보란 소문이…… 예, 그런 소문들입니다.” ============================ 작품 후기 ============================ 큰 애 작은 애 이야기 오가는 게 정신 사납진 않으시려나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0019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로테는 신랄하게 웃었다. 사람을 모함하길 좋아하는 궁정인들을 증오스럽다. 몸 닦기를 멈추고 스스로 옷을 갈아입으며 타는 속을 다스렸다. 그런데…… 언니라고 하나 있는 데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앞길에 초를 치는 느낌이라니! 얼마 전 오를린에서 온 전갈에는 황당무계한 소식이 있었다. 언니 마리가 드래곤을 타고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는 내용! 그 때만 해도 차라리 드래곤 꼬리에 맞고 죽었단 소식이 더 그럴듯하다며 피식 웃었는데, 피를 나눈 자매를 두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아무래도 벌을 받은 모양이다. 언니의 소문이 왜곡되어 도리어 자신을 공격하는 도구가 되다니! 그나저나 포르투바 작자를 두고 봐야겠다. 감히 미래의 황태자비를 두고 망발을 일삼다니. 훗날 뼈에 사무치게 후회하도록 해줄 거라며 복수를 다짐했다. ‘내 반드시 포르투바 네놈을 소용돌이 산의 괴물들 먹이로 내던져 주리라.’ 렌은 로테에게서 뿜어 나오는 살기를 느꼈다. “저기, 아가씨… 괜찮으세요?” “뭐가? 아, 참. 렌.” “예.” “품위를 지키도록 해. 그런 작자들의 농담에 귀를 기울이지는 마. 눈 하나 깜빡이지 말란 말이야. 괜히 신경 쓰다간 바보 취급받는단다.” “알겠습니다.” 자신도 궁정 생활에 익숙해지려면 멀었지만, 하녀인 렌도 궁정의 시녀들과 같은 눈치를 기르기엔 아직 한참 멀었다고 생각했다. *** 황태자는 연회 때 오를린의 로테에게 춤을 신청했고 그녀의 처소에 밤마다 들렀다. 이미 그것으로 황태자비는 뽑힌 거나 다름없음을 공공연히 알렸는데 물론 그게 다는 아니었다. 실은 그것보다 더욱 실속 있는 일들을 궁정인들 몰래 진행하고 있었다. 이미 황태자 관할 지역-야울(북쪽에 있는 사막 지역)-엔 오를린으로 가는 텔레포트 홀 공사가 개시되었고, 바너의 유명한 보석 장인은 로테아르카의 이름이 새겨진 황태자비용 티아라를 극비리에 제작 중이었다. 오를린 출신 사람들과 반 할데바인 사람들로 구성된 황태자비 시종조를 만들기 위해 사람을 구하는 데 한창이었고, 통합된 오를린-네히트에선 미래의 황태자비를 위한 사병을 모집 중에 있었다. (명분은 황태자비의 사병이나 결국엔 황태자 자신의 사병을 증병하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일들은 할데바인 측 몰래 진행하는 것이 편하나 설사 그 측이 알아챈다 해도 황태자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믿는 구석은 하나 없지만 그래서 더욱 자기 생각과 결정에 충실할 수 있었다.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 누구도 자신을 막을 수 없다는 고집. 그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할데바인에 넘어간 황족의 권위를 되찾고 훗날 동양까지 모두 정복하여 대륙의 절대적인 권력으로 군림하는 것이 야망이었다. 아니, 그것은 야망이라기보다 차라리 자신에게 열린 숙명의 길이리라. 문득, 먼 과거 오를린의 말괄량이 아가씨에게 들었던 말이 기억났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대륙을 정복하겠다는 꿈같은 것도 없어?’ 사람의 꿈은 아주 사소한 계기로 작아졌다, 커졌다, 아름다워졌다, 일그러졌다, 제각각 바뀌곤 한다. 그래서 어쩌면 부질없고 하찮은 것으로 보일 때도 있으나, 그렇게 생각해 버리면 세상사 모든 것이 하찮지 않은 게 어디 있을까. 어차피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한 번쯤은 과감하고도 격렬할 필요가 있다. 신이란 게 있다면 신의 앞에서 자신이란 인간은 절대 하찮지 않다고 온몸으로, 온 정신으로 대항해 볼 가치가 있었다. 비오르틴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음울해 보이는 그의 표정이 한 번씩 이렇게 밝아질 수 있다는 걸 그의 측근들조차도 잘 알지 못했다. 연회 기간에도 황태자로서의 정무와 야울의 영주로서의 업무, 신성국 로젠플라드의 수호자로서의 형식적인 일들 그리고 (점찍어둔) 황태자비 후보와의 시간 등으로 바쁜 그는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침소에 몸을 누일 수 있었다. 평소 수면 시간이 길어야 네 시간이었다. 그래서 대개 베개에 머리를 닿자마자 잠드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어째 그러기가 힘들 것 같았다. “……!” 궁 안 은밀한 적들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영역-정신-에 누군가의 메시지가 흘러들어왔다. 적들로부터의 철저한 보안을 위해 몇 년간 독학으로 심령술에 매진하여 얻은 능력 중 하나였다. 이러한 텔레파시 능력은 할데바인을 축출하기 위한 기본 중 기본으로 여러모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누군가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정신 영역의 메시지라 하더라도, 할데바인 측에서도 심령술 상급 능력자가 없으리란 보장이 없다. 또한, 그들이 황태자의 메시지를 간섭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래서 자신을 통해 들어오는 메시지는 언제나 암호가 가득했고 그마저도 축약적이었다. 비오르틴은 제게 들어온 메시지를 해석하였다. ‘크큭, 내 사지를 찢어발기지 못해 안달이 났군…… 그 미친 너구리가.’ 미친 너구리는 할데바인 대공을 뜻했다. 황태자가 할데바인의 딸을 철저하게 외면한 지금, 할데바인 대공은 그 치욕을 그저 참고만 있지는 않았다. 본래 제국의 황족과 귀족들은 각자가 가진 경제력에 따라 사병, 사병부대, 기갑부대, 마력기갑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황태자 또한 황태자 자신의 직속 영지인 야울의 수호임무를 수행하는 마력기갑부대 루빈을 거느리고 있었다. 할데바인 대공은 황태자의 권력 중 가장 큰 기반이라 할 수 있는 루빈을 빼앗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계획을 세운다 한들 명분 없이는 실행하지 못하리라. 권력자들의 거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명분이요, 둘째도 명분이요, 셋째도 명분이었다. 자칫하다간 ‘저 늙은 너구리가 제 딸을 황태자비로 만드는 것에 실패해서 복수하는 게 분명하다.’는 비판을 정면으로 받을지도 몰랐다. 그런고로 할데바인 대공이 내세운 명분이란 게 ‘짐승(오슬의 비타협적인 수인족 세력)’이 신성국 로젠플라드(친 할데바인 세력)를 끊임없이 괴롭히니 로젠플라드의 수호자인 황태자가 짐승을 몰아내야 할 의무를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해 황태자의 마력기갑부대 루빈을 로젠플라드 신성정부에 귀속시키는 안건을 황의회에 낼 것이다.’ 였다. ‘내게서 루빈을 빼앗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비오르틴은 얌전히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신성국 로젠플라드는 할데바인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종교이자 지역이다. 그들에게 자신의 루빈을 빼앗기는 치욕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나으리라. 할데바인 대공이 과거 로젠플라드의 수호자 성명을 받길 원치 않은 황태자에게 그 성명을 반강제로 얹어 준 이유도 바로 이러한 일을 미리 그렸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비오르틴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 잘난 너구리의 뒤통수를 쳐주는 수밖에 없다고. 할데바인에 맞서는 계획을 세우기 위해 재빨리 수단을 생각했다. 명분, 명분이라. 짐승(오슬의 비타협적인 수인족 세력)이 로젠플라드를 끊임없이 괴롭힌다고? 그럼 그 증거가 있어야 한다. 누구나 짐승(오슬의 비타협적인 수인족 세력)이 심하게 괴롭혀 로젠플라드가 안 됐다고 생각할만 한 확실한 사실이 있어야 한다. 종종 짐승(오슬의 비타협적인 수인족 세력)이 식량 확보를 위해 로젠플라드의 시골을 약탈하긴 한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소규모 약탈일 뿐이었다. 고작 그것으로 황태자의 루빈을 귀속하여 짐승에 대항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미친 할데바인은 그 약탈을 마치 대규모 침략인 듯 포장하고 있었다. 로젠플라드를 지키기 위해 루빈을 귀속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기 위해 무리를 하는 것이다. 비오르틴은 그 명분에 걸맞게 로젠플라드를 망쳐주고 싶었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내가 기초 작업을 잘 해주겠어, 늙은 너구리 씨.’ 로젠플라드가 짐승들에게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 상태는 되어줘야겠지. 별로 다치지도 않았는데 루빈을 귀속시키려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속 보이는 짓이 아닌가? 로젠플라드를 폐허로 만들어놔야 황의회에다 대고 ‘제 루빈을 귀속시키겠습니다!’라고 공언할 모양새가 될 것이다. 아니, 그때는 로젠플라드가 신성국이란 이름을 버리고 황태자의 땅 야울로 귀속되는 것이라 해야 옳다. 어쨌거나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은 짐승이 로젠플라드를 갈가리 찢어발기게 해야 하는 것. 자신은 연회 중에다 온갖 일로 바쁘고 게다가 야울의 사람들을 직접 움직이기엔 위험 부담이 크다. 그래서 자신의 패를 하나 꺼내 쓰기로 했다. 그 패는 바로 바너의 실세를 이용하는 것이다. 비오르틴은 주저하지 않고 바너의 실세에 텔레파시 능력을 쓰기로 했다. 바너의 실세라 불리는 자는 장인 길드 중 최고의 부를 자랑하는 보석 길드의 마스터로 바너의 영주보다 더 큰 힘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검소한 여행자 행세를 하며 신분을 숨긴다고 알려졌었다. 비오르틴은 텔레파시 도감을 막기 위해 황태자의 신분을 위장하여 대화를 시도했다. ‘형, 요즘 장사는 잘 돼요?’ 한참 후에 대답이 돌아왔다. ‘잘 되긴. 어느 사랑에 눈먼 새파란 녀석이 제 미래의 아내에게 줄 거라고 큼지막한 머리띠(티아라)에다가 그 여자 이름을 새겨달라는 작업을 부탁하지 뭐냐? 돈도 돈이지만 닭살이 돋아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원. 노총각은 서럽다고.’ ‘하하. 그렇군요. 그러게 누가 서른이 넘도록 미혼으로 있으랬나…… 그런데 형, 혹시 저번에 저한테 도움 좀 받으신 거 기억나요?’ ‘…… 그랬지.’ 바너의 실세는 황태자의 정치적 도움으로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언제나 말로만 고맙다, 보답하겠다, 충성하겠다 했지만, 실제로 직접 나서서 보답해준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황태자가 부탁한 티아라 작업을 그 보답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째 황태자는 티아라를 결혼 축의금 정도로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젠 형이 저를 도와주실 차례예요.’ ‘음, 음.’ 바너의 실세는 곤란해 하다가 겨우 대답을 해주었다. ‘뭘 도와주면 되는데?’ 비오르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배신과 모함이 주특기인 황도의 대귀족 출신들과 달리, 밑에서부터 올라온 평민 출신 인간들은 받은 게 있으면 반드시 보답을 해주려 했다. 바너의 실세도 보라. 곧 거절하지 못하고 제가 해야 할 일에 관해 묻지 않는가. 비오르틴은 오슬의 짐승들을 사서 로젠플라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라는 부탁 아니, 지시를 아주 귀엽게 표현했다. ‘우리 동물원 동물들이 교회 구경 가고 싶다네요. 보내주고 싶어요.’ 한참 후에야 의미를 알아챈 바너의 실세는 어렵사리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 장인의 도시 바너. 중심지 크래파. 바너의 실세이자 바너 길드의 마스터인 륀체르 사파이어는 ‘정염’이란 간판을 내건 싸구려 술집에서 접대부의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고 있었다. “어머, 자기 어딜 만져?” “생명의 젖줄을 만지지… 이리와 보래도.” “하여간 이 남자는 생긴 건 나보다 예쁘게 생겨선 하는 짓은 오십 대 능구렁이 변태 아저씨 같다니깐. 뭐, 그래도 그런 녀석들에게 가슴 만져지는 것보다는 백 배 나은 편인가?” “킥킥….” 륀체르 사파이어는 챙모자를 벗어 던지고 본격적으로 접대부의 가슴을 빨기 시작했다. 모자를 벗은 그의 얼굴은 접대부의 말대로 남자치고는 너무나 예쁘게 생겼다. 금방이라도 맑은소리를 내며 부서질 보석 같은 사파이어 빛 눈동자와 피를 바른 듯 붉은 입술이 아름다움을 넘어선 요기를 띠고 있었다. 비단 그런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입은 망토 아래 다리도 늘씬한 맵시를 자랑하고 있었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바너의 미인들의 공분을 살 정도로 아름다운 다리였다. 접대부는 이 뛰어난 미모를 가진 30대 초반의 남자가 이 영지의 실세, 이 도시의 가장 큰 부자인 륀체르 사파이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챙모자와 망토라는 차림 때문인지 그저 여행자-그것도 여자 가슴 만지기를 좋아하는-쯤으로만 알고 있었다. 아이가 젖을 빠는 듯 맹렬히 가슴을 탐해대는 행동에 접대부는 자지러지며 고양된 소리를 흘렸다. “하앙… 이쪽은 꼬집어 줘, 막, 막, 세게…….” 륀체르 사파이어는 해사하게 웃으며 그 미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상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너 처맞는 거 좋아하는 변태야?” “어머, 변태라니. 취향일 뿐이야… 깨물어줘. 아프게 해줘.” “난 가슴 빠는 것만 좋지, 그런 끔찍한 취미는 없는데 어쩌나?” 그런데 그때였다. 륀체르 사파이어의 정신에 누군가의 메시지가 흘러들어왔다. ‘형, 요즘 장사는 잘 돼요?’ ……. 륀체르는 흥이 그만 싹 달아났다. 지금 이러한 메시지를 보내는 이가 황태자라는 사실에 흥이 식고, 황태자가 사용하는 ‘형’이라는 호칭이 불편하여 흥이 식고, 황태자가 그 후에 한 부탁이란 게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는 성가신 일이라 흥이 식었다. …… 뭐? ‘우리 동물원 동물들이 교회 구경 가고 싶다네요. 보내주고 싶어요.’ 라고? 오슬의 거친 수인족을 이용해 신성국 로젠플라드를 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오빠, 어디가? 벌써 가는 거야? 나 팁은?” “시끄러워, 미친년아. 거울 좀 봐라. 양심이 있으면 팁을 누가 받아야하는지 알겠지?” 퉁명스럽게 말을 던진 륀체르 사파이어는 ‘정염’을 나서서 밤거리로 나갔다. 오늘, 어쩐지 운수가 좋은 일만 일어난다고 했다. ‘침묵의 장’이란 큰 여관에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갔었지. 그곳에서 오를린 영주의 아름다운 딸이 그 호위 기사와 다투는 모습을 우연히 구경할 수 있어 재미있었다. 기회가 닿는다면 그 귀여운 아가씨를 또 보고 싶었다. ‘하지만 곧 제 아버지에게 잡혀가 뒈지게 맞으려나.’ 그 구경 후에 얻어낸 정보를 팔아 음식값을 치르기도 했다. (돈을 안 쓸 수 있다는 게 그에겐 가장 중요한 횡재였다!) 그리고 본래 음식값으로 쓰려던 돈을 술 먹고 여자 가슴 만지는 데 쓸 수 있다고 생각하고 기분이 좋았는데……. 갑자기 황태자가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해온다. 물론 지금의 륀체르 사파이어가 있게 해준 것에 황태자가 일등공신이란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 고마움을 모른 척할 생각도 없다. 언젠간 그에게 보답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하지만 정치적인 문제에 휘말리는 것만은 질색이었다. 지금 자신이 거머쥔 자리를 죽을 때까지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중립은 필수였다. 자기가 괜히 정치적 중립 도시인 바너를 떠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애당초 황태자에게 도움 받은 것부터가 실수였던가? 어찌 됐든 이제 바너도 중립의 땅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군.’ 물론 황태자가 부탁한 일의 보안이 철저히 지켜진다면, 바너는 그 아름다운 이름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0020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바너의 수도 크래파 외곽엔 ‘영원의 봄’이라 불리는 가옥이 있다. 어째서 그러한 낭만적인 이름이 붙었을까? 눈이 내리기 시작한 계절, 하얗게 시린 숲 가운데 영원의 봄은 다채로운 색채의 식물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몇 년 동안 계절의 변화를 모르는 듯 듯 싱그러움을 유지해왔기에 마치 끝나지 않을 봄을 보는 듯하여 그러한 낭만적인 이름이 붙었다. 온갖 식물들로 이루어진 거대하고도 두꺼운 벽을 갑옷처럼 두른 이 유백색 저택은 마치 세상과 동떨어진 차원에 존재하듯 신비롭고도 섬세한 장식미로 가득했다. 이곳은 바너의 실세이자 보석 길드 마스터인 륀체르 사파이어의 집이다. 혹자들은 그가 몸값 비싼 마법사를 고용했기 때문에 한겨울에도 식물을 푸르게 유지할 수 있다고 하는데 순 낭설이었다. 영원의 봄을 둘러싼 식물은 대부분 모조품 장인들이 만들어낸 가짜 식물들에 불과하다. 여관에서의 음식값도 치르기 아까워서 남의 정보를 팔아 음식값을 내는 구두쇠 륀체르에게 거액의 몸값을 자랑하는 마법사를 고용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마법사들에게 매년 수억 자일의 급여를 지급하고 식물들의 생명력을 유지할 바에야 단 한 번에 1억 자일쯤을 들여 인조식물들로 장식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훨씬 나은 일이었다. 게다가 이곳이 어떤 도시인가. 바로 장인의 도시 바너가 아닌가? 륀체르가 1억 자일의 모조 식물을 사들인 것은 바너의 모조품 장인들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그는 모조 식물들의 숲을 가르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유백색의 건물은 흠잡을 곳 없을 정도로 깔끔했고 폐부를 적시는 인공 나무 향은 정말 숲에 들어온 듯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생생했다. 나무 향은 거리를 떠돌다 지친 그에게 작은 안식이 되었다. 그런데 뭔가가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누군가 내 구역에 허락도 없이 들어왔군. 천천히 혼내줘야겠지…….’ 현관문을 연 륀체르가 안으로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일흔 살의 집사는 흘러내린 안경을 바로 쓰며 정중히 주인을 맞아들였다. 그리고 요깃거리가 필요하시지 않으냐고 물었는데, 륀체르는 대답하는 대신 아주 좋지 않은 표정을 하면서 다른 말을 던졌다. “경비놈 잘라버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잘리는 데 이유가 중요한가?” 륀체르는 챙모자와 망토를 벗어 던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여관 ‘침묵의 장’과 술집 ‘정염’ 그리고 밤거리에서 때처럼 묻은 심신의 피곤함을 씻으려고 목욕을 했다. 마친 후에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토션 레이스가 가득한 리넨 셔츠와 늘씬한 맵시를 드러내는 갈색 문직 원단의 바지. 그것은 그가 거리를 나설 때 즐겨 입는 여행자 복장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빈곤한 여행자에서 대 귀족 가의 미남 도련님으로 변신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고급스러움과 편안함, 우아함이 묻어나 있었다. 몇 번이나 강조했듯 그는 남자치고는 미모가 어지간한 미녀 뺨치게 아름다웠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 했던가. 그가 지금처럼 아름다운 옷을 입고 저택을 돌아다니면 그의 얼굴을 처음 보는 신입 사용인들은 착각들을 많이 하곤 했다. ‘이 집 마님이 아주 아름다우시다’고. (실제 륀체르는 아직 미혼인데도 말이다.) 옷을 갈아입고 단도도 하나 챙겨 든 그가 방을 나갔다. 허락도 없이 자기 구역을 침범한 누군가를 찾아야 한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집사가 그에게 물었다. “운동하러 가십니까, 마스터?” “아니.” “그럼 어디 가시는지요?” “경비가 못한 일 하러.” 륀체르는 현관 밖으로 나갔다. 영원의 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무수히 많은 나뭇잎 벽 가운데 구불구불한 가지가 엉켜 만들어진 문이 하나 있다. 그 문은 륀체르가 아끼는 비밀 정원으로 가는 입구였다. 륀체르는 집에 올 때 그게 살짝 열린 것을 목격했다. 자기 외엔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고 또 사용인들에게도 그 점을 주의하라 일러두었다. 그런데 누가 감히 그곳에 드나들었단 말인가? 흔적을 남기지나 말던가. 그가 경비를 해고하려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혹 누군가는 경비를 두둔하며 말할 것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고작 딱 한 번 비밀 정원의 문이 열렸다는 이유로 해고하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냐고. 하지만 륀체르 사파이어는 그런 하소연이 절대로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집사를 제외한 많은 사용인이 채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해고당하는 일들이 그걸 증명했다. 경비는 경비 일에 충실해야 한다. 경비가 제 구역을 관리하지 못하면 무능력한 거 아닐까? 단 한 번의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단 한 번의 실수란 것을 예측하고 저지르지 않아야 하는 게 일을 맡은 자로서의 마음가짐이다. 그 정도의 마음가짐도 없이 영원의 봄에 머무르며 급여를 받는 것은 주인인 자신을 기만하는 일이리라. 지나치게 원칙을 고수해 어딘가 유치하면서도 병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 성격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륀체르는 12대 보석 길드장이었던 생부의 인지(認知)를 얻지 못한 사생아에다 어미마저 출산 후에 죽어버린 고아였다. 거리의 거지처럼 살던 그를 보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제 아버지를 닮아 미모가 출중하다.’ 하였는데, 그는 그 덕분에 아버지의 신분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를 찾아가 아들로서 인정받길 원했지만, 아버지는 비정했다. 너 같은 아들을 둔 적 없으며 이제와 증명할 방법도 없다. 정 내게 인정받고 싶다면 날 닮은 모습, 자수성가한 자신의 독기를 흉내라도 내보라 하였다. 이에 륀체르는 아버지의 성-사파이어-를 물려받기 위해 미친 듯 노력했다. 비정한 아버지에게서 단 한 번의 지원을 받지도 못하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온갖 일을 해냈다. 개중엔 기억하기 싫을 만큼 힘들고 더러우며 치욕을 감내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갖은 고생 끝에 거머쥔 자금으로 자신의 가치를 키워 기어이 스물세 살이 되었을 때 정식으로 사파이어라는 성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륀체르도 알고는 있었다. 고작 성을 물려받기 위해 해온 일들이 무모하고도 위험하며 맹목적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그렇게 비정한 사람이라면 차라리 아버지를 잊고 자신의 삶을 사는 게 더 나은 길일지도 모른단 것을. 그러나 그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핏줄에 대한 결핍을 채워야 했다. 또한 아버지가 가진 영광의 자리를 물려받고 싶단 야심도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시킨 일들을 멈출 수 없었다. 륀체르, 너는 이복 형(아버지의 부인이 낳은 아들)보다 잘난 녀석이니 반드시 길드 마스터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을 거야. 륀체르, 너처럼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버지를 잇는 게 당연해. 그것을 철석같이 믿었던 그는 훗날 배신을 당하게 되었다. 어느 날 우연히 본 아버지의 유서! 그 내용을 보고 알 수 있었다. 후계자로 지목된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사파이어 도련님이라 불리는 이복형이란 것을! 륀체르 사파이어는 몹시 억울했다. 아버지란 작자는 고작 허울뿐인 성 하나만 물려주는 생색을 내면서 사실은 부려 먹기 좋은 하수인을 고용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버지가 그럴 리는 없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보석 빼돌리기에다 난봉 질에 술주정뿐인 무능력자 이복형에게 후계의 자리를 줘 버리다니! 그때부터 증오가 삶의 동력이 되어버렸다. 사파이어 가와 보석 길드를 위해 배운 힘들을 그 증오에 써버렸다. 륀체르는 지독한 흉계를 꾸며 아버지의 가족을 몰살시켰다. 자연스럽게 13대 보석 길드 마스터가 되어 바너의 크래파를 장악하기 시작했고 훗날엔 황태자의 도움으로 바너의 실세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은 핏줄이 아닌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을! 또한, 자기 자신이 갈고닦은 능력뿐이란 것을! 그는 무능한 사람을 경멸했고, 그런 자들이 높은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부당하게 앉는 것도 경멸했다. 모자란 인간이 그저 배경만 믿고 거들먹거리는 것 또한 경멸해 마지않았다. 오늘처럼 경비를 단칼에 해고하려는 것도 모두 그런 인이 박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겁 없는 쥐새끼가 감히 내 집에 기어들어 왔나 볼까.’ 그는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찬 인조 숲을 헤치고 정원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예상대로 침입자가 있었다. 반가운 손님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불청객이라고 해야 할까? 보고 싶긴 하지만 반갑지는 않은 손님을 뭐라고 해야 하지? 륀체르는 침입자를 보았다. 금빛 달 렌키스 아래, 달빛보다 더 밝은 금발을 찰랑거리며 조화를 하나 뜯어 머리에 장식하는 숙녀. 실없는 사람처럼 헬렐레 웃어 살짝 미친 여자처럼 보이는 그녀의 이름은……. “당신은 오…….” 오를린의 마리니시네 양이 아닌가? 물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륀체르는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괜히 그녀의 본명을 부르며 아는 체한다면 언젠가는 성가신 일에 말려들 것만 같았다. 논리 없는 직감이라 해야 할까. 그는 그녀와 그녀의 호위기사가 사용한 가명을 떠올려 인사했다. “당신은 네히트의 와트프라우어 부인 아닌가요?” 마리는 숙녀들의 예법으로 우아하게 인사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맞아요. 저는 네히트의 와트프라우어 부인이랍니다!” ‘얼씨구.’ 륀체르는 ‘아아, 그러세요?’하고 빈정거리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본래 여성들의 인사법엔 소녀의 인사, 숙녀의 인사, 부인의 인사, 노쇠한 부인의 인사 등 총 네 개가 통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금발 아가씨는 당당하게 숙녀의 인사법에 따른 움직임을 하면서 자신을 ‘부인’이라 칭하고 있었다! 즉 입으로는 유부녀라 소개하고 몸으로는 숙녀라 소개하는 셈이었다. ‘뭔가 웃긴데? 그런데…….’ 륀체르는 그녀가 무슨 이유로 남의 집 정원에 무단침입했는지 궁금했다. 그의 앞으로 사뿐사뿐 걸어온 마리는 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에게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륀체르 사파이어. 바너의 실세라는 자가 자신의 정보를 정보상에게 팔았다는 것을. 마리는 기분이 나빴지만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대륙 정복의 기둥을 하나 세울 작정이었다. “반갑습니다. 와트프라우어 부인. 저는 륀체르 사파이어라고 합니다.” “예. 알아요. 저녁에 침묵의 장에서 저희 부부를 도청하신 분이죠?” “이런…… 무례하군요. 남의 집 정원에 몰래 들어왔다면 마땅히 사과부터 하고 사정을 설명하는 게 예의 아닌가요? 그리고 도청이란 표현보단 ‘엿듣다’라는 더 순한 표현이 있네요. 물론 이 경우에는 ‘엿듣다’는 표현보다는 ‘우연히 들렸다’는 표현이 옳겠지만요.” 륀체르는 다가오는 마리에게서 슬금슬금 뒷걸음치면서도 할 말을 조곤조곤 했다. 마리는 그에게 더욱더 바싹 다가갔다. 마치 제가 이 집의 원래 주인이었다는 듯이 당당한 태도였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는 륀체르에게 부담을 주었다. 줄곧 인공 나무 향만 맡다가 마리에게서 풍기는 달콤하고 상큼한 향기를 맡으니 기분이 쓸데없이 달콤해졌다. 정말이지 이런 겨울에는 어울리지 않는 향수라며 그 센스를 비웃었다. 마리가 해사한 표정을 하며 그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따졌다. “엿들었든 우연히 들었든, 어쨌거나 저희 부부의 이야기를 팔아서 공짜로 음식을 드신 분 아니냔 말이에요?” 륀체르는 굳이 이제 와 변명하고 싶진 않았다. “공짜라니요. 저는 엄연히 정보의 가치를 팔고 음식을 먹었기에 공짜란 표현은…….” 자꾸만 표현, 표현 운운하는 그를 보고 마리는 짜증이 나서 외쳤다. “닥치고! 내 사생활을 팔아댔으니 나한테 빚진 셈이잖아, 그렇지?” 드디어 나온 ‘와트프라우어 부인’의 본색에 륀체르도 가면을 벗었다. “숙녀가 입이 험하군. 빚졌다는 표현이 조금 우스운데…… 내게 뭐 원하는 거라도 있는가, 마리니시네 양? 지금쯤이면 오를린 사병들에게 끌려가 아버지한테 궁둥짝이나 뒈지게 맞아야 할 때일 텐데?” 마리는 발끈하여 그의 멱살을 잡았다. 바너의 실세란 자는 도무지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감히 나를 애 취급해?” “애 같은 짓을 하니까.” 륀체르는 그녀의 달콤하고 상큼한 향기가 더욱 가까워지자 그만 머리가 아팠다. “아, 물론 네 젖통은 예외로 해두지.” “하아, 뭐?” “네년은 몸만 큰 애새끼란 말이야.” “…… 그래서?” 마리는 진지하게 묻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륀체르는 힘없는 웃음을 실실 흘렸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냐니, 무슨 소리지? 미인을 괴롭히는 취미는 없다. 하지만 그 미인이 무능력에 백치 같은 인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여자, 오를린의 마리니시네. 말괄량이 색광녀의 악명을 하루 이틀 들은 게 아니었고 그녀가 얼마나 무능력한 인간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를 잘 만나 호의호식하는 여자! 백치계의 전설! 그저 얻은 미모 하나로 애꿎은 남자들을 울리는 난봉질의 여왕! 침묵의 장에서도 멍청한 짓으로 호위 기사의 속을 썩였지. 태어나서 스스로 한 노력이라곤 단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이 못난 여자! 이런 여자는 한 번쯤 괴롭혀보고 싶은 법이었다. 륀체르는 팔짱을 끼며 이죽거렸다. “그래서라니? 내게서 뭘 더 듣고 싶지? 혹시 욕을 더 해달란 말인가?” “미쳤어? 이봐! 내 젖통이 99.9점이라는 건 나도 아는데 말이야? 지금 내가 듣고자 하는 말은 그런 게 아니잖아? 나한테 빚진 걸 갚겠느냐, 어쩌겠느냐고 물었어. 네 녀석이 남의 정보를 팔고 이익을 취했으니 정보 제공자인 나에게 최소한의 성의 표시는 해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호오, 시끌벅적한 여관에서 소리 죽여 말하지 않은 주제에 그런 말을 하나? 네년이 흘린 정보는 거의 무상이라 여겨도 무방한데?” “하지만 나의 동의를 받지 않고 팔았잖아!” “백치 같은 년. 정보를 사고파는 일의 기본도 모르는군?” 마리는 오를린의 건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뻔뻔한 륀체르에게 질리고 말았다. 사과를 하고 자기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냐는 말은커녕 도리어 남 탓만 하다니! 마리는 태어나서 가장 험한 욕을 쓰고야 말았다. “말 다 했어, 이 갈보같이 생긴 년아?” 순간 륀체르의 고운 아미가 포악한 모양새로 씰룩였다. 그의 붉디붉은 아름다운 입술도 분노로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뭐라고? 갈보같이 생긴 년이라고? 오를린의 마리니시네는 돌이킬 수 없는 망발을 하고야 마는군. 언젠가 아버지란 녀석이 그랬던가? 어떤 지원도 바라지 말고 너 스스로 능력을 키워보라고. 그래서 대답해 주었다. 지원을 해주시지 않긴요? 이미 이 미모를 내려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미모를 철저하게 이용하여 능력을 키울 밑천을 마련했다. 밤의 거리에서, 밤에만 쓰는 또 다른 이름으로, 수없이 자신의 밤을 팔면서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보석 세공 같은 가업과 관련된 일과 잡학 그리고 텔레파시 같은 이능력까지 골고루 배울 수 있었다. 능력을 키우는 데 뒷받침되었던 돈, 그것을 단 시간에 모을 수 있게 한 데는 순전히 미모의 덕이 있었다. 그래서인가. 미모에 대한 타인들의 찬사는 언제나 의식 저 깊은 곳에서 그 양면성을 충돌해 자신을 괴롭히곤 했다. 아름다우시네요. 넌 갈보야. 어느 미녀보다 예뻐요. 넌 갈보 중에서도 상 갈보야. 길드 마스터란 자리보다 플라미네(미의 여신)가 더 어울릴 것 같아요. 어쭙잖은 가업 물려받기는 때려치우고 갈보로 말뚝 박아버려. 갈보. 밤의 거리에서 쓰이던 자신의 이름. 수많은 밤의 손님들이 자신을 농락하면서 부르던 그 이름. 그가 가장 지우고 싶어 하는 이름이었다! 륀체르는 일그러진 표정에 독사 같은 웃음을 드리웠다. 만약 이 광경을 집사가 보았다면 심장이 철렁했을지도 몰랐다. 핏줄을 모두 죽여 버리고 아버지의 자리를 꿰찬 륀체르와 같은 독한 사람을 자극하는 욕을 하다니! “다시 말해보실까, 마리니시네 양?” 마리는 머리를 긁적였다. “헙…… 미안. 갈보 같은 년은 너무 심했나?” “다시 말해보라고.” 마리는 륀체르의 표정을 보고 살짝 겁을 먹은 듯 비굴한 웃음을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절대 비굴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갈보 같은 년보다 갈보보다 못한 년이란 말이 더 적절할 것 같아. 에휴, 이런 년에게 내가 상식을 기대한 게 죄지.” 륀체르는 단도가 있는 바지 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리고 마리와 눈을 마주한 채 살인을 예고했다. “이봐… 가출소녀가 변사자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지?” “응, 뭐라고?” 륀체르가 단도를 빼어 들려는 그 찰나였다. 비밀 정원 내부에서 강한 소용돌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단도의 도신을 잡은 륀체르는 손등에 뭔가가 깊숙이 박히는 걸 느꼈다. 마치 거대한 쇠꼬챙이가 손등을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악!” 쇠꼬챙이, 은빛의 기다란 흉기는 가장 강하다는 금속 플래티르콘으로 만들어진 듯 단단했다. 그것은 륀체르의 손등을 꿰뚫고 그를 땅에다 고정해 버렸다. 비명을 지르던 그는 이 흉기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파악했다. 눈앞에, 그러니까 오를린의 백치 옆에 커다란 짐승이 하나 있었다. 드래곤도 아니고 유니콘도 아닌 짐승! 드래곤과 유니콘의 장점을 모두 갖춘 짐승! 손등을 뚫어 땅에 박힌 뿔은 그 짐승의 이마에서 뻗어 나온 것이었다! “대체… 대체 그건 뭐냐!” 마리는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어머, 갈보보다 못한 데다가 멍청하기까지 하네. 무슨 부자가 드래콘도 못 알아봐? 보석 길드장 때려치우지 그래?” ============================ 작품 후기 ============================ 이 정신나간 용량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0021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마리가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의 힘을 빌려 륀체르를 혼쭐내고 있을 때, 여관 침묵의 장에서 그녀의 호위 기사 하이너는 꿈속에서 헤맸다. 아득한 꿈의 안개가 온몸을 휘감다가 사라졌다. 그 이후 보이는 곳은 고향 오를린의 정겨운 풍경이었다. 푸릇한 들판에 알록달록 피어난 꽃들과 크림 같은 구름, 오 년에 한 번씩 열리는 풍년제를 상징하는 금색 깃발이 여기저기 휘날리는 것으로 보아 시기는 대략 동생 마르틴이 아직 살아있는 어느 봄날이었다. 물론, 마르틴이 병을 앓는 시기도 아니었다. 하이너가 가장 그리워하는 시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개 이런 꿈에선 꿈꾸는 이가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보고 싶다고 외치거나 꿈에서 깨어나기 싫다고 애원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꿈속 분위기는 그런 애틋함이나 아련함과는 거리가 조금 멀었다. 아니, 조금이 아니라 어쩌면 상당히 먼지도……. 제 형 하이너와 똑같이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소년 마르틴은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연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소년은 두 손에 월계수 왕관을 들고서 발뒤꿈치를 들었다. 한 뼘 이상 눈높이가 올라가자 비로소 키 큰 형과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헤헤, 형.” 천진난만하게 웃은 마르틴은 형의 머리 위에 월계수 왕관을 씌웠다. 형은 멋진 남자다. 몸도 좋고 성격도 조금 까칠하지만 좋은 편이고 검술도 오를린에서 따라올 자가 없다. 형이 왕이 된다면 아마 세상 어떤 왕들보다 멋진 왕이 될 것이다! 이런 월계수 왕관보다 플래티르콘(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금속) 왕관이 형에게 더 어울린다고!. 마르틴은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며 축하 인사를 전했다. “동정을 뗀 것 축하해, 형!” 석상처럼 멀뚱히 있던 하이너는 얼굴이 달군 쇠처럼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어젯밤에 마리 아가씨와 나눈 정사가 떠올랐다. 하이너는 월계수 왕관을 팽개치려고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렸다. “형은 이런 미성년자 간섭 불가한 일로 가족에게 상 받고 싶지 않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월계수 왕관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에 누군가가 강력한 아교를 발라놓은 듯 달라붙어서 도무지 머리에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이너는 이런 왕관을 씌운 동생이 야속했다. “마르틴! 장난이 심하군! 한 번만 더 이런 장난을 치면 너를 소용돌이 산에 처박아 버리겠다!” 동생에게 심하게 삐친 하이너는 월계수 왕관을 쓴 채로 씩씩거리며 침묵의 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곳에는 그의 아가씨 마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새하얀 튜닉 원피스 차림의 그녀는 옆으로 누워 잘록한 허리와 아름다운 곡선을 자랑하는 골반을 틀어 올린 자세로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순간 하이너의 검은 눈동자에 불이 붙는 듯했다. 아아, 저 사슴처럼 커다란 눈망울을 보라지. 곧게 뻗은 저 청순한 콧방울 하며. 그 아래 살짝 벌린 꽃분홍색 입술은 아침 이슬을 맞은 듯 윤기가 흐른다. 귀엽고 청초한 매력이 넘치는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야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어젯밤 달콤한 첫 잠자리를 가져서일까? 하이너는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애끓는 목소리를 뱉었다. “아가씨….” 그는 월계수 왕관을 떼어내야 한단 사실도 잊고 멍하니 마리에게 다가갔다. 미인의 아름다움에 혼이 빨리어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마리의 머리 위에도 월계수 왕관이 있음을! “아가씨, 숙녀가 되셔서 그런 경망스러운 복장을 하시고 그런 야릇한 자세를 하시면 안 됩니…….” “이리와.” 마리가 손을 내밀자 하이너는 시답잖은 잔소리를 멈추고 말았다. 유령에 홀린 사람처럼 마리의 손을 천천히 잡았다. 그러자 마리가 그의 검은 눈동자를 보며 까르르 웃었다.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어제 가지고 논 장난감이 대단했다고 되새기는 아이 같았다. “어젯밤 정말 끝내주지 않았어? 다시 생각해도 넌 보석 같은 녀석이야. 거기가 드래곤이 되어 내 몸을 잡아먹을 것 같았다고! 동정이었지만 너는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아주 뛰어난 것 같아!” “하하, 과찬입니다. 드래곤처럼 저를 잡아드신 건 아가씨 쪽입니….” “한 번 더 하고 싶은데 어때?” 마리가 탄탄한 가슴에다 검지를 대고 빙글빙글 돌리자 하이너는 코피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얼굴에서 흘러나온 건 코피가 아닌 타액이었다. ‘젠장!’ 침을 흘리다니! 욕실에서 아가씨가 침을 흘릴 때만 해도 미친년 취급을 했는데 지금은 그 미친년이 자기가 된 듯했다. 그런 속도 모르고 마리는 몸을 일으켜 하이너의 입가로 흘러내린 타액을 혀로 슥 핥았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에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그녀가 하이너의 귓가에다 대고 눈썹을 내리깔며 속삭였다. “실은 한 번도 모자라지. 너라면 평생을 하고 싶은데 말이야.” 평생 하고 싶다. 그건 혹시 아가씨가 하는 청혼이 아닐까? 하이너는 이성의 끈이 끊어진 듯 마리의 몸을 안았다. 그러자 느껴지는 등의 통증! “으아아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하이너는 꿈에서 깨어났다. “헉… 허억…… 뭐지? 뭐야…….” 드래곤화의 저주 아닌 저주는 이런 꿈에서도 자신의 거사를 방해했다. “젠장!” 욕지기를 뱉으며 하체의 사정을 확인했다. 어젯밤 그토록 격렬하게 동정 떼기를 했으나 불뚝 선 성기는 그런 거사 따윈 잊은 지 오래라는 듯 충전되어 팽팽한 부피감과 뜨거움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런 성욕이 몹시도 귀찮아 서둘러 헤츨링의 마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식어라……, 거기만.’ 성기를 지배하던 흥분은 어느 정도 줄어들었다. 성욕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등이 아프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잖은가. 그는 잠시 환기하며 하늘을 멍하니 보았다. 불현듯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잊은 것 같은데?’ 잊은 것이 무엇일까. 마리티오르(하이너의 검)는 잘 있나? 대륙 지도도 잘 있겠지? 싸구려 스크롤들은? 젠장, 그런 것들은 모두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의 등 보따리에 있기에 지금으로썬 확인할 길이 없었다. 어찌 됐든 당장 중요한 돈이 수중에 있으니 안심인데……. ‘대체 뭐가 사라진 거지? 하이너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잊어버린 것이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사라진 거야! 이 미친 여자!” *** 륀체르의 저택 ‘영원의 봄’.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가 륀체르의 손등에 구멍을 내고, 그에 륀체르가 비명을 질러도 비밀 정원 밖으로는 소리가 전혀 새어나가지 않았다. 마리아 그로스의 소음 차단 마법 덕분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륀체르는 또 경비 탓을 하기 시작했다. ‘자르길 잘했지! 내가 이 꼴을 당해도 누구 하나 오지 않는군!’ 그런데 지금 경비 탓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머, 갈보보다 못한 데다가 멍청하기까지 하네. 무슨 부자가 드래콘도 못 알아봐? 보석 길드장 때려치우지 그래?…… 라고 약 올리는 오를린의 금발 아가씨가 저기 있다. 백치 주제에 남보고 멍청하다고 하는 것에 짜증이 치미는데 갈보란 단어를 거듭 사용해 혈압을 올리는 마녀 같은 여자였다. 륀체르는 드래콘을 못 알아본다고 무시하는 마리에게 반박했다. “멍청한 건 너라고. 이런 도시에 살아본 적 없는 촌년이라 잘 모르나 본데, 여기선 저런 무식하게 생긴 짐승 말고 텔레포트 홀이라는 간단하고도 세련된 이동수단을 쓴단다.” 바너와 같은 대도시에서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가 걷거나 뛸 길이 전문적으로 만들어지진 않았다. 드래콘보다 작은 마차나 사람들을 위한 길은 있지만 말이다. 드래콘 역시 바너 같은 도시 지역에서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을 꺼렸다. 드래콘의 모습으로 하늘을 날면 도시의 탐욕스러운 마법사들이 그걸 목격한 순간 드래콘 사냥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태어나서 줄곧 바너에서만 살아왔고 드래콘이 나오는 동화책 따윈 읽은 적 없는 륀체르가 드래콘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륀체르는 그러한 사실도 모르는 주제에 헛소리하는 마리가 웃겼다. “그러니 어쭙잖은 탈 것 갖고 으스대지 말지?” 건방지게 굴고 있지만 실은 그 ‘어쭙잖은 탈 것’의 뿔에 손등을 꿰뚫려 고통스러운 지금 처지가 자존심이 상하긴 했다. 몸은 ‘이 무시무시한 뿔에서 얼른 해방해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지만,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곧 죽어도 ‘이 뿔 좀 치워주세요….’ 하는 부탁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얄미운 오를린 금발 아가씨는 드래콘에게 시시껄렁한 소리나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 텔레포트 홀! 뭔가 멋진 이름이다! 마리아. 우리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그거 같이 타고 여행 가자! 홍홍홍!” 푼수처럼 웃던 그녀는 륀체르와 눈이 마주치자 대뜸 요구했다. “슬슬 사과하지 그래? 남의 정보를 멋대로 판 거 말이야.” 륀체르는 아름다운 눈을 흉하게 일그러뜨리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사과하라니. 무엇을 사과하란 말인가. 어째서 자신이 사과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 그래. 백 번 물러나 사과해준다고 하자. 설사 사과받아도 그것으로 저 멍청한 아가씨는 만족할까? 세상에서 말만큼 알량한 것은 없을 텐데. 말로는 세상 어떤 거짓말도 진실로 만들 수 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해도 말로만 잘못했다고 눈물로써 호소하면 결국에는 용서가 되고 마는 게 세상 이치 아니던가? 손등이 아파 죽을 것 같은 이 상황에서도 그는 이죽거리고 있었다. “네년 귀에 이 뿔을 꽂아봐. 그럼 사과해주지…… 아악!”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의 뿔이 굵직한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큰 폭의 진동은 륀체르의 손등을 완전히 갈아버리려 하고 있었다. 피와 뼈 그리고 살점이 그의 아름다운 얼굴과 새하얀 셔츠에 마구 튀었다. “으…… 아아악……!” “사과해.” “하윽…… 이런 씨팔!” “길드장 품위가 있을 텐데 말버릇 하곤. 정말 사과할 마음 없는 거야?” 륀체르는 사과에 집착하는 마리에게서 소름이 돋았다. 그는 마리에 대한 경멸을 담아 외쳤다. “닥쳐! 내가 사과를 한다고 해서 네년이 풀릴 것 같냐? 정말 풀린다면 네년은 알량한 말에 놀아나는 얼간이란 걸 증명하는 거다! 나는 얼간이한테 굽실거릴 마음은 추호도 없어! 말뿐인 사과 타령은 때려치우고 네년이 원하는 진짜를 요구해라! 정보를 팔았단 약점을 잡고 등 쳐 먹을 게 무엇인지 그 속셈을 말하란 말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생각은 해보마! 차라리 그편이 더 아름답잖냐?”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걸로 아는데 생각 수준은 나보다 스무 살이나 어리잖아…….” 마리는 인간의 품위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륀체르에게 크게 실망했다. “마리아. 풀어주렴.”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는 륀체르의 손등에서 뿔을 뽑아내었다. 그렇다고 고통이 가신 건 아니었다. 손등에서 흘러내린 피가 정원 바닥과 바지를 사정없이 적시고 있었다. 시야가 어질어질하다면 엄살일까? 륀체르는 얼른 지혈해야 할 것 같아 비밀 정원을 빠져나오려 했다. 그 순간 등을 얕게 찌르는 느낌에 또 한 번 신음해야 했다. 이번에는 드래콘이 등을 찌르려 하는 것 같았다. “으윽…….” 마리는 다정한 목소리로 협박했다. “조금만 더 파고들면 네 심장이 박살이 날 수도 있어. 어때? 사과할 테야?” “무섭도록 집요한 년이네.” “집요한 교육열이 불타올라서 말이지. 인간이 덜된 녀석은 마땅히 인간의 길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자아. 사과할 때까지 셋을 세겠어. 하나, 둘….” “죽여!” 륀체르는 거침없이 외쳤다. 이 대답은 도박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오를린의 미친 아가씨가 진짜로 죽이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황태자가 오슬의 수인족을 이용해 로젠플라드를 쑥대밭으로 만들라고 지시한 지금, 륀체르는 심경이 몹시도 날카로워져 있었다. 정치적으로 입장이 난감해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 에라 모르겠다는 자포자기가 머릿속에 섞여 뒤죽박죽이었다. 차라리 드래콘에게 죽임을 당하면 그런 곤란함에서 탈출할 수 있겠지. “죽이라고! 미친년아!” “바너의 실세란 자는 똥고집이 장난이 아니구나?” 마리는 내심 놀랐다. 많은 부와 명성을 거머쥔 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게 생소하다. 싹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겁도 없는 녀석이다. 마음 같아서는 마리아 그로스의 뿔로 심장을 꿰뚫는 시늉 정도만 하고 바른 인간으로 갱생시키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대륙 정복의 일이 길고 복잡해질 것 같다. 마리는 마리아 그로스에게 뿔을 치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륀체르를 대할 때 한층 인내심을 끌어올리기로 했다. “좋아. 일단 사과는 바라지 않겠어.” “영원히 바라지 않는 게 좋을걸?” “어쨌거나 내가 원하는 진짜를 요구하라고 했으니, 요구해 보지.” 대륙 정복의 꿈을 가진 자신은 일단 바너의 실세 륀체르 사파이어를 제 편으로 만들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다. 그의 인간성이 누더기 수준인 것으로 보아 썩 기대되진 않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정복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싶진 않다. 무조건 장인의 도시 바너부터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바너 뿐만이 아니다. 고향 오를린은 이미 내 편일 것이고, 네히트도 오를린과 통합되었으니 훗날 내 편이 되어줄 것이다. 그 점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다. 장인의 도시 바너, 풍년의 평지 로샤타르트, 동양의 식민지 서한, 동양의 독립지 동한, 수인족의 땅 오슬, 신비의 지역 루앙, 사막 야울, 얼음 도시 시귀르, 신성 도시 로젠플라드, 황금의 땅 할데바인, 이 모두를 내 편으로 만들어 황도 로귀하르트를 흡수하고 제국을 흡수하는 것이 야망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갖가지 방법을 이용해 각 지역의 실세를 포섭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계획을 발설하면 곤란하다. 충직한 하이너에겐 두루뭉술한 표현 정도로 말할 수 있겠지만, 여기 인간성 엉망인 륀체르 사파이어에겐 위험했다. 만에 하나 그가 황도에 반역을 모의한 오를린 아가씨가 있다고 고발이라도 하면 어쩌겠는가? 륀체르란 인간을 알기 위해, 그리고 륀체르의 약점을 파악할 때까지는 적어도 시간을 벌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마리는 천진난만한 표정을 그리며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건 침묵의 장 홀 천장을 장식하는 예쁜 샹들리에야. 그게 너무 가지고 싶더라고.” “푸하하하!” 륀체르는 손등이 아픈 와중에도 그만 폭소를 하고 말았다. “그리고 여기 너무 추워서 그러는데 나와 우리 마리아가 마실 따뜻한 차와 달콤한 과자 좀 준비해 줄래?” 륀체르는 과연 백치 아가씨의 수준답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요구사항에 대답하는 것조차 귀찮은 일이리라. *** 흘러내린 안경을 바로 쓴 노집사는 마스터가 데려온 두 여자를 보았다. 하나는 금발에 청록색 눈동자의 숙녀로 매우 아름다웠는데 얼굴 가득 장난기가 가득했다. 저택 곳곳을 재미있게 구경하는 표정이 마치 장난감 구경에 나선 아이 같은 표정이라 그 아름다운 얼굴을 도리어 짓궂어 보이게 했다. 두 여자 중 다른 하나는 진줏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붉은 눈동자의 소녀인데 어린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조용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라 마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여기저기를 보고 감탄사를 연발해대는 금발 아가씨와 매우 비교되었다. 륀체르는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붕대로 감으며 지시했다. “다과를 준비해.” 집사는 주방 하녀에게 가서 다과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하녀가 다과를 만들 동안 집사는 생각에 빠져 혼잣말했다. “단 한 번도 그러신 적이 없었는데 말이지….” 하녀가 그 말이 궁금하여 물었다. “누가요? 뭐가요?” “아무것도.” 마스터는 영원의 봄에 단 한 번도 여자를 데려오지 않았다. 그랬기에 조금 전 마스터가 두 여자를 데려온 것은 그가 손을 다친 일보다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비록 마스터가 밤거리에서 여러 곳을 다니며 시답잖은 정보나 팔아서 공짜로 밥을 먹으려 하고 시시껄렁한 술집에 들어가 여자의 가슴을 만지고 노는 등 날건달처럼 굴긴 해도 그것은 오직 밤거리에서만 한했다. 영원의 봄에서 지낼 때의 마스터는 독서, 보석 디자인, 운동, 기초 염동력 연구와 같은 취미에만 철저히 매진했다. 사파이어라는 성을 물려받기 전 신산하게 살아 인간에게 질릴 대로 질려버려서인지 단 한 번도 사람 그것도 여자들과 진지하게 교제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집사는 오늘과 같은 마스터의 행동을 특별한 의미로 해석하고 있었다. ‘집에 데려올 정도면… 혹시 결혼상대로 생각하시는 건가?’ 혼기가 넘은지도 벌써 오래되었으니 그 해석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두 여자 중 마스터가 신부로 원하는 쪽은 누구일까? 진줏빛 머리카락 소녀는 아직 어려서 위험하고, 아무래도 금발 아가씨 쪽인 듯한데……. 그렇다면 손의 상처는 무엇을 뜻하지? 노집사의 오해는 강물에서 바닷물로 흘러가고 있었다. 소녀들이나 읽기 좋아하는 낭만 소설에서의 한 장면이 노집사의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여성을 차지하기 위해 구애의 혈투를 벌이는 마스터와 또 다른 남자의 대결…… 그 격정적 싸움의 승리자는 마스터! 그래서 마스터가 그 여성을 집에 데려온……! 노집사는 두 주먹을 아래 위로 탁! 하고 부딪쳤다. ‘오호! 마스터에게 그런 열정이!’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022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영원의 봄, 륀체르의 서재. 륀체르는 불청객 여자들을 응접실이 아닌 서재로 데려왔다. 서재는 응접실과는 달리 밀폐된 곳이라 대화가 새어나갈 염려가 없다. 만에 하나 여자들의 공격으로 손등이 피죽이 된 상황임을 암시하는 말이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아랫사람들에게 체면이 말이 아니게 상할 것이다. 그는 책상 의자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히고 두 발을 책상에 올린 건방진 자세를 하며 불청객들을 보았다. 소녀로 변신한 드래콘은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었고, 오를린의 미친 아가씨는 책들을 구경했다. 책장을 빼곡히 채운 책의 대부분은 철학, 인문학, 광물학, 보석 디자인, 염동력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륀체르의 독서 취향을 한눈에 파악한 마리는 비웃었다. 책을 이렇게 많이 읽으면 뭐하나? 인간성이 개판인데! 그러나 치료는 필요할 듯하다. 륀체르라는 작자가 너무 밉지만, 박살 난 손등에 붕대를 감고 옷 여기저기 피 칠갑한 꼴을 하고 있으니 그 모습이 퍽 불쌍했다…… 는 거짓말이고 미관상 너무 흉하니까. “마리아. 저 작자를 좀 치료해주겠어? 아파죽겠으면서 저런 건방진 자세를 하는 데 내가 지켜보기가 다 불쌍할 지경이야.”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는 륀체르의 다친 손을 재생해주었다. 그의 옷을 더럽힌 피도 정화마법으로 깔끔히 없애주었다. 서재에 맴도는 피 냄새가 싹 지워지고 코를 뻥 뚫는 시원한 향기가 감돌았다. 고통에서 해방된 륀체르는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빈정거렸다. “오호, 탈 것 주제에 마력을 좀 쓰는데?” ‘탈 것’으로 불린 마리아 그로스는 선홍빛 눈동자로 륀체르를 죽일 듯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녀가 드래콘 상태라면 또 륀체르의 손등을 뿔로 뚫었으리라. ‘짐승 주제에 감히 누굴 노려봐?’ 륀체르는 그 시선을 무시하고 기지개를 켰다. 때마침 집사가 노크했다. “마스터. 다과를 준비했습니다.” “들어와.” 조용히 문이 열리고 집사는 다과가 올라간 쟁반을 들고서 소파 테이블에 자리했다. 그는 마스터의 손을 보고 이상함을 느꼈다. “마스터, 손은 벌써 치료가……?” “아, 저기 저 빨간 눈의 귀여운 꼬마 아가씨가 고쳐주더군. 너무 고마워서 죽이고 싶을 지경이다.” 집사는 마리아 그로스를 보고 어린 것이 제법 재주가 있다고 감탄하며 차를 따랐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마스터. 그리고…… 흠흠.” 집사의 눈은 마리에게 향해 있었다. “참 아름다우신 숙녀분이시군요. 정말이지 영원의 봄에 어울리는 미모입니다.” 이유 모를 미소를 보이고 가는 집사의 뒷모습에 마리는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문이 닫히자 마리는 집사를 마구 욕해댔다. “이봐, 길드장 당신. 저런 변태 같은 웃음 짓는 늙은이를 집사로 두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차나 마시지그래?” 그제야 마리는 청록빛 색채가 고운 차의 향기를 맡았다. 산뜻하고 달콤한 눈꽃향이 났다. 하늘에서 눈꽃 씨앗이 내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눈꽃차가 있다니. 이것은 오를린의 꽃차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향기와 맛 그리고 반짝이는 질감을 가졌다. “오오, 장인의 도시 바너답네. 이것도 장인들이 만든 차인가? 고급이야.” 륀체르는 별 대꾸하지 않고 어느 책을 들었다. 바너의 모든 물건의 표준 가격이 제시된 책이었다. 계산이 시작되었다. “어이, 너. 네년이 요구하는 것과 내가 얻어간 걸 비교해 보자고. 침묵의 장과 같은 대 여관에서 사용하는 샹들리에 값은 기본 300자일이군. 그리고 그 눈꽃차는 티백 하나에 1자일이나 한다고. 두 잔이니 2자일. 다과는 무료로 해주겠어. 그럼 네년이 네게 요구한 것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302자일이 되지? 그런데 이걸 어째. 나는 네년의 정보를 팔고서 지급한 음식값이 고작 1자일도 되지 않아. 거래치곤 별로인데. 내키지 않아.” 달리 말하자면, 샹들리에 사주기가 너무 싫다는 뜻이었다. 마리는 그런 그를 걱정하듯 안쓰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에휴, 자업자득이야. 네가 뭐래도 나는 침묵의 장에 있는 그 아름다운 샹들리에를 받았으면 하는데…… 그러게 누가 1자일 아끼자고 남의 정보를 멋대로 팔래?” “원래 떠도는 정보는 멋대로 팔리는 게 이 바닥 법칙이다! 내가 몇 번을 말해야 하지?” “그럼 나한테 들키지 말고 팔든가. 길드장이란 사람이 왜 이리 대충대충 해?” 륀체르는 몹시 피로했다. 가택 무단 침입을 한 네년은 어째서 사과하지 않느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더 속 시원한 말이 생각났다. 이를테면 여자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깔아뭉개는 말들? “침묵의 장에서 봤는데 말이야….” 륀체르가 책을 덮으며 말을 이었다. “오를린의 구제불능 퇴물 아가씨가 불쌍한 호위 기사만 고생을 시키더군. 아니, 애당초 가출은 왜 했지? 나 같은 선량한 부자들 등쳐 먹으려고 한 건가? 그럴 바엔 괜찮은 황도 귀족 하나 골라잡아 결혼이나 하는 게 시간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훨씬 경제적일 텐데 말이지.” 마리는 과자 하나를 우물거리고 또 하나를 더 집어서 마리아에게 주었다. 마리아는 주인이 내민 과자를 아무 말 없이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시붉은 눈동자에 만족감이 스며들고 두 뺨도 발그레하게 변했다. 그런 마리아의 표정 변화를 보고 마리가 물었다. “씹다 보니 달콤하지?”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마리아를 보며 마리는 흐뭇하게 웃으며 뒤늦게야 륀체르의 말에 대꾸했다. “황도의 귀족들과 결혼해봤자 빤하지 않겠어? 여자의 삶이라는 게 말이야.” “……?” “돈깨나 있는 귀족놈과 결혼한다면 허구한 날 연회다 사치다 외도다 바쁠 테고, 가문의 적이 많으면 매일 모략이나 꾸미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겠지. 권세는 없지만 그래도 나는 잘난 놈이요 뻐기는 부류의 귀족놈과 결혼한다면 언젠간 황족들의 눈에 어긋나게 마련. 종장에는 남편따라 유배를 가는 불상사도 일어날 수 있어. 대개 남편의 지위에 따라 휘둘리는 삶이잖아? 자신의 의지에 충실할 수 없고 큰 그림을 그릴 수도 없지. 물론 내 관점이 부정적이라는 건 인정해.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생각해봐. 그런 삶이 보통의 삶이라고. 여태 귀족들과 결혼한 여자 중 그렇게 살지 않은 여자들이 있었던가?” 륀체르는 오를린의 아가씨가 철이 없다고 생각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했던가. 그 자신이 나약하니 여자들의 나약한 점만 눈에 들어온 것 아닌가? 의지라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의지는 무엇이든 가능하게 한다. 거리의 창녀가 되든 귀족 부인이 되든 의지만 있으면 남자들의 삶에 휘말리지 않아도 되지 않은가? 그것은 밑바닥 인생을 살던 자신이 바너의 실세가 된 것으로도 충분히 증명 가능했다. “이봐, 부정적인 아가씨. 로젠플라드에서 큰 고아원을 운영하는 살아있는 성자 데트겐 부인의 이야기를 모르나 보지? 가난한 귀족 부인의 삶으로 출발해 수많은 고아를 보살피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았잖아? 그녀는 소신으로 살면서 절대 남들에게 휩쓸리지 않았다. 귀족놈들과 결혼한다고 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수동적인 삶만 사는 건 아니란 말이지.” “풉.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데트겐 부인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 본인의 의지도 있겠지만, 그 뒤에 숨겨진 배경도 무시할 순 없어. 그녀가 로젠플라드 신도인 건 알지?” 륀체르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물론. 그러니까 그녀가 로젠플라드에 사는 거 아니겠어, 이 아가씨야.” “그래. 허울좋게 고결한 아름다움과 생명의 고귀함을 가치로 내세우는 종교가 판치는 지역! 예로부터 로젠플라드라는 종교에 어마어마한 검은 자금을 숨겨놓은 할데바인 사람들은 저들의 종교가 제국교가 될 명분을 원했어. 그 명분을 세우려면 데트겐 부인 같은 마음씨 좋은 자들을 내세워야 하지. 그런 성자 같은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제국민들의 환심을 사기 좋잖아? 처음에는 무너져가는 낡은 집에서 고아 한 명만 보살피던 그녀가 어째서 나중엔 커다란 고아원을 가질 수 있었을까? 모두 할데바인의 각본에 놀아난 거야. 결과적으로 그녀는 소신으로 알려진 사람이라기보다 할데바인의 계략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부풀려진 성자라 할 수 있지.” 륀체르는 데트겐 부인을 새로이 평가하는 마리를 보고 조금 놀랐으나 절대 티를 내진 않았다. “과정이 어찌 됐고 계략을 누가 꾸몄든 그녀가 자신의 의지에 충실한 삶을 살았단 사실엔 변함이 없어. 그녀의 자애로움만은 할데바인도 건드릴 수 없는 진심이자 진실이었다. 그 자체로도 그녀는 훌륭한 귀족 부인, 아니 인간의 표본이 되었어.” 그것은 데트겐 부인이 아니라 륀체르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사생아 출신으로 일가족 몰살이란 죄를 지었지만, 결국엔 지금 이렇게 바너의 지배자로 있지 않은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던 자신의 의지, 야망만은 진실했다. 마리는 반박했다. “웃기는 소리! 길드장 당신은 과정이 어찌 됐든 결과만 좋으면 다 괜찮다는 거야? 권력자들에게 이용당하는 사람은 성자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권력자들의 필요에 따라 마녀가 되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어!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고! 수동적이란 건 그런 거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삶이 휘둘려 버리지. 이건 비단 귀족과 결혼을 하고 말고 하는 소소한 문제가 아닌 인간 모두에게 해당하는 문제란 말이야!” 차하! 륀트겐은 혀를 찼다. 저 촌뜨기 아가씨가 무슨 근거로 데트겐 부인을 과소평가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말하는 분위기를 보자니 뭔가 맺힌 게 있는 것 같다. 저 아가씨의 정체는 무엇일까. 반 로젠플라드 파라고 해석해야 하나? 륀체르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리는 이제 잼이 묻은 빵을 마리아에게 주면서 혼잣말했다. “아무튼, 나는 때가 되었다는 이유로 마지못해 떠밀리듯 하는 그런 시시껄렁한 결혼은 싫어. 이왕 한 번 사는 인생이라면 빤한 길은 피하고 싶잖아.” “하하, 그러신가? 빤한 게 싫으셔서 오를린에서 그렇게 화려한 별명이 달린 미친 숙녀로 살아오신 건가, 마리니시네 양?” “응.” 너무나 진지한 마리의 태도에 륀체르는 빈정거리고자 하는 의욕이 싹 사라지는 걸 느꼈다. 발끈하는 반응이 돌아와야 빈정거리는 것도 재미있는 법이었다. 얼른 샹들리에 값 300자일이나 던져주고 단잠이나 자고 싶었다. 그런데 어째 오를린의 아가씨 쪽은 대화 의욕이 더 솟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길드장 당신이야말로 어째서 그 나이 먹도록 결혼도 못 하고 찌질하게 사는 거야? 생긴 건 갈보…… 아니, 주, 준수하게 생겨선.” 일어나려던 륀체르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잠자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오를린 아가씨의 도발엔 자꾸 말려드는 느낌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아가씨에겐 조금 솔직해져도 별 잃을 게 없을 것 같은 느슨한 기분? “나도 네년과 같은 이유야.” “같은 이유?” “결혼이란 것은 빤하지. 괜찮은 여자를 만나고 아이를 낳고 적당히 구색을 갖춰 살면서 서서히 늙어간다…… 뭔가 무의미해 보이지 않아?” “네가 사랑하는 여자와 한다면 무의미하지 않잖아?” “푸하하…… 역시 백치 아가씨답군. 사랑? 그따위 감정 또한 훗날 무의미해지고 만다고. 한 쌍의 남녀가 지금은 좋아서 서로 붙어먹고 멋대로 아이를 낳고 해도 나중에는 그게 지우고 싶은 기억이 되는 경우도 생긴단 말이다. 이건 지독한 불행 같지? 하지만 실제 차고 넘치는 일들이란다. 뭐, 좋아. 평범한 상상을 해보자고. 네 말대로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해 행복한 결혼을 시작했다고 치자고. 달콤한 신혼을 누리겠지. 나중엔 자식도 낳을 거고. 그러다 반드시 권태가 올 테고. 그래도 자식 키우고 길드 확장해가며 사는 맛이 있으니 그럭저럭 살아내긴 할 거야. 종종 바람도 피우면서 말이야. 늙게 되면 이 자리를 이어받을 녀석도 뽑아야겠지. 그런데 내 자식이란 녀석들이 하나같이 후계를 물려주기 싫을 정도로 멍청하면?” 말하다가 자신의 과거에 이입한 륀체르는 문득 이복형의 얼굴을 떠올렸다. 보석 빼돌리기로 용돈을 벌던 얼간이 같은 녀석. 무식하고 멍청해 도무지 길드 마스터 자리를 물려받을 자격이 없었던 이복형! 그리고 그런 놈에게 후계를 주려 한 아버지란 작자! 마리가 조금 격앙된 모습을 보이는 륀체르에게 대답했다. “상상해도 왜 그렇게 하지? 꼭 자식에게 후계를 물려주란 법 있나? 핏줄이라고 후계를 넘기는 건 좀 그래. 능력 있는 사람에게 줘야지.” 륀체르는 서랍에서 싸구려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인 후 회상하듯 말했다. “그래. 그런 거야. 후계의 자리를 자식에게 주는 게 아니라 능력 있는 녀석에게 줄 거라면 굳이 자식을 만들 필요도 없다고. 그러니 결혼할 이유가 없어. 더는 사랑하지 않는 배우자 때문에 성적으로 억압될 이유도 없지. 그냥 자유로운 지금이 좋잖아? 마음만 먹으면 그 어떤 여자의 가슴이든 빨면서 말이야….” 담배 연기에 멍해진 륀체르는 천천히 마리에게로 눈동자를 굴렸다. 정확히는 마리의 가슴께를 보고 있었다. 서재에 들어와서 두꺼운 외투를 벗은 지 오래인 마리는 가슴의 풍만한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웃긴 자식. 99.9점짜리는 알아서.’ 마리는 륀체르의 나쁜 시선을 느끼며 히죽 웃었다. 저런 시선을 던지는 남자들을 포섭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다. “한마디로 당신은 이 여자 저 여자 자유롭게 건드리고 싶어서 결혼하지 않는다는 거구나?” “뭐 그렇게 해석해도 좋아. 어때? 하는 짓은 금수저 물고서 제멋대로 날뛰는 아가씨에다 발정 난 암캐인 주제에 독립적인 여성의 삶을 살고 싶단 핑계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오를린의 금발 계집애보다 천 배는 솔직하고 인간적인 대답 아닌가?” “흥! 이봐! 나는 황도의 귀족놈들과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 결혼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한 적은 없어! 나는 반드시 내가 선택한 아름다운 인간과 결혼할 거라고!” “오호, 이거 실례.” 둘은 대화와 다툼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갔다. 그때 마리아 그로스가 하품했다. 드래콘 소녀는 마리의 무릎에 누워 잠을 자기 시작했다. 남의 손등을 거침없이 뿔로 뚫을 땐 언제고 저렇게 얌전히 자는 걸 보니 마치 아기 같았다. 륀체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리아 그로스를 번쩍 들어 안았다. “꼬마 아가씨에겐 폭신한 침대가 어울리지. 내가 침실을 제공해주겠어.” 마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오호, 웬 친절?” “손을 고쳐준 것의 답례다.” 륀체르가 서재 옆의 손님용 침실에 마리아 그로스를 눕혀놓고 다시 서재로 왔다. 마리는 처음으로 예쁜 짓을 하는 륀체르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며 눈꽃차의 마지막 한 모금을 다 마셨다. 륀체르는 서재 한편에 있는 책장 문을 열었다. 겉은 책장인 듯했으나,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술이 가득했다. 모두 독주였는데 생산자는 바로 오를린에서 약사라 불리면서 남몰래 밀주업에 손을 대는 남자 한스 레 하인첼이었다. 마리는 한스가 만든 술에만 붙는 검은색 코르크를 보며 픽 웃었다. “결국, 이곳은 술을 마시는 용도인가? 그럼 그렇지. 길드장 당신이 이 많은 책을 읽으려고 서재를 만든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 륀체르는 술병 중 가장 독한 술이 담긴 병을 꺼내 가볍게 흔들며 물었다. “마실래?” 그의 시선은 다시 마리의 풍만한 가슴으로 옮겨갔다. ============================ 작품 후기 ============================ 세라비이 1호-(세라비이 2호가 쓴 오늘편을 읽으며)그래서 륀체르가 마리와 ㅇㅇ함? 세라비이 2호-짜놓은 내용에는 안 ㅇㅇ하는데 독자들이 역하렘을 원함! 1호-난 시름! 2호-크헤헤... 00023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 무수한 여자의 가슴을 보았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가슴을 본 적은 없었다. 가녀린 몸에 가슴만 저리 풍만하니 정말 신이 빚은 것 같았다. 성격은 고약한데 얼굴과 몸매는 플라미네(미의 여신) 수준이니 부조화의 극치라고 할까. …… 그래서 더욱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제가 신이라도 되는 양 사람에게 사과하라니 어쩌라니 건방지게 굴어도 저 가슴에 자극을 받으면 어차피 다른 암컷들과 똑같은 시시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예상이었다. 독주 한 잔을 먹이면 그 예상은 현실이 될지도. 륀체르의 검고 탁한 눈빛을 마리는 단번에 알아챘으나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마리아가 잠든 동안은 함께 마셔주지.” *** 사각의 마을이 서로 거미줄처럼 구조적이고 빽빽하게 연결된 바너. 하이너는 거리 구석구석을 미친 듯 돌아다니며 마리를 찾았다. 만약 지금이 한낮이라면 그녀가 좋아할만 한 장소, 이를테면 마법용품 상점이나 카드점을 보는 가게, 드레스 가게, 장신구 가게, 구둣가게, 달콤한 간식을 파는 곳을 전부 뒤졌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시간인지라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술집, 여성 전용 유흥업소가 전부였다. ‘젠장, 이 몹쓸 여자! 나한테서도 도망간 거야, 뭐야!’ 아무리 찾아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니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 바너까지 오는 동안은 그저 심심풀이 말상대가 필요했겠지. 이곳 바너에는 시골 오를린이나 네히트와 달리 텔레포트 홀이란 게 있으니 여행자 입장에선 이동이 수월해지는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이동이 수월해지면 호위기사는 그다지 필요가 없단 뜻도 되겠다. 그래, 그래. 그 빌어먹을 아가씨는 사사건건 잔소리를 해대고 난데없이 드래곤으로 변해버리는 성가신 호위기사 따위는 필요 없었던 것이다! 커다란 덩치에다 마법을 사용해서 사람의 이목을 끌기만 하는 드래콘 역시 마찬가지! 그래서 마리아 그로스는 진즉 비싼 값에 팔려간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마리아 그로스가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나? ‘가려면 곱게 떠날 것이지! 남의 동정을 빼앗기나 하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하이너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비록 아가씨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그게 다 아가씨를 향한 애정에서 우러나왔다. 아가씨를 좋아했단 말이었다. 그러나 아가씨는 그게 아닌 듯하다. 어째 호위 기사를 그저 하룻밤 꿀꺽 먹기 좋은 노리개로만 쓰고 떠나버리나……. 하늘에서 가랑눈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이 뜨거운 분노와 배신감을 식히기엔 부족했다. ‘좋다. 나도 내 갈 길을 가겠어!’ 다시 침묵의 장으로 돌아가 짐을 꾸리기로 했다. 빨리 돌아가려면 다리 아래 징검다리를 이용하는 게 좋았다. 수위가 높아 이따금 거센 물살이 징검다리를 삼킬 때도 있어서 거길 건너다가 자칫 동상에 걸릴지도 모른다. 뭐 어떠한가. 지금 끓어오르는 분노를 잊기 위해서라면 그런 육체의 괴로움은 오히려 반갑다. 그런데 다리 아래로 내려가다가 하이너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 마주하게 되었다. “으으으… 추워…….” 헐벗은 가시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속옷 한 장 차림의 소년. 겨우 열한 살, 열두 살쯤 되었을까. 지저분한 모습이 거지 같았는데 아무리 거지라 해도 저렇게 홀딱 벗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하이너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 꼴은 뭐지?” 하이너의 목소리를 들은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사람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다. 소년은 하이너가 혹시 자신을 쫓아온 나쁜 사람들인가 싶어 더욱 몸을 떨었다. “으으으… 안 돼…… 안 되는데.” “이봐.” 하이너가 외투를 벗어 소년에게 씌워주려고 다가갔다. 소년은 도망을 가려고 가시나무 사이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마음만 급했는지 팔과 등 여기저기에 가시가 긁혔고, 결국엔 너무 아파서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비틀거리고 말았다. “아으앗!” “어이가 없군.” 하이너는 외투를 벗어 소년에게 씌워주고 안심하게 했다. “무엇 때문에 도망가려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나쁜 사람은 아닐 거다.” 그제야 소년은 조금 마음을 놓았다. 어둠에 적응한 소년은 하이너의 얼굴을 제법 자세히 알아볼 수 있었다. 반듯한 이마, 조각 같은 코, 날렵한 턱선, 하나로 묶은 검은 머리카락…… 어쩐지 낯이 익다. “다, 당신은…!” 소년은 언젠가 이 남자의 얼굴을 본 적 있었다. 물론 하이너는 소년을 본 적이 없을지 몰라도. 왜냐하면, 당시 하이너는 술에 취해 기절해 있었을 때니까. “음?” 하이너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는 소년을 보고 당최 알 수 없었다. 소년이 자기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 “저, 그러니까, 아직 모르시나 보군요. 그게… 기사님의 몸에 링클을 잘못 이식한 녀석이 바로 저입니다…….” 그랬다. 이 갸륵할 지경으로 정직한 소년의 이름은 루돌프 하인첼. 고아로 살다가 한스에게 길러진 소년. 한스에게 약학을 배우며 비합법적인 마법, 밀주업 보조도 하던 소년이었다. 소년은 마스터에게서 부탁을 받았다. 영주님 딸의 호위기사에게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깔을 바꾸는 링클을 이식하라고. 하지만 실수로 다른 링클-그것도 값비싼 드래콘 링클-을 이식해버린 것이다. 이식할 당시 하이너는 술에 취해 의식이 없는 상태라 루돌프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루돌프는 하이너의 얼굴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루돌프는 자기의 실수 때문에 드래곤화라는 불상사를 겪는 사람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워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기사님께 악감정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마스터의 지시를 받아 한 일일 뿐이었고, 그게 드래곤 링클이란 것도 절대로 몰랐습니다. 링클들이 대개 비슷비슷하게 생겼거든요. 어찌 되었든…… 무슨 말로도 용서를 받을 순 없다는 걸 알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기사님.” 후환이 두렵지도 않은지 거침없이 자기 잘못을 고백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감추려 했을 것이나, 고작 열두 살의 순수한 소년 루돌프는 그런 뻔뻔한 인간이 되지 못했다. 다른 말로 하면 융통성이 꽝이랄까. 드래곤 링클을 다시 마스터께 돌려줘야겠단 일념 하나로 돈을 모으기 위해 가출을 한 것만으로도 루돌프란 소년은 양심적인 인간이라 할 수 있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하이너는 분노보다는 측은함을 느꼈다. “그렇게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 아직 어린 네가 무슨 죄가 있겠나.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그런 불법적인 일에 손대는 네 마스터가 죽일 놈에다…… 그런 일을 사주한 어떤 미친년이 죄인이겠지.” 하이너는 자취를 감추어버린 마리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꽉 깨물었다. 루돌프는 하이너의 용서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는데도 쉽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가랑눈에 섞인 찬바람이 한차례 세게 불었다. 루돌프는 더더욱 몸을 떨며 어깨를 움츠렸다. 지켜보기가 다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하이너는 문득 궁금하여 물었다. “그건 그렇고, 너는 어째서 이런 겨울에 다 벗고 이런 먼 곳에 와있는 거지? 설마 링클 이식을 실수했다고 네 주인이 쫓아낸 건가?” “아니에요! 마스터께선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에요! 저는 단지, 마스터의 귀한 물건을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사용해버린 게 정말 미안해서, 돈을 모아서 다시 드래곤 링클을 사드리려고, 그래서 오를린을 떠나왔는데…….” “그런데?” “검은 마차를 탄 사람들이 도시에 빨리 데려가 주겠다고 해놓고선 제 짐을 모두 빼앗고 옷을 벗기고…….” 루돌프는 인신매매를 당할 뻔했다. 검은 마차 사람들은 루돌프와 같은 소년 혹은 소녀들을 묘기 단에 팔아버리는 불한당이었다. 어린이들이 반항이 심하면 팔이나 다리 하나를 잘라버려 구걸을 하게 하고, 외모가 괜찮으면 돈깨나 있는 변태들에게 팔아버리고, 사지가 멀쩡하며 말을 잘 들으면 묘기를 가르쳐 기예단에 서게 하는 그런 악질이었다. 루돌프의 경우엔 귀족들에게 팔려가 성 노예로 쓰일 계획이었는데, 그것을 알아차린 루돌프는 도망을 결심했다. 그래서 한 시간 전 감시인이 소홀한 틈을 타서 그곳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고, 이렇게 속옷 한 장 차림으로 다리 밑에서 숨어있었던 것이다. 사정을 들은 하이너는 루돌프 대신 분노하고 루돌프 대신 욕지기를 뱉었다. “소용돌이 산에 단체 매장해야 할 놈들!” 루돌프를 보면 동생 마르틴이 떠올라 더더욱 감정적이 되었다. 때마침 마리가 사라져서 화가 나 있던 중에 그런 인간쓰레기 같은 놈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분노들이 동반 상승하여 살인 충동에 가까운 감정을 만들어냈다. 하이너의 눈이 살기 어리게 떨렸다. “…… 그래서 그 빌어먹을 녀석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내게 장소를 알려줄 수 있나?” “예? 저기 삼 번가 팻말 뒤에 가장 낡은 사 층짜리 건물인데, 뭘 어쩌시려고요?” 하이너는 주저 없이 뒤돌아 삼 번가로 향했다. 순간, 루돌프는 아차! 싶었다. 인신매매단의 본거지로 향하는 기사님의 뒷모습에서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설마 나 대신 녀석들에게 복수하시려고? 설마 혼자서 그 녀석들을 다 해치우려 하시는 거야? 그건 위험한데!’ 루돌프는 장소를 말해준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기사님이 허리춤에서 단도를 빼 드는 것을 본 순간 이미 때는 늦었다고 생각했다. 혹독한 겨울바람에 기사님의 질끈 묶은 검은 머리카락이 가랑눈과 함께 휘날리고 있었다. 달빛의 역광 때문인지 기사님의 뒷모습이 멋져 보였다. 루돌프는 이를 꽉 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함께해야 해! 내게도 책임이 있어!’ 루돌프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각목과 짱돌을 들고서 하이너의 뒤를 따라갔다. 인신매매단 녀석들과 다투다가 죽어버리면 어쩌나 두려움이 들었지만, 기사님을 모른 척하고 나만 살자고 도망갈 수는 없었다. 낡은 사 층짜리 건물 입구로 들어가니 계단에 한 명의 경비가 보였다. 그는 단도를 든 청년과 각목과 짱돌을 들고 들어오는 소년을 보고 휘파람을 불어 침입자의 소식을 위층 사람에게 알리려 했다. “휘이….” 그러나 휘파람은 중간에서 뚝 끊기고 말았다. 하이너가 번개와 같은 발차기를 날려 경비를 계단 아래로 떨어뜨렸기 때문이었다. 경비는 비명 한 번 질러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했다. 하이너는 처음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기절시킨 것에 자기도 놀라고 있었다. 죽은 건 아니겠지? 하이너는 설마 그 지경은 아닐 거라며 뒤돌아서 이 층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루돌프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뭐지?” “루돌프요! 루돌프 하인첼!” “루돌프. 제국법에 인신매매가 불법인 거 알고 있나?” “예!”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일은 경관 나리들을 대신해서 하는 정의의 심판이니 좀 심한 꼴을 봐도 그러려니 하도록!” 하이너는 거침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 륀체르는 사파이어 빛 눈동자를 흐리멍덩하게 굴리며 자꾸만 테이블로 머리를 박았다. 그의 시붉은 입술에서 독주의 독한 향이 훅 끼쳐 올랐다. 오를린의 미친 아가씨와 같이 독주를 마셨는데 어째서 자기만 이리 해롱해롱하는지 모르겠다. 미친 아가씨에게 적당히 술을 먹이고 가슴이나 빨면서 놀려고 했는데 그 욕정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자꾸 푼수처럼 신세 한탄도 나오고 있었다. 밤거리에서 일할 때만 해도 일절 주사를 부리지 않았던 자신인데 말이다. 누군가 정신을 조작하는 게 분명하지만, 지금으로선 막을 도리도 없었고 막고자 하는 의지도 딱히 없었다. 오를린의 미친 아가씨의 얼굴을 보면 그런 생각이 모두 날아가 버린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 그 은밀한 가슴골을 보면 도리어 욕정이 팍 죽어버렸다. 대신,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의 인격이 나오는 듯했다. 륀체르는 열 살이나 어린 마리 앞에서 떼를 쓰듯 징징거렸다. “있잖아. 아휴, 골 때리지 뭐야.” “응, 륀체르?” 어느샌가 마리는 륀체르의 이름을 부르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륀체르는 곤란한 지시를 내린 황태자 비오르틴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며 토로했다. “내 친구 중에 좀 어린 녀석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응응. 그런데?” “휴우, 나 오늘 그 녀석 때문에 무지 짜증 나잖아.” 마리는 세상에서 륀체르 사파이어란 녀석보다 짜증 나는 녀석도 있느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기껏 잘 구슬려 놓은 분위기-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에게 부탁한 정신 조작-를 망치게 될 것 같아 온화하고 유한 태도로 대답해주었다. “어머! 누가 이 아름다운 사파이어 빛 눈동자를 가진 꽃미남을 짜증 나게 할까?” “있어. 나보다 열 살쯤 어린 싹수없는 녀석인데. 한때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녀석이 좀 도와주긴 했거든. 그래서 나도 그 빚은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륀체르는 오슬의 수인족을 매수하여 로젠플라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두어야 한다는 의무감과 압박감에 몸서리를 쳤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내란을 꾸몄단 모함을 뒤집어쓰고 사형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진짜 곤란하지 뭐냐. 아, 녀석이 나한테 하나를 받아가 놓고 백을 달라고 하거든? 이거 불공정거래 아닌가?” 마리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럼 싫다고 하면 되잖아.” 마리는 륀체르가 성격상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라 생각했다. 고작 갈보라고 불렸다고 칼을 꺼내 드는 성격 나쁜 녀석이 그런 불공정거래는 어찌 쩔쩔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륀체르가 끄응 앓는 소릴 내며 대답했다. “그게, 싫다고 하기 좀 어려운 처지라서.” 호위 기사에겐 어리숙한 매력을 내세우지만, 실은 눈치가 백 단인 마리는 뭔가 알아차린 듯 대꾸했다. “왜? 그 사람 신분이 아주 높은가 보지? 어디 보자, 바너의 보석 길드 마스터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면 황도의 귀족들, 로젠플라드 성황예하라 불리는 사람 그리고 할데바인 대공 아니면 황….” 륀체르는 신분 노출이 될 수도 있단 생각에 펄펄 뛰었다. “신분이 높긴! 녀석은 그저 깡패일 뿐이야! 암! 힘이 좀 센 깡패라 보면 돼!” 졸지에 로귀하르트 제국 황태자는 깡패로 비하되고 있었다. 마리는 륀체르가 깡패라 부르는 이가 대충 누군지 짐작이 갔다. 앞서 말한 성황, 할데바인 대공 아니면 황족 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마리는 짐짓 모른 척 대꾸해주었다. “흐음, 깡패라. 바너의 실세인 네가 상대하는 깡패면 좀 규모가 큰 깡패집단의 우두머리쯤 되겠군?” 륀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수많은 제국민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이고 그것으로 방위하면서 저들의 이익도 챙기는 제국 정부도 넓은 의미에서는 조직화한 깡패라 아니할 수 없으리라. “이봐, 륀체르. 일단 그 깡패한테는 뭐라고 대답해두었어? 백을 줄 수 있다고 해버렸어?” “그럼, 했지. 안 하고 어떻게 배겨? 싫다고 하면 당장 나를 밟으러 올걸? 뭐, 나를 밟는 건 괜찮아. 하지만 바너 전체가 좆 된다고.” 야심으로 바너의 장인 길드 전체를 통솔하는 실세가 되었으나 그 무게는 상당히 무겁다. 자기 하나 잘못하면 바너 전체가 쑥대밭이 될 수도 있으니. 그래서 륀체르의 고민은 깊을 수밖에 없었다. 마리가 눈을 빛냈다. “내게 생각이 있어.” “무슨 생각? 백치 같은 아가씨도 생각을 할 줄 아나?” 륀체르의 이죽거림에 마리는 조금 발끈했지만, 티 내지 않고 차분히 설명했다. “네가 그 깡패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거야. 오히려 그 깡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그런 가련한 지경이 되어버리는 거지. 깡패도 사람인데 엉망진창인 녀석에게 백을 달라고 조르겠어? 차라리 ‘벼룩의 간을 파먹고 말지!’ 하고서 포기하게 될걸?” “뭔 소리야? 나더러 망하라고?” “아니. 융통성 없긴! 이 경우엔 망한 척만 하란 소리잖니. 깡패가 삥 뜯지 못하게 그저 망한 척만 하란 소리. 지금 나한테 구는 것처럼 징징 거리고 떼쓰며 못하겠다고 하라고.” 륀체르는 비웃었다. “웃기는 소리! 하여간 이래서 백치들과 대화하는 건 무의미하다니까! 언제나 말은 쉽지! 그저 말만 쉬워! 하긴 네까짓 게 내 무게를 알 리가 있나!” 마리는 순간 륀체르를 하이너의 드래곤 꼬리로 때려죽이고 싶었다. 그 순간, 그녀는 반짝하고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드래곤을 이용하면 되잖아! 너도 바너 지역이 드래곤에게 시달려서 누구 도와줄 형편이 안 된다고 해버려! 그럼 쉽다고!” 륀체르는 뜬금없이 드래곤 타령을 하는 마리를 보고 차라리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드래곤을 이용하겠다 생각만 하면 어디서 드래곤이 툭 튀어나와 협조를 해주나? 어찌 됐든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테고, 이 고민도 내일 풀어나가면 되겠지…… 그는 책상에 고개를 박고 잠들었다. 그러자 마리는 마리아 그로스의 등에 타고 서둘러 침묵의 장으로 돌아갔다. 하이너에게 드래곤화를 부탁할 생각이었다. 드래곤이 바너에 등장해 뭔가를 파괴했단 소문을 흘린다. 그리고 실제로 바너 상공에 드래곤의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그런 이야기를 퍼뜨리는 것만으로도 그 ‘깡패’라는 작자는 더는 륀체르에게 곤란한 부탁을 하지 않으리라! 아니, 못하리라! “후후! 나는 정말 천재라니까!”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00024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바너의 수도 크래파. 강변 삼 번가의 팻말 뒤 가장 낡은 사 층 건물. 인신매매단 소굴인 이 층엔 주로 잡혀 온 아이들이, 삼 층엔 퇴폐 업소가, 사 층엔 관리자들이 있었다. 하이너는 이 층 감시자 하나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곧바로 삼 층으로 올라갔다. 지배인으로 보이는 뚱뚱한 남자가 몸싸움에 제법 자신이 있는지 거침없이 달려들며 외쳤다. “네놈은 뭐냐!” 날아오는 지배인의 발을 하이너는 발로 찼다. 거구의 지배인은 종아리 관절이 뒤틀리는 걸 느끼며 그대로 구석에 처박혔다. 이 소란에 다른 덩치들이 달려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하이너가 지배인의 목에 칼을 댄 후였다. “피 보는 꼴 싫지? 다들 나가줘 보실까?” 하이너의 말에 모두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지배인은 덩치들에게 뭣들 하느냐고 얼른 나가라고 눈짓했다. 그 신호를 듣지 않으면 지배인의 목이 썰리리라. 덩치들은 그제야 출입문을 통해 모두 밖으로 나갔다. 이미 손님들도 두려워하며 나간 지 오래였다. 하이너는 루돌프에게 부탁했다. “출입문을 좀 잠가 줄래?” “예!” 삼 층 출입문이 폐쇄되자 하이너는 지배인 역시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풍덩! 하고 지배인이 강물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거구의 지배인을 대체 얼마나 세게 던졌기에 그런 소리가 나는 걸까! 어린 루돌프는 하이너의 힘에 경탄해 마지않았다. 그사이 하이너는 삼 층 업소의 내부와 연결된 사 층으로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이미 사 층의 관리자들은 아래에서 일어난 소란을 알아채고 내려오고 있었다. 관리자들은 처음 보는 새파란 젊은이가 영업을 방해하는 상황에 기가 차서 물었다. “넌 뭐하는 놈이냐!” “너희 같은 놈 패는 놈.” 무신경하게 대답한 하이너는 제게 달려드는 네 명의 남자들에게 단도를 넓게 휘둘렀다. 이런 칼질로 그들에게 겁을 줄 수는 있었지만, 언제까지고 겁만 줄 순 없었다. 그렇다고 찌르기도 내키지 않았다. 피를 보는 건 왠지 싫었다. 그때 불현듯 드는 생각이 있었으니. “루돌프! 내 뒤로 바짝 붙어라!” 하이너는 루돌프를 안전한 곳에 오게 한 뒤 헤츨링의 마법을 이용했다. 창밖 가랑눈이 실내로 몰아치더니 뜨거운 수증기가 되어 넷에게 열기를 뿜어댔다. “으아아아!” “앗, 뜨…!” 갑작스럽게 화상을 당한 이들이 고통에 신음했다. 그 꼴을 보고 하이너가 냉소를 흘렸다. “아픔을 알긴 아나 보군. 그런 놈들이 죄 없는 애들 팔다리를 잘라댔나?” 하이너는 루돌프가 듣지 못할 정도의 작은 욕지기도 같이 뱉었다. 이런 상황이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한때 기사를 꿈꾸었던 이로서 검이 아닌 저급 마법으로 몹쓸 놈들에게 복수하는 게 알량한 방식 같아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난생처음으로 기사다운 정의로운 일을 한 것 같아 뿌듯한 기분도 들었다. ‘헤츨링의 마법도 썩 나쁘지 않군.’ 아가씨 때문에 드래곤화를 겪었던 것도 마냥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네 명으로 끝나지 않았다. 바깥 출입문이 쾅! 소리를 내면서 부서져 버렸고, 그 사이로 녀석들이 더 쳐들어오고 있었다. 녀석들은 동료들을 괴롭히는 수증기를 보고 기가 차서 외쳤다. “뭐하는 새끼지?” “일단 잡아!” “못난 놈들! 쥐새끼 하나 못 잡아서 이러고 있냐?” 하이너는 끊임없이 헤츨링의 마법을 사용해 녀석들에게 화상 공격을 먹이다가 문득 싸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녀석들에 비해 말쑥한 차림의 중년 남자가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하이너는 직감으로 알아챘다. ‘총이다!’ 이미 중년 남자의 총을 든 손은 하이너를 겨누고 있었다. 탕! 탄환은 하이너의 강철 같았던 어깨 근육을 꿰뚫어버렸다. “윽!” 정작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지르는 이는 루돌프였다. 하이너는 고통보단 오히려 어깨를 냉찜질 받는 듯 시원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0.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 하이너는 느꼈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그렇다면 죽이는 편이 낫지 않은가? 정의로운 일을 하느라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해하고 있지만, 피만은 보기 싫어서 살인하지 않았던 고집은 그렇게 꺾였다. 헤츨링의 마법이 발현되었다. 하이너의 앞에 나타나는 인신매매단들은 하나둘씩 혈액이 얼어버렸다! 쿵……. 탁. 챙그랑! 쿵! 혈액과 체액이 얼어버린 그들은 시체가 되어 넘어지고 부서지면서 테이블을 넘어뜨리고 유리 장식물을 깨뜨렸다. 루돌프가 겁에 질려 소릴 냈다. “흐악…!” 혼란에 빠진 루돌프는 주위를 살폈다. 안타깝게도 조금 전에 말쑥한 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 때문에 기사님이 어깨에 총을 맞아버렸다. 그런 때에 누군가가 마법을 부리기라도 하듯 나쁜 녀석들이 갑자기 몸이 굳어서 픽픽 쓰러져버리니…… 신기하고 무서웠다. “기사님, 이건 대체 뭐죠?” “…….” 하이너는 시체들보다 더 굳어버린 표정이었다. 난생처음 살인을 한 감각이 구름을 걷는 듯 현실감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 소굴에 득시글거리는 인신매매단 녀석들을 모조리 해치우는 게 우선이었다. 그는 부서진 출입문을 통해 사 층으로 올라갔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피가 몸을 타고 바닥 여기저기를 적시는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아니, 끔찍할 정도로 싫었다. 곧바로 어깨 표면에 흐르는 피를 얼려 지혈했다. 예상대로 사 층엔 아직 잔챙이가 몇몇 더 있었다. 하이너는 그 중 구석에서 총을 꺼내 드는 녀석을 보았다. 저 녀석도 마찬가지로 죽여야만 했다. “젠장.” 욕지기에 또 한차례의 살인이 이어졌다. 총을 꺼내려다가 피가 얼어버린 이는 곧바로 바닥에 데구루루 굴렀다. 하이너는 그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다른 이들에게 알렸다. “저런 꼴이 되기 싫으면 여기서 꺼지는 게 좋을 거다.” 그러자 잔챙이들은 상어로부터 도망치는 작은 물고기 떼처럼 건물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루돌프는 그제야 기사님의 능력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놈들을 기절시키다니, 혹시 마법을 쓰시는 거야?’ 이미 많은 피를 흘린 하이너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러나 여전히 할 일은 남아 있었다. 인신매매단 녀석들을 이 건물에서 쫓아내긴 했으나, 아직 그들에게 납치되었던 어린아이들은 이 층에 머물러 있었다. 그 불쌍한 아이들을 도망가게 해야만 했다. 그는 이 층으로 내려가려다 휘청거렸다. 걱정한 루돌프가 하이너를 앉혔다. “어딜 가시려고요! 일단 앉아 계세요, 여기!” 하이너는 쓰러지듯 바닥에 드러누우며 루돌프에게 부탁했다. “아이들에게 얼른 도망가라고 해줄래?” “네!” 루돌프는 재빨리 2층으로 내려갔다. 아이들은 모두 신기해했다. 분명히 낮에만 해도 같이 잡혀있었던 루돌프가 도망쳐 이렇게 다시 돌아온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겁에 질린 그들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고 루돌프에게 물었다. “위층 나쁜 놈들 어떻게 된 거야?” “아까 그 멋진 형이 놈들을 다 물리쳐준 거야? 그런 거야?” “대답 좀 해봐!” 그러나 루돌프는 대답해줄 여유가 없었다. 일일이 설명하다간 시간이 지체될 뿐이었다. 밤의 소란은 누군가에게 들키기 딱 좋은 것이고 그것은 분명 또 다른 소란을 불러올 것이리라. “난 하나도 몰라. 너희는 여기 있으면 안 돼. 얼른 뭐라도 챙겨 입고 떠나. 그리고 절대 다시 잡히면 안 돼. 알았어? 도시는…… 너무 무서운 곳이야.” 아이들은 삼삼오오 건물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루돌프는 커튼을 찢어 챙겼다. 기사님을 지혈하기 위한 물건이었다. 지혈하지 않으면 기사님이 위험할 것 같았다. 루돌프가 커튼 천을 들고 하이너가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일 층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아닌 어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야?” “예! 갑자기 나타나서 영업 방해를 하지 뭡니까!” 루돌프는 인신매매단 녀석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단 사실을 알았다. 계단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니 경관 모자를 쓴 다섯 명의 모습이 보였다. ‘뭐지? 어째서 인신매매단 녀석들이 경관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야? 어째서 경관들이 이 나쁜 녀석들을 돕는 거냐고!’ 시골 출신 소년이 부패할 대로 부패한 경관들의 사정을 알 리는 없었다. 루돌프는 재빨리 하이너에게로 가서 조용히 알렸다. “놈들이 경관을 데려오고 있어요! 그것도 다섯 명씩이나 돼요!” “뭐라고?” “도망을 가야 할 것 같아요!” 하이너는 이런 상황이 웃겼다. 죄를 지은 것은 인신매매단인데 어째서 자신이 도망을 가야 하는지? 하지만 이미 살인을 했으니 자신도 범죄자인가? 도망가야 한다는 루돌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경관들은 골치 아픈 존재다. 인신매매단 녀석들이야 기껏 사용할 수 있는 무기란 게 칼이나 총 등 물리적인 것이 전부였지만, 엘리트들로 구성된 경관 중에는 간혹 마법을 사용해 범죄자를 제압하는 이도 있었다. 그 말인즉 하이너가 사용하는 헤츨링의 마법도 무력화할 수 있단 뜻이었다. 경관들이 계단을 올라 사 층으로 가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하이너는 조급해졌다. 도망을 쳐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얌전히 계단으로 내려가면 포박을 당하기밖에 더 하는가? ‘드래곤이 되어야 한다.’ 그전에는 어떻게든 드래곤화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몸이 공중부양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닌 이상 하늘을 날고자 하면 드래곤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변신해야 하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가 진정으로 드래곤화의 필요성을 느낀 순간, 그의 몸은 드래곤으로 변신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으아아아악!” 등을 찢고 나오는 날개. 하이너는 고통에 겨운 비명을 지르면서도 루돌프에게 말하는 걸 잊지 않았다. “내 등에 올라라!” “예?” “얼른 등에…… 그어아아아!” 하이너의 등에서 무시무시한 검회색의 날개를 뻗치자 루돌프는 기절할 것 같았다. 실수로 이식한 드래곤 링클의 효력을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제야 인신매매단들이 왜 픽픽 쓰러졌는지도 알 수 있었다! 모두 기사님이 드래곤의 마법을 쓰신 것일 터! 변하는 건 기사님 등의 모습뿐만이 아니었다. 기사님의 모습도 드래곤을 닮아가기 시작했고, 그가 내는 목소리 또한 드래곤의 포효가 되었다. “그아아아아아!” 건물 벽이 부서지고 매캐한 흙먼지 사이에서 드래곤의 눈빛이 외치고 있었다. 얼른 등에 타! 루돌프는 주저하지 않고 하이너의 등에 오르려 했다. 그 순간, 뒤에서 경관들의 외침이 들렸다. “저건 뭐야! 드, 드래곤 아닌가!” “드래곤이 쳐들어왔단 말은 없었잖소?” “일단 여기서 나갑시다! 위험해요!” 루돌프가 그들을 멍하니 보는 사이, 드래곤화한 하이너는 날개를 뻗어 루돌프의 다리를 살짝 쳤다. 덕분에 루돌프는 드래곤의 날개 위에 엉덩방아를 찧게 되었다. 루돌프는 날개를 엉금엉금 기어 하이너의 등에 올라탔다. 푸드덕푸드덕! 드래곤이 날기 시작했다. 가랑눈이 휘날리는 밤하늘 아래로 밤보다 더 짙은 검회색 드래곤이 하늘을 날았다. 드래곤은 오들오들 몸을 떠는 루돌프를 위해 루돌프의 주변 수증기를 가열해 열기를 만들어주었다. 스아아아아…… 수증기가 끓어오르는 소리가 퍼졌다. 열기 덕분에 그들 주변이 새하얀 안개에 휩싸인 듯했다. 저 멀리 날아가는 안갯속 드래곤은 흡사 신화의 한 장면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적어도 태어나서 드래곤을 처음 보는 경관들에겐 그랬다. 경관들은 해야 할 일도 잊은 채, 하늘에서 드래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구경했다. “우리가 지금 꿈을 꾸는가?” “꿈이 아니라고. 드래곤이었어, 분명! 맙소사, 우리 할아버지 세대나 볼 수 있었던 것을…….” *** 마리는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와 함께 침묵의 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얌전히 잠들어 있어야 할 호위 기사가 보이지 않았다. 취미는 아가씨에게 잔소리하기요, 특기 또한 아가씨 걱정하기인 호위 기사는 그사이를 참지 못하고 아가씨를 찾으러 갔으리라. 마리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나를 너무 과보호한단 말이지. 나에겐 이렇게 든든한 마리아가 있는데 말이야. 응?” 마리는 자그마한 마리아 그로스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비비며 대답을 바랐다. 그 모습은 마치 애완견이 주인에게 애교를 떠는 것 같았다. 이 경우엔 애완동물과 주인이 뒤바뀌었지만. 마리아 그로스는 제게 찰싹 달라붙은 주인을 보며 의식의 메시지-텔레파시를 건넸다. [주인님, 호위 기사를 찾으러 나갔다 올까요?] “그러지 않아도 돼. 곧 오겠지. 날씨도 춥고 짐도 여기 있는데 말이야.” 그러자 마리아 그로스는 객실 소파에 앉았다. 하얀 원피스 차림에 진줏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얌전히 앉아있는 모습은 예쁘고 순한 아이를 보는 듯했다. 물론 그 기이한 기운을 뿜어내는 선홍빛 눈동자만은 예외였다. 마리는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마리아 그로스의 모습이 어쩐지 불편해 보였다. 본래 드래곤과 유니콘의 중간격인 드래콘은 사람의 눈이 그다지 닿지 않는 마구간이나 주택의 옥상 같은 데서 몰래 자는 것을 좋아했다. 마리는 마리아를 위해 문을 열어주며 상냥하게 말했다. “그렇게 불편하게 앉아있지 말고 마구간에 가서 자렴!” […….] “괜찮대도! 당분간은 귀찮게 하지 않을게!” 보통의 주인이었다면 ‘당분간은 부르지 않을게!’라고 했을 것이나, 마리는 마치 자기가 민폐 주인임을 시인하듯 ‘귀찮게 하지 않을게!’라고 했다. 마리아 그로스는 그런 주인을 한참 동안 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리아 그로스가 옥상으로 자러 간 사이 마리는 외투를 벗고 침대에 뻗어버렸다. 영원의 봄에서 륀체르와 독주를 마셨다. 취하지 않은 척했지만, 그 후유증이 상당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이 메스껍기 짝이 없었다. 오를린에서 술 마시기 훈련(?)을 많이 해두었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진즉 기절했을 것이다. 곧 호위 기사가 돌아와서 이 술 냄새를 맡는다면 잔소리를 한 보따리나 퍼부을 것이다.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열린 문 사이로 호위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어깨에서 쉴 새 없이 피가 흘렀고 낯빛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런 꼴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여 소년의 어깨에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마리는 놀라서 침대 밖으로 튀어나왔다.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이니! 호위기사가 다치는 일이 생겨? 그것도 이런 도시에서? 이 상처는 다 뭐야? 그리고 꼬마 너는 누구니?” 소년, 루돌프는 하이너를 일단 침대에 눕히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했다. “저, 그게, 기사님께서 저 대신 인신매매단 녀석들에게 복수를 해주시려다가 총을 맞….” 하이너가 그 말을 끊고 마리에게 물었다. “그러는 아가씨야말로 대체 이 새벽에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조용한 목소리이나 섬뜩할 정도로 신경질적인 감정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으악, 하이너! 무서워!’ 마리는 이런 때에 ‘어떤 갈보 좀 약 올리고 왔다!’는 너스레를 떨어선 안 될 거라고 느꼈다. 어릴 적 어머니 몰래 소용돌이 산을 탐험하러 간다고 나섰다가 밤늦게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지으셨던 표정을 지금 하이너가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어머니께 비 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엉덩이를 맞아야 했지……. 호위기사가 감히 아가씨의 엉덩이를 눈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때리는 일은 없겠지만, 그 대신 대륙 여행 따위 가지 않겠다고 나올 수도 있었다. 마리는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호위기사만큼 재미있는 여행 동반자도 없고, 호위기사만큼 데리고 다니기 괜찮은 수컷도 없었다. 호위기사만큼 강력한 동료도 없지 않은가? 그는 드래곤으로 변신도 가능하니까! 마리는 너스레를 떠는 대신, 야밤 외출 내용을 육하원칙에 따라 정직하게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네가 잠들었을 때! 바너의 실세라는 보석 길드 마스터 륀체르 사파이어의 집에서! 그를 매수하기로 했어! 왜냐하면, 그래야 대륙 정복을 하고 로테를 구하는 일의 첫 단추를 끼울 수 있으니까! 그런고로 지금 그의 고민을 해결해주고 그의 환심을 사려고 해!” 하이너는 분명 육하원칙에 따른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어느 횡설수설보다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들은 것 같아 머리가 아팠다. 총 맞은 어깨도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 머리까지 아프게 하는 아가씨가 너무나 미웠다. “대관절… 누구의 고민을 해결하고… 누구의 환심을 사려 한단 말입니까…….” 제발 그 전에 호위 기사의 고민을 해결해주시고 호위기사의 기분을 생각해달라고 빌고 싶었다. …… 대륙 정복이고 뭐고 다 떠나서 어딜 가면 간다고 알려주시면 안 되나? 꼭 이렇게 멋대로 나가서 호 기사의 속을 썩여야 하는가? 호위기사가 밤늦게 거리를 떠돌아다닐 거란 건 예상하지 못하시나? 물론 루돌프 대신 복수하다가 살인을 하고 총을 맞은 것은 자신이 선택한 일의 결과니 아가씨를 탓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호위기사의 선에서만 분노하고 따지고 싶을 뿐이었다. 하이너는 다량의 출혈과 드래곤화로 인한 고통에 의식을 까무룩 잃으며 중얼거렸다. “가끔은 아가씨를 어디에 묶어놓고 그 가벼운 엉덩이를 패고 싶어…….”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 쿠폰 감사합니다. 00025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새하얀 눈이 쌓인 크래파. 한겨울에도 태양은 침묵의 장 지붕에 쌓인 눈을 서서히 녹이며 제 몫을 하고 있었다. 하이너가 의식을 되찾은 것은 쓰러진 후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커튼을 타고 들어오는 따가운 햇볕에 눈을 뜨자 아가씨는 보이지 않았고 검붉은 머리칼의 소년-루돌프-이 자신을 간호하고 있었다. 이름이…… 루돌프라 했던가. ‘얘가 이렇게 생겼던가?’ 지난밤에 보았을 땐 캄캄하여 잘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조막만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또렷하다. 그렇다고 남자답게 잘 생겼다기보다는 좀…… 머리만 길면 영락없는 예쁜 소녀 느낌이 난다고 해야 적당하겠다. 루돌프는 기절한 기사님이 깨어나자 몹시 기뻤다. “깨어나셨군요!” 하이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깨를 보았다. 총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통증이 하나도 전해지지 않았다. “이상하군.” “아,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불편한 곳이 하나도 없어서 말이지.” 모두 루돌프가 치료해준 덕분이었다. 소년은 스승이자 마스터인 한스 레 하인첼 밑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을 이런 위기에 과감히 쓰는 기지를 발휘했다. 조혈 작용과 회복에 도움이 되는 약으로 하이너의 몸을 깔끔히 회복한 솜씨가 제법이었다. 그러나 루돌프는 자신의 능력을 으스대는 대신 오를린의 아가씨 공이 크다며 추켜세우고 있었다. “마리니시네 아가씨께서 필요한 약들과 도구를 사다 주셨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기사님! 이렇게 무사히 깨어나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리고 저 대신 그 몹쓸 놈들을 물리쳐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제야 하이너는 인신매매단 소굴 사건을 떠올렸다. 어린아이들에게 몹쓸 짓을 하는 놈들에게 본때를 보인 일은 태어나서 처음 해본 정의로운 일이자 또한 범죄였다. 열 손가락 이상에 달하는 인간을 죽였다. 그것도 그들 체액을 얼리는 방식으로 죽여 버렸으니, 그 기분이 멀쩡할 리 없었다. 그들이 제아무리 인간말종이라고는 하나 인간이 인간을 죽였다는 본질적인 껄끄러움은 가시지 않았다. 하이너의 불편한 기색에 루돌프가 물 한 잔을 내밀었다. “목이 마르실 텐데 이거 좀 드세요.” 하이너는 물을 단숨에 마셨다. 물맛이 이토록 쓰디쓴 적이 있었던가.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나 일단 물어볼 것은 물어봐야 한다. “그 건물 아이들은 무사히 떠났나?” “예. 대부분 그때 빠져나간 것 같아요. 하지만…….” 루돌프의 얼굴이 한순간 어두워졌다. “왜 그러지?” “다리가 잘린… 아니, 다리가 불편한 애들은 어찌 되었나 모르겠어요.” 루돌프는 인신매매단에게 심하게 반항하다 몹쓸 짓을 당한 그 아이들을 걱정했다. 다른 아이들이야 두 다리가 멀쩡하니 어디로 도망을 쳐도 쳤겠지만, 다리가 불구된 그 아이들은 도망갈 수 없다. 그대로 있다간 또 나쁜 놈들에게 돌고 도는 인생을 살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세상 모든 시름을 다 해결하지 못할 바에는 모르는 게 좋고 모른 척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는 사실을 이 어린 소년은 아직 알지 못했다. “마리니시네 아가씨께서 약을 사 오시다가 그 아이들이 단체로 마차에 타는 것을 봤다고 하셨는데, 어디로 끌려갔을지…… 물론 제가 이런 걱정을 한다고 그 아이들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요.” “개자식들!" 하이너는 그 가련한 아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현실에 또 한 번 분노했다. 다행히 이 분노는 살인을 저지른 그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정당화해주었다. 이젠 뭔가를 해야 한다. 해야만 했다. 아가씨를 따라서 대륙을 정복하고 싶은 야망은 없으나 한때 기사를 꿈꾸며 정의를 추구하던 이로서 그런 천하의 몹쓸 놈들을 대륙에서 소탕해버리고 싶은 의무감은 희미하게나마 솟아나고 있었다. 루돌프는 잔뜩 화가 난 하이너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이제 기사님도 깨어나셨고, 저도 이렇게 아가씨께 훌륭한 옷을 선물 받았으니… 이곳에서 제가 할 일은 다 끝난 것 같아요. 아, 참. 기사님. 언젠가는 오를린으로 다시 돌아오실 거죠?” “흠, 모르겠다만.” “저 대신 복수해주신 은혜, 그때 꼭 갚겠습니다. 저는 그럼 이만.” “어딜 갈 생각이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려고요.” “어째서? 네 스승이자 주인의 드래곤 링클을 사줄 생각인가?” “예.” 하이너는 기가 찼다. 바너에서 무시무시한 일을 당해 놓고도 혼자서 여행하려는 이 소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모한 걸까. 겁이 없는 걸까. 열두 살의 소년이 혼자서 돈을 벌고자 여행을 떠나기엔 이 세상은 너무나 삭막하고 가혹하다. 차라리 고향 오를린으로 돌아가서 스승의 일이나 얌전히 보조해주다가 어른이 되어 떠난다면 몰라도. 그때였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리고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모습엔 아가씨의 정숙함이라곤 없어 호위 기사의 시름 어린 한숨을 샀다. 마리는 여관 점원 대신 먹을 것을 챙겨 들어오며 외쳤다. “대륙 정복을 하면 드래곤 링클을 몇 개라도 살 수 있단다, 예쁜 꼬마야!” 바깥에서 대화를 모두 들은 모양이었다. 언제나 하녀들이 해다 바치는 음식만 먹다가 직접 누군가에게 음식을 건네는 그녀의 모습이 사뭇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이너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리고 싸늘하게 대꾸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까지 아가씨의 무모한 여행에 끌어들이려 하지 마십시오.” “어머! 무모한 여행이라니! 긍정의 여행이라고 하면 안 돼?” “긍정은 무슨.”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뭐가 남지?” 마리는 버릇 같은 말을 하며 신문을 던졌다. 신문에는 한겨울 밤 바너의 상공에 나타났던 드래곤에 관한 기사로 가득했다. 대륙에선 삼십 년 만에 나타난 드래곤이었고 바너에선 무려 백 년 만에 나타난 드래곤이었다. 총 스무 명의 사상자를 낸 드래곤에 대해 제국 정부가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황도 로귀하르트에선 마력기갑부대원들을 바너 관리 명목으로 배치한 상태라고 하니 그 위기감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바너의 수도 크래파 주민들은 불안에 떨었고, 바너의 실세에 도움을 요청한 황태자는 할데바인의 정치적 공격을 타파할 방법이 사라져 난처해졌고, 인신매매단에 얼굴이 알려진 하이너와 루돌프는 몸을 숨겨야 했다. 마리는 신문의 기사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했다. “봐봐. 정의로운 기사님께서 인신매매단을 소탕해주셨다가 상을 받기는커녕 바너 전체에 수배를 당하게 되었지. 이게 말이 돼? 나쁜 놈들을 혼냈는데 도리어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게? 한마디로 그 몹쓸 녀석들이 바너 경관청에 뒷돈을 주었단 의미가 아니고 뭐겠어? 이런 도시는 썩었어. 이런 도시를 여럿 거느린 제국 역시 썩은 거라고! 그러니 내가 대륙 정복의 꿈을 품지 않을 수 있겠어?” 하이너는 마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절대 티 내지 않았다. “인신매매를 목격했으면 합법적인 신고 절차를 밟아 죄인들을 고발해야겠지요. 그러지 않고 저처럼 막무가내로 살인을 저지른 것은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풉! 웃기지 마! 합법적인 신고 절차를 밟는답시고 쳐! 우리가 그자들을 경관청에 고발했다고 해보자고! 과연 경관청은 그들의 죄를 캐물으려고 할까? 수사는 흐지부지하다가 놈들에겐 아무런 죄가 없다는 식으로 종결 내버리고 말걸?” 하이너는 마리의 말이 틀린 데가 없다고 생각했다. 기사에선 인신매매단의 죄에 대해 일절 서술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정당한 영업을 하다 피해를 받은 피해자로만 묘사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 조작은 경관청이 인신매매단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자에게 뒷돈을 받았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하이너는 왠지 이런 현실을 인정하기가 싫었다. 아직은 세상을 향한 믿음이 남아있었고 세상의 법칙을 따르고 싶었다. 아가씨처럼 세상에 증오를 격렬히 품는 것만은 가능하면 미뤄두고 싶었다. “어쨌거나, 신기하군요.” “뭐가?” “수배를 당하는 제가 이런 여관에 무사히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게.” 마리는 침대에 털썩 앉아 하이너의 어깨를 탁! 치며 호탕하게 대답했다. “아, 그 점에 관해서라면 걱정하지 마. 내 친구 륀체르가 너와 저 소년을 보호해준다고 했으니. 그러니까 거기 예쁜 꼬마야? 내 말 좀 들어볼래?” 루돌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가씨?” “글쎄 아가씨라고 하지 말래도! 너에겐 누나로 불리고 싶구나! 아무튼, 엄한 데 가서 경관청에 붙잡히지 말고 이곳에 얌전히 있으렴!” 상황을 파악한 루돌프는 마리의 말대로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하이너와 함께 수배된 지금 길을 나서봐야 득이 될 건 없었다. 하이너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바너의 실세를 벌써 ‘친구’라고 부르는 아가씨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자가 범죄자를 무사히 숨어있도록 선뜻 도와주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대관절 그자가 그런 일을 하여 얻는 게 무엇일까? “아가씨, 륀체르 사파이어라는 그 사람. 믿을 수 있습니까?” “아니!” “…… 참 해맑게도 대답하시는군요. 믿지도 않는 사람의 도움을 어째서 받으려 하시는 겁니까?” “으흠,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하이너, 나는 말이지. 비록 륀체르 사파이어라는 자의 인간성에 대해선 불신하지만 말이야. 그 자가 처한 정치적인 상황 그 자체를 불신하진 않아. 불신할 필요도 없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어?” 하이너는 당연히 그 사정을 알 수 없었고, 알 수 없으니 이해할 수도 없었다. “가끔은 좀 알아듣게 설명하실 수 없습니까?” 마리는 할 수 없이 처음부터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륀체르 사파이어가 황도의 어느 높으신 분께 곤란한 부탁을 받았다는 것, 륀체르 사파이어는 그 부탁을 들어주기가 싫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륀체르 사파이어 본인이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상황에 처했다고 엄살을 부려야 한다는 것. 즉, 륀체르가 실세로 있는 바너가 대위기 상황에 부닥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드래곤이 바너의 수도 어느 건물을 휩쓸어버린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너가 드래곤에 의해 쑥대밭이 될지도 모른단 불안감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고도 남았다. 그야말로 륀체르에게 있어 천우신조의 기회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예로부터 드래곤이 인간 세상 어느 한 부분이라도 파괴한 이상, 또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드래곤의 출몰은 최소 십 회에서 수백 회에 걸치는 파괴를 불러오는 법이었다. 그것은 오를린 같은 시골에서보다 바너와 같은 대도시에서 더 명확해진다. 기질 상 인간들이 모은 보석을 좋아하는 드래곤에게 부자들이 득시글대는 도시는 협박하기 가장 좋은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제국민들은 바너가 드래곤의 먹잇감이 되었다며 걱정하고 있었으나, 륀체르 사파이어만큼은 절대 걱정하지 않았다. 륀체르는 마리를 통해 드래곤의 정체를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자존심을 버린 륀체르는 마리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호위 기사를 시켜 바너의 하늘을 좀 날아달라고. 때로는 못 돼먹은 놈들의 소굴을 인신매매단 소굴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마구 파괴해도 좋다고 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저 ‘드래곤의 파괴’로 보일 것이고 그런 일이 자주 있어야 륀체르도 황태자에게 ‘나도 어려워 누군가를 돕질 못하겠소.’라는 변명을 할 수 있다. 륀체르가 정치적으로 난처해질 일도 없을 테고 바너의 정의를 확립하는 일 역시 덤으로 따라 온다.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륀체르가 여관 주인에게 거액의 돈을 찔러주면서 하이너와 루돌프의 신변을 지켜주는 것도 당연했다. 당사자 아니, 당사‘용(dragon)'인 하이너는 잠시 한참 동안 듣기만 할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이 알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견디다 못한 루돌프는 헛기침하며 객실 ’다른 방에 가서 잠 좀 자겠다,‘ 하고 자리를 피했다. 마리는 그런 소년이 혹시라도 굶을까 걱정했다. “그럼 여기 빵이라도 가져가서 먹어! 어머, 얘! 예쁜 꼬마야! 듣고 있니?” “다음에 먹을게요…….” 루돌프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그러자 마리는 ‘성장기엔 많이 먹어두는 게 좋은데….’라고 걱정하며 빵을 한 입 삼키려 했다. 그 순간, 하이너에게 손이 잡혔다. 마리는 하이너가 어마어마한 분노를 느끼고 있단 걸 알았지만, 모른 체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빵을 흔들었다. “먹을래?” 앞으로 무지막지한 잔소리를 쏟아낼 호위 기사의 입을 빵으로 틀어막겠단 생각.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하이너는 그 어떤 잔소리도 하지 않고 마리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프기 직전까지 세게 잡고서 그저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낼 뿐이었다. “하이너?” 호위 기사는 대관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심각해 보인다. 눈이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러다 혹시 우는 거 아닌가? 그의 심상치 않아 보이는 표정에 마리가 잡힌 손을 까딱였다. “괜찮아? 하이너?” 하이너는 살인을 하여 심란한 이때, 세상 근심이라곤 모르는 듯 맹한 얼굴을 하는 아가씨가 너무 얄미웠다. 또한, 그러한 낙천적인 성격이 부러웠다. 그리고…… 그 밝은 표정을 계속 지켜주고 싶단 기분도 들었다. 이토록 복잡한 기분을 들게 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이 일그러진 감정을 말로 설명하지 못하고 설명할 수도 없어서 그저 아가씨의 애꿎은 손목만 잡고서 고개를 숙였다.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저는…….”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아가씨의 호위 기사입니다.” “으응.” “그러니, 다음부터 어디 나가실 땐…….” “으응, 응. 무슨 말 하는지 알아. 다음엔 어디 나갈 때 꼭 말하고 갈….” “나와 같이 가!” 버럭 외쳐진 소리에 마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이너는 그대로 마리의 몸을 침대에 눕히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짜증스럽게 외쳤다. “당신이 어디에 갈 건지, 뭘 할 건지 내게 말하지 않아도 돼! 내게 알려줄 필요도 없어! 나는 당신의 부모가 아니니까! 나는, 나… 저는…… 호위 기사입니다. 당신의 기사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러니 저와 같이 가시란 말입니다! 어딜 가셔도 저와 같이 가시잔 말입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0026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마리는 보았다. 늘 강인하고 당당한 기운을 뿜어내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는 것을. 두려움인지 불만인지 알 수 없는 것이 호위 기사를 괴롭히고 있었다. “당신을 지켜야 하는데, 내가 지킬 것은 당신인데, 당신이 보이지 않아서…….” “하이너.” “결국엔 엉뚱한 것에 분풀이하고 말았잖아!” 난생처음 커다란 사건에 휘말린 하이너는 눈동자뿐만 아니라 몸도 떨고 있었다. 그를 불안하게 하는 게 무엇일까. 차가운 밤거리를 길 잃은 미아처럼 떠돌며 아가씨를 찾아 헤맬 때 느낀 배신감일까. 아니면 제가 죽인 이들의 모습일까. 그게 무엇이든 마리는 이번 여행의 책임자로서 호위 기사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녀는 하이너의 커다란 몸을 아이처럼 안고 달래주었다. “괜찮아, 하이너. 나는 알아. 넌 분풀이를 한 게 아니야. 정의롭고 멋진 일을 한 거라고. 루돌프도, 거리의 사람들도, 하나같이 네가 멋진 드래곤이라고 칭찬을 한다고.” 하이너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아가씨가 말하는 내용은 그다지 중요하게 들리지 않았다. 아니, 전혀 들리지 않는다고 할까. 단지 아가씨가 다른 날과 달리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어조를 써서 그런지 조금 기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등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아가씨의 손길 역시 끔찍한 시체의 밤을 기억에서 지워주었다. “나는 그런 네가 아주 자랑스러워. 네가 나의 호위 기사라서 정말 다행이야. 너와 함께라면 대륙 정복은 그야말로 시간문제가 아닐까?” “…….” “우리는 반드시 영웅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하이너는 이런 말을 연속으로 듣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몸을 뗐다. “그쯤 해두세요.” “오우, 아직 덜 했어!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하이너.” 마리가 잠시 숨을 고르며 눈을 빛냈다. 그러고는 하이너의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날렸다. 그녀의 키스는 제비가 물어다 준 꽃향기와 같이 향긋했다. 하이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가씨?” 하이너는 키스를 받아 가슴이 설레지만, 한편으로는 아가씨께서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려고 이러는지 불안하기도 했다. “조금 전에도 사정을 말해서 알겠지만, 다시 정식으로 말할게. 하이너 그로스. 나의 기사여. 앞으로 며칠 동안 바너에 머물면서 나쁜 놈들 좀 소탕해주면 안 될까?” 마리는 륀체르의 부탁을 받았다. 앞으로 드래곤 사건과 같은 사건을 더 일으켜야 할 임무가 있었다. 바너를 드래곤 소동으로 시끌벅적한 도시로 만들어야 했다. “하이너? 응?” “…….” “하이너?” “…….” 그러나 까칠한 호위 기사가 그 부탁을 들어줄 리 없었다. 물론 하이너도 륀체르의 처지를 들어서 안다. 드래곤이 바너를 휘저어야 하는 이유나 상황은 대충 알아듣겠는데, 어쩐지 그 부탁을 들어주다 보면 살인자가 아닌 살육자가 될 것 같았다. 그건 살육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처지보다 더욱 꺼려졌다. 또한, 비록 나쁜 놈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이 있으나 자신의 의지로 시작하는 일이 아니라는 점도 껄끄러웠다.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일이니 여기서 발을 빼는 게 좋을 것이다………… 는 핑계고 그저 아가씨가 륀체르의 부탁을 들어주려 하는 것이 싫다. 그냥 싫었다. ‘남의 부탁은 잘 들어주시지, 아주.’ 하이너는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거절합니다.” “흐이잉?” “저는 얼른 바너를 떠나고 싶습니다만.” “아잉, 그러기야?” “어디서 자꾸 애교를 부리십니까!” “통하니까 부리지, 지금 얼굴 붉히면서. 응응?” 하이너는 밀착하여 눈을 깜빡이는 아가씨의 모습에 그만 정신을 놓을 뻔했다. 매번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는 아가씨를 밀어내고 까칠하게 굴었다. “아가씨는 빈곤한 여행자입니다. 당장 호위 기사의 월급을 줄 형편도 되지 않지요. 그런 처지에 남의 일을 도우려 하십니까? 나쁜 놈들을 소탕해주는 것? 물론 일 자체야 좋지요. 하지만 그것뿐 다른 장점이라곤 없지 않습니까? 대관절 이런 여관에서 무사히 몸을 숨길 수 있는 것 외에 또 다른 장점이 뭐가 있습니까?” 마리는 별것을 다 걱정한다는 듯 손사래 쳤다. “어머! 륀체르 사파이어의 체면이 있지! 힘든 일 시켜놓고 고작 여관투숙비만 제공해줄까 봐?” “힘든 일 시켜놓고 나중엔 모른 척할 수도 있는 게 그런 작자들의 특징 아닙니까? 밤거리에서 들은 바로는 륀체르 사파이어란 자가 아주 위험한 자라고 하던데. 출신이 좋은 것도 아닌데 고작 서른의 나이에 그 자리에 오른 것 하며, 일족이 갑자기 죽어버린 것 하며…… 여러모로 신뢰할 구석이 없습니다. 또 모르죠. 우리가 그를 도와줬다 한들 보상이나 제대로 받을 수나 있을지. 그는 훗날 자신이 드래곤과 결탁했단 소문이 황도에 흘러들어 가는 걸 경계하여 우릴 죽일지도 모릅니다. 누구도 장담하지 못해요.” 그러자 마리는 심각해졌다. 하이너는 아가씨를 이기는 기분에 득의양양하여 물었다. “솔직히 뒤통수 맞고 죽고 싶진 않을 거 아닙니까? 아가씨?” 하이너는 아가씨가 바너의 실세에 뒤통수를 맞고 죽음의 위기에 처해버린 먼 훗날의 모습을 그리면서 벌벌 떨 줄 알았다. 말괄량이에다 무모하고 무식한 아가씨이긴 해도 결국은 나약한 여자 아니던가. 게다가 예전부터 은근히 겁이 많았다. 그러나 하이너의 오만한 예상은 틀리고 말았다. “저기, 하이너?” “예?” “넌 아직 자각이 없구나?” “무슨 말씀입니까?” “네가 누구지?” “그야 저는 당신의 호위 기….” “너는 드래곤이야!” 마리는 씩씩거리며 두 손을 제 허리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 마치 호위 기사를 혼내듯 외쳤다. “물론 너는 인간이기도 해. 하지만 무려 드래곤으로도 변할 수도 있다고! 너는 황도의 마력기갑 부대도 설설 기게 하는 무적의 드래곤이란 말이야! 그게 뭘 뜻하는지 알아? 바너의 보석 길드 마스터가 감히 너의 뒤통수를 칠 수 없는 데다 치지도 못한다는 이야기라고!” “그…….” 하이너는 굳어버렸다. 그래. 물론 그렇다. 인간이 감히 드래곤의 뒤통수를 치진 못한다. 그 당연한 사실을 왜 몰랐을까. 마치 사람이 여태 숨 쉬고 살 수 있는 이유가 공기 덕분이란 사실을 뒤늦게야 인식한 것처럼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아가씨? 제가……?” “그래, 너! 드래곤 하이너 그로스!” “그랬죠. 제가…… 드래곤이었죠. 아니, 드래곤이죠.” “그러니 이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걱정은 버려도 된다고! 드래곤으로서의 패기와 드래곤 만의 긍정을 가지고 살란 말이야!” 커다란 깨달음의 종이 하이너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쳤다. 경쾌한 소리가 뇌리에 울렸다. 링…딩…… 동…… 콰아아앙! 잊고 있었다. 자신이 드래곤이란 것을.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는 인간이란 것을! 그렇다면 이제 아가씨의 말대로 무적이 아닌가? 마리는 그의 심경 변화를 모두 읽고 더욱 후리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자! 그러니 륀체르에게 뒤통수를 맞을 걱정 따윈 접어 둬! 정의의 용사가 되어 바너를, 그리고 이 세상을 정화하는 데만 노력하는 거야!” 마리는 하이너의 두 팔을 으쌰 으쌰 들어 올리게 했다. “해낼 수 있어! 너라면 가능해! 너처럼 멋지고 용감하고 잘생긴 남자는 희대의 용사 드래곤이 되기에 외모로 보나 내면으로 보나 가장 최적이라고!”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마리는 더는 강제 만세를 할 수 없었다. 하이너의 근육질 두 팔을 휘두르기엔 그녀의 팔은 너무나 가녀렸다. “헉, 허억… 헤헤헥…… 네 팔은 무쇠로 만든 것 같구나.” 하이너의 얼굴에서 멍한 표정은 사라지고 서서히 웃음기가 번졌다. 더는 하니 마니 하는 대화를 나눌 마음이 없어지는 듯했다. 시름이라고는 모르는 아가씨의 재롱이 귀엽기도 하고, 또 너무 예쁘기도……. “헥헉헉… 그러니까 하이너. 하이너 그로스. 헉… 아니, 드래곤 용사님, 헥…… 들어줄 거지, 내 부탁?” 대답은 하이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나오고 있었다. 그의 눈이 뭔가에 홀린 듯 풀리면서 고개 역시 서서히 움직였다. 어느 순간 그는 아가씨의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었다. “……!” 마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이너는 아가씨의 거친 호흡이 진정될 때까지 그 입술을 비비다가 갑자기 정신이 들어 고개를 뗐다. 그리고 창문으로 시선을 피했다. 마리는 홍조가 든 호위 기사의 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 탄탄한 팔을 손가락으로 살살 찌르며 물었다. “지금 이거 뭐야?” 하이너는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어차피 급여 주실 형편도 아니잖습니까. 저도 뭐 공짜로 부탁을 들어줄 순 없으니까.” “호오오?”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호오오?” “…… 기분 나쁘시면 제 뺨을 쳐도 됩니다.” “호오오오오?” “젠장, 멋대로 나가셔서 절 걱정하게 하셨잖습니까! 이 정도는 하게 해….” 하이너는 다가오는 아가씨의 두 손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가씨가 한 손도 아니고 무려 두 손으로 뺨을 칠 작정인 듯했다. 눈 또한 노려보는 것 같아 무서웠다. 하긴, 그저 동정 떼기 잠자리 한 번 가진 사이일 뿐이었다. 그런 사이일 뿐인데 제 애인에게 하는 양 멋대로 키스해버렸으니 노려보고 뺨을 치는 것도 당연.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하이너는 잊고 있었다. 함께 여행해준다면 창녀이자 애인이 되어주겠다고 한 아가씨의 말을. “남자가 얼굴을 붉히는 게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거야, 응응? 너무 사랑스럽잖아? 응?” 마리는 하이너의 날렵한 턱선을 마치 귀여운 강아지의 귀를 잡듯 잡고서 흔들어댔다. 하이너의 얼굴은 이번엔 다른 의미로 붉어졌다. ‘괜히 겁먹었잖아. 하여간 왜 사람을 빤히 봐서……, 젠장.’ 하이너는 이런 장난을 치는 아가씨가 몹시도 얄밉기 짝이 없었다. “동정을 뗀 지도 얼마 안 된 녀석이 기습 키스를 그렇게 막 해도 되는 거냐고, 앙?” “아가씨….” “지난밤 잠자리도 그렇고 키스도 그렇고 너는 아주 여자에 타고난 것 같은데, 정말 내가 처음이 맞아?” “정말이지….” “으흠, 역시 이런 물음은 좀 실례인가…… 앗!” 마리의 몸은 맹수에게 덮쳐지듯 또다시 눕혔다. 호위 기사를 약 올리고 놀리는 것도 그때까지일 뿐이었다. “당신은 나를 늘 도발해.” 하이너는 아가씨의 입술을 물며 불만인 양 나지막이 토로했다. “동정을 뗀 지도 얼마 안 된 녀석이 뭐가 어째? 당신이니까 뗀 거야. 당신이기 때문에 저절로 키스해버린 거라고.” 아가씨의 달콤상큼한 향기에 취해 어느샌가 그는 목덜미에 입 맞추었다. 간지러운 느낌에 마리가 몸을 움츠리자 하이너는 그녀의 가느다란 어깨를 뺨으로 비비며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어깨에 총을 맞았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지. 그날 당신과 나눈 그 밤 말이야. 아, 그 밤이 당신과 나눈 내 인생의 첫날밤이자 마지막 밤이 되겠구나. 그러면 안 되는데, 나는 아직 당신을 더 알고, 더 안고 싶은데…… 그런데 참 다행이지. 이렇게 멀쩡히 깨어나 당신을 안을 수 있으니까.” “하이너….” “정말이지 신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이너는 신을 믿지 않았다. 동생의 쾌유를 빌 때도 신에 기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신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눈에 들어오는 아가씨의 아름다운 얼굴, 귀를 간질이는 아가씨의 싱그러운 숨소리, 코로 느껴지는 아가씨의 달콤한 체취, 가끔은 욕지기를 뱉게 하지만 그래도 생기발랄한 농담과 장난들, 그 모든 것을 다시 마주할 수 있단 현실이 경이로워 견딜 수 없었다. 아가씨와 언제까지 함께할 수 있다면……. 좋다. 바너의 나쁜 놈들을 소탕하는 것쯤이야 뭐 어렵지 않을 테지. 아가씨의 부탁이라면 그 무슨 일이든 해줄 수 있었다. 아니, 하고야 말겠단 욕심이 솟았다. 고양된 기분은 또 이성의 끈을 살짝 놓았다. 그가 취한 듯 흐린 눈을 감고서 목 여기저기에 키스를 해대자, 마리는 나른한 숨을 내쉬며 손을 움직였다. 욕망을 아는 가느다란 손은 호위 기사의 널따란 가슴을 쿡쿡 찌르다 어느샌가 그의 하체로 내려갔다. 하이너는 끓어오르는 정염을 잠시 억누르며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아가씨…….” ============================ 작품 후기 ============================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00027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마리는 호위기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바지 속 그녀의 손은 짓궂은 짓에 능숙했다. 물렁물렁한 살덩이를 주무르고 간질이며 장난을 치자 금세 반응이 왔다. “후우….” 피가 몰려 아래가 팽창하는 느낌에 하이너는 심호흡했다. 아가씨는 손을 쉴 새 없이 놀리면서 총 맞았던 어깨에 부드러운 입맞춤도 하고 있었다. 아이가 어미의 젖을 빨면서 손으로는 장난감을 쥐고 흔들어도 이처럼 귀엽고 해맑을 순 없을 것이다. 그러한 모습인데도 묘하게 사내의 정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하이너의 눈이 붉게 물들어가고 마리는 기분이 좋아 쿡쿡 웃었다. 하이너는 왠지 머쓱하여 불퉁하게 물었다. “뭐가 그리 좋으십니까?” “으응. 솜씨 좋은 예쁜 꼬마 덕분에. 열두 살이 이렇게 훌륭하게 사람을 고쳐놨는데 훗날 어른이 되면 멋진 능력자가 될 거란 생각이 드네.” 루돌프는 하이너의 몸에서 탄환도 능숙하게 빼내었고 통증과 회복에 좋은 약도 훌륭하게 썼다. 호위기사를 다치기 전의 상태로 되돌린 것은 모두 그 소년의 공이었다. 은인이나 다름없는 루돌프에게 감사했다. 따지고 보면 호위 기사가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는 것도 루돌프 덕분이고, 호위기사가 못된 놈들을 소탕한 계기도 루돌프 덕분이었다. 가슴에 안도감과 고마움이 가득 찼고, 호위기사의 어깨에 퍼붓는 키스도 더욱 진해졌다. 그때 하이너가 갑자기 마리의 등에 손을 가져갔다. 그는 아가씨의 목덜미에 만져지는 리본을 풀면 옷이 벗겨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런 생각하고 웃을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리본이 풀리기 시작하자 마리의 가슴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풍만한 가슴을 감싼 하늘하늘한 속옷이 사내의 눈을 어지럽혔다. “아가씨….” “안 돼. 다 벗기면.” “어째서요?” “옆방에 예쁜 꼬마가 있단 걸 잊었어?” 하이너는 옷 벗기려던 것을 멈추고 탄식을 삼켰다. 아아아, 루돌프. 아무리 근처에 루돌프가 있다곤 하지만, 만약 그 소년이 이곳에 다시 들어온다면 노크를 할 테고, 그러니 너무 주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마리는 하이너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얌전히 있어.” 그녀는 제 옷이 벗겨지는 건 거부했으나 호위기사의 옷은 벗기고 싶었다. 하이너를 눕히고 그의 바지를 천천히 벗겼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옷이 흘러내려 풍만한 가슴이 완전히 노출하였다. 예쁜 두 살덩이가 부드럽게 움직이며 온기를 퍼뜨릴 때마다 하이너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루돌프 때문에 아가씨의 옷을 다 벗기진 못하지만, 이렇게 반쯤 벗겨진 것도 괜찮았다. 하이너의 바지가 다 내려가자 마리가 그의 사타구니 사이로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환자에게 주는 선물이야.” 하이너의 속옷 또한 바지처럼 내려가 버렸다. 검은 수풀 사이에 굵은 핏줄이 선 것이 제 몸체를 튕기듯 드러냈다. 하이너는 제 것을 제가 보지 못하곤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를 부끄럽게 한 것도 모자라 마리는 그의 허벅지 안쪽에 뺨을 비비기 시작했다. “기대되지 않아?” 그 말에 하이너는 다시 눈을 떴다. 청록색 눈동자는 음탕한 빛을 발하고 연분홍빛 입술은 금방이라도 남자의 것을 삼켜버릴 듯 아슬아슬했다. 그런데 갑자기 하이너가 그녀의 뺨에 감히 손을 지그시 가져다 대며 고개를 저었다. 그 때문에 마리는 더는 그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비비지 못했다. 하이너는 이런 식으로 아가씨에게 쾌감을 선물 받는 것이 꺼려졌다. 마리가 볼을 부풀리며 뾰로통한 표정을 했다. “싫어? 내 선물?” 하이너의 반듯한 이마에 잠시 주름이 생겼다. “뭐하시는 겁니까? 오를린에서도 그랬지만, 자꾸 이런 식으로 당하는 것은 싫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서 있는데?” “…… 만져주셨으니 어쩔 수 없잖습니까. 저는 그냥…….”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가씨가 남자의 것을 스스럼없이 만지고 비비고 핥고 그러는 게 싫다. 물론 본능이 있다 보니 그러한 행위를 반긴다는 걸 부정할 수 없으나, 아가씨의 능숙한 몸짓, 어딘지 모르게 헤픈 행동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심술이 일었다. 또한, 어리숙한 남자처럼 휘둘리어 아가씨를 안게 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하이너는 아가씨의 손을 끌어와 그 손등에 키스하며 속내를 고백했다. “저는, 그저 아가씨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아가씨를 안고 싶습니다.” 그는 대답을 구하듯 아가씨의 청록색 눈동자를 보았다. 크고 맑은 구슬 같은 눈동자는 언제나 그 자체로 긍정의 대답이 되는 듯했다. 마리 또한 호위 기사의 검은 눈동자를 보았다. 거기엔 알 수 없는 고집이 버티고 있었다. “제가 원해서 아가씨께 입맞춤하고, 제가 원해서 아가씨의 몸을 탐하고 싶습니다만…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마리는 그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기대할게.” 하이너는 그녀의 손등을 다시 한 번 깨물 듯 키스했다. 새하얀 손등에 자신이 만든 붉은 자국이 보였다. 기분이 좋았다. 붉은 자국은 가녀린 팔뚝을 따라가 동그란 어깨를 지나 쇄골에 머물렀다. 이제 하이너의 입술은 풍만한 가슴 언저리에 닿아 농밀하게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흐아아, 하이너.” “아가씨….” 심장의 울림이 느껴지는 살덩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탄성과 같은 숨을 내쉬었다. 열기와 함께 콧속으로 들어오는 달콤하고도 상큼한 향기. 가장 좋아해 마지않는 여자의 향기. 향기만으로도 사람을 이리 아찔하게 하는데 그 맛은 얼마나 다디달까. 하이너는 조심스럽게 혀를 내밀어 살결을 맛보았다. 따스한 체온의 맛은 확실히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달콤하다 할 수 있었다. “맛있어… 정말 맛있습니다.” 쉴 새 없이 간지러운 느낌이 몰아치자 마리가 나른하게 한숨 쉬었다. 눈이 저절로 감기고 몸에서 힘이 빠졌다. 가슴을 여기저기 건드리고 탐해보는 호위기사의 분위기가 여전히 서투른 소년 같았으나 썩 나쁘지 않았다. 칭찬하듯 그의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웃어주었다. 마치 광대의 재주를 보고 나서 웃는 그런 소소한 만족감의 표시였다. 호위기사는 그 미소에 눈을 가늘게 떴다. 흡사 야속한 사람을 노려보는 눈 같았다. “왜?” 하이너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감싼 옷을 완전히 벗겨버렸다. 이런 여행자 복장은 오를린에서 아가씨가 입었던 옷보다 벗기는 게 한결 쉬웠다. 탐스러운 복숭앗빛 몸이 드러나자 하이너는 그 몸 전체에다가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가슴에 퍼부었던 키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칠고 뜨거운 입맞춤을 퍼붓고 싶었다. 다시는 아가씨가 소소한 만족감의 미소 따위는 짓지 못하게 하리라. 여유로움은 모두 앗아 가버리고서 쾌감에 울부짖게 하리라. “하이너? 앗!” 하이너는 새하얀 목을 혀로 짓누르며 빠른 손짓으로 아가씨의 속옷을 반쯤 내렸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질척한 타액이 흘러나와 아가씨의 목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아가씨가 맛난 음식도 아닌데 자꾸만 군침이 도는 이 현상이 기이하다. 게다가 자꾸만 의식보다 행동이 앞서고 있었다. 이미 손은 아가씨의 허벅지 온기를 마구 빼앗듯 탐하고 있었다. “뜨거워, 몸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잖아….” 혼잣말한 그는 아가씨의 귓불을 입술로 빨아들이며 한 손으로는 은밀한 수풀을 건드려 보았다. 축축하고 따스한 살결이 있는 금빛 숲. 보송보송한 살결은 만지면 만질수록 중독되는 것 같았다. “아아… 너무 부드럽습니다…….” 마리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었으나 그 숨만은 뜨거워졌다. “좋아… 하이너. 거기 더 만져줘.” 하이너는 젖은 살결을 천천히 만지며 되물었다. “여기 말씀입니까?” “응, 아… 너무 거칠어.” “그야 아가씨가 저번처럼 많이 젖지 않으시니까.” “바보. 벌써 그걸 바라는 거야? 그 정도로 젖게 하려면 아직 멀었어.” 하이너는 호승심을 느꼈다. 피식 웃으며 그런 말을 하는 아가씨를 흠뻑 적시다 못해 엉엉 울리고 싶었다. 곧바로 아가씨의 몸 위로 올라탔다. 고개를 숙여 아가씨의 상체 중 가장 쾌락에 취약한 분홍색 꽃봉오리 하나를 혀로 간질였다. 그러면서 아가씨의 속옷을 더욱 아래로 내렸다. 아가씨의 허벅지가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하이너는 다른 쪽 가슴을 베어 물며 그 다리 사이에 지난번처럼 손등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좀 더 부드럽지 않습니까?” “글쎄.” 검지의 돌출된 관절로 아가씨의 균열을 은근히 문질렀다. 아가씨가 그런 하이너를 재미있다는 듯 보며 속삭였다. “내 작은 별은 이런 손보단 네 입술이 좋다고 하는데.” “…… 아.” 하이너가 뒤늦게 떠올린 것은 아가씨의 은밀한 부위에 있던 별 문신이었다. 삼각형과 역삼각형이 포개어진 문양. 귀엽고 특이하게 존재감을 과시하던 그 연갈색 모양의 별. 그곳에 혀를 가져가 핥고 빨아들인 경험이 있었지……. 지금 아가씨는 그때의 감촉을 다시 원하신다. 하이너는 기꺼이 고개를 내렸다. 자신 또한 그때의 경험을 다시 복습하고 싶은 욕심이 가득했다. “아아, 하이너……!” 밝은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어느 금빛 숲에 숨은 작은 별이 물기를 머금고 반짝이기 시작했다. *** 루돌프는 기사님을 간호할 때만 해도 기사님의 곁에 딱 붙어 있었다. 식사나 볼일은 기사님이 머문 객실에서 해결했고, 약과 치료에 필요한 도구들도 전부 아가씨에게 건네받아 밖에 나갈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지금 그 객실을 벗어나 여관 주인이 안내한 또 다른 객실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불편함을 만나게 되었다. 원인 제공자는 바로 마리아 그로스였다. 그 진줏빛 머리카락의 소녀는 루돌프와 같은 객실에 있었다. 그것도 이층 침대의 1층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침묵이 어색한 루돌프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음… 안녕?” “…….” “음, 죄송해요. 저와 같은 또래인 줄 알았어요. 다시 인사할게요. 안녕하세요?” “…….” “음…….” 마리아는 인간체라 성대를 움직여 인간의 말을 하는 게 가능했지만,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침묵했다. 마리아가 익숙한 것은 주인 마리와 텔레파시로써 소통하는 것뿐이었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고, 게다가 그녀의 정체가 드래콘이란 것도 알 리 없는 루돌프는 몹시도 당황스러웠다. ‘뭐야, 말을 못하나? 표정 변화가 없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원.’ 루돌프는 어색함이 싫어서 헛기침을 몇 번 하다가 이런 상황을 벗어날 궁리를 했다. 마리니시네 아가씨께서 말씀하시길 밖이 위험하다 하니 나가는 건 안 된다. 여관 홀을 도는 것도 조심스러웠고 결국 이 객실 안에서 어색함을 해결해야 한다. ‘음, 위에 올라가서 잠이나 자야지.’ 루돌프는 이층 침대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자리에 누우니 천장과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말 없는 진줏빛 머리카락의 소녀보다는 덜 부담스러우리라. 소년은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건 진줏빛 머리카락 소녀의 인형 같은 얼굴, 그녀가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깜빡이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깜빡, 깜빡. “…….” 깜빡, 깜빡, 깜빡. “………….” 깜빡, 깜빡, 깜빡, 깜빡. “……………….” 루돌프는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아 몇 번이나 뒤척였다. 침묵과 어색함이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오를린에서 스승 한스 레 하인첼과 한 침대에 누워 잘 때도 지금처럼 어색하진 않았다. 이층까지 와서 자려고 한 마당에 소녀에게 다시 말을 거는 것도 우스웠고, 설사 말을 건다 해도 대답을 들을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편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마리니시네 아가씨처럼 미인이 될 누나야!’ 능글맞은 청년이라면 ‘미인은 좋은 거구나!’ 하고서 허허 웃으며 껄떡대거나 우스갯소리를 시도하겠지만, 어린 루돌프는 그런 일을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열두 살 루돌프의 눈엔 마리아 그로스가 성가신 존재였다. 가슴에 괜한 방망이질만 해대어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눈에 아른거리는 것이 그저 불편할 뿐이었다. ‘왜 미인이 나와 같은 방에 있는 거지… 저 누나도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인가? 하여간 여관 주인은 왜 이런 방에 나보고 들어가라고 한 건지……. 잠이나 자야지.’ 그러나 대낮에 잠이 쉽게 올 리 없었다. 아래층 침대에 어여쁜 소녀가 있으니 더더욱. 소년은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몸을 뒤척였다가 바로 누웠다가를 반복했다. 그 사이 침대 일층의 마리아가 한 일이라고는 눈을 서른세 번 깜빡거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마흔네 번째 눈을 깜빡이는 그 순간. 어디선가 울먹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아…… 하이너!” 루돌프는 큰일이 난줄 알고 벌떡 일어나다가 그만 천장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아야!”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0028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두개골이 깨진 건 아닐까 하는 염려가 들 정도로 너무 아팠다. 머리 위에서 종달새들이 별사탕을 뿌리며 뱅글뱅글 도는 것 같았지만, 지금 이렇게 해롱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가씨께서 위험에 처했으니 구해줘야 한다. “앙, 하이너! 아! 아!” 루돌프는 비틀거리며 침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아가씨를 구해야…!” 소년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그때였다. 마리아가 소년의 옷자락을 잡았다. 루돌프는 자기의 길을 막는 마리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놔요! 어째서……?” 어째서 막는 걸까. 마리니시네 아가씨의 우는 듯 혹은 앓는 듯한 소리가 자꾸 들려서 너무 불안한데, 이 진줏빛 머리카락의 누나는 어떤 동요도 하지 않는다. 대관절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무슨 위기가 닥쳤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건가? 마리아는 나가지 말라고 고개만 가로젓고 있을 뿐이었다. 루돌프는 속이 타서 설명했다. “저기 지금 마리니시네 아가씨께서 저런 소리를 내시는데…….” 마리아는 낮게 한숨 쉬더니 다시 한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절대 루돌프를 놔주지 않겠다는 듯 옷자락을 더욱 세게 잡았다. “아가씨를 구해야 하는데…….” 마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마리아는 연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미간을 팰 정도로 인상을 찌푸리며 노려보았다. 사람의 눈이 아닌 듯 시붉은 빛을 발하는 눈동자를 마주한 루돌프는 그만 얼어버렸다. ‘이 누나, 좀 이상해. 아니! 많이 이상해!’ “그, 그냥 잘게요. 놔 주세요.” 그제야 마리아는 옷자락을 놓아주었다. 루돌프는 몹시 찜찜한 기분으로 다시 사다리를 올라탔다. 위험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 붉은 눈동자의 누나 때문에 겁을 먹고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 상황이 싫다. 여전히 바깥에선 자꾸만 알 수 없는 신음이 새어들어 왔다. “으아앙…… 더 위에, 아앗…… 아아!” 침대에 누운 루돌프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마리니시네 아가씨는 대체 뭘 하시는 걸까. 어딜 다치신 걸까. 설마하니 기사님이 괴롭히시는 건가? 착하고 정의로운 기사님이 다른 사람을, 그것도 모시는 아가씨를 때리실 리는 없어! “앙, 아아! 앗!” 하지만… 역시나 지금 저 소리는 아가씨께서 아파하는 소리잖아. 안 돼. 기사님이 아가씨께 그래서는 안 되는데. 정말이지 어른들의 일은 참 알 수가 없어. 신분이 낮은 기사님께서 아가씨를 저리 대하시다니……. 소년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신음이 작게 줄어들 즈음에야 하품했다. 기사님을 치료하느라 며칠 신경을 많이 쓴 탓일까. 결국에는 잠을 이기지 못해 꿈나라로 갔다. ***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 밤하늘을 수놓은 화려한 환형 마법들이 이제는 한층 줄어들었다. 궁 관현악단이 밤낮으로 연주하는 곡들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거대한 홀에 매일 같이 등장하던 사람들도 발걸음이 뜸해 썰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연회 기간을 장식하던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니 황태자비 간택연회의 무용함과 무의미함을 알리는 듯했다. 황태자의 눈을 사로잡고 더불어 이 간택 연회를 종료시킨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 오를린의 아가씨 로테의 침실에선 지금 뜨거운 정사가 한창이었다. 꽤 많은 날 동안 황태자에게서 쾌락을 배우고 알아간 로테는 지금 연신 달콤한 신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아, 전하….” 로테는 품에 안긴 남자의 암갈색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온몸이 짜릿하게 저리는 기분을 느꼈다. 비오르틴은 꽃향기에 취한 나비처럼 로테의 목을 음미했다. 오늘 그는 평소와 달랐다. 왠지 모르게 짓궂고 거친 방식으로 그녀를 안던 것과 달리 오늘은 안달이 나고 애틋해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정말 좋아해서 어쩌질 못하겠다는 듯이 지극한 감정을 보였다. 그런 변화에 로테가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곧 이유가 밝혀졌다. 비오르틴이 로테의 어깨와 가슴 언저리에 뺨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너는 향수를 쓰지 않는 편이 좋아. 지금처럼 이렇게 아무것도 쓰지 않도록 해.” “전하….” 로테는 사실 향수를 쓰지 않는 게 아니었다. 렌에게 얻어오게 한 향수를 쓰고 있었다. 그 향수는 성분도, 재료의 원산지도 알 수 없었다. 달콤하고 상큼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풋내가 나는 게 조금 정제되지 않은 거친 느낌이었다. 깊은 산골짜기나 들판 야생화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런 향이었다. 아마도 황태자의 취향이 그런 것이리라. 그간 온갖 향수로 황태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애썼던 로테는 비로소 화살로 과녁을 맞힌 느낌이었다. ‘렌에게 그 향수를 더 가져오라고 해야겠어!’ 비오르틴은 향기에 취해 그녀의 드레스 속으로 파고들었다. 실오라기 하나 가리지 않은 은밀한 부위를 마주한 비오르틴의 음울한 회색 눈동자에 붉은 정염이 일었다. 침소에서든 연회장에서든 속옷을 입지 말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다. 과연 지시대로 잘 따라주고 있었다. 그는 살 오른 허벅지를 양쪽으로 벌렸다. 그리고 홀린 듯이 사타구니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보드라운 수풀에 코를 묻고 혀끝에 힘을 주어 습한 살결을 몇 번이고 핥았다. 드레스 너머로 로테의 손이 내려와 감히 그의 머리를 붙잡고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아아, 전하…!” 참을 수 없이 짜릿한 느낌에 몸을 떠는 것도 잠시, 갑자기 불쑥 침범한 살덩이에 로테가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몸 안을 휘젓고 간질간질한 쾌감을 선사하는 게 황태자의 기다란 손가락이란 것을 안 그녀는 자지러지기 시작했다. “전하, 그렇게 하시면 너무, 앗… 읏, 응!” 비오르틴은 그녀의 쾌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만족을 위해 움직였다. 코로는 중독성 있는 이 여인의 무향(無香)을 흠뻑 들이마시고, 혀로는 벌게진 살구슬을 힘주어 꾹꾹 눌렀으며, 입술로는 얇은 꽃술에 키스했다. 손가락은 끊임없이 내벽을 괴롭혀 로테를 울먹이게 했다. 그녀가 절정에 다다르자 비오르틴의 얼굴이 흠뻑 젖었다. 자신 또한 강하게 흥분해버린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로테의 두 다리를 벌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아!” “걸리적거리는군.” 그는 평소 같으면 치맛자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리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마구 움직였을 것이다,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치맛자락을 신경질적으로 내렸다. 그리고 땀으로 젖은 로테의 머리카락을 치우고 그녀의 얼굴을 꿰뚫듯 내려다보며 허리를 처박아댔다. 다른 때보다 로테의 감도가 더욱 좋은 듯했다. “윽, 아, 앙! 아, 전하! 앗!” 처음엔 어리숙하고 부끄러워만 하던 그녀가 이제는 적극적으로 쾌락을 좇을 줄 알았다. 비오르틴의 눈에 제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으면서 어떻게든 그를 더 삼키려고 애를 썼다. “흐우… 하아.” 그녀의 안은 남자를 쉼 없이 조이고 빨아들이고 있었다. 비오르틴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낮게 욕지기를 뱉다가 갑자기 몸을 빼냈다. 연달아 치닫던 쾌감이 뚝 끊기자 로테가 아쉬움의 탄성을 흘렸고, 비오르틴은 그 반응에 한쪽 입가를 올려 웃었다. “안달 내지 마라. 더 좋은 걸 줄 테니.” 곧 로테의 몸이 뒤로 돌려졌다. 짐승처럼 엎드린 채 삽입당한로테의 엉덩이는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이런 자세는 가장 수치스럽지만 가장 잘 느끼는 자세였다. 이미 비오르틴도 그 사실을 아는 듯했다. 그는 거침없이 제 것을 찔러 넣으며 로테의 쾌감점을 연신 자극해댔다. “아, 아앙… 아, 아!” 유혹하는 듯 소리를 높이며 엉덩이를 조금씩 흔드는 모습에서 더는 시골 출신 영애의 새침함이나 정숙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반응이 비오르틴은 너무나 좋았다. 솔직하게 쾌락에 충실한 모습은 가식과 연기로 가득 찬 황궁에서는 더욱 눈에 띄고 값진 법이었다. 그는 보드라운 엉덩이를 세게 붙잡고 피를 낼 듯이 손톱을 깊게 새겨 넣으며 끊임없이 자신을 처박아댔다. 마치 발정하여 미쳐버린 짐승과 같은 모습이었다. “윽, 좋군… 더 흔들어. 어서!” 그러기를 얼마쯤 지났을까. 수컷의 희뿌연 액체가 몇 방울 새어 나와 접합부를 적셨다. 그는 거칠게 숨을 고르며 로테의 등을 껴안았다. 그리고 로테의 가슴을 주물러대면서 절정을 참았다. “후우.” 지금 이런 느낌이 좋았다. 여인의 안에 자신을 찔러 넣은 채, 쾌감을 쏟아내다 말고, 이렇게 참고 참으며 조임을 받는 느낌이 사정하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그는 자극이 세지 않게 천천히 움직이면서 로테의 귀를 이로 짓씹어 물었다. “좋아….” 로테는 전율했다. “하아, 저도, 저도 좋습니다. 전하… 아, 아아…….” “전하라 부르지 말고 이름을 불러.” “전하….” “얼른.” 비오르틴은 로테의 가슴을 거칠게 움켜잡으며 보챘다. 그제야 로테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비오르틴…….” “크흐하!” 비오르틴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시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 움직임에 맞춰 엉덩이를 들썩이는 로테가 마음에 들었다. 몸의 정이 마음의 정을 만드는 것일까? 아니. 이 경우는 반대다. 어린 시절, 오를린에서 만난 말괄량이 아가씨에게 마음의 정부터 들어버렸다. 이렇게 스무 살에 재회해서 상황에 쫓기듯 안았지만, 안는 시간이 자주 생기면서 다시 과거의 그때처럼 사이가 좋아지는 것 같다. 비오르틴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들어갔다. “다시 불러봐, 내 이름.” “전하….” “얼른.” “비오르틴…….” 비오르틴은 로테의 배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며 서로 한몸이 될 듯 거세게 부딪쳤다. 끅끅거리는 로테의 신음에서 더는 전하라는 호칭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몇 번이나 황태자의 이름을 불렀고, 황태자 또한 로테의 이름을 불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비오르틴은 뜨거운 절정을 맞이했다. 그는 로테의 어깨에 이를 박아 넣으며 거칠고 진한 쾌감의 여운을 느끼다가 그 여운이 한풀 꺾일 때쯤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아, 아, 하아…… 로테, 오늘처럼만 해.” 로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 순간 떠올린 것은 렌에게 받은 향수였다. 앞으로 계속 사용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전하도 오늘처럼만 해주시면 좋겠어요.” “하하하….” 또한 황태자의 취향이 얌전하고 조용한 여자가 아니라는 결론이 났다. 그는 연회장에서든 침대에서든 오늘처럼 솔직하게 표현하는 여자를 좋아한다. 로테는 과감히 손을 뒤로 뻗어 황태자의 목을 어루만졌다. 만족스러운 정사를 치러준 황태자를 칭찬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러자 황태자가 그녀의 목덜미 여기저기에 부드러운 키스를 시작했다. 이런 후희도 전에는 하지 않았던 행동이었다. 로테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간지럽습니다.” 그러자 비오르틴의 입술이 느려졌다. 그는 로테가 간지럽지 않게, 그러면서도 더욱 잘 느낄 수 있도록 혀를 지그시 누르며 그녀의 등 여기저기에 키스했다. 로테는 신기했다. 사랑이 흘러넘친단 느낌을 이토록 야한 순간에도 느낄 수 있는지? 그간 황태자가 거친 정사를 해왔던 것도 모두 사랑 때문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런 시간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너무… 좋아요.” 비오르틴은 호흡을 차분히 돌려놓기가 무섭게 다시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더욱 달콤한 분위기였다. 그는 로테의 얼굴을 돌려 입술에 키스하면서 천천히 제 것을 박아 넣으며 오랫동안 살결을 음미했다. 만개한 꽃이 향기를 뿜어내듯 침실 가득 야한 향으로 가득 찼다. 질척이는 소리와 키스하는 소리가 어지러이 떠돌며 그들은 수없이 하나가 되고 몇 번이나 동시에 쾌감을 맞이했다. “…… 마음에 들었어.” “저도요, 비오르틴.” 한참 후 그들은 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휴식했다. 기력과 체액을 너무나 많이 빼버린 탓일까. 비오르틴은 목이 마르다 했고, 로테는 밖에서 기다리는 렌에게 차를 준비하게 했다. 이윽고 렌은 그들에게 은은한 풀향이 나는 차를 한 잔씩 올렸다. 렌이 물러가기도 전에 비오르틴은 그 차를 입에 갖다 대었다. 딱 마시기 좋은 온도의 차를 한 모금 삼키려 했다가 그것을 로테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생각은 곧 행동이 되었다. 차를 머금은 그가 로테의 입술을 찾았다. 그 광경을 안 보는 척하면서도 흘끔 목격한 렌의 얼굴은 발갛게 물들고 말았다. ‘전하께선 정말이지 아가씨를 무척 좋아하시나 봐.’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황태자에게서 차를 받아 마시려던 로테가 갑자기 한 손으로 입을 막기 시작했다. “우욱!” 자리에서 물러나려던 렌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녀를 사랑스럽게 지켜보던 황태자의 표정도 그대로 굳어버렸다. “욱…… 죄송합니다. 그만 차향이 역하여.” 비오르틴은 렌에게 어찌 이런 몹쓸 차를 가져왔느냐고 호통치려고 했다. 그러려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들었다. “너…….” 이 헛구역질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렌 또한 황태자와 같은 생각인지 감동하여 손뼉을 치고 있었다. “아가씨!” 언제나 음울해 보이던 황태자의 회색 눈동자에 형형한 빛이 스미기 시작했다. 그는 로테의 뺨을 만지며 그녀를 자랑스럽다는 듯 보았다. “이제 의미 없는 연회는 그만둬도 되겠군.” ============================ 작품 후기 ============================ 선작, 코멘트, 추천,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어느새 1권 분량을 썼더군요 ㅋㅋ 00029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예?” “간택은 처음부터 의미 없는 거 아니겠나.” 모든 것은 짜고 치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간악한 할데바인이 제 일족의 여자를 황태자비로 올리려 할 때부터, 또한 자신이 오를린의 말괄량이 아가씨를 반려로 삼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간택연회는 피차 무의미했다. 비오르틴은 로테에게 몸조심을 당부하고 그곳을 떠났다. 내일 이곳에 황의가 들를 것이란 말도 빼놓지 않았다. 들뜬 로테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달거리가 없었어. 종종 늦긴 했지만….’ 거듭된 정사로 몹시 피곤했으나 잠자지 않고 고향의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먼저, 드래곤을 타고 하늘로 날아 가버린 언니에 관해 유감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자기가 드디어 황도에 온 목적이 달성되었다는 말로써 간택전의 결론을 암시했다. 곧 황도 구경을 하시게 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황의에게 확실한 진단을 받기 전까진 이 편지를 고향에 보내지 않을 테지만, 지금 당장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는 덴 이런 글쓰기가 최고였다. 다 적고 나서는 렌에게 편지를 전했다. 그리고 따로 지시했다. “오늘 쓴 향수, 몇 병 더 구해와. 구입처를 확실히 알아오면 더 좋고.” 어째서인지 렌이 난색을 보였다. “왜 그러지?” “그게요, 향수를 더 구해오는 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또한, 구입처도 알 수 없고요. 이런 말씀을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뭐라고? 설마…… 저번에 향수를 훔쳐서라도 구해오라고 했다고 진짜로 남의 향수를 훔쳤던 거니? 그래서 그런 거야?” 렌은 펄펄 뛰며 손사래 쳤다. “그럴 리가요! 아가씨의 명예를 걸고 맹세코 그런 불명예스러운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째서 감히 내게 불가능을 말하지?” 로테의 태도는 이미 황태자비가 된 듯 오만했다. 렌은 겨우 입을 뗐다. “그야 오늘 아가씨께서 쓰신 향수가 바로 마리 아가씨께서 선물하신 향수이기 때문입니다.” “언니가 줬다고? 언니가… 언니가 내게 언제 그런 선물을 주었지?” 렌은 동생이란 사람이 어찌 이리 무심할 수 있나 싶었다. “황도로 떠나시기 전날 밤에 마리니시네 아가씨께서 주머니에 담아 주셨잖아요. 그때 분명 제가 보여드렸는데…….” 로테는 기억을 겨우 더듬었다. 황도로 떠나기 전날 밤이라. 그때 분명 가족, 친척들이 모두 모여 배웅과 이별의 말들을 주고받고 하였다. 모두 ‘로테 너는 황태자비가 될 것이고 또한, 제국의 황후도 될 것이다!’고 축복하였고 개중에 몇 명은 황도의 온갖 신기한 물건들을 부탁하기도 하는 등 시끌벅적했다. 그런 분위기에 애물단지 쌍둥이 언니의 술주정이 귀에 제대로 들릴 리는 없었다. ‘가만, 그랬지. 그날 언니가 술을 진탕 마시면서 내게 줄 거라곤 자기가 아끼던 물건밖에 없다고 하며 주머니 하나를 건넸지.’ 솔직히 만지기도 싫은 낡고 지저분한 주머니였다. 주머니 안에 뭐가 들었는지도 관심이 없었다. 아마도 그 주머니 속에 오늘 쓴 향수가 들어있었던 모양이었다. 렌은 향수에 까다로운 아가씨 때문에 여기저기서 향수를 빌리고 빌리다 지쳐서 그 향수를 건넸을 테고. 참. 잊고 있었다. 당시 언니가 어떤 말을 했지……. 로테는 그 말이 떠올라 싸늘한 표정을 했다. 홑몸이 아닐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화를 내거나 분노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혈압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못된 언니! 뭐? 배웅은 앞날이 밝은 사람한테만 하고 싶다고? 아무리 내가 자기 선물을 무시했다고 해도 그런 악담은 하는 거 아니잖아? 그러니 드래곤이 물어 가버리는 거야!’ 회상에 회상을 거듭하다 보니 언니에 관한 씁쓸한 기억만 떠올랐다. 그러는 사이 하녀 렌은 여전히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주 작은 병에 들어있고 재료나 제조자도 표시되지 않은 향수라서 다시 구해오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아가씨께서 꼭 구해야 하신다면 제가 오를린에 전갈을 보내 마리 아가씨의 방을 샅샅이 뒤져달라고 해서…….” “아, 됐어.” 로테는 잠이나 자기로 했다. 고향에 사람을 보내 언니 방을 뒤적거리는 유난을 떨면서까지 향수를 가지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까지 애쓰면서 황태자의 환심을 사야 할 이유도 이젠 사라지지 않았는가. ‘뭐가 걱정이야? 내 뱃속엔 비오르틴의 씨가 있다고!’ 로테는 복중의 아이를 위해 최대한 심신을 안정할 수 있는 침향을 피우라고 지시하곤 잠이 들었다. *** 장인의 도시 바너. 수도 크래파. 대(大) 여관 침묵의 장. 하이너는 스무 살 평생을 살면서 요즘처럼 과로한 적이 없었다. 기사 시험을 준비한다고 검술을 연마할 때, 오를린 동양 무술 모임의 극기 훈련을 할 때, 동생의 병간호를 할 때, 아가씨가 사고를 쳐서 그 뒷수습을 한다고 여기저기 바삐 돌아다녔을 때 한 고생도 지금 고생에 비하면 모두 새 발의 피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바너의 악당들을 소탕하는 일.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물론 녀석들에 관한 정보를 얻는 건 쉬웠다. 정보는 륀체르가 전해주기도 했고, 아가씨께서 미인계를 이용하여 밤거리의 정보상들에게서 빼 오기도 했다. 작전 후 몸에 난 상처는 루돌프가 치료해주어서 편했다. 다들 곁에서 손을 합치니 전혀 힘들 게 없었다. 문제는 드래곤으로 변하여 작전지에 침투했을 때였다. 단지 머릿속으로는 덩치 큰 드래곤이 화염을 내뿜어 악당들을 통구이로 만드는 빤한 그림을 그렸지만, 실제 작전에선 공격 범위와 대상에 관해 엄청난 주의와 세심함이 요구되었기에 통구이가 불가능했다. 마구잡이로 공격해버리면 죄 없는 사람들마저 피해를 볼 위험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본 작전 시에 아가씨와 루돌프를 투입했다. 자신이 작전지에 인간의 모습으로 침투해 녀석들을 골라잡아서 혼쭐을 내면, 그사이 마리와 루돌프는 죄 없는 사람 혹은 피해자를 선별해 마리아 그로스의 등에 태우거나 도망을 가게 했다. 그 뒤엔 건물에다가 악질 중의 악질, 정말 지상에서 사라져야 할 최악의 놈들만 따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드래곤으로 변신하여 하늘로 떠올랐다. 드래곤으로서의 연기를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고성을 지르고 날갯짓을 몇 번을 하다가 건물 전체에 화염을 내뿜어 모두 파괴해 버렸다. 그러면 바너의 시민들은 그 모습을 마법영상구에 담아 제국 곳곳에 퍼뜨렸다. 그것으로 바너가 드래곤에 의해 쑥대밭이 된다는 증거는 만들어지는 셈이었다. 륀체르의 주문도 해결하고 바너를 정화하는 것 또한……. 그런 식으로 단 이렛날 만에 많은 일을 해냈다. 바너 전 지역의 인신매매단과 결탁한 경관청 간부가 운영하는 기예단 건물을 박살 내버렸고, 미남, 미녀로 박제품을 만들어 귀족들에게 파는 잔인한 장인들의 공동 작업실 또한 박살 내버렸다. 구원해준다며 여자들을 겁탈한 몹쓸 종교의 녀석들도 혼내주었다. 인간과 오슬의 수인족 사이에서 혼혈 아이를 낳게 하여 애완 인간으로 파는 놈들의 공장 또한 다시는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부수어버렸다. 그 덕분에 당분간은 악질의 놈들이 다시 활개를 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놈들에게 물건을 사간 귀족 놈들도 겁을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걸로 정의가 확립된 것일까? 하이너는 자신할 수 없었다. 작전을 마치고 륀체르가 제공한 장소인 침묵의 장에서 몸을 치료하고 휴식하다 보면 끝도 없는 찝찝한 기분에 시달려야 했다. 오늘 일 중 실수는 없었나? 죽을 만큼 죄지은 사람이 아닌데도 죽여버린 건 아닐까? 애당초 사람이 사람을 죽음으로써 단죄하는 게 옳은가?……. 그뿐만 아니라 변신 시에 수반되는 어마어마한 고통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아 괴로웠다. 물론 이런 속내를 드러내거나 누굴(가령 아가씨를) 원망하진 않았다. 작전을 시작하기 전에는 아가씨께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며 싫은 척했으나, 한 번 하기로 한 이상 그런 구시렁거리는 짓은 꼴사나웠다. 그래서 회의감이 들 때마다 루돌프에게 수면제를 빌려 잠을 자곤 했다. 어제도 초저녁 작전 후에 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아침이었다. 침실은 루돌프와 함께 쓰고 있었는데 루돌프는 곁에 없고 아가씨가 있었다. 아가씨는 검은 가발을 쓰고 입술을 새빨갛게 칠해놓았다. 게다가 입은 옷은 이런 겨울엔 입기 불편해 보이는 짧은 길이의 관능적인 드레스였다. 어디 가려는 걸까. 설마 또 저런 차림으로 바너의 정보상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가서 미인계를 써 못된 놈들의 정보를 사오려는 것일까? 자꾸 미인계만 쓰면 오를린 영주님의 귀에 들어가게 될 거라고 그렇게 주의를 드렸는데……. 그런데 무엇이 그리 찾고 싶은지, 아가씨는 서랍 여기저기를 여닫고 있었다. 하이너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의 턱에 난 수염만큼이나 까칠한 말투로 물었다. “아침부터 뭘 찾길래 이리 시끄럽게 하십니까?” “으응, 일어났어?” “일어났으니 이렇게 묻잖습니까.” “아침마다 까칠하네, 하이너는… 아니, 요새는 밤낮으로 까칠한 건가?” 하이너는 잠시 얼굴을 붉혔다. 티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가씨도 요사이 호위 기사의 번뇌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화제를 돌릴 필요가 있었다. “뭘 찾으시느냐고 물었습니다만.” “마리티오르.” 마리티오르는 하이너가 기사 시험을 준비할 때부터 소유한 검의 이름이었다. 검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황제 아니면 영웅담의 용사나 고명한 기사들만의 취미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시골 기사 연습생에 불과했던 하이너가 그 자신의 검에 구태여 이름을 붙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오직 하이너 형제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형, 이게 형이 쓸 검이야? 아주 멋지다! 제복을 입고 이 검을 휘두를 형 모습이 벌써 기대돼! 내가 이 검의 이름을 붙여줄게! 마리티오르! 마리를 지키는 강철이란 뜻이야! 어때? 어울리지?’ 마르틴은 영주님의 첫째 따님인 마리니시네 아가씨를 좋아하는 형을 은근슬쩍 놀린다고 그렇게 말했다. 당시만 해도 하이너는 형을 놀리면 못 쓴다고 했지만……. 마르틴의 죽음 이후, 마르틴이 지은 검명은 그대로 사용되었다. 어차피 그 후에 하이너가 정말로 마리의 호위 기사가 되었으니 퍽 어울리지 않는가. 마리를 지키는 강철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그 검을 쓸 일은 별로 없었다. 실상 오를린에선 늘 시답잖은 일들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곳 바너에 와선 몹쓸 놈들을 혼내준다고 종종 쓰긴 했지만. 그런 검을 지금 아가씨께서 찾고 있었다. 왜? 어디에 쓰려고? 검은 함부로 휘두르면 안 되는 물건인데? …… 하지만 그런 의문보다 더 앞선 의문이 있었다. 하이너는 헛기침을 몇 번 어색하게 하다가 물었다. “저기, 아가씨. 누가 가르쳐줬습니까?” “응, 뭐가?” “제… 검의 이름…… 말입니다.” 그러자 마리는 청록색 눈을 깜빡이며 무슨 당연한 질문을 하느냐는 듯 되받아쳤다. “그야 네 검이니까? 아니야?” “예?” “너는 나의 호위 기사잖아? 나를 지키는 사람이니까, 네 검 또한 나를 지키는 데 쓰는 거고. 그래서 내가 마음대로 마리티오르(마리를 지키는 강철)라고 부른 건데? 왜?” 하이너는 정말 아가씨다운 발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발상이 정답이라 기분이 묘해졌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마리는 하이너의 곁에 앉아서 불만인 양 물었다. “혹시 내가 지은 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니면 검 이름이 원래 따로 있었던 거야?” “따로 있기는요.” “마리티오르라는 검명, 참 마음에 들지? 응?” “…….” “응응?” 마음에 들고 말 것도 없이 처음부터 마리티오르라는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게 영 쑥스러운 하이너는 고개를 딴 데로 돌리며 대답을 피했다. 마리는 그런 호위 기사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다가 다시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사이 하이너는 침대 매트 아래로 손을 내리고 있었다. 최근 검을 자주 쓰면서 검과 한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잘 때도 이렇게 곁에 두고 잤다. 아가씨가 원하시니 검을 드려야겠는데, 그 전에 이유는 알아야 했다. “제 검으로는 뭘 하실 생각입니까?” “응. 정보를 사러 가는 데 필요해.” 하이너는 기가 차서 마리를 보았다. 정보를 사러 가려면 돈이나 미인계가 필요하지, 어째서 남의 검이 필요한가? 륀체르가 돈을 안 주나? 그래서 남의 검을 팔아 써야 할 정도인가? “아가씨! 기사의 검을 멋대로 팔려고 하시다니요. 제정신입니까?” “앙? 팔다니? 그럴 생각 없는데?” “그럼 어째서 정보를 사러 가는 데 제 검이 필요한 겁니까?” 마리는 이유를 설명했다. 오늘 얻어야 할 정보는 마검 제조장인 사괴탄에 관한 정보다. 사괴탄은 평소 검 쓰는 데 능력이 뛰어난 자의 영혼을 빼내어 제가 만드는 검에 강제로 봉인해버린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 소문은 단지 소문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이미 ‘마검 제조장인’이란 호칭이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가? 그가 제조한 검이 지능을 가지고 사람을 벤다는 제보가 바너를 포함 제국 전역에서 속출했다. 그러한 이유로 륀체르는 마리에게 사괴탄과 사괴탄의 제조장을 없애라고 부탁해두었다. 마리는 일단 검 동호회부터 다니면서 검을 좀 다룬다 하는 이들과 어울려 지내며 사괴탄의 꼬리를 밟을 예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검을 지니고 가는 것은 필수라 할 수 있었다. 사정을 들은 하이너는 마리티오르를 빼내지 않고 더욱 깊숙이 넣었다. 지금 들은 이유라면 절대 마리티오르를 빌려줄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빌려드릴 순 없을 것 같군요.” “어째서?” 어째서냐고? 정녕 몰라서 묻는가? 사괴탄이라는 무시무시한 작자의 정보를 그런 식으로 확인한다는 것부터가 틀렸다. 일단 검 동호회엔 검을 잘 쓰는 이들이 오지 않는다. 그것은 시골 오를린에서도 마찬가지고 이런 장인의 도시 바너에서도 마찬가지다. 검에 능력이 있는 자들이 있다면 황도 로귀하르트에서 정식 기사나 병사가 될 테지, 뭐하러 이런 장인의 도시에 있겠는가? 아마도 검 동호회에서는 비싼 검을 과시하려는 졸부들 아니면 그저 수집이 취미인 자들만 모여들 뿐일 것이다. …… 물론 비싼 검을 과시하려는 졸부들에게서 마검에 관한 정보를 얻고 덩달아 사괴탄의 정보도 얻을 수 있겠지만……. 하이너는 그럴 가능성을 생각하기 싫었다. 그냥 싫었다. 하이너는 아가씨의 딱 붙는 드레스를 못마땅한 듯 보았다. ‘남자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에서 저런 야한 차림으로 가다니, 제정신인가? 아무리 미인계가 효과적이라 하지만 아가씨께서는 너무 위기감이 없군.’ 만에 하나 흉흉한 심보를 가진 녀석이 어디 데리고 가서 나쁜 짓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절대로 마리티오르를 빌려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딴 정보 수집 작전을 세울 시간에 황도에 가서 제국 기사들을 상대로 수소문하는 게 훨씬 빠르고 낫다고 큰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일이 커질 것 같아서 참았다. 그런 마음도 모르고 마리는 호위 기사의 앞으로 쫑쫑 걸어와 연달아 물어댔다. “어째서 안 빌려주는데? 응?” ‘안 빌려주는 게 아니라 못 빌려주는 거라고, 이 답답한 아가씨야!’ “왜 대답을 안 해? 내가 검 상하게 할까 봐 겁나서 안 주는 거야?” ‘검이 상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고!’ “자꾸 이런 식으로 치사하게 나올 거야?” 마리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는 호위 기사가 답답하여 돌아서며 외쳤다. “흥! 주기 싫으면 그만두라지! 네가 빌려주든 말든 나는 동호회에 나가서 그들과 어울릴 필요가 있다고. 정보가 나온다는 가능성을 무시할 순 없잖아?” 하이너는 이럴 때만 세심해지는 아가씨가 미웠다.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퍽 큰 가능성이겠습니다……, 그래서 뭘 들고 가실 겁니까? 과도? 손톱칼? 눈썹칼?” “검은 내 친구 륀체르에게도 차고 넘쳤어!” 그 순간 하이너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에 휩싸여 눈이 돌아가는 걸 느꼈다. 그는 마리의 손목을 거칠게 잡았다. 비웃음이 머물렀던 그의 눈빛은 돌연 사납게 변해버렸다. “놔! 영원의 봄에 갈 거야!”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뭐?” 하이너는 마리티오르를 빼 들고 침대 밖으로 나가 거울 앞에 섰다. 변복이 시작되었다. 그는 외출할 때처럼 마스크와 모자, 재킷을 갖춰 입었다. 대체 어딜 가려고 그러는 걸까. 마리는 마리티오르를 검집에 넣는 그에게 물었다. “뭐해?” 하이너가 모자를 더욱 깊이 쓰고 객실을 나서며 대답했다. “검 동호회, 제가 갑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00030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네가?” 하이너는 침묵의 장에 상주한 정보상에게 찾아갔다. 마리가 그를 쪼르르 쫓아갔다. “정보를 사려고 합니다.” “말해보시오.” “크래파 지역 검 동호회 모임 장소와 시간.” “흐음.” 정보상은 바너에 떠도는 정보를 거의 파악했고, 신문에 나돌아다니는 드래곤의 인간변신체 즉 하이너의 모습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하이너가 마스크와 모자로 모습을 가려서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마침 딱 하나 들어온 정보가 있소만, 가격이…….” 흥정이 시도되었으나, 하이너는 단칼에 거부했다. “실상 이런 정보는 정보 축에도 들지 않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크래파 광장 게시판에 가서도 얻을 수 있는 정보 아닙니까? 거기까지 가는 게 몹시 귀찮아서 그러니 1자일로 합시다.” “으흠…….” 정보상은 탐탁지 않았지만, 하이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어서 못 이기는 척하고 정보를 넘겼다. 1자일이라면 크래파 광장 게시판까지 마차로 세 번은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비용이었다. 마리는 그런 호위 기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나한테 말해달라고 하면 되지. 왜?’ 마리는 하이너에게 따지려고 다가갔다. 그러나 정보를 얻은 하이너는 아가씨와는 말도 섞기 싫다는 뒤 돌아보지 않고 침묵의 장을 나섰다. 기분이 상한 마리는 볼을 잔뜩 부풀리며 팩 돌아섰다. ‘흥! 너 같은 무뚝뚝한 남자가 가서 정보를 얻으려 하면 그자들이 퍽 잘 가르쳐주겠다!…… 몰래 따라가 볼까?’ 마리는 마리아를 불러 같이 나가기로 했다. *** 그 시각 마리아는 루돌프와 함께 여관 측에서 제공한 간식을 먹었다. 마리아는 언젠가 주인 아가씨와 함께 영원의 봄에서 고급 과자를 대접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경험한 쿠키 맛에 반하여 이렇게 종종 인간의 간식을 즐기게 되었다. 루돌프는 과자를 오도독 오도독 씹고 삼키는 마리아를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배고팠나 봐요? 많이 드세요.” “…….” ‘정말 보면 볼수록 귀여운 누나네.’ 루돌프는 선홍빛 무서운 눈동자의 마리아 그로스를 처음에는 이상하고 특이하다고 느꼈으나 이레 동안 함께 지내다 보니 그녀의 성격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점점 마음을 열었다. 소년은 마리아에게 가장 맛이 좋은 쿠키를 골라 건네며 수다를 떨어댔다. 화젯거리는 주로 고향의 이야기였다. 스승과 함께 있을 땐 입도 꿈쩍하지 않던 이 소년은 희한하게도 마리아 그로스라는 미소녀의 앞에서는 수다쟁이로 변하곤 했다. “오를린에도 종종 눈꽃이 피곤하거든요. 눈꽃 씨앗이 하늘에서 내리는 걸 본 적이 있어요? 그건 정말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요. 신이 세상에 요정가루를 뿌린 것 같다니까요. 저기, 언제… 언제 한 번 고향으로 함께 돌아가는 날이 온다면 꼭 같이 보고 싶…….”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마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인 아가씨 마리가 함께 밖에 나가자고 메시지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루돌프는 혹여 자기 수다가 마리아에게 너무 지겹게 들린 건 아닌가 걱정했다. “앗, 죄송해요! 제 이야기가 지루하죠?” 마리아는 예의 그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어디 가세요?” “…….” “이제 간식은 다 먹은 거예요?” “…….” 마리아는 언제나 그렇듯 침묵했다. 루돌프는 그녀에게서 대답 듣는 것을 금세 포기했다. 하긴, 이 누나가 언제 사람의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악당 소탕 작전을 하는 위급한 상황에도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적이 없다. 언제나 소년 자신만 일방적으로 수다를 떨어댔다. 루돌프는 객실 밖으로 나가는 마리아의 뒷모습을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보았다. ‘나도 누나 따라가고 싶은데. 에이, 됐다. 그냥 책이나 봐야지.’ 최근 기사님의 상처를 아물게 해준다고 약학, 의학 다방면의 공부를 했다. 이 공부는 매우 중요하다. 악당 소탕 작전에 참가하고 기사님의 몸을 고쳐주면 아가씨께서 꽤 많은 급여를 주셨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일에 참가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애당초 이 여행의 목적이 무엇인가. 드래곤 링클을 사서 스승님께 되돌려주는 것! 그러기 위해서라면 돈 모으기는 필수다! 루돌프는 이 모임의 일원으로 지내면서 앞으로 드래곤 링클을 살 정도로 큰돈을 벌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다른 허드렛일보다 큰돈을 버는 건 사실이라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먼 훗날을 위해서라도 의학은 배워두는 것이 좋아 부지런히 공부할 생각이었다. 기초 의학서를 펴들던 루돌프는 문득 고향의 스승님 한스 레 하인첼을 떠올렸다. 술과 사람을 좋아하는 스승님은 여전히 오를린에서 밤마다 주정뱅이들과 어울려 지낼 게 분명하리라. ‘잘 계시나….’ *** 바너의 수도 크래파. 영원의 봄. 흰 눈이 가득 내려앉은 지금 영원의 봄은 늘 그래 왔듯 인조 식물로 화려한 색깔을 자랑했다. 륀체르는 어젯밤 인조 식물 곳곳에 그윽한 자연의 향기를 내는 향수를 뿌리고 먼지를 닦는 등 원예(?) 활동을 하다가 잠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챙 모자를 쓰고 여행자 차림으로 크래파의 밤거리를 다니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살피고 겸사겸사 창녀들 가슴 만지며 노는 것을 일과의 마지막으로 했다. 그런데 이젠 달라졌다. 최근, 그러니까 오를린에서 어여쁘고 입이 거친 아가씨가 온 뒤로는 말이다. 저녁마다 아가씨와 비밀 정원에서 티타임을 즐기거나 영원의 봄 곳곳을 구경하게 해주며 이런저런 정보를 주고 대화 나누는 것에 재미가 붙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알게 된 게 있었다. 오를린 출신 금발 아가씨 마리니시네의 진정한 모습에 관하여! 처음에는 백치에다 무능하고 말괄량이일 뿐만 아니라 바람둥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인상이 달라졌다. 가끔 얕은 지식수준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 모습이 ‘일부러 연기하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유식함을 자랑할 때가 있었다. 특히 점성술, 천문학, 마법, 연금술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러했다. 그리고 아주 무능력한 것도 아니었다. 뒷조사를 시킨 사람에게 전해 듣기론, 악질 장인 길드 건물을 박살 내고 강간범 패거리를 벌하고 인신매매를 하는 이들을 혼내주는 등 모든 작전에서 그녀의 소소한 공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게다가 시골 아가씨 출신이 무려 드래곤을 호위 기사로 부리고 있으니 그 자체로 대단하지 않은가? 그 내막이야 어찌 된 것인지 알 수 없어도 가장 강력한 힘을 휘두르는 생물을 종으로 부리는 것은 인정해줘야 할 점이다. 듣자하니 드래곤이자 호위 기사의 성격이 보통 까칠한 게 아니라던데 말이다. 여러모로 그녀가 충실히 해준 덕택에 지금 바너는 대외적으로 ‘드래곤에게 시달리는 힘든 도시’로 알려졌다. 그 결과 자신은 황태자가 지시한 작전-오슬의 수인족을 움직여 로젠플라드를 침략하는 것-을 못한다고 하소연하듯 배짱을 부릴 수 있었고, 정치적으로 곤란한 입장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게다가 바너의 인간쓰레기도 청소하고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정말이지 마리니시네는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능력까지 출중하여 미워할 구석이 없다. 기분파인 줄 알았는데 작전이 시작되면 계획에 따라 차분하게 움직일 줄 알았고, 떠도는 말처럼 바람둥이 같지도 않다. 자기 외모에 관해 하늘을 찌를 듯 자신감이 넘치고 그 미모를 미인계로 이용할 줄은 알지만, 특별히 남자들을 따로 후리거나 가지고 노는 것을 본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 모든 평가가 단 이렛날 동안의 작전으로 파악된 것이라 조금 성급하단 느낌은 지울 수 없겠지. 중요한 건, 보면 볼수록 이 여자를 더 알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는 것이었다. 륀체르는 잠에서 깨어난 직후 내내 마리의 생각을 하며 히죽 웃었다. 그러다가 그가 여자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을 퍼부었다. “빨고 싶은 가슴이라니까.” 인간을 평가하는 무수한 명예로운 말 중 하필이면 그러한 음탕한 말을 골라 쓴 륀체르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집사에게 외출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이번 외출은 검 동호회에 가기 위한 것이다. 이에 집사는 인조 플래티르콘(가장 강한 금속) 검을 챙겼다. 인조가 아닌 진검-플래티르콘 소재-또한 륀체르에게 차고 넘쳤지만, 그러한 검은 밤거리에 가지고 가려면 위험하다. 검을 챙기는 집사에게 갑자기 륀체르가 하나 더 지시했다. “하나 더 챙겨.” “예?” “숙녀용으로.” 숙녀용 검을 하나 챙기라? 집사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오늘 마스터는 검 동호회 모임을 자기 소유의 식당에서 치르게 예약해두었다. 검 동호회엔 관심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데다가 숙녀용 검을 준비하라는 것은……. ‘후후. 마스터께서 마리니시네 양에게 푹 빠지셨나 보군. 분명 그제도 어제도 만나셔놓고 오늘 이런 모임까지 주최하여 그 핑계로 또 만나시려고 하다니.’ 검 동호회 모임은 명색만 그러할 뿐 필시 마스터의 청춘사업 장이 될 것이 분명했다. 검이 없는 마리니시네 아가씨에게 빌려주며 이런 저런 이야기꽃을 피우시겠지……. 그렇게 생각한 집사는 륀체르가 소유한 검 중 숙녀가 들고 다니기에 가볍고 좋은 디자인의 검을 골라 준비했다. 륀체르는 마차에 몸을 싣고 모임 장소에 갔다. 영원의 락(㦡)이라 이름 붙인 그 식당은 저녁 시간에 화려한 무대가 펼쳐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식당의 중앙 무대에서는 황도의 유명한 가수들이 와서 공연하는 일이 많았고, 때로는 음악을 곁들인 연극이 펼쳐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이곳은 륀체르의 지시로 다른 공연단이나 손님을 받지 않고 검 동호회 사람들만 입장할 수 있다. 륀체르가 도착하기 전부터 그곳은 모든 준비가 철저히 되어있었다. 차분하고 세련된 음악이 흘렀고, 테이블 가득 일급 요리와 훌륭한 술들이 가득 찼다. 식당 가운데는 검술 대련을 위한 무대로 꾸며져 있었는데, 이는 실제로 대련을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모임의 분위기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륀체르가 한눈에 보기에도 모임 회원 중 실제 대련 능력을 갖춘 이들은 많아 보이지 않았다. 하나같이 사치스러운 졸부의 차림을 하고선 수집물을 자랑하는 목적으로만 온 게 눈에 보일 정도이니……. 그런데 회원들 또한 륀체르를 그와 비슷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그들은 바너의 실세란 자의 외모를 단번에 알아보고 저마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기 우리 모임의 새로운 물주께서 오시는군.” “갑자기 가입한 이유가 뭐지?” “모르지. 어쨌거나 여자보다 예쁘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네. 바너를 삼킨 이라면 조금 더 독사 같이 생겼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얼굴만 예쁜가. 저 몸을 보라지. 남자 몸이 뭐 저리 날씬해? 저래서 검이나 제대로 들… 헉! 저것 좀 봐! 세상에! 저건 플래티르콘으로 만들어진 검집 아닌가? 그렇다면 검도 플래티르콘으로 만들었단 건데 저 무거운 걸 어찌 저리 가볍게 들지?” 회원들은 륀체르가 보기보다 힘이 좋은가보다 하고 있었지만, 실상 륀체르가 가지고 온 플래티르콘 검은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인조 검이었다. 륀체르는 장중의 회원들에게 정중히 인사하며 미소를 가장한 조소를 흘렸다. ‘명색이 검을 좋아한단 이들이 진짜랑 가짜도 구분하지 못하지? 얼간이들이라니까. 하지만 뭐… 상관없지.’ 오늘 이 모임의 목적은 검에 관한 담소가 아니라 오를린의 마리니시네와의 담소였다. 회원들은 그저 들러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비밀 정원이나 영원의 봄에서 작전을 핑계로 대화를 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한 번쯤은 이렇게 밖에서 그녀를 만날 핑계도 있어야 했다. 륀체르는 그녀가 올 때까지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개중엔 검 장인(장인조차도 플래티르콘 검이 가짜란 걸 알아보지 못했다.)도 있었는데, 검 장인은 바너의 리더 격인 륀체르를 붙잡고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아, 요새 정말 죽을 맛이지 말입니다…….” 검 장인의 주요 수입원은 장난감 검으로, 평범한 장난감 검은 아니었다. 그것은 값비싼 보석과 경량화 마법을 건 귀금속으로 만들었고 사는 사람도 주로 귀족들이었다. 귀족들이 그런 사치스러운 검을 사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애완 인간으로 키우는 자그마한 인간-오슬의 수인족과 인간의 혼혈아-에게 장식도 하고 장난감도 줄 겸 그 고가의 검을 사 갔던 것이다. 일종의 귀족들에게만 부는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바너에 드래곤이 나타나 애완 인간 공장을 불 질러버린 사건이 일어나버렸고, 그 결과 애완 인간 공급이 줄어들어 자연스럽게 장난감 검의 수요도 줄어들게 될 거란 예상이 나돌았다. 그러하다 보니 검 장인의 입장에선 갑자기 나타나 바너를 휘젓는 드래곤이 얄미운 존재가 아닐 수 없으리라. 검 장인은 륀체르에게 바너의 책임자나 마찬가지인 당신이 뭔가 수단을 취해야 할 거라며 우는소리를 해댔다. 지금 드래곤을 견제하고자 황도에서 마력기갑 부대원을 고작 두 명만 지원했는데, 그 두 명으로는 생색내기일 뿐이라며 부대 전원을 지원 요청해야한다고, 그렇게 해서라도 드래곤을 물리쳐야 한다며 열을 냈다. 조용히 듣던 륀체르는 정색하며 대답을 시작했다. “이거, 이거, 도무지 장인인지 저질 상인인지 모를 발언을 하시는군요. 오히려 저는 당신과 달리 드래곤의 행보에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만…. 바너에서 몹쓸 놈들을 없애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드는 것은 훗날 바너의 상업 발전과도 이어지는 길이니까요. 또 그게 제국의 발전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제아무리 바너 장인, 수공예인들의 상업을 보호해야 하는 입장라고는 하나 인간의 길을 저버린 자들과의 거래까지 보호해야 할 의무는 없지요. 애완 인간이나 키우는 귀족들과의 거래는 예전부터 지양하려 그 방법을 모색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정 앞으로 매출이 걱정되신다면 다른 검을 만드는 데 주력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검 장인의 얼굴은 똥을 맞은 듯 굳어졌지만, 무려 바너의 영주보다 실 권력이 강한 륀체르의 앞이라서 입도 벙끗할 수 없었다. 대신 속으로만 구시렁거릴 뿐이었다. ‘흥! 제 아비가 얼마나 인간 같지도 않은 자들과 거래하고 모의하여 바너를 장악했는지 빤히 알면서 정의를 운운하는군. 제 놈도 역겨운 귀족 놈들과 거래는 더 많이 했으면서 말이지! 뭐, 하긴…… 자기도 어쩔 수 없으려나.’ 큰 모임이 아니라서 슬쩍 말해봤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사소한 모임에서는 말이 더 쉽게 새어나가는 법이었다. 속으로는 얼마나 더러운 생각을 하든 겉으로는 깨끗하고 정의로워 보여야 하는 게 륀체르와 같은 이들의 역할 아닐까. 륀체르가 겉으로는 저렇게 굴어도 곧 드래곤을 몰아낼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검 장인은 자리를 먼저 파했다. 그렇게 모임이 약 한 시간 정도 이어지고 있었다. 마음에도 없는 자들과 말을 나눠야 하는 륀체르는 슬슬 지겨워졌다. ‘아니, 이 아가씨는 왜 아직 안 오는 거야?’ 원래라면 한 시간 전에 와야 할 마리가 오지 않으니 무슨 일인가 싶었다. 갑자기 작전이 생겨 드래곤과 나선 건가? 아니면 이곳에 오는 중에 무슨 사고라도 당했나? 아니면 갑자기 백치 지수가 높아져 모임을 가야 한단 사실을 새까맣게 잊은 건……? 기다리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는 하인에게 시켜 그녀의 소식을 알아오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직전, 저 구석의 한 남자에게 눈이 갔다. 건장한 체격에 점잖은 재킷을 입고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남자인데, 짙은 눈썹과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수염만 아니면 더 젊어 보이고 반듯해 보이는 외모이거늘…. 륀체르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 어디서 많이 봤는데?’ 저 남자를 어디서 봤는가 하고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다 우연히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남자는 륀체르를 향해 눈인사했다. 그런데 눈인사가 비틀린 웃음으로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느낌이 썩 좋지가 않았다. 금방이라도 눈빛으로 사람을 찔러죽일 것 같은 살기가 어려 보였다. ‘……아!’ 뒤늦게야 륀체르는 남자의 정체를 기억해냈다. 바너의 신문에 몇 번 얼굴이 알려진 자, 바너의 악당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자, 오를린의 아가씨가 데리고 다니는 충실한 호위 기사……. ‘드래곤!’ 륀체르의 노골적인 시선이 불편한 하이너는 매서운 눈빛으로 경고하고 있었다. 아는 체 해봐야 피차 좋을 것 없어, 라고. ============================ 작품 후기 ============================ 허헛! 윈디 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 이 글을 봐주시고 추천해주시고 코멘트 달아주시는 분들도 모두 감사합니다! 제가 모 출판사에 중단편 원고를 내야 할 게 있어 당분간은 일일연재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양해바랄게요 ㅠㅠ 00031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사실 하이너는 륀체르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주먹을 한 방 날리고 싶었다. 륀체르라는 저 교활한 녀석은 아가씨께 사괴탄에 관한 정보를 알아오라고 지시하며 이런 모임을 추천해줬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놓고 자기가 이 모임에 오다니? 사실은 사괴탄에 관한 정보는 이미 제 손에 쥐고 있는 것 아닌가? 그간 명색이 정보 제공자였으면서 말이다. …… 결국엔 이런 모임은 그저 아가씨를 만나기 위한 륀체르의 작은 핑계에 불과할 뿐이리라. ‘하여간 계집애 같이 생겨선 마음에 안 드는군.’ 그렇지 않아도 그동안 쓸데없는 일로 아가씨를 영원의 봄에 오라 가라 부른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쪼르르 달려가는 아가씨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런 귀찮은 일까지 만들어 아가씨를 만나려고 하다니, 남자가 되어서 만나고 싶으면 솔직하게 만나고 싶다고 해야 하지 이런 핑계로 만나는 건 다 뭔가? 아무래도 륀체르의 저러한 유치함 속에는 엉큼한 욕심이 도사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게 밉다고 시비를 거는 것은 귀찮고 성가신 일. 지금 보내는 눈빛만으로도 륀체르에게 경고하기엔 충분했다. ‘가야겠군.’ 여기까지 달려온 수고가 있으니 사람들과 적당히 어울리는 척하면서 식사나 하고 있었지만, 배를 두둑이 채운 지금은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생각을 마친 하이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여태 함께 대화하던 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사람들은 모임에 처음 나타난 검은 수염의 청년(하이너)이 벌써 헤어지려 하자 서운했다. 이 청년 덕분에 적당히 분위기가 띄워졌는데 이렇게 보내긴 싫었다. 게다가 청년은 바너에 나타난 드래곤에 관해 우스갯소리도 잘했다. ‘정의의 드래곤에게 누가 피로 해소제라도 줘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아마도 사람들이 너무 기대해서 그 드래곤도 피곤할 게 분명해요. 참 그렇죠, 드래곤도 지금 한창때일 거라 연애할 시간은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마치 당장 무대에 서서 좌중을 웃겨도 될 전문화자 같았다. 게다가 이 청년 덕분에 화젯거리가 풍부해진 것도 좋았다. 청년은 검을 수집하여 자랑만 할 줄 아는 다른 자들과 달리 정말 검을 다룰 줄 알았고, 동양의 검술에 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잡아도 떠나려 하니,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청년을 포기해야 했다. 대신에 다음에도 자주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하이너는 이곳에 다시 올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며 뒤돌아섰다. 하이너가 식당을 나가려는 낌새에 륀체르는 뒤따라 나섰다. 그는 언젠가 하이너가 여관 숙박부에 거짓으로 쓴 이름을 부르는 장난도 쳤다. “이여어! 와트프라우어 씨가 여긴 웬일인가?” ‘와트프라우어 씨 좋아하네.’ 하이너는 자기를 아는 체하는 이의 목소리를 가능하면 무시하고 싶었다. 그의 걸음은 더욱더 빨라졌다. 그럴수록 륀체르는 싱긋 웃으며 더욱 빨리 뒤쫓아 갔다. ‘젠장!’ 하이너는 결국, 식당 입구 계단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무뚝뚝하게 물었다. “왜 따라옵니까?” 잘 벼린 검처럼 날이 잔뜩 선 목소리였다. 마치 시비 걸면 죽여 버리겠단 경고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륀체르는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하이너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댔다. 곱게 자란 아가씨 손처럼 희고 가느다란 손이 하이너의 탄탄한 어깨를 톡톡 두 번 두드렸다. “으음, 자네를 따라가면 와트프라우어 부인 아니, 그러니까 자네 아가씨 마리니시네 양, 아니, 내가 고용한 숙녀분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닌가?” 하이너는 비웃으며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글쎄요. 아가씨는 당신과 만날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만.” “오호, 어째서?” “바쁘신 분이니까요.” “내가 알기엔 그렇지 않은데? 아, 물론 자네 아가씨가 우리 영원의 봄에 들른다고 바쁘긴 했지.” 순간 하이너의 어금니가 꽉 깨물어졌다. 그런 미묘한 변화에 륀체르는 즐거워하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자네는 언제부터 아가씨의 시간을 관리하는 사람이 되었지? 꼭 하인 같구만. 원래 호위 기사가 아니었던가?” 륀체르는 괜스레 나이 든 사람들의 권위적인 말투를 사용하며 열 살이나 어린 하이너의 심리를 꾹꾹 눌러보고 있었다. 하이너는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지만, 륀체르가 꼭 하나 알아야 할 것이 있어야 할 것 같아 똑똑히 이야기해주었다. “호위 기사 맞습니다. 다만 ‘사적으로 좀 더 가까운’ 기사, 쯤 되겠죠. 어쨌든 더는 따라오지 마십시오.” 그러나 륀체르는 무시하고 하이너와 나란히 서서 걸으며 그의 옆모습을 슬쩍 보았다. 이 스무 살의 호위 기사란 자의 표정엔 남모를 자부심과 건방기가 묻어나 있었다. ‘사적으로 가까운’이라는 표현을 말할 때부터 특히 그랬다. 륀체르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봐야 호위 기사가 호위 기사지. 아, 참. 자네 말이야. 마침 할 말이 있었네.” “……?” 륀체르는 주위를 살피며 한결 줄어든 목소리로 속삭였다. “작전 말이지. 박제 공장을 그런 식으로 불 질러 버리는 건 너무 경솔한 행동이지 않았나 싶네만?” 악당 소탕 작전에 관한 말이 나오자 하이너의 걸음이 다시 멈추었다. 지난번에 인간 박제품을 만드는 자들을 죽여 버린 적이 있다. 그들은 아름다운 사람이라면 성별과 나이를 막론하고 잡아다가 박제로 만들어 파는 미친 장인들이었고, 하이너는 그런 자들이 일하는 공장 역시 처참하게 때려 부수고 불 질러 버렸다. 그런데 그 일이 경솔한 행동이라니? 륀체르의 계산적인 목소리가 귀를 자꾸만 자극했다. “때론 정의감보다 현실감이 더 앞서야 할 때도 있는 법이네.” “현실감? 앉아서 정보나 주고 지시만 내리는 당신이 현실감을 말합니까?” 그땐 작전도 작전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악당들에 분노가 치솟아 그렇게라도 파괴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것은 기사 시험을 준비하면서 공부한 표면적인 정의감, 어릴 때부터 주입된 평범한 정의감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동생 마르틴의 병간호를 오랫동안 하면서 인간 생명의 소중함을 느꼈다. 아픈 사람에겐 숨을 쉴 수 있는 하루하루가 모두 소중하단 걸 깨달았고, 그러므로 아프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역시 값진 것이라고 느꼈다. 아니, 그것은 단편적인 느낌에 그친 게 아니라 살이 느끼고 뼈에 사무치는 체득이었다. 그런 밑바탕이 때문인지 죄 없는 사람을 박제품으로 만드는 놈들에 대한 분노가 크면 컸지 절대 줄어들 수는 없었다. 그런 분노가 현실과 타협하거나 인내할 성질의 것이란 생각도 당연히 들지 않았다. “이봐, 앉아서 정보만 주는 내 일이 쉬워 보이는가? 그 정보를 얻는 것에도 어마어마한 위험이 따른다고.”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녀석들을 죽이고 녀석들의 건물을 불지를 때의 분노가 다시 온몸을 잠식하는 것만 같아 하이너는 잠시 숨을 골라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륀체르의 시비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장인이기도 하지만 장사꾼이기도 하지.” “장사꾼? 그래서 박제품을 더 비싼 가격에 팔기라도 하려 했습니까?” 되묻는 하이너의 눈빛에 흉흉한 살기가 어려 있었다. 끝도 없이 검은 눈동자가 살기를 뿜으니 마치 저승의 사자의 눈 같았다. 그런 눈동자에 륀체르의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가 마주했다. 다른 견해를 가지고 서로를 마주 보는 두 남자의 눈빛은 금방이라도 강렬한 불꽃을 터뜨릴 것 같았다. “그 박제품을 팔아 이익을 취하려고 했느냐고 묻잖습니까?” “오, 그 끔찍한 것들을 팔다니… 말도 안 되지! 그거 빼고 다른 걸 말하는 거야. 나는 장인과 장사꾼이라는 두 직업의 종합 대리인으로 바너를 ‘운영’하고 있으니 항상 득과 실을 따질 수밖에 없지. 자네가 불태워버린 그 공장은 건물 자체로 봤을 땐 제법 유서가 깊어. 새로 건축하기도 어렵고 말이지. 그런 건물의 자재나 기계 또한 한두 푼 하는 게 아니었어. 무슨 말인지 알겠나? 박제품을 만드는 녀석들이 죄악이라고 그 녀석들이 쓴 시설이나 도구마저 죄악은 아니란 말이네.” “역시. 결국엔 당신이 꿀꺽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깝다는 말을 줄여서 하는군.”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나는 단지 자네가 다음부턴 그런 무식한 방법은 쓰지 말고 조금 더 생각이란 걸 하…….” “난 네놈의 하인이 아니야!” 하이너는 소리를 지르며 륀체르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륀체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이 호위 기사 아니, 이 드래곤의 나이 이제 고작 스무 살. 드래곤으로 치면 스무 살은 아기나 마찬가지다. 인간으로 쳐도 한창 치기 어린 나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어린 수컷이 이토록 포악하게 나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은 일이었다. “이런 이런. 물론 자네는 내 하인이 아니지.” 륀체르는 말을 하다가 잠시 멈추곤, 멱살을 잡은 하이너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제 의복이 구겨진 걸 바르게 정리하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하인이니 주인이니 하는 관계는 싫더군. 일방적으로 부리고 일방적으로 종속당하는 삶만큼 억울하고 추한 게 어디 있나? 모든 인간관계는 주고받는 것이 맞아떨어져야 아름다운 법이지. 난 한 번도 자네를 내 하인이라 생각한 적이 없어. 자네는 작전 한 건당 2000 자일의 급여를 받는 피고용인이라 할 수 있지. 일종의…… 그래. 보수를 받고 정의를 행하는 용사님. 절대 내 하인이라 할 수 없는 관계지. 아무래도 자신을 하인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자네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 하이너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가씨가 말해줘서 알고는 있다. 륀체르 덕분에 침묵의 장에서 신변 보호를 받으며 묵을 수 있었고, 작전 건당 2000 자일의 급여를 받을 수 있었으며, 작전 규모당 많게는 5000 자일 적게는 500 자일의 특별 수당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러한 돈이 모두 아가씨의 여행 자금, 그리고 루돌프의 급여로 이용됐다. 아가씨는 대륙 정복을 위해선 돈이 많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루돌프는 값비싼 드래곤 링클을 사서 제 주인이자 스승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목적이 있지, 제아무리 자신이 돈에 욕심이 없는 호위기사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의 사연을 외면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아가씨와 루돌프가 생판 남이면 몰라도 말이다. 그랬기에 륀체르에게서 돈을 받는 게 기분 나쁘더라도 기를 쓰며 반대할 수는 없었다. ‘재수 없는 녀석!’ 하이너는 륀체르와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다시 조용히 길을 걸었다. 륀체르의 말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자고로 피고용인은 고용인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어. 그러니 다음 작전엔 그런 무식한 파괴는 일삼지 말게. 알겠나?” “…….” “대답?” “…….” “대답? 음?” 그때였다. 갑자기 그들의 주변에 달콤하고 상큼한 향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한 여인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이런 겨울에 입기엔 너무 추워 보이는 짧은 드레스를 입었는데, 그 디자인이 훌륭한 몸매를 관능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차림만으로도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물결치는 금발, 빨간 입술은 모든 이들의 시선을 아예 훔쳐버리고 있었다. 하이너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가씨…….” 그녀, 마리를 본 륀체르의 눈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마리는 륀체르를 흘겨보며 쏘아붙였다. “내 기사에게 감히 겁도 없이 대답을 재촉하는군?” 그녀는 감히 드래곤에게 대답을 하라 마라 요구하는 륀체르의 건방짐을 조소했다. 륀체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명을 부르며 인사했다. “와트프라우어 부인, 모임에 지각을 하시다니요?” “지각? 마치 나를 기다린 것처럼 말하네?” “뭐, 그렇다고 봐야 하지.” “어째서?” “그야 이 모임 주최자가 나니까?” 순간 마리가 볼을 부풀리며 화난 표정을 했다. 륀체르의 입가가 씩 올라갔다. ‘화난 표정도 어찌 저리 귀엽지?’ 마리가 륀체르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륀체르를 죽일 듯이 노려본 그녀는 그의 다리 가운데를 무릎으로 사정없이 차버렸다. “으윽!” 하필이면 그런 곳을 공격하다니, 어째서……. 지켜보는 하이너마저도 그 고통을 느끼는 듯 얼굴을 살짝 구겼다. ‘하여간 아가씨는…… 그렇게 정숙하지 못한 행동은 하지 말라고 말렸는데.’ 륀체르는 마리에게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따지는 듯 보았고, 마리는 그런 륀체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고약한 길드장 같으니. 자기도 모임에 갈 거면 얼마든지 사괴탄의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단 말이잖아? 그런데 꼭 나를 시켜 가보라 해야겠어?” 륀체르는 고통이 얼른 잠잠해지길 빌며 겨우 변명했다. “그야 와트프라우어 부인께서 미인계를 쓰셔야 나보다 더 정보를 잘 얻어갈 거라 생각했기에…….” “뭐?” “…… 는 거짓말이고.” 륀체르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히죽 웃었다. 아직도 다리 사이에 얼얼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는 이 순간만큼은 제 음흉한 속내를 굳이 감추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바깥에서 널 만나는 것도 괜찮잖아?” 순간 하이너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마리의 대답 또한 그의 얼굴을 더욱 싸늘하게 만들었다. “풉, 하여간 99.9점짜리 얼굴은 알아서.” ‘아가씨는 진짜!’ 하이너는 이 순간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함께 여행해준다면 애인이 되어준다던 아가씨가 아니었던가? 물론 그걸 정말 믿은 건 아니었고 그런 말을 보상으로 여행을 시작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가씨가 이렇게 다른 남자와 농담을 주고받는 것은 불쾌한 일이다. 상대가 괜찮은 남자라면 몰라도! 륀체르는 마리의 대꾸가 99.9점짜리 센스라고 감탄하며 솔직하게 말했다. “오늘 밤 어때? 나랑, 응?” 마리는 뭐 나쁘지 않단 식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길드장 당신이 사괴탄에 관한 정보를 알아온다면야.” 륀체르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답했다. “아, 그건 걱정하지 마. 사실 나한테 다 있거든. 사괴탄 그자의 공장은 괴지(사람이 살지 않는 암흑의 구역)에 있지.” 결국, 사괴탄의 정보를 다 알고 있으면서 이러한 모임을 꾸민 것이 기정사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마리는 또 한 번 륀체르의 다리 가운데를 발로 찼고, 륀체르는 고통에 욕지기를 뱉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오늘 밤을 기대하는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으…… 이 포악한 년. 어쨌든 정보 줬잖아…… 이대로 나랑 어디 좋은 데 갈까?” “놀러 간단 말은 취소.” 마리는 그를 지나쳐 하이너의 팔짱을 꼈다. 하이너의 얼굴이 화를 내는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닌 모호한 느낌으로 붉어졌다. 마리가 하이너와 함께 뒤돌아서며 륀체르에게 말했다. “생각해보니 애인과 밤을 함께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륀체르는 그 애인이 하이너라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았지만, 모른 척하고 싶었다. “애인? 누군데? 나보다 잘난 놈인가?” 이렇게 물어서 호위 기사란 녀석의 자존심을 한 번 깔아뭉개는 것도 재미있으니까. 그런데 마리가 잠시 걸음을 멈추곤 뒤돌아보며 륀체르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신랄해 보이는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현재까진 썩 잘난 녀석은 아니야. 인간으로 치자면 아직 뭐랄까, 아기거든. 하지만…….” 마리는 하이너를 얼굴을 올려다보며 눈을 빛냈다. “내 애인은 훗날 길드장 당신보다 크게 될 녀석인 건 분명해.” ============================ 작품 후기 ============================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감상, 추천, 코멘트,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00032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 붉은 핏방울 문양이 수놓인 깃발이 곳곳에서 휘날렸다. 이 깃발은 황궁 내 다른 소궁에는 휘날리지 않고 오직 이곳에서만 휘날렸다. 붉은 핏방울, 생명의 고귀함을 의미하는 로젠플라드의 표식. 황태자가 자신의 아이가 생겼음을 널리 암시하는 것. 그는 황태자비 간택 연회를 황의회의 찬성 없이 제멋대로 중단하였다. 그리고 오를린의 로테아르카가 자신의 반려가 될 거라고 널리 알렸다. 일족의 딸을 황태자비에 올리려 했던 할데바인 대공이 이를 두고 볼 리 없었다. 할데바인 대공은 조카인 황후에게 ‘황태자의 행동이 전통에 무시한 파격’이라며 당장 그러한 행위를 중단해줄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황후는 ‘황제도 어찌하지 못하는 황태자를 계모인 자기가 회유하기는 어렵다.’고 곤란한 입장을 내보였고, 결국 숙부인 할데바인 대공에게 쓸모없는 인형이란 조소를 들어야 했다. 할데바인 대공은 직접 나서기로 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할데바인 측 전서인 하나가 황태자에게 알현 요청을 하였다. 전서인은 격식을 갖춰 황태자 앞에서 인사를 하였다. “야울을 지키는 왕이시자 로젠플라드의 수호자 그리고 제국의 황태자이신…….” “인사는 됐고, 무엇 때문에 왔지?” 로테아르카가 아이를 가진 것이 사실로 확인된 이후, 황태자의 음울하던 낯빛은 한층 밝아졌다. 그런데 오늘 방문한 전서인은 그런 낯빛을 다시 어둡게 만들 내용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기 시작했다. “최근 오슬의 수인족이 신성국(로젠플라드)에서 심한 행패를 부리는 것은 아실 겁니다. 신의 땅을 침범하는 자들을 방관하는 것은 신을 저버리는 일. 이에 로젠플라드의 수호자이신 황태자 전하의 루빈(마력기갑 부대)을 신성 정부에 귀속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저희가 보고해드리는바….” “아아.” 말을 끊은 비오르틴은 분노로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애써 웃으며 숨겼다. 비틀리고 포악해 보이기 짝이 없는 웃음이 나타나려다 사라지자, 전서인이 고개를 숙여 황태자의 시선을 피했다. 비오르틴의 파르르 떨리는 입에서 진심이 아닌 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짐승(오슬의 비타협적인 수인족 세력)이 언제 한 번은 혼을 나긴 나야한다고 생각했지. 나도 로젠플라드의 수호자로서 두고만 볼 수 없는 일이었고. 한데…….” 전서인은 시선을 다시 슬쩍 올렸다. 비오르틴은 전서인 앞으로 다가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비오르틴의 암갈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음울한 회색빛 눈동자에 더욱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분노가 압축된 암회색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사람을 질식해 죽일 듯 독했다. 전서인의 눈썹이 불안한 듯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비오르틴의 손이 전서인의 어깨를 천천히 매만졌다. 전서인에겐 가시보다 따가운 손길이었다. 비오르틴의 본심이 나왔다. “나는 로젠플라드의 수호자이기 전에 야울의 왕이네. 루빈 역시 나의 사병이기 전에 야울의 수호자들이고. 지금 그대가 보고한 내용은 야울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이지 않나?” “전하, 그게….” “게다가 대공이 루빈을 신성국에 보내려 했다면 적어도 황의회에 그 안건을 내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물었어야 했어. 안건에 관한 찬성 표를 얻은 뒤에 일을 진행해도 늦지 않았단 말이지.” 전서인은 비오르틴을 두려워하는 와중에도 꼬박꼬박 제가 해야 할 말을 전했다. “감히 아뢰옵건대 대공의 뜻이 아니라 성하(로젠플라드 신성국 대표)의 뜻이자 신의 뜻입니다. 신이 그만큼 오슬의 수인족을 빨리 벌하고자 하신 선택이었고, 저희는 어디까지나 신의 충실한 사자를 자처하여 이 소식을 보고해드리는 것으로…….” 구구절절한 변명이 이어졌지만, 비오르틴의 귀에는 그저 간사한 핑계로만 들릴 뿐이었다. 성황 예하, 성하라 불리는 이도 할데바인의 꼭두각시이고, 그렇기에 저들이 신의 뜻이라 말하는 것도 전부 할데바인의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뒤돌아선 비오르틴이 제 자리에 앉으며 경고했다. “그렇다면 신께 전해주게. 제아무리 신이라고 하셔도 루빈은 다루기 제법 까다로운 부대라는 걸.” 전서인은 형식적인 예를 갖춰 인사한 뒤 야울 궁을 나섰다. 그 뒤 황태자는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꽃병 하나를 집어 던졌다. 쨍그랑! 소리와 났고, 벽 한가운데 걸린 태피스트리가 물과 도자기 조각이 범벅으로 엉망이 되었다. 비오르틴은 숨을 고르다가 그 태피스트리마저 뜯어 바닥에 내던져버렸다. 그러곤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어 넘기며 분노를 삭였다. “하하… 무엇하나 순조로운 게 없군. 뭐, 그래야 게임이 재미있어지는 법이지.” 할데바인이 루빈을 신성 정부에 귀속해버린 데는 황제의 허가가 있었을 것이다. 할데바인 대공의 조카인 황후의 치마폭에 휩싸인 황제의 선택다웠다. 스스로 황권을 약화하는 아버지의 모습만 보아도 구역질이 치미는데, 자기에게 가장 조력자가 되어야 할 륀체르 사파이어도 조력이 불가함을 알려왔다. 최근 바너가 드래곤 소동을 앓느라 황태자를 도울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제 믿을 건 마력기갑 부대 루빈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마저도 할데바인의 손에 넘어가게 생겼다. 하지만 다행히도 루빈은 다루기가 까다로운 부대다. 할데바인 같은 권력자들이 멋대로 신성 정부에 귀속한다고 해도 루빈의 부대원이 그들의 명령을 순순히 들어주진 않을 것이다. 루빈이 그토록 까다롭고 다루기 어려운 부대가 된 것은 모두 부대의 대령이자 비오르틴의 오랜 지기인 헤그 레 지괴르의 힘이 강한 덕분이었다. ‘헤그…… 내 명령도 잘 안 듣는 녀석이 신성 정부의 명령은 들을지 모르겠군. 그래서 지금으로선 더 믿음직하지만.’ 사실 비오르틴은 자기 소유의 마력기갑 부대인 루빈을 이용해 로젠플라드를 칠 수도 있었다. 구태여 바너의 륀체르에게 성가신 지시를 하지 않았어도 되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황태자 소유라 알려진 루빈을 이용해 로젠플라드를 치게 되면, 황태자로서의 정치적 명분을 잃게 된다. 싫든 좋든 아직은 자신이 로젠플라드의 수호자란 칭호를 달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설사 황태자가 명분을 잃는 것을 각오하고 로젠플라드를 치려고 해도, 그 작전에 루빈을 투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지괴르 대령이라 불리는 자는 군인에 어울리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황태자에게 명령을 받아도 제 기분에 맞지 않을 땐 어기기가 일쑤였다. 오랜 지기라는 관계 덕분에 중요한 명령은 그럭저럭 잘 들어주는 편이었지만, 그마저도 황태자가 오랫동안 공을 들여 회유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까다로운 자가 이끄는 부대가 앞으로 할데바인 측의 꼭두각시 노릇을 잘해줄지는 미지수였다. 비오르틴은 일단 루빈에 대해서는 신경을 끄기로 했다. 당장은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고 국혼을 치르는 일에만 집중하는 게 좋다. 퍼러럭…. 널찍한 창밖에서 붉은 깃발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자신이 증오해 마지않는 로젠플라드를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생명의 고귀함을 상징하는 붉은 핏방울 표식의 깃발들이었다. 자신은 저 깃발을 증오하면서도 저들이 주창하는 생명의 고귀함을 내세워야 하는 이중적인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그래야만 앞으로 태어날 아이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반드시 이긴다, 반드시.’ *** 장인의 도시 바너. 대(大) 여관 침묵의 장. ‘와트프라우어 일행’에게 제공된 객실의 거실에선 식사가 한창이었다. 식탁에는 마리와 하이너만이 자리했다. 루돌프는 의학서를 본다고 제 객실에 틀어박혀 있었고, 마리아 역시 어딘가에 떠돈다고 없었다. 이런 겨울에는 과일이 매우 귀하지만 륀체르의 호의 어린 지원 덕분에 값비싼 과일들이 식탁에 가득 차려져 있었다. 마리는 그런 과일을 닥치는 대로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사괴탄 그 작자가 괴지에 있다니 우리가 괴지로 가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곳에 가려면 네히트를 지나쳐야 하는데, 이동 방식은 어떤 게 좋을까? 마리아 그로스를 타고 가면 좋겠지만, 마리아가 투명화 마법이 불가능하니 사람들에게 들킬 염려가 있어. 그렇다고 걸어가자니 그것도 위험하고. 저기, 하이너는 수분 온도 조절마법만 가능한 거야? 투명화 마법은 어떻게 되지 않나? 역시 아직 무리겠지? 그렇다면 륀체르에게 마법사를 고용해달라고 해서 투명화 마법을 받아야 할까 보네. 설마 륀체르 그 녀석이 우리 돈으로 알아서 하라고 치사하게 나오진 않겠지…….” 재잘재잘 수다를 떨어대는 아가씨의 모습만 보아도 하이너는 배가 불렀다. 이 행복한 포만감은 어째서일까? 오늘 밤 어떠냐는 륀체르의 물음에 아가씨가 거절해 주어서? 아가씨가 호위 기사의 미래를 높이 사주어서?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최근 작전 때문에 너무 피곤했는데 이렇게 느긋하게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것, 단지 그게 좋아서 행복감을 느끼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째서, 문득 씁쓸한 웃음이 나오는 걸까. 하이너는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각자 간단히 목욕했다. 그리고 하이너는 여관장에게 부탁해 미용사를 오게 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싶었다. 최근 작전을 경험하면서 끔찍한 장면, 인간의 길에 어긋난 사연을 너무 자주 접했기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고, 그래서 머리를 자르는 것으로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다. 한참 후, 어깨를 넘던 머리카락이 짧게 잘리자 하이너는 한층 가벼운 마음으로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그는 대륙지도를 살피며 괴지의 지형을 보았다. ‘잘하면 오를린을 거쳐 갈 수도 있겠군.’ 다시 생각이 많아지려 하는 그때, 문이 조용히 열렸다.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오는 사람은 언제나 딱 한 사람, 바로 아가씨였다. 이미 콧속으로 스며드는 달콤하고 상큼한 향기가 그걸 뜻했다. “하이너, 까꿍!” “갑자기 등에 달라붙으셔서는… 뭐하시는 겁니까?” “으응, 최근엔 내가 너를 이렇게 안아준 적이 없는 것 같아서.” 하이너는 등을 껴안는 아가씨의 체온이 따뜻하고 좋아서 딱히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대륙 지도에 있었지만, 신경은 온통 아가씨와의 밀착감에 뺏기고 말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등을 안기는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아늑했다. 갑자기 마리가 선언했다. “우리, 사괴탄을 찾아 해치우고 나선 바너를 떠나자.” “아가씨?” 생각지도 못한 말에 하이너가 지도를 손에서 내려놨다. 바너를 떠나자니? 벌써? 아가씨는 장인의 도시 바너에서의 생활을 누구보다 즐기는 것처럼 보였는데…. 마리가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너무 나만 생각했어. 여행 자금도 중요하고 루돌프의 빚 청산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너야.” 마리는 하이너가 작전 시에 드래곤으로 변하고, 다시 인간으로 변하는 걸 반복하면서 그때마다 고통을 겪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하이너의 넓은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아이를 어르듯 다정히 말했다. “나는 네가 아픈 게 싫어.” 하이너는 잠시 침묵했다. 고작 호위 기사의 고통 때문에 아가씨의 대륙 정복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호위 기사로서 원치 않았다. 그는 거짓을 말했다. “아프긴요. 작전을 거듭 할 때마다 점점 고통에 무뎌졌습니다. 저는 적응했으니 더 머무르기로 합시다. 급여도 많잖습니까.”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잖아. 게다가 륀체르에겐 약점을 잡을 만큼 잡아뒀으니 떠나도 돼. 이건 분명 훗날 내 계획(대륙 정복)의 훌륭한 거름이 될 거라고!” 하긴, 바너 드래곤 소동의 배후에는 륀체르가 있다는 사실, 그것을 알고 증인이 된 것만으로도 아가씨는 큰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훗날 아가씨의 말마따나 대륙 정복에 큰 주춧돌이 되어줄 것이다. 아직은 그저 멀기만 한 것 같고 허황해 보이지만, 이런 경험을 거듭하다 보면 그 정복이란 게 그리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리라. 하이너는 돌아누워 마리를 마주 보았다. 풋과일처럼 상큼하게 생글거리는 아가씨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세상 모든 근심이 싹 날아가는 것 같았다. “아가씨.” “응? 와아! 그런데 우리 하이너 머리 자르니까 훨씬 더 멋지네!” “푸하, 참나… 지금 제 머리 보고 감탄할 때가 아니잖습니까……, 만약 루돌프가 링클 이식에 실수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제가 드래곤이 되지 못했다면 어찌하려고 그러셨습니까? 이렇게 사파이어 그 작자의 약점을 잡는 것도 어려우셨을 텐데요.” 마리는 굉장히 밝은 얼굴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걱정하지 마. 네가 드래곤이 되지 않는 몸이라면 다른 드래곤을 따로 구하면 되지, 뭐! 아마 나는 드래곤을 유혹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서라도 륀체르의 일을 맡았을 거야! 그렇잖아? 이 미모는 드래곤에게도 99.9 점으로 통한다고!” 내숭도 겸손도 없는 아가씨의 말은 언제나 유쾌했다. 하이너는 씩 웃으며 자기도 모르게 손을 올려 아가씨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곤 마리의 말에 농담 아닌 농담의 대꾸를 했다. “아가씨께서 드래곤을 유혹하시면 제가 견딜 수가 없을 텐데요.” “응? 왜?” 그야 질투가 날 것 같습니다만…, 하이너는 뒷말을 삼켜야 했다. 그런 말을 아가씨의 눈을 보고 하기에는, 아직은 많이 부끄러웠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 쿠폰 감사합니다! 00033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아가씨께 험한 농담을 하는 건 쉬우나, 정작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기는 늘 어려웠다. 하이너는 이 이상한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몰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응?” 마리는 하이너의 짧은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 느낌이 좋아서 하이너는 눈을 스르륵 감았다. 머리카락을 헤집던 마리의 손은 서서히 그의 반듯한 이마에 닿았다. 따스한 손가락은 하이너의 눈을 더욱 감기면서 내려와 잘 뻗은 콧등을 타고 촉촉한 입술까지 닿았다. 하이너의 입술을 살짝 꼬집혔다. “말 좀 해봐아아.” 피식. 이 잘생긴 입술은 언제나 이런 불퉁한 웃음소리를 흘리곤 했다. 픽, 피식, 푸하, 하고 비웃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 웃음의 진짜 매력이 그의 보이지 않은 따스함이란 걸 마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키스해볼까? 아니, 먼저 키스하는 하이너의 모습도 괜찮겠지, 전에도 이 녀석이 먼저 했을 때 참 설렜어…….’ 그런 설렘을 다시 기다리며 그녀는 하이너의 입술에 닿은 손을 더욱 아래로 내려 그의 턱을 만졌다. 머리카락을 자르면서 면도도 말끔하게 했던 그의 턱은 아주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마리는 강아지의 턱을 만지듯 하이너의 턱을 오랫동안 간질였다. 정작 하이너는 간지럽다기보다는 솜에 닿은 듯 기분이 좋았다. 봄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 같은 아가씨의 손가락에 숨소리마저 평온해졌다. 지금 눈을 감은 때라서 마땅히 어두워야 하지만, 그렇다기보다는 오후 햇살 속으로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밝고 따스했다. 게다가 나른하고……. 그러니까 적어도, 아가씨가 호위 기사의 셔츠 끈을 풀기 전까진 말이다. ‘못 살아. 못된 버릇 어디 안 가시지.’ 하이너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설레었다. 눈을 뜨고 아가씨를 보자 세상 그 어떤 사랑에 빠진 자들보다 몽롱한 기분에 감겨들었다. “아가씨.” 하이너는 문득 마리의 손을 잡아 제 입술로 끌었다. 그러곤 부들부들한 손등에 한참 동안 입맞춤하였다. 그 감촉만으로도 마리는 발끝까지 짜릿한 기분이었다. “그만, 간지러워.” 마리가 다시 하이너의 셔츠 끈을 풀려고 하자, 하이너는 그녀의 손을 더욱더 세게 잡고 자국이 남도록 뜨겁게 입맞춤했다. 그러다 달뜬 숨을 뱉으면서 괜스레 마리를 꾸짖었다.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아아, 목소리 야해. 너도 흥분하고 있구나?” “아니라곤 말씀 못 드리지만.” “이러다가 너 혹시 드래곤이 되어버리는 거 아니니? 너는 흥분하면 그런 편이잖아.” 하이너는 대답 없이 피식 웃었다. 드래곤화를 자주 겪다 보니 그런 조절쯤은 이제 자유자재나 마찬가지다. 마리는 대답하지 않는 하이너를 보고 걱정인 듯 물었다. “옷을 더 벗기면 위험해질까? 아니, 아니지. 예전처럼 네 몸에 열 조절 마법 좀 걸어 봐.” “뭐 어떻습니까.” “…… 응?” “드래곤이 되면 그 상태로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어머머!” 하이너는 제가 뱉어놓고도 제 말이 왠지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마리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키스하면서 어느샌가 마리의 몸 위에 올라타 있었다. 얼굴은 부끄러운 소년처럼 하고서 몸짓은 자연스러운 짐승이라니, 마리는 감탄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역시 이렇게 키스하기에는 인간의 몸이 좋군요.” “으응.” 하이너의 입술은 마리의 손을 떠나 가느다란 팔에 닿았다. 부들부들한 살결에 반한 입술은 곳곳을 빼놓지 않고 키스했다. 혹시 어쩌면…… 아가씨의 몸은 짐승을 위한 향초가 아닐까? 가장 강한 온기를 발하는 심장에서 향기가 뜨겁게 흩어져 사내를 유혹한다. 그 달콤하고도 상큼한 향기에 이끌려 가슴 쪽으로 조심스럽게 얼굴을 옮겼다. 그러곤 살짝 달아오른 숨소리를 내며 그녀의 왼쪽 가슴 위에 뺨을 비볐다.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살갗을 자극하는 이 기분이 좋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아가씨가 입은 딱 붙는 드레스가 미웠지만, 지금은 그 반대. “이렇게 뺨을 비비기에도 인간의 몸이 좋은 건 확실하군요.” 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들어 마리의 입술을 찾았다. “하이너, 읍!!…… 하아.” 붉디붉은 입술 화장이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지워졌다. “웬일이야, 이런 키스라니….” “예?” “잘해. 너무 잘해서.” 키스를 잘한다, 라……. 그도 그런 게, ‘잘 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키스를 제대로 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무려 구강성교를 먼저 한 사이임에도, 소용돌이 산의 동굴에선 선을 넘으면 안 된다고 키스를 하지 않았다. 동정을 떼던 광란의 밤에도 키스만큼은 어색하여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다음 키스도 아가씨가 정의의 용사가 되어 달라고 하기에 ‘그럼 급여 대신 받겠다,’고 의뭉스럽고도 엉겁결에 하고 말았다. 하이너에게 키스란 언제나 ‘무례한 것’, ‘성기를 마주하는 것보다 어색한 것’, ‘충동적이고도 부끄러운 것’이었으나, 이제는 달랐다. “칭찬해주셔서 감사.” “으음…….” 그는 마리의 입술을 다디단 케이크를 먹듯 다시 음미했다. 이런 행위가 무례하다, 어색하다, 부끄럽다,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서, 그저 기분과 마음에 충실하여 아가씨의 입술을 찾고 원했다. 솔직하게 지난 시간을 들여다보자면, 이미 호위 기사가 되기 전부터 아가씨를 원하지 않았던가! 그 마음이 이제야 해방구를 찾은 것뿐이었다. 입술이라는 달콤한 부위로 말이다. 그런 그의 진지함이 마리에겐 사뭇 다르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잠시 입술을 떼고 풀린 눈으로 중얼거렸다. “으응, 하이너. 좀 이상해.” “예?” “그게,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음…… 그러니까, 내 혀에서 꿀이 흐르는 것 같아!” “그거….” 아니요,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좋은 거예요, 좋은 거잖아요, 얼마든지 더 드리겠습니다……. 하이너는 그 말을 속삭이듯 다시 마리의 입술을 찾았다. “진짜 이상하…… 읍!”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 격정이 담긴 키스여서 입술 화장이 아예 지워졌다. 오늘 마리가 입은 딱 달라붙은 드레스는 너무나도 자극적이라 그의 성미를 점점 더 급하게 만들었다. 달아오른 그는 아가씨의 옷을 완전히 벗기기를 포기하고 일단 풍만한 가슴부터 살짝 해방하였다. 복숭아빛깔 살덩이에서 연분홍의 돌기가 그를 유혹했다. 그는 과일을 삼키듯 그것을 입속에 가져갔다. “으앗, 하이너…!” 마리의 가슴 속 혈류가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딱, 그 순간이었다. 쾅쾅쾅! 누군가가 무식하게 문을 두드렸다. 오랜만에 감정과 육체의 흥분에 충실하려던 하이너의 미간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쾅쾅! 쾅쾅쾅쾅! 저런 식으로 거칠게 두드리는 사람은 루돌프도, 여관의 종업원도 아니었다. 마리는 지금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보나 마나 여관의 어느 정신 나간 술주정뱅이일 거로 생각하고 무시하기로 했다. 그녀는 하이너의 머리를 끌어당겨 다시 제 가슴에 키스하게 하였다. “얼른, 얼른 다시 해줘어….” 그런데 문이 결국 제멋대로 열리고 말았다. “어머나!” “젠장!” 불청객의 난입에 욕지기를 뱉은 하이너는 아가씨의 몸이 노출되지 않도록 재빨리 이불로 가려주었다. 물론 그사이 마리 역시 하이너의 셔츠 끈을 다시 묶어주었다. 객실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맑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륀체르의 목소리였다. “내 길드인들이 드디어 정보를 가져왔어! 사괴탄이 재료를 대량 거래하러 네히트의 실렌틴 광산에 갔다더군!” 륀체르는 대식당 영원의 락(㦡)에서 집으로 돌아갔다가, 바로 그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바로 마리에게 전해주러 침묵의 장에 왔다. 평소라면 집사를 보내어 소식을 알렸을 테지만, 오늘은 무슨 꿍꿍이인지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이다. 그런 그의 속내-아가씨와 놀 건수를 만드는 것-를 하이너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일단은 무시하기로 했다. “자, 이게 그자의 얼굴이라네.” 륀체르는 하이너에게 실렌틴 광산 거래 지점과 사괴탄의 외모가 그려진 종이를 내밀었다. 하이너는 그것을 받아들고 보았다. 옷매무새를 다듬은 마리가 쪼르르 다가와 같이 보았다. 그림 속 사괴탄의 모습은 ‘아름답다.’ 이 한마디로 설명이 가능했다. 아름답기로는 마리도 뒤지지 않지만, 그녀와 같은 점은 금발뿐이다. 마리의 눈동자가 숲과 바다를 섞은 청록색이라면 사괴탄의 눈동자는 심해의 짙푸른 색. 나이는 마리와 비슷해 보이지만, 그 눈동자의 깊이로 보아 어쩌면 마리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았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인형처럼 정돈된 선량한 미소까지……. 악당은 추하게 생겼을 거라고 믿는 자들의 눈으로 보자면, 사괴탄은 도저히 사람의 영혼을 빼앗아 마검을 만드는 사악한 악당처럼 보이지 않았다. 마리는 손뼉을 치며 여인의 그림 속 미모에 감탄했다. “어마맛! 범죄자를 이토록 예쁘게 그려도 되는 거야?” 륀체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 말을 부정했다. “이봐, 오를린 아가씨. 예쁘게 그린 게 아니라 그녀는 정말 예뻐.” “뭐? 세상에 나만큼 예쁜 여자가 있을 수 있다니… 로테 말고는 처음이야!” 하이너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마리를 보았다. ‘이토록 자신감 충만한 여자도 처음입니다만!’ 륀체르는 사괴탄에 관한 정보를 더 말해주었다. “그렇지, 너만큼 아름답지. 빨고 싶은 가슴 하며……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여자가 어째서 마검 제조 장인이 되었는지 그 사연이 궁금하지 않아?” 마리는 눈을 빛내며 궁금하다 말했고, 하이너는 악당의 사연엔 관심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하이너의 의견 따윈 중요하지 않은 륀체르는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전설의 검황 세이든 레 지괴르가 갑자기 실종되었단 이야기는 알고 있지? 세이든이 왜 실종된 줄 알아? 바로 사괴탄이 세이든의 영혼을 검에 넣어 마검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야. 참고로 세이든은 사괴탄을 양녀로 들이고 있었다.” “아니, 어째서 양부의 영혼으로 그런 짓을? 기껏 키워놨더니 배신하는 거야?” “그러니까 들어 봐, 사괴탄은 양부인 세이든에게 그런 짓을 할 정도로 그가 미웠던 거야. 왜냐하면…… 그녀는 세이든을 이성으로 여기고 사랑했지만, 세이든은 그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거든. 세이든에게 사괴탄은 어디까지나 마음으로 낳은 딸일 뿐이었어. 그리고 사괴탄이 세이든의 친아들과도 잘 지내자 훗날엔 그녀를 친아들과 결혼시키려 하기도 했지.” 하이너는 문득 질린다는 표정을 하며 창밖을 보았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하이너의 눈에는 눈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서 콩가루가 내려주시는군.’ 그런데도 마리는 하이너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눈을 빛냈다. “우와! 나 이런 막장 흥미진진해! 더 이야기해줘, 어서!” 듣다 못 한 하이너가 마리를 말렸다. “아가씨, 제발 좀. 아가씨 같은 청자들 때문에 막장 소설이 유행하게 되잖습니까! 이딴 이야기엔 귀를 기울이지도, 궁금해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문학이 부흥할 수 있어요!” 하이너가 그러거나 말거나 륀체르는 마리가 제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는 것에 즐거워하며 말을 이어갔다. “세이든의 아들 역시 사괴탄을 사랑했지. 세이든은 사괴탄의 마음이 어떠하든 제 아들과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거로 생각한 거야. 그가 그럴수록 사괴탄은 점점 실망하게 되었지…… 그러던 어느 날, 세이든이 황실 여인과 스캔들이 나고 말았지. 아내를 일찍 잃은 사십 대 남자라면 얼마든지 스캔들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아? 게다가 세이든은 스무 살이나 어린 사괴탄을 반하게 할 만큼 미남이었다고. 어찌 됐든 사괴탄은 양부의 스캔들을 용납하지 못한 거지. 자기를 강제로 결혼시키려 한 것도 아주 미운데, 그가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게 된 거야. 그래서 그녀는 양부에게 복수할 방법을 생각했고, 당시 마검 제조 장인이었던 사람을 찾아가서…….” “오호라! 그래서 검황 세이든의 영혼을 검에 봉인하는 거로 복수했구나! 양부가 다시는 스캔들을 일으킬 수 없도록 아예 검으로 만들어버린 거로군?” “뭐, 쉽게 말해 그런 사연이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참 무섭다아! 그렇지, 하이너?” 하이너는 관심 없다는 듯 망토를 걸쳤다. 마리가 그를 붙잡았다. “어딜 가?” “실렌틴 광산에 갑니다.” “벌써?” 그러자 륀체르가 끼어들었다. “벌써라니? 이봐, 우리 ‘드래곤 용사님’께선 여기서 한가하게 막장극 들을 시간 없다고.” 하이너는 자꾸만 ‘드래곤 용사님’이라 표현하는 륀체르에게 몹시 짜증이 났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에 시비를 걸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실렌틴 광산에 가서 사괴탄을 제거하는 게 우선이었다. 하이너는 마리의 앞에 무릎을 꿇고 인사했다. “그럼 아가씨,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정식 기사가 아니지만, 이런 때만큼은 정말 기사처럼 품위 있어 보였다. 마리는 혼자 가려 하는 하이너에게 섭섭했다. “다녀오겠다니? 나와 같이 가야지!” 하이너는 고개를 저었다. “함께 가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륀체르도 거들었다. “맞아. 같이 갈 필요 없지. 드래곤 용사님 하나로도 충분해. 아름다운 여인(사괴탄) 하나 잡으려고 너도나도 우르르 간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마리는 하이너를 향해 서운한 눈길을 건넸다. “하지만 하이너….” “다녀오겠습니다. 아가씨.” 하이너는 뒤돌아보지 않고 나섰다. 사괴탄 일만 끝내면 바너를 떠난다는 아가씨와의 약속 때문에 발걸음이 더욱더 빨라졌다. 문이 닫히자 마리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피! 하는 소리를 냈다. 그때 륀체르가 손뼉을 한 번 쳤다. 그러자 문밖에서 대기하던 집사가 들어왔다. 집사의 손에는 최고급 과실주 한 병이 있었다. 집사가 테이블에 술을 올려두는 동안 륀체르가 먼저 자리해서 마리에게 앉으라고 눈짓했다. “뭐해? 나와 마시지 않겠어?” “하이너가 큰일을 하는데 술이나 마시고 있을 순 없어.” 마리는 아예 창문을 열어 하이너가 떠나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하이너! 잘 다녀와!’ 라는 말 대신 ‘와트프라우어 부인’으로서 배웅 인사를 했다. ‘여보! 잘 다녀와요!’라고. 그 인사에 하이너의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졌다. 륀체르는 그런 촌극이 별로라는 듯 혼자서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 마리가 뒤돌아서자 시치미를 떼고 우아하게 술잔을 들어 올렸다. “마시자니까?” “흐음. 안 돼.” “이봐, 그렇다고 용사님이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시간을 죽이는 짓이야. 그거 알아? 바너의 륀체르 사파이어가 이렇게 몸소 술을 챙겨 놀러 가는 상대는 그대 마리니시네 양밖에 없다는 거? 가끔은 이런 귀한 호의를 즐기는 것도 좋다고.” ============================ 작품 후기 ============================ 뀨? 00034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어째 그의 말투가 사근사근해지는 느낌에 마리는 비웃었다. “그대? 마리니시네 양? 웃기고 자빠졌네!” “…… 자빠졌네?” 귀족 아가씨의 말투와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이 여자는 첫 만남 때도 남자보고 갈보라고 했지. 그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늘 그랬다. 사실 그 누구도 륀체르 사파이어란 사람 앞에서 감히 그런 거친 말투를 쓰지 못했다. 그가 13대 길드장에 오른 이후 바너의 영주보다 실권이 강해졌고 그의 정체를 아는 거의 모든 이가 외경으로 그를 대했기 때문이다. 륀체르는 길드 마스터 이전에 거리의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자였다. 거친 말로 인격을 난도질당하는 건 과거로도 충분히 경험했다. 비록 자기가 거친 말로 누군가를 난도질할망정, 그 누군가는 자신에게 이렇게 대할 수 없었다. 이토록 무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평소라면 저 시골뜨기 아가씨의 목이 뒤틀려 죽어도 이상할 게 없겠지만……. 륀체르는 그저 입술만 샐쭉거리는 것으로 불만을 표시할 뿐이었다. “흐음, 마리니시네 양은 이상하게 내 앞에서만 말이 거칠어지는 느낌인데?” 마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빈정거렸다. “오우, 그러는 당신은 제 앞에서 말이 거칠어지지 않으셨던가요?” “이봐, 내 말투는 내 외모와 같이 타고난 거라고 해두지. 타고 나는 건 바꿀 수 없다고.” “거짓말은!” 륀체르는 호위 기사를 대할 때의 마리를 떠올리며 불퉁한 표정을 부러 지어 보였다. “어쨌든 마리니시네 양은 나한테만 말을 그따위로 쓰는 것 같아.” “예! 맞아요! 저는 입 걸레 앞에서는 입 걸레가 되는 편이랍니다!” “매력적이군.” 륀체르는 술잔을 내밀었다. 이미 한 번 거절당했으면 상대에게 다시 술잔을 내밀지 않을 텐데, 그런데도 륀체르는 끄떡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마리는 참말이지 그를 알 수 없었다. 술잔 안에서 꿀색 향긋한 술이 잔잔히 출렁였다. 자꾸 보다 보니 오를린의 사과주가 생각이 났다. ‘사과주에 취해 해롱거릴 때면 하이너가 등에 업어 데려가곤 했지……, 뭐, 이렇게 눈 뜨고 있어 봐야 하이너 걱정만 할 텐데 그냥 한 잔 마시고 잘까?’ 마리는 잔을 받아들고 단숨에 마셨다. 그녀의 술 마시는 속도에 놀란 륀체르가 말렸다. “이봐, 급한 아가씨. 시간은 많잖아. 좀 천천히 즐기자고.” 탁! 소리가 나도록 술잔을 내린 마리가 뒤돌아서 침대로 걸어갔다. “길드장.” “응?” “이제 자려고 그러는데 좀 나가주겠어?” 그녀는 머리를 베개에 누였다. 그리고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당긴 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바르게 정돈했다. 정말 잠이 들 눈치에 륀체르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매정한 년 같으니.” 마리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 하늘 역시 차디찬 눈을 매정하게 쏟아 내렸다. 갈수록 굵어지는 눈발에 륀체르의 시야가 갑갑해졌다. 하지만 그는 이런 것을 나름대로 즐겨 마부를 부리지 않고 밤길을 걸었다. 이게 얼마만일까. 챙 모자를 쓴 여행자 차림으로 밤거리를 떠돈 게 말이다. 그렇게 몸이 으슬으슬 떨릴 정도로 걸었을 즈음이었다. 언제나 그의 주변을 은밀히 호위하는 무인이 텔레파시로 메시지를 전해왔다. ‘누군가가 따라붙습니다.’ ‘그럼 잡아.’ 륀체르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무신경하게 대답했으나, 이내 자기 대답이 적절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걸음이 멈추어졌다. …… 잡을 수 있는 적이라면 호위 무인이 진즉 잡아도 잡았겠지. 잡지 못해 이렇게 미리 보고하는 게 아닌가. 호위 무인은 증원을 바라고 보고한 것이었다. 륀체르는 잠시 생각했다. 바너 최고 금권을 자랑하는 자신이 고용한 특별 호위 무인도 잡아내지 못하는 기(氣)의 소유자라면 대상은 좁혀진다. 황태자의 마력기갑 부대 루빈의 병사 혹은 황제 직속의 사병들 등……. ‘어린놈의 새끼(황태자)가 사람을 붙여놨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바너에 드래곤이 나타나 소동을 부린다!’고 우는소리를 해도 황태자가 그걸 곧이곧대로 믿어줄 리 없다. 날 적부터 불신이 몸에 밴 황족들은 언제나 ‘만에 하나’를 염두에 두며 일을 진행하고, 그것은 황태자도 마찬가지라. 다만 륀체르는 지금 황태자의 처지(간택 연회, 할데바인 측의 정치적 공격, 루빈 강탈)가 처지라 바너에까지 신경 쓰긴 무리라고 안일하게 대처해왔다. 실제로 누군가가 몰래 이렇게 따라붙는 경우는 이번에 처음이었다. ‘흐음, 내 호위 무인도 잡지 못하는 기(氣)의 소유자를 붙일 정도라면 녀석(황태자)이 아직 여유가 있나 보군? 루빈에서 데려온 건가? 하지만 정말 녀석이라 한다 해도…… 여태 너무 조용했잖아? 그간 내가 침묵의 장에 드나들면서 와트프라우어 내외와 용사님 운운한 게 벌써 며칠인데.’ 그 대단하신 황태자가 자신이 기만당했단 걸 알았다면 진즉 보복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륀체르는 호위 무인에게 물었다. ‘언제부터였지?’ ‘예. 길모퉁이를 도실 때부터였습니다.’ 따라온 지 채 일 분도 되지 않았단 말. ‘뭐야? 겨우 그거밖에 안 됐어?’ ‘예, 하지만 너무 강한 기(氣)라….’ 시간상 와트프라우어 내외와 공모한 일들이 들키진 않았다. 어쩌면 뒤따라 붙는 자는 황제 측 첩자인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면 할데바인 대공 측에서 감시하는 사람을 붙인 건지도? 뭐, 누가 되었든 당장 공격하진 않으니 내버려 두기로 했다. 자신에겐 호위 무인도 있고 위험이 닥치면 그때 움직여도 늦지 않았다. *** 그런 찝찝한 기분으로 계속 걷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거리에 와 있었다. 영원의 봄으로 가는 길목, 유흥의 거리. 자기가 툭하면 술 마시고 여자들 가슴을 빨러 가는 그 거리였다. 날씨가 추워 그런지 평소보다 거리에 나와 있는 취객이 많지 않았다. 취객보다 호객하는 이들이 더 많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드래곤 소동이 일어난 후에는 이쪽 상권이 많이 죽은 것도 사실이었다. “자기이이?” 뒤에서 누군가가 아는 체를 해왔다. 뒤돌아서 얼굴을 보았다. 예쁘장하게 생긴 접대부였다. 구면이었다. 한때 자신이 자주 들른 적이 있는 술집이자 매춘업소인 ‘정염’의 접대부였다. “어디 가는 중이야?” 평소의 륀체르라면 대꾸했을 것이다. 그러는 너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출근하느냐고, 요즘 장사가 잘 되지 않아서 마구 지각하는 거냐고. 사실 드래곤 소동만 아니었다면 저 접대부처럼 예쁘장하고 몸매가 되는 이들은 지금이 한창 바쁠 시간이었다. “응? 어디 가냐구우.” 그러나 지금 륀체르는 대답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여인의 말을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여인은 륀체르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의 드레스 안쪽 가슴이 풍만함을 과시하듯 출렁였다. “오늘은 만져주지 않을 거야?” 불콰한 얼굴에 살짝 꼬인 발음. 여러모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벌써 이리 취하다니.’ 대개 이런 여인들은 좀처럼 취하지 않는다. 취한다 해도 새벽녘은 되어야 한다. 륀체르는 여인을 재미있다는 듯 보고 픽 웃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여자의 가슴을 보고 생명의 젖줄이니 뭐니 찬사를 퍼부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뒤따라오는 찝찝함도 찝찝함인데 그것보다 오를린의 99.9 점짜리 젖통에 거절을 당해 기분이 상해서 다른 이와 놀고 싶지 않았다. “아앙, 자기 어디 가느냐니깐….” 무시하고 가려던 륀체르가 불현듯 걸음을 멈추었다. 따라붙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그 누구든 상관없이 그에게 거짓 정보를 흘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륀체르는 자꾸 어디 가느냐고 발목을 잡는 접대부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집에 갈 건데, 왜?” “나 매상 좀 올려주고 가아아.” “흐음, 이걸 어쩌나. 빨아본 가슴에는 흥미 없는데.” “나랑 끝까지 해본 적도 없잖앙…….” 접대부는 교태 어린 목소리로 륀체르의 품에 파고들었다. 륀체르는 못 이긴 척 여자가 이끄는 대로 가게 ‘정염’ 안으로 들어갔다. 여인은 카운터를 지키는 포주에게 어깨를 으쓱이며 제가 손님을 데려왔다고 호들갑 떠는 몸짓을 했다. 요즘 같은 강제 불경기엔 손님을 데려온 것만으로도 으쓱해할 수 있겠지만… 지배인의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뭐랄까. 올 게 왔다, 하는 느낌? 륀체르는 외투를 스스로 벗으며 객실로 들어섰다. 어지러운 향이 감도는 좁은 방안은 너무나 어두웠다. 기껏 하나 켜진 마력등이라니. 밤손님을 받는 객실치고는 성의가 없는 편이다. 다른 남자도 그렇듯이 륀체르 역시 시각적인 흥분을 중요히 여겼다. 그가 마력등 몇 개 더 키자고 말하려는 때였다. 갑자기 접대부가 륀체르의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뭐, 어두워도 상관없나.’ 하체를 감싸는 여인의 따스한 온기에 륀체르가 느긋하게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얼마나 잘하나 볼까.” 차가운 성기가 여인의 뜨거운 입속에 단숨에 삼켜졌다. 륀체르는 이런 상황에서도 심드렁하게 여인을 관찰했다. “흠.” 장점이라곤 오직 뜨거움 하나뿐이었다. 이가 너무 자주 닿고 깊게 빨지도 못한다. 교태를 부리는 것만큼이나 솜씨도 좋은 줄 알았더니 영 아니었다. 그러나 불만은 륀체르가 아닌 여인 쪽에서 먼저 나왔다. “으웁… 왜 이리 안 서?” 륀체르는 여인의 머리를 잡고 천천히 흔들며 대답했다. “기분 탓인가, 심란하거든.” “읍… 어째서?” “요즘 내 구역을 건드리는 파충류 새끼가 있어서.” 파충류에게 제 구역을 건드리라 지시했던 륀체르는 도리어 지금 피해자의 입장을 연기했다. 어디선가 감시할 존재에 대해 이런 거짓말을 흘려두어도 나쁠 게 없단 판단이었다. 용케도 접대부가 말을 알아들었다. “설마 드래곤 말하는 거야?” “그럼 그거지, 뭐겠어?” “으읍…… 자기도 드래곤 때문에 손해 본 거 있었어?” “있으니까 말하지. 움푹 팬 부분 중심으로 핥아봐.” 륀체르는 여인의 머리를 점점 빨리 흔들었다. 제법 커다란 성기가 목구멍에 닿을 때마다 여인이 못살겠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륀체르는 그 표정을 관찰하듯 내려다보다 기가 찬다는 듯 중얼거렸다. “질이 개판이군.” 그러자 여인은 륀체르의 것을 더욱 깊게 빨아들이려 애를 썼다. 여전히 표정은 괴로워하는 표정이었다. “하아…. 빨아들여보라니까. 젠장.” 인간이란 이상한 존재다. 육체는 쾌감에 서서히 물들려고 하는데 정신은 찝찝함을 넘어서 불안감이 스미기 시작하니 말이다. 텔레파시로 호위 무인에게 무인들을 더 증원하라고 전하였다. 뒤를 밟은 자가 갑자기 공격을 해올 것 같았다. 아니, 꼭 그게 아니라도…… 애당초 자신에겐 적이 많았다. 일족을 말살하고 피로 얻은 길드 마스터의 자리란 게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어찌 됐든 지금 이렇게 호위를 증원하여 만에 하나 일어날 수 있는 공격에 대비해야 할 것만 같았다. 기우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아, 완전히 섰어. 침대로 갈까?” 여자가 일어서면서 묻자, 륀체르는 그대로 여자를 벽으로 밀고 갔다. 그리고 다시 여자의 어깨를 내리눌러 무릎을 꿇게 하였다. 지금은 왠지 질펀한 정사가 끌리지 않았다. 기계적인 배설만 필요할 뿐이다. 발기된 참에 얼른 해치워야겠다. “빨아.” “자기, 침대는….” “얼른.” “으음…….” 성기를 삼키던 여인은 갑자기 륀체르의 허리로 입술을 옮겼다. 그녀의 손이 단검이 있는 허리춤을 더듬기도 했다. “뭐하는 거야….” 짜증이 난 륀체르가 경고의 시선을 건넸으나 여인의 고개는 점점 올라왔다. 륀체르의 셔츠 끈을 풀어 내린 여인은 그의 가슴을 핥기 시작했고, 그런 여인의 이마를 밀쳤다. “빨라고만 했잖아.” “하지만….” 여인은 륀체르의 손을 끌어 제 음부를 만지게 했다. 삽입하기 딱 좋게 젖어있었다. 짙은 화장수 향기가 사내를 더욱 동하게 만들었다. 이런 싸구려 가게의 접대부가 쓰기엔 은은한 것이 제법 고급 향수를 쓰는 것 같았다. ‘음… 이런 꼴림 성가신데.’ 질펀한 정사까진 원치 않았던 륀체르도 슬슬 고집을 꺾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여기는 준비 됐잖아, 자기가 박아줘야지… 응?” 애교 가득한 목소리에 륀체르는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여인의 귓가에다 대고 속삭였다. “전에, 나랑 술 마실 때…… 아픈 거 좋아한댔나?” “으응, 그랬지….” “그럼 아파도 좀 참아.” 여인의 몸을 돌린 륀체르는 치마를 걷어 올리고 단숨에 제 것을 쑤셔 박았다. “아아악!” 남자의 것을 원한 여인의 입에서 나온 교성치고는 너무나 컸다. 마치 두드려 맞는 사람의 비명 같았다. 여인의 축축한 음부가 아닌 꽉 다 물린 배설 기관에다 삽입을 한 륀체르는 숨을 고르며 흥분과 신경질이 섞인 미소를 뿌렸다. “큭… 꽉 조이는데. 여기론 한 번도 해본 적 없나 봐? 갈보 주제에?” “그, 그건 아니지만, 아…!” 여인은 신음 섞인 말을 내뱉으면서 바닥에 짚은 손을 침대 쪽으로 움직였다. 사내의 것에 몸이 꿰뚫려 두 손과 두 발로 기어가는 폼이 쓸데없이 필사적으로 보였다. 할 땐 하더라도 침대로 가서 하자는 신호인 듯했으나…… 어쩐지 그 모습이 억지스러워 륀체르의 의심을 샀다. “뭐해? 이 자세 좋잖아?” “침대로, 읏, 악! 침대로 가! 아악!” “싫은데?” “어서!” 짐승처럼 기어간 여인이 침대 머리맡에서 뽑아낸 것은 다름 아닌 검이었다. 찰나, 륀체르의 얼굴에 그럴 줄 알았단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아까부터 수상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역시나 이 여인은 평범한 창녀가 아니었다! 여인의 입에서 포악한 외침이 터졌다. “죽어라!” 그 순간, 출입문이 부서지고 륀체르의 호위 무인 하나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사이 이미 륀체르는 여인의 허리를 꽉 붙잡고 제 것을 처박아 넣음과 동시에 여인의 팔을 꺾어 칼을 빼앗았다. “마스터!” “나설 거 없다. 증원은 쓸데없는 짓이었군.” 평소 검술을 즐겨 쓰지 않는 남자인 륀체르에게 팔이 꺾이는 수준의 여인이라면 그 실력은 안 봐도 뻔했다. 륀체르는 신음하는 여인을 보며 히죽 웃다가 호위 무인을 보았다. “이거 들고 나가 주겠나?” “예!” 무인이 칼을 받아들고 나가자 륀체르는 여인의 팔을 더욱 꺾으며 제 것을 더욱 깊이 밀어 넣었다. 접합부에서 짙은 피가 흘러내려 여인의 허벅지를 기분 나쁘게 적셨다. 여인은 죽을 것처럼 앓는 소리를 냈다. “후우, 고통스러운가 보지?” 기이하게도 흥분은 이런 습격의 상황에서 한층 더 강렬해졌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기이한 증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인간의 원초적 욕구는 늘 발화하는 법이니까. 륀체르는 여인의 엉덩이를 끌어당겨 더욱 세게 제 것을 밀어 넣었다. 그러곤 신랄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어째서지?” “아, 윽…… 윽, 인간쓰레기인 네놈은 죽어야 마땅하다!” “후우, 인간쓰레기?” 이런 말을 운운하는 자들이라면 대개 륀체르가 13대 길드 마스터 자리에 오르는 걸 반대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본래 륀체르의 생부인 12대 길드장 중심으로 활동하던 상인 세력이었다. 그런데 륀체르가 새 마스터 자리에 오르고 나서 다른 세력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자, 그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었고 그 탓에 륀체르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그들은 륀체르의 생부 가족이 죽었을 때도 륀체르에게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고, 바너에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륀체르의 능력 부족이라 탓하는 걸 서슴지 않았다. 요즘처럼 드래곤 소동이 끊이지 않을 땐 그야말로 그들이 륀체르를 노릴 적기라 할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 비방과 비판을 하는 것도 좋지만 그래서는 너무 늦다. 차라리 이렇게 갑자기 죽이는 게 그들이 제 입지를 다지는 데 더 지름길이리라. 륀체르는 언젠간 이런 일이 한 번쯤 올 거로 생각했지만, 그게 이토록 허술한 방식으로 나올지 몰랐다. 륀체르는 자신에게 인간쓰레기라 말한 여인의 머리카락을 끌어당기고 더욱 세게 허리를 움직이며 실소를 터뜨렸다. “어쭙잖은 실력으로 날 죽이려 하는 그 오만함도 쓰레기 수준이라 할 수 있겠군. 너희가 어지간히 급했나 보지?” “읏, 아, 아!” “뭐야, 개통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느끼는 거냐? 안타깝군…….”륀체르는 기계적인 절정에 오른 뒤 곧바로 여인의 목을 한 손에 움켜잡고 그 머리를 벽에 세게 찧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여인이 고꾸라졌고 륀체르는 여인의 치맛자락에 제 성기를 닦았다. 그의 표정은 막 절정에 이른 자답지 않게 딱딱했다. 목소리 또한. “안타깝기 그지없어.” 바지를 제대로 갖춰 입은 그는 다시 여인을 보았다. 엎드린 여인은 아직 살아있는지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그게 몹시도 고통스러워 보인 륀체르는 그녀의 어깨를 고정한 뒤 목을 돌려버렸다. 여인은 그대로 숨을 끊었다. 호위 무인으로부터 전언이 전해졌다. ‘그자의 기(氣)가 끊겼습니다.’ 기(氣)라는 건 서서히 다가오다가 사라질 때도 서서히 사라지는 법이었다. 기(氣)를 가진 생명체가 순간 이동을 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륀체르는 기(氣)의 주인공, 거리에서부터 자기를 뒤따라오던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하여간 기 수련만 상급이면 뭐해. 암살 교육도 상급으로 받으라고.” 죽은 여인은 대답이 없었다. 륀체르가 객실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나 쫄았잖아, 나쁜 년.” ‘정염’의 지배인 또한 여인이 속한 세력의 녀석들일 터. 이미 ‘정염’의 사람들은 륀체르의 호위 무인에게 모조리 죽임을 당한 후였다. *** 바깥에 나온 륀체르는 하늘을 보았다. 여전히 눈발은 거셌다. 어두운 밤 달빛에 폭발하는 눈들을 보니 제가 조금 전에 뱉어낸 체액도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문득, 이 찝찝한 기분을 없애줄 누군가의 존재가 필요한 걸 느꼈다. 오를린의 아가씨 얼굴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덜 싼 기분이야.” 륀체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영원의 봄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035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륀체르가 두 시간이나 걸어서 자택에 도착했을 때, 그의 발 빠른 호위 무인들은 정염의 시체들을 모조리 거둬 정리해두었다. 정리한 장소는 다름 아닌 비밀 정원이었다. 영원의 봄 안에 있으며 륀체르가 타인의 출입을 경계하는 그 은밀한 장소를 말했다. 시체들은 과거 륀체르를 노린 다른 적들이 그러했듯이 아주 깊숙이 파묻혔다. 만에 하나를 대비하여 사파이어 가의 마법사는 시체에 어떤 부활 의식도 할 수 없도록 결박을 걸어두었다. 시체들이 파묻힌 땅 위에는 인조 식물이 아닌 진짜 식물들이 식수 되었다. 이를테면 수목장. 그것은 륀체르가 적들에게 베푸는 유일한 호의라 할 수 있겠고, 아니면 이 인조 식물들로만 가득한 곳에서 진짜 식물도 몇 개 추가해보자는 그의 소소한 취미라고 볼 수도 있다. 노집사는 륀체르에게 정염의 나머지 정리에 관해 보고했다. “새벽이 되기 전에 길드 청소부들이 가서 깨끗이 치워둘 겁니다. 경관청 수사에 관해서는 일단 그 측에 이야기를 해두었고 음, 또 그리고….” 륀체르는 만사가 귀찮다는 듯 욕실로 향했다. “알아서 해. 아, 그리고 요깃거리는 필요 없어. 목욕물만 받아둬.” 집사는 지치다 못해 싸늘해진 마스터의 표정을 보았다. 호위 무인들에게 들어서 마스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알고 있었다. 마스터가 마스터 자리에 오른 이후로 이런 사건을 겪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독 피곤해 보였다. 최근 금발 아가씨가 감정적으로 애를 태워서 그러한가? 노집사는 그럴 거로 생각했다. “참, 목욕 시중도 필요 없다.” “예. 알겠습니다.” 한참 후 륀체르는 쏟아지는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따뜻하고 세찬 물줄기가 머리와 등을 마구 안마하며 오늘 하루 고생했다고 위로하는 듯했다. 륀체르는 눈 밑까지 피곤이 검게 내려앉은 얼굴을 씻고, 추위에 긴장한 목을 어루만지듯 씻었다. 그리고 점점 내려오다가 가장 지저분한 부분-성기-를 보았다. 잠시 술에 취한 듯 기억이 흐려졌다. 오늘 사정을 하고 나서 죽였던가, 아니면 죽이고 나서 사정을 했던가?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갈수록 그런 것에 무신경해지는 자신이 한편으로는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축 처진 성기를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아예 소독제로 소독을 해버렸다. 그러고 나서는 뜨거운 물에 담근 채 한숨을 쉬었다. 불현듯 거리의 밑바닥으로 살 때 자주 불렀던 노래가 성대를 타고 흘러나왔다. “눈부신 그대 안았더니 심장이 불타 사라지네, 오! 신이시여… 나는 이제 빛이 두려워. 그대와 닮은 것이라면 보석이라도 뒤돌아설 테야…….” 당시, 간혹 그런 이들이 있었다. 몸을 팔아 살아가는 이들 중 손님과 진짜 사랑에 빠져 되돌아올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간 이들. 지금 부르는 노래는 그런 이들의 심정을 그린 노래였다. 물론 륀체르는 언제나 위로 올라가길 원해서 사랑 같은 낭만적인 것을 기대하고 산 적은 없었다. 그래서 이런 노래를 부를 이유도 따지자면 없다. 하지만 지금은 부르고 싶었다. 왠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었다. 그는 자조적으로 개사했다. “큭… 눈부신 이름 얻었더니 심장이 쫄아버리네. 오! 신아… 그래, 어디까지 달리나 보자…….” 어둠을 등에 업고 잠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하긴, 오늘 너무나 많은 일을 했다. 새벽부터 보석 길드 정무를 보았고, 오전엔 검 동호회에 갔다. 그곳에서 평소와 같이 가벼운 망발을 일삼다가 오를린의 아가씨에게 다리 사이를 발로 차이는 수모를 겪었다. 아가씨와의 밤 약속에 실패하고 집에 돌아와서 쉬려고 하니 사괴탄의 정보가 들어와 그것을 침묵의 장에 전해주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염에서 기습을 받고, 살인함으로써 그 위기를 천만다행으로 벗어났다. 이후 무려 두 시간이나 걸어 돌아왔으니 잠이 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런데 단잠에 빠져드려는 그에게 텔레파시가 들어왔다. 텔레파시를 보내는 이는 조금 전에 거리에서 전언을 주고받던 호위 무인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이었다. ‘형.’ ‘……?’ ‘형?’ ‘… 아.’ 언제나 ‘형’이라는 호칭으로 텔레파시를 해오는 존재, 야울의 왕이자 겁 없는 사자라 불리는 스무 살의 새파란 녀석. 황태자 비오르틴의 텔레파시였다. ‘형, 머리띠 고맙습니다.’ 머리띠는 황태자비에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오를린의 로테아르카를 위해 황태자가 륀체르에게 주문한 티아라를 뜻했다. 륀체르는 잠결에 한참 생각하다가 엊그제 황도에 티아라를 보낸 것을 기억해내고 대답해주었다. ‘고맙기는 뭘.’ ‘그렇게 좋은 재료로 만들어주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플래티르콘(가장 강하다는 금속)으로 티아라를 만든 것을 칭찬하는 말이었다. 만약 지금 황태자가 륀체르의 표정을 볼 수 있다면, 륀체르는 ‘당연한 재료를 썼을 뿐입니다!’라고 되받아치며 생글생글 웃는 너스레를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표정을 보일 수 없는 지금 륀체르는 그저 최대한 성의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그것을 대신했다. ‘최근에 네게 도움이 되지도 못하는데 머리띠라도 예쁘고 단단하게 만들어줘야지 않겠냐? 그나저나 네 여자친구는 마음에 들어 해?’ ‘그럼요. 얼른 쓰고 싶다고 하네요.’ ‘다행이네.’ ‘그래서 말인데….’ 륀체르는 하품을 하며 다음 전언을 기다렸다. ‘여자친구가 머리띠 쓰는 날, 구경하러 오세요. 뭐니 뭐니 해도 장인의 기쁨은 자기 물건이 제대로 쓰이는 걸 보는 시간 바로 그때가 아니겠어요?’ ‘아….’ 결국 황태자 결혼식에 참석하란 말이나 다름없었다. 원래는 약혼식이어야 하겠지만, 오를린의 로테아르카가 비오르틴의 아이를 회임하였단 이야기가 있었고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약혼을 건너뛰고 결혼 일정이 잡혔다. 륀체르는 축하부터 전했다. ‘너 아주 번식력이 좋구나?’ ‘과찬이세요. 그런데 어째…… 오늘 좀 피곤하신 듯하네요?’ 륀체르는 질리겠단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아닌데 단지 오가는 텔레파시로 어떻게 피곤한지 아닌지를 다 안단 말인가. 정말이지 황태자 이 어린놈은 눈치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좋단 생각이 아니 들 수 없었다. 륀체르는 솔직하게 답해주었다. ‘오늘 누가 나 때려서 말이야. 좀 혼내주느라 피곤했어.’ ‘저런, 누가 우리 형을 때려요?’ ‘왜 있잖아, 맨날 나 패려고 오는 애들.’ ‘아.’ 굳이 자신이 위협받는단 사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지만…… 요즘 같아선 좀 우는 척해야 좋을 것 같았다. 드래곤이 때려서 아파요, 적들이 때려서 아파죽겠어요, 라고 해야 황태자가 전처럼 부담스러운 지시를 하지 않을 테니까. 황태자가 대답했다. ‘형은 좀 만만하게 보이는가 봐. 맨날 맞네.’ 어쩐지 깔보고 놀리는 것 같은 어감. 분명 어감이 느껴지지 않은 텔레파시라 해도 륀체르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직 상대가 황태자이기에 가능한 저 비웃음이라……. 륀체르는 발끈하거나 반박하지 않고 더욱 우는소리를 했다. ‘그래. 다들 나를 아주 동네북으로 안다니까?’ 황태자와의 대화를 마친 륀체르는 욕조에서 일어나 몸을 닦고 잠자리에 들었다. 녀석, 괜히 사람 잠은 깨워서는. 몸은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았다. 밤을 잠식하는 상념의 시간이 와버린 것이다. 예전에는 모든 게 단순했다. 사파이어라는 성을 물려받고 싶었다. 그 자리에 앉아 보여 온 세상에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노력해서 능력을 키우라 하였고, 자신은 그 능력을 키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과 자존심을 따지지 않고 무슨 일이든 했다. 그렇게 해서 훗날 아버지가 인정하는 능력자가 되어 아버지의 성을 얻고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으면,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배신이라는 비정한 복수를 주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피비린내 나는 일들 그리고 온갖 추악한 일로 유지해온 13대 길드 마스터의 자리. 그 자리를 지키며 산다는 것은 무거웠다. 점차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다. 행복 따윈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거라고. 특히나 오늘처럼 습격을 받은 날엔 그 생각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륀체르는 마력등이 아닌 촛불을 켰다. 그리고 어둠을 밝히는 샛노란 불을 지그시 응시했다. 저 불은 심지와 산소가 다할 때까지 무조건 탄다. 결코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오직 불타오르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듯. 오직 제 몸과 세상의 달콤한 공기를 소모하여 밝게 빛나는 것에만 열중해야 한다. 어쩐지…… 자신의 이런 삶과 닮아 있었다. ‘그렇다면 짧고 거세게 타오르는 것도 좋지. 아니, 아예 폭약이 되어버리는 거…… 그거 좋군.’ 그러려면 지금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하다. 고작 바너의 영주를 이기는 힘 따위로 만족한다면 죽을 때까지 오늘처럼 진절머리 나는 일상을 이어갈 것이 분명하리라. 앞으로는 바너의 영주가 아닌 황태자를, 황태자가 아닌 황제를 이겨야 한다. 자신에게 지금 가진 패는 많으나 그 패들이 하나같이 너무 커서 다루기가 조심스러웠다. 큰 패이되, 누구도 모르는 패를 쥐어야만 더 큰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불현듯 떠오른 것은 어느 미청년의 얼굴 아니, 어느 드래곤의 모습이었다. 하이너 그로스라는 이름을 가진 드래곤. 오를린 아가씨의 호위 기사. 지금까진 그 청년의 성품에서 야망을 느낄 수 없어 시답잖은 듯이 대해왔지만, 앞으로는 친화적으로 굴 필요가 있다. 뭐, 이쪽이 제아무리 살갑게 군다 해도 저쪽에서 이쪽을 연적 비슷하게 여기고 날을 세우는 이상 어쩔 수 없겠지만. ‘아, 내가 제 아가씨와 친구가 되면 또 모르려나?’ 그 왜, 남들이 우정이라 말하는 그런 관계들. 겉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그런 관계들. 륀체르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을 썼다. 촛불이 꺼지고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우정이라니. 남녀 사이에 우정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오를린의 아가씨가 가끔 기분이 좋을 때 ‘내 친구 륀체르’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걸 듣고 있으면 픽하고 비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물론, 살을 섞는 친구라면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그저 마음 편히 그녀의 가슴만 빨고 싶은데, 그렇게 되면 드래곤이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가 없고. 륀체르는 잠이 들면서 피곤한 목소리를 냈다. “아아, 아버지 사는 건 참 성가시군요.” *** 하이너는 마차에 타고 바너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곳에서 내렸다. 그리고 단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은 숲으로 가서 드래곤이 되었다. 아니, 변신했다는 말이 옳으리라. 네히트의 실렌틴 광산으로 빨리 가기 위해선 이 변신은 필수였다. 변신을 마치고 나니 주위 땅에 쌓인 눈이 녹아버리면서 수증기를 만들었다. 척추에서 비롯된 고통이 신경을 타고 퍼져 단단한 비늘 가죽 전체를 비명 지르게 했다. 그아아아아……. 사람의 것이 아닌 소리, 드래곤의 포효가 밤의 고요함을 괴악하게 찢어놓았다. 지금으로썬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명색이 드래곤이라는 마력 생물인데 고통을 없애는 마법을 쓸 수 없단 게 한탄스러웠다. 아가씨껜 변신 시 고통이 그리 크지 않다는 듯 말해두었지만, 사실 그렇진 않았다. 한 번 몸이 바뀔 때마다 화형을 당하는 듯 괴로웠다. 작전 시에는 아가씨 앞이라 괴로움에 몸부림치지도 못하고 불길에 떠밀리듯 일했지만, 지금은 아가씨 앞이 아니었다. 하이너는 약 십 분간 고통에 몸서리를 치고 나서야 하늘을 향해 활개를 칠 수 있었다. *** 눈발 사이를 헤치고 날아 네히트의 실렌틴 광산에 도착했다. 눈꽃이 만개한 광산은 광산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은백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무슨 마법의 힘인지 유독 이 지역의 눈에는 발광현상이 보였다. 남색 밤하늘 아래서 온 세상이 선명한 은백색을 발하는 것을 보니, 고통을 잊을 만큼 낭만적인 기분이 들었다. 만약 지금 이 풍경을 아가씨가 본다면 손뼉을 치고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시면서 ‘온 세상이 각설탕으로 조각한 것 같아!’라고 감탄하셨겠지. ‘다음에 아가씨에게 보여줘야겠군.’ 지도에 표기된 사괴탄의 거래 장소가 가까워지자 하이너는 착지했다. 그리고 다시 인간으로 변신했다. 거대한 생물체에서 인간으로 변하는 고통은 조금 전 느낀 고통을 압축한 듯 육신을 더욱 힘들게 했다. 지금 이 변신이…… 가능하면, 가능하다면 마지막이었으면 했다. 사괴탄을 죽일 땐 드래곤으로 변할 생각이 없으니까. 그리고 작전을 무사히 마치고 바너의 아가씨께 돌아갈 땐 하늘을 날지 않고 대신 마차로 재빨리 달려갈 작정이었으니까. 다시 한 번 사괴탄의 그림을 보았다.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은 차라리 인간의 감정을 죽이고 있었다. 륀체르의 말에 의하면, 사괴탄은 이 그림대로 예쁘다 했다. 이런 예쁜 여인을 본다면 망설임 없이 죽여야 하는 게 이 밤의 의무. “후우….” 아가씨께서 분명 드래곤이 되었으면 그 배포도 드래곤처럼 크게 가지라 했는데, 어째서 이리 떨리고 긴장되는 걸까. 괜스레 인사를 해본다. “그럼 아가씨, 다녀오겠습니다.” 고통이 남아 바르르 떨리는 사지를 허우적거리며 목적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고도가 높은 곳에 목적지가 있었고, 오르막길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눈이 쌓이고 눈꽃이 만개한 땅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이러다가 발을 헛디디면 곤란하다 생각하는 그때, 공교롭게도……. “어!” 그는 드래곤의 마법을 쓸 틈도 없이 땅 밑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가 빠진 곳은 실렌틴 광산의 광부들이 광물 시추를 위해 파놓은 구멍이었다. 하이너를 삼킨 어둠은 곧 침묵했다. 그 위에는 마치 요정의 가루가 뿌려지듯 싸늘한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스토리를 따라 썸이 가느라 ㅠㅠ 썸 기대하시는 분들 ㅈㅅ욤! 00036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다음날 오후, 마리는 영원의 봄에 찾아갔다. 그녀는 마친 호위 기사가 작전을 마치고 오전쯤에 바로 돌아올 줄 알았으나 소식이 없어 걱정하고 있었다. 호위 기사를 찾으러 가려는 수단을 얻기 위해선 륀체르가 필요했다. 집사는 마스터를 찾아온 금발 아가씨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그녀를 마스터의 침실로 안내했다. 이 금발 아가씨는 평소 영원의 봄 비밀정원에도 무단침입을 하고 구석구석 구경하러 다니는 등 무례하게 굴었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는다. 그녀의 심란한 표정을 보니 아마 급해도 매우 급한 일이 있어 보였다. 침실로 들이기 전에 집사는 한 가지를 강조했다. “참, 그걸 알아두셔야 합니다. 마스터의 침실로 안내받은 분은 아가씨가 처음이란 것을.”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여태 이곳엔 많은 손님이 왔지요. 곳곳의 길드장들, 다른 영지의 귀족들, 그리고 바너의 영주까지…… 하지만 제아무리 높은 자들이 와도 이렇게 바로 마스터의 침실로 안내되신 분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스터의 사적인 공간에 들어갈 아가씨는 그만큼 호의를 얻는 분이란 말입니다, 이 답답한 아가씨 같으니…! 집사는 그 말을 삼키고 조용히 문을 열었다. “흠흠. 저기 마스터, 주무시는 데 죄송하지만 그분이 오셨습니다.” 밤새 험한 일을 당해 피곤하여 오후까지 깊게 잠들어있던 륀체르는 집사가 몇 번이나 깨우고 나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하지만 집사의 목소리에 잠을 깬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잠을 깼다. 달콤하고 상큼한 봄의 향기. 꽃밭에 와있는 듯 착각하게 하는 상냥하고 아름다운 그녀만의 향기. 바로 마리의 향기였다. 흐릿한 시야에 마리의 얼굴이 보이자 륀체르는 히죽 웃었다. 집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스터, 일단 식사와 옷을….” “식사는 됐고 옷은 내가 알아서 해. 차나 가져와.” “예, 알겠습니다.” 집사가 자리를 비우자 마리는 륀체르의 침대 옆 테이블에 서서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후웁, 후웁! 하는 소리가 륀체르의 잠을 완전히 깨웠다. 제 딴에는 불안함을 애써 지우려 하는 행동이었는데 그것을 본 륀체르는 히죽 웃고 말았다. “무슨 일이야?” “하이너가 오지 않아. 어떻게 된 거지?” 륀체르는 고작 그런 것을 물으러 이곳까지 왔다는 것에 조금 실망했다. “큭… 성격 급하긴. 어젯밤에 떠난 사람이 오늘 올 리 없잖아?” “아니야! 륀체르가 지도도 주고 그림도 줬는데, 그러면 일이 금방금방 돼야 하는 거잖아. 이렇게 오래 걸릴 이유 있어?” 륀체르는 기가 찬다는 듯 대꾸했다. “하! 참, 나…… 일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느냐에 따라 다르지. 네 호위 기사 아니, 네 신중한 드래곤 용사님께서 신중한 작전을 펼치시고 있나 보지. 하여간 인내심을 좀 기르셔야겠어. 오를린의 아가씨는.” 자리에서 일어난 륀체르가 잠옷 셔츠를 벗었다.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받은 그의 몸은 마른 편이지만, 키가 크고 잔 근육이 잡혀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제법 예쁜 몸이라 할 수 있었다. 하얀 피부에 검은 비단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 선명한 사파이어 빛 눈동자, 붉은 입술 등 모든 게 감탄을 자아낼 수준이었지만, 그러한 아름다운 모습은 지금 마리의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느긋한 태도에 속만 더욱 답답해졌다. “지금 이렇게 얌전히 있을 때가 아니라고. 내 호위 기사는 여러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 작전해야 했을 때도 지금보다 빨리 끝내곤 했어! 고작 약한 여자 하나 상대하러 가는 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그사이 새 셔츠를 갈아입은 륀체르가 목부터 끈을 여며 내리며 성가시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내가 네히트(실렌틴 광산이 있는 지역)까지 가서 용사님 빨리 오라고 보채기라도 해야겠냐?” 어쩐지 빈정거리는 태도를 느꼈으나 마리는 신경 쓰지 않고 대답했다. “길드장 당신이 그럴 필요는 없지. 내가 가도 충분해.” “네가 가다니?” “으응, 내가 하이너 데리고 올 작정이야. 알아보니까 바너에서 네히트까지 가는 텔레포트 홀은 없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이동 스크롤 부탁해도 될까?” 그 거리의 이동 스크롤이라면 가격이 꽤 나갔다. 바너와 네히트가 지리적으로 바로 붙은 영지라고는 하나 그래도 인간이 이동할 물리적 거리로 따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람의 걸음으론 족히 잠을 자지 않고 보름이나 걸어야 할 그런 거리였다. 그런 거리를 만약에 텔레포트 홀로 단숨에 돌파한다고 봤을 때 내야 할 요금은 팔구천 자일쯤. 그런데 그런 텔레포트 홀보다 더욱 간편하고 빠른 수단인 이동 스크롤을 사려면 가격이 억대로 넘어가고 만다. 저 오를린의 아가씨는 그간 드래곤 소동 작전을 하면서 억대의 돈을 보수로 가져갔다. 마음만 먹으면 그런 이동 스크롤은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돈은 다 어디에 쓰고 구걸을 하는 걸까. 식당에서 식사할 때도 정보를 팔아 식사비를 냈던 구두쇠 중 상 구두쇠 륀체르는 살짝 약 올리듯 웃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전에, 내가 왜 그런 고가의 스크롤을 너에게 제공해야 하는지 알고 싶은데?” “내가 언제 제공해 달래? 부탁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그 이유를 알고 싶단 말이지. 아주 타당한 이유 말이야.” 마리는 고향 영지에서 여러 남자를 만나봤지만, 륀체르처럼 경제적 능력이 어마어마한 남자는 본 적 없었다. 이동 스크롤을 달라고 하면 바로 ‘옜다!’ 하고 줄줄 알았는데 그 예상이 무참히 깨져버렸다. 마리는 륀체르를 살짝 흘겨보며 팔짱을 꼈다. “왜 이렇게 쪼잔하게 굴어? 애당초 이 작전을 부탁한 사람이 누군데? 이게 다 당신 좋자고 하는 일 아니야? 그러니 좋은 말 할 때 스크롤 내놔.” ‘이동 스크롤을 부탁해도 될까?’ 에서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내놔!’라는 표현이 된다니. 륀체르는 마리의 단순한 태도에 깔깔 웃었다. 그러곤 침대에 몸을 뉘었다. 두 팔을 베개 삼아 천장을 올려다본 그가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그런 행동이 답답하고 약이 오른 마리가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어어어! 안 줄 거야?” 륀체르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마리를 보았다. “이봐, 아가씨.” “왜!” “물론 이 일을 부탁한 건 나야. 하지만 부탁하면서 내가 분명 그랬지? 작전 성공 시에만 급여를 지급하겠다고. 네 드래곤 용사님이 사괴탄을 죽이는 게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모르는 판국에 내가 뭣 하러 그런 거금을 써야 해? 단지 네 걱정을 덜어주려고? 응?” 논리적으로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물론 마리가 드래곤을 부리는 아가씨로서 갑의 입장을 내세워 ‘스크롤을 주지 않으면 네놈의 드래곤 소동에 관한 진실을 황도 상부에 다 까발리겠다!’ 하고 협박하면 끝날 문제지만, 그녀는 그런 치사한 짓까진 하고 싶지 않았다. 륀체르 또한 마리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어느 정도 파악하여 이렇게 나오는 것이었다. ‘쪼잔한 자식! 계집애처럼 생겼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내가 한 푼 두 푼 좀 아껴보겠다고 부탁했더니 도무지 빈틈이란 게 없군.’ 그동안 받은 돈은 여행 자금으로 모아두었고 나머지는 루돌프의 의학 공부에 필요한 학자금으로 줘버렸다. 그래서 무턱대고 스크롤을 사버리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가진 장신구를 팔면 스크롤을 살 수 있겠지. 그사이 호위 기사가 돌아와 주면 더할 나위 없고! 마리는 입술을 샐쭉 이며 뒤돌아섰다. 여전히 륀체르는 자기가 왜 스크롤을 사주어야 하는지에 대해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 그래, 안 그래? 사람들이 부자들에 대해 착각하는 게, 돈이 많으면 쓸 때 막 써도 되는 줄 안다니까? 큰돈을 만지는 사람들일수록 그 돈의 가치를 알기에 함부로 쓰지 않는다고. 유지비나 이래저래 나가는 돈이 한두 푼인 줄 알아? 내게도 책임져야 할 길드 식구들이 수백 명이나 된다고. 그런데 나에게 대뜸 그 비싼 이동 스크롤을 사달라고 하다니, 경솔하기 짝이 없군. 오를린의 아가씨는 말이야…… 이봐, 어디가?” 마리가 침실을 나가려는 사이, 집사가 차를 준비해왔다. 마리는 륀체르가 잡든 말든 그냥 나가려다가 집사를 보고 갑자기 생각을 달리했다. 좀스러운 남자가 제 아랫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도 조금 전처럼 좀스러운 말을 계속 늘어놓을지 상당히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마리는 뒤돌아서서 갑자기 세상 누구도 짓지 못할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흐느끼는 소리도 괜스레 내기 시작했다. “흑… 그래서 나를 도와주지 않을 거야…요? 어쩔 수 없지요, 뭐. 날씨도 춥고 눈도 장난 아니게 내리지만, 제가 직접 걸어서 갈 수밖에… 이 못난 걸음으로는 한 달은 걸리겠지. 동상 걸려도 길드장님의 탓은 하지 않겠어요…….” ‘이 여자, 왜 갑자기 말투가 달라지는데?’ 륀체르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고, 집사는 이게 다 무슨 일인가 하고 마스터와 아가씨를 번갈아 보았다. 륀체르의 얼굴에서 당황의 빛을 읽은 마리의 연기는 더욱 물이 올랐다. “그리고 만약 네히트의 광산에서 얼어 죽은 제 시체가 발견된다면, 고향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길 부탁해요…… 흐흑!” 륀체르는 집사에게 ‘차를 가지고 왔으면 얼른 나가라!’고 눈짓했고, 집사는 자리를 떠났다. 마리 역시 눈물 닦는 시늉 하며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직전, 어느새 침대에서 뛰쳐나온 륀체르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아주 우스운 연기를 하네?” 마리가 륀체르의 눈을 올려다보며 보조개를 패 웃었다. “어머, 연기라니요? 도와주시지 않으니 저라고 별수 있겠나요?” “이봐….” 륀체르는 다시 나가려는 마리의 팔뚝을 잡고 짜증 난다는 듯 낮게 외쳤다. “멍청한 아가씨야! 좋아! 네 말대로 내가 스크롤 사줘서 네가 네히트까지 간다고 쳐! 네 용사님이 어디 있는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고 만날 건데?” 륀체르가 마리에게 이동 스크롤을 사주려 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이 가녀린 아가씨 혼자서 눈이 뒤덮인 광산에 가는 것은 위험하고도 미친 짓! 륀체르는 그런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용사님 구하려다 자칫 그대가 위험해질 수도 있단 말이다!” 마리는 배시시 웃었다. 뭐가 걱정인가? 자기에겐 마력을 쓰는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가 있다. 마리아와 함께 간다면 실렌틴 광산에서 하이너를 찾는 것쯤은 누워서 쿠키 먹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버릇과 같은 그 말을 내뱉었다. “이봐, 길드장님.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뭐가 남죠? 내가 네히트까지 간다면야 호위 기사를 찾는 것쯤은 시간문제랍니다!” “…….” 마리는 이제 애교를 부리듯 륀체르의 가슴팍을 어깨로 살살 흔들 듯 쳤다. “그러니 스크롤 사주라, 응? 길드장 님, 길드장 아저씨이….” 무려 열 살이나 차이가 나다 보니 마리는 그런 호칭으로 불렀으나, 순간 륀체르가 충격을 받았다. 동안에다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어디 가서 소년, 혹은 총각, 혹은 오빠라는 소릴 들으면 들었지, 아저씨란 소리를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륀체르는 진정으로 발끈하여 마리를 떼어냈다. “너…… 두고 보자.” “어맛, 왜?” “나를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지?” “응, 뭐가? 내가 뭐라고 했는데?” 륀체르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뒤돌아섰다. 서른 살 평생 아저씨라는 말을 처음 들은 충격에 머리가 다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이쯤 되면 그의 외모에 관한 은근한 자부심이 사실은 은근한 게 아니라 하늘을 찌를 정도라 해도 되겠다. “아니 누굴 아저씨로 만들어? 그리고 지가 뭔데 스크롤을 사 달라, 말라야? 가슴 한 번 빨게 해준 적도 없으면서.” 마리는 쪼잔하고도 꿍한 륀체르에게 질릴 대로 질려 완전히 스크롤을 포기했다. 그녀도 팩 뒤돌아서며 들으란 듯 중얼거렸다. “싫으면 그만둬! 누군 돈 없나…. 내 사괴탄 작전이 끝나는 대로 다시는 여길 오나봐라! 바너는 이제 안녕이다, 흥!” 그녀가 다시 출입문의 손잡이를 잡을 때였다. 그녀의 말 중 어느 부분이 륀체르를 아쉽게 만들고 말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여태와는 다른 진지한, 그리고 사뭇 신경질적인 표정을 하며 따졌다. “이봐. 마리니시네.” “왜?” “진심이야? 이번 일이 끝나면 떠나겠다는 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00037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진심이냐고 묻잖아.” 표정은 신경질적인데 어쩐지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떨리는 건 손을 잡은 그의 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모든 분위기가 쓸데없이 침울하게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 마리는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그럼 진심이지, 뭐야?” 륀체르가 마리의 손을 끌어당겨 마주 섰다. “진심이면 가슴 한 번만 빨아보자.” 당혹스러운 요청에 마리는 입을 반쯤 벌린 채로 멍해졌다. 륀체르는 자기 말에 어떤 이상함이나 망측함을 느끼지도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하는 스크롤 줄 테니까.” “…….” “빤다고 닳는 거 아니잖아?” 다른 아가씨라면 질려서 도망쳤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는 그러지 않았다. 조금 놀라긴 했어도 도망까지 갈 정도는 아니었다. 애당초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를 얻기 위해 호위 기사를 성적으로 유혹한 전적이 있다. 그런 자신이 이제 와 저런 가슴 변태에게 무엇을 불쾌해 해야 할까? 어차피 륀체르의 인간성이 엉망이란 건 예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그가 크래파의 뒷골목에서 여행자 변복을 하며 가슴 성애자처럼 행동하고 다니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다 알면서 지금에서야 그의 망발을 도덕적 잣대로 힐난하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사괴탄 작전만 끝나면 평생 별로 볼 일 없을 사람이긴 한데…….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가슴을 내어주긴 싫었다.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이쪽은 충분히 갑의 입장이다. “륀체르, 저기 음, 물론 빤다고 이 99.9 점짜리 가슴이 닳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가슴이 닳는 건 아니지만…….” “…… 아니지만?” “기분은 닳을 것 같아.” 한마디로 기분이 나쁘단 말? 륀체르는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풀려 떨어졌다. 마리는 이동 스크롤에 아쉬움이 남아도 과감하게 뒤돌아섰다. 륀체르는 마리의 뒷모습을 보고 물었다. “뭐냐, 닳는다니. 내가 네 기분을 더럽게 하기라도 하냐?” “응. 당연한 거 아니야?” “어째서?” 륀체르는 묻다가 왠지 마리가 야속해서 조금 짓궂게 말했다. “어차피 예전에 나보다 더 못난 녀석들한테도 빨게 해준 가슴일 텐데.” “뭐, 너보다 외모는 덜 했겠지만, 인간적으로는 훨씬 나은 편들이었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래 봬도 내가 사람을 좀 가리거든. 그리고 뭐 그런 것을 다 떠나서 생각해도…… 넌 내 타입이 아니야.” 순간, 륀체르의 초록색 눈동자가 여리게 흔들렸다. 오를린의 아가씨와 감정적으로 친해지진 못할 거라면, 적어도 우호적인 관계, 친구의 관계는 유지해야 한단 조급함이 몰아친 탓일까.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바너를 떠나면 다시 오지 않아? 나를…… 친구로도 원하지 않아?” 륀체르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뒤돌아서 이마를 잡고 말았다. 실수했단 생각에 자신을 벌하듯 입술을 세게 깨무는데, 등 뒤에서 마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 그건 아니야!” 륀체르는 뒤돌아서 다시 마리를 보았고, 마리는 그린 듯 딱딱한 웃음을 머금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난 세상 모든 사람과 친구 하고 싶은 긍정의 숙녀라서! 그럼 이만 갈게! 친구!” 문이 닫히고 그녀는 영원의 봄을 벗어났다. 륀체르는 소파에 널브러지듯 앉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하…… 대차게 차였군.” 자신에게 욕을 퍼부어주고 싶었다. 병신! 머저리! 접근하는 방식이 틀렸단 걸 모르겠냐? 결국, 그녀도 보통의 여자라고! 다른 녀석들처럼 끝까지 점잖을 떨며 다가갔어야 했다고! 여자들이 괜히 멋진 남자 타령을 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뒤늦은 후회와 함께 가슴이 답답해 창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창문을 열지 않았다. 그녀가 남기고 간 향 때문에 환기하기가 싫어졌기 때문이다. 분명 그녀는 호위 기사를 찾기 위해 네히트까지 갈 것이다. 향기마저 얼려버릴 이런 추운 날씨 속에서 말이다. 륀체르는 누군가가 몹시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몇 분 후, 그는 집사에게 ‘마리니시네 양에게 이동 스크롤을 주고 오라.’고 지시했다. *** 마리가 륀체르에게 무상으로 이동 스크롤을 받고서 마리아와 함께 네히트로 가는 그 시각, 하이너는 낯선 곳에서 눈을 떴다. 낯선 곳. 낯설다는 느낌을 넘어 이상한 곳. 공간 구분이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새까맣다. 공포가 드리워졌다. 등에 닿은 차가운 바닥은 아주 미끄럽고 매끈하여 마치 유리로 만든 듯했다. 그 바닥 역시 다른 곳과 같이 새까말지도. 아마 누군가가 하이너를 위에서 본다면 하이너는 별 하나 없는 우주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괴상한 공간에다 기온도 너무나 낮았다. 추위에 몸을 떨던 하이너는 일어나려 했으나, 사지를 압박하는 투명색의 줄-아마도 마력 결박 도구- 때문에 일어나지 못했다. 오를린에서도 아가씨에 의해 사지가 묶인 적이 있었는데 이런 불가사의한 곳에서 또 묶여 있다니……. 하이너는 한 번만 더 사지가 묶인 때가 오면 ‘이건 내 전문이죠!’하고 너스레라도 떨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에 아가씨께서 말씀하셨던가. 드래곤이 되었으면 드래곤처럼 생각하라고. 하이너는 망설임 없이 헤츨링(새끼 드래곤)의 열기 조절 마법을 썼다. 그러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두꺼운 이불을 덮은 듯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후우.” 이런 수상한 곳에 끌려와서 죽지 않은 것을 보니 일단은 안도감이 들었다. 여차하면 드래곤으로 변신해서 도망을 가도 될 테지만, 당분간은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다…… 는 거짓말이고 드래곤으로 변신해서 도망가는 것 자체가 아프고 성가셔 미루고 싶었다. 그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을 누군가가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 모양이다. 갑자기 하이너의 위에서 불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챙! 챙! 찬! 창! 파아아앗! 새까만 어둠을 바탕으로 수백, 수천 개의 검들이 첨예한 끝을 빛내며 하이너의 몸을 노렸다. 그러나 노리기만 할뿐 달려들진 않았다. 마치 얌전히 있으라고 겁만 주는 것 같았다. 검들은 모두 제각각의 모양을 자랑하고 있었고 하나같이 평범한 검 그 이상의 기묘한 빛깔들을 내뿜어댔다. 그리고 그 빛깔들은 단지 빛깔이라기엔 상당히 무게감이 있었다. 그래, 마치 사람의 시선, 눈들을 보는 것 같은 그러한 무게감이었다. ‘마검인가?’ 마검이 아니라면 이렇게 온몸을 감싸는 특이한 기운들을 설명할 순 없다. 그렇다면 이곳은 괴지에 있다는 사괴탄의 작업 장소가 분명하리라. 실렌틴 광산의 구덩이에 떨어졌을 때 하필이면 다른 이들에게 구해지지 않고 사괴탄에게 구해진 모양이었다. 악운이었다. 소지한 물건중에는 사괴탄의 거래 장소가 설명된 지도와 사괴탄의 외모가 그려진 종이가 있었다. 사괴탄은 아마 그걸 보고 하이너가 암살자임을 확신했을 것이다. ‘죽는 건 시간문제군.’ 하이너는 저 검 끝들이 목숨을 노릴 때를 대비해 드래곤 화를 준비했다. 그런데 그때, 차가운 구두 소리가 일정하게 들렸다. 또각, 또각, 또각……. 우아한 걸음 소리에 하이너는 변신을 보류했다. “정신이 드나요?” 재개비처럼 탁하고도 몽환적인 음성이었다. 동시에 안개에 젖은 장미 같은 향기가 감돌았다. 그 강렬한 첫인상의 주인공은 바로 사괴탄이었다. 수천 개의 검광 아래 드러난 그녀의 모습을 본 하이너는 놀라고 말았다. 검광의 역광 아래 우뚝 선 그녀의 모습, 얼굴. …… 아름답다. 초상화의 표현은 아주 못 그렸다고 평할 수 있을 정도로 사괴탄은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 하얗고 투명한 피부에 흑적색의 입술, 검푸른 괴기를 담은 눈동자에 하이너의 시선이 무력하게 강탈당해 버렸다. 흠잡을 곳 없는 몸매를 드러내는 적자색의 드레스 또한 마검 제조 장인이라는 직업과는 어울리지 않는 우아함과 고혹적인 매력을 더했다. 어떤 이들은 마음이 아름다우면 외모도 그에 걸맞게 된다 하는데 이 경우에는 반대였다. 멀쩡한 검사들의 영혼을 빼내어 마검으로 만드는 사악함이 미모에 비례하고 있었다. 마리 아가씨와 비교해볼까? 아가씨가 미의 여신 플라미네의 빛을 그대로 흡수한 듯 밝은 미모를 가졌다면, 이 사괴탄이란 여자는 플라미네의 어둠을 모두 흡수한 듯 음산하고 퇴폐적인 미모를 과시했다. 사괴탄은 하이너를 내려다보며 검푸른 안개처럼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 죽이려고 했는데.” “그런데?” “…… 너무 잘 생겨서 내버려뒀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다른 이의 외모를 칭찬하는 것은 진정성이 없어 보인다. 하이너는 대충 대꾸했다. “이거 참 영광이군. 부모님께 감사해야겠어.” “정말이지 당신 같은 잘생긴 남자를 가둬둘 수 있어 영광이에요.” 사괴탄 역시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자기가 잘 나가는 극단 남배우의 열렬한 응원자도 아니고, 단지 잘생겨서 살려뒀다는 말은 순 거짓이다. 이 잘생긴 남자를 살려둔 것에는 사실 다른 목적이 있었다. 이 남자는 마검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몸을 가졌다. 몸만 봐도 그 과거를 읽을 수 있었다. 전신을 감싸는 탄탄한 근육, 자잘한 상처, 손에 밴 굳은살의 위치 등으로 보아 검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 굳은살이 연습의 결과인지 아니면 실전의 흔적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런 남자의 영혼을 빼내어 마검으로 만들면 상급의 검은 만들 수 있다는 건 확실했다. 사괴탄이 하이너를 살린 이유는 바로 그때문이었다. “정말 탐나는 몸을 가졌어요…… 아, 혹시 소원 있어요?” “뜬금없군. 소원은 왜 묻지?” 사괴탄은 가장 나긋나긋하고 상냥한 말투로 가장 무서운 사실을 알렸다. “당신… 곧 이 몸을 떠나야 하거든요.” 하이너는 사괴탄이 어째서 자신을 살려두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아아. 마검으로 만들겠단 말인가? 이거 참 경사군. 인간에서 검으로 전직하다니.” “그러니까 소원을 말해 봐요. 뭐든지 들어줄게요. 맛있는 걸 달라면 근사한 요리를 맛보게 해드리죠. 아름다운 곡을 듣고 싶다면 기꺼이 악단을 초청해드리죠. 그리고…….” 그녀의 말이 같잖은 하이너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죽기 전에 그딴 걸 할 것 같은가?” “그럼 뭘 할 생각이죠?” 하이너는 사괴탄의 손에 죽어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드래곤이 일개 마검제조가에게 죽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어디 있을까? 게다가 지금 사괴탄이 묻는 말, ‘죽기 전에 뭘 하고 싶은가?’를 도리어 자신이 사괴탄에게 물어야 함이 옳았다. 그러나 하이너는 짐짓 곧 죽을 사람처럼 생각에 빠져보았다. “음.”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이라…. 아가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름답긴 하나 어딘가 음습한 사괴탄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아가씨의 밝은 얼굴이 저절로 떠오르고 있었다. 빛이라곤 검들이 뿜어내는 살벌한 빛 뿐에다 그 외에는 전부 어두운 이 공간에선 아가씨의 눈부신 얼굴 자체가 안식이 되는 법이었다. “죽기 전이라면 역시……좋아하는 여자와 침대에 뒹구는 게 최고 아니겠어.” “그런 여자가 있나요?” “있지. 당신과 닮았어.” 당신에겐 조금도 보이지 않는 눈부심이 있지만 말이야. 하이너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사괴탄은 불쾌한 표정이었다. 마치 거리에서 시시껄렁한 남자에게 껄떡이는 말을 들은 아가씨처럼. “나와 닮았다니. 정말 낡은 수법이네요. 그런다고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버려요.” “하지만 사실인걸. 그녀도 당신과 같은 하얀 피부에, 금발에…….” “그럼 나는 어때요?” “무슨 말이지?” 사괴탄은 대답 대신 하이너의 눈을 어루만졌다. 이 남자의 눈동자는 검디검다. 이곳을 감싸는 어둠보다 더욱 검은 눈동자. 그리고 이곳을 장식하는 가장 강한 마검보다 더 강해 보이는 몸. 그것은 어떤 향수를 일으켰다. ‘닮았어.’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사람, 지금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 한때는 전설의 검황이라 불렸던 자였으나 이제는 하나의 마검이 되어버린 자였다. 이 남자는 자신의 양부였던 세이든 레 지괴르와 닮아 있었다. ‘이 검은 눈동자 좀 보라지…….’ 세이든의 검은 눈동자가 겹쳐 보인다. 그 사람의 눈에는 언제나 양딸로서의 자신만 있었다. 여자로서의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남자의 검은 눈동자를 보니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 눈동자는 눈앞의 여자를 여자로 본다.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정염에 휩싸인 남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세이든이 드디어 자신을 여자로 봐주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사괴탄은 조금 동요하여 입을 열었다. “이봐요, 당신.” “말해.” “여기가 비록 침대는 아니지만, 나와 뒹구는 것도 괜찮지 않나요?” “그거…… 나쁘지 않군.” 하이너는 점점 가까워지는 사괴탄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눈이 감겨갔다. 스르륵 감기기 전 보이는 새파란 눈동자가 시체의 눈동자 같다. 그만큼 공허한 시선이었다. 마약에 취한 여자가 아무나 입맞춤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는 게 옳으리라. 그녀의 입술이 하이너의 입술에 닿으려는 그때, 하이너는 고개를 돌렸다. 사괴탄이 어째서 그러느냐고 묻는 듯 하이너를 보았다. 하이너는 조금 더운 듯 목을 움직이다 말했다. “풀어.” “꼭 그래야 하나요?” “제대로 뒹굴고 싶지 않나? 그러려면 푸는 게 좋아.” 잠시 숨을 참은 하이너가 눈을 뜨며 입가를 올렸다. “아주…… 뜨겁게 해줄 테니까.”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 쿠폰 감사합니다! 00038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이런 어둠과 어울리는 묵직한 저음이었다. 그런데 그 울림이 듣는 여자의 혈류를 외려 경박스럽게 만들었다. 야릇한 의미를 담은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짜릿해진 사괴탄은 잠시 눈을 감으며 심호흡했다. 그녀의 열기 어린 숨이 차가운 어둠을 데웠다. 얼른 이 탄탄한 육체를 자유로이 풀어주어서 느껴보고 싶었다. 이 남자가 어떻게 나올지. 이 남자가 여자의 몸을 어떻게 다룰지. 그녀의 본능이 그렇게 외쳤지만, 아쉽게도 본능에 따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관계는 가벼운 하룻밤을 위해 만난 남녀 사이가 아니라 오직 마검 제조 장인과 ‘재료’로서의 관계일 뿐이었다. “뜨겁게 해준다, 라…. 말이 이상하군요. 내게 그러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그냥 얌전히 있어도 곧.” 사괴탄은 잠시 말을 중단하고 하이너의 얼굴을 사랑스럽다는 듯 보았다. “곧, 만족하게 될 거니까.” “…….” “어디까지나 사형수이자 재료에게 주는 선물로만 알아줘요.” 입술이 닿았다. 차디차서 사람의 것이 아닌 듯한 입술을 느끼며 하이너는 이 상황을 벗어나고자 생각했다. 그녀의 체온, 그녀의 피를 가열하는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그녀의 혈액, 체액은 절대 가열되지 않았다. ‘어째서?’ 헤츨링(새끼 드래곤)의 힘을 써서 사람 하나쯤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인신매매단을 잡았을 때부터 가능한 힘이었는데, 지금은 그게 되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사괴탄이 보이지 않는 마력 보호막으로 제 몸을 무장하고 있다는 걸 뜻했다. 역시, 마검 제조 장인을 만만하게 볼 게 아니었다. 당황할수록 침착해야 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드래곤으로서 생각해야……. 하이너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의 표정은 아름다운 여인의 키스를 받는 혈기 어린 남성의 표정이라 할 수 없었다. 그 표정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은 사괴탄은 하이너의 혀를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술 밖으로 피가 흘러 잘 생긴 턱을 적셨다. 그런데도 신음 하나 흘리지 않는 이 남자의 반응이 미심쩍어 그녀는 고개를 뗐다. “무슨 생각 중이에요? 어떻게 하면 이 여자를 죽일 수 있을까, 그런 생각 하나요?” ‘젠장.’ 하이너는 자신의 헤츨링(새끼 드래곤) 마법이 들킨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하지만 사괴탄은 그가 헤츨링 수준의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다만, 그가 검을 다루는 자들 특유의 검기로 반항을 시도할 거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검 수련을 얼마나 했는지 몰라도 고작 그런 검기만으로 나를 죽이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그러니…… 포기하고 이 키스에 집중해요.” 하이너는 다가오는 입술을 거부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진짜 마검이 될 사람처럼 살짝 겁먹은 티를 내며 투덜거렸다. “맙소사, 인정할 수 없군. 내가 정말 마검이 된다고?” “어머, 겁쟁이인가요?” 사괴탄은 바람 같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의뭉스러운 시선을 건넸다. 마치 ‘그럼 거짓으로 마검을 만들 줄 알았나요?’ 하고 놀리는 것 같았다. 하이너는 이런 현실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겠다는 듯 마뜩잖은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제의했다. “키스 같은 건 때려치워. 화끈하게 가보자고.” “화끈…… 그러니까 풀어주는 건 안 된다고 했는데.” “풀어줄 필요 없어.” “그러면요?” 하이너는 자기가 지을 수 있는 가장 불량한, 마치 오를린의 날건달들과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헤츨링의 마법으로 이 여자의 몸에 감도는 마력 보호막을 깨트릴 수 없다면 다른 방식을 선택해야 했다. 다른 방식. 여자의 몸을 가열하는 단순한 방식이 아닌, 좀 더 새로운 방식. 그러기 위해선…… 무슨 짓으로든 시간을 끌어야만 한다. “내 앞에서 자위해봐.” “……!” “가장 야한 모습을 보여 봐. 당신 스스로 당신 걸 만지고 문지르고 손가락도 써보는 거야. 물론 옷도… 아, 옷은 벗지 않아도 돼. 가슴과 xx만 보여주면 만족할게. 입은 채로 자위하는 편이 더 야한 법이지.” 음탕한 말이라곤 모를 것 같은 남자, 용모에서부터 점잖음과 준수함이 흘러넘치는 남자, 세이든과 똑같은 진중한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음란한 요구를 했다. “잠깐만요, 당신. 짓궂어요.” 하이너는 당최 누가 짓궂은 인간인지 알 수 없었다. 악당이 범부에게 짓궂다니. 하지만 짓궂다고 해주니 짓궂은 미소를 지어줄 수밖에. 하이너는 눈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러곤 도리어 억울하단 듯 굴었다. “이런 건 짓궂은 축에 속하지도 않아. 당신을 안지도 못하고 가슴을 만질 수도 없고 당신 안에 내 것을 넣어 흔들고 싸지도 못하는데, 적어도 그 정도의 볼거리는 제공해줘야지.” “아, 하지만 어째서…… 내가 분명 그랬잖아요. 만족하게 할 거라고.” “그러니까 어떻게? 무슨 방식으로? 당신이 위에서 흔들겠다고?” 사괴탄은 입술을 사리물었다. “그런 행위까지 간다고 한 적은 없어요!” “하! 그런 행위라니! 그럼 어떤 식으로 날 만족시키려고 했나?” 사괴탄은 입에 아교를 붙인 듯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하이너는 만찬을 방해받아 성난 야수처럼 말했다. “후우, 당신…… 나 같은 한창의 남자가 고작 조금 전 같은 키스만으로 만족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쉽게도 남자는 그런 간지러운 동물이 되지 못해. 보고, 만지고, 맡고, 먹고, 느끼고, 상대에게서 반응을 끌어내야만 만족하는 그런 짐승일 뿐이야.” “…….” “그러니까 얼른 스스로 가는 모습을 보여 봐. 조금 전에 말한 방식 그대로.” 사괴탄에겐 너무나 수치스러운 말들이었다. 그 언젠가, 사괴탄은 로귀하르트의 바람둥이로 유명한 검사의 영혼으로 마검을 제조한 적이 있었다. 그 검사는 마검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음탕한 욕설을 해대어 듣는 이와 듣는 마검들에게 넌더리를 일으켰다. 같은 마검들 사이에서도 ‘저 녀석은 남자의 수치야!’라고 할 정도이니, 그 음담패설의 수위가 짐작이 가리라. 사괴탄은 그런 마검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야 그녀는 남자라고는 세이든 밖에 모르고, 성적인 일이라고는 세이든을 생각하며 몸이 뜨거워지는 것 외엔 없었기 때문에 그런 음탕한 마검을 견디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음란 마검은 땅속에 묻혀 봉인되었고, 비로소 사괴탄과 다른 마검들은 조용히 지낼 수 있었다. 비록 악당이긴 하나 성적인 내면을 평하자면 검황 가에서 얌전히 큰 아가씨에 불과할 뿐인 그녀는 하이너의 야한 말을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두 다리를 벌리고 내게 안쪽을 보여. 그리고 살결을 손가락으로 벌려서 네가 가장 느끼는 살을 물이 주르륵 나도록 문질러 보란 말이야.” “정말 짓궂어…….” 하이너는 멈추지 않았다. “봐봐. 말만 하는 것만으로도 섰잖아.” 하이너는 알몸 위에 우뚝 선 제 성기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물컹해 보이는 살덩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인간의 살이 아닌 것 같은 단단함과 굵기, 길이를 과시하며 천장들의 마검을 올려다보았다. 세이든과 비슷한, 세이든의 청년 시절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남자가 저속한 말을 흘리며 그런 모습을 하자 사괴탄은 기분이 이상했다. 세이든을 향한 망상과 이 남자를 통해 겪는 현실이 뒤죽박죽 섞여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너무 서서 아플 지경이다.” “…….” “싫으면 그만둬.” “그만두면요?” “내 검기로 죽일 수 있는 건 당신 말고도 많거든. 가령 여기 어느 발정한 놈이라든가.” 결국, 자기 검기로는 사괴탄을 죽이지 못하니 차라리 자신의 검기로 심장을 멈추든 기도를 막든 해서 자살하겠단 말. 만약 그가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그 영혼을 마검에 넣지도 못하게 된다. 괜찮은 재료를 만난 마검 제조 장인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조급해진 사괴탄이 말했다. “할게요.” 하이너가 듣는 시늉도 하지 않자 사괴탄이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고 더 큰 목소리를 냈다. “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자살은 안 돼!” 그러자 하이너가 새카만 눈동자를 드러냈다. 더는 흥정할 기분이 없다는 듯 명령조의 말이 나왔다. “벌려봐.” 사괴탄은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이너가 보기에 마음의 준비를 하는 듯했다. 창백한 흰 뺨에 살짝 붉은 기가 도는 것은 마치 수줍어하는 아가씨를 보는 것 같았다. 등장할 때만 해도 감정이라곤 없는 인형 같았는데 말이다. 아마 그런 그녀의 모습을 륀체르가 보았다면 ‘흥분되는 요소가 있으니 죽이지 마라!’고 참견해댈지도 몰랐다. 몸을 일으킨 사괴탄은 ‘벌리는 것’ 대신 일단 구두부터 벗었다. 예쁘고 고운 발이 드러났다. 하이너는 ‘좋은 자세야.’라고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사괴탄은 더욱 느려진 손길로 치맛단을 들기 시작했다. 그때, 하이너가 막았다. “잠깐.” “……?” “너무 가까워. 좀 더 떨어져서 내가 제대로 볼 수 있는 거리를 만들어 봐. 내가 네 온몸을 볼 수 있게. 네 야한 몸이 한눈에 들어오게 말이야. 좋군. 그 정도 거리면…… 괜찮아. 물론 네 야한 곳의 구슬까진 자세하게 볼 순 없겠지만 말이야.” 사괴탄의 귓가가 그녀의 입술만큼이나 붉어졌다. 그런데 방금 들은 말보다 그녀를 더욱 흥분하게 하는 말이 나왔다. “뭐… 그래도 괜찮지. 이따 네 물 마시면서 보면 될 테니.” 사괴탄은 숨을 거칠게 들이마셨다. 물을 마시다니. 어디의 물을? 이토록 야한 말을 할 수 있는가? 이리도 점잖게 생겨서 세상에서 가장 음탕한 말을 하는 게 가능한가?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런 모습이 그녀의 꾹꾹 눌러오고 외면해왔던 욕구를 폭발하게 했다. “아, 못하겠어요.” “이거 안 됐군.” “미안해요. 그런 선물은 못 주겠어요.” “더는 너와 흥정할 마음이 없다. 죽여. 이렇게 성난 상태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지.” 맨발의 사괴탄은 조용한 걸음걸이로 다시 하이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망설이다 제의했다. “풀어줄게요. 풀어줄 테니, 당신이 하고 싶은 것 해봐요.” “……?” “남자 앞에서 자위 따윈 할 마음 없으니까.” 마음이 없는 것보다 부끄러워서 할 수 없었다. 그런 부끄러운 일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 남자가 멋대로 하게끔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이너는 솔직히 그녀가 풀어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사지가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그녀를 죽일 방법을 생각했기에 여태까지 시간을 벌고 그녀를 몰아세웠지만, 풀어준다 하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사괴탄이 마력 속박을 푼 덕분일까? 하이너는 갑자기 온몸의 상태가 한결 편한 듯했다. 팔을 뻗어보았다. 다리를 들어보았다. 모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하이너는 지금까지 내뱉은 음탕하고 저속한 말과는 반대의, 아주 정중한 말투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맙군.” 사괴탄이 고개를 숙였다. “날 고작 마검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인생 마지막으로 최고의 섹스를 하고 죽을 수 있게 해줘서 정말이지 고마워.” 사괴탄은 급기야 하이너를 마검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기분까지 들었다. 몸을 일으킨 하이너가 그녀와 마주 섰다. 장신의 탄탄한 육체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였다. 그의 날카로운 창 같은 시선만으로도 사괴탄은 몸이 저릿한 흥분을 느꼈다. 하이너와의 거리가 계속 좁혀졌다. 사괴탄이 천장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아, 세이든. 저를 보지 마세요…….’ 그녀는 천장 위 수 천 개의 검 중 양부의 영혼이 녹아들어 간 마검이 이 모습을 지켜본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저릿했다. 육체의 욕구는 극렬히 사랑했던 존재도 잠시 마음 한편에 치워둘 정도로 강했다. 하이너는 상체를 조금 숙여 사괴탄의 이마에 키스할 듯 다가갔다. “안아도 되나?” 사괴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안아도 되나?” 이 남자는 제가 뱉어낸 말과는 달리 조심스럽고 정중했다. 대체 얼마나 여자를 기대하게 할 셈인가? 어쩌면 하찮은 검기로 적을 죽이기 위해 시간을 벌려는 건지도? 그러나 사괴탄은 안심, 또 안심했다. 검황 세이든의 검기도 자신을 죽이지 못했다. 이런 처음 보는 무명의 검사의 검기에 자신이 죽을 리는 없었다. 만에 하나 이 검사가 검기가 아닌 다른 물리적 공격, 가령 급소를 친다든가 하는 짓을 해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그 즉시, 천장 위 수천 개의 마검은 이 남자의 몸을 쑤셔버릴 것이기에. 사괴탄은 떨리는 목소리로 첫 경험의 시작을 알렸다. “안으세요. 자위하는 것보단 그편이 낫죠, 그러니…….” 어서요. 해봐요. 부끄러움과 은밀한 재촉이 담긴 시선이 하이너를 직시했다. 하이너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분명 사괴탄을 처음 인지했을 때만 해도 안개에 젖은 장미에게서 나는 향기를 느꼈으나, 이제 다시 맡으니 자신의 착각인 듯하다. 사괴탄에게 향기는 없었다. 굳이 뭔가가 있다고 우기고자 한다면야 이름 붙일 수는 있으리라. 차가운 냄새. 혹은 돌의 냄새. 수많은 검사의 영혼을 빼내어 검을 만든 악인의 냄새. 그것은 바로…… 죄의 냄새. 그녀를 단죄해야 할 임무를 지닌 하이너가 속삭였다. “아주 끝내줄 거다.” 그 말은 사괴탄에게 가장 저질스럽고도 가장 야한, 가장 황홀한 말이 되어 귓가를 잠식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아!” 하이너의 팔 안에서 사괴탄의 몸이 튕기듯 나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마검들이 하이너의 몸을 노렸고, 딱 그 순간이었다. 사괴탄의 눈이 더할 수 없이 커졌다. 사아아아아아! 수 천 개의 마검이 뜨거운 쇳물이 되어 사괴탄을 향했다. 마검은 어디까지나 검. 검이라는 육신을 잃은 마검의 자아, 수많은 검사의 영혼들이, 사괴탄을 향한 원망을 그 열기로 내뿜으며 그녀를 공격했다. 이것은 하이너의 열기 조절 마법이 사괴탄을 죽이는 흉기를 만든 결과였다. 그리고 사괴탄의 몸은 쇳물에 삼켜져 죄의 대가를 치렀다. 하이너는 참혹한 광경에서 천천히 눈을 돌렸다. 그 순간 뭔가가 눈을 사로잡았다. 사괴탄을 향하지 않은 한 덩어리의 쇳물, 쇳물이라기엔 아직 검의 형태를 갖춘 것이 하나 허공에 떠 있었다. 그 일그러진 검은 웅웅하고 검성을 흘렸다. 어쩐지 우는 것 같았다. …… 검황 세이든이 생각나는 건 어째서일까? 하이너는 하품했다. “흐음. 피곤하군. 옷은 어디서 구해 입는다?” 아마도 사괴탄을 삼킨 쇳물이 차갑게 식을 때쯤, 자신은 바너에 있으리라. 그리고 아가씨를 만나리라. 피곤함이 서서히 잊혔다.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 쿠폰 감사합니다! 00039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아가씨를 만나면 그 몸에 나를 깊이 파묻고 쉬어야지. 하루 동안 아가씨를 느끼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지. 아가씨도 좋아하실 거야. 아가씨도 내가 무사히 돌아와서 기뻐하실 게 분명해. 설레는 기분에 다리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뛰어나가려고 하는 그때였다. 휘이이익! 우우우우웅……! 검성의 울림이 수상하게 들려 하이너는 뒤돌아보았다. 쇳물로 녹지 않고 아직 검의 형태를 유지한 채 검성을 울리는 그 검. 그것이 갑자기 제 자리에서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녹아버린 쇳물을 다시 검의 형태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무수한 마검이 녹아들며 소멸할 때, 유일하게 형태를 유지한 검. ‘혹시 검황 세이든의 영혼이 깃든 것은 아닌가?’ 의심을 샀던 바로 그 검이었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우웅! 음산하게 울부짖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래 위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더욱 격렬해졌다. 사람의 몸짓으로 치자면 울다가 웃으며 발작을 일으킨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현상을 위험하게 여긴 하이너는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그 검이 하이너의 앞을 막아서더니, 그대로 돌진했다! “으아아아악!” 뜨거운 금속의 날카로운 부분이 하이너의 한쪽 눈을 뚫으려 다가왔다. 그 찰나, 일 초를 수 천 개로 쪼갠 것 같은 그런 찰나에, 하이너는 검 속에 들어가 있는 두 자아의 다툼을 들었다. ‘무고한 젊은이다! 영혼이 선한 젊은이란 말이다! 제발 이러지 마라! 끝까지 사악한 영혼이 될 셈이냐?’ ‘무고하다니! 영혼이 선하다니! 그런 자가 날 이렇게 죽여 버려요? 방해하지 마세요! 날 사악하게 만든 건 당신이야!’ 검은 하이너의 눈을 살짝 파고들었다가 다시 튕겨 나갔다. 고통 속에서 하이너는 그 둘이 누군지 대번에 간파했다. 그들은 바로 사괴탄과 그의 양부 세이든이었다. 애당초 사람의 영혼을 검에 심는 일을 하는 사괴탄이었기에, 그녀의 영혼이 검에 들어가 적의 안구를 찔러버리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리라. 그리고 그것을 그의 양부가 말리려고 대립하고 있었다. 하이너가 열심히 뒷걸음치는 그때까지도 부녀는 다투었다. ‘이 젊은이를 이대로 죽여선 안 돼!’ ‘당신이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해? 이 자가 날 죽였어! 이 자가 감히 날 죽였다고! 그런데 당신은 어찌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아아, 딸아…….’ ‘날 그렇게 부르는 건 그만두라고 했지!’ 거의 사괴탄의 승리로 검이 움직였다. 검은 하이너의 눈을 찌르는 것도 모자라 그의 뇌를 파버리려고 했다. 그 직전! 세이든이 사괴탄의 힘을 겨우 막아섰다. 그는 하이너에게 검을 녹이는 힘이 있단 사실을 알고서 하이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젊은이, 어서!’ 사괴탄의 힘을 막는 게 하이너가 사는 길이기도 했다. 하이너는 찰나의 시간에 기적적인 힘을 발휘하여 세이든과 그 양녀가 든 검을 녹였다. 천장의 수많은 검을 녹였을 땐 시간이 좀 걸렸지만, 지금 이런 검 하나쯤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검이 녹아들자 사괴탄이 양부에게 발악했다. 마검을 녹이면 그에 깃든 영혼마저 서서히 파괴된다. 영혼의 파괴는 새 생명으로서의 환생이 불가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당신과 나 둘 다 죽는다고! 영원히 죽는단 말이야!’ 부녀의 영혼이 담긴 검은 다른 검들이 그러하듯 완전히 쇳물로 변해버렸다. ‘그렇게 되어도 나는 상관 없…….’ 그 탓에 세이든의 말은 끝마쳐지지 못했다. 부녀의 자아는 동시에 소멸을 맞이했다. 쇳물 주위에서 최대한 물러난 하이너가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헉, 허헉…….” 왼쪽 눈에선 쉴 새 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대로 안구를 못 쓰게 되겠지? 고통도 고통이지만, 바너에 온 뒤로 이런 고통이 너무 자주여서 지긋지긋했다. 이런 순간에도 그는 특유의 건방기 가득한 웃음을 흘리며 이죽거렸다. “이거 아주 끝내주는 경험인데?” 드래곤으로 변하면 날아갈 힘이 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또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하며, 정신력 또한……. 몰려오는 성가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드래곤으로서의 변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변신은 중단되었다. 의식이 급속도로 흐려진 탓이었다. “아가씨…….” 핏물로 암전한 시야에서 유일하게 떠오른 사람은 아가씨, 단 한 사람뿐이었다. *** 사괴탄의 영혼이 완전히 소멸하자, 그녀의 마검을 모아둔 금고의 잠금장치도 자연히 풀렸다.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는 어찌나 큰지 죽은 땅인 괴지를 살아 날뛰는 용처럼 들썩이게 했다. 사괴탄의 작업장에서 일하던 인부들은 너도나도 동요했다. “그녀의 금고가 열렸다!” “그녀의 금고에 들어갈 수 있다고!” “정말이야? 정말이냐고!” 그들은 처음엔 괴지에 지진이 일어났거나 드래곤이 쳐들어왔다고 생각하다가 이내 상황을 파악하곤 머리를 굴렸다. 마검을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 동요는 곧 살인으로 번졌다. 값비싼 마검을 독차지하고자 서로서로 죽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소요 사태는 금세 마무리되었다. 바너 출신의 신입이 모두를 제압해버렸다. 그가 단 다섯 명의 목숨을 단숨에 끊어놓는 장면을 보고서 겁을 먹은 잔챙이들은 모두 작업장을 떠나버렸다. 혼자 남은 신입은 곧바로 사괴탄의 검 금고로 찾아 들어갔다. 마검들이 다 녹아 쓸모없게 돼버린 것이 아까웠다. 그런데 마검들보다 더 눈에 띄는 존재가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나신의 남자, 바로 하이너였다. 그는 하이너의 핏물이 흐르는 왼쪽 눈을 보고 끔찍하다는 듯 몸을 떨었다. “그런데 이건 진짜 심하네. 실명할지도…….” 한편으로는 눈 외에 목숨엔 지장이 없어 보여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혼자서 수많은 마검을 없애버리고서 고작 눈의 상처만 얻은 것은 찬사를 퍼부어야 할 일이었다. 그는 재빨리 자기 주인인 륀체르 사파이어에게 텔레파시를 보내 하이너의 상태를 알렸다. ‘다행히 숨은 붙어있습니다만.’ *** 마리는 호위 기사를 데려오기 위해 처음엔 바너에서 네히트로 가는 텔레포트 홀을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그 구간의 텔레포트 홀은 아직 건설되지 않았다. 그래서 륀체르에게 이동 스크롤을 받게 되었다. 이동 스크롤은 텔레포트 홀처럼 빠르게 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싹수없는 륀체르가 이동 스크롤을 제공하지 않을 듯했으나, 결국엔 집사를 통해 건네주었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덕분에 지금 이렇게 마리아와 함께 네히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마리는 추위에 두 손을 비비면서 마리아에게 중얼거렸다. “후우, 춥구나.” “…….” “어머! 고마워! 내가 춥다고 하자마자 온기 마법을 드리우다니, 넌 어쩜 이리 말 한마디 없이도 다정하니?” “…….” 새까만 밤, 눈 쌓인 실렌틴 광산은 으스스했다. 이곳에 가면 호위 기사를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어 그가 없으면 직접 사괴탄의 작업장이 있다는 괴지에 까지 몸소 갈 생각이었다. 조금 위험하다곤 생각되지만, 자신에겐 마리아 그로스가 있고 온갖 공격 스크롤도 있다. 오를린에서 조금 배워둔 저급 마법으로 공격 스크롤의 힘을 활성화하면 무엇도 두려울 게 없다. 뭐, 지나친 긍정일지 모르겠지만, 원래 인간에겐 긍정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법이다. ‘아아, 보고 싶어라. 그 남자!’ 주인의 마음을 꿰뚫은 마리아가 싱긋이 웃었다. 언제나 표정 없는 인형 같은 마리아가 미소를 보이자, 마리는 그게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마리아의 미소 하나에 광산의 으스스함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똑똑이 의사 소년 루돌프가 마리아를 보고 종종 얼굴을 붉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리는 문득 마리아의 목소리도 듣고 싶었다. 드래콘의 울부짖음이 아닌, 마리아가 내는 소녀의 목소리를 듣길 원했다. 목소리도 외모처럼 아름답지 않을까? “저기, 마리아?” 마리는 대답 대신 눈을 마주쳤다. 기다란 눈썹을 늘어뜨린 눈꺼풀이 깜빡이면서 선홍색 눈동자를 가렸다 드러냈다 반복했다. 반지르르하게 세공한 루비 같은 눈동자였다. 마리는 그 보석 같은 눈에 홀려 다시 그녀를 불렀다. “마리아?” 깜빡. “있지, 마리아 그로스?” 깜빡, 깜빡. “우리가 드디어 이동 스크롤을 이용해서 네히트에 왔어. 정말 신났지? 혹시 예전에 이동 스크롤을 써본 적이 있니?” 마리아의 첫 주인은 마리였다. 그렇기에 마리아가 겪은 인간 문명 역시 마리와 함께 한 것들뿐이었다. 주인도 이동 스크롤을 이용해 본 적 없는데 그 종속 생물이 이동 스크롤을 이용해 볼 리 없었다. 마리아는 ‘아니요.’라는 말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리는 끄응, 하고 앓다가 다시 물었다. “역시 내가 첫 주인이라 그런 경험이 없구나? 이동 스크롤은 경험해봤으니 됐고…… 텔레포트 홀, 기대되지 않아? 나는 촌구석에서 살아서 그런지 그런 걸 꼭 한번 타보고 싶더라! 이동 스크롤이 일억 자일쯤 한다니 그건 더 비쌀 거야, 그렇지? 어쨌든 너도 텔레포트 홀을 타는 걸 기대할 때 있지? 응?” 마리아는 한참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통의 하녀라면 기대하지 않아도 기대한다고 대답했을 테지만, 역시 마력 생물인 드래콘은 인간의 하녀와 달랐다. 마리는 아예 대놓고 마리아의 목소리를 들어 보려고 조건을 내걸었다. “끄응……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에 대답할 때 눈짓이나 텔레파시 말고 네 목소리로 해줘. 네가 내는 사람의 목소리 말이야. 알았지?” 마리아는 확연히 난색을 보였다. 마리가 눈을 찌푸리며 웃었다. “왜? 싫어? 흐응…… 싫다면 강요는 하지 않아.” 그때였다. 저 뒤편에서 헐벗은 나뭇가지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등장하고 있었다. 마치 여태까진 조용히 뒤따라왔다가 이제야 대놓고 제 정체를 드러낸다는 듯이 나타나는 사람. “누구……?” 그의 정체는 바로 륀체르가 보낸 사람이었다. 륀체르는 마리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 몰래 사람을 따라 붙였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마리는 마리아를 탓하며 무기인 화염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어쩜! 마리아 너는 저런 자가 뒤쫓아 오는 걸 감으로 느낄 텐데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사이 뒤따라온 자가 외쳤다. “오해입니다! 오해예요! 아가씨!” 마리는 화염 스크롤을 든 손을 멈췄다. “뭐라고? 오해…… 라고?” 마리아는 바너에서 출발할 때부터 무인이 뒤따라온단 걸 느꼈지만, 륀체르가 ‘이 모든 게 다 마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니 모른 체하라.’는 메시지를 보내 줄곧 모른 척하였다. 뒤따라온 자가 자기를 소개했다. “저는 마스터께서 보내신 호위 무인으로……! 지금 와트프라우어 부인의 부군께 큰일이 생겨서 이렇게 다급하게 나서게 되었습니다만!” 순간, 마리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거니, 너!”*** 장인의 도시 바너. 수도 크래파. 영원의 봄. 륀체르는 비밀 정원에 드러누워 담배를 피웠다. 한참 후에 그의 입에서 새하얀 연기가 뿜어져 인공 나무 향과 어지러이 섞였다. 연기로 자욱한 시야엔 온통 숫자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후우…… 젠장, 대체 얼마를 쓴 거?” 구두쇠인 그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돈이 물처럼 콸콸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애당초 자기가 마리니시네라는 여자에게 자꾸만 마음이 간 것부터가 실수다. 정황 파악을 위하여 자기가 다루는 무인 중 가장 실력이 좋으며 텔레파시가 가능한 녀석을 사괴탄의 작업장에 미리 보냈다. 사괴탄이 실렌틴 광산에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괴지의 작업장에 돌아올 것이기에, 하이너의 동태를 파악하려면 그녀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이 좋았고, 그러므로 무인을 괴지에 보내는 일도 필수였다. 또한, 마리와 마리아의 이동 스크롤을 대주기까지 했다. (스크롤 하나가 일억 자일쯤 한다!) 그녀들을 보호하란 의미로 무인까지 몰래 붙여준 데 든 비용도 만만찮았다. (무인 또한 이동 스크롤을 사용했기에!) 후에 왼쪽 눈이 박살 나버린 드래곤의 치료를 부탁하느라고 솜씨 좋은 의사를 매수하기까지 했다.(의사의 입을 막으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갔다!) 계산에 계산하다 보니 이 모든 일에 엄청난 비용이 들고 있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황태자 녀석의 부탁을 들어주는 쪽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드래곤 덕분에 바너의 ‘정의’가 확립되니 좋다고 여겨야 하겠지만……. 마침 집사가 와서 소식을 알렸다. “그분(마리)께서 막 침묵의 장에 도착하셨습니다. 치료가 끝나는 대로 면회를 하겠다고 합니다.” 륀체르는 마리가 어째서 면회를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자신을 만나서 감사했다고 말하려 하겠지? 하지만 륀체르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일단은 한 번 튕겨 보고 싶었다. “필요 없다고 해.” 집사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예? 무슨 말씀인지?” “나는 그 여자 만나고 싶지 않다고.” 집사는 식은땀을 흘렸다. 금발 아가씨가 면회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마스터가 아니라 바로 와트프라우어 씨(하이너)였다. “저기 그러니까…… 아닙니다. 어쨌든 시력 회복은 시간이 좀 걸리지만 성공적으로 될 거라는 말씀을 전하러……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집사가 륀체르의 방에서 빠져나올 때였다. 등 뒤에서 알 수 없는 말이 들렸다. “억울해서라도 반드시 가슴 빨고 만다.” 마스터가 오기를 품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섬뜩해진 집사는 자기 가슴을 두 팔로 감싸 안으며 그곳을 나섰다. ============================ 작품 후기 ============================ 으... 오랜만에 연재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최근 급한 단편 원고 내야 할 게 있고 전자책 작업을 같이 하다 보니 미친 아가씨 일일연재에 소홀하게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7월부터는 자주 보실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꾸준히 감상, 추천, 코멘트 달아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00040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장인의 도시 바너. 수도 크래파. 대 여관 침묵의 장. 의사는 하이너를 치료하고 루돌프는 그 곁에서 성실하고 침착하게 치료를 도왔다. 이 소년의 솜씨는 어찌나 훌륭한지 의사를 따라온 노련한 조수도 다 감탄할 정도였다. 하긴. 어릴 적부터 마법 약 공부를 해왔고 의학에도 관심이 있었던 루돌프와 이제 막 반 년 차 병아리인 조수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소년 덕분에 제법 이른 시간에 치료를 마친 의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소년을 칭찬했다. “의학 공부를 한다고? 과연 손도 빠르고 눈치도 빠르고 참 탐나는 녀석이로군. 공부를 멈추지만 않는다면 바너에서 가장 훌륭한 의사가 될지도 모르겠군.” “과, 과찬을…….” 루돌프는 얼굴이 발그레해져선 머리를 긁적였다. “이건 내 명함과 내 병원 약도다. 내 밑에서 일할 생각이 있으면 오너라.” “감사합니다!” 루돌프는 의사에게 명함을 받아들어 가방에 넣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 지금, 마리아 누나가 없다는 게 참 아쉬웠다. 마리아 누나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의사는 외투를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그의 조수도 짐 정리를 마치고 따라 일어났다. “자, 그럼 우리는 환자의 안정을 위해 이만 가봐야겠군.” 의사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마침 복도 의자에 대기하던 마리가 벌떡 일어났다. 호위 기사를 볼 생각에 격앙된 그녀는 의사와 눈이 마주치자 차분해지려 애쓰며 잠시 의사에게서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귀족 아가씨가 아닌 평민 와트프라우어 부인으로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 그쪽이 와트프라우어 부인인가요? 부군께서는 지금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아, 혹시 면회하면 안 되는지요?” “그건 아닙니다만, 으흠. 예를 들면…… 부군을 자극할 수 있는 행동, 울음이나, 몸을 흔들고 소리를 친다든가…… 예, 뭐 그런.” 의사가 대충 말을 줄이자 마리는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떠나자 마리는 곧바로 침대에 가서 하이너의 손을 만졌다. “오, 내 가여운 기사…….” 잘생긴 얼굴에 흉한 상처가 생겨버렸다. 다친 눈에선 회복이 진행되지만, 마리의 눈에는 가슴을 쓰라리게 하는 모습일 뿐이었다. “누가 눈을 이 따위로 만든 건지, 으휴!” 의사가 마법술을 이용했는지 하이너의 몸 전체에서 푸르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저급 마법 정도는 숙지해둔 마리는 그 푸른 기운이 몸속에 들어온 나쁜 균과 싸우는 증거란 걸 알 수 있었다. “어찌 됐든, 얼른 나아야 할 텐데.” 듣자하니 날카로운 마검에 눈이 찔린 것 같다고 했다. 자칫 뇌마저 손상될 뻔했다던데, 얼마나 아팠을까! 눈뿐만 아니라 손등, 발목에 보이는 크고 작은 흉터를 보니 그 고생을 알 것 같았다. 대륙 정복 여행을 하면서 그 어떤 일이 생겨도 꿋꿋하리라 생각했지만, 가장 아끼는 사람이 이렇게 다치는 것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차라리 드래곤으로 변신할 줄 아는 사람이 호위 기사가 아니라 자신이 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뭐가 이리 가렵지?” 눈이 가려워 손등으로 훔치는데, 알고 보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호위 기사를 보고 딱하단 생각을 하면서 그만 울어버린 것이다! 마리는 눈물이 나온 참에 조금 더 이 감정에 몰입해 보기로 했다. 와트프라우어 씨의 부인으로서. “흑흑! 여보! 이대로 죽으면 안 돼요! 눈을 떠요! 이렇게 가버리시면 나와 아이들과 뽀삐는 어쩌라고요…… 으흑흑!” 의사가 환자의 안정을 부탁했기에 그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크진 않아도 환자의 깊고 오랜 잠을 깨우기엔 충분했다. 하이너는 고통이 스민 잠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눈을 천천히 떴다. “아가씨?” 눈앞에 그토록 원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던 여인이 있었다. 기뻤다. 그녀의 찰랑거리는 금발을 보니 밖에서 얼어버린 마음이 따스하게 녹았다. 그녀의 깜빡이는 청록색 눈을 보니 기운이 솟았다. 아아, 나의 아가씨. 이 현실이 믿을 수 없어서 자신의 두 눈을 만졌다. 이 두 눈으로 아가씨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단 사실이 아주 행복했다.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스며들자, 아가씨가 그것을 보더니 눈물을 흘리면서도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어머! 여보! 소생하셨군요! 아아, 정말 다행이야…….” “하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와트프라우어 부인을 연기하는 아가씨를 보고 하이너는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그는 한 손을 뻗어 감히 아가씨의 뒤통수를 감쌌다. “아가씨….” 이대로 아가씨와 입 맞출 생각이었다. 사괴탄을 없애러 가기 전이었던가? 아가씨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고 했을 때 륀체르의 방해를 받아 몹시 짜증 났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의 기분을 지금 이 시간에 격렬한 입맞춤으로 모조리 풀 생각이었다. 심장보다 더욱 격렬해진 입술이 아가씨의 입술에 돌진했다. “하이너, 괜찮… 읍!” 마주치는 호위 기사의 입술 때문에 마리는 괜찮으냐는 말도 다 하지 못했다. 환자의 몸으로 달려드는 기세가 짐승처럼 위험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니! 황홀함과 짜릿함이 온몸에 번졌다. 아팠던 마음도 조금이나마 낫는 듯했다. 마리의 혀가 하이너의 혀를 힘 있게 휘감으려 할 때였다. “으윽!” 하이너가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마리가 입술을 떼고 물었다. “어디 아파? 눈에 통증이 온 거야?” “으, 그게 아니라.” “아니면, 어디가 아픈데?” “사실은…….” 하이너는 혀가 아픈 이유를 말하기 어려웠다. 괴지의 마검 제조장에서 사괴탄과 키스하다가 생겨난 상처임을 어찌 아가씨께 말할 수 있을까. 아가씨가 아무리 털털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해도 실망하실 게 뻔하다. 비록 사괴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상황이었다고 해도 말하기 싫었다. “어디가 아프냐고, 하이너?” “음, 그게…….” 괜스레 의사를 탓했다. 의사가 눈과 머리, 사지 여기저기에 난 상처는 빠른 회복을 할 수 있게끔 조치를 해놓았으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인 혀는 내버려 둔 것에 몹시 아쉬웠다. ‘몸을 고치려면 다 고치란 말이다!’ 마리는 왠지 하이너가 곤란해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디가 아프고 왜 아프기에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이런 표정을 지을까? 장난기가 도졌다. 그녀의 손이 하이너의 성기 부분을 꽉 움켜쥐었다. 자극을 받은 하이너의 눈이 커졌다. 마리가 배시시 웃으며 심술궂게 물었다. “설마 고작 키스로 여기가 아플 정도로 부풀어 오른 거야, 응? 그래서 그런 표정 하는 거지, 응?” “아, 아가씨.” “아직은 말랑말랑하네, 어디 보자. 이렇게 조물조물 만지면…….” “경망스럽게 숙녀분께서 이 무슨 짓입니…… 으!” 힘없던 아랫도리가 아가씨의 손길에 점차 부피를 키워갔다. 대관절 이게 얼마 만에 느끼는 흥분인지 모르겠다. 당장에라도 아가씨를 뜨겁게 안고 싶었다. 가능하면 키스를 자연스럽게 피하면서 움직여야 했다. 아가씨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아가씨….” 마리는 한 손으로는 하이너의 아랫도리를 만지작거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목을 끌어와 다시 입 맞추려 했다. 하이너는 피하지 않고 키스하면서 최대한 혀를 쓰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아가씨가 어찌나 열정적인지 자꾸만 혀를 강하게 휘감아왔다. 그녀의 뾰족한 혀끝이 하이너의 혀 부위 중 하필이면 사괴탄에게 깨물린 부분만 거침없이 콕콕 찌르고 있었다. ‘으으.’ 하이너는 혀가 아릿하여 또 소리가 나올 것 같았으나 꾹 참았다. 꾹 참으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키스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아가씨의 혀도 조심스럽게 삼키려 했다. 그러다 문득 다른 곳에 입 맞추면 되겠거니 하고서 아가씨의 목에 입술을 파묻었다. 오랜만에 맡는 아가씨의 새콤달콤한 향기가 천연 치료제가 된 듯했다. 혀의 고통도 다 잊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아아, 하이너.” 마리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그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가슴 깊숙이 이 남자의 고개가 파묻히는 느낌이 좋았다. 수염이 자라 가슴을 까칠하게 쓰는 느낌, 몸에서 나는 치료약 냄새도 좋았다. 다시 키스하고 싶어 고개를 당기는데 이 남자는 가벼운 입맞춤만 쪽 하더니 한쪽 가슴을 입에 물어버렸다. “으, 하이너. 바로 그러는 것도 좋지만, 아직은 키스를 좀 더 하고 싶어.” 열정적인 아가씨는 힘 있게 호위기사의 머리를 당겨 키스했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키스에 하이너가 결국엔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다른 곳을 다쳐도 엄살을 부리지 않았지만, 찢어진 혀에 끊임없이 자극을 받으니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읏, 으윽. 아! 아! 아가씨!” 심상치 않은 소리에 그제야 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이너?” 혀가 너무 아프다 보니 엄청나게 매운 것을 먹은 것처럼 숨을 거칠게 쉰다. 입 속에 바람을 넣어 볼을 부풀리기도 한다. 미간은 있는 대로 찌푸려지고 살짝 벌린 입술 사이에선 고통의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 호위기사의 반응에 마리는 갑자기 그의 입을 벌렸다. “혀 내밀어 봐. 빨리.” “안 됩니다.” “얼른.” “안 됩… 으으!” 마리는 손가락으로 하이너의 혀를 꺼냈다. 붉은 혀 가운데를 누가 세게 깨물어버린 모양인지 아주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마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이거 뭐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상처를 어떻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어?” 하이너는 끄응 앓다가 마지못해 변명했다. “그러니까 이건 제가…… 괴지에서…… 마검들 없앨 때 생긴 상처입니다.” 마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마검들이 대체 어떻게 공격했기에 사람 혀가 이렇게 깨물린 것처럼 다칠 수 있을까? 그녀는 하이너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했다. 하이너는 미심쩍어하는 아가씨에게 최대한 그럴듯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검들의 공격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 기합을 넣는다고 입을 벌리다가 단도 하나가 입에 들어온 줄도 모르고… 그때 생긴 상처입니다.” “웃기지 마! 그게 곧이곧대로 들릴 것 같아? 마검이 이런 곳에 상처를 낼 리 없어! 이건 마치, 마치…….” 하이너는 마리의 노려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면 거짓말을 들킬 것 같았다. 그런데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것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마리는 그를 오래 알아왔기에 그의 표정을 잘 읽을 수 있었다. 호위 기사가 슬그머니 아랫입술을 깨문다는 것은, 불안하고 초조해 한다는 걸 뜻했다. 그녀는 한 쪽 눈썹을 올리며 진실을 찔렀다. “혹시 누군가와 입 맞추다 생긴 상처 아니야?” “큽!” 하이너는 먹은 것도 없는데 사레들릴 것 같았다. 마리가 하이너의 코를 꼬집으며 미소와 함께 눈을 흘겼다. “혹시 누군가에게 강제로 입 맞추려다가 혀가 깨물린 건 아니겠지?” “당치도 않습니다!” “자아아… 그럼, 괴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서 설명해보실까?”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00041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마리는 팔짱을 끼며 대답을 기다렸다. 하이너는 잠시 고개를 딴 데로 돌리며 대답했다. “듣지 않는 편이 좋으실 겁니다.” 마리가 고개를 돌리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쪼르르 움직여 앉은 뒤 다시 그를 마주 보았다. “왜? 나는 듣고 싶어.” “듣고 싶어 하지 마십시오.” 마리의 입이 댓 발 나왔다. 하이너는 눈치를 보다가 그녀와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맹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아가씨가 말한 것처럼 누군가에게 강제로 입 맞추려 한 적은 맹세코 없습니다. 아가씨의 기사로서 그런 불명예스러운 일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흐으음. 네가 누군가에게 입 맞추려 한 적이 없다면, 결국 그 상처는 다른 누군가가 너에게 입 맞추려 하다가 생겼다는 말이야?” “말하지 않겠습니다.” “흐으음. 뭐, 좋아.” 좋다고 말하면서도 마리의 표정은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이너는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아가씨의 질투를 느낄 수 있어 색다른 기분이었다. 그는 작게 헛기침하며 슬쩍 떠보았다. “그런데 아가씨. 지금 혹시 질투 같은 것, 하셨습니까?” 마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두 손바닥을 하늘로 치올렸다. “질투? 하! 내가? 난 그런 거 모르는데?” “오호, 정말입니까?” “그럼. 질투란 건 못난 사람들만 하는 짓이라고.” “푸하. 그럼 어째서 여태 꼬치꼬치 캐물으셨습니까?” “어머! 그건 일종의 의무라고! 내가 널 이 여행에 끌어들였으니 네 상처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설명을 들어야 하지 않겠어? 그런데 너야말로 처음부터 ‘질투’라는 표현을 쓰는 것 보니 혀의 그 상처가 누군가와 키스하다 생긴 상처가 확실한 것 같네?” 하이너는 곤란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질투하지 않는 척하면서 집요하게 키스에 관한 것을 묻는 아가씨가 귀여워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좀처럼 입을 열 생각하지 않자, 마리는 팔짱 낀 것을 풀고 하이너의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물었다. “말해봐. 마검 때문에 생긴 상처가 아니라 사괴탄이 낸 상처지?” “글쎄요. 기억나지 않는군요.” “기억나지 않긴! 내가 대충 그리는데 말이야! 사괴탄이 너에게 먼저 입 맞췄고, 네가 뭔가 딴생각을 하다가 그녀가 그걸 눈치채고 미워서 네 혀를 깨물었다거나, 뭐 그런 상황 아니었어? 난 척하면 척이라고!” 하이너는 상황을 정확히 추측해내는 아가씨에게 놀랐다. 매우 놀랐다. 혹시 아가씨가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에게 시켜 호위 기사를 감시하게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그랬다면 사괴탄에게 그 지경이 되기 전에 마리아가 와서 구해줬겠지. 하여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아가씨였다. 그는 끝까지 기억나지 않는 척했다. “으흠, 내가 그런 식으로 물렸던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마리의 양 눈썹이 이제는 가히 V자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꿈틀거렸다. 하이너는 그 귀여운 모습에 그만 혀의 고통이 싹 치료되는 것만 같았다. 뾰로통한 모습이 아주 귀엽지만, 슬슬 달래줘야 할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진실을 요구하던 아가씨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뭐가 됐든, 저는 말입니다.” “……?” “지금 이런 아가씨의 모습을 보니 상처가 다 아무는 느낌입니다.” “뭐얏?” “키스하다가 혀가 찢어지든 말든 입 좀 맞춰야겠습니다.” “엇! 읍!” 상처가 덧나든 말든 달려드는 호위 기사에 기겁한 마리는 바동거리다가 겨우 고개를 떼어냈다. 호위 기사는 혀가 얼얼해 아파 죽으려 하면서도 다시 입 맞추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고서 그를 막았다. “얼렁뚱땅 넘기려 하긴… 뭐, 좋아. 더는 묻지 않겠어. 하지만 잠시, 잠시 기다려봐.” “예?” “난 네가 아픈 건 이제 봐줄 수 없으니까.” 마리는 주요 짐을 모아둔 가방이 있는 곳으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그녀가 가방에서 꺼낸 작은 종이 두루마리는 스크롤의 한 종류였다. “그게 뭡니까?” “치료 스크롤. 그런데 좀 싸구려야. 이거로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아물게 할 수 있단다.” 마리는 치료 스크롤을 불태우면서 하이너의 이름을 마법어로 중얼거렸다. 스크롤 대상자를 하이너로 한다는 의미였다. 이윽고 기존 하이너의 몸에 감돌던 치료의 푸르른 기운과 싸구려 스크롤의 붉은 기운이 부딪쳐 신비로운 빛을 냈다. 그 순간, 하이너의 혀에 있는 통증은 완전히 낫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나아 있었다. “이게 무슨……?” 하이너는 놀랐다. 아가씨의 마법 스크롤 사용 수준이 이 정도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아가씨가 고향에서부터 마법, 연금술, 점성술 같은 학문에 취미를 둔다는 건 알았지만, 워낙에 아가씨가 평소 보인 지식수준이 형편없어서 아가씨의 스크롤 치료도 그다지 큰 기대가 되지 않았다. 아가씨가 그런 학문에 취미를 둔 것 또한, 다른 아가씨들이 꽃꽂이나 바느질을 하는 것과 같이 하나의 대외용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아가씨는 정말이지 알 수 없는 분입니다.” “으움?” “치료 스크롤을 대충 사용하면서도 제 혀 부위만 집중적으로 치료하셨잖습니까? 부위별 집중 치료는 어렵다고 들었는데.” “어머. 치료는 스크롤이 했지, 내가 한 게 아니야. 난 어디까지나 주문을 외운 것뿐이란다.” “그렇다고 해도 어느 정도 노련하지 않으면…….” “그래서 내 실력이 나답지 않단 거야?” 마리가 눈을 흘기며 묻자 하이너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단지 아가씨의 지식수준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이지 알 수 없을 뿐…… 흠.”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잖아?” 두 팔을 서서히 벌린 마리가 하이너의 목을 감아 안았다. 아름다운 몸이 착 감겨오는 느낌에 하이너는 불필요한 생각들을 금세 지워버렸다. 마리가 그런 하이너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며 속삭였다. “치료도 해줬으니 이젠 걱정 없이 입 맞출 수 있겠지?” 하이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응?” “오늘 제 혀가 부러지도록 아가씨를 핥을 겁니다.” 하이너는 마리를 귀한 비단 다루듯 눕혔다. 스크롤 치료 한 차례로 거의 치료된 혀는 자유로워졌다. 성마른 입술과 애타는 혀가 마리를 깊이 탐했다. 마리는 정신이 아찔하여 하이너의 등을 열 손가락으로 꾹 찌르고 있었다. “으읍, 읍!” “당신은 침마저 달아….”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들이 아내와 잠자리할 때면 유독 거칠어진다던가? 지금 호위 기사의 몸짓도 딱 그런 꼴이었다. 사괴탄을 없애면서 엄청나게 큰 위기를 겪었으리라. 그래서 다시 만난 여인을 이리도 격렬하게 탐하는 것! 마리는 파도 같은 호위 기사의 입술을 맞이하면서 조금 걱정되어 물었다. “하아, 읍, 이제 등이 가렵진 않아?” “후우, 예?” “드래곤으로 변한다든가, 뭐 그런 거 말이야.” “걱정은 접어두시고.” 서서히 내려간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를 탐욕스럽게 깨물었다. 마리가 자국이 생기면 드레스 입을 때 곤란하다고 주의를 시키자, 퍼뜩 정신이 든 그는 더 밑으로 입술을 내려 가슴을 짓눌렀다. 꽉 조이는 드레스에 갇혔던 가슴 한쪽이 물결처럼 출렁이며 나왔다. 성수가 든 것처럼 한입에 다 머금으려 들다가 혀끝으로 거침없이 찌르며 핥았다. 잘 익은 가을 과일처럼 달콤하고 햇살처럼 따스한 맛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아직 부족하다. 그는 다른 쪽 가슴도 똑같이 탐했다. 찌릿한 느낌에 마리가 하이너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하아…… 좋아.” 호위 기사의 아랫도리가 더욱 단단해지는 걸 느끼는 지금 이 기분이란! 거추장스러운 머리핀을 풀어 아래로 떨어뜨리면서 그녀는 다시 호위기사의 입술을 찾았다. 다디단 입술과 혀를 만끽하며 호위 기사에게 재촉했다. 얼른 이 단단한 것을 몸 안에 들이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고. “얼른, 얼른.” “급하시긴.” 하이너는 마리의 입술에 응해주며 한 손으로 그녀의 치마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원래라면 겹겹이 가려져 있어야 할 안쪽에 아무런 천도 만져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그가 입술을 떼고 멍하니 보자, 마리가 싱긋 웃으며 속삭였다. “네가 회복하자마자 널 안을 계획이었거든.” “하, 하하….” 그의 손가락이 까슬까슬한 숲을 만졌다. 눈으로 마주 보는 것도 아니고 단지 손으로 이렇게 만질 뿐인데도, 별 가루를 만지는 것처럼 반짝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가씨의 은밀한 살결에 언제나 자리 잡은 그 연갈색 별이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보라. 벌써 물기로 질척여 부들부들한 감촉과 손가락 하나를 오물오물 씹는 것 같은 이 느낌을! 이거야말로 아가씨의 몸이 가장 빛날 때가 아닐까? 하이너는 아가씨의 귓가에 키스하며 신기해했다. “어쩜 벌써 이러신 겁니까? 어쩜 벌써 이리도… 야한 몸이어선.” “으응, 너니까 그래. 읏… 아앙.” “후우, 진짜 당신이란 사람은…… 미치겠군요.” 하이너가 바지춤을 풀려는 그때였다. 똑똑똑! 누군가가 그들의 객실에 노크했다. 노크 소리가 들린 순간 하이너의 표정이 진수성찬을 빼앗긴 맹수처럼 섬뜩해졌다. 예전에 륀체르에게 방해받아 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왠지 지금도 륀체르일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또 륀체르라면 그 이유가 뭐가 됐든 간에 주먹을 한 방 갈겨 주리라……. 그가 이를 악무는 와중에 마리는 가슴을 드레스 안으로 욱여놓고 외쳤다. “들어오시죠!” 재빠른 그녀는 이미 침대 밖을 벗어나 서 있었다.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자는 다름 아닌 의사의 조수였다. 예상했던 륀체르가 아니자, 하이너의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다. 조수는 헛기침을 몇 번 하다가 테이블 바닥에 있는 작은 나무 트렁크와 자기가 든 나무 트렁크를 바꾸었다. “똑같이 생겨서 잘못 가져왔지 뭡니까. 그럼 저는 이만. 아, 그리고.” 조수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뒤돌아 두 사람을 보았다. 와트프라우어 부인이라는 사람은 머리에 꽂았던 핀이 침대에 떨어져 있었고, 와트프라우어 씨도 앉아있는 자세가 수상쩍었다. 아마도 이 부부는 초저녁부터 뜨거운 사랑을 하려 한 모양이리라. 뭘 하려 했든 침대에 누워서 안정을 취해야 할 환자가 이러면 곤란하다. 조수는 의사 대신 주의를 주었다. “저희 선생님께서 조금 전에도 말씀하셨듯 환자는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그럼 부인, 부탁하겠습니다.” “어마맛! 맞아! 선생님이 그러셨지! 내가 주의할게요! 그럼 잘 가요!” 마리가 조수를 배웅하는 사이 하이너는 이마에 손을 대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정말이지, 거기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그럴 땐 그냥 알겠다고만 하면 된단 말입니다!’ 그는 눈을 뜨다가 문득 이상한 걸 느꼈다. 손에서 뿜어져 나와야 할 푸르른 기운이 약하다. 손뿐만 아니라 몸에 감도는 푸른 기운도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 조수를 배웅하고 다시 객실에 온 마리가 그 모습을 보더니 손뼉을 딱 쳤다. “어머나! 하이너! 몸이 이제 다 치료됐나 봐! 어쩜 드래곤은 회복 기간도 이리 초고속일까!” 이것은 드래곤화가 가능한 인간을 치료해본 적이 없는 의사가 본다면 매우 놀랄 일이다. 완쾌나 다름없단 말에 하이너는 천천히 셔츠 끈을 풀어 내리며 미소 지었다. 절대 안정? 웃기는 소리. 드래곤에겐 해당 없는 말이다. 하이너는 등 뒤에서 껴안는 아가씨에게 고개를 돌려 짧게 입 맞추며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응?” “일어서신 김에 부탁 좀 해도 되겠습니까?” “응응! 뭔데?” “문을 아예 잠그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00042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마리는 하이너의 거칠한 뺨에 제 보드라운 뺨을 비비며 성가시다는 듯 대답했다. “흐응, 어차피 이젠 들어올 사람도 없잖아.” 하이너는 아가씨의 말에 장담할 수 있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저번처럼 륀체르가 무례하게 들어오면 어쩔 거냐고 따지려다가 따지지 못했다. 조급한 아가씨의 손이 바위 같은 가슴 전체를 매만지다가 이제는 아예 가슴 가운데를 얄궂게 간질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정말이지.” 말은 그렇게 뱉으면서도 기분 좋은 손길에 입가가 올라갔다. 그래. 이 손길이 떨어지는 게 아쉬울 것 같다. 아가씨가 문을 잠그러가는 아주 잠시간, 단 몇 초의 시간도 아쉬워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뭐…… 문을 잠그려면 다른 방법을 써도 좋을 테지. 그는 헤츨링의 열기 조절 마법을 쓰기로 했다. 문이 잠기는 부분의 쇠를 마법으로 녹인 뒤 식혔다. 누군가가 바위로 치지 않는 이상, 저 문을 열지는 못할 것이다. 드래곤이 되어 편하다면 편한 점이랄까! 그는 뒤돌아 아가씨를 안고 입 맞췄다. “후우, 아가씨.” 언제나 달콤한 이 입술! 아가씨는 입 맞추는 도중에 스스로 등 뒤의 끈을 풀어 드레스를 벗어 내리셨다. 잘 익은 과일 속살처럼 깨물어버리고 싶은 나체가 드러났다. 사괴탄의 몸매가 제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지금 이 몸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라. 하이너는 작은 복숭아처럼 동그란 어깨를 한입에 삼켰다. 그의 혀가 붓처럼 어깨를 간질였다. 마리는 간지러워서 어깨를 떨었다. “히읏, 간지러워!” 입술은 점점 내려와 다시 풍만한 가슴에 머물렀다. 그는 따스하고 폭신한 감촉을 탐닉하며 그녀를 자연스럽게 눕혔다. 그리고 가슴에서 내려와 늘씬한 배에 입 맞추었다. “아, 간지럽다니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리는 호위 기사가 전해주는 감촉이 견딜 수 없이 짜릿했다. 나른하게 열기에 물드는 몸은 어느샌가 두 다리를 서서히 벌리고 있었다. 곧 하이너의 눈에 반짝이는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가씨의 금빛 숲을 지키는 연갈색의 별 문신! “아가씨…….” 이제는 탄성이 되어버린 말을 읊조리며 그곳에 얼굴을 파묻었다. 조심스럽게 혀를 건네어 별부터 어루만졌다. 촉촉한 그곳은 아주 다디달았다. 밤하늘의 별을 먹는단 게 이런 느낌인가 싶었다. 몇 번을 맛보다가 두 손으로 은밀한 곳을 벌렸다. 붉으면서도 투명한 구슬이 있는 부분을 마치 붓꽃의 꿀을 빨아들이듯이 가볍게 빨아들였다. “앗!…… 후읏, 응!” 마리는 온몸을 조금씩 비틀면서 두 손으로 호위기사의 머리를 헤집었다. 그 손길에 하이너는 머리가 뱅글뱅글 도는 것 같았다. 아가씨의 맛은 혀를 중독 시키고 아가씨가 조이는 이 손가락은 온몸을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지금도 이러한데 한 몸이 되면 얼마나 더 좋을까? 마침 바르작거리던 아가씨가 친히 호위기사의 바지춤을 내려주기 시작했다. “아아, 미칠 것 같아….” 마리는 단단한 것을 움켜쥐고 얼른 제 안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하이너는 응하지 않았다. 아가씨의 몸 안에 들어가기 전에 몇 번이나 감촉을 느끼고 싶었다. 당장 들어가고 싶어 미칠 것 같은 기분을 꾹 참고 그곳으로 키스하듯 문질렀다. 그의 것이 가장 예민한 구슬을 쿡 찌르자 마리의 허리가 휘면서 튕겨 올랐다. “흐응, 하이너. 얼른!” 하이너는 따스한 살결을 가르고 안으로 들어섰다. 마리는 그를 더욱 깊이 느끼려고 두 다리를 접고 탄탄한 몸을 죄었다. 그러는 사이 하이너가 그녀의 무릎 하나를 끌어와 입 맞추었다. 그러자 아가씨의 안이 숨 막히도록 수축하는 게 느껴졌다. “후우, 굉장하군요.” 자신을 향한 뜨겁고도 강한 환호를 한참 동안 느끼기만 하던 하이너는 뒤늦게야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그녀의 종아리가 짓이겨질 듯이 몸을 세게 놀리며 쾌락의 대지를 파내려갔다. 여리디여린 살이 엄청난 압력을 내며 들러붙어선 놔주려고 하지 않았다. 치고 나갈 때마다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 아가씨, 흐읏…!” 금방 절정에 이를 것 같았다. 이대론 안 된다는 생각에 잠시 아가씨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거칠어진 숨을 고르면서 아가씨의 작은 머리를 안고 어르듯 만졌다. 눈을 감으면서 몇 번이나 성급해지면 안 된다고 자신에게 주의를 주는 그때, 이 아가씨는 뭐가 그리 급한지 두 다리로 허리를 휘감고서 재촉하고 있었다. “얼른, 더 깊게, 응?” 안달이 난 사람처럼 말해대신다. 하이너는 자기도 마음이 급하긴 마찬가지라며 웃어주었다. 그렇게 다시 아가씨의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아가씨가 몸을 일으켰다. “안되겠어! 후우, 이런 자세보다는…!” “아가씨?” 아가씨는 탄탄한 몸 위에 올라타는 쪽을 택했다. 그녀는 자신의 좁디좁은 곳에 쾌락의 심지를 욱여넣고서 욕망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읏… 으응, 읏!” 스스로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보채는 것만 같은 소리를 내신다. 좋아하는 지점을 찾아 빠르게 허리를 놀리면서도 더 쾌감을 달라고 말하시다니, 사악해 보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토록 야한 욕망의 화신이 또 있을까? 어느 순간 신음이 더 커진 쪽은 아가씨가 아닌 자신이 되고 말았다. “하아… 흐읏! 읏! 크윽!” 자꾸만 사출하고 싶어 큰일이었다. “윽, 아, 가씨! 읏!” 아가씨의 무게가 가벼우니 망정이니 살집이 좀 있는 분이었다면 어땠을까? 그 무게감과 압력이 만든 쾌감에 자신은 진즉 절정을 터뜨리고도 남았으리라. 가까스로 절정을 미루며 두 손을 올려 아가씨의 허리를 잡았다. 아가씨의 움직임을 천천히 하게 하려는 의도였는데, 갑자기 아가씨가 이렇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후아, 하읏, 이상해. 머리는 아닌데, 으응… 몸이 자꾸만 조급해져. 하으읏, 나, 널, 다시 못 보면, 아읏, 어쩌는가 하고 걱정… 했나 봐!” 호위기사 역시 같은 말을 하고 싶었다. “후읏, 그래서, 하아, 그래서 이렇게 널 욕심 부리나 봐, 으응, 그리고, 그리고오…….” “읏, 아가씨, 제발, 천천히….” “으응, 그리고 내가 이 시기엔, 아아! 내가 이 시기엔, 좀 많이 민감해서… 하앙! 짐승이 된 기분, 으응, 이야! 앗, 앗! 아!” 하이너는 도무지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는 간질간질한 쾌감에 잔뜩 흐려진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흥분에 일그러진 얼굴을 하면서도 생긋이 웃었다. “후후훗, 으응… 요즘 내가, 앗, 아앙… 하아… 내가 마법에 빠지기 직전이거든.” 마법? 하이너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당장은 허리를 튕겨 올렸다. 안으로 거침없이 치고 올라오는 짜릿함에 마리의 호흡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단단한 게 끊임없이 몸 안에 은하수를 뿜어 올려주는 것만 같았다. 우주에 붕 뜬 이 기분을 어찌하면 좋을까! 이러다 기절하는 건 아닌가? 그녀는 그런 걱정을 하면서 잠시 하이너이 허리를 멈추게 하고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그의 반듯한 이마에 키스했다. “후읏, 으응, 움직이지 마….” “아가씨의 허리가 아니, 아가씨의 안쪽이 움직이잖습니까…… 읏!” “아, 앗!” 마리는 다시 한 번 하이너의 허리를 꼼짝달싹 못하게 한 뒤, 천천히 심호흡했다. 그러고는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두 손바닥으로 제 얼굴과 목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후우, 하아… 매일 너와, 매일 이 시기만 즐기면 얼마나 좋을까?” “예……?” “마법이 싫다아….” 하이너는 아가씨가 말한 마법이 진짜 마법이 아닌 여성들의 마법이란 것을 뒤늦게야 눈치챘다. 그러고 보니 여자들은 특정 시기를 맞이하기 전에 욕구가 왕성해진다던데……. 숨을 고른 아가씨의 허리 놀림이 다시 빨라졌다. 쿡쿡 치고 올라오는 쾌감을 즐기는 데 조금도 부끄러워하시지 않는다. 두 손으로 풍성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흔들리는 가슴도 스스로 감싸 안으며 쾌락을 충실히 탐하는 아가씨의 모습이 너무 야해서 하이너는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흐읍, 아, 가씨!” 어쩌면 이대로 가다간 아가씨의 몸에 큰 실수를 저지를지도…. 그는 곤란해질 것 같아서 재빨리 아가씨의 몸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그때 아가씨가 그것을 막았다. “안 돼! 내 안에 잔뜩…… 응?” “… 아가씨?” 하이너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보자 마리가 그를 더욱 안으로 인도하며 대답했다. “괜찮아. 난 언제나 안심해도 돼! 으앗!” “하, 하아…….” 그 말에, 하이너의 눈에 초점이 풀리고 말았다. 그는 두 손으로 아가씨의 허리를 받쳐 잡은 뒤 그대로 허리를 세게 짓쳐 올렸다. 아가씨는 몸이 부서질 세라 허덕이면서도 황홀한 얼굴을 하고 계셨다. 절정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뜨겁게 내뿜는 절정을 함께 맞이한 아가씨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잠시 몸을 수축하듯이 떨었다. “아, 너무 좋아… 좋았어.” “저도, 후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숨을 거칠게 쉬며 아가씨의 몸을 끌어당겼다. 온몸이 축 늘어져 안기는 아가씨는 마치 지는 꽃잎과 같았다. 충만한 쾌감의 여운에 다시 입맞춤을 시도했다. “흐읍, 하이너… 달다.” 호위기사의 열기는 아직 사그라지기엔 멀었다. 그는 입맞춤을 멈추고 아가씨의 몸 위로 올라탔다. 짓무른 꽃잎처럼 녹진해진 몸에 다시 자신을 깊숙이 파묻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번 절정을 맞은 몸은 더 예민해져 있었다. 아가씨가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리며 좋아하는 소리를 흘렸다. 아가씨가 좋아할수록 단단한 것은 더욱 커지고 뜨거워지는 듯했다. 마치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여 하이너는 제 것을 달래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는 아예 상체를 일으켜 아가씨의 가느다란 두 다리를 잡고서 오직 진퇴하는 것에만 몰두했다. 아가씨의 향기와 정사의 기운이 잔뜩 퍼졌다. 아가씨의 좋아하시는 소리도 안개처럼 귓가를 간질였다. 그러던 한순간, 아가씨가 부탁해오셨다. “눈을 보여줘, 하이너.” “…… 예.” 하이너는 아가씨의 맑은 바다 같은 눈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 속에 자신이 있었다. 아가씨가 귀엽게 생글생글 웃기 시작했다. 하이너도 따라 웃다가 문득 접합부를 내려다보았다. 남녀가 결합된 부분은 마치 안개꽃이 핀 듯 하얗게 반짝였다. 아가씨의 것과 제 것이 하나가 되어 이런 빛깔을 이루었다. 진정으로 아가씨와 하나가 된다는 느낌에 취하는 순간이었다. 경이로웠다. 다시 몸짓이 빨라졌다. “읏, 으응!” *** 장인의 도시 바너, 수도 크래파. 영원의 봄. 륀체르는 바너 길드장 모임에서 몹시 불만스러워 고성을 외쳐댔다. 뜻하지 않게(?) 드래곤이 나타나 몹쓸 인간들을 소탕해주었는데, 어째서 그 와중에 길드 협회 가입한 이들이 그런 몹쓸 인간들의 사업을 이어받아 하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며 그들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회의에 참가한 바너의 영주도 륀체르의 뜻에 동의하여 비합법적 사업에 손대는 길드장들에게 엄벌을 내릴 것이라며 경고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각 길드장들의 음지 사업이 멈출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더 큰 힘이 필요해.’ 회의를 마친 륀체르는 서둘러 영원의 봄에 돌아와 집사를 불렀다. 집사는 그의 명령에 따라 외출 준비를 했다. 회의에 참가할 때 입었던 무거운 복식과는 다른 산뜻하고 가벼운 복장을 준비하고 달콤한 향수에 꽃 선물도 준비하였다. 륀체르는 집사가 준비한 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붉은 건 별로야. 너무 방정맞지 않은가? 좀 더 연한 계통으로 하도록.” “예. 마스터.” 요새 륀체르는 며칠 동안 시무룩해 있었다. 분명 집사가 말한 적 있지 않았던가? ‘그분(마리)께서 막 침묵의 장에 도착하셨습니다. 치료가 끝나는 대로 면회를 하겠다고 합니다.’ 라고. 그런데 어째서 만나러 오지 않고 무소식인지? 사실 그 말은 마리가 하이너의 치료가 끝나는 대로 하이너를 보러 가겠다고 한 말이었다. 절대 륀체르를 만나 고마움의 인사를 하겠단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륀체르는 마리가 자신을 만나러 오는 줄 알고 오해하고 있었다. ‘은혜를 모르는 아가씨 같으니.’ 어째서 안 오는 걸까. 어쩌면 그날 자기가 혼잣말로 ‘필요 없다고 해.’라고 한 것을 집사가 마리에게 일러바친 건가? 그래서 마리가 영원의 봄을 찾지 않은 건지도? 아니. 아니다. 자신의 집사가 눈치가 몇 단인데 그런 것을 사사건건 일러바칠 리는 없다. ……아아. 여자 하나 때문에 작은 것에 연연하는 자신이 싫다. 륀체르는 옷을 갈아입고 차를 마시면서 꽃을 기다렸다. 발 빠른 집사는 금세 새로운 꽃을 들고 나타났다. 상아색 잔꽃 사이에 청록색 커다란 꽃 몇 송이가 포인트로 있는 꽃다발이었다. 이런 겨울에 구하기 어려운 꽃이기에, 분명 받는 이가 기뻐하리라. “흐음, 마음에 드는군. 아, 참. 그리고 내가 준비하라고 한 물건은?” “여기 있습니다.” 집사는 작은 보석함을 내밀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이 안에는 반지가 들어 있다. 마리에게 선물해줄 생각으로 자신의 길드에다가 미리 주문해놓은 것이었다. “어디 볼까.” 상자를 열어 반지의 모양을 본 륀체르는 흡족한 듯 미소 지었다. 이 반지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랑? 정욕 충족을 위한 기초 작업? 모두 틀렸다.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쓴 게 억울해서라도 마리니시네의 가슴을 빨고 말겠단 야심을 다졌지만, 지금은 그런 음탕한 야심만 다질 때가 아니었다. 그 아가씨와 친구가 되어야 했다. 그래야만 드래곤이라는 큰 패를 쥘 수 있을 테니까. 고로, 이 반지는 우정의 의미를 담은 반지라 할 수 있겠다. 륀체르는 물건을 챙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사가 황태자 결혼식에 관해 뭐라 뭐라 말했지만, 륀체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얼른 침묵의 장으로 가서 그녀를 만날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 시각, 대 여관 침묵의 장에서 마리는 마리아와 함께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바너를 슬슬 떠나기 위해서였다. ============================ 작품 후기 ============================ 이 챕터가 1편 남았습니다! 그렇다고 륀체르 빠이빠이는 아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0043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바너의 수도 크래파. 대 여관 침묵의 장. 찬바람이 무시무시하게 불어오는 날씨지만, 루돌프는 외출하기로 했다. 중요 의학서와 약학서를 사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이너는 그런 루돌프의 길잡이가 되어줄 겸 바너를 떠나기 전 필요한 물품을 사려고 따라나섰다. 루돌프는 명함을 주었던 의사에게 마법의학서에 관한 조언도 얻고 싶었다. 루돌프가 하이너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 참. 저번에 기사님 몸을 돌봐주신 의사 선생님께도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가도 되나요?” “흠. 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러 가야겠군. 위치는 알고 있나?” “예! 제게 명함이 있어요!” *** 마리가 머무는 객실 화로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끊이지 않고 뿜어져 나왔다. 마리는 이 따뜻한 곳에서 언제든 머물고 싶었지만, 앞으로의 여정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마리아가 마리의 짐 정리를 도왔다. 조용한 마리아와 달리 마리는 수다스러웠다. 요즘 틈만 나면 마리아의 진짜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시시껄렁한 주제로 말을 붙여보는 것이 취미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마리아의 나이를 듣고 좀 놀랐다. “어머! 마리아! 네가 마흔다섯 살이나 되었다고? 인간의 나이로 치자면 너는 너 만한 소녀를 낳고도 남을 나이란다. 내가 아주머니라고 불러도 될 나이지!” 마리아는 주인에게 몇 번이나 나이에 관해 알려주었는데, 그때마다 새로이 듣는 척하는 주인이 몹시 의뭉스러웠다. 마리아는 주인에게 인간의 음성 대신 텔레파시로 대화를 받아주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단답형의 텔레파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마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언제쯤 내게 네 진짜 목소리를 들려줄 거니, 응?” 마리아는 대답 대신 눈만 깜빡 깜빡였다. 선홍색 눈이 인형의 눈처럼 귀엽고 예뻤다. 눈만 귀엽고 예쁜 게 아니었다. 발그레한 뺨도 토실토실하니 예쁘고, 가녀린 목도 아름다웠다. 머리카락 한 번 제대로 감는 걸 본 적이 없어도 진줏빛 머리카락은 늘 향기로운 야생화 같은 향기를 냈다. 아무리 외모와 목소리는 연관이 없다고 하고, 그래서 그녀의 목소리도 외모처럼 아름다울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설마 걸걸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닐 테지? 마리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오랜만이군, 마리니시네.” 방문자는 륀체르였다. 그의 복장은 한여름 식물을 보는 듯 산뜻했다. 초식 동물처럼 늘씬한 다리가 드러나는 연갈색 바지에 연청록 색의 재킷을 가볍게 걸치고 있었다. 평소에 자주 쓰던 챙 모자도 쓰지 않아서 머리카락이 다 보였는데, 짧게 정리한 모양이 아주 시원시원해 보였다. 응당 이런 미남이 들어오면 두 여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집중되어야 할 테지만, 마리아는 그를 보지도 않은 채로 고개만 숙여 딱 최소한의 예를 갖춘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짐 정리에 몰두할 뿐이었다. 또한, 마리 역시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며 이죽거림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흐응, 길드장께서는 노크라곤 모르시는 것 같군요.” 그래도 마리아 앞이라고 호칭을 제대로 쓰는 것이 그녀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배려였다. 륀체르는 그녀들이 짐 정리하는 것을 보고 몹시 못마땅했다. 그는 기껏 가져온 꽃을 건넬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따져 물었다. “뭐야, 지금 뭐하는 거지? 이 짐들은 다 웬 것이야?” “보면 모르시나요? 이번 일이 끝나면 바너를 떠나겠다고 했을 텐데. 그나저나…… 호오, 이런 겨울에는 참 귀하디귀한 꽃다발이로군요. 제게 주시는 건가요, 길드장?” 륀체르는 그녀의 격식 있는 말투에서 가시를 느꼈다. 뒤늦게야 그녀에게 꽃다발이 건네졌다. 그녀가 꽃다발을 받아들었고 륀체르는 불만인 듯 물었다. “하지만 이리 금세 떠나는 거야?” 마리는 마리아가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금세라니. 벌써 사흘이라 미루적거렸다고. 물론 그간 그대가 보여준 호의는 고맙게 생각해.” 구두쇠 륀체르가 ‘와트프라우어 부부와 그들의 일행’에게 베푼 경제적 호의는 높이 치켜세울 만했다. 침묵의 장 내에서 편하게 지내라고 이것저것 신경 써 준 것에 마리는 감사하고 있었다. 륀체르는 정말로 바너를 떠날 것처럼 구는 마리를 보고 조급해졌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만큼은 최대한 여유로움을 연기했다. “흐음. 그래, 이거 참 아쉽군. 앞으로 생각이 나면 종종 바너에 오도록.” 마리는 잠시 생각했다. 이 륀체르 라는 녀석에겐 ‘그래! 시간 나면 들를게!’ 라는 말을 하기보단 사실대로 말해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나도 내 일(대륙 정복!)이 바쁜데 그럴 시간이 있나 모르겠네.” 실망스러운 대답에 륀체르의 미소가 옅어졌다. 그는 바짝 마르는 입술을 혀로 살짝 적시며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뭣하면 내가 그대들을 만나러 가도 되지?” 그는 대답을 기다릴 인내심도 없었다. 급하게 마리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이 ‘텔레파시 채널을 공유하고 싶다.’고 제의하고 있었다.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륀체르 사파이어와 텔레파시 채널을 공유하는 것. 그것은 보통 주인의 의사를 따르고 나서야 결정해야 할 문제지만, 주인 마리가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는 걸 보니 허락이나 마찬가지인 듯했다. 마리아가 긍정의 신호를 보내자 륀체르의 입가가 활짝 올라갔다. ‘꾸준히 연락하길 싫어하진 않는군?’ 사실 마음만 먹으면 이 아가씨 일행이 어디로 이동하고 무엇을 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사람들을 시키면 그만이니까. 단지 그런 식으로 뒤꽁무니를 밟게 하는 것보다 마리아와 텔레파시 채널을 공유하는 편이 훨씬 정확하고 빠르다. 륀체르는 마리아에게 (마리는 모르게) 텔레파시를 전했다. ‘아가씨와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어 그런데, 잠시 자리를 좀 비켜주겠어?’ 마리아는 마침 짐이 꽉 찬 가방을 닫고 정리를 마쳤다. 그러곤 두 사람에게 예를 갖춰 인사한 뒤 객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침묵이 찾아왔다. 마리는 오직 자기 장신구를 하나하나 정리하는 데만 열심이었다. 옆에 떡하니 사람이 있는 데도 그녀의 태도는 실내에 개미 한 마리도 느낄 수 없다는 듯이 무심해 보였다. 륀체르는 야속함을 느끼며 흠흠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냈다. 우정의 반지! 반지 싫어하는 여자도 있을까? 그는 보란 듯이 반지 상자를 스스로 열어 보였다. 마리는 그제야 장신구 정리를 멈추고 륀체르가 내민 것에 관심을 가졌다. “이게 뭐지?” 반지의 가운데엔 플래티르콘 장식이 있었는데, 그 장식 모양이 여타의 반지와는 달랐다. 두 개의 원을 나란히 붙이고 각 원의 가운데마다 붉은 꽃이 피어 있었다. 붉은 꽃. 그것은 마치 마리아의 선홍빛 눈동자를 떠올리게 했다. 마리는 단순하게 해석했다. “안경 모양의 반지는 처음이네.” 륀체르는 고개를 저었다. “안경이라니. 가슴 모양의 반지야. 유방 모양의 반지라고. 내 우정의 선물이다. 친구.” 그는 아예 반지를 꺼내 마리의 왼손 중지에 직접 끼워주었다. 사이즈는 기가 막히게 딱 맞았다! 마리는 당최 륀체르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후음… 뭐지, 이 변태 같은 디자인은? 아, 물론 변태 같음을 욕하는 건 아니야. 나는 뭐랄까…… 단지 가슴 모양과 우정이 무슨 연관인지 궁금해서 말이지.” 언제나 거만하고 심술궂게 빛나는 륀체르의 파란 눈동자가 약에 취하기라도 한 듯이 몽롱해졌다. “쉽게 생각해.” “어떻게?” 그의 마음의 소리를 울려댔다. “나는 기본적으로 여성의 가슴을 친애… 그리고 친구인 너도 친애, 그러므로 너라는 친우의 가슴을 초 극단적 친애…….” 논리도 괴상하고 만족도 얻지 못하는 이상한 답변을 긴 시간 듣기 무서워진 마리는 대충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만. 거기까지! 고마워. 잘 받을게.” 그녀는 드디어 장신구 정리를 마쳤다. 륀체르는 그녀의 중지에서 반짝이는 유방 모양의 반지를 보곤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짐 정리는 모두 마친 상태. 마리는 외출한 두 남자가 오길 기다리며 기지개를 켰다. “하으음, 추위가 얼른 풀렸으면 좋겠네.” 기지개를 켜느라 풍만한 가슴이 팔과 함께 살짝 올라갔다. 륀체르의 몽롱한 눈빛은 더욱 초점을 흐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점잖게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마리는 곧바로 뒤돌아 달려가 문을 열어주었다. 문밖에는 두꺼운 겨울 외투를 걸친 호위기사가 서 있었다. “우왓! 하이너!” “아가씨, 제가 실내에서 쿵쿵 뛰지 말라고 몇 번이나…….” 하이너는 마리의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곤 그만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창밖에서 부는 칼바람도 지금 하이너의 표정처럼 싸늘하진 못할 것이다. 마리의 가슴에 영혼마저 팔려있던 륀체르는 문 두드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지 엉뚱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대의 호위기사는 참 무례하군, 문을 그냥 열고 들어오질 않…….” 륀체르는 말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앞으로 대의를 위해 드래곤과 친분을 다져야 하니, 드래곤의 심기를 거슬리게 해봐야 좋을 게 없다. 그가 반색하는 척하며 하이너에게 인사를 하려는 그때, 하이너가 먼저 예를 갖춰 인사했다. “길드장 님, 그간 신세 많이 졌습니다.” 바너를 떠날 생각에 그간의 감정을 털고 형식상 인사를 하는 것뿐이었다. 륀체르도 형식상 고개를 끄덕거리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하이너는 문득 아가씨의 왼쪽 중지에 있는 낯선 것-유방 반지-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화 중 끼어들어 죄송합니다만, 이 흉측한 모양의 반지는 무엇인지요?” “이봐, 이봐. 흉측하다니….” 륀체르가 하이너를 흘겨보는 그때, 마리는 반지를 낀 손을 자랑하듯 쫙 펼쳐 보였다. 륀체르 사파이어가 이 반지를 선물했단 것은 바너라는 커다란 영지를 이 마리니시네 님의 편으로 만들었다는 의미나 마찬가지. 그렇게 해석해도 되겠지? 그녀는 나름대로 의미를 붙여 설명했다. “이건 대륙 정복의 첫 열쇠야!” 그 소리가 마냥 귀엽고 듣기 좋은 륀체르는 활짝 웃었다. 하이너의 표정이 종잇장처럼 구겼다. 얼른 이 바너를 떠나든가 해야지. 그는 객실 내부를 두리번거리다가 아가씨의 목도리와 모자, 외투를 발견하곤 직접 아가씨에게 씌우고 입히고 둘러주기 시작했다. 그의 현란한 손길에 마리는 제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려지면서 순식간에 외출복 차림이 되었다. 하이너는 아가씨가 정리한 작은 가방을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가며 재촉했다. “루돌프가 나갈 준비를 마치고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른 나가잔 재촉이나 다름없는 말에 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그녀는 떠나기 전에 륀체르와 마주 서서 왼손을 건넸다. “자, 그럼 륀체르.” 악수하잔 의미였다. 륀체르는 아쉬움이 그득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손도 내려다보았다. 이 손을 잡고 악수 후엔, 그녀는 떠나겠지. 솔직한 말이 나왔다. “손잡기 싫은데.” 그때였다. 마리가 륀체르의 뺨에 촉! 하고 짧게 입술 자국을 남겼다. 륀체르의 눈이 커졌다. 마리는 호위기사의 눈이 충혈되었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륀체르의 다른 쪽 뺨에도 입술 자국을 남겼다. 그리고 속삭였다. “친애하는 길드장. 이 우정의 키스가 마지막이 아니길 바라며, 당신의 무탈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키스를 마친 그녀는 치마 자락을 들고 허리를 숙이며 작별 인사를 했다. 이런 인사를 받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륀체르는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자, 그럼 가자고. 하이너.” 호위기사는 말없이 아가씨를 뒤따라 나섰다. 금발을 휘날리며 객실을 나가는 마리의 뒷모습을 보면서, 륀체르는 자신의 붉어진 두 뺨에 손을 가져갔다. 그녀가 뺨에 입 맞출 때 닿았던 가슴의 감촉이 떠올랐다. 심장이 달궈졌다. 이 온기는 어찌나 뜨거운지 창밖 꽁꽁 언 대기마저 녹일 것 같았다. 문이 닫히자 륀체르는 혼잣말했다. “가지마라…….” 바깥에선 진눈깨비가 휘날리고 있었다. 동쪽으로 향하는 바람. 마리니시네 일행이 향할 네히트 방향이었다. ============================ 작품 후기 ============================ 바너 챕터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00044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황태자의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모든 행사 준비는 황태자의 독단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친 할데바인 세력인 로젠플라이드 신의회 그리고 황후는 황태자의 독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혼식을 당장이라도 없는 일로 덮어버리고 싶었지만, 그것은 황태자의 체면을 노골적으로 깎아내리는 일이다. 또한 황실 전체의 체면을 깎는 일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다음 황위는 황태자의 것이니 말이다. 심약한 황제는 할데바인의 눈치를 보며 절절매었다. 결국에는 그도 아들을 이기지 못하는 아버지인지라 국혼 서류에 황제의 인장을 찍어주었다. 오를린의 아가씨를 황태자비로 들이는 데 탐탁지 않아 하는 무리의 반발을 감내해야 했던 것도 당연지사. 특히나 할데바인 영주의 측근들은 허구한 날 예비 황태자비의 단점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시골에서 조용히 지내온 그녀에게 이렇다 할 단점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그들은 모략을 해서라도 로테를 끌어내려야 한다고 부추겼다. 그러나 할데바인 영주는 반대했다. “뿌리가 약한 것은 스스로 쓰러지게 되어 있어. 우린 이 국혼을 조용히 지켜보면 될 일이네.” 그런 말을 하는 그는 뒤로는 로테아르카의 부친 즉, 오를린 영주의 비리나 약점을 캐는 데 열심이었다. 세상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게, 할데바인의 지론이었다. *** 네히트. 실렌틴 광산 가장자리의 어느 폐가. 깊게 쌓인 눈 때문에 폐가는 지붕의 선만 언덕처럼 동그랗게 드러내었다. 멀리서 언뜻 보면 집이 아니라 그냥 언덕이라 착각하고 지나쳐버리기 쉬웠다. 마리 일행은 이곳에 이틀째 머물고 있었다. 첫날엔 네히트까지 이동해오면서 추위에 지긋지긋하게 시달려 꼬박 휴식해야 했고, 오늘은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마리가 좌중-좌중이라 해봐야 루돌프, 하이너가 전부인-의 가운데 서서 어깨를 들썩이며 열변을 토했다. 그녀가 지금 강조하여 보이는 것은 륀체르에게 받은 유방 모양의 반지였다. “자자, 제군들! 우리는 자금줄이나 마찬가지인 바너와 친교를 맺었어. 바너의 금권을 쥐게 되었단 말이지. 이제는 네히트의 실렌틴 광산을 접수해야 해. 왜냐고? 우리의 큰 적들은…!” 그때 루돌프가 손을 들고서 끼어들었다. “큰 적들이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지요?” 다른 아가씨라면 감히 말하는 데 끼어들었다고 화를 냈을 테지만, 권위 의식 따윈 이미 예전에 버려둔 마리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눈알을 좌우로 굴리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음, 뭐 예를 들자면 힘세고 정의롭지 못한 무리? 대충 그렇게 알아들어. 아무튼! 우리의 큰 적들은 다들 기갑부대나 마력기갑부대를 다루니까, 그들의 동력인 기갑체를 제조하고 수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선 실렌틴 광산을 살살 꼬드겨 쇠의 공급을 중단하게 해야 해. 말하자면 적의 심장을 정지시키기 위해 사지의 피를 말려버리잔 거지.” 하이너는 웃음을 참느라 애써야 했다. 아가씨께서는 어째 말장난을 즐기시는 것 같다. 말이 좋아 바너의 금권을 쥐었다고 하지, 사실은 바너 출신 친구를 하나 얻은 것 아닌가? 물론 그 친구가 돈이 천문학적 액수로 많고, 바너의 길드들을 좌지우지할 만큼 영향력 있는 자에다가, 여태 이 아가씨 일행에 보인 경제적 호의를 생각하면 같은 편이라고 생각해도 그다지 이상할 건 없지만, 그래도 아가씨가 저렇게 바너의 자금줄마저 완전히 제 것이 되었다고 장담한 것은 솔직히 과장된 표현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뭐? 적의 심장이 어째? 하이너의 어쩐지 비웃는 듯하고 떨떠름한 표정을 본 마리가 두 손을 허리에 갖다 대고 눈썹을 씰룩씰룩 움직였다. “으응, 뭐지? 그 같잖단 표정은?” 만약 하이너의 기분이 좋았다면 그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이고 말 테지만, 지금은 그런 장난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일단 이동하면서 쌓인 피로가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았고 아가씨의 말만 그럴싸한 계획에 그냥저냥 휘둘리는 것 같아 유감이었다. 그는 대놓고 무례하게 굴었다. “말씀 그대로 참 같잖은 말씀을 하셔서 말입니다.” “뭐얏!” “제아무리 세상 물정 모르는 루돌프도 아가씨가 바너의 금권을 획득했다는 데 동의하진 못할 테지요. 안 그런가? 루돌프?” 하이너와 마리의 시선이 동시에 루돌프에게 향했다. 순간 루돌프의 호흡이 멈춘 듯했다. ‘끄응.’ 이들 사이에서 어느 한 사람의 편만 들었다가는 안 될 것이야……. 그렇게 판단한 루돌프는 급하게 일어섰다. “갑자기 응가가 마렵네요!” 루돌프는 차라리 조용한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와 함께 있는 게 훨씬 편했다. 소년이 나가버리자 하이너는 사뭇 건방진 미소를 지으며 마리를 보았고, 마리는 그런 호위 기사의 앞에 가까이 다가가 씩씩거리며 물었다. “꼭 애 앞에서 나에게 그렇게 빈정거려야했어?” “빈정거리는 게 아니지요. 저는 어디까지나 사실을 말했습니다만.” “보자 보자 하니깐!” “그야 그렇지 않습니까? 아가씨가 정말 위급할 때 바너의 돈을 쥐락펴락할 수 있어야 완전히 금권을 쥐었다고 장담할 수 있는 게지요.” 하이너는 잠시 시선을 내려 마리의 손을 보며 말을 이었다. “푸후… 고작 그런 반지 하나 받았다고 우쭐해 하시면 곤란하단 말입니다.” 그러자 마리는 짐을 뒤적거려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바너에서 네히트 실렌틴 광산으로 가는 이동 스크롤(가격이 무려 1억 자일.)을 사용했다는 증거물인 표식이었다. 하이너는 갑자기 그런 물건을 꺼내는 마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너 이게 뭔지 알아?” “글쎄요.” “이 어마어마한 가격 보이지? 이건 내 친구 륀체르가 사준 거야. 그는 내가 널 찾으러 간다는 말에 이런 비싼 것까지 시원시원하게 제공한 남자라고! 이쯤하면 서로 친교를 맺었음은 물론이고 필요에 따라 그가 내 부탁도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을 거라 보는데?” 게다가 드래곤 소동의 공범자이다. 공범자끼리는 원래 공조하는 법 아니던가. 마리의 주장을 들은 하이너는 끝까지 신뢰할 수 없다는 듯 코웃음만 쳤다. 그러더니 갑자기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하며 마리를 약 올리기 시작했다. “글쎄요. 또 모르지요. 만약에 그 사파이어라는 자가 내일 당장 누군가와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고 봅시다. 제 남편이 엄한 여자에게 무한정의 협조를 해주는 데 가만히 있을 부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친교라는 그 관계는 때에 따란 재앙이 될지도 모르니 주의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하! 넌 인간이 얼마나 부정적이어서 대체 그런 생각마저 하는 거지? 서른 살이나 되도록 자유롭게 살아온 륀체르가 갑자기 결혼은 무슨 결혼이며! 설사 네 말대로 결혼한다고 해도 그자가 어디 아내의 말에 눈 하나 깜빡할 것 같아?” “그건 그의 아내가 누가 될지에 따라 다르지요. 황족 출신의 아내를 들였다고 친다면 그는 아내의 말을 절대로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뭐, 어찌 됐든 아가씨는 바너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였다고 그렇게 자만하셔서는 안 될 겁니다.” 하이너는 아가씨의 중지를 옭아매는 유방 모양 반지를 다시 한 번 보더니 고개를 홱 돌리며 혼잣말했다. “그리고 그런 것 끼고 다니는 것도 좋지 않지. 모양은 둘째 치고 여행자 주제에 비싸 보이는 걸 드러내놓고 다니시다니. ‘날 잡아가쇼!’랑 다를 게 뭔지. 뭐든 마음대로 하는 건 좋지만…… 결국엔 고생하는 건 호위 기사인 나뿐이겠지.” 유독 시비조의 말에 마리가 분개했다. “지금 나더러 이 반지를 빼란 말이야?” “음?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흥! 잘 들어! 하이너! 네가 뭐라고 하든 이 반지는 끼고 있을 거야!” 하이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 작은 마리는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키는 하이너를 올려다 봐야만 했다. 호위 기사의 표정이 어쩐지 몹시도 억울해 보이는 건 착각일까? “뭔데? 왜?” “대체 저는 아가씨에게 뭡니까? 무슨 존재냐 말입니다?” “뭐?” “아가씨께서 다른 남자에게 반지를 받았습니다. 그 반지를 이틀 동안 보란 듯이 끼고 다니시는 것도 모자라 앞으로도 끼고 있을 거라니요?” “그러니까 그게 왜?” “왜라니요! 무려 다른 남자에게 받은 반지란 말입니다! 그것도 음험하기 짝이 없는 모양의! 저는 당최 아가씨란 사람의 속을 모르겠습니다! 저와 단지 주종의 관계일 뿐입니까? 전 그냥 호위기사니까 아가씨가 아무리 제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해도 그냥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야만 합니까?” 빙빙 돌려서 말하지만, 결국엔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단 말이었다. 아가씨가 다른 남자에게 굉장히 부담스러운 가격과 모양의 반지를 받고 그것을 내내 끼고 다녀서 내심 짜증이 난단 말이었다. 충실한 호위기사에서 꿍한 연인의 태세로 변해버린 하이너의 모습에 마리는 잠시 기가 차서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곤 넌더리가 난다는 듯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대관절 남자들은 왜 이럴까! 언제나 여자들보고 별것도 아닌 것에 집착한다고 하지만, 이럴 때 보면 너희도 똑같아!’ 이런 때에 반지를 일일이 빼고 다녀야 한다니! 그런 것까지 신경 쓰기엔 너무 성가시다! 날씨가 너무나 추웠다. 겹겹의 옷을 입고도 덜덜 떨어야 했고, 온기 마법을 좀 이용해 보자니 행인들의 눈에 띌 것 같다고 자중하잔 호위기사의 대답을 들었었다. 그런 추위와 싸우며 이런 네히트까지 오는 길에서 대관절 반지 하나에 신경을 쓸 겨를이 있을까? 그리고 만에 하나 그런 정신이 있다고 해도, 우정의 의미로 받은 반지를 며칠 동안은 아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단 이틀 만에 홀라당 빼버리는 것은 선물을 받은 자로서 절대 내키지 않았다. 설사 그런 행동이 호위기사에게 질투를 일으킨다 할지라도! 게다가 호위기사가 질투를 느끼는 것은 너무 멀리 나간 행동이다. 자신이 륀체르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모를까. 신이 있다면 그에게 맹세컨대, 이 마리니시네 루 오를린은 여행을 떠난 전후로 현재까지 하이너 그로스라는 남자 외엔 그 어떤 남자도 이성으로 느끼지 않았다. 따라서 호위기사가 부리는 질투는 괜한 짓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남자들의 이런 짓은 자신의 마음이 여유로울 때나 귀여워 보이는 법이지, 지금처럼 대의(!)를 모색하는 와중엔 그저 성가실 뿐이었다. 생각에 빠진 마리를 보고 하이너는 더욱 약이 올랐다. 자기가 이 정도로 말을 했으면 아가씨 아니, ‘연인’으로서 반지를 빼주시는 게 예의가 아닌가 하는 심정이었다. “어째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까?”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으니까.” “하?” “그렇지만 이건 꼭 말해야겠어.” 하이너는 팔짱을 끼고 듣는 자세를 취했다. 어디 무슨 말을 할지 들어나 보잔 태도다. 그의 건방진 자세에 마리의 표정이 살짝 굳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기로 하고 말했다. “여긴 어디지?” “어디긴요. 네히트입니다.” “그래. 바로 우리 영지와 통합된 네히트! 그곳이지.” “그런데요?” “고향 지척에서 ‘도망자’인 내가 이렇게 별 탈 없이 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하이너는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느냐는 듯 대꾸했다.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입니다. 영주님께서도 지척에서 따님이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하셨겠지요.” “물론 그렇긴 해. 하지만 무엇보다 륀체르가 결정적인 도움을 준 덕분이야. 우리는 그의 깊은 배려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해.” 하이너의 눈썹이 불만스럽게 씰룩였다. “대관절 무슨 도움에 무슨 배려 말씀입니까? 그 자가 우리더러 여기까지 편하게 가라고 또 텔레포트 홀 티켓을 주기라도 했습니까?” “아니! 그는 우리를 위해 거짓 소문을 흘려주었어. 오를린의 아가씨로 보이는 여자와 드래곤이 동한(서북쪽에 있는 지역. 지리상 동남쪽에 있는 네히트에서 상당히 먼 곳이다.)으로 갔다는 소문을 오를린 수색꾼들 측에 일부러 흘렸단 말이지! 그의 자금력이면 그런 소문은 금세 사실처럼 꾸며질 게 분명하고 덕분에 우린 당분간은 수색꾼들의 눈에서 피할 수 있단 말이야. 그래서 네히트까지 무사히 오고 무사히 은신할 수 있었단 말이고! 알겠어? 난 그런 도움을 준 친구에게 아주 고마워하고 있고, 또한 그런 친구를 소중히 생각하고 있어.” 마리의 시선이 반지로 내려갔다. 그녀는 손바닥을 펴서 반지의 빛을 잠시 관찰하다가 혼잣말했다. “내 우정에 관해 더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군.” 그러니까 그가 준 ‘우정의 반지’에 관해서도 입 닥치고 있으라고? 하이너는 따지듯이 물었다. “대관절 사파이어 그자가 그런 소문을 흘렸다는 걸 아가씨께서 어찌 아십니까?” 그러자 마리가 대뜸 한 손을 외투 속으로 집어넣었다. 집어넣더니 가슴 사이를 마구 헤집기 시작했다. 풍만한 가슴을 스스로 헤집는 그녀의 모습에 하이너의 얼굴이 잠시 붉어졌다. 마리가 가슴살을 뒤적여 꺼낸 것은 바로 굴종의 인이었다.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를 제 것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물! 마리는 그간 텔레파시를 이용해 륀체르와 소식을 꾸준히 주고받는 마리아에게서 륀체르의 온갖 호의에 가득 찬 행동에 관해 보고받았다. “이건 단지 그냥 예뻐서 달고 다니는 게 아니잖아?” 마리가 굴종의 인을 하이너의 앞에 왔다 갔다 보이며 말했다. 하이너는 자신이 선물한 굴종의 인 때문에 마리와 륀체르의 관계가 꾸준히 이어질 것 같단 생각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드래콘인지 뭔지 하는 그 생물은 평소에는 통 모습을 드러내질 않더니 이런 식으로 아가씨에게 도움이 되어주었고, 도움이 되는 걸 넘어서 그 사파이어라는 자와 아가씨의 연락까지 돕고 있었다. 하이너는 문득 드래콘이라는 그 생물이 몹시 성가시게 느껴졌다. ‘이거 뭐 작은 고양이처럼 어디다가 유기해버릴 수도 없고.’ 하지만 하이너는 자기가 그런 생각을 했단 사실에 금세 경악했다. 자기가 거둔 생명을 자기가 버리려 하다니! 기사도를 배울 땐 절대 하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어째서인지 여행을 하면 할수록 인간의 길을 벗어나는 이 기분 나쁜 느낌은 뭐람……. 이번에는 그가 두 손으로 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괴로워해야 했다. 그때였다. 그의 엉덩이를 마리가 손바닥으로 세게 때리며 외쳤다. “다시 한 번 말하겠어! 네가 나의 호위 기사이든 연인이든 간에, 내 우정과 물건에 관해서는 참견하지 마! 그건 신이라도 할 수 없는 거란다!” 그녀는 그 말을 뱉고는 루돌프와 마리아를 찾으러 나가려 했다. 그러자 하이너가 뒤돌아서서 마리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그녀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손을 차지하는 반지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좋습니다. 우정일 때까지만 참견하지 않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우정일 때까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아가씨.” 하이너는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세게 잡고 마주 보았다. 갑작스러운 밀착에 마리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 뭐야? 왜 이래?” 하이너는 그 눈을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입술을 보았다. 번뇌가 생겼다. 이 아름다운 입술은 어쩜 이리 야속한 말만 하실까. 남자들과 이런저런 관계를 자유롭게 맺어온 분이란 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걸 모르고 아가씨와 이런 관계가 된 건 아니지만, 가끔은…… 화가 난다. 아이처럼. “실례지만, 이건, 이건 그냥 제 발작이니까 그러려니 해주십시오.” 아가씨를 더욱 끌어올려 깊게 입 맞추었다. 지금으로썬 이 질투심을 해소할 방법이 이런 방식밖에 없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주말 되세요. 00045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그런데 그 발작은 아주 달콤한 것이었다. 아가씨의 야속한 입술을 막아버리고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에만 집중하니 하이너는 살 것 같았다. 아가씨 역시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날씨가 춥기 때문일까. 오히려 품으로 더 파고들며 키스에 응하는 것 같다. 한참을 그렇게 키스를 나누다가 아가씨가 살짝 눈이 풀려서 고개를 떼어냈다. 하이너는 놀리듯 말했다. “아주 매미처럼 착 붙어 안기시던데.” 마리는 아예 두 팔로 하이너의 목을 끌어안으며 대꾸했다. “흐응, 추워서 그런 것뿐이야. 어째서 온기 마법을 약하게 두른 거냐고.” “그야 세게 두르면 이 집을 가리는 눈들이 녹으니까요. 그리고…….” 도발적으로 목을 감는 아가씨의 표정이 어쩐지 유혹하는 것만 같다. 졸리는 사슴처럼 나른히 깔린 눈 하며, 살짝 벌어진 입술. 하이너는 다시 키스하려고 고개를 갸울며 속삭였다. “온기 마법 대신 더 뜨거워지는 법이 있잖습니까. 그게 뭔지 알고 계시잖습니까…….” “으음….” “이제부터… 허락해주시겠죠?” 마리는 그의 입술을 다시 찾는 것으로 허락을 표시했다. 하이너는 아가씨의 등을 어루만지며 입맞춤 했다. 갈수록 짙어지는 입맞춤에 한껏 흥분된 하이너는 아가씨를 한쪽 벽으로 밀어붙였다. 아가씨의 몸을 가뿐히 들어 올려 풍만한 가슴이 눈앞에 오도록 한 뒤, 달콤한 향기가 나는 앙가슴 사이에 그는 고개를 파묻고 수없이 비볐다. 살갗과 살갗을 가리는 털옷이 성가시다. 왜 아직 자신은 열기 조절 마법밖에 못하는 걸까. 이대로 옷을 다 없애버리는 마법은 불가능한지? 마음이 점점 조급해진 그는 자기 외투를 짚더미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다 아가씨를 눕혔다. 한겨울에 더욱 짙은 향을 내는 달콤한 목덜미에 입 맞추기 시작하자, 아가씨가 그 간지러운 감촉에 몸을 움찔움찔 떨면서 중얼거렸다. “아아, 한순간에 이 옷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렸으면 얼마나 편할까!” 하이너는 잠시 멈칫했다.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자신이 한 생각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아가씨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래. 자신이 유치했다. 이런 사소한 것에도 마음이 서로 같을 진데 이 관계에 서투른 의심 따윈 말자. 한낱 쇠붙이(유방 반지) 따위에 연연하진 말잔 말이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와 앙가슴만으로는 흥분을 달래기 부족하여 그녀의 어깨를 덮는 옷을 내리며 빨았다. 마치 달콤한 꿀을 핥듯 어깨를 한참 동안 먹었다. 그러다 입술이 점점 가슴으로 향했다. “저기, 루돌프가 올지도 모른다고.” “오면 오는 거지요.” 하이너는 괜한 말을 하는 아가씨가 아가씨답지 않아 꾸짖듯 살결을 살짝 깨물었다. 가슴 언저리에 작은 잇자국이 생기는 감각이 더할 수 없이 야릇하여 마리의 몸은 살짝 비틀렸다. 호위 기사는 이제 희고 기다란 팔에 입 맞추었다. 가녀린 팔등을 흘러내린 그의 입술이 노린 것은…… 문제의 반지였다. ‘역시나 싫어.’ 그는 입술로 기어이 그 반지를 빼버리려는 생각이었으나 실패했다. 마리가 반지 낀 손을 들어 하이너의 머리를 어루만졌기 때문이다. “이제 혀는 아프지 않아?” 하이너는 그녀의 입술을 다시 찾고 거세게 혀를 놀림으로써 대답을 대신 했다. 그의 손은 도망간 아가씨의 손을 붙들어 다시 제 입술 앞으로 가져오고 있었다. 그리고 아가씨의 손에 입 맞추는 척하며 다시 반지를 빼내려고 했다. 마리는 그런 그를 살짝 흘겨보았다. “너 진짜….” 하이너는 이제 노골적으로 손을 뻗어 반지를 빼려 했다. 낮고 갈라진 그의 음성이 마리의 귓가에 왠지 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저와 키스 다 하고 나서 그때 다시 끼면 되잖습니까….” 물론 다시 껴야겠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게끔 그녀의 정신을 흩트리고 싶고, 흩트릴 작정이다. 마리는 호위기사의 고집이 생각보다 세다고 처음으로 느꼈다. 하지만 못 이기는 척이라도, 반지를 빼주는 것은 왠지 지는 기분이다. 그녀의 반지 낀 손이 호위기사의 손에서 벗어나 그의 가슴팍을 매만졌다. 탄탄한 가슴 가운데를 살살 간질이자 호위기사의 입에서 옅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마리가 그 표정을 느긋이 감상하며 물었다. “이런 걸 하는 데 반지가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아. 안 그래?” 그녀는 그의 젖꼭지를 비틀었다. “읏!” “안 그러냐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의 손은 호위기사의 다리 사이로 향했다. 언제나 능숙한 손이다. 가장 예민한 선단을 나비의 날개 잡듯 살며시 쥐었다가 은근한 압박을 주었다. 그러다 다시 살며시 쥐고 다시 세게 잡고 그것을 반복한다. 손의 속도가 빨라지니 하이너는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에 이를 꽉 다물고 눈을 감았다. 반칙이다. 아가씨의 손이 닿자마자 커져버린 성기도 반칙이지만, 아가씨가 이런 식의 자극을 주면서 반지 이야기를 묻어버리는 것도 명백히 반칙이었다. ‘하여간 이 아가씨는….’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까. 그는 검은 눈동자를 드러내며 야릇한 소리를 흘려댔다. “하, 아가씨… 읏…… 으!” 마리는 짓궂은 눈으로 하이너의 눈을 감상했다. 쾌감에 쉽게 흐트러지는 검은 눈동자에 그녀는 빠져들 것만 같았다. “어쩜 이리 예쁘니, 우리 호위 기사는. 응?” 손짓은 더더욱 빨라졌다. 어느샌가 하이너가 눕고 아가씨가 그 위에서 쾌락의 풀무질을 하는 자세로 변했다. 하이너의 거친 호흡은 곧 아가씨의 차분한 입술 속에서 어지럽게 휘저어졌다. 서로의 입술과 서로의 몸 그 어느 곳도 꽉 닿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우르르르릉! 갑자기 집 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한 흔들림은 아니었지만,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리가 키스를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뭐지?” 하이너는 곧바로 옷을 껴입고 밖으로 나갔다. 눈더미를 헤치고 나가서 본 것은 새하얀 설원일 뿐이었다. 뒤따라 나온 마리가 목도리를 목에 칭칭 휘감으며 물었다. “무슨 소리였어? 뭔데?” 하이너는 잠시 눈을 감았다. 흥분으로 인해 인간의 감각에 취하다 보니 드래곤의 발달한 감각을 사용하는 것에 잠시 소홀했다. 그는 심호흡하고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모든 감각을 집중하고 보니 저 먼 곳 어디선가 금속성의 기운이 느껴졌다. 또한, 콧속을 알큰하게 하는 어떤 냄새까지. “아가씨는 여기 계십시오!” 하이너는 수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달려갔다. 헐벗은 나뭇가지와 눈꽃 더미 사이에서 대형 사고가 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여행자용 기갑체, 아마도 멀쩡했으면 작은 드래콘 모양의 기갑체였을 것이 엉망으로 부서져 있었다. 추락한 게 분명했다. 다행히 커다란 나무에 떨어져 충격을 덜 받았지만, 기갑체 안에 있던 물건들은 모두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수상한 냄새가 나는 이유도 바로 그 물건들이 부서져 내용물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웬 술 냄새가…….” 하이너는 엉망진창 속에서 한 사람을 발견했다. 기갑체를 조종하던 사람이 분명했다. 그는 나뭇가지가 뒤엉키고 눈꽃이 핀 곳에 떨어져 부상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다만 사지를 꿈틀거리는 게 딱해 보였다. 적어도 하이너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이는 청년이었다. “루돌프!” 하이너는 쓰러진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서둘러 루돌프를 불렀다. *** 오를린. 한스 레 하인첼의 밀주 제조실 뒤편 큰 마당. “아이고, 허리야… 이거 원.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허리부터 맛 가게 생겼네.” 한스는 대량의 누룩을 상자에 담으며 불평했다. 종자이자 조수인 루돌프가 가출했어도 한스는 혼자서 나름대로 잘 해나갔다. 낮에는 주로 본 직업인 약사의 일에 충실했고, 밤에는 마법 연구와 밀주 제조를 열심히 하였다. 일손이 부족해져서 몸이 더 힘들고 곁에 함께 하는 사람이 사라지니 적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새로 조수를 구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자신의 비합법적 일들에 기밀유지를 하려면 지금처럼 쭉 혼자인 편이 좋다. 게다가 만약 입이 무거운 사람을 구한다고 해도, 그 사람과 끝까지 함께하리란 보장이 없다. 그리고 혹시 아는가? 어린 루돌프가 험한 세상에 시달려 금세 돌아와 줄지도. 그렇게 되면 사람을 구한 것은 말짱 헛일이 되고 말 것이다. 한스는 내심 루돌프가 돌아와 주기를 바랐다. 오늘 한스의 밀주 제조장엔 사람이 하나 와 있었다. 스물세 살 훤칠한 키의 청년은 배달원으로 곧 결혼식을 앞두었다. 결혼식 자금을 모은다고 밤이고 낮이고 매일 열심히 일하면서 각지의 특산물을 사서 약혼자에게 바치고, 또 약혼자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자기도 뿌듯해 하는 게 낙인, 그런 자였다. 배달원의 이번 임무는 늘 그렇듯 오를린의 영주에게서 받은 것이다. 오를린 영주는 밀주업자 한스 레 하인첼의 누룩을 사들여 로샤타르트에서 비싸게 팔 계획이었다. 이에 배달원은 그 누룩을 로샤타르트까지 가져가는 일을 맡았다. 어째서 한 영지를 책임지는 영주가 불법 밀주업자와 거래를 하느냐. 일종의 영지 생리였다. 주된 수입원이라곤 농산물과 시답잖은 공예품이 전부인 오를린은 불과 오십 년 전만 해도 영지민들이 굶어 죽어버리는 일이 예사인 몹시 빈곤한 지역이었다. 이에 전 영주가 비합법적인 일에 손대어 영지의 경제에 수혈을 시작했고, 현재 오를린은 그나마 사람 사는 곳처럼 될 수 있었다. (또한, 영주의 사병도 늘릴 수 있었다 한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설사 영주의 비합법적인 사업을 안다고 해도 그것에 손가락질하는 영지민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할 성질의 일도 아니다 보니, 배달원은 언제나 이동에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배달할 때 운송용 기갑체가 아닌 여행자용 기갑체를 이용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놈의 허리가 진짜 맛이 갔나?” 배달원은 자기가 타고 온 여행용 기갑체의 먼지를 닦아내다가 한스의 엄살을 듣곤 피식 웃었다. 그러곤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바로 루앙의 깃발이었다. 루앙 출신 사람이 기갑체를 타고 여행하는 듯이 보여야 다른 영지민들의 눈을 속일 수 있다. ‘흐음, 매일 루앙 깃발을 달고 다니는 것도 의심 사기 좋은데. 영주님께서는 다른 깃발을 주실 센스도 없단 말이지.’ 배달원은 기갑체 정리를 끝내고 한스의 일을 도왔다. 두 남자가 손을 합치니 누룩 상자가 금세 기갑체 안에 가득 쌓였다. 배달원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제조장을 한 번 슥 둘러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여기 올 때 늘 보이던 꼬마가 보이지 않았다. 배달원은 한스가 내민 서류에 사인하며 물었다. “그 꼬마는 어디 갔어요?” 한스는 사인이 끝난 서류를 받아들고 배달원의 이동용 기갑체 연료통을 보며 대답했다. “우리 꼬맹이 내가 말실수해서 가출했지. 그나저나 이거, 이거….” 연료통의 수위가 아슬아슬하다. 로샤타르트까지 가려면 조금 더 연료를 채우고 가는 게 좋다. 걱정된 한스는 배달원에게 조언했다. “영주께 연료비 좀 더 받아내. 이래선 사고 난다고.” “받았어요.” “그런데 왜 채우지 않아?” “젊은이라면 자고로 긴장감을 즐겨야 하지 않습니까?” 배달원은 유쾌하게 웃으며 한스의 팔을 툭 쳤다. 사실은 정말 긴장감을 즐기고자 연료를 채우지 않은 건 아니다. 연료비를 아껴 결혼자금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청혼 반지를 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걸 사실대로 말했다간 이 한스 레 하인첼이라는 작자에게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한스는 기분이 좋으면 상냥하다가도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었을 땐 사납게 돌변하고 마니까. 그것이 설사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한스는 매우 불만인 듯 인상을 구겼다. “긴장감을 즐기고 나발이고, 연료 채우라니까. 위험해.” “위험한지 아닌지는 다음 임무 때 밝혀지겠죠. 그럼 저는 이만!” 한스가 끝까지 말렸지만, 배달원은 무시하고 기갑체에 몸을 실었다. 곧 그것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드래콘 모양의 기갑체는 서쪽으로 유유히 비행했다. 아마도 네히트의 실렌틴 광산을 지나 바너와 할데바인의 접경을 이루는 생명의 역광이라는 강줄기를 지나쳐, 로샤타르트의 수도에 다다르겠지. 단…… 연료가 받쳐주는 한까지만 말이다. 만약에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연료가 떨어져 버린다면……. “영주도 미쳤어! 두 번은 나누어 옮겨야 하는 것을 한 번에 다 가라고? 하여간 영주나 저놈이나…… 젠장! 신경 끄자. 나랑 무슨 상관이람!” 한스는 만사 생각하기 귀찮다는 듯 뒤돌아섰다. 그리고 약 두 시간 뒤, 배달원의 기갑체는 실렌틴 광산에서 추락하고 말았다. 원인은 연료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 과잉적재, 그게 문제였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046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로귀하르트 제국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 성대한 국혼식이 끝났다. 이 행사엔 많은 이들이 참석하였다. 황태자 독단으로 치러지는 식이다 보니 황태자와 반목하는 할데바인 측은 오지 않을 거라고 모두가 예상했지만, 그 예상은 틀리고 말았다. 친 할데바인 계열의 로젠플라드, 로샤타르트, 루앙, 서한, 중천의 귀족들이 모두 모였고, 그들의 축하 공물 또한 풍성했다. 무엇보다 할데바인 영주 본인이 참석했다는 점이 괄목할 점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여유롭고 밝은 미소로 황태자 부부의 앞날을 축복하였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가 독사의 이빨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오늘의 꽃 로테는 곧 자러 올 황태자, 이제는 남편이 된 그 남자를 침소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양 손에는 국혼식에서 쓴 왕관이 당당히 빛나고 있었다. 바너의 총 길드장이자 보석 길드 마스터인 륀체르 사파이어가 직접 제작했다는 이 물건은 매우 아름다웠다. 가장 강하다는 금속 플래티르콘으로 뼈대를 잡고 각종 은빛 보석을 쏟아 부은 세련된 모양인데 겉보기완 다르게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무겁다. 겉모습은 화려하나 그 화려함을 유지하기 위해선 엄청난 마음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황족의 길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로테는 왕관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가 시간을 알리는 기구를 보았다. ‘그 남자가 올 때가 되었는데.’ 로테는 왕관을 시녀에게 건네주었다. 시녀가 그것을 받아들고 보관함에 두었다. 어째 왕관이 보관함 바닥에 닿는 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크다. 로테는 시녀를 흘긋 보았다. 이 시녀의 표정은 찬물에 담근 모난 돌 같다. 보는 사람을 늘 불편하게만 한다. 국혼 사흘 전부터 평소에 부리던 하녀인 렌을 쓰지 못하고 내궁부에서 정해준 시녀를 쓰게 되었는데, 매번 대할 때마다 낯설기만 하다. 예전 하녀 렌을 대할 때는 스스럼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내온 덕분도 있고, 무엇보다 렌이 제 신분에 맞게 굴었던 점이 자신을 편하게 했으리라. 그러나 이 시녀는 다르다. 도무지 예의를 갖출 줄 몰랐다. 보통 이런 시녀들은 귀족가에서 곱게 자라온 여식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듣자 하니 이 시녀도 로샤타르트 출신 귀족가의 딸이라던데……. 황태자비와 시녀의 관계가 아니라 그저 귀족의 자식으로서 연회장에서 만났다면 오를린 시골 출신의 자신은 백 번 기가 죽고도 남았으리라. 시녀는 그런 도도한 기운이 흘러넘쳤다. 용모 또한 자신과 비슷하여 곁에 두다간 황태자의 시선을 빼앗길지도 모르겠다는 조바심이 날 정도였다. ‘기죽으면 안 돼, 절대로… 난 이 나라의 황후가 될 몸이라고!’ 침실이 어두웠다. 초야부터 이런 어두침침한 기분으로 있을 순 없었다. 로테는 시녀에게 지시했다. “어둡군. 마광석은 너무 밝으니 별로고 일단 촛불을 두어 개 더 밝혀.” 그러나 시녀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차갑게 대꾸했다. “이제 그만 주무시는 게 어떻습니까.” 기가 차는 대답이었다. 오늘은 다른 날도 아니고 국혼 초야. 이런 날 황태자비가 황태자를 맞이하기도 전에 그냥 잠을 자다니? 어찌 이리 무례하게 구는 걸까. 과거 황실 전통처럼 황족 부부의 초야를 귀족들이 직접 지켜보는 정도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초야엔 황궁의 보이지 않는 많은 눈과 귀가 집중된다. 황손의 정통성, 황태자비의 순결함을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지금도 침실 밖에선 황궁의 사병들이 지키고 서 있었고 침실 곳곳에 초야를 위한 형식적인 준비물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뭐라고? 이제 그만 자라고? 국혼을 치르기도 전에 이미 황손이 들어섰으니 그 외의 형식은 의미 없다 이건가? 로테는 조금 짜증스럽게 지시했다. “촛불을 더 밝히라고 했어.” “어차피 태자 전하께선 오지 않으실 텐데요.” 명백한 도발이었다. 로테는 자신에게 이토록 무례한 시녀를 붙인 내궁부, 더 나아가서는 내궁부의 총관인 황후가 야속했다. 할데바인 대공의 조카인 황후는 오직 할데바인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눈엣가시인 황태자비에게 저런 불손한 시녀를 붙이는 행위도 어찌 보면 할데바인이 주도한 간택전 결과에 대한 보복일지도 모른다. 로테는 자신이 겪어야 할 궁, 자신이 겪어야 할 황족들에게 매일 각오를 다지며 최대한 의연해지려 노력했다. “불경하군.” “솔직한 말씀을 드린 것뿐입니다.” “뭘 믿고 솔직하다고 자신하는 거지? 그나저나, 이리 건방지게 굴면 널 시녀로 뽑으신 분께 폐가 된다곤 생각해본 적 없는가?” 이런 태도 하나하나가 흠이 잡히다 보면 결국 내궁부를 다스리는 황후에게도 흠이 될 것이라고 경고였는데, 시녀는 비릿하게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절 뽑으신 분께 지금 누구보다 폐가 되는 존재는 제가 아니라 이 궁 어딘가에 있는 촌뜨기 아가씨일 겁니다.” “……!” 로테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대관절 뭘 믿고 이렇게 구는 건지, 황태자비에게 이토록 못되게 굴 수 있을 정도로 할데바인의 배경이 대단한 건가? 저러다 훗날 할데바인이 힘을 잃게 되는 날이 오면 지금 저런 행동을 크게 후회하게 될 텐데……. 그러니까, 자신에게서 태어난 황손이 황위 계승서열 1위로 오른다면 말이다. 로테는 버릇처럼 배를 만지며 일어났다. 불을 켜기 위해서였다. 불을 밝혀야 할 시녀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몸소 하면 그만이다. 어두운 침실을 밝히는 로테의 뒤에서 시녀가 끈질기게 참견했다. “주무셔야 할 시간입니다.” “내가 자든 말든 알아서 해. 그만 나가 주겠나?” “주무실 때까지 잠 시중을 들란 지시를 받았습니다만.” “누구에게?” 설마 황후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더냐고 로테는 묻고 싶었다. 로테의 물음에 시녀는 몹시 지루한 듯 한숨을 쉬었다. “제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드려야 하는지요?” 촛대를 든 로테는 그것을 그만 시녀에게 던져버릴 뻔했다. 로테는 이를 악물고 천천히 뒤돌아 시녀를 보았다. 시녀가 마지못해 대답을 내놓았다. “태자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로테는 커다란 돌덩이로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해졌다. “그…….” 그럴 리가. 비오르틴이 여길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설마, 그래서 저 고얀 시녀가 저런 고자세였단 말인가? 그 남자는 어째서 그런 말을 한 건지……. 수치스러움에 로테는 그만 발화석 하나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아마도 내일이면 궁의 호사가들 입이 바빠질 모양이다. *** 장인의 도시 바너, 수도 크래파. 륀체르 사파이어의 가택 영원의 봄, 비밀 정원. 아직도 많은 연인이 회자하는 낭만 시인 수스스의 사랑 이야기. 수스스는 방랑하며 수백 명의 여자와 사귀었지만, 그가 사랑한 여인은 단 한 명-뤼후켄뿐이었다. 뤼후켄은 보잘것없는 가문에서 박색으로 태어났다. 그녀의 삶은 신산했다. 신분은 높지만, 성격이 형편없는 남자와 결혼해 갖은 고생을 하다 버려지기도 했고, 불량배들에게 강간당해 임신한 적도 있었으며, 겨우 정신을 추스르고 살다가 재혼했더니 그 새 남편은 얼마 되지 않아 그만 죽어버렸다. 그런데 그 장례식에 재혼남의 내연녀가 찾아와 아이를 맡기고 갈 줄이야! 훗날 사귄 방랑 시인 수스스도 그녀의 몸에 아이를 남기고 훌쩍 떠나 버렸다. 뤼후켄은 남자 운이 지독히도 따라주지 않는 여자였다. 그녀는 첫 결혼 때 낳은 아이와 강간을 당해 낳은 아이, 유복자,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서 얻어온 아이, 어느 방랑 시인(수스스)에게서 얼떨결에 낳은 아이, 저의 집 앞에 버려진 아이 그렇게 총 아홉 명의 아이들에게 똑같이 제 젖을 먹이고 자신의 힘으로 키웠다. 그 아이들은 하나같이 훌륭한 인간들로 성장했다. 뤼후켄의 고생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으리라. 무려 아홉 명의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자란 그녀의 가슴은 축 처져 형편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녀의 가슴을 아름답다고 극찬했다. 어쩌면 수스스는 그녀를 사랑한 게 아니라 그녀가 가진 모성을 느끼고 숭배한 것은 아닐까. “얼굴이 박색이었다곤 해도 분명 가슴은 특급이었을 거야. 아무렴.” 비록 마리가 뤼후켄과 외모와 신분과 나이 그리고 운명이 같진 않지만, 그녀의 가슴만은 가히 뤼후켄의 가슴보다 아름답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아름다운 가슴을 가진 밝고 쾌활하고 명랑한 여자가 뤼후켄보다 못한 모성을 가질 리는 없다.(이것이 륀체르의 논리였다!) 그녀가 내 아이를 낳는다면 뤼후켄보다 더 성스러운 어미가 될 것이리라,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말리라……. 인간에 대해 불신하면서도 륀체르는 오직 마리에게만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확신했다. 그것은 마리를 향한 충족되지 못한 욕구가 빚어낸 감정이라 할 수 있었고, 어찌 보면 그녀와 반드시 다시 만나고 말겠다는 의지가 빚어낸 환상일 수도 있었다. 혼기가 훨씬 지나버린 수컷들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간혹 가지곤 하는 그런 환상, 말이다. “이게 믿겨? 나이 서른에 이런 사랑을 느낀다는 게 말이지. 어쨌거나 나는 매일 그녀의 소식에 집중해. 그녀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며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보고받고 싶어져. 가능하다면 족쇄라도 달아서 곁에 두고 싶지만, 사정상 그게 힘들단 말이지. 이럴 땐 내가 길드 마스터가 아니라 그냥 떠돌이였으면 한다니까. 수스스 같은 아무런 책임과 의무도 없는 시인, 뭐 그런 인간들처럼 말이야.” 륀체르의 독백 같은 말을 들은 비오르틴은 조금 지루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신랑에게 수다쟁이 동네 형은 성가신 존재다. 지금 황태자에게 륀체르는 딱 그런 존재다. ‘장인 작자들이란 대화만 하면 재미가 없단 말이지.’ 예쁜 왕관을 만들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직접 바너까지 초청한다. 그것도 국혼 첫날에 말이다. 초청해서 대접받은 일이라곤 지루한 공연을 보는 것 그리고 바너의 장인들이 만든 최고급 술과 마약을 즐긴 것뿐이었다. 바람둥이 시인의 사랑을 극찬하는 수다까지 듣고 있을 정신도, 체력도 바닥 난 비오르틴은 그만 잠이 들고 싶었다. “형.” “응?” “그나저나 난 어디서 자면 돼요?” “뭐야. 벌써 자려고?” “그럼 여기서 시답잖은 시인과 어느 못생긴 아줌마의 이야기를 더 들어야 하나요?” “뤼후켄이야기는 시작일 뿐이지. 지금부터 그녀보다 더 뛰어난, 더 사랑스러운, 내 짝사랑의 이야기를 해주려고 하잖아.” 륀체르는 황태자의 팔을 끌어당겨 앉혔다. 이런 몸짓까지 하는 것 보니, 술이 엄청나게 취한 모양이다. 황태자는 한숨을 쉬며 또 몇 분을 더 시간 낭비를 해야 하는가, 소리 없이 푸념했다. 륀체르가 담배 하나를 꺼내 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게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황태자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뜩이나 음울한 인상이 멍하게 있으니 더욱 무기력해 보였다. 륀체르는 그 무기력한 눈동자에 살짝 도발하듯 중얼거렸다. “오늘 결혼식 내내 신경 쓰였어. 나의 그녀, 뤼후켄보다 아름다운 그녀가…… 오늘의 주인공과 참 많이 닮았더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사파이어?” 황태자는 정색하며 물었다. 아무리 서로 ‘형’, ‘아우’ 하며 편히 지냈어도 황태자비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은 그런 태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감히 황태자비를 누구와 비교하는 것인가. 황태자는 피곤함과 짜증이 겹친 시선을 쏘았고, 륀체르는 테이블 밑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손바닥 만한 크기의 마법영상구가 나왔다. 황태자의 시선이 그 화면에 고정되었다. 곧 화면에 한 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금발을 사랑스럽게 풀어 내린 여인, 청록빛의 눈동자가 아름다운 한 여인. 황태자비 로테아르카와 똑같이 생긴 한 여인이 화면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로테아르카는 아니다. 황태자는 웃는 것도 찡그리는 것도 아닌 모호한 표정이 되었다. “이게 무슨…….” “나의 그녀야.” 황태자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륀체르는 취해서 흐늘거렸지만 그 웃음만은 날카로웠다. 지금 황태자의 표정으로 보건대 아직 소문을 모르는 모양이다. 오를린의 로테아르카가 실은 쌍둥이라는 것을. 바너에 사는 자신도 그것을 아는데 어째서 정보의 중심지 황도에 쭉 살았던 황태자가 그 사실을, 무려 제 아내에 관한 사실을 몰랐을까. 어쩌면 오를린이 변방의 빈곤한 영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개 황도 인간들이란 거대 영지 영주 일가의 가계도는 줄줄 꿰고 살지만, 시골 영지 아무개가 지도의 어디에 붙어있는지는 잘 모르곤 하니까. 어찌 됐든 륀체르는 황태자 부부 사이에 분탕을 칠 필요는 있다. 앞으로 바너 영지가 아닌 제국 전부를 삼키려 하는 야망을 품은 이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황실의 안녕을 파괴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가뜩이나 지지기반이 약한 황태자 내외가 첫 목표물이 되겠다. 비록 그간 서로 동맹의 관계를 지내왔어도 말이다. 륀체르는 계속 술 취한 척 연기하며 마리니시네의 다른 모습도 연달아 황태자에게 보여주었다. “아마도 쌍둥이가 아닐까 해. 아니, 이쯤이면 쌍둥이가 확실하지. 어느 마법사가 성형 농간을 부린 게 아니라면 말이지.” “…….” “흐음.” “…….” 황태자는 지금 대체 무슨 생각 중인 걸까? 동맹 관계가 다름없는 바너의 실세가 한 여자를 짝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여자가 황태자비의 쌍둥이일지도 모르겠다니. 그런데 마법영상구에서 보이는 이 여자, 궁의 로테아르카와는 달리 밝고 쾌활해 보인다. 마치 어린 시절 보았던 그 소녀처럼. 황태자가 마법영상구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때, 륀체르는 아주 비싸게 사들인 황실 정보를 운운하며 자극하기 시작했다. “듣자하니 너, 시골 영지의 여자를 아내로 들인 결정적인 이유가 어린 날의 추억 때문이라 하던데.” 황태자의 눈이 흔들렸다. 륀체르가 마법영상구를 끄며 차분히 물어보았다. “추억 속 그 여자와 결혼한 게 맞아? 나 진심으로…… 전하의 앞날이 걱정돼서 하는 말이라고. 전하를 걱정하지 않았다면 이런 거, 말해주지도 않았어.” 00047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황태자의 색색 내뱉는 숨소리가 날카로운 가시 같다. 불편한 정적이 흘렀지만, 륀체르는 느긋하게 황태자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자아. 이제 이 새신랑 녀석은 어떤 질문을 던질까? 저 여자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여자인지, 또는 지금 어디 있는지, 그리고 사파이어 그대와는 어떻게 만났는지 그러한 것을 물으리라. 그러하다면 륀체르는 숨김없이 대답할 작정이다. 그녀는 공식적으로는 망자로 알려진 오를린의 딸 마리니시네라고. 또한, 그녀가 드래곤의 주인일지도 모른다는 정보까지! 그렇게 되면 황태자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갓 반려가 된 자의 불분명한 정체, 그 진실을 캐기 위해 집요하게 일을 벌일 것이다. 자기가 가진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드래곤의 꼬리를 밟을 테고, 점점 드래곤 일행을 향한 포위망은 좁혀지겠지. 드래곤과 함께 운신을 압박받는 마리가 믿을 구석이라고는 오직 바너의 길드 마스터밖에 없다. 그녀는 반드시 이 륀체르 사파이어에게 찾아와 도움을 청하리라! 그런 식으로 그녀와의 친애 관계는 더욱 공고해지겠지! 더불어 드래곤과 같은 패가 되는 것 역시! 륀체르의 계산은 그러했으나 황태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몹시 피로한 듯 이마를 만지다가 뒤돌아서 그곳을 나갔다. 영원의 봄에서 자고 갈 것처럼 굴더니 결국, 오늘 잠은 황궁에서 잘 듯했다. “흐음, 성격 급하긴. 그나저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취한 얼굴이었던 륀체르는 냉정한 표정이 되어 소파에 몸을 길게 뉘었다. 자기가 걱정해야 할 일은 아니나, 앞으로 다른 이들의 사정이 어찌 될지 궁금하다. 딸에 관한 정보를 숨긴 영주에게 내려질 처벌은 어찌 될 것이며, 태자비의 운명과 그리고 그녀의 뱃속에 든 황손의 운명은……. *** 할데바인의 수도 리데바인. 대공의 저택. 야심한 밤, 대공은 국혼식에서 쌓인 피로를 풀고자 목욕을 하기로 했다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얼마 후, 시종 하나가 탕 속에 붉은 액체를 가득 부었다. 몸의 각질을 먹어주는 미생물 용액이었다. 탕 속은 피처럼 붉은색이 짙게 번졌다. “흐음.” 대공의 짙은 눈주름 아래 탁한 회색 눈동자가 출렁이는 물결을 노려보았다. 요즘 가장 눈엣가시인 오를린의 촌뜨기 여인(황태자비)이 아른거렸다. “으흐흠…….” 고얀 계집! 원래라면 내 딸이 앉았어야 할 자리를 감히 빼앗은 계집! 푸드덕! 때마침 넓은 창문으로 검은 새 한 마리가 들어왔다. 하루 두 차례 크고 작은 소식을 알리러 오는 새다. 대공이 나지막하게 사법 주문을 외우자, 새는 대공의 앞에서 검은 날개를 활짝 펼쳤다. 곧 허공에 대공만 알아볼 수 있는 사법어가 보였다. 「현재 오를린 영주는 폐 귀족 한스 레 하인첼과 거래하여 밀주업에 손대고 있음. 현재 오를린에서 루앙 깃발로 위장한 여행자용 기갑체가 로샤타르트의 수도 야르칸 공장으로 한스의 물건을 납품하러 가는 중임. 도착 시각은 내일 오전 아홉 시.」 “하하하하하!” 대공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인간은 없다. 툭하면 사람이 굶어 죽던 찢어지게 빈곤한 영지가 어느 순간부터 그럭저럭 먹고 살아간다는 소식이 들리던데, 그 이유가 다 있었다. 오를린 영주가 이런 불법적인 일에 손대고 있는 덕분이었다! 대공은 서둘러 사람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대공은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며 지시했다. “야르디네(로샤타르트의 수도)의 야르칸 공장 아홉 시. 증거를 모아놓아라.” 그의 몸에서 흘러내린 붉은 물이 욕조 밖으로 흘러넘쳐 바닥을 뜨뜻미지근하게 적셨다. *** 네히트. 실렌틴 광산. 기갑체와 함께 추락한 배달원은 새벽이 되어서야 의식이 돌아왔다. 누가 몸을 고쳐주었는지 사지에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움직여 좌우를 살폈다. ‘이런.’ 낡긴 했지만 그리 지저분하지는 않은 폐가에 몸을 누이고 있었다. 자신의 왼편에는 소년이 잠들어 있었고, 오른편에서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금발 머리 아가씨가 누워 있었다. 그런데 이 소년과 남자, 그리고 아가씨가 어째 눈에 익다……. ‘맙소사! 하인첼 씨의 작업장 조수인 그 꼬마잖아! 그리고 저 아가씨는 영주님의 따님!’ 본래 영주님의 따님은 두 분이다. 그 중 한 분은 너무 말괄량이고 행실이 좋지 못하여 대외적으로 없는 사람처럼 취급되었고, 다른 한 분은 얌전히 지내시다가 황태자비가 되기 위해 무려 황궁으로 가셨다. 지금 보니 이 아가씨는 자고 있으면서도 표정에 장난기가 가득 느껴지는 것이, 그 말괄량이 따님 쪽 같다. 아무렴. 황태자비가 되러 황도에 가신 분이 여기 있을 리는 없으니 당연히 이 여자는 그 말괄량이 언니겠지. ‘그리고 이 남자는…… 그 호위기사!’ 기갑체의 추락으로 땅에 떨어져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일인데, 오를린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사람 세 명을 무려 한꺼번에 만난다. 이게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인지! 배달원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자 잠귀가 밝은 하이너도 눈을 떴다. “음, 벌써 일어났습니까?” “아, 예. 안녕하십니까. 대관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저는 분명 실렌틴 광산 상공에서 추락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하이너는 조용히 몸을 일으키더니 조용하란 시늉했다. 아가씨의 잠을 방해하기 싫었다. 배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두 남자는 폐가 밖으로 나갔다. 휘영청 밝던 달이 한 걸음 물러나 새벽을 부르고 있었다. 하이너는 푸른 대기에 자신의 새하얀 드래곤 안광을 길잡이 삼아 산길을 걸었다. 배달원은 조용히 뒤따라갔다. 하이너가 안내한 곳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기갑체가 있는 곳이다. 하이너는 부러진 나무를 보며 설명했다. “나무에 스치며 추락한 덕분에 천만다행입니다.” “아, 그래서 제가 별 상처를 입지 않았던 거군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치료는 어찌 이리 말끔하게 되어 있는지…?” “똑똑한 꼬마와 저희가 가진 스크롤의 힘을 빌렸지요.” 배달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폐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치료 스크롤은 돈이 꽤 들 텐데, 그런 걱정이었다. 하이너가 기갑체에 관해 말했다. “연료가 제법 남은 걸 보니 아마도 과적 때문에 추락한 것 같습니다. 좁은 기갑체에 그 많은 물건을 실으셨더군요. 적어도 두세 번에 걸쳐서 나눠 가져가셔야 할 것을.” “아, 그게 사정이 그리되었습니다.” “박살 난 물건들의 냄새를 맡아보니 술 누룩 같던데요.” “…….” 영주님의 불법적인 일에 관해서는 구태여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배달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하이너는 날카로운 눈으로 배달원을 보았다. 어쩐지 끝까지 대답을 원하는 눈치였다. 곤란한 질문에는 곤란한 질문으로 답하는 것이 배달원의 재치(?)였다. “그나저나 아가씨께서 살아계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아, 그게 사정이 그리되었습니다.” 하이너는 대답하고 나서야 자기가 배달원과 똑같은 대답을 했단 것을 알았다. “아가씨께서는 대체 어디로 여행 중이신지요? 비록 대외적으로는 돌아가신 분이 되었지만…… 아무튼 그분을 향한 영주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 하이너는 아가씨의 대륙 정복 여행 계획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해봐야 미친 사람 취급만 받을 게 빤하니까. 그런데 그때, 그들의 뒤에서 마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 “나야말로 아버지가 걱정돼!” 씩씩거리며 두 남자 앞에 다가온 마리가 배달원을 향해 물었다. “내가 분명 누룩 냄새를 맡았다고! 아버지께선 밀주업에 손대고 계셔, 그런 거지? 그런 사업을 지시할 사람이 우리 영지에 딱 한 사람, 그분밖에 없거든! 정말이지! 아무리 잘 먹고 잘사는 게 중요하다곤 하지만, 그런 창의력 빵점인 사업으로 돈을 벌고 계셨다니! 무지 실망이야! 실망!” 배달원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쩔쩔매었다. 불효녀 아가씨가 지금 누구를 혼내려 하시는지 통 모르겠다. 가만. 만약 영주님이 이 상황을 알게 된다면 어떤 말씀을 하실까? 아가씨와 호위기사를 오를린으로 붙잡아 오라고 하지 않으실까? 그러한 생각에 대뜸 권유가 나왔다. “아가씨! 이런 차가운 산속에 계시지 마시고 얼른 고향으로 돌아가시지요! 제가 여기서 아가씨를 뵙고 훗날 영주님께 뭐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저를 봐서라도 부디 오를린으로…….” 그때 갑자기 마리가 호위기사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호위기사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흑회색으로 빛나는 손바닥 만한 비늘. 그것은 바로 드래곤의 비늘이었다! 하지만 그것의 정체를 알 리 없는 배달원은 신기한 것을 다 보겠다는 듯 물었다. “이게 대체 무엇입니까?” 마리가 대답했다. “내가 드래곤의 보호를 받고 있단 증표라고 할까? 그러니 아버지는 안심하셔도 돼.” “예? 드래곤이라니요?” 배달원은 아가씨가 실성하신 건 아닌가 했다. 그런데 호위기사가 ‘드래곤 비늘’에 이어 뭔가를 또 하나 건넸다. “아니 이건?” 무려 오천만 자일의 가치가 있는 바너 발행 수표. 그것은 마리 일행이 바너 정화 임무를 수행하면서 받은 급여에서 빼낸 돈이다. 호위 기사가 배달원에게 설명했다. “기갑체 그리고 거래품 손실액에 비하면 적은 돈입니다. 하지만 드래곤 비늘과 같이 팔아 현금화하면 적어도 당신이 처벌받는 것은 면할 수 있겠지요. 오를린으로 돌아가셔서 이걸 영주님께 전해주시고 부디 아가씨는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해주십시오.” 배달원은 돈을 받았다. 과적으로 인한 추락 사태, 그에 따른 피해를 일으킨 것은 영주였으나, 영주는 제 잘못을 인정할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배달원 탓을 할 것이 분명하다. 그건 영주가 악독한 인간이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영주는 다른 영주에 비해 괜찮다는 평판을 받고 있었다.) 단지 그 자리가 만들어내는 인성일 뿐이었다. 원래 윗사람들이란 게 그랬다. 모든 일의 책임은 아랫사람으로 돌려버리지 않던가. 적어도 배달원과 같은 제국의 소시민들이 겪어온 바에 의하면 그러하였다. 배달원은 타인의 앞날을 걱정하여 이런 거금을 선뜻 내어주는 아가씨께 감동하고 말았다. “아가씨, 정말 감사합니다.” “나한테 고마워하지 마. 이 돈은 이 멋진 기사가 번 것이니까.” 그러자 호위 기사가 아가씨께 반박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 여행의 중심은 아가씨기 때문에 아가씨가 번 것입니다.” “하지만 네가 가장 고생했기 때문에 네가 번 거나 다름없어.” “정 그렇다면 우리 같이 번 것으로 하죠.” “그거 좋네.” 배달원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선 호위기사와 아가씨를 번갈아 보았다. 이들에게 너무 고마워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추락해 죽을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무사히 살아났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이 사람들은 치료를 해주고 한낱 배달원이 영주님께 처벌받지 않도록 세심한 신경을 써주고 있었다. “기사님,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해 뜨면 바로 오를린으로 가십시오.” 갑자기 마리가 배달원에게 농담했다. “가만! 생각해봐! 그 시골(오를린)이 싫으면 이 돈을 가지고 바너와 같은 도시로 나가는 건 어때? 어차피 오를린에 가면 아버지께 잔소리나 들을 거 아니야? 사실 바너는 장인의 도시라 샹들리에서부터 작은 탁자까지 예쁘지 않은 게 없어! 게다가 여관에선 물 온도 조절도 마법으로 자유자재로 되더라! 진짜 오를린 시골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멋진 도시였어! 그리고 그곳 음식들은…….” 어째 농담이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 되어가는 분위기다. 배달원은 난처한 얼굴로 애써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자기가 결혼을 앞둔 자가 아니라면 이 드래곤 비늘과 오천만 자일의 돈을 가지고 다른 영지로 도망을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딸린 가족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선 안 된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 오를린 영지의 알 만한 사람 모두가 자신의 신부가 누구인지를 안다. 이대로 이 돈을 가지고 도망을 친다면 신부의 처지는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네 예비 신랑이 누룩을 판 돈을 어디에 숨겼느냐!’고 혹독한 고문을 당할지도. 배달원이 그러한 생각을 할 때 마리의 농담은 점점 진담으로 변했다. “오를린에서 불법적인 일을 하기엔 위험하지 않아? 아직 나이도 젊고, 결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응? 바너가 싫으면 풍요로운 로샤타르트로 도망가는 건 어때? 거기는 진짜 사시사철 따사롭다던데….” “실례지만 아가씨.” 배달원이 마리의 말을 끊었다. “응?” “이것저것 권해주시는 것은 감사드리나, 저는 오를린으로 돌아가는 걸 택하겠습니다.” “흐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하나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뭔데?” 배달원은 문득 하늘을 보았다. 이런 새벽에도 하늘에선 야생화뿌리 별자리가 아름답게 빛난다. 꽃을 상징하는 가장 큰 별을 중심으로 두 개의 작은 잎사귀 별과 은하수가 식물 뿌리처럼 뒤엉킨 그 별자리는 요즘 같은 계절에 가장 밝게 빛났다. 두 개의 작은 별. 하나는 황도 로귀하르트의 안주인이 되셨다지. 다른 하나는 지금 여기서 보는 마리니시네 아가씨일 것이다……. 배달원은 마리에게 제 소망을 말해주었다. “다음 대 오를린의 영주는 반드시 아가씨께서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오를린은 정말 살기 좋은 곳이 될 거예요! 아가씨 같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다스리는 영지라면 분명히 그리 될 겁니다!” 배달원은 확신했다. 마리가 위풍당당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하지! 나는 오를린의 영주이자 세상의 주인이 될 거라고!” 언제나 자신만만한 그녀의 모습에 하이너는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세 사람이 서 있는 광산에 작은 바람이 불어 눈꽃이 휘날렸다. 지상에서 흩어지는 은하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00048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로귀하르트 제국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 어두운 침소에서 로테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시녀가 다른 시녀들을 물리며 자기 혼자서만 황태자비 전하의 잠 시중을 들겠다고 했으나 로테는 그것마저도 싫다고 모두 쫓아내 버렸다. 비오르틴 그 남자가 오지 않는 첫날 밤이 마음을 무저갱으로 떨어뜨린다. 분명 오를린에 살던 시절에는 어지간한 일로 좌절하지 않았고, 황궁에서 그 어떤 일을 당해도 씩씩하게 버틸 수 있을 거라 자신만만해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황궁이란 장소는 사람을 옴츠리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물증은 없지만) 적들에 대한 온갖 의심도 날로 깊어져만 갔다. 예전에 향기에 예민한 황태자 때문에 하루가 멀다고 향수를 바꾼 적 있었다. 수많은 향수 중엔 궁 밖에서 들여오는 향수도 있었는데 그때 그 무리(할데바인)가 향수에 못된 약을 타서 바꿔치기한 것은 아닌가? 그런 의심을 했다. 의심은 하녀 렌이 쫓겨나고 내궁부(황후 측)에서 정해준 친 할데바인 지역 출신 시녀가 오면서 더욱 깊어졌다. 그래. 그때 그들이 향수에 장난질을 쳐서 내 정신이 예민해진 거야, 그때 그 무리가 이상한 짓을 해서 이런 기쁜 날에도 내가 기쁠 수 없는 거야, 저 고얀 시녀가 기분 나쁘게 침소 밖을 지키고 있어서 내가 이런 기분이 드는 거야……. 몸을 뒤척이는데, 갑자기 침소 밖에서 병사들이 경례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지는 시녀의 목소리. “야울을 지키는 왕이시자 로젠플라드의 수호자 그리고 제국의 황태자이신….” “그런 말은 되었다.” 언제나 딱딱 끊어지는 차가운 목소리. 비오르틴의 목소리를 들은 로테는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끝없는 침울함에 빠졌던 기분이 들뜬 표정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전하. 오시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비오르틴은 시중을 들기 위해 뒤따라 들어오는 시녀에게 한 손을 들어 물러가라 지시하곤 소파에 앉았다. 곧바로 질문이 던져졌다. “네 자매는 어디서 뭘 하지?” “…… 예?” 뜬금없는 물음에 로테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뒤에서 시녀가 듣고 있는데도 격식을 차리지 않는 남편의 말투가 서운하게 느껴졌다. “네 언니인지 동생인지 지금 뭐하느냔 말이다.” 비오르틴은 일종의 시험을 하고 있었다. 로테아르카가 제 자매에 관한 사실을 숨길지, 부정할지, 시인할지. 질문이 거듭되고 나서야 로테는 드디어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언니와 관련된 질문. 아아, 왜 이런 날이 오지 않는가 했다. 원래라면 입궁 전에 겪어야 할 일이었으나 누구도 묻지 않아 함구해 왔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될 정보라면 구태여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단 판단이었다. 애당초 아버지 측에서 언니 마리니시네의 존재를 숨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매 중 황태자비의 자격에 더 어울리는 게 동생이라 일이 이렇게 진행되었다. 만약에 언니가 황태자비 후보로 궁에 들어왔으면 어찌 되었을까. 그 무례하고 말괄량이에다 성적으로 방종한 성격이 흠이 되어 오를린 영지에 해가 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같은 외모라면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은 동생 쪽이 더 황궁에 어울리지 않는가? 로테는 언니의 존재를 숨기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제 언니 마리니시네를 말씀하시는군요.” “그래. 쌍둥이라던데.” “예. 저와 똑같이 생긴 언니가 하나 있죠. 그래서 궁에서 초상화를 부탁할 때 난감했습니다. 누굴 그려도 둘의 모습이라…….” “네 언니는 어떤 사람이지?” “제 언니, 마리니시네는…… 바람과 같은 사람이라 영지에서도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취급되었습니다.” “아, 그래.” 비오르틴는 짧고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음울한 회색 눈이 조금 전보다 한층 누그러진 느낌이었다. 로테는 그를 간절한 눈으로 보았다. 비오르틴은 그녀의 눈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외면하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람과 같은 사람이라. 로테를 보고 줄곧 연약한 들꽃 같단 생각을 했는데, 그 언니가 바람이라니. 같은 외모면서도 참 다르단 생각이 든다. 어쨌든 그렇다면 자기가 어릴 적 만난 여인은 지금 이 로테아르카가 아니라 그 마리니시네라는 말인데. ‘어긋나버렸군.’ 로테가 언니에 관한 사실을 모른 척하거나 부정했다면 당장에라도 목을 쳤을 것이다. 황궁이라는 영광의 자리를 독차지하려 했다는 점이 괘씸하게 느껴져 그 대가를 치르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테는 거짓을 말하진 않았다. 담담히 언니의 존재에 대해 시인했다. 비오르틴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지나갔다. ‘뭐, 그렇다고 네가 그 여자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할데바인과 반목하며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강행한 결혼식이었기에 보는 눈이 많아 이리 조용히 넘어가는 척하는 것뿐이지만, 앞일에 관해선 장담할 수 없다. 비오르틴은 당장 마리에 관한 신변을 조사할 예정이다. 지금 반려가 된 여자를 버리든 어쩌든 마리니시네가 어디서 뭘 하는지는 적어도 알아놔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로테는 침소를 나가려는 비오르틴을 잡았다. “전하.” “음?” “어, 어디 가시는지요?” “자러 간다.” 침소가 여기인데 대관절 어디서 잔단 말인지. 로테는 남편을 야속해 하며 청했다. “곁에 있어주시지 않는 겁니까?” 목소리에 서운함이 눈물처럼 짙게 번져 있었다. 비오르틴은 귀찮다는 듯 한숨 쉬다가 문득 침소를 가리는 커튼 밖의 인영을 보았다. 시녀와 병사들이 있다는 걸 새삼스레 지각하게 된다. 아아. 오늘은 다른 날도 아니고 무려 국혼을 치른 날 밤이지. 이제 저 촌뜨기 여자도 밤 노리개가 아니라 황태자비가 되었단 말이다. 비오르틴은 그녀의 자존심을 최소한이나마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녀를 위한 일은 아니고 황태자 내외에 관한 잡음을 방지하기 위한 일일 뿐이었다. 비오르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아내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로테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어둠 속, 짙게 내리깐 속눈썹 아래 커다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그래. 저 눈은…….’ 비오르틴은 어릴 적 그 말괄량이 소녀를 떠올렸다. ‘그 눈과는 다르다. 처음부터 달랐단 말이다.’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최대한 속내는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굴어야 한다. 이 침소에 집중된 눈이 한두 개가 아니지 않은가. 그는 아내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한 손을 올려 아내의 뺨에 지그시 갖다 댔다. “로테.” “예.” “그대를 안고 싶어 미칠 것 같소.” 로테는 흔들리는 눈으로 황태자를 올려다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아니,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라기보다 안심의 눈물이다. 로테의 뺨에 닿은 손은 서서히 내려와 그녀의 배에 닿았다. 기분이 묘하다. 저급하게 표현하자면 씨앗을 잘못 심은 농부의 심정이라고 해야 할까. “당장에라도 그대를 탐하고 싶으나…… 하지만 모든 것은 이 녀석이 나온 후로 미룰 수밖에 없겠군. 용서하시오.” “전하…….” “좋은 꿈 꾸길 바라오.” 비오르틴은 서둘러 침소를 나섰다. 그가 침소를 찾지 않은 것이 태중의 아이 때문이었단 것을 확신한, 아니 확신하고 싶어 한 로테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녀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창밖에 반짝이는 별들이 은은한 빛으로 전신을 달래는 것 같았다. ‘고작 남자의 반응 하나에 흔들리다니. 황궁에서의 너는 참 보잘것없어. 굳세어지렴. 굳세어지라고. 로테.’ 배를 만지면서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밤이 깊어지고 그녀는 잠이 들었다. 스스로 빛을 내지 않고 달빛을 반사해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침소 밖에서 시중을 들던 시녀는 침소 공기가 차가워지자 서둘러 창문을 닫았다. 달빛이 들어오지 않는 침소는 죽은 듯이 깜깜했다. 마치 로테의 아이가 있는 뱃속처럼. *** 할데바인의 수도 리데바인. 대공의 저택. 검은 새 한 마리가 대공의 집무실에 들어왔다가 전언을 알려주고 난 다음 처참하게 짓이겨졌다. 새에게 죄는 없지만, 굳이 붙인다면야 대공에게 좋지 않은 소식을 들려주었다는 것쯤 되겠다. 시종은 바닥에 널브러진 새의 피와 검은 깃털을 정리하려다가 대공의 화가 가라앉을 때를 기다려 잠시 자리를 피했다. “쓸모없는 녀석들!” 할데바인은 지금 격노하고 있었다. 무엇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니! 때를 노리는 맹수처럼 차분히 기다리며 시골뜨기 황태자비를 물러나게 하려 했으나 어째 번번이 실패만 한다. 조카인 황후에게 입김을 넣어 촌뜨기를 태자비에 올리지 못하게 한 일도 실패. 향수에 약을 섞어 촌뜨기의 정신을 불안하게 만들어 태자와의 분란을 일으키려 하는 일도 감감무소식. 기어이 촌뜨기는 태자비가 되었다. 그래서 특단의 방법을 실행하기로 했다. 바로 태자비의 아비인 오를린 영주의 비리를 캐려한 것. 오를린 영주가 밀주업자 한스 레 하인첼과 손잡고 누룩을 로샤타르트의 공장에 팔아넘기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그들의 거래 현장을 덮치기 위해 약속 장소에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돌아오는 전언이라곤 거래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뿐이었다. “운트하!” 시종의 이름을 부르자 시종이 한달음에 왔다. 대공은 조만간에 황후의 봄 별장에서 알현 요청을 하라 일러두었다. 내궁부를 움직여 극단의 수를 써야만 했다. “결코 무사히 태어나진 못할 것이다.” *** 오를린. 영주의 저택. 영주의 저택은 최근 증축을 시작했다. 황태자비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기 때문에 황태자는 그에 합당한 품위가 있어야 한다면서 증축을 권했고 증축 비용 전액을 원조했다. 워낙에 어마어마한 금액이 투입된 덕분에 증축 규모도 엄청났다. 영주는 이렇게 커지는 저택처럼 영지도 더욱 번영할 거라고 희망에 찼다. 앞으로는 불법적인 일도 줄이고 야울 궁의 원조를 받아 오를린을 더욱 발전시킬 생각이다. 그러나 밀주업만은 워낙에 큰돈이 되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다. 밀주업이 황태자비가 된 딸의 발목을 잡을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당장 큰돈이 되어 영지를 돌아가게 하는 게 그러한 일들이라 선뜻 그만두기가 어려웠다. 최근에도 한스 레 하인첼의 누룩을 사들여 로샤타르트에 파는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배달 보냈던 사람이 로샤타르트와의 거래에 문제가 생겼다면서 돌아왔다. 그것도 거액의 여행자용 기갑체가 파손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영주는 진노해서 펄펄 뛰었다. “맙소사! 그 비싼 걸 어디에 처박았느냐! 그 안의 누룩도 모두 사라져버렸단 말이냐? 대체 무슨 낯짝으로 여길 다시 왔어! 앙?” 배달원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정을 설명했다. 과적 때문에 네히트의 실렌틴 광산 상공에서 그만 추락해버렸다는 것, 불행 중 다행으로 나무에 처박혀 숨은 붙어있었다는 것, 대신에 기갑체와 누룩은 지킬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자기 몸을 치료해준 이들이 있다는 것, 그분들이 누구신지 궁금하시지 않으냐는 질문. 거기까지 들은 영주가 시답잖은 말을 들은 듯 코를 팠다. “흥! 무능력한 네놈 몸을 고쳐준 게 누구인지 내가 알게 뭐냐!” 배달원은 잠시 분노가 치솟았지만, 꾹 참았다. 과적의 원인은 영주 자신이면서 아랫사람을 무책임한 인간으로 몰다니. 그런 영주가 야속해서 마리니시네 아가씨께 받은 돈을 들고 예비 신부와 함께 도망이라도 갈까 생각했으나……. 마리 아가씨를 봐서라도 참아야겠지. “어쨌거나 영주님은 그분들이 누구신지 아셔야 합니다.” “어째서?” 배달원은 잠시 집무실을 살폈다. 하녀 하나가 영주의 시중을 들기 위해 한쪽에 서 있었다. 배달원이 하녀를 보고 곤란하다는 눈초리를 건네자 영주가 하녀에게 잠시 나가 있으라고 지시했다. 그제야 배달원은 영주에게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분들은 바로…….” 드래곤을 타고 하늘로 날아가 버렸던 큰 딸! 그리고 그녀의 호위기사 하이너 그로스! 게다가 그들은 여행용 기갑체 비용과 누룩 비용을 하라고 거액의 돈도 영주에게 주었다. “마리…… 마리!” 딸이 용케 살아있단 걸 들은 영주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어흑! 어흐흐흑! 이 애물단지 계집애! 아빠 속을 그렇게 썩이다니! 어흑흑흑! 자네는 어찌 그 애를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어, 어째서!” 원망하면서 말하지만 영주도 큰딸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큰딸이 다시 귀향하는 건 어렵단 걸 알고 있었다. 배달원은 그런 영주를 잠시나마 위로했다. “늘 씩씩하고 밝은 분이시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 돈, 얼른 받으시고요.” 영주는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이런 돈 필요 없다. 나는, 나는…….” 그 애가 살아있단 소식을 들었으면 됐어. 이 돈은 그 값으로 치르겠네. 결국, 훗날 그 거액의 돈은 배달원의 결혼자금으로 쓰였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049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네히트. 실렌틴 광산. 눈꽃이 샛노란 새벽 달빛을 반사해 반짝였다. 이따금 차가운 바람이 불어 눈꽃에 쌓인 눈들이 설탕 가루처럼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하였다. 얼마 후면 이 바람도 따스해져 눈꽃과 함께 설원을 녹이리라. 마리 일행의 근거지인 폐가엔 소년 루돌프만 남아 있다. 마리가 켜놓고 간 마법광구 아래, 소년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책을 보았다. 이런 추운 곳에서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면 땀이 다 흐르는 걸까! 이제나저제나 소년은 큰돈을 벌어 주인이자 스승인 한스 레 하인첼의 드래곤 링클을 다시 사 드려야겠다는 생각뿐이다. 그러기 위해선 의학 공부에 매진하여 마리 아가씨를 도와야 한다. 한참을 공부에 집중하다가 스승님 생각이 났다. 아아. 스승님의 누룩이 기갑체 사고로 모두 사라지고 말다니. 조수 없이 혼자서 만드신 게 안타깝게도 그리되었다. 스승님은 얼마나 속상하실까? 비록 거래 전에 영주님 측에서 누룩값을 충분히 치러주셨을 테지만, 어쨌든 기갑체 사고는 술 장인의 입장에선 속 쓰린 일이 아닐 수 없다. ‘스승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반드시 드래곤 링클을 사서 돌아가 다시 스승님을 돕겠습니다!…… 그나저나, 다들 어디 가셨지?’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끊임없이 나왔다. 아가씨를 따라 광산에 은신한 뒤로는 하루 한 끼 밖에 못 먹어서 아쉽다. ‘바너에선 늘 잘 먹었는데. 달콤한 간식 하며….’ 아동학대까진 아니더라도 다들 해도 해도 너무한다. 소년 혼자 폐가에 내버려두고 자취를 감춰버리다니. 하지만 이런 생각 또한 마리 아가씨께서 너무 잘해주셔서 드는 배부른 투정일 뿐이겠지? 루돌프는 서운함을 털어버리기로 했다. *** 그 시각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는 어떤 조사를 하고 있었다. 아가씨께서 실렌틴 광산의 소유자가 머무는 장소를 찾으라 하여 동분서주 움직였다. 광산 소유자는 이런 새하얀 설산과는 어울리지 않는 검은 피부의 여인이라 한다. 흑인. 그들은 동한이나 서한보다 더 먼 나라에서 온 이들이다. 타향 출신 여인이 어째서 이 먼 곳의 광산을 소유하게 되었을까? 아니, 정말 소유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름만 소유자로 올려놓은 것일지도? 마리는 그 내막이 궁금했고, 그래서 마리아에게 조사를 맡겼다. 마리아가 열심히 일하는 사이, 마리와 호위기사는 폐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을 거닐었다. 눈꽃 위에 헐벗은 나뭇가지가 가득한 숲은 이 연인이 산책하기 그리 썩 좋은 곳은 아니었다. 아가씨는 폐가에만 지내다 보니 몸이 찌뿌듯하다고 운동하러 가자고 했으나 하이너는 그것을 순전히 핑계로만 여겼다. 왜냐하면, 아가씨는 운동에 그리 열의가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분은 자꾸만 신체적 접촉만 하려 하고 그 외의 체력단련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하이너는 자꾸만 엉덩이를 쓰다듬는 아가씨의 추행에 급기야 참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운동하자던 말씀은 다 거짓이었습니까? 자꾸 이러실 거면 그냥 저기 가서 기갑체 잔해나 같이 정리합시다. 그러는 게 훨씬 운동이 될 테니 말입니다.” “아. 그건 내가 정리했어. 하이너는 그 대답이 믿을 수 없었다. 기갑체의 잔해를 가녀린 여자가 정리하기에는 좀 무겁고 위험하니까. “대체 그걸 어떻게 정리하셨습니까?” “염력 스크롤.” 딱 듣기에도 비싸 보이는 스크롤. 아가씨의 못 말리는 낭비벽에 하이너의 표정이 거침없이 솔직해졌다. 그는 나쁜 짓을 한 귀여운 강아지를 혼내듯 엄한 표정으로 변했다. “얼마였지요?” “이 모임의 대장은 난데 그걸 너한테 알려야 할 의무가 있어?” “그러시는 걸 보니 값이 꽤 하겠군요. 나, 참! 정말이지 흥청망청!” “마냥 낭비라고 하기엔 좀 그래. 넌 잘 모르겠지만, 이곳에는 광산 소유주가 고용한 마법사들이 많다고. 그들에게 기갑체 잔해를 들키면 곤란하단 말이야.” 마법사들의 임무는 넓게 보면 광산을 지키는 것이다. 그들은 적들의 물리적 공격에서 광산을 보호하는 일도 하지만, 그것보다 광산의 철을 다른 곳에 도둑맞지 않게 그 기운의 흐름을 파악하는 일을 더 많이 한다. 그러다 보니 마법사들은 광산 곳곳에 감도는 쇠의 기운을 감지하는 데에 능했다. 특히나 광산 바깥에 나온 기갑체의 기운은 더욱더! 마리는 마법사들에게 기갑체를 들키는 일을 막고자 염력 스크롤로 최대한 빨리 정리해버렸던 것이다. “호오, 그렇다면야.” 하이너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무예만 익힌 시골 출신 기사가 광산이 돌아가는 사정을 알기엔 그 시야가 어두운 건 사실이다. 왠지 아가씨에게 지는 느낌이 별로다. 백치 아가씨라고 깔본 적이 있었는데 역시 귀족은 귀족. 지난 시간 동안 가정교사를 불러 공부하신 게 영 헛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이너가 그러한 생각을 할 때, 마리의 손은 귀여운 도마뱀처럼 그의 엉덩이로 내려갔다. 다시 희롱이 시작된다. 하이너는 인적이라곤 볼 수 없는 이런 곳에서 괜스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아가씨의 손을 쳐냈다. “왜 이러십니까, 진짜.” 성가셔하는 말을 하면서도 얼굴을 붉히는 반응에 마리는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다시 손을 그의 엉덩이로 가져갔다. “좀 가만있어보라니까.” “아가씨….” “네 엉덩이가 시려 보여서 내가 따뜻하게 만져주려는 거야. 얌전히 있어.” “이거, 추행입니다.” “흐응, 정말 그렇게 생각해?” 마리의 손가락들이 단단한 엉덩이 사이를 얄망궂게 갈랐다. 겨울의 차디찬 바람에 몸이 얼어있던 하이너는 그 간지러운 감촉의 공격에 그만 몸을 살짝 떨고야 말았다. 아아. 아가씨의 손이 엉덩이 안쪽으로 자꾸만 오는데……. 하이너는 아가씨를 몹쓸 인간 보듯 하며 물었다. “실은 이런 짓을 하기 위해 여기 오자고 하신 거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마리는 하이너의 귓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야 집에는 루돌프가 있잖니?” “정말이지 아가씨는… 여행의 대장을 자처하시면서 여행원이 배고프진 않은지 그런 거나 신경 쓰실 일이지. 하여간!” “쉬잇. 이제 와 잔소리는 재미없어. 어때?” 마리의 손은 이제 하이너의 엉덩이에서 바지 앞쪽으로 옮겨갔다. 예민한 부위에서 왔다 갔다 하는 아가씨의 손이 자극적이다. 이런 음탕꾸러기 같으니. 천진난만한 청록색의 눈동자를 굴리면서 이런 짓을 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하이너는 아가씨의 눈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이제 나 마법도 끝났는데 넣어주지 않을 테야?” “넣… 어찌나 이런 저속한 표현을.” “그게 더 야하잖아?” 이미 마리는 그를 커다란 나무로 밀고 가면서 그의 허리끈도 풀어 내리고 있었다. 하이너는 그녀에게 속수무책으로 밀려가면서도 발끈하여 따졌다. “이런 장소에서, 그것도 준비도 안 됐는데 넣어달라니까요!” “아아, 준비라.” 끈을 다 풀어낸 마리가 바지를 벗기기 직전이었다. “잠깐만요!” 하이너는 아가씨의 손을 잡았다. “왜 그래?” “그…….” 사실 아가씨의 손가락이 엉덩이골을 간질일 때부터 그곳이 조금 흥분하고 있었다. 하이너는 이런 것을 들키기가 좀 그랬다. 준비도 안 됐다고 말한 게 거짓으로 들통 나면 조금 부끄럽지 않은가. 물론 자기가 말한 준비가 안 됐다는 말은 사실 이런 장소에서 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지, 몸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이토록 남자의 몸이란 건 사랑하는 이의 육탄 공격에 무력할 뿐이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몸만 이러한지도.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경건하고 금욕적인 기사로 그려온 그는 자신을 질타하는 느낌에 휩싸였다. 그는 아가씨가 바지를 완전히 벗기기 전에 헤츨링의 열기 마법을 이용하여 하체에 감도는 열기를 조절했다. 그의 물건 또한 흥분을 감추었다. 마리가 무릎을 꿇으며 그의 바지를 완전히 내렸다. “하이너. 머뭇거릴 시간 없다고. 자아, 준비라면 내게 맡겨.” 추위에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아직 완전히 팽창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예뻐해 주기 좋다. 마리는 그것을 단숨에 삼켰다. 흥분한 상태가 아니어도 한 입에 다 들어가지 않는 그것은 그녀에게 좀 버거워 보였다. 그래도 그녀는 열심이었다. “맛없지 않으십니까?” 맛없긴. 맛이 있고 없고를 논할 수도 없이 깨끗하다. 설산의 눈을 녹여 매일 목욕을 열심히 하는 호위기사의 것은 늘 그렇다. 마리는 그런 대답 대신 더욱 열심히 핥기만 했다. “하아.” 하이너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아가씨의 머리를 만지려 했다. 그러다가 주먹을 지그시 잡고 허리 옆으로 떨어뜨렸다. 아가씨의 머리를 잡아버리면 이대로 누워 큰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흐읏, 후우.” 그는 문득 설산을 둘러보았다. 새하얀 눈들이 전부 설탕같이 달콤하다. 아가씨가 주는 감촉이 극히 다디달기 때문이리라. 그만 눈을 감았다. ‘이러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아가씨에게 이런 일을 당하다니. 이렇게 된 이상 빨리 흥분하는 것은 부끄럽다. 흥분에 서투른 척 더 연기하는 수밖에 없겠다. 헤츨링의 열기 조절 마법을 끊임없이 사용했다. “우웁, 웁…….” 그러다 보니 마리가 아무리 애써서 준비(!)를 해주려 해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흐음, 왜 이러지?’ 으슥한 실내가 아니라 실외라서 호위 기사가 좀처럼 집중할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더욱더 열심히 해줄 수밖에……. 그렇게 열심히 하던 마리가 어느 순간 멈추었다. ‘이상한데? 보통 이 정도 자극 받으면 바로 서야 하는 거 아니야?’ 의혹의 답은 호위기사의 표정에 있었다. 올려다보니 평소와는 다른 표정이다. 온전히 쾌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치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느끼는 것 같다. 혀와 입술의 감촉엔 달콤해 죽으려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감촉에 흥분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표정. 마리는 뒤늦게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어머! 세우지 않으려고 나 몰래 용의 마법을 사용했나 보군! 미워라!” 삐친 마리는 그린 듯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호위기사의 바지를 추켜올렸다. “끈은 알아서 묶도록 해.” 그러곤 몸을 일으켜 뒤돌아섰다. 그녀가 이렇게 토라지는 것을 처음 본 하이너는 당황하며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아가씨!” “흐응. 이거 놓으라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됐어! 난 삐쳤다고!” “아가씨, 진짜 그게 아니라…….” 백번의 핑계보단 행동이 낫겠지? 하이너는 대뜸 아가씨의 몸을 나무쪽으로 밀었다. 어째 형세가 조금 전에 자신이 아가씨께 당한 것과 같아졌다. 놀란 마리가 호위기사를 올려다보자 호위기사는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뭐하는 거야?” 하이너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사실 전 아가씨라면 언제나 준비되고 마는 몸입니다. 그런… 쉬운 몸입니다. 다른 이들도 다 이러는지, 아니면 제가 유혹에 약한 몸이라서 이런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부끄러울 때도 있어요. 죄송합니다. 절대로 아가씨에게 장난한다고 마법을 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아가씨.” 하이너의 두 손이 그녀의 치마를 천천히 올렸다. “저는 그만 용서해주세요. 이제는…….” “어맛!” “아가씨께서 준비하셔야 할 차례니까.” 하이너는 치마 안쪽으로 완전히 들어가 버렸다. 나란히 서 있는 가느다란 두 다리를 양쪽으로 쫙 벌리고 속옷에 손을 가져갔다. 치마 바깥에서 아가씨가 잔뜩 긴장하여 숨을 거칠게 들이쉬었다. “후우, 좋아. 용서해주겠어.” “감사합니다.” 하이너는 마리의 허벅지 안쪽 여린 살갗에 입술을 문질렀다. 그 느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야릇하여 마리는 그만 이 추위도 다 잊을 것 같았다. 벌써 이렇게 몸이 달아오르는데 나중엔 어떻게 될까? 호위기사의 입술이 더욱 안쪽으로 느릿느릿 옮겨갔다. 마리는 두 손바닥을 등 뒤의 나무에 갖다 대며 살짝 골반을 내렸다. 이윽고 들리는 소리. 가장 은밀한 부분을 감싸는 천이 찢기는 소리. 그리고 흥분하여 갈라진 호위기사의 그윽한 음성. “…… 또 비싼 속옷을 찢습니다. 다음 달 급여는 주지 않으셔도 돼요.” “읏! 아…….” 뜨거운 혀가 마리의 가장 예민한 곳을 쓸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크 덥군요. 더위 무탈하게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00050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두어 차례 가볍게 쓸어 올리자 아가씨의 두 허벅지가 살짝 비틀렸다. 이번에는 한 세 번쯤 혀로 쓸어 올려 보았다. 그러자 아예 골반마저 귀엽게 들썩였다.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소리도 어찌나 귀여운지. 두 손으로 아가씨의 엉덩이를 받치어 은밀한 부위가 얼굴에 좀 더 가까이 오도록 했다. 찢긴 속옷 사이 분홍빛 여린 살은 단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다. 또한, 향취도 얼마나 감미로운지. 한겨울에도 상큼한 과일향을 맡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이곳뿐이리라. 혀를 길게 빼내어 찢긴 속옷 사이 균열을 아래에서 위로 반복해 핥았다. 그러다가 도드라진 살점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리고 깊이 빨아들였고, 곧 새된 소리가 들렸다. “아앗!” “벌써 좋으십니까?” “어쩜 이리 능숙한 거야?” 하이너는 대답 없이 피식 웃을 뿐이었다. 이런 것을 한 적이 지금껏 몇 번인데.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떻게 하면 그녀가 더 좋아하실지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의 혀는 자극을 가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하이너의 타액으로 얼룩진 살결이었는데 나중에는 스스로 물을 흘리어 남자의 혀를 진하게 적셨다. 본격적인 행위를 하지도 않았는데 너무나 자주 느껴버린 마리는 점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눈밭에 드러누워 바르작거리며 애원했다. “흐읏, 그만! 넣지도 않고 계속 이러는 거, 일부러 날 괴롭히는 거야? 읏….” “참으세요. 준비는 충분해야 하니까.” 여태 한 것은 준비가 아니고 다 뭐란 말인가. 마리는 호위기사의 머리를 밀어내려다가 쑥 들어오는 이물감에 온몸을 잔뜩 수축했다. 아무래도 호위기사의 손가락인 듯했다. 축축한 살결에 자리 잡은 기다란 검지는 거센 압력을 받아 좀처럼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여린 살 어디에서 이런 조이는 힘이 나오는 걸까. 신기해하며 하이너는 다시 도드라진 살점을 빨았다. 그러자 마리가 흐익! 하는 소리를 냈고 그사이 꽉 조이던 것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 틈을 이용하여 하이너는 조심스럽게 중지마저 넣어버렸다. “응, 아앙!” 성기에 비할 수 없지만 쾌감을 자극하는 덴 충분했다. 내부가 꽉 조일 때마다 손가락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하이너는 아가씨의 숨소리를 봐가며 손가락을 빼고 넣기를 반복했다. 아가씨의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음란해지고 뜨거워졌다. “하이, 너! 아앙, 너무 좋잖아!” 애끓는 소리에 흥분한 하이너는 재빨리 치마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손가락은 그녀에게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본 마리는 반쯤 몸을 일으켰고, 하이너는 손가락을 더욱 세게 움직이면서 다른 쪽 손으로는 그녀의 목을 받쳤다. 마리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흐읏, 응! 아, 아아! 하이너! 하이너!” “아가씨, 아가씨….” 이런 때에 서로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만큼 흥분에 불을 지피는 행위는 없을 것이다. 검은 눈동자와 청록색 눈동자는 자석이나 된 듯 떨어지지 않았다. 쾌감에 머리가 저릿해진 마리가 눈을 감을라치면 하이너의 손은 더욱 빨라졌다. “흐앙… 앗! 아!” 너무 좋으면 울음이 나오기도 한다. 지금 마리의 표정이 딱 울기 직전이었다. 그 표정이 지독하게 야해서 하이너는 거세게 그녀의 입술에 입 맞췄다. 아래에서 쉴 새 없이 가해지는 자극에 숨쉬기가 버거운 그녀는 키스를 받아들이면서 더욱 조여 댔고, 급기야 한순간. “으읍, 흣, 흐으아앙!” 호위기사의 손바닥이 뜨겁게 적셔졌다. 그 순간 하이너는 치마를 들쳐 안을 보았다. 눈밭을 녹인 액체는 여태 그녀가 흥분하여 쏟아낸 액체와는 그 양이 달랐다. 하이너는 얼떨떨하여 제 손과 아가씨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널브러지듯 누워버린 마리가 원망하듯 중얼거렸다. “하아, 하. 준비가 너무 심하잖아.” “죄, 죄송합….” “바보. 사과하란 말이 아닌데.” 숨을 고른 마리가 손을 뻗었다. 나중에는 두 손 다 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예?” “나 이런 준비라면 온종일 즐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하이너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 말뜻을 알아듣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 아가씨는 재촉을 하시는 거겠지……. “그럼….” 덮치듯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들이 한몸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차갑고 딱딱한 바닥은 아무런 장해가 되지 않았다. 드레스가 더러워지는 것도, 하늘 아래 겨울새들이 오가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들은 짐승이 되어 서로를 탐했다. “앗! 나 이런 자세로 더 잘 느껴서……!” “후우, 아가씨… 너무 야하잖습니까.” “앗, 아! 앙!” 그렇게 몇 번이나 체위가 바뀌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쯤 그들은 녹초가 되어 나란히 누웠다. 머릿속의 모든 것이 쾌감에 새하얗게 지워졌다. 마치 지금 보는 하늘색처럼. 하이너는 불현듯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여기 머무는 이유가 뭐였더라? 아가씨께서 뭘 해야 한다고 하셨더라? 분명 네히트의 실렌틴 광산 소유자를 만나 쇠의 공급에 관해……. “참, 정화마법 사용할 수 있어?” 하지만 바로 옆에서 들리는 맑고 또렷한 목소리는 언제나 그런 현실적인 생각들을 모조리 날리고 만다. “네?” “몸이 너무 지저분해졌어. 이런 추운 날 계곡에서 씻긴 무리잖아?” “아.” “괜찮지 않을까? 네 열기 조절 마법은 특히나 수분에 특화된 거로 아는데. 정화마법 가능하겠지?” 하이너는 정화마법을 단 한 번도 써본 적 없었다. 그야 바너에서는 언제나 목욕시설이 최상급으로 갖춰진 곳에 머물렀고, 여기 와서도 눈을 녹여 씻었기에 정화마법을 쓸 생각을 그다지 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자. 정화마법은 초급 마법 같은데? 명색이 드래곤인 이상 지금 사용 가능한 마법-열기 조절 마법-을 응용하면 못할 것도 없다고 본다. 하지만 해주기가 싫다. 이런 곳에 왔으면 사소한 고생은 각오하셔야 하거늘. 매사에 편히 해결하려는 아가씨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나 할까? 하이너는 솔직하게 대꾸했다. “불가능하진 않을 거라 봅니다만, 해주기가 싫군요.” “뭐엇! 어째서?” “바깥에서 이런 일을 저지르면 그 뒷감당이 얼마나 성가신지 몸소 느끼셔야 할 것 아닙니까.” “와아! 하이너, 너무하네. 같이 즐길 땐 언제고 뒷감당이라는 단어를 쓰다니. 그나저나 우리 호위기사께서 언제부터 내 지시에 쌀쌀맞게 거절하고 사사건건 가르치려 하셨을까, 응?” “그러게 누가 드래곤으로 만들라 했습니까?” 마리는 심드렁히 대꾸하는 호위기사를 보고 기가 차서 웃음이 터졌다. 하, 참! 나! 원래부터 시건방진 호위기사이긴 했으나 어째 요새 행동을 보면 육체적으로 조금(?) 가까워졌다고 기어오르는 느낌인데……. 마리는 그의 건방진 태도를 잘근잘근 밟아주고 싶었다. “이봐, 드래곤 씨. 정화마법을 사용할 줄 모른다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지그래? 괜히 내게 잔소리하지 말란 말이야. 정화마법은 수분 온도 조절이 가능하다는 전제만 갖추면 사실 속도전이라 할 수 있어. 오염된 것을 눈 깜짝할 사이에 물로 가열하여 증발시켜 버리는 거지. 알겠어? 그 눈 깜짝할 사이라는 게 번개가 치는 속도보다 몇 배는 더 빨라야 하는 걸 의미하는 거야. 알겠지? 자아. 이제 해봐. 내 피부와 옷에서 물이 가열되어 증발한다는 것을 내가 느낄 새도 없이 빠르게 정화를 해보란 말이야. 실시!” 심드렁하게 하늘을 보던 하이너의 표정이 대놓고 구겨졌다. ‘젠장, 뭡니까….’ 정화마법의 이치를 운운하며 가르치는 모습이 마치 아이를 가르치는 듯 유치하여 그만 발끈하게 된다. “실시!” “때리고 싶군요.” “뭐라고?” “예?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실시!” “실시!” 하이너는 힘차게 외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녀석이 왜 이러지? 정화마법을 쓸 땐 굳이 일어날 필요가 없는데……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며 어리둥절하게 있는데, 갑자기 하이너가 언덕 아래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너 뭐 하니?” “후후… 아가씨. 특별 정화마법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심술궂은 미소를 지은 호위기사는 정신을 집중하여 열기 조절 마법을 이용했다. 곧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다. 마리가 누운 곳에서 언덕 아래로 구불구불한 얼음의 오솔길이 생겼다. 눈밭과 눈꽃이 가득한 사이의 그 길은 마치 매끈한 은빛 뱀이 길게 늘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리는 누워 있었기 때문에 그 장관을 확인하지 못했는데, 곧 호위기사에게 몸이 밀리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그 은빛 뱀을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려가게 되었다는 것을! “어랏! 으아아아!” 마리의 몸은 언덕을 매끄럽게 내려갔다. “이런 미친! 나를 어디다가 처박으려는 거야! 앙?” 그사이 하이너는 휘파람을 불면서 천천히 따라 내려갔다. 물론 그는 미끄러질 위험의 오솔길이 아닌 푹푹한 눈밭을 걸었다. 아가씨의 놀란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미워! 밉다고! 나 무섭단 말이야!” “그러라고 그런 겁니다만.” 싱글벙글 웃으며 그는 또 한 번 마법을 이용했다. 은빛 오솔길의 끝, 설산의 계곡 물을 미리 따스하게 녹이는 마법이었다. 적어도 아가씨가 계곡 물에 빠질 땐 오돌오돌 떠실 일은 없어야 하지 않는가. 한참 후, 아가씨의 비명은 뚝 끊겼다. 하이너는 그제야 오솔길 위에 섰다. “자, 그럼 나도 미끄럼틀을 타봐야겠군.” 그의 몸 또한 아가씨의 몸처럼 얼음 오솔길 미끄럼틀에 타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따끈한 계곡물에 함께 몸을 담갔다. 드래곤이 만든 인조 온천이라니! 수증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물은 추위를 모두 날려버릴 만큼 따스하고 그 깊이도 적당하다. 마리는 젖은 옷을 보며 속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못됐어, 정말! 나보다 장난이 더 심하잖아! 미워! 미워, 진짜!” 그러고는 물속을 허우적거리며 호위기사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한 쪽 팔을 들고서 그의 어깨를 때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이너는 그녀를 덥석 품에 안아버렸다. 물에 젖은 그의 가슴팍은 계곡의 따스한 물보다 더욱 따뜻한 느낌이었다. 마리는 그 가슴에 얼굴을 파묻힌 채 허우적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썹이 씰룩였다. 발그레한 뺨도 뾰로통하게 부풀어 올랐다. “뭐야, 지금? 이렇게 안는다고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 마리는 하이너의 미소에 그만 따지려던 것을 멈추었다. “너…….” 이상하다. 조금 전에 뜨겁게 몸을 겹칠 땐 몰랐는데, 지금 보니 호위기사의 얼굴이 저 은빛 설산보다 더 눈부시게 느껴진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축 가라앉아 잘생긴 두상을 오롯이 드러내기 때문일까? 아니면 물에 젖은 눈썹 아래 검은 눈동자가 물보다 더 투명하기 때문일까? 눈동자 너머로 보이는 이 남자의 감정이 보이는 듯하다……. 짐승처럼 굴던 조금 전과는 다른 단정한 분위기가 도리어 더 야하게 느껴진다. 마리는 지금 이 얼굴에 현혹되어선 곤란하다고 생각하며 잠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하던 말을 이어서 했다. “어쩜 그렇게 심술궂게 굴어? 만약 내가 얼음 미끄럼틀 밖으로 튕겨나가 어느 바위에 부딪치기라도 했으면!” 그러자 하이너는 마리의 등을 더욱 세게 감쌌다. 곧 그의 한 손이 슬금슬금 올라와 그녀의 가녀린 목을 어루만졌다. 널찍한 손바닥의 느낌이 젖은 솜처럼 부드러워 마리는 그만 눈을 감을 뻔했다. 거친 줄로만 알았던 손이 이렇게 느껴질 때도 있다니. 달콤한 저음이 들려왔다. “심술 맞긴요. 얄팍한 수의 정화마법보다는 이런 목욕이 더 좋지 않습니까?…… 낭만도 있고.” “나, 낭만?” “당신은 늘 낭만 타령을 해도 막상 이럴 때보면 낭만에 둔한 사람 같아.” 하이너는 마리의 이마에 키스했다. 00051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그의 키스는 더할 수 없이 달콤했으나 마리는 왠지 발끈했다. 낭만에 둔하단 말 때문일까? “흐응. 낭만도 낭만 나름이지. 누가 이런 거친 낭만을….” “그야 이렇게 씻으면서 또 할 수 있잖습니까.” 아가씨의 이마 전체를 입 맞추던 그는 점점 입술을 노렸다. 입술과 입술의 마주침은 점점 진해졌다. 계곡의 솟아오르는 수증기만큼이나 뜨거운 시간이 또 한 차례 이어질 조짐이었다. 인적이 드문 실렌틴 광산의 계곡은 그들이 은밀한 유희를 즐기기에 최상의 장소가 되었다. *** 해가 질 무렵까지 공부하던 루돌프는 온몸이 찌뿌듯하여 잠시 몸을 풀 겸 밖으로 나갔다. 눈을 헤치고 나가 설산을 내려다보니 하품이 나왔다. 어째 하품하는 모양새가 이런 추위에 제법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꼬르륵.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배고픔에 힘이 들었다. ‘다들 어디 가셨지?’ 어둑해질 때까지 오시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확인해 봐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새삼 무서워졌다.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와 대장 마리니시네 아가씨 그리고 멋진 기사님이 없으면 자신은 그저 무력한 소년일 뿐이다. 불길함이 엄습하자 소년은 급기야 대장을 탓하고 말았다. ‘나, 참. 갈 땐 가더라도 어딜 가시는지 언제 돌아오시는지는 말씀하셔야지.’ 또 한 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오늘 한 끼도 먹지 않았으니 이젠 정말로 뭔가를 먹어야 할 때다. 무얼 먹는담. 물론 실내로 돌아가면 먹을 게 있긴 하다. 기사님의 커다란 가방엔 없는 게 없으니까. 그중 먹을 것은 마른 빵, 육포, 말린 과일, 당과 등 보관이 쉬운 것들이 대부분으로 맛도 좋았다. 무려 부자 사파이어 님 측에서 챙겨주신 고급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음식들도 엄연히 아가씨의 물건. 허락도 받지 않았는데 먼저 손대선 안 된다. 누군가의 종이자 조수로 살았던 자신으로서 그런 일은 조금 꺼려졌다. “하아.” 하품 후에 이어진 한숨이 새하얀 바람에 섞여 멀리 날아갔다. 터덜터덜 힘없이 걷는 소년의 눈에 불현듯 한 생물이 들어왔다. 하얀 눈밭에서 갈색 털을 날리며 달리는 사람 머리 만한 동물. “포케다!” 포케. 대륙 동남쪽에 서식하는 귀가 축 처진 포유류. 루돌프는 언젠가 스승 한스 레 하인첼이 저것을 잡아 직접 요리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맛이 제법 나쁘지 않았던 거로 기억한다. “좋아! 오늘은 내가 요리사!” 오늘의 식량을 점 찍어둔 소년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사냥을 시작했다. 포케의 다리는 굉장히 날쌔서 소년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달려야 했다. 불어오는 찬바람이 뜨겁게 느껴질 정도로 달리는 데도 포케라는 짐승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이놈!” 포케는 이따금 뛰다가 멈추기도 했고, 헉헉거리는 소년의 앞에서 혀를 내밀기도 했다. 그 행동은 체온 조절을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소년의 눈에는 사람을 놀리고 여유를 부리는 행동처럼 보였다. 감히 고작 식량인 주제에 사람을 놀릴 줄 알다니! 소년은 약이 올랐다. “좋아! 오늘 널 잡다가 내가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거다!” 그렇게 소년이 광전사가 되어 달려가고 있을 때였다. 열심히 달리던 포케는 한순간 뒤따라오는 자가 없단 걸 느끼고 멈추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소년이 오던 쪽을 보았다. 소년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딜 갔는지……. 그때 루돌프는 설산의 어느 구덩이에 빠져 미끄러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파놓은 것은 아닌 자연적인 구덩이인데, 그 구덩이가 눈밭에 파묻혀 있어 소년은 그것을 미처 확인할 수 없었다. 겁먹은 소년은 비명도 지르지도 못하고 구르다가 구덩이 안쪽 깊숙한 곳에 몸이 처박혔다. “읏! 아얏!” 전신을 파고드는 욱신거림에 한참을 찡그리다가 주위를 살펴보았다. 구덩이 안으로 들어온 햇볕 덕분인지 보는 데 지장은 없었다. 대체 이 구덩이는 뭘까. 가만. 예전에 기사님께서 말씀하셨지. 실렌틴 광산 주변 광부들이 시추를 위해 파놓은 구멍에 빠진 적이 있었다고. 그렇다면 자기도 그런 데 빠진 건가? 꼬르륵. 꼬르륵. 이런 상황에서도 배고픔은 여전하다. 소년은 구덩이를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했다. 그리 깊지도 않고 경사도 완만하여 탈출하는 데엔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포복하면서 천천히 올라가면 될 거로 생각하고 자세를 잡으려 했다. 그 직전. “응?” 어떤 빛이 눈을 사로잡는다. 지금 있는 곳보다 더 안쪽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자세히 보니 마치 반짝이는 가루를 품은 푸른색 수증기가 나오는 것만 같았다. ‘신비로워…… 실렌틴 광산은.’ 이제야 이 구덩이 내부가 어째서 밝아 보이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햇볕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저 아래서 뿜어 나오는 푸른빛 때문이리라!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소년은 잠시 탈출을 미루고 좀 더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주 특이한 물건을 발견했다. 반질반질하고 바스락거리는 특이한 소재의 주머니가 빛의 중심에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였다. ‘뭐지, 이건?’ 색깔은 빨강이고 모양은 사각. 크기는 넓게 펼친 손바닥보다 조금 크다. 그런데 네 변 모두 뚫린 데가 없다. 그래서 안의 물건을 확인할 수 없었는데, 만져보니 원형의 딱딱한 뭔가가 들어있는 것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안에 든 물건도 물건인데, 소년의 눈을 더욱 사로잡는 게 있었다. ‘이걸 어떻게 읽으라는 거야?’ 주머니 아니, 봉투 바깥쪽에 표기된 검은색 문자들. 마치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다른 세계에서 온 문자인 듯 낯설다. 바탕에 보이는 그림도 특이하다. 따끈한 붉은 국물에 꼬불꼬불한 면이 담겨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 하지만 봉지 속에 뜨거운 물이 있다는 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소년은 황당했다. 잡혀야 할 포케는 잡히지 않고 이런 엉뚱한 것만 보이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 이런 게 다 있지? 배고프다 보니 헛것이 보인 건가?” 그때였다. 갑자기 어깨로 슬금슬금 뭔가가 기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설마 뱀이? “으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던 소년은 곧 어깨를 타고 오르는 것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앞으로 걸어와 섰다. 진줏빛 머리카락에 진홍빛 눈동자의 소녀. “마리아 누나?” 마리아는 여기서 뭐 하고 있느냐는 듯 소년을 보았고 소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휴우. 심장 떨어질 뻔했네. 그나저나 실렌틴 광산 조사는 잘 되었어요?”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루돌프가 손에 든 붉은 주머니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소녀도 그것의 정체가 몹시 궁금한 듯했다. 루돌프가 설명했다. “아, 이거요? 좀 특이하죠? 겉은 반질반질하고 바스락거리는 것이 안에는 단단한 게 들어가 있는 것 같은데……. 일단 우리 이곳을 빠져나가죠.”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루돌프의 뒤를 지나쳐갔다. “뭐하세…?” 마리아는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는 곳을 보고선, 그곳에서 봉지를 몇 개나 더 챙겼다. 루돌프는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은근 욕심쟁이라니까.’ *** 실렌틴 광산 폐가. 화로에선 불길이 적당하게 치솟고 있었다. 그 위 커다란 냄비에는 물이 한가득 끓었다. 여기서 나오는 온기와 습기 덕분에 실내는 전혀 춥지도 건조하지도 않았다. 하이너는 식사를 준비했다. 눈을 녹인 물에 손을 깨끗이 씻고 앞치마를 몸에다 둘렀다. 건장한 체격에 그러한 차림이라니. 마리는 그가 제법 귀여운 듯 웃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를 돕기도 했다. 예전 같으면 호위기사에게 식사준비를 모두 맡기고 유유자적 쉬었겠지만, 이제는 여행의 대장이자 동료라는 개념이 든 덕분인지 그를 돕는 데 스스럼이 없었다. “보자, 육포와 조미료들 그리고 건조채소만 내놓으면 되는 거야?” 그녀가 짐을 뒤적거려 필요한 재료를 꺼내놓는데, 갑자기 하이너의 낯빛이 걱정에 물들었다. “루돌프가 어디 간 걸까요?” “음, 글쎄? 책이 펼쳐진 것을 보니 공부하다 나간 것 같은데. 잠시 가볍게 운동하러 나간 거 아닐까?” 그때 문이 열리고 루돌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마리아는 보이지 않았다. 마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하이너에게 조용히 말했다. “제 이야기를 하는데 오다니, 저 애도 하여간 귀족은 못 된다니까.” 루돌프는 구덩이에서 주워 온 봉지들을 모조리 테이블 위에 두었다. 봉지는 반질반질하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루돌프는 그 주머니들을 보다가 대장과 기사님을 보았다. 이 두 남녀……. 왠지 옷도 깨끗하고 머리도 보송보송하고 무엇보다 얼굴들이 다들……. “반짝반짝 하시네요들?” “응? 뭐가아?” “얼굴이요.” “어머! 내 얼굴은 원래 반짝반짝해!” 루돌프는 자기도 씻고 싶다고 중얼거리다가 테이블에 오른 봉지들을 가리켰다. “이것 좀 보세요. 구덩이에 빠졌다가 주워왔는데 참 신기한 물건이에요.” “위험한 거면 어쩌려고….” 하이너가 루돌프에겐 좀처럼 하지 않은 잔소리를 하며 봉지들을 살폈다. 그런 와중에 마리가 그 봉지 중 하나를 들고선 요리조리 살피다가 아는 체 했다. “호오! 이거.” 루돌프는 아가씨가 봉지 앞뒷면의 낯선 문자를 읽을 줄 아는 눈치라서 대뜸 물었다. “이 물건을 아세요?” “몰라. 하지만 글은 읽을 수 있어.” 그러자 루돌프가 존경스럽다는 듯 보았고, 하이너는 피식 웃으며 화로에 나뭇가지를 몇 개 더 넣었다. ‘읽을 줄 아시긴. 어차피 읽는 척만 하시겠지. 엉터리로 읽어도 다들 알 게 뭐냐.’ 하이너가 비웃는 사이 마리가 주머니에 쓰인 글귀를 읽기 시작했다. “왕라면, 매운맛. 물 오백오십… 분말을 넣고 면을 넣은 후 사 분간 더 끓입니다. 분말스프는 식성에 따라 적당량 넣어 주시고, 기, 김치? 파? 계란 등을 곁들여 드시면 더욱 맛이 좋습니다…….” 루돌프가 손뼉을 쳤다. “우와! 맛? 맛이요? 그렇다면 이건 역시 여기 나온 그림답게 뜨거운 물에 면을 끓여서 먹는 거란 말이군요? 마침 저기 물이 끓으니까 저기다가 해먹으면 되겠어요!” “어마마! 그러네! 우리 이거 먹어 보자!” 소년과 아가씨가 합심하여 요리하려는데, 하이너는 반대했다. “구덩이에서 나온 것을 뭘 믿고 먹겠다는 겁니까? 안 됩니다.” “어머! 촌스럽긴! 이건 자연적으로 생성된 텔레포트 홀에서 이따금씩 나오곤 하는 다른 세계의 식량, 라면이라고. 먹기 싫으면 먹지 마. 어쨌든 네가 육포 스프를 끓일 물은 우리가 라면을 끓이는 데 써야겠으니 양보 바랄게.” 하이너는 몹시 못마땅했다. 아가씨는 전에도 호르몬이니 뭐니 하는 제국에선 쓰지 않는 단어를 쓰시더니 이번에는 라면이라는 별 괴상망측한 것을 식량으로 인정하며 아는 체 하신다. 나, 참. 호위기사를 뭐로 보고. 저걸 먹고 잘못되면 자신의 체면이 어찌 되는지는 전혀 안중에도 없는가? 하이너는 어디 한번 잘 먹고 잘 해보라는 듯 짚더미 위에 드러누웠다. “이거 잘 됐군요. 덕분에 귀찮게 식사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그럼 어디 두 분끼리 라면인지 뭔지 맛나게 드시길.” 호위기사는 제 말을 듣지 않는 아가씨께 삐친 게 분명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는 라면을 무려 다섯 봉지나 끓였다. 루돌프는 새로운 세상의 음식을 맛볼 생각에 군침이 돌았고, 아가씨의 지시에 따라 스프 봉지를 뜯는 등 최대한 도왔다. 그리고 드디어 라면이 완성되었다. 냄새를 맡은 하이너의 잘생긴 코가 조금 전부터 씰룩이기 시작했다. “킁, 크… 흐엣취!” “어머, 하이너! 감기야?” 하이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감기는 무슨. 그나저나 아가씨 진짜 저걸 드실 생각인가? 냄새만 맡아도 이렇게 매운데? 정말이지 미치셨군. 어디 혀에 한번 불이나 나보라지.’ 라면의 매운 냄새에 질린 그가 아예 벽 쪽으로 돌아누워 눈을 감아 버렸다. 아가씨와 소년은 신이 나서 테이블에 라면을 차렸다. 루돌프가 바너에서 받은 가벼운 소재의 식기들을 내려놓자 마리는 그 식기를 선물한 이를 떠올렸다. “사파이어 그 녀석 덕분에 여행이 참 편하단 말이야. 어쩜 이리 가벼운 식기가 있을 수 있는지. 바너는 정말 장인의 도시다웠지…….” 륀체르 사파이어의 칭찬을 들은 하이너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당장에라도 사파이어 그 녀석이 선물한 유방 모양의 반지를 아가씨의 손가락에서 빼내어 라면 냄비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루돌프가 라면을 그릇에 옮겨 담아 아가씨에게 먼저 건넸다. 마리가 그것을 받아들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고마워, 소년!” 마리는 팩 토라져 누운 하이너에게 다가갔다. 눈을 감아 자는 것 같았지만 불퉁한 표정을 보니 완전히 잠든 건 아닌 듯했다. 아니…… 분명 자는 척하는 것이리라. 마리는 포크로 면을 돌돌 말아 후후 불었다. 그리고 대뜸 그것을 호위기사의 입에 슬며시 넣었다. 그렇게 하이너는 원치 않은 라면을 강제로 먹게 되었고……. “어때? 맛이?” “정말이지 개의 똥을 먹는 것 같….” 그 순간, 입속으로 퍼지는 매콤한 스프의 맛과 꼬들꼬들한 면발의 감촉, 그리고 강렬한 MSG의 감칠맛……. “맛있어?” 하이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라면은 그의 목구멍을 지나쳐 위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052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맙소사! 맛있다! 맛이…… 있다니!’ 감탄하는 사람은 하이너뿐만이 아니었다. 루돌프도 새로 맛보는 음식에 혀가 짜릿해져 그 전율이 온몸으로 번졌다. 차분하던 성격의 소년이 방정맞게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그것은 맛있었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꼬들꼬들하고 쫄깃한 면발이 예술적이었다. 따뜻하고 짜고 매콤한 국물 역시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와! 이거 진짜 독특하고 새로운 맛이에요! 조금 맵긴 하지만, 정말 맛있어요!” 그러잖아도 배고픈 참에 사실 무얼 먹어도 맛나다고 했을 것이다. 마리는 호위기사의 은근한 표정변화와 소년의 찬사에 기대하며 라면을 먹어 보았다. 그리고 약 오 초후. 그녀는 그릇을 하이너에게 미련없이 내밀었다. “난 이리 매운 건 못 먹어!” “그, 그렇다면 기꺼이….” 하이너는 마지못해 라면을 받아드는 척하면서 내심 기뻐했다. *** 라면 다섯 봉지를 먹은 거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호위기사와 소년은 또다시 라면을 찾으려고 구덩이를 수색하러 갔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던 호위기사가 라면의 맛에 사로잡힌 것을 보고 마리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그게 녀석의 매력이기도 하지.’ 폐가에 누군가 들어섰다.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였다. 마리가 소녀를 맞이했다. “엇! 마리아! 넌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다들 라면이라는 매운 음식을 보고 맛있다고 하지 뭐야!” 마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말이 아닌 텔레파시로 대답이 돌아왔다. ‘나무뿌리를 좀 캐 먹고 왔습니다.’ “아.” 일종의 드래콘 메뉴란 건가? 마리는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따로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충실한 드래콘은 조사한 결과를 보고했다. ‘현재 실렌틴 광산의 법적 소유주는 홀디네 본이라는 이름의 여자라고 합니다. 그녀는 광산 마법사 거주구역에서 마법사들의 보호 아래 지내고 있습니다.’ “오호. 어째서 보호를 받아야 하는 거야? 그녀가 무슨 죄라도 지었나 봐?” ‘거기까진 아직 알 수 없습니다만… 그런데 누구도 그녀의 모습을 본 적은 없다고 하더군요.’ “뭐, 아무튼 일단 가봐야 알겠군.” ‘그러실 줄 알고 그녀 측에다가 미리 만남 요청을 해두었습니다.’ 마리는 이토록 착실한 드래콘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서로 텔레파시를 쓰고 있는 덕분인가. 주인의 마음을 잘 알고 무엇이든 척척 해주는 것 같아 좋았다. 바깥의 바람이 돌풍으로 변하듯 소리가 거세졌다. 또한 눈송이도 커졌고 날도 어두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아가 말하는 약속 시각이 오늘 밤이라 슬슬 나갈 준비를 해야 할 때다. 마리는 가방을 뒤적거려 얌전한 드레스를 갖춰 입고 화장도 했다. 홀디네 본이라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를 만나러 가는 데 화장을 진하게 하는 것은 좋지 않을 듯하다. 마리아가 꾸미는 것을 도와주어서 마리는 외출 준비를 금세 마칠 수 있었다. 마리는 거울 대신 마리아를 보았다. 그러곤 두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려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며 물었다. “어떠니? 내가 예쁘니?” ‘…….’ “흐응. 빈말이라도 예쁘다고 해주면 안 돼?” ‘저는 드래콘이라 인간의 미모를 평할 수 없습니다.’ “피이.” 시킨 일은 잘 해내면서 이럴 땐 눈치 없이 군단 말이지. 떨떠름한 표정의 마리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졌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라면 봉지를 사냥(!)하러 갔던 호위기사와 소년이 돌아왔다. 그들은 내내 라면에 관해 수다 중이었다. “분명 낮에 봤을 땐 봉지가 열 개쯤은 더 있었는데!” “녀석. 아쉬워하지 마라. 세상엔 라면 말고도 맛난 게 많다.” “그게 뭔데요?” “가령 면을 꼬불꼬불하게 튀기어 따끈하고 매콤한 국물에 끓이는 거라든가.” “기사님! 그게 라면이란 말이에요!” “아, 그런가.” 마리는 그들에게 인사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어랏?”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 곁에 있던 드래콘이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이다. 일종의 순간 이동이라 해야 하나? 그러나 순간 이동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두 남자의 발걸음 기척이 느껴지는 즉시 마리 모르게 주방을 이용하여 밖으로 빠져 나가버렸던 것이다. 마리는 그런 드래콘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여간 얘는 하이너만 오면 자리를 비운다니까. 아니, 아니지! 드래콘일 때는 자리를 비우지 않아! 그러니까 얘는 꼭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만 하이너에게 들키지 않으려 하더라…….” 단 한 번도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의 인간체를 본 적 없었던 하이너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다가 묻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가씨의 모습이 시선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점잖은 드레스와 연한 화장을 한 아가씨를 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늘 당돌해 보이던 청록색 눈동자가 은은한 푸른색 눈 화장 아래 연한 옥구슬처럼 빛난다. 창백한 피부는 그녀의 말괄량이 분위기를 조금 죽여주어 청순가련하게 보이게 했고, 주황색 입술은 그녀를 어린아이처럼 어려 보이게 했다. 이상하다. 오전에도 그토록 격렬하게 안아놓고도 지금 이렇게 가슴이 떨리다니. 얼이 빠진 호위기사에게로 마리가 다가갔다. “준비해. 이제부터 실렌틴 광산의 법적 소유자라는 홀디네 본을 만나러 갈 거야. 가방에 네가 입을 정장이 있을 테니까 입고. 참, 루돌프 너는 여기서 집을 지키렴. 혼자 있으면 공부하기도 좋겠지? 우리가 올 때까지 수상한 자들에게 문을 열어주어선 안 된다. 배가 고프면 라면을 끓여먹든지 가방을 뒤져 간식을 챙겨 먹으렴.” 루돌프는 부모님이 출타할 때 얌전히 집을 지키는 아들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하이너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굳은 석상처럼 마리만 볼 뿐이었다. 마리가 들고 있던 머리빗을 가방에 넣으며 물었다. “뭐해? 준비 안 해?” “…….” “하이너? 왜 그리 넋을 놓고 있는 거야?” “아.” 마리가 가까이 다가가 발 뒤꿈치를 들고 그의 이마에 가볍게 박치기했다. 그러자 그녀의 달콤하고 상큼한 향기가 하이너의 코를 자극했다. 그제야 하이너는 고개를 내리며 작게 헛기침했다.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리 얼이 빠져 있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칭찬에 인색한 이 호위기사는 곧 죽어도 아가씨의 새로운 화장(진한 화장이 아닌 연한 화장)이 매우 어울리면서도 아름답다고 찬사를 보내진 못했다. 그것도 루돌프가 있는 곳에서는 더욱더. 하이너는 마리가 시키는 대로 높은 이를 만나러 갈 때나 입을 법한 예복을 갖춰 입고 머리도 멋스럽게 빗어 올리는 등 외출 준비를 마쳤다. 공부하려고 새로운 책을 펴들던 루돌프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잘 어울리는 한 쌍의 귀족 부부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생각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육성으로 튀어나오기도 했다. “정말 잘 어울리는 부부 같아요!” 하이너는 얼굴을 붉혔고 마리는 소년의 말에 맞장구쳐주었다. “어머! 그럼! 그럼! 우리는 밖에만 나가면 한 쌍의 부부! 와트프라우어 내외가 된단다! 호호호!” 루돌프는 더욱더 너스레를 떨었다. “예! 그런데 어째 오늘은 아가씨의 화장이 진하지 않네요? 바너에서 하던 것처럼 진하게 하시는 게….” 그때 줄곧 침묵하던 하이너가 끼어들었다. “그건 안 된다!” 너무나 단호한 목소리에 마리와 루돌프 모두 놀랐다. “예?” “왜 안 되는 거야?” 둘의 물음에 하이너는 다시 작게 헛기침하며 딴 데를 보았다. 어째서 아가씨가 진한 화장을 하면 안 되느냐고? 그야…… 아가씨의 진한 화장을 한 모습은 너무 아름다우니까. 본연의 얼굴도 미의 여신 플라미네처럼 아름다운데 그런 아름다운 눈, 코, 입을 더욱 강렬하게 부각하는 화장은 그야말로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만에 하나 광산의 남자들이 꼬이면 곤란하지 않을까? 물론 바너에서 온갖 작전을 수행하던 당시에는 아가씨가 미인계로 정보를 빼내야 한다는 계획에 따라 진한 화장을 해도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부턴 어림도 없다. 실상 연인의 그런 매혹적인 모습은 자기만 봐야 하지 다른 누가 봐서는 안 된다. 다른 누가 보는 것은, 싫다. “안 된다면 안 돼요.” “그러니까 안 되는 이유를 좀 알자고.” 하이너는 아가씨를 야속한 눈초리로 보았다. 이 둔한 아가씨. 그걸 꼭 말로 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알려줄 수밖에. “광산 소유자를 만나서 회의해야 하지 않습니까? 부탁하는 입장이니 최대한 정중한 모습을 보이셔야 합니다. 짙은 화장은 도리어 상대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어요.” “아하! 그렇구나!” “예, 그렇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하이너는 먼저 폐가를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마리는 루돌프의 귓가에다 대고 소곤거렸다. “곧 죽어도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루돌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기사님은 종종 그럴 때가 있더라니까요.” *** 초저녁의 파란 하늘에 새하얀 눈발이 거침없이 휘날렸다. 그 매서운 눈 사이를 뚫으며 한 마리의 드래콘이 활개를 쳤다. 드래콘의 등 위에는 멋스러운 복장의 남녀가 타고 있는데, 그들은 바로 마리와 하이너다. 마리는 여전히 궁금했다. 어째서 마리아는 하이너가 있을 때는 소녀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어째서 매번 드래콘의 모습만 보이지? 그녀는 궁금함을 참지 못해 마리아에게 텔레파시로 물어보았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무례하게도 없었다. ‘흥! 계집애! 좀 알려주면 덧나나!’ 마리가 삐쳐있는데 갑자기 하이너가 물었다. “어쩔 계획입니까?” “응?” “아가씨께서 하고자 하는 게 힘 있는 자들의 주 무기인 기갑체나 마력기갑체의 숨통을 끊어놓는 거라는 건 잘 알아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광산 소유자가 이해해 줄까요?” “그러니 회의가 필요한 거야.” “설마 무작정 쇠의 공급을 중단하라고 하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넌 대체 나를 뭐로 보고 그러니? 내가 그렇게 우아하지 못하게 생떼를 부릴 것 같아?” 하이너는 자신만만한 태도에 궁금증이 일었다. 등 뒤에 밀착해오는 아가씨를 느끼며 그가 물었다. “그러니까 대답해 보시란 말입니다. 회의에서 어떤 카드를 내놓으실 겁니까?” “그건 비밀.” “동료 의식이 없군요.”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하이너 성격에 이러쿵저러쿵 따지려 할 거란 말이야.” “그래도 알아야겠습니다만.” 마리는 잠시 뜸을 들였다. 호위기사의 성격이 까칠하긴 하나 어쨌든 동료인데 계획에 관해 알 의무는 있겠지. 대답을 내놓았다. “정신 조작. 그걸 이용할 거야.” “미치셨습니까? 흑마법이니 하는 것을 배우시더니 그런 나쁜 일에 쓸 생각이었습니까?” “바보. 정신 조작은 흑마법과 상관없어. 그리고 나는 바람만 잡고 정신 조작하는 일은 마리아를 시킬 예정이야.” 마리아는 예전에 취한 륀체르에게 정신 조작을 걸어 그의 솔직한 성격이 나오게 한 적도 있었다. 드래콘이 사용하는 그러한 마법은 이번 회의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리라. 하지만 하이너는 반대했다. “저는 찬성할 수 없군요.” “아니, 어째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신뢰를 저버리는 것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 비겁하니까요. 그리고 생각해 보니…….” 하이너는 문득 등 뒤에 달라붙는 아가씨의 풍만한 가슴 그 부피감을 느꼈다. 이 감촉 그리고 따스함. 그것은 분명 이런 추위에 작은 기쁨이다. 또한, 사랑스러운 기분도 들게 하고. 하지만 이것도 결국엔 마리아의 정신 조작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기분이 나빠졌다. 아무리 대륙 정복을 위한 것이라 하나 타인의 정신을 조작하여 일하는 건 내키지 않는다. 게다가 상대가 선인인지 악인인지 아직 알 수도 없는 데 말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악인의 정신을 멋대로 조작한다는 것도 이성적으로는 내키지 않지만. 말끝을 흐리는 호위기사가 답답하여 마리는 살짝 짜증 냈다. “생각해 보니 뭐? 왜 말을 안 해?” 깔끔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닙니다. 저는 내려주세요. 이대로 돌아가겠습니다.” 드래콘의 뿔보다 단단한 고집, 얼음장보다 차가운 말투에 마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는 미운 호위 기사의 가슴을 양 팔로 휘감았다. 그리고 그의 두 젖꼭지가 있는 부분을 사정없이 비틀기 시작했다. “으윽!” “하여간 단 한 번도 곱게 협조해 준 적이 없지! 우리 기사님은!” 00053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이런 괴롭힘이 검 공격보다 짜증 나는 법이다. 그야 간지러움과 따가움은 당해낼 재간이 없으니까. 갈수록 심해지는 공격에 하이너는 드래콘의 고삐를 쥔 상태에서 상체를 비틀며 애원했다. “젠장! 아가씨! 그만!” “어머, 욕한 거야? 나쁜 아이네!” “앗, 읏, 윽!” “이제 보니 우리 기사님 신음이 야한데?” 당최 꼬집을 것도 없는 남자의 편평한 젖꼭지를 옷 위에서 이리도 자극적으로 비틀어 버리다니. 그것도 하늘을 나는 드래콘의 등 위에서! 하이너는 성가시고 몹쓸 장난을 치는 아가씨의 손이 미워서 내쳤다. “얼른 내려 주십시오! 마리아 그로스! 뭐하나! 날 내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드래콘은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마리가 호위기사의 가슴 간질이기는 그만두고 그의 탄탄한 목을 부드럽게 안마하며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이봐, 기사님. 네가 아무리 내려달라고 해도 이 아이는 말을 듣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굴종의 인은 내게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목적지에 내릴 때까지 얌전히 있으렴.” “아가씨….” “정 그렇게 여기서 내리고 싶다면 드래곤으로 변신해서 날아가는 것도 좋지. 어때? 이참에 특기를 발휘해보라고.” “때려죽이고 싶군….” “뭐라고?” “음?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드래곤화에 수반되는 고통을 알면서 저런 말을 하시는 게 몹시 밉다. 이대로 아가씨를 드래콘의 등에서 떠밀어버리면 어떨까 하는 충동이 들 정도의 짜증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태 그래 왔던 것처럼 성질을 죽이고 최대한 양보했다. “좋습니다. 그럼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음. 뭔데?” “여태 제게 정신 조작을 거신 적은 없습니까?” “단 한 번도 없어. 그런데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 마리는 호위기사에게 의심을 받아 기분이 나빴다. 마리아 그로스에게 지시하여 타인에게 정신 조작을 한 거라곤 예전 바너에서 술 취한 륀체르의 감정을 나약하게 했을 때, 오직 그때뿐이다. 하이너가 정말 모르겠느냐는 듯 대꾸했다. “그야 궁금하지 않을 수 없잖습니까. 이 여행은 계획부터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해괴하게도 진행만큼은 착착 되었습니다. 모든 게 순조로워서 이상하단 말입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맨 처음 아가씨께서 제게 무엇을 부탁하셨는지?” 하이너는 잠시 드래콘의 눈치를 보다 말을 이었다. “드래콘을 사냥해오라 하셨지요. 그게 애들 장난도 아니고 아주 어렵다는 것을 아시고서도 말입니다. 그때 제가 그 지시를 받아 순순히 사냥해온 게 어쩌면…….” “이봐. 네가 썩 순순하지 않았는데.”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사냥해온 거 아닙니까! 저는 그 일 역시 정신 조작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군요.” “이봐. 그건 순전히 네 의지로 갔던 거야. 그리고 그땐 내게 굴종의 인이 없어서 네게 정신 조작을 걸려고 해도 걸 수가 없을 때란다.” “만약 걸 수 있었다면 걸었을 거란 말씀이군.” “아니야!” 마리의 외침은 날카로웠다. 하이너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세찬 바람과 함께 몰아치는 눈들이 화난 마리의 뺨을 마구 때렸다. 그녀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식어가는 데도 호위기사는 그 싸늘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 마리가 갑자기 따지기 시작했다. “고작 그것뿐이야?” “예?” “나를 향한 네 마음이 조작이 아니라면 타당성을 두지 못할 정도로 네 애정에 확신이 없어? 그저 호위기사이기 때문에 내 지시에 따르는 거야? 그래서 매사 마지못해 해주는 거냐고!” 호위기사는 일 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럴 때도 있습니다.” “…….” “그리고 저야말로 묻고 싶군요. 저를 향한 아가씨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함께 여행해준다면 애인이 되어주겠다 하셨지요? 그렇다면 지금 저를 곁에 두고 싶은 사람, 보고 싶은 사람, 아끼는 사람으로 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언제 무슨 일을 시켜도 다 잘해줄 것 같은 그런 만능의 호위기사 아니, 만능의 드래곤으로 보십니까? 물론 뭐… 아가씨의 막무가내 행동을 보면 가끔 답을 알 것 같기도 합니다만.” 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휘이이이잉……. 달빛이 잠시 구름에 가려지고 바람 소리가 한층 거세졌다. 그들 사이에 밤하늘보다 어둡고 겨울바람보다 차디찬 분위기가 감돌았다. 드래콘도 이 어색함을 느낀 것인지 괜스레 날갯짓을 빨리했다. 만약에 이 자리에 루돌프가 있었더라면 따라온 것을 후회했으리라. 지상에서 마법사 거주지역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거대 유리 무덤 여러 개가 서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독특한 구조다. 유리 무덤 안은 마법사들의 주거 지역이 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곳은 마치 거대 구형의 얼음 덩어리가 세찬 눈바람을 맞는 것처럼 보인다. 드래콘은 이곳 지하 시설에 홀디네 본이 산다고 했다. 마법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그 누구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다나. 마리는 상념을 지우고 홀디네 본을 만날 생각에만 집중했다. 홀디네, 홀디네 본이라. 네히트는 빈곤한 영지다. 이 지역 주민들이 제아무리 실렌틴 광산을 보고 은광산이라고 치켜세우곤 해도 실은 은보다 다른 잡금속이 더욱 많이 난다. 네히트 영지가 황태자의 명령에 따라 항거다운 항거도 한 번 하지 못하고 오를린과 통합된 것만 봐도 그 빈곤함은 타당성이 있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별 볼 일 없는 광산이라면 그 소유자가 설산에 꽁꽁 숨어 있을 리 없다. 비록 잡금속이 나오는 광산이라 하더라도 광산은 광산이다. 그것도 이토록 많은 마법사들이 지키는 광산이 아닌가. 제법 부자라 할 수 있는 자가 숨어서 산다는 건 뭔가 휘말리기 싫다는 증거다. 다분히 귀찮은 걸 싫어하는 성격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에는 뭔가 지키고 싶은 게 있으니 숨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점은 광산 소유자의 약점으로 써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마리아가 가져온 정보가 약하긴 하지만, 최대한 광산 소유자의 약점을 들먹여야 한다. 그런 식으로 제 말을 듣게 하든가…… 그게 통하지 않으면, 진짜로 정신 조작을 할 수밖에. 마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하이너는 문득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놀랐다. 구름에 가려진 어두운 달빛의 역광을 받은 아가씨의 얼굴이 너무나 낯설기 때문이다. ‘뭐지? 내가 아는 여자 맞는가?’ 백치 같고 천진난만하던 아가씨는 온데간데없고 섬뜩하도록 계산적인 표정의 인간이 있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청록빛 눈동자가 바늘처럼 예리하게 반짝이는 것만 같다. 말다툼 후라면 상대의 몸짓에 으레 신경을 쓸 만도 하건만 얼마나 생각에 골몰하는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무섭군.’ 하이너는 다시 앞을 보았다. 이 여자, 분명 네히트를 움직여 세력들의 팔다리를 끊어버린다고 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실속 없이 거창하기만 한 망상이라 생각했다. 대륙 정복이란 핑계로 남의 장사나 말아먹을 궁리를 한다고 비웃기도 했다. 하지만…… 잊어선 안 된다. 그동안 그녀의 능청맞고 비현실적일 정도로 낙관적인 분위기에 휘말려 자신이 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여행의 목적은 대륙 정복이다. 다시금 되새기니 그녀의 망상이 단지 장난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 본 그녀의 악마 같은 표정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녀는 네히트에 손해를 끼치는 한이 있더라도 계획대로 밀어붙일 것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특유의 막무가내 성격으로 무엇이든 해버릴 것이다. ‘이봐!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뭐가 남지?’ 그러한 버릇 같은 무기를 들먹이면서! 호위기사의 생각이 거기까지 뻗쳤을 때, 아가씨는 그 마음을 명중시키듯 말했다. “그런데 하이너.” “예?” “그건 이해해줬으면 해.” “……?” “난 널 곁에 두고 싶고 매우 아끼지만, 네가 내 결정에 반대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저기 아가씨. 저는 아가씨의 결정에 늘 반대했습니다만?” “여태 해온 반대는 늘 말뿐인 반대였지. 그 반대가 행동으로까지 이어진다면 나는 네게도 정신조작을 걸게 될지도.” 하이너는 미련 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럴 바엔 제가 떠납니다.” “좋아. 그럼 그땐 흔쾌히 보내주도록 하지. 여기보다 더 높은 곳으로 말이지.” “……!” “농담이야! 호호호!” 바람이 불어 그녀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멀리 날아갔다. 어째 농담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하이너는 침을 꼴깍 삼키며 드래콘의 고삐를 더욱 세게 쥐었다. 아가씨가 저렇게 구는 것은 처음이다. 여기까지 왔으면 도중에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그럴 거면 차라리 죽으라는 듯 무시무시한 협박이라니. 물론 알고는 있다. 세상사 무엇이든 도중에 멈출 거라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을. 지금껏 여행하면서 중도하차를 할 거라는 생각은 그다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가씨의 말마따나 대륙 정복이 성공할 거라는 생각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단순히 아가씨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그녀의 호위기사로서. 또 그녀의 드래곤으로서. 그리고 그녀의 연인으로서. 그런데 그게 얼마나 많은 각오가 필요한 일일까. 늘 익히고 몸에 배도록 노력한 기사도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가는 것일까. 때로는 정의롭지 못한 일도 눈감아야 하고 때로는 끔찍한 일에도 엮이게 된다. 지금도 보라. 이렇게 드래곤으로 변하는 몸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지 않는가. “왜 이리 굳은 거야? 농담이라고 하잖아! 아이, 참! 호호!” 자꾸 저러시니 더 농담이 아닌 것만 같다. 심호흡이 필요할 때다. “후우…….” 그러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자아. 이제 내리자고.” 마법사들의 돔 입구에는 검은 옷을 입은 경비병들이 서 있다. 그사이에 하얀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가 마리 일행에게 먼저 인사했다. 금발의 준수한 인상이지만 너무 특징이 없어 묻혀버리기 좋은 인상이다. 마리는 달빛보다 환한 웃음으로 그 남자의 인사에 답해주었다. 곧 드래콘이 두 사람을 내려놓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앞으로 드래콘은 광산 어디엔가 숨어서 주인의 텔레파시 지시에 따라 마법을 부리리라.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머. 그다지 먼 길도 아니었는데요. 이렇게 밤늦게 찾아뵌 저희가 죄송할 따름입니다.” 마리는 예의 바르게 굴면서 하얀 정장의 남자를 따라갔다. 하이너는 그런 아가씨의 가식에 영혼이 달아나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뒤따랐다. 드디어 그들은 홀디네 본의 집무실 앞에 섰다. 안내인이 주의를 시켰다. “아시다시피 주인님께서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예.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저희에게 시간을 내주신 걸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오늘 만남 이후로도 주인님에 관한 이야기는 삼가셨으면 합니다.” “어머.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어려운 부탁을 하러 온 주제인 만큼 당연히 그런 예의는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이너는 아가씨의 끝없는 가식에 치를 떨어야 했다. 안내인이 가볍게 노크를 두 번 했고 안에서는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와.” 차분하고 매혹적인 음색이다. 안내인이 문을 열어주고 떠났다. 마리는 긴장한 듯 가슴을 한 번 쓸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하이너는 그런 그녀의 외투를 받아 하녀에게 주었다. 이러고 있을 때면 자신이 호위기사가 아니라 시종이 된 느낌이 든다. 홀디네 본은 제국 사람이 아니다. 키도 크고 관능적인 몸매를 가진, 게다가 인상마저 요염한 흑인 여인이다. 대개 흑인들은 동한이나 서한보다 더 머나먼 곳에서 온 인종이다. 그들은 제국 인종 정책 때문에 최근에야 제구에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이민자가 타국 광산을 소유하고 있어서 정체를 숨겨야 했나? 마리는 그렇게 예상하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홀디네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환영합니다.” 짧은 말이었지만 제국어 발음은 놀라울 정도로 완벽했다. 마리 역시 예를 갖추었다. “안녕하세요. 와트프라우어라고 합니다.” 하이너는 아가씨가 마리니시네 본인이 아닌 와트프라우어 부부의 행세를 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똑같이 인사했다. 그는 미혼 청년의 인사법이 아닌 제대로 된 기혼 신사의 인사법을 사용했다. “반갑습니다. 와트프라우어입니다.” 홀디네가 그들에게 앉으라고 소파에 손짓했다. “이런 미남미녀 부부는 처음 뵙는군요. 누가 보면 플라미네(미의 여신)가 페이르메르(예술의 신이자 가장 완벽한 용모를 지닌 자. 신화에 의하면 미의 남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결혼한 줄 알겠어요. 이런. 제가 주제넘은 말을 했나요? 일단 앉으세요.” 그녀는 시종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차를 따라 대접했다. 자리에 앉은 마리는 그녀가 내미는 차를 마시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광산 소유자 느낌이 아니라 수행인 느낌인데? 그것도 남자들이 좋아할 것 같은. 그리고…….’ 흑인들은 대개 이렇게 몸매가 좋은가? 짝 달라붙는 흰색의 드레스는 홀디네의 검은 피부를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고, 그녀의 탄력적인 몸매도 돋보여주었다. 그사이 하이너는 마리에게 은근한 눈짓으로서 눈치를 주었다. ‘멍청한 아가씨! 유부녀 행세를 하려면 부인의 인사법을 써야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소녀들의 인사법을 쓰면 대관절 어쩌란 말인지! 저리 허술한 연기력으로는 대륙 정복은커녕 무엇이든 불가다!’ 호위기사의 그런 마음도 모르고 마리는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돌입하려 했다. 그런데 그 직전, 갑자기 집무실의 책장이 저절로 열리기 시작했다. 그르르륵… 하고 굵직한 소리를 내며 열린 문 너머엔 화려한 비밀의 방이 있었다. 그 방에서 한 남자가 맑은 목소리를 냈다. “우리 왕가슴 아가씨께서는 여전히 숙녀와 부인의 인사법을 구분하지 못하시는군. 어디 가서 귀족 출신이라고 하지 마. 못 배워먹었단 소리 들을 테니까.” 그의 체격은 늘씬하고 눈동자는 아름다운 보석, 사파이어 같다. 익숙한 모습을 본 마리가 외쳤다. “륀체르!” 00054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생각지도 못한 이를 본 하이너의 얼굴은 돌가루 반죽이 굳은 듯 딱딱해졌다. 륀체르! 륀체르 사파이어! 이미 바너에서 지겹도록 본 얼굴이라 이렇게 다시 만나는 것이 전혀 반갑지 않다! 또한, 저자는 아가씨에게 기분 나쁜 모양의 반지를 준 경멸스러운 녀석이지 않은가! 반면에 륀체르의 태도는 하이너와 달랐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좋아하는 친구를 만난 듯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쪽 눈을 감아 보이는 게 아닌가. 그것은 애교다. 흡사 한 아름다운 여인이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유혹할 때 짓는 표정 같은 애교. 그 은밀한 신호가 마리 아가씨가 아닌 자신에게 온 거란 걸 깨달은 하이너는 잠시 몸 전체에 와자작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뭐지, 저건?’ 어찌하여 남자가 같은 남자에게 한쪽 눈을 감아 보이는 기행 아니 추행을 저지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물론 이 순진한 호위기사는 바너의 실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륀체르가 그의 주적들에게 수시로 목숨을 위협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 그것을 위해서라면 드래곤과 친화적으로 굴어야 하는 것은 필수라는 것. 하이너는 그러한 속셈을 전혀 알지 못하니 그저 난감할 뿐이다. ‘아가씨만 아니라면 당장 죽이고 싶군. 대체 내게 무슨 속셈으로 저딴 역겨운 인사를…….’ 이미 그사이 륀체르는 마리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그의 인사법은 미혼 남성이 결혼한 부인에게 쓰는 인사법이었는데 몸짓에 우아함과 예의가 가득 넘쳤다. “일단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와트프라우어 부인.” ‘부인’이라는 단어의 느낌이 좋아서 하이너는 조금 전의 애교를 너그럽게 잊어주기로 했다. 인사를 마친 륀체르의 시선은 마리의 손가락에 머물렀다. 희고 고운 손에는 유방 모양의 우정 반지가 영롱하다. 륀체르가 싱글벙글 웃었다. “평소에도 끼고 있을 줄은 몰랐군. 기분 좋은데?” 원래라면 마리는 ‘선물이니 일단은 소중히 쓰고 있답니다.’하고 심드렁하게 대꾸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광산 소유자의 진짜 정체가 저 흑인 여자가 아니라 륀체르 사파이어라면 이제부터 친절한 태도는 필수. 마리는 자신이 햇살 그 자체라 세뇌를 걸며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호호호! 친애하는 길드장이 준 반지인데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나요! 그나저나, 그간 잘 지내셨나요?” 제아무리 거짓된 웃음이라도 아름다운 미인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청명한 목소리와 함께라면 륀체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야, 뭐….” “아, 참. 혹시 당신이 홀디네 본이었나요?” 륀체르는 소파에 걸터앉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소리야? 홀디네 본은 저 여자야.” “아, 그럼 다시 묻죠. 실렌틴 광산의 법적 소유자인 홀디네 본의 뒤에 숨어있는 실제 소유자는 당신인가요?” “틀렸어. 홀디네가 광산 주인이라니까. 왜 사람 말을 못 믿지?” 마리는 잠시 홀디네를 보았다. 홀디네는 륀체르의 말이 사실이라는 듯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러자 홀디네가 륀체르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와트프라우어 부인께선 저희를 믿지 못하는 눈치군요.” “내버려 둬. 믿든 안 믿든 그건 자유니까.” 륀체르는 속 편하게 대꾸했으나, 마리는 끝까지 믿지 않았다. 빈곤한 타국에서 온 여자가 이 제국의 광산을 사들일 확률은 극히 미미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륀체르가 법적인 복잡한 문제에 걸리지 않기 위해 저 여자를 대리인으로 고용한 게 틀림없으리라. 마리는 잠시 차를 마시며 생각을 마무리했다. ‘뭐, 좋아. 누가 소유자인 건 중요하지 않잖아. 홀디네 본의 집무실에 륀체르가 와 있는 거면 말 다 한 거야.’ 그사이 륀체르가 하이너에게도 차를 마시라고 눈짓했다. 하이너는 그의 다정한 눈빛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홀디네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런데 홀디네 역시 하이너에게 한쪽 눈을 감으며 애교의 인사를 했다. 마치 륀체르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찡긋. 하이너는 당황했다. ‘뭐야?’ 찡긋, 찡긋. ‘단체로 눈병이 걸렸나.’ 하이너는 시선 둘 곳이 없어 테이블을 보았다. 그때 륀체르가 마리에게 물었다. “자아. 우리 아가씨께선 무슨 일로 여길 오셨지?” 마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러는 길드장이야 말로 이 먼 곳엔 어쩐 일이죠?” 륀체르는 등을 비스듬히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그러곤 팔짱까지 끼면서 아주 느긋한 태도로 마리의 몸 전체를 감상했다. “나야 친애하는 그대 와트프라우어 부인을 보기 위해서지.” “오호. 거리가 꽤 멀 텐데요.” “멀긴. 그대를 보기 위해서라면 이곳 네히트 정도야 그냥 집 안방에서 마당까지 가는 수고일 뿐이지.” 하이너의 눈에 푸른 불꽃이 팍 튀었다. 마리는 사심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륀체르를 보며 싱긋 웃다가 홀디네 쪽을 보았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오늘 이렇게 온 것은 대의를 위해서입니다.” 홀디네 본이 대답했다. “대의요?”“예. 혹시 제 종자(마리아)에게 듣지 못했나요? 제가 말한 광산 거래 제한 요청…….” 그때 홀디네 대신 륀체르가 대답했다. “이런 이런. 나는 마리아에게 그런 공적인 일까지 전해 듣진 않아.” 순간 침묵이 돌았다. 륀체르가 지금 한 말은 그가 마리아와 텔레파시를 교환하며 마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받는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애당초 홀디네에게 던져진 질문에 륀체르가 대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광산 주인은 결국 륀체르라는 말이다. 홀디네는 이쯤 하면 자신의 역할은 끝이라 생각하고 조용히 서재 너머의 방으로 자리를 피해버렸다. 마리는 역시나 홀디네 본이 륀체르의 대리인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보다 더 빨리 그것을 눈치챘던 하이너는 이를 갈며 륀체르를 노려보았다. ‘뭐? 공적인 일까지 전해 듣진 않는다고? 그럼 사적인 건 전해 듣는단 말인가?’ 호위기사의 분노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는 그때, 마리는 홀디네도 나갔고 하여 원래대로 륀체르에게 편한 말을 썼다. “길드장의 말은 어딘가 이상하게 들리는군. 공적인 일까지 전해 듣지 않는다는 말은 즉 사적인 일은 전해 듣는다는 뜻이야? 이건 친구 사이라고 하기엔 너무 과도한 간섭 아닌가?” 륀체르는 고개를 뒤로 젖혀 느른하게 하품하며 대답했다. “아아.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네 종자에게 텔레파시를 허용한 건 너라고. 그리고 이걸 알아뒀으면 하는군. 나는 내게 간섭하고자 네 행적을 보고받는 게 아니야. 어디까지나 친구의 안전을 위해 하는 일일 뿐이지.” 그녀의 안전을 위해 누구보다 든든한 드래곤 호위기사가 있는 데도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은 호위기사의 자존심을 대놓고 밟아버리는 일이다. 륀체르는 말을 다 하고 나서야 그것이 실수임을 깨달았고 미안함에 하이너에게 또 한쪽 눈을 감는 애교를 보였다. 거듭된 애교에 하이너는 그만 마리티오르를 꺼낼 뻔했다. 륀체르가 못 본 척 마리에게 떠들었다. “그보다 광산 거래 제한 요청이 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건…….” 마리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 아아. 이걸 어떻게 말한담. 저 사파이어라는 작자가 지금 하품하며 대수롭지 않은 듯 굴어도 실은 밑바닥에서 시작해 바너의 실세에 오른 능구렁이다. 절대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겠지. 그런 자에게 ‘앞으로 광산 거래 중지해! 특히나 돈 되는 기갑체 납품을 중심으로!’ 라고 지시하면 순순히 먹힐까? 호위기사가 전에 한 말마따나 ‘누구 장사 말아먹으려고 작정했느냐?’ 같은 대답이 돌아올 게 뻔하다. 그사이 륀체르는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어째서 말끝을 흐리지?” ‘끄응. 복잡한 건 질색인데. 그냥 이대로 저 자식에게 정신 조작을 걸어버릴까?’ 마리가 그러한 생각을 하며 애써 웃음 짓고 있을 때, 륀체르가 폭탄선언을 했다. “아, 참. 정신 조작을 걸 생각이라면 거부하겠어. 세상사 그리 쉽게 될 거로 생각하면 안 되지. 아무렴.” 뜨끔한 마리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한층 줄어들었다. “저기…… 길드장. 혹시 내 속을 읽는 거야?” “물론.” “독심술이 가능한가?” “천만에.” “그럼 어떻게 안 거지?” “이봐. 네 시꺼먼 속이 아무리 진짜라곤 해도 그렇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시인하지 말라고. 뻔뻔해서 귀여워 죽겠잖아.” “흠. 내가 좀 귀여울 때도 있지.” “그래. 때로는 그 뻔뻔하고 못된 입에 입 맞추고 싶다니까.” 챙! 마리티오르가 검집에서 뻗어 나오고야 말았다. 마리가 도발당한 하이너를 미리 제지하지 않았다면 유혈 사태가 일어날지도 몰랐다. 정작 륀체르는 자신의 도발과 그에 따른 하이너의 반응을 즐겼다. 드래곤이 보이는 저 정도의 충성심이면 걱정은 없다. 드래곤의 주인인 마리를 움직여 드래곤을 한패로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리라. 륀체르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그나저나 나야말로 묻고 싶군! 날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면전에서 정신 조작을 걸려고 해? 내가 누군지 잊어버린 건가?” “잊긴. 바너의….” “그래. 나는 바너의 무수한 길드를 총괄하는 사람이지. 거대한 황금을 지키기 위해선 사소한 수작쯤은 금세 알아차리는 법이다.” 마리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어째서 예전에 처음 만나 독주를 마셨을 때 걸었던 정신 조작은 예견하지 못 했느냐고 묻고 싶었다. 이미 륀체르는 그날, 독주를 마셨던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마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이었지…….” 그들의 첫 만남을 알지 못하는 하이너는 검을 거두고 이야기에 집중했다. 륀체르가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흐렸다. “…… 내 생에 그런 황당한 날은 또 없을 거야. 남의 집, 그것도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두었던 비밀정원에 무단으로 침입하질 않나. 제가 부리는 드래콘 뿔로 남의 손등을 갈아버리질 않나. 정보를 사고파는 일의 기초도 모르고 사과를 하라고 하질 않나.” 마리는 질 수 없다는 듯 맞받아쳤다. “나도 그토록 예의가 없는 녀석은 처음이었어. 적어도 보통 남의 사생활을 팔아넘긴 것을 들켰으면 사과는 한다고.” “이봐? 예의에 관해선 무단 침입한 너도 지지 않아. 됐어. 뭐 싸우자는 건 아니야. 여하튼 넌 특이했단 말이야. 그리고…….” 륀체르의 눈이 잠시 마리의 가슴에 향했다. “그리고…… 예뻤지. 아, 이건 현재형과 미래형으로 말해야 하는가? 아무튼, 전형적인 백치 미인형. 그래서인지 경계를 못 했나 봐.” “웃겨. 무단침입 당하고 손등을 뿔 난도질당해도 경계를 못 하다니. 이래서 수컷들은 안 된다니까.” “그래. 그런 물러터진 수컷이라 이렇게 널 알게 되지 않았어? 하지만 두 번은 속지 않아.” 당시 독주를 같이 마셨는데 취해서 고민을 털어놓은 사람은 륀체르 뿐이었다. 륀체르는 훗날에서야 그게 정신 조작의 효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자신에게 정신 조작을 건 마리에게 꺼림칙함보다는 귀여움을 느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마리의 장난질에 두 번 이상 넘어가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러니 내게 얕은수를 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목적이 있다면 정정당당하게 밝히라고.” 이번만큼은 그녀의 호위기사도 동의하는 바다. 그가 마리에게 눈빛을 보냈다. 아가씨. 사파이어와 교섭하려면 진실 되게 임하십시오, 라고. 마리는 두 남자의 시선에 부담을 느껴 괜스레 차를 홀짝거렸다. 다른 때엔 하늘의 별을 따달라고 하면 구시렁거리면서도 다 해줄 것 같은 남자들이 지금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다. 부담스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날 생각은 없다. 일단은 부딪쳐 봐야 아는 법. “각 영지 부대 상대로 하는 거래를 중단해줘.” “하하하!” 륀체르가 웃음을 터뜨렸고, 이런 반응을 예상한 하이너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대관절 장사치에게 장사를 그만두라니 당치도 않다. “군수물자가 얼마나 많은 돈이 되는 줄 모르는 아가씨로군.” “륀체르는 보석 길드 장인이지! 전쟁 지원자가 아니잖아?” “이봐. 나는 보석 길드 마스터이기 이전에 장사치야.” “네 장사로 대륙이 망가져도 좋아?” “대륙이 망가져도 나만 살면 그만 아닌가.” “실망!” 륀체르는 반쯤 장난스럽게 대답하고 있지만, 실은 진짜로 거절할 작정은 아니다. 자기도 최근 기갑 부대 상대로 거래를 중단해야겠단 생각은 한다. 이유는 단 하나. 적들의 몸집을 조금씩 줄일 요량이다. 가장 큰 거래처는 총 네 개로 황도 로귀하르트, 할데바인, 신성 정부 로젠플라드, 황태자의 부대 루빈인데 이들은 친할데바인(할데바인, 로젠플라드)파와 황족(로귀하르트, 루빈)파로 그 힘의 균형을 아슬아슬하게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할데바인의 공작으로 인해 황태자의 루빈이 신성 정부 로젠플라드에 귀속되어버리는 일이 일어났고 힘의 균형은 깨지고 말았다. 할데바인이 득세하는 중에 그쪽과 수월하게 거래를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립에 있던 륀체르에게 썩 좋지 않은 일이었다. 황태자의 은혜를 입은 그가 할데바인과 장기간의 거래를 하는 것은 대외적으로 배신자의 낙인을 찍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홀디네 본이라는 대리인을 고용했다. 그녀의 뒤에 숨고 적법하게 자금 추적을 피하면 마음 놓고 거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지금까지의 이야기일 뿐. 이제 거래는 끝이다. 이유는 바로 주적들 때문이다. 바너의 술집 ‘정염’에서 생긴 살해 미수 사건 후로 귀찮고 성가신 주적들을 내 칠 생각 중이고 그러기 위해선 황태자, 황제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필요한 게 전쟁이다. 광산의 금속 생산량이 줄어든다는 핑계를 내세우며 거래를 중단하면 저 네 개의 세력들이 압박을 가해올 것이고 그때부터 전쟁의 불씨는 서서히 번질 것이다. 이길 자신은 있느냐고? 그것은 당연. 질 것 같으면 시작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기갑 부대들과 거래를 중단할 계획은 있다. 그러나 할 땐 하더라도 륀체르는 마리를 좀 애타게 하고 싶다. 그리고 그녀가 그런 부탁을 하는 이유에 관해 알고 싶기도 하고. 륀체르는 시침을 떼며 엄살을 부렸다. “어이, 아가씨. 실망이라니. 장사치에겐 돈보다 소중한 건 없다고. 그러니 내게 거래를 중단해야 하는 타당한 이유를 설명해 보실까?” 마리는 지금부터 본격적인 설득의 시간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흡사 연극배우가 비장한 연기를 할 때처럼 과장되게 얼굴 근육을 굳혔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주먹을 세워 들고 불끈 쥐었다. 그 모습에 하이너는 사지가 오그라들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들의 그러한 반응에 륀체르의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글쎄 이유를 말해보라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마리는 말을 끌며 륀체르의 앞에 다가갔다. 그리고 륀체르의 두 팔을 들어 올려 함께 주먹을 불끈 쥐게 시켰다. 엉겁결에 그것을 따라 한 륀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마리가 고백했다. “내가. 대륙을. 정복할. 예정이거든. 당신. 그 계획에. 좀. 따라줘야겠어!”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녀의 말이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의 향기가 비현실적으로 달콤하기 덕분일까. 륀체르는 대답에 집중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녀의 입술을 바라볼 뿐이었다. “길드장. 듣고 있어?” “응? 뭐라고 했지?”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0055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내 계획에 따라줘야겠다고.” “그러니까 왜? 다시 말해봐.” 마리는 그만 힘이 빠지고 말았다. 진지하게 말해줬더니 상대는 정작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멍하게만 있다. 삐친 그녀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깊은 한숨도 나왔다. “푸후! 이봐! 내가 대륙을 정복할 거라고. 그러니 내 계획에 따라주면 좋겠다고!” “아아.” “‘아아’가 아니잖아?” “그래. 음…….” 륀체르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기계처럼 중얼거렸다. 대륙 정복, 대륙 정복, 대륙 정……그리고 약 오 초 후. “푸하하하하하! 흐하하하하하! 으하! 아하하하하!” 집무실 가득 웃음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륀체르의 웃음에는 조롱과 비웃음이 가득했다. “으앙, 기분 나빠!” 꿈이자 대의를 무시당한 마리는 시무룩해졌고, 그런 그녀보다 더 기분이 좋지 않은 이가 있었다. 바로 그녀의 기사 하이너였다. ‘젠장, 내 이럴 줄 알았지.’ 대륙 정복의 꿈을 원색적으로 말하는 아가씨가 바보 같다. 그 꿈을 비웃는 륀체르라는 작자도 몹시 야속하다.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우스운 얼간이가 되고 마는 일보다 짜증 나는 일은 없으리라.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하이너를 더 속상하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실컷 비웃은 륀체르가 난데없는 말을 던졌다. “하하, 하하하! 그거 알아? 마리니시네?” “응?” “네가 지금 한 말, 아주 미치도록 귀여운 거?” 하이너는 감히 그런 식으로 아가씨를 비웃느냐고 마리티오르로 륀체르에게 응징해 주려 했으나, 마리가 계속 저지하고 있었기에 참아야만 했다. 마리는 최대한 의연한 태도로 륀체르의 말을 맞받아쳤다. “응. 알아. 나는 미치도록 귀엽게 대륙 정복을 할 예정이야.” “후후. 그래. 거래를 중단하면 각 영주의 부대는 기갑체 운용이 불가할 테지. 이 광산은 사실 금속 생산보다 기갑체 부속품 제작 기술에 더 특화되어 있고, 그 부품들을 각 영주의 부대들에게 팔아왔으니 말이야. 큰 세력의 팔다리를 절단하겠다는 네 계획은 그리 나쁘진 않아. 대륙 정복 방법의 하나로써 손색이 없어.” “그래! 역시 길드장도 그렇게 생각하지? 내 계획은 귀엽고도 이토록 천재적이라고!” “물론 어디까지나 ‘계획’으로 보자면 말이지. 응당 계획은 누가 세우고 실행하느냐, 그게 핵심이다. 마리니시네 네 처지로 봤을 땐 좀 주제 넘는다고 생각하지 않아?” “어머! 내 주제가 어때서?” “사람은 각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어째서 나 같은 큰 사람이나 세워야 현실성 있는 계획을 일개 촌뜨기인 네가, 그것도 수행 능력이 한참 떨어지는 네가 세우는 거지? 너무 무모해 보여.” 륀체르는 할 수만 있다면 공중제비를 돌고 팔짝 뛰면서 그녀를 비웃고 싶을 지경이다. 하이너도 이 순간만큼은 륀체르에게 동의한다. 륀체르의 빈정거림은 끝나지 않았다. “정말이지 광산 주인이 다른 이가 아닌 ‘홀디네’니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거야. 만약에 탐욕과 권력에 눈이 먼 자가 이 광산의 주인이었다면 어땠을까? 특히나 너 같은 미녀라면 그저 깎아내리고 싶어 하는 뚱뚱하고 못난 마귀할멈이라면 말이야. 아마 마귀할멈은 네 계획을 듣자마자 너를 광산 시추 구멍에 파묻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마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런 마귀 같은 할멈이 광산주라면 나는 또 다른 수를 썼겠지.” “다른 수?” “그래. 교섭 시에 나는 뒤로 숨고 이 잘생기고 훤칠한 수컷을 앞세우면 이야기는 끝이라고.” “일종의 미남계란 말인가?” “그렇지!” 하이너는 이제 그만 이곳을 떠나고 싶다. ‘웃기지도 않는군. 애인으로 대하시겠다면서 결국엔 그런 카드로 쓰려고 절 데리고 다니시는 겁니까? 여차하면 포주 노릇이라도 할 기세군.’ 호위기사의 불만이 어떠하든 마리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 이야기가 장난 같겠지만, 들어봐. 내 여행의 목적은 처음부터 대륙 정복이었어.” 륀체르의 눈에 문득 흥미가 번졌다. “그나저나 촌뜨기 망나니 아가씨께서 왜 갑자기 그런 ‘대의’를 품으셨지? 나는 그 계기가 궁금한데?” “어느 날 갑자기 세운 계획은 아니야. 모든 것은 필연이라 해두지. 나 마리니시네 루 오를린은 필연적으로 대륙을 정복해야 해. 그래서 내 동생을 무사히 구하고 이 어지러운 세상도 구할 생각이야.” 륀체르는 첫 번째 이유는 어렴풋이 이해했다. 황태자비가 된 동생을 구하려 하는 것은 황족의 권력에 손대고 싶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된다. 즉, 권력욕을 형제애로 포장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두 번째 이유는 그다지 동의할 수 없었다. “어지러운 세상을 구한다니. 나는 알아듣지 못하겠는걸. 세상은 어지럽지도 않고 그러므로 구해야 할 필요도 없다.” 마리는 발끈하여 외쳤다. “그건 어디까지나 길드장 당신이 지금에 만족하는 기득권자이기 때문에 하는 말일 뿐이잖아!” 그녀의 격한 감정에 하이너가 놀랐다. 아가씨가 진심으로 화를 내는 모습은 보기 드문 것이다. 마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의 텅 빈 공간을 왔다 갔다 하며 자기가 보는 세상에 관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장 가까운 호위기사도 모르고 있던 사실들과 함께! “잘 들어. 이 세상은 엉망진창이야! 다들 알고 있잖아? 북쪽에서부터 점점 암흑 지형(땅과 하늘의 경계가 불분명하며 온통 검은 안개로 뒤덮여 생물이 살 수 없는 곳)이 늘어나고 있단 걸! 그런데도 제국은 그 현상을 막을 궁리는 하지 않아! 허수아비 황제는 할데바인에게 휘둘리기만 하지! 어째서 제국민들의 동의도 없이 로젠플라드가 국교가 돼버린 거지? 그 허울 좋은 종교는 암흑 지형의 비밀엔 접근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종교일 뿐인데! 게다가 각 영지의 영주들도 그래! 의견을 모아 암흑 지형의 비밀을 캐야 한다고 황실을 종용하기도 바쁜 마당에 다들 탐욕에 눈이 멀어 제 힘만 키우기 바쁘잖아? 언제부터 영주들의 사병들이 기갑체를 타기 시작했지? 무엇을 위해? 무기라곤 맨몸뿐인 오슬의 수인족들을 상대하려고? 보잘것없는 힘을 가진 루앙의 마법사들을 견제하려고? 결국에는 영주들 각자 반역을 위해 그러는 거 아니야? 그들은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 무엇이 대륙을 위한 것인지, 무엇이 대륙의 평화를 위한 것인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륀체르는 어느샌가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태우고 있었다. 연기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마리의 모습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뜨거운 의지. 그녀의 호위기사도 그러한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인지 얼떨떨한 표정이다. 뤼체르는 담뱃재를 털며 대답했다. “아아. 무슨 말 하는지는 알겠어. 곱게 자란 아가씨께서 머리가 크면서부터 세상에 불만을 가질만도 하겠지. 네 말은 즉, 암흑 지형에 대륙이 먹혀버릴지도 모르는데 다들 제 밥그릇만 챙긴다… 이거잖아?” “그뿐만이 아니야. 대륙을 위협하는 것은 암흑 지형 말고도 더 있지.” “차원의 균열?” “그래. 차원의 균열!” 차원의 균열. 대륙 여기저기에서 듣도 보도 못한 생물과 물건들이 불쑥 나타나는 신비 현상. 지금으로부터 약 백 년 전이었다. 암흑 지형이 나타나 수백 명의 사람과 무수한 동식물을 삼키는 참사가 일어났고, 같은 시간대 남쪽 어느 땅에서는 낯설고도 사나운 짐승들이 나타나 농경지를 못 쓰게 만들고 사람들을 공격하는 등 여기저기 해를 끼쳤다. 그 때문에 생태계가 교란된단 말도 많았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당시 각 지역의 영주들은 암흑 지형의 비밀을 밝히는 데 힘을 합칠 의향이 있다고 했고, 차원의 균열로 나타난 짐승들을 연구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귀족과 부호들을 중심으로 대륙 수호 지원부서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단기간일 뿐이었다. 결국에는 보여주기 식 정책에 불과할 뿐이었다. 황실은 제국민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오랜 역사를 되새겨 보면 혼란의 시기는 꼭 반역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황실은 권위 있는 과학자들과 대마법사들을 매수하여 ‘암흑 지형은 더는 늘어나지 않는다.’는 거짓 연구 결과를 공포하게 했다. 또한, 차원의 균열로 나타나는 물건으로 혼란을 겪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물건중에는 이로운 물건들이 많다며 무조건 나쁘게 볼 것을 지양하자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런 식으로 암흑 지형과 차원의 균열은 백 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이제 그것은 더는 공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암흑 지형이 천천히 늘어나며 대륙을 삼키고 차원의 균열로 온갖 물건과 생물들이 흘러나와도, 사람들은 그것의 위험성을 느끼기보다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데 열심일 뿐이다. 마리는 그러한 안일한 분위기를 방관할 수 없었다. 세상일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 어느 날 갑자기 암흑 지형이 무한 증식할 수도 있고 차원의 균열에서 위험한 것이 나타나 제국민에게 혼란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다들 모른 척하며 손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런 때야말로 힘을 합쳐 그것을 조사해야 하는데, 정작 힘 있는 자들은 저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느라 바쁘다. “즉, 결국에는 누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되고, 그 사람이 너란 말이지?” “그래.” “대의라고 주장할만하군.” “그러니 나를 도와.” 마리는 륀체르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그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뭐야, 마리니시네?’ 륀체르는 이 가까운 거리와 마리의 가녀린 손에서 느껴지는 힘에 설렐 뻔했다. 하지만 곧 그런 기분보단 당황스러움을 더 크게 느꼈다. “뭐지? 진지한 너는 어울리지 않잖아.” 마리가 눈을 천천히 치뜨고 륀체르를 보았다. 륀체르의 파란 눈동자에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그녀의 얼굴 그 어디에도 백치의 무모한 구석은 보이지 않는다. 간절하고 비장한 눈빛은 ‘오직 당신만이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고, 오직 당신만이 내 고민, 이 세계가 안고 있는 고민을 풀어줄 열쇠를 쥐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륀체르의 귓가에 울렸다. “륀체르 사파이어. 나를 도와줘.” 짧지만 깊은 생각의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륀체르는 그녀의 손을 맞잡고 더욱 힘주었다. 밀착한 두 사람의 손은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 하나가 될 듯하다. 륀체르는 잔잔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숙녀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멋진 남자의 예의가 아니지.” “고마워.” 설혹 마리의 부탁이 아니라고 해도 이미 영주들과의 거래는 중단할 생각이었으나, 륀체르는 그 사실을 구태여 말하진 않는다. 다만 선심 쓰듯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며 조건 하나를 걸 뿐. “네 말대로 각 영지의 부대를 상대로 하는 거래는 중단하겠어. 하지만 이쪽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니 그냥 해주기는 싫은데.” “그냥 해주기 싫다면?” “넌 내게 뭘 줄 수 있지?” “원하는 걸 말해봐.” 륀체르의 얼굴에 악마의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내려가 있었다. “한 번만 빨게 해주면 안 되나?” 호위기사가 인내해야 하는 시간은 거기서 끝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마리티오르의 끝이 그의 심장에 겨누어졌다. 하이너가 서늘한 기운을 뿜으며 물었다. “다시 말해보실까?” 00056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마리티오르의 날카로운 끄트머리는 금방이라도 륀체르의 가슴을 뚫을 것만 같다. 이 위협은 보통 위협이 아니다. 무려 드래곤의 위협이지 않은가. 드래곤이 뿜어내는 살기도 사람을 질식시킬 듯 강하다. 그런데도 륀체르는 눈 한번 깜빡거리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거만한 태도 웃으며 빈정거렸다. “뭐야, 감히 내게 칼을 대? 이렇게 되면 협상결렬인가? 마리니시네 루 오를린?” “아니. 얼마든지 빨게 해주지.” 망설임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마리의 대답에 하이너가 고함쳤다. “아가씨!” 마리의 과감함을 기대한 륀체르는 서둘러 담배를 비벼 껐다. 불량하고 위험한 미소가 번졌다. “지금 여기서 가능해?” “물론.” 그녀의 두 손이 제 풍만한 가슴을 떠받쳤다. 그러자 챙그랑! 하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났다. 호위기사가 검을 바닥에 던져버린 것이다. 성적으로 방종하게 살던 아가씨란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제와 실망할 것도 없다. 다만 그는 난잡한 꼴을 보기 싫을 뿐이다. 그래서 이대로 집무실을 나가려 했다. 그 직전이었다. 마리가 가슴 사이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 물건은 드래콘의 주인이 지니고 다니는 굴종의 인이다. 굴종의 인을 본 하이너는 당황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 륀체르는 조금 전, 가슴을 빨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은 없다. 그냥 ‘빨게 해주면 안 되느냐?’고 했을 뿐이다. 마리는 주어가 없는 그 질문의 주어를 마음대로 상상했다. 금속성의 반들반들한 굴종의 인이 륀체르의 입 앞에 내밀렸다. “자. 왜 빨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 있으니 실컷 빨아.” 륀체르는 텔레포트 홀을 이용하는 도시에서 살던 자라 드래콘에게 관심이 없었고, 드래콘의 주인이 지니고 다니는 굴종의 인에 관해서도 무지했다. “대체 이건 뭐지?” 마리는 륀체르의 입에 굴종의 인을 쑤셔 넣을 뿐이다. “어서 빨라니깐?” 금속 특유의 미묘한 맛이 륀체르의 혀를 뒤덮었다. 그는 그 해괴한 맛을 느끼다가 갑자기 혀를 움직여 굴종의 인 구석구석을 핥았다. 새빨갛고 뾰족한 혀끝은 그 물건을 마치 달콤한 열매로 여기는 듯했다. 륀체르의 얼굴 가득 미미한 만족감이 스며들었다. 무려 마리의 앙가슴에 있던 물건이라 그런지 온기가 느껴졌다. 즉, 지금 이 달콤한 맛은 사랑스러운 그녀가 뿜어내는 온기의 맛이라 할 수 있겠다. “맛있군…….” 그들의 모습을 본 하이너는 허탈해져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꼴을 보고 있자니 여태 화를 낸 자신이 다 싫어질 지경이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마리티오르를 들고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더 함께 있다간 신분과 예의를 잊고서 ‘병신 같은 짓 좀 작작하라!’고 외칠 것만 같았으니까. 한편으로는, 아가씨가 변태 길드장의 짓궂은 장난질에 놀아나지 않을 거란 확신도 들었다. ‘그럼 그렇지. 아가씨를 뭐로 보고.’ 탁! 하고 문이 닫히자, 그제야 두 사람은 바보짓을 그만두었다. 마리는 륀체르의 입에서 굴종의 인을 빼내어 찻물에 담근 다음 손수건으로 바득바득 닦았고, 륀체르는 상체를 뒤로 젖히며 두 다리를 테이블 위에 길게 뻗었다. “너무 그렇게 박박 닦지 마. 내 침이 세균도 아닌데.” “흥!” “아무튼, 이제……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걸 말해주지.” 마리가 굴종의 인을 다시 가슴 속에 챙겨 넣으며 물었다. “그게 뭔데?” “일단 알아두길 바란다. 난 어디까지나 제국의 존속을 원한다는 것을.” “서론이 길면 졸려. 요점만 말해.” “제국의 존속을 위하는 애국자의 눈으로 보자면 말이야…… 요즘처럼 각 영지가 기갑체 부대를 이끄는 건 옳지 않아. 매우 옳지 않지.” 마리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속으론 다른 생각 중이다. 어차피 장사치의 말을 믿는 사람이 바보! 사파이어는 그저 영지들이 힘을 키우는 게 싫을 뿐이겠지. “그래서?” “특히나 보통의 기갑부대가 아닌 마력기갑부대를 이끄는 부대는 최악이지. 그야말로 황실을 대놓고 위협하는 것 아닌가? 건방지게 말이지.” “할데바인을 말하는 거야?” “그렇지.” 마리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륀체르는 제게 들어온 황도 로귀하르트의 정보 중 1급 정보를 발설했다. “그들이 황태자비를 암살하려고 해.” 마리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보통, 동생의 암살 계획 소식을 들으면 분노로 온몸을 떨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을 테지만 마리는 그러지 않았다. 다만 차분히 숨을 고를 뿐이다. 륀체르는 그 반응을 특이하다고 느꼈으나 그다지 신경 쓰진 않았다. 무려 대륙을 정복할 꿈을 품은 아가씨이니 어지간한 음모에는 끄떡도 하지 않으리라, 그러한 자세쯤으로 여겼다. “알다시피 나는 헛된 정보는 사들이지 않아. 그러니 의심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물론. 네 정보에 의심은 하지 않아.” “황족을 죽이려 하다니. 말이 되지 않지. 할데바인 그들이야말로 제국 존속에 가장 큰 해가 되는 존재야.” “동감해.” 륀체르는 다시 한 번 담배를 빼내 입에 물었다. 천천히 불을 붙이는 그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목소리 또한 줄어들었다. “제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들의 만행을 두고 볼 수 없어. 그들이 암살에 성공하기 전에 그 증거를 잡아야 해. 그래야만 그들을 완전히 매장할 수 있지.” “그것도 동의.” “그 일을 네가 해줬으면 한다.” “좋아. 받아들이겠어.” 수월해진 대화에 륀체르는 만족했다. 그는 담뱃재를 마리의 찻잔에 털어 넣으며 구체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행에 필요한 정보라면 이쪽에서 얼마든지 제공해줄 수 있다. 없는 정보라도 사서 주겠어. 그들은 이미 황태자의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없애려는 계획도 실행 중이야. 처음엔 아이고, 다음 목표는 황태자비지.” 륀체르의 시선은 그때까지 찻물에 있었다. 담뱃재로 지저분해진 찻물 표면에 비친 마리는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다. 이게 단지 찻물 표면이 흔들리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륀체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찻물 표면에 일그러져있던 표정과 지금 마리의 표정은 전혀 다르지 않다. 동생을 암살한다는 소식에는 그다지 동요가 없던 그녀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조카를 없앤다는 소식에는 조금 동요하는 듯하다. 죄 없는 아이를 노리는 사악한 계획에 분노하지 않는 여성은 찾아보기 힘들 테지. “그 너구리(할데바인 대공)가 늙어서 시간이 촉박한지 저 두 가지 흉계를 한 달 안에 해치울 생각인가 봐. 그러니 그 안에 증거를 잡아. 네가 성공만 한다면, 나는 그 즉시 네 요구를 들어줄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마리가 조금 쌀쌀맞게 피식 웃었다. ‘길드장 이 녀석, 그랬군. 결국에는 자기도 기갑부대들을 중심으로 거래를 중지할 생각이었잖아?’ 배배 꼬인 관점으로 보자면, 륀체르의 지금 행동은 위험하고 성가신 일은 남에게 맡겨버리고 자신은 뒤에서 지켜만 보겠다는 것으로 풀이될 수도 있다. 가장 큰 세력의 약점을 발견해 그들을 없애 버리고 자신이 권력의 중심에 서겠단 뜻으로 해석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마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륀체르는 신분과 지위가 있으니 정보를 모으는 것 외에 다른 표면적인 행동을 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누군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도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들이. 그 존재는 드래곤 일행이 가장 적절하리라. 륀체르와 자신은 이미 드래곤 소동의 공범자가 아니던가. 즉, 이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자신들은 진정으로 같은 배를 타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반드시, 반드시 그 늙은 너구리를 없애주겠어.” 륀체르는 마리의 고운 두 손이 각자 주먹을 꽉 쥔 것을 보았다. 어찌나 세게 쥐는지 푸른 핏줄이 다 불거져 나왔다. 이런……. 불안하다. 저런 태도는 위험하다. 친족의 복수에 눈 먼 자들은 대개 냉정을 잃고 감성적으로 굴기 십상이다. 이건 바너에서 한 악당 소탕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다. 무려 황실과 관련된 일이다. “이봐. 마리니시네. 너무 자신만만한데? 걱정되게 말이야. 나는 너구리를 없애달라고 한 적 없어. 어디까지나 그가 불충한 일을 하려고 하니 그 증거를 모으라 할 뿐이었지.” “어쨌든 내게 불가능은 없어.” “넌 무슨 약을 빨았기에 매번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확신하지 않으면? 이봐, 길드장.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뭐가 남지?” “하하. 단지 그런 단순한 마음일 뿐이야?” “마음이 복잡해지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법이지.” “말이야 틀린 건 없지만.” 륀체르는 몸을 일으켰다. 무거운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싶다. “자, 답답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제 좀 즐기러 갈까? 거사를 앞두고 신 나게 놀아야지. 물론 삐친 드래곤 기사님의 기분도 풀어주고.” *** 황도 로귀하르트. 황후의 봄 별장 트리아노네. 온 세상이 동면해도 성질 급한 이곳은 봄맞이 단장에 바쁘다. 궁정 안을 가득 감도는 공기는 따스하고 정원 가득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 언제라도 황제가 와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포근하고 화사한 장소로 만들라는 황후의 지시에 궁정 마법사들은 쉴 새 없이 기온 유지 마법을 써야 했고 식물들에게도 생장 유지 마법을 걸어두어야 했다. 그런 업무야 원래 업무이니 그다지 어렵진 않았으나, 가장 어려운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오슬의 수인족들에게서 생포해온 어린 수인들을 다루는 일이다. 수인족이라고 해서 모두 험악하고 사나운 종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수인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귀족들의 애완동물로 키워졌다. 황후 역시 그 수인들의 새끼를 별장 가득 풀어놓는 취향이 있었다. 아름다운 장소에서 귀여운 새끼 동물들이 뛰어노는 것만큼 천국의 풍경은 없으리라. 하여 마법사들은 그 어린 수인들이 난폭하게 변하지 않도록 세뇌를 걸어야만 했다. 그렇다고 너무 과하게 걸어버리면 귀여움이 사라지고 멍청해 보인다. 너무 순해서 멍청할 정도는 아니되 그렇다고 너무 발랄해서 여기저기 사고를 칠 정도는 아닌 그런 적당한 수준으로 세뇌를 거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도 마법사들은 정원의 비싼 꽃을 짓밟은 새끼 수인들을 따로 거둬 훈련실로 데려가면서 푸념 어린 한숨을 쉬어야 했다. 우리가 동물원 조련사인지 궁정 마법사인지를 통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할데바인 대공은 황후와 이곳 트리아노네에서 만나기로 해 약속 시각이 되자 자리했다. 아직 황후는 오지 않았다. 대공은 새끼 수인들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은 정원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주제도 모르고 여기저기 팔짝 뛰어다니는 짐승들을 보는 것이 몹시도 짜증이 났다. 아니, 이 짜증은 어쩌면 조카인 황후에게 향하는 짜증일지도 모르겠다. 내궁부를 움직이고 황제 또한 조종하려고 조카를 황후로 세웠으나, 어째 그녀는 자기 주제도 모르고 사치스러운 황궁 생활에만 흠뻑 빠져 있는 듯하다. 게다가 듣기로는 이런 정원을 차려놓고 누군가와 따로 밀회를 즐기기도 한다던데. ‘멍청하고 한심한 것. 그러다가 촌뜨기(황태자비 로테아르카)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황실에서 쫓겨나도 할 말이 없을 테지.’ 할데바인 대공은 최근 가장 눈엣가시인 촌뜨기(황태자비 로테아르카)를 제거하는 것에 관하여 밀의를 원했다. 그동안 해온 일들이 너무 물렀던 탓인지 자꾸만 실패했다. 황후에게 입김을 불어넣어 촌뜨기를 황태자비가 되지 못하게 방해한 것도 실패. 향수에 약을 섞어 촌뜨기의 정신을 이상하게 하려는 것도 실패. 오를린 영주의 비리를 캐려 한 것도 실패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촌뜨기가 품은 황손을 죽이는 것뿐이다. 또한, 그 후에 촌뜨기 역시 죽이는 것도 당연. 때마침 여기저기서 듣기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가장 먼저 들었던 소식은 바너의 믿을 만한 정보상들에게서 왔다. 황태자비가 고향에 살던 시절에 관한 정보. 글쎄 그녀가 오를린의 난다 긴다 하는 남자들과 난잡한 생활을 했단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황태자비를 감시하라고 야울 궁에 시녀를 보낸 적이 있다. 그 시녀 역시 이렇게 보고했다. 황태자비가 쌍둥이라고! 국혼 첫날밤 황태자가 촌뜨기에게 그 진실에 관해 물었다고! 대공은 그림을 그렸다. 아마 오를린 영주는 쌍둥이 중에서 행실이 별로인 딸을 아예 없는 듯이 매장해버리고 다른 딸을 황실에 들여보냈으리라. 그러나 진실이 어떠하든 중요하지 않다. 이제부터 진실은 대공 자신이 바꾸면 그만이다. 난잡한 성생활을 즐기던 문제의 그 딸이 황태자비가 되었다. 그것을 소문으로 만들어 흘릴 작정이다. 드디어 오늘의 밀의를 위해 황후가 자리했다. 대공과 황후는 시종과 시녀 앞에서는 형식적인 인사와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러기를 얼마 후, 대공이 헛기침했고 황후는 시종들을 접견실에서 물렸다. 그제야 대공은 품 안에서 종이와 작은 필기용 숯을 꺼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특이한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할데바인 가문 외의 사람들은 일절 읽을 수 없는 문자다. 대공이 비밀스러운 문자를 차분히 적어 내려갈 동안 황후는 제 무릎에 올라온 작은 토끼 수인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앙증맞은 엉덩이 사이 돋아난 꼬리는 아주 짧은데도 마치 강아지의 꼬리처럼 살랑였다. “귀여워라! 어쩜 이리 털이 보들보들한지…….” 토끼 수인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듯 황후의 무릎에 몸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그리고 얼마 후, 황후의 앞에 종이가 내밀렸다. 황후는 토끼를 끌어안고서 그것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숙부의 계획을 읽은 황후는 토끼 수인을 무릎에서 내렸다. 그리고 숙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황후는 시골뜨기의 하녀를 살려둔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0057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황후의 별장 트리아노네의 지하는 지옥 그 자체였다. 꽃이 피고 귀여운 수인들이 노니는 천국 같은 풍경의 지상과는 달리 이곳은 음습하고 지저분하고, 게다가 끔찍한 비명도 끊이질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은 할데바인을 매장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반 할데바인 파의 첩자들이 잡혀 와 고문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트리아노네의 주인인 황후는 맨 처음 그런 잔혹한 곳을 자기 별장 아래 두길 원치 않았다. 그러나 할데바인 대공은 황후의 별장 외엔 마땅한 장소가 없다고 여겼다. 끔찍한 용도의 감옥을 다른 곳에 두면 세간의 눈에 띄어 잡음이 생길 수 있었다. 횃불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으니 황족의 일원이 머무는 곳에 이러한 장소를 두어야만 가장 안심할 수 있었다. 국혼이 있기 사흘 전이었다. 그때 황태자비의 하녀인 렌은 이곳에 억울하게 잡혀 왔다. 그전까지만 해도 렌은 로테 아가씨가 드디어 황태자비가 된다고 기뻐했다. 이제 자기도 황궁 시녀가 된다고 기뻐해 마지않았다. 황궁에 자주 오는 귀족들과 혼처를 알아볼 수도 있고 오를린에서보다 더욱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늘 들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궁부에서 사람이 찾아와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우는 게 아닌가. 황태자비가 되실 분의 향수에 독성의 액체를 탄 게 바로 네 짓이냐?……고. 그 황당무계한 물음에 렌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로테 아가씨가 별스럽게 향수를 자주 바꾼 건 사실이고, 그 하녀로서 매번 다른 향수를 구하느라 힘들었던 것 또한 사실이지만, 맹세코 단 한 번도 그런 몹쓸 짓은 한 적은 없었다. 로테 아가씨가 무사히 황태자비가 되는 거야말로 자신의 영광인데 어째서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그래서 당당하게 말했다. 자신은 로테 아가씨의 친자매나 다름없는 사람이고 또한, 하녀로서 단 한 번도 성실히 임하지 않은 적 없다고. 아가씨께 나쁜 마음을 품은 적 또한 없었으며 당신들이 말하는 독을 어디서 구하는지조차도 모른다고. 그런 자신이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느냐고. 그러니 어서 로테 아가씨를 만나게 해달라고. 아가씨는 자기 말을 들어주실 거라고. 그러나 내궁부 사람들은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 이후 렌은 이곳으로 끌려왔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내궁부. 황후가 관장하는 기관. 하지만 황후의 숙부인 할데바인 대공이 휘두르는 기관이라 봐도 무방한 곳. 자신은 그 적들이 씌운 누명에 속수무책 휩쓸려 갇힌 것이다. 견디기 힘든 심문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감옥 관리자들은 끝도 없이 사람을 고문했다. 교묘하게도 육체적으로 뚜렷한 증거가 남는 것은 아니다. 잠을 자지 못하게 하거나,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하고, 소금물로 배를 채우게 하는 것. 그리고 그런 고문은 차라리 양호한 수준이었다. 렌은 때로는 개미가 가득 들어간 수프를 먹어야 했다. 잔악한 그들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괴롭히며 ‘네가 황태자비의 향수에 몹쓸 독을 섞었다고 자백해라!’고 강요했다. 지독한 고문을 견딜 수 없어서 렌은 결국, 거짓을 말했다. 제가 황태자비가 쓰시는 향수에 정신을 이상하게 하는 독을 섞었다고 자백 아닌 자백을 해버렸다. 그 후에는 고문이 멈추어서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느 날부터 고문보다 더 끔찍한 일들이 시작되었다. 감옥 하급 관리자들이 저들끼리 낄낄거리며 작당을 하더니 능욕을 시작했다. 렌은 밤낮없이 그들과 몸을 섞어야만 했다. 렌은 차라리 죽고만 싶었다. 언니 엔처럼 오를린에 남았다면 이런 모진 일도 당하지 않았을 테지. 괜히 로테 아가씨를 따라 황궁으로 왔기에 이런 수모를 겪는다.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이런 몸으로 오를린에 갈 수도 없다고 생각하니 그저 죽고만 싶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그날도 눈을 뜨자마자 관리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그들은 행위를 하면서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했다. 이러다가 임신이 되는 거 아니냐며, 그러면 그냥 죽이고 위에는 이 여자가 자살했다고 하면 그만이라고. 소름끼치는 그 말을 들은 렌은 혀를 꽉 깨물고 죽을까 했다. 그때 갑자기 감옥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관리자 두 명과 새로운 ‘죄인’ 하나. 끌려들어 온 죄인은 남자인데 갓 스무 살을 넘긴 듯 젊어 보였다. 관리자들이 말했다. “자, 이제 이 녀석 작업 시작하자고.” 렌은 그들이 말하는 ‘작업’이 거짓 자백을 받아내는 것임을 직감했다. 위기를 느낀 청년은 목숨을 구걸했다. “살려만 주세요! 제발 목숨만 구해주세요!” “네가 하는 말에 따라 달렸지, 그건.” 청년은 오를린 토박이의 억양을 썼다. 그가 고향에서 왔음을 안 렌은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으아아아악! 아아악!” 잔인한 고문이 이어졌다. 관리자들은 청년의 고개를 더러운 물통에 처박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 다음엔 청년의 몸을 천장에 매달아서 매질했다. 때로는 그 상태로 채찍질도 했다. 나중에는 청년의 열 손톱 사이를 못으로 하나하나 찌르기도 했다. 렌이 초반에 받은 고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일들이었다. 청년은 자기 죄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무조건 용서를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뭔진 몰라도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저를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으아아악!” 손톱 고문이 끝난 뒤에 관리자들은 인두를 불에 지졌다. 벌겋게 달궈진 인두는 청년의 눈앞에 들이밀렸다. 관리자들이 청년에게 물었다. “자자. 솔직하게만 말하면 돼. ‘그라토’ 자네가 오를린의 마리니시네와 난잡하게 놀았던 것이 사실이지?” 렌은 알 수 있었다. 그라토라는 이름을 가진 저 청년은 반드시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어야 하리라. 진실이 뭐가 됐든 간에 그들이 원하는 답을 주어야만 저 뜨거운 인두를 피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순진한 시골 청년은 잔뜩 겁을 먹고서 진실만 말할 뿐이었다. “하늘에 맹세코 그런 적 없습니다! 저는 절대 아가씨와 그렇고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어요! 무, 물론, 저는 아가씨만 보면 가슴이 떨리긴 했습니다. 잠시나마 주제를 모르고 연정을 품긴 했습니다만, 소심해서 절대 다가가지도 못하던 그런…… 아아아아악!” 그라토의 눈에 인두가 처박혔고, 감옥 가득 비명이 울려 퍼졌다. 렌은 눈을 질끈 감으며 두 귀를 막았다. 두 귀를 막아도 그라토의 울먹이는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지독한 고통에 그라토가 조금씩 달라졌다. 고문에 질린 그는 점점 마리니시네를 험담하기 시작했다.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절대 그런 적이 없습니다. 마리니시네 그 마녀가 워낙 방탕한 여자라 온갖 남자들과 추문을 뿌린 건 사실이었어요! 하지만 저만큼은 절대 그녀와 잔 적이 없습니다!” “머리가 나쁘군.” 관리자들은 그라토의 뺨에 인두를 갖다 대었다. 그러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답답하단 듯 설명했다. “네가 해야 할 말은 그게 아니라고. 알겠어? 자, 다시 생각해보고…… 다시 대답해봐. 네가 마리니시네와 추잡하게 즐긴 게 맞지? 너를 포함한 여러 남자와 여자가 그 마녀와 로젠플라드의 교리를 어기는 그런 더러운 짓거리를 했지 않았느냔 말이야!” 결국, 기나긴 심문에 지친 그라토는 ‘마리니시네 아가씨와 추잡하고 난잡한, 그야말로 입에도 담지 못할 정도로 심한 짓들을 했다!’고 거짓을 말했으며, 그에 신이 난 관리자들은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퍼부었다. 망나니 마리니시네는 자기와는 다르게 평소 행실이 정숙하고 평판이 좋은 동생 로테아르카를 질투했다 하던데 그게 사실이냐? 마리니시네가 동생을 매장해버리고 자기가 동생인 것처럼 속여 황태자비 후보가 되었다는데 그게 사실이냐? 그 말인 즉, 지금 궁에 있는 여자는 그 마녀라는 말이냐? 그런 여자가 황태자비가 되었는데, 과연 그녀가 국모가 될 품격을 갖췄다고 생각하느냐? 그라토는 그 모든 질문에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잔혹한 심문에 지친 그라토에겐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고통스러운 시간만 멈출 수 있다면 어떤 거짓도 진실인 듯 말해줄 생각이었다. 거듭된 질문에 급기야 그라토는 ‘그 더럽고 미친 여자는 황궁의 치욕이다!’고 외치기까지 했다. 하하하하! 관리자들이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어떤 관리자는 손뼉을 치기도 했다. 그러한 소리들이 렌에겐 소름끼치도록 무섭게 들렸다. ‘마리 아가씨를 어쩌면 좋담!’ 갑자기 관리자 하나가 렌에게 다가왔다. 렌은 뒷걸음질 쳤지만 도망갈 곳은 없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느냐?” 렌은 관리자의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고 대답하거나 부정하면 자기 목숨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자꾸만 진실을 왜곡하는 질문들이 몰아쳤다. “너도 마리니시네가 로테아르카를 질투했단 것에 동의하느냐?”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자가 야비한 웃음을 흘리며 쐐기를 박듯 물었다. “그 마녀 같은 여자가 동생으로 위장해 입궁했다는 것도? 지금 황태자비가 즉 그 여자라는 것 또한?” 렌은 눈을 감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더욱 난잡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너도 그라토와 황태자비가 그런 난잡한 일을 할 때…… 함께 했느냐?” 렌은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어 고개를 돌려 관리자를 보았다. 관리자가 렌의 뺨을 만지며 물었다. “너도 함께 즐겼느냔 말이다!” 관리자는 렌의 뺨을 만지던 손을 제 주머니로 가져가 단도를 꺼냈다. 단도는 렌의 눈을 노리렸다. 대답에 따라서 렌은 한쪽 눈을 잃을지도 모른다. 겁에 질린 렌은 기계처럼 대답했다. “……예. 예…… 저도, 함께 했습니다. 함께…… 했어요!” “그들과 함께했다고?” “예!… 저도 그들과 즐겼습니다! 저도 그들과 같이 즐겼단 말입니다! 그들이 그러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했어요!” 관리자는 뒤돌아서며 마지막 말을 전했다. “좋다. 그럼 그것을 며칠 뒤 열릴 재판에서 증언하도록. 네 목숨과 자유는 네 태도와 진실 된 대답에 달렸단 걸 명심해라.” 관리자들이 떠나고 감옥엔 그라토의 희미한 신음만 나왔다. 렌은 무릎에 고개를 파묻으며 숨죽여 울었다. 울면서 자기를 놓아버렸다. 로테의 하녀였던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말았다. ‘역시 그 변덕스러운 시골뜨기 년이 문제야! 아무것도 믿을 게 없는 주제에 황족이 되려 한 것부터가 악이라고! 이제 나도 어쩔 수 없어! 나도 어쩔 수가 없다고!’ *** 네히트. 실렌틴 광산. 륀체르는 ‘홀디네 본’이 소유한 여관에서 자그마한 연회를 열기로 했다. 삐친 드래곤 기사를 달랠 겸 마리와 재미있게 놀 생각이었다. 물론 그는 폐가에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을 루돌프와 마리아 역시 외면하지 않았다. 그가 언제나 마리와 연결될 수 있는 이유는 마리아의 텔레파시 덕분이 아닌가. 마리아에게도 호의를 표시하고 싶은 그는 얼른 즐기러 오라며 초대 메시지를 보냈다. 마리아는 나지막이 한숨 쉬었다. 드래콘으로서 인간들이 먹고 마시는 자리에는 통 흥미가 없고 그래서 끼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지만 륀체르 사파이어는 아가씨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 아가씨의 종자인 자신이 그의 말을 거절할 수는 없는 법이다. 마리아는 공부에 열중한 루돌프의 등 뒤로 다가가 잠시 입 주위의 근육을 씰룩였다. 그러더니 대뜸 인간의 언어를 썼다. “루돌프.” 루돌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책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녀의 목소리도 느끼지 못했다. 마리아는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봐요. 루돌프.” 그제야 루돌프는 뭔가가 이상하단 걸 느꼈다. 아니, 이상한 정도가 아니다. ‘뭐지? 누가 말을 하네? 누가…… 맙소사. 설마 마리아 누나가? 뭐? 마리아 누나가 말을 해? 사람의 말을?’ 루돌프는 손에서 책을 떨어뜨렸다. 난생처음 이 과묵한 드래콘의 인간체 목소리를 들은 듯하다. 소년은 너무 얼떨떨한 나머지 입을 벌리고 눈 또한 휘둥그레 떴다. 마리아는 예의 그 선홍빛 눈동자를 꼼짝도 하지 않으며 인형처럼 중얼거릴 뿐이다. “루돌프. 륀체르 사파이어 길드장이 우리를 초대했어요. 얼른 가요.” 당황한 소년에게서 대답은 미처 나오지 않았다. 마리아는 뒤돌아서 밖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서둘러야 해요.” 루돌프는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사람의 목소리를 뭔가에 비유해본 적 없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없는 문학적 재능을 짜내서라도 그녀의 목소리를 뭔가에 비유하고 싶었다. “얼어버린 호수 위에 달이 구르면 저런 목소리를 낼까? 한여름 장미에 태양 빛 알갱이가 부서질 때 저런 소리가 나올까? 너무…… 너무 아름다워! 어째서 마리아 누나는 그간 저 예쁜 목소리를 숨긴 거야?” 소년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0058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소년은 외출 준비를 대충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밖엔 아주 아름다운 모습의 생물체가 소년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드래콘으로 변신한 마리아의 모습이다. 눈이 그치고 달빛이 밝아진 덕분일까? 달빛을 받아 눈부신 눈밭에 우뚝 선 드래콘의 새하얀 모습이 잘 만들어진 얼음 조각처럼 아름다워 보인다. 머리에 솟은 뾰족한 뿔은 유니콘의 고고한 분위기가 흘렀고 온몸을 감싸는 유백색의 비늘은 백조의 보드라운 털보다 훨씬 우아하다. 본래 드래콘의 모습이 이토록 아름다우니, 인간으로 변신하면 그토록 아름다운 소녀가 되는 것도 당연하리라. 그사이 마리아의 진홍색 눈빛이 소년에게 재촉했다. ‘뭐해? 얼른 내 등에 타지 않고.’ 또 한 번 마리아의 예쁜 목소리가 소년의 가슴에 울려 퍼졌다 . ‘저렇게 눈빛이 아니라… 말로 해줬으면 좋겠어.’ 루돌프는 서둘러 드래콘의 등에 올라탔다. 드래콘은 낮은 고도로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눈이 그치고 바람도 약해져서 그다지 춥지는 않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루돌프는 몸을 떨었다. 마리아의 목소리가 전해준 여운 때문에 소년의 심장도 구름 위를 두둥실 떠다녔다. 그들은 눈 깜짝 할 사이에 목적지에 가까워졌다. 그곳은 유리 돔 여러 개가 옹기종기 모인 구역이다. 루돌프는 이곳이 광산을 지키는 마법사들의 거주 구역임을 짐작했다. 드래콘이 착지하자 루돌프도 그 등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드래콘은 금세 인간체로 변신했다. 유니콘과 드래곤을 반반 닮은 동물이 아름다운 소녀로 변신하는 일련의 모습. 그것은 아주 신비로웠다. 루돌프는 이번에는 설렘이 아닌 조금 다른 의미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떻게 보면 무섭기도 해, 그래서 더 신비로워…….’ 안내인이 그들을 단장하는 방으로 데려갔다. 한 쌍의 미용사들이 몰려와 소년, 소녀를 꾸며 주었다. 루돌프는 점잖은 정장을 갖춰 입었고 마리아는 눈의 요정처럼 보이는 하늘색 계통의 옷을 입었다. 두 사람의 옷 모두 얇고 가벼운 소재인데, 보온 마법이 처리돼 따뜻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루돌프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늘 덥수룩하던 검붉은 머리카락은 단정히 정리되었고, 추위에 시달리던 창백한 피부는 핏기가 도는 발그레한 뺨으로 바뀌어 있다. 아래위로 입은 은색의 정장도 파란색 눈동자를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몸매도 또래에 비하면 마르긴 했지만, 절대 나쁘진 않다. 아직 어려서 그렇지 조금만 더 크면 기사님만큼 아니, 기사님보다 훨씬 멋진 남자가 될지도……? 소년은 혼자서 바스스 웃다가 마리아를 보았다. 전처럼 수수한 옷이 아니라 예쁜 드레스를 입은 마리아는 어쩐지 불편해 보인다. 그녀는 장식이 많은 소매 부분을 만져보기도 하고 허리 부분을 당기기도 하는 등 새 옷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간혹 거울을 보면서 얼굴을 붉히기도 한다. 불편함은 불편함이나, 어째 새 옷을 입고 더욱 예뻐진 듯한 자기 모습이 은근히 마음에 드는 눈치. 그녀의 감정을 조금씩 읽기 시작한 루돌프는 기분이 좋았다. 가능하다면,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듣고 싶다. “참 예뻐요.” “…….” “그러니까, 마리아 누나의 옷…이요. 옷과…… 머, 머리 모양…….” 칭찬을 해 주면 그녀에게서 고맙다는 말 한마디쯤 듣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말을 걸었지만, 마리아는 늘 그렇듯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는다. 다만, 루돌프의 칭찬이 싫지는 않은지, 어여쁜 얼굴에 잠시 고요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뭐야, 웃으니까 더 예쁘잖아.’ 루돌프의 가슴이 다시 한 번 뛰었다. 빨라진 심장 박동 때문일까? 소년의 이성이 잠시 달아났다. 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마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돌발적인 행동에 마리아가 조금 놀란 눈으로 루돌프를 보았다. 마리아의 시선에 루돌프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자신의 행동에 루돌프도 당황한 듯. 하지만 어색한 순간도 잠시, 머뭇거리던 루돌프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마리아의 손을 이끌었다. “얼른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요.” “…….” 마리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루돌프는 마리아의 손을 이끌며 문을 열었다. *** 광산 소유자의 돔에서 작은 연회가 열렸다. 작은 연회라 해도 모인 사람이 족히 오십 명은 된다. 마리, 하이너, 륀체르, 홀디네, 광산 마법사와 그들의 시중들이 참가해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물론 사람이 많은 만큼 주의해야 할 점도 많다. 광산소유자에 관한 이런저런 말이 새어나갈 염려가 있기에 중요 인물들이 정체를 가리는 건 당연. 륀체르는 이곳에서 홀디네와 친분이 있는 평범한 젊은이 흉내를 낸다고 수수한 복장을 하고서 어설픈 남쪽 지방 사투리를 썼다. 한때 밑바닥 인생을 산 적이 있었기에 그때의 경험을 살려 행동하면 누구도 그를 바너의 실세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이인 양 마법사들에게 궁금한 걸 묻기도 하고 광산에 처음 오는 사람처럼 네히트의 문화에 신기한 척도 하며 이 시간을 즐겼다. 그사이 마리는 여기저기 차려진 신선하고 맛난 음식들을 먹는 데 바빴다. 폐가에서 다들 라면을 먹을 때 혼자만 굶었던 마리는 지금 이 음식들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호위기사는 여전히 불퉁하게 굴었다. 그런데 정작 자세히 관찰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닌 게, 표정만 불퉁하지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이따금 그녀가 잘 먹는 음식을 따로 접시에 담아주기도 하고 그녀에게 음흉한 잡담을 걸어오는 시시껄렁한 마법사들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저속하게 휘파람을 불며 마리의 시선을 끌려고 하는 이십 대 초반의 마법사들을 향해 슬쩍 중지를 세워 보이기도 했다. 기사로서 그런 저속한 욕을 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아가씨께 감히 버릇없이 휘파람을 부는 녀석들에게는 그런 저속한 욕도 부족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중지를 세워 보이는 그때, 아가씨께 들키고 말았다. 아가씨가 알 것 같단 표정으로 싱긋 웃자 하이너는 머쓱하여 괜히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광산 촌구석 마법사들은 바너의 날건달 수준만도 못하군.” “어머! 당신은 질투가 너무 심하다니까요! 호호호!” 그들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마법사들은 입을 모아 ‘부부가 사이가 참 좋다!’고 칭찬했고, 마리는 ‘아직 신혼부부라서 그런답니다!’하고 와트프라우어 부인으로서 너스레를 떨어댔다. 하이너는 그런 농담이 그리 싫진 않은지 웃었다. 마리는 갑자기 하이너를 조용한 곳에 데려가 소리를 낮춰 물었다. “저기, 하이너. 괜찮은 거야?” 하이너는 까칠하게 비꼬았다. “괜찮다니, 무얼 말씀입니까? 아가씨가 어느 음흉한 변태에게 가슴을 보여줄 뻔한 일에 관해서 말입니까?” “흐잉. 여전히 삐쳐있긴. 내 말은, 기운 잘 숨기고 있느냐고.” “무슨 기운 말입니까?” 마리아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더욱 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무슨 기운이긴. 네 정체 말이야.” 아아. 아가씨께선 지금 다른 이들이 드래곤의 마력을 느끼는 건 아닐까 염려하고 있다. 걱정 따윈 모르고 사시는 분 같아도 그런 염려를 하긴 하는군. 하이너는 같잖다는 듯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말 괜찮아?” “예. 아무래도 (드래곤) 기운은 제 심리 상태에 따라 자유로 조절되는 것 같습니다.” “후와. 다행이다.” 마리가 해맑게 웃자 하이너는 또 비꼬았다. “그나저나 아가씨, 순서가 뒤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무슨 순서?” “그런 걱정은 여기 도착하기 전에 하셔야 하는 것 같은데요.” “아하! 그랬나?” “정말이지 당신이란 사람은 왜 그리 대충대충인 거야…….” 호위기사가 힐난의 소리를 해대도 마리는 유쾌하게 그의 등을 치며 농담할 뿐이다. “뭐라고? 내가 너무 아름답다고? 어머! 당신도 참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그런 칭찬을 하면 낯부끄럽잖아요! 호호호!” “이 푼수데기 아가씨 같으니.” 그런 그들의 모습을 저 멀리서 지켜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루돌프와 마리아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 얼른 섞여 들어가 맛난 음식을 즐기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루돌프는 마리아의 손을 잡아 이끄는데, 마리아는 어째 꿈쩍도 하지 않는다. “뭐해요? 안 가요, 누나?” “…….” 마리아는 하이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루돌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하이너가 마리를 보며 싱긋 웃자 그녀는 그것을 보고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루돌프는 마리아의 미묘한 표정을 보는 게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한 기분도 들었다. “들어가자니까요?” “…….” “누나?” 마리아 누나는 어째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로 기사님만 바라보기만 할까. 기사님의 웃는 모습에 어째서 이토록 미묘한 표정을 하는지……. 소년이 그런 생각을 할 때, 갑자기 마리아가 소년의 손을 뿌리치고 복도를 가로질러 도망가기 시작했다. 미련도 없이 달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니 다시 돌아올 것 같진 않다. “휴우.” 루돌프는 한숨을 쉬며 텅 빈 손안을 내려다보았다. 마리아의 온기가 남은 손을 한참 동안 보는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누나가, 기사님을?” 그러고 보니 자기가 알기로 마리아 누나는 단 한 번도 기사님 앞에서 인간체의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예쁘게 단장한 모습을 했으니 일행에게 자랑하고 싶을 만도 한데, 어째서 도망을 갈까? 인간체로 변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쑥스러워서 그런가? 어찌 됐든, 마리아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녀와 함께하지 않는 연회는 소년에겐 무의미하다. 소년도 마리아처럼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사이 륀체르는 마법사들과의 영혼 없는 수다에 한창이었다. 그런 수다가 길게 이어지자 하품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륀체르는 입을 가리고 하품하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출입문 쪽을 보았다. 그곳에선 어여쁜 드래콘 소녀가 어여쁜 소년의 손을 뿌리쳐 도망가고 있었다. 륀체르는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어이쿠, 손님이 그냥 가시네?” 그러나 그는 굳이 그들을 잡지는 않았다. 그에겐 어린애들보다 더 중요한 손님이 있으니까. 여태 다른 이들과 하하 호호 떠들었지만, 실제 목적은 오를린의 아가씨와 즐겁게 노는 게 아닌가. 륀체르는 슬슬 마리에게 다가갔다. 그가 오는 걸 본 마리는 접시에 맛난 음식을 들어 보이며 ‘얼른 이것 좀 먹으러 오라!’고 손짓했다. 그녀에게 다가간 륀체르는 시무룩한 표정을 연기하면서 그녀의 귓가에다 속삭였다. “귀여운 숙녀(마리아)분께 좋은 술을 대접하고 싶었는데 오다가 그냥 가버리는군.” 평소 마리아가 인간의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아는 마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륀체르를 혼냈다. “떽! 못 써요! 어린애에게 술을 먹이려 하다니!” 륀체르는 뭐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뿐만 아니라 짓궂은 농담도 했다. “이 날건달 출신 아가씨께서 뭐라고 하는 거야? 마치 자기는 어릴 때 그렇게 놀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군?” 마리는 말도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어릴 적부터 술을 입에 대는 사람 취급하는 륀체르를 이해할 수 없고, 마리아와 같은 어린 숙녀에게 술을 마시게 하려는 것도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친구로서 진지하게 말하는데, 다음부터 어린애에게 그런 농담은 하지 말라고.” 륀체르는 ‘어린애’라는 말에 궁금해져 물었다. “네 드래콘은 몇 살인데?” “마흔다섯 살이라고.” “푸하! 뭐야? 그냥 아줌마였잖아…… 그럼 마셔도 되지 않아?” “어멋! 드래콘의 나이로 마흔다섯 살이면 인간 나이로는 아직 어리디어린 소녀일 뿐이라고!” 대화가 오가는 중에 누군가의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그는 바로 하이너다. 이 질투심 가득한 호위기사는 륀체르의 모든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곳의 주인인 주제에 연회장에서는 뜨내기인 척 구는 것도 가증스럽고, 사실 마리아에겐 관심도 없으면서 마리아를 빌미로 아가씨와 대화를 시작하는 것도 같잖다. 처음엔 술이니 드래콘의 나이니 이야기를 해대다가 이제는 저렇게 엉큼한 말도 하지 않은가!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너희 말이야. 폐가에서 잘 때… 넷이 다 같이 자는가?” “응.” “호오. 그렇게 함께 자면 사고가 일어나진 않아?” “무슨 사고?” “음, 가령 너와 마리아가 여자끼리 은밀하고 질척한 유대의 몸짓을 한다든가.” “으, 은밀하고 질척한 유대의 몸짓?” “가령 몸부림을 친다고 손을 뻗다가 서로의 가슴이나 그 아래를 만진다거나, 아주 우연히 말이지…….” 하이너는 도저히 듣고 있을 수 없어 한마디 하려 했다. 그런데 촉새 같은 륀체르는 금세 다른 주제를 꺼내 하이너의 입을 막아버렸다. “참! 이런 시시껄렁한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내가 와트프라우어 부인에게 줄 선물이 있는데 말이야.” “우왓! 그게 뭔데?” 마리가 선물을 기대하자 하이너는 다시 잠자코 있어야 했다. 륀체르는 마리의 손을 잡아끌며 어느 방으로 갔다. 하이너도 그들을 따라 방으로 갔다. *** 그곳은 널찍한 밀실로, 바닥을 채우는 가구라고는 화려한 침대밖에 없다. 한마디로 침실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천장을 보니 아주 아름다운 물건이 달려 있다. 바로 활짝 핀 봄꽃 모양의 샹들리에다. 마리는 그와 똑같이 생긴 샹들리에를 언젠가 본 적이 있다. 그래. 그때였지. 바너의 여관 침묵의 장에 머무르면서 보았던 그 샹들리에! 마리가 손뼉을 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와아! 너무 예뻐! 이게 내 선물이야, 길드장?” “예전에 가지고 싶어 했잖아? 뒤늦게 생각나서 말이지.” 하이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졸부의 방식이란.’ 하지만 아가씨께서 저 예쁘기만 하고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또 우정이 어쩌니 하며 냉큼 받으실 것 같단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런 하이너의 예상은 틀리고 말았다. 마리가 륀체르에게 정중히 말했다. “고맙지만 지금은 받을 수 없어. 알다시피 나는 중대한 임무를 앞둔 떠돌이잖아.” 륀체르는 그게 뭐 대수냐는 듯 대꾸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게 이 몸 아니겠어? 걱정하지 마라. 내가 책임지고 잘 보관해놓을 테니.” “고마워!” “그래서 말인데, 와트프… 아니, 마리니시네.” 륀체르는 고개를 숙여 마리의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마리 혼자만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수한 복장을 한 륀체르는 그 어느 때보다 륀체르답고 소년 같아 보인다. 무려 서른 살이라는 나이에도 말이다. 륀체르가 샹들리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대뜸 제의했다. “우리 이거 환하게 켜놓고 저 침대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볼까?” 륀체르의 눈동자는 은밀한 기대를 하며 반짝였다. 누가 들어도 흑심 가득한 제안이리라. 하이너의 인상이 구겨지는 그때, 마리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은 생각이야! 이 넓은 침대를 쓰는 김에 우리 셋이서 오붓하게 베개 싸움해보는 건 어때? 나 어릴 적부터 베개 싸움하는 게 소망이었는데 내 동생이 유치하다며 한 번도 상대해준 적이 없거든!”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059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그녀에게 베개 싸움이란 유년 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하나의 작은 소망이었다. 기대감에 잔뜩 부푼 그녀는 가느다란 팔을 뻗어 두 남자의 어깨에 휘감았다. 하이너는 그녀의 유치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베개 싸움이라니. 어쩐지 오를린에서처럼 아가씨의 보모 노릇을 다시 하게 된 기분이다. 륀체르는 잠시간 말이 없다가 눈을 빛내며 마리에게 물었다. “좋아. 베개 싸움이라… 모두 웃통 까고 하기 어때?” *** 연회가 파했다. 참석한 사람들도 한둘 씩 숙소의 돔에 들어가 잠을 잤다. 그사이 베개 싸움의 준비는 완료되었다. 침실의 봄꽃 샹들리에 아래서 하이너와 륀체르 두 남자가 웃통을 벗고 커다란 베개를 든 채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런 자세를 하는 것만으로도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마리가 두 남자 사이에서 손뼉을 치며 경기의 규칙을 알렸다. “자! 두 사람이 베개 싸움을 하다가 이기는 사람이 나와 붙는 거야. 알았지?” 륀체르는 반드시 이기리라 다짐했다. 이겨야만 마리와 베개 싸움을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그 베개 싸움이 야릇하게 전개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는 결전의 기분을 다지며 고개를 끄덕였고, 하이너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기습했다. “와악! 이 성질 급한 드래곤!” 생각지도 못 한 사이에 머리를 세게 맞은 륀체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치 어릴 적 길거리에서 시시껄렁한 불량배와 싸우던 기억이 나면서 온몸이 전율했다. “좋아! 이런 유치한 공격 오랜만이라고! 아주 짜릿해 죽겠군!” 이대로 질 순 없단 생각에 반격을 가했다. 그는 하이너에 비하면 체격이 건장한 편은 아었다. 선이 가는 예쁘장한 얼굴에 어울리게 몸도 날씬한 편이다. 힘은 부족하지만, 재빠르고 날렵한 공격을 하기는 좋다. 길바닥 생활을 하면서 불량한 자들에게서 몸을 지키고자 각종 체술을 연마했고 길드장에 오른 뒤로도 끊임없이 훈련해왔기에 연습 경기를 할 때도 쉽사리 지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하이너는 륀체르의 그런 실력을 잘 알지 못했다. 단지 자신의 첫 공격에 륀체르가 심하게 휘청거리는 것을 보고 돌연 미안한 마음이 들 뿐. 기습에다가 너무 강하게 후려쳤나? 제아무리 미운 녀석이라 해도 이건 아니다 싶은 기분이 든다. 동네 꼬마에게 힘자랑한 괴수가 된 것 같지 않은가. 하여 하이너는 적당히 륀체르의 반격을 허용하고 일부러 맞아주는 척도 했다. 그런데……. “이야아아아오호아아앗! 아뵤오!” 거대새의 괴음 같은 소리를 지른 륀체르가 다짜고짜 베개를 번개 같은 속도로 연타해왔다. 과장을 보태서 말하자면 팔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이것은… 그래. 동한이나 서한에서 다절곤을 휘두를 때나 쓴다는 기술로 그 모양새가 방정맞기 짝이 없다. 그런데 방정맞은 만큼이나 또 빠르다! 하이너는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드는 베개에 연타를 허용했다. ‘뭐지? 이 촐랑거리는 기술은? 하…….’ 베개에서 빠진 하얀 깃털이 얄밉게 휘날렸다. 하이너는 아픔보다 짜증을 더 느꼈다. 길드장 이 녀석이 외국 무예를 섭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 녀석! 이젠 안 봐준다!’ 하이너는 기사답게 쓸데없는 움직임은 절제하며 베개를 둔기류처럼 강력하게 휘둘러 공격했다. 나중에는 륀체르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베개가 날아오기 무섭게 뒤로 빠졌다. 그리고 상체를 숙여 륀체르의 허리를 베개로 강타했다. 명치에 부서질 듯한 고통이 엄습한 륀체르가 신음을 삼켰다. “허으으!” “모양 빠지네, 길드장.” 마리가 실망이라는 듯 중얼거리자 륀체르는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싸우는 그들은 한 사람만의 우위로 승리의 종지부를 찍나 싶을 때 또 판도가 뒤바뀌어 점점 끝을 예측할 수 없는 지루한 싸움으로 변했다. 마리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서로를 향해 죽일 듯 베개를 돌격하는 그들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 누가 대결하는 남자들의 모습이 멋있다고 했는가? 지금 저들의 대결은 완전히 수면제에 불과할 뿐이다. 그녀는 허공에 휘날리는 깃털 하나를 집고서는 푸념했다. “베개 싸움이 이리도 금세 시시해질 줄은 몰랐네.” 하지만 두 남자는 그녀의 말이 귀에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싸움에 열심이다. 두 남자의 베개는 모두 깃털이 반쯤 나가 너덜너덜해졌고, 륀체르는 그런 힘 빠진 베개도 무기나 다름없다고 여기며 치사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 치사한 공격이란 바로 남자의 중대한 부위를 노리는 것이었다. ‘젠장! 어딜 치려고 하는 거냐!’ 위기에 처한 하이너는 요리조리 피하며 자신 또한 비겁한 수를 쓰기로 했다. ‘내 비록 기사도를 따른다고 그동안 정정당당한 대결을 추구해 왔지만, 너 같은 놈팡이에겐 그런 기사도도 아깝지!’ 그는 드래콘의 열기조절마법을 이용하여 주변의 수증기를 모아 륀체르의 눈앞에 쏘았다. 순식간에 륀체르의 눈앞에는 사람 손바닥 만한 모양의 안개가 생성되었고, 륀체르는 앞이 잘 보이지 않아 허우적거려야 했다. 그러다 그는 뒤늦게야 이 드래곤 기사가 마법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후후, 드래곤 기사님이 치사한 기습도 모자라 그런 꼼수마저 쓰신다? 좋아.’ 륀체르는 여태까지 펼친 공격과는 조금 다른 공격을 모색했다. 과거 길바닥 시절, 아름다운 외모로 무수한 손님을 끈 적이 있다. 여자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 남자들까지도 후리던 얼굴, 이 얼굴로 다시 한 번 드래곤 기사님에게 유혹해야 한다! 연회장에서 한쪽 눈을 감고 애교를 부리던 때처럼! 그는 하이너에게 다가가 밀착하듯 안겼다. 하이너는 공격도 하지 않고 안겨오는 륀체르에게 당황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륀체르가 초승달처럼 눈을 휘며 기다란 눈썹을 파르르 떨더니 갑자기 한쪽 눈을 찡긋! 하고 감았다. 찡긋! 하는 그 순간엔 마치 사파이어 보석이 수면 위에 떨어지는 것처럼 맑은소리가 나는 듯했다. 그것을 본 하이너는 이번에도 당황해 뒷걸음질 쳤다. ‘이 녀석 이거, 왜 툭하면 눈을 저렇게…….’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더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륀체르는 찰싹 붙은 채로 따라와 입술까지 쭉 내밀었다. 마치 입맞춤해달라고 앙탈을 부리는 여자와 같이. ‘후후, 어떠냐? 눈 애교 한 방에 뒷걸음질 치더니 입술을 들이미니까 몸을 떨기까지 하는군?’ 약삭빠른 륀체르는 그 시간을 놓치지 않고 하이너의 다리를 걸어 자빠뜨리면서 그의 베개마저 빼앗아버렸다. 그리고 두 베개 모두를 들고 환호했다. 흡사 승전하여 돌아온 장군과 같은 위세다. “하하하! 내가 승리야! 내가 드래곤을 이겼다고!” 마리도 일어나서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어머나! 이건 기록적인 날이야! 하이너가 싸움에서 질 때도 다 있네! 어쨌든 륀체르! 베개 싸움의 강자군! 축하해!” 그녀는 싸움이 지루해서 잠이라도 자고 싶을 찰나에 결판이 나서 아주 기뻤다. 그들이 환호하는 그때, 하이너는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베개 싸움을 해본 적도 없었고, 이런 황당한 식으로 싸움에 져본 적도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늘따라 눈병이 난 것처럼 구는 륀체르란 녀석이 이상했고, 그 녀석이 입술을 쭉 내밀며 이상한 짓을 하려 한 것도 기분이 나빴다. 패배라니, 이런 식의 패배라니! 그저 지금 이 현실을 머릿속에서 아주 새까맣게 지우고만 싶다. 그런 와중에 륀체르가 마리에게 으스대며 다가갔다. “자, 마리니시네. 이기는 사람이 너와 싸울 수 있다고 했던가? 이제 나는 너와 싸움을 하고 싶은데?” 그는 하이너 쪽을 보며 약 올리듯 부탁했다. “그러니, 드래곤 기사님! 좀 나가주실까?” 앉아있던 하이너는 단숨에 일어나 륀체르를 쏘아보았다. 밉긴 하나 어쨌든 바너의 길드 마스터이기 때문에 예를 차린 말이 나왔다. “이해할 수 없군요. 길드장 님. 두 분이 싸우면 싸우는 거지, 어째서 제가 나가야 합니까?” “그야 싸움에서 졌으니 더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아? 게다가 호위기사 노릇도 이런 시간엔 보통 쉬는 거 아닌가?” 하이너는 저 능구렁이 같은 길드장과 아가씨를 침실에 단둘이 두고서 떠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봄꽃 샹들리에가 꺼지면 길드장 저 녀석이 아가씨께 무슨 일을 저지를지 어찌 알까! 하여 그는 이 방에서 나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글쎄요. 가능하면 항상 아가씨 곁에 있자는 게 제 신조라서.” 빈정거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항상? 그건 호위기사가 아니라 보모 아닌가? 아가씨께서 보모가 필요해 드래곤을 곁에 둔 것은 아닐 텐데. 그리고 신조라는 말을 이럴 때 함부로 쓰는 거 아니라고…… 이봐, 기사면 기사답게 승패를 인정해. 지질해 보이잖아.” 하이너는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더는 그에게 예의를 지킬 수 없다. 그는 곧바로 륀체르의 멱살을 잡은 뒤, 아가씨가 듣지 못할 정도로 나지막이 그르렁거렸다. “정말이지… 허튼수작 부릴 생각일랑 마라.” “허튼수작?” “저분께 네가 감히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거, 다 알고 있다.” “어떤 이상한 짓? 이런 이상한 짓?” 륀체르는 익살을 부리며 조금 전처럼 또 한 쪽 눈을 감는 애교를 부렸다. 또한, 입술을 내미는 행동까지! 하이너의 입에서 꾹 참았던 욕설이 흘러나오고야 말았다. “젠장, 갈보같이 생긴 놈이 몹쓸 눈병엔 걸려선…….” “눈병 아닌데? 드래곤 기사님께 퍼붓는 내 마음인데?” 하이너는 하품하는 아가씨의 눈치를 살피다가 륀체르의 멱살을 쥐고 한쪽 벽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곧 죽일 듯이 살벌한 눈빛을 쏘며 따졌다. “마음? 대체 그 재수 없는 짓은 왜 하지?” “말했잖아? 널 향한 내 마음이라고. 나는 드래곤인 너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 그런 순수한 마음일 뿐이라고.” 드래곤과 친해져야만 앞으로의 일도 수월할 것이다. 그러한 전략을 그는 순수한 마음이라 포장했다. 듣던 하이너는 가소롭다는 듯이 조용히 실소를 흘렸다. “그러다가 역효과가 난다는 건 모르나 보지?” “역효과?” “사이좋게 지내기는커녕 광산 시추 구멍에 매장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알아라. 그리고 당신, 바너에서부터 자꾸 우리 아가씨께 수작을 부리려는데…….” 수작을 부릴 상대를 가려가면서 부려야지. 감히 아가씨께……. 현재 아가씨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연인이다. 아가씨는 고향에선 방탕하게 굴었는지 몰라도 여행을 시작하면서 목표 달성에 집중하며 살다 보니 최근 그 어떤 추문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 말인즉, 아가씨는 철이 드셨다는 말씀! 그러니 아가씨가 지금의 연인을 배신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장담한다. 그런 끈끈한 관계인데 아가씨가 륀체르가 눈에 들어올까? 오히려 륀체르가 저런 짓을 하면 할수록 질려서 친구 사이마저 깨버리려고 하시겠지. “…… 너의 그런 수작도 언젠간 역효과가 날 테지.” 왠지 모르게 자만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하이너가 몹시 미워 보인 륀체르는 갑자기 뺨을 부풀리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열 살 어린 하이너에게 어른이 아닌 꼬마처럼 굴었다. “드래곤이면 다냐? 네가 잘 모르나 본데 이번 일의 칼은 내가 쥐고 있다고. 너희 아가씨가 내게 부탁하는 입장이란 걸 잊었나 보지?” 륀체르는 마리의 동의를 원한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륀체르의 소깡패 짓에는 관심도 없이 이미 베개를 껴안고 널브러져 잠자고 있었다. 륀체르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달콤한 과실을 따 먹기 위해 승리했는데, 정작 그 과실은 저 멀리 꿈나라로 떠나려 하다니. “안 돼! 이럴 수 없어! 눈을 떠! 뜨란 말이야! 나와 베개 싸움하기로 했잖아!” 그녀를 깨우러 가려는 그를 하이너가 말렸다. “젠장! 주무신다! 깨우지 마라!” 그녀와 많은 밤을 공유한 호위기사는 그녀의 잠든 표정만 보고도 그녀가 얼마나 깊게 잠들었는지 알았고, 그래서 잠을 깨우는 걸 원치 않았다. 마리가 이대로 잠 드는 것이 몹시 싫은 륀체르는 하이너의 손을 뿌리쳤다. “내 마음이다!” 륀체르는 마리의 얼굴을 보았다. 잠든 그녀의 얼굴은 보는 사람마저도 포근히 졸리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 거짓말쟁이 계집…….” “감히 누구에게 계집이란 말을 쓰는 건가!” 하이너는 그렇게 쏘아붙이며 이불로 아가씨의 몸을 덮어주었다. 그런 그를 보고 륀체르가 못 말리겠다는 듯 픽 웃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애벌레처럼 웅크려 쌔근쌔근 잠든 마리를 보니 깨우는 게 자신도 점점 미안해진다. 괜스레 호위기사를 놀리는 말이 나왔다. “보모가 확실하군.” “기사 겸 드래곤 겸 보모도 하는 편이지. 오를린 때부터 그래 왔다.” “휴우. 좋다. 그럼 나도 여기서 잘 거다.” 함께 오붓한 베개 싸움을 하지 못하는 이상, 그녀의 옆에서 잠이라도 같이 자야겠다는 게 그의 고집이다. 하이너는 그런 륀체르를 노려보다가 아가씨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이 밤 동안 저 녀석이 아가씨를 건드리지 않도록 지키는 게 자신의 임무다. ‘가만.’ 그러다 문득 그는 좀 더 확실한 경계가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아가씨를 가운데 두고 두 남자가 양쪽에서 잔다는 건 몹시 위험할 것이다. 하여, 하이너는 아가씨의 몸을 번쩍 들어 안았다. 그리고 그 가벼운 몸을 침대 저 구석에 고이 내려놓았다. 황당한 륀체르는 마냥 지켜만 보았다. 호위기사는 바지 허리끈을 풀어내려 그것으로 륀체르와 아가씨 사이에 선을 표시했다. 그리고 륀체르에게 똑똑히 경고해두었다. “넘어오면 죽인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060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로젠플라드 성도. 드넓은 광장에 하얀 장미들이 싱싱하게 가득 피었다. 이런 겨울에도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성도의 신성 마력덕분이다. 그 아름다운 장미 밭 너머로 붉은 첨탑형 건물 두 개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높이도 너비도 같은 두 건물 사이엔 역삼각형 모양의 거대 금속 조각품이 우뚝 세워져 있는데, 멀리서 보자면 이 건물들과 조각품이 하나의 저울 모양을 그리는 듯하다. 매우 장엄한 분위기의 이곳은 ‘신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대법원이다. 신의 뜻은 원래 황도 로귀하르트에 있었지만, 로젠플라드 신의회의 입김이 거세지면서 이곳 성도로 자리를 옮겼다. 그 후로 이곳에서 근무하는 법무자들은 모두 로젠플라드의 신도들로 바뀌었다. 이곳에서 내려진 판결 또한 제국법에 기초하기보다 신법에 기초하여 내려질 때가 많았다. 하여 제국민들에게 신의 뜻이 곧 제국의 법이라는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신의 배후가 할데바인 대공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리라. 이른 새벽부터 재판이 열린다. 재판이 열리기엔 이례적인 시각이지만, 그것엔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오늘 열릴 재판이 비공개 황족 재판이라는 것. 법무자들은 황족 전체의 체면 문제로 많은 이목을 집중하지 않기 위해 황실 정무가 시작되기 전인 이 시간에 재판하기로 한 것이다. 오늘 재판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황태자비다. 회장은 그리 넓지 않은 곳이 선택되었다. 그곳엔 지금 다수의 원고와 한 명의 피고가 출석해 착석 중이다. 원고는 할데바인 대공의 딸을 비롯한 각 영지에서 온 예전 황태자비 후보들이고, 피고는 황태자비다. 그리고 이번 재판은 특이하게도 신성 정부에서 파견한 진행자가 참여한다. 표면상으로는 재판 도중 황족의 품위가 떨어질 상황도 일어날 수 있음을 대비해 그때 중재할 사람이 필요하므로 진행자를 내세운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할데바인에 매수당한 신성 정부 측이 황태자비를 벼랑으로 몰고 가기 위한 악수로 진행자를 쓴다고 여겼다. 진행자는 만면에 미소 가득한 채로 참석자들에게 인사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인사를 받는 이는 오늘 피고인인 황태자비의 남편, 즉 황태자가 되었다. “야울을 지키는 왕이시자 로젠플라드의 수호자 그리고 제국의 황태자이신 비오르틴 뤼크…….” 황태자는 자리가 자리인 만큼 지루한 인사를 다 들을 생각이 없기에 한 손을 들어 되었다는 손짓을 하였다. 그런데 다른 때 같으면 인사치레가 중단되었을 것이나, 지금 이 진행자는 인사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황태자의 손짓을 봐놓고서도 고집스럽게 인사를 마저 하였다. “… 뤼크, 피나센토 로귀하르트 전하. 바쁘신데 황도에서 이곳 성도까지 이른 시간에 자리해주신 것에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황태자의 손 신호를 무시한 진행자는 마치 ‘이곳에선 황태자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빈정거리는 듯했다. 황태자는 고개를 돌려 진행자를 보았다. 무감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실은 진행자를 노려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진행자는 그 다음으로 황태자비를 향해 인사했다. 황태자비에겐 황태자에게 인사했을 때처럼 무수한 칭호가 따라붙었다. “야울을 지키는 여왕이시자 로젠플라드의 성녀 그리고 제국의 황태자비 전하께 송구하다는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그 먼 황도에서 홑몸도 아닌데 이렇게 몸소 와주신…….” 로젠플라드의 성녀라는 부분을 힘주어 말한 것은 이곳 법원의 심판, 신의 뜻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강압적인 기운이 배어 있다. 진행자의 인사는 할데바인 대공의 딸을 비롯한 전 황태자비 후보들에게도 건네졌다. 그 사이 로테는 몇 번이나 주먹을 쥐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사실 오늘 재판에 관한 간략한 설명을 들으면서 너무 당황한 터라 이곳에 오는 내내 마음의 안정이 되질 않았다. ‘감히 황태자비인 나를 모함하다니….’ 하지만……. 로테는 문득 남편을 보았다. 남편은 언제나 그러하듯 음울한 회색 눈으로 모든 이들을 무감하게 바라볼 뿐이다. 맨 처음 황궁에서 저 표정을 보았을 땐 생명력이 없는 조각 같다고 생각했지만, 벌써 그에게 익숙해진 것인지 그의 기분이 느껴졌다. 담담함과 당당함. 그리고 그 당당함은 다르게 보면 호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로테는 그런 남편을 보고 조금은 안심했다. ‘그는 황태자라고. 그가 제국의 미래인데… 그의 아내인 나에게 칼이 들이밀릴 리 없잖아.’ 배 속에 든 황손의 존재 때문인지 그녀는 어느샌가 은근한 교만에 물들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자각하지 못했다. 재판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원고 측 변호인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변호인은 할데바인 대공이 직접 고용한 자로,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험상궂게 생긴 여인인데 그녀의 쇠를 갉아먹는 듯한 탁한 목소리가 회장의 고압적인 아치형 천장 아래 가득 울렸다. “황태자비 로테아르카, 아니 황태자비 마리니시네는…….” 딱 거기까지 말이 나왔을 때 장내가 술렁였다. 황태자비의 이름을 아예 ‘마리니시네’라고 단정 지으면서 시작되는 공격적인 언행. 변호인은 그런 반응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제 할 말을 이어갔다. “마리니시네 그녀는 동생 로테아르카를 시기하여 자기가 동생인 양 위장하고 황태자비 후보자 자격으로 입궁한 게 사실입니까?” 로테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어이가 없을 뿐. 애당초 자기보고 로테가 아니라 언니 마리라고 부르면서 질문을 해버리다니, 그런 질문에 대답하는 것부터 웃긴 일이다. 그때 진행자가 여전히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 채로 대답을 재촉했다. “피고는 대답 부탁합니다.” 진행자가 호칭한 ‘피고’라는 단어에 압받을 받은 로테는 겨우 대답했다. “당황스럽군요. 저는, 마리니시네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원고 측 변호인은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갑자기 판결을 내리는 자에게 증인을 세우겠다고 요청하였고, 그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아마도 지금 이 회장에 있는 황태자비가 마리니시네가 확실하다는 증거를 말해줄 사람이라 할 수 있겠군요, 후후.” 얼마 후, 회장에 한 청년이 나타났다. 소탈하지만 깔끔한 복장에 인상은 말끔한 청년이다. 원고 측 변호인은 반가운 손님이라도 본 듯 청년을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자기소개를 해주시죠.” 청년은 오를린 방언으로 신 앞에 자신을 소개했다. “거룩하신 로젠플라드시여, 저는 오를린에서 온 그라토라고 합니다. 오를린에서 아버지의 제분업을 물려받아 하고 있으며 나이는 스물두 살로 오늘 이렇게 오게 된 이유는…….” 어제까지만 해도 황후의 별장 트리아노네 지하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던 그라토는 할데바인이 고용한 마의사들에게 말끔히 치료받고 안구 또한 회복되어 사지 멀쩡한 모습이다. 소개를 마친 그는 거짓 증언을 시작했다. 트리아노네에서 받은 고문을 다시 받지 않으려고, 그리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마리니시네 그녀는 그녀의 정숙한 동생인 로테아르카를 늘 시기했습니다. 제게 그 못난 마음을 고백한 적도 있지요. 동생만 보면 답답하고 숨이 막힌다고. 틀어박혀서 꽃꽂이밖에 할 줄 모르는 따분하고 멍청한 아이라고. 그런 식으로 동생을 욕하고 희화화하던 그녀가 어느 순간 달라졌습니다. 예. 오를린 영주에게 황태자비 후보 간택전의 이야기가 들어오면서부터 말입니다. 영주는 당연히 여성으로서 흠잡을 곳 없는 로테아르카를 후보로 들이려 했으나 마리니시네가 반대했지요. 마리니시네는 자기가 무조건 황궁의 안주인이 되어야 한다며 모든 이를 속이고…….” 그라토가 ‘마리니시네’라는 이름을 말할 때마다 그의 눈빛은 로테에게 향했다. 그것은 마치 지금 저 황태자비가 마리니시네라고 이르는 듯했다. 그라토의 발언에 장내가 또 한 번 술렁였고 로테는 부들부들 떨었다. 언니가 고향에서 무수한 남자와 염문을 뿌린 것은 사실이지만, 저 청년은 그 남자들에 속하지 않았다. 언니의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지금은 마치 언니의 과거 애인이라도 된 듯이 모든 이를 기만하는 데 열성이다. 그라토는 황태자비를 보고 손가락질 하며 외쳤다. “정말이지 마리니시네 ‘저’ 여자는 인두겁을 쓴 악마인 게 분명합니다! 그녀는 나와의 잠자리로도 부족한지 이틀이 멀다고 남자를 갈아치웠고, 때로는 다른 남자와의 잠자리에 나도 함께하자며 불러들이질 않나, 그 남자는 그녀의 호위기사로 이름은…!” 그때 진행자가 손을 들어 발언을 중단시켰고, 판결을 내리는 자 또한 종을 울리며 그라토를 제지했다. “증인은 묻는 말에만 대답해주길 바랍니다. 그라토. 즉, 당신이 하고자 하는 말은 지금 이 회장에 나와 계신 분이 로테아르카가 아니라 마리니시네란 말입니까?” “그러합니다!” 듣다 못 한 로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다. 그때, 황태자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의 눈이 말하고 있다. 아직은 일어날 때가 아니라고. 성급하게 굴었다간 본전도 찾지 못할 거라고. 로테는 떨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하며 시선을 내렸다. 그라토가 판결을 내리는 자에게 주의를 받았는데도 말을 절대 멈추지 않았다. “여러분은 지금 속고 계십니다! 저 여자는 정숙하고 현명한 로테아르카가 아니라 백치에다 난잡한 성생활을 즐기는 마리니시네입니다! 황궁이란 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창녀 같은 여자란 말입니다!” 듣다 못 한 로테 측 변호인이 일어나 외쳤다. “저런 발언은 황족 모독죄에 해당합니다만!” 그러자 원고 측 변호인이 맞서 외쳤다. “아직 증인 출석이 더 남았습니다! 황족 모독인지 아닌지는 그때 가서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원고 측 변호인의 쇳소리 같은 목소리에 로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제부터 나오는 증인도 저 그라토라는 남자처럼 거짓 증언을 퍼부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재판은 재판이 아니다. ‘대체 이게 뭐야! 이상한 언니 때문에 왜 나만……!’ 로테는 구원의 손길을 바라듯 남편을 보았지만, 그녀의 남편은 무심한 태도로 방관할 뿐이다. 이윽고 원고 측 변호인이 두 번째로 데려온 증인이 출입문을 통해 들어왔다. 그 증인을 본 로테의 눈이 금방이라도 피를 쏟을 듯 충혈되었다. “렌!” 그녀가 나지막이 전 시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 시녀라고도 할 수 없다. 렌은 정식 시녀가 되기도 전에 궁에서 사라져버리지 않았던가. 그 아이가 지금 증인으로 출석했다. 무엇 때문인지 안색이 창백하고 조금 마른 듯하지만, 입은 복장이 고급스러운 것을 보니 고생하며 지낸 것 같진 않아 로테는 안심했다. ‘소식이 끊겨 불안했는데 잘 지내고 있나 보구나, 렌.’ 로테는 최대한 렌과 눈을 마주치려 했으나, 렌은 어째서인지 로테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이따금 눈을 마주쳐도 급하게 회피할 뿐. 황태자비 간택 연회 내내 로테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렌이 증인으로 출석하자, 할데바인 대공의 딸을 비롯한 많은 후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머나… 기르던 개가 주인을 배신하는 꼴이 되려나?” “그러게 주인이 주인답게 행실을 했어야지.” “참, 그렇지? 호호호…….” 그들이 로테를 비웃는 사이, 이미 렌의 증언은 이어졌다. “저는 원래 로테아르카 아가씨의 하녀였습니다. 아가씨는 참되고 멋진 분이셨지요. 어릴 적부터 저를 친자매처럼 대해주셨고 저 또한 아가씨와…….” 그때까지만 해도 로테는 안심했다. 렌이 나타나 자신의 진실을 밝혀주겠거니 기대 했지만, 그것은 이 살벌한 곳을 우습게보고 하는 무른 생각일 뿐이다. 렌은 돌연 초점이 없는 사람처럼 눈을 흐리더니 로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조금 전 증인으로 나왔던 그라토보다 더욱 큰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저기 앉은 저 여자는 절대 로테 아가씨가 아닙니다! 저 여자는 간악한 마리니시네입니다! 오를린에서 황태자비 간택전의 요청을 받은 그때부터 저 여자는 로테 아가씨를 눈엣가시로 여겼습니다! 급기야 로테 아가씨를 드래곤에 팔아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지요! 그리고 자기가 아가씨인 양 아가씨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저 여자의 협박으로 본의 아니게 모두를 속여야 했습니다! 오를린 영주님 내외까지도!” 그 순간, 로테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만 같았다. “렌, 네가 어떻게 나를…….” 이곳이 재판장만 아니었다면 렌의 어깨를 잡고 흔들면서 묻고 싶다. 대관절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게 무엇이냐고. 그게 무엇이기에 이리도 나를 위기로 모느냐고! 할데바인에 매수당해서 이렇게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이냐고! 지금 이 재판에선 피고와 가까이 지내던 전 하녀의 증언만큼 확실하게 받아들여지는 정보는 없다. 재판장은 렌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렌은 할데바인의 꼭두각시가 되어 철저히 그들이 원하는 대로만 대답해주었다. 백치에다 사고뭉치, 방탕하고 음란한 마리니시네는 그라토와의 잠자리는 물론이요, 다른 남자들과도 동시에 즐기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때로는 그 하녀인 자신에게도 그런 음란한 행동에 함께하기를 강요했다고, 그 밖에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거짓 내용을 증언이랍시고 내놓았다. 그런 것만으로도 로테의 정신을 조각내놓기엔 충분했는데 렌은 로테와 드래곤까지 연관하여 모함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저 여자는 검은 드래곤과 사통하여 동생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다시는 오를린에 돌아오지 못하게 말이죠! 그리고 자기 영지인 오를린이 네히트와 통합된 후에 더욱 욕심이 생겨서 바너까지 오를린에 흡수하려 했습니다! 바너에서 일어난 드래곤 소동 사건이 그 증거입니다!” 원고 측 변호인은 렌을 거들었다. “비공개 재판이기에 피고 측의 부모를 불러오진 못했지만, 드래곤 제물설은 그녀의 부모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지금 그 증언을 받기 위해 오를린에 사람을 보낸 상태이며 결과는 2차 재판에 제출할 예정입니다.” 진행자가 자연스럽게 그 말을 받았다. “그렇군요. 자. 그럼 원고 측 분들의 의견을 들어볼까요?” 피고 측엔 어떤 항변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재판이 돌아갔다. 할데바인 대공의 딸부터 시작하여 친 할데바인 파 영지에서 온 여인들이 너도나도 황태자비의 진실에 관하여 한소리씩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먹이를 보고 달려드는 짐승들 같았다. 어쩐지 저 여자가 처음부터 이상하더라, 황실 예절도 지킬 줄 모르고 귀족이 가져야 할 품위도 없더라, 남자 시종들에게도 헤픈 웃음을 보이고, 간택전일 때부터 제 침실로 황태자 전하를 끌어들이질 않나, 향수를 자주 바꾸는 사치를 부리고, 일찍 회임한 것도 전부 노린 것 아니었느냐는 등……. 누가 들어도 질투와 시기로 얼룩진 악의적인 평들 일색이다. 로테는 정신이 아뜩하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아 한동안 눈을 감아야 했다. 귓가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말들이 마치 악마의 노래 같다. 모두가 적이 되고 믿었던 렌마저 자신을 음해한다. 음모와 모략이 끊이질 않는 곳이 황궁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각오는 금방이라도 짓뭉개질 무른 과일보다 못한 듯하다. ‘내게, 내게 대체 어찌 이런 일이…….’ 그녀에겐 구원의 손길이 필요했다. 그녀는 눈을 천천히 뜨며 남편을 보았다. 야속하게도, 황태자는 여전히 침묵만 지킬 뿐이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061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황태자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일전에 바너의 길드 마스터가 보여준 로테와 똑같이 생긴 금발 여자를 암암리에 수소문하고 있긴 하나, 그것은 개인적인 추억에 의한 일일 뿐 지금 일과는 전혀 연관이 없고 연관시킬 생각조차 없다. 그는 황태자비 자리에 앉은 ‘이’가 어떻게 이 위기를 타개할지 궁금할 뿐이다. 그녀가 마리니시네든 로테아르카든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해내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내 여자의 자격이 없는 거겠지.’ *** 로귀하르트 제국. 풍년의 평지 로샤타르트. 어느 유명한 관광업체. 이곳은 오를린에서 온 관광객들을 로샤타르트의 명소에 안내하는 일을 도맡아 한다. 이들의 대표에게 비밀 전서가 도착했다. 전서를 읽은 대표는 평소 유창하게 쓰는 로샤타르트의 말을 버리고 오를린의 방언으로 외쳤다. “은혜를 갚을 기회가 왔군!” *** 로귀하르트 제국. 신비의 지역 루앙. 루앙엔 오를린 출신의 젊은이가 둘이나 있다. 하나는 유명 단장가게를 운영하는 젊은이고 하나는 인기 마법사 공연단 음악 총괄책임자다. 그들에게 비밀 전서가 도착했다. 이들은 전서를 읽고 나서 하나같이 오를린 방언으로 외쳤다. “그분이 위기에 처하다니! 내가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일이야!” *** 로귀하르트 제국. 얼음 도시 시귀르. 겨울이 끝나가는 때, 시귀르의 조각가들은 황도에서 열릴 축제에 필요한 얼음을 조각하느라 바쁘다. 이 중 한 오를린 출신의 유명 조각가에서 비밀 전서가 날아들었다. 전서를 다 읽어 본 조각가는 남은 작업을 도제들에게 맡기고 서둘러 로젠플라드 성도로 갈 준비를 했다. “사건이 이렇게 돌아가는 걸 정말이지 두고 볼 수 없군!” *** 재판이 열린지 사흘도 되지 않아 2차 비공개 재판이 열렸다. 말이 비공개지 1차 재판에서 일어난 일이 황도에 퍼지고 말았고, 이에 여러 사람이 온갖 경로로 재판의 추이를 지켜보려 했다. 황도에서는 이미 재판의 결과에 따른 도박마저 횡행하고 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원고들과 피고는 상대를 이기려고 안간힘을 썼다. 원고 측 여인들은 너도나도 황태자비에 관한 추문들을 흘리며 여론을 조성하느라 바빴고, 로테는 의지할 곳 없는 황궁에서 고군분투하느라 바빴다. 황태자는 가장 먼저 회장에 도착하여 재판을 기다렸다. 그간 궁에서 아내를 대할 때는 재판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평소처럼 대했다. 한 나라의 황손을 회임한 아내를 위해서 황태자 그리고 남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예를 다 했다. 그렇다곤 하나, 오늘 아내를 위해 무엇을 준비한 것은 아니다. 그저 담담하게 지켜볼 생각이다. 물론, 이미 열세의 로테가 패배하는 모습이 생생히 그려졌지만 말이다. ‘자, 내 예상을 깨주시지.’ 황태자비가 회장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황태자의 시선과 태자비의 시선이 우연히 부딪혔는데, 그녀는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형형한 눈빛을 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특유의 표정에서 벗어난 눈빛이다. 왠지 불안함이 보이지 않는다. 황태자는 그 분위기를 의외라고 여겼다. 약간은 기대하기도 했다. 그녀가 어떤 방패를 가져왔는지, 또 어떤 반격의 무기를 준비해왔는지. 그는 막 곁에 앉은 아내에게 물었다. “간밤 잠은 잘 잤소?” “덕분에요.” “마음고생 한 것과는 다르게 오늘따라 얼굴이 밝아 보이는군. 너무 밝아 보여서…… 너답지 않아.” “그런가요?” “네 그런 눈빛을 보는 건 처음이야.” “저도 이런 기분은 처음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군요.” “무엇이…?” “글쎄요. 이기기 위해선 때론 저를 버려야 할 때도 있는 법인가 봅니다. 청컨대, 설혹 오늘 제가 황실 체면을 상하게 하는 행동을 하더라도 용서를 해주시길.” 그때까지 황태자는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녀가 무엇을 각오하고 이곳에 나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뭐, 기대하지.” 재판은 금세 시작되었다. 1차 재판에서 나온 진행자는 오늘도 시건방지고 원고 편향적인 태도로 재판을 진행했다. 원고 측이 데려온 증인들은 1차 재판에서 그라토와 렌이 했던 증언을 못 박아주는 역할을 하러 나온 듯 황태자비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그라토와 같은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자기가 지금 황태자비의 과거 연인이었고 음탕하고 난잡한 관계를 즐겼다고 거짓 증언을 일삼았고, 심지어 지금 황태자비의 태중 아이가 제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파렴치한까지 나타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생판 모르는 사람, 가까이 지내던 하녀의 배신도 모자라 혈족마저 로테를 배신했다. 오를린 영주의 친척, 즉 로테아르카의 사촌까지 나서서 황태자비를 모함했다. “그녀는 입궁 전날까지 뻔뻔했지요! 글쎄 친척들에게 이런 망발을 일삼지 뭡니까? 곧 검은 드래곤이 오를린에 나타나 동생에게 구혼할 거라나! 그것은 자기 동생이 드래곤에게 납치될 것을 뻔뻔하고도 천연덕스럽게 포장하여 예고한 것이었어요!” 그녀는 오를린 일족에 다른 성숙한 여인들도 많은데 오직 오를린 영주의 딸만 황태자비 간택전에 초청을 받은 것에 관하여 평소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로테가 친척의 배신에 치를 떠는 그때, 뜬금없이 황실 재정을 담당하는 서기도 증인으로 나섰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녀는 황태자비에 오를 것을 미리 알고 황의회의 동의 없이 제국 재정을 멋대로 건드리기도 했지요!” 만면에 미소 가득한 진행자가 자세한 사항을 재촉했다. “오호. 그 일은 정말 지나칠 수 없군요. 상세 내용을 부탁합니다만.” “예! 그녀가 황태자비로 간택되기 전후에, 제국 재정의 계획엔 없던 여러 소비가 생겼습니다. 어이없게도 머나먼 시골 오를린과 황도를 잇는 텔레포트 홀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바너의 길드마스터는 거액의 왕관을 제작해야 했습니다. 피고는 내궁부의 동의 없이 자신의 시종들을 자신의 고향 사람들로만 채우려 시도한 적도 있었고, 자기 신분을 이용하여 사병을 모으는 데도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얼마나 탐욕스럽고 허영에 빠진 여자인지 알 수 있지요!” 재정 담당 서기는 관련 서류 다발을 진행자에게 전해주며 말을 마쳤다. “황태자비가 입궁한 후의 기록입니다. 제국 재정이 엉망이 된 시점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진행자에게서 서류를 건네받은 자들이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사실 텔레포트 홀 공사, 거액의 티아라 제작, 시종조 건, 사병 건 모두 황태자가 주도한 것일 뿐 로테는 그에 관해 조금의 의견도 낸 적 없다. 황궁 생활에 적응하기도 바쁜 자신이 어찌 그런 큰일을 요청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남편에게서 고향과 황도의 텔레포트 홀 공사가 시작된다는 말은 전해 듣기는 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반려가 될 이의 고향에 바치는 그의 예우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그게 지금은 자신을 공격하는 도구가 되고야 말았다. 억울하다. 하지만 일전의 재판에서처럼 남편에게 구원의 눈길을 건네진 않았다. 어차피 그래 봐야 이 남자는 언제나 그렇듯 무덤덤하게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그녀는 지금 이런 공격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자신을 다독이며 원고 측의 증언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그 시간이 왔다. 진행자가 피고 측에게 반대 증언의 기회를 준다고 일렀다. 그 말투와 태도는 마치 졸부가 거지에게 적선이라도 하는 것 마냥 오만하고 불손했다. 피고 측 변호인은 기다렸다는 듯 준비된 증인들을 하나둘씩 데려왔다. 그들이 들어서자 장내가 조금 술렁였다. 증인들은 하나같이 말끔한 외모, 세련된 복장, 능숙한 황도의 말투, 중급 이상의 사회적 지위를 가진 남자들이다. 그들을 본 원고 측 증인, 즉 오를린에서 온 시골뜨기 남자들이 바짝 긴장하였다. ‘지, 진짜 마리니시네의 애인들이잖아!’ ‘진짜 마리니시네의 애인’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공통적으로 했다.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마리니시네 루 오를린의 전 연인들입니다. 그런 자격으로 증언하는데, 지금 원고 측의 증인으로 나온 자 중 그 누구도 진짜 미리니시네의 연인이었던 적은 없습니다.” 잠시 말이 멈추다가 가벼운 웃음과 함께 혼잣말이 나왔다. “정말이지 저런 멍청해 보이는 남자들을 그녀가 사귈 리 없잖아.” 가짜 연인들은 큰 죄라도 지은 듯 모두 동요했고, 사람들도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진짜 애인들이 증언을 이어갔다. “저들은 하나같이 마리니시네에게 퇴짜를 맞은 이들이죠. 그래서 고향에 남아 있었던 거고요.” “마리니시네에게 퇴짜를 맞는 것과 고향에 남는 것이 무슨 관련이라도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퇴짜를 맞은 남자들은 고향에 남아 한심한 인생이나 살아가지요. 하지만 그녀와 사귀다가 헤어진 자들은 모두 다른 지역에서 성공하고 맙니다. 이것은 법칙과도 같아요.” “저기,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인지……?” “그녀는 나, 아니, 우리 시골뜨기들에게 구원자나 마찬가지였어요. 그녀와 사귄 연인들은 전부 외지로 나가 성공한 삶을 살고 있거든요. 제 입으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저는 원래 오를린의 소작농 아들로서 따분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언제나 지도만 바라보면서 외지에 가길 꿈꾸었지만, 현실에선 오를린 밖으로 단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겁쟁이였지요. 그런 나에게 그녀가 말했습니다. 해보지도 않고 겁만 먹는 겁쟁이는 오를린의 수치라고. 그 후로는 그녀와 함께 소용돌이 산에 가서 겁을 없애는 훈련을 시작했지요. 말이 훈련이었지만 아주 달콤한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용돌이 산에서 아주 무시무시한 마력 생물을 만났습니다. 그때, 마법이라곤 조금도 쓰지 못하는 제가 맨손으로 그 생물을 때려잡았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오직 마리니시네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예. 제 등에 난 짐승의 발톱이 할퀸 자국이 보이시죠? 이게 그 증거지요. 겁쟁이였던 저는 저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그런 일을 해낸 겁니다. 그리고 그날…… 그녀에게 이별을 선고받았지요. 그녀는…… 겁을 떨쳐낸 너에게 이제 자신의 존재는 필요 없다고…….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그 이별 선언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어서 그녀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 일을 시작했지요. 지금 저는, 로샤타르트 관광업에 몸담고 있습니다. 오를린과 같은 시골 영지에서 로샤타르트로 오려는 여행자들을 안내해주는 일이죠.” 그러자 다른 젊은이들까지 나서서 그와 비슷한 사연을 말했다. “저도 오를린 노예로 귀족들 머리나 빗겨주며 살았죠. 그러던 어느 날 마리니시네 아가씨께서 이렇게 말씀해주시더군요. 너는 손재주가 좋구나! 그 뒤 아가씨께서는 저에게 하녀들의 단장 교육을 맡기셨습니다. 제게 단장법을 교육받은 하녀들은 하나같이 자기 아가씨들의 외모를 빛나게 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지요. 그 후에 아가씨께서는 저를 자유 신분으로 만들어주셨고 현재 저는 루앙의 단장가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오를린의 멋쟁이라는 상호명 아시죠? 요새는 황도에까지 분점을 낸 상태로…….” “저는 오를린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죠. 저희 집은 언제나 저렴한 가구만 만들었습니다. 영지민들이 주로 사용하던 투박한 모양의 의자, 식탁, 나막신…… 저는 그저 나무 깎기 도구가 된 것 같은 제 삶에 늘 염증을 느꼈어요. 그대로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으며 살아야 하나, 아니면 영지를 뛰쳐나와야 하나, 그런 회의를 느끼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가씨께서 한 유명한 조각가분께 저를 제자로 삼아주길 추천하시더군요. 그렇게 저는 이 년간의 도제 생활을 거쳐 현재는 시귀르 얼음 조각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저의 작품은 매년 제국 예술제에…….” “저는 원래 오를린의 자유 신분이었지만 당장 잠을 잘 집도 없는 거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진 거라곤 그렐(현악기의 일종)과 목소리뿐인 저는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번 돈으로 빵 한 조각을 사 먹고 궁핍한 일상을 이어갔죠. 그러던 어느 날 아가씨와 사귀게 되었고, 아가씨는 제 목소리가 뛰어나다며 좀 더 큰 도시로 가서 많은 사람에게 제 노래를 들려줄 것을 권유하셨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직접 제게 교통비까지 대주셨고, 최고급 그렐도 사주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아가씨와 뼈아픈 이별을 해야 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아가씨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저는 현재 루앙 인기 마법사들의 공연관에서 공연 음악을 책임지는 총괄자가 되었거든요…….” 잇따른 증언에 따르면 마리니시네라는 여자는 그저 그런 촌부를 훌륭한 요리사, 복식사, 운동선수 등으로 키워낸 마성의 여자로 표현되었다. 이에 원고 측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증거를 요구하였다. 이미 증인들이 나와서 하는 증언인데 또 증거가 필요하다니? 그들은 자신들이 거쳐 온 행적을 증명하는 서류와 신분을 보이며 증언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알려주어야 했다. 그러자 원고 측은 이번엔 다른 것으로 시비를 걸었다. 증언들이 아무리 사실이라고는 하나 동생을 대신하여 입궁한 피고의 죄는 어찌할 수 없을 거란 주장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재판장에 있는 황태자비를 로테가 아닌 마리로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드디어 로테 측 변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진정한 증언은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로테는 다가올 일을 각오하고 눈을 감았다. 황태자는 그런 아내를 흥미로운 눈길로 보았다. 피고 측 변호인은 증언하러 나온 남자들을 보고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엄중하고도 무겁게 입을 열었다. “먼저 황태자 전하께 용서를 구합니다. 유감스럽게도 궁의 품위를 훼손하는 질문을 던져야겠습니다. 자, 그럼 오를린의 청년으로 살며 마리니시네와 사귀었다던 당신들 모두에게 묻겠습니다.” 진짜 연인들은 질문이 무엇인지 각오한 듯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피고 측 변호인이 한참을 뜸들이다 어렵게 물었다. “연인으로 지냈다면 깊은 관계도 했다는 걸 의미하겠지요. 그런 관계를 한 분들만 대답하시면 됩니다. 로테아르카와 마리니시네를 구분할 수 있는 당신들만의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까?” 한참 동안의 침묵 후에 남자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있습니다.” 그러자 피고 측이 증인으로 내세운 가짜 연인들은 입을 꾹 다문 채로 서로 불안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사건을 지켜보는 황태자는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제 아내를 보았고, 로테는 시선을 내리며 고백했다. “저 역시, 언니와 저를 확실히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진행자는 할데바인 대공 딸의 눈치를 보느라 진행을 할 수 없었다. 그 사이 판결을 내리는 자가 남자들에게 물었다. “그 방법이 무엇이지요?” 진짜 연인 중 대표로 나선 관광업자가 고백했다. “마리니시네와 잠자리한 남자들이라면 모를 수 없을 겁니다. 그녀의 국부에는 다른 여자들에게선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양이 있지요. 여기서 원고 측의 증인들에게 묻겠습니다만…… 당신들은 그 특이한 모양이 무엇인지 압니까? 연인이라 했으니 모를 리 없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연인이라 해도…….” “다 육체적 관계를 맺는 건 아니니…….” 원고 측 증인들이 난감한 기색으로 그렇게 대답했으나, 할데바인 대공 딸의 매서운 눈초리에 그들은 우왕좌왕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화, 확실히 마, 마리니시네 그녀의 그곳엔 특이한 모양이…….” 관광업자가 물었다. “그 특이한 모양이 무엇이죠?” “그, 그게…….” “어째서 말하지 못하는지?” “그게 뭐냐면, 그,…….” 우물쭈물하던 원고 측 증인은 급기야 제멋대로 지껄이고 말았다. “…… 털이 리본으로 묶여 있습니다만!” 그러자 장내에 침묵이 돌았고, 판결을 내리는 자는 헛기침을 했으며, 진행자는 난감한 표정으로 ‘신성한 재판장에서 농담하면 안 된다!’고 꾸짖었다. 할데바인 대공의 딸은 구두 굽으로 바닥을 긁으면서 욕설마저 했다. “그딴 데다 그런 창의력을 쓰지 말란 말이야!” 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하하하하!…….” 그는 다름 아닌 바로 황태자였다. 그의 웃음에 놀란 로테가 당황스러워 그를 보았고, 그는 너무 격하게 웃어서 살짝 흘러내린 암갈색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올리며 잠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원고 측 증인이 내세운 말이 너무나 어이가 없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리본이라…… 뭐, 그 여자랑 어울리긴 하는군.’ 황태자는 언젠가 륀체르 사파이어가 보여준 영상 속의 그녀, 장난꾸러기 같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내의 얼굴이지만, 결코 아내가 아닌 그녀의 얼굴을.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062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그때 피고 측 증인들이 답을 알려주었다. “리본이라니, 우습기 짝이 없군요. 원고 측 증언은 거짓입니다. 진짜 연인이 아니니 당연히 잘 알 수 없겠지요. 그래서 저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나 해댈 테고. 마리니시네와 진짜로 사귀었던 저희가 고백하건대 마리니시네의 국부에 있는 것은 바로 별 모양의 점입니다.” 그제야 원고 측 증인들이 너도나도 맞장구치기 시작했다. “그래! 그녀의 리본을 풀고 걷어내면(?) 별 모양의 까만 점이 있었지!” “맞아! 맞아!” “아주 특이했지!” 그러자 피고 측 증인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이마를 만졌다. “하하, 미치겠군요. 그 별 모양은 검은색이 아닙니다만?” 당황한 원고 측 증인들은 끝까지 아무거나 갖다 붙였다. “빠, 빨간색 점이었어! 맞아!” “아니야! 파란색이야!” “아니! 흰색!” “얼간이들 같으니! 이럴 땐 무지개색이라고 말하는 게 현명하단 말이다!” 그런 촌극을 보다못한 할데바인의 딸이 두 손으로 제 머리를 붙잡으며 신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피고 측 증인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설명했다. “모두 틀렸습니다. 그 점은 삼각형과 역삼각형이 포개진 별 모양으로 연갈색이지요. 마리니시네의 국부에는 바로 그러한 점이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저희 모두는 세상에서 그런 점을 가진 여인이 그녀 하나뿐이라고 감히 주장합니다.” 그러자 웃던 황태자는 더욱 큰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하고 당황하는 사람은 오직 원고 측 사람들뿐이고, 정작 황태자비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맞습니다. 제 언니에게 그런 점이 있단 것은 저도 몰랐던 사실이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제 증인들을 통해 알게 되었죠.” 그녀의 증인들이 그 말을 받았다. “예. 황태자비 전하께서는 저희를 소집하시어 재판 사정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곤 언니분과 당신이 구별되는 가장 큰 점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아마도 자매께서 너무나 똑같이 생겨 성격 같은 내면적인 것으로는 구분점을 찾기가 힘드셨을 테지요. 하여, 저희는 의견을 모아봤습니다. 마리니시네와 진짜 사귄 연인들로서 모을 수 있는 의견, 그것은 결국…… 은밀한 부위에 있는 특이한 모양의 점, 그게 마리니시네에겐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황태자비 전하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더니 언니분과 당신을 구분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될 거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원고 측은 말도 안 되는 농간이라며 소리쳤다. 진행자는 일단 그들을 진정시켰지만, 판결을 내리는 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만약, 판결자의 입에서 사실 확인을 부탁한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리고 지금 저 피고인 여자의 국부에 별 모양의 점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재판은 원고 측에 불리하게 돌아갈 게 자명해진다. 그렇게 되면 진행자 자신은 친 할데바인의 사람으로서 과연 재판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가……. 이미 판결자는 지시를 내리고 있다. “고로, 지금 피고로 나온 황태자비 전하의 국부엔 그 점이 없다는 말이겠지요? 사실 확인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그것은 황태자비의 국부를 확인해보자는 의미였다. 치욕스러운 검사가 아닐 수 없다. 과연 지고한 황족이 그런 일에 응할 수 있을까? 벼랑 끝에 내몰린 할데바인 대공의 딸은 황태자비가 그런 수치스러운 증명을 절대 하지 못할 것이라며 코웃음 쳤다. ‘길가의 창녀도 재판장에서 제 것을 보여주진 못할 테지, 아무렴.’ 그러나 로테는 적의 예상을 벗어났다.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서서히 일으키는 로테를 보고 할데바인 대공 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런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이 상황을 제지했다. “그런 확인까지 굳이 할 필요는 없는 것 같군. 그녀에게 그런 별난 점은 없다고 내가 보증하지. 그녀와 나만큼 가까운 이는 없을 테니. 아닌가?” 그 자는 바로 황태자비의 남편인 황태자다. 비로소 로테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아아, 비오르틴. 당신….’ 남편의 결정적 한마디가 구원처럼 느껴진다. 여태 온몸을 팽팽히 죄었던 긴장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다. 황태자는 그동안 보인 방관적인 태도와는 다르게 굴기 시작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판결자의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판결자 뒤에 있는 로젠플라드 신상에 대고 예를 갖춰 인사하며 이 상황을 종결시킬 발언을 하였다. “로젠플라드시여. 저희가 비록 부부로서 짧은 시간 함께 한 사이라 할지라도 이 말씀은 드려야겠군요. 저는 한때 아내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은 적 있습니다. 고향에서의 그녀는 순진하고 마음씨 착한 여인이었습니다. 고향 시절을 이야기하던 아내의 눈빛과 표정, 목소리 그 모든 것이 그녀가 진실하다고 증명했습니다. 그녀는 결백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제 모든 것을 신께 걸고, 지금 황태자비로 있는 그녀가 마리니시네가 아니라고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황태자의 시선이 문득 로테에게 향했다. 로테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드디어 남편이 제 편을 들어주는 것 같아 든든하고 고마웠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황태자는 아내에게 무감정한 시선을 고정하며 했던 말을 또 반복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녀는 절대…… 마리니시네일 수 없습니다.” 시선이 로테를 향해 있어도, 로테를 향한 것 같지 않다. 그의 말 또한 분명 로테에게 도움이 되는 말이지만, 어째서인지 로테는 싸늘한 한기만 느꼈다. “이상입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녀는 그저 몸이 떨렸다. 남편의 목소리가 이토록 가까이에서 들리는데도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아득했다. 그만큼 남편의 말에서 거리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아랫배가 시큰거렸다. 불쾌하고도 뜨거운 기운이 배를 감싸는 듯했다. 여태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로테는 행여 아이가 잘못될까 두려움에 한참을 떨어야만 했다. ‘재판 때문이야. 재판 때문에 아이가 화를 내는 거라고.’ *** 2차 재판은 할데바인의 패배나 마찬가지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판결자는 할데바인의 눈치를 보는 것인지 아니면 신중에 신중을 기하려 한 것인지 판결을 미루었다. 즉, 3차 재판을 열겠다고 한 것이다. 할데바인이 질 거라 판단한 원고들(할데바인 딸을 제외한 간택전의 후보들)은 몸을 사렸다. 황족을 건드려놓고서 이대로 재판에 지게 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황태자 내외에 의해 보복 재판이 시작될 것이다. 평소 할데바인에 이를 갈던 황태자가 그 보복을 주도할 것은 당연한 일. 그렇게 되면 할데바인에 붙어 황태자비를 공격하는 데 동참했던 자신들의 안위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뒤가 구린 그들은 지레 겁을 먹어 재판에서 손을 떼겠다며 물러났고, 할데바인은 몇 남지 않은 원고들과 힘을 합치기로 했다. 3차 재판은 그들에겐 마지막 발악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밤낮없이 로테를 흠잡을 일만 모색하였다. 3차 재판이 시작되면서 이 싸움은 소모전으로 변해갔다. 사건의 중심과는 관계없는 비난 위주의 소모전. 오를린의 재정이 갑자기 좋아진 것은 영주의 비합법적인 사업 덕분이 아니냐? 그 뒷배엔 황태자비가 있는 게 아니냐? 그것만으로도 지금 황태자비로 있는 여자는 마땅히 물러나야 한다, 그것을 도와줬을 황태자도 책임에서 벗어날 순 없을 것이다……. 할데바인 대공은 어떻게든 로테를 끌어내리려고 온갖 흠잡을 만한 일을 다 끌고 와 그녀를 벼랑 끝에 몰았고, 그녀는 몸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진실을 밝혀 이겨내려 애썼다. 물론 뒤늦은 감이 있으나 그때부터는 황태자도 나서서 그녀를 위해 최고의 변호인을 붙여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황태자비에게 정체불명의 상자가 도착했다. 상자에는 바너의 우편 번호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보낸 사람은 알 수 없다. (*보낸 사람이 불명확한 우편물은 원래 황궁에 도착할 수 없으나, 그 우편물은 오를린 영주의 저택을 거쳤다가 무사히 황궁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우편 상자 속에는 마법영상구가 들어 있었고, 로테는 그 영상을 재생해 보았다. 이럴 수가! 글쎄 황태자비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자기 자신을 ‘99.9점짜리 가슴의 마리니시네 님!’이라 칭하지 않는가. 그녀가 자신을 보고 ‘마리’라고 칭하는 부분이 몇 차례 더 나왔고, 그녀를 보고 ‘아가씨’, 혹은 ‘마리니시네’라고 부르는 남자들도 많았다. 그 마법영상구 속 금발 여인의 목소리, 표정, 말투, 그 모든 것이 로테와는 다르다. 얼굴만 같지 완전히 다른 인격의 사람이라 할 수 있고, 그 말인즉슨 영상 속 여인은 마리니시네라는 말이다. ‘언니! 대체 바너에서 왜 그런 푼수 같은 말이나 하고 있는 거야? 드래곤에게 잡혀갔다더니 거기서 뭐하는 거지?’ 영상에는 날짜가 표시되어 있다. 모두 로테가 황궁에 있는 시기에 찍힌 영상들이다. 마법영상구의 날짜는 마법으로도 조작할 수 없는 것. 그 덕분에 로테가 영상을 조작하여 만들었다는 누명은 피할 수 있으리라. *** 3차 재판이 시작되고, 로테는 그 동영상을 증거물로 썼다. 쓰면서 ‘언니 마리니시네는 영상 속에서 나온 것과 같이 외지를 돌아다니느라 바쁘다.’고 주장하였다. 회장의 분위기는 진행자의 주도와는 다르게 점점 로테의 승리로 넘어갔다. 황태자가 고용한 변호인들의 합동 변호로 인해 할데바인은 수렁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판결이 내려졌다. 피고 로테아르카 루 오를린은 무죄. 황태자는 쾌재를 불렀다. 이번 일로 할데바인을 공격할 명분이 생긴 것이다. 황족에게 불경하고 악질적인 누명을 씌운 그 자체만으로도 그 일족을 멸할 명분으로 충분했다. 그는 먼저 황의회에 안건을 내어 로젠플라드에 빼앗겼던 자신의 부대인 루빈을 복속시키는 일을 진행했고, 그사이 할데바인을 재판에 회부할 기초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이미, 할데바인은 방어를 해둔 상태였다. 그들은 황족을 상대로 무려 3차 재판이 일어나게 된 이유를 순전히 남 탓으로 돌렸다. 그들은 엉터리 증언을 한 이들, 즉 그라토와 렌과 오를린의 가짜 연인 청년들 때문에 이 사달이 일어난 거라며 대외적으로 피해자인 척 굴었다. 그들은 증인으로 이용했던 자들, 그라토와 렌을 포함한 모두를 무고죄로 고발하였다. 그리고 황족 모욕죄를 추가하기까지 하였다. 로젠플라드 신의회는 자체 재판을 열어 그들을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화형에 처해 버렸다. 제국민은 오를린 시골 사람들이 황태자비를 시기하여 그런 일을 벌였다고 믿게 되었고, 그들을 벌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던 할데바인을 황족의 수호자, 제국의 안녕을 위하는 자로 포장되고야 말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황태자는 할데바인을 공격할 수 없다. 진실이 어떻든 많은 이들에게 황실을 지켜주는 이로 추앙받게 돼버린 할데바인을 공격한다면 그림이 좋지 못하리라. 하지만 이렇게 같은 편인 척 흘러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내 수호자를 자처했으면 나를 위해 죽을 수도 있어야겠지. 안 그런가, 늙은 너구리?” 황태자는 할데바인 영지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하늘 아래, 널따란 화단엔 고양잇과 수인 하나가 뱀을 물어뜯었다. *** 할데바인의 수도 리데바인. 대공의 저택. 할데바인은 태초의 나무 조각이라는 고급 재료로 만들어진 활을 들고 취미에 열중했다. 살아있는 수인들의 심장이나 눈을 과녁 삼아 화살을 날리는 것이 그의 오랜 취미다. 지금, 궁장 가득 고통 받는 수인족이 내지르는 신음으로 가득하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궁장에 울리는 신음은 괴기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정말이지 운이 나빴고, 또 나쁘다. 다른 날에는 쏘는 족족 명중했으나 오늘은 기분 탓인지 쉽지 않다. 애꿎은 수인들은 심장 근처에 화살을 여러 차례 맞고 죽었으며, 어떤 동물들은 눈 대신 이마에 화살이 꽂혀 즉사했다. 마지막으로 대공이 노린 수인은 유대류의 수인이다. 그 수인은 육아낭 속에 새끼를 품고 있었는데, 잔인한 대공의 화살은 육아낭 속의 새끼를 관통하고 어미의 배에도 깊숙이 박혔다. 어미가 고통에 신음하였다. 어미의 육아낭은 피범벅이 되었다. 대공은 어미의 몸부림을 한참 동안 구경하다가 어미 머리에도 화살을 날려 죽여 버렸다. 주름 가득한 대공의 입에서 저주가 흘러나왔다. “저런 꼴이 될 날도 머지않았다.” 황태자비의 아이와 황태자비에게 하는 말이다. 처음에는 재판을 열어 로테를 폐위하고 그 자리에 자기 딸을 올리려 했다. 그런데 재판에서 지게 될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영상을 보내 황태자비를 도운 녀석은 대체 누구일까? 정보에 의하면 상자가 오를린 영주 저택에서 온 게 아니라, 실은 바너에서 왔다고 하던데……? 큰 세력을 유지하다 보니 적이 한둘이 아니어서 대관절 누구인지 추측할 수 없다. 어찌 되었든 재판이 패배로 끝났으니 이제는 방식을 바꾸어야 할 때다. 더는 얌전한 방식만 써서는 안 된다. 물론, 이미 2차 재판 중 황태자비가 마시는 물에다가 태중의 아이를 서서히 사산케 하는 독약을 미량 넣어두었다. 그날 재판을 마칠 즈음, 황태자비가 배를 잡고 얼굴을 구겼었지……. 아마도 태중의 아이는 독약의 효과가 제대로 드러나기만 한다면야 앞으로 이틀 안에 죽을 것이다. 그다음엔 그녀가 슬픔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다……. 대공이 계획한 방식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물론, 자살로 꾸며진 액살이겠지만 말이다. 대공은 제가 죽인 유대류 수인을 보면서 차분히 마음을 식혔다. 핏물을 본 그의 마음은 안정되었다. *** 대공의 기대와 달리 이틀 후에도 황손은 사산되지 않았다. 대공은 하수인의 일 처리에 문제가 생겼다고 여겼다. 누군가가 자기 일을 방해한다는 생각이다. ‘대체 어떤 녀석이 내 일을 방해하는 거냐!’ 무엇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는 와중에 딸이 와서 우는소리를 했다. “아버지! 저는 이대로 혼기를 놓쳐야 하나요? 야울(황태자비가 기거하는 야울 궁을 일컬음)의 안주인은 정녕 되지 못하는 건가요?” 대공은 아무런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황태자비를 그대로 암살하는 방법밖에 남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에 실패한다면, 그때야말로 자신이 감춰둔 마력기갑부대를 동원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아버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냐고요!” “음? 아니다. 뭐, 그래. 네가 야울의 안주인이 되라는 법은 없지.” “하! 뭐라고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그래. 그까짓 안주인이 별거냐?” 마력기갑부대를 동원한 반역에 성공만 한다면 딸을 야울의 여왕으로도 만들 수 있는데 말이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063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로젠플라드 성도. 포근한 봄바람이 겨울의 등 뒤에 바짝 따라붙어 사람들의 옷차림이 한결 가벼워졌다. 대법원 ‘하늘의 뜻’과 가까이 있는 작은 개인 신당의 나뭇가지에도 새싹이 가득 돋아났다. 얼마 후에는 나뭇가지 가득 화사한 꽃이 피어나리라. 그러나 이 신당에서 그 꽃을 보고 봄을 즐길 방문자들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렇다. 이곳은 로젠플라드 신당이지만, 그다지 인기는 없는 편이다. 무릇 장사치로 최고의 자리에 선 무교인에게 종교란 무엇일까? 세상 모든 것을 돈벌이로 경험한 자에겐 종교 역시 상업 활동의 일부일 뿐이다. 적어도, 륀체르 사파이어에겐 그러하다. 륀체르는 영지마다 자기 소유의 신당을 두었다. 특정 종교의 신당만 열어둔 게 아니라 각 영지에 우세한 종교의 신당만을 열어두어 그곳에 기도하러 오는 이들에게 기부를 받는다. 물론 기부금 자체가 그의 목적은 아니다. 실상 기부금은 신당을 유지하는 데 쓰면 남는 것도 없는 편. 그는 단지 각 지역의 동태나 주요 정보를 얻고자 종교 사업을 소소하게 이용할 뿐이다. 지금 ‘하늘의 뜻’ 근처에 있는 이 작은 신당도 몇 년 전에 그러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하얀 콧수염이 인상적인 노인 사제 하나가 지키는 이곳은 언제나 쥐죽은 듯 고요하다. 그도 그럴 것이, 노인 사제가 기도문을 잘 외우는 것도 아니고 기도하러 오는 신도들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편도 아니다. 그 노인은 언제나 신도가 오든 말든 불퉁한 표정으로 신당 청소나 독서, 카드놀이를 하는 데만 시간을 보낼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불성실한 사제로 지내도 누구 하나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고, 그래서 이곳은 무탈하고도 있는 듯 없는 듯 계속 유지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식으로 신도들에게 외면당하고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신당 실소유주인 륀체르에게는 더 편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이곳에 신녀, 사제 지망생이 넷이나 찾아와 머무른다. 그들은 신당의 투자자(륀체르 사파이어)가 보낸 지망생들로 전부 바너 출신이라 하였다.(바너 출신인데도 다들 오를린 억양을 쓰는 것은 수상한 일이다.) 파리만 날리는 신당에 지망생이 넷이나 찾아오다니. 사제 노인은 처음엔 그들을 성가시게 여겼으나, 막상 신당에 들이고 보니 성가신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똘똘하게 생긴 사제 지망생 소년 루돌프는 언제나 공부하는 데 바쁘고, 선홍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조용한 신녀 지망생 소녀 마리아는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지 신당에 붙어있는 적이 없다. 그리고 약 스무 살쯤 된 청년 하이너는 언제나 루돌프에게 의학책을 가져가 인체 지식을 묻고 배우기에 바쁘다. 아마도 나중에 치유계 사제가 될 생각이겠지. 마지막으로 신녀 지망생 숙녀 모리. 그녀의 실제 이름은 마리니시네 루 오를린이지만, 사제 노인은 그녀의 진짜 이름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녀가 와트프라우어라는 청년과 같은 성을 쓰는 남매라 알고 있고, 아주 추녀라고 알고 있을 뿐이다. 모리는 이곳에서 신분을 감추느라 언제나 추녀 분장을 하고 있다. 가을 보리밭을 보는 듯 아름다운 금발은 온데간데없고 하늘과 숲의 색을 섞은 듯한 청록색 눈동자도 없다. 륀체르가 그토록 찬사를 퍼부었던 풍만한 가슴도 없을뿐더러 백옥처럼 고운 피부, 잘록한 허리도 모두 없어져 버렸다! 사실 그것은 없어진 게 아니라 감추어져 있을 뿐. 마리는 와트프라우어 남매 중 못난이 여동생 ‘모리’로 행세하려고 기다란 금발을 단발로 치고 검은색으로 물들여야 했으며, 륀체르가 고용한 마법사의 도움으로 눈동자 색깔을 촌스러운 연두색으로 바꾸어야 했다. 또한, 면포로 풍만한 가슴을 꽉 조여 절벽 가슴인 것처럼 위장하였고, 아침에 화장할 땐 주근깨를 잔뜩 그렸다. 잘록한 허리와 복부를 지방이 넘쳐나는 똥배처럼 보이려고 속옷을 겹쳐 입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처음에는 자기 모습을 버리고 다른 누군가처럼 구는 것이 재미있어서 분장 자체를 즐겼으나 그것도 하루 이틀 뿐이었다. 금세 분장이 지루해지고 귀찮아진 마리는 간혹 주근깨 그리는 것을 잊거나 면포로 가슴을 죄는 것을 빼먹기도 하였다. 그런 ‘모리’에게 ‘오빠’ 하이너는 오늘도 잔소리했다. “모리! 얼굴은 대체 왜 그렇게 예쁜 거냐!” 주근깨를 그리라는 잔소리다. “그리고 옷은 또 왜 그리 야해! 민망하구나!” 얼른 가슴을 꽉 죄라는 잔소리다. “식사 좀 든든하게 하렴! 허리가 그렇게 가늘어서 쓰겠니?” 얼른 배가 뚱뚱하게 보이도록 뭔가를 감으라는 잔소리다. 어디까지나 오를린의 마리니시네가 가진 특징을 절대 드러내어선 안 된다는 잔소리였으나, 마리 아니, ‘모리’는 그 잔소리를 콧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흐응, 오라버니도 참…, 내 얼굴이 예쁜 게 하루 이틀이어요? 그리고 내 옷이 대체 뭐가 야하다는 거죠? 그냥 봄맞이 가벼운 옷일 뿐인데. 허리가 가늘어진 것도 건강해졌다는 의미로 봐줘요. 게다가 로젠플라드 음식은 내 입에 맞지도 않아. 그러니 허리도 자꾸 가늘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지.” 모리는 하이너의 ‘여동생’으로서 꼬박꼬박 대꾸하다가 반격을 시도했다. “그나저나 오라버니는 정신의학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나요? 게을리해선 치유계 사제 시험에 떨어지고 말 거라고….” “아니, 이게 어디서 오라버니에게 악담을! 아주 제대로 혼나보려고 그러느냐!” “뭐요? 혼나요? 설마 날 때리게요?”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언제 널 때린다고 했어?” “때려 봐요! 어딜 때리실 거예요? 입술? 가슴? 아니면……?” 하이너와 모리 남매 곁에서 묵묵히 청소하던 사제 노인은 하마터면 빗자루를 손에서 떨어뜨릴 뻔했다. ‘무슨 남매의 대화가 저렇지? 참 말세다, 말세야…….’ 저 와트프라우어라는 성의 남매는 늘 저런 아슬아슬한 수위의 대화를 나누곤 한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못난이 여동생을 미녀로 취급하는 오빠의 행동도 이상하고, 그런 오빠에게 야릇한 도발을 하는 못난이 여동생의 행동도 이상하기 짝이 없다. “신께서 허락하신다면야 모리 너의 궁둥이를 팡팡 때려주고 싶구나!” “어머! 여기서요? 나 엎드려? 엉덩이 까볼까?” 사제 노인은 결국 빗자루를 떨어뜨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당을 나가버렸다. ‘로젠플라드시여! 저런 이들이 사제, 신녀를 지망하다니! 이 세상은 망조가 든 게 분명합니다!’ 그가 나가자 오빠 하이너, 아니 호위기사 하이너는 깊은 한숨을 쉬며 창밖을 보았다. 창밖 거리 저편에 사제 노인의 뒷모습이 자그마하게 보였다. 벌써 저 멀리 가다니. 노인 걸음치곤 상당히 빠르다. 아마도 얼마간 산책을 할 모양이다. 하이너는 이때다 싶어 신당의 문을 잠가버리고 마리에게 짜증 냈다. “대체 요즘 들어 도무지 긴장이라곤 하지 않으시는군요! 그러시다가 마법영상구에 진짜 모습이 찍혀 오를린 본가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어쩌실 작정입니까?” 황태자비 재판사건으로 시끄러워 오를린 영주님께서도 딸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한때 가출한 딸을 망자로 만드신 모진 분이라 하여도 설마 지금도 그러실까? 하루빨리 딸이 돌아오길 바라시겠지. 하지만 아가씨께서 지금 본가에 돌아갔다가는 여태 벌여놓은 일들이 전부 엉망이 되고 만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만, 도중에 그만둘 거면 안 한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하이너는 어디까지나 일을 벌였으면 책임은 져야 한다는 생각에 그런 걱정을 했으나, 정작 마리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 본가에 알려져서 이대로 잡혀가면 나와의 낭만적이고도 뜨거운 밤을 영영 다시 맞지 못하게 될까 아쉬워? 아잉! 엉큼하긴!” “예? 지금 그걸 말씀이라고 합니까? 아가씨는 어째서 늘 그쪽으로만 생각하시는 건지…….” “그야 요즘 그런 농담 말고는 재미있는 게 없잖아? 하아. 지루해. 너무 지루하다고.” 요 며칠 동안 륀체르가 제공한 정보를 이용해 두 가지 일을 했다. 먼저, 할데바인에 의한 황손 사산 계획을 저지한 게 그 첫 번째였다. 할데바인은 재판 중 황태자비가 마시는 물에 독을 타 태중의 황손을 서서히 죽이려 했고, 마리는 대법원에 잠입하여 독을 임신 유지에 좋은 약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에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바로 로젠플라드 신녀 지망생이라는 지금의 예비 신분이었다.) 그리고 독을 타려 한 신녀를 륀체르 측에 넘겨 증거를 확보하는 일까지 덤으로 완료했다. 이 증거는 훗날 할데바인의 목을 조르는 훌륭한 도구가 될 것이다. 덕분에 로테는 무사히 임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약 효능이 도느라 처음에는 배가 뜨겁고 아릿했지만, 이제는 그런 증상도 없고 입맛이 도는 등 원만한 상태다. 그 이후 마리는 상할 대로 상해버린 황태자비의 품위를 회복하는 일을 했다. 이번 재판에서 황태자비는 무수한 오명으로 명예가 많이 실추되어버렸고, 마리는 언니로서 동생의 그런 좋지 않은 일이 내심 신경 쓰였다. 자신의 명예는 자신이 지키는 것이고 그냥 알아서 헤쳐나가게 내버려두는 게 옳으나, 그러기엔 로테는 아직 너무 나약한 존재, 하여 언니로서 동생의 명예를 지키는 일을 해왔다. 그 일이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황도 로귀하르트, 할데바인의 수도 리데바인, 로젠플라드 성도 이 삼각지점을 잇는 날개 다리 곳곳에다 황태자비에 관한 훈훈한 미담을 흘리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날개 다리는 세 개의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대륙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미담을 흘리면 금세 제국 각지에 퍼져나가기 마련이다. 마리의 예상대로 미담은 천리마가 나르는 듯 재빨리 퍼져 나갔다. 황태자비는 부패한 권력인 할데바인에 혼자 맞서 싸우는 외로운 성녀, 그렇지만 굳세고 당찬 성녀, 가난한 영지 출신이라 힘없는 자들의 고통을 알기에 제국민들을 따스하게 보살펴줄 거라는 예상, 모리 본인도 황태자비 전하께서 남몰래 기부하시는 돈으로 신녀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연, 그뿐만 아니라 황태자비의 고향인 오를린에 가면 그녀의 도움을 받은 이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까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해도 괜찮다. 그런 식으로 세운 체면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 해도 상관없다. 언젠간 연기처럼 사라질 말이라도 아쉽지 않다. 뭐 어떤가. 어차피 할데바인이 황태자비에 관해 뿌린 소문 역시 새빨간 거짓이 아니었던가. 마리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황태자비에 관한 소문을 이런 식으로라도 조금이나마 잠재우고 싶었다. 그래. 일종의 자매애, 라고 하면 되겠다. 물론 저 두 가지 사건이 임무라고 부를 만한 일은 아니다. 애당초 자신이 각 영지의 기갑체를 상대로 거래를 중단해달라고 륀체르에게 요청했을 때, 그에게서 제시받은 조건은 오직 하나의 임무뿐이었으니까. 그 임무란 바로, 황태자비를 암살하려 하는 할데바인에게서 증거를 확보해올 것. 즉, 할데바인을 벼랑으로 몰 증거만 가져오면 충분하지, 황손의 사산을 막거나 황태자비의 명예 지키라는 사항은 없었다. 그런데도 마리가 저런 일을 한 것은 앞서 말했듯이 자매애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하나의 이유는…… 이곳에서의 하루하루가 지루하기 때문이다. 할데바인이 황태자비를 암살하려는 그 증거를 확보해야 하는데 그쪽에서 도통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무슨 방식으로 암살하려 하는지 그 방법을 모색 중일까? 이상하다. 이미 모색이 다 끝났으니 륀체르에게 정보가 간 것 아닐까? 어찌 됐든 지금 할데바인의 행동은 흡사 독사가 사냥감을 삼키기 전에 조용히 노려보기만 하는 것 같은 그런 분위기다. 그런 분위기가 길어지니 지루한 건 당연. 마리 일행은 기다리는 자체에만 시간을 쓰기보다는 각자 할 일을 했다. 루돌프는 공부, 마리아는 언제나 그렇듯 곳곳을 다니며 동태 파악, 하이너는 드래곤으로서 열기 조절 마법 그 이상을 배우기 위해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는 마법에 입문, 그리고 마리 자신은 이렇게 동생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 요새는 긴장감이 사라진 것도 사실이라 변신에도 소홀하다. 언제나 근심 걱정 투성인 호위기사는 아가씨의 그런 느슨한 모습을 경계했고, 그래서 늘 이렇게 잔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 “구시렁거리지 마시고 얼른 주근깨나 그리세요.” “흐잉, 귀찮아! 꼭 이 고운 피부에 그딴 걸 그려야겠어? 보는 사람도 없는데?” “이곳은 신당이란 말입니다. 언제라도 신도들이 기도하러 들를 수 있단 말입니다!” “피! 어차피 파리만 날리는데? 그리고 신도들이 와서 내 진짜 얼굴을 봐도 뭐 달라지는 것 있어? 그들이 내가 오를린의 마리인지 어떻게 아느냔 말이야!” “그야 제국에 퍼진 황태자비 전하의 초상화가 있기 때문 아닙니까!” “흐응, 아무튼 나는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어맛! 너 뭐하는 거야? 내려놔! 어서 나를 내려놓으라고!” 마리를 가벼운 나무토막 들 듯이 번쩍 들어 안은 하이너는 어디론가 걸어갔다. 마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는 절대 내려주지 않았다. 그는 여자들(마리, 마리아)이 쓰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며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아가씨.” “흥! 왯!” “제게 내려달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하이너는 화장대 앞에서 아가씨를 내려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어깨에 실려 바동거리는 아가씨를 보니 불현듯 짓궂은 장난이 떠올랐다. “아가씨.” “흥! 뭣!” “정말 곱게 내리고 싶으시다면,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아주 공손하게요.” “무슨 말?” “오라버니, 내려주세요… 라고요.”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064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최근 신당에서 와트프라우어 남매로 위장하고 지내며 ‘오라버니’ 호칭을 자주 쓰긴 한다. 그런데 그 호칭이 호위기사의 귀에는 은근히 듣기 좋은 모양이다. 아니, 듣기 좋은 정도가 아니라 이렇게 단둘이 있을 때도 계속 듣고 싶을 정도로 아주 달콤하게 착착 감기는 모양이다. 하긴, 형제라곤 남동생 마르틴 하나뿐인 하이너에게 ‘오라버니!’라고 불러주는 어여쁘고 귀여운 여동생이란 그가 살면서 한두 번쯤 상상했을지도 모를 소소한 환상의 존재 아닐까? ‘그렇다곤 해도 참 놀랍네. 놀라워.’ 마리는 사실 조금 놀랐다. 호위기사가 이런 요구를 하는 게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니까. 호위기사는 언제나 잔소리하고 인상 쓰고 비꼴 줄만 알지, 뭔가를 대놓고 바라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지금 이런 모습이 그 자체로 흥미롭다. 마리는 호위기사의 요구를 좀 더 듣고자, 호위기사가 제대로 조르는 모습을 보고자, 은근히 한 번 튕겨 보았다. “싫은데? 보는 이들도 없는데 내가 어째서 그 호칭을 써야 하지?” 하이너는 내심 시무룩해졌다. 비록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이렇게 부탁하면 흔쾌히 ‘오라버니!’하고 불러주실 줄 알았다. 그 호칭 한 번 쓴다고 아가씨 입술이 닳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삐친 하이너는 ‘한 번만 오라버니라고 불러주면 안 되겠습니까?’하고 아가씨를 조르는 대신 생떼를 썼다. “좋습니다. 그럼 저도 이렇게 계속 아가씨를 제 어깨에 올려놓고 있지요, 뭐.” “그럼 나도 계속 이렇게 있을게. 네 어깨에 이렇게 올라가 있는 것도 썩 나쁘지 않거든. 그래 봐야 너만 고생할 테지.” “흥. 마음대로 하십시오. 아가씨 몸은 너무나 가벼워서 고생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만!” “그래! 마음대로 할 거야!” 서로 말은 툭 뱉으면서도 미소 가득한 눈길로 눈동자를 탐한다. 들쳐 올리고, 들쳐 올려진 자세로 보는 거라 왠지 묘하다. 두 쌍의 눈은 마주 보다가 점점 상대의 입술로 옮겨갔다. 불퉁함과 미소가 오묘하게 어우러진 호위기사의 입술. 장난기와 미소가 오묘하게 어우러진 아가씨의 입술. 끌리고, 당기는 입술들. 갑자기 하이너의 얼굴이 붉어졌다. 입술을 보는 것만으로도 욕정이라는 무시무시한 녀석이 심장을 똑똑! 하고 두드리는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실렌틴 광산을 떠난 후, 입맞춤다운 입맞춤을 해본 적이 언제더라? 젠장!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입맞춤을 이렇게 오랫동안 못할 줄 알았다면 진즉 많이 해뒀어야 했다. 로젠플라드로 오기 전에, 그러니까 유치하기 짝이 없는 베개 싸움 후의 그 밤에 말이다. 그때 아가씨와 함께 잠들며 입맞춤도 하고 다른 야한 일들도 마구 해야 했는데……! 이게 다 어떤 가슴 집착남이 둘만의 침대에 끼어 자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때 쫓아내야 했지! 생긴 건 계집애 같은 놈이 좀 곱게 자지는 못할망정 이를 어찌나 바득바득 갈던지, 그때 잠을 설친 걸 떠올리면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군. 하아. 륀체르 사파이어. 다시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고, 무려 백 번을 생각해도 짜증 나는 노총각 같으니…….’ 하이너에겐 서른 살 아름다운 동안 외모의 남자 륀체르가 그렇게 여겨졌다. 입맞춤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불이 붙은 하이너의 상태를 안 것일까? 마리가 먼저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럽게 아가씨의 입술을 느낀 하이너는 온몸에 봄꽃이 피어나는 것만 같다. 노인 사제가 아침 후식으로 주었던 상큼한 향의 차가 아직도 아가씨의 입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미치도록…… 좋아 죽겠군.’ 얼마 후 두 입술이 아쉬운 듯 떨어졌다. 마리가 하이너의 눈을 보며 속삭였다. “나, 하고 싶은 게 생겼어.” “예?” “그건 이 자세로는 조금 불편한데…… 일단 나를 좀 내려주시겠어요? 오. 라. 버. 니?” 듣고 싶어 하던 호칭이 귓가에 속삭여지자, 하이너는 대번에 마리를 내려주었다. 그것도 침대라는 가구 위에. 마리는 구름 위에 솜털이 내려앉듯 가뿐히 내려앉아서 하이너를 보았다. 오라버니 소리에 정신을 살짝 놔버린 하이너는 이미 작정한 듯 눈을 빛내며 두 팔을 뻗고 있다. “아가씨!” 탄탄한 두 팔이 마리를 침대에 쓰러뜨렸다. 곧 두 사람의 거친 입맞춤 시작되었다. 조금 전에 나누었던 스치듯 하는 입맞춤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아, 입맞춤! 입술과 입술의 달콤한 마주침! 그리고 꿀처럼 감기는 혀와 타액의 농밀한 교류! 로젠플라드에 온 뒤로 좀처럼 기회가 없어서 이런 행위를 하지 못했다. 신당엔 언제나 루돌프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공부했고 노인 사제도 모질어 보이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소일거리 없나 하고 신당 안에서 끊임없이 움직여댔기 때문이다. 물론 가물에 콩 나듯 기회가 올 때도 있다. 가령 루돌프가 산책하러 가거나 노인 사제가 장을 보러 가는 그런 때 말이다. 하지만 그땐 느닷없이 신도들이 찾아와 기도하고 갔다. 평소엔 파리만 날리는 신당에 말이다! 그게 아니면 마리에게 일이 생기곤 했다. 그런 온갖 일들 때문에 하지 못했던 행위를 지금 하게 되자, 두 사람은 자석처럼 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입술이 벌게지도록 짙은 입맞춤을 한참이나 하다가 마리가 숨을 헐떡였다. 하이너는 애써 흥분을 꾹꾹 누르며 담담한 척 물었다. “후우… 그렇군요. 하시고 싶은 게 겨우 이거였습니까?” “뭐? ‘겨우’ 이거? 담담한 척하지 말라고. 그렇게 발정이 난 얼굴을 하고서 말이야. 뭔가 하고 싶다고 말한 건 나지만 먼저 달려든 건 너잖아?” “그야…….” 하이너는 변명하려다가 관두었다. 이럴 땐 그냥 솔직한 말을 하는 게 제일 좋다. “당신이 고팠으니까.” 대답이 만족스러운 마리는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아당겨 다시 입맞춤할 것처럼 가까이했다. “나도 네가 고팠단다. 지금도 많이 고프단다. 어쩜 이렇게 매일 보고 있어도 말이지.” 문득 하이너의 눈이 아련해졌다. 단둘이서 달콤한 밀어를 속삭일 때 아가씨의 목소리는 유독 저음인 경우가 많았는데, 그게 그렇게 야하게 들릴 수 없다. 하이너의 두 손도 마리의 얼굴을 감싸기 시작했다. “아가씨는 정말…….” “하이너. 네 입술도 정말…….” “아가씨…….” “그래. 하이너. 아니, 나의 오라버니…….” 또 다시 불린 오라버니란 말에 하이너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이 놀이에 빠져들었다. “…… 모리. 나의 여동생 모리라고 불러주면 되겠느냐?” 자연스럽게 시작된 남매 놀이에 마리는 야한 여동생이 되기로 작정하고 하이너의 한 손을 끌어와 제 가슴에 갖다 대었다. 하이너의 손가락은 가슴 가운데 가장 도드라진 부분에 닿았다. 오늘 그녀가 가슴을 죄는 면포를 하지 않아서인지 얇은 옷 위로 제대로 느껴졌다. 왠지 흥분하여 바짝 선 것 같은 상태…. 이상하다. 이제 겨우 닿았을 뿐이고 자극을 주지도 않았는데 이렇다니? 하이너는 아가씨의 음탕한 몸에 놀랐고, 마리는 더욱 음탕하게 굴었다. “오라버니. 저 젖꼭지가 너무 간질간질해요.” 하이너는 무서운 오라버니처럼 굴기로 했다. “못쓴다. 이런 야한 아이 같으니….” 마리는 받아칠 줄도 아는 호위기사가 재미있으나 웃음을 꾹 참고 호위기사의 손을 아래로 이끌었다. “어디 가슴뿐인 줄 아세요? 여기는 벌써 이렇게 젖었다고요. 오라버니….” “이런 음탕하고 고얀 녀석 같으니…….” 하이너는 아가씨가 이끄는 대로 손을 내려 치마 속을 더듬었다. 아가씨의 부드럽고 따스한 허벅지가 만져졌다. 얼른 얼마나 젖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저는….” 달콤한 호칭을 거듭 속삭인 마리가 갑자기 침대 저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더니 다리를 M자로 벌리고 치마를 활짝 걷어 올리는 게 아닌가! “여기 젖은 것 보이시죠?” 하이너는 입을 반쯤 벌리고 말았다. 젖은 것, 보였다. 그것도 살결까지 아주 자세히 보였다. 살결에 맺힌 습기마저 보일 지경이다. 맙소사! 아가씨께선 치마만 입고 속옷은 한 장도 걸치지 않았다! 이런 차림은 언제부턴가 마리의 버릇이 되었다. 정확히는 호위기사가 속옷을 상습적으로 찢기 시작한 그때부터라고나 할까? “흐응… 젖은 것 보이시냐고요?” 하이너는 잠시 고개를 두어 번 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마리가 피식 웃었다. ‘야한 말도 곧잘 받아칠 땐 언제고 저런 걸 보면 아직 귀엽다니까.’ 은밀한 부위를 내려다보는 호위기사의 시선은 고정되어 도무지 떨어질 줄을 모른다. 그는 그대로 굳어 하나의 커다란 바위가 된 듯하다. 마리가 먼저 손 내밀기 전에는 꼼짝도 하지 않을 것처럼. ‘후후, 하이너! 속옷을 입지 않고 있었던 게 그리도 충격이었니? 그대로 돌이 되어 부서질 기세구나!’ 그런데 그것은 순전히 마리의 착각일 뿐이다. 하이너는 시선을 은밀한 부위에 고정하며 서서히 움직였다. “오라버니?” 그의 두 손은 아가씨를 완전히 벽으로 밀어붙였다. 덕분에 마리는 등을 벽에 바싹 붙이게 되었다. 하이너의 손은 서서히 내려와 그녀의 은밀한 부위를 만지기 시작한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야릇한 손길. 간질간질한 느낌에 마리는 살짝 몸을 비틀면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웃음과 흥분과 앙탈이 동시에 나왔다. “아아, 오라버니. 그렇게 만지시면 이불이 젖잖아요!” 원망하는 말투지만 이미 그 자체가 교태나 다름없다. 어차피 이불 따위 젖으면 세탁하면 그만! 하이너는 아가씨의 금빛 숲 그 아래 별 모양의 점을 어루만졌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보다 보니 은근히 반갑다. 별을 어루만지고 금빛 숲도 어루만지며 한참을 노닐었다. 그러다 보니 아가씨의 살결이 더욱 축축이 젖었고 살결 틈에 자그마한 것이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이것이 드디어…… 아가씨의 쾌감 단추.’ 하이너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은밀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축축한 액을 쓸어 올려 쾌감의 단추를 적시어 꾹꾹 눌러주었다. 아가씨의 입에서 야릇한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흣, 흐응…… 하아, 아.” 그 소리가 점점 높아질수록 하이너의 손도 짓궂어졌다. 고조를 향해 달려가는 그때, 갑자기 문밖에서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설마, 하필 이런 때 신도가 기도하러 온 것은 아닌가? 마리가 그런 생각에 퍼뜩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하이너가 그녀의 어깨를 내리누르며 아주 작게 속삭였다. “쉿. 움직이지 마세요. 그리고 소리도 내지 마세요. 문 여는 소리와 걸음 소리를 보니 루돌프군요.” 하이너는 단지 밖에서 나는 소리만으로도 신당에 들어온 이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드래곤의 뛰어난 청력 덕분이다. 새벽에 마리아가 신당을 나설 때 뒤따라 나갔던 루돌프가 이제 막 돌아와 가볍게 세수를 한다. 산책이 원래 그 소년의 취미긴 했는데 어째 갈수록 산책에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 같다. 하이너는 소년의 산책 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들어온 이가 신도가 아니라서 마리는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기사의 눈빛이 정중히 부탁했다. 이런 땐 방에 아무도 없는 척하는 게 좋습니다, 라고. 그는 눈빛으로 그런 뜻을 전달하면서도 손으로는 다시 아가씨의 쾌감 단추를 찾아 부지런히 자극했다. 아가씨가 작은 절정에 이르려다 뜻하지 않은 불청객에 방해받은 것이 안타깝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손가락은 더욱 격렬하고 뜨거워졌다. 마리의 입에서 자꾸만 원치 않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으읏, 응…….” 하이너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아예 눕혀버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한 손은 은밀하게 부풀어 오른 살점을 자극하느라 바삐 움직였다. 멈출 듯하면서도 멈추지 않는 희미한 신음이 신경 쓰인 그는 아가씨의 귓가에다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모리 이 녀석, 글쎄 소리를 내면 안 된다니까.” 마리는 말을 할 수만 있다면 ‘소리를 자꾸만 내게 하는 건 오라버니예요!’라고 외치고 싶었다. 호위기사의 손가락은 점점 쾌감의 절정 부분을 연주하려 바빠졌다. “읏, 하, 지만, 흐읏…… 응!” 어쩌면 호위기사는 이런 은밀한 분위기를 나름 즐기는지도 모르겠다. 쌓인 욕정 때문인지 이런 상황 자체가 오락이 돼 버렸다. 그가 그녀의 귓가에다 대고 다시 경고를 하였다. “잘 들어. 자꾸 그런 소리 내면 이후에는 모리 너에게 벌을 주겠다.” “아앙, 벌이요? 앗!” “그래. 벌, 말이다.” 마리는 무섭게 휘몰아치는 손놀림에 그만 이른 절정을 맞이하고 말았다. 거침없이 신음을 흘리며 절정을 표현할 수 없으니 그 대신 몸이 쾌감을 표현했다. 골반이 부르르 떨리고 사지가 어찌할 바를 몰라 침대 사방으로 나른히 뻗어 나갔다. 소리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입 밖으로 ‘흐읏, 읏!’ 하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후후. 벌이라. 입으로는 조용히 하라 경고하면서 손으로는 무섭게 몰아붙이는 호위기사의 몸짓 전부가 바로 벌 그 자체 아닐까? 마리가 그렇게 생각하며 숨을 고르는데, 그녀의 귓가에 달콤한 말이 흘러들어왔다. “이제부터 오라버니의 이 단단한 것으로 너를 아프게 때리며 벌을 줄 생각이다.” 하이너는 마리의 손을 끌어와 제 단단한 성기를 만지게 했다. 어쩜 이리 자기 자신을 오라버니라 칭하는 게 자연스러운지. 게다가 능글맞은 상황극도 수준급에 이르렀다. 마리의 입가가 씩 올라갔다. ‘뭐야… 좀 하잖아?’ 00065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그런 호위기사가 기특하다. 그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폭탄처럼 아슬아슬한 매력이 있다. 조금 길어버린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크고 기다랗고 하얀 손, 야하게 젖은 눈, 엄중히 닫힌 입술, 그 모든 것이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청회색 사제복과 어울려 마리의 눈과 가슴을 터트릴 듯 두드렸다. ‘어쩜 이리 흥분되는 거야, 너란 남자는!’ 하이너의 성기를 만지는 마리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것은 돌처럼 단단하고 옷깃 너머에서도 손이 델 듯 몹시 뜨겁다. “후우. 그럼…….” 마리의 손길에 더욱 흥분한 하이너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제 셔츠 끈을 반쯤 풀어 내렸다. 이대로 옷을 완전히 벗어낼 생각이었으나, 마리에게 저지당했다. 하이너가 어째서 그러냐는 듯 마리의 눈을 보았다. 마리, 아니 모리가, 애원했다. “오라버니…… 벌, 벌이요. 사제복 입은 채로 주시면 안 돼요?” *** 산책에서 돌아온 루돌프가 세수를 마치고 책상에 앉아 책을 펼친 지 무려 십 분이 지났다. 하지만 루돌프는 도무지 공부에 집중할 수 없다. “으으, 책을 보자. 책에 집중하자. 루돌프, 정신 차려.” 종이 가득 빽빽이 적힌 의학 용어를 보아도 머릿속에 생각나는 것은 오직 단 하나. 마리아 누나.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유일한 존재! 그녀는 매일 아침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저물녘이 되어서야 돌아온다. 대체 어디 가는 것일까? 궁금한 소년은 매일 소녀의 뒤를 쫓아갔다. 사람들은 소년이 산책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실은 마리아의 뒤를 밟았던 것이다. 그러나 소년의 미행은 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녀는 대체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러 가는지……? 생각에 빠져있는데 여자들의 방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읏, 흐읏…….” “쉿, 조용히 하라고.” “하지만, 읏!” 후끈한 수증기처럼 뜨겁고도 몽롱하게 퍼지는 소리. 소년의 얼굴이 불쾌한 듯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이 은밀한 소리를 언젠가 들은 적 있다. 바너의 여관 침묵의 장에서 들었던 소리, 실렌틴 광산의 폐가에서 들었던 소리, 아가씨와 기사님이…… 사랑하는 소리. 루돌프의 입이 댓 발로 튀어나왔다. ‘흥! 마리아 누나는 알고 있을까? 아가씨와 기사님이 그런 사이라는 걸? 그래! 모르는 게 이상하지. 저렇게들 서로 좋아하는데 말이야. 그런데도 어째서 누나는…….’ 기사님만 보면 입을 꾹 다물고 얼굴을 붉히는 마리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사님만 보면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을 보듯 설레어 하는 그녀의 표정도 떠올랐다. 아아. 자신에게도 그런 가슴 설레는 표정을 지어줬으면 좋으련만…. 소년은 애가 탔다. 갑자기 기사님이 미웠다. 한때는 생명의 은인이었던 기사님이 미워졌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분명 기사님은 내게 고마운 분이 아닌가. 기사님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이 상황이 싫다. 자꾸만 그런 자신을 책망해도 마음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다. 최근 최면 연구에 빠진 기사님이 정신 의학서를 들고 이것저것 물어보실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자신은 자꾸 사적인 감정으로 반응하려 했다. 기사님이 이런 걸 배우셔서 어디에 쓰려고? 최면을 다루는 것은 허세용 공부가 아닌가? 기사님이 의학 용어를 알긴 아시나? 그런 식으로 자꾸만 못된 마음이 들었다. ‘아, 열세 살 인생. 여자를 알게 돼서 썩어버렸어. 어쩌지?’ 여자는 무섭다. 여자는 공부도 못하게 하고 은인도 몰라보게 한다. 루돌프는 부모와 같은 그 사람, 스승이자 주인이었던 한스 레 하인첼을 부르며 한탄했다. “아아. 여잔 정말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군요. 스승님.” 속이 탄 소년은 뭔가 마실 것을 찾았다. 주방에서 투명한 액체가 든 병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안의 내용물은 물이 아니다. *** 한바탕 뜨거운 시간을 벌인 마리와 하이너는 나른히 낮잠이 들려 했다. 그 직전, 외출했던 마리아가 신당으로 돌아왔다. 륀체르의 전언 때문이다. 두 사람의 흐트러진 복장을 보고 민망해진 마리아는 마땅히 시선을 둘 곳이 없어 방의 물건을 정리했다. 한참 후 두 사람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고, 마리아는 륀체르의 뜻을 알렸다. ‘황태자비를 암살하려던 녀석들(할데바인)이 갑자기 조용해진 게 이상하지 않아? 우리는 선수를 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시녀를 이용하길 제의해. 황태자비 곁을 지키는 시녀가 할데바인 측이 데려온 로샤타르트 출신 여자란 건 잘 알지? 그녀에게 최면을 걸어. 그래서 암살 정보를 빼 와. 빼 올 수 있으면 좋은 거고 빼 오지 못한다 해도 나쁠 건 없잖아.’ 지시를 들은 마리는 ‘좋은 생각이야!’라고 칭찬하지 않고 분개했다. “흥! 길드장 녀석! 잘난 척하긴! 나도 그러려고 했다고! 어디서 명령이야? 앙?” 하이너는 아가씨를 못 말리겠다는 듯 보며 피식 웃었다. 륀체르의 계획이 위험하긴 하지만, 이렇게 마냥 신당에서 기다리는 것보다 나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어째 아가씨는 그런 묘책을 먼저 생각해낸 사람이 당신이 아니라 사파이어이기에 은근히 약이 오르는 모양이다. 하이너는 놀리듯 떠보았다. “그러려고 했다고 하셨습니까? 그럼 길드장이 저런 지시를 하기 전에 아가씨께서 진즉 움직이시지 않고요?” 마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우리에겐 궁내의 정보가 없잖아? 정보 담당은 우리가 아니니까 말이야.” 하긴, 재판 때 하늘의 뜻에 잠입하여 황태자비가 마실 물에 들어갈 독을 약으로 바꾼 일도 륀체르에게서 건물 지도나 건물 내 인물에 관한 정보가 들어왔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로귀하르트 황궁에 들어가서 황태자비의 시녀와 접촉하는 일도 반드시 그의 정보력이 필요하리라. 마리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다가 마리아에게 전했다. “진즉 이랬으면 시간 낭비하지 않았잖아. 륀체르 바보 녀석! 굼벵이! 그렇게 전해줘.” 마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얌전히 있을 뿐이다. 욕을 전해달라고 해서 그것을 정말로 전해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눈치 없는 일. 그런데 마리는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로 이 욕설을 륀체르에게 전하길 원했다. “그렇게 전해달라니까, 마리아?” 마리는 과묵한 마리아가 말로써 대답해주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텔레파시로나마 ‘알겠습니다.’라고 하거나 그게 아니면 적어도 고개라도 끄덕여주길 바랐다. 그러나 마리아는 조용한 미소만 머금고서 언제나 그렇듯 인형처럼 가만히 있을 뿐이다. 마리는 왠지 달라진 분위기의 마리아가 수상하다. 그러고 보니 요새 은근히 표정이 싸한 것이……. ‘얘가 오늘 왜 이러지? 아니, 요즘 내내 이랬지, 참? 굴종의 인이 고장이라도 났나? 그래. 아마도 저번에 륀체르가 그걸 빨아대느라 그 녀석의 침에 있는 독이 굴종의 인에 퍼진 게 틀림없어. 그래서 마리아가 저렇게 싸늘해진 거야….’ 그사이 하이너가 신당에 걸린 달력을 가져왔다. 매달 로젠플라드 대신관에서 배달되는 그 달력에는 종교 관련 행사가 빽빽하고도 상세히 적혀 있었다. 하이너는 이틀 후에 열릴 축성회를 눈여겨보았다. 정기적 종교행사인 축성회는 본래 로젠플라드에서 열렸다. 그런데 달력에 표시된 장소는 황도 로귀하르트다. “아가씨, 분명 축성회는 성도에서 열리는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황손이 태어나기 전과 후에는 특별히 로귀하르트의 황궁에서 열린다지.” “그렇군요. 그럼 궁내로 들어갈 땐 축성회 행사를 이용해야겠습니다. 우리 같은 사제 지망생 신분이 황궁에 입궁할 기회는 그런 때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이너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마리가 차분히 이야기했다. “하이너. 나는 보다시피 황태자비와 똑같이 생겨서 황도에 가면 의심받기 딱 좋아. 그래서 늘 못생기고 뚱뚱한 모리 분장을 해야 해. 하지만 분장이란 건 금세 들통 나기에 십상이잖아? 그래서 너에게 부탁하는데…….” “예.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제가 사제 지망생 자격으로 입궁하겠습니다.” “고마워. 내가 텔레포트 홀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줄게.” “아,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마리는 편한 방법으로 보내주려 하는 데도 그것을 거절하는 하이너를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텔레포트 홀이 빠르고 편하잖아? 이틀 후라고. 이틀 후에 황도에 도착하려면 텔레포트 홀을 이용해야, 그게 아니라면 이동 스크롤이라도…….” 하이너는 오래간만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푸하. 그런 데다 쓰실 돈이 있으면 아껴서 루돌프 주십시오.” “그럼 어떻게 황도로 가려고?” “제가 누굽니까.” “응?” “바로 드래곤 아닙니까? 오랜만에 하늘을 날아보고 싶군요.” “그러다가 누구 눈에 띄기라도 하면?” “투명화 마법도 배워뒀습니다. 심려하실 것 없습니다.” 마리는 호위기사의 마음 씀씀이에 감탄했다. 아무리 드래곤으로 변신할 때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해도 그것이 정말이라고는 생각지 않아서 텔레포트 홀로 이동하라고 권유한 것인데, 호위기사는 그런 호의를 거절했다. 단지 루돌프의 사정, 드래곤 링클을 사서 스승 한스 레 하인첼에게 되갚아야 한다는 사정을 헤아려주기 위해서. 마리는 루돌프 대신 감동 받아서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하이너, 너는 어쩜 마음도 드래곤처럼 크구나!” 호위기사는 아가씨의 칭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했다. “아무튼, 축성제 때 사제 지망생 자격으로 입궁하여 황태자비의 시녀를 만나겠습니다. 최근 루돌프에게서 정신 의학을 배워둔 것이 유용하군요.” “그래. 시녀에게 최면을 걸기 딱 맞지. 그녀가 로샤타르트 출신이니까 그쪽 방언을 배워두는 것도 친근하게 접근하기에는 좋아. 타향에 사는 사람에게 고향사람만큼 친근한 것은 없잖아? 게다가 너는 잘 생겨서 더욱 접근하기 쉬울 거야. 그녀에게 빼 올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를 빼 왔으면 해.” 하이너는 태어나서 잘 생겼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아가씨에게 듣는 것은 매우 특별하고 기분 좋아서 금세 뺨이 발그레해졌다. “흠흠. 그런데 최면 말입니다… 루돌프에게서 이론만 배웠을 뿐인데, 실전에선 어떨지 장담할 수 없군요. 일단 누구에게 실험할 필요를 느낍니다. 누가 좋을까요?” “음, 글쎄.” 최면을 걸어 시녀에게 정보를 빼 오기 위해서는 미리 연습이 필요하다. 하이너는 누구를 상대로 어떤 식으로 연습해야 하는지 고심했다. 그때, 갑자기 주방에서 루돌프가 비틀거리며 나왔다. 소년의 손에는 투명한 물병이 들려 있는데, 그 안에는 액체가 이제 서너 모금밖에 남지 않았다. 마침 목이 말랐던 하이너는 소년에게 물병을 달라고 손짓했다. 그런데 루돌프는 하이너에게 물병을 건네기는커녕, 갑자기 물병을 탁자에 쾅! 하고 내려놓는 게 아닌가? 단 한 번도 무례한 행동을 해본 적 없는 소년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행동은……. 모두가 놀란 눈으로 소년을 보았다. 소년이 하이너에게 삿대질하며 외쳤다. “어른이라면 어른답게 행동하세요!” 뜬금없는 소년의 말에 마리와 하이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데 마리아는 차분히 소년을 바라볼 뿐이다. 소년은 자기가 좋아하는 소녀의 차분한 눈길을 의식하면서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런 채로 소년은 하이너와 마리 두 사람을 보고 마구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정말이지 짜증이 나서 원…… 그래요. 처음엔 두 분이 싸우는 줄 알았지요! 기사님이 일방적으로 아가씨를 못살게 괴롭히시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침묵의 장에서! 실렌틴 광산의 그 폐가에서! 그리고 이곳 신당에서! 저도 이제 알 만큼 안다고요! 두 분이 무엇을 하는지 알 만큼 아는 나이라고요!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어쩜 두 분은, 어쩜 그렇게…….” 소년이 지적하는 바를 깨달은 마리와 하이너는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그들은 말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어맛! 하이너! 어쩜 좋아? 저 어린 것이 알고 말았어!’ ‘요즘 애들은 정말 빠르군요.’ 마리아는 묵묵히 시선을 딴 데로 돌릴 뿐이다. 그런데 세 사람 모두 눈치챈 게 있었다. 소년이 손에 들었던 물병, 그 안에 든 것이 물이 아니라 술인 것을. 소년이 말할 때마다 소년의 입에서는 술 냄새가 폴폴 풍겼다. 아마도 루돌프는 노인 사제가 남몰래 넣어둔 술을 물인 줄 알고 마신 게 분명하다. 갈수록 마리와 하이너를 부끄럽게 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 아가씨는 대륙 정복을 하러 오셨으면 좀 진지해지실 필요가 있다고요! 그리고 기사님은 그런 아가씨에게 말로만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지 마시고 좀 진지하게 아닌 건 아니라고 말씀드릴 필요가 있단 말이에요! 어째서 두 분은 어른이면서 어른답게 굴지 않는 거죠? 어째서 저희와 같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그런 부끄러운 짓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거죠?” 듣다 못 한 마리가 겨우 입을 뗐다. “얘, 일단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란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 너희가 없거나 잠들었거나 아니면 눈치채지 못할 줄 알고 한 것뿐…….” 하지만 소년은 듣지 않았다. 소년은 두 사람 중 특히 하이너를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리고 기사님도 그래요! 어째서 매일 밖에서 나돌아다니며 위험한 조사를 하는 것은 마리아 누나인 거죠? 그건 원래 기사님이 해야 할 일 아닌가요?” 마리가 또 끼어들었다. “얘, 네가 드래콘의 습성에 대해 잘 모르나 본데 드래콘은 원래 밖에서…….” “듣고 싶지 않아요! 그거 아세요? 마리아 누나는 기사님이 해야 할 일을 모조리 맡지만, 그런데도 단 한 번도 기사님께 고맙다는 말을 듣지 못했어요! 그런 기사님이, 그런 기사님이…….” 처음에는 불타는 연인의 뜨거운 생활에 관해 훈계하던 소년이 이제는 드래콘 소녀의 열렬한 변호인이 되어 하이너의 무심함을 원망했다. 그런데 어째 소년의 말끝이 이상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런 기사님이…… 대관절 어디가 좋다고 저 누나는 얼굴을 붉힌담.” 그러자 마리와 하이너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그들보다 더 당황한 사람이 있다. 바로, 마리아. “응? 말 좀 해봐요. 마리아 누나. 누나는 어째서 기사님을 좋아하는 거죠?” 소년은 원망하듯 물었다. 제발, 마리아가 아니라고 대답해줬으면 바랐다. “기사님을 좋아하는 게 맞죠? 네? 말 좀 해봐요!” 소년은 마리아가 아니라고 대답해줬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질문이 아니라 마치 질타하는 듯하다. 그러자 마리아의 선홍빛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그렁그렁해지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은, 단 한 번도 그녀의 그런 눈을 본 적이 없었다. 00066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마치 루돌프에게 한마디라도 더 들으면 무너질 것만 같은 그런 아슬아슬한 눈이다. 대답 없는 마리아가 원망스럽기 그지없는 루돌프가 다시 물병을 들었다. 한 모금 더 마시려는 것이다. 소년은 아직도 그게 술이란 걸 눈치채지 못했다. “어머! 얘 좀 봐!” 보다 못한 마리가 그것을 빼앗아 들었고, 술병을 다시 손에 넣으려는 루돌프와 실랑이했다. “놔요!” “얘, 이건 물이 아니야! 루돌프! 정신 차려!” “목이 마르단 말이에요!”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지! 맛이 물과 다르단 걸 못 느꼈니? 중요한 공부를 하는 애가 이렇게 둔해서야!” 둘이 실랑이하는 사이 하이너는 마리아를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마리아는 회피하듯 시선을 내리깔았는데, 그 가녀린 몸이 죄라도 지은 양 바들바들 떨고 있다. ‘설마? 나를……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던가. 그러고 보니 루돌프의 말이 그럴듯하다. 마리아는 언제나 하이너의 앞에서는 투명 인간처럼 있는 듯 없는 듯 굴었다. 지금처럼 인간 소녀의 모습을 드러낸 것도 성도에 온 뒤에야 겨우 가능하게 되지 않았나. ‘부끄러워서 그랬던 건가? 하?’ 모습뿐이랴.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마리도 듣고 루돌프도 들은 마리아의 인간 목소리를 하이너는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평소 하이너가 마리아에게 의견을 물어봐도 마리아는 언제나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는 것으로만 표시했다. 목소리를 드러내는 게 수줍은가? 자주 뺨이 발그레해지는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보자면……. ‘나를 남자로 본다고?’ 놀란 하이너는 마리아에게서 루돌프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다면 루돌프의 저런 행동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소년이 조금 전과 같은 술주정을 하는 이유는 분명 마리아에게 연정을 품었기 때문이리라. ‘그런 거였군.’ 그때 마리에게 술을 빼앗겨버린 루돌프가 악다구니를 썼다. “하! 참, 나! 어째서 내가 물도 마음대로 못 마시지? 그나저나, 마리아 누나! 어째서 말을 안 하는 거예요? 그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고 말을 좀 해봐요!” 마리아는 누구에게 맞기라도 한 듯 울먹거렸다. 하이너는 그런 소녀의 표정을 보고 있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언제나 묵묵하고 담담하게 제 일을 하던 소녀의 동요를 마주하는 건 낯설고도 안쓰러운 일이다. ‘어쩔 수 없군.’ 하이너는 루돌프의 주사도 잠재울 겸, 조금 전에 하려던 최면 연습을 해보기로 했다. 의학서의 정보와 루돌프에게서 배운 지식 그리고 드래곤의 마력을 합쳐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최면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상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는 과정. 그는 집중력을 모두 끌어모았다. 그리고 루돌프의 어깨를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마리가 놀라서 물었다. “하이너? 너, 뭐하려는…?” “쉿.” 하이너는 마리에게 조용히 하라고 이른 뒤, 술에 흐리멍덩해진 루돌프의 눈에 지그시 눈 맞추었다. 하이너에게 어깨가 잡힌 루돌프가 잠시 반항하며 노려보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최면의 효과가 금세 나온 것이다. 루돌프의 눈이 더욱더 흐리멍덩해졌다. 이내 소년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침실로 얌전히 걸어갔다. 흡사 좀비와 같은 걸음걸이다. 궁금해진 마리가 물었다. “어라? 하이너, 너 루돌프에게 뭘 한 거야?” 하이너는 대답 대신 싱긋 웃어 보였다. 최면. 생각보다 쉬웠다. 자신이 드래곤이라서 더 쉽게 한 건지도? 어쨌든 이대로 황궁에 가서 황태자비의 시녀를 만나도 단번에 최면에 성공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긴다. 루돌프가 잠이 들자, 마리아의 동요도 금세 진정되었다. 하이너, 마리아, 마리. 세 사람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그때, 외출했던 노인 사제가 돌아왔다. 노인 사제는 진동하는 술 냄새와 거의 다 비어버린 술병을 보곤 불퉁하게 외쳤다. “아니! 누가 내 술에 손댔어?” 그러자 마리가 능글맞게 웃으며 대꾸했다. “어머, 어머! 사제가 술을 마셔도 되나요? 나빠라!” ***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 봄이 온 세상을 조금씩 물 들였다. 햇살에도 봄기운이 스며들고 그 온기에 방안이 훈훈하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날이지만, 로테의 기분은 전혀 아름답지 못하다. 그녀는 손에 쥔 편지를 들여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를린의 앤에게서 온 편지다. 앤은 동생 렌이 화형이라는 끔찍한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에 슬퍼하고 있으며, 동생의 유품이나마 하나쯤 보내달라고 로테에게 간청했다. “렌의 물건이라….” 로테는 자신의 방에 있는 물건들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그중에 렌의 물건은 없다. 렌은 언제나 귀중품을 자신의 몸에 지니곤 했고 그것들은 이미 렌과 함께 불타버렸으리라. 귀중한 물건이 아닌 일상적인 것들은 하녀들이 쓰는 처소에 있었는데, 재판 중에 처소가 싹 비워진 상태라 그런 일상적인 물건조차 로테는 건질 수 없다. 동생을 잃게 된 앤에게 대관절 무엇을 보내줘야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예전이라면 이런 부탁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재판을 치르며 성격에 어떤 변화라도 생긴 것인지 어떻게든 앤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다. ‘가만, 렌의 손때가 묻은 물건이 있었지.’ 이를테면 빗이나 반짇고리, 화장 도구, 안마용 온돌과 같은 시중을 들 때 사용했던 물건들이다. ‘가여운 것.’ 로테는 재판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던 렌을 미워하기는커녕 가여워했다. 렌이라고 그런 거짓증언을 하고 싶어서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누군가의 압력이 있었겠지. 필시 할데바인이……. 생각이 상념으로 바뀌며 로테는 한줄기 눈물을 흘렸다. 빗과 반짇고리를 보니 렌과 함께 한 과거가 떠오른다. 렌이 머리를 곱게 빗겨주던 일, 렌이 소매에 달 아름다운 장식을 바느질로 만들어주던 일, 렌이 안마를 해주던 일, 렌이 부지런히 향수를 구해주던 일, 그뿐만 아니라 오를린에서 렌과 함께 자매처럼 지내던 크고 작은 추억까지. 많은 시간을 함께 나누었던 벗이 화염에 휩싸여 한 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아아. 어째서 황궁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일까. 어째서 이곳은 사람을 서글프고도 고독하게 만드는 건지. 각오하지 않고 온 건 아니지만, 그동안의 체득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로테는 시녀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렌의 손때가 닿은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끝나지 못한 상념은 무시무시한 고독감과 절망의 덩어리가 되어 심장을 아리게 했다. 몇 번이고 되뇐다. 황궁에선 철저히 혼자일 수밖에 없다고. 이곳에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배신을 당해도 배신한 사람의 잘못이라기보단 숙명에 가깝다고. 숙명. 문득, 재판에서 남편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녀는 절대…… 마리니시네일 수 없습니다.’ 그 남자 딴에는 위기에 처한 아내를 구해 주려는 말이었는데, 정작 그것을 들은 로테는 싸늘한 한기를 느꼈다. ‘그때 그 남자는 나를 보며 마치…… 너는 어째서 마리니시네가 아니냐고 묻는 듯했어. 어째서 네가 황태자비가 되었느냐고 따지는 것만 같았지.’ 잊으려 해도 그때의 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때론 사람의 눈은 사람의 말보다 더 진실하다. 황태자의 눈이 말했다. 너는 마리가 아니라고. 너는 마리일 수 없다고. 언니와 그 남자 사이의 일을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위치는 잘 알고 있다. 태중에 황손을 키우는 황태자비. 그 남자의 아내. 이보다 더 좋은 자리는, 있을 수 없다. 좋게 생각하자. 모든 것은 자기가 하기 나름이리라. 로테는 렌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챙겨 고운 비단 주머니에 넣은 뒤 그것을 시녀에게 건넸다. 시녀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오를린의 저택으로 보내.” 시녀는 언제나 그렇듯 대답하지 않는다. 단지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최소한의 의사 표시만 할 뿐이다. 무례하다. 언제나 무례하다. 할데바인이라는 거대한 뒷배를 믿고 이리도 오만하게 구는 것인지. 예전 같았으면 로테는 서슬 퍼런 말을 던지며 시녀의 주제를 지각하게 훈계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그럴 힘이 없을 정도로 심적으로 지쳤다. 시녀가 물건을 황궁 체신청으로 가지고 간 사이, 로테는 스스로 단장했다.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다. 바로 남편인 황태자와 단둘만의 저녁 시간이다. 예전에는 언제나 황태자 측에서 먼저 시간을 정해 알려왔지만, 오늘은 이례적으로 이쪽에서 먼저 약속시간을 잡았다. 이것은 일종의 발버둥이다. 재판 이후로 아내를 찾지 않는 남자에게 아내의 존재를 상기시켜주는 일. 로테는 그 일을 해야만 한다. 남편의 마음에 자리한 여자가 언니든 그 누구든 간에 자신은 황손을 몸에 밴 유일한 여인. 조금씩 불러오는 배를 보이며 함께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면 지금의 이 어색한 관계를 어떻게든 풀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체신청에 간 시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 로테는 이미 훌륭하게 단장을 마친 뒤였다. 시녀는 로테의 몸을 깐깐하게 심사하듯이 아래에서 위로 훑어보았다. 막 자고 일어났을 때만 해도 굵게 물결치던 곱슬머리는 세련된 직모로 반쯤 자연스럽게 묶였고, 연했던 입술은 봄꽃처럼 화사한 붉은색으로 칠해졌다. 드레스는 모양은 단순하지만, 색깔만큼은 밝은 청록색을 선택해 가뿐하고도 생기 가득한 느낌이 든다. 장신구는 오직 은색 귀걸이 하나. 그러나 음각된 문양이 매우 섬세하여 드레스의 단순한 모양과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시녀는 한쪽 입가를 올리며 픽 웃었다. ‘촌뜨기 주제에 제법 황도의 유행을 따를 줄 알잖아?’ 명백히 비웃음이다. 원래라면 발끈해야 할 로테는 힘없이 웃으며 물었다. “촌스러운가?” 시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로테는 담담히 말했다. “촌스러운 곳이 있으면 말해봐. 눈 화장? 입술 화장? 뭐가 됐든 다시 하지.” “……그것은 아니지만.” “아니지만?” “어울리지 않아서요.” “어울리지 않는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바라는 눈치에 시녀는 대꾸를 해주었다. “소용돌이 산(오를린의 위험한 산)의 헐벗은 짐승이 에텐트포르가(로귀하르트의 뛰어난 의상 가게들이 모인 거리)에 나들이하러 온 것 같은 느낌, 이랄까. 대충 그런 느낌입니다만.” 시녀는 뺨을 맞거나 고문을 당해도 싸다고 생각될 정도로 건방지게 굴었다. 그러나 로테는 시녀의 뺨을 때리지 않고 고문도 하지 않는다. 그저 차분히 거울 앞에서 제 모습을 다시 한 번 바라보기만 했다. 촌구석 헐벗은 짐승이 에텐트포르가에 나들이하러 온 것 같은 느낌이라니. 웃음이 나왔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황도의 유행을 따르며 화려하게 꾸미고 살았던 것일까. 물론 어릴 때는 황도의 유행에 관심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 시절은 관심이 있다고 해서 그 화려함을 다 꾸미고 살 여유는 없었다. 간택전 당시 조금 여유가 생긴 했으나, 그때도 촌티를 완전히 벗진 못했지. 그랬는데…… 언제부턴가 이런 식으로 세련된 단장을 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처음부터 황족으로 태어난 양 화려함이 몸에 배어버렸다. 재판 당시에도 화려한 차림으로 나가서 입방아에 오르곤 했지. 지금의 이 단장, 일개 시녀의 눈에도 그 어색함이 보인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로테는 뜬금없이 칭찬 투로 말했다. “너는 참 솔직하구나.” “과찬이십니다.” “그래. 역시 이건 나와 어울리지 않아.” 로테는 몸소 화장을 지우려 했다. 그런데 시녀가 그녀에게서 화장 지우는 도구를 빼앗았다. 로테는 건방진 행동이 최고조에 이른 시녀를 힘없는 눈으로 보았다. 시녀의 눈이 심술궂게 빛났다. “원래의 전하답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시녀는 화장을 지워주었다. 화장 솜에 수액을 묻혀 화사한 색조를 지우는 손길이 매우 부드러웠으나 로테가 느끼기엔 가시처럼 따가웠다. 한참 후, 시녀가 다시 한 단장을 본 로테는 웃고 말았다. 그것은 단장이라고 할 수 없다. 옷은 그대로이되, 머리를 풀고 화장을 지웠을 뿐이다. 아름다운 얼굴이긴 하나 화장을 지우자 야생에서 온 짐승처럼 품위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입은 드레스는 그대로이니 몹시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시녀는 그게 어울린다고 거짓을 말했다. “워낙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분이시니 이대로도 좋군요.” “…….”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은 오를린에서 막 올라왔을 때의 모습과 같다. 로테는 매일 보는 민얼굴이지만 어쩐지 낯선 느낌이 들어 한참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리…….” 거울 속에는 짐승처럼 품위 없는 얼굴, 아니 날 것 그대로의 여인 마리가 있다. 적어도 로테의 눈에는 그러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067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야울 궁내 황태자 처소의 식당. 황태자가 부부가 식사를 함께 할 때 주로 선택된 장소는 로테 처소의 식당이었다. 그곳의 식탁은 그리 크지 않아서 부부가 가까이 앉아 대화를 나누기에 편하고 좋았다. 침대에서 서로 몸의 감각을 나누는 것도 좋은 일이나, 로테는 식사하며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정감있고 좋은 일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로테는 자기 처소의 그 작은 식탁을 침대보다 더 중요한 장소로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오늘 남편과의 저녁 약속은 남편 처소의 식당에서 행해질 것이다. 그런데 그곳 식탁은 자기 처소의 식탁과는 달리 아주 길고 널찍하다. 그래서 거리감이 느껴졌다. 마지막 재판 이후 처음 만난 남편은 이상하다. 아내를 보고 유령이라도 본 듯 흠칫 놀란 얼굴이다. 로테는 처음엔 그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금세 알게 되었다. 자신의 민얼굴을 황태자가 낯설어한다는 것을. 형식적인 인사가 오갔다. 경어로 인사를 건네는 황태자의 모습에선 감정이라곤 읽을 수 없다. 황태자는 로테의 얼굴을 몇 번이나 흘긋 보더니 먼저 자리에 앉았다. 언제나 많은 시중이 보는 앞에서 몸소 아내의 의자를 빼주며 애정을 과시하던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멀찍이 떨어져 앉은 그는 그 거리감을 유지하듯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머쓱한 식사가 시작되는 가운데, 황태자는 급히 식당에 들어선 시종에게 어떤 보고를 받았다. “……그래?” “예.” “다음부터 그딴 소식을 가져 올 거면 차라리 그냥 죽는 것도 좋아.” “송구합니다, 전하.” “그만 가봐.” 재판이 있기 전에 황태자는 마리 일행을 찾으라고 사람을 보낸 적 있다. 지금 시종에게 온 소식은 바로 그들에게서 온 소식이다. 마리의 존재를 슬쩍 흘렸던 존재인 륀체르 사파이어의 주변을 집요하게 캤으나 마리 일행의 정보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는 소식에 황태자의 무감한 표정은 어둡게 변했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로테는 갈수록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을 느꼈다. ‘저녁 말고 아침 식사를 약속할 걸 그랬나.’ 시종이 황태자에게 귀엣말로 보고했기에 로테는 남편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화제를 꺼내기가 매우 조심스러웠다. 나중에 겨우 고심하여 꺼낸 화제란 게 배 속의 아이에 관한 이야기였다. “황의가 왔다 갔습니다.” “그렇습니까.” 로테는 남편의 계속되는 경어에 차가운 벽을 느꼈다. “화, 황의가…….” “참, 그래. 최근 배가 아렸다면서요? 뭐라고 하던가요?” “…… 심려하실 것 없다는 말을 하더군요.” “다행이군.” 또 이어지는 침묵. 하지만 로테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남편이 아내의 배가 아린 증상, 2차 재판 전후로 배가 아팠던 증상에 관해 아직도 알아주고 신경 써준다는 사실이 그녀는 기쁘다. 물론 부부 사이의 정이 두터워 신경 써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배 속에 든 것이 황손, 권력의 공고함을 더할 존재이기에 이 남자가 신경 쓰는 것이겠지. 그렇다고 해도 로테는 입가는 자꾸만 올라갔다. 그녀 앞으로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담긴 접시가 놓였다. “이것도.” 챙겨주는 남편의 행동에 로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 다음 대화는 어떤 게 좋을까. 참. 내일 황도에서 축성제가 열린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이야기할 게 많으니 천천히 하기로 하고……. 옳거니. 그 이야기가 좋을 것이다. 예로부터 황손의 이름, 축제, 신변에 관한 사소한 모든 것은 내궁부의 결정에 따를 때가 많았다. 하지만 단 하나, 이름 중 아명만큼은 내궁부가 아닌 부모의 소관이다. 로테는 태어날 아이가 부디 사내아이이길 바랐고, 따라서 사내아이가 쓸 만한 아명에 관해 남편과 미리 상의하고 싶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명 말입니다만….” “먼저 일어나지.” 동시에 엇갈린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일순 로테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고, 황태자는 자못 미안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나 이내 식당을 떠나고 말았다. 톡, 톡톡톡……. 로테의 손에서 작은 열매가 떨어져 식탁 위에 굴렀다. 그사이 시중이 눈치를 보다가 후식을 내오려 했으나, 로테는 그것을 막았다. “아직 식사가 끝난 게 아니다.” 남편이 먼저 자릴 떴어도 배는 고프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배 속의 아이가 부추기는 식욕이 화악 일었다. 로테는 기름진 고기, 신선한 채소, 굴러떨어진 열매 모두를 남김없이 해치웠다. 남편이 남겨둔 음식까지 모조리 해치웠다. 황궁에서 지내면서 품위와 위엄을 지키려 애썼으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그녀는 시종이 건넨 후식을 먹고, 차까지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불리 먹어도 어째서 이리도 헛헛할까. 처소로 돌아가는 그녀의 눈에서 작은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 눈물은 처소에 도착할 때까지 멈추질 않았다. 황태자의 무심한 듯 냉랭한 분위기 때문에 내일 있을 축성제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했다. 황손의 무사 탄생을 기원하는 내일 축제에 거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이 눈이 퉁퉁 부은 얼굴로 갈 순 없다. 로테는 몇 번이고 찬물에 세수했다. 세수를 마치니 시녀가 기계적으로 수건을 건넸고, 로테는 그것을 받아들고 얼굴을 닦았다. 그러다가 문득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리 지워도 눈물의 흔적을 지우진 못했다. ‘이런 게 상처…라고 하는 건가.’ 고향 오를린에선 상처받고 산 적이 없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으면 줬지, 누군가가 자신의 자존심을 때리고 마음을 상하게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지금 느끼는 이 기분이 몹시 두렵고 불편하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시녀가 사람의 속내를 꿰뚫듯 이야기했다. “사내들이란 다 그렇죠. 이루어지기 전에는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처럼 대하다가, 이루어진 후에는 썩은 짐짝 취급해버리죠.” 시녀는 감히 윗사람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받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입을 연다. 그것도 동정 가득한 눈길로. 게다가 이 시녀는 간택전과 결혼 후에 달라진 황태자의 태도를 마치 자기가 황태자의 부인인 양 다 꿰는 듯하다. 하긴, 궁정에서 떠도는 말들이 있으니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로테는 시녀의 건방짐에 불쾌함보다 오히려 신선함을 느꼈다. 이 시녀에게 너무 자주 불쾌하다 보니 이제는 새로운 감정이 드는 것이리라. 시녀는 마치 제 친구에게 말하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리고 짐짝이 보기 싫어지면 내치는 거고요.” 로테는 멍하니 있다가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아주 잘 아는 듯이 말하는데?” “잘 알죠. 저 역시 내쳐진 신세라서요.” “내쳐진 신세?” “모르셨나요? 로샤타르트 출신의 이혼녀. 저를 시기하는 궁정 여인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말들인데.” 로테는 시녀가 이혼녀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야 자신은 궁정 여인들과 어울린 적이 없으니 말이다. 시녀의 사연이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기구한 것은 틀림없다. 귀족가의 젊은 처녀여야만 가능한 자리를 이혼녀가 차지했으니 말이다. 예전 같았으면 관심도 두지 않았을 사연이지만, 로테는 왠지 솔깃해졌다. “이혼이라. 그럼 이곳에 오기 전에는 유부녀였단 말인가?” “그런 셈이죠.” “결혼 기간은?” 시녀는 젖은 수건을 정리하며 담담히 대답했다. “딱 석 달이었어요.” “안 됐군.” “그렇죠. 석 달 정도면 혼인 무효로 해줘도 좋은데 성도(로젠플라드) 혼인청에서 허락하지 않더군요.” 시녀가 여태 이토록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은 적이 없었다. 로테는 조금 더 파고들어 보았다. “남편이… 누구지?” “어머. 제게 호기심이 생겼나요?”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오슬 총독 프리드리히였습니다만.” 로테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녀로서는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로테는 시녀가 어째서 시녀로 오게 됐는지 추측했다. 오슬 총독 프리드리히. 오슬은 기본적으로 반 할데바인 세력에 속한다. 그곳의 총독 부인이었다가 쫓겨난 신세의 여자라면 그 남편에게 복수를 꿈 꿀만도 하다. 복수하기 가장 좋은 세력이라면 역시나 할데바인. 그리고 이 시녀가 친 할데바인 영지인 로샤타르트 출신이라 했던가? ‘친 할데바인 아가씨와 반 할데바인 청년이라…….’ 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혼인이 성사되기 까진 분명 ‘사랑’이라는 매개체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시녀는 그 ‘사랑’ 이란 것에 크게 데어 다시 고향으로 갔다가 이렇게 입궁하여 할데바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겠지. ‘사연 없는 사람은 없군.’ 로테는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었다. 시녀는 황태자비에게 폭신하고 가벼운 이불을 덮어주었다. 로테는 그런 시녀의 얼굴을 뚫어질 듯 보았다. 그래. 못난 얼굴은 아니다. 외려 자신과 비슷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어쩐지 처음부터 기분 나쁜 분위기가 느껴진다 했더니, 결국 전 남편에게 받은 상처의 흔적이 얼굴에서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테는 어쩐지 같은 여자로서 측은함을 느꼈다. 그런 탓인지 자기도 모르게 오지랖이 나왔다. “재혼할 생각은 없는가?” 대다수의 궁정 시녀가 그러하듯 이 여자도 귀족들과의 결혼을 꿈꾸고 있을 거란 생각에서 한 질문이다. 그러나 로테의 예상은 깨졌다. “천만에요. 한 번의 경험이면 충분하답니다. 저는 사내에게 의존하지 않기로 했어요.” “왠지… 멋져.” 로테는 그 말을 중얼거리다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이를 가진 후로 부쩍 잠이 많아져 베개에 머리가 닿는 순간 잠이 드는 것이 예사다. 시녀는 언제나 그랬듯 향긋한 침향을 피웠다. 그리고 침대맡에 서서 황태자비의 얼굴을 아주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다. 어디서 울고 왔는지 세수를 해도 눈 주위가 여전히 빨갛다. 그런 가여운 꼴로 자면서도 종종 옆으로 누워 제 배를 어루만지곤 한다. 마치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보물을 껴안듯이. ‘하긴, 보물은 보물이지. 지금 현재 제 입장에선 말이지.’ 온실 속 화초 같은 이 계집, 이제 겨우 스무 살이라 했던가. 촌구석에서 살다가 황태자비의 자리에 오르고 세상을 배워가면서부터 제법 어른의 흉내를 낼 줄 안다. 하지만 그런 흉내를 언제까지 낼 수 있을까? 자신은 분명 암시를 주었다. 사내에게 의존하지 말라고. 사내가 심어 준 아이 같은 것엔 더욱더 의존하면 안 된다. 의존하면…… 위험해지니까. 자신이 프리드리히에게 내쳐졌던 그때처럼. ‘세상모르는 공주님. 세상에 믿을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랍니다.’ 신랄한 미소를 흘리며 시녀는 침실을 나섰다. 황태자비의 침실 바로 옆에 자그마한 침방이 시녀의 처소다. 원래라면 서너 명의 시녀가 함께 써야 할 장소이나, 내궁부에서 황태자비에게 달랑 시녀 하나만 붙여주었기에 이렇게 그녀 혼자만의 차지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은밀한 것을 숨겨둘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시녀는 침방의 자그마한 신발장을 열었다. 신발장 안에는 새끼 토끼 수인이 있다. 그 수인은 성대가 제거되어 어떤 소리도 낼 수 없다. 황후의 봄 별장 트리아노네에서 생후 한 달 만에 온 것으로, 루앙의 흑마법사들에게 개조당해 기존 토끼 수인의 모습에서 많이 벗어나게 되었다. 털은 온통 검고 앞니 두 개는 흡혈귀의 송곳니처럼 날카로우면서도 매우 길다. 게다가 손톱과 발톱 역시 맹수의 것처럼 날카로워서 아무리 새끼 수인이라 하더라도 위협적으로 보인다. 성격 또한 기존 토끼 수인의 포악함보다 열 배는 더 좋지 않다고 한다. 다행히도 지금 이 토끼 수인은 마법사들의 최면에 걸려 신발장 속에서 얌전히 있다. 하지만 이런 평화로운 상태도 고작 내일 아침까지일 뿐이다. 내일 아침 해가 뜨면 이 토끼 수인은 황태자비를 죽인다. 그런 최면이 걸려 있고, 그렇게 조치한 것은 할데바인이라는 흑막이다. 최면에 걸린 이 무시무시한 수인은 인체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을 먹기 좋아한다. 안구, 내장, 뇌, 그리고…… 태아. 시녀가 할 일은 내일 축성제 전에 단장을 마친 황태자비에게 향수를 건네는 것이다. 아마도 그 향수의 향이 퍼지는 순간, 토끼 수인은 각성하여 황태자비를 공격할 것이다. 미루고 미뤘던 황태자비 암살 계획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할데바인은 야울 궁을 지키는 무인 중 하나와 미리 입을 맞춰 놓았다. 무인은 스스로 수인을 궁에 들여온 범인이 되기로 했다. 어째서 그런 죄를 짊어지기로 했을까? 시녀가 추측건대, 보나 마나 할데바인이 무인 가족을 인질로 삼은 게 틀림없다. 그러니 무인이 처형받을 게 분명한 악역의 길을 스스로 가려는 것이리라. 시녀는 멍하니 있는 토끼 수인의 귀를 쓰다듬었다. 자신이 할 일은 내일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무인이 수상한 생명체를 궁에 들인 것 같다.’는 말만 아주 살짝 흘려두면 된다. 그리고 할데바인이 시킨 거짓말을 늘어놓으면 그만. 이번 암살사건이 끝나고 그 후 그리 멀지 않은 날에, 할데바인의 딸은 기어이 황태자비에 오르고 말 테지. 그리고 그때, 자신은 전남편의 자리인 오슬 총독을 빼앗아 차지하게 된다. 전 남편의 비리를 캐어 그 목을 교수대에 걸고서 말이다. 그만큼 통쾌한 복수도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 거리로 내쫓은 그 남자 프리드리히를 수렁에 빠뜨릴 방법으로 최고이지 않은가? 프리드리히는 교제 당시만 해도 황도 최고의 남자였다. 반 할데바인 파에 속한 남자이면서 친 할데바인 여자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면 그 인기를 다 증명한 셈. 그 남자는 기존 할데바인 중심의 체제에 극렬히 반대했고 시를 사랑하며 춤을 열정적으로 잘 추는, 게다가 오슬의 페이르메르(예술의 신이자 가장 완벽한 용모를 지닌 자. 신화에 의하면 미의 남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로 불릴 정도로 출중한 외모를 자랑했다. 그런 남자의 불같은 구애에 빠져 자신은 친 할데바인 영지인 로샤타르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결혼했다. 그 남자와 결혼한다면 의절을 해야 할 것이라는 집안의 경고도 무시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참혹했다. 프리드리히는 반 할데바인 파의 젊은 피라는 주제로 주목받길 좋아하는 명예욕의 노예였으며. 시와 춤으로 무수한 여자와 낭만담을 만들어내는 저급한 바람둥이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탓하고 잘못되었다고 가르쳐주는 아내를 유령 취급하며 독단적으로 이혼해버리는 아주 이기적인 작자이기도 하고. 시녀는 그렇게 내쫓겨 고향 로샤타르트에 돌아가지도 못했다가 가까스로 친척 언니의 도움을 받아 시녀 자격으로 입궁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황궁 시녀의 자리로 남은 생을 살아가면 그만이라도 생각했지만, 일이 굴러가는 것을 보니 그것은 참 소박한 꿈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오슬의 총독이 될 수 있다고! 내가 그 녀석에게 복수를 할 수도 있단 말이지!’ 아아. 자신에게 기회가 올 줄이야. 내일, 바로, 내일. ‘해가 빨리 떴으면 좋겠어.’ 시녀는 신발장 문을 닫고 잘 준비를 했다. 창밖에는 밤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068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그 시각, 하이너도 밤하늘에 뜬 작은 태양을 보았다. 밝은 달을 보니 활짝 웃는 아가씨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긴장으로 굳은 얼굴이 서서히 풀리다 급기야 미소가 나왔다. 단지 그분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가가 올라가다니……. 그러던 어느 순간이다. 달을 향해 다가오는 한 무리의 구름이 보였다. 갑자기 하이너의 시선이 내리깔렸다. 저 구름처럼 어두운 마리아의 표정이 떠오른 것이다. 감정을 가진 사람인지라 자기에게 반해버린 소녀의 기분을 모른 체하기가 쉽지 않다. ‘임무나 생각하자.’ 드래곤이어서 편하다. 오늘 자신이 휘두를 무기가 두 가지나 있으니 말이다. 그 힘이란 바로 투명화 그리고 최면. 협찬으로는 륀체르에게서 받은 황태자비 소궁의 구조가 그려진 지도. 아, 참. 그리고 자신의 연기력도 받쳐줘야겠다. 그 모든 게 조화롭다면야 오늘 임무를 성공이라 할 수 있을 테지. 지금쯤 로젠플라드 성도의 작은 신당에서 자신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을 아가씨에게 다짐해 본다. “성공해서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그 일행들에게도. “꼭 성공해서….” *** 시녀는 온몸을 감싸는 찬바람에 잠을 깼다. 그리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밤중에 갑자기 나타난 이 침입자는 대체 누구일까? 어둠 속에서, 키 큰 그 침입자가 두 손을 들며 시녀를 진정시키려는 듯 말했다. “아, 일어나셨군요.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저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궁이 너무 넓고 복잡해서 길을 잃었습니다만. 저쪽 방(로테아르카의 방)은 뭔가 들어가서 길을 묻기가 부담스럽고 무서워서…….” 저음에 상당히 유순한 말투였다. 그리고 시녀 자신의 고향 로샤타르트의 억양이 느껴졌다. 보통 이런 어둠 속에서는 목소리에 담긴 진심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법. 직감으로 판단컨대 적어도 나쁜 이 같지는 않다. 이런 궁에서 고향 로샤타르트의 말을 들으니 괜스레 친근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시녀는 잠시간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사연으로 궁에 들어와 길을 잃었을까? 달빛의 역광 때문에 침입자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아서 시녀는 천장의 줄을 끌어당겨 마력 광구 하나를 켰다. 그러자 침입자의 복장이 확실히 보였다. 청회색 바탕에 하얀 장미 하나가 수 놓인 옷, 바로 로젠플라드 하급 사제 지망생 복장이다. 아마도 내일 있을 축성제 때문에 입궁한 사람일 것이다. 앳된 얼굴을 보니 갓 스무 살이 되었을까 말까 한 젊은이다. 자꾸 보니 제법…… 준수하게 생긴 편이다. 아니, 어쩌면 상당히 잘생긴지도. 젊은이의 검은 눈동자가 빤히 바라보는 느낌에 시녀는 시선을 피하며 얇은 겉옷을 하나 걸쳤다. 그리고 물어야 할 것을 물었다. “그리 넓은 궁도 아닌데 길을 잃다니요. 어느 신당에서 오셨나요?” “성도 제 43신당에서 왔어요.” 의심이 많은 시녀는 좀 더 확실한 정보를 원했다. 원래부터 의심이 많은 게 아니라 거사를 앞두다 보니 없던 의심도 생기게 된다. “사제 신분증을 좀 보여주시겠어요?” 그러자 젊은이는 폭이 넓은 소매 안에서 팔찌 하나를 꺼냈다. 팔찌의 금속 장식에는 성도 제 43신당의 사제 지망생이라는 정보가 음각돼 있다. 그것을 확인한 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분이 확실하니 걱정할 일은 없을 듯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일개 종교인이 멋대로 이곳에 오다니. 내궁부에서 황태자비를 홀대하는 것은 알겠지만, 소궁 경비를 이토록 허술하게 세우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 자칫 잘못하면 시녀들의 안전도 위험한데 말이다. 시녀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젊은이는 곤란에 처한 사람처럼 쩔쩔매며 부탁했다. “저, 실례지만 출구를 좀 가르쳐주시면 안 될…….” 그때, 갑자기 침방 저쪽에서 신발장이 덜컹거리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그 탓에 신발장 문이 반쯤 열리고 말았다. 그 틈으로 토끼 수인이 튀어나왔다. 원래라면 최면에 걸려 멍하니 잠든 듯 있어야 할 생물이 스스로 뛰쳐나오자 시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 안 돼!’ 저 생물이 그 누군가의 눈에 띄기라도 한 순간, 할데바인의 거사는 시작부터 삐걱거리게 된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그녀와 달리 정작 젊은이는 놀라지 않는다. 놀라기는커녕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것을 본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으며 토끼 수인에게로 손을 뻗었다. “어쩜 이곳에 이리도 귀여운 아이가…!” “만지면 안 돼!” 시녀는 토끼 수인을 들어 안고 감쌌다. 젊은이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놀라고 살짝 미안한 표정이 되어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두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그녀에게 진정하라는 표시를 했다. “워워, 해치지 않아요. 빼앗지도 않고요. 저는 단지 너무 귀여워서 그만… 그리고 토끼 수인을 원래 좋아하기도 하고요. 음. 제가 사는 신당에서도 토끼 수인을 세 마리 키우는데, 암컷 두 마리에 새끼 수컷 한 마리요. 하지만 저 아이처럼 귀여운 맛은 없죠. 특히나 가장 큰 암컷은 어찌나 말을 안 듣는지 잔소리를 하면 무시하기 일쑤에다 도리어 사람을 놀리질 않나, 정말이지 말을 괜히 가르쳤다는 생각밖에는…….” 토끼 수인에 관한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의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마치 어제도 그제도 대화를 나눈 친구를 보는 듯하다. 시녀는 토끼 수인의 몸을 잡은 손에 힘을 빼며 차분히 호흡을 골랐다. 조금 전에 젊은이가 토끼 수인을 보고 귀여워하는 모습을 보고 그만 이성을 잃어 만지면 안 된다고 신경질적으로 외쳐버렸다. 그런 행동이 도리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었다. 조심해야겠다. 이 침방에 토끼 수인이 있다는 사실이 퍼지든 퍼지지 않든 일단은 침착함을 유지해야만 한다. 시녀는 머뭇거리다가 젊은이에게 토끼 수인을 건넸다. 토끼 수인을 보며 끔찍하단 표정을 연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뱉었다. “이게 언제 여기 숨어들었는지… 설마 무슨 병이라도 옮기러 온 거 아니겠지요, 끄, 끔찍하게 생긴 것이…….” “끔찍하긴요! 이렇게 귀여운 데요!” 시녀에게서 토끼 수인을 받아든 젊은이는 귀여워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웃었다. 어미가 재롱부리는 제 아이를 바라볼 때도 저런 표정을 짓진 못할 것이다. 커다란 두 손으로 토끼 수인의 몸통을 안고 우르르 까꿍하고 어르는 모습에서 행복한 분위기가 가득 뿜어져 나왔다. 귀여운 모습에 흠뻑 빠져선 이런 지엄한 장소에서 목소리 크기 하나 조절하지 못하는 모습이 어찌나 칠칠하지 못한지. 그야말로 저 수려한 용모가 다 아까울 지경이다. “우리 신당의 모리는 하얀색인데 너는 특이하게도 검은색이구나! 이 용심 많아 보이는 이빨 좀 보라지! 이 심술궂은 주둥이 좀 보라고! 뭘 먹으면 너처럼 이리도 귀여운 앞니를 가지는 거야, 응? 우왓! 눈 떴다! 눈은 또 노란색이네, 우리 모리는 청록색인데. 눈만큼은 우리 모리가 더 귀여운지도?…….” 젊은이는 특히나 토끼 수인과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길 좋아했다. 정작 토끼 수인은 천적이라도 마주한 양 겁에 질렸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혼잣말에 시녀는 얼떨떨하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다. 흉악하게 생긴 토끼 수인이 대관절 뭐가 그리 귀엽다고 저렇게 유난을 떠는 걸까. 하지만 그 모습이 괜찮은 외모와 다정한 목소리 때문인지 그리 밉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언제까지 저렇게 안고 놀게 내버려둘 수도 없다. 시녀가 두 손을 내밀며 부탁했다. “아무튼, 무슨 병을 옮길지 모르니까 이리 주세…….” 그런데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젊은이가 토끼 수인의 귀를 쓰다듬더니 원래 있던 장소인 신발장 안에 고이 넣어두는 게 아닌가. 시녀가 그 행동의 의미를 몰라 멍하니 있는데 젊은이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아마 잘못 들어온 거겠죠. 이렇게 두면 다시 알아서 나갈지도 모르잖아요?” “그, 그렇긴 하지만….” “토끼 수인 성격이 좀 그래요. 고슴도치처럼 남몰래 움직이길 좋아하거든요. 그러니 시녀님도 모른 척해줘요. 그게 얘한테는 좋은 거니까요. 그러면 정말로 알아서 나갈 것 같으니까.” “…….” “그나저나, 나갈 길 좀 알려주시겠어요? 저희 같은 지망생들에게 내려진 방이 분명 어딘가에 있었는데…….” 시녀는 어쩐지 젊은이에게 마구 휘둘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 남자, 어떤 말을 해도 자연스럽다. 아마도 사제를 지망하지 않았다면 거리에서 물건을 팔거나 보육원에서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해도 되리라. 시녀는 광구를 꺼버리고 문을 열었다. “나를 따라오세요. 참…… 이름이 어떻게 되죠?” 젊은이는 말했다. 자신의 이름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알려줄 수 있으니 양해해 달라고. 하지만 성만은 알려줄 수 있다고. 젊은이의 성은, 와트프라우어라고 한다. 시녀는 소궁 침방에서 객들이 머무는 지하 침소 입구까지 젊은이를 안내했다. 입구 안쪽을 보니 젊은이와 같은 사제 지망생 복을 입은 자들이 많이 잠들어 있다. 길을 안내받은 젊은이는 정중하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시녀는 그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다시 자기 침방으로 돌아왔다. 선한 젊은이 같다. 토끼 수인을 광적으로 귀여워하는 것 빼면, 용모도 목소리도 웃는 표정도 무엇 하나 눈에 어긋나는 게 없는 바른 젊은이의 표본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토끼 수인을 목격했으니 살려두어선 안 된다. 시녀는 스크롤 하나를 태워 할데바인의 전서조(소식을 알리는 새)를 불렀다. 그리고 젊은이의 외모를 묘사한 종이를 전서조의 발에 묶어 창밖으로 날려 보냈다. 물론 젊은이가 속한 신당과 젊은이가 쓰는 성을 적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마도 전서조는 곧 야울 궁내의 할데바인 측이 심어둔 무인에게 갈 것이다. 그리고 종이를 펼쳐 본 무인은 내일 해가 뜨기도 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와트프라우어를 죽여 버리겠지. ‘잠이나 자자.’ 시녀는 자꾸만 아른거리는 젊은이의 얼굴을 외면하듯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잠을 이룰 수 없다. 밤중에 일어난 작고도 엄청난 소란도 소란이지만, 자꾸만 젊은이의 달콤한 목소리가 귀에 다시 감겨오는 듯하다. ‘그러게 왜 그리 수다스러워서는 원!’ 토끼 수인를 안고 노는 그 해맑은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불현듯 전 남편의 별명이 떠올랐다. 뭐라고? 오슬의 페이르메르(예술의 신이자 가장 완벽한 용모를 지닌 자. 신화에 의하면 미의 남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라고? 틀렸다. 고작 그런 외모로 페이르메르라 불리는 건 옳지 않다. 시 좀 좋아하고 춤 좀 추는 멀쩡하게 생긴 남자라고 다 페이르메르인가? 진짜 페이르메르는 자신의 침방에 잘못 들어온 그 젊은이다. 그의 용모는 정말이지 살아있는 인간 페이르메르라 할 수 있다. 수다스러운 성격도 달리 보면 매력이라 할 수 있을 테고, 그러므로 따르는 여자가 한둘이 아닐 텐데 어째서 사제 같은 따분한 직업을 지망하는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잠이나 자자니까.’ 어차피 죽을 사람인데 기억해서 뭐하는가. 자꾸만 떠오르는 젊은이의 얼굴을 지우듯 고개를 흔들며 이불 속 깊이 몸을 파묻었다. 그런데 그때, 신발장에 얌전히 잠들어 있어야 할 토끼 수인이 또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녀가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 때쯤, 이미 토끼 수인은 그 흉한 이를 드러내며 시녀의 앞에 있다. “뭐……지?” 토끼 수인에게 걸린 최면이 엉터리 최면이라 이리도 자주 제멋대로 행동하는가? 시녀가 그런 생각을 할 때, 토끼 수인의 입이 벙끗 열렸다. 마치 괴기스러운 인형과도 같은 표정이다. 「나. 내일. 향. 수. 병. 뚜. 껑. 열릴. 때. 움직이면. 돼?」 절대 목소리를 낼 수 없는데 말을 하다니. 시녀는 할데바인이 고용한 마법사들의 실력이 형편없다며 혀를 찼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전서조가 돌아오면 토끼 수인이 잘못되었다는 소식을 할데바인에게 알려야 했다. 토끼 수인이 또 한 번 중얼거렸다. 「나. 마. 음. 껏. 먹을. 수. 있는. 거야?」 “큰일이군.” 「로. 테. 아. 르. 카. 어. 디. 부. 터. 먹을. 까? 뇌? 내장? 아니면 아이…….」 듣다 못 한 시녀가 짜증스럽게 소리 낮춰 말했다. “마음대로 해! 이제 좀 자라고! 어째서 말을 하는 거야, 정말…….” 「이. 제. 자. 라. 고? 」 중얼거린 토끼 수인은 다시 신발장에 들어갔다. 바로 누워 두 손을 배에 포개며 눈을 감는 모습이 정말 잠들 것 같다. 그러나 장담할 수 없다. 또 깨어나서 자기가 해야 할 일에 관해 중얼거릴 수도……? 저대로 계속 아무 일 없다는 듯 자다가 내일 무사히 최면 받은 대로 굴어주면 좋으련만……. 하지만 이미 말을 했다는 것부터 틀렸다. 저 토끼 수인도 할데바인에 의해 폐기되어야 하리라. 전서조는 금세 돌아왔고 시녀는 토끼 수인의 최면 실패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 할데바인 측으로 날려 보냈다. 보내면서 별별 생각을 다 했다. ‘설마 그 젊은이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던 건……?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할데바인이 자부하는 흑마법사들이 건 최면을 풀어 토끼 수인을 멋대로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마력을 가진 젊은이라면 애당초 입궁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야울 궁을 지키는 마법사들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데 그런 마력자를 잡아내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대체 이 사람들은 왜 이리 늦는 거야. 잘못됐단 소식이 오면 즉시 와서 (토끼 수인을) 수거해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걱정된 시녀는 한참을 침대 위에서 뒤척였다. 그런데 그녀는 모르고 있다. 그녀가 그러는 동안, 투명화한 ‘와트프라우어’가 로테의 침실에 가서 뭔가를 훔쳐 나왔다는 것을. 그 물건은 바로 내일 암살계획에 이용될 향수병이다. 하이너는 마력을 숨기고 투명화하여 궁 밖을 나서면서 소름이 끼쳐 온몸을 떨었다. 소름이 끼친 이유는 첫 번째로 자신의 뛰어난 연기력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황태자비 암살 방법 때문이다. ‘미친 할데바인 자식들! 아이를 가진 여자를 그런 흉악한 동물로 죽이려 들다니!’ 시녀에게 최면을 걸려다가 갑자기 나타난 토끼 수인(아마도 드래곤 기에 반응하여 놀라 신발장 속에서 뛰쳐나온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저도 모르게 수인까지 최면을 걸고 말았는데, 뜻밖에 이런 성과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토끼 수인의 속내까지 읽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이러면 굳이 시녀에게 최면을 걸 필요도 없고, 마법사들이 그녀에게서 최면의 흔적을 찾을 수도 없으니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을 수 있다. 일거양득의 성과다. 그의 손에는 마법영상구에 들어갈 링클 하나가 들려 있었다. 링클에는 토끼 수인이 시녀에게 했던 말들이 모조리 담겨있다. 전부 자신이 투명화하여 찍은 영상으로, 앞으로 할데바인을 협박할 수 있는 훌륭한 증거물이 될 것이다. ‘아가씨! 성공했습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069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향수와 링클은 로귀하르트에 있는 륀체르의 정보인에게 전달되었다. ***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시각, 륀체르는 정보인에게서 증거물들을 건네받았다. 하이너의 편지도 함께였다. 「링클엔 암살에 쓰일 토끼 수인의 대화가 들어있다. 그리고 향수도 보낸다. 향수 역시 암살에 쓰이려던 물건이었지. 뭐, 긴 설명은 다음에 하기로 하고, 일단 우리 일행을 안전한 곳에 피신시켜 줬으면 좋겠군. 내가 궁녀에게 가짜 신분을 말했지만, 내 얼굴이 알려질 테니 우리 일행이 잡히지 않을 거란 장담은 못해. 그럼 나는 할데바인이 머무는 곳에 들러서 좀 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가겠다. 아가씨를 잘 부탁한다.」 륀체르는 챙 모자를 쓰며 심술 맞게 웃었다. 좀 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오겠다는 하이너의 말이 믿음직스러웠다. 그리고 한편으론 이렇게 세세한 지시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일을 찾아 해내는 사람을 호위기사를 둔 아가씨가 부러웠다. 그나저나……. “이봐, 기사님. 네가 그렇게 챙기지 않아도 이쪽에서 알아서 하려고 했다고.” 그는 곧바로 성도 신당의 마리 일행에게 피신하라고 전언을 보냈다. 피신 장소는 야울에 있는 자신의 별장이다. *** 꿈속에서, 마리는 임무를 마친 호위기사를 만났다. 호위기사는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태양이 그의 몸 전체에 사파이어 빛 역광을 드리웠다. ‘아가씨! 임무에 성공했습니다!’ ‘우왓! 역시 나의 기사야! 못하는 게 없구나!’ 마리는 호위기사가 기특한 나머지 그를 안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칭찬을 받은 호위기사는 갑자기 평소와는 다르게 야비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부탁했다. ‘성공했으니 가슴 한 번 빨아도 될까요?’ 그러자 마리는 울상을 지으며 대꾸했다. ‘으앙…… 륀체르와 베개 싸움을 하더니 가슴 성애 병이 옮은 거야?’ 그러나 호위기사는 대답도 하지 않고서 두 손을 그녀의 풍만한 가슴으로 가져갔다. 딱 그 순간, 마리는 잠에서 깨어났다. *** 어디서 은은하고 기분 좋은 나무 향, 그러니까 륀체르의 영원의 봄 비밀정원에서나 맡을 수 있는 향기가 난다 했더니, 정말로 눈앞에 륀체르가 있다. 향기는 아마도 륀체르에게서 나는 향기일 것이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 흐리멍덩하던 마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륀체르는 그녀의 반응이 귀엽다는 듯 싱긋 웃었다. 마리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물었다. “뭐지?” 륀체르는 침대 옆 탁자에 자리하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뭐긴 뭐야. 나지.” “아니, 그러니까 길드장 당신이 어떻게 여길……? 나는 분명 성도의 신당에서 잠들었는데 이곳은…….” 처음 보는 침실. 벽 곳곳에 사막에서나 볼 수 있는 생물의 뼈가 전시되어 있고, 탁자마다 모래시계가 가지각색의 모양으로 여러 개 놓여 있다. 단지 시간을 보려고 둔 것이 아니라, 수집 목적인 듯하다. 륀체르가 이곳에 관해 설명했다. “여긴 야울에 있는 내 별장이야. 너의 꼬마 숙녀님이 갖춘 능력(투명화)과 내가 가진 피 같은 돈(이동 스크로에 쓴 돈)이 힘을 합쳐 이런 마법과 같은 순간이동에 성공해냈지. 흠. 네 호위기사가 임무에 성공했단 소식을 듣고 나는 너희의 안전이 걱정 되어 이곳으로 옮겨야겠다고 판단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만, 어쩐지 섭섭한 기분이다. “아무리 그래도… 나 아직 사제님이랑 작별 인사도 못 했는데.” “노인이랑 그딴 거 해서 뭐해?” 언제나 싹수없는 말버릇이 얄미워서 마리는 그를 째려보았다. 예전처럼 욕설을 쓰며 남을 부르거나 하진 않지만 그래도 여전하달까? 오직 돈에 미친 남자라 도무지 낭만이란 걸 모른다. 대륙 정복 여행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과 헤어질 때 하는 눈물의 이별! 그 감성의 향연! 마리는 그런 것을 은근히 바랐다. 륀체르는 그녀의 째려보는 눈을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그렇게 도끼눈으로 보지 마.” “남이사!” “자꾸 째려보면 확….” 무언가 심술 맞고도 야한 말이 나오려는데 마리가 그 말을 막았다. “내 아이들은 어디 있어?” 륀체르는 픽 웃었다. 내 아이들? “누가 들으면 네 자식이라도 있는 줄 알겠군. 그 빨간 눈 꼬마 숙녀는 잠들었고 똘똘하게 생긴 소년은 책 보더라.” “잠들어 있다니? 어디에서?” “어디긴 어디야. 침실 안의 침대겠지. 내가 밖에 나가는 건 주의하라고 일렀으니까.” 아무리 투명화가 가능한 드래콘이라 하더라도 이런 밤엔 몸을 사리는 게 좋다. 마리는 고개를 저으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리아는 드래콘이라 인간처럼 침대에서 자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륀체르의 특별 지시가 있었다고는 하나, 그렇게 얌전히 침대에서 잔다는 말을 들으니 좀 낯설다. 그 아이가 서서히 인간의 방식을 배워가나? 그게 아니면 최근 일어난 루돌프의 주정 사건 때문에 심란하여 그런 식으로 잠에 도피를……. 마리는 그런 생각을 하며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손질했다. 잠옷 차림으로 물결치는 금발을 틀어 올리는 모습, 아름다운 얼굴로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는 모습이, 륀체르의 눈에는 그녀의 몸에 늘 감도는 향기만큼이나 달콤해 보였다. 당장에라도 두 손에 쥐고 맛보고 싶을 만큼…. 그는 한참 전부터 바랐던 것, 하고 싶었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잠깐 방 밖으로 나갈래?” “음?” “모래 정원에 가자.” “모래 정원? 거긴 왜?” “천장이 유리로 돼 있어서 밤하늘을 볼 수 있지. 이 방을 나서면 금방이야.” “음.” “…… 혹시 야울의 밤하늘에 관해 들은 적 있어? 굉장하다고.” “응. 밤하늘이 다양한 색깔로 빛난다고 들은 적은 있어. 아직 본 적은 없지만.” “그래. 그걸 보는 거야!”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살짝 들떠있단 느낌은 마리의 착각일까? 륀체르는 이미 마리가 입을 겉옷을 들어 그녀에게 건네었다. 머리를 완전히 틀어 올린 마리는 그것을 받아들고 입을까 말까 망설였다. 그러자 륀체르가 아예 겉옷을 그녀의 어깨에 걸치며 팔을 이끌었다. “고민할 시간 없어. 밤은 금세 끝나버릴 거라고.” *** 모래알이 밤하늘 아래 반짝였다. 밤하늘을 보면 인간은 상념에 빠지곤 한다. 채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들은 영원할 것 같은 꿈을 이루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데, 밤하늘은 그 아등바등하는 인간들에게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라는 듯 어둠을 고요하게 드리웠다. 물론 하늘이 안식 같은 어둠만 드리우는 건 아니다. 때로는 인간을 벌하듯 재앙을 내리기도 하고, 때로는 지금과 같이 아름다운 볼거리를 주어 낭만에 젖게 하기도 한다. 흑청색 하늘엔 신이 드리운 아름다운 빛깔이 있다. 부드럽게 퍼지는 청록빛의 기운은 마치 구름과 안개가 한 데 모여 천천히 추는 춤 같다. 그것도 구슬픈 춤사위 말이다. 그 사이에서 점점이 반짝이는 별빛은 구름과 안개의 춤사위에 화음을 더했다. 새까만 하늘을 은은하게 수놓는 발광현상, 이것은 대륙에서 위도가 높은 지역인 동한, 야울, 시귀르에서나 볼 수 있고, 사람들은 이를 라인햐르라고 부른다. 라인햐르. 그것은 륀체르의 야울 식 발음이기도 하다. 야울 출신인 륀체르의 어머니는 아이에게 별빛처럼 반짝이는 사람보단 라인햐르처럼 넓고 은은하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사람이 되라고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륀체르는 어머니의 뜻을 거부했다. 은은하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사람이라니. 너무 약하다. 그렇다고 라인햐르보다 더 강한 빛을 뿜어내는 별이 되는 것도 싫었다. 라인햐르, 별 모두가 밤을 밝히는 것들 아닌가? 자신은 밤을 밝히기보다 밝은 곳을 더 밝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는 한낮의 태양을 야망 했다. 태양이 되길 원하고 있다. 륀체르는 밤하늘을 보고 연신 아름답다고 말하는 마리에게 라인햐르의 생성에 관해서 설명했다. “만물의 신(태양)이 보낸 은혜가 대륙 마력장과 반응해 극북, 극남부 하늘에 이런 대규모 발광 현상을 일으키지. 신은 지상의 생명체들에게 이런 식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곤 해. 종종 예술가들이 밤하늘을 보면 울고 싶다고들 하잖아? 그건 신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래. 예술가들이 그 어떤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도 신이 빚은 것들엔 미치지 못하니까. 나는 신을 믿진 않지만, 그 점에는 동감한다. 인간이 그 무엇을 만들든…… 이 대자연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어.” 그리고 마리니시네 너도 그 대 자연이 빚은 것 중 하나야. 륀체르가 그러한 의미를 담은 눈길로 마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리는 여전히 밤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감동에 젖은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오…로라. 이건 오로라야.”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륀체르는 알 수 없다는 눈으로 마리를 보았다. “오로라? 그게 무슨 말이야?” 밤하늘에 빠져 륀체르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던 마리는 뒤늦게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싱겁긴.” “그런데 정말 예쁘다! 보여줘서 고마워!” “너무 기뻐하잖아? 이런 거 그냥 고개만 들면 볼 수 있는 거….” 마리는 밝게 웃으면서 륀체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았다. “……!”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는 라인햐르의 청록 빛깔보다 더 투명하고 빛난다. 륀체르는 홀린 듯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언제나 그녀를 보면 풍만한 가슴으로 시선이 저절로 내려갔는데, 이번만큼은 다르다. 그녀의 눈이 놓아주질 않는다. 그녀의 눈빛에서 시선을 뗄 수 없다. 왜일까. 다른 때와 달리 그녀가 먼저 손을 잡아줘서? 그녀의 목소리가 별빛이 울리는 소리처럼 아름다워서? 어쨌거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 그녀와 자신, 그리고 아름다운 밤하늘만 존재하는 듯하다. 륀체르는 서른 살이 된 지금에야 사춘기의 설레는 기분을 느끼며 읊조렸다. “마리니시네….” “암살에 실패한 할데바인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까?” 륀체르의 설레는 기분은 별똥별처럼 낙하했다. 그래. 밤하늘의 아름다움도 잠시 뿐, 그녀는 줄곧 암살 계획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암살 계획의 중심에 자기 동생이 있는 한. 몽상에서 현실로 돌아온 륀체르는 마리의 말이 못마땅하여 빈정거렸다. “호오. 백치께서 그런 것도 질문할 줄 아셔?” 이미 백치가 아니란 것은 알았지만, 그런데도 그렇게 놀리고야 말았다. “흥. 그건 날 시기하는 무리가 지은 별명일 뿐이라고.” “그래. 백치가 아니라면 어디 스스로 앞일을 예측해보시지?” 마리의 시선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라인햐르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저 먼, 아주 어두운 하늘을 보았다. 갑자기 가슴이 싸늘해졌다. 하이너에게 거사를 방해받은 할데바인은 지금쯤 칼을 갈 것이다. 지금껏 그 자는 지고의 권력을 위하여 차분히 한 계단 씩 밟아왔다. 조카를 황후로 만들었고, 황제를 무력하게 했으며, 성도를 흡수하고 법을 제 편으로 끌어오려 애썼다. 마지막으로 딸을 황태자비에 올린 뒤 황실 전체를 장악하려고 했다. 그게 그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황태자비 간택전에서 황태자의 독단적 행동에 그 야망이 꺾이고 말았다. 이대로 갈 수 없다고 생각한 할데바인은 어떻게든 시골뜨기 황태자비의 뒤를 캐고 그 아버지인 오를린 영주의 흠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황태자비의 회임으로 황태자의 힘만 더 키워준 꼴이 되었다. 언제나 할데바인에 반목하던 황태자가 황제에 오르면 어떻게 될까? 누구도 할데바인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다시는 야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자근자근 밟힐 것은 불 보듯 빤한 일. 그런 앞날을 막고자 할데바인은 황태자비의 도덕성과 행실을 문제 삼아 재판에 회부하는 강수를 두었다. 재판에서 이기면 황태자의 자질까지 걸고넘어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패배. 그래서 황태자비 암살 계획을 세웠다. 암살만 성공한다면 야울 궁의 경비를 트집 잡을 수 있고, 나아가 황태자의 지휘력을 대외적으로 깎아내리는 것도 가능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차근차근 일을 진행하여 황태자가 가진 병력을 제 것으로 모조리 흡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암살 계획이 망해버렸으니, 그 모든 게 좌절된 할데바인은 결국…… 전면전을 택할 수밖에 없겠지. 마리는 여전히 어두운 밤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그 늙은 너구리는 아마 군사를 움직일 거야. 마력 기갑 부대를 움직여 황태자를 벼랑 끝에 몰 것 같아.” “으흠, 마침 야울의 어린 사자(황태자)가 늙은 너구리(할데바인)에게 칼을 갈면서 보복 재판에 넘기려고 한다더군.” “혐의는?” “워낙에 죄 많은 인간이라서 사자가 뽑아내기 나름이야. 만약 재판이 시작되면 너구리는 패배를 각오해야 할 거야. 독 오른 사자는 무자비하게 너구리를 깨물 거라고. 너구리가 사자에게서 빼앗아간 마력 기갑부대 루빈의 수장도 원래는 사자의 친우나 다름없기에 너구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있고, 게다가 너구리에겐 원래 적이 많으니 사자의 승리 쪽으로 기울 게 빤하다. 언젠간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너구리가 법관들을 매수했다곤 하지만, 법은 결국 황족이 가진 절대불변의 권력 앞에서는 어떻게 나올지 장담 못 하지. 너구리는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받아 민심을 잃을 바에야 차라리 군대를 움직이는 길을 택할 거다. 재판에 진 패배자보다는 황실을 단죄하는 정의의 사도 역할이 권력을 잡기엔 더 유리한 위치이기 때문이지. 어찌 됐든, 마리니시네….” 륀체르는 잠시 마리를 보며 픽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정수리에 손을 가져다 대 쓰다듬었다. 마치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처럼. “군사를 움직일 거라는 네 말은 정답이야. 잘 맞췄어.” 마리는 전혀 으쓱해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흥!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라고 해야 할 사람이 그러기는커녕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녀가 정수리를 쓰다듬는 륀체르의 손을 치우며 곰곰이 생각하다 질문했다. “루빈의 수장이라는 사람, 어떤 사람이야?” “어떤 사람이긴. 황태자의 친우나 다름없다고 하잖아.” “알아. 그건. 알긴 아는데…….” 마리가 떠올린 것은 사괴탄 사건이다. 일전에, 사괴탄 작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륀체르가 사괴탄의 집안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하이너는 그 이야기를 막장이라 했다.) 검술에 뛰어나 검황이 되었던 남자 세이든 레 지괴르. 그가 입양한 딸 사괴탄. 그 둘은 하이너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 아니, 죽음이라고도 할 수 없는 영혼의 소멸을 맞이했지만, 그 가족 중 아직 남겨진 자가 있다. 바로, 헤그 레 지괴르. 세이든의 아들이자 사괴탄의 양 오라버니이자, 루빈의 수장. 그리고 황태자의 친우. “언젠가 륀체르가 이야기하지 않았어? 세이든이 자기 아들과 양딸을 결혼시키려 했다고. 그리고 그 아들이 사괴탄을 사랑했다고.” “아, 그랬지. 그런데 그게 왜?” “그 말인즉슨 헤그는 상처 많은 남자란 말이잖아.” “상처?” “그래! 헤그는 한때 아버지가 맺어주려 한 여자, 즉 자신의 양 여동생을 사랑했어. 그런데 정작 그 여자는 헤그를 사랑하지 않았지. 그것만으로도 헤그에게 괴로운 일이었는데, 그녀는 양 아버지를 사랑하기까지 했어. 헤그의 아버지를 말이야. 나중에는 그 여자가 나쁜 마음을 먹고 양아버지를 마검으로 만들어 버렸잖아? 내가 헤그라면 마음이 너무 아팠을 거야. 아니, 아프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해. 그 아픔을 뭐라 설명할 수 없을 거라고.” “응. 그런데 그게 왜?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야?”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대화가 답답해지는 느낌이다. 륀체르라는 남자는 헤그라는 남자를 도구로만 보지 감정을 가진 하나의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어쩌면 이번 일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비극적인 집안사를 가진 헤그는 어떤 기분,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듣자하니 할데바인이 교묘한 수법을 써서 황태자의 마력기갑 부대 루빈을 성도로 귀속시킬 때도 헤그는 그러든가 말든가 하는 방관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무려 공식적으로 지휘관이 바뀌는 일을 당했는데도 그렇게 구는 것은 군인으로서 실격 아닌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상처받고, 그 후에 그 여자와 아버지를 동시에 잃어야 했던 남자는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강을 건넜을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자포자기하여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은 아닐까? 마리는 루빈의 수장, 헤그에 관해 정보를 더 알고 싶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아야 안심할 것 같다. 비록 륀체르는 황태자가 보복 재판을 하게 된다면 황태자의 친우인 헤그가 할데바인에 불리한 증언을 할 거라고 자신하지만, 마리는 그렇게 여기기가 찝찝하다. “있잖아, 길드장. 루빈은 모두가 넘보는 거대한 군사력이야. 만에 하나 헤그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할데바인 편을 든다면 황태자가 보복 재판에서 이기리라는 보장이 없잖아? 만약에 보복 재판이 일어나기도 전에 할데바인이 군사를 일으켜버린다 해도, 그때 헤그가 할데바인의 편에 선다면…….” “하아음.” 륀체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품했다. 최종 목표가 따로 있는 그에겐 고래 싸움의 승자가 누구일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왜 할데바인의 약점을 잡으려고 암살 계획의 증거를 모으라고 했느냐고? 그것은 순전히 할데바인을 먼저 제거하는 길이 쉽고 편할 것 같기 때문이다. 결코 자신이 황태자 편이기 때문은 아니다. 뭐라고? 만약에 헤그가 할데바인의 편에 서면 어쩌겠느냐고? 그땐…… 할데바인과 손을 잡고 황태자를 죽이면 그만이다. 뭐가 문제인가? 그런데 이 오를린의 아가씨는 만에 하나라도 할데바인이 이기는 상황이 오는 것을 꺼리는 모양이다. 동생이 걸려있는 문제라 그런가? 륀체르는 고개를 숙여 마리의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소리 없이 눈으로 외쳤다. ‘대륙 정복을 원했다면서? 그러면 사사로운 것에 신경 끄라고. 백치야.’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차후에, 본편에는 나오지 않는 인물들의 외전(황태자 남동생과 특이한 능력을 가진 소녀)를 한 권 분량 쯤으로 연재할까 하는데 무료 연재가 좋겠지요? 제목 정해지면 후기를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00070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불안하고 초조한 마리는 뒤돌아섰다.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신경 쓰여.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뭔가를 해야겠어.” 피곤한 륀체르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 잡으며 외쳤다. “나는 그런 네가 신경이 쓰인다! 그냥 좀 얌전히 있어 주면 안 되냐?” 마리는 그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헤그, 헤그를 만나야겠어.” 듣다 못 한 륀체르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돌려세웠다. 힘이 너무 강했는지 마리의 몸은 목각인형처럼 뱅그르르 돌아 륀체르와 다시 마주 보게 되었다. 륀체르가 미간에 강한 주름을 잡으며 혼냈다. “안 된다니까. 여긴 야울이라고! 대관절 어딜 가겠다는 거야?” “놔.” “싫은데?” 륀체르가 심술궂게 웃으며 그렇게 대꾸하자 마리도 심술궂게 웃었다. 곧, 마리의 허벅지가 올라갔다. 륀체르의 주요 부위를 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륀체르가 날래게 그녀의 허벅지를 내리누르며 피식 웃었다. “나쁘네! 남자들이 가장 아파하는 부위를 공격하려 들다니! 대체 누구 씨를 말릴 작정이야?” 마리는 입을 꾹 다물고서 볼을 부풀렸다. 륀체르가 너무나 얄미웠다. 그가 요구했던 것은 애당초 ‘할데바인이 황태자비를 암살하려는 증거를 모으라!’ 이것 아니었던가? 그 요구를 들어주었으니 남이야 무엇을 하든 신경을 끌 일이지, 왜 이리 방해를 하는지? “못 됐어, 정말! 놓으라고! 얍! 야!” 륀체르는 절대로 마리의 손목을 놓아주질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마리의 두 손을 잡아 올린 뒤 그녀의 몸을 뱅글뱅글 돌리는 장난까지 쳤다. 그녀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할 작정이다. 정신이 뱅뱅 돌아가야 나중에 헤그를 만나야겠단 생각을 다시는 하지 못할 테지. 팽이처럼 자꾸만 돌려져 어지러운 마리는 울상을 지으며 따졌다. “뭐하는 짓이야!” “헤헤. 글쎄?” “손을 놓으라고! 왜 이리 힘이 세?” “그럼 내가 너보다 힘이 세지, 약하겠냐?” 마리는 인간 팽이로 돌려지면서도 코웃음 치며 쏘아붙였다. “아하! 여자한테 힘으로 이겨서 퍽 좋으시겠어요?” “여자한테만 이기는 게 아닌걸? 나는 네 호위기사님한테도 이기는데?” “흥! 약은 방법이나 쓰면서 이기는 베개 싸움 따위!” 마리가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쉽지 않았다. 사실 륀체르의 힘을 은근히 우습게 여겼고,자기 힘으로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거로 생각했다. 하이너의 몸이 건장하고 탄탄한 편이라면 륀체르의 몸은 선이 가늘고 날렵한 느낌이고, 일단 륀체르는 생긴 것부터 여려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륀체르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마리의 몸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았다. “약은 방법으로 이기든 힘으로 이기든 몇 번을 붙어도 내 호위기사님에겐 이길 자신이 있다고!” 마리는 너무 돌려져서 구토할 것 같다. “흐앙! 그만해! 그만하라고! 어떻게 하면 놔줄 거야?” “너야말로 어떻게 하면 얌전히 있어줄 거냐?” 얌전히? 마리는 세상에서 듣기 싫은 말을 하나 뽑자면, 륀체르가 방금 한 이 말을 꼽을 수 있다. 얌전히? “흥! 얌전은 개나 주라지!” 어쩐지 진짜 화난 기색에 륀체르는 장난을 멈추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물었다. “너, 헤그를 만나서 뭘 할 건데?” 마리는 뱅글뱅글 돈 후유증으로 한참을 비틀거리다가 륀체르가 부축해주자 겨우 대답했다. “헥, 헤엑… 부탁할 거야. 황태자를 배신하지 말아 달라고.” “하?” 륀체르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려다 말았다. 너무나 순수한 정공법이라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마리는 그 순수한 정공법을 진짜로 쓸 생각이다. 루빈. 무시할 수 없는 군사력. 그게 자칫 할데바인과 손을 잡고 황권에 맞서 전쟁을 일으키면 그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높으신 분들의 세력 다툼에 죽어나는 것은 언제나 힘없는 사람들 아닌가? 마리는 헤그에게 황태자를 배신하지 말아 달라고 최대한 간곡히 부탁할 생각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헤그가 그 의견에 반대한다면……. 문득, 마리가 떠올린 것은 자신의 충실한 호위기사였다. 인간이긴 하나, 인간이 아닌 존재. 헤그 하나쯤은 가뿐히 없애버릴 수 있는 뛰어난 존재. 그녀는 그런 위험한 그림까지 그리고 있었다. 너무 진지해서 싸늘해 보이는 안광을 내뿜으며 그녀가 거듭 말했다. “헤그에게 황태자를 잘 보좌해달라고 할 거야. 그가 할데바인과 손잡고 황태자를 치는 일 따위는 못하게 내가 막을 거라고.” 점점 듣고 있기 힘들어진 륀체르가 막말을 퍼부었다. “너 저능아야? 헤그는 황태자의 친우라고 몇 번을 말해? 그런데 그가 배신하겠어? 네가 갑자기 찾아가서 그딴 부탁을 하면…… 헤그는 배신할 생각이 없다가도 멍청한 널 놀리고 싶어져서 할데바인과 손잡게 될 거다. 아마.” 마리가 고개를 들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외쳤다. “륀체르는 어째서 그렇게 자신할 수 있는 거야? 헤그가 황태자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뭘 믿고 장담하지?” “그것…….” “그것은?”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뭐가 남지?” 엉겁결에 마리의 버릇 같은 말을 떠올려 흉내 내버린 륀체르 때문에 마리가 씩씩거리다가 웃고 말았다. “뭐야, 진짜.” 하지만 웃음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륀체르가 헤그의 태도에 확신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동의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 불안함이 사라질 것 같았다. “미안. 와트프라우어 부인의 전용 명언을 따라 해 버렸군. 어쨌거나 내가 헤그를 확신하는 이유는…….” “…….” “헤그의 원수나 다름없는 사람이 할데바인이기 때문이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마리는 눈을 크게 떴다. 륀체르가 밤하늘을 보며 헤그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상하지 않아? 사괴탄이 어떻게 그 젊은 나이에 짧은 수련 기간을 거쳐 마검제조장인이 되었다고 생각해? 그건 바로 할데바인이 뒤를 봐주었기 때문이야. 할데바인은…… 사괴탄을 마검제조장인으로 만든 장본인이지. 즉, 헤그에게 그 너구리는…… 절대 편들 수 없는 원수나 마찬가지란 말이다.” *** 사 년 전. 서한에서 반 제국 운동을 가장 격렬하게 하던 청규룡의 무리가 제국 검황 세이든의 부대에 몰살되었다. 본디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 생기면 검황은 몸소 황도까지 가서 황제에게 승전을 알려야 하지만, 이례적으로 황제가 친히 검황의 저택에 방문하기로 했다. 야울과 로귀하르트 접경지대에 있는 검황 세이든 레 지괴르의 저택. 이곳에선 지금 성대한 연회가 벌어졌다. 황제의 행차에는 많은 귀족이 함께했다. 할데바인 대공, 로샤타르트 영주 야르디네, 바너 영주 크래파, 중천 총독 지율선 등 각 영지 권력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와서 황제와 함께 검황을 격려했다. 연회가 무르익고 늙은 황제는 피곤하여 먼저 잠이 들었다. 다른 영주들도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연회는 젊은 귀족들의 차지가 되었다. 이에 검황 세이든도 적당히 눈치를 보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전장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한 여인과의 달콤한 유희 시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이미 침실에서 기다리고 있거나 아니면 침실에 올 그녀를 떠올리면, 세이든은 벌써 온몸이 반응할 것 같았다. 그가 어두운 복도를 가로질러 가는 그때, 누군가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아버지.” 세이든은 놀란 눈으로 아들을 보았다. 아들의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다. “헤그.” 세이든의 외아들 헤그 레 지괴르. 열여섯 살의 소년. 또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이 소년은 지금 저택에 있는 화려한 복장의 사람들과 달리 단정한 셔츠 차림에 안경을 쓰고 있다. 얼굴도 선하게 생긴 데다 호리호리한 체격이라 부드러운 인상을 주지만,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이곳 본가에서의 모습일 뿐이다. 군사학교에서 헤그는 정식 군인도 아닌데 벌써 전장에서 공을 이뤄 작은 검황이라 불린다. 언제나 거칠고 고된 훈련에 미쳐 있으며 기갑체를 이용한 모의전투를 치르느라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그 때문에 학교에서 그는 언제나 한 마리 들짐승 같다. 오늘도 원래라면 군사학교에서 기갑체 모의전투를 치러야 할 날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본가에 와서 수심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다니, 세이든은 의아했다. “웬일이냐? 아무리 오늘 연회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내 분명 너에겐 학교 일이 더 중요하다고 일렀다.” “군장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혹시……그 아이를 못 보셨습니까?” 그 아이, 사괴탄을 말함이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헤그에겐 살짝 부끄러워하는 표정도 엿보였다. 세이든의 눈가에 미소가 머물렀다. “녀석.” 언제부터였던가. 아들 헤그가 그 아이, 즉 이 집의 양딸 사괴탄을 이야기할 때마다 저렇게 얼굴을 붉히곤 한다. 둘의 사이도 제법 괜찮은 듯하여 양딸을 아예 며느리로 들이고자 했다. 그래서 올봄에 약혼시켰다. 그 후에 아들이 군사학교 모의전투에서 더욱 좋은 성적을 내고 이따금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번 서한 전장에서도 기갑체를 다루며 아군에 큰 힘이 되어 훈장까지 받아왔다. 그런 자랑스러운 아들과의 약혼에 사괴탄의 소극적인 태도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사괴탄 그 아이가 이른 약혼에 적응을 못 해서 그런 것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결과적으로 좋으면 그만이었다. 지금 아들의 저 표정을 보라. 약혼녀가 보이지 않아 걱정하면서도 약혼녀를 곧 만날 생각에 들뜨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여러모로 양딸과 아들의 약혼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세이든은 아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어 번 쳤다. “폐하와 인사할 때만 보였고 그 후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너무 많은 사람이 와 있으니 부끄러워 숨어버렸겠지. 그 아이 성격이 그렇지 않으냐? 그러니 너는 이만 잠이 들 거라. 훈련도 피곤했을 테니 쉬는 게 좋다.” “예, 아버지.” 하지만 헤그는 자러 가지 않고 저택 뒤편의 숲으로 갔다. 혹시나 자신의 약혼녀가 숲에 바람을 쐬러 갔는지 찾아보고 싶었다. 약혼녀가 되기 전, 아주 어린 여동생일 때부터 그 아이는 숲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시각. 세이든의 침실에선 뜨거운 정사가 벌어졌다. 침대를 열기로 물들이는 이들은 바로 세이든과 한 흑발의 여인이다. 여인은 황실 연회에서 무희와 가희들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예술 총관으로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다. 그녀는 젊었을 적 무수한 귀족과 염문을 뿌리기로 유명했다. 마흔 살이 된 지금도 삼십 대 못지않은 미모로 많은 황도 남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존재다. 작년까지만 해도 높은 귀족의 정부로 지냈던 그녀였으나, 올해 들어 그녀는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했고 남편이 될 사람을 고르던 중 세이든을 만났다. 그녀는 무섭게 몰아붙이는 세이든의 목을 두 팔로 감싸며 신음했다. “아아! 전장에서 돌아온 당신은 언제나 굉장해!” “당신이 이렇게 좋아하니 매일 전장에 가야겠군.” “읏! 아아! 더! 아앙!” 흔들리는 침대 옆에는 창문을 가리는 가림막이 있다. 불투명한 재질로 된 두꺼운 가림막 뒤로 누군가가 숨어 있다. 입을 틀어막고 눈을 크게 뜬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그녀는 바로 세이든의 양녀였다가 며느리가 된 사괴탄이다. 사괴탄의 하얀 뺨에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양부는 검성의 무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타인의 기를 잘 알아냈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가정교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양딸이 벽장에 숨어있으면 그 기만으로도 알아채고 벽장의 문을 열어 ‘공부하러 가라!’고 하던 분이셨다. 숲으로 산책갔다 길을 잃은 양딸을 기 하나만으로 찾아내던 분이셨다. 그런 분이라면 가림막 뒤에 양딸이 있는 것을 눈치채야 한다. 그러나 양부는 역겨운 화장품 향기가 나는 여인과 그저 정사에만 몰두할 뿐이다. “더 빠르게 해줘, 아아!” 타인의 기도 눈치채지 못하고, 긴장이 풀려선 쾌락만 탐하는 그분. 늙은 여자에게 몰두하는 데 미친 그분. “아! 아! 세이든! 좋아! 멈추지 마!” “얼마든지.” 사괴탄은 이 현실을 믿을 수 없다. 양부가 황도에서 황실 여인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 소식에 코웃음 쳤다. 단지 양부를 시기하는 무리가 지어낸 거짓이라고만 여겼다. “이제 슬슬 내 청혼에 답을 들어야 할 때라고 생각하는데.” “흐응…… 내 몸이 답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군.” 사괴탄는 꽉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날카로운 검지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핏물이 번졌다. 한참 후, 정사를 마친 세이든은 여인과 달콤한 입맞춤을 나눈 후 밖으로 나갔다. 둘은 새벽 숲을 은밀하게 산책할 예정이다. 그들이 침실 밖으로 나가고 나서도 사괴탄은 한참 동안 가림막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주저앉은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다. “아, 세이든…… 싫어요, 싫단 말이야!” 야속한 사람! 그를 사랑했다. 그의 양녀로서 품으면 안 될 마음을 품어버린 자신을 얼마나 책망했는지 몰랐다. 그래서 언제나 이 마음을 숨겨야만 했다. 당신을 향한 연정을 몰라봐 준다고 해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었다. 그 연정을 모르는 척 양 오라버니와 약혼시켜버린 일도 견딜 수 있었다. 양딸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즉시 패륜의 검황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에! 하지만 왜 하필 저 여자인가! 왜 하필 창녀 같은 저 여자를 애인으로 두시는 건가! 황궁의 무희와 가희를 창녀로 만들어버리는 존재! 여자의 적! 포주나 마찬가지인 저 여자를! 사괴탄은 그 여자가 절대 양부의 애인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애인이 되어서도 안 되는데 이 지괴르 가의 안주인이 되는 것은 더더욱 참을 수 없다! 그들의 결혼이 이뤄지는 꼴을 볼 바에는 차라리……. ‘죽으세요! 차라리 죽어버리란 말입니다!’ 질투와 분노에 눈이 멀어 씩씩거리는데, 누군가가 가림막을 들추었다. 놀란 사괴탄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눈앞에는 웬 회색 머리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예술 총관의 옛 애인이자 할데바인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 황도 사람들에게 소 황제로 불리는 할데바인 대공이다. 사괴탄은 그의 얼굴을 기억해내고 뒷걸음질 쳤다. “어, 어떻게 여기를…….” 할데바인은 시선을 내려 소녀의 두 손을 보았다. 자그마한 두 손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다. 두 손 가득 깨진 유리라도 들고 있었나 했더니 그게 아니다. 소녀는 손톱이 살갗에 상처를 낼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던 것이다. 할데바인은 의뭉스럽게 물었다. “많이 울었나 보구나. 어째서 울었느냐.” 사괴탄은 그가 속내를 다 알면서도 그런 질문을 하는 것만 같아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다. 역시나 속내를 꿰뚫는 듯한 물음이 던져졌다. “네 아버지라는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냐?” 그 순간 사괴탄은 표독스러운 눈으로 할데바인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고개는, 끄덕이고 있다. 대답을 들은 할데바인의 입가가 올라갔다. 그래. 좋다. 저런 눈이면 무엇을 시켜도 잘할 것이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제의했다. “가르쳐주랴?” “무엇을…… 말이죠?” “다시는 네 양부가 다른 여자에게 눈독 들이지 않게 하는 방법, 말이다.” 한참을 망설이던 사괴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약혼녀가 저택을 떠날 거란 전언을 들은 헤그는 학교 훈련도 뒷전으로 하고 귀가했다. 마침 약혼녀가 마차에 오르고 있다. 헤그는 약혼녀의 팔을 잡으며 외쳤다. “어딜 가는 거야!” 하지만 사괴탄은 무심한 눈길로 그 팔을 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이 년이 흐른 후. 뛰어난 마검제조장인이 탄생하였다. 사괴탄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가 가장 처음 만든 마검은, 검황 세이든 레 지괴르로 만든 검이다. *** 이야기를 마친 륀체르는 잠시 기지개를 켰다. 이로써 헤그에게 할데바인이 어떤 존재인지는 잘 알려준 셈이다. 할데바인. 헤그가 사랑하는 여인인 사괴탄을 돌이킬 수 없는 악의 길로 걸어가게 만든 장본이다. 할데바인이 악의를 품지 않았다면 검황이 마검이 될 일도 없었다. 마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말도 안 돼! 그런 사연이라니! 그럼 어째서 헤그는 자기 부대가 신성 정부에 귀속될 때 그저 방관만 했던 거야? 신성 정부는 할데바인 편이나 마찬가지인데!”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방관하는 척했던 것 아닐까? 신성 정부 내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귀속되는 것도 나쁘지 않지. 훗날 황태자가 할데바인을 치려고 할 때, 헤그는 황태자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어쨌든…….” 륀체르는 다시 한 번 마리의 손목 아니, 이번에는 손을 잡았다. “헤그 레 지괴르는 절대로 할데바인의 편을 들지 못한다고. 내 말 알아듣겠어?” “그래….” 륀체르는 은근슬쩍 마리의 어깨에 팔을 둘러 안았다. “그러니 지금은 그냥 자. 뭐, 잠이 안 오면 내 품에 안기는 것도 좋지. 내가 가슴 빠는 거 다음으로 잘 하는 일이……자장가 불러주는 일이니까.”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00071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마리는 어깨를 감싸는 그의 팔을 치우며 복도 입구에 섰다. 륀체르에게서 헤그의 정보를 들은 이상, 다시 침실로 가 얌전히 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륀체르는 고집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러 다시 어깨동무했다. 이번에도 마리는 그의 팔을 쳐냈다. 륀체르는 다시 어깨동무했다. “왜? 자장가 듣기 싫어? 그럼 그 전에 말했던 건 어때? 내가 가장 잘하는 일 말이야.” “그럴 상황이 아니군요!” “최고의 가슴이 최고의 애무를 받아야 천상의 피조물을 만든 신께 미학적 의무를 다하는 거 아닌가?” “그런 의무, 전혀 관심 없답니다!” 둘은 실랑이하며 복도를 가로질러 침실에 들어갔다. 마리는 침실에 다시 따라오려는 륀체르를 막으려고 침실 문을 닫으려 했다. “자, 이제 그만 당신은 좀….” “아, 진짜 한 번만 가슴 좀! 진짜 좀!” 집요한 가슴 타령은 마리에게 의문을 품게 했다. 그녀는 문 닫기를 멈추고 팔짱을 끼며 희한하다는 듯 륀체르를 보았다. “별종이야, 진짜. 어째서 그렇게 가슴에 집착하는 거야?” “음?” 륀체르는 은근슬쩍 침실로 들어와 마리를 지나쳐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마리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당신과 대화를 할 때면 꼭 한 번은 등장하는 단어가 가슴이었어. 어째서 그렇게 집착하는 걸까? 혹시…… 어릴 적 젖을 못 먹고 크기라도 한 거야?” 마리는 말하는 도중에 제 손가락을 보았다. 손가락에는 예전 륀체르가 선물해준 유방 모양의 반지가 끼여 있다. 가슴을 향한 저 남자의 집착이 예전에는 단순한 장난이라고 여겼지만, 점점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애당초, 바너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어마어마한 돈을 가졌으면서 자기 돈으로 식사비를 해결하지 않고 정보를 판 돈으로 해결했다. 그런 구두쇠 잡배처럼 굴면서도 창부들 가슴을 탐하는 데는 돈을 아낌없이 썼다. 가슴에의 집착은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고, 마리는 그 이유가 문득 진지하게 궁금해졌다. 륀체르는 마리보다 먼저 그녀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대답했다. “물론 내가 젖을 먹지 못 하고 큰 건 맞아.” “어머! 정말? 생긴 건 여러 명의 유모와 보모에 둘러싸여 귀여움받으며 곱게 자란 것 같은 사람인데.” 륀체르는 그 말을 비웃었다. 그녀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핏. 언제는 나보고 갈보 같이 생겼다더니. 유모와 보모 좋아하네. 친모의 애정도 못 받고 자랐다고.” 그 자신이 느끼기에도 조금은 불쌍한 아이처럼 한 말이다. 마리가 그를 가여운 고아보듯 했다. “저기, 혹시 이런 질문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어머니도 안 계셨어?” 륀체르는 주머니에서 작은 약포지를 꺼내 그것을 통째로 씹기 시작했다. 수용성 약포지 안에 쌓인 환약은 졸음을 쫓고 피곤한 상태를 잠시나마 상쾌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어머니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태초에 아무것도 없는 대지에서 혼자 태어났다는 나무 신 히규나 땅속에서 자연 발생한다는 토인들 제외하고 모든 생명체는 제 모체로부터 태어나지. 당연하지 않아?” 마리는 그런 설명을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길드장의 어머니는 어디 계시는데? 대체 어디 계시기에 당신은 젖도 못 먹고 자란 거야?” “일찍 돌아가셨어.” “아… 하지만…….” 일찍 돌아가신 것만큼이나 더욱더 유모와 보모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도련님이 그런 혜택도 못 받았다니, 어째서? 마리가 사연을 알고 싶단 눈초리를 건네자, 륀체르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조금이나마 이야기해주기로 했다. “나는 사생아였어. 그것도 찢어지게 가난한 여자 밑에서 태어난 사생아였지. 덕분에 성장기 내내 거리의 음식물 쓰레기 청소부로 살아야 했고. 보모나 유모 같은 것은 그 시절엔 이해하지도 못하는 단어의 하나일 뿐이었어.” 사생아… 라. 마리는 륀체르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독주를 나눠 마시며 륀체르가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푸하하…… 역시 백치 아가씨답군. 사랑? 그따위 감정 또한 훗날 무의미해지고 만다고. 한 쌍의 남녀가 지금은 좋아서 서로 붙어먹고 멋대로 아이를 낳고 해도 나중에는 그게 지우고 싶은 기억이 되는 경우도 생긴단 말이다. 이건 지독한 불행 같지? 하지만 실제 차고 넘치는 일들이란다…….〉 그것은 어쩌면 자기 과거를 떠올리며 한 말이었을까? 륀체르는 약의 쓴맛을 지우려고 협탁의 주전자에 있는 물을 잔에 따라 마셨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대륙 정복을 할 거면 굵직한 인물 정보쯤은 꿰고 다니란 말이야. 나 정도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주요 인물이지 않나?” 살짝 발끈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 조사는 했어. 너에 관해 알만큼은 안다고 여겼다고. 륀체르 사파이어. 바너의 실세. 아버지도 형제도 잔혹하게 몰살해버린 탐욕스럽고도 비정한 남자! 인조 나무를 손질하는 취미가 있고 황태자의 비호를 받아 큰 부를…….” 하지만 그런 정보는 어디까지나 소문에 의존한 정보일 뿐이다. 어떤 소문은 진실일 것이고, 어떤 소문은 거짓이겠지. 어쨌거나 마리는 륀체르가 곱게 자란 도련님에다 욕심쟁이, 그리고 인간성이 극악인 인간이라 가족들을 그렇게 죽였다고만 알고 있었다. 사생아라니. 그것도 그토록 불우하게 살아온 사생아라니. 그 말만으로도 아픈 과거가 느껴지는 듯하다. 지금 저 남자가 짓는 저 표정, 씁쓸함을 감추려는 서글픈 미소를 보면 느낄 수 있다. 륀체르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가슴을 좋아하는 건 단순히 내가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이기 때문에 생긴 취향이지, 그 취향에 다른 원인은 없어. 젖을 못 빤 결핍을 채우려고 그런 거라고 말하기도 싫고 그렇게 보이는 것도 싫어. 그건 책상에 앉아서 사람 심리 분석하기나 좋아하는 변태들에 동조하는 꼴 같아서 말이지……, 나는 그냥 가슴이 좋다. 여자 가슴을 좋아하는 남자,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마리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라고 해서 다 유방을 좋아하는 건 아니야. 여자의 납작한 가슴만을 탐하는 남자들도 존재한다고. 게다가 가슴을 좋아한다고 당신처럼 늘 가슴 타령을 하진 않는데? 당신은 뭐랄까, 집착이라 할 정도야. 게다가 이건 여성을 대하는 예의의 문제라고.” 륀체르는 남의 정원에 무단 침입한 전적이 있는 여자에게 예의 운운 하는 소릴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점을 지적하기보다는 그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두 손으로 귀를 막고 고개를 흔들기만 했다. 그 아이 같은 모습에 마리가 할 말을 잃었고, 그제야 륀체르가 말했다. “어쨌든 네 가슴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져. 네가 아직도 잘 모르나 본데, 나는 네 가슴에 목이 말라 허덕이는 지경이라고.” 그 말을 곱씹는 마리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이 구두쇠가 비싼 이동스크롤을 들여 자기 일행을 이곳 야울로 안전하게 이동하게 해주고, 그전에도 온갖 호의를 베풀어 주곤 했다. 그 배경엔 역시나 흑심이 있으리라. ‘흑심, 흑심이라.’ 못된 생각이긴 하나 저 애타는 마음을 최대한 오랫동안 이용하는 게 좋을 듯하다. 마리는 어머니의 미소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허덕이는 지경이라고? 그럼 그 허덕이는 남자의 자장가 실력이나 좀 볼까? 얼마나 목소리에 절절함이 배었는지 심사를 좀 해보겠어.” 자장가를 요청한 그녀는 겉옷을 벗어 걸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곤 두 손을 가지런히 배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정말로 자장가를 기대하는 표정이다. 퇴실 명령을 들을 줄 알았던 륀체르는 막상 자장가를 불러줘야 할 상황이 되자, 도리어 기분이 이상하다. 그는 자장가를 부르지 않고 한참 동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침묵이 이어지자 마리가 눈을 뜨고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물었다. “안 불러줘?” “아니….” “음?” “자장가 부르기 말고 다른 걸 하고 싶어지는데.” “다른 거?” “예를 들자면 말이야….” 륀체르는 마리의 눈을 응시하며 그녀의 팔로 손을 뻗었다. 학의 날개처럼 곱게 뻗은 그의 손가락이 가녀린 팔을 따라 움직이다 반지 낀 손에 멈추었다. 그는 마리의 반지 낀 손등을 부드럽게 만졌다.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마리는 뭔가를 말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륀체르는 마리의 손을 제 입술로 끌고 왔다. “륀…체르?” 그는 마리의 손등에 천천히 입 맞추다가 유방 모양의 반지에 다다랐다. 자기가 선물한 반지가 아직도 이 여자의 손가락을 지키고 있어 기분이 좋다. 이제 그는 아예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받쳐 들고 입 맞추었다. 자연스럽게 혀끝이 나와 반지를 가볍게 쓸었다. “이런 거. 이런 게 하고 싶어져. 미치겠다고.” 그의 혀끝이 반지의 유방 장식 가운데를 꾹 눌렀다. 여자처럼 예쁜 얼굴에 창부처럼 야한 눈을 하고서 뱀처럼 혀를 놀리다니… 새빨간 혀가 유방 장식 가운데를 간질였다. 시각을 통해 들어선 망상이 마리의 머릿속을 야하게 휘젓기 시작했다. “길드장 당신….” “륀체르라고 불러주는 편이 더 좋은데.” “륀체르….” 이것은 노골적인 신호다. 이성적인 판단은 날려버리라는 고요한 외침. 눈에서 본능의 불꽃이 서로 팍! 하고 튀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감정은 불꽃에 달아올라 육체의 편을 들 것이다. 마리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불현듯 스친 것은, 암살 증거를 더욱 확실하게 모으기 위해 어디선가 고군분투를 하고 있을 충실한 기사의 모습이다. ‘도망가야 해!’ 마리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그 순간이다. 갑자기 륀체르가 그녀의 반지 낀 손가락을 깊게 빨아들인다. “아….” 촉촉한 달팽이가 달라붙어 손가락을 뜨겁게 죄는 느낌이 무척이나 자극적이다. 마리는 눈썹을 파르르 떨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녀의 손에 입맞춤하면서 눈을 감았던 륀체르가 일순 새파란 눈동자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어쩐지 속을 들여다보고 웃는 것 같다. 도망가고 싶니? 그렇게 묻는 것 같다. 입맞춤이 멈추어졌다. 그는 마리의 손을 놓아주며 나른히 중얼거렸다. “가슴이 빨고 싶고, 큰일을 저지르고 싶다곤 해도…… 그래. 드래곤을 적으로 둬선 안 되겠지.” “… 말이 통하는군.” “나는 너처럼 백치가 아니니 말이야.” 륀체르는 마리의 몸 위로 이불을 끌어올려 주었다. 그러곤 잠시 옆으로 돌아앉아 제 얼굴을 두 손으로 몇 번이나 문질렀다. 뜨거워진 호흡을 다스리려는 것 같기도 하고, 끓어오르는 욕구를 잠재우려고 시원스럽게 웃어 보이려고 애쓰는 것 같기도 했다. “륀체르, 당신…….” 그는 마리의 눈을 마치 봐서는 안 될 것처럼 여겼고, 나중엔 아예 그녀의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버렸다. 그리고 벽에 고개를 대고 한참 동안 호흡을 고르다가, 한참 전에 부르기로 한 노래를 시작했다. “눈부신 그대 안았더니 심장이 불타 사라지네, 오! 신이시여… 나는 이제 빛이 두려워. 그대와 닮은 것이라면 보석이라도 뒤돌아설 테야…….” 거리의 밑바닥 인생으로 살던 시절 버릇처럼 부르던 노래. 몸을 팔아 살아가는 이들 중 손님과 진짜 사랑에 빠져 되돌아올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간 이들. 그들의 심정을 그린 노래를 륀체르는 자장가로 불러주었다. 부를 줄 아는 노래가 그것밖에 없으니 자장가로 선택되었다. 가사의 사연은 그러한데, 그의 목소리는 라인햐르처럼 은은하고 잔잔하다. 가히 자장가를 잘 부른다고 자부할 만큼. 마리는 자장가에 집중하느라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다만, 이불을 살짝 걷어 귀만 드러내놓을 뿐이다. 이불 속에서 듣는 노래도 이토록 기분이 좋아지는데, 이불을 다 걷어내면 얼마나 더 아름답게 들려올까. 하지만 그녀가 완전히 이불을 걷어내고 고개를 돌렸을 때, 륀체르는 그녀의 곁에 없다. 그는 노랫소리를 줄이며 방을 나서고 있다. 탁, 하고 문이 닫혔고 침실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륀체르가 불러주고 간 자장가의 여운이 오랫동안 머물 듯하다. 그런데 마리의 침실을 나서는 륀체르를 멀리서 지켜보는 한 사람 아니, 한 생명체가 있다. 시붉은 눈빛을 뿜는 그 생물은 바로 마리아였다. *** 황도 로귀하르트. 할데바인의 별장. 축성제에서 황손을 향한 제국민의 축복어린 기도를 질리도록 들은 할데바인은 일찍 귀가하여 화풀이하듯 애인을 안았다. “어흑! 그만! 그만하죠!” 하지만 몸이 제구실을 잘하지 못했다. 나이가 먹을 만큼 먹고 노쇠한 몸은 연인을 제대로 안지도 못할 정도로 약해졌다. 이래서야 연적을 마검으로 만드는 무시무시한 질투를 하면서까지 옛 연인을 다시 찾아온 의미가 없다. 어디 침대에서의 능력뿐이랴. 최근에 눈이 급격히 어두워졌고,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낄 수 없다. 관절염과 같은 지긋지긋한 지병에 마의사를 불러 치료하게 해도 효력이 먹히지 않는 몸이 되었다. 부릴 수 있는 욕심이 오직 권력욕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마저도 잘되지 않자 대관절 얻다 대고 욕구를 풀어야 할는지 막막하다. 그의 갑갑한 속을 알 리 없는 여인은 타박하는 조로 말했다. “흐응, 기껏 축성제 때 먼저 자리를 비우고 왔더니…… 저는 이만 가겠어요.” 할데바인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새겨졌다. 저 여자. 황궁 예술 총관. 한때 결혼을 염두에 둔 남자가 마검으로 변해버리자 옛 연인인 자신에게 다시 달라붙었다. 그런데 어째 요새 여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제 딴엔 할데바인 대공가의 안주인이 되어 훗날엔 제국의 안주인 자리도 차지할까 싶은 계산에 다시 이곳을 드나들며 관계를 이어왔겠지만, 황태자비 재판 이후 싸늘하게 변했다. 어쩌면 조만간 배신할지도? 할데바인은 여인이 떠난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몸을 씻었다. 그리고 축성제가 완전히 끝날 때쯤, 손님을 불렀다. 그의 저택에 초대된 손님은 몇 달 전에 신성 정부에 귀속된 부대 루빈의 수장이다. 원래는 황태자의 부대나 다름없었던 루빈을 강제로 신성 정부 휘하에 두고 그것도 모자라 오슬의 수인족을 상대하게 했으니, 그 수장이란 자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오늘 밤 할데바인은 그런 그에게 심심한 격려의 말을 전하며 은밀한 제안을 할 것이다. 함께 손을 잡고 제국을 바꾸어보자고. 손님이 황태자의 친우이기에 어떻게 나올지는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절대로 친구를 배신할 순 없다고 나올 테지. 하지만 세상에 ‘절대’란 통하지 않는다. 친우라는 아름다운 끈도 야망을 자극하는 더 좋은 조건 앞에서는 끊어지게 마련. ============================ 작품 후기 ============================ 이 챕터 끝이 다가오는군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코멘트, 추천, 쿠폰으로 응원해주시는 분들께도 감사합니다! 00072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그 시각, 별장 후원. 할데바인의 정예 호위병 중 마법을 쓰는 자들은 별장 가득 감도는 특수한 마력을 느꼈다. 그 마력의 기운을 뿜어내는 이가 누구인지, 그들로서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강력한 마력을 소유한 누군가가 별장에 침입하여 제힘을 숨기는데 어째 숨기는 기술이 노련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황제 휘하 마황의 사람들은 아니라는 뜻. “이상해. 정말 이상하단 말이지.” “그렇지? 나도 그걸 느껴.” “그래… 딱히 ‘이거다!’ 하고 말할 순 없지만, 뭔가 찝찝해. 이곳은 찝찝하다고.” “그나저나 대공께 알려야 할까?” “미쳤어? 융통성 있게 굴어. 알린다고 해도 우리가 잡지 못하면 모가지란 말이다.” 이런 때일수록 자신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나, 자꾸만 임무에서 회피하고 싶어진다. 지난 몇 년 동안 대공이 이동하는 곳은 그 어디든 따라와 지켜왔고 위험한 일도 몇 번이나 무사히 헤쳐나갔다. 하지만 오늘처럼 강력한 마력을 가진 이가 숨은 경우는 없었고 마병사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별들이 반짝이는 것이 불길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제발 별일 일어나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런데 이 기운,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해도 특별하다. 황궁 마법사들과 맞먹는 실력의 자기들이 찾아내지 못할 정도라면, 설마…… 드래곤? “그럴 리 없지.” “응? 뭐가?” “아닐세. 아무것도.” *** 헤그 레 지괴르는 자정이 넘어서야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원래 새하얀 그의 얼굴은 지금 먹구름에 침착당한 듯 어두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리 하루 이상을 자지 못했다. 성도에서 부대일로 바쁜 중에 황도의 축성제 행사가 있었고, 축성제에 참가한 후 황태자와 석찬 시간을 가졌다. 그 후에는 황궁 음악회가 있었고 다시 이어지는 황태자와의 음주 시간, 그리고 조금도 쉬지 못하고 할데바인과 약속이 잡혀버린 것이다. 낯빛이 어두워질 정도로 심신이 지치는 것도 당연하리라. 이번 축성제엔 잡음이 많았다. 경사스러운 행사를 앞두고, 야울 궁에서 황태자비를 모시는 시녀가 잔인하게 살해당한 것이다. 용의자는 오슬 총독 프리드리히 측의 사람으로 지목되었다. 시녀의 전 남편인 프리드리히가 두려움에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말이 있다. 과거 그의 바람기 때문에 이혼녀가 되어야 했던 시녀가 앙심을 품고 오슬 총독의 자리를 넘본다는 말이 떠돌았고,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기 전에 미리 손을 썼다는 이야기. 물론 프리드리히는 아직 범인이 아닌 용의자일 뿐이고, 저렇게 떠도는 말도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야울 궁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궁의 주인인 황태자는 몹시 불편해한다. 시녀가 죽임을 당한 사건은 시녀가 지척에서 시중들던 성손(聖孫)을 품은 황태자비 또한 위험한 처지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시사하는 일이고, 그것은 결국 황태자를 향한 도발이나 다름없다. 재판만으로도 황태자의 이름이 충분히 먹칠이 되었는데 또다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니 이제는 잠자코 당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황태자는 궁인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 또한 강하게 부정했다. 그는 용의자로 지목된 오슬 총독을 구금하는 것에 강경히 반대하며 ‘마탑의 마법사들을 불러 사건을 제대로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태자는 믿었다. 오슬 총독을 용의자로 모는 짓은 할데바인의 수작일 뿐이고, 실제 시녀를 죽인 이는 할데바인일 것이라고. 그리고 죽인 이유는 아마도 시녀를 통해 불거져 나올 수 있는 반역 의혹을 잠재우기 위한 것일 터. ‘조만간 야울 궁을 싹 청소해야겠어.’ 황태자는 친우인 헤그에게 우스갯소리로 말했지만, 그것을 정말 우스갯소리에 머물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는 또 하나 우스갯소리를 흘렸다. ‘널 이 궁에 붙잡아둘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고 싶어.’ 그것은 야울 궁 경비를 맡을 사람이 자신의 친우였으면 하고 바라는 말이다. 헤그는 그런 황태자에게 웃고 말았다. 마력기갑 부대 수장이 전쟁터가 아닌 궁을 지킨다는 것은 아무리 농담이라 해도 어불성설이다. ‘제가 전하의 궁을 지키는 개가 되었으면 한다니. 그러다 제게 물리시면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그러자 황태자는 기꺼이 대답했다. ‘차라리 네 손에 죽을 거라면 기분이 더럽진 않겠지.’ 헤그를 향한 황태자의 신뢰는 그토록 깊다. 그는 헤그에게 술잔을 바치며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 ‘야울 궁을 지켜달란 의미가 아니야. 제국을 지키고, 나아가서 이 대륙을 지켜달라는 말이야.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지. 황금의 땅(할데바인 영지)을 달라면 그걸 너에게 줄게. 검황의 자릴 달라면 당장 내일이라도 황의회에 안건을 내겠어. 네가 달라는 건 무엇이든 줄 테니……지금의 평온을 지키자.’ 헤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의를 거절하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뭐랄까. 황태자만큼 제국을 지키고자 하는 데 열의도 없고 개인적인 야심마저 없는 상태라 친우의 고양된 기분에 맞장구 쳐주기 싫을 뿐. 황태자도 헤그의 그런 상태를 잘 알기에 웃으며 ‘좀 더 야심을 가지는 게 좋다.’고 했지만, 아쉽게도 헤그에겐 야심을 붙잡아 둘 구심력이 없다. 아버지 세이든이 마검이 되고 사랑하던 약혼녀 사괴탄마저 그 마검과 소멸하여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은 그에겐 살아가는 의미라곤 없다. 친우인 황태자는 ‘오히려 그러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대가 잡념에 휘둘리지 않고 빠르게 출세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정작 헤그 본인은 오르면 오를수록 거대한 공허함만 느꼈다. 이 공허함은 채울 수 없지만, 채운다 해도 조금도 기쁘지 않을 것 같다. 헤그는 지금 할데바인 별장의 응접실에서 대공을 만나고 있다. “로샤타르트의 농장엔 가끔 대륙에선 볼 수 없는 열매들이 불쑥 나타난다지. 무슨 차원의 균열인지 뭔지에선가 나온다던가? 그 열매들이 제법 맛은 훌륭하다더군. 이 술은 그 열매로 술을 담가 시귀르(빙하 지역)에서 오랫동안 숙성한 거라네. 참고로, 황궁에선 구경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지. 하하. 흠. 향이 참 좋군.” 할데바인은 헤그의 잔이 텅 비기가 무섭게 다시 술을 채워 넣었다. 이미 궁에서 술을 실컷 마시고 온 헤그이지만, 할데바인이 따르는 술을 아무리 마셔도 도무지 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할데바인이 극찬하는 향도 느끼지 못했다. 할데바인은 헤그가 이미 취했다고 생각하고선 본론을 꺼냈다. “이보게. 지괴르.” “예.” “오랜 시간 동안 살아오면서 달라진 것이 하나 있네. 과거에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참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렸다면 이제는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나 할까. 하여 이렇게 자네에게 말하는 것이네만…….” 헤그는 곧 들을 말을 예상한다는 듯 싱긋 웃었다. 루빈이 신성 정부에 귀속된 후로 할데바인은 자주 접근해왔고, 그때부터 헤그는 이런 시간이 오리란 걸 예측했다. 오늘처럼 황태자비 시녀 살해 사건이 일어난 어수선한 날이 반역을 모의하기엔 적기에다 또 이 노인에겐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둘러가는 길엔 취미가 없는 헤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게 무엇을 약속하실 수 있습니까?” 몇 단계는 건너뛰고 나오는 태도에 할데바인의 눈에 이채가 스몄다. “말이 쉬워서 좋군.” 할데바인은 지금껏 내던 목소리보다 더욱 작은 목소리를 냈다. “신성 정부 군권의 전부를 넘기지. 검황의 자리 또한.” “아.” 헤그는 피식 웃고 싶은 걸 참아야 했다. 어차피 저쪽에서 내미는 수가 저것뿐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다. 기대하고 온 것은 아니지만, 무릇 인간이란 기대한 것에서 벗어나는 상황을 맞이하면 없던 흥미도 생기는 법이었다. 그런데 고작 검황의 자리라. 저쪽은 검황 자리를 약속하는 게 무슨 큰 수라도 되는 양 말하는데, 어차피 그 자리는 결국 지금과 다르지 않다. 황권 아래 권력 중 하나일 뿐이고 마황보다도 지위가 낮다. 그것은 한때 검황의 아들이었던 자신이 제일 잘 안다. 뭐, 물론 이십 대에 차지하기엔 탐나는 자리이긴 하지만……. 야심 없는 헤그는 고요한 미소로 대답을 회피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조건이 제시되었다. “리데바인의 주인이 되는 것도 한 번쯤 생각해 보게나.” 할데바인의 수도인 리데바인의 주인이 되라는 말은 결국 할데바인 영지를 넘기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할데바인 영주인 자신은 더 높은 지역의 주인, 즉 황도 로귀하르트의 주인이 되겠다는 말. 반역자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라 볼 수 있다. 이미 황태자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겠다고 약속받은 상황인 헤그에게 할데바인의 조건이 달콤하게 들릴 리는 없다. 그런데도 헤그는 사뭇 달콤한 제안을 받은 양 대답했다.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저에게 과분한 것을 약속하시는군요. 신권, 군권을 장악하고 황금의 땅이라 불리는 대지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 너무 꿈 같아서 도무지 현실적인 가능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가능한지 아닌지는 자네에게 달려있네만.” 헤그는 빈 잔에 다시 따라지는 술을 보았다. 취한 것은 저쪽인지 술이 흘러넘쳤다. 탁자를 적시는 황금빛 액체가 주체할 수 없는 욕망과 같다. 헤그는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그 술잔을 기꺼이 마셨다. 입가로 술이 잔뜩 흘러내렸다. “어찌할 텐가. 자네가 가진 열쇠를 내게 주겠나?” 헤그는 턱을 손등으로 천천히 닦으며 대답을 내놓았다. “그럼 제가 가능성을 증명해 보이면 되겠습니까?” *** 「그럼 제가 가능성을 증명해 보이면 되겠습니까?」 헤그가 거기까지 말할 때, 할데바인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고 실내를 가림막으로 가려버렸다. 아마도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갈 것이다. 그 때문에 창밖 테라스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던 하이너는 마법영상구 촬영을 중단해야 했다. 기껏 자신의 기운을 숨기고 잠입했더니 여기서 멈춰야 한다니. 하지만 괜찮다. 헤그가 말한 딱 그 부분까지, 반역의 증거로 쓰기엔 충분하니까. 하이너는 투명화한 몸 그대로 테라스 기둥을 타고 내려와 별장의 가로수 쪽으로 걸어갔다. 가로수의 그늘로만 다녀야 그림자가 들키지 않는다. 투명화한 그의 몸이 안전하다 해도 그림자가 누군가에게 목격되기라도 하면 일이 귀찮아진다. 별장을 벗어난 그는 인근 숲에서 드래곤으로 변신했다. 아가씨가 계시는 야울로 가려면 이런 변신은 필수. 텔레포트 홀을 이용하면 흔적이 남고 이동 스크롤은 너무나 고가이기에 이런 변신이 여러모로 낫다. 드래곤으로의 변신은 늘 그렇듯 고통을 수반했다. 그아아아…… 하고 나오는 소리도 참아야 해서인지 고통이 배로 느껴지는 것만 같다. 살갗이 수포가 되어 팽창하더니 비늘로 변했고, 척추는 찢어지는 느낌에 떨다가 어느샌가 거대한 꼬리를 땅에 드리웠다. 이런 고통이 전염되어 혹시 주변마저 고통에 떨게 하는 것일까? 땅이 흔들리는 것 같고 앙상한 나뭇가지들도 바람에 괴기스러운 춤을 추었다. 그러나 하이너에겐 다행스럽게도, 이 소동이 별장을 지키는 할데바인의 병사들의 시선을 끌진 않은 듯하다. 별장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아니면 이곳의 기현상을 외면할 정도로 별장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건……? 어쨌든 변신을 마쳤으니 이젠 야울로 날아가야 할 때다. 흑회색의 드래곤은 투명화까지 마친 다음에야 검푸른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이번 작전 때문에 몇 번이나 드래곤으로서 하늘을 날았는데 날 때마다 온몸이 투명한 자신을 보니 마치 하늘과 하나가 된 기분이다. 대낮에 날면서 지상을 내려다볼 때는 마치 자신의 세상 그 자체가 된,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신이 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다. 황도의 중남부에 있는 할데바인의 별장에서 야울 북쪽까지는 꽤 먼 거리다. 그래도 최대한 이 밤이 가기 전에 아가씨를 만나고 싶어서 전속력을 다했다. 다행히도 투명화한 상태에서 드래곤의 빠르기는 더욱 높아졌다. 북반구의 라인햐르가 보이는 지점까지 왔을 때, 이미 새벽이 밝아왔다. 남청색 하늘에 드리운 청록빛깔의 라인햐르는 드래곤으로 변신할 때 느낀 고통과 긴 시간 날아온 피곤함을 모두 잊히게 할 만큼 아름답고 신비롭다. 이대로 아가씨를 등에 태우고 라인햐르에 닿을 듯 높이 날면 좋을 텐데. 아, 그러면 정말…… 좋을 텐데. ‘내일 밤에 해드려야지.’ 아가씨만 생각하면 드래곤으로 변할 때의 고통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다. 들뜬 마음으로 날아가다 보니 드디어 륀체르의 야울 별장이 보였다. 유백색 사암으로 높게 지어진 방형 건물의 중심은 유리 천장이 덮여 있으나 내부가 보이진 않는다. 아마도 내부에선 유리 천장을 통해 하늘의 라인햐르를 볼 수 있게끔 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아가씨는 이미 저 천장을 통해 하늘을 보셨는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발광 현상에 아가씨는 얼마나 낭만에 젖으셨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데도 가슴이 설레었다. 그는 모래바람을 휘날리며 고요히 착지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변신, 고통. 이번에도 역시나 소리를 참았다. 잠들어 계실지도 모르는 아가씨를 드래곤의 포효로 깨우긴 싫었다. 그건 아가씨에게도 폐가 되는 일이고, 또한 일행에게도 폐가 되는 짓이다. 변신을 마친 그의 옷은 군데군데 찢겨 있다. 다행히 마법영상구에 들어갈 링클은 주머니에 안전히 보관되었다. 경비병들이 그를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투명화한 드래곤이 인간으로 변신 후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 모습은 경비병들에겐 마치 순간 이동처럼 보였을 것이다. “뭐지? 손님이 오기로 하긴 했는데 뭔가 범상치 않군?”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없지. 암호나 제대로 말하는지 보자고.” 암호가 어긋날 시엔 보안 문제가 걸려있으니 방문자를 잡아야만 한다. 아니면 그 자리에서 사살도 가능하다. 하이너는 ‘아아.’하고 자기 목소리를 점검했다. 조금 기운이 없긴 하나 제대로 발음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발음은 지금부터 아주 중요하다. 그는 경비병들에게 다가가 륀체르가 설정해둔 암호를 말했다. “유.” “…….” “방.” “통과.” 경비병들은 문을 열어주었다. 하이너는 아무리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암호에 넌더리를 치며 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저 먼 복도 끝에서 서로 눈이 마주친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벽 뒤로 몸을 쏙 숨겨버렸다.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이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하이너의 발걸음 소리가 소녀의 가슴을 쿵쿵 뛰게 한다. 소녀는 도망갈 것처럼 벽 뒤로 모습을 숨겼지만, 끝까지 도망치진 않는다. 안내인의 안내를 받은 하이너가 벽을 돌아서 마리아를 보았다. 그는 안내인을 따라 륀체르의 침실로 가려다가, 불현듯 뭔가 생각한 것인지 멈춰 섰다. 마리아의 가슴이 더욱 세게 쿵쿵 뛰었다. “지금 일어난 건가?” 마리아는 하이너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너가 빙긋 웃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저번에는 경황이 없어 말하지 못했다만.” 갑작스러운 말에 마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시붉게 괴이한 광채를 내던 그녀의 눈이 하이너의 검은 눈동자를 볼 때는 아련하고 순한 토끼의 눈이 되었다. 하이너는 마치 예전 동생 마르틴을 대할 때처럼 따스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하지 못하는 일, 모두 알아서 척척 해주는 네가 있어 든든할 때가 많아. 너를 사냥한 것은 기대 이상으로 행운이었어.” 마리아의 눈이 그렁그렁해졌고 하이너가 커다란 손을 내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맙구나. 마리아 그로스.” 두세 번 쓰다듬은 손은 금세 떨어졌고, 하이너는 륀체르의 침실로 다시 걸어갔다. 마리아는 그가 침실로 들어가기 직전까지, 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녁 맛나게 드세요. 저는 매운 돼지 갈비찜을 먹을 예정입니다. 하하하. 00073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그럼 제가 가능성을 증명해 보이면 되겠습니까?” 헤그는 그렇게 물었고, 그 말을 긍정의 대답으로 여긴 할데바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창문 가림막을 쳤다.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는 경비 능력을 갖춘 별장이지만,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때다. 할데바인이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그때, 헤그가 비어버린 잔에 다시 술을 부어 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반쯤 채운 술을 천천히 마시며 할데바인에게로 걸어갔다. 어쩐지 한참 전에 이곳에 올 때와는 다르게 조금 비틀거렸다. 큰 군대를 지휘하는 군인의 흐트러진 모습은 할데바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할데바인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가림막에서 손을 떼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려 했다. “그래. 자네가 그 가능성을 보이면….” 그의 말이 잘리고 뜬금없는 물음이 나왔다. “가능성을 보인 후에는 어찌 됩니까?” “……?” 술을 다 비운 헤그는 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비틀거리며 옅은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반역, 에 성공하고 검황, 이 되고, 리데바인의 주인, 이 되면…… 더 큰, 공허…함만 남을 텐데요.” “하. 설마 자네 취한 건가?” “예.” 당황한 할데바인은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헤그의 팔을 잡았다. “이보게, 지괴르….” 헤그는 할데바인의 손을 천천히 떼 내며 바로 섰다. 바로 서려고 노력했다. 여태 그 누구에게도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궁에서부터 술을 계속 마셔서 그런지 이제야 취한 느낌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느낌이다. 쉽지 않다. 술로 정신을 가득 채우면 언제나 자신을 괴롭히는 공허함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정작 공허함은 소용돌이가 되어 온몸을 잠식했다. 그는 바닥의 유리잔 테두리를 보며 현기증을 느꼈다. 혼잣말이나 다름없는 말이 나왔다. “취했어도 이 기분은 떨칠 수 없군요.” 그를 보는 할데바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어쩌면 이 새파란 녀석이 정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기에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닐지도. ‘괜히 술을 많이 줬나? 이래서야 원….’ 하지만 할데바인에겐 따로 시간이 없다. 야울 궁에서 시녀를 죽여 황태자의 분노를 사놓고 이제 와 미루적거리면 곤란하다. 노인은 갑자기 젊은 군인의 두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서 눈을 마주쳤다. 헤그는 노인의 두 손을 보며 힘없이 웃었다. 살짝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 너머 자색 눈동자가 초점이 없어 보였다. 할데바인은 그 시체 같은 눈동자에 대고 힘주어 똑똑히 일러두었다. “공허함이라고 하였나? 이보게. 공허함이 남을 건지 아닌지는 해보면 아는 걸세. 시작도 하지 않고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자네. 내 말을 듣게나. 루빈을 움직여 황태자의 야울을….” 그 순간이다. 헤그의 기다란 손이 올라가 할데바인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통째로 마치 나무뿌리를 뽑듯 움켜잡았다. 너무 놀란 할데바인이 그 손을 치우려 하는데 헤그는 할데바인의 머리를 찍어 누르듯 하여 그의 몸 전체를 깔아뭉갰다. “이보게!” 놀란 할데바인이 몸부림쳤지만, 젊은 헤그의 힘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자네, 지금 무슨……?” 할데바인은 그때까지도 헤그의 술버릇이 과격하다고만 생각했다. 헤그는 팔을 뻗어 바닥에 있는 술잔을 가볍게 깨뜨렸고, 그 모습에 할데바인은 호위병사들을 불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해 했다. “윽, 크어억! 자네! 일단 여기서 한숨 자고 다시 이야기를…!” 헤그는 할데바인의 말에는 조금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헤그의 손은 술잔 손잡이를 감싸던 쇠 장식을 잡았다. 쇠 장식은 아주 날카로워서 헤그의 손에 상처를 냈다. 장식의 날카로운 부분이 할데바인의 뺨을 찔렀고, 뒤늦게야 위협을 느낀 할데바인은 고개를 비틀며 뭔가를 외치려 했다. “이…!” 그리고 그 순간, 날카로운 금속은 주름 가득한 그의 목동맥을 깊게 갈라버렸다. 맹수가 극도의 차분한 몸짓으로 먹이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만 같은 그 시간은 단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가히 어린 시절부터 검황가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은 자다운 손짓이다. 아마도 노인은 고통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으리라. 순식간에 망자가 되어버린 할데바인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헤그의 뺨을 뜨겁게 물들였다. 술 냄새에 이어 짙은 피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었고, 헤그는 줄곧 느끼던 공허함에서 잠시나마 생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헤그는 피 묻은 얼굴을 몇 번 닦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할데바인이 둘러놓은 가림막을 다시 치우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 머리를 차갑게 식힌다. 여기 오기 전만 해도 잔잔하게 불던 바람이 지금은 마치 어디에서 드래곤이 날갯짓이라도 하는 듯 강하게 불어왔다. 아마도 인근 숲을 지나쳐오는 바람일 것이다. 그의 시선은 하늘로 옮겨갔다. 밤하늘에 널찍하게 퍼진 먹구름 사이를 누군가가 갈라버린 듯 길이 나 있고, 그 하늘길 사이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헤그는 그 달빛을 보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지축이 흔들리는 것 같기도. 아니면 취해버린 자신이 흔들리는 건가? 아무래도 좋다. 어쨌거나 할데바인이 요구하는 가능성을 0으로 만들어버렸으니 오늘 하루의 목적은 다 이룬 셈이다. 이 일을 명령한 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황태자가 암시를 주지 않았다고 해도 자신은 아마도 이런 비슷한 일을 저질렀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자기파괴를 통한 공허함에서의 탈출일지도 모르겠다. 몸에 밴 짙은 피 냄새를 거센 바람에 지우면서 그저 서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 때, 이 응접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알아챈 자들이 하나둘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대공께서…!” “지괴르 대령! 이게 어찌 된 것인지요?” 헤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별장 사람들은 갑자기 살해당한 주인을 보고 놀랐고, 그에 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는 헤그를 보고 또 놀랐다. 밤, 거세게 불던 바람은 어느샌가 잦아들었다. 헤그는 어떤 반항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잡혀 황궁 감옥으로 끌려갔다. *** 애당초 하이너는 할데바인의 황태자비 암살 증거만 수집해서 돌아가면 되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큰 증거, 바로 할데바인 반역 모의의 확실한 증거를 손에 넣게 되었다. 하이너가 그것을 챙겨 륀체르의 침실에 찾았을 때, 륀체르는 이미 황도 할데바인 별장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전해 들은 뒤였다. 루빈의 수장 헤그 레 지괴르가 어째서,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돌발 행동을 했는지 륀체르로서는 알 수 없다. 할데바인을 그런 식으로 죽여버리면 결국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 아닌가? 친 할데바인 세력인 로젠플라드 신의회는 지괴르 대령을 가만두려 하지 않을 것이고, 황태자는 그 세력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친우를 어떤 식으로든 비호할 것이다. 즉, 황태자에 의한 할데바인의 잔챙이 청소 시기가 올 것이다. 어쨌거나 한가지 정확한 것은, 그런 돌발 행동 때문에 륀체르가 당분간 느긋하게 쉴 수 있단 것이다. 륀체르는 당분간 황태자의 ‘청소’ 실력을 보면서 느긋하게 앞일을 꾸밀 생각이다. 할데바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하이너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과 같은 표정을 하며 탁자 위에 링클을 내려놓았다. 륀체르는 막 가져온 따끈따끈한 증거물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자 아쉬웠다. 하지만 일단 이런 증거물을 손에 넣은 것만으로도 남은 할데바인 세력을 깡그리 없애는 데 도움이 될지도. 물론, 어디까지나 황태자가 곤란에 처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그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하이너를 올려다보았다. 이 드래곤 기사는 대체 황도에서 뭘 하다 왔는지 옷이 찢기고 꼴이 말이 아니다. 륀체르는 그런 그의 모습에 엉뚱하게도 칭찬을 해주었다. “다음부터 그렇게 계속 찢어진 옷 입어봐. 아주 관능적이야.” 하이너는 소름이 돋았다. 거지 같은 옷차림을 보고 관능적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 들어도 빈정거림밖에 되지 않는다. “죽고 싶은가?” “그나저나 자네에게 상을 줘야겠지?” 륀체르는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이며 물었다. 하이너는 그를 눈병 걸린 사람으로 여기며 뒤돌아섰다. 저딴 자식에게 상을 받을 생각은 전혀 없다. “아가씨가 부탁한 실렌틴 광산 거래 중지 건이나 지켜라.” “그건 당연한 거고.” 하이너가 문을 닫고 나가자, 륀체르는 곧바로 실렌틴 광산의 홀디네에게 전언을 보냈다. ‘시작해.’ *** ‘시작해.’ 전언을 들은 홀디네는 광산 거주구역을 점검했다. 거주 구역엔 사람이라곤 홀디네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홀디네는 혹시나 남아있는 사람이 없는지 구석구석 샅샅이 점검한 후에야 출구로 나갔다. 그녀는 문득, 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봄이 오긴 하나 돔 천장엔 아직 눈이 가득 쌓여 있다. 지난 기간 동안 이곳은 기갑체, 마력기갑체에 들어가는 수많은 부품을 부지런하게 생산해냈다. 이곳이 있어서 권력자들의 부대들은 그 위용을 과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실제 소유주인 륀체르에게서 명령이 떨어진 이상, 이곳은 기약할 수 없는 기간 동안 생산의 의무를 하지 못할 것이다. 홀디네는 서둘러 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돔 반경 10KM 이내에서도 인간의 기운이 남았는지 가늠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주위에 사람의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몇몇 하급 마력 생물이 느껴지긴 했으나 신경 쓰이는 수준은 아니다. 홀디네는 밝아오는 태양을 보며 잠시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서쪽 머나먼 나라인 동한과 서한보다 더욱 먼 곳에서 온 흑인인 그녀는 아주 예전부터 믿던 고향의 신앙으로 기도하였다. 그녀의 낮고 매혹적인 음색이 어쩐지 구슬프게 울렸다. “차토(此土, 고통스러운 세계를 일컬음.)의 형제들이여. 부디 앞으로 펼쳐질 고통을 끝으로 완전한 낙원에 잠드소서.” 기도를 마친 홀디네의 몸 전체에 그녀의 피부색과 같은 갈색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곧 그 빛은 강한 에너지를 내면서 그녀의 몸을 가열하는 것처럼 뜨겁고 샛노랗게 반짝였다. 이윽고 하나의 빛 덩어리가 된 홀디네는 돔 위의 상공으로 높이 치솟았다. 태양과 똑같은 높이로 치솟았기 때문인지 무엇이 홀디네인지 무엇이 태양 빛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곧 태양 앞에서 하나의 거대한 밝은 빛 덩어리가 방사형으로 퍼지더니 끝내는 거미줄 같은 모양을 펼쳤다. 그로부터 얼마 뒤, 돔을 중심으로 크나큰 폭발이 일어났다. 그 영향으로 근처 모든 생물이 산화로 소멸했다. 돔 주변으로 가득 피어난 눈꽃들도 순식간에 기화되어 자욱한 연기 속에 수증기를 드리웠다. 폭발의 반향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지축이 흔들리고 돔 상공에서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광풍이 몰아쳐 실렌틴 광산 전체에 잿개비의 비를 뿌렸다. 강력한 빛에 휘날리는 잿개비는 파괴의 흔적이라기보다 차라리 하나의 거대한 아름다움이다. 이 폭발의 불꽃이 얼마나 거대한지 이웃 바너, 오를린, 괴지에서도 목격되었다. 이웃 영지인들은 불꽃을 보고 실렌틴 광산에 큰일이 났다고 걱정했고, 어떤 이들은 차원의 균열에서 온 종말의 징후가 아니냐며 두려움에 떨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아이들은 눈꽃이 피어나는 실렌틴 광산에서 커다란 샹들리에가 만들어졌다고 아름다워했다. 그리고 그 시각, 륀체르는 홀디네에게서 실렌틴 광산 공장을 폐쇄했다는 전언을 듣고 그제야 잠이 들었다. “나는 약속은 지키는 남자라고.” *** 하이너는 지저분해진 몸을 씻으려고 욕관으로 갔다. 그런데 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웬 예쁘장하게 생긴 하녀 하나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하이너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하이너가 그것을 멀뚱한 시선으로 보았다. “새, 새로 갈아입을 깨끗한 옷이에요.”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하녀는 이곳에 온 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다정하고 예의 바른 말을 들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제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말했다. “목욕 시중을 들겠습니다.” 목욕 시중. 이 이른 아침에 그녀가 맡은 일이다. 주인님(륀체르)이 ‘고생하고 오신 분께 정성을 다해 시중을 들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녀는 이 늠름한 남자분의 목욕 시중을 무조건 들어야만 한다. 하이너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 당황했다. “예? 지금 뭐라고……?” “큰일 하시고 오신 분이니, 주인님께서 그래야 한다고, 그게…….” “아닙니다! 혼자서 할 수 있습니다만!” 하이너는 극구 사양했다. 시중받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데 하물며 목욕시중이야 오죽하랴. 그런데도 하녀는 ‘주인님의 명령이 있었다.’며 절대 물러나지 않으려 했다. 난감한 하이너는 결국, ‘주인님에겐 내가 잘 말하겠다.’고 겨우 달래 하녀를 보냈다. ‘사파이어 이 녀석, 대체 무슨 속셈이냐!’ 그는 욕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혼자 씻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다 보니 드래곤으로 변신할 때 느끼던 고통이 싹 잊히는 것 같다. 너무 노곤해서 깜빡 잠이 들 뻔했지만, 금세 정신을 차렸다. 아가씨께 무사히 다녀왔다고 인사는 드리고 자야 한다. 아니, 인사를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그냥 아가씨를 안고 싶다.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그냥 아가씨의 살결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 정말이지 이상한 게, 오를린에서 살던 시절에는 한 이레 쯤 못 본 것 정도론 이토록 절절한 기분이 든 적이 없었는데 요새는 단 사나흘만 못 봐도 보고 싶어서 미칠 것만 같다. 몸은 뜨거운 물에 잠겨 있는데, 머릿속은 온통 아가씨 생각에 잠겨버렸다. 어찌 된 게 뜨거운 물보다 자신의 몸이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만 같다. 목욕을 마무리한 그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욕관을 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아가씨가 머문다는 침실 앞이다. 그는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차분히 숨을 골랐다. 이 문만 열면, 아가씨를 만날 수 있다. 그의 손이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기척도 없이 다가와서는 주의의 말을 남겼다. “아가씨께선 주무시고 계셔요.” 하이너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보려 했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 마리아는 벌써 자기 침실로 가서 문을 닫고 있다. 하이너는 문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멋쩍은 듯 웃었다. ‘참, 주무시는 데 방해하면 안 되지.’ 너무 보고 싶어서 가끔 이렇게 무례한 행동이 나오곤 한다. 그런데……. 하이너는 문득 마리아가 들어간 침실 쪽을 보았다. 그리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마리아를 사냥한 뒤 몇 달이 흐른 지금에서야 겨우,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생각보다…… 예쁘군.” ============================ 작품 후기 ============================ 다음 편이 이 챕터 마지막 편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0074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아가씨의 잠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한 침실에서 혼자 잠이 들었던 하이너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아주 오랜만에 동생 마르틴이 나왔다. 마르틴은 이번에도 생글생글 웃으며 형에게 월계수 왕관을 씌워주었다. 하이너는 처음에는 그 왕관을 쓰고 하하 호호 웃다가 나중에 벗으려고 했는데, 도무지 아무리 벗으려고 애를 써도 벗겨지지 않았다. 왕관에 무슨 마력이라도 깃든 듯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여행 초반에도 이러한 꿈을 꾼 적 있었는데……. 꿈에 관한 생각을 꿈속에서 하다 보니 어느샌가 자각몽이 되고 말았다. 자각몽 속에서 하이너는 ‘이 꿈이 혹시 앞일에 관한 어떤 암시는 아닌가?’ 하고 의심하다가 금세 부정했다. 암시는 무슨. 단지 추억 조각이 멋대로 끼워 맞춰져 꾼 꿈일 뿐. 과거, 동생은 형이 멋진 기사님이 되는 것을 바랐다. 그리고 종종 말하곤 했지. ‘형은 늘 나의 왕이야.’ 아마 그래서 왕관을 쓰는 꿈을 꾼 것일 게다. 고단한 여행을 이어오다 보니 유일한 가족이었던 동생이 그리웠던 모양이기도 하고. 동생은 나타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사라지려 했다. 하이너는 그런 동생을 붙잡듯이 애타게 외쳤다. ‘마르틴! 가지 마라! 나는 왕보다 더 멋진 존재가 되었다. 이 형은 드래곤이 되었단 말이다!’ 동생의 모습이 점점 작아져 작은 점이 되더니 끝내는 소멸해 버렸다. 하이너의 외침은 메아리로 어두운 꿈속을 방황했다. “으흐흐…….” 가슴이 먹먹해진 하이너는 눈물 같은 숨을 토해냈다. 관자놀이에 흐르는 눈물의 촉감이 느껴졌다. 뜨거운 서러움이었다. 하이너는 그 눈물이 귓속으로 흘러들었을 즘에야 꿈에서 현실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그때, 또 다른 감각이 몸을 덮쳤다. 하이너는 눈을 뜨고 배 쪽을 내려다보았다. “아가씨?” 아가씨는 고양이처럼 호위기사의 아랫배에 얼굴을 부드럽게 비볐다. 아마도 노골적으로 잠을 깨우기보다는 포근한 감촉으로 서서히 잠을 깨우려 했던 모양이다. 하이너는 타박의 말을 해댔다. “아무리 아가씨라 하셔도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셔서는….” 그러나 그의 표정은 그 타박이 진심은 아니라는 듯 미소에 젖어 있었다. 마리는 잠에서 깬 하이너의 얼굴에서 눈물 자국이 보이자 슬금슬금 올라와 포동한 입술로 그 눈물을 모조리 핥아주었다. “울면서 웃다니. 너는 참.” 하이너는 눈을 감고서 아가씨의 다정다감한 몸짓을 느꼈다. 아가씨의 달콤하고 상큼한 향기에 잠이 완전히 깨 창밖으로 달아나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우리 기사님께서 무슨 악몽을 꾸셔서 이리 우셨을까.” “악몽은 아닙니다만.” 마리는 호위기사가 드래곤으로 변신할 때의 고통이 크지 않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그랬기에 호위기사가 자면서 흘리는 눈물도 바로 그러한 고통에 찌든 악몽일 거로 생각했다. “드래곤으로 왔다 갔다 한다고 아팠지? 고생했어. 가여워라….” 하이너는 그런 아가씨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고생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하이너…….” 그리고 고생을 좀 하면 어떠한가. 다 감수할 수 있다. 정식 기사도 아닌 채로 시골 오를린에서 계속 살았다면 그저 그런 따분한 인생을 살았음이 분명하다. 아가씨께서 다른 아가씨들처럼 결혼하시면 자신은 기사의 자리에서도 쫓겨나 농장 일 같은 힘쓰는 일 따위나 하면서 늙어갔겠지. 비록 아가씨의 대륙 정복이라는 터무니없는 계획에 끌려갔지만, 지금에 와서 되새겨 보니 썩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지상 최고의 생물이 될 수 있다는 은밀한 비밀이 생겼으며, 전에는 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던 다양한 공부를 할 수도 있었으며, 세상 돌아가는 것에도 어느 정도 시야가 생겼다. 기나긴 인생으로 보자면 지금까지의 시간은 전반전에 지나지 않겠지만, 이미 남들은 이룰 수 없는 경지로 성장했다는 느낌에 설레고 좋았다. 하이너는 두 손으로 아가씨의 자그마한 얼굴 전체를 쓰다듬다가 그녀의 맑은 청록색 눈을 마주하며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가끔은 아가씨께 고마울 때도 있습니다.” “흐응, 다행이구나.” 마리 역시 하이너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 두 사람은 이끌리듯 이마와 이마를 맞대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호위기사를 보는 아가씨와, 사랑스러워 죽을 것 같다는 눈길로 아가씨를 보는 호위기사. 금세 진한 입맞춤이 시작되었고, 서로의 타액은 달콤한 과즙이 되어갔다. 두 사람의 격정은 만나지 못했던 시간만큼이나 끓어올랐다. 하지만 앞으로 시간은 많다고 생각해서인지 누구도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음, 하이너 잠깐.” 문득 마리가 창밖 밤하늘을 보았다. 하이너는 그제야 지금이 밤임을 알았다. 잠을 몇 시간 자지 않았나 했더니 그게 아니라 엄청난 시간 동안 잔 것이었다. 그래서 아가씨께서 몸소 깨우러 오신 거겠지. 마리가 밤하늘에 널게 드리운 라인햐르를 보며 탄성과 함께 속삭였다. “아아… 너와 함께 저걸 보고 싶었지.” “…… 저 역시 그랬습니다.” 어느샌가 마리는 창문을 더욱 활짝 열어 놓았다. 그리고 하이너의 품에 안겨 밤하늘을 보았다. “야울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이 땅을 가진 황태자가 정말 부러워.” “오를린보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두 사람을 휘두르던 뜨거운 격정은 라인햐르의 은은한 빛에 차분해졌다. 도란도란 대화가 오가는 낭만적인 분위기가 이어졌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차가워도 좋다. 서로 더욱 꽉 안고서 밤하늘을 볼 수 있으니까. 오를린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장관을 보던 두 사람은 아름답단 말을 연발했다. 혼자 있으면 그냥 ‘아름답구나!’ 하고 그칠 일인데, 둘이서 함께 겪으니 두 배로 아름다운 것 같고 좋다. 갑자기 하이너가 마리를 불렀다. “아가씨.” “응?” “드릴 선물이 있습니다.” “뭔데?” 하이너는 미소 지으며 먼저 침대에서 일어났다. “숫자 100까지 세시고 나와 보십시오.” *** 마리는 숫자 100까지 세고 있을 참을성이 없었다. 그녀가 숫자 50까지 세고 바깥으로 나갔을 때, 저 먼 모래밭에서는 호위기사의 드래곤 화가 진행되었다. 바람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드래곤의 포효 소리가 마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아아아……. 고통에 몸부림치는 드래곤의 모습은 마치 거대 드래곤 석상이 전지전능한 존재로부터 생명력을 부여받고 활개 치기 시작하는 것처럼 강렬했다. 어떤 이는 그 모습을 보고 공포와 경이로움에 전율했을 테지만, 마리는 마치 제가 아픈 듯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만둬! 뭐하는 거야! 지금 왜 변신을 해야 해?” 하지만 이미 하이너의 몸은 드래곤으로 변신을 마친 후였다. 사아아아……. 잦아드는 모래바람을 헤치며 마리는 하이너에게 다가갔다. 드래곤의 시푸른 눈동자에다 대고 원망의 말이 쏟아졌다. “뭘 하려고 이런 거야? 응? 왜 날 자꾸 미안하게 해?” ‘100까지 세고 오라고 했거늘.’ 드래곤은 아가씨에게서 조금 거리를 두더니 한쪽 날개를 아가씨 쪽으로 펼쳐 땅에 깔았다. 그의 눈이 아가씨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날개를 밝고 올라와 제 등에 타십시오. 마리는 자기 앞에 펼쳐진 검회색의 날개를 보고는 마지못해 한 걸음씩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드래곤의 날개는 사람의 뼈보다 몇 배는 더 단단하고 그런데도 탄성이 있는 듯했다. 그녀가 완전히 등에 올라타자, 드래곤은 먼 데를 보던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널찍하게 펼쳐진 라인햐르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 자신들을 향해 어서 즐기러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망설일 이유는 없겠지. 드래곤은 천천히 날갯짓을 시작했다. 라인햐르를 향해 날아가는 드래곤의 몸짓은 밤하늘에 진풍경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참 후, 마리는 라인햐르 속에서 신비롭게 녹아들 수 있었다. 그녀는 드래곤 호위기사에게 받은 선물을 태어나서 받은 선물 중 가장 최고로 쳤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하이너 네가 있어서 나는 정말 행운아라고 생각해! 네가 정말 좋아!” 그리고 그녀의 그런 반응 역시, 하이너에겐 태어나서 가장 기쁜 일 중 하나였다. ***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그림이 아름다운 하늘에 펼쳐졌다. 우아한 몸체의 드래곤과 그 생물의 등에 탄 긴 머리의 아가씨. 그들은 신비로운 라인햐르보다 더욱 신비로워 보이는 한 쌍의 연인이다. 아름다워 보인다. 경이롭기까지 하다. 저들이…… 부럽다. 마리아는 그들의 모습을 한참 동안 보다가 주저앉듯 땅에 앉았다. 옥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온몸을 시리고 에이게 했다. 마리아는 두 손으로 제 팔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한참 동안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고서 차마 옥상으로 올라오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루돌프였다. 루돌프는 바람이 차다는 이유로 마리아를 데리고 실내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금세 포기했다. 생각해 보니 그녀는 인간이 아니기에 자기처럼 추위를 타지도 않을 것이다. 루돌프는 혼자서 기다란 복도를 걷다가 문득 륀체르가 머문다는 침실의 출입문을 보았다. 출입문의 화려하고 복잡한 문양을 보니 이상하게도 생각이 정리됐다. 최근 자신을 심란하게 한 고민의 해결책도 떠오르는 것 같았다. …… 스승 한스 레 하인첼의 빚을 갚아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엄청난 액수의 돈을 모아야만 하고. 여태 아가씨 일행의 도움을 받고, 또 자기도 도움을 주면서, 큰돈을 가지게 되었다. 확실히 열세 살 소년이 단기간에 모으기엔 어려운 돈이었다. 정말 과분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이런 기회를 주신 기사님 그리고 아가씨께 너무나 감사한다. 하지만…… 자신이 언제까지나 이 일행으로 있어도 되는 걸까? 아가씨는 이 일행을 이끌며 큰 그림을 그리시는 분이시고, 기사님은 아가씨의 충실한 팔다리가 되어주신다. 마리아 누나 또한 기사님이 하지 못하는 여러 일을 수행한다. 하지만 자신은? 고작 의학 지식 조금 있는 거로 이런 과분한 혜택을 받으며 남아 있어도 되는지 확신이 없다. 이미 호위기사님도 어느 정도 의학지식을 익히셨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 가르쳐드렸지만, 그분의 습득 속도와 능력은 드래곤이어서 그런지 인간인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 자기는 몇 달에 걸쳐 머릿속에 넣어둔 최면에 관한 지식을 그분은 단 열흘 만에 당신 것으로 만드셨다. 그런 기사님에게 다른 의학 지식 역시 간단하게 익힐 수 있을 것일 테지. 이 일행이 치료사는 둘이나 있을 이유가 없다. ‘이건 절대 기사님이 미워서 하는 생각이 아니라고.’ 하늘에 맹세할 수 있다. 모든 생명을 관장하는 로젠플라드께도 맹세할 수 있다. 절대로 성도에서 주정 부린 게 부끄러워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게 아니다. 절대로 기사님을 연적처럼 생각해서 이런 결론에 이른 것도 아니었다. 자신은 아직 연적을 만들기에 너무나, 너무나 어린 나이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좋아해서도 안 되고. ‘스승님의 빚을 갚아야 하잖아. (마리아)누나 생각 따위는 모두 사치라고!’ 거기까지 마음을 정리한 루돌프는 행동을 결심했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륀체르의 방문을 두드렸다. *** 똑. 똑. 똑. 정중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륀체르는 서둘러 창문을 닫고 가림막으로 밤하늘을 가려버렸다. 아름다운 밤하늘에 보기 싫은 벌레들이 날아다니고 있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들어와.” 그가 널찍하고 폭신한 의자 가운데 길게 누워 팔짱을 끼고서 대답했고, 문은 금세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루돌프가 대뜸 이런 말을 했다. “길드장님. 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음?” “사파이어 가에서 치료사로 일하고 싶습니다.” “흐음.” 륀체르는 갑작스러운 소년의 제의에 갸우뚱했다. “일단 앉으려무나. 그런데 네 말, 아가씨께 허락은 받고 하는 건가?” 자리에 앉은 루돌프가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께선… 필시 제 의견을 존중해주실 거로 믿습니다.” “흐음.” “전해 듣기로, 황도에는 사파이어 가에서 운영하는 큰 의학원이 있다고 합니다. 황궁 의사들이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이렇게 염치 불고하고 부탁합니다만, 제가 사파이어 가를 위해 일하게 해주시고 거기서, 거기서 제가…….” “거기서 공부를 하게 해달라?” 루돌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륀체르는 어린 소년답지 않게 앞날을 또렷하게 구상하고 당돌한 부탁을 하는 소년을 흥미로운 눈초리로 찬찬히 살펴보았다. 흐음. 사파이어 가를 위해 일하게 해달라. 사실 사파이어 가에 따로 치료사는 필요하지 않다. 각 길드를 통솔하는 자에게 치료사는 많아야 세 명 정도면 된다. 게다가 구두쇠인 륀체르는 달랑 한 명만 고용한 채로도 지금껏 건강하게 잘살고 있다. 그런데 이 소년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요청을 한다, 라…. ‘가만.’ 어쩌면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이 소년 또한 마리니시네와의 끈 중 하나가 될 것이니까. 게다가 앞으로 대의를 위해 많은 이가 피를 흘려야 할지도 모르는데, 어릴 적부터 잘 키워놓은 충실한 치료사 하나 정도는 곁에 두어도 되지 않을까? 륀체르는 흔쾌히 소년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단, 그만큼 철저한 조건은 필수. “난 최고가 아니면 고용하지 않아. 그러니 의학원에서 수석으로 졸업한 뒤 황궁의로 1년 이상은 일해라. 비용은 내가 대주겠다. 단, 최고가 되지 않으면 너에게 쏟아 부은 돈은 모조리 회수할 것이다. 사파이어 가에서 일하는 것 역시 불가겠지. 자신 있나?” “열심히 할 생각은 있습니다!” 루돌프는 륀체르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로써 소년은 모든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스승에게 갚을 빚, 그리고 의원으로서 최고가 되는 것. 두 가지 목적이 생겼다. 이 목적은 자신을 갈고닦게 할 것이고, 절대로 잡념에 휘둘리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럼 기대하겠어. 그만 가봐.” “예! 감사합니다!” 소년은 그곳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가던 소년은 마리아가 있는 옥상으로 가려다가 그만두었다. 마지막 인사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 누구도 듣지 못할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 마리아 누나. 안녕…… 내 첫사랑.” ============================ 작품 후기 ============================ 이 챕터는 끝났습니다. 2권 분량이군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등으로 응원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부디 완결까지 함께 달려주시길 바라요! 00075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손톱 만한 잘슈베리 열매가 달콤하게 익어 새빨개진 무렵, 오를린 영지에선 한 명의 청년이 이주 허가를 받아 출향 길에 올랐다. 청년은 한때 영주의 장녀 마리니시네와 깊은 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고 지금은 그녀와 헤어진 상태다. 청년이 떠나는 것과 그 교제의 상관관계에 관해서는 아직 누구도 알지 못한다. 마리니시네와 사귀었던 청년들이 고향을 떠나는 일은 비단 오늘만은 아니다. 지금 떠나는 청년과 평소 친하게 지냈던 한 무리의 사람이 환송을 나와 두 팔을 흔들고 외쳤다. “로샤타르트에 가서도 잘 살아야 해!” “편지해, 난 비록 글을 모르지만 그림 편지라면 읽을 수 있으니까, 어쨌든 성공하면 꼭 고향에 오는 거야!” “신이시여, 저 녀석의 앞날에 축복을 내리소서…….” 눈물과 기도의 환송 시간이 끝나고, 청년의 모습은 서쪽 생명의 강줄기 방향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사람들도 뒤돌아 각자 길을 갔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줄곧 궁금해했던 말을 슬쩍 꺼내놓았다. “이상하지 않아?” “뭐가?” “왈가닥(마리니시네)과 사귄 사람은 다 오를린을 떠나.” 공교롭게도 마침 소용돌이 산 밑에서 체력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던 하이너가 그 ‘왈가닥’이라는 별명에 귀를 기울였다. 왈가닥. 자기가 모시는 아가씨의 별명이니 무시하려야 할 수가 없다. “마녀가 아닐까?” “마녀?” “여태 그 여자와 좀 깊은 관계를 맺었던 남자들이 통 오를린에 남아나는 걸 본 적이 없어. 다들 미련도 없이 떠나버리잖아. 헤어진 직후엔 그냥 떠나버린다고. 어쩌면 그 왈가닥한테 아주 무시무시하고 사악한 뭔가가 있어서, 남자들이 남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결국 저렇게 고향을 떠나는 게 아닌가….” 그런데 그 순간, 그 말을 하는 청년의 앞에 나무 작대기 하나가 날아왔다. 나무 작대기는 청년의 뺨을 다치게 하진 않았지만, 그 속도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청년은 이런 무례한 짓을 하는 자가 누구인지 보려고 눈을 부라리며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죄를 지은 사람처럼 금세 고개를 숙였다. 작대기를 던진 이는 영지에서 가장 몸이 강하고 날렵하다고 알려진 하이너로, 마리니시네의 ‘호위기사’다. 하이너는 그 청년의 옆을 지나치며 싸늘하게 경고했다. “사실도 아닌 말을 떠들어서 좋을 건 없다. 게다가, 아가씨는 그런 분이 아니시기도 하고.” 그가 아주 멀리 떨어지고 나서야, 청년은 구시렁거렸다. “쳇! 누가 그 계집 좋아하는 놈 아니랄까 봐! 그러는 자기도 그년에 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두둔하네! 내 참 웃기지도 않아서, 원!” *** 하이너는 집 앞 개울에서 가볍게 등목을 하다가 아가씨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이너! 운동 마치고 온 거야?” 그는 면포로 몸을 닦으면서 저 앞쪽을 보았다. 아가씨께서 뛰어오고 계셨다. 또 어디선가 숨어서 괴상한 실험이라도 하셨는지 옷과 얼굴, 머리카락에 검댕이 잔뜩 묻어 있다. 하여간 못 말리는 분이다. 플라미네와 같은 미모를 저런 식으로 쓰다니. 하지만 그런 꼴인데도……. 갑자기 하이너의 얼굴이 잘슈베리 열매처럼 빨개졌다. 쌀쌀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마저도 덥힐 것처럼 열이 화악 오른다. 단지 아가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학, 하악… 하이너, 있잖아!” “뭐가 그리 급하셔선. 그나저나 그 거지꼴은 뭡니까?” 마리는 숨이 차서 헉헉거리며 이야기를 마구 늘어놓았다. 소용돌이 산 근처의 화전에 덜 탄 나무뿌리로 연금술 재료를 만든다나, 뭐라나. 하이너는 어째서 연금술에 그딴 재료가 필요한지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여태 뽑아온 나무뿌리는 그리 크지 않아서 내가 데리고 다니는 애 두 명으로 쉽게 뽑을 수 있었거든! 그런데 앞으로 뽑을 건 너무 커서 우리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요는 그 나무뿌리 뽑는 일을 좀 도와달라는 것이다. 마리는 고양이처럼 하이너의 곁에서 몸을 비비며 아양을 떨었다. “응? 해줄 거지? 해주시겠어요, 그로스 님? 아앙! 대답 좀 해봐아!” 마리는 언제나 그랬다. 명령조의 말보다 부탁조의 말로써 호위기사를 대했다. 맨 처음 하이너는 그런 태도에 익숙지 않아 당황하고 불편했지만, 지금은 아가씨에게 익숙해졌다. “하이너? 앙? 으응? 이이잉?” 하이너는 조잘조잘하는 떠들어대는 말을 조금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저 야속한 사람 보듯 원망스러운 눈길로 아가씨를 볼 뿐이다. ‘뭐? 마녀? 이렇게 귀여운 분이 마녀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다들 정말이지… 그리고 아가씨도 그렇지. 왜 그렇게 여러 명과 교제하셔서는 당신 평판이나 깎아 먹으실까. 어쨌든 그 만남들이 썩 나쁜 건 아닌 모양이다. 한때 사귀었던 남자가 떠났어도 아가씨는 지금 이렇게 해맑은 얼굴이시잖은가. 분명 그 교제로 상처를 받진 않으셨을 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교제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단 한 번이라도 진지한 사랑을 해보고 싶진 않은 지? 어째서 틈만 나면 상대가 휙휙 바뀌는 그런 가벼운 사랑만 하느냔 말이다!’ 이 의문은 정말 의문스러워 하는 게 아니었다. 이 마음은 뭘까. 어째서 시중이나 드는 주제에 이런 생각이 가슴을 괴롭힐까. 아가씨께서 누구와 얼마나 교제를 하건 자기가 판단할 문제도 아니고 막을 일도 아니다. 조언하는 것조차 신분으로 보자면 불경한 일이다. 게다가 자기가 뭐라고 아가씨를 보며 진지한 사랑을 운운하는가. 그 누가 뭐라든 아가씨의 사랑이 진지했는지 아닌지는 당사자들만이 판단할 일이다. 옳고 그름을 운운하는 것 또한 자기 주제를 벗어났고……. “흐응… 하이너. 어째서 내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그렇게 빤히 보는 거야? 어디 몸이 불편한 데라도 있어?” 대답 없는 그를 보고 급기야 마리가 팔짱을 끼고 눈을 흘겼다. 그제야 하이너는 머릿속의 상념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날 아주 자세히 보던데?” 하이너는 붉어진 얼굴 속 본심을 들킬세라 고개를 홱 돌리며 상의를 입었다. 그리고 불퉁한 대답을 내놓았다. “예. 자세히 봤지요. 아주 밉상…이라서 흘겨봤을 뿐입니다.” “아이, 거짓말하시긴! 옷 다 입었으면 얼른 나무뿌리 캐러 가자고! 어서!” 마리는 툴툴거리는 호위기사의 등을 밀고 어디론가 갔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 아래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늑대와 토끼가 아웅다웅하는 모습 같았다. 그날 하이너는, 나무뿌리 캐는 데 온 힘을 쓰며 아가씨를 향한 상념을 애써 지워야 했다. *** 할데바인에게서 황태자비 암살 증거를 확보해올 것. 만약 그 일에 성공한다면, 실렌틴 광산은 각 기갑 부대를 상대로 하는 거래를 중단할 것이다. 륀체르는 약속을 지켰다. 실렌틴 광산이 아예 거래하지 못하게끔 생산 공장 전부를 폭파해버린 것이다. 이 과감한 방식의 계기는 무엇일까? 언젠가 륀체르는 황태자 비오르틴에게서 부담스러운 부탁을 받은 적 있다. 오슬의 수인족을 매수하여 로젠플라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달라는 요청. 륀체르는 길드장에 오르기 직전 황태자에게 도움을 받은 적 있었기에 요청을 거절하기 곤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키는 대로 하자니 정치적으로 곤란한 입장이 될 것 같았다. 고민에 빠진 그때 우연히 오를린의 아가씨를 만났고, 조언을 들었다. 「뭐가 어려운가! 이쪽은 그런 어려운 부탁 따윈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곤란한 처지라고 우는 소리를 하라!」 륀체르는 그 말을 듣고 마리의 드래곤 기사를 이용했다. 드래곤은 바너의 악당들만 골라서 파괴적으로 소탕해버렸고, 바너는 대외적으로 ‘사악한 드래곤’에 시달려서 신음하는 도시가 되었다. 그러므로 바너의 실세인 륀체르가 황태자의 부탁을 들어줄 여력 따윈 없다는 ‘사실’이 만들어졌고, 비로소 륀체르는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륀체르는 이번 실렌틴 광산 거래 중지 건도 같은 방식으로 해결했다. 실렌틴 광산 폭파는 홀디네 본이 고의로 일으킨 게 아니라, 원인을 알 수 없는 마력 실험에 의한 ‘사고’로 알려졌다. 즉 륀체르는 각 기갑체 부대를 거느린 굵직한 세력에게 ‘당신들한테 절대로 금속, 부품을 팔지 않겠습니다.’며 그 세력들을 적으로 돌리는 대신, 아예 금속, 부품의 생산 설비를 망가뜨림으로써 ‘팔고 싶지만 팔 물건이 없다!’고 도리어 하소연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륀체르는 이 폭파 사건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제국에 신청한 상태며, 또한 대륙 연합 구호 재단에 보험금을 청구했다. 장인이지만 장사꾼이기도 한 그는 조금의 손해도 견딜 수 없다는 듯 어마어마한 액수로 이 사고의 피해를 보상받길 원했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과연 그다운 처사라며 사고를 안타까워했다. 이에 황제는 폭파 사건의 진상을 캐는 것에 온 관심을 쏟았다. 황궁 최고위 마법사들이 조사에 참여했지만, 힘의 근원이 마력이 아니라서 조사하기 어렵다는 결론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황궁은 어수선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광산 사고가 터졌고, 황제 다음 세력이라는 할데바인이 고위 군인의 손에 살해당했으니, 그 분위기가 뒤숭숭한 건 당연. 황태자 비오르틴은 제 아버지가 발 벗고 나서서 하지 못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는 할데바인의 잔존 세력과 열심히 싸웠다. 할데바인 대공의 지위를 그의 딸이 승계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잔존 세력들이 다시 뭉치지 못하도록 밤낮없이 일을 꾸몄고, 할데바인 대공의 조카이자 자신의 계모인 황후와 늘 대립해야 했다. 정원이나 꾸며놓고 연회다, 수집품이다, 그저 사치 부리기만 즐길 줄 알았던 황후는 대공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위기를 느껴 상당히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녀는 숙부의 죽음 뒤에는 황태자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에 루빈의 수장 헤그 레 지괴르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진실을 캐야 한다고 남편을 못살게 굴었고, 우유부단한 남편인 황제는 늘 그렇듯 실렌틴 광산 건에 집중하는 것으로 도피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시각, 황궁 감옥에서 헤그는 무시무시한 고문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가 왜, 무슨 이유로, 어떤 심경의 변화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일을 했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 황도 로귀하르트. 성도 로젠플라드. 할데바인의 수도 리데바인. 제국의 중심지인 세 지역을 편히 오갈 수 있도록 만든 마법 공중 다리가 바로 플래티르콘의 날개다. 그 거대한 삼각의 다리 위는 언제나 은빛으로 깨끗하게 반짝이며 지상 모든 것을 오만하게 내려다본다. 하지만 다리 아래는 사정이 다르다. 그곳은 한마디로 도시의 하층민들이 모이는 쓰레기장이나 마찬가지다. 성공을 꿈꾸어 대도시로 올라온 시골 출신의 가난한 이들, 한때는 풍족한 삶을 살았다가 마약, 도박 등에 미쳐 파산해버린 자들, 푼돈을 받고 몸을 파는 창녀, 불법 마약 판매상, 도주 중인 범죄자 등이 득시글거리는 이곳은 도시의 암울한 그림자와도 같은 곳이다. 언제나 욕설, 칼부림, 살인, 강간 등이 끊이지 않는 아주 무시무시하고도 위험한 이곳에서 마리 일행은 한동안 머물기로 했다. 야울을 떠나올 때 륀체르가 ‘어중이떠중이들이 돌아다니는 곳에 있으면 위험하다!’고 경고했지만, 마리는 듣지 않았다. 그녀는 이곳 황도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이곳, 불법으로 지어진 한 조잡한 건물의 삼 층. 마리는 이곳 관리인에게 최면을 걸어 머물 장소로 썼다. 그녀는 앞일을 구상하다가 잠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안타까움이 가득 밴 한숨이다. “녀석, 그렇다고 인사도 하지 않고 쏙 빠지다니.” 하이너는 그 말이 루돌프를 두고 하는 말임을 알았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더욱 심화한 공부를 하겠다며 일행과 완전히 갈라선 루돌프에게 줄곧 행운을 빌다가 이제 와서 저러시는 이유가 뭘까. 하이너는 궁금했지만,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자신은 다만 아가씨께서 계획하시는 일이 궁금할 뿐이다. “황도에서 무얼 하실 생각이지요?” 마리는 곡물 찌꺼기를 충전재로 한 낡은 이불에다 새하얀 면포를 깔아 누우며 대답했다. “신성 정부를 부술 생각이야.” 하이너는 마리의 머리에 자기 외투를 포개어 베개 삼게 해주었다. 신성 정부를 부술 생각이라는 말이 어쩐지 우습게 들렸다. 하긴, 뭐 언제는 아가씨의 말이 우습게 들리지 않았던가? 할데바인의 잔존 세력이나 마찬가지인 신성 정부는 그냥 내버려두면 황태자가 알아서 부술 텐데 말이다. “언제나 터무니없는 목적만 세우시는군요.” 버릇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뭐가 남지?” “푸하.” “여태 내가 어떤 목적을 세워서 실패한 적이 있었니?” 마리가 의기양양하게 말하자 하이너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가씨께선 실패한 적은 없으시다. 예전에 당신께서 말씀하셨던가? 희미하게나마 앞일을 볼 수 있다고. 지금껏 아가씨가 겪은 행운들은 바로 그 점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지금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아가씨 혼자서 신성 정부를 부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는 것. 하이너는 미리 말해두었다. “제가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하지만, 성황청 건물에다 불을 토하는 것만큼은 별로 하고 싶지 않군요.” 신성 정부를 부수고 싶으면 어디 혼자의 힘으로 부수어 보란 말이다. 말귀를 알아들은 마리가 몸을 호위기사 쪽으로 돌려 누워 팔짱 끼며 심술궂게 웃었다. “으흐흥, 우리 기사님께서 많이 지치셨구나?” “지치는 거랑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그저 순수하게 아가씨의 힘을 구경해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만.” “힘? 어떤 힘? 꼭 너처럼 거대한 생물이 뭔가를 파괴해야만 힘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야?” “또 무슨 말을 하시려고….” “잘 들어, 하이너.” 마리는 팔짱을 낀 그대로 다시 몸을 돌려 천장을 보았다. 거미줄이 쳐지고 곰팡이가 슨 지저분한 천장이 흡사 이 혼탁한 세상처럼 보였다. “힘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옮고 그름을 따지고 움직이는 그때부터, 뭔가를 하려고 스스로 일어서는 그때부터 진짜 힘이 생기는 거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봐야 해. 내가 바라보는 신성 정부는 쓰레기야. 그것들은 그동안 할데바인과 한통속이 되어 종교라는 잘난 이름으로 수없이 악랄한 짓을 해왔지. 겉으로는 생명의 아름다움과 피의 고귀함을 섬기고 모든 종교를 포용한다고 하지만, 그 진상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뭐, 반박은 하지 못하겠군요.” 하이너도 로젠플라드가 암중에 행하는 일들에 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피의 고귀함을 숭배하므로 전쟁을 섣불리 일으켜서도 안 된다고 말하는 평화적 종교, 로젠플라드가 아닌 종교라 해도 모두 수용한다는 관대함의 상징과도 같은 그 종교는, 철저히 인간만을 위해 만들어지고 움직였다. 그들은 오직 인간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전쟁에만 반대하고, 오직 인간들만이 믿는 종교에 관해서만 포용해주었다. 그것도 오직 제국 출신 인간들만의! 그 말인즉 그들은 제국이 아닌 지역, 즉 동한과 서한, 중천, 수인족 거주 지역인 오슬 등지에 관해선 전혀 보호하지 않을뿐더러 수용도 하지 않는다는 말. 차라리 거기까지라면 괜찮은데 때로는 먼저 도발을 걸고 탄압을 일삼기도 했다. 과거 신성 정부는 동한과 서한, 중천의 사람들을 수인과 동급으로 여기며 끊임없이 ‘인간답게’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로 전쟁을 일으켰고, 급기야 서한을 식민지로 만들어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동한을 서한에 이어 식민지로 삼으려고 군력을 키우는 데 힘썼다. 그 군력에서 남은 힘은 오슬의 수인족을 괴롭히는 데 쓰였다. 그들은 야만적인 수인족들의 종교는 대륙 평화에 해악이 되는 거로 판단, 끊임없이 군사를 보내 탄압했고, 그 일을 이종 간의 통일이라고 성스럽게 포장하여 모금 운동을 했다.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 온 모금 운동은 신도들에게 영적 행복의 최상위 단계로 가는 길목이나 마찬가지라는 인식으로 변질하였다. 신도들이 많은 돈을 낼수록 성도의 몸집은 커졌고 그들의 ‘성스러운 폭압’도 규모가 커지고 방식도 다양해졌다. 하이너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는 있다. 수인족이 인간을 못살게 괴롭히는 게 아니라, 사실은 신성 정부 측이 먼저 수인족을 괴롭혔기 때문에 수인족도 참지 못하고 때때로 들고 일어난다는 것, 그러는 사이 은근슬쩍 신성 정부가 로젠플라드를 제국교로 올린 것, 그리고 성황청을 중심으로 커지는 온갖 사업들. 그러니까 지금, 아가씨는 그런 상황에 불만을 품고 그들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들은 선과 악을 이상한 방식으로 구분해. 인간이냐 아니냐, 제국이냐 아니냐로 가르려 하지. 때로는 차원의 균열 자체를 그저 ‘사악한 힘’이라고 뭉뚱그려 스리슬쩍 덮어버리곤 하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악은 수인도 아니고 수인들이 믿는 종교도 아니야. 제국 정책에 반대하는 동한 사람들 또한 아니지. 죄 없는 이들을 무조건 악으로 몰아넣고 그것을 폭압으로 단죄하려는 신성 정부 또한 악은 아니야. 그들은 단지 무지고 또 무지에 휘둘리는 약자들에 불과해. 진짜 악은 말이지…… 거대한 위험 앞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커다란 사명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외면하고 선이니 악이니 떠들어대며 무지한 자들의 피나 빨아먹는 기만자들이야.” 하이너는 그 기만자의 대표를 잘 알고 있었다. “성황 말씀입니까?”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있지, 나는 야울에서 너와 같이 밤하늘을 날며 느낀 게 있어. 그 아름다운 하늘을 절대로 차원의 균열 같은 것에 빼앗기지 않겠다고. 그러려면 일단 저 한심한 성황을 없애고 그 무리를 없애야 해. 그게 내 숙제라고. 헤헤!” 성황 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그 무리를 모두 죽이겠다는 말. 죽여서라도 세상에 닥친 위기를 헤쳐나가겠다는 무겁한 의지. 훗날, 이 아가씨의 명분이 증명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이번 계획을 뭐라고 부를까? 아마도 미치광이의 ‘살육’ 계획이라 하겠지. 하이너는 사람을 죽이겠다는 말을 아침 이슬처럼 맑은 목소리로 하는 아가씨를 보고 기묘해졌다. 그리고 조금 불만이 생겨 여쭈어 보았다. “혹시 이번에도 가슴 변태의 힘을 이용하실 생각입니까?” 하이너의 물음에 마리는 갑자기 제 손가락을 보았다. 우정의 의미로 받은 유방 반지가 반짝였다. 이런 위험한 지역에서 이토록 값나가는 것을 손에 끼고 다니면 위험하겠지. 슬슬 뺄 때도 되지 않았나? 이것을 준 륀체르 사파이어의 도움을 그간 무시할 순 없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마리는 반지를 빼버렸다. “가슴 변태는 당분간 만날 일이 없을 거야. 물론, 그의 힘도 지금은 필요 없지.” ============================ 작품 후기 ============================ 이번 챕터에선 륀체르는 별로 등장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짜논 대로 보자면 아예 등장을 안 해용... 그리고 하이너가 마리 때문에 번뇌에 휩싸일 일이 좀 있습니다. 더 말하면 재미 없으니 여기서 컷! (뭐라고요? 지금도 재미 없다고요? 운다.) 읽어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00076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반지는 이불 위에 놓였다. 마치 머리 묶을 때 쓰는 리본 따위나 된 듯 흔한 물건 취급을 당했다. “하아음. 그럼 난 꿈나라로!” 마리는 피곤한 듯 먼저 눈을 감았고, 하이너는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가 반지를 훔쳐갈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러시나? 제아무리 꼴 보기 싫은 녀석이 준 반지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고가의 물건. 하이너는 이런 비싼 물건이 막 다뤄지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반지를 아가씨의 가방 깊숙이 잘 숨겨두었다. 그나저나 ‘륀체르의 힘이 필요 없다.’고 하시다니. 그간 제국에서 크고 작은 전쟁은 자주 일어났다. 그 뒤에는 언제나 기갑체, 마력기갑체라는 훌륭한 병기가 있었다. 기갑체 부품 생산 설비가 완전히 파괴된 지금, 누구도 예전처럼 섣불리 전쟁을 일으키진 않을 것이다. 다들 과거에 확보해둔 부품의 재고량을 드러내지 않는 데만 혈안일 테지. 한정된 힘을 쥔 자들은 자신들의 밑바닥을 보이길 두려워하는 법이니까. 전쟁은 꼭 일어나야지만 전쟁이 아니다. 굳이 일어나지 않아도 전력 비교를 통해 심리전이 치러지고 그 심리전에서 우세를 차지하는 것도 전쟁의 승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게 권력가들의 욕심이다. 심리전에서 이기려면 군사훈련의 규모-물론 기갑체 부품을 소모하지 않는 선에서의 훈련-가 커야 하거나 기갑체 병력을 제외한 다른 병력을 증강해야 한다. 그 과시적인 행태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금력이 받쳐줘야 한다. 제국에서 돈 좀 가졌다 하는 이들은 각 세력의 협조 요청을 받느라 바쁠 테지. 이 점에선 바너의 길드 마스터 륀체르 사파이어도 예외일 수 없다. 즉, 아가씨는 륀체르가 바빠질 것이고 정치적으로 시끄러운 소용돌이에 빠질 것을 예상하고 그의 도움을 필요 없다고 말씀하는 것이리라. 륀체르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신성 정부를 괴멸에 빠뜨리겠다는 것은 강한 의지의 표시인가. 자만인가. 말버릇 그대로 무한 긍정인가. 아니면 륀체르를 배려하는 건가? 그딴 가슴 변태 자식을 배려…… 하는…. 하이너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기는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똑, 또똑, 똑……. 어쩐지 지친 느낌의 소리. 하이너는 이곳에 올 사람은 오직 마리아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서둘러 문을 열어주었다. “마리아?” 마리아의 상태가 이상하다. 아가씨의 생필품 심부름을 하고 오는 길인데, 아마도 누군가에게 맞은 듯 입가에 피를 묻히고 있다. 하이너는 그 상처에 손을 가져가려다 차마 대지는 못하고 물었다. “괜찮은가? 무슨 일이지?” 마리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기가 사온 물건들이 든 주머니를 짐 더미 사이에 내려놓았다. 사실 입가의 상처는 거리의 불량배들에게 반항하다 생긴 것이다. 드래콘으로 다니면 마력을 다루는 사냥꾼에게 잡혀갈 것 같아서 인간체의 모습으로 다녔는데, 그 인간체의 모습이 워낙 아름답다 보니 불량배들이 음심을 품고 접근한 것이다. 아직 소녀의 모습에 불과한 마리아를 건드리려 했던 그들은 이 거리에서도 아동들을 상대로 나쁜 짓을 하기로 소문난 이들이다. 마리아는 그 불량배들과 싸우면서, 치안이 좋은 도시에만 있다가 이런 질 나쁜 곳에 오니 확실히 별로긴 하다고 생각했다.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하이너는 그녀에게 뭔가 더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워낙에 말이 없는 아이다 보니 물어봤자 대답을 듣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든다. 그냥 자기가 스스로 짐작할 수밖에. …… 혹시 나쁜 녀석들이 이 아이를 건드린 건? 하이너는 현관문 밖을 잠시 둘러보고 나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그사이 마리아는 지저분한 자기 외투를 창밖에다 털어 말렸다. 그 모습이 이젠 제법 인간 모습에 익숙해져 보였다. 하이너는 예전 마르틴을 대할 때처럼 다정한 형 아니, 오라버니의 표정으로 다가가며 손을 뻗었다. “입가의 상처는 내가 치….” 하이너의 입술이 ‘치료’를 발음하기 그 직전, 마리아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치료를 기대한 것일까? 마리아의 뺨이 붉어졌다. 선홍빛 눈동자도 수줍은 듯 아래로 깔렸다. 순간 하이너는 그녀의 상처를 만지려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는 망설였다. 최근 치료 마법을 배우고 응용할 곳이 없다 보니 괜히 그녀를 고쳐주려 했다. 물론 이런 친절 그 자체는 좋은 것이나, 이 친절로 인해 마리아가 오해하면 곤란하다. 보라. 저 발갛게 상기된 뺨을. 조금씩 달싹이는 입술을. 소용돌이 산에서 사냥했을 당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순종적인 눈동자를. 그것은 필시 마리아가 자신을 보고 어떤 감정을 느낀……. 하이너는 그런 오해를 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무리 다 잡은 동물, 마음껏 부려도 되는 종속물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감정을 가진 생물이 아닌가. 괜한 오해를 시작으로 나중에 상심에 빠뜨리고 싶진 않다. 그리고 굳이 자기가 치료해줄 이유도 없다. 드래콘이란 원래 마력 생물이니 어느 정도 치유 능력이 있다. 하이너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갑자기 손을 들어 꼬마 아이 머리를 쓰다듬듯 마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후회의 말을 했다. “미안하구나. 내가 진즉 나가서 사 왔어야 했다. 괜히 마리아 네가 나가서 고생만 한 것 같군. 나는 필요한 물건이 있으니 밖에 좀 다녀오겠다. 그동안 아가씨와 단둘이 편히 쉬었으면 해.” 하이너는 자기가 방에 있으면 마리아가 불편할 것으로 생각하고 외투를 챙겨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마리아는 멍한 얼굴로 한참 동안 있다가 제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직 기사님의 손이 남겨주신 온기가 남아있는 정수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괜스레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숨이 나왔다. 드래콘의 호흡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의식하는 한숨, 매우 낯선 한숨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며칠이 지났다. ***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과 황제의 궁 사이에 둥글게 솟아난 언덕, 그 위에 있는 국사범 수용소. 대륙에 뜨는 달은 평소엔 하나고 그달을 부르는 이름은 나라, 지역, 종족마다 각각 다르다. 매일 밤하늘에 뜨는 노란 달을 보고 황도 사람들은 ‘렌키스’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따금 또 다른 달 하나가 렌키스 옆에 뜨곤 한다. 바로, 오늘처럼. 그 달은 렌키스와 같은 천체라고 할 수도 없고, 마법으로 인한 환영 현상인지도 알 수 없다. 오직 신만이 그 달의 정체를 알리라. 저명한 천문학자들과 뛰어난 마법사, 그리고 언제나 정확에 가까운 예측을 하는 점성술사들도 렌키스의 옆에 종종 출몰하는 그달에 관해 아직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달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었고, 그렇게 그달은 ‘포울룬디’로 불리게 되었다. 오늘은 노란 렌키스와 푸른 포울룬디 모두가 만월인 덕분에 밤하늘이 아주 밝다. 누군가는 두 개의 달이 뜬 밤하늘을 보고 낭만에 젖기 좋았지만, 여기 국사범 수용소는 그런 낭만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이곳의 고문실에서 헤그는 며칠 동안 끔찍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리데바인의 주인이자 소 황제로 불리었던 할데바인 대공을 살해한 혐의, 그리고 살해 동기를 실토하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그에게 갖가지 고문이 가해졌다. 채찍질, 물고문, 괭이질에 피부가 벗겨진 적도 있었으며 뜨거운 돌 위에 몸이 굴리는 고문도 당했다. 이런 고문 끝에는 언제나 치료사가 붙었다. 치료사는 그의 온몸을 다시 고문받기 좋도록 말끔히 고쳐놓았고 때론 배려라도 해주듯이 수면마법을 써줄 때도 있었다. 고문도 쉬어가면서 받으라는 뜻이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진즉 미쳐버릴 테지만, 마력기갑체를 다루는 군인으로 독한 훈련을 받고 고통 완화 능력을 키우며 살아온 헤그의 정신은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예상보다 세지 않는 고문이라 여기고 있다. 본래 국사범들은 흡혈인들에 의해 피가 빨려 죽기도 하고 쇠꼬챙이가 잔뜩 돋아난 관에 들어가 죽기도 하며 날개 없는 기형 드래콘 네 마리에 각각 사지가 묶여 온몸이 찢긴 채 죽기도 했다. 세상 그 어떤 고문보다 잔인한 고문을 받고 더러는 영혼 소멸형까지 당하는 것이 국사범들의 운명인데, 그에 비해 자신에게 가해진 고문은 그리 심하지 않은 수준이니…… 누군가가 뒤를 봐주는 게 분명하다. 헤그는 황태자 비오르틴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비오르틴은 정말 모르는 건가? 이런 끝나지 않는 지겨운 고문보다 영혼까지 사라져버리는 소멸형이 더 낫다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게 아니었어.’ 황태자는 아마도 오해하고 있을 것이다. 헤그 레 지괴르가 친우인 황태자를 위하여 할데바인 대공을 죽여주었다고. 하지만 천만에. 자신이 할데바인을 살해한 동기는 그런 눈물겨운 우정 때문이 아니다. 헤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게…… 아니었다고. 차라리, 차라리…….” ……줘. ……주라고. 소리가 너무 작아서 누구도 듣지 못했다. 아니, 설사 소리가 작지 않다고 해도 감옥 관리인은 그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관리인과 고문자들은 언제부턴가 꾸벅꾸벅 졸다가 깊은 잠이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헤그는 고요한 감옥에서 음산한 웃음을 계속 흘렸다. 전장에서 그를 날뛰는 야수처럼 호전적으로 보이게 하던 붉고 길었던 머리카락이 지금은 마귀의 머리카락처럼 기괴한 분위기를 뿜어내었다. 또한, 가뜩이나 마른 얼굴이 고문으로 인해 초췌해져서 그가 뿜어내는 자색의 눈빛 또한 이승 사람의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만약 고문하는 자가 깨어 있다면 그 몰골을 보고 놀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무섭지도 않은지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 또각또각… 또렷이 들리는 구두 소리.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가녀린 그림자. 그런데 소리와 그림자만 느껴질 뿐, 원래 형태는 보이지 않는다. 즉, 어떤 존재가 투명화하여 헤그에게 접근한다는 것. 감옥 문은 기분 나쁜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헤그는 이제 황태자가 할데바인의 잔존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친우를 풀어주는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아직 시간이 너무 이르다. 헤그는 이 감옥에 들어온 이가 누군지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고문자를 포함한 관리인들이 다 잠든 것도 수상하게 느껴진다. 혹시 할데바인의 잔존 세력이 자길 죽이러 온 건가? 그렇다면 얼마든지 기쁘게 죽어줄 수 있다. 투명한 침입자가 목소리를 또렷하게 냈다. “방을 나오실까요?” 여자다. 그것도 갓 소녀를 벗어난 듯한 목소리. 아주 발랄하고 아름다운 목소리. 헤그는 무기력하게 대답했다. “누구지?” 그러자 여자가 헤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는 당신에게 사과해야 할 일이 좀 있는 사람이랍니다.” “아아?” 헤그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눈을 돌리며 실소를 터뜨렸다. 들리는 목소리가 너무 아이의 것처럼 해맑아서 웃음이 나왔다. *** 그로부터 약 십 분 후, 국사범 수용소와 야울 궁이 이어지는 좁은 길목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탈주한 헤그와 그의 탈주를 도운 여자가 함께 야울 궁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일단 야울 궁은 무조건 벗어나야 해요. 그래야 날아갈 수 있으니까. 날아간다면 아무도 우릴 잡지 못할 거라고요.” 그의 탈주를 도운 이는 마리다. 그녀는 헤그를 만나려고 드래콘과 드래콘의 도움으로 가장 뚫기 어렵다는 황궁 감옥을 뚫었던 것이다. “뭐 지금 봐서는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기어가도 병사들에게 잡힐 것 같지 않지만요. 후후! 생각보다 야울 궁의 경비는 허술하군요. 빵점이야아!” 마리는 사실 헤그의 느린 걸음걸이에서 도무지 탈주 의지라고는 느낄 수 없어서 당황하고 있다. 끔찍한 고문을 받았을 텐데 이렇게 탈주를 도와주면 응당 고마워하고 기뻐해야 하지 않는지? 그런데 정작 헤그는 어째서 이런 짓을 돕느냐고 묻고 있다. “왜 나를 구했지?” 마리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일종의 속죄죠. 당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소멸해버린 사람이 바로 나니까요.” 마리는 헤그의 아버지인 세이든 레 지괴르와 헤그의 양 동생이자 약혼녀인 사괴탄의 영혼들을 한때 호위기사로 하여금 소멸해버렸던 일을 사과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저도 대의가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답니다. 어쨌든 당신에게 이런 식으로라도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그러니까 탈주를 돕는 것으로서 소중한 사람을 소멸해버린 죄를 용서해달라? 헤그는 웃지도 않고 그저 침묵했다. 살면서 난감함이라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하는 마리가, 그런 헤그의 반응에는 난감해했다. “어째서 나를 죽이지 않죠?” 헤그가 되물었다. “죽길 원하나?” “그렇진 않아요. 하지만 죽이기 쉽긴 하잖아요. 당신은 이런 으슥한 길에서 나 같은 작은 여자애 하나쯤은 쉽게 죽일 수 있는 사람 아니던가요?” “당신은 어째 죽으러 온 사람 같지 않군.” “헤헤. 어떻게 알았어요?” 목소리만으로도 느껴지는 법이다. 헤그는 지금 곁에 졸졸 따라오는 이 투명한 소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가족을 소멸해버린 사람을 응당 미워해야 할 테지만, 헤그는 미워하기는커녕 도리어 그 사람에게 자기도 소멸해 달라고 빌고 싶다. 한때 그는 아버지가 마검인 채로 영원히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양 동생이자 약혼녀인 사괴탄이 마검제조장인이라는 악의 길을 걸어가는 것도 싫었다. 그저 그들이 인간으로서, 아버지와 약혼녀로서 평범히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마검과 마검제조장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니 어쩌면 그 둘은 소멸된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이 투명한 소녀가 그들을 소멸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영원히 괴로워하며 살아야 했겠지. 아버지를 마검이 되는 마수에서 구해내지 못한 죄책감에 허덕이며, 양 오라버니로서 동생을 회유하지 못한 것에 괴로워하며, 남자로서 약혼녀의 마음에 싹 트던 악마 같은 생각을 없애주지 못한 과오에 후회하며 말이다. 앳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런데 정말 나를 죽이지 않을 거예요?” “죽고 싶다면 고통도 느끼지 못하게 죽여줄 수 있다만. 죽고 싶은가?” “아니! 전혀요! 저는 대륙 정복을 해야 해서 바쁘답니다!” 헤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동생도 구해야 하고, 호위기사한테 빚도 갚아야 하고, 차원의 균… 아무튼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고요! 호호!” 방금, 뭔가 아주 황당무계한 말을 들은 것 같다. 이 여자는 혹시 미치광이는 아닐까? 아무런 의욕이 없고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헤그가 거기까지 의심을 했을 때, 갑자기 마리가 몇 걸음 떨어졌다. 그리고 헤그의 앞에서 완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녀, 마리니시네의 모습을 본 헤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괴…….” 헤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언젠가, 친우인 황태자의 아내가 될 사람, 지금은 황태자비가 돼버린 사람을 봤을 때 느꼈던 충격이 지금 또 찾아왔다. 로테아르카 루 오를린을 봤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사괴탄과 너무 닮아서 놀라야 했다. 그리고 지금, 로테아르카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여기 있다. 하지만 뭔가 다르다. 렌키스의 금빛으로 물결치는 금발, 투명한 눈동자, 한여름 열매처럼 생기가 도는 입술, 그리고 저 백옥처럼 흰 피부 하며. 아마 저 투명한 눈동자는 햇볕 아래 청록색이거나 청색일 것이다. ……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사괴탄과 닮았다. 단 하나 다른 게 있다면 해사한 표정, 쯤. 그러고 보니 이 여자가 재판의 중심에 있던 오를린의 그 색광녀 아가씨인가? 어째서 이 여자가 자기 앞에, 그것도 자기의 탈주를 돕기까지 하는지. 헤그가 혼란에 빠진 그때, 마리가 입을 열었다. “이봐요. 지괴르 대령.” “……?”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면 내 부탁 하나 들어줄래요?” 아마도 지금 이 물음이 그녀가 꺼내 드는 본론이리라. “부탁?” 헤그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바람 소리 때문에 마리는 그 떨림을 느끼지 못했다. 마리는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 눈을 빛냈다. 헤그 레 지괴르. 이 남자에 관해 안다면 모두 다 아는 편이다. 황태자의 친우이자 야울을 지키는 마력기갑 부대 루빈의 수장. 그러나 황태자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굴기가 일쑤라 자유로운 군인이라고 불리던 자. 하지만 황태자가 정말 힘이 필요할 땐, 헤그는 그를 망설임 없이 돕는다. 온갖 군대가 싸움을 걸어와도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던 그야말로 불패의 신화. 이 자가 할데바인을 죽인 것도 아마 황태자와의 우정을 지키고자 한 것일 테지? 그런데 그런 돌발적인 살해라니. 뭐, 그것도 지괴르 대령답다는 인상은 맞지만. “듣기로 당신은 비록 지금 범죄자이지만, 군인으로서, 한 부대를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 당신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당신은 얼마 전까지 신성 정부에 귀속되어 일한 적이 있기도 하고. 아, 무슨 말인가 하면…… 나는 당신의 그런 능력, 신성 정부를 파악하는 능력과 통솔력이 탐난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신성 정부를 무찔러줄 수 있나요? 멍청이 성황과 그의 무리를…… 깡그리 없애줄 수 있는지 묻는 거예요.” ============================ 작품 후기 ============================ 선, 추, 코 감사합니다! 최대한 빠릿빠릿 쓰도록 노력할게요! 00077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즉, 성황파를 무찔러달라? 헤그는 마리를 천천히 지나쳐가며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할데바인이 악귀처럼 굴었기에 그 잔존 세력인 성황 무리도 할데바인 취급을 받고 있다. 그래서 악귀 같은 그들이 사라지길 바라는 이들은 많다. 오슬의 수인족부터 시작해 반 로젠플라드 교, 황태자, 할데바인의 경제 정책에 반대하는 무리 등 많은 이가 성황 무리를 몹쓸 집단 취급했다. 그런데 헤그가 생각하기에 원래, 성황파를 무찌르는 것은 황태자의 다음 목적이기도 하다. 어째서 이 여자가 먼저 와서 부탁하는 것일까? 적어도 황태자가 시킨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늘 친우인 자신에게 직접 표현하곤 했으니까. 굳이 이 여자를 시킬 별다른 이유도 없을 것이고. 지금 이 여자는 궁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부탁했다. 살짝 고집스럽게 느껴지는 눈빛이 그걸 증명한다. 헤그는 무기력한 기분 중에 아주 약간의 흥미를 느꼈다. “성황 파를 없애달라니, 나 같은 죄인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는군.” 그를 따라잡은 마리가 살짝 조급하게 말했다. “무리한 부탁이 아니란 걸 알고 있어요! 당신은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혹시 알고 있나요? 황도에서 당신은 소 황제(할데바인)를 죽이고도 죄인 취급은커녕 영웅 취급을 받고 있어요! 게다가 당신의 부하들은 황궁에 침입해서라도 영웅 지괴르 대령을 구출하겠다고 열의를 불태우고 있답니다! 그런 그들이 당신의 명령을 듣지 않을 리 없잖아요! 당신은 성황 파를 잡기 딱 좋은 사람이라고요!” 헤그는 비웃었다. 사람들이야 흡혈귀 같은 정책만 내세워 온 할데바인이 죽어서 기쁜 것일 테고, 부하들 역시 루빈이라는 공동체를 멋대로 신성 정부에 귀속하여 갖은 훈련을 시킨 할데바인이 미웠는데 그 복수를 지휘관이 대신해주니 좋아서 저러는 것이리라. 하지만 헤그는 그들을 위해 할데바인을 죽인 것이 아니다. 할데바인 살해는 오로지 개인적인 의도, 더럽혀진 마음을 스스로 고통의 구렁텅이로 빠뜨려 단죄하려고 저지른 짓일 뿐이었다. 오직 자신을 위해 한 일인데 어째서 남들에게 찬양을 받아야 하는가? 이제 와 영웅 취급받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이 여자는 영웅이 되라 말한다. “당신만이 루빈을 지휘해 멍청이 패거리를 없앨 수 있어요! 지금으로선 당신밖에 없다고요!” “…….” “지괴르 대령! 내 말 듣나요?” “……좋다.” 헤그는 대답을 하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문득 올려다 본 하늘이 낮처럼 밝아, 너무 밝아서 기분이 이상하다. 어차피 진흙탕에 굴러도 괜찮을 몸, 신성 정부와 싸우다가 죽는 것도 자신에겐 고통스러운, 그래서 더 짜릿한 싸움이 될 테지. 다만 그는 하나의 조건을 원하는 사람처럼 굴어보았다. “내가 성황을 죽이면 당신은 내게 뭘 해줄 수 있지?” 어쭙잖은 대답을 듣는다면 왠지 기분이 나쁠 것 같다. 제아무리 스스로 바닥을 구르기로 했지만, 이를테면 제국의 정의 확립이라느니, 평화라느니, 악의 무리 단죄라느니 하는 뜬구름 잡는 목표에는 어울려주지 못할 것이다. 일신의 평화를 스스로 망친 이가 제국의 평화를 위한다는 말에 동조할 순 없는 법이다. 마리는 다시 그의 앞에 서서 기도하는 이처럼 두 손을 모으며 물었다. “무얼 바라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듯 자신만만한 태도. 두 개의 달이 뜬 밝은 밤이라 그런지 그녀가 뿜어내는 안광도 선명하다. 맑은 눈이다. 좋은 표정이다. 세상의 더러움을 모르고 고생도 겪어 보지 않은, 태어나서 아름답고 밝은 일만 겪으며 살아온 듯한 자의 해맑은 표정을 보고 있으니 문득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이 생각났다. 자신의 양 동생이자 약혼녀도 돌이킬 수 없는 광인의 길로 빠져들기 전에는 저런 표정이었다. 이슬처럼 투명하고 달빛처럼 어둠을 밝히는, 빛나는……. 가슴이 너무 뛰어 터져버릴 것 같아서 차마 단 한 번도 만지지 못했던 얼굴. 애증의 얼굴. “바라는 걸 말해 봐요.” “…….” “무엇이든 들어줄게요.” 헤그는 순식간에 불편한 표정으로 변하여 마리를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마리가 그의 한쪽 팔을 잡았다. 헤그는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단단한 보석 같은 눈동자가 흔들린다는 것을 마리는 눈치챘다.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는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다. ‘이 남자는 텅 빈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야! 누가 곁에서 훅하고 바람만 불어줘도 그쪽으로 쓰러지기 직전인 그런 남자라고!’ 마리는 헤그의 팔을 부드럽게 쓸었다. 가녀리고 기다란 손가락이 스치는 촉감은 부드럽고도 간지러웠다. 긴 시간 고통에 절었던 헤그의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대답해 봐요. 당신…… 나를 만지고 싶죠?” 헤그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사내들이 득시글대는 감옥에 있다 보면 당신 같은 여자에게 한 번쯤 손대고 싶은 법이지.” “그럼 손대요. 얼마든지.” “……!” 헤그는 자기가 말을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했다. 과연, 색광녀라 알려진 자답게 스스럼없다. “어차피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인 거 다 알아요. 자신을 스스로 죽이지 못해서 그 너구리를 죽이고 감옥에 제 발로 들어간 거겠죠? 그런 사람에게 그 어떤 명분도 중요하지 않다는 건 잘 알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조건, 참 괜찮잖아요? 황태자비와 똑같이 생긴 창녀 하룻밤 품고 그 창녀의 조건을 들어주는 것? 먹을 거로 치자면 최후의 만찬 같은 느낌도 들 테고…….” 헤그의 눈이 경멸의 빛을 띠며 가늘어졌다. “스스로 만찬이란 표현을 하다니. 자신감이 대단하군.” “몸은 더 대단하답니다.” 헤그는 숨이 막혔다. 그녀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서둘러 야울 궁 쪽으로 내려가며 겨우 호흡을 추슬렀다. 그런 그의 등에 가까이 다가간 마리가 악마처럼 속삭였다. “서로가 좋은 일을 하자고요. 지괴르 대령.” 마침 바람이 불었다. 밤바람은 마리의 몸에서 나는 달콤하고 상큼한 향기를 온 주위에 퍼지게 했다. 헤그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자기도 모르게 대답이 나왔다. “나쁘지 않지.” “역시나!” “아, 하룻밤 가지고는 안 될 거야. 쌓인 게 많아서 말이지.” 마리는 역시나 생각했던 대로의 대답이라고 생각하며 씩 웃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저 멀리 위에서, 그들이 탈주하는 것을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비오르틴은 편안한 수면에 효능이 있다는 차를 한 잔 마시며 담담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았다. 곁에 있는 자가 그에게 말했다. “저대로 도망가게 두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전하.” 황궁에 정체 모를 기운이 침입했다는 소리에 놀라서 마법사들에게 주시하라 일렀는데, 생각지도 못한 방문자를 보게 되었고 그 방문자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목격했다. 마리니시네. 그렇게 찾고 잡으려 해도 꼬리를 밟을 수 없었는데 이렇게 스스로 궁에 나타나 줄 줄이야. 한참 전부터 마리와 헤그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마리는 지괴르 대령에 관한 것도 잘 알고 성황파를 없애려는 야심도 가진 여자다. 또한, 무슨 능력을 갖췄는지 이런 궁에도 멋대로 침입하는 게 가능했다. 투명화라는 고급 마법을 쓰면서까지 말이다. 흥미로웠다. 그러잖아도 신성 정부가 눈엣가시였는데 어릴 적 추억의 그 말괄량이가 나타나 헤그에게 신성 정부를 망가뜨려 달라고 부탁하다니. 헤그가 성황을 제거하면 자신으로서야 좋고, 제거하는 데 실패한다 해도 자신은 관여하지 않았으니 잃을 게 없다. 그러니 앞으로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될 일이다.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어서 좋긴 한데 문제는 저 여자가 스스로 창녀를 자처했다는 것이다. 비오르틴은 문득 재판에서 할데바인 측이 주장하던 마리니시네라는 여자의 특징을 떠올렸다. 성적으로 난잡하게 군다는 것. 어디까지나 너구리가 일방적으로 내세우는 악담에 불과할 뿐이라고 여긴 적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게, 그게 아닌 모양이다. ‘확실히 그냥 시골 창녀로 남기엔 대담한 여자야.’ 비오르틴은 찻잔을 내려놓고 하늘을 보았다. 두 개나 떠오른 달 때문에 밤이 밝았다. 아주 쓸데없는 밝기다. 마리니시네가 궁에 침입한 것을 괜히 알아버렸나? 덜 비워진 찻잔이 탁! 하고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내려졌다. ***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는 야울 궁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가, 주인과 죄인 두 사람을 태워 서쪽으로 날았다. 한 시간 이상을 날아 도착한 곳은 아주 크고 조용한 저택이었다. 지붕과 외벽 모두가 남색 타일로 단순하고도 세련되게 만들어졌고 나무는 사시사철 똑같은 소나무뿐이다. 흔한 조각상 하나 없고 정원도 없다. 나쁜 말로 하면 황량하고 좋은 말로 하면 절제미가 보이는 이 집은 누가 보아도 군인의 집 같다. 그렇다. 이곳은 헤그의 저택이다. 하인들과 경비들은 전부 보이지 않았다. 헤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즉 그의 아버지가 마검이 된 후로 저택 관리를 거의 하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사람들이 모두 떠나갔던 것이다. 마리가 마리아에게 일러두었다. “기다리지 말고 당분간 느긋하게 황도 구경이나 하라고 해주렴.” 호위기사에게 전하는 말이었다. 마리아에게는 듣기 좀 이상한 말이었다. 저 죄인과 주인이 무슨 일을 하기에 기다리지 말라는 말을 들어야 할까. 주인의 종이 되어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계획에 관해 듣긴 했고 그래서 주인이 이 죄인을 만나 무엇을 논의할지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마리아는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곧 마리아는 왔던 길을 되돌아 하늘을 날았다. 몇 시간을 날아서 삼각 다리 플래티르콘의 날개 위에 착지했고, 그때부터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다리 아래 불법 건축물, 자기들의 거주지로 가야 할 때다. 예전에 그 거리에서 불량배들에게 당한 적이 있기에 몸을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 그러므로 남성용 후드와 로브는 필수다. 키가 커 보이려고 나막신도 신었다. 한낱 인간들 따위에 이런 사소한 것을 신경 써야 한다는 게 영 마뜩잖았다. 드래곤만큼은 아니지만 드래콘도 긍지 높은 생물이었는데 고작 인간을 조심해야 한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애당초 탓해야 할 게 있다면 인간에게 잡혀 굴종하게 된 숙명을 탓해야 하리라. 소용돌이 산에서 기사님과 만나지만 않았다면……. “하아.” 점점 인간으로서 내쉬는 한숨에 익숙해져 간다. 거리 입구에 들어서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보았다. 기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님은 비록 후드와 로브로 온몸을 가리고 있지만, 자신은 그런 기사님을 잘 알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기사님이 입고 있는 후드를 사다 준 이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두 개의 밝은 달빛 아래 기사님의 얼굴이 아주 잘 보였다. “이제 오는구나.”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너가 마리아에게 뭔가를 물으려다가 그만두고 걸음을 나란히 했다. 마리아는 기사님이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혼자 올 거라고 생각했더니 역시나군.” 뜬금없는 말에 마리아는 하이너를 올려다보았다. 하이너는 앞을 보면서 묵묵히 말을 이었다. “참 겁도 없지. 이런 밤에 돌아다니면 질 나쁜 녀석들에게 시비가 걸릴 수도 있어. 너는 그렇게 남자의 후드나 로브를 입고 둘러도 여자애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다. 다음부터는 투명화해서 다니는 게 좋아. 비록 그림자가 걸릴 수도 있다는 게 문제지만 어쨌든 편하니까.” 마리는 그제야 하이너가 아가씨가 아닌 자신을 걱정하여 마중 나왔단 걸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마리아는 기사님이 아가씨에 관한 것을 물을 줄 알았으나 정작 기사님은 아가씨에 관해 전혀 묻지 않는다. 아마도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거니 하고 묻지 않는 듯했다. 오늘따라 거리의 사람들이 조용하다. 침묵이 너무 무겁다 보니 밤하늘에 뜬 두 개의 달빛이 마치 소리라도 되는 듯 시끄럽게 느껴졌다. 자신이야 인간의 말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늘 조용하지만, 기사님도 조용한 게 이상하다. 기사님은 외모와 달리 말이 적은 분이 아니시다. 적어도 자기가 아는 기사님은, 언제나 아가씨와 투덜거리셨고 또 그것을 즐기시는 분이었다. *** 마리아와 하이너는 거처에 돌아왔다. 바깥에서도 어색하던 침묵이 이런 한정된 공간에서 더더욱 어색하게 느껴졌다. 물론 어디까지나 마리아의 생각일 뿐이었다. 마리아는 지금 소년 루돌프의 빈자리를 아주 크게 느꼈다. 루돌프가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런 때 곁에 있다면 이 어색함을 조금이나마 없앨 수야 있었겠지. ‘잘 지내고 있을까?’ 마리아는 청소할 것도 없는 방을 괜히 청소하기 시작했다. 하이너도 씻으러 욕실에 들어갔다. 이 건물은 빈자들에게 머물 곳을 제공하고 월세를 받으려고 만들었기 때문에 시설이 좋지 않다. 그러므로 다른 건물들과 달리 온수 시설 같은 것은 기대해선 안 된다. 욕실에선 녹이 슨 더러운 물만 나오는 편이었는데, 하이너는 자신의 헤츨링 마법을 이용하여 그 물을 깨끗한 온수로 만들어 씻는 데 이용했다. 한참 후 씻고 나온 하이너는 마리아에게 말했다. “물 준비 해놓았다. 씻는 데 쓰려무나.” 그러나 자체적으로 정화 마법이 가능한 마리아는 씻지 않아도 된다. 마리아는 괜찮다는 의미로 조용히 웃어 보였다. 얼마 후, 마리아는 하이너가 외출하려고 외투를 다시 입는 것을 보았다. 하이너는 후드가 아닌 멋진 모자를 쓰기도 했다. 그 순간 마리아는 그가 아가씨를 마중 나갈 거라고 예상했다. 마리아는 아가씨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기다리지 말고 당분간 느긋하게 황도 구경이나 하라고 해주렴.’ 마리아는 하이너의 뒤를 바짝 붙었다. 그를 잡아야 했다. 아가씨는 당분간 못 올지도 모른다고. 그 말을 기사님께 전해야 한다. 그래야 기사님이 헛된 걸음을 하지 않으시고, 그래야 헛된 실망을 하지 않으시……. 마리아는 하이너의 옷깃을 잡고 돌려세웠다. ============================ 작품 후기 ============================ 선, 추, 코 모두 감사합니다! 00078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자주 쓰지 않는 성대에서 어설픈 인간의 말이 나왔다. “아, 아가씨께서, 기다리지 말고 당분간, 느긋하게 황도 구경, 하시라고,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만.” 이상하다. 인간의 말을 거의 쓰지 않았다고는 하나, 예전에는 그럭저럭 말이 잘 나온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자꾸만 더듬거렸다. 어쩌면 기사님 바로 앞에서 하는 말이라 그런지 도 몰랐다. 그런데 그런 마리아의 모습이 퍽 귀여운지 하이너가 웃었다. 마리아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아가씨를 구, 굳이 마중 나가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 “마중 나가려는 게 아니다.” 마리아는 그러면 어째서 기사님이 나가려 하는지 궁금했다. 사실 하이너는 거처에서 마리아와 단둘이 있는 조용한 시간이 머쓱했다. 그런 참에 마침 필요한 물건이 생각나기도 하여, 이런 밤이지만 사러 가려고 외출 준비를 했다. 혼자 산책도 할 겸 조용히 갔다 오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이 작은 드래콘 아가씨의 표정이 좀 쓸쓸해 보인다. 하이너는 마리아에게 물어보았다. “뭘 좀 사러 가려는 참인데, 같이 갈 텐가?” 몇 초간 망설이던 마리아는 입가가 살짝 올라가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줍고 설레는 표정이라서 하이너는 잠시 고민했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함께 데려가지 않으면 텅 빈 방에서 혼자 있을 마리아가 신경 쓰일 것이다. 게다가 위험할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가 갑자기 쳐들어오면 이 소녀는 원래의 야성을 드러내 드래콘으로 변신하여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을 택하기보다, 그저 얌전히 인간체로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에.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그녀가 단 한 번도 누군가와 함께 어떤 목적을 가지고 외출한 적이 없었기에, 하이너는 그녀가 외출 시에 어떤 모습을 할지 기대됐다. 또한, 이번 외출로써 자신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도 괜찮겠지. 하이너는 먼저 앞서며 중얼거렸다. “가자. 너와는 산책을 해본 적이 없구나.” 두 사람은 말없이 거리를 걸었다. 두 개의 달이 뜬 날이라 그런지 밤거리가 밝고 사람도 다른 밤보다 많아서 왁자지껄하다. 질 나쁜 거리답게 수상쩍어 보이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흘긋흘긋 기분 나쁜 시선을 던졌지만, 하이너의 모습 자체가 든든한 호위기사 역할을 하다 보니 별난 수작을 거는 이들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하이너의 드래곤 기운에 그들이 무의식적인 공포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초보 드래곤의 기운이란 그런 것이다. 제아무리 기운을 숨긴다 하더라도 솜씨가 어설프니 조금씩 드러나게 마련. 그리고 그 기운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생물은 바로 드래콘이다. 유니콘과 드래곤의 특징이 반반 섞인 이 생물이야말로 누구보다 드래곤의 기운을 잘 감지한다. 두 사람이 길모퉁이를 돌아설 때, 하이너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마리아.” “……?” “맨 처음 너를 봤을 때, 굉장하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말에 마리아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하이너는 거리 먼 곳에 시선을 고정하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아가씨께서는 하얀 드래콘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지. 하얀 드래콘인 너는 기적처럼 내게 나타나 쉽게 잡혀주었어. 마치 신이 날 위해 널 거기(소용돌이 산)에 둔 것 같았다. 아, 혹시 이런 말이 기분 나쁘게 들린다면 사과하마. 마치 널 마냥 종속물인 거처럼 말한 것이 미안하구나. 나는 사냥 때만 너를 종속물로 보았지, 그 이후엔 아니다. 너를 잡았지만, 완전한 종속물로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리아는 그때를 아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지난가을 어느 날이었다. 어미의 둥지에서 떠날 때가 되어 소용돌이 산을 어슬렁거리는데 우연히 한 인간, 즉 지금의 기사님을 만났다. 아니, 기사님이 자신에게 나타났다. 기사님은 언뜻 보기에는 체격 건장한 남자였으나 어딘가 달랐다. 그래. 그때부터 기사님에게서 드래곤의 기운을 미미하게나마 느꼈던 건지도 모르겠다. 기사님은 맹수보다 더 맹수 같은 도전적인 눈빛을 빛내며 사냥의 의지를 전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자신은 기사님에게 마법 공격을 하려 했으나, 이미 기사님의 몸에는 방어 스크롤이 발동되어 있었다. 기사님은 그뿐만 아니라 스크롤을 하나 더 써서 드래콘을 무력하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금속(플래티르콘)과 은이 합성된 검으로 공격해왔다. 짧은 시간에 일어난 공격에 난생처음 당황한 자신은 그대로 굴종의 인을 기사님께 넘겨야만 했다. 처음엔 적응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굴종해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굴종해야 할 상대가 그렇게 허무하게 생겨버린 것에 자존심이 상했고, 자신이 드래콘으로서 하찮은 부류인지 모르겠다는 자괴의 탄식도 했다. 그렇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력 생물 드래콘과 일개 인간의 대결에서 인간이 이겼고, 그 이긴 자를 주인으로 삼는다는 것. 주인에 관해 기대심이 생겼다. 자신을 이긴 자는 다른 인간들과 달리 종속물한테 거칠게 대하지 않았고 자기가 가진 드래곤의 힘을 과시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래서 곁에 두고 봐도 괜찮을 거로 생각했는데, 결국 진짜 주인은 기사님이 아니라 ‘마리’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아가씨가 되었고……. 마리아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잠시 상념에 젖었던 하이너가 이런 말을 전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런 생각도 했다. 마르틴이 날 위해 환생해준 건 아닐까, 하는.” 마리아는 최초로 먼저 물어보았다. “마르틴이… 누구예요?” “내 동생이지. 유일한 가족이었는데 몇 년 전에 병을 앓다가 떠나버렸다. 하늘로 말이지.” “아.” 드래콘에게 병이란 개념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웬만한 병이나 상처는 스스로 치료 가능하기 때문에 애당초 병이란 개념이 생길 수 없다. 비록 그런 드래콘이긴 하지만, 마리아는 루돌프를 통해 병과 치료의 개념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병을 앓다가 죽었다는 마르틴이라는 사람이 가여웠다. 그녀는 병에 동생을 잃어야만 했던 하이너를 측은한 눈으로 보았다. 기사님이 상심한 것은 아닌가 걱정도 됐다. “아주 버릇없는 녀석이지. 형보다 먼저 가다니. 어쨌든 그 애가 살아있었다면 아마 네 또래였을 거다. 그래서 너를 볼 때, 그리고 너보다 더 어린 루돌프를 볼 때, 마르틴 생각을 많이 했지.” “…….” “난 신을 믿진 않는다. 하지만 운명 같은 것은 믿는 편이지. 동생이 사라진 내게 너희가 나타난 것은…… 세상이 내게 동생을 준다는 의미였다. 지금도 그러하고.” 하이너는 예전 마르틴에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루돌프에게 그랬던 것처럼, 마리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주 다정한 오빠나 된 듯 쓰다듬어주었다. 마리아는 잠시 얼굴을 붉혔으나 그것은 기사님의 손길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왠지 모를 발끈하는 기분을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동생 같은 존재로 보는 걸 다 알고 있다고요!’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아마도 목소리에서 원망하는 기분이 드러나고 말 테지. 하지만 결국, 그런 원망도 배부른 것이 아닌가? 종속물 주제에 노예 취급을 받지 않고 동생 취급을 받는 것만 해도 당연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마리아는 노력했다. “그만큼 너를 귀여워하고 있단 말이다. 마리아.” 어디까지나 동생으로서. 마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썹이 토라진 사람처럼 일그러지고 있다는 걸 하이너는 알지 못했다. 한참 후, 하이너는 가까운 곳에 있는 어느 낡은 옷가게를 가리켰다. 그곳은 도시로 올라온 빈곤한 여행자들에게 간단한 외투나 장화 따위의 물건들을 파는 상점이다. “저기로 들어가자.” 가게엔 하이너와 마리아 외에도 손님이 대여섯 명은 더 있었다. 언제나 붐비는 거리답게 이런 시간에도 손님이 많다. 서글서글한 청년 점원이 가게를 보면서 손님들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청년은 마리아의 예쁘장한 얼굴을 보자마자 놀라며 다가왔다. “와우! 이런 거리에서 보기 힘든 아름다운 꼬마 숙녀분이군요! 잘생긴 오라버니와 무얼 사러 왔나….” “오라버니가 아니야!” 점원의 말을 갑작스럽게 끊은 이는 마리아였다. 하이너는 놀라고 말았다. 마리아가 점원에게 호통치듯 외쳤다. “이분은 내 오라버니가 아니라, 내, 내 주인님이시다!” 마리아가 지금처럼 제 의견을 단 한 번도 강하게 주장한 적이 없거니와 이토록 발끈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었다. 순간, 점원 청년과 가게 안의 사람들은 소녀의 고운 외모와 다른 거친 성깔에 놀랐고 소녀가 말하는 ‘주인’이라는 말에 또 놀랐다. ‘주인님’이라는 말을 쓰는 이들은 대개 귀족의 노예들 아니던가? 이런 위험한 거리에 귀족이 스스로 발을 들일 이유가 없었다. 마리아의 말 한마디로 하이너는 자그마치 무려 ‘노예’를 부릴 정도로 높은 신분이라는 오해를 사고 있었다. 이렇게 빈곤하고 위험한 곳에서 높은 신분임을 내세우는 것은 여러모로 좋을 게 없다. 게다가 진짜 높은 신분도 아닌데 말이다. 하이너는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마리아를 정신 이상한 아이 보듯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네 주인님이 대관절 어디 있다고? 자꾸 그런 헛소리를 하면 혼을 내주겠다. 그나저나 여기 이 아가씨가 쓸 만한 옷을 찾고 있는데.” 점원은 금세 친절하게 말했다. “어떤 옷을 원하시죠?” “가능하면 남자애로 보이게 하는 옷이 필요합니다만.” “아, 이리 따라오시죠.” 마리아는 그제야 기사님이 사러 온 물건이 무엇인 줄 알았다. 여자 복장을 하는 드래콘이 줄곧 신경 쓰여 위험에 휘말리지 않도록 남자애 옷을 사주려 하는 것이다. 기사님이 그토록 자기를 생각해주는 것은 고맙긴 하지만, 마리아는 어쩐지 남자애 옷을 입는 것이 마뜩잖았다. 그러니까 기사님에게, 남자애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 황도 로귀하르트. 지괴르 저택. 밝고 따스해 보이는 두 개의 달빛도 날을 잔뜩 세운 침엽수 무리 사이에 내려앉으면 차갑게 보인다. 저택을 둘러싼 을씨년스러운 숲 사이로 바람이 음산하게 불었다. 헤그가 도주했다는 것이 이미 궁에 알려졌을 텐데도, 저택은 바람 소리 외엔 고요하기만 하다. 아마도 황태자가 손을 써서 도주 사건을 숨기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헤그는 생각했다. 야울 궁에서 그런 짓을 할 만한 이는 그 친구밖에 없으니까. 뭐, 아무래도 좋다. 잡히면 또 잡히는 거고, 잡히지 않는다면 또 그대로 지내면 그만이다. 마리가 침실에 들어와선 저택을 평했다. “너무 고요해서 유령이 사는 곳 같아요.” 헤그는 새하얀 면포가 덮인 침대에서 면포를 치워버리고 누웠다. “당신도 눕지그래.” “어머, 어째서요?” “스스로 내건 조건이 있지 않나?” 마리는 손바닥 뒤집듯 다른 태도를 했다. “네. 그러기로 했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성황을 죽이고 나서의 일이랍니다. 지금 이 장소는 남녀가 그런 일을 하기에 그리 안정된 장소가 아니기도 하고요. 언제 궁의 병사가 들이닥칠지도 모르고, 게다가 할데바인의 무리가…….” “아. 그런가?” 헤그는 능청스럽게 되물으며 힘없이 웃었다. 자기도 딱히 침대 위에서 뒹굴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사괴탄과 닮은 여자를 봐서 기분이 이상하긴 하지만, 긴 복도를 걸어오면서 그 이상하고 야릇한 기분이 어느샌가 쉬고 싶다는 생각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이미 처음부터 이 뻔뻔한 아가씨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기도 했다. 마리는 헤그가 어떤 시선으로 보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의 전략을 읊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괴르 대령이라는 남자를 잘 꿰뚫고 있었다. 제멋대로 구는 군인이긴 했으나 부하들이 위험에 휘말리는 것은 늘 꺼리던 자다. 아마 이번 성황파 살해 계획에 부하들이 직접 얽히는 것을 원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성황파를 제거하려면 그에게 지원 병력은 필요하다. 마리는 그 지원 병력에 관해 말했다. “일은 내일 아침이 좋을 듯해요. 신성군대 훈련이 있다고 하더군요. 당신의 부하들은 신성군의 시선을 돌릴 아주 자그마한 소란만 일으키면 돼요. 부하들 기체가 실수로 건물 어디에 스쳤다거나, 장비 문제로 폭발했다거나 그런 소란 말이죠. 그렇게 되면 당신 부하들이 이번 계획에 직접 뛰어드는 게 아니니까 괜찮겠죠? 신성군 시선이 분산되는 사이 당신은 당신의 기갑체로 성황파가 있는 곳에….” “공격을 하면 된다?” “그렇죠!” 헤그는 작전을 지시하는 마리가 마치 그 어떤 군인보다 필사적으로 보여 재미있었다. 신성군대 훈련 날짜를 아는 것이야 군사정보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자라면 쉽게 알 수 있고, 부하들이 신성군의 시선을 돌리기도 그다지 어렵진 않다. 하지만 뭐? 당신은 당신의 기갑체로 성황파가 있는 곳에 공격하면 된다고? 이 아가씨는 그 어마어마한 일이 무슨 그림 그리듯이 뚝딱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헤그는 한심한 사람에겐 화도 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며 설명했다. “성황 무리에겐 언제나 신의 가호(신성 방어력을 말함)가 따르지. 제아무리 마력기갑체라 해도 그것을 파괴하는 덴 무리가 있어.” “물론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 아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지.” “아니요! 나는 그렇게 대책 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다 생각이 있답니다! 짠!” 마리는 한 손을 자신의 앙가슴 깊숙이 넣더니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자그마한 장식이어서 자세히 보기가 힘들었다. 로젠플라드 성물이 투명한 유리에 감싸여 있다. 마리가 자신 있게 건넬 만한 지원 ‘병력’이다. 헤그는 그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이건…….” 마력기갑체 엔진부에 들어가는 부속물. 성력 동화 매개체. 오직 신성군 조종사만 정식 훈련을 받은 뒤에 가질 수 있는 물건이다. 본래 신성군 출신이 아닌 헤그는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헤그는 이 아가씨가 어째서 저걸 손에 넣을 수 있었는지 몹시 궁금했다. 설마하니, 제 동생인 황태자비를 통해 얻은 건가? 헤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물건을 받아들었다. “어떻게 구한 거지?” “제가 한때 신녀 지망생인 적 있었거든요. 거기 사제님이 절 예쁘게 봐주셔서 받은 선물이죠. 후후!” 거짓말이다. 마리는 사제를 통해 성물체를 구한 것은 맞지만, 거기에 사제의 의사는 없었다. 즉 그녀는 도둑질을 한 것이다. 노인 사제는 소싯적 신성 기갑체를 다루던 신성군에 속해 있었고, 출신별 파벌 싸움이 어마어마한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데 회의를 느껴 퇴역했다. 보통 그럴 시엔 상관이 신성군인의 성물체를 회수해야 하지만, 야망 없는 군인의 성물체가 어디로 가든 그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노인 사제 역시 성물체를 아무런 의미 없이 줄곧 가지고 살아왔다. 훗날 륀체르가 정보 수집처로 쓸 겸 만들어 둔 신당에서 노인 사제는 관리일을 하기 시작했고, 성물체는 그날부터 신당 구석에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었다. 마리는 딱히 관심 두는 사람이 없는 그것을 앞날에 대비해 미리 챙겨두었고, 지금 이렇게 헤그에게 건넬 수 있었다. 이 성물체가 마력기갑체 엔진부에 들어가면 신성 보호막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조종사의 마력이 성력으로 변환되어 헤그가 그 점을 이용해 성황파에 막대한 공격력을 행사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즉, 마리는 모든 준비를 다 해왔고 헤그만 움직여주면 될 일이다. “어쨌든 이것만 있으면 당신은 무적이라고요! 절대 질 일 없음!” 헤그는 마리에게 놀라기보단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아주 근원적인……. “당신 목적이 뭔가?” 대뜸 나온 물음에 마리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침대에서 일어난 헤그가 마리에게 점점 다가가며 취조하듯 물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일개 시골 출신 아가씨가 성황을 제거하려 하고….” “어머! 말하지 않았나요?” 마리는 분명 세계 정복에 관해 말했을 텐데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헤그가 답답했다. 어째서 남자들이란 여자의 말을 그냥 흘려듣지? “말했다고?” “뭐, 잊었으면 다시 말해주죠! 이젠 잊지 말아야 할 거예요! 난 대륙 정복이 소원이랍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079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 범죄자가 탈주한 사건이 있어도 궁은 겨울새 울음소리만 감돌 뿐 아무런 소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헤그와 마리의 대화를 들은 비오르틴이 그들을 얼마간 지켜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수면제 삼아서 독한 술 한 잔을 마신 후 침실에 들었던 비오르틴은 몇 시간째 뒤척이기만 했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할데바인 잔존 세력을 없애는 것, 헤그 탈주에 관한 타 세력의 공격에 마땅한 변명을 생각하는 것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더욱 심란하게 하는 한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마리니시네였다. 헤그와 함께 감옥을 빠져나가던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궁 마법사들 덕분에 마리의 모습과 목소리를 마치 가까이에서 접하는 듯 생생히 보았고 그 강렬한 이미지는 수면제로 마신 독주의 효과를 무력하게 했다. 그 여자, 마리는 궁이라는 위험한 곳에서도 전혀 두려워하거나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궁을 마치 제 집 안방처럼 뛰어다녔고, 헤그에게 친한 친구 대하듯 굴면서 거사를 논했다. 렌키스의 달빛보다 더 당당하고, 더 강렬한 그녀. 그녀를 향한 이 갈증을 언제쯤 깨끗하게 해결하고 편히 잠들 수 있을까. 아내와 똑같이 생겼지만, 아내가 아닌 여자. 아내보다…… 더 좋은 여자. 더 좋은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게다. 목소리, 성격, 웃는 표정,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점은 바로, 어린 시절의 추억. 그 추억 때문에 로테아르카는 절대로 마리니시네를 이길 수 없고, 없을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제국 황태자는 무작위 추첨으로 뽑은 영지에서 며칠 간 머무르는 관례가 있었다. 이른바 제국 순례. 무작위 추첨이라고는 하지만, 무작위 지침이 지켜진 적은 사실은 없었다. 역대 황태자들은 대부분 황도와 가깝고도 각종 기반 시설이 발달한 영지가 순례 장소로 추첨되게끔 조작하곤 했다. 황도에 가까운 곳에서 순례하는 편이 훨씬 편하고 위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은 달랐다. 황궁과 황도 생활에 일찍부터 질려버렸고, 시골 생활에 환상이 있어서 황도와 가까운 영지에서 순례 일정을 치르기 싫었다. 하여 일부러 추첨과정을 조작, 변방의 소 영지 오를린이 나오도록 했고, 그 조작이 들켜 아버지와 마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오를린 행에 돌입했다. 처음 갔을 때 혼자서 멋대로 시종들을 따돌리고 어느 위험한 산(소용돌이 산)을 겁도 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차원의 균열에서 나온 입이 뾰족한 생물을 보고 놀라 울고 말았다. 그 생물은 기어다니는 개미들을 모조리 먹어치워 댔다. 말로만 듣던 차원의 균열을 직접 보고, 이세계의 생물을 마주한 공포는 상상을 초월했다. 과거에 이세계에서 온 생물들이 인간을 공격했다는 글귀 때문인지 더욱 공포스러웠다. 바로 그때 말괄량이가 나타나 주었다. 금발이 눈부시고 뺨이 발그레하며 보조개가 예쁘게 패 들어간 그 작은 여자애는 ‘도시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약해빠졌다!’고 말하며 그 생물을 능숙히 다루어 숲 깊숙한 곳으로 보내버렸다. 놀라운 첫인상이었다. 궁에서 허영에 찌든 여자, 약한 척하는 여자, 거짓된 웃음만 지을 줄 아는 간교한 여자들을 보던 자신에게 그런 씩씩한 시골 소녀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함께 이틀을 놀았다. 꽃이 핀 산과 들판을 뛰어다니며 황도와 오를린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고,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드래콘을 잡겠다고 작은 모험을 시도하기도 했다. 난생처음으로 강한 척을 해보겠다고 목검으로 죄 없는 짐승을 쫓아다녔다. 난생처음으로 마법을 할 줄 안다며 허세를 부렸다. 난생처음으로 꽃 왕관을 만들어서 여자애 머리에 올려준 적도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그 여자애한테 비싼 장신구를 빼앗긴 적도 물론. 「내가 빼앗는 게 아니라 잠시 빌려가는 거야. 알겠지? 너희 부모님한테 이르면 안 된다!」 그때의 기억은 잊을 만하면 다시 떠올라 자신을 웃음 짓게 했다. 말괄량이에다 천방지축, 날건달 같은 그녀와 함께 한 시간이 비록 흐릿한 어린 때일지라도 인생에서 가장 활력이 넘치던 시절이라 자신할 수 있다. 그녀와 헤어질 땐 얼마나 아쉬웠던가. 아쉬움에 저도 모르게 선언해버렸다. 「너와 결혼할 거야.」 결혼이 그렇게 쉽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째서?」 「너와 결혼해야만 인생이 지루하지 않을 것 같거든.」 권력 싸움으로 지루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대답했다. 「흐음. 글쎄? 나는 눈이 아주 높아서 너랑 결혼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내 남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겁쟁이여선 안 돼! 비올 너는 겁이 너무 많아!」 「그래도 반드시 할 거야! 너와 나는 결혼을 하게 되고 말 거라고!」 고집을 부렸다. 고집을 부리고 다짐하면 훗날 정말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헤헤. 비올. 너 참 되게 긍정적이구나.」 「이, 인, 인간에게 그, 긍정을 빼면 뭐가 남지?」 난생처음으로 뭔가 멋진 말을 뱉은 것 같았다. 말해놓고도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혔는데, 정작 그 말을 들어주던 그녀는 너무나 진지한 표정이었다. 한참 후에 그녀가 지은 미소는 너무나 눈부셨다. 마치 사월의 따사로운 햇살처럼. 「그 말 멋있네. 비올. 좋아.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엔 동의해. 너는 앞으로도 계속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면 좋겠어!」 불꽃처럼 번지던 꿈도 잠시, 그런 추억 조각은 안개꽃송이처럼 점점이 줄어들고 안개처럼 아스라해졌다. 다시 황도로 올라가 황태자의 삶을 살아야 했기에.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몇 년간의 세월 동안 오를린에서의 추억은 하나의 색 바랜 그림이 되어버렸고, 결국에는 소멸하는 듯했다. 그렇게 황태자 간택 연회 준비 시간을 맞이했다. 단지 너구리(할데바인)의 딸을 피하고자 별다른 기대도 없이 신청한 각 영지 여인들의 초상화에서, 맙소사! 말괄량이를 보았다. 어릴 적 소용돌이 산에서 만났던 그 소녀를! 자신이 결혼을 약속한 그 소녀가 분명했다. 성격, 외모 모든 게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내 반려가 될 것이다. 그녀만이 내 반려가 되고 말리라! 아무런 뒷배가 없는 그녀야말로 제 반려가 되기 적당했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기회라 생각했다. 그런데 결국, 그 기회는 신의 속임수일 뿐이었다. 어릴 적 만났던 말괄량이 소녀가 아니라 소녀의 동생이 반려가 되어버리다니. 그리고 그 동생이 지금 황손까지 가졌다. 불러오는 배를 볼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다. 신에게 물을 수 있다면, 묻고 싶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느냐고. “젠장!” 아무리 자려고 노력해도 상념에만 젖어갈 뿐. 헤그와 함께 궁을 떠나는 그녀, 마리의 뒷모습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녀가 헤그에게 하던 말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남자로서 대답해 봐요. 당신…… 나를 만지고 싶죠?」 「그럼 손대요. 얼마든지.」 「몸은 더 대단하답니다.」 온몸에 잔뜩 힘이 들어가고 알 수 없는 불쾌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 할데바인이 재판에서 지고 살해당한 후에, 할데바인의 조카인 황후도 그 입지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궁부에서 휘두를 수 있던 권한들이 일부 축소된 것이다. 권력은 그런 식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법이었고, 그 틈새에서 황태자는 제 아내에게 내궁부의 권한을 조금씩 나눠주는 데 신경 썼다. 그것은 당연히 아내를 위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입지를 위한 것이다. 내궁부의 권한 이동 덕분에 로테는 자기 마음에 드는 시녀를 직접 고를 수 있었다. 새로 온 시녀들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들 중 친 할데바인 영지의 시녀는 단 한 명도 없다. 오를린 출신의 시녀 두 명, 황태자 관할지 야울 출신의 시녀 한 명, 그리고 중립 바너의 시녀 한 명, 이렇게 총 네 명의 시녀들은 예전 시녀와는 다르게 건방지지도 않고 딱딱하지도 않으며 황도에서 외로움을 많이 타는 로테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친구가 되었다. 지금도 그녀들은 로테의 주위에 모여 수를 놓고, 황궁 예술가들에 관해 수다를 떠는 등 로테를 지루하지 않게 해주고 있었다. 특히나 수다의 꽃은 바너 출신 시녀의 궁정 남자들에 관한 소문이었다. “지휘자로 들어온 포반트 말이야. 지금은 궁내 여자들에게 인기가 최고지만, 원래는 뭐였는지 알아?” 그러자 로테의 머리를 빗질해주던 오를린 출신 시녀가 물었다. “뭔데? 그 사람, 진짜 잘 생겼던데.” “소싯적에 제국 음악원에 갈 학비를 모으기 위해 바너의 뒷골목에서…….” 로테는 격식 투성인 궁에서 잘 들을 수 없는 어두운 바닥의 말에 저절로 귀가 기울여졌다. 시골에서 얌전하게 살다가 황도로 온 로테에겐 세상 모든 일이 흥미로웠다. 그녀가 시녀들의 수다에 섞여들어 망측스러워하고 적당히 대꾸도 하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침소에 찾아왔다. “야울을 지키는 왕이시자 로젠플라드의 수호자 그리고 제국의 황태자이신….” 시녀들은 하던 것을 멈추고 황태자의 앞에서 인사를 하려 했다. 그러나 비오르틴은 한 손을 들어 그들 모두에게 나가란 표시를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 기분이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침의 그대로 온 것을 봐도 뭔가 심상치 않았다. 시녀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둘 씩 침소에서 떠났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방문과 심상찮은 표정에 로테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시녀들이 완전히 나갔을 때, 비오르틴은 아내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시선이 아내를 향해 있어도 아내를 보는 게 아니었다. 일그러진 눈썹은 누군가를 원망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로테는 텅 빈 황무지에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짐승 같은 그의 시선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껴 뒷걸음질 치려 했다. 그러자 비오르틴의 한 손이 뻗어 그녀에게 닿았다. “전하?” 그녀의 하늘하늘한 침의가 인형 옷 벗기듯 벗겼다. “전하!” 비오르틴은 반쯤 흘러내린 침의를 다시 입으려는 로테의 몸을 사납게 돌렸다. 그리고 그녀를 천천히 벽 쪽으로 밀고 갔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는, 오직 욕정에 의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로테는 그의 힘을 이길 수 없었고, 이기려는 시도도 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침소를 찾은 남편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안는 것, 그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아, 아!” 제대로 젖지 않은 곳에 잔뜩 발기한 것이 들어가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로테는 이런 일을 아주 오랜만에 해서 마치 처음 하던 때처럼 쓰라렸다. 비오르틴은 메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길로 그녀의 가슴과 아래를 대충 만지더니 전혀 젖지 않자 포기하고 그녀를 돌려세웠다. “뭐지, 그 표정은?” 입으로라도 시키려 했더니 이 여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그는 잠시 그대로 정지한 듯 멈춰 있었다. “전하, 어째서….” “어째서라니?” 어째서 이리도 막 대하듯 할 수 있느냐고 원망하는 눈빛에다 대고 비오르틴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말했다. “아내를 안는 것에 뭐 잘못되었나?” 그의 손은 로테의 어깨를 천천히, 그리고 강하게 짓눌렀다. 로테는 주저앉듯 않았고, 그의 성기를 입에 물어야 했다. 그녀는 도구처럼 다루어졌다. 이런 일에 익숙지도 않은 그녀의 입이 무자비하게 괴롭혀졌고, 한참 후 비오르틴은 절정에 떨었다. “삼켜.” 로테는 처음으로 남성의 욕구가 ‘배설’되는 것을 보고, 겪었다. 목이 메었다. 비오르틴은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곧 아내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울음소리가 역겹게 느껴졌다. “이리와.” 로테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정신도 없이 비틀거리며 비오르틴에게로 걸어갔다. 그녀가 침대 가까이 와 머뭇거리자 비오르틴은 명령했다. “내 몸 위로 올라타.” 로테는 도무지 남편이란 사람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그에게 반항이란 것을 해본 적 없는 그녀는 실에 묶인 인형처럼 너덜너덜한 몸짓으로 그의 배 위에 올라탔다. “힘을 빼.” “……?” “편히 앉으란 말이다.” 로테는 주저하다가 비오르틴의 눈빛에 지레 겁을 먹고 시키는 대로 했다. 곧 비오르틴은 그녀의 무게는 완전히 느낄 수 있었다. 단지 그녀의 무게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배에 들어선 아이의 무게도 동시에 느꼈다. 임신한 여자의 무게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가벼웠는데도,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무겁군.” 그의 한 손이 서서히 올라가 그녀의 배를 만졌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가 있었다. 짓무른 꽃잎 같은 얼굴. 언제나 저런 얼굴. 비오르틴은 신물이 났다. “어째서 너여야 했지? 어째서…… 네가….” 한참 후에야 로테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 어째서 자기여야 했느냐, 라니. 그럼 언니가 황태자비 후보로 왔어야 한단 말인가? 한 군데 처박혀서 인형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면,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는 길을 택할 그 여자를? 그 바람 같은 여자를? “어째서 네가, 내 아이를 배고 있는 건가.” “…….”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그런 표정을 짓는 것밖에 모르는 네가, 어째서…….” 로테는 듣다못해 물었다. “싫으십니까?” “싫다.” 로테의 눈물 줄기는 더욱 굵어져 아래로 흘러내렸다. 나중에는 아예 비오르틴의 옷을 적실 정도였다. 비오르틴은 이 여자가 싫었다. 궁에 들어온 야심만큼이나 강하지도 않으면서, 몸 하나 믿고 궁에 들어온 다른 여자들처럼 자존심을 버릴 줄 아는 것도 아니면서, 배 속의 생명 하나 쥐고 끈질기게 궁 생활을 버텨내는 것이 무척이나 성가셨다. 이런 감정이 언제부터였을까. 그래. 이 여자의 언니, 쌍둥이 언니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인지도 모르겠다. “싫으시면서 어째서 저를 찾으신 겁니까.” “그럼 누굴 찾아야 하지?” “궁에 여자는 많습니다.” 로테가 그의 몸을 벗어나려 하자, 비오르틴은 그녀가 그러지 못하게 꽉 잡고 경멸의 미소를 흘렸다. 정말이지 머저리 같은 여자다. 다른 여자를 찾으려 했다면 진즉 찾았겠지. 이쪽은 어디까지나 황태자비의 체면을 생각해서 이곳으로 와 배설한 것일 뿐. 그래. 설사 다른 여자를 안는다고 하자. 황태자에게 안긴 여자들은 그 순간부터 한 마리의 뱀이 되고 만다. 그 뱀들이 온갖 공격을 퍼부어도, 저 여자는 언제나 저런 표정을 하겠지? 언제나 저런 울 것 같은, 혹은 울음 범벅의 표정으로 지낼 머저리 같은 여자. 스스로는 절대 뭔갈 시도하지 못하는 여자. “늘 그렇게 피해자의 표정을 짓는군.” “…….” “늘 그렇게 피해자가 되려 하고.” “전하.” “역겹다. 진짜 피해자들은 따로 있고 서로 만나지도 못하는데 어째서 너만 늘 그런 얼굴인지.” 로테는 황태자가 말하는 ‘피해자들’이 황태자 본인과 제 언니 마리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황태자의 뺨이 아주 세게 후려쳐졌다. 황태자는 로테의 손찌검에 가느다란 웃음을 지었다. “그…… 시, 실수… 인, 전하, 저는…….” 로테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면서 놀라다가, 순식간에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실수, 실수였습니다. 피, 피해자라면, 언니……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제 언니는 피해자가 아닙니다. 제 언니는… 황태자비가 될 기회를 놓쳤다고….” “놓친 게 아니라 너에게 빼앗긴 거겠지.” “……놓친 것이든 빼앗긴 것이든, 제 언니는 이 궁의 안주인이 되지 못했다고 그것을 피해로 여길 사람은 아닙니다.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언니를 원망해야 하는 이때, 어째서 언니를 감싸주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황태자 이 나쁜 놈! 00080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아니, 이것은 언니를 감싸는 게 아니라 황태자의 오해를 비웃다가 저절로 나온 말인지도 모른다. 언니는 정말로 궁 생활 따위에 미련이 없다. 언니는 비록 황도와 같은 발달한 도시에 대한 동경, 황족, 귀족들의 물질적으로 부유한 삶을 부러워하는 마음은 있어도, 그들이 휘두르는 권력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불완전한 것이라 하며 전혀 부러워하지 않았다. 어디 그것뿐인가? 기억이 난다. 자신이 어릴 적 황후가 될 거라는 말을 하면, 그걸 듣고 있던 언니는 언제나 그 야심을 ‘멍청이의 눈먼 계획’이라 비하했다. 「황후? 단지 몸이 조금 편할 뿐이야. 예쁘게 꾸며져서 보기가 더 좋은 것일 뿐이라고. 그 인형극 같은 천국이 언제까지 갈진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단다. 특히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멍청한 사람에겐 말이야. 로테 너는 역사 공부를 조금만 했어도 그 자리를 꿈꾸지 않았을 거야.」 「정말 공부가 필요한 건 마리 너야! 언제까지 뜬구름 잡는 학문에 빠져 사고만 치고 다닐래? 그러다가 나중엔 결국, 그 곰팡이 같은 오칼에게 시집가는 길밖에 남지 않을 거라고!」 *오칼 : 오를린 영주의 육촌. 정신병을 앓고 있다. 오를린 일가의 유일한 아들이라 훗날 영주의 딸 중 하나와 결혼하여 영지를 물려받게 될 거라는 말이 떠돈다. 「멍청이! 황후 아니면 다른 귀족의 처, 네 머릿속엔 사람으로 태어나 갈 길이 그 두 가지밖에 없는 거야? 그러니까 우물 안 개구리란 소릴 듣는 거라고!」 「더 있는데? 말해볼까? 비렁뱅이 평민의 처! 늙고 기분 나쁘게 생긴 부호의 첩! 창녀! 무당! 심심하고 지루해 빠진 신녀들! 우리 여자들이 갈 수 있는 길은 언제나 그런 것뿐이야! 그게 현실이라고! 나는 그런 한심한 길을 갈 바에 황궁의 안주인이 되겠어! 너는 아마도 끽해야 창녀나 되겠지!」 「황후는 창녀가 아니라고 생각하나 보지?」 황태자는 그런 언니를 모른다. 모르고서 아내를 그저 언니의 자리를 빼앗은 악녀로만 취급한다……! 남편을 내려다보는 로테의 눈에 한심함이 드러난 것일까. 비오르틴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네 언니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예.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전하께선 잘못 알고 계십니다.” “오만함은 벌써 황후 급이군.” 황태자는 로테를 밀치듯 일어나 침소를 나섰다. 그의 몸짓이 너무 과격했던 것일까? 태중의 아이가 신경질을 내듯 발길질했다. 로테는 그 배를 한참 동안 어루만졌다. 궁에 온 지가 벌써 몇 달인가. 온갖 일을 겪은 이제야 알 것 같다. 언니가 어째서 이 자리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 ‘마리. 어디서 뭐 하니?…… 행복하니?’ * 마리아는 새벽, 갑자기 바깥으로 갔다. 하이너는 그녀에게 외출 이유를 굳이 묻지 않았다. 그녀가 갑자기 나갈 때는 거의 주인의 부름을 받고 나가는 경우밖에 없기 때문이다. 필요하시니까 그 아이를 불렀겠지, 때 되면 어련히 알아서 오겠지, 하고 내버려 두는 게 좋았다. 어느덧 두 개의 달이 지고 해가 떠오르는 아침이 되었다. 거처에 온 사람은 마리 혼자뿐이었다. 하이너는 아가씨가 오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늦게 오실 줄 알았습니다. 마리아에게 그렇게 듣기도 했고요.” “생각보다 이야기가 빨리 진행되어서 말이지. 그럼 난 씻으러.” 하이너는 밤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퀭한 눈을 비볐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아가씨가 벗어놓은 옷에 눈길이 갔다. 저절로 인상이 구겨진다. 드래곤이 되어 좋지 않은 점을 말하자면 바로 이거다. 냄새를 추적할 수 있다는 것. 아가씨가 벗어놓은 옷에서는 여러 냄새가 났다. 드래콘화한 마리아의 냄새. 아마도 오면서 마리아의 등에 타느라 밴 냄새겠지. 그리고 인간 남자들의 냄새, 낡은 방에서나 날 것 같은 곰팡이, 먼지의 냄새, 젖은 돌 냄새, 불을 붙일 때 쓰는 짐승의 기름 냄새 등, 온갖 냄새가 어우러져 아가씨의 달콤하고 상큼한 향기를 지워버렸다. 하이너는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가씨의 아침 식사를 차려주었다. 식사라고 해봐야 곡물가루를 물에 갠 것과 말린 과일, 육포가 전부였으나, 그 세 가지만으로도 역겨운 냄새를 잊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씻고 나온 아가씨는 정작 그것들을 먹지 않았다. “드시지 않습니까?” “으응. 좀 피곤해서.” 마리는 눈짓으로 뭔가를 부탁했다.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달라는 요청이었다. 아가씨와 오랫동안 지내온 호위기사는 그 신호를 알아듣고 눈 깜짝할 새에 아가씨의 머리를 보송보송하게 말려주었다. “고맙습니다, 멋진 기사님!” 건조 마법을 받은 마리는 스스럼없이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언제나 자연스러운 몸짓. 호위기사의 앞에서도 알몸을 드러내는 것에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는 그 모습. 하이너는 그런 모습을 하루 이틀 본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자려는 아가씨에게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아가씨.” “음?” “지괴르 대령은 무사히 구출하셨습니까?” “어머. 싱겁긴! 구출했지. 그러니 내가 지금 여기 이렇게 편히 자려는 거 아니겠어?” “다행이군요.” 마리는 싱긋 웃으며 눈을 감았다. 하이너의 시선이 그녀가 벗어놓은 옷가지에 머물렀다. 뒤늦게야 정화 마법을 쓸 곳이 생겼음을 알았다. 그래. 배운 것을 이런 때 써먹어도 좋겠지. 그러려고 그동안 공부한 게 아니던가. 그는 옷가지에다 마법을 썼다. 정화 마법의 기능으로 잠시간 주위가 싸늘해진 것을 느낀 마리가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우리 기사님이 워낙 깔끔하셔서 냄새에 민감하구나.” “실례지만 구출 후에 어딜 다녀오셨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으음, 황궁 감옥, 지괴르 대령의 저택, 루빈의 숙소 등…….” “그렇군요. 그나저나, 대령은 그 일을 하겠다고 하던가요?” “그럼! 내게 불가능이 어디 있겠어?” 하이너는 아가씨의 말이 어째 찝찝했다. 듣기로 헤그 레 지괴르라는 작자는 자유분방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라는데, 그런 자가 아가씨의 부탁을 쉽게 들어주는 것에 안심되지 않았다. “아가씨는 언제나 그렇게 긍정만 하시는군요.” “너는 언제나 그렇게 걱정만 하고?” “헤그를 믿습니까?” “응. 내가 미끼를 던졌거든.” “미끼요?” 하이너가 궁금해하는 눈초리를 건넸지만, 마리는 돌아누워 잠이 들었다. 어째 대답을 해줄 눈치가 아니다. 호위기사에게 말해주지 못할 미끼인가? ‘섭섭하군.’ 하이너는 환기가 끝난 것 같아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아가씨에게 혹시 들릴지도 모르는 혼잣말을 했다. “어떤 방식이든 저는 아가씨를 믿습니다. 아가씨의…… 야망마저도.” 창문을 닫았는데도, 떠오르는 태양에 눈이 시렸다. 지금쯤 지괴르 대령은 일을 시작할지도? *** 그 시각 성도 로젠플라드. 로제나 호수. 물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른 새벽이다. 로젠플라드 신성군은 사철마다 성황 참관하에 대규모 훈련을 하는 관례가 있다. 오늘 열릴 훈련도 원래는 꽃이 가득 핀 봄의 한가운데나 되어야 열리는 것이지만, 이례적으로 아직 눈이 다 녹지 않은 이 시기에 열리게 되었다. 주변 영지 세력들은 신성군의 훈련 날짜가 앞당겨진 것을 나름대로 힘을 과시하는 한 방법이라고 파악했다. 실렌틴 광산 폭파 사건 이후, 기갑체 부품 구하기가 마땅찮은 각 마력기갑 부대들의 눈치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신성 정부 권력의 보이지 않는 핵심인 할데바인이 살해당한 시기. 이들은 권력의 큰 축이 사라졌어도 군사적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음을 대외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었고, 이번 훈련은 그에 가장 적절한 방식이 될 것이다. 신성군 본군이야 철마다 해온 훈련이고 그게 조금 앞당겨진다 해도 별 불만 없는 편이다. 하지만 원래는 야울을 지키는 부대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신성군에 강제 귀속된 부대인 루빈은 다르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향 아닌 타향을 지켜야 하는 상태로 몇 달을 지낸 그들의 불만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뿐이지 이미 한계치에 다다라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한계치는 벗어난 건지도 모른다. 할데바인을 죽인 지괴르 대령을 구출시키자는 말이 떠돌 때부터 그들은 신성군 본군과 적대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곳 로젠플라드에서 겪은 것이라고는 본군의 텃세, 본군 출신 지휘관이 시키는 가혹한 일들뿐이었다. 대령 헤그 레 지괴르가 너구리를 살해한 후로 그 가혹한 일들은 더 많아졌고, 부대 전체의 봉급도 축소되었다. 그들은 하루빨리 황태자가 너구리의 잔존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길 원했다. 그래야 자신들 루빈이 야울로 돌아갈 수 있었고, 가족과 고향민이 있는 곳을 지킬 수 있었다. 루빈의 아만카이트 중령은 신성 정부를 따르기 싫어하는 부하들과 신성 정부 사이에서 곤욕을 치르는 인물이다. 예전에야 지괴르 대령이 있었기에 그럭저럭 견딜 만했지만, 대령이 투옥당한 지금은 대령의 힘든 일을 모조리 대신 맡아야 했다. 힘든 나날을 보내기 때문인지 요새는 수면 장애를 다 앓을 정도다. 성황 참관의 대규모 훈련을 앞두고서도 잠을 이루지 못한 그는 아예 잠을 포기했다. 그리고 아침이 밝기 전에 잠시 산책이나 할 겸 로제나 호수 근처를 걸었다. 물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시야가 맑아졌다. 새싹이 조금씩 돋아나는 나무들을 보고, 또 그 나무들 사이를 휘젓는 바람을 쐬니 복잡한 마음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로제나 호수를 보았다. 봄을 알리는 따뜻한 바람 덕분인지 빙판이 녹거나 깨진 곳이 여러 군데 보였다. 저 위험한 곳에서 아이들은 앞으로 썰매를 타거나 하며 놀진 못할 것이다. 위태로워 보이는 빙판을 보니 부대 생각이 또 머리를 지끈하게 했다. 앞으로 루빈은 어떻게 될까. 비록 대령이 친우인 황태자의 비호를 받아 사형을 당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리데바인의 주인을 죽인 죄는 몹시 크다. 대령의 복귀는 당연히 기대하기 어렵겠지. 훗날 황태자가 루빈을 야울로 귀속한 다음에는 누구를 지휘관으로 올릴지? 어쩌면 황태자는 할데바인 잔존 세력과 기나긴 대립에 지쳐서 타협을 볼지도 모른다. 그 세력의 인물을 루빈의 새로운 지휘관으로 앉히는 조건이라든가, 그런 것 말이다. 군부에선 이미 그런 말이 들리고 있었다. 루빈에 치욕을 줬던 세력에서 온 지휘관을 모실 바에야 차라리 퇴역하는 게 좋을지도? 아만카이트 중령이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의 뒤에서 옷자락을 잡았다. 그 순간 중령은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군인이나 무인은 언제나 기에 민감해야 하는데, 누군가가 기척도 없이 뒤따라 붙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중령은 제발 위험한 일이 아니길 바라면서 뒤돌아보았다. “누….” 한 자그마한 소녀가 중령의 옷자락을 잡고서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녀는 마치 인형 같았다. 진줏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괴괴한 선홍빛 눈동자를 반짝이는 아주 예쁘장한 인형. 그러나 어째서인지 복장은 소년들이나 입을 것 같은 털털한 옷이다. 이런 새벽에 민가라고는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 군인의 뒤를 잡는 이유가 뭘까? 중령은 어이가 없어서 그만 웃음이 나와 버렸다. “너는 누구냐?” 그 순간, 간결한 정보가 한꺼번에 뇌리에 들어왔다. 기갑체 부품 창고를 지키는 군인들에게 적당한 핑계를 대 그들을 대피시킬 것. 사괴티오르의 열쇠가 숨겨진 곳을 말할 것. 그것은 정보라기보다는 숫제 지시에 가까웠다. 사괴티오르. 그것은 헤그 레 지괴르가 몰던 기갑체의 암호명이다. 파괴력이 굉장한 기체고 그것의 암호명을 아는 자는 헤그의 직속 부관인 아만카이트 중령뿐이다. 중령은 이 소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 소녀가 헤그의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 자신에게 왔단 것은 알 수 있었다. 감옥에 있는 대령이 어떤 일을 시작하기라도 한 건가? 아만카이트 중령은 붉은 눈의 소녀에게 뭔가를 물으려고 했으나, 그사이 또 뇌리에 어떤 말이 들어왔다. 시간이 없다. 성도의 너구리 새끼들을 죽이고 싶다면 얼른 사괴티오르의 열쇠가 숨겨진 곳을 말하라. 아만카이트 중령은 난생처음으로 군인의 길에서 벗어나고야 말았다. “트리아노네(황후의 봄 별장) 뱀 수인의 배. 그곳에 열쇠가 있다.” 성도의 건방진 무리를 없앨 수만 있다면, 뭐가 어찌 돼도 그는 좋았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081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마리아는 낭패한 기분으로 중령을 떠났다. 트리아노네. 황도에 있는 황후의 봄 별장. 하필이면 열쇠가 있는 장소가 그곳이라니. 이곳 로젠플라드에서 거기까지 가자니 너무 멀어서 답이 보이지 않는다. 가능하면 최대한 빠르게 사괴티오르의 열쇠를 지괴르 대령에게 건네줘야 한다. 순간 이동 스크롤을 이용하면 좋은데 그런 고가의 물건이 지금 당장 있을 리도 없고, 대관절 어떻게 열쇠를 찾으러 간다? 아가씨께서도 열쇠가 그리 먼 곳에 있을 거라고는 미처 염두에 두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 순간 마리아가 생각해낸 것은 하이너 아니, 드래곤 기사님이었다. 현재 드래곤 기사님은 열기 조절, 투명화, 치료, 최면 마법 등을 어느 정도 숙지한 상태다. 그러나 순간 이동은 과연 어떠할까? 기사님은 장거리 이동할 때가 되면 순간 이동보다는 하늘을 나는 쪽을 택했기에 지금으로선 가능할지 장담할 수 없다. 그래도 마리아는 일단 전언이나 보내보기로 했다. ‘주무시나요?’ *** 그 시각, 거처에서 명상에 잠겼던 하이너는 마리아의 전언을 듣고 눈을 떴다. ‘주무시나요?’ ‘안 잔다. 무슨 일이지?’ ‘저, 그게…….’ ‘뜸 들이지 말고 말해봐라.’ ‘혹시 순간 이동 마법 가능하신가요?’ 마리아는 사정을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었다. 하이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듣고 보니, 매우 급한 일이다. 순간 이동이라는 고급 마법을 이용하여 황도에 있는 트리아노네에 갈 것, 가서 뱀 수인의 배를 갈라 마력기갑체의 열쇠를 찾을 것. 그리고 그것을 헤그 레 지괴르 대령에게 전달할 것. ‘어려운 요청이라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만.’ 마리아는 만약 하이너가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륀체르와 텔레파시 채널을 공유 중이니 그에게 금전적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다. 륀체르 정도면 이동 스크롤과 사람을 쓰는 데 그리 어렵지 않을 테고 아가씨께서도 아마 그 방식을 택하셨을 것이니까. ‘마리아.’ ‘예.’ ‘내가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무래도 사파이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이 좋….’ ‘그건 안 된다!’ 하이너는 그 꼴만은 보기 싫었다. 곧 죽는 한이 있어도 가슴 변태의 도움 따윈 다시 받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와 엮이는 것 자체가 무조건 싫다. ‘내가 방법을 찾아보마.’ 그는 마리아와 통신을 단절하고 급한 대로 예전에 사두었던 마법 총서를 펴들었다. 드래곤이 가진 마력을 체계적으로 쓰기 위해선 교과서가 필요했고, 그래서 사둔 책이다. 지난 시간 동안 투명화, 정화 마법 등을 배울 때 아주 유용하게 썼다. 이제는 여기서 가장 어렵다는 순간 이동 마법을 아주 제대로, 그것도 매우 빨리 배워야 할 때다. 목차를 훑던 그가 한때 기사도를 수련하던 자답지 않게 욕지기를 뱉었다. “젠장, 이런 걸 단 몇 분 만에 배우는 게 가능했으면 내가 지금 고집쟁이 아가씨를 따라다니는 기사가 아니라 제국학술원 수석이 되어있겠지!” 처음 보는 희한한 마법 공식들이 눈을 핑핑 돌게 했다. 가장 어렵다는 최면을 배울 때도 지금처럼 머리가 어지럽진 않았다. “불가능해. 이건 못한단 말이다!” 기적은 없는 걸까. 역시나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그것뿐인가? 가진 거라고는 돈과 얄미운 주둥이밖에 없는 가슴 변태의 도움을 청해야……. 하이너가 그런 생각을 하며 혀를 차는 그때였다. 한참을 달게 자던 마리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졸음이 가득 밴 목소리를 냈다. “하으음, 하이너?” “왜 깨셨습니까?” “꿈에서 누가 자꾸 불가능하다고 해서… 혹시 하이너가 중얼거린 거야?” 하이너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다.” 심상찮음을 느낀 마리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호위기사는 두꺼운 책 한 권-마법서-를 들고 있었다. 목차를 보니 순간 이동을 배울 참인 듯하다. 마리는 호위기사의 어두운 표정에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사정인지 말해줄래?” 하이너는 마리아에게 들은 사정을 말했고, 마리는 푸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이너는 그 웃음이 기분이 나빴다. 누구는 진지하게 임하려 하는데 웃기나 하시다니. “웃음이 나옵니까?” “그럼 울어?” “쯧, 언제나 명령을 내리는 쪽은 그렇게 속이 편하시겠지요.” “난 명령내린 적 없는데? 좀 해달라고 애교를 부렸을 뿐이지.” “그거나, 그거나.” “어쨌든 우리 기사님께서 순간 이동을 매우 하고 싶으신가 보군?” “그럼 아가씨는 뭐 다른 좋은 방법이라도 있단 말씀입니까? 아. 혹시 바너에 사는 괴짜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라면 차라리 입 밖으로 꺼내시지 않는 게 좋겠군요.” “호오. 질투야?” 하이너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마리는 그의 손에 든 책을 빼앗아 방 저쪽으로 던지더니 그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 그의 두 손을 마주 잡았다. 하이너가 예의 가칠한 표정으로 물었다. “뭡니까.” 마리는 생글생글 웃으며 뜬금없이 질문했다. “기적의 재료가 뭔지 알아?” “예?” “믿음. 그리고 능력. 그것만 있으면 되지.” “언제나 그런 속 편한 말씀만 하시죠.” 마리는 하이너의 빈정거리는 말이 너무하다는 듯 서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았다. 아가씨와 마주 보는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호위기사는 얼굴을 붉혔다. 마리가 속삭였다. “우리 드래곤 기사님은 뭐든지 의지로 만사를 해결해왔지. 정식 기사가 아니어도 내 기사가 되겠다는 의지 하나로 정말 기사가 되었고, 나를 충실히 지키겠단 의지 하나로 지금까지 날 무사히 지내게 해줬어. 열기 조절 마법을 배운 것, 드래곤으로 변신할 때 고통이 줄어든 것, 최면 마법을 빠른 시간에 배운 것, 마법서를 보기 위해 마나어를 단시간에 배운 것 전부가 의지의 힘이었어. 너의 의지는 드래곤 급이라고!” 하이너는 그 중에서 세 개는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가씨의 기사가 되겠다는 의지 하나로 호위기사가 된 것은 맞지만, 아직 정식 기사 작위는 없다. 또한, 아가씨를 충실히 지키겠다는 의지로 이 여행에 따라온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휘말린 것일 뿐! 게다가 드래곤으로 변신할 때 고통이 줄어든 것도 의지의 힘이 아니라 아가씨를 안심하시게 하려고 지어낸 거짓말일 뿐! 그런데 아가씨께서는 그 모든 것을 의지의 힘으로 여기시며……. 또한, 당신의 말을 믿으라 하신다. “저딴 책을 쓴 자들은 마법에 관해 떠들기만 좋아할 뿐, 마법 전체를 다 알지는 못해. 그랬다면 그들은 진즉 차원의 균열 비밀을 밝혀서 책을 내고도 남았겠지. 대관절 자기들이 너처럼 드래곤이 되어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마법을 다 안다고 지껄일 수 있는 거야? 책은 믿지 말고, 네 의지를 믿으렴. 나의 기사님. 나의 드래곤.” 그러니까 의지로 순간 이동을 하라, 그런 말? “아가씨는 혹시 아십니까?” “응?” “아가씨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때마다 제가 얼마나 아가씨를…….” 패고 싶은지. 하지만 마리는 그의 속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지 갑자기 서로의 입술이 닿을 듯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눈을 천천히 감으며 몽롱하게 속삭였다. “복잡한 공식 따윈 잊고 네 의지에다 명령해봐. 나는 트리아노네로 순간 이동 할 수 있다. 나는 트리아노네로 성공적으로 순간 이동하여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성공하고 나면 아가씨의 뜨거운 키스를 받을 것이다…… 자, 어서 따라 해.” 하이너는 그런 아가씨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다. “따라 하라니요, 이런 바보 같은….” “따라 해보라니까. 나 하이너는 트리아노네로 순간 이동 할 수 있다. 나 하이너 그로스는 트리아노네로 순간 이동하여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성공하고 나면 아가씨의 뜨거운 키스를 받을 것이다…….” “아가씨…….” 하이너는 아가씨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보았다. 아가씨는 어쩌면 아직도 꿈을 꾸시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주 동화 같은 꿈을. 동화책 같은 말을 한다고 그 동화가 현실이 될 수는 없는데. “어서.” “젠장!” 그래. 밑져야 본전. 하이너는 아가씨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어차피 순간 이동이 불가능해질 테고, 그러면 그 실수한 것만큼 아가씨도 부끄러워서 자기 말이 경솔했음을 좀 느끼실 테지. 하이너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리가 그의 입술에 살짝 키스하며 마법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키스를 받았으니 하이너는 성공한다. 반드시.” “……!” “자. 무서우면 나와 같이 이동하는 거야. 차원의 균열에 몸이 낀다 해도 너와 단둘이라면 난 무섭지 않거든.” “정말이지 소름 돋아서 원….” 말은 그렇게 하지만 하이너는 이미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나 하이너는 트리아노네로 간다. 나 하이너 그로스는 아가씨와 함께 트리아노네로 가고 만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이동해버리면 안 되겠지. 트리아노네의 사람들에게 모습을 들키면 곤란하니까. 좋다. 나 하이너 그로스는 지금부터 약 오 초 후…… 아가씨와 단둘이 투명화한 채로 트리아노네에 간다, 가 있다. 그가 기적을 바라며 아가씨의 달콤한 입술을 더욱 세게 문질렀다. 만약 오 초 후에 기적이 통하지 않으면, 아가씨의 입술과 간사한 혀를 깨물어버리는 벌을 줄 생각이다. 그런 못된 마음을 담아 한 키스가 점점 짙어지고, 그의 혀가 마리의 부드러운 혀에 달콤하게 엉켜 들었다. 마리의 호흡은 거칠어지고 드래곤 기사의 온몸은 뜨거워졌다. 그리고 일순간 그들 주위에서 백색 빛이 번쩍이더니,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 황도 로귀하르트. 황후의 봄 별장 트리아노네. 아침이 완전히 밝기 전, 황후는 시종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 뜰에 나갔다. 수인들도 잠들어 있고 가득 핀 꽃과 식물들도 잠든 것 같은 이곳에 혼자서만 아직 잠을 이루지 못한 한 남자가 있었다. 턱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르고 널찍한 어깨를 가진 그는 바로 뜰을 돌보는 정원사이다. “새벽까지도 안 오시기에 오늘은 못 만날 줄 알았습니다. 에리네.” 정원사는 황제도 잘 부르지 않는 황후의 진짜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젖가슴에 입술을 가져갔다. 시중들이 볼 때는 순하고 얌전한 정원사였다가 황후와 단둘이만 있을 때면 그는 늘 한 마리 난폭한 짐승으로 돌변한다. 여자의 기분을 맞춰주고 여자의 몸을 쾌락으로 이끄는 데는 가히 따를 자가 없었고, 그렇다 보니 황후는 성적으로 시들한 황제보다 정원사와의 잠자리를 더 즐길 때가 많았다. “늙은이(황제)가 늦게야 나가지 뭔가. 아, 나의 귀여운 늑대. 얼른 아 치마 속으로 들어가렴….” 정원사는 황후 에리네의 잠옷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쾌락에 젖어든 황후는 점점 뒷걸음치며 뜰의 탁자 위에 올라 누웠고, 정원사는 그녀의 다리를 벌려 자신을 밀어 넣었다. “후후, 오늘은 우리가 수인들의 잠을 깨워보자. 앗! 아아!” “헉, 허억….” 숨죽인 것만큼이나 격렬한 정사에 널찍한 탁자가 흔들렸다. 황후는 정원사가 주는 짜릿한 쾌감에 허덕이면서도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잠시 후 정원사는 귀를 찌르는 여자의 소리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에리네. 소리가 너무 큽니다만.” “읏, 무슨 말이야?” 에리네는 만에 하나 시종들이 들을까 절대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정원사는 분명 여자의 소리를 들었고, 그게 황후의 목소리가 아니란 것에 매우 놀라 잠시 몸을 뗐다. 몸이 한창 달아오른 황후가 그에게 손짓했다. “뭐하니? 이리 오렴….” 그런데 그 순간, 정원사는 바닥을 보면서 입을 크게 벌리고 비명을 지르려 했다. 그러다가 소리를 도로 삼켰다. “저, 전하!” 놀란 황후가 그의 시선을 따라 바닥을 보았다. 바닥에는 뱀 수인 한 마리가 배가 찢긴 채 죽어 있었다. 황후는 한숨을 쉬었다. “휴, 난 또 뭐라고. 그깟 짐승 한 마리 죽은 거로 너도 참….” 황후는 다시 정원사를 안으려다가 뭔가 이상하여 고개를 다시 뒤로 돌렸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뱀 수인에게서 나온 피가 뜰 저 안쪽까지 이어져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황후는 뜰 안 모든 수인이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뱀 수인을 제외한 모든 수인이 외상없이 죽은 것으로 보아, 위협적인 기(氣)에 의한 소행임이 분명하다고 황후는 생각했다. *** 플래티르콘의 날개. 마리 일행의 거처. “휴우. 거봐. 내 말대로 하니까 정말 기적이 일어나지?” 마리는 순간 이동에 성공한 하이너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그를 자랑스러워했다. 그사이 하이너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고 있었다. 순간 이동에 성공할 줄이야! 그것도 그런 터무니 없는 방식으로! 의지의 힘은 정말 가능한 것이었다. 아니, 이 드래곤의 의지 그 자체가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아가씨와 함께 트리아노네로 투명한 모습으로 순간 이동 한 것도 모자라 뱀 수인의 배에서 필요한 물건-사괴티르콘을 조종할 수 있는 열쇠-을 빼 오고, 뜻하지 않은 수확하기도 했다. 하이너는 그 수확의 증거, 즉 황후와 정원사의 밀회 현장이 약 3초간 찍힌 마법영상구 링클을 마리에게 보였다. 마리가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와아! 우리 하이너는 불가능한 게 없네? 우리 이거, 륀체르에게든 황태자에게든 아무한테나 팔아서 용돈 하자!” ============================ 작품 후기 ============================ 하이너야 나 로또 번호 좀 ㅠㅠ 00082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어쩜 저리 만사를 즐기실 수 있을까? 하이너는 아가씨의 느긋한 마음가짐이 부러웠다. “지금 그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아, 그렇지. 참!” 마리는 얼른 열쇠를 헤그에게 전해주러 가겠다며 외투를 집어 들었다. 하이너가 그녀를 막고 자기가 나갈 준비를 했다. 마리가 의아한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 “제가 가겠습니다. 아가씨는 마저 주무십시오.” “어째서?” “그게 나을 겁니다. 저야 순간 이동이 언제든 가능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나도 따라가면 안….” 하이너는 정색하며 말을 끊었다. “뭐 하러 번거롭게 그래야 합니까? 좌표나 불러주십시오.” “흐음. 헤그의 좌표는 대륙 북동서…….” 하이너는 헤그의 위치를 기억해두었다. 마리는 잠시 어깨를 으쓱이다가 마법영상구 링클을 가방 속에 꼼꼼하게 정리해두었다. 황후 간통의 증거물은 아주 값비싼 물건이다. 하이너가 피식 웃었다. 아무리 경황이 없어도 값어치 나가는 물건은 잊지 않고 꼼꼼히 챙기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그는 아가씨를 번쩍 들어 안았다. 마리의 눈이 동그래졌고, 하이너는 그런 그녀의 뺨에다 솜털처럼 가볍게 어르며 살짝 입맞춤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으응.” “달콤한 꿈이나 꾸고 계세요.” “그럴게.” 백색의 빛과 함께 호위기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마리는 짧은 한숨을 쉬며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가끔 보면 무서운 구석이 있는 녀석이라니까.” *** 황도 로귀하르트. 황제 궁. 황의회에서 고성이 오갔다. 헤그 레 지괴르가 감옥을 탈출한 사건 때문이었다. 할데바인 잔존 세력은 황태자가 친우 지괴르 대령을 빼낸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고, 탈출한 대령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수선을 피웠다. 그들의 공세에 황태자는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대령은 탈출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사라졌다는 것. 그것은 ‘차원의 균열’이라는 실재하기는 하나, 증명하기 힘든 현상을 핑계로 사건을 무마하려는 말이었다. 할데바인 파는 어이가 없었다. “제아무리 황태자 전하라 하셔도 황의회 전체를 기만하는 발언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만!” 황태자는 픽 웃었다. 의자에 느긋하게 앉아 좌중을 한심한 장난감 보듯 하는 그는 이미 승리자의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니까 증거가 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하오? 감옥 사람들도 대령이 뛰쳐나갔단 걸 목격한 적 없고 궁 밖 경비들도 그를 본 적 없다 하지 않소? 최고위 마법사들도 잡아내지 못하는 이 기묘한 현상이 차원의 균열이 아니면 대관절 뭐란 말이지?” 할데바인 파는 못마땅한 듯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황태자가 그들 하나하나를 쏘아보며 입가를 올렸다. “내 주장이 정녕 황의회를 기만하는 것으로 들린다면 그대들이 증거를 가지고 오시오. 대령이 도망갔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으면 그때 가서 나를 탓하는 것도 늦지 않지.” 할데바인 파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증거? 야울 궁 마법사 전체가 황태자의 편인데 설사 증거가 있다 한들 세상에 알려질 수 있을까? 이 싸움은 진실이 무엇이든 결국 황태자의 승리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참담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황태자는 태연함을 연기하면서 속으로는 누구보다 열심히 기도했다. 부디 자신의 친우가 성황 무리를 깨끗하게 없애주기를. *** 성도 로젠플라드. 로제나 호수. 물안개가 걷히고 태양이 민낯을 드러냈다. 한여름의 것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그것은 호수의 빙판도 끓어오르게 할 것 같았다. 어쩌면 이 봄의 시작은 매우 격렬할지도 모른단 걸 암시하는 것일지도. 호수 옆 광장에서 약 일만 명에 가까운 신성군이 모였다. 마력기갑체, 기갑체를 다루는 정예군을 제외한 병사들이었기에 대부분은 총, 화기를 중점으로 다루었고 개중 몇몇만 신성 마법에 특화된 자들이었다. 성황 참관하에 이들은 잔뜩 긴장하여 시작 명령을 기다렸는데, 화창한 날씨에 푸른 군복을 입고서 오열을 맞춘 모습이 멀리서 보자면 무너뜨리기 쉬운 도미노 조각 같았다. 그런 군을 만족스럽다는 듯 보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성황이다.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자애와 사랑의 상징으로 군림하던 그는 이 순간만큼은 독재자의 표정을 하고 신성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기는 성황 측근의 고위 사제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황제도 짓지 않는 거만한 표정의 그들, 성황 무리를 보며 누군가가 한숨을 쉬었다. ‘너구리가 죽었어도 저 치들은 여전하군.’ 그는 바로 루빈의 아만카이트 중령이다. 루빈의 붉은 군복이 아닌 신성군의 푸른 군복을 입는 이 치욕도 오늘이 끝이라고 생각한 그는 어서 빨리 지괴르 대령이 뭔가 일을 저지르면 좋겠다고 생각 중이었다. “에, 이번 봄 정기 훈련은 성스러운 로젠플라드의 대리인이자 리데바인의 군주인 고 헤슈트 레 할데바인을 추모하며….” 그러는 사이 성황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너구리를 향한 추모만 다를 뿐, 언제나 똑같은 소리다. 생명의 소중함과 피의 고귀함 따위의 그럴듯한 단어로 치장된 말들. 그러나 뜻을 살펴보면 저들의 종교만이 오직 대륙에서 가장 정의롭고, 가장 훌륭한 심판자로서해야 할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도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저질렀던 타 종족, 타 종교 탄압을 단죄라는 이름으로 꾸며놓은 결론도 마찬가지. 자기들이 생각해도 언제나 빤한 말인지 사제 중 어느 누군가는 하품을 했고, 또 누군가는 옆 사제와 농담을 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들의 그런 모습에 아만카이트 중령이 신물이 난 표정을 하는 그때였다. 펑! 퍼퍼퍼퍼펑! 펑펑! 퍼퍼퍼펑! 그리 멀지 않는 곳, 신성군 군수물자 창고에서 고막을 찢는 듯 어마어마한 폭발음이 들리더니 창고 전부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시민들부터 대피시켜!” “전쟁인 거야?” “그럴 리가!” 군사훈련장은 순식간에 동요했다. 가장 먼저 몸을 사리는 자들은 역시나 권력자들이었다. 성황 무리는 매처럼 빠르게 신성 마법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공중 방공호로 향했고, 정예 마병사들은 각자의 기갑체를 타고 가 폭발의 원인을 탐지하기 시작했다. 혼란 속에서 아만카이트 중령은 루빈에게 대기 명령을 내렸다. 명령 후 그의 입가가 씩 올라갔다. 성황은 이 상태를 어떻게 볼까? ‘마른하늘에 웬 날벼락이냐 하겠지.’ 성력 보호막으로 방어되는 신성군 창고를 폭발시키는 힘은 대륙에 두 가지뿐일 것이다. 하나는 마황의 강력한 힘, 하나는 마력기갑체를 조종하는 누군가가 성력 동화 매개체를 구해서 그것을 기체 엔진에 장착하여 성력 보호막을 무력화한 뒤에 내는 힘. 전자를 살펴보자면 현재로써 마황 세력은 그런 일을 저지를 명분이 없다. 즉, 성황은 마력기갑체를 조종할 줄 아는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것이다. 그게 감옥을 탈출한 헤그 레 지괴르 대령인 것은 당연한 수순 아닐까? 어쨌거나 이 폭발은 신성군의 힘과 주의를 돌리는 데 충분하다. 아만카이트 중령은 새벽에 만났던 선홍빛 눈동자 소녀의 말을 되새겼다. 아마도 곧 지괴르 대령이 나설 테지. 중령은 지휘관의 지시가 아닌 독자적인 판단으로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붉은 핏방울을 짓뭉갠다!” 붉은 핏방울. 로젠플라드 상징물 중의 하나. 암호를 알아들은 루빈의 병사들은 모두 ‘아군’인 신성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만카이트 중령은 군이라는 집단의 움직임과는 반대로 행동해주는 자신의 부하들, 아니, 루빈의 용감한 이들에게 마음속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설사 이 거사가 자신의 오판으로 실패하여 전원 사형 처분이 내려진다 해도, 그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지괴르 대령, 당신만 믿습니다!’ 그리고 그사이, 아수라장이 된 지상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저쪽 하늘에서부터 눈 깜짝할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대 전갈 아니, 전갈 모양의 마력기갑체였다. 눈부신 하늘을 한 바퀴 선회한 그것은 바로 헤그의 기체인 사괴티오르였다. 새까만 플래티르콘으로 무장된 위압적인 모습의 기체를 보고 신성군의 안색은 하나같이 창백해졌다. “아니, 저건!” “루빈의 개다!” “모두 피해! 젠장, 우린 다 죽었어!”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틀렸다. 헤그가 노린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 거대한 기체의 두 집게발에서 뿜어져 나온 살육의 자색 빛은 성황 무리가 피신한 공중 방공호를 정조준했다. 마리가 헤그에게 준 성력 동화 매개체 덕분일까? 제국 마력 기갑체 중 상위 5위 안에 든다는 그 기체는 성황이 두르고 있는 강력한 ‘신의 보호’를 파괴할 수 있었고, 기체 공격력 상향이라는 동반 상승효과까지 누렸다. 물론, 이 역시 조종사의 능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헤그에겐 더 내려갈 지옥도, 더 올라갈 천국도 없고 그렇기에 두려움도 기대도 없다. 그의 정신력은 순수하게 기갑체 조종에만 특화될 수 있었고, 사괴티오르는 그 어떤 전장서 싸울 때보다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낳았다. 성황의 방공호에서는 끊임없이 반격의 빔, 마나빔 등이 쏟아져 나왔지만, 헤그의 기체는 조금도 상처 입지 않았다. 방공호는 채 5분도 되지 않아 성황 무리와 함께 잿개비가 되어 청명한 하늘을 오염시켰다. 황제의 방공호 다음으로 강하다는 거대 요새가 무너진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검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듯했고, 검은 눈물들은 이내 루빈에게 죽임을 당한 신성군의 시체 위에 쌓였다. 하늘에서 검은 눈이 내리면 이런 광경일까? 세상이 지옥이 된 것만 같다. 헤그는 기체를 로제나 호수 위에 세운 채로 한참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회의가 몰아쳤다. 이게 과연 깔끔하게 끝내버린 일일까? 루빈을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하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그들은 독자적으로 신성군을 공격하고야 말았다. 만약에 군사 재판이 시작되면 루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헤그는 자신이 어떻게 되는 것이야 상관이 없어도 루빈이 말려드는 것은 원치 않았다. 한참 후에 헤그는 아만카이트 중령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죽고 싶은 건가?’ 능글맞고 뻔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죽이시려거든 그 멋진 기체로 죽여주시길 바랍니다.’ ‘간이 크군.’ ‘뭐가 문제입니까? 저희는 어디까지나 상사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하면 그만이니까요.’ 헤그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상사의 명령에 따라 신성군을 공격했다고 해도 다른 죄목으로 사형당하는 것은 분명할 텐데.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상사를 도운 부하의 천연덕스러움에 지고 말았다. ‘무덤에 갈 친구가 많아서 좋겠군.’ ‘마찬가지입니다. 대령. 아직 청소를 좀 더 해야겠군요.’ 살아남은 신성군들이 겁을 먹고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일부는 물에 뛰어드는 자도 있었고, 겁 많은 이 중엔 자살하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군사는 구경꾼들이 몰린 쪽으로 도망가는 것을 택했다. 루빈은 죄 없는 사람들을 공격하진 않았고, 신성군들은 사람들 틈에 섞이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예상대로 헤그와 루빈은 사람들이 몰린 쪽은 공격하지 않았다. 이미 루빈은 반항하는 신성군만 죽이고 있었고, 나머지는 내버려둔 채였다. 그리고 사괴티오르는 공중을 선회하다가 성황청에서 돌진해오는 증원 부대 기갑체들을 폭격했다. 대낮에 폭죽 잔치가 이어지는 듯 하늘이 시끄러웠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로제나 호수는 폐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겁에 질린 시민들은 하나같이 우르르 도망을 가고 있었으며, 신성군의 몇몇 지휘관들은 항복 의사를 표시해왔다. 그런데 한순간, 누군가가 하늘을 보더니 외쳤다. “전갈이 사라졌다!” 사괴티오르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드래곤의 마법을 받아 투명화되었을 뿐. 헤그는 사괴티오르를 로제나 호수 옆 평원까지 몰아 착지시켰다. 아마도 곧 황도에서 마황의 부대가 신성군에 증원을 해올 것이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때가 늦지 않았다고 해도 증원 활동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애당초 마황과 성황은 견제관계에 있으므로 그들의 증원활동이라고 해봐야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물론 그들은 성황파를 공격한 헤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진 않을 게 분명하다. 사괴티오르를 금세 찾아내 헤그도 잡으려 들겠지. 신성군과 반대로 행동한 루빈 또한. 지금까지 헤그의 활약을 지켜본 하이너는 어째서 그가 도망가지 않고 다시 이곳에 내리는지 궁금했다. 하이너는 헤그가 사괴티오르에서 내리자마자 그에게 뛰어가 외쳤다. 아니, 질문했다. “당신! 목적이 뭡니까?” “목적?” 헤그는 천천히 내려와 하이너와 마주섰다. 하이너를 보는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야울의 군인들만 보다가 오를린 억양을 쓰는 젊은이를 보니 기분이 묘하다.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사괴티오르의 열쇠를 건네줄 때도 그 억양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 자는 자기가 마리니시네의 기사라 하였지? 일개 기사라 하기에는 엄청난 마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가진 힘답지 않게 생긴 것은 소년과 청년 그사이에 있을 정도로 앳되어 보인다. 물론 고작 스무 살인 자신이 누군가를 보고 앳되다고 할 처지는 아니지만. 헤그의 알 수 없는 미소에 하이너는 그를 노려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을 사신처럼 휘날리고 있지만, 그 자색 눈동자엔 어떤 의지도 없어 보일뿐더러 너무 우울해 보였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궁금해서 아가씨 대신 이곳에 왔다고 해도 사실 과언이 아니다. “어째서 아가씨의 부탁을 들어주지? 그 이유가 뭔지 알고 싶군.” “욕정을 풀 생각이었지.” 헤그가 바닥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며 대답했다. 욕정을 풀다? 그 말뜻을 금세 알아차린 하이너가 주먹을 꽉 쥐었다. ‘설마 아가씨께선 또 창녀처럼…!’ 헤그는 그런 하이너를 아이 보듯 재미있어하며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금세 이유가 바뀌더군.” “……?” “단지 놀고 그치기엔 너무 무거운 아가씨야.” “무거워?” 헤그는 그녀가 가진 야심을 떠올렸다. 대륙 정복. 장난 같은 그 말과 결코 장난 같지 않은 준비들. 그는 마리니시네에게 받은 강렬한 인상을 지우며 농담했다. “…… 특히나 쇄골 아래 두 살덩이가 무거운 것 같더군.” “젠장,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 그분의 거기만….” “뭐, 어쨌거나 잠시 도와주려는 것뿐이다. 구경하는 재미가 있으니.” 하이너는 헤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단 하나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이 생겼다. “이미 충분히 도와주었다. 고맙군.” 하이너는 그를 떠날 준비를 했다. 남의 일인데도 괜스레 한숨이 나왔다. 이 사람, 어째서 이곳에 드러누워 하늘만 보고 있지? 도망가야 할 때 아닌가? 이대로라면 아무리 사괴티오르가 투명화된다 해도 마황 증원부대에게 들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자의 목숨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기껏 감옥에서 구출해주었고 이렇게 도망갈 절호의 기회가 있는데도 그것을 스스로 포기하려는 행동이라니. 뭐, 죽든지 말든지 자기가 상관할 건 아니지만. “행운을 빌지.” 하이너는 최소한의 인사 후에 떠났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083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성황 암살 사건으로 제국이 발칵 뒤집혔다. 로젠플라드교에 억압당해왔던 이들은 ‘드디어 신이 제대로 된 심판을 하였다!’며 기뻐했고, 이와는 반대로 자신을 독실한 로젠플라드 신자라 자처하는 이들은 신의 대리인 성황의 죽음을 통탄해 마지않았다. 신자들은 성황파를 살해한 헤그 레 지괴르를 악마라 욕하고 그의 부대 루빈을 악마의 부대라고 비난하며 전원 소멸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계에 거센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이때, 정작 황태자는 한 시름 놓게 되었다. 혹자들은 황태자의 친우가 할데바인, 성황파 등 주요 적을 황태자 대신 제거해주었기에 황태자가 편해졌다고 하면서도, 앞으로는 로젠플라드 신자들이라는 거대 집단이란 숙제가 남았다고 걱정했지만, 원래 주축이 사라진 것들은 금세 와해되기 십상이므로 황태자는 조금도 심려하지 않았다. 그는 차분하게 다른 종교를 위한 정책을 펴면서 자신의 방패를 만들었다. 그의 종교 정책엔 종족, 지역 차별이 없으니 여러 종교가 두 손을 들고 환영했고 그것은 로젠플라드 신도를 무너뜨리는 최고의 무기가 되었다. 그사이 과거 친 할데바인 파를 자처하던 이들이 한둘 씩 황태자의 편에 서기 시작했다. 할데바인이 죽은 당시에만 해도 지괴르 대령에게 쓴맛을 보여준다고 하던 그들은 성황파 암살 사건을 계기로 크게 달라졌다. 그들도 권력의 축이 변하고 있음을 드디어 느낀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할데바인 대공의 조카인 황후와 그녀가 낳았던 어린 황자를 마지막 남은 희망, 권력유지를 위한 도구로 여겨왔으나, 그마저도 여의찮게 되었다. 바너에서부터 떠돌기 시작한 제작자 불명의 영상, 거기에 담긴 황후의 부정한 모습이 원인이었다. 제국민들은 황후를 폐위해야 한다고 소리 높였고 심지어 황후의 치마폭에 놀아난 황제 역시 이젠 물러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친 할데바인 파가 입장을 바꾸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황제는 황태자가 서서히 힘을 얻어갈수록 자신이 물러나야 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황후가 낳은 황자를 폐위하지 않는 조건으로 황제 자리를 황태자에게 물려주겠노라 했고, 그에 관한 작업을 시작했다. 이에 황태자는 이제야 황권다운 황권이 자리 잡을 것 같아 만족했다. 황태자의 권력이 서서히 정립된 덕분에 루빈과 지괴르 대령의 처벌도 이례적으로 가벼운 것에 그쳤다. 루빈은 야울로 귀속되어 비로소 다시 고향을 지키게 되었고, 지괴르 대령은 감옥에 재수감되는 것에 그쳤다. 여론은 ‘할데바인과 신성 정부가 오죽 못났으면 군인이 나서서 그런 짓을 저질렀겠느냐?’며 대령의 편을 들어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론은 여론이고, 군사 재판에선 이야기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군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오직 최고 지휘관의 명령에만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지괴르 대령은 어떤 명령도 받지 않았으면서 독단으로 움직였고 그것은 중죄로 여겨져야 함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 점에 관한 처벌을 가볍게 한다면 앞으로의 군 기강에도 문제가 생기리라. 사람들은 황태자가 아무리 황권다운 황권을 갖추게 되었다고 해도 친우를 비호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여겼고, 황태자도 그 점을 고심하는지 군사 재판 일정이 이런저런 핑계로 자꾸만 늦춰졌다. 그사이 마리 일행은 오를린에 몰래 다녀가고 바너에도 가는 등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황후의 부정한 영상을 륀체르 사파이어 측에 대리 판매해 큰돈을 거머쥐게 되었고, 그 돈은 단 한 푼도 남지 않고 모조리 쓰였다. 돈은 바너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루돌프에게도 조금 돌아갔고, 특별한 가방을 사는 데도 쓰였다. 그 가방은 어떤 물건이라도 다 들어간다는 무한의 가방인데, 그러면서도 무게는 아주 가벼워서 일행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들이 다음에 산 것은 무기다. 마법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하이너와 마리아와 달리, 마리는 누군가를 공격하려면 언제나 스크롤의 힘을 빌려야 했다. 그 때문인지 마리는 자신에게 늘 멋진 지팡이가 필요하다고 했다. 호위기사는 특별히 누군가를 공격할 일도 없는 아가씨가 그런 무기를 손에 쥐는 것을 처음에는 못마땅하게 여기며 ‘마력 방어가 되는 망토나 사시라.’고 조언하였으나, 고집불통 마리는 ‘방어라면 훌륭한 기사가 있으니 괜찮고 그 지팡이를 꼭 사야 한다.’고 우겼다. 지팡이를 손에 넣은 그녀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바로 헤그가 있는 감옥이었다. *** 사막 야울. 사자의 무덤. 무더운 밤, 건조한 모래바람 사이로 굉장한 마기가 흘러들어왔다. 그 마기의 주인공이 드래곤이란 것을 아는 것은 드래곤의 기에 약한 동물들 외엔 별로 없으리라. 이곳은 루빈의 북쪽을 지키는 부대가 주둔한 곳으로, 지하 감옥엔 헤그가 수감 중이다. 황태자는 친우가 황도 감옥보다 자신의 관할 지역 감옥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게 더 편하다고 판단해 이곳에 가게 했다. 예전처럼 헤그에게 모진 고문은 가해지지 않는다. 감옥 전체를 지키는 이들은 모두 헤그의 부하들이었고, 그들은 지극정성을 다 해 옛 지휘관을 모셨다. 황태자 대리인은 헤그에게 사치스럽다 할 정도로 많은 혜택-의복, 음식, 때론 창녀-을 주었고 헤그는 저택에서 지낼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누리고 지냈다. 곧 치러질 군사 재판만 아니라면 그의 일상은 완벽한 휴식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오늘도 그는 사막의 모래를 빻아 만든 물감으로 그림에 열중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붓은 마치 오랫동안 그림에 몸담은 자의 손처럼 능숙했다. 일평생 그림이란 걸 그려본 적 없던 그의 솜씨치고는 굉장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리는 족족 심기가 불편해졌다. 누구를 그려도 자꾸만 약혼녀의 얼굴이 되어가는 것만 같다. 모래로 만들어진 물감의 특성상 표현할 수 있는 색이 황색 계열뿐인데도 도무지 황색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림 속 인물의 눈동자를 응시하면 사괴탄의 음울한 청색 눈동자가 보이는 듯했고, 쇄골의 목걸이를 보고 있으면 자신이 약혼 전에 선물한 푸른 보석이 보이는 듯했다. 그런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화판을 몇 번이나 엎어버렸다. 감옥 안의 공기가 제법 후텁지근해졌다. 대륙 최북단인 지역의 지하 공기가 이러하다는 건 여름이 온다는 증거. 그가 새로운 그림에 열중하는 그때, 누군가가 후텁지근한 공기에 상큼한 향기를 뿜어내며 감옥에 침입했다. 침입에 앞서 감옥 관리자들은 이미 모두 잠이 든 상태. 헤그는 이런 방식으로 감옥에 오는 이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중얼거림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미치광이 아가씨군.” 등 뒤에서 꽃 같은 향기와 함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어째서 나를 미치광이라 부르는 거죠?” 헤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형체는 볼 수 없지만, 그림자가 그녀의 존재를 증명해주고 있다. 기다랗게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풍성한 드레스, 한 손에 든 기다란 지팡이. 그림자로 보면 날씬한 마녀라도 찾아온 것 같지만, 헤그는 방문자가 마리니시네임을 알았다. 마리는 헤그에게 공격이라도 할 듯 지팡이를 장난스럽게 휘둘렀다. “숙녀에게 그런 말은 실례라고요! 이얏! 얏!” 그녀의 익살에 헤그의 입가가 씩 올라갔다. 그의 손에서 붓이 내려갔다. “미치광이를 미치광이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부르지?”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한층 더 생기 어린 꽃처럼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앞으로는 대 마법사 마리니시네라고 불러줘요.” 헤그는 어쩐지 그녀가 우스웠다. “마력이 있긴 있는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지팡이가 내 명성을 만들어줄 거라고요!” “도구를 지나치게 믿는군.” 헤그가 감옥 한 편에 앉자, 마리가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아서 뒤늦게야 안부 인사를 했다. “잘 지냈어요? 황궁 감옥에서보단 얼굴이 더 나아진 것 같은데?” 헤그는 깔끔하게 면도 된 턱을 만지작거렸다. “보다시피 예술가 행세하면서 잘 지내고 있지.” 마리의 시선은 그가 그린 그림들에 향했다. “싸움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그림도 제법 잘 그리는군요. 페이르메르(예술의 신이자 가장 완벽한 용모를 지닌 자. 신화에 의하면 미의 남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의 작품이라 해도 믿겠어.” “과찬이군.” 그림을 다 구경한 마리가 정말 묻고 싶은 것을 물었다. “당신, 어째서 그때 도망가지 않았죠?” 바람에 누운 풀처럼 기력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글쎄.” 여러 가지 추측이 날아들었다. “당신이 도망가버리면 당신 부하들이 전원 소멸형을 당할까 봐?” “그런 걸 염려할 정도로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은 없는데.” “당신이 도망가버리면 황태자의 처지가 난처해질까 봐?” “그만큼의 우정이라 할 수도 없고.” 마리는 여기저기 흩어진 화판과 종이를 보며 알 것 같단 미소를 흘렸다. 이런 어두침침한 곳에서 마법광구 하나 달랑 켜놓고 죽은 약혼자의 모습만 진탕 그려대는 그에겐 감옥이든 아니든 세상 모든 곳이 지옥이나 마찬가지겠지. 도망이 의미가 없으니 가지 않은 것일 뿐. 마리는 그를 가느다란 눈으로 흘기듯 보다가 씩 웃었다. 헤그가 마리에게로 고개를 천천히 돌릴 때였다. 갑자기 마리는 그의 다리 사이에 손을 가져갔다. 헤그의 고개가 멈춰버렸다. “……?” 그는 천천히 제 바지춤을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손이 남자의 중심을 뱀처럼 감싸며 어루만지고 있었다. 헤그는 천천히 시선을 올려 마리를 보았다. 마리의 고개가 숫자를 세는 듯 끄덕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스물하나. 그녀는 헤그의 중심에서 손을 떼고 팩 토라진 얼굴을 했다. “뭐야! 실망이네!” 헤그는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무엇이 실망이지?” “보통 열을 세기 전까진 서던데. 남자란 족속들이 말이죠.” “…….” “혹시 성황을 죽이면 내가 자준다고 한 거 기억나요?” “그랬던가.” “이거 봐. 기억도 못 해. 사실은 날 안고 싶지도 않은 거였어.” “안길 생각이나 있었나?” “그건 당신의 반응에 따라 다르다고요! 왠지 당신처럼 반응이 없으면 더욱 욕구가 솟지만…… 뭐, 어쨌든 이건 이거대로 찝찝하군요.” “찝찝할 게 대관절 뭔가.” “흐으음. 당신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내 부탁을 들어준 것 같아서 말이죠. 빚지는 기분은 싫은데.” 헤그는 담담히 시선을 내려 제가 그린 그림들을 보았다. 빚지는 기분…이라.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얼마든지 빚을 지고 살아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데 희한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리가 만질 땐 별 반응이 없다가 이제야 서서히 몸이 반응하는 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며칠 전 황태자 대리인 측에서 보낸 창녀를 그냥 돌려보낸 것이 실수인 듯하다. 헤그는 끓어오르는 열기를 성가신 감각으로 취급하며 이를 악물었다. 마리는 헤그에게 성황을 죽인 것의 보답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얼 원해요? 보답할 수 있는 선에서 보답하고 싶은데. 이번에도 탈주를 도와줄까요? 당신, 군사 재판 잘못 되면 죽을 수도 있다는데. 죽는 건 차라리 좋지. 영혼 소멸형까지 당할 수도 있다고요.” 헤그는 자기가 그녀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엉뚱한 말들만 나왔다. “사 년 전으로 되돌려주겠나?” “무엇을요?” “시간.” “불가능하군요.” “그럼 그녀를 살려줄 수는?” “불가능해요.” “그럼 내 기억을 지워주는 건?” “어째서 그렇게 불가능한 것만 묻죠?” 제아무리 모든 것이 가능하단 것처럼 구는 마리라도 불가능한 건 존재했고, 그런 것만 골라 묻는 헤그가 그녀는 미웠다.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건가요?” “알았다면 그만 가보는 것도 좋아.” 헤그는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마리는 심통이 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처음으로 이런 감옥 같은 장소가 그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답한 남자! 오직 사랑하는 이가 다시 살아나기만을 바라는 바보 같은 자! 이 자에겐 살아가는 의미라곤 오직 벌, 그것도 자기가 자신을 괴롭히는 벌밖에 없어 보인다. 무엇이 그렇게 벌 받을 일인지. 사랑하는 여자를 잃어야 하는 게 그리도 자괴할 일인가? 사괴탄을 소멸시킨 것이나 다름없는 마리는 헤그의 이런 행동들이 몹시 불편했다. “당신, 혹시 죽지 못해 사나요?” “…….” 침묵은 긍정의 대답이 되었다. 조심스러운 제안이 나왔다. “그렇다면 내가 죽여줄 수도 있는데.” “죽음? 그녀의 영혼마저 사라진 지금 내가 죽어선 또 뭘 하지?” 마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답이 없는 인간이군요.” 마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지팡이를 잠시 매만졌다. 그러더니 그 지팡이로 헤그가 그린 그림들을 모조리 순간 발화시켰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모조리 재가 되어버린 그림들에 헤그가 쓴웃음 지었고, 마리는 가슴 속에서 뭔가를 꺼내 그에게 던졌다. “이건 내 드래콘의 인이에요.” “이걸 어째서 내게 주지?” “내겐 이제 드래콘은 필요 없으니 당신에게 주겠어요. 성황을 죽인 대가라고 해둬요. 어쨌든 그것으로 탈주를 할 때든 도피 생활을 할 때든 유용할 거예요. 탈주할 마음이 없다면 버려도 좋아요. 그래도 이왕이면 나쁜 놈들 손에 들어가지 않게 드래콘 그 아이에게 직접 전해줬으면 좋겠네요. 그럼 난 이만.” 마리는 감옥에서 걸어나가다가 문득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조언을 해주었다. “고작 스무 살. 당신은 과거에 연연하는 데 시간을 쓰기엔 너무 젊어요. 이런 어두침침한 일에 시간을 쓸 바엔 차라리 내 일행이 되는 걸 권하죠. 어차피 죽어도 의미 없을 몸이라면 좋은 일에 쓰는 것도 괜찮지 않나?” *** 감옥 밖, 지상에선 그녀의 호위기사와 드래콘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리가 굴종의 인을 헤그에게 주었다고 해도, 헤그가 그것을 쓸 의지가 없으니 마리아는 여전히 마리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마리는 자신의 주인이 형식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정말 바뀔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었다. “아가씨.” “응, 하이너.” “그자는 그것(굴종의 인)을 받았습니까?” “받았지만 쓸 것 같진 않더군.” 그들은 무더운 모래바람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감옥이 보이지 않는 지점까지 다다르면 하늘을 날아 마법의 땅 루앙에 갈 예정이다. 마리가 갑자기 궁금한 것을 물었다. “하이너.” “예.” “너는 내가 죽음 아니, 영혼마저 소멸이 돼 버리면 어떻게 할 거야?” 하이너는 그런 질문을 하는 아가씨를 이해할 수 없었다.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도 마리를 이해하지 못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죽는 것도 끔찍한데 영혼마저 사라진다니. 환생의 여지도 없는 일은 끔찍하다. 주인은 어째서 자신이 영혼마저 소멸되는 일을 상상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마리아는 어쩐지 앞으로 나올 기사님의 대답이 기대된다. 호위기사가 까칠한 대답을 내놓았다. “쓸데없는 질문 하지 마십시오.” “말해봐. 대답이 듣고 싶어.” “아가씨의 비싼 물건들을 모조리 팔아 월급을 되찾겠습니다만.” “어머! 농담은 싫다!” “진담입니다만.” “진짜?” 하이너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가씨의 육체는 물론이오, 영혼마저 소멸한다면? 과연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가 있으려나? 하나뿐인 가족인 마르틴이 하늘로 간 후, 자신에겐 의지할 사람이라곤 오직 아가씨밖에 없다. 아가씨께서 세상을 뜬다면 아마 자신도 아가씨를 따라 갈지도 모르겠다. 아니지. 따라 간다 해도 아가씨의 영혼이 소멸되었으니 만나지 못할 텐데. 살든 죽든 모두 지옥이려나? “아가씨의 영혼이 소멸된다 해도…… 저야 살아가겠지요.” “흐음.”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여기면서 말입니다.” 마리는 어깨를 떨며 외쳤다. “오우! 끔찍하군! 나는 절대 소멸당하지 말아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사막의 모래바람이 지옥의 유황불처럼 뜨겁게 불어 그들의 머리카락에 섞였다. 하이너의 마지막 말을 들은 마리아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졌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084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무슨 일이 있어도 소멸당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아가씨를 보며 하이너는 픽 하고 웃었다. “쓸데없는 상상 좀 하지 마십시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아가씨가 소멸당하는 걸 제가 마냥 구경만 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마리는 그런 호위기사가 든든했다. “어머! 명색이 호위기사라 이거니?” 하이너는 대답 대신 그저 걷기만 했다. 마리아 앞이라서 더 낯 뜨거운 말은 하지 못하지만, 아가씨는 호위기사가 얼마나 특별하게 아가씨를 생각하는지 좀 아셔야 한다. 자신은 호위기사이긴 한데, 단지 그것만으로 아가씨를 지키는 것은 아니다. 아가씨는 분명 말씀하셨다. 함께 여행해주면 창녀이자 애인이 되어주겠다고. 창녀야 마음만 먹으면 얻을 수 있지만, 애인은 다르다. 애인은 시간과 운명이 만들어주는 것이므로 쉽게 얻을 수도 없고 그러므로 쉽게 잃어서도 안 될 존재다. 애인이 소멸당할 위기에 처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남자는 없잖은가. “우리 하이너 덕분에 참 든든해. 그렇지, 마리아?” “…….” “어머, 지지배. 한 번이라도 ‘예!’하고 대답하는 걸 못 본다니까.” “맙소사! 이 못된 입 같으니. 지지배가 뭡니까! 지지배가! 품위 있는 말을 좀 쓰라고 그렇게 일러드렸거늘!” “잔소리꾼 기사님 또 시작이군!” 마리아는 먼 데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시끌벅적한 대화가 바람 소리보다 더 흐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마리, 하이너. 그들을 묶는 견고한 끈이 있다. 그 끈은 플래티르콘으로 만들어진 듯 굉장히 강하고 끈끈하다. 그 끈 안에 한낱 마력 생물 따위는 절대 들어갈 수 없을 테지. 마리아는 일행이지만, 일행이 아닌 듯 외떨어진 기분을 느껴야 했다. 이제 주인 마리니시네에게 드래콘이라는 존재는 뭘까. 탈것으로의 가치가 남아있긴 하지만 그 외에는? 어찌 됐든 그녀의 드래곤 호위기사보다 못한 존재겠지. 그러니 지괴르 대령에게 굴종의 인을 줘버린 거 아닌가? 마리니시네는 지괴르 대령이 굴종의 인을 쓰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지만, 마리아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어쩌면 언젠가는 이들을 스스로 떠나야 할지도. 루돌프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 황도 로귀하르트. 트리아노네. 수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황후가 정원사와의 부정한 일로 조용히 폐위된 후, 그녀의 봄 별장 트리아노네의 주인은 순식간에 황태자비로 바뀌었다. 황태자비는 트리아노네를 여름 별장으로 쓰면서 수인들을 모조리 치워버렸다. 태동을 느낄 때부터 몸이 심상치 않았다. 그 때문에 황의는 로테에게 절대 안정을 취하라 하였고, 로테는 이곳 트리아노네에서 시녀들과 정원을 가꾸고 자수를 놓으며 지냈다. 언뜻 보면 평화로운 시간 같아도 전혀 그렇지 않다. 남편인 황태자의 권력이 공고하게 다져질수록 그녀는 불안하기만 했다. 예전에는 참 한심하게 살았다. 궁이 돌아가는 사정에는 귀를 닫은 채 그저 하녀 렌을 괴롭히며 향수나 바꿔오게 하고, 외모나 가꾸는 데 바빴으니 말이다. 하지만 몇 번의 힘든 일을 겪은 뒤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새는 정원을 가꾸고 바느질을 하면서도 궁이 돌아가는 일, 궁의 보이지 않는 적들을 살피느라 나름대로 바빴다. 황태자비가 되기 전, 간택 연회 때였던가. 그때 포르투바라는 작자의 무리가 있었다. 친 할데바인 세력의 그들은 무슨 사촉을 받았는지 오를린에서 올라온 후보를 마구 험담해댔고, 그래서 로테를 신경 쓰이게 했다. 당시 포르투바는 ‘오를린 촌뜨기가 드래곤에 사주하여 쌍둥이 언니를 없애버리고 그 언니 대신 황태자비 후보가 되었다! 고로 그녀는 가짜 후보다!’라는 소문을 거침없이 흘려댔다. 예전의 로테는 황태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만 미쳤기에 그들을 무시했으나,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런 불행의 씨앗을 내버려두면 언젠가는 또 곤란한 일에 휘말리고 마는 게 이 궁의 생리 아니던가. 하여 로테는 시녀들과 시녀들이 가진 인맥을 이용해 포르투바의 약점을 캤다. 포르투바는 할데바인 세력이 와해하는 지금도 당당히 황궁 연회에서 얼굴을 내밀었고 황태자 측과도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황태자비에 관한 악질의 소문을 흘린 그들이 대체 무얼 믿고 아직도 황궁에 뻔뻔하게 나타나는지 로테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정원의 웃자란 가지를 자르며 로테는 시녀에게서 포르투바에 관한 보고를 들었다. “포르투바의 출생지는 플래티르콘의 날개 아래라고 합니다.” 로테는 플래티르콘의 날개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포르투바가 마력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날개 밑에서 태어났다는 소리로만 들렸다. “플래티르콘의 날개? 무슨 말이야? 거기가 어디지?” 시녀는 로테에게 당황했다. “그, 그 왜 있잖습니까. 빈곤한 이들이 모여 있다는.” “아. 빈민촌인가? 그럼 빈민촌이라고 알아듣기 쉽게 말해야지. 어쨌든 그래서?” “포르투바는 집안도 자금도 어느 하나 내세울 게 없는 거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특함을 알아본 귀족이 그를 후원하였고, 덕분에 그는 훗날 제국 기술원 수석이 되었습니다. 현재 그는 마나와 과학의 결합 현상을 연구하는 데 일인자라고 합니다. 기갑체 공학 분야에서 따라올 자가 없단 뜻입니다. 그는 홀디네 본이 소유했던 공정보다 더 섬세하고 발달한 공정을 사 년 째 제작 중이라 하며, 또 그의 부인은 로샤타르트에서 알아주는 대부호로…….” 로테는 자기가 쳐낸 가지들을 잔디 위에 차곡차곡 올려두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공부벌레가 제 기술 하나 믿고 나를 음해했단 거야? 건방지군.’ 그런데 갑자기 정원 밖에서 부산한 기척이 나더니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잔뜩 화가 난 얼굴의 황태자는 언제나 그렇듯 모두를 물려버렸고, 로테는 무거운 몸으로 그의 앞에서 예를 다 갖춰 인사했다. 시종이 탁자 의자에 방석을 깔고 자리를 비우자, 황태자는 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탁자 여기저기에 묻은 흙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고작 정원 손질을 하는 거면서 참 요란하게도 하는군.” 장갑을 낀 그의 손은 탁자 위에 떨어진 흙을 천천히 치웠다. 로테는 살짝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남편의 눈동자는 언제나 얼음으로 만들어진 바위처럼 음울한 회색을 띠고 있다. 로테는 이런 여름에도 가슴이 시렸다. 저이는 왜 왔을까. 평소 욕정을 해소하러 올 때 외엔 전혀 방문하지 않던 사람이었고, 게다가 지금은 정무로 바쁠 시간이다. 흙을 다 치운 황태자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아주 쓸데없는 일을 했더군.” 로테는 남편의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황태자가 장갑을 벗어 던지며 고개를 젖혔다. 그리고 아내를 한심한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네가 남 출신 따위를 알아서 다 무얼 하지?” “전하, 무슨 말씀인지….” “시치미 떼지 마라. 시녀들을 시켜 황궁연회에 나오는 이들의 뒷조사를 하는 걸 다 알고 있다.” “저, 그게….” “포르투바는 실렌틴 광산에 있었던 공장보다 더 좋은 공장을 완성하는 데 누구보다 큰 힘이 되는 작자다. 그런 중요한 인간을 어째서, 네가 무슨 권리로 건드리지?” 로테는 이제야 황태자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알 것 같았다. 실렌틴 광산의 마력기갑체 부품 공장이 망가진 지금, 그 공장보다 훨씬 뛰어난 공장을 누구보다 빨리 재건하는 데 꼭 필요한 인물이 바로 포르투바다. 기갑체 부대를 거느린 세력들에겐 포르투바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그것은 루빈의 최고 지휘관인 황태자도 마찬가지다. 현재 황태자는 파격적인 조건과 신분 상승을 미끼로 포르투바를 매수하려 애쓰고 있었다. 단지 로테가 그 점을 몰랐던 것뿐이었다. 그런 사정을 알기엔 그녀는 이제 막 궁을 알아보려 하는 병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얌전히 정원이나 다듬으라고 했더니….” 어째서 시키지 않을 일까지 나서서 하느냐고 힐난하는 것 같은 황태자의 표정에, 로테는 차분히 눈을 내리깔며 솔직히 대답했다. “궁은 얌전히 정원만 다듬고 있기엔 위험한 곳이잖습니까.” “그런 곳을 선택한 건 바로 너다. 설사 위험이 닥친다 해도 그것은 내 소관이지, 네가 나설 게 아니다.” “전하.” “말해라.” “포르투바 그 자는 한때 저의 명예를 더럽혔습니다. 그들은 간교한 할데바인과 마찬가지로 저를 악녀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냥 참아야만 합니까? 적어도 그의 약점 하나쯤은 잡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티를 내지 말았어야지. 만천하에 나는 저자의 약점을 캡니다, 하고 알리면서 캐? 대관절 포르투바 그 작자의 기분을 거슬려 뭘 얻지? 네가 그러니까 촌뜨기 소리를 듣는 거다.” 황태자는 이제 아내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이기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이미 예전부터 그에게 상심했던 로테는 이제 와 충격적일 것도, 더 아플 것도 없었다. 다만 조금 빈정거리는 식으로 항의해 볼 뿐이었다. “그래서 체면이 상하셨습니까? 무엇하나 두려워하지 않는 당신도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쩔쩔맬 때가 있군요.” 황태자는 그 소리에 어이가 없었다. “하! 무엇하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그건 멍청이들이나 하는 소리지. 이 자리가 그냥 지켜지는 줄 아는가?” “존엄과 정의와 품위로 지켜지는 줄 알았습니다. 겁내고 조급해하고 구차해지면서까지 지켜지는 자리인 줄은 몰랐습니다.” 듣다 못 한 황태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아내에게 다가가 그녀의 멱살을 쥐었다. “뭐라? 존엄과 정의와 품위? 궁에서 뜬구름 잡는 말들만 배웠나 보군. 이곳은 네가 꿈꾸는 곳처럼 그런 명예로운 곳이 아니다. 언제나 두려워하고 남들보다 빨라야 하며 악해야 하지. 너는 그런 자리에 네 발로 찾아온 거다. 그래서 너도 포르투바의 뒤를 캐려 한 것 아닌가? 촌뜨기라는 별명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당장 궁의 역사부터 배워야 할 거야. 여태 살아남은 이들의 ‘고고함’을 말이지. 이제 그만 너의 눈치 없는 실수에 사과나 하지그래. 감히…….” “…….” “감히 이 내게 품위를 운운하다니.” 그는 아내를 패대기치듯 손에서 놓았다. “아!” 로테가 쓰러지면서 잔디 위에 차곡차곡 쌓였던 나뭇가지도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붉은 여름 장미 위에 쓰러진 로테가 배를 움켜잡고 고통의 신음을 흘렸다. 황태자는 구겨진 옷을 정리하며 그녀를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듣자하니 그놈의 복통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더군.” 그래서 황의가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하라 하였다. 로테는 그 절대적인 안정을 방해하는 게 바로 당신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런데 황태자의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소름 끼치게 악의적이었다. “하찮은 몸 같으니. 그 안에서 자라는 핏덩이도 빤하겠지.” “전하……?” “뭐, 태어나기도 전에 없어지는 것도 편한 방법일 테지.” 한여름 장미의 가시보다 더 날카롭고 독한 말에 로테는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녀의 눈물이 흐르든 말든 황태자는 정원을 나섰다. 시키지도 않은 남 뒷조사를 하질 않나. 황손을 밴 몸이면서도 툭하면 아프다니. 저럴 거면 차라리 황태자비라는 존재는 없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소문에 의하면 황족 측(황태자비)이 뒷조사한 것에 마음이 상한 포르투바가 황궁에 발길을 서서히 끊고 바너 최고의 금권과 손을 잡아 기갑체 생산 공장을 재건하려 한다는데……. 짜증스럽게 혀를 찬 황태자는 뒤따라오는 정무대리인에게 지시했다. “그자가 리데바인(할데바인의 수도)을 달라고 하면 줘. 황의회 10인의 기사 자리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줘버리라고…… 단.” 그는 걸음을 멈추고 정무대리인의 눈을 마주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자가 바너와 기술 협력을 하겠다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중요 군사 공장이 일개 부호의 손에 넘어간다는 것은 제국의 체면이 상하는 일이지.” “알겠습니다!” 황태자는 마력기갑체 부품 생산 공장, 그와 관련된 모든 권한을 얻기 위해서라면 포르투바에게 자기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줄 수 있었다. 그만큼 기갑체 부대의 효용과 의미는 크다. 시도 때도 없이 자기가 황권입네 하고 으스대던 할데바인이 죽었고, 그 할데바인에 붙어 신권으로 군림하며 제국민의 우상으로 살던 성황도 죽었다. 이젠 자신이 황권, 신권, 군권 모두를 장악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력기갑체의 심장을 손에 넣는 일이야말로 당장 해두어야 할 일이다. 야울 궁으로 돌아온 황태자에겐 군사재판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황 암살 사건으로 황도가 발칵 뒤집혔고, 황태자는 암살 사건의 중심에 있는 지괴르 대령을 구하고자 친히 쟁쟁한 변호인단을 꾸려주었는데 그 결과가 드디어 나온 것이다. 황태자는 많은 이들의 비난을 감수하고 친우를 감싼 그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매우 기대되었다. “전하, 그것이….” “아직은 말하지 말게.” 황태자는 몹시 피곤한 얼굴로 침소로 걸어가 침대에 누웠다. 시녀들이 빙 둘러서서 그의 신발, 겉옷, 장신구 등 모조리 벗기기 시작했다. 속옷 한 장만 입은 그에게 궁 마법사가 와서 정화 마법을 걸어주었고, 안마사가 와서 그의 깨끗한 몸을 안마해 주었다. 피곤함에 찌든 몸이 따스하고 단단한 손길에 녹진하게 풀렸다. 황태자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기분 좋은 탄성이 낮게 흘러나왔다. 그가 편안한 얼굴을 하면 할수록 보고인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안마가 끝나고 황태자는 시녀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시녀가 얇은 여름용 이불을 황태자의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 보고인이 작게 헛기침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가 시작되었다. “변호인단이 주력한 건 암살 사건 당시 지괴르 대령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는 루빈의 지휘관이 아니라 할데바인을 암살한 죄명으로 수감 돼 있다가 무단으로 탈옥한 다중 범죄자의 신분이었고, 그런 고로 그가 성황을 죽였다 해도 군사 재판 판례대로 처벌받기엔 무리가 있다고….” 황태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자신이 보낸 변호인단이 얼마나 애를 썼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결론은?” 보고인은 딴소리만 했다. “지괴르 대령이 군인 신분이 아니기에 그의 명령으로 움직인 루빈도 군사 재판 판례로 처벌할 수 없고, 따라서 그들은 무죄. 즉 지금처럼 야울을 잘 지켜주는 것으로 끝나면 됩니다만….” “그 녀석에게 내려진 판결이나 말해.” 보고인은 보고서를 손에서 내리고 접으면서 한참을 뜸 들이다가 말했다. “국사범에다 탈주자의 신분으로 신의 대리인을 죽인 죄. 헤그 레 지괴르에게는 사형이 내려졌습니다.” 황태자는 눈을 감았다. ============================ 작품 후기 ============================ 어제 무슨 일인지 선작이 다른 날보다 아주 많이 붙었습니다. 주말도 아닌데 말이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0085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소감이 나왔다. “그것참 다행이군.” “예, 전하?” “다행이야.” 친우가 사형을 당하는데 다행이라고 하는지, 보고인은 황태자의 심중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황태자는 그 어느 날보다 편하게 오수에 들었다. *** 황도 로귀하르트. 지괴르 대형의 사형이 거행될 대광장. 지글지글 끓는 뙤약볕에 대기가 기력을 잃어 매우 건조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수놓는 하얀 새 무리가 있다. 여름만 되면 이 근방을 지나가는 그 철새의 이름은 ‘플라그메’로, 원래 이름보다 하늘의 구름이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린다. 플라그매의 날개는 여인의 새하얀 치맛자락 같다. 날개 깃털이 버들잎처럼 축 처져 길게 늘어지는데, 그 날개가 하늘을 수놓을 때면 사람들은 하늘의 구름이 대지에 가림막을 친다고 표현했다. 오늘은 하늘의 가림막이 잔뜩 쳐 있다. 열을 이루어 일제히 북쪽으로 향하는 플라그메 무리를 보며 헤그는 문득 저런 새 한 마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어떤 과거도 잊을 수 있고 그 누구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죽음 후, 이 작은 소망이 이뤄질지도 모르겠다. 광장 가운데로 걸어갈수록 다른 사형과는 다르단 게 느껴졌다. 로젠플라드를 상징하는 푸른 옷의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다. 사람들은 어떠한가. 신의 대리인을 죽였다는 것에 공분하는 모습이 없다. 돌을 던지는 이도 없고, 신을 저버렸다고 비난하는 이도 없다. 아마도 황태자가 이곳에 로젠플라도 신도가 오는 것을 철저히 막아준 덕분이리라. 사형대를 앞에 두고 걸음을 멈추자, 법관의 목소리가 엄중하게 외쳐졌다. “헤그 레 지괴르는 국사범의 신분으로 감옥을 탈주, 종교계 관계자를 살해한 혐의로 제국법에 의해 사형에 처한다.” 단출한 말이 헤그는 마음에 들었다. 성황을 신의 대리인이라 하는 대신 종교계 관계자라고 한 것에도 안도했다. 한 제국을 주름잡던 종교가 격하된 것을 보아하니 벌써 친우의 영향력이 느껴졌다. 친우의 미래는 아마도 밝을지도. 헤그는 담담하게 교수대 위로 걸어갔다. 법관 두 명이 양쪽에 서서 기도문을 외웠다. 특정한 종교에 기댄 기도문이 아니라 무교인들을 위한 것이다. 주로 헤그의 영혼이 구원받았으면 한다는 내용이다. 구원을 믿지 않고 원하지도 않는 헤그는 조용히 눈을 감을 뿐이다. 보여주기 식의 성가신 절차들이 끝나고 그의 목 앞에는 살상용 무기 대신 밧줄이 내려왔다. 그것을 본 헤그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이왕이면 깔끔하게 총살이 좋겠다고 했더니 결국에는 교수형이다. 친우의 의도를 알 것 같다. 깔끔하게 죽어버리는 모습보다 교수형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기엔 더 효과적이다. 아마도 앞으로 펼쳐질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은 숭고하게 포장되겠지. 그러면 성황 무리를 포함 로젠플라드에 향한 대중의 반발심은 더욱 커질 테고. 친우는 그것을 이용하여 남은 적들을 정리할 모양이다. 밧줄이 내리자 고요하던 광장 여기저기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대령의 영혼이 반드시 부활하도록 기도하겠다는 것과 대령에게 사형을 내린 것은 재판관의 실수라는 말들. 그리고 저 멀리서 아만카이트 중령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군인이 눈물이라니, 헤그는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태어나 한 거라곤 한 여자를 사랑한 것과 전쟁밖에 없는데 이제 와 이런 영웅 대우를 받으니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얼른 이 숨이 다 하면 얼마나 좋을까. 턱을 들고 밧줄의 까슬한 감촉을 느끼는 그 찰나. 솨아아… 솨아아아……. 하늘에서 새하얀 것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헤그는 눈을 떠 하늘을 보았다. 플라그메 수천 마리가 술에 취한 듯 하늘을 비틀거리며 날았다. 이게 대체 무슨 현상일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일제히 북쪽을 향하던 새들이었다. “모두 피해!” “왜 이러는 거야!” 그들은 알 수 없는 기운에 휘말려 서로 부딪히다 저절로 땅에 떨어지기도 하였다. 플라그메가 수직으로 떨어지면 그 파괴력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사람들은 흩날리는 깃털 비 사이에서 몸을 피하느라 바빴고, 법관들은 헤그를 데리고 어딘가로 잠시 피신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플라그메 사이에서 갑자기 한 생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에에에에에, 구라아아아아, 그에에에에! 포효 소리는 위협적이었다. 그런데 모습은 더 위협적이다! 하늘을 향해 위협적으로 뻗은 은색의 뿔, 그리고 진줏빛 비늘의 몸체! 그 거대한 등에서 뻗어나는 드래곤의 날개! 그것은 마력 생물 드래콘이 분명하다! 법관들이 그것을 보고 서둘러 황궁 마법사를 소환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드래콘의 선홍빛 눈이 반짝이더니 헤그를 잡던 사람들이 모두 기절하듯 쓰러졌고, 원거리 무기를 들고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풀처럼 쓰러졌다. 헤그 역시 깃털 사이에서 눈을 감았다. 깃털은 안개처럼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헤그의 의식도 안개가 되는 듯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단 한 번도 굴종의 인을 쓰지 않았는데 드래콘이 왔다는 것은, 그리고 드래콘이 자신을 구출한다는 것은, 분명 그 미치광이 아가씨가 멋대로 구하게 지시를 내린 것이리라. 믿지도 원하지도 않는 구원이 이런 식으로 떠들썩하게, 왔다. *** 로귀하르트와 야울의 접경 지역. 일 층짜리 낡은 여관. 마리는 이곳을 통째로 빌려 일행의 거처로 쓰고 있었다. 웬만하면 아무 데서나 지낼 수 있는 호위기사와 드래콘과는 달리 그녀는 언제나 집이나 여관 형태의 거처를 원했기 때문이다. 마리는 지금 마리아를 통해 륀체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륀체르의 태도가 까칠하다. 왜일까. 최근 기갑체 부대를 가진 세력 사이에서 투자 교섭에 한창이고 마력 기술자 포르투바를 데려오기 위해 대리인을 내세워 황태자와 신경전을 벌이느라 바빠서 쉬질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리가 친분을 빌미로 또 어마어마한 돈을 요구해서? [이봐, 마리니시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너구리 조카딸(폐위된 황후)의 영상만 해도 어마어마한 가격을 쳐줬다고. 그런데 또 그 빌미로 삥을 뜯으려 해?] 마리는 ‘삥 뜯는다.’는 표현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륀체르 사파이어의 입버릇이야 더러운 것은 알지만, 아무리 그리고 ‘삥 뜯는다.’는 너무 한 거 아닌가? 자신은 그런 날강도가 아니다. “어머! 뻔뻔하셔라! 자그마치 제국 안주인을 바꾸었던 자료인데 고작 4억 자일이 말이 되나요? 나는 그거 1부 지급인 줄 알았고, 10부 지급까지 있다고 아는데? 그러니 얼른 지원 좀 부탁합니다. 저는 이동 스크롤이 몹시 필요하거든요.” 1부에 4억 자일이라면 10부에 40억 자일? 기가 찬 륀체르가 빈정거렸다. [차라리 내 뼈를 삶아 드시오.] 마리는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애교를 부렸다. “아잉, 륀체르… 정말 이동 스크롤 지원 안 해줄 거야?” [내가 너 뭐가 예쁘다고 그 비싼 걸 지원해야 해?] “흐아앙, 나 운다? 정말 이러기야? 밉잖아앙…….” 마구 퍼붓는 저렴한 애교에 하이너가 치를 떨었다. ‘아가씨는 정말이지 오를린 여자의 망신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애교를 듣는 륀체르의 가슴은 현악기의 현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뭐, 뭐지? 이 푼수가 지금 나한테 애교를 부린 거야? 그런 거야?…… 귀엽잖아! 젠장!’ 마리는 말이 없는 륀체르가 이동 스크롤 지원을 해주지 않을 거란 생각에 시무룩해져 마지막 인사를 했다. “피이, 싫으면 관….” [잠깐.] “응?” [지원해주지.] “오! 역시 륀체르 사파이어뿐이야!”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륀체르는 조건을 걸었다. [단, 지원을 받고 싶다면 바너에 놀러 와야 할 거다. 지금 당장 말이지.] “후으응?” 마리에겐 지금 어디 놀러 가고 그럴 여유가 없다. 그녀는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기, 으음. 내가 오늘은 좀 바쁘고.” [그럼 내일.] “내일도 좀 바쁜데.” [그럼 모레.] “모레도 좀 바쁜데.” [그럼 그만둬라.] “아니! 아니야! 이거 어때? 길드장 당신 생일이 언제지?” [푸하! 생일에 오겠다는 거냐?] “내 사정도 좀 봐주세요오….” 이리하여 마리는 사파이어의 생일이 다가오는 몇 달 후에야 바너에 놀러 가기로 했다. 륀체르는 비싼 놀이 상대라 투덜거리며 이동 스크롤을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고, 마리는 신이 나서 통신을 끊었다. 그녀가 들뜬 표정으로 마리아의 어깨를 주무르며 부탁했다. “자자, 마리아. 황도에는 륀체르의 연결망이 무려 열 개나 있다고 해. 이곳 북동 쪽 시계탑 뒤의 3층 붉은색 건물도 그곳 중 하나라네. 가서 스크롤 좀 가져다주지 않으련?” 부탁 조지만 이미 마리의 손은 마리아의 머리에 외출용 챙 모자를 씌우는 중이다. “요샌 볕이 장난이 아니라서 이거 써야 한다고.” 마리아는 언제나 그렇듯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곳을 나섰다. 호위기사는 아가씨의 행동에 왠지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마리가 그의 표정에 신경 쓰며 눈썹을 부라렸다. “그 얼굴은 뭐야?” 하이너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가씨가 뻔뻔한 것 같아서 솔직하게 지적했다. “너무 짓궂으시잖습니까. 어차피 하늘을 날아갈 아이입니다. 굳이 챙 모자를 챙겨주실 이유가 뭔지 모르겠군요.” 말인즉슨 필요도 없는 챙 모자를 씌워 보내는 그 행동이 의뭉스럽다는 것이다. 마리는 난데없는 지적에 팽 토라진 얼굴로 하이너를 째려보았다. “그러는 너야말로 굳이 저 아이에게 소년의 옷을 선물해준 이유는 뭐지?” “예?” “못 보던 옷이 보이길래 물었더니 예전에 기사님이 사주었다고 하던데?” 하이너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마리아가 그런 것까지 시시콜콜 마리에게 말할지는 몰랐다. 변명 아닌 말이 변명처럼 나왔다. “아, 그건 어디까지나 그 애가 남자애 행색으로 다니면 몸을 보호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리는 호위기사의 엉덩이를 탁! 때리면서 외쳤다. “괜한 참견이잖아! 마리아는 제 몸 보호 정도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한다고! 말하자면 네가 그런 옷을 사준 거나 내가 챙 모자를 씌워 준 거나 실용의 목적보다는 어디까지나 친애의 의미를 담은 행동 아니겠어? 그런데 너는 어째서 내 행동에만 그렇게 지적을 하지? 응? 넌 가끔 나를 너무 가르치려 한단 말이지….” “…….” 하이너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가씨의 눈을 잠시 보았는데 온갖 감정이 느껴졌다. 드래콘 주인으로서의 자부심, 드래콘에게 옷을 사준 연인의 행동을 살짝 미워하는 마음, 사람을 떠보는 것 같은 짓궂음,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야한 장난기.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던 아가씨의 손이 어느샌가 척추를 쓰다듬고 있었다. 하이너의 시선이 내려앉았다. 마리가 그의 귓가에다 대고 은밀한 질문을 속삭였다. “최근에 많이 쌓이지 않았어?” 그 질문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하이너가 마리의 눈을 보며 이죽거렸다. “무엇이 말입니까? 아가씨를 향한 크고 작은 분노? 아니면 제 밀린 월급?” 마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유혹하는 듯이 굴었다. “우리 금욕적으로 생기신 기사님의 몸에 고이 숨겨둔 욕정 말이잖니.” “아.” “그렇게 멍하게 있을 때가 아니라고. 바쁜 우리에겐 시간이 그다지 없잖니.” “…….” 아가씨의 손은 엉덩이를 돌아서 호위기사의 은밀한 부위를 만지작거렸다. 하이너는 아가씨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참 해맑다. 어쩜 이리 아이처럼 순진무구한 얼굴로 음탕한 연주를 해대실까. “아가씨….” 이런 반응도 이젠 버릇이나 마찬가지. 하이너의 호흡이 금세 가빠졌다. 마리가 잔뜩 달아오른 하이너의 귀에 입 맞추며 제의했다. “침대로 갈까?” 그때 작은 침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나왔다. 새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청년, 흘러내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그는 바로 얼마 전까지 사형수의 신분이었던 헤그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방해해서 미안한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줬으면 좋겠군.” 그가 나오는 소리에 하이너는 금세 아가씨에게서 떨어지며 시침을 뗐다. 마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헤그에게 물 한 잔을 내밀었다. “그게 설명이 필요한 일인가? 죽는 거보다 낫지 않나요?” 헤그가 마리에게서 물을 받아 마시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일행인 하이너를 살피며 대답했다. “나는 분명히 그쪽 일행이 되겠다고 한 적이 없는데.” “일행이 안 된다 해도 당신은 쓸모가 있어요.” “예를 들면?” 마리는 그와 마주 앉아서 두 손으로 제 턱을 받쳤다. 그런 장난꾸러기 같은 자세를 하며 생글생글 웃었다. 하이너는 그런 아가씨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괜스레 창가로 걸어가며 하늘을 보는 시늉을 했다. “대관절 무슨 쓸모지?” 대답을 원한 헤그는 마리를 지그시 보았고, 그러자 탁자 아래 마리의 발이 헤그에게로 뻗었다. 뾰족한 구두를 신은 작은 발은 헤그의 다리 사이에 닿았다. 은밀한 간질임이 시작되었고, 헤그는 이 장난을 희한하게 여기며 입가를 올렸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는 이런 행동이 다 뭐냐고 묻는 듯했다. 대답이 돌아왔다. “이런 쓸모죠. 그러니까….” 마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소리 없이 입만 벙끗거렸다. 이런 거요.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086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그 짓궂은 장난을 호위기사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무례하고 음탕하기 짝이 없는 행동에 잔소리를 한 바가지 퍼붓고 싶었다. 그러나 인내심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손님 앞에서 아가씨를 혼내는 무례한 짓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건 자신의 자존심과도 관련이 있다. 남에게 이상한 아가씨를 충실히 모시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여 하이너는 차라리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모습과 표정 전체에서 삐친 남자의 분위기가 폴폴 풍겼고, 헤그는 어렴풋이 눈치챘다. 이 두 사람이 연인이란 것을. 연인이 빤히 보는 데서도 못된 장난을 하는 아가씨에게 솔직한 평이 내려졌다. “참 짓궂은 아가씨군.” 그런데 마리는 호위기사가 나가버리자 언제 농담을 즐겼느냐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본론을 말하죠. 당신의 쓸모.” “……?” “황도에 복귀해주시죠. 군인으로서 다시 말이에요.” “복귀?” 헤그는 이 여자가 대관절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형수를 멋대로 탈출시켜 다시 군인으로 복귀하게 한다는 게 말이 되는지? “내가 죄인인 걸 잊은 모양이군.” 마리는 앉은 자리에서 의자를 끌어당겨 헤그와 더욱 거리를 좁혔다. “오, 죄인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말! 당신은 사형수에서 마력생물에게 납치당해 생사를 알 수 없는 행방불명자가 되었어요. 당신의 죄도 유야무야 잊히고 말겠죠. 아마 로젠플라드 신도들을 제외한 모두가 그 죄를 묻어주려 할 거예요. 면죄부는 얻은 셈이나 마찬가지라고요. 황도에서는 당신을 수색하려는 움직임조차 없답니다!” “그래서?” “그러니 당신은 다른 죄인들보단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죠. 사자(황태자)의 비호도 받고 있고요. 제법 깊은 우정이라 알고 있는데… 나는 그걸 이용하고 싶어요. 그래서 당신이 필요해요.” “잘 알아듣지 못하겠군.” “지금 당장 사자에게 가서 한 자리 내놓으라 하세요.” 그런 말을 하며 마리는 느긋하게 헤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기다란 붉은 머리는 그의 무기력함을 지울 듯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보이고, 깊은 자색 눈동자는 신비로워 보인다. 새하얀 피부 역시 군인 같지 않고 곱다. 얼굴선도 가느다란 편이라 아직 앳된 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검황가 출신에다 높은 계급의 군인이었다는 점이 놀라울 정도로 꽃 같은 외모. 이를 보고 그 누가 감옥에서 고되게 지낸 사람이라 여기겠는가. 여기에 변화를 가한다면? “코 밑에 점 하나 찍거나 머리카락을 염색해 봐요. 그리고 헤세 레 지괴르가 되는 거예요. 그런 채로 황태자에게 가서 새 계급을 달라고 하는 거죠.” 헤그는 진심으로 궁금하여 물었다. “헤세가 누구지?” “당신의 쌍둥이 동생이죠.” “난 외아들이야.” “그걸 누가 모르나요? 연극을 하란 말이잖아요. 이제부터 쌍둥이가 되란 말이에요. 형은 형장에서 드래콘에 의해 행방불명되고 그 동생이 나타나서 형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제국의 창이 되어 황태자를 보좌하는 거죠. 좋은 각본이잖아요?” 거침없는 악평이 쏟아졌다. “황도 싸구려 극단에서도 생각하지 못할 저질 각본이군.” 마리는 상처받은 표정을 하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시늉 했다. “어머! 너무해! 어째서 내 주위 남자들은 하나같이 말버릇에 싹수가 없지?” “악담하는 취미는 없지만, 당신 싹수도 만만찮아.” “내 싹수가 왜요?” “여자에게 그런 식으로 만져진 건 처음이거든.” “아, 그때 감옥에서? 나도 남자에게 그런 시든 대파 같은 반응을 겪은 건 처음이었다고요.” “그만하지.” 헤그는 처음으로 여자와 옥신각신하면서 없던 기력이 솟는 걸 느꼈다. 하지만 기력이 솟는 이 기분이 퍽 좋은 편은 아니다. 우울한 그에겐 기력 따윈 쓸모도 없는 성가신 것에 불과할 뿐. 황당한 각본을 짜는 그녀의 속이 매우 궁금하다. 그녀의 말마따나 황태자와 자신의 관계는 나름대로 끈끈하여 이대로 야울 궁에 가서 ‘나를 복귀해 달라.’고 한다면 황태자는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친우를 복귀하게 해줄 것이다. 황태자가 친우의 사형에 안도한 이유가 다 무엇이겠는가. 사형은 소멸형과 달리 그 영혼이라도 구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눈물겨운 우정 따위야 제쳐 두더라도, 지금의 황태자에겐 제국민의 신뢰를 모을 만한 군권의 상징이 필요하다. 악마 같은 너구리를 해치워 준 헤그의 부활. 아마도 제국민들은 반기겠지. 그런 고로 조금 전에 들었던 저질 각본도 그리 허황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 미치광이 아가씨가 그런 그림을 그리는 것쯤이야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닌데, 대관절 그렇게까지 해서 그녀가 무엇을 얻는지, 그는 다시금 궁금했다. “당신의 생각을 알고 싶군.” 마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헤그를 자극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어머. 감옥에 너무 오래 있다 보니 정치적 사고가 정지되었나요? 황태자에게 믿을 만한 군권이 필요하다는 건 황도의 개도 다 아는 사실이고.” “그리고?” “또 그가 가장 규모가 작지만 가장 무시할 수 없는 집단인 마황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것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죠.” 즉, 새로운 군권을 내세워 눈엣가시인 마황을 제거하고 싶다? 제국 황제의 권력 중 신권을 제외한 양대 산맥은 바로 검황과 마황이었다. 그러나 양대 산맥이란 말은 두 세력이 동등할 때나 쓰는 말. 지금의 검황은 제국민에게 마황과 동급으로 여겨지질 않는다. 마황 세력이 마력기갑체를 개발해낸 후부터 검황은 언제나 마황 아래라는 인식이 만연해 있었고, 한때 소 황제라 불리던 할데바인이 마황에게 절절매었던 것을 떠올리면 그 인식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모든 마법사들의 주군이자 마탑의 주인, 황제가 소유한 마나의 인을 유일하게 조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권력, 마황. 그걸 눈엣가시로 여기는 사람은 비단 황태자뿐 아니라 마리니시네 이 여자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당신이 헤세 레 지괴르라는 새로운 인물로 군에 복귀해서 마황을 없애는 작업을 시작하면, 황태자가 아주 좋아할 거라고요. 최근 황태자는 아버지를 물러나게 하고 황제가 될 거라는데, 그가 마나의 인을 소유한 뒤 당신을 비호하면 마황 제거 작업도 수월해지지 않을까 싶네요.” “그러니까 당신은? 나는 당신이 얻는 게 뭔지 궁금하다고 말한 것 같은데.” “에이. 알면서.” “……?” “또 대답하면 세 번째 대답하는 거로군요.” 그제야 헤그는 마리가 그토록 주장했던 ‘대륙 정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녀는 정말 대륙 정복을 위해 루빈의 전 대령을 황도에 다시 군인으로서 보내려는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거대한 계획인데 그녀는 마치 놀이판 위의 인형을 움직이듯이 해내려 한다. 그 얄궂은 기색을 보니 헤그는 허탈한 웃음이 소리 없이 나오고야 말았다. 마리는 그게 비웃음이란 것을 알면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욱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제 야심을 그렸다. “당신이 좀 움직여줘야겠어요. 어차피 당신이라는 사람, 그냥 둬봤자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기밖에 더 해요? 그런 잉여 목숨인 당신을 이용하고, 당신의 친우를 이용하고, 당신들의 관계를 좀 이용하고 싶군요. 그러니 좀 따라주시겠어요?” 헤그는 아이처럼 해맑은 얼굴과 끝 모를 자신감에 문득 없던 심술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이 여자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실패란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가? 단 한 번도 좌절해 본 적이 없는지? 심술은 대답으로 표현되었다. “싫다면?” “싫어요?” 헤그의 눈에 흐릿한 미소가 어렸다. “싫은데.” “싫어요, 진짜?” “싫어.” “진짜? 정말?” “몇 번을 말해.” 마리의 작은 발이 다시 헤그의 다리 사이를 찾아갔다. 헤그는 은밀한 발장난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다. 누굴 희롱해본 적도 없는데 누군가에게 희롱 받은 적도 없다. 참 희한한 여자다. 마리는 그런 헤그에게 재차 물었다. “안 해줄 거예요? 내가 당신 목숨도 구해줬는데?” “구해달라고 부탁한 적 없는데.” “그래도 보통은 고마워하고 은혜를 갚으려고 한다고요.” “동화책에서나 있는 이야기지. 모든 이가 구원을 원하는 건 아니야.” “그래서 정말 안 해줄 거예요?” “싫다고 했잖아.” “이거…….” 생각보다 어려운 남자잖아. 생각보다 짜증 나는 남자야. 마리는 뒷말을 삼켰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헤그를 향한 수천 마디의 욕이 퍼부어졌다. 심술이 난 마리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출입문으로 가서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그리고 미련 없다는 듯 외쳤다. “제가 괜한 분을 구해드렸군요! 잘 가시죠! 앞길이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 국사범에서 탈주자로, 탈주자에서 암살자로, 암살자에서 사형수가 되었던 이는 그렇게 나그네가 되어 길을 떠났다. 사막의 잡초가 한여름 태양에 말라 저들끼리 뭉쳐 공처럼 굴러다녔다. 무더운 바람이 불고 모래가 아지랑이처럼 휘날리는 저 먼 곳에서 헤그는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졌다. 마리에게 어떤 희망과 기대도 심어주지 않은 채 그저 미련 없이. 가라고 하니 정말 가버리는 그에게 마음이 단단히 상한 마리는 씩씩거리며 외쳤다. “어이없네! 그렇다고 진짜 가? 마황 좀 구워삶아서 차원의 균열 문제 해결을 보려 했더니, 진짜! 와! 뭐 저런 남자가 다 있지? 진짜 말도 안 되게 약 오르게 하는 남자잖아! 나처럼 99.9 점의 얼굴과 몸매를 가진 여자가 부탁하는데도? 이해할 수 없어! 완전 게이 아니야?” “게이가 뭡니까?” “있어, 고추 달아놓고 고추 단 사람에게만 성적으로 끌리는 종족.” “동성애자 아닙니까? 좀 알아듣게 말을 쓰십시오. 늘 이상한 단어를 쓰신다니까.” 아무리 만사 제멋대로 밀어붙이는 그녀이긴 해도 한 사람에게 집요한 부탁을 할 깜냥은 되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부정하지 못하리라. 명색이 가라고 해놓고 다시 붙잡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녀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애꿎은 호위기사에게도 씩씩댔다. “그리고 너는 저 치에게 뭐하러 돈을 챙겨줬니?” 하이너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챙겨 주면 뭐합니까. 어차피 받지도 않던데.” 하이너는 헤그가 무욕자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저대로 어딘가 처박혀서 죽어 내일 시체로 발견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무기력한 얼굴을 하는 남자에게 아가씨의 계획에 제발 참여해달라고 강요하기는 어려운 거겠지. 그리고 한 번쯤, 아가씨도 아셔야 한다. 세상엔 불가능한 일도 있다는 것을. 인간이 무한 긍정만으로 살 수는 없단 것을. 아가씨의 투덜거림은 도무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호위기사의 팔에 이끌려 다시 여관 안에 들어가면서도 계속 구시렁거렸다. “저런 남자 처음 봐. 진짜 보람 없게 하는 인간이잖아. 기껏 구해줬는데도 고맙단 소리 한 번 제대로 못 듣고. 그뿐만 아니지. 저 치는 정말 괴짜라고. 몸도…….” 마리가 회상하는 것은 감옥에서 한 번 만져 본 헤그의 다리 중심, 그 축 처진 물건이었다. 그녀는 무심코 그 말을 했다가 호위기사에게서 궁금해하는 눈초리로 받자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괜스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마리아는 어디쯤 갔으려나.” 하이너는 차 마실 시간을 가지려 했다. “글쎄요. 아마 밤이나 돼야 오지 않을까 합니다만.” 루돌프가 없으니 호위기사와 시중드는 하녀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된 그는 딱 좋게 끓인 물에 차를 우렸다. 아가씨의 향기만큼이나 달콤한 차 향이 무더운 공기 중에 퍼졌다. “차나 드시지요.” 조심스럽게 찻잔을 옮기는 그의 표정은 마치 장인 같다. 마리는 그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하이너는 아가씨를 보았다. “아가씨?” 마리는 차 같은 걸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다만, 헤그를 향한 덜 충족된 기분을 얼른 보상받고 싶을 뿐이다. 말초적이고도 단순한 그 뭔가로. “하이너.” “예?” “차 말고 다른 거 마실 생각 없니?” ============================ 작품 후기 ============================ 선, 추, 코 감사합니다! *후원 쿠폰 주신 윈디 님! 항상 장문의 코멘트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00087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하이너는 아가씨의 눈빛에서 야릇한 욕구를 읽었다. “다른 거… 라니요.” “알면서.” 마리가 배시시 웃으며 하이너에게 다가가 호위기사의 옷을 벗겼다. 탄탄한 근육으로 뒤덮인 상체가 드러났다. 무더운 여름 뙤약볕에 그을어 짙게 변하고, 긴 여행에 살짝 마른 듯한 몸은 성숙한 남성의 기운이 흐른다. 여행 초반 때보다 한층 더 소년기를 벗어던진 몸. 이 몸에 섞여들어 여름 바람보다 더 뜨거워지고 싶다고, 마리는 욕망했다. 그녀의 두 손이 호위기사의 가슴에 닿더니 딱딱한 복근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하이너는 마리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무더위의 갈증을 해결해줄 듯 맑고 시원한 눈동자가 세상에서 가장 음탕해 보이는 것은 지극히 신비로운 일이다. “대체 무엇을….” “조금 전에 하려던 일을 마저 해야지?” 그녀가 한쪽 다리를 의자에 올리고 치마를 걷었다. 속옷이라고는 걸치지 않은 생살이 보였다. 그녀는 전혀 부끄러워하는 것도 없이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얼른 이 다리 사이에 고개를 들이밀고 뭐라도 하라는 노골적인 명령. 뻔뻔해서 귀여운 그 신호에 하이너는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아가씨에게 이 은밀한 행위는 연인 간의 다정한 시간을 위해서라기보다 어쩐지 다른 용도가 있어 보인다. 하이너는 그녀의 지나치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보며 미간을 살짝 패었다. “왠지 짜증스러워 보이십니다만.” “그러니 네가 필요한 거 아니겠니?” 이를테면 짜증을 풀기 위한 것? “굉장하시군요.” “뭐가?” “글쎄요.” 하이너는 기꺼이 무릎을 꿇고 아가씨께서 원하는 것을 해주었다. 아가씨의 몸 중 가장 민감한 살결에 입술을 갖다 댔다. 여성의 향기가 물씬 풍겨 나오는 그곳이 움찔거리며 기대를 표시한다. 하이너는 더욱 얼굴을 강하게 파묻었다. 입술 사이에서 천천히 나온 혀는 은밀한 살결을 탐구하며 헤치듯 집요하게 움직였다. 마리가 낮게 탄성을 내질렀다. “후우.” 금세 그녀의 깊숙한 곳에서 진득한 물이 왈칵 흘러내렸다. 차보다 더 뜨겁고 향기로운 것이라고, 호위기사는 생각했다. 혀 놀림이 더욱 진해졌다. 아가씨는 쾌감을 이르게 얻어내려고 허리를 흔들었다. 하아, 하… 하고 그녀가 숨을 가쁘게 쉬는 그때, 하이너가 무심코 자기 속내를 흥분 어린 목소리를 뱉었다. “가끔 아가씨께선 이런 것을 다양하게 이용하신단 생각이 듭니다.” “하, 응? 이런 것?” 하이너는 마리의 엉덩이를 돌렸다. 그 때문에 마리는 호위기사의 얼굴 앞에 엉덩이를 내미는 민망한 자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민망해하기는커녕 호위기사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하이너는 은밀하게 갈라진 부분을 쉴 새 없이 간질이고 핥으며 입술을 놀렸다. “야한 일, 들 말입니다.” “흣, 야한 일?” “돌이켜 보면 그렇지요. 당신께서 단지 순수하게 저를 원하셔서 이런 것을 요구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만?” “아닐 때가 더 많았습니다.” 하이너는 아가씨의 그곳이 축축이 젖어들자 몸을 일으켰다. 아가씨를 젖게 하면서 이미 자신도 충분히 준비되었다. 그는 팽팽히 선 물건을 아가씨의 깊숙한 곳에 단도를 찔러 넣듯 박으며 읊조렸다. “이를테면 제가 하나의 도구 같다는 생각이 드는 때, 그때 말입니다.” 하이너는 오를린에서의 기억부터 되새겼다. 아가씨는 드래콘을 손에 넣고자 호위기사의 것을 가지고 음탕한 장난을 치시며 감질을 한껏 끌어 오르게 하신 적이 있다. 그뿐인가. 함께 여행해주면 창녀이자 애인이 되어준다는 말씀을 하시며 당신의 성 자체를 조건으로 내거셨지. 그 다음은? 바너에서 호위기사가 인신매매단을 없애다가 어깨에 총을 맞은 적이 있었다. 그 후에 아가씨는 그게 미안한 듯 야릇한 행위를 시도했다. 화해의 도구로 그런 야한 일이 쓰인 것이다. 실렌틴 광산의 눈밭에서 한 행위는 마치 연인 간의 즐거운 한 때라기보단 친한 친구 간의 발랄한 유희 같기도 했다. 여행 중 때로는 ‘몰래 하는 게 더 재미있다.’며 마리아 몰래 사람을 자극하는 개구쟁이 같질 않나, 오늘은 누군가에게 받은 자잘한 분노와 짜증을 풀고자 이런 식으로 호위기사를……. 정말이지, 도구라는 생각이 아니들 수 없다. 아가씨에게 성교는 어쩌면 하나의 유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기분 나빠해야 할까. 아니면 그녀의 유희 대상이 지난 몇 달간 오직 호위기사인 자신뿐이란 것에 감사해야 할까. 하이너가 그러한 상념에 빠져있을 때, 마리가 엉덩이를 흔들어 그를 더욱 깊이 삼키며 물었다. “흐응, 도구라니. 말이 밉구나. 지금은 내가 너를 순수하게 원하지 않는다는 거야?” 하이너는 아가씨의 등을 끌어안고 허리를 움직이면서 그녀의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풍만한 가슴들을 헤치고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부분을 지그시 만졌다. “글쎄요. 그건 저한테 할 질문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하셔야 할 질문인지도 모르겠군요.” 가슴을 만지는 호위기사의 손은 마치 심장이라도 꺼낼 듯 날카롭다. “복잡한 남자 같으니. 그래서… 읏, 도구 같은 느낌이 왜? 별로야? 그래서 멈추기라도 할 거니?” 하이너는 시선을 내렸다. 남자의 성기를 좀 더 깊숙이 담고 빠르게 움직이려고 안달인 뽀얀 엉덩이를 보니, 지금까지 느낀 상념들이 우스워 지는 것 같다. 역시 육체는 정신을 이길 수 없는 건가? 불길처럼 휩싸인 정욕에 눈이 먼 하이너는 마리의 가녀린 허리를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상념을 하찮아하는 실소를 흘리며 조금 건방지게 대답했다. “멈추다니, 천만에.” 대답과 동시에 그는 폭군처럼 허리를 쳐댔다. “앗, 아!” 마리의 입술 사이로 이 더운 여름날 태양보다 더 뜨거운 숨이 턱턱 터져 나왔다. 호위기사의 무자비한 몸짓에 그녀는 허리가 반쯤 접혀 머리를 바닥에 박을 것 같았다. 가녀린 두 팔이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고, 떨리는 두 손은 바닥 어디를 짚어야 할지 모른 채 여기저길 헤맸다. “흐응, 앗! 좋아! 더! 더 세게 해! 앗!” 몸이 금세 쾌락에 짙게 물든다. 잔뜩 조일수록 더 커지는 것 같은 호위기사의 물건도 참 재미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한 번 불타오르고 사라질 그런 배설의 시간에 불과할 뿐일까? ‘이대로는 안 돼. 이거 정말 어렵잖아.’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고집불통 우울증 환자인 헤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에 관한 계략으로 가득 차올랐다. *** 밤. 황금빛을 뿜는 달 렌키스와 더불어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푸른 달 포울룬디가 함께 떠 있다. 이토록 밝은 밤에는 그림자가 숨을 여유가 없다. 하늘에 드래콘이 날아다녀 지상에 그 그림자가 지게 되면 어찌 될까? 마리 일행엔 좋지 않겠지. 그래서 마리아는 드래콘으로 날아다니지 않고 비싼 이동 스크롤을 사용해 여관으로 돌아왔다. 륀체르의 연결망으로부터 얻어온 이동스크롤 중 하나를 과감하게 쓴 것이다. 어마어마한 가격의 이동 스크롤을 어찌하여 주인의 허락도 없이 썼느냐, 하나도 아니라 여러 개를 가져온 덕분에 그렇게 막 헤프게 쓰는 거냐, 사파이어라는 대부호가 주인을 무한정 지원해준다는 사실만을 믿고 낭비하는 거냐, 그렇게 질책한다면 마리아는 맹세코 그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마리아는 직감으로 알고 있다. 자신이 가져온 이 이동 스크롤들이 결국에는 아가씨가 아닌 바로 자신의 소유가 될 거라는 것을. 즉, 아가씨는 처음부터 이 스크롤들을 드래콘 소녀에게 주려고 얻은 것이다. 그야 빤하지 않은가. 주인 마리에게 더는 이동 스크롤 따위의 물건이 필요 없다. 듣자 하니 주인의 호위기사님은 몸속에 지닌 드래곤의 힘 덕분인지 순간 이동이 자유자재라 하셨다. 그런 믿을 만한 기사가 있는데 그거보다 한참 모자라는 능력의 드래콘이 여행에 동행할 필요는 없겠지. 아마도 주인 마리는 이 이동 스크롤들을 드래콘에게 이별 선물로 건넬 것이다. 그러려고 바너의 길드장에게 스크롤 지원을 해달라고 조른 게 틀림없다. 그렇게 예상한 마리아는 씁쓸함을 가슴에 감춘 채 여관 앞에 섰다. 똑. 똑. 똑. 출입문을 두드리는데 안에서 아가씨의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렴.” 마리아는 문소리가 나지 않게끔 조심해서 문을 열고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아가씨는 막 씻고 나왔는지 알몸에 수건을 허리에만 걸치고 있다. 그녀는 무사 귀환한 드래콘을 보며 반가움에 싱긋 웃더니 하얀 상의로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눈부신 달빛들이 마리의 뒷모습에 역광을 드리웠다. 찰랑거리는 금발 아래 가느다란 허리가 같은 암컷이 보아도 아주 관능적이다. 마리아는 주인에게 시선을 빼앗긴 채 멍하니 걸음을 멈추었다. 뒤돌아선 마리가 마리아에게 소파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스크롤 가져오느라 참 수고했어. 힘들었겠구나.” 마리아는 대답 없이 그녀와 마주 앉았다. 어쩐지 기사님은 보이지 않는다. 마리는 주전자에서 물 한 잔을 따라 마리아에게 내밀었다. 마리아는 주전자의 표면을 본다. 표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것으로 보아, 물 온도는 아주 차가운 듯하다. 이런 여름밤에 주전자 물을 차갑게 만드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마리의 마력 스크롤이 사용돼서? 아니면 기사님의 마력 덕분? 만약 기사님의 마력 덕분이라면 기사님이 실내에 있다는 말인데……. 늘 그렇듯, 어느샌가 마리아의 정신은 기사님에게 가 있다. 마리가 차가운 물을 마리아에게 권했다. “목이 탈 테니 마시렴.” 마리아는 물 잔을 받아 단숨에 마셨다. 식도를 타고 흐르는 상큼한 냉차가 무더운 여름날의 임무를 깨끗이 다독여 주었다. 아! 하고 시원해서 지르는 탄성에 자신이 다 놀랄 정도다. 이런 반응을 보면 자신도 인간의 몸에 아주 익숙해진 모양이다. 마리가 웃으며 물었다. “시원하니?”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어. 이거 받으렴.” 탁자 위에 놓인 금속 장식의 목걸이. 그것은 굴종의 인이다. 헤그에게서 되돌려 받은 물건을 마리는 지금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려주었다. 마리는 중대한 말을 마치 일상적인 대화를 하듯 가볍게 뱉었다. “마리아 그로스. 아니, 드래콘 소녀여. 이제 넌 자유야.” 자유? 보내준다는 말인가? 역시나……. 마리아는 예상한 것과 똑같은 현실을 맞이했다. 전혀 놀라지 않아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다. 사람처럼 넋두리가 나왔다. “역시 그렇군요.” “응, 뭐가?” 마리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마리는 마리아가 가져온 이동 스크롤을 마리아가 쓸 가방에 모두 담아주며 온화한 친언니처럼 말했다. “인간으로 떠돌 때 필요할 것 같아서 이 스크롤들을 너에게 주는 거란다. 팔아도 큰 돈이 될 테지. 나는 예전부터 느꼈어. 너는 드래콘이라는 마력 생물이지만, 인간에 더 가깝지. 바너에서 고급 과자를 먹으며 맛있어할 때도 그랬고, 차를 음미할 줄 알 때도 그랬고, 예쁜 옷이나 장신구를 보며 눈을 빛낼 때도, 루돌프와 이 층 침대를 제법 자연스럽게 잘 쓸 때도, 인간의 식사 예절을 잘 지킬 때도, 그리고 인간인 내 말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고 착실히 도와줄 때도…….” 인간에 더 가깝다, 라. 마리아는 주인에게 ‘하나 더 추가하셔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자신의 가장 인간다운 부분. 그것은 바로 인간인 호위기사님을 좋아해 버린 것, 아닌가. “나는 마리아 네가 인간 세계에 쉽게 적응하는 모습을 보고 느꼈어. 넌 누군가의 종속물로 다뤄져선 안 된다는 걸. 네겐 자유가 필요해.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말이야.” 마리아는 마리의 눈동자만 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마리는 드래콘의 앞날에 행운을 빌며 안녕을 고했다. “자유롭게 네 갈 길을 찾으렴. 이제 나는 더는 네 주인이고 싶지 않아. 너를 진심으로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아니에요!” 마리아는 마리도 놀랄 정도로 크게 외쳤다. 마리가 당황하여 웃음기를 지운 얼굴로 물었다. “아니…라니?” 마리아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제 갈 길이라고 하셨나요? 그건 제 선택을 존중한단 말씀이지요? 저는, 저 마리아 그로스는요! 오직 기사님 곁에 있고 싶어요! 저는 당신의 종속물로 있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의 기사님의 곁에서 그 분을 지켜보고 싶단 말이에요! 그 분의 웃음, 그 분의 목소리, 그 분의 모든 것을 느끼고 싶단 말이에요! 이건 아니지 않나요? 정말로 저를 진심으로 생각하신다면, 정말로 저를 일행으로 생각하셨다면, 이렇게 갑자기 떠나라는 말씀을 하기 전에 적어도, 적어도 한 번쯤은 ‘앞으로도 일행으로 함께 해주겠니?’라고 물어 보셨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속은 폭발할 듯 끓어올랐지만, 그 속이 외침으로 터져 나오진 못했다. 하이너가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리아를 보자마자 욕실 문을 다시 닫았다. “음, 이거 실수했군.” 알몸으로 나오려던 그는 다시 들어가 깔끔하게 옷을 갖춰 입고 나왔다. 그런데 그가 욕실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마리아는 사라진 채였다. 하이너는 마리에게 물었다. “그 애는 어디 갔습니까?” 마리는 하품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창밖 하늘을 가리켰다. 밝은 하늘에서 드래콘 한 마리가 남쪽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자유를 찾아갔지.” “예?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인사도 없이….” 하이너는 서운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뭐 잘못됐니? 그녀는 드래콘이야. 인간과 같은 감정을 기대해선 곤란하지. 종속물 신세에서 드디어 벗어났는데 뭔들 못할까.” 하이너는 당황해서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이런 식의 이별이라니? 루돌프와도 갑작스럽게 이별해야 할 때도 이 정도로 어이없진 않았다. 그는 아가씨에게 좀 더 해명을 요구하고 싶었지만, 이미 아가씨는 침대에 누워 잘 눈치다. 하이너는 아가씨를 보며 조금은 원망했다. ‘비정한 주인이야.’ 하지만 하이너는 몰랐다. 마리가 눈을 감으며 하는 생각을. ‘잘한 거야. 가을이 오기 전에 보내려 했잖아? 그러니 괜찮아. 괜찮다고.’ 가을. 마법의 계절. 모든 마력 생물들이 크고 작게 발정하는 계절. 마리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지난해 가을, 마리아가 한낱 인간 남성인 하이너에게 그토록 쉽게 잡혔던 이유에 관해. 그것은 바로 마리아가 마력 생물 드래콘이고, 하이너가 마력 생물 중 최상위라는 드래곤의 인자를 몸속에 가지고 있었던 수컷이기 때문이다. 당시 계절은 가을. 드래콘은 태어나 성체로서 처음 맞는 발정기, 그것도 본인조차도 눈치채지 못하는 발정기였다. 발정기를 맞은 드래콘은 수컷 마력 생물인 드래곤에게 순순히 굴복했다. 그 굴복 덕분에 하이너는 굴종의 인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마리 또한 지금까지 채 일 년이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드래콘을 살뜰히 ‘이용’해 왔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래선 안 된다. 탈 것이라면 호위기사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가을은 또다시 올 테고, 마법의 계절은 드래콘을 또다시 발정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번 발정에는 하이너도 예외일 수 없겠지. ‘나는 그를 고작 그런 이유로 빼앗기고 싶진 않으니까.’ 마리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뿌리를 뻗는 독점욕을 느끼며 나른히 잠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그 황제의 은밀한 욕구] 다음으로 3권 분량을 쓰고 있군요. 정말 장편은... 머리를 새하얗게... 하는 것 같습니다... 00088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헤그는 계획이나 의지 없이 걸었지만, 버릇이란 게 참 무서워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야울 령으로 향했다. 그곳은 한때 그의 부대인 루빈이 지켰던 곳이다. 지금도 루빈은 지휘관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야울 령을 지키고 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사구의 숲에서 무수한 발자국이 생기고 또 모래바람이 뒤덮였다. 헤그는 문득 뒤돌아서서 자신의 발자국을 보았다. 생기고 금세 지워지는 발자국을 보니 인간의 삶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황이었던 아버지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름다웠던 약혼녀도 영혼이 소멸되어 가버렸다. 만약 자신이 이대로 헤매다 말라 죽으면 어떻게 될까. 자신을 사랑하던, 또 자신이 사랑하던 이가 죽었으니 자신을 위해 추모해줄 이는 없겠지. 하늘에 달과 별이 있는 것만으로도 헤그는 감사했다. 새벽이 되자 지친 그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는 주저앉아서 마르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먹고 마신 것이 없어서인지 의식이 혼탁한 모래바람처럼 흐리고 어지럽다. 그런 상태로 먼 곳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바람이 온몸을 때리며 강하게 불어왔다. 발자국을 지우던 바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주 거센 바람, 그것은 마치 몸 전체를 지울 것만 같았다. 솨아, 솨아아아……. 한참 요동치던 바람은 어느샌가 잠잠해졌고, 그 후 그가 앉은 곳 바로 옆 사구에서 한 생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래콘. 두 개의 달빛을 받아 새하얀 몸을 우아하게 빛내는 생물. 유니콘과 드래곤을 반반 섞은 진주색의 그 생물은 엎드린 채로 축 늘어져 있었다. 모래 속에 파묻혀 있다가 바람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 듯하다. 드래콘은 모래알이 잔뜩 앉은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선홍빛을 내뿜는 신비로운 눈동자가 드러났다. 헤그는 선홍빛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목격했다. 눈물이 투명한데 어쩐지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어찌 된 눈물일까. 저 드래콘은 미치광이 아가씨의 일행으로 다니던 그 소녀 같은데, 어째서 울고 있을까. 어제만 해도 사형수를 멋지게 구해내고 그 미치광이 아가씨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주던 동물이 지금은 무슨 이유로 이런 달밤에 머나먼 사막에서 눈물을 흘리는지. 측은하다. 헤그는 무심코 마리아에게 위로의 손길을 건네려 했다. 하지만 이내 거두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지금 누군가를 위로해줄 처지가 아닌 듯해서. 또한, 이 드래콘 암컷도 누군가의 위로를 바라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게다가 인간의 관심 어린 시선을 외면하듯 눈을 감고 있잖은가. 바라지 않는 위로는 하지 않는 게 좋다. 저 드래콘의 서글픔을 못 본 척해주기로 했다. 헤그는 없는 힘을 쥐어짜 내 마리아로부터 거리를 넓히기 위해 몇 시간을 더 걸었다. 드래콘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걷다가 어느 순간, 잠이 무거운 바위처럼 덮쳐 모래 위에 쓰러졌다. 뺨에 닿은 모래알들이 거칠기는커녕 구름이나 된 듯 아무런 촉감이 없다. 죽음이 다가오는 전조일까. 바라는 죽음이지만, 그는 전혀 기쁘지 않다. 영혼이 소멸한 연인은 죽어서도 만나지 못한다. 새벽바람이 거침없이 불고 쓰러진 그의 몸을 금세 뒤덮었다. ***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 의식을 잃었던 헤그는 야울 남쪽을 순찰하던 루빈의 부대원에게 구해졌다. 부대원은 임시 대령 아만카이트에게 연락하여 전 지휘관인 지괴르 대령을 발견했다 했고, 아만카이트는 그 즉시 자신의 기갑체로 헤그를 데려가 야울 궁에 내려다 주었다. 헤그의 친우 황태자가 헤그를 돌보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예상대로 황태자는 헤그를 거두어주었다. 그리고 헤그가 무사한 것을 보고 안도도 했다. 오전 정무를 마친 황태자가 헤그가 머무르는 침소에 들렀다. 궁내 황의가 헤그를 돌보기엔 위험 요소가 많아서 황태자는 바깥에서 구해온 마의사에게 헤그를 돌보게 했는데, 마의사는 탈진으로 죽음 직전에 간 헤그의 숨을 기적적으로 붙어있게 해주었다. 그는 황태자에게 헤그의 상태를 보고했다. “워낙 몸이 좋은 편입니다. 젊기도 하고 다년간 훈련을 해온 터라 회복력이 놀라운 수준이지요.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전하.” “수고했소.”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만 나가보라는 시늉을 했다. “그럼 저는 이만….” 마의사는 사형수였던 지괴르 대령을 죽음에서 구해준 자신이 크나큰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그 예상은 틀리고 말았다. 한껏 기대에 부푼 그가 침소에서 나가기도 전에 황태자의 비밀 무사들에게 끽소리도 내지 못하고 목이 뒤틀려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끈따끈한 시체는 금세 깨끗하게 치워졌다. 헤그의 존재를 알고서 죽어버린 사람은 비단 마의사뿐만이 아니다. 헤그를 목격한 루빈의 부대원과 그와 접촉한 이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물론 아만카이트 중령은 예외다. 예전부터 헤그의 충실한 부관이었던 그는 임신한 아내를 야울 궁내 시녀로 보내면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즉, 황태자는 헤그가 살아있다는 정보를 발설하지 말라는 뜻으로 아만카이트 중령의 아내를 인질로 삼은 것이다. 황태자는 자신이 믿는 사람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친우가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싫었다. 아니, 이것은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이루어야 할 야망을 위해서 반드시 조심해두어야만 할 일이다. 황태자는 천천히 헤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언제까지 그리 잘 셈이지, 지괴르?” 그의 음울한 회색 눈동자만큼이나 목소리도 우울한 신경질이 배어있었다. 그는 감옥에서의 시간이 헤그에게 충분히 휴식이 되었을 거로 여기고 있으며, 그 휴식은 이제 끝날 때가 되었다. “군기가 빠졌다고.” 게다가 그는 헤그에게 모호한 심술도 느끼는 중이다. 헤그가 국사범의 신분으로 말괄량이의 도움을 받아 야울 궁 감옥을 탈출할 때, 당시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가 있었다. 황태자는 그 대화를 잊을 수 없었다. 「남자로서 대답해 봐요. 당신…… 나를 만지고 싶죠?」 「사내들이 득시글대는 감옥에 있다 보면 당신 같은 여자에게 한 번쯤 손대고 싶은 법이지.」 「그럼 손대요. 얼마든지.」 「어차피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인 거 다 알아요. 자신을 스스로 죽이지 못해서 그 너구리를 죽이고 감옥에 제 발로 들어간 거겠죠? 그런 사람에게 그 어떤 명분도 중요하지 않다는 건 잘 알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조건, 참 괜찮잖아요? 황태자비와 똑같이 생긴 창녀 하룻밤 품고 그 창녀의 조건을 들어주는 것? 먹을 거로 치자면 최후의 만찬 같은 느낌도 들 테고…….」 「스스로 만찬이란 표현을 하다니. 자신감이 대단하군.」 「몸은 더 대단하답니다. 서로가 좋은 일을 하자고요. 지괴르 대령.」 「나쁘지 않지.」 「역시나!」 「아, 하룻밤 가지고는 안 될 거야. 쌓인 게 많아서 말이지.」 그날 밤 친우와 그녀가 ‘만찬’ 행위를 했는지 않았는지는 자신으로서는 모른다. 시시콜콜 물어서 대답을 듣는 것도 마뜩잖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그들이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쪽으로 여기고 싶다. 자신의 친우는 약혼녀 하나밖에 모르던 남자에다 루빈의 대령으로 있을 때도 여자 쪽 문제는 결벽이다 싶을 정도로 깨끗했다. 그런 그가 그녀와 성적인 느낌의 대화를 천연덕스럽게 나누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농담으로 여겨야지, 진심은 아닐 것이다. 그러는 게 자신으로서도 속이 편한 일이고. 그는 도무지 잠에서 깰 줄 모르는 친우에게 명령했다. “눈을 떠라.” “…….” “넌 그날 사형당한 거다. 그리고 다시 태어날 때가 되었어.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계급이 필요할 때야. 하지만 가능하면 지괴르라는 성은 버리지 않는 게 좋겠군. 네 가문은 제국민이 아주 좋아하니까 말이다.” 황태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묻혔던 존재, 혈육, 이를테면 쌍둥이 같은 게 좋겠군. 넌 앞으로 헤그 레 지괴르의 형제가 되는 거다. 다시 군에 와. 내 친히 너에게 검황의 자리를 줄 테니.” 헤그의 평온한 얼굴은 미동도 없다. 황태자는 그런 친우가 분명 자신의 말을 듣고 있을 거라고 여기며 계속해서 명령을 이어갔다. “마황을 이겨라. 그가 가진 마나의 인을 내 손에 쥐여 주는 게 네 임무다.” 황태자는 할 말이 다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돌아서 가려다가, 갑자기 멈추어서 경고했다. “잠은 오늘까지만 허락하겠어.” 그가 나가고 헤그는 한참 동안 누운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후의 햇살이 비쳐들 즘에야 그는 눈을 떴다. 보라색 눈동자가 암울하게 천장을 응시했다. 명령에 대한 아주 뒤늦은 대답이 조용하게 흘러나왔다. “알겠습니다. 전하.” 그는 미치광이 아가씨의 고집엔 장단을 맞춰줄 순 없었어도, 친구의 명령을 거절하진 못한다. 아니, 그것은 못한 게 아니다. 반쯤은 자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목숨이 붙어 있고 살아가야 하는 한, 도피처는 필요한 법이니까. *** 하이너는 말도 없이 떠난 마리아에게 섭섭했으나, 최대한 섭섭함을 잊기로 했다. 동물과 사람 사이에 인연이라는 말을 쓰는 게 우습지만, 인연이 있다면 언제든 다시 보겠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하이너에겐 마리아와 이별하는 편한 방법이었다. 네 명의 일행은 이제 두 명이 되어 일행이라는 단어조차 거창하게 느껴진다. 이제는 함께 여행을 떠나는 연인…이라는 말이 더 적당하리라. 하이너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가씨의 저녁을 만들고, 아가씨가 목욕할 물을 데우고, 아가씨의 잠옷을 깨끗하게 준비해 놓았다. 어쩐지 신혼부부가 된 느낌이다. 통째로 빌린 덕분에 아무도 없는 여관에서 단둘이 이렇게 지내는 것이 정말 그런 느낌을 북돋아 주었다. 아가씨는 잠이 들기 전에 야울 소식지를 들여다보았다. 지방 령의 소식지에다 저 예산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보니 황도의 주요 소식을 다루는 것에는 소홀한 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작은 규모의 소식지라서 황도의 검열 없이 날 것의 정보가 있는 그대로 실리기도 한다는 것. 마리는 그 소식지에서 암흑 지형에 관한 부분을 다룬 기사를 읽었다. 내용인즉슨 북쪽에서부터 조금씩 번진다는 암흑지형이 번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 간다는 것. 비록 지방의 마법사 지망생들이 측정하여 발표한 소식에다 지금 당장 먹고사는 문제와는 큰 관련이 없으니 큰 시선을 끌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신이 있다면 정말 그렇게 생각할까? 백 년, 천 년, 영원의 시간을 생명체와 함께 살아가는 신들이라면 저 암흑지형 문제를 방관해선 안 되리라. 마리는 살아있는 신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암흑지형이 번지는 것을 막고자 했다. 골똘히 생각에 빠진 그녀에게 호위기사가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 작정입니까?” 그러자 마리는 소식지를 덮었다. 그리고 예전부터 생각하던 것을 말했다. “마황을 공략하러.” 마황이라. 검황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권위를 가진 자? 그리고 자연에 깃든 모든 마력의 총량을 조절하는 데 필요한 물건인 마나의 인을 소유한 덕분에 황제도 쉽게 건들지 못한다는 그자? 하이너는 대륙 정복이라는 기치 아래 아가씨가 행했던 일들을 언제나 실행 불가하고 터무니 없는 망상에 불과하다고 여겨왔지만, 언젠가부터 그런 태도는 버렸다. 아가씨가 마황을 공략하러 간다고 하면, 공략하러 가는 것이겠지.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 마황을 공략하러 어딜 가시느냐, 이 질문이었습니다만.” “루앙에 가야지. 마법 미치광이들만 모여 산다는 동쪽의 외톨이 지역 말이야. 군인도 날 도와주지 않고 대부호의 도움도 지금으로선 큰 쓸모가 없으니 나 스스로 마나의 인을 빼앗으려 노력해야 하지 않겠어? 루앙은 그런 의미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야. 그 마력의 도시를 주름잡는 대마법사라면, 마나의 인을 빼앗는 방법도 알고 있겠지.” “루앙이라….” “그리고 이번에는 네 도움이 가장 많이 필요해. 드래곤 님. 바로 너 말이야. 기사님.” 마리는 지상 최고의 마력 생물을 자신의 호위기사로 둔 것에 감사하여 그의 이마에 키스했다. 하이너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자신의 도움이 가장 많이 필요하다니. 그렇다면 기꺼이 도움이 되어드리리라.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00089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하지만 대답은 언제나 그랬듯 까칠하게 나왔다. “정말이지 당신은… 대관절 나 없으면 어찌 살려고 그러지?” 마리는 그 말에 왠지 듣기 좋지 않았다. 물론 호위기사가 이번 여행에서 크고 작은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호위기사 없으면 어떻게 살까!’하고 난감해할 정도로 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은 하이너가 아니더라도 여행을 추진했을 것이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어떻게든 헤쳐나갈 것이다. 그것이 곧 신념이자 자존심인데 호위기사는 그 자존심의 중심에 자신이 있다고 오만하게 구는 듯했다. 이 오만함의 근거는 대체 무엇일까. ‘그저 사내들이란… 좀 가까워졌다고 느끼기만 하면 저렇게 굴곤 하지.’ 마리는 하이너의 조각 같은 코를 살짝 꼬집으며 날카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는 기사님이야말로 나 없으면 이런 먼 곳에 구경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 같나요? 호호!” ***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 아침부터 태양이 분노했다. 펄펄 끓는 공기 속에서 황태자는 땀에 진탕 젖은 채 단검을 휘둘렀다. 그를 상대하는 호위 무인은 갈수록 재빨라져 가는 그의 손에 기가 질렸다. “헉, 허억….” 예전에는 황태자의 체면을 생각한다고 적당히 지는 척 상대해준 편이었는데, 지금은 지는 척을 하면 정말로 목숨이 날아갈 것 같다. 그만큼 황태자의 단검 솜씨는 수준급이다. 그의 실력이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나아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황태자비를 들인 후라고 할 수 있겠다. 묘하게도 그때부터 황태자는 달라졌다. 일단 외모부터 그랬다. 볼살이 쏙 빠져 골격이 선명하게 드러났으며 오직 음울함만 배어 있던 회색 눈동자는 점점 예기와 흉기가 서렸다. 조바심과 불안함이 보이던 걸음걸이와 몸짓, 목소리도 어느샌가 황권을 물려받을 자답게 패기와 위엄을 드리우고 있다. 한 번 목표한 것은 꼭 이루고 마는 성정도 보라. 갈대처럼 약한 황제라 놀림 받던 제 아비와는 확실히 달라도 다르다. 이 모든 변화가 주적들을 없애면서 겪은 풍파 덕분일지도 모른다. 야울의 새끼 사자가 소년티를 벗으며 비로소 수사자가 된 것이다. 굶주린 매와 매의 사냥감처럼 쫓고 쫓기듯 하던 대련은 황태자의 물음으로 멈추었다. “헉, 허억… 어째서 끝내고 싶단 말을 하지 않지?” 무인은 살짝 난처한 듯 미소 지어 보였다. 예전에 대련할 땐 언제나 자신이 먼저 중단 요청을 하여 끝냈다. 황태자보다 더 강한 힘을 지녔던 자신이 ‘이젠 힘들어서 못하겠습니다.’라는 겸양의 방식으로 중단 요청을 하면, 그제야 황태자가 마지못해 끝내주곤 했다. 하지만 이제부턴 아니다. 겸양, 겸손이라는 것은 상대보다 실력이 더 나을 때나 편히 내세울 수 있는 태도다. 이제 무인의 실력은 황태자보다 출중하다고 할 수 없는 상태. 명색이 호위 무인이면서 황태자보다 실력이 좋지 않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리기가 쉽지 않다. ‘이젠 힘들어서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해버리면, 그 말이 사실인 것만 같아 무인 자신도 견딜 수 없었다. 무인은 적당한 대꾸를 생각해냈다. “전하께서 언제 지치실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시종이 시원한 물을 황태자에게 올렸고, 황태자는 그것을 받아 마시며 신랄하게 웃었다. 언제 지치실지 기다리고 있었다…라니. 지치는 것은, 지쳐 쓰러지는 것은, 자신에게 사치다. 이런 단검 대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하고도 복잡한 일을 해나가는 자신에게 피곤함 따위는 접근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다음부턴 날 그렇게 봐줄 필요 없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늘 네게 말하지만, 나를 죽일 작정으로 임해야 할 거다.” “…… 알겠습니다.” 황태자는 궁 내 인공 계곡에 몸을 빠뜨렸다. 태양에 한껏 달아오른 몸이 차가운 물 속에서 깨끗하게 씻기고 식혀졌다. 그 뒤 그는 아침 정무를 시작했다. 정무의 대부분은 황제가 물러난 후의 국정을 다루었다. 황태자는 황위를 물려받을 때를 대비한 준비 작업을 충실히, 그리고 꼼꼼하게 했다. 할데바인이나 로젠플라드 고위직이 제거되었다고 해도, 불편한 세력은 아직 남은 법이다. 중립 지역들이 바로 그러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친황파가 아니고 이익에 따라 적이 될 수도 있으므로, 되도록 호의적으로 대해야만 한다. 장인의 도시 바너, 죽은 땅 괴지, 빙하 지역 시귀르, 그 땅의 군주들이 갑작스러운 황권의 변화를 불편하게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게 자신의 임무이다. “괴지 녹화(산이나 들 따위에 나무나 화초를 심어 푸르게 함.)작업은 네히트 영주에게 권한을 맡깁니다. 시귀르 관세 문제는 가능하면 줄이는 쪽으로 하시고.” “전하, 괴지 녹화 작업은 오를린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행정적으로도 그 작업은 오를린이 맡는 게 좋았다. 게다가 오를린은 황태자의 장인이 돌보는 땅이 아니던가. 황의원들은 황태자가 장인에게 괴지 작업을 맡길 줄 알았는데, 예상이 어긋나자 술렁였다. 황태자가 그 점에 관해 대답했다. “오를린은 텔레포트 홀 공사만으로도 바쁘지 않습니까. 괴지 녹화 작업은 경제 기반이 크게 망가진 네히트에게 멋진 재기의 발판이 되어줄 겁니다. 자, 그리고 다음 문제는…….” 황태자는 신경 써야 할 게 중립 지역뿐만이 아니라며 회의를 이어갔다. 오슬의 수인족이 제국을 적대시하는 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 동한의 식민지 문제와 교역품 관리 등에 관한 일이 다뤄졌고, 회의 중 몇몇 이들이 안건과는 다른 생각을 했다. ‘장인을 무시하는 거, 맞지?’ ‘황태자비가 몸이 약하다더니, 황태자의 저런 태도도 그와 관련이 있을지도.’ *** 황의회가 끝난 후, 황태자비에게서 요청이 왔다. 만나 뵙고 싶다고. 그러나 황태자는 매몰찬 거절의 의사를 시종에게 전했다. 그는 아내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남편에게 몇 번이나 자존심을 짓밟히면서도 그것이 없었던 일인 양 태연하게 만나려고 하는 그 여자에게 점점 질려간다. 그는 신하들이 빤히 보는 데서도 ‘자존심이 없는 여자’라는 식으로 혼잣말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고 궁정인들은 황태자비의 미래가 그리 밝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오전 정무 후에 다과 시간, 황태자는 접객실에서 한 손님을 맞이했다. 그 사람은 바로 마탑의 이인자라는 후슈킨의 무남독녀로, 금녀의 구역이던 흑마탑 최초의 여성 수련생이었다. 지금은 수련생 신분이 아니라 마탑에서 제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는데, 그 능력이 널리 알려져 마법사를 꿈꾸는 모든 여학생의 본보기가 되었다. 황태자는 접객실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후슈킨의 딸을 보았다. 그녀는 검고 곧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검은 드레스를 입었는데, 군데군데 간단한 모양의 장신구로 밋밋한 차림을 치장해주었다. 그런데 그 장신구들이 하나같이 마법을 의미하는 달, 별, 마력 생물들의 모양이다. 황태자를 진알한다고 나름대로 외모에 신경을 쓴 것 같지만, 마법에 빠진 자 특유의 취향을 지우진 못하는 그 모습이 왠지 재미있어서 황태자는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황태자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했다. “사루아 루 후슈킨, 야울의 왕이시자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는 그 인사가 마음에 들었다. 둔한 궁인들 중 일부는 여전히 황태자를 두고 ‘야울의 왕이시자 로젠플라드의 수호자’라는 직명을 부르곤 하는데, 로젠플라드가 제국교에서 물러난 지금 그 직명은 의미도 없고 황태자가 듣기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황태자는 자신을 로젠플라드의 수호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전부를 못마땅하게 여기곤 했다. 그런데 이 후슈킨의 딸은 궁 밖에서 생활하는 자 치고는 그런 눈치 하나는 좋다. 아니, 어쩌면 눈치가 아닐지도 모른다. 권력의 중심이 서게 될 황태자를 미리 외경하여 인사 하나하나에도 조심하는 것일 수도 있다. 황태자는 사루아에게 앉으라고 눈짓하며 인사했다. “궁에서 아름다운 마녀를 보게 될 때도 있군요.” 아름다운 마녀라. 시종은 보기 드문 황태자의 농담에 상당히 놀랐으나, 정작 사루아는 그 농담을 기분 좋게 들었다. 그녀는 황태자가 자리에 앉자, 그제야 따라 앉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표정 가득히 설렘과 두려움과 기대가 섞여 있다. “듣자하니, 후슈킨 양이 최근 부친보다 마탑의 이인자 자리 노릇을 더 톡톡히 한다고 하던데.” “과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후슈킨 가문의 영광을 위해 맡을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게… 제국을 위한 일이라고 배웠습니다.” 틀에 박힌 대답 같지만, 그 속에서도 진심이 느껴졌다. 황태자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눈 밑에 짙은 그림자를 보니 마탑에서의 연구와 작업이 얼마나 고되고 빡빡한지 보였다. 그런데 그게 나름대로 매력적이다. 얼굴 자체가 귀여운 편이라 그런지도. “나이가.” “스, 스물네 살 입니다!” “아.” “…….” 황태자는 그녀가 자기보다 무려 네 살이나 많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혼기를 놓쳐도 한참 놓친 그녀가 일에 파묻혀 있으면 따분하지 않을까. 문득 그런 궁금증이 일었다. “마탑을 뛰쳐나오고 싶을 때는 없습니까.” “예?” “결혼의 형태는 아니더라도 짝을 짓고 싶단 생각은 들 텐데. 내 말은, 일을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설레는 상대나 사랑하는 이가 없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아, 아직 그런 분이 나타나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이 나타난다고 해도, 그렇다고 마탑을 나오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이 일이 재미있고, 적성에 맞아서…….” “그렇군요. 그나저나 차를 좀 마시지 그래요.” 사루아는 황태자의 말에 따라 차를 마시려다가 잠시 멈추었다. 황태자가 어찌 그러냐는 듯 물었다. “뭐 불편한 데라도?” “그게 아니라…… 저기, 전하.” “말하세요.” “결례가 아니라면 잠시 마법을 쓰는 것을 허락해주실 수 있는지요?” 궁내에선 생활에 필요한 마법을 제외한 마법은 금지다. 더군다나 황족 앞에서라면 더욱더 불가능하다. 황태자는 그녀가 마법으로 무엇을 할 건지 궁금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사루아는 고개를 저었다. “문제랄 것까진 아닙니다만.” “간단한 거라면 허락하겠습니다.” 그러자 눈 깜짝할 새에 마법이 행해졌다. 황태자의 잔에서 얼음 덩어리 두 개가 생겨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낸 것이다. 황태자는 소리가 난 잔을 들여다보며 알 것 같단 미소를 지었다. 무더운 날 미지근한 차 대신 냉차를 마시는 게 좋겠지. 그녀 나름의 마음 씀씀이였다. 사루아가 쑥스럽게 웃으며 설명했다. “박하 향이니까 차갑게 마셔도 괜찮을 듯하여 재주를 부려봤습니다. 마음에 드시지 않으시면 다시 가열하는 마법을 허락해 주시….” “아니. 괜찮아요. 마음에 듭니다.” 두 사람은 다과를 즐기며 대화를 이어갔다. 주로 황태자가 사루아의 일이나 후슈킨 가문에 관한 말을 물으면, 그녀가 대답하는 형식이었다. 대화 내내 사루아는 황태자가 어째서 자신을 불렀는지 궁금해 했다. 말을 거는 것을 보면 특별히 목적이 있어 보이진 않는 것 같은데……. 그리고 그에게 느낀 것이 하나 있었다. 그가 자신을 보는 눈이 심상치 않다. 눈빛만 보자면 조만간 무슨 일이 생겨도 생길 것 같은, 아찔한 느낌. 그것은 결코 그녀의 착각만은 아님이 곧 밝혀졌다. *** 그녀와의 제법 긴 다과 시간이 끝나고 황태자는 륀체르와 통신을 시도했다. 극비리에 행해진 통신이고, 그만큼 앞으로 나눌 대화는 중요하다. 륀체르는 황태자의 예상보다 빨리 그 통신을 받았다. [황태자 전하. 어쩐 일로 저를 찾으시는지요. 곧 다가올 제 생일이라도 챙겨주실 생각인지?] 어조나 분위기를 느낄 수 없지만, 그런데도 륀체르의 말투는 황태자의 귀에 마치 생생히 들리는 듯하다. 서른 살이라는 나이답지 않은 특유의 발랄함과 건방기가 그대로 전달되었다. [형, 편하게 말해요.] 그러자 한참의 침묵 후 대답이 돌아왔다. [이봐, 비올. 네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무지 불편하다는 거, 알고 있어?] [하하. 그러면서도 제 이름을 잘 부르잖아요?] [전하께서 까라면 까야지. 안 그래?] [그나저나 바쁘실 듯한데 본론을 말하죠.] [기대하던 바야.] 황태자는 황궁의 주도 아래 기갑체 부품 생산 공장을 재건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마력 기술자 포르투바가 필요했다. 그러나 교섭 끝에 결국, 그를 바너의 륀체르 사파이어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각자 대리인을 내세워 행해진 이번 쟁탈전은 ‘피가 터진다.’는 표현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살벌했지만, 결국에는 사파이어가 황궁 권위를 이기고 포르투바를 차지한 것이다. 그것이 몹시 못마땅한 황태자는 륀체르에게 압력을 넣어야만 한다. [제국기술원 기술자는 제국에서 키워낸 인재입니다.] 포르투바가 제국기술원 수석 출신임을 내세운 말이다. 제국에서 키워낸 인재이니만큼 그의 기술 협력도 제국과 함께해야 한다, 그러니 포르투바를 제국에 넘기라는 말 아니, 협박. 륀체르는 알아듣고 있으면서도 침묵했다. [억만 자일보다 소중한 인재가 돈에 눈이 멀어 개인의 수하가 된다는 건 말이 안 되지요, 형.] [이봐, 수하라니. 우리는 동등한 동업자 관계라고.] [우리? 벌써 포르투바와 그렇게 말할 관계가 되었습니까?] [젠장, 비올…. 대체 뭐하자는 거야? 아무리 궁에 사는 높으신 분이라도 이건 아니잖아. 영업 방해라고. 제국법에 황권은 상권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는 거로 아는데?] 살짝 신경이 날카로워진 륀체르의 말에, 황태자는 표연히 대꾸했다. [지금의 제국법이 낡은 법이 될 날이 머지않았잖아요. 잘 판단하세요. 참, 몇 달 후에 생일인 거로 아는데 미리 바너에 선물 보낼게요. 그럼 잘 지내시길.] 황제가 되면 제국법을 뜯어고쳐서라도 포르투바를 빼앗겠다는 협박. 륀체르에게 보낼 생일 선물은 포르투바를 넘겨달라는 계약서나 다름없는 서류임이 분명하다. 륀체르는 이래서 황족들이 짜증이 난다며 넌더리를 쳤고, 통신을 마친 황태자는 잔잔히 내비치던 미소를 싹 지워버리고 정색했다. 예전, 사파이어가 로테아르카와 닮은 여인이 담긴 마법영상구를 보여줬을 때부터 줄곧 신경 쓰였다. 로테아르카의 쌍둥이 자매를 두고 ‘나의 그녀야.’라고 소개하는 것도 묘하게 거슬렸다. 사람을 자극하는 느낌 같기도 하고. 그런 판국에 주요 기술자까지 냉큼 가져가 버리니 여간 눈엣가시로 보이는 게 아니다. 물론 륀체르의 입장이야 이해는 한다. 소유하던 실렌틴 광산 기갑체 부품 공정이 엉망이 되어버렸으니 새로 만들려고 기술자를 구하는 것이야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를 가려서 까불어야지. 바너에서 세력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도와줬던 이가 누구인가. 바로 황태자 자신 아닌가. 그런 황태자가 포르투바를 원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륀체르는 뻔뻔하게 이번 일을 감행했다. “올챙이 적 시절을 생각 못한다더니, 딱 그 꼴이군.” 황태자가 륀체르의 얄망궂은 표정을 떠올리며 싸늘한 한숨을 쉬는 그때, 급하게 시종이 트리아노네(최근 로테가 거주하는 별장)의 소식을 전했다. “전하! 황태자비 전하께서 해산하실 기미가…!” “뭐라?” 예정보다 두 달이나 이르게 로테가 아이를 낳으려 한다는 내용. 소식을 전하는 이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황태자는 로테의 해산이 난산이 될 것을 짐작했다. ============================ 작품 후기 ============================ 선작, 코멘트, 추천,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다음 편이 이번 챕터의 마지막 편입니다!로테에게 시련이 기다리고 있어요! 00090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층층이 쌓인 구름 색깔이 거무튀튀한 게 마치 시체의 낯빛 같다. 오늘 중에 소나기가 거세게 퍼부을 게 분명하다. 급하게 차려진 산실에선 몇 시간 째 반가운 소식이 들릴 낌새가 없다. 황태자비가 간헐적으로 뱉는 신음과 시녀들의 산란한 움직임, 황의들의 초조하기 짝이 없는 표정 등이 암울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임신 내내 상태가 좋지 않다고 했더니 조산에 난산이다. 마법이 제아무리 만능이라 하여도 인간은 출산할 때만큼은 절대 동물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그 현실이 로테를 절망하게 했다. 밑이 찢어지고 척추가 부서질 것 같은 고통에 허우적거리는데, 산파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한다. “자, 이때입니다! 어서 조금만 더 힘을 주세요, 전하!” 없던 힘도 쥐어짜 내고 있는데 자꾸 힘을 주라 하니 미칠 노릇이다. “헉, 허억, 으윽……!” 말로만 듣던 하늘이 노래진다는 말이 이제야 실감이 난다. 의식마저 흐려지려 하는데 아직도 배 속의 아이는 나올 것 같지 않다. 이쯤 되니 살아온 지난 시절이 순서대로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 언니와 티격태격하던 어린 시절, 황후가 되겠다고 까불던 소녀 시절, 설레며 황도에 가던 시절까지. 지난날 꿈꾸어왔던 모든 것이 그저 철없는 아가씨의 몽상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초인적인 희생정신이 들었다. 이 몸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지만, 배 속의 아이만큼은 살아야 할 테지. 어떻게든 몸 밖으로 빼내 세상의 빛을 보게 하고 말리라고 다시 한 번 온 힘을 쥐어짜 냈다. “으으윽!” 오를린 출신으로 아이를 낳은 적이 있는 시녀 하나가 보다 못해 움직였다. 시녀는 황의들은 인정하지 않는 요법으로 태자비의 고통을 없애주려 했다. 그 요법이란 바로 마취 효과가 있다는 식물의 잎을 찧어 물을 끓인 뒤 그 수증기를 임신부의 곁에 두는 것이다. 황의들이 그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궁에서 금지된 짓을 하는 촌뜨기 시녀에게 놀라고, 그녀의 고집에 두 번 놀랐다. “글쎄 이름도 모르는 약초 따윈 치워두래도!” “이 약초가 전하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없애줄 수도 있단 말입니다!” “고집불통인 여자군. 대관절 저걸 어디서 보관했다가 이리 들이대는 겐지.” 로테는 뭐가 됐든 고통만 덜 수 있다면 환영했다. 황의들이 ‘엄하게 벌하겠다!’, ‘부작용이 있을 것이다!’는 말을 해대도 시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기어이 알싸한 향이 나는 수증기를 로테의 곁에 두고 쐬게 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마취 효과가 있는 잎이라 해도, 물에 끓여져 수증기로 변한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로테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짜증스럽게 손을 들어 수증기를 내뿜는 것들을 치워버렸다. 그러자 시녀는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야겠다며 수선을 피워댔다. 그러는 사이 황의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로테로부터 좀 멀찍이 떨어졌다. 황의들은 만일에 대비한 일을 조용히 상의했다. 가장 경력이 오래된 황의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나라도 살려야겠어.” “역시 그렇지?” “마탑에서 사람을 불러야 할 거야.” “마탑? 마의사도 아니고 마법사를 부르겠단 말인가?” “우리 마의사만으로는 힘이 부족하지 않은가.” 경력이 오래된 황의는 마법사를 부를 필요성을 느꼈다. 마법을 이용해 임신부의 생명력을 아이에게 전부 희생시키는 방식. 그래서 아이만이라도 살릴 생각이었다. “어쩔 수 있나? 저래서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 길어질수록 둘의 목숨 전부 다 장담할 수 없네. 황손이라도 구해야 우리의 면이 서지 않겠나.” 가장 경력이 적은 황의가 저어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전하는 아직 이렇게…… 가시기엔 젊으신데…….” 황태자비가 젊은 거야 황도의 개들도 다 아는 사실. 황의들은 그걸 누가 모르느냐는 듯 신입을 흘겨보았다. 그 따위 감성만으로 일을 처리하기엔 황궁이란 곳은 그리 녹록한 곳이 아니다. 결국, 의견을 모은 황의들이 마탑에 전언을 보내려 하는 그때, 야울 궁에서 황태자가 찾아왔다. 황의들은 사람을 부르려던 것을 중단하고 황태자에게 상태를 보고했다. “전하, 지금 상태는…….” 보고를 들으며 황태자는 아내를 지켜보았다. 고통에 신음하다 지친 아내는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다. 약한 자는 그 자체로 죄인이 되어버린다는 생리를 겪어온 그에게 아내의 모습은 보기 좋은 것이 아니다.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는 이대로 두면 둘 다 위험하다는 황의의 말에 어떤 지시도 내리지 않고 아내에게 다가갔다. “로테.” 그는 아내의 손을 만졌다. 손의 차가운 감촉을 느낀 로테가 흐린 눈으로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고통 속에서 의식이 흐려지면서도 그녀는 남편에게 한 가닥 희망을 품었다. 그가 다정한 말이라도 해주길 원했다. 그가 힘내라는 말 한마디라도 해주길, 간절히 바랐다. 묵직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렇게 다 죽어갈 때가 아니지.” 로테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그런데 황태자는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재촉을 했다. “이 꼴이 대관절 뭔지 모르겠군. 지금 너는 뭘 하고 있지? 단 하나 네가 자신 있어 하던 게 이 일, 아니었나?” “저, 전하….” 로테는 남편의 눈에서 경멸을 보았다. “얼른 내게 황자를 안겨.” “……!” “그것만이 네가 본궁(황제 궁)에 내 아내로서 갈 길이란 건 알아야 할 거야. 이렇게 다 죽어가는 꼴로 있다간 트리아노네조차도 빼앗기고 말 테지.” 로테는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황후의 봄 별장이었다가 황태자비의 것이 된 트리아노네를 빼앗기고 말 거라니. 그게 대관절 무슨 말인지? 주었다가 빼앗는 경우가 바로 이러한 것인가? 그러나 의문은 고통에 다시 흐려졌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화가 난다는 것이다. 황태자의 신경질 어린 태도에, 그의 아이를 낳는 여인으로서 고통보다 더 큰 분노가 솟았다. 그 분노는 그녀의 몸에 큰 변화를 주었다. 그녀의 상태를 관찰하던 산파가 외쳤다. “조금만 더 힘을 주세요! 조금만 더요!” 로테는 어떤 신음도 내지 못하고 이를 꽉 깨물었다. 여태와는 다른 반응이다. 황태자는 그런 아내를 보며 시린 미소를 던졌다. 그리고 미련 없이 그곳을 나갔다. 드디어 아이가 태어났다. 다행히 황의들이 예상한 것과는 다르게 누구하나 목숨을 잃지 않았다. 산실에선 아이의 울음소리가 힘없이 나왔다. “으애앵… 으애…….” “어, 어떻게 이런 일이…….” 황의와 산파, 시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로테가 낳은 것은 딸아이다. 딸이란 것만으로도 로테에겐 아쉬운 일인데, 아쉬움을 넘어서 충격적인 점이 생겼다. 대저 황궁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사지가 멀쩡한 것을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려 눈동자를 보기도 하는데, 그 검사를 하던 황의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검어… 너무 검다고.” 시녀 하나가 황의의 어깨너머로 아이의 눈동자를 보았다. 안구가 들어 있어야 할 부분에 안구는 없고 새까만 어둠이 가득 차 있다. 어둠은 어둠으로만 끝나지 않고 아이의 눈꺼풀 밖으로 끊임없이 검은 기운을 뿜어내었다. 두 눈 모두가 그런 상태다. 황의는 이런 어둠을 잘 안다. 북쪽에서부터 번진다는 암흑 지형에 가득 찬 안개, 바로 그와 같은 불길한 물질이 분명하다. “어찌 전하께서 이런…….” “가여우신 분! 이를 어쩌지!” 로테는 앞날에 드리운 먹구름을 알지 못하고 아이를 낳자마자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 *** 황태자비가 낳은 아이 때문에 궁이 떠들썩했다. 황제와 황태자는 이번 일을 매우 민감하게 여겼다. 황태자비가 낳은 아이의 눈이 검은 기운으로 가득 찼다는 것은 제국민들이 잊고 있는 암흑 지형 문제를 다시 불거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황제와 황태자는 제국의 혼란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황태자비를 포함한 그녀의 시녀 네 명, 산파를 모두 트리아노네에 유폐하였다. 그리고 분만을 지켜보았던 황의들에게도 궁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떠들썩한 것은 오직 궁 뿐, 황도 사람들은 황손의 탄생에 관해 전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궁에서 아이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에겐 어떤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았으며, 형식적인 로젠플라드의 축성도 행해지지 않았다. 황태자는 아이 문제를 외면하듯 오직 황위를 이어받을 작업에만 집중했다. 그 와중에 소문이 돌았다. 비오르틴이 황제가 되면 후궁을 들인다는 소식. 소문의 중심에 있는 그 여자는 바로 마탑의 이인자 후슈킨의 무남독녀 사루아였다. *** 오를린. 루돌프를 후원하기로 한 륀체르가 자금력과 인맥을 동원하여 제국 의학원에 루돌프를 특별히 입학하게 해주려고 노력했고, 그 노력은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루돌프는 가을 학기부터 제국 의학원에 입학하기로 결정이 났다. 가을까진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 하여, 륀체르는 루돌프에게 공부를 좀 더 하거나 아니면 고향에 다녀오라고 배려해 주었다. 덕분에 루돌프는 고향 오를린에 가서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채 일 년도 되지 않은 사이에 고향은 제법 변했다. 텔레포트 홀이 만들어져 (돈 많은 사람들의) 이동이 쉬워졌고, 전보다 기반 시설도 좋아졌다. 마을 곳곳에 ‘황태자비의 고향’이라는 주제를 내세운 관광 시설, 상품이 가득하다. 시골스러움을 한층 덜어낸 고향의 모습에 루돌프는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스승이자 마스터인 한스 레 하인첼이 생각보다 화내지 않고 기쁘게 맞아줘서 그것도 고마웠다. 오랜만에 본 스승은 여전히 술과 사람을 좋아했고, 조금 마른 것만 빼면 표정도 밝고 모두 좋아 보였다. 그는 말도 없이 멋대로 오를린을 떠난 제자에게 도리어 자기가 속이 좁았다며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루돌프는 스승에게 그간의 사연을 설명했다. 물론 아가씨와 드래곤 기사님에 관한 것은 될 수 있는 한 말 하지 않았다. 그게 아가씨를 위한 일이라 여겼다. 루돌프는 특히나 새로운 마스터-륀체르 사파이어-에 관한 말을 아주 길고 자세하게 했다. “그분은 구두쇠에다 말이 거칠기로 유명하시지만, 정작 저에겐 단 한 번도 구두쇠처럼 군 적이 없어요. 오를린으로 가는 이동스크롤도 지원해 주셨는걸요. 게다가 소년에겐 욕을 하지 않는다며 저에게 언제나 고상한 말만 쓰신답니다.” 한스는 안도했다. “어찌 됐든 참 다행이다. 나보다 더 잘난 마스터를 만나니 원하는 공부도 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네겐 좋은 일이구나.” “그리고 스승님, 이거 받으세요.” 루돌프가 건넨 것은 좀 큰 액수의 자일이다. 루돌프는 머뭇거리다가 설명했다. “제가 그동안 어찌어찌 모은 건데 드래곤 링클을 사기엔 아직 좀 부족해요. 하지만 나머지 돈은 제가 나중에 더 드릴 테니까….” “이런 건 됐다니까.” 한스는 그 돈을 한사코 거절했다. 그리고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루돌프, 행여나 나중에 훌륭한 의사가 되어도 오를린에 다시 정착할 생각은 하지 마라. 여긴 네가 그리울 때 가끔 찾는 그런 고향으로 남았으면 하니까.” “스승님….” 한스는 루돌프가 의학 공부를 위해 오를린을 떠나는 것에 아쉬움을 감출 길이 없었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앞길이 창창한 소년의 발목을 잡고 싶진 않았다. 다만 그는 소년에게 작게나마 어떤 기대를 걸고 있을 뿐이다. “저기 말이야. 이건 그냥 하는 말이니까 대충 흘려들어.” “예? 뭐를요?” “음. 황도에 가면 거기서만 판다는 아포크시에 누룩 좀 보내줘. 나는 그거 정도면 만족하니까.” 루돌프는 버럭 성질을 냈다. “스승님! 누룩이라니요! 제가 술 끊으라고 했잖아요!” “아니! 내가 마시려고 그러는 게 아니야. 여기 사람들이 황도 사람들이 마시는 술에 관심이 많아 보여서 말이지.” “밀주업도 이제 좀 그만두세요!” 변성기가 찾아온 루돌프의 고함에 한스는 두 귀를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시끄럽다. 못 본 사이 잔소리꾼이 되었구나. 그러면 여자들이 싫어한다는 걸 알아둬. 하긴. 공부하느라 네 또래 여자애들이랑 놀 시간도 없겠군. 그래도 적어도 황도에 가서 공부할 때 ‘오를린 남자는 잔소리꾼이다.’는 인상은 만들지 않도록 하려무나.” 저녁이 되고 그들은 소용돌이 산 아랫자락에 있는 음식점에서 저녁 식사했다. 달이 하늘 한중간에 걸리고 곤충 소리가 무더운 밤공기를 간질이는 시간, 그때까지도 한스는 음식점에서 술을 마시며 마을 사람들에게 제자 자랑을 하는 데 바빴다. 제자가 사온 선물들과 제자가 갈 학교 등을 마치 제 자식의 일처럼 자랑했다. 쑥스러운 루돌프는 먼저 집으로 돌아가 있겠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점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문득 고향길을 산책하고 싶었다. 일 년 전만 해도 밤에 산책, 그것도 소용돌이 산 아랫자락이라는 다소 외진 곳을 산책하는 것은 위험하여 꺼렸지만, 이제는 다르다. 아가씨 일행과 함께 한 시간이 자신을 한층 대범하고 성숙하게 변하게 하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루돌프는 소용돌이 산 입구로 향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더운 바람도 시원하게 느껴졌다. 마력생물이 득시글거리는 위험한 곳이라는 말 때문에 사람이 없다. 하지만 그런 점이 특히나 마음에 들었다.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는 황도에서는 이런 고요함을 돈 주고도 살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얼마간을 걸었을까. 심상찮은 바람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리자, 루돌프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놀라서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아! 저건……!” 하늘에 낯익은 생물이 날아다닌다. 마력 생물 드래콘! 달빛 아래 진줏빛 몸을 우아하게 활개 치는 그 생물은 소용돌이 산을 향해 날아가는 듯하다. 그에에에! 그에에에에! 루돌프는 그 생물의 눈빛을 보았다. 피처럼 붉은 선홍빛 눈동자! 자기가 아는 한 이 소용돌이 산에서 그러한 눈동자를 가진 마력 생물, 그러한 눈동자를 가진 드래콘은, 단 하나뿐.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다. “누나! 마리아 누나!” 오랜만에 첫사랑 아니, 짝사랑을 본 소년은 목청이 터져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들리지 않는 건지,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지 마리아는 멈추지 않고 기어이 소용돌이 산 저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와 함께 지냈던 시간도 함께 떠나가는 듯했다. “마리아…….” 자기도 모르는 사이 소년의 눈동자가 축축이 젖어들었다. 보고 싶고 그리운 이를 보았지만, 보면서도 손을 뻗을 수 없다는 사실이 이토록 가슴이 먹먹한 일이라는 것을 소년은 살면서 처음 알았다. 그런데 언제 따라왔는지 등 뒤에서 스승이 소년을 부르고 있었다. “집에 가자! 루돌프!” “…… 예.” “눈가가 축축해. 무슨 일이야?” 소년은 잠시 한 손으로 가슴을 꾹꾹 눌렀다. 그리고 애써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더워서… 더워서, 땀이 나네요.” ============================ 작품 후기 ============================ 소년... 어린 날의 사랑은 원래 이루어지지 않는 거란다. 선작, 추천, 코멘, 쿠폰 감사합니다! 00091 7. 악의 발화 =========================================================================                            신비의 지역 루앙. 마도(魔都) 루네. 오를린에서 북쪽 소용돌이 산을 지나면 루앙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법사들의 땅이 나온다. 대륙에서 마법에 뜻을 둔 이들은 대개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한다. 가문과 학벌이 받쳐주는 이들은 황도 로귀하르트의 마탑으로 가고, 배경 없이 가진 거라고는 마력 하나뿐인 이들은 루앙의 마도(魔都) 루네로 모였다. 그래서 이곳은 대륙에서 마탑 다음으로 마기가 세다. 마기의 덕분인지 이곳은 한여름인데도 그다지 덥진 않다. 마탑에서 마법사들이 황궁의 기온을 서늘하게 해주는 것처럼, 이곳도 루앙의 마법사들이 자신들의 생활이 편하도록 기온을 조절 중이다. 이곳 루네의 특징이라 하면 하나같이 기괴한 모양을 자랑하는 건물들이 되겠다. 호박, 버섯, 거미줄, 헐벗은 나무, 박쥐, 뿔이 지나치게 긴 산양 등을 흉내 낸 건물들을 구경하다 보면 이곳에 모인 이들, 특히나 이곳의 건물주들이 얼마나 독특함을 추구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으리라. 루네의 극서 쪽에 있는 여행자의 거리도 마찬가지다. 이곳 건물들은 다양한 모양으로 여행자들을 유혹하는 여관이 대부분이다. 가장 허름한 건물 하나를 보자. 최상층인 3층 지붕이 첨두아치로 옹기종기 모여 있어 하늘에서 보면 마치 벌집이 내려앉은 듯하다. 하지만 이곳 주인은 최상층의 장식에 지나치게 신경 쓴 나머지 간판을 만들지 못했고, 덕분에 나그네들은 이 여관을 두고 ‘벌집’이라 부르곤 했다. 천장 말고는 특징이라곤 내세울 게 없는 여관에다 시설도 엉망이다 보니 숙박비는 아주 저렴하고, 덕분에 빈곤한 뜨내기들이 모이기 좋았다. 마리는 이곳 최상층의 방 하나를 빌렸다. 화장실과 욕실이 없다는 게 좀 걸리지만, 정화 마법이 가능한 드래곤 호위기사가 늘 곁에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했다. 방을 빌린 첫날에는 루앙의 지리를 꿰며 여기저기 떠도는 정보를 모았다. 그리고 오늘 그녀는 호위기사보다 일찍 일어나 1층에서 정보지를 가져와 읽었다. 마리가 정보지에서 특히나 눈 여겨 본 것은 황도 로귀하르트의 궁 소식이다. 글쎄 이 엉터리 같은 정보지가 밑도 끝도 없이 황태자비 소식을 괴상하게 다루질 않는가. “흐음,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애가 나오려면 아직 두 달이나 남았는데 벌써 태어났다니? 아기가 여자애라는 건 그렇다고 쳐. 그런데 장애아라니. 이것들이 아무리 자극적인 거로 돈을 버는 족속이라지만, 이런 건 너무하잖아?” 제 동생이 낳을 아이에 관한 일이다 보니 마리는 은근 예민하게 느꼈다. 그뿐만 아니라 황태자가 황위를 물려받으면 후궁을 들인다는 소식도 그녀를 찝찝하게 했다. ‘로테, 너 잘 있는 거니? 후궁이라니! 그런 걸 좌시하려고 궁에 간 건 아니지 않니?’ 모두 거짓이길 바랄 수밖에. 원래 세상은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이 얼굴 하나 믿고 황태자비에 오른 여자를 질투하는 법이다. 그러니 신문 내용이 저 따위겠지. 그냥 무시하는 게 좋다. 심란함을 잊으려고 정보지를 덮고 창문을 열었다. 마법사들의 친절한 마기 덕분인지 바람이 여름치고는 제법 선선하다. 바람은 실내에 들어와 낡은 방 특유의 퀴퀴한 공기를 조금이나마 정화했다. 마리는 바깥 공기를 몇 번 들이마시다가 고개를 돌려 호위기사를 보았다. 아직도 그는 바닥에서 깊은 잠이 들어 있다. 침대도 아닌 바닥에서 말이다. 대관절 무슨 고집인지 호위기사는 늘 바닥에서 자려고 한다. 특히나 침대가 하나뿐일 때면 더더욱. 평소 연인 간의 다정하고 은밀한 행위는 침대에서 한다 해도, 결국에는 졸리면 바닥으로 가버리는 것이다. 가끔 자신이 능글맞게 웃으며 ‘탄탄한 근육을 쿠션 삼아 자고 싶다!’고 고집을 부려도, 단호한 호위기사는 ‘아가씨가 침대에서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편히 주무시는 게 저는 좋습니다.’라며 끝끝내 지저분한 바닥에 누워버렸다. 만약에 그를 호위기사가 아닌 동등한 신분으로 만났으면 어땠을까? 이 관계도 신분에 따지지 않고 그저 평범한 연인 관계였다면? 마리는 상상해 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 남자는 지금도 건방지고 잔소리쟁이인데 신분마저 같다면 더 건방지게 굴 게 분명하리라. “흐아음.” 잠이 모자란 것 같아서 마리는 다시 침대로 갔다. 그리고 베개에 머리를 누이고 눈을 감았다. 하품이 한 번 더 나왔다. 눈꺼풀이 무거워 눈을 한 번 비볐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잠이 쉽게 들지 않는다. 동생과 동생의 아이에 관한 믿을 수 없고도 찝찝한 정보를 들어서일까? ‘역시 미래가…… 그런 식으로 가는 건가. 그러면 안 되는데. 진짜, 안 되는데.’ 이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희미하게나마 앞날을 본 적이 있다. 동생의 불행하고도 끔찍한 미래를 보았고, 암흑 지형과 차원의 균열로 인한 참사를 어렴풋이 느끼기도 했다. 동생을 구하고 끔찍한 미래를 맞지 않기 위해 이 여행에 뛰어들었는데, 벌써 소식지에 저런 불길한 정보들이 떠돌아다니니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신경이 쓰인다. 몸은 피곤한데 잠을 이룰 수 없는 그 상태가 얼마간 지속되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마도 바닥에 있던 호위기사가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리라. ‘오호, 우리 기사님이 깨어나셨군.’ 마리는 아침 인사를 하는 대신 계속 눈을 감은 체 했다. 호위기사가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뭘 할지 궁금하고, 그것을 자는 척 하며 지켜볼 요량이다. 여행 동료이자 ‘연인’으로서 한 번쯤 아침에 일어나면 이마나 뺨, 입술에 입맞춤해줄 법도 하건만, 하이너는 단 한 번도 먼저 그런 적이 없다. 아마도 지난날엔 항상 루돌프나 마리아가 함께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 루앙에서는 오직 단 둘 뿐. 그런 소소하고도 달콤한 일을 기대할 만하지 않을지? 하지만 마리의 그런 기대는 깨지고 말았다. 드르륵. 창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호위기사가 창문을 닫은 것이다. 아마도 그는 아침 햇살이 아가씨의 잠을 방해하는 게 싫은 모양이다. 그다음엔 침대 옆 세면대에서 물소리가 났다. 호위기사가 세수와 양치를 하는 소리다. 자고 일어나면 역시 그런 깔끔한 일부터 해야 하는 게 맞겠지? 드래곤의 마법으로 몸을 정화하는 게 간단할 테지만, 아직 정신이 인간에 머물러 있는 하이너는 손수 물로 씻는 방식을 택했다. 마리는 그가 그 후에 자기에게 입맞춤해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다음에 나는 소리는 식탁에서 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 호위기사가 찻잔과 정보지를 정리하는 듯하다. 마리가 어질러둔 것을 정리하는 그의 습관은 오늘도 여전. 옷자락 소리가 났다. 호위기사가 가볍게 몸을 푸는 게 분명하다. 넓은 곳을 뛰어다니며 체력 단련할 환경이 아니기에 적어도 그런 최소한의 움직임, 사지를 쭉쭉 펴는 것으로 몸의 따분함을 덜어내는 것이리라. ‘칫!’ 마리의 입술이 씰룩였다. 호위기사의 체조는 제법 오래 이어졌다. 그 후에 마리가 들은 것은 바로 그의 걸음 소리였다. 어쩐지 그가 침대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마리는 실눈을 뜨고 움직임을 살폈다. 호위기사는 옷걸이가 놓인 방구석, 그러니까 벽과 벽이 직각으로 닿는 구석을 보며 서 있다. ‘뭘 하려고 저래?’ 잠시 벽을 응시하던 호위기사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예전에 성도 로젠플라드에서 마리가 충동구매한 손수건 중 하나인데, 개수가 너무 많다 보니 호위기사의 주머니에도 늘 한두 개씩 챙겨다니는 물건이 되었다. 손수건을 꺼낸 호위기사는 사람이라곤 아가씨밖에 없는 이 방안에서 괜스레 누군가의 눈치를 보듯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그 순간 마리는 잠들지 않은 것을 들킬세라 눈을 재빨리 감았다. 궁금증이 일었다. ‘뭐지? 손수건을 왜 꺼내? 울 일이라도 있는 거야?’ 눈 감은 어둠 속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오직 천이 사그락 소리 뿐. 그런데 그 사그락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뭐하지?’ 마리는 조금씩 실눈을 떴다. 벽을 마주한 호위기사가 오른손을 바지춤에다 대고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또한, 그의 숨소리는 조금씩 가빠진다. 마리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어머! 우리 기사님, 혼자서 은밀한 시간을 가지는 거니?’ 마리는 그게 귀여워서 어쩔 줄 몰랐다. 아침부터 이 얼마나 혈기 넘치는 일인지! 하지만 저렇게 죄짓는 사람처럼 벽을 보며 하는 모양새는 별로다. 아무리 이 방이 화장실이나 욕실이 없어서 저런 일을 할 적당한 장소가 없다 해도 저건 좀 그렇지 않은지? 저렇게 움츠린 채 하는 것 말고도 다른 방법이 많지 않은가. 이 방엔 저 남자만을 위한 창녀이자 애인이 있고 그 애인은 오롯이 침대에 누워 호위기사의 손길을 언제나 그렇듯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데 말이다. ‘밉잖아….’ 한편으로는 저런 행동을 이해한다. 숨소리도 자제하려고 애쓰는 저 모습 좀 보라. 아가씨의 잠을 방해하는 게 싫어서 저러는 것이겠지. ‘혈기가 넘쳐. 너란 남자는.’ 피 끓는 스물한 살, 드래곤의 피를 가진 연인은 눈만 마주치면 야하게 돌변하곤 했다. 어젯밤에도 사지를 으깨버릴 듯 짐승처럼 굴었으면서 오늘 아침에도 또 저러다니……. 마리는 호위기사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 지켜보기로만 했다. 그러다가 그녀 자신이 도리어 흥분하고 말았다. 신음 같은 묘한 소리, 남자의 흥분 하는 소리가 견딜 수 없이 야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오! 하이너 그로스! 넌 정말 못난 게 뭐니! 목소리! 목소리뿐 아니야! 그 뒤태마저도 아주 굉장하잖아! 마치 나보고 덮쳐달라고 들썩이는 것 같아!” 갑작스러운 소리에 기함한 하이너는 석상이나 된 듯 굳었다. 다람쥐처럼 가뿐하게 일어나 달려간 마리는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널찍한 등에 뺨을 비볐다. “아아, 하이너… 하이너 이 미치도록 귀엽고 야한 남자야…….” 그녀의 나른한 목소리가 호위기사의 등에 소름을 일으켰다. 나른한 목소리는 점점 야릇한 흥분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난 그런 멋진 남자가 날 덮치길 바란다고… 나를 두고 이렇게 몰래 할 필요는 없잖니?” 어느새 마리의 손은 호위기사가 열심히 흔들던 그 부위를 감쌌다. 핏줄이 잔뜩 불거져 나온 기다란 것을 감싸며 살살 흔들었다. 뺨은 물론이고 귀와 목까지 시뻘게진 호위기사는 그 반드러운 손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 아가씨.” “우리, 같이 할까?” “그게….” “변명은 필요 없단다, 응?” 마리는 호위기사의 것을 잡은 채로 마주 섰다. 그러자 하이너가 그녀의 눈을 보지 못하고 바닥을 보았다. “하지만, 그, 어젯밤에도 아가씨가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서….” “쉿.” 이제부터 말 따위가 필요한지? 마리는 그의 셔츠를 벗기기 시작했다. 그는 뒷걸음질 쳤고, 마리는 그런 그를 침대에 눕혀버렸다. 탄탄한 근육질의 맨 몸이 드러나고 마리는 그 몸에 올라타며 제 풍만한 가슴을 조이는 끈을 하나하나 풀었다. “그나저나 최근에 우리 호위기사님이 자주 달아오르신단 말이야. 엇?” 마리는 말하다가 그게 범상치 않은 일임을 깨달았다. 이거, 이 잦은 발정! 단지 나이와 드래곤의 혈기 탓을 할 게 아니었다. ‘설마 가을이 오기도 전에 발정하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한 마리의 눈이 야살스러운 빛을 띠었다. 드래곤의 발정이라. 같은 마력생물에게 이끌리는 생식 본능. 그 증상이 오기 전에 마리아와 이별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마리는 두 손으로 하이너의 가슴 양쪽을 부드럽게 매만지다가 고개를 내렸다. 그녀의 가느다란 금발 한 가닥 한 가닥이 하이너의 몸을 간질였다. “후후, 그랬군. 우리 기사님이 그랬어…….” 그녀의 촉촉한 입술은 호위기사의 몸 중에서 가장 수컷다운 향기가 나는 부위를 삼키려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아, 아가씨! 이런 못된 짓을 또! 아니, 안 됩니…….” “못된 짓이 아니잖아… 어라. 그런데 이게 뭐지?” “예?”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아가씨의 야릇한 희롱에 마땅히 더 흥분해야 할 그것이 흥분은커녕 축 늘어져 버린 것이다. 마리는 기가 차서 물었다. “하이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아…….” 저도, 저도 정말이지 모르겠습니다. 아가씨께서 절 깜짝 놀라게 하셔서 그런 건 아닙니까? 하이너는 그 대답이 목구멍까지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조바심이 난 나머지 그 부위를 잡고 흔들고 핥아대기 때문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저기, 아가씨, 저기….” 그의 성기는 아가씨가 과감하게 굴수록 더욱 위축되었다. “소용없단 말입니다!” 결국, 그것에서 입을 뗀 마리가 침대 구석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호위기사는 절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해댔다. “같은 종족에게만 반응하는 거야? 그런 거냐고!” 하이너는 바지를 제대로 추슬러 입으며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아가씨?”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이건!” “대체 뭐가 말이 안 되는 겁니까? 놀라서 그렇습니다! 제가 놀라서 그런 거라고요!” “아니! 놀라서 그런 게 아니란다!” “예?” 마리는 하이너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헤쳐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하이너는 불안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가씨의 시선이 안타까운 것은 어째서일까? “하이너.” “……예.” “잘 들어.” “잘 듣고 있잖습니까.” “넌, 넌 이제…… 가을을 맞이할 거야.” 뜬금없는 말에 하이너는 픽 웃었다. “저만 가을을 맞이합니까? 가을은 모두에게나 공평합니다만.”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야. 넌 정말 모르니? 루돌프와 의학 공부를 하면서 뭘 배운 게 없느냔 말이야. 넌 너 자신, 드래곤이라는 생물에 관해 좀 더 알아야 한다고.” “대관절 무슨 말씀인지…….” 하이너는 마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점점 깨닫게 되었다. 가을. 가을을 맞이하다. 마력생물 드래곤에겐 가을은 평범한 계절이 아니다. 가을은 마법의 계절이고, 마력생물들이 크든 작든 발정하는 계절이라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론으로만 알고 있고, 그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없었기에 하이너는 별로 괘념치 않았다. 그런데 아가씨는 그 계절이 싫다는 듯 말씀하신다. “무슨 말씀이긴. 당분간은 네가 내게 발정하지 못한단 거지.” “…….” “인간인 나에게 말이야.” “……!” 하이너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된다. 자신이 이런 아름다운 분에게 앞으로 발정하지…… 못한다고? 아가씨의 이토록 달콤하고도 상큼한 향기, 이 향기만으로도 흥분하던 자신이? 과거엔 아가씨의 모습만 봐도 가슴이 미친 듯 뛰었던 자신이? 그는 정색했다. “농담은 그만하십시오.” 마리가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 아니야. 그게 이 대륙, 이 대자연의 법칙이라고.” “그래요…… 뭐, 농담이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하이너는 피식 웃었다. 아가씨의 말을 그냥 무시하고 싶었다. 뭔가를 결심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부터 제가 보여드리죠.” 하이너는 마리의 상체를 밀어 눕혔다. 놀란 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이너?” 자신만만한 표정의 그는 그녀의 가슴에 입술을 가져갔다. 경고와 같은 말이 나왔다. “오직 당신, 이 아름다운 당신의 몸 앞에서 나는 그 어떤 법칙에도 휘둘리지 않는다는 걸 똑똑히 보여주겠어.”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감사합니다! 00092 7. 악의 발화 =========================================================================                            단언한 그는 반쯤 드러난 풍만한 가슴에서 가장 도드라진 분홍색 부분을 꺼내 단숨에 삼켰다. 그러자 마리의 입에서 달뜬 숨이 짧게 터져 나왔다. 달콤한 입술과 혀에 몇 번이나 녹진하게 굴려지니 가슴에 피가 잔뜩 모이면서 도드라진 부분이 바짝 섰다. 아가씨의 그런 반응만으로도 하이너는 흥분했다. 아니. 흥분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달콤한 살이다. 이렇게 금세 반응하는 살덩인데 내가 흥분하지 않을 리 없단 말이다.’ 그는 마리의 다른 쪽 가슴도 같은 방식으로 자극해 주었다. 자극을 주면서 자신 또한 자극받길, 그래서 진짜로 흥분하길 원했다. “하, 읏… 하이너. 하이너.” 두 가슴의 정점이 동시에 빨리자 마리는 온몸을 뒤틀며 야릇한 소리를 흘렸다. 그 소리에 하이너가 거친 숨을 내쉬며 다른 부위에 입맞춤을 시도했다. 그녀가 어깨를 움츠리면 하이너는 그녀의 어깨에 입 맞췄고, 그녀가 두 팔로 호위기사의 머리를 감싸면 하이너는 그녀의 겨드랑이에 입 맞췄다. 그녀가 두 손으로 호위기사의 머리를 아래쪽으로 밀면 하이너는 그녀의 은밀한 곳을 입 맞추었다. 그리고 어젯밤처럼 집요하게 혀를 놀려 기어코 달콤한 꿀을 흘리게 하였다. 어젯밤보다 더욱 간드러진 소리가 들렸다. “하응… 아…….” 흠뻑 젖어 벌름거리는 살결을 보고 하이너가 미간을 심하게 찌푸렸다. 평소 같으면 그의 그런 표정은 흥분의 증거라 할 수 있을 테지만, 오늘은 다르다. 하이너는 조금의 반응도 하지 않는 자기 성기에 당황했다. ‘뭐냐!’ “하아, 하이너, 어서….” 이미 한 번 작은 절정에 다다른 아가씨가 재촉했다. 하이너는 짐짓 흥분한 척하며 그녀의 눈을 다정한 손짓으로 감겼다. “왜 이렇게 조급하십니까. 어제보다 더 오랫동안 달궈놓을 작정인데.” “읏, 응….” “좀 얌전하게 기다릴 줄도 알아야지.” 조바심을 숨긴 하이너는 좀 더 격한 몸짓을 했다. 혀와 입술만 사용하던 그는 이로 아가씨의 몸 여기저길 깨물어 버렸다. 아가씨의 신음에서 은근한 고통이 배어났다. 그게 귓가에 자극적으로 스며들었다. “아앗, 읏! 아프잖아!” “죄송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아가씨의 살결을 좀 더 오랫동안 깨물었다. “아얏, 읏…….” 아가씨가 평범한 흥분으로 뱉는 호흡은 말 그대로 평범하다. 자극이 일정해지면 더 큰 자극을 바라는 게 인간의 심리 아닐까. 하이너는 아가씨의 소리를 더 크게 만들어 자신이 더 크게 자극받길 원했다. 부지불식간에 가학성애의 경계에 다다른 그가 아가씨의 가슴을 잇자국이 나도록 깨물었다. 그러자 여태 나온 소리와는 다른, 명백한 고통의 반응만이 나왔다. “악!” 그 소리에 하이너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 죄송합니다.” 마리는 애써 웃었다. 화를 내는 것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호위기사의 표정에서 꾸중 듣는 아이와 같은 기분을 보았기에. 그녀는 하이너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어미처럼 자애롭게 속삭였다. “뭐가 문제니. 하다 보면 거칠어질 수도 있는 거지, 뭐.” “아가씨….” 하이너의 얼굴이 잠시 흐려졌다. 아가씨는 이따금 호위기사의 성기가 닿을 때 그게 축 처져 있다는 것을 느끼고도 아무런 생각이 없으실까? 아니면 아무런 생각이 없는 척하시는 건지. 평소완 다른 성기는 도무지 일어날 기미가 없다. 오기가 붙은 하이너는 대뜸 마리의 젖은 살결 안으로 손가락을 두 개나 찔러 넣었다. “이걸, 후우, 좋아하셨죠?” “으읏!” “꽉 무시는군요.” “아, 아아….” 손가락질이 점점 규칙적으로 변했고 젖은 소리가 음탕하게 났다. 마리는 호위기사의 손가락을 꽉 물고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보통 이렇게 하면 호위기사의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금세 그의 성기가 안으로 돌진하듯 들어와야 하는데, 지금으로썬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다. “후우, 흐으.” “좋으시죠?” “으응, 읏!” “아가씨가 좋으니 저도 좋습니다….” 거친 숨을 토해낸 마리가 호위기사의 앞머리를 모두 걷어냈다. 그리고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엔 수심이 가득하다. 원래라면 잔뜩 흥분해야 할 호위기사가 그러질 않는다. 아무리 봐도 이 눈은 흥분한 눈이 아니다. 이 눈은…… 욕망에 절은 눈이라기보다는, 욕망 아닌 다른 뭔가를 바라고 갈구하는 눈이다. ‘이 눈은….’ 그녀는 알 수 있다. 호위기사는 예전에도 이렇게 애쓰는 듯한 눈빛을 한 적이 있지. 트리아노네에 있는 토끼수인의 몸 안에서 기갑체 열쇠를 빼내야 했던 그때. 그곳으로 가기 위해 순간이동이라는 마법을 써야만 했던 바로 그때. 「기적의 재료가 뭔지 알아?」 「예?」 「믿음. 그리고 능력. 그것만 있으면 되지.」 「언제나 그런 속 편한 말씀만 하시죠.」 오직 의지의 힘으로 순간이동을 해야 했을 때, 호위기사는 그것을 비웃으면서도 결국 응해주었다. 그래서 순수한 의지의 힘으로써 먼 거리를 순간이동 하는 것에 성공했다. 호위기사는 지금도 그런 기적을 바라고 있다. 오직 의지의 힘으로만 신체의 흥분을 끌어올리려고 아가씨 몰래 소리 없는 발악을 하는 중이다. 이 얼마나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인지.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결국, 그만큼 흥분하기가 어렵고 난처하단 말 아닌가. 억지는 싫다. 오직 자신의 기쁨을 위해 호위기사가 일방적으로 거짓된 흥분을 끌어올리려 하는 것이 마리는 마뜩잖았다. ‘흐음, 우리 기사님의 자존심이 다치지 않아야 할 텐데 말이지.’ 연기의 시간이 되었다. 호위기사를 무안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핑계를 내세워야 할 연기의 시간. 호위기사의 눈을 뚫어지게 보던 마리는 생글생글 웃었다. 그러더니 때마침 깜빡 잊은 것이 있다는 듯 호위기사의 어깨를 손으로 밀고 일어났다. “미안! 생각해 보니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아!” “……예?” “으음. 내가 아까 정보지를 봤잖아? 글쎄 오늘이 루앙의 우두머리가 마도사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기 하루 전이라네. 그가 돌아오면 루네 시내는 축제로 떠들썩해질 거야. 우리는 그때를 이용해 그의 정보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이왕이면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밖에 나가보는 게 좋겠지.” 마리가 일어나서 정화를 부탁했다. 하이너는 정화마법을 둘러주면서 짐짓 심각한 척 대꾸했다. “우두머리라면 대현자라고 불리는 슈테반 뷔야크 말씀입니까?” “그래. 슈테반 어쩌고 그런 이름이더라고. 하지만 이걸 알아야 해. 알려진 정보, 누구나 아는 정보만 알고 그에게 접근해선 안 된단다.” “누구나 아는 정보라… 듣자하니 대현자라는 이름은 장식일 뿐이고 미친 짓을 많이 저지르고 다닌다던데. 그가 순례한 지역의 마력생물 중 강력한 마력생물들은 한 번쯤 그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고.” “그래. 인간으로 태어났으면서 마력생물들을 탐하고 다니는 또라이지. 마계의 흡혈귀라나 뭐라나. 어쨌든 그러니까 더욱 신중해야 해. 우리는 그의 진실을 알 필요가 있다고. 내 로브 좀 주겠니?” 하이너는 기꺼이 아가씨의 여름용 로브를 집어 주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정화를 걸었다. 마리가 화장을 시작하면서 서두르는 체 했다. “서로 욕정에 눈이 멀어 목적을 잊었구나. 가끔 그런 생각하지 않니? 우리는 너무 사이가 좋아. 너무 말이지. 달콤한 시간도 좋지만 이 여행의 의미를 잊어선 안 돼. 아무렴.” “그럼요.” 하이너는 외출복으로 갈아입으며 잠시 이를 꽉 깨물었다. 아가씨에겐 들리지 않는, 아주 작은 욕지기가 나왔다. “젠장….” 어째서 몸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까. 아가씨의 연인이면서, 어째서 이 몸은 그것과는 반대로 움직이는지. 답답함은 여전히 가슴을 옭아맨다. 다가올 가을이 성가시기 짝이 없다. 그는 아가씨를 뒤따라 나서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슈테반인지 뭔지 하는 마법사 놈을 만나면 이 빌어먹을 몸 좀 어떻게 해달라고 해야겠군.’ *** 마리아는 어젯밤 하늘을 나는 도중에 익숙한 목소리-루돌프의 목소리-를 들은 듯했으나, 무시했다. 그녀는 누군가의 말에 대답해줄 기분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는 오를린 북쪽의 소용돌이 산을 지나 서쪽으로 향했다. 서쪽에는 루앙과 할데바인의 접경지 노릇을 하는 커다란 강줄기가 있는데, 그곳에서 지친 몸을 쉬고 물을 실컷 마실 작정이다. 며칠 동안 힘들었다. 아가씨로부터 ‘버림받은’ 처지로 인한 상심과 기사님을 향한 멈출 수 없는 연정으로 제 몸을 돌보지도 못했다. 얼마나 굶었는지 이젠 투명화도 불가능하고 하늘을 날지도 못한다. 그저 평범한 말이나 된 듯 숲을 걸어야만 했다. 강줄기가 가까워지자 드래콘 소녀는 소용돌이 숲 자락에 몸을 숨긴 채 인간체로 변했다. 이렇게 몸체를 줄여 움직이는 게 얼마 남지 않은 기력을 아끼는 방법이다. 태양이 하늘 한중간에 걸린 낮인데도 소용돌이 숲은 매우 빽빽하여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다. 징그러울 정도로 강력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여름 식물들이 서로 뒤엉켜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런 어둠 속에서 마리아에게 달려드는 하등 마력생물이 많다. 여름의 강력한 생명력은 식물뿐 아니라 그런 동물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곤 한다. 아마도 그들은 그녀의 약해진 기운을 느끼고 해코지를 하러 오는 게 분명하다. 약한 마력생물이 강한 마력생물-드래콘-의 몸을 파먹으면 마력을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뜯고 그녀의 뽀얀 살 또한 개미처럼 파먹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내버려 두었다. 지금 그녀에겐 이 귀찮은 생물들을 일일이 쳐낼 힘조차 없다. 어차피 그냥 두어도 나중에 물을 좀 마시고 굶주린 배를 채우면 몸은 알아서 회복되기 마련이다. 그러면 이 징그러운 생물들도 떨어져 나갈 테지.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강줄기가 보였다. 숲에 햇볕이 스며들기도 했다. 햇볕에 약한 일부 마력생물들은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날카로운 무언가가……. 슈슈슈슈슉! 파앗! 날카로운 그것은 그녀의 어깨에 깊이 박혔다. 별 모양의 수리검. 그녀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 그녀는 무심코 인간의 비명을 질렀다. 놀란 그녀가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공격자가 보였다. 차림을 보아하니 인간이다. 검은 로브 밖으로 새하얗고 기다란 머리카락이 삐져나와 있다. 그것을 보면 노인이 아닌가 해도…… 체격을 보아하니 노인 같진 않다. 허리는 꼿꼿하고 각져 드러난 어깨는 제법 넓다. 흔한 건장한 젊은이의 몸이다. 마리아는 공격자가 인간인 것에 조금 안도했다. 자기보다 강력한 마력생물보다야 인간이 만만한 편이니까. 그녀는 땅에 주저앉아 바들바들 떨었다. 어깨에선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공격자의 목소리가 숲에 음산하게 울렸다. “흐흐… 기력이 떨어진 드래콘이군.” 공격자의 목소리는 녹슨 못이 땅에 긁히는 소리처럼 탁했다. “흐…… 약한 놈은 내 타입이 아니지만…… 흐흐흐…….” 그자는 점점 마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럴수록 마리아는 그자의 얼굴을 확실히 보게 되었다. 하얗고 곧은 머리카락도 흔하지 않더니, 흰자위밖에 없는 그의 눈은 너무나 기괴하여 마력생물 마리아에게도 공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아아…….” 마리아는 두려움에 질린 소리만 냈다. 가뜩이나 힘이 없는데, 그런 상태에서도 온 힘을 쥐어짜 내 그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도무지 공격이 먹히질 않는다. 그가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을 뻗쳐 마리아에게 가져갔다. 마리아는 다시 한 번 그에게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으으아아….” 마리아가 지금 느끼는 공포는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공포나 다름없다. 작년 가을 소용돌이 산에서 기사님에게 사냥당할 때 느꼈던 공포보다 훨씬 크다. 이것은 대관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마리아는 그자의 정체를 파악했다. ‘인간이 아니야!’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니다. 공격자는 드래곤인 기사님보다 강력한 마력을 다루는 마력생물체임이 분명하다. 그자의 손이 마리아의 머리에 닿았다. 진줏빛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던 손은 어느샌가 마리아의 어깨에 박힌 수리검을 빼냈다. 마리아가 고통에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아악!” 그자는 수리검에 묻은 마리아의 피를 맛있게 핥아 먹었다. 그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어깨에 묻은 피도 모조리 빨아먹었다. 마리아는 반항하려 해도 반항할 힘이 없었다. 그의 차가운 혓바닥은 오랫동안 마리아의 어깨를 괴롭혔다.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흐히히, 맛있어…….” 피를 모조리 빨고 그는 제 입술을 혀로 슥 훑었다. 갑자기 마리아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겁에 질린 마리아에게 그가 놀리듯 말했다. “너어… 지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그렇지? 네 멋대로 공격할 수도 없어서 막 놀라고, 응? 흐흐흐…… 대개…… 나를 보고 그런 반응을 보이더라고. 그런데…… 나는 그런 반응이 이젠 지루하더라, 흐흐흘…….” 그는 강력한 마법으로 순식간에 마리아를 잠재웠다. 사지가 축 늘어진 마리아는 허공에 뜬 채로 그의 뒤를 따라가는 꼴이 되었다. 그는 마치 강아지를 줄에 꿰어 질질 끌고 다니는 사람처럼 굴며 혼잣말했다. “하지만 넌 반반하게 생긴 게 좀 덜 지루할 것 같아, 키키킥…….” 그는 후드를 완전히 벗었다. 그러자 새하얀 머리카락이 더욱 풍성하게 드러났다. 어두운 숲에서 그의 머리카락은 특이하게도 발광한다. 게다가 머리카락뿐 아니다. 눈동자도 마찬가지. 마리아는 그의 눈을 보고 흰자위밖에 없다고 여겼지만, 그의 눈동자는 사실 미약한 상앗빛으로 빛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의 모든 마기를 응축한 보석과 같다. “실컷 빨아줄게…… 아가야…….”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00093 7. 악의 발화 =========================================================================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비의 별장 트리아노네. 궁 전체가 황위 재편 작업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오직 이곳만 무덤처럼 조용하다. 어찌나 조용한지 가끔 들리는 여름 곤충 소리가 다 시끄러울 정도. 사람이라고는 형식적으로 궁을 지키는 호위병사들 두 명과 예전에 황태자비가 직접 뽑은 시녀 네 명, 요리사, 유모가 전부. 심지어 황태자비의 음식에 만에 하나 들어갈 수 있는 독을 검사하는 이조차 없다. 그들 모두는 황태자비의 침울한 기분에 쩔쩔매며 그리 밝지 않은 앞날에 관해 이야기했다. “무사히 궁의 안주인이 되실 수 있을까.” “무사하다는 게 듣기 별로군.” “우리도 슬슬 앞날을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차라리 고향에 가버릴까.” “고얀 것! 네가 태자비 전하께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데, 어찌 그럴 수 있어?” “시끄러워. 너라고 나중에 나처럼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 같니? 후슈킨의 딸이 어찌 나올지 모르는데 말이지. 지금은 순진한 마법사처럼 굴어도 후궁이 되는 순간 마녀로 변해 이곳 사람들에게 해코지할 수도 있다고.” 궁에서 진정으로 사이가 좋은 관계는 없다. 특히나 하나의 남편을 둔 여자들끼리는 더더욱. 사루아 루 후슈킨이 훗날 후궁이 되어 황태자비의 자리를 뒤흔들면, 황태자비 또한 얌전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시녀들은 그런 황태자비의 힘이 이미 다 소진했다고 여겼다. 그녀가 낳은 괴상한 눈동자의 딸 때문이다. “그나저나 우리 아기님은 통 우시질 않네.” 시녀는 배가 고프나 목이 마르나 도무지 울지를 않는 어린 황녀가 굶주릴까 봐 유모에게 젖을 먹이라고 했다. 유모는 젖을 먹이면서 딱하다는 눈으로 황녀를 보았다. 황녀의 두 눈에는 안대가 쓰여 있다. 안대 너머 눈동자가 들어있어야 할 곳엔 검은 안개가 가득 차 있겠지. 무슨 저주에 걸려서 이렇게 끔찍한 모습으로 태어나셨는지……. ‘딱하신 분. 눈만 아니면 얌전히 잠든 모습이 천사 같으신데 말이야.’ 황녀의 이름은 없다. 그저 아기님으로 불릴 뿐. 할아버지인 황제도, 아버지인 황태자도 이 가여운 생명의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트리아노네 사람들은 그저 그런 식으로 부를 수밖에 없다. 황녀가 배가 부른지 입에서 젖을 떼 냈다. 유모가 황녀에게 트림을 시키는데, 갑자기 황태자비가 침대 밖으로 나왔다. 해산한 이후 그녀의 모습은 줄곧 굶어 죽은 귀신처럼 초췌하다. “내 딸을 다오.” 유모가 황태자비에게 어린 황녀를 안겨주었다. 그녀는 딸을 안고 다시 침소로 들어가 가림막으로 침대 전체를 가렸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누웠다. 마땅히 행복하고 평온해야 할 시간이 불행하고 위태로워 슬프다. 며칠 전만 해도 자기가 낳은 게 사람의 아이가 아닌 괴물이라 부르짖으며 현실을 외면했다. 자신이 이런 아이를 낳을 순 없는 거라며 현실을 부정했다. 때로는 죽은 렌이 저주를 퍼붓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누구도 아이의 탄생을 축복하지 않는 싸늘한 현실에 어미로서의 자포자기한 마음이 생겨났다. 그런 때에 남편은 어느 마법사 가문의 여자를 궁에 들인다고 한다. 그것도 후궁으로서! 이 현실은 얼마나 외롭고 서글픈가.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딸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말이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가여운 것.” “흐에에….” 소리를 내지 않던 아이는 제 어미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로테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로테는 아이의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재웠다. 아이는 완전히 잠들었고, 로테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러곤 가슴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가림막을 묶는 기다란 끈이다. 로테는 끈을 매만지며 눈물을 삼켰다. 아이는 측은하지만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만다. 이젠 이 진저리나는 눈물도 끝이다. 자신을 아프게 하는 그 남자와도 작별이다. 궁에서 없는 사람 취급받는 자신에게 남은 것은 영원한 잠뿐이겠지. 결심하고 베개 밑에서 편지를 꺼냈다. 고향 오를린의 부모님께 썼던 편지다. 물론, 언니에게도 편지를 썼다.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의 글귀는 짧다. ‘행복하니? 뭐가 됐든 나보단 좋겠구나. 적어도 괴물을 낳진 않았을 테니. 아. 다시 산다면 이런 삶보단 차라리 너와 같은 삶을 택하겠어.’ 궁에서 이 편지를 가족들에게 전해줄 확률은 거의 없겠지. 그런데도 이런 편지를 썼던 것은, 남편에게 보이기 위해서다. 그 남자가 아내인 자신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닫게 해주고 싶으니까. ‘잠깐이나마 동화 같은 사랑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내가 바보였군요. 당신을 원망하진 않습니다. 안녕히.’ 로테는 편지를 아이의 몸 위에 올려두었다. 이젠 아이와 작별의 시간, 그녀는 아이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그 뒤 기다란 끈을 침대 머리맡의 철제 장식에 묶었다. 그리고 끈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대고 돌돌 말았다. 이젠 누울 차례다.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느슨하지도 꽉 죄지도 않는 끈은 잠이 들면 들수록 조여 언젠가 숨을 끊어놓을 것이다……. 로테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 변방 오를린. 어느 여름날, 마리와 앤이 떠들썩하게 수선을 피운다. 무슨 일 때문에 그들이 그러는지 궁금해진 로테는 하녀 렌에게 시켜 사정을 알아보라 한다. 「로테야! 궁금하면 네가 직접 오지그래!」 쾌활한 언니는 그런 대답을 동생 측으로 보낸다. 하여, 로테는 언니에게 직접 찾아간다. 「마리, 왜 이리 시끄러운 거야? 무슨 기쁜 일이라도 있어?」 언니는 치마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 자랑하듯 외친다. 「이거 봐라!」 동생은 눈을 감는다. 망측해라! 숙녀가 그런 짓을 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눈을 더욱 질끈 감는다. 그러다가 눈을 다시 슬며시 뜬다. 치마를 들어 올린 언니는 가장 은밀한 부분을 보여주고 있다. 로테는 언니의 그 부분을 보며 홀린 듯 다가간다. 언니의 그곳에는 역삼각형이 포개어진 별 모양이 자리 잡았다. 당황한 동생은 묻는다. 「이게…… 이게 대체 뭐야? 마리 네가 그린 거니?」 언니는 고개를 젓는다. 「내가 그렸다면 삐뚤삐뚤할걸?」 동생은 언니의 은밀한 곳에 누가 저런 해괴한 그림을 그렸는지 몹시 궁금하다. 「그럼 누가 그린 거야?」 언니는 어깨를 으쓱이며 두 손바닥을 하늘로 치든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한다. 「몰라! 쉬야를 하다 보니 보이더라고.」 동생은 두 손으로 이마를 쥐며 오싹한 일을 다 보겠다는 듯 중얼거린다. 「너무 끔찍해. 무슨 문신 같기도 한 게… 나중에 분명 남편에게 정숙하지 못하단 말을 들을 거야…….」 언니는 별걱정을 다 한다는 듯 대꾸한다. 「끔찍하긴! 좀 좋게 생각할 순 없니? 나는 세상 누구도 갖지 못한 장신구를 갖게 된 거라고!」 동생은 어이가 없다. 「미친 마리! 그게 그렇게 되는 거니? 넌 정말 못 말려. 언제쯤 그 괴상한 성격이 고쳐질까! 너에겐 마녀가 저주를 퍼부은 게 분명해!」 「흥! 난 괴상한 게 아니라 밝고 긍정적인 거라고! 너야말로 언제쯤 그런 잘난 척하는 버릇을 고칠래?」 언니의 ‘잘난 척’이라는 표현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동생은 생각한다. 동생은 언니에게 한 번쯤 언니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고 싶다. 그게 바로 지금이다. 「오, 미친 것도 딱한데 멍청하기까지 한 마리. 난 잘난 척이 아니라 실제로 너보다 잘났단다. 너보다 악기도 잘 다루고 너보다 그림도 잘 그리고 너보다 사교춤도 잘 추고 너보다 글도 빨리 깨우쳤지.」 아마 외모도 언니보다 더 뛰어날지도. 비록 남들은 이 자매의 외모가 똑같다고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언니는 동생의 말을 비웃는다. 「흥! 구구절절 자랑해도 결국엔 따분한 걸 즐기느라 아이들과의 신나는 시간을 놓친 바보일 뿐이로군!」 「아이들과 신나는 시간이 대관절 너에게, 내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니?」 그러자 언니는 어깨를 으쓱이며 돌아선다. 그리고 두 팔을 날개처럼 펼쳐 언덕을 뛰어다니며 외친다. 「신나는 시간은 나를 행복하게 해줘! 맑은 바람에 춤을 출 수 있지! 따사로운 태양에 목욕할 수도 있어! 산새들과 풀벌레와 나뭇잎들이 이루는 화음을 들을 수도 있어! 아이들과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놀다 보면 세상 무엇도 부럽지 않지! 그것 자체가 신나는 일 아니야? 로테 너는 이 대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낄 필요가 있다고. 게다가 때로는…….」 잠시 목소리를 낮춘 언니가 하녀 앤과 렌 자매의 눈치를 본다. 그러더니 동생의 귓가에다 동생만 들으라는 듯 속삭인다. 「……때로 산과 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말이지, 잘생긴 황태자를 만나서 그에게 청혼을 받을 수도 있단다.」 동생은 그 말이 거짓 같아 비웃는다. 하지만 이내 언니가 내민 황가의 문장이 새겨진 장식을 보고 비웃음을 멈추게 된다. 언니는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으며 그 장식에 관해 설명한다. 「이건 말이지. 위대한 도적 마리니시네 님께서 황태자한테서 빼앗은 거지.」 동생은 아연실색한다. 「말도 안 돼! 어떻게 황태자가 이곳에……!」 언니는 오른손 검지를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가르치듯 말한다. 「오, 로테. 너는 모르나 보구나. 공부를 그렇게 했다는 애가 황가의 관습을 모르다니. 역대 제국 황태자들은 제국 순례를 한단….」 동생이 그 말을 가로막는다. 「제국 순례를 한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들은 위험하단 이유로 먼 곳에 오질 않는다고! 이런 변방 지역에 귀하디귀한 몸인 황태자를 보낼 리 없잖니?」 「틀에 박힌 생각 따윈 치우렴. 어쨌든 나는 산과 들을 뛰어다니다가 그를 만났고, 그에게 청혼도 받았어. 왜. 부럽니? 부러워서 인정하기 싫어?」 동생은 언니의 말에 약이 잔뜩 오른다. 아니, 약이 오른 것보다 언니의 말을 인정할 수 없다. 황궁이라는 지엄하고 품격 있는 곳에 사는 황태자가 저런 무식한 말괄량이에게 청혼하다니, 대관절 말이 되지 않는다. 동생은 대뜸 언니의 손에서 황가의 장식을 빼앗아 버린다. 그 물건이 언니와 전혀 어울리지 않으므로! 그러나 언니는 그런 것을 빼앗겨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가져가렴! 어차피 황태자는 내 취향이 아니니까!」 「웃기고 있어…….」 동생은 황가의 문장을 가져가 제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날 밤, 그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다. 황태자님은 어떤 분이실까. 마리의 취향이 아니라 하면 분명 마리와는 반대인 사람이겠지. 고상하고 점잖은 사람일 거야. 마리가 그를 보고 잘생겼다고 했으니 정말 동화에서나 나오는 왕자님 같을 거라고.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째서 언니에게 청혼한 거지? 아니, 뭐 신경 쓸 건 없겠지. 어차피 황가의 사람들은 아무나와 결혼하지 않는다고. 아아. 하지만…… 그 청혼, 나도 한번 받아보고 싶구나. 그날부터 동생은 꿈을 키운다. 황태자비, 더 나아가, 황후가 되는 꿈을. 그런 꿈을 이루나 싶었는데……. 「로테아르카 이 어리석은 년!」 불현듯 누군가의 얼굴이 로테의 눈앞에 마주 선다. 그 얼굴은 얼굴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뼈가 드러나 있다. 썩은 살로 뒤덮인 몰골을 본 로테는 비명을 지른다. 「으아아아아아!」 해골은 로테의 멱살을 잡는다. 로테가 해골의 이름, 해골이 살았을 적 불리던 이름을 부른다. 「렌! 렌!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하구나!」 해골은 입을 벌린다. 검은 어둠 속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렌이 소리 없이 외치고 있다. 몹시, 억울한 목소리로. 「넌 죽으면 안 돼! 황궁까지 와서 무수한 희생을 치러놓고 네가 이대로 죽으면 절대 안 된다고! 정신 차려! 나약한 마음 따윈 집어치우란 말이야!」 「으아아아…….」 악몽은 비명으로 마무리된다. *** “하, 으아…… 흐흐흑…….” 꿈에서 깨어난 로테는 눈을 감은 채 흐느꼈다. 눈물로 젖어가는 얼굴에 누군가의 손이 닿는다. 길고 커다란 손은 순식간에 그녀의 뺨을 세게 쳤다. 짜악! 뺨에 새빨간 자국이 생긴 로테가 눈을 떴다. 남편이 눈앞에 있다. 비오르틴은 로테의 목을 죄는 끈을 재빨리 풀어주었다. 악몽에서 느낀 감정과 머리를 휘감는 현기증에 허덕이며 로테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흐흑, 비, 비올….” “닥쳐라!” 낮게 외친 비오르틴은 아내를 일으켰다. 그리고 아내의 상의를 풀어내려 가슴을 드러나게 했다. 그의 외침 때문에 어린 황녀가 잠에서 깨어 작게 칭얼거렸다. “으에에….” 비오르틴은 제 딸을 안아 거의 강제로 아내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아내의 젖을 제 딸의 입에 물리도록 했다. 어미의 따스한 체온을 느낀 황녀는 젖을 빨기 시작했다. 이미 배가 부른데도 그렇게 맹렬히 젖을 빠는 것은 안도감을 얻기 위한 행동이리라. 그리고 안도감을 원한 건 어린 황녀뿐만이 아니다. 비오르틴는 실성을 하기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이성을 추스르는 듯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아내의 어깨를 아프도록 꽉 쥐었다. “아니카.” “……?” “아니카 뤼리 피나센토 로귀하르트.” “전하….” “네 딸의 이름이다. 네 딸을 봐라. 네 딸이 널 찾는 걸 보란 말이다. 이게, 이게 네 역할이다. 지금은 이게 네 역할이란 말이다!” 로테는 시선을 내려 딸을 보았다. 젖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데도 딸은 어미의 가슴을 힘껏 빨았다. 또다시 눈물이 흐른 로테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편을 보았다. 비오르틴은 뒤돌아서서 궁을 나가며 시녀들에게 지시했다. “그녀를 감시해라! 잠시도 혼자 두어선 안 된다! 침대에 가림막 따윈 못 치게 해!” 로테는 뒤늦게야 딸에게 붙여진 이름을 되새겼다. 아니카. 강의 어부들이 쓰는 단단한 끈을 부르는 이름. 그러나 실제로는 ‘굴레’, ‘감옥’, ‘벌’이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이는 단어다. ============================ 작품 후기 ============================ 제가 싸대기 치기 집착증이 좀 있음;;;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00094 7. 악의 발화 =========================================================================                            신비의 지역 루앙. 마도 루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술집에서 마도의 대현자에 관한 정보를 모은다는 핑계로 술을 진탕 마신 마리 일행은 다음날 술집 뒷골목에서 잠든 채 널브러졌다. 입술 위로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하이너는 눈을 떴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입술 위를 걷는 게 수백 개의 다리를 가진 절지 곤충이란 것을. 그리고 그 곤충이 입술을 깨물고 있다는 것을. 고작 벌레가 깨무는 것이지만, 생각보다 굉장히 아프다. “…….” 하이너는 그 벌레를 손으로 잡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면서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생각했다. 이게 무슨 일일까. 어째서 여관이 아닌 이런 뒷골목에서 눈을 뜨게 된 걸까. 품위를 잃고 비렁뱅이 부랑자가 된 듯하여 기분이 좋지 않다. 예전에 오를린에서 술을 마시고 정신을 잃은 적이 있다. 당시 정신을 차리니 사지가 묶였다는 걸 알았고, 아가씨께 몸을 닦이고 이런저런 능욕을 당했지. 그것도 모자라 드래곤 링클 이식이 되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아가씨는 단지 머리 색깔과 눈동자 색깔을 바꾸려고 링클 이식을 시도했다고 말씀하셨지만, 결과적으로는 드래곤이 되는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 후로 술이라면 질색했다. 지금처럼 정신을 잃도록 취한 적이 없었다. 물론 아가씨와 술을 마시는 일이 그다지 없기도 했고, 간혹 그런 일이 생겨도 극도로 자제해왔다. 그런 자신이 어째서 또 술을 진탕 마시고 이렇게 뒷골목에서 추하게 잠을 깨는 불상사가 일어나버렸을까. 자신이 품위를 유지해야 할 정식 기사가 아니고 또한, 이곳이 지인들이 많은 고향이 아니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라면 망신을 당하고도 남을 일이다. 아니, 이미 사람들의 시선이 와 닿는 걸 느끼는 것 자체가 망신이겠지. “젠장, 마법사들의 술이란….” 하이너는 마법사들이 만든 술이 그들의 마력만큼이나 독하기 때문이라고 탓했다. 이제 아가씨를 깨워야 할 때다. 호위기사의 옆에 누운 아가씨는 딱딱한 돌바닥이 불편한지 자면서도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봐서는 큰 걱정이라곤 없는 안일한 분위기다. 그걸 보는 호위기사는 혀를 가볍게 찼다. 정말이지 겁도 없는 분이시지. 호위기사가 옆에 같이 잤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길거리의 불한당들에게 어떤 일을 당할지도 몰랐다. 아가씨의 속 편함에 넌더리가 나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그래도 어쩌겠어. 이건 내 죄다. 어쨌거나 이 분을 제대로 모셔야 할 호위기사는 나 아닌가.’ 그는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일어나세요. 아침입니다.” 그러나 아가씨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이너의 미간에 주름이 패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아가씨의 팔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아가씨.” “…….” “아가씨?” “……” “어쩔 수 없군.”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벌레를 아가씨의 눈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조금은 장난기가 감도는 태도로 협박했다. “일 초 드립니다. 일 초 안에 일어나지 않으시면 어찌 될지 모릅니다.” 마리의 얼굴에 벌레의 그림자가 졌다. 벌레의 기운을 무의식에 느낀 마리는 눈을 스르륵 떴다. 다리가 수백 개나 달린 기다란 벌레가 검은 몸을 바동거린다. 그 징그러운 모습에 마리는 숨이 멎을 듯 경기하다가 소리를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앗!” 거리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행에게로 쏠렸다. 하이너는 원래 벌레로 아가씨를 조금 더 놀릴 생각이었으나,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그러지 못했다. 그는 벌레를 얼른 하수구에다 버리며 아가씨를 일으켰다. “이렇게 추하게 누워있을 때가 아닙니다. 얼른 슈테반인지 뭔지 하는 자의 정보를 알아내야죠.” “흐잉… 무서웠잖아! 미워!” 마리가 미운 짓을 한 호위기사의 가슴을 치려고 했으나, 호위기사는 이미 허리를 숙여 그녀의 옷 여기저기에 묻은 흙과 먼지를 털어내 주느라 바빴다. “때마침 바깥에 사람들도 많아 정보를 모으기 쉬울 것 같군요. 서두릅시다.” 그의 말마따나 거리 곳곳이 벌레 떼 같은 사람들로 붐빈다. 사람들로만 붐비는 게 아니라 거리 모양새도 시끌벅적하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기다란 끈이 달리고, 그 끈에는 마법의 상징들을 그린 알록달록한 깃발이 내걸렸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나팔, 타악기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주전부리와 장난감, 마법 물품을 파는 상인들의 호객 소리도 끊이질 않는다. 거리가 이런 왁자지껄한 분위기인 이유는 오늘 아침, 마도사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슈테반을 환영하기 위해 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마리는 차분하게 그들을 살펴보았다. 어젯밤 술집에서 본 사람 중에도 마법사들이 많았는데, 오늘은 아예 마법사들이 떼를 이루고 있다. “어머나! 이 거리 좀 봐! 그 누가 루앙을 마법에 심취한 자들의 음습한 곳이라고 할까! 황도의 번화가보다 더 시끌벅적한데 말이지!” “축제라서 그런 거잖습니까.” 가장 많은 수를 자랑하는 종족은 바로 인간. 대륙의 종족 중에서 가장 강한 마력치를 타고난다는 이들이니 그 수가 많은 것도 당연하다. 빗자루나 지팡이를 쥐고, 마파에 따라 다른 모양의 로브를 입은 그들은 가장 전형적인 마법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다음 많이 보이는 종족은 수인으로 크게 두 종족이 있다. 검은 피부에 작은 날개를 등에 단 박쥐수인, 그리고 코 옆에 기다란 수염과 기다란 홍채가 특징인 고양이수인으로, 그들은 수인족 중에서도 달을 섬기는 밤의 종족으로 유명하다. 어제도 그랬지만, 마리는 그들이 능숙하게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아주 신기했다. 모인 이들 중에는 간혹 동한이나 서한의 복장을 한 자들도 있다. 그리고 흑인이 마도사 복장을 한 진풍경도 보인다. 제국 간 왕래가 자유로워지다 보니 요새는 흑인 마법사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특별하게도 귀여운 이들이 왕왕 보인다. 그들은 아주 어린 마법사 수련생들이다. 자그마한 몸체에 마법사 로브를 두르고 큰 고깔모자를 쓴 것만으로도 귀여운데, 고사리손에 들린 지팡이라니! 그 모습이 귀엽기 짝이 없어서 하이너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마리는 호위기사가 그 귀여운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간파하곤 씁쓸해졌다. “참 딱하지?” “예?” “저 아이들 말이야.” 저렇게 귀여운 아이들이 딱하다고? 하이너는 아가씨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설명했다. “저 아이들은 자기가 원해서 마법사의 길을 가는 게 아니야. 부모 때문이지.” “그렇습니까.” “사실 마법사들은 자식을 낳으려 하지 않지. 마법 수련만으로도 바쁘고 고된데 자식을 낳아 기를 여유는 없거든. 간혹 고(高) 마도에 오르거나 마탑에서 일을 하는 안정적인 시기에 자식을 낳거나 양자를 두기는 하지만.” “즉, 저 아이들이 딱한 이유가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살기 때문이란 말씀입니까?” “그런 것도 있고…… 마법사의 자식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험난하고 위험한 일이잖아. 온갖 위험한 실험도 그렇고 저들의 마기로 인해 마력생물들이 위험하게 꼬이는 것도 그렇고.” “흐음.” “부모가 나빠. 저 아이들은 때로는 말이지…….” “때로는요…?” “부모의 마력을 높여줄 제물로 희생되기도 해.” 호위기사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아가씨야 영주의 딸로 태어나 나름대로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자랐기에 부모가 아이를 제물로 삼는 것이 충격적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은 그녀와는 다르다. 평민과 천민들이 자식을 도구로 쓰는 것을 워낙 많이 봐온 터라 이제 와 충격적일 것도 없다. 대수롭지 않다는 대꾸가 나왔다. “어딜 가나 자식을 종속물로 대하는 부모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종속이라는 단어조차 과하지. 저 아이들의 부모는 아이를 노예보다 못하게 취급한다니까. 그들은 늙거나 예기치 못한 사고로 마력을 잃으면 자기보다 약한 마력생물의 마력을 빼앗거나 그게 아니면 자식의 마력을 빼앗지. 저 아이들도 그런 목적으로 태어난 도구일 확률이 높아. 이른바 마력 건전지라고나 할까?” 조금 격해진 목소리에 하이너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가씨가 말씀하신 ‘건전지’라는 단어를 몰라서 묻고 싶어도 꾹 참았다. 한참 후에 마리는 잠시 불거진 감정을 추스르며 마음을 다잡았다. “언젠가 내가 대륙을 완전히 정복하는 날이 오면, 마법사들이 자식을 그렇게 다루지 못하게 법을 만들 거야. 반드시 그렇게 하고 말 거라고.” “예, 뭐. 아가씨께선 가능할 겁니다.” “그렇게 봐줘서 고맙구나!” “흠, 뭐. 원래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법이지요.” 대현자 슈테반 뷔야크는 마신의 광장에서 마도사 순례에 관한 연설을 한다고 한다. 하여, 두 사람은 마신의 광장으로 향했다. 그곳까지 가려면 대략 한 시간이 걸린다. 마리는 걸으면서 행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 지역의 마도인들은 대개 슈테반 뷔야크의 대륙 순례 이야기에 기대하거나 그를 향한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으나, 간혹 수다 중에는 저속한 내용도 섞여 있었다. 한 중년 사내가 들창코를 씰룩이며 큰 소리로 떠들었다. “우리 대현자께서는 마탑의 일인자도 맥을 못 추린다는 마력의 소유자라는데, 참 좋겠어!” “무엇이?” “고결하신 마탑의 귀족들과 달리 제국민들의 눈치 따윈 보지 않고 이년 저년 후릴 수 있잖아.” 들창코의 중년 사내는 제 하체를 난삽하게 튕기며 이죽거렸다. “대현자님의 거시기에서 마력이 샘솟는다 하면 달려들지 않을 년들이 어디 있겠느냐고. 아오, 내가 생각해도 참…….” “듣고 보니 그러네. 로젠플라드 사제가 돼서 신녀들을 따먹는 것보다 백 배는 재미있겠어. 실컷 먹고 나서 마력 따윈 하나도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낄낄거리면 따먹힌 년들의 표정이 어떨까. 흐히히….” 악질적인 말에 한 사람이 나서서 호통쳤다. “천벌 받을 소리! 대현자께서는 여자의 몸이나 탐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그럼 그분은 뭘 탐하시는데?” “피야. 피라고.” “흡혈귀란 말이야?” 아무리 대현자에 관한 정보를 모은다지만, 저런 정보는 밑도 끝도 없지 않은가? 마리는 소음 공해라고 생각하며 혀를 찼다. 그런 그녀를 하이너는 한참 동안 보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결국, 대현자에 관한 정보는 이런 식으로 얻게 되는 건가. 이런 신빙성도 없는 정보들을…….’ 씁쓸하다. 아무래도 아가씨께서는 어제 여관에서 통 발기되지 않는 호위기사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대현자의 정보를 핑계 대며 외출하신 거겠지. 대현자의 정보 따위는 처음부터 핑계일 뿐이었던 게다. 아아. 일행이 단 둘뿐이다 보니 앞으로 그녀와 무수한 밤을 보낼 일은 많은데, 망할 놈의 드래곤 발정이 지속된다면 곤란하다. 인간인 아가씨에겐 발정하지 않는 몸이라니. 아가씨의 연인으로서 면목이 없어지지 않은가. 가뜩이나 정사를 즐기는 분이신데……. 호위기사가 그러한 생각에 잠겨 침울해 있는데, 마리가 물었다. “참, 하이너. 속은 어때?” “속이요? 그러고 보니….” 어젯밤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도 속이 좋지 않거나 머리가 아프거나 하는 과음 후유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하이너는 이 상태를 의아하게 여기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만.” “후후. 그래?” “아가씨 속은 좀 괜찮습니까?” “나야, 뭐.” 마리는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지만, 괜찮다는 듯이 밝게 웃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어제 술집 주인 여자와 수다를 떨다가 남자의 정력에 좋다는 약을 달인 물을 호위기사에게 술인 양 속이고 주었는데, 그 효과가 어떠할지 오늘 밤이 매우 기대된다. “흐흐흠!”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거리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한 상인이 맛난 주전부리를 팔고 있다. 당분을 가공해 실처럼 하늘하늘하게 만든 뒤 날개 모양으로 굳힌 맛도 좋고 보기도 아름다운 과자다. 마리는 하이너의 팔을 잡고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 “기사님! 나 저거 사줘요!” 돈도 없고 월급 개념도 아가씨 때문에 잊은 지 오래인 하이너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거지라서 말입니다.” “아잉, 지갑에 100자일 있는 거 다 알아. 그 돈이면 저거 배부르도록 먹을 수 있다고오….” “떼쓰시긴.” 호위기사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상인에게 다가가 날개 과자를 색깔별로 다섯 개나 사서 모조리 아가씨에게 주었다. 마리가 그것을 받아들고 하얀색 날개 과자를 혀로 할짝거렸다. 하얀색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다. 온몸이 저릴 듯 다디단 맛에 속이 메스꺼운 것도 잊고 함박웃음 짓는 그녀를 호위기사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 달다! 기사님은 안 드세요?” 글쎄요. 아가씨가 그걸 드시는 모습만 봐도 온몸이 달아서……. 수줍음이 많은 호위기사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지 않고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아가씨나 많이 드십시오.” “다섯 개는 너무 많은데, 흐음.” 마리는 날개 과자 하얀색을 빨면서 나머지 네 개는 꼬마 마법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어여쁜 아가씨에게 날개 과자를 받아든 아이들은 부끄러워하거나 기뻐하면서 그것을 받아 맛있게 먹었다. 한 아이는 아이답지 않게 능글맞은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두 분!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려!” “호호호!” 마리가 입을 가리고 웃자, 하이너도 피식 웃었다. 대현자를 보러 가는 길이 마치 연인이 한적하게 거리를 걷는 오붓한 시간처럼 변한 듯하다. 그렇게 그들이 계속 걸어갔고, 어느새 마신의 광장이 가까워졌다. 붉은 벽돌이 바닥에 촘촘히 박혀 있고 광장 한가운데엔 검은 달 모양의 돌 조각과 널찍한 단상이 있다. 박쥐수인 마법사 하나가 사람들 머리 위로 날갯짓하며 외쳤다. “대현자님께서 나타나셨다! 모두 경배하라!” 그러자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마법사가 단상 쪽을 향해 머리 위로 합장하며 외쳤다. “슈테반 님! 마력의 지존이시여!” “루앙의 지도자시여!” “검은 달의 수호자시여!” 마법사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 상인, 자경단, 축제의 볼거리를 제공하려고 모인 예술가들마저도 그에게 경배를 표현했다. 마리 일행 역시 군중 사이에서 튀지 않으려고 그들을 따라 합장했다. 그 후에는 단상 쪽을 보며 대현자라는 이의 모습을 확인했다. 한 남성, 주름 하나 없는 매끈하고 새하얀 피부의 젊은 남성이 하얀색 기다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피부도 새하얀데 입은 옷도 새하얗다. 이 여름에 입기엔 제법 두꺼운 원단의 하얀 로브와 그 로브 전체에 수 놓인 은색의 기하학적인 문양은 아주 세련되고 섬세한, 한마디로 고급이라 그가 이 지역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한눈에 알린다. 하얀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눈동자도 하얗다. 그 때문에 인상이 상당히 괴기스럽다. 아무리 하얀색을 좋아하는 마리라고 해도, 저런 모습을 친근하게 느낄 수 없다. 오싹해진 그녀는 온몸을 떨었다. “뭐지? 온통 새하얀 게 유령 같아. 정말 무섭게 생긴 작자야….” 하이너는 말없이 대현자 슈테반 뷔야크를 보았다. 늦여름의 후덥지근한 공기에다 마법사들의 후끈한 열기마저 섞여 가슴을 갑갑하게 했다. 단상 위의 슈테반은 한 손을 들어 경배와 찬양의 소리를 중단시켰다. 그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녹슨 못이 녹슨 쇠판에 긁히는 듯 탁한 목소리가 기다란 울림통을 통하여 광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연설의 시작을 장식하는 것은 마도인들을 향한 인사도, 축제를 시작하기 전에 흔히 하는 형식적인 말도 아니다. 오직 음산한 웃음소리뿐. “으흐흐…….” 그게 대현자라는 작자의 첫 마디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마리가 호위기사의 귓가에다 중얼거렸다. “나 태어나서 저런 병신 같은 웃음소리는 처음 들어. 륀체르가 베개 싸움 할 때 질렀던 미친 닭소리보다 더 하다니까.” 품위를 갖추지 못한 말버릇에 호위기사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아가씨, 제발 그 저속한 말 좀 어떻게….” 하이너는 말을 뚝 멈추었다. 단상의 슈테반 뒤에서 나타나는 두 명의 마법사와 그들이 든 들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들것의 위에는 이번 축제의 제물로 보이는 자가 누워 있다. 그것은 진줏빛 머리카락을 바닥으로 길게 늘어뜨린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다. 하이너는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리아……!” ============================ 작품 후기 ============================ 즐거운 주말 보내시나요? 날씨가 춥던데 감기 조심하세요!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00095 7. 악의 발화 =========================================================================                            마리 역시 마리아를 보았다. 대현자라는 작자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처음부터 불길하다 했더니, 그자가 마리아의 새하얀 목덜미에 이를 박으려 한다.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한 뱀이 먹잇감을 물기 직전의 탐욕스럽고도 위협적인 모습으로 보였다. 과장스럽게 한 손을 높이 드는 모습을 보니 뭔가 제물로 삼을 것이 분명하다. 마리는 두고 볼 수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일행이었던 저 소녀를 제물 삼다니! “가엾잖아!” 마리는 위험에 빠진 마리아를 모른 체 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눈을 질끈 감은 그녀가 체머리를 흔들더니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호위기사를 보았다. 이미 호위기사는 결심한 눈빛을 하고 있다. 마리아를 구하려는 결심이다. “아가씨.” “응?” “나서게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 “그럼 잠시 물러나 계시길 부탁합니다.” 그 사이 마리의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주위엔 심상찮은 바람이 사람들을 휘감았다. 단상 주변으로 강풍이 불었고 축제를 수 놓는 색색의 깃발들이 수선한 소리를 내며 펄럭였다. 마리는 그 바람이 드래곤의 마법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호위기사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신을 아릿하게 하는 살기가 그 증거! 그녀가 사람들에게 외쳤다. “모두 피해요!” 사람들 역시 마기에 예민한 부류들만 모인지라 이미 드래곤의 살기를 느끼고 자리를 피하고 있다. 단상 위의 대현자와 드래콘 소녀, 그리고 단상 아래 여행자 차림의 한 미청년-하이너-를 제외한 모두가 비껴 나가는 모습이 마치 잔잔한 호수에 파문이 퍼지는 모습 같다. “흐… 으아?” 슈테반은 제물을 바치는 의식인 흡혈을 멈추었다. 드래콘의 마기를 빨아들이는 의식을 진행하는 데 방해를 받다니. 하지만 그는 이 상황을 성가시고 불쾌하게 여기기보다는 흥미롭게 관조했다. “으흐흐…… 이게 무슨 소동인지 한 번 볼까으으흐흐…….” 그 사이 하이너는 여태 해온 것보다 훨씬 조용하게 변신을 시도했다. 인간의 몸체에서 거대한 드래곤으로 변해가는 일련의 과정이 마법영상구의 느린 화면을 보듯 느른하다. 강함을 느낄수록 부드럽게, 분노를 느낄수록 침착하게 굴어야 한다고 자기 스스로 끊임없이 최면을 건 덕분이다. 이런 변신에도 적응했는지 고통도 미미한 정도다. “아니, 저건!” “드래곤이야! 드래곤이라고!” 온전히 변신을 마친 하이너를 보고 사람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고, 슈테반은 히죽 웃었다. “흐흐, 이거 이거… 드래곤께서 용케도 그 굉장한 마력을 숨기고 계셨군. 흐흐…….” 슈테반의 품에 있던 마리아가 단상 안쪽으로 패대기쳐졌다. 슈테반은 이제껏 음산하게 중얼거린 것과는 다르게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크게 외쳤다. “이깟 드래콘 따위완 비교도 할 수 없는 맛 난 피가 오셨잖아! 흐하하하!” 맛 난 피. 그것은 마력생물 드래곤의 피에 깃든 마기를 뜻한다. 슈테반은 신이 난다는 듯 드래곤을 보았다. 아아. 이렇게 반가운 존재라니. 줄곧 드래곤의 마기를 숨기고 있던 걸 보면 마력이 보통이 아닐 것이다. 아주 강한 녀석이 제 발로 찾아와 준 것이다! 슈테반은 여태 자신의 적이 마탑의 고상한 족속들이라고만 생각했다. 언제나 간접적이고도 우회적인 방식으로만 루앙의 대현자에게 힘을 자제할 것을 종용, 혹은 협박해온 그런 가식적이고 넌더리 나는 것들을 적이라고 둔 것에 슈테반은 불만이 많았다. 그런데 그런 따분한 틀이 깨지고 드래곤이 나타났다. 그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흐… 얼마든지 상대해주지!” 슈테반이 몸을 수직으로 띄우자 하이너 역시 날갯짓을 시작했다. 그들 사이엔 축제를 상징하는 물건들을 포함, 온갖 물건들이 먼지처럼 나부꼈다. 금세 하늘엔 새하얀 인간의 형상과 검디검은 드래곤의 형상이 서로를 마주 본 채 대치했다. 광장에 모인 마법사들이 저마다 중얼거렸다. “대결인가!” “역시 그렇게 해석해야겠지?” “너무 갑작스럽긴 해도 이거 진짜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겠어!” 대현자와 드래곤이 서로를 노려보는 사이, 마리는 때마침 몸에 늘 지니는 스크롤 중 항풍의 힘을 지닌 것을 소진하여 거친 바람을 뚫고 단상의 마리아에게로 달려갔다. 칼춤처럼 무자비한 먼지 바람을 뚫고 돌진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여쁜 숙녀가 아니라 재빠른 산 동물 같다. “저 금발 여자는 어째서 제물을 구하는 거지?” “글쎄.” 마리는 두 무시무시한 마력 생물체들이 싸우는 여파에 행여나 마리아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마리아를 부축하여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융통성 있는 드래곤이라면 사람들이 모인 곳을 최대한 피해 대결하리라! 마리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른 사람 같으면 두 강한 마력 생물의 대치에 걱정의 말을 했을 것이나, 애써 걱정을 지워버린 그녀는 호위기사를 향해 응원의 말을 전할 뿐이다. “지지 마!” 갑작스러운 말에 마법사들이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그 시선에 부끄러워하면서도 당당히 외쳤다. “싸움까지 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리됐으니 나도 모르겠어! 난 널 믿어! 넌 이길 수 있을 거야! 저딴 하얀 병신에게 지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러자 어떤 마법사들은 대현자를 보고 ‘하얀 병신’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불쾌감을 표했고, 또 다른 마법사들은 재미있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드래곤은 놀라운 청력으로 지상에서 나오는 모든 목소리를 들었다. “루네에서 40년을 살았지만, 대현자께 시비를 거는 이는 인간과 마력생물을 통틀어 처음인 것 같군!” 그러자 한 예리한 목소리의 노인이 대꾸했다. “저건 시비가 아닌 것 같군?” “어째서?” “제물로 나온 이는 드래콘 처녀라고. 드래콘 처녀가 대현자께 피를 빨려 마력을 흡수당하는 것이 대관절 드래곤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보통은 드래곤이 그러든가 말든가 하고 무시하는 게 좋아. 그러는 게 서로에게 상책인데, 저 드래곤은 대현자의 제물 의식을 무시하기는커녕 공격을 시도할 낌새를 보이잖은가. 분명 드래곤과 드래콘 처녀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야.” “이른바 둘은 연인관계라 이건가?” 사람들의 말에 하이너는 비웃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얼굴을 감싸는 단단한 드래곤 비늘이 비웃기에는 너무나 무겁다. ‘웃기는 소리! 연인관계라니! 애당초 드래콘과 드래곤은 그 종부터 다르다고! 금단으로 엮지 말란 말이다! 이 변태 마법사 자식들아!’ 그는 아가씨의 응원도 들었다. 난 널 믿어! 넌 이길 수 있을 거야! 난 널 믿어! 넌 이길 수 있을 거야! 난 널 믿어! 넌 이길 수 있을 거야! 하이너는 슈테반을 찢어 죽일 듯 노려보며 마음으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그럼요. 제가 저 자그마한 녀석에게 진다는 건, 정말이지 말이 안 되는 일이지요. 인간의 나이로 치자면 아직 아이에 불과한 마리아의 피를 빨다니! 드래곤으로서, 아니, 오를린 남자의 명예를 걸고 저 사악한 자를 내버려두지 않겠습니다! 드래곤이 거칠게 포효했다. 그아아아아아아! 그아아아아!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였다. 겁이 많은 사람들은 그 소리에 질려 도망가느라 바쁘고, 두 마력생물의 싸움에 흥미가 생긴 노련한 마법사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줄곧 서로를 보기만 하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둘을 보며 사람들이 갖가지 추측의 말을 쏟아내었다. 바로 붙기엔 무리겠지, 아마도 서로 힘을 가늠하는 중일 테야, 대현자께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맞붙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하신 게 분명해. 그래서 드래곤에게 장소 이동을 제의하시겠지, 드래곤이 무턱대고 변신한 기세와는 다르게 지금 대현자님께 잔뜩 겁을 먹고 얼어붙어 있어, 저 포효는 겁이 나서 지르는 것에 불과할 뿐……. 하지만 그 말은 모두 틀렸다. 상대의 힘을 가늠하는 데 애쓰는 쪽은 오직 슈테반이다. 지고의 마력에 통달한 뒤 늘 표면적인 적이 없던 그가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드래곤의 도발을 받았다. 그런 슈테반이 드래곤의 힘을 가늠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 게다가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싸움 장소를 다른 곳으로 정하려 한다는 추측도 틀렸다. 슈테반은 그런 배려심을 조금도 가지지 않은 인물이기에. 슈테반은 야비한 웃음을 흘리며 모두가 들으라는 듯 웅장한 마성(魔聲)으로 도발했다. “으흐흐…… 어째서 공격하지 않지?” 드래곤에게선 대답이 없다. 그렇게 얼마쯤 있었을까. 인내심이 바닥 난 슈테반이 다시 말했다. “혹시 나와 겨뤄볼 생각이 없…으아아아악!” 드래곤의 입에서 화염이 번개처럼 터져 나와 슈테반을 노렸다. 그 탓에 슈테반의 하얀 머리카락과 로브에 불이 붙었다. 슈테반의 몸체는 순식간에 통구이가 되려 했으나 그 자신이 가진 강력한 회복 마법에 의해 원상태로 돌아왔다. 동시에 슈테반은 재빨리 화염 방어 마력도 둘렀다. 그리고 드래곤과 거리를 넓혔다. 아아. 드래곤의 기습을 받다니! 자극받은 슈테반은 크게 웃었다. “으흐하하하! 파충류에게 신사적인 것을 기대한 게 잘못이겠지? 흐흐…!” 한번 기습으로 시작한 드래곤은 화염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맹렬한 기세로 슈테반을 태워 없애려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심함을 잃지 않았다. 자신의 화염이 광풍으로 다른 엉뚱한 곳에 번지는 걸 막고자 바람 마법을 중단했다. 기습하는 건 자신인데, 오히려 기습 받는 처지처럼 포효가 터져 나왔다. 구아아아아! 그아아아아! 사실 이런 기습은 기사도를 배우던 시절에는 절대 하지 않았으며 치욕으로 여기던 일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치욕이 아니다. 여행에서 온갖 일을 겪고 또한 륀체르와 베개싸움을 하면서 기습의 효용을 터득했기에 자신은 이제 기습이란 개념 자체에 어떤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어째서 자꾸 짜증스럽게 굉음이 터져 나오는지. 아마도 드래곤 발정기의 효과임이 분명하다. 그아아아아아아아!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슈테반에게 끊임없이 화염을 쏘지만, 슈테반은 공격을 하기보다 방어에만 집중하고 드넓은 공터 쪽으로 빠질 뿐이다.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행동인가?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엔 저 녀석의 허언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악의가 배려심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이는데? ‘어째서 도망만 가지? 화는 나지만 어떤 공격을 할 수 없으니 그냥 도망가는 건가? 녀석…… 대현자라는 이름은 허세고 실은 약한 놈인지도?’ 잠시 그런 생각을 들게 하지만, 약한 놈은 아니다. 드래곤의 집중 화염 공격을 받고도 방어막 하나 손상되지 않은 점이 그것을 증명한다. 하여, 하이너는 화염 공격을 지속하면서 다른 공격을 생각했다. 아무리 불을 뿜어도 손상되지 않는 슈테반의 방어막에 긴장도 느껴졌다. ‘여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맞수를 만나서 기분이 좋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건 절대 기분 좋은 일일 수 없다! 한때 자신의 일행이던 마리아를 노린 녀석을 상대하는 일 아닌가? 자아. 생각해보자. 만에 하나 아가씨와 자신이 이 광장에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마리아의 목숨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몹쓸 놈! 너는 마리아를 죽이려 했어!’ 그런 생각에 화염 공격은 더욱 강해졌다. 화염 공격에 이어 드래곤은 전광을 뿜어 공격하기도 했다. 그가 뿜어내는 전광의 모습은 마치 신이 휘두르는 거대한 창과 같은 모습이었다. 공격이 갈수록 격렬해져서 지상에서 그들을 구경하던 마법사들도 화염으로부터의 방어막을 펼쳐야 할 정도다. 마리는 마리아를 꼭 안으면서 무심코 신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오, 로젠플라드시여! 믿지도 않은 신을 부를 정도로 그녀는 불안하다. “하이너! 이 자식! 대체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면 어쩌겠다는 거야! 이성을 잃은 거니? 그런 거야?” 드래곤을 노려보던 마리는 잠시 시선을 내려 마리아를 보았다. 이 마력 생물 소녀 하나 때문에 드래곤이 저토록 날뛸 정도인가, 어쩌면 발정기의 힘 때문에 저렇게…… 마리의 생각은 거기까지 뻗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그 생각을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이니, 마리! 우리는 일행이었어. 일행이 다칠 뻔했으니 하이너가 저렇게 화내는 건 당연하다고!’ 그때였다. 강한 전광에 방어막이 조금 손상된 슈테반은 화가 났는지 갑자기 더욱 강한 방어막을 두르더니 드디어 드래곤에게로 돌진했다. 아이처럼 따지는 행동마저 하고 있다. “우와아아아!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이 삼아 사는 게 당연한 건데 어째서 방해를 하느냐! 네놈은 대지의 마기를 빼앗아 사는 용 주제에!” 슈테반이 돌진할수록 하이너는 온몸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슈테반이 조금 전에 외치는 말은 확실히 이곳 루네의 모든 마법사에게 슈테반 자신이 약자임을 공표하는 것과 같다. 마땅히 하이너는 기분이 좋아야 했으나 그러지 못하다. ‘내가…… 대지의 마기를 빼앗아 사는 용이라고?’ 그때 슈테반이 외쳤다. “흐흐…… 다 먹어주마!” 그 짧은 순간 하이너는 슈테반의 목적을 깨달았다. 슈테반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가 드래곤의 마력을 미약하게나마 빼앗고 있다! 슈테반은 드래곤의 마력을 빼앗을 목적이다! 불현듯 하이너는 거리에서 들은 슈테반에 관한 정보를 기억해냈다. 「천벌 받을 소리! 대현자께서는 여자의 몸이나 탐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그럼 그분은 뭘 탐하시는데?」 「피야. 피라고.」 「흡혈귀란 말이야?」 뒤늦게야 알았다. 가까이 다가오면서 마기를 빼앗는 이 대현자라는 자식! 이 자식은 지금 드래곤의 몸에 붙어 피를 빼앗는 식으로 더욱 깊게 마력을 흡수할 속셈이다! ‘모기 같은 녀석! 그렇다면 그 방식에 따라주겠어!’ 드래곤은 슈테반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한쪽 날개를 스스로 물어뜯어 허공에 드래곤의 피를 흩뿌렸다. 그 핏방울들은 모조리 슈테반에게 흡수되었고, 핏방울에 깃든 마력으로 한층 강해진 슈테반은 드래곤의 포효 그 이상의 마성파음을 지르며 거대한 백룡이 되었다. 그러나 하이너만큼 그리 몸체는 크지 않았다. 슈테반은 이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듯, 갑자기 드래곤의 상처 난 날개에 달라붙어 핥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쾅! 드래곤은 추락하듯 지상으로 낙하했다. 드래곤의 거대한 바위 같은 몸체가 백룡의 모습을 한 슈테반을 깔아뭉개버린 것이다. 드래곤은 백룡을 완전히 납작하게 만들 기세로 짖어댔다. 그아아아아아아! 드래곤은 그것도 모자라 백룡의 피를 모조리 빨아들였다. 지고의 마력을 가졌다고 알려진 슈테반의 모든 마기가 드래곤에게 흘러들어갔다. 하이너에게 흡혈, 흡기의 능력은 없으나, 그런데도 그의 흡기 기술은 능숙하다. 순간이동이 처음으로 가능했던 그때처럼, 강한 의지의 힘이 그의 몸에 기술을 저절로 습득하게 한 것이다. 슈테반의 피, 그가 가진 마기, 그의 기술 모든 것이 드래곤의 몸에 흘러들어 가고, 드래곤은 끔찍할 정도로 진한 포만감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날갯짓했다. 그아아아아! 그 순간 마리는 드래곤의 아래를 보았다. 드래곤의 몸에서 뻗은 수백, 수천 개의 나무뿌리 같은 검은 물질이 백룡의 정기를 모조리 빨아들이는 모습이 보였다. 백룡은 반항한다고 몸부림쳤지만, 점점 비쩍 말라갈 뿐이다. 그 끔찍한 광경에 마리는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불길해…….” 슈테반을 새하얀 가루로 만들어버린 드래곤은 승천하는 용처럼 하늘로 날아가 구름 위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 광경을 본 수많은 마법사가 입을 모아 외쳤다. “새, 새로운…….” “새로운 대현자 님께서 나타나셨다!” “새로운 지도자께서 나타나셨어!” “이제 이곳은 드래곤의 땅이 되었다고!” 그들은 경배와 찬양의 의미로 하늘을 향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마리는 짙은 구름 저 너머를 보는 듯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불안함에 자꾸만 입술이 깨물렸다. 그녀는 자신의 품에 안긴 마리아에게 묻듯이 혼잣말했다. “단지 너를 구하려 한 것뿐인데…… 왠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한 듯해. 그렇지 않니?”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00096 7. 악의 발화 =========================================================================                            한여름인데도 바람이 스산한 소리를 내며 불었다. 마리는 마리아를 일으키면서도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 구름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던 하이너는 어떻게 되었을까. 거대한 드래곤은 구름을 지나치면서 강력한 마기의 덩어리가 되어 천공에 녹아내렸다. 인간에서 드래곤으로, 드래곤에서 하늘 그 자체가 되는 기분은 어떠할까. 하이너는 단 한마디로 대답할 것이다. 세상을 아우르는 느낌이라고. 그가 그러한 경이로움에 도취한 사이, 슈테반의 모든 것 또한 구름처럼 하이너에게 스며들었다. 하이너는 슈테반의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한 듯 느껴야 했다. 슈테반의 탄생과 삶 그리고 드래곤에게 먹히기 전까지의 기억 전부가 마기의 덩어리가 되어 하이너에게 녹아들었다. 그 현상은 이른바 슈테반의 기를 흡수한 후유증이라 할 수 있다. 슈테반 뷔야크는 마법 명문 후슈킨 가문의 아이였다. 그러나 어미의 부정한 관계로 태어난 데다가 갓난아이부터 마력조절이 되지 않아 갖은 말썽을 일으켰고, 그 때문에 그의 어미는 늘 불안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녀는 후슈킨 가문의 건강하던 하녀가 갑자기 죽거나, 집안의 우물이 모조리 증발하거나, 늦봄 마당의 식물들이 모조리 말라죽었을 때 그 범인이 자기 아들이라고 여겼다. ‘너는 내 죄다.’ 어미는 그 말을 버릇처럼 했다. 그녀는 남몰래 가슴 졸이며 그를 키우다가 지쳐 버렸고, 급기야 아이를 숲에 버렸다. 아이는 숲의 동물들 혹은 마력생물들에게 먹힐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뷔야크라는 성을 가진 한 늙은 마법사가 순례 도중 슈테반을 발견했고, 그렇게 슈테반은 새로운 성을 얻고서 마법사 노인에게 거두어졌다. 부모이자 스승 역할을 맡은 마법사 노인은 썩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린 슈테반이 마력 자제가 되지 않아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눈치 챈 그는 슈테반에게 일단 마력 결박을 걸어두어 아이 주변을 안전하게 했다. 그 후에는 평범한 아이처럼 키우는 듯했다. 하지만 슈테반이 여섯 살이 된 무렵부터, 노인은 슈테반을 마치 노예처럼 부려 먹었다. 세탁, 물 긷기, 청소, 음식 만들기 등 자잘한 가사는 모두 슈테반에게 맡겼고, 마법 실험 재료가 필요하면 그 재료가 어떤 위험한 곳에 있든지 간에 무조건 슈테반에게 ‘구해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으며, 때로는 슈테반을 마법 실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또한, 그 노인은 ‘사춘기는 마법사들에게 성가신 것’이라며 슈테반이 사춘기를 맞이할 즈음엔 생식의 능력을 없애는 만행도 저질렀다. 그 시절은 그야말로 슈테반에겐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어린 시절의 슈테반은 단 한 번도 또래 아이들처럼 뛰어놀 시간이 없었고, 실험 후유증으로 인해 언제나 몸이 좋지 않았다. 그의 음산한 성격은 그때부터 만들어졌다. 어느덧 시간은 흐르고 슈테반은 청년이 되었다. 그동안 스승 몰래 마법을 공부해온 슈테반은 자신에게 마력 결박이 걸려있단 걸 알았고, 그날 바로 마력 결박을 풀었다. 그런 다음 스승의 마력을 모조리 흡수한 뒤 스승의 온몸을 난도질해 죽였다. 그러지 않으면 언젠가는 스승의 먹이로 소모될 것 같은 공포 때문에 견딜 수 없었다. 끝없는 마력 사냥은 그런 증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집을 떠난 슈테반은 루앙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돌아다니면서 약한 마력생물의 마기를 흡수하거나 아니면 마법사들의 마기를 조금씩 빨아들이는 방식으로 자신의 마력을 키웠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게, 자신이 다른 마법사들보다 마력의 흡수가 굉장히 빠른 편이고, 남들이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은밀하게 흡수를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마기를 흡수하면서 마법사들의 삶과 지식도 흡수했고, 그러다 보니 그는 어느 순간 루앙에서 대현자 혹은 지도자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물론, 그때부터 마탑의 견제가 시작된 것은 당연. 마탑의 이인자 후슈킨은 자신의 가문에서 루앙의 대현자라 불리는 마력 괴물이 나왔다는 것에 경악하며, 최대한 완곡한 내용의 전언을 슈테반에게 보냈다. 가능하면 조용히 지내달라는 것, 그리고 괜스레 힘을 과시하여 제국을 어지럽게 만드는 일은 자제해 달라는 것. 슈테반은 그 전언을 본가에서 보낸 협박으로 여겼다. 그는 그런 전언을 보낸 후슈킨을 증오했고, 후슈킨이 몸담은 마탑의 수장 마황도 이겨서 없앨 거라고 결심했다. 그는 루앙의 최고가 된 후에도 마력 사냥을 멈추지 않았다. 마도사 순례 역시 마력 사냥을 목적으로 떠났다. 마력 사냥을 하기엔 마법사를 먹는 게 가장 좋지만, 루앙의 우두머리가 된 후라 같은 마법사의 마력을 먹는 것은 상황이 마뜩 잖았다. 괜스레 도시 전체를 불안하게 하고 적으로 만들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마탑이 있는 황도에 가야 했다. 하지만 루앙을 떠난 그는 바로 황도에 가는 것은 자제했다. 제국 외곽에서 힘을 모은 뒤에 황도에 갈 생각이었다. 일단 극동 지역 달의 바다에서 휴양하며 마력생물들을 잡아먹었다. 그 뒤 북쪽으로 가서 오슬의 수인족 중 먹을 만한 마력이 있는지를 살폈다. 예전에 흡수한 지식에는 수인족 중에서도 쓸 만한 마력이 있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인족 중에는 그다지 탐나는 마력이 없었다. 게다가 수인족은 언제나 로젠플라드 신성군과 전투를 벌이느라 분위기도 어수선했다. 그는 더욱 북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얼음 도시 시귀르에서 빙귀의 휴야를 찾아갔다. 그곳은 마력이 깃든 유령들이 모인다는 곳으로, 심령 마법을 통해 대규모 사냥을 하기 좋았다. 그는 유령들을 사냥하며 마력의 목마름을 해소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는 수많은 마법사의 지식을 흡수했지만, 그 지식이 대부분 잠든 채로 의식의 표면에 등장하지 않았고, 그 탓에 유령의 마력이 지니는 저주를 알지 못했다. 처음엔 유령의 마력도 쓸모가 있을 거로 생각하고 모조리 먹어치웠지만, 마력을 탐하면 탐할수록 더욱 마력에 굶주린, 마치 아귀 같은 상태가 되었다. 훗날 마법사들의 지식을 의식 표면에 띄워 그 굶주린 상태의 원인을 알아본 결과, 유령의 저주란 것이 밝혀졌고 그는 절망했다. 유령처럼 떠돌던 그는 또 무작정 북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며칠 뒤, 위험지역이라 알려진 영원의 꿈 근처에 다다랐다. 그곳은 암흑지형에 점점 침식당해 불안정한 곳이었다. 게다가 빙귀의 휴야에서보다 더욱 엄청난 마력을 지닌 유령들이 득시글댔다. 예전 같으면 슈테반은 그 유령들의 마력을 모조리 먹어치웠을 테지만, 마력을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목말라지는 증상에 사냥을 일절 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유령들에게 조언을 구하였다. 「아아. 어찌하면 이 목마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유령들은 비웃었다. 그를 절망케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없지. 만약에 네가 황도의 위선자(마탑의 마법사 귀족 무리)들을 모조리 먹어치워 그들의 모든 것을 흡수한다면 또 몰라도.」 슈테반은 앞이 막막했다. 마탑의 마황을 이기고자 마력 사냥을 시작했는데, 마력에 더욱 목이 마른 저주에 걸려버리고, 그 저주를 풀기 위해선 마탑의 마법사들을 전부 먹어치워야 한다니. 유령들은 절망의 끝에 다다른 슈테반에게 조언했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마력을 먹어치워라. 절대로 유령의 마력은 먹지 마라. 가능하면 인간, 그것도 오래 수행한 마법사의 마기가 좋겠지. 아니면 강한 마력생물의 마기도 좋아. 저주에서 벗어나 지고의 마력을 얻게 된다면 너는 먼 훗날, 암흑 지형이 온 대륙을 뒤덮어도 살아남을 수 있겠지.」 그러자 다른 유령들이 끼어들었다. 「그 여러 가지 지식을 흡수하고도 저주에 걸린 꼴을 보니 아주 불가능할 테지만 말이야! 하하하!」 이에 슈테반은 발끈했다. 저주에 걸린 것도 화가 나는데 유령들의 조롱이라니. 이성을 잃은 슈테반의 유령 학살이 시작되었다. 그는 유령들을 먹으면 먹을수록 저주가 더 심해진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모든 유령을 먹어치울 기세로 달려들었다. 「흐흐! 저주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상관없다고! 으하하하하!」 급기야는 영혼이 피폐에 물들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는 영혼들의 역공에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잃기 전만 해도 자신이 차원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어간다고 느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그곳은 차원의 소용돌이가 아니라 야울의 어느 시골이었다. 야울은 황태자 비오르틴의 자치령으로 쉽사리 건드려선 안 될 곳. 슈테반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굶주림을 외면하고 서둘러 거대 호수 요호를 지나 서쪽 동한으로 갔다……(중략). 긴 여행 아니, 긴 마력 사냥은 피곤한 법이었다. 그는 잠시 쉴 겸 자신의 본거지인 루앙에 되돌아가기로 했다. 되돌아가는 길, 루앙과 오를린의 접경에서 우연히 드래콘 소녀를 발견했다. 그는 그녀의 마력을 반쯤 먹어치웠다. 그리고 나머지는 축제 때 제물 의식을 위해 남겨두었다……. 기억이 거기까지 다다랐을 때 하이너는 혼란을 느꼈다. 자신이 슈테반인지 아니면 마리 아가씨의 충실한 호위기사인지 헷갈렸다. 그런 와중에 마리아를 노린 슈테반의 악의가 인지되었고, 그것은 다시 하이너를 분노하게 했다. 분노 덕분에 하이너는 겨우 자신의 자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기의 덩어리가 되어 세상을 내려다보는 느낌. 그 경이로움에 잠시나마 분노를 달래며 자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낙하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마치 대지가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느낌이었다. *** 정신을 차린 하이너는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인간의 몸으로 일어나는 기분이 가뿐하지만, 어쩐지 이 가뿐함이 기분이 좋지 않다. 눈앞에는 호수가 있다. 평범한 호수는 아니다. 새빨간 물결이 인상적인 이 호수는 피의 호수라 불리는 루앙의 명소. 즉, 이곳은 여전히 루앙이라는 이야기. 호수가 붉은 것은 이곳에만 있다는 특유의 미생물 때문이다. 호수의 핏빛을 본 하이너는 돌연 급격히 허기를 느꼈다. 슈테반의 기운이 그를 조종하는 것일까? “그아아아아……!” 인간이면서도 마치 드래곤인 양 울부짖는다. 그러다 한참 후, 하이너는 호숫가의 마력생물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미미한 마력을 가진 곤충부터 시작해 마법 약의 재료로 쓰이는 풀과 꽃, 토끼처럼 자그마한 생물 그 모든 것을 뜯어 먹었다. 사람이 없으니 망정이지, 혹시나 마력을 지닌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조차 사지가 뜯겨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슈테반의 기운은 하이너의 자아를 내리눌러댔다. 포식의 시간이 끝나고 하이너의 입가에는 흙과 풀물이 묻어 있다. 그리고 호수보다 더 붉디붉은 피도 주르륵 흘러내렸다. 기분 나쁜 포만감을 느끼며 그는 원래 자신의 자아를 일깨우려 애썼다. 하이너. 하이너 그로스. 오를린의 청년이자 마리니시네 아가씨의 충실한 기사. 그 정체성을 몇 번이고 되뇌는 순간, 갑자기 몸의 내부에서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흐흐…… 정의로운 기사 씨.」 자신을 부르는 이는 아마도 슈테반의 자아일 것이다. 하지만 하이너는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다. 하이너는 괜히 다시 물었다. 내부에서 말을 거는 이가 슈테반이 아니길 바라며. “누구지?” 대답이 돌아왔다. 「슈테반. 슈테반 뷔야크. 그 누구보다 네가 나를 가장 잘 알 텐데? 흐흐…….」 하이너는 침묵했다. 침묵으로써 슈테반과의 대화를 단절하고 싶다. 그러나 대화는 단절되지 않을 분위기다. 「하나 묻지. 나에게 도전한 건가, 아니면 정의감에 사로잡혀 그 드래콘을 구하려 한 건가.」 “처음부터, 도전할 생각은 없었다.” 「아하. 그래. 정의의 사도 씨. 드래콘 아가씨를 살리니 기분이 어떤가? 기쁘고 즐거운가? 보람차고 뿌듯해서 미칠 것 같은가?」 하이너의 미간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정의의 사도 흉내도 상황을 봐 가면서 하는 거라고. 알겠나?」 “닥쳐라!” 하이너는 슈테반에게 조롱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슈테반은 고맙다는 듯 굴었다. 「그나저나 참 다행이지…… 너도 알지 않나? 내가 늘 갈증으로 괴로웠단 걸. 늘 목이 말랐다. 부모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 내 멋대로 할 수 없었던 마력 조절을 향한 열망, 그리고 누구도 넘보지 못할 강한 힘…… 하지만 이제 자유군. 그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니까.」 “자유?” 「그렇다. 이렇게 영혼이 되어서야 평화를 느껴. 더는 살육을 저지르지 않아도 되니 말이야. 이게 자유가 아니고 대체 뭔가.」 그 말인즉슨, 그가 저지르던 살육의 굴레, 그가 느끼던 모든 굶주림이 드래곤으로 옮겨갔음을 뜻한다. 슈테반에게서 저주 같은 말이 나왔다. 「정의로운 드래곤 기사 씨. 그대는 영원히 목마르게 될 거다. 영원히. 그게 내가 주는 선물이다. 으흐흐흐…….」 슈테반이 사악한 웃음을 전할수록 그 반동으로 하이너는 점점 자신의 자아를 오롯이 의식 가운데로 옮길 수 있었다. 그는 한 순간 우두커니 서서 눈을 질끈 감고 있는 힘을 다해 몸속을 떠도는 슈테반의 목소리를 지웠다. 아니, 그의 자아 전부를 최대한 지워내려 애썼다. 그랬더니 슈테반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을까? 정말 그가 영영 사라졌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싫다…….” 하이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점점 호수로 돌진했다. 풍덩! 하고 온몸을 호수에 내던지고 한참 동안 침잠했다. 그가 원한 것은 단 하나. 온몸에 깃든 슈테반의 망령에서 벗어나고 그의 저주 또한 무효로 만드는 것. 만약에 이 목마른 저주를 해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좋은 건 하나에, 안 좋은 건 전부다. 우선, 좋은 것은 아가씨가 원하는 마황 제거 작업을 쉽게 할 수 있다는 것. 원래부터 막강한 드래곤의 마력에, 루앙의 대현자의 마력까지 흡수한 덕분에 마황을 대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딱 거기까진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다음은? 마황이라는 커다란 먹이를 먹어도 이 저주받은 몸은 더 큰 마력을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아우성칠 것이다. 그리고 대륙의 모든 마력생물의 씨는 마르겠지. 아가씨에 의한 대륙 정복이 아니라 자신에 의한 대륙 정복 아니, 자신에 의한 대륙 파괴임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맹세코 그런 상황을 맞이하길 원하지 않는다. 하이너는 버릇처럼 아가씨의 말을 떠올렸다. 「기적의 재료가 뭔지 알아?」 「예?」 「믿음. 그리고 능력. 그것만 있으면 되지.」 지금부터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은, 몸속에 녹은 슈테반의 저주를 오직 의지의 힘으로만 지워내는 것이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물 속 깊은 곳에서 나오지 않았고, 그 덕분에 호수에 녹은 모든 산소가 그의 호흡으로 소진되었다. 그리고 그가 호수 표면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땐 호수 주변 모든 동식물이 생명력을 잃고 널브러졌다. 그가 슈테반의 기운을 없애려 애쓴 나머지 그 파괴력이 주변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슈테반을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이봐. 나는 한낱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고. 날 없애고 저주에서 벗어나려면 그깟 의지의 힘 따윈 통하지 않아. 차라리 나와 비슷한 마력을 가진 자를 흡수하는 게 더 빠를 거야. 이를테면 마탑의 역겨운 놈들 말이지.」 하이너는 물 밖으로 힘없이 걸어 나왔다. 그리고 달 아래 붉은 물결을 보며 중얼거렸다. “때론 아가씨의 무한 긍정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있군요.” 아직 여름인데, 벌써 가을이 온 느낌이다. 이젠 어디로 가야 할까? 아가씨껜 갈 수 없다. 만약 그런다면 아가씨와 함께 있을 마리아를 먹어치울 것이 분명하기에. 지금도 호수의 마력생물들을 먹어치우는데, 마리아를 보면 먹어치우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잖은가. 게다가 루네의 마법사들도 먹어치워 버리겠지. 그리고 그건 가히 폭주라고 할 수 있겠지……. 아가씨께 너무나 가고 싶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갈 수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아가씨를 최대한 빨리 볼 방법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마황을 흡수해야겠어.’ 폭주가 걱정되긴 하지만, 그 방법 외엔 마땅한 게 없다. 마탑의 책임자이자 귀족인 마황은 슈테반보다 훨씬 절제된 이성의 소유자일 것이고, 그 이성이 폭주를 막아 주리라. 지금으로선 그런 실낱같은 것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순간이동을 하기로 했다. 목적지는 마황이 있는 황도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00097 7. 악의 발화 =========================================================================                            마리는 마리아를 부축하여 아주 오랜 시간 걸어 겨우 여관에 도착했다. 마리아를 침대에 눕히고 보니 보는 사람이 다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지금 마리아는 상당량의 혈액과 마기를 빼앗겨 의식이 불분명한 상태. “가여운 것.” 마리는 마리아를 정성껏 간호했다. 누군가가 그 모습을 본다면 고작 과거의 종속물일 뿐인 존재에게 지나친 정성을 쏟는다 하겠으나, 마리에겐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마리아가 무사히 회복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지금 없다. “마력 회복에 좋은 게 뭐가 있더라. 이럴 때 루돌프가 없다는 게 참 아쉽네. 하아.” 마리는 여행 가방 속에 있는 책을 뒤적거리다가 포기했다. 마력이고 뭐고, 마리아가 인간의 몸으로 있으니 일단 기력 회복을 우선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숟가락을 꺼내 물과 비상용 영양제를 조금씩 섞어 마리아의 입에 흘려 넣어 주었다. 그리고 마리아의 몸을 찜질해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주 오랫동안 호위기사를 기다렸다. ‘우리 호위기사가 아무래도 루앙의 유명인사 아니, 유명용사가 된 것 같은데, 흐음.’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다. 순간이동을 자유자재로 쓰는 자이므로 다시 돌아오는 게 그리 어렵지도 않을 것인데, 어째서인지 올 기미가 없다. “이상해. 어찌 된 일이지? 마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응?” 혼미한 상태의 마리아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보면서 마리는 초조함과 적적함을 달랬다. 어느덧 시간은 늦은 밤. 힘없이 축 늘어졌던 마리아가 조금씩 몸을 뒤틀었다. 깜빡 졸았던 마리는 그 기척에 눈을 떴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마리아의 선홍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마리는 마리아의 의식이 완전히 돌아온 듯한 분위기에 안도하며 마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기쁜 목소리를 냈다. “정신이 드나 보구나. 목에 상처가 심하던데, 아프지는 않니?” 어둠 속에서도 마리아의 표정은 그녀의 빛나는 눈동자 때문인지 환히 보인다. 어째서인지 마리아는 옛 주인을 봐도 전혀 반가운 표정이 아니다. 마리는 그것에 섭섭하기보다 측은함, 죄책감을 느꼈다. ‘널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어. 너와 그렇게 헤어지는 게 아니었다고.’ 드래콘의 나이로 마흔 살이 넘었지만, 그 나이를 인간 나이로 치자면 아직 어리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어린아이를 세상에 혼자 보낸 것이 뒤늦게나마 후회가 됐다. 보낼 당시에는 마리아가 원체 혼자서 이것저것 잘 해내서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고, 또한, 마리아를 독립시키는 것이 그녀를 성숙하게 하는 일이라 생각했기에 결정에 후회할 거란 생각은 없었다. 여러모로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선택한 일이었는데, 마리아가 슈테반에게 마기를 빼앗긴 현실을 보니 결과적으로 그 선택이 나빴던 것 같다. ‘사과…해야겠지. 주인으로서. 아니, 동료로서.’ 마리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사과의 말을 하려고 입을 떼는 그 순간, 갑자기 마리아가 눈동자를 좌우로 흔들며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불안한 모습에 놀란 마리가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춥니? 이곳은 다른 곳보다 서늘하긴 하다지만.” 마리는 마리아가 슈테반에게 잡히기 전에 어디에 있었는지 모른다. 적어도 루앙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예상만 할 뿐. 더운 여름 공기를 가르며 날아다니던 드래콘 소녀가 루앙의 마법사들이 만든 서늘한 공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렇게 몸을 떠는 것은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다. 게다가 지금 마리아는 몸이 허약한 상태라 서늘한 공기를 더더욱 차갑게 느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마리는 마리아에게 이불을 덮어주려 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 손길을 세게 쳐냈다. 마리가 서운한 눈초리로 마리아를 보았다. “마리아?” 마리아는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마리의 예상대로 추위 때문에 몸을 떠는 것은 아니다. 지금 마리아가 시선을 고정한 곳은 바로 출입문. 출입문을 향해 다가오는 강력한 마기, 악의, 그것도 한 사람의 것이 아닌 여러 사람의 기운에 그녀는 겁을 먹은 것이다. “으아아!” 마리아가 인간의 성대를 쓰며 공포에 질린 소리를 내는 그때, 갑자기 출입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마리는 하이너가 온 줄 알고 기뻐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방문자는 하이너가 아니다. 방문자는 여러 명의 법의를 입은 정체불명의 집단이다. 마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금세 눈치챘다. 그들은 고급 법의를 걸쳐 입었는데, 그 법의에 황가의 문양이 수 놓여 있다. ‘마탑의 마법사들?’ 그들 가운데 있는 여자가 지휘자, 혹은 우두머리로 보였다. 그 여자는 검고 곧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도전적인 눈빛을 뿜어냈다. 어려 보이지만, 남들을 압도케 하는 분위기가 있는 사람이다. 그 분위기는 그녀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 때문일지도. 마리아는 그 여자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에 질겁하고 몸서리쳤다. 마기를 잃고 약해진 마리아는 적의를 가진 검은 머리 여자의 마력에 질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은 머리가 마리와 마리아를 보며 외쳤다. “뭐해? 얼른 자루에 넣지 않고!” 법의의 마법사들이 그녀의 명령을 따랐다. “예! 사루아 님!” 마리는 난데없이 들이닥친 그들에게 끌려 어디론가 가야 했다. 불안한 시간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 황도 로귀하르트. 마탑. 새로운 검황의 즉위식은 야울 궁의 주도로 소리 소문도 없이 속결로 해치워졌다. 새 검황은 헤세 레 지괴르라는 이름의 젊은 남성인데, 대외적으로 검성 명문 지괴르 가에서 나온 인재라고 알려졌다. 그는 사형수였다가 행방불명된 헤그의 이란성 쌍둥이 형이라고 한다. 이 사실에 야울 수호 부대 루빈을 포함, 황도의 수많은 군인이 다행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검성 명문 지괴르 가를 존경해왔고, 검황이 새로 나온다면 마땅히 그 가문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헤그의 쌍둥이 형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하니, 그들은 그 형의 정체를 불신하기보다 오히려 헤그가 부활하기라도 한 듯 더욱더 환영하고 응원했다. 재야에 파묻혀있던 헤그와 비슷한 능력을 갖춘 쌍둥이 형이 동생의 불운에 슬퍼하며 동생의 길을 따르겠다고 군에 들어오고, 황태자의 도움으로 검황에 이른 것에 그 누구도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새 검황 헤세 레 지괴르의 정체는 사형장에서 실종됐다고 알려졌던 헤그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추측하는 이들도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황태자 최측근과 헤그만의 비밀이 되었다. 새로운 신분과 지위를 얻은 그는 황태자로부터 중대 임무를 받았다. 그것은 마황을 이기고 마황이 가진 마나의 인을 빼앗는 것. 마황은 누구인가. 모든 마법사의 공식적인 주군이자 마탑의 주인, 황제가 소유한 마나의 인이 조종 가능한 유일한 자. 그리고 그 유일성에서 나온 권력의 소유자. 하지만 그는 권력을 소유할 뿐, 휘두르는 데는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황권의 입장에서 보면 견제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 황태자는 마황이 지닌 마나의 인을 빼앗아서 절대적인 황권을 구축하고자 하는 야망이 있고, 그 야망에 검성의 일인자인 헤그와 마탑의 이인자인 후슈킨을 이용하고자 했다. 후슈킨의 딸 사루아를 후궁으로 들이려 하는 것과 사루아에게 이것저것 중대한 업무를 맡기는 것도 그런 의도에서 한 일들이다. 후슈킨은 딸이 궁의 안주인이 될 수도 있단 기대에 더욱 열정적으로 황태자의 계획에 따라주기로 했다. 지금 후슈킨은 마탑의 최상층에서 검황 헤세 레 지괴르를 기다리고 있다. 헤세가 오고 난 후에는 늘 그렇듯 약속 장소에 가장 늦게 나타나곤 하는 권력자, 마황이 올 것이다. 마황은 오늘 이 모임을 새로운 검황과의 사교행사쯤으로 알고 있다. 마황이 오고 형식적인 검황 소개 시간, 식사 시간이 이어지고 그 후엔 거사가 시작되리라. 후슈킨 자신이 마황에게 마력 결박을 걸면, 검황 헤세가 마검을 마황에게 휘두를 것이다. 그가 휘두를 마검은 역대 황제에게만 내려온다는 비기를 가진 물건으로, 그 비기란 게 사실 별거 없다. 바로, 마나의 인에서 자유롭다는 특징. 마나의 인에서 자유로운 검이지만, 그러므로 마황에게 휘두를 수 있는, 즉, 마황을 벨 수 있는 유일한 검이라는 의미. 자신에게 그 검이 휘둘려지는 것을 본 마황은 당연히 마나의 인을 조종하여 헤그에게 반격을 할 것이지만, 이미 이곳 최상층에는 마탑의 수많은 마법사들이 거사를 대비해 마황의 힘을 제압하려고 준비 중이다. 그것은 마탑의 이인자인 후슈킨 자신도 마찬가지. 물론 검황과 자신, 그리고 수많은 마법사의 힘을 모은다고 해도 마황의 힘을 이기긴 어려울지 모른다. 그래서 오늘 검황 헤세의 기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마법사들이 마황을 견제할 수 있는 능력은 한정돼 있으나, 검황의 능력은 한정이란 게 없다. 그가 마검을 휘두르면서 동시에 마검에만 쓸 수 있는 방어, 공격력 강화 스크롤을 얼마나 잘 쓰느냐에 따라 오늘의 거사가 판가름이 난다. 오늘 이 계획은 과연 완벽하게 마무리될까? 준비는 다 되었으나 후슈킨은 초조함을 감출 수 없다. 귀에서는 자꾸만 황태자의 말이 맴돌았다. ‘그대들만 믿네. 이 거사를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쳤어.’ 모르긴 몰라도 그 말의 의미인즉, 마탑의 마법사들을 매수하려고 황태자 본인의 사유 재산 전부를 다 썼다는 말이리라.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바친 건 후슈킨도 마찬가지다. 한 번 황태자의 사람이 된 이상, 성공이든 몰락이든 황태자와 함께하게 될 터. 그것도 자신의 딸 사루아와 함께 말이다. 후슈킨은 오늘의 마법을 위해 곳곳에 배치해둔 주술의 물건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때 검황 헤세가 도착했다. 후슈킨은 마탑의 이인자로서 검성의 최상위 신분에 있는 헤세에게 예를 갖춘다고 허리를 잠시 숙였다. 그러자 헤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후슈킨의 옆에 앉았다. 거사를 앞둔 두 사람은 눈짓으로만 인사할 뿐 일절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헤세, 헤세라.’ 동생 헤그와 머리 색깔, 눈 색깔만 다를 뿐 그 외엔 외모가 똑같은 헤세를 보고 후슈킨은 늘 그렇듯 미심쩍은 표정을 감출 수 없다. 오늘로써 다섯 번 보는 것인데, 볼 때마다 묘하게 마력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그게 헤세의 기운이 세서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인 것인지, 아니면 헤세의 표정이 끝 모를 허무에 젖어 그에게 자연스럽게 동화하여 느끼는 기분인 건지, 후슈킨 본인도 잘 알지 못했다. 중요한 건 그 미묘한 느낌이 검황의 쌍둥이 동생이던 헤그와 닮았다는 것. 역시 쌍둥이는 그 느낌마저 닮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한다. 후슈킨은 무거운 마음을 털어낼 겸 헤세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식사(거사)가 아주 기대되어 아침도 먹지 않고 나왔습니다. 검황께선 뭐 좀 드시고 나오셨는지요?” “예.” “…….” “…….” “무엇을 드셨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죽.” “아.” “…….” “맛있었습니까?” “별로.” 이러한 단답형도 제 동생이 살았을 적의 행동과 닮았다. 후슈킨은 웃으며 농담했다. “어찌 이리 동생을 쏙 빼닮으셨는지 아니, 동생분이 형을 빼닮으셨나 봅니다.” 그러자 헤세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후슈킨을 돌아보며 촥 가라앉은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시기적절하지 않은 말이군요.” “예? 무엇이……?” “그 아이(헤그)에 관한 언급은 삼가길 바랍니다.” 후슈킨은 뒤늦게야 자신의 잘못을 눈치챘다. 동생이 사형수였다가 행방불명 당한 것은 그 쌍둥이 형에게 퍽 좋은 일은 아니리라. 그런 동생을 언급했다는 것은 역시 적절하지 못한 행동이다. 하지만……. 예전 같으면 후슈킨은 바로 사과를 했으나, 지금 그는 그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거사가 성공하게 되면 자신은 검황보다 한층 높은 존재, 새로운 마황이자 차기 황제의 장인이 될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허허…….” 후슈킨이 괜한 웃음으로 사과를 대충 때우려는 그때였다. 식당 출입문에서 여러 사람의 걸음 소리가 나더니 마황이 나타났다. 그런데 법의가 그 조수 마법사들이 입는 것과 똑같다. 황제도 꼼짝 못 한다는 권력을 쥔 자치고는 아주 소담한 복장이다. 그야 그는 보이지 않는 마력 하나로 모두를 제압하는 이기에 의복이나 장신구로 과시할 필요가 없는지도. 그런데 후슈킨은 매일 보는 얼굴이라 잘 느끼지 못하지만, 마황을 많이 봐야 일 년에 두세 번만 보는 검황으로서는 마황의 표정이 자신의 표정보다 더 무기력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마황이 마나의 인을 자유롭게 조종한 지 어느덧 백 년, 권력의 정점에도 올라봤고 제국을 좌지우지해봤지만, 더 높은 차원의 마력을 움직이는 것보다 더 큰 희열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마황은 정신이 몹시 건조하고 무기력해진 상태다. 헤세는 마황의 표정을 보며 한 가지 간파했다. ‘당장 죽여도 아쉬울 게 없을 얼굴이군.’ 생각 그대로, 마황은 당장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해도 별로 분노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 정도로 기운이 없는 표정이다. 어차피 죽어도 영혼이 환생하면 그만 아닌가. 어쩌면 이 늙은이는 지고의 마력에 오른 육신을 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원할지도 모른다. 마황의 등장에 시중을 드는 이들을 포함, 후슈킨, 헤세 모두가 예를 표시했다. 그러자 마황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했다. 곧 형식적인 인사가 오갈 테고, 식사가 시작될 테고, 식사 후에는 진짜 일이 시작되겠지……. 후슈킨이 거기까지 생각하는 그때, 갑자기 헤세가 마황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잔 의미였다. 실로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다니. 마황이 마나의 인을 조절하는 게 가능해진 시점부터 그의 권력은 황제도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높아졌고, 그 때문에 원래는 동등했던 검황과 마황의 관계도 검황이 마황보다 아래라고 재정의 되었다. 지금 헤세의 행동은 제국 정서에 맞지 않는 행동. 그래서인지 마황은 제게 악수를 청해오는 새로운 검황에게 의아한 시선을 건넸다. 하지만 그의 손을 외면하진 않았다. 검황은 헤세의 손을 맞잡아주며 인사를 건넸다. “내 몸이 좋지 않아 당신의 등극제엔 참가하지 못했소만, 앞으로 나의 오른팔로 제국을 부탁하오.” 헤세는 검황의 손을 놓아주지 않으며 특유의 무기력한 얼굴로 대답했다. “몸이 좋지 않다니, 이것 참 유감이군요.” “음…… 이제 그만 손을 놓는 게.” 마황의 입에서 손을 놓는 게 좋겠다는 말이 나온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상황이다. 아니, 차라리 돌발 상황이나 다름없다. 후슈킨은 계획에 없던 일이 벌어지자 불안한 눈으로 헤세를 보았고 그 순간, 헤세는 투명 결박을 풀었다. 그러자 그의 손아귀에 잠들어있던 마검이 원래의 기다란 모습을 드러내며 마황의 손바닥을 지나쳐 그의 다리를 깊게 찔렀다. 뼈에 닿는 날카로운 고통이 실로 수십 년 만에 처음 느끼는 고통인지라 마황의 시체 같은 표정에 확연한 변화가 생겼다. “으……!” 후슈킨은 놀랄 틈도 없었다. 후슈킨은 그저 재빨리 마황에게 마력 결박을 거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황의 호위들이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에 대비하여 방어막을 펼쳤다. 그 후엔 헤세를 노려보았다. 후슈킨은 헤세의 섣부른 시작이 몹시 당황스러웠다. ‘검황 이 녀석! 왜 이리 제멋대로 움직이는 거냐! 이래서 새파란 녀석들은 안 된다니까!’ 헤세 아니, 헤그는 무덤덤하게 계획을 펼쳐나갈 뿐이다. 마치 할데바인을 돌발적으로 죽이던 그때처럼. ============================ 작품 후기 ============================ 감기에 걸려서 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00098 7. 악의 발화 =========================================================================                            마황의 다리를 박은 검은 수직으로 올라갔다. 늙은 근육은 고깃덩이처럼 썰리고 힘줄은 가느다란 식물 줄기처럼 잘렸다. 그 속절없는 덩어리 속에 둘러싸였던 뼈도 기괴한 소리를 내며 중단이 되려는 찰나. “허윽!” 당하고만 있을 마황이 아니다. ‘배신인가?’ 그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급격히 회복 마법을 쓰고 헤세에게 공격을 시도했다. 파아아아앗! 평범한 마법사도 아니고 마황이므로 그의 공격은 엄청나다. 전격 마법 전문인 그는 일절 스크롤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강한 전류를 일으켜 공격할 줄 안다. 하여, 그 공격을 받은 헤세의 몸은 마땅히 잿개비가 되어야 했다. “뭐…?” 하지만 곳곳에 걸린 후슈킨의 주술과 마법사들의 재빠른 보호 덕분에 헤그의 몸은 상하지 않는다. 물론, 이 안전함도 공격받는 헤그의 마법 방어력이 제국 최고의 수준이니 가능한 것이다. 그가 황태자에게 받은 마검이 마나의 인에서 자유롭고, 그 덕분에 헤그의 강한 검기도 유지되어 헤그의 몸을 다중으로 보호하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공격이 먹히지 않자 마황은 얼굴로 욕지기를 표현했다. 그 사이 공격해야 할 대상을 잃은 전류는 검을 타고 마황에게 되돌아갔고, 그 힘은 마황이 언제나 자기의 몸을 보호하려고 두르던 마력 보호막마저 파괴했다. 보호막이 파괴되고 마황의 몸에 전류가 흐르는 소리가 났다. 푸쉬이이이! 헤세의 공격은 그런 마력 보호막에는 구애되지 않는다. 헤세의 검은 곧바로 마황의 심장을 노렸고, 악에 받친 마황이 급한 대로 즉흥 방어막을 두르며 외쳤다. “감히 내게……!” 이번 계기로 마황은 새로운 검황 헤세 레 지괴르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존재감이 크지 않아 새 검황이 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지금 하는 행동과 방어력을 보니 아무래도 재야에 묻혀 살던 인물이 아닌 듯하다. ‘헤그인가? 그럴지도!’ 마황은 몸에 착용한 대용 스크롤의 힘을 빌려 공격을 시도했다. 평소에는 거추장스러운 장신구 취급을 하던 대용 스크롤의 힘을 자급히 불러야 할 정도로 그의 사정은 아슬아슬하다. 물론 마황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마력 완전체, 즉 자신의 드래곤화를 통해 헤세를 공격할 수 있을 것이나,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파아아아앗! “윽!” 마황의 스크롤 공격은 먹혔고, 헤세의 몸은 멀리 튕겼다. 단, 마황의 몸을 노리던 마검은 여전히 스크롤 공격에 휘둘리지 않고 공격을 계속 이어갔다. 챙! 채애애앵! 챙! 마황이 그 검을 열심히 피하는 사이, 후슈킨은 헤세를 보호하려고 장신구 스크롤을 이용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넓은 창문이 가루가 되듯 부서졌다. 파앗! 파괴 소리와 함께 대포알처럼 한 사람이 튕겨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 난입자에게로 향했다. 마황과 다투던 헤세 역시 이 갑작스럽고도 과격한 방문자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창문을 망가뜨리고 등장한 그는 언뜻 보기엔 건장한 체격의 평범한 인간이다.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인데 어쩐지 표정이 심상치 않다. 눈동자가 새하얀 게 마치 사악한 마기에 물든 것처럼 보인다. 그 눈동자가 너무 이질적이라 헤세는 그를 알아보지 못 할 뻔했다. ‘낯이 익군. 그래. 그 미치광이 여자의 기사라던……?’ 헤세는 불현듯 기억이 났다. 저 남자는 마리니시네를 호위하던 기사다. 그 기사가 어째서 지금 이 장소에 온 것인지? 물론 그 미치광이 여자가 마황을 제거하고자 야심을 품은 적은 있다. 그 여자가 당시 힘을 합치면 어떻겠냐고 물었을 때 자신은 거절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은 그 여자의 편이 아닌 황태자의 편에서 마황을 제거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여자는 그 여자 나름대로 호위기사를 보내 마황 제거 작업을 수행 중인가 보다. ‘무모하군. 단신으로 마황에 맞서 싸울 생각이었나?’ 헤세가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휘두를 때, 후슈킨이 외쳤다. “저 자는 강력한 마기를 지녔다!” 그 사이 마황은 하이너에게 눈을 떼지 않으며 서서히 변신을 시도했다. 마황의 몸은 점차 금빛으로 변해가고 사지도 파충류처럼 변이되었으며 크기도 커졌다. 그는 하이너에게서 느껴지는 강력한 기운에 이미 이 암살 시도가 평범한 건 아니라고 눈치챘다. 헤세와 마탑의 이인자가 함께 시도하는 암살보다 이 검은 머리 불청객이 뿜어내는 마력이 앞으로 더 무서운 암살 시도가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 중이다. ‘당황스럽군!’ 마황은 엄청난 고통을 인내하여 순식간에 전류가 흐르는 금색 드래곤으로 변하여 건물 밖으로 달아났다. 그 탓에 헤세의 마검은 공격 대상을 잃게 되었으며, 후슈킨의 지원 마법도 중단되었다. 후슈킨은 하늘로 날아가는 마황을 보며 사태를 살폈다. ‘뭐지? 마황보다 더 큰 마력이라니?’ 마력의 일인자라 불리던 그가 바로 젊은이와 헤세를 죽이지 않고 달아났다는 것은 무얼 뜻하는가. 그것은 갑자기 난입한 젊은이의 마력이 마황을 두려워 도망치게 할 정도로 강하단 의미다. 이미 마법사 후슈킨을 포함한 마탑의 마법사은 온몸으로, 아니, 모든 곳에 흐르는 공기로 그걸 느끼고 있다. 하이너는 금색 드래곤의 모습을 보더니 재빨리 드래곤화를 시도했다. 검은 드래곤이 야수처럼 하늘을 향해 뻗어 날았다. 금색 드래곤은 검은 드래곤에게 금세 따라잡혔고, 하늘에선 최강 마력생물 간의 싸움이라는 대 장관이 펼쳐졌다. 파아아아앗! 펑! 퍼퍼퍼퍼펑! 강한 전류의 빛줄기가 새파란 하늘에 뿌리를 치올리듯 퍼지고, 폭죽처럼 연기가 터져 그 전류의 불빛을 감싸는 듯하다. 금색 드래곤이 전격 위주로 공격을 펼치며 이따금 검은 드래곤의 시야를 가리는 반면, 검은 드래곤은 금색 드래곤을 어딘가로 몰며 단지 방어만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런데도 금색 드래곤의 몸 여기저기는 거대한 삼지창이 갈긴 듯 혈흔이 생겨났다. 검은 드래곤의 의지가 금색 드래곤의 몸에 해를 가하는 증거! 피 튀기는 공중전 도중, 마황이 먼저 물었다. 「웬 놈이냐!」 그러자 마황을 당황케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를린의 평범한 청년이라고만 해두죠.」 마황보다 강력한 마력을 가진 자, 오만하게 공격을 시도하는 자치고는 지나치게 정중한 대답이다. 마황은 기가 차서 물었다. 「무슨 이유로 내게 공격을 하는 거지?」 아니, 그 전에 어째서 이런 괴마력을 지니고서도 여태 대륙에서 조용히 살아왔는지, 마황은 그거부터 궁금했다. 하지만 부정적인 대답만 돌아올 뿐. 「사연이 복잡합니다. 죄송하지만, 설명은 드릴 수 없군요. 그럼.」 줄곧 방어만 펼치고 의지의 힘으로 간접 공격만 하던 검은 드래곤이 갑자기 태세를 달리하여 무시무시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전류를 막아낼 암석 공격부터 시작하여 전류를 흡수하는 암흑 공격까지, 검은 드래곤의 공격은 검은 드래곤 자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하고 뛰어났다. 그러자 저 먼 마탑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후슈킨이 한결 시름을 놓은 얼굴을 했다. “저 검은 드래곤… 일부러 호수 쪽으로 가서 공격하는군.” 이른바 사람들에게 피해를 덜 끼치는 곳에서 전투를 펼치는 전략이리라. 후슈킨으로서는 헤세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터였고 헤세와 마황의 대결에서 헤세의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지경이었는데, 갑자기 와 준 젊은이 아니, 검은 드래곤의 도움이 반갑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그 검은 드래곤이 험악하게 생긴 모습과 달리 황도 사람들에게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게 호수에서 전투하려 하니 황도에 사는 한 사람으로선 그저 감사할 뿐이다. 하이너 역시 후슈킨이 예측하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금색 드래곤을 호수로 유인해 싸우고자 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전격 마법은 물 주변에서 더욱 강해진다. 금색 드래곤도 그걸 계산하고 순순히 검은 드래곤이 모는 대로 호수로 간 것이다. 한순간 호수의 물이 하늘에 치솟아 올라 두 드래곤을 가리는 거대한 전류의 장막이 되었다. 전류의 장막은 무형의 흉기가 되어 하이너를 공격했다. ‘이런!’ 장막 안에서 하이너는 당황했다. 마력으로는 마황을 압도하고 있지만, 사방에서 전격공격이 들어올 것 같은 눈치에 고도를 더욱 상향하며 달아났다. 그 사이 마황은 하이너에게 공격을 퍼부으며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욕지기를 퍼부었다. 한 집단의 수장이 의문의 드래곤에게 노려지고 다투는 상황인데도 그 부하란 것들은 한참 전부터 도우러 오지 않는다. 헤세와 싸울 때부터 느꼈지만, 이건 명백한 배신이고 그는 이 배신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아무래도 황제 혹은 황태자에 의해 주도된 암살 계획이다. 집단적으로 마황을 호위하지 않는 것이 그 증거다. 파아아아아앗! 전류는 방향성을 띠고 검은 드래곤의 꼬리를 잡았다. 그러나 검은 드래곤은 공격을 받는 즉시 회복을 해내는, 그야말로 역사적으로 누구도 할 수 없는 마법을 쓰고 있다. 그 뛰어난 마력은 검은 드래곤의 내부에서 하이너가 아닌 다른 자아가 휘두르는 힘이다. 하이너는 마황에게 암석의 공격을 퍼부으며 내부의 인격에게 물었다. ‘어째서 날 돕지?’ 실상 이건 우문이라 할 수 있다. 슈테반의 의식이 온몸에 흘러들어와 슈테반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에게 이런 질문은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친절한 슈테반은 다시 한 번 알려주듯 대답을 내놓았다. ‘흐…… 마탑의 인간들은 재수 없으니까.’ ‘아, 넌 그랬지.’ 하이너는 슈테반이 후슈킨 가문에서 버려진 아이였다는 걸 뒤늦게 되새겼다. 슈테반이 의식은 하이너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흐흐…… 이봐, 마황를 죽인 후에 후슈킨도 죽여줬으면 좋겠군. 하이너에게서 암석 공격을 받은 마황의 공격은 한층 약해졌다. 그 사이 하이너는 한결 편하게 움직이며 슈테반의 자아에 물었다. ‘죽여줬으면 좋겠다니. 지금처럼 스스로 내 몸을 움직여 그를 죽이면 되지 않나?’ 그러자 슈테반이 가당찮다는 듯 대꾸했다. ‘지금처럼 네 몸을 내가 움직인다고? 흐흐흐……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그래. 너는 마황을 흡수하고 나면 그의 힘과 이성적 절제력을 통해 내 저주를 붕괴시키고 나 역시 없앨 심산 아니던가?’ 하이너는 픽 비웃었다.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지. 실패하면 나는…….’ 마황의 의식으로 슈테반의 의식과 저주를 파멸하려고 지금 이렇게 고군분투하지만, 승리 후엔 장담할 수 없다. 슈테반의 저주를 없애지 못하면 자신은 마력의 피에 굶주린 역대 최악의 흡마귀가 될 것이고, 온 황도 마법사들의 마력을 흡수하려 들 것이다. 그것은 곧 폭주. 하이너는 폭주하게 된 후의 일을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아가씨를 만나지 못하고 괴물로 전락하는 현실을 맞고 싶지 않다. 그런데 슈테반은 하이너의 그런 마음을 훤히 꿰뚫었다. ‘흐흐…… 이봐, 실패할 생각일랑 말라고. 그렇게 되면 날 먹은 의미가 없지 않나?’ 슈테반은 하이너를 응원했다. 하이너는 잠깐이지만 슈테반이 마치 자신의 편이 된 듯한 착각 했다. 그래. 천공의 구름을 휘저으며 격렬히 싸우는 이때, 상념에 젖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이너는 전격 공격을 거의 하지 못하는 마황에게 날릴 최후의 일격을 생각해냈다. 그런데 생각과 동시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검은 드래곤의 온몸에서 하얀 촉수가 뻗어 나오더니 금색 드래곤의 약해진 전류를 대뜸 삼켜버리는 게 아닌가. 그것도 모자라 하얀 촉수는 금색 드래곤의 온몸에 붙어 그의 모든 힘, 마기, 의식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 현상은 곧 하이너의 승리를 의미하리라 슈테반이 경이에 차서 감탄했다. ‘제국 최초 아니, 대륙 최초로 마황을 이긴 자의 출현이군.’ 그것은 곧 마탑의 사람들이라면 무조건 경멸하고 증오하던 슈테반의 오랜 염원이기도 했다. 슈테반은 하이너의 힘이 더욱 강해지도록 도왔고, 그 결과 하늘을 휘젓던 두 드래곤은 호수 깊숙이 잠겼다. 그들이 물에 잠기기 전에 하늘에선 금색 드래곤의 괴로운 울부짖음이 들렸다.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든 후슈킨이 중얼거렸다. “검은 드래곤의…… 승리겠지요?” 헤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부하에게 고갯짓했다. 그러자 마황 암살 작업에 동원했던 이들은 철수했고, 오늘 두 드래곤의 싸움은 곧바로 황태자에게 알려졌다. *** 호수 속은 바다처럼 검푸르다. 검은 드래곤은 금색 드래곤의 마기를 흡수하면서 그를 종잇조각처럼 만들어버렸다. 마황의 모든 힘을 앗아버리겠다고 결심하니, 그 결심만큼이나 모든 일이 이뤄졌다. 승리의 순간이겠지. 하지만 승리할수록 초조해져만 간다. 흥분의 극에 다다른 하이너는 어딘가에 있을 아가씨께 들으란 듯 중얼거렸다. 「의지의 힘은…… 있군요.」 그러나 의지의 힘이 진짜 있다는 건 이제부터 증명해야 할 일이다. 하이너의 온몸에 마황의 의식이 스미기 시작했고, 하이너는 그 의식과 싸워 반드시 이겨만 한다. 꼭 이겨야만, 아가씨를 만날 때 편히 웃을 수 있으리라.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감사합니다! 00099 7. 악의 발화 =========================================================================                            로귀하르트. 야울 궁. 새파란 나무를 스치는 바람이 지하 세계를 어루만지는 죽음의 손길처럼 서늘하다. 어쩌면 황도 로귀하르트에서 일어난 두 강력한 마력생물, 즉 마황과 하이너의 싸움에 대지가 바짝 긴장하여 얼어붙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호수 속으로 들어간 검은 드래곤은 승리한 것처럼 보였어도 지금은 워낙 잠잠하다. 그래서 마탑에 남은 마법사들의 궁금증을 일으켰다. 그렇다고 그들이 호수에 가서 검은 드래곤의 생사를 확인해 보지는 않는다. 검은 드래곤이 어찌 나올지 예상하지 못하기에 섣불리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호수에 가지 않으려는 건 마법사들뿐만이 아니다. 다른 이들도 호수 근처에 가려 하지 않는다. 호수 주변의 사람들도 제각각 피신한 상태다. 그 사이 검황 헤세 레 지괴르는 이번 사건을 실질적 주군-황태자-에게 보고하려고 황태자가 이용하는 비밀의 방에 들렀다. 비밀의 방 앞에서는 황가 직속의 마법사 세 명이 지키고 있다. 헤세는 평범한 병사가 아닌 마법사들이 이 방을 지키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지만, 딱히 그 점에 관해선 질문하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마법사들이 대답했다.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헤세는 먼저 들어가 황태자를 기다리기로 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낯익은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달콤하고도 상큼한 향기. 향기를 표정으로 비유하자면, 지금 이 향기는 다정하고도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짓는 어여쁜 아가씨의 표정이리라.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이들이 방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바로 미치광이 아가씨 마리니시네와 그녀보다 조금 작은 소녀 마리아다. 그렇다. 향기는 마리에게서 나오고 있다. 마리가 헤세를 보자마자 용케 그를 알아보고 외쳤다. “어맛! 이게 누구야! 헤그 아니야? 고집불통 우울증 환자님을 여기서 뵙네요!” 헤세는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마리를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헤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이들은 헤세 레 지괴르라는 새로운 인물을 보면 하나같이 ‘헤그, 헤세 쌍둥이 형제가 닮긴 닮았다!’고 표현하지, 저 미치광이 아가씨처럼 제대로 알아보진 못한다. 그도 그럴 게 헤세의 외모에 눈에 띄는 변화가 생기지 않았던가. 비록 머리카락 색깔과 눈동자 색깔의 변화뿐이지만, 그래도 변화는 변화.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새 검황은 헤그가 아니라 헤그의 쌍둥이 형이라고 알려졌는데, 어째서 저 아가씨는 검황 제복을 입은 자보고 대뜸 헤그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굴까? 헤세가 입이 무겁지 않은 남자라면 아마도 적당히 연기하며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마리는 한쪽 구석에서 시체처럼 축 늘어져 앉아있는 마리아를 붙들고 구시렁댔다. “이봐, 마리아! 저 우울증 환자님, 정말이지 너무하지 않니?” 마리아가 눈을 끔뻑이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듯 마리를 보았다. 마리가 수다를 떨어댔다. “아니, 마황 제거 작업 말이지! 글쎄 내가 부탁할 땐 귓등으로도 듣지 않더니, 황궁의 고귀하신 분(황태자)께서 부탁하니 또 그건 들어주더란 말이야. 그 일은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었어. 내 미모가 통하지 않아 충격이었다고! 세상에 그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니! 헤그 저 남자는 남자도 아니라니까!” 마리는 마리아에게 구시렁대는 듯했으나, 실상 헤세에게 하는 원망이나 다름없었다. 그러자 헤세는 멋쩍은지 괜스레 창밖 먼 곳을 보는 척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무기력한 표정은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처럼 우중충하다. 이제 와 생각건대, 저 아가씨와 드래콘 소녀의 복장, 초췌한 몰골을 보니 저들이 호의적인 방식으로 이 궁에 온 것 같진 않다. 무엇보다 이 비밀의 방은 황태자가 지시해야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던가. 황태자가 저들에게 납치라는 과격한 방식을 택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방 밖의 마법사들 의미를 알 것 같다. 아마도 드래콘 소녀의 마법을 막기 위한 장치일지도. ‘알 수 없군.’ 헤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마리는 줄곧 대답이 없는 마리아의 귓가에 대고 헤그를 욕해댔다. “마침 기분도 좋지 않은데 저 우울한 남자를 보니 더 우울해지지 뭐니. 그나저나 플라미네(미의 여신)도 불공평하시지. 저렇게 배신자에다 무기력한 표정을 하고 있을 거라면 굳이 저 잘생긴 얼굴을 주실 필요는 없잖아? 뭐, 이렇게 잡혀 온 처지고 심심한 우리 여자들에게 그럭저럭 눈요기는 된다만.” 헤세 아니, 헤그는 코웃음을 칠 뻔했다. 배신자 취급하는 것은 둘째 치고, 사람을 동물원 수인족 혹은 박물관 물건처럼 훑어보는 마리의 태도에는 잔망한 구석이 있다. 헤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네가 시킨 짓인가?” 마리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헤그는 이어지는 잔망스러움에 점점 미워할 수 없는 미묘한 매력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 곱게 온 것 같진 않은데 걱정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고, 사람이 무슨 질문을 하는지 빤히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모른 척하는 게 은근히 유쾌해 보여서…… 자신 또한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헤그는 생각을 지워버리고 질문을 이어갔다. “검은 드래곤 말이야. 그 드래곤이 마황을 노렸지. 정확히 말해서는 마황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 것이지만. 아무튼, 그 일이 네가 네 기사에게 시킨 짓이냐고 물었다.” “아하. 나의 기사.” “그래. 너의 기사. 너의 드래곤 기사 말이지.” 마리는 마리아에게 무릎 담요를 덮어주고 헤그의 앞에 마주 앉아서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뭘 시켰는지 모르겠네. 우리 기사는 가출한 게 아닐까 싶은데 잘 모르겠어. 그가 가출한 건지 그게 아닌지 확인하기도 전에 그만…… 내가 이렇게 못된 태자 전하에게 잡히고 말았거든.” “그렇군.” 마리는 테이블 위의 식어버린 물을 잔에 따라 헤그에게 내밀었다. 마치 아주 예전부터 이 비밀의 방 주인인 양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헤그는 그녀에게서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자연스러운 행동에 동화되어 자기도 이 방의 오랫동안 머무른 사람처럼 굴게 된다. 마리는 흥미로운 듯 헤그를 찬찬히 살폈다. 전보다 한층 어두워진 머리카락이 그를 더 우울하게 보이긴 하나, 밝은 청색의 군복이 우울감을 조금 덮어 주어서 마음에 든다. 그녀는 점수를 매기듯 중얼거렸다. “검황 군복이 더 어울리네. 왠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각이 꽉 잡힌 군복을 입는 편이 더 야한 것 같아. 갈색 머리카락도 제법 잘 어울리고 말이야.” 칭찬을 들었지만, 헤그는 딴청을 부렸다. “이제 더는 내게 격식을 차리지 않는군.” 마리는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가 싶었다. “내가 당신에게 격식을 차리길 바라? 말도 안 돼. 내 부탁도 들어주지 않는 사람에게 내가 격식 따위 차려 봐야 뭐하겠어? 검황이 됐다고 재는 거야, 뭐야?” 마리는 헤그가 자기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 황태자 편에 선 것에 여전히 꿍해 있다. 헤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고, 그때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황태자 비오르틴과 그의 시종관이다. “제국의 황태자이시자 야울의 수호자이신 비오르틴 뤼크 피나센토 로귀하르트 전하 납십니다.” 검황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황태자에게 예를 표했다. 그러나 마리는 헤세와는 달랐다. 그녀는 ‘어째서 예를 갖춰 황태자를 맞이하지 않느냐!’고 꾸짖는 듯한 시종관의 싸늘한 눈초리를 무시하고 황태자의 앞에 거만한 자세로 섰다. 그리고 대뜸 황태자의 뺨을 쳤다. “이 비겁한 자식!” 순간, 공기는 얼어붙었다. 헤세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렇게 표독스럽게 들릴 때도 있단 걸 처음 느꼈다. 시종관은 태어나서 황족들이 이런 모욕을 당한 것을 처음 보고 심장이 철렁 내려 앉는 듯했으며,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것 같았다. 헤세는 그녀의 독한 목소리에 놀라긴 했지만, 역시 미치광이 아가씨다운 행동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던 마리아는 마리의 행동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황태자, 비오르틴은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스스로 만지면서 시종관에게 잠시 나가 있으라고 전했다. 낮고 엄중하게 지시하는 그의 목소리와 달리 그의 표정은 미묘하다. 그의 뺨이 맞은 것이 아닌 다른 이유로 붉어져 있다는 걸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종관이 눈치를 살피며 자리에서 나갔고, 황태자는 소파에 자리하며 모두에게 명령했다. “앉지.” 그러자 헤세가 자리에 앉았고, 마리는 여전히 씩씩거리며 두 손을 허리에 갖다 댔다. 그리고 황태자를 비난하는 말을 던졌다. “이제 와 날 궁에 데려온다고 해서 너와 결혼하는 일은 없을 거야! 게다가 넌 내 동생과 결혼한 몸이면서 어찌 이런 행동을 하는 거지? 처와 자식이 생겼으면 좀 어른답게 굴어!” 순간, 헤세는 ‘결혼’이라는 말의 사연을 몰라 황태자를 보았다. 마리아 역시 마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 황태자 아니, 비오르틴은 마리의 말을 예상하지도 못했기에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마리가 씩씩거리며 따졌다. “웃어?” “그럼 울까?” “뭐가 웃기지?” “결혼이라니. 우습잖아. 너는 날 여전히 예전 그 꼬마로 생각하는 것 같군.” 그러자 마리는 황태자의 맞은편에 앉으며 거침없이 말했다. “오! 당연하지! 대체 그럼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해야 하지? 내가 알기로 잘 자란 비오르틴은 적어도 이렇게 숙녀와 소녀를 멋대로 납치하지 않을 거야! 이런 비겁한 방식을 쓰는 넌 여전히 어린애에 불과할 뿐이지! 날 여기로 데려온 건 아마도 애정결핍에다 충동제어장애에 걸린 환자의 실수라고 보는데, 아닌가?” 비오르틴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헤세에게 사건의 보고를 부탁했다. “드래곤들 간의 싸움을 알고 싶은데.” 황태자의 말에 마리의 귓가도 솔깃해졌다. 드래곤들 간의 싸움. 무려 하이너가 엮인 소식이라 듣지 않을 수 없다. 헤세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고 했다. 마황 제거 작업을 시작하는 도중에 한 청년이 마탑에 난입한 이야기, 그 청년이 검은 드래곤으로 변하여 마황의 마력 변신체와 대적한 이야기. 그리고 승리는 검은 드래곤 쪽이 차지한 것으로 추측된다는 이야기. 이야기를 모두 들은 마리는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하이너야! 뭐, 여관에 돌아오지 않고 바로 황도에 간 건 괘씸하지만…… 참 잘했어. 내 호위기사답다니까.” 그 말에, 황태자의 웃는 얼굴에 자그마한 균열이 생겼다. “호위기사?” “그럼. 그는 내 호위기사야.” “알지.” “알아?” “뭐, 대충 알고 있었어. 그가 잠시 보이지 않길래 널 여기로 데려온 거고.” 말인즉슨 마리가 드래곤의 보호에서 벗어난 틈을 타 납치했단 이야기. 마리는 다시 한 번 신랄하게 황태자를 욕했다. “역시나 비겁한 자식이군.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야.” 황태자는 황태자비와 똑같이 생긴 여자의 곁에 항상 체격이 건장한 미청년이 함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개인적인 이유로 그들의 뒤를 캐던 그때부터 줄곧 보고받아왔기에 하이너의 존재를 알긴 했으나, 그 명칭이 호위기사인 것은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황태자와 마리 사이의 시선이 심상치 않자 헤세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따로 보고할 게 있으면 검황성을 통해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그가 떠나고, 마리는 본격적으로 비오르틴에게 물었다. “대체 날 이런 짜증 나는 방식으로 납치한 이유가 뭐야? 어릴 적 소꿉놀이라도 기억나셨나? 아, 물론 우리는 소꿉놀이 따윈 한 적이 없지만.” “그래. 소꿉놀이 따윈 한 적이 없지. 단지…….” 비오르틴은 옛일을 떠올렸다. 둘 사이는 가까이 사는 친구들처럼 소꿉놀이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그녀는 산과 들판을 뛰어다니며 놀았고, 자신은 그녀와 함께하며 마음에 돌덩이처럼 안고 있던 두려움을 아주 잠시나마 떨쳐내는 색다른 경험을 했을 뿐이다. “단지 뭐?”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어째서 날 납치한 거지, 비올?” 비오르틴은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내 도구가 되어줘야겠어.” 그는 알고 있다. 마리를 언제나 곁에서 지키는 남자의 정체가 드래곤이란 것을. 그 드래곤이 어떤 힘을 가지든 간에 같은 편에 두는 게 좋다. 드래곤은 그런 생물, 아니, 그런 병기다. 그것을 알고 언젠가는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마리니시네라는 인질을 데려온 것인데, 조금 전에 검황에게서 보고를 받고 보니 아주 잘한 일인 듯하다. 마황과 싸워 이긴 드래곤이라니. 그리고 그런 최강의 드래곤을 꼼짝 못 하게 하는 존재, 마리니시네를 인질로 삼다니. 비오르틴은 자신이 뱉은 말을 강조하듯 다시 한 번 읊조렸다. “마리니시네 네가…… 날 위해 인질이 되어줬으면 해.” 부탁조의 말이지만, 납치 감금이 지속되는 이상 그것은 강요나 다름없다. 아니, 권력에 의한 강제나 마찬가지. 마리는 온몸이 사슬로 죄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길길이 날뛰며 외쳤다. “맙소사! 아주 오랜만에 만나서는 하는 말이라곤! 비올! 넌 내가 제일 듣기 싫은 말을 했어! 난 평생 누군가의 도구가 될 생각도 해본 적 없을뿐더러 그러고 싶지도 않은걸! 이런 방식은 너 스스로 불명예를 짊어지는 일이고 너에게 후환을 안길 거야! 그리고 나에게도, 내 피부에도, 내 미모에도, 그다지 좋지 않은 경험이 될 테지! 얼른 그만두는 게 좋다고! 으휴! 불쌍한 내 동생! 가여운 로테! 고작 이런 엉망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니!” 아내의 이름이 나오자 비오르틴의 미간이 심하게 구겨졌다. 눈빛으로 그 어떤 단단한 암석도 부수어버릴 듯한 그런 살기가 뿜어졌다. 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리가 뭐라고 하든 말든 밖으로 나가면서 문을 쾅! 닫았다. 마리는 문을 바라보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봤지, 마리아? 황족이란 족속들은 저렇게 지독히도 유치하고 이기적이란다. 그 누구와 깊은 관계를 맺는다 해도 결국에는 도구로 계산하고 멋대로 다룰 뿐이지. 정말이지 아무리 (추억에)정을 붙이려 해도…….” 마리아가 무거운 입을 아주 오랜만에 열었다. “태생이… 태생이 그런 걸까요.” 마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래 그런 아이는 아니었어. 저 빌어먹을 황위가 저 애를 저렇게 만든 거겠지.” 마리는 모르고 있었다. 비밀의 방 밖으로 나간 황태자가 한참 동안 자신의 뛰는 가슴을 붙들고 숨을 골라야 했다는 것을. ‘도구야, 도구일 뿐이라고.’ 그는 그리운 추억의 상대를 다 커서야 만난 황홀감, 그리고 이 상황이 자아낸 격한 급류에 휘말려 그만 이성을 잃을 뻔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00100 7. 악의 발화 =========================================================================                            황태자비의 별장 트리아노네. 자살 시도 사건 후 로테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 어쩌면 비오르틴이 로테의 뺨을 친 그 순간부터,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도 모른다. 새 삶이 필요할 때다. 나약한 마음은 접어두고 또 다시 일어나야 할 때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한 게 벌써 몇 번째일까? 어릴 적엔 ‘다시 일어난다.’는 말을 관념적으로만 해석할 뿐 실제로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했다. 황궁에 들어오면서 그 느낌을 뼈저리게 체득하게 되었다. 다시 일어난다는 것. 그것은 희망을 가리키고 마냥 기쁘기만 한 일이 아니다. 앞으로 또 넘어져야 할 일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일일 뿐이다. 황태자비 간택전에서 촌뜨기로 불리고 황도의 귀족 아가씨들에게서 따돌림을 받을 때는 ‘궁 생활이 이렇게 험난하게 시작되는구나!’ 했다. 그러다 자신이 정말 황태자비로 간택되었을 땐 그 험난한 기억들이 모조리 지워질 정도로 기쁘고 새 삶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할데바인이 재판으로 공격했을 때도 마찬가지. 황태자비 후보에 들었던 이들이 다 같이 자신을 공격했고, 그땐 그렇게 치욕적인 누명을 쓴 채 속절없이 궁에서 퇴장당해야 하나 했다. 유일하게 의지하던 남편도 도와주지 않고 방관만 하는 태도라서 서운함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대로 재판에서 지면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에 스스로 움직였다. 마리의 전 애인들을 불러 자신에게 덮어씌워진 악의적 오해들을 풀고 재판을 유리하게 진행하여 결국엔 승리로 이끌었다. 이렇게 또다시 일어나 꿋꿋하게 사는가 싶었다. 하지만 또다시 닥친 시련이라니. 저주의 눈을 가지고 태어난 가여운 딸 아이.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제위에 오르기도 전에 마탑 출신 능력자 후궁을 들인다는 소식이나 흘린다. 제대로 된 황손을 낳지도 못하고 남편의 마음도 꽉 붙잡지 못한 자신이 과연 궁에서 사는 의미가 있을까? 이번 시련만큼은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아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했으나…… 우습게도 그걸 막은 사람은 남편이다. 남편은 딸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면서 사는 의미를 떠안겼다. 아니카. 굴레, 감옥, 벌을 뜻하는 단어. 「네 딸의 이름이다. 네 딸을 봐라. 네 딸이 널 찾는 걸 보란 말이다. 이게, 이게 네 역할이다. 지금은 이게 네 역할이란 말이다!」 그리고 시작된 감금의 시간. 로테는 할 수만 있다면 남편에게 묻고 싶었다. 아이를 잘 키우기만 하면 되느냐고, 궁에서 보모와 유모의 역할만 하면 황태자비로서 온전히 있을 수 있느냐고, 역대 그런 황태자비는 없지 않았느냐고, 그리고 그 역할 끝에는 대체 자신에게 남는 것은…… 무엇이냐고. 하지만 무의미한 질문이다. 어차피 황족이란 족속들은 타인의 인생에 관심이 없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그들을 존재하고 권력을 유지하게 해줄 온갖 정치적인 도구들일 뿐. 로테는 자신을 질타했다. ‘아직도 모르겠니? 그는 널 위해 자살을 막은 게 아니야. 언젠가는 어떤 도구로 쓰려고 널 살린 것뿐이라고. 기대하지 마. 아무것도 기대하려 들지 마. 그는 네게 마음이 없다고. 어차피 처음부터 너도 그의 마음을 얻으려고 궁에 온 건 아니잖아? 단지 궁이 좋았기 때문이잖아?’ 로테는 유모, 보모를 모두 물리고 마치 사가의 부인들처럼 아이를 돌보았다. 아이를 돌보면서 오를린에 부지런히 편지를 썼고, 믿을 만한 궁정인들을 시켜 편지를 보냈다. 하루 세 끼를 먹되 몸에 좋은 것 위주로 소식을 하고 시녀들을 통해 궁이 돌아가는 사정을 전해 들었다. 특히나 황태자와의 불화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던 포르투바의 뒤를 캐는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것에 집중했다. 로테는 트리아노네에 갇혀 있지만, 궁 밖의 사람처럼 활발하고 부지런한 일상을 보냈다. 그러자 황태자에게서 시녀들의 감시가 느슨해졌다. 시녀들은 로테의 상태가 점점 정상이 되어간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자 로테는 시녀들에게 뭔가를 알아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트리아노네를 잠시 떠났다. 원칙대로라면 그 사실이 황태자에게 보고돼야 하지만, 로테는 자신의 행적이 보고되기를 원치 않았다. 하여, 시녀들은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것을 황태자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어차피 황태자가 제위 등극 문제에 바쁘고 사루아에 미쳐 로테의 소식을 궁금해할 것 같지도 않았기에 시녀들도 보고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녀들의 잘못된 생각이었다. 황태자는 불시에 트리아노네를 방문했고, 아내를 찾았다. 황태자비가 어디에 가 있느냐는 질문에 시녀들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황태자는 우물쭈물하는 시녀들에게 격노하는 대신 전원 해고령을 내렸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불충한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전하!” “성심성의를 다 해 로테아르카 전하를 모실 테니, 부디 자비를!” 그러나 비오르틴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시녀들 네 명 모두 죽이고 싶은 지경이다. 로테아르카의 행동 하나하나를 보고하는 것은 그녀를 자살의 유혹에서 막는 의미도 되지만, 무엇보다 황태자 자신을 향한 시녀들의 충심 표시 아닌가? 그 충심이 게으르다는 것은 마땅히 지탄해야 할 일이고, 시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으로 벌한다고 해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황태자 전하, 제발……!” 말 없는 황태자를 대신해 그의 시종관이 시녀들에게 정중히 말했다. “저는 트리아노네가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당신들이 태자비 전하께서 직접 뽑은 이들이고 나름 애정이 있었으니 이런 해고에 그치는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모두 암흑 지형(죽음을 속되이 이르는 말)에 가셨겠지요.” 정중한 말투로 포장된 쫓아내기에, 시녀들은 결국 모두 물러났다. 조용해진 시간, 황태자는 자신의 딸을 찾았다. 안대에 두 눈이 둘러싸인 딸은 배가 고픈지 점점 칭얼거렸다. “흐에에엥…….” 딸의 울음에 황태자는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로테……, 이 어찌 이리 모진 어미일까. 직접 젖을 먹이라고 유모를 들이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녀가 사가의 어미들처럼 아이에게 직접 젖을 먹이는 일을 하면서라도 삶의 의지를 찾았으면 하는 게 남편인 자신이 바라는 거였다. 비록 자신은 황가를 이을 극존으로 태어나 어미의 젖이 주는 평온함이나 만족 따위는 모른다. 게다가 아이를 키우는 어미의 뿌듯함 역시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머릿속으로 그림은 그릴 수 있었다. 이 아이, 아니카. 비록 저주스러운 눈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지만, 어미의 따스한 살결과 다디단 젖을 먹으면 평범한 아이들처럼 자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미가 이 아이를 돌봄으로써 저 자신을 구원하는 일도 일어날 것이다. 그랬으면 하고, 비오르틴은 바랐다. 그 바람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그런 모녀로 남았으면 하는 단순한 마음일 뿐이다. 그런데 이 여자가 아이를 팽개치고 자리를 비우다니. 그는 시종관에게 지시했다. “유모를 데려와야겠군. 그리고 그 여자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당장 알아내서 보고해.” “예,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흐에에?” 배가 고파 칭얼거리던 아이가 제 어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아는지 잠시 ‘흐에에?’하는 소리를 냈다. 착각인지 몰라도 황태자는 그 소리를 아이가 울다가 웃는다고 여겼다. 그는 처음으로 제 딸이 낸 소리에 아무런 생각 없이 웃을 수 있었다. 얼마 후 트리아노네에 유모가 찾아왔고, 아이는 유모의 젖을 먹으며 울음을 그쳤다. 배가 부르도록 젖을 먹은 아이는 곧 까르르 웃어댔다. 황태자는 문득 느꼈다. 이 가여운 아이의 웃음을 지켜야 한다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요즘과 같은 시국이 안정돼야 한다. 마리니시네의 드래곤을 견제하는 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그가 이미 그런 생각을 한 시점에서, 그의 추억 속 첫사랑 마리는 그의 딸 아니카보다 우선순위가 아닌 셈이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을 비오르틴은 자각하지 못했다. *** 장인의 도시 바너. 수도 크래파. 륀체르 사파이어의 저택 영원의 봄. 륀체르의 비밀 정원에 한 쌍의 남녀가 들어섰다. 남자는 이곳 주인 륀체르고, 여자는 그가 밤거리에서 데려온 이름 모를 매춘부다. 한 번 즐기고 곧 잊을 여자지만, 륀체르가 고른 여자답게 가슴만은 예쁘다. 여자는 이 비밀 정원 지하에 무수한 시체가 잠들어있다는 사실을 모르면서도 직감으로 오싹함을 느꼈다. 그녀는 불안해하며 륀체르의 팔을 붙잡았다. “자기, 정말 이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야?” 밀착된 여자의 가슴은 성가시지 않지만, 여자가 하는 질문은 왜 이리도 성가실까? 그는 대충 대답하며 여자를 인조 나무쪽으로 데려갔다. “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해.” “그런데 정원사가 주인 허락도 없이 멋대로 여잘 데리고 와도 돼?” “그게 재미 아니겠어. 뒤돌아.” 여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찝찝한 표정으로 뒤돌아 치마를 올렸다. 그러자 곧바로 정원사 아니, 정원사로 자신을 속인 륀체르의 성기가 여자의 체내로 들어갔다. 륀체르는 여자의 가슴을 마치 매일 먹어야 하는 빵처럼 쭈물거리며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읏…… 아, 앙!” 여자는 헐떡이며 정원을 계속 두리번거렸다. 여자가 알기로 이곳은 한 겨울에도 싱싱하고도 화사해 보이는 인조 식물들이 봄을 훌륭히 연기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름도 영원의 봄이잖은가. 그래서인지 늦여름을 맞이한 지금도 겨울과 마찬가지로 봄꽃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 알 수 없는 오싹한 기분의 원인이 뭘까? 여자는 륀체르에 의해 흔들리는 내내 그 답을 생각했다. 그리고 뒤늦게야 그 답을 찾았다. 이곳, 식물과 꽃투성이면서 향기가 조금도 없다. 냄새라는 게 있다면 막 퍼지기 시작한 정사의 냄새뿐. 여자는 호기심에 물었다. “하아, 읏, 아! 저기, 읏! 여기, 좀 이상하지 않아?” 륀체르는 동물적인 성교에만 집중하며 대꾸했다. “후우, 뭐가?” “이상해. 향기가 없어. 풀 향기나 꽃향기, 뭐 그런 거 말이야. 앗! 응!” 륀체르는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여자의 허리를 붙잡고 더욱 강하게 움직였고, 금세 절정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는 뭔가 부족하다는 듯 다시 여자의 가슴을 건드리기 시작했고, 정사는 또 한 번 이어졌다. 얼마 후, 여자의 몸은 다 쓴 일회용 손수건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볼 일 다 끝났으니 가 봐.” 륀체르는 여자의 몸 위에 1만 자일을 던져주며 바지를 올려 입고 뒤돌아섰다. 여자가 돈이 적다고 구시렁거리긴 했으나, 구두쇠 륀체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여자도 륀체르의 어여쁜 외모가 몸을 섞기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고 생각하면서 이 찝찝한 곳을 떠나려고 했다. “쳇, 다시는 비렁뱅이 정원사와 상대하나 봐라!” 그녀가 떠나고 륀체르는 나무 의자에 길게 누워 한숨을 쉬었다. 싱그럽게 보이는 초록의 (인조)식물들을 보아도 기분이 전혀 싱그러워지지 않았다. ‘참, 나무 향 뿌릴 때가 되었지.’ 겨울에는 인조 식물들에 식물향 향수를 부지런히 뿌렸는데 요새는 그러지 못한다. 왜 그럴까. 비밀 정원 관리를 소소한 취미로 삼던 자신이 취미에 소홀하게 된 데는 아무래도 다 이유가 있다. 전제국적으로 벌였던 사업도 잘되고, 기갑체 제조 공정부지 문제도 잘 해결되고, 부패한 로젠플라드 신당을 흡수하여 사파이어 재단의 건물로 만드는 일도 잘되며, 똑똑한 소년 루돌프의 공부를 지원하는 일도 그럭저럭 보람차다. 그런데 최근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황도 측에 심어 놓은 사람에게서 소식이 도착했는데, 글쎄 황태자 비오르틴이 마리니시네와 드래콘 소녀를 납치했다지 뭔가.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륀체르는 하이너를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색이 호위기사라는 녀석이 제 아가씨가 납치될 때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느냐고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곧 루앙에서 대현자 슈테반 뷔야크와 하이너의 대결 소식이 들려왔고, 륀체르는 알게 되었다. 하이너가 그 대결로 잠시 자리를 떠난 틈에 황태자가 마리와 마리아를 납치했다는 것을. 사정이 그러하다면야 제아무리 호위기사라 해도 아가씨의 납치를 미리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하이너는 황도 마탑의 수장과 싸워 이긴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대체 호위기사라는 녀석이 이래도 되는 거냐고.’ 하이너를 탓해 보지만, 마냥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 드래곤 기사가 마황에 이겼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실 자신으로선 알지 못한다. 황태자가 마리를 사심으로 납치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계획이 있어서 납치한 것인지. 그러나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은 있다. 생각해보자. 자신이 황태자라면 어찌할까. 비오르틴은 곧 제위 등극을 앞두고 있다. 지금껏 아버지를 뒤흔들던 실제 정치권력 할데바인을 제거했고, 그의 잔존 세력을 없애는 데 앞장섰으며, 종교로 제국을 장악하려던 성황파도 모조리 죽였다. 이제 마황이라는 단 하나의 적만 없애면 되는 비오르틴에게 마땅한 무기는 없었는데, 그의 손에 마리가 들어옴으로 인해 무기가 생긴 거나 다름없게 된 셈이다. 그 무기란 바로, 검은 드래곤 하이너 그로스. 륀체르는 황태자가 하이너를 제 수하에 두려고 마리를 감금하고 있단 사실을 눈치챘고, 또한 분노했다. 제국 최고의 자리를 노리는 자신이야말로 그 남자, 그 검은 드래곤을 제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황태자가 선수를 치다니! 사실 검은 드래곤의 성격으로 보건대 황태자 편에 쉽게 설 인물 같진 않다. 오직 아가씨만 위하는 그 남자가 황권을 섬길 이유는 없다. 하지만 만약에 비오르틴이 마리의 생명이라는 미끼를 던진다면? 대륙 최고의 마력 생물도 황태자의 손아귀에 놀아날 테지. “안 돼, 안 된다고…… 젠장!” 륀체르는 지상 최고의 무기가 새파란 황태자 녀석에게 가는 것을 볼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마력 기갑체 기술자 포르투바로 황태자와 신경전을 벌였는데, 그 황태자가 권력을 잡게 되면 누굴 먼저 제거할까? 어떤 명분을 대든 바너의 대부호를 죽이려 들 게 분명하다. 륀체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노집사에게 일러 외출준비를 했다. “어디 가십니까?” “포르투바에게 가야겠어.” 그런데 공교롭게도, 륀체르가 외출 준비를 다 마칠 때쯤 그에게 전언이 날아들었다. 포르투바에게서 온 전언이었다. 륀체르의 자본과 포르투바의 기술력으로 마력 기갑체 공정을 최상으로 설계하려는 일을 유감스럽지만 못할 것 같다는 정중한 형식의 편지. 사방에 온통 위기뿐인 륀체르는 편지를 구기며 외쳤다. “알아내! 이 미친 새끼가 왜 갑자기 이딴 식으로 구는지 그 뒤를 당장 캐라고!”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감사합니다! 100회군요! 00101 7. 악의 발화 =========================================================================                            마황은 슈테반 뷔야크와는 대조되는 삶을 살았다. 마황은 마법 명문의 적자로 태어난 데다 그 주제에 걸맞게 마력도 어마어마하게 가졌다. 갓 태어난 슈테반이 마력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주위를 혼란에 빠뜨리고 제 어미로부터 ‘너는 내 죄다.’라는 비정한 말을 들은 반면, 마황은 갓난아이치고는 최고의 마력을 가지고 그걸 절제하는 능력 또한 최고라 집안사람들로부터 ‘가문의 보물이다.’라는 찬사를 들었다. 슈테반은 숲에 버려졌지만, 마황은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귀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슈테반은 노인에게 주워져 혹독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마황은 마탑에 정식으로 들어가 교육생의 과정을 거쳤다. 슈테반이 유령들의 마기를 흡수하는 실수를 저질러서 끝없는 마력 갈증에 시달리는 저주를 받은 반면, 마황은 최고의 마력에 도달하고 어떤 저주에도 걸리지 않았다. 하여, 어찌 보면 마황의 삶은 지루하다고 평할 수도 있으리라. 누군가가 만약 ‘마황의 생에서 가장 지루하지 않은 때가 언제인가?’ 하고 묻는다면, 마황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검은 드래곤과 겨룰 때, 라고. 그리고 그 대결은 마황의 패배로 이어졌다. 마황은 패배한 것도 모자라 마력과 영혼 모든 것을 검은 드래곤 하이너 그로스에게 흡수당해버렸다. 이로써 하이너는 루앙의 대현자 슈테반 뷔야크와 마탑의 최고수장인 마황, 그 두 사람의 힘 전부를 넘겨받은 역대 최고의 마력자가 된 것이다. 하이너는 거대한 마력의 덩어리가 되어 호수 속에 침잠했다. 육신의 형태란 게 사라지자,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호수의 물이 아닌, 새까만 암흑이라는 것을 느낀다. 이 암흑은 특별하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이 아니라 마력으로 충만한 어둠이다. 북쪽에서 번진다는 암흑 지형의 한가운데 들어선다면 지금과 같은 기분일까? 세상을 다 가질 힘에 둘러싸인 채 암흑을 견디는 것은 묘한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어디 보자.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마력을 조절하는 것이 마나의 인이라지. 이제 자신은 마황의 힘을 흡수했기에 마나의 인을 조종하는 것도 가능하다. 마나의 인을 잘만 조종한다면, 슈테반에게서 옮겨붙은 흡마귀의 저주를 없애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일단 그러기 위해선 마나의 인이 있는 황도에 가야만 한다. 당장 가야 하는데……. 슈테반의 의식이 끼어들었다. 「흐흐…… 더 큰 힘을 줘! 목마르다고! 목이 마르단 말이야!」 그 칭얼거림에 하이너는 어이가 없다. 육신을 잃어 목 따윈 없는 사념 덩어리 주제에 목이 마르다고 하다니. 역시나 슈테반의 저주가 문제다. 하이너가 마황의 힘을 흡수한 후, 슈테반은 더 큰 마력을 흡수하게 해 달라고 졸랐고, 그것 때문에 하이너는 골치가 아팠다. 그런데 마황의 사념 덩어리마저 하이너를 괴롭게 했다. 「흐하하! 이건 유례없는 축복이다! 무려 대현자와 검은 드래곤과 마황인 내가 합쳐졌다니! 오오! 뭘 망설이는가? 이대로 암흑 지형을 파괴해 버려라! 그럼 된다! 그럼 이 세상의 비밀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마황의 사념 덩어리는 아무래도 미친 게 분명하다. 마황은 인간일 땐 마력의 최고에 올라봤고, 그 이상의 힘을 얻으려 했지만, 정치적 입장과 마탑의 수장이라는 의무에 휩싸여 암흑 지형 파괴라는 큰일을 저지를 수 없었다. 하지만 마황은 검은 드래곤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이후로는 달라졌다. 그는 자신이 검은 드래곤에게 졌다고 생각하기보다, 검은 드래곤의 힘이 자신에게 합쳐졌다고 여겼다. 어디 검은 드래곤뿐인가. 루앙의 마력자 슈테반 뷔야크의 마력도 합쳐지지 않았나. 마황은 자신이 지상 최고의 마력생물이 되었다고 착각, 자만하고 있다. 슈테반과 마황은 하이너의 의식에 혼재되어 끊임없이 하이너의 정체성을 흐려댔다. 「흐흐흐…… 하이너 그로스! 어서 황도에 가지 않고 뭐하는 거야? 얼른 마나의 인을 움직여 세상 모든 마력을 마셔버리라고! 다 들이켜잔 말이야! 흐흐흐…….」 「시끄럽도다! 마력은 이쯤이면 충분하구나! 아귀 새끼 주제에 지랄발광하는 소리 말고 얼른 암흑 지형을 파괴하러 가자! 그럼 이 대륙의 비밀이 뭔지 밝혀진다!」 「닥쳐! 대륙의 비밀 따위 알아서 뭐해? 어차피 마력의 궁극에 오르면 그건 자연히 밝혀지게 돼 있다고! 으흐흐흐……!」 「이래서 근본 없이 아무거나 주워 먹다 저주에 걸려버린 녀석들은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자. 뭐하느냐! 얼른 북쪽(암흑지형이 있는 곳)으로 가자니깐!」 자타공인 대현자와 자타공인 마력 수장이라는 자들의 다툼이 이토록 유치하단 것을 제국민들은 알까? 하이너는 자신이 성대를 쓰는 게 가능한 상태라면 두 사람에게 ‘좀 닥치라!’고 고함을 쳤을 것이다. 만약 육체가 멀쩡하다면, 요새는 쓰는 일이 거의 없던 마리티오르를 꺼내 두 말썽꾼을 구타할지도 모른다. 「젠장, 저것들을 조용히 시켜야 해. 제발 좀 조용히…….」 괴로워하던 순간, 반짝이는 생각이 났다. 하이너는 두 말썽꾼의 사념에 뜬금없는 선물을 주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 아가씨가 진한 사랑을 나누던 시절의 그림이다. 그러니까, 야한 그림이란 의미. 「후후, 이번 마사지는 하이너의 동정을 앗아갈 수도 있을 텐데…… 괜찮겠어?」 「괜찮지 않….」 「후후후…… 이렇게 삼킬까, 말까? 괜찮겠냐고 묻잖니? 우리 귀여운 기사님….」 하이너가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는 순간, 슈테반과 마황의 다툼이 뚝 끊겼다. 하이너는 옳다구나 하고 그때의 경험을 더욱더 되새겼다. 「괜… 으읏! 괜찮지 않… 하으! 괜찮지 않습… 아아! 괜찮지 않습니… 헉!…… 괜찮습니다! 괜찮다고요, 젠장!」 「아앗!」 「하아… 생각보다 괜찮군요.」 「후읏….」 「아니, 생각 이상으로…… 좋잖아.」 「아앗! 하이너! 읏! 아아!」 이어지는 그림은 두 사람의 짐승 같은 성교를 묘사하고 있다. 구강성교 경험은 있지만 본질적 성교는 하지 못했던 젊은이와 예쁘고 야한 아가씨의 달콤하고도 관능적인 이끎. 하지만 그림은 오래 펼쳐지지 않는다. 하이너가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두 마력자들이 동시에 항의했다. 「…… 흐, 흐흐… 더 안 보여주나?」 「이게 끝인가, 그대?」 하이너는 할 수만 있다면 웃고 싶었다. 다음 편에 애가 탄 연극 관람자들을 희롱하는 극작가의 느낌이 이런 거구나! 육신을 잃고 따라서 성욕도 잃은 사념 덩어리들이 관음 욕구만은 잃지 않았는지 타인의 성생활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다니. 하이너는 그들에게 조건을 걸었다. 「두 사람 모두 조용히 굴면, 온천 편을 보여드리지.」 그러자 반응이 왔다. 「하, 뭐라?」 「아니, 어떻게 그런 공공장소에서……! 그런데 그건 상태가 흐림인가, 맑음인가?」 하이너는 조건을 재차 강조했다. 「당연히 맑음이다. 그나저나, 둘 다 조용히 하라고 했는데?」 그러자 거짓말처럼 두 사념 덩어리들이 침묵했다. 그제야 고요함을 만끽하게 된 하이너는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게 자신만의 계획을 세웠다. 「이 두 녀석의 의식을 조종하는 게 가능해지면 그때 황도에 가야겠어.」 그는 마나의 인을 어서 빨리 손에 넣길 원했다. ***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 마리와 마리아가 머무는 비밀의 방에서는 대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연인의 소식이 없어 시무룩해진 아가씨와 기력을 회복하는 게 더딘 드래콘 소녀의 대화는 허심탄회하게 흘러갔다. 마리는 마리아에게 하이너의 소식을 전했고, 마리아는 갑자기 사과했다. “저기…… 잠시나마 아가씨의 연인에게 마음을 둔 것에 죄송해요.” 그러자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할 것까지야. 마음은 누구도 어쩔 수 없는 문제 아닌가 해. 그리고 그거 아니? 나도 사실 하이너가 너에게 눈길이 계속 가면 어쩌나 하고 남몰래 신경 쓴 적도 있어. 하지만 지금은 이런 생각이야. 그가 그냥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고. 그가 누굴 좋아하든 응원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가을이란 계절 때문에 마력생물과 교미를 해야 한다면 다른 생물보단 차라리 너와 하는 편이 더 좋겠지.” 그러자 마리아는 당치도 않다는 듯 도리질을 쳤다. “그런 말씀 마세요. 그리고 설사 관계가 그렇게 흘러간다 해도 말이 안 돼요. 그 분(하이너)은 이제 저 같은 작은 마력생물들은 감히 입에 올리지도 못할, 너무나 큰 존재가 되신 걸요.” 마리는 큰 존재라는 말이 왠지 싫었다. 거리감이 느껴져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큰 존재? 흥. 그래도 내 호위기사, 우리 일행의 지킴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고.”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를 보았다. 마리의 눈길은 따스하고 마리아의 눈동자엔 생기가 조금 도는 듯하다. 마리가 먼저 마리아를 안았다. 그러자 마리아도 마리를 안았다. 포옹의 시간이 길어지는 그때……. 갑자기 비밀의 방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시녀가 들이닥쳤다. 수상한 느낌에 마리아가 마력을 이용하여 마리를 보호하려 했으나, 비밀의 방을 지키는 마법사들 때문에 불가능했다. 시녀들은 마리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이런 식으로 어디론가 끌려가기는 싫은 마리가 크게 외쳤다. “이거 놔! 놓으라고! 날 대체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시녀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 한참 후, 마리는 눈이 부시도록 깨끗하고 화려한 욕관에 도착했다. “뭐하는 거야? 응?” “옷을 벗어야 합니다.” “이거 놔! 내가 알아서 벗어!” 시녀들은 마리의 몸을 깨끗이 씻기기 시작했고, 마리는 자신이 항거할 수 없단 것을 알고 순순히 몸을 맡겼다. 한참 후, 마리의 몸은 깨끗해졌고 은은한 향까지 났다. 하지만 마리는 시녀들이 뿌린 은은한 향이 싫다. 자신의 몸 자체에서 나는 달콤하고도 상큼한 향기가 지워져 낯설다. 시녀들은 마리의 몸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흥. 날 이렇게 씻겨서 뭐에 쓰려고? 목욕재계시킨 후 멋진 드래곤님을 만나게 해주기라도 할 셈인가?’ 이제 옷을 입을 차례인가 하고 마리가 시녀들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지만, 옷은 없다. 시녀들은 마리의 몸을 새하얀 면포로 돌돌 말아 감쌀 뿐이다. “뭐야? 뭐하는 거야? 대답 좀 해!” 마리가 짜증을 내자, 그제야 차갑게 생긴 시녀 하나가 겨우 대꾸해 주었다. “전하를 만나러 가는 길이니 얌전히 따르십시오.” 마리는 그제야 상황을 알았다. 듣자 하니 작위가 없고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자 혹은 창녀를 들일 때, 그자들의 몸에 어떤 무기도 소지하지 않게끔 지금과 같은 행색을 하게 한다고 한다. 알몸에 면포만 달랑 돌돌 말아버리는 우스꽝스러운 행색 말이다. 마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로테의 언니야! 오를린 영주의 딸이라는 확실한 신분이 있다고! 어째서 내가 이런 꼴로 가야 하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단 하나뿐이었다. “비올…… 이 음탕한 놈!” 만나려면 평범하게 만나도 되는데, 꼭 이렇게 창녀 취급을 해야 하는가? 마리는 분개했다.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시녀들은 면포에 싸인 그녀의 몸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은 드디어 황태자의 침소 앞에 도착했다. “전하, 도착했습니다.” 문이 열렸다. 마리의 몸은 황태자의 침상에 내려졌다. 황태자 비오르틴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면포말이를 보았다. 그의 눈이 무심함을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생각에 깊게 빠진 상태를 표현한 것인지, 시녀들은 알지 못했다. 마리는 재빨리 면포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비오르틴을 보고 곧바로 손을 들었다. 그의 뺨을 칠 생각이다. 하지만 비오르틴은 지난번처럼 뺨을 맞아줄 생각이 없다. 그가 마리의 손목을 아프도록 세게 잡았다. 마리가 아름다운 눈을 부라렸다. “놔! 안 놔?” 비오르틴은 손을 놓아주는 대신, 그녀의 눈을 볼 뿐이다. 아내와 똑같이 생겼지만, 아내가 아닌 사람의 눈. …… 바다와 숲을 합친 듯 아름다운 첫사랑의 눈을.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모두 감사합니다! 00102 7. 악의 발화 =========================================================================                            “이거 놓으라고!” “못 놔.” 비오르틴의 입에서 나온 말에 마리가 황당하여 할 말을 잃었다. 황족의 위엄 따윈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어릴 적 숲에서 뛰어놀던 때와 같은 말투. 황태자라는 사람은 아이처럼 변한 듯했다. 비오르틴은 마리의 손목을 잡은 채로 그녀를 눕혔다. 말은 아이처럼 해도 힘은 다 성장한 어른의 것이므로 그녀의 반항은 무의미하다. 힘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 같은 행동에 마리의 눈이 찌푸려졌다. 어릴 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비오르틴은 오히려 그때가 지금보다 더 어른스러웠던 것 같다. “못 놔. 아니, 절대로 안 놔줘.” 마리는 얼굴을 붉혔다. 나신으로 그의 몸에 깔린 지금이 민망하긴 하나, 할 말은 해야 한다. “생떼니? 어쩜 이리 유치한지. 위험을 무릅쓰고 먼 시골에 순례를 왔던 멋진 황태자 전하는 어디 가시고 이런 녀석이 있는 거지?” “이런 녀석?” “그래. 실망이야!” 비난은 조금의 효력도 내지 못했다. 그는 마리의 모습을 보고, 듣고, 느끼며 전율해버린 상태라 마리가 어떤 이야기를 하건 개의치 않는다. 그녀가 뭐라고 욕해도 그 감정, 그 감정을 내지르는 생생한 얼굴에 여태 쌓인 그리움만 해갈될 뿐. 그리고 그 느낌은 키스를 부르려 했다. 다가오는 그의 입술에 마리가 고개를 돌리며 짜증 냈다. “어째서 날 이런 방식으로 만나야 하는 거야, 이런 게 아니면 나와 이야기도 못 하니? 제국 황태자란 녀석이 고작 이 정도였어?…… 비올! 말 좀 해보라고! 그렇게 보지만 말고!” 비오르틴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를 보면 만 가지 상념이 머리를 뒤흔들어 차라리 아주 단순하게 몸으로만 표현하고 싶어진다. 문득, 어떤 물건이 기억났다. 지금 이 침소에 있는 물건, 그것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마나의 인이다. 원래는 마탑의 수장이었던 마황이 제국 황제를 향한 충성을 매개체로 그 힘을 휘두를 수 있었던 물건이다. 온 대륙에 퍼진 마력을 움직일 수 있는 어마어마한 물건이 지금 여기 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는가. 그것으로 시간을 돌릴 순 없는데. 비오르틴은 할 수만 있다면 마나의 인을 움직여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이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도 있을 텐데. 나지막이, 한숨이 나왔다. 그는 마리의 손목을 옥죄던 손을 풀어주었다. 덕분에 마리는 두 손이 자유로워졌고 다시 한 번 그에게 뺨을 때릴 기회가 생겼지만, 결국 때릴 순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움직임이 왠지 모르게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의 안색만큼이나 창백하고 기다란 손은 그녀의 눈동자를 만지고 꺼내기라도 할 것처럼 탐욕스럽게 그녀의 뺨을 기어가 눈꺼풀에 닿았다. 덜덜 떨리는 손은 엄청난 격정을 압축하고 있어서 마리는 얼굴 근육 하나도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비오르틴은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는 마리의 얼굴에 서글퍼졌다. 이런 얼굴, 이런 표정은 아내 같아서 서글프다. 분명 아내보다 밝은 눈동자라고 생각했는데……. 탄식과 같은 말이 나온다. “왜….” “…….” “왜, 네가 아니었지?” “뭐?” “왜 네가 오지 않았어?” 비오르틴은 두 손으로 마리의 얼굴을 감쌌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커가는 동안 내내 묻어두었던 말이 제멋대로 나오려 했다. “나는 널 생각하면서 몇 년을 기다렸는데.” 그제야 마리는 말을 이해했다. 황태자비 후보로 온 사람이 어째서 언니인 너 말고 네 동생이냐고, 자신은 네가 올 줄 알고 기대했다고, 기대했었다고, 그런데 그 기대가 이런 현실로 이어져…… 괴롭다고. 비오르틴의 눈동자엔 탓할 길 없는 분노가 녹아 있다. 보는 사람도 느껴지는 그 분노가 그의 괴로움을 전해주고 있다. 마리는 열없는 웃음을 흘렸다. “저기, 난 너에게… 기다리라고 한 적 없는데.” 그리고 그녀의 대꾸는 싸늘한 편이다. 비오르틴은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말을 인정하기 때문에 끄덕이는 게 아니었다. 옛 기억을 잃은 그녀에게 분노한 것을 어찌할 줄 몰라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달래는 것뿐이다. 「너와 결혼할 거야.」 「어째서?」 「너와 결혼해야만 인생이 지루하지 않을 것 같거든.」 「흐음. 글쎄? 나는 눈이 아주 높아서 너랑 결혼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내 남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겁쟁이여선 안 돼! 비올 너는 겁이 너무 많아!」 「그래도 반드시 할 거야! 너와 나는 결혼을 하게 되고 말 거라고!」 「헤헤. 비올. 너 참 되게 긍정적이구나.」 「이, 인, 인간에게 그, 긍정을 빼면 뭐가 남지?」 「그 말 멋있네. 비올. 좋아.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엔 동의해. 너는 앞으로도 계속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면 좋겠어!」 그리고 오를린을 떠나기 며칠 전, 그녀가 했던 말. 「날 신부로 맞이할 테면 그래보라고! 얼마든지 기다려줄 테니!」 기다린다 했다. 분명, 기다려 준다고 했다. 겁쟁이 남자여서는 안 된다고 했었지. 겁쟁이가 되지 않으려면 최고가 되어야겠다고 남자아이는 자신을 다스렸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자신의 중심축으로 삼으며 겁 따윈 버려두고 부지런히 권력자들을 해치워나갔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만났는데, 그녀는 어째서. 어째서. 비오르틴은 그녀의 작은 몸을 아이 다루듯 두 손으로 움켜잡고 제 무릎에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을 머리부터 점점 내려 보았다. 그녀의 물결치는 금발, 매끈한 이마, 보석 같은 눈, 작고 오뚝한 코, 아내보다 당차 보이는 입술, 새하얀 목 전부를 보았다. 아내와 같은 얼굴이지만, 절대 아내와 같지 않다. 쾌활하고 자유로운, 그래서 그 분위기에 동화되고 싶다고 욕망하게 했던 모습이 성장한 채로 눈앞에 있다. 그러나 못된 시간은 그녀의 기억 일부를 지워버리고 말았다. 기다려줄 테니, 기다려준다고 했으면서. 비오르틴은 허망한, 허망해서 화가 난 눈으로 그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기다리라고 한 적 없지. 그렇다고 기억하고 있을 테지.” “…….” “그런데도 기다려지더군.” “비올?” “기다리는 게 힘들어서 그만두려고 해도 저절로 원하고, 바라고, 욕망하게 되더란 말이지. 너를. 네 동생이 아닌 너란 여자를.” 마리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너, 이상해.” “…무엇이?” “이상해. 집요함이 느껴진다고. 그렇잖아. 어떻게 그 어린 시절 기억에 집착하듯 굴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처럼 바쁜 애가, 너처럼 쉽지 않은 자리에서 살아가는 녀석이…….” 그게 이상한 일인가? 비오르틴은 되묻고 싶었다. 마리니시네야 어릴 적 친구들도 많고 자유롭게 뛰어노는 게 일상인 나날들을 보냈기에 잘 모를 것이다. 자신에게 마리는 처음으로 궁 밖에서 사귄 친구였고, 처음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어울릴 수 있었던 여자 친구였다.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이 얼마나 좋았는지 그녀는 모른다. 그 이후에는 숨 막히는 궁의 시간뿐인데, 그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그리움은 더 짙어진다는 것을 이 여자는 절대로, 절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널 이해할 수 없어…….” 그녀는 자신을 옥죄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몸을 비틀었다. 그녀의 희고 보드라운 살결에 비오르틴은 상념이 뭉개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내가 어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상관없어. 뭐가 됐든 나는 너를 기다렸고,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으니까. 마리.” 비오르틴은 금방이라도 마리에게 입 맞출 듯 고개를 가까이 가져갔다. 그에게 이름이 불린 마리는 섬뜩했다. 보이지 않는 그물이 몸에 내려앉은 듯했다. “……마리. 마리니시네.” “시끄…….” “기다리라고 한 적 없는데도, 기다리고, 그리워하라고 한 적 없는데도, 그리워했어. 사람들은 이걸 보고…….” 마리의 심장이 울렁거렸다. 비오르틴은 얼굴을 붉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사랑, 이라고 하던데.” 마리는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비오르틴이 그녀의 반응에 고양되어 다시 말했다. “사랑이라, 부르던….” 말이 채 마쳐지기도 전에 마리의 손이 올라갔다. 짜악! 비오르틴의 뺨에 붉은 자국이 생겼다. 마리는 여태 받은 고백 중 가장 최악이라 느꼈다. 황태자의 뺨을 친 것도 모자라 그의 가슴팍을 밀쳐 일어나며 외쳤다. “시끄러워! 더는 그녀를 욕보이지 마!” 이런 식으로 동생이 무시되는 걸 참을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로테가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 “너 진짜 너무 하잖아.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비오르틴은 그녀의 몸을 돌려세우고 가녀린 두 팔을 꽉 잡으며 도리어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처음부터 그녀가 아니라 네가 왔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테지!” 마리는 목소리에서 점점 광기가 느껴지는 그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럴수록 비오르틴은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애탄 목소리를 뱉었다.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넌 몰라. 얼마나 많은 밤을 널 다시 만날 기대로 버텨냈는지 넌 모른다고!” 이 궁, 이 궁의 주인 자리를 확고히 유지하기 위해선 불안한 일들과 끊임없이 다투고 이겨야 한다. 그런 나날 속에서 그녀를 향한 그리움,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는지, 그녀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와 결혼할 거라 했다. 그녀와 반드시 결혼하고 말 거라고 했고, 그녀는 그 다짐을 언젠간 잊혀 날아갈 농담처럼 여기며 ‘넌 참 긍정적’이라는 말로 적당히 대꾸했다. 자신의 고백이 그렇게 하찮게 여겨지는 게 싫어서, 비오르틴은 어린 마음에 치기가 올라서 이런 말을 했다.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무엇이 남느냐고. 그러자 그녀는 그 말이 멋지다고 했고, 언제나 그런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온 것뿐인데……. “넌 네가 내게 얼마나 굉장한 존잰지 전혀 모르고 있어.” “그래! 몰라! 하지만 안다고 해도 뭐? 네가 느끼는 감정에 나는 동의해야 해? 그래야만 하냐고!” 그녀는 차갑게 말한다. 어린 날의 기억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 자신은 꿈에 부풀던 소년을 새까맣게 지우고 살았다는 듯. 뭐, 상관없다. 자신에게 처음부터 반려는 이 여자 하나뿐이고, 길이 꼬여버렸지만, 지금이라도 다시 함께 걸으면 그만이니까. 비오르틴은 마리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바동거리는 그녀의 몸을 옥죄고 수도 없이 입 맞추려 했다. 마리는 몸서리치며 그를 제정신으로 돌려놓으려 했다. “미쳤어! 로테, 로테를 생각하라고!” “그녀를 말하지 마. 네 생각을 말해. 이렇게 내게 안겨 몸을 붉히는 네 기분을 말하라고.” 비오르틴은 금방이라도 그녀의 몸을 취할 듯 점점 입술을 내렸다. 그러자 그녀의 반항이 거세졌다. 그는 일그러진 웃음을 지으며 다시 그녀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고 벌하듯 그녀의 입술을 깨물었다. 거친 키스가 시작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려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녀가 운다. 울고 있다. 불쾌하고 속상해 보이는 눈썹 아래 맑은 눈동자가 짙은 슬픔에 물든 채 젖어 있다. 비오르틴이 잠시 고개를 뗐다. 그 틈에 그녀가 비오르틴의 뺨에 침을 뱉으며 뒤늦은 대답을 내놓았다. “내 기분? 이거야. 이게 내 기분이고, 이게 내 마음이지.” 그리고 그 순간. 챙그랑! 탁자 위의 화려한 꽃병이 비오르틴을 지나 침상 기둥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분명히 탁자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누군가가 그 병을 던졌다. 마리와 비오르틴은 꽃병이 던져진 곳을 보았다. 그곳에는 하이너가 있다. 그를 본 비오르틴의 눈이 묘하게 가늘어졌다. 야울 궁에 도착하자마자 보게 된 이런 불상사에, 하이너는 낮은 목소리로 황태자에게 경고했다. “더러운 손 떼라.”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103 7. 악의 발화 =========================================================================                            비오르틴은 하이너의 눈동자를 보았다. 우주처럼 검은 눈동자가 바위 같은 회색으로, 바위 같은 회색이 눈 부신 빛처럼 새하얗게 변한다. 그런 현상은 슈테반이 지녔던 흡마귀의 저주가 여전히 유효하단 의미, 그리고 저주가 더 강해졌단 의미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하이너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를 뜻한다. 하지만 비오르틴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는 순순히 마리에게서 손을 떼 주려 했다. “아!” 하지만 그런 몸짓은 찰나의 속임수일 뿐이다. 비오르틴은 손을 떼는 척하며 마리의 목을 낚아챘다. 그 사이 하이너는 마나의 인을 움직여 황태자를 막으려 했지만, 늦어버렸다. 비오르틴은 언제나 몸에 지니던 단도를 이미 마리의 목에 댔다. 실처럼 가늘고 낫처럼 예리한 흉기가 하얀 살에 자국을 내기 직전. 비오르틴이 외쳤다. “맹세해라!” 마리와 하이너는 알아듣지 못했다. 비오르틴은 칼을 든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다시 외쳤다. “내게 복종하겠다고, 이 마나의 인 앞에서 맹세하란 말이다!” 황태자의 손은 ‘마나의 인’을 말하는 부분에서 조금 떨렸다. 그 탓에 마리의 목엔 아주 실처럼 작은 핏자국이 생겼다. 황태자는 자기 손, 덜덜 떠는 손 안의 단도를 잠시 흘긋 보았다. ‘이’ 마나의 인 앞에서 맹세하란 말……. 마나의 인. 필시 형태가 뚜렷하지 않은 마력주체. 주인을 가려 움직인다고 한다. 주인이 원하면 그가 원하는 물건에 깃들어 있는 게 가능하다고. 지금 마나의 인이 깃든 물건은 황태자가 마리를 찌르려 사용한 그 단검이다! 하이너는 뒤늦게야 그 말을 알아들었다. 마리 역시 황태자가 의미하는 마나의 인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마나의 인이 황태자의 손아귀에 있다, 라……. 지금껏 이 마나의 인을 움직이는 사람은 마황이었으나 그가 곧 마나의 인의 주인이란 의미는 아니다. 마나의 인은 제국 대대로 황가, 로귀하르트 피를 가진 권력자의 소유이고, 지금도 그것은 유효하다. 즉 이 물건은 소유자와 다루는 자가 다르다는 의미. 마황은 언제나 제국 황권의 허락이 있어야만 마나의 인을 다룰 수 있었다. 지금 황태자는 마리를 인질 삼아 드래곤의 힘을 황가에 종속하려 한다. “이 여자가 죽는 걸 원치 않겠지? 로귀하르트의 피에 충성을, 그리고 복종하겠다고 얼른 약속하라!” 마리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비, 비올…….” 황태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하는 게 분명하다. 이렇게 떨리는 손으로, 이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떨리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이면서 누군가를 인질 삼으려 하다니. 모든 권력을 해치우며 무패의 신화를 쓰려던 그가 지금은 불안한 자세로 극단적인 승부수를 내던지고 있다. 감히, 드래곤 앞에서 말이다. 하이너는 그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다가오면 마리를 죽일 거라는 협박을 들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한 발짝, 한 발짝 씩 걸어갔고 그럴수록 그의 눈동자는 슈테반의 눈동자와 비슷하게 순백으로 변했다. “그녀를 죽일 것이다!” 비오르틴이 거듭 협박했지만, 협박은 통하지 않았다. 하이너의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비오르틴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의 덜덜 떠는 손은 여전히 마리를 죽이지 못했다. 차마, 죽이지 못했다. 하이너는 고작 세 걸음 정도 남겨 놓고 그를 노려보았다. “내게…… 복종을 강요했나?” *** 잠시 후, 야울 궁 상공이 이상해졌다. 하늘에선 구름이 제멋대로 퍼졌고 공기는 진동했다. 마치 신의 손이 하늘을 휘젓고 신의 목소리가 세상에 으름장을 놓는 듯했다. 그아아아아! 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화가 난 드래곤의 포효가 시작되었다. *** 제국에 적대적인 동한의 수도 조영. 한 의원이 있다. 겉보기엔 추레하지만 제법 많은 이가 찾는 곳이다. 쌍꺼풀이 없고 턱이 네모난 밋밋한 인상의 의사이자 침술사인 노파가 침을 골랐다. “그게 어디 보자, 살이 오르고 생기를 넣는 게 어디….” 노파의 앞에는 침상이 있는데, 거기엔 한 여인이 살집이라곤 조금도 없는 등을 드러내놓고 있다. 그녀는 제국 출신의 아름다운 백인 여인으로 머리카락은 한가을 보리밭을 보는 듯 금빛으로 찰랑거리며 눈동자는 바다와 숲을 섞은 청록색이다. 그런데 어쩐지 몸만은 비쩍 마르고 생기가 없어 보인다. 분명 살을 찌우면 아주 예쁜 몸일 텐데……, 아마도 최근 출산으로 인해 몸이 이리도 상한 것이리라. 노파는 여인의 신분이 궁금하다. 이곳에 올 때 보니 귀티가 흐르는 제국식 복장이던데, 그런 차림으로 이런 먼 곳에 와서 치료를 받으려 하니 자연히 궁금증을 자아낼 수밖에. 이곳 동한은 치안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므로 이런 부유해 보이는 여인은 오는 길에 무뢰배들에게 해를 당할 위험이 크다. 아니, 반드시 해를 당하고 만다. ‘높으신 분이겠지. 필시 제국의 요술(이동 스크롤)을 써서 왔을 거야.’ 그러나 노파는 괜히 묻는 일은 자제했다. 이곳은 신분을 숨기고 싶은 자들이 유일하게 이용할 수 있는 의원이고, 노파는 그 장점을 유지해야만 하니까. 노파는 앞으로 자기가 놓을 침을 설명해 주었다. “시술 후 반나절만 지나면 몸에 보기 좋게 살이 오를 겁니다. 아이를 낳기 전의 몸으로 되돌아가실 수 있어요. 탄력이 생기고 가슴도 더욱 부풀게 되지요. 물론, 젖은 나오지 않아요. 그런데 통증은 하루 정도 지속됩니다. 흐음, 견디실 수 있는 수준일 겁니다만.” 여인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녀가 제국인이라 노파의 동한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어릴 적부터 제국어 외에 다른 언어도 많이 배워두었기에 노파의 방언까지도 잘 이해하고 있다. ‘통증 따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지.’ 여인, 로테에게 통증은 견딜 수 있는 수준이라면야 별로 신경 쓸 게 못 된다. 얼른 노파에게 침을 맞고 몸을 출산 전으로 살찌워야만 한다. 최대한 몸을 건강하고 매혹적으로 되돌려 서한의 수도 광천에 가는 것이 중요하다. 광천에는 만나고 싶은 아니,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포르투바의 장남, 엔카드라노 포르투바. 엔카드라노의 아버지는 제국 기술원 수석 출신이다. 엔카드라노 역시 아버지의 길을 밟으려 제국 기술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버지처럼 뛰어난 성적은 내지 못했다.) 그는 병에 걸려 얼마 살지 못할 제 부친을 대신해 조만간 포르투바 가를 물려받을 것이다. 가독 승계야 당연한데 아버지의 기술 관련 건들도 모조리 물려받는다는 소식이 있어 황도 학계와 사업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여기까지가 로테가 알아본 엔카드라노의 정보. 하지만 로테는 그런 알려진 정보만으로는 뭔가 부족하였고, 그래서 트리아노네에 있을 당시 그를 조금 더 조사해 보았다. 엔카드라노는 열등감 덩어리의 호색한이라고 한다. 최고의 기술자로 불리는 아버지가 사실은 플래티르콘의 날개(빈민가) 출신이라는 것, 어머니가 황도 로귀하르트의 대부업으로 돈을 모은 졸부라는 사실이 그 열등감의 뿌리다. 아버지가 차지했던 제국 기술원 수석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언제나 바닥을 파 내려가는 성적도 엔카드라노의 열등감을 키웠으리라. 천민에 졸부가 만나 이룬 집안에서 태어난 저능아! 그런 심한 욕을 들어서 기술원 내에서 크게 싸움을 일으킨 적이 있다고. 그 사건 이후 그는 기술원보다 황궁 사교로 더 도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교 생활이 그의 장래에 관한 생각을 바꾸었는지, 그는 아버지가 만들어낸 온갖 기술들을 소재로 한 제품들을 파는 훌륭한 상인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거래 건으로 황도를 떠나 먼 서한의 수도 광천에 있다. 그가 벌인 사업에서 누구보다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었던 이는 누구일까. 졸부인 어머니? 아니다. 그는 지금은 죽어버린 할데바인 대공, 정통 귀족 혈통인 할데바인 대공의 후원을 받아 사업을 단기간에 번창하였다. 과거 황태자비 간택전이 펼쳐질 때 ‘포르투바가 황태자비를 험담한다.’고 떠돌던 말도 모두 그러한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할데바인 대공은 어떻게든 자신의 딸을 황태자비에 올리려 했고, 그러다 보니 대공의 편에 있던 엔카드라노도 자연스레 오를린 출신의 황태자비 후보를 깎아내려 버린 것이다. 당시에도 대공의 원조를 받았고 그 훗날에도 원조를 받을 생각에 그의 입장에선 그렇게 구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성공을 위하여 그런 짓을 했겠지만, 그것 때문에 로테는 적잖이 마음고생을 했다. 엔카드라노. 로테에겐 마냥 미운 사람이지만, 이제 로테는 그 감정을 잠시 접어야 할 때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아버지의 기술, 기술권, 지위를 모두 물려받을 엔카드라노를 이용해 포르투바가 륀체르 사파이어와 기술 협력을 하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드시 포르투바의 기술을 황태자의 자본과 합쳐야만 한다. 듣자 하니 엔카드라노는 아내를 두고도 수많은 애인을 둔다고 한다. 그 애인들이 하나같이 황도의 대귀족 출신이라는 것. 어쩌면 그는 제 아버지가 빈민촌 출신이다 보니 신분이 높은 여자들을 탐하는 취향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의 애인들, ‘야르디네(로샤타르트의 수도) 왕녀, 중천 총독 부인, 황제궁 시녀장 등 모두가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졌다는 미인이란 것이 특이하다. 로테는 그의 취향을 알아낸 후 계획을 세웠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의 미인, 바로 자신이고 자신이 이 계획에 직접 뛰어들어야만 한다. 엔카드라노를 유혹하여 포르투바 가가 사파이어와 맺은 조약을 파기하게 하자. 이는 남편을 위한 일이 아니다. 황가, 더 나아가선 자신의 안위를 위한 일일 뿐. 로테는 남편의 얼굴을 떠올리며 잡초처럼 쓴 웃음을 지었다. ‘더는 당신의 마음을 바라지 않아. 아니,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그런 것 따윈 바라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고작 남자의 마음 따위. 이젠 인정해야 할 때다. 실은 눈부신 자리를 위해서 궁에 왔을 뿐이다. 여자가 오를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황태자비가 되었을 뿐이다. 그 자리가 최고에 오르기도 전에 바너의 대부호 때문에 부서진다면, 여태 자신이 온갖 치욕을 감당한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하여, 자신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포르투바 가와 사파이어의 계약을 깨게 할 것이다. 치료를 마친 로테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의원을 나섰다. 그리고 곧바로 엔카드라노 포르투바가 있는 서한의 광천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후, 바너의 륀체르 사파이어는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포르투바가 사파이어 재단과 기술 협력을 할 수 없다는 내용, 즉 배신을 고하는 편지다. *** 야울 궁에서 시작된 검은 드래곤의 폭주는 마탑으로 번졌다. 검은 드래곤의 포효를 감지한 마탑 마법사들이 힘을 합쳐 드래곤을 공격하려 했고, 그러자 드래곤이 그들에게 보복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참사였다. 마리니시네를 인질로 삼은 황태자에 미친 듯이 분노한 청년 하이너의 인격과 흡마귀의 저주에 걸려 끝없이 마력을 흡수해야만 하는 슈테반의 인격, 그리고 얼른 무엇이든 결판을 내서 암흑 지형의 비밀을 캐내는 데만 집중하고 싶은 마황의 인격이 혼재한 검은 드래곤이라는 괴물은 황태자의 소유물인 마법사들, 그 엄청난 마력 덩어리를 미친 듯이 먹어 치웠다. 최강의 포식자에 의한 엘리트 마법사 집단 학살. 그 광경은 대륙이 생긴 이후 최초이자 최악이자 최후의 참사임이 분명하다. 특히나 하이너는 마탑에서 강한 마력을 가진 이들부터 순서로 먹어치웠는데, 그 바람에 마탑의 중요한 일을 맡은 이들이 모조리 죽게 되었다. 황궁을 호위하고 관리하던 이들 역시. 후에 살아남은 무마력자 시중, 요리사 등이 하이너의 모습을 증언하길, ‘선하고 준수하게 생긴 젊은이가 무서운 눈을 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죽이고 뜯어먹는 모습이 마치 지옥에서 온 식인마 같다.’고 했다. 하이너가 마탑의 마력자들을 싹 먹어치우자, 이번에는 황가의 마력 기갑체가 지원을 나왔다. 그러자 하이너는 마력 기갑체를 마치 바람에 바스러지는 낙엽처럼 부서뜨려 버렸다. 한바탕 파괴의 시간이 지나자 그는 더 먹을 마력이 없나 하고 궁을 휘젓다가 트리아노네까지 가게 되었다. 얼마 후, 하이너는 작은 생명과 함께 황태자의 앞에 섰다. “아……!” 비오르틴은 하이너의 품에 안긴 작은 아이, 아니카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아니카의 눈을 가리던 천이 사라져 있다. 아이의 눈에서는 끊임없이 검은 기운, 암흑 지형에서나 번진다는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저것은 미미하게나마 마력이 분명하고, 흡마귀의 저주에 혼재된 검은 드래곤은 필시 그 마력을 흡수하려 들 것이다…….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비오르틴은 그렇게 외치고 싶지만, 검은 드래곤이 뿜어내는 살기에 압도당하여 입을 움직이지 못했다. 하이너…! 어째서! 마리 역시 하얀 눈을 희번덕거리는 하이너가 하이너 같지 않다고 느꼈다. 그녀는 변해버린 호위기사를 어떻게든 말리고 싶었다. 안 된다고, 아이 만큼은 먹어선 안 된다고. 그 아이는 내 조카라고! 하지만 그녀 역시 비오르틴처럼 검은 드래곤이 뿜어내는 감정의 기운에 얼어붙은 채 몸만 덜덜 떨고 있을 뿐이다. 하이너는 아니카를 들어 올렸다. 그가 뿜어내는 살기에 아니카는 벌써 죽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모습이라 하기엔 비정상적으로 침착하다. 너무 침착해서 공포를 드리웠다. 아이를 들어 올린 하이너의 모습에 비오르틴은 무슨 일이라도 해야만 했다. 바닥에 떨어진 마나의 인으로 마리를 베는 시늉을 다시 해서라도 아니카를 살려달라고 협박해야 할 때였다. 아니카……! 하이너는 아니카의 검은 눈동자, 아니, 검은 기운을 뿜어내는 동공을 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보다 보니 아니카가 울기 시작했다. “흐애애애앵!” 하이너의 하얀 눈빛이 빛으로 사람을 죽일 듯 더욱 밝아졌다. 그런데 그 순간. 낯설지 않은,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하이너의 귓가를 때리는 듯했다. 「형! 안 돼! 그건 아니잖아! 그 아이는 죄가 없어! 형을 해치려한 자들과는 다르다고!」 하이너, 슈테반, 마황이 사로 혼재한 의식에 등장한 누군가의 영혼. 그는 바로……. “마르틴…….” 과거에 죽어버린 동생의 이름. 마르틴의 영혼은 하이너의 의식에 단단한 축을 세웠고, 지금도 세우고 있다. 「아이에겐 손대지 마, 제발! 살아갈 날이 많은 아이야!」 살아갈 날이라는 부분에서 하이너의 표정에 균열이 생겼다. 몸이 좋지 않았던 마르틴은 그 얼마나 살아갈 날을 희망했던가. 하이너의 눈동자는 아니카를 향해 있지만, 절대 아니카를 보는 게 아니다. 과거 동생의 웃음을 보는 것이다. 하이너의 눈동자가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눈 부신 빛이 흰색으로, 흰색이 밝은 회색으로, 밝은 회색이 무거운 흑색으로……. 그때 비오르틴이 소리를 질렀다. “안 된다! 절대……!” 그 사이 하이너의 눈동자는 원래의 색깔을 되찾았다. 그는 천천히 비오르틴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니카를 비오르틴의 품에 안겼다. 덕분에 비오르틴의 손에 쥐어졌던 단도가 챙!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마법사들의 피와 살점이 묻어 지저분한 하이너의 입에서 거칠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잘 들어라.” “아, 아니카…….” 비오르틴은 울부짖으며 아니카의 새하얀 피부에서 피를 닦아냈다. 하이너는 아기를 안은 비오르틴의 어깨를 세게 잡았다. 비오르틴의 협박, 마나의 인에 대고 황가에 복종하라던 말에 대한 뒤늦은 대답이 나왔다. “내가 복종해야 할 분은 오직…… 마리 아가씨뿐이다.” ============================ 작품 후기 ============================ 악의 발화 부분은 끝인 듯?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0104 8. 삶, 삶, 삶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검은 드래곤 하이너, 오를린의 아가씨 마리니시네, 드래콘 소녀 마리아, 그들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아마도 하이너가 마법을 써서 모두 어디론가 데려간 게 분명하리라. 그리고 이곳엔 황태자만이 남았다. 황태자는 딸을 안은 채 영혼이 날아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다. 아니카는 기절한 것인지 잠이 든 것인지 조용하다. 그런 딸을 바라보는 황태자의 눈은 초점이 사라졌다. 검은 드래곤의 난리 통을 헤치고 뒤늦게 달려온 야울 궁 근위대장조는 황제 친위대에 협조 요청을 한 뒤 장내의 이들에게 지시했다. “황녀 전하를 얼른 모셔라!” “궁의 마병사들을 모두 소집해!” “죄송하지만, 마병사들은 모두 의식이 없습니다!” 검은 드래곤이 황궁의 모든 마력을 흡수했기에 마법을 쓰는 마병사들 역시 의식이 없는 상태다. 근위대장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멀쩡한 병사가 있으면 죄다 모으란 말이다!” 그들이 재빠르게 궁을 정리하는 사이 황제 측에선 비상 회의를 소집해야겠다고 알렸다. 황의회의 사람들이 다 모여 이번 일에 관해 논의해야만 한다. 제국의 최고 권력이 사는 곳이 엉망이 되었다는 사실이 퍼지게 된다면, 제국민들은 불안에 떨 것이 분명하다. 권력자들은 힘을 합쳐 검은 드래곤과 대적할 수를 모의해야만 하는 상태다. 시종 하나가 ‘태자 전하께서도 얼른 황제궁에 가셔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황태자, 비오르틴은 힘없이 창가로 걸어갔다. 검은 드래곤의 마기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인지 하늘의 모습이 우중충하다. 구름대신 검은 기운이 점점이 박혀 마치 하늘에도 곰팡이가 필 수 있단 걸 보여주는 듯하다. 한참 동안 보다 보니, 마치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 같다. …… 오염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만 여겨진다. ‘죽였어야 했어.’ 첫사랑. 약속. 그리움. 그러한 추억에 오염되어 현실을 잊어버렸다. 그녀를 인질로 삼았으면 마땅히 인질로서의 구실을 했어야만 했다. 지금 궁을 보라. 야울 궁과 마탑이 엉망이 되었다. 그녀에게 칼자국이라도 남겨 검은 드래곤에게 협박을 했다면 이런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왜. 자신은. 그녀의 이름이 저절로 불린다. “마리…….” 이 현실이 싫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황의회 따위뿐이겠지. 그리고 그 짜증은 뜨거운 물방울이 되어 턱밑으로 흘렀다. “마리……!” *** 트리아노네. 서한의 수도 광천에서 포르투바를 만났던 로테는 며칠 시간을 두었다가 황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자신의 딸 아니카가 지내는 트리아노네에 바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곳을 포함한 야울 궁, 마탑의 꼴이 말이 아니다. 대규모 마법사 학살이 벌어졌던 마탑은 재건축이 필요할 정도로 엉망이 되었고, 야울 궁도 보수가 필요해 보인다. 아이가 편안히 지내야 할 트리아노네의 바닥엔 피가 말라붙어 있다. 오는 길에 검은 드래곤 사건을 들은 로테는 어찌하여 궁궐이 그런 꼴이 되었는지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너무 참혹하여서 할 말을 잃었다. 청소부 하나가 검은 드래곤이 난입한 그때를 떠올리며 공포에 물든 표정을 했다. 실질적으로 궁을 지키는 세력인 마법사들이 사라졌단 사실은 그들에게 기본적인 궁내 예의마저도 잊게 해버렸다. 그들은 황태자비가 먼저 말을 걸지 않았는데도 그때의 일을 마구 떠들어댔다. “사람을 산 채로 뜯어 먹었대요! 사람이 사람을 산 채로 막! 어쩜 그런 식인종이 궁에 올 수 있죠?” “그야 드래곤이니 그렇지! 그나저나, 마법사들이 모조리 사라졌어요! 이제 궁은 누가 지키죠?” 수선을 피우는 사람을 뚫고 시녀장이 나와 헛기침하며 주의하라고 경고하였다. 눈에 주름이 진 시녀장은 황태자비에게 쓸데없는 말을 해대는 이들을 싸늘하게 노려보았고, 그러자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부턴 말을 삼가야 한다. 특히나 그들은 황녀 아니카에게 일어났던 일에 관해선 함구해야만 한다. 어미에게 자식의 불상사를 괜스레 알려줄 필요는 없으니까. 시녀장이 로테에게 물었다.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로테가 뭐라고 대답을 하려 입을 떼는 그 순간. 트리아노네의 드넓은 정원을 가로지르며 한 사람이 도착했다. 그는 야울 궁에서 온 자다. 초조한 얼굴의 그는 로테를 보자마자 마침 잘 되었다는 듯 반색하며 간단히 예를 취했다. 그러더니 트리아노네의 모든 이들에게 고했다. “자자, 다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아닙니다! 큰일이 앞당겨졌어요!” 로테가 궁금하여 물었다. “큰일이라니?” “등극식이 사흘 후입니다!” “하지만 등극식은 아직…….” 로테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등극식이 파격적으로 앞당겨진 이유를 알 것 같다. 검은 드래곤의 마탑 공격으로 황도가 어수선해졌지만, 황실은 등극식을 무사히 치러내서 각 영지에 황권의 건재함을 과시할 작정인 것이다. 그리고 등극식 이후 자신은……. 드디어 황후가 될 것이다! ‘마리! 내가 드디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직전엔 언제나 가슴이 뛰는 법이다. 그러나 지금 이 가슴은 마냥 기뻐서 뛰는 게 아니다. 말 많고 탈 많던 길을 지나오면서 느낀 수많은 감정이 요동치는 것일 뿐. 로테는 등극식 준비에 서둘렀다. 서두르면서 잡념을 잊어버렸다. 엔카드라노 포르투바와 있었던 일, 남편 비오르틴이 마리를 끝내 죽이지 못했다는 따위의 사연들은 최대한 잊으려 했다. ‘그나저나…… 참 잘 된 일이지. 후슈킨과 그 딸이 죽은 것은.’ *** 얼음도시 시귀르. 수도 유르. 가을을 앞두었지만, 이 도시는 혹한의 겨울을 보내는 듯 온통 눈 범벅이다. 도시 외곽엔 눈의 결정을 표현한 육각형의 새하얀 건물이 크게 세워져 있어, 마치 유르의 상징물을 자칭하는 것 같다. 제국어로 ‘안식의 겨울’이라는 간판이 달린 이 건물의 진짜 정체는 사파이어 가에서 만든 자선 재단 사무관이다. 대외적으로는 어려운 이들을 돕는 사업을 하는데, 실상 사파이어 가에 들어오는 검은 자금을 세탁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하이너는 이곳을 두 여자가 쉴 장소로 택했다. 륀체르를 싫어하는 그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드래곤인 자신이야 어디에서 어떻게 지낸다 해도 불편할 것이 없다. 하지만 아가씨와 마리아는 자신과 다르다. 아가씨는 검은 드래곤의 소동 때 많이 놀란 눈치고, 마리아는 슈테반에게 마기를 빼앗긴 후라서 몸이 좋지 않은 상태다. 하이너는 그들을 황도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유르에서 안락하게 지내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왠지 륀체르라면…… 그들을 잘 돌봐줄 것 같았다. 아가씨와 마리아를 쉬게 한 후 자신은 곧바로 길을 떠났다. 혼재된 인격을 다스릴 시간도 필요하고, 끊임없이 마력을 원하는 이 저주를 달랠 시간도 필요했다. 가장 먼저 오를린의 소용돌이 산에 갔다. 그곳이 흡마귀의 저주를 푸는 데 괜찮은 장소라 판단했다. 소용돌이 산의 마력생물들 때문에 고향 농부들이 수확 시기에 크고 작은 피해를 본 적이 있으니, 그곳 마력생물들의 마력을 흡수하는 게 농부들을 편안하게 하는 길이었다. 대규모 사냥이 시작됐고, 농부들은 검은 드래곤 덕분에 올해 농사는 편해졌다고 좋아했다. 그 후 하이너는 동한, 서한과의 교역 거점지인 섬 중천으로 갔다. 중천에는 값비싼 물건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마력을 지닌 물건이 상품으로 상당수 차지한다. 하이너는 그 상품의 마력을 모조리 흡수했다. 상인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흡마귀의 저주는 그렇게 해서라도 해소해야만 했다. 해소하지 못하면 전 대륙을 멸망시켜버릴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런 식으로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력을 사냥하니, 흡마귀의 저주를 참을 수준이 되었다. 안심했다. 아주 잠시뿐일 테지만, 당분간은 마기를 흡수하고 싶은 충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걱정되는 건 다가올 가을. 마력생물들이 발정하는 계절. 대현자의 자제력이 발정을 막아줄 거로 기대해 보지만, 과연 어떠할지. 암흑 지형의 비밀에 눈이 먼 대현자의 인격은 그런 자제력을 조금도 발휘해주지 않을 눈치다. 가을이 되면 어찌한다? 발정이 일어나 버리면 어떻게 해결하지? 대륙의 마력체들은 자신이 거의 흡수해버린 상태인데. ‘역시 마나의 인을 파괴해야 하나?’ 마나의 인이 파괴되면 마법 관련 저주들도 어떻게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파괴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당장은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겠다. 아직은 고민할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하이너는 아가씨 앞에서 평범한 호위기사의 모습을 보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며칠 후에야 유르에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대륙의 정황을 파악했다. 모두 바쁘게 살고 있다. 황태자는 등극식을 마쳐 로귀하르트의 황제가 되었고, 륀체르 사파이어는 기갑체 제조 공정 건에 잡음이 생겨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래서 유르에 있는 마리를 한 번도 만나러 오지 않았다고. 하이너는 아가씨를 만나기 전에 잠시 단장의 시간을 가졌다. 대륙을 돌아다니며 마력을 게걸스레 흡수했던 자신의 야만적이고도 추레한 꼴을 보이기 싫기 때문이다. 상주하는 사용인들의 도움을 받아 깨끗이 씻고 깔끔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물론 자신은 마법 최강의 신체를 가졌기에 그런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편하게 정화마법을 써도 되고 최고급 옷가게에서 가장 멋진 옷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낼 수도 있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대륙 최고의 마력생물이 되었어도 아가씨 앞에서는 그저 평범한 호위기사, 아가씨를 만날 생각에 설레는 보통의 남자이고 싶었다. 긴 복도를 가로질러 아가씨가 있다는 방을 향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기분이 이상하다. 드래곤이 되어 하늘을 나는 것보다 가슴이 떨렸다. 똑똑. 똑똑똑. 들어오란 말씀이 없다. ‘주무시는가?’ 하이너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가씨가 머무는 곳에서만 느껴지는 특유의 달콤하고도 상큼한 향기가 기분을 더 들뜨게 한다. 침대에 똑바로 누워있는 아가씨의 모습이 보였다.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천천히 다가갔다. 침대 옆에 조심스레 앉아서 아가씨의 자는 모습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여전하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모습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차가운 공기를 녹이는 것만 같은 금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동자라는 보석을 품은 기다란 속눈썹, 한 입 베어 물면 달콤한 맛이 느껴질 것 같은 촉촉한 입술, 너무나 안고 싶어 마지않았던…… 작은 몸. 안고 싶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가을은 마력생물끼리 서로 발정하게 한다지. 그래서 한때 걱정을 한 적이 있다. 드래곤인 자신이 인간인 아가씨에게 발정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그런 고민 말이다. 그러나 지금 아가씨의 모습을 보니 그런 고민은 그저 기우일 뿐. 만나서, 참 좋다. 그것으로 다른 고민은 그냥 잊힌다. 그것만으로도 아가씨는 내게 고마운 분이 아닐까? 이런 고마운 분과 평온하게 있을 시간이 주어져 있는데, 그리고 자신은 누구도 두렵지 않을 최강의 생물인데, 대관절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나. “다녀왔습니다…… 아가씨.” 어느샌가 그의 입술은 천천히 아가씨를 향해 내려가고 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0105 8. 삶, 삶, 삶 =========================================================================                            그 순간, 잠이 들은 줄 알았던 아가씨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앗! 치한이야아아앗!” 심지어 그녀는 베개를 들고 방어하는 자세까지 취했다. 너무 놀란 하이너는 두 손바닥을 펼친 채 잠시 몸을 뒤로 뺐다. 치한 보듯 반응하는 아가씨의 모습에, 오히려 자기가 더 놀라 마치 없는 애도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런데 그런 호위기사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마리가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푸하하하! 하하! 하…….” 다 장난인데. 치한이니 뭐니 하는 장난을 쳤을 뿐인데. 어쩜 이리 재미있담? 오랜만에 만난 호위기사는 정말이지 귀엽기 짝이 없다. 자기는 치한이 아니라는 듯 억울한 저 표정을 보라. 저 표정 어디가 지상 최강의 마력생물인 드래곤이라 할까. “정말이지…… 아가씨. 진짜.” “하하, 하하하…….” “뭐가 그리 웃기십니까.” “하…….” 한참을 웃던 마리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웃음 가득하던 눈이 촉촉해지고 한껏 올라갔던 입가가 바르르 떨렸다. 마치 금세 눈물을 뚝뚝 흘릴 사람처럼. 그리고 그녀가 호위기사의 가슴을 주먹으로 살짝 치는 순간, 그녀의 눈물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흐아아앙……!” “아가씨….” 마리는 호위기사의 목에 두 팔을 두르고 안기며 울먹거렸다. 하이너는 이토록 서러워하는 아가씨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왜 이제야 오는 거야! 나, 무서웠어! 네가 슈테반과 싸운 후에 여관에 오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했다고! 마법사들이 나랑 마리아를 황궁에 납치해가기도 했단 말이야! 내가 궁에서 네가 마황이랑 싸웠다는 이야기 듣고 얼마나 걱정한 지 알아? 그리고 비올이, 비올 그 녀석이 나를…….” 하이너는 마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다. 안다, 알다마다. ……두려우셨을 테지. 황태자가 아가씨를 인질로 삼았던 당시, 아가씨는 분명 담담한 척하셨다. 하지만 그 속은 절대 담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나 공포에 떠셨을까. 정말로 죽는 건 아닌지 얼마나 두려우셨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세계 정복을 꿈꾸던 아가씨가 그런 식으로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얼마나……. 세상에서 아가씨를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은 당시 아가씨의 기분을 모두 헤아렸다. 그러므로 호위기사로서, 사과하지 않을 수 없다. “죄송합니다.” 아가씨는 그때의 기분을 투명한 눈물처럼 쏟아냈다. “무서웠단 말이야! 처음으로 세상일에 긍정할 수 없는 시간도 온다는 걸 느껴버렸다고! 흑흑…….” 하이너는 아가씨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없이 달래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왠지 웃음이 나왔다. 언제나 희망과 긍정과 낙관만을 외치시던 아가씨께서 긍정할 수 없는 시간도 온다는 걸 느껴버렸다고 말씀하시니 소리 없이 웃음이 터졌다. “흐아앙, 그리고 있지. 나 내가, 내가 아주 작은 사람이란 걸 느꼈어!” 하이너는 아가씨도 결국 자신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평범한데, 결코 긍정을 포기하길 싫어하시는 분일 뿐. 이런 분이 좌절할 때마다 내가 곁에 있어 드려야겠지. 그러한 생각에 아가씨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으흐아앙…….” 농담 같은 말을 좀 속삭여줘야 아가씨가 그만 울 것 같다. “아가씨 같은 긍정괴물도 우실 때가 있군요.” “흑흑! 나보고 괴물이라니! 그리고! 내 눈물샘은 장신구가 아니라고! 으하아앙!” “마음껏 우세요.” “흐앙?” 하이너는 마리의 몸에서 잠시 제 몸을 떼어냈다. 그리고 마리의 발그레한 뺨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두 손으로 천천히 닦아주었다. “언제까지고 달래드릴 수 있으니까.” “하이너?” “그러려고 제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마리는 스스로 눈물을 모두 닦아낸 뒤 하이너의 눈을 마주했다. 어딘가 낯설다. 예전보다 조금 흐려진 회색 눈동자가 좀 신경 쓰이긴 하지만, 표정만은 너무나 따스하다. 이따금 까칠하고 마음에도 없는 못된 소리를 잘하던 그런 호위기사는 온데간데없고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 세상에서 가장 기대고 싶은 남자가 있다. 제멋대로 뻗은 그녀의 두 손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의 얼굴을 만졌다. 그러자 하이너는 아가씨의 두 손목을 어루만지다가 아가씨를 안고 눕혔다. 홀린 듯 서로를 보던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추었다. “……!” 오랜만에 닿은 하이너의 입술이 너무나 달콤하여 마리는 연기처럼 흐린 신음을 뱉을 뻔했다.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고 가슴이 달리기하는 것처럼 뛴다. 그녀는 자신의 뛰는 가슴 좀 느껴보라며 호위기사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끌고 왔다. 호위기사는 오롯이 그 파동을 느꼈다. 쿵, 쿵, 쿵, 쿵쿵쿵! 그녀의 심장이 세차게 뛴다. 마치 고요한 연못에 연속으로 떨어지는 장대비처럼 맑은소리. 마리는 금세 눈물이 마른 눈으로 하이너를 올려다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그래. 내 가슴을 뛰게 하려고 네가 있는 것 같아. 그런 거야. 하이너.” “하하.” “날 더 가슴 뛰게 해줄 수 있지?” “……예.” 가녀린 손이 그의 셔츠 단추를 한둘씩 풀기 시작했다. 하이너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기꺼이 셔츠를 다 벗어주었다. 근육질의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마법생물의 피, 험한 일을 당한 흔적을 모두 마법과 물로 씻어 내린 몸, 오직 아가씨 하나만을 위해 단장한 몸이 드러났다. 그가 최강의 드래곤이 되어서일까? 마리는 그 몸이 너무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아가씨의 욕망을 한껏 헤아린 그는 기꺼이 몸을 숙였다. 그리고 아가씨의 몸 곳곳에 입 맞추기 시작했다. 옷을 입은 상태라도 좋았다. “아… 좋아.” 마리는 물길을 느긋하게 헤쳐나가는 작은 물고기처럼 몸을 움직였다. 그러면서 두 손으로 호위기사의 몸 전체를 손바닥 가득 쓰다듬고 주물어댔다. 옷 위로만 입을 맞추던 하이너가 아가씨의 입술을 찾았다. 두 사람의 입맞춤은 몸짓만큼이나 더욱 진해졌고, 마리의 흥분도 만개한 꽃처럼 최고조에 이르렀다. “하이너, 있지. 우리….” 그녀의 성급한 손이 호위기사의 성기에 닿았다. 그 순간, 그녀의 눈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어…?” 호위기사의 성기는 몸의 대화를 나눌 준비가 전혀 되지 않는다. 그녀는 물렁물렁하기 짝이 없는 그곳을 만지면서 호위기사의 표정 또한 다시 확인했다. “하이너?” 담담하면서도 겸연쩍은 묘한 표정. 마리는 왠지 그 표정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가을. 마력생물이 마력생물들에게만 발정하는 계절. 지금 호위기사는 인간인 아가씨에게 성적으로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슈테반과 마황을 물리치면서 그런 것쯤 어떻게 없애버렸을 줄 알았더니…….’ 호위기사의 탓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마리는 왠지 섭섭하다. 그런데 그녀의 마음을 훤히 꿰뚫는지 하이너가 대뜸 물었다. “실망하셨습니까?” “응.” 너무나 솔직하게 나온 말에 마리는 자기도 놀라 다시 부정했다. “아니! 아니! 실망 한 개도 안 했어!” 하이너는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한순간 그 웃음이 거짓인 듯 정색했다. 마리는 왠지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갑자기 그가 그녀의 한쪽 가슴을 부드럽고도 강하게 움켜잡았다. 천 사이로 닿는 손의 촉감이 오소소 소름을 일으켜 마리는 불안한 눈으로 호위기사를 보았다. “하이너?” 하이너는 풍만한 가슴을 움켜쥔 그대로 그 위에 입 맞추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잔잔한 손짓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살벌한 느낌이 들어 마리는 꼼짝도 못 하고 벗겨지는 대로 있을 뿐이다. “실망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알아두실 게 있군요.” 흥분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호위기사의 건조한 목소리가 귓가를 통해 들어와 심장을 울리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으응?” “제가 인간에겐 반응 아니, 흥분하지 않는 몸이 되었다고 해서 제 마음도 흥분하지 않을 거로 여기신 건 오해입니다. 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아가씨께 흥분하고 있어요. 며칠 동안 이 몸을 탐하지 못해서 미쳐버릴 정도로 흥분해 버렸는데 이것을 제 몸으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답답함이 얼마나 지독한지…….” “하이너?” “이제부터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제 아가씨의 몸에서 이제 남은 것은 팬티 하나다. 하이너는 버릇처럼 그것을 찢어버렸다. 어찌나 거침없이 찢는지 마리는 그만 천이 살결에 스치는 감촉이 아파 작게 소리를 흘렸다. “읏! 웁!” 하이너는 그런 아가씨의 입에 입 맞춘 채 기다란 손가락으로 아가씨의 아랫배를 만졌다. 보들보들한 살결은 좋지만, 살이 하나도 없어 마음이 좋지 않다. 안타까움은 손에 힘을 잔뜩 들어가게 했다. “하이너!” 키스도 파도처럼 거칠고 광폭해졌다. 아랫배와 그 아래 황금빛 수풀을 만지는 손은 그 어느 때보다 아가씨를 욕망하는 듯 과감하다. “으웁, 읍, 숨 막혀…….” 하이너는 고개를 돌리려 하는 아가씨를 따라가 강하게 입 맞추었다. 마리는 조금도 흥분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관능적으로 입맞춤하는 호위기사에게 오싹함을 느끼며 입술을 열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하이너가 재촉하듯 얼렀다. “어서요.” “후우, 나, 숨 막힌다니까.” 숨이 막힌다, 라……. 그럼 더 몽롱하게 즐기실 수 있겠지. 하이너는 집요하게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리고 그녀의 혀를 절대로 놔주지 않을 것처럼 이로 꽉 물고, 손가락을 점점 은밀한 곳으로 내려갔다. “아…… 이런.” 아래의 상태를 확인해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호위기사가 흥분하지 않아 실망했다, 숨이 막힌다, 그런 말을 하시면서도 이곳은……. “축축하네요. 키스만으로도 이렇게.” 그의 목소리처럼 건방진 손가락은 금세 안을 꿰뚫었다. 마리가 다리를 움찔거리며 신음을 내질렀다. “아!” 마주친 입술 사이로 삐져나온 그 소리가 듣기 좋아서 하이너는 입맞춤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귓불을 혀로 핥으며 아래를 찌르는 손가락을 더욱 빨리 움직였다. 안을 퍽퍽 찌르는 소리가 젖어 음란하기 짝이 없다. 상큼한 열매에 절은 꿀처럼 달콤한 신음이 톡톡 터져 나왔다. 방안이 금세 야한 기운으로 불타올랐다. “하앙, 읏! 아!” 살 안쪽은 또 어찌나 이렇게 꽉꽉 깨무시는지. 반응이 좋으니 앞일에 걱정이 없다. 오늘 비록 자신의 성기로 만족을 드리지 못하겠지만, 그런 덕분에 다른 행위들로 쾌감을 연주하는 또 다른 방식을 깨우칠 수 있지 않을까? 하이너는 손가락을 하나 더 늘려 아가씨의 안쪽을 콱콱 찔렀다. 아, 앗, 하앙……자지러지는 신음이 마구 터졌다. 아가씨는 두 손으로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황홀해 하셨다. 그 사이 자신은 손가락을 잠시 늦추고 아가씨의 다리 사이를 보았다. 흥건해진 붉은 속살이 끊임없이 움찔거리며 얼른 움직여 달라고 보채고 있다. 마리는 하이너의 정수리에 손을 가져가며 물었다. “하아, 뭐하려고….” 하이너는 고개를 들어 아가씨를 보았다. 뚫어지게 보니 아가씨가 민망한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하이너는 살다 살다 저런 부끄러워하는 반응을 다 볼 때도 있나 싶어 호기심이 생겼다. 아마도 아가씨는 혼자만 흥분하시고 신음을 흘린 게 창피하기라도 한 모양인지……. 그런데 어째서인지, 저런 표정이 더 보기가 좋다. 더 보고 싶다는 생각에 손가락이 하나 더 늘어 총 세 개가 아가씨의 안에 들어섰다. 속살은 비명을 지르는 듯 꽉 죄고, 아가씨의 눈은 고통스러운 듯 찌푸려졌다. “으읏!” 그러나 그런 표정은 그때뿐, 세 개가 들어갔다 나가기를 계속 반복하자 아가씨는 심호흡하셨다. 몇 번의 심호흡을 거치자 그 아름다운 입술에서 나오는 소리는 미묘한 소리가 되었고, 나중에는 마치 더욱 빨리해달라고 보채는 소리처럼 들렸다. “하응, 아… 앙…….” “그렇게 좋으십니까?” “싫어, 읏…… 세 개라니.” 다른 때 같으면 아주 좋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실 분이, 오늘은 혼자만 그런 쾌감을 느끼는 게 민망한지 부정하신다. 하이너는 건조한 목소리로 심술궂게 말했다. “더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요.” “아앗! 너무 짓궂… 아아!” 하이너는 어느샌가 이마에 땀을 흘릴 정도로 아가씨의 쾌감점을 자극하는 데 바빴다. 고통스럽게 바르작거리는 몸짓이 사실은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현처럼 느껴져 그는 손가락을 절대 쉬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가씨의 가슴을 한 입에 물었다. 그곳을 사탕처럼 빨아들이고 깨물며 손짓을 더욱 세게 했다. 그러자 마리의 골반이 튕기어 올랐다. 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하앙, 앗!…… 아앙, 더, 아!” “아가씨…….” 하이너는 손가락으로 쾌감에 다다를 수도 있단 걸 느꼈다. 그렇게 속도를 한껏 올리던 어느 순간. “아……!” 마리는 등을 세차게 튕겨 올리며 부르르 떨었다. “하아, 하… 후우.” 하이너는 그녀의 안을 꾹 누르다가 손바닥을 보았다. 손바닥을 타고 흐르는 투명한 물을 보니 그녀가 절정에 다다랐다는 게 느껴졌다. 손을 천천히 빼 번들거리는 손 전체를 보았다. 핥고 싶다. 예전에는 이런 욕구가 강하게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변태나 된 듯 욕구가 치솟는다. 그녀의 가장 야하고 은밀한 물에 취하다 보면, 자신도 마력의 가을이고 뭐고 다 잊고 진정 흥분하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하아, 후우… 하이너?” 숨을 고르던 마리는 놀랐다. 갑자기 호위기사가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기 때문이다. “뭐하는….” “아시면서.” 하이너는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별이 있는 그곳에 혀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 혀는 달팽이처럼 천천히 움직여, 뜨거운 물이 흐르는 살결 사이로 깊게 파고들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챕터엔 륀체르 분량이 많을 거예요! 00106 8. 삶, 삶, 삶 =========================================================================                            그러자 마리가 하이너의 검은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허벅지를 튕겨 올렸다. “으읏!” 반응하는 몸짓이 커졌고 하이너의 혀는 더욱 꼿꼿해졌다. 그가 타액이 번진 혀끝을 세워 안쪽을 집요하게 괴롭힐수록 마리는 그의 혀를 움찔거리며 쉴 새 없이 조였다. 날렵한 코끝이 가장 은밀한 체취를 빨아들이는데, 마리는 마치 자신의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아, 앙!… 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마리의 복부는 아주 큰 갈증을 느꼈다. 더 큰 것을 빨아들이고, 더 긴 것을 부딪치고, 또 가득 흡수하고 싶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않다니! 다른 방식으로 쾌감을 얻고자 몸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결국, 그녀는 한 손을 가장 은밀한 구슬에 가져다 대 스스로 마찰하며 골반을 튕겼다. “아, 흣…!” 어떻게 하면 더 높은, 더 깊은 쾌감에 도달하는지 잘 알기에 여기까지 와 구태여 내숭 따윈 떨지 않는다. 그리고 그게 가장 자신다운 모습이기도 하단 생각에 마리는 솔직하게 욕망했다. “오! 하이너! 미칠 것 같아, 아앙!” 하이너는 마리의 바쁜 손가락을 치워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그 은밀한 구슬을 혀로 핥아주었다. 이미 그의 손가락들은 혀를 대신해 안쪽에 다시 한 번 빡빡하게 들어갔다. 음부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동시에 간질거리는 느낌에 마리는 눈앞이 하얘졌다. 곧 몸이 가루가 돼 버리는 것만 같이 아찔해졌다. “응, 아아아!” 어째 두 번째 절정은 첫 번째 절정보다 훨씬 빨리 찾아온 듯하다. 하이너의 손바닥에는 처음의 절정보다 더 진한 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긴 혀를 빼내 그것을 모조리 핥고 마시며 갈라진 목소리로 맛을 평했다. “달군요…….” 이제는 아예 눈을 감고서 그 달콤한 액체를 모조리 빨아먹는 데 집중했다. “흐읏, 으…… 후우.” 거듭된 절정에 축 늘어진 마리는 지친 숨을 내뱉으며 호위기사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호위기사의 핥는 감촉이 야릇하여 이따금 몸을 비틀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아닌, 황당한 웃음을 터트렸다. 뒤늦게야 자신의 행동이 우스운 모양이다. “흐아앙. 뭐야, 나 혼자만 느끼고.” 그런 모습마저도 호위기사에겐 그저 다디단 모습이다. 그는 연체동물처럼 스멀스멀 올라와 그녀의 가슴을 끌어안고 핥았다. 여전히 꼿꼿이 세운 두 젖꼭지가 깜찍하여 모두 모아 한 번에 빨아들였다. 한껏 느끼고 또 달려드는 호위기사가 성가실 만도 하건만 그녀에겐 전혀 성가셔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하으응…….” 어쩜 이리 야한 몸인지 모를 일이다. 늘 어디까지 느끼실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게 하는 그런 몸. “아직 더 느끼셔야 합니다.” 그는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내며 아가씨의 몸을 뒤로 돌렸다. 네발 달린 짐승처럼 엎드린 마리는 호위기사가 어떤 식으로 더 느끼게 해줄지 기대했다. 그는 아가씨의 엉덩이를 한껏 들어 갈라진 틈 사이를 자세히 보았다. 흘러내리는 투명한 물방울을 보니 감탄사가 터질 것만 같다.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부분으로 가는 가장 원시적인 길을 마주하는데, 어째서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하지 않는 건지…. 이쯤 되면 그 빌어먹을 가을에 관한 정의가 다시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가을은 마력생물들의 발정 기간이 아니라 인간의 발정을 방해하는 도구가 된 듯하다. ‘…얼마든지 방해해 보라지.’ 자신을 막을 수 있는 건 그 무엇도 없다. 지상 최고의 마력생물 좋다는 게 뭔가. 장점을 이용할 수 있으니 이용하면 그만이겠지. 마법을 이요해 금세 자신의 성기로 혈류를 회오리치게 했다. 마치 가을에 반항하듯 굳세어진 그것, 인간 남성의 성기는 단숨에 아가씨의 뒤를 파고들었다. “아앗!” 마리는 안쪽에 바짝 힘이 들어간 채 고개를 베개에 파묻었다. 단지 삽입한 것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엉덩이 뒤의 근육이 바짝 수축한다. “아! 어, 어떻게……?” 그녀는 인간에겐 성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호위기사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궁금할 뿐이다. 하지만 호위기사는 그 점에 관해 대답할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그는 무자비한 몸짓으로 아가씨의 안을 꿰뚫은 채 거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폭죽처럼 교성이 터졌다. “으읏, 아, 아앙!” 안을 찌르는 거대한 쾌감의 창에 마리는 울부짖었다. 여태 몇 번이나 체내에 들였던 것인데, 지금처럼 뜨겁고 단단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찌를 때마다 치고 들어오는 쾌감의 극이 안쪽을 짓이기고 머리를 부순다. 뭐가 어떻게 되어 발기하게 한 건지는 모르지만…… 드래곤의 힘이라는 것은 굉장하다 못해 괴로울 정도다. 그리고 정신이 없는 와중에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쾌감, 마치 고통 같은 쾌감을 선사하는 그의 표정은…… 어떠할까? “하읏, 읏, 하이너….” 마리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뒤돌아보려 했다. “아가씨.” 하지만 하이너는 그녀가 뒤돌지 못하게 한 손으로는 그녀의 고개를, 또 한 손으로는 그녀의 가슴을 만지며 더욱 거칠게 밀어붙였다. “아, 아… 앗, 앙!”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더욱 조이고 빨아들이는 내벽, 그리고 등을 바르르 떠는 아가씨의 모습. 모든 것이 참을 수 없이 황홀하다. 하지만 그 황홀함은 시각적인 감각에서 오는 것이지, 결코 성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젠장…….’ 그는 아가씨의 귀를 물어뜯듯 키스하며 더욱 허리를 쳐댔다. 아마 누군가가 그의 몸짓을 본다면 성교로 얼마나 난폭해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절정을 알지만 결코 절정에 다다를 수 없는 그의 몸은 아주 오랫동안, 집요하게 아가씨의 안쪽을 괴롭혔다. “하, 하응, 하이너, 제발!” 제발이라는 소리가 나온 건 거의 처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하이너는 멈추지 않았다. 이러다가 혹시 침대가 부서지는 건 아닐까? 마리가 그런 걱정을 하다가 갑자기 여태 내선 교성과는 다른 소리를 흘렸다. “아얏!” 그제야 하이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는 숨을 고르며 아래를 보았다. 교접 부위를 보니 대체 자기가 무슨 짓을 했나 싶다. 성기에 슬쩍 묻어 나온 피라니. 다른 때 같으면 월경을 하시는가 보다 하겠지만, 조금 전에 들은 아릿한 소리가 그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다. “젠장…….” “하이너?” “아닙니다.” 그는 자꾸만 뒤돌아보려 하는 아가씨를 뒤에서 꼭 껴안고서 아가씨의 몸에 치유를 걸었다. 그리고 정화까지 해주었다. 그 사이 마리가 뒤돌아 그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여전히 불가능하다. 그는 가녀린 등을 껴안은 채 옆으로 누워 그녀의 동그란 뒤통수에 입 맞추었다. “…… 죄송합니다.” “으응, 뭐가?” 마리가 뒤돌아 그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하이너는 그녀를 더욱 꽉 껴안고 뒤돌아보지 못하게 했다. 첫 번째 사과가 상처를 낸 것에 관한 사과라면, 지금 하는 사과는 이 상황에 관한 사과라 할 수 있으리라. “죄송합니다.” 감히 아가씨께서 보고 싶어 하시는 걸 못 보게 하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 거듭되는 사과에 마리는 눈을 감았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는 몰라도 아주 오랜만에 만나 뜨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화를 내고 싶진 않다. “흐응, 우리 까칠한 기사님께서 죄송해하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하.” “하이너가 웃으니까 좋네!” 마리는 호위기사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는 그 상태가 아쉽긴 하지만, 적어도 그의 체취와 체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서로의 차분하고 고른 숨결에만 집중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하이너는 제안을 했다. “…… 아가씨께 자장가를 불러드리고 싶은데, 될는지요.” “으응. 네 노래라니. 그러고 보니 잘 듣지 못한 것 같아. 불러줘.” 그러자 하이너가 낮은 헛기침을 두 번 하다가 노래를 시작했다. 그 특유의 중저음은 말할 때의 까칠함이나 정중함 같은 개성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오직 감미로울 뿐. “산골짜기 아름다운 새소리, 내 마음 꽃잎 되어 태양 아래 춤추노라. 오, 마리. 가끔은 새의 날개 되어…….” 언젠가 마리가 하이너에게 불러주었던 노래인데, 하이너는 그것의 가사를 바꾸어서 불러주었다. 그런데 노래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그가 노래를 시작함과 동시에 그녀에게 수면 마법을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걸 알면서도 그냥 잠이 들었다. 잠이, 들어주었다. ‘얼굴을 못 보게 할 정도라면 뭔가 있겠지. 오래간만에 봤는데 귀찮게 하진 말아야지 않겠어, 마리? 참아. 나중에 실컷 보면 되니까.’ 마리가 완전히 잠에 빠지자 하이너는 그녀의 옷을 하나 하나 꼼꼼히 입혀주었다. 그리고 이불을 그녀의 목까지 끌어올려 덮어준 후, 방을 나서기로 했다. 문을 여는 하이너의 눈이 새하얗다. 마치 슈테반의 눈처럼. 그는 아가씨가 이런 눈을 보지 않으셨으면, 하고 바랐다. ‘젠장, 이놈의 저주…….’ 흡마귀의 저주가 자꾸만 더 큰 마력을 달라고 한다. 마황의 인격도 암흑 지형에 가보면 그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챈다. 이를 어떻게 다스리면 좋을까. 혹시나 해서 황가가 소유한 마나의 인을 부수지 않았다. 어떻게든 마나의 인을 이용해 이 저주를 깨부수고만 싶다. *** 중요한 손님이 도착했던 소식이 륀체르에게 전해졌다. 그러자 륀체르는 곧바로 안식의 겨울이 있는 시귀르의 유르로 향했다. 마차 전체에 이동 스크롤을 사용해서 왔기 때문에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건물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실내로 갔다. 마차 안에서는 답답하단 이유로 구두를 절대 신지 않는 그가, 마차 밖으로 나올 때도 신발을 신지 않고 뛰어가는 모습은 시종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만큼 륀체르에게 검은 드래곤의 방문은 중대한 일이다. “어디 있어, 이 근무태만 녀석은!” 근무태만이란 아가씨를 열심히 지켜야 하면서 잠시 자리를 비웠던 호위기사를 두고 꾸짖는 말이다. 마침 하이너는 긴 복도를 천천히 걷는 중이다. 심각한 표정의 그는 달려오는 륀체르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륀체르의 코가 추위 때문인지 새빨갛게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저걸 보고 누가 서른 살의 남자라고 할 수 있을까. 동안에서 새빨간 코를 한 륀체르의 모습은 동네 귀엽게 생긴 청년 같다. ‘사파이어는 여전히 만만해 보이는군.’ 웃는 하이너가 다르게, 륀체르는 하이너를 보고 얼어붙어 버렸다. 하이너의 얼굴에서 변화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하이너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 어깨를 만지며 대뜸 물었다. “자네, 눈알이 왜 그리 허옇나?” 여전히 륀체르다운 말버릇이다. 억양 자체는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나 쓴다는 세련된 억양이지만, 단어 선택은 바너의 뒷골목 시절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저속한 편이다. 아가씨는 지금 저런 말투의 륀체르와 곧잘 유쾌하게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지만, 자신은 아니다. “눈알이 어찌 그리되었느냐 묻잖아.” 하이너는 새하얀 눈동자를 지그시 감으며 대답해주었다. “…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 해두지.” “오호라. 뭐, 사정은 대충 알고 있지만, 그 흰색은 그러면….” 하이너는 말을 끊고 물었다. “날 보려고 여기까지 뛰어온 거야 알겠지만, 잠시 시간을 좀 줄 텐가?” 그는 내부에서 충돌하는 세 가지 인격과 저주에의 욕구를 다스릴 시간이 필요하고, 륀체르는 지상 최고의 마력생물이라는 쓸모 있는 손님이 편하게끔 최대한 대우해줄 생각이 있다. “우리 흑룡께선 얼마든지 최고의 휴식을 보내실 수 있지.” 륀체르는 그런 말을 하며 마침 지나가는 하녀 하나를 불렀다. 북구인 특유의 새하얀 피부에 몸매가 굉장히 탄탄한 아가씨다. 그리고 표정이나 화장법도 상당히 도발적이고 주인 앞에서 한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뱅글뱅글 꼬는 모습도 왠지 모르게 불량한 매력이 있다. 어딜 봐도 얌전한 하녀로는 보이지 않는데……. 륀체르는 하이너를 가리키며 하녀가 해야 할 일에 관해 알렸다. “이봐, 이분은 아주 중요한 분이야. 이분께는 유르의 최고급 여관, 아니, 로귀하르트 황궁에서 하는 접대보다 더 끝내주는 접대를 해야 할 거라고. 알겠나?” 하녀는 하이너를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어보며 야한 농담을 던지는 익살을 부렸다. “끝내주는 접대요? 이를테면 침대, 아니면…… 주방은 어떻죠?” 그녀의 눈썹 하나가 요사스럽게 올라갔고, 륀체르는 그 신호를 받아들여 고개를 두 번이나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이분께서 원하신다면야 그 어디에서건 괜찮겠지.” “쓸데없는 짓을.” 단호히 말한 하이너는 뒤돌아서서 가던 길을 갔다. 그는 야릇한 표정을 짓는 하녀도 이해할 수 없고, 그런 하녀에게 성적으로 모욕적인 발언을 농담이랍시고 하는 륀체르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륀체르는 더욱 심술궂게 웃으며 하녀에게 재촉할 뿐이다. “뭐하나? 얼른 접대하지 않고.” 농담하곤 있지만, 어차피 검은 드래곤이 이 농담에 어울려 줄 이가 아니란 건 알고 있다. 단지 륀체르는 지금 이런 시답잖은 말이나 하면서 자신의 흥분을 다스리는 중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생물이 이곳, 다름 아닌 자신의 건물을 이용한다. 제 편으로 끌어들일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으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건방진 놈들(포르투바 부자(父子), 두고 보자고!’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 감사합니다! *윈디님 닉네임 바꾸셨군요! 늘 댓글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닉네임이 바뀌셔도 윈디님의 댓글은 소중소중+_+ *복귀하기 전에 한 편 더 보고 싶다고 하신 분, 설마 제가 늦은 건가요? 죄송합니다 ㅠㅠ... 00107 8. 삶, 삶, 삶 =========================================================================                            마리 일행 아니, 이젠 드래곤 일행이라 불러야겠지. 이들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꾸준히 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앞으로 교섭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물론 마리니시네 입장에선 지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바너 길드 마스터가 원하는 일을 제대로 해냈고, 그로써 보수를 받았다고 생각할 테지. ‘지원’이라는 말을 불쾌하게 받아들일 게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의 입장으로 보자면……. 지원이다. 구두쇠 자신이 그 누군가에게 그만큼 지원을 한 적은 없다. 정말 보수만 주고 끝냈다면 그녀가 그동안 결과적으로 무사히 대륙행을 할 수 있었을까? 오를린 영주 사병들은 그녀를 뒤쫓았고, 남부지역 호위대들도 그녀를 수색했다. 무엇보다 가장 성가신 수색대는 황태자가 보낸 이들이었다. 그들의 뒤쫓음에서 그녀 일행을 나름대로 자유롭게 하려고 자신은 그녀에 관한 각종 거짓 소문을 풀어 수색을 교란했다. 때때론 호위도 붙였는데, 어디 그게 한두 푼이 드는 일이던가. 그것은 단연코 그녀를 지원하고 돌봐주었다고 자부해도 될 일이다. 륀체르는 어깨에 바짝 힘을 주었다. 눈빛이 마치 개구쟁이의 눈빛 같다. 동네 친한 친구에게 맛난 간식을 줬다가 나중에 세 배로 돌려받을 욕심쟁이의 눈빛. ‘너희도 알 테지. 모른 척하기 없기야. 후후.’ 그는 초조한 표정으로 콧노래를 부르면서 곧바로 마리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이 괜찮은지 확인한다. 오랜만에 만나는데 잘 보여야겠지. 이런 식으로 신경이 쓰이는 건 처음이다. 마차에서 구두를 팽개치고 온 것이 우습지만, 그 외에는 훌륭한 모습이다. “흠흠.” 노크를 했다. 그런데 노크를 해도 답이 없고, 이름을 불러도 답이 없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들어가고 보니, 그녀가 잠들어 있다. “흐음.” 깨우고 싶지만, 괜히 거슬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자게 내버려 두었다. 아아. 얼마나 좋은지. 잠든 그녀의 얼굴을 원 없이 바라볼 수 있다. 륀체르의 손은 저절로 마리의 얼굴을 향했다. 그러나 그녀가 작은 몸부림을 치는 순간, 황급히 손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갔다. “젠장!” 예전 같았으면 신경 쓰지 않고 그녀의 이마 정도는 만졌을 텐데, 지금은……. “너, 마리 너 이놈아. 왜 하필 드래곤이랑 사귀느냐고. 슬슬 깨질 때 되지 않아? 나 같으면 그딴 애인, 엄청나게 부담스러워서 도망갈 거라고. 게다가 종도 달라! 파충류라고, 파충류! 그나저나…….” 륀체르는 손이 아닌 눈길로 마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온화한 얼굴을 보고 혼잣말을 하는 것뿐인데, 어느샌가 자신의 표정마저 온화하게 물들어 있다. “내 생일에 와준다고 했으면서 결국 이렇게 만나네. 반가워.” 다시 만난 인사는 이것으로 충분하겠지. 이후에도 시간은 있으니까. 륀체르는 아쉬움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주 느린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의 눈에는 계속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른거렸다. “여전히 99.9 점이라니까.” ***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 황의회에서 등극식에 관한 사항을 논의한 후, 황태자는 일찍 잠이 들었다. 제국 권력의 상징, 제국의 태양이 될 날을 앞두고 그는 지난날을 되돌아보듯 과거의 꿈을 꾸었다. *** 풍요의 평지 로샤타르트. 봄날, 궁정 여인들이 변복하고 단체로 황금보리 호수에서 소풍을 즐겼다. 황태자 비오르틴의 생모인 황후와 그녀의 시녀들, 그리고 호위차 따라온 마탑의 여인들이 함께 꽃과 봄바람을 즐기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들의 화제는 궁정 음악가, 황도의 소문들에서 점점 다른 것으로 옮겨갔다. 여인들은 대륙 순례를 마치고 온 황태자의 경험담을 원했다. 그러나 입이 무거운 황태자는 좀처럼 오를린의 이야기를 하려 들지 않았다. 다만 여인들은 그의 잔잔한 미소로 보아, 황태자가 그곳에서 좋은 일이 있었다고 짐작할 뿐이다. “마탑 분들이 호수에 수성(水性) 라인햐르 꽃을 피웠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 구경하러 가요!” “로샤타르트 남자들도 나와 있다고요!” “어디 따분한 황도 남자들과 얼마나 다른지 한 번 볼까요?” “호호호!” 수다스러운 궁정 여인들은 호수의 마법을 볼 겸 지방 귀족 청년들과 어울리려고 자리를 떠났다. 이제 남은 사람은 비오르틴과 그의 어머니, 황후뿐이었다. 비오르틴은 그제야 숨이 트였다. 황궁을 떠나 지방 귀족처럼 행세하는 건 즐거운 일 같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시녀들의 시선을 받지 않고 어머니와 단둘이 있을 수 있고, 오를린의 아름다운 소녀에 관해 넌지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저기, 어머니.” “음?” “어머니께서는 만약 제가 황의회의 성미에 차지 않는 여인을 반려로 맞으려 하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네가 황의회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위엄을 찾으렴.” 황후는 엄중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속으로 빙긋이 웃음 짓고 말았다. ‘오를린에서 맘에 든 아이라도 만난 게지.’ 오를린의 여인이라면 보나 마나 평민의 아이이거나, 평귀족일 것이다. 어찌 이리 제 아버지랑 똑같은지. 자신 역시 황의회의 입맛에 맞지 않는 평 귀족 출신 여인이었다. 그런데도 남편은 황태자였던 시절 어떻게든 평귀족 출신이었던 자신을 태자비로 맞이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갖은 고생 끝에 혼인은 성사했고, 자신은 먼 훗날 이렇게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아들도 아버지의 길을 밟으려 하다니. 황후는 슬그머니 자기 생각을 알렸다. “… 그리고 내 생각이 뭐 중요하겠느냐. 나는 네 아버지를 보고 불가능은 없다고 여겼단다. 네 아버지께서는 나와 결혼하기 전에도 늘 말씀하셨지.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요.” “그래. 그 말 덕분에 나도 주눅이 들었던 마음을 버리고 나름 기지를 발휘해 보았었다. 그 기지가 네 아버지의 계략, 계략이라고 하니 말이 좀 이상하구나. 하여튼 네 아버지의 계획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결국에 우리는 부부가 되었지……, 그러니 비오르틴, 무엇이든 네가 마음먹은 대로 이뤄질 거다.” “예.” “이제 슬슬 오를린에서 만난 여인에 관해 이야기해주지 않겠느냐?” 비오르틴은 수줍게 웃었다. 황후는 아들이 그렇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하지만 어쩐지 오를린 여인에 대한 대답은 듣지 못할 눈치였다. 사실 이미 비오르틴은 무언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 그 애요, 참 재미있는 아이예요. 황궁의 여인들이랑은 다르죠. 무려 드래콘을 잡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아이니까요. 생김새는 또 어떤데요. 보고 있으면 활기가 돌아요. 목소리는 맑고 힘이 있어 또렷하고요, 바다와 숲을 섞은 듯한 눈동자를 보면 잡념이 모두 사라질 정도예요. 금발 머리도 황도에서 한껏 멋 낸 부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요. 그 아이는 마치…… 나무 여기저기를 바쁘게 날아다니는 황금방울새 같다, 그 표현이 적당할 것 같아요. 방울새처럼 언제나 바쁘죠. 온갖 위험한 마력생물들이 들끓는다는 소용돌이 숲을 제 앞마당처럼 다니면서 자기만의 실험을 해요. 흑마법이니, 연금술이니, 하면서 말이에요. 동물들을 제 친구처럼 데리고 놀고, 시냇물을 제집의 욕조처럼 다루죠. 노래는 또 얼마나 경쾌하게 잘 부른다고요. 이렇게 되새기다 보니…… 또, 또 오를린에 가고 싶습니다. 또 그 애를 만나고 싶어요. 며칠째 그 아이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가슴이 타네요. 어머니. 아버지도 이러던 때가 있었을까요. 아버지는 저와 같은 병을 앓을 때 대체 어떻게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저는요. 저도…… 아버지가 그러했듯, 그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황후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한참 동안 오를린의 소녀를 떠올리며 소리 없는, 오직 마음의 소리로만 이뤄진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주위가 흐려지며 시간이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암흑 지형…인가?’ 거대하고도 공허한 어둠이 생겼다. 공포감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데, 새하얀 연기가 샘솟으면서 검은 드래곤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한다. 꿈 깨. 네가 말하는 그 여자가 과연 궁에서 황후로 살 수 있을 것 같나? 이어지는 현실의 조각들. 삶은 언젠가 반드시 퇴색되고 만다. 현실의 조각들이 그걸 증명했다. 그리운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퇴색하신 아버지는 간악한 할데바인의 조카를 새 아내로 들이셨다. 오를린에서의 추억은 잊고 묻어 둬야만 하는 기억으로 바랬고, 자신의 주위에는 온통 자신을 물어뜯을 생각만 하는, 그저 겉모습만 화려한 짐승들만이 남았다. 살아야 한다. 모두가 지켜보는 투명한 유리 감옥 같은 권력의 무대 한중간에서,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자기편을 만들어갔다. 검황의 아들 헤그와 신뢰와 우정을 쌓고, 바너의 야심자를 황태자의 권한으로 도와 길드 마스터로 끌어올리며 제 편을 만들었다. 황도에서 세력을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데만 바쁘다 보니, 어느새 자신은 추억 따윈 가물가물해진 청년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황태자비 간택전. 다시 떠오른 과거의 추억 조각을 짚어 오를린의 신부를 맞이했다. 다시 본 그녀는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기대했던 것보다 다른 모습이긴 했다. 잘 자라주었지만 어릴 적 모습과는 어딘가 다르다. 당당해도 뭔가 모자란 당당함이었고, 활짝 웃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두려움을 가리려고 애써 과장하여 웃는 웃음일 뿐이었다. 그런 첫사랑의 모습에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 아내가 된 그녀를 안고 또 안아도 갈증을 채울 수 없는 생활에 염증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훗날 아내가 된 그 여자는 결국…… 첫사랑이 아닌 그녀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사실. 그리고 진짜 첫사랑인 그녀는……. 다시 검은 드래곤이 활개를 치며 추억 조각을 모두 부수어버렸다. 감히 네까짓 게 껴안고 살 게 아니라는 듯 사납고, 거세게. 비오르틴은 꿈속에서 팔을 허우적거리며 조각을 잡으려 했다. 마리니시네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깃든 파편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안 된다… 가지 마! 가면 안 돼……!”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을 땐, 참을 수 없는 갈증만이……. *** 트리아노네. 로테는 아니카를 따뜻한 물에 손수 씻긴 후, 젖을 먹이고 눕혔다. 산뜻하고 배가 부른 기분에 아니카는 놀고 싶은 모양이다. 제 눈을 가린 손수건이 답답한 듯 긁다가 어미의 말소리를 들으면 까르르 웃음소리를 흘렸다. 로테는 등극식을 앞둔 와중에서 그 웃음소리를 들으면 모든 피로가 싹 가시는 듯하다. 동시에 미안한 기분도 들었다. ‘이런 너를 두고 나는……. 아니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아니카를 보면 볼수록 독해져야겠다는 마음만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황태자가 왔다. 시종도 없이 혼자 온 그의 표정. 눈동자, 걸음걸이 모두 예사롭지 않았다. 로테는 버릇처럼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이미 비오르틴의 손은 그녀의 목을 감고 있다. “전….” 로테는 전하라고 부르려던 것을 마치지 못했다. 황태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머리 뒤통수를 쓰다듬는 손길의 감촉도 이상하다. 마치 금방이라도 깨부술 듯 힘이 들어가다가 다시 힘이 빠지는, 그래서 더 긴장되게 하는 손짓이다. “전하.” 로테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더욱 뒤로 걸었다. 그 순간 비오르틴은 그녀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입술을 가까이 닿을 듯하다. 비오르틴은 금방이라도 그녀를 덮칠 사람처럼 심상치 않은 눈길로 그녀의 얼굴 전체를 샅샅이 보았다. 머리카락은 가을 보리밭을 보는 듯 윤기가 나고 눈동자는 바다와 숲을 합친 듯 청아하다. 뺨에 감도는 생기와 입술의 선명함. 도저히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인의 모습이라 생각할 수 없다. 이 모든 게 동한의 조영에서 출산 전의 몸으로 보기 좋게 되돌린 덕분이지만, 비오르틴은 그런 사실은 알지 못한다. 다만 첫사랑과 똑같은 피사체가 여기, 이곳에, 아내로 있다고만 생각할 뿐. 로테는 최대한 당황하지 않으려 그와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이제 더는 그에게 아쉬운 마음이 들 까닭이 없다. 죄인처럼 주눅이 들어야 할 이유도 더더욱 없다. 검은 드래곤이 제국민에게 절대적 힘의 상징으로 먼저 각인되는 게 두려워서 등극식을 서두르는 겁쟁이 황태자 앞에서 대관절 자신이 전전긍긍해야 할 이유가 뭔가. ‘당신이나 나나 피차 동등한 황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로테는 더욱 고개를 치들고 비오르틴을 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쥐는 비오르틴의 손에 힘이 빠졌다. 도발적인 아내의 눈에서 아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보이는 듯하고, 그것은 그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잠시 흐려지는 비오르틴의 눈동자가 이상하여 로테가 미심쩍게 보자, 그제야 비오르틴은 황급히 뒤돌아섰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뒤돌아서는 모습이다. “네 언니에게 전해라.” “……?” “아니카를 살려줘서 고마워한다고. 그리고.” 로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비오르틴은 뒷말을 흐리며 그곳을 떠났다. “…미……아니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주말 되세요! 00108 8. 삶, 삶, 삶 =========================================================================                            얼음도시 시귀르의 중심지 유르. 안식의 겨울의 가장 큰 방. 이 방은 오늘 륀체르 사파이어 개인 손님의 응접실로 이용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때와 같이 시종이나 음악가 등은 함께 하지 않는다. 그만큼 극비로 해야 하는 모임이기 때문이다. 황도 로귀하르트에서 등극식이 성대하게 치러지는 동안, 이곳에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등극식과는 무관한 화제를 이야기하리라. 널찍한 식탁 가득 질 좋은 술과 고급스러운 음식들이 차려졌다. 륀체르가 고귀한 드래곤 일행에게 대접하는 것들이다. 식량이 귀한 냉지에서 이토록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 식탁을 본 마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이 음식들 좀 봐! 이곳, 자선 사업하는 곳으로 아는데…… 저 구두쇠가 사람들한테 무료로 나눠주려고 늘 이런 재료 쟁여두는 거야? 구두쇠가 웬 일이래!’ 별일이 다 있다는 듯 보는 눈길에 륀체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마리는 그가 정말 본받아야 할 부자의 표본이라고 여기며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흡사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을 격려하는 듯한 손짓이다. 륀체르는 그 손짓의 속내가 궁금했다. “갑자기 왜 이래?” 마리는 생각하던 것을 그대로 말했다. “이제야 알겠어. 네가 왜 구두쇠처럼 구는지.” “음?” “사실은 이 좋지 않은 환경에 사는 사람들에게 넉넉히 베풀려고 다른 것에는 돈을 안 썼던 거지, 그렇지? 이 음식들 좀 보라지. 이 음식재료들을 좀 보라고. 추운 곳에서 이런 음식을 뚝딱 요리해 내온다는 건 언제나 이런 재료가 가득 쌓여 있다는 뜻일 테고, 그건 길드장 당신이 사람들에게 늘 베풀 준비가 되어있단 것, 아니야?” “하하…….” 륀체르는 어이가 없다. 이 아가씨가 어디 동화책에 나오는 마음씨 착한 부자, 굶주린 이들에게 맛좋고 기름진 스프를 마구 퍼주는 그런 부자를 그리나 본데…… 천만에. 그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마리를 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만졌다. 다정한 태도이긴 하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침이 없다. “오, 마리. 달콤하고 다정한 그림은 누구나 그리지. 그따위 초 단순한 사고를 하는 아가씨 주제에 어떻게 드래곤을 하수로 부리는지 신기하구나.” “뭐엇?” “이 사파이어 님께서 아주 원색적으로, 너무 원색적이라서 유치하게 들릴 정도로 쉽게 가르쳐주지.” “뭘 가르치는데?” “넌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세상에 네가 말하는 마음씨 착한 자선 사업가는 없어. 그러므로 나도 그런 자선 사업가가 아니지. 이 건물은 어디까지나 내게 들어오는 검은 자금을 세탁하려고 만든 기관에 불과해. 그러므로 빈곤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질 좋은 식재료를 언제나 가득 쌓아놓는 일 따윈 없다고. 알겠어?” 마리는 발끈했다. “어머! 당신이 그런 뻔하디뻔한 부자인 줄 몰랐네!” 륀체르는 그런 마리가 재미있어서 더욱 과장된 연기를 했다. “오호! 이제라도 아는 게 다행이군. 나는 뻔하디뻔한 부자랍니다. 광대들이 자주 연기하는 흔하디흔한 악독 부자이기도 해요! 호호호!” “뭐가 잘났다고 말을 그런 식으로 하지, 앙?” “으흠. 내가 뭐가 잘났냐고? 생각해 봐. 뻔하디뻔한 부자라 하지만 어쨌든 무수한 거지보단 잘났기에 이 자리에 오른 거라고. 그것만으로도 내 잘남은 증명돼야 하는 거 아닌가. 무엇보다 나는 부모를 잘 만난 게 아니라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왔지. 그 사실에 주목하자면 나는 더더욱 뛰어난 부자지. 이쯤 돼서 눈치 챘겠지만, 이건 내 자랑이야…… 참, 그리고 자꾸 나보고 구두쇠, 구두쇠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리니시네 너만은 그런 말을 하면 안 될 거야. 양심적으로 이제 슬슬 알 때도 되지 않나, 응?” 륀체르는 마리의 두 뺨을 두 손으로 쭉 늘어 당기며 아이에게 장난치듯 했다. 그의 눈이 다정하고도 사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내가 그동안 너한테 들인 돈이 얼만데. 마리는 그런 신호를 충분히 알아듣고 있지만, 모른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륀체르는 마리가 했던 베풂이 어쩌고 하는 말이 다시 생각해도 웃겨 혼잣말했다. “세상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도 모르면서 정복을 하겠다니, 원. 애 같아서 귀엽잖아.” 마리는 눈썹을 V자로 만들고 아랫입술을 한껏 깨물었다. 그 모습을 만약 하이너가 보았다면, 아가씨께서 엄청나게 화가 나셨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아. 결국, 륀체르도 다른 녀석들이랑 똑같구나!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그 재산을 합하면 대륙 부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인간일 진데, 그런 중요한 위치에 선 자가 어찌 이리 검은 자금에 관해 당당하게 말하는 걸까. 보통, 숨기는 게 정상 아닌가? 자기를 너무 믿는 건지. 아니면 자기가 그다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편하게 말하는 건지. “마리. 만에 하나 진짜 대륙을 정복하더라도 싸구려 적선은 하지 말라고. 알겠어, 귀염둥이?” “…….” “통치에 한해선 내게 많이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군. 후후.” ‘흥. 돈 좀 만진다고 자기가 통치를 운운해? 가당찮아.’ 마리는 륀체르가 가르칠 통치란 것을 안 봐도 훤히 알 수 있다. 권력을 쥔 자들이 피지배층의 삶에 관심이 없는 거야 잘 안다. 적선이 다 무엇인가. 제공한 노동력에 타당한 임금을 지급하는 것조차도 인색한데. 그들이 관심 있는 것은 제국민들이 어떻게 하면 더 괜찮은 환경에서 살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기들의 힘을 더 키우고 지킬 수 있느냐, 이것뿐이다. 행여나 제국민들이 배가 부르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그들은 더 큰 삶의 만족을 찾을 것이고, 만족하게 되면 이상향의 질을 따질 것이다. 종국에는 권력자들의 입지를 줄이는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 그렇기에 권력자들은 그런 현실이 오기 전에 미리 견제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에게 들어오는 검은 자금을 세탁하려고 이 건물을 지은 륀체르도 그렇고, 황도의 소황이라 불리며 제 입맛에 맞게 권력을 휘둘러왔던 할데바인도 그러했다. 어디 그뿐인가. 당장 로귀하르트의 황태자, 아니, 이제는 등극식을 마쳐 황제에 오른 비오르틴을 보라. 지금껏 그는 개인적인 욕망으로 다른 권력자들을 해치워왔지, 결코 제국을 더 좋게 만들려고 싸운 게 아니다. 그가 등극식을 서두르는 것은 자기보다 더 강한 드래곤이 제국 권력의 상징이 되는 것을 미리 막으려함이 아니던가. 다른 역대 황제들도 마찬가지다. 권력자들은 늘 견제한다. 늘 인색하고 억압하고 군림하려 든다. 자비와 평화와 제국민의 생활상 따윈 전혀 그들의 중요 문제가 되지 못한다. 지금껏 천 년이나 이어진 제국에 조금의 발전도 없다는 게 그걸 증명했다. 그렇다면 제국민으로서 생각할 때, 이런 현실에 마땅히 분개해야 하지 않을까. 사욕을 채우려고 권력에 서서 만인을 지배하려 드는 이를 지배자로 모셔도 되는지……? ‘너희는 모두 죽어야 해.’ 차라리 그편이 이 대륙, 이 대륙의 모든 인간이 한 단계 더 진화한 세상에서 사는 길이라고 여긴다. 마리는 어둡고도 무거운 생각을 가리듯 상냥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륀체르.” “응?” “잘 들어.” “난 언제나 너의 말은 잘 듣는데? 다만 잘 듣기만 하고 동의를 안 할 뿐이지. 으하하하!” 마리는 발꿈치를 높이 들어 올려 륀체르의 높은 어깨에 가느다란 두 손을 갖다 댔다. 아아. 이 부자님 얼굴 좀 보라지. 아름답고 고귀하고 고생 따윈 모르는 듯 살아온 매끈한 도자기 같은 얼굴. …… 이런 얼굴은 그냥 장식품처럼 있는 게 좋다. 마리는 륀체르에게 격려하듯 협박했다. “부자만 하렴. 다른 건 되지 말고 되려 하지도 마. 그냥 부자로 있어.” “무슨 말이야?” “부자 아닌 다른 거, 다른 권력을 탐하면, 이 마리니시네 님께서 가만두지 않을 거야! 호호호!” “뭐래….” 대충 대꾸하고 있지만, 지금 륀체르는 다른 때보다 비교적 진지한 마리의 얼굴에 놀랐다. 과장을 보태자면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고 해야 할까? 그는 찝찝한 기분을 지우려고 술병에 손을 댔다. “먹기나 하자고. 네 드래곤 기사님 기다리다가 뱃가죽이 등짝에 달라붙겠어.” 그가 먼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리도 배가 고픈지 신선한 채소를 감싼 밀쌈에 손을 가져갔다. 한 입 베어 무니 입 안 가득 봄의 기운이 퍼지는 듯 신선함이 몰려왔다. 먹음직스럽게 꿀꺽 삼키면서 마음을 단단히 먹어본다. ‘이런 맛 좋은 건 모두가 먹고 살아야지! 아무렴! 마법 만능의 제국에서 그걸 못한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그러다가 문득 뒤늦게야 의문이 들었다. 그녀는 얼음을 동동 띄운 물을 한 잔 마시고 음식을 삼킨 후 물었다. “그럼 어쩌자고 이런 음식들을 준비한 거야? 신선한 음식재료 같은 것을 쌓아두는 게 아니라면 이건 언제 다 준비한 거고, 왜 준비한 거지?” “정말 몰라서 물어?” “아하! 나 때문에?” 륀체르는 하마터면 솔직하게 ‘당연한 거 아냐!’하고 대답할 뻔했다. 하지만 참았다. 그는 때마침 방으로 들어서는 하이너를 보고 이렇게 대답했다. “너 때문이라니. 저기 오시는 귀하신 손님분 대접하려고 그러지. 어서 여기 앉지.” 륀체르는 직접 의자까지 내어주며 하이너를 맞이했다. 하이너는 호의를 미심쩍게 여기며 앉아서 아가씨께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낮고 상냥한, 그래서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목소리가 나왔다.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까칠하고 무례하던 호위기사의 모습은 대관절 어디에? 마리는 이질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잘 잤어.” “다행이군요.” 어색한 분위기는 알게 모르게 궁금증을 자아낸다. 륀체르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하이너의 잔에 술을 따랐다. 곧 륀체르가 바너에 유행하는 극단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참, 요새 오슬의 수인족 출신으로 꾸며진 극단이 제국을 돈다던데 말이야. 그들에게도 예술가의 피가 흐르는지 몰랐다니까…….” 중요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음식에 곁들이는 배경음악의 용도로 나누는 유형이다. 그 소음 속에서 하이너는 내부의 다른 인격들과 다투느라 바쁘고, 그들이 가진 각각의 야망을 다스리는 것도 바쁘다. 주로 슈테반과 마황이 다투면 얌전히 있던 마르틴이 나와서 둘을 중재하다가 그것도 안 되면 하이너가 나서는 모양새다. 더 큰 마력을 달라는 슈테반과, 암흑 지형에 가서 세상의 비밀이나 파헤치자고 강력히 주장하는 마황, 둘을 말리다가 뜬금없이 ‘영혼이 소멸하지 않았으니 육체만 있으면 다시 살 수 있는 거 아니냐?’며 삶을 희망하고 집착하는 마르틴, 그 셋의 인격을 감당해내느라고 허우적거리는 하이너의 표정을 보고 있기 힘든지 마리가 륀체르를 보았다. “아무튼, 고마워. 륀체르. 내 일행을 이렇게 거절하지 않아 줘서.” “무슨 소리. 당연한 일 아닌가. 그나저나 잘 됐지. 마침 드래곤을 내 패로 끌어들이려 했거든. 얼마나 잘 된 일이야.” 륀체르는 스리슬쩍 ‘이미 드래곤 너는 내 편이 되었어!’라고 옭아매려 했다. 그러자 하이너가 아주 피곤한 표정이 되었다. 륀체르의 편에 서서 여러 일을 했지만, 표면적으로 같은 패라고 단언할 관계는 아닌 듯한데…… 단도직입적인 질문이 던져졌다. “난 당신의 패가 된다고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러자 륀체르가 도리어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 “하하. 이상하군. 내 패도 아닌데 왜 내 건물에서 나의 대접을 받지?” 하이너는 담담히 대꾸했다. “네 그늘 외엔 숨을 곳이 없었다.” “없다니?” “나는 아가씨의 호위기사지. 그리고 연인이다. 언제나 이분께서 안전하고 편안하고 아늑하게 지내셔야 할 곳을 찾아 모셔야 해……, 그리고 드래콘의 몸을 회복하려면….” 그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잠시 아가씨의 눈치를 보았다. 그의 말은 중단됐다. 여전히 륀체르는 하이너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다. 어찌 보면 ‘고작 그런 편의를 위해 감히 날 찾았느냐, 내 편에 서지 않을 거라면 이건 좀 무례한 호의호식이 아니냐?’라고 따지는 표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이너는 그런 의뭉스러운 시선을 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 너무나 당당해서 오만하기까지 한 눈으로 륀체르를 본다. 그러자 서서히 륀체르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인정하긴 싫지만, 인간 아닌 초월 생물의 기에 지고 말았단 게 맞겠지. ‘뭐야. 지금 제가 드래곤이라고 재는 거야? 아주 미친 듯이 센 생물이면 내 편의를 마음껏 이용해도 되느냐고!’ 그러다가 륀체르는 갑자기 입가를 올렸다. ‘후우, 그나저나…… 호위기사로 머무르길 원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야.’ 이 시골 청년은 최강의 존재가 되어서도 여전히 제 아가씨의 호위기사, 연인으로만 머물러있길 원한다. 이런 무욕한 성향이란 게 얼마나 고마운가. 하이너가 할데바인 대공과 같은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다면, 분명 할데바인이 그랬던 것처럼 대륙을 탐욕스럽게 지배하려 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륙은 어떻게 될지 장담하지 못하리라. 륀체르가 그러한 생각을 하며 포크를 집어 드는데, 마리가 발랄하게 웃으며 물었다. “길드장. 당신은 내 호위기사를 당신 편으로 들여서 뭐할 생각이었어?” 륀체르는 윤기 나는 소스가 흘러내리는 고기 조각을 썰어 먹었다. 그리고 향긋한 술을 음미하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마리 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 세상을 먹을 작정이거든.” 그의 푸른 눈이 야심을 담아 고요하고도 강하게 빛났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주말 되세요! 00109 8. 삶, 삶, 삶 =========================================================================                            시선이 식탁 위의 장식꽃을 향하지만, 실은 장식꽃을 보는 게 아니라 먼 미래를 보는 듯하다. 하이너는 그런 륀체르의 태도에서 지금껏 보았던 것과는 다른 위험한 분위기를 느꼈으나, 이내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그리 큰 신경을 쓸 정도로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리는 하이너와 달리 륀체르의 말을 시답잖은 농담으로 여기며 투덜거렸다. “뭐얏! 이봐, 길드장! 내가 아까 당신보고 뭐라고 했지? 그냥 부자로 있으라고 했잖아. 그냥 부자만 하고 다른 건 하지 말라고 했잖아! 세상을 먹겠다니, 싫다! 하지 마! 세계 정복 같은 거 하지 마!” 륀체르는 혀를 쭉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싫은데? 내가 세상을 먹을 건데?” 마리가 의자에서 일어나 목에 핏대를 세웠다. “뭐래! 내가 먹을 거거든?” 그러자 륀체르도 함께 일어나 장단을 맞춰 목에 핏대를 세웠다. “네가 통치의 기본도 모르는데 어떻게 먹어?” “당신한테 그딴 평가 듣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당신, 돈 좀 있다고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는 알겠지만, 단지 돈 따위로만 세상을 당신 맘대로 할 수는 없을 거야!” “그럼 금권 말고 또 뭐가 세상을 정복할 수 있지? 역대 마탑의 마법사들도 돈 때문에 움직였던 것을 알고 있긴 하나? 무조건 돈을 돈 따위라 운운하며 하찮게 보는 버릇은 좀 고쳐. 돈이야말로 모든 것의 척도라고. 그리고 그러는 너야말로 세상을 먹는 게 쉬워 보이나? 아, 혹시 무적의 드래곤을 기사로 부려서 만사가 그렇게 자신만만한가?” “웃기고 있어! 난 내 기사가 드래곤이 되기 전부터 자신만만한 사람이었다고!” 유치한 싸움으로 번지는 느낌에, 하이너가 그들을 멈추게 하려고 륀체르에게 질문했다. “세상을 먹을 작정이라니,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다들 뭔가를 정복해야 한다고만 생각할까. 주어진 삶에 만족하는 법 따윈 모르는지? 요즘 들어 평온한 일상의 소중함이 절실하고, 그걸 간절히 원하는 자신을 느낀다. 그래서인지 아가씨나 륀체르가 야망하는 것을 도무지 공감할 수 없다. 륀체르는 단순하게 정리해서 대답했다. “왜냐니. 누구도 내게 달려들지 못하게 하고 싶으니까.” 누구도 달려들지 못하게, 누구도 자신의 자리를 넘보지 못하게, 누구도 자기를 위협하지 않게 하려고……. 그래서 세상의 절대자가 되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혹여나 그때 누가 달려든다 해도 뭐 어떠랴. 적어도 바너의 얼간이 길드마스터들의 음모에 휘말리는 일보다 훨씬 그림이 좋겠지. 증오와 시기의 대상이 되는 것에도 미학이 있는 법이거든. 작은 그림 속 분쟁은 사람을 초라하게 하지만, 큰 그림 속 분쟁은 하나의 역사, 전설이 된다고. 륀체르는 그런 생각에 싱글벙글 웃음 지어 보였다. 하이너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누가 좀 달려들면 어떻지?” 륀체르는 웃음을 지우고 정색하며 대답했다. “성가시잖아. 귀찮다고!” “여태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나?” “지긋지긋하다고.” 하이너는 시선을 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한참 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그게, 인생 아닌가.” 그러자 마리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하이너는 자기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지긋지긋한 것, 그게 인생이란 말은 즉 아가씨와 함께 한 날들을 지긋지긋하게 정의한 것이나 다름없다. 진심은 그게 아닌데 말이다. 그는 큰 실례를 했단 생각에 정정했다. “내 말은, 지긋지긋한 게 인생이란 말이 아니고…… 그 어떤 삶을 봐도 좋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나쁜 일도 겪게 되는 그런 순환을….” 륀체르가 그 말을 끊으며 가당찮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오! 무적의 드래곤에게 인생론을 듣고 싶지 않다고. 현실감이 없단 말이다. 이제 쓸모없는 이야기는 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어. 내 패가 되어달라는 부탁까진 하지 않을게. 그동안 너희를 친애하며 돌봐준 사람으로서 감히 부탁할 테니 그것만 들어줬으면 좋겠군. 그러니까, 친구로서, 들어달란 말이야.” “무슨 부탁?” 륀체르는 하이너의 눈을 마주하며 간절히, 그리고 진지하게 부탁했다. “포르투바 녀석들이 로귀하르트 작자들(황족, 황제가 된 비오르틴을 뜻함.)과 손을 잡지 못하게 해줘.” “더 자세히 말해보겠나?” 륀체르는 실렌틴 광산 재건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재건 자본이야 자기가 대면 되지만, 기술자인 포르투바가 변덕을 부렸다. 자신이 아닌 황족과 손을 잡는다니. 세상의 절대자가 될 야심이 있는 자신이 황가에 이득이 가는 일을 멍청히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설사 황태자 아니, 이제는 황제가 된 비오르틴이 예전에 자기를 도와준 은인이라고 해도. “마리. 하이너. 너희가 좀 도와줬으면 해. 비오르틴이 기갑체 제조 공정을 장악하게 되면 마력기갑체를 제멋대로 다룰 수 있는 이는 대륙에서 오직 그 하나뿐이 될 거야. 독재의 밑바탕이 다져지게 되는 셈이라고.” 마리는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했다. 절대적인 권력을 위해 황도의 세력가들을 차례로 해치운 비오르틴이 권력의 정점, 허울뿐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정점에 올랐을 때, 독재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다. 그리고 마리에겐 그런 이유 외에도 황제를 견제할 이유는 충분히 있다. ‘비올 그 녀석이 다 해먹게 둬선 안 되지.’ 륀체르가 말을 이었다. “이번 한 번만 부탁하지. 우리가 협력자로 일한 건 처음이 아니잖아. 포르투바 그 녀석 아니, 포르투바 그 부자들에게 드래곤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최면 마법을 걸어서라도 그들과 로귀하르트 작자들이 힘을 합치지 못하게 하자고…… 이 대륙, 이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 말이지.” 마지막 말-대륙의 평화-에서 가식을 느꼈지만, 마리는 개의치 않고 하이너에게 권했다. “하이너. 나도 륀체르의 생각에 동의해. 황제가 마력 기갑체 부품 제조 공정의 전부를 독식하면 독재는 피할 수 없어. 제국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황제가 아닌 륀체르에게 포르투바의 기술력이 협력 되는 게 옳아.” “제가 보기엔 독재의 위험성은 사파이어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만.” 마리는 물을 한 잔 마시며 본격적으로 이야기했다. “글쎄? 태생부터 고귀하신 황족들과 이익에 충실한 장사꾼 중 누가 더 앞일을 정확히 계산하는 데 능할까? 황족들은 저들의 미래에 종종 ‘제국민들은 우리에게 무조건 충성해줄 거다!’라는 망상을 집어넣고 무리하게 나가다가 반역이란 철퇴를 맞지만, 장사꾼들은 저들의 계산에 절대 망상 따윈 집어넣지 않아. 그들은 언제나 순익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지. 특히나 사파이어 길드장 같은 큰 장사꾼은 더더욱! 생각해 봐. 비오르틴이 기갑체 제조 공정 전반을 장악해버리고 그것을 제국 정부의 신성한 일이라고 포장하면 역풍을 맞기 쉽지만, 륀체르가 주도자가 됐을 땐 이야기가 달라져. 각 세력은 저들이 갖춘 능력만큼이나 륀체르에게서 기갑체를 정비할 부품을 살 테고, 륀체르는 순수한 상인의 정신으로 그 거래를 할 테지. 그렇게 되면 결국 마력 기갑체는 힘을 원하는 사람들이 골고루 운용할 수 있을 것이고, 각 세력 간 힘의 균형은 맞춰질 거야. 적어도 황가의 독재보다는 훨씬 그림이 좋지 싶은데.” 하이너는 아가씨의 말에 오류가 있다고 여겼다. “힘을 원하는 사람들이 골고루 운용할 수 있을 것이고…… 이상하군요. 애당초 각 세력이 마력 기갑체를 운용하지 못하게끔 부품 거래를 중단하게 해달라고 사파이어에게 부탁하신 분은 아가씨가 아니었습니까?” 마리는 부정할 수 없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과거 실렌틴 광산이 폭파된 이유를 되짚어 보자면 자신이 륀체르에게 했던 부탁, 즉 부품 거래를 중단하게 해달라고 했던 사실을 외면하지 못하리라. 하이너는 시선을 내리고 진지하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장황하게 말씀하시지만, 결국에는 비오르틴과 포르투바가 손을 잡는 것이 그냥 싫다고 우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아가씨께서 황태자 아니, 이제는 황제가 되어버린 그 사람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 그 사람을 견제하려고 내리시는 명령이라면 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는 아가씨께선 사사로운 복수에 휘말리기보다 제국, 대륙을 생각하여 움직이는 분이시고, 저는 그런 아가씨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아가씨, 제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으응……?” “포르투바를 사파이어 길드장과 손잡게 하려는 의도의 진심, 말씀해달라고 하는 겁니다.” 마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마음 같아서는 륀체르처럼 ‘대륙을 위해, 이 대륙의 평화를 위해’ 이 일을 하려 한다고 연기라도 하고 싶었으나, 정말 대륙의 평화를 위한다면…… 마력 기갑체 공정 따위 모조리 박살 내는 게 옳다. 그런 공정을 만들려는 움직임 자체도 무효화시켜야하겠지. 그래. 결국, 자신도…… 비오르틴에게 분노하고 복수를 원하여 륀체르의 편에 서려는 것뿐이리라. 하지만 자신을 속이는 짓은 하고 싶지 않고,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호위기사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고 싶진 않다. “아가씨?” “그래. 인정할게. 솔직하게 말하자면 황도의 그 xx에게 가장 강력한 x을 먹이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미안. 하이너. 내 개인적인 원한으로 대륙 정복이라는 대의에 스스로 누를 끼치려 했네. 나답지 못하고 얼간이 같은 모습이었어. 사과할게.” 륀체르가 짜증이 난다는 듯 포크를 탁! 소리 내며 내렸다. “뭐야, 마리! 네가 그렇게 말하면 드래곤이 내 부탁 안 들어줄 거 아니야! 아우, 짜증나!” 그는 아이처럼 울상을 지었고, 하이너는 여전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다. 마리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호위기사의 달라진 태도 변화 때문에 심란한 모양인지, 굳은 얼굴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응접실을 나서며 차갑게 말했다. “그래. 사실 이 대화에 나는 필요 없을 것 같아. 드래곤께서 알아서 하시는 게 옳지.” 어차피 륀체르가 필요한 것은 그녀의 힘이 아니다. ‘너희’라는 말을 쓰며 ‘너희에게 부탁한다.’고 표현하지만, 결국에는 그녀가 아닌 최강 생물 드래곤에게 부탁하는 것이지 않은가. 그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자, 륀체르는 어색한 분위기에 두 손을 하늘로 들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복잡한 여자의 속을 잘 모르긴 해도, 저 아가씨가 호위기사의 말 때문에 불편해 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럴 땐 같은 남자로서 ‘따라가서 달래줘야 하지 않느냐?’고 조언해야 할 테지만, 륀체르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자기가 마리를 달래러 갈 뿐. “참! 마리니시네! 요새 왜 내가 준 반지 안 해? 앙?” *** 혼자 남은 하이너는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올렸다. 손이 내려가고 그의 눈이 드러났다. 어느샌가 새하얘진 눈은 하이너의 말이 아니라 슈테반의 눈을 하고 있다. 슈테반은 하이너의 내부에서 흡마귀의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근처에 마리아 그 계집 있지 않아? 흐흐…… 정말 맛있을 텐데. 작은 마력이지만 그 애는…….」 더 듣기 싫은 하이너는 서둘러 제 방으로 갔다. 자신에게 스스로 수면 마법을 걸어 당분간 깨지 않을 작정이다. 그런데 그 직전, 그의 방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왔다. 노크를 조심스레 하고 들어온 이는 바로 마리아다. “무슨 일이지?” 마리아는 슈테반에게 마력을 빼앗기고 회복하는 중이라 다른 때보다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자그마한 목소리를 겨우 냈다. “부탁이 있어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에 하이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서로를 특별히 크게 의식하지 않는 듯 굴지만, 실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이 긴장하고 있다.“뭐지, 부탁이란 게?” “…… 제가 마력 쓰는 게 힘들어서 그러는데, 혹시 제게 수면마법을 좀 걸어주실 수 있으세요?” 순간, 하이너는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이 아이가 이런 부탁을 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이 아이에게 수면마법을 몰래 걸어뒀어야 했다. 마력생물들이 같은 마력생물들에게 발정하는 시기가 코앞에 닥친 요즘, 성적으로 곤란해지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다. 이 소녀도 그런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다. 당연히 가까운 곳에 있는 가장 강력한 마력생물, 드래곤을 의식하고 드래곤이 뿜어내는 생기에 반응할 것이리라. 저 아이도 서로 의식하는 것이 불편하기에 수면마법을 해달라고 하는 것 아닌가. 저 아이의 입으로 이런 민망한 부탁을 하게 해뒀어야 했는지…… 하이너는 자기가 배려가 부족했다고 후회했다. 그는 곧바로 마리아에게 수면마법을 걸어주고 일렀다. “오 분. 오 분이 지나면 기절하듯 잠들게 될 거다.” “감사합니다. 그럼.” 반나절 정도 자게 해두었다. 온종일 자게 해버리면 마리아의 몸에 좋지 않을 것 같기에, 반나절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깼을 때…… 자기가 이곳에 있으면 피차 불편할 테니……. ‘어디 가 있든가 해야겠군.’ 하이너는 마리아가 깨기 전에 어딘가 피해 있어 주기로 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0110 8. 삶, 삶, 삶 =========================================================================                            방에 들어간 마리는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들어간 방의 문은 마치 철벽처럼 굳게 닫혀 있다. 그것을 보며 륀체르는 한숨을 쉬었다. 어째 이 문이 그녀 마음의 문으로 보이는 것은 착각인가? 문 너머에는 그녀, 그녀는 아마도 침대에 엎드려 소리를 지르고 있을 것이다. 짜증 나서 지르는 소리,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지르는 소리. 천을 뚫고 나오는 탁한 목소리가 그것을 증명한다. 륀체르는 무엇이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 대략은 알고 있다. ‘망할 놈의 기사 놈 같으니.’ 그녀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던 호위기사였다. 까칠하게 굴긴 해도 결국에는 아가씨의 명령대로 움직여 주었는데……. 그랬던 그가 조금 전 응접실에서 보였던 모습은 어떠한가. 평소처럼 까칠하지 않은 것도 이상하고, 아가씨의 명령을 독자적으로 판단하여 면전에서 정중하게 말하는 것도 낯선 모습이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너무 진지해서 아가씨를 무안하게 했다는 것, 그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겠다. 마리라고 자기가 개인적인 원한으로 비올에게 복수하려고 떼쓰듯 일을 밀어붙인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하고 있을까. 전혀. 그녀도 자기 마음의 사사로운 조각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호위기사는 그냥 늘 그랬던 것처럼 장난처럼 투덜거리며 ‘사악하시다.’하고 농담으로 대꾸해줬으면 될 일이었다. 절대, 그렇게 정색하고 진지하게 아가씨의 의도를 물어선 안 되었다. 이것은 그가 아가씨의 명령을 받드느냐, 마느냐와는 관련이 없다. 순수하게 그들 관계의 일상성이 깨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래서 어린놈들은 안 된다니까. 최강의 드래곤이면 뭐해. 아가씨의 충실한 호위기사입네 하면 뭐하느냐고. 여자를 모르다니.’ 그런 생각을 하는 륀체르도 사실은 난생처음으로 여자를 달래는 거나 마찬가지다. “마리! 이봐, 와트프라우어 부인! 왜 내가 선물해준 반지에 관해선 대답이 없냐? 그리고 이런 데 와서 꿍하게 처박혀있기엔 시간이 아깝지 않아? 나가서 눈사람이라도 만들며 놀자고. 왠지 너랑 놀면 나이 따위 싹 잊고 정신없이 즐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 후에도 륀체르는 어떻게든 마리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시답잖은 이야기부터 시작해 혼내고 어르고 난리를 쳤지만, 마리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륀체르도 제풀에 지쳐버렸다. “젠장,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어차피 달래줘 봐야 하이너와 아가씨를 화해시키는 일밖에 더 되나. 화해하고 드래곤이 포르투바를 구워삶는다면야 륀체르 자신에겐 좋은 일이지만, 하이너의 태도를 보니 포르투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다.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지. 륀체르는 그렇게 판단하고 서둘러 비서를 불렀다. 그의 비서는 대륙 극 서쪽에서 온 흑인 미녀, 홀디네 본이다. 실렌틴 광산 폭파 사건 이후 실업자가 된 그녀는 륀체르의 곁에서 그를 보좌했다. 홀디네는 늘 그렇듯 고혹적이고도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음. 황도 얼간이들에게 선물 좀 보내. 등극식에 못 간 것에 관한 적절한 이유 좀 대고. 아, 선물은 황태자비, 아니, 이젠 황후가 된 여자지. 그 여자가 좋아하는 것으로 보내면 더 좋아.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거로 골라주라고. 가능하면 전 황도에 다 소문이 나게끔 끝내주는 선물이어야 할 거야. 이 륀체르 사파이어께서 황족을 향한 충성이 지극하다는 것을 대륙 모든 이가 알 정도여야 할 거라고.” 황제 내외에게 지극정성으로 구는 척해야 적어도 표면적으로 황제에게 공격받을 일은 없으리라. 황족들은 체면과 명분에 약한 인간들이라 대외적으로 자기에게 잘해준 인간에게 창을 겨누진 못하는 법이다. “아, 그리고 우리 고귀하신 아기님(황녀 아니카)의 선물도 잊으면 안 된다.” “알겠습니다.” 홀디네는 인사를 하고 뒤돌아섰다. 그런데 륀체르가 그녀를 다시 잡았다. “음, 멈춰 봐. 가장 중요한 용건이 남았으니까.” 륀체르는 한참 생각에 잠기다가 갑자기 기다란 팔을 뻗었다. 그의 손이 향한 곳은 홀디네의 목을 감싸는 시붉은 색깔의 목도리다. 륀체르는 그 목도리를 거침없이 풀었다. 그러자 목도리에 가려졌던 홀디네의 깊은 가슴골이 드러났다. 흑인 특유의 까맣고 탱탱한 살덩이가 뿜어내는 건강한 기운에 가슴 탐애자인 륀체르의 눈길에 갈 법도 하건만, 그는 홀디네의 가슴골에는 관심이 없이 제가 할 일을 했다. “어디 보자….” 목도리는 하늘하늘한 소재인데, 륀체르는 그것을 펼쳐 손바닥에 대고 염력어를 입력했다. 염력어는 눈 깜짝할 새에 입력됐다. “이 편지를 반드시 새끼 사자(비오르틴)에게 전해줬으면 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비올. 내게서 포르투바를 빼앗아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우리의 우정이 깨지길 원치 않는다고. 실렌틴 광산처럼 산산조각 나고 싶은 건 아닐 테지?」 *** 황도 로귀하르트. 황제 궁. 비오르틴의 등극식은 무사히 치러졌다. 그의 아버지는 할데바인 영지를 내려 받고 황의회에서 영원한 퇴장을 했고, 비오르틴은 로귀하르트, 야울, 로샤타르트, 서쪽 식민지, 수인족의 땅 오슬 등을 다스리는 지배력의 상징이 되었다. 각 영지의 영주들은 황가에 어마어마한 공물을 바치며 황가에 충성을 맹세했다. 제국민들은 강력한 드래곤이 등장해도 제국의 패권은 여전히 황가에 있다고 여겼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국민들은 드래곤에 의해 루앙의 대현자가 사라지고 마탑의 마황마저 패배했으니 이제 드래곤의 목표물은 황제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드래곤은 잠잠할 뿐이다. 제국민들의 눈으로 봤을 때, 이 고요한 시간은 황제와 드래곤 사이에 힘의 균형이 암묵적으로 잡힌 증거였다. 매일 같이 이어지는 축하 연회에선 서쪽 식민지 관리자들, 대부호, 귀족들의 아첨이 끊이질 않았다. 새로 올라선 황제에게 잘 보여 이익을 얻고자 하는 무리로 궁은 연일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 무리 중에 오를린 일족이 껴 있다는 것은 주목할 점이다. 다르게 보자면 황제는 아직 장인 집안과 영지에 등극식을 계기로 한 어떤 특별 혜택도 주지 않았단 뜻이 되겠다. 비오르틴이 아내를 들이기 전까지만 해도 아내의 고향인 오를린에 적잖이 혜택을 주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지금의 태도는 궁금증을 자아내었다. 어찌 됐든 황제가 장인의 영지에 이익이 가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영지에도 마찬가지라는 의미. 각 영지의 영주들은 황태자가 베풂에 인색한 속내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면서도 언젠가는 이익을 얻지 않을까 싶어서 황제를 향한 아첨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연회, 그간의 연회와 다른 점이 있다. 바로, 마법사들의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는 검은 드래곤 하이너 그로스 때문이다. 그가 마탑의 마법사들을 가히 학살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없애 버리고, 황도에 있는 모든 마법사, 마병사들의 마기를 흡수한 까닭에 지금 황도에는 마력자의 존재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예전 연회에서는 연회하기 좋지 않은 날씨나 기온 따위는 마법사들이 얼마든지 조절 가능한 것이었다. 궁의 마법사들은 이 너른 궁에 끊임없이 향긋한 향기를 드리울 수 있었고, 낮과 밤에 어울리는 음악을 무한하게 재생해두는 마법을 쓸 수도 있었다. 파란 하늘을 알록달록하게 수놓은 환형 마법을 그릴 수도 있었으며, 술에 취한 귀족들을 깔끔하게 낫게 하는 마의학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능력자들이 사라진 지금, 궁의 연회는 현이 하나 빠진 악기로 연주하는 부산스러운 곡처럼 매우 삐거덕거린다. 참석자들은 추위를 이겨내려 멋을 포기하는 복장을 해야 했고, 궁 곳곳에 감도는 악취를 덮으려고 향수를 써야 했다. 낮과 밤 그 어느 때도 음악이 흐르지 않아 연회 하는 재미라곤 없다. 하여, 혹자가 좋은 말로 포장하길, ‘마력이 없으니 연회에 이런저런 수고스러운 낭만이 생긴다.’고 했으나, 결국에는 불편하단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연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눈치를 보면서 한둘씩 자기 영지로 돌아가기 바빴고, 연회는 역대 등극식 중 가장 최단시간에 끝이 났다. 새벽부터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부쩍 추워진 날씨에 황제의 침소엔 벽난로가 피워졌다. 장식물에 불과했던 벽난로가 제 기능을 한 것은 궁이 세워진 이래 거의 처음이라 할 수 있다. 타닥. 탁. 타닥. 한쪽에 가득 비치된 장작과 쉴 새 없이 불타오르는 장작불을 보며 비오르틴은 역설적이게도 한기를 느꼈다. 아니, 마법사들의 마력이 아닌 나무에서 타오르는 순수한 불을 보면 볼수록 무력함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 적절하겠다. 현실을 외면하듯 눈을 감는데, 마침 시종이 와서 오늘의 할 일을 일렀다. 따분한 내용의 책을 읽는 듯 얼마간 정신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할 일에 관한 보고가 끝나자, 이번에는 내일 황전에서 받을 공물에 대한 이야기가 미리 보고되었다. 공물이라면 지긋지긋한 비오르틴은 깜빡 잠이 들 뻔하다가, 바너에서 온 공물이란 소식에 정신이 들었다. “내일 황전에 나가셔서 받으실 그 선물에 황도의 모든 눈과 귀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우리에 든 맹수는 차원의 균열을 타고 흘러온 맹수라고 했습니다. 다들 얼른 폐하께서 그 우리의 가림막을 펼쳐 그 안에 무엇이 으르렁거리고 있는지 확인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공물 또한 바너 사파이어 가에서 온 것으로 황녀 전하를 위한 것인데…….” 비오르틴은 바너 실세 륀체르 사파이어의 속내를 통 모르겠다고 느꼈다. 대관절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간 공물을 바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포르투바를 데려가지 말라는 뜻인가? 아니면 황가에 관한 충성을 이만큼 보였으니 나중에 제 얼굴에 침 뱉지 말라는 뜻인지? 비오르틴이 생각에 빠져 있는데, 보고를 마친 시종이 갑자기 꼭 드려야 할 것이 있다며 황제에게 뭔가를 건넸다. 이것 역시 륀체르 사파이어로부터 온 전서라고.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폐하.” 시종이 물러나고 황제는 제게 온 시붉은 색깔의 목도리를 보았다. 리본으로 묶여 있는 모습이 마치 풀어달라고 무언의 말을 건네는 것 같다. 그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목도리를 펼쳤다. 그리고 보이는 글귀. 「비올. 내게서 포르투바를 빼앗아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우리의 우정이 깨지길 원치 않는다고. 실렌틴 광산처럼 산산조각 나고 싶은 건 아닐 테지?」 황태자가 그 글을 다 읽은 순간 목도리는 기화되어 사라졌다. 염력어로 쓰인 편지, 증거를 남기기 싫은 범죄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륀체르 사파이어…… 협박을 이런 방식으로 하다니. 얼굴이 싸늘해진 비오르틴은 한차례 몸을 떨었다. 실상 륀체르야 포르투바를 빼앗긴다 해도 무서울 게 없는 인간일 것이다. 대륙 금권의 절반을 저 혼자서 휘두르는 인간이니, 기갑체 제조 공정 건에 황가가 계속 방해를 한다면 그는 제국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장난질을 쳐서라도 반드시 황가를 굴복시키고 말 것이다. “결국, 실렌틴 광산 사고는 사파이어의 짓이었는가. 엄살 연기 하나는 끝내주는군.” 어차피 이건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다. 저쪽이 금권을 가지고 있다면, 이쪽은 유서 깊은 권력과 제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각자의 무기로 싸우는 거야 두렵지 않지만……. 그는 륀체르와 겨루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다는 걸 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 드래곤과 겨루는 일. 검은 드래곤의 인간체 모습을 떠올린 비오르틴은 혀를 찼다. 거슬리는 존재를 잊으려면, 몸을 푸는 게 최고다. “검황에게 연무장으로 오라고 해라.” 그는 검황을 불러 검 대련을 하고자 했다. 검황 헤세 레 지괴르는 등극식 이후 내내 궁에 있는데, 그것은 마병사들이 사라진 궁의 경비를 대신 맡기 위해서였다. 황제 친위대로도 경비를 맡을 수야 있지만, 아무래도 마병사들을 부릴 수 없다 보니 경비를 대폭 강화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명예직인 검황까지 호출되어 황제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새벽에는 추적추적 내리던 가을비가 아침이 되어서는 장대비가 되었다. 황제와 검황, 두 친우는 가을비 속에서 대련했다. 검황 헤그 레 지괴르 아니, 이제는 헤세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그 남자는 여전히 말수가 적다. 그러나 검에 관해선 여전히 제국 최고라 할 수 있다. 황제를 향한 사려 또한 깊다. 일부러 져주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황제를 일방적으로 패배자로 만들어버리는 짓도 하지 않는다. 황제가 몸을 풀 수 있도록 적당한 시간을 주면서 황제가 검술 연마 시간을 갖는 것처럼 상대해준 다음에야 황제의 목에 칼을 들이댄다. 지켜보는 이들은 매우 놀라 웅성거렸다. “아무리 검황이라 해도 감히 폐하의 목에…… 저런 걸 보면 루빈의 지휘관이었던 남자가 생각나는구만.” “그래. 헤그 그자도 검황 예하처럼 황제 폐하의 목에 칼을 대곤 했었지.” “뭐, 그만큼 폐하께서 검황을 격 없이 대한다는 것 아니겠나.” 대련 후에 황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둘만의 대화를 시작했다. 오직 친우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고민이 던져졌다. “세상엔 내가 이길 수 없는 게 너무 많군.” 검은 드래곤을 떠올리며 한 말에, 헤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여태 이기기만 하셨잖습니까. 한두 번쯤 지는 것도 폐하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로 봅니다.” 비오르틴은 씁쓸히 웃었다. 기탄없는 말이 고맙긴 하나, 한두 번쯤 지는 것으로 끌날 문제가 아니다. 상대는 검은 드래곤이지 않은가. 검은 드래곤과 진심으로 맞서게 되면 지고 말고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설 것이다. “그리고 늘 싸우며 살 수도 없는 법입니다. 검은 드래곤의 조용함을 긍정적으로 여기셔도 될 듯합니다.” “긍정적으로 여기라?” “그는 권력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 말입니다.” 헤세는 자기가 보고 느낀 하이너에 관해 말했지만, 비오르틴은 그 점에 동의하지 못했다. 검은 드래곤이 권력에 관심이 있든 없든, 황제 자신보다 더 큰 힘이 존재한다는 것은 황제가 죽을 때까지 신경 쓰이는 일이 될 것이다. 황제는 비에 젖어 우는 것 같은 얼굴로 먼 곳을 보았다. 철제 장미 덩굴 장식 울타리 너머엔 황족들이 간단한 운동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있다. 그곳에 비를 뚫고 한 무리의 사람이 걸어오고 있다. “로… 아니카.” 비오르틴은 무의식적으로 아내의 이름을 부르려다 딸의 이름으로 바꿔 불렀다. 아내가 이런 비 오는 날, 그것도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어찌 밖으로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헤세 역시 흥미로운 눈길로 황녀와 황후의 모습을 보았다. 연무장에 황제가 있는 모습을 보고 시녀들은 멀리서 예를 갖춰 인사했으나, 로테는 눈인사만 할 뿐 그 이후에는 전혀 남편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남편을 하늘에서 내리는 비보다 더 무의미한 것처럼 대했다. 딸 아니카를 안으며 비를 맞는 그녀가 집중하는 일은 오직……. “아, 차가워! 미끌미끌 거린다! 톡톡 튀고! 입에도 들어가고! 옷이 젖네! 아, 차가워! 차갑다! 미끌미끌 거리고 톡톡 튀고! 또 톡톡 튀고! 피부가 따갑네!” 바로, 딸에게 비를 느끼게 해주는 행위. 시녀들 역시 그녀 곁에서 그녀의 말을 따라 한다. 그녀는 아이의 손을 하늘로 뻗게 해 보기도 하고, 아이의 눈을 가리는 안대를 풀어주기도 했다. 그녀가 하는 짓을 비오르틴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는 아내를 실성한 사람 보듯 하며 중얼거렸다. “대체 저게…… 무슨 해괴한 짓이지?” 왜 저런 짓을 하지? 유모와 보모를 없애버리니 반항을 한다고 저러는 건가? 황제는 심지어 그런 생각도 했다. 헤세는 아이에게 비를 가르쳐주고 비와 연관된 언어를 익히게 해주는 황후가 이제 보니 마리와 상당히 닮은 구석이 있다고 느끼며 대답했다. “해괴한 짓이 아닙니다. 폐하.” “아니라면?” “제가 생각하기에, 지금 황후 폐하께서는……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소소하면서도 가장 위대한 일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말수가 적은 헤세가 그렇게 감상적인 느낌으로 말한 것은 처음이다. 비오르틴은 뒤늦게야 로테가 하는 일을 깨달았다. 앞을 볼 수 없어도 손가락을 움직이며 비의 감촉을 느끼고 까르르 웃는 소리를 내는 딸의 모습에 답이 보였다. ‘로테…!’ 아내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그의 입가는 그가 의식도 하지 못한 사이에 서서히 올라갔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벽에 M83의 wait라는 곡을 들으면서 썼어요. 그곡 뮤직비디오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비오르틴을 잠시 생각했습니다. ㅠㅠ. 아, 그리고 이 소설에서 19씬을 뺀 일반 연재(무료)를 한다면 과연.... 독자님들의 생각은 어떤지 좀 여쭤 봐도 될까요? 조심조심... 그럼 내일 오겠습니다. 00111 8. 삶, 삶, 삶 =========================================================================                            웃고 있다고 생각지 못하던 그는 우연히 헤세와 눈이 마주치고 뒤늦게야 자기 표정을 인지했다. 그의 표정에서 금세 미소가 지워졌고, 헤세는 황제의 얼굴에 비쳤던 찰나의 표정에서 황후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속내를 읽었다. 다소 의외인 속내이지만, 헤세 자신이 상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폐하.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헤세가 읽은 속내가 정답인지, 황제는 굳이 그를 잡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로테에겐 함께 저녁을 먹고 싶어 한다는 황제의 전언이 갔다. *** 황의회에서 한 의원이 ‘포르투바가 누구와 손을 잡는가?’는 안건을 슬며시 꺼냈다. 근래 궁에서 떠도는 이야기는 포르투바가 예정대로 바너의 실세와 손을 잡았다, 아니다, 그는 변심해서 제국 정부와 손을 잡았다, 등 제각기 갈리고 있다. 검은 드래곤 때문에 마력 기갑체를 운용하지 못한다고 해도, 마력으로 돌아가지 않는 물리적인 기갑체 운용은 여전히 유효하다. 최강의 무기를 원활하게 쓸 수 있는 힘이 개인 자본에 넘어가느냐, 제국 정부에 소속되느냐는 황의회의 중대사다. 이 안건을 꺼낸 의원은 포르투바가 황제와 손잡을 거라고 믿는 편에 속하며, 과거에 황제에게 도움을 받았던 륀체르 사파이어가 당연히 황제에게 포르투바의 기술을 양보해줄 거라고 믿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믿고 싶어 한다.’가 바른 표현이리라. 의원은 그간 많은 적을 거침없이 해치웠던 황제가 이번 문제도 시원시원하게 정리를 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황제는 ‘고려할 사항이 많으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모호한 말로 넘어가 버렸다. 황제가 회장에서 퇴장하자, 의원들 사이에선 또 의견이 분분하게 갈렸다. “은인에게 양보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내가 사파이어라도 양보하기 싫을 것 같은데. 폐하께 보낸 선물(우리 안의 맹수)을 봐. 사자를 뜯어 먹는 맹수라니. 그건 폐하께 포르투바를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단 뜻 아닌가? 협박이라 봐도 될 정도인데.” “사파이어가 싫고 좋고 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힘의 문제입니다. 전 대륙이 마력을 못 쓰는 이런 상황에서 이번 갈등은 순수하게 금권 겨루기만으로 결론이 날 겁니다.” “그 말은 즉 사파이어가 유리하단 말?” “글쎄요. 실질적인 자본력은 사파이어가 우세하지만, 그 자본이 어디로 가는지 제도화하는 힘은 우리 황의회에 있으니…….” “이거, 이거, 여태 봐 온 그 어떤 싸움보다 흥미진진하겠구먼.” “싸움이 길어지는 것은 서로에게 손해인 일이오. 황의회가 제도를 만들기도 전에 사파이어가 제국 정부를 장악해버리는 최악의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마시오.” “그건 반역이 아닌지?” *** 륀체르 사파이어가 황제에게 보낸 선물, 우리 안의 맹수는 죽임을 당했다. 진상되자마자 잔인하게 살해된 짐승에 관해 궁정인들의 말이 많았으나 로테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도 이제 궁에서 일어나는 일들엔 면역이 쌓인 건지도 모른다. 오늘 아니카에게 비의 감촉을 전해준 것이 즐거웠고, 아니카가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곁에서 돌봐주는 것도 보람차서 좋았다. 궁에서도 이런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게 가능한 것에 즐거워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그리고 곧 시작될 남편과의 저녁 식사도 소소한 일상……. ‘……그건 즐겁다고 할 수 없지.’ 식탁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보면서 부르던 콧노래가 천천히 멈추었다. 시녀들은 궁에서 콧노래를 부르는 황후의 모습이 이색적으로 보다가 콧노래가 멈추어지자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황후가 시녀들을 모두 물려버린 것이다. “왜 저러시지?” “폐하와 단둘이 드시고 싶으셔서 그런가?” “어쩌면 오늘 황자 전하가 생기시려는 거야?” “어머! 야해라! 싫다! 호호호!” 황제 부부관계에 관해 잘 모르는 신입 시녀들은 긍정적인 추측을 해댔다. 그러나 당연히, 로테는 그들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비오르틴은 세간의 시선, 황제 부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시선을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형식적인 부부의 정 따위를 쌓고자 식사 시간을 제안한다고, 로테는 여기고 있다. 시녀들을 물린 로테는 손에 잡히는 양념통을 닥치는 대로 잡고 음식들에다가 아무렇게나 뿌려댔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어차피 황제는 먹는 것, 음식 따위에 흥미가 없는 인간이다. 맛이 최악이면 식사를 재빨리 끝내고 가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음식에 장난을 치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감돌아 생기가 돈다. ‘그 음울한 얼굴 보고 있어 봐야 좋을 것 하나 없어.’ 달콤한 음식에는 쓴맛을, 짠 음식에는 지독히 신맛의 조미료를 퍼부었다. 그 후에는 꽃장식의 각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꽃을 만졌다. 꽃장식이라면 오를린에서 아주 지겹도록 배웠고, 솜씨도 좋다는 평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꽃장식을 예쁘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최대한 아무렇게나 흉하게 보이게 하는 게 중요하다. 지나가는 거지가 봐도 별로다, 라고 할 정도로 막 해두는 것. 그게 남편을 향한 자신만의 소심한 분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남편이 들어섰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그도 제 아내처럼 시종들을 물려버리고 혼자 들어오고 있다. ‘또 무슨 꿍꿍이야?’ 로테는 보는 이가 없지만, 한껏 예를 갖추어 황제에게 인사했다. “대륙의 지도자이시자 제국의 태양, 그리고 야울의 왕이신 비오르틴 뤼크 피나센토 로귀하르트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외국 사절단이나 할 법한 기나긴 인사인데, 비오르틴은 그 인사가 재미있다는 듯 로테를 보았다. 인사가 끝마쳐지고, 로테가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비오르틴이, 손수 그녀가 앉을 의자를 미리 빼준 것이다. 로테는 자기가 뭔가 잘못 본 것은 아닌가 했다. ‘뭐지…?’ 그녀는 바늘방석에 앉는 듯 불편한 마음으로 의자에 앉았다. 황제는 식탁 가득 차려진 윤기가 흐르는 음식들을 보고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시간, 아주 오랜만에 가지는 것 같군.” 로테는 가득 차려진 식탁을 보며 인형처럼 무감정하게 대꾸했다. “영광입니다, 폐하.” “먹지.” 두 사람 다 아무런 말없이 식사를 이어갔다. 로테는 식사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불편해졌다. 음식에 장난을 쳐놓았으니 그 맛에 황제가 도망갈 거로 생각했지만, 왠지 비오르틴은 도망가지 않는다. 맵고 짜고 신 음식을 묵묵히 먹으면서 아내의 얼굴을 끈지게 볼 뿐. 그런데 그의 시선에 전과 다른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로테만의 착각일까? 불편한 로테에게 비오르틴은 시선을 놓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내 앞에서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어.” “…… 무슨 말씀인지.” “그렇게 새 모이 먹듯 먹지 않아도 된단 말이다.” “새 모이 먹듯….” “먹던 대로 많이 먹는 게 좋아.” 같잖은 참견이라 생각하며 로테는 식기를 든 손을 내렸다. 아무리 황후라 할지라도 황제 앞에서 식기를 내리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그러나 그녀는 거침없이 그렇게 했고,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저를 잘 모르시는 건 여전하군요.” “뭐라?” “아니카를 낳은 뒤로, 지금이 가장 많이 먹는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게 많이 먹는 거라고?” “예.” 그녀는 딸을 낳던 당시 남편이 와서 한 모진 말들을 절대 잊지 않는다. 단 하나 자신 있어 하는 게 아이 낳는 일이 아니었느냐고, 이렇게 다 죽어가는 꼴로 있다간 트리아노네를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협박하던 사람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출산 전후로 그의 눈길은 늘 원망에 가득 차 있었다. 어째서 네 언니가 아닌 네가 이 궁에 있느냐고 따지는 듯했다. 그런 차에 아이마저 눈에 장애를 안고 태어나니 어찌 제정신일 수 있었을까. 죽음까지 생각하며 무너졌던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에게 식사의 즐거움 따위가 다 무엇인가. 죽지 못해 먹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 법한데도, 이 남자는 모르는 모양이다. 비오르틴이 피식 웃었다. 출산 후에 보기 좋게 살이 오른 그녀의 모습은 대관절 어떻게 가능한 건지, 그는 궁금하다. “그럼 그 살들은 플라미네(미의 여신)께서 붙여주셨나?” 비오르틴은 자기 물음이 어색했는지 뒤늦게야 어색함을 감추려고 낮은 기침을 했다. 보기 좋게 살이 오른 모습의 아내가 잘 먹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데,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아내가 가진 미를 향한 찬미로 나와 버렸다. 그는 무안한 듯 시선을 내리깔았지만, 오히려 로테는 살기에 찬 눈으로 그를 보았다. “플라미네께서는 그렇게 한가하신 분이 아니지요.” “……?” “그리고 폐하의 농담은 제게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군요. 저희가 그런 농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잖습니까.” “그런 농을 주고받을 사이?” “플라미네를 운운하시는 건 다른 여인에게나 하십시오.” 비오르틴은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까칠한 반응이 신선하다고 여겼다. 조금은 독기 어린 표정이 그녀답지 않아 자꾸 눈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둘이서 아이까지 본 사이에 이런 농담쯤은 해도 되지 않는가? 아니면 뭔가? 우리 황후께서는 언니에게 질투하는 건가?” 로테는 속에서 불길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꾹 참았다. 이런 도발에 일일이 반응하면 우스워질 뿐이라고 몇 번이나 자기를 다독였다. 애써 웃음 지은 그녀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좋지 않아 이만 일어납니다.” “무례하군.” “참, 그리고 포르투바 문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갑자기 나온 그의 이름에 비오르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황후 제깟 게 뭘 안다고 포르투바 문제를 운운하는지? 로테는 왠지 모를 승리자의 미소를 던지며 뒤돌아섰다. “그는 절대 폐하 아니, 이 황실을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황제가 의아하게 여기며 자기 거처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앞으로 포르투바의 전언이 도착했다. 제국 정부에 기술력을 협력하겠다는 뜻을 전한 내용이다. *** 얼음 도시 시귀르의 중심지 유르. 안식의 겨울의 륀체르 침소. 륀체르는 황궁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받고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이거, 이거, 그 촌뜨기 황후가 그런 짓을 저지를 줄이야!” 황궁에 심어둔 첩자들에게서 온 소식이 아주 가관이다. 황제가 전과 달리 황후에게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고, 그런데 그 식사 후에 황의회에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고, 포르투바가 황제 편에 서기로 했으므로 기갑체 공정에 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거기까지만 보자면 황제에겐 기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마냥 기쁜 일이 아니다. 포르투바가 황제 편에 선 이유 때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로테가 포르투바와 내연 관계라나. 그래서 포르투바는 황실의 편에 선 것이고, 결국 황제는 아내를 팔아 제국 기술의 핵심을 쥐게 된 셈. 제국민이 듣기엔 소문으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지만, 그날 황제가 황의회를 마치고 자기 침소의 물건을 닥치는 대로 부수었단 소식이 그 소문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다. “천하의 사자 놈도 건드리지 못하는 게 생겼다니, 이럴 수가…… 불쌍해서 이를 어쩐담! 제 성격대로 아내를 잡자니 그 기술자 놈이 떡 버티고 있으니 이도 저도 못할 테고, 으하하…… 역시 사람은 자기만의 무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니까. 그게 xx(여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비속어. 이 경우엔 황후의 성기를 뜻한다.)이든 머리(포르투바의 기술력)이든!” 륀체르가 한참 동안 깔깔거리고 웃자, 궁의 일을 보고하던 홀디네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 마스터에게 중요한 건 황후의 정략적 외도가 아니라 다른 것일 텐데……. “황제는 우리가 쉽게 양보해준 것을 수상히 여기고 조사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당분간 내버려 두자고.” “내버려 두자고요? 하지만…….” 륀체르는 의자 뒤에 목을 대고 느긋하게 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붉은색의 투명한 잔 속에선 검은 드래곤이 날갯짓을 하는 환상이 보였다. “생각해 보니 우리가 애태울 이유가 없어.” “하지만 정부에 빼앗길 이유도 없지 않나요?” “물론 없지. 다만 나는 황제가 기갑체 기술을 장악하고 어디까지 가느냐, 그게 궁금해졌다는 말이야. 드래곤에 한 번 진 황제가 다시 드래곤을 이기려 들 것인지, 아니면…… 내게 정면으로 맞설 것인지. 그때 내가 움직이면 오히려 명분을 얻을 수 있지. 선량한 자본가를 건드리는 권력에의 항거, 뭐 이런 게 그림이 좋잖아?” *** 황도 로귀하르트. 그 시각, 황제는 궁에서 술독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황의회에서 의원들은 기뻐했다. 포르투바가 황실과 손잡고 결과적으로 황의회는 안심할 수 있었기에, 의원들은 황제를 칭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비오르틴이다.’, ‘역시 전 황제와는 다른 능력을 보여준다.’, ‘역시 불가능도 가능하게 한 황제다!’라며 비오르틴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비오르틴은 그런 칭찬이 모조리 조롱으로 들리기만 했다. 인간들의 황제일 뿐, 모든 대륙을 아우르는 패왕이 되지 못한다는 탄식은 그를 비참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보다 그를 더욱 비참하게 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아내의 외도. 그리고 그에 따른 자신의 마음, 자신이 아내를 향해 가진 마음이다. ‘왜……!’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ㅠㅠ 00112 8. 삶, 삶, 삶 =========================================================================                            기갑체를 다루는 최고의 기술이 제국 정부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 기술은 권력의 핵이나 다름없고, 황의회는 기갑체 공정의 실질적인 부분을 파고들며 임무를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황후가 엔카드라노 포르투바와 외도를 한다는 소문은 전혀 논란이 되지 않았고, 황제 역시 소문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굴었다. 포르투바와 몇 차례 만나며 실무에 관해 상의하는 황제의 모습은 황후의 불륜 문제를 정면으로 덮는 역할을 했다. 황의회, 포르투바, 황제는 몇 번의 회의 끝에 세 가지 숙제를 만들었다. 현재 쓸 만한 마력자들이 부족하니, 재야의 마력자들을 비밀 장소에 불러들일 것. 그들을 마력 기갑체를 조종할 인재로 키우는 것이 황의회의 목적이다. 그리고 실렌틴 광산의 소유권을 완전히 제국 정부에 귀속시킬 것. 이는 기갑체 공정을 원활히 하려면 필수인 일이다. 마지막으로, 륀체르의 사병, 그가 가진 군대를 전멸시켜 버릴 것. 이 사항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륀체르의 모든 것을 빼앗자는 것이다. 황의회는 황제와 반목한 륀체르를 내버려 둘 수 없다고 판단했고, 어정쩡한 적대 관계는 싹을 자르는 게 옳다고 여겼다. 물론 이미 륀체르는 싹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물이 되었지만 말이다. 바야흐로 제국은 검은 드래곤 소동에 이어 금권과 정권의 전쟁이라는 큰일을 앞두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위기라고 여겼다. 황궁은 황의회와 포르투바, 황제가 관련된 심각한 회의를 진행할수록 성대한 연회를 열어 사람들의 눈과 귀를 속였다. 연회의 취지가 제국기술원 인재들을 격려하는 것이라고 알려졌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륀체르의 귀에 그 실상이 들리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륀체르도 바보는 아니기에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진즉 자기 사병들을 해체한 후 그 대장들을 각 대륙 곳곳에 분산하여 재야의 마력자들을 끌어모으라고 했다. 제국 정부에서 단 한 명의 마력자도 데려가지 않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 마력자들이 포르투바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마력 기갑체를 조종하여 제국 힘의 상징이 되는 꼴을 륀체르는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만 했다. 륀체르의 능력 좋은 사람들은 금세 마력자들을 모아왔고, 륀체르는 그 마력자들을 전원 비밀 수용소에 거주시켰다. 그리고 그들에게 두 가지 선택권을 던져주었다. 검은 드래곤에게 마력을 바칠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할 것인지. 기꺼이 마력을 바치는 이들에겐 경제적 보상을 주기로 했다. 하지만 마력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은 살아 돌아갈 수도 없으며, 검은 드래곤이 폭주할 시 먹이가 된다. 이 선택권은 한마디로 협박이나 마찬가지다. 깡패가 나약한 자들에게 ‘맞고 줄래? 그냥 줄래?’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평소 륀체르라면 때리고 빼앗는 것을 택할 테지만, 검은 드래곤과 그의 주인이라는 존재 때문에 그는 최대한 신사적으로 나왔다. 협박을 받은 마력자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일제히 전자를 택했고, 검은 드래곤 하이너는 륀체르의 행동에 침묵했다. 그 침묵은 결국 마력자들이 바치는 마력을 굳이 마다치 않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런 결정엔 마리의 허락이 뒷받침되었다. 사실 마리는 륀체르가 그토록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마력자들에게 선택권을 준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혐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반대했다. ‘바너 뒷골목의 건달은 출세하고 나서도 여전히 건달 짓을 한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결국, 현실적으로 반대할 계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자신의 호위기사는 발정의 기운을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죽이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이성의 마력생물, 혹은 마력자들은 그를 괴롭게 한다. 또한, 호위기사는 발정의 기운뿐만 아니라 흡마귀의 저주에서도 자유롭지 못해 폭주의 위험을 껴안고 있다. 그가 폭주해서 많은 희생이 나는 것보다야 차라리 마력자들의 반강제적 희생이 더 낫다고, 마리는 판단했다. 무엇보다 하이너가 마력자들의 마력을 흡수한다고 해서, 마력자들의 생명마저 앗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그녀를 안심하게 했다. 갖은 수모를 견뎌내고 제국의 패왕으로 안착하려는 황제. 그런 황제를 머리 꼭대기에서 다루려는 대부호. 인간들의 싸움보다 자신의 고뇌에 머리가 아픈 최강의 생물체, 드래곤. 그런 드래곤을 보면서 여행 이래 가장 혼란에 빠진 아가씨. 그리고……. 각자가 각자의 일을 떠안고 사는 세계. 대륙의 공기는 얼어붙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열기를 감추고 있다. 황궁은 오늘도 화려한 연회 중이다. 마법사가 사라진 연회는 인간들의 수고가 미치지 않은 부분이 없다. 어두운 공간을 밝히는 촛불부터 차가운 공기를 따뜻하게 덥히는 장작, 흥겨운 음악 소리, 모든 것이 인간들의 공이 필요한 구석이다. 이런 때다 보니 모두가 마력자들의 존재를 간절히 바란다. 연회의 황족, 귀족들은 황의회의 자본으로 꾸린 추격단이 재야의 마력자들을 찾아오지 않는 상황에 걱정의 말을 해댔다. “이런 추운 가을도 처음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언제까지 이런 불편한 생활을 해야 하는지.” “아무리 검은 드래곤 때문에 다들 몸을 숨긴다고는 하나, 이건 정말 너무 마력 가뭄 아니오?” 그 와중에 미미한 마력을 지닌 지인을 자랑하는 이들도 있다. “친척 아이 중에 어디 자랑할 정돈 아니고 재주(마력)를 조금 지닌 아이가 있는데, 이번에 시골에서 데려와서 잘 쓰고 있어요. 장작보다 좋더군요. 적어도 이 궁보다는 따뜻하답니다! 호호!” “조심하셔야겠네요. 검은 드래곤이 언제 와서 해코지할지 누가 알겠어요?” “어머. 나타나려면 진즉 나타났겠지요.” 부인들이 대화를 나누는 그때, 요즘 사교계에서 가장 뜨거운 인사가 된 엔카드라노 포르투바가 부인들을 지나쳐갔다. 엔카드라노가 지금 향하는 곳은 황후 로테아르카가 있는 곳이다. 언제나 알 수 없는 불만이 가득해 보이던 그의 표정은 다른 때와는 사뭇 다르다. 누가 봐도 막 사랑에 빠진 소년 같았고, 그게 그의 외모와 어울리지 않아 부인들을 웃게 했다. 자연스레 부인들의 숙덕거림이 시작되었다. “우리 제국 정부를 살려주신 구원자께서 오늘 밤도 트리아노네에 들르실 모양인가 봐요.” “그러게 말입니다. 참 대단하지 않나요? 그 아름다운 금발 푸른 눈의 애인들을 다 쳐내버리고 트리아노네에 가서 철학 토론을 하다니. 고상하기도 하셔라.” “하하! 철학 토론? 언제부터 몸의 대화가 철학 토론이 된 거죠?” “어머! 몸의 대화라니, 그 무슨 망측한 소리! 트리아노네의 주인께서는 정말 엔카드라노와 철학 토론을 하신다니까요. 다만 조금 격렬할 뿐…….” 부인들은 명백히 황후를 얕잡아 보고 있다. 선황보다 강력한 황권을 가진 비오르틴이라 하더라도 그의 촌뜨기 아내는 여전히 궁 여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의 위치 정도. 그런데 갑자기 부인들을 기겁하게 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거기까지 하는 게 좋을 거요.” 목소리의 주인이 제국 황제라는 것을 알게 된 부인들은 얼어붙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황제가 한 말은 단 한마디뿐인데도 부인들의 귀에는 마치 사형을 부르는 공포의 말처럼 들렸다. 황제가 그들을 시린 눈으로 보며 어금니를 악물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간 부인들이 아는 황제는 황후의 외도를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국정에만 힘쓴 이였으나, 저 표정 하나로 그가 황후의 외도 소문을 누구보다 의식하고 있단 사실이 밝혀졌다. ‘이를 어째!’ ‘맙소사! 대체 누가 먼저 이 이야기를 시작한 거람!’ 황제는 엔카드라노를 어느새 앞질러가 황후의 손목을 잡았다. 부인들은 황제에게 겁을 먹은 와중에도 그 세 사람, 황후, 엔카드라노, 황제의 움직임에 눈을 떼지 않았다. 황제는 공적인 일로 대화를 하던 때와는 사뭇 다르게 엔카드라노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황후의 손목을 어디론가 갈 듯 잡아끌었다. 보는 눈이 한두 개가 아니다. 황후는 황제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그를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황후는 남편의 손을 내쳤다.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포르투바는 한 발짝 물러나며 자리를 피했다. 그 나름 황제 부부의 격을 지켜주려 한 행동이지만, 누가 봐도 황후의 마음을 차지한 자의 오만으로 보인다는 게 문제다. 후에 황제는 더욱 격노한 듯 싸늘한 표정으로 황후의 손목을 잡아끌었고, 부부는 연회장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부인들은 트리아노네에서 철학 토론이 아니라 부부싸움이 한바탕 일어날 거라고 수선을 피웠다. *** 트리아노네. 아니카는 오랜만에 기분 좋은 냄새에 까르르 웃었다. 어머니 로테아르카의 달콤한 향기와 아버지 비오르틴에게서 나는 시원한 식물 향이 섞여 났다. 아니카는 작은 팔을 뻗어 허공에 휘저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이 어린 황녀는 향기를 만질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는 아니카의 좋은 기분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비오르틴은 로테에게 짧은 말로써 경고했다. “격을 지켜라. 네가 황후라면 말이다.” “격, 말씀입니까?” “자존심도 없나? 한때 간택전에서 널 욕보인 사람과 어울리는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의미라. 로테는 소릴 내어 웃었다. 자기를 험담한 남자와 외도를 하고 싶어 하는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보라. 자신이 엔카드라노를 유혹한 결과, 제국 정부는 바너의 실세에 지지 않을 수 있었다. 검은 드래곤에게 권력의 상징성이 빼앗길까 두려워 등극식도 서두른 반쪽짜리 황제가 바너의 금권에 반역을 당하는 것은 누구나 예측 가능한 일이었는데, 자신이 엔카드라노를 유혹함으로써 그 상황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외도의 의미는 이미 충분하다. 황제 아닌 다른 이로 얻은 쾌락은 덤이었지……. 로테는 시녀에게 머리 손질을 시키며 태연히 대꾸했다. “하하. 의미라. 의미는 황의회 사람들이 열심히 찾고 있지 않나요? 매일 매일 포르투바와 회의를 하면서 말이죠.” 로테의 대답에 기가 찬 황제가 거울 앞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지금 뭐라고 했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시녀가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로테는 거울 속 비오르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자리가 저 덕분에, 아니, 그분과 저 덕분에, 이렇게 온전히 유지될 거라는 사실을 감사할 줄 아세요.” 지금 로테는 거의 최초로 자신의 외도를 시인하는 셈이다. 비오르틴은 머리가 뜨거워지면서 눈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아내의 외도와 그 외도가 불러온 제국 정부의 이익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듣는 사실은 그의 피를 끓게 했다. 그는 거울 앞의 물건을 던졌다. 거울이 와장창 깨지며 그 소리를 들은 아니카가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고, 로테는 태연하게 일어나서 아니카를 보듬어 안았다. 비오르틴이 거친 호흡을 추스르며 다시 물었다. “뭐가 뭐 덕분에 온전히 유지될 거라고?” 로테는 아니카의 등을 쓰다듬으며 정확하게 대답해주었다. 그것이 남편의 화를 부채질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의 황위를 책임지는 것은 포르투바 가의 기술력뿐이란 말입니다. 제가 엔카드라노와 친분을 다지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게 가능했을까요?” 급기야 미쳐버린 비오르틴은 로테의 어깨를 세게 잡고 그녀를 돌려세웠다. 아니카가 더 큰 울음을 터뜨렸고, 비오르틴은 아이가 울든 말든 로테를 벽으로 몰고 갔다. 음울하던 얼굴 가득 분노가 차 있고, 그 눈빛은 금방이라도 그녀를 찔러 죽일 듯 날카롭다. 분개심을 압축한 목소리가 파들파들 그녀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언젠가 네 목을 칠 거다.” “……?” “언젠가 너를 엉망진창으로 만들 거야. 주제도 모르고 감히 내게 그딴 망발을 일삼은 널 벌하고 말겠다.” 로테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황제가 자신의 체면이 상하는 것에 분노하여 이러는 것은 알겠지만, 그 분노가 조금 지나쳐서 같잖게 느껴질 뿐. ……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이러는가?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빼앗겨 분개하는 남자의 표정이라니. 다시 봐도, 당치 않다. 체면이 상해 시비를 거는 자의 표정이 아니라 상처 받은 남자의 표정을 하는 남편이 당치도 않아 견딜 수 없다. 그녀는 차분히 아니카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녀가 비오르틴의 멱살을 잡은 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아내에게 멱살이 잡힌 비오르틴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로테는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다가 그를 바닥으로 밀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비오르틴의 목소리보다 더욱 악독하고 적개심에 가득 차 있다. “…… 그래! 나도 그런 꿈을 꿨지. 네놈의 명령으로 내 목이 뎅강 잘리는 끔찍한 꿈을! 꾸고 나니 네가 내게 어떤 존재인지 알겠더군! 날 엉망진창으로 만들 거라고? 내가 주제를 모른다고? 그 말 그대로 네게 돌려주지! 나는 비오르틴 네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거야! 주제를 모르는 네놈을 짓이겨 버릴 거라고! 날 죽이고 싶으면 어디 죽여 봐! 가능하다만 말이야!” 폭발하는 화산처럼 감정을 쏟아내는 그녀의 모습에서, 비오르틴은 마리를 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마리의 등 뒤를 거대하게 지켜주는, 자기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인 검은 드래곤을 본 건지도 몰랐다. “마리의 동생인 나를…… 죽일 수 있으면 죽여보란 말이야!” 로테의 협박은 비오르틴을 무너지게 했다. 그런 말을 하는 그녀도 비참하긴 마찬가지. 흐애애……. 아니카의 칭얼거림이 공간에 서글프게 울렸다. ============================ 작품 후기 ============================ 사랑과 전쟁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0113 8. 삶, 삶, 삶 =========================================================================                            아내에게 밀쳐져 주저앉았던 비오르틴은 딸의 울음소리에 겨우 이성을 찾아 일어났다. 가녀린 여인이 밀치는데 주저앉아 버릴 정도로 힘이 없는 게 아니었다. 아내의 독한 눈빛에 놀라 넘어졌다는 말이 적절하리라. “격을 지켜라. 내가 할 말은 그것뿐이다.” 그는 다시 한 번 황후에게 경고하며 그곳을 떠났다. 밖에 있던 시녀는 급히 들어와서 아니카를 얼러주려 했으나, 로테가 시녀를 물려버리고 스스로 아이를 안았다. 어미의 품에 안긴 아니카는 겨우 울음을 멈추었고, 로테는 시녀가 듣든 말든 속에 있는 말을 모조리 배설했다. “자아, 다 괜찮단다. 울지 마. 그나저나, 이거 참 답답하구나. 마력자가 와야 하는데 네 무능한 아비가 부리는 무능한 인간들은 마력자를 단 한 명도 찾아오질 못하니, 원. 황제랍시고 마나의 인을 가지고 있으면 뭐하겠니. 자기 딸의 눈 하나 어떻게 하지 못하는데.” 시녀는 패역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 황후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황후는 시녀의 시선 따윈 안중에도 없다. 무엇도 두렵지 않은 심정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황후는 가여운 딸의 눈, 안대가 씐 눈을 어루만지며 다짐했다. “기다리렴, 아니카.” 시녀는 무엇을 기다리라고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황후가 아이를 품에 꼭 안고서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제 금방이야. 제국기술원에선 못하는 게 없단다. 이 어미가 너를 어둠에서 구해주마. 네 눈은 반드시…… 아름다워질 거야. 아무렴. 누구의 딸인데.” 로테는 아이를 안고 침대에 누워 자장가를 불렀다. 시녀는 그런 황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왜 저러시는 걸까. 제국기술원이라니…… 포르투바를 저렇게 노골적으로 말씀하시다니!’ 새로 들어온 시녀로서는 잘 알 수 없었다. 황후가 한때 자살 시도를 함으로써 딸에게 얼마나 커다란 죄책감을 느꼈는지. 그리고 그녀가 외도를 이용하여 남편의 무력함을 얼마나 증명하고 싶어 하는지. 시녀는 불안한 눈길로 황후를 보았다. ‘무엇도 부러울 게 없는 분이 왜 저러실까, 대체 왜 궁에 불화를 일으키려고 하시지…….’ 황후의 자장가엔 독기가 서렸다. 그래서인지 아니카도 좀처럼 빨리 자지 못했다. *** 얼음 도시 시귀르. 수도 유르. 사파이어 가의 자선 재단 사무관인 안식의 겨울 가까이 위치한 별장. 이 별장은 마리 일행이 머무는 곳이며, 륀체르가 제공한 마력자들이 검은 드래곤에게 마력을 바치려고 대기하는 비밀 장소이다. 이곳에서 마리는 깃털펜을 잡고 종이에 뭔가를 사각사각 소리 내며 적고 있다. 진지한 표정이 공부에 심취한 사람처럼 보이나, 사실 그녀는 공부가 아니라 이곳에 있는 고급 깃털펜의 감촉이 궁금하여 단순한 낙서를 하는 것뿐이다. 오랜만에 종이에 뭔가를 그리고 적는 기분이 참 좋다. 무심코 시작된 낙서는 점점 그녀의 무의식을 반영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정식으로 배워본 적 없는, 그리고 누구에게서도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노래를 마치 익숙한 노래처럼 부르며 낙서했다.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종이에 그려진 것은 삼각형, 역삼각형이 포개어진 별 모양이다. 자기 몸의 은밀한 부위에 있는 점을 그린 것이다. 이 점. 이 인위적이고도 기이한 모양의 점. 마리는 이것에 관해 살면서 수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릴 적,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이 점의 정체는 무엇일까?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생긴 건지 알 수 없어서 불안하기도 하고 많이 놀랐지만,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았다. 점에 관해 걱정하는 동생 로테에겐 오히려 유쾌하게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나는 세상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멋진 장신구를 가졌다!’고. 이 ‘멋진 장신구’는 자라면서 기이한 능력도 주었다. 종종 꿈에서 먼 미래의 나날을 보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게 정말 앞일인지 아니면 꿈의 한 조각인지는 자기도 장담할 수 없다. 이 점의 의미를 밝히려고 연금술, 흑마술, 점성술 등에 손을 댄 것은 비밀이다. 사람들은 오를린의 마리니시네가 숙녀로서 해야 할 교양을 공부하는 것에 흥미가 없어서 그러한 잡다한 학문에 빠졌다고는 알지, 이러한 실상은 모른다. 그러나 연금술, 흑마술 등을 아무리 공부해 봐도 점의 비밀을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눈치챌 수 있는 것은 하나 있다. 이 점이 생긴 후로 마력이 가까운 곳에 가면 갈수록, 점에서부터 온몸에 생기가 더욱 활발하게 돈다는 것. 그러한 이유로 어릴 적부터 소용돌이 산에 가는 것을 즐겼다. 소용돌이 산에는 마력생물이 많고, 그곳에만 가면 심란함이 사라져 기분이 좋았다. ‘소용돌이 산은 몹시 위험한 곳이라 인간들이 함부로 다녀서는 안 된다!’는 주위의 반대도 늘 모른 척했다. 마력생물 드래콘을 타고 싶어 했던 것도 그런 이유가 있었다. 장대한 여행을 떠나면서 탈 것이 필요하여 드래콘을 원했는데, 마력생물 드래콘을 곁에 두면 늘 기분이 상승할 것 같단 예상도 드래콘 사냥에 큰 이유를 차지했다. 작게는 몸에 생긴 비밀을 알고자, 또 크게는 세계를 정복하여 불안한 미래를 스스로 바꿔보고자, 그렇게 시작한 여행이었다. 깃털펜은 다시 무의식을 낱말로 표현했다. 사각사각……. 대륙 여행. 세계 정복. 할데바인 사망. 마황 파멸. 검은 드래… 하이너 이상해. “하이너. 하이너.” 마리는 머리가 아팠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목표에 한 발짝 씩 다가갔지만, 호위기사 문제에서 시원시원한 느낌이 들지 못했다. 마리는 하이너의 이름을 깃털펜으로 마구 지웠다. 그러다가 아예 종이를 구겨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울 앞에 다가간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외투를 걸쳤다. “직진! 직진하는 거야! 목표가 코앞이라고! 그러잖니? 마리니시네?” 자기를 독려한 그녀는 우아하고 당찬 표정으로 무장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복도를 걸어가 마리아가 있는 방의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때마침 그녀의 뒤를 걸어가던 사용인이 이렇게 말했다. “그 소녀분은 지금 방에 없습니다만.” “응? 마리아가 없다고? 어디 갔는데?” “오를린에 갔습니다.” 마리는 서운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흐응. 나쁜 계집애. 가면 간다고 말은 하고 가야 할 거 아니야!’ 그러다 문득, 마냥 서운해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 애로서는 그게 최선이겠지.’ 마리아는 하이너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좋다고 판단하여 남쪽으로 내려갔으리라. 이곳에서 충분히 쉬면서 마력을 회복했으니, 혼자서 오를린의 소용돌이 산으로 가도 문제 될 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는 모르고 있다. 그 드래콘 소녀가 오를린으로 간 것은, 드래콘 소녀의 뜻이 아니라 하이너의 배려라는 것을. 아니, 하이너의 처지에선 배려가 아니라 필수의 선택이나 마찬가지다. 흡마귀의 저주, 발정의 기운에 괴로워하는 그에게 마리아는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좋은 존재이다. 마리아를 만날 수 없게 된 마리는 기다란 복도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흐음. 이를 어쩐다.” 당장 탈 것을 이용하려면…… 역시 이동 스크롤을 이용해야 할까. 하지만 여행 중 생긴 절약 정신이 그런 고가의 스크롤을 사용하길 자제하라고 한다. 그런데 그때, 복도에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흑회색의 깔끔하고 우아한 복장, 잘 정돈된 검은 머리카락의 그는 바로 그녀의 호위기사다. “하이너?” 륀체르가 ‘잡아들인’ 마력자들의 마력을 흡수한 후일 테지. 그런데 어째 차림새와 어울리지 않게 표정이 초췌하다. 아가씨를 보고 인사를 하는 미소가 억지로 쥐어짜 낸 것 같다. 막 마력을 흡수하여 눈이 회색을 띠긴 하지만 멀리서 보면 흰색은 것이나 마찬가지. 그래서인지 얼굴이 더 무서워 보인다. 마리는 저런 표정의 이유를 안다. 하이너는 마력자들의 마력을 흡수한 후로는 늘 저렇게 죄인의 표정을 한다. 그러잖아도 내부에서 여러 개의 인격과 싸우는 그가 누군가의 힘을 자의든 타의든 빼앗은 후에는 저런 어두운 기분이 되는 것도 당연하겠지. 마력자들이 검은 드래곤에게 마력을 바치는 대신 금전적 보상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실상 그 일은 륀체르의 강제로 인한 일이니 마력자의 의지 따윈 무시된다. 또한, 마력자 중 심약한 이들은 검은 드래곤에게 마력을 빼앗기는 때에 종종 비명을 지르며 혼절하기도 한다. 그걸 코앞에서 지켜보면서 마력 갈취를 해야 하는 하이너의 기분은 어떠할까. 하이너가 마력자들의 마력을 흡수한 후엔 오슬의 산에 가서 포악한 짐승들을 죽인다는데, 그게 오슬 주민을 위한 게 아니라 자기 분노를 다스리려는 행동인 걸 마리는 잘 알고 있다. 마리는 그런 호위기사의 어둠을 잘 다스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짐짓 품격이 넘치는 사람처럼 한쪽 팔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호위기사의 입맞춤을 받으려 했다. “아아, 나의 호위기사여.” 그러자 하이너는 심란한 와중에도 기꺼이 그녀의 장난에 맞장구쳐주었다. 단정한 입술이 그녀의 새하얀 손에 내려앉았다. “예, 나의 아가씨.” 마리는 ‘나의’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어 싱긋 웃었다. 그녀가 호위기사를 일으켜 마주 보았다. “가자!” “어디를 말씀입니까?” 마리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암흑 지형을 좀 조사하러 가야겠어!” 암흑 지형이라……. 하이너는 아가씨의 의중을 알 수 없다. *** 대륙 북부. 야울과 시귀르 사이에 있는 위험 지역, 영원의 꿈. 사람들이 흔히 ‘암흑 지형’이라 불리는 이곳은 땅과 하늘의 경계가 없고 온통 새까만 암흑으로 뒤덮여 있다. 이 암흑 기운의 정체는 바로 강력한 마력이다. 하지만 쉽사리 흡수해서도 안 되는 마력. 마리와 그녀의 호위기사는 이곳에 발을 닿진 않았다. 물론, 발이 닿으려 해도 불가능한 건 당연. 그들은 암흑 지형에 있는 게 아니라 암흑 지형이 저 멀리 보이는 가까운 곳에 서서 스산한 기운을 느끼고 있다. 한때 흡마귀의 저주에 걸렸던 대현자 슈테반 뷔야크가 하이너에게 경고했다. 암흑 지형에 머무는 마력과 암흑 지형 근처 빙귀의 휴야에서 마력자들의 유령이 가진 마력을 흡수하면 흡마귀의 저주가 더욱 강력해질 거라는 거라고, 더욱 끔찍한 목마름에 시달리게 될 거라고 주의하라고 했다. 하이너에게 이곳은 마력을 흡수하고 싶은 충동을 더욱 부채질하는 곳이며, 위험한 유혹이 도사리는 곳이다. 마리도 그러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굳이 이곳에 호위기사보고 같이 오자고 했을까? 탈 것이 없어서 호위기사의 순간이동력을 빌리려는 이유 때문이라 해도 이건 너무 하지 않은지? 평소 투덜거리기 좋아하던 호위기사라면 마땅히 그것을 아가씨께 따져야 했다. ‘언제나 자기 생각만 하는 아가씨군요! 이곳이 제게 얼마나 불편한 곳인지 알긴 아십니까?’, 아니면 ‘대륙 정복에 미쳐 호위기사의 사정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이겁니까? 정말이지 귀족만 아니면 혼내주고 싶군요!’라고 쏘아붙여야 했다. 그러나 지금 하이너는 그러지 않는다. 흡마귀의 저주에 시달리지 않는 척 담담하게 있으려 노력할 뿐. 그렇게 무리하는 모습은 지켜보는 마리를 더욱 불편하게 했다. ‘으으, 이런 하이너는 싫다고.’ 관계의 일상성이 깨진 것은 비단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하이너가 저주에 걸리면서, 또 얼마 전에 륀체르와 하이너, 자신, 이렇게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눌 때도 그랬고, 호위기사의 태도는 달라졌다. 예전에는 투덜거리면서 모든 일을 다 들어준 반면, 요즘은 정중하게 굴면서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인달까. 그런 태도는 마리의 번뇌를 불러일으켰다. ‘이거, 이거, 이래서는 안 되겠어. 마리아와 함께 이곳에 와서 스크롤로 조사 좀 해보려 했는데, 불편하니 뭔가를 할 수 있어야지, 원. 직진! 나는 직진이라고! 반드시 이 녀석의 원래 얼굴을 드러나게 하고 말겠어!’ 마리는 갑자기 하이너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하이너가 투명한 회색 눈을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의 손을 잡은 마리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하이너.”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다. 호위기사를 부를 때 나는 목소리가 아니라, 연인을 부를 때 나오는 아주 다정한 목소리. 그래서 하이너는 ‘예, 아가씨.’라고 대답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마리가 입가를 올리며 속내를 터놓았다. “요즘 힘들지?” 하이너는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왠지 솔직하게 말할 수 없다. “힘들지 않습니다.” “힘들잖아?” “전혀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마리의 표정에 작은 균열이 일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는 호위기사가 좋다. 힘들면 투정하고 반항하는, 그래서 이 여행의 무모함을 꾸짖으며 끝없는 생기발랄함을 늘 되돌아보게 해주는 호위기사가 함께하기 더 편하다. 자기에겐 그런 파트너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녀는 하이너의 두 팔을 잡고 자기를 마주 보게 한 다음, 이런 말을 했다. “거짓말은 이제 그만 둬! 난 나의 호위기사가 날 속이는 걸 원치 않아! 솔직히 말해서, 나 하나만으론 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알아.” “예?” “그러니 네 멋대로 해도 좋아. 나를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가을이 다 가고 있다고!” 하이너는 마지막 말에서 머리가 아팠다. “가을이…… 간다고요?” “그래! 가을이 가고 있어! 마력생물들이 일 년 중 유일하게 화끈하게 즐길 수 있는 시기가 지나간다고! 오슬의 산에 가서 포악한 수인을 죽이는 것도 좋지만, 이제는 오를린에 좀 가보라고. 소용돌이 산엔 네가 필요한, 그리고 너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많잖아? 난 지금 같아선 말이지! 네가 욕구를 제대로 풀고 살 수만 있다면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좋을 것 같아! 그런 기분이란다!” 그러나 정작 하이너는 그 뜻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다. 절대, 그러지 못한다. 그의 눈동자가 새하얗게 변했다. 마력자의 마력을 흡수하고 반나절은 지나야 새하얗게 될 눈이 이렇게 이른 시간이 하얗게 변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이성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그만큼 그가 분노했다는 것을 뜻한다. “어처구니가 없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셨습니까? 차라리 나보고 발정이 난 암컷들을 찾으라고 하시지.” “어멋! 말이 너무 심하잖아! 난 그렇게 노골적인 말은….” “당신이 이렇게 만들잖아! 욕구를 풀라니, 짜증이 난단 말입니다! 당신 하나만 보고 따르고 욕망하게 해놓고서 소용돌이 산은 무슨 얼어 죽을!” 아주 오랜만에 들은 까칠한 말에, 마리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그런데 태도가 변한 것은 그런 말뿐만이 아니다. 갑자기 암흑 지형의 검은 기운이 그들, 정확히는 하이너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하, 하이너?” “이 지긋지긋한 상태도 이젠 끝이야. 인간들의 마력을 흡수하는 것도 취향에 맞지 않아! 이젠 이런 복잡한 생각, 끝이란 말입니다!” 마리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채 묻기도 전에, 하이너는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검은 드래곤이 날아가는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겨울의 시작. 가을의 끝. 그리고…… 이 번뇌의 끝이 오는 신호. 마리의 몸은 드래곤의 마력에 의해 어디론가 옮겨졌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0114 8. 삶, 삶, 삶 =========================================================================                            그 장소는 마리가 당분간 편하게 쉴 수 있는 시귀르의 거처이다. *** 황도 로귀하르트. 황제궁. 검은 드래곤이 향한 곳은 바로 이곳, 황제가 있는 곳이다. 멀리서 검은 드래곤의 모습을 발견한 궁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제각각 으슥한 곳에 몸을 숨겼고, 검은 드래곤은 황궁 광장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왠지 그의 걸음걸이가 이곳에 날아올 때의 빠르기처럼 빠르지 않고 느리다. 검은 드래곤은 위엄이 넘치는 건물의 기다란 복도를 걸었다. 그의 내부에선 제각각의 욕망을 지닌 여러 인격이 끊임없이 다투어댔다. 마황은 여전히 ‘암흑 지형을 파괴하여 세상의 비밀을 밝히라!’고 강요했고, 대현자는 ‘인간 마력자들의 마력은 간에 기별도 차지 않는다!’며 ‘얼른 마나의 인을 움직여 세상 모든 마력을 들이켜라!’고 부추겼다. 지칠 줄 모르는 그들의 부추김을 멈추는 존재는 마르틴, 즉 검은 드래곤의 죽은 동생이다. 마르틴의 영혼은 그 파괴적인 인격들에게 경고하며 제 형이 나아갈 길의 등대 노릇을 해주었다. 「다들 조용히 하지 못해! 모두 좀 닥치라고!…… 그리고 형! 형도 참을 만큼 참았어! 이젠 망설이지 마! 그러려고 여기까지 온 거지? 나는 다 알아. 형이 저들에게 시달리고, 빌어먹을 가을 때문에 드래콘 소녀만 보면 괴로워했다는 걸! 어디 드래콘 소녀뿐이야? 그 대부호의 비서 노릇을 하는 흑인 여자에게도 괴로움을 느껴야 했지! 그래서 형은 늘 충동에 시달려야 했어! 발정 충동이 아니라 마나의 인 자체를 파괴하고 싶은 충동을 말이야! 하지만 형은 마나의 인을 파괴할 수 있으면서도 그러지 않았어. 왜냐하면, 왜냐하면…….」 마르틴의 영혼은 잠시 침묵한다. 하이너는 동생의 뒷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듣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틴은 기어이 이어서 말하고 만다. 「마나의 인을 파괴하면…… 나를 살아있는 때로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아 그게 두려웠기 때문이잖아…….」 정곡을 찌르는 말에 하이너는 걸음을 멈추었다. 번뇌에 시달려 새하얗게 된 그의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려졌다. 「나 때문에 마나의 인을 파괴하지 못한 거잖아!」 하이너는 가슴이 저릿했다. 동생의 목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라, 동생 영혼의 목소리가 뇌리에서 울리는 것뿐인데, 마치 성대에서 울리는 서글픈 감정의 목소리가 두 귓가에 생생히 들리는 것만 같다. 「그러지 마.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영혼이 부활하려면 누군가의 신체를 강탈하는 건 필수라면서? 그건 싫어. 나는 남의 몸을 빼앗아가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아. 나는 그저, 이런 영혼으로서 형을 곁에서 지켜볼 수만 있다면 바라는 게 없어. 그거로 만족해.」 하이너의 감긴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력생물로 평생을 살아갈 생각은 조금도 없는, 그저 일상의 평온함을 원했던 자신에게 내부의 인격들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세상의 비밀을 알고 싶어 환장한 마황과 흡마귀의 괴물이 되라고 부추기는 대현자를 모조리 소멸하고 싶었다. 이 몸의 마력을 없애고 평범한 인간이 되어 예전처럼 아가씨의 평범한 호위기사로서 아가씨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나의 인을 파괴하는 게 필수. 그러나 그것을 파괴해 버리면, 동생 마르틴이 영원히 사라질까……, 그게 두려웠다. 그래서 줄곧 외면해왔다. 마황과 대현자의 강요를 외면하고, 시귀르에서 륀체르가 제공하는 마력자들의 소소한 마력을 먹으며 꾹 참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동생은 이제 그러지 말라고 한다. 여기까지 와 놓고, 머뭇거리지 말라고 한다. 「혹시 형의 몸에 마력이 사라지고, 내 영혼도 사라지게 된다 해도 나는 괜찮아. 나는…… 다시 태어나도 형의 동생으로 태어날 테니까.」 하이너는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목멘 소리가 나올 것 같기 때문이다. 「나를 배려해주는 건 이제 됐어, 형. 이것으로 충분해. 나는 행복해.」 하이너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허리춤에서 마리티오르를 빼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하늘로 쳐 올렸다. 과거, 오를린에서 동생과 함께 살 적에, 마리티오르를 들고 이렇게 멋진 몸짓을 하면 동생은 언제나 탄성을 지르곤 했다. 마르틴. 미안하구나. 하이너는 사과를 가슴에 묻고서, 황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드래곤의 강력한 마력은 꽁꽁 잠긴 문도 쉽게 부수어 버렸다. 검은 드래곤에 겁을 먹고 궁인들 대부분 몸을 숨겼지만, 황제를 포함한 황족들, 그리고 시중을 드는 이들은 모두 한곳에 모여 있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차림으로 가장 화려한 방에 모조리 모여서 널찍한 탁자에 둘러앉아 차를 마신다. 죽음을 기다리는 걸까? 아니면 검은 드래곤의 성정이 사람들을 몰살시킬 정도로 잔혹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여유를 부리는 걸까? 황제는 검은 드래곤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찻잔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지금 그는 황권의 상징인 마나의 인을 따로 숨기지도 않고 있다. 검은 드래곤이 다시 궁에 온다는 것은, 어떻게든 마나의 인을 노린다는 의미이고, 황제로서는 그것을 막을 길이 없다. 두려움에 떨면서 마나의 인을 감추기보다는 차라리 태연하게 있기를 택한 것이다. 하이너는 친절하게도 황제에게 지금부터 할 일에 관해 알려주었다. “들어라.” 황제를 포함한 황족 모두의 시선이 검은 드래곤에게 향했다. 하이너는 건조한 목소리를 뱉었다. “앞으로, 당신들이 여태 누렸던 안락함을 빼앗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미리 사과하도록 하지. 모든 인간은 행복해야 한다는 제국 건국이념 따윈 모른다. 비오르틴 네가 황제로서 지켜야 할 의무 혹은 마나의 인을 향한 권리 같은 것도 관심 없다. 나는 단지……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는, 오를린의 평범한 남자로 되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황족들이 웅성거렸고 비오르틴은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는…… 이라고 했나? 그것참 부럽군.” 황후의 눈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황족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하이너는 마지막 말을 던졌다. 검은 드래곤으로서 뱉는 마지막 말을. “그러니…… 나를 원망하지는 마라.” 마나의 인, 아주 오랫동안 로귀하르트 제국 권력의 핵이 되었던 물건이 파괴되기 직전이다. 검은 드래곤을 괴롭히는 저주와 함께, 마나의 인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 대륙 전부가 잠이 들었다. 인간들도, 수인들도, 동물, 식물, 모두가 잠이 들어 꼬박 하루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그것뿐이 아니다. 하늘에서 내리던 눈도 허공에 정지하고, 바람에 날리던 앙상한 나뭇가지는 떨림을 멈추었고, 거기서 떨어지는 잎들도 하강을 멈추었다. 암흑 지형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들도 그림 속 검은 연기가 된 듯 멈춰버렸다. 세상은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먼 훗날, 사람들은 그날 일을 두고 대륙이 꿈꾼 날이라고 불렀다. *** 검은 드래곤이 마나의 인을 파괴하고, 꼬박 하루가 지났다. 정지해있던 세상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난 세상은 부자연스럽게 일상을 펼쳐나갔다. 해가 움직이고, 허공에 떠 있는 눈들이 바닥에 닿았다. 눈 쌓인 세상은 점점 하얘졌다. 그리고 이 눈은 암흑지형에도 예외가 없다. 본래 암흑지형에 눈 따윈 내리지 않는데 말이다. 기이하게도 암흑지형이 고대의 모습을 되찾았다. 눈을 내리는 하늘과 땅이 생긴 암흑지형은 이제 더는 암흑지형이라 부를 수 없으리라. 고대처럼, 북쪽 평야로 불릴 것이다. 차원의 균열에서 흘러나온 동물, 사물 들이 모습을 싹 감추었다. 마치 처음부터 세상에 없는 듯 홀연히 사라졌다. 그 탓에 차원의 균열에서 흘러나온 물건을 거래하던 상인들은 울상을 지어야 했다. 울상을 짓는 사람은 그들뿐만이 아니다. 자그마한 마력생물을 팔던 상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기들의 상품에서 마력이 사라진 것을 눈치채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 괴지. 사괴탄이 죽은 이후, 폐허가 된 마검제조 공장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음산한 소리가 맴돌았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마검들의 검성일 거라고 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괴지를 떠도는 사람들의 환청이었을까? 이제 더는 검성이 울리지 않는다. *** 오를린의 소용돌이 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일반 짐승들이 마력생물을 사냥하기 시작했고, 마력생물들은 마력을 쓰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일반 짐승들에게 당하기만 했다. 오를린 사람들을 그것을 보고 ‘이제 소용돌이 산이 위험하진 않겠다!’고 입 모아 말했다. *** 황도 로귀하르트. 잠에서 깨어난 검황 헤세 레 지괴르는 검기와 마기를 조금씩 모았다. 이건 군직에 몸담은 자들이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무조건 하는, 마치 몸에 밴 습관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검기는 모이는데, 마기가 모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빼앗기기라도 한 것처럼. *** 바너. 잠에서 깨어난 륀체르는 자기가 모은 사병들을 한둘 씩 깨워 진행하던 회의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의 비서 홀디네는 마력이 사라진 자기 몸 상태를 마스터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륀체르는 신나게 휘파람을 불었다. ‘뭔지는 몰라도 내가 더 유리해지겠어!’ *** 시귀르. 거처에서 잠들었던 마리는 부스스한 모습으로 잠에서 깨어나 호위기사를 찾았다. 어쩐지 다른 날보다 힘이 없는 느낌에 그녀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힘이 없는 느낌이 불길하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시름을 떨친 듯 가벼웠다. *** 황도 로귀하르트의 제국의학원. 루돌프는 학원 기숙사에서 공부에 열중하다가 코피를 쏟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닦다가 깊은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어난 소년은 찌뿌듯한 몸에 기지개를 켜고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 명의 소녀를 보았다. “마리아 누나? 마리아…… 누나!” 마리아의 특징이던 선홍빛 눈동자가 온데간데없다. 마리아는 지금 진줏빛 머리카락과 어울리는 푸른 눈동자를 하고 있다. 다른 날과 달라 보이는 이 소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눈동자를 적시고 있다. 학생들이 그녀를 보고 웅성거렸고, 루돌프는 재빨리 마리아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반가운 듯 그녀의 두 팔을 잡고서 물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제가 깜빡 잠이 들었죠? 그런데 누나, 그 눈은 대체…….” 드래콘 소녀, 아니, 이제는 마력을 쓸 수 없게 되어 인간 그 자체가 되어버린 마리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어떻게 해? 나 좀 고쳐줘, 루돌프! 나, 더는…… 더 이상…….” “예?” “원래의 모습으로 변할 수가 없어!” 원래의 모습이라. 그 말인즉, 이제 더는 드래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걸 뜻한다. 얼떨떨한 말을 들은 루돌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마리아를 보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세상은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마리아 누나는 뭔가 변한 것 같다. 인간의 감정, 상실감이 짙은 목소리와 당황에 빠진 표정이 그걸 증명한다. “너는 의술에 능하니까 내 증상도 잘 알겠지? 내가 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는지, 잘 알겠지?” 루돌프는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요, 누나.” “루돌프…….” 마리아는 아예 주저앉아 버렸다. 혼자서 소용돌이 산에 있다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루돌프가 있는 곳까지 왔는데, 오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니 온몸을 휘감는 무거운 느낌, 그리고 둔해진 감각이라니. 마치 인간들의 감각이 몸에 들어선 듯했다. 이런 증상이 불안해서 루돌프에게 물었지만, 아쉽게도 루돌프는 모른다고 한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한다. “흐흐흑…….” 마리아가 절망적으로 울음을 터뜨렸고, 루돌프는 한숨을 쉬면서 웃었다. 그리고 그녀와 눈을 맞춰 앉았다. “누나가 어째서 이런 눈을 하고 있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요.” “……?” “오랜만에 누나를 보니까 정말 좋아요. 누나가 나를 찾아와줘서, 나는 정말 반갑고 기뻐요.” 루돌프는 망설이다가 마리아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소년이 전해주는 손의 온기가 마리아의 시름은 잠시나마 덜어주었다. “루돌프…….” 우울하던 마리아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 황궁. 대륙 곳곳에 퍼진 변화, 마력이 사라진 현상은 황궁도 예외가 없다. 로테는 황족 중에서 가장 먼저 눈을 떴다. 품에 아이를 안은 채 잠들어버린 그녀는 아이의 꿈틀거림에 가장 먼저 의식을 차릴 수 있었다. 모두가 잠들어 있다. 남편부터 시작해 선황, 선황의 애인들, 선황의 형제들, 모두가 잠들어 있고, 정신이 든 것은 오직 로테 자신과 딸 뿐이다. 그리고 검은 드래곤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마나의 인을 파괴해버리고 재빨리 어디론가 몸을 숨긴 게 분명하리라. 로테는 아니카를 안고 찌뿌듯한 몸을 풀 겸 멍하니 한 걸음씩 걸었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아이가 웃는 것 같다. 로테는 아이의 얼굴을 샅샅이 보았다. 그아아…… 갸르…… 하고 웃는 소리가 평소와 달라 눈을 뗄 수가 없다. ‘잠깐……?’ 안대 주위를 늘 맴돌던 검은 연기 같은 게 보이지 않는다. 로테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아이의 눈을 감싸는 안대를 풀었다. 그리고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아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마므아…… 기아아…… 꺄!” 높은 목소리로 옹알이하는 아니카, 이 아이의 눈에 더는 검은 기운은 흘러나오지 않는다. 검은 기운을 뿜어내던 끔찍한 눈은 제 어미와 같은 청록색 눈, 바다와 숲을 섞은 듯한 아름다운 빛깔로 반짝이고 있다. 감격한 로테의 두 눈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검은 드래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지금 그녀는 검은 드래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카…… 오오! 나의 아니카! 난 알고 있었어! 난 진즉 알았다고! 네 눈이 이렇게 예쁘다는 걸 어찌 모를 수 있겠니! 아아, 감사합니다! 로젠플라드시여…… 감사, 또 감사합니다!” 기뻐하는 목소리에 아니카도 따라 웃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미의 얼굴을 보는 아이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날 기미가 없다. 그리고 모녀의 웃음소리에, 잠을 깬 또 하나의 사람이 있으니……. “아니카!” 기쁨의 탄성을 지르는 그는 바로 황제, 아니, 어여쁜 딸아이의 아버지 비올이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0115 8. 삶, 삶, 삶 =========================================================================                            장인의 도시 바너. 수도 크래파. 오래된 가구에 흐르는 품격처럼 점잖은 역사를 자랑하는 이 도시엔 언제나 장인들과 그 제자들이 넘쳐났다. 어지간해선 군인이란 존재가 대거 모여들 일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크래파 대광장에 어마어마한 수의 군인들이 집결해 있다. 이들은 바로 륀체르 사파이어의 사병들이다. 연녹색 군복을 갖춰 입은 그들은 곧 출정 예정이다. ‘대륙이 꿈꾼 날’ 이후, 권력자들의 전쟁은 오직 각자가 가진 군대의 결투로만 판결이 날 분위기다. 하여 륀체르는 사병을 움직이기로 했다. 홀디네가 마력을 쓸 수 없으며, 다른 모든 마력이 깃든 것들도 힘이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은 륀체르는 이때야말로 자기 사병들이 훈련한 것들을 전부 뽐내야 할 적기라고 여겼다. 륀체르는 가장 먼저 포르투바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은 황궁을 치려고 사병들을 이곳에 집결하였다. 군인들 앞에 선 륀체르는 원래 직업이 군인이었다 해도 될 정도로 위엄이 넘쳐흘렀다. 흑마에 올라탄 그가 검을 들어 보이며 모두에게 외쳤다. “모두 들어라! 마나의 인을 관리하지 못한 황제는 이미 제국 정부를 이끌어갈 의미와 자격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어디 그 죄뿐인가? 그는 기갑체 공정 독점이라는 사익을 취하려고 바너를 건드려 제국 경제를 어지럽힌 죄까지 있다. 이는 마땅히 우리 제국민이 엄벌로써 다스려야만 한다. 자아! 다들 생명의 역광(북쪽 강의 이름)을 건너 할데바인부터 휩쓸어 버리자! 할데바인 다음엔 황도 로귀하르트다!” “와아아아아!” 수많은 군인이 내지르는 함성은 크래파 광장을 부수어버릴 듯했다. 제국을 위한 강직한 충성심보다는 부담스러운 의무감으로 모인 제국 군대와 달리, 사파이어 군대는 오직 돈을 향한 욕망으로 모인 집단이고, 륀체르가 모든 금권을 쏟아 부은 결과 지금 그의 군대 사기는 제국 군대보다 훨씬 높다고 자부할 수 있다. 륀체르는 난생처음으로 직접 전투에 나서는 지휘관이 되어 앞장섰다. “자! 가자고! 건방진 황족 녀석들을 아주 처참하게 짓밟아주마!” 뿔피리가 세 번 울리고, 군인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우중충한 빛을 띠는 겨울 하늘이 앞으로 다가올 황가의 운명을 알려주는 듯하다. *** 얼음 도시 시귀르. 륀체르가 제공해준 마리의 거처. ‘대륙이 꿈꾼 날’ 이후 겨우 닷새가 지났다. 마력이 사라진 세상은 마법영상구를 이용할 수 없고, 각종 스크롤이나 마약 같은 마력이 깃든 물건을 이용할 수도 없다. 텔레포트 홀 같은 시설도 마찬가지. 마력이 쓰였던 모든 것에, 이제는 인간의 순수한 힘이 필요하다. 제국의 심장인 황도 소식을 들으려면, 무조건 황도에 사람을 보내야만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황도에서 멀리 떨어진 시귀르는 당연히 고요하다. 마리는 황궁의 소식도, 호위기사의 소식도 듣지 못했다. 마력이 사라져 흉흉한 분위기가 감도는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사파이어 재단에서 전달해주는 잡다한 소식만 수동적으로 받고 있다. 세상 소식에 어두운 것이 답답하고 한곳에 있기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그녀는 한계에 다다랐다. 하여, 그녀는 짐을 꾸렸다. 부피가 작고 값비싼 물건을 가방에 챙겼다. 그리고 이제는 쓸 수 없어 종잇조각이 된 스크롤은 버리고 외투 한 벌, 겨울 장화, 봄 구두를 챙겼다. 아침 식사를 가져온 사용인이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난처해 했다. 왠지 이 아가씨가 외출하는 일만은 왠지 막아야 할 것 같다. 마스터 륀체르 사파이어로부터 따로 보고받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저런 가녀린 여자가 함부로 돌아다니기에는 위험한 시기이니 말이다. “어딜 가시는지요?” “알려줄 이유가 있을까?” “물론 제가 들을 필요는 없겠지요. 무엇 때문에 나가시려는지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여길 떠나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흐응. 세상이 어수선한 건 나도 안다고. 아니까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준비하는 거 아니야?” 마리가 외투의 단추를 열어 보였다. 그러자 외투 속 차림이 드러났다. 지금 마리는 남자처럼 바지를 입고 있다. 바지 뿐 아니라 상의도 남성용 셔츠다. 그러고 보니 머리에도 모자를 쓰고 있다. 기다란 머리카락을 모두 가리는 털모자. ‘남장하고 밖을 떠돌 예정인가?’ 물론 남자의 행색으로 돌아다니는 게 아름다운 아가씨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용인은 마리가 이곳을 떠나지 않았으면 했다. ‘흐음. 이 고집 세 보이는 아가씨를 어떻게 말린담?’ 일단 식사가 든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쟁반의 찻잔만 들어 마리에게 건넸다. 찻잔에서는 과일 차의 달콤한 향기가 솟아 나왔다. “그럼 가실 땐 가시더라도 이걸 좀 마시세요. 몸이 따뜻해질 겁니다. 향도 참 좋고요.” 마침 밖 날씨가 매우 쌀쌀하다. 마리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순간. 사용인의 손이 미끄러져 마리의 옷에 뜨거운 찻물이 흘러내렸다. 찻물은 옷을 적시고 맨살에도 닿았다. 놀란 마리가 팔짝 뛰었다. “앗, 뜨거!” “어마맛! 이를 어째!” 사용인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잔에 남은 한 방울까지 모두 마리의 옷에 퍼붓고 있다. 마리는 젖은 외투와 옷을 벗으며 속상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사용인은 재빠르게 그녀의 외투와 셔츠를 가지고 밖으로 나가며 친절하게 말했다. “기다리세요! 금방 빨아서 말려 갖다 드릴게요!” 순 거짓말이다. 외투는 어딘가에 쏙 감춰질 것이다. 마리도 사용인의 표정에서 그 속셈을 느꼈다. 문이 닫히고, 마리는 찌푸렸던 얼굴에서 금세 히죽 웃는 얼굴로 변했다. “흥! 내가 그거 아니면 다른 옷은 없을 줄 알고?” 그녀가 버려둔 짐에서 새 외투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문이 또 열렸다. 마리는 들어온 이가 사용인인 줄 알고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세탁 따윈 할 필요 없다고. 난 여길 떠날 거야.” “…… 떠나긴 어딜 떠나십니까?” 익숙한 중저음. 마리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닷새 전에 헤어지고 소식이 없던 호위기사가 지금 이 같은 공간에, 아주 말끔한 모습으로 서 있다. 헤어졌던 당시와 똑같은 복장, 그런데 눈이 검다. 원래처럼, 맑은 검은색이다. “하이너?” 하이너가 마리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이제 마력 따윈 모두 사라졌단 말입니다.” “알아, 아는데….” “만약, 지금 떠나셔서 저와 길이 엇갈리기라도 하시면 어쩌시려고요?” “왜 이제 오는 거야! 너 찾으러 가려는 거였다고!” 마리는 하이너의 목을 끌어안았다. 하이너를 만나려고 길을 나서려 했는데, 하이너가 나타나 준 이 현실이 기적 같아서 그의 목을 몇 번이나 문지른다. 거울 표면처럼 부드럽고 오래된 나무보다 단단한 이 목, 이 온기 가득한 살이 얼마나 반가운지! 하이너는 말없이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찻물에 옷을 버려 달랑 가슴 속옷만 입고 있는 그녀의 상체 곳곳에 호위기사의 크고 따뜻한 손이 천천히 머무른다. 닷새 만에 만난 아가씨의 살결이 반가운 건 그도 마찬가지다. “저를 찾으려 하시다니요. 호위기사가 괜히 호위기사입니까? 때가 되면 아가씨께 돌아오는 게 당연한데. 그나저나…….” 하이너는 잠시 마리의 몸을 떼 냈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를 가리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눈동자를 지긋하게 보았다. 암흑지형에서 있었던 일이 하나하나 되새겨졌다. “아가씨께선 분명 그러셨지요. 가을이 간다는 둥, 화끈하게 즐길 수 있는 시기가 지나간다는 둥, 제가 욕구만 풀 수 있다면 무슨 짓을 해도 좋을 것 같다는 둥,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셨으니…….” 마리는 암흑지형에서 한 말을 떠올리곤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당시엔 호위기사를 잔뜩 화나게 해서 원래의 까칠한 성격을 되돌리고 싶었다. 음습한 마기가 들끓는 장소에서 가장 자극하는 말을 하면 호위기사의 본래 성질이 나올 것 같아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호위기사는 그때의 일이 아주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이제는 보복을 좀 받으셔야겠습니다.” “보복?” “호위기사에게 월급도 제대로 주지 않으시면서 속을 박박 긁으셨으니, 벌을 받으셔야겠지요.” “하이너, 저기! 월급 운운하는 건 예전 같아서 듣기 좋은데, 벌이라니 무슨……!” 하이너는 마리를 순식간에 들어 올렸다. 보복과 벌을 말하면서도 그의 표정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는 아가씨의 몸을 인형처럼 가볍게 다루며 침대로 데려갔다. 지금부터 아가씨에게 드릴 대가는 지독할 것이다. 그동안 참고 참아야 했던, 온갖 억눌린 욕망을 한꺼번에 터트리는 것으로 벌을 줄 것이기에 아가씨는 단단히 각오하셔야 할 것이다. 아가씨도 그걸 느꼈는지 침대에서 뒤로 슬그슬금 물러났다. 생글생글 웃으려 애쓰지만, 어째 겁을 먹으신 얼굴. 좀처럼 보기 힘든 표정이다. 하이너는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웃었다. “하이너, 오늘따라 굉장히 무서운 거 알아? 드래곤일 때보다 더 무섭다고……!” 하이너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가녀린 발목을 붙잡아 더는 뒤로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어차피 아가씨께 더 도망갈 공간 따위 없다. 마침 옷을 반쯤 벗고 계시니 참 편하다. 무례한 두 손이 아가씨의 속옷을 단번에 벗겨 내렸다. “엇!” “아가씨….”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꽃이 눈앞에 있다. 어떻게 하면 그 꽃이 활짝 피는지 너무나 잘 아는 하이너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그곳에 얼굴을 묻었다. 혀가 은밀하고 섬세한 춤을 춘다. 그런데 그 움직임은 결국, 가장 무자비한 애무가 되었다. “아아…… 읏!” 마리가 호위기사의 머리를 붙잡고 가녀린 사지를 파들파들 떨었다. 표정만 보자면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절대로 호위기사를 밀어내지 않는 몸짓. 그 몸짓은 호위기사를 웃게 했다. 그러나 웃는 것도 잠시, 곧 그의 입술은 다시 꼿꼿한 혀를 빼내 아가씨의 은밀한 감각을 부추겼다. 살결에 가려졌던 작은 구슬이 한껏 달아올라서 빨갛게 부풀어 고개를 내민다. 아래에서 흘리는 농밀한 체액을 핥던 호위기사는 그 젖은 혀로 구슬을 건드리다가 한꺼번에 힘주어 빨아들였다. “아아!” 하이너의 몸이 바짝 흥분했다. 순수하게 아가씨의 몸에 흥분할 수 있는 게 대체 얼마 만일까? 아주 오랜만에 돌아온 이런 은밀한 시간에,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흥분에 취한 목소리로 모조리 쏟아져 나왔다. “하아. 당신은… 마셔도 마셔도 저를 목마르게 하는 여자입니다.” “그, 읏, 그런데 이젠… 앗! 저주는? 읏, 앙!” “…… 흡마귀의 저주? 세계의 비밀? 다 꺼지라 그러십시오.” “정말 괜찮은 거야? 견딜 수 있어?”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당신을 향한 목마름이었습니다. 당신을 마시고 마셔도 취할 수 없었던 현실이었으니까.” “읏, 아앙!” “지금부터 당신을 원 없이 취하고, 가질 거야.” 한껏 녹진해진 살 틈으로 기다란 손가락이 뱀처럼 찾아들었다. 그 뱀은 저를 꽉 죈 내부가 답답하다는 듯 난폭하게 움직였다. 마리는 전율했다. “으읏! 아, 안 돼!” 안 된다고 하시면서도 그곳은 꽉 물고 끊어버릴 듯 죈다. 하이너가 흥분 어린 숨을 뱉으며 잠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리의 귓가에 키스를 몇 번이고 했다. “언젠가 그러셨지요. 창녀이자 애인이 되어주시겠다고, 이제 그런 말은 필요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 욕구를 해결하란 말도 더는 듣지 않겠습니다. 제가 정리해 드리지요. 당신은 내 거예요. 창녀도 애인도 아닌 내 소유물이 되어주셔야…….” 그는 말을 잠시 끊으며 제 것을 드러냈다. 아가씨의 앞에서 당당히 발기한 그것이 위협적인 기운을 뿜어낸다. 하이너는 마리를 눕혔다. “준비되셨지요?” 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이너에게 따로 대답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대답이 무엇이든 간에 그는 쌓아두었던 정염을 터뜨릴 작정이다. “하이너….” 마리는 얌전하다. 가녀린 두 다리가 호위기사의 어깨에 올라가고, 젖은 틈새에 딱딱하게 선 것이 꽉 들어차 움직임이 시작되어도, 그녀는 얌전해 보였다. 그러나 호위기사의 것을 받아들이는 안쪽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히 맥동했다. 결합부에서 질척질척 음란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흐읏… 읏! 아!” 하이너가 어깨에 걸친 가느다란 발목을 양손으로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마치 따스하고 축축한 살결을 잠시 그대로 느끼고 싶어 하는 듯. “후우…….” 그의 허리가 잠시 멈추나 싶더니 다시 거세게 움직였다. “굉장해…… 이거 진짜 미칠 것 같군요.” “하아, 읏, 하앙!” “그거 아십니까? 내 아래서, 내가 이끄는 몸짓으로, 내 것이 되어 신음하는 당신을 보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 “아, 아, 아아!” 하이너는 마리의 상체를 일으켜 안고서 또 허리를 움직였다. 한껏 높아진 숨소리로 쾌감을 표현하는 아가씨의 머리를 감싸고 한참 동안 기계처럼, 그것도 한 사람의 몸을 파괴하려 작정한 무시무시한 기계처럼 허리를 움직였다. “흐윽, 으!” 깊게 치고 들어올 때마다 마리의 시야가 통째로 백색에 물든다. 차라리 고통이라 말할 수 있는 쾌감에 허덕이면서 마리는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집착 어린 호위기사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갈퀴처럼 긁어댔다. “당신은 내 거야! 나도 당신 것이고! 그러니 다시는 다른 것으로 욕구를 해소하란 말 따윈 하지 마!” “아아, 하이너! 읏!” “이젠 나를 진짜 연인으로 인정해 달란 말입니다!” “아! 지, 진짜 연인…… 진짜… 어쩌지?” 하이너는 끊임없이 그녀의 몸을 갈구하며 대답했다. “뭘 말입니까.” “하아, 아! 마, 마…….” 마음도, 몸도, 이 남자가 중심이 된다. 진짜 연인으로 인정해 달라는 말이 이리도 무섭게 느껴질 수가. 이 남자에게 휘둘려 한몸이 되고 그가 일방적으로 선사하는 쾌락에 빠지자, 그제야 깨달았다. 암흑지형에서 하이너와 헤어졌던 닷새 전부터, 아니, 하이너가 번뇌에 괴로워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니, 어쩌면 훨씬 그 이전부터…… 이 여행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 아닌 호위기사가 되는 느낌, 그런 묘한 느낌이 마리는 두려웠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이너 없이는 이만큼 오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 자기 자신은 그저 치기 어린 인간에다 몸만 먼저 나서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다. 마리는 한껏 고조된 쾌감 속에서 겨우 정신을 차리며 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커다란 호위기사의 몸을 껴안았다. 속에 담아두었던 말이 나왔다. “하아, 아! 미안해! 알잖니? 읏…! 난 누구의 것이 되진 못해! 그런 성질이 안 된다고! 내가 잘못했어! 무모하게 여행하고 고생만 시켜서, 읏……! 아! 이제 너는 내 호위기사를 하지 않아도 돼!” 예상도 하지 못한 말은 하이너를 화나게 했다. 그는 갑자기 몸짓을 멈추다가, 마리를 뒤돌아 엎드리게 했다. 달아오른 작은 엉덩이를 가득 들어 올리고, 그 갈라진 틈새에 자신을 거칠게 박아 넣었다. 아가씨의 입에서 거친 신음이 짧게 터져 나왔다. “으읏!”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마력이 없어지니 날 버리겠단 겁니까? 세상에서 마력이 사라졌으니, 호위기사 놈도 별 볼 일 없어졌다고 버리시려고?” “아, 그게 아니라…!” 하이너는 더욱 성이 나서 그녀를 밀어붙였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후우…… 잘 들어요. 나는 두려웠어. 드래곤이 아닌 평범한 인간인 채로 당신을 제대로 지켜낼 수 있을까 두려웠다고.” 솔직해진 감정만큼이나, 몸짓도 적나라해졌다. 마리는 위기를 느꼈다. 절정을 코앞에 둔 하이너의 몸짓을 얼른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 아아! 하이너, 이제 안에는 절대…!” 마력이 사라지고, 마력으로 인한 피임 효과도 사라진 지금, 너무 위험하다. 이미 삽입한 채로 이러는 것부터 선을 넘은 짓이 아닌가? 이제 더는 곤란하다. 자신의 안에서 절정을 맞이하게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이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만둬 달라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의 성기가 작살이 된 것 같고, 그를 절대 거부할 수 없을 것 같다. “아, 아! 어떻게 해! 아!” 하이너가 그녀의 허리를 더욱 세게 붙들고 절정을 향해 달렸다. “그러니 나는 죽을 때까지 당신 곁에서 당신을 지키는 것을 증명해 보이면서 살겠어. 후우, 이건 당신의 호위기사로 있겠다는 말이 아니야, 당신의 연인, 진짜 연인이 되겠단 말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나를 내쳐서도, 내게서 도망가서도 안 돼. 절대…… 안 됩니다. 아……!” 그의 입에서 새하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잔뜩 수축한 살결 속에 뜨겁고 진한 체액이 번졌다. 동시에 절정에 이른 마리가 온몸을 떨었다. 곧, 하이너의 커다란 몸이 마리의 가녀린 등을 깔고 쓰러졌다. “하아…….” 하이너는 아가씨가 무거워할까 봐 금세 그 가녀린 몸을 돌려 눕혔다. “눈을 떠. 나를 보십시오.” 마리가 쾌감에 눈물을 흘리던 눈을 천천히 떴다. 하이너의 눈을 보기가 두려웠다.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 무서운 집착과 소유욕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틀린 생각이다. 한없이 검고 투명한 눈동자는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두려움을 안고 있다. 그 눈이, 당신이 없으면 안 된다고 애원한다. “얼른 대답하세요.” “하아, 하… 대체 무슨…….” “나의 평생 연인이 되어주겠다고.” 그 눈에, 마리는 자기가 지금껏 했던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자신은 몸도 마음도 이 남자가 중심이 되는 걸 경계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삶이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두려움을 만드는 건 철저히 자기 하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이다. 자신과 달리, 이 남자의 눈은 그 반대다. 오직 하나의 감정만 말한다. 오직 순정, 그것만 외친다. 아가씨의 중심에 자신이 없다고 항의하는 눈. 아가씨를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아가씨가 자신을 쳐 내려 해서 두렵고 겁을 먹은 표정. “어쩜 이렇게 미아 같은 얼굴을 하는 거야, 하이너….” 하이너는 떼를 쓴다고 욕먹어도 좋았다. “내가 여행에 따라가 줬으니, 이젠 당신이 갚을 차례잖아.” 마리가 눈을 감았다. 당신이 갚을 차례라니…… 도저히 이 말을 듣고, 그를 거부할 수 없다. 그럼. 갚다, 마다. 새하얀 열 개의 손가락이 호위기사의 반듯한 이마에 닿았다. 그리고 그 이마에, 촉촉한 입술도 닿았다. “아가씨…?” “이제 아가씨라고 부르지 마.” “예?” “마리라고 부르렴. 그리고 나 미리니시네 루 오를린. 여기서 맹세할게. 너의 진짜 애인이 되어주기로. 하이너 그로스의 평생 연인이 되어주기로!”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0116 8. 삶, 삶, 삶 =========================================================================                            어느 해, 그러니까 비오르틴에게 아직 앳된 소년티가 그대로 남아있었을 때의 일이다. 먼 곳에서 황궁까지 손님이 찾아왔다. 궁의 출입 허가를 받은 적이 없으며 귀족 작위도 없는 그자의 이름은 바로 륀체르 사파이어였다. 그는 비록 귀족 작위는 없어도 바너의 모든 길드장을 통솔하는 길드 마스터의 직위는 있었다. 그의 진알 요청에 궁 안 황족, 귀족의 시선이 쏠렸다. “제 아비를 죽이고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던데, 그런 자가 무슨 이유로 황태자 전하를 만나려고 하는 게지?” “모르지, 뭐. 설마 바너의 영주 자리를 달라고 청할지도?” “오, 그거……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새끼 사자와 바너의 깡패가 장래를 위해 힙을 합친다는 그림인가?” 황태자는 처음엔 륀체르의 진알 요청을 거절했으나, 사흘에 걸친 집요한 요청, 포기를 모르는 륀체르의 성격이 괘씸하기도 하고 흥미가 도는 것도 사실이라 결국에는 진알 요청을 받아들였다. 둘의 만남은 야울 궁의 응접실에서 단둘이서만 은밀하게 이뤄졌다. 그들의 회담이 있었던 후, 황태자의 친우 헤그는 걱정이 되어 궁을 방문했다. 륀체르가 바너의 영주 자리를 황태자에게 청탁했을 거라고 여긴 헤그는, 황태자가 그 청탁을 받아들이는 것을 시기상조라고 여겼다. “어쩌실 겁니까.” “지원해야지.” “하지만 륀체르 사파이어는 출신이 불분명한 자 아닙니까. 그에게 도는 소문도 심상치 않아 뒤탈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 자기 입으로 뒷골목 출신이라 하더군. 제 아비를 죽였느냐고 묻는 말에 딱히 부정하지도 않았고.” “너무 솔직한 인간이군요.” “…… 그래서 마음에 들었어.” 헤그는 황태자의 속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황태자가 륀체르 사파이어와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궁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어. 그래서 염력어로 대화를 나누었지. 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엔 어떤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어. 그는 자신에게 단점이 될 만한 사실도 거침없이 말해주더군. 내가 내게 진실한 자의 부탁을 어찌 외면하겠나?” “그저 솔직하다고 해서 청탁을 들어주려 하시다니요. 그리고 그가 솔직한지 아닌지 누가 장담한단 말씀입니까.” “내가 그런 조사도 하지 않고 그를 만났을 것 같나?” 황태자는 륀체르가 진알 요청을 하는 사흘이라는 시간 내내, 륀체르에 관한 모든 소식을 수집했고 그 정보를 토대로 륀체르의 진심을 판단한 것이다. 헤그는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가 륀체르 사파이어라는 자에게 느낀 바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헤그 너도 알겠지만, 염력어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지. 특히나 도시 뒷골목 출신 창부로 살아온 이가 단시간에 배우기엔 너무 어려운 기술이야. 그런 기술을 그자는 마치 그제, 어제, 늘 써왔던 것처럼 능숙하게 썼어. 염력어 뿐만이 아니야. 손 한 번 대지 않고 빈 찻잔을 탁자에서 옮기는 것, 그 속도를 볼 때, 그의 염력은 상당 수준이지.” “즉, 그 말은…….” “그는 길드 마스터가 되기 이전부터 자기 앞날을 준비할 줄 아는 인간이란 이야기지. 탐나지 않아?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거기까지 올라와 그런 능력을 거침없이 쓰는 패기. 나는 그런 자의 부탁을 외면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친해지고 싶지.” 헤그는 황태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략 이해할 수 있었다. 앞을 그릴 줄 아는 용기 있는 야심가는 나중에 황태자가 황권을 잡을 때 크게 이용할 수 있는 존재로 클 것이다. 황태자는 아군을 만들어두려 하는 것이다. “그럼 그를 정말로 바너 영주로 천거하실 예정입니까?” “무슨 말이야, 바너 영주라니? 내가 황제 폐하라도 되는 줄 알아? 난 아직 거기까지 힘이 미치지 못해.” “그렇다면…….” “듣자하니 예전 길드 마스터의 편에 서서 상업을 주름잡던 이들이 륀체르에게 날을 세운다더군. 나는 그걸 조금 정리해줄 작정이야. 그가 바너에서 막힘없이 사업할 수 있도록 말이지. 그거야말로, 지금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호의지.” 황태자는 그 당시만 해도 륀체르를 도와주면서, 거목으로 자라날 나무의 씨를 심는 기분만을 느꼈다. 그 후로 그와 형과 아우 할 정도로 친분을 다지면서, 헤그 다음으로 든든한 사람을 얻었다고 여겼다. *** 황도 로귀하르트. 궁의 겨울은 죽은 듯 고요하다. 황제궁 연못엔 잔물결 하나 일지 않았다. 매끈하고 투명한 표면은 마치 물이 아니라 거울 같고, 그 위에 떨어진 빛은 태양의 부서진 파편 같다. 물가의 헐벗은 나뭇가지에서 사파이어처럼 새파란 털 빛깔을 가진 겨울새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그 때문에 나뭇가지 위에 쌓였던 눈들이 연못으로 떨어져 작은 파문이 일었다. 그런데 파문이 인 것은 연못뿐이 아니었다. 연못가에 자리를 깔아놓고 책을 읽다가 잠시 잠이 들었던 황제 비오르틴의 암흑 같은 꿈속에서도 파문과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아…!” 제 입으로 내지른 짧은 신음에, 악몽을 꿨단 걸 지각한 황제는 눈을 떴다. 시린 겨울 해가 얼굴을 강타했다. “허, 허헉…….” 너무나도 생생한 악몽, 그 속에서 륀체르는 자신의 목을 잘라 버렸다. 최근 그가 반란군을 데리고 진격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인지 꿈도 그런 흉흉한 걸 꾼다. 황제는 그를 믿고 싶다. 믿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륀체르가 자신과 제국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는 륀체르에게 예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염력어를 보냈다. 하지만 닿지 않았다. 그의 성을 부르고, 이름을 부르고, 친하게 어울리던 때처럼 형이라고 불러도, 륀체르에게서는 답이 없다. 아아, 어둡다. 포르투바를 암살한 륀체르는 이제 제국을 넘보려 하겠지. 호랑이 새끼를 키운 거나 다름이 없다. 황의회 의원들과 황제가 가진 모든 재산을 합쳐도 륀체르가 가진 것에는 미치지 못하고, 그러므로 륀체르는 거침없이 군대를 일으킬 것이다. 아니, 이미 일으켰다. 사파이어 가의 깃발이 이곳에 꽂히게 되면, 제국 황제에게 미래는 없다. 그게, 현실이다. 비오르틴은 새하얗게 질린 자기 두 손, 이제는 무력해져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두 손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제발, 그 아이만은……!” *** 트리아노네. 현재 트리아노네에 시녀라고는 없다. 당연한 일이다. 황의회 의원들도 황도를 버리고 각자 살길을 찾아 나섰는데, 귀족 출신의 시녀들이 궁에 발을 붙이고 있을 리 없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저 멀리서 먹구름이 쫓아오면 비와 벼락을 맞기 싫어하는 이들은 알아서 또 다른 햇볕이 드는 자리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구름에 가려진 해는 그들을 도무지 막을 도리가 없다. 로테는 지금 콧노래를 부르면서 오를린의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내용은 곧 자신이 딸과 함께 귀향할 테니 기다려달라는 애정 어린 말이다. 아직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은 오를린 출신의 병사 하나가 편지를 받아들고 먼 길을 떠났다. 로테는 아니카가 잘 자는지 확인했다. 딸이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 그 어디에도 현 상황에 관한 걱정은 찾아볼 수 없다. 이미 그 점에서 그녀는 자기가 황족과는 별개의 존재가 되었다고 느낀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얼마 전 포르투바가 암살당했어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에게 포르투바는 제국 기술원을 이용하려고 접근한 관계, 황족의 안위와 아니카의 눈을 치료하려고 접근한 관계에 지나지 않았다. 황족의 파멸이 결정되고 아니카의 눈이 정상으로 돌아온 지금, 로테에게 포르투바는 먼지와 같은 단어일 뿐이다. 어미의 기척을 느낀 아니카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청록색의 커다란 눈동자는 어미의 얼굴을 보자 한층 더 밝아지는 듯하다. 로테는 그런 딸의 눈을 보면 그저 좋아서 딸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두 눈을 마주치며 다정히 말했다. “그거 아니, 오를린의 봄이 대륙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걸? 사람들은 로샤타르트의 평지가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하지만, 그건 오를린의 진가를 알지 못해서 하는 말이야. 평지의 사계절은 단조롭지. 오를린은 그렇지 않아. 서쪽으론 실렌틴 광산, 북쪽으로는 소용돌이 산, 남쪽으로는 괴지와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둘러싸인 오를린은 봄만 되면 사방에서 꽃으로 물든 산을 볼 수 있단다. 소담한 계곡과 그 물을 찾는 작고 아름다운 동물들도 그림 같지! 왜 몰랐을까. 그곳이 낙원의 풍경과 가장 닮았었는데, 왜 모르고 나는…… 황궁을 원했던 걸까. 딸아. 우리는 그곳에 갈 거야. 너는 거기서 크게 되겠지. 평온하게, 또 한가롭게…….” “그아아아, 갸아.” 아니카는 어미의 말에 대꾸라도 하듯 옹알이를 하며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때, 황제궁의 사람 하나가 찾아 왔다. 그는 바로 검황, 아니 이제는 권력의 불안정함으로 검황이라는 직위조차 입에 올리기 무안해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 헤세 레 지괴르. 곁을 지키는 이가 모두 사라진 황제에게 유일하게 남은 한 사람이다. 헤세는 가지고 온 상자를 로테에게 내밀었다. 로테가 물었다. “이것은 뭐죠?” “열어보시면 압니다.” 로테는 아니카를 잠시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상자를 보았다. 상자의 가장 위쪽엔 종이가 놓여있다. 종이를 펼쳐 드니, 고어로 리슈라, 즉 ‘빛’ 혹은 ‘행운’을 뜻하는 단어가 적혀 있다. 어쩐지 필체에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헤그가 쪽지에 관해 설명했다. “폐하께서 보내신 아니카 전하의 새 이름입니다.” 로테는 하! 하고 비웃었다. 아니카라는 이름에 결코 좋은 뜻이 담긴 게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서글픈 이름을 지어준 이는 바로 다름 아닌 아니카의 아버지 비오르틴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무슨 마음의 변화로 새 이름을 지어주는 것인지? 로테는 종이를 바닥에 버리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속은 반짝이고 있다. 로테가 한때 썼던 작은 왕관, 거기서 나오는 빛이다. “이것은…….” 어제, 로테는 이 왕관이 더는 자기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황제에게 돌려주었다. 그런데 오늘 황제는 이것을 다시 돌려주고 있다. 로테는 뚜껑을 닫아버리며 짜증스럽게 외쳤다. “내 것이 아니니까 돌려준 것일 텐데요!” “그랬지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이것을 다시 당신이 가지길 원하십니다.” “대체 그이는 무슨 생각을…….” 헤세는 황제에게서 들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이 말씀을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 “……?” “이 왕관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로테아르카 당신뿐이라고. 마리니시네가 아닌 오직 당신뿐이라고.” 그는 자기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뒤돌아서서 그곳을 나섰다. 로테는 확 분노가 치밀었다. 이 왕관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나라고? 언니가 아닌 나라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왕관. 바너의 길드 마스터 륀체르 사파이어가 제작했다는 고가의 물건. 무겁고 사치스러운 것. 혹은…… 아름다운 것. 이걸 마리가 아닌 자신에게 주는 이유가 뭔가. 이 무겁고 사치스럽고 아름다운 것을 자신에게 주는 이유가 대관절 뭐냔 말이다. “왜 이딴 걸 내게 주는 거야! 내가 되돌려준 걸 왜, 어째서! 어째서 마리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마음을 안정하려고 아니카를 안아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 날씨가 추워서 그런 게 아니다. 단지 겨울이라, 마력 난방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은 절대 아니다. 불길한 일이 어디선가 일어나는 것 같다.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이 벌어지는 것만 같다. 왠지 그런 느낌에 온몸이 떨렸다. 그런데 그 느낌이 자신의 느낌만은 아닌지, 아니카도 따라 울기 시작했다. “으애애앵…….” 로테는 아이를 달랬다. “자자, 괜찮다. 다 괜찮단다…… 리, 슈……라.” 싫은 말을 했으면서도 끝내는, 아니카의 새 이름, 더 밝고 희망찬 이름을 부르는 그녀다. *** 그 시각, 황제궁. 황제의 처소에는 붉은 열기가 가득하다. 그것은 갓 반역을 당한 황제의 몸에서 나오는 피의 온도일까. 아니면 반역을 일으킨 어느 청년이 뿜어내는 야심의 온도일까. 바닥에 쓰러진 비오르틴의 모습은 처참하다. 륀체르는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살에서 자신의 단도를 빼 들었다. 참 적절한 시간이었다. 그림자처럼 황제를 지키던 검황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이 황제의 거처에 찾아들었으니 말이다. 뭐, 물론 검황 헤세 레 지괴르가 있었다고 해도 황제를 지킬 가능성은 0이겠지. 륀체르는 하늘이 자신을 돕는다 생각하며 피 묻은 구두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피 묻은 단도를 닦으며 한 쪽 입가를 올렸다. “참 고단한 여정이었어, 할데바인 땅을 지나 로귀하르트까지…… 그치? 나도 이런 단시간에 해낼 줄은 몰랐다고.” 그의 부하들은 륀체르와 같은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제국의 미래는 밝을 것 같습니다. 마스터. 아니, 이제는 폐하라고 불러야 하나요?” “글쎄. 난 폐하라는 호칭 싫은데. 집정관 어때? 그게 더 세련돼 보이잖아. 세습권력은 역사에 남겨버리고 이제 공화정을 시작하자고.” 부하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피 흘리는 황제의 육신을 관에 담았다. 그리고 그 관은 밖으로 옮겨졌다. 로귀하르트 제국의 마지막 황제, 비오르틴과의 영원한 이별에 륀체르는 모자를 벗어 정중히 예를 갖추며 중얼거렸다. “이제 편히 쉬길 바란다. 형이 돼서 뒤통수나 치고 정말 미안하구나.” 이제 비오르틴의 육신은 초라한 땅에 버려질 것이다. 이왕이면 괴지와 가까운 곳이 좋겠다고, 륀체르는 생각했다. 권력은 이런 것이다. 이토록 단순한 것이다. 치거나, 당하거나. 그게 자신의 지론이다. 륀체르는 황좌에 앉으며 모두에게 명령했다. “자자, 황의회에서 이빨을 가장 잘 털던 놈 데려와. 본격적인 일은 지금부터잖아?”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0117 8. 삶, 삶, 삶 =========================================================================                            헤그는 로테에게 왕관을 전해준 뒤 황제궁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뭔가 심상치 않다. 궁이 사파이어 색깔의 깃발들로 얼룩져 있다. 로귀하르트를 상징하던 붉은색의 깃발은 사라지고, 궁 전체가 파랗게 물들어 있다. 바너에서 올라온 륀체르 사파이어의 사병들이 궁을 점령한 것이다. 그들의 움직임은 가까운 트리아노네에 있던 헤그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주 고요하고, 신속했다. 그만큼 륀체르의 지휘력 또한 뛰어나다는 걸 증명했다. 때마침 저 멀리, 본궁 건물에서 륀체르가 나왔다. 헤그는 실눈을 떠 륀체르를 살펴보았다. 거리가 멀지만, 반역자의 표정이 잘 보인다. 전혀 웃지 않는 표정, 어찌 보면 죄책감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륀체르의 표정에, 헤그는 직감했다. 자신의 친우, 로귀하르트 제국 황제 비오르틴이 살해당했다는 것을. 온몸에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하다. “비올…….” 아버지와 사괴탄을 잃었을 때처럼 먹먹함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어찌할 도리도 없이 몰락해가는 권력의 소용돌이에서, 친우를 지킬 수 없을 거란 사실에 친우와 함께 죽으려고 황제궁에 있었다. 그런데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친우가 먼저 가 버렸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륀체르의 손짓에 수십 명의 병사가 헤그를 둘러쌌다. 그 밖으로는 수백 명의 궁수가 압박한다. 이렇게 되면 제아무리 무적의 헤그라고 해도, 륀첼의 군대에 맞서거나 도망갈 도리가 없다. 륀체르는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띠고 헤그의 앞에 섰다. 촤앙! 장검을 빼 드는 소리가 끌밋하다. 바너의 검 장인이 만든 최고급 검은 이 순간 숙련된 검황의 검보다 훨씬 위협적이다. 륀체르는 헤그의 목에 검을 갖다 대며 선택권을 주었다. “자, 나 바쁘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여기서 죽을래, 아니면 트리아노네의 그분(로테)을 오를린까지 모셔다드리는 호위기사 노릇을 할래?” 헤그의 눈이 흐려졌다. 선택권을 받았지만, 듣기에 영 기분이 좋지 않다. 황후를 데리고 오를린까지 가라고? 그래. 아무래도 약한 모녀가 머나먼 길을 가려면, 호위가 필요하긴 할 테지. 하지만 어째서 륀체르 저 자가 직접 지시하는가? 로테를 오를린에 보내려면 자기가 직접 호위를 붙여도 되잖은가? 설마…… 검황, 황후, 황녀 모두 오를린으로 가는 길목에서 한꺼번에 죽이려 하는 의도는 아닌지. 온정을 베풀면서 귀향하게 해준다고 해도 결국은 보여주기 식이나 마찬가지다. 누군가 보지 않는 으슥한 곳에서 죽여 버리려는 것이, 륀체르의 의도일 것이다. 무릇 반역자들은 승리를 거두면 황손의 씨를 말리는 법이니까. 헤그는 그 속셈을 알 것 같았지만, 그런데도 한 번 물어는 보았다. “어째서 그분은 살려두는 거지?” 륀체르는 여전히 헤그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댄 채로 천사처럼 대꾸했다. “난 여자와 아이에겐 언제나 관대하지.” 헤그는 차갑게 비웃으며 물었다.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죽이는 게 당신이 말하는 관대함인가?”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라니까. 관대하게 살려드리겠다고. 그러니 당신은 잘 선택하는 게 좋아. 생각해 봐. 황녀 전하를 지키는 게 검황의 마지막 임무였다……, 그림이 좋잖아?” 헤그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선 여기서 죽는 것도 마뜩잖다. 친우의 처와 그 자녀를 책임질 수 있는 데까지는 책임지고 싶었다. “…… 좋아.” “수락한단 뜻이겠지?” “그래.” 륀체르는 검을 거두고 헤그를 보내주었다. 헤그는 륀체르 사병들의 감시하에, 다시 트리아노네로 가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트리아노네에선 아니카 아니, 리슈라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흐아아아앙! 으아아앙! 흐애애애앵!” 궁을 떠나면서 부산스러움에 짜증이 나 우는 걸까. 아니면 배가 고파 우는 걸까. 아니면 잠을 자지 못해서 우는 걸까. 원인이 무엇이든…… 아기의 울음소리라기엔 너무 구슬퍼 듣는 헤그의 심장을 건드린다. 어쩌면 리슈라는 제 아비에게 드리워진 죽음을 아는지도 몰랐다. *** 로귀하르트 제국은 로귀하르트라는 구 황가의 성을 버리지 않았다. 다만, 제국이라는 명칭을 공국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새로운 공국은 집정관 륀체르 사파이어의 주도로 변화를 맞이했다. 제국기술원에서 마력과 관련한 기술을 다루던 이들은 싹 물갈이되었고, 마탑도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했다. 검은 기운이 사라진 암흑지형은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섰고, 각 지역의 텔레포트 홀은 폐쇄되었다. 그리고 제국의 식민지였던 동한과 서한은 자치령이 되어 공국과 평등한 관계를 맺으며 나아가기로 했다. 마력이 사라진 시대, 인간들은 나름대로 살아갈 방식을 구했다. 공국은 인간의 순수한 힘과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기치 아래 의원들을 새로 꾸렸다. 그리고 공국민들은 집정관 사파이어의 새로운 정치를 환영해 마지않았다. 특히나 오슬의 수인족은 륀체르를 신격화했다. 왜냐하면, 륀체르의 주도로 드디어 오슬의 수인족에게도 공국 시민권이 부여된 것이다. 륀체르는 그것 말고도 암암리에 일어났던 종교 탄압을 엄벌하는 법도 만들었다. 모든 일이 가탈 없이 진행되는 와중에 집정관의 정신을 긁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플래티르콘의 다리. 로귀하르트, 할데바인, 로젠플라드 세 곳의 주요 도시를 편히 드나들게 하려고 만든 삼각형의 대형 마력 다리는 마력이 사라진 지금도 하늘에 온전히 떠 있다. 대륙에서 마력은 모조리 사라졌는데, 그 다리에만 마력이 남은 듯 아주 당당하게 말이다. 그 때문에 플래티르콘 다리 아래 살던 밑바닥 인생들은 깔려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다. 다만, 언제 다리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에 하나둘 그곳을 떠나가는 분위기다. 륀체르는 플래티르콘의 다리가 수상하고 신경 쓰여서 견딜 수 없다. 마력의 상징이나 마찬가지가 돼 버린 거대 다리가 하늘에 떠 있는 이상, 사람들은 마력을 향한 희망 혹은 집착을 놓지 않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마력 없는 보통 인간들의 새 시대를 연 집정관의 권위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짐짐한 가운데 궁에 손님이 찾아왔다. 바쁘신 집정관의 사정을 알지만,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다는 요청. 마리니시네 루 오를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에게서 온 요청. 륀체르는 온갖 일정을 미루고 마리를 만나기로 했다. *** “아아! 사파이어 집정관님! 하해와 같으신 마음으로 제 동생의 무사 귀향을 도와준 것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요!” 마리는 신을 만나기라도 한 듯 정중한, 너무 정중해서 비꼬는 것 같은 느낌으로 륀체르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로테가 헤그의 보호를 받으며 오를린까지 이동한다는 말을 들은 마리는 걱정에 빠져 있다. 황족이라면 무조건 죽일 륀체르가 황후와 황녀를 과연 무사히 돌려보낼 수 있을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륀체르는 동생을 걱정하는 마리의 불안한 마음을 훤히 꿰뚫었다. 그는 자기에게 씐 누명이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 그러지 말라고. 왜 날 못 믿는 거야? 난 여자와 아이에겐 관대하다.” 섭섭하단 투로 말하며 자리에 앉는 륀체르에게 마리가 마주 앉으며 씩씩거렸다. “왜 널 못 믿느냐고? 그야 네가 내 동생을 그런 방식으로 고향에 보냈기 때문이지!” “그런 방식?” “궁에 넘치고 넘치는 게 사파이어 사병 아니, 공국 수호대 아닌가요? 그들에게 호위를 맡기지 않고 달랑 한 사람, 그것도 옛 검황에게만 호위를 맡기다니! 그건 마치, 그건 마치 돌아가는 길에 내 동생을 검황과 함께 죽여 버리겠다는 의미로 보인단 말입니다! 알겠어?” 륀체르는 마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에 질식할 것 같다. 형제라고는 꼴 보기 싫은 이복형밖에 없었던 륀체르에게, 마리가 느끼는 자매애는 솔직히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다. “워워, 진정해. 헤세의 검은 제국 최고라고. 네 동생의 호위를 아무에게나 맡긴 게 아니란 말이다.” 하이너 역시 흥분한 마리에게 진정하라고 달랬다. “아가씨, 분노는 피부에 좋지 않습니다.” “지금 그깟 피부…!” 마리는 지금 그깟 피부가 문제냐고 외치려다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발갛게 달아오른 자기 얼굴을 손부채 질로 식히며 차를 들었다. 그리고 제 호위기사에게 보내는 사랑스러운 눈빛까지. 무슨 저런 여자가 다 있나? 분노에서 순식간에 침착함이라니. 감정 변화 속도가 아주 아주 빠르다. 륀체르는 흥미로운 눈길로 마리를 보았다. 하이너는 마치 능숙한 조련사가 야수를 다루듯, 마리에게 일렀다. “집정관‘께서’ 신중하지 못한 결정을 하셨으리라 믿지는 않습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아가씨의 동생인데 나쁜 마음을 품으셨겠습니까.” 륀체르도 거들었다. “그럼. 로테아르카와 그녀의 딸은 무사히 오를린까지 도착할 거니까 화 풀라고. 아, 그리고 잠시 내 방에 좀 가 있겠어?” 마리가 미심쩍은 표정을 하며 되물었다. “네 방에는 왜?” “거기 샹들리에가 있어. 특별 제작한 거지. 네가 온다기에 선물하려고 주문해 놓은 거다.” “흠, 그래? 설마 유방 모양은 아니겠지?” 륀체르는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그것으로 대답이 된 거나 마찬가지다. 마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런 심각한 때에 또 유방으로 장난을 치려 하다니…… 가방에 있는 유방 반지라도 당장 땅에 버리고 싶을 지경이다. 그녀의 감정이 또 격렬해지려 하자, 하이너가 끼어들었다. “설마 진짜 그런 모양이려고요. 아닐 겁니다. 가서 보고 오십시오.” 마리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 내 선물을 외면하지 말라고.” “아가씨, 어서요.” 하지만 지금 분위기를 보니, 왠지 두 남자 사이에 할 말이 있어 보인다. “륀체르, 두고 보자고.” 마리는 시중의 안내를 받아 륀체르가 기거하는 곳으로 갔다. 두 남자만이 남은 탁자엔 침묵이 감돌았다. 륀체르는 하이너가 대체 무슨 수를 써서 마리를 순식간에 얌전하게 만든 건지 궁금해했고, 하이너는 지긋한 눈길로 륀체르를 보고 있다. ‘뭐야, 저놈의 전직 드래곤 자식. 설마 아직도 마력이 있는 거야? 그래서 분노하는 아가씨를 순식간에 최면을 걸어 얌전하게 만든 거?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보이는데…….’ 한참 후에야 륀체르가 입을 열었다. “어이, 드래곤.” “무슨 소리냐. 난 드래곤이 아니다.” 천연덕스러운 표정의 하이너가 딱 끊어 부정했지만, 륀체르는 믿지 않았다. “궁에 온 진짜 목적이 뭐지?” “진짜 목적? 아가씨께서 당신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하셔서.” “글쎄. 그게 아닌 것 같은데.” “그게 맞아.” “하! 웃기지도 않는군. 그런 큰 힘을 갖고 여길 그냥 온다고? 그게 말이 돼?” “말이 안 되면?” “…….” 하이너는 륀체르가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것 같다. 륀체르는 지금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 여전히 드래곤의 마력을 가진 게 아닌지, 그 마력으로 집정관의 자리를 위협할 것인지……. 하이너는 짧은 말로써 륀체르에게 경고했다. “집정관.” “왜.” “앞으로 잘하는 게 좋을 거다.” “뭐?”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플래티르콘의 날개가 이곳에 떨어질지도 몰라.” “…… 뭐? 뭐가 떨어진다고?” “인간 육포라고 들어는 봤나? 궁에서 대량 생산될 테지.” 그리고 그 순간, 하얗게 빛나는 하이너의 눈. 륀체르는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인간 육포라니, 이 잔인한 놈!” 여전히 드래곤은 드래곤이다.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랬기에 플래티르콘의 다리가 멀쩡하게 하늘에 떠 있는 것이고, 그렇기에 저 자의 눈이 저렇게 기묘한 빛을 띠는 것이리라. 륀체르는 하이너가 마나의 인을 파괴하고, 진정 모든 마력의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단 사실을 깨닫고 몸서리치듯 의자에서 일어났다. “뭐야! 이거, 이거, 되게 찝찝하잖아! 진짜 찝찝하다고!” 집정관이 되고 제국을 통솔하는 인간이 되어도, 왠지 저 정의의 기사님께 계속 감시받고 살 것 같다. 여태 과감하게 행해온 반역의 일들이 종이인형의 놀음처럼 한심해지는 느낌에, 륀체르는 짜증이 치솟았다. 그러나 정작 하이너는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는 눈치다. “찝찝할 게 뭐 있나? 명색을 공국으로 해놓고서 독재만 하지 마라. 그러면 이 궁이 플래티르콘의 날개에 박살 나는 일은 없으니.” 요는 드래곤 자신은 최고의 힘을 숨긴 채, 집정관의 감시자가 되겠다는 선언. 하이너는 용건이 끝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만나서 반가웠다. 난 이만 일어서겠어.” 그 순간, 륀체르가 다가가 하이너의 팔을 잡았다. 하이너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륀체르는 손이 떨리는 것을 겨우 참으며, 하이너에게 자기가 생각한 가장 최선의 수를 두었다. “가긴 어딜 가! 날 감시할 거면 먼 데서 하지 말고…… 여기서 해. 여기서 네 아가씨와 함께하라고!” “뭐?” “그러니까, 기사단 단장이 되는 게 어때?” 그 수란 바로, 가장 강력한 힘을 공국을 수호하는 자리에 앉히는 것. 하이너의 눈이 반짝였다. 과거 ‘소박하게’ 기사 작위를 꿈꾸었던 그가 기사단 단장이라는 직위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다. 륀체르는 찰나에 하이너의 심리를 간파하곤, 이 권유에 더욱 강조를 해주었다. “아가씨의 호위기사 말고, 진짜 기사가 되는 거지. 정식 기사 말이야.”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성탄절 연휴 되세요! 00118 8. 삶, 삶, 삶 =========================================================================                            플래티르콘의 다리. 서남쪽 방향. 황도에서 서남쪽 오를린까지 내려가는 길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특히나 마력 이동 편의 시설을 사용할 수 없는 요즘 같은 경우에는 각오를 단단히 해야만 한다. 황도 로귀하르트에서 플래티르콘의 다리를 타고 리데바인까지 간 다음, 줄곧 남하하여 생명의 역광 강을 타고 동쪽으로 가다 보면 네히트가 나온다. 그곳에서 강을 타고 동쪽으로 한참 동안 가야만 오를린이 나오는데, 전 황후 모녀와 그들을 지키는 남자 이 세 사람이 아무리 빠르게 간다고 해도 족히 오십 일 정도는 걸린다. 긴 시간도 시간이지만, 가는 동안 무사히 갈 수 있을지도 걱정이다. 공화정이 시작되고 옛 제국의 행정 체계는 급작스러운 변화에 몹시 어수선하다. 그 사이 공권력의 물갈이는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자연스레 공국 수도 이외 지역의 치안도 불안정해진다. 위험한 마력생물이 사라졌어도 마력생물보다 더 악독한 게 사실은 인간이라, 이런 시기 역시 여행자들에겐 그다지 좋지 않다. 로테와 리슈라, 그리고 헤그는 플래티르콘의 다리를 걸었다. 그러다가 리데바인에 가까워지는 어느 한 지점의 낡은 여관에 하룻밤 머물기로 했다. 물론 치안 문제 때문에 그들은 한방을 썼다. 황도를 떠나 이레가 되는 시간 동안 참 많은 일을 겪었다. 불량배들에게 시비가 걸리는 건 기본이고, 여자와 아이를 팔지 않겠느냐고 묻는 불법 노예 상인들의 음험한 권유를 받은 적도 있으며,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은 불한당들이 헤그에게 칼을 겨눈 적도 있다. 물론 헤그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고, 그런 그가 지키는 로테 모녀도 무사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습격을 당할 수 있단 사실은 모두를 불편하게 한다. 그렇잖은가. 단지 이레 동안 일어난 불상사들이라기에는 너무 잦다. 로테는 헤그에게 매번 보호의 도움을 받아도 어마어마한 불안을 느껴야 했다. 황도를 떠나던 당시만 해도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있던 그녀는 금세 해골처럼 말랐으며, 리슈라 역시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지 밤이면 밤마다 울어댔다. 지금도 리슈라는 목청 높여 울고 있다. “으아아앙! 으아아아앙!”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밑바닥의 신산한 인생을 살다 보니 한밤에 우는 아이를 너그럽게 봐줄 성격이 되지 못했고, 여관 곳곳에서 로테가 묵는 방에 욕설이 날아들었다. “거, 애 좀 조용히 시켜!” “주둥이를 진흙으로 막아버리라고!” “다섯까지 셀 동안 조용히 시키는 게 좋을 거야! 어디 팔려가기 싫다면 말이지!” 사람들의 모진 소리를 알아듣기라도 하는지, 리슈라는 더 서럽게 울어댔다. 참 박복한 아이다. 태어나자마자 앞 못 보는 저주에 걸리나 싶더니, 그 저주가 사라지자마자 아비를 잃었다. 그리고 이젠 어미와 함께하는 고단한 여행길. “리슈라… 옳지, 뚝.” 로테는 리슈라의 기저귀를 확인해주기도 하고, 혹시나 추울세라 이불을 더 덮어주기도 해봤다. 그래도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로테는 결국, 리슈라에게 젖을 먹이기로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다. 잘 나오지도 않는 젖이지만, 리슈라는 어미의 가슴을 빠는 것으로 울음을 그치고 안정을 찾았다. 덕분에 여관에서 머무는 손님들의 사나운 말도 멈췄다. 그제야 로테는 한시름 놓았다. ‘오를린에만 가면 돼, 오를린에만 도착하면 우리는…… 편하게 살 수 있을 거야.’ 제국이 몰락했다 하더라고 새로운 공국 정부는 기존 영지의 영주들에게 호의적이기에, 오를린 영지는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오를린 영지민을 늘 움츠리게 했던 소용돌이 산의 사나운 마력생물들도 모두 사라진 터라 그곳은 인간이 지내기에 참 아늑하고 좋다. 로테는 하루라도 빨리 고향에 도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리슈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진다. 이 좁은 방에서 시선이 느껴질 만한 곳은 단 한 곳. 언제 잠에서 깨어난 것인지, 저쪽에서 헤세가 이쪽을 보고 있다. “……?” 헤그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미술작품을 감상하거나 고귀한 성물을 바라보듯, 어미가 아이의 젖을 먹이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던 그는 문득 로테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실수를 해버렸다. 로테가 비록 이제 더는 황후가 아니더라도, 예의는 지켜야 할 상대다. 그런데 그만 자기도 모르게 실례를 저지른 것 같다. 헤그는 소릴 낮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로테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불쾌해 하지 않았다. 수유하는 모습을 보던 헤그의 시선이 전혀 불쾌함을 자아내지 못할 정도로…… 순진무구했다고 할까? “죄송할 것까지야. 자연스러운 모습일 뿐인데요.” “…….” “아니면 뭔가요? 유모에게 젖 주는 일을 맡겨야 할 황후라는 여자가, 이런 누추한 데서 직접 젖을 먹이니 우스워 보이나요?” 헤그는 그런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다시 고개가 돌아갔다. “그건 절대 아닙니다만….” 그러다 그는 로테의 눈을 보았고, 로테는 풉 하고 웃었다. 헤그는 급하게 다시 시선을 깔았다. 로테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장난으로 해본 말이었어요. 그나저나, 검황께서도 당황하고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을 줄도 아는군요.” 헤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전 황후가 이런 험난한 여정 중에 사람을 놀리는 여유를 보여주다니. ……몰락한 황가를 마지막으로 섬기는 헤그에겐 위안이 되는 모습이다. 그리고 헤그는, 방금 로테가 보여준 장난기가 마리와 닮았다고 느꼈다. 달라 보였어도 역시 이럴 때 보면 자매는 자매인 모양이다. 헤그가 다시 잠이 들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로테가 물었다. “나를 오를린에 바래다준 후에 당신은 어쩔 예정이죠?”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헤그는 눈앞이 새하얘졌다. 어쩔 예정이라니. 특별히 계획은 없다. 몰락한 제국의 검황이 할 수 있는 게 대관절 무엇일까. 지금은 맡은 일만 끝난다면야 어떻게 돼도 상관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오를린까지 간 김에 그곳에서 가까운 괴지에 가보는 것도 좋겠지. 사괴탄의 마검제조공장을 둘러보고 싶다. “……약혼녀를 만나러 가볼까 생각합니다.” 로테는 금시초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약혼녀요? 그런 사람이 있었나요?” “있었…습니다.” “지금 어디 있지요?” “괴지에 있습니다. 아마, 있을 겁니다.” 마검제조 장인이 소멸했단 사실을 믿으면서도, 사실은 믿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라도 헤그는 괴지에 가고 싶고, 약혼녀가 만든 흔적을 느끼고 싶다. 로테는 괴지라는 말에서 헤그의 약혼녀가 누구인지 대충 짐작했다. 그리고 헤그가 누구인지도…… 알 것 같다. 여태 긴가민가하던 생각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역시 저 사람은 헤세가 아니라 헤그였어. 루빈의 그가 맞다고.’ 이제 와 그의 정체를 캐물을 필요는 없겠지. 로테는 리슈라가 잠이 들자, 자기도 잠이 들려고 누웠다. 헤그가 나지막이 밤 인사를 했다. “그럼 주무십시오.” “…….” 헤그와 사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오래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좋았다. 적어도 이렇게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한 남자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었기에. *** 「아가씨의 호위기사 말고, 진짜 기사가 되는 거지. 정식 기사 말이야.」 륀체르에게서 아주 매혹적인 제안을 받았으나, 하이너는 단칼에 거절했다. 진짜 기사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그는 ‘기사단장이 되는 것보다 공국의 슬기로운 치하에서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남자로서의 길을 택하겠다.’는 대답을 남기며 마리가 있는 곳으로 갔다. 웃기지도 않아! 하고 륀체르가 못마땅해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 한때는 황제궁이었으니, 지금은 륀체르의 거처가 된 호화롭고 널찍한 방. 마리는 그곳 바닥에 놓인 괴이한 모양의 샹들리에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곁에 륀체르가 없는데도 륀체르에게 하듯 중얼거렸다. “오, 사파이어! 너는 어쩜 이리도…… 한결같을 수 있는 거니?” 동그란 두 개의 유리구와 그 각각의 가운데 붉은색 광석을 받은 샹들리에는 마지 예전에 선물 받은 유방 반지의 장식을 거대화한 모습이다. 이런 것을 선물이랍시고 주는 것에 마리는 감사해야 할지 아니면 선물한 자를 찾아가 그 가슴에 딱총을 날려야 할지 고민됐다. “이 변태가 공국의 집정관이라니! 정말 큰일인걸! 법도 막 이상하게 만드는 거 아니야? 가슴 작은 여자는 노역 의무를 더 부과한다든가, 가슴 큰 여자에겐 높은 자리를 준다든가 하는…… 좀 얼간이 같은 생각이긴 하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 궁에 새로 들어온 시녀들의 그 가슴이 파인 옷을 보면 딱 느껴지잖아? 흐음.” 그녀는 이 선물을 거절하자니 좀 아쉽다. 선물에 붙은 보석들이 좀 고가인가? 그렇다고 보석 하나하나 다 떼 가자니 이런 샹들리에를 완성한 장인의 예술혼을 무시하는 짓 같기도 하고……, 그런데 한편으로는 가슴 변태 집정관의 주문에 따라 이런 걸 만든 장인에게 과연 예술혼이 있나 싶기도 하면서 머리가 복잡해지는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한 남자가 그녀를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길로 보고 있다. 그는 바로 하이너 그로스. 세상 모든 마력을 압축한 최강의 인간이라고 해도,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 받은 선물 그 휘황찬란함에 눈을 반짝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몹시 신경 쓰이는 일이다. ‘그딴 녀석이 준 것을 뭘 그리 유심히 보십니까!’ 보라. 아가씨께서 저렇게 보석 하나하나를 만지는 해낙낙한 손길을. 그리고 보석보다 더 빛나는 눈빛을! 아가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변태 같은 모양의 샹들리에는 아니라고 생각하듯 체머리를 흔들다가도 다시 보석을 만지신다. 그것은 지켜보는 호위기사 아니, 연인의 가슴을 불타오르게 했다. “아가씨.” 그가 마리의 뒤에 바짝 서자, 놀란 마리가 뒤돌아섰다. “어머, 언제 왔니? 글쎄 이젠 아가씨라 부르지 말고 마리라고 부르래도…….” “결혼합시다.” “……하?” 급작스러운 청혼에 마리는 당황했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얻은 뒤라 득의양양해진 건가? 결혼이라니, 당치도 않다. 그녀는 호위기사의 옷에 구김이 간 것을 펴주며 가르치듯 말했다. “아직 세계 정복이란 숙제가 남아있다고. 내 말 알지?” 하이너에게 이 거절이 반가울 리 없다. 그런데 그때, 하이너 대신 하이너의 대변인이 된 사람이 그곳에 도착했다. “이봐, 야망쟁이 아가씨! 이제 암흑지형도 없고 차원균열도 없는데 세계 정복은 뭐하러 하게?” 그는 륀체르 사파이어로, 기사단장직을 거절한 하이너를 어떻게든 회유하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다. 아가씨가 또 세계 정복이다 뭐다 해서 대륙 곳곳을 다닌다면, 그의 호위기사도 아가씨를 따라가느라 이곳에 머무를 일이 없다. 그렇게 되면 기사단장직에서 더더욱 멀어지겠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사단장 하이너 그로스라는 완성체를 보고 싶은 륀체르는 지금 당장 마리의 세계 정복 욕구를 꺾어야 했다. “귀찮게 살지 말고 이곳에 눌러앉으라니까. 세계 정복을 꼭 거창하게 할 필요 있어? 차기 오를른 영주 후보인 마리니시네 네가 이곳 로귀하르트 공국의 의원으로 살면서 세계를 조금씩 천천히 바꾸는 것도 정복이라 할 수 있다고. 좀 생각을 유연하게 해보란 말이야. 그리고 그리고 대체 뭐 때문에 세계 정복에 집착하는 거야, 응?” 높은 자리를 제안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나, 마리는 딱 잘라 거절했다. “어머나! 집정관 감투를 쓰시더니 정부 인사도 막 제멋대로 하려고 하시네요? 웃기지 말라고! 너 같은 제멋대로의 독재자가 집정관으로 있는 이상, 내게 세계 정복을 해야 하는 명분은 사라지지 않는 거라고!” 그러자 륀체르가 눈을 축 늘어뜨리고 혀를 내미는 등 힘 빠진 시늉을 했다. “오, 그런 말은 말자. 기껏 의원직 하나 주겠다는 말 했다고 나를 제멋대로 행동하는 인간으로 판단하면 곤란해! 그리고 뭐? 독재자라고? 진짜 독재자가 누구인지 알려주랴?” “뭐?” 진짜 독재자. 그 말이 곧 최강의 마력을 가진 자기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어서 하이너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리는 륀체르가 하는 말의 의도가 궁금했다. “륀체르, 무슨 말이야?” 륀체르는 하이너를 가리켰다. “네 기사님께 물어봐. 여전히 드래곤이신 네 기사님께…… 물어보란 말이지.” 여전히 드래곤이라……, 마리는 하이너를 의심 가득한 눈으로 보았다. “너, 아직도 마력이 있는 거야?” 돌아오는 대답은 뾰로통했다. “제 청혼도 받아주시지 않는 분께 대답해서 뭐합니까.”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표지를 바꾸었어요. 이 소설도 끝나가고 취미 삼아 놓았던 그림이나 그려보려고... 그래서 표지가 시시각각 변할지도 모르겠음. 세라비이 2호 말로는 표지의 하이너가 댕기동자 같다고 ㅠㅠ 00119 8. 삶, 삶, 삶 =========================================================================                            “뭐얏! 얼른 대답이나 하지 못해?” “제게 마력이 있는지 없는지 알고 싶다면, 얼른 저와 결혼하겠다고 대답해주세요.” “이것 봐라…… 아니, 우리 호위기사님께서 왜 이렇게 갑자기 유치하게 구실까?” “그러는 아가씨야말로 왜 평소와 다르게 대답이 술술 나오지 못합니까?” “청혼에 대답을 술술 하는 여자는 원래 잘 없어!” “흥.” “뭐, 흐응?” 마리가 하이너를 찌릿 째려보았다. 그 사이 그들을 지켜보는 누군가는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저주 같은 응원을 퍼붓고 있다. ‘오, 싸워라! 싸워라! 싸워서 아무나 이기든지 말든지 해버려! 그대로 헤어지면 더 좋고!’ 륀체르는 저들이 저렇게 계속 티격태격 싸우다가 영원히 사이가 틀어지면 정말 뛸 듯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끼어들었다. “이봐, 마리. 얼른 그의 청혼을 수락해주라고…… 안 그러면 확 내가 청혼해버릴 테니까.” 마리는 륀체르의 농담 같은 진담은 단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팽 토라진 표정을 하는 연인의 고개를 돌려 자기를 보게 했다. “하이너.” “…….” “내 눈을 봐.” 하이너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진실 아닌 대답은 원치 않는 마리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엄중하게 물었다. “아직 힘이… 남아있는 거야? 마력이 남아 있어?” “없습니다.” “정말?” “없다고 하잖습니까.” 하이너의 대답은 칼처럼 날카롭고 바위처럼 묵직하다. 그걸 지켜보는 륀체르는 세상에 저런 뻔뻔한 거짓말쟁이도 없다고 생각하며 마리의 귓가에 수다쟁이처럼 속삭였다. “믿지 마. 믿지 마. 마력이 아직 남아있는 게 분명하다니까. 분명 나보고 ‘독재하면 인간 육포를 만들어 버린다!’니 어쩌니 협박했다고. 그게 다 저놈에게 마력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겠어? 그러니 마리, 네 드래곤의 청혼을 받아들여. 그게 세계를 정복하는 지름길이다.” 마리는 하이너의 깊은 우물 같은 눈동자를 오랫동안 올려다보았다. 검은 눈동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아가씨를 꿰뚫어 본다. 건방지다 싶을 정도로 당당하게. …… 보면 볼수록 거짓말을 하는 눈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관절 륀체르의 말은 뭐란 말인가. ‘설마 마력이 없으면서 있는 척하고 륀체르 저 녀석에게 겁준 거야? 오호…… 그게 가능성 있겠는데.’ 마리는 뒤돌아서서 나갈 준비를 했다. “어쨌든 륀체르, 샹들리에 고마워. 가지고 가긴 부담스러우니 마음만 받을게. 이제 그만 여길 떠나야겠어. 참! 알아두는 게 좋을 거야. 난 세계 정복을 하기 전까진……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는다는 걸!” 그러자 륀체르는 하이너보다 더 빨리 마리의 뒤에 따라붙었다. 마리가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고 이대로 가는 건 아니 될 일이다. 륀체르는 하이너가 듣든 말든 대놓고 제의했다. “흐음. 어쩔 수 없군. 그럼 이렇게 된 이상…… 나랑 결혼해.” “미쳤어?” “집정관의 아내도 세계 정복하기 쉬운 위치라고. 말 한마디로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니까? 베갯머리송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 “당신은 나를 몰라도 정말 몰라!” “윽!” 마리의 팔꿈치가 륀체르의 가슴을 세게 쳤다. 그리고 하이너는 그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하여간 이 변태는 그저 틈만 나면…….’ *** 로귀하르트 황궁 주위의 어느 여관. 밤은 차가운 대기를 검푸른 색으로 두껍게 칠하고 또 덧칠했다. 소리마저 칠흑 같은 어둠에 덮인 이런 시간에, 하이너는 한숨도 자지 않고 있다. 아니,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이 맞으리라. ‘그 변태 녀석, 끝까지 아가씨한테 청혼 타령을…!’ 은밀한 질투심으로 달아오른 하이너는 마리의 몸을 뱀처럼 감쌌다. 신중한 포식자처럼 은밀하고 강하게 움직이는 하이너 덕분에 마리의 몸은 깊은 잠에 빠진 중에도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앗, 안 자? 거기를 왜…… 아앗!” “아가씨…….” “흐으읏!” 한몸이 된 그들이 서로가 흘린 땀에 젖는 건 순식간이다. “으으, 하이너! 침대가 질척해….” 얼마나 격정적으로 서로를 탐했는지 보송보송하던 침대도 축축이 젖어든다. 하이너는 잠시 마리에게서 몸을 빼내고 침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가벼이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마리가 물었다. “어엇! 뭐하려고?” “침대가 질척하다고 하셨잖습니까.” 하이너는 달빛이 들어오는 창가에서 마리를 안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얄상궂게 눈을 빛내더니 마리를 데리고 거울 앞으로 갔다. 거울은 그들의 모습을 반사했다. 방은 어둡지만 희미한 달빛이 새어 들어와 그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는 편이다. 하이너는 마리를 안은 채로 그녀의 가녀린 두 다리를 활짝 벌려 거울에 비추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기 것을 아주 깊고 빠르게 삽입했다. 덕분에 마리의 모든 근육이 수축했다. “으읏! 하아…… 갑자기 이런 자세라니….”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서.” “하지만…….” “싫습니까?” “싫다기보다 읏! 네가 불편하지 않을까 싶은데… 아!” 하이너는 걱정도 팔자라고 중얼거리며 마리의 안쪽을 무지막지하게 파고들었다. 한 번의 사정 이후에 하는 몸짓은 훨씬 여유롭다. 자신의 만족보다 아가씨의 쾌감에만 집착한다. 안쪽이 심하게 죄면 더욱 퍼붓듯 찌르고, 아가씨께서 견딜 만하다는 듯 숨을 천천히 내쉬면 그 호흡의 속도에 맞춰주는 듯하다가 갑자기 콱 치고 들어간다. “앗, 아앙! 아!” 마리는 그가 한 번 치고 들어올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 쾌감에 자기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냈다. “하으, 읏, 으응! 하이, 너! 하이너! 멈출 것 같지 않은 쾌감도 버거운데, 그 쾌감이 점점 더 큰 쾌감으로 변해 머리를 부술 것 같다. “으으, 그만! 아!” 그러나 하이너는 그만이라는 말을 반대로 들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박아 넣으며 그녀의 귀와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여유롭게 으르렁대는 목소리가 마리의 귀마저 녹여버릴 기세다. “소리가 너무 크잖습니까.” “으읍!” “그렇다고 참으려 하지도 마십시오. 참으려 하시면 더 터뜨리고 싶은 법이니까.” “아, 앗! 읍! 하이너!” 느긋한 말투와는 다르게 허리는 미칠 듯이 몰아붙이는 하이너 때문에 마리는 이를 악물고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혀를 스스로 깨물어버릴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눈을 살짝 뜬 그녀가 거울 속에서 반짝이는 뭔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그녀의 은밀한 곳, 늘 같은 자리에 있는 별 모양의 점! 그 점이 달빛처럼 황금색으로 강하게 반짝이고 있다. 그 반짝임은 하이너가 더욱 거센 쾌감을 줄 때마다 더 강해진다. 나중에는 마리가 거울에 반사된 그 빛을 제대로 볼 수가 없을 정도. “하아, 후, 읏! 아아… 하아…… 하이너, 저게 뭐, 앗! 지? 저게 뭐야? 앗, 아, 아아아!” 마리가 묻는 중에도 하이너의 몸짓은 멈추지 않고 더욱 강렬해졌다. 결국, 마리는 바닥이 흥건해질 정도로 절정을 느껴버렸고, 하이너는 이제 자신의 절정을 향해 가면서 뒤늦게야 마리가 말하는 거울 속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픽 웃고 말았다. 저, 점. 마치 별처럼 빛나는 저 점이 아가씨는 아주 신기하고 궁금할 것이다. 그렇다면 답을 알려드려야겠지. 그는 체머리를 흔들어 눈을 가리는 자기 앞머리를 치웠다. 입가가 올라간 묘한 미소가 스민 얼굴이 드러난다. “모르시겠습니까?” “모르, 읏! 겠는데, 아앙! 그만! 아!” “마력이 사라진 지금, 아가씨의 이곳만 후우, 읏! 이렇게…… 반짝이는데, 정말 뭔지 모르시겠습니까?” 마리가 대답하려는데, 하이너는 갑자기 그녀를 엎드리게 하고 자신을 그녀의 안에 담았다. 곧 그가 절정에 이르자, 마리는 엎드린 채로 거친 숨을 내쉬며 흐트러진 감각을 정리했다. 한참을 그러다가 바닥에 엎드려 누웠고, 하이너는 그런 그녀의 등에 함께 엎드렸다. 그리고 파르르 뜨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하아, 하…….” “하이너.” “후우, 예.” “하아…… 저기, 이건 말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물어볼게. 너… 나한테 마력을 넘긴 거니?” 하이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예. 그랬습니다.” “네가 가진 모든 힘을…?” “예. 제가 가졌던 것과 세상에 머무는 모든 마력을요.” 얼마간, 마리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했다. 마리는 서서히 그의 몸에서 빠져나와 그와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의 두 팔을 잡았다. 지금 그녀는 당황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이너가 별 점에 관해 설명했다. “아가씨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약자들이 고통받지 않는 세계를 원하신다고도 하셨습니다. 대륙의 하층민들이 모여 산다는 플래티르콘의 다리 밑, 아시는지요. 그 위의 다리가 무너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가씨께서 그 가련한 인생들이 죽길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그 다리는 허공에 떠 있는 게 가능합니다. 암흑지형이나 차원의 균열도 마찬가지예요. 아가씨께서 그 수상하고 위험한 현상을 꺼리시기에…… 모두 사라진 겁니다. 자. 이쯤하면 눈치채셔야 할 겁니다. 이건 아가씨만 알고 계셔야 해요. 아가씨는…… 마나의 인이 되셨습니다.” “……뭐라고!” “그리고 저는 그것, 그러니까 마나의 인이 된 아가씨를 다루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고요.” “하이너! 어째서 나를 그렇게…….” 마리는 이 현실을 믿을 수 없다. 자신이 마나의 인 그 자체가 되다니. 그렇다면 이 작은 몸 안에 세상 모든 마력이 응축돼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힘을 조종하는 사람이 하이너라고? 여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마리는 하이너의 몸을 흔들며 물었다. “하이너! 다시 설명해봐! 왜 이렇게 한 거야?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왜 멋대로 남의 몸을 마나의 인 같은 무시무시한 물건으로 쓰느냐, 그렇게 따지는 말과도 같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얼른!” “…… 제가 저주에서 벗어나려고 마나의 인을 파괴했을 때, 오갈 곳이 없어진 채 한 데 모인 이 세계의 모든 신비로운 힘, 즉 마력은 강력한 구속제가 필요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마력은 대륙 곳곳에서 제멋대로 날뛰어 세상을 어지럽힐 위기였어요. 쉽게 말하자면, 당장 그 힘을 담을 단단한 그릇이 필요했단 말이겠지요. 또 새로운 마나의 인이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 그릇이 나냐고!” “물론 처음에 저는 제 몸을 마나의 인으로 쓰려고 했습니다. 아가씨께 그 짐을 지시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얼마든지 저 자신을 마나의 인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만…… 끝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째서? 너는 정의로운 기사님이잖아! 그거로 충분하잖아! 자격이 된다고!” “글쎄요. 저는 그간 여행하면서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하이너는 아가씨를 안았다. 그리고 아가씨를 마나의 인으로 설정할 수밖에 없었던 속내를 터놓았다. “아가씨. 저는 평범을 원합니다. 초야에 묻혀 사랑하는 분과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조용히 살길 원합니다. 이런 저는 처음부터 아가씨처럼 자의로 큰 포부를 가진 적도 없고, 그러므로 아가씨와 같은 큰 그림을 그리는 능력도 미천합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힘(마력)은 저보다 아가씨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가씨께…….” 마리는 허탈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솔직히 말해서, 아가씨처럼 밝은 분이 그런 큰 힘을 지니시기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자신을 마나의 인으로 만들었단 이야기인가.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힘을 담은 그릇이 된 기분, 이상하다. 기쁨도 아니고 화도 아닌, 그렇지만 뭔가 경이롭고도 섬뜩한 기분에 빠진다. “아가씨는 반 이상 꿈을 이루신 거나 다름없습니다. 아가씨가 원하는 세상이요? 지금부터 륀체르만 잘 감시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아가씨. 저는 아가씨를 믿습니다.” 마리는 하이너의 등을 어루만졌다. 하이너에게 무슨 감정이 들어서 만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기분을 정리하려는 손짓. 갑자기 하이너가 그런 마리를 일으켜 세웠다. “당황스러우실 거란 건 충분히 짐작합니다. 하지만 걱정은 마십시오. 제가 곁에 있잖습니까.” 그는 그녀의 앞에서, 마치 서임식에서 주군에게 인사하는 기사처럼 무릎을 꿇었다. 아가씨를 올려다보는 하이너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정중하고, 엄숙하다. “감히 이 자리에서 고백합니다. 평생 연인이 되어주신다는 말보다 저는 더 강한 약속, 아가씨와의 더 끈끈한 고리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이건 청혼입니다. 낮에 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식 청혼입니다.” “하이너!” “저와 결혼해주십시오. 저를 평생 부려주십시오. 마나의 인이신 아가씨를 평생 모시며, 당신의 영원한 종으로 남고 싶습니다.” 마리는 새하얗게 질려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며 중얼거렸다. “홀딱 벗은 채로 그렇게 진지해지지 말란 말이야…….”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내심 그 어느 때보다 하이너의 청혼, 아니, 자신의 몸 안에 깃든 거대한 힘을 유일하게 다룰 수 있는 자의 청혼을 진지하게 따져보고 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편 더 남은 듯? 00120 8. 삶, 삶, 삶 =========================================================================                            그 시각, 그들이 있는 방 밖에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여관의 여자 종업원으로 이런 늦은 시각 수상하게도 복도의 먼지를 훑고 있다. 종업원은 지금 몇 시간 째 복도의 먼지를 훑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먼지 청소는 끝이다. 정말 중요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는…… 마나의 인이 된 아가씨를 다루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고요…….” 종업원은 마스크와 모자를 벗었다. 복도 창문으로는 달빛이 은은하게 들어왔고, 덕분에 종업원의 얼굴이 자세히 드러났다. 그녀의 얼굴은 어두운 밤처럼 검다. 그렇다. 그녀는 바로 홀디네 본이다. 먼지떨이를 1층에 둔 홀디네는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집정관 륀체르의 거처다. *** 얼마 후, 집정관저(옛 황궁). 홀디네에게서 마리 일행의 진실을 전해 들은 륀체르는 충격에 빠졌다. “하, 뭐야? 그녀가 마나의 인이고 그녀가 가진 힘을 조종하는 게 그 호위기사라고? 오호라. 그래. 그 자식이 감히 인간 주제에 나한테 인간육포가 어쩌고 협박한 근거는 바로 그런 점이었구만!” 륀체르는 하이너를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황당한 녀석 같으니! 가장 큰 힘을 쥘 수 있으면서도 그놈의 종놈 기질 때문에 그 힘을 제 아가씨에게 모두 넘겨버린다! 물론 아가씨 자체는 원래부터 인간이기에 그 힘을 다룰 능력이 없다. 없다고 보는 게, 맞다. 그리고 그녀 안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은 역시 그녀보다 마력 다루기에 능한 하이너겠지. 그들은 주군과 종이라는 것보다는 실은 서로 평등한 관계라 할 수 있겠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륀체르는 이해할 수 없다. “완전 머저리 아니야?” 아가씨의 호위기사, 연인, 결혼하고 싶어 청혼한 남자, 뭐든 좋다 이거다. 좋으면 좋아하고 그칠 일이지, 왜 힘까지 주는지? 어떻게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왜 손해를 보지? 응?” 륀체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점에서부터, 그는 하이너와 다른 성향이라 할 수 있다. “하여간 재수 없어. 사랑인지 뭔지에 빠지면 무조건 믿는 거야? 믿어서 막 주고 그런 거야?” 하이너의 깊은 사랑을 탓해보지만, 그렇다고 그를 이길 수도 없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어쩐다, 어쩐다…….” 자기보다 강한 힘과 그 힘을 다루는 이가 여전히 두 눈 똑바로 뜨고 살아있다는 점, 그리고 그들이 한때 동지 관계였다는 점은 륀체르를 편히 잠들지 못하게 했다. 애당초 륀체르는 자기를 노리는 자가 없는 세상을 원했고, 자기보다 높은 자가 없는 현실이 좋았다. 륀체르는 마리와 하이너의 성격을 인정하지만, 성격에 대한 인정이 곧 성격에 대한 변치 않는 믿음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누구에게나 변화는 찾아오고 그것은 인간을 변하게 한다. 그리고 그 변화 앞에서, 인간의 마음 혹은 신념은 어떻게 변할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게 그가 마리 일행을 끝끝내 믿지 못하는 이유……라 할 수 있겠다. 륀체르는 어떻게 해야만 그들의 힘을 빼앗거나 소멸시킬까 하다가 문득 원초적인 궁금증이 일었다. “어라? 가만.” 갑작스러운 그의 소리에 홀디네가 그를 보았다. 륀체르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밤하늘에 떠 있는 노란 달 렌키스를 올려다보았다. 불현듯 궁금증이 인다. “……마나의 인과 그걸 조종하는 인간은 그럼 얼마나 오래 살지? 대륙에 감도는 모든 힘을 다 가진이라면 마땅히 대륙보다 더 오래 살지 않나? 그럼 그들은 영생한단 말이야?” 언제나 대륙의 밤하늘을 지키는 달은 그에게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는다. 륀체르가 창가에서 뒤돌아서자, 하늘엔 또 하나의 달이 떴다. 그달은 바로 푸른 달 포울룬디. 달 같으면서도 달이 아닌 또 다른 존재다. (*76편 참조. 대륙에 뜨는 달은 평소엔 하나고 그달을 부르는 이름은 나라, 지역, 종족마다 각각 다르다. 매일 밤하늘에 뜨는 노란 달을 보고 황도 사람들은 ‘렌키스’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따금 또 다른 달 하나가 렌키스 옆에 뜨곤 한다. 그달은 렌키스와 같은 천체라고 할 수도 없고, 마법으로 인한 환영 현상인지도 알 수 없다. 오직 신만이 그 달의 정체를 안다. 저명한 천문학자들과 뛰어난 마법사, 그리고 언제나 정확에 가까운 예측을 하는 점성술사들도 렌키스의 옆에 종종 출몰하는 그달에 관해 아직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달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었고, 그렇게 그달은 ‘포울룬디’로 불린다.) *** 마리는 하이너에게 먼저 자라고 했다. 그러나 하이너는 잠들기는커녕 청혼에 대한 대답을 원했다. 결국, 마리가 윽박지른 후에야 그는 못 이긴 척 잠이 들어주었다. 마리는 잠든 하이너를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몸을 섞고도 이 녀석은 전혀 피곤하지 않은 거야?’ 잠든 얼굴이지만, 피곤해 보인다기보다 여전히 생기 가득하다. 달빛처럼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고요한 얼굴은 살짝 설레어 보이기도 한다. 마치 내일 눈뜨자마자 청혼 수락을 기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마리는 손을 올려 하이너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스물한 살을 넘기려 하는 지금도 여전히 소년과 같은 말간 얼굴. 특히나 요즘 면도와 이발을 깔끔하게 하고 다녀서인지 더욱 앳되어 보인다. 이런 젊은이가 결혼이라. 물론 영지 소년들도 이 나이 때 모두 가정을 꾸리곤 하지만……. ‘하이너, 내가 네 신부로 적절할까?’ 마리는 어쩐지 자신이 없다. 아니, 자신이 없다기보다는 왠지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다. 그녀는 하품하며 하이너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문득, 얼음도시 시귀르에서 하이너와 뜨거운 시간을 가지며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마력이 없어지니 날 버리겠단 겁니까? 세상에서 마력이 사라졌으니, 호위기사 놈도 별 볼 일 없어졌다고 버리시려고?」 「아,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후우…… 잘 들어요. 나는 두려웠어. 드래곤이 아닌 평범한 인간인 채로 당신을 제대로 지켜낼 수 있을까 두려웠다고. 그러니 나는 죽을 때까지 당신 곁에서 당신을 지키는 것을 증명해 보이면서 살겠어. 후우, 이건 당신의 호위기사로 있겠다는 말이 아니야, 당신의 연인, 진짜 연인이 되겠단 말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나를 내쳐서도, 내게서 도망가서도 안 돼. 절대…… 안 됩니다.」 그때만 해도 그가 미아 같아 보여서 가여웠다. 마력을 잃고 평범한 사람이 되었으므로 만에 하나 아가씨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혼자만의 두려움에 빠진 가련한 녀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그게 아니다. 죽을 때까지 자신의 곁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을 증명해 보이면서 살겠다는 말은 곧, 마나의 인을 다루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영원히 함께할 거라는 다짐이다. 그는 제가 모시는 아가씨께 세상에서 가장 강한 올가미를 걸어놓고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그의 청혼을 거부하는 것은…… 그 다짐을 부숴버리는 짓이겠지. 괜스레 투덜거림이 나온다. “하아음… 무서운 녀석…….” *** 「하아음… 무서운 녀석.」 「무섭긴 뭐가 무서워? 이 대륙이 생겨난 이래 최고의 순정이라 하겠는데. 세상에 너처럼 뜨거운 사랑을 받는 인간이 흔한 줄 알아? 나는 마리 네가 아주 부러워 죽겠구만.」 마리는 낯선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 뒤돌아보았다. 「어…허억!」 언제 들어온 것인지, 어떻게 들어온 것인지, 정체 모를 여인이 후드를 뒤집어쓰고 서 있다. 마리는 소스라치게 놀라 하이너를 깨우려 했으나, 결국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후드를 벗어던진 여인의 얼굴을 보고, 숨이 멎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 너는…!」 후드를 벗은 여인은 놀랍게도 마리와 똑같은 얼굴이다. 마리는 그녀가 동생 로테인 줄 알았다. 「로테! 아기는 어디에다 두고 너 혼자야?」 「아기? 후후. 나는 네 동생 로테가 아니라고.」 「그럼 넌, 넌 누구야?」 여인은 창가로 가 하늘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마리 역시 여인이 보는 달로 시선을 옮겼다. 이상하다. 조금 전에는 황금빛 달 렌키스만 떠 있는데, 지금은 푸른빛 달 포울룬디도 함께 떠 있다. 여인은 두 개의 달 중 포울룬디를 보고 있다. 정체를 묻는 말에 대답이 나왔다. 「나는 푸른 달. 너희 세계 사람들이 포울룬디라고 부르는 밤하늘의 감시자. 하지만 진짜 정체는 선행 우주에서 날아온 또 다른 로테야.」 마리는 여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말도 안 돼. 또 다른 로테라니? 그리고 네가 어떻게 푸른 달이야? 선행 우주라는 말은 또 뭐야?」 여인, 아니 포울룬디는 마리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마리는 마치 거울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포울룬디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곧 완전히 드러누웠다. 그리고 두 팔로 자기 머리에 베개를 한 채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태도는 마리와 똑같다. 포울룬디가 설명했다. 「뭐, 시간도 많으니 천천히 설명해볼까? 선행 우주란 말이야…… 다중 우주의 하위 개념이라 할 수 있어. 중심 우주보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또 다른 우주이지.」 「빠르게 지나가는 우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줘.」 「태초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고 사건의 양상은 다양하게 뻗어 나가지. 사람들은 그걸 다중 우주라 불러. 하나의 사건이 처음으로 일어난 지점을 중심 우주라고 하고, 선행 우주는 그 중심 우주에서 뻗어 나온 나뭇가지와 같은 또 다른 우주야. 중심 우주보다 시간이 빨리 가서 모든 사건이 앞서지. 참, 그리고 다중 우주는 총 여섯 개이지.」 마리는 언젠가 꿈속에서 느꼈던 또 다른 세계에서의 지식이 떠올랐다. 태초의 대폭발. 다중 우주. 수억 개의 또 다른 세계들. 그런데 포울룬디는 어째서 다중 우주가 여섯 개뿐이라고 할까? 「이봐, 세계는 무한의 숫자로 생기는 게 아니었어?」 「아니야. 여섯 개뿐이야. 상징을 하나 들어볼까? 네 은밀한 곳에 있는 점, 모양이 어때? 삼각형과 역삼각형이 포개어진 모양이지? 뾰족한 곳이 초 여섯 개라는 것, 바로 중심우주를 통해 뻗어 나온 다중 우주가 총 여섯 개라는 의미이지.」 마리는 기가 찼다. 다중 우주건 뭐건 다 좋은데 왜 하필 그런 은밀한 지점이 생겼는지, 그 점이 궁금하기도 했다. 뭐, 그렇게 은밀한 곳일수록 남들 눈에 띄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겠지만. 포울룬디는 우주에 관해 설명을 이어갔다. 「아무튼, 나는 그런 선행 우주 중 하나에서 온 또 다른 로테야. 이곳의 로테가 안정과 영광을 추구했다면 그곳의 로테, 즉 나는 도전과 궁극의 힘을 추구했지. 그곳에서 나는 절대자에 근접한 힘을 얻게 되었어. 이곳 사람들이 말하는 신, 뭐 그런 걸 절대자라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끝끝내 절대자가 되지 못했어. 왜냐하면 절대자에 가까운 힘이 없었기 때문이지. 」 「절대자에 가까운 힘…….」 포울룬디가 눈을 형형히 빛냈다. 「……바로, 모든 우주에 녹은 마나의 인을 합친 힘이지.」 「마나의 인?」 그 단어가 나오자 마리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 여자가 마나의 인을 합쳐서 절대자가 되려고 한다면, 마나의 인인 자신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마리는 포울룬디로부터 뒷걸음질 쳤다. 「서, 설마 나를 데려가서 쓰려 하는 거야?」 포울룬디가 누운 그 상태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 아직은 멀었어. 너 외에도 모아야 할 마나의 인은 더 있거든.」 「그럼 어째서 여기 나타난 거야?」 「마나의 인인 너에게 힘을 잘 간직하란 말을 하기 위해서…… 라고 하고 싶지만, 사실은 한가해서 와 봤어.」 그 후로도 두 여인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절대자 지망생 ‘로테’. 그녀는 다중 우주, 즉 여섯 개의 세계에서 마나의 인을 모두 모아 하나로 합쳐 절대자에 도전하려 한다. 그러려면 각 우주의 로테들이 마나의 인 그 자체가 되는 것은 필수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로테라는 여자는 황궁의 꽃이길 원하지, 마나의 인에 관해선 전혀 욕심이 없다. 거기까진 괜찮은데, 먼 미래에 남편인 황제 때문에 목이 잘리기까지 한다. 즉, 이 세계에서 로테가 마나의 인이 될 확률은 0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절대자 지망생 포울룬디의 입장에서, 마나의 인을 하나 잃는 셈이나 마찬가지. 이 세계의 로테 미래가 어둡다는 것을 미리 점친 포울룬디는 로테가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수를 쓴다. 그것은 또 다른 로테를 태어나게 하는 것. 그래서 로테는 마리와 함께 쌍둥이로 태어난 것이다. 포울룬디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마리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마리, 너는 내가 출생 이외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혼자 잘해나갔어. 너는 네 동생과 개성이 겹치는 것을 극도로 꺼렸지. 나는 거기에 잠깐 지름길을 터준 것뿐이야.」 「지름길?」 「그래. 네가 마나의 인이 더 빨리 될 수 있는 지름길.」 차원의 균열도 그러해서 생겨난 것이다. 그곳에서 출몰한 위험 요소는 마리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불안을 느끼게 했고, 새로운 세상에의 열망을 생기게 하였다. 그 열망으로 마리는 여행을 꿈꾸었다. 포울룬디는 그녀의 여행을 종종 도와주기도 했다. 암흑 지형은 차원의 균열로 인한 우주의 오류를 수거하는 쓰레기통이며, 드래콘 마리아가 쉽게 잡혀준 것도 포울룬디가 마리의 앞을 터줬기 때문이다. 과거에 마리가 로테의 어두운 미래를 보았던 것은 어떠한가. 그것 역시 포울룬디가 마리에게 전해준 예지였다. 마리가 이따금 다른 세계의 모습을 본 것 또한 차원의 균열로 인한 오류 현상이었다. 「마리. 너는 로테의 불길한 미래를 막고 세계를 정복하고자 여행을 떠났어. 로테는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났고, 너는 세계를 정복한 거나 다름없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내 소원을 이루어 주기도 했지. 이렇게 마나의 인이 되어서 말이야…….」 마리는 왠지 알 수 없는 모멸감이 들었다.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단 생각에 분노가 치솟는다. 어느샌가 그녀는 포울룬디의 멱살을 잡고 있다. 하지만 이미, 포울룬디는 투명하게 사라지려 한다. 아주 얄미운 말을 남기며. 「후후……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조금만이라고 해봐야 여기서는 천 년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 테지만. 내 반드시 마나의 인 여섯 개를 다 모으면 절대자에 도전할 거야.」 마리는 사라져 가는 포울룬디를 보고 다급해졌다. 포울룬디가 절대자에 도전하면 마나의 인인 마리 자신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설마 인생이 끝난다는 말인가? 아니, 그것보다 더 확인하고 싶은 사실이 있다. 「빌어먹을! 이 튀겨 죽여도 시원찮을 년아! 이것 하나만 대답해! 드래콘을 나타나게 한 게 네가 한 짓이라면, 하이너도, 내 호위기사 아니, 내 연인도 네가 한 짓이야? 그를 드래곤으로 만든 것도 네 짓이냐고! 그의 진심도 모두 만들어진 거냐고!」 포울룬디는 입술을 달싹였다. 희미하게나마, 마리는 포울룬디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무슨 말이야, 그의 진심이 모두 만들어진 거냐니? 상황은 만들 수 있지만, 진심은 조종하지 못해. 그리고 내가 아까 너보고 부럽다고 한 거 기억 안 나? 그의 순정을 모욕하지 말아 주려무나.」 ============================ 작품 후기 ============================ 오늘도 완결을 내지 못했습니다 ㅠㅠ... 마리와 하이너 외에도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가 남았는데 ㅠ.ㅠ 00121 8. 삶, 삶, 삶 =========================================================================                            아침. 태양은 밤사이 마리가 느낀 분노에 들끓은 달처럼 폭발적인 빛을 쏟아낸다. 차가운 대기가 그 빛에 몸서리를 쳤다. 하이너는 아가씨의 욕설을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아가씨께서는 잠들어 누운 채로 허공에 삿대질하며 누군가에게 욕을 하신다. “빌어먹을! 이 튀겨 죽여도 시원찮을 년아! 이것 하나만 대답해! 드래콘을 나타나게 한 게 네가 한 짓이라면, 하이너도, 내 호위기사 아니, 내 연인도 네가 한 짓이야? 그를 드래곤으로 만든 것도 네 짓이냐고! 그의 진심도 모두 만들어진 거냐고!” 그러더니 한참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가, 엉엉 우시는 게 아닌가. “으흑흑! 그가 순정남이라니! 그가 순수 순정남이라니! 나는 어쩜 이리 남자 복이 터진 거야…….” 하이너는 당황해서 웃음이 터졌다. 아가씨의 잠을 깨우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하지만, 깨우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다. 꿈이 너무 진지해 보이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그는 그녀를 깨웠다. “아가씨, 좀 일어나 보세요. 무슨 악몽을 꾸셨습니까?” 묵직한 목소리와 따스한 손의 감촉에 마리는 잠을 깼다. 그리고 관자놀이에 흐르는 닭똥 같은 눈물을 닦았다. “흑흑… 아아?”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하이너를 한참 동안 본다. 하이너가 빙긋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마리는 안도했다. 곧 하이너가 알아들을 수 없는, 저 혼자만의 말을 마리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모두 끝인가. 그럼 내 세계 정복의 꿈은…… 이 여행의 의미는…….”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창처럼 날카로운 햇빛, 그리고 하이너의 따스한 미소. 이것은 현실이다. 생생한 현실. 그러하다면…… 간밤에 만났던 다른 세계의 로테, 즉 포울룬디는 악몽 속 인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마리는 그 결론을 인정하는 게 쉽지 않다. 여태 꾼 그 어느 꿈보다 생생한 꿈이란 말이다. 포울룬디는 다른 우주에 반드시 있고, 언젠가는 각 우주 마나의 인을 다 모으려고 자신을 찾아올 것 같다. 그 빌어먹을 절대자인지 신인지 그따위 것이 되기 위하여! 아아…. 마리는 피가 나기 직전으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하이너는 그런 모습을 보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평소 아름답기만 하던 아가씨의 눈매가 너무 진지해서 매서워 보일 지경이다. “아가씨,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마리가 하이너를 똑바로 보며 나지막이 말을 뱉었다. “좋아.” “예?” 하이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리의 ‘좋다.’는 말은 하이너에게 청혼에 대한 대답으로 들렸다. “좋다…? 드디어 제 청혼을 받아주시는 겁니까?” 마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했다. “이젠 세계 정복이 아니라 우주 정복이야!” “하아?” “내 반드시 포울룬디 그년을 그냥 확……!” “예? 포울룬디는 또 뭐……? 후우. 정말이지…… 아가씨.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셨습니까? 지금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란 말입니다. 대체 무슨 말씀하시는 건지…….” “포울룬디는 꿈속의 여자가 아니야! 현실의 나쁜년이라고!” “으으, 미치셨습니까.” “미쳤다고 해도 좋아!” 갑자기 마리는 하이너의 몸을 꽉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하이너는 놀라기도 하지만, 자꾸만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아가씨께서 횡설수설하시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청혼을 받아들일 것 같은 분위기라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곧, 청혼에 대한 답이 돌아왔다. “좋아! 이런 미친 나라고 해도, 결혼하자!” “…… 감사합니다!” “단, 조건이 있어.” 하이너는 어떤 조건이든 들어줄 자신이 있다. 그가 그녀를 더욱 세게 껴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건! 말씀만 하십시오! 다시 드래곤이 되라고 하시지만 않으면 무엇이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있지, 난 한곳에 머무르면 안 돼. 바람처럼 살고 싶어. 아니, 바람처럼 살게 될 운명이야! 나에겐 큰 목적이 있거든! 지금껏 가졌던 목적보다 더 어마어마한 꿈이 있다고!” “설마 그게 우주 정복입니까?” “만약 네가 내 사정을 이해하고 동행해주기로 한다면, 난 너와 결혼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 어쩔래? 이런 나와 결혼해줄 수 있니?” “당연한 말씀을.” 하이너의 대답은 말할 것도 없다. 세계 정복도 이룬 거나 다름없는데 우주 정복이라고 못할 게 뭔가! 그리고 실상 그는 아가씨의 목적을 애당초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왜냐. 아가씨를 믿으니까. 그녀가 언제나 말씀하시는 긍정을…… 사랑하니까. “고마워! 하이너!” “저도 감사합니다. 아니, 사랑합니다. 아가씨.” 마리가 진정으로 영원한 여행 동반자를 얻는 순간, 이다. *** 약 한 달 보름 후. 오를린.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와 미지근한 바람은 이른 봄을 예고한다. 시대가 제정에서 공화정으로의 빠르게 변화하면서, 덩달아 계절의 변화도 가속한 듯하다. 영주의 저택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한 무리의 사람이 있다. 그들은 영주의 딸 로테를 마중 나온 사람들이다. 최근 사냥에 나갔다가 다리를 다친 영주는 나오지 못했고, 영주 부인과 그 하녀들, 그리고 저택에서 검 좀 쓴다 하는 이들이 호위의 목적으로 미리 나와 있다. 그들은 저 멀리서 마차를 몰고 오는 한 마부를 보았다. 마부는 아주 젊고 이런 시골에서 마차나 몰 것 같지 않은 귀티가 흐르는 미청년이다. 그런데 어쩐지 표정이 매우 피로해 보였다. 아주 오랜 시간 마차를 몬 듯이.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마차가 맞아!” “저 안에 황후께서 타고 계시겠지?” “어머, 쉿. 황후라니. 이젠 다시 로테 아가씨… 라고 불러야겠지.” 마차는 그들의 앞까지 가지 않고 갑자기 멈추었다. 누군가가 내릴 모양이다. 사람들의 예상대로 마차에서 나오는 이는 로테와 그 딸 리슈라였다. 멀리서 딸이 나오는 걸 보는 영주 부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로테는 한참 잠에 빠진 리슈라를 안고 나오면서 마부, 헤그의 앞에 섰다. 헤그는 말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피로가 짙게 번진 그의 눈이 고요하게 로테를 본다. 그의 입가는 아주 살짝 올라가 있다. 미소. 아마도…… 무언의 작별 인사, 인 듯하다. 로테는 그의 웃는 얼굴이 생각보다 부드럽다고 느꼈다. “헤그.” 헤그는 자신의 가짜 이름 헤세가 아닌 진짜 이름이 불렸는데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로테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것이다. 헤그는 그 손을 보다가 천천히 잡았다. 로테는 그의 손을 꽉 잡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무사히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이런 인사만으로는 부족할 텐데, 며칠 오를린에서 머무는 건 어때요? 제 아버지 저택 말이에요.” 헤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다른 곳으로 가야 해서.” “그렇군요. 혹시…… 괴지에 가는 건가요?” “예.” “당신의 행운을 빌어요.” “당신과 따님의 영광을 빕니다.” 인사는 그것으로 끝이다. 헤그는 조금 전보다 훨씬 빠르게 마차를 몰아 남쪽으로 향했다. 사괴탄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길이다. 아니, 어쩌면 그는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지도 모른다. 먼 길을 보는 그의 눈이 아련하다. 그때 로테는 아주 오랜만에 어머니와 저택 사람들을 만나 눈물을 흘렸다. 황궁에서 몸 고생, 마음고생 많이 한 딸을 보고 어머니는 소리 내 울었다. “오, 딸아! 고생 많았다! 무사히 와 줘서 고맙구나! 이 아이 좀 보렴! 어찌 이리 아름다운 게냐!” 사람들의 수선에 깨어난 리슈라가 깨어나 울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헤그의 귓가에 아주 오랫동안 맴돌았다. *** 오를린에서 가장 맛 좋은 술을 판다는 주점, ‘잘생긴 한스’. 과거, 술과 사람과 마법을 좋아하는 한 약사가 있었다. 그는 드래곤이 되어 하늘을 나는 게 꿈이었고, 그래서 자신의 귀족 작위와 약, 밀주를 팔아 모은 돈 20억 자일로 드래곤이 되는 약인 드래곤 링클을 샀다. 하지만 그 링클이 조수의 실수로 다른 청년(하이너)의 몸에 이식되고, 한스의 꿈은 와장창 깨졌다. 그러나 한스는 좌절하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면 즐기라 했던가. 한스는 드래곤이 되지 못해도 오를린에서의 삶을 즐겁게 잘 살아갔다. 공화정은 술에 대한 법을 바꾸었고, 이제 더는 밀주 단속이 행해지지 않는다. 덕분에 한스는 약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인 술 장인으로 거듭났다. 술 빚는 솜씨가 상당히 좋아 바너 장인 길드 중 주조 길드에서 협업을 요청할 정도. 그러나 한스는 자기 주점인 ‘잘생긴 한스’를 운영하는 것에 만족한다. 한스에게 오랜만에 손님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연인인데, 아직 연인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좀 어리다면 어린 게 특징이겠다. 한스는 작은 연인을 반겨 마지않았다. “오! 루돌프! 공부는 어쩌고 여길 왔느냐,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다. 그런데 이 종달새처럼 아름다운 소녀는 누구지?” “스승님, 제 약혼녀예요. 마리아. 인사해. 내 스승님이셔.” 소녀, 마리아는 종달새라는 표현을 듣고 수줍은 표정으로 허리를 살짝 낮추어 인사했다. “야, 약혼녀?” 한스는 기가 찼다. 일단 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좀 내주면서, 그간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세상에! 약혼녀라니? 하라는 의학 공부는 안 하고 연애만 했던 게냐!” “아니에요. 후원자이신 집정관께서 일찍 가정이 안정되어야 학업과 일도 잘된다고 추천하셔서…….” “그래서 덜컥 약혼을 했다?” “예.” 루돌프는 수줍게 대답했다. 소년의 후원자 륀체르가 소년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어떤 학문 과정을 밟아도 남들보다 훨씬 빠르게 수료해내는 지력에 반한 것이다. 륀체르는 ‘학자에게 있어 이성과의 안정된 관계는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면서 ‘자기처럼 노총각이 되기 싫으면 얼른 약혼하라!’고 부추겼다. 그런 까닭으로 루돌프는 마리아에게 약혼을 요청했고, 마리아는 그 요청을 고심 끝에 받아들였다. 그녀는 인간으로서의 새 삶을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반드시 도움이 되고 싶어 했고, 또 루돌프를 싫어하지 않아서 약혼 요청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약혼 후 마리아는 루돌프에게 최고의 조력자가 되어주었고, 루돌프의 의학 연구도 점점 빛을 발휘했다. 한스는 그들을 흐뭇한 눈으로 보다가 갑자기 한 장의 수표를 받았다. 수표 봉투에는 루돌프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게 뭐냐?” 루돌프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2억…자일이에요.” “하? 이 큰돈을 네가 어디서 구했어?” “마리 아가씨를 따라다니며 번 돈과 후원자께서 주신 용돈, 그리고 연구 성과금을 모은 거예요.” “그런데 어째서 이걸 나에게 줘?” 루돌프는 벌써 잊으셨느냐는 표정이다. “드래곤 링클이요. 제 실수 때문에 영영 가지지 못하시게 됐잖아요. 이 돈으로 드래곤 링클을 살 정도는 아니지만…… 일단 받아주세요. 앞으로도 살면서 다 갚아드릴게요.” 한스는 봉투를 내쳤다. “흥! 넣어둬! 넣어둬! 마력도 사라진 마당에 드래곤은 무슨! 나는 지금 삶에 아주 만족해! 너무 만족해서 가끔은 웃다 죽을 지경이라고!” 하지만 루돌프는 그 돈을 받으려하지 않았다. 소년은 봉투를 다시 들어서 스승의 앞에 내밀었다. “받으시라니까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해요.” “글쎄 난 이 돈 없이도 문제없다니까! 너 물장사가 얼마나 돈이 되는 줄 아니? 내가 말이야, 바너의 술 장인들보다 훨씬 부자…….” 돈 봉투를 주고 싶어 하고, 돈 봉투를 무조건 받기 싫어 티격태격하던 두 남자는 갑자기 묘안을 냈다. “자자, 루돌프! 그럼 이건 어떠냐? 이걸 오를린 재단에 전부 기부하는 거야! 넌 고향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는 거고, 나는 우리 지역 사람들이 이 돈으로 넉넉한 생활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아지겠지! 응?” “그거 좋네요! 그렇게 해요!” “아, 안 돼!” 갑작스럽게 반대의 의사를 내비친 이는 루돌프도, 한스도 아니다. 바로, 마리아였다. 루돌프는 방금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아 마리아를 보았다. “마, 마리아?” “…….” “방금 뭔가 안 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아니야! 나는 잠시 볼일 좀!” 마리아는 자기가 무심코 내뱉은 말이 부끄러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루돌프는 마리아에게서 처음 느끼는 물욕에 놀랐다. ‘눈, 그렇게 탐욕적인 거 처음 봐!’ 한스는 마리아를 보고 낄낄 웃으며 중얼거렸다. “네 약혼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욕심쟁… 아아, 아니지. 아무튼, 나중에 훌륭한 살림꾼이 되겠구나! 자자. 그나저나 며칠 머물다 갈 예정이냐? 이왕이면 엿새 정도 더 머물러라! 엿새 후엔 마리니시네 아가씨의 결혼식이 있거든! 축제는 즐기고 가야 하지 않겠어?”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편이 진짜 마지막 ㅠㅠ... 진짜진짜... 00122 8. 삶, 삶, 삶 =========================================================================                            공국 수도 로귀하르트. 집정관저. 관저 주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행복에 넘쳐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관저 내의 집정관 표정은 불퉁하다. 최근 륀체르는 정치적 욕구 불만에 가득 쌓여있다. 자기를 음해하던 바너의 인간들을 싹 쓸어버리고 싶은데 누군가의 눈치를 보느라 하지 못하고, 공회 의원들도 입맛대로 뽑고 싶은데 그것도 누군가의 눈치를 보느라 하지 못한다. 사파이어 재단의 배를 불릴 온갖 정책을 밀고 싶지만, 그것도 좌절. 집정관을 뽑는 투표도 백 년 아니, 천 년에 한 번 하고 싶은데, 그것도 오를린 출신 그 누군가의 눈치를 보느라 오 년에 한 번 하는 것으로 정해야 했다. 제국이 몰락한 후, 사람들은 륀체르 사파이어의 독재를 예상했다. 애당초 륀체르는 바너 길바닥 출신에 생부의 가족을 몰살하였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자였고, 그 소문을 증명하듯 자신을 도와준 은인 비오르틴에게 주저하지 않고 칼을 디밀었다. 그 외에 그가 보인 급진적 행보들을 보자면 그가 공국을 독재 통치할 가능성은 아주 커 보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륀체르의 상식적이고도 이성적인 행보에, 사람들은 수상하게 여기면서도 싫지는 않은 분위기다. 종종 온갖 말들이 나돌기도 한다. ‘사파이어답지 않은 행보다, 사파이어가 정권을 잡더니 사람이 변했다.’ 심지어는 ‘사파이어에게 유령이 씌었다…….’는 말까지. 그리고 그가 오슬 수인족 출신의 무녀와 결혼을 발표했을 땐 드디어 미쳤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정작 륀체르는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자기를 보고 미쳤다고 기사를 써대는 로귀하르트 신문을 구겨버리며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체, 내 결혼을 대륙 화합의 표상으로 좀 쓰겠다는데 왜 남들이 난리야? 아, 평화를 위해 내 인생 하나 희생하겠다는데 어째서 미쳤느냐는 말을 들어야 하지? 억울하다!” 그의 말마따나 결혼은 대륙 종족 간 화합의 표상일 뿐이다. 그와 신부의 관계가 소와 닭처럼 심심하고도 건조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홀디네 본은 그의 불평에 적당히 맞장구쳐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륀체르는 그 봉투를 보았다. 참 이상한 봉투다. 오를린에서 보낸 것인데, 보낸 날짜가 바로 어제다. 마력이 사라진 지금 이동 스크롤이나 텔레포트 홀이 없어서 우편물이 하루 만에 오는 일은 불가능한데, 즉 이 봉투는…… 마력으로 전해졌다는 것. 홀디네가 설명했다. “오를린의 그분들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럼, 그럼! 그들밖에 없겠지!” 륀체르는 봉투를 열어 편지를 보았다. 통통 튀고 발랄한 글씨체가 단번에 눈을 사로잡았다. 「안녕! 내 친애하는 변태여! 잘 지내지? 달마다 한 번씩 배달되는 정국 소식지를 보니 당신이 나라를 아주 잘 이끌어가는 것 같아 매우 기특하고 기뻐! 탐욕스럽게 나라를 독식하려 들면 내가 당신, 튀겨 죽이려고 했는데…… 앞으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 아주 안심이야! 사실, 오늘 이렇게 편지를 쓰는 목적은 다른 게 아니라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사흘 후에 내 결혼식이 있어. 내 충실한 호위기사가 나의 남편까지 되어주기로 했지. 그러니 부디 참석해줬으면 해. 당신은 내가 여행하면서 만난 가장 가까운 친구였으니까. 그럼 이만! 추신. 참! 결혼 축하해! 당신 취향이 뱀 수인인 건 의외였어.」 륀체르는 편지를 가장한 청첩장을 구겨 던졌다. “젠장, 젠장! 내 취향은 뱀 수인이 아니라 가슴 큰 너라고! 너, 마리니시네였다고! 으아아아! 짜증 나! 이딴 건 왜 보낸담?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이나? 자기도 내 결혼식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으면서 나보고는 자기 결혼식에 오라? 하여간 이상한 여자야. 자기 중심적이라니까!” 홀디네는 륀체르의 커다란 목소리에 잠시 귀를 막았다가 그가 조용해지자 물었다. “가실 겁니까? 여정은 그리 고단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이 집정관님께 순간 이동을 써서 바로 오를린으로 가시게끔 해줄 것 같은데요.” 륀체르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가긴 무슨! 축하 선물이나 줘버려! 아주 구린 것으로!” *** 오를린 시. 공국의 새로운 정책 때문에 오를린은 영지라는 낡은 이름을 버리고 ‘시’라는 명칭을 달았다. 영주의 직위는 시장으로 바뀌었고, 로테도 영주의 딸이 아닌 시장의 딸로서 그리고 자식을 혼자 키우는 어머니로서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녀에겐 소일거리도 있다. 종종 꽃꽂이와 외국어, 춤, 바느질 등 소양을 쌓고자 오는 아가씨들이 있는데, 그녀는 그들을 대상으로 가르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치고 보수를 받았다. 언니 마리의 결혼식을 하루 앞둔 로테는 예식 당일 딸 리슈라에게 입힐 옷의 마무리에 한창이다.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는 그녀의 표정이 어째 많이 피곤해 보인다. 최근 며칠 동안 언니 결혼식 준비에 가장 열성적으로 임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걱정된 하녀가 로테에게서 바늘을 빼앗아 들었다. “이리 주세요. 마무리는 제가 할 테니 아가씨는 그만 쉬셔야…….” 하지만 로테는 그것을 도로 가져갔다. “언니 결혼식에 입힐 내 딸의 옷이니만큼, 내가 해야 하지 않겠어.” 하녀는 로테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바느질에만 집중하는 아가씨의 모습이 심심해 보여서 하녀는 무슨 말이라도 걸려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 갑자기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더니 한 붉은 머리 아가씨가 들어와 수선스럽게 외쳤다. “로테! 오랜만이야!” 로테는 피곤한 중에도 반가워서 미소를 지어다. “실로이.” 실로이라는 이름의 붉은 머리 여인은 로테의 사촌으로 네히트에 살고 있다. 눈치가 없고 시끄러운 게 특징이지만, 그다지 악한 사람은 아니다. 지금 이렇게 온 것은 분명 마리의 결혼식 때문일 것이다. 실로이는 사 년 전에 로테를 마지막으로 봤는데, 이렇게 다시 보자 반가움에 어쩔 줄 몰라 실언을 했다. “이게 얼마 만이니! 저 잠든 귀여운 아이가 작은 황녀님이셔? 뭐? 이름이 리슈라라고? 좋은 이름이구나! 어쩜 이렇게 널 닮아 예쁘니! 아아… 아기인데도 얼굴에 귀티가 좔좔 흐르는 거 보니 황궁 물이 좋긴 좋은가 봐! 나도 너처럼 궁에서 단 하루만이라도 살아봤으면 소원이 없겠어…….”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말. 하녀는 헛기침하며 간접적으로 주의를 시켰지만, 실로이는 실언을 멈추지 않았다. 실로이는 로테가 바느질하는 옷을 빼앗아 들고 외쳤다. “어머, 이 아기 드레스 좀 봐! 이게 황궁식이니? 이런 레이스 뜨기는 황도에서 배운 거야? 응?” 이제는 누구도 황궁이나 황도라는 말을 쓰지 않는데도 실로이는 그렇게 물었다. 거듭되는 눈치 없는 말에 로테의 기분이 어두워질 것 같은데, 정작 로테는 전혀 그렇지 않다. 로테는 실로이의 손에 든 옷을 다시 가져가 바느질하며 찬찬히 말해주었다. “궁이 뭐 별거겠니? 그리고 이 드레스는 황궁식이 아니라 그냥 내 취향으로 만든 것일 뿐이야. 실로이. 궁 같은 그런 허무한 곳에 환상을 가지지 마.” “하지만 대단하긴 대단했었잖아! 제국이 공국이 되었어도 여자들이 궁에 품는 환상은 여전하다고! 넌 그 환상의 중심에 있었잖니!” “얘…… 대단이라니. 그곳이 네가 생각하는 대로 정말 대단한 곳이라면 지금 그렇게 몰락했을 리가 없잖아?” 로테는 어깨를 으쓱이며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 미소가 실로이의 눈에는 어쩐지 진짜 웃음으로 보이지 않는다. 무안해진 실로이는 리슈라를 안아 들면서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로테는 바느질하는 것을 멈추고 실로이에게서 리슈라를 빼앗아 안았다. “이리 줘. 내 딸은 낯선 사람에게 안기면 금세 울어서.” “아. 그, 그래.” 로테는 하녀에게 바느질감을 건드리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말한 뒤, 리슈라를 안은 채로 밖으로 나갔다. 사촌의 괜한 소리 때문에 기분이 나빠져 자리를 피하는 게 아니다. 단지 방 안의 공기가 답답해서 산책을 좀 하려는 것뿐이다. 자면서 하품하는 리슈라의 표정이 답답해 보이기도 했고. 역시나 밖으로 나오니 리슈라가 잠에서 깨어나 방글방글 웃는다. 그런 딸의 얼굴을 보며 로테는 딸을 웃게 하는 여러 소리를 내고 감미로운 노래도 불러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리슈라와 노는데, 갑자기 리슈라의 얼굴이 낯설어 보인다. “너….” 사람들은 리슈라를 보고 어미인 자신을 쏙 빼닮았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의 눈에 리슈라는……. ‘어쩔 수 없이 그 피를 받았구나. 너는 누가 뭐라고 해도 비오르틴 그 남자의 딸이야.’ “그아아?” 리슈라가 어미의 눈동자 속에 담긴 말이 궁금한 듯 소리 냈다. 로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활짝 웃으며 리슈라를 안고 숲길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그때, 그녀가 사라진 길에 누군가가 들어섰다. 말끔한 여행자 복 차림의 한 남자. 매우 젊다. 암갈색 머리카락은 길어서 목을 넘고, 음울한 회색 눈은 사라진 여자의 방향을 쫓는 듯 초조해 보인다. 마른 입술 사이로 서글픔이 잔뜩 묻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리슈라….” 남자는 한때 딸에게 지어줬던 두 번째 이름을 몇 번이나 읊조리면서, 로테가 사라진 길 쪽으로 걸어갔다. 밝은 달빛이 그 길 곳곳에 총총 내려앉았다. *** 마리와 하이너의 결혼식은 마을 축제처럼 소박하고 화기애애하게 치러졌다. 결혼식에 나왔던 술은 전부 주점 ‘잘생긴 한스’에서 무상 제공한 것이고, 루돌프와 마리아도 결혼식에 참석했다. 로테는 자기 결혼식 때보다 더 기쁘게 언니의 결혼을 축하해주었고, 리슈라는 처음으로 ‘엄마’가 아닌 ‘이모’라는 발음을 하여 마리와 그 가족들을 기쁘게 했다. 시장 내외, 시의 사람들, 모두가 그들의 앞날을 축복해주었고, 뒤늦게 집정관도 와서 마리를 축하해주었다. 집정관은 그들의 결혼을 축하해주면서도 신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신랑의 귓가에 대고 이죽거렸다. “하이너! 이 야심가야! 이거, 이거, 귀족 아가씨에게 장가가서 신분 상승을 좀 해보려 했더니, 여전히 평민이네? 이걸 어쩌나? 앙?” 신분제가 사라진 현재, 하이너는 아가씨와 결혼한다고 해서 귀족이 되지는 않는 사실을 놀리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너는 그런 놀리는 말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세계 최고의 힘을 유일하게 다룰 줄 아는 이에게 신분이란 먼지만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이너는 다만 그런 의미를 담은 미소를 륀체르에게 보일 뿐이었다. *** 결혼식과 피로연이 끝나고 다음 날, 마리 부부는 길을 떠나기로 했다. 마리는 마지막으로 조카를 안아보며 축복의 말들을 해주었다. “건강하게 자라야 한다! 무엇보다 큰 꿈을 가져야 해! 희망의 신 마리니시네님께서 언제나 너를 위해 기도할게! 아휴, 귀여운 것…….” 한참 동안 좋은 말들을 해주다가 마리는 동생에게 아이를 넘겨주었다. “자, 그럼 로테. 잘 있어.” “너도 즐겁게 여행하길 바라.” 지켜보는 어머니는 표정이 어둡다. 딸이 또 고향을 떠나는 게 싫은 것이다. 아쉬움에 다시 한 번 붙잡는 말이 나왔다. “마리. 꼭 떠나야겠니? 여기서 정착하는 것도 좋잖니? 하이너도 그걸 원하는 것 같은데.” 하이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건 아가씨가 원하고, 선택하시는 길뿐입니다.” “이보게. 결혼했는데 아가씨라니.” 하이너는 멋쩍게 웃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가씨’가 아닌 다른 호칭을 쓰는 건 익숙지 않다. 이번엔 마리의 아버지도 여행을 말렸다. “마리, 다시 생각해봐라. 우리 영지 아니, 우리 시에는 다른 시를 상대하는 행정 쪽 일손이 부족해. 여행을 많이 다닌 너와 하이너가 그 일손이 되어줄 수 있잖니? 이렇게 꼭 가야만 하느냐?” 마리의 대답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예! 아버지! 저는 꼭 가야만 해요! 그래야 우주를 지키거든요!” 해맑은 말(우주)의 의미를 모르는 아버지는 갸우뚱해졌다. 어머니 역시 ‘얘가 또 미친 병이 도졌나…….’하는 생각을 했다. 우주 정복의 속사정을 아는 하이너만 속으로 끙끙 앓는다. ‘아가씨께선 정말이지, 지금 와서 우주가 어쩌고 하면 누가 알아 듣느냐고. 하여간 꼭 저렇게 티를 내셔야 하나.’ 하지만 그가 아가씨를 보는 눈길은 봄 햇살처럼 따사롭다. 로테가 아쉬워하는 어머니, 아버지를 달랬다. “마리를 그냥 보내주세요. 여행이 지겨우면 한 번씩 오를린에 들른다잖아요.” 마리는 부모님을 달래주는 로테를 지그시 보았다. 자매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왜, 마리?” “아니. 고마워서.” “뭐가?” “아무것도. 리슈라 잘 키우렴! 그럼 우린 이만 갈게요!” 탁 트인 평지가 그들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 부부는 남하하여 괴지 쪽으로 갔다. 당연히 두 다리로 걸어서 간다. 마력으로 순간 이동을 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눈에 띄는 곳에서는 웬만하면 마력을 쓰지 않는 것이 그들이 정한 법. 하여, 그들은 다리가 아플 정도로 길을 걸었다. 괴지에 도착하면 그때 순간 이동을 해도 늦지 않다. 괴지에 다다르기 직전, 마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봄 날씨가 매우 덥다. 문득 그녀는 그동안 모호했던 것을 물어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하이너. 내가 마나의 인이라면 죽은 후엔 어떻게 돼? 대륙이나 내 안의 마력들 말이야.” “무슨 소립니까? 아가씨는 죽지 않습니다.” “아니, 죽지 않겠지만, 만약 사고로 심정지 같은 걸 일으킬 수도 있잖아. 그럼 부활하나?” “포울룬디가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겠지요. 뭐, 포울룬디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아가씨의 심장을 지킬 테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아가씨는 분명 영원히 사실 겁니다.” 마리는 기분이 좋아져서 웃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하이너의 목에 두 팔을 감아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그럼 너도? 너도 나와 영원히 사는 거야?” 하이너는 그 점에 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 포울룬디가 했던 말에 의하면 영생은 마리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지, 자신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닌 듯. 그러나 하이너는 왠지 거짓을 말하고 싶다. “그럼요. 저도 아가씨와 같이 영원히 살지요.” 하이너는 말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으나, 정작 마리는 실망한 눈치다. “흐잉, 뭐야! 이 결혼 무를래! 죽지 않고 너랑 영원히 부부가 돼야 한다니!” 하이너는 참 그녀다운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서운함을 어찌할 수가 없다. 삐친 그는 그녀의 몸을 떼어내면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괜스레 못된 목소리가 나왔다. “정말이지, 아가씨! 제발 그 낭만 깨는 말씀 좀 하지 않으시면 안 됩니까?” 마리는 나름 진지하여 하이너를 쫄래쫄래 따라가면서 가르치듯 말했다. “그야 그렇잖아? 너도 언제까지고 한결같을 순 없다고. 좀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란 말이야.” “아, 예.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그건 현실적인 게 아니라 부정적인 겁니다.” 마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흐음, 그런가?” 하이너는 백치 같은 물음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몸을 옆으로 돌려 마리와 마주 보았다. 그의 두 손이 마리의 두 손을 잡았다. “그래요. 그렇고말고요……, 저기 아가씨.” “응?” “제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가씨를 영원히 사랑할 테니까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그의 입술은 당장에라도 입맞춤을 퍼붓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굳건한 눈동자도 배신이나 변심 따위는 없을 거라고 외친다. 하지만 마리는 괜스레 생글생글 웃으며 의심하는 말을 던져본다. “헤에,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어떻게 나를 영원히 사랑한다고 희망차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아앙?” “……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뭐가 남습니까?” 되묻는 기사의 눈엔 어떤 번뇌도 보이지 않는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완결입니다! 그동안 읽어주시고 후원해주시고 코멘트, 추천 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특히나 윈디 님, 큰 힘이 되었습니다. 다음엔 현대 로맨스 물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