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화 : 빙의미소년(憑依美少年) "꺄악! 카이엔 오빠!" "제발 여기 한번만 돌아봐줘요!" 기분이 얼떨떨하다. 시선을 두는 곳마다 온통 여자들. 여자들. 여자들 투성이다. 어찌나 열광적으로 떠들어대는지 한번 쳐다보기도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난 그냥 묵묵히 앞을 보고 가능한 서둘러 걸었다. 교실까지 가는 걸음이 천리길처럼 멀게 느껴졌다. 초조해진 나는 걸음을 조금 서둘렀 다. 하지만 치렁치렁 길게 늘어뜨려진 익숙하지 않은 옷 때문에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이건 내가 아냐. 원래의 내가 아니라고! 지금 내 앞에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풍경들밖에 보이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이 몸은 진짜 내 몸이 아니다. 아마 빙의라고 하던가? 지금 나의 영혼은 생판 모르는 사람의 몸 속에 깃들여 있었다. 그리고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깃든 사람은 이 대륙 최고의 미소년이라 불리는 소년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하면 이야기는 3일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야, 진짜 할 거냐?" "내 성질 몰라서 그래? 한다면 한다구!" 나와 같이 올해 고등학교 2학년인 친구 손문길. 내가 봐도 상당히 기분나쁘게 생긴 음침한 녀석으로 흑마술이나 심령현상 등에 대단한 조예를 가지고 있다. 이건 전교에 널리 알려진 사실로 이녀석은 당연히 친구고 뭐고 없다. 나만 빼놓고... 젠장! 왜 내가 저 녀석의 친구로 취급되야 하냐구! 문길이도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 역시 교실에서 음침하고 존재감 없기로는 빠지지 않는 성격이다. 커플? 당연히 저 주한닷! 사랑과 우정? 엿먹어라! 나도 날때부터 이렇게 음침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뭐, 문길이 녀석과 같이 다녀서 좋은 점도 많았다. 저녀석이나 나나 같은 전교 왕따 최상위 리스트에 들기는 했지만 애덜이 우리를 피해 다니면 피해 다녔지 절대로 우리를 괴롭히는 또라이 같은 놈도 년도 없었다. 흑마술 한다고 소문난 놈을 누가 건드리겠는가? 그렇잖아도 누가 아프면 문길이가 부두인형으로 만들어서 저주했다는 소문이 쫙 퍼지는 판에. 에? 문길이는 그렇다치고 내가 왜 왕따냐고? 정정보도를 요청하겠다. 나는 왕따가 아니다! 어쩌다가 문길이 녀석이랑 엮여서 이렇게 된 것 뿐이 라고! 결코 내가 워해서 걔랑 노는 게 아냐! 같이 도매금 취급하지 말란 말이다! 뭐, 사실 내가 독특하다면 독특한 녀석이라고는 인정할 수 있다. 세상에 수업시간에 신화 야오이 팬픽 쓰다가 선생님한테 걸린 [남학생]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 그리고 지금은 그 팬픽, 복사본조차 우리 학교에서 정말 구하기 힘든 레어아이템으로 소문나 있다. 특히 여편네들 사이에서 말 이다. 하여간 이놈이 오늘 나를 늦은 야밤에 이런 구석진 학교 체육창고로 불러낸 것은 비뚤어진 귀축정신을 발휘하여 나를 덮치기 위해서... 가 아니 라 다른 세계로 가는 마법을 알아냈다는 말도 안 돼는 연유 때문이다. 너, 쓸데없는 책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그래도 아무도 안오면 녀석이 너무 불쌍하니까 특별히 내가 나와 줬다. "우켈켈켈." "이 쉐이 웃음 졸라 기분나쁘게 하네. 거짓말이면 너 어쩔거야?" "분명 말했잖아. 거짓말이면 얼마전에 내 동생이 갖고 있는 god 대형 브로마이드 한정판 갖다 준다고. 사실은 그거 집 정리하면서 갖다버릴려고 했는데 네가 필요할 것 같아서 참았다." ...고백한다. 사실은 저거 받고 싶어서 나왔다. "멤버들끼리 스캔들 일으킬 수 있는 저주는 없냐?" "이 변태쉐이. 그런 거 취급 안해. 하여간 잘 보고 있으라고!" 그래도 뭐 좀 한답시고 동그랗게 마법진 그려놓고 펜타그램인지 헥사그램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상한 별을 바닥에 하나 그려 놓았다. 어디서 갖다 놓은 건지는 몰라도 그림 옆에는 우리에 갖힌 산 토끼와 식칼이 놓여 있는데 왠지 섬뜩했다. 이 자식이라면 나를 흑마법의 제물로 삼을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들어 오싹했다. 근데 저 마법진, 비뚤비뚤하잖아? 이번에 보여준다는 것도 뻔할 뻔자군. 또 흑마법을 빙자한 한편의 코미디를 보여주겠지. 사람 저주는 그렇게 잘 하는 녀석이 왜 딴 거는 그렇게 삽질일까나? "근데 상우야. 너 이세계로 가면 어떤 세계로 가고 싶어?" "사랑이 넘치는 세계. 그것도 금지된 사랑이 잔뜩."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절반쯤은 진심이었다. 아니 절반이 아니라 진짜 진심이다. 상상해 봐라.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온갖 가식과 허위로 덮여 있 는 세상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즐거운 세상을 말야. "흐음... 난 여자가 되고 싶어. 초 극강 미소녀!" "변태쉐이는 너구만 뭐. 여자가 되서 어쩔려구. 자기 몸 보고 흥분하는 짓거리를 할 테냐? 아, 그게 없으니까 그건 못하겠군." "너야말로 변태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유가 뭐냐면 마법지팡이와 빗자루는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마법의 낭만이라면 역시 강력한 마법 소녀가 아니겠냐?" "....." 역시 이녀석은 '나보다' 이상한 녀석이다. 내 양심에 걸고 확신한다. "넌 여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냥 이대로 남자의 생활에 만족해?" 음... 글쎄. 내가 여자가 된다라고? 그것도 초 절정 미소녀라면... 그렇다면 온 나라의 부와 권력을 가진 왕자들이 대쉬해올 테고, 그 중에서 초 절 정 미소년과 함께... 헤에... "이자식 벌써 맛이 갔구먼. 변태쉐이. 하여간 집중해. 시작한다." "그래라." 하거나 말거나. 어차피 공상은 공상의 영역만으로 족한 법이라고. 그런 망상 단계까지 간 공상이 설마 실현되리라고 믿는 건 아니겠지? 쯔쯔. 그 러니까 니가 왕따인 게다. 뭐... 사돈 남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돈데 기리기리 돈데 기리기리..." 얼씨구? 어디선가 많이 듣던 주문이다. 이런 주문 제대로 통할까? 하긴 원래부터 믿지 않았으니 뭘 해도 상관없다만... "주문 끝. 자, 이제 이 마법진 위에 서서 기다리기만 하면 돼. 이리 와." "저 토끼와 식칼은 왜 갖다놨는데? 안 써?" "장식용이야. 저런 것쯤은 있어야 흑마술이라는 폼이 나잖아." "....." 말을 말자. 쳇! 아아, 오늘은 더이상 이녀석의 장단에 놀아주는 것도 지쳤다. 빨리 집에가서 밥먹고 세수하고 강타오빠 화보집이나 뒤적거려야지. 그러고 보니 테니프리 다음권이 나왔는지도 확인해야 하는데... "나 간다." "어이. 가지 마. 발동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얼마나 기다려야 되는데?" "1분도 안 남았어." "그럼 1분 센다. 1분동안 아무 일 없으면 그냥 갈거야." 손목에 찬 싸구려 시계의 스톱워치를 맞추고 돌리기 시작했다. 1초...2초...3초. 아, 심심해. 밤이니까 당연하지만 어째 음침한 분위기가 맘에 안들 어. 게다가 이 분위기의 절반은 문길이녀석이 만들고 있고 말이야. 이것저것 잡생각을 하는 사이에 금방 30초가 넘어갔다. 어? 뭐지? "됐다!" 문길이 녀석은 필이 왔다는 듯한 느낌이 든 듯 외쳤다. 나도 뭔가 번쩍이는 빛을 본 것 같기도 한데... 알 수는 없었다. 그런데 40초쯤 되자 마법 진에서 눈부실 정도로 밝은 빛이 솟아나왔다. 그 엄청난 빛에 나는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어이어이. 설마 진짜는 아니겠지? 밑에 후뢰시 켜고 장난치는 거 아냐? 아니, 생각해보니 체육창고 바닥에 조명장치가 있을 턱이 없는데. "문길아?" 하지만 대답소리는 없었다. 눈을 떠보려고 했지만 시력이 맛이 가버렸는지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다. 나는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문길아! 어딨어!?" 여전히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어쩐지... 체육창고에서 이정도 큰 목소리를 냈다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야 할텐데 목소리가 전혀 울리지 않았다. 문득 섬뜩해졌다. 설마 손문길 이자식. 진짜로 날 흑마법의 제물로 쓴 건 아니겠지? 흐으... 역시 저런 녀석이랑 친구를 한 건 내 일생일대의 실수야!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나오라고 할 때부터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사실은 혹시나 덮쳐줄까 하고... 가 아니라 그래도 친구나까 나갔는데... 아아. 대략 정신이 멍해온다. 이제 내 영혼은 악마의 제물로 바쳐지는 걸까. 흑흑. 제발 살려주세요. 제 잘못이라고는 오직 친구 잘못 사귄 죄밖에 없어요. 흑흑. 그리하여 깬 곳이 이세계의 푹신푹신한 침대 속이었다. 어떻게 깨어나자마자 이세계라고 단언할 수 있냐고? 간단하다. 물의 정령이라는 것들이 내 옆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말을 걸었거든? 근데 솔직히 거울을 보고서는 좀 놀랐다. 귀찮을 정도로 허리까지 길게 늘어진 황금빛 머리카락 가운데 있는 잡티 하나 없는 얼굴에 초롱초롱한 에메랄드 빛깔의 눈동자. 오똑한 코, 묘하게 섹시한 입. 아무리 봐도 이전의 내 모습과는 상전벽해의 모습이다. 유령인지 의심스러워서 거울 앞에 서 이리저리 움직여 보고서야 거울 속의 미소년이 나라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그런데 그 외모가 지금까지 내가 본 어떤 연예인도 저리가라 할 만큼의 엄청난 정도의 절세미소년이였다. 마치 사람이 아닌... 인형같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으니. 그리고 분명 난 특별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분명 한국어는 아닌데 정령들과도, 그 나라 사람들과도 100%말이 통했다. 게다가 집이 호화번쩍한 것을 보니 분명 평범한 신분은 아니겠는걸? 정말 행운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우연이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잘 먹고 잘 살수 있는 그런 불로소득의 생활! 그걸 얼마나 내가 꿈꿔왔는데 말야. 내가 깃든 이 몸을 사람들은 카이엔이라고 불렀다. 카이엔 브리타뉴. 카이엔이 이름이고 브리타뉴가 성이다. 깨어나서 어떻게 된 일인지 연유를 들어보니 나, 아니 이 몸은 너무 아름다워서 뭇 남성들의 질투를 한몸에 산 나머지 사악한 흑마법사에게 저 주를 받은 후에 쓰러져 며칠 동안 잠든 채 누워 있었던 모양이었다. 몸은 좀 어떠냐고 묻는 집사나 카이엔의 부모님들에게 나는 굳이 카이엔이 아니라고 이야기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런 경우에 가장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잖아? 기. 억. 상. 실. 증. 아비 애미도 못 알아본다며 벽을 치며 탄식하는 부모들 앞에서 귀엽게 어리버리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내 모습이 꽤나 살인적이었던 모양이다. 어 떻게 그걸 아냐면 내 앞에 있던 하녀들 몇이 코피를 흘렸거든? 어쨌건 새 부모님(?)들은 별별 마법사나 주술사들을 다 불러 기억상실증을 치료하려고 했지만 말짱 헛수고였다. 생각해보니 대부분 사이비인거 같기도 하였다. 내가 이 몸에 빙의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녀석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하여튼 그런 시도가 헛수고로 돌아가자 그들은 차선책으로 내게 이런저런 많은 지식들을 집어넣으려고 애썼다. 이 나라의 이름은 유클리네 왕국 이니, 나는 브리타뉴 귀족가문의 차남이니 하는 등의 지식 말이다. 지금부터 어떻게 되든 중요한 지식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에 나는 귀담아 들었 다. 그나저나 문길이 자식은 어디로 떨어진 거야? 여자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과연 소원성취 했을까? 궁금한 게 많았지만 알 길은 없다. 게다가 지 금은 내 자신을 추스리는데도 바빴으니까. 갖가지 상념들로 머리를 채우며 주변에서 울려오는 여인네들의 소음을 무시하고 교실로 들어서자 또 묘한 분위기가 교실을 감싸고 있었다. 제2화 : 학교수업(學校受業) 교실 분위기는 상당히 묘했다. 일반적인 한국 교실처럼 책상과 걸상이 줄을 지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전에 대학 탐방 가서 본 것처럼 책상이 길쭉했다. 그다지 남녀를 구분하 지는 않는 듯 자기 편한 데로 자리에 앉고 있는 것 같았는데 한 이삼십 명 쯤 들어갈 것 같은 교실에는 열 명 정도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들어오자 교실의 모든 사람이 날 쳐다보는 게 아닌가? 아, 시선집중이다. 부담스럽네. 난 동물원의 원숭이가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저 중에 끼여있더라도 돌아보지 않을 수는 없었을거야. 거울로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정말 내 자신이 스스로의 외모가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으니까. 어디까지나 고독을 홀로 씹기를 즐기는 내 성격에는 잘 맞지 않는다고. 다시 말하지만 난 왕따가 아냐! 다만 조금 내성적인 성 격일 뿐이야! 그때 한 남학생이 일어나서 나에게 다가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다란 금발의 머리카락. 좀 버터 바른 끼가 나기는 하지만 의외로 내 취향에 맞는 귀공자 타입... 쳇.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해 버렸다. 머리카락 길이로 치면 지금 나도 만만찮게 길다고. 물론 내가 직접 감는 게 아니라 감겨 주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아침에 머리 감을 때마다 돌아버릴 지경으로 길다. "안녕. 카이엔." "으. 응." "나 기억 안나?" "으. 응." 뭐라고 말하고 싶지만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내가 학교 애들이랑 이야기를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화술에도 서투니까 대답 자체가 너무 궁색하 다. "기억을 잃어버렸다더니, 정말이구나. 뭐, 이런 말하기는 새삼스럽지만 난 우리 반 부반장 린넬 케이준이야. 린이라고 불러줘." "응. 린." "허억!" "끼악!" 뭐... 뭐야? 갑자기 반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세상에 이럴 수가...!" "그 카이엔이... 카이엔이... 저렇게 단번에 애칭을 불러주다니!" "너무해... 나한테는 아무리 부탁해도 절대 애칭을 안 불러줬으면서!" "아무래도 성격까지 확 변해버린 거 아냐? 이거?" 젠장. 원래 주인의 성격까지 내가 어떻게 알어? 그리고 원래 그놈 성격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일일이 따라줄 의무까지는 없다구! 그래도 일단 이 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정확하게 알아야겠다. "저기, 이건 어떻게 된 거야?" 린넬이라는 그 아이는 할 수 없다는 듯 푸욱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저 녀석, 그러면서도 뭐가 좋은지 히죽히죽 웃고 있잖아. 난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다구!" "카이야." "응?" 카이... 라면 분명 카이엔의 애칭이겠지? 부모님들도 그렇게 불렀던 것 같으니까. "대... 대답했다." "기분 나쁠때는 카이엔 브리타뉴라고 풀 네임을 불러줘야 간신히 대답하던 녀석이!" "꺄아, 그래도 이런 카이군의 모습 또 나름대로 매력적이야!" "거기 조용!" 내 뒤쪽에서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선생님이 들어온 모양이다. 휴우. 일단은 살았다. 도무지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알 수가 있어야 말 이지. "카이엔 브리타뉴 군. 자리에 가서 앉게." "네. 저... 그런데, 제 자리는 어디에..." "여기야! 여기! 내 옆에 앉으라고!" "무슨 소리야! 카이엔님의 옆자리에 어울릴 만한 사람은 이 시에나 뿐이야!" "조용히 안 하나!" 하여간 시끄러운 녀석들이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애들도 시끄럽기는 했는데 이정도까지 시끄럽지는 않았다. 게다가 선생이 들어왔는데도 노 골적으로 떠드니... 아, 다들 빵빵한 귀족집 아들딸들이라서 그런가? 하여튼 그 시끄러움의 중심에는 항상 내가 있었다. 하기야 이 정도 미모를 가지고 전교의 아이돌이 되지 않는 것이 이상하겠지. 대륙 최고의 미소년으로 먼 나라에까지 소문이 자자하다니... 할말없다. "카이엔 브리타뉴 군." "네." "린넬 케이준의 옆에 앉게." "알았습니다." "너... 너무해요! 선생님! 어째서 린넬 녀석의 옆에!" "맞아요! 저 녀석은 위험하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조용히 좀 햇! 근데, 자네.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들었는데. 나도 기억하지 못하나?" "죄송합니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흠흠. 그렇다면 잘 기억해 두게, 나는 이 학교의 역사를 가르치는 퓌셀 몽마르뜨라고 하네. 집에서는 기초상식 같은 것도 완전히 잊었다고 들었 으니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312호에 있는 내 연구실로 찾아와서 묻게." "감사합니다." 예의바르게 인사하면서 나는 슬쩍 반 아이들의 눈치를 보았다. 헉! 그런데 다들 표정이 왜 저래? 입이 딱 벌어져 있잖아. 내가 뭘 잘못했나? "마... 말도 안돼! 그 카이엔이... 선생님에게 예절바르게 인사를 했어!" "선생이라면 전부 엿같이 보면서 면전에서 까대던 그 카이엔이!" 에엑? 나는 놀라서 퓌셀인지 몽마르뜨인지 하는 혀 굴러가는 발음의 이름을 가진 선생의 얼굴을 벌떡 쳐다보았다. 그 선생은 근엄한 표정을 유 지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당황한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대체 카이엔 브리타뉴 이 자식은 뭐하는 놈인거야아아앗! 우여곡절 끝에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이미 수업시간은 꽤 지나간 후였다. 말을 할 수 있는데 설마 글을 읽을 수 없지는 않겠지. 역사책에 있는 글 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배경 상식이 아무것도 없는데 이 나라의 역사니 세계니 하는 걸 이해할 수가 있겠냐? 주신 다르군트 를 비롯한 신들의 이야기 어쩌구... 잠온다. 여기나 한국이나 역사 시간이 지루한 건 똑같구나. 툭툭. 야, 건들지 마. 나 요새 피곤하다고. 집에서 내 교육을 처음부터 다시 시킨다는 집사 녀석이 얼마나 극성인지. "야, 카이. 일어나. 빨리." 린넬이 옆에서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뭐 상관없어. 나랑 문길이는 수업시간에 퍼 자도 아무도 못 건드린다구. 크득크득. 아마 내 팬픽을 뺏아 간 그 선생. 보름 동안씩이나 불면증에 시달렸다지? "흠. 흠. 브리타뉴 군." "음냐... 왜 그러세...요.. 쿠울..." "자네가 기억을 잃은 후에는 좀더 성실해 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구먼?" 그래? 이건 나랑 똑같은 면이 있군. 다행이다. 그럼 더 자도 상관없겠지, "하지만 조는 것도 정도껏 해야 하는 법이네. 저쪽에서 조는 모아라드 군과 시클레인 양은 그래도 책상에 얼굴을 처박고 있지는 않지 않은가?" "네. 부르셨어요. 선생님? 죄송하지만 무슨 질문인지 다시 한번 물어 주세요." 그 시클레인 양이라는 여자가 자기 이름이 나오자 잠이 번쩍 깨서 동문서답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훗. 그에 비하면 나는 이렇게 자고 있어도 주 변 상황은 확실하게 체크하고 있다고! "몽마르뜨 선생님." "케이준 군. 왜 그러나?" "저기... 지금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카이의 옆얼굴. 너무 귀엽지 않아요? 반할 것 같아요." 뭐어? 갑자기 정신이 확 깨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나는 벌떡 일어났다. 퍽. 쿠당탕. 어? 이 소리는 뭐지? "몽마르뜨 선생님! 괜찮으세요?" "에헤헥?" 어쩐지 머리에 뭔가 맞은 느낌이 들었더니... 내가 고개를 쳐들자 책상 사이에 엉망으로 넘어진 몽마르뜨 선생의 참혹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뜻밖의 사고에 반 애들이 우르르 내 쪽으로 달려왔다. "카이엔. 머리 안 다쳤어?" "사람 턱에다 머리가 맞았으니 머리가 꽤 아플 텐데. 괜찮아?" 어이. 너희들. 걱정하는 핀트가 조금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냐? 몽마르뜨 선생은 혀를 깨물었는지 입술에서 피가 나오고 있는데... 하여튼 더 이상 수업은 진행 불능이었다. 몽마르뜨 선생은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고통스러워하면서 학생들의 부축을 받고 양호실로 실려갔다. 그나저나 내가 왜 갑자기 잠이 확 깨서 일어난 거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분명 책상에 업드려 자면서도 교실의 모든 상황을 귀로 체크 하지만, 정작 잠이 깨고 나면 그 상황은 전부 기억이 나지 않는 스타일이다. 흠... 그 때문에 난 항상 이렇게 항변하곤 했다. 분명 자면서도 수업 은 다 들었다고. 하지만 성적이 별로 안 좋았음은 물론이다. "오옷. 역시 기억을 잃었어도 카이엔은 카이엔인걸? 착하고 예의바른 척 하면서 결국은 한 방 먹였구나!" "쌈박한 모습도 멋져어∼♡" 근데 선생 때려눕혔다고 나중에 교무실 같은데 불려가서 혼나는 건 아니겠지? 에이 몰라! 어차피 지금 상황을 보니까 어차피 모든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걸. 게다가 집사가 말해 준 바에 의하면 나는 이 나라에서도 둘째가면 서러워할 집안의 차남이라구! 근데 장남, 그러니까 나의 형이란 녀석은 누구지? 제3화 : 가족상봉(家族相逢) 다사다난했던 수업이 끝나고 마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아무래도 마차는 자동차에 비해서 상당히 승차감이 안 좋다. 중형차까지의 안락함은 아니겠지만 암만 타도 초등학생용 두발자전거보다 조금 나 을까 말까 한 승차감이다. 그래도 집까지의 거리가 멀진 않아서 참을만하긴 하다. 집에 돌아올 때쯤 집 마당에는 뽀대나는 갑옷을 입은 누군가가 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엄마 아빠. 정확하게 말해서 새엄마, 새아 빠가 오랜만에 본 손님을 맞이하듯 반가운 얼굴로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탄 마차도 그쪽으로 다가갔다. 마차 밖으로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카이엔은 어디있습니까? 동생이 깨어났다는 말을 듣고 천리길을 밤새 달려왔습니다." "저기 저 마차에 타고 있단다. 사이엔." 사이엔? 내 이름이랑 어째 비슷해보이는게 돌림자인가? 게다가 동생? 허거걱! 그렇다면 설마! "사랑하는 동생아! 형이 왔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말에서 내린 사이엔은 어느 새 정지한 마차 앞까지 다가와 내 얼굴을 마주보고 섰다. 한눈에 본 내 형이란 작자는 한마 디로 말해서... 엄청난 미청년이었다. 다소 어리고 중성적인 티가 나는 미소년인 내 모습과는 달리 진짜 준수한 왕자님이 무엇인가를 한눈에 표본 으로 보여주는 듯한 자태였다. 참고로 말하지만 우리 아빠는 검은 콧수염이 너무 잘 어울리는 나이스 미중년이고 우리 엄마는 암만 봐도 기혼이라는 것조차 사기로 느껴질 정 도의 누님 얼굴이다. 피는 유전된다지만 이건 너무 비정상적이야! 이 집안, 내력이 심히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네가 쓰러졌다길래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하지만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보여줘서 다행이구나!" 사이엔은 나를 한번 덥썩 껴안고는 내 어깨를 잡고 가까이서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어째 내 얼굴을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아 보 이는 것은 눈의 착각일까나? 그러고 보니 두 손으로 어깨를 잡고 있는데다 체구 차이도 있으니 어째 자세도 묘해 보이는... 안돼지. 안돼. 설마 형이 동생에게 그런 감정을 품으랴. 하도 학교에서 여학생들 뿐만 아니라 남학생들한테까지 묘한 시선을 많이 받은 터라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모양이었다. "당신이... 제 형이에요?" 허억. 내가 한 마디 던지자 사이엔, 그러니까 내 형의 표정이 갑자기 확 편했다. 그러면서 마치 세상을 다 잃은 듯한 절망적인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안았다. "아아! 기억을 잃었다고 하더니 정말이었구나! 같은 핏줄의 형도 알아보지 못하니 이게 무슨 비극이란 말인가." 한 가지는 알았다. 내 형이라는 녀석은 엄청나게 오버를 잘하는 오버맨이었다. 하지만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뒤에 이어진 형의 한마디였다. "이제는 대체 누가 재수없는 말 좀 하지 말라며 날 걷어차준단 말인가! 인생의 크나큰 낙이 사라졌구나!" "....." 아무래도 저 녀석, 생각보다 더 위험한 녀석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으니 형이 날 갑자기 내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헉! 뭐지? 저 눈빛, 왠지 무서워! 형은 내 쪽으로 다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조금 겁먹은 표정으로 형을 바라보며 마차 안에 앉아 있었다. 형이 갑자기 다시 두 손으로 내 어 깨를 꽉 잡았다. 아... 아파! "평소에 보기 힘든 가련한 표정이구나... 불쌍하다 내 동생이여. 하지만 미안하다. 날 용서해라 카이엔. 이것은 비극이기도 하지만 또한 기회이기 도 한 법! 오늘 밤에는 기필코 너를 내 품에..." 딱! "에끼 이놈아! 아직도 그런 소리 하고 망발이냐! 맨날 그딴 소리 했다가 맨날 카이엔한테 그렇게 얻어맞았잖아!" 아버지가 어느 새 형의 뒤에 와서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말했다.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형이 하는 말, 장난인 건지 진담인 건지 도통 구별 할 수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어차피 이 세상에 카이엔의 미모에 어울릴 만한 여성은 눈 씻고 찾아봐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고요! 최소한 나 정도 아름다움 을 지닌 자가 아니면 카이엔의 반려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여자가 있을 리..." "날 빼놓고 그런 소릴 하다니 섭섭한걸. 사이엔 오빠?" 얼레, 이건 또 누구다냐?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니 나보다 조금 키가 작은 여자아이가 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과... 표정 이...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다! 작달막한 키에 한 손가락으로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워 보이는 몸. 더없이 부드러워 보이는 연황색 피부에 동글동 글하게 커다란 눈. 한마디로 새끼 고양이 같아 보이는 것이 정말로 귀여운 아이였다. 이런 아이들을 뭐라고 하더라... 로리? 젠장. 내 어휘력은 고작 이정도가 전부인 거냐. 아무래도 암흑의 세계에 너무 오래 빠져 살았어. "카이엔 오빠에 어울리는 사람은 바로 나야! 그러니까 카이엔 오빤 내 꺼야!" 허억! 또 이건 무슨 말이다냐? 그렇다면 저 애는 내 여동생이라는 이야기인데. 지금까지 어디에 처박혀 있다가 이제 나와서... 아냐아냐. 지금 상 황이 내 형제자매들끼리... 날 두고 쟁탈전을 벌이는 건가? 이거 정말 막나가는데? [사랑이 넘치는 세계. 그것도 금지된 사랑이 잔뜩.] 문득 생각이 났다. 문길이가 무슨 세계로 가고 싶냐고 물었을때, 나는 저렇게 대답했었다. 이 상황은 설마... 정말로 내가 말했던 그대로 이루어진 건가? 반쯤은 장난삼아 했던 말이었는데? 나머지 반은 그럼 장난이 아니냐고 말하면 나는 할 말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저 말이 진짜로 이루 어졌단 말야? "오호라. 아직 꼬맹이 주제에 카이엔에게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이렌?" 흠. 내 여동생의 이름은 아이렌이군. "흥! 아직 어려도 몇 년만 있으면 금세 세상이 놀랄 만한 예쁜 아가씨가 된다구! 그때가 되면 사이엔 오빠따윈 명함도 못 내민다구! 게다가 사이 엔 오빤 남자라는 치명적인 핸디캡을 결코 극복할 수 없을 거야!" 흠... 아이렌의 말은 내게 엄청난 설득력이 있게 느껴졌다. 저렇게 귀여운 아이가 조금만 자라면... 분명 초절정 미소녀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여자가 될 것이 확실했다. 나이가 40대인 엄마의 미모가 저러한데 어찌 그 핏줄을 잇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사이엔 형도 이대로 물러설 위인은 아니었다. "무슨 소리냐! 진정한 사랑이란 국경도 가족도 성별도 무의미한 것. 그 정도 시련쯤이야 극복하지 않으면 진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지!" 그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또 누군가가 소리쳤다. "무슨 이야기야? 아이렌은 앞으로 커서 내 아내가 될 거라고!" 이번엔 남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남자아이기는 하지만 집안의 내력이 그렇듯이 아이렌과 비교해서도 결코 뒤지지 않을만큼 귀엽고 천진난만한 아 이였다. "레이엔!" "아이렌. 너랑 나랑은 한날 한시에 태어난 쌍둥이잖아. 너랑 나랑은 운명적으로 맺어진 거야. 얼마 전에 여보라고 불러 주기도 했잖아." 오옷. 이번에는 쟁취 대상이 내가 아니군. 다행이다. 근데 왜 실망스러운 기분이 동시에 드는 거지? 그리고 생각해보니 별로 다행스러운 일도 아 니잖아! 저 두 애는 이란성 쌍둥이라는 이야긴데! 하여튼 정말 대단한 집안이 아닐 수 없다. "레이엔, 너 돌대가리 아냐? 그거 소꿉놀이잖아?" "엄마가 그랬어. 우리같은 고귀한 귀족은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어휴. 어떻게 놀이와 현실도 구분을 못하니?" 어래? 쟤네들끼리 티격태격거리네? 음음. 역시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야. 어쨌건 레이엔 덕택에 아이렌에 대한 걱정은 조금 덜 수 있을 것 같 아 다행이다. "자, 내 사랑스런 동생 카이엔아. 저런 유치한 어린애들은 남겨 두고 나와 함께 가자꾸나!" 이제 저 형이라는 작자만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 그 걱정은 아빠가 어느 정도 해결해 줄 듯 했다. "떽! 사이엔! 네 나이가 몇인데 언제 정신차릴래! 너한테 시집가려고 줄을 선 여자만 몇 명인데... 언제까지 동생만 쫓아다닐 테냐!" "아버지. 그 여자들 중에 카이엔의 미모의 반 정도만 따라오는 처자가 있어도 전 당장 결혼하겠다고 분명히 전에 말했습니다." 어째 중구난방으로 시끄러워졌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인생은 정숙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 삶이 될 것 같았다. "자, 카이. 슬슬 저녁밥이 준비됐을테니 먹으러 가자꾸나." 왁자지껄한 가운데서도 신기하게 카리스마적인 누님의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던 엄마가 빙긋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그리고 내 마음에 가장 드는 말이기도 했다. "네. 가요." "앗, 나도 밥 먹을래! 밥!" "카이엔 오빠랑 같이 밥 먹을거야!" "나도 아이렌이랑 같이 밥 먹을래!" "카이엔, 아직 몸이 성치 않을테니 이 형이 밥을 손수 먹여주마." 이 떨거지들은 좀 그만 따라붙으면 안되나. 아무리 잘생긴 선남선녀라고 해도 자꾸 추근덕거리면 귀찮다고! 아무래도 조용히 밥 먹기는 틀린 듯 하다. 어쩌면 밤에 몰래 쳐들어와서 귀찮게 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밤에 잠잘 때는 방문 단속을 잘 해야겠군. 이래저래 시끌벅적한 저녁식사를 먹은 후 나는 다시 집사와 함께 기억상실에 의한 기초지식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서 두시간 가량의 수업에 들어 갔다. 으하암... 이래저래 시달려서 그런지 엄청 피곤하다. "오늘 어떠셨습니까? "어휴. 말도 마.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왜 이렇게 피곤한지... 근데 차남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다들 어디 있길래 오늘 처음 보는 거지?" 처음에는 멋모르고 아무에게나 존대말을 썼는데 하인같이 지체낮은 사람에게는 반말을 쓰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반말을 썼다. 처음에는 어색했는 데 며칠이 지나자 꽤 익숙해졌다. 이런 것이 너무나 당연시되는 세계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수 밖에요. 사이엔 도련님은 남쪽에서 중요한 요새를 수비하시는 장군이시고, 레이엔님 도련님과 아이렌 아가씨는 요즘 친척 집에 계셨으 니까요. 세이렌 아가씨께서는 최근 궁중에 계셨지만 그분도 소식을 들었을 테니 곧 오실겁니다." "그 분은...?" "카이엔 도련님의 누님 되시는 분이지요." 또 있냐? 나는 다소의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며 집사에게 물었다. "혹시 누난 미혼..." "네. 미혼이십니다. 그리고 짐작하셨듯이 카이엔 님이라면 귀여워 하다 못해 아예 매일같이 인형처럼 품에 넣고 귀여워하시는 분이시죠. 기억을 잃기 전의 카이엔 님도 그분만큼은 차마 거칠게 대하지 못했습니다." "....."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그래도 그 누나도 100%확신하건데 절세미녀일게 뻔했다. 음. 그런 누님의 품에 안긴다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닐지도 모르 겠다. "근데... 그 카이엔... 아니 내가 그렇게 성격이 나빴나?" "실례의 말씀이지만, 저는 카이엔 도련님께서 기억을 잃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워낙 주변 분들이 극성으로 카이엔 님에게 관심을 쏟으셔서... 에... 이런 말씀드리기는 송구스럽지만 다소... 비뚤어져 있었다고나 해야 할까요." "이해가 갈 만하군." 남의 사정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저토록 맹목적으로 사랑과 애정을 퍼붓는 사람들만이 주변에 가득하다면 사람이 반쯤은 미치거나 비뚤어지지 않고 성장할 수는 없겠지. 어쩐지 수긍이 갈 만한 이야기였다. "죄송합니다. 혹시라도 기억이 돌아오시면 이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아. 아. 괜찮아. 난 기억을 되찾고 싶은 마음 따윈 추호도 없으니까." 미쳤냐? 원래 카이엔의 기억, 즉 인격이 돌아오면 난 어떻게 되는 건데? 원래 내가 있었던 학교로 돌아간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잖아? 내 인격 이 소멸될 수도 있겠고 어쩌면 그 카이엔의 인격과 내 인격이 공존할 수도 있겠지. 아니면 서로 융합되어 새로운 인격이 창조될 지도... 어느 쪽 이건 다 싫다. 나는 나로서 존재해야 진짜 내 가치가 있는 법이라고! 제4화 : 누나 오다. 내 이름은 김상우. 대한민국의 건강하고 팔팔한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이다. 좋아하는 것은 [잘생긴 오빠]들이고 취미는 [남자]연예인 화보집 및 사진 긁어모으기와 팬픽 쓰기다. 요즘 세상에서 그렇게 특이한 취향은 아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내가 정상적인 인간으로 비춰지기에는 내 성별이 결정적인 문제점으로 작용했다. 사회의 소수자는 슬프다. 사람들에게 괄시받고 천대받으며 꿋꿋이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언더그라운드 사회의 마이너리티들. 그 중의 하나가 바 로 나였다. 혹자는 왕따라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우는데 결코 오해는 하지마라. 게다가 난 의외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단 말이다! 정정한다. 사실은 내 자신이 아니고 내가 쓴 팬픽이 인기가 많았다. 쳇쳇. 하여간 이 몸은 동병상련인 처지의 친구를 찾다가 그 친구를 잘못 사귀는 바람에 알지도 못하는 이상한 세계로 떨어져 버렸다. 거기에서 나는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고 사귀고 싶어하는 절세의 미소년 카이엔 브리타뉴. 화제의 인물답게 매일같이 떠들썩한 생활이다. "오늘 세이렌 아가씨께서 집에 오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저... 저기 집사. 나 누나 안 보면 안될까? 왠지 겁나..." 처음에는 누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지만 요사이 계속 사이엔 형과 레이엔, 아이렌 두 쌍둥이 동생들에게 시달린 나머지 이제 나랑 관련된 뉴 페이스가 등장하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부담스럽게 작용했다. 동생들이야 그렇다 치고 사이엔 형은 중요한 요새를 수비하는 장군이라 면서 거기 비워 둬도 좋은 거냐! "카이엔 도련님. 그렇게 된다면 세이렌 아가씨는 무척 화내실 겁니다. 만약 그 분이 화를 내시기라도 하면..." "하면?" "왕국이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뭐어어?" "실은 세이렌 브리타뉴 아가씨께서는 대륙 7대 마법사의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계신 천재 마법사이십니다. 평소에는 온화하고 상냥하시지 만 한번 화를 내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시는 분인지라... 일전에 카이엔 도련님과 여행을 갔다가 울창한 나무에 찔려 얼굴에 상처를 입으셨을 때는 그 산을 통째로 날린 적도 있으신 분입니다." "에엑!?" 그... 그렇게 말하니까 더 무섭잖아! 지금까지는 동생을 인형처럼 귀여워하며 아끼는 순정틱한 누나로 생각하는데 갑자기 그 이미지가 시커먼 가 죽옷을 입고 채찍을 든 섹시한 여인상으로 바뀌어 버렸다. ...왜 이런 것만 생각나지? 으드득... 이건 모두 문길이 그 변태자식 때문이야! 뭐 남자의 순수한 욕망은 아름답느니 어쩌니 하면서 이상한 책들이 랑 시디를 건네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젠장. 나도 우여곡절 끝에 결국 다 보긴 했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도 남자랍시고 느끼는 호기 심은 어쩔 수 없었다구! 그런 건 전혀 내 취향이 아니었어! 내가 좋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잘 생기고 멋있는 오빠들이라고! 어쨌건 처음 보는 누나가 그런 쪽의 미녀가 아니라 처음에 상상한 만큼 귀여운 누님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몸을 정갈히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물론 내 몸을 씻겨주는 사람도, 입혀주는 사람도 따로 있었다. 원래는 집안의 하녀가 하는 일은데 하녀들은 내 몸을 만지거나 속살을 봤다는 이 유만으로 코피가 터지거나 졸도하는 경우가 다반사라서 어쩔 수 없이 조금 서툴긴 하지만 하인들이 맡는다. 하지만 하인들도 가끔씩 날 이상한 시선으로 슬쩍 날 훔쳐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마치 중년 아저씨들의 음흉한 시선을 느껴야 하는 여고생의 심정이랄까.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혼자 있을 때가 아니면 어디서든지 그런 시선이 느껴진다. 할 수 없다. 이것은 미소년으로 다시 태어난 숙명적인 대가로 받아들이는 수 밖에. 누나가 거의 다 와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가족들과 함께 누나를 마중하러 나갔다. 아빠와 엄마는 고대되는 표정으로 누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사이엔 형이나 아이렌은 내심 경계하는 눈초리가 역력했다. "것 참. 누나도 궁정 일이 바쁜데 뭐하러 이곳까지 오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사이엔 형이 투덜거렸다. 사돈 남말 하고 있는 거 아냐, 형? "맞아맞아. 카이엔 오빠 외의 딴 사람들에겐 자꾸 히스테리만 부리는 노처녀 아줌마 주제에 말야." 당사자가 듣지 않는다고 두 사람은 험한 말을 거리낌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라이벌이라면서 이럴 때는 또 서로 동지다. 그만큼 세이렌 누나가 그 들에게 강력한 적수라는 뜻일까? 하긴 나도 이런 걸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있을 제3자가 될 만한 입장은 아니로군. 내 형제들이 쟁취하고자 하는 보상은 바로 나니까 말이야. "어머나, 그 말 과연 누구에게 하는 걸까나?" 부드러우면서도 소름이 돋힐 만큼 가시가 섞인 목소리가 허공속에서 들려왔다. 나는 처음 듣는지라 아무것도 없는 허공 속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어안이 벙벙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이렌은 잽싸게 엄마 뒤로 숨었고 사이엔 형은 겉으로는 애써 태연해하고 있었지만 허리에 찬 검 손잡이를 자꾸 쓸데없이 만지작거리는 게 초조함을 숨길 수 없는 듯했다. 그리고 세이렌 누나는 나랑 한 삼십센치도 떨어지지 않은 코앞에서 불쑥 나타났다. 우와아앗! 나는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가 무게중심이 뒤 로 향했다. 하지만 세이렌 누나는 아주 자연스럽고 우아한 동작으로 뒤로 넘어지려는 나를 한 손으로 떠받쳤다. 이건 어째 고귀한 귀족 청년이 돌에 걸려 넘어지려는 청순한 처녀를 잡아 받쳐주는 듯한 동작... "카이, 괜찮니?" "아, 네." 가까이서 본 누나의 인상은 처음에 생각했던 순정파 여인도, 엉터리로 생각했던 섹시한 여인도 아니었다. 내가 누나에게서 받은 인상은 강하고 당당하게 거친 세상을 헤쳐나가는 커리어 우먼 같은 이미지였다. 자신에 차 있으면서도 남을 리드하는 부드러운 웃음을 은근슬쩍 흘리는 누나의 모습을 단순히 미녀니 미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모욕에 가까운 언사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우리 귀여운 카이. 불쌍하게도 기억을 잃다니. 하지만 걱정하지 마렴. 이 누나가 너에게 접근하는 모든 악마의 손길을 막아 줄께." "아, 네." "저런저런.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지만 남을 보듯이 이 누날 대하면 안돼. 자, 따라해봐. 세이 누나∼" "세... 세이 누나아..." "안돼. 안돼. 좀더 귀엽고 앙큼한 목소리로 말해보란 말야. 세이 누나앙∼" "세... 세이 누나앙∼" 하지만 아직도 익숙하지 않아서 어색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자 세이렌 누나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뒤에서 다급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이엔! 빨리 누나가 원하는 대로 해 주거라! 그렇지 않으면 집이 날아갈 수도 있다고!" 집아 날아가? 아, 맞아. 누나는 대륙 7대 마법사에 들어가는 엄청난 천재 마법사로 왕국을 날릴 수도 있다고 했지! 나는 다급하게 내가 낼 수 있 는 모든 닭살과 애교를 섞어서 말했다. 내 평생의 연기력을 쏟아붓는 듯한 노력이었다. "세이 누나아∼ 아이. 왜그래. 내가 미안했쩌어∼ 그러니까 이제 뚝! 화 풀어. 응?" 우욱. 내가 말해도 견디기 힘든 엄청난 닭살이야. 저 뒤에서 관전하고 있는 우리 가족들이랑 하인 하녀들도 거의 넘어가려고 한다. 태반은 황홀 감에 넘어가는거 같긴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엄마만은 여전히 평상시 표정을 유지하고 계셨다. "그럼 내가 원하는 소원 들어줄꺼야?"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다 들어줄께. 응? 말해봐. 무슨 소원인데?" 나같은 놈이 연기자의 자질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오늘 처음 깨달았다. 역시 사람은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법이구나. "그럼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키스해줘!" "에엑!?" "안돼? 안돼?" 이제 깨달았다. 누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우아하고 카리스마있는 여걸일지는 몰라도 내 앞에서는 완전히 어린애였다. 뭐... 나도 남자니까 싫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긴 그래도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저... 누나, 그냥 볼에 뽀뽀만 하면 안될까?" 그러자 누나의 표정이 다시 아까처럼 울음보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 아냐. 누나. 내가 잘못했어. 키스해줄께! 응!?" 난 필사적으로 울 것 같은 누나를 달랬다. 이건 완전히 시한 폭탄이잖아. 집이나 산, 하다못해 왕국마저 날릴 수 있는 위인이라니. 그리고 그 폭 탄을 동작시키고 끌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단 한명. 나뿐이었다. "정말?" "그럼. 그럼. 누구 소원인데 못들어주겠어?" "응! 그럼 카이 이리와∼ 이 누나는 기본이 롱 키스인거 알지이? 오늘은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프렌치 키스 하는 거다아!" 뭐어어엇! 누... 누나,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여자랑 뽀뽀 한번 해본 적 없는 나에게 이건 좀 충격이 크다고! 하지만 뒤에 관전석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이 더 컸던 모양이다. 특히 아빠와 사이엔 오빠, 그리고 아이렌에게는. 레이엔은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듯이 호기심어린 표정이었고 엄마는 여전히 계속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안돼애!" 땅에 철푸덕 주저앉는 아이렌의 절규와 함께 누나는 날 꼭 껴안으면서 내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누나와 내 얼굴은 차츰차츰 가까워졌다. 어... 어쩌지? 내 가슴은 콩닥콩닥 뛰다 못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내가 볼 순 없지만 내 얼굴은 홍시처럼 새빨갛게 익었을 것이다. 이대로 피해 버린다면 이번에야말도 누나 진짜 화나겠지... 할 수 없다. 딥 키스고 프렌치 키스고 상관없으니 지금은 어절 수 없이 내 퍼스트 키 스에 대한 운명을 받아들일 수 밖에... 휘익! 헉! 뭐야!? 갑자기 내 앞으로 뭔가 지나간 것 같은데!? 정확하게 말해서 누나와 내 얼굴 사이였다. 좌우를 돌아보니 왼쪽으로는 사이엔 형이 아 주아주 화가 난 모습으로 서 있었고 오른쪽에는 검이 땅에 박혀 있었다. 헤엑! 그럼 누나와 내 얼굴 사이를 지나간 게 칼이었단 말야!? 하지만 누나의 표정은 화가 잔뜩 난 사이엔 형보다 더 무서웠다.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면서 극한까지 타오른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모습 이 눈에 확연히 보였다. "사...이...엔... 니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하지만 사이엔 형도 결심하긴 단단히 결심하고 검을 던진 듯 기세에서는 좀 밀리긴 해도 주눅이 들지는 않았다. "세이렌 누님... 더 이상 아름다운 카이의 얼굴에 마녀의 낙인을 찍는 것은 이 사이엔 브리타뉴의 이름을 걸고 허용하지 않을 겁니다!" 사이엔 형은 허리에서 검을 뽑으면서 소리치려고 하다가 아까 검을 뽑아 던진 것을 깨닫고는 팔을 쭉 뻗으면서 손가락으로 세이렌 누날 가리키A8★ 면서 외쳤다. "이젠 돌이킬 수 없게 되었군." 아빠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 뒤로는 언제나처럼 얼굴에 미소를 띤 어머니가 다가와서는 말했다. ZZZZZZZZZZZZZAAASSSSSSSA "그래도 집을 부수면 안돼요. 세이렌. 싸울려면 이공간에서 싸워요." "알...았어...요. 텔레포트!" 세이렌 누나가 외치자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은 언제 그 자리에 있었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후우. 일단 또 소동은 진정되었군. 그래도 세 이렌 누나는 대륙 7대 마법사라던데, 사이엔 형은 괜찮을까? 궁금해진 나는 물었다. "사이엔 형은 괜찮을까요?" "걱정 마라. 사이엔 녀석도 대륙에서 7명밖에 없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다. 별 탈은 없을거다." 아빠가 걱정말라는 투의 가벼운 미소를 던지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런 일. 꽤 흔하게 있는가 보지? 그나저나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고? 그거 엄청 굉장한 거 같은데? "하지만 사이 형. 칼 안 갖고 갔는데?" 레이엔이 우리 모두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레이엔이 가리킨 쪽에는 아까 사이엔 형이 던진 검이 그대로 바닥에 꽃혀 있었다. 멀 리서 봐도 삐까번쩍한 것이 틀림없이 엄청난 위력을 지닌 명검이라는 티가 팍팍 나 보였다. 그러자 아빠는 약간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바꿨다. "사이엔이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바라자구나." "....." 제5화 : 누나의 집착.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이 돌아온 것은 이공간으로 사라진 지 딱 사흘이 지나서였다. 세이렌 누난 분노가 풀릴 만큼 풀렸는지 시원스런 표정으 로 오자마자 날 꼭 껴안고 부비적거렸고 사이엔 형은 온 몸이 상처투성이에다가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일 정도로 기진맥진해 있었다. "사이엔 형. 살아 있을까?" "걱정하지 마. 카이. 아무리 저녀석이 얼굴만 반질반질한 초 극악 변태 녀석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 동생이니까 죽지 않을 만큼만 했어. 그것보다 그 동안 나 많이 보고 싶었지? 카이. 이공간에서는 반나절뿐이었지만 이곳에서는 한 사흘쯤 지났을테니까." "으... 응. 누나. 많이 보고 싶었어!" "그래. 그래. 그럼 우리 삼일 전에 하다 만 거 계속 할까?" 허거걱!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단 말야? 이번에는 아예 동의도 필요없이 날 끌어안고는 입을 맞추려고 했다. 아빠도 동생들도 삼일 전과 마찬가 지로 입을 딱 벌리고 경악하기는 했지만 쓰러진 사이엔 형의 몰골이 앞에 있는데 누가 감히 막을 수 있으랴! 하지만 거의 다 된 거나 다름없던 나와 누나의 입술의 접촉은 누나가 갑자기 뒤를 홱 돌아보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이엔 형. 생각보다 엄청나게 끈질긴 구석이 있었다. 언제 여기까지 기어왔는지 세이렌 누나의 신발 뒷굽을 붙잡고 잡아당기고 있었다. "정의의 이름으로.... 키...스는... 내가... 용서 못..." 누나는 그런 사이엔 형을 가볍게 한번 밟아 주었다. 사이엔 형도 그게 마지막 발악이었다는 듯이 정신을 잃었다. "치이. 기분 잡쳤어. 하기야 지금은 때도 안 좋을 것 같네. 저 녀석 손 좀 봐준다고 옷매무새도 많이 비뚤어졌고 화장도 엉망이 됐으니 말야. 그 럼, 내가 좀 씻고 꾸미고 나서 다시 키스하자. 알았지, 카이?" 누난 얼굴에 그을음이 좀 묻고 화장이 지워져도 여전히 매력적인걸 뭐. 하긴 내가 자다 일어나 눈꼽이 끼고 머리가 엉망으로 망가져도 다들 귀 엽다고 하더라. 역시 진정한 초 미소년 미소녀들에게는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으. 응. 알았어. 누나." 또 누나의 표정이 변하려고 했다. 나는 즉각적으로 표정과 말투를 바꿨다. "기다리고 있을께 세이 누나아∼" 이거 암만 생각해도 오누이라기보다는 연인끼리 나눔직할 대사 아냐? 에이. 모르겠다. 다음에는 또 어떻게 넘어가겠지. 그깟 키스 한두번 했다고 사람이 죽을까? 좀 있다가 집사에게 그렇게 말했더니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카이엔 도련님은 절대 키스를 하시면 안됩니다." "왜?" "그 사실이 대외적으로 알려지면 목을 매달겠다는 여학생들이 좀 많을 겁니다." "그럼 난 한번도 키스를 해보지 않았다는 거네?" "그렇죠. 뽀뽀 한 번 해본적이 없습니다. 원래 카이엔 도련님은 그런 걸 엄청나게 싫어하셨으니까요." "그럼 기억을 잃기 전에는 세이 누나의 키스 요청을 어떻게 넘겼는데?" "그 전에는 그런 요청을 안 하셨습니다. 카이엔 님이 확실히 거부하셨으니까요." "거부해도... 괜찮아?" "후우." 집사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한 가지 알아두십시오. 카이엔 도련님. 세이렌 아가씨와 도련님 사이에서 주도권을 가진 건 도련님입니다. 아무리 기억을 잃으셨다지만 그렇게 느슨하게 대하시니까 세이렌 아가씨께서 자꾸 기어오르려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사이엔 도련님도 아이렌 아가씨도 그렇고... 다들 도련님이 기 억을 잃으신 걸 기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전처럼 불량한 모습으로 돌아가라는 건 아닙니다만... 좀더 강단있고 확실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 지만 마음에 상처를 줄 만한 거친 말은 하면 안 되겠지요." "어려운 이야기네..." 집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여자를 상처주지 않고 멋지게 떠나보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아, 진짜 갈등되네. 이놈의 집안이 아무리 콩가루 집안이라고 해도 이건 좀 너무하잖아! "알았어. 좀 생각해 볼께." "그럼 내일은 학교에 꼭 나가십시오." "응." 그래, 학교에 나간지도 며칠 됐으니 좀 나가봐야겠지. 응? 그런데 학교가 며칠에 한번씩 가는 곳인가? 하도 정신이 없어서 완전히 잊고 있었네. "자... 잠깐!" "왜 그러십니까?" "학교 말이야. 며칠에 한 번씩 가는 거야?" "아!" 집사는 그제서야 뭔가 깨달은 듯이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랬군요. 카이엔 도련님은 기억을 잃으셨다고 했죠. 주신 다르군트 님이시여 감사합니다. 드디어 카이엔 도련님을 학교에 매일매일 보낼 수 있 게 되었군요!" "어. 어이." 이거 괜히 말했나. 나 학교라는 곳 평소에 별로 안 좋아했는데 말야. 학생의 개개인의 인격을 억압하고 모든 사람을 일률적인 공부기계로 만드는 주입식 교육의 문제점이 극대화되는 장소라서 말이지. ...결코 왕따라서 그런 게 아니라니깐? "왜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가족들]과 함께 집안에 있고 싶으십니까?" "아... 아니. 학교에 갈께." 잘 생각해 보니까 학교에 가는게 더 나을 거 같았다. 집안에 있어봤자 콩가루 집안에서 누나와 형, 동생들의 육탄공세(?)에 시달릴 것이 너무나 확연해 보였다. 저 상태로 보아할때 누나나 형 모두 순순히 빠른 시일 내에 직장으로 돌아갈 의지가 없어 보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새롭게 친구를 사귀고 싶었다. 어둡고 음침한 성격에다가 마이너한 취미 때문에 세상이 나를 외면했지만 설마 이번 세 상도 나를 외면하지 않겠지. 결코! 결코 문길이 녀석같은 친구가 아닌 제대로 된 친구를 좀 사귀어 보고 싶다. 특히 나의 걸출한 미모 때문에 가 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다가오기 때문에 조건은 훨씬 좋잖아? 후후. 왠지 나, 자의식 과잉이 되어 가는 거 같네? 이렇게 만인의 관심을 받고 빼어난 외모를 가지게 되니까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찾을래야 찾 을 수 없었던 자신감이라는 게 비아그라 먹고 발기하듯 팍팍 솟아오른다. 아, 비유가 조금 이상하군. 하여간 이전보다는 좀더 적극적인 성격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자 가자! 김상우... 아니 카이엔 브리타뉴 화이팅이다! "카이야∼ 어딨어어? 누나랑 같이 목욕하자아∼" 히에엑! 누나의 목소리다. 여자가 씻고 화장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아, 하긴 누나는 초 천재 마법사니까 그런것도 마법으로 하면 순식간이겠군. 그런데 뭐라고? 이번엔 키스가 아니라 모... 목욕? 뜨어어억!? 내가 안절부절하고 있자 집사가 슬쩍 나를 방 안으로 밀어넣으면서 말했다. "여기 숨어 계십시오. 세이렌 아가씨는 제가 어떻게 잘 따돌리겠습니다. 물론 그분이 추적마법 같은 걸 쓰신다면 별 소용이 없겠지만... 소중한 동 생에게 함부로 그런 짓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 알았어." 나는 재빨리 방 안으로 숨어들어갔다. 바깥 복도에서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이 어디 갔어? 아까까지 집사랑 같이 얘기하고 있었는데?" "다치신 사이엔 도련님께서 걱정된다며 병문안을 가셨습니다." "어머, 병문안도 가고 내가 없는 사이에 많이 기특해지... 가 아니라 사이엔 그 자식 어디에 누워 있어! 동생이라고 봐줘서 반만 죽여놨는데 이번 엔 진짜 죽여버릴 테다! 그토록 카이에게 접근하지 말랬는데...!" 잔뜩 격앙된 목소리가 벽을 사이에 둔 여기까지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나에 관한 일이라면 뭐든지 발끈하는 누나는 역시 무서워어. 근데 집사 도 꽤 사악한 걸. 모든 잘못을 사이엔 형에게 돌려버리다니. "그래? 자기 방에 있다고? 어디 보자. 텔레포트!" 성질도 급하다.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텔레포트로 공간이동을 해 버리다니. 어쨌건 나는 사이엔 형이 큰 탈을 입지 않기를 바라면서 조용히 방문 을 열고 내 방으로 돌아갔다. 좀 귀찮게 구는 형이긴 해도 내가 한국에서 알았던 어떤 남자 연예인보다도 훨씬 멋진 귀공자 미청년인걸! 그래도 나중에 문득 생각해보니 조금 걱정되기는 해도 누나랑 키스해보거나 같이 목욕하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누나라고는 하지만 내 원래 정신은 대한민국 고딩생 김상우니까 별로 죄책감이 드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엄청난 미인이 아닌가. 게다가 나는 자의는 아니 지만 금단의 사랑을 원해서 이곳에 왔잖아. 하여간 내 취미가 남성스러움과는 좀 거리가 멀긴 해도 근본은 남자라서 그런지 별별 잡스런 생각이 다 든다. 에구. 에구. 그래도 정신차려야지. 남정네들 사이에서 별로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라고 해도 그동안 지켜온 동정을 단숨에 내팽겨칠 순 없잖아? 물론 문길이는 그런 나의 의견을 헌신짝처럼 무시해버렸지만. 그녀석은 과연 소원대로 여자가 됐을까? 만약에 여자가 됐다면 만족하고 있을까? 아니면 후회하고 있을까? 제6화 : 수학은 어려워. 학교에 갔다. 언제나처럼 내가 학교에 모습을 보이자마자 소문과 억측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금세 전교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우왓! 카이엔 브리타뉴가 나흘만에 학교에 왔어!" "그동안의 최고기록 5일을 경신했어! 어떻게 된 거지?" "꺄아∼ 좀더 그분의 용안을 자주 보게 되어 너무 기뻐♡" 이놈의 학교는 어떻게 된 건지 출석체크 같은 것도 안 하냐? 궁금해서 옆자리의 린넬에게 물었더니 아주 단순한 대답이 돌아왔다. "출석은 상관없어. 시험만 잘 치면 돼." "그럼 학교는 왜 오는 건데?" "흠흠. 뭐 이런 말하기는 그렇지만 우리 학교 같은 곳은... 배움의 장이라기보다는 사교의 장이지. 하여튼 교사들도 성적만 잘 나오면 크게 문제삼 지는 않아." "근데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시험을 잘 쳤어? 공불 잘 했어?" "시험날에 안 나왔어. 이정도면 대답이 됐을까?" ...카이엔 브리타뉴라는 이 자식. 알면 알수록 사이코같은 놈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랑 문길이는 시험때는 확실하게 출석해서 시험을 쳤 다고. 물론 시험 때만 되면 일찍 마치는 것을 빌미로 평소보다 훨씬 놀아제꼈지만 말야. "그럼 유급되지 않아?" "원래 유급되야 하지만 유급 안 됐어." "왜?" "높은 학년 애들을 가르치는 교사일수록 힘이 더 쎄거든. 그래서 너네 집으로 특별교사를 보내 추가시험을 치게 해서 어떻게든 진급처리됐어." 헉. 학교 선생들마저 날 대상으로 쟁탈전을 벌인다는 건가? 저번에 수업시간에 들어왔을 때는 그렇게 안 봤는데. 뭐 하긴 학교에 온 적이 딱 한 번 있으니 그걸 알 리가 없지. 내가 그때 제대로 본 선생은 그 몽마르뜨라는 역사 교사와... "모두들 왔나, 빨리 자리에 앉게." 방금 교실로 들어온 담임 선생인 사브르 리쥐앵 선생님이다. 담당 과목은 수학이라고 한다. 아아악! 수학하니까 옛날의 악몽이 자꾸 떠오르는구 나. 내가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2년까지 학교를 다니는 동안 치욕스런 역사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문제를 다 풀고도 0점을 받은 과목이 딱 하 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수학이었다. 단순히 0점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중요한 문제는 100점 중 80점은 사지선다형 객관식 문제였는데다가 나도 진심으로 노력해서 끙끙대면서 풀었 다는 점이었다. 이 일 때문에 한동안 바보라는 소리 엄청 듣고 한때 성적부진아를 위한 특별 교습에 억지로 참여해야 했던 슬픈 과거가 있었다. 수학은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잘 하면 되는 거지 더 이상 뭐가 필요하냐구! "그럼 지금부터 출석을 부르겠다. 카이엔 브리타뉴 군 왔나?" 온 거 알면서 빤히 내 얼굴 보면서 묻는다. 선생인데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냥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네. 왔습니다." "음, 기억을 잃었다더니 많이 사람다워졌군. 기억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이전에 성격만 좀 고치면 정말 멋진 사람이 될 거라고 충고해 준 적이 있 었지. 담임선생으로서 아주 기쁘다." 담임 선생의 말은 딱딱했지만 얼굴은 더할 나위 없는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문득 모든 사람들이 내가 기억을 잃은 것을 기회로 삼고 있다던 집 사의 말이 아주 절실하게 다가왔다. '이래서야 처음 목표한 대로 제대로 친구들을 사귈 수 있을까?' 이런 의구심이 머릿속을 내내 맴돌았다. 수업도 도통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하기야 내가 언제부터 수학 수업을 제대로 들었다고 이런 말을 하 는 건지. 영원토록 수학 따위는 공부하고 싶지 않아라∼ "카이엔 군. 나와서 이 문제 좀 풀어 보겠나?" 이봐요! 담임 선생! 아무리 나한테 관심이 있다는 건 잘 알지만 딴 사람도 많은데 왜 하필 나한테 문제를 풀게 하냐구? 차라리 영어라면 그나마 수학보다는 잘 한다구! ...근데 이 세계에는 미국도 영국도 호주도 없으니까 영어같은 건 쓸 필요가 없겠군. 치잇. 게다가 나는 초급 수준이긴 하지만 일본어도 할 줄 알 았는데 다 쓸모가 없어졌잖아 우어어어! 이 동네는 언어가 달라서 일이삼사 숫자 기호나 플러스 마이너스 같은 계산 부호도 한국이랑 다 틀리다. 하지만 그걸 술술 읽는 나의 천부적인 재능도 역시 대단하다는 것에 감탄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문제는 풀 수 없었다! 삼각형이 하나 주어져 있고 두 변의 길이와 그 사잇각이 주어져 있는데 나머지 한 변의 길이를 구하라. 대충 그런 문제인데. "제2코사인 법칙을 활용하면 쉽게 구할 수 있는 문제네." ...그게 뭐지? 수업 시간에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나마 이해가 좀 갔던 중학 수학을 암울하게 만들었던 게 사인 코사인 탄젠트 나오고나서부 터였는데 이제는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한다. "카이엔 군. 못 풀겠나?" "카이 화이팅!" "괜찮아! 못풀어도 내가 대신 풀어줄께! "담에 내가 과외도 해줄께!" 어이. 너희들. 지금 그거 격려라고 하는 거냐? 마치 내가 못푼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잖아? 원래 카이엔 녀석도 공부에는 별로 소질이 없었던 모양이긴 하지만. 하여튼 이런 말까지 들으면 사람이 오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나는 손에 분필을 꾹 쥐고(그러다 하나 부숴먹고 딴거 들었다.) 칠 판에 써진 문제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내가 수학 문제에 이토록 열중한 적은 초등학교 때 중학교 문제 하나 풀면 HOT공연 티켓 사준다고 했 던 이후 처음이었다. 물론 그때는 결국 티켓 확보는 실패하고 말았지만... 하지만 역시 수학 문제는 눈싸움 잘 한다고 풀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결국 교과서를 꺼내서 제2코사인 법칙이라는 놈의 공식을 다시 한번 들추 어 보았다. 호오. 젠장! 공식만 알면 풀 수 있는 예제 수준의 문제였잖아!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다시 분필을 들어 공식에 삼각형의 숫자들을 대입해나갔다. 아무리 수학을 못하는 나지만 제곱도 알고 루트도 안다. 하지만 공식의 마지막에서 나는 더 커다란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코사인 45도가 정확하게 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교과서를 뒤져봐도 선행학습 내용인지 이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지금까지 교과서를 뒤 진 것만 해도 쪽팔리는 일인데 더 쪽팔리는 일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코사인 45도가 몇이죠?" "2분의 루트 2라네 카이엔 군." 으으...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다. 내가 고2지만 고2의 학력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을 멀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문제 잡고 있는 동안 꽤 많 은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아무도 들어가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슬쩍 선생과 급우들을 돌아보니 다들 흥미진진하게 내가 끙끙대는 모습을 즐겁 게 구경하고 있었다. 뭐야 이것들! 마지막에 씌워진 루트를 벗기는데 잠깐 헤매긴 했지만 인고의 과정끝에 결국 하나의 문제를 풀어냈다. 아아∼ 좀 창피하긴 했지만 정말 내가 자 랑스럽다! 문제를 풀고 이렇게 보람찬 느낌을 받은 적인 지금껏 처음이었다. "와우! 카이 수고했어!" "휘익∼ 중간에 안 때려치고 끝까지 푼 적은 첨이야!" 다들 축하의 메세지를 던져준다. 아아∼ 이제는 기쁨과 자랑스러움을 넘어 감동의 눈물이 철철 흘려 넘치려고 한다. 옆에서 끈질기게 내가 문제 를 푸는 것을 지켜보던 선생도 한 마디 했다. "정말 수고했네. 카이엔 군 헌데..." 뭐? 시간이 좀 오래 걸렸다고? 교과서를 본데다가 코사인45도가 뭔지 물어봤다고? 그딴건 다 상관없어. 내가 저 어려운 수학 문제를 어떻게든 풀어냈단 말이야! 중요한 점은 그거야! 급우들도 저렇게 환호하잖아? "답이 틀렸네." "....." 뜨어어억! 뭐라고? 나는 화들짝 놀라 칠판을 바라보았다. 어디지? 어디서부터지? 뭐가 틀린거지? 그럼 처음부터 다시 풀어야 한단 말이야? 오 마 이갓! 그건 악몽이라고! 이렇게 힘들게 문제를 한번 풀었으면 됐지 또 풀라는 것은 너무나도 잔혹한 행위를 강요하는 거라고! 무심결에 반 애들을 한번 바라보니 답이 틀렸다는 말에 놀라는 녀석들도 몇몇 있었다. 오오. 다행이다! 나만 이렇게 뒤떨어지는게 아니었잖아, 수 는 적지만 동지들도 확실히 있구나! 어쩐지 마음이 위안되는 느낌이 들었다. ...좋아할 일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두. 나는 필사적으로 어떻게 내가 이 어려운 문제를 다시 풀 수 있느냐는 처량한 표정을 한껏 선생 앞에서 지었다.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 만 특히 눈에 포인트를 둬서 눈물을 글썽이는 듯한 표정을 연출해냈다. "선생님, 카이엔 대신 제가 풀께요. 또 풀라니 너무 불쌍해요." "맞아요. 끝까지 다 푼 것만 해도 카이에겐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요." 반응이 오는 걸 보니까 내 표정 연기가 확실히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당장에 급우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서 나를 감싸줬다. 우헤헤. 이거 탤런트로 나가도 확실히 성공하겠는걸? 선생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야기했다. "카이엔 군. 수고했네. 이만 들어가서 앉게." "알겠습니다." 후아. 드디어 상처입은 새는 자유의 품으로 돌아가는구나. 긴장되고 초조한 시간이 끝나는 순간이다. "그럼 카이엔 군이 어디를 틀렸는지 보도록 하자. 특히 카이엔 군. 그렇다고 고개를 떨구지 말고 확실히 보게. 다음부터는 틀리지 않도록 해야 지." 부끄러워서 고개를 쳐박으려 했는데 그 의도마저도 간파당하고 말았다. 흑흑. 이 세계에서도 공부라는 날 따라붙는 끔찍한 괴물만은 떨쳐 버릴수 가 없구나. 게다가 반 정원이 한국에 비해 반의 반밖에 안되니까 선생들도 모든 학생들을 이렇게 다 챙길 수 있고. 익숙해서일까. 애초에 선생들도 학생들도 다 나한테 무관심했을 때가 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때는 정말 내 마음대로 뒷자리에서 수업시 간에 공책에 팬픽이나 슬슬 써가면서 놀았는데... 지금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할려고 해도 연예계 소식이나 동향을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니 그런 건 무의미하다. 사이엔 형이나 동생 레이엔도 왠만한 연예인들보다 훨씬 잘생겼기 때문에 그럴 의욕도 사라진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대상으로 팬픽을 쓸 수는 없잖아! 그렇게 되면 내 자신이 내 글에 안 나올 수가 없게 되 버리는데... 그런 이야기는 죽어도 쓰기 싫어! 게다가 내 팬픽은 의외로(?) 하드했다고! 제7화 : 거부할 수 없는 등교거부. "오늘부터는 학교 안 갈래." "지... 지금 무슨 말 하셨습니까? 어제부터 매일매일 학교에 가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안 간다면 안 가!" 어제는 정말 망신살이 뻗친 날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그런 모습도 좋아하고 환호할지 몰라도 난 정말 길지 않은 인생 동안 최대로 쪽팔렸 었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 매일매일 가지 않기로 마음먹고 그 결심을 집사에게 알렸다. 역시 학교라는 것은 한 일주일에 한번 정도 놀러 가줘야 제격인 법이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나는 결심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새 나타난 세이렌 누나가 아주아주 기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다. "어머나! 카이. 정말 잘 생각했어. 누나는 어제 종일 네가 없어서 너무 외롭고 심심했어. 카이도 마찬가지였지?" 그러면서 누나는 내 얼굴을 가슴에 꽉 껴안고 부비적대면서 말했다. 옷 사이로 느껴지는 야들야들하면서도 뭉클한 느낌이 정말 기분이 째질 듯 좋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계속 누나의 품에 얼굴이 묻혀 있자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우켁켁! 어떻게 여자 악력이 이렇게 센 거야? 나는 벗어나려고 바둥바둥거렸지만 한번 먹이를 품에 안은 누나는 날 쉽게 놔주지 않았다. "그래그래. 카이야. 오늘은 이전에 못했던 키스도 목욕도 마저 하고, 밤에 내 침실에서 같이 자자꾸나. 알았지?" "우케엑!" 뭐시라! 침실? 나는 깜짝 놀라서 전심전력으로 머리에 힘을 준 끝에 누나의 폭신폭신한 가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누나,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냐...? 가 아니라, 누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앗! 집사도 정색하면서 누나에게 말했다. "세이렌 아가씨. 마음은 이해하지만 부디 지금은 자제해 주십시오." 마음은 이해한다니 뭘 이해한단 말야! 집사앗! 하긴 집사도 내 아름다운 미모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는 건가. 흑흑흑. 아, 목마르다. 여 기 옆에 있는 물이라도 마셔야겠어. "싫어. 몇 년 더 지나서 카이가 사이엔 녀석처럼 버터바른 녀석으로 크기 전에 미리미리 따먹어 둬야지." "우퀘엑!" 켁켁! 바... 방금 뭐라고 들었지? 내 귀가 잘못된 건가? 순간적으로 몸에 번개가 떨어지는 듯한 큰 쇼크가 왔고 나는 물 먹다가 물이 목에 걸려 켁켁거렸다. "어머나. 물은 조심해서 먹어야지 카이. 이 누나가 치료해줄께. 큐어!" 눈앞에 예쁜 빛이 반짝이더니 단번에 켁켁거리던 목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우와아. 역시 대륙 7대 마법사라더니 정말 굉장한 능력이다. 누나랑 같이 평생을 살면 아무 불편한 것 없이 마음대로 살 수 있으니 의외로 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을....리가 없잖아앗! "세이렌 아가씨." "왜 자꾸 귀찮게 그래, 집사?" "요즘도 카이엔 도련님의 식사에 정력제를 넣으십니까?" "집사야말로 요즘도 카이에게 주는 식사는 먼저 맛을 보고 내가지?" "흠흠. 덕택에 부부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 는게 아니라 넣으신다는 이야기군요." "그야 당연하지! 이렇게 예쁜 내가 유혹하는데도 지금까지 한 번도 날 제대로 상대해주지 않잖아? 그래서 생각했지. 카이가 너무 아름다운 나머 지 남성으로의 기능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하고... 앗, 카이. 어딜 가니?" 으아아아아악! 도대체 누나랑 있으면 도대체 무슨 말이 더 튀어 나올지. 무슨 꼴을 당할지 예측할 수가 없다. 이전에 완전히 누나랑 내가 부부사 이 같다고 이야기했는데 그건 확실히 착각이었다. 이대로라면 나는 완전히 누나의 장난감이잖아. 문득 사이엔 형 생각이 났다. 조금 못 미덥기는 하지만 대륙 7대 마법사인 누나를 막을 만한 사람은 역시 대륙 7대 그랜드 소드 마스터 중 하나 인 형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앞뒤 가리지 않고 사이엔 형이 누워 있는 병실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사이엔 형이 있는 방 쪽으로 달려갔는데 여기는 아까 내가 출발했던 길이다. 의아하게 여겨 다시 한번 가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누나의 득의양양한 웃 음이 뒤에서 들려왔다. 설마!? "오오∼홋홋홋. 카이야. 너에게 나쁜 흑심을 품고 있는 사이엔 녀석은 이제 너에게 접근할 수 없단다. 그녀석의 병실이랑 네가 있는 장소 사이에 메이즈 마법을 걸어놓았기 때문에 소용이 없어. 학교에 가기 싫으면 누나랑 같이 병원놀이라도 하면서 노올자. 내가 간호사 하고 네가 환자 하 자. 응?." 우와아아아악! 나는 견디다 못해 달리고 계속 또 달렸다. 이젠 사이엔 형을 찾는게 문제가 아니라 이 난관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문제였다. 하지 만 집안의 어느 방향으로 달려도, 계단 위로 아래도 내려가도 그 어느 곳에도 누나가 있었다. "흑... 카이. 이 누나가 그렇게도 싫은 거니? 그렇다면 난... 난!" 헉. 이건 위험한 느낌! 당황해서 바로 아부성 멘트가 튀어나왔다. "아, 아냐! 누나. 난 누나가 싫은게 아니라..." "다 필요없어! 카이가 날 외면하는 이상 나도 이 세계도 더이상 존재할 가치가..." 크아악! 나보고 도대체 어떻하라는 말이야아! 내가 스스로 누나의 품에 안겨 동정을 주면서까지 세계의 위기를 막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결심할 때쯤 대신 세계의 위기를 구하고자 나타난 검을 든 상처입은 전사가 출현했다. 아직 몸이 성치 않을 텐데 나타난 형은 내게는 마치 구세주같이 느껴졌다. "사이엔 오빠..." 잘생긴 연예인 오빠들에게만 쓰던 소리가 나도 모르게 절로 나와버렸다. 조금 애처로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내 모습이 형의 눈에 어떻게 비 췄는지는 몰라도 형은 비분강개하여 당당히 누나 앞에 나섰다. "그만 하시죠. 누님. 그러니까 카이가 외면하는 겁니다." "사이엔... 벌써 일어서서 돌아다니고 내 마법마저 깻단 말야? 제법이네." "그렇지 않으면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명성이 아깝지요. 하여튼 제가 온 이상 순진무구한 동생 카이엔은 건드릴 수 없습니다." "아직 뜨거운 맛을 못 본 모양이군." 이때다. 두 사람이 불붙었을때가 절호의 찬스! 나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와 원래 집사랑 이야기하던 그 방으로 잽싸게 달렸다. 집사는 여 전히 그 방에 그대로 앉아서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결심이 서셨습니까?" "응! 학교 갈께! 지금 당장이라도 갈께! 앞으로 학교 안 간다는 얘긴 절대 안 꺼낼께!" "알겠습니다. 당장 마차를 준비시키도록 하지요." 그래도 학교에서는 보는 시선만 노골적이지 저렇게 행동파인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내가 느낀 바로는 아무래도 학교 학생들 사이에 지나치게 튀어서 내게 접근하는 사람은 외면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엄청난 미소년이라는 사실은 처음에는 기뻤지만 이거 갈수록 부담스러워진다. 항상 아이돌을 선망해 왔던 내가 전 세계의 아이돌이 되다니! 좋아. 이왕 어긋나기 시작한 인생, 끝까지 화려하게 살아보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학교에 가기 위해 마차에 올라탔다. "카이엔! 이 형을 내버려두고 어딜 가는 거냐!" "카이야아∼ 학교 안가고 누나랑 놀기로 했잖아아!" 아, 몰라. 안들려. 나는 모르는 일이야. 더이상 따지고 싶으면 학교로 직접 찾아와서 얘기해! 헉, 그러고 보니 진짜 형이랑 누나가 학교로 찾아오 면 어쩌지? 그 파장을 감당하기 힘들텐데? 에라, 모르겠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내가 지금껏 받았던 두려움 반, 멸시 반인 사람들의 시선에 비하 면 여긴 천국 같은 세상 아니냐! 나름대로 적응하면서 사는 거닷! 물론 원래 세계의 사람들은 이제 만날 수 없겠지만... 엄마? 아빠? 외할머니? 치잇. 이 세계로 오고나서 쭈욱 외면했던 현실세계의 사람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분들을 생각하면 너무 슬퍼질 것 같아서 일부러 애써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정말로 그랬다. 외면과 무관심, 그리고 냉대로 가득찬 세상 속에 나를 아껴준 몇 명 안되는 정말로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뚝... 뚝... "으흑... 으흑흑..." 슬픔은 갑작스럽게 밀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염없이 눈물 콧물을 잔뜩 흘리면서 울고 있었다.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사람들 을 이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날 괴롭게 했다. 세월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잊혀지게 만든다지만, 지금은 그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의 고통으 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제8화 : 공주 전학오다. 지각이긴 했지만 어쨌건 학교로 돌아오자 언제나와 같이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오옷! 카이엔이 왔다!" "이건 말도 안돼! 지각이긴 하지만 이틀 연속... 연참을 때렸어!" 학교 교실마다 수업 중에 교실 밖으로 머리가 포도처럼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는게 재밌다. 어, 저기 포도알 하나가 떨어지네? 누구지? 그런데 아 무도 떨어진 포도알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다. 왠지 불쌍한 것 같아 한번 그쪽으로 달려가보려고 했지만 그러다가 전교생이 다 뛰어내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일부러 가지 않기도 했다. 음, 나도 모르게 오만과 자존심 게이지가 팍팍 상승하는군 그래. 뭐, 학생들은 아무도 신경 안 써도 선생들 몇 명이 그쪽으로 달려가고 있으니까 괜찮겠지. 나중에 병문안이라도 가줘야 겠다. 느긋하게 교실로 향하고 있는 가운데 뒷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꺄아! 진짜 카이엔 브리타뉴 님이다! 나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야!" "고... 공주님! 체통을..." "시끄럿. 그 유명한 카이엔 님, 만인(萬人)의 카이 군을 보러 왔는데 그깟 체통이 대수야?" 원래 내 주위는 좀 시끄럽지만 그 중에서도 기차 화통 삶아먹는 듯이 쩌렁쩌렁한 소리였다. 이제는 개나 소나 내 애칭을 부르는 건가. 카이엔이 매사에 세게 나간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지금은 나한테 몸을 뺏기고 어디로 갔을지 모르는 그 녀석도 나름대로 피곤했겠 지만. 하여간 짧은 기간이지만 그 동안의 패턴으로 볼때 또 한명의 진드기가 달라붙을 것 같다는 예감에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앗, 카이엔 님, 기다려 줘욧!" 보지 않아도 선하다.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땅바닥에 닿지 않으려고 양 손으로 치켜들고 굽 높은 구두로 무리하게 뛰어오는 모습이.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땅과 뜨거운 키스를 나누겠지... "우왁!" 철푸덕. "괜찮으십니까, 공주님!" "아야야야... 우앙!"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랬다. 솔직히 이럴 때 남자답게 친절하게 다가서서 손을 내밀며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이제는 내가 슬쩍 미소짓기만 해 도 거품을 물고 넘어가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러기에는 망설여졌다. 내 등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간에 그냥 안면몰수하고 그냥 갈 길 이나 가는 수밖에. 근데 뭐라고 했냐? 공주니임!? "소문은 들었지만 소문보다 훨씬 예의없고 불량한 녀석이군요." "헤헤. 그런 불량기 있는 반항아적인 모습도 멋있잖아?♡" "어쨌건 전 공주님이 저런 자 때문에 이런 누추한 곳에서 수업을 하셔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도 최근에 흑마법사에게 저주를 받고 나서는 많이 얌전해졌다더라. 뭐. 잘 키우면 착한 낭군이 될거야." "다른 훌륭한 귀족자제분들도 많은데 어째서..." "잘 들어, 실론! 남자의 불량한 성격은 여자가 따뜻하게 보듬어주면 개과천선시킬 수 있지만 외모는 하늘에서 타고나는 거라구! 알아?" 아직 얼굴은 보지 않았지만 저 무슨 공주라는 작자도 울 누나처럼 제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마이 페이스 타입인 것 같았다. 저런 타입은 좀 많이 피곤한데 말이지. 그래도 아무리 공주라고 해도 한 학년에 반이 열 개 정도 되는데 설마 우리 반으로 오겠냐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럼 소개하겠다. 오늘부터 우리 반에서 공부하게 된 자하기니아 왕국의 둘째공주님이신 피요르 자하기니아 님이다. 우리 학교는 학교 내에서는 상급생과 하급생 외의 신분 구별은 신경쓰지 않으므로 특별히 존칭을 쓸..." "꺄아! 카이엔 님 저기 있다아! 선생님, 저 제발 카이엔 님 옆에 앉혀주세요!" "...말을 놓든 존칭을 하던지는 본인의 자유의사에 맞기겠다. 공주님. 그렇지 않아도 저희 반은 딴 반에 비해 학생 수가 다섯 명이나 많아서 스물 명입니다. 굳이 억지를 쓰셔서 이 반으로 오려고 했지만..." "좋아, 그럼 나 대신 누가 딴 반으로 나가면 되는거지?" 저 자신만만한 표정, 어째 불길해 보인다? 그렇잖아도 나 잘난 사람이요 하는 것이 얼굴에 그려져 있는데. 음. 하기야 나도 마찬가질런지도 모른 다. 환경이라는 것은 때론 사람의 성격을 크게 변화시키니까 말이야. "저기 카이엔 옆에 너! 나와 카이엔 님의 장래를 위해 다른 반으로 옮겨주었으면 한다. 물론 보상은 충분히 내리..." "웃기지 마!" "공주면 다냐!" 건방지고 오만한 피요르 공주의 명령에 온 반이 들고 일어났다. 공주는 자존심이 상한듯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옆에 따라온 기사에게 명 령했다. "실론, 당장 저 녀석들을 끌어내!" 기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공주님. 이곳은 자하기니아 왕국이 아니라 유클리네 왕국입니다. 저는 단지 공주님의 신변을 호위할 뿐 그런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음. 반 애들이 전부 용감하게 공주에게 반항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군. 나는 여유있게 강 건너 불구경 자세로 돌아서서 지금 상황을 관찰하기로 했다. 최소한 이곳에는 서로 눈치를 보느라 함부로 육탄 공세를 퍼부어대는 사람은 없... "카이야, 도시락 놓고 갔어!" 헉, 이 목소리는! 설마? "우왁!" 처음 누나를 봤을 때처럼 누나는 나랑 5센치도 떨어지지 않은 코앞에서 순간이동으로 나타났다. 정말이지 조금만 앞으로 움직이면 입술 박치기 가 들어갈 만한 위치다. "누... 누나?" "우와악! 또 나타났다!" "으헤헥...! 세이렌 브리타뉴 더 마요르카 오브 세븐 매직 마스터즈!" "불과 열네살에 대륙 7대 마법사로 인정받은 천재 마법사!" "그... 그러고 보니 카이엔의 누나가 그분이었지!"1 우리 누나도 나만큼 유명하긴 한 모양이다.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걸 보니까. 하지만 다들 얼굴이 새파랗게 떨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악 명 쪽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저건 또 뭐야?" 딱 모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방금 전에 우리 반에 전학을 온 자하기니아의 피요르 공주였다. "공주님. 저 분은 대륙 7대 마법사의 한 분이신 세이렌 브리타뉴 님입니다." "그래? 근데 그런 사람이 왜 여기 있는데?" "아마도 동생인 카이엔 브리타뉴를 보러 온 것 같습니다만..." "그래?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떡 줄 생각도 없는데 김치국부터 먹는 것은 이 공주도 누나랑 별로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누가 누구더러 형님이라는 거야! 너도 카이엔에게 함부로 마수를 펼치는 요망한 계집년들 무리냐!?" 헉 누나가 엄청 화났다. 그러고보니 평소에는 나랑 어떻게든 가까이 붙어서 친하게 굴려던 애들이 전부 내 시선을 못 본듯 피하고 있잖아? 바로 내 옆에 앉은 린넬조차 고개를 돌리고 벽 쪽을 바라보고 있다. 아무래도 이전에 와서 깽판을 친 적이 여러번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화내시지 마세요. 전 단지 카이엔 님을 사모할 뿐인걸요. 형님." "그 사모 자체가 하늘을 거스르는 대역죄야! 이 건방진 년, 쓴맛을 봐야 겠구나!" "누가 누구더러 쓴맛이라는 거예요? 카이엔 님의 누님이라길래 예의를 갖춰 대해 줬더니 기가 막혀서!" 피요르 공주도 화났다. 저 공주도 누나 만만찮게 인내심이 없는 것 같았다. 누나랑 꽤 성격이 닮았는지도... 음. 나로서는 어느 쪽이 더 낫냐고 하 면 아무래도 얼굴은 누나 쪽이 훨씬 낫다. 나에게만 보여주는 한없이 부드러운 미소와 때때로 자꾸 칭얼대는 모습은 날 진땀 흘리게 하긴 하지 만 정말로 깜찍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질투심이 필요 이상으로 강한 나머지 저런 폭주 모드를 자주 보이기 때문에 마녀 같아서 너무 무섭다. 그럼 피요르 공주는 어떠냐고? 글쎄에. 얼굴은 예쁜 것 같은데 공주다 보니까 이것저것 장식을 너무 많이 달아서 잘 모르겠다. 보석이라는 게 전 체적으로 사람의 본모습과 조화를 이뤄야 하는 건데 얼굴이 장식품같이 느껴져야 곤란하지 않은가? "공주님. 그만 진정하십시오. 그리고 세이렌 님도 이쯤에서 물러나십시오. 만약에 공주님께 해를 끼친다면 저 실론 파르스가 용서치 않겠습니다." "실론 파르스!?" "그 대륙 7대 그랜드 소드 마스터 중 하나?" 겁을 먹고 잔뜩 쫄아있던 급우들이 다시 시끌시끌해지면서 갑자기 흥미진진한 세기의 대결을 지켜보는 청중으로 변해 버렸다. 그건 그렇고 대륙 에 일곱 명 밖에 없다면서 내 근처에는 왜 이렇게 강한 사람들만 파리떼처럼 모여드는 게냐? 정작 나는 아무 힘도 안 가지고 있는데... 누나도 번뜩이는 그의 눈빛을 보자 조금 진정한 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검 한자루가 세계의 진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때로는 검 한자루가 세계의 진리를 담을 수도 있는 법이지요." 음. 갑자기 무협소설에서 봄직한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네. 역시 실력자들끼리는 뭔가 서로 통하는 게 있나보지? 물론 세이렌 누나와 카이엔 형 사이는 전혀 아니었지만... "실론, 무슨 소리야? 실론도 못 이기는 사람이 있어?" 휴우. 누나는 나랑 관련된 일에만 철이 없어지지만 저 공주는 모든 일에 철이 없는, 온실 속에서 자라난 어린아이나 다름없군. 그런 거라면 아무 리 예쁘다고 해도 사양하겠어. 게다가 어리니까 몸매도 빈약한.... 아, 이게 아니고 어쨌건 어린애는 피곤하니까 절.대.싫.어! "그 철없는 공주님이 내게 정식으로 사과한다면 이대로 물러나주지요." "그렇다면 피요르 자하기니아 공주님께서 이 반에서 카이엔 브리타뉴와 함께 수업을 들어도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오오. 두 사람의 눈에서 불꽃이 튀기다 못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서로의 오오라가 중간에서 충돌하고 있는게 눈에 훤히 보일 정도니까 말이다. 반 애들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면서 과연 이 눈싸움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지 가늠하고 있었다. "위대한 마법사이신 세이렌 브리타뉴 님.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얼라리오? 저 철없는 공주가 왠일로 진지한 눈을 하고 누날 쳐다보고 있지? 게다가 사과까지 했잖아!? 하긴 내가 며칠이나 그 공주를 봤다고 함 부로 평을 내릴 수 있겠냐. 사람이라는 것은 깊게 사귀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지만... 하여튼 모든 이들의 시선이 피요르 공주에게 집중되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진심으로 카이엔 브리타뉴 님을 사모하고 있고 그걸 위해서라면 공주의 신분이든 뭐든 집어던질 수 있어요." "고... 공주님!?" "파르스 경. 저는 진심이에요. 제가 몇 년 전 유클리네를 방문했을 시절에, 단 한번 스쳐지나갔지만 그 후로 일분일초라도 그 아름다운 모습을 잊 은 적이 없는 걸요. 카이엔 님을 위해서라면 전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이거... 날 향한 고백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그런데 모든 사람들의 눈이 내가 아니라 누나 쪽으로 시선이 향해 있다. 암만 봐도 내 의견은 별로 안 중요하고 뭐라고 말해도 씹힐 것 같은 분위기다. "이제서야 일국의 공주다운 눈을 하고 있군요. 이 교실에서 카이엔과 공부하던지 뭔지는 상관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누나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카이엔은 내 거예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어요!" 온 교실, 아니 온 학교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의 목소리로 누나는 외쳤다. 그리고는 공간이동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도시락을 안 주고 가버렸다. 제9화 : 도시락 소동 점심시간이다. 누나가 도시락을 갖고 와 놓고는 잊어먹고 공간이동하면서 도로 들고 가 버렸기 때문에 나는 점심 도시락이 없었다. 하지만 굳이 그렇지 않아도 내게 도시락을 제공하고자 몰려온 학생들의 수는 최소 한 다스가 넘어갔다. 하도 자기 도시락을 먹어달라고 극성을 부려서 모든 도시락을 다 한 번씩 맛보기로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녀석들이 누구 도시락이 제일 맛있었냐고 따지고 들듯 물어와 참 당황스러웠다. 어떻게든 얼버무리면서 넘어가려 했는데 하도 극성스럽게 굴어 그래도 제일 마음에 들었던 도시락을 하나 찍었다. 그런데 그 많은 도시락 중에서 내가 찍은 도시락이 하필이면 린넬 케이준 녀석의 도시락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나를 위해서 만든 거라고 한다. 자세히 보니 주제에 예쁘게 밥에 하트 무늬까지 그려져 있었다. 왜 내가 남자한테 이런 도시락을 받아야 하지? 그리고 왜 이게 제일 맛있 었을까? "우하하하핫! 나의 승리다! 봤지? 이건 카이의 마음이 내게 있다는 증거라고!" "우왕∼ 카이엔 님! 말도 안돼요. 어째서 린넬 따위에게!" "두고 봐요! 다음에는 반드시 더 맛있는 도시락을 대접해 드릴 테니까!" 어이. 고작해야 도시락 하난에 그렇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음... 그러고 보면 이것도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하는 건 가? 내가 현실 세계에 있었을 때 연예인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열광하고 환호하고 즐거워했던 걸 생각하면... "호호. 고작해야 저런 하찮은 도시락 따위로 카이엔 님의 마음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내일은 내가 특별히 주문한 뷔페식 만찬을 교내에 들 여오도록 하지요." 아까의 소동 이후 여차저차 해서 오늘부터 우리 반의 일원이 된 피요르 공주가 다른 사람들을 비웃는 듯이 낮춰보면서 말했다. "호오. 역시 공주님은 뭘 몰라도 모르는군. 요리라는 건 말이야. 만든 사람의 정성이 가장 중요한 거라구. 자신이 직접 만든 사랑의 마음이 잔뜩 담긴 도시락이야말로 카이가 가장 기뻐할 선물이야. 물론 손에 물도 안 묻혀 본 공주님의 요리 실력으로는 절! 대! 무리겠지만 말이야." 린넬이 그런 공주를 비웃으며 말했다. 저런 대사를 사내녀석이 아니까 어째 기분이 좀 이상하다? 그건 그렇고 난 도시락 받고 기뻐한 적 없어! 이전의 카이엔은 도시락을 절대 받지 않고 혹여나 건네주더라도 땅바닥에 내팽개쳐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모질지 않아서 도 시락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내가 나오지 않는 날에도 나만을 생각하면서 새벽같이 일어나 만들었다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들으면 그 말이 비록 거짓이라고 할 지라도 먹지 않을 수 없어진다. 그래서 나는 모든 도시락을 전부 조금씩 먹어 한 끼 식사를 채웠다. "두고 봐! 반드시 카이엔 님이 기뻐할 요리를 직접 만들어 올 테니까!" "후훗. 그 고운 손이나 다치지 않토록 조심하는 게 좋을껄. 공.주.님?" 오옷. 린넬 이 녀석. 공주를 도발하고 있군그래. 저 공주도 참 순진하긴 순진한지 그대로 시행할 모양이다. 그런데 저 말 들어보니 내일 과연 먹 을 만한게 나올지 불안한걸. "게다가 시식평가단의 감정도 통과해야 하니까 말이야." "시식평가단?" 이건 나도 처음 듣는 소리다. "아, 카이. 오늘 네가 처음으로 이틀 연속 나온데다 애들 도시락을 먹어주는 바람에 내일부터는 오늘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도시락이 쏟아들 어져 올거야. 그 많은 것을 일일히 네가 먹을 수가 없을 거 아냐? 그래서 전교의 미식가들을 소집해서 네게 오는 모든 도시락들을 일일히 시식 해보고 수준 미달의 도시락은 과감하게 탈락시키기로 했어. 맛뿐만 아니라 향미나 장식, 정성 등을 모두 검증해온 도시락만이 네 앞에 놓여질 수 있을거야. 물론 내가 싸온 도시락도 마찬가지지. 수십 개 이상의 도시락 중 통과하는 건 아마 열 개 남짓에 불과할 거야." "....." 얼마나 도시락이 많이 쏟아져들어오길래 그러냐? 하긴 내가 그토록 학교를 나오지 않는데도 매일같이 내 도시락을 만드는 녀석도 있다니까 내가 매일 학교에 나온다면 그 갯수가 엄청나겠지. 알아서 저런 걸 챙겨주는 녀석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고맙기까지 하다. "두... 두고봐. 반드시 카이엔님이 내 도시락을 선택하게 만들어줄테니까." 어이. 공주, 기세에서 밀리고 있잖아. 솔직히 자신이 없는 게로군. 뭘 어쩌겠냐. 쯔쯔쯔... 내일 손가락마다 붕대를 둘러감고 학교에 오는 것은 아 닌지 심히 걱정된다. 아, 마법이 있으니까 그럴 일은 없겠네. 그럼 이제 다 먹었으니 다음 수업에 들어가 볼 까... 나? 우욱! "커억!" 뭐... 뭐지? 갑자기 속이 심하게 울렁거리면서 뒤집힐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괴... 괴로워.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뭘 잘못 먹었나? "카이엔!" "카이!" "카이엔 님!"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양호실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양호실은 나를 문병온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있어 도통 조용히 쉬질 못 할 지경이었다. 동그란 안경을 낀 흰 가운의 양호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몸은 좀 어떠니, 브리타뉴 군?" "아직 좀 불편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아요." 아, 이럴 때 누나가 있으면 금방 낫게 해줄텐데. 하지만 누나가 학교에 오면 그 파장이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오늘은 아까 한번 학교를 반쯤 뒤집어놓을 뻔한 걸로 족했다. "그런데 제 옷은 누가 갈아입힌 거죠?" 어느 새 내 옷은 교복에서 하얀 환자용 가운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음. 고작해야 잘못 먹어서 체한 것 같은데 이럴 필요까지야... "내가 했단다." "....." 어이, 양호 선생! 왜 갑자기 얼굴을 붉히면서 몸을 배배 꼬는 거냐구? 헉, 그러고 보니 양호선생님은 여선생이었잖아! 그렇다면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 양호선생님이 내 옷을 벗기고... "선생님! 너무해요!" "어떻게 카이엔의 알몸을 혼자서만 볼 수 있어요!" "만지기까지 했죠? 부러워라...!" "어디까지 벗겼어요? 어디까지 진도가 나갔어요?" 나랑 비슷한 생각을 다른 학생들도 한 모양이다. 어쩐지 이런 것까지 걱정해야 하는 내 자신이 너무 슬퍼진다. "조용. 조용. 선생님은 단지 양호교사로서 브리타뉴 군의 옷만 갈아입혔을 뿐이에요. 여러분이 걱정하시는 삐리리하고 삐리리한 일은 상상만 했을 뿐이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와, 그 상상 정말 리얼했겠다!" "선생님, 저도 카이의 몸에 부비적대며 그런 상상 해보고 싶어요!" "안 부비적 거렸다니깐요!" 잘 하는 짓이다. 이거 우리 누나가 알면 또 한바탕 엎어버리겠지? 앗, 안돼지. 안돼.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던데 자꾸 누나 생각을 하면 누나가 진짜 또 나타나버릴지도 모른다구. "그것보다 브리타뉴 군이 쓰러진 원인은 식중독이에요. 아무래도 상한 음식을 먹은 모양이군요." 양호선생님은 단순히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 말한 것 같지만 의외로 아이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맞아! 범인을 찾아내야 해! 카이엔 님에게 그런 불량식품을 먹인 년이 누구야?" "오늘 카이는 열 다섯 명이 준 도시락을 조금씩 먹었어. 범인은 분명 그 중에 있을거야!" "당장 데려와서 심문하고 조사해보자!" "고문도 하자!" 어... 어이. 갑자기 재판정 분위기로 가는 건 뭐야? 내가 양호실에 누워 약을 먹고 휴식을 취하는 동안 어느 새인가 열 다섯명의 남녀가 끌려왔 다. 얼굴을 전부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나한테 도시락을 줬던 학생들인 것 같았다. 그 피고인 중에는 린넬 케이준 녀석도 끼여 있었는데 그를 포함해서 총 남자 셋, 여자 열둘이었다. 가만히 있으니까 자기들끼리 판사고 변호사고 배심원들을 선임하고는 비관계자들을 전부 양호실 밖으로 몰아냈다. 얼씨구, 얘네들 지금 뭐하는 짓이냐? 그것보다는 지금 수업이 지나도 한참 지난 시간인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학교 방송에서 교장 선생님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목소리 가 들려왔다. [오늘 오후 수업은 임시 모의 재판을 여는 것으로 대체합니다. 학생 여러분들이 역할을 맡아 실제로 재판을 진행해 보면서 판단력과 논리력을 향 상시키고...] 단순히 학생들의 압력에 밀렸군. 우리 학교 학생들은 하여튼 다들 집안 뒷배경들이 짱짱하니까. 하긴 선생님들 몇 명도 치열한 선발 경쟁을 거친 끝에 임시 재판정이 된 양호실에 고문 자격으로 들어왔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재판정이라고 정식 재판에 맞추어 절차를 진행하는 것을 보니 꽤 감탄사가 나왔다. 음. 다들 노는 것 같아 보여도 공부하긴 하는구나. 나 만 안했던 건가... "여러분도 다들 아시겠지만 오늘 점심때 우리 학교의 자랑이자 전 대륙의 아이돌인 초 극강 미소년 카이엔 브리타뉴가 오늘 학생들이 제공한 도 시락을 먹고 식중독으로 쓰러졌습니다. 이에 저는 전교생들의 염원을 담아 카이엔 브리타뉴에게 사악한 음모로 상한 도시락을 제공한 범인을 가 려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버하는 것 같은데 다들 진지한 눈빛이다. 하... 하... 하... 이 녀석들 정말 진심인 거야? 문득 나는 이 아이들의 분위기를 내가 이전에 들었다가 탈퇴했던 모 가수의 팬클럽 분위기에 대입해 보았다. 신(神)에 가까운 맹목적인 추종에 가까운 감정. 하나하나 만나보면 괜찮았었던 아이들이 자 신의 우상에 관한 일만 나오면 인격이 바뀐다. 나를 좋아하는 이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걸까? 아무도 이런 희극적인 상황에 반대하지 않는 거야? "그럼 묻겠습니다. 피고 린넬 케이준 외 14명은 오늘 점심때 카이엔 브리타뉴에게 점심 식사 도시락을 제공했습니다. 맞습니까?" "이의있습니다! 검사님. 어째서 저만 풀 네임을 부르고 나머지는 그 외 입니까?" "그건 피고 린넬 케이준 당신의 도시락을 카이엔 브리타뉴가 가장 맛있게 먹었기 때문입니다." 불쌍한 린넬 케이준 녀석. 다들 내가 저 녀석 도시락이 제일 맛있었다고 했던 사실에 질투를 하는지 다들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 치 범인은 바로 너지! 하는 분위기가 좌중에 형성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검사역을 맡은 아이의 이야기는 이어져나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카이엔 브리타뉴에게 고의적이든, 실수건 간에 상한 도시락을 제공한 피고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몇십 초의 시간이 흘렀지만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좋습니다. 여기 전교생들이 피고인 15명의 도시락을 모두 압수해서 수거해 왔습니다. 이 중 4개의 도시락은 비워져 있지만 11개의 도시락은 카 이엔 브리타뉴가 먹은 부분 외에는 그대로 남아 있군요. 그럼 여기서 학교 3대 미식가분들을 모셔서 도시락을 감정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째 갈수록 재판이라기보다는 무슨 토크쇼같은 느낌이 든다. 게다가 3대 미식가라는건 또 뭐냐? 초밥왕에 나오는 것처럼 천재 요리사들의 요리 를 먹고 화려한 수식여구로 감탄사를 늘어놓는 녀석들? 근데 이번에는 상한 음식을 가려내야 하는 거니까 썩 기분이 좋지는 않겠구먼. 후후후. 학교 3대 미식가로 나타난 애들은 남자 둘에 여자 하나였다. 원래 그들은 내일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던 나에게 지급하는 도시락들을 감정하기 위 한 시식평가단의 핵심 멤버가 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음식 감정에 들어가기에 앞서 주신 다르군트에게 진실의 맹세니 어쩌니 하는 선서를 했다. 임시 법정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말하지 않 겠다. 선서가 좀 길어지려고 하니 청중들이 쓰레기를 던지더라는 것만 알아둬라. 관객들의 열렬한 반응 덕에 차례로 해야 할 선서가 대표자 선서로 마감되고 본격적인 시식에 들어갔다. 첫 번째로 먹는 도시락은 린넬 케이준의 하트 도시락이었다. 먼저 도시락에 손을 댄 것은 치즈라는 이름의 여자아이였다. 뚱뚱하지는 않았지만 통통하고 귀여운 느낌이었다. 그리고 두 남자아이도 차례로 도시락과 반찬을 먹었다. "오옷!" "이것은!" "이 맛은!" "너무 얇지도, 두껍지도 않으면서 바삭바삭하게 구운 이 맛!" "게다가 너무 맵지도, 싱겁지도 않게 간이 정확하게 맞춰졌어! 적당히 혀를 자극해 주는 매콤한 이 맛은... 그래! 마치 오랜 기다림 끝에 월척을 낚을 때의 그 쾌감이야!" "점심시간에 개봉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나 식었는데도 이 정도의 맛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아아! 그때 나도 어떻게든 이 도시락을 얻어먹었어 야 했는데!" 어이. 어이. 나도 좀 맛있다고 느낀 건 사실이지만 그건 엄청나게 오버잖아? 뭐, 미식가라니까 어쩔 수 없는 노릇인가. 그들의 평을 지켜보고 있 던 학생들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리고 린넬 케이준이라는 인간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바뀌었다. 그에게 씌워진 의심과 누명(?)은 완전히 벗겨졌 을 뿐만 아니라 다들 나도 한번쯤 먹어보고 싶다는 선망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린넬의 도시락을 맛본 시식단은 단숨에 다음 도시락으로 차례차례 넘어갔다. 그들은 이 생선은 냉동품이라서 신선도가 한참 떨어지느니, 양념을 골고루 뿌리지 않았다더니, 불에 너무 많이 졸였다느니 하는 평가를 내뱉으면서 도시락을 하나하나 검증해나갔다. 나는 다 비슷비슷하게 느꼈는데 어떻게 저런 것까지 알 수 있는거야? 그래도 린넬의 도시락보다 더 나은 도시락은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내일부터는 꼼작없이 린 넬 녀석의 도시락만을 먹어야 하는 사태가 올 지도 모른다. 만약에 그녀석보다 더 뛰어난 도시락을 만들어 오는 녀석이 없다면 말야. 그렇게 11개의 도시락을 차례로 맛본 시식단은 완전히 비워진 4개의 도시락 쪽으로 넘어갔다. 아무래도 범인은 저 쪽에 있는 걸까? 지금까지 도 시락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걸 보니 말이야. "틀림없지?" "음. 틀림없어. 범인은 바로 그 도시락이야." "카이엔에게 그런 도시락을 제공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 하지만 어떻게든 결론은 난 것 같다. 특히 그 치즈라는 여자아이는 주먹을 꽉 쥐면서 분노의 불꽃이 눈가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누가 범인이야!" "빨리 말해! 잡아 족치게!" 휴우. 하여간 나한테 상한 도시락을 먹인 녀석은 무사하기 힘들겠군. 분위기가 완전히 인민재판정 분위기잖아? "범인은..." "바로..." "너야!"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지목한 범인은 바로 같은 반의 시에나였다. 요즘, 아니 사실은 오늘부터 피요르 공주가 설치는 바람에 영향력이 갑자기 줄 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반에서 나를 사이에 두고 린넬과 투닥거리던 여자아이였다. 음... 둘다 나한테는 관심 끊고 서로 사귀거나 하는 편이 내 겐 더 편할텐데 말야. 시에나는 수긍할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외쳤다. "말도 안돼! 이건 억지야! 모함이란 말야! 내가 어떻게 카이엔 님께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글쎄. 시에나. 이 도시락, 니가 직접 만든 거지?" 치즈가 전면에 나서서 시에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시에나도 지지 않겠다는 듯 치즈를 쏘아보았다. 여자들끼리 싸움이다. 무서워라... "그래. 당연히 매일같은 정성으로 카이엔님께 바치려고 준비했던 도시락인데 물론 내가 만들어야지!" "무슨 재료를 넣었는지 알기나 해?" "뭐 많이 넣었지만 대표적인 것만 말해보자면 도마뱀 꼬리, 족제비 간, 웅담(熊膽), 말린 금붕어 눈깔, 해구신, 원숭이 뇌수 등등해서..." 우웨엑! 나에게 저런 걸 먹였단 말야? 안그래도 식중독이라는 게 완치되지 않아 속이 불편한데 이제는 아까 먹은 것들이 다 올라올 것 같은 기 분이 들었다. 근데 해구신은 뭐하는 음식이지? 설마 저런걸 별미로 즐기는 녀석이 있으려구? 다행스럽게도 좌중의 음식에 대한 센스 역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속이 메슥거린다는 듯 기분나쁜 표정을 지었고 비위가 약한 사람은 등을 돌린 채 입을 손으로 막았다. "넣은 재료만 해도 초특급범죄감이고, 만든 작품은 대량살상무기감이야. 네 죄를 알기나 해?" "뭐가 어때서? 그래도 몸에 좋은 것들만 잔뜩 넣었어! 그리고 내 도시락도 카이엔은 맛있게 먹어 주었다구! 증거 있어?" 그러고 보니 시에나의 도시락은 모양이 조금 이상해 보이긴 했지만 맛은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뭐, 사실 나는 어느 나라 음식이건 별로 가리는 게 없긴 하지만. 오히려 나중에 먹은 음식의 재료를 뒤늦게 알고 충격을 먹은 적이 많았다.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의 케이스군 그래. 시에나가 성깔을 부리며 따지며 들자 치즈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저건 득의만만한 미소? 하지만 앞으로 나선 사람은 치즈가 아닌 다 른 두 남자아이였다. "물론 맛이야 나쁘지 않았다. 재료는 독특했지만 적절한 조리와 양념을 통해 그럭저럭 먹을 만한 맛을 만들어 냈으니까." "재료 자체도 일반인들이 혐오감을 느끼는 것이라 그렇지 영양이나 약효 등의 효과가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두 남자 미식가의 말이 끝나고 치즈가 앞으로 나섰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치즈의 조금 두꺼워 보이는 입술로 집중되었다. "카이엔의 특이체질을 잊은 건 아니겠지? 카이엔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라면 전교 1,2위를 다투는 그 시에나 카발리에나 양이 말이야?" 양호선생이 그 말을 듣자마자 무릎을 쳤다. "맞아! 브리타뉴 군은 특이체질이었지. 그랬다면 그걸 먹고 탈이 나는 건 당연해!" 다른 학생들 역시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그리고 시에나의 표정은... 당황스럽다 못해 하얗게 탈색되어가고 있었다. 뭐 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내가 특이체질이라고? 무슨 특이체질? 음... 혹시 내가 웅담에 알레르기가 있다던가 하는 거? 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자 양호 선생님이 그런 내 표정을 보고는 잊은 것을 가르쳐 주려는 듯이 말했다. "브리타뉴 군도 알고 있지? 브리타뉴 군은 무마력증(無魔力症)이라는 걸 말야." "무마력증 이라고요?" "어머? 자기가 자기 체질을 몰라?" "양호 선생님. 카이엔 님은 얼마 전에 기억을 완전히 잃으셨잖아요." "아, 참. 그랬지. 그러고보니 그렇지않으면 브리타뉴 군이 남 앞에서 이렇게 뇌살미소를 지으며 순진한 표정으로 있을 리 없잖아? 오호호." 내가 카이엔의 몸을 차지하게 되어 인성(人性)이 바뀌게 된 것이 참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 같았다. 불쌍한 카이엔 녀석. 기왕 미소년 으로 태어났으면 그 외모를 잘 활용을 해먹어야지 맨날 그렇게 사람들에게 인상만 쓰고 다니면 쓰나? 하긴 그것도 반항아적인 모습이라고 다들 좋아했다만. 그나저나 무마력증이 뭐야? 빨리 설명해 줘! "그럼 기억을 잃은 귀여운 카이엔 브리타뉴 군을 위해서 특별히 설명해 주도록 할께에." 네네. 그리고 기왕이면 설명하면서 콧소리 좀 내지말아줬으면 하는데요. "이 세상 모든 자연에 마력이 퍼져 있고 사람의 몸에도 마력이 일정량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마법사들은 이 마력을 통해 마법을 쓰고 전사 들은 마력을 기의 형태로 이용하여 더 뛰어난 움직임과 위력을 보태지. 하지만 무마력증은 말 그대로 몸에 마력이 전혀 없는 희귀한 증상이야." "아, 그렇군요." 흠. 마력이 없으니 마법같은건 못쓰고 기같은 것도 못쓰겠네.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악당들의 음모를 분쇄하는 영웅 역할 같 은 건 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난 이런 빵빵한 가문에서 초미소년으로서 만인의 아이돌 노릇이나 하는 걸로 족한걸 뭐. "그렇군요가 아니잖아? 마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이끌어내는지 몰라?" "어떻게 되는데요?" 난 진짜 모르겠는데? 마법을 못 쓴다는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나? 양호선생님이 어이가 없는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어느새 치즈가 재판정에 서 내가 앉아 있는 곳까지 다가와 말했다. "한마디로 카이엔 너 자신을 오브젝트로 삼은 마법에 대해서는 저항력이 제로가 된다는 소리야." "뭔 말이야?" 더 알수 없는 말이다. 그때 옆에 있던 담임선생님이 보충설명을 했다. 약간의 악의적인 한 마디와 함께. "치즈 셀바캬란 양. 카이엔 군의 지적 수준을 고려해 줘야 하지 않겠나. 게다가 기억까지 잃었다는 데 말야." 맘에 안 들어. 그렇잖아도 자꾸 수학 문제를 나한테만 시키는 것도 짜증나는데다 수업에 들어오는 선생들 중에 유일하게 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게 왠지 기분나쁘다. 집사에게 들은 이 세계의 호칭에 관한 것은 아이나 학생들끼리는 보통 이름으로 통하지만 성인이 되거나 공식적인 자리에 서는 성을 쓰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음. 알았어요. 그럼 설명해 줄께. 그러니까 카이엔 넌 마법이나 검기의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전혀 없다는 말이야.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마력이 자신에게 사용되는 타인의 마법에 대해 반발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에 가벼운 마법이나 검기에 대해서는 정신을 집중하면 그 효과를 상쇄 시킬 수 있어. 마력에 정통한 사람일수록 그 효과는 더 커지지. 하지만 카이엔 너는 마력이 없기 때문에 그 저항력이 전혀 없어. 때문에 누가 너 한테 마법을 쓰면 마법이 무엇이건 간에 넌 절대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어." "뭐어?" 헉. 무시라? 이거 큰일이잖아? 그래서 그 흑마법사에게 당했다는 저주도 간단하게 걸린 건가? 이거 괜히 불안해진다. 엄청나게 부담스럽고 진땀 흘리기야 하겠지만 역시 내 인생은 누나 옆에 있어야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위험한 상상마저 드니까. "시에나가 쓴 요리 재료들 중에서는 마력을 띤 것들이 몇개 있어. 그래서 속에 탈이 난 거지." "혹시... 학교에 마법 쓸 줄 아는 사람 많아?" "불안해 할 필요는 없어." 그제서야 양호 선생님이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네 누나]가 만들어준 그 절대마력보호의 반지가 모든 마력에게서 널 지켜줄 테니까." 양호선생님은 방금 '네 누나'라는 말에 엄청난 감정을 실어서 말했다. 음. 왜 저러지? 둘이 싸우기라고 했나? 절대마력보호반지라면 내 오른손가 락 약지에 끼워져 있는 이거? 음. 이 세계로 올 때부터 끼워져 있던데 지금까지 아무리 벗겨보려고 해도 안 벗겨져서 이상하게 생각했건만 그 때문이었나? "하지만 절대보호반지라고 해도 먹는 거에 관해서는 어쩔 수 없네... 앞으로 먹는 거 조심해야 겠다. 누가 음식에 마력을 심어서 먹이면 어떻해?" 치즈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충고해 주었다. 음. 그렇겠다. 앞으로 딴 사람 도시락은 먹지 말고 집에서 싸 준 도시락만 먹어야지. 그럼 누나가 싸 주는 도시락인가? 말만 들으면 참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마음속에 일말의 불안감이 드는 건 왜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치즈는 내 귀에 입을 갖다 대고 소근거렸다. "대신에 앞으로 린넬 케이준이 싸준 도시락은 나한테 다 줘. 알았지?" ...뭐냐. 결국 먹는 게 목적이였냐? 내 주변이 어수선하고 학생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사이에 나한테 그런 음식을 먹인 시에나 카발리에나는 재빨리 교정 밖으로 도망갔고 판사 를 맡은 아이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가운데 [시에나는 카이엔 브리타뉴에게 사과하고 당분간 카이엔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판결을 내 리고는 재판을 마무리지었다. 제11화 : 카이엔의 마법무구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세이렌 누나가 재빨리 내쪽으로 반갑게 뛰어오는 사이엔 형을 밟아주면서 나를 열광적으로 환영해 주었다. 마차에서 내리자 마자 나를 와락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으려고 했지만 사이엔 형이 필사적으로 일어나 검기를 날렸기 때문에 누나와 내 입술이 최초로 충돌하는 순간은 아쉽게도(?) 뒤로 미루어져야만 했다. "사... 이... 엔... 너 이번엔 진짜로 죽인다앗!" "훗. 이번에야말로 전처럼 맥없이 당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저에게는 이 명왕검(冥王劍)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오오. 저건 저번에 사이엔 형이 일전에 던졌던 삐까번쩍한 검이잖아? 아, 그렇구나. 저번에는 검을 손에서 놓고 가는 바람에 누나한테 무차별로 깨졌었지. 그래서 이번에는 검을 날리지 않고 검기를 날렸구나. 확실히 한결 진보했는데? "그런 문제가 아냣! 나한테 도전하는거야 이 누님의 아량으로 얼마든지 봐 줄 수 있지만 이 아름답고도 가녀란 카이가 맞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못해? 니 머리속에는 그런 개념이 전혀 없는 거야? 게다가 카이는 무마력증이잖아!" "누님. 누님이 만든 절대마력보호반지와 제가 만든 기혈환(氣穴環). 그리고 아이렌이 만들어준 정령왕의 목걸이, 심지어 레이엔이 만들어준 예지 의 귀걸이까지 몸에 지니고 있는 카이엔에게 누가 상처를 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누누히 말했지만 제 목표는 오직 욕정으로 가득찬 누님 의 사악한 유혹에 넘어가려는 순진무구한 카이엔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너야말로 속에 시커먼 마음을 풀고 있잖아, 이 변태야!" 아, 또 시작이다. 첨엔 재밌는 싸움이라도 자주 보면 지겹고 짜증나다 못해 권태스러워진다. 나는 누나랑 형을 무시한 채 내 양손을 쳐다보며 양 손에 끼워진 반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흠. 나는 단순히 장신구인줄로만 알고 귀찮아 했는데 내 양손 약지에 끼워진 이 반지와 목걸이, 귀걸이 는 전부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잖아? 하긴. 어째 반지도 목걸이도, 귀걸이도 전부 몸에서 안 빠지는 것 자체가 이상하긴 했다. 형이 대륙 7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이고 누나가 대륙 7 대 마법사이면 아이렌은 대륙 7대 정령 마스터라도 되는 건가? 그리고 레이엔이 만들어줬다는 예지의 귀걸이는 어떤 능력을 지닌 걸까? 걔는 뭐 예언 능력이라고 갖고 있는 거야? 또, 그거 말고도 내 양 손에는 역시 아무리 해도 빠지지 않는 팔지가 끼워져 있는데 이것도 무슨 강력한 능력 을 지니고 있는 걸까? 나는 종종걸음으로 집사의 방으로 향했다. 역시 가장 이성적이고 제정신 박힌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집에선 집사밖에 없다. 아빠와 엄마 는 요즘 왕궁에 자주 나가셔서 잘 안들어오시기 때문에 더 그랬다. 내가 흑마법사의 저주 때문에 쓰러진 이후 너무 오래 왕궁을 비우고 있었단 다. 그런데 왜 사이엔 형이랑 세이렌 누난 돌아가지도 않고 집안을 시끄럽게 만드는지 원... "도련님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아이렌 아가씨는 대륙 7대 정령 마스터이시죠." "그럼 레이엔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어? 레이엔이 이 귀걸이를 만들어 줬다며?" "레이엔 도련님은 예지력을 지니셨죠.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대륙 7대 점성가의 반열에 올라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혹시 카이엔 도련님께 무슨 일이 닥칠 일이 생긴다면 아마 그 반지가 반응할 겁니다." 허허허. 아무리 마력이 없다지만 내 몸은 온통 마법 관련 아이템들로 도배가 되어 있군. 그것도 전부 대륙 7대 어쩌구 하는 사람들이 만든 거니 위력은 보증이 되겠고. 그러고보니 전부 다 대륙 7대 자가 붙네? "그럼 다른 아이템들에 대해서도 가르쳐줘!" "알겠습니다. 우선 오른손 약지에는 세이렌 아가씨의 절대마력보호반지. 카이엔님을 대상으로 작용하는 모든 마력과 마법을 무효화시킵니다. 그리 고 왼손 약지에는 사이엔 도련님의 기혈환. 카이엔 님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물리적 충격을 급감시킵니다. 아마 제가 칼로 카이엔 도련님의 목을 베어도 도련님께는 생채기 하나 안 날 겁니다." "헤에. 굉장하네." "아이렌 아가씨의 정령왕의 목걸이는 대상자에게 모든 정령에 대한 친화력을 부여합니다. 때문에 카이엔 님은 원하시는 때 어떤 정령이든 불러내 어 부탁할 수 있습니다. 레이엔 도련님의 예지의 귀걸이는 아까 말한 대로고... 마지막으로 그 팔찌는 사모님께서 만드신 겁니다." "에? 엄마가?" "역시 도련님께서는 잊으셨을 테죠. 사모님은 결혼하시기 전에 주신 다르군트를 모시는 신관장으로 대륙 7대 신관장 중의 한 분이셨습니다. 물론 지금은 신관장을 그만두셨지만 그 권능만은 왕년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으셨습니다. 그 팔찌의 이름은 무한의 팔찌라고 하는데 착용자의 어떤 상처라도 순식간에 아물고 설사 죽었다고 할지라도 부활시켜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히야...." 엄마도 대륙 7대 어쩌구가 붙는구나! 아마 아빠도 뭔가 붙긴 붙겠지? 그럼 나는 뭘까? 대륙 7대 미소년이라고 붙는 건 아니겠지 설마... 하지만 정말 굉장하네? 마법공격도 안 통하고, 물리적 공격도 안 통하고, 마음대로 정령 쓸 수 있고, 미래에 대한 예지도 보여주고, 게다가 다치 거나 죽어도 바로 회복된다니. 이건 레벨1짜리 초보가 초고수들의 레어아이템들을 몽땅 가진 거랑 다름없잖아? 초미소년이 될 때부터 알아봤지 만 난 완전히 축복받은 몸인 것 같다. "다들 많이 신경을 써주네... 기쁘기도 하고... 어쩌면 나만 편애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당연한 일입니다. 만약 도련님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당장 피를 나눈 다른 가족분들도 그 영향을... 아, 으흠. 으흠." "피를 나눈 가족들이 뭐?" "아, 아닙니다. 걱정하시는 분이 많다는 겁니다." 집사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재빨리 말을 얼버무렸다. 물론 내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날 끔찍히 아끼는 가족들이 당장에 달려오겠지. 하지만 왜일까? 내게 집사의 말은 부담스러울 정도 내게 이런 엄청난 마법무구들을 채워 준(왜냐하면 벗을 수가 없으니까) 이유가 따로 있는 것처럼 들 렸다. "카이야! 누날 두고 가버리면 어떻하니? 내가 그동안 너 오기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 세이 누나. 근데 사이엔 형은?" "아, 걔는 칼 들고 덤벼들길래 마법 미궁에 가둬놨어. 아무리 녀석이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지만 그거 깰려면 그래도 시간 좀 걸릴껄?" "응. 알았어. 그럼 밥 먹으러 가자. 아무래도 낼부터는 하녀들한테 도시락 좀 싸달라고 해야겠어." "앗, 그러고보니 내가 실수로 도시락을 안 주고 가버렸구나! 카이야 미안해! 누나가 정말 잘못했어! 낼부터는 꼭 내가 도시락을 싸줄께, 잊지 말 고 들고 가." 오늘 식중독 이야기를 꺼내면 또 한바탕 학교에 가서 뒤집어엎겠지? 그리고 시에나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을 테고. "아냐. 괜찮아. 난 평범하게 만든 아주 평범한 요리가 더 좋은 걸. 이상한 재료들로 만들지만 않으면 뭐든 상관없어." 나는 극구 사양하면서 말했다. 그런데 내가 평범한 요리가 좋다고 하자 누나의 표정이 어째 조금씩 변하는 것 같다? 마치 뭔가를 숨겼다가 들킨 것처럼... "카... 카이야. 어... 어떻게 안 거니? 사실은... 오늘 가져갔다 도로 들고온 도시락에는 도마뱀 꼬리, 족제비 간, 웅담(熊膽), 말린 금붕어 눈깔, 해구 신, 원숭이 뇌수 같은 몸에 좋은 것들을 잔뜩 넣어 만들었는데...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저것들 어째 오늘 낮에 많이 들어봤던 음식 재료들 목록이다? "근데 그것들... 혹시 재료에 마력이 든 거 아냐?" "아, 맞어! 저런 걸 마력 안 없애고 그냥 먹으면 탈 나지! 게다가 카이 넌 무마력증이니까...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용서받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 이든지 해 줄테니까 제발 용서해 줘!" 세이렌 누나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필사적으로 내게 빌었다. 어째서일까? 그렇게 강하고 당당하면서 어째서 내게는 그렇게 저자세지? 그토록 나 의 미움을 사고 싶지 않는 걸까? 아마 나의 인격이 들어오기 전의 카이엔은 거칠고 불량했다니까 누나는 더욱 저자세로 일관했을 거다. 카이엔. 세상에 둘도 없는 초 미소년 카이엔 브리타뉴. 대체 네 정체는 뭐지? 정체가 무엇이길래 이토록 사람들을 마법에 빠진 것처럼 홀릴 수 있는 거지? 조금 마음이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 기회에 조금 덜 시달렸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조건을 하나 붙이기로 했다. "누나. 괜찮아. 용서해 줄께. 대신에..." "대신에?" "앞으로 사이엔 형이랑 아이렌이랑 사이좋게 지내줘." "하지만 시비는 걔네들이 먼저 거는걸!" "그러니까 지나친 애정표현은 좀 자제해 달라는 말이야. 그 때문에 자꾸 싸움나면, 나 진짜 누날 미워하게 될지도 몰라." "그... 그건..." "알았지? 자, 약속!" 내가 먼저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누나에게 내밀었다. "치이... 알았어." 누나는 내 말에 풀 죽은 모양이었지만 의외로 쉽게 동의했다. 어라? 그 독점욕 강하고 나한테라면 물불 가리지 않던 누나가 이렇게 간단하게 물 러서? 어쩐지 미심쩍은걸? 하여튼 이제 나도 슬슬 누나 다루는 법을 익혀가는 것 같다. 우하하핫. 내일 또 학교에서는 무슨 일이 있으려나... 제12화 : 절연(絶緣) 꿈을 꾸었다. 흑백(黑白)으로 점철된 지직거리는 세상. 비 내리는 어두운 교실. 선생님은 앞에서 뒤에서는 도통 보이지도 않는 깨알같은 글씨로 뭐라고 잔뜩 글씨를 적어내려가고 있고, 대부분의 학생 들은 수업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는 고개를 책상에 파묻은 채 졸고, 또 다른 학생들은 메모지에 글을 적어 돌리는 방법으로 다른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고, 또 다른 아이는 만화책을 교과서 사이에 꽂아 두고 킬킬거린다. 그 와중에 내 모습이 있었다. 반 학생들 중에 유일하게 앞머리가 눈을 덮을 정도로 긴 아이다. 학교의 두발검사는 꽤 엄격한 편이었지만 나에 대 해서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적용되지 않았다. 1학년 초에 걸어다니는 바리깡으로 악명높았던 생활지도 교사가 내 앞머리를 보고 화가 잔뜩 나서 앞머리를 사정없이 싹뚝 잘라 버린 다음 날. 그 선생은 학교에 영원히 나올 수 없게 되었다. "별로 널 위해서는 아냐." 문길이 녀석은 담담하게 말했었다. 하기야 여자애들 머리카락도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과감하게 짤라버리는 교사를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게다가 그 교사가 모 게임의 수위를 생각나게 할 정도로 변태틱하게 생겼다면 말이다. 그것 외에 녀석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학교의 모든 사람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석의 저주 때문이라고 믿었지만 본인은 인정도 부 인도 않은 채 노 코멘트로 일관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증거가 있을 리도 없는 일. 내가 쓰던 신화 야오이 팬픽 뺏아간 선생도 그 알 수 없는 저주 덕택에 한참을 시달린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그렇잖아도 나를 멀리하던 녀석 들이 그 사건 이후에는 내 근처에도 다가오지 않았다. 학교 내에서는 교사 급우를 불문하고 나를 피하고 꺼렸다. 물론 덕택에 건드리지 않아서 편하긴 했다. 단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덕택에 같이 놀 만한 녀석이 손문길 녀석 하나뿐이었다는 사실이겠지만. 그 교실에서 나는 그날도 무언가를 계속 쓰고 있었다. 그날은 뭘 쓰고 있었을까? 내가 지금까지 끄적거린 것이 워낙 많은지라 지금은 기억도 나 지 않는다. 내 팬픽 쓰기의 역사는 먼먼 유치원 시절까지 거슬러올라가니까. "헤에, 오늘은 누구 이야기?" 문길이 녀석은 내 옆자리에 있었다. 전교에서 그녀석과 같이 않는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핑클." "오오. 네가 여자 연예인 팬픽을 쓰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나!" "핑클 4대천왕에게 잡혀간 젝키 오빠들을 구하기 위해 해체된 H.O.T멤버들이 팀을 재결성하는 스펙타클 로맨틱 액션 판타지 대하 팬픽." "소속사가 안 맞는 것 같은데..." "그런거 필요없어. 그놈들은 우리 오빠들을 헐값에 부려먹는 악의 단체야." "....." 지금 생각해보니 이녀석도 참 왜 나같은 인간이랑 같이 다녀야 하는지 많이 의심했을 것 같다. 그래도 그건 모두 이 녀석 탓이지 내 탓은 아니 다 뭐. (아마도) 내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지가 해당 당사자한테 저주를 내리니까 그렇게 된 거지. 쳇. 그러고보면 내가 오히려 이 녀석땜에 피해를 보고 있는 건가? "엄마. 다녀왔어요." 집에 왔지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난 식탁에 있을 다 식은 저녁식사와 오늘도 늦는다는 쪽지를 무시하곤 하릴없이 내 방으로 들어와 방 한가득 쌓인 만화책을 한쪽으로 밀어넣고는 게임기를 켠다. 무관심(無關心) 때론 증오보다 더 참고 괴롭고 견딜 수 없는 것. 하지만 너무 익숙해져버린 혼자만의 생활.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 따윈 없어도 난 외롭지 않아. 그래도 재작년에 돌아가신 푸근하신 외할머니의 모습만은 도저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꾸고 있는 이 꿈은 나의 과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 이건 악몽인 걸까? 어두움으로 가득 찬 속에 빛바랜 흑백영상같은 끝없는 이미지가 쉴 새없이 떠올라 내 머릿속을 침식해왔다. 그 침식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다다랐을 무렵 나는 돌연 눈을 떴다. 아직 동이 채 떠오르지 않는 어둠으로 가득찬 새벽이었다. 별일이다. 아침잠많은 내가 이렇게 일찍 깨다니. 다시 잘려고 자리에 누웠지만 도저히 남은 잠을 잘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잠깐 산책이라도 할 생각으로 파자마 차림 그대로 방문을 나섰다. 어둠 속 거울에 내 모습이 흘끗 비쳤다. 그리고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지금가지 몇번이고 봤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느끼는 내 모습은 항상 적 응하기 힘들다. 어둡고 희미한 새벽빛에 파자마를 입은 아담한 사이즈의 내 모습은 졸린 표정과 더불어 푸른빛 색기로 가득찬 것이 내 자신도 황홀해질 정도였다. ...이러다 나 나르시스트 되는 거 아닐까 정말. 방문을 나섰다. 복도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집에는 누나가 깔린 마법트랩이 잔뜩 깔려있기 때문에 허가받지 않은 외부의 침입 자가 쳐들어 올 위험은 거의 없었다. 집사의 말에 의하면 지금까지 수면중에 나를 덮치겠다는 흑심을 품고 잠입한 남녀 침입자가 몇몇 잡히긴 했지만 그들은 내 방은 커녕 집 건물 안에도 들어올 수 없었다고 한다. 딱딱. 무슨 소리지? 한없이 고요한 어둠 속에서 희미한 소리의 한 가닥이 귀청을 노크했다. 소리는 다시 한번 들려왔다. 누굴까? 우리집의 철저한 보안 시스템 덕택에 침입자가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 집안 가족들이나 하인하녀들 중에 누군가라는 이야긴데... 나는 갑자기 궁금해 져서 소리가 난 곳을 향해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 희미했던 소리는 그곳으로 다가갈수록 조금씩 커져서 귓가를 간지럽혔다. 미로나 다름없는 거대한 저택 안을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 한 구석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근처까지 조심스럽게 걷고는 벽을 따라서 이동했다.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궁금했다. 혹시 어느 젊은 하인하녀가 서로 눈이 맞아서 저 방에서 꿍짝씬을 벌이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니... 으아아악! 왜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는 거야!? 이건 내 탓이 아냐! 나도 한때는 순진무구하고 티없이 맑은 소년이고 그게 내 본성이었다고! 슬프 게도 그건 이미 과거형이 되어 버렸지만... 이건 모두 내게 이상한 시디나 만화책들을 잔뜩 빌려준 그 놈 때문이다. 하아... 내 인생은 어딜가나 걔랑 연관이 되는구나. 뭐, 실제로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건 간에 한번 솟아나온 호기심을 억누르기는 어려운 법이다. 방 안에서 들리는 것은 물소리. 그리고 뭔 가 딱딱거리는 소리. 자세히 들어보니까 뭔가 잘리는 소리도 들린다. 그리고 닫힌 문틈사이로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 응?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얏! 또 베였네. 에잇. 히일! 어휴. 음식 한번 내 손으로 만들어보려다가 마법을 더 많이 쓰겠네. 응?" "누... 누나?" 그 방은 조리실이었다. 그 넓은 조리실 한가운데서 세이렌 누나는 마법으로 만든 환한 등불을 공중에 띄운 채 이것저것 음식재료를 가져다 놓고 요리하고 있었다. "어, 카이. 이시간에 웬 일..... 푸웁!" "세이 누나! 왜 그래? 어떻게 된 거야?" 누나는 민망스럽게도 코피를 철철 쏟으면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누나에게 달려가서 일으켜세웠다. "어떻게 된 거야? 정신차려 누나!" "오... 오..." "오?" "옷 좀... 챙겨입어." 나는 누나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져 내가 입은 파자마를 내려다보았다. 어느 사이엔가 단추가 하나 날아가서 파자마가 한쪽으로 흘러내려 한쪽 어깨가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그럼 방금 전 누나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은... 이제 됐다. 그런 거 상상하다간 내 자신이 이상해질 것 같아서 더 이상 상상하기 싫어. 나는 한 손으로 황급히 흘러내린 파자마를 끌어올렸다. 그제서야 누나는 비틀거리면서 내 다른 한쪽 손을 잡고 일어났다. 누나는 코피를 흘렸다는 사실이 창피하고 부끄러운듯 등을 돌리고 서서 마법 을 걸어 코피를 멈추게 했다. "으... 응. 이렇게 늦은 야밤에 웬일이야?" 누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반대편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비비 꼬고 있는 누나의 얼굴은 홍시처럼 붉게 변하지 않았을까 싶다. "누... 누나야말로 이런 밤중에 뭐 하는 거야?" "그... 그게..." 누나는 흘끔 아까전까지 재료를 썰고 있던 조리대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비뚤비뚤하게 썰려 있는 오이와 지운다고 지웠겠지만 그래도 살짝 재료 에 묻어 있는 핏빛이 그 과정의 파란만장함과 어려움을 보여 주는 듯 했다. "도시락... 싸 주고 싶어서..." "요리사더러 시키면... 되잖아? 그게 아니라면 마법으로 할 수도 있고..." "틀려." "뭐가?" "어떤 마법사라도... 아무리 신에 가까운 능력을 지닌 마법사라도... 오랫동안 쌓아온 경험과 기술에서 나오는 손끝에서 나오는 것 같은 훌륭한 물 건은 만들 수 없어. 그것이 음식이건... 검이건... 공예품이건 간에 말이야." 그래.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이지만 원하는 모든 일을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새삼스럽게 난 놀랐다. 워낙 누나의 마법은 대단한지라 이세상에서 못하는 일이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누난 대신에 강력한 마법이 있잖아.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그렇게... 생각해?" 너무나도 수줍게 더듬거리며 말하는 누나. 새삼 누나에게 저런 면이 있었을까 놀랄 정도다. 이 세상에서 저런 누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뿐이겠지. 나, 복받은 걸까나? "하지만 난 그래도 카이 너에게 내가 직접 만든 도시락을 먹여주고 싶어. 모양도... 비뚤비뚤하고... 맛도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정성을 담아서." "분명 맛있을거라 생각해. 왜냐하면 다름아닌 누나가 만든 거니까..." "카이..." 잠이 덜 깬 걸까? 아니면 아직도 난 꿈 속에 있는 걸까? 어두운 밤이 가져다주는 신비한 매력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면 역시 달라진 외모와 주 변환경에 맞춰서 성격까지 변해가는 것일까? 나, 지금. 원래대로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못할 닭살 대사를 줄줄줄 읖어나가고 있잖아!? 안돼. 안돼. 이거 위험하잖아? 갑자기 이상한 생각 들어버리면 안되는데... 김상우 군. 아니 카이엔 브리타뉴. 상대는 지금 네 누나란 말야! "카이!" 내게 등을 돌리고 서 있던 누나가 갑자기 홱 돌아섰다. 그리고 당장에라도 나를 껴안을 듯이 내게 달려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결정해 버렸다. 누 나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부터는 단순히 내 주위의 흐름에 맞춰 흘러가는대로 살지는 않을거야. 나는 내게 격렬하게 다가오는 누나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카... 카이?" 깜짝 놀란 듯히 머리를 잡힌 채 나를 올려다보는 누나의 모습. 나는 누나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누나의 이마에 살짝 입을 갖다 맞추었다. "고마워. 누나. 하지만 여기까지야. 미안." 그리고는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그대로 조리실을 뛰쳐나왔다. 누나는 뭐라고 할까? 화낼까? 아니면 아쉬워할까? 아니면 슬퍼하고 있을까? 그렇 지 않았다면 내가 정말 말도 안돼는 엄청난 오해를 해 버린 걸까?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선택을 해 버렸다. 나 자신의 의지로. 언젠가는 누나가 원하는 대로 될 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내가 나아갈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어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기에는 나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의 마음에 일일히 응답해 주지는 못하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절대로 내가 자라난 세계로는 돌아가지 않아.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는 사랑과 관심을 바라는 법이니까. 각막한 현실을 살아가면서, 학교 급우들과 유리(遊離)된 삶을 살아가면서 오랫동안 필 요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었는데... 막상 그것을 얻고 나니까 절대로 손에서 놓고 싶지 않다. 나는... 이곳에서 살아갈테야. 앞으로는 절대, 꿈에서라도 내가 떠나온 곳을 뒤돌아보지 않겠어.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내가 주인공이라는 마음 으로, 좀더 자신 있게 이 세상을 살아나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떠나온 세계와의 연(緣)을 완전히 끊었다. 제13화 : 괴도 시르팡 그날 아침은 언제나와 다름없이 시끌벅적했다. 다만 세이렌 누나가 아침식사 시간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긴장감이 파르르 넘치는 분위기 대신 아옹다옹하는 다툼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 는데, 그건 보통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이 주도하던 전면전이 사이엔 형과 아이렌간의 티격태격거리는 국지전 형태의 전쟁으로 옮겨갔기 때문 이었다. 그것도 매우 유치했다. "카이엔 오빠에겐 내가 밥 먹여줄거야!" "무슨 소리냐! 호랑이 없는 정글에는 여우가 왕초인 법! 카이엔은 내가 돌본다!" 사이엔 형... 평소에 바락바락 대들긴 하지만 역시 세이렌 누나의 카리스마에는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긴 인정하는구나. 하지만 사이엔 형은 좀 반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좋을텐데 말이야. 형은 남정네가 밥 먹여주겠다고 설치면 기분 좋겠수? 하긴 내가 먹여주면 황홀해할지도... 쿠엑. 어쨌건 밥 먹을 때 싸우는 사람 옆에 있으면 파편이 튀는 일이 잦기 때문에 나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레이엔과 식사를 같이 했다. 사랑과 관심은 소중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때로 지나치면 피해를 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스토킹은 범죄잖아? "카이엔 형. 좀 피곤하지?" "어."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아이렌은 언젠가는 내 것이 될테니까." "확신할 수 있어? 아이렌은 넌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던데..." "대륙 7대 예언가의 이름을 걸고 말하건데, 아이렌은 내 반려가 될거야." 헉, 맞아. 그러고보니 레이엔 녀석. 점성가, 그러니까 예언가였지? 그래서 아이렌이 나만 졸졸 따라붙는데도 전혀 초조함 없이 저렇게 여유만만하 구나. "하지만 그 예언이라는거, 본인이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이루어지는거야?" 난 운명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구속이라는 굴레에 묶인 숙명이라는 낱말은 더더욱 싫어하고. 레이엔이 저렇게 자신하고 있지만서도 아 무것도 하지 않고 아이렌이 마음을 돌릴 수는 없잖아? "음... 그건 아냐. 예언이라는 건 말야, 형. 눈앞에 뻗은 길 끝에 있는 목적지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거지. 만약에 그 목적지를 안다고 해도 자신이 가던 길을 계속 가지 않고 멈춰서거나, 다른 길로 빠진다면 그 예언은 더 이상 실현될 수 없어. 사람들이 예언을 알고 싶어하는 것은 단 순히 미래를 알고자 하는 목적만은 아냐.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도 예언은 필요한 거지." "그럼 아이렌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거네?" "물론이지. 계속 하고 있어. 두고봐. 언젠가는 카이엔 형보다 훨씬 더 멋진 꽃미남이 되어 아이렌의 마음을 돌릴 테니까." 레이엔은 스스로 다짐하면서 포크에 고기를 꾹 눌러 찍었다. 후훗.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보다 더 매력적인 미소년이 되는 건 힘들껄? 거울을 볼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난 내가 내 얼굴을 직접 볼 수 없다는 것을 엄청난 다행으로 생각한다. 거울을 볼 때마다, 아니면 분수나 세숫대야에 비 친 내 얼굴을 볼때면 가끔씩 멍해져서 넋을 잃고 있기도 한다. 어쩌면 그리스 신화에 나온 나르시스처럼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까지 든다니까 정말. 그때 갑자기 서로 무슨 작당을 했는지 아이렌과 사이엔 형이 갑자기 내 쪽으로 달려와서는 각각 내게 가지고 온 음식을 내밀었다. "자, 사랑하는 동생아. 이 형의 마음이 가득 담긴 고기를 먹어 다오." "카이 오빠에게 무슨 짓이야, 사이 오빠! 그런 몸에 나쁜 육류를 함부로 먹였다가 혹여나 저 아름다운 자태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책임질꺼야? 카이 오빠. 저 능글맞은 떨거지는 무시하고 여기 내가 가져온 딸기 좀 먹어봐. 응?" 우쒸. 밥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던데 자꾸 귀찮게 굴거야? 게다가 무엇보다 그렇게 열을 내면서 떠들어대면 음식에 뭐가 튀잖아! 조금 성질을 내려고 자릴 박차고 일어서려던 참에 집사가 들어와서는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카이엔 도련님. 세이렌 아가씨께서 이걸 전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집사가 가지고 들어온 것은 빨간 보자기였다. 아, 맞어. 어제 누나는 밤새도록 날 위해 요리도 할 줄 모르면서 열심히 도시락을 만들었지. 솔직히 맛이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열심인 누나의 마음을 외면할 수는 없다. "알았어. 책가방과 같이 놔둬. 학교 갈 때 들고갈 테니까." "헤. 저거 도시락이네? 그것도 세이 누나가 직접 만든. 맞지 형? 레이엔은 척 보면 척이라는 듯 보고 말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먹던 밥을 계속 먹었다. 그리고 사이엔 형은 무릎을 꿇고 분한 듯 외쳤고 아이렌은 뾰로통해져서는 입이 툭 튀어나왔다. "젠장... 누님은 항상 나를 한 발짝 앞서가는군! 좋아, 내일부턴 나도 카이엔을 위해 도시락을 싸 주겠어!" 어이. 형. 제발 그건 좀 관두는 게 어때? 형도 어차피 음식같은 거 제대로 만들 줄 모르잖아? 린넬 녀석 정도의 요리 실력이 되면 상관없지만 같 은 서투른 요리를 먹을 때 남자라면 남자가 만든 요리와 여자가 만든 요리 중 어느 걸 먹고 싶겠어? "피이. 세이 언니가 만든 요리 따윈 안 봐도 뻔하지. 그게 어디 사람이 먹을만하겠어?" 아이렌은 화가 난 건지, 삐진 건지 귀엽게 툴툴댔다. 세이렌 누날 평가절하하고는 있었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분한 모양이었다. "아야." 갑자기 오른쪽 귀가 아파왔다. 아무래도 귀에 달린 귀걸이 같은데... 어떻게 된 거지? 내가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오른쪽 귓가를 만지자 어떤 영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뭐, 뭐야, 이건?" "내 예지의 귀걸이가 작동하나 보네 형. 그냥 조용히 눈을 감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상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돼." 으흠. 눈을 감으면 미래에 일어날 일이 보인다 그거지? 나는 레이엔이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떠오르는 영상에 정신을 집중했다. "뭐가 보여, 형?" "검은 옷... 가면을 쓴 남자... 아, 나는 그 사람과 같이 있어. 그리고 노란색 꽃인데... 무슨 꽃인지 잘 모르겠어? 뭐? 노란 수선화의 예고장이라 고..? 넌 대체..." 쾅! "뭐얏!" "노란 수선화의 예고장!?" 식탁이 쾅 울리는 소리에 난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식탁을 친 장본인은 바로 사이엔 형이었다. 사이엔 형은 생긴 거에 걸맞게 좀 품위있는 모 습을 보여주면 멋있을 것 같은데 어째 나 앞에만 오면 바보열혈이 되는지 잘 모르겠다. 반면에 아이렌은 기대되는 것이 있는 듯 눈동자에 초롱초롱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유명한... 괴도 시르팡 님?" "시르팡?" 괴도 시르팡이라니, 뭐 하는 인간이냐? 방금 내가 영상에서 본 사람인가? 가면을 썼기 때문에 얼굴을 알아 볼 수는 없었지만 예고장을 던지는 타입이라니 꽤나 자신의 기술에 자신을 갖고 있는 녀석인 것 같다. "나, 기대되는 걸. 그 유명한 시르팡 님을 직접 볼 수 있다니 말야. 그렇지 않아, 오빠?" "이래서 애들이란. 카이엔. 그놈이 우리집에서 뭘 훔쳐가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니 신변은 확실히 내가 보장하마. 아무 걱정 말거라." 아이렌과 사이엔 형의 말이 엇갈리면서 다시 둘은 눈을 부라리고 서로를 쏘아보았다. 그때 레이엔이 식사를 완전히 끝내고 물을 들이키면서 이 야기했다. "글쎄. 우리 집에서 괴도 시르팡이 훔칠 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은 하나밖에 없지." "뭔데?" "뭐야?" "그건 바로 카이엔 브리타뉴 형 뿐이야." "뭐얏!" "그건 절대 안돼!" "오빠만은 정령왕들을 몽땅 소환해내는 한이 있더라도 지키겠어!" 어이, 어이. 아직 그 예고장이라는 건 아직 오지도 않았다고. 물론 레이엔의 예지의 귀걸이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섣불리 판단하기에는 이르지 않아? "왜냐하면 카이엔 형은 절대마력반지와 기혈환 등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귀한 마법무구들을 잔뜩 갖고 있으니, 그걸 얻으려면 카이엔 형을 노 리는 것은 당연... "좋아! 집안의 경계태세를 잔뜩 강화한다!" "바람의 정령들아, 물의 정령들아, 흙의 정령들아. 집 주위를 샅샅히 지키고 서서 혹시 이방인이 들어오지는 않는지 감시해서 내게 알려주렴." 레이엔이 말을 이어갔지만 사이엔 형도, 아이렌도 레이엔의 말은 전혀 듣지 않는 듯 했다. 그때 다시 우리 집사가 밖에서 꽃다발을 가지고 들어 왔다. 앗, 저것은! 내가 예언의 귀걸이를 통해 봤던 노란 수선화!? "집사, 그거 위험한 물건이야! 나한테 먼저 한번 줘봐!" 사이엔 형이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집사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사이엔 도련님. 이건 카이엔 도련님께 편지와 함께 온 물건입니다. 아무리 형이라고 하셔도 마음대로 동생분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은..." "그것보다는 카이엔의 안전이 먼저야!" "맞아요! 아무리 시르팡 님의 편지라지만 오빠에게만은 절대로 해를 끼칠 수 없어요!" 후우. 왜 다들 이렇게 시끄럽게 반응하는지. 저게 폭탄 메일이라도 되는 줄 아나? 나는 한번 확인을 해보기로 했다. "레이엔, 저 꽃다발이랑 편지 위험해?" "아니, 전혀. 그냥 평범한 꽃이랑 편지야." 자꾸 달라붙어 꽃다발과 편지를 뺏으려는 사이엔 형과 아이렌에 맞서 간신히 그들을 제지하고 있던 집사는 레이엔의 말을 듣자마자 재빨리 몸을 빼내 내게 꽃다발과 편지를 건넸다. "흠흠. 대륙 7대 점성가이자 예언가이신 레이엔 도련님께서 말씀하신 일이니 틀림없겠지요. 자, 카이엔 도련님. 여기 꽃다발과 편지가 있습니다." 정말 물건 하나 받기도 힘들군. 오래간만에 맡는 꽃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하지만 한가롭게 꽃이나 감상하는 건 편지부터 뜯어본 후로 미루는 게 좋겠지. 그런데 어째 편지 겉봉에 하트 무늬가 붙어 있는 게 왜 이렇게 찝찝할까나. <<<<< 사랑하는 카이엔 브리타뉴에게. 오늘 밤 자정에 당신을 훔치러 찾아가겠습니다. 그대를 격렬히 사모하는 시르팡. 룬. 와크레이. >>>>> "역시 내 말대로지?" 점점 변해가는 내 표정을 보면서 레이엔은 자신의 예언이 옳았다는 것을 당연한 듯이 확인했고 사이엔 형과 아이렌은 궁금증에 당장이라도 내 편지를 뺏을 듯한 분위기다. "무슨 일이냐, 카이엔!" "오빠... 설마?" "저기... 아이렌. 시르팡은... 남자야?" "에? 아... 아마도 그럴 거야." 나는 눈을 감으며 아까 전에 보았던 시르팡의 영상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하지만 눈으로 들어오지 않고 머릿속으로만 맴돌았던 영상과 음성은 마치 구겨진 테이프를 재생하기라도 하듯 불투명했고 많은 부분이 끊겨 있었다. 쿠엑. 정말 저 편지의 주인공이 남자라고는 상상하고 싶지 않아 앗! 뭐, 주변에 날 좋아하는 남정네들이 원체 많기는 하지만 저 글은 거의 연애편지 수준이잖아! "그놈이... 감히 카이엔을 노리다니..." "저도 시르팡 님을 평소에 좋아하긴 했지만 이번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절 모습을 보니 의외로 사이엔 형과 아이렌도 죽이 꽤 맞는 걸지도? 음... 하지만 두 사람을 옆에 붙여놓으면 아무리 봐도 변태청년과 로리꼬마 애다. 우선 원조교제성 짙은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나는 좀 더 현실적인 걱정을 해 볼 필요를 느꼈다. "시르팡이 얼마나 유명한 괴도인지는 난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별로 걱정은 안돼. 나에겐 많은 마법무구들이 있고. 나를 지켜주겠다는 우리 가족 들을 믿으니까. 게다가 그보다는 먼저 생각해봐야 할 일이 있지 않아?" "그게 뭐야, 오빠?" "이 일. 세이 누나는 모르고 있는 편이 좋겠지?" 아이렌과 사이엔 형은 물론 레이엔과 집사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하고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이 일 때문에 시끄러운데 가장 강력한 파괴력 을 가진 누나마저 합세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 지 예측할 수 없으니까. 사이엔 형도, 아이렌도 못내 불안해했지만 나는 학교 등교를 강행했다. 뭐, 내 몸에 덕지덕지 붙은 마법무구들을 믿는 탓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세이렌 누나에게는 이 일이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짧은 경험이지만 누나가 한번 일을 저지르면 정말 걷잡을 수 없고 일일히 내가 가라앉혀 야만 조용해지므로 정말정말 피곤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도시락까지 싸줬는데 학교를 안가버리면 또 나름대로 뒤집어엎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여간 그래서 이왕 학교에 온 김에 괴도 시르팡에 대해서 여러가지 좀 알아보기로 했다. "카이엔! 정말 새사람 됐구나! 지금 며칠째 학교에 연속 등교하는 거야?" "까야∼ 오늘도 카이엔 님이 등교했다! 요즘 너무 행복해애∼" 언제나와 별 다를바 없는 일상의 소리. 며칠 학교에 나왔다고 이러는지는 몰라도 이젠 슬슬 무감각해진다. 하지만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아직 적 응되지 않는 장면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했다. 교실 내 책상에... 웬 선물이 가득 쌓여 산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에엑? 저건 그 만화 책에서나 볼수 있던 전설의 광경이 아니였나? 근데 진짜로 선물이 쌓이다 못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가 교실에 들어서자 린넬 녀석이 재빨리 달려와서는 칭얼댔다. "아, 카이엔 왔구나. 이건 좀 빨리 치워 줘. 내 자리까지 잔뜩 튀어나와 있어서 곤란하다구." "아, 알았어. 근데 저 선물들은 왠 거야?" "아, 몰라? 내일은 사랑의 신 파라브나 여신의 날이거든. 보통 청춘 남녀가 사랑의 고백을 하는 날이야. 근데 내일은 학교 휴일이라서 저렇게 다 들 미리 선물을 준비해 놓은거지. 니가 왔으니 다들 대쉬하면서 선물 주려고 할껄?" 문득 시르팡이 보낸 편지 내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자식, 분명 오늘 자정에 온다고 했지? 편지 내용도 그렇고... 그렇다면... 우어우어우어. "자, 이건 내가 네게 주는 선물... 어, 카이엔, 어딜 가!?" 난 패닉 상태에 빠져 린넬이 내게 무슨 말을 하면서 주려던 선물을 외면하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그건 더 엄청난 실수라는 것을 곧 깨달아야만 했다. 나를 발견한 수많은 학생들이 내 쪽으로 대쉬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카이엔 님 싸랑해요오∼" "카이 오빠, 내 마음을 받아주세요!" 후에엑! 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지? 갑자기 떼거지로 몰려들다니... 나는 불현듯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냅다 튀었다. 아무리 전설의 마법무구 들이라 할지라도 저 여학생(남학생도 일부 섞여 있음)들의 개떼러쉬에는 당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와아아아악! 사람 살려어!" 헉, 반대편에서도 애들이 손에손에 선물 보따리를 쥐고 몰려온다. 아무리 내가 인기인이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평소에는 학생들끼리 어떤 규율이 있어 자율적으로 아무나 내게 접근해 오는 것을 제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만은 그런 규율이고 나발이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멈춰! 고귀한 카이엔 님께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는 오직 나 피요르..." 콰직. 저 앞에서 피요르가 학생들을 저지하기 위해 온 몸을 바쳐 막아섰지만 그들은... 잔인하게도 피요르 공주를 밟고 지나갔다. 무서운 것들. 나는 양 쪽에서 쏟아들어져오는 애들 때문에 갈 길이 막히자 할수 없이 학교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뭐, 2층에서 뛰어내렸으니까 별로 다친 곳도 없이 사뿐히 착륙했다. 콰콰쾅! 어랏! 갑자기 웬 폭발음이 나지? 뒤를 돌아보자 내가 뛰어내린 자리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솟아오르고 있었다. "피요르 공주님의 옥체에 감히 손상을 입히다니, 용서하지 않겠다앗!" 이 사명감 넘치는 목소리는... 파 어쩌구 하는 피요르 공주의 호위이자 대륙 7대 그랜드 소드 마스터 녀석? 맞아. 애들이 피요르 공주를 밟고 지 나가니까 열받아 버렸군. 이틈에 나는 재빨리 달려서 다시 원래의 내 교실로 돌아왔다. 내가 있는 교실은 나로 인한 불상사를 막기 위해 등교시 간부터 하교시간까지 루프(loop) 마법이 쳐져 있어 우리 반 학생들과 교사들 빼고 용건이 없는 사람은 들어오지 못한다. 후아. 후아. 그나저나 열 심히 달린다고 엄청 힘들었다. 근데 내가 들어왔는데도 의외로 다른 애들 반응이 별로 없다? 반 급우들 전체가 한곳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린넬 녀석이 있 는데... 갑자기 만인의 아이돌이 나에서 녀석으로 교체됐을 리는 없고... 난 저 가운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확인하기 위해 책상 위에 올라 갔다. 헉... 저건! 끄아아악! 린넬이 들고 있는 저건 시르팡에게서 받은 예고장이잖아아아아앗! 아까 뛰어나올 때 깜빡 잊고 흘린 모양이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큰일이다. 아니 애초부터 저런 걸 품에 넣고 다닌 내가 잘못이지 흑흑. 내가 왜 그랬을까? "까아! 시르팡 출현이다! 나 보러 갈래! 보러 갈래!" "오옷, 빨리 왕립경찰청 시르팡 담당 형사인 아버지께 알려야겠군!" "카이엔! 오늘은 너네 집에서 밤을 샌다!" "나도!" "나두 끼워줘!"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잖아, 너네들! 할 수 없지. 원체 충격이 큰 지라 이 방법은 안 쓰려고 했는데. "후우. 우리 누나가 꽤나 좋아하겠구만 그랴. 얼마든지 와라." "헉, 맞아, 그 마녀의 존재를 잊고 있었어!"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내 동생 생일이야. 아쉽지만 못 가겠네. 시르팡 님의 모습을 꼭 보고 싶었는데." "가고 싶은데... 가고 싶은데... 하지만 너무 무서워." 생각보다 너무 효과가 좋아서 내가 놀랄 지경이었다. 울 누나가 이렇게까지 애덜한테 공포스러운 존재로 인식이 되고 있었나? 하기야 누난 내가 있어도 자주 발칵 폭주하곤 하는데 내가 없는 곳에서는 어떤 행동을 할 지 알 수가 없다. 그런 고로 오늘 밤에 시르팡이 온다는 정보는 온 동네에 다 까발려진 거나 다름없군. 누나 귀에는 어떻게든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건 불가능하겠지? 일단은 우선 시르팡이 누구인가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시르팡. 룬. 와크레이. 성별 불명. 나이 불명. 출신지 불명. 3년 전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정체불명의 괴도로 그 자신의 인적사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다. 항상 왕족이나 귀족, 또는 부자의 아주 값비싼 보물만 노리며, 범행 전에 반드시 노란 수선화와 함께 예고 편지를 보낸다. 지금까지 그의 도둑질 성공률은 100%. 총 25번의 도둑질 을 시작해서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름높은 도둑 길드와 마법사들이 그를 잡기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 대륙에 많은 팬을 거느 리고 있었다. 그가 때때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준 것도 이유이지만 경찰들에게 잡힐 듯 말듯 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는 그의 활약. 그 러면서도 항상 여유와 세련된 매너를 가지고 행동하는 활약이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킨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나는 간단하게 결론지었다. '젠장. 혹 하나 더 붙었다.' 원래 나라는 존재가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세상에 수많은 스캔들을 일으킨다. 그런데다 가족들이 전부 대륙 7대 어쩌구가 붙으니까 매일 같이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 와중에 또 이런 대형 사건이 터지다니... 그래도 난 사건을 낙관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대단한 괴도라고 해도 내 주변의 짱짱한 가족들을 뚫고 나를 납치해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치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화려한 그의 경력에 한 줄기 오점이 남을 거리고 난 100%확신하고 있었다. "자, 자, 수업을 시작하겠다. 다들 앉도록 하게." 앗, 어느 새 수업 시작 시간이 다 되 버렸다. 모여있던 급우들은 각자 자기 자리로 하나둘씩 되돌아갔다. 하지만 내가 돌아갈 자리에는 대책없이 쌓여있는 선물들... [저거 치워 줄까?] 희미한 모습으로 미소짓는 여인이 내 목걸이에서 빠져나와 날 빙그르르 감싸며 말했다. "아, 미안하지만 부탁해. 시르케이안." [별 말을. 아이렌의 부탁인데다 카이엔을 위한 일이니까.] 곧이어 조그만 소용돌이같은 바람이 불더니 내 책상을 주위로 난잡하게 쌓여 있던 선물들을 차곡차곡 교실 뒤편에다가 쌓았다. 그리고 내 자리 로 들어가려고 하니 왠걸? 수업을 시작하려는 선생님을 비롯해서 모든 급우들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브... 브리타뉴 군... 그... 그분은?" "바람의 정령왕, 시르케이안 님!?" "세상에, 그런 분을 제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니!?" 왜... 왜들 그러지? 난 그냥 아이렌이 불안해서 내게 감시를 붙여야겠다면서 가볍게 시르케이안이라는 바람의 정령을 소환해 목걸이에 넣어 주길 래 그런가 하고 그냥 왔는데... 근데 뭐? 정령왕? "시르케이안, 너 정령왕이었어?" [아라, 들켜버렸네? 그럼 무슨 일 생기면 또 불러, 귀여운 내 카이엔∼♡] 내 주위를 뱅뱅 맴돌던 시르케이안은 내 뺨에 살짝 입을 맞추더니 다시 정령왕의 목걸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령한테서 뽀뽀받는다는 거. 꽤 나 이상한 느낌이다. 나는 뺨을 살살 문지르면서 상황을 보았는데... 이번에는 각각 반응이 달랐다. "그... 그래, 분명 카이엔 님의 가문에는 대륙 7대 정령사의 반열에 이름을 올린 꼬마아이가 있다고..." 세이렌 누나의 존재감이 워낙 컸던 모양인지 상대적으로 아이렌의 존재감은 덜했던 모양이다. "브... 브리타뉴 군. 자넨 분명 드래곤에게도 총애받겠군." 선생님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칭찬인지 비꼼인지 알 수 없는 한 마디를 건넸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반응은 벙찜과 분노 두 갈래로 나눠져 있었다. "우오오오오오! 비록 뺨이지만 카이에게 키스하다니 아무리 정령왕이라도 용서할 수 없어!" 린넬 케이준 군. 자네가 왜 열을 내는 건가? 설마 진짜로 정령왕이랑 맞짱 뜨자고 덤비는 건 아니겠지? "하아, 부럽다. 내가 정령왕이었으면..." "누가 아니래." "흠. 흠. 그럼 이제 다들 수업에 집중하도록 하게."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수업을 할 의욕이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 듯 했다. 그리하야 점심 시간이 왔다. 나는 어느새 전교의 도시락을 모조리 시식하여 검증된 도시락을 가져온 시식평가단의 성의를 사양하고 누나가 새벽 에 싼 도시락을 꺼냈다. 도시락을 어떻게 만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먹지 않으면 누난 화내겠지? 하지만 도시락을 여는 순간 밤늦게까지 손가락을 수십번씩 베이며 도시락을 만들었을 누나의 정성에 대한 배려고 감사고 하는 마음은 깨끗하게 하늘 저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그야말로 아이렌이 아침에 비꼬았던 말 그대로였다. [그게 어디 사람이 먹을 만하겠어?] 다른 친구들도 나와 같은 생각인 듯 했다. "우욱. 심하다 이건. 너네 누나같으면 차라리 그냥 마법으로 자동요리시키는 편이 훨씬 더 나았을 텐데..." 짧은 시간이지만 시대의 흐름과 압력의 무게를 한눈에 보여주는 지층밥. 잘린 모양이 가지런하지 못한 건 둘째치고 냄새마저 묘한 반찬들. 탄 건 지 설익은 건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고기들. 이걸 먹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암만 생각해도 먹었다간 어제처럼 또 양호실 신세를 질 거라는 예감이 팍팍 들었다. "시식평가단 동지들." "왜, 카이엔?" 치즈와 두 남자녀석(사실은 아직 이름을 모른다)이 내가 부르자 쪼르르 다가와서 내 옆에 섰다. "이것좀 한번 먹고 평가해주게나." 그들은 누나의 도시락을 보고 기겁을 하는 모양이었지만 내가 간절히 부탁하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자 치즈의 마음이 움직였다. "이것 봐. 뭘 망설이고 있는거야? 우뉴, 이멜츠! 우리의 임무는 카이엔을 위해 카이엔에게 가는 모든 도시락을 직접 시식해서 평가해주는 거잖 아?" 하지만 우뉴와 이멜츠라는 두 남정네는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좀... 겉만 봐도 뻔하잖아!"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하지. 통계적인 자료를 감안해볼 때 이정도로 음식 상태가 개판일 경우에 맛도 최악일 가능성을 따져 보자면..." "잔말말고 먹엇!" 결국 그들은 시식평가단의 보스인 치즈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는 듯 할수 없이 우리 누나의 도시락을 조금 먹었다. 그리고 그들은 즉시 양호실 로 실려가서 온종일 병원 신세를 졌다. 누나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역시 누나의 밥은 위험하기 그지 없다. 담부턴 왠만하면 좋은 말로 거 절해야지. 그리고 나는 린넬 케이준 녀석이 가지고 온 도시락을 오늘 점심으로 먹었다. 오늘도 하트 모양으로 밥을 수놓은 도시락을 먹으며 찜짐한 기분을 느끼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치즈도 이게 가장 맛있다고 격찬을 했고 실제로도 이게 젤 맛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밤이 왔다. 평소라면 집 안만 시끄러웠을 테지만 오늘만은 집 밖도 이래저래 시끄러웠다. 시르팡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왕창 퍼졌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세이 렌 누나의 귀에도 들어갔고 누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불타올랐다. 그렇잖아도 누나는 조금 연한 붉은 머리색깔이 길게 늘어져 그냥 보기만 해 도 다혈질적인 느낌을 주는데 걸핏하면 이렇게 폭주모드로 돌변하니 과연 누가 데려가려나... 난 아냐! 절대 아냐! 심리적으로는 물론 남남이지만 그래도 이곳 사회에서는 남매로 이어져 있는데 어떻게 그러겠냐? 물론 계속 누나가 날 유혹 해온다면 하룻밤 정도는 자 줄 수도... 가 아니잖았! 으으... 아무리 순수의 이미지로 가득찬 절세미소년이니 어쩌니 해도 결국 소년(少年)이란 남 성인 것을. 현실적으로도 누나와 살면 심장 덜컹거릴 일이 많아서 제 명에 못 살 거야 분명. 아니, 내가 이런 미소년으로 태어난 사실부터가 천 수(天壽)를 제대로 누리지 못할 운명일지도 모른다. 거, 미인박명이라고들 하잖아? 그런 고로 누나가 집을 둘러싸고 완전히 겹겹으로 배리어를 쳐 놓는 바람에 달려온 각지의 취재진 및 왕립경찰들, 기타 구경꾼들은 집 대문 안 으로는 한 발짝도 들어오지 못한 채 밖에서 진을 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집 안도 여유로왔던 것은 아니다. 사이엔 형은 주변에서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기사들을 긁어모아 집안 곳곳에 박아두었고, 아이렌도 정령들을 닦달해서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게 했다. 반면에 이상할 정도로 무사태평한 사람도 있었다. 가만히 서고에 앉아서 [세계의 유명괴도들 -고대편-]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 레이엔은 둘째치더 라도 집사는 평소처럼 하인들을 부릴 뿐이었고 왕궁에 가 있는 아빠 엄마도 소식을 분명 들었을 텐데 집에 들어올 기미는커녕 연락조차 없었다. 우리 가족들을 믿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단지 무책임한 걸까? 지금 나는 집안 거실에서 초조한 기분으로 앉아 있다. 나를 정면으로 마주본 곳에는 세이렌 누나가 긴장한 기색으로 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누... 누나. 그렇게 쳐다보면 부끄럽잖아? 하지만 오늘의 누나는 평소처럼 단지 야릇한 눈빛으로 쳐다보지 않고 뭔가 확실한 사명감에 찬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앉은 소파 뒤에 언제라도 검을 꺼낼 수 있는 자세로 서 있는 사이엔 형의 눈초리도 못내 매서워 보였다. 심지어 내 옆에 같 이 앉아 있는 꼬맹이 아이렌조차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단지 태평스러운것은 여전히 서고에서 꺼내온 [세계의 유명괴도들 -현대편-]을 읽고 있 는 레이엔뿐이었다. "레이엔, 네 예지력으로 괴도의 행동을 알 수 없어?" "없어." "왜?" 대륙 7대 점성가이자 예언가라면서? 혹시 사기는 아니겠지? "두 가지 문제가 있거든. 첫째는 괴도 시르팡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 성좌와 연관된 생년월일, 풍수와 연관된 출생장소는 물론이고 성별이나 이름조차도 불명이니 아무것도 예지할 수 없어." "시르팡이라는 이름은..." "장담하건데 가명이야. 그리고 둘째 문제는 형이 무마력증이라는 것. 마력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성좌의 지배도, 풍수의 지배도 받지 않거든? 게 다가 신의 궤도에서도 어느 정도 일탈된 존재기 때문에 그 미래의 영역을 전혀 읽을 수 없어." "그럼 이 예지의 귀걸이는 뭐야?" "음... 그러니까, 그걸 극복해보기 위해 사력을 다해 만든 내 하나의 시험(試驗)이지. 하지만 형도 봤다시피 형 본인에게만, 그것도 꿈처럼 몽롱하 게 제한적으로만 미래의 영상을 가끔 볼 수 있을 뿐이야. 형이나 누나가 준 마법무구들에 비하면 별로 보잘 것 없는 편이지. 뭐." 결국은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이군. "하지만..." "아무것도 아냐." 레이엔은 말을 흐리면서 뭔가를 말하려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곧바로 부정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거지? "비밀이야?" "응. 비이밀!" 그러면 할말이 없잖냐. 무슨 일인지 알고 싶은데에... 내가 이 몸에 빙의하기 이전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가족들 각자가 모두 나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생각을 했을 때 귀가 아파오면서... 눈앞에 무언가가... 보였다. 하지만 너무 빨리 지나가 서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뭐지...?" "시간이 됐어." 그때 아이렌이 시계를 보면서 말했다. 벽에 걸린 괘종시계의 바늘은 자정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세이 누나와 사이 형도 더 긴장하는 듯했 다. 그리고... 드디어 초침이 임계선을 넘어갔고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뎅∼ 뎅∼ 아직인가? 아니면 서로의 시계가 약간의 격차를 보이는 건 아니겠지. 평소라면 벌써 잠들었을 시간이지만 잔뜩 분비된 아드레날린이 몸 안을 휘 젓고 돌아다니고 있어서 잠은 전혀 오지 않았다. 창문쪽을 바라보니 집 안팏으로 불빛이 잔뜩 있었다. 저 밖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쯤 아마 애가 타겠지? 자리에 오래 앉아 있어서 몸도 뻐근한 데다 조금 긴장을 풀려고 나는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본 형이 말했다. "아직 안심할 수는 없다. 카이엔." "그런 건 알아. 가만히 앉아 있으니까 답답해서." 그때 자정이 넘기까지 가만히 책만 읽고 있던 레이엔이 중얼거렸다. "카이 형과 시르팡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예지할 수 없다고 했지. 하지만 주변인물을 예지하는 방법으로 어느 정도 알 수는 있어."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 그러고보니 그렇네. 세이렌 누나나 사이엔 형의 미래를 엿본다면 간접적으로나마 시르팡이 실패할지 성공할지 짐작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 데 왜 지금까지 레이엔은 그 말을 전혀 하지 않았을까? 세이렌 누나, 사이엔 형, 아이렌도 모두 레이엔의 다음 말을 귀담아 듣고 있었다. "절대적인 강함은 자연스럽게 오만을 불러오지. 그 틈새를 파고들어오는 상대방은 그 약점을 파고드는데 있어 최고수야. 호흡이 맞지 않는 동지 는 효율을 떨어뜨릴 뿐더러 서로가 서로를 공격할 뿐..." 레이엔의 말은 난데없이 뜬구름을 잡는 듯했다. 하지만 저 비관적인 말들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해 보였다. 시르팡은 성공하고 내 가족들은 실패 한다. 모두들 잠깐 머리를 굴린 끝에 레이엔의 말을 이해했을 무렵. 갑자기 불이 꺼졌다. "왓! 뭐야. 왜 갑자기 불이 나갔지?" "말도 안돼! 내 라이트 마법이 왜 듣지 않는 거지?" "카이 오빤 어딨어? 최우선 확인 대상이야!" "카이엔! 대답해!" 그들의 목소리는 명확하게 내 귓가에 들려왔다. 하지만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알 수 없는 거친 손길이 내 입 을 틀어막았다. 그 손에서는 희미한 박하향이 났다. 그리고 내 귓가로 소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소 무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용히 계셔주셨으면 합니다." 약간 목소리가 높고 느끼하긴 했지만 분명한 남성톤의 목소리였다. 왠지 미모의 여자 괴도였으면 더 좋았을 걸 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 맥이 빠졌다. 하지만 귓가에 듣는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간지러웠다. 곧이어 얕은 그의 숨결이 뒷가에 닿으면서 몸이 찌릿거렸다. 헉...! 이거 몸이 반응하고 있는 거 아냐? 서... 설마? 이 내가 남자에게!? 말도 안돼! 이건 그렇고 그런 류의 반응이 절대 아냐! 이 느낌은 분명 두려움과 공포일 꺼야! 그래! 그런 망상을 하다 보니 미처 저항하거나 소리지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 전에 이미 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해서 몸을 움직일 만한 의욕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는 가운데 가족들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마나의 흐름 전체가 제멋대로 소용돌이치고 있어!"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젠장!" 쿵쾅거리는 소리. 사이엔 형이 방 밖으로 뛰쳐나오는 건가? "어떻게 된 거야? 시르! 제대로 못해?" [소리칠 시간 있으면 빨리 따라와! 저쪽에서 바람의 움직인 흔적이 남아 있으니까!] 목소리는 분명히 들린다. 지금 내가 납치당한 거지? 그 예고장에 쓰여진 대로... 희미하게 떠진 눈앞에는 온통 암흑뿐이라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 는다. 술에 취한 듯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내 몸은 흔들리고 있었다. 내 귓가를 스쳐가는 그의 달콤한 목소리가 다시한번 머릿속을 울렸다. "절대마력보호반지의 영향인가요? 과연... 작용이 늦군요. 죄송하지만 좀 많이 뿌리겠습니다. 악몽...을 꾸실지도 모르겠지만 사죄는 나중에 드리겠 습니다." 다시 한번 그는 내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아까전에 맡았던 박하향이 좀더 진해졌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내 정신은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무(無)의 공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영역만이 가득한 어딘가에 나는 홀로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 무엇도 느껴지 지 않는 공간 속에서 나는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갑갑함을 느꼈다. 그 와중에 갑자기 숨통이 트이는가 싶더니 낯익은 광경이 눈 속으로 빨려들어왔다. 바로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였다. 지은지 수십년은 된 듯한 낡은 건물 앞에는 많은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축구, 농구, 손야구, 살인배구 등등 뛰어노는 학생들은 쌓인 스트레스를 마음껏 분출하고 있었다. 운동장 한쪽에는 비교적 최근에 지은 듯한 강당과 식당이 있고, 그 귀퉁이에는 조그마한 체육창고가 붙어있다. 체육 창고를 발견한 나의 시선은 어느새 그 앞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테이프가 쳐져 관계자 외 출입금지 라는 말이 떡하니 붙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경찰들이 몇 명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제물로 사용한 듯한 토끼, 비뚤비뚤하게 그려진 마법진... 이라고 하나요? 이런 걸? 게다가 주민들이 여기서 왠 빛이 솟아오르는 걸 봤다고 하죠. 이건 마치..." "설마 흑마술의 저주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길 지껄이고 싶은 건 아니겠지?" "설마요. 하지만 미심쩍은 면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 무엇보다도 두 아이의 옷이 팬티며 양말이고 시계까지 몽땅 이 동그라미 위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다는 것이 맘에 걸려." "식칼에는 문길 군의 지문뿐이고 말이지요. 게다가 누구의 옷에도 단서가 될 만한 것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핏자국은 물론이고 누군가와 싸우거 나 저항한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아요." "이래서는 범인은 커녕 사건 경위조차 짐작할 수 없으니..." 경찰 아저씨들. 수고하십니다만 이제 저는 그곳에 없어요. 문길이는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이미 결심을 굳힌걸요. 아마도 포기하시고 실종처리하시는 편이 더 속이 편할 걸요? 음... 근데 혹시 이거 제2의 개구리 소년 사건처럼 되는 게 아닐까? 언론의 스포라이트를 받으려면 몇년 있다가 깜짝 출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지도... 하지만 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어. 게다가 돌아가는 방법도 전혀 알 수 없는 걸. "근데 두 애 부모님들 말하는 게 가관이었죠?" "그래. 아무리 요즘 가정이..." 듣고 싶지 않아! 엄마 아빠는 내가 사라져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무덤덤했을까? 아니면 슬퍼했을까? 하지만 어떤 경우건 간 에 듣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왜냐면 대답이 어느 쪽이건 관계없이 나는 슬퍼질 테니... 젠장! 잊기로 결심했는데 왜 자꾸만 이런 꿈이 나에 게... 다시 무(無)의 세계로 돌아오면서 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꿈이라면 깨면 되는 거잖아. 이잇! 이잇! 꿈이여 깨라! 나는 전심전력을 다해서 몸을 움직이고자 노력했다. 얼마간 가위눌린 듯한 기분에 저항해서 낑낑거린 결과, 마침내 눈을 뜰 수 있었다. 희미한 빛이 눈으로 들어왔다... 푹신한 느낌이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 이곳은... 침대? 그리고 눈 앞에 보이는 여자는... 누구? "까아아아악! 카이가 눈을 떴다아! 식은땀을 흐르는 걸 보니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아 걱정했는데... 게다가 예지의 귀걸이도 뭣때문인지 빛을 내고 있었고... 다행이야!" "누... 누구?" 그러고 보니 귀가 좀 아프군. 아까 그 꿈에 예지의 귀걸이가 영향을 끼친 건가? 눈앞을 보니 짧은 연갈빛 머리칼 사이에 은빛 머리띠를 끼운 여 자가 기쁜 듯이 꺅꺅대면서 소리지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려고 몸을 일으켰지만 곧바로 그 여자가 날 제지하는 바람에 다시 침대에 눕 혀져 버렸다. "어머나. 아직 일어나면 안돼. 혼몽초(混夢草)의 약효가 아직 남아 있을 지도 모르는걸." 그 여자는 자연스럽게 윙크하며 내게 말했다. 그 때 문득 생각이 났다. 나, 괴도 시르팡에게 납치당했지. 그럼 더욱 이대로 있을 수 없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곧바로 힘을 줘서 침대에서 일어섰다. "어라, 이상하네... 원래 지금쯤 깰 약효가 아니고 일어나지도 못할 텐데... 절대마력보호반지 때문만은 아닐테고... 앗! 맞다. 그 팔목에 있는 무한 의 팔찌 때문이구나! 어쩐지... 그 팔찌는 상처뿐만 아니라 독성물질도 치유할 수 있으니까..." 혼자서도 잘 떠드는 이 아줌만 대체 뭐냐. 꽤나 동안(童顔)이고 예쁘긴 했지만 살짝 겹쳐진 화장이나 여유로운 분위기는 미시족에게서나 느낄 만 한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아줌마는 누구세요?" "아... 아... 아줌마!? 너... 너무해!" "다녀왔습니다. 어, 카이엔이 벌써 깨어났네?" 그때 한 소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말했다. 내가 워낙 유명 인사라는 건 아는데 얘네들, 왜 이렇게 자연스러운 듯이 날 대하고 있냐? 그새 우리 가족 멤버 구성이 또 바뀐 건 아니겠지? 아니면 내가 또 다른 사람 몸에 빙의된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거울을 보았지만 거울에 비치는 모 습은 내가 봐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황홀한 카이엔 브리타뉴의 모습이 맞았다. "시르쥬! 들어봐! 글쎄 카이가 나보고... 나보고 아줌마래!" "아줌마 맞잖아. 엄. 마. 지금 다 큰 아들을 앞에 두고 본인이 처녀라고 주장할 셈이야?" "그래두... 그래두..." 헉, 아줌마란 사실은 감으로 대충 맞춘 거지만 아들네미가 저렇게 클 줄이야... 거의 중학생이나 다름없는 덩치잖아! 이 아줌마. "에이 몰라. 하여간 힘들어 죽는 줄 알았으니까 다시는 이런 일 시키지 마! 애초부터 사람을 훔쳐오라니 기가 막혀서 원... 게다가 그 느끼한 문 구로 치장한 예고장은 뭐얏!" "어머나. 난 카이를 직접 데려오라고 한 적은 없는 걸. 단지 카이엔이 가진 절대마력보호반지와 기혈환. 정령왕의 목걸이. 예지의 귀걸이. 무한의 반지를 갖고 싶다고 한 것 뿐인걸?" "그게 그거잖아..." 시르쥬라는 그 아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설마 저 꼬맹이 녀석이 괴도 시르팡의 정체라는 건 아니겠지... 이쯤되면 나도 가만있을 수 없다. "대체 당신들 누구야? 사람을 마음대로 물건취급하면서 데려오다니..." "어라,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그 느끼한 예고장, 분명 보냈지, 엄마? 우리들은 그 괴도 시르팡이야." "우리들?" 복수형이네? 그렇다면 시르팡은 한 사람만이 아니라는 것!? "시르쥬!" 시르쥬의 엄마가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으로 내 짐작이 더욱 확실해졌다. 나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빠져나와 일어서 면서 말했다. "하여간 난 갈거야. 제멋대로 사람을 가지고 놀고 있..." "호홋. 재미있는 애네? 얼마나 어렵게 훔친 물건인데 그대로 되돌려보네 주겠니?" "카이엔 형. 엄마에게 잡힌 이상 그건 불가능해요. 엄마는 하여간 예쁜 거 수집에 있다면 뭐든지 가리지 않는 열혈 콜렉터(collecter). 이대로 꼼 짝없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편이..." "분명... 구하러 올거야. 우리 집에는 세이렌 누나가 있고, 사이엔 형도, 아이렌도, 레이엔도 있어. 우리 가족들이 힘을 합하면 분명..." "그리고 우리 시르팡은 그들이 쳐 놓은 경비를 뚫고 널 훔쳐 왔지."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저 아줌마. 콜렉터인지 뭔지 몰라고 어쩐지 짜증이 날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내가 완전히 믿었던 누나와 형, 누이동생의 방어선을 뚫고 날 빼내온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이 아무리 엄청난 괴도라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레이엔이 마지 막에 했던 그 말이 머릿속에 떠올라왔다. [절대적인 강함은 자연스럽게 오만을 불러오지...] 레이엔은 이런 결과를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이 상황을 그대로 방치한 건 아니겠지? 아무리 레이엔이 아이렌을 노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경쟁자 인 날 제거할 생각은... 설마. 아니, 설마가 사람잡는다. 내가 실종되어 슬픔에 빠진 아이렌을 그 옆에서 위로하는 레이엔... 그리고 그 둘 속의 마 음에는... 쳇. 내가 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들 둘 가지고 소설을 쓰는 거지? 머리가 뒤죽박죽이야. 내가 그녀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또 누군가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키가 훤칠한 청년이었다. "어머님 다녀왔습니다. 아, 카이엔 브리타뉴 씨. 깨어나셨군요." 이 높고 떨리는 톤 목소리는... 설마 어제 나를 납치해 온 장본인!? "넌... 설마?" "어제는 많은 실례를 범했습니다. 몸에 착용하고 계시는 마법무구들 때문인가요? 약도 잘 듣지 않아서 좀 과다하게 투여를 했는데 벌써 일어서서 돌아다니시는 것을 보니까 다행입니다." 그는 깍듯한 동작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존재말을 써 가며 날 대했다. 날 납치해 왔다는 데에서 거부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절도있는 동작과 세련된 매너. 바른 예의범절은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멋있었다. 멋대로 꺄꺄 소리나 지르는 그 어미라는 작자와는 정말 천지차이였다. "제 이름은 시르젤. 괴도 그룹 '시르팡'의 한 일원입니다. 저희 가문의 성은 밝힐 수가 없어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부디 이곳에서 편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묻고 싶은 게 많아요." 예의를 갖춰 대하는 사람에게는 나도 예의를 갖춰 대해야겠지. 나도 그래서 존대말 모드로 돌아섰다. "왜 날 납치해 온 거죠? 역시 내가 가진 엄청난 마법무구들을 노린 건가요? 그렇다면 헛다리 짚었어요. 집사가 말해 준 바에 의하면 내 마법무 구들은 나와 모든 생사를 함께 해요. 그래서 내가 죽으면 그것들도 무용지물이 되거든요? 그럼 이제..." "죄송합니다. 목적은 그게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시르젤은 고개를 푹 숙이면서 우물쭈물거렸다. 뭐지? 뭔가 다른 이유가 있나? 그때 두 아이의 엄마가 옆으로 떡 나섰다. 어째 아주 불길한 예감 이 머릿속을 팍 스쳐갔다. 아, 물론 귀에는 아무 반응이 없었지만 느낌이 그랬다는 얘기다. "그야 카이 널 우리 집의 며느리로 삼기 위해서지!" "어, 어머님!" "그야 카이 널 우리 집의 며느리로 삼기 위해서지!" "어, 어머님!" 나는 순간 휘청거렸다. 아니 거의 넘어질 뻔 했다. 이봐, 아줌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구! 오히려 제정신이 박힌 어머니라면 이런 금단의 사랑 같은 것은 말려야 정상이 아냐? 남자끼리 혼인시켜봤자 애도 못 낳잖아? 그런데도 당연한 듯 '며느리'라는 말이 나오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난 남자야!" "말이 안 되기는? 카이 군. 카이 군이 카이 양이 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거지!" 오잉? 그건 무슨 말이다냐? 내가 이해를 하지 못하고 벙쪄 있자 그 아줌마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카이엔 브리타뉴 군의 미모는 정말 아름답지. 백옥같이 흰 피부. 반짝반짝 윤기나는 머리카락. 신의 조화가 서린 아름다운 얼굴. 날씬하면서도 가녀린 몸매. 카이의 몸은 세상 어느 보석도 견줄 수 없는 예술품인걸. 난 이 아름다운 작품을 내 아들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로 만들고 싶어..." "난 물건이 아냣! 게다가 자식을 사내와 결혼시키겠다니, 아줌마 제정신이얏?!" "오호호홋. 당연히 그럴 수는 없지. 나도 귀여운 손자 손녀들을 보고 싶은걸?" "근데, 왜?" "간단하잖아?! 카이 니가 여자가 되면 되는 거야! 어차피 네 그 아름다운 미모는 남자보다는 오히려 여자에 훨씬 더 어울려! 지금 니 모습을 한 번 보렴. 훨씬 더 예뻐 보이질 않니? 사랑스런 며늘아? 엑? 아까 전에 거울을 볼 때는 침대 속에서 봐서 잘 몰랐는데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딸기무늬가 잔뜩 그려진 분홍색 원피스 파자마였다. 이건 뭐 야앗! 여자 꺼잖아앗! 근데... 근데... 왜 저렇게 잘 어울리는 거냐. 이 모습으로 거울을 보니 가슴만 없지 완전히 여자 같잖아! 그렇게 자괴감을 느 끼면서 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렇지만 남의 의견같은거 물어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결정짓고 있어... 여자로 만들겠다고?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시르젤 씨! 뭐라고 좀 해봐요! 자기 일이잖아요!" 하지만 시르젤은 절래절래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시르쥬는 뭐가 재밌는지 저쪽에서 싱글싱글 웃으면서 지켜보기만 할 뿐. 이씨이! 열받어! 이 버 거운 아줌마를 나 혼자 상대해야 한단 말야? "무슨 수로 날 여자로 만들겠다는 거야? 게다가 난 여자가 되고 싶은 마음 따윈 추호도 없어!" 나도 꽤 성격파탄자긴 하지만 문길이 녀석처럼 여자가 되겠다고 설치고 드는 극단적인 녀석까진 아니다. 여자가 되어봤자 뭐가 좋은데? 십년 넘 게 남성으로의 사고방식, 생활방식에 익숙해진 사람이 거기에 제대로 쉽게 적응해서 정상적인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아? "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만들 수 있어." "뭐, 뭐어?" "카이 군 같은 특별한 보석을 세공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보석 세공사가 필요하겠지? 비싼 돈을 들여서 이 방면 전문의 흑마법사를 불렀으 니까 목욕재개하고 기다리고 있으렴♡" 쿠에엑! 설마 설마 했다만 이 아줌마 진심이잖아? 큰일이다 이거! 절대로 도망가야 해! 도망가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황급히 그들을 제치고 시르쥬와 시르젤이 들어온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안돼! 거기는!" 문을 열자 보이는 광경은 큰 홀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종 미술작품들과 보석류가 열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시르팡이 지금껏 훔쳐온 전리품이 이 건가? 한결같이 아름답고 내력이 있어 보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런 데 넋을 팔고 있을 여유가 없지. 빨리 도망가자. 이런 마음으로 발걸음을 내딛자 웬걸? 달려가는 내 몸은 어느새 허공에 띄워져 있었다. 바... 바닥이 열려 있잖아! 설마 함정? 이런 말은 없었잖 아! 우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해가려는 차에 내 손을 꽉 붙잡는 손길이 있었으니 바로 시르젤이었다. 나는 그의 손길만을 의지한채 그대 로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다. "괜찮습니까? 다친 곳은 없으신지요?" "아, 네." 밑을 바라보니 사람이 올라오기 힘든 밑바닥은 온통 가시밭으로 되어 있는 것이 보기만 해도 섬뜩했다. 내가 저기에 떨어져 온몸이 찔려 피범벅 이 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물론 기혈환도 있고 무한의 반지도 있으니까 크게 다칠 걱정도 없고 다쳐도 곧 회복되겠지만 이건 그것과는 별개의, 심리적인 문제다. "무... 무서워요. 빨리 끌어올려줘요!"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이야압!" 시르젤이 힘을 쓰자 나는 단번에 끌어올려졌다. 그리고 그 잡아당긴 힘 때문에 나는 비틀거리면서 땅을 밟았고 중심을 잡지 못해 곧바로 시르젤 의 품 안으로 쓰러져 버렸다. 찌릿. 뭐... 뭐야? 어쩐지 몸이 찌릿한 기분을 느꼈다. 게다가 왜인지는 몰라도 피가 얼굴로 모여드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하...하... 그냥 갑자기 어지러워서겠지? 난 정상적인 이성애자라야. 남자에게 이런 기분 같은 건 느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히야. 형 그림 좋다." 시르쥬가 휘익 하고 야유를 보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난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상황을 깨달았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여자 잠옷인데 다가 얼굴을 붉히면서 이 남정네 품 안에 안겨 있는 상황이라면 남들 눈에 보이기에는... 끄아악! 난 황급히 시르젤을 밀치고 아까 침대가 있던 방으로 되돌아갔다. 그곳에서 나는 숨을 고르며 잔뜩 피치를 올리고 있던 심장의 두근거림을 진정 시키기 위해 애썼다. 시르젤은 잠깐 당황한 모양이었지만 이내 자세를 바로잡고 변함없이 예의를 깍듯이 차려 말했다.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이 저택 곳곳에는 시르팡의 일원들이 아니면 지날 수 없는 함정들이 수없이 놓여 있습니다. 불편하시겠지만 저희 들의 안내 없이 함부로 돌아다니는 것은 사양해 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걸작선들을 보관하고 있는 저 [시르팡의 홀]은 말야. 그냥 형의 신부가 되는 운명을 받아들여. 평생동안 호강할 수 있을테니까 말야." "오홋홋. 그럼 이 엄마는 그 흑마법사분을 모시러 갈련다. 연락을 취해놨으니 곧 올거야.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리렴 사랑스러운 우리 며눌아∼♡" "싫어어어어어어엇!" 하지만 아줌마는 이미 나가버린 후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시르팡의 이름을 걸고 절대 당신을 행복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시르젤도 자기 엄마의 극성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포기하고 그 길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이봐! 당신에게는 괜찮을 지 몰라도 내겐 절대 바람 직한 일이 아냐! 으앙∼ "흑... 흑..." 웬지 모르게 울음이 나왔다. 감정이 한껏 격앙되다 최고조에 달하자 쌓인 것들이 한꺼번에 터진 모양이었다. 무엇 때문에 우는 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여자가 되는 것이 싫어서? 아니면 저 괴도 남정네랑 결혼하게 되는 게 싫어서? 아마도 '구속'이란 것 때문일지도 몰라. 나는 이미 전 대륙에 널리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사니까. 결혼 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시르팡'이라는 저 들의 입장에서는 아까의 홀에 있었던 수많은 작품과 보석들처럼 나도 일종의 수집품에 불과할 지 모른다. 아마도 꽁꽁 숨겨놓고 절대 남에게 보 여주려 하지 않겠지. 행여나 소문이라도 나면 큰일일테니까. 그러면 나는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유폐된 생활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끝도 없이 펑펑 울음이 나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갑자기 변해버린 내 인생. 다시 시작하게 된 삶. 당황스러웠지만 난 적응해나갔고 매일매일이 사건투성이라 정신없었지 만 그래도 전과 달리 활기차게 살 수 있어서 좋았다. 내게 대한 형제자매들의 관심은 때론 부담스럽게 다가오지도 했지만 그들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고 또한 내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그리하여 난 무한대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자유가 박탈당하려고 한다. 내게 유일하게 즐거웠던 모든 사람을 보지 못하게 또 빼앗아가버리려고 한다. "형. 어떻게 좀 해봐. 울려버렸잖아." "저어... 저와 결혼하는 것이 그렇게 싫으십니까?" "당연히 싫엇! 절대로 싫어! 죽기보다 싫어! 내가 가진 마법무구들 너네들 다 가져도 좋으니까 차라리 나 죽을래 흐어엉∼" 이젠 배 째라 모드다. 진짜로 확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엄마가 준 무한의 팔찌는 내가 죽어도 도로 살려낼 거라는 사실을 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더 크게 울면서 소동을 피웠다. "나 집에 가고 싶어... 흐윽... 훌쩍." 내가 강한 거부반응을 보인 탓일까. 시르젤과 시르쥬가 당황스러워하건 말건. 나는 계속 눈물 콧물을 다 흘려가면서 울었다. 시르젤이 친절하게 도 손수건을 가져다 주었지만 엄청나게 운지라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서 별수 없이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 콧물을 다 닦았다. 날 납치해 온 것만 해도 중대범죈데 쫀쫀하게 이정도로 불만 가지진 않겠지, 앙? 하여튼 혼자서 울다가 슬슬 진정되면서 훌쩍이고 있을 때 다시 문이 열리고 그 아줌마가 들어오면서 울어서 다 가라앉았던 나의 분노 게이지를 다시 상승시켰다. "쨔잔, 성전환이라면 전문인 특급 전문 흑마법사, 셰더 님을 모셔오셨단다. 어라, 근데 카이 얼굴이 왜 그러니? 세상에, 울었잖아! 어떻게 된 거 니, 혹시 시르쥬나 시르젤이 못살게 굴던? 시르쥬! 앞으로 니 형수가 될 사람인데 함부로 까불거나 장난치면 안돼지! 그리고 시르엔! 네 아내가 될 사람이잖아, 제대로 안 할래?" 내가 울었던 건 전부 아줌마 당신 때문이잖앗! 시르쥬와 시르젤도 자기들 엄마지만 하도 어이가 없었던지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오호호. 어쨌건 셰더 님. 그럼 잘 부탁드려요." "별 말씀을. 그나저나 약정하신 물건은 반드시 주셔야 합니다." "당연하지요. 우리 집의 어떤 보석이나 명작도 카이엔보다 더 가치있는 건 없으니까. 그정도쯤이야 기꺼히 내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 당장 시작해도 될까요?" "그렇게 하세요. 자, 시르쥬, 시르젤. 우린 자리를 비켜 주자꾸나." "에... 에?" 울어서 진이 다 빠진 탓일까. 나는 뭐라고 항의 한번 못해보고 그 셰더라는 흑마법사를 남겨두고 시르팡의 사람들이 방을 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 흑마법사는 자기가 흑마법사라는 것을 피알이라도 하듯 온통 옷을 검은 색으로 치장한 데다 머리칼이고 눈동자고 죄다 검었 다. 그래도 단순히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멋없는 모습이 아니라 의외로 복장이라던지, 망토라던지 디자인에는 꽤 신경을 써서 만든 것 같다. 일 단 옷만 놓고 봤을 때는 꽤 멋있다 라고 생각되었을 정도니까. 그리고 그 흑마법사에 비해 존재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셰더의 옆에는 테가 비정상적으로 넓고 약간 꼬부라질 정도로 높은 검은색 모자를 쓴, 길다란 흑발의 신비한 느낌을 주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마치 이야기 속에서 나오는 마녀의 이미지같다고 느껴지는... 나는 잠시 그 여자아이 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잠깐 정신을 딴데 파느라 시르젤이 나가기 전에 내게 했던 말은 듣지 못했다. 그들이 문을 나서고 셰더와 그 여자아이와 나만 남자, 셰더가 내게 반가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간만이군. 카이엔 브리타뉴 군." "에에? 날 알아?" 난 널 모르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셰더의 얼굴을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자 그 녀석이 말했다. "물론이지. 네게 저주를 걸어서 기억을 잃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나니까." 제18화 : 변태 흑마법사 셰더. "물론이지. 네게 저주를 걸어서 기억을 잃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나니까."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폼을 재는 셰더는 억울하면 덤벼 봐라는 듯한 자신만만한 제스쳐를 취했다. 하지만 나는 셰더의 말을 단 한마 디로 일축했다. "그래서?" "그래서... 라니! 넌 '어떻게 하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죠?' 아니면 '내게 감히 저주를 걸다니, 이 자식!'같은 반응을 하지 않는 거냐앗!" "내가 왜 그렇게 반응해야 하는데?" 오히려 저 셰더 녀석 덕택에 오리지날 카이엔의 정신이 어딘가로 날아가고 내가 대신 빙의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튼 저 셰더가 실 제로 내게 저주를 내려 기억을 잃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내가 화낼 이유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감사를 표하면 표할 일이었지만. "이이익! 내가 원했던 대답은 이게 아냣!" 자기 생각대로 남이 반응해주지 않으면 열받아버리는 타입이로군. 이 인간 역시 사교관계가 썩 좋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긴 흑마법사라 는것 자체가 음침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주는 느낌이잖아? 음... 음... 문길이 같은 어둠의 세계에 사는 녀석에게는 딱 알맞은 직업이지. 나? 에이 왜그래? 난 이렇게 밝고 힘차게 맑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잖아? 지금쯤 녀석은 어디 있을까... "솔직히 말해. 흑마법사 아저씨. 원래 내리려 했던 저주는 내 기억을 잃게 하는 게 아니었지?" "헉!" 셰더는 니가 그걸 어떻게 아냐는 표정으로 싱글거리는 날 쳐다보았다. 아마도 정확하게 찌른 모양인걸? 셰더 옆에 있는 여자아이의 반응은 어던 가 싶어서 쳐다보았더니 여자아이는 아무 말도 없이 부끄러운 듯 수줍게 얼굴을 돌려버렸다. 음... 웃으면서 바라보지 말 걸 그랬나. 그렇잖아도 내 미소는 살인미소라는 평을 듣는데. "이 놈... 그걸 어떻게 알았지?" "찍었어. 아저씨가 나한테 그런 쓸데없는 저주를 걸 필요가 없잖아?" 만약에 내가 저주를 걸었다면 기억상실 같은 거보다는 세상의 모든 뭇 남성들의 질투심을 모아서 괴물로 변하게 하거나 온몸에 종기가 나게 하 는 등 악독한 저주를 걸었겠지. "그래... 그랬지. 하지만 절대마력보호반지에 완전히 막히지 않는 저주는 그것뿐이기에 어쩔 수 없었지. 그것조차도 역마법으로 상당히 되팅겨나왔 기 때문에 제물을 쓰지 않았다면 나도 큰일날 뻔했지." "바보." "이이잇! 감히 바보라니, 지금 네 운명은 완전히 내게 맞겨져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거냐! 난 지금부터 널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리따운 미 소녀로 만드는 중요한 일을 할 예정이지. 만약에 네놈이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으면 더할나위 없이 흉측한 몰골로..." "그랬다가는 아저씨도 끝이지. 저 아줌마, 이 저택에서 살려보내려 하지 않을껄?" "치잇!" "하지만 나도 궁금하긴 해. 강력한 마법무구로 보호받는 나를 어떤 방법으로 성전환시키겠다는 거야?" 나는 완전히 내 페이스와 여유를 찾아가고 있었다. 아까전에는 그 아줌마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가 잔뜩 화도 내고 결정적으로 함정에 떨어질 뻔 한 사실 때문에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하지만 이 흑마법사라는 아저씨가 원체 좀 띨한 데가 있어서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진짜 흑 마법사 맞기는 한거야? "크크크크큿." 웃음소리를 보니 흑마법사가 맞긴 맞는 거 같다. "내가 네게 저주를 성공시킨 데서도 알 수 없듯이 절대마력보호반지가 모든 종류의 마력에서부터 보호해주진 않아. 그래서 여러 가지로 만반의 준비를 해 왔지. 그럼 일단 침대에 누워 주실까?" "누구 맘대로 침대에 누.... 앗!" 그때 내 몸이 두둥실 떠올라 그대로 침대에 눕혀지더니 침대에서 길다란 끈이 솟아나 순식간에 내 두 손발을 결박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깜짝 놀라 셰더를 바라보니 그는 다시 의기양양해진 표정으로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크캬캿. 놀랐나? 절대마력보호반지는 착용자를 대상으로 하는 마법만 방어할 뿐이야. 지금처럼 주위의 사물에 마법을 거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 지." "치잇." 그때 난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좀 띨띨하고 바보같아 보인다고 해도 그는 한번은 절대마력보호반지의 방어벽을 뚫고 저주를 성공시킨 상당한 수준의 흑마법사란 사실을 잊다니. 그를 가볍게 본 것은 실수였다. "이것 놔!" "흐흐흐. 놓으라면 놓을 것 같냐? 아무래도 자꾸 시끄럽게 굴까봐 안되겠군. 입을 막아야겠어." 안돼애애! 난 여자가 되기 싫어어! 초미소년은 예쁜 여자가 잔뜩 달라붙지만 초미소녀가 되면 징글징글한 남자들이 잔뜩 달라붙을 게 뻔하잖아! 물론 성별 무시하고 달려드는 소수의 남자들도 있긴 하지만 남자들만 우글거리는 건 절대 싫어! 에에... 사실 여자의 삶은 적응하기 힘드니 어쩌 니 해도 여자가 되기 싫은 결정적인 이유는 이거다. 고2가 될때까지 남자로 살아온 내가 여자가 되서 남자랑 제대로 사랑하고 뭐고 하기는 절대 싫다구! 에?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 오빠들과 그 오빠들을 엮은 팬픽은 뭐였냐고? 다시 말하건데 그건 분명히 [취미]의 영역이야! 좀 독특한 취! 미! 그 상황에 날 대입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어! 소프트한 정도라면 용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셰더는 품속에서 여러가지 잡다한 도구들을 꺼냈고, 검은 모자의 여자아이가 옆에서 셰더를 거들었다. 셰더의 몸에서 나온 물건은 장갑, 촛불, 성 냥, 오이, 그리고 채찍과 길고 검은 부츠. 저 괴상한 아이템들은 뭐냐? 지금 당신 하려는 짓이 뭐야아앗! 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입은 이미 셰더가 막아놓은 재갈 때문에 봉인되어 있었다. 뭐 하려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눈을 질끔 감아 버렸다. 싫 어싫어싫어싫어 절대로 싫어어어! 그때 귀가 다시 따끔거려왔다. 눈을 감은 나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려들어왔다. [카이엔 형?] 이 목소리는.... 레이엔! 그럼 그렇지! 우리 가족들이 날 납치당한 채 그대로 내버려 둘 리 없잖아? 나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레이엔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조용히 듣기만 해 형. 무언가 방해하고 있는 건지 마법이나 정령들을 총동원해도 지금 형이 있는 장소의 위치 파악이 전혀 되고 있어. -지지직 - 지금 예지의 귀걸이를 통해 이야기하는데 연결이 될지 안될런지는 모르겠네. 하여튼 어떤 방법이든 좋아. 형이 있는 위치를 우리가 알 수 있 도록 해야 돼. 그럴러면...] 툭. 거기서 연락은 끊어져버렸다. 말이 길어길수록 귀가 더 심하게 아파왔고 그래서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이 원인인 듯 했다. 사정을 모르는 셰더 녀 석은 내가 얌전히 있자 더 노골적으로 음침하게 말했다. "이제 반항을 포기하고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냐? 후후후." 그러면서 셰더 녀석은 내 파자마 치마 밑으로 스윽 손을 집어넣더니 슬슬 다리를 문질렀다. 으히히힉! "읍읍읍" 난 몸무림치며 끝까지 거부했지만 난 손발과 입이 모두 묶여 있는 몸. 게다가 시르팡 녀석들이 모든 일을 이놈에게 맡기고 사라진 터라 도움을 청할 수도 없다. 그래도 제법 멋있어 보였던 시르젤 같은 애라면 몰라도 너같이 징그러운 아저씨에게 이런 식으로 희롱당하는 건 절대 끔찍해! 셰더가 다리를 문질렀을 때 마치 벌레 수천 마리가 다리를 기어다니는 듯한 기분을 느꼈으니까 말야. 그의 손길은 자꾸 위로 올라왔다. 저항할 수 없는 나는 기껏 눈을 감았다. 흑흑.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누나에게 몸을 허할 걸 그랬어 잉잉. 아무리 여자로 변한다지만 내 첫경험이 이런 사이코 변태 중년 아저씨에게 유린당한다니 흑흑. 그런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손길은 허벅지 위로는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이 위로 올라가면 별로 좋지 않은 녀석이 버티고 있지... 후후후. 하지만 기대하고 있거라. 이 몸이 바로 그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떼내고 세상 제 일가는 절세미녀로 탈바꿈시켜 줄 테니까!" 그러면서 셰더는 여자아이가 준비해서 건네준 가죽장갑을 손에 끼고 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채찍을 들더니 촛농을 조심스럽게 채찍에 떨어뜨 리고 있었다. 뭐, 뭐하려는 거야? 나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패닉 상태로 빠져들었다. 아직 이 세상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진 못했지만 저 아이템들은 절대 100% 성전환과는 무관한 용도에 쓰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나를 구속하고 있는 셰더의 끈들은 내가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 더 단단하 게 날 조여올 뿐이었다. 누군가... 날 구해줘! 누구라도 좋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해 줄 테니까. 뭘 하고 있는 거야? 모두들! 정작 내가 필요할 때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이제는 빠져나갈 방법이 전혀 없는 건가...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괜찮을 거야. 여자가 되도 어차피 대륙 제일 의 초미인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을 테니까. 다만 초미소년에서 초미소녀로 'ㄴ'한 글자가 빠져나갈 뿐인 걸. 그 후에 이곳을 빠져나간다 해도 가족들은 여전히 날 이뻐해줄 거고(특히 사이엔 형이 엄청 좋아하겠지.) 여전히 만인의 아이돌로 남아 있을 수 있을 테니까. 제길. 그런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거지? 왜 이렇게 분한 거지? 이렇게 되도록 난 운명에 순응해갈수밖에 없는 거야? 언제까지 이대로 끌려가 기만 할거야? 정신차려! 김상우! 내 인생은 결국 내가 결정하는 거잖아! "울어봤자 소용없어. 그럼 지금부터 시술에 들어가겠다. 당분간 편하게 잠들고 있도록." 셰더가 손짓하더니 여자아이가 이상한 분말가루 봉지같은 것을 가방에서 꺼냈다. 저건... 수면제일까나? "원래대로라면 살짝 조금만 뿌려주면 되지만 절대마력보호반지가 일차로 막는데다가 무한의 팔찌 때문에 훨씬 빨리 약효가 없어지니 어쩔 수 없 지. 그럼 달콤한 휴식 속에서 앞으로 변할 네 모습을 그려보도록." 저 분말가루를 마시게 되면 끝장이라는 느낌이 왔다. 그 전에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해! 나는 힘이 없으니까 도움이 될 만한 마법무구의 힘이 라도 빌어야겠다. 절대마력보호반지. 기혈환. 정령왕의 목걸이. 예지의 귀걸이. 무한의 팔찌. 젠장! 왜 전부 보호용 아이템들 뿐이야? 지금같은 경 우에는 저 나쁜 흑마법사한테서 그것들이 100%커버해준다고 보장할 수도 없는데... 아, 그래! 정령왕의 목걸이는 정령에 대한 친화력을 줘서 어떤 정령이든 불러내서 부탁할 수 있다고 했지! 헉... 근데 난 지금 입이 막혀 있기 때 문에 정령을 불러낼 도리가 없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난 정령들의 이름을 하나도 모른다. 내가 아는 정령의 이름이라고는 시르팡에게서 예고장을 받은 날 아이렌이 목걸이에 붙여줬던 바람의 정령왕 시르케이안 뿐. 하지만 아이렌이 시르 또는 시르케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시르케이안은 하교 한 후 아이렌이 도로 걷어간 상태였다. 아무리 정령왕의 목걸이라고 해도 난 정령사가 아닌걸. 정령왕을 부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이래저래 머리를 바쁘게 굴리고 있을 찰나에 어느새 여자아이가 분말가루 봉지를 들고 바로 내 앞까지 다가왔다. 눈물이 옆으로 흘러내리는 내 얼굴을 본 소녀는 일말의 동정심이 인 듯 잠깐 머뭇거리는 듯 했다. "어서 하지 않고 뭐 해!" 셰더가 그런 여자아이의 모습을 보고는 호통을 쳤다. 그 아이는 머뭇거린 끝에 결국 봉지를 개봉했다. 그리고 가루를 내게 뿌리기 위해 재갈을 뺏다. 올지 안 올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난 내가 아는 유일한 정령의 이름을 마지막 희망을 담아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염원해서 불 렀다. "시르케이아아아안! 도와줘어어어어어!" 제19화 : 난입(亂入) 바람이 불었다. 소용돌이치는 작은 폭풍이 커다란 방 전체를 이리저리 휩쓸었다. 그것은 내 앞에 서 있는 적들에게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거 친 폭풍이었지만 나에게는 아주 부드럽고 상냥하게 느껴지는 숨결 같은 미풍이었다. 여자아이가 내게 넣으려던 가루 봉지는 그녀의 손을 살짝 베고 지나갈 정도로 날카로운 바람에 의해 옆으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소녀는 멍하 니 베인 손을 바라보았지만 바람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건!" 셰더가 깜짝 놀라 소리쳤지만 어느 새 그도 휘몰아치는 바람에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려야만 했다. [카이엔! 무사했어? 좀더 빨리 불렀으면 좋았을텐데. 아이렌이 부탁해서 네가 부르면 언제든지 정령왕의 목걸이를 매개로 달려갈 채비를 해놓고 있었거든.] "아하하... 진짜... 와줬구나. 고마워. 형체가 없는 바람이지만 바람의 정령왕 시르케이안은 보일 듯 말 듯이 투명한 자태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바람은 눈으로 볼 수 없다. 하지만 바 람의 정령들만은 이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희미하게 사라질 것 같이 떠 있는 그들은 더욱 신비로운 존재였다.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일까. 나는 단지 고마워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어찌됐건 저 변태 중년 흑마법사에게 나같은 초미소년이 농락당하는 것 은 내게도 끔찍한 일이지만 전 세계적으로도 큰 여파가 일 일대 대사건이잖아?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아직 약간 일렀다. "율(律)! 정(靜)!" 셰더의 외침과 함께 거세게 몰아치던 방 안의 바람이 마치 거짓말처럼 조용히 멈춰버린 것이다. 시르케이안 역시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박(縛)!" 셰더가 손을 휘저으며 연이어 짤막하기 그지없는 일음절 주문을 외자 어둡고 흐린 기분나쁜 기운들이 솟아나와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시르케이안 을 잡아 묶어버렸다. 허걱! 설마 정령왕을 구속시키다니, 농담이지? "시... 시르케!" 하지만 진짜로 시르케이안은 셰더의 구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듯했다. [네녀석은...] "이제야 상대가 누군지 알았나? 바람의 정령왕 시르케이안? 이 셰더를 잊어서는 곤란하지. 이래뵈도 대륙 7대 흑마법사 중의 한 자리를 당당하 게 차지하고 있는 이 몸을 말야. 뭐... 그래봤자 이렇게 구속시켜 두는 게 한계긴 하지만 말야. 그나저나 의외군. 정령왕의 목걸이가 마력 하나 없 는 사람이 정령왕을 불러낼 수 있을 정도였던가?" [...카이는 특별하니까.] "쳇. 암만 대륙 최고의 미소년이라고 해도 정령왕까지 후리다니... 무서운 놈." 셰더는 날 째려보면서 투덜거렸다. 엄청난 질투의 오오라가 내 주위를 감싸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저 녀석... 역시 뭐라고 지껄여도 놈도 남자 라고 결국 날 질투한 건가? 왜지? 내 미모 레벨은 상당수의 남자들마저 추종할 정도로 질투라는 말을 쓸 수 있는 레벨을 훨씬 넘어서 있는데? "상관없어. 여기서 바로 네년을 역소환시켜버리면 한동안은 다시 올 수 없겠지." [푸훗.] 하지만 시르케이안은 전혀 위축된 모습이 아니었다. 셰더의 사기(邪氣)에 포박되어 있으면서도 알 듯 말듯한 미소를 흘리고 있어서 난 놀란 가슴 을 쓸어내릴 수 있겠다. 시르케, 뭔가 대책이 있는 거겠지? "왜 웃는 거지? 카이엔을 구하기 위해 소환된 것이 아니었나?" [맞아. 하지만 아무리 내가 바라고, 카이가 바라고, 정령왕의 목걸이가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내가 이곳에 소환될 수 없거든?] "그건.... 설마!?" [정답. 하지만 너무 늦게 알아차렸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내가 여전히 침대에서 손발이 묶인 채 의아해하고 있을 때 다음 순간 곳 그것을 깨달았다. 침대 위에 세이렌 누나, 사 이엔 형, 아이렌, 레이엔이 동시에 공간이동을 해 온 것이다. [이미 이곳의 위치는 아이렌을 통해 세이렌 브리타뉴 더 마요르카 오브 세븐 매직 마스터즈에게 전달되었는걸.] 그들은 세이렌 누나 - 사이엔 형 - 아이렌 - 레이엔의 순으로 차곡차곡 내 위에 떨어지면서 날 압박해 왔다. "꾸에에에엑!" 나 같은 초미소년이 이런 돼지 멱 따는 비명을 지르기엔 영 안 어울리지만 묶여서 침대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인간 네 명이 한꺼번에 올라타 니까 어쩔 수 없이 이런 소리가 날 수밖에 없다. "앗, 카이야! 괜찮아? 다친 덴 없어? 근데 왜 이렇게 묶여 있니? 좀만 기다려. 저녀석 처치하고 너와 둘만의 일(?)을 치르고 난 다음에 풀어 줄테 니까." 내 코앞에서 나와 포개져 있는 누나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헤벌쭉거리면서 뭐라고 이야기한다. "무거워..." 기혈환 덕택에 고통만은 별로 느끼지 않지만 그래도 무게감은 느껴진단 말이다! "누님 빨리 비켜주시는게 어떻습니까? 카이엔이 누님의 무게에 괴로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씨, 여기서 제일 무거운 게 너면서 무슨 망발이야!?" "레이엔, 빨리 안 비켜! 너부터 비켜야 내가 비킬 거 아냐!" "싫어. 간만에 아이렌이랑 얼굴 맞대고 있을 수 있는 걸." "이 인간들이... 잡담만 하고 있지 말고 좀 비키란 말얏! 무거워!" 난 짜증이 나 소리를 지르며 내 형제자매들을 떨구기 위해 안간의 몸부림을 쳤다. 그런 몸부림이 성과가 있어서 내 위에 차곡차곡 쌓여서 티격 태격하고 있던 그들은 한쪽으로 기우뚱하더니 침대 옆으로 넘어가버렸다. 콰당탕. 젤 위에 있던 레이엔은 옆으로 넘어지면서도 제빨리 자세를 잡아 사뿐하게 두 다리로 바닥에 섰고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바닥에 뒹구려는 아이렌을 잡아 일으켜세웠다. "...고마워." "별 말을." 왜 그런지는 몰라도 아이렌은 레이엔에게 도움받았다는 게 조금 기분나쁜 표정이었다. 하지만 레이엔은 그냥 헤죽대며 아이렌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은... "너 솔직히 말해! 물귀신 작전으로 넘어지면서 나 잡아끌었지!!" "무슨 소립니까. 그래도 누님인데 안 다치게 잡아주려고 한 것 분이라고요!" 이것들이 정말 나 구하러 온 게 맞기는 한 건가... 그렇게 역정을 내고 있을 때쯤 레이엔이 내 옆으로 다가와 사건의 본질을 가르쳐주었다. "세이렌 누난 카이엔 형에게 공간이동할때는 항상 형의 코앞에 나타나는 습관이 있거든." ...절대 내가 누워있을 때에는 세이렌 누나가 공간이동해오지 않기를 빌어야겠군. "그나저나 나 좀 풀어줘." "내가 풀어주마." 사이엔 형이 그 삐까번쩍한 검을 꺼내더니 셰더 녀석이 내 손발을 결박해 놓은 마법끈을 무 자르듯이 잘라 버렸다. 한편 내 가족들이 소란을 피 우는 사이에 소외되어 있던 셰더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이 놈들이!" "어라, 너 어디서 많이 본 녀석 같다? 니가 카이를 납치해갔어!?" 세이렌 누나가 셰더를 슥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에게 말했다. 어? 웬일인지 셰더 녀석이 누나의 모습을 보고는 움찔거리는 것 같다. 오호라. 둘이 아는 사이? [아이렌, 나도 좀 풀어줘어!] "어? 시르. 정령왕 주제에 왜 그렇게 잡혀 있어? 하여튼간에..." 아이렌은 궁시렁거리면서도 묶여 있는 시르케이안에게 손길을 내밀었다. 순간 방 안에 강한 바람이 밀어닥치더니 시르케이안 혼자서 셰더의 포 박을 풀어냈다. 내 눈에는 아이렌이 시르케이안의 힘을 증가시켜 준 것 같이 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유, 셰더 님. 왜 이렇게 시끄럽지요?" 그때 시르젤과 시르쥬. 그리고 그 엄마가 방문을 열고 난입했다. 아아아악! 이거 왜 이렇게 복잡한 상황으로 얽혀져만 가는 게냐앗! 그런 상황에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내 어깨를 살짝 툭툭 건드리는 손길이 있었다. 바로 아까전에 내게 분말가루를 먹이려고 했던 셰더의 시다 바리 여자애였다. 그렇게 큰 모자를 쓰고 있는데도 아무도 그 존재감을 신경쓰고 있지 않다니 어떻게 된 거지? 게다가 침대 바로 옆에 있는데 도? "...도와줘."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그 소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주 약하고 떨리면서도 묘한 음색을 지닌 그 목소리. 마치 마력이라도 담긴 듯한 황홀한 느 낌을 주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감정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듯 표정변화가 별로 없었지만 눈동자 가에 맺혀 있는 눈물방울 은 확실히 그녀의 감정을 내게 전달해오고 있었다. "넌..." "에잇.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빨리 오지 못해!" 내가 그녀에게 뭐라고 말하려 할 때, 셰더 녀석이 그 여자아이를 불렀다. 그애는 잠깐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뭐라 말 할 수 없이 슬픈 미소를 지 으며 셰더 녀석의 곁으로 달려가 버렸다. "셰더 씨!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저 자들이 마력추적방해장치를 완비한 우리 집의 위치를 알아낸 겁니까?" "내 잘못이 아냐! 저 갑자기 나타난 시르케이안 년이 모든 걸 망쳐놨다고!" "근데 쟤들이 너 납치해 간 놈들 맞지, 카이엔?" "뭐 하는 녀석들이야, 오빠?" "저 검정색으로 온몸을 치장한 놈은 셰더라는 변태 흑마법사고 딴 녀석들은 시르팡의 일원들이야. 시르팡 룬 와크레이는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어떤 집단의 이름이래." 이래저래 떠들석한 가운데 드디어 우리 브리타뉴 가의 형제자매들과 시르팡, 셰더 연합군과의 배틀이 그 막을 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방은 넓었 지만 사람들이 워낙 많이 몰려서 마주보고 있었던지라 어쩐지 좁게 느껴졌다. 이거, 위험하지 않아? 실내에서 싸우는 것은... 제20화 : 시르팡의 진(陣) "하여튼." 어지럽혀진 장내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카리스마 만땅인 세이렌 누나가 나섰다. "너네들 중에 시르팡이 누군지 집단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내 사랑스럽고 이쁜 동생 카이를 납치한 죄! 백번 죽어 마땅해!" "용서하지 않겠다!" 사이엔 형은 누나에게 선수를 뺏긴 것이 분하다는 듯 주먹을 꽉 쥐며 검을 빼들고 외쳤다. 아이렌도 뒤질세라 시르케이안을 앞세우고 목청을 높 였다. "간도 크군요. 누굴 제멋대로 데려가는 거에요!" 초강력 전투력을 지닌 우리 가족들이 전면에 나서는 동안 나와 마찬가지로 전투력이 없는 레이엔은 내 옆으로 쪼르르 붙어 다른 가족들이 들리 지 않을 만한 소리로 작게 말했다. "...난 저 멤버로 어떻게 하면 카이엔 형을 납치당하게 할 수 있는 지 궁금해." "동감이야." 나는 레이엔의 말에 역시 소근거리는 말로 동의했다. 대륙 7대 마법사. 대륙 7대 그랜드 소드 마스터. 대륙 7대 정령 마스터. 생각해보니 이 세명이 내 옆에 붙어 있으면서도 내가 납치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셰더도 본인이 대륙 7대 흑마법사라고 주장했고, 시르팡 녀석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상대일지도 모른다. 셰더는 우리 가족들이 전면에 나서자 심리적으로 위축이 된 듯 움찔했다. 왜 그래? 본인은 대륙 7대 흑마법사라면서? 아, 그렇군. 마법사라는 것 은 모든 종류의 마법사들을 다 포함한 거고 흑마법사라는 것은 마법사 중의 한 집단일 뿐이잖아. 그럼 확실히 누나가 더 강하겠군. 우훗훗훗. 그 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저 시르팡 녀석들뿐인가. "휴우. 하는 수 없군요." "뭔가 대책이 있는 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드는 시르젤에게 셰더가 궁금한 듯 물었다. "어머나, 셰더 님. 셰더 님이라면 저 무식하게 센 애들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세요?" 시르젤과 시르쥬의 엄마가 말했다. 겉만 보면 멀쩡하고 예쁜데 다 큰 아들을 둘씩이나 둬서 그런지 말투가 정말 아줌마틱하다. "그... 그럴 리 없잖습니까! 저 세이렌 브리타뉴 더 마요르카 오브 세븐 매직 마스터즈는 일전에 모 왕국의 성산(聖山)을 일격에 평지로 만들어버 린 사건으로 악명이 자자한..." "악명이 뭐 어쨋!" 세이렌 누나가 셰더의 말에 열받은 듯 소리쳤다. 셰더는 더욱 쫄아들면서 시르팡 가문의 사람들 뒤쪽으로 슬슬 피했다. "하... 하여튼 저로서는 무리입니다." "그렇죠?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에요." "그건 바로 도망이죠!" 시르쥬가 외침과 동시에 시르젤과 시르팡. 그리고 그 아줌마는 잽싸게 그 함정이 장치된 방으로 뛰어들었고 셰더도 허겁지겁 뒤따라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검은 대형모자의 여자아이가 뒤따라갔다. "놓칠 줄 알고!" "게 섯거라!" "누나! 형! 그 방은...!" [시르팡의 홀]에는 함정이 잔뜩 장치되어 있다고! 라고 외치려고 했으나 문득 저 인간들이 어떤 인간들인데 그런 시시한 함정따위에 당하랴는 생 각이 들어 더 이상 제지하지 않았다. 게다가 외쳐봤자 이미 방 안으로 진입한 후인데 어쩔 수 없잖아? "어쩔 수 없네. 따라가자." 레이엔이 내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머뭇거렸다. "형, 왜 그래?" "아니... 조금 무서워서. 저 방에는 함정이 잔뜩 장치되어 있거든." "그렇지만 형하고 누나하고 떨어져 있으면 또 언제 납치될지 몰라. 설마 했는데 그 녀석들, 진짜 그 엄청난 방비를 뚫고 형을 납치해 갔어. 알 지?" "네 예언으로 알 수 없는거야?" "별자리가 사소한 미동 하나하나에도 영향받는 건 사실이지만 관측자의 입장으로서는 개략적인 큰 그림밖에 알 수 없어. 그래도 한 가지 말하자 면 최소한 들어가도 죽거나 다치지 않는다는 건 확실해." "그럴까?" 난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 레이엔이 이끄는 손을 따라 활짝 열린 시르팡의 홀로 발걸음을 내밀었다. 그렇지... 레이엔은 납치가 성공할 거라는 걸 납치 직전에서야 알 수 있었지. 어디에서나 완벽한 예언은 없는 법이고 확실히 모든 것을 가르쳐주는 예언이란 것도 없는데. 레이엔에게 너무 많 은 것을 기대한 모양이야. 하지만 그래도 나는 이 애를 믿고 따라야겠지. 예언이라는 것은 앞을 내다볼 수 있는 길잡이가 될 테니까. 예상대로였다. 우리 가족들이 함정을 전부 부순 듯 바닥이 꺼지는 함정 외에도 여러 가지 병장비들과 괴물 등이 어지럽게 방 안에 널려져 있었다. 다만 그 와 중에도 보석들이나 명화 등은 특별한 보호가 되어 있는 듯 아무 손상이 없이 유리 케이스 안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무사히 통과한 모양이군." "그런가봐." 아직 부서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함정에 주의하며 레이엔과 난 조심스럽게 걸으면서 방을 빠져나갔다. 레이엔이나 나나 보석이나 예술품에는 관심이 없었을뿐더러 또 건들다가 어떤 함정이 남아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런 쪽으로는 전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방으로 들어섰을 때 이리저리 꺽인 미로같은 복도가 펼쳐졌다. 이리저리 갈림길이 나 있는데다 조명마저 어두워 길을 찾기 쉽지 않 아 보였다. "이거... 가다가 길을 잃지 않을까 걱정되는데?" "하지만 길은 여기밖에 없어." 그랬다. 내가 깨어난 침대방은 창문이 전혀 없었고 거기서 문이라고는 내가 함정에 빠졌었던 시르팡의 홀로 통하는 길 하나뿐. 거기서 다시 길은 이곳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망설이고 있자 레이엔은 나를 흘끗 쳐다보더니 크게 소리쳤다. "답답한 소리 말고 따라와 형! 왜 그런 옷을 입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애 잠옷을 입었다고 해서 행동까지 소심한 기집애처럼 굴 참이야? 그렇지 않으면 난 누나나... 사이엔 형이나... 아이렌처럼 지켜줄 수 있는 강한 힘이 없다고 해서 날 믿지 못하는 거야? 나도... 나도... 카이엔 형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만은 딴 형제들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나는 움찔했다. 그래. 사실 그랬다. 세이렌 누나나 사이엔 형. 아이렌과는 달리 레이엔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직접적인 전투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예언. 그 때문에 레이엔만이 내 옆에 남게 되자 다른 가족들보다 못미더워 한 것이 사실이었다. "...미안. 널 믿지 못해서." 난 고개를 떨구면서 사과했다. 레이엔은 그런 내 사과를 제대로 받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갈림길에서 길을 선택하면서 이야기했다. "따라와 형. 찍기라면 누구보다 좋은 감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는 허겁지겁 레이엔을 따라갔다. 맨발에다가 팔랑팔랑거리는 여자 파자마 옷차림으로는 어쩐지 추워지는 기분이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때는 아니었다. "다들 제대로 길을 찾아갔을까?" 시르팡 놈들이라면 제대로 된 길을 알겠지만 우리 가족들이 이런 미로를 헤쳐나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아마도 길을 잃고 헤메고 있는지는 않은 지. 뭐,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누나가 공간이동을 할 테니까 아무 문제 없겠지만." "시르케이안이 있을 테니까 괜찮을거야." 아, 맞아. 바람의 정령왕 시르케이안. 들은 바에 의하면 바람의 정령은 공기의 움직임을 통해 미로의 출구를 찾을 수 있다고 하지. 어떻게든 빨리 만나야 할 텐데... 콰쾅! 그때 미로 전체에 굉음이 울려퍼지더니 잠시 동안 서 있지도 못할 정도로 미로 전체가 흔들렸다. 나와 레이엔은 서로 붙잡고 쓰러져 미로 바닥 을 뒹굴었고 희미한 빛만이 어디선가 새어들어오는 미로 천장에서는 작은 돌부스레기들이 흘러내렸다. "괜찮아?" 난 내 품에 꼭 안겨 있는 레이엔을 보고 말했다. 레이엔이 나보다 작으니까 무의식중에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차피 나는 어디 부딪쳐도 크게 고통을 느끼지 않는데다가 다쳐도 금방 회복되니까. "으... 응. 고마워." 내 품 속에서 고개를 든 레이엔의 얼굴은 새빨갰다. "너... 얼굴이... 괜찮아?" "괘... 괜찮아! 이건... 형이 너무 예쁜데다 여자옷까지 입고 있으니까... 에... 왠지모르게 그냥... 그래서. 그래!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형. 내가 좋아하는 애는 오직 아이렌이니까 말이야." "그... 그래. 어서 빨리 누나랑 형이랑 어디있는지 찾아보자. 아마 그 셰더라는 녀석이 이 미로를 무너뜨리려고 작정했을지도 몰라." "아... 아하하. 혹시 어쩌면 인내심이 바닥난 누나가 열받은 나머지 마법을 난사했을 지도 모르지." 나와 레이엔은 서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일어나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다. 레이엔은 분명 아이렌을 좋아한다고 했고 아까전의 그 반응도 단 순히 당황해서일 터였지만... 왜이렇게 목 뒤로 식은땀이 뻘뻘 흐르는 걸까. 게다가 맨바닥에 넘어지는 바람에 그나마 걸치고 있는 잠옷도 때가 잔뜩 묻어 엉망이었다. 어찌됐건 그다지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게 서로를 의식하면서 겉도는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아이렌이 벽을 붙잡고 비틀거리면서 나타났다. "아이렌!" "아이렌! 괜찮아?" 내가 놀라 손을 내미려 할때 레이엔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렌 옆으로 다가와서 그녀를 부축했다. 휴우. 그래 자기 신부가 될 여자라고 참 끔찍 하도 챙기는군. 잠깐. 근데 왜 내가 그걸 당연시 여기고 있는 거지? 두 사람은 분명 이란성 쌍둥이 관계잖아? 내가 잠깐 이상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쯤 레이엔이 아이렌을 바닥에 앉히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어떻게 된거야? 아이렌?" "그 흑마법사한테... 결국 시르가 역소환당했어..." 들은 적이 있었다. 자기 통제하에 있는 정령이 타격을 받아 본의에 반해 정령계로 되돌아가게 되면 그를 통제하는 정령사도 그 충격에서 자유로 울 수 없다고. 시르케이안을 이곳으로 불러 낸 것은 분명 나였지만 그녀는 확실히 아이렌의 힘을 통해 여기서 활동하고 있었으니까. "그 폭음은 뭐야?" "놈들을 놓쳐 버린데다 공간이동이 전혀 안통했어. 나도 시르를 재촉했지만 길을 찾을 수 없었어. 게다가 셰더가 갑자기 습격해오는 바람에... 세 이 언니가 화가 나서 결국 마법을 날려버렸어. 그래서..." 아이렌은 다소 숨을 헐떡거리면서 그녀가 온 방향을 가리켰다. 아이렌이 가리킨 쪽 복도 끝에는 무너진 돌무더기들이 통로를 완전히 막고 있었 다. 헉! 그럼 이제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된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중요한 질문을 아이렌에게 던졌다. "그런데 공간이동이 안된다니 어째서야?" "세이 언니가 말해 줬어... 여긴 일종의 폐쇄계(閉鎖界). 즉 진(陣)이래." "뭐어!?" 레이엔이 아이렌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폐쇄계? 진?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나는 단지 멍하니 서 있다가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뭔데?" "음... 형한테는 조금 어려울 지도 모르는 설명인데..." 레이엔이 약간 말끝을 흘렸다. 으윽. 아무리 내가 이 세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원래 세계에서도 공부를 좀 못했다지만 저런 어린애들한테까지 무 시당하다니... 오기가 생겨서라도 설명을 들어야겠다! "괜찮아. 가르쳐 줘." "알았어. 일단 계(system)의 개념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계라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특정한 한 부분을 지칭하는 말이야. 일종 의 조그만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지. 이 계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어. 열린계(open system), 닫힌계(closed system), 그리고 폐쇄계 혹은 고립계 (isolated system)가 있어." "그래서?" 답변을 듣자마자 젠장! 괜히 물어봤어! 하는 생각이 팍 들었지만 그래도 형이라고 자존심이 있는 법. 이해하던 말던간에 일단 넘어가고 보자 라 는 생각으로 다음 설명을 재촉했다. "열린계에는 물질과 에너지가 경계(boundaries)를 통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 만약에 컵에 물이 담겨 있다고 하면 컵에서 물을 빼낼 수도 있 고, 에너지를 가해 데울 수도 있지. 그리고 닫힌계는 에너지는 통과할 수 있지만 물질은 통과할 수 없는 계야. 만약에 우리가 닫힌계에 있다면 경계를 부수지 않는 이상 나갈 수는 있지만 에너지가 통과할 수 있기 때문에 외부와 연결되는 공간이동 같은 것은 가능해." 괜히 듣자고 했어. 흐윽. 레이엔은 딴에 쉽게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은데 전혀 기초지식이 없는 나는 멍하게 고개만 끄덕거리면서 듣고 있을 뿐이었다. "형, 듣고 있어?" "응." 레이엔은 벙찐 내 표정을 보고 심히 불신하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설명은 이어나갔다. "그리고 폐쇄계에서는 물질과 에너지의 통과가 모두 불가능해. 그것 때문에 공간이동을 해 봤자 폐쇄계 밖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어." "그... 그런게 가능한거야? 영영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건 아니지?" 그래도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는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공간이동으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공간에서 과연 나가는 게 가능해? 그렇 다면 녀석들은 어떻게 이곳에 우릴 가둔거지? 아까 침대와 연결된 방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었다. 레이엔의 설명을 반절이나마 이해할 수 있 으면 알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빠져나갈 수는 있어. 인간의 힘으로 완벽한 폐쇄계는 만들 수 없으니까. 하여간 진(陣)이란 이런저런 마력과 장치를 이용해서 인위적으로 만든 폐쇄계야. 진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단 두가지!" 레이엔이 힘없이 벽에 기대앉아 있는 아이렌의 상태를 살피면서 말했다. "진에는 반드시 생사(生死)의 문이 있어, 그 문으로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경계를 찾아 부수거나 둘 중 하나야." "흐음... 그래서 세이 누나가 마법으로 벽을 부순 건가?" "그런 목적은 아냐. 폐쇄계가 얼마나 넓느냐에 달렸지만 폐쇄계에서는 어떤 에너지도 밖으로 방출되지 않고 들어오지도 않아. 때문에 누나같이 강력한 마법사가 함부로 마법을 써댔다가는 이 공간의 마나가 전부 고갈되어 마법을 전혀 쓸 수 없게 되어 버릴껄? 물론 사이엔 형도 마찬가지 야. 검기를 전혀 사용할 수 없겠지." 헉, 그렇다면 큰일이잖아! 누나나 형의 힘으로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상황에 마나를 이용한 모든 것이 봉쇄되면... 셰더와 시르팡 녀석들이 습격하 면 그대로 당한다는 이야기 아냐? "그렇다면 정령은! 정령은 그런 거와 관계없겠지?" "관계없기는 하지만... 아이렌이 이런 상태로는..." 숨은 아까보다 고르게 쉬는 모양이지만 아이렌은 영 힘이 없는 모양이었다. 시르케이안이 강제역소환 당한 충격이 꽤 큰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소환하는것도 문제지만 또 역소환 같은 거라도 당하면 죽어." 레이엔이 딱 잘라서 말했다. 으으... 그 싸이코 변태 중년 흑마법사 셰더 녀석, 끝까지 사람을 괴롭히는군. 그때 딱 생각나는 게 있었다. "아, 그래. 내가 낀 마법아이템들... 무한의 팔찌 같은 거 있잖아. 벗겨지지는 않지만 그 힘을 어떻게든 아이렌에게도 적용시킬 수 없을까?" 하지만 레이엔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그건 무리. 애초부터 그 아이템들은 전부 카이엔 형 only!라는 조항이 붙어 있어. 그것들은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형만을 위해 설계되고 제작된거야." "이왕 만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쓸 수 있도록 했으면 좋았을텐데..."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레이엔은 묘한 눈으로 나를 여기저기 뜯어보는 듯한 눈치였다. "형... 변한 것 같아." "응? 아, 그렇긴 그럴 수밖에 없지. 난 예전 일들은 하나도 기억할 수 없으니까." "아냐...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인격이 이렇게 변하리라고는 납득할 수 없어. 이전의 형이라면 남에게 받는 것을 당연스럽게 여기고, 남은 전혀 생 각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혼마저도 변한 것은 아닐까... 그런 느낌이야." 덜컹.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점성가이자 예언가이기도 한 레이엔. 나는 혹시라도 레이엔이 나의 진짜 정체를 알아낸 것이 아닐까 하는 불 안감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들이 알던 카이엔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빙의한 정신이라는 그 사실을 만약에 저들이 알게 된다면... "카이 오빠..." "어, 아이렌. 몸은 좀 어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 그 때 아이렌이 나를 불렀다. 나는 기회라는 듯 아이렌의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살폈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게 불안감이 가시 지 않은 듯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레이엔은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응. 조금은 움직일 수 있을 거 같은데... 오빠가 업어 줄래?" "내... 내가?" "응." 그렇잖아도 여자애 파자마를 입고 있는 판국에 애까지 업으라니 좀 망설여진다. 게다가 아까 레이엔이랑 껴안고 뒹구는 바람에 때묻기 쉬운 파 자마는 더럽혀진 곳이 많아 엉망이었다. 하긴 그 점은 아이렌이나 레이엔도 마찬가지라 크게 신경쓰이는 일은 아니었다. "내가 업고 가면 안 될까? 아이렌?" 그때 레이엔이 점수를 좀 따보겠다는 듯 날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레이엔은 아이렌의 말 한 마디에 단숨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나보다 키도 작으면서 무슨...." 그랬다. 둘다 꼬마아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여자애가 성장이 더 빨라서인지 몰라도 아이렌의 키는 레이엔보다 몇 센치 가량 눈에 보일 만큼 더 컸다. 그러자 레이엔도 조금 열이 받은 듯 홧김에 말을 내뱉었다. "키가 나보다 큰 만큼 무게도 나보다 무겁지." 이번엔 아이렌이 스팀을 좀 받은 듯 표정이 변했다. "아, 그러셔? 명색이 대륙 7대 예언가라면서 이번 카이 오빠 납치사건에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되잖아?" "대륙 7대 정령 마스터란 누구는 바보같이 정령왕을 역소환 당했다지. 니가 제대로 정신만 차리고 있으면 세이렌 누나도 쉽게 역소환 같은거 못 시키는 거 알어." "뭐야? 넌 정령소환 같은 거 할 수 있기나 해!?" "앞뒤 가리지도 않고 진(陣)에 빠져든 바보가 누구더라?" "우쒸. 너도 결국 들어왔잖아! 결국은!" "너네들이 무작정 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알다시피 카이엔 형이랑 난 전투력이 거의 없는데 그렇다면 또 납치되기 십상이잖아! 바보!" 애들이란 아무리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래도 홧김에 열받고 하면 싸우고 마는가 보다. 아, 그건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진가? 점점 더 목청을 높이 며 격렬해지는 두 쌍둥이간의 다툼을 오빠&형 된 입장으로서 말리는 것이 대의! 간만에 오빠 노릇을 하긴 해 본다. "자. 자. 아이와 레이가 서로 싸우면 이 오빠는 슬퍼요. 그러니까 서로 싸우지 말고 세이 누나와 사이 형을 찾아 여길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해 보 자꾸나." 나는 세이렌 누나가 삐졌을 때 쓰는 초 필살 뇌살미소를 얼굴에 띄우면서 아이렌과 레이엔을 토닥거리며 달랬다. "응. 알았어 카이 오빠. 카이 오빠가 하는 말이면 무조건 들을께. 레이엔 녀석이 좀 귀찮게 굴긴 하지만 그정도는 가뿐히 무시해주지 뭐." "나야말로 카이엔 형 때문에 참는거야. 쳇." 레이엔과 아이렌은 끝까지 적대감어린 눈빛을 교환하기는 했지만 내가 잘 달래서인지 더이상 싸우지는 않았다. 만약에 말리는 사람이 내가 아니 었다면 싸움이 이렇게 쉽게 그칠 리 없겠지. 나는 새삼스럽게 내 방긋방긋거리는 얼굴의 위력을 실감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 유명한 괴도 시르팡. 아니... 카이엔 형의 말로는 시르팡 일족이 되겠지. 그들이 만든 진이라면 결코 파해(破解)하기가 쉽 진 않을거야." 내가 칭얼대는 아이렌을 하는 수 없이 등에 업어주는 사이에 레이엔은 어느 새 평소 때의 얼굴로 돌아와서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무서운 놈. 아무리 별의 궤도를 읽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지만 그래서인가? 지나치게 애들답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정신연령으로만 따지만 세 이렌 누나나 사이엔 형보다 더 높은 것 같다. 그 사람들이 너무 낮은 탓도 있겠지만... "일단은 따라와. 형. 어떻게든 파해해볼 테니까." 레이엔은 흥미로운 도전거리가 생긴 듯 주먹을 꽉 쥐면서 아이렌이 걸어온 막힌 방향 대신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걸어나갔다. 나는 아이렌을 등 에 업은 채 레이엔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아이렌은... 레이엔이 말한 대로 꽤 무거웠다. 하지만 꼬마라도 여자앤데 그런 말 함부로 할 수 없겠지. 그리고 아무리 내 체격이 남자답 지 않게 가늘어도 솔직하게 이런 꼬마애 하나 못 들면 그래도 남자로서 좀 창피하잖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아이렌이 내 머리 옆으로 얼굴 을 불쑥 옆으로 내밀었다. 아마도 앞을 보려는 걸까? 라고 생각했을 때 아이렌은 내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바람을 후우 불었다. "우와아악!" 아마도 앞을 보려는 걸까? 라고 생각했을 때 아이렌은 내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바람을 후우 불었다. "우와아악!" 나는 온 몸이 전기가 짜르르 흐르듯 찌릿해지는 충격을 받고는 하마터면 업고 있던 아이렌을 떨어뜨릴 뻔했다. 헉. 헉. 놀란 가슴이 쉽사리 진정 되지 않았다. "자...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아이렌?" "오빨 사랑하는 애정표현이야.♡ 이왕이면 귀를 깨물어줄걸 그랬나?" "쓸데없는 짓 마. 아이렌. 형이 곤란해하잖아." 레이엔이 아주아주아주 화난 눈으로 아이렌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왜 그런 걸까? 레이엔이 굳이 어린애가 아니더라고 질투를 느끼는 것은 자연 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레이엔은 절대 나를 상대로는 그런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가 좋아하는 상대인 아이렌에게 그런 적대감을 드러내고 마는 것이었다. 나는...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라는 걸까? 레이엔의 태도에서 오는 의미를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아이렌... 좀 놀랐으니까. 조용히 가자. 그런 짓은 좀 말아줘." 나는 아이렌을 살살 달래면서 말했다. "응. 알았어. 오빠 말대로 할께." 아이렌은 꽤 아쉬워하는 것 같았지만 내 말에 따랐다. 계속 레이엔의 뒤를 따라 걸으니 아이렌이 내 등에 얼굴을 묻고는 부비적거리는 것을 느 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남자답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는 내 몸은 마음껏 부비적댈 만큼 등이 넓지도 않은데도 아이렌은 그래도 좋은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네. 이 정도는 봐줘야겠지? 레이엔은 조금 신경이 날카로워 보이는 듯 했지만 아이렌의 나에 대한 애정행각(?)을 무시하기로 작정한 듯 벽을 더듬고 갈림길에서 이곳저곳을 뒤지면서 진을 파해하는 데 집중했다. "카이 오빠아♡." 아이렌이 콧소리를 잔뜩 넣어 앞에 가는 레이엔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의 목소리로 날 불렀다. 으히힉. 평소에 워낙 가족들에게 이것저것 이상 한 일을 당하는 고로 이런 목소리를 들으면 이제는 딴 사람들처럼 좋아하면서 반갑게 대답해주기보다는 식은땀이 흘러내리면서 두려워지기까지 한다. "으... 응? 무슨 일이야?" "오빠 등에 이렇게 업혀 있으니 정말 좋아." "그... 그래." 이건 정상적인 대화야. 정상적인 대화. 나는 그렇게 머릿속에 되뇌며 아이렌이 즐거운 듯 므흣흣거리면서 걸어오는 말을 받아넘겼다. "특히 손에서 엉덩이로 전혀져오는 느낌이 너무 좋아." "켁!" 비틀. 하마터면 또 아이렌을 등에서 떨어뜨릴 뻔했다. 으허엉∼ 꼬마라고 생각해서 좋아한다니 뭐니 해도 세이렌 누나보다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세이 누나 만만찮게 무서운 녀석이잖아! 하여간 그런 말을 들으니까 나도 모르게 괜히 아이렌을 업은 손길에 신경이 쓰인다. 나는 두 손으로 아이렌의 엉덩이를 받쳐 업고 있는데 자꾸 방금 아이렌에게 들은 말이 신경이 쓰여서 손가락을 나도 모르게 꼼지락꼼지락 거리고 말았다. ...이거 뭐 하는 추태일까. 한국식으로 치면 초등학교 4학년정도밖에 안 되는 꼬마 여자애한테 말이야. "오... 오빠아?" "미... 미안." 아이렌이 이번에는 조금 놀란 어투로 날 불렀다. 아무래도 아까 쓸데없이 아이렌의 엉덩이를 잡은 손가락을 좀 꼼지락거린 것을 눈치챈 모양이 었다. "더 해줘..." 비틀. 나는 다시 한번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허어엉∼ 아무리 꼬마애라지만 그래서 아이렌이 더 무서워어! 세이 누나라도 상관없으니까 누가 얘 좀 맡아줘어! 나 더이상 얘 못 업고 있겠어어∼ 라고 조금 위험을 각오한 생각을 머릿속에 펼치고 있을 때쯤 앞서 가던 레이엔이 참다 못해 한 마디 쏘았다. 진을 파해하는 것만 생각하겠다고 는 했지만 아까부터 대충 상황 돌아가는 것은 짐작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카이엔 형. 아이렌이 자꾸 입을 나불대는 걸 보니까 다 나았나봐. 그냥 내려놓고 걷게 해버려." "무슨 소리야!? 레이엔! 정령왕 역소환이 몸에 얼마나 부담이 되는지 몰라서 그래!" "부담이 간 것치고는 지나치게 팔팔하군그래." 다시금 아이렌과 레이엔이 눈을 부릅뜨고 싸우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내게는 살았다는 느낌이 왔다. 그래. 싸우는 걸 말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싸 우는 걸 냅두는게 오히려 나한테는 편하겠다. "하여간 대충 진의 구조는 알았으니까 슬슬 생문으로 빠져나가... 업드려! 아이렌!" "에?" 레이엔이 다급하게 외치며 바닥에 몸을 밀착시켰고 아이렌도 재빨리 내 등에서 내려와 바닥에 업드렸다. 내가 재빨리 행동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하게 서 있자 무언가 검은 기운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지금 껀... 뭐지?" "일종의 흑마법인데... 형은 절대마력보호반지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 그래서 아까전에 아이렌에게만 업드리라고 소리친 거군. 애초부터 나는 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고... 하지만 왠지 섭섭한 느낌도 들 기는 하다. 그래도 레이엔이 나보다는 아이렌을 확실히 먼저 생각한다는 점만은 느낄 수 있었다. 아이렌도 레이엔의 말에 재빨리 반응해줬고 말 이야. '뭐. 나름대로 잘 된 건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통로 앞에서 흑마법을 날렸던 주인공, 셰더가 입을 열었다. "쳇. 카이엔에게는 통하지 않겠지만 다른 놈들은 마비를 걸려고 했는데 용케 피했군. 하지만 그런 운이 언제까지나 지속되지는 않을거다." 여전히 거부감이 팍팍 드는 목소리다. 하지만 괜찮아. 이제 내 옆에는 내 가족들이 있으니까 말야. 응? 근데 잠깐 생각해보자. 레이엔은 직접적인 전투력은 없고 아이렌은 아까 시르케이안을 역소환당한 충격으로 아직... 우아아악! Shit! "카이 오빠를 건드리게 놔두지 않아!" 아이렌이 내 앞으로 나서면서 소리쳤다. 아이렌, 이제 괜찮은 거야? "맹랑한 아가씨. 아까 내가 역소환시킨 충격이 아직 남아 있을 텐데? 함부로 상위 정령이나 정령왕을 다시 소환하면 위험할 거라구. 그렇다고 약 한 녀석들을 소환하면 이 몸에게는 꿈쩍도 안할테고 말야. 우하하핫!" 기분 나쁜 웃음소리. 기왕 중년이라면 중년의 호쾌함이 묻어나는 카리스마라도 있어야 하는데 조명이 희미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 시꺼먼 옷으로 저렇게 웃어봤자 바보같게만 보인다구! 하지만 저놈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상당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괜찮아. 형." 그런 나의 불안감을 눈치챈 듯 레이엔이 내 곁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아이렌을 믿어. 그리고 우리 가족들을 믿어줘. 우리는 형이 기억을 잃기 전부터 지금까지 형을 쭈욱 믿고 있으니까." "응. 믿을께." 어째서일까? 그렇게 말하면서 아이렌의 옆에 서는 레이엔의 작은 뒷모습이 더없이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전혀 애다운 면이 없기는 하지만 다 른 가족들이 전부 정신연령이 조금 낮아서인지 몰라도 가족 누구보다도 레이엔의 말은 신뢰가 갔다. 그때 레이엔이 아이렌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닥속닥거렸다. 뭐지?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지만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아이렌은 레이엔의 한 말이 어딘가 말이 안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레이엔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 두사람이면 충분히 말이 된다고 생각해. 특히 누나에게는 말이야. 게다가 폐쇄계긴 해도 같은 계 안이잖아.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계의 크기에 는 제한이 있어. 특히 폐쇄계는." "하긴." 아이렌은 선뜻 믿기는 힘들지만 납득은 한다는 기색이었다. "후후후.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라도 너희들이 나 셰더를 상대할 만한 기력이 없다는 것은 너희들이 가장 잘 알텐데? 너희들도 항복한다 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글쎄요. 분명 우리들만으로는 아저씨의 상대가 되지 않겠죠. 하지만..." 아이렌이 바람의 하급 정령들을 여럿 불러내면서 말했다. "바람의 하급 정령 실피? 어이가 없군." "카이엔 형. 귀 막아. 꽉." 셰더가 기도 안 찬다는 듯 코웃음을 칠 때 레이엔이 뒤를 돌아보며 셰더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성량(聲量)으로 내게 말했다. 나는 레이엔의 말에 따라 귀를 꽉 막았다. "이런 방법이 있죠. [세이 언니! 사이 오빠! 그 흑마법사가 카이 오빠의 순결을 뺏으려 해! 빨리 와줘!]" 갑자기 귀청이 떨어질 듯한 엄청난 소음이 머릿골을 울렸다. 소리지른 방향이 반대쪽인대다 귀를 꽉 막았는데도 이 정도였다. 아무래도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서 소리를 엄청나게 증폭시킨 모양이었다. 소리는 바람을 타고 전파될 테니까. 아이렌이 소리지른 내용이 좀 창피스러워서 귀에서 손을 무심결에 떨어뜨릴 뻔했지만 어떻게든 끝까지 귀를 보호할 수 있었다. 설마 세이렌 누나와 사이렌 형이 저 증폭음을 듣고 어디선가 이곳으로 공간이동하거나 열심히 달려와 구해줄거라고 믿고 그렇게 큰 소리를 낸 건 아니겠지? "어디야! 어딧! 그 죽일놈의 흑마법사 자식!" "감히 내 동생을! 사악한 흑마법사 주제에 용서할 줄 아느냐!" 거짓말처럼 눈앞에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이 나타나 [감히 카이엔의 순결을 빼앗으려고 한 백번 죽어 마땅한 사악한 흑마법사]를 찾아 두리번 거리는 것이었다. "저... 정말로 나타났네? 공간이동 안된다며?" "외부 세계와 공간이동이 안되는 거고 같은 세계 내에서는 가능해 형. 그리고 이 폐쇄계는 그 자체로는 그다지 크지 않아서 목소리가 전달될 거 라고 생각했어... 아마. 누나라면 목소리를 전해준 실피에게 물어서 이곳의 좌표를 알아냈겠지." "잘도 그런 생각을 했네." "이 공간에 대한 예지가 조금 보였거든." "치이. 그 예지력도 가끔씩은 쓸만할 때도 있네." 그렇게 아이렌, 레이엔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고작 대륙 7대 '흑'마법사 중 한명인 셰더는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한테 집중공격을 받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가고 있었다. 하지만 원체 공간이 좁은 터라 아까처럼 무너질 위험이 있어 공격에 제한 요소가 있었고 시르팡과 연합한 셰더는 이 공간에 대해 잘 알고 있어 쉽게 도망갈 수 있었다. 누나와 형은 아까처럼 날 떼어두고 간 걸 생각해서인지 더 이상은 그를 쫗지 않았 다. "미안해. 카이. 누나가 널 내버려두고 가서." "됐으니까 빨리 여기서 나갈 방법이나 찾아봐." 나는 뾰로통해져서는 팔짱을 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렇게 소란을 피우며 날 지켜준다면서 결국 납치당하고, 여기 와서는 날 빼놓고 가 버 리고, 뭐야? 흥! "아이렌에게는 조금 무리겠지만 나나 누님에게 있어서 이곳을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아. 힘으로 깨부수면 되니까. 하지만 카이엔 너를 찾느라고 그럴 수 없었지." 사이엔 형도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다들 쓸데없이 감정만 앞서서는... 좀 냉정해졌어야지. 우린 카이엔 형을 구하러 온 거지. 시르팡 놈들을 잡아 족치는 것은 차후의 문제였잖아?" 레이엔도 투덜거리면서 이야기했다. 레이엔도 참 여러가지로 고생이 많은 녀석이다. "이제 됐어.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자. 응? 레이엔. 여긴 답답해." "알았어. 원래는 생(生)문을 찾아서 지나가야 하지만 사이엔 형이나 세이렌 누나도 있으니까 부수면 되겠지. 경계 위치는 아래 쪽 방향이야." "아래?" 아래 방향이라니 그게 뭔 말이냐? 그런 궁금증을 느낄 때 아이렌이 살짝 귀띔해 주었다. "폐쇄계에서의 방향은 원래 세계와는 조금 달라, 오빠." "그럼 내가 길을 만들지. 누님은 방어막을 쳐서 카이엔과 동생들을 보호해 주십시오." "좋아. 간다. 세계를 가르는 힘이여! 솟아라! 계간파(界間破)!" 검을 들고 외치는 사이엔 형의 모습은 듣고 있는 내가 왠지 쪽팔릴 지경이었지만 나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세이렌 누나의 방어막 안에서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저렇게 기술 이름을 열혈틱하게 외치는 게 당연한 걸까? 사이엔 형의 검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솟아나 앞을 가렸다. 그리고 폭음과 함께 공간이 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하지만 구체 형태의 방어 막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어떤 피해도 주지 않았다. 제23화 : 마도(魔道)의 노예(奴隸) 그리고 그 빛과 진동이 사라졌을 때 우리가 있었던 희미한 빛으로 차 있던 묘한 동굴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산 중턱 어딘가의 공터에 서 있었다. "여긴...?" "1회용 공간이었나 보군. 별 거 아니잖아." 사이엔 형이 검집에 검을 집어넣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세이렌 누나는 사이엔 형과는 달리 약간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하지만... 1회용 공간이라도 닫힌계가 아닌 폐쇄계 공간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냐. 시르팡이란 자들... 좀더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그러면서 누나는 어디서 주웠는지 알 수 없는 종이 쪼가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시르팡 일가가 남긴 메세지가 써 있었다. [오오. 우리 시르팡의 진을 무너뜨리다니 제법이잖아? 그럼 담에 또 봐, 형수님! -시르쥬-] ...누가 형수라는 거얏! [오호호호∼ 이번에는 방심했지만 담에는 놓치지 않겠다. 사랑스런 며눌아∼ -시르쥬, 시르젤의 에미가-] 이 인간들... 누가 담에 또 납치당할 줄 알아? 너네 맘대로 결정하지 말라구! 난 더이상 남들에게 휘둘리는 건 싫단 말얏! [여러 모로 심려 끼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다음에 뵐 때는 좀더 좋은 모습으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르젤- 시르쥬고 그 엄마고 전부 보기 싫었지만 그래도 시르젤은 친절하고 예의도 깍듯해서 다음에 한번 또 볼 수 있었으면 좋을지도... 하는 생각이 잠 깐 동안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납치당할 수야 없는 노릇이지. "그럼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 더 이상은 이런 곳에 있고 싶지 않아." 집. 집. 산 지 며칠이나 됐냐고 이렇게 집 타령을 하냐만은 지금 생각으로는 그 어디보다 돌아가고 싶은 장소였다. "잠깐. 모두들 저기 좀 봐." 재깍 공간이동을 시전하려는 세이렌 누나를 레이엔이 말리고는 여기서 약간 떨어진 바위 위를 가리켰다. 바위 위에 서 있는 소녀는 자기 키보다 조금 작을 정도로 커다란 모자를 쓰고 칠흑같은 머리를 늘어뜨리며 멍하니 서 있었다... "저 애는..." "쟤 누구야?" "글쎄, 난 본 적 없는데?" 이어지는 세이렌 누나와 아이렌의 이야기를 듣고 난 다시금 휘청거렸다. 아무리 존재감이 없어보이는 애였다고 하지만 저렇게 커다란 모자를 쓰 고 있는데도 기억이 안 나? 아무도 신경을 안 썼구먼! 레이엔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어이없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날 대신해서 그 소 녀의 정체를 설명했다. "정말이지. 저 애는 셰더라는 그 흑마법사와 함께 있던 여자애잖아?" "기억 안나." "저런 애가 있었나?" 이 사람들이 정말... "하여간 그녀석들에 대한 단서가 될 수 있겠군. 내가 잡아 오지." 사이엔 형이 그렇게 말하며 몸을 날려 뛰었다. 나는 처음에 저런 거리에 있는 애를 데려오는 것은 아이렌의 정령이나 세이렌 누나의 마법이 더 낫지 않겠느냐고 말하려다가 사이엔 형의 모습을 보고는 입을 꾹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세상에세상에! 저게 과연 인간의 몸으로 낼 수 있는 스피드냐!? 사이엔 형은 무슨 자동차가 돌진하는 것 같은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장애물이나 바위가 있으면 멈춤없이 단번에 점프하여 지형을 타고 넘는 것이 마치 논밭을 뛰어다니는 메뚜기 같았다. 비유가 이상하지만 그 정도로 점프력 이 뛰어났다는 말이다. 새삼스럽게 그랜드 소드 마스터 라는 이름의 존재감을 실감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여자아이는 사이엔 형의 옆구리에 끼여 축 늘어져 있었다. "셰더라는 녀석, 자기 수하를 내버리고 가다니." 레이엔이 기가 찬다는 듯이 내뱉었지만 나는 사이엔 형이 한대 쳐서 기절해 있는 그 소녀의 신비로워 보이는 얼굴이 묘하게도 뇌리에 꽉 박히고 있었다. 어쩐지 독사과를 먹고 잠들어 있는 공주님의 이미지랄까... 마녀틱한 의상과 더불어 더 몽환적으로 느껴지는 여자아이였다. "저 여자... 집으로 데려가자." "에?" 세이렌 누나가 한 말에 아이렌과 사이엔이 동시에 반응했다. "그게 무슨 말야, 세이 언니?" "맞습니다. 그렇잖아도 카이엔이 왜인지 모르게 이 애한테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경쟁자가 늘어나면..." 딱! "사이엔, 너 몇대 맞고 헛소리 집어치울래?" "왜 때립니까! 누님! 제 말에 틀린 데가 어디..." "흑마법사라는 종족들을 몇 번 상대해봤으면 알 거 아냣! 이 소녀가 어떤 아이인지!" "설마... 마도(魔道)의 노예(奴隸)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마도의 노예? 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레이엔의 표정은 굳었고 아이렌의 입은 딱 벌어졌다. 주변 공기가 갑자기 변하는 듯한 느낌이 왔다. "난 절대 반대야, 세이 언니. 그건... 위험해." 아이렌이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으며 세이렌 누나의 결정에 반대하고 나섰다. "뭐가 위험해? 설마 이 세이렌 브리타뉴 더 마요르카 오브 세븐 매직 마스터즈에게 이런 노예따위가 무슨 해꼬지라도 할까봐?" "누가 언니 따위 걱정한데? 내가 걱정하는 건 카이 오빠란 말야!" "시끄럿! 감히 내 사랑스런 카이를 여.자.로 바꾸려고 했다니 잡아 찢어죽여도 모자랄 것 같단 말야! 데려가서 잡아 족쳐서 그 셰더라는 놈이 어 디 있는가 알아봐야 겠어. 그리고 그 시르팡이라는 괴도작자들도!" "그래도..." 아이렌이 뭐라고 항변하려고 했지만 누나의 변한 눈빛을 보더니 입을 다물고 내 뒤로 쪼르르 달려와서는 숨었다. 오오! 저 눈빛은 바로 폭주 모 드로 돌입하기전 상태인 데프콘 쓰리가 아니던가! 다행스럽게도 누나는 곧 평상시의 눈빛으로 돌아오면서 쐐기를 박았다. "그럼 집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곧 공간이동을 했고 그 다음 순간 우린 우리 집 마당에 서 있었다. 정말로 반가운 집이였지만 이렇게 어이없이 도착하니 감동이라고 해 야 하나 기쁨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들이 좀 덜했다. 역시 고생과 인고의 과정을 겪고 도착한 목적지라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걸까나? 세이렌 누나와 아이렌은 바로 집안에 마련된 온천으로 달려가 몸을 씻으러 가 버렸고 사이엔 형은 여전히 옆구리에 그 소녀를 든 채 집사에게 말하고 부모님들께 알리겠다며 총총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당에는 나와 레이엔만이 남아 있었다. "형. 우리도 목욕이나 할까?" 그래. 어서 빨리 이 묘하게 어울리는 게 심히 불쾌한 분홍색 파자마부터 빨리 벗어던져 버려야지! 하지만 그렇다고 좋아라 들어가기에는 망설여 지는 점이 있었다. "으... 응. 하지만 세이 누나와 아이렌이 혹시..." "그러니까 두 사람이 온천에 들어간 지금 재빨리 해야 하는 거야. 평소라면 형이랑 같이 하겠다고 난리를 피우니까 말야. 다행히도 여자들이라서 오래 들어앉아 있거든? 둘이 나오기 전에 다른 온천에서 후닥닥 끝내고 나오자." "응. 알았어." 에휴. 난 욕탕에 오래 들어앉아서 본전을 뽑는 걸 좋아했는데 이제 그것도 느긋하게 못 하겠구나. 하지만 여인네들의 태클 없이 온천에 들어앉아 목욕을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야겠지. 그렇게 들어간 집 안 온천은 동네 목욕탕보다 몇 배 정도 큰 규모였다. 우리가 오고 나서 황급히 준비한 듯 커다란 욕조에 아직 물이 한창 채워 지고 있었다. "원래는 노천 온천도 있지만 세이렌 누나와 아이렌이 쓰고 있을 테니... 할 수 없지." 우우... 노천 온천... 아직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데. 가 보고 싶다. 그런 눈빛을 띄우고 있자 레이엔이 눈치를 챈 듯 내게 말했다. "카이엔 형. 기억을 잃어서 잘 모르겠지만 형이 노천 온천에 들어가면 온 집안 하인하녀들이 담장에 뚫린 구멍에 달라붙어. 그래도 괜찮아?" "그... 그래?" "그 사람들 쫗아내려면, 세이렌 누나나 아이렌이 있어야 하지. 힘으로 쫓아버릴 수 있으니까." 크윽. 그래도 한번은 거기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레이엔과 함께 물이 채워진 욕조에 들어앉았다. 물은 뜨끈했지만 그다지 뜨겁지 는 않았다. 난 원래 나이 든 어른들처럼 뜨거운 열탕에 들어앉는 것을 좋아했지만 몸 체구가 가늘어지고 피부가 매끈하고 부드럽게 바뀐 탓인지 그때처럼 뜨거운 물에는 견디기 힘들었다. 물론 나보다 작고 어린 레이엔도 그렇게 뜨거운 물을 좋아할 리 없으니 한국에서 목욕할 때보다 온도 를 좀 낮춰 넣을 수밖에 없겠지. 그건 그렇고, 여기 때는 밀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여기는 몸을 먼저 씻고 욕조에 들어가는 것이 한국식보다는 일본식에 가까운 온천 같았다. 언 젠가 때밀이를 구해 혼자 들어와 때를 밀어보겠다는 원대한 야망을 가슴에 품으며 레이엔과 함께 이번 납치 사건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 었다. 내가 납치당하고 난 후에 우리 가족들의 반응, 그리고 나를 찾으려고 했던 과정에 관해 레이엔은 말해 주었고 나는 그 시르팡이라는 자들과 셰 더에 대한 솔직한 내 감상을 말했다. "그건 그렇고... 그 마도의 노예라는 것은 뭐야?" 그 소녀. 왜인지는 몰라도 자꾸 신경쓰였다.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그녀의 모습뿐만 아니라 딱 한 번 들었던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 [도와줘...]라는 그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울려 증폭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도의 노예란..." 원래 침착성질냉정을 주위에 뿌리고 다니는 녀석이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고 듣고 있는 나도 긴장한 채 이야기를 들었다. "말 그대로야. 마도, 즉 흑마법사들의 노예. 그들에게 강제로 종속되서 보통 자잘한 심부름이나 기타 등등을 떠맡고 약간의 흑마법도 써. 당연히 그런 걸 나서서 지원하는 사람은 없고, 흑마법사들이 제멋대로 납치해서 노예로 만들지.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리기 때문에, 한번 그들의 노예가 되면 도망갈 곳도 없어." "불쌍하네..." 그런 변태 마법사 밑에서 생활을 했다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애초부터 제대로 생각이 박힌 녀석이라면 강제로 성전환을 시키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겠지. "아마도 그 애는... 좀더 심각한 상태일거야." "뭐가?" "이런 이야기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레이엔. 니가 좀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날 생각해 주는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내 나이가 너보단 많잖아. 충분히 이해하고 알아들을 수 있어." 레이엔이 어딘지 모르게 머뭇거리자 나는 내 나이를 이용해서 압박에 들어갔다. 레이엔이 알 만한 사실을 내가 못 알아듣는 일이 있을 수 있겠 냐? "그 애는... 상대가 상당히 안 좋았어. 그 셰더라는 흑마법사. 그 소녀를 흑마법의 반작용으로 돌아오는 저주의 제물로 사용한 것 같아." 그랬나... 그래서 그 소녀는 그렇게 백치같이 행동했나 보다. 셰더의 명령을 받아 행동했지만 동작은 느리고 위태롭기 그지없어 보였으니까. 내게 했던 그 도와달라는 말. 그 말조차 목이 메어 나올 수도 없는 말을 간신히 끄집어 낼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슬프게도... 흑마법사들은 마도의 노예로 젊은 여자를 선호해. 성적 노리개로도 쓰기 위해..." "뭐야!?" 나는 깜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욕조에서 일어섰다. 일어선 내 몸에서 물이 잔뜩 튀면서 수면에 셀 수 없이 많은 파문을 남겼다. 레이엔은 내가 갑자기 일어서자 깜짝 놀란 듯 얼굴을 가렸다. "아, 미안, 레이엔." "아냐. 역시 형에게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나..." 초등학생의 얼굴로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는 네가 더 내겐 충격적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욕조에 몸을 담궜 다. 불쌍한 소녀... 그 변태틱한 흑마법사에게 이렇고 저렇고 또 그런 짓까지 멋대로 당하면서 불행한 삶을 살았단 말이지! 나는 주먹을 불끈 쥐 면서 셰더에게 적의를 불태웠다. 다음에 만나면 절대로 가만히 둬서는 안될 정말 사악한 작자다. 레이엔은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럼히 바라보면서 뭔가를 중얼거렸다. "후우... 조만간에 다들 난리나겠군. 라이벌이 하나 더 늘었으니." "뭐라고 했어, 레이엔?" "아무것도 아냐." 후웅... 레이엔녀석 뭔가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린 것 같은 데 작은 목소리로 말해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나저나 흥분해서 갑자기 열을 냈더니 왠지 더워졌다. 그래서 몸도 정신도 좀 식히자는 취지에서 나는 한쪽 구석에 있는 조그만 냉탕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24화 : 새 식구 아시에. "안녕... 하세요." 다음날 아침에 아침밥을 먹으러 식당에 나섰을 때 나는 거기서 어제 우리가 데려온 셰더의 노예라고 하는 소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말을 더듬거렸지만, 어제 보았던 백치나 다름없던 상황보다는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아... 안녕." 나는 엉거주춤하게 서서 어색하게 그 소녀에게 인사했다. 그런데 저 애. 밥 먹을 때도 저 커다란 모자를 쓰고 먹는 걸까? 불편할 뿐만 아니라 주 변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텐데 말이야. 어제 레이엔에게 마도의 노예에 대해 여러가지 말을 들어서 그런지 여러가지로 그 소녀에 대해서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왕궁에 가 있는 엄마 아빠를 제외한 전 가족이 다 모이자, 집안의 실질적인 카리스마 서열 1위인 세이렌 누나가 그 소녀의 옆에 서서 말 했다. "자, 자기소개 해야지. 오늘부터 우리 집 식구가 되는 아시에 양?" "네에..." 여전히 여리고 묘한 톤의 약한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이름은 아시에인가? 이름도 그 외모나 목소리에 걸맞게 어딘지 신비스런 느낌이었다. 그런 데 갑자기 우리 집 식구가 된다고? 세이렌 누나,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때 아이렌이 식탁을 쾅 치면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난 절대 반대야! 더러운 마도의 노예 따위 받아들여 봤자, 카이 오빠에게 나쁜 일만 생길거야!" 어린애의 고집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렌의 사려깊지 못한 창끝을 곤두세운 투정은 날 슬프게 만들었다. 마도의 노예라는 낙인이 찍힌 사람은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은 레이엔에게 들었지만 실제 아이렌의 반응을 보니 더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나는 원래 이곳 사 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잘 이해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그런 존재를 무려 우리 집 식구로 받아들이기로 한 누나의 저의는 대체 뭘까? "그런데다 엄마, 아빠가 허락도 안했는데 이게 언니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아이렌은 결사항전의 뜻을 밝히며 세이렌 누나의 결정에 저항하고 나섰다. "그게 본심은 아닐텐데?" 세이렌 누나가 역질문을 하면서 아이렌의 말을 되받아쳤다. "그런 건 모두 핑계일 뿐이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잖아." 진짜 이유가 따로 있다고? 아이렌이 아시에라는 저 여자아이를 받아들이기 꺼려하는 이유라면... 설마... 아이렌은 세이렌 누나의 추궁에 머뭇거리더니 쌓인 감정을 한꺼번에 털어놓기라도 하듯이 외쳤다. "그래. 세이 언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나 저 계집애가 싫어! 특히 카이 오빠가 저앨 볼 때면... 어쩐지 넋을 잃고 바라보는 것 같아. 혹시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언니는 그런 생각 들지 않아?" 단순한 어린아이의 질투의 감정인가... 하지만 아이렌은 자기 나름대로 진지해보였다. 눈망울 눈물방울까지 보일 정도였으니까. 어린애가 집착이 생겨서 떼를 쓰면 무섭다고 하는데 독기어린 아이렌의 눈이 딱 그 꼴이었다. 하지만 역시 누나도 만만히 물러설 상대는 절대 아니었다. "오∼ 호호호. 그런 약한 말이 나오는 걸 보니 자신이 없는 모양이구나. 그렇지 않으면 네 미모가 솔직하게 아시에보다 떨어진다는 걸 인정하는 게니?" "이... 이... 으아앙∼" 아이렌은 세이렌 누나의 말을 듣고 다시 한번 아시에를 홱 돌아보았다. 그녀의 맹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얼굴을 한동안 쳐다본 아이렌은 뭐라 반 박할 말이 없는 듯 울음을 빼액 터뜨리고는 식당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쯔쯔... 어려요 어려." 세이렌 누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보통 누나라면 이럴 때 '언니가 잘못했어'라고 말하며 어떻게든 달래줘야 정상이 아닌가? 여기 처음 왔을 때부터 느끼고 있던 거긴 하지만 우리 집안... 정말 콩가루집안이군그려. 뭐 그래도... 저렇게 절망하고 뛰어나갈 필요는 없을텐데. 사실 아시에가 아이렌보다 훨씬 예쁜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실 아이렌은 예쁘고 뭐고를 논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잖아? 아직 신체발육도 안 된 어린애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 의도는 뭔지 저도 궁금합니다. 누님." 사이엔 형이 뛰쳐나간 아이렌을 대신해서 세이렌 누나를 추궁했다. 사이엔 형 역시 납득할만한 설명이 없으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야 예쁘잖아!" "네에?" 사이엔 형과 나뿐만이 아니라 레이엔마저도 이게 뭔 뜬구름 잡는 소리냐 하는 표정으로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기야 매일같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카이엔의 얼굴을 보고 사니까 왠만한 아름다운 미모라도 길가의 돌멩이같이 느껴지는 건 알겠지만, 아시에를 잘 봐. 이정도로 예쁜 천연미소녀는 아무 데서나 발굴할 수 있는 게 아니라구! 신비로우면서 멍한 분위기가 정말 매력적이지 않아?" 누나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커다란 모자와 찰랑거리는 흑발 사이에 있는 아시에는 내가 이 세계에 와서 본 여자 중에 가장 예뻤다. 단순히 예쁘다 라고는 느꼈지만 이느 정도 예쁜지 심각하게 따져보질 않았으니까 눈치채지 못했나 보다. 하기야 그 극악변태자식 셰더에게 가려서 별다 른 존재감조차 느끼지 못했지. 그렇다면 내가 아시에에게 끌린 듯한 느낌을 받은 것도 외모 때문일까? "하지만 외모보다도 훨씬 더 매력적인 게 있어. 바로 그건 목소리야, 목소리! 이 애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보면 약하고 떨리는 목소리 음색이 마 치 신비로운 음악소리처럼 느껴진다니까!? 이 목소리를 들으려고 어제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불쌍하게도 얼마나 흑마법의 부작용을 뒤집어썼는 지 도통 말을 못하더라니깐! 그래서 간신히 이 정도로 회복시켜 놨다. 휘유..." "흠흠. 뭐 그 아이가 예쁘고 청아한 목소리를 가진 건 별개로 하고 말입니다. 혹시 누님은 그 아이가 카이엔을 가로챈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시는 겝니까? 우리에게는 그냥 보통으로 대하는 카이엔이 저 애만 보면 어쩐지 눈빛이 달라진다고요!" ...잘도 그런 걸 알아채는군. 하기야 사이엔 형도 남자라서 티만 덜 날 뿐이지 세이렌 누나나 아이렌이나 다를 바 없는 극성 스토커들이지. "호호호호. 너도 아이렌과 마찬가지구나. 그건 분명 자기 능력에 자신감이 없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에엣?" "경쟁에서 이겨낼 자신이 없다는 말이잖아? 원래부터 나한테도 딸렸는데다가 하나 더 있으니까 위기감을 느끼는 모양이지?"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세이렌 누나에게 개겨볼려고 노력하기는 했지만 사이엔 형도 결국에는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세이렌 누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나와 레이엔에게 동의를 구했다. "카이와 레이도 이의없지?, 어 레이엔은?" 그러고보니 내 옆자리에 있는 레이엔이 그새 어딜 갔는지 식탁에 보이지 않았다. "레이엔 도련님께서는 아이렌 아가씨를 달래러 가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집사가 레이엔의 행방을 가르켜주었다. 오오. 레이엔 녀석. 이 기회에 아이렌에게 점수를 따볼 모양인가 보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레이엔을 속으로 응원했다. "자, 엄마 아빠한테도 미리 말해 뒀으니까 연락이 올거야. 자, 아시에. 이번에야말로 정식으로 자기 소갤 하렴. 이 언니는 네 신비로운 목소리를 듣고 또 듣고 싶단다아." "아... 안녕... 하세요. 구해주... 셔서... 감사... 하고요... 오늘...부터 신세... 를 지게... 된 아시에라고... 해요." 아시에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 듯 연신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하기야 어제 내게 말했던 도와달라는 말도 온 몸의 기력을 짜내서 간신히 말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누나가 그 흑마법의 반작용인가 뭔가를 치료했다지만 그렇게 쉽게 치료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전(前) 대륙 7대 신관장이었다는 엄마가 와야 하겠지. "꺄아∼ 목소리 너무 예뻐어! 참 잘했어. 아시에. 이 언니가 너한테서 셰더놈한테서 받은 흑마법의 저주를 전부 풀어줄 만한 사람을 알고 있으니 까 안심하고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커헉. 세이렌 누나는 라이벌이 될 위험이고 뭐고 간에 일단 예쁘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시르팡의 그 아줌마와 비슷한 성격 일지도... 근데 어째 아시에가 세이렌 누나의 장난감 2호가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건 왜일까? 1호는 누구냐고? 묻지 마라... 괴롭다. 뭐 그래도 누나가 1호 장난감에게 싫증을 느낀 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아냐. 누나가 쉽게 날 포기할 리 없지. 아암. 형제자매간의 우애를 -나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만을 제외하고는 그런게 처음부터 있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마구 파괴시켜가면서 세이렌 누나의 강제적인 결정에 의해 아시에는 오늘부터 우리 집 식구가 되었다. 이 결정에 대한 나의 생각은... 솔직하게 별 생각이 없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좋든 나쁘든 신경쓰이는 애라는 사실을. 제25화 : 카이엔 공식팬클럽 <신세기 미소년전설> 이래저래 시끄러웠던 납치사건이 마무리되고, 나는 다시 학교에 등교했다. 평소에도 내가 학교 앞까지 와서 마차에서 내리면 여러 사람들이 달라 붙어서 서로 이야기를 걸려고 하지만 오늘은 유난히도 심했다. "카이엔 오빠, 오빠, 괜찮아요? 아무일 없었어요!?" "카이엔! 무사했구나!" "얼굴 좀 보여줘! 제발!" "시르팡은 어떤 괴도였어? 예고장에서 뜨거운 고백을 받았다며?" 에에? 아 많은 인파를 어떻게 뚫고 교실까지 들어가란 말야? 마차 주위로 사람들이 삐잉 둘러싸서 심지어 내릴 수조차 없었다. 교실 안까지만 들어가면 관계자 외 다른 사람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루프 마법이 걸려 있어서 우리 반 애들이 아니면 접근을 못하지만 이렇게 처음부터 길을 막 아버리면 대책이 없잖아? 그럴 때였다. 일련의 학생들이 인파를 헤집고 마차 쪽으로 다가오더니 몰려든 학생들을 강압적으로 치우고 길을 만들고 있었다. "와앗! 이건 뭐야! 뭐 하는 짓이야?" "누구 맘대로 카이엔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거야?" 하지만 여학생과 남학생이 뒤섞인 그 학생들은 미리 준비를 철저히 하고 나온 듯 수는 상대적으로 딸렸지만 이미 강력한 저지선을 형성한 후였 다. "이 때에요. 빨리 나오세요, 카이엔 님!" 그리고 그 저지선 안에서 마차 쪽으로 다가와 날 부른 사람은... 같은 반 급우 시에나 카발리에나였다. 같은 급우이면서도 항상 내게는 존댓말을 쓰는 아이였다. "너..." "시간이 없어요! 빨리!" "아... 알았어!" 시에나 저 애... 얼마 전에 마력재료를 넣은 도시락을 내게 먹인 죄명으로 학교 재판에서 내게 접근하지 말라는 처분을 받았잖아? 그런데 어떻게 된 거지? 그런 내 의문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저지선에 막혀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야유가 들려왔다. "어머 뻔뻔스러워라!" "저 기집애는 카이엔을 다 죽일 뻔해 놓고 또 설치네." 모여든 학생들을 저지하고 있는 애들은 나와 시에나 주위를 둘러싸며 보호하는 형국으로 저지선을 만들어 인파를 뚫고 점차 학교 쪽으로 전진해 갔다. 이런저런 소음이 뒤섞여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 이건 어떻게 된..." "나중에 교실까지 가서 설명할께요!" 그렇게 말하면서 시에나는 내 손을 잡고 냅다 뛰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군중들의 감정을 자극한 듯 잘 유지되고 있던 저지선이 일순간 흔들리 기 시작했고 학교쪽으로 전진하는 것도 힘들어지고 있었다. "회... 회장! 이대로는 무리야! 뚫리겠어!" "버텨! 끝까지 버텨! 우리가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결성되었는지 생각해!" 한 아이가 몰려드는 화난 군중 앞에 더 이상 버티기 힘든 듯 하소연했지만 시에나는 계속 버틸 것을 독려했다. 근데 뭐? 결성이라니, 얘네들 무 슨 학교 내 불량써클이라도 조직한 걸까? 하지만 여자애들이 다수인 것으로 봐서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혹시라도 내 친위대 같은 걸 자처하는 집단은 아니겠지? "아... 안돼!" 드디어 저지선이 뚫리고 사람들이 물밀듯이 시에나와 내가 있는 쪽으로 몰려들려고 할 때였다. 휘익. 내 주위로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었다. 나와 시에나는 거의 타격을 받지 않았지만 내 주위에 몰려든 학생들은 갑작스런 풍압에 모두들 반대쪽으 로 나자빠져 탑을 쌓거나 데굴데굴 굴렸다. 그 중에서는 저지선을 펴고 있던 애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수고했어, 회장." 그리고 나뒹구는 인파 너머로 손을 흔드는 사람과 뽑았던 검을 집어넣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피요르 자하기니아 공주와 그의 충직한 호위기사 이자 대륙 7대 그랜드 소드 마스터 중 하나인 실론 파르스였다. 바람을 일으킨 자는 아마 저 사람이겠지. 정말로 강력한 검풍(劍風)이다. 사이엔 형이랑 붙으면 누가 이길까? "늦었잖아, 부회장! 활동 첫날부터 이럴거야?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어." 시에나가 피요르에게 약간 짜증을 내면서 그녀를 질책했다. 회장? 부회장? 내가 없는 동안 뭔 일이 있었나? 게다가 쟤네들 언제 그 사이에 서 로 친해진 거지? "아, 좀 늦잠 잤거든... 그나저나 그 손 안 놓을 거야?" 그제야 눈치챈 사실이지만 시에나는 아까 혼란중에 내 손을 잡고 뛴 이후 은근슬쩍 그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시에나는 피요르가 쫑알거리며 째려보자 그제서야 아쉬운 듯 내 손에서 자기 손을 뗐다. 그리하여 그녀들과 함께 교실에 들어서니 또 분위기가 달랐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들어서자마자 다들 몰려들어 안부를 물었어야 하는데 다들 인 사만 하고 쉽게 접근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일..." "일단 앉아." 내가 당황해서 자리에 앉지 못하고 멈칫거릴 때 린넬이 내 어깨를 눌러서 자리에 앉혔다. 뭐야? 뭐야?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그때 시에나가 교실 앞으로 걸어나가더니 교탁에 서서 연설을 시작했다. "그럼 카이엔 님도 오셨으니 시작해볼까요. 며칠 전에 전교의 우상이자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초 미소년이신 카이엔 님이 시르팡이라는 사악한 범죄자에게 납치당한 것은 알고 계시죠?" 시르팡은 특정한 개인만을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었지만 그런 내막을 아는 사람이 이 중에있을 리 없었다. "물론 강력한 힘을 가진 카이엔 님의 가족과 친지들이 다행스럽게도 어제 무사히 카이엔 님을 구해서 이렇게 그 존안(尊顔)을 오늘도 뵐 수 있 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세상에는 카이엔 님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카이엔 님에게 고통을 주면서까지 혼자 독점하려는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시에나는 스스로가 자기 말에 감동한 듯 손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고 마음은 별세계로 가 있는 듯 눈동자에는 초점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 다. "그래서, 저 시에나 카발리에나와 피요르 공주님, 린넬 케이준 등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학교 어디서든지 카이엔 님을 위험에서부터 보호하고 여 러분들의 카이엔 님에 대한 마음을 체계적으로 모아 카이엔 님께 전달하고 카이엔 님을 위한 활동을 벌이기 위해 학교에 카이엔 님을 위한 공식 팬클럽을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에엥? 패... 팬클럽 결성? 그거 진담이야? 일단은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만... 발기인들의 명단을 보니 어딘지 좋지만은 않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참고로 이 연설은 교내 전체에 방송되도록 손을 써 놨어." 린넬이 내게 살짝 귀뜀했다. 이 팬클럽 결성... 꽤 계획적으로 성사된 것 같군. 하지만 단순히 날 보호하겠다는 그런 목적 외에 특별히 다른 이유 가 있을 것이 뻔했다. 어차피 나는 가족들이 채워준 강력한 마법무구들로 보호받고 있으니까. "그 팬클럽의 이름은 <신세기 미소년전설>로 지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팬클럽은 앞으로 학교에서의 카이엔 님의 모든 것에 대해 독점적인 권리 를 가질 것을 선언합니다. 카이엔 님을 사랑하는 전교생들께 많은 가입을 부탁드립니다." 시에나의 연설이 끝나자 교실은 박수소리로 가득찼다. 아무래도 이 팬클럽 결성. 최소한 이 교실에서는 상당한 지지도를 확보하고 있는 모양이었 다. "무슨 생각이야?" 나는 돌아가는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 옆자리의 린넬에게 물었다. "얼마 전에 시에나가 너에게 접근하지 말하는 판결을 받았잖아? 그래서 너한테 어떻게든 접근해볼 목적으로 시작한 것 같아." "아니 그런데 피요르 공주는 둘째치고 왜 너까지 끼여있어?" "일단은... 뭐. 너에게 얼굴도장 찍어두고 한마디라도 이야기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까 교통정리 좀 하자는 취진데. 나도 그렇고 많 은 사람이 그런 조직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동의를 했어. 시에나가 팬클럽 회장직을 맡은 데는 일단 논란이 많지만..." "그럼 <신세기 미소년전설>의 출범과 더불어 카이엔 님의 납치 정황에 대한 인터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에나는 일단 방송부 부장이니까. 나름대로 끗발이 있거든." 헉... 인터뷰? 가족들끼리는 일단 시르팡에 납치당한 일에 관해서는 모든 일을 함구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이러면 좀 난감해지잖아. "첫번째 질문입니다. 시르팡 룬 와크레이의 정체는 뭐였죠? 남자? 아니면 여자? 잘생긴 사람이었나요?" 그런 사정을 모르는 시에나는 천연덕스럽게 질문을 던졌고 교실 전체의 눈과 귀가 내게 집중되었다. 아마도 전교의 귀 역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겠지. 그때 수업을 시작하러 선생님이 들어왔다. "수업 종이 친지 오래네. 그리고 방송 빨리 안 끄나? 카발리에나 양? 우리 반 뿐 아니라 전교에서 수업에 들어갈 수 없잖냐?" "아이, 선생님. 조금만 봐주세요. 오늘은 특별히 카이엔 님이 납치당했다 돌아온 날인데..." "빨리 들어가게. 그렇지 않으면 점수를 깍겠네." "치이." 하지만 상대는 엄하기로 소문난 예절 선생님 티센 푸르지오. 시에나는 어쩔 수 없이 제자리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시 에나는 대신 보복으로 마법으로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전교 방송을 끄지 않는 만행을 저지름으로써 한동안 푸르지오 선생님의 수업이 전교에 방송되도록 내버려두었고 이 사태는 옆반 선생님이 항의하러 온 이후에야 종결지었다. 푸르지오 선생님은 노발대발해서는 시에나의 방송부 부장 직을 박탈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으나 시에나는 끝까지 실수였다고 잡아뗐다. 그리하여 이번 수업의 반 이상을 사제간의 말다툼으로 날려먹게 되었다. 잡다한 일로 수업 진도를 제대로 못 빼는 게 우리 반의 특징이기도 했 다. 제26화 : 치료(治療) "카이엔 님! 모두가 궁금해하잖아요. 제발 좀 가르쳐줘요!" "저도 부탁드려요. 카이엔 님. 핫, 혹시 그 시르팡이라는 자에게... 당하신 건!" "그럴 리가 없잖아! 조용히 밥 좀 먹자!" 점심 시간. 나는 오늘도 치즈가 선정해준 오늘의 주니어 베스트 도시락을 먹으면서 자꾸 시르팡에게 납치되었던 일을 묻는 시에나와 피요르에게 짜증을 잔뜩 내고 있었다. 쉬는 시간마다 귀찮게 구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밥 먹는 데까지 간섭이야? 그래서 나는 항의의 표시로 일부러 린넬의 도시락을 먹지 않았다. 괜히 팬클럽을 만들어서 이렇게 귀찮은 꼴을 당하고 있는 데 대한 무언의 항 의였다. 대신에 루카라가 싼 두 번째 순위의 도시락을 먹기로 결정했다. 지금 루카라는 내내 들떠서 여자애들한테 이야기하면서 카이엔 님이 내 도시락을 먹어줘서 황홀하다고 말하고 다니며 자랑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치즈는 조금 실망한 듯했다. 내가 최고의 도시락을 먹는 대신에 두 번째는 항상 시식의 명목으로 그녀가 먹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린넬에게 아예 도시락을 제출받는 것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에 치즈는 린넬의 도 시락은 시식조차 해 볼 수 없었다. 신경이 예민해진 채 밥을 먹으니 밥맛도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소화도 잘 안 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역시 밥은 편안하게 먹어야 제 맛인데... 원래대로라면 평소에 다른 애들의 눈치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하던 시에나와 피요르는 이제는 팬클럽 회장과 부회장이라는 감투를 쓰고 안하무 인격으로 노골적으로 접근해 왔다. 애초부터 이걸 노리고 팬클럽을 결성한 걸까? 그리고 최고 권력자 둘이 나한테 얼굴 비치는 데 열중하고 있을 때 린넬은 무슨 생각인지 가입자 신청을 받는 등 새로 출범한 조직을 열성적으 로 정비하고 있었다. 수업시간에는 도통 수업을 듣지 않고 팬클럽 규약이니 뭐니 하는 것을 열심히 제작하고 있고... 의외로 열정을 가지고 행동 하는 데 내가 놀랄 정도였다. 게다가 내게 도시락을 거절당한 사실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내가 팬클럽의 발기인이 된 건 너를 위해서라는 판단이 들어서야. 그 점은 명심해둬."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경험만을 생각해서는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카이엔, 경찰 조사에 협력하는 셈치고... 우리 아버질 위해서라도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가르쳐 줄 순 없어? 아버지가 왕립경찰청 시르팡 전담 담당 형사라는 키론 모아라드라는 급우도 내게 부탁하고 나섰다. 하지만 난 썩 내키지 않았다. 어쨌건 우리 가 문은 웬만한 국가에서도 함부로 할 수 있는 가문이 아닌 것이다. 그런 조사쯤 협력하지 않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래도 하도 끈질기게 달라붙는지라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머지 한 가지만 가르쳐주기로 결정했다. "에이, 귀찮아! 시르팡은 단수가 아냐, 그럼 됐어? 나 집에 갈거야!" "뭐?" "카... 카이엔. 미안해, 가지 말아줘!" 그렇게 말해봤자 이미 늦었어. 난 이미 마음속으로 조퇴를 결정해놓은 상태였다. 선생님의 허락? 국가 공권력도 건드릴 수 없는 학생들이 태반인 이 학교에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카이엔... 기억을 찾아가는 걸까? 옛날 성격이 나오는 것 같아..." 조금 신경쓰이는 발언을 누군가가 하는 것 같았지만 난 그대로 큰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나왔다. 집에서 마차가 올 시간은 아니었지만 나같이 학교를 불성실하게 다니는 학생이 워낙 많은지라 승객을 수송하는 마차들이 여럿 대기하고 있었다. "일찍 왔구나. 카이엔." "아빠?" 기분이 나쁜 채 집에 돌아오니 집 마당에서는 언제 왕궁에서 돌아왔는지 아빠가 정원에서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내가 납치당했을 때도 안 왔다더니, 왠일이에요?" 나는 서운한 감정을 담아서 아빠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아빠는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나, 누가 머리 쓰다듬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하핫. 그땐 미안했단다. 하지만 네 형제들이 결국 널 무사히 구해왔잖니?" "치이. 그럼 무사히 못 구해졌으면 어쩌려고요?" "알고 있다. 자칫하면 여자가 될 뻔했다면서?" "그래요. 그 변태 흑마법사 자식, 생각만 해도 징그러워서 소름이 온몸에 돋을 것 같다고요!" "그래그래.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구나. 네 엄마도 와 있단다." "엄마도?" "알고 있지? 아시에라는 아이를 식구로 맞아들이고 싶다고 세이렌에게서 연락이 왔단다. 네 엄마는 지금 그 아이에게 걸린 수많은 흑마술의 부작 용들을 치료하고 있어." 예상은 벌써부터 하고 있었지만 역시 그런 심각한 휴유증에서 그녀를 치유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엄마밖에 없겠지. 경과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아빠의 안내를 따라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침대에 아시에가 새하얀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그래서 난 그 커다란 검은 모자를 벗은 그녀의 얼굴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맨머리가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새하얀 옷과 겹쳐져 창백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녀는 새장 속에 갖힌 작고 연약한 새처럼 보였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큰 모자는 조그만 자신을 그 안에 가두어 외부의 두려움과 격리하기 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 카이엔 왔구나. 오늘은 일찍 왔네?" "네, 엄마도 왕궁에 잘 다녀오셨어요?" "어휴. 말도 마. 하루이틀 일은 아니지만, 어찌나 자기 딸 좀 며느리로 맞아달라는 귀족부인네들이 많은지. 그래도 그건 양반인 편이야. 세상에 자 기가 신부가 되고 싶다는 뻔뻔한 부인네들도 있고 심지어 카이엔을 신부로 삼고 싶다는 정신나간 작자들도 있지 뭐야?" "아하하... 네. 그렇네요." 내가 금지된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원해서였을까? 이 세계의 사람들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도덕률에 거의 얽매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당 당하게 내게 접근해오는 세이렌 누나나 아이렌을 보면 근친도, 사이엔 형을 보면 동성애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심지어 이란성이 기는 하지만 쌍둥이 누나를 좋아하는 레이엔의 경우도 있으니까. 겉으로는 평화롭고 별 탈 없이 굴러가는 세계지만 내가 아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상식으로 돌아가는 별세계 같은 느낌이 들어 가끔씩 멍한 느 낌이 들 때가 있다. 그 느낌이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은 내 생각과 겹치면 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헤매는 존 재 같은 생각이 가끔 머릿속을 맴도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자신이 여기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나는 김상우가 아닌 '카이엔 브리타뉴'라고 머릿속에 계속 되뇌이면서 마음을 가다듬곤 했다. "근데 무슨 일로 일찍 온거야? 요즘은 학교 잘 다니던 거 같았는데... 물론 며칠간은 사정상 못 갔지만 말야." 엄마 옆에 있던 세이렌 누나가 내게 일찍 온 이유를 물었다. 나는 문득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누나에게 말할까 말까에 대해 갈등에 휩싸였 다. 물론 세이렌 누나가 열받으면 파장이 클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시에나와 피요르가 짜증이 났고 뭔가 응징을 가해 주고 싶은 마음이 속에서 굼틀거렸다. "왜 그래, 카이? 정말로 무슨 일 있었던거야?" "아, 아냐. 그냥 별로 수업 듣기 싫어서야. 그것보다 아시에는 어떻게 됐어, 누나?" 결국 나는 한번은 참기로 정하고 화제를 돌렸다. 내일도 그녀들의 태도에 변화가 없으면 반드시 세이렌 누나에게 고자질해서 따끔한 맛을 보여 주기로 결정내리고는 나는 마음 속에 참을 인 자 하나를 그렸다. "엄마가 계속 단계별로 치료하고 있어. 이제 거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어. 그런데..." "이 아이, 보통 아이가 아냐." 엄마가 조용히 잠들어 있는 아시에의 팔을 살살 건드리면서 말했다. "엄마도 같은 느낌을 받으셨죠?" "그래. 갑자기 생판 모르는 누군가를 식구로 받아들이겠다길래 의아해했다만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엥? 둘 다 그게 무슨 말씀이슈? 사이엔 형이나 다른 사람에게는 단지 예쁘고 귀여워서하고 황당한 이유를 댔지만 아무래도 누나에겐 다른 특별 한 이유가 있던 모양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단순한 마도의 노예. 그 이상으로 무슨 의미가 있지?" 나를 안내해서 아시에가 치료받고 있는 방으로 데려왔던 아빠가 궁금증이 인 듯 물었다. 그러자 엄마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누나에게 거 의 키스 당할 뻔할 때도 항상 얼굴에 스마일을 거두지 않던 엄마가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 애. 원래대로라면 벌써 수십 번도 더 죽었어야 해요. 되돌아오는 흑마법의 나이테를 계속 거슬러올라가면서 제거해왔는데. 이 아이를 저주의 희생양으로 해서 고위 마족들만 해도 열 명 넘게 소환되었어요." 그 말에는 아빠뿐만 아니라 세이렌 누나도 큰 충격을 받은 듯 눈이 동그래졌다. "어... 엄마, 그게 사실이야? 그렇다면 저 애... 아시에라는 애 인간이 맞어? 신의 가호를 듬뿍 받는 엄마라도 해도 벌써 여러 번 죽었을 만한 일이 잖아?" "나도 믿을 수 없구나. 게다가 지금 마지막으로 제거해야 할 나이테는... 마왕을 소환한 흔적이야. 그것도 마파왕(魔破王) 디크로드를 말이야." 집안 공기가 찬바람이 쌩쌩 불 정도로 얼어붙어 있는 가운데 나만 상황파악 못하고 그냥 눈만 껌뻑껌뻑거리고 있었다. 뭐라고 물어보고 싶었지 만 그러기에는 다들 표정이 너무 심각했다. "이제껏... 마왕 소환의 제물로... 바쳐지고도 살아남았다는 제물은 역사상... 한 명도 없어." 아빠가 많이 놀란 듯 조금 더듬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세이렌 누나도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로 평소보다 느린 톤의 어조로 말했다. "이건... 이제는 상황이 바뀌게 됐어요. 셰더를 잡기 위해 아시에를 구해야 하는 게 아니라 아시에의 정체를 알기 위해 셰더를 잡아야 해요." "그래. 아시에 본인에게는 기억을 유추해내기 힘들 테니까 말이야." 잠시 후에 안 사실이지만 봉인된 기억이 아닌 흑마법에 의해 지워진 기억은 엄마 같이 엄청난 능력을 신관장이 전심전력을 동원해도 회복될 확 률이 거의 없다고 한다. 셰더에게 내가 당한 것도 아마 기억의 상당수가 지워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가족들은 추정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억을 100%잃는다면 의사소통조차 제대로 안 될 테니까. "그럼, 지금부터 마지막 나이테를 제거하도록 하자꾸나." 그리고 엄마는 마지막으로 아시에를 치료하기 위해 스태프를 들었다. 새하얀 바탕에 얇은 금박이 입혀져 있고 끝에 다이아몬드라고 추정되는 보 석이 박힌 엄마의 스태프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엄마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와 엄마를 부드럽게 감쌌고 그 빛의 기운이 엄마의 손을 따라 아시에에게도 전해져 갔다. 그 따뜻하고 강 력한 기운이 내게도 느껴졌다. 누나는 주변에 방어막을 쳐서 혹시나 누군가가 땀까지 흘려 가면서 치료에 몰두하고 있는 엄마를 방해하지 못하 도록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제27화 : 아시에 깨어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왕 소환의 제물이 되어 얻은 저주의 흔적을 벗겨내는 것이 한때 대륙 최고위급의 신관이었던 엄마로서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닌 듯 싶었다. 나와 아빠는 조용히 서서 엄마한테 방해되지 않도록 소근소근 이야기를 나눴다. "아빠, 근데 형이랑 동생들은 어딨어요?" 세이렌 누나야 엄마와 함께 아시에를 치료하고 있기 때문이었지만 평소라면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만사 제쳐두고 날 보러 나와서 소란법 석을 떨었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조용했다. "아이렌은 엄마가 아시에를 치료하는데 방해하려다가 세이렌한테 쫓겨났다. 레이엔은 그 애 뒤를 졸졸 쫓아다녔고. 그래서 세이렌이 이렇게 방어 막을 철저하게 치고 있는 게지." "엄마가 치료하는 거 방해하면 아시에도 그렇지만 엄마도 위험할 텐데요?" "휘유. 그러게말이다. 레이엔 녀석은 너무 애늙은이 같아서 문제지만 아이렌은 너무 애같으니." "아이렌 애 맞잖아요. 레이엔이 튀는 거지." "그럼 사이엔 형은요?" "사이엔은 뒤뜰에서 명상을 하고 있다. 그 동안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해." 조금씩 깨달아 가는 거지만 이 집안의 생활에 차차 익숙해지면서 내 가족들이 무조건 나에게 달라붙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반열에 올라 있으면서도 사이엔 형은 매일마다 명상과 검술 수련을 거르지 않았고(물론 내가 오늘 학교에서 일찍 올 줄 알았다면 일정을 바꿨을 때지만), 자기가 지키는 요새의 상황도 나름대로 점검하고 있었다. 세이렌 누나 역시 지금은 집에 돌아와 있지만 세계 곳곳의 마법사들과 교류를 계속하고 있었다. 레이엔이야 내가 납치되기 직전까지도 책을 읽었던 독서광이니 두말할 것도 없었다. 단지 예외가 있 다면 아이렌이랄까. 정령쪽의 능력은 거의 99%가 천부적인 재능으로 결정된다는 이야기답게 아이렌은 심심하면 정령들을 불러서 놀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엄마가 아시에를 향해 뻗은 손과 스태프를 거두었고, 몸에서 나오는 빛도 천천히 사라져갔다. 이제 끝난 걸까? 아 시에는 완전히 치료된 걸까? "끝났어요, 엄마?" 세이렌 누나가 손수건으로 엄마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그래. 역시 마파왕 디크로드를 소환한 흔적은 원체 강력해서 벗겨내기 힘들더구나." "그야 그렇겠죠. 걔를 없앤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었는데, 엄마 아빠도 거기 있었잖아요." "흠흠. 그랬었지. 사실은 그때 디크로드를 내 손으로 직접 쓰러뜨린 다음에 네 엄마에게 프로포즈할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당신도 참 꿈이 컸다니까요. 세상에 아무리 당신이 대륙 7기사의 한명인 섀도우 나이트였다고 해도 어떻게 혼자 힘만으로 덤빌 생각을 했어요? 내가 안 말렸으면 당신도 지금쯤 그 사람처럼... 어이없이 끝났었겠죠. 당신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었지만 그 오만은 결국 화를 불렀잖아요?" "하하핫. 대신 당신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된 거 아냐?" 이 이야기는... 설마 아빠와 엄마는 이전에 마왕을 쓰러뜨린 적 있는 그런 전설의 용자들? 그리고 우리들은 그런 부모 밑에서 난 자식들이라는 건가. 이것 역시 내겐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무슨 소리에요? 그때 엄만 벌써 날 임신하고 있었잖아요. 둘 다 아닌 것처럼 시치미는..." 엄마와 아빠가 옛날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데 세이렌 누나도 끼어들어 화기애애한 이야기의 장이 마련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여년 전. 마파왕 디크로드가 누군가에 의해 부활하였고 디크로드는 그의 강력한 마왕군과 함께 세계 정복에 나섰다고 한다. 세계 각국은 연합하여 디크로드에 맞섰으나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다. 세계 각국의 전력을 모두 합치면 마왕군을 능히 무찌를 수 있었으나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힌 데다가 마왕의 편을 들어 배신한 나라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12명의 최고위급 용사들이 힘을 모아 소수정 예의 특공부대와 함께 디크로드의 본거지로 침입하여 결국 디크로드를 무찔렀다고 한다. 그 12명의 최고위급 용사에 엄마와 아빠가 있었던 것이 다. "참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그때의 동료들도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군." 한참동안 무용담을 이야기한 아버지는 과거가 다시 한번 생생하게 살아난 듯 눈을 살짝 감았다. 세이렌 누나는 한두 번 들어본 이야기가 아닌 듯 대수롭지 않게 고개만 끄덕거렸지만 나는 정말로 그 활약상을 흥미롭게 들었다. "정말 세월이 오래 지났죠? 그렇다고 해도 그때 마왕 부활의 제물이 저 애였을 줄.... 핫!" "왜 그래, 당신?" 엄마는 평소처럼 웃음을 띠며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뭔가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다면 저 아시에라는 아이, 대체 몇 살이라는 이야기에요?" 그제서야 아빠도, 세이렌 누나도 나도 깜짝 놀라 침대 위에 누워 잠들어 있는 아시에를 바라보았다. 나이는 나와 비슷하거나 약간 어려 보이는 데... 마왕을 소환할 때 제물로 쓰인 아이라면 실제 나이는 누나보다도 훨씬 더 많다는 이야기잖아? "글쎄. 흑마법을 다루는 마도에 관해서는 세이렌이 그나마 아는 게 있지 않을까?" 아빠는 잘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대답했다. "저도 잘 알지는 못해요. 마도에 속한 자들이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은 거의가 누군가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드레인(drain)인데 그 마법으로는 성장한 골격까지 어린 시절로 되돌릴 수는 없거든요." 누나도 자신없다는 말투였다. 아시에 이 아이는 대체 정체가 뭐지? "으응..." 우리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자 그 목소리에 깬 듯 아시에가 몸을 뒤척거리면서 일어났다. 눈을 비비면서 일어난 아시에는 약간 잠이 덜 깼 는지 졸려보이고 하품까지 했지만 치료 전에 비해서 상태가 좋아 보였다.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는데도 그 모습이 꼴불결이기는 커녕 더욱 귀여워 보였다. 처음 왔을때는 너무 창백하고 힘이 없이 지나치게 갸날프게 보여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지금 회복된 모습을 보니 정말 대단한 미소녀였다. "여기는...?" 확실히 그녀에게 씌워진 모든 저주가 풀렸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 주듯 아시에는 전혀 더듬거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목소리도 이전에 비해 톤이 조금 낮아지면서 안정되고 부드러운 음색이 느껴졌다. "기억나니? 넌 그 나쁜 흑마법사한테서 벗어나 우리 집으로 왔어. 어제 말해 줬지? 세이렌 브리타뉴라고. 세이 언니라고 부르면 돼." "세이 언니..." "그래그래." 아시에의 눈가에는 눈망울이 맺혀 있었고 세이렌 누나는 아시에를 끌어안고 토닥거리면서 달랬다. 아까까지의 추측으로 보면 분명 아시에가 나 이가 더 많을 텐데... 그건 신경쓰지 말도록 하자. 지금은 그런 사실이 급하고 중요한 게 아니니까. "으흑... 으흑흑..." 세이렌 누나의 품에 안긴 아시에가 무엇 때문인지 어깨를 들썩이면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훌쩍임과 흐느낌으로 시작된 그 울음 은 점차 커져 결국에는 서러운 눈물을 펑펑 터뜨렸다. "우아아아아앙!" 세이렌 누나는 말없이 아시에를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오랫동안 마도의 노예로서 셰더 놈에게 붙잡혀 있었다고 했지. 레이엔이 마도 의 노예에 대해 말해준 일들을 그대로 겪었다면 그동안 정말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이다. 게다가 말이나 몸의 움직임마저 부담스러울 정도의 저주 가 중첩된 채 살아왔으니 저 눈물에는 수없는 한(恨)이 서려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엄마가 조용히 내 손을 잡아끌었다. 이쯤에서 자리를 비켜주자는 것이었다. 아빠는 이미 방문을 나서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확실히 내가 끼어들 수 있는 자리는 없겠지.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방을 걸어나와서는 방문을 닫았다. 오늘은 저렇게 심리적인 안정을 찾아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미 아시에가 우리 집 식구로서 받아들여진 이상 여러가지 의문점에 대해서 파헤 치는 것은 천천히 해도 늦지 않으니까. 나도 별 탈 없이 무사하니 급히 서두를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내가 만약에 힘든 꼴을 당해도 내 가족들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아껴 줄까? 저렇게 날 감싸안고 위로해 줄까? 나는 믿고 싶다. 너무 극성이라 서 문제라면 문제지만 나를 제일로 생각해주는 사람들을. 하지만 지금 날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원래 세계의 내 아빠 엄마라면... 젠장! 그런 건 생각하지 않기로. 완전히 연을 끊기로 작정했잖아! 하지만 결심은 했어도 완전히 잊기에는 좀더 시간이 필요할 성 싶다. 제28화 : 최악의 하루. 그리고 다음 날. 여전히 나는 평소처럼 학교에 갔다. 제발 시에나와 피요르가 정도를 지키면서 내게 접근하기를 바라면서. 아직까지 아시에에 대 해 들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시에는 어젯밤 세이렌 누나의 품에 안겨 울다 지쳐 잠든 모양이었다. 간만에 누나의 간섭이 없으니까 시원하다고 해야 하나. 섭섭하다고 해야 하나. 나도 모르게 소외받은 느낌이 약간 드는 것이 나조차도 놀랄 지경 이었으니까. 내가 세이렌 누날 부담스러워하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끈적끈적해서 꺼려질 정도라도 그런 사랑을 내가 원했을런지도 모른다. 아이렌 역시 토라진 채 어느 구석엔가 짱박혀 버려 레이엔이 이리저리 찾아 돌아다니느라 애를 먹는 것 같았다. 레이엔은 '아이렌이 이럴 때 가 는 곳은 정해져 있다.'라면서 자신만만해 했는데... 쌍둥이 남매 여부를 떠나 그냥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뭐, 그런 쓸쓸한 기분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대신에 평소에 누나의 기세에 눌러 기죽어 지내던 사이엔 형이 한밤중에 내 방으로 쳐들어와 서 쿵짝쿵짝 하며 놀았다. 쿵짝쿵짝이라니 그게 뭐냐고? ...내 입으로 말하기엔 좀 창피한데... 그게 세이렌 누나나 아이렌이 알면 또 화가 머리끝까지 날 일이라서 말이지. 그런 고로 그게 뭔지는 일단 함구하도록 하겠다. 엉뚱한 상상을 막기 위해 단지 야한 거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사실만 알아두면 된다. 다만 그 랜드 소드 마스터인 사이엔 형이 체력이 소진되어 헐떡거리면서 나중에 자기 방으로 돌아갔가긴 했지만... 오늘 아침에도 여전히 팬클럽 멤버 회원들이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해가면서 나의 등교길을 원활하게 해주고 있었다. 어제보다 인원이 많이 는 것이 린넬 녀석이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팬클럽 회원을 모집한 보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일에 힘쓰는 린넬을 생각하니 웬지 흐뭇해졌다. ...하지만 일에 너무 힘써도 문제라는 사실을 교실에 도착하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자, 이거."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당연히 니 팬클럽이니까 팬클럽의 모든 활동의 중심은 너에 관해서가 될거야. 그리고 절대 너한테 불리하거나 무리한 내용은 없으니 까 안심해." "일단 한번 읽어보기나 하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린넬이 내미는 종이를 들어 읽었다. "매주 1회 팬클럽 회원 한정 사인회 개최시 참석하여 사인 50장을 해줄 것. 한달에 한번 팬클럽 피크닉 갈때 참석할 것. 생일 때 팬클럽 회원들 은 집에 초대해 줄 것. 근데 내가 왜 이런 걸 해야 하는데?" "하는 게 여러모로 좋을 거야. 대신에 아무나 너한테 접근해서 귀찮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막아줄테니까." "시에나와 피요르 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워." "훗. 괜찮아. 걔 둘도 이제 어제처럼 난리치지 못할 테니까." "어떻게?" "걔 둘한테만 특권을 허용하면 팬클럽 활동 자체가 붕괴되어 버리잖아? 그래서 철저하게 규약을 짰어. 거기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카이엔과 독대 (獨對)하지 말 것. 카이엔이 싫어할 경우에는 눈치 까고 알아서 그 자리에서 꺼질 것. 등등 여러가지 집어넣었어." 어제 하루종일 바쁘게 돌아다니고 적더니 결국은 해낸 모양이었다. "알아서 해. 관심없어." 실제로 그랬다. 이곳은 원래 세상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보다는 훨씬 나았지만(자기 마음대로 굴어도 되니까) 그래도 공부를 해야 하고 시험도 펴 야 하니까 학교는 학교였다. 게다가 시험을 거부하면 집에까지 쫓아와서 시험을 치게 하니까 어찌보면 더 악랄한 면도 없지 않았다. 사정이 편해지니까 더 편한 길만 찾으려고 하는 듯한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체질상 학교에 도통 다니기 싫은 것은 변함없었다. 처음에 여기 왔을 때 학교를 꼬박꼬박 나갔던 것은 그냥 단순히... 어린 시절부터 버릇처럼, 습관처럼 다녔던 학교니까 나가지 않으면 허전할 것 같아서 계속 나갔을 뿐. 그 이상의 의미도, 그 이하의 의미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선언했다. "앞으로는 내가 내킬 때만 학교에 올 때니까 말이야." 그러자 린넬의 얼굴이 무언가게 크게 놀란 듯 굳었다. "진심이야...? 카이엔?" "그래. 진심이야. 평소에 그런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번 팬클럽 사건으로 더 확실해졌어." "카이엔..." 린넬은 충격이 꽤 큰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과정은 어쨌던간에 팬클럽이 결성되자 가장 열심히 뛰어다녔던 아이가 린넬이었으니까. 교실 안 의 다른 학우들도 마찬가지로 놀란 모양인지 내 쪽으로 다가와서 사정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학교에 나와줘. 카이엔." "미안해. 접근금지된 시에나 같은 애가 만든 팬클럽 따윈 때려치라면 당장에 때려칠 테니." "이미 늦었어. 계속 귀찮게 굴면 지금 당장 집에 갈테야." 나는 완전히 못을 박았고 아이들은 다들 침울한 표정으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특히 이번 일에서 악의 원흉으로 낙인찍힌 시에나와 피요르는 얼 굴이 새하얘졌다. 그래도 자신들이 한 행동이 옳다는 것을 여전히 항변했다. "...오로지 카이엔 님을 더 가까이서 보고, 위하고 싶은 마음으로 만든 건데..." "맞아. 이건 분명 뭔가 오해가 있는 거야." 마음? 오해? 팬클럽 따위 만들건 말건 나는 상관치 않아.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무기로 이용해서 너희들이 날 짜증나게 만들어 버렸다는 거지. "뭐야? 다들.... 난 공주야! 이렇게 무시당할 수는 없어!" 그것은 너의 생각일 뿐. 네 행동이 모두에게 외면받는 것은 현실이야. 이 교실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을 들테니까. 비 록 내가 잘못하는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내 편을 들겠지. 그게 내게 쏟아지는 절대적인 애정과 사랑이니까. 아무도 날 탓하는 사람은 없어. 피요 르와 시에나도 다른 사람을 탓할지언정 날 탓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섬뜩할 정도로 무서운 사실을 결국 깨달아버리고 만 것이었다. "흐아아앙∼" 철부지 공주는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자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교실을 뛰쳐나가 버렸다. 시에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만 깨물고 있을 따름이었다. 곧이어 선생님이 들어왔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학교 역사상 가장 조용한 수업이 되었다. 아무도 떠들지 않고, 아무도 장난치지 않고, 단지 나만을 기분나쁘게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들로 가득찬 수업이. 답답한 공기가 나를 옥죄어 왔다. 그래서 나는 쉬는 시간 종이 치지마자 잽싸게 화장실로 향했다. 학교에서 내가 일반 화장실을 사용하다가 괴한 (?)의 습격을 받아 스캔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인정했기 때문에 나는 항상 교직원용 화장실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화장실에 막 들어가려고 할때 누군가의 차가운 검날이 내 목덜미에 닿아 서늘한 감촉을 선사해 주었다. "피요르 공주님께 무슨 짓을 한 거지?" 실론 파르스였다. 이 사람도 사이엔 형과 같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혼자서 화내고 혼자서 울고, 혼자서 뛰쳐나간 것 뿐이야." 내가 퉁명스레 말하자 그의 눈빛이 매서워지더니 목에 닿은 검을 위로 올렸고 내 머리도 검을 따라 올라갔다. 뭐하는 짓이야, 너! "웃기지 마. 카이엔 브리타뉴. 공주님을 저렇게 울릴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네녀석이 관련되었을 뿐이야. 언제까지 공주님을 울리기만 해야 속이 시원하겠나?" 그녀석도 상당히 열받은 모양이었지만 나도 뚜껑이 단단히 열려 있다고. 나는 기분나쁘게 목을 쳐들게 만드는 검을 한 손으로 당장 잡아 옆으로 내렸다. 날카로운 검날에 손이 베여 피가 뚝뚝 흘러내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점차 나를 감싸고 옥죄고 있는 마법무구들의 위력에 익숙해져 가는 것이다. 신기하지? 이전에는 종이에 손이 살짝 베이기만 해도 기겁을 하면서 휴지를 잔뜩 감싸 지압하고 침도 묻히고 하면서 난리법썩을 떨었는데 이제 는 아무렇지도 않다. 점점 이전의 나와는 달라지는 것 같지만... 사람은 변해가기 마련이니까. "크크큿. 그래서 어찌할 거지? 나를 벨텐가? 상처입힐 텐가? 그거 재밌겠군. 그랬다가는 그 한심한 공주님이 정말 슬픔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 을지도 모를테니 말이야." "이... 이 자식이!" 실론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당장 그가 든 칼이 완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부르르 떨리고 있었으니까. 한눈에 봐도 그가 극도의 자제심을 발휘해 분노를 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유지만 내가 그것을 거부하는 것도 자유. 나한테 쏟을 정신이 있다면 어느 다른 나라의 왕자 처자나 소개시켜주는게 나을 텐데 말이지. 후후훗." "공주님은... 몇년 전부터... 오래 전부터 네놈만을 그리고 사모해왔다... 그런데 너라는 녀석은..." 실론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기라도 실은 듯 또박또박하고 위협적인 울림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약간 움찔하는 기분도 들었지만 여기서 지고 싶 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니까 바보같은 공주란 말이다. 하하하하하핫. 그럼 더 이상 볼일이 없으면 그만 가도록 하지." 나는 그런 그에게 비웃음을 날려주면서 원래 가던 화장실로 향했다. 뒤에서 극도의 모멸감을 느끼며 나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을 그놈의 모습을 상상하니 왠지 모를 음흉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푸욱. "이 자식... 죽...여." 이... 이런. 너무 도발했나? 뒷등을 찌르는 느낌에 앞을 보내 내 배를 뚫고 실론의 검이 삐져나와 있었다. 사이엔 형의 기혈환이 이런 충격을 크 게 감소시켜 주긴 하지만, 녀석도 엄청나게 강하니까 이런 게 가능했겠지. 배에 불타는 듯이 아픈 고통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도... 이대로 죽진 않겠지? 나에겐 가족들이 달아준 강력한 마법무구들이 있으니까... 아니 어쩌면 이 녀석은 진짜 날 죽일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했을 때 눈앞에 어디서 한참 울다 왔는지 눈이 퉁퉁 불은 피요르 자하기니아 공주가 서 있었다. "카... 카이엔 님... 그, 그리고 파르스... 경." "고... 공주님?" 쑤욱. 당황해하는 실론 녀석의 목소리와 함께 실론의 검이 내 배에서 쑤욱 빠졌다. 배를 헤집는 동안 그 고통이 사람을 미치게 할 지경이었다. 나는 검 이 빠지자마자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실론! 어떻게 된 거야? 왜, 왜 실론이 카이엔 님을...!" "고... 공주님... 저는 단지..." 실론 녀석을 추궁하는 피요르의 다그침이 고통 속에서 머릿속에 울려왔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고, 또 외치는 것 같았지만 그것을 더 이상 느낄 새도 없이 나는 구멍뚫린 배를 붙잡고 혼절해 버렸다. 제29화 : 그랜드 소드 마스터끼리의 대결 눈을 뜬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눈을 뜨자 마자 세이렌 누나의 얼굴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누... 누나?" "카이엔, 깨어났어!?" 세이렌 누난 날 와락 안고는 다행이라고, 정말 다행이라고 계속 중얼거렸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져오는 심장 박동 소리 때문일까? 얼굴에 피 가 갑자기 몰려드는 듯 했다. "으응... 조금 더 쉴께." "그래그래. 육체적으로는 완전히 회복되었지만 아직 정신적 상처까지 회복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까." "카이엔 씨. 좀더 쉬세요." 세이렌 누나 옆에 서 있는 아시에도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흑마법의 제물로 겹겹이 씌였다는 저주를 치료하기 전까지만 해도 초점 을 알기 힘든 멍한 눈빛에다가 부서질 것 같이 불안한 행동만을 거듭하던 그녀였지만 엄마가 완전히 저주를 벗거낸 후에는 목소리도 태도도 안 정되어 보통의 소녀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얘는, 나한테도 편하게 세이 언니라고 부르랬잖아? 카이한테도 편하게 대해, 카이라고 한번 불러 봐, 응?" "카... 카이..." "그래그래. 잘했어. 카이 넌 뭐해? 빨리 받아 줘야지. 시에라고 불러. 빨리!" "시... 시에." "참 잘했어요. 둘다." 그러면서 누나는 우리 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이거 어쩐지 유아원에서 애들 가르치는 보모 같은 행동인걸? 하아. 그러고보니 내가 여기에 누워 있는 이유는... 맞다. 그 실론이라는 놈이 내 등을 뒤에서 찔렀었지. 그때는 내가 짜증이 많이 난 상태라 도발을 해 버렸는데, 그 자식.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면서도 의외로 인내심이 약해빠진 모양이다. 근데 내가 집까지 실려왔으면 세이렌 누나도 그걸 모를 리 없을텐데 왜 여기 있지? 벌써 잡아 족쳤나? "아, 누나. 근데 그 실론이라는 사람은..?" 각오는 했지만 순간적으로 강력한 살의가 흠칫 느껴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일전에 접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당장 누구라도 서슴없이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기운이었다. 아시에도 그 살기에 놀란 듯 몸을 떨면서 내 옆으로 찰싹 붙었다. "사이엔이 싸우고 있을거야." "사이엔 형이?" "기사라는 작자가 무방비의 사람을 뒤에서 찔렀다 라고 분개하며 내가 끼어들 틈도 없이 무섭게 뛰쳐나갔어." 담담하게 말하는 누나의 목소리가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나는 무서워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얼른 말을 돌렸다. "무한의 팔찌가 있으니까 죽지도 않고 상처도 자동회복되는 데 뭘...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반응할 건..." "죽었으면 어떡할꺼야!!?" "에?" 세이렌 누나가 눈물방울을 날리며 격정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침... 튀었어. 언니." 누나가 격분하여 이야기를 계속 내뱉으려 할때 아시에가 갑자기 분위기를 깨는 말을 했다. 세이렌 누나도 나도 어이없게 아시에를 바라보았다. 분위기에 안 맞는 어이없는 말이긴 했지만 덕택에 터질 것 같은 세이렌 누나의 감정이 다소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그 녀석...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거... 알잖아. 어떤 강력한 도구로 보호받고 있더라도. 그 녀석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너 하나 죽이는 거. 떡 주워 먹는 거보다 더 싶다구..." "죽어도 살아나..." "목을 베면 끝이야. 아무리 무한의 팔찌라도 잘린 목을 재생시킬 순 없어." 나는 침묵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로 난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것이다. 그날 기분이 나빠서 괜히 실론을 도발시켜서 내가 내 스스로의 무덤 을 판 거나 다름없었다. 아마도 그가 모시는 피요르 공주가 날 사모하지 않았다면 그는 단칼에 내 목을 베었을지도 모른다. 강한 사람들이 옆에 있어 나를 보호해준다고 나 자신도 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그들의 힘을 무의식중에 내 힘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있었을런지 모른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힘이라는 거, 한번 볼래?" "본다니... 어떻게?" "지금 그 놈과 사이엔이 싸우고 있을거야. 거기서 영상을 가져오도록 패밀리어에게 명을 내려두었어. 한번 볼래, 카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끼리의 전투라, 싸우는 사람들의 마음이야 결사적이겠지만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엄청난 세기의 대결을 본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그럼." 누나가 짧은 주문어를 외더니 방 한쪽 옆에 16:9비율의 대형 와이드 스크린이 떴다. 큰 화면에 광대한 산야가 비춰졌다. 이거 정말 홈 시어터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대형 화면이다. "이야." "패밀리어의 눈과 귀를 이용한 감각을 그대로 전달해오는 시스템이야." 콰콰쾅! 누나가 화면에 대해 설명해줄 때 홈 시어터에서 -원래 이름은 그게 아니겠지만 내가 멋대로 그렇게 부르기로 결정했다- 콰쾅거리는 소리가 들 려왔고 산속에서 뿌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 외에도 뭔가 부딪치는 소리와 콰쾅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지만 상황을 제대로 짐작하 기는 힘들었다. 영화 상영할 때처럼 다양한 카메라 각도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대로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잖아? 아시에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듯 화면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우리 생각을 궤뚫어 본 듯 세이렌 누나가 보충 설명을 덧붙였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폭발만 보이지? 그럴 수밖에. 그랜드 소드 마스터급의 전사가 극한으로 움직일 때는 일반인의 눈으로 그걸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해. 소드 마스터급만 해도 눈으로 쫓아가기 힘들 정도니까... 지금 둘은 이 넓은 산야 전체를 옮겨다니면서 싸우고 있어. 어느 정도인지 짐 작가?" 에엑? 저 화면에 보이는 넓은 산자락 전체가 결전장이라고? 저렇게 광대한 영역을 순식간에 옮겨다니면서 싸울 수 있을 정도의 인간... 그것이 바로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이름을 얻은 자들의 능력이라는 것인가... 그런 녀석을 함부로 도발했다니... 나 어떻게 되었었나 봐. 또다시 콰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쪽 산자락이 파였다. 폭음과 주변에 있던 나무 수십 그루가 한꺼번에 조각나 주위로 흩어졌다. "서로 힘을 절제하면서 싸우고 있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끊임없는 탐색전을 펼치면서, 빈틈을 찾고 있는 거야." 나와 아시에의 눈에는 뭔가 터지고 폭발하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누나는 그게 보이는 건지 전투 상황을 이래저래 설명해 주고 있었 다. 절제한 힘의 위력이 저정도라면 진짜 힘을 쓰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 때였다. 갑자기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울리던 폭음이 그치더니 서로 멀찍하게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검을 든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제 결판을 내려는 건가?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마지막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패밀리어가 너무 멀리 떨어진 탓인지 무슨 말을 하는 지 도통 들을 수가 없었다. "치이. 안 들리네." "패밀리어의 죽음을 무릅쓰고 저기 보내기는 좀 그렇네." "세이렌, 마침 잘 있었구나. 저기까지 공간이동 할 수 있지?" 나와 세이렌 누나, 그리고 아시에가 저 두사람이 어떤 멋있는 대사를 하고 있을지 갖은 상상력을 동원해서 고민하고 있을 때 아빠와 엄마가 왠 뚱뚱한 사람과 함께 황급히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할 수야 있는데, 무슨 일이에요?" 누나가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묻자 아빠 엄마와 같이 따라온 뚱뚱한 사람이 말했다. 말하는 투로 봐서는 왕국의 관리 같아 보였다. "부탁드립니다. 마요르카 더 세븐 매직 마스터즈의 칭호를 가지신 분이시어.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칭호를 지닌 자의 대결은 그 강력한 위력 때 문에 필연적으로 한쪽이 죽거나 재기불능이 되는 법. 이대로라면 어느 쪽의 승리로 끝나더라도 큰 문제가 됩니다. 더욱이 실론 파르스 경은 저 자하기니아 왕국 출신이 아닙니까?" "저 대결은 반드시 사이엔이 이겨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 녀석을 그렇게 쥐어 팼던 보람이 없을 테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카이를 해치려 했던 저 녀석은 내 손으로 찢어갈기고 싶다구요!" 관리는 당당한 세이렌 누나의 모습에 쩔쩔매고 있었다. 하기야 그렇게 강한 사람들이 격돌하여 죽고 다치는 것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국가적 인 중대사임에 틀림없긴 했다. 만약에 저 대결에서 어느 한쪽이 죽으면 유클리네 왕국과 자하기니아 왕국간에 분쟁의 소지가 일어날 지도 모를 일이다. "세이렌. 기분은 알겠지만 화를 식히고 가서 싸움을 말려라." "아빠, 아빠는 카이가... 죽을 뻔한 상황을 용납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우리에게 카이가 얼마나 중요하고... 그런 존재인지는 아빠가 제일 잘 알 잖아요?" "...쟈켄 파르스의 청이다. 한번만 자기 자식을 용서해달라고. 그의 요청을 난 거절할 수 없어." "아빠 엄마와 함께 디크로드와 싸운 12용사인가요... 그렇다면?" "실론은 그의 둘째아들이라는구나." 영상에 보이는 실론과 사이엔 형의 말다툼은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점점 격렬해지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둘은 마지막 격돌을 준비하는 듯 자세를 잡고 있었다. 세이렌 누나는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처지였다. 내 이름은 실론 파르스. 자하기니아 왕국의 강력한 귀족 가문인 파르스 가의 차남이다. 내 아버님 쟈켄 파르스는 마왕 디크로드를 물리친 주역인 최고 12용사 중 한 분이셨고 그런 아버님을 따라가고자 노력한 결실이 있어 마침내 전 대륙에 7명밖에 없다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칭호를 획득할 수 있었다. 자하기니아의 국왕께서는 나의 무용에 감탄하여 바로 왕국의 기사단장 직위를 내리려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20세도 안 되는 젊은 나이에 대 성(大成)한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찬사뿐만 아니라 많은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고 아버님께서 누누히 강조하신 말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나는 자하기니아 왕국의 둘째공주님이신 피요르 공주님의 호위를 맡게 되었다. 호위는 쉽지 않았다. 피요르 공주님은 워낙 말썽과 장난을 좋아하셔서 조금만 눈을 떼었다 하면 어디론가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래도 아직 어리고 철없는 공주님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어린 시절을 고된 훈 련과 수련의 나날로 보낸 내게 알 수 없는 위안을 주었다. 이런 것을 대리만족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유클리네 왕국에 공주님이 여행을 다녀온 후, 평소라면 활기차게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공주님께서 갑자기 방에 틀어박혀 끙끙대는 것 이었다. 나는 이유를 알지 못해 공주님에게 물었다. "유클리네 왕국에 다녀오신 후 몸이라도 좋지 않으십니까?" "우응... 사실은 말야. 유클리네 거리를 지나다가 진짜진짜 뿅 갈만큼 멋진 오빨 봤다!" "하핫. 멋진 남자는 우리 자하기니아에도 잘 찾아보면 맞습니다. 굳이 유클리네 인 한 명에게 그렇게 신경을 쓰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아냐아냐. 실론은 아직 그 사람을 보지 못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인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조각상처럼 깎인 얼굴에 그 초롱초롱 한 눈동자. 부드럽게 몸을 감싸고 내려오는 몸의 곡선... 너무나도 아름다운 분이셨어!" "어딘가의 유명한 음유시인입니까? 그래도 남자라면 유약한 것보다는 힘과 패기가 있어야죠. 사랑하는 여인을 지켜줄 만큼 말입니다. 그렇지도 않으면 한 나라에 이름을 떨칠 만한 명성은 있어야 합니다." "에이... 실론. 알고 보니 그 사람은 한 나라뿐 아니라 대륙 전체에 이름이 자자한 분이야! 카이엔 브리타뉴 님이라고 들어봤어?" "네. 아, 네? 카이엔 브리타뉴 라고요!?" 카이엔 브리타뉴. 유클리네의 브리타뉴 가 역시 아버님과 같이 싸운 친우들이 있다는 가문이었다. 우리 파르스 가가 결코 그 가문에 뒤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대단한 가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마왕 디크로드와 맞서 싸운 두 용사분을 제외하더라도 나와 같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있을 뿐 아니라 대륙 7대 마법사, 대륙 7대 정령 마스터, 대륙 7대 예언가가 모두 있다는 집안이 아닌가! 그 가문의 자제 중에서 유일하게 아무 능력도 없으면서 다른 형제자매들보다 대륙에 훨씬 명성이 자자한 재수없는 자식이 바로 카이엔 브리타뉴 였다. "응, 나 그 분을 사랑하게 된 것 같애! 어쩜 좋아..." 대략 정신이 멍해왔다. 직접 실물을 본 적은 없지만 거의 남자보다는 여자같은 외모의 뺀질뺀질한 녀석이라고 들었다. 난 그런 녀석이 뭐가 좋다 고 여자들하고 일부 이상한 남자들이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오직 미모 하나만으로 대륙에 이름이 자자하다는 것은 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피요르 공주님도 그 녀석의 포로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오직 한번 얼굴을 마주치고 지나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버님 무슨 괴상한 흑마법이라도 쓰고 있는 게 아닙니까, 그자식?" "내 친구의 자제분에게 그런 말씀을 쓰는 게 아니다. 실론. 그녀석의 엄마가 전직 신관인데 그럴 리가 있나? 혹시 그런 녀석을 질투하는 거냐?" "아, 아닙니다. 제가 뭣 때문에 그런 녀석을." "그럼 신경쓸 필요 없지 않느냐. 너는 카이엔보다는 오히려 사이엔을 신경써야 할 거다. 너와 마찬가지로 열 다섯살의 나이에 그랜드 소드 마스 터의 경지에 오른 아이지 않느냐?" "...알겠습니다." 아버지에게 쓴소리를 듣고 나는 그런 녀석쯤은 신경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공주님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때의 동경이겠지 하고 생각하 면서 말이다. 그런데 공주님의 상사병은 날이 갈수록 낫기는 커녕 갈수록 심해지기만 했다. 매일같이 카이엔의 초상화를 보고, 카이엔을 보고 싶다면서 유클리네로 유학보내 달라고 국왕 전하께 매일같이 떼를 쓰고 성화를 부리셨다. 그렇 게 몇 번 국왕 전하와 왕비 전하와 수십 번을 다툰 끝에 결국 두 분 전하께서는 피요르 공주님의 유학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공주 님의 경호를 맡은 나도 자동으로 따라가게 되었다. 그 카이엔이라는 자를 내가 처음 본 것은 하필이면 공주님과 함께 학교에 가던 전학 첫날이었다. "꺄아! 진짜 카이엔 브리타뉴 님이다! 나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야!" "고... 공주님! 체통을..." "시끄럿. 그 유명한 카이엔 님, 만인(萬人)의 카이 군을 보러 왔는데 그깟 체통이 대수야?" 얼마나 여러 각도에서 그려진 갖은 초상화를 다 봤으면 뒷모습만을 보고도 공주님은 카이엔을 알아보았다. 하기야 이전에는 스쳐지나가듯 단 한 번만 봤다니 제대로 봤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앗, 카이엔 님, 기다려 줘욧!" 공주님은 카이엔이 혼자서 교실로 걸어나가자 그를 부르면서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헐레벌떡 뛰었다. 고... 공주님. 그런 옷과 구두를 입고 함부 로 뛰시다가는... "우왁!" 철푸덕. 넘어지신다고요.... 하지만 이미 늦은 터였다. "괜찮으십니까, 공주님!" "아야야야... 우앙!" 피요르 공주님은 소리내어 울었지만 진짜로 울기보다는 카이엔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카이엔 놈은 듣고 있을 것이 분명하면서도 공 주님을 완전히 무시하고는 제 갈길만 가는 것이었다. "소문은 들었지만 소문보다 훨씬 예의없고 불량한 녀석이군요." "헤헤. 그런 불량기 있는 반항아적인 모습도 멋있잖아?♡" "어쨌건 전 공주님이 저런 자 때문에 이런 누추한 곳에서 수업을 하셔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도 최근에 흑마법사에게 저주를 받고 나서는 많이 얌전해졌다더라. 뭐. 잘 키우면 착한 낭군이 될거야." "다른 훌륭한 귀족자제분들도 많은데 어째서..." "잘 들어, 실론! 남자의 불량한 성격은 여자가 따뜻하게 보듬어주면 개과천선시킬 수 있지만 외모는 하늘에서 타고나는 거라구! 알아?" ...그런 식으로 외모만 따졌다가 결혼하고 후회하는 여인네들이 얼마나 많은 건지 아시기나 하는 겁니까, 공주님? 남자도 남자 나름이라고요! 하 지만 공주님이 카이엔을 좋아한다고 선언할 때부터 그랬듯 어떤 설득의 말도 공주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걱정이 되었다. 왕실 안에서 곱게 자란 공주님이 비록 대부분 귀족 자제라고 하지만 일반 학생들과의 부대낌을 견뎌낼 수 있을지 말이다. 분명 이 학교 학생들 중에서도 카이엔 놈을 좋아하는 애들은 많을 테니까. 내가 좀더 정신을 차려 보호해 줘야만 하겠지. 교실에 들어가 선생이 피요르 공주님을 소개하는데도 공주님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카이엔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뭔가 저지 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그럼 나 대신 누가 딴 반으로 나가면 되는거지? 저기 카이엔 옆에 너! 나와 카이엔 님의 장래를 위해 다른 반으로 옮겨주었으면 한다. 물 론 보상은 충분히 내리..." "웃기지 마!" "공주면 다냐!" 예상대로 멋대로인 공주님의 발언에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래도 일국의 공주님인데 너무 심하게 반응하는 게 아닌가 하는 모욕감도 들었지 만 그래도 타국이니까 일단은 참아야만 하겠지. 공주님은 뜻밖의 반응에 상당히 화가 난 듯했다. "실론, 당장 저 녀석들을 끌어내!" "공주님. 이곳은 자하기니아 왕국이 아니라 유클리네 왕국입니다. 저는 단지 공주님의 신변을 호위할 뿐 그런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어찌보면 이런 유학도 잘된 일일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지 생각하는 대로, 자기 맘대로 된다고 믿는 공주님에게 여러 사람들과 어 울려서 지내고 살아가는 법을 익히게 할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거부감만은 주지 않아야 할 텐데... 그 때 브리타뉴 가의 유명인사들 중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은 세이렌 브리타뉴가 나타날 줄은 예상밖의 일이었다. 열 네살에 대륙 7대 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엄청난 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악명높은 자에게 공주님이 멋모르고 대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바람은 역시 헛된 것이었다. 게다가 더 황당한 일은 세이렌이 카이엔이 자기 꺼라고 낯짝 한번 안 바꾸고 외치는 일이었다. 남매끼리 사랑 고백을 하다니... 물론 유클리네 왕 국의 결혼 문화는 자하기니아 왕국보다 훨씬 자유스럽다고 듣긴 했지만 난 정말 놀라 자빠질 일이었다. 애초에 카이엔이라는 녀석을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그런 녀석이나마 좋아하는 공주님의 사랑이 실현되지 않을 것 같은 가능성이 커져 염려스러웠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진심으로 카이엔 브리타뉴 님을 사모하고 있고 그걸 위해서라면 공주의 신분이든 뭐든 집어던질 수 있어요." 하지만 공주님은 한번 결심한 일에 대해서는 끝까지 밀고 나가는 타입.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불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 후로 공주님은 의외로 조용히 학교를 다녔다. 카이엔 녀석이 시르팡이라는 괴도에게 납치당했다고 해서 나한테 시르팡을 잡아달라고 해서 곤 란한 적도 있긴 했지만... 하지만 결국 그런 혼자만의 짝사랑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만은 없는 법. 공주님은 어딘가 심한 말이라도 들었는지 펑펑 울면서 교실을 뛰쳐나 왔다. 나는 분노했다. 수 년간 피요르 공주님을 모시면서 그동안 많은 정이 쌓여 이제는 동생처럼 느껴지기도 할 정도로 친근했다. 활달한 공주님은 평 소에 우는 일이 전혀 없었다. 유클리네 왕국으로 보내 달라고 수없이 국왕, 왕비 전하와 싸웠어도 눈물 몇 방울만 흘렸을 뿐, 저토록 서럽게 울 지는 않았다. 공주님에게 그 정도로 큰 상처를 안겨줄 수 있는 자는 내가 알기로 단 한사람밖에 없었다. "피요르 공주님께 무슨 짓을 한 거지?" 난 검을 뽑아 그녀석의 목덜미에 대면서 위협했다. 어차피 무능력자인 녀석. 이대로 겁을 먹고 쫄지나 않을지 모를 일이다. "혼자서 화내고 혼자서 울고, 혼자서 뛰쳐나간 것 뿐이야." 카이엔은 조금 놀란 것 같기는 했지만 이내 퉁명스레 대꾸했다.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 무신경하기 그지 없는 대꾸였다. 내 손에 힘이 들어 갔고 검을 위로 들어올렸다. "웃기지 마. 카이엔 브리타뉴. 공주님을 저렇게 울릴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네녀석이 관련되었을 뿐이야. 언제까지 공주님을 울리기만 해야 속이 시원하겠나?" 그러자 그 녀석은 겁도 없이 내 검을 잡고 아래로 내렸다. 이 자식... 뭐야? 제정신인가? 내 검은 스치기만 해도 베일 정도의 명검이라고! 그놈의 손에서 핏물이 땅바닥으로 흘러내렸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크크큿. 그래서 어찌할 거지? 나를 벨텐가? 상처입힐 텐가? 그거 재밌겠군. 그랬다가는 그 한심한 공주님이 정말 슬픔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 을지도 모를테니 말이야." "이... 이 자식이!" 몰랐다. 피요르 공주님이 저 녀석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도 넘어갔고, 유학까지 오고 난데없이 도시락을 싸느니 마느니 분주할 때도 따가운 시선 만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조금 비뚤어져 보이기는 해도 본심만은 좋은 녀석이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그런데... 이런 놈이라니! 이런 놈에게 천 진난만하고 깨끗한 공주님의 마음이 가 있다니!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유지만 내가 그것을 거부하는 것도 자유. 나한테 쏟을 정신이 있다면 어느 다른 나라의 왕자 처자나 소개시켜주는게 나을 텐데 말이지. 후후훗." "공주님은... 몇년 전부터... 오래 전부터 네놈만을 그리고 사모해왔다... 그런데 너라는 녀석은..." "그러니까 바보같은 공주란 말이다. 하하하하하핫. 그럼 더 이상 볼일이 없으면 그만 가도록 하지." 카이엔은 더 이상 날 상대할 생각이 없는 듯 등을 돌리고 가 버렸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정신을 차린 순간 내 검은 카이엔의 뱃속을 뚫고 있 었다. 그리고 앞에는 피요르 공주님이 있었다. "카... 카이엔 님... 그, 그리고 파르스... 경." "고... 공주님?" 나는 무의식결에 카이엔를 궤뚫은 검을 뽑아냈다. 워낙 잘 드는 칼은 너무나도 쉽게 뽑혀져 나왔고 카이엔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실론! 어떻게 된 거야? 왜, 왜 실론이 카이엔 님을...!" "고... 공주님... 저는 단지..." 제... 젠장할! 왜 이런 짓을 저지르고 만 거지!? 아버지께서 항상 강조하셨다. 지나치게 젊은 나이에 너무 강대한 힘을 얻은 것이 오히려 걱정이라 고 말이다. 그러면서 항시 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이지 말고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했는데...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어 버렸다. 깊고 깊은 어느 산 속. 나는 내 검을 들고 산 중턱의 커다란 바윗돌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 기슭에는 조그만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이엔 브리타뉴가 있었 다. 나와 같이 고작 15세의 나이에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칭호를 얻은 천재. 언젠가 한번 만나서 자웅을 겨루고 싶은 욕망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강요당한 결전을 벌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짐작지 못했다. 내가 카이엔을 검으로 찌른 이후 학교는 온통 뒤집어졌다. 피요르님이 비명을 지르며 혼절하는 바람에 이 사실은 전교에 순식간에 퍼졌고 소식 을 접한 카이엔의 가족들이 곧바로 공간이동해 왔다. 그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내 목숨을 끊어버릴 듯한 기세였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당장에 마법을 날리려던 세이렌을 사이엔이 말리고는 이 곳까지 장소를 옮겨 정정당당한 일대 일 대결을 청한 것이다. 그에게도 한번 나와 일전을 벌이고 싶은 마음이 있던 걸까? 피요르 님께는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게 되었지만 무인으로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쉬잇 검기(劍氣)가 날아왔다. 나는 곧바로 점프하여 그 자리를 피했다. 콰쾅거리는 폭음과 함께 바위가 부서지고 나무가 쓰러졌다. 다른 나무 위로 착 륙한 나에게 곧바로 사이엔의 검이 육박해 왔다. 채챙 빠른 손속으로 몇 번의 검을 주고받은 후 우리는 다시 서로 뒤로 물러섰다. 사이엔은 작은 틈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연속으로 검기를 날렸 고 나는 조금씩 휘어들어오는 검기들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했다. 그 속도로 휘어들어오는 검기라니... 역시 만만치 않은 능력을 지닌 자다. 그렇게 몇 번 검을 나누자 사이엔이 말을 걸어 왔다. "탐색전은 끝났나?" 저런 말을 꺼내는 것은 이제 상대의 실력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는 의미.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가 진짜 승부가 될 터였다. 그런 데 저 돌진 자세는... 얼핏 보면 평범한 돌격 자세처럼 보이지만 같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나는 알 수 있었다. 저것은 마지막 일격으로 이 대결 을 끝내자는 의미였다. 나는 바짝 긴장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왜냐하면 저런 일격승부는 자기 실력에 대한 대단한 자신감이 없이는 흔히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 소한 실수 하나로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승부를 피하고 다른 공격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지만 나도 자존심이 있어 사이엔과 같은 자세를 취했다.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온 정신을 상대에게 기울여야 할 지금, 사이엔은 어째서인지 내게 말을 걸어 왔다. "실론 파르스. 너에 대해서는 나도 오랫동안 많은 이야기를 들어 왔다. 또한 아버님 어머님과 함께 싸운 동지의 아들이고 해서 가능한 죽이고 싶 지는 않지만... 안타깝게도 너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어." "스스로의 승리를 너무 과신하고 있군. 게다가 카이엔은 죽지 않았어. 죽일 생각이었다면 단숨에 목을 내려쳤겠지." "마찬가지야. 카이엔에 해를 입히는 것 자체만으로 한 나라의 국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는 것보다 비교도 안되는 죄명이 성립돼."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물론 가족인 카이엔이 자신들에게 아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반역이나 쿠데타보다도 훨씬 더한 죄목이라니 그 건 말이 안되잖아? "네가 그런 걸 이해할 필요는 없어. 유감이지만 난 반드시 널 죽여야겠다." 사이엔과는 가능한한 서로 죽이지 않고 무예의 우열을 겨루는 자리에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사이엔의 눈빛은 확고했다. 사이엔이 죽느냐, 내 가 죽느냐. 사이엔은 내게 그런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당연히 내가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때문에 이번 격돌은 서로에게 있어 필살(必 殺)의 격돌일 수밖에 없었다. "하이퍼 모드." 무른 마음가짐으로 격돌했다가는 그대로 목숨을 내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내 검의 하이퍼 모드를 작동시켰다. 검 전체에 은은한 빛이 감돌며 평소보다 훨씬 강력한 기가 검에 집결했다. 오래 사용하면 생명력을 크게 손상시키기 때문에 평소에는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지금 은 쓰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베스트 텐션." 사이엔도 나를 쉽게 꺾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 듯 검에 특별한 기술을 건 모양이었다. 물론 저 기술이 어떤 기술인지는 난 알 수 없다. 사이엔 역시 나의 하이퍼 모드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무인이라면 비기(秘技)를 공개하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으니까 위험한 상환이 아니면 좀처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들바람이 부는 가운데 나와 사이엔 둘 사이에 참새가 날아오는 것을 신호로 해서 나와 사이엔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돌격해 갔다. 거리가 좁 혀지는 것은 수 초도 걸리지 않을 만큼 순식간이었다. 이제 누가 더 빨리 검을 휘둘러 더 강력한 타격을 입히느냐에 승부의 결과가 달려 있었다. 자칫하면 동귀어진할 가능성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간 왜곡!" 분명히 베었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검은 어이없이 허공을 갈랐다. 그렇다고 내가 사이엔의 검에 당한 것도 아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 라는 작자들끼리 서로 격돌하면서 양쪽 다 허공을 가르는 어이없는 실수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인물 이 우리 옆에 나타나 있었다. 세이렌 브리타뉴 더 마요르카 오브 세븐 매직 마스터즈. 카이엔과 사이엔의 누나였다. "누나, 뭐 하는 짓이야! 당장에라도 저 자식을 베어버리려는 참인데!" "불만은 아빠한테 해. 나도 납득할 수 없으니까." 저들의 아빠... 라면 내 아버님의 친우이신 지카니 브리타뉴 씨를 말하는 걸까? 세이렌의 옆을 보니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잘생긴 아저씨가 한 분 있었고 관리틱하게 생긴 뚱뚱한 사람이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당연히 앞쪽이 브리타뉴 씨라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자네가 실론 파르스 군인가. 허허. 이전에 봤을 때는 조그마했는데 벌써 이렇게 컸구나."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예의를 갖추어 대답했다. 어쨌거나 아버지의 친우이자 서로의 생명을 뺏을 수 있는 이 위험한 싸움을 말려 주신 분이었다. "그 쟈켄 파르스의 아들이 어째서 이런 무모한 일을 했는지... 나도 솔직히 말해 이 자리에서 당장에 널 척살해 버리고 싶다." 브리타뉴 씨의 말에 내 몸이 부르르 떨리는 듯 했다. 내가 아버님께 들은 말이 진실이라면 저 분은 세이렌이나 사이엔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대 한 힘을 지닌 사람이었다. 대륙 7기사 중 하나인 섀도우 나이트. 아무리 천재로 이른 나이에 대성하여 [대륙 7대]라는 명칭을 얻었다고 해도 밑 바닥 서열에서 헤매고 있는 나나 저 사이엔, 세이렌과는 차원이 다른 힘의 소유자인 것이다. 게다가 마왕 디크로드와 혼자서 맞장뜨려고 했었다 는 소문도 있는 사람이었다. "쟈켄에게 가서 말해라. '이제 다음에 만날 때 빚은 없다.' 라고." "무슨 뜻... 입니까?" "무슨 말이야, 아빠!" "맞습니다! 어째서 그냥 돌려보내는 겁니까?" "...휴우.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다. 나는 그 녀석에게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신세를 졌고 나는 조금이라도 빚을 갚기 위해 단 한번은 무슨 소원이든 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반드시 들어준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아직까지 한 번도 쓰여지지 않았는데... 오늘 이렇게 쓰게 될 줄이야." 그래도 다행인 걸까? 그 싸가지없는 카이엔 녀석을 문병가서 미안하다고 싹싹 빌어줄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지만 어떻게든 잘 해결된 모양이 다. 나는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거 없어. 너 집에 가서 뒤지게 맞을 테니까." "네에? 전 한번도..." 아버지에게 맞아 본 적이 없다 라고 말하려고 할 때 브리타뉴 씨는 내 말을 끊고 확실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 최초로 맛보게 될거다." 등뒤에 식은 땀이 흘렀다. 아버지는 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한번도 날 때리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건 나의 다른 형제자매들도 마찬가 지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친우인 브리타뉴 씨가 저렇게 말하자 나는 진짜로 아버지가 날 두들겨 팰지, 그렇다면 어떻게 맞을 지 불안감이 잔뜩 들었다. "그나저나 나도 큰일이군... 마누라가 화낼 거 같은데..." "히엑, 어... 엄마가 화낸다고요? 맞어. 아빠 그걸 대체 어떻게 감당하려고 마음대로 용서해준 거에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빨리 저 자식을 죽이란 말예요!" "나, 난 오늘 당장 남쪽의 요새로 돌아갈래! 중요한 곳인데 너무 오래 비웠어. 아버님, 어머님과 카이엔한테 안부 전해 줘요." "나, 나도 궁정으로 돌아가 다른 마법사들을 좀 만나봐야겠어." "같이 가요! 누님!" "저... 저도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에 떨거지로 끼어든 뚱뚱한 관리와 함께 사이엔과 세이렌은 공간이동으로 사라져버렸다. 내가 멍하니 서 있자, 브리타뉴 씨는 한쪽 바위에 걸터앉더니 혼자서 욕을 궁시렁댔다. "쓰벌. 젠장. 썩을. 그놈의 조까튼 약속 땜시 마누라하고 정면승부하라고? 차라리 마왕 디크로드를 다시 불러내서 한판 싸우러 가는게 낫지. 그땐 미쳤지. 나도 왜 그딴 약속을 해갖고..." 나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가족들이 옆에 있을 때 근엄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브리타뉴 씨는 내가 아직 남아있다는 사 실을 눈치채고 날 휙 쏘아보더니 말했다. "뭘 봐? 나 너땜시 기분이 존나 더러우니까 존 말할 때 빨리 눈앞에서 꺼져. 안그러면 진짜 약속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죽인다. 그랜드 소드 어 쩌고 하니까 3초만에 사라지겠지. 센다. 하나." "아, 안녕히 계십시오!" 평소의 인자하고 시원시원해 보이는 표정과는 전혀 다른 불량스럽고 무서운 표정이 까닥하다가는 정말 날 죽이려 들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대충 인사를 하고 내가 낼 수 있는 최대 스피드를 내서 그 자리를 떴다. 제32화 : 질투심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세이렌 누나도, 사이엔 형도 반드시 실론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아빠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세이렌 누나와 함께 사이엔 형과 실론이 싸우 고 있는 격전장으로 가서 싸움을 말리고 실론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 모두 갑작스럽게 자기 근무지로 돌아가버 렸다고 한다. 내게 아무런 언질도 없이 말이다. 왠지 모르게 모든 사건에서 나만 소외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과잉보호 탓인지, 아니면 나는 알면 안되는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나도 여러가지를 알고 싶은데 나에게만 뭔가를 숨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말로만 나를 사랑하느니 지켜주겠다더니 하지만 결국 이렇게 말도 없이 가 버리다니. 쳇쳇.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나보다도 아시에가 훨씬 더 불안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를 제외하면 아시에 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문제는 가족 전원이 반대하고 나선 일이었다. 그런데 일을 성사시킨 세이렌 누나가 갑자기 돌아가 버렸으니 항상 안절 부절하고 차분하게 있지를 못했다. "...미안하오." "아녜요. 당신 결정인데 당연히 따라야겠지요. 오래간만에 한번 '그 방'에서 오붓하게 이야기나 할까요?" "아, 아니 여보. 이야기라면 여기서도 얼마든지..." "어머나, 정말로 여기서 해도 돼요? 진심으로? 좋아요 얼마든지 받아들이죠. 하기야 우리 둘 간의 진실한 대화를 항상 그곳에서만 하는 건 아무 래도..." "미, 미안하오. 다, 당장 그 방으로 갑시다, 빨리!" "여기서 하자고 하시지 않았나요?" "바... 방금 그 말은 취소요, 자, 자, 갑시다." "...그래요. 이번 대화는 좀 오래 갈 거에요." 엄마는 여전히 미소짓는 얼굴과 부드러운 말씨로 아버지를 대했지만 그 말 속에는 어쩐지 날카로운 가시가 잔뜩 돋아난 듯했다. 대화 내용 자체 는 별다른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았지만 아빠는 분위기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대화라는 말에는 다른 의미라도 있 는 걸까? 그리고 엄마 아빠는 난데없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주인님과 사모님께서는 며칠간 데이트를 즐기실 겁니다.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있는 장소를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궁금해서 집사에게 물어봤더니 나온 대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왠 데이트? 나는 석연치 않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려면 어때. 부부 관계라 는 건 내가 이해할 만한 게 아니라구. 게다가 나처럼 부모와의 접촉이 드물다시피했던 사람은... 쳇. 또 안 좋은 게 또 생각났군. 그래서 엄마도 사라진 고로 아시에는 더욱 의지할 곳이 없었다. 내가 학교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침부터 밤까지 어미닭을 따르는 병아리처럼 나만 졸졸 따라다녔다. 그렇게 되자 아이렌이 집안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호랑이 없는 굴에는 여우가 왕초라고 집안에 걔보다 센 사람이 모두 집 을 비운 아이렌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외.부.인. 이 우리 집에서 멋대로 장기투숙하는 것도 실례되는 일인데 무슨 권리로 멋대로 카이 오빨 졸졸 따라다니면서 스토킹하는지 몰라." "죄... 죄송해요." "아이!" "피이. 뭐야, 카이 오빠도 그런 마도의 노예 따위, 그렇게 신경쓰이는거야?" 그러고는 아이렌은 후닥닥 달려가 버렸다. 아시에는 주눅이 들어 연신 사과만 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렌은 주변에 정령들을 불러 아시 에를 위협하거나 괴롭히는데 대항할 힘이 없는 그녀로서는 겁을 먹고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시에는 더욱 내 곁에 찰거머리처 럼 붙어 다녔다. 하기야 나 외에는 편 들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레이엔은 아이렌과 달리 아시에를 색안경 낀 눈으로 보지는 않지만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은 마찬가지였고 집사나 다른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아이렌에게 대항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사람은 전혀 없었다. 결국 아시에에게 책임감을 가지고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목욕탕이나 화장실까지 졸졸 따라붙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내가 언짢아하는 것을 아는지 아니면 소심해서인지 나와 같이 목욕을 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세이렌 누나나 아이렌이라면 당장 같이 목욕하자고 윽박질렀을 거다.) 내가 목욕하는 동안에는 욕탕 밖에서 내내 안 절부절하지 못하고 서성거렸고 아시에게 목욕하는 동안에 내가 밖에 서 있다는 기척을 내어주지 않으면 불안한 듯 자꾸 문을 반쯤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서 내가 확실히 있는지 살피곤 했다. 답답해서 괜찮으니까 내가 먼저 같이 목욕하자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그런 걸 아이렌이 알았다가는 또 난동을 피울 것이 뻔했기 때문에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한 가지만은 각오해야 했다. 이미 예상 은 했지만 아시에가 절대로 혼자 자기 싫다고 나와 같이 자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나선 것이다. "시에. 그러면 정말 내 입장이 곤란해. 그런 거 아이가 가만히 보고 있을 거 같아?" "하지만... 아이렌은... 카이가 없으면 항상..." 아시에는 내가 강경하게 나서자 주저하기는 했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지금 아시에는 오늘에만 물의 정령한테 물을 세 번이나 뒤집어썼고 불의 정령한테 머리카락 일부가 타 버렸다. 바람의 정령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쓰고 다니는 커다란 모자가 다섯 번이나 날아가는가 하면 땅의 정 령이 발목을 잡아 열 번 가까이 땅바닥에 넘어졌다. '이건... 자업자득이겠지.' 어린아이의 질투라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악의적이었다. 항상 내 옆에 있어도 이 모양인데 내 곁에서 떨어지면 어떤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시에를 옆에 재우면 아이렌이 절대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때문에 나는 결국 내리고 싶지 않았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카이 오빠, 불렀어?" "그래. 아이. 아무래도 너 때문에 시에가 혼자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애. 그래서 오늘은 내 옆에서 재우기로 결정했다." "뭐... 뭐어? 오빠, 그... 그런 여자따위를... 오빠 옆에 재우겠다고?" 예상대로 아이렌의 입이 떡 벌어지면서 경악하더니 곧이어 화를 터뜨릴 것 같이 보였다. 나는 아이렌이 화를 내기 전에 앞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아이 너도 오늘 내 옆에서 자라. 어차피 침대는 넓으니까." "그... 그건..." 예상대로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는지 아이렌은 열심히 고민하고 있었다. 여동생을 상대로 외모를 무기로 꼬드기고 있다니, 이게 무슨 꼴이다 냐. 어휴. "싫으면 말고. 대신 레이엔하고 같이 자면 되니까." "같이 잘래! 절대로! 레이엔 혼자서는 그 마도의 노예가 무슨 짓을 해도 막을 수 없다고!" ...그리하여 이 세계로 떨어진 후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잠을 자게 되었다. 아이렌은 처음에는 아시에는 침대 밑에서 담요나 던져두고 재워도 된다고 주장하다가 내가 화를 내자 아시에-아이렌-나 카이엔 순서대로 누워 자자고 물러났다. 하지만 그래서야 아시에에게 무슨 짓을 안 한다고 보장할 수 있나? 나도 강경하게 나섰다. 이건 전부 아이렌 때문에 생긴 문제라구! "내 방 침대에 내가 구석에서 자라고? 내 방 주인은 나야. 내가 결정할거야." 그리하여 결국 아이렌-나-아시에의 구도로 잠을 자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이렌은 불만인 모습이었지만 다시 레이엔 얘기를 꺼내며 너 없어도 돼 라는 투로 넘겨짚자 내 이야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난생 처음 여자를 둘씩이나 끼고 잠을 자게 되었다. 과연 제대로 잠을 잘 수 있을 건지 잘 모르겠다. 비단 여자가 아니라도, 지금 까지 누군가와 함께 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로지 혼자서 잠들고, 혼자서 일어나는 그런 생활을 난 해왔으니까... 불이 꺼진 어둠 속에 창문 커튼 사이로 별빛만이 방 안을 희미하게 비치는 어두운 방. 평소라면 벌써 잠들고도 남았을 터이지만 지금 나는 도 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내 양쪽에서 서로 내 팔을 붙잡고 잠들어 있는 두 여인네들 때문이었다. 잘려면 그냥 조용히 잘 것이지 남의 팔은 왜 붙드냔 말이야! 그렇 지 않아도 다른 사람과 함께 자 보는 것은 처음인데다가 그 상대가 둘 다 여자라서 처음부터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생각해 봐라. 이렇게 젊고 팔팔한 나이의 신체건강한 청년... 까지는 아니더라도 한창 때의 청소년이 양 옆에 마찬가지로 젊은 여성이 옆에서 자 고 있는데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을 것 같냐? 좀 논다고 싶은 놈들은 두 여자를 한꺼번에 먹으려 들테지만 나같이 소심한 부류의 인간들은 어떻 게 하지도 못한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되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물론 이계에서 남의 몸에 빙의해서 가족 관계가 된 터라 특별히 가족으로서의 애정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되었건 아이렌은 나의 여동생인 데다가 귀엽고 예쁘기는 하지만 성적 매력을 느끼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리고 나는 그런 어린아이를 먹으려 들 만큼 변태적인 취향은 없었다. 최소한 중학생급은 되야... 가 아니라 하여간 그렇다는 거다. 아시에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아시에의 정확한 나이는 알 길이 없지만 외모만 놓고 보았을 때는 나와 비슷해 보였다. 게다가 세이렌 누나가 그 가치(?)를 미리 알아보고 마도의 노예라는 감점 포인트에도 불구하고 나 못지 않게 귀여워할 정도로 대단한 미소녀다. 당장에 따지자면 당장 이쪽으로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고, 지금도 실제로 적극적으로 달라붙는 아이렌보다는 수줍어하면서 나만 따라다니는 아시에가 훨씬 더 신경이 쓰인다. 지나치게 예쁜 꽃에는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렇다고 아시에에게 마음놓고 접근하기는 어려웠다. 우리 집 가족들부터 남녀를 불문 하고 내게 달려드는 상황에서 아시에와 가까워졌다가는 오히려 아시에에게 피해가 갈 수 있었다. 오늘 아이렌이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힌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겉으로는 신경쓰지 않는 척 했지만 마도의 노예라는 그 출신도 내심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시에는 최근의 기억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누나의 물음에 답했다. 엄마도 거듭되어 제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정신영역에 손상 이 크고 회복 불가능한 곳에 상당히 많다고 했다. 대답을 회피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 나쁜 흑마법사 셰더의 노예로서 그녀가 할 수 있 는 모든 것에 대한 희생을 강요당해 온 것이다. 저주받은 자. 자신과 다른 자.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일반인의 첫 반응은 동정심이다. 하지만 그런 자들이 자신의 주위에 자리잡으려고 하면 사람 들은 그 자들을 꺼리고 기피하며 그들의 집단에서 쫓아내려고 한다. 그런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을려고 노력하지만 그래도 본능적으로는 거부감이 남아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으응... 오빠." "하지 맛!" "냉정해..." "...방금 네가 하려는 짓이 뭔지 알텐데?" 어떤 의미에서는 아이렌이 더 무섭다는 말이 이거다. 세이렌 누나야 원래 성숙한 이미지로 이렇게 저렇게 애정 공세를 가해 와도 조금 부담스럽 기만 할 뿐 어떻게 넘길 수 있지만 이렇게 어린 애가 도대체 뭘 보고 자랐는지 성인들이나 할 만한 애정 공세를 퍼부어오면 놀라다못해 섬뜩해 지는 것이다. 아이렌이 방금 뭘 했냐고? 내 아랫도리로 손을 슬슬 뻗어 왔었다. 저번에 시르팡에게 잡혔을 때도 귀에다 바람을 후 불지를 않나 원... 도무지 잠들 생각을 하지 않고 틈만 나면 잠든 나를 공략(?)하려고 호시탐탐 눈을 번뜩이는 아이렌의 존재 역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아시에도 아이렌처럼 내 팔을 끌어안고 있었지만 아이렌과는 달리 새근새근 잘 자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아이렌에게 많이 시달려 피곤했겠지. 뺨을 내 팔에 가져다 대고 곤히 잠든 모습이 마치 그림 속에 나오는 풍경처럼 아름다웠다. 다른 한쪽 팔이 아이렌에게 잡혀 있지만 않더라면 머 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다만 이쪽은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문제가 생겨서 나의 수면에 장애를 주고 있었다. 아시에가 워낙 내 팔을 꼭 껴안은 나머지 팔에 이어져 있는 손이 그녀의 가슴께에 파묻혀 버린 것이었다. 이리저리 움직여서 꺼내보려 했지만 워낙 꼭 붙들고 있는지라 손을 빼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힘을 줘서 억지로 빼내자니 너무 충격이 커서 아시에를 깨울 것만 같았다. 맞닿은 손에 느껴지는 아시에의 가슴은 평소에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큰 것 같았다. 말랑말랑하고 뭉클거리는 느낌이 생각보다 자극적으로 느껴 졌다. 아이렌이 껴안은 다른 한쪽 손에는 아무것도 없이 평평한 느낌만 왔기 때문에 더 비교가 되었다. 하아. 아드레날린이 잔뜩 분포된 지금 몸 상태로는 자는 걸 포기하는 편이 속 편하겠지. 어차피 학교도 한동안 안 가겠다고 결심했겠다 내일 낮잠이라 도 자면 그런대로 보충은 될 거 같았다. 그렇게 포기하고 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고개를 돌려서 본 아이렌은 내가 잠들기를 기다리다가 지쳤는지 결국 먼저 잠든 모양이었다. 이 기회에 어 떻게 한쪽 팔만이라도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기대하며 팔을 빼내려 했지만 아이렌도 팔을 꽉 잡고 있어서 도통 빠지지 않았다. 아시에와는 달 리 억지로라도 빼내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올랐지만 아이렌이 깨 버리면 아시에가 깨는 것보다 훨씬 골치아플 터였다. 익숙해지면 편해지고, 편해지면 혹시 늦게나마 잠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한번 달아오른 흥분상태는 쉽게 가라앉고 있지 않았다. 특히 아시에의 가슴에 놓여 있는 내 손에서 느껴지는 야릇함은 몇 시간이나 지나도 도저히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한밤중이 지나 잠마저 쏟아지자 졸음과 더불어 흥분은 더욱 이성을 잠식해 갔다. 몽롱한 정신 때문에 당장이라도 아시에를 와락 끌어안고 껍질 을 벗겨내고 싶은 충동이 더 강해져 갔고 나의 심장박동소리도 점차 그 간격을 좁혀 갔다. 그리하여 확 아이렌에게서 팔을 빼내 아시에를 껴안으려고 했을 때... "...버리지 마... 엄마. 아빠. 다신 날..." 짧은 잠꼬대였지만 본능에 잠식되어가던 이성을 되찾기에는 그걸로 충분했다. 과거에 대해서도, 부모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던 아 시에가 꿈 속에서나마 무언가 기억을 하고 추억해낼 수 있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슬프고 괴로운 현실에서 누군지도 알 수 없는 부모님 을 찾아 헤매는 걸까? "휴우..." 왠지 바보 같아졌다. 오랫동안 한껏 달아있던 정신적, 육체적인 흥분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깨끗이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생각에 잠겼다. 나는... 아이렌을, 아시에를. 이 세상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나는 결심했다. 쉽지는 않지만 이전의 괴로웠던 일은 다 잊어버리고 많은 사람들과 활기차게 살아가자고.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쏟아진 사랑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점차 사람들을 대하는 법 이 점차 거칠어져 가고 있었다. 마치 이전 세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에나와 피요르에 대해 지나치게 화를 내 버렸고 결국 실론을 도발시켜 내가 나 스스로를 위험하게 만들었다. 큰 사고가 났으니 두 사람 모두 이제 학교를 제대로 다니기 힘들겠지. 이럴려던 게 아닌데... 이렇게 사고를 일으키고자 새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게 아닌데. 왜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 걸까? 복잡한 생각의 끝에 나는 창 너머로 하늘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할 때쯤에야 비로소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늦은 아침에 퀭한 눈빛으 로 간신히 일어났을 때, 자주 그랬듯이 전날 밤 잠들기 직전에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을 할 수 없었다. "괜찮아, 카이? 좀더 자는 게 좋지 않아?" 늦은 아침에 피곤한 기색으로 일어서자 내 옆에 누워 있는 아시에가 말했다. "지금 시간... 해가 중천에 떴네." 동이 터올 때쯤 자서 그런가. 이렇게 늦게 일어났는데도 정신은 피곤하고 몸은 나른했다. 밤중에 힘 좀 쓴 것도 아닌데 몸이 벌써부터 왜 이러나 몰라. "미안해. 나 때문에 못 잤지?" "굳이 너 때문만도 아냐. 애초부터 이녀석이 원인이니까." 습격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다 결국 제풀에 지쳐 먼저 잠든 아이렌은 그녀도 늦게 잤다는 것을 증명하듯 여전히 웅얼웅얼거리며 잠들어 있었 다. 잠이 들기 전에는 내 팔을 꽉 잡고 놔줄 생각을 하지 않더니 잠버릇이 나쁜지 어느 새 저 침대 구석진곳까지 가서 굴러떨어지기 직전의 상 황까지 가 있었다. "근데 시에 넌 일찍 깬 거 같은데 왜 지금까지 여기 누워 있어?" "카이와 같이 있고 싶어서..." 아시에는 그러면서 얼굴을 붉히고는 고개를 떨궜다. 어이... 그런 말을 하면 나까지 얼굴이 빨개지잖아? 그럴 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고 나와 아시에는 깜짝 놀라 서로 등을 돌렸다. "카이엔 형. 들어간다." "응. 들어와." 노크소리의 주인공은 레이엔이었다. 레이엔은 우리가 늦잠을 잤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의관에 머리손질까지 제대로 한 상태로 방으로 들어 왔다. "뭐야? 잠옷차림이라니... 아직까지 안 일어나고 뭐 한 거야? 그건 그렇고... 아이렌녀석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저 상태로 자고 있군." "방에 들어온 이유가... 아이렌때문이야?" "응. 아이렌은 내가 안 깨워주면 항상 늦잠을 자거든." 그렇게 말하며 레이엔은 침대 구석에 널부러져 있는 아이렌을 깨우러 갔다. "아이렌. 일어나. 빨리 안 일어나면 내가 뽀뽀한다?" "우응... 카이 오빠에게 받는 뽀뽀라면 언제든지 좋아.. 우웅... 기왕이면 키스해줘." "이거 영 비몽사몽이군. 내 목소리가 카이엔 형 목소리로 들리냐?" "웅... 이 목소리.. 레이엔? 야! 누구 마음대로 남의 얼굴에 뽀뽀한다는 거야?" 잠에 취해 웅얼거리던 아이렌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레이엔에게 소리를 질렀다. 참 독특한 깨우기 방법이었다. "하여간 그래서 넌 내가 없으면 안된다니까." "그 핑계로 요조숙녀의 방에 맨날 들어와서는 이상한 짓이나 하려 하고 말이야. 당장 나가!" "맘대로 해. 난 분명 여기 방 주인의 허락을 받고 들어왔다구." "아 맞어! 나 어제 밤에 카이 오빠의 방에서 잤지. 카이 오빠 잘 잤어?" 아이렌은 그걸 깨닫자 마자 레이엔 무시 모드로 들어가서는 방긋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니 눈에는 내가 잘 잔 것 같이 보이냐?" 비단 아이렌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나는 어제 여자 둘을 옆에 끼고 자서 잠을 설친 원인의 화살을 모두 아이렌에게 돌렸다. 하지만 이 당돌한 애 는 '미안해 오빠. 나땜에 못 잤지?'라던가 하는 귀여운 대사를 내뱉는 성격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아시에와는 완전히 천지차이였다. 아시 에는 무의식적으로 남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반면 아이렌의 말을 들으면 그나마 있던 분위기조차 왕 창 깨질 것 같았다. "치이. 그러니까 나랑 같이 뜨거운 밤을 불태우면 됐잖아?" "....." 저래서 자꾸 짜증나는 거잖아! 더 이상 내가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이런 내 심경을 대변이라도 하듯 레이엔이 기도 안 찬다는 투로 말을 꺼냈다. "내가 카이엔 오빠라도 너같은 애는 상대 안 하겠다." "어라, 그러셔? 그럼 그런 애를 좋다고 따라다니는 어디의 누구는 대체 뭘까?" "좋아하는 거랑 밤을 지새우는 것과는 차이가 있잖아?" "좋아하면 같이 밤을 불살라야 하는 거야! 하얗게 다 태우는 거라구!" 어째 남녀의 대사가 뒤바뀐 감이 들었다. 휴우. 이젠 나도 몰라.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저래서야 누가 쟤를 데려갈꼬... 레이엔이 데려가겠다 는 의지를 필력하고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 난 별로 쟤 데려가고 싶지 않아. 그럴 바에는 차라리 세이렌 누나의 품 안에서 사는 게 더 낫겠다. "하여간 나가. 나 씻고 옷갈아입을 테니까." "아이렌도 같이 갈아입을래!" "나갓!" "그럼 저 아시에란 여자도 내보내." 좀 조용히 있기 위해서 어떻게든 아이렌을 레이엔과 엮어 내보내려고 했지만 아이렌은 물귀신작전까지 써가며 쉽게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아시에를 쳐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슬픈 듯하며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어떻게든 내 곁에 있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레이엔." "왜그래, 형?" "아시에와 아이렌을 데리고 나가. 아이렌이 쓸데없는 짓 못하도록 잘 감시하고." "알았어." 아시에는 뭔가 내게 말하려는 듯 머뭇머뭇거리면서 눈빛 공격을 계속했지만 난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잠깐만 나가 있어. 시에." "응..." 아시에는 할 수 없이 레이엔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아시에를 보는 아이렌의 시선이 못내 염려스러웠지만 나도 때로는 보살펴 줄 수 없는 때도 있는 법이다. 넓은 방안이 텅 비었다. 그제서야 나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수 있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분위기에 휩쓸려가... 잠깐! 지금 내가 혼자를 편하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이전에 혼자인게 편했던 때를 그리워하는 걸까? 설마... 그럴 리가. 나는 고개를 붕붕 저으면서 옷을 갈아입고 씻기 위해서 하인을 불렀다. ...나도 제발 하녀들 좀 불러서 시중받아 봤으면 좋겠다. 쳇. 과유불급이라더니 너무 미모가 지나쳐도 문제긴 문제인가 보다. 하여간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고, 옷을 갖춰 입고 거의 점심식사나 다름없는 늦은 식사를 마친 나는 집사를 불렀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는데, 아시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으니 가족으로 대해야겠지요." "휴우. 세이렌 누난 둘째치더라도 엄마만 돌아와도 어떻게든 될 텐데. 아빠랑 둘이서 뭘 하고 있는지..." "그렇습니다만 현실적으로 지금 아이렌 아가씨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두 분이 같이 학교에 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학교?" 얼마 전에 학교에 한동안 안올거라고 폭탄 선언을 했는데 학교에 가라고? 내가 난감해하고 있자 집사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습니다. 아이렌 아가씨는 카이엔 도련님이 다니는 학교에 다닐 만한 나이는 안 되니까... 최소한 학교에 있을 때만은 괜찮겠지요." "한동안은 별로 갈 생각이 없는데..." "학교에 문의해본 결과 카발리에나 씨가 팬클럽 회장에서 물러나고 케이준 씨가 회장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아마 괜찮을 겁니다. 자하기니아의 공주님도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하고..." "진짜야, 그거?" "네." 시에나가 물러난 것은 다행이었지만 피요르가 돌아갔다라... 아마도 그런 커다란 일이 일어났으니까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겠지. 아무리 왕족의 호위에다 대륙 7대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지만 왕족보다 결코 뒤지지 않은 끗발을 지닌 가문의 중요한 사람을 비겁하게도 뒤에서 찔렀으니... 실 론 파르스. 뭐, 내가 도발한 탓도 있으니까 이제와서 원한이라고 할 만한 건 없지만... 쨔샤. 넌 건드릴 사람을 잘못 건드린 게 죄야. 나는 전국구 도 아닌 대륙급이라고! "그렇지만 아시에는 마도의 노예라고 했어. 다른 애들이 색안경을 끼고 본다면 그게 더 큰 상처가 될지 모르잖아?" "그 사실은 시르팡과 직접 관계가 되었던 집안 사람들과 하인, 하녀들 몇 명밖에 모릅니다. 입단속만 잘 하고 먼 친척이라고 이야기하면 괜찮을 겁니다." "아시에 브리타뉴가 되는 거야, 그럼?" "아마 그렇겠지요. 어차피 신분 하나쯤은 필요할 테니까요. 이미 주인님과 사모님의 재가가 난 사항입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전학 수속을 밟도록 하지요." "알았어." 괜찮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쁘지는 않겠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대로 넘어갔다. 그리고 나는 아시에에게 이 일을 알려주러 갔다. 레 이엔 녀석. 아이렌을 제대로 제어하고 있는지나 모르겠다. 하여간 그놈의 질투라는게 뭔지 참... 제35화 : 질투단 "....." "....." "저 애... 여자일까?" "...카이엔을 오래 보더니 드디어 남녀 구별을 못하게 되었구나 너." "카이엔의 가족들 중 저런 아이는 본 적이 없어." "저 기지배 누구얏!" 다들 입이 쩍 벌어져서는 조금 늦게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내가 가족이 아닌 다른 여자를 대동했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껏 전혀 없었던 일이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아시에가 대체적으로 미형인 이곳 애들보다 훨씬 더 예쁜 미소녀였다는 데 있었다. 어떻게 확신하 냐고? 난 분명히 들었다. 아시에가 군중의 분위기에 부담을 느끼고 고개를 숙여 커다란 모자 밑으로 얼굴을 감추자 남정네들 사이에서 한숨짓는 소리가 곳곳에서 나왔으니까. 시에나의 뒤를 이어 내 팬클럽 회장이 되었다던 린넬조차 몰려드는 군중을 통제할 만한 이성을 잃은 듯 멍하니 이쪽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내 팬클럽 회장이니... 꽤 충격을 받은 걸까? "예... 예쁘다!" 남자에게 딱히 질투심을 느낄 이유는 없었지만 어쩐지 열받게 만드는 린넬 녀석의 대사였다. "흠흠. 오늘 전학 온 학생은 얼마 전 브리타뉴 가문에서 양녀로 받아들인 아시에 브리타뉴 양이다. 원래는 다른 반으로 보내려고 했지만 이 애가 낯을 심하게 가린다고 해서 카이엔 브리타뉴와 같은 반에 들어오게 되었다. 마침 자하기니아의 공주님이 고국으로 돌아가셨으니 그 빈 자리에 앉으면 되겠지... 아무래도 분위기에 익숙지 않을 테니 카이엔의 곁에 앉히는 게..." "선생님!" 린넬이 손을 번쩍 들고 일어섰다. "무슨 일인가. 케이준 군." 역시 저 담탱이. 나만 이름으로 부르고 다른 사람은 모두 성으로 불러. 무슨 음모야, 대체? 하지만 린넬이 일어섰다는 건... 아시에에게 내 옆자리 를 뺏기기 싫은 거야? "아시에의 옆자리에 앉고 싶습니다!" 린넬이 외치고 나서자 다른 남자애들도 그 뒤를 따랐다. "아시에를 제 옆자리에 앉게 해주세요!" "잘 보살펴줄께요, 제 옆으로 보내주세요!" "야, 너 나한테 싹싹빌며 옆에 앉아달라 할 때는 언제고..." 불끈. 왜 내가 기분이 나쁜 거지? 아시에는 예쁘고, 남자애들이 걔 옆에 앉고 싶어하는 건 당연할텐데... 어차피 나는 몸도 마음도 남자. 그런 남자애들 이 관심을 쏟아주지 않아도 별 상관없잖아? 상관없을텐데... "선생님." 나는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아시에는 제 옆에 앉을 겁니다." 시끄럽던 교실이 잠시 침묵했다. 담임 선생은 아시에에게 동의하냐고 물어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아시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환 경에 불안초조해하고 있던 것 같았는데 내가 강하게 나서자 조금 안심한 듯한 눈빛이 되었다. "그럼 좋다. 린넬 케이준 군은 짐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공주님이 앉던 자리로 가도록." "네." 린넬은 의외로 조용히 짐을 챙겼다. 말투나 주섬주섬 챙기는 손길에 검은 오라가 느껴졌다. 이 녀석... 삐졌나? 그렇지 않으면... 린넬은 가방을 챙기고 내 옆을 지나가면서 나만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니가 모든 것을 독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 절대 뺏기지 않을 거야." 순간 난 놀라서 멍하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저 자식... 아시에한테 반해버린 거야?, 진짜로? 난감해진 내 심정을 아는 지 모르는지 아시에는 교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이고 내 옆자리로 걸어왔다. 아시에가 내 옆자리에 앉았을 때 나는 그들의 시선을 조금 훔쳐볼 기회가 있었다. 여자애들은 아시에에 대해서, 남자애들은 나에 대해서 한결같이 적대감을 담은 눈빛 이었다. 이전까지 남녀 모두가 선망의 대상으로 날 바라보던 눈빛에 변화가 온 것이다. 바로 '질투'라는 감정을 담은... 이곳에 와서 쭈욱 사랑받기만 해 왔던 나에게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기분나쁨과 부담감을 주는 시선이었다. 전에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의 시선과도 또 달랐다. 그때 받았던 시선은 '거부'와 '무시'였으니까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적대감인 질투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 다. '역시 그만두는 게 좋으려나...' 엄마가 돌아올때까지 며칠만 버티면 되지 않느냐고 했지만 집사는 엄마가 돌아와도 세이렌 누나가 돌아오지 않는 이상은 완전히 아이렌을 막기 는 어렵다면서 입학을 강행시켰다. 엄마와 아빠가 없어도 모든 일을 당연한 듯이 짜고 진행시키는 집사가 의심스러웠지만, 현실적으로 내가 이의 를 걸기 힘들었다. 그것은 이 세계에 대한 나의 무지가 첫번째 원인이겠지만 내가 매섭게 추궁한다고 추궁해도 집사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 창끝 을 무디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하여튼 이래서는 세이렌이 마도의 노예라는 것을 어떻게 잘 숨길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선은 당장 형성된 질투단들이 어떻게 나올지 심히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나야 남자들이 질투하니 어쩌니 해도 견딜 만큼의 뻔뻔함은 있지만 낯가림 심하고 유약한 아시에게 어떻게 벼텨낼 수 있을까? 걱정이 걱정이 꼬리를 물어 수업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원래부터 그랬지만) 그리고 하필이면 첫 수업이 담탱이의 수업이 었다. "카이엔 군. 나와서 이 두 다항식의 최소공배수와 최대공약수를 구해 보게. 인수분해를 사용하면 쉽게 풀 수 있을 걸세." "....." χ의 최고차항이 3이었다. 저런 것도 인수분해 할 수 있나? 열심히 삽질한 끝에 간단한 거는 할 수 있게 되었지만서도... "자... 잘 모르겠습니다." "조립제법을 사용하게. 그렇다면 간단하게 인수분해 할 수 있을 걸세." 조립제법이 뭔지 내가 어떻게 알아아아아앗! 그 때 내 옆에서 들려오는 부드럽고 청아한 목소리가 있었다. "선생님... 제가... 카이엔 대신에 풀어도 될까요?" "우와아아아" "우에에에에" 아시에가 풀겠다고 나서자 격려와 야유가 뒤섞인 목소리가 교실을 울렸다. 각 목소리는 성별에 따라 구분지어졌다. "응? 브리타뉴 양? 좋아. 한번 풀어보게." ...아시에한테도 성을 불러주면서 왜 나한테는 이름이냐아! 기분나빳! 아시에는 나갈 때는 시선과 함성이 부담스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이고 나갔지만 정작 칠판 앞에 서서 분필을 잡더니 망설임 없이 단번에 공식과 답을 써내려갔다. 적어도 이 교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문제 풀이 속도였다. 어쨌건 귀족들에게 있어서 빼어난 수학 능력은 하인들이나 실무 관료 들에게 맡겨도 상관없는 그런 문제였으니까, 수학을 잘 하는 녀석은 드물었다. 반 애들도 그렇고, 담탱이도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저... 정답이네. 브리타뉴 양. 그렇다면 옆에 있는 이 문제도 풀어보겠는가?" 옆에 있는 문제는 χ의 최고차항이 5나 되는데다 나로선 잘 알 수 없지만 어딘가 꼬여 있는 문제였다. 아마 저런 수학 문제 풀 수 있는 애. 이 학교에서는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거다. 평민들 학교에서는 좀더 많을 지도 모르겠지만... 아시에는 그 문제도 단번에 풀어버렸다. "우와, 대단하다." 감탄의 탄성. "흥. 밥맛이야. 기집애가 수학같은 거 잘해서 어디다 써?" 질시의 쏘아붙임. 저런 아이들이 아시에의 정체를 알고 나면 어떻게 될까? 동정심을 가질지... 아니면 레이엔이 말하는 대로 그녀를 거부해 버릴지. 아시에가 이 학 교에 들어온 것만 가지고도 학생들의 마음은 크게 변하고 행동도 달라졌다. 그런 그들이 아시에의 정체를 알고 나면 당연히 보란 듯 외면하고 거부하고, 쫓아내려 할 거라는 생각을 할 거니 슬퍼졌다. 그래. 좋아. 상대가 아시에이건 나이건 간에 마음껏 질투해도 좋아. 거부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나을 테니까. 그런 거쯤이야 어떻게든 극복해 낼 수 있겠지. 그렇게 마음가짐을 굳게 잡고 있을 때 담임 선생은 아시에를 자리에 들여보내면서 말했다. "그럼 카이엔 군에게는 대신 다른 문제를 내겠네." 뜨아아아아악! 제발 그만해! 담탱이 수업은 역시 악몽이야야앗! 왜 나만 걸고 맨날 이러냐굿! 첫째 시간 수업이 끝나자. 대충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우선은 상황이 그렇게 절망적이지만은 않다는 점. 질투의 시선을 팍팍 쏘아대는 무리 들도 있었지만 사심이 없는 급우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시끌벅적하고 즐거운 쉬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어쩜... 좋겠다. 나도 브리타뉴가의 양녀로 들어갈 수 있으면..." "훗. 너 같은 호박 받아주기나 한데?" "말 다 했어, 키론?" "그나저나 둘이 참 잘 어울린다. 그치?" "아하하. 뭘..." 나와 아시에를 선망해서 이렇게 책상을 둘러싸고 있는 애들도, 질투해서 저만치에서 쏘아보는 애들도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미소년 미소녀인 우리 둘이 그림이 된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꺄아∼ 너무 귀여워!" 치즈 녀석은 언제 들어왔는지(내 시식 평가단 자격으로 우리 반 출입 자격을 가지고 있다) 어느 새 아시에를 꼭 끌어간고 부비적거리고 있었다. 인파에 익숙치 않은 아시에는 곧 새파랗게 질렸기 때문에 나는 바로 치즈를 떼어내고 설명을 해 줘야 했다. "오호∼ 그래서 그런거구나. 알겠다!" 내 설명을 듣자 치즈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뭔가 알겠다는 듯 손바닥을 마주쳤다. "혼자만 알지 말고, 무슨 일이야?" "아까 복도에서 린넬이 애들 모아놓고. 카이엔 팬클럽 해산하고 카이엔 질투단 만들 거라던데? 거기에 회장에서 물러났던 시에나가 반발해서, 아 시에 질투단 만들거라고 버럭버럭 소리질렀어. 그래서 난 아시에가 누구길래 그러나 했지." 지... 지... 질투단? 아무리 그림이 되고 옆자리에 앉았고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 공인 커플로 취급받게 된 거지? 질투단의 마수인가... 그런 악의 무리쯤이야 뜨거운 커플 파워로 단번에 물리칠... 만한 상황이 아니잖아! 일단 최초의 전제인 '카이엔과 아시에는 커플이다.'라는 조항 부터가 거짓이잖아, 삼단 논법이 성립이 안된다구! "여하튼 아시에는 참 이뻐. 대륙 7대 미소녀와 비교해서도 전혀 딸리지 않아. 내가 그 중에 두 명을 직접 본 적이 있거든?" "나도 그렇다고 생각해. 게다가 그 중에 한 명이 곧 결혼할 예정이니까... 아시에가 그 빈 자리를 채우게 될 지도 모르겠어." 치즈의 말에 키론이 동의했다. 그나저나 대륙 7대 미소녀라니 그건 또 뭐시기다냐? 이제는 별 이상한 데까지 대륙 7대라는 말이 다 붙는구나. 궁 금증이 든 나는 물었다. "혹시 대륙 7대 미소년 그런 건 없어?" "당연히 있지. 카이엔 니가 대륙 7대 미소년 서열 1위잖아? 잊어먹었어?" "에? 그런데 왜 난 아직 한번도 그런 말 들은 적이 없지?" "당연하잖아. 최고 앞에서 다른 6명과 뭉뚱그려 이야기하면 좋아하겠어?" 음... 한 가지는 알았다. 대륙 7대 마법사라는 세이렌 누나도. 대륙 7대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사이엔 형과 실론 자식도. 대륙 7대 정령 마스터 라는 아이렌도. 대륙 7대 예언가라는 레이엔과 전 대륙 7대 신관장이였다는 우리 엄마, 대륙 7대 기사 섀도우 나이트였다는 우리 아빠도 결코 최 고의 지위에 있지는 않았다는 것. 그런 것도 다 서열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만 유일하게 지존의 자리에 앉아 있는 건가? 우하하핫. 하여간 린넬 녀석이 배신을 때리고 나 대신 아시에 파로 돌아섰기 때문에 나는 일전에 그랬던 것처럼 루카라 시클레인의 도시락을 점심시간에 먹게 되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점심 먹을 때는 치즈 패거리랑 같이 점심을 먹는다. 원래대로라면 린넬도 있어야 하지만... 대신에 아시에가 들어 왔으니 상관 없겠지 뭐. 아시에에게도 내게 들어온 도시락 중 괜찮은 것을 치즈가 골라주었다. 그때 린넬 녀석이 자신의 존재감을 피력하려는 듯 쿵쿵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왠일이냐?" "너 보러 온 거 아니니 걱정말도록." 이 자식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태도가 180도 변할 수 있는 거야? "아시에 브리타뉴... 내 도시락을 받아 줘!"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아시에에게 도시락을 주러 왔다. 린넬의 도시락은 확실히 맛 하나만은 보장할 수 있다만은... 아시에가 받아들일까? "...미... 미안. 이미 먹고 있..." "한입이라도 좋아, 제발 먹어줘!" 린넬 녀석은 머리까지 숙여가면서 필사적으로 아시에에게 도시락을 내밀었다. 아시에는 난감한 듯이 우물쭈물하다가 도와달라는 듯 내 눈치를 살폈다. "카이... 이건... 어떻게..." "이건 네가 판단해야 하는 거야. 시에." 사실 저런 의리없는 철새 자식의 도시락따위는 집어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너무 쪼잔한 놈이 될 것 같아서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해 버 렸다. "맛있겠다... 아시에! 그냥 받아. 못 먹을 거 같으면 내가 다 먹어 줄께!" 그렇다고 부추기지 말라고, 치즈... "일단 놓고 갈께. 마음이 있으면 먹어줘." 아시에가 계속 우물쭈물거리고 있자 린넬은 다짜고짜 자기 도시락을 놓고 가 버렸다. "카이엔, 이거 나 먹어도 돼?" "왜 나한테 물어? 나 저놈 도시락은 아무리 맛있어도 이젠 안 먹어." "아시에, 이거 나 먹어도 돼?" "으... 으응." "고마워! 너 정말 좋은 애야 아시에! 그럼 잘 먹겠습니다아!" "나도 좀 줘, 치즈!" "그래그래. 혼자만 먹지 말라구!" "시끄럿! 나 혼자만 먹기도 모자라다구!" 우뉴와 이멜츠가 자기들에게도 떡고물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고 기대한 모양이었지만 치즈는 간만에 들어온 떡을 놓고 놔주려 하지 않았다. 뭐, 린넬이 여기에 도시락을 두고 가버렸을 때부터 그 도시락의 운명은 대충 예상했지만... "크... 큰일났어, 얘들아!!!" 그때 루카라가 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뛰어올라왔다. "아, 루카라. 점심 도시락 잘 먹었어." "무슨 일이야, 루카?" "아, 치즈. 그리고 카이. 지금 당장 창문 밖에 좀 내다봐. 빨리!" 아직 밥을 다 먹지 않았기 때문에 좀 찜찜했지만 루카라가 말하는 대로 우리들은 창문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 밖에서 우리는 플래카드를 들고 양쪽에 대치한 두 무리의 집단을 볼 수 있었다. [카이엔 질투단] [아시에 질투단] 아직 질투단 이름은 미처 정하지 못한 모양이엇다. 하긴 오늘 급조했을테니까 제대로 된 이름이 나오기는 쉽지 않겠지만. 하여간 빠르기도 빠르 다. 아까 치즈의 말 듣고 짐작은 했지만 벌써 당일부터 이 꼬라지냐? "아시에 질투단은 시에나가 만들었는데, 카이엔 팬클럽 중에 상당수가 저기로 갔어. 카이엔 질투단은 린넬이 만들었는데, 짧은 시간 내에 꽤 많이 모았네?" "린넬 저래뵈도 꽤 능력 있는 녀석이니까." 치즈의 설명에 이멜츠가 덧붙여 말했다. 하기야 그녀석 내 팬클럽 만든다고 할 때도 정말 철두철미하게 잘 했지. "그럼 내 팬클럽은 어떻게 된거야?" "음... 유감이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해진거지. 지도부가 저 쪽으로 다 가 버렸으니." 내가 살던 곳에도 하루살이 정당이며 철새 정치인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 동네라고 해서 별 다를 건 없는 모양이군. 둘이서 뭐라고 싸우고 있는 데 원체 시끌시끌해서 여기서는 잘 안 들린다. "별 거 아니네. 빨리 밥이나 먹자." "에에, 신경 안 쓰여, 카이엔?" 집안 문제만 해도 신경 쓸 곳이 널리고 널렸는데 저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어딨냐? 일일히 신경 쓰면 스트레스 받아서 일전에 실론한테 그랬다 당했던 것처럼 위험한 일을 겪게 될 지도 모르고 말야. 중요한 건 나한테 피해만 안 오면 돼! 피해만 안 오면! 문길이 자식도 우리들을 건드리지 만 않으면 함부로 저주를 남발하지는 않았으... 이상한 일이네. 잊겠다고 결심한 이후, 집이나 원래 부모님 같은 거 생각하는 빈도는 상당히 줄어들었는데 왜 문길이 녀석만은 문득문득 생각이 떠오르는 걸까? 그만큼 그 녀석이 의외로 내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걸까? "저 애들... 나 싫어하는 거야?" 자리로 되돌아가려는 찰나에 아시에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마도의 노예로 있으면서 많은 고통을 겪은 탓일까, 그렇잖으면 기억이 지워진 데 대한 영향을 받는 걸까. 그녀에게 씌워진 저주의 굴레는 모두 엄마가 치료했다지만 아직 마음까지 치료되지는 않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저 대사. 그 말과 동시에 왠지 모르게 복잡미묘한 감정이 마음속을 휘감아 왔다. "신경쓰지 마. 모든 사람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건 아니니까. 그보다는 널 사랑해 주는 사람들만 신경쓰면 돼. 식겠다. 와서 빨리 밥이나 먹어." "...응." 아시에는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 속에는 어디엔가 살짝 드리워진 어둠이 비추었다 사라지는 듯 했다. 다음 날에는 질투단이라는 이름이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의식한 듯 둘 다 이름을 바꿨다. 실제로 이 때문에 가입을 꺼리는 사람들도 좀 있었 으니까. 그치만 이름 정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하루만에 이름을 바꾸냐? 우리나라 정치판에 끼워주면 꽤 잘 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왜일 까? 어쨌건 카이엔 질투단은 [신비소녀 아시에 수호단]으로. 그리고 아시에 질투단은 [영원한 미소년 카이엔 찬양단]으로 각각 이름을 바꿨다. 내 찬양단은 기존의 내 팬클럽 조직을 흡수해서 꽤 커진 모양이었지만 아시에 수호단도 단장인 린넬 녀석의 수완이 만만치 않은 듯 상당한 남성 가입자를 순식간에 확보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조직이 커질수록 수호단과 찬양단의 싸움은 점차 격렬해져만 가고 있었다. 심지어 선생님 들마저 패를 지으려 드는 움직임이 보인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그리고 내게 그 소문들의 대다수를 전해주는 녀석이 바로 치즈 패거리들이었다. "...왜 자꾸 그런 걸 내게 보고하는 거야?" "응? 관심없어? 너랑 아시에에 관한 일인데..." "지네들끼리 열심히 치고 박으라고 해. 나하고 시에만 안 건드리면 상관없어. 그건 그렇고 오늘 루카라의 점심밥은 어제랑 좀 맛이 다른 것 같 네." "눈치챘구나!? 실은 루카가 오늘 아침에 도시락을 만들다가 손을 좀 베었대. 의외로 카이엔도 식도락가의 자질이 될 가능성이 있을 지 모르겠는 걸?" "그 의외라는 말은 대체 뭐냐." "카... 카이. 저기 좀." "왜그래, 시에?" 치즈 패거리와 어울리면서 언제나 그랬듯이 정신없이 먹으면서 쉴새없이 떠드는 치즈의 언변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을 때 갑자기 아시에가 내 옷을 잡아당기면서 교실 한켠을 가리켰다. 뭐야. 설마 그 수호단인지 찬양단인지 뭔가 하는 놈들이 시비걸러 왔나? 그래봤자 우리 교실은 허가받 은 사람들 외에는 못 들어오는데? 아시에가 가리킨 쪽에는 린넬과 시에나가 있었다. 요즘 쟤 둘은 각자 수호단과 찬양단의 단장으로 서로 싸운다고 들었는데 왠일로 둘이 같이 여 기로 걸어오고 있냐? 굳은 얼굴로 걸어오는 게 심상치 않아 보이지만 도시락을 주려면 이미 늦었... "카이엔 브리타뉴." 말을 먼저 꺼낸 것은 린넬 녀석이었다. "....." 그리고 나는 의도적으로 그놈의 말을 무시했다. 무시했기 때문에 린넬의 표정이 어떻게 변해 있는지는 모르지만 주먹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은 슬쩍 보였다. 훗. 그렇다고 어쩔 거냐, 때릴거냐? 실론 파르스의 교훈을 잊은 건 아니겠지? 하기야 그 정도 실력자가 때린 주먹이 아니면야 아프 지도 않아. 사이엔 형이 준 이 반지가 있는 이상에야... "카이엔 님!" 이번엔 시에나가 말했다. 나는 그녀 역시 무시했다. 시에나는 내 찬양단 단장이라지만 나에게는 린넬이나 시에나나 마찬가지의 녀석이었다. 단지 꼴보기 싫은 녀석들일뿐. 그때 다소곳이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아시에가 말을 걸어 왔다. "카이... 좋지 않아. 그런 건." "...뭐가? 난 내 기분대로 행동할 뿐이야." "잘은... 모르지만... 세상은... 기분대로만 행동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흔들리는 눈동자. 셰더 놈에게 당할 뻔 했을 때부터 그랬지만 나는 왜 이 애의 눈빛만 보면 마음이 흔들리는 걸까. 단지 예쁘다는 이유일까? 그 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혹시 저 눈빛이 마성이라도 띠는 건 아니겠지? "쳇. 어차피 카이엔의 원래 성격이 돌아온 것 뿐인걸." "린넬!" 린넬이 내뱉듯이 말했고 시에나가 소릴 질렀다. 이쯤되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별로 저 녀석들 꼴 보고 싶은 건 아니지만, 고개를 들어 녀 석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지, 린넬?" "새삼스럽게 묻긴. 기억을 잃어도 그 더러운 성격은 변하지 않았단 말야! 그래도 기억을 잃고 나서는 좀 버벅이긴 해도 착해지고, 예의발라 진 것 같이 보였는데... 이제는 다시 원래 성격이 돌아오나 보지?" 그... 그랬나? 그러고보니 내가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등교했을 때와 지금의 모습은 꽤 많이 틀려진 것 같다. 성격도 어쩐지 변한 것 같기도 하고. 난 단순히 학교에, 이 세계에 적응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짚어넘겼는데... 하지만 별로 인정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웃기는군. 누구 때문에 자꾸 그렇게 짜증을 내는 거라 생각하는 거지?" 내가 빙의되기 전의 그놈과 내가 같다고는 절대 인정할 수 없지만 어딘가 그 싸가지없었다던 원래 카이엔의 기분이 이해가 가는 것은 사실이었 다. 주위 사람이 관심을 가져주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필요 이상이 되어버리면 나도 모르게 그만 짜증을 벌컥 내 버리고 만다. 이런 데 잘 적응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난 원래 성격이 뒤틀린 탓인지 쉽게 익숙해지지 않아. "너희야말로 간사해. 남자니까 여자 쪽을 선호하는 건 당연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태도가 확 변할 수 있는 거야? 그렇게 쉽게 호 의를 적대감으로 돌릴 수 있는 거야!? 대답해, 린넬!" "나... 난." 내가 벌떡 일어나며 버럭 소리지르자 린넬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긴 금발과 준수한 외모에 걸맞지 않게 우물쭈물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의외 로 귀여워서 난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풋..." "왜... 왜 웃는 거야?" "의외로 꽤 귀엽다. 너?" 정말로, 정말로 난 아무 생각없이 지나가는 말로 그렇게 말했다. 어떤 사심 없이 단지 지금 느낀 바를 그대로 표현했을 뿐. 그런데 왜 그런지는 몰라도 주변 분위기가 상당히 냉랭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어리둥절했다. 사태를 파악한 것은 시에나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 을 때였다. "카... 카이엔 님... 혹시 그건... 그건 설마 고.백.은 아니시겠지요?" "뭐?" "카이엔 너 남자 취향이었냐?" "무슨 말이얏, 치즈!" 고개를 홱 돌려 아시에를 쳐다보자 그녀는 등을 돌린채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왜, 왜 그래? 설마 그런 바보같은 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 여기 있는 애들이 전부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자, 그럼 고백을 받았으니 답변을 해야지, 린넬?" "빨리 빨리. 숙녀를 기다리게 하는 건 폐라고." 우뉴와 이멜츠마저 장단에 맞춰서 놀고 있었다. 너네들마저 이러기냐! 하기야 저놈들은 둘이서 동격으로 취급받는 걸 의외로 즐기는 녀석들이 니... 할말없다. "카이엔은... 숙녀보다는 신사 쪽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어느 새 루카라까지 이쪽으로 와서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아마도 오늘도 열심히 친구들에게 내가 자기 도시락을 먹어줬다고 자랑하다가 다 먹은 도시락을 받으러 왔겠지만 내 입장에서 별로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다. "음... 하지만 그렇다고 린넬을 수비 쪽으로 보기에는 좀 오버 아냐?" "꼭 그렇지만도 않아. 일전에 학교 축제때 린넬이 여장한 거 못 봤어? 꽤 어울렸잖아?" 잘들 논다 잘들 놀아. 사람은, 특히 여자애들은 대다수가 표현은 다르지만 동인녀 성향을 마음 속 어디엔가 품고 있다는 이야기를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때가 오자 이렇게 어이없이 사람을 멋대로 엮어놓고 즐거워하다니... 근데 나도 이전에 자주 했던 짓이라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아마도 이건 이전에 했던 과거의 업보를 청산하기 위한 과정일지도 몰라. 흑흑흑. 후다다닥 "야! 어디 가!" "대답은 하고 가야지, 린넬!" 그리고 린넬 녀석은 얼굴이 시뻘개진채 그냥 도망가 버렸다. 저... 저 반응은 뭐야? 농담이면 농담답게 넘기면 되지 왜 저러냐고! "설마... 진짜는 아니겠지?"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중얼대고 있을 때 여자애들은 뭐가 좋은 지 한 건 잡았다는 듯 즐겁게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꺄아♡ 스캔들이다!" "나, 방송부 부장의 권한으로 당장 이 사건 전교에 방송할께!" "하지 마, 시에나!" 하지만 여자애들의 소문 전파 속도란 실로 엄청난 거라서 어떻게 포기하고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겠지. 에휴... 그런 소란에 휩쓸 리는 바람에 나는 어느 사이엔가 아시에가 자리에서 없어진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제38화 : 린넬 이야기 내 이름은 린넬 케이준. 신체건장하고 평범한 소년이다. 취미는 요리. 우리 집은 유클리네 왕국에서도 뛰어난 요리 가문으로 3대 선조가 전승(戰勝)을 축하하기 위한 궁중 잔치에 평생 가도 절대 다시는 먹을 수 없 는 최상의 요리를 선보인 공로로 귀족 자격을 얻었다. 요리를 잘해서 귀족이 된다는 것은 좀 이상해 보일지는 몰라도 유클리네 왕국은 원래 그런 나라다. 뭔가 빼어난 특기가 하나 이상 없으면 절대 귀족이 될 수 없는 나라다. 덕택에 귀족들 중에는 대륙 최고의 마술사도 있고, 대륙 랭킹 1위의 장기 챔피언도 있다. 때문에 나도 가문의 영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요리 수업을 받아 왔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가장 주목받는 최고의 귀족 가문을 들라면 역시 브리타뉴 가문이다. 전설의 12용사 중 두 사람이 결혼하여 생긴 가문이라는 것도 화제지만 그 집안에서 대륙 7대 마법사, 그랜드 소드 마스터, 정령 마스터, 예언가가 모두 출생했다는 것도 그 명성을 더욱 드높게 했다. 하지만 브리타뉴 가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라고 하면 대륙 7대 미소년의 최고봉에 서있는 최고의 미소년, 카이엔 브리타뉴였다. '같은 반...' 카이엔 브리타뉴와 같은 반이 되었을 때, 나는 왠지 가슴이 설레었다. 카이엔은 그 인기 때문에 같은 반 급우나 선생님, 특별허가를 받은 몇몇 학생이 아니면 그애가 있는 교실에 들어갈 수 없다. 때문에 나는 먼발치에서만 쭉 그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비록 건방지다느니, 예의없다느 니 하는 악평이 몇몇 남자애들 사이에서 나돌았지만 그동안 먼 곳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카이엔의 아름다운 자태는 분명,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 늘은 왜 저런 아이를 여자로 태어나게 해 주지 않았을까 하고 원망했을 정도니까. 그러나 같은 반이 된 첫날, 나는 카이엔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흑마법사의 저주를 받고 쓰러졌다고?" "응.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래..." 하지만 며칠이 지난 후, 곧 카이엔이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나도, 반 아이들도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충 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카이엔이 기억을 잃어?" "어떻게 된 일이야? 역시 그 저주가..." 웅성웅성 댄다고 결론이 나오지는 않겠지만 나 역시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카이엔이 등교했다. 그가 교실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카이엔 브리타뉴의 자태를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에 든 느낌은 정말 남자같지 않아. 라는 느낌이었다. 예쁘장한 외모에 어중간한 키도 그랬지만 결정적인 것은 어깨까 정말 좁았다는 사실. 여성용 블라우스를 입혀도 무리없이 잘 들어갈 만한 몸 크기였다. 왜 그랬을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카이엔에게 가장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 카이엔." "으. 응."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카이엔은 성격이 좋지 않다고 했는데, 기억을 잃은 탓인지 몰라도 우물쭈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좋아, 그렇다면 좀더 강하게 나가볼까? "나 기억 안나?" "으. 응" 확실히 모든 기억을 잃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카이엔은 당연히 날 기억할 리 없는데 저런 반응이라니. 하지만 이건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내 가 선망하는 사람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기억을 잃어버렸다더니, 정말이구나. 뭐, 이런 말하기는 새삼스럽지만 난 우리 반 부반장 린넬 케이준이야. 린이라고 불러줘." ...언제 부반장이 되었는지는 따지지 마라. "응. 린." "허억!" "그 카이엔이... 카이엔이... 저렇게 단번에 애칭을 불러주다니!" "아무래도 성격까지 확 변해버린 거 아냐? 이거?" 이건 성격이 변한 것 정도가 아니다. 어쩌면 사회를 살아가는 문화적인 풍습까지 잊어먹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래도 카이엔이 애칭을 불러주니까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나도 애칭을 불러서 좀더 가까워지기로 생각했다. "카이야." "응?" 흑흑흑. 감격스럽다. 대답까지 해줬어!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분위기가 계속 유지되지는 않았다. 학교에 적응하기 시작하자 카이엔은 애칭을 부르 는 것의 의미를 깨달은 듯, 나를 린넬이라고 불렀고 나는 한동안 카이라고 불렀지만 반 애들의 시선 때문에 계속 그렇게 부르지는 못했다. 애칭이라는 것은 아주 친근한 가족, 최고의 친구, 연인 또는 부부간에만 통하는 거니까. 게다가 귀족 집안에서는 가족이라 할지라도 애칭을 쓰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더 이야기할 기회는 놓쳤지만 내 옆자리가 마침 비어 있는 바람에 카이엔을 내 옆에 앉힐 수 있었다. 아싸∼ 의외로 예의발라지고 얌전해진 카이엔. 하지만 역시 공부는 몸에 안 맞는 듯 수업 시작된지 얼마나 되었다고 엎어져 버렸다. 선망의 대상이었지 만 거친 이미지 때문에 다가가기 꺼려졌던 아이였는데... 이렇게 옆에서 모습을 보니까 나도 모르게 꽤 귀여운 녀석이잖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기억을 잃어서 잘된 일일지도 몰라. "몽마르뜨 선생님." "케이준 군. 왜 그러나?" "저기... 지금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카이의 옆얼굴. 너무 귀엽지 않아요? 반할 것 같아요." 나는 카이엔의 잠을 깨우러 온 몽마르뜨 선생님에게 동의를 구했다. 하지만 카이엔은 그 와중에서도 다 듣고 있었는 듯 깜짝 놀라 벌쩍 얼어났 고 선생님의 턱에 카이엔의 머리가 맞는 사고가 일어났다. 아프겠다. 카이... 그 이후에 카이엔은 이전과는 달리 꽤 꼬박꼬박 학교에 나왔다. 그리고 그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다. 자하기니아 왕국에서 피요르 공주가 전학와 서, 카이엔의 누나 세이렌과 신경전을 벌이는가 하면 시에나가 무마력증인 카이엔한테 마력이 든 음식을 먹이는 바람에 카이엔이 탈이 난 일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나는 기뻤다. 교내 제일의 미식가인 치즈 셀바캬란의 인정과 함께 카이엔이 내 도시락을 제일 맛있게 먹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내 도시락을 맛있게 먹는 카이엔의 미소를 보면서 나는 행복을 느꼈다. 어렸을 때부터 피나는 훈련으로 요리를 배운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 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르팡에게 납치되고 나서 카이엔은 어딘가 변했다. 나는 그것도 모른 채, 시에나, 피요르와 함께 카이엔의 공식팬클럽 <신세기 미소년전 설>을 출범시켰다. 나는 오로지 카이엔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이 일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컸던 시에나와 피요르의 태도가 결국 화를 불러왔다. 얌전하게 지내던 카이엔을 자극해 버린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시르팡에게 납치되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 는지 조금 분위기가 이상했는데 그녀들의 태도는 거기에 도화선을 붙인 꼴이었다. 나는 그녀들에게 화를 냈고 카이엔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애썼다. 하지만 카이엔의 분노를 식히기에는 너무 늦었다. "앞으로는 내가 내킬 때만 학교에 올 때니까 말이야." "진심이야...? 카이엔?"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는 카이엔에게, 나는 카이라고 친근하게 불러줄 수 없었다. 그것이 더 큰 분노를 일으킬 거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리고 녀석은 일을 저질렀다. 대체 어떻게 되었길래 피요르 공주의 호위기사이자 대륙 7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실론 파르스가 카이엔을 등 뒤에서 찌른 것일까. 그 이후로 브리타뉴 가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사이엔이 실론과 한판 붙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분명히 브리타뉴 가에서는 실론을 척살하려 고 들겠지. 하지만 브리타뉴 가 만큼은 못해도 자하기니아의 파르스 가 역시 만만찮은 가문은 아닌데... 큰일이 나는 게 아냐? 관계자가 아닌 나로서는 더 이상의 진실은 알 수 없었지만 학교에 이제 있을 수 없게 된 피요르는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학교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갔다. 짧은 기간이지만 인상에 남는 공주님이었는데. 카이엔을 찌른 실론 그 자식은 어떻게 되었을까? 피요르는 실론을 원망하는 듯이 보였 지만 그렇다고 그를 증오하지는 않는 것 같아 보였는데... 그렇게 카이엔과의 관계가 소원해져 갈 무렵, 카이엔은 아시에라는 아이를 학교에 데려왔다. 아시에에 관해서 말하라면... 한마디로 예쁜 아이였다. 큰 모자 때문에 얼굴 전체의 윤곽을 제대로 알기는 어려웠지만 사람에게는 단박에 꽂히는 '삘'이 있는 법이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 신비스러워 보여 심경을 자극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아시에의 옆자리에 앉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이 연이어서 아시에와 앉고 싶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그때 카이엔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아시에는 제 옆에 앉을 겁니다." 그때 나는 갑자기 정신이 확 뒤집히는 느낌을 들었다. 그동안 카이엔에 대한 선망과 동경의 감정이 지배하고 있던 내 마음속의 이면에서 어두운 감정이 무럭무럭 피어나올랐다.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면서... 저 애까지 독차지하겠다는 거야? 너라는 애는 사랑을 받기만 할 뿐, 남에 게 주지는 않는 거야? 어째서... 어째서 네녀석은!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카이엔 대신 아시에를 원했기 때문에 카이엔이 혹시 삐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이 들 틈이 전 혀 없었다. 그래서 난 짐을 싸고 아시에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카이엔에게 말했다. "니가 모든 것을 독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 절대 뺏기지 않을 거야." 어쩌면 오기일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때는 정말 아시에라는 신선한 존재에 넋을 잃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카이엔 질투단을 결성했고 곧 아시에 수호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카이엔 찬양단을 결성한 시에나와 적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마음에 두었으면서도 어쩐지 마음속에 빈 공간이 있었다. 그것은 항상 카이엔을 위해 준비해 왔던 도시락이었다. 그 도시 락을 아시에에게 먹어주기를 부탁하면서 두고 나왔지만 어쩐지 카이엔에게 줄 때만큼의 느낌이 오지 않았다. '이건 뭔가 아냐.' 나는 지금... 카이엔을... 아시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은 누구지? 누가 진짜야? 누구라도 좋으니까 내게 가르 쳐 줘! 그때 마음의 신 코코룰 님의 격언이 떠올랐다. '자신에 관한 진실은 자신이 아니면 찾을 수 없다.' 라는 그 말이. 그래서 나는 결말을 내기 위해 카이엔을 찾아가기로 했다. 아시에는 항상 카이엔의 곁에 있으니까 굳이 찾을 필요는 없겠지. 왜 그렇게 그녀는 카이엔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남의 가정사를 알 수는 없는 법. 우선은 내 마음을 정하는 것이 먼저다! 그리하여 나는 굳은 결심을 하고 카이엔의 앞에 섰다. "카이엔 브리타뉴." 나는 그의 풀 네임을 불렀다. 묵직한 음성에는 내 비장한 각오를 담았다. 동시에 한 발 숙이고 들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하지만 카이엔은 내 말을 무시했다. 아시에나 치즈들이 긴장한 눈빛으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카이엔만은 나에게 시선을 돌리고 딴 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화가 났다. 아무리 내가 너한테 서운한 모습을 보였다고 해서 이럴 수 있는 거야? 계집애도 아니면서 사내자식이... 저렇게 삐지다니. 나도 모르게 얼굴 근육을 뒤틀고 내려간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카이엔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이렇게 카이엔의 앞에서 우물쭈물대고 있는 나의 한심 한 모습에 더욱 화가 났다. 그런 교착 상태를 타개해 준 사람은 아시에였다. "카이... 좋지 않아. 그런 건." "...뭐가? 난 내 기분대로 행동할 뿐이야." "잘은... 모르지만... 세상은... 기분대로만 행동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제멋대로인 녀석. 그래. 사랑만 잔뜩 받고 자라서, 자기 기분대로만 행동하는 데 익숙해 있겠지? 다른 사람의 감정따위, 너에게는 아무런 고려 대 상이 안 되겠지? 그런 녀석인데도... 어째서 나는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걸까? 카이엔이 기억을 잃고 등교한 후의 녀석을 기억한다. 모르는 일이 많 아 혼란스러워했지만 녀석은 차근차근 적응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카이엔은 비뚤어져 있었다. 지금의 카이엔에게서... 내 도시락을 먹 어줄 때의 그런 표정을 바랄 수 있을까... 그렇게 요동치는 마음 속에서도 나 역시 속에서 굼틀거리는 불만을 아직 완전히 삭이지 못했다. "쳇. 어차피 카이엔의 원래 성격이 돌아온 것 뿐인걸." "...무슨 뜻이지, 린넬?" 카이엔이 반응했다. 그냥 듣고 넘길 수 없다는 말인가? 그래. 그렇다면 아예 철저하게 공격해 주마! 설사 카이엔이 날 미워하게 될지라도! "새삼스럽게 묻긴. 기억을 잃어도 그 더러운 성격은 변하지 않았단 말야! 그래도 기억을 잃고 나서는 좀 버벅이긴 해도 착해지고, 예의발라 진 것 같이 보였는데... 이제는 다시 원래 성격이 돌아오나 보지?" 당장에 화를 내며 반격에 나설 줄 알았다. 하지만 의외로 카이엔은 내 발언에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왜 저러지? 내 말에 어딘가 충격적인 가시라 도 돋혀 있었나? 하지만 카이엔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곧 정신을 차리고 맞받아쳤다. "웃기는군. 누구 때문에 자꾸 그렇게 짜증을 내는 거라 생각하는 거지?" 잘못을 내게 돌리려는 것 같았다. 역시 단순히 이기주의자였을 뿐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미련을 접고 등을 돌리려 했을 때 카이엔이 연이어 외쳤다. "너희야말로 간사해. 남자니까 여자 쪽을 선호하는 건 당연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태도가 확 변할 수 있는 거야? 그렇게 쉽게 호 의를 적대감으로 돌릴 수 있는 거야!? 대답해, 린넬!" "나... 나는..." 그제서야 나는 카이엔이 삐진 본질을 깨달을 수 있었다. 카이엔은 다수의 여성 팬을 거느리고 있지만 그 여성적인 외모와 중성적인 목소리 음색 때문에 남자 중에서도 좋아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 강력한 미소녀인 아시에가 교실에 와서 온 남자들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자 소외 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사람은, 가진 것에서 더 가지게 되는 경우의 기쁨보다는 가진 것에서 잃는 것에 대한 상실감을 더 크게 느끼기 마련이니 까. 특히 내가 카이엔을 위해서 도시락도 싸주고, 팬클럽 한다고 뛰어다니는 등 눈에 보이는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카이엔은 더 서운한 감정을 느 꼈을런지 모른다. "풋..." 그때 카이엔이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했다. 내 모습을 보고 갑자기 웃은 것이다. 왜 저러지? 아침에 빗질은 제대로 하고 왔는데? 아니면 혹시 바 지끈이 풀어졌나? "왜... 왜 웃는 거야?" "의외로 꽤 귀엽다. 너?" 왜 그런지는 몰라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귀까지 달아오른 얼굴이 김을 뿜어낼 지경이었다. 가...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리고 나는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정신차려! 카이엔은 예쁘긴 하지만 남자고 나는 단지 카이엔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한동안의 침묵 속에서 시에나의 말이 들려왔다. "카... 카이엔 님... 혹시 그건... 그건 설마 고.백.은 아니시겠지요?" 커헉... 바... 방금 카이엔이 했던 그 말. 나에 대한 고백이라는 말이야? 삐진 것 같이 보여도 사실은 날 좋아하고 있는... 그럴 리 없잖앗! 그래. 분 명 그냥 해 본 말일 뿐야. 그렇잖아도 주변에 여자로 가득찬 녀석이 뭐가 아쉬워서 나 같은 남자를... "카이엔 너 남자 취향이었냐?" "무슨 말이얏, 치즈!" 그래. 카이엔은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겠지. 그래도 그런 말을 해 준것이 묘하게 기뻤다. 하지만 도저히 밖으로는 표출할 수 없이 부끄럽게 느껴지는 감정이기도 했다. 나... 왜 이러지? "자, 그럼 고백을 받았으니 답변을 해야지, 린넬?" "빨리 빨리. 숙녀를 기다리게 하는 건 폐라고."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얘네들이 지금 상황을 뭔가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은 '고마워.'라고 카 이엔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왠지 저 녀석들의 장단에 놀아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져서 그만뒀다. "카이엔은... 숙녀보다는 신사 쪽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음... 하지만 그렇다고 린넬을 수비 쪽으로 보기에는 좀 오버 아냐?" "꼭 그렇지만도 않아. 일전에 학교 축제때 린넬이 여장한 거 못 봤어? 꽤 어울렸잖아?" 커헉... 그때의 치부는 왜 꺼내내내앳! 나도 미쳤지 정말. 예쁜 주방용 앞치마 준다길래 조금 창피함을 무릅쓰고 나갔는데 상당히 못 볼 꼴을 많 이 겪었다. 단순히 치마랑 블라우스 걸쳐입고 화장 좀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뽕브라는 기본에, 팬티까지 여자 걸로 갈아입히질 않나, 그때 쯤 나기 시작한 다리털을 몽땅 깎아버리고 하이힐을 신기질 않나. 게다가 노출이 심한 미니스커트 차림... 나는 아직도 어떻게 그녀석들이 파인 가슴곡선을 만들 수 있었는지 아직도 미스테리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내 모든 과거사가 카이엔에게 까발려지고 말거야앗! 싫어어어! 카이엔 앞에서 그 모든 걸 폭로당하고 싶지 않아아아앗! 그래서 나는 도망갔다. 어쩐지 도망가는 게 더 나쁜 결과를 낳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당장 카이엔이 내 부끄러운 과거사를 내 앞에서 알게 되는 것의 창피함에 비하면 어떻게든 커버할 수 있지 않을까. "헉... 헉..." 카이엔과 다른 아이들이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도망쳐 숨을 돌릴 때, 나는 누군가가 내 뒤에서 역시 숨을 헐떡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날 쫓아온 건가? "하아... 하아..." 아시에였다. "아... 아시에, 무... 무슨 일로 날 따라 온 거야? 아까 일에 대해서라면..." 모자를 고쳐 쓰며 숨을 고르는 아시에의 모습은 언제, 어느 각도에서 봐도 참 예뻤다. 아무리 맘에 따로 품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남자라면 꼭 한번쯤은 돌아보게 되는 그런 미모였다. 그래서 나도 한순간 마음이 흔들렸던 거겠지. "린넬..." 설마 아시에도 내게 고백해오려는 건... 아니겠지? "린넬은 카이를 좋아해?" 헉, 갑자기 그런 노골적인 질문을 던지면 어떻해? 그렇잖아도 아까 일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참인데. 나는 어물어물 거리면서 대답했다. "그... 글쎄. 물론 난 카이엔을 좋아해. 하지만 그건 사랑의 감정이라기보다는... 에... 동경이나, 선망이나... 그런 것들이 주가 되는 거라고나 할까... 그냥 단순히 가까이 지내고 싶은 거, 그래. 그런 거야." 워낙 정신없이 지껄여서 나조차 내가 한 말을 이해하기 힘들 판이었다. 말이 꼬여서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되자 나는 머리를 박박 긁으며 아시에 에게 질문을 돌려보냈다. "아시에는 카이엔이 좋아?" "응. 세이 언니 다음으로 좋아!" 세이 언니? 아, 카이엔의 누나 세이렌 브리타뉴 더 마요르카 오브 세븐 매직 마스터즈인가. 하도 무서워서 절로 칭호까지 다 외워버렸다. 피요르 한테 경고했듯이 카이엔 옆에 누군가를, 특히 여자를 접근시키기 싫어하는(심지어 친여동생인 아이렌조차) 그 사람이 어째서 아시에를 카이엔과 함께 두는 거지? 그러고보면 카이엔이 남자들의 관심을 뺏긴 거에 대한 적의를 아시에에게는 전혀 돌리지 않은 것도 이상하고... "카이랑... 싸우지 말아줘. 좋아하잖아?" "으, 응." 아시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것보다 낯가림이 심해서 도통 카이엔의 옆에서 떨어질 줄 모르더니 왜 갑자기 날 찾아와서는... 이런 말을 하는 거지? "그냥... 그런 말을 하고 싶었어. 그럼 안녕." "응. 조심해서 가." 뒤에 생각해보니 좀더 많은 이야기를 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항상 카이엔의 옆에 있으니까 아시에와는 이야기할 기회가 흔치 않 은데. 하지만 저 애, 평소 카이엔의 앞에서는 수줍고 말수도 적은 것 같았는데 이렇게 몇 마디 나눠보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항상 카이엔의 옆에 붙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까 한 말을 생각해보면 카이엔을 좋아하지만 사랑은 아닌 것 같아 보이고... 또 지나치게 카이엔한테 의지하고 있는 게 신경쓰인다. 카이엔에게도 아시에는 또 뭔가 다른 특별히 돌봐줘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저 애는 누굴까? 브리타뉴가는 왜 저 애를 양녀로 받아들였지? 대륙 7대 미소녀급의 애를 발굴해서 집안의 대륙 7대 리스트에 또 하나를 끼워넣 으려고?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브리타뉴 가의 속사정까지는 알 수 없다. "응?" 무엇 때문인지 화단의 꽃이 몇 개 시들어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전부 생생하게 살아 있었던 것들인데 무슨 일이 있었나? 나중에 학교 정원사 에게 말해야 겠군. 별일이네. 누가 이 근처에서 흑마법 시험이라도 했나? 제40화 : 수학여행을 가자! 예상했듯이, 내가 린넬에게 고백을 했다는 어이없는 소문은 방송부 부장 시에나와 목격자라고 주장하는 몇몇 인물에 의해 순식간에 전교에 전파 되었다. 시에나는 바로 방송실로 달려가서 전교 방송을 때려버린 것이다. 한번 퍼진 소문은 소문이라는 게 원래 그렇듯이 엄청나게 왜곡되고 와 전되어 학교가 끝날 때에는 '모월 모일 어디에서 화촉을 밝힌다.'라니 혹은 '사실 둘에게는 숨겨둔 아이가 있다!'라는 황당하다 못해 경악할 수준 에 이르렀다. 그렇잖아도 엉터리 이야기지만 어떻게 하면 저정도까지 바뀔 수 있는 거야? 최소한의 상식조차 안 따지는 거야? 애초에 남자 둘 사이에서 애기 가 생길 리 없잖아아아앗! 하지만 그것보다는 아시에가 조금 이상했다. 점심시간에 잠깐 없어져서 찾았었는데 결국 끝날 때쯤에야 교실에 들어온 것이다. 어디 갔었냐고 물 어보니 린넬을 만나러 갔다 왔다고 한다. 둘이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나? 뭐... 뭐야? 나는 그런 녀석 조.금.도 신경쓰고 있지 않다고! 그 와중에서도 학교에는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바로 다음 주에 4박 5일의 일정으로 떠나게 되는 수학 여행의 시즌이 도래한 것이었다. 사실, 수학 여행에 대한 나의 기억은 썩 좋은 것은 아니다. 애초에 세상을 왕따하는 녀석이 철저하게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단체로 우글우글 행동 하는 그런 행사를 좋아할 턱이 있겠냐? 뭐, 그래도 다른 애들이 알아서 피해줬기 때문에 나와 문길이는 꽤 쾌적한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은 좀 다른 의미로 즐거울 수 있으면 좋을텐데...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해. 반드시. 근데 가는 장소가 자하기니아 왕국의 수도 핀치였다. 자하기니아라면... 피요르라는 그 시끄러운 공주의 나라잖아? 왜 하필이면 그런 곳으로 가는 거지? 그건 둘째치고 4박 5일의 일정동안 그곳에 왔다 가는 게 가능한거야? "자하기니아와 우리 유클리네 사이에는 직통 마법진이 뚫려 있어. 그곳을 이용해서 바로 핀치로 이동하게 돼." 뒷자리에 앉은 키론이 대답해 주었다. 지금까지는 모르는 일이 있으면 항상 옆자리에 앉아 있던 린넬이 가르쳐 줬는데... 에잇. 이런 걸 내가 왜 신경쓰는 거지? 집으로 돌아가자, 며칠 간 도통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엄마와 아빠가 집에 막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 엄마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밝은 미소로 가 득차 있는 반면에 아빠는 섀도우 나이트라고 불리는 대륙 7기사답지 않게 초췌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아빠,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치고는 얼굴이 너무 안 좋잖아요?" 엄마가 오자 어느새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 안긴 아시에도 걱정되는 표정으로 아버질 쳐다보았다. "별거 아냐... 너무 많이 퍼내서 말라버린 것 뿐." 아빠는 알 수 없는 말을 던지고는 하녀의 부축을 받아 터벅터벅 자기 방으로 걸어갔다. 내가 어제 집사에게 계속 추궁해서 알아낸 것은 엄마가 아빠가 실론 파르스를 멋대로 용서한 데 대해 심기가 상해서 며칠간 어디로 갔다고 한 거였다. 항상 미소짓는 엄마가 그러리라고는 쉽게 상상이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잔소리 같은 거 바가지로 얻어먹고 올 거라는 건 추측이 가능했다. 하지만 아빠는 상상외로 엄청나게 진이 빠진 반면 엄 마는 예전과 다름없었다. 아무리 며칠 동안 잔소릴 들었다고 해서 아빠같은 사람이 저렇게 지칠 리 없는 데 말이다. 아빠가 대답해주지 않으니 엄마한테 물어볼 수밖에. "아빠랑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엄마?" "네 아빠도 나이가 든 거란다. 이전에는 일주일간 나갔다 와도 끄떡없었거든?" 더 알 수 없는 이야기. 무언가 힘든 벌이라도 준 건가? 만화책 보면 그런 거 있잖아. 애인이 수행을 시킨다면서 남자친구를 이리저리 막 들볶 는... 하지만 이 나이가 되서 그런 짓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 게다가 나간 이유가 엄마가 심기가 상한 탓이라던데... 아시에도 궁금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할 뿐이었다.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역시 아빠와의 일에 대해서 알려줄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다. 할 수 없지. 아빠는 방에 들어박혀 잠이라도 자는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수학여행에 대해 말하자 엄마는 큰 관심을 보이면서 내게 물었다. "그래? 자하기니아의 수도 핀치로 간다고? 하긴 요즘 거기 대축제 기간일테니까 딱 좋은 때구나. 엄마 아빠도 옛날에 갔었지. 그때는 디크로드와 의 싸움 때문에 한창 분주했는데... 지금쯤은 평화롭겠지." 하기야 20년 전에 일어난 전쟁과 혼란은 이제와서는 평화에 가려 점차 잊혀져 가는 시기겠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나는 우선 대축제에 흥 미가 갔다. "무슨 축제죠?" "대축제 기간에는 꽃 축제나, 도서전, 서커스 등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핀치에서 열리는 대축제의 하일라이트는 역시 무술 대회지." "무술 대회요?" "그래. 우리 유클리네의 마법 대회에 비견되는 대륙 전체에서도 알아주는 대회란다." 그러고 보니 수업시간에 문득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유클리네에서는 마법과 철학, 문학 등이 발달한 반면에 자하기니아에서는 상대적으로 검술 등 전투 기술과 무기 제조, 과학 등이 유클리네보다 뛰어나다고 하지. "그럼 거기에 그랜드 소드 마스터도 출전하나요?" 사이엔 형과 실론이 싸울 때 세이렌 누나가 패밀리어의 눈으로 둘이 싸우는 영상을 보여 주었지만 내 눈으로는 뭔가 터지고 폭발하는 것만 보일 뿐 어떻게 싸우는 지는 도통 알 수 없을 따름이었다. 그랬다면 이번에는 그 진면목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밀려왔다. "얘는... 축제의 장에 그런 강한 사람들이 나가면 제대로 대회를 열 수 있겠니? 게다가 소드 마스터 이상의 인재는 각국의 중요한 전력이기 때문 에 함부로 나가지도 않아." "치이..." 뭐, 일전에 보고 느낀 거지만 내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급의 전투를 제대로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소드 마스터조차 출전 하지 않는 대회가 무슨 대륙에서도 알아주는 대회라는 거야? 물론 내가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강한 건지 전혀 모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재야에 묻혀 있는 소드 마스터급의 인재가 종종 나오니까 심심하진 않을 거야. 그렇게 실망하지 않아도 된단다." "이... 이모." "응, 무슨 일이니, 시에?" 엄마가 좀 실망한 날 토닥거리고 있을 때 아시에가 입을 열었다. 원래 엄마는 시에가 '언니'라고 불러주길 바란 모양이었지만 세이렌 누나가 그 렇다면 엄마랑 자기가 비슷한 동년배냐고 따져대는 바람에 결국 명칭은 '이모'가 되었다. 뭐, 나도 엄마가 '아줌마'라고 불릴 만한 외모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잘 된거지. "저도... 가야 해요?" 아시에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그녀를 셰더의 마수에서 구했고, 그녀에게 겹겹히 쌓인 제물의 저주도 풀어주기는 했지만 그녀는 아직 도 셰더가 다시 나타나서 자신을 데려갈 거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자주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호의를 가져주는 세이렌 누나와 엄 마, 그리고 나에게 자꾸 의존하려 드는 거겠지. 수학여행을 가면 아무래도 집에서 먼 곳으로 떠나게 되니까 불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서워요... 언제 그 사람이 또 나타날지... 밤마다 꿈을 꿔요. 그 사람이 나타나서 날 데려가려 해요. 비천한 계집 주제에...라고 무서운 말을 하면 서. 그리고... 그리고..." 엄마가 떨고 있는 아시에를 살짝 감싸안았다.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시에. 우리 집에서 널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럼 저번에 코앞에서 날 시르팡 패거리들에게 납치당한 건 뭐냐구! 라고 항변하고 싶지만 불안해하는 아이를 달래고 있는 엄마 앞에서 괜히 초 를 칠 필요는 없겠지. "카이가 널 지켜줄거야. 알았지? 그러니까 안심하고 가도록 해." 그래봤자 형제자매들의 마법무구에 의존하고 있는 내가 어떻게 아시에를 지켜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래도 남자니까 그런 말은 할 수 없지... 쪽팔리니까 말이야.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볼 수밖에. 무슨 일이 생기면 세이렌 누나나 사이엔 형을 부르자. 내 귀에 있는 예지의 귀걸이로는 레이엔과 직접 연락을 취할 수 있고, 다른 마법무구로도 강하게 염원하면 가족들에게 내 의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하니까. 내가 부르 면 만사를 제치고 반드시 달려오겠지. "같이 가자, 시에. 내가 지켜줄께." 무책임한 말이었지만 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았지만, 아시에를 안심시킬 수 없을 테니까. "고마워. 카이." ...왠지 쑥쓰럽다. 실제로 내가 그런 힘을 가진 것도 아닌데. 그리고 드디어 수학여행을 가는 그 날이 오게 되었다. 수학여행(修學旅行). 말 그대로 하면 학문을 닦는 여행이라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그냥 다 같이 어디 놀러 가자! 라는 정도의 의미일 뿐인지 이놈 의 학교에서는 그런 수학여행의 정의를 그대로 실천하려는 듯 여행을 가기에 앞서 숙제 더미를 잔뜩 한아름 안겨주었다. 여행지에 대한 역사와 전통, 지리 등에 관한 사전 자료 조사라던지, 여행 계획서 작성. 여행 후의 장문의 감상문 쓰기 같은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숙제가 잔뜩 던져졌지만 숙제보다도 오히려 골치아픈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조를 짜라는 것이었다. 단순무식하게 학생들을 전원 일방적으로 끌고 다니는 한국의 수학여행과는 달리 이곳의 수학여행은 숙소를 정해두고, 아침저녁으로 점호만 할 뿐. 어디로 여행을 가든 일절 터치를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학생들의 자율에 맡긴다는 거다. 하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조건이 있었는데 반드시 조를 짜고 조별로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조는 반에 관계없이 최소 4명에서 최대 8명까지 넣을 수 있다. 그러니까 과연 누구를 이 안에 집어넣어야 할 지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차라리 숙제라면 배째라고 안 해 버리면 그만인 것을...(물론 그만큼 성적에서 까이겠지만) 벌써부터 나와 같은 조에 넣어달라는 애들이 득실득실거렸다. '에 일단 아시에와는 반드시 같이 있어야 할거고... 누굴 넣을까? 치즈 패거리? 시에나 녀석은 일단 빼고... 지금까지 짜증나게 한 것도 모자라서 그런 이상한 소문을 교내에 퍼뜨려? 그럼 린넬은...' 린넬의 이름이 생각나자 나는 조금 망설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많이 서운했다. 원래대로라면 당연히 그 이름은 고려 대상에서 빠져야만 했다. 하 지만 그러기에는 어쩐지 마음속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도 기억을 잃은 날 많이 도와줬는데... 고심 끝에 간신히 조를 짤 수 있었다. 멤버는 역시 신청자가 많았던 관계로 당연히 최대치인 8명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그 멤버의 면면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이 남자 다섯, 여자 셋 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카이엔 브리타뉴(남) 2. 아시에 브리타뉴(여) 3. 치즈 셀바캬란(여) 4. 우뉴 나니카(남) 5. 이멜츠 뢰벤브라우쳐(남) 6. 키론 모아라드(남) 7. 루카라 시클레인(여) 8. 린넬 케이준(남) 나와 아시에가 들어가는 건 당연하고 치즈 패거리(치즈, 우뉴, 이멜츠)가 자동으로 따라왔다. 내가 시에나의 도시락을 먹고 쓰러진 이후 친분을 쌓은 치즈 패거리는 전원 다른 반임에도 불구하고 나와 가장 격의없이 친하게 지내는 애들이었다. 특히 린넬과의 관계가 어정쩡해진 지금은 더 욱 그랬다. 키론은 아버지가 시르팡 전담 형사여서 그런지 시간만 나면 나에게 자꾸 이전에 시르팡 납치 사건에 대한 일을 물어와서 좀 귀찮은 애였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를 넣기로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우리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 하는 애였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모든 숙 제를 해결해 줄 구세주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감상문을 제외한 계획서 작성이나 사전 조사 등은 조별로 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키론은 기 대에 보답하듯 치즈 패거리와 협력해서 자하기니아의 음식 문화에 대해 깜짝 놀랄 만큼 대단한 사전 조사 보고서를 제출했다. 루카라는 우리 학교에서 린넬 다음으로 맛있는 도시락을 만드는 아이이자 치즈의 친한 친구이기도 하다. 몇 번 도시락을 얻어먹었기 때문에 조 에 끼워달라는 요청을 쉽게 거절할 수 없었고 치즈도 부탁해 왔기 때문에 넣기로 했다. 린넬은... 솔직히 말해 넣을 생각이 없었다. 사이도 그동안 소원했던 데다 시에나 때문에 묘한 소문이 전교에 퍼져 있는 터라 더욱 그랬다. 우리 학교의 비정상적인 소문 왜곡 시스템을 거치면 수학여행이 언제 사랑의 도피여행으로 변할 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치즈가 린넬을 꼭 넣자고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다. "뭐 때문에 내가 그 녀석을 조에 끼워눠야 해?" "그렇다면... 이대로 린넬이랑 계속 사이 나쁘게 지낼 거야? 그동안 린넬이 얼마나 널 도와줬는지는 네가 더 잘 알잖아?" "카이... 나도 카이가 린넬이라는 애랑 잘 지냈으면 좋겠어." 아시에까지 치즈를 거들고 나섰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마음이 내키지 않아 계속 변명을 댔다. "그래도... 시에나 때문에 안 좋은 소문이 퍼져 있는데..." "피이, 뭐야? 남자가 존쫀하게 그런 소문에나 이리저리 휘둘려서 되겠어? 오히려 정면돌파해서 서로 화해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난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내가 가자고 해서 린넬이 과연 따라올까?" "내가... 이야기해볼께." 린넬을 설득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아시에였다. 왜... 왜 저러지? 어제도 나랑 린넬이 싸우지 않으면 좋겠다고 하더니... 젠장, 대체 뭐가 어떻게 돌 아가는 지 알 수 없잖아! "마음대로 해..." 그래서 결국 린넬도 조에 끼게 된 것이다. 아시에의 말에 의하면 조금 망설이는 듯 하더니 그대로 승낙했다던데 린넬은... 무슨 생각을 하고 조 결성을 승낙한 걸까? 그리고 하나 더 말하자면 조를 완전히 정하고 나서 시에나가 좀 시끄럽게 굴었다. 지은 죄를 알기는 아는지 나와 같은 조에서 수학여행을 갈 자 격이 없다고 스스로 인정하기는 했지만 린넬을 끼워줄 정도면 왜 자기는 안 끼워주냐고 형평성의 문제를 들어서 따지고 나온 것이다. 그런 태도가 더 널 싫게 만드는 거야, 알아? 너랑은 니가 나한테 도시락을 잘못 먹였을 때부터 비뚤어진 인연이라굿! 시에나만 있어도 이런데... 피요르가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 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일단 한 가지 과제가 해결되었으니 다음으로 정해야 할 것은 조 이름을 짜는 일이었다. 그리고 조 구호나 깃발 만들기 등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여러가지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조 이름은 [미소년, 미소녀와 함께 하는 식도락기행]으로 정해졌고 조 구호는 [먹자!]로 되어버리는 어이없는 일 이 발생했다. 어째서 이런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냐 하면 우선 치즈가 뭔가를 제안하면 죽이 맞는 우뉴와 이멜츠가 자동으로 따라가고, 친구인 루 카라가 치즈의 설득에 넘어가버려 단숨에 과반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키론은 애초부터 조 이름이나 구호에 관심이 없었고 린넬은 수학여행 당일날 보자며 자리를 피했다. 아시에 역시 괜찮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저 어이없는 조 이름과 구호에 항의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고개만 끄 덕일 수 밖에 없었다. 조 깃발 그림은 우뉴와 이멜츠가 그려 왔다. 커다란 깃발에 자하기니아의 문양이 그려진 빵을 나와 아시에가 먹고 있는 그림이었다. 나와 아시에 의 그림은 그림체가 좀 틀렸는데 내 모습은 이멜츠가 그리고 아시에는 우뉴가 그렸다고 한다. 듣자 하니 이멜츠는 미소년을 잘 그리고 우뉴는 미소녀를 그리는 데 일가견이 있다나? "...이거 좀..." 그렇잖아도 나랑 아시에랑 붙어 있으니까 질투의 시선이 많은데 그림마저 이러면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치즈 패거리의 입장은 단호했다. "이 그림으로 카이엔♡아시에의 커플링을 확고히 함으로서 린넬과의 스캔들에 종지부를 짓는 거야. 가장 확실한 방법 아니겠어?" "그... 그래도 우리 둘만 있는 건 좀... 다른 사람들도 좀 그려. 치즈나 키론도..." "나도 사실 그림에 들어가고 싶은데, 우뉴가 넣어주기 싫대." "당연하지. 치즈를 실제보다 미화시켜 그리려니까 손이 사도(邪道)를 행하지 마라고 떨더라니깐?" "우뉴, 너어!" ...이쪽은 안되겠군. 그럼 이멜츠에게 부탁해 보자. "그... 그럼 이멜츠는 다른 남자애 그릴 생각이 없는거야?" "넣어 봤자 삼각 관계로밖에 오인되지 않을 거야. 원한다면 린넬 정도는 그려 줄 수 있지만..." "아, 아니 됐어." 나와 아시에, 린넬 셋이 같은 그림에 그려져 있으면 셋을 어떨게 마구 엮은 소문이 날지 상상하기도 싫다. 차라리 아시에와 소문나는 게 낫겠지. 아이렌이나 사이엔 형은 별로 안 좋아하겠지만 실질적으로 집안을 휘어잡는 세이렌 누나는 아시에를 좋아하니까 그나마 뒷탈이 덜 할거야. "그럼 지금부터 자하기니아의 수도 핀치로 이동하겠습니다. 학생들을 인솔하시는 선생님들은 빠진 학생이 없는지 모두 확인해 주세요." 마력으로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끔 충분히 증폭된 목소리로 학년 주임선생인 예절교사 푸르지오 선생이 말했다. 지금 우리가 모인 곳은 우리 유클리네 왕국의 수도 유레카의 동쪽에 있는 커다란 공터였다. 이곳에서 자하기니아의 수도 핀치로 바로 직통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 외 에도 여러 나라의 수도나 중요한 장소로 단번에 이동할 수 있다고 한다. 세이렌 누나는 순간이동을 장난처럼 휙휙 해대지만 정말은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마법사는 아주 드문 편이라고 한다. 그것도 제한적으로만. 그 래서 필요한 장소간의 공간이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마법진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 마법진은 그 편리성에도 불구하고 잘 사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출발하는 장소의 마법진과 도착하는 장소의 마법진에서 동시에 진을 작동시키고 마법 언어를 조절하고 주파수를 맞춰야 할 뿐 아니라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발목을 잡는 문제는 마법진은 각국 정부에서 특별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해당 각국 정부의 특별 승인이 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다. 때문에 귀족이나 부호가 아닌 일반 여행객이나 상인은 함부로 이용할 수 없었다. 만약에 사람들이 제멋대로 여러 나라를 드나들게 된다면 분명 큰 혼란이 일어날 테니까 내린 결정인 것 같았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이 공터에 있는 여러 개의 마법진 중에서도 특별히 수백 명의 대인원을 이동시킬 수 있는 특별한 마법진이라고 한다. 공간이동이야 세이렌 누나와 몇번 해 봤지만 이번에는 왠지 특별한 긴장감이 들었다. "그럼 출발합니다. 10, 9, 8" 카운트를 세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주변에서 '나 공간이동 첨 해보는데', '자하기니아는 어떤 곳일까?'하는 불안과 기대의 목 소리가 동시에 웅성거렸다. 나 역시 그들과 똑같은 감정이었다. "5! 4! 3!" 학생 전원이 푸르지오 선생의 말에 맞추어 카운트를 세었다. 어느 샌가 나 역시 숫자를 세는 데 동참하고 있었다. 수를 세는 소리가 공터 전체에 우렁차게 울러퍼졌다. "2! 1! 출발!" 공간이동이라는 것은 이름은 거창했지만 실제로 행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간단했다. 뭐 영화나 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이상한 터널같은 공 간을 통과하는 게 아니라 시간의 격차가 전혀 없이 그대로 사람을 해당 장소에 사뿐히 내려놓는 것이다. 때문에 출발 소리와 동시에 우리가 본 것은 단지 달라진 주변 풍경 뿐이었다. 그래도 공간 이동을 처음 해 본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여기 저기서 감탄성이 터져나왔다. "뭐, 뭐야, 우리 지금 순간이동 한 거야, 맞어?" "바보. 지금 주변 풍경 바뀐 거 보면 몰라?" 감탄보다는 너무 싱거워 실망한 사람이 많은가 보다. 나도 세이렌 누나와 함께 공간이동을 한 적이 없으면 저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겠지. 우리 조 [미소년, 미소녀와 함께 하는 식도락기행]에서도(어째 언급하기조차 쪽팔렸다.) 여러 가지 다양한 반응이 터져나왔다. 우뉴와 이멜츠는 신기한 듯 소리를 지르고 다녔고 치즈는 공간이동도 못해봤냐며 그들을 구박했다. 키론은 혼자서 '흠. 원리는 알지만 이런 식으 로 구동되는가.'하고 중얼거렸고 루카라는 이전에 공간이동 해 본 적 있다면서도 분위기에 휩쓸려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수다를 떠는 통에 치츠 가 찾아다녀야 했다. 아시에는 그 나쁜 흑마법사 녀석과 공간이동을 여러 번 해 본듯 무덤덤했고 린넬은... 단지 짧게 한마디만 내뱉었다. "공간이동은... 오랜만이야." ...저녀석 갑자기 왜 저렇게 폼을 잡고 난리야? 우릴 인솔하는 선생들은 이쪽에서 공간이동을 도운 마법사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우리를 데리고 마법진 밖으로 나갔다. 짧은 숲길 저쪽으로 자하 기니아의 수도 핀치의 성문이 보였다. 우리의 신분은 모두 자하기니아 측에 사전 통보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별 검문 없이 바로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고, 곧바로 예약된 고급 호텔로 향했다. 자하기니아의 풍경은 색달랐다. 몇 번 나가보지 않아 자신있게는 말할 수 있었지만 유레카의 거리는 좁은 도로에 낮은 집이 많아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고 혼잡한 반면, 핀치의 거리는 도로가 넓고 고층 건물이 많았다. 상대적으로 덜 붐빌 뿐만 아니라 질서가 더 잘 잡혀 있다는 인상을 받았 다. 하지만 나다니는 사람의 수가 유레카보다 적어 활기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길가를 순찰하는 자하기니아의 경찰도 유레카보다 훨씬 눈에 자 주 띄였다. "이거... 축제 기간 맞기는 해?" "글쎄말이야. 핀치는 우리 나라 수도 유레카에 비견될 만큼 대단한 곳이라도 들었는데 무슨 일이지? 사고라도 났나?" 내 궁금증에 아시에나 치즈도 동의하는 듯 맞장구쳤다. "축제 기간은 맞아. 하지만 축제 기간이건 아니건간에 이런 고급 주택가에는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게 당연하지. 여기도 시내로 나가면 길 좁 고 사람 미어터지는 건 마찬가지야." 키론이 우리들의 잘못된 판단을 시정해주었다. 하긴 이 동네 와본 적이 없으니까 어떻게 알겠냐? 응? 근데 여기가 고급 주택가라고? 뭐 우리 집 은 유클리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자자한 가문이니까 대저택이라고 쳐도 고급 주책가 치고는 좀 초라한데? "고급 주택가로는 안보이는데?" 치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듯 했다. 그런 치즈의 질문에 키론이 대답했다. "자하기니아의 풍속은 근검절약을 중요시하고 과소비를 죄악으로 보거든. 그리고 자하기니아 사람들은 면적이 넓기보다는 층수가 높을 수록 고급 으로 쳐." "왜 그렇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한데." 이상한 사람들이야. 집은 넓으면 넓을수록 좋은 거지. 키론은 자기가 공부 잘 하는 걸 티라도 내는 듯 이런 주거 문화는 자하기니아의 무력(武 力) 중심주의 정책과 엄정한 위계질서 체제에서 파생되었다는 등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기만 내 귀에는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가 묵을 호텔은 이 고급 주택가의 끝부분에 있었다. 호텔도 역시 높은 층을 최고로 치는 듯 층수가 무려 10층에 달했다. 나는 한국에서 높은 건물을 많이 봐서 무덤덤하지만 다른 애들은 어떻게 저런 건물을 지을 수 있냐, 굉장하다 등등 찬사를 늘어놓았다. "카이엔, 아시에. 너네들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다?" 이멜츠가 우뉴를 상대로 우뉴를 몇 개 쌓아야 옥상까지 닿을까 하는 시덥잖은 농담을 하면서 나와 아시에에게 물었다. "그냥... 저런 건 왠지 익숙해서." "나도... 어디서 봤는 지는 모르겠는데, 더 높은 것도 본 기억이 나... 50층도 넘는... 그런." "엥? 아시에,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세상에 50층이 넘는 건물이 어딨다고 그래? 탑이라면 몰라도 말야. 인간의 힘으로는 그런 건 불가능 해. 혹시 옛날 전설 같은 데서 본 거 아냐?" 이멜츠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아시에의 말을 일축했다. 그러나 아시에는 왜인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면 서 중얼거렸다. "몰라... 기억이 안 나. 하지만 그런 거 본 적 있어. 100층이 넘는 건물이 연기를 뿜으며 무너지는 것도 본 적이 있는 걸..." 100층이 넘는 건물이 무너지는 것도 본 적이 있다고? 하지만 이멜츠의 반응을 볼 때 지금 이 세계에는 그런 건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데... "아시에도 참, 그 옛날 전설과 현실을 혼동하는 건가 보네. 그런 구절이 있잖아? 주신 다르군트 님에게 저항하는 마신 베링거의 암흑성은 높이가 100층에 이르렀다." "그리고 암흑성은 신이 내린 용사 로또의 검에 무너져내렸다는 말이지." "푸훗. 꿈이라도 꿨나 보지. 그것도 신화시대 꿈을 말야." 치츠 패거리들은 아시에의 말을 꿈에서 본 게 너무 현실감이 강한 나머지 착각하고 있는 것 뿐이라고 넘겨짚었다. 아시에도 기억이 확실하게 나 지 않는다며 아마 그런 것 같다고 자신없게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묘하게 신경쓰였다. 처음에는 그 셰더 녀석이 무슨 거대한 악의 단체에 연관 되어 그놈들의 본거지가 그렇게 크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100층이 넘는 건물이 연기를 뿜으며 무너졌다라는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끄응... 뭐지? 원래 있던 세계랑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벌써부터 거기 일을 다 잊으려고 그러나 기억이 잘 안 나네.' 하지만 오래동안 건물 외양만 바라보며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바로 호텔로 들어가서 예약된 방에 짐을 풀러 나갔다. 같은 조지 만 당연히 방은 남녀 따로 잡고, 서로 층도 다르다. 거기서 나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깜빡 잊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나... 카이랑 같은 방에 있을거야." 어제는 엄마가 돌아와서 엄마랑 같이 재울 수 있었지만 그 전에는 집 안에서도 항상 내 옆에 있어야 안심하던 애다. 게다가 지금은 아예 밖에서 무려 4박을 묵게 되니... 내 옆에 더욱더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을 터였다. 역시 괜히 데려온 건가? 그런데 의외로 조원들이 찬성하고 나선 것이 문제였다. 물론 그 핵심세력은 치즈와 우뉴, 이멜츠 녀석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린넬 까지 엮어들이고 나선 것이다. "자, 린넬! 카이엔이 아시에랑 둘만이서 뜨거운 밤을 보내겠데! 질투나지 않어? 화나지?" "무... 무슨 소리 하는거야, 치즈? 난 별로 저녀석이랑..." "것봐, 일전에 고백했을 때 빨리 대답을 안했으니까 차인거지." "차인거다∼" "린넬이 카이엔한테 차였다∼" 잘들 논다. 잘들 놀아. 일단 저녀석은 저녀석들끼리 놀게 내버려두고 일단은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데... "굳이 억지를 쓰겠다면, 선생님들한테 찾아가서 허락을 맡아. 너네 집안이 갖는 무게도 있고... 피는 섞이지 않았다지만 어쨌건 남매니까 부탁하면 방도 따로 잡아 주겠지." 키론이 얹짢은 듯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긴, 양녀로 들어온 거고, 그래서 우리 가문의 성도 받은 거니까 일단 형식상 남매 관계는 남 매 관계지. 나는 키론의 말을 쫓아 이번 수학여행을 총괄하는 푸르지오 선생에게 갔고 엄하기로 소문난 푸르지오 선생은 노발대발하면서 안된다 고 소리쳤지만 나는 결국 원하던 목적을 얻어낼 수 있었다. 부탁 안 들어주면 지금 당장 다 때려치고 아시에랑 집에 돌아가겠다고 난리를 쳤기 때문이었다. "둘이서 대체 뭔 짓을 하려고 그런 걸 원하는 건가, 자네?" "아시에는 당분간 제가 보살필 책임이 있는 아이입니다. 단지 그것뿐이지요." "꼭 자네가 아니면 안 되는 건가? 다른 여자아이들에게 부탁해도..." "집안 사정입니다. 우리 집안에서 아시에를 양녀로 받은 이유와 관계있는 거죠." 그녀가 마도의 노예였고, 그 때문에 얻은 심리적 상처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학교 선생들 뿐만이 아니라 집안 사람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비밀이 었다. 하지만 푸르지오 선생은 그 말을 좀 다르게 이해한 모양이었다. "자네들 혹시... 약혼한 사이인가?" "...약혼할 사람을 양녀로 받는 집안 봤습니까?" "마음에 들진 않지만 고집을 부리니 하는 수 없지. 선생님들이 묵는 방 근처에 방을 하나 더 잡아 줄 테니 거길 쓰게." "감사합니다." 휴우... 간신히 문제가 하나 해결되었다. 물론 이상한 소문이 이리저리 나겠지만 그건 우뉴와 이멜츠가 출발할 때 나와 아시에가 사이좋게 그려진 우리 조 깃발을 당당하게 들고 펄럭일 때부터 각오한 터였다. 이제 와서 무슨 소문이 나던 무슨 상관이오... 이제는 득도한 것을... 점심은 호텔 식당에서 단체로 먹었다. 대체로 채식이 많고 담백한 유클리네의 음식과는 달리 자하기니아의 음식은 고기가 많고 기름진 음식이 많았다. 좀 느끼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난잡하지 않고 깔끔하게 잘 정리되어 나왔기 때문에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냥 음식을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거지... 얘들은... "이 블랑슈 부채살 고기는 쫄깃쫄깃하게 잘 구워졌을 뿐만 아니라 참기름과 들깨, 고추장과 칠리 소스가 최상품으로 적절히 버무려진 양념도 훌 륭해. 게다가 미적 감각도 뛰어나서 고기를 자른 모양 자체도 하나의 예술품이라 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걸!" "하지만 치즈. 이 샐러드 같은 경우에는 드레싱 소스의 경우에는 맛도 좋고 적당량이 예쁘게 뿌려져 있지만 정작 야채들이 거의 신선하지 못해. 여기 있는 양상추에는 상당기간을 냉동한 흔적까지 있는걸." "이멜츠, 그래도 이곳 핀치 근교의 환경이 채소 농사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도 고려해야 돼. 게다가 작년에는 흉작에다가 올해 물량이 출하될 시 기도 한 달 정도 남았고. 그런 환경에서 이 정도의 맛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솜씨는 칭찬해 줘도 좋다고 봐." 치즈 패거리는 음식을 앞에 두자 끝도 없이 시식평가 모드에 들어갔고. "역시 블랑슈 고기하면 본고장인 자하기니아에서 먹는 게 제격이지. 루카라, 자하기니아에서 블랑슈 고기가 유명한 이유를 알아?" "아니. 블랑슈라는 동물은 들어본 적도 없는 걸. 어떻게 생긴 동물이야?" "호랑이보다는 작으면서 늑대보다는 조금 큰 육식동물인데..." 키론은 의외로 루카라랑 죽이 맞아서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린넬은 별 말 없이 조용히 식사하고 있었고 아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놀란 것은 치즈가 정말 많이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고기를 내가 먹는 양의 거의 3배는 먹는데, 청소년 주제에 무려 뱃살이 나온 우뉴가 먹은 고 기와 거의 비슷한 양이었다. 물론 치즈는 날씬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비만으로 여겨지기에도 무리가 있는, 좀 통통한 정도였기 때문에 의외였 다. "정말 많이 먹는다. 치즈... 그러고도 살 안쪄?" 가장 놀란 것은 역시 린넬이었다. 여기서 가장 표준적인 덩치의 청소년인 린넬이 양껏 먹은 양도 치즈의 2/3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글쎄말이야. 살 좀 빼야 하는데 왜 이렇게 고기가 맛있는지 모르겠어." "우에... 그렇게 먹으면서 다이어트래애∼" "나보다 먼저 빼야하는 건 우뉴 너잖앗! 이 나이에 뱃살이 그렇게 출렁거리는 게 말이 돼?!" 가장 적게 먹은 사람은 역시 아시에였고 그 다음이 나였다. 이 몸에 빙의하기 전의 나였더라면 최소한 린넬만큼은 먹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 그 렇게 먹으려면 당장 조그만 위장이 거부하고 나설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내 몸은 여성용 블라우스를 딱 맞게 입을 수 있을 정도로 어깨 가 좁고 체구가 작아 몸 형태가 사실상 여성형에 가깝다. 많이 먹고 싶어도 이 몸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제43화 : 카이엔, 여장하다! 4박 5일간의 수학여행 일정. 수학여행은 학교에 미리 제출한 계획서에 따라 조별로 자율적으로 움직인다. 즉, 돌아다니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정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첫날과 마지막 날만은 예외였다. 그래서 점심을 먹은 후에는 호텔 지하에 있는 대강당에 모여 앉아 자하기니아의 문화, 풍 속, 예절 등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강의라는 명목이긴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다른 문화 때문에 벌어질 수 있는 오해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주의사항을 주입시켜 주려는 측면이 강했다. 하지만 다들 호텔 식당에서 맛좋은 음식들을 거하게 먹은 탓인지 대부분의 학생이 의자에 앉아서 자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졸리는 상황에 의자 까지 푹신푹신하니 졸음이 안 오는 게 이상한거지. "...브리타뉴 군." 흠냐냐. 누가 날 부르냐? 한창 잘 자고 있는데 귀찮게시리. "저기 근처에 누가 브리타뉴 군 좀 깨워... 다 자는군." "됐어요. 제가 직접 가서 깨울께요." 나 깨울려고? 에이. 좀만 더 자게 내버려둬어. 근데 방금 전의 목소리는 여자였지 아마? 이번 수학여행에 따라온 여교사라면 아마... "브리타뉴 군.♡ 일어나, 후욱∼" "우와아악!" 귓볼을 간지럽히는 뜨거운 바람과 함께 나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래. 이번 수학여행에 따라온 여교사는 단 한 명. 바로 그 양호선생님... "정말이지... 깨울려면 정상적으로 좀 깨우라고요!" "후훗. 너같이 귀여운 애가 잠들어 있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그러고 싶어져서 말야." "...됐어요. 왜 깨웠어요?" "내일부터 조원들이랑 같이 핀치 시내를 나다닐 거잖아? 그때 변장 좀 하고 나가라고." "왜요?" "왜기는. 요즘 대륙 각지의 화방에서 여자들한테 가장 잘 팔리는 초상화가 네 거잖아. 니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게다가 이번 수학여 행에 네가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자하기니아 각지에서 극렬 여성팬들이 모여 호텔 앞에 진을 치고 있다구." 뭐야? 초상권 저작권료도 안주고 마음대로 초상화를 그려 팔다니... 가 문제가 아니라 자하기니아 각지에서 극렬 팬들이 모여들었다고? 허억. 물 론 내 이름이 전 대륙에 걸쳐 유명하다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타국에 와서도 이정도로 뜨겁게 반응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 그럼 어떻하죠? 난 변장같은 건 미처 생각도..." "푸훗. 그래서 이 선생님이 너한테 갈아입힐 옷과 분장을 미리 준비해 왔단다." "....." 그런 걸 뭐하러 미리 준비해 오는 거야? 아무래도 어째 멋대로 이상하게 갈아입혀질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누구 나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예상은 놀랄만큼 잘 맞아떨어졌다. "좋아. 이러면 아무도 못 알아보겠지? 자, 거울 좀 봐봐." 양호 선생님의 꾸미기 작업 끝에 만들어진 나의 모습은 나조차도 놀랄 지경이었다. 원래 체구가 여자같은 덕에 더 그랬지만 지금 거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누가 아무리 봐도 절대 남자가 아닌 여.자.의 모습이었다. 등 뒤로 길게 늘어뜨린 빨간색 가발을 꼭 쓴 데다 가볍게 화장도 하고, 우 리 학교 교복 치마를 입은 나를 카이엔이라고 당장에 알아볼 사람은 몇 명 없을 것이다. "근데, 이거 지나치게 눈에 띄잖아요?" 그랬다. 원판이 워낙 대륙 제일의 미소년이다 보니, 여자로 꾸며도 지나칠 정도의 미소녀가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몽땅 내게 올 것 같 아 보였다. 내 모습이 아시에보다 더 예뻐 보인다는 사실도 내겐 왠지 섬뜩하게 느껴졌다. 카이엔이 안보이고 갑자기 우리 학교 교복을 입은 왠 미소녀가 나타났다고 하면 적어도 우리 학교 학생 중에서 그 진상을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호호. 너무 지나치게 꾸미다 보니 깜빡했네." "깜빡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래서야 더 눈에 띌 거라고요!" "괜찮아. 어차피 활동은 조별로 이루어지니까 다들 흩어질거고, 그 자하기니아 여자애들만 못 알아보면 되잖아? 내일 나갈 때 다시 꾸며줄 테니 까 가발하고 옷 다시 갈아입고 나가." 할 수 없지. 그렇게 내키는 여장은 아니었지만 즐겁게 수학여행 왔는데 시달리면서 가기는 싫으니까. 사실은 뭐 수십 명쯤 되겠지 하고 가볍게 돌파하려다가 창 밖을 내다보니까 최소한 백 명에서 이백명 가까이 인파가 몰렸기 때문에 어렵게 결심한 일이었다. 이런 인원이 따라붙으면 제 대로 된 수학여행이 될 리 없을테니까. "브리타뉴 군?" 옷을 원래대로 남자 교복으로 갈아입고 나가려는데 양호 선생님이 다시 뒤에서 불렀다. "또 뭐죠?" "아무래도 교복 치마가 너무 잘 어울리는데... 평소에도 그대로 입고 다니는 게 어때?" "헷. 그것만은 사양하겠어요." 내 외모가 이렇다고 해서 여자건 남자건 간에 반쯤 여자취급 할 때가 자주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 나름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뿐. 어느 쪽으로도 오버하지 않는 것이 내 방침이었다. 저런 시덥잖은 농담에 '난 남자에요!'하고 화를 낼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여자 교복을 입으면서 변태스럽게 즐거워 할 필요도 없다. 물론 후자를 택하면 주변에 즐거워할 사람이 꽤 있겠지만... 저녁을 먹을 때, 나는 절대 비밀이라는 점을 꼭꼭 강조하면서 우리 조원들에게 내가 수학 여행 기간동안 여장을 하고 같이 행동할거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자 다들 기대된다는 듯 반짝반짝하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어... 어이! 난 구경거리가 되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 "카이... 예쁠 것 같아." 흑... 하지만 아시에조차 저렇게 이야기하는데 대체 어쩌랴. "나... 난 별로 상관없어." 린넬, 왜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붉히는 거야아! "그러고보니까 그때 린넬이 여장했을 때도 꽤 잘 어울렸지? 최우수상을 탔잖아. 카이엔이 만약 나갔다면 달라졌겠지만..." "루카라, 그 이야기는 하지 맛! 내 인생 절대절명의 치욕이라구! 나도 미쳤지... 하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그 앞치마가 갖고 싶었는지..." "린넬은 좋은 가정적인 남편이 될거야. 후훗." "치즈 너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까 왠지 기분나빠." "하여간 이제 남녀 비율이 4:4로 균형이 맞는구나. 우리들끼리 미팅이라도 해 볼까?" 우뉴 너. 이젠 아예 나를 여자로 분류하려고 드냐? 그때 조용히 밥만 먹고 있던 키론이 내게 넌지시 귓속말을 건넸다. "카이엔. 근데 너 다리털 같은 건 안 났어? 깎아야 되지 않아?" "응. 안 났어." "'거기'에도 안 났냐?" "...그딴 건 묻지 마!" 다리에 털 안 난 건 반바지 입을 때도 겉보기에 부담이 덜 가길래 오히려 선호하는 바였지만 키론의 두 번쩨 질문은 나도 샤워나 목욕 할 때마 다 항상 신경쓰이는 거란 말이야! 아직까지 그걸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레이엔 밖에 없지만...(들은 바로는 원래 카이엔 녀석은 크고 나서는 항상 혼자서만 목욕했다고 한다.) 없다가 있는 건 몰라도 있다가 없으니 기분이 묘하다... 음. "뭔데, 뭔데? 둘이서 무슨 얘기 하고 있어? 나도 좀 듣자, 키론." "루카라, 이건 여자들하고는 상관없는 남자들의 이야기야. 좀 참아줘." "남자들끼리의 이야기라면 나도 끼워줘! "나도!" 키론이 이상한 말을 하는 바람에 우뉴와 이멜츠가 갑자기 끼워달라고 난리를 치고 말했다. "나도 듣고 싶은데." 그러자 린넬 녀석마저 호기심이 든 모양이었다. "핏. 그럼 여자들끼리도 여자들만의 얘기 할래. 가자, 아시에. 그리고 카이엔도 같이." "야, 카이엔은 왜 데려갈려고 그래, 치즈?" "어라, 방금 전에 카이엔을 여자로 분류한 게 누구였더라, 우뉴 군?" "흠흠... 자네들, 그만 떠들고 빨리 먹게." 한창 떠들고 있는데 몽마르뜨 선생이 다가와서 가볍게 경고를 주었다. 이 선생은 내가 학교로 돌아온 첫날에 내 머리에 턱을 맞고 양호실로 실 려갔었지. 그때의 충격이 큰 탓인지 몽마르뜨 선생은 절대 다른 사람의 1m반경 안으로 접근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드디어 수학여행지에서 보내는 첫날 밤이 왔다. 우리 조는 나와 아시에가 선생님들 방과 가까운 곳에서 묵고 키론, 린넬, 우뉴, 이멜츠가 4인용 방을. 치즈와 루카라가 2인용 방을 쓴다. 아시에랑 단 둘이서 같은 방에 묵게 되었지만, 남들이 우려하는 것 같은 그런 심각한 일이 생길 만한 여지는 없었다. 양호 선생님이 동태를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어느 새 우리 방으로 와서 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원래는 키론과 남자들이 묵는 방으로 조원들이 다 모여서 놀기로 했는데 놀러 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브리타뉴 군. 호텔 밖에서 이 머리핀 샀는데, 예쁘지? 내일 여장할 때 같이 꽂으려고 하는데 한번 꽂아보자." "그... 그래도 지금은 좀... 시에한테나 한번 꽂아줘 봐요." 하지만 양호선생님은 내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브리타뉴 양도 보고 싶지?" "네. 보고... 싶어요." "그리고 교복에 달 리본도 한번 골라봤는데..." 그렇게 해서 양호 선생님이 주도하고 아시에가 성원을 보내는 카이엔 요모조모 꾸며보기는 밤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수학여행까지 와서 이게 무 슨 꼴이냐구...! 흑흑 "안녕." "안녀엉." 다음 날 아침. 물론 예상했던 바이지만 다들 밤새도록 논 탓인지 피곤한 기색이었다. 아침을 먹기 위해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아시에랑 나와 가장 먼저 본 애들은 우뉴와 이멜츠였다. "흐아암. 카이엔, 아시에랑 둘이서 잘 놀았냐?" "분위기 좋았겠는걸?" "잘 놀긴 뭐가 잘 놀아? 양호 선생님이 들어와서 날 대상으로 인형놀이를 했다구!" "그래? 그것도 나름대로 좋았겠네 뭘." "좋긴 뭐가 좋아! 너네들은 밤새 뭐 했어?" "카드놀이 하다가 몇 잔 마시고 잤지." "이 자식들, 나만 빼두고 지네들끼리만!" "어쩔 수 없잖아. 니가 안 왔으니까." 수학여행의 낭만은 역시 밤중에 둘러앉아 포커 치고 몰래 꿍쳐온 술을 몇 잔 마시는 게 진정한 수학여행의 묘미라고 믿고 있던 나에게 그런 기 회를 놓쳤다는 건 아쉽다 못해 억울할 지경이었다. 물론 고1때 수학여행이 있었지만 그때는 사소한 사고 때문에 집에서 요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혼자서 쓸쓸하게... 간병해 주는 사람도 없이... 칫. "여, 좋은 아침이네. 카이엔, 아시에." 그때 키론 녀석이 복도를 걸어나오면서 인사했다. 그런 키론을 우뉴와 이멜츠가 달려가서 붙들고는 말했다. "야, 솔직하게 말해서 어제 좀 많이 땄잖냐, 돈 좀 풀어, 응?" "어떻게 돈을 그렇게 다 싹쓸이해갈 수 있냐?" "어허, 너네들도 참. 물론 내가 돈을 젤 많이 따긴 했지만 치즈도 조금 땄고, 린넬과 루카라는 거의 본전 치기는 했잖아. 어제 누누히 욕심 부리 지 말라고 그토록 말했건만 끝까지 '못 먹어도 고!'를 외친 주제에." "그... 그건 술김에 한 거라구!" "맞아맞아. 평소라면 절대 그러지는 않았을거야." "잘 잤어, 카이엔, 아시에?" 키론과 우뉴, 이멜츠가 서로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치즈와 루카라가 윗층 여자애들 방에서 걸어나왔다. 특히 치즈는 방금 샤워를 마친 듯 머리카 락이 젖어 있었고 좋은 냄새가 났다. 그런데 왜 머리를 안 말리고... 아 참. 이 세계에는 헤어 드라이어 같은 건 없지. 깜빡 잊었네. "샤워 했네?" "응, 아침 운동을 좀 했거든. 살 좀 빼야 하기 때문에 꼭 하루에 한 번씩은 운동을 해." "그래봤자 그 이상으로 먹어대니까 효과는 없겠지만." "흥, 우뉴 너는 아예 운동도 안 하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살이 피둥피둥 돼지처럼 찌는 거지.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라, 너랑 나 중에 누가 더 뚱 뚱한지." 치즈가 앙칼진 목소리로 우뉴에게 소리쳤다. 그래도 다년간 치즈 옆에 있어서 익숙한 듯 우뉴는 끄떡도 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훗. 여자의 뚱뚱함은 비만이자 시각공해지만 남자의 뱃살은 부의 상징이기도 하다구!" "돈으로 여자를 끌려오게 만드는게 자랑이냐? 헤." 참고로 우뉴 녀석은 유클리네에서도 꽤 이름난 상회를 운영하고 있는 나니카 가문의 막내아들이었다. "이씨. 나도 카이엔 미모의 반 정도만 따라갔어도 그런 얘기는 안꺼낼거라고!" "요즘 미모는 꾸미기 나름이라더라. 결국은 네 노력 부족이지, 뭐." 우뉴 녀석, 꽤 맞받아치기는 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치즈의 승리라는 걸 학교에서부터 쭈욱 보아오던 터였다. 내공이 꽤 증진되기는 했지만 아직 멀었어. 곧이어 린넬도 방에서 어기적거리면서 기어나왔다. 린넬은 아무래도 잠이 덜 깨지 않은 듯 내내 반쯤 감긴 눈으로 걷더니 아침 식사 시간에는 아시에가 미리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음식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언뜻 보니 우리 이야기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키론, 린넬 왜 저러냐?" 아무래도 본인이 대답해 줄 상태가 아닌 것 같아 나는 키론에게 물었다. 키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귓속말로 답해주었다. "린넬은 술이 약하더라고, 몇 잔 마시더니 바로 취했는데 그런 주제에 갑자기 병나발째 마시지 뭐야?" "아, 안 말리고 뭐했는데?" "그러자 린넬이 아주아주 중요한 고백을 털어놓았어." "뭔데?" "그건 남자들만의 비.밀!" "뭐야? 궁금하게시리... 나도 남자잖아!" "가르쳐줄까?" "응!" 처음에 귓속말로 시작한 이야기가 어느샌가 커져 치즈와 루카라, 아시에까지 키론의 말에 귀를 귀울이고 있었다. "야야, 키론. 그걸 말해버리면 좀..." "어제 딴 돈 절반 돌려줄께." "얼마든지 폭로하세요∼" 헷. 다들 돈 모자란 집안은 아니면서 왜 저러냐? 하긴 도박에서 잃는 건 돈 문제도 문제지만 기분 문제도 크지. "린넬이, 취한 상태에서 카이엔이 여자가 될 수 없으면 자기가 여자가 되겠다고 방방 뛰면서 설쳤어. 조만간에 금지된 흑마법사라도 찾아가 성전 환 수술을 받겠다나 뭐라나." "...설마 그거 진심은 아니겠지?" "취했는데 뭔 말을 못하겠냐? 그랬다고 진짜로 그러지는 않겠지." "설마가 사람잡는다는 말도 있는데... 취중진담이라는 말도 있잖아." "어이... 다 들었어." 키론이 폭로한 린넬의 충격고백을 두고 우리 조원들끼리 열심히 수다를 떨고 있을 때 헤롱거리던 린넬이 이마를 붙잡고 일어나면서 날카로운 눈 초리로 낮게 깐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잠깐 든 정신도 잠시, 다시 린넬은 비틀거리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으... 머리아퍼." "당연하지. 어제 남자 넷이서 먹은 술 중에 2/3을 니가 먹었잖아? 다 폭로해버렸다고 서운하다고 생각하지 말라구. 게다가 물주한테 말이야." 그랬다. 사실 호텔에 술을 꿍쳐온 녀석은 바로 키론이었다. 단지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라서 숙제와 과제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서 넣었는데 의 외의 면모를 보여주는 녀석이었다. 키론은 린넬 때문에 가져온 술이 모자라자 밤중에 호텔을 몰래 빠져나다서 술을 더 사오는 짓까지 했다고 한 다. '이래서... 사람 속은 확실히 모른다니깐.' 제정신이 아닌 린넬을 키론과 남자애들한테 맞기고 식탁에서 일어서려고 할 때, 이미 양호선생님이 내 앞에 와 있었다. "자, 옷 갈아입으러 가야지 브리타뉴 군?" 아 물론 그건 알고 있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브리타뉴 양도 같이 올래, 남매니까 말야?" "네에..." 그... 그렇게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발그레하게 얼굴 붉히지 말라고, 아시에!" "선생님, 저도 보고 싶어요!" "저도요!" "얘들은, 변신 장면은 아무한테나 함부로 보여주는 게 아니란다. 놀랄 만큼 이뻐진 브리타뉴 군의 모습을 보여줄테니 기대하렴." "네에∼" 그리고 잠시후... "꺄아, 너무 예쁘다 이거...!" "아시에 앞에서 이런 말하기는 뭣하지만 아시에보다도 더..." "괜찮아. 내가 카이랑... 비교될 수 있을 리 없잖아." "왜 그래, 카이엔. 얼굴 좀 펴. 얼굴 좀. 예쁜 얼굴이 일그러지잖아." 우드득. 하지만 이건 화가 나지 않을래도 화가 안 날 수 없는 상황이다. 어제는 단지 가발 쓰고, 여자 교복만 입고, 굴곡이 생기도록 가슴에 솜뭉 치 좀 넣은 정도였다. 그런데도 상당히 눈에 띄는 외모였다. 그런데 오늘 양호 선생님은 완전히 작정하고 나온 듯 했다. 먼저, 속옷부터 여자 걸로 갈아입도록 명령했다. 기분상 꺼림직하기는 했지만 일단 수용할 근거는 있었다. 우리 학교 여자 교복 치마는 꽤 짧기 때문에 자칫하다가 남자 팬티가 보이면 곤란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왜... 왜 이렇게 요란한 색깔이에욧!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아줌마틱하잖아!" "그... 그래? 나름대로 잘 고른다고 고른건데..." 암만 그래도 가려 입어야 할 게 있었다. 흰색 속옷을 입으라고 해도 얼굴이 벌개져 창피해 죽을 지경인데 저 번쩍거리는 속옷을 입으라고 주다 니 말이 되는 거얏! 양호선생님은 아줌마 취향이라고 내가 주장하자 찔리는 점이 많았는지 결국 속옷은 무난하게 결정되었다. 그래도 왠지 야릇 하게 찜찜한 기분은 마찬가지였다. 이런 느낌때문에 변태들이 여자 속옷을 입고 다니는 건가... 으아아아, 그럼 내가 지금 변태라는 소리잖아!? 흑 흑흑.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망가지기 시작한 거지. "이 뽕브라는 왜 이렇게 커요?" "뭐기는, 남자애들은 큰 걸 좋아하잖아?" "남자애들한테 인기 있어서 뭐하려고요." "그건 전문 마법사한테 특별 주문 제작한 거기 때문에 만지면 감촉이나 물컹거리는 느낌까지 실제랑 똑같아. 그래도 솜뭉치 집어넣는 거보단 이 게 훨씬 낫겠지 않아? 마법제품이기 때문에 가슴에 붙이면 완전히 진짜인 것처럼 몸에 맞춰서 변한다구." "...좀 작은 건 없어요?" "그거 비싸. 그것밖에 없어. 원래는 내가 쓰던건데 어느 날 우연찮게 다 폭로되서 말야..." 그리하여 나는 암만 봐도 부담스럽기 그지 없는 크기의 가슴을 달고 다닐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저번에 같이 잘 때 본의아니게 만 드게 되서 알게 된 아시에의 가슴 크기보다 훨씬 더 크잖아! 흐으... 여장이고 뭐고 다 때려치울까 하고 몇번이고 씩씩거리다가 간신히 이성을 되 찾을 수 있었다. "특히 이 가슴이 짜증난다구! 걸을 때마다 출렁출렁거리는게 얼마나 보기 부담스러운 줄 알아?" "좋기만 하구먼..." "맞어." 우뉴와 이멜츠의 반응은 아저씨틱해서 내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하기야 그 양호 선생님 원래부터 좀 이상했지?" "맞어. 애초부터 이럴 생각으로 미리 수학여행 정보 누출시킨 거 아냐?" 치즈와 루카라는 양호선생님을 탓했으며 "좀 크긴 하다... 하지만 괜찮을거야. 카이는 예쁘니까..." 아... 아시에, 괜찮기는 뭐가 괜찮다는 거야? "일단 사소한 건 신경쓰지 말고 나가자." "그래그래. 다른 조 애들은 벌써 다 나갔는걸." 린넬과 키론은 외면 모드였다. 크아아! 다들 당사자의 입장 따위는 눈꼽만큼도 생각해주지 않잖아앗! 단지 나 혼자만 울상이 되어 기분나빠할 따 름이었다. 내가 여장한답시고 양호선생님이 이리저리 꾸미는 사이에 이미 다른 조 애들은 시내 곳곳으로 흩어진 지 오래였고 우리 조만 남아 있었다. 덕택 에 우리 조 애들을 빼고는 우리 학교 학생들 중에서 여장하여 미소녀로 다시 태어난(?) 나를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나가기 전에 이름 정해야지, 그대로 카이엔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맞어맞어. 이왕이면 성도 브리타뉴 말고 딴 걸로 해. 너무 유명하잖아." 키론의 말에 다른 애들이 동의하고 나섰다. 확실히 일리있는 말이었다. 수상한 요소는 하나라도 줄이는 게 나았다. "음... 그럼 뭘로 하지? 우리 집 여자 아름은 전부 '렌'자 돌림인데 그렇다고 카이렌 하면 좀 이상하고 어설픈 것 같으니까..." "카렌... 이 좋을 거라고 생각해." 의외로 아시에가 가장 먼저 이름을 제안했다. "카렌... 그거 괜찮은데?" "이름도 예쁘고, 원래 이름하고도 연계가 충분히 되니까 헷갈릴 염려도 없겠어." 아시에의 제안에 모두 동의했다. "그렇다면 성도 혹시 정해둔 거 있어, 시에?" "루아르..." "카렌 루아르인가..." 썩 나쁘지 않은 이름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수학여행의 둘째날 여정을 위해 호텔 정문을 나섰다. 정문 앞에는 앞서 나간 우리 학 교 학생들 중에서 날 발견하지 못한 수많은 여자(와 일부의 남자)들이 수군거리며 우릴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게 마지막 조 맞어? 어째서 카이엔님이 안보이는 거지?" "글쎄. 혹시 저 빨간 머리 여자애가 눈에 띄는데 혹시 카이엔 님이 여자로 변장같은 거 한 게 아닐까?" 뜨끔! "에이, 농담도 참. 카이엔님이 저렇게 출렁출렁대는 한심한 가슴을 달고 다닐 리 없잖아?" "맞어. 아마도 지금까지 지나간 사람들 중에 놓친 걸지도 몰라." ...별로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의외의 곳에서 도움이 되는 양호선생님의 무식하게 큰 가짜 가슴이었다. 정문 앞으로 길게 늘어선 자하기니아의 내 팬들 사이를 빠져나가고 나서 그제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인파를 빠져나오면서 얼마나 긴장했는지 원. "자, 이제 변장이 완벽하다는 건 확인했으니 이제 시내를 쏘다녀 볼까, 카이... 아니 카렌?" "그러자." 색다른 속옷의 느낌과 가슴의 무게, 이물질이라는 느낌에 어쩐지 신경쓰이는 머리의 머리띠. 교복 치마 사이로 살랑거리며 들어오는 바람 등 모 든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런 느낌을 받으면서 핀치 시의 지도를 뒤적이며 시내로 걸어가다가 나는 한 가지 잊은 것을 발견했다. "실피. 나와 봐." 나는 문득 생각난 바가 있어 바람의 하급 정령 실피를 불렀다. 아이렌이 만들어 준 정령왕의 목걸이는 정령들과의 강력한 친화력을 부여해 준다. 때문에 타고난 정령력 같은 것이 전혀 없는 나도 하급 정령 정도는 불러내서 부탁할 수 있었다. 뭐, 워낙 편하게 놀면서 다니는 터라 평소에는 부탁할 일이 거의 없지만 말이야. "내 목으로 들어가서... 목소리를 여자 목소리로 울리게 할 수 있어?" 깜짝 잊은 것은 바로 목소리를 바꾸는 것이었다. 물론 어차피 내 목소리는 원래 중성적이었기 때문에 이대로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때문 에 목소리를 문제삼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왕 한 이상 완벽하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다고 양호선생님이 시 키는 마냥 오버하는 건 질색이지만. 실피는 내 목 안으로 스윽 들어가서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좀 이상한 기분도 들었지만 바람의 정령이하서 목에 걸리적거리는 느낌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몇 번 마이크 테스트를 거치고 실피에게 주문을 한 끝에, 드디어 정상적인 여자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아, 아. 이제 괜찮아?" "굉장해, 카이.. 아니 카렌! 이거 정말 완벽한 여자 목소린걸?" "끼야! 너무 귀여운 목소리야!" "바람의 정령으로 이런 것도 할 수 있구나. 몰랐어." 공부해 두면 살이 되고 피가 된다는 격언이 이런 것 때문인가. 정확한 원리는 모르지만 목소리는 공기의 진동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릴 적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한번 시험삼아 해 보았는데 의외로 결과가 대성공이었다. 그래도 공부는 하기 싫어. 우에∼ "카렌... 여자 목소리... 내고 싶었어?" "그냥, 여장했으면 목소리도 여자 걸로 내는게 더 완벽하다 싶어서." "이런이런. 카렌. 지금 그걸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응?" 갑자기 우뉴 녀석이 시비를 걸고 나선다. 예쁜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면 더 좋아할 텐데 왜 저러지? "목소리만 여자 음이 나는 걸로는 부족해! 말투까지 완벽하게 여자 말투를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걷는 폼이나 행동거지도 고쳐야 해!" "....." 우뉴의 말에 이멜츠까지 끼어들어 외쳤다. 의외로 일리 있는 것 같으면서도 왠지 수긍하기에는 기분 나쁜 이야기... "너희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너무 이상하다 싶으면 옆에서 그냥 지적해주면 되는 거고, 말투도 조금만 연습하면 될 건데 뭘." 치즈가 날 도와주고 나섰다. "내 말은. 그 본보기가 될 대상이 치즈여서는 곤란하다는 거지. 올바른 숙녀의 자세와는 거리가 한참 멀잖아?" "우뉴 너엇!" "됐어. 난 빨리 시내로 나가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싶다구!" 그래도 의식을 좀 한 탓인지 여자 말투를 흉내내면서 나는 확 시내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빨리 가서 놀고 싶은데 아침부터 왜 자꾸 이런 데 발목이 잡히는지 몰라. "카이, 아니 카렌! 발걸음 조심스럽게!" 내가 발걸음을 넓게 벌리자 키론이 그걸 지적했고, 나는 깜짝 놀라 순간 비틀거리면서 넘어질 뻔했다. 앞으로의 여정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이 눈 에 선히 보였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걸으라고. 그래. 그렇지." 괜히 목소리를 바꾸겠다고 설쳤나 보다. 애초부터 이 여장은 호텔 앞에 진을 친 자하기니아의 내 팬들을 피하고 시내에서도 날 알아보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단순한 목적이었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녀석들은 나한테 올바른 숙녀가 되는 법을 가르치자는 신념으로 날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 그만하면 안돼? 아무렇게나 걸으면 뭐 어때서." "궁시렁거리지 마. 그런 건 전혀 여자답지 않다고. 그럼 짧은 치마를 입고 아까처럼 휙휙 발을 내딛으면 보기 좋을 것 같아?" 왜 키론 저녀석이 제일 난리를 치는 거냐구! 우어어... 하필이면 잘못 걸린 것이, 키론 녀석은 예절 선생 티센 푸르지오가 고문으로 있는 동아리 인 궁정예절부 부부장이었던 것이다. "괘... 괜찮아, 카이엔?" 린넬이 그런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옆에서 내 상태를 살폈다. 니 눈에는 이게 괜찮아 보이냐? 물론 키론이 내게 어려운 걸 시키는 건 아니었 지만 난 평소에 발걸음을 빨리 내딛는 데 익숙해서 이렇게 조신하게 걸으려니 적응도 안 되고 답답했다. "린넬, 너 자꾸 카렌이라고 안 부를 거야? 들키면 어떻하려구." "미안, 안 익숙해서." 다른 애들은 몇 번 실수하더니 바로 카렌이라는 임시 이름이 금방 익숙해졌는데(분명 재미있어 하기 때문에 그랬을 거다,) 린넬은 아직까지도 쉽 게 익숙해지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이런저런 원치 않은 조련을 겪으면서 온 관계로, 시내까지 오는 건 꽤 힘든 여정이었다. 힘들다 보니 금세 배가 꺼진 듯 배가 고파졌다. 다른 조 원들도 배가 고픈 건 마찬가지였다. 다들 늦게 자서 피곤하다 보니 아침을 제대로 다 먹지 않은 녀석들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먹을 것 걱정을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애초부터 우리 조를 완전히 휘어잡고 있는 치즈, 우뉴, 이멜츠 이 세 녀석은 우리 학교에서도 이 름난 미식가이자 현재 카이엔 점심도시락 시식평가단 멤버이기도 한 애들이다. 얘네들 때문에 조 이름이 [미소년, 미소녀와 함께 하는 식도락기 행]이 되 버린데다 이 말을 그대로 실천하려는 듯 학교에 내야 할 답사 계획서도 핀치 시 곳곳의 맛집을 순회하는, 순전히 먹을 것들 탐방으로 가득 찬 계획서가 된 것이다. 키론이 이 과정에서 한 일은 식도락 여행으로 가득찬 답사 내용을 선생들의 교육적 목적에 만족할 수 있도록 반쯤 과장으로 가득 찬 다량의 미사여구로 꾸며 제출하는 일이었다. "자, 점심은 저걸로 하자! 자하기니아의 대표적인 점심 식사, 스프란젤리 파스타!" "아자!" 치즈 녀석들은 먹을 욕심에 불타고 있었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니깐, 역시 책에서 안 나오는 보통 외국 사람들의 실생활을 익히려면 좋은 방법이야. 좋은 공부가 되겠어." 키론은 벌써부터 학교에 제출할 보고서거리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 자하기니아 요리는 잘 모르는데... 이왕에 온 김에 몇 가지 배워 가자." "나도 배울래." 린넬과 루카라는 치즈와 함께 맛집 기행을 다니면서 새로운 요리를 몇 가지 배울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멋대로 해. 하지만 딴건 몰라도 마지막 날 전날에 가기로 한 곳만은 지켜줘, 알았지?" "카렌! 목소리!" "알겠지∼이♡" "합격." "....." 지금, 나 신부수업이라도 받고 있는 걸까? 제46화 : 용병이란... 원래 나를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면서도 사실상 조를 제 멋대로 쥐어잡고 있는 치즈의 주장대로 우리는 그 스프 어쩌고 파스타를 먹기 위해 식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 카렌. 이제 지금까지 배웠던 걸 실습할 차례야." "화이팅!" 여러가지 축제가 겹쳐 시내는 번잡했고, 번잡한 만큼 식당도 북적거렸다. 게다가 지금은 점심시간이니까. 8명이나 모인 우리가 자리를 잡기는 쉽 지 않았다. 결국 2층 구석자리까지 가서야 간신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4인용 식탁 두 개를 붙여서 모여 앉은 우리들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자하기니아의 학교에서는 교복을 입지 않으니까 우리가 유클리네 출신이 라는 것은 다들 단박에 알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그 시선의 대상이 주로 나와 아시에, 특히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은 금세 느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시에만 해도 대륙 7대 미소녀의 반열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예쁘다고 들었는데 여기 있는 모두가 지금 여장한 내 모습이 아시에보다도 더 예쁘다고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면 지나는 사람의 눈길을 받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할 정도였다. "히야. 저 아가씨들 예쁜데?" "어이. 함부로 건드리지 마. 저 교복 안 보여? 꼴보니 유클리네의 귀족들 같은데 함부로 건드려서 좋을 것 없다구." "그래도 한번이라도 말 걸어봤으면 좋겠다." '다 들린다. 다 들려...' 휴우.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랬나? 어려운 단어 같은 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튀는 미모를 자랑하는 것도 피곤하 긴 하다. 그냥 적당히 멋있는 외모, 한 린넬 정도라면 난 만족하는데 왜 이렇게 튀는 인간의 몸에 빙의된 건지 원. "카렌, 인기 좋은데?" "정말이지 부러워." 치즈 패거리들이 날 놀렸다. "쳇. 난 별로 반갑지 않다고." "카렌, 말투 똑바로 쓰랬지!" "아... 알았어. 쓰면 되잖아잉... 힝..." "그렇다고 오버할 것까진 없고." 갑자기 키론 녀석은 나를 이상적인 여인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란 말씀이야. 평소에 남성으로서의 올바른 자세와 말투 이런 건 전혀 얘기한 적 이 없으면서 왜 여장을 하고 나니까 이러냐? "카렌, 좀 참어. 키론은 여자가 남자처럼 설치고 다니는 그런 건 절대 못 봐준데." "히잉.... 치즈도 있는 데 왜 나만 갖고 그러는거야?" 루카라의 말에 나는 일부러 징징거리면서 대답했다. 여자 말투... 이것도 꽤 익숙해질려니까 의외로 재미있기도 하고 꽤 중독성도 있다 이거? 으 으윽! 안돼, 이런 생각은 바로 변태로 가는 첫걸음이잖앗! 지금 나는 필.요.에 의해 여장을 하는 것 뿐이라고! 그것을 잊어서는 안돼! "어이, 아가씨. 저런 솜털 보송보송한 애들은 내버려두고 우리랑 같이 노는 게 어때?" 미녀 근처에는 항상 날파리들이 꼬인다지만 우에... 대머리에 턱수염을 기르고 웃통을 벗은 근육빵빵한 아저씨. 보기만 해도 부... 부담스럽잖아! 나도 놀라서 뒤로 주춤거리고 있는데 옆에 있는 아시에마저 내 팔을 꼭 붙드니 몸이 더 떨렸다. 저 아저씨의 시선은 움직일 때마다 내 출렁이는 가슴에 가 있었다. 기분나빠! 그래도 얼굴보다는 가슴에 눈이 가는 걸 보니 역시 아저씨는 아저씬가 보다. "어이, 시킨. 하여간 밝히는 꼴 하고는, 그런 버거운 얼굴로 접근하니까 아가씨께서 싫어하잖아. 얼굴이 안되면 센스라도 있어야지 그러니까 맨날 여자한테 변태로 찍히..." "시끄럿! 그래도 네 훼방만 없으면 잘 될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구, 스텐!" 시킨이라는 대머리 아저씨 뒤에서 대머리 아저씨를 놀라고 있는 스텐이라는 아저씨는 그나마 꽤 정상적으로 보였다. 전투 의상은 잘 모르겠지만 가죽 갑옷 같아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고, 검은 머리와 검은 수염이 날카롭게 세워져 있었다. 얼핏 보면 신경질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의외로 웃음이 꽤나 능글맞은 아저씨였다. "어차피 저 식탁에는 앉을 자리도 없잖냐. 수학여행 온 유클리네의 귀족집 아가씨 같은데 너같은 용병 나부랭이를 제대로 상대해주기나 하겠냐? "헹! 그거야 부딪혀봐야 알지! 남자라는 게 뭐냐, 끓는 피와 젊은 혈기 아니냐!" "...그 나이로 젊은 혈기 해봤자 비웃음산다고." "푸훗." 본인들은 꽤 심각하게 다투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너무 재밌어서 그만 웃음이 나왔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조원들도 다 들 키득거리면서 웃고 있었다. 그 대머리 아저씨는 우리가 웃자 화를 내려 하다가 나랑 아시에가 웃고 있는 걸 보면서 화를 내기가 뭐했던지 머 리만 긁적거렸다. "저, 아저씨. 머리카락도 없는데 긁어서 어쩌려구 그러지?" 우뉴가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일격을 찔렀고, 순간 식당 전체가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개중에는 밥 먹다 말고 음식물을 쏟아내면서 자지러지 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 서빙하는 사람들, 나중에 일거리가 조금 더 늘겠군. "너 이자식!" 그 대머리 아저씨가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쥐고 우뉴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정작 그 상태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망설이고 있었다. 지금같은 상황에서 함부로 덤벼들었다가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만 더 살 뿐이다. 그래도 그 덕택에 이 아저씨들이 질 낮은 깡패는 아니 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랬다면 벌써 사고 났겠지. 아니, 정말 그랬다면 정의의 용사가 나타나 구해 주었을려나? 그래서 나는 저 두 사람을 점심 식사에 맞이하기로 결정했다. "식탁 하나 더 끌고 와서 앉으세요. 이왕 먹는 거 같이 먹죠." "저... 정말 그래도 돼?" "네." "그럼 사양치 않고..." 치즈나 다른 애들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별 반대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기왕 여행을 온 거, 여러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으면 즐거울 테니까. 특히 키론 녀석은 자하기니아 사람들의 실제 생활에 대해 공부하려고 했지? 대머리 아저씨는 한손으로 자기네들 식탁을 들고는 우리 테이블 옆에 놓았다. 다른 사람들은 부러운 표정으로 저 아저씨 둘을 쳐다보았다. 그 사 람들도 우리 옆에 앉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대머리 아저씨가 무서운 눈으로 좌중을 돌아본 탓인지 아무도 그런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시에, 괜찮아.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있잖아." 평소에 저런 갑빠 만땅인 사람을 볼 일이 거의 없던 아시에는(사실은 나도 마찬가지지만) 조금 불안해 하는 것 같아 안심시키기 위해 살짝 토닥 이며 달랬다. "거, 이렇게 만난 거 반갑네. 후후. 난 그 명성만 들어도 산천초목이 부르르 떠는 이름난 용병, 시킨즈 루폰기라고 하지. 아가씨 이름은 뭔가?" 그러면서 시킨즈라는 대머리 아저씨는 나 쪽으로 고개를 넌지시 내밀며 물었다. 그때 검은 머리 아저씨가 손으로 시킨즈 아저씨의 머리를 끌어 당기며 말했다. "넌 꼭 예쁜 여자만 보면 내 존재를 잊어버린단 말이야. 나도 소개 좀 하자구! 흠흠. 하여간 이 망할 녀석하고 같이 얽히는 바람에 별에 별 꼴을 다 봤지. 스텐리 페밀란이라고 한다. 반갑네. 유클리네 친구들." 아저씨들의 소개가 끝나자 우리 쪽도 소개에 들어갔다. 아시에는 아직 저 사람들이 무서운지 자꾸 내 뒤에 숨어서 슬슬 피했기 때문에 내가 직 접 소개해 줄 수밖에 없었다. "호오. 카렌 루아르란 말인가. 예쁜 이름인데, 루아르 양?" "아, 네. 고마워요." 그런데 이야기하는 건 좋은데 대체 무슨 얘기를 한다냐? 게다가 더 대머리 아저씨. 노골적으로 나한테만 관심을 보이니 부담스럽다. 정확하게 말 하자면 양호선생님이 붙여 준 이 가짜 가슴에 관심이 더 가는 것 같지만... 이잇. 원래는 남자긴 하지만 대륙 7대 미소녀급인 미모의 사람을 보고 대체 보는 게 가슴밖에 없냐, 이 변태아저씨야! "아저씨, 용병이라고 하셨죠?" 그때 키론이 중간을 자르고 들어오면서 물었다. 시킨즈 아저씨는 나랑 이야기하려는 순간에 방해받아서인지 조금 언짢아 보였지만 내가 있어서 인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은 짓지 않았다. "그래." "그럼 그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암암. 들을 이야기가 좀 많을 거다. 내가 시킨 녀석때문에 맺힌 한이 얼마나 많은데..." "야, 스텐! 애들한테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마! 자... 자, 스텐이 하는 이야기는 듣지 말고." "듣고 싶어요. 아저씨이∼" 나는 키론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실습한다는 느낌으로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최대한 초롱초롱한 눈빛과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그... 그런... 그렇게 말한다면야... 알았다." 시킨즈 아저씨는 내 말에 조금 당황해하더니 결국 승락했고 스텐리 아저씨는 지금이 기회다! 라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때 키론이 내 곁으로 슬쩍 다가와서 귓속말로 이야기했다. "너... 꽤 소질이 있다? 방금 거 훌륭했어." "시... 시끄러. 방금 전 예외라고." "그러니까 지금부터 10년 전의 이야기지. 내가 시킨 녀석을 만난 것도 그 때였고." 다들 모여들어 스텐리 아저씨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랬고, 아시에도 이런 이야기에는 흥미가 가는 듯 나한테 기대는 척 하면서 슬쩍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당시 용병 세계에서 나름대로 실력있는 젊은 무사라고 자부하던 스텐리 페밀란은 자하기니아의 수도 핀치에서 열리는 무 술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이 땅에 발을 내딪었다. 핀치에서 열리는 대축제 기간의 하이라이트인 무술 대회는 재야에 묻혀 있거나 특정 국가에 소속되지 않은 소드 마스터들도 종종 참가하는, 대륙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무술 대회였다. 그런 강자들과 검을 맞대 보고 스스로의 실력을 측정하 고, 자랑하고자는 욕심에 해마다 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회에 몰려들었다. 참가 인원이 1000명이 넘기 때문에 몇 가지 테스트를 거쳐 최종예선 진출자를 100명 내외로 추려낸다. 그 다음에 두 번의 리그전을 거쳐 16명의 본선 진출자를 뽑은 다음에 토너먼트 방식으로 대결을 시키는 방식이었다. "그때 참 많은 걸 깨달았지. 우리도 꽤 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최종예선에 진출하는 것만도 힘들더라고. 힘든 테스트를 턱걸이로 통과한 다 음에 1차 리그전을 시작했는데, 그때 젤 처음에 상대하게 된 녀석이 시킨이었지." "그때도 대머리였나요?" 우뉴가 끼어들면서 질문했다. 대머리라는 데 상당히 집착하는 것 같은걸, 이녀석. "이놈아! 그때는 단지 삭발한 거였다고!" "그때부터 원형탈모증이 있어서 홧김에 다 쳐버린 거라 하지 않았나, 시킨?" "...젠장. 머리 깎은 건 아직도 후회하고 있어. 설마 머리가 더 이상 나지 않을 줄이야..." 시킨즈 아저씨는 머리 이야기만 나오면 스트레스가 팍팍 쌓이는 듯 머리카락도 없는 머리를 양손으로 자꾸 쥐어뜯었다. 그리고 갑자기 책상에 손을 뻗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스텐에게 물었다. "너, 왜 술을 안 시켰어?" "점심부터 왠 술이야? 게다가 자라나는 소년들 앞에서 취한 아저씨꼴 보여야 쓰겠냐?" "쳇." "그럼 이야기를 계속하지. 그래서..." "스프란젤리 파스타 8인분하고 브로콜리 치킨 6인분 나왔습니다. 그리고 라즈베리 파이도 있고요. 예쁜 외국 손님들이 오신 보너스에요. 그럼 이 만. 호호호." 그때 점심 식사가 나오는 바람에 잠깐 이야기가 중단되었다. 브로콜리 치킨이라는 건 저 용병 아저씨들이 시킨 모양이지? 6인분이라서 꽤 양이 많아 보였지만 곧 두 사람이 게걸스럽게 치킨을 먹는 모습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하긴 저 갑빠를 유지하려면 많이 먹어야 할 거다. "근데... 치즈. 그걸로 충분해? 모자랄 거 같은데..." "괜찮아, 아시에. 점심 많이 먹으면 간식을 제대로 못 먹잖아. 식도락기행을 온 의미가 없어진다고." 치즈하고 우뉴 녀석. 저녀석들도 거뜬히 3인분은 먹을텐데 1인분만 시킨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군. 그렇게 생각하며 나도 뭔지 알수없는 연분홍빛 소스가 드레싱된 파스타를 포크로 감아 먹었다. 스텐리 아저씨는 시킨즈 아저씨랑 먹을 거 놓고 아웅다웅 다툰다고 이야기를 계속 해 주지 못하 고 있었다. 이야기는 밥 먹고 들어야겠군. 그나저나 저 나이 되도록 저렇게 티격태격 거리다니 사이가 참 좋군. 정말 부러... 부럽다? 그래... 이곳으로 오고 나서 새롭게 가족들이 생기고, 친구들이 생겼지만 아직도 마음속에 있는 알수 없는 공허감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잊자 고 결심했으면서도, 한국에서의 기억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가끔씩 그때를 떠올리는 것은 역시 그 때문이겠지. 친구. 아직 술맛은 잘 모르지만 내겐 같이 술 한잔 나누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때론 다투기도 하는 사이좋은 친구가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는 문길이 녀석이 그 친구라는 개념에 그래도 제일 가까운 녀석이었는데...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시나, 아가씨? 아하, 알았다. 혹시 이 시킨즈님의 멋진 모습에 반해..." "말이 될 만한 소리를 해라. 시킨. 하여간 이 남은 치킨들은 내가 고맙게 먹어주마." "어, 그래? 그럼 나는 대신 이 라즈베리 파이를..." "무슨 소리에요? 이건 우리들한테 보너스로 준 거지 아저씨들 게 아니잖아요!" "에이... 짜게 굴지 말고 좀 나눠 먹자. 어차피 그... 저 카렌과 아시에한테 온 걸텐데 너희들이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가 있냐? 치즈와 시킨즈 아저씨가 가게 종업원이 보너스로 준 라즈베리 파이를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 우뉴와 이멜츠는 치즈를 응원했지만 스텐리 아저씨 는 시킨즈 아저씨를 돕지 않았기 때문에 시킨즈 아저씨는 고립무원의 상황이 되었다. "그럼 파이를 두고 승부를 하는 건 어떨까요?" 그때 키론이 한 가지 게임을 제안했다. 모두의 시선이 키론에게 향했다. 키론의 손에는 어느 새 카드 뭉치가 한 아름 들려 있었다. "고 스타르 게임인가." "맞아요. 도전할건가요?" 고 스타르 게임은 카드 게임의 일종이다. 상당히 복잡미묘한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가 본 느낌으로는 고스톱과 포커를 섞어 놓은 듯한 게 임이었다. 평소에는 자잘한 돈이 왔다갔다하며 가볍게 즐길 수 있지만 갑자기 어느 순간엔가 판돈이 확 커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꽤 중독성 있는 게임이었다. 어제 나와 아시에를 뺀 우리 조원들이 방에서 모여앉아 밤을 센 게임이기도 했다. "물론이지, 남자로서 그런 승부에 발을 뺀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어이, 시킨. 너 저번에도 도박판에 끼어들었다가 엄청 날렸잖아. 이번엔..." "걱정마 스텐. 그래봤자 파이 승부일뿐인데." 그로부터 1시간이 지난 무렵... 시킨즈 아저씨는 상당한 돈을 잃었다. 스텐리 아저씨가 중간에 도와준다고 끼어들어 보았지만 키론의 수완에 혀를 내두르며 손해를 최소화하는 선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원래는 파이 내기였던 승부가 내깃돈까지 가게 된 이유는 시킨즈 아저씨가 파이 내기 승 부에서 너무 어처구니없는 패로 지는 바람에 오기가 들어 실제 돈을 걸고 재대결을 요청한 까닭이었다. "크오오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분명 사기를 친 거라구, 저 자식!" "인정할 건 인정해라. 시킨. 키론이라고 했나? 너, 평범한 사람이 감당할 만한 레벨이 아니군." "감사합니다. 루폰기 씨도 이제 포기하는 게 좋을 걸요. 지금까지는 슬슬 봐주면서 했지만, 계속 귀찮게 굴면 제 진짜 실력을 발휘하는 수밖에 없 습니다." 놀랐다. 단순히 아빠를 형사로 둔 공부 잘하는 애로만 생각했던 키론이, 공정예절부 부부장이며 모범생으로 이름난 녀석이 도박을 저렇게 잘 하 는 애였다니 그런 측면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그... 그럼, 키론. 어제 밤새 했던 그 게임에서는..." "적당히 놀면서 한거야. 우뉴. 맘만 먹었다면 30분도 되기 전에 너네들 재산 전부 쓸어갈 수 있었다." "....." "더 이상 하면 정말 땡전 한푼도 없어져. 시킨." "쳇. 알았다구, 그만 하면 될 거 아냐!" 시킨즈 아저씨는 그러면서도 분하다는 듯 여전히 씩씩거렸다. "뭐, 대신 파이는 그냥 드릴 테니까 먹으세요." "싫어!" 돈을 잃어 기분이 상당히 상한 듯 시킨즈 아저씨는 키론의 선심성 제의를 단박에 거부했다. 그래서 결국 치즈 패거리들이 좋아라 파이를 먹었다. "하여튼 쉽게 흥분하기는. 맨날 잃으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끈질기게 계속 도박판에 끼는지 알 수 없다니깐." 스텐리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며 아까 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시킨즈 아저씨는 결국 참지 못하고 술을 시켜 마시며 화를 식혔고, 우리들도 각자 음료수를 시켜 먹으면서 이야기를 경청했다. 스텐리 아저씨와 시킨즈 아저씨의 실력은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고 한다. 그때의 승부는 결국 시간초과로 무승부로 끝났고 둘 다 1차리그 예선에서 좋지 못한 성적으로 탈락했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로가 서로에 대해 특별한 감정같은 건 없었다고 한다. 문제는 대회가 끝난 후부터 일어났다. 비록 1차 리그에서 떨어졌다고 해도 100명 남짓 남는 최종예선까지 올라갔다는 건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였고 그 모습을 눈여겨 둔 용병 길드에서 둘을 고용한 것이다. 그런데 그 용병 길드에서 일을 맡기면서 내건 조건에 둘이서 페어를 이뤄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두 사람이 서로 스타일이 달랐기 때문에 둘이 조화를 이루면 일을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때부터가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이게 된 시발점이었지." "나야말로 그때부터 잘 나가던 시킨즈가 끝장나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지만 당시 둘 사이는 그야말로 물과 기름 같았다고 한다. 두 사람의 성격이 너무나 달랐던 탓이었다. 시킨즈는 성 격이 불 같고 쉽게 흥분하며, 직설적인 반면, 스텐리는 침착하고 신중했으며 쉽게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는 두 사람의 검술 스타일에도 그대 로 반영되어 시킨즈는 공격 일변도의 파괴력 강한 검술을, 스텐리는 초반에 방어하며 적을 파악한 후 역습에 나서는 검술을 구사했다. "그래서 첫 임무만 끝나면 둘 다 바로 찢어질 생각이었지." "그런데 어떻게 지금까지 같이 다니게 된 거죠?" 린넬의 질문에 스텐리 아저씨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주저하더니 시킨즈 아저씨가 마시던 술을 뺏아서 들이켰다. "야, 왜 남이 마시던 술은 뺏아 먹고 그래?" "너만 마시려고 시킨 거 아니잖아? 게다가 돈 잃어서 술값이나 있냐?" "에, 방금 그게 전재산이에요?" "저놈한테는 저축이라는 개념이 없어. 몸이 재산인데 나중에 나이들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쯔쯔." 스텐리 아저씨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면서 말했다. 확실히 두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이었다. 그렇게 시끌벅적한 이야기를 나는 조 신하게 웃으면서 경청했다. 아까 키론한테 여자다운 애교 말투에 소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터프 하게 굴 수도 없고 결국은 되도록 말을 아끼고 있기로 마음먹었다. "괜찮아, 괜찮아. 이번 무술 대회에서는 반드시 16강 토너먼트전까지는 올라갈테니까. 그러면 짭짤한 일감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시킨즈 아저씨는 껄껄 웃으면서 자신있게 이야기했다. "내가 저놈과 다니면서 확실히 얼굴 하나는 좀 뻔뻔해지게 됐지. 그 실력으로 16강은 무슨 16강이야." "어허. 이 사람이. 그래도 스텐 너 때문에 요즘은 꽤 성질 많이 죽였다고." "10년동안 다니면서 성질 죽인 게 그 모양이냐. 참 발전도 없다." 그렇게 말하면서 스텐리 아저씨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치즈는 원래 밖으로 나돌아다니면서 여러가지 자하기니아 특제 음식들을 맛보는 식도락기행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조금 불만을 털어놓았지만 나와 아시에, 린넬과 키론뿐만 아니라 루카라와 우뉴, 이멜츠조차 저 용병 아저씨 들의 이야기에 더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이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두 사람이서 서로 씹고 씹어 가면서도 끈끈한 우정을 과시하는 모습이 내게는 더 관심이 간 탓도 있었다. 왜 그런지 그런 모습이 자꾸 머릿속에 다른 장면들과 겹쳐 가면서 부러움과 질투심이 났다. 이미 나는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무언가가 모자란 걸까... 용병 길드에서 임무를 맡기면서 결정해준 페어가 찢어지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만큼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 내 버렸기 때문이다. 스텐리는 시킨즈, 시킨즈는 스텐리 대신 자기 자신을 그 자리에 놓았다고 하면 절대 불가능했을 만큼의 성과였다. 시킨즈는 스텐리에게는 없는 과감성과 용기가 있었고, 스텐리는 시킨즈가 가지지 않은 침착함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이질적인 사람이 섞이면 호흡이 잘 안 맞기 마련인데 이 두 사람의 기질이 어떻게 섞인 노릇인지 전투에서 놀랄 만한 성과를 발휘해낸 것이다. "역시 내 눈은 틀림이 없군. 하하핫. 앞으로도 계속 페어로 활동해 주게. 자네들 둘이 함께라면 훨씬 더 어렵고 중요한 임무도 안심하고 맡길 수 있겠군." 임무를 간단하게 마치고 가자 일을 맡긴 용병 길드의 대장은 능글맞게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성과가 어쨌건 간에 무조건 찢어 졌어야 했다. 사이 나쁜 페어가 좋은 성과를 내는 법은 그다지 흔하지 않는데다 장기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칠 리 없으니까. 하지만 뒤에 이어진 용병 대장의 말이 두 사람의 발목을 잡았다. "자네들에게 맡길 다음 의뢰는... 어디보자. 하파킨 백작 영애이자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미녀인 세리실 하파킨의 호위를 지원하는 건데, 너무 유명 하지 않으면서도 실력이 빼어난 용병을 추천해 달라더군. 할텐가?" "하겠습니다." 시킨즈와 스텐리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서로를 쳐다보더니 흥!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방금 서로에게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기 때 문이었다. 두 사람이 발견한 서로의 공통점이란 '여자를 밝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페밀란 아저씬 별로 여자를 밝히는 것 같지 않은걸요?" 변태 아저씨틱한 대머리 시킨즈 아저씨는 그렇다쳐도 스텐리 아저씨는 별로 여자를 밝히는 것 같이 보이지는 않는데? 궁금해진 나는 직접 물었 다. "후후. 성 대신에 스텐리 아저씨라 불러도 돼. 난 이미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도 있으니까. 지금도 그렇게 여자를 노골적으로 밝힌다면 그건 철.이. 안.든. 녀석이지." "공.처.가. 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데, 스텐?" "너야말로 나이 생각 좀 해라. 시킨 너, 그대로 살다 그대로 죽을 생각이냐?" "...남이사." "지금 여기 있는 루아르 양이나 브라타뉴 양만큼은 안되지만 당시 하파킨 백작 영애의 미모도 자하기니아에서는 꽤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귀가 솔 깃했거든. 그런데 그놈의 용병 길드에서는 둘이 페어를 이뤄야만 보내준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손을 잡았지." "암. 그랬지. 근데 이상하게 이놈하고 같이 다니니까 이상하게 임무가 술술 잘 풀린단 말이야." "용병 길드에서도 자꾸 그렇게 유도했고... 그렇다 다니다 보니까 저런 녀석이도 이래저래 정이 든거다." "흥. 마치 선심쓴것처럼 얘기하네. 오히려 네가 나한테 더 의존했잖아." "뭐얏!" "자, 자. 두 분 다 그만하시고요. 저흰 이제 가 봐야 하겠거든요? 언제까지고 여기서 이야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이야기가 대충 끝났다 싶자 치즈가 일어서며 말했다. 하기야 지금쯤 맛있는 거 잔뜩 먹고 있을 시간인데 이런 이야기나 듣고 있는 건 그녀에겐 엄청 지루했던 것 같았다. 아마도 지금까지 이야기를 끝낼 기회만 노리고 있었나 보다. "이런, 이런. 즐거운 여행을 온 학생들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나 보군. 미안하네." "사과할 것 까지 있나. 스텐. 우린 여기 여러 번 와서 지리를 잘 아니까 시내를 안내..." "시킨. 너 무술 대회에 안 갈 거냐? 오늘부터 대회 시작이라고. 오후 늦게 우리가 예선을 치를 차례라는 걸 잊었어?" "그래도 조금만." "잔말말고 따라와. 너 때문에 오래 전에 2년 연속 지각패한거 생각하면 열 오르니까. 그럼 재밌게 놀아. 유클리네 친구들." 그렇게 말하며 스텐리 아저씨는 시킨즈 아저씨를 붙잡고는 질질 끌고 나갔다. "그럼 다음에 또 봐. 예쁜 아가씨들∼ 루아르 양, 가슴 처지지 않게 잘 관리해∼" "아저씨∼잇!" 그렇잖아도 가짜 가슴 주제에 쓸데없이 커서 제멋대로 출렁거리는 게 짜증나 죽겠는데 끝까지 저러기냐? 흔들. 눈앞이 흐릿해지면서 오른쪽 귀에 통증이 느껴졌다. 예전에 시르팡에게 납치당하기 전에도 그랬지. 예지의 귀걸이가 지금 뭔가를 보여주려는 걸 까? 나는 귀에 손을 대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피.... 피? 검붉은 피가 보였다. 보름달이 뜬 어두운 밤의 월광에 피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칼날이 날아와 사람들을 베었고 칼날이 달빛에 한 번 번쩍일 때마다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영상뿐만 아니라 진한 혈향(血香)과 섬뜩한 공포감마저 동시에 온 몸의 감각으로 전해져왔 다. 그리고 내 앞에서 죽어가는 두 사람은... 아까 그 용병들? "우와아아악!" 나는 헐떡거리면서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자 어느 새 조원들이 날 부축하며 걱정스런 눈빛을 던졌다. "카이... 아니 카렌, 쾐찮아?" "으, 응. 잠시 어지러웠던 것 뿐이야." "갑자기 헛것이라도 본 건 아니지?" "괜찮다니깐." 나는 아시에가 건네 준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으며 애써 괜찮은 척 했다. 하지만 예지의 귀걸이가 보여 준 끔찍한 장면은 눈앞에서 쉽게 사라 지지 않았다. '방금 그건... 뭐지? 게다가 방금 만난 시킨즈 아저씨와 스텐리 아저씨가 나오다니...' 불길한 느낌이 몸을 휘감았다. 꼭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수학여행을 그만두고 당장에라도 돌아가는 편이 더 낫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 니까. 하지만 막연한 생각만으로 이곳저곳을 돌며 견문을 넓힐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겠지. 나중에 방에 들어가면 레이엔한테 연락해서 해석이라 도 부탁해봐야겠다. "카렌. 방금 비명 부주의했어. '우와아아악'이 아니라 '꺄아아아악'이라고 했어야 했다구. 그리고 최대한 애처롭게 감정을 살려서." "....." 키론은 이런 상황에서도 나에게 '여자다움'을 가르치는 것을 끈질기게 계속했다. 어쨌건 그 후로는 여러 곳을 다니면서 축제를 구경하면서 치즈의 원대로 여러 가지를 먹었다. 비록 이름은 달랐지만 핫도그나 햄버거와 비슷한 음식도 있었고 심지어 아이스크림과 솜사탕까지 길 곳곳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팔고 있었다. 치즈를 중심으로 한 다른 애들은 열심히 군것질을 하면서 구경을 하고 다녔지만 위장이 작은 나와 아시에는 별로 많이 먹지 못하고 솜사탕만 핥을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첫날 일정을 마쳤다. 호텔 입구에서는 자하기니아의 내 팬들이 내 행방을 찾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갈 때와 마 찬가지로 나는 아무 의심도 받지 않고 호텔로 들어올 수 있었다. 누군가가 내 얼굴 형태가 초상화에 나온 얼굴과 너무 유사하다는 의혹을 던졌 으나 또 역시 커다란 가슴 문제 때문에 곧바로 면박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왠지 싫다. 호텔로 들어온 나는 다른 우리 학교 애들이 여장한 날 눈치채지 전에 빨리 양호 선생님 방으로 후닥닥 뛰쳐들어가서 원래의 카이엔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무엇보다도 걸을 때마다 대책없이 흔들리는 가슴을 떼낸 것이 너무 후련했다. 원래는 호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해야 했으나 많은 학생들이 밖에서 워낙 열심히 군것질을 한 터라 저녁을 먹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 마 저러다가 또 나중에 야식 사먹으러 가겠지. 저녁 식사 후에 나중에 강당에 모이기까지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시에와 방에 들어온 후 귀걸이를 통해 레이엔을 불렀다. 점심 때 본 그 피빛 난무한 풍경이 너무 실제상황처럼 리얼한 것이 충격이 큰 까닭이었다. [아, 카이엔 형이네. 무슨 일 있어? 지금 저녁 먹고 있으니까 잠깐만 있다 다시 불러.] 아무래도 저녁 식사를 방해한 것 같네.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나는 다시 레이엔과 접촉을 시도했고 레이엔에게 오늘 있었던 일과 예지의 귀걸이 에서 본 내용을 말해주었다. "이대로 있다가 뭔가 큰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글쎄. 저번 시르팡 사건의 경우에는 가까운 시일에 일어났지만 꼭 모든 예언이 근시일에 일어난다고는 할 수 없어.] "그럼 괜찮은 거야?" [당연히 아니지. 내 모든 능력을 쏟아 만든 귀걸이를 뭘로 보는 거야? 일단 귀걸이가 보여주는 내용은 상황에 따라 내용이 조금 달라질 수는 있 어도 반드시 일어난다고!] "그... 그럼 어떻해야 해?" [글쎄... 일단 오늘 본 용병들이 나왔다고 하니까 수학여행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일단 높게 봐야겠지. 일단 세이렌 누나랑 사이엔 형 한테 연락은 해 놓을께. 무슨 일이 있으면 단번에 달려갈 수 있게 말이야. 형도 무슨 일 있으면 바로바로 연락해 줘." "아이렌은?" [수학여행 때 걔 달고 다니고 싶어? 그리고... 알잖아?] 아직 열심히 '작업'중이니까 방해하지 말란 얘기군. "알았어. 그럼 부탁해." [어.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 "...카이. 무슨 일 생기는 거야? 무서운 일이..." 아시에가 옆에서 내 얘기를 듣고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레이엔과의 이야기는 되도록 아시에가 없는 곳에서 하고 싶었지만 아시에가 떨어지려 하 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괜찮아. 아무 일 없을거야. 내게도, 시에한테도.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당장 세이 누날 부를께." 세이렌 누나의 이야기를 하자 아시에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응. 세이 언니 보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한구석에 자리한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마법무구는 좋지만 이 예언의 귀걸이는 어떻게든 좀 빼는 게 좋지 않을까? 미래를 안다고 해도 그것이 불길한 미래라면, 게다가 그 미래를 막을 수도 없다면 오히려 안다는 것이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 지 않을까? 레이엔한테는 미안하지만 수학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한번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 제49화 : 취중난동 "자, 카렌. 니 차례야." "카렌, 지금은 고를 외칠 때라고, 고를!" "야! 남자로 돌아왔느데 왜 자꾸, 카렌, 카렌 하는 거야?" "카렌. 내가 여성스럽게 말하라고 누누히 강조했지!" 이곳으로 수학여행을 온 우리 학년 전체이 모인 모임이 끝나고 나서(사실 전원은 아니었다. 도박장으로 빠졌거나 여자 꼬신다고 호텔에 안 들어 온 놈들도 여럿 있었다.) 점호를 한 후에 우리 조원 전원은 남자애들 방으로 몰려서 약간의 알콜 음료와 함께 고 스타르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녀석들이 지금은 여장을 풀고 완전히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데도 자꾸 카렌이라고 부르잖아! 어쩐지 너무 쉽게 이름을 불러줄때부 터 예상했어야 했는데... 완전히 재미를 붙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키론마저 저러니... "야, 키론. 내가 남자 모습으로 아잉∼ 너무해∼ 그런 식으로 말하면 역겹지 않아?" "아니. 잘 어울려." "맞아맞아. 또 해봐. 또." "....." 아무리 내가 대륙 제일의 미소년이라도 해도 왜! 왜 남자로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냔 말이야! 흑흑. "어쩔 수 없네... 카이. 수학여행 기간동안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지내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 전혀 위로가 안 돼! 아시에! 게다가 흥분해서 열이 오른 탓인지 게임도 쉽게 잘 풀리지 않고 있었다. 현재 키론이 게임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데도 그랬다. 내가 게임의 규칙 만 숙지했을 뿐 아직 완전한 요령을 익히지 못한 것에도 원인이 있지만... 키론은 아까 낮에 시킨즈 아저씨를 처참하게 뭉개 버린 이후 다들 키 론이 게임에 들어오는 것을 기피한 까닭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훈수나 두고 있었다. 고 스타르는 최소 2인에서 최대 5인까지 할 수 있는 게임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키론이 또 어디선가 가지고 들어온 술과 안주를 마시면서 계속 멤버를 교체해가며 게임을 계속했다. "좋아. 이번에는 완벽한 상황이야, 고!" "이걸 어쩌지. 미안한테, 카렌?" 그러면서 린넬 녀석이 내놓는 건 주술 카드 '미모의 레이디'카드. 내가 힘겹게 기사 종류 카드 세 장을 모아 만든 '삼총사' 조합을 '분열'시켜 못 쓰게 만든다. 게다가 린넬이 뒤집은 카드는 '장미꽃송이의 청혼'카드. 린넬이 이미 가진 '백마탄 왕자'카드와 조합이 되어 '웨딩 마치'의 조합으 로 단번에 판을 뒤집어 버렸다. "사기야, 이거언!" 나는 절규했다. "원래 사기게임이라는 걸 알면서 그러긴. 그래서 더 중독되는 거지." 키론이 능글맞게 웃으면서 말했다. "에이, 몰라! 난 이제 그만둘래!" "조금만 쉬다가 돌아와, 카렌∼ . 너 아니면 잃은 내 돈을 보충해줄 사람이 없어!" "이젠 안 돌아와! 절대!" ...사실은 아까도 이런 말 하고는 판을 나갔었다. 하지만 옆에서 게임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자꾸 게임에 끼어들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도무지 게임에 참가하지만 하면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는다. 기사 셋을 모아 '삼총사'를 만들려 하면 꼭 뒤집을 때 '혼돈의 흑기사'가 끼 어 패를 망치질 않나. 흑마법사, 흑기사, 흑룡, 마녀를 모아 '암흑군단'을 만들려고 치면 꼭 가장 중요한 '타락한 마녀'카드는 상대쪽에서 가지고 도무지 내줄 생각을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 점에서 키론은 정말 대단한 녀석이었다. 한번 시험삼아서 진짜 실력을 보여달랬더니 단박에 쓰리 고에 양박을 씌우는 것이었다. 흑룡, 백룡, 적룡, 청룡을 모두 모아 '드래곤 마스터즈'에다가 '암흑군단'을 동시에 만들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세 번째 판에서 평생 가도 한 번 보기 힘 들다는 '사신소환'을 눈앞에서 보여 준 것이었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카드와 키가 되는 '순결한 무녀'카드가 모이고 자기가 딴 카드에 성별이 남성인 기사나 마법사 종류의 카드가 하나도 없어야만 발동되는 '사신소환'은 포커로 치면 로열 스트레이트 플래시 만큼 보기 힘든 거라고 한다. 그 이후로 키론이 게임에 끼어들지 못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들에게 '따'당한 키론은 몇 번 게임 진입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자 훈수를 두 며 돌아다녔고, 그것도 면박을 받자 은근슬쩍 술 먹이기 작전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그렇지만 그걸 우린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게다가 키론이 사온 술은 맛있으면서도 자기가 취했다는 사실을 쉬이 느끼기 어려운 종류였다.(한마디로 비싼 거였다.) 먹고 남은 빈 병이라도 많이 보였으면 자제하고 안 먹었겠지만 키론은 자기가 게임에 전혀 안 낀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눈에 안 띄는 구석에 빈병들을 전부 숨겨 두었다. 우리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만취한 상태였다. 심지어 술을 잘 마시지 않는 아시에조차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 그만큼 키 론 녀석은 한번 실행하기로 결정하면 무서운 능력을 발휘했다. "카이∼ 나 카이엔 너 먹고 싶어어∼♡" 치즈는 혀 꼬인 소리로 말하며 몸을 배배꼬았고, "멋진 우뉴!" "사나이 이멜츠!" "합체, 크로스!" 우뉴와 이멜츠는 서로 팔을 마주치며 잘 놀고 있었다. 아시에는 그대로 힘을 잃고 쓰러져 버려 방 구석으로 치워 놓아야 했다. 나도 제정신을 차 리지 못하려는데 사람을 치우려니 너무 힘들었다. 루카라와 린넬은 아직 치즈 패거리들처럼 맛이 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꾸 비틀거리고 흐느 적거렸다. 오로지 멀쩡한 것은 키론뿐이었다. 우리에게 술을 권하며 치사하게 저 혼자만 요령껏 술을 슬슬 피해 나갔던 것이다. "키로오온∼ 너어∼" 남이 들으면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지금 나는 그런 걸 느낄 정신이 아니었다. "자, 카렌. 취해도 여자답게 귀엽게 취해야지." "나안∼ 카렌이 아냐아∼ 카이에엔이야아. 그렇게 마알하며언 시러어어어∼♡"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워낙 정신이 몽롱하고 흐릿했으니까. 그 때 뒤에서 무언가가 날아와 내 머리를 툭 쳤고, 가벼 운 충격임에도 불구하고 취한 나는 힘없이 쓰러졌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내 머리를 친 물건의 정체를 보았다. 베개였다. "머야아아아아." "우∼ 하하하. 나의 승리다." 린넬이 승리의 V자를 그리면서 씨익 미소지었다. 저놈이 베개를 던졌군. 승부냐? 마다할 이유가 없지. 나도 간다! "우쒸이. 복수다앗!" 나는 린넬이 던진 베개를 들고 바로 린넬에게 던졌다. 하지만 취기에 힘이 실리지 못한 베개는 허무하게도 린넬 앞에 떨어져 버렸다. 그런데 웃 긴 것은 취한 린넬이 그런 메개를 피하려다가 저 혼자 비틀거리면서 넘어져 버린 것이다. "꺄하하하하" "나도 공격!" "받아라아!" 그리하여 분위기는 순식간에 베개 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꺄호오! 이것이 바로 수학 여행의 하일라이트이자 최대 묘미지! 퍽퍽 퍼퍼퍽 열심히 맞고 깨지고 두들기는 소리가 방 안에 가득한 가운데, 그 와중에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등불마저 꺼졌고 그 이후로는 도저히 상황이 어 떻게 된 지 기억하지도 못한 채 다음 날 아침을 맞았다. 제50화 : 시드의 검 "으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속이 뒤틀릴 듯이 쓰렸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숨마저 탁탁 막혔다. 알 수 없는 꼬질꼬질한 냄새도 나고... 키론 녀석... 마실 때는 몰랐는데 대체 얼마나 먹인 거야? 마실 때는 몰랐는데 깨고 나니까 너무 괴롭다. 하긴 고2가 술을 마셔봤자 얼마나 마셔봤겠냐. 게다 가 같이 마실만한 친구도 없었으니까... 머리가 몽롱하고 어지러운 가운데 간신히 눈을 뜨고 일어나려 했더니 내 머리 위에 뭔가가 걸리적거린다. 이건... 누군가의 다리? 나는 뜬금없이 눈앞에 보이는 다리를 옆으로 치우고 비실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그 다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나는 린넬의 허벅지 사이에 얼굴이 끼여 있었던 것이다. 어제 내가 뭔 짓 했 더라? 막 베개 싸움을 했고 그 다음부턴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데... 왜 내 얼굴이 쟤 양 허벅지 가운데 끼여 있냐구! 아까 전에 숨이 막히고 꼬 질꼬질한 냄새가 난 건 그것 때문이었군. 그런데 어떻게 하면 사람 허벅지 사이에 끼여 잘 수가 있냐? 나중에 린넬한테 물어봐야겠다. 걔도 기억 이 날 지는 의심스럽지만. 방 전체를 둘러보면서 본 광경은 더 가관이었다. 우뉴와 이멜츠는 둘이서 밤에 뭔 짓을 했는지 옷이 반쯤 벗겨진채 서로 껴안고 자고 있었고 치 즈는 차마 보기 민망한 모습으로 방바닥에 팔다리를 쩍 벌리고 쓰러져 있었다. 아시에는 그나마 멀쩡하게 구석에서 찌그러져 자고 있는데... 아 맞다. 아시에는 빨리 쓰러져서 한쪽으로 치웠었지. 방 곳곳에 베개가 찌그러져 널부러져 어제의 처참한 전투 흔적을 보여주었다. 술 쏟아진 곳도 있고... 낮에 방 치우러 오는 아줌마들, 욕 좀 많이 하겠군. 그런데 키론과 루카라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거지? 하지만 일단 의문은 접어두고 나는 당장 일어나 급한 용변을 해결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 들어간 나는 볼것 없이 바로 변기의 위치를 향해 옷을 내리고 물총을 발사했다. 근데 왜 그런지 졸졸졸거리는 소리가 안 난다? 왠지 이상해서 밑을 내려다보았더니... 흐에엑! 세상에! 루카라가 변기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고 나 는 거기에다 소변을 갈기고 있었다! 변기 밑에는 토사물이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변기에 토하고 난 후에 그대로 쓰러진 모양이었다. 그걸 모르고 그냥 애매한 사람한테 누런 액체를 뿌려버렸으니 어떡한다냐? 그냥 입 씻고 넘어가? 그렇다고 해도 여자앤데 아침부터 흉한 꼴 보 여주기는 싫어서 나는 수도꼭지를 틀어 대야에 물을 가득 담아 루카라에게 뿌렸다. 오줌도 씻어내고 누린내도 지우고 덤으로 사람도 깨울 수 있 는 일석이조의 좋은 방법이었다. 옷은 좀 젖겠지만 말야. "우웅..." 물벼락을 맞은 루카라는 정신이 드는지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여긴... 어디... 앗!" 그런데 루카라가 일어서려다가 바닥에 흥건히 고인 물에 미끌어졌다. 그리고 하필이면 내 쪽으로 넘어졌다. 나같이 가녀린 몸으로 루카라를 받아 내라는 건 무리다. 게다가 바닥도 젖어 있었으니까. 나는 루카라와 함께 그대로 욕조 바닥에 쓰러졌다. "아야야." 아프다고 말은 했지만 그래도 심각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사이엔 형의 기혈환은 내가 받는 물리적인 충격을 크게 줄여 주니까. 그래도 욕조 바닥 이 워낙 단단한지라 약간의 통증은 있었다. 그런데 이건 쓰러진 나 위에 루카라가 올라탄 자세... 아냐? 이 상황은... 어쩐지 남들의 오해를 살만 한 로맨틱한 상황... "웁..... 우웨엑" ...이 결국 되지 못하고 말았다. 현실은 꿈과는 달리 가혹했다. "카이엔, 정말로... 정말로... 미안해!" 루카라는 나에게 고개를 거듭 조아리며 사과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욕실에서 내 위에 올라탄 루카라는 화장실 변기에 쏟은 1차 토사물에 이어 2차 토사물을 내 얼굴에 쏟아냈던 것이다. "아... 아냐. 난 괜찮아. 어제 그렇게 마셨는데 그럴 수도 있지 뭐." 하지만 난 양심에 찔리는 구석이 있어 화를 내지 않고 그냥 웃으면서 넘어갔다. 나도 그런 짓을 해놓고 일방적으로 사과만 받기에는 내 양심이 너무 괴로웠다. 그 와중에 다른 애들도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때 방 밖에서 키론이 들어와 말했다. "일단 우리 조 아침 점호 미뤄놨어. 지금은 아침식사 시간인데... 아무래도 우리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더라고. 식사하러 온 사람 이 얼마 없는 걸 보니." 키론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등학교에서는 선생들이 규제를 해도 술을 가져와서 마시곤 하는데 여기처럼 학생들 입김이 엄청 센 곳은 말 할 필요조차 없겠지. 인솔교사들도 마지막 날에 우리들이 한 명도 실종되는 사고 없이 돌아가는 것이 최대의 목표라니 말야. 자율적으로 숙제만 제대로 하면 왠만한 일은 간섭하지 않았다. 심지어 재작년에는 수학여행 기간에 애를 밴 여학생이 있어 문제가 됐다지 아마? 원래는 키론한테 어제 일에 관해서 따져야 했지만 다들 헬렐레∼ 하며 축 늘어진 게 그럴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는 곧 전쟁이 벌어졌으니... 그것은 화장실 쟁탈전이었다. 원래 키론, 우뉴, 이멜츠, 린넬 네 명이 자는 방에 여자방에서 치즈와 루카라가 놀러 왔고 나와 아시에도 와서 같이 놀다가 그대로 자버렸으니... 총 8명의 인원이 있는데 화장실은 하나니 문제가 안 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중 세 명은 여자잖아?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호텔 4인실이라서 화장실과 욕실은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는 거였다. 일반 여관 4인실에나 호텔 2인실에는 화장실과 욕실이 같이 있다고 하니까 말야. "엿보지 마! 너네들!" "헹. 누가 치즈 같은 퉁퉁한 몸매 보러 간대?" 우리 조원들이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나와 아시에는 화장실 쟁탈 인구밀도도 줄일 겸 일단 우리 방으로 돌아가서 화장실과 욕실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아시에는 얌전히 자서 상태가 가장 멀쩡했고, 나도 루카라가 내 얼굴 위에 토한 이후에 좀 씻었기 때문에 그나마 덜 꾀죄 죄해 보였다. 게다가 초 미소년 미소녀인 우리가 숙취 상태에서도 가장 멀쩡해 보인 것도 한 이유였다. 내가 나갈 때까지도 남자애들이랑 여자애들은 누가 먼저 사용하느냐 여부를 놓고 다퉜다. 남자애들은 남자들이 아침 일을 보는 동안 여자들이 샤워하고 나가라고 했지만 여자애들은 붙어 있는 욕실에 엿보러 올 우려가 있다며 여자들이 화장실과 욕실을 모두 사용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주 장하는 모양이었다. 그냥 여자애들도 나가서 자기들 방에서 씻으면 안 될까 라고 말해봤지만 치즈도, 루카라도 머리카락이고 얼굴이고 완전히 헝클어진 몰골로 밖에 나가기는 영 창피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아시에조차도 여기서 씻고 가려다가 내가 혼자 나가버린다고 하니까 그제서야 날 따라왔으니... 뭐, 나로서는 어찌 되건 상관없나? 이미 난 내 방에서 아시에가 씻고 나오기만을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으니. 룸서비스로 시킨 커피를 홀짝거리면 서 그렇게 노닥거리다가 양호선생님이 날 부르며 문을 노크하자 그제서야 내 처지를 깨달았다. 우아아아악! 오늘도 그 괴상망측하게 큰 가슴을 달고 다녀야 한단 말야? 어떻게 저항하려고 했지만 양호선생님의 주장은 단호했다. 어제 나를 찾지 못하고 허탕을 친 애들이 우리 학교 학생들 일부를 매수해서 내가 어 디로 어떻게 이목을 속이고 빠져나오는지 알아내려 하고 있다고 여장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갔다. 다른 변장 방법도 많은데 굳이 여장이냐고 따져보았지만 양호선생님은 여자들의 예리한 눈썰미를 무시하면 안된다며 그나마 여장이 가장 의심을 덜 타는 방법이라고 했다. "게다가, 그 왕가슴. 도움이 되고 있잖아?" 흑흑... 그래. 그것때문에 혹시나 하면서도 쉽게 의심을 안하더라구, 젠장! 하지만 걸을 때마다 출렁거리는 기분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묘한 기분이다. 오죽 거기에 신경이 쓰였으면 여자 교복에 여자 옷을 입은 사실을 스스로 전혀 인식하고 있지 못할 정도니까. 변장이 끝나고, 나는 조원들과 함께 호텔 밖으로 나왔다. 자하기니아의 내 팬들은 어제보다 더 집요한 눈길로 우리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러자 나도 모르게 움찔해서 들킬까봐 일부러 가슴을 흔들리게 하면서 걸었다. 젠장. 이런 짓까지 해야하냐구웃! 그래도 '카렌 루아르'라는 여자로서 행세해야 한다는 것만 빼고는 밖에 나오면 완전 자유! 오늘도 치즈 패거리와 함께 먹거리 순회를 다니면서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것을 많이 보았다. 특히 무도(武道)가 발달한 나라답게 차력 시범이나 즉석 레슬링 시합 같은 흥미진진한 구경거리가 많았 다. "카렌... 저기." 우리 조원들이 도너츠를 하나씩 입에 물고 정신없이 길거리 레슬링을 관전하고 있을 때 아시에가 갑자기 내 옷자락을 붙들었다. 아시에는 무언 가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그 손가락의 끝에는... 에엑!? 저게 누구야? 왜 저 사람이 여기에 있어!? 그 사람은 나를 일전에 납치했었던 시르팡의 일원, 시르젤이었다. 멀리서 보았지만 틀림없었다. 그 요란스런 시르젤의 엄마나 그 동생은 기억이 조금 헷갈리지만 시르젤의 모습만은 인상깊게 남아있었다. 그 훤칠한 키와 화사한 얼굴. 깍듯한 말투와 부드러운 매너는 잊을래도 쉽게 잊기 힘 든 요소였다. "한번... 따라가보자." 아시에는 조금 망설이는 것 같았지만 내 확고한 의지를 읽었는지 내 손을 잡고 날 따라나섰다. 이 와중에도 다른 녀석들은 레슬링을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었다. 얘들아. 미안. 잠깐만 갔다가 올께. 이거 너무 신경쓰여서 말이지? 시르젤이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하다. 또 뭔가를 훔치러 온 걸까? 나와 아시에는 거리를 두고 몰래 시르젤의 뒤를 밟았다. 축제 때문에 사람들이 많아 몇 번 놓칠 뻔도 했지만 어떻게든 간신히 따라갈 수 있었다. 그는 얼마간 걷더니 사람이 많은 곳에서 빠져나가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이라... 좁고 구석진 곳으로 들어가기는 싫은데. 하지만 이왕 칼을 뽑 았는데 무라도 자르고 가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지형지물을 이용해 숨어 가면서 계속 시르젤의 뒤를 밟았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걸음은 그다지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발걸음이 느린 아시에까지 충분히 같이 데리고 갈 수 있었다. 시르젤은 자꾸 골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자꾸 들어가면 이대로 나갈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될 정도로 복잡한 미로였다. 내가 계 속 시르젤을 미행하러 움직이려 하자 아시에가 다시 내 옷깃을 잡았다. "이대로...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불안해." "그럴지도..." 너무 깊이 들어왔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왠지 아쉬운걸. 그렇게 하면서 미행을 그만두려 할 때 시르젤이 갑자기 뒤로 홱 돌았다. 골목 벽 뒤에서 개벽이처럼 고개를 빼꼼 내밀고 시르젤을 살피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집어넣었다. 보... 보였을까? "거기 계신 분들. 무슨 볼일이십니까??" 여... 역시 들켰다. 어쩌지? 어쩌지? 만약에 시르젤에게 들키면... "안 나오시면 제가 가겠습니다." 도망가려고 해도 나나 아시에 모두 얼마 뛰지 못하고 지쳐 버릴 게 분명했다. "안심하십시오. 저는 사람을 함부로 해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어떻게 정령이라도 불러서 도망 방법을 찾으려다가 시르젤의 예의바른 말투를 듣고 마음이 흔들렸다. 그... 그래. 시르젤은 착한 사람이니까 우릴 해치지 않을거야. 게다가 나는 지금 카이엔 브리타뉴가 아니라 카렌 루아르로서 여장을 하고 있잖아? 분명 못 알아볼 거야. 호텔 앞에 진을 친 여자애들 중에 하나도 알아보지 못했는걸. 그러니까 괜찮아. 라고 생각하며 나는 조심스럽게 시르젤의 앞으로 나섰다. "카이엔 브리타뉴 씨와 아시에 브리타뉴 씨군요. 여기서 만나뵐 줄을 몰랐습니다. 무슨 일로 저를 그렇게 따라오신 겁니까?" 헉! 아시에는 그렇다치고 날 어떻게 곧장 알아본 거지? 가발도 쓰고 여자 옷도 입고 정령을 이용해 목소리마저 바꾼 날 아직까지는 아무도 알아 보지 못했는데... 에잇! 일단 개겨보자! "오호호. 사람 잘못 보셨어요. 전 카이엔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카렌이라고 해요. 카렌 루아르." "분명히 그정도로 꾸며놓으니 도저히 카이엔 씨라고는 알아보지 못하겠습니다. 목소리까지 다르니까요. 하지만 양 손가락 약지에 낀 반지는 분명 절대마력보호반지와 기혈환이 아닙니까? 게다가 귀에는 예지의 귀걸이, 목에는 정령왕의 목걸이, 양 팔목에는 무한의 팔찌. 이러고도 카이엔 브 리타뉴 씨가 아니라고 주장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것들은 죽지 않는 이상 몸에서 벗겨낼 수 없는 것들인데 말입니다." "그걸... 어떻게?" 분명 내가 낀 마법무구들은 위력은 엄청나지만 세공면에 있어서 그렇게 눈에 확 뛸 정도의 물건은 아니다. 내 가족들은 악세서리들이 지나치게 반짝반짝거리면 오히려 내 매력을 깎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때문에 항상 착용하고 다니면서도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알아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전부 어머님께서 갖고 싶어하는 콜렉션들에 포함되어 있는 물건입니다. 시르팡의 정보수집력과 귀중품에 대한 안목을 얕보지 마십시오." 쩝. 그랬군. 하기야 그렇지 않으면 그 유명한 보석과 미술품들을 훔칠 수 없겠지. 내가 들은 바로는 시르팡을 속이기 위해 거의 진짜같은 가짜를 여럿 만들어서 위장했는데도 그들은 감쪽같이 진품만을 훔쳐갔다고 한다. "길가에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여럿 봤습니다. 수학여행을 오신 모양이죠?" "그래요. 시르젤 씨는 무슨 일로 여기 있는거죠?" "이런, 못 보셨습니까? 홍보는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걸 보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시르젤이 내게 꽃 한송이와 조그만 카드를 던졌다. 내 품으로 날아오는 카드를 나는 멋지게 검지와 중지를 써서 샤샥 하고 잡으 려고 했지만 그건 오로지 망상속의 나일 뿐, 현실로는 못 잡고 땅바닥에 떨어뜨린 카드를 허리를 숙여 주워야 했다. 당연히 노란 수선화도 잡지 못했다. 카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친애하는 자하기니아의 국왕 폐하와 귀족 여러분께. 무술 대회의 결승전 이후에 '시드의 검'을 훔치러 가겠습니다. 정해진 소드 마스터의 안배를 위해서. 시르팡. 룬. 와크레이. >>>>>>>>>> "시드의 검?" "자하기니아의 무술대회에서 우승자에게 매년 주는 상품입니다. 이곳의 무술대회가 대륙에서 가장 번화한 것도 이 검 때문이지요." "근데 왜 이번에는 수선화가 왜 조화(造花)죠? 노란 수선화는 시르팡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건데, 왜 이걸 조화로 주는 거지? 일전에 받았던 꽃은 분명 생화였는데 말이야. 그러자 시르젤이 우 물쭈물거리면서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실 폐쇄계(isolated system) '미에나이 라비린스'가 무너졌을 때 저희 화원도 같이 무너진 터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습니다." 아, 그렇다고 미안할 것까지는 없는데. 그 폐쇄곈지 뭔지가 무너지는 데는 우리 가족들이 한몫 했으니까 말야. 잘못은 너네들이 먼저 했으니까 우리가 책임질 필요는 없지만. "근데... 좀 부수긴 했는데 그걸로 무너져요?" "진(陣)은 폐쇄계니까요. 한곳이 뚫리면 바로 열린계가 되어버리고 그걸로 진은 균형을 잃으면서 붕괴되는 겁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완전히 이해도 못하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그런가 부다 라고 생각하는게 낫겠지. "절 보고 싶었습니까? 이렇게 따라오신 걸 보니 말입니다." "그... 그런게 아니라... 그래요! 단지 이번에는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할 건가 궁금해서 따라온 것 뿐이에요!" 나는 갑작스런 질문에 좀 더듬거리면서 대답했다. 답변이 바로 생각이 안 난 걸 보니까 시르젤의 말에 옳은 부분이 있었던 건가? 시르팡의 딴 사람들은 맘에 안들지만 시르젤만은 괜찮은 사람이니 말이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혹시 다시 또 납치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에엑? 생각해보니까 그럴지도... 이렇게 구석진 골목까지 왔는데 누가 도와줄 사람도 없잖아? 만약에 시르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날 다시 납치해가서 저번같은 꼴을 당할 수 있겠지... 흐아악! 내가 왜 겁도 없이 시르젤을 따라 여기까지 들어온 거지? "...그래도... 시르젤은 왠지... 그런 짓 하지 않을 거 같아서." 난 우물쭈물거리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시르팡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시르젤만은 내게 나쁜 짓을 할 거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보 같은 생각이지? 근거는 하나도 없는데... "절... 믿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시르젤은 내 말을 듣고는 놀란 듯 눈을 뜨더니 곧 감사의 예를 갖추며 내게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시르팡은 절대 예고장 없이는 무언가를 훔쳐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절 따라오는 건 이제 그만두십시오. 저쪽 골목으로 가면 다시 큰 도로로 나갈 수 있습니다." "알았어요. 고마웠어요." 사실은 시르젤한테 정체를 들키면서 혹시 딴 맘을 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시르젤이 내 생각대로 나쁜 사람이 아니어서(물론 내 주 관적인 생각이지만 말이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참. 그리고 아시에 씨는 조심하십시오. 이 도시에 셰더 씨가 있습니다." 아시에의 손을 끌고 골목 밖으로 빠져나가려던 우리에게 시르젤이 깜빡했다는 듯 말했다. 뭐... 뭐라고? 그 셰더 자식이 여기에 있어? "뭐... 뭐라고요?" "카이엔 씨에겐 어떻게 대할 지 모르겠지만... 그분은 브리타뉴 가에서 아시에 씨를 데려간 데 대해 격분하셨습니다.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 오." 아시에의 손이 비정상적으로 크게 떨리고 있는 것이 맞잡은 손으로 던해져 왔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듣지 못할 걸 들었다는 듯 사색(死色)이 되 어 있었다. "시에, 정신차려! 시에!" 나는 아시에를 붙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그제서야 아시에는 정신이 돌아온 듯 했다. 하지만 아직도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 다. "그 사람... 무서워... 다시 보고 싶지 않아..." "괜찮아. 다시 널 데려가게 두지 않을 테니까." 나는 불안에 떠는 아시에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녀를 꼭 껴안아 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전의 모든 기억을 잃고 기억이라고는 그 놈과 의 나쁜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는 그녀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해야 극복시킬 수 있을까... 아무래도 이제는 레이엔 뿐만이 아니라 세이렌 누나와도 연락을 한번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놈의 왕가슴. 껴안는 데도 되게 방해된다 이거. "카이엔, 어디 갔었어?" "한참 찾았잖아." "미안. 미안. 잠깐 가보고 싶은 데가 있어서..." "정말... 이러면 안 돼! 조별 활동이잖아!" 시르젤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큰길로 나왔지만 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는 난생 처음 보는 길이었다. 애초에 핀치의 지리를 내가 알 턱이 없잖 아? 유클리네의 수도 지리도 잘 모르는 판에. 그래서 바람의 정령에게 부탁해서 아까 내가 떠난 위치와 조원 친구들을 찾도록 부탁했다. 그 덕택 에 다행히 빨리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잔소리를 잔뜩 듣긴 했지만. "그런데... 아시에는 왜 이래?" 아시에는 셰더가 여기 있다는 말을 듣고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나마 내가 조금 안심시킨 거다. 아까까지는 자꾸 '날 다시 데려가려 온거야.'라는 둥의 이야기를 자꾸 해댔으니까. 축제 구경을 계속 못해서 아쉽지만 오늘은 아시에를 쉬게 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축제의 하일라이트인 무술 대회는 내일 하니까. 애초에 보기로 한 대회였지만 시르젤이 우승 상품 시드의 검을 훔치러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더욱 더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응. 시에가 몸이 좀 아픈가봐. 미안하지만 먼저 돌아갈께." 나는 그렇게 조 애들한테 양해를 구하고 호텔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나마 호텔 안에 있으면 안전하겠지. 그리고 난 후에 세이렌 누나와 연락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호텔 앞까지 도착했을 때,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꺄아! 카이엔 님!" "일찍 돌아오셨네요, 찾았어요!" 어디서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내가 카이엔 브리타뉴라는 사실을 호텔 앞에 진을 친 저 여자들에게 들켜 버리고 만 것이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내 주위는 금세 여자들로 가득 찼다. "저... 저기요! 전 카이엔이 아니에요. 사람 잘못 보셨어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이미 모든 정황증거가 확보되었으니까요." "정황 증거라니..." 한 여자애가 나를 둘러싼 여자애들의 열광을 잠시 제지시키고는 자신만만하게 서류를 내밀었다. "그건..." "네. 이번에 수학여행을 오신 유클리네 분들의 학생 명단이죠. 이걸 빼낸다고 고생한 걸 생각하면... 아아! 옆에 계신 분은 같은 조원이자 이번에 양녀로 들였다는 아시에 브리타뉴 양이죠? 다른 분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당신과 같이 행동했고요. 카이엔 님의 이름은 분명히 이 명단에 등재되어 있지만, 실제로 이 조에 해당되는 그룹을 찾아보니 카이엔 님 대신에 듣도보도 못한 초강력 미소녀가 있었어요. 여자로 변장하시다니,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솔직히 좀 놀랐죠. 그런 식으로 어제와 오늘 아침까지는 잘 피해 갔지만 오늘만은 속일 수 없어요!" 시르젤도 그렇고, 이 여자들도 그렇고, 아시에를 양녀로 들인지는 얼마 안 됐는데 왜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걸까? 우리 가문이 원체 유명해서 시 시콜콜한 일까지 전파 속도가 빠르던지, 아니면 의외로 이 세계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첨단 정보화 시대를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는 내가 저들을 너무 과소평가 했는지도... "저... 정말로 아녜요. 전 단지..." "그럼 당신의 이름은 뭐죠? 학생 명단에 등재되어 있나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그 빼어난 미색은 어떻게 설명하실 거죠? 아니면 아예 그 치마 를 들어올려서 진짜 여자라는 걸 증명해 보지 그래요? 그 여자가 매섭게 질문 공세를 퍼부으며 날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피케. 카이엔님을 너무 몰아세우지 마." "카이엔님이 곤란해 하시잖아. 그렇다고 진짜로 치마를 들출 거야? 흐에에엑? 치마를 들춰? 그건 좀 심각한 문제다. 물론 안에 입은 건 여자 속옷이지만 남자가 그런 물건을 입었을 시에 그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 도 민망하다 못해 고개를 돌려 버릴 수밖에 없는 장면이 연출될 것이다. 게다가 우리 학교 여자 교복 치마는 한국에 비해 유난히 짧고 단이 넓 기 때문에. 누군가가 마음만 먹으면 옆에서 치마 들추는 것 쯤이야 누워서 떡 먹기보다 더 쉬웠다. "어쩔 수 없네. 어떻게든 조용히 수학 여행을 보내고 싶었는데. 하지만 이젠 이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풀고 부담스러운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으 니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개기다가 진짜로 그런 사태가 오기 전에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동시에 목에 들어간 바람의 정령에게 부탁해서 목소리도 원래대로 바꿨다. "카이엔 님, 무슨 소리에요? 여장도 잘 어울린다고요." "맞아요. 카이엔 님이 여장한 모습을 볼 수 있다니... 감동이야!" "목소리는 어떻게 바꿨어요? 그리고 그 가슴은... 완전 진짜같아 보이는데." "마... 만지지 말라구!" 이거 잡혀도 정말 잘못 잡혔는걸? 아시에도 빨리 안정시켜야 하고 셰더 녀석에 대해 세이렌 누나와도 상의해봐야 하는데. "자.. 잠깐만. 무작정 달려들지 말라구. 원하는 걸 말해봐." 그러자 아까 날 몰아붙였던 피케라는 여자아이가 나서서 말했다. 아무래도 그녀가 이 여자애 그룹의 리더인 듯했다. "사인과 인터뷰. 그리고 내일 하루 놀아줘요. 이정도면 무리한 요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저쪽에서 조건을 걸고 나오면 나도 어느 정도는 타협할 수밖에 없지. 이미 잡힌 이상 무작정 거절하거나 난폭하게 나설 수는 없다. 나는 내가 깃 들기 이전의 그 불량한 카이엔이 아니니까. 수학 여행을 오기 전 린넬이 원래 성격이 돌아오나보지라고 비꼬았던 말이 계속 신경쓰였다. 설마 내 영혼이 육체의 영향을 받는다던가, 그런 일은 없겠지? 새로운 세상을 만나서 조금 생활 방식을 바꾼 것 뿐인걸. "딴 건 받아들이지만, 내일 놀아줄 수는 없어. 내일은 무술 대회를 구경하러 가야 하거든?" "가지 마세요!" "맞아요! 시르팡이 또 카이엔 님을 납치해가면 어떡해요!" "시르팡?" "네. 못 들으셨어요? 시내 곳곳에 예고장이 나붙었다고요. 무술 대회 우승상품인 시드의 검을 훔쳐가겠노라고." 아, 아까 시르젤이 홍보가 덜 됐냐고 중얼거리던 건 그 때문이었군. "그래도 갈 거야. 난 무술 대회를 보러 수학여행을 왔다구." 이건 사실이었다. 검과 마법이 발달한 이 세상에 와서 나는 지금까지 한번도 제대로 된 검술, 또는 마법 싸움을 본 적이 없다. 물론 세이렌 누나 의 영상으로 사이엔 형과 실론이 싸우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그 싸움은 보통 사람의 레벨을 지나치게 벗어나는 것이라 내 눈에는 폭발음만 들 리다가 누나가 끼어들어 끝난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검과 마법 같은 건 가르치지 않는다. 그런 걸 배우는 곳은 따로 있었다. 때문에 나는 이번 수학여행에 만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피이... 다는 못 들어가겠군요. 모두들, 당일날 최대한 표를 확보해." 피케가 다른 여자애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일 하루 열리는 무술대회는 어제와 오늘 예선을 거친 선수들이 모여 16강 토너먼트를 하루 종일 진 행하게 된다. 워낙 권위있는 대회인만큼 표도 비싸고, 지금쯤이면 다 팔렸을 테지. 물론 우리 학교에서는 수학여행을 가기 전 관람 신청 요망자 를 뽑아서 표를 대신 구입해주었고 나는 표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여자애들은 이제와서 표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겠지. "자, 그럼 볼일은 끝났지? 길 좀 비켜줘. 아시에가 아픈 것 같으니까." 아시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힘겨운 지 휘청거리고 있었다. 덕택에 나는 그녀를 부축해서 걸어야만 했다. 아직 여장을 한 것이 효과가 있는 탓인지, 뒤편에서 질투의 오오라는 그리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점심 드시고 나오세요. 사인회 준비해놓고 있을 테니까." 피케가 여자애들을 밀어내고 길을 만들어 주면서 내게 말했다. 음... 아예 들어와서 오늘 나오지 말아버려? 하지만 그랬다가는 후환이 두렵다. 아 예 정문을 봉쇄하고 내일 무술대회 구경을 못 가게 막아버릴 수도 있잖아? 유감스럽게도 호텔에는 몰래 빠져나갈 수 있는 후문 같은 곳은 없었 다. 여자애들의 뜨거운 성원을 뒤로 하며 호텔 로비로 들어오자, 아시에는 이미 기절해 있었다. 아시에는 왜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지 몰라. 처음 봤 을 때 왠지 모르게 신비스럽고 끌리는 느낌이 아직 없어진 건 아니지만, 자꾸 옆에서 보살펴줘야만 하니 솔직히 말해 좀 귀찮기도 했다. 일단 옷 도 원래대로 갈아입고 쓰러진 아시에도 맡기기 위해 난 양호선생님이 묵는 방으로 향했다. 호텔은 조용했다. 학생들이고 선생이고 가릴 것 없이 다 축제 보러 놀러 나갔으니까 아마도 돌아가면서 남는 당직 선생 한 분 빼고는 우리 학교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호텔 프런트에서 키를 얻어 양호 선생님의 방으로 향했고, 그 방 침대에 기절한 아시에를 눕히고는 옷을 갈아 입었다. 후아. 시원하다. 이젠 다 들켰으니까 굳이 여장을 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지금까지 날 힘들게 한 가짜 가슴 뭉치를 가뿐하게 걷어차주고는 원래 의 남자 교복으로 다시 갈아입고 가발도 벗었다. 밖에 있는 여자애들과 만나 주기로 약속한 것은 점심 먹은 후다. 그때까지는 잠깐 시간이 있으 니까 세이렌 누나와 접촉해볼까나. 우선 예지의 귀걸이를 통해서 레이엔을 불렀다. 하지만... [아, 형. 지금 바쁘니까 정 급한 일 아니면 나중에 연락해줘. 조금만 더 하면 아이렌이 넘어올 것 같다구!] 귀찮음과 흥분됨이 동시에 뒤섞인 듯한 말이 내 머릿속에 전해져오더니 그대로 끊겼다. ...작업중인거냐!? 나는 오기가 생겨 다시한번 연락을 해 보았다. [아, 형. 지금 바쁘니까 정 급한 일 아니면 나중에 연락해줘. 조금만 더 하면 아이렌이 넘어올 것 같다구!] 아까와 똑같은 목소리. 이거 자동응답인 거냐? 이래서야 어떻게 연락을 취해 볼 방도가 없잖아? 할 수 없지. 일단 호텔 안에 있으니까 별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밖에서 죽치고 있는 여자애들과의 일부터 처리하고 보자. 아시에를 혼자 놔두는 게 마음에 좀 걸리기는 하지 만... 항상 내게만 의존하게 놔둘 수는 없겠지. 별일 없을 거다. 아마도... 귀찮은 것은 후닥 처리하고 치워버리자! 라는 모토 아래 나는 밖에 [사랑해요♡ 카이엔 님]등의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여자아이들 중 몇 명을 호 텔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식사가 비싸긴 하지만 내가 카이엔이 되고 나서는 남아도는 것 들 중의 하나가 바로 돈이다. 부족한 용돈에 이것저것 아껴 써야 했던 과거를 회상하면 가끔 돈을 지불하며 흠칫 할 때도 있지만, 이제는 돈 쓰는데도 꽤 익숙해져 가는 것 같다. 여자애들끼리 박이 터져라 싸울 것 같았는데 의외로 큰 탈없이 대표들이 나왔다. 미리 질문 내용도 준비해 왔다는 걸로 봐서 팬클럽 조직이 나 름대로의 질서를 지키며 탈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 팬클럽 조직의 리더는 예상했던 대로 아까 여자애들을 통 제하던 피케 에스페란토였다. 점심을 먹으면서 그녀들은 미리 준비한 질문을 던졌다. 키와 체중은 얼마나 되는지, 좋아하는 꽃은 무엇인지, 좋아하는 과목은 어떤 것인지. 생년 월일은 언제인지 같은 뻔해 보이는 질문에서 숨겨둔 여자친구는 없는지, 아시에와는 어떤 관계인지 등등에 대해서 집요하게 캐물었다. 하지만 나 는 그 질문에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대충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여자들은 어째서 저런 시시콜콜한 질문을 중요시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따름 이었다. 대신 나는 오히려 내가 질문을 막 던지는 방법으로 질문 공세에 따른 스트레스를 극복해나갔다. 오늘 온 여자애들은 총 몇 명이야? 자하기니아 뿐만 아니라 딴 나라에도 내 팬들이 많아? 핀치의 축제에서 무술대회 말고는 또 무슨 볼거리가 있어? 등등의 질문을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내뱉 었다. 그녀들은 차마 내 말을 끊지 못하고 허둥대며 대답해 주었다. "지금 온 사람은... 그러니까 211명!" "아냐. 페란나와 몇 명이 빠져나오려다 엄마한테 걸렸대. 208명이야." "얘네들은... 저 젤미마을에서 원정 온 애들을 왜 안쳐? 그러면 총 213명이잖아." 웃기는 건 내 질문에 지네들이 헷갈리며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피케가 내 질문에 대답하면 옆에 파이란이 피케를 면박하며 다른 의견 을 내놓았고, 그러면 또 노비스라는 아이가 그녀들이 미처 빠뜨린 다른 사실을 지적하곤 하는 것이었다. 덕택에 내가 질문해놓고도 내가 헷갈릴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길 하다가 이번 무술대회 이야기까지 가게 되었다. "이번 무술대회 상품이라는 '시드의 검'은 어떤 거야?" "카이엔 님. 시드의 검은 이번뿐만이 아니라 매년 주는 상품이에요. 시드의 검이 뭐냐 하면... 시드라는 사람이 만든 아주 좋은 검이죠!" "피케... 아까부터 정말 카이엔님 앞에서 그렇게 무식을 티낼래? 시드의 검은 자하기니아의 유명한 장인 시드 가(家)에서 심혈을 기울여 매년 나 라에 한 개씩만 바치는 명검이에요. 마력이 깃든 광석을 사용하지 않는 검중에서는 최고로 꼽히는 검이죠." 이번에도 피케를 면박 준 건... 파이란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이어 노비스가 보충 설명을 했다. 음... 얘네들의 패턴이 이제 이해되기 시작하 려 한다. "마력광석으로 만든 검을 주로 쓰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들이나 일부 소드 마스터들에게는 다소 격이 떨어지지만 일반 검사들에게는 그래도 선망 의 대상인 검이에요. 해마다 16강 전에 출진하는 인원의 4분의 1 정도에서 3분의 1 정도는 소드 마스터일 정도니까요." 그녀들의 말을 들으니까 더욱 더 무술대회를 구경하고 싶어졌다. 점심을 먹고 인터뷰를 끝낸 후에 나는 사인을 해 주러 밖으로 나갔다. 밖에 모여있던 여자들은 이미 펜과 종이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고작해야 이백 명쯤이야... 라고 생각하고 나는 종이에 사인을 하고 한 명 한 명의 손을 잡아주면서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다들 나와 손을 맞잡 은 것이 감격스러운 듯 날 껴안아서 당황스럽게 만드는 여자애도 있고, 오빠 정말 사랑해요! 라고 수줍게 외치고는 사인지도 안 받고 냅다 줄행 랑치는 여자애도 있었던 반면, 산만한 덩치에 홍조를 띠며 다가와 왠지 모를 강력한 압박을 느끼게 하는 여자애도 있었다. 이 세계의 언어를 나는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전 카이엔이 싸인을 어떻게 했는지 난 모른다. 그래서 그냥 이 세계 의 언어로 내 이름을 휘갈길까 하다가 한글로 [김상우]라고 써서 돌렸다. 한글을 써 본 건 참 오래간만이다. 온 지 그다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마치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 언어에 익숙해서 요즘은 생각조차 가끔 이 세계의 언어로 할 때가 있다. 그래. 이렇게 해서 차 츰 과거와의 연결점을 끊어 가는 거겠지... 다행스럽게도 내 싸인이 맞는지 틀린지 확인하려 드는 여자애는 없었다. 하기야 그녀들에게 그런 싸인이 맞느냐 틀리느냐는 중요한 게 아닐 거 다. 단지 '내가 친필로 쓴 글씨를 가진 것'이 중요하겠지. 마치 연예인이나 유명인사처럼 나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이 다른 사람에게 커다란 의미 를 가지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나 정말로 유명한 녀석이구나... 하는 기분이 들어서 공중에 붕 뜬 듯한 느낌이랄까? 으... 그나저나 팔 아퍼! 처음에는 별 거 아니라 생각했는데 이백명한테 일일히 사인해주고 악수해주려니 팔이 너무 아프다. 하여간 그렇게 바쁘고 들뜬 나머지 나는 저 멀리서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날 지켜보고 있는 검은 로브의 마법사를 눈치채지 못했다. "카렌, 너 여장한 거 들켰다면서?" "꽤 시달렸겠다. 조심했어야지. 카렌." "야! 이제부터는 여장 안 할 건데 왜 자꾸 카렌이라 부르는 거얏!" "여장이라니, 너 원래 여자였잖아?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맞아. 빨리 남장 풀고 여자로 돌아와. 그게 더 이뻐." "이것들이...!" 우리 조 애들은 내가 이제 여장을 할 필요가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날 자꾸 카렌이라고 불렀다. 으으... 아예 작당을 했구만. 재미를 붙여도 단 단히 붙인 것 같다. 이래서야 학교로 돌아가도 계속 저러지 않을지 심히 걱정된다. 하기야 여장을 하고 거울을 보니 나 스스로도 정말 놀랄 만큼 잘 어울린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놀려대다니! "오늘 밤에도 놀러 올 거지, 카렌? 넌 항상 잃는 내게 있어서 유일한 자금줄. 희망이자 태양이야." 우뉴가 싱긋 웃음지으며 말했다. 이 녀석들, 오늘 밤도 고 스타르를 하면서 지샐 생각이군. "싫어." 나는 우뉴의 말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깟 돈 잃는 게 문제는 아니지만... 자꾸 지니까 짜증나잖아? 게다가 그 게임, 중독성이 심하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고 있었다. 한번 카드를 잡기 시작하면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아, 나도 '사신소환'같은 거나 나와서 한번 판돈을 싹쓸이 해 가 봤으면.... "오늘은 술 안 먹일테니까 오지 그래?" 키론 녀석이 날 설득하려고 나섰다. 어제 키론이 우리들에게 몰래몰래 먹인 술 때문에 베개싸움 대난투가 벌어지고 다음 날 우리들은 정말 민망 해서 보지 못할 꼴로 바닥에 널부러졌던 것이다. 게다가 루카라의 머리 위에 오줌을 누고, 그녀의 토사물을 정면으로 뒤집어 쓴 기억은 결코 유 쾌한 기억이 아니었다. "그럼 오늘은 니가 한번 죽을때까지 취해봐. 그럼 갈테니까." "...좋아. 그 제안 받아들이지." 헉! 난 그냥 휙 던진 말인데 그대로 받아들이면 어떻해? 할 수 없잖아. "알았어. 일단 시에가 놀러갈 수 있는 상태인지 보고 올께." 아까 저녁 먹으러 가기 전에 확인해 보았지만 아시에는 아직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우선은 돌아온 양호선생님께 맡기긴 했지만 그녀를 두고 나 혼자만 놀라간다는 것은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카이... 왔구나." 내가 양호선생님이 묵는 방문을 열었을 때, 아시에는 일어나 있었다. "응. 양호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이랑 같이 밥 먹으러 가셔서 아직 안 오셨어." "몸은 좀 괜찮아." "응... 걱정시켜서 미안해. 나 때문에... 항상 귀찮지?" "귀... 귀찮기는 뭘. 이제는 남매지간인데 당연한 거지." 조금 찔린 게 있는 탓일까? 나는 자신이 귀찮지 않냐는 아시에의 질문에 약간 말을 더듬으면서 대답했다. "그 사람을 본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이 내가 여기 있는 걸 아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불안해졌어. 그 사람이 내 기억을 지웠기 때문에 내게 남아 있는 기억은... 단지 그 사람과의 기억 뿐이라..." "그만해!"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물론 그녀의 사정이야 자세히는 몰라도 대충은 안다. 레이엔에게서 마도의 노예란 어떤 존재인지 이미 다 들었으니까. 하지만... 아직도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시에의 모습을 보니 짜증이 솟아올랐다. "그런 자식, 왜 자꾸 그 사람이라고 부르는 거야? 왜 자꾸 나쁜 기억만을 떠올리는 거야? 그런 새끼는 분이 풀릴때까지 욕해버려도 괜찮아! 그리 고 앞으로 생길 좋은 일만을 기억하라고! 그때의 기억이 행복해? 아니잖아! 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불행한 거야?" "나... 난... 흑..." 조금 심하게 소리를 질렀나보다. 특별히 그녈 미워하는 것도 아닌데... 으윽. 요새 난 왜 자꾸 이럴까? 조금 짜증난다고 막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대고... 그래서 실론한테 칼맞고 린넬하고도 서먹서먹해진 건데... 정신차리자, 정신차려. 이전의 카이엔을 닮아간다는 소릴 듣고 싶지는 않잖아? "미... 미안. 말이 좀 심했나봐." "으응... 흑... 괜찮아... 내가 바보같기 때문인걸... 지금 난 충분히... 행복하니까... 카이가 심한 말 해도... 받아들일께." 바보같이. 그렇게 말해도 내 가시돋힌 말에 상처를 안 받았을 리 없잖아. 이렇게 훌쩍거리면서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간신히 참고 있으면서... "카이... 훌쩍." "응. 말해봐. 시에. 뭐든지 다 들어줄 테니까."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려 하며 아시에에게 말했다. "만약 내가 기억을 찾아 성격이 변해도... 카이는 날 지금처럼 보살펴줄거야?" "응. 보살펴줄께." "약속하는... 거지?" "약속할께." 조금 무책임할지도 모르지만 난 약속해버렸다. 가족으로서 보살펴주는 건 당연하다라고 할까? 지금의 난 단지 그런 식으로 가볍게 생각하고 있 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아마도 아시에가 기억을 찾을 일은 없을 것 같다. 셰더가 내게 건 저주도 실은 기억상실의 저주였다고 셰더 스스로 말했잖아. 나같은 경 우에는 잃은 기억 대신 다른 인격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지만... 아시에의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고마워..." 그렇게 말하며, 아시에는 조용히 내 가슴에 얼굴을 기대었다. 아무래도 오늘 다른 조원들과 고 스타르 게임을 하기에는 무린가 보다. 시드의 검. 자하기니아에서 검의 명가(名家)로 이름난 시드 가에서 일년에 한번 나라에 진상한다는 명검이다. 보통 세상에 이름난 검들은 '미스릴'이라던지 ' 오리하르콘'같은 특별한 마력이 깃든 광석을 사용해서 만든 검이기 마련인데 시드의 검은 그런 광석을 쓰지 않고도 명검 대열에 서 있는 검이다. 철광석에 여러가지 재료를 혼합한 합금으로 만드는 데 시드 가문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제련해서 웬만한 마법검보다 가벼우면서도 날이 잘 들어 많은 고급 검사들로부터 각광받고 있다. 나는 어제 인터뷰했던 여자아이들 중 파이란이라는 애가 주고 간 이번 무술 대회를 소개하기 위한 팜플렛을 얻어 읽고 있다. 특히 이 검은 장점은 '베는 맛'이 뛰어나다고 한다. 사람을 벨 때 마법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 독특한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며.... ...뭐 설명이 이래? 하여간 훌륭한 검이라는 건 잘 알겠다. 나는 검을 쓸 수 없다. 마법도 쓸 수 없다. 왜냐하면 내 몸에는 마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마법을 못 쓰는 거야 당연하지만 검도 쓸 수 없는 이유는 마력이 없으면 아무리 수련해도 원래 세계의 무술 고수들 수준 정도밖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을 무도에 몸바친 그들을 비 하할 의도는 없지만 이곳 사람들은 수련을 하면서 마나를 '기'로 활용을 하는 방법을 배우기 때문에 고수의 경지에 이르르면 몇 미터나 되는 높 은 담장도 한번에 넘을 수 있고, 백 미터쯤 되는 거리를 오 초 안에 돌파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력이 전혀 없는 나는 수련을 해도 체력 증진 외 에는 그다지 눈에 띄는 성과를 얻을 수가 없다. 한번 검을 잡아 보겠다고 하다가 사이엔 형이 말리면서 해 준 말이었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스피드로 싸우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들의 싸움을 나는 이미 한 번 목격한 터였다. 때문에 나는 검과 마법의 세계에 왔으니 이왕이면 좀 배워보자! 라는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미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한번 무술 대회도 구경가려고 한 거고. 하지만 특별히 저 시드의 검이 신경쓰이는 것은 사이엔 형 이 가진 삐까번쩍한 검을 만든 사람도 시드 가의 장인이라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었다는 그 검은 엄청 무거웠는데 보기 드 문 에고 소드(스스로 마음을 가지고 주인과 이야기할 수 있는 검)라고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그 검과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 검은 마력이 없는 사람과는 의사소통할 수 없다고 했다. '쓸 줄은 몰라도 저런 검 하나 갖고 있으면 뽀대날 텐데.' 물론 무술대회 우승상품이니 나와 관계없고 게다가 시르팡에서 나온 시르젤이 훔쳐갈 게 뻔한 검이긴 했지만 그래도 좀 갖고 싶다는 느낌이 들 긴 했다. '근데 시르팡 애들은 왜 저런 걸 훔쳐가려고 할까? 좀더 비싸고 멋진 마법검은 세상에 많이 있다고 하는데... 게다가 이 대회의 역사도 오래 되었 으니 세상에 나온 시드의 검만 해도 수십 개가 넘을 텐데...' 시르젤의 어머니는 각종 보물을 모으는 것을 취미로 삼는 콜렉터라고 했다. 그러면 희귀한 보물만을 모아야 하는 게 아닐까? 세상에 수십 자루 나 나와 있는 이 검에 무슨 희귀성이 있다고 저러는 걸까? 게다가 합금이라고는 해도 철로 만든 검에 말이다. 그렇다고 특별히 화려한 장식이 달린 것도 아니고... 추측할 수 있는 단서라고는 예고장 카드에 씌여진 '정해진 소드 마스터의 안배를 위해서'라는 문구밖에 없었다. 음... 걔네 집 에 소드 마스터라도 한명 나와서 선물 주려고 그러나? 이러저리 따져봤자 알 수 없다. 나는 아침을 일찍 먹고 조원들과 함께 무술 대회를 구경하러 나섰다. 무술 대회는 아침 일찍 시작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호텔 앞에 진을 친 여자애들이 없었다. 다들 무술 대회장에서 대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른 조원들은 어제 또 밤을 센 모양인지 눈이 퀭했지만 아시에를 핑계로 방에서 일찍 잔 나는 아침이 상쾌하고 가뿐했다. 게다가 여장을 해서 보기싫은 가슴과 찜찜한 속옷을 안 입어도 되니 더욱 마음이 편했다. 아시에는 밤 사이에 내 품에 안겨 자면서 불안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는지 평소와 같이, 다소 수줍은 모습을 보이며 날 따라 나섰다. 참고로 말하건데, 단순히 같은 침대에서 '옷 입고'잔 것 뿐이다. 게다가 무슨 일이 생길 만한 분위기도 그다지 없었고... "으... 또 키론 녀석에게 말렸어. 어제 술을 얼마나 먹은 건지..." 그렇게 말하는 이멜츠는 한쪽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취중에 깨진 술병에 찔렸다고 한다. 어제의 배게 싸움은 좀더 격렬했는지 몸에 사소한 부상을 입고 있는 애들이 몇 명 있었다. "게다가 키론 녀석에게 술을 먹인 게 잘못이었어." 다들 그제께 밤의 복수라도 하려는 모양인지 경쟁적으로 키론에게 술을 먹인 모양이었다. 술에 취하면 충분히 괴롭혀 줄 거라고 계획했던 모양 이었지만 취한 키론은 취권이라도 쓰는 듯 비틀거리면서도 베개 싸움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본인 얘기로는 슬쩍 빠져나와 구석에 박혀 있으니 쟤네들끼리 열심히 싸우더라 였지만(베개 싸움 중에는 꼭 누가 불을 끄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루카라는 어제 밤에도 술 때문에 먹 은 것들을 바닥에 토해 냈고 운 없게도 린넬이 비틀대다 그 토사물 위에 얼굴을 갖다 박은 모양이었다. 조원들끼리 티격태격하면서 싸우는 걸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걷다 보니 어느 새 무술대회장 주변에 도착했다. 무술 대회의 권위를 반영하듯 수많 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웅성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리들 가운데서는 자하기니아의 내 팬들도 있었다. 그들은 내 모습을 보자마자 내 쪽으로 우르르 달려와서 말했다. "카이엔 오빠 파이팅!" "오늘 경기 힘내요." ...누가 들으면 내가 대회 출전하는 줄 알겠다. "카이엔 님. 어제 깜빡하고 못 물어봤는데 ,혹시 1등석이에요?" "아니. 특등석인데?" 그러자 여자애들 사이에서 환호와 비탄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내가 이 대회에 구경오니까 나랑 같이 보기 위해서 표를 구하러 뛰어다녔겠지. 하 지만 마음만 앞서다 보니 내가 어디의 표를 갖고 있는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피케, 미리 알아봤어야지!" "까... 깜빡했다니까. 좀 봐줘. 노비스. 니가 산 그 특등석 표 나 주면 안돼?" "싫어. 그러니까 나처럼 특등석과 일등석을 다 사놓았어야지." "치이. 우리 집이 너네 집처럼 갑분줄 알어?" "얘는, 얘는, 나도 없는 돈 융통해서 산 거라구." 아무래도 1등석 쪽에 도박을 건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어제 모인 200여명의 팬들 가운데서 무술대회 표를 살 수 있었던 사람은 대략 50여명. 그 중 특등석에 베팅한 사람은 약 10여명이었다. "자, 여자애들이랑 그만 놀고, 빨리 들어가자. 카.렌." "카렌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우뉴!" "저기요. 카렌이 뭐예요? 카이엔 오빠의 별명이에요?" "응. 카렌은 카이엔의 진정한..." "쓸데없는 말 하지 맛!" 그랬다. 이제는 더 이상 여장을 하지 않는데도 나는 여전히 우리 조원들로부터 카렌 루아르라고 불리고 있었다. "미안해... 카이. 내가 그런 이름을 지어줘서." "그... 그건 네 잘못이 아니잖아. 시에. 그렇게 말할 필요 없어." 엉뚱하게도 사과해야 할 녀석들은 안 하고 아시에가 내게 용서를 구했다. 이런 걸 보고 찔리지도 않냐, 너네들? 어디 영화 같은데서 본... 뭐더라? 콜로세움이라고 하던가? 그런 건물을 연상시키는 무술대회 경기장은 외관도 크고 화려했지만 내부도 꽤 컸다. 한국의 대형 경기장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한 일이만명은 충분히 채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나와 우리 조원들, 그리고 특등석 표를 가지고 있는 내 팬들은 경기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특등석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아직 사람들이 완전히 들어차지 않아, 그리 어 렵지 않게 인파를 헤치고 내려갈 수 있었다. 경기가 벌어지는 필드는 축구장보다 조금 작았다. 단순히 두 사람이 대결을 벌이는 데 왜 이렇게 공간을 넓게 쓰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래도 소드 마스터까지 참가하는 전투라면 꽤 스케일 넓게 싸우는 모양이지 라고 생각하며 일단 넘어갔다. 필드에서는 관리 요원들이 한창 바닥을 손 질하고 있었다. 경기장 맨 앞은 특등석이다. 그리고 그 한쪽에는 서서 연설하면 꽤 폼 날 것 같은 높은 연단이 있는데 거기에는 보기에도 푹신푹신해 보이는 의 자 몇 개와 햇빛을 가리기 위한 차양막이 있었다. 아마도 저기에는 이 나라의 국왕이 앉게 되는 걸까? 그러고 보니까 난 유클리네의 국왕도 본 적이 없고, 제대로 들은 적도 없다. 재미없는 공부하고 주변에서 사건 터지는 것만 넘어가는데도 바빠 죽겠는데 국왕 나부랭이까지 신경 쓸 정신 이 어딨냐? 게다가 우리 집안 자체가 원래 국왕쯤이야 우습게 볼 수 있는 권력을 가진 빵빵한 집안인 것도 한 원인이었다. 그런 족속들한테 신 경쓰고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지나가는 정보지 판매원에게 이번 16강 진출 멤버들에 대한 소개와 대진표가 적혀 있는 경마장에서 파는 것 같이 생긴 정보지를 샀다. 분 명 16강 진출자가 결정된 것은 어제였을텐데... 벌써 다음 날 아침에 저렇게 정보를 모아 인쇄를 할 수 있다는 데 대해 난 감탄했다. 상암 경기장 같은 한국의 대형 스타디움보다야 못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봐줄 만한 화려하고 큰 경기장도 있고, 국가간을 잇는 대형 공간이동 마법진도 있 고. 어쩌면 이 세계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발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내 이름이 전 대륙적으로 유명한가 하면 아시에를 우리 가문에서 양녀 로 맞은 것도 이 먼 곳에 있는 내 팬들에게 벌써 알려져 있을 정도로 정보가 퍼지는 속도가 빠르니 말이다. 아,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마도의 노 예였다는 사실은 아직 새어나가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왜 교통수단은 마차에 의존하고 있는 걸까? 비행기까지는 안 바래도 자동차 정도는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냐? 길도 좀 닦여 있지만 아 스팔트나 시멘트를 깐 것처럼 반듯한 길이 아니니까 흔들림이 있어서 처음에 마차 타는 데는 꽤 고생했다구! 그렇게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고 우리 조원들과 날 따라온 여자애들의 갖은 수다를 흘려들으면서, 나는 정보지를 폈다. 제55화 : 무술대회 개시! 햇살이 따가운 봄 하늘 아래서, 시합 개시를 알리는 타종의 여운을 느낄 사이도 없이 사람들의 환호성과 함께 무술대회가 시작되었다. 내 인생 처음으로 누군가가 '제대로' 싸우는 것을 목격하는 내 마음은 간만에 몸 골고루 넘쳐 흐르는 아드레날린과 더불어 짜릿한 흥분으로 가득 찼다. 옆에서 저 선수가 잘생겼느니 이 선수가 잘생겼니 하다가 결국 내가 젤 잘생겼다고 귀결되는 여자애들의 수다도, 뻔한 내용의 지리한 국왕의 연 설도 이 순간만을 기다리면서 참아 왔다.. 귀가 멍멍했다. 사람들의 환성으로 시끄러운 주위 때문이 아니었다. 이건 모두 지루하기 그지없는 연설을 거의 삼십 분 가까이 계속하다가 마지 막에 사자후(獅子吼)를 써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황당한 국왕 때문이었다. 그 국왕은 그러면서 만족스러운 듯 크하핫 거리면서 나가버렸 다. 그러고 보니까 저 국왕, 피요르의 아빠겠네? 피요르는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16강전의 첫 대결은 탄탄한 근육을 밖으로 드러낸 검사, 아포로 뮤철펀드와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르고 언월도를 쓰는 노코드 로드맷간의 싸움이 었다. 언월도에 긴 수염이라... 오락실 게임에서 본 관우랑 비슷하게 생겼다. 뭐, 난 제대로 삼국지를 읽어본 적은 없지만 말야. 정보지에 쓰인 설 명에 따르면 아포로는 자하기니아에서는 꽤 알려진 용병이고 노코드는 먼 남쪽의 소국에서 온 이색적인 전사인데, 예선전에서 검기를 살짝 내비 췄기 때문에 소드 마스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검기 쓰면 소드 마스터 아니었어?" "보통 검기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구현되면 소드 마스터로 보기는 하지만 상당한 고수 검사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면 간혹 검기가 나타날 수도 있어. 게다가 거기에 맞는 검술 실력도 필수지. 때문에 검기만 보인다고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어." 키론이 내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루카라가 끼어들면서 물었다. "저 이상하게 생긴 칼은 뭐야, 저런 칼을 쓰는 사람도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어?" "저 칼은 언월도라고 하는데, 이 근처 나라에서는 드문 검이네... 나도 제대로 본 건 오늘이 처음이야. 그리고 소드 마스터라는 건 보통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게 검이라 그렇지, 활이나 도끼 등 다른 무기를 사용한다고 해서 결격될 이유는 없어." 루카라의 질문에 대답한 건 키론이었다. 린넬은 우리 반 부반장이고 키론은 공부 1등이지. 역시 이 녀석들은 여러 가지로 아는 게 많아서 옆에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된다. 린넬하고는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잠시 서먹해졌었지만, 그래도 수학여행에서 억지로 같은 조로 넣으니까 이래저래 가 끔씩 얘기도 하게 되면서 관계가 회복되어 가는 것 같다. 처음 두 사람의 거리는 대략 50여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위치에서 시작한다. 먼저 노코드가 몸을 푸는 듯 언월도를 이리저리 돌렸는데, 그 거대 한 칼날이 이리저리 돌아가는 것이 환상적이어서 절로 감탄성이 터져나왔다. 아포로는 화려한 노코드의 검술에 다소 주눅이 든 듯한 모습이었다. "아마 소드 마스터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아포로를 위축시킨 걸꺼야." "게다가 상대의 검은 이 지방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언월도... 그 특성에 대해 잘 모른데다가 이국적인 풍모에 긴 수염. 비록 덩치는 자기보다 작지만 주눅이 들지." 키론과 린넬은 싸움에 대해 심도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해설 모드에 들어갔다. 덕택에 나는 무작정 싸움을 구경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이해를 하면서 넘어갈 수 있었다. 반면에 수학여행을 와서 지금껏 열심히 떠들던 치즈 패거리는 무술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는지 그냥 입을 닫고 키론과 린넬의 합동 해설을 들을 따름이었다. 물론 경기장이 시끄럽긴 했지만, 인구 밀도가 낮은 특등석에서는 큰 소리로 말하면 그런대로 들렸 다. 노코드가 아포로를 향해서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걸어갔다. 아포로는 그 걸음의 무게감에 조금 놀랐는지 흠칫하다가 자세를 바로잡고 노코드 를 향해 돌진했다. 빠르다. 마치 인간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한 스피드. 내가 저런 상황에 있었으면 다가오는 걸 알기나 했었을까?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노코드가 언월 도를 가볍게 살짝 움직이더니 가볍게 그 공격을 막아냈다는 사실이었다. 그 뒤로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아포로는 쉴새없이 노코드를 찔러들 어갔고 노코드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대충 승부 난 거 같네." "검기를 쓸 수 있는지는 몰라도 저 아포로가 그정도 레벨에 못미치거든. 노코드가 제대로 마음만 먹으면 금방 끝나." 나는 마치 무협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엄청난 스피드와 공격에 넋을 잃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키론과 린넬은 그새 상대의 실력을 평가하고는 승부를 결정짓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 끝날 거라는 린넬의 예상대로 상대의 공격을 피하기만 하던 노코드가 아포로의 빈틈을 찔러 복부에 강력한 킥을 날렸다. 어찌나 강한 킥인지 아포로의 몸뚱아리는 허공을 그대로 가로질러 저쪽 관중석 밑에 있는 벽에 부딪혔다. 세이렌 누나의 엄청난 마법, 사이엔 형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간의 결투를 보고도 채 실감나지 않았던 강자들의 힘이 이제서야 피부로 다가왔다. 편집 기술도 없고, 와이어도 없지만 저들은 무협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수 있을만한 엄청난 싸움을 눈앞에서 벌이고 있었다. 두 번째 경기도, 세 번째 경기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자기 키보다 더 큰 무거워 보이는 검으로 상대를 허공 수십 미터 상공에 날리는 모습을 보 았고, 맨손의 격투가가 날카로운 칼을 맨살로 막아내는 장면도 보았다. 짜고 쳐도 절대 이런 장면이 나올 수는 없겠지만, 이건 무술대회가 아니 라 WWE같은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유흥산업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나도 흥분 상태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키론과 린넬은 경기가 거듭될수록 더 흥분해서 자기들만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음. 역시 검이 크고 무거운 만큼 가르는 용도로는 적합하지 않군. 그래서 하늘로 띄울 수 있었겠지만.' '검기를 손과 팔에 씌우는 저런 맨손 격투가도 소드 마스터라 고 불러야 할까?' 등등의 이야기를 끝없이 계속하고 있었다. 루카라나 치즈, 아시에 같은 여자애들이나 우뉴, 이멜츠같이 싸움 세계에 관심이 그다지 없어 보이는 아이들도 어느 새인가 무술가들의 화려한 기술 하나하나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도 16강까지 온 실력인지 다들 자기만의 특별한 기술 하나씩은 지니고 있었다. "어디보자... 다섯번째 시합은 시킨즈 루폰기 대 나샤드 큐펜리드인가... 시킨즈 아저씨?" 나는 정보지를 보다 깜짝 놀라 경기장을 쳐다보았다. 대머리가 반짝반짝 눈에 띄는 게 그제께 식당에서 본 그 시킨즈 아저씨가 맞았다. 헤에... 16강 진출했네? 두번째 시합에서 본 검사만큼 무식하게 큰 칼을 들고 있진 않았지만 꽤 큰 검을 들고 있었다. 검날 한쪽에만 날이 서 있고 다른 한쪽은 날이 없이 두꺼운데... 저런 건 검(劍)이라고 하지 않고 도(刀)라고 하던가? 잘 모르겠는데? "키론. 저 아저씨가 들고 있는 거, 한쪽에만 날이 선 게 역날검 맞지? 나 책에서 본 적 있어. 옛날에 어떤 전설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그런 검 을 들고 활약했다는 얘기 말야. 알지?" "루... 루카라. 저건 그냥 도(刀)야." "웅... 하지만 이상하게 생겼는걸." "...이상하게 생기면 다 역날검이냐." 린넬을 제외한 나머지 조원들, 그리고 날 따라온 팬클럽 여자들 몇 명은 다들 아,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키론의 말을 주의깊게 경청했다. 휴우. 나만 무식한 게 아니라서 다행이군. "어쩔 수 없지. 그 [방랑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는 전 대륙적으로 여자들한테 선풍적으로 인기를 끈 소설이니까 말야." 린넬이 어쩔 수 없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방랑하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가... 하긴 제목부터 꽤 운치를 자아내기는 하는군. "여어! 아저씨... 힘내요!" 시킨즈 아저씨가 몸을 풀고 있는 위치는 우리 자리와 꽤 가까웠기 때문에 린넬이 아저씨를 한번 큰 소리로 불러 보았다. 아저씨는 린넬의 목소 리를 들었는지 우리가 있는 관중석으로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히야. 유클리네의 학생 친구들이네. 나 응원하러 와 준거야? 그런데 딴 사람은 다 있는데 카렌 양은 어디 갔어?" 시킨즈 아저씨의 말에 다른 조원들이 입을 막고 키득거렸다. 그러고보니까 시킨즈 아저씨를 만났을 때는 내가 카렌 루아르라는 이름으로 여장을 했을 때잖아? 하지만 이제와서 정체를 밝히기도 뭐하니까... 다행히도 린넬은 말을 딴 쪽으로 돌렸다. "카렌은 일이 있어서 딴 데 갔어요. 그런데 스텐리 아저씨는 어떻게 된 거에요?" 그러자 시킨즈 아저씨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 녀석... 떨어졌어. 이상한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녀석한테 대기하고 있던 신관들이 금방 치유하기 힘들 정도의 상처를 입었거든. 상처만 입지 않았어도 다른 상대들을 이기고 올라올 수 있었을 텐데..."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요? 마법사에요? 하지만 무술 대회에는 마법사는 출전이..." "아니. 그 녀석. 검을 쓰긴 썼어. 심판진들도 경기 중에 마법을 쓰는 흔적같은 건 발견하지 못했고... 하지만 왠지 모르게 찜찜한 녀석이었어."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검사라... 갑자기 셰더 녀석이 떠올라서 기분이 나빠졌다. 시르젤이 셰더가 이 도시에 있다고 했는데 혹시 그 녀석이 셰더 는 아니겠지? 설마 그 싸이코같은 자식이 검까지 쓰려고? 나는 정보지를 뒤져 보았다. 그 녀석은 16강전 마지막 경기에 있었다. 성인지 이름인지 가명인지 알 수 없는 [래더]라는 짤막한 이름으로만 적혀 있는데 전혀 특별해 보이는 검술을 보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쟁쟁한 상대방들을 기 묘한 방법으로 제압했다. 라고 씌여져 있었다. "네. 응원할 테니까 어저씨 힘내요." "그래. 우핫핫. 오늘은 스텐 녀석도 모르는 비기를 특별히 보여 줄 테니까, 잘 보라고." 따사로운 햇빛 속에서 반짝이는 머리를 빛내며 자신있게 돌아서는 스텐리 아저씨의 상대는 아까 말했던대로 나샤드 큐펜리드라는 여성 궁수였 다. 근데 뭐, 여성 궁수? 이거... 1:1로 싸울 수 있기라도 한 거냐? 반대편에서 커다란 활을 들고 시킨즈 아저씨의 반대편으로 자리를 잡는 나샤드라는 여성 궁수에 대해 황당함을 느낀 건 나뿐만은 아닌 듯했다. 관객들은 야유인지 격려인지 알 수 없는 거대한 소음을 내뱉었고 키론과 린넬도 서로 마주보면서 이 상황에 대한 심도깊은 논의를 하고 있었다. "키론. 니가 알기로 이 대회 역사상 활을 쓰는 사람이 대회에 나온 적이 있냐?" "대회에 나온 적은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16강에 그런 사람이 올라왔다는 얘기라면 난 그런 이야길 한 사람을 미쳤다고 할 거다. 소드 마스터 급에 필적하는 대단한 능력의 궁수라고 할 지라도, 1:1대결에서 제대로 된 검사를 상대하긴 힘들다고." 심도깊은 토론을 계속하는 그들에게 나는 드디어 그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줄 수 있다는 뿌듯한 자부심으로 정보지에 나온 그녀에 대한 설명을 읽었다. "키론. 린넬. 저 여자는 16강까지 올라가면서 한 번도 화살을 쏜 적이 없대. 가지고 있는 저 커다란 활로 상대를 패대기쳤다는데?" "음. 그쪽이 좀더 현실성이 있겠군." "하기야 몇 년 전 대회에는 비파라던가 뭔가 하는 이상한 외국 악기를 가지고 검처럼 휘두르면서 8강까지 오른 음유시인도 있었으니까." 그들은 내 말을 듣고 의외로 쉽게 저 여자의 무기를 수긍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의 수긍과는 달리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고 있었다. 활로 사람을 패대기치고 악기로 검과 맞서다니. 지금 어떤 로봇만화처럼 뿅망치가지고 적을 무찌르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냐굿! 하지만 원래 형식과 격식에서 벗어난 게임일수록 더 재미있는 것도 사실. 16강 다섯번째 경기를 알리는 타종과 동시에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단번에 경기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무기라는 것을 논할 때 있어서 팔방미인인 검이 좋느니, 창이 길어서 쓸만하느니, 도끼가 파괴력이 있어서 너 낫느니 하는 논쟁은 개인의 성향이 나 자질, 또는 전투 상황에 따라 다른 것으로 딱히 어떤 것이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무기간의 상대적 우위를 논한다고 해도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무기가 쓰여지는 상황. 그리고 그 무기를 다루는 자의 실력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시킨즈 아저씨와 일전을 벌이는 나샤드라는 여자는 그런 상식을 깨기라도 하듯 등에 화살통을 매고 커다란 활을 들고 버 티고 서 있었다. 16강전까지 올 정도의 고수라면 최소한 아까 노코드에게 패한 아포로 정도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시작하는 위치가 5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린데 그런 상대에게 화살을 날린다는 것은 아무리 궁술의 고수라고 할 지라도 한 번이나 쏠까 말까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도저히 화살 을 날려서 적을 공격하기에는 무리인 상황이었다. 어차피 상대를 직접 때릴 거면 검이나 창처럼 좀더 효율적인 무기를 택하지 왜 저 여자는 활을 선택했을까? 그런 의문을 뒤로 한 채 경기 시작 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시킨즈 아저씨는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거리를 좁히기 위해 뛰쳐나갔다. 활을 든 상대를 마주하고 있는 검사라면 당연한 행동이다. 딱 시킨즈 아저씨가 순식간에 나샤드의 앞까지 달려들어 검을 휘두르려 할 때 먼저 나샤드가 내리친 활이 시킨즈 아저씨의 마빡에 작렬했고 시킨즈 아저씨는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그녀의 활 길이는 시킨즈 아저씨의 도보다 길었다. 나샤드는 균형을 잃은 시킨즈 아저씨를 시위 방향으로 내리쳤고 시킨즈 아저씨는 비틀거리면서도 힘겹게 활을 피했다. 하지만 휘두르는 활에 크 게 베인듯 왼쪽 팔에서 피가 뚝뚝 흘려내렸다. "피?" "피라고?" 관중들이 웅성거렸다. 화살을 재어 쏘는 활에 날카로운 부분이 어디 있다고 활에 베인단 말이야? "그렇군. 저 활시위가 문제군. 너도 느꼈지, 린넬?" "응. 저 활시위. 뭘로 만들었지는 모르겠지만 팽팽하게 서 있는데다 날이 든 검에 비견될 정도로 날카로워. 저건 화살을 쏘기 위해 만든 게 아냐. 애초부터 사람을 베기 위해 만들어진 활시위다." 이 방면에서 나름대로 전문가인 린넬과 키론이 상황을 보고 재빨리 판단을 내렸다. 그렇다면... 저 여자는 활시위를 검날처럼 이용한다는 이야기 인데... 하지만 아무리 활을 휘두르는데 자신이 있다해도 검보다 불편하지 않아? 그러는 와중에도 나샤드는 시킨즈 아저씨에 대해 계속 적극적인 공격을 하고 있었다. 시킨즈 아저씨는 점차 안정을 찾아가면서 나샤드의 활시위를 막아내고 있었지만 피가 흐르는 왼팔에 힘을 집중시키지 못하 는 듯 반격에 나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근육에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저 활시위. 검과 부딪히고도 쉽게 끊어지지 않는군. 게다가 쉽게 늘어나지도 않아." "저정도면 활시위라기보다는 얇은 검날이라고 보는 편이 좋겠는데?" 시킨즈 아저씨는 몇 번 검을 나샤드의 활시위에 마주치더니 잠깐 안정을 찾기 위해 뒤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나샤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화살통 에서 활을 하나 꺼내더니 활에 화살을 잰 것이 아니라... 시킨즈 아저씨를 향해 화살을 던졌다. 더... 던져? 뭐하는 짓인지... 갈수록 행동이 엽기적이잖아? 빠른 속도로 날아간 화살을 시킨즈 아저씨는 깜짝 놀란 듯 간신히 몸을 틀어 피했다. 하지만 나샤드는 화살을 계속 꺼내서 시킨즈 아저씨에게 던졌고 시킨즈 아저씨가 다시 그것들을 피하는 사이에 다시 근처로 접근해왔다. "저 나샤드라는 여자 궁수, 대단해!" 루카라가 화려한 나샤드의 솜씨에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키론과 린넬의 생각은 좀 비판적이었다. "분명 저런 무기로 저렇게 싸우다니... 대단하긴 해. 하지만 활을 저렇게 검처럼 쓸 바에야 아예 처음부터 검술에만 매진했다면 훨씬 더 뛰어난 성과를 거뒀을 텐데... 이해할 수 없어." "활을 검처럼 쓰고, 화살을 단검처럼 쓰다니... 보기 드문 구경거리긴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통할거라는 보장은 없어. 만약 시킨즈 아저씨가 너무 서둘러 접근하다 상처를 입지 않고 약간의 거리를 두고 치고 빠지고를 반복했으면 저 여잔 지금쯤 고전하고 있었을 거야." 하지만 가정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 그것만으로 현실에 일어나는 일을 바꿀 수는 없다. 시킨즈 아저씨는 한 손으로만 도를 다루면서 어떻게든 버텼지만, 나샤드의 활시위에 오른쪽 어깨가 베이는 부상을 입고, 결국 기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까 자신만만하게 쓴다고 선언 했던 비기도 쓸 기회가 없겠지. 그리고 흥미진진한 볼거리를 제공해 준 나샤드는 관중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쳇. 너무 방심했어. 좀 이상한 상대긴 하지만 처음에 상처만 안 입었으면 이길 수 있었는데." 시킨즈 아저씨는 우리 관중석 밑에 있는 신관들에게 다친 상처를 치료받으러 오면서 투덜거렸다. 린넬이 그런 아저씨를 위로하려는 듯 말을 건 넸다. "고정관념을 깬 데 만족하세요. 그래도 16강에 오른 상대인데 방심해서 될 일이 아니었잖아요." "그래. 니 말이 맞다. 스텐 녀석보다 좋은 성적을 거둔 데 만족해야지. 하핫." "그런데 스텐리 아저씬 어디에 있어요? 떨어졌으면 응원이라도 하러 왔어야 하는 거 아녜요?" "병원에 있어. 하필이면 그 녀석. 다리가 잘렸었거든." 헤엑? 다리가 잘렸어? 오지 못한 것도 당연하군. 이 세계는 웬만큼 큰 상처도 신관들의 신성력에 의해 낫게 할 수 있지만 그 정도 상태는 우리 엄마 정도 되는 초고위급 신관이 아니면 하루이틀 내 회복되는 건 무리다. 나중에 한번 문병이라도 할까? 하지만 내일이면 수학여행이 끝나는데 갈 시간이 없군. "카렌 양을 못 봐서 아쉽네. 만나면 안부 전해줘." "네. 알았어요. 조심해서 가세요." 린넬이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시킨즈 아저씨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이씨이! 뭐가 그렇게 우스워? 노비스를 포함에 날 따라온 여자애들조 차 키득키득 웃고 있었으니까. 우뉴와 이멜츠 녀석은 그게 내가 여장해서 핀치 시를 돌아다녔을 때의 가명이라는 것을 이미 그 여자애들에게 떠 벌인 모양이었다. 저 놈들은 어째 계집애들보다도 입이 가벼운게냐... 망할. 그리고 연이어 시작된 16강전이 하나둘씩 끝나고 드디어 16강 마지막 시합인 여덟뻔째 시합이었다. 이 시합이 끝나면 잠시동안 점심시간이다. 그 리고 이 시합에 나오는 녀석은 바로 스텐리 아저씨의 다리를 잘랐다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의문의 검사, 래더. 다리를 잘린 것에 그래도 되나 하는 의문이 들어 키론에게 물었지만 상대가 죽지 않고, 승리가 확정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한 행위가 아니라면 큰 문제는 없다고 한다. 하기야 그런 큰 상처를 입어도 신관들 덕택에 다 치료되니까. ...어쩌면 이 세상. 내가 살았던 한국보다 훨씬 더 좋은 세상일 지도? 래더라는 녀석과 싸우는 사람은 창을 쓰는 소선 태크랙이라는 사람이었다. 창은 길이가 길긴 하지만 1:1상황에서 그렇게 선호되는 무기는 아닌 데... 아니나다를까. 정보지를 보니 끝에 창 촉이 달려있다 뿐이지 거의 봉처럼 휘둘러서 적을 제압한다고 씌여 있었다. 반면에 래더라는 자의 검 은 검에 대해 안목이 없는 내가 봐도 전혀 특별한 것이 없이 평범했다. 게다가 저렇게 무거운 로브를 쓰고 다니면 움직이기에도 무지 불편할 텐 데... 멋있어 보여서 한번 뒤집어 써 봤기 때문에 무거운 줄은 안다. 래더라는 저 녀석이 기분나쁜 건 관중들도 마찬가지인지 열심히 야유가 쏟아지고 있었다. 오죽하면 오물까지 쏟아져서 스피커로 자제 요청이 들 어올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자 다들 입을 굳게 닫고 침을 삼키며 경기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종이 울리고, 먼저 공격을 시작한 쪽은 창을 든 소선이었다. 16강에 오를 정도의 모든 고수들이 그렇듯, 그는 긴 창을 앞으로 세우고 빠른 속도 로 래더를 향해 돌진했다. 래더는 그래도 16강에 진출한 고수답게 검을 창 옆으로 비껴 막음으로서 공격을 피했다. 곧이어 소선의 파상공세가 이어졌다. 창을 봉처럼 이리저리 휘두르는 소선의 공격은 검을 쓰는 검사들처럼 빠르고 변화무쌍하지는 않았지만 예 측할 수 없는 방향에서 쉴새없이 공격이 들어가는 데다, 창의 긴 길이를 이용해 래더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가며 접근을 허용치 않았다. 게다가 래더는 왜 그런지 모르게 공격에는 소극적이었다. 단지 이어지는 소선의 공격을 검으로 막아내거나 큰 동작으로 휘두르는 창 공격을 유 연하게 피해낼 뿐이었다. 아, 정신없는 속도로 이루어지는 대결을 싸움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이정도로 평가할 능력은 없다. 아까부터 설명하고 있는 내용은 전부 키론과 린넬이 이리저리 떠든 것들을 종합한 것이다. 사람들은 창술이라기보다는 봉술에 가까운 소선의 화려한 공격에 취해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간신히 피하는 듯이 움직 이는 저 래더가 마치 악당이라도 되듯 공격을 외쳤다. 그렇게 몰아가는 군중 심리에 휩싸인 건지, 그렇잖으면 나 자신도 래더에 대해 나쁜 기분 을 느낀 듯 나도 그들과 함께 래더에게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소선에게 보내는 환성이 경악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정보지에 나온 대로의 '기묘한 방법'을 래더가 쓰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뭐야! 저건...! 말도 안 돼!"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고. "세상에... 꽤 많은 무술대회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군." "아까 나샤드라는 여자가 쓴 방법은 차라리 애교로 봐줄 만한 거 같아. 검을 저런 식으로도 쓸 수 있을 줄이야." 린넬과 키론을 비롯한 검을 좀 안다 싶은 사람들의 반응은 이랬다.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하도 어이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래더가 검을 휘둘렀을 때, 순간 검의 길이가 늘어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검날이 검에서 순간적으로 튀어나간 것이다. 애초에 여유를 두고 찔러들어오는 검을 피했던 소선은 갑작스레 날아오는 검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뒤로 넘어지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하도 빠른 순간에 일어 난지라 내가 제대로 보고 설명을 했는지 몰라 이거... 래더 역시 겉보기에는 허접해 보여도 16강까지 올라온 고수. 소선이 넘어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찔러들어갔는데... 위잉∼ "끄아아악!" 세상에... 소선의 비명소리가 경기장 전체를 울렸다. 소선은 자리에 넘어진 상태에서 찔러들어오는 검을 피하지 않고 창으로 어떻게든 막으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큰 실수가 되었다. 놀랍게도 소선에 게 찔러들어가는 래더의 검날은 마치 드릴처럼 위잉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회전했다. 래더의 검을 몇 번이나 정면으로 막아내도 멀쩡했던 튼튼한 창은 무토막처럼 싱겁게 두 동강이 나고 회전하는 검날은 소선의 팔을 뚫고들어가며 사방에 피를 튀겼다. "꺄아아악!" "우와아악!" 아시에와 치즈, 루카라를 비롯한 여자애들은 그 끔찍한 장면에 고개를 돌렸고, 린넬과 키론을 비롯한 남자애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어느 쪽 이었냐 하면... 여자애들과 같은 행동을 취했다. 저런 끔찍한 장면따위는... 보고 싶지 않다고! "끄으으윽..." 경기는 중단되었다. 16강전 여덟 번의 시합이 모두 끝나고 점심 시간이 왔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락을 먹거나 식사를 위해 잠시 경기장 밖으로 나갔지만(표는 저녁식 사 후에 입장할 때 회수한다.) 나는 별로 식사를 하고픈 생각이 없었다. 아까의 끔찍한 장면이 자꾸 머리속에 떠올라서 배가 고플 시간인데도 식 욕은 전혀 돌지 않았다. 자꾸 그 모습을 상상하면 속이 메슥거렸기 때문이었다. 회전하는 칼날로 팔이 뚫리는 끔찍한 장면에 황급히 몸을 돌렸지만, 그래도 어떻게 되어 가는 게 궁금한 것이 사람 심리인 터라, 고개를 돌렸던 여자애들도, 나도 스리슬쩍 몸을 돌려서 그 장면을 목격하고야 만 것이다. 자리에서 박차 한꺼번에 경기장 안으로 진입하는 신관들. 검에 뚫리며 살점이 여기저기 튀어나간 듯 래더의 검은 로브에 잔뜩 묻은 핏자국. 달랑 거리듯 몸에 간신히 붙어있는 팔로 고통을 호소하는 소선. 한창 배고픈데도 식욕을 잃어버리는 건 당연했다. "스텐리 아저씨가 당한 게 저 기술인가요?" 린넬이 시킨즈 아저씨에게 물었다. 이미 탈락했지만 시킨즈 아저씨는 신관들에게 치료를 받고 관중석 밑에 있는 벤치에서 참가선수 자격으로 경 기장에 계속 남아 있었다. 이는 다른 탈락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냐. 스텐은 더 넓게 회전하는 검에 잘렸어." 더 넓게 회전하는 검이라니... 무슨 뜻일까? "저거... 반칙 아냐?" 나는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하지만 키론은 씁쓸한 표정으로 내 말을 부인했다. "마법무기, 마법방어구나 마법만 쓰지 않으면 어떠한 제한도 없어. 하지만 저 검의 정체는 대체..." 그랬다. 검에 무슨 전기 모터라고 달렸냐? 회전하게? 게다가 접는 우산도 아니고 갑자기 날이 상대를 향해 팍 튀어나가다니... 마법검이니 에고 소드니 하는 말은 들어봤어도 저런 황당한 검은 처음 보는 터였다. 래더의 승리가 선언되고 관중석에서는 야유와 함께 쓰레기들이 마구 날아왔다. 경기 운영진들은 재빨리 오전 경기의 종료를 선언해 버렸다. 하지 만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격앙되어 있었다. 결국 점심을 먹으러 간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먹는 데 목숨을 거는 치즈와 우뉴, 이멜츠뿐이었고 린넬은 끔찍한 사건으로 답답해진 우리의 마 음을 풀어주려는 듯 냉수과 음료를 사 왔다. 그리고 나는 화장실에 다녀온 후에 펜으로 정보지에 그려진 16강 토너먼트 대진표에서 참담한 마음 으로 소선의 이름에 엑스표를 그렸다. 오후 경기에 붙을 사람들의 이름을 대자면 8강 제1경기 노코드 로드맷 vs 그리피 스켈가츠 8강 제2경기 타오린 뮤코로코스 vs 파인 8강 제3경기 나샤드 큐펜리드 vs 그릴곤. 칼. 쥰페이. 8강 제4경기 홀타 멜티카 vs 래더 노코드는 아까 본 대로 언월도를 자유자재로 쓰는 이국적인 전사였고, 그리피는 자기 키보다 큰 거검을 쓰는 검사다. 타오린은 일종의 소드 마스 터로 검 대신 자기 팔과 다리에 기를 집중시키는 맨손 격투가였고 파인은 길고 가는 펜싱용 검 비슷한 검을 쓰는 검사였다. 저런 걸 레이피어라 고 부르던가? 나샤드는 활을 검처럼 쓰는 엽기 궁사였고 그릴곤은 두꺼운 갑옷을 입고 헬버드를 두른 덩치 큰 전사다. 홀타는 타오린과 함께 확실히 유형의 기를 쓸 수 있는 밝혀진 소드 마스터였다. 밝혀진 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노코드와 같이 아직 검기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녀석도 있기 때문이었다. 훗훗훗. 래더 녀석. 정체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끝이군. 운 없게도 소드 마스터한테 걸리다니 말이야. "그러고 보니... 옛날에 저런 비슷한 검에 대해 들은 적이 있어." 내가 대진표를 보면서 요모조모 결과를 예상하고 있을 때 키론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어떤 검인데?" "응. 기계검(器械劍)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 모두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심지어 린넬조차도 키론이 말한 것을 처음 듣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도 소문으로만 들은 건데...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기계장치로 작동시키는 무기가 있대. 처음 들었을때는 전혀 상상이 안 갔는데... 저 래더라는 자의 검을 보니까 어쩌면 저런 걸지도 모르겠어." 기계검이라... 과연 무서운 검이다. 나는 단순히 번개나 화염 등의 마법이 담긴 마법검 같은 거나 무서운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런 식으로 움직이 는 검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 어쩌면 마법검이나 그런 종류의 검보다 더 위험한 걸지도 모른다. 다른 8강 진출자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무더기로 래더에게 쏟아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옷에 제멋대로 묻은 핏자국과 살점 조각 을 떼내려거나 씻으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주최측의 정령술사가 그에게 물의 정령으로 옷을 씻어주겠다고 했지만 래더는 그 말을 무시하고 여전 히 로브 속에 모습을 감춘 채 주최측에서 제공하는 점심 식사를 먹을 뿐이었다. "저 사람... 그 사람과 비슷한 느낌이 와..." 내 옆에 있는 아시에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라니... 셰더 놈?" "응... 하지만 저 사람은 그 사람이 아냐... 하지만 비슷해..." 아시에는 무언가 느낌이 오는지 계속 중얼거렸지만 난 그녀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셰더와 동일 인물이 아니면 같은 패거리일까? 아니면 단순히 같은 흑마법사기 때문에(근거는 없지만) 비슷한 느낌이 오는 걸까? 뭐, 칙칙한 검은 로브를 입은 잔인한 녀석이라는 점에 있어서 썩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놈이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점심 시간동안 밖으로 나갔던 여자들이 다시 돌아왔다. 10여명 남짓한 여자애들 중에서 몇 명의 얼굴이 바꼈다. "헤헤헤. 카이엔 님이랑 같이 경기 보게 됐다." "아까 왔던 애들은?" "몇몇 애들은 지금처럼 중간 쉬는 시간에 서로 표를 바꿔서 들어오기로 했어요." 그 여자들의 리더격인 노비스가 내 말에 대답했다. 그녀는 어제 호텔에서 같이 밥을 먹었던 3인조 중 하나였는데 옆에서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 면 나름대로 박학다식하고 야무지며 차분한 여자애였다. 어째서 이런 애를 제치고 피케 같은 덜 떨어지고 가벼운 애가 자하기니아의 내 팬클럽 대장 노릇을 하고 있나 몰라. "생각해봐도 노비스가 피케보다는 더 회장직에 어울릴 거 같은데."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카이엔 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피케는 장점이 많은 좋은 아이에요." "아하하. 역시 그렇겠지?" 서로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노비스의 말에는 뼈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잘 알지도 모르면서 남에 대해 함부로 단정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그렇게 서로 이야기하는 사이에 점심시간이 다 끝났고 사람들도 식사를 마치고 들어와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오전 시합들은 정말로 재미있게 봤는데 단 한경기. 래더라는 놈이 나온 경기 때문에 기분이 흐트러졌다. 오후 시합을 보면서 다시 기분을 추스려 야겠지? 그리고 그 소드 마스터라는 홀타 멜티카라는 자가 반드시 래더를 꺾어 주기를 바라며 나는 경기장에 눈을 집중했다. "둘 다 무기만 디따 크네?" "풋." 우뉴의 말에 난 실소를 머금었다. 그도 그럴 것이 8강 1차전에 대결하는 노코드와 그리피 둘 모두 체구는 작지만 모두 큰 무기를 쓰는 사람들이 었기 때문이었다. 노크드와 언월도와 그리피의 거검 둘 다 그들의 키보다 컸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렇게 큰 무기를 휘두르면 무게와 크기 때 문에 대체로 동작이 크고 느릴텐데도 실제 싸움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거였다. "튼튼한 근육에서 나오는 힘과 수련으로 쌓인 기를 효율적으로 운용하면 무거운 검도 가벼운 수수깡처럼 다룰 수 있어." 나의 질문에 대한 키론의 대답은 무협지에서 나올 것 같은 뻔한 대답이었지만 단순히 글로 읽어서 상상되는 장면보다는 역시 두 눈에 직접 보이 는 장면이 임팩트가 크기 마련이었다. 채챙.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금세 둘의 검이 부딪혔다. 사실 워낙 전투가 빠르게 전개되는지라 잠깐 한눈을 팔면 금방 뭐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 게 되어버린다. 하지만 역시 큰 무기로 근접전은 쉽지 않은 듯 두 사람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검과 도를 서로 맞부딪혔다. 그리피가 휘두르는 거검은 확실히 위력적이었다. 노코드가 그리피의 검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언월도로 검을 막을 때마다 노코드의 몸이 뒤로 밀렸다. 하지만 전체 적으로 공세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노코드였다. 똑같이 큰 무기라고 해도 무기의 무게중심이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노코드의 움직임이 상대적 으로 무기를 받치는데 더 큰 힘이 필요한 그리피보다는 훨씬 부드럽게 흘러갔다. "헤에... 역시 노코드가 이기려나?" "그쵸? 그쵸? 카이엔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죠?" "맞아요. 게다가 저 노코드란 사람. 좀 이국적으로 생기긴 했지만 멋있잖아요." 내가 무심결에 중얼거리자 여자애들이 내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를 표하고 나섰다. 내 팬클럽 여자애들이 이 대결에서 노코드를 응원하는 이유는 거의가 노코드 쪽이 더 잘 생겼는데다 그의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검술이 언뜻 무식해 보이는 그리피의 검술보다 훨씬 인상깊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관우랑 닮아 보인다고 느낀 건 단순히 수염을 길게 길렀기 때문이 아니었다.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그런 위압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 다. "아직 승부를 결정짓기는 일러." 노코드의 승리를 예측하는 분위기에 키론이 끼어들었다. 우리는 의아해하면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노코드는 공세를 더 강화 해서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슨 얘기야?" "노코드라는 사람.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서두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서둘러? 승기를 잡고 공격하는 게 아냐?" "그리피는 비록 공격을 당하고 있지만은 큰 흐트러짐이 눈에 띄질 않아. 반면에 노코드는 간혹 들어오는 그리피의 반격을 받을 때마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밀리고 있어. 이대로라면 시간을 끌면 끌수록 노코드 쪽이 먼저 힘이 빠져버려. 그 때문에 그는 초조해하는거야." 린넬이 끼어들어 대답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듯했다. 나름대로 좀 안다는 녀석들의 이야기인데다 린넬의 말대로 노 코드는 그렇게 공격하면서도 아직 치명적인 타격을 전혀 주지 못하고 있었다. "저, 저것 좀 봐!" 이멜츠의 외침에 우린 다시 경기장을 돌아보았다. 순간적으로 노코드의 언월도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 하더니 방어하는 그리피의 거검을 그 대로 싹뚝 베어버린 것이다. 콰당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검의 무거운 날이 바닥을 울렸고 노코드의 언월도는 그리피의 목 바로 앞에 다다라 있었다. "우와아아아아!"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소드 마스터의 검기에 사람들이 환성을 질렀다. "...소드 마스터였네?" "쳇. 소드 마스터였나. 그럼 얘기가 다르잖아!" 자기 예측이 빗나가자 투덜거리는 린넬. 전문가라고 할지라도 정확한 정보가 없으면 때때로 빗나갈 수도 있는 모양이다. "내기하자." 8강 제2시합인 타오린과 파인의 경기를 앞두고 린넬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자신 있게 예측한 결과가 허무하게 빗나가서 꽤 실망이 큰 모양이었 다. "그거 좋지." "나도 할래!" 키론이 동의를 표했고 다른 애들도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스포츠라는 것이 원래 내기를 걸어야 더 관람에 몰두할 수 있고 짜릿한 기분을 선사해 줄 수 있는 일이니까. 오히려 지금까지 왜 내기 걸자고 한 녀석이 하나도 없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나는 사실 처음 보는 엄청난 전투에 놀란 나머지 미처 생각을 못해서 그랬지만... 어쨌건 린넬의 제안에 따라 우리들은 이 시합에 내기를 걸게 되었다. 16강전이라면 몰라도 8강전에는 이미 모든 선수들이 한 번씩 16강전에서 싸웠던 터라 선수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정보가 있었고 잘 알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판단하는 바가 있을 테니까. 먼저 린넬이 타오린에게 돈을 걸었고 키론이 그 뒤를 따랐다. 그 뒤를 이어 치즈, 이멜츠, 우뉴, 이멜츠가 모두 타오린에게 돈을 걸었다. "다 거기다 걸면 내기가 안되잖아?" 하지만 타오린은 밝혀진 소드 마스터 능력의 소유자.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거기에다 돈을 걸 거다. "할 수 없지. 내가 파인한테 돈을 거는 수밖에." 학교 다닐 때 이런 내기를 많이 해 봤지만 이긴 기억은 그다지 많지 않다. 어차피 돈 부족할 일도 없는데 이럴 때 내가 조금 희생해줘야겠지 하 는 심정으로 나는 파인에게 돈을 걸었다. "나... 해도 돼? 하지만 내 돈은... 브리타뉴가(家) 건데..." "니 돈이야. 우린 가족이야. 남의 돈이라는 생각따윈 가지지 않아도 돼. 알았지?" 사실 아시에는 우리 집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았고 아이렌의 괴롭힘 등으로 융화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직 저런 식의 생각 을 가지는 거겠지. "나도 카이와 같은 데 걸께." 아시에는 당연한 듯이 나를 따라서 돈을 걸었다. 조금은 주체성을 가져주면 좋겠는데... 아직 무릴까나? "저도 카이엔님이랑 같은 데 걸래요!" "저두요!" 끼워준다는 말도 안했는데 노비스를 비롯한 자하기니아의 팬클럽 여자애들이 전부 날 따라서 돈을 걸고 나섰다. 아시에에게 날 따라 하지 말고 스스로 판단해서 정하라고 충고해줄 참이었는데 이래서야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반면에 별 기대를 하지 않다가 갑자기 배당률이 껑충 뛰어버린 우리 조 애들은 희희낙락했다. "고맙다. 카이엔. 고 스타르 게임도 그렇고 넌 영원한 우리의 물주야!" 특히 우뉴녀석은 오버해가면서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런 얘긴 이기고 나서 해." 린넬이 타오린에게 건 사람들의 돈을 모으고 노비스가 파인에게 건 사람들의 돈을 모으는 가운데 곧이어 타오린 뮤코로코스와 파인의 대결이 시 작되는 종이 울렸다. 먼저 타오린이 손을 까딱거리면서 먼저 돌격해오라는 투의 도발을 했다. 그러자 파인은 혀를 빼죽 내밀면서 마치 컴온∼ 베이비! 이런 느낌으로 뒤돌아서서는 엉덩이를 툭툭 쳤다. 피와 살이 튀길 전투 중에 둘 다 뭐 하자는 짓이얏! 이게 무슨 TV중계되는 쇼인줄 알어? 하지만 관중들은 그런 쇼맨쉽에 더욱 열광하는 듯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그리고 그런 유치한 도발의 끝에 먼저 열받아 버린 쪽은 뜻밖에서 소드 마스터급인 타오린이었다. 시끄러운 경기장의 환성 때문에 뭐라고 외쳤 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상당히 심한 욕을 퍼부은 모양이었다. 타오린은 아예 처음부터 작살을 내버리겠다는 듯 금방 오른손 주먹에 유형의 푸른 기를 집중시켜서 돌진했다. 그에 맞서 파인도 가는 그의 검을 앞으로 내질렀지만 푸른 오라가 뿜어져 나오는 타오린의 주먹 에 파인의 검은 너무나도 약해 보였다. 콰콰쾅. "우와아악" "끼아악!" 그 때였다. 순간 파인의 검 끝에 붉은 빛의 기운이 맺히는가 싶더니 엄청난 속도로 앞으로 뿜어져 나갔다. 타오린은 그 기운을 간신히 피한 듯 했지만 한번 발사된 붉은 기운은 그대로 앞으로 뻗어 나가 관중석 밑에 있는 벽 한켠을 부쉈고, 관중석의 일부가 부서지면서 사람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끄응... 아무래도 이번에도 표를 잘못 던진 것 같군." 린넬이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면서 중얼거렸다. 키론도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검강이다. 아무리 권위있는 자하기니아의 무술대회라지만 저 정도의 실력자가 나올 줄이야." "검강?" 새로운 단어에 나는 되물었다. 비록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소드 마스터를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가 검기의 사용 유무라고 했는데... 검강을 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높은 수준에 있는 건가? "검기는 오로지 자기 자신이나 그 주변의 사물에만 작용하지. 검기를 사용하는 소드 마스터라면 나뭇가지 만으로도 검을 자를 수 있어. 검강은 그런 검기를 확장시켜 사용할 수 있는거야. 지금처럼 기를 상대에게 쏜다던지, 아니면 기를 원하는 대로 여러가지 다양한 형태로 바꿀 수 있는 검기야." 나와 몇몇 사람들이 이해를 못한다는 눈치를 보이자 키론이 알아서 설명을 해주고 나섰다. "그렇다면... 검강을 쓰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수준이야?" "그랜드 소드 마스터까지는 안되고... 소드 마스터 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자들이지. 저 녀석. 이번 대회의 유력한 우승 후보겠는걸. 보통 저 정 도 실력이 있는 자라면 마법검도 아닌 시드의 검 정도를 얻으려고 이런 대회에 출전하지는 않는데... 왠만한 나라에 고용되면 미스릴이라 오리하 르콘제 마법검은 그냥 얻을 수도 있다구." 키론은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내 질문에 대답했다. "내 도오오오오온!" "흑흑흑!" "쪼잔하게시리 왜 그거 갖고 궁상질이얏!" 그 옆에서 우뉴는 누가 상인 집안 아들 아니랄까봐 내기에서 잃은 돈이 염려되는지 이멜츠와 함께 서로를 붙들고 절규하고 있다가 치즈에게 열 심히 구박을 받고 있었다. 아까전에 래더에게 중상을 입은 소선을 치료하기 위해 열심히 뛰었던 신관들은 이제는 무너진 관중석에 깔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16강에서 떨 어진 선수들과 함께 무너진 경기장 쪽으로 달렸고 타오린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기권을 선언했다. 그리고 나와 아시에, 내 팬클럽 여자애들은 내기에서 이긴 대가로 약간의 돈을 얻었다. "이대로는 용납할 수 없어, 다시 내기 승부닷!" 린넬은 자꾸 자기 예상이 빗나가자 더 오기가 생긴 듯 다시 승부를 제의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 승부를 회피할 만큼 돈이 딸리는 녀석도, 삶의 규모에 맞지 않게 쪼잔한 녀석도 없었다.(우뉴와 이멜츠는 내기에서 잃었을 때는 말이 많지만 그들 역시 내기를 했다 하면 꽤 화끈하다.) 8강 제3경기. 나샤드 큐펜리드 대 그릴곤 칼 준페이. 린넬은 당연하다는 듯 갑옷과 핼버드를 든 그릴곤에게 돈을 걸었다. 그 뒤를 치즈와 우뉴와 이멜츠가 뒤를 따랐고, 나와 아시에, 그리고 내 팬클 럽 여자애들도 그릴곤 쪽을 선택했다. 나샤드의 편을 든 것은 루카라와 키론이었다, 그리고 노비스도 팬클럽 여자애들 중 유일하게 내와 다른 쪽 에 돈을 걸었다. "왜냐면 저 나샤드라는 언니, 너무 멋진걸!" 이게 루카라의 이유였고, "...이성적으로 볼 때는 그릴곤 쪽이지만 도박사의 감으로 느낄 때 린넬이 가는 쪽은 꼭 틀리리라는 예감이 와." "뭐야앗! 키론 너 그러기얏?" ...키론은 이렇게 말했으며 "음... 여자의 감! 이라고나 할까요?" 노비스는 검지손가락을 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이. 노비스 양. 그럼 여기 있는 다른 여자들은 여자의 탈을 쓴 다른 생물들이야? 그런 가운데 8강전 제3시합이 시작되었다. 나샤드는 당연히 가벼운 방어구에 활통을 뒤로 맨 채 활을 들었고 그 상대인 그릴곤은 금속제 갑옷으 로 온몸을 둘러싼 채 거대한 핼버드를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었다. 아무리 몸 속의 마력을 이용하여 기를 끌어내 근육의 힘과 함께 사용한다지만 저렇게 무거운 것들을 가볍게 다루다니 보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참 놀랍지 그지 없다. 비록 활을 쓰지만 그것도 나샤드의 입장에서는 상대를 속이는 훼이크 중 하나겠지. 활을 들고 있다고 해서 함부로 접근했다가는 재빠른 나샤드 에게 농락당할 가능성이 컸다. 아무리 저런 큰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룬다고 해도 지나친 근거리에서는 이용에 제약을 받는데다 무거운 갑옷까지 입어서는 움직임 또한 빠르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난 그릴곤이 승리할거라고 생각했다. 아까 열린 16강전에서 그는 상대방의 빠른 공격에 자꾸 밀리면서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더니 단 한 번의 역습으로 적을 박살내 버렸다. 그 파워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큰 언월도를 쓰는 노코드나 거검을 쓰는 그리피보다 훨씬 힘이 강해 보 였다. 보통 상대는 활을 든 냐샤드의 모습을 보고 거리를 좁히기 위해 돌진하기 마련인데, 그릴곤은 아까의 시합을 본 모양인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천천히 그녀에게 접근해 갔다. "거리가 있는데도... 화살을 안 쏘네?" "당연하지. 일종의 검이나 다름없는 저런 활시위로는 화살을 잴 수 없다고." 린넬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말투였다. 서로의 거리가 10여미터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먼저 그릴곤이 핼버드를 휘두르며 돌진했다. 나샤드는 그릴곤의 상대적으로 느린 움직임을 어렵 지 않게 피하고는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가는 활시위는 그릴곤의 두꺼운 갑옷에 기스만 낸 채 그대로 튕겨나왔다. "그릴곤의 튼튼한 갑옷과 큰 덩치 때문에 비록 움직임이 느리다고 해도 검기를 다루지 못한다면 저런 검으로는 별 타격을 줄 수 없어. 저런 갑옷 은 연결부위를 노리거나 아니면 힘으로 깨부술 수밖에 없는데, 둘 다 아무리 봐도 무리야." 린넬은 그릴곤이 이기고 있자 신이 난 듯 설명을 계속했다. 역시 내기를 거니까 눈빛이 엄청나게 달라지는 걸? 뭐, 나도 그릴곤에게 걸었기 때문 에 그리 기분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당연히 내가 응원하는 쪽도 내가 돈을 건 사람이니까! 나샤드는 재빠른 스텝으로 정신없이 움직이면서 계속 공격해댔지만 머리까지 온통 갑옷으로 도배한 그릴곤에게 쉽사리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었 다. 게다가 그녀는 활에 달린 시위를 검처럼 사용하고 있는데 저런 걸로는 베기나 휘두르기는 가능할 지 몰라도 찌르기는 불가능하다. 투구나 갑 옷 관절부위의 빈틈마저 쉽사리 노리기 힘든 무기다. 비록 동작이 다른 선수들보다 다소 굼뜨다고는 하나, 그릴곤 역시 상당한 실력을 가진 선수 였다. 그릴곤의 핼버드가 최초의 나샤드의 활에 맞닿았을 때, 그녀의 가는 활시위는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 두동강나고 말았다. 린넬은 환호성 을 질렀고 나는 그릴곤의 승리를 확신했다. 나샤드의 활이 부러졌을 때 나는 승부가 이미 결정났다고 생각했다. 비단 그릴곤을 응원하던 린넬뿐만 아니라 나샤드에게 돈을 걸었던 키론이나 루카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샤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화살통에서 화살을 두 개 꺼내 양손에 들고 계속 공격했다. 하지만 화살로는 찌르기 공격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베기 공격같은 건 전혀 할 수 없다. 아무리 봐도 무리라고 할 수 밖에는...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샤드는 꽤 분투했다. 그럴 것이, 그릴곤의 움직임이 원체 느린지라(그래도 나같은 사람보다는 훨씬 빠르다.) 나 샤드가 먼저 공격해오지 않는 이상은 도저히 그녀를 공격할 만한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저 나샤드란 언니는 저런 무기로 저렇게까지 싸워야 하는 거야?" 아시에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 글쎄? 우리도 그거야 모르지." 나는 어설프게 아시에의 말에 대답했다. 이잇. 대답같은 건 할 필요없는 중얼거림인데 내가 왜 바보같은 대답을 해 버렸담? 하지만 아시에의 말 은 그냥 단순히 구경거리려니 하고 생각하고 있던 나샤드의 이상한 무기에 관한 의문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활을 검처럼 쓰는 궁사. 비정상적이다. 비정상적이다 못해 말도 안 되는 바보같은 짓이다. 다른 사람에게 저런 사람이 있다. 라고 말한다면 분명 허풍쟁이 취급을 받을 거다. 하지만 나샤드는 여자는 실제 그런 무모한 짓을 행했고 그것으로 8강까지 올라오는 기염을 토했다. "설마..." 키론이 용전분투하는 나샤드의 모습을 보면서 뭔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듯 표정이 달라졌다. "왜 검을 쓰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만약에 검을 썼다면... 그릴곤 정도는 상대도 되지 않았을지도 몰라." "어쨌건 그녀는 패자야. 뭐라고 말해봤자 변명일 뿐이지." 린넬은 키론의 말을 묵살하면서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경기장을 가리켰다. 나샤드는 분투했지만 타오린처럼 맨손격투가가 아니니까 제대로 된 무 기도 없이 갑옷으로 무장한 그릴곤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릴곤의 승리였다. "우하하하핫. 드디어 내기에서 이겼도다!" 린넬은 드디어 경기 결과를 맞추자 희희낙락했다. 반면 이번에도 결과를 틀린 키론은 꽤 떨떠름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이리저리 박식하다고 해도 완전하지 않은 어설픈 지식만으로는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없는 법이니까. 운도 좀 나빴고 말이야. "자, 여기 돈 배분이다. 자." "뭐... 뭐얏! 왜 이렇게 배당금이 적어!" "나샤드에 건 사람은 키론과 루카라와 노비스 밖에 없어. 다른 사람은 전부 그릴곤에 걸었다고." 린넬과 우뉴는 원금보다 별반 늘어날 바 없는 배당금에 투덜거렸지만 내 팬클럽 여자애들을 포함에서 그릴곤에 건 사람들의 쪽수가 워낙 많은지 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드디어 다음 시합은 래더 놈의 차례군." 내 말에 모두들 긴장했다. 특히 아시에는 그 중에서도 가장 초조한 듯했다. 셰더와 비슷한 느낌이 전해져온다고 했지? 내 생각으로는 셰더와 그 다지 관계가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흑마법사로 보이기 딱 좋은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데다 아까 잔인한 경기를 벌인 탓에 전체적으로 인상이 좋지 않았다. 8강전 마지막 시합인 홀타 멜티카 vs 래더의 경기가 이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소드 마스터라는 홀타에게 일방적으로 응원을 보내는 반면 래더에게는 말할 수 없이 거친 욕과 야유를 퍼붓고 있었다. 이번 시합에서 린넬과 치즈, 우뉴, 이멜츠, 루카라와 다른 모든 내 팬클럽 애들은 홀타에 돈을 걸었다. 하지만 나는 이리저리 고민한 끝에 결국 래더에게 돈을 걸었고, 아시에와 키론이 나를 좇았다. 왜 래더에게 돈을 걸었나고 묻는 치즈에게 나는 대답했다. "래더라는 녀석... 잘은 모르겠지만 위험한 예감이 느껴져." 이성은 홀타의 승리를 점치고 감성은 래더의 패배를 응원하지만 난 래더에게 돈을 걸었다. 막연한 불안감. 알 수 없는 초조감. 래더를 보면 이 성이나 감성 이상으로 그런 감각이 온몸으로 전해져왔다. 아시에도 나와 같은 느낌을 받고 있는 모양이지만 너희들은 느끼지 못하는 거야? 아무 것도? 종이 울렸다. 래더는 여전히 아까 경기의 피가 말라붙은 로브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홀타는 그런 래더의 모습에 눈쌀을 찌푸리며 처음부터 검에 녹색의 검기를 모으고 공격에 들어갔다. 래더는 홀타의 검에 맞서 검을 휘둘렀다. 기계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특별한 재료로 만들어진 검 이 아니라면 검기에 그대로 잘려버릴 텐데... 무모한 게 아닐까? 앗. 이런 안되지. 내가 분명 래더에게 돈을 걸긴 했지만 그렇다고 래더를 응원하 는 건 아니라고! 래더도 그것만은 이해하고 있는지 홀타의 검을 정면으로 받지 않고 슬쩍 옆으로 흘리면서 피했다. 아까 그릴곤도 무거운 갑옷을 온몸에 뒤집어 쓰고 잘도 움직였지만 래더 녀석 역시 저렇게 두껍고 땅에 끌리는 로브를 입고도 피하는 걸 보니 역시 쉽지 않은 녀석이었다. 위이이잉. 래더의 검이 오전에 소선의 팔을 날렸을 때처럼 잔디 깎는 기계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소드 마스터인 홀타를 상대로는 역시 쉽지 않 았기 때문에 일찍 비기를 꺼낸 모양이었다. 린넬의 혹평에 따르면 래더는 검술 자체로는 별로 특별할 데가 없는 교과서적인 검술을 구사한다고 하니까. 역시 필살 승부수는 검으로 띄우는 것 같아 보였다. 홀타는 회전하면서 재빨리 찔러 오는 래더의 검을 막지 않고 피했다. 저 회전하는 검 역시 검기가 실린 검처럼 한번 맞으면 치명적인 타격을 입 게 될 테니까. 전기톱 같은 게 무기로 쓰이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겠지. 일초에 수십 수백번이 돌아가는 회전력에서 나오는 살상력이란 무시할 만 한 것이 절대 못 된다. 내가 아는 군대 다녀온 형도 총 안에도 나사 모양으로 강선이라는 게 파여 있어 회전하면서 날아가 파괴력을 엄청나게 높인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쉽게 접근하려 들지 않았다. "왜 홀타는 공격하지 않지? 래더의 검이 부담스럽다고 해도 소드 마스터의 검술이면 충분히 돌파 가능할텐데." 이멜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질문에 키론이 설명을 했다. "린넬의 말대로 래더의 검술은 교과서적이야. 나쁘게 말하면 응용력이 떨어지지만 좋게 말하면 기본기가 뛰어나다는 얘기지. 때문에 반격을 걱정 한다면 쉽게 들어가지 못하지. 지금 래더의 회전검과 홀타의 검기가 부딪히면, 두 힘간에 강력한 충돌이 일어나서 두 검이 모두 부러질 가능성이 커. 특별한 재료로 만든 검이 아닌 이상에야 말야." "이상하네. 검기가 더 강한 게 아냐? 회전하는 정도 가지고 검기를 이길 수 있는거야?" 루카라가 키론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나도 잘은 모르겠어. 하지만... 회전의 힘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냐. 아까 16강전에서도 봤잖아." 소선은 지금 특별치료를 받으러 대신관으로 후송된 상태였다. 비록 팔이 떨어졌다고 해도 고위 신관이라면 팔을 붙일 수 있다. 하지만 래더의 회 전검은 소선의 팔에 구멍을 뚫어 상당량의 피부와 뼈를 무수히 많은 파편으로 만들어 경기장에 뿌렸다. 때문에 아예 팔을 재생해야 할 판이었다. 루카라의 말대로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회전력이 검기 못지 않은 힘을 지닐 수 있다는 데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는 서로 부딪히겠지? 그럼 결과가 나올 거 아냐? 쓸데없는 논쟁은 그만 하고 일단 경기나 보자." 치즈가 점심시간에 밖에서 사온 강냉이를 뽀드득 씹으면서 이야기했다. 그 상황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 대치중이었다. 관중의 열띤 함성에 묻혀서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무언의 긴장감이 경기장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휘익 팽팽한 균형을 깬 것은 래더였다. 그의 회전검이 빠른 속도로 공간을 갈랐다. 홀타는 래더의 검을 어렵지 않게 피하며 반격에 나섰다. 래더는 신 속하게 이루어지는 홀타의 검기가 실린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하지만 검에 실린 강력한 검기의 영향으로 검은 로브의 일부가 떨어져나가 고 맨살이 드러났다. 그 뒤로도 홀타의 짜임새 있는 공격에 래더는 몇 군데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이제 승리는 시간 문제라고!" 린넬이 불끈 쥔 주먹을 히딩크 액션으로 치켜들며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사실 홀타가 래더에게 상처를 입힐 때마다 관중들의 일방적인 함성 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소드 마스터의 이름을 외치고 홀타의 승리를 부르짖고 있었다. "불길한 기운이... 더 강해져 가." 아시에는 내 옆에서 조그만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운 상처기는 하지만 몇 번이나 홀타에게 타격을 입었는데 도 래더의 움직임은 조금도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타가 일방적으로 게임을 밀어붙이기 시작하 는데도 그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축구에서 우리나라 팀이 일방적으로 상대를 밀어붙이고 있는데도 상대의 견고한 카데나치오(빗장수비) 는 미동도 하지 않아 혹여나 역습을 당하지 않을까 하고 느끼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순간. 래더가 검의 회전을 풀었다. 빙글빙글 회전하던 검은 몇 번 힘없이 돌더니 원래의 자리에 멈춰섰다. 홀타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달 려들었다. 회전하지 않는다면 래더의 검도 검기에 힘없이 잘릴 보통 검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마주쳤을 때, 어깻죽지에 찔린 검의 고통 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소드 마스터인 홀타였다. "어... 어떻게 된 거지?" 관객은 의외의 결과에 경악하고 야유하기보다는 깜짝 놀라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반응을 보고 나는 내가 본 장면이 헛것이 아니라는 것 을 깨달을 수 있었다. 홀타와 래더가 서로 교차하는 그 짧은 순간에 래더는 사라졌었다. 래더가 사라진 공간에 홀타가 휘두른 검기서린 검은 허 공을 갈랐고 어느새 다시 그 공간에 나타난 래더가 홀타의 어깨에 검을 박아넣었던 것이다. "너... 너도 봤냐, 키론?" "응. 그래.... 확실히 사라졌다." 키론과 린넬의 말도 내가 본 사실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혹시... 마법 아냐? 공간이동 같은?" 루카라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실제로 정신을 차린 일부 관중들은 마법으로 사기를 친 걸꺼라며 흥분하며 고래고래 소릴 지르고 있었다. 자하기니 아의 무술 대회는 유클리네의 마법 대회가 물리적 타격을 줄 수 있는 모든 무기를 쓰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종류의 마법(심지어 보조마법이라 할 지라도)과 마법무기를 금지한다. 때문에 만약 래더가 마법을 쓴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실격될 뿐만 아니라 큰 처벌을 받게 된다. "이런 대규모 무술대회에는 나라에서 많은 마법사들이 대회지원을 맡고 있고, 저쪽 자하기나아의 국왕 옆에 있는 궁정수석마법사도 있어. 만약에 마법을 썼다면 모를 리 없지. 대륙 7대 마법사 중 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무슨 기술을 썼는지는 나도 궁금해." 하지만 키론은 래더가 마법을 썼다는 의혹을 완전히 부정하고 나섰다. 헤에. 자하기나아의 국왕 옆에 있는 저 사람이 대륙 7대 마법사 중 한 사 람이라고? 그렇다면 세이렌 누나랑 거의 동급이라는 이야기다. "키론의 말이 맞을 것 같애. 아마..." "아무리 대륙 7대 마법사라고 해도 그렇지. 짧은 순간에 놓칠 수도 있지 않아?" 하지만 우뉴와 이멜츠는 아직 키론의 주장을 인정하기 힘든 듯 래더의 공격이 정당하다고 몰아가는 분위기에 계속 저항하고 나섰다. "하지만 대륙 7대 마법사라면, 우리 누나랑 동급이라는 얘기잖아." "헉! 그렇네?" "마... 맞아! 듣고 보니 그러네!" ...녀석들은 단번에 말을 바꿨다. 이전부터 그랬지만 우리 학교의 어느 누구도 울 누나 얘기만 나오면 표정이 싸악 바뀐다. 평소에 학교에서 얼마 나 자주 찾아와 깽판을 치면서 인심을 잃었길래... 쉽게 상상이 가질 않는다. 어쨌건 경기는 래더의 승리. 덤으로 내기도 대박. 준결승전은 노코드 로드맷 vs 파인, 그리고 그릴곤. 칼. 쥰페이 vs 래더의 순으로 진행된다. 준결승 경기는 잠시간의 휴식 후에 진행되고, 저녁식 사 후에 3,4위전과 결승전이 동시에 진행된다. 아침에 동쪽 하늘에서 따사롭게 땅을 비춰주던 햇님도, 이제는 강렬한 햇빛으로 더위마저 느끼게 하면서 서쪽으로 조금씩 넘어가고 있었다. 제60화 : 여자 화장실에서의 작은 사건 준결승전은 노코드 로드맷 vs 파인, 그리고 그릴곤. 칼. 쥰페이 vs 래더의 순으로 진행된다. 준결승 경기는 잠시간의 휴식 후에 진행되고, 저녁식 사 후에 3,4위전과 결승전이 동시에 진행된다. 아침에 동쪽 하늘에서 따사롭게 땅을 비춰주던 햇님도, 이제는 강렬한 햇빛으로 더위마저 느끼게 하면서 서쪽으로 조금씩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잠시 다른 애들과 떨어져 아시에와 함께 쉬는 시간을 이용해 화장실로 향했다. 나는 빈 창고 한구석에서 미리 준비해온 가발을 쓰고 여자 옷으로 갈아입고는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목소리를 바꿨다. 즉, 다시 여장을 한 것이다. 물론 그 꼴보기 싫은 가슴은 당연히 가져오지 않았다. 대 신에 이전에 입었던 여자 교복 대신에 다소 풍성한 옷으로 갈아입음으로서 가슴이 없는 약점을 해결했다. 치마가 길었기 때문에 이전처럼 속옷 까지 갈아입을 필요는 없었다. 이 모든 번거로운 과정을 행해야 했던 이유는 순전히 아.시.에 때문이었다. 아니 화장실을 가려면 치즈나 루카라와 같이 가면 될 거 가지고 왜 꼭 나하고만 같이 가려고 하냐구! 학교에서야 수업 조금 땡땡이치고 한산한 때 슬쩍 같이 갔다오면 되지만 이렇게 사람들로 북적대는 경기장에 서 아시에의 손을 잡고는 어느 쪽 화장실로 가더라도 이상한 오해를 받기 십상일 것이다. "...미안해." "알면 좀 치즈나 루카라랑 같이 가라구." 나는 미안해하는 아시에의 말을 퉁명스레 받았다. 이것 때문에 다른 애들 따돌린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준결승 시작되기 전에 빨리 가자." 나는 아시에의 손을 잡고 종종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아니나다를까. 점심시간 때도 그랬지만 화장실은 그야말로 줄을 선 사람들로 엄 청나게 미어터지고 있었다. 무술 대회는 특성상 여자 관중이 적어서 더 낫지 않냐고 생각하시는 분들, 천만에! 남자야 바지 슬쩍 내리고 일을 본 후 탈탈 털어주기만 하면 끝이지만 여자는 그 신체구조의 특성상 남자보다 시간을 훨씬 많이 소모하고 공간도 많이 필요하다고! 여자 화장실의 공간은 남자 화장실의 세 배 정도는 되어야 공평하다는 이야기도 못 들어 봤어? 그나마 점심시간에는 아예 경기장 밖으로 나가서 일을 보는 사람도 많았지만(나와 아시에도 점심시간에는 나가서 일을 처리했다.) 준준결승과 준 결승 사이의 휴식 시간은 상대적으로 짧다 보니 밖까지 나갈 여유가 없다. 때문에 경기장 내부 화장실에 사람이 집중적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다. "이거 난감한데..." 이대로 무작정 줄을 서다가는 어쩌면 준결승 시합 일부를 놓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랴. 나도, 아시에도 생리적 욕구를 어떻게 든 해결하지 못하면 경기 구경하다가 별로 좋지 못한 꼴을 보일 텐데. 물론 두 경기만 끝나면 저녁식사 시간이었지만 그때까지 내 방광이 견뎌 줄지는 나도 시험해 본 적이 없어서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때와고는 육체가 완전히 틀리니까... 화장실은 한정되어 있는데 사람은 몰리니 질서가 잡힐 리 없었다. 일을 어떻게 보는 건지 찌린내는 기본이고, 몇몇 곳에서는 새치기를 했니 어쩌 니 하면서 싸우는가 하면 줄이 얼마나 긴데 작은 일도 아니고 큰일을 보고 나오냐고 시비가 붙은 아주머니들도 있었다. 하기야 남자들이야 저런 일로 싸울 일은 없겠지. 굳이 안에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가볍게 소변을 볼 수 있으니 말이야. 뾰족한 수가 없어 무작정 줄을 서서 죽치고는 있는데, 중간 휴식 시간이 다 끝나가는데도 줄은 쉽게 줄어들 기색을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남자 화장실로 갔다면 벌써 보고 나왔을텐데... 차라리 아시에를 남장시키는 방법을 생각해 보는게 더 나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어떻게 하랴. 경기를 조금 못 보더라도 급한 불은 꺼야지. 나도 그렇지만 아시에도 꽤 참은 모양인지 얼굴 표정이 별로 안 좋았다. 사 실 여기 줄 선 사람 중에 얼굴 표정 좋은 여자들은 한 명도 없지만. "어휴. 매년마다 화장실 부족한 거 알면서 왜 늘릴 생각을 안 하는 거야?" "글쎄말야. 아니 최소한 여자 화장실은 남자 화장실보다는 좀 더 크게 해 줘야 할 게 아니냐고!" "우리 남편은 벌써 일 보고 자리에 갔을텐데..." 나와 아시에 앞뒤로 선 아줌마들이 투덜거렸다. 무술대회의 여자 관객은 왜 그런지는 몰라도 아줌마들이 꽤 많았다. 아줌마들의 불평불만의 목소 리는 중간 쉬는 시간의 종료 벨 소리 및 그녀들의 푸르죽죽해지는 얼굴 표정과 더불어 더 격렬해져 갔다. 아마 아직까지 남자 화장실이 북적거 리지 않았다면(어쨌건 관객은 남성이 다수니까) 당장에라도 남자 화장실도 점령해 버릴 듯한 기세였다. "미안해... 카이. 더 이상은... 견딜 수 없겠어." 뭐... 뭐라고, 아시에? 설마 여기서... 여기서... 안돼! 나는 황급히 아시에의 손을 잡고 억지로 줄 틈을 비집고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몸으로 밀어 내는 아줌마들의 완강한 저항에 새치기 진입은 처참하게 실패하고, 이미 섰던 자리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아줌마라는 존재에 맞서 서 싸워 이긴자는 드물다는 사실은 역시 진실이었다. 그 순간. 아시에는 낮은 음색의 목소리로 무언가 주문 같은 것을 외우는 듯 했다. 평소 목소리가 워낙 특이해 일종의 음악 같이 들리는 아시에의 목소리가 낮은 옥타브로 연주되는 것과 함께, 신기하게도 아랫배를 한계상황까지 몰고 가던 엄청난 압박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 이거 어떻 게 된 거야? 난 아직 화장실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엄마야, 난 몰라!" "비... 비켜요! 끼악!" 갑자기 주위의 모든 여자들이 화장실로 일제히 돌격하더니 곧 비명과 절규 소리로 홀이 가득찼고, 동시에 화장실 근처에서나 나는 찌린내가 복 도 전체로 퍼져왔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아시에의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미안해... 흑마법... 써 버렸어. 세이 언니한테 앞으로 절대 안 쓸거라고 약속했는데...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어." "무... 무슨 흑마법인데?" "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떠맡기는 마법..." 아시에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배변의 욕구가 사라진 것은 아시에가 그런 마법을 썼기 때문인가... 그리고 그 고통은 주위에 있던 사람에게 얹혀져 결국 터져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그다지 착한 녀석은 못 되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지 않은 이상 그 정도는 내 가 편하면 됐지 하는 생각이었지만 아시에게 끝까지 흑마법 사용을 꺼린 이유는 궁금했다. "흑마법... 쓰면 안되는 거야?" 아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흑마법이건... 제물을 쓰지 않는 이상은 시전자에게 카운터가 날아오니까." "그... 그럼 시에 넌 괜찮은거야?" "기억엔 없지만... 마왕을 소환하고도 살았다는 걸. 이 정도는... 아마 괜찮을거야." 시에는 아무래도 흑마법을 쓴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듯 힘없는 음색을 내뱉었다. 아마도... 괜찮겠지? 그렇게 겹겹히 쌓인 저주의 나이테는 모 두 벗겨냈으니까, 흑마법이래도 사소한 거 한두가지쯤은... "아앗.. 카이엔... 아니 카렌 언니!" 우웁! 잘못 걸렸다! 빨리 옷을 다시 갈아입으러 구석 창고로 가려 하는데 운 없게도 여자화장실을 비집고 나오는 노비스 및 몇몇 자하기니아의 팬클럽 여자애들과 마주쳐버렸다. 이미 입싼 우뉴와 이멜츠에게서 내 여장 행각에 대한 모든 전모를 들은 노비스는 아주 자연스럽게 호칭을 카 렌 언니로 바꿔버렸다. "너무 예뻐요, 카렌 언니!" "자, 빨리 경기 보러 가요. 준결승 시작하겠어요." "자, 잠깐. 옷 좀 갈아입..." "시간 없다니까요. 그리고 그 모습이 훨씬 더 어울리는데 뭘 부끄러워해요?" 그러면서 그녀들은 양 옆에서 내 팔을 하나씩 붙들고 날 질질 끌고 갔다. 어, 어. 안되는데... 옷 좀 갈아입고 가자구! 하지만 그녀들은 다시 날 남자로 돌려보내지 않을 기세로 내 팔을 꽉 잡았기 때문에 난 빠져나가지 못하고 끌려가면서 버둥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아시에는 그런 그녀들 을 굳이 말리려 들지 않았다. "시... 시르젤?" 그때 끌려가면서 나는 저쪽에 직원 복장을 입고 자연스럽게 복도를 지나가는 시르젤의 모습을 목격했다. 시드의 검을 훔치러 온다더니... 드디어 작업을 개시한 건가? 나는 황급한 마음에 외쳤다. "따... 따라가봐야 해!" "어딘 어딜 간다는 거에요. 언니? 빨리 따라 와요. 경기 못 보잖아요!" 하지만 그녀들의 힘은 생각 외로 강했고(사실은 내가 형편없이 약한 거지만... 이 유약한 몸뚱아리 어디서 힘이 나올 수 있겠어?) 그 사이에 시르 젤은 복도 한켠으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제61화 : 만월(滿月)의 혈향(血香) 나는 반쯤은 놀림당할 각오를 하면서 노비스와 다른 여자애들에게 끌려왔다. 하지만 경기장에 들어선 순간. 모두들 경기에 몰입해 있느라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경기장으로 눈을 돌렸다. 거기에는 파인의 레이피어에 서린 붉은 빛의 검기 와 노코드의 언월도를 감싸고 도는 새하얀 검기가 서로 충돌할 때마다 놀랍고도 아름다운 빛의 향연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번 시합에서 최초로 벌어지는 진정한 소드 마스터들끼리의 대결은 너무 차원이 높아 상황을 알 수조차 없었던 그랜드 소드 마스터들끼리의 대 결에 비해 훨씬 화려하고 흥미진진했다.(타오린 대 파인의 대결이 있었지만 타오린은 검 같은 무기를 쓰지 않으니까 열외로 치자.) 워낙 전투 속 도가 빨라 주의깊게 보지 않으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상황에 경기장에서 눈을 떼고 있을 만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증거로 저기 누가 슬쩍 남의 지갑에서 돈을 빼내고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도망가버리지 않는가... 하지만 나도 제자리에 돌아와서는 어떻게 한눈을 팔 여유가 없었다. 채챙. 파인이 노코드가 거대한 언월도를 반원형으로 휘두리며 생긴 작은 빈틈에 검을 찔러넣는다. 노코드는 재빨리 뒤로 스텝을 밟고 물러나며 언월도 로 레이피어를 내리친다. 다시금 붉은 검기와 하얀 검기가 부딪치면서 예쁜 빛을 전장에 뿌렸다. 하지만 검기가 서린 레이피어는 마찬가지로 검 기가 서린 언월도에도 쉽게 부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검을 서로 맞대면 작은 쪽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 파인은 검을 뒤로 빼냈고 그 순간 파인 이 앞으로 급전진하면서 푸른 창공을 비상하는 새와 같은 기세로 언월도를 위로 휘둘렀다. "노코드라는 사람... 경기를 거듭하면서 더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어." "실력을 숨기고 있던 거야. 분명." "하지만 파인은 검강을 쓸 수 있는데... 노코드는 파인마저 이길 수 있을까?" 키론과 린넬은 내가 여장을 하고 제자리에 돌아오는 것을 신경도 쓰지 않는건지, 경기에 열중해서 모르고 있는 건지. 지네들끼리 열심히 경기를 보면서 판세를 전망하고 있었고. "파인 이겨라! 너한테 돈 걸었단 말야!" "무슨 소리야! 노코드가 이겨야 한다고!" 치즈 패거리는 파인에게 돈을 건 우뉴&이멜츠와 노코드에게 돈을 건 치즈&루카라가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파인은... 왜 검강을 쓰지 않는 거지?" "경고를 먹었거든요." 경기에 열중해서 내 말따위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우리 조원들 대신 노비스가 대답했다. "아까 경기에서 파인 씨가 검강으로 관중석 한켠을 부수면서 한 명이 죽었고, 여덟 명이 중상을 입고 수십 명이 경상을 입었어요. 그래서 대회 주최측에서 다시 한번 관중에게 해가 가는 기술을 쓴다면 실격시킬거라고 경고했어요." "한 명이 죽어...? 그렇다면 왜 바로 실격시키지 않아?" "이전까지는 이런 일이 없었으니까요. 애초에 검강을 쓸 정도의 실력자는 이 대회에 출전하지 않거든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드의 검이 분명 훌륭한 검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뛰어난 검을 손에 쉽게 넣을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왜 굳이 이런 대회에 참가하는 걸까? 지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봐도 이번 대회는 역대 대회 중에서도 가장 참가자들의 수준이 높은 편이라고 한 다. 게다가 시르팡 놈들도 시드의 검을 노리고 있으니... 이런저런 정보를 종합해 볼 때 이번 상품인 시드의 검이 다른 검과는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내가 알 수 없다. 어차피 딸리는 머리로 추리해봤자 괜히 머리만 아파질 뿐이다. '일단은... 지켜볼까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도시 어딘가에 있을 셰더의 위협으로부터 아시에를 지키는 것. 그걸 가장 우선적으로 명심해야 하겠지. "와아아아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파인이 악전고투 끝에 노코드를 이겼다. 관중석에 피해가 가지 않게 검강의 위력을 아껴서 여러 번 시전한 결과였다. "봤어? 봤어? 카이엔... 오오! 드디어 원래 모습인 카렌으로 돌아왔구나!" 린넬이 흥분해서는 날 보며 말했다. 이제야 알아채냐? 옆에 있는 사람 신경 좀 써! "뭐가 원래 모습이얏! 임마!" "또 그런다. 카렌. 여자애가 그런 험한 말을 하면 못 써. 내가 책임지고 확실히 조교해줄 테니까 맞겨주도록." "이상한 낱말 쓰지 마, 키론. 변태스러워 보여." 키론은 내가 여장한 모습만 보면 어떻게든 여자의 도(道)를 외치며 여성스러움을 팍팍 주입하려고 애쓴다. 하아. 쓸데없는 데 저렇게 정열적으로 나설 필요는 없는데 말야. 차라리 치즈나 루카라한테나 그런 거 가르치라구! "돈 내놔, 돈! 돈!" "어유. 내가 이런 일로 돈 떼먹을 것 같아? 더러워서 준다. 자!" 우뉴와 이멜츠는 내기에서 이긴 기쁨에 서로 얼싸안고 춤추더니 치즈와 루카라 앞에서 노골적으로 돈 내놓으라고 땡깡을 부렸다. "야, 드디어 카렌 양 왔네. 얼라... 그런데 가슴 어디 갔니?" 관중석 밑에 선수대기실에 있는 시킨즈 아저씨가 날 발견하고는 말했다. 헉. 그러고보니까 나는 카렌의 모습으로 저 아저씰 만났었지? "아하. 알겠다. 쿡쿡. 빈약한 가슴에 콤플렉스를 느껴서 그런 걸 달았었구나. 이 아저씨 다 이해하지. 아암." "시끄러워욧!" 관중석 밑으로 뛰어내려가서 걷어찰 수도 없어서 나는 옆에 놓인 빈 깡통을 시킨즈 아저씨에게 집어 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시킨즈 아저 씨는 16강까지 오른 실력자 답게 여유있게 한 손으로 깡통을 받으며 놀리는 듯이 웃을 따름이었다. 끄윽. 이렇게 자하기니아의 팬클럽 여자애들한테 들킬 줄 알았으면 아예 처음부터 여장따위는 안 하는 건데. 괜히 여러 사람한테 이상한 꼴만 보 여줬잖아. "후후. 자신만만해 하더니 역시 탈락했나 보군. 시킨." 그때 우리 뒤에서 스텐리 아저씨가 나타났다. 분명 래더의 검에 다리가 잘려 병원에서 치료중이라고 들었는데... "어라, 스텐 너 벌써 퇴원했냐?" "접합은 무리없이 잘 됐어. 하지만 신관 선생님이 당분간은 절대 뛰어나 발에 힘을 주지 말라더군. 그래서 천천히 걸어오느라 늦었다. 우승은 따 논 당상이라며 소리를 치더니 결국 16강에서 탈락이냐? 자랑하던 비기는 쓰고 탈락했는지나 모르겠군." "시... 시끄러. 넌 16강도 못 왔잖아!" "날 이긴 상대는 벌써 준결승에 와 있네. 됐어. 이 사람아." 시킨즈 아저씨와 스텐리 아저씨가 평소와 다름없이 서로 잡담을 떨고 있을 무렵. 준결승 제2시합이 시작되려는 듯 그릴곤과 래더가 경기장으로 올라왔다. 래더 놈은 여전히 피가 말라붙은 로브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저걸 만약 패션이라고 주장한다면 정말 엄청난 악취밀 거야.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그릴곤을 응원하면서 래더의 패배를 기원했다. 하지만 8강전에서 강력한 소드 마스터 홀타를 무릎꿇린 래더는 시합 개시 5 분이 채 지나지 않아 회전검으로 그릴곤의 두꺼운 갑옷을 간단하게 궤뚫고 결승행 티켓을 잡았다.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결말이었다. 그릴곤은 타 선수들보다 느린 스피드를 튼튼한 갑옷으로 커버해왔는데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래더의 회전하는 검의 위력은 생각 이상으로 강했다. 웃기는 건 다들 래더의 패배를 바라면서도 돈은 대부분 래더에게 걸었다는 사실. 이제 저녁식사 시간 후에 3,4위전과 결승전이 연달아 치뤄진다. 우리들은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경기장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하기니아의 내 팬클럽 인원까지 합해서 열 다섯명이 넘는(밖에서 대기중인 애들까지 합하면 걷잡을 수 없이 많아질거다.) 대인원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패를 지어 다니는 듯 했다. 아까 래더의 잔혹한 행동 때문에 다들 식욕이 떨어져 점심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들 배가 고팠다. 비위좋은 치즈 패거 리들은 당연히 점심을 먹었지만 얘네들은 원래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은 부류들이기 때문에 일단 열외로 치자. 서쪽으로 지는 붉은 노을의 반대편에는 다가오는 어둠과 함께 하얀 보름달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여어. 루아르 양과 그 친구들. 저녁 같이 먹자고!" 경기장을 나가려는 우리들을 시킨즈 아저씨와 스텐리 아저씨가 불렀다. 뭐, 별달리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듣고 싶은 것도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저씨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게다가 두 아저씨는 이 도시에 여러번 왔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괜찮은 식당 같은 곳도 알고 있었다. 노비스와 다른 여자애들은 나와 같은 특등석에 들어오지 못한 피케나, 다른 여자애들과 같이 저녁을 먹겠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기야 식당 크기는 한정되어 있는데 사람이 수십명이나 몰린다면 식사에 어려움이 좀 크겠지. 식당에는 저녁시간에 경기장을 나온 사람들이 밀려들어올 것을 대비해서인지 미리 음식을 식탁위에 얹어 둔 곳이 많았다. 메뉴의 선택 여지가 없는 건 유감스러웠지만 경기 관람객이 만 단위에 달하니까 이해할 수밖에 없겠지. 스텐리 아저씨와 시킨즈 아저씨가 데려간 식당에서 내놓은 음식은 비프 스테이크 비슷하게 생긴 음식이었는데 꽤 먹을 만했다. 하지만 전에도 그랬지만 이 카이엔의 아담한 몸은 위장이 정말 작아서 채 반도 먹지 않았는데 배가 잔뜩 불러왔다. 나 외에도 아시에가 양이 작아 반도 먹지 못했고 루카라도 삼분의 일 정도는 남겼다. 남은 음식을 먹으려고 치즈와 우뉴가 피튀기는 접전을 벌이다가 음식은 슬쩍 끼어든 시킨즈 아저씨 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저녁식사를 하고 잠깐 시간이 있어 나는 시합내내 궁금해하던 일을 아저씨들한테 물었다. "저 시드의 검이 그렇게까지 대단하지는 않다고 들었는데... 이번 대회에는 왜 이렇게 강한 사람들이 몰렸는지 혹시 아시나요?" "글쎄. 하긴 예선전부터 전체적인 레벨이 올라갔다고 느끼긴 했어. 작년 대회 같은 경우에는 나는 8강. 시킨은 16강까지 갔는데 이번 대회에는... "사기치지 마, 스텐! 니가 16강이고 내가 8강이었잖아!" "무슨 소리야? 내가 알기로는 분명..." "그런 건 중요한게 아니니까 빨리 계속 이야기해주세요." 린넬이 두 사람을 말리며 말했다. 린넬과 키론도 나와 똑같은 의문을 느끼고 있었는지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흠... 그건 우리도 잘은 모르겠어. 하지만 경기 전에 여러가지 루머가 돈 건 사실이야. 그런 루머쯤이야 원래 대회가 열리면 돌기 마련인 허무맹 랑한 이야기들이기는 하지만... 결과가 이렇게 되다 보니 신경쓰이는 루머가 있긴 하군." "그 시드 가에 관한 소문 말인가, 스텐?" "그래 맞아.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시드 가에서 시드의 검을 국왕 폐하께 바치면서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검이 다른 특별한 검과 바뀌었다는 소문이 있더라고." "하지만 검에 특별한 마법이나 저주 같은 게 걸려 있다면 궁정마법사들이 금방 알 텐데요?" 린넬이 그 소문의 신빙성을 부정하고 나섰다. 하기야 대륙 7대 마법사라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걸 발견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되지. "물론 그래서 그 소문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어. 하지만 시드 가는 묘한 기능이 걸린 검을 가끔씩 만들곤 하는 터라. 100%거짓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소문도 아니지." "그럼 래더라는 사람의 검도 시드 가에서 만든 걸까요?" 이번에는 루카라가 질문했다. 그 질문에 스텐리 아저씨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저런 검은... 나도 처음이야. 하지만 시드 가는 검에 장난을 칠 지언정 정도에 어긋나는 검은 만들지 않아. 시드 가의 검은 아닐거라고 생각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았지만 그다지 뾰족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치즈는 우리와는 상관도 없는 곳에다 정신을 쏟을 필요는 없다고 얘기했지 만 그래도 여전히 신경쓰였다. 무엇보다도 나는 시르팡의 핵심 멤버인 시르젤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했고, 셰더가 여기 있다는 말을 그에게서 들 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대목이라지만 바가지가 너무 심해!" 각자 계산을 하는 와중에 스텐리 아저씨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유클리네에서 온 우리 학교 학생들 전원이 권력 또는 금력이 빵빵한 터라 별달리 스텐리 아저씨의 하소연이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키론은 시킨즈 아저씨에게 딴 돈 덕택에 여행경비가 굳었다면서 놀렸다. 대신 시킨즈 아저씨는 우리가 전부 덤벼들어도 자기를 절대 이길 수 없다며 큰소리를 쳤지만 키론에게 잃은 돈은 아무래도 아까운 모양이었다. 식당에서 나온 우리는 경기장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비스 일행과 합류했다. 점심시간 후와 마찬가지로 멤버가 일부 체인지되었는데 그 중 에는 피케와 파이란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와∼ 카이엔... 아니 카렌 님인가요? 너무 예뻐요♡ 깨물어주고 싶어." "으... 응. 고마워." 난 어설픈 웃음으로 피케의 환호에 답했다. 하도 주변에서 여장에 대해 말이 많은지라 이제는 슬슬 무감각해지려고 하는가 보다. 설마 이러다가 내 성적 정체성까지 잃는 건 아니겠지? 지금도 키론이 여성스러운 행동에 어긋남이 없는지 옆에서 눈을 치켜뜨며 감시하고 있는데... "자. 들어가지. 곧 경기 시작하겠다." 경기장에 들어와서 가장 처음 들은 소식은 그릴곤이 3,4위전에서 기권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노코드가 자동적으로 3위를 차지하고 시드의 검 을 상품으로 주는 결승전만이 마지막 경기로 남아 있었다. 소드 마스터를 꺾은 괴검(怪劍)의 소유자 래더와 검강을 쓰는 상급의 소드 마스터 파 인의 대결이었다. 결승전에 앞서 몇 가지 간략한 부대 행사와 국왕의 지루한 연설이 있었다. 혹시 또 사자후같은 걸 써서 놀래키는 게 아닌가는 생각이 들어 별 알맹이없는 연설을 열심히 들어줬건만 국왕은 연설을 마치고는 그대로 연단 아래로 내려가버렸다. 다른 사람들도 그 때문에 긴장한 채 쓸데없이 긴 연설을 들은 게 억울한 듯 경기장에 야유 소리가 울려퍼졌다. "근데 야유 같은 걸 해서 불경죄같은 건 안 걸려?" 노비스는 그런 질문을 하는 날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유클리네에는 고작 야유 좀 했다고 사람들한테 벌을 주나요?"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우리 나라 국왕 폐하는 용맹한 전사들의 영원한 친우이고, 유클리네의 국왕은 브리타뉴 가문 같은 대귀족들의 대표자일 뿐이에요. 그런 사람들 이 시민들에게 야유 좀 받았다고 함부로 목을 베거나 감옥에 가둔다면 당장에 폭군 취급을 받아 권좌가 위협받겠죠." 그... 그런건가? 내 의식이 카이엔의 몸에 떨어진 지도 한두어달 정도 지났지만 아직까지 이 세계에 대해 파악하고 있지 못한 점이 많았다. 나는 국왕이라고 해서 사극 같은데서 보는 강력한 왕권을 상상했는데... 최소한 유클리네와 자하기니아 두 나라의 국왕에 대한 개념은 내가 아는 것과 다른 것 같다. 에잇. 두 나라의 정치체계가 어찌되건 나랑 무슨 상관이야? 경기에 앞서. 우승 상품인 시드의 검이 경기장 한켠에 걸렸다. 거리가 멀어서 검이 잘 보이지 않아 뭐가 특별한지는 알 수 없었다. 하긴 내가 검 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겠냐? 봐봤자 특별히 알 수 있는 건 없겠지. 이미 어둠이 상당 부분 핀치 시의 하늘을 잠식했다. 동쪽 하늘에서는 보름달이 환하게 빛나면서 달빛의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그래도 밤은 밤. 밤눈이 밝은 사람이라도 경기를 제대로 관람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그때, 국왕 옆에 있는 대륙 7대 마법사라는 작자가 거대한 빛덩어리를 만들어 경기장 상공에 띄웠다. 경기장과 관람석 전체를 낮이나 다름없이 밝게 비출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였다. 그 와중에. 타종소리와 함께 파인 vs 래더의 결승전 시합이 시작되었다. 파인은 래더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생각했는지 검을 한 번 섞어 보지도 않은 채 바로 검에 검기를 끌어올렸다. 래더 역시 검기에 상대하기 위 해 검을 고속회전시키며 파인과 맞섰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검을 섞기도 전에 갑자기 공중에 떠 있는 거대한 빛이 꺼지면서 증폭시킨 듯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 핫핫핫. 예고했던 대로 검은 내가 접수해간다!" 목소리의 출처는 국왕과 유력 귀족들이 앉아 있는 연단석 꼭대기에 높이 세워진 자하기니아의 국기 위였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 위로 향했 고 거기에는 달빛 아래 검은 인영이 망토를 휘날리며 서 있었다. "시르팡!" 시르팡이 나타나자 장내는 혼란에 빠졌다. 달빛은 밝았지만 경기장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혼란은 가중되었다. 몇몇 마법사들이 불빛을 켰지만 묘하게도 모두 허무하게 픽픽 꺼져버렸다. 게다가 그런 와중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파인과 래더는 검을 맞대고 격돌했다. 검기와 회전력 이 충돌하면서 묘한 오라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예고장에는 결승전 이후에 훔치러 간다고 했는데... 어째서 지금 왔지?" 이멜츠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저건... 시르젤의 목소리가 아냐. 목소리도 틀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이라면 저런 식으로 말하지 않지. 조금 앳된 목소리인데... 혹시 시르쥬? 아니 면 시르팡의 또 다른 사람?' 저 인영의 정체에 대해 내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을 때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한꺼번에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띄였다. 국왕 또는 실무자 레벨에서 시르팡을 잡으라는 명령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시드의 검 주위에도 검을 지키기 위해 여러 사람이 배치되었다. 시르팡의 인영이 아래로 뛰어내렸고, 기사들이 그 인영을 쫓아 움직였다. 쳇. 어두운데다 여기서 멀기 때문에 뭐가 어떻게 되가고 있는지 통 보 이질 않잖아. 그때 무슨 원인인지는 몰라도 불을 꺼지게 만든 원인이 제거된 듯 곳곳에서 마법의 불이 다시 피어올랐다. 하지만 시르팡이 뛰어내 린 곳에는 그의 남색 망토와 옷가지만 남아있을 뿐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경기장 한켠에 걸린 시드의 검도 아무 이상 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도망친 걸까..." "글쎄?" 뭔가 석연찮은 걸. 이대로 그냥 도망갈 리가 없잖아. "그치만... 왜 방금 마법이 한순간 마비되었던 걸까?" "시르팡이 나타나는 곳은 어디든 그랬어. 짧은 시간 동안 갑작스레 모든 마법이 무력화되면서 마법으로 펼쳐 놓은 모든 함정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지." 키론이 주먹을 꽉 쥐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키론의 아버지는 분명 유클리네의 시르팡 전담 형사였지. 그러고 보니 내가 납치당했을 때도 그랬다. 갑자기 불이 나가면서 마법이 듣지 않았다. 세이렌 누나와 아이렌은 나중에 그 때의 상황을 말해주며 주변을 흐르는 마나의 흐름이 마법사의 통제를 듣지 않고 제멋대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고 말했고, 정령들도 폭풍 같은 마나의 폭풍에 감각을 잃고 쉽게 내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파인과 래더는 잠시 동안의 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치열한 결전을 벌이고 있었다. 서로의 검이 맞부딪힐 때마다 파인의 검기가 래더의 회전검에 휘말려 불규칙하고 어지럽게 흔들렸다. 파인은 확실히 강했다. 검강을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움직임도 이번 대회에 출전한 모든 선수들 중 가장 좋았다. 하지만 거추장스러운 검은 로 브를 온 몸에 걸치고 있는 래더도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파인의 공격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때때로 간간히 역습을 가해 회전검의 위 력을 과시함으로서 파인이 전면공세로 들어오는 것을 사전에 차단했다. 파인이 싸움을 압도하고 있다면 래더는 경제적으로 싸우고 있다고 할까? 그 화려한 경기에 관중들은 방금 시르팡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시 경기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거, 검이 없어졌다!" 승부를 가릴 수 없는 팽팽한 접전이 계속되고 있을 때 누군가의 절박한 외침이 경기장을 울렸다. 그런데 이 목소리... 어딘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 인걸... 누굴까? 아까 시르팡이 나타났는데도 전혀 신경쓰지 않고 격돌하던 파인과 래더는. 일제히 싸움을 멈추고 검이 걸려 있던 경기장 한켠을 바라보았다. 거 기에 놓여 있던 검은 경기장 관객 모두가 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쪽같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래더가 먼저 검이 걸려 있던 곳을 향해 뛰어 들었고 파인이 그 뒤를 따랐다. 래더가 검을 지키던 자들을 붙잡고 뭐라고 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관중들의 웅성거림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그때 사자후라도 지른 건 지 래더의 목소리가 크게 경기장에 울려퍼졌다. 음침한 편이었지만 힘있는 소리였다. "아.까. 검.이.없.어.졌.다.고 소.리.친.놈. 어.디.갔.냐.고!!!" 그러고보니 방금 전 시르팡이 깃대 위에 나타났을 때 검을 지키기 위해 검 주위에 몰려들었던 병사 다섯 중에 한 사람이 없었다. 나는 순간 아 까 화장실 근처에서 목격했던, 직원용 복장을 입고 있던 시르젤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아는 모든 괴도의 행동 패턴(그래봤자 대부분 만 화책에서나 보던 거지만)을 과거속에서 떠올렸다.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대충 감이 왔다. 조금 혀를 꼰 목소리기는 했지만 아까의 외침은 아마 시르젤의 것 같었다. 다른 시르팡의 멤버로 하여금 주의를 집중시키는 사이 검을 지키는 병사들 사이에 끼어들었고 사람들의 이목이 경기에 쏠린 사이 검을 훔쳐 달아난 것이다. 그 사이에 소리까 지 지르고 가다니... "아무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 녀석은 병사로 분장해 있다!" 그때까지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모든 사건을 지켜보고 있던 자하기니아의 국왕이 사자후를 외쳐 전 경기장에 자신의 명령을 전했다. 으으... 웬만 한 고수 전사라면 거의가 쓸줄 안다는 저 사자후. 꽤 편한 수단이기는 한데 귀울림이 너무 심하단 말이야. 귀아퍼. "말도 안돼... 이 와중에서 어떻게 저런 일을 할 수 있지?" "카이엔의 형제자매들이 옆에 있는데도 카이엔을 납치할 수 있었던 녀석이야. 저런 허접한 방어망쯤이야 문제될 게 없겠지." 루카라가 어이없이 중얼거리자 키론이 주먹으로 의자 팔걸이를 내리치며 이를 갈았다. 시르팡이 이리저리 활약하는 것이 그에게는 별로 즐거운 일이 아닌 듯했다. 나한테도 지금까지 자꾸 시르팡에 대한 정보를 알려고 여러가지를 캐물어 왔으니까 말야. "끼아악!" 키론이 참다 못해 벌떡 일어나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 근처로 가보려고 할 때 난데없는 여성들의 비명 소리가 들러왔다. 헉... 경기장에서 다시 파 인과 래더가 검을 맞대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검을 지키던 경비병들의 목이 나뒹굴고 있었다. 저... 저녀석! 혹시나 했는데 결국 사고를 치잖아! "래더 녀석.... 역시..." "틀려. 경비병들의 목을 벤 건 파인이야." "뭐어?" 린넬이 하는 말에 방금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은 모두 경악했다. 어째서 파인이 저런 짓을... 키론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별로 상황이 좋지 못한 걸. 어디로는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키론의 충고가 끝남과 동시에 파인이 래더를 향해 검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건 원래 결정적인 순간에 치명타를 날릴 목적으로 때 려야 효과가 있는 법. 래더는 어렵지 않게 그 검강을 피했고 따라서 검강은 모두 관중석 쪽으로 날아가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쪽 자리가 터 져나감과 동시에 불길이 치솟으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폭사(爆死)하거나 폭발의 압력에 공중으로 치솟았다. 밤 이었기 때문에 그 폭발은 거욱 크고 화려해 보였다. 이런 위험한 상황속에서도 화려하다는 것 같은 감정을 가지다니. 저런 광경은 TV나 영화로만 보던 세계의 이야기라서 그런 걸까? "앗 따거...!" 파편이 튀어 사방에 뿌려지고 있었다. 다행히 나와 친구들이 있는 곳은 폭발장소에서 멀어 큰 파편은 날아오지 않았지만 자잘한 것들은 많이 날 아와 사람들의 피부를 스치면서 상처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기혈환의 보호를 받는 내 몸은 단지 무언가가 피부에 닿는 것을 느낄 뿐. 심각한 상 처도, 따가운 아픔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카렌! 빨리 피해야 해! 어서!" ...이런 상황에서까지 카렌을 고집하기냐? 경기장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결승전을 앞둔 콜로세움은 입추의 여지없이 관중이 만원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은 극에 달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파인의 검강은 차례차례 패닉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잔인하게 덮쳤다. "위험해!" "으악!" "꺄아아!" 빠져나가려 해도 사람들은 많은데 출입구는 좁고 한정되어 있어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부대껴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파인 의 검강 한 줄기가 우리 쪽을 향해 날아왔다. 우와아아아악! 아무리 내가 절대마력보호반지와 기혈환의 가호를 받고 있다고 해도 검강을 맞고 살 아있을거라고는 보장할 수 없다. 무엇보다 그런 걸 시험해본 적이 없으니까. 서... 설마 여기서 죽는 건 아니겠지? 퍼엉.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절망에 쌓여 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도 이미 포기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왜인지는 몰라도 감은 눈을 떴을 때 우리 조 원들과 노비스를 비롯한 여자애들, 그리고 사람들은 여전히 혼란스런 상태로 살아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시킨즈 아저씨... 그리고 스텐리 아저씨..." 그 두 사람이 어느샌가 관중석 제일 앞자리 스텐드에 올라와서 검강을 직격으로 막아낸 것이다. 어이. 아저씨들. 그런 실력이 되는 거야? 검강을 막아낼 정도로? 나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아저씨들이 있는 쪽으로 황급히 뛰어내려갔다. "카렌, 어디 가?! 위험하다고!" "너희들이나 먼저 피해! 난 마법무구가 있어서 괜찮아!" 어느 사이엔가 허공에 떠 있는 마법의 불이 꺼졌다. 불이 꺼지면서 사람들의 혼란은 가중. 비명소리가 곳곳에서 들리면서 흥분과 열기로 가득 찼 던 콜로세움은 이젠 완전히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월광이 은은하게 비치는 경기장에서는 여러 기사들과 마법사들. 그리고 국왕 옆에 있던 대륙 7대 마법사라는 사람이 파인을 공격하고 있었다. 하 지만 이해할 수 없는 점은 그들이 파인과 맞서 싸우던 래더마저 공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저러지? 래더와 함께 파인을 공격하면 더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텐데... "괜찮아요? 시킨즈 아저씨!? 스텐리 아저씨?" 괜찮을거라고 생각했다. 막연한 불안감 속에서도 그만큼 무모하게 검강을 받아냈다면 그만큼 실력이 되니까 그랬겠지 하고 믿었다. 하지만 역시 그건 그들에게도 힘에 겨운 일이었던 것인지 내가 거기까지 달려오자 그만 바닥에 풀썩 쓰러져 버렸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아저씨들의 몸은 곳곳에 핏줄이 터져 엉망이 되어 있었다. "헤헤헤... 별로 멋있는 꼴 보이려 한 건 아니었는데..." "...미친 놈. 여자를 지키다 죽겠다더니 진짜로 그러냐. 시킨." "스텐 너야말로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데 뛰어들기냐." "뭐에요! 둘 다! 고작 그런 거 한방 맞았다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얘기하지 말아요!"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태연하게 말하는 아저씨들을 보니 울컥 짜증이 났다. 왜! 왜 그렇게 위험한 일에 뛰어든 거야 아저씨들! 아저씨면 아저씨 답게 지나다니는 여고생... 아니 여자들이나 감상하고, 친구들이랑 술이나 한잔 마시며 도박판에나 끼어들면서 느긋하게 인생을 살아갈 것이지. 그렇게 나잇살먹어서 무슨 호승심에 실력도 안 되면서 저렇게 무모한 검강을 막냐고! 젠장. 짜증이 나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흐르는 걸까. 철철 흐르는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려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빨리 피하는 게 좋아. 루아르 양.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언제 또 뭐가 날아오려는지 모른다고." "후후... 뭐 어때 스텐. 이런 혼란 속에서는 마땅히 피할 방법은 별로 없다고... 그런 상황에서도 이렇게 우리 쪽으로 와줬으니 감사해야지. 여자를 지키다 죽었으면 여자 품에서 죽는 정도의 대가는 있어야하지 않겠어?" "죽을 때도 말이 많군..." 이 아저씨들. 죽음 직전에 와 있는데도 이렇게 천하태평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니... 대단한 사람들이다. 이럴 때 이 무한의 팔찌를 전혀 쓸 수 없 는 것이 분했다. 나의 모든 마법무구는 나 자신을 위해서만 만들어진 것. 남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어떻게든 이 사람들을 들어 옮기려고 해봤지만 이런 유약한 몸으로는 저 근육질 빵빵한 아저씨들을 끌고 가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사람들을 불과 며칠 전에 만났다. 예전의 내 성격이라면 분명 이런 상황에서 남이야 어찌되건 말건 내 갈길을 갔겠지. 하지만 이 사람들 은 날 좋아해주고 있다. 사랑해주고 있다. 새로운 가족들도, 친구들도. 모두 형태는 달라서 때론 난감하게 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모든 것이 나를 향한 애정의 표시다. 난 사회를 외면했다. 급우들도 나를 피하고 상대하려 들지 않았다. 제대로 이야기 할 상대라고는 오직 문길이 녀석밖에 없는 상황에서 난 사회를 왕따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은 내가 사회와 괴리되는 비참한 상황속에서 스스로를 자책하고 싫어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비록 맹목적이라고 할지라도 좋아한다고,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곳에 와서 몇달동안 들은 그 말이 이전에 들었던 말 의 합보다도 더 많았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고, 보다 활발하고, 자유롭게 내 영혼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완전히 행복하지는 않아. 날 사랑하고 좋아하는 고마운 사람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어. 받은 사랑을 돌려줄 수 없다 고! 제길! 미소년이 되었고, 돈 걱정도 없어졌고, 무엇보다 사랑받게 되었으면서도 그런 자책감이 여전히 날 괴롭게 했다.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말했지? 여자 품에 안겨 죽고 싶다고." 나는 여자가 아니에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죽음의 앞에 서 있는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런 잔혹한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코를 훌쩍이면서 눈물을 스텐리 아저씨의 옷에 훔쳤다. 시킨즈 아저씨는 웃옷은 아무것도 안 입었으니까... "죽기 전에 소원이 있는데... 쿨럭, 쿨럭" "죽는다는 말 하지 말아요!"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시킨즈 아저씨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가슴에 상처가 너무 크게 벌어져 있어 걷잡을 수 없이 피가 솟아나오고 있었다. 옷을 찢어서 어떻게 지혈해보려고 했지만 금세 천쪼가리가 물에 탄 듯이 시뻘겋게 젖어들어갔다. "죽기... 전에 키스해줘." "에에?" 이 아저씨, 거의 죽을 것 같으면서 뭔 소릴 하는거얏! 이럴 때 그런 말이 나와? 우우우. 게다가 여자도 아니고 내가 왜. 남자 따위한테, 그것도 잘생긴 미청년이라면 몰라 이런 대머리 아저씨한테 내가 왜 그런 버거운 짓을 해야 하냐고? 하지만 또 다 죽어가는 사람의 부탁인데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좀 그렇고... 아아악! 나는 어찌해야 하냐구? "시킨. 바랄 걸 바래라. 얼굴이 빨개지는게 아직까지 그런 거 한번 해 본적 없는 쑥맥인 거 같은데 뭘..." "그런가... 쿨럭. 유감스러운걸." 시킨즈 아저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지만 말투에는 아쉬워하는 기색이 잔뜩 묻어 있었다. 게다가 목소리가 평소의 활력이 10분의 1도 안 나올 정도로 약하고 떨렸다. 휴우. 할 수 없다. 전에 세이렌 누나한테 그런 것처럼 타협을 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몸을 숙여 시킨즈 아저 씨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거길 택한 이유는 오로지 이마에는 머리카락이 없으니까 하기 쉽다는 이유였다. "...그냥 이걸로 만족해요. 그럼 됐죠?" 나는 몸을 일으키면서 퉁명스레 말했다. 실제로 목에서 나오는 낭랑한 목소리는 퉁명스럽기보다는 사실 새침떼는 것 같았지만. 하지만 시킨즈 아 저씨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저씨?" 여전히 대답이 없다. "아저씨이!" 나는 떨리는 손으로 피투성이의 가슴에 살짝 손을 얹었다. 살결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어 따뜻했지만 심장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피 냄새가 느껴졌다. 사실 지금까지 피 냄새라는 것을 한번도 맡아 본 적은 없지만 비릿한 느낌이 확실히 전해져 왔다. "...멍청한 녀석... 바보같이 살더니 역시 바보같이 죽었어." 나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단지 멍하니 넋을 잃고 서서 죽은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 아는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바로 내 앞 에서. 이미 흘릴 눈물은 아까 다 흘려버렸기 때문에 슬프기보다는 단지 정신이 멍했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런 게 죽음이라는 건가... 너 무 단순하고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하하..." "끄응..." 스텐리 아저씨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 역시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듯 했지만 그는 시킨즈 아저씨와 달리 가죽 갑옷 같은 걸 입고 있었 기 때문에 치명상만은 피한 듯했다. "...이 아저씨... 주... 죽었어?" "시, 시에! 왜 여기 있어? 어서 피하지 않고!" "하지만... 카이가 여기 있으니까..." 갑작스러운 아시에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쩍 깨었다. 윽. 아시에가 항상 나만 졸졸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었잖아? 그 사이에 스텐리 아저씨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아직도 피가 많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큰맘먹고 치마 아랫단을 북 찢어 아저씨의 상처에 덧댔다. 길고 치렁치렁했던 치마가 이제는 무릎까지 오는 평범한 치마로 변해버렸다. 나는 어떻게든 스텐리 아저씨를 부축해보려고 했지 만... "그만둬... 큭... 그렇게 여린 몸으로는 내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고." 분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아픈 사람을 부축해주는 것조차 할 수 없다니... 무력감이 절실하게 가슴을 후벼 팠다. 정령을 쓰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령왕의 목걸이조차 나를 위해서만 쓸 수 있도록 그 기능이 제한되어 있다. 내가 이 목걸이로 쓸 수 있는 정령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급정령만 가능한데다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 아니면 들어주지 않는다. 나는 애초부터 정령에 대한 친화력이 없기 때문에 정령들은 계약자인 아이렌의 명으로 내 말을 따른다. 정령들이 계약자도 아는 내 말을 듣는 조건 중 하나가 나를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지성을 가지는 상급정령쯤 되면 어떻게든 내 미모를 이용해 설득해 볼 수도 있겠지만 명령에만 철저히 따르는 하급정령에게 그런 걸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아이렌도 없는 곳에서 이 목걸이만으로 상급정령의 소환은 절대 무리고... 결국 이전에 예지의 귀걸이로 보았던 것처럼 되어버린 걸까... 보름달 아래의 살육. 그리고 날 지키려다가 쓰러진 두 사람...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역시 조금 무리해서라도 레이엔과 다시 한번 연락을 해 보았어야 했는데...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걸까. "윽..." 스텐리 아저씨는 힘겹게 몇 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잠시... 쉬는게 좋겠군." "괜찮아요?" "걱정 마. 내겐 따로 지켜야 할 가족들이 있으니까... 여기서 끝나지는 않아. 윽..." 그러면서 스텐리 아저씨는 정신을 잃고 푹 쓰러져 버렸다. 나는 혹시 죽지 않았나 당황해서 아저씨를 살펴보았지만 죽지는 않은 듯 했다. 피도 조금씩 멎어 가는 것 같아 안심하고 있는데... 아시에가 옆에서 사색(死色)이 된 얼굴로 떨고 있었다. "왜그래! 무슨 일이야! 시에!" "이런이런. 여기서 다시 재회하게 될 줄이야. 카이엔. 그리고 아시에." 나는 고개를 들어서 그 우중충하고 기분나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온 몸을 죄다 검은색 옷과 악세사리로 치장한 흑마법사 셰 더 녀석이었다. "셰더...!" "뭐야. 역시 이전에 여자가 되기 싫다던 반응은 역시 앙.탈.이었군. 쯔쯔. 평소에도 그렇게 여장을 하면서 음흉한 욕망을 채울 것이면 차라리 진짜 여자가 되서 마음편하게 즐길 것이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거야!" "그럼 지금 하고 있는 여장은 뭘로 설명할거지? 게다가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목소리까지 완벽한걸? 손에 끼고 있는 반지와 팔찌 같은 게 아니면 나도 못 알아볼 뻔했다니깐." 으윽. 할 말 없는 상황. 내 다음부터는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여장같은 거 하나 봐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런 진짜 변태스런 녀석한태 변태 소릴 듣고싶진 않아! 그나저나 셰더 녀석, 뭐 하러 다시 또 나타난거지?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떨고 있는 아시에를 감싸면서 뒤로 물러났다. "네가 걱정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거다. 이미 아시에는 쓸모가 없으니까. 마법적으로는 뛰어난 소재인데 그만큼 다루기가 힘들어서... 게다가 아무리 최면을 걸어도 밤일이 영 시원찮았다고." 뭐... 뭐라고?... 네녀석이 아시에에게 얼마나 큰 정신적 상처를 입혔는지 알고 하는 소리얏! "이 자식!" 한쪽 주먹에 잔뜩 힘이 들어갔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단지 그것 뿐. 당당하게 서 있는 그를 나는 공격할 용기가 없었다. 몸이 떨리는 것이 분노와 증오 때문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너희들을 상대할 시간이 없어. 마나티." "네. 주인님♡" 어린애같은 코맹맹이소리를 내며 셰더의 뒤에서 자줏빛 머리에 초록색 눈동자를 한 여자아이가 다가왔다. 역시 셰더 녀석의 취향이 반영된 듯 회색 셔츠 위에 검은 블라우스와 검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아시에가 보통의 수줍은 미인형이라고 하면 마나티라는 여자아이는 몸은 성인 처럼 나올데 다 나오고 들어갈 데 다 들어간 글래머이면서도 행동은 아동틱한 분위기가 넘쳐 흐르는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도... 노예?" 하지만 셰더는 내 말에 응답하지 않았다. "마나티. 소환 준비는 됐나?" "넵. 온 사방에 시체와 피가 철철 넘치는 게 제물은 충분하네요. 당장이라도 소환시켜 래더 오빠를 구할 준비가 됐습니다 주인니임♡" "그놈을 오빠라고 부르지 말랬잖아." "히잉∼ 그래도 주인님을 오빠로 부르기에는 좀 뭐하잖아요. 나이가 있는데에." "...닥치고 빨리 소환이나 해." "알겠습니다. 루리루리 룰라라 아리아리 알라라◇ 아싸라비야★ 깐따비야♬ 호루루루루∼ 검은 고양이 아저씨 네로 나와주세요∼" .....뭐 저런 주문이 다 있냐? 게다가 마나티라는 저 여자애, 거의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춤을 춰가면서 주문을 외네? 손에 마법봉이라도 쥐어주면 딱 어울릴 것 같은 그런 행동이다. 쿠르르르르... "헉! 뭐야!" 지금 경기장의 상환은 파인이 마법사들의 협공을 받아 주박당하고 래더도 간신히 공격을 막아내고 있지만 거의 지쳐가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 위에 갑자기 다른 세계로 통하는 듯한 거대한 통로가 열리더니... 거기서 거대한 검은 고양이가 내려와 땅에 발을 내딛었다. 그 충격으로 경기장 전체가 흔들렸고 나와 아시에는 서로 부둥켜안으면서 넘어졌다. 저... 저 황당한 주문. 진짜 작동했잖아? "휴우... 마나티. 저런 걸 소환해서 대체 어쩌자는 거얏! 저래갖고 보는 사람들이 겁을 먹고 공포심에 떨 것 같아?" 셰더는 한숨을 쉬고는 버럭 소리질렀다. 정말 저 고양이는 덩치는 크긴 한데 크기에 걸맞지 않게 귀엽게 생겨 그냥 보면 전혀 적으로는 느껴지 지 않을 것 같았다. "이잉∼ 하지만 마나티는 그런 흉악한 괴물은 싫은걸. 하지만 네로씨는 래더 오빠를 구할 만큼 충분히 강하니까 주인님은 걱정말고 지켜보세요!"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자고로 흑마법사라면 사람들에게 공포감과 불안을 심어 줘야 하는 거라고!" 저 셰더 녀석은 참 쓸데없는 미학을 여러가지로 추구한다는 말이야. 온통 검게 칠한 괴상망측한 옷 센스부터 해서... "냐아아옹∼" 고양이의 울음소리는 무섭지는 않았지만 밤이라 그런지 소름이 쫙 돋아오는 소리였다. 그 소리와 함께 놀랍게도 고양이의 입에서는 브레스가 발 사되었다. 하지만 대륙 7대 마법사라는 녀석은 가볍게 방어막을 쳐서 브레스를 막고는 기사와 마법사들에게 이리저리 지시를 내렸다. 래더는 고 양이가 마법사들을 상대하는 사이에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대륙 7대 마법사의 반격에 고양이가 타격을 입었다. "아앗! 네로씨! 조금만 더 힘내요! 나중에 마계로 맛있는 생선 잔뜩 보내드릴테니까요!" ...저 마나티라는 여자애를 보고 있으면 지금이 위기상황이라는 긴장감이 도통 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셰더가 지금 딴 데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 에 도망쳐야 할까... 하지만 기절한 스텐리 아저씨는 어떡하고? "지금 가도... 소용없을 것 같아." 아시에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패닉상태에 빠져서 출입구로 몰려드는 사람들은 자하기니아의 기사와 마법사들이 파인과 래더를 제압하자 다 소 진정되는 것 같더니 거대한 검은 고양이가 경기장에 출현하자 다시 혼란에 빠졌다. 빠져나간 사람도 꽤 있지만 아직도 몇천의 사람들이 좁은 출입구 몇 군데에 몰려 있었다. 지금 저기로 달려간다고 해도 쉽게 빠져나갈 수는 없겠지. 지금 누구보다도 셰더 근처에서 떨어지고 싶은 아시에 가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그쪽 상황은 나빴다. "...흑마법... 쓸까? 쓰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또 카이가 위험하니까." "일단은 상황을 보자. 좀더 위험해지면 쓰도록 하고." 아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아시에의 흑마법이든 뭐든 상관없으니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빠져나갈 수 있으면 빠져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분명 흑마법은 그 반작용이 오는 마법이다. 물론 아시에는 마왕을 소환해도 살아있었을 만큼 그 반작용에 강한데다 엄마의 힘으로 저주의 나이 테를 지워낼 수 있기는 했지만 세이렌 누나가 쓰지 말라고 한 데는 아마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다. 난 마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니까... "아아, 네로 씨... 미안해요. 흑흑." "짜고 있을 시간 없어. 마나티. 래더가 오자마자 바로 워프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네로라는 고양이는 다른 마법사나 기사들보다는 훨씬 강한 것 같았지만 역시 대륙 7대 마법사 중의 한 사람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듯 곳곳에 큰 상처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브레스를 뿜고 공격을 계속하여 래더가 도망칠 수 있는 틈을 만들어냈다. "네! 주인님. 그런데 결국 시드의 검은 못 얻었네요." "할수 없지. 시르팡 녀석들.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어. 결승전 후에 가져간다고 해놓곤 선수를 칠 줄이야." "주인님도 순진하시긴. 그걸 곧이곧대로 믿어요?" "시끄럿!" 그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더니 상처입은 래더가 혼신의 힘을 다해 여기까지 오자 바로 워프해 버렸다. 그 뒤로 마법사들이 쏜 듯한 불덩어리 가 뒤늦게 내 쪽으로 날아왔다. 흐아아아아악! 저거... 절대마력보호반지로 막아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내가 어떻게 해 보려던 차에 아시에 가 날 붙잡고 낮게 웅얼거렸다. 제65화 : After... 콰쾅거리는 거대한 폭음 소리와 함께 나는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내가 일어났을 때 내 옆에는 밤새 간호라도 한 건지 아시에가 의자 위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셰더 녀석이 래더, 마나티와 함께 공간이동으로 어디론가 사라졌고, 간발의 차이로 그들을 놓치고 갈 곳을 잃은 마법이 이 쪽으로 날아왔던 것 같던데... "여∼ 카렌! 몸은 좀 괜찮냐?" "몸은 어떠세요? 카이엔 오빠? 이리저리 그때 상황을 떠올리면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문이 활짝 열리면서 키론, 린넬, 치즈를 비롯한 우리 조 애들과 노비스, 피케를 비롯한 여자애들이 무더기로 들어왔다. 별로 크지도 않은 방은 순식간에 사람으로 북적댔다. 으윽... 환자실에 들어와서 한꺼번에 떠들어대니까 정신 사 납잖아! "좀 조용히 좀 하렴. 브리타뉴 군이 싫어하잖니." 그때 양호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애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래도 여전히 꿋꿋하게 떠드는 치즈 삼총사를 한대씩 쥐어박고는 양호선생님 은 내 앞에 다가와 섰다. "별 상처 없는 것 같으니 다행이구나." "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죠?" "아, 그 파자마 말이니? 혹시라도 브리타뉴 군이 아파서 쓰러질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챙겨왔지. 오호호홋. 갈아입히느라 즐거웠단다." 난 어젯밤 무술대회에서의 사건을 묻는 건데 웬 파자마? 양호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고개를 숙여 내가 입고 있는 잠옷을 보았다. 전체적 으로 파스텔 톤의 분홍색에 무려 당근 무늬가 새겨진 파자마를 나는 입고 있었다. 우웁! 또 언제 이런 걸 입혀놓은 거얏! 게다가 뭐가 그렇게 즐 거워? "호호호. 예쁘지?" "예쁘긴 뭐가 예..." "네!" 내가 반박하려고 했지만 지금 이 방에 북적거리는 수많은 문병객들의 이구동성인 외침에 아무 힘도 쓰지 못한채 내 말은 허공에 묻히고 말았다. 흑흑. 처음 이 몸에 빙의할 때만 해도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요새는 뭐가 잘못되었길래 이렇게 반 여성 취급받느냔 말이야! 물론 여장도 하긴 했지만 이번 수학여행때 한 게 전부라구우! "으응... 아, 카이. 깼어?" 갑자기 찾아온 방문객들의 소음 탓인지 아시에가 졸린 표정을 짓고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으음... 어쩐지 귀엽다아. "시에가 밤새 날 간호해 준거야?" "응. 카이가 걱정되었고... 양호선생님께서도 부탁하셨으니까." 양호선생님이? 나는 고개를 돌려 양호선생님쪽을 바라보았다. "우후훗. 감사하라고. 브리타뉴 군. 이 선생님이 둘만의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줬으니까." "너무해요! 저도 카이엔 님을 간병하고 싶었다고요!" 소리높여 항의하는 피케. 하지만 양호선생님의 입장도 단호했다. "쓸데없이 간병인이 많으면 옆에서 수다나 떨면서 휴식을 방해하기 마련이에요. 간병인은 한 사람으로 족해. 게다가 아시에가 여기 여자애들 중 에서 제일 예쁘잖아!" 예쁜 것과 간병인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심히 궁금했지만 그보다는 어제 일을 아는 것이 더 중요했다. "딴건 상관없으니까 어제 어떻게 되었는지 좀 말해 줘어. 궁금하단 말이야." "알았어." 내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서 나선 사람은 키론이었다. 음... 이런 경우에 제대로 분석해서 설명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저녀석 외에는 린넬이 유 일하겠지. 다른 애들은 솔직하게 쓸데없이 이것저것 떠들기만 한단 말이야. 키론을 비롯한 우리 조원들과 노비스를 비롯한 여자애들은 혼잡한 와중에서도 간신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물론 많이 뚱뚱한 우뉴와 다소 통통 한 치즈는 까딱하면 나오지 못할 뻔도 했단다. 루카라와 치즈, 린넬은 빠져나오다 인파에 치여 몇 군데 상처를 입어 신관에게 치료를 받았다. 거 대 고양이가 출현해서 갑자기 혼잡해진 것은 나도 아는 이야기였고 그 후로도 경기장에 몇 번 콰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빠져나오고 보 니 아시에가 언제 빠져나온 건지 기절한 나를 어깨에 부축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 조원들의 눈에 띈 것이다. 나는 키론의 말을 들으면서 아시에를 살짝 쳐다보았다. 혹시... 흑마법같은 걸 쓴 건? 아시에는 나중에 가르쳐주겠다는 듯 손을 살짝 흔들면서 미 소로 넘겼다. 무술대회 이야기로 가자면. 지금까지 자하기니아 정부측에서 모든 정보를 통제하고 핀치 시 전체에 계엄령을 내렸다. 때문에 지금쯤 아침밥을 먹 은 뒤 인원을 체크하고 출발준비를 했어야 할 유클리네에서 온 우리 학교 학생들의 귀국도 오후쯤에야 가능할 예정이라고 한다. 정보가 공개되 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소문이 무성했다. 들려오는 소문을 종합해보면 강력한 흑마법사가 출현했다는 이야기가 있었고(이건 셰더 녀석인것 같고) 괴도 시르팡에 의한 시드의 검 도난은 기정사실화되었다. 래더는 셰더 패거리인것이 밝혀졌으니까 문제는 위험한 검강을 난사해서 다수의 인명 피해를 낸 파인의 정체인데 파인은 현재 자하기니아측 마법사들에게 사로잡혀서 왕성 깊숙한 감옥에 갖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둑맞은 시드의 검에 대한 정체는 이것저것 황당한 헛소문만 잔뜩 퍼져 있는 상태였다. "결국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거네." 뭔가 알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맥이 풀렸다. 하기야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몸 건강히 살아돌아가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생각해야겠지만. 아무 래도 까딱 죽을 뻔했다는 건 세이렌 누나나 사이엔 형한테 비밀로 해야겠다. 알면 분명 난리를 칠 테니까. "카이엔 니임∼" 그때 빽빽거리는 커다란 목소리가 온 방안을 쩌렁쩌렁 울리며 병실 문이 열렸다. 헉...! 이 목소리는!? "공주님! 이런 비상시국에 함부로 움직이면 안된다고 하셨잖습니까!" "하지만 카이엔 님이 우리 나랄 방문하셨다는 데 안 보고 갈 수 있어!?" ...시끄러운 공주 피요르였다. 수학여행 와서 가능하면 쟤는 좀 안 보고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뭐하러 왔어?" 나는 낮은 목소리로 따지듯이 물었다. 피케와 노비스같은 자하기니아의 여자애들은 공주에게 나름대로 예를 차리는 것 같았지만 유클리네에서 온 내 친구들의 시선은 대체적으로 싸늘했다. 피요르야 둘째치더라도 그 뒤에 선 호위무사 실론 녀석은 뭐니뭐니해도 뒤에서 나를 찌른 녀석이 니까. 피요르도 그런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밝은 표정을 좀 누그러뜨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이전엔 죄송했어요." "사과를 해야 하는 건 너가 아닐텐데." 나는 그러면서 뒤에 꼿꼿하게 서 있는 실론을 흘끗 바라보았다. 실론 녀석도 나를 대하기가 불편한 듯 나와 의도적으로 눈을 피하는 모습이었다. "실론. 사과해." "고... 공주님... 전." 저 자식. 울 형한테 죽을 뻔했다가 누나랑 아빠가 말려서 간신히 살아난 주제에... 사과 한번 하는 데도 왜 저렇게 인색해? 일본 정치인들도 아니 고 말야. "파.르.스.경. 그때의 일은 경위야 어찌되었건 분명히 경의 잘못이에요. 그때 카이엔 님은 무방비 상태였고 경은 뒤에서 검을 찔렀으니까요." "...죄송합니다." "사과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에요!" 피요르 공주가 진지모드로 질책을 하자(실론을 파르스경이라고 부를 때다), 실론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 쪽을 바라보았다. "가능한한 성.의.있.게 해주었으면 좋겠군요." 나는 비아냥거리면서 이야기했다. 어느 나라 사람들처럼 이상한 단어 짬뽕하면서 유감인지 사과인지 도통 감 잡을 수 없는 헛소리로 사과를 하 려면 나는 아예 그걸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실론은 내 말에 심기가 거슬린 듯했으나 그걸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 다. 오히려 당당한 태도로 서 있는 것이 이미 마음을 정한 듯 했다. "저 실론 파르스는 무인으로서 카이엔 브리타뉴 씨께 말할 수 없이 부끄러운 행동을 했습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백번 사죄해도 모자라지만, 부디 용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실론이 허리를 90도로 숙이면서 말했다. 실제로는 무릎꿇고 손을 싹싹 빌어야 용서해 줄까 말까 하는 심정이었지만 이 세계에서는 무릎을 꿇는 예는 한 나라의 국왕에게나 하는 거다. 그래도 이리저리 얼버무리지 않고 꽤 시원스럽게 대답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럭저럭 만족하기로 했다. "용서해 줄께요. 단!" "단?"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윽. 이러면 좀 말하기 부담스럽잖아? 에라. 모르겠다! 이왕 조건을 달기로 했는데 그대로 관철해야지. "언젠가 다시 만나 제가 위험해 처하게 되면 꼭 구해줘요." "알겠습니다." 별것 아닌 조건이지만 어쩐지 그냥 용서해 주기는 뭐가 찜찜해서 말이지. 이런 한심한 조건을 달다니 나도 참 쪼잔한 인간이기는 하다. 그래도 실론 녀석은 수용할만한 조건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예 앞으로 날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카렌. 호위기사 갖고 싶었어?" "아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아리따운 여인을 찔러야 했던 기사가 이번에는 그 여인을 지키게 되는 역할을 맞게 되다니!" "무슨 소리얏!" 난 그냥 쪼잔한 마음으로 조건을 달았던 것 뿐인데 우뉴, 이멜츠 이 녀석들은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후훗... 실론. 처음으로 아빠한테 비오는 날 먼지나게 두들겨 맞더니 꽤 멋있어졌네?" "아앗! 공주님! 그 얘기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랬잖아요!" "어머. 그거 핀치 시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거 아니었나? 너네들. 알고 있지?" "네. 저도 들어봤어요. 12용사이신 쟈켄 파르스 님이 엄청 화나셨다면서요?" 피케가 피요르 공주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대답했다. 실론이 지 아빠한테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고? 하긴 기사 아빠라면 엄청 화낼만도 하지. 게다가 대륙 7대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행동을 저질렀으니. 반병신 만들지 않은게 오히려 다행이다. "저기... 카이엔 브리타뉴 씨 계신가요? 여기 편지 왔습니다." 편지라고...? 누굴까? 나는 호텔 직원이 가져온 꽃무늬가 그려진 편지를 받았다. 예쁘게 치장된 걸로 봐서 나를 흠모하는 어떤 여자애가 보낸 걸 까? 라고 생각하며 나는 별 생각없이 편지를 뜯었다. >>>>>>>>>>>>>>>>>>>>>>>>>>>>>> 카이엔 브리타뉴 씨께. 당신을 여기서 만난 것은 뜻밖이었습니다. 그리고 뜻밖의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여장이 잘 어울리시더군요. 하늘이 내린 듯한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저는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비록 이번에는 일이 바빠서 이렇게 편지로만 안부 전하지만, 다음에는 한번 차라도 마시면서 천천히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신실한 마음을 담아서 시르젤이. <<<<<<<<<<<<<<<<<<<<<<<<<<<<<<< 헉... 이건 시르젤한테서 온 편지잖아!? 근데 뭐? 가슴이 두근거렸다고? 이... 이거 설마 위험한 편지 아냐? 묘한 편지 내용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치즈가 샤샥 하고 손에 든 편지를 휙 뺏아갔다. 어어억! 안돼애! 그러나 이미 종이는 내 손을 벗어나 있었으니 아무리 내가 돌려달라고 외쳐봤자 죽은 자식 나이 세는 일이요.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며. 지나 간 버스에 손 흔드는 격이자,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었다. 치즈의 손에 들어간 시르젤의 편지 내용은 곧 만 천하에 공개되었고 나는 창피함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으으... 시르젤 은 무슨 생각으로 저런 편지를 띄우고 가 버린 거야? "이 시르젤이라는 사람, 카이엔을 잘 알고 있는 거 같아 보이지?" "어투나 표현을 볼때 남자 같은데... 혹시 변태 스토커?" "카이엔 님이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걸 보니... 설마 카이엔 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까?" 편지 내용에 대한 갖가지 추측과 논쟁으로 양호 선생님이 조용히 시킨 병실 안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사람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처음에 는 시르젤의 정체나 나와의 관계에 대해 논하던 애들의 논쟁은 갈수록 점입가경으로 흘러갔다. "이 편지 니가 가명을 써서 위장해서 보낸거지! 필체가 너랑 비슷하잖아!"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너야말로 그런 짓을 해 놓고 뒤집어씌우는 거 아냐?" "계집애. 아닌 척 해놓고는 몰래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고 있..." "그만햇!" 나는 견디다 못해 이불을 집어던지며 버럭 소리 질렀다.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건 혼자서 차분하게 이것저것 생각해 볼 시간이지 저런 한심한 싸움 구경할만한 여유는 없다고! "병문안 온 거야, 떠들러 온 거야!? 다 나갓!" "그럼, 브리타뉴 군이 직접 편지에 대해 해명하면 모든 게 정리되겠군요. 그렇죠?" 나의 강경한 태도에 다른 애들이 주춤거리더니 내 기세에 눌려 뒤로 물러나면서 주춤주춤 나가려는 기미를 보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병 실 안에는 양호 선생님이 있었다. 역시 나이를 헛먹은 게 아닌지 이 정도로 성질을 부리는데도 끄떡도 하지 않고 오히려 역공을 가했다. "말해봐요. 브리타뉴 군. 시르젤이라는 사람은 누구죠?" "그건..."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물론 그놈이 시르팡의 일원이라는 정체 따위, 굳이 목숨걸고 비밀을 보장해 줄 필요는 없지만 지금 상황에서 밝혔다가는 엄청난 여파가 학교뿐만 아니라 여러 사교계에 몰아닥칠 거다. 아마도 내가 시르팡에게 납치당했던 때 이미 금단의 사랑은 싹트기 시작했고 우리 브리타뉴 가가 내 납치에 관한 사건의 전말을 밝히지 않는 것 은 그때 내가 차마 밝힐 수 없는 부끄러운 짓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등의 악질적인 소문이 나돌 가능성이 컸다. 특히 내가 평소에 저런 류의 팬 픽을 여러 번 써 봤으니까 잘 알지. 암암.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인데... 하핫. 어쩌다가 이번 수학여행에서 잠깐 얼굴만 봤어. 그런데 이런 편지를 보내오다니... 별난 사람이네. 그럼. 난 좀 쉴테니까. 시에만 빼고 다들 나가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어색하게 변명했지만 내 스스로 생각해봐도 별로 설득력 있는 변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애들이 뭐라고 더 추궁하려 했지만 나는 아까 집어던진 이불을 후딱 집어들고 침대에 누워 등을 돌리며 외면 모드에 들어갔다. 몇몇 애들이 불평을 내뱉었지만 나 는 꿋꿋하게 아무것도 안 들린다는 듯 이불을 뒤집어 썼고 약간의 실랑이 끝에 양호선생님이 친구들을 다독거리면서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다시 방안에는 아시에랑 나 둘만이 남았다. 휴우. 이제야 아까 못 물어본 걸 물어볼 수 있겠군. "그때 그 상황... 어떻게 된 거야?" "응... 미안해. 알고 있겠지만... 흑마법 썼어.... 그러면서 두 사람을... 미안해! 하지만 카이를 구하려면..." "무슨 말이야? 좀 자세히 말해봐." 아시에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을 더듬었다. 무슨 말이야? 나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침대를 박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안해... 흑... 미안해..." 하지만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연발하는 그녀. 말을 하기 전에 위로부터 먼저 해 줘야 할 성 싶다. 나는 그녀의 손을 살짝 붙잡으면서 가능한 부 드러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 휴우. 이렇게 상대한테 맞춰줘야 하는 말투는 세이렌 누나만으로 족한데 말이지. "괜찮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시에를 탓하지 않을 거니까. 시에는 아무 잘못 없어." "흑... 하지만... 하지만 사람을 죽여버렸는걸!" 주... 죽이다니? 분명 그때 상황은 우리가 죽임당하기 직전이면 직전이었지 누굴 죽일만한 상황은 아니었는데? 나는 깜짝 놀랐지만 놀란 감정을 애써 감추며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아시에를 계속 다그쳤다. "설마. 시에가 그런 일을 할 리 없잖아. 그때 주위에는 스텐리 아저씨 말고는 아무도 없..." 헉...! 그러고 보니까 깜빡 잊고 있었다. 시킨즈 아저씨는 결국 죽어버렸지만 스텐리 아저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살아있었는데! 그때 휘말려 죽었을 까? 아니면 아시에가 나처럼 그 아저씨도 살릴 수 있었을까? "...미안해. 흑... 카이를 구하는 것만도 벅찼으니까. 하지만 카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 카이를 구하기 위해... 아시에는 경기장 밖에 있는 누군지 모를 두 사람과 우리 둘의 위치를 뒤바꾸는 흑마법을 썼어. 난... 공간이동 마법은 모르니까... 그래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위해 나는 잠깐 생각을 해야 했다. 아시에는 공간이동 마법을 쓸 수 없다. 그 상황에서 날아오는 마법을 피하기 위해 흑마 법을 쓸 수밖에 없었고. 그 마법은 근방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와 장소를 바꾸는 마법이라는 것 같았다. 아시에가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그 결과 로 결국 이름모를 누군가를 희생시킨데 대한 죄책감인 것 같았다. "날 구했잖아.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난 너에게 정말로 고마워하고 있어." "카이..." 나는 맞잡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면서 속삭였다. 지금 자책감에 빠져 있는 그녀에게는 질책보다는 위로가 필요하겠지. 사실 그녀의 정신상태는 아직 정상적인 게 아니니까. 게다가 아시에 덕택에 목숨을 건진 것도 사실이기는 했다. 물론 나는 강력한 마법무구를 착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것이 어느 선까지 통할 건지에 대해서 도박을 해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니까 울지 말고. 알았지?" "으응." 그리고 자하기니아 정부측의 심사가 끝난 오후 무렵에 우리는 왔을 때 타고 온 마법진을 타고 유클리네의 수도 유레카로 돌아갔다. 원래대로라 면 이번 수학여행의 즐거운 추억에 대해 웃고 떠드는 즐거운 분위기였어야 하지만 이번 수학여행에 온 대다수의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침울해하 고 있었다. 다른 조원 학생들 중 두 명이 어제 무술대회 경기장에서 죽었고 세 명이 중상을 입었다. 중상을 입은 애들은 훌륭한 신관들이 있으니 한동안 요양하면 건강하게 다시 등교할 수 있겠지만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도저히 무리. 우리 엄마 정도 되는 최고위 신관급이라면 영혼이 빠져나가기 전이라면 부활시킬 수도 있겠지만 다수의 사상자가 난 어제 사고에서 죽어가는 사람 살리기에도 급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힘이 드는 부활까지 시도할 만한 여유는 없었겠지. 죽은 두 애들 중 남자애 한 사람은 파인의 검강때문에 생긴 폭발에 휘말려서, 여자애 한 사람은 어이없게도 좁고 북적이는 출입문으로 빠져나오 다가 넘어져서 몰려든 사람들에게 밟혀 죽었다고 한다. 시킨즈 아저씨와 스텐리 아저씨도 죽고... 정말 기대했던 여행이었지만 여러 가지로 상처 만 받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동안 귀걸이 연락을 자동응답 모드로 해 놓았었던 레이엔은 뒤늦게 귀걸이로 연락을 해 왔지만 이미 그때 상황은 모두 종료된 후. 나는 이런 귀걸이는 이제 빼고 싶다는 말을 레이엔에게 늘어놓고는 연락을 끊었다. 아이렌을 어떻게 꼬드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이엔은 처음으로 아이렌과 둘이서만 데이트(레이엔은 그렇게 주장했다.)를 한다고 방해받기 싫어서 자동응답 모드로 해놓았다고 했다. 처음에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었 지만 이제는 더 이상 따질 힘조차 없었다. 이해해줘야겠지. 아시에도 우울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비록 아무 해꼬지는 안 했다고 하지만 결코 좋은 기억을 가질 리 없는 셰더 녀석을 눈앞에서 목격했고(게다 가 그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새 여자(?)를 끼고 다니고 있었다.) 나를 위해서라지만 세이렌 누나가 금지시켰던 흑마법을 두 번씩이나 쓴데다 어쩔 수 없다지만 그 결과로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여전히 그 사건은 자하기니아 정부의 정보통제로 정확한 사정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나와 아시에는 다시 며칠 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당분간은 마음을 정리할 만한 시간이 필요했다. 제67화 : 두사람의 생일 자하기니아의 수도, 핀치로 갔던 수학여행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고 돌아온 지 며칠 후. 나는 여전히 학교에 가지 않고 있었다. 아직 좋지 못한 기분이 남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역시 며칠밖에 보지 못한 남남이어서 그런가. 그때는 그렇게 눈물까지 짜면서 울부짖었는데도 지금은 약간의 우울한 감정만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학교에 안 가기 때문에 즐길 수 있는 달콤한 늦잠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으니까. '근데 이상하다?' 나는 아침잠을 잘 자다가 이상한 느낌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내 몸은 계속 수면을 원하고 싶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어딘가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에 갸웃거리며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요즘 늦게 일어나는 데 맞춰서 하인하녀들이 깨 우러 오고 나를 씻기고 갈아입힌다. 그런 데 익숙해지다보니 가끔 혼자 씻고 옷 입으려면 엄청 귀찮아진다. 머리도 길고, 꾸며야 할 곳도 많고, 옷 입는 방법도 까다로우니까. 일단 곧 하인을 불러야지 하고 생각하며 나는 우선 세수라도 하기 위해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고는 비실거리며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세면대 앞에 서서 내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외쳤다. "끼아아아아악!" 덜커덩 나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엄마방까지 쉴새없이 달려와 노크도 없이 방을 열어제꼈다. "하아... 하아... 엄마아!" "어머나. 카이야. 일찍 일어났구나. 아침부터 무슨 일이니?" 엄마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원하는 옷이라면 거의 다 손에 넣을 수 있는 집안에서 왜 뜨개질 같이 지루한 걸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취미라고 하는데 뭐라고 하겠냐. "이... 이거 어떻게 된 거에요!" 바람의 정령에게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내 목소리는 완전한 여성, 정확하게 말해서 딱 표준적인 여고생 정도 톤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게다가 일전에 양호선생님이 달아준 가짜 가슴이 아닌,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범한 크기의 '진짜'가슴이 달려 있었고 결정적으로... 결정적으로... 내 다 리 사이에 항상 존재하면서 아침저녁으로 팽창과 수축을 거듭하고 하는 골칫덩어리인 '그것'이 없었다. 으아아아악! 그랬다. 지금의 내 모습은 완전한 '여자'였다. 밤에 자는 사이에 셰더 놈이 와서 성전환 시술이라도 하고 간 것도 아닌데 무슨 일이 있었냐구우! "어머나. 그러고보니 오늘이 카이엔과 미렌의 생일이구나. 미렌. 카이엔에게 인사해야지 뭐 해?" "카이 오빠, 안녕? 1년간 잘 지냈어?" 나는 그 목소리에 충격을 받고 그대로 몸을 비틀거리면서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카이엔의 내 원래 목소리와도, 지금의 내가 내고 있는 여자 목소리와도 또 다른 이형(異形)의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바로 내 입에서 나왔다. "제 동생이라고요!?" 아침식사 시간에 아빠와 엄마. 레이엔, 아이렌, 아시에와 함께 밥을 먹으면서 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밥상은 내 생일이라고 아침부터 화려한 메뉴들만 잔뜩 놓여 있었지만 나는 식탁에 놓인 수많은 음식들을 뒤로 한 채 집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미렌 브리타뉴. 애칭 미이.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나와 같이 태어났어야 하는 내 쌍둥이 여동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간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미렌의 육체는 내 육체에 흡수되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내 생일만 되면 하루 동안 내 몸은 완전한 여자로 변하고 나와는 다른 인격이 나 타난다고 한다. "카이엔 도련님께서 여성스러운 외모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마 미렌 아가씨의 육체를 흡수한 영향이라고 생각됩니다." "미렌은... 그럼 내 생일이 지나면 다시 일년동안 잠들게 돼?" "그렇습니다. 그리고 육체도 다시 남성으로 돌아오지요." "미렌이라 부르지 말라니깐, 카이 오빠! 미이라고 불러 줘!"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동시에 나는 그 말을 듣고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자신의 육체를 잃은 데다가 일년에 한번밖에 나오지 못한다니... 물론 이건 원래 내 몸은 아니지만 내가 그녀의 몸을 뺏아서 미소년이 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이 참! 카이 오빠도... 그런 건 오빠 탓이 아니니까 그러지 마!" "내 생각... 읽을 수 있어?" 헉... 큰일이네! 만약에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내가 진짜 카이엔이 아니라는 게 밝혀지잖아? "아니. 하지만 감정은 느낄 수 있는걸. 그런데 오빤 왜 다 알고 있는 걸 다시 물어? 그러고보니 성격도 좀 변한 거 같고..." "카이엔 형이 몇달전에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그래." 레이엔이 미렌의 말에 대답했다. 으음... 내 입에서 내 의지대로가 아닌 또 다른 말이 나오니까 기분이 진짜 이상하다. 하지만 가족들 중 누구도 그다지 위화감을 느끼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다만 아시에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흐응... 꽤 여러 가지 일이 있었나 보네. 못보던 얼굴도 있고. 아이는 레이랑 약혼했어?" "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에요, 미렌 언니!" 아이렌이 미렌의 장난기 어린 말에 반발했고 레이엔은 옆에서 살짝 실망스런 한숨을 지었다. 근데 이상하다? 미렌의 말과 함께 내 얼굴이 나도 모르게 아시에 쪽으로 돌아가더니 다시 레이엔과 아이렌 쪽으로 향했다. 말은 내 의지가 아니 지만 분명 몸은 내 의지대로 움직였는데 왜 미렌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된 거지? "놀랐어, 오빠? 역시 기억을 잃었다는 게 진짠가 보네. 내가 유일하게 나올 수 있는 오늘은 카이 오빠의 의지에 내가 원하는 대로 약간 영향을 끼칠 수 있어. 하지만 예전의 카이 오빠는 날 별로 안 좋아해서 이렇게 쉽게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는데..." 이전의 카이엔의 성격은 별로 좋지 못하다고 했지. 자기 몸이 여자로 변하고, 또 다른 인격에 조종까지 받는 걸 그리 달가워 하지는 않았을거라 는 생각이 든다. "자. 자.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아침부터 먹자꾸나. 내 소중한 아들딸, 카이엔과 미렌의 생일을 축하한다!" "축하합니다. 카이엔 도련님. 그리고 미렌 아가씨." "카이... 그리고 미렌 씨. 생일... 축하해요." "축하해. 카이엔 형. 미렌 누나." "미렌언니는 안 나와도 되는데. 축하해. 카이 오빠." "요 방정맞은 입이 뭐라고 했어?" "아야야." 어엇? 나도 모르게 아이렌이 얄미운 감정이 들어 아이렌의 볼을 꼬집었다. 평소의 나라면 이런 생각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을 텐데... 이거 오늘은 완전히 미렌이 의도하는대로 조종당하는 거 아냐 이거? "아이 참. 우릴 빼놓고 먼저 시작해버리면 어떡해요? 축하해. 카이. 미이." "사랑스런 동생들아. 생일 축하한다." 그때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이 같이 공간이동으로 나타나서 내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아하핫. 그 때 집사가 바깥에서 온 다른 하인과 잠깐 이 야기하더니 엄마 아빠 쪽으로 와서 말했다. "주인님. 밖에 카이엔 도련님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온 분들이 잔뜩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글쎄... 이전의 카이엔이라면 당장에 거절했겠지만 오늘 카이엔은 어떨지 모르겠군. 어떠냐? 카이엔." "네에? 저... 저는..." 아빠는 전적으로 내 의사에 맡기려는 듯 했다. 모두들 생일을 축하해주러 왔다. 이것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 카이엔 브리타 뉴라는 남자의 몸이 아닌 미렌 브리타뉴라는 여자의 몸이고 예전의 카이엔처럼 미렌을 밀어내려는 강력한 의지도 없는 나는 미렌에게 완전히 조 종당할 가능성이 커서 조금은 불안했다. "불러줘! 불러줘! 지금까지 10년넘게 거부하고 생일마다 집 밖에 한 발자국도 안 나간 걸로 충분하잖아, 응? 응? 카이 친구들도 보고 싶고, 집 밖 에도 나가보고 싶어!" ...카이엔 녀석.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생일때마다 집에 가둬두고 한번도 밖에 내보내지 않았단 말인가... 이거 너무 불쌍하잖아! 하지만 내 여자모 습과 미렌의 존재로 인해 또 다른 스캔들이 생기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이젠 정말로 학교에 갈 수 없게 되버릴 거다. 으으... 어떻해 야 좋은 거야! 난! 하지만 고심 끝에 나는 냉정한 판단으로 현실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돌려보내세요." "카이 오빠!" 내 말이 끝나자마자 미렌이 뒤이어 외쳤다. 윽. 소리지르는 건 너지만 목이 아픈 건 나라고, 그렇게까지 소리지르지는 마. "알겠습니다. 그럼 예전처럼 선물만 받고 돌려보내도록 하지요." ...진짜 카이엔 녀석. 그래도 선물은 받았군. 의외로 뻔뻔하다고 해야할지 얍샵하다고 해야 할지. "너무해너무해너무해너무해너무해너무해..." 으으으. 기분은 이해하지만 그렇게 혼자만 떠들면 내가 얘기를 할 수가 없잖아! 내 몸을 이용해서 기껏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미렌이지만 지나치 게 양보를 해 줄 생각까지는 없었다. 나는 미렌의 의지를 거부하여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일단 끊고 외쳤다. "조용히 해!" "하지만..." "대신 밖에 내보내 줄 테니까 그걸로 참아줘." 암만 생각해도 도저히 모든 사람에게 미렌을 보여주고, 거기에 따른 무성한 소문을 감당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는 모질게 굴 수는 없어서 일단 타협안을 제시하기로 결정했다. "히잉..." "카이의 입장도 이해해 주렴. 미이." "세이 언니... 어째서 나는... 난 이렇게... 흑흑." 헉. 문득 멍하니 있는 사이에 나는 어느새인가 세이렌 누나의 품에 파고들어서 징징 울고 있었다. 으악! 남의 감정까지 후벼파고들어서 눈물 흘 리게 하지 말라고! 나는 내 의지에 침입해온 미렌의 정신을 다시한번 쫓아내면서 세이렌 누나의 품에서 떨어졌다. "하아... 조금만 방심해도 내 몸을 멋대로 조종하다니." "미렌 누나도 그동안 쌓인 게 많으니까. 카이엔 형도 이해해줘." "그래야겠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힘없이 숨을 내쉬었다. 사람의 심리가 간악한 것이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면 당연히 동정심이 들어 도와주고 싶 다. 위해주고 싶다는 감정을 느끼면서도 정작 자신이 거기에 필요 이상으로 깊게 관련될라치면 거부하려는 마음이 본능적으로 솟아나는 것이다. "자, 자. 카이. 미이. 오늘은 좋은 날이잖아? 서로 기분 풀라고. 그것보다는 번저, 어서 빨리 선물을 풀어보자!" 세이렌 누나가 들떠서는 말했다. 다른 가족들도 그 말을 듣고 다들 뭔가 준비해온 선물을 하나둘씩 꺼내고 있었다. 과연 무슨 선물일까? 나는 기대되는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생일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내 생일 아침에는 항상 엄마 아빠가 친구들이랑 뭐 사먹으라면서 남기고 간 돈 몇푼이 식탁 위에 놓여져 있을 뿐. 생일날 아침에 그 흔한 미역국 한번 해주지 않 아, 오기가 생겨서 전날 일부러 인스턴트 미역국을 사다가 아침에 혼자 끓여 먹은 적도 있었다. 그 때문에 갑작스런 생일이긴 하지만, 이 선물에 거는 내 기대는 각별했다. 가장 먼저 선물을 건네준 사람은 세이렌 누나였다. "자, 받아 내가 준비한 선물이야." "세이렌 누님. 말은 똑바로 하셔야지요. 실질적으로는 내가 거의 다 만들다시피 한 건데요!" "내가 만든 부분이 키 포인트라는 걸 몰라서 그래, 사이엔!?"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이 합동으로 준비한 물건인 것 같다. 뭐길래 저렇게 싸우는 거지?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부피는 별로 크지 않은 선물 포장을 조심스레 뜯었다. 뜯긴 포장 속에서 나온 물건은...... 머리띠였다. 그것도 한쪽에 예쁜 핑크빛 꽃 한 송이가 달려 있는.... "고마워요. 세이 언니. 사이 오빠." 이게 뭐야아앗! 하고 소리치려고 할 때 미렌이 먼저 선수를 쳐서 말했다. 허걱. 이렇게 해 버리면 내가 싫다고 나설 말이 없잖아? 오늘은 여자 몸이긴 하지만, 가끔씩 반 여자 취급받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난 남자라고! 반지에 팔찌에 목걸이와 귀걸이까지 끼운 걸로 모자라서 이제는 머리 띠까지 씌우려는 거야앗!? "예쁘지? 예쁘지? 이 꽃은 내가 마법을 걸어놔서 카이와 미이가 죽지 않는 이상은 영원히 지지 않거든?" "이 머리띠는 기혈환처럼 내가 기를 집어넣어 특별제작한거야. 집중력의 머리띠라고 하지. 뭔가 정신을 몰두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집중이 더 잘 되는 물건이지. 기혈환만큼 강력한 마법무구는 아니지만 꽤 쓸만할거야." 미렌은 이미 머리띠를 받아 머리에 꽂고 거울을 바라보면서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미렌이 거울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내 시선도 당연히 거울을 통해 보이는 내 모습에 박혔다. 자주 보는 내 얼굴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잘 어울린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 꽃을 달아서 그런지 좀 더 어 리게 보이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카이 오빤 예쁘다고 생각안해?" "응. 예뻐." "왜 그래애∼ 아까부터 반응이 시원찮어!" "내 얼굴이야 자주 보는 건데 뭐." "피잇. 카이 오빠한텐 그래도 난 일년에 한번 밖에 못 보는 얼굴이라구!" 미렌에게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일년에 한번밖에 못나오는데다 그나마 그 하루의 기회조차 원래 카이엔이 막아버려서 원하던 대로 움직이 지 못했는데 이렇게 들뜨는 건 당연하겠지. 지금 몸도 여자고 하니까 하루정도는 이렇게 머리띠를 쓰고 다녀도 될 거 같다. 그렇잖아도 아침 먹 기 전에 엄마한테 강제로 여자 옷으로 갈아입혀진 판국이니까. 흐흑. "그럼 다음 선물을 풀어보자." 나는 내 감정을 미렌이 눈치채고 뭐라고 하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도 내게 느껴지는 미렌의 감정은 선물에 엄청나게 들떠 있어 내 감정 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이렌의 선물 포장은 사이엔 형과 세이렌 누나가 공동으로 준 선물보다도 더 작았다. 아무래도 우리 가족들은 덩치보다는 실속을 추구하는 타 입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선물을 뜯었는데 웬걸? 정체불명의 약병이 나오는 게 아닌가? "웬 약?" "건강에 좋은 약이야. 카이 오빠." "그럼 어디 하나 먹어볼까?" "아... 안돼! 지금 먹으면 안돼!" 아이렌이 약을 준다 하니 조금 미심쩍었지만 생일 선물인데다 나한테 나쁜 약을 줄 리는 없으니까 한 알 정도 먹어보려 하니까 아이렌이 말렸 다. "이건 카이 오빠가 내일 남자로 돌아온 후부터 먹어야 한다고!" "이리 줘봐." 세이렌 누나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더니 약병을 내 손에서 뺏아갔다. 그리고는 병을 열어 초록색 완두콩처럼 생긴 묘한 약들을 이리저리 살펴보 았다. "아이... 적당히 하고 대. 이 약들 뭐야?" "왜... 왜그래, 세이 언니? 몸에 좋은 건강식품이라고 했잖아?" "건강식품을 꼭 남자 몸일때 먹어야 한다는 건 이상한데... 바른 대로 대! 이거 정력제지!" "아... 아냐! 절대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냣! 재작년에 이미 전과가 있잖아! 작년에는 카이의 음료수에 최음제를 타 놓고 덮치려 한 적도 있고!" 재작년이라면... 아이렌은 여덟 살때가 아닌가. 무섭다... 근데 뭐어? 최음제를 타!? 아무리 그런 거에 취해도 저런 꼬마아이한테 성적 욕구가 들려 나... 알수 없는 일이다. "진짜 정력제 아니라니깐! 이번엔 발기촉진제라고!" "그게 그거잖아! 앗, 사이엔 뭐야?" 아이렌과 세이렌 누나가 소리치며 싸우는 사이에 사이엔 형이 누나의 손에서 스윽 약병을 빼냈다. "순진무구하고 사랑스런 내 동생 카이엔에게는 너무 위험한 물건이군요. 이건 제가 책임지고 처분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약병이 사이엔 형의 손에 있던 것도 잠시. 이번엔 아빠가 형의 손에서 병을 뺏었다. "흠흠. 너희같이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이런 물건을 써서야 되겠느냐? 요즘 나이가 들어서 이 아비가 힘이 조금 딸리는 듯하니 유용하게 쓰 도록 하..." "이전부터 말했죠, 여보? 이상한 보약 같은 거나 매일 지어먹으려고 하지 말고 운동 좀 하라고 말이죠. 아무리 세월이 지났다지만, 그 옛날의 12 용사가 지금은 이렇게 뱃살이 하나둘씩 늘어가다니... 이건 집사에게 주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사모님." 엄마가 아빠한테 약병을 뺏아서는 집사에게 주었다. 엄마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언제나 그랬듯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엄만 겉만 보고는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단 말야. 아이렌은 자기 선물이 집사에게 갔다고 투덜거렸지만 엄마의 부드럽지만 뼈 있는 질책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잘들 하네. 빨리 레이엔의 선물이나 뜯어보자, 카이 오빠." "그러지." 나는 미렌의 말에 동감하면서 레이엔의 선물을 뜯었다. 부피가 아이렌의 것보다 더 작은 레이엔의 선물은 귀걸이였다. 일전에 예지의 귀걸이를 빼고 싶다고 해서 레이엔이 가지고 갔는데... 그 대용품인가? "일전에 카이엔 형이 예지의 귀걸이를 빼달라고 했지? 막을 수 없는 미래를 보는 건 괴롭다고... 그래서 갖고 가서 좀 개량해 봤어. 나랑 통신할 수 있는 기능은 그대로 두고, 예지 능력은 카이엔 형이 간절히 원할 때만 보여줘. 하지만 항상 보여주지는 않으니까 유의해." 조금 이상한 선물들을 받았지만, 남은 선물들은 대체로 정상적이었다. 아시에는 언제 내 생일을 알았는지 주저하면서 선물을 주었는데 직접 만들 었다는 초콜릿이었다. 모양은 조금 어설펐지만 맛은 좋았다. 아빠는 요새 지나치게 건강보조식품이나 보약에 신경쓰고 있다는 엄마의 핀잔을 증 명이라도 하듯 다시마 액기스 한 통을 선물했다. ...요즘 변비 증세가 있어서 쓸만한 물건이긴 한 거 같다. 엄마는 이미 아침식사 시간 전에 나에게 선물을 주셨다. 지금까지 말을 안 했지만, 나는 지금 인형에게 입혀 놓은 듯이 치렁치렁한 프릴이 엄청 많이 달린 핑크빛 드레스를 입고 있다. 요즘 여러 가지 일로 여자 옷을 여러 번 입어봐서 이제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불만스러운 일 이 하나 있었다. 일전에 시르팡 일가한테 잡혀갈 때도 그랬고 왜 자꾸 사람들이 나한테 뭔가 입혔다고 하면 꼭 분홍색이냐 이거? 예쁜 거라면 다른 색도 많잖아? 노란색도 있고, 연두색도 있는데 왜 꼭 분홍색이어야 하지? "카이의 요염한 매력을 제대로 발산하려면 핑크색이 어울리니까." ...하지만 내 엄마라는 분부터 이렇게 말씀하시니 어쩌랴. "카이엔 도련님. 선물 왔습니다." 가족들의 선물을 모두 다 확인했을 때 집사가 선물로 가득 찬 리어카를 밀며 방으로 들어왔다. 밖에 모여있는 애들의 선물을 모은 거겠지. 아마. 저거 언제 다 뜯어본다냐. 에휴. 하지만 미렌이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싫다고 할 수도 없고. 주로 모르는 사람의 선물이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아는 이름이 나올 때도 있었다. 예상했지만 린넬의 선물은 역시 도시락. 아직 화해했다고 말한 건 아니었지만 저번 수학여행 때 키론과 린넬이 함께 한 무술대회 중계를 들으면서 어느샌가 분위기에 말려 이전처럼 막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루카라도 마찬가지로 도시락을 보내 왔다. 키론은 실력 좀 키우라는 쪽지와 고 스타르 게임 카드를 보내왔고, 치즈 패거리들은 자기들이 공 동 집필해서 냈다는 맛집소개서. '유레카 맛있는 집 100선'을 보내왔다. 3쇄라고 씌인 게 의외로 꽤 팔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가장 의외의 사람이 보낸 선물은... 시르젤의 선물이었다. 아직 미에나이 어쩌고 하는 게 복구가 안되었는지 같이 보낸 노란 수선화는 여 전히 조화였지만. 특대 중에서도 특대 사이즈인 선물상자 안에 들어있던 물건은... 뜨아아아악! 이... 이게 뭐얏! 편지 한 통 밑에 잘 접혀 있는 물건은 바로 세간에 '웨딩 드레스'라고 불리는 옷이었다. >>>>>>>>>>>>>>>>>>>>>>>>>>>>>>>> 카이엔 브리타뉴 씨에게. 진심으로 당신의 16번째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우리 집의 콜렉션을 하나 보내려고 했는데 어머니께서 이 선물을 미리 손수 준비해셨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실거라는 건 잘 압니다만, 그래도 당신이 이 옷을 입은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군요. 부디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을 생각하며, 시르젤이 <<<<<<<<<<<<<<<<<<<<<<<<<<<<<<<<<<< "용서할 수 없어! 이 자식!" "감히 누굴 노리는 거야!"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은 불타올랐고.(누나랑 형은 서로 싸우면서도 어쩐지 의외로 잘 어울리는 거 같다. 이번 선물 만든것도 그렇고.) 덤으로 아빠도 거기에 끼어들었다. "히잉... 시르젤 님의 마음도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카이 오빠는 양보할 수 없는걸." 여전히 괴도에 대한 동경이 남아있는 아이렌은 머뭇거렸으며. "그래도 카이를 신부로 맞으려면 백년은 이르지. 후훗." 엄마는 여전히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미소를 유지했다. "카이... 시르젤과 결혼하는 거야?" "글쎄..." "아냣!" 아시에의 질문에 난 본능적으로 거부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전에 미렌이 먼저 애매한 말을 꺼냈기 때문에 상황이 묘하게 되어버렸다. "미렌... 아니 미이.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그녀석은 남자고, 난 내일부터 다시 남자로 돌아갈 거라고." "그 시르젤이라는 사람. 보고 싶어." "뭐... 뭐어?" "왜냐하면 카이 오빠가 선물보따리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봤을 때, 그리고 편지를 읽었을 때 오빠의 감정이 어딘지 모르게 미묘하게 흔들렸는 걸?" "카... 카이!?" "지, 진짜냐, 카이엔!"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이 눈이 휘둥그래져서는 내게 되물었고 "거짓말이야...! 내 아들이.. 내 아들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거예요!" 아빠는 벌써부터 내가 시르젤의 신부라도 된 듯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하아. 시르젤 씨. 친절하고 좋은 사람인데 자하기니아에서 내게 보낸 편지도 그렇고, 이번 선물도 그렇고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웨딩 드레스가 선물이라니... "'작업'이라는 거겠지. 우훗♡. 그사람 보고 싶다아∼ 카이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자... 작업이라니. 시르젤 씨는 극성스런 엄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편지랑 선물을 보내 온 거라고. 따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미이." "것봐. 또 시르젤 편 들어 주잖아." "그게 아니라니깐!" 시르젤의 선물로 빚어진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어찌어찌 넘어간 된 후. 나는 약속대로 미렌에게 집 밖을 구경시켜주기 위해 시내로 나왔다. 세이 렌 누나나 사이엔 형, 아이렌 등이 같이 따라갈 거라고 고집을 부렸지만 나는 매몰차게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미렌에게는 처음으로 나오는 바 깥 구경인데 그사람들이 끼였다가는 보고 싶은 건 못보고 이리저리 휘둘려다니다가 끝날 공산이 컸다. 나는 우선 활동하기에도 불편하고 눈에도 지나치게 띄는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간편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원래는 바지를 입고 나오고 싶었 지만 미렌이 치마를 입고 싶다고 떼를 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성용 외출복을 입었다. 이전의 카이엔은 미렌에게 한번도 치마를 입어 볼 기 회를 주지 않았다니까 양보해 줄 수밖에 없겠지. 엄마는 웨딩드레스를 한번 입어 보라고 자꾸 내게 종용했지만... 이것만은 미렌이 아무리 떼를 써도 들어줄 생각이 없다. 원래는 몸에 이것저것 달고 다니는 취미는 없었지만 이제는 귀걸이도, 목걸이도, 반지나 팔찌도 다 몸의 일부분처럼 느껴지는 가운데 머리에 예 쁘게 꽂힌 집중력의 머리띠는 그런 걸 처음 달고 다녀서 그런지 약간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길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이 날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 즉 미렌의 몸으로 변한 내 모습은 원래 얼굴인 카이엔의 모습과 비슷하게 생기긴 했지만 또 미묘하게 틀렸다.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아름다운 미모는 여전했지만 의외인 것이 이런 미인이 시내를 걸어다니면 누군가가 꼭 작업을 걸어오는 것이 이 세계의 법칙인데 아직까지 시선은 받아도 접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기야 아무리 예뻐도 혼자서 좋아라 떠들어대다가 또 화내고 소리지르는 사람한테 누가 쉽게 접근하고 싶어하겠냐? 나는 미렌이랑 말다툼한다 고 그런 거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한테는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아예 내가 입을 닫는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미렌은 지금까지 얼마나 쌓인 게 많은지 수다를 1년분이 아니라 10년분을 쏟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시내를 걸어다니는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거리의 생동감넘치는 사람들. 생생하게 인체를 묘사한 광장의 동상과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며 무지개를 만들어내는 분수. 따사롭게 비치는 햇빛이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와 시원한 바람에 흔들리는 돌 틈의 잡초 하나하나까지 미렌에게는 감탄의 연 속이었다.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는 그녀를 나는 '쪽팔리니까 제발 그만 둬'라고 말릴 수 없었다. 차라리 미렌이 다른 사람이면 외면이라 도 하련만... 미렌과 나는 같은 몸을 쓰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래서 아예 몸에 힘을 빼기로 했다. 아예 오늘은 마음껏 하고 싶은데로 내버려두는 편이 낫다고 나는 생각했다. "...혹시, 카이엔 브리타뉴 씨?" "네에?" "아, 아니군요. 하지만 모습이 너무 닮아서.. 하핫." 미렌이 시내를 여기저기 활보하고 있을 때 웬 잘생긴 청년 한 명이 웃음지으며 나와 미렌에게 다가왔다. 척 보기에 하고 다니는 폼이 조금 노는 애처럼 생겨보여서, 한국에서 한때 솔로천국 커플지옥을 외치고 다닌 과거를 지닌 나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미렌은 우리 가족 외에 최초로 말을 건 다른 사람에 대해 먼저 호기심이 이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 청년이 웃는 모습이 참 천진난만해 보여서 나도 저런 녀석들 에 대한 편견만 없다면 좋은 인상을 받았을 거라고 스스로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호홋." 미렌은 16년동안 내 생일 외에는 한번도 나올 수 있는 날이 없었다는데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러운 응답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까지 15번 인가 16번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얘긴데 내 기억까지는 읽진 못한다면서 어떻게 이 정도 지식수준을 가지고 있는거지? "이거 실례했습니다. 사과의 의미로 차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은데, 어떠신지요?" "싫... 좋아요!" 내가 거절해 버리려고 하자 미렌이 먼저 눈치를 까고 재빨리 그 남자의 제의를 받아들여 버렸다. 어어. 이거야 말로 진짜 '작업'이잖아 미렌! 미 렌한테 뭐라고 해 주고 싶었지만 서로의 의식속으로 직접 접촉은 할 수 없는 상황.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데 멋대로 떠들어댈 수 도 없고...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 나는 미렌의 의도에 따라 어느샌가 그 남자의 뒤를 졸졸 따라가고 있었다. 그 사이에 나는 미렌에게만 들릴 만한 자그 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생각인 거야, 미이!' '일년에 한번밖에 못 나오는데, 데.이.트.! 라도 한번 하고 가야 하지 않아?'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면 어떻해!' '하지만 카이 오빤 오빠 친구를 나한테 소개시켜 주지 않잖아!' '그... 그건.' '그러니까 내가 직접 할 수밖에 없잖아?' '그러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해!' '그땐 오빠가 어떻해든 해 주겠지.' '...확 지금 바로 집에 가 버린다?' "어디 아프십니까, 아가씨? 아까부터 조금 이상한 소릴 중얼거리시는 거 같은데..." 나와 미렌이 작은 소리로 말다툼하는 것을 그 청년이 눈치를 챘는지 뒤돌아 물었다. "아, 아니에요. 잠깐 신경쓰이는 곳이 있어서... 지금 어디로 가는 거에요? 조금 멀리 가는 거 같은데." "이제 조금만 가면 됩니다." 하지만 이미 저 남자와 나는 시내를 벗어나 조금 한적한 주택가로 나와 있었다. 아직까지 좁은 골목같은 곳에 들어가지는 않아서 안심하고는 있 지만... 그래도 좀 의심스러운 면이 없잖아 있었다. 그런 생각에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아가씨?" "저... 역시 모르는 곳으로 따라가는 건... 좀..." 그다지 좋지 않은 예감. 미렌이 뭐라고 하건 나는 여기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마음먹고 반발하려는 미렌의 의지를 꾹 눌렀다. 나와 미렌은 서 로 목소리가 달랐지만 같은 목청에서 나오는 소리기 때문에 성대모사를 조금만 하면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러신가요?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는데... 하는 수 없군요." "네에?" 하는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인지 내가 눈을 껌뻑거리는 사이에 그 청년은 재빨리 내 입을 막고는 날 끌고 재빨리 주택가 안쪽에 있는 골목으로 날 끌고 들어갔다. 꺄아아악! 무슨 짓이야! 하지만 억세고 큰 손으로 막힌 내 입에서는 웅웅거리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그러길래 내가 따라오지 말라고 그래잖아아아아아! 하지만 이제와서 미렌을 탓해봤자, 그런 미렌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날 탓해봤자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평소 남자 모습일 때도 힘이 너무 없으니까. 오죽하면 치즈랑 팔씨름 해서 지고 루카라랑 했을 때 비겼겠냐?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의 반지는 내게 가해지는 위해를 막을 뿐. 납치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그건 전에 시르팡 녀석들한테 납치되었을 때 이미 증명되었다. 정령이라도 부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입이 막혀 있어서는 그들을 부를 수 없다. "지금와서 알아차려봤자, 늦다구. 아가씨. 대로에 있으면 안전할거라 생각했나? 지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도?" "읍읍!" "여자들은 참 단순하지. 단순히 외모만 보고 사람의 선악을 판별해주니 말이야. 덕택에 난 편하지만." 날 골목 구석으로 끌고들어온 그 녀석의 표정은 180도 돌변해 큭큭거리는 사악한 웃음을 얼굴에 띄웠다. 아무리 그래도 저 녀석 그렇게 해맑은 미소를 지을 수 있으면서 저렇게 태도가 갑자기 돌변하다니... 솔직히 말해 너무 당황스러웠다. 의심을 미리 하고 있던 나도 이런데 거의 의심을 하지 않던 미렌은 엄청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놀란 감정에 젖어 있을만한 여유는 없었다. 그놈은 이런 짓을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불과 1분도 안되는 시간에 내게 재갈을 물리 고 두 손을 묶어 근처에 있는 나무에 매달았다. 그리고는 바로 바지를 벗어버렸다. 싫어어어어엇! 가끔은 장난처럼 팬픽에 위험한 내용 쓰기도 했지만 진짜로 이런 짓 당하는 건 싫다구! 내가 왜 남자한테 이런 짓 당해야 해! 주의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위급한 상황에 처해도, 어떻게든 될 거야 라고 안이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러나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험하고 위험했다. 그리고 나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오늘의 내 몸은 '여자'라 는 것을. 이걸 충분히 내가 인식하고 있었다면 순진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미렌이 제멋대로 저놈을 따라가게 내버려두진 않았을거다. 내가 가진 원죄(原罪) 때문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집 밖 세상을 보는 미렌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무조건 받아준 것이 화근이었다. "우읍!" 야이 놈아! 악당이면 악당답게 하기 전에 먼저 신세 한탄이라도 하란 말야! 저놈은 뭐가 그리 급한지 속전속결로 해치우려는 듯 바로 치마 속으 로 손을 집어넣어 속옷을 내려버렸다. 꺄아아악! 이래서 치마가 싫어! 예쁘고 귀엽긴 하지만 행동을 조심하지 않으면 남들 눈에 팬티가 보이는데 다가 결정적으로 이런 놈들을 만났을 때 바지에 비해 전혀 방어가 안 되잖아! 흑흑. 항상 이럴 때는 어디선가 정의의 용사, 하다못해 백마탄 왕자님이라도 나타나서 구해주는게 세상의 도리인데 왜 이 순간까지 아무도 안 나 타나는 거야! 누가 좀 제발 구해줘! 누구든 좋아! 구해주는 사람한테는 내가 아주 찌인하게 키스해줄께에! 나는 마음속으로 절규했고, 그 자식은 짐승의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스스로의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게 덤벼들었다. 구해줘... 짧은 마음속의 단발마. 닥쳐오는 어둠 앞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쩔 수 없어...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그 찰나에... "크윽! 이 년이!" 미렌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읍읍!(미렌!?)" "읍읍 읍읍읍읍 읍읍읍! 읍읍읍읍!(눈을 질끈 감아버리면 어떡해! 못 맞출 뻔했잖아!)" 미렌이 일이 터지기 직전에 걷어찬 필사적인 발차기가 저 청소녀폭행강간미수(현재까지는...)납치범 자식의 안쪽 허벅지에 적중했다. 아슬아슬하 게 빗나가 정확히 '그'장소에 적중하지 않은 것이 매우 유감스러웠지만 그는 갑자기 당한 반격이 충격이 큰 듯 허벅지를 감싸안고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워낙 긴박한 상황이라 서로 인식은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팬티를 내린 채 껑충껑충 뛰면서 허벅지를 부여잡은 저 자식의 모습이나 마찬가지로 팬티가 벗겨진 상태에서 발로 걷어차는 행동 양쪽 모두 어찌보면 민망하기 그지없는 꼴이었다. 덕택에 발목까지 벗겨진 팬티는 완전히 찢어져 버렸다. "이 미친 년!" "꺼어..." 그 녀석이 열이 단단히 뻗은 듯 다짜고짜 다가와 내 배를 주먹으로 쳤다. 그리고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크윽. 원래대로라면 연약한 내가 저런 일 격을 맞으면 엄청 아파서 신음을 흘리고 축 늘어져야할텐데 사이엔 형의 기혈환 때문에 그런 고통조차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도 묘한 언밸런스라고 해야 할까. 하여간 화가 나서 씩씩대는 저 놈은 먼저 때려 패서 반항을 못하게 만들어놓은 다음에 일을 처리하기로 결정한 모양이 었다. 젠장! 이 재갈만 어떻게 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잡아라!" 그렇게 별로 아프지도 않은 주먹을 이리저리 얻어맞고, 이성을 잃은 손에 옷가지마저 이곳저곳 찢어져가고 있을 때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아니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인 것 같다- 발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어떻게 여길!" "드디어 꼬리가 밟혔군! 꼼짝 마라!" 누구지? 경찰인가? 아니면 또 다른 조폭 패거리? 기혈환 덕택에 크게 다친 곳도, 그리 아프지도 않았지만 몸에 무리가 전혀 오지 않는 것은 아 니었기 때문에 난 지쳐서 그곳을 쳐다볼 힘이 쭉 빠져 있었다. 그놈은 다 된 밥에 재가 뿌려진 게 못내 아쉬운지 길바닥에 침을 퉤 뱉고는 반대편으로 냅다 뛰었다. "저쪽으로 도망간다, 쫓아, 키론!" "네, 아버지!" 잠깐... 지금 누구라고 했지, 키론? 설마 우리반의 그 키론은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며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내 앞에는 숨을 헐떡이 는 안경을 쓴 중년신사가 있었다. "헉헉... 역시 나이가 들긴 들었어 나도...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저는 유레카 시 동부경찰서 형사인 멀린 모아라드라고 합니다." 성이 모아라드라면 아까 그 목소리는 키론이 맞는가보다. 그녀석... 아빠가 경찰에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실제 사건에도 참가하고 있을줄은 몰랐 는걸? 나한테는 다행이지만 키론의 아빠가 왜 여기 있지? 시르팡 사건만 전담한다고 들었는데? 그는 내 입에 물린 재갈을 빼고, 손에 묶여 나뭇가지에 달린 밧줄을 풀어주며 물었다. 나는 정신적 충격 때문인지 육체적 타격인지 순간 몸을 가 누지 못하고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이런 질문 드리는 건 실례지만... 벌써 당하셨습니까?" 그는 바닥에 널부러진 내 찢어진 팬티를 집어들더니 물었다. "아직 안 당했어욧!" 정말 실례되는 질문이었기 때문에 발끈 화가 난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곧 저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진짜로 큰일날 뻔했다는 것을 깨 닫고는 고개를 돌린 채 짤막하게 말을 이었다. "...고마워요." "이 근처를 다닐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요즘 이 근처에서 여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쇄살인사건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벌써 다섯 명째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멋모르고 따라갔다는 말인가... 하긴 수학여행을 며칠 갔다온데다, 학교에도 며칠 안 가니 그런 소식같은 걸 전혀 알 길이 없다. "아버지. 놓쳤어요. 그녀석. 골목지리를 잘 아는 것 같더라고요." 멀린 씨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를 덮치려 했던 그 나쁜 자식을 쫓아갔던 키론과 몇몇 경찰관들이 돌아왔다. "그래? 그렇다면 녀석은 이 근처에 살 확률이 높겠군." "그렇겠죠. 근데 그 여자애는 괜찮아요? 어디 안 다쳤대요?" 키론이 그렇게 묻더니 내 쪽을 바라보았고 나는 키론의 시선을 피했다. "카이엔이랑... 닮았네?" "뭐라고, 키로? 어디 좀 보자!" "와... 진짜다. 예쁜 애네." "떽! 이것들이 지금 피해자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 키론 너는 지금 당장 가서 여자 팬티 좀 사와!" "에엑? 쪽팔린다고요! 아버지가 사오면 되잖아요!" "...진짜로 내가 사랴?" "하기야 아빠는 맨날 야한 팬티만 샀다가 엄마한테 맨날 구박받았죠." "오옷! 정말입니까 경감님!" "닥치고 당장 가서 사오기나 해! 지금 이런 상태로 걷게 할 수는 없잖아!" 키론의 아버지이자 형사인 멀린 모아라드씨는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함을 질렀고 그 박력에 놀란 키론은 잽싸게 뛰어갔다. 휴우. 일단 키론에게 내가 카이엔이라는 사실 자체는 들키지 않은 것 같다. 하여간 지금 모습은 이전처럼 전혀 꾸밈없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니까 시르 젤같이 내 장신구 하나하나까지 관심을 쏟지 않는다면 알아보지 못햇을거다. 게다가 오늘 처음 한 꽃장식 머리띠도 있고 말이야. 곧이어 키론이 속옷을 사왔고 나는 경찰서 사람들이 날 위해 잠깐 자리를 비워줄 동안 재빨리 옷을 입었다. 그리고 아직 놀란 가슴과 충격이 가 시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들을 따라가서 오늘 일에 대해서 진술을 좀 해야 했다. 지친 마음으로 경찰서를 나올 때, 키론 아빠는 내게 모르는 사 람은 함부로 따라가면 안된다는 초등학생이나 들을만한 설교를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행동한 게 사실이었기 때문에 나는 꿀먹은 벙어리처 럼 가만히 있을 수밖에... 집으로 돌아갈 때는 이미 해가 많이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하지만 도시에는 밤늦게까지 볼 게 많으니까 레이엔한테 연락만 한다면 더 놀고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고 미렌은 충격을 받은 건지 죄책감을 느끼는 건지 도통 말이 없고 내 몸을 어떻게 움직이려들지 도 않은 채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내가 자꾸 말을 걸어도 전혀 대답을 하지 않았으니까. 무한의 팔찌 덕택에 살짝 다친 곳들은 대부분 멀쩡하게 돌아왔지만 찢어진 옷을 입고 그냥 집으로 갈 수는 없어서 옷가게에 들려서 팔자에 없는 새 옷을 맞췄다. 점원이 예쁜 새 원피스가 있다고 옷을 추천했지만 더 이상 치마를 입고 싶은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아 그런 걸 입으면 내 매력이 죽는다는 점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머슴 스타일로 옷을 골랐다. 가족들은 내가 풀이 죽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놀라 무슨 일인지 물었지만 나는 미렌때문에 조금 피곤하다는 말로 때워 넘기고는 저녁식사도 거 부한 채 내 방으로 돌아왔다. 우울했다. 뭔가 충격을 크게 받았기보다는 그냥 기분이 푹 가라앉았다. 오늘은 이렇게 본의아니게 여자 몸으로 변해 있지만 난 원래 남자고, 이 세계에 와서도 여전히 남자다. 그래서 그런 상황을 당했을 때, 또는 당할 뻔 했을 때 여자가 어떤 충격을 받을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런 상황을 가정하고 팬픽을 여러 번 써 본적은 있었지만, 원래 그런 종류의 글이 그렇듯이 거기서는 겉으로는 거부하면서도 속으로는 아잉∼ ♡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이런 강제적이고 일방적인 폭력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18금성을 띤 내용의 팬픽에 여자 캐릭터를 등장시켜 본 적이 없기도 하지만서도... 쩝. 그래도 나도 남자라고, 그렇게까지 하면서 성적 만족을 하고 싶은 남성의 욕망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새로운 세상에 갑자기 떨어져 어리둥절한 데다가 아직 내가 이성적으로 사회의 도덕을 지키려고 그래서 지금까지 이렇게 지내고 있는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겉잡을 수 없이 일이 커 졌을지도 모른다. 어쨌건 내 가족들부터 시작해서 날 유혹하는 여자들은 많았으니까. 나쁜 짓. 못된 짓. 있어서는 안될 짓. 그리고 용서할 수 없는, 한 사람의 일생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행위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욕 구 자체를 부인할 수 없는 남자의 본성을 알기에 그렇게 우울해진 것이다. "....." 그렇게 남자들을 홀리게 만드는 여체(女體)란 과연 뭘까? 뭐 여기 와서 이리저리 여자들이 접근해 온 적도 있고 한국에서 차마 말할 수 없는 여 러 인터넷 사이트에서 사진이나 동영상 같은 걸 본 적은 있지만 내 눈으로 가까이서 직접 그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은 한번도 없다. 물론 오늘 여 러 번 옷을 갈아입을 때 전혀 안 본 건 아니지만 의도적으로 내가 나 자신의 몸을 보는 걸 피했었다. ...한번쯤은 봐 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오늘만이지만 어차피 내 자신의 몸이니까 크게 사고날 일도 없고 하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스스로 하나둘씩 블라우스의 단추를 끌러나갔다. 뽀얀 살결 위로 부드럽게 아래로 이어나가는 곡선. 그리고 그 끝에 건포도처럼 튀어나온 꼭..... 으아아아아악!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내가 내 몸을 음흉한 눈으로 훑어가면서 발그레 얼굴을 붉히고 있는 짓이라니! 이건 전부 문길이 녀석한테 전염된거야. 분명! 하지만 내 본성은 역시 용서할 수 없는 극악변태인가... 슬프다. 흑흑흑. "뭘 그렇게 혼자서 궁상 떨고 있는 거야, 카이 오빠?" "미이?" 갑자기 죽은 듯이 있던 미렌이 이야길 걸어왔다. 윽! 그렇다면 아까 내가 하던 짓도 다 알고 있을 거잖아! 왜 그걸 잊어먹고 있었지!? "난 오늘 얼마나 놀랬는데 오빠는 잘도 이상한 짓 하면서 베헤헤거리고 있네." "얼씨구... 원인 제공한게 누군데 그래! 내가 따라가지 말자고 했잖아!" "내가 그럴 줄 알았나 뭐. 그리고 잘못한 건 그 나쁜 놈이지 왜 나한테 잘못을 돌려?" "잘못을 돌리다니! 애초에 모르는 남자가 접근하면 경계해야하는 게 당연하잖아!" "치이. 오빠도 안 말렸으면서!" "그건 니가 하도... 관두자, 쳇." 이런 식으로 싸우다가는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관뒀다. 어디 담배 하나 없을까. 담배라고는 고1때 그냥 호기심에서 몇 번 피워본 게 다지 만 이렇게 울적할 때면 담배라도 한 대 피면서 별을 바라봤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곧 잘 시간이다. 몇 시간만 지나면 나는 다시 원래의 남자 모습으로 돌아오고 미렌은 1년동안 다시 잠들겠지. 나는 말없 이 창문사이로 보이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결코 탁하기만 한 서울 하늘에서는 볼 수 없는 수많은 별들이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저마다 앞다투어 빛나는 별들을 보고 있으니 울적했던 마음도 가라앉는 것 같았다. 마음이 안정되자마자 나는 망설임이 깃들기 전에 사과하기로 마음먹 고 먼저 말을 꺼냈다. "미안... 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그때 난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 네가 아니었으면 난 바보같이 그대로 당해버렸을 거야." "으응.... 괜찮아. 내가 잘못한 일인걸. 난 세상물정을 모르니까... 그냥 오빠한테 맡겨놨으면 좋았을 걸. 괜히 들떠서..." "내년에는 더 재미있게 보낼 수 있도록 해줄께." "정말?" "응. 오빠로서 약속할께."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래... 내년에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상우 오빠. 그럼 잘 자." "뭐?" 바... 방금 뭐라고 한 거야, 미렌! "미이! 미이!" 하지만 아무리 불러봐도 미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 이제 다시 잠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응답이 없 었다. 미렌은... 내 진짜 정체를 알고 있는 거야? 하지만 어째서 지금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은거지? 아예 눈감아 줄 작정이었다면 왜 이제와서 갑 자기 저렇게 밝힌 거지?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71화 : 욕구불만? 맑고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 산새들이 지저귀고 토끼가 수풀 사이에서 귀를 쫑긋거리는 울창한 숲 사이로 따가운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뚫고 비춰들어오고 있었다. 큰 나무를 베어 만든 나이테가 선명한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조그만 찻잔을 들어 입에 대었다. 그리고 반대편에 여 유롭게 앉아 있는 누군가도 찻잔을 들고는 조용히 차를 마셨다. "마음에 드십니까?" 약간 톤이 높기는 하지만 분명한 남자 목소리. 하지만 억양의 고저가 부드럽고 감미롭게 흐르는 그 말투는 누가 들어도 아름다운 미성(美聲)의 매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그 천사의 노래에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었을까. 내 가녀린 손은 그만 찻잔 손잡이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아앗!" "이런.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하지만 모처럼의 웨딩 드레스가 엉망이..." 에에? 웨딩 드레스? 나는 나 자신인 것 같으면서도 또 다른 나인것 같은 내가 한 말에 놀라 밑을 쳐다보았다. 살짝 불그스름한 기운이 도는 홍 차액이 적시고 있는 물건은 분명히 순백의 웨딩 드레스였고 나는 그것을 입고 있었다. 뭐, 뭐야? 왜 내가 이걸 입고 있어? 시르젤에게 받은 웨딩 드레스는 분명 입지 않고 치워두도록 했는데? 그렇다면... 맞은편에서 나와 같이 티 타 임을 가지던 사람은... "일단 이 손수건으로 닦으십시오. 곧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게 다가와 체크무늬로 수놓아진 손수건을 건네는 사람은 시르... 젤. 으악! 당신이 왜 여기 있어? 그러고보니 여긴 어디야? 난 왜 여기 있지? 난 뭘 하고 있었던거야? "여긴... 어디죠?" "크크크. 알았다고 해도 이미 늦었어. 단순히 외모만 보고 정신을 놓다니, 멍청하군." 시르젤의 말과 함께 갑자기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맑고 청명한 숲 속의 아담한 공간은 어느샌가 폭풍우가 쏟아지는 밤의 구석진 헛간으로 변 했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도 방금 전까지 맑은 미소로 예의를 깍듯이 차리던 시르젤이 아니었다. 그 남자는 눈에 붉은 빛을 띠고 힘을 질질 흘 리는 늑대같은 남자로 변해 있었다. "이리 왓!" "꺄악!" 그놈은 내 한쪽 손을 붙잡고 날 끌어당기더니 다른 손으로 옷을 찢어발겼다. 억센 손에 힘없이 찢겨진 옷 사이로 한쪽 가슴이 드러났고, 나는 재 빨리 다른 쪽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소용없이 그 놈의 몸 전체가 내 가냘픈 몸을 포개듯 덮쳤고 나는 헛간에 가득찬 짚더 미에 깔리듯 쓰러졌다. "끼아아아아악!" "하아... 하아..."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악몽(惡夢)인가... 몸도 옷도 내내 흘린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돌아왔네..." 내 몸은 어제 여자 몸으로 하루를 보냈다는 것이 꿈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완벽한 남자 몸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이제 미렌이 다시 나오기까지는 또 일년을 기다려야겠지. 왜 그런 꿈을 꾼 걸까? 아무래도 어제 일이 너무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비록 미수에 그치기는 했지만 완전히 나쁜 짓을 당하기 일보직전에 있 었으니까. 하지만 시르젤은 왜? 웨딩드레스라는 이상한 선물이 신경쓰여서? 그렇다면 왜 하필 시르젤이 그런 야수로 돌변한 거지? 한번 나중에 레이엔에게 해몽이라도 부탁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일단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는데 아랫도리에 느껴지는 말할 수 없이 찝찝하고 끈적거리고 축축한 기 분.... 젠장! 왜 하필 이런 꿈을 꾸고 이런 일이... 하지만 남자라면 누구든지간에 서서 오줌누는 일 만큼 익숙한 일 중 하나.(그래서 어제 여자 몸으로 소변을 볼 때 영 느낌이 묘했다.) 나는 아무 일 없이 옷을 빨래통에 집어넣고 땀을 씻기 위해 샤워를 한 후 전부 새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잘 먹었습니다." 어제 깜짝출연했던 미렌은 이미 떠나고 없지만 생일축하하러 집에 돌아온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이 아직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레을 포 함한 3인방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나는 그 소란을 피해 일찍 밥을 먹고 복도로 나섰다. 그런데 복도를 한참 걷고 있을 때 뒤에서 아이렌이 부 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카이 오빠아∼" "응? 무슨 일이니, 아이렌?" 내가 아이렌의 모습을 보려 몸을 돌리는 순간, 아이렌이 달려와 내 가슴에 안겼다. 내 키가 그다지 크지 않은 데다 아이렌은 그보다 더 작았기 때문에 영화에서 나오는 것 같은 멋있는 그림은 되지 않았지만 아이렌은 남에게 보이는 모습같은 건 그리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왜... 왜 이래, 갑자기." 그러자 아이렌이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오빠, 요새 욕구불만이지?" "무슨 말이야?" "숨겨도 소용없어, 이 팬티가 증거야!" 아이렌이 손으로 가리키는 것을 보니 아이렌의 정령이 내 팬티를 하나 들고 있었다. 헉! 저건 분명 내가 어젯밤중에 갈아입은 그.... 그.... 분명 지 금쯤 하녀들이 빨래하고 있어야 할 저게 왜 저기 있는 거야? "왜 니가 그걸 갖고 있는 거얏!" "카이 오빠 옷에서 느껴지는 오빠의 체취를 맡으려고 아침에 빨래 치우는 하녀한테 갔었어. 그런데 이걸 발견했지 뭐야?" 허걱!!! 이제는 페티시즘까지?(내가 이런 용어까지 아는 건 모두 문길이 녀석 탓이다... 으득.) 아이렌은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의 변태스런 중년 아저씨로 태어나는 게 좋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열 살짜리 꼬맹이가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너무 무섭고 소름끼친다고! 암만 그래도 내 가 로리콘도 아닌데 어떻게 저런 꼬마애한테 성적 욕구를 가질 수 있겠냐? 딱! 그때 사이엔 형이 아이렌 뒤에서 나타나 꿀밤을 한 대 먹였다. "아얏! 왜 때려, 사이엔 오빠!" "숙녀가 그런 물건 함부로 갖고 다니는 게 아냐. 그나저나 내 사랑스런 동생 카이엔아. 네가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구나. 이 형이 너 를 위해 특별히 자주 다니던 물 좋은 단란주점을 하나 소개해 주..." 퍼억! 사이엔 형은 순간 옆에서 날아온 세이렌 누나의 마법에 맞아 복도를 떼굴떼굴 굴렀다. "새파랗게 젊은 게 단란주점에 다녀!? 그러면서도 카이한테 접근하다니... 저질!" "맞아요. 세이 언니. 사이엔 오빤 완전 짐승에다 변태라니깐요!" 아이렌에게 저런 대사는 조금 안 어울린다고 느껴진다만... "오... 오햅니다 누님! 그건 오로지 부하장교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갔던 것으로..." "문답무용! 이유는 필요없어! 어쨌거나 결과는 단란주점에서 할거 다 했단 얘기 아냣!" 세이렌 누나는 사이엔 형을 열라게 마법으로 두들겨 팼고 아이렌도 정령을 불러서 세이렌 누나를 거들었다. 내가 보기에 사이엔 형도 꽤 잘생겼 고 실력도 있어 어디가서 꿀릴 사람은 아닌데 세이렌 누나라는 강력한 존재가 위에 있다는 게 불행이랄까 말야. 쿡쿡. 그리고 내가 그 틈을 뚫고 살짝 빠져나가려고 할 때 세이렌 누나가 날 붙잡았다. "어딜 가려고, 카이?" "네에? 볼일 끝났으니까 전..."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께, 카이. 여자, 안고 싶어?" "그... 그런 질문은 좀..." 으윽. 이런 걸 가지고 도대체 무슨 대답을 듣고 싶다는 거야? "왜 이렇게 잔말이 많아? 너도 남자니까 당연히 그런 욕망이 있을 거 아냐? 불구도 아니니까 말이지." "세이 언니 말이 맞아 카이 오빠. 그런 욕구는 숨기지 말고 자연스럽게 분출해도 돼. 언제든지 내가 상대... 읍읍."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한 말을 늘어놓으려는 아이렌의 방정맞고 무책임한 입을 세이렌 누나가 막았다. "아이야. 네 나이로는 그건 의제강간의 영역에 해당될 뿐만 아니라 몸에도 아주아주 나쁘단다. 그러니까 조용히 가서 레이엔이랑 소꿉놀이나 하 렴." "사랑한다면 나이따윈 관계없이..... 언닛!" 하지만 세이렌 누나는 더 이상 아이렌의 말을 듣지 않고 강제로 순간이동 시켜버렸다. 아마도 금방 다시 여기를 찾아오지는 못하게 만들었을 거 다. "잠깐 진지하게 이야길 해 보는게 어떨까, 카이?" 나는 어떻게든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세이렌 누나는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리고 의외로 이야기를 제안하는 누나의 표정이 생 각외로 진지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세이렌 누나의 손에 끌려 누나의 방으로 향했다. 세이렌 누나의 방은 처음 들어와 봤다. 우리 집은 넓은데다 개인적인 프라이버시의 영역은 절대 존중해주기 때문에 가족 각자의 방은 담당하는 하인하녀들 외에는 허가없이 절대 들어갈 수 없다. 만약에 사생활 존중이라는 대원칙이 없었다면 나는 항상 세이렌 누나의 마법과, 아이렌의 정 령에 감시당하며 살아야 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의외로 세이렌 누나의 방은 입구부터 책들로 빼곡했다. 집에 따로 서재가 있는데도 방에 왜 이렇게 많은 책을 쌓아두는 지 모를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역시 아무 노력도 없이 그냥 공짜로 최연소 대륙 7대 마법사의 반열에 오른 게 아니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방 안 정리는 깨끗하게 잘 되어 있었다. 세이렌 누나는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방을 잘 어지르기 때문에 누나가 집에서 체류할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이 들어가 정리를 한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마법으로 금방 찾아낼 수 있다니까 아무렇게나 정리해 놓아도 상관이 없다고 한다. 넓은 방 한가운데 위치한 내 방 침대만큼 커다란 침대. 각종 화장도구가 가득찬 화장대. 옷걸이에 걸린 수십 벌이 넘는 옷들과 패물이나 보석류 를 넣어 두는 것 같아 보이는 고급스런 서랍장이 수많은 책더미들 가운데서 여기가 여자 방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듯했다. "여기 앉아. 카이." "에에... 왜?" 누나가 침대에 걸터앉으면서 내게 옆에 앉으라고 이야기했다. 책을 읽거나 연구를 하는 책상에 의자가 하나 있었는데도 그렇게 말하다니... 혹시 내가 옆에 앉으면 바로 옆에서 덮쳐버리는 게 아닐까. "그냥 단순히 이야기하고 싶은 것 뿐이야. 그렇게 겁내지 말아도 돼." 내가 우물쭈물거리자 세이렌 누나가 조금 기분이 상한 듯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거... 믿어도 될까나? "이전에 카이하고 약속했잖아, 지나친 애정표현은 하지 않겠다고." "으...응. 그랬지." 내가 여기에서 생활을 시작했던 초기에, 세이렌 누나가 거의 애인에 가까운 자세로 내게 애정표현을 해 왔고 세이렌 누나한테 질 수 없다는 듯 사이엔 형과 아이렌도 무서울 정도로 내게 접근해온 적이 있었다. 그때 어찌어찌 하다가 세이렌 누나와 지나친 애정표현은 하지 않겠다는 약속 을 받아내었고, 그 이후로는 육체적인 애정 공세는 현격히 줄어 그럭저럭 정상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내가 너무 민감해진 걸까... 난 의심이 지나쳤다고 생각하며 세이렌 누나 옆에 앉았다. 그러나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는 게 사실인 건지, 세이렌 누나는 내가 옆에 앉아마자 바로 날 껴안고 침대에 쓰러졌다. 나는 저항하려 했지만 밑에 완전히 깔린데다 누나 힘이 나보다 강했기 때문에 난 빠져나갈 수 없었다. "누.. 누나! 왜 이래?" "...잠깐 이대로 있어주지 않을래?" 평소의 기운찬 목소리와는 달리 나즈막하면서도 어딘가에는 쓸쓸함이 깃든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고 나는 마음이 흔들려 반항하려던 몸의 힘을 뺐다. "단순히... 이야기만 한다면서?" "이대로... 이야기하고 싶어." "굳이 이런 자세로 이야기해야 해?" "미안해... 하지만 견딜 수 없는 걸." 좀더 침울한 목소리. "난... 카이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사랑하고 있는데. 그런데도 안아주지 못하고, 키스해주지 못하고, 심지어는 손도 자주 잡아볼 수 없어서 그동안 괴로웠어. 이젠... 도저히 약속을 지킬 수 없는걸." "그... 그건, 아이렌도 있고 사이엔 형도 있으니까 좀..." "그럼 그건 아이와 사이엔 녀석만 없으면 괜찮다는 뜻이야?" 나를 침대에 깔아뭉갠 채 얼굴을 침대에 박고 이야기하던 세이렌 누나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또렷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섹시해 보이는 게... 으악!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야? 게다가 방금 그 말은 손 잡는 거에 관한 대답이었을 뿐이라고! "그... 그게 아니라..." "걱정마렴. 사랑하는 내 동생 카이♡ 이미 내 방에는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어 아무도 들어올 수 없고 빛도 소리도 절대 새어나지 않는단다. 그 럼 시작해볼까?" 뜨억! 완전히 속았다아! 그러길래 방으로 데려간다고 했을 때부터 먼저 의심을 했어야 하는데... "세... 세이렌 누나! 백주대낮부터 뭘 시작한다는 거야!?" "어머나, 빛이 신경쓰이니? 알았어. 불 꺼 줄께." 세이렌 누나가 대답하자마자 주변이 갑자기 깜깜해지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시각이 마비되자 귀로 들리는 세이렌 누나의 숨소리 와 피부로 느껴지는 촉감이 더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뭐라고 외치려고 하자 세이렌 누나는 미리 알아챈 듯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호호. 이 누나는 네 모습이 다 보인단다∼" 비겁해앳! 자기만 마법으로 다 보다니! 입이 막힌 나는 더욱더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세이렌 누나는 근력을 강해지게 하는 마법이라도 썼는지 그 손아귀에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었다. 으흑. 내 운명은 왜 이렇게 돌아가는 거냐고! 어제는 여자 몸으로 남자한테 당할 뻔하고! 오늘은 또 남자 몸으로 여자한테 끝장나기 직전의 상황 이잖아! 왜! 어째서! 나는 이렇게 남의 성적 욕구에 휘둘려 당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 거야? 내 눈망울에 찔끔이지만 눈물이 맺혔다. "카이..." 그런 눈물을 세이렌 누난 본 것일까. 누나는 나를 찍어누르던 손을 치웠고 나는 이때다 싶어 재빨리 옆으로 굴렀다. 그러나 온 방 안이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침대 끝에서 허공의 존재를 느끼고는 바닥에 굴러야 했다. "왁!" 데구르르 쿠당탕. "아야야." 기혈환 덕택에 전혀 아플 턱이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본능적으로 타격을 받은 부위를 감싸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세이렌 누나가 전혀 보이지 않 았지만 내가 보이는 세이렌 누나가 다시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도 훼이크인 건 아니겠지? "카이... 정말로 넌 여자를 원하지 않는 거야?" "....."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실 내 육체적 욕구만으로 치자면 세이렌 누나의 어택을 거부할 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나와 살을 맞대고 있었던 누나도 그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거부하게 되는 건 어째서일까. 한 남자는 한 여자만을 신심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도덕률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몇 달밖에 보지 않았으면서도 누나라고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 다. "아니면... 여자보단 남자에게 관심이 있어?" "무슨 소리야!" 나는 갑작스런 세이렌 누나의 질문에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면서 외쳤다. 하지만 통 어두우니까 당최 누나가 내 말에 무슨 반응을 보이고 있는 지 알 수가 있나... "하지만... 나도... 모르겠는걸." 나는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도 왜 그런지 내 자신을 알 수 없는걸. "그럼 아이렌이나 아시에가 너한테 접근해 오면 어떻게 할 거야?" "아이렌은... 너무 어려. 그리고 아시에는... 글쎄... 모르겠어. 아무것도." 갈수록 복잡해져만 가는 마음 속. 젠장! 모르겠다고! 내게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거야?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냥 친구나 가족의 의미가 아닌, 다른 사람보다 훨씬 소중하고 특별한 사람 말이야." 글쎄... 그런 사람이 있을까? 우선 학교를 생각해 보면 시에나와 피요르 공주같이 시끄럽게 날뛰는 애들은 싫고, 치즈는 보통의 친구이고, 남자인 키론과 린넬같은 애는 지긋이 밟아줄 뿐. 가족을 생각해보면... 레이엔을 제외한 형제자매 세 사람이 내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해오지만 정도의 차 이가 있으면 내게는 다 똑같이 보인다. 차라리 그들 중 한 사람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쳤다면 조금 다른 마음을 먹었을지도 모르겠지 만... 아시에는 어떨까? 외모상으로는 나와 나이도 비슷하고. 예쁜 데다 세이렌 누나와 언니 다음으로 나를 잘 따르기는 하지만... 아직 정신적 충격이 가시지 않아 자폐적 경향이 남아 있고 말이 드문 그녀에게 남을 리드하기보다는 남에게 휘둘리는 편인 내가 신경써주기도 쉽지 않다. 시르젤 씨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 상냥함과 친절에 감동받은 적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남자. 그래도 이성애자를 자처하는 내게 연애의 대 상은 될 수 없어. 물론 시르젤 씨의 열혈엄마는 이번 선물에서 보듯 어떻게든 날 며느리로 맞아들이려고 하겠지만 난 그럴 마음이 없어서 말이 지. "글쎄... 아마 없는 거 같아." "아직 여유가 없는 거구나. 마음에." 세이렌 누나가 그 말을 함과 동시에 다시 방에 원래대로 빛이 돌아왔다. 갑작스런 빛에 놀라 나는 한동안 눈을 깜빡여야 했다. "솔직하게 말할께. 내가 카이의 몸을 가지려 한다면 언제든지 가질 수 있어. 젊은 남자의 육체는 이성과 따로 놀기 때문에 쉽게 반응하니까. 정 안되면 최면이라도 걸거나 최음제라도 먹이면 그만인걸." 세이렌 누나는 잠깐 숨을 들이키더니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난 카이를 원해. 갖고 싶어. 그 부드럽고 남자답지 않게 갸냘프면서도 묘한 색기가 흘러넘치는 그 몸뿐만이 아니라 네 여린 마음과 상처받은 그 영혼까지 전부. 그 중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진다면 내게는 공허할 뿐이야. 카이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내 마음만은 확 실히 알아줬으면 좋겠어." "누나..." 가슴이 아파왔다. 숨이 막힐 듯 마음이 저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날 사랑하고 함께 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내가 그 사람들의 부담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사랑을 어떻게 해야 되돌려 줄 수 있을까. 나는 그 모든 사람들을 동일한 가치로 사랑해 줄 수 없는걸. 수없이 쏟아지는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나는 과연 누군가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될 수 있을까. "오늘은 미안했어. 이만 돌아가도록 해."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학여행 때 시르젤의 뒤를 쫓아갔을 때도 그랬지만 도통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나는 방금전에 당할 뻔 해놓고도 쉽게 세이렌 누나의 방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 누나가 날 사랑해주는만큼 내가 누나를 사랑해주지 못한 데서 오는 죄책감이겠지. 나는 방을 나서기 전에 세이렌 누나에게 다가가서 허리를 살짝 숙이며 다시 한번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방문을 열고 나올 때 누나가 희미하 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절대 응답해 줄 수 없는 공허한 목소리가. "진짜 욕구불만에 시달리는 건... 오히려 나인걸." 제73화 : 중간고사! 카이엔 과외작전 어제의 사건 이후, 나는 도저히 집안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다. 세이렌 누나는 누나답지 않게 우울 모드에 빠져 있었고 아이렌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고 갖가지 억측을 하면서 끈질기게 달라붙는데다 사이엔 형 역시 혼자서 절규와 탄식을 하는 생 쑈를 해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서 나는 다시 학교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카이는... 학교가 질리면 집에서 지내고, 집이 질리면 학교로 가는 것 같아." 아시에의 따끔한 한마디. 하기야 아시에는 내가 학교에 갈 때만 같이 따라 가니까... 아하핫. 머쓱함을 뒤로 하고 나는 예전처럼 마차를 타고 학교에 갔다. 그런데 왠걸? 평소라면 내가 며칠이나 학교를 빠졌냐와 상관없이 배치된 고정 팬 들이 호들갑을 떨며 날 맞이해야 하는데 그 수가 절대 모자랐다. 평소의 반에 반도 안 되는 인원이었다. 그 이유는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린넬이 내게 불쑥 던진 말을 듣고 알 수 있었다. "히야. 카이엔. 드디어 왔네? 그것도 날짜 딱 맞춰서." "날짜 맞춰서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몰랐어? 오늘부터 중간고사 시즌 개막이야." 허걱! 뭐라뭐라뭐라? 시험이라고!? 윽! 하필이면 왜 이런 날을 선택해서 온 거얏! 봄 학기도 한 두어달 지나고 수학여행까지 갔으니 시험 한번쯤 은 있을 거라는 것은 상식이었지만 평소에 나라는 인간은 한국에서 학교 다닐 때도 그런 거 도통 신경을 안 쓴 터라. 그래도 벼락치기나마 공부는 했었다. 내가 무관심한 듯한 부모님이었지만 그래도 시험 시즌이 끝난 후 성적표를 내놓지 않으면 용돈을 주지 않 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용돈 액수는 학교 등수에 따라 오르락내리락거렸다. 나는 알 수 없는 무슨 공식까지 써서 계산해 주던데, 대충 등수가 5등 오를 때마다 한달 용돈이 만원 단위로 변한다는 것까지는 체험해 봤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내가 시험을 칠 의무따위는 없어. 꼭 시험을 치게 만들겠다면 우리 집까지 찾아오라지 뭐. 나는 린넬의 말을 듣자마자 별로 든 게 없는 책가방을 다시 메고 교실 문을 다시 나가려 했다. 그런데.... "어딜 가는가, 카이엔 브리타뉴 군!" 나를 가로막고 있는 선생님... 에... 누구더라? 기억이 가물가물... 맞아! 담탱이였지! 음... 신경을 안쓰는 사람은 자꾸 잊어먹는단 말이야 이거. 하지만 여기 와서 등 뒤에서 칼까지 맞아본 나다. 나름대로의 배짱은 있었다. "집에 가죠. 뭐 잘못된 거 있나요?" 아아... 선생들한테 개기는 거. 정말 꿈같은 일이었는데... 중학교때 그랬다가 가히 빅장이라고 부를 만한 뺨싸대기 갈기기와 주먹질에 당한 이후 처음으로 하는 노골적인 반항이었다. 여기서는 체벌도! 학생에 대한 욕설도 절대 허용되지 않으니까. 예나 지금이나 교육계를 장악하는 것은 학 생도, 교사도 아니다. 단지 학부모의 입김일 뿐... "물론 잘못되었네. 오늘은 중간고사 기간 첫날이므로 당연히 시험을 쳐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그런 건방진 학생들을 워낙 많이 상대하는 교사들의 자질도 역시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생각하지 않았던 반격이 들어와 나는 잠깐 당황 했지만 곧 침착을 회복하고는 다시 공격에 나섰다. "며칠 학교를 쉬었더니 공부한 게 하나도 없어요. 추가시험으로 대신하죠." "올해도 변함없이 말이냐?" ...진짜 카이엔 녀석. 제때 시험을 친 적이 한번도 없었나? 이러고도 교사들 간의 알력 때문에 유급도 안하고 재깍재깍 진급을 하다니 말이야. "그리고 올해도 변함없이 진급하겠지요." 나는 이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며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교실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담탱이는 날 절대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 인지 문을 막고 서며 말했다. "...하지만 올해는 틀려. 처음으로 넌 시험날 학교에 왔어." "실수에요. 실! 수! 시험날인걸 알았다면 애초부터 학교에 안 왔다고요!" "비단 0점을 맞더라도 시험만은 치는 게 학생의 도리! 절대 못 가!" 이렇게 바락바락 담탱이와 싸우고 있을 때 아시에가 내 옷깃을 잡으며 말했다. "카이... 그냥 시험 치고 가자. 대충 찍으면 맞는 것도 반드시 나올 거야. 아마도..." 아시에는 오래간만에 온 학교에서 금방 집에 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시에는 여전히 낮을 가리지만, 그래도 내가 근처에 있으면 학교 애들 하고 가끔씩 이야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는 아시에도 나름대로 극복하려고 노력하고는 있는 것 같다. 아직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돼지만... "...내일은 안올거야." 이건 담탱이의 설득이 아냐. 아시에에 대한 동정심일 뿐이지. 라고 생각하며 나는 꼬리를 내리고 내 자리에 앉았다. "근데, 카이엔. 며칠 전에 너랑 꼭 닮은 여자애를 봤다? 꽃이 달린 머리띠를 한 여자애였는데... 정말 예뻤어." 자리에 앉자마자 키론이 내게 다가와서 얘기를 했다. 윽! 키론이 봤다는 여자애라면... 내 생일날 미렌 모드로 있었을 때의 나잖아? 다행히 들키 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지금 그때의 집중력의 머리띠는 남자 모습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쪽팔리니까 쓰고 다니지는 않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 해서 가지고 다니기는 한다. "우우. 부러워 키론. 카이엔을 쏙 빼닯은 여자애가 있으면 바로 사귀자고 할 텐데!" 의외로 위험할 지 모르는 녀석이 저 린넬이다. 내가 남자가 아니었으면... 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나. 문길이 같은 변태 녀석이라면 오히 려 환영하고 나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난 정상인이라고! ...라고 외치고 싶지만 그동안 쓴 팬픽들을 생각해보면 정상이라 자신할 수 없다. "그런데 키론, 너희 아버지 여전히 시르팡 담당이야?" "아니... 실적이 나빠서 전출됐어..." 키론은 조금 좋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나... 괜한 질문을 했나보다. "근데 아빠가 그럴수록 반드시 시르팡을 잡아 족쳐 명예회복을 해야겠다고 방방 뛰어서 오히려 걱정이야." 쯔으... 내가 얼마 전에 본 바로는 중년 아저씨 치고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시르젤 같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건 좀 무리라고. 이렇게 남자애들이랑 이야기하고 있을 때 역사를 담당하는 몽마르뜨 선생이 들어와서 가지고 온 시험지를 돌렸다. "모두들 잘 알고 있겠지만, 컨닝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 걱정마시라! 애초에 할 생각이 없다고! 그냥 대충 찍어버리고 자야지 하고 생각하며 시험지 뭉치를 받았는데... 이게 뭐다냐! 말도 안돼애! 이리 넘겨봐도, 저리 넘겨봐도 그동안 대한민국의 제도권 교육을 겪어오면서 눈에 잔뜩 익다시피한 사지선다 또는 오 지선다 유형의 객관식 문제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시험지를 살펴보았다. 문제는 많지 않았지만, 문제와 문제 사이에 상당한 공간 이 비어 있었다. 이번 과목은 국어. 문제는 10문제. 2개가 단답형 주관식 문제고 8개가 10개에서 50개 가량의 단어 사용을 요구하는 서.술.형 문 제였다. 우욱! 그래도 백지를 내는 건 내 자존심이... 자존심이... 그러나 우리나라 문학작품도 모르는데 이 유클리네 왕국의 소설작가와 작품을 어떻게 알 것이며, 게다가 아무리 무의식적으로 써지는 이 나라 말과 글이라고 해도 각종 방언과 고어(古語)까지 뜻을 완벽히 해석해주지는 않았다. 그나마 조금 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문제도 몇 단어 생각하다보면 더 이상 진진이 없었다. 10분이 지나도, 나는 이름말고는 시험지에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무려 10분씩이나 그래도 풀어보겠다고 삽질을 했다. 아무리 봐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아채기까지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컨닝을 시도한다 해도 이런 서술형 문제에 똑같은 답이 나온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당연히 의심할 거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풀고 있을까? 나는 몽마르뜨 선생의 눈을 피해 주변을 살짝 돌아다보았다. 너무 간단하게 슥삭 써내려가는 키론. 뭘 그렇 게 장황하게 쓰는지 오히려 분량제한을 지키라고 몽마르뜨 선생의 경고를 받는 린넬... 우우... 부럽다. 하지만 내게 다행스러운 것은 그렇지 않은 부류가 더 많았다는 사실이었다. 조금 난감해하다가 아예 시험지를 뒤집고 자버리는 루카라. 눈을 여기저기 번뜩이며 어떻게든 남의 답안을 볼려 고 노력하는 시에나. 쿠쿠... 동지들이 있으니 어쩐지 안심된다. 설마 꼴등은 안하겠지? (나는 동지의식에 취한 나머지 내 시험지가 지금 백지라는 사실을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아시에는 이전에 수학 문제를 풀었을 때부터 느꼈지만 의외로 공부를 잘한다. 지금도 차분히 문제를 보면서 잘 풀어나가고 있다. 나처럼 평소에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나 때문에 출결도 들쑥날쑥한데 어떻게 저렇게 잘 하지? 어떤 조화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녀가 존재 했었을런지도 모른다고 엄마와 세이렌 누나가 이야기하는 걸 들었으니까 기억을 잃었어도 무의식결에 옛날 배웠던 것들이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그냥 책상에 엎드렸다. 아아... 좋구나. "휴우. 시클레인 양. 브리타뉴 군. 자네들은 앞으로 뭘 하고 살려고 벌써부터 이러나?" 몽마르뜨 선생의 질책. 첫날에도 이 선생한테 수업시간에 잔다고 루카라와 같이 질책받은 것 같은데... 루카라가 질책을 듣고 자신만만하게 대답 했다. "좋은 데 시집가서 안주인 해야죠." "안주인도 충분한 교양과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안 드나?" "물론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 교양있다는 안주인들이 여자의 기본인 요리, 바느질, 청소, 빨래, 돈관리 이런 기본적인 걸 다 제대로 하는지 묻고 싶네요. 요즘 귀부인들은 귀찮다고 전부 하인하녀들에게 맡긴다죠? 그런 한심하고 겉멋만 든 아줌마는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러고 보니 루카라는 현모양처가 꿈이랬지. 공부는 안 하는 것 같지만 나름대로의 자신과 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요리도 잘 하고 손재주도 있 는 애니까. "후우... 그렇다면 브리타뉴 군은 어떤가? 신랑수업이라도 할 텐가?" ...그... 글쎄? 그런 건 생각해본 적이 없는걸. 내가 카이엔의 몸에 깃든 지 여러 달. 비록 여러가지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기쁠 때도 있었고 슬플 때도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처음으로 울어 보기도 했고, 연이은 사랑 공세에 행복한 고민을 해 보기도 했다. 이런 생활이 영원히 계속될거 라고 확신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기야 자네 데려갈려고 하는 여자들은 많겠지. 쓸데없는 걱정이었네." 상당히 비꼼이 들어간 말과 함께 그는 다시 다른 학생들을 감독하러 갔다. 몽마르뜨 선생은 내가 학교에 온 첫날에 내 머리에 턱을 얻어맞고 혀를 깨물고 이가 몇 개 깨진 이후 날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다. 사실은 반 애들이 아무도 자기 걱정 안하고 내 걱정만 해서 삐진 것 같지만서도... 쳇. 나는 시험지를 구겨쥐면서 다시 책상에 머리를 파묻었다. 지가 무슨 상관이야! 1교시 국어 : 백지답안 제출 2교시 신학 : ...그나마 신들의 이름 몇개는 적을 수 있었음. 3교시 예절과 윤리 : ...궁중예절 같기는 한데 궁중에 안가봤으니 알 턱이 있나. 대충 맞다싶은 걸로 휘갈겨 씀. 4교시 수학 : 이건 그나마 우리나라 수학과 공통점이 좀 있었음. 삼분의 일은 답을 썼음. 당연히 답이 맞다고 보장못함. 수학도 역시 전부 주관식 이었음. 그리하여 첫날 시험이 암울하게 끝났다. 내일은 절대 학교에 안 와야지 하면서 주먹을 꽉 쥐고 굳은 결심을 하고 집에 돌아가려 하는데 반 애들 이 내게 몰려왔다. "카이엔! 시험 잘 쳤냐?" ...보면 모르냐? 나는 인상을 최대한 찡그린 채 녀석들을 노려보았지만... 내 외모로는 찡그린 표정 지어봤자 뾰로통하고 귀엽게 보일 뿐. 으으윽! 짜증나! "이 상태로 가다가는 올해도 반 꼴지는 틀림없겠군." "뭐어?" "아. 참. 기억을 잃었으니 모르겠지. 카이엔 너, 입학하고나서 지금까지 쭈욱 학교 시험에서 꼴등을 차지해왔어. 시험거부에다가 추가시험도 치나 마나했으니 당연하지만." 꼴등이라니! 최하위라니! 내가 아무리 공부를 안 했어도(절대 못 한거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아직까지 뒤에서 1등 해본적은 없다고! 뒤에서 4등 해본 게 내 인생사상 최악의 기록이고 좀 컨디션 좋았을 때는 반에서 중간정도까지 올라간 적도 있어! "오오. 카이엔 불 붙었다." "과연 이번에는 공부를 할 것인가?" 내 반응을 보고 놀려먹는 키론과 린넬. 나는 홧김에 일어서서 당장에 10등을 올려주지! 라고 외치려고 하다가 그건 제 무덤을 파는 짓이라는 짓 을 깨닫고 다시 앉았다. 한 반에 수십 명에서 많으면 오십 명까지 한반에 우글대는 한국과 달리 많아봤자 20명 정도가 한 반이기 때문에 당장 10등을 올린다는 건 내 능력으로 절대불가능!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쫀심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나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최소한 꼴등은 안해!" "진짜?" "그 말 믿어도 될까?" "암만 그래도 반 꼴등은 안 한다고!" "만약에 그래도 꼴등하면?" "너희들 마음대로 해." "음... 우리반 전원에게 키스해주기로 하면 어때요, 카이엔 님?" 시에나가 이야기에 갑자기 끼어들더니 말했다. "그거 좋은데!" "꺄아! 너무 멋져!" "그... 그건 좀..." "좋아! 결정이다!" ...내 말은 아무도 듣지 않고 있다. 이렇게 해서 내가 꼴등하면 반 전원에게 키스를 해줘야 하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크윽! 내가 조금만 더 강 단이 있다면 따지고 나설텐데... 남들과 많이 어울려보지 못해 소심한 나는 분위기에 그대로 휩쓸려 가는 경향이 강했다. 나는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면서 결심했다! 그래, 조금만 공부하면 설마 꼴등이야 면할 수 있지 않겠어?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아시에에게 특별과외를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아시에는 자기 공부도 있을텐데 내 말을 선뜻 들어주었다. "시에... 너 시험공부는 괜찮아?" "...나 시험공부 안 하고 친 거야." 허억! 그럼 기본 실력이 어느정도나 된다는 거야? 공부를 전혀 안하고도 문제를 저렇게까지 잘 풀 수 있다니!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풀어?" "문제가... 아는 것들만 나왔을 뿐인걸." 흐으... 난 저런 애들한테 부러움과 시기, 질투를 항상 느꼈지. 하지만 상대가 아시에다 보니까 그런 티를 낼수도 없고... 기분이 착잡하다. "하여간 그럼 내 공부를 가르쳐 줘." "...하지만 내일 무슨 과목 치는지, 시험범위는 어디까지인 줄 모르는걸?" 윽! 아시에는 중간에 전학 온데다가 내가 학교에 안 가는 날은 아시에도 무조건 안 갔으니까 그걸 알 턱이 없잖아! 으아아악! 그럼 난 어떻게 해 야 좋은 거냐구우! 그때 집사가 밖에서 나를 불렀다. "카이엔 도련님. 손님이 왔습니다." "누군데?" "키론 모아라드 씨입니다. 도련님의 친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들여보내." 키론이 웬일이지? 날 보러 온 걸텐데... 내게 무슨 일로 오는 걸까? 지금은 걔도 내일 공부 할 시간 아닌가? "여. 카렌 안녕. 아시에도 잘 있었어? 하여간 브리타뉴 집안은 대단하군. 집 정문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린 건지 원." 한참 뒤에 들어온 키론이 땀을 닦으면서 말을 내뱉었다. 하기야 우리 집이 좀 크긴 크지. 요즘은 익숙해져서 나도 깜빡 잊고 살지만 말이야. "카렌이 언젯적 이야긴데 아직도 써먹냐?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야?" "너 공부 가르쳐 주려고." "왜?" "...아무리 이뻐도 난 남자한테 키스 받기는 싫거든. 린넬같은 사이코 녀석하고는 달라서." "...." 뭔가 상당히 어이없는 이유 같았지만 일단 키론이 정상적인 이성애자라는 사실에 나는 상당히 고무되었다. 사실 지금까지 만난 남자의 상당수가 내가 남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게 대해 이상야릇한 호감을 보내는 통에 자꾸 내 정체성에 혼란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공부를 가르쳐 준다니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상황에 하늘에서 천군만마가 내려온 것 같았다. "공부 열심히 해야 할 거야. 널 어떻게든 반 꼴등으로 만들겠다고 시에나와 루카라 같은 애들도 안하던 공부를 시작했어." "뭐?" 헉! 집요한 녀석들. 그렇게도 내 키스를 받으려고 악을 쓰는 거야? 남의 중요한 키스를 뭘로 생각하는 거야? 키스가 무슨 길가에서 전단지 나눠 주는 것처럼 함부로 줄 수 있는 건 줄 알아? 게다가 어찌어찌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난 입을 맞춰봤자 이마나 뺨에 해 보았을 뿐 입술과 입 술(口口)이 마주치는 키스는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어! "자, 당장 공부를 시작하자. 내일 과목은 정치경제와 천문점성학, 역사, 예술, 생물학이야." "아... 알았어! 공부할께!" "남아 일언 중천금이다, 카이엔! 어기면 난 널 영원히 카렌이라고 부를거야!" "응! 좋아!"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키론이 나를 위해 베푸는 친절한 과외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아시에도 보조 자격으로 여기에 끼어들었다. 내 형제자매들 은 난 공부 안해도 된다고 내가 공부하는 걸 신통찮게 여기는 듯 했지만 내 결심은 확고했다. 비단 키스 문제가 아니라고 해도 꼴.등.이라는 건 내 자존심 문제다. 나는 그 정도로 꼴통이 아니라고! 그러나 그놈의 공부라는 것은 아무리 해도 왜 그렇게 집중하기 힘든 걸까? 정신은 멍하니 딴생각을 하고 있고, 손은 이미 다른 장난을 치는가 하면 어느샌가 그 낮고 일정한 알아들을 수 없는 강의의 멜로디에 어느샌가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환상의 꿈나라로 여행을 가기 시작하는 건 지... 날 깨워야 할 아시에는 쭈빗쭈빗거리면서 망설이다가 날 깨우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키론의 지휘봉(언제 이런 걸 준비해 온 건지)에 몇 번 씩이고 머리를 얻어맞아야만 했다. "아야얏!" "잘 들어! 이건 진짜 중요하고 시험에 꼭 나오는 분야라고! 20년 전 마왕 디크로드와의 격돌은 너네 아빠 엄마도 같이 싸웠던 일이잖아!" 물론 잘 안다. 그래서 나도 흥미를 갖고 제대로 들었다구! 한 10분 동안은 말야... "그냥 싸워 이겼으면 되는 거지, 왜 그렇게 질질 끌어?" "어휴. 아직 이해 못하는 거야? 마왕의 부활과 격퇴는 그 이후 세계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적 흐름을 완전히 바꿔 놓은 분수령이 되는 거야. 그 런 점에서 보다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면에서 거시적인 역사적 물줄기를 읽어..." "나 화장실 갈래." "...시작한 지 두시간만에 화장실에 간다는 말, 벌써 네 번째다." "....." 괜히 공부한다고 꺼냈나 보다. 차라리 그냥 내일 출석 안 하면 되는 것을. 이제와서 물리려고 해도 그 남아 일언 어쩌고라는 말에 동의해버렸기 때문에 이제와서 물릴 수는 없었다. 만약에 그랬다가는 키론은 정말로 날 계집애 취급하려 들지도 모른다. "쳇. 공부하면 될 거 아냐. 공부하면." "그럼 계속한다. 일단 12용사 이름은 당연히 다 외워야 하는거니까 다시 불러봐." ...아아 공부하기 싫다아... 내가 왜 공부를 하자고 했을꼬... 그때 나는 깜빡 잊고 있었던 중요 아이템이 하나 생각났다. 그건 바로 집중력의 머리 띠! 평소에는 남자로서 쪽팔린다는 이유로 처박아 두고 다니지만 이럴 때는 엄청 유용하게 쓸 수 있잖아?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면서 머리띠를 찾아 꺼냈다. "그거 뭐야? 카이엔?" "응. 집중력의 머리띠라고 집중력을 높여 주는 기능이 있는 거야. 키론." "호오. 지금 너에게 딱 필요한 거군. 이런 게 있으면 진작 꺼냈어야지!" "깜빡 했단 말이야. 이런 머리띨 평소에 쓰고 다닐 수는 없잖아!" "딴 애들은 좋아하지 않나? 니가 그런 거 쓰고 다니면..." "키론... 너마저." "그건 그렇고, 그 머리띠 어딘지 낯이 익은걸? 요즘 유행하는 건가?" 윽... 미렌의 모습으로 이 머리띠를 쓰고 나갔을때 키론과 한번 마주친 적이 있었지. 나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자, 머리띠도 썼겠다, 공부 다시 시작하자!" 쓰기 전에는 그 효능을 심히 의심했지만 집중력의 머리띠는 정말로 날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태어난 이래 딴 데 정신을 전혀 팔지 않고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키론의 설명도, 아시에의 보충설명도 이상할만큼 머리에 잘 들어왔다. 한국에서 몇몇 애들이 사 용하는 XX 스퀘어 같은 것들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효능이다. 듣도보도 못한 성계(星界)의 이름과 내력을 단번에 외우고, 평소에 신경도 안 쓰던 정치와 경제의 기본적인 생리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유클리네와 자하기니아 간의 평화와 대립의 긴 역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고, 여러 가지 식물과 동물의 생활에 대해서 도 흥미깊게 들을 수 있었다. 오오오! 내가 이 머리띨 한국에서 쓸 수 있었다면(물론 많이 쪽팔렸겠지만) 시험 1등에다 전교 짱, 용돈의 파격적 상승은 따놓은 당상이었을텐 데... 너무너무 아쉽다. "자! 이대로 밤을 새는 거다, 카이엔!" "좋아!" "그... 그건... 카이." 아시에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나는 마치 신이 내린 것처럼 뜨인 맑은 정신에 취해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다. 득도, 득햏했다는 말이 과연 이런 것일까. 나는 내가 세계 최고의 천재가 된 듯한 기분에 취해 있었다.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더니 어느샌가 새벽이 되어 있었다. 아... 피곤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엄청나게 피로가 몰려왔다. 이제 공부 할만 큼 충분히 했으니 자도 되겠지. 가르치는 키론도 녹초가 되어 있었다. 어찌나 피곤한지 씻고 옷 갈아입기도 귀찮을 정도였다. 나는 하루빨리 휴 식을 취하고 싶은 욕구에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했다. "카이엔! 일어나, 카이엔!" "어떡하지... 벌써 1교시가 지났는데..." "미안... 내 잘못이야. 진작 그 머리띠의 문제점을 알았어야 했는데..." "넌 잘못없어. 아시에. 카이엔은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는걸. 정작 시험은 이렇게 못 치게 되었지만..." "그리고 카이엔 님은 우리 모두에게 키스해주고 말이죠. 이것이야말로 일석 이조!" 음... 이것들이 뭐라고 떠드는거야? 남 잘 자고 있는데... 그런데 어째 지금 여기서 들릴 리 없는 루카라나 시에나 같은 애들 말도 들린다? 뭐, 상 관없겠지. 지금은 도저히 일어날 수도 없을만큼 피곤하다고... "결국 ...아무도 카이엔 깨울 생각이 없는 거군." 그래. 깨우지 마. 시험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어. 시험 안치면 꼴등이 될 테지만 그것도 상관없... 그런데 꼴등이 되면 뭔가 안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뭐더라? 에이 몰라. 그런거 신경쓰기도 싫어. 일단 자고 보는 거야. 키스를 해주건 말건 그건 지금 나와 관계... ...뭐? ...키스!? 나는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났다. 맞아! 이번 시험에서 꼴등을 탈피하지 못하면 반 전원에게 키스해주는 걸로 지들이 멋대로 결정을 내 렸었지! 그런데 이상하다? 난 분명 공부하다가 집에서 잔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여기는 학교? 우리 반 교실? 내가 왜 여기 와 있는 거지? 내가 일어나 어리벙벙해하고 있자 아시에가 말했다. "다행이야... 일어났구나, 카이?" "내가 왜... 여기 있지?" "어제 밤새 공부하다 쓰러진 다음에 못 일어났어. 너희 누나 힘을 빌려 어떻게든 학교에는 데려다 놓았는데, 시험 1교시가 끝나도록 일어날 생각 을 안 해서..."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키론. 나는 정색하며 외쳤다. "왜 안 깨웠어?" "미안해... 카이... 사이엔 씨... 아니 사이엔 오빠에게 오늘 아침 뒤늦게 들은 이야긴데, 그 머리띠는 순간 집중력을 엄청나게 높여 주는 대신 피로 도 그만큼 훨씬 빨리 쌓여." "...그 말이 진짜라면 지금 일어날 수 있었던 게 기적이다. 카이엔." "우읍...! 안돼! 안돼!" 절대 꼴지는 할 수 없고 키스는 더더욱 할 수 없어! 3일간에 걸쳐 펼쳐지는 중간고사 시험. 어제와 오늘 1교시를 거의 망쳤으니 지금부터 상당한 성적을 내지 않으면 꼴지를 면할 수 없다. 나는 굳은 결심을 하고 다시금 집중력의 머리띠를 썼다. "그거 쓰고 시험 치면 규칙위반인거 아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태클을 거는 키론. 어이. 넌 날 도와주려는 게 아니었냐? "아무러면 어때. 잘 어울리잖아. 너무 예뻐." ...하기야 저러는 린넬보다는 낫군. 나는 절대 이번 시험은(그래봤자 이 세계에 와서 최초로 치는 시험이지만) 꼴등을 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를 하고 시험지를 받았다. 뭐, 아무리 집중력의 머리띠라고 해도 공부를 보조하는 것뿐이고 직접 지식을 집어넣어 주지는 않기 때문에 시험지의 모든 문제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 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훨씬 문제가 머리에 잘 들어왔고 답을 쓸 수 있는 것도 많아졌다. 오오오오! 나의 손이... 나의 손이 쉴새없이 답을 써 넣 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샤이니∼잉 해앤∼드! 아아... 감격스러워 눈물이 흐를 지경이다. 내가 평생에 걸쳐 이렇게 자신있게 시험 답안지에 답을 써내려간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감동에 취해 있을 때가 아냐. 정신차리고 끝까지 문제를 풀고 답안지도 재검토해야지. 자, 바쁘다 바뻐! 그러다보니 어느샌가 4교시가 끝나고 마칠 시간이 되어 있었다. 정말 기분이 째진다. 시험이라는 것을 이렇게 즐겁게 칠 수 있다니... 다른 사람 들은 즐겁게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경악하고 있었다. 하긴 시험치고나서 즐겁게 웃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니까. "카... 카이엔, 그렇게 잘 썼어?" "답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하여간 답은 거의 다 채워넣었어." "오오... 추가시험조차도 백지 러시로 악명높던 그 카이엔이!" "이건 기적이야, 기적임에 틀림없어!" "잠깐, 그럼 카이엔 님과의 키스는 어떻게 되는 거에욧!" 반 하위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루카라나 시에나 같은 애들도 이번에는 완벽하게 날 꼴지로 몰아넣기 위해서 꽤 공부를 했다지만 내가 이렇게 웃 고 있자 불안초조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시에나. 그리 걱정하지 마. 카이엔은 어제 시험을 거의 망쳤고 오늘 1교시도 못 쳤잖아?" "하지만 루카라... 카이엔 님이 내일도 오늘처럼 저렇게 문제를 풀어나간다면..." "그래도 아직 카이엔은 우릴 따라잡지는 못했을 거야. 우리도 오늘 같이 모여서 공부하자. 질순 없잖아?" "응!" 다른 아이들도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왜... 왜들 이래? 다들 평소에 별로 공부하지도 않으면서 왜 내 문제만 걸리면 이렇게 악을 쓰는 거야? 휴우... 하여간 오늘도 열심히 공부해야겠군. 내가 한숨을 내뱉고 있을 때 키론이 옆에 와서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오늘도 도와주러 갈께. 하지만 어제처럼 오버하지는 마." 그렇지. 어제 갑자기 공부가 너무 잘 되는 데 감동해서 오버하다가 너무 늦게 잤고, 집중력의 머리띠를 과다사용하는 바람에 피로가 배로 쌓여서 자칫 오늘 시험 전체를 망칠 뻔했으니까. 한번 했던 과오를 다시 되풀이할 수는 없어. "키... 키론. 언제 그렇게 카이엔과 다정한 둘만의 대화를 나누게 된 거야? 부러워! 응?" 린넬이 당황스러워하면서 놀란 눈으로 키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쓸데없는 걸 부러워하지 마. 린넬 넌 괜히 이상한 생각을 가지니까 진도가 잘 안 나가는 거지." "뭐... 뭐가 이상한 생각이라는 거야? 게다가 진도라니!" "카이엔은 우리 친구야. 그렇게 생각하지?" "그... 그야 물론이지!" "그럼 친구면 친구답게 행동하면 되지 왜 그렇게 외계인 보듯이, 건드리면 안 될 신비스런 사람을 보듯이 대할 필요가 있어? 린넬뿐만이 아냐. 시에나도 그렇고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특별취급 한다고 카이엔이 기뻐할 것 같아?" 오오... 키론의 청산유수같은 그 말이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내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주목받는 데 익숙하지 않은 터라 모든 사람들이 내게 대해주는 특별대우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냥 단지 친구로 사이좋게 지내면 좋을텐데 많은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면서 베푸 는 호의를 받고, 때론 음흉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정말 부담스러웠다. 정작 나는 기대해주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럼 집에 가자. 너희들도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카이엔한테 키스 못 받을껄?" 키론은 그렇게 말하면서 책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섰다. "좋아! 내일도 간다아!" 나도 활기차게 외치면서 그 뒤를 따라 교실을 나갔다. 좋아! 이 집중력의 머리띠가 있는 한 난 더이상 두려울 게 없어! 당장에 등수를 몇 등이고 올려주지. 우핫핫핫! 어쩐지 자신감 과잉이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기분 째지는데! 제76화 : 유리상자 속의 행복 3일째로 시험이 끝났다. 어제 키론과 한 공부 때는 집중력의 머리띠 사용법을 어느 정도 마스터해서 적당한 정도로 공부할 수 있었고, 다음날에 는 맑은 정신으로 시험을 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잘 쳤어도, 집중력의 머리띠가 있어도 하루아침에 키론이나 린넬처럼 상위권으로 도약할 수는 없는 일. 게다가 첫날 시험과 둘째날 1교시까지는 거의 답을 제대로 쓴 게 하나도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꼴등을 완전히 자신할 수 없었다. 그렇게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던 루카라나 시에나 같은 애들도 이번엔 공부를 열심히 했다지 않은가. 시험 결과는 이틀 후에 나온다. 음... 학교에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꼴등이 아니라면 자신만만하게 등교해서 나를 무시했던 녀석들을 비웃어 줄 수 있지만 만약 꼴등이라면... 당장에 다들 키스해달라고 덤벼들거고. 나는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겠지... 음... 어떻게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까? 그래! 그 방법이 있었지! 내 생일날 레이엔에게 받은 개량형 예지의 귀걸이! 저번처럼 지 마음대로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할 때 그 미래를 보여준다. 레이 엔의 말로는 어떤 미래가 나올지 알 수 없고 상황에 따라 안 나올수도 있다고 했지만 그래도 내가 강하게 바란다면 그 의지가 반영된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집중력의 머리띠까지 머리에 씌우고는 시험 결과를 보여주기를 강렬히 염원했다. 나와라 나와라. 과연 이틀후에 내 성적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 무언가가 보인다. 우리 학교. 학교 운동장을 따라가서... 교실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 게시판이 달려 있다. 그 게시판에 학생들이 몰려 있다. 서로 그 게시판을 보려고 아웅다웅 다투는 모습... 그래! 저 게시판에 분명 성적이 있겠군. 하지만 좀 악취미인걸. 성적표 나눠주는 방식이 아니라 저렇 게 전체 성적을 공개해버리다니. 게시판의 성적은 당연히 성적순대로 달려 있다. 한 면에는 전교 전체 성적. 또 다른 한 면에는 반별 성적이 나와 있었다. 일단 제일 위에 내가 위치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일단 제일 끝부터 뒤져야겠지. 전교 성적을 보니 다행스럽게도 전교 꼴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우리 반 성적표가 어디 있는지 찾았다. 으으... 이거 집중하기 힘드네. 레이엔은 예지의 귀걸이는 단편적이고 짧은 시간의 예지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오래 보기는 힘들거라고 했다. 나도 그나마 집중력의 머리띠의 힘을 빌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거고. 으윽!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줘! 저기 우리 반 성적이... 제일 밑에 내 이름이 있나없나... 잘 안보여... 너무 흐릿해... "푸핫!" 으으... 머리가 엄청 어지럽고 띵하다. 결국 못 봤잖아. 젠장. 괜히 정신력만 낭비해서 피곤하기만 하다. 나는 바람이라도 쐬면서 정신 차려야지 싶어서 집 정원으로 어슬렁어슬렁 기어나왔다. 그때 정원 어딘가에서 두런두런 이야기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 게다가 레이엔도 있었다. 왜 그랬는지 몰라도 나는 재빨리 모퉁이 벽에 붙어서 세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기 시작했다. "요즘 카이가 공부를 열심히 하던데? 이유 알아? 학교에서 무슨 일 있는 걸까?" "스스로 공부 한다는데 누가 말리겠습니까 누님. 우리가 특별히 만들어준 집중력의 머리띠가 도움이 되서 다행이죠." "맞아요. 세이렌 누나. 솔직히 카이엔 형은 그동안 너무 공불 안 했다고요." "그건 그렇지. 그보다는... 자하기니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알아봤어?" "시드의 검 도난 사건 말이군요." "그래. 아무래도 카이도 거기에 어느 정도는 말려들었지 싶은데... 아무 이야기도 안 하니 따져볼 수가 있어야지." "무사히 돌아왔으니 상관없잖습니까." "...시에가 흑마법을 두어번 가량 썼었어. 내가 그렇게 쓰지 말라고 말했는데도. 쓰지 않을 만큼 급박한 상황이 있었던 게 분명해!" "흑마법을... 말입니까." "그거... 위험할텐데요." 어... 어? 잠깐! 세이렌 누나! 사이엔 형! 그리고 레이엔! 어떻게 그런 것들을 전부 다 알고 있는 거야? 그리고 아시에가 흑마법을 썼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고 있고?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사설 정보망이 있는 모양이다. 누나랑 형 모두 일단은 국가 고위직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레이 엔은... 예언가였지 맞아. "카이 녀석... 그렇게 위험한 꼴을 당할 뻔했으면서도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거야..." "기억을 잃었으니까 할 수 없죠." "카이엔 형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도 잊었을 걸요." "그렇다고 카이를 감시했다가는 또 미움받을 테고..." 자신의 역할? 감시? 무슨 소리지? 하지만 세 사람은 더이상 그 화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검에 대해서는 알아봤어?" "네. 실수로 봉마석(封魔石) 일부가 검에 들어갔다고 하는군요. 시드 가에서도 뒤늦게 알아챘다고 합니다." "실수가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그렇게 한 거겠죠. 시드 가 내부에서." 코웃음을 치는 레이엔. 으윽... 궁금해서 듣고 있기는 한데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이왕 엿듣기 시작한 거 중간에 모 습을 드러내기도 뭣하고... "누님도 조사해봤을 텐데요? 검을 훔쳐간 시르팡. 그리고 난동을 부린 파인과 래더라는 자에 대해서 말입니다." "아마도 시르젤이라는 녀석이겠지. 저번에 우리 귀여운 카이를 데리고 간!" 세이렌 누나는 시르젤에 대해서 감정이 별로 안 좋은 것 같다. 자기가 옆에 있었는데도 날 뺏긴 것이 엄청 억울한 모양이었다. 누나는 아이렌과 함께 내가 여자가 되는 건 반대하는 파니까.(반면에 사이엔 형은 내가 그때 셰더한테 성전환 수술을 받은 후에 구출했으면 더 좋았을거라고 중얼 대다 세이렌 누나한테 엄청 두들겨맞은 적이 있었다.) "래더라는 자는 정체불명의 흑마법사와 함께 도망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파인에 대한 정보는 자하기니아의 극심한 통제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 았어. 하지만 그 검을 최소 3개 세력이 노렸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어." "시르팡. 래더와 흑마법사, 파인. 그리고 또 알 수 없는 다른 자들인가요... 하지만 조각난 봉마석으로 뭘 할 수 있다는 걸까요?" 사이엔 형이 질문한 후에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혹시 내가 숨어 있는 게 들켰나 싶어서 손으로 입을 막고 숨소리마저 죽였다. 부스럭거 리는 소리마져 들리지 않게 하려고 나는 벽에 붙은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 잠시 후에 세이렌 누나가 사이엔 형의 말에 대답했다. "시에..." "네?" "아시에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네. 어머님께서 말씀해주셔서... 단순한 마도의 노예 그 이상의 존재라는 점은 알았습니다만..." "만약에 그런 존재가 또 있다면... 그걸 상상해봤어?" "네에!?" "마파왕 디크로드 소환의 제물이 되고도, 몇 번이고 강력한 흑마법의 저주를 받고도 시에는 살아 있었어. 만약에 마도의 노예 중 그런 자가 시에 말고 더 있다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에요 누나!" "...분명 시에만이 특별케이스라고는 생각하지만...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어. 시에같은 애가 더 있다면 봉마석이 불완전한 것 쯤은 아무 문제가 안 돼." 아시에에 대한 이야기가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 레이엔의 입에서 다시 한번 나왔다. 아시에. 너는 대체 어떤 운명을 가진 아이지? 셰더에게 이리저리 이용당하고, 고통을 겪은 걸로는 괴로움이 끝나지 않는 걸까? 누나의 말대로라면... 아시에와 같은 운명을 지닌 아이들이 여러 명 더 있 는 거야? 잠깐 동안 생각한다고 세 사람의 대화 중 몇 마디를 놓쳤다.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이야기만은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내 이름이 나 왔으니까. 하지만 그 내용이야말로 내가 엿들은 대화 중 하일라이트에 해당하는 대목으로 그 이야기가 나온 후 그 세 사람이 헤어져 각자의 일 을 하러 갈 때까지도 나는 멍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마지막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카이도 이제 16세 생일이 지났어. 때가 멀지 않았지..." "그걸 아시면서... 왜 카이엔을 덮치지 않으신 겁니까? 누님." "웬일이야, 사이엔? 너한테는 다행인 거 아냐?" "분하지만... 저는 남자니까요. 덮쳐버린다고 해도 의미가 없으니... 그래서 내심 카이엔이 여자가 되었음 하고 바랬던 건데..." "푸훗. 레이도 남자고, 아이는 밝히긴 하지만 고작 열살짜리 꼬맹이. 카이에게 총각 딱지를 확실히 떼줄 수 있는 사람은 확실히 나밖에 없겠지... 알아... 카이를 이대로 동정으로 놔두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하지만 난... 할수 없었어... 카이의 마음을 잃는것이... 너무... 두려워서..." "누나... 하지만 이대로라면... 카이엔 형은..."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걸까? 그리고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는거지? 머리가 어질어질해왔다. 아까 집 중력의 머리띠를 과용한 데 대한 부작용 때문일까? 나는 비틀거리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카이엔 형." 레이엔의 차분한 목소리가 눈앞에서 들려왔다. 헉! 내가 엿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야? 레이엔은 평소와는 달리 쓸쓸한 얼굴로 날 바 라보고 있었다. 어린애답지 않게 우수에 젖은 그 눈빛이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레... 레이엔." "들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세이렌 누나나 사이엔 형한테는 말하지 않을테니까 오늘 들은 것은 잊어. 카이엔 형." 내게 망각을 요구하는 레이엔. 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지 못해도 그렇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잊으라는 거야? 날 동정으로 놔두면 위 험하다니!? "무슨 일이... 무슨 일이 벌어지는거야? 왜 내게만 숨기고 있어? 지금..." "카이엔 형. 지금 행복해?" 엥? 뜬금없이 왠 이상한 질문? 하지만 언령과도 같은 레이엔의 질문은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마력이라도 지닌 듯 했다. 나는 자신없는 목소리 로 말을 흘리면서 대답했다. "아마도... 그럴거야." "궁금한 게 많겠지만... 모르는 편이 행복해. 지금의 행복을 깨면서까지 진실에 접근하고 싶지는 않겠지?" "....." 내 가족들이 내게 감추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정말로 미치도록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레이엔은 진실을 알게 된다면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지금까지 누리고 있는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카이엔 형은 기억을 잃은 게 다행이야. 이전의 형은 그 모든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불행했으니..."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알고는 싶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내가 불행해진다는 것은 훨씬 두려운 일이었다. 지금 나는 만족하고 있다. 정말로 만족하고 있어서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게 없을 정도로. 그런데 그런 삶이 파괴된다면 난 견딜 수 있을까? 견뎌낼 수 있 을까?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두고 레이엔은 집안으로 걸어가면서 짧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마. 카이엔 형." 제77화 : 요동치는 마음 뒤에서 3등. 썩 만족할만한 성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3일 시험 중 첫날 친 과목들의 점수가 대부분 한 자리수였던 것을 생각하면 기적적이라고 봐도 무 방한 성적이었다. 게다가 어찌되었건 그놈의 키스 문제도 합법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점수가 아닌가. 사브르 리쥐앵 선생. 즉 담탱이는 우리 반 성적이 같은 학년 중에서 최고를 기록하자 상당히 고무된 모습이었다. 그 원인은 나를 꼴등으로 만들 기 위해 다들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지만 선생들이 그런 깊은 속사정까지는 알 리 없다. 하지만 학교에 등교한 나는 키스작전이 불발로 그친 데 대한 급우들의 푸념과 꼴지 탈출에 대한 축하 어느 것도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만큼 그제께 엿들은 세이렌 누나, 사이엔 형. 레이엔의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다. 동정으로 놔두면 위험하다니, 죽지 말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내가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온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그들은 분명 내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고 내가 모르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고 있었다. 또한 내가 그런 것들을 알기를 바라지 않는 듯 했다. 무언가를 계속 숨기면 자꾸 궁금증이 생기는 게 사람의 심리다. 당장이라도 가족들을 닦달해서 내가 모르는 많은 일들을 전부 알고 싶었 다. 하지만 알게 되면 불행해진다는 레이엔의 말은 무시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레이엔이 굳이 내게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으니 까... 에휴. 어렇게 저렇게 고민하고 생각해봐야 뭐 하겠냐. 지금까지 생활해 온 대로, 생각없이 즐겁게 살면 그만인 것을. 무슨 일이 있으면 내 가족들 이... 지금처럼 알아서 해 주리라고 믿을 수밖에. 하지만 마음 속 깊숙한 곳 어딘가에 담긴 의구심을 완전히 지울 순 없었다. "들었어? 저번에 자하기니아 수도 핀치에 나타나 시드의 검을 훔쳐갔던 시르팡이 이번에는 왕궁에 보관된 국가중요문화재 [머신검]을 훔치겠다는 예고장을 보낸 거 말야! 그것도 오늘 밤에!" 점심시간때 도시락을 까먹고 있을 때 치즈가 호들갑을 떨며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최근 자주 나타나네. 그 녀석." "일전에 카이엔을 납치했다가 실패한 데 대한 분풀이일까?" 당장 내 일만을 추스리는 데도 벅차긴 하지만 시르젤이나 셰더의 움직임 역시 신경쓰인다. 어제 엿들은 바에 의하면 시드의 검을 훔쳐간 이유가 아마도 거기에 들어간 불완전한 봉마석 때문이라던데... 그게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이전에 12용사에 의해 퇴치당한 마왕을 부활시키겠다는 가 하는 황당한 계획은 아니겠지? 시험기간에 공부를 조금 하긴 해서 이제는 거기에 대해 약간은 안다. "어때, 카이엔. 오늘 밤에 나타난다니까 한번 구경이라도 가 볼래?" 치즈가 은근슬쩍 내게 다가와 제안했다. 나는 별로 시르젤과 마주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퉁명스레 거절했다. 의미불명의 웨딩드레스까 지 받은 상황에서 먼발치라도 어떻게 얼굴을 마주본단 말이야? "내가 왜 가야 해?" "그러고보니... 카이엔은 시르팡의 진짜 모습을 본 적이 있지? 어떻게 생겼어? 소문대로 훤칠하고 예의바른 미청년이야? 응? 알고 싶단 말이야!" 시르젤에 한해서라면 그 소문은 확실히 맞군. 하지만 내 대답은 이전에 납치당한 후에 돌아왔을 때랑 마찬가지로 노 코멘트. 키론과 힘을 합쳐서 물어보는 질문 공세에도 꿋꿋히 나는 침묵을 지켰다. 이런저런 소란 속에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를 마치고 집에 오자, 아이렌 혼자서 나와 아시에를 맞이했다. "카이 오빠. 오빠 오길 기다렸어. 오늘 왕궁에 괴도 시르팡이 나타난다는데 구경 가자, 응? 세이 언니랑 사이엔 오빠랑 레이엔도 벌써 가 있는 걸." "누나가? 형도? 왜?" "왕궁에서 특별경계령이 내려져서 전국의 실력자들이 총동원됐대. 이번에야말로 꼭 시르팡 녀석들을 잡아서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야. 가자 오빠. 응? 우리는 특별대우를 받아서 왕궁 바깥 바리케이트 밖이 아니라 안에서 돌아다닐 수 있어." "글쎄... 별로 가고 싶지는..." 뺨을 긁적거리며 내가 시큰둥한 태도를 부리자 아이렌은 내 팔을 잡고 착 달라붙으면서 응석을 부렸다. "가자, 으응? 아빠 엄마도 곧 갈건데 카이 오빠랑 시에 언니 둘만 남아서 어쩌려고? 설마... 설마 집안 식구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단둘이 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 뜨거운 밤을 불태울..." "무슨 소리얏!" 흐윽. 열살짜리가 왜 저런 어휘를 스스럼없이 쓰는 거냐구! 무모한 오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말을 들을 수밖에 없잖아 이거? "피이. 찔리는 구석이 있나 보네. 오버하는 걸 보니." "...말을 말자." "하여튼 갈꺼지?" 어쩔 수 없지. 자꾸 이렇게 가자고 끈덕지게 달라붙으면 갈 수밖에 없잖아. "가면 될 거 아냐. 시에도 같이 갈 거지?" "응. 세이 언니가 거기 있으니까..." "그럼 시에 언니는 엄마한테 가 봐. 가기 전에 준비할 게 있대." "응." 아시에는 아이렌의 말을 듣고 밖으로 나갔다. 아시에가 우리 집에서 잘 따르는 사람은 첫째가 세이렌 누나. 둘째가 엄마. 셋째가 나니까 이런 경 우에는 내가 옆에 없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아시에가 나가자 아이렌이 말을 계속 이어갔다. "하여간 간다니까 다행이야. 세이 언니가 '카이 오빠의 의지에 상관없이' 끌고 오라고 말했거든?" "에? 세이 누나가 왜 그런 말을..." "시르팡. 그중에서도 시르젤이라는 사람을 잡아서 오빠 앞에서 심한 굴욕을 줘서 완전히 오빨 포기하게 만들 셈인가봐. 그렇잖아도 세이 누난 저 번 납치 사건 때 감정이 상했는데 얼마 전 웨딩드레스 선물 때문에 더 열받았거든." "좀 이상한 선물이긴 했지만 열받을 것 까지야..." "오빤 몰라서 그래. 이전에 납치당했을 때 우리가 오빨 구해서 집에 돌아온 다음에 오빨 납치해간 시르팡 일당에 대해 시시콜콜히 물어봤었잖 아?" "그랬지." "그때 오빤 이상한 아줌마와 시르쥬, 시르젤이라는 사람. 그리고 셰더와 시에 언니에 대해 말했고." "그런데?" "모르겠어? 카이 오빠가 말해준 그 시르젤이라는 사람이 오빨 대하는 태도가 어떤 건지?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 예의바른 말투와 절도있는 행동. 세련된 에티켓. 오빠는 그런 그 사람을 단순히 훌륭한 신사쯤으로 봤을지도 모르겠지만 세이 언니랑 나는 그게 작업 들어가는 걸로 보인다 고!"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그 사람의 행동에는 전혀 사랑이 담긴 표현 같은 건..." "카이 오빤 남자니까, 남자에게 애정을 받게 되면 오히려 거부하게 되지. 사이엔 오빠처럼 말이야. 그래서 먼저 친절하게 대하면서, 그런 마음은 전혀 없는 것처럼 호감을 먼저 심어 주는 거야!" "말도 안돼...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카이 오빠. 웨딩드레스까지 선물로 받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어?" "그건 그 시르젤의 엄마라는 사람이 억지로..." "정신 차려! 오빠! 그 시르젤이라는 사람은 분명 오빠에게 마음이 있는 거라고!" "듣기 싫어!" 뭐야! 왜 자꾸 그런 식으로 나와 시르젤을 연결하려고 드는 거야? 난 남자야! 같은 남자에게 연인으로서의 매력 같은 거, 느낄 리가 없잖아? 아 무리 여자들끼리 괜한 호기심에 이래저래 짝짓는 거야 이해할 수 있지만(왜냐하면 내가 많이 해본 짓이니까) 그걸 실제 생활에까지 연결시키는 건 용서할 수 없어! 내가 성질을 내자 아이렌은 잠깐 말을 멈추더니 잠시 간격을 두면서 이야기했다. "시르젤의 편지 내용... 기억해?" "...그런 거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아." "그 사람. 카이 오빠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고 싶다고 편지에 썼었어." 아이렌이 말하자 나는 그제야 생일선물과 함께 보내온 편지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마음에 들지 않으실거라는 건 잘 압니다만, 그래도 당신이 이 옷을 입은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군요.] "그거... 실질적인 청혼이야." "그... 건... 단순히 내가 예쁘장하니까, 여자옷을 입혀서 어울리는 걸 보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이랑 비슷한 거... 아냐?" "카이 오빠가 생각하기에 시르젤이라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야?" "하지만..." 몰라. 모르겠어. 나 스스로도 갈피를 잡기 어려운걸. 시르젤이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이리저리 가지고 놀며 즐거워할 사람이 아닌 건 알지만... 나 스스로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날 사랑의 대상으로서 좋아할거라는 상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걸. 특별히 눈앞에서 좋 아한다는 표현을 한 것도 아니고... 시르젤보다는 오히려 그 엄마라는 작자가 극성이었으니까. "그럼 다시 물을께. 카이 오빠는 시르젤을 어떻게 생각해?" "난... 그냥 단지... 좋은 사람이라고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으윽. 왜 자꾸 그렇게 끈질기게 캐묻는 거야? 아이렌 이야기를 듣다 보니 완전히 시르젤과 내가 서로 좋아하면서도 쑥쓰러워서 본심을 털어놓지 못하는 한심한 커플들 이야기로 비춰지잖아! "그... 그래! 왜 자꾸 그렇게 끈질기게 캐물어? 너와는 관계없... 는 일은 아니겠지만..."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꼬리를 내렸다. 내 가족들은 나와 밀접한 관계. 관련이 없을 리가 없겠지... 그렇게 아이렌한테 시달리고 있을 때 엄 마 아빠가 아시에와 함께 들어왔다. "준비 다 됐니? 아이렌. 카이엔? 어서 가자꾸나. 이번에야말로 카이엔 네가 납치당했을 때 느꼈을 불안과 공포를 완전히 되갚아 주마!" "아... 아빠. 그럴 것까지야..." "맞아요. 아빠. 완전히 온세상에 창피당하게 해 주라고요!" 아빠의 말에 동조하는 아이렌. 하지만 왜일까. 이 순간 나는 시르젤이 우리 가족들에게 잡히지 말고 무사히 빠져나갔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머 릿속으로 하고 있었다. 하늘에 드문드문 떠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이 서쪽 산 너머로 넘어가는 장파장의 햇빛을 받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몸을 돌려 반대편 하늘을 바 라보면 어둠이 밤의 영역권을 주장하면서 점차 그 세력권을 넓혀 오고 있다. 하루종일 각지에서 온 사람들과 쇼핑을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시내의 가게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고, 반면에 주점과 사창가가 몰려있는 유흥가에서는 홍등을 밝히고 본격적인 장사를 시작할 채비를 갖추었다. 유클리네의 수도, 유레카의 왕궁은 사람을 압도하게 만들 정도로 웅장하고 거대하지는 않았지만 소박함이 지나친 나머지 과연 처음 갔을 때 과 연 여기가 궁궐인지 눈을 의심했을 정도로 초라해 보였던 경복궁보다는 그래도 궁전이라는 건물의 멋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궁궐 이야말로 백성의 피와 땀을 빨아낸 산 증거라고 주장하는 전교조 역사 선생님도 있었지만 그래도 웬만한 나라라면 왕궁 정도는 좀 뽀대나야 하 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었다. 착한 어린이와 성실한 어른들 모두 집으로 돌아가 둘러앉아 화기애애한 저녁 식사를 해야 할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지 않고 왕궁 앞에 모여 있었다. 모두 오늘 나타난다는 시르팡을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시르팡은 나타날 때 주로 하늘에서 날아온다.) 아빠의 말로는 보통 왕 궁 앞에 저렇게 사람이 모이면 불법 집회로 간주하고 해산시킨다지만 오늘은 단순히 병사들을 동원해서 바리케이트를 치는 정도로 그치는 모양 이었다. 아마 저 중에 치즈나 린넬 같은 다른 우리반 애들도 있을까? 나는 아시에, 엄마와 함께 궁전 귀빈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 세계에 와서 특히 많이 먹은 음식이 있다면 그건 차다. 엄마 아빠도 집에 잘 없는 상황에 학교 자판기에서 나오는 싸구려 인스턴트 커피에 의존했던 내가 어디 제대로 된 차를 먹어볼 기회가 있었겠는가. 솔직히 말해 홍차 와 녹차의 차이도 잘 몰랐다. 그냥 이름 듣고 색깔 차이가 아닐까 생각했을 뿐. 어쨌건 차를 하도 마신 덕택에 이제는 차 맛도 구별할 줄 알고 다도(茶道)도 조금은 안다. 그래도 역시 난 싸구려 음식에 길들여진 탓인지 과일 맛에 설탕 많이 뿌린 걸 제일 좋아한다. 우우... 콜라가 그리워어! 사이다도! 레모네이드와 포카리스웨트! 아침햇살과 박카스! 갈아만든 배와 식혜! 이젠 차는 질린단 말야아! 내게 탄산음료를! 이온음료를 줘어! (아마 내가 성년이었다면 여기에 하이트와 참이슬이 추가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_-) "마음에 드시나요?" "아. 네." 그래도 유클리네의 첫째 왕자라는 사람이 정성을 다해 대접하고 있는데 노골적으로 싫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기... 곧 예고시간이 되어가는데... 안 나가보셔도 되나요? 왕자님?" "하핫. 브리타뉴 가의 여러분들이 많은 도움을 주시고 계시니까 별 걱정이 없을 겁니다. 그나저나 그 미모를 초상화나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이렇 게 처음 보게 되니 감개무량하군요." 유클리네 왕국의 첫째 왕자. 다즐링 유클리네는 20대 중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존대말을 쓰는 예우를 하면서 귀빈 대접을 하고 있 었다. 이건 그만큼 우리 집안이 이 나라에 가지는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감개무량할 것 까지는 없는데. 하긴 나는 기억을 잃기 이전이든 이후든 간에 왕궁에 와 본적은 한번도 없다고 한다. 어쩌다가 한번 학교에 다니는 것 이외에는 왕궁 출입을 거부했다고 하는데 엄마 아빠는 이유를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집에 칩거했던 이유가 가족들이 내게 숨 기고 있는 것들과 관련이 있는 걸까? 나는 어렴풋이 그렇게 생각해 볼 뿐이었다. 웨엥∼ 왕궁을 울리는 경보소리. 그리고 시끄러워지는 밖. 아무래도 시르팡이 나타난 것 같다. 이번에 온 사람은 시르젤일까? 아니면 또 다른 시르팡의 일원? "안심하고 여기 계십시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경보 소리에 당황해서 일어나려는 나를 다즐링이 제지했다. "네? 저를요?" 나는 그렇게 말하는 다즐링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그냥 특별한 생각없이 호의로 생각하고 받아들였겠지만 아까 나는 아이 렌에게 시르젤과의 관계에 대한 묘한 소리를 듣고 온 터라 저 왕자의 행동에 무슨 특별한 흑심이 끼인게 아닌가 하는 의심부터 했다. 게다가 지 켜준다니... "아핫. 죄송합니다. 여기 전(前) 대륙 7대 신관장님이 계신데 제가 주제없이 나섰군요." 다즐링은 의심스러워하는 내 눈빛을 받고 황급히 말을 돌렸다. 왕자의 실력이 어느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옆에 있는 우리 엄마와는 확실히 비할 바가 못 되겠지. "마음만으로도 고마워요." 나는 평소처럼 의례적인 답변을 했지만 답변을 하면서도 이리저리 많이 신경쓰였다. 혹시나 이 말이 상대에게 나도 특별한 호의를 가지고 있다 는 착각을 주지는 않을지 말이다. "하필이면 [머신검]을 훔치려 하다니 국왕께서도 꽤 골치아프시겠군요. 왕자님?" "네. 브리타뉴 부인. 시르팡 녀석. 이제는 간이 부을대로 부었다고 해야 할까요. 감히 마파왕 디크로드를 봉인시킨 국가 최우선 보물을 훔쳐가려 하다니 말이죠!" 으윽... 또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 이번엔 좀 설명을 들어야겠다. "저기... 그런데 머신검이 어떤 검이죠? 디크로드를 봉인시킨 검이라니요?" 순간 다즐링 왕자는 짧은 순간이지만 어떻게 그런 것도 모를 수가 있냐는 표정을 내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왕자는 왕자. 금세 표정을 고치고 아 무렇지도 않은 듯 검에 대해 설명해 나갔다. "먼 옛날 옛날. 마신 베링거의 암흑성이 다르군트님의 명을 받은 전설의 용자 로또의 손에 무너진 이후 조각난 마신의 분신들이 전 세계로 흩어 졌고, 이로 인해 각지에 마왕의 씨앗이 뿌려진 대륙의 전설은 아시겠죠?" "네." 설마 이것도 모르지는 않겠지 하고 물어보는 듯했다. 뭐 일단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시험 때 공부한 게 있어서 조금은 기억날똥 말똥했 다. 일단 그건 그렇다치고 그게 무슨 상관인데? "많은 사람들이 마왕은 죽었다고 착각을 합니다만, 영원불멸한 마신의 조각인 마왕들은 잠들지언정 죽지 않는 존재. 그들의 강렬한 육체에서는 끝없이 암흑의 에너지가 용솟음치고 그 에너지는 흑마법의 근원이 되지요. 그 강력한 에너지가 계속해서 쌓이면 마신의 육체조각은 스스로 의지 를 가지고 마왕이 됩니다." 나는 아시에의 표정을 보기 위해 힐끔 옆을 돌아보았다. 아시에는 흑마법 이야기가 나오는데도 별 반응이 없었다. 아시에는 자기가 흑마법을 쓴 다는 걸 안다면 당장 여기서 쫓겨날 거라고 생각하고 초조해했는데, 엄마가 잘 진정시킨 탓인지 괜찮은 모양이었다. 흑마법사들은 대부분 어둠의 기척을 숨기는 데에는 익숙하니까. "마왕을 근본적으로 없애려면 그 육체를 소멸시켜야 합니다만 신들조차 없애지 못하는 강력한 마기덩어리를 인간이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하죠. 그래서 봉마석이라는 게 필요합니다. 전설의 용자 로또를 위해 희생한 성소녀 토토가 죽기 전에 마지막 마력을 방출해 만들어 전 세계로 퍼뜨렸 다는 봉마석은 희귀하지만 엄청난 항마력을 가집니다. 정제되지 않은 봉마석은 고위 신관이 아니면 손도 대지 못할 정도지요." 다즐링은 연이어 말하다 목이 타는 듯 차 옆에 놓인 아이스 티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대륙에 존재하는 상당량의 봉마석이 12용사들이 마왕을 봉인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봉마석들은 대륙 곳곳에 흩어졌죠. 마왕의 부활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마신의 육체를 봉인한 봉마석은 항마력을 잃고 평범한 돌처럼 되었습니다. [머신검]에 그 마왕을 봉인한 봉마석 중 하나가 들어가 있지요. "즉. 봉마석은 봉인된 마왕 그 자체란다. 카이. 봉마석을 모두 모으면 마왕이 부활할 수 있는 조건이 하나 만들어지는거지." 다즐링 왕자한테는 미안하지만 왕자의 장황설보다는 우리 엄마의 설명이 간단하고 알아듣기 쉬웠다. 그런데 봉마석에 마왕이 봉인되어 있으면 그 봉마석을 모으려 드는 자는... 마왕을 부활시키려한다는 거야? 말도 안돼! 셰더는 흑마법사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시르젤 씨가... 그런 짓에 참 가하고 있다는 거야? 그때 방을 밝히고 있던 불이 갑자기 꺼졌다. "앗! 불이 나갔군요. 지금 당장 불을 밝히겠습니다. 어? 왜 안켜지는 거지? 이잇! 마법이 잘못될 리가 없는데..." "시르팡 마나 케이아스 현상이에요. 소용없어요." 나는 마법으로 불을 켜려는 다즐링 왕자를 향해 힘없이 말했다. 불이 꺼져 방안은 어두웠지만 그래도 바깥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별빛 때문에 눈 이 익숙해지자 사물의 윤곽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시르팡 마나 케이아스라면... 신력도 소용없어." 엄마도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시르팡 마나 케이아스. 시험공부하다가 안 용어 중 하난데 내가 납치당할 때도 그랬지만 시르팡이 나타났을 때 자주 마나가 마법사의 컨트롤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소용돌이치는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단다. 세이렌 누나의 말로는 아직까지 원인도 이유도 알아내지 못한 상태라나. 신들과의 교감조차 방해되기 때문에 신력조차 제대로 쓸 수 없다고 한다. 검기도 한번 뿜어내면 제멋대로 폭주하기 때문에 결국 인간 의 순수한 육체로 할 수 있는 일 이외에 모든 것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드 마스터도, 엄청난 대마법사라고 해도 완전히 속수무책 일 뿐. "시르팡은 아까 나타났는데... 그럼 이 근처에 있는 걸까?" 아시에가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시르젤이 근처에 있는 걸까? 물론 시르젤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때 어둠 속에서 아시에가 엄마한테 뭐라고 속삭이는 것을 보았다. 깜짝 놀라는 엄마의 모습. "뭐어? 그게 정말이니 시에? 그렇다면 큰일이..."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밖에서 무언가가 날아서 이곳 왕궁 귀빈실 안으로 들어왔다. 뭐... 뭐야? 누구야!? "쨔쟈잔∼ 안녕하세요? 유클리네의 여러분? 많이 놀라셨죠? 오호호홋.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을 해할 의사는 전혀 없답니다♡" "누... 누구냣!" 갑작스런 사태에 다즐링 왕자가 검을 빼들었고 엄마 역시 신력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스태프를 빼들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런데 저 코맹맹이 소리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하지만 어두워서 잘 안보여. 그리고 그 뒤에 또 누가 있는데... "마나티, 사설이 길다. 빨리 잡아와! 시간이 없어!" 마나티라면 설마... "셰더!" 그 변태 흑마법사놈! 하지만 여길 어떻게...? 시르팡 마나 케이아스 상태에서는 마법을 쓸 수 없다고! 왕자도 엄마도 마력과 신력을 써보려고 하 지만 잘 나오지 않고 있는데... 그때 아시에가 내 팔을 꼭 붙잡으면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카이... 시르팡 마나 케이아스에서도 흑마법만은... 발동해." "뭐... 뭐어?" "넌 뭐하는 녀석이냐!" 검을 빼들고 덤벼드는 다즐링 왕자. 하지만 검기나 마법을 쓸수 없는 상황에서 고위 흑마법사를 당하기는 무리다. "율(律)! 박(縛)!" "우욱! 이건... 설마 넌 흑마법사? 어떻게 마법을 쓸 수 있는거지?" 아무것도 모르고 뒷북을 쳐도 한참 뒷북을 치는 다즐링 왕자. 셰더는 그를 무시하고 마나티에게 명령을 내렸다. "빨리 카이엔을 잡아. 늦으면 그놈을 놓쳐 버린다고." "네에! 그런데 아시에 선배가 절 방해할 분위긴데 어쩌죠?" 당황스러워 하는 내 앞에는 어느새 아시에가 굳은 표정으로 내 앞에 서서 당장이라도 마법을 발동할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직도 셰 더를 두려워하는 듯 몸이 조금은 떨리고 있었지만... 어이 아시에. 정말 셰더와 맞서 싸울 생각인거야? "할수 없지. 그렇다면 내가 직접 나설 수 밖..." "주인님! 조심하세요!" 강력한 빛무리가 셰더를 직격으로 덮쳤다. 하지만 셰더는 암흑배리어를 치고 어떻게든 잘 막아낸 모양이었다. 셰더를 공격한 사람은 바로 엄마였 다. 신력을 쓸 수 없을텐데 어떻게!? 그런 의문을 던지고 있을 때 갑자기 방에 빛이 다시 돌아왔다. 우웁. 눈부셔! "괜찮으세요, 주인님?" "괜찮아. 시르팡 녀석들. 이 근처를 떠난 모양이군. 시르팡 마나 케이아스가 사라졌어. 너는 어서 빨리 카이엔이나 잡아." "하지만 상대는 마파왕을 봉인시킨 12용사... 게다가 흑마법사와는 상극(相剋)인 신관이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버틸 동안에 빨리 잡으란 말얏!" "네!" 그 동안에 나는 아시에의 조언에 따라 물의 하급정령을 불러내 기초적인 방어막을 만들고 방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마법이나 기가 돌아왔어도 이미 셰더의 포박에 당한 다즐링 왕자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엄마 vs 셰더와 아시에 vs 마나티의 대결이 지금 이 방에서 벌어지 려 하고 있었다. 우리가 4차원의 세상에 살고 있는 이상 시간과 공간에 의한 근본적인 한계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인류는 수많은 기술의 발전을 거듭하여 이 시공간의 한계를 넘고자 노력해 왔지만 그래도 결국 넘을 수 없는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한국의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날 철책에서 전방 근무를 서야 하는 상황. 격무 속에 간신히 휴가를 얻어 친구들이랑 해운대에 놀러 가기로 작정 했는데 때마침 아들네미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각자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활용하는 노하우를 가지고 있지만서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긴다면 우선 순위에 따라서 어느 한 가지만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딜레마를 가지게 된다. 그해서 싸움센스나 눈썰미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서 두 싸움을 동시중계 할 수 없는 나는 아시에와 엄마의 전투 중에 어느 것을 지켜볼 것인가 하나를 결정해야 했다. 어차피 나는 싸움에는 방해물일 뿐이니까 구경이라도 잘 해야 하지 않겠어? 그런 고민 끝에 나는 아시에의 경기... 가 아니라 전투를 보기로 결심했다. 중요한 싸움을 스포츠로 생각하다니 이건 모두 WWE의 폐해야! 어쨌 건 셰더보다 월등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는 엄마의 싸움보다는 아시에의 싸움이 더 걱정되고 궁금하니까 그쪽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 다. "설마 너하고 싸우게 되리라고는..." "동감이에요. 선배님. 하지만 배신자를 처벌하는 손에 자비의 손길을 기대하지는 마세용♡" 싸움 직전의 대사. 어이. 지금 상황에서 저렇게 윙크를 하면서 하트를 남발하다니. 아시에를 얕보는 거야? 여유만만인데. "카이를... 포기해. 알잖아? 너로는 날... 이길 수 없어." "무서워라아∼ 아시에 선배님. 하지만 과연 선배님이 절 쓰러뜨릴 수 있을까요?" "어디 한번 보도록 하지. 사. 면. 초. 가. (四面楚歌)!" 전혀 싸움에 임하는 사람답지 않게 날뛰는 마나티의 장난기어린 표정과 행동에 아시에도 질린 듯 먼저 선제공격에 나섰다. 몇 번 사용하기는 했 지만 아시에가 흑마법을 제대로 쓰는 것은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아시에가 모은 양 손에서 검은 오오라가 마나티를 포위하듯이 뻗어나가 그녀 를 덮쳤다. 하지만 그 오오라가 마나티를 완전히 덮치기 전에 마나티도 스펠을 외쳤다. "강. 행. 돌. 파. (强行突破)!" 마나티의 몸은 마기에 포위공격되기 직전에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끄럽게 앞으로 튀어나왔고 곧이어 아시에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아시에 는 마법이 아닌 갑작스런 육체공격에 놀라 마력을 집중시켜 방어막을 쳤으나 마나티는 고속이동 상태에서도 재빨리 스텝을 바꿔 옆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녀가 방향을 돌린 곳은... 우왁! 내 쪽이잖아! 내가 어떻게 대응할 틈도 없이 마나티는 물의 하급정령의 방어막을 깨고 나를 어깨에 들 어메었다. "카... 카이!" "헤헷. 정면대결해서 제가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요? 그럼 갑니다. 담에 뵈요 선배니임! 주인님도 빨리 와요!" "우욱! 왜 이렇게 늦었냐! 젠장! 죽는 줄 알았잖아!" 한쪽 전투에서는 셰더가 우리 엄마한테 거의 일방적으로 신력을 두들겨 맞고 있었다. 평소에 멋을 잔뜩 내고 다니던 검은 옷이 거의 너덜너덜해 지고 곳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으니까. "카이엔 씨!" 이미 강력한 존재들의 싸움 가운데 존재감을 잃어버린 다즐링 왕자가 자신의 존재를 피력하려는 듯 외쳤다. "카이야!" 엄마는 내가 잡힌 것을 알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오히려 엄마가 내게 신경쓰느라 셰더를 공격하지 못할 때 셰더는 재빨리 창가로 몸을 빼냈 다. 마나티도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고, 이미 대기하고 있던 빗자루를 타고 셰더와 함께 복잡한 왕궁을 저속비행해서 엄마 의 사정권을 빠져나갔다. 아시에와 엄마도 창문 밖으로 몸을 빼내서 날 뒤쫓는 것 같았지만 왕궁이 원체 복잡한지라 금세 날 찾을 수 없게 되버 렸다. "야! 이거 놔!" 마나티의 어깨에 매인 나는 발버둥쳤으나... "어머. 카이엔 님. 반항하시면 연약한 마나티는 카이엔님의 바지를 벗겨 XX를 맛있게 XX해드릴꺼에요. 아앙∼" "무... 무슨 짓이야! 하... 하지맛!" "알았죠오∼ 착한 카이엔 님은 얌전히 있는거에요. 착하지... 자." "....." 마나티는 실제로 저 말을 하면서 내 바지에 손을 가져다대고 만지작거렸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길다란 빗자루 뒤에 탄 셰더 녀석이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시르팡 녀석들이나 찾아. 지금쯤이면 벌써 머신검을 훔쳐 나오고 있을거다." "치이.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인질을 잡았는데 재미없어라아∼" 마... 맛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렇다면 날 잡아먹는다는 거야? 나는 저 말이 말 그대로 음식으로 먹는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세이렌 누나나 아이렌이 흔히 그러듯 삐리리한 의미가 섞여 있는 말인지 순간 혼란스러워했다. "우와아악!" 셰더와 마나티는 시르팡의 침입으로 혼란에 빠진 왕궁 병사들에게 흑마법을 한 대씩 쏴 주면서 복잡한 궁궐을 빗자루를 타고 저공비행으로 돌아 다니고 있었다. 워낙 궁궐 구조가 복잡한지라 여기저기에 부딪힐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눈을 감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빗자루를 조종하 는 마나티는 전혀 속도를 줄일 생각 없이 급커브에서 드리프트까지 해 가면서 한 군데도 부딪히지 않고 시르팡을 찾아 궁궐 곳곳을 탐색했다. 하지만 이런 좁은 곳을 이 속도로 돌아다니는데 쉽게 적응이 안 되는 나는 우와악 소리만 지르면서 이성적인 판단을 할 틈도 없이 팽팽 도는 눈 앞의 광경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우우... 여기는 속도 위반 카메라나 경찰도 없냐!? "시르팡 마나 케이아스 지역에 들어왔습니다. 주인님!" "지하다! 녀석은 지하에 있어, 파버려!" "넵! 지. 면. 삽. 질. (地面揷質)!" 쿠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지면이 한 일미터 가까이 가라앉았지만 그 이상 파이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단단한데요?" "더 센걸 쓰란 말야!" "넵! 지. 면. 굴. 착.(地面掘鑿)!" 마나티의 외침과 함께 강렬한 흑마법의 기운이 땅을 짓누르더니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허헉. 엄청나다. 땅이라는 건 엄청 단단해서 파는게 쉬운 일은 아닌데 이렇게 금방 파 버리다니. 어디 터널 공사 같은 데 엄청나게 환영받을 거 같은 마법이다. "가자!" "가요∼앗싸아☆ 지하탐험이다!" 마나티와 셰더의 외침과 함께 빗자루는 순식간에 어둠으로 가득찬 지하로 가라앉았다. 히이이이익! 엄마야! 이거 자이로드롭 타는 거 같애애애 애! 살려줘어! 나는 창피하게도.... 기절해 버렸다. 하지만 롯데월드에서 처음 자이로드롭 탈때도 기절했었다고... 놀이기구 같은 건 나한테 안 맞아!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주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처럼 느껴졌다. 왜 나는 여기에 있지? 어째서 다들 나한테 모든 것을 숨기려고만 하는 거야? 무엇 때문에 나를 노리고 이렇게 싸우는 거야? 내가 무엇이길래? 난 누구길래!? [크크크크. 내가 떠난 내 몸을 잘난 듯이 차지하더니 너도 여기로 오고 싶은 거냐?] 뭐지...? 이 목소리는? 이건 내 목소리인데... 하지만 내 목소리면서도 마치 다른 사람같은 분위기가 풍겨나온다.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그 옆에 서 들렸다. 이건... 미렌의 목소리?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도망친 주제에 남에게 뭐가 잘난 듯 큰소리야, 카이'엔' 오빠. 카이 오빠는 신경쓰지 말고 빨리 가. 어서.] [칫. 상우인지 뭐하는 놈인지는 몰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놈은 태평해서 좋겠군. 됐어. 내가 먼저 간다.] [그... 그럼 또 봐. '상우'오빠.] 자... 잠깐! 이왕 나타났으면 좀 제대로 가르쳐주고 가라고! 얼렁뚱땅 사라지지 말란 말이야! 그렇게 외치려 할 때 나는 갑자기 눈을 떴다. 그리고 암만 들어도 여전히 적응 안되는 코맹맹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카이엔 님이 깨어나셨습니다앙∼ 역시 제 말이 맞죠!? 잠든 왕자님을 깨우는 데는 아리따운 소녀의 사랑이 담긴 찌인한 키스가 최고라 니깐요!" 마... 마나티? 뭐야? 내가 잠든 틈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누워 있던 곳은... 동굴 바 닥? 그것도 어디서 났는지 짚으로 만든 깔개까지 있었다. "주인니임!" "조용히 하고 카이엔이나 잘 감시해!" "그럼 마나티. 마음대로 카이엔 님 갖고 놀아도 되요? 카이엔 님 너무 예뻐어∼ 멋져어∼ 마나티, 카이엔 님 보고 있으면 더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애애∼" "안돼!" "히잉∼" 쌀쌀맞은 셰더의 소리. 셰더 녀석은 무슨 취향인건지 왜 이런 이상한 애를 노예로 둔다냐? 말을 듣고 있는 것만 해도 아이렌을 대하는 것처럼 식은땀이 뻘뻘 나려고 한다. "카이엔 브리타뉴 씨를...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이 약간 높은 톤의 차분하고 정제된 목소리는... 시르젤. 어둠 가운데 공중에 떠 있는 마법의 빛 한줄기만이 동굴을 비춰 주고 있는 상황에서 셰 더와 시르젤이 서로 대치하고 서 있었다. 시르젤의 옆에는 시르쥬도 서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왕궁 침입은 둘이서 같이 한 모양이었다. "간단해. 머신검을 이미 훔쳤겠지? 그걸 내게 넘겨라. 그러면 카이엔을 네게 넘겨주겠다." "넘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글쎄. 내가 인질을 어떻게 할 것으로 보이나?" "....." "네가 보는 앞에서 철저하게 능.욕.해 주지." "그런 짓을 하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쩔 거냐? 너희 시르팡이 자랑하는 마나 혼란... 시르팡 마나 케이아스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었다지? 그것도 공간 중의 마나를 이용하 는 것이 아니고 직접 마왕의 힘을 빌리는 흑마법만은 통하지 않는데." 헉... 능욕이라니! 저 변태 자식, 무슨 생각을 하는 거얏! 시르젤 씨는... 날 구해줄 생각인가? 지금이라도 관계없는 나 같은 사람은 내버려두고 가 버리면 될 것을... "시르쥬..." 시르젤이 시르쥬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대답을 요구하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눈빛. 갈등에 쌓여 있는 시르젤에게 시르쥬는 웃으며 말했다. "시르젤 형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해. 분명 그렇다면, 엄마도 '그 분'도 형을 그렇게 탓하지는 않을 거야. 형에게 있어 더 중요한 쪽을 택하라고."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고, 셰더는 시르젤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빨리 결정하게. 시간을 끌면, 사람들이 몰려온다." "그러면 불리해지는 것은 셰더 씨겠지요." 조금 여유를 찾은 시르젤의 대화. 그렇지. 여러가지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는 시르팡 일가보다는 확실히 흑마법의 기운을 풍기는 셰더 쪽이 더 잡 기가 쉬울거다. 아무리 셰더가 강한 흑마법사라고 해도, 우리 가문 사람들 중 누구를 만나도 패할 테니까. 하지만 그 말이 셰더를 오히려 자극한 모양이었다. "마나티. 지금 당장 카이엔의 옷을 벗겨라!" "네에! 얏호∼★" "으헤엑?" "그만 두십시오!" "가만히 지켜보는 게 좋아. 마법을 무효화시키지 못하는 이상에야 네가 날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없으니까." "하... 하지마!" "마나티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어요." 어디 일본 18금 미소녀 애니에서 나올 듯한 어투의 대사. 마치 어디서 많이 해 본것처럼 능숙하게 내 옷을 하나하나 벗겨가는 마나티. 게다가 벗 길 때마다 몸의 묘한 곳을 한군데씩 건드려서 몸이 찌릿하게 자극되고 있었다. 그녀의 전직이 심히 궁금할 따름이다. 게다가 그런 상기된 표정을 지으면서, 벗기지 마! 기분이... 기분이 이상해지려고 하잖아! 아으... "아으.... 아아..." 내 입에서 내가 한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괴상한 신음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몸이... 이상해질 것 같애. 아악! 타탁. "카이엔 씨를... 놔주십시오!" 계속 갈등을 겪던 시르젤이... 더 이상 내가 당하는 모습을 눈뜨고 볼 수 없었는지 머신검으로 보이는 검을 셰더의 앞에 던졌다. 시... 시르젤? 어 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그렇게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마나티. 그만둬라." "체에. 이제 겨우 재미있어질려 하는 참인데. 조금만 더 했으면 알몸이 되는 순간에 달아오르게 할 수 있었다구요!" "네가 해서는 능욕이 안되잖아! 내가 해야지!" "어라, 주인님 남색 취향? 징그러워라∼" "무슨 소릴 하는 거얏!" 그러나 시르젤이 수많은 갈등과 번민을 거쳐 가면서 내린 결정이 이 두사람을 보고 있으면 바보같은 행동이 되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휴우... "약속대로... 카이엔 씨를 넘겨주십시오." "마나티. 넘겨 줘라." "싫어요!" 에? 뭐야? 갑자기 마나티가 셰더의 명령을 거부하고 나섰다. 분명 셰더가 주인이고 마나티는 아시에와 같은 마도의 노예일텐데? 마나티가 셰더 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는데다 아시에를 선배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잖아? "생전 처음 보는 싱싱하고 순결하면서도 이렇게 귀엽고 예쁜 아이를 넘겨 주다니, 그러면서도 주인님이 진정한 변태의 길을 간다고 자부할 수 있 는 거에요? 흑마법사라면 흑마법사답게 남과의 약속따위는 축산농가의 오물이 가득한 개천에다가 헌신짝처럼 휙 하고 던져버리란 말이에요!" "내가 왜 변태야!? 네 기준으로 날 평가하지 마!" 마나티의 달변에 항의하는 셰더. 하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다고. "...그럼 평소에 잠자리에서 저한테 하시는 짓들을 전부 폭로해 버리..." "하지맛!" 아아... 더이상 이 녀석들을 보고 있으려면 나까지 지끈지끈 머리가 아파질 지경이다. 그렇게 의미없이 시간만 지나가고 있을때 시르젤이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마나티라고... 하십니까? 만족하실지는 모르지만... 카이엔 씨 대신에 저를 마음대로 하실 수는 없으신지요?" "시르젤 형!" "어머나∼♡." "시... 시르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당황한 나머지 나도 엉겁결에 외쳤다. 근데 내가 왜 시르젤을 말리는 걸까. 시르젤의 말대로 대면 나는 마나티의 손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는데... 그런 시르젤을 마나티는 한동안 각도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유심히 바라보았다. 시르젤의 눈은... 대사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진지했다. "푸훗♡ 아깝지만 할 수 없네. 시르젤 오빠도 나름대로 색다른 맛을 줄 것 같은 사람이지만. 그냥 이대로 카이엔 님을 넘겨 드리죠. 제가 열심히 응원할테니까 힘내는 거에요. 알았죠?"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마나티! 열심히 응원한다니 뭘 응원한다는 말이야! 하지만 내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마나티는 날 시르젤 쪽으로 떠 밀었고 나는 갑자기 떠밀려서 비틀거리다가 그만 시르젤의 가슴에 안겨 버렸다. 이녀석의 품 안에 안긴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시르젤. 괴도 '시르팡'의 일원. 나는 이전에 이녀석의 품에 한번 안긴 적이 있었다. 물론 내가 시르젤을 러브러브해서 그런 건 절! 대! 아니다. 나를 여자로 만들겠다는 시르젤 엄마의 말에 놀라 황급히 도망치다가 저택 곳곳에 가득한 트랩에 빠졌을 때 시르젤이 함정에 빠지기 직전의 나를 구했고, 그 와중에서 우! 연! 하게 품에 안긴 것 뿐이다. 혹은 그림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단지 시르젤과 나와의 키 차이. 덩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 뿐이야! 시르젤은 근육질은 아니지 만 키가 훤칠한 데다(아마 185정도쯤 될 거 같다.) 충분히 다른 사람을 충분히 껴안을 수 있을만큼 남자다운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지고 있으니 까. 반면에 지금의 나는 키도 170이 될까말까하고(미소년으로 변하면서 억울하게도 키가 몇센치 줄었다.) 어깨도 좁고 체구도 작기 때문에 내가 시르젤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이녀석은 분명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으면 나까지 저절로 심장이 쿵쾅 거리면서 요동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전에 안겼을 때도 묘하게 피가 얼굴로 쏠리는 느낌을 받았는데 지금은 쏠리다 못해 머리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올 것 같이 어지러웠다. "...자네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텐가? 보기에 심히 민망하군." 셰더가 시르젤이 던진 머신검을 집어들어 품에 집어넣으면서 한 마디 던졌다. "...와앗!" 그제서야 나도 정신을 차리고 시르젤의 품에서 떨어져나왔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시르젤에게서 등을 돌렸다. 무엇때문에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 르지만 지금의 달아오른 얼굴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때 등 뒤에서 얇은 망토가 내 몸위로 하나 걸쳐졌다. 내 작은 몸에는 너무 크고 헐렁한 시르젤의 망토였다. "시르젤 씨..." "감기 걸립니다. 변변치 않지만... 이거라도 뒤집어쓰세요." 등을 돌리고 있어서 표정은 볼 수가 없지만 시르젤의 목소리는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까 마나티가 내 옷을 반 이상 벗겨내다 말았기 때문에 사실상 내 몸은 반나신... 이었다. 으헤헤엑? 그럼 아까까지 이 꼴로 시르젤한테 안겨 있었단 말야? 우와아악! 쪽팔려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 흑흑흑. "주인님. 늦으면 사람들한테 발각된다고요. 어서 가요." "마나티... 잠깐만, 꽤 괜찮은 구경거리니까 조금만 보고..." "꺄아∼ 주인님도 드디어 그 금단의 세계에 눈을 뜨셨군요! 다음 노예는 미소년이에요! 미소년! 아셨죠? 대륙 최고라는 카이엔님까지는 아니라도 샤방하고 귀여우면서 좀 피학적인 기질이 있는 미소년을 잡아와서 마도의 노예로 만든 다음에 3P를..." "마...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맛! 어서 가자, 마나티!" "에이... 진실한 속마음을 부정하실 것 까지야..." "빨리 따라왓! 안오면 놔두고 간다!" "알겠습니다. 푸훗♡" 여전히 머리가 멍해 오는 정체불명의 이상한 대사들을 내뱉으면서 마나티와 셰더는 다시 빗자루를 타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하얀 마법 구가 희미하게 어둠을 밝혀 주는 동굴속에는 나와 시르젤, 단 둘만이 남아있는.... 게 아니라 사실은 시르쥬도 있었다. 그녀석은 뭐가 즐거운지 아 까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은채 이 상황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저...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다니요? 절 다시 납치해서... 데려가는 것 아니었나요? 그럴려고 그 아까운 검을 그대로 내준 줄 알았는데..." "물론 그렇습니다만, 카이엔 씨가 원하지 않는데 강제로 끌고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절 놔주면 시르젤 씨는 검도 셰더한테 뺏기고 아무것도 못 얻었잖아요? 이대로 돌아가도 괜찮은거에요?" 나 자신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는 무의식중에 나보다는 시르젤을 걱정하고 있었다. "카이엔 씨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감당하고 책임져야 할 문제니까요." "그래도..." "그렇다면 저와 함께 저희 새로운 저택으로 가시겠습니까? 이번에는 저번과 같은 납치가 아닙니다. 저희 집으로 초대하는 겁니다." "초대... 라고요?" "네. 나중에 브리타뉴 가의 집까지 확실히 에스코트 해 드리지요." 그리고 또 시르젤이 말한 에스코트 라는 말이 보통 남자를 상대로는 쓰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사실은 공부를 안 해서 그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몰랐건 거지만. "...갈께요." 엄마 아빠, 다른 형제자매들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나는 시르젤의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원래대로라면 당연히 돌아가는 것을 택해야 했지만 왜일까. 항상 시르젤 녀석에 대해서는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나는 그를 괴도지만 친절한 사람쯤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 는 그 이상 가는 어떤 감정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요동치는 마음이 호감인지, 불안감인지 나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럼 제 등에 업히세요. 단번에 왕궁을 빠져나가겠습니다." "네." 시르젤의 등에 업힌 나. 겉보기로도 그래 보였지만 업히고 보니 그의 등은 넓고 편안했다. "가자, 시르쥬." "응. 형. 내가 먼저 가서 길을 만들께 천천히 와." 시르쥬는 그렇게 말하며 먼저 동굴 저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시르젤은 시르쥬가 간 방향과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달렸다. "떨어지지 않게 꽉 잡으세요. 조금 빨리 달리겠습니다." "저... 저기. 근데 왜 반대쪽으로 가는거죠?" "시르쥬는 미끼 역할을 하러 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시르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르쥬가 달려간 방향에서 콰쾅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시끌벅적해졌다. 괜찮을까나? 지금쯤 우리 엄마나 세이렌 누나, 아이렌, 레이엔도 날 찾고 있을텐데... 가족들한테는 좀 미안한걸. 말도 없이 시르젤을 따라 가버리다니 말야. 이런저런 걱정을 하다가 나는 그만 시르젤에게 업힌 채 잠들어 버렸다. 셰더한테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마나티한테 당할(?)뻔하다 보니 피로가 쌓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시르젤 의 등이 생각보다 너무 따뜻하고 승차감(?)이 좋은 탓도 있었다. 제82화 : 셰더 이야기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시끄러워. 너무 시끄럽다. 당장에라도 파괴의 마법을 써서 달콤한 아침잠을 괴롭히는 저 알람시계를 부숴버리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지 금까지 어찌나 시계를 많이 부숴먹었는지 이제는 그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굳게 마음을 먹고 시계를 부수면 내게 카운터 마법이 날아오도 록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번을 호된 꼴을 당하고 나서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방 반대편에 있는 알람을 끄러 갈 수 있게 되었다. 내 이름은 셰더. 성도 출신도 나이도 묻지 마라.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칭호는 단 하나면 족하다. 대륙 7대 흑마법사 중 한명이라는 칭호 말이다. 흑마법사는 마법사의 반열에 넣어 주지 않기 때문에 비록 대륙 7대 마법사라는 타이틀을 딸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그들과 맞붙어도 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대륙 7대 마법사 말석에 있던 누군가와 붙어 처참하게 깨지기 전에는. 젠장! "음냐... 음냐... 쿠울..." 나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에 옷을 걸쳐입으며 여전히 내 침대에서 일어날 줄 모르는 마나티를 슬쩍 바라보았다. 귀엽고 예쁜 외모에 몸매마저 쭉쭉빵빵인 여자의 나신을 보면 보통 남자라면 정욕이 불끈 솟아서 당장에라도 이불속으로 파고들어야겠지만 밤새 저녀석한테 시달린 나는 그럴 힘도 의지도 없었다. "음냐... 주인님 역시 나이는 못 속인다니깐... 약한 모습..... 음냐리." 저걸 그냐앙... 저녀석은 어째 잠꼬대도 저런 식으로 하는 거얏? 나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세면대에서 세수하고 간단히 몸을 씻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마나티는 일어나자마자 밥부터 찾으면서 징징대기 때문이다. 대체 이건 누가 노예고 누가 주인인 거야? 내가 왜 노예보다 먼저 일어나 노예의 식사를 챙겨줘야 하냐굿! 으으... 아시에가 있을 때는 좋았지. 그때는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마다 모닝 커피를 마실 수도 있었고, 씻고 나서 바로 따뜻하게 데워진 밥과 국 을 먹을 수 있었는데다 옷 입는거랑 간단한 수발까지 해줬으니... 이제와서 후회하기는 뭣하지만 잠자리에서 나무토막같이 재미없다고 일하다 잊 고 놔두고 온 아시에를 브리타뉴가에 넘어가도록 방치한 건 실수였다. 하지만 이미 카이엔 놈의 엄마가 신력으로 나와 아시에의 계약을 강제로 끊어버렸기 때문에 이젠 어찌할 수도 없고... "흐아암. 잘 잤다. 주인님. 식사 준비 됐어요?" "다 돼 간다. 좀만 기다려!" "마나티가 도와 드릴까요?" ...기특하게도 도와줄 게 없냐고 묻는 마나티. 하지만 난 마나티가 만든 음식 먹었다 일주일간을 복통으로 앓아누운 적을 세 번씩이나 겪은 후에 는 절대 그녀에게 식사를 만들게 하지 않는다. 나도 참 바보같지. 세 번씩이나 같은 과오를 반복하다니. 하지만 내가 제대로 가르쳐 주고 옆에서 지켜보기까지 했는데도 마나티가 만든 식사는 왜 꼭 문제가 생길까? 도저히 알수 없는 미스테리였다. "일어났으면 먼저 씻기나 해. 밥 먹으면서 눈꼽 비비지 말고." "주인님 모닝 키스는 안 해줘요?" "...했다하면 몇십 분씩 가잖아. 그거 할 때마다 힘들어 죽겠으니까 그런 거 요구하지 마." "에이... 그러니까 흑력환(黑力丸) 한 알 정도는 먹고 자래도요." "미쳤냐. 내가? 넌 주인이 빨리 죽길 바라는 게냐?" "헤헷. 하긴 그러면 밥이랑 빨래 해줄 사람이 없네." 저걸 그냥... 하지만 아무리 힘이 딸린다 해도 흑력환 같은 것까지 먹을 생각이 없다. 흑력환이란 흑마법의 정수를 모아 만든 일종의 정력제로 이 걸 복용하면 하룻밤에 능히 백 명의 여자를 상대할 수 있다 해서 일야백녀환(一夜百女丸)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이 약을 만든 흑마법사는 뒷 구멍으로 이 약을 엄청 팔아서 떼돈을 벌어 그 돈으로 섬 한구석에 흑마도의 왕국을 세웠다고 하는 실화가 존재할 정도다. 하지만 흑마법이 원래 그렇듯이 힘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이 약은 효과가 엄청난 만큼 그만큼 엄청난 진기를 몸에서 앗아간다. 사용 후에는 체 력과 정신력이 급격히 저하되고, 수명이 줄어드는데다가 마약 효과마저 있어 갈수록 많은 양을 복용해야 하며, 나중에는 아무리 대단한 나신의 미녀를 보아도 먹지 않으면 욕구가 생기지 않는 폐인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각국에서는 이 약을 금단의 약으로 지정하고 적발시 중형을 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약을 찾는 수요는 좀처럼 줄지 않아서 바다 건너 실제로 존재하는 흑마도 왕국의 강력한 자금줄이 되고 있다고 한다. 아침밥이 준비되자마자 마나티는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면서 음식을 마구 먹어제끼기 시작한다. 나는 힘들고 피곤해서 깨작깨작 아침밥을 먹는 데... 나보다 몇배는 더 많이 먹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이 안 찌는 것도 일단은 흑마법을 좋게 이용한 결과였다. "에에... 주인님 너무 기운없게 먹잖아요. 아침밥을 힘차게 먹어야 건강에 좋다구요!" "피곤하다니깐..." "에휴. 그러니까 마나티가 항상 말하잖아요. 가사 전반을 담당할 새로운 노예를 하나 잡아오라고요. 이왕이면 샤방샤방한 미소년으로! 이전에 일 나가면서 찍어둔 사람도 있어요!" "너같은 애 나올까봐 무서워서 새로 계약을 못하겠다." "너무해요. 흑. 멀쩡한 사람을 납치해와 기억도 지운 채 노예로 만들고는 그렇게 심한 말씀을 하시며 괴롭히다니... 저질!" 나는 왜 납치해서 강제계약을 해도 이런 노예들만 만나는 거야? 적당히 써먹으면 저주가 쌓여 죽어줘야 정상인데 아시에는 아무리 흑마법의 저 주를 씌워도 쇠약해지기만 할 뿐 죽지 않았다.(심지어 마왕을 소환하고도 살아있다.) 마나티도 죽지 않았는데 아시에와는 달리 저주가 씌이면 씌 일수록 갈수록 이상할 정도로 색을 밝히며 야해져 갔다. 덕택에 나는 더 이상 흑마법의 제물로 마나티를 쓸 수 없었다. 더 이상 저주가 씌이면 이대로 난 복상사해버리고 말거야 분명. 샤방한 미소년따위를 내가 원하는 건 아니지만 제물로 쓸 노예가 또 필요해진 건 어쨌건 사실이었다. 마나티도 처음에는 평범한 여자애였는데... 아시에도 그랬었지. 원래대로라면 지금까지 저주에 걸려 죽은 많은 제물들처럼 인격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이용해먹고 버리는 대상이었을 뿐인데 왜 안 죽어서 이렇게까지 날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다른 흑마법사들이야 부러운 소리 한다며 농담처 럼 이야기하지만... 정작 난 괴롭다구! 밥 먹고 설거지하고 빨래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마나티한테 설거지를 맡기면 꼭 접시를 잔뜩 깨먹고 빨래를 맡기면 옷은 찢어 걸레로 만들어놓 는다. 아시에가 있을 때는 내가 이런 것까지 안 해도 됐는데... 빨리 노예를 새로 잡아오긴 와야겠다. 그나마 마법의 도움 없이 내가 직접 빨래방 망이를 빨래판에 대고 두들겨야 했다면 난 정말 힘들어서 미쳐버렸을 거야. "후우∼" 심심한 듯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내 옆으로 다가와 귀에 바람을 불어넣는 마나티. 하지만 나는 그대로 하던 빨래를 계속하며 심드렁하게 대 답했다. "재밌냐?" "치. 역시 주인님은 너무 늙었어요! 삭을대로 삭았다구! 전혀 반응이 없잖아요!" "하루에 그런 일을 백번 넘게 당하다보면 누구라도 익숙해진다고. 그런 거. 정신 사나우니까 딴데 가서 놀아." "하지만 마나티 너무너무 심심한걸요. 주인님은 밖에 내보내 주지도 않고... 항상 놀아주던 아시에 선배님도 이젠 없고 주인님마저 마나티를 외면 하시니 마나티는 너무너무 외로워요." "칭얼대지 말고, 저녁에 왕궁에 갈 테니까 필요한 거 빠짐없이 준비해놔." "에에? 왕궁에요? 왕궁엔 왜요, 주인님? 드디어 과거의 잘못을 전부 회개하고 자수하여 피를 볼 생각이 드신 모양이죠?" "자수를 내가 왜 해? 머신검을 가지러 가는 것 뿐이야!" "...주인님 실력으로요? 왕궁의 쟁쟁한 실력자들을 뚫고?" 으드득. 내가 마나티를 노예로 삼은 후에 이 녀석을 죽도록 패 주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주인은 노예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노예의 신변을 보호하고 책임져줘야 한다. 원래는 흑마법의 제물로 몇 번만 사용하면 저주가 쌓여 죽기 때문에 별 신경쓸 필요가 없는 조항이지만 아무리 저주를 받아도 죽지 않는 이 괴상한 녀석들(아시에, 마나 티) 때문에 이 계약은 오히려 내게 짐이 되고 있었다. 어느 놈이 대체 마도의 계약이 사용자에게 유리하고 노동자를 착취하는 불평등계약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는거야! "게다가 시르팡 애들이 먼저 예고를 때려 놨잖아요. 이제와서 협동 플레이를 하겠다는 것도 아닐테고..." "좋아. 그럼 이제부터 작전 계획을 말해줄 테니까 잘 들어." 나는 빨래들을 마법으로 날려 줄에 걸고 인공바람을 돌리면서 마나티에게 오늘의 계획을 차례차례 설명해 주었다. "꺄아∼♡ 그렇다면 카이엔님을 납치한다 그 말이에요? 너무 기뻐어♡ 저번에는 절 안데려가고 아시에 선배님만 데려가셔서 슬펐다구요." "어디까지나 인질이야! 인! 질!" 그때 마나티를 데려갔다면 아마 마나티는 필사적으로 카이엔을 여자로 만들지 못하도록 막았을 거다. 뭐, 결과적으로는 그때 성공하지는 못했지 만... "카이엔님을 어디부터 먹어치워야 할까. 혹시 카이엔님 그런 경험 전혀 없을까? 그렇다면... 꺄아∼♡" "안 듣고 있군..." 냅두자. 마나티는 한번 망상에 빠지면 한동안은 제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런데 마나티가 저 상태니까 결국 저녁에 나갈 준비도 내가 해 야 하잖아... 으윽. 이래서야 흑마법 연구는 언제 하고 한달 뒤에 제출해야 하는 논문은 언제 쓴단 말야? 휴우... "흐음..." 유클리네의 수도 유레카 북쪽에 위치한 유클리네 왕국의 왕궁 유클리드는 대륙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지나치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딱 적당한 땅 가운데에서 적당한 크기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중도(中道). 건국이래 유클리네 왕국이 걸어온 길은 저 두 글자로 표현할 수 있다. 강자를 존중하는 반면에 결코 무시당하지 않을 실력을 갖추며 약자를 배려하는 동시에 결코 기어오르게 놓아 두지 않는다. 혹자는 '적당주의'라고 비꼬는 사람도 있지만 오랜 세월동안 이어져 온 저 원칙은 유클리네 왕국이 지금까지 멸망한 수많은 나라의 전철을 따르지 않고 유구한 역사를 이어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눈을 돌려서 수도 남쪽에 향한 마법사의 탑으로 눈을 돌렸다. 타국에서 유클리네 왕국을 방문한 사람들이 가장 놀라는 것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저 탑이다. 그들은 탑의 위용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수도에 궁궐보다 더 큰 건물의 존재를 용납하는가에 대한 놀라 움을 표현하고는 했다. 하지만 저 탑이야말로 대륙의 마법과 예술, 문화를 선도해나가는 작지만 강한 나라 유클리네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물 이었다. "주인님. 겁나세요? 자꾸 탑 쪽을 쳐다보는 걸 보니." "말조심해. 마나티." "네에∼♡" 마나티 녀석은 꼭 말을 해도 저런 식으로 사람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 때가 많다. 내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은 훌륭한 인내심과 자제력을 가지지 않았다면 벌써 마나티를 잡아 족치고 말았을 거다. 나처럼 착하고 관대한 흑마법사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그런데 카이엔님이 왕궁에 과연 왔을까요?" "확신해. 이번에 시르팡을 잡기 위해 브리타뉴가 사람들이 전부 왕궁에 와 있기 때문에 카이엔도 같이 왔을거야." "흐음... 앗, 저 방에 카이엔님이!" "뭐어?" 나는 놀라 원거리 탐색마법으로 마나티가 가리킨 쪽을 바라보았다. 왕궁 창문 안으로 확실히 카이엔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 세 명이 있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이 거리에서 저걸 본 거야..." "마나티의 육감을 무시하지 말라고요!" 저 육감 나도 알지. 자기가 관심이 있는 건 귀신같이 찾아내고 관심이 없는 건 바로 옆에 있어도 전혀 모르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마나티의 육감. 웨엥∼ 왕궁 전체에 울려퍼지는 경보소리. 시르팡 녀석이 방어망을 뚫고 침입한 모양이다. "늦기 전에 가자. 잠입할 통로는 마련해 놨지?" "래더 오빠한테 맡겨 놨어요." "또야? 하여간 래더 녀석도 물러서는..." 말이 노예지 요즘은 대체 마나티가 하는 일이 대체 무엇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가사노동도 내가 하고, 연구할 때는 하도 시끄러워서 도움보다는 방해가 되니 말이야. "그럼 갑니다. 꼭 잡으세요!" "좋아." 나는 빗자루 뒷자리에 타서 이미 앞좌리에 탄 마나티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안전벨트 같은 게 있을 리 없는데다 빗자루를 타다 보면 급제동, 급 가속, 급회전의 3급 위험때문에 빗자루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앞사람을 꼭 잡아야만 한다. 게다가 빗자루다 보니 오래 타면 엉덩이가 아픈 문제 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승차감이 나쁜 빗자루를 타는 이유는 그게 내가 가진 흑마법사의 미학에 가장 잘 어울리는 도구니까라는 이유 다. "아앙♡ 더듬으면 안돼요☆" "...이상한 소리 내지 말고 빨리 갓!" 내가 절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만약에 그랬다가는 마나티 녀석은 당장에 으슥한 숲 쪽으로 빗자루를 착륙시키고 끝장을 보려고 할거다. 마나티는 한 번 발동이 걸리면 상대를 넉다운 시킬때까지 그치려고 하지 않는 폭주기관차 같은 녀석이니까. 부앙 바람을 가르면서 빗자루는 급가속했다. 나는 그 가속도를 견디기 위해 마나티를 꼭 잡았다. 이 빗자루는 오래된 물건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좀 있 는데 그 중 하나가 저속을 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급가속과 급제동 때문에 처음 타보는 사람은 멀미때문에 엄청 고생한다. 빗자루는 여기저기 설치된 마법트랩을 피해 단번에 카이엔이 있는 방까지 도달했다. 운전이 거칠기는 해도 마나티는 지금까지 이 빗자루를 다루 면서 한번도 어디 부딪히는 사고가 없었을 정도로 운전 솜씨 하나는 뛰어났다. "불이 꺼져 있네요? 아깐 켜져 있었는데..." "시르팡 마나 케이아스 현상이군. 오히려 더 잘 되었어. 이런 상황에서는 흑마법밖에 통하지 않으니까. 가자!" "넷. 주인님! 아쟈!" 쨍그랑 나와 마나티는 유리를 깨고 단번에 방 안으로 쳐들어갔다. "쨔쟈잔∼ 안녕하세요? 유클리네의 여러분? 많이 놀라셨죠? 오호호홋.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을 해할 의사는 전혀 없답니다♡" "누... 누구냣!" 방안에 있던 어떤 녀석이 검을 빼들었다. 왕궁에서 붙여준 호위기사인가? 뭐, 저정도 녀석은 나한테 아무 방해도 안되겠지만. 아직 녀석들은 갑 작스런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어두워서 우리가 잘 보이지도 않을테고. 빨리 카이엔만 잡아서 내빼는 편이 좋겠다. "마나티, 사설이 길다. 빨리 잡아와! 시간이 없어!" "셰더!" 카이엔이 그제서야 나를 알아보고 외쳤다. 하긴 밤이고 불이 꺼져 어두운데다 나와 마나티의 옷은 전체적으로 회색 또는 검정색 계열로 온통 치 장했으니 알아보기 힘들겠지. "넌 뭐하는 녀석이냐!" "율(律)! 박(縛)!" 일단 귀찮게 하는 녀석부터 처리하고. "우욱! 이건... 설마 넌 흑마법사? 어떻게 마법을 쓸 수 있는거지?" ...바보는 무시하자. 그보다는 빨리 카이엔을 잡는 것이 급선무다. "빨리 카이엔을 잡아. 늦으면 그놈을 놓쳐 버린다고." "네에! 그런데 아시에 선배가 절 방해할 분위긴데 어쩌죠?" 그러고보니 아시에가 있었군. 그녀는 흑마법을 쓸 줄 알테니까 방해가 되긴 할거다. 마나티보다는 흑마법 실력도 더 낫고... 그럼 내가 직접 카이 엔을 잡아야겠군. 비록 아시에가 나와의 계약에서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내게 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나의 '조 교'는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경험이자 근본적인 공포로 뼛속 깊숙히 새겨져 있을 테니. "할수 없지. 그렇다면 내가 직접 나설 수 밖..." "주인님! 조심하세요!" 마나티의 외침과 함께 소름끼칠 정도로 강력한 성스러운 기운이 온 몸을 덮쳐왔다. 나는 순간적인 공격에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쓸 수 있는 최 고의 방어막을 쳤다. 몸에 무리가 조금 갈 정도로 강력한 방어막이었지만 쓰지 않으면 죽는다는 육감이 들었기 때문에 나는 전혀 주저하지 않았 다. 그리고 방에 불이 다시 들어왔다. "크윽..." "괜찮으세요, 주인님?" "괜찮아. 시르팡 녀석들. 이 근처를 떠난 모양이군. 시르팡 마나 케이아스가 사라졌어. 너는 어서 빨리 카이엔이나 잡아." "하지만 상대는 마파왕을 봉인시킨 12용사... 게다가 흑마법사와는 상극(相剋)인 신관이잖아요!" 카이엔의 엄마는 솔직히 말해 내게 버거운 상대다. 그녀가 진심으로 나선다면 내가 5분 이상을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좀더 빨리 일을 처리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니까 내가 버틸 동안에 빨리 잡으란 말얏!" "네!" 나는 마나티에게 카이엔을 잡으라는 명령을 내리고는 카이엔의 엄마 쪽을 향해 섰다. 이제 문제는 마나티가 얼마나 빨리 카이엔을 잡느냐인데... 솔직하게 말해 마나티는 아시에보다 약하다. 마력 용량, 마법 센스, 마법 저항력, 마법 주문, 마력 회복력 등 모든 면에서 마나티는 아시에의 상 대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시에에게는 결정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 마법은강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법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능력이 떨어졌 다. 창조적인 플레이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내가 아시에를 놓고 온 걸 알았을 때 처음에 크게 신경쓰지 않은 것도 잠자리에서 인형같이 수동적으 로만 움직이는 그녀에 대해 정이 떨어졌기 때문... 흠흠. 하여간 지나칠 정도로 혼자 마음대로 움직이는 마나티보다 전투 센스는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아시에는 자기가 마나티보다 강한 걸 알고 있지 만 그걸 잘 모른다. 약간의 변칙 공격을 하면 아시에는 우리의 전략적 목표가 카이엔이라는 것을 깜빡 잊을 테고 그때 쉽게 카이엔을 납치하면 되는 것이다. "신벌(神罰)!" 우아아아아악! 마나티! 빨리 좀 하라고! 이 아줌만 왜 이렇게 마왕을 상대할 때 썼다던 전설적인 기술들을 나같이 불쌍한 흑마법사한테 망설임없 이 쏴대냐고! 으윽... 간신히 막고는 있지만 죽을 맛이다 정말. "사. 면. 초. 가. (四面楚歌)!" 아시에가 흑마법을 쓰는 목소리가 들렸다. 흐으... 뭐 하고 있다가 이제서야 싸움에 들어간 거야! 카이엔 엄마의 무식한 신력공격은 계속 이어져 오는데 이대로 가만 있다간 진짜 죽겠다 이거. 그녀의 공격을 막는다고 마력이 상당히 고갈되었을 뿐만 아니라 옷가지도 여러 군데가 찢겨져나 갔다. 몇 군데서는 따끔거리는 것이 피도 좀 나는 모양이었다. 조금만 더 공격이 이어진다면 내상을 입고 말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마나티가 생각보다 빨리 아시에를 속이고 카이엔을 잡아 들쳐메었다. "카... 카이!" "헤헷. 정면대결해서 제가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요? 그럼 갑니다. 담에 뵈요 선배니임! 주인님도 빨리 와요!" "우욱! 왜 이렇게 늦었냐! 젠장! 죽는 줄 알았잖아!" 이제 어떻게든 카이엔 엄마의 공격에서 빠져나가는 것만 남았다. 하지만 카이엔 엄마가 순간적으로 카이엔을 신경쓰느라 나를 향한 공격에 틈이 생겼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나티가 기다리고 있는 창가로 몸을 날렸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같은 걸 확인할 만한 여유도 없이 카이엔을 들쳐멘 마나티와 나는 빗자루를 타고 재빨리 도망쳤다. 마나티는 대담하게도 왕궁 밖이 아니라 오히려 복잡한 왕궁 안을 이리저리 빠른 속도로 돌아다니면서 카이엔 엄마와 아시에의 추적을 피했다. 내가 마나티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이런 점 때문이었다. 아시에가 단순히 명령에 따르는 '노예'란 의미 그대로의 역할을 수행해왔다면 마나티는 평소에는 못미더워도 중요한 일은 의외로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동반자였다. "야! 이거 놔!" 이제 정신을 좀 차린 걸까? 마나티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카이엔이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쳤다. 웁쓰∼ 이런 좁은 빗자루 위에서 그런 난동을 부 리면 위험하잖아! 몸을 돌리지 않았다면 저녀석의 무릎에 맞을 뻔했다. "어머. 카이엔 님. 반항하시면 연약한 마나티는 카이엔님의 바지를 벗겨 XX를 맛있게 XX해드릴꺼에요. 아앙∼" "무... 무슨 짓이야! 하... 하지맛!" "알았죠오∼ 착한 카이엔 님은 얌전히 있는거에요. 착하지... 자." 마나티는 저 말을 하면서 실제로 카이엔의 바지에 손을 가져다대고 더듬거렸다. 마나티가 카이엔을 상대로 저러는 모습을 보니 난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마나티는 내 명령만을 따르고 나만을 위해서만 일해야 하는 노.예.라고! 내 허락 없이 저런 짓은 용납 못해! 그렇다고 따져봐자 말을 들을 마나티도 아니니 원...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시르팡 녀석들이나 찾아. 지금쯤이면 벌써 머신검을 훔쳐 나오고 있을거다." "치이.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인질을 잡았는데 재미없어라아∼" 투덜거리면서 빗자루를 다시 가속시키는 마나티. 아무래도 마나티는 내가 죽을 때도 무덤으로 같이 데리고 가야 할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애 를 내 통제 없이 마음대로 세상에 풀어둔다면 분명 건전하고 상식과 원칙이 지배하는 아름다운 세상에 커다란 악의 근원이 되고 말거야. 나도 흑마법사긴 하지만 우리는 단지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다소의 인명 손실은 각오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마법사들일 뿐이라고! "우아아악!" 쳇. 비명도 좀 더 귀엽게 지를 수는 없냐? 하긴 마나티의 거친 운전솜씨는 나도 익숙해지는데 오래 걸렸지. 저러면서도 절대 어딘가에 걸리거나 부딪히는 법이 절대 없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마나티와 함께 중간중간에 우릴 발견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쫓아오는 병사들을 가볍게 한 대 씩 먹여주면서 시르팡을 찾아 궁궐 곳곳을 휘저었다. 카이엔은 정신이 없어 보지 못했을 테지만 중간에 카이엔의 가족 중 한명인 레이엔이라는 꼬마아이한테도 한 방 먹여주었다. 세이렌 같은 괴물아줌마는 안 만난게 천만다행이지... 휴우. "시르팡 마나 케이아스 지역에 들어왔습니다. 주인님!" 모든 마력과 신력이 무력화되는 나조차 정체를 알 수 없는 시르팡 녀석들의 특수 비기. 그들의 무서운 도둑질 성공률은 이게 없으면 절대 불가 능한 일이다. 하지만 강대하신 마왕님들의 흑마법만은 여기서도 예외지. 암. "지하다! 녀석은 지하에 있어, 파버려!" "넵! 지. 면. 삽. 질. (地面揷質)!" 콰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지면이 꽤 내려앉았지만 부족했다. 역시 왕궁답게 지면 토대도 단단하게 세운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단단한데요?" "더 센걸 쓰란 말야!" "넵! 지. 면. 굴. 착.(地面掘鑿)!" 이번에는 주변 마법사들에게 쉽게 발각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마나티는 강력한 흑마법을 썼다. 쉽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 곳곳을 비행하면 서 가짜 흑마법을 발산하는 더미를 몇군데 설치해 두긴 했지만 쉽게 안심하기는 일렀다. 하여간 마나티의 흑마법은 마력을 잔뜩 쓴 만큼 멋지게 성공! 마나티와 나는 동굴 안으로 중력의 힘을 이용해 수직낙하했다. 간만에 느끼는 중력 제로의 감각 때문에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가요∼앗싸아☆ 지하탐험이다!" "어이. 마나티. 카이엔 기절했다." 이녀석 과연 남자 맞어? 몸도 여자 체구인데다 예쁘장하기까지 한데 성격도 그렇게 강인하지 못한 것 같으니... 한심한 녀석. 역시 이런 녀석은 언젠가 성전환에는 도가 튼 이몸이 여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인류의 오랜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겠지. "에에? 카이엔 님이요? 카이엔 님! 카이엔 님!" "운전하면서 카이엔 잡고 흔들지 마." 마나티는 운전하면서도 가만히 있는 법이 절대 없다. 가끔가다 빗자루를 바이브레이터로 쓰는 듯이 묘하게 빗자루를 진동시키는 건 둘째치더라 도 각종 오버 액션은 기본에 그냥 가면 될 걸 곡예비행을 해대질 않나 종이비행기 접어서 종이비행기랑 똑같이 날기, 두 손을 모두 놓고 실뜨기 등 별에 별 짓을 다 한다. 이젠 다 익숙해져서 뭐라 할 말도 없지만... 참고로 이전 아시에는 절대 마나티랑 같은 빗자루를 타지 않았다. 지하동굴은 좁지만 엄청 넓었다. 이 지하동굴은 한때 다섯명의 마왕이 동시에 부활해 전 세계를 파멸 직전에 몰아넣었던 '암흑 시대'의 유산으로 웬만큼 역사가 오래된 나라들은 보통 왕궁 지하에 이런 동굴을 가지고 있었다. 마신 베링거 이래 인간 역사 최악의 시대라고 불려지는 암흑시대 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 규모의 지하동굴이 필요했던 것이다. "시르팡 녀석. 찾기 힘들군. 그새 언제 이렇게 이동한 거야? 아예 우리가 놈을 직접 부르는 게 낫겠다." "언제든 오케이에요☆ 증폭마법 준비되었습니다!" "흠. 흠. 마법 테스... 웁!" "소리지르지 마세요. 주인님. 놀랐잖아요?" "나야말로 놀랐다. 빨리 제대로 해." 나는 귀청을 울리지 않기 위해 나즈막한 목소리로 마나티에게 말했다. 원래 동굴 안에서는 소리가 울리는데 이쪽에 음파 차단마법을 걸지 않고 무작정 증폭마법을 걸었으니 그 소리가 장난이 아니게 귀를 아프게 했다. "아. 아. 음. 이제 제대로 나오는군. 시르팡의 여러분. 아마 시르젤 군도 있겠지? 네놈은 아마 내가 어딨는지 알거다. 잔말말고 빨리 내 앞에 나타 나도록. 자네 집안의 며느리 될 카이엔 브리타뉴를 이몸이 데리고 있다. 빨리 안오면 이녀석의 소중한 순결은 보장하지 못한다. 이상. 마나티, 증 폭 꺼." "한번 방송했다고 시르팡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까요?" 마나티가 증폭을 해제하면서 물었다. "못 들었다면 녀석들은 괴도로서 실격이다." 저녀석들은 시르팡 마나 케이아스가 전혀 통하지 않는 흑마도의 왕국에도 잠입해서 물건을 훔쳐 온 경력이 있는 놈들이다. 단순히 비기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 드는 어설픈 바보들이 아냐. 내 생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시르팡 일가의 시르젤과 시르쥬가 내 앞에 나타났다. 시르젤이 이쪽까지 다가와서 뭐라고 말했다. 엥? 근데 귀가 먹었나? 왜 쟤들이 하는 말이 하나도 안 들리지? "주인님. 한번 목소리 좀 내 보세요. 시르젤 오빠의 목소리가 전혀 안 들려요." "나도 안 들리는... 근데 니 말은 들리잖아?" "어. 주인님 말은 들리네? 이건 설마 저와 주인님의 정신적 교감이 한계치를 넘어서 주종합일(主從合一)의 경지에 이르른..." "이상한 단어 지어내지 말고 음파 차단마법이나 빨리 해제해. 아까 증폭마법 해제하면서 왜 그건 남겨둔거야?" 마나타기 마법을 해제하자 그제서야 시르젤의 고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셰더 씨! 제 말을 듣고 있기는 한 겁니까!!!" 웁! 동굴에 울려서 귀 아프잖아. "들리니까 그만해. 사정상 음파를 차단하고 있었다고." "혹시 카이엔 씨에게 무슨 나쁜 짓을 한 건 아니겠지요?" "물론 소중한 인질은 잘 데리고 있지. 그렇지 않나, 마나티? 앗! 마나티 너 뭐하는 짓이얏!" 마나티는 기절한 카이엔의 얼굴을 양 손으로 붙잡고 얼굴을 마주대고 있었다. "에에? 이제 카이엔 님 좀 깨워야지요? 예로부터 잠이 든 미소년을 깨우려면 마나티 같이 참하고 착하고 아름다운 순정파 소녀가 사랑이 듬뿍 담긴 키스를 해야..." "하지 맛!" "그만 두십시오!" 나와 시르젤이 동시에 외쳤다. 이런 때 왜 그런 쓸데없는 곳에 정신을 포대자루 털듯 쏟아붓고 있는거야? "으응..." 그때 카이엔이 신음소리를 내면서 몸을 굼틀거렸다. 아마도 정신이 든 모양이겠지. 그나저나 저 녀석 신음소리. 묘하게 색기를 띤단 말이야? 음... 역시 카이엔은 미소녀로 태어나야 할 것을 하늘의 실수로 잘못 태어난 녀석인가 보다. 하늘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주는 선량한 일을 계속해온 이몸과 카이엔이 인연을 맺은 것도 하늘의 뜻이겠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반드시 카이엔의 염색체를 뜯어고쳐야 겠다. "주인님. 카이엔 님이 깨어나셨습니다앙∼ 역시 제 말이 맞죠!? 잠든 왕자님을 깨우는 데는 아리따운 소녀의 사랑이 담긴 찌인한 키스가 최고라 니깐요!" 키스 안 했잖아? 하여튼 오버 하나는 대단하다니까. 카이엔도 깜짝 놀라서 금방 자리에서 일어난다. 저 녀석도 마나티 무서운 건 확실히 아나보 다. 일단 한숨 놓고 나는 시르젤이나 상대해야지. "주인니임!" "조용히 하고 카이엔이나 잘 감시해!" "그럼 마나티. 마음대로 카이엔 님 갖고 놀아도 되요? 카이엔 님 너무 예뻐어∼ 멋져어∼ 마나티, 카이엔 님 보고 있으면 더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애애∼" 크아아아아아! 마나티 너 나 자꾸 열받게 할래애? 조금 스팀을 받은 나는 단호하게 잘라 외쳤다. "안돼!" "히잉∼" 마나티의 막가는 행동에 카이엔마저도 질린 듯한 표정으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이런 애한테 매일밤 시달리는 나도 참 불행하고 불쌍 한 사람이지.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기에 이러누... "카이엔 브리타뉴 씨를...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시르젤의 말 덕택에 나도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하여간 마나티랑 있으면 너무 이것저것 휘둘리는 일이 많아서 내가 지금 뭘 해야하는지 금세 현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나는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바로 요구사항을 말했다. 여기 오래 있어봤자 좋을 것 없으니까. "간단해. 머신검을 이미 훔쳤겠지? 그걸 내게 넘겨라. 그러면 카이엔을 네게 넘겨주겠다." "넘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글쎄. 내가 인질을 어떻게 할 것으로 보이나?" "....." "네가 보는 앞에서 철저하게 능.욕.해 주지." "그런 짓을 하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쩔 거냐? 너희 시르팡이 자랑하는 마나 혼란... 시르팡 마나 케이아스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었다지? 그것도 공간 중의 마나를 이용하 는 것이 아니고 직접 마왕의 힘을 빌리는 흑마법만은 통하지 않는데." 지금 당장에라도 네 녀석까지 가루로 만들어 줄 수 있다는 협박이자 시위였다. 시르젤은 잠시 생각하더니 옆에 있는 시르쥬에게 무언가 허가라 도 구하려는 듯 형제끼리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음... 의외로 서로 뜨거운 눈빛인거... 아악! 이게 아니잖아! 마나티가 맨날 이상한 소릴 하더니 나까지 전염된 것 같다. 제길. "시르젤 형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해. 분명 그렇다면, 엄마도 '그 분'도 형을 그렇게 탓하지는 않을 거야. 형에게 있어 더 중요한 쪽을 택하라고." 그러고도 한참을 침묵하는 시르젤 녀석. 이 자식, 고의로 시간을 끌고 있는 거 아냐? "빨리 결정하게. 시간을 끌면, 사람들이 몰려온다." "그러면 불리해지는 것은 셰더 씨겠지요." 어쭈. 개기는 거냐? 그렇다면 본때를 보여줘야 정신을 차리겠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마나티에게 명령을 내렸다. "마나티. 지금 당장 카이엔의 옷을 벗겨라!" "네에! 얏호∼★" "으헤엑?" "그만 두십시오!" "가만히 지켜보는 게 좋아. 마법을 무효화시키지 못하는 이상에야 네가 날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없으니까." "하... 하지마!" "마나티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어요." 마나티는 아예 작정을 한 듯 이제는 노골적으로 색기를 잔뜩 담은 목소리를 내면서 카이엔의 옷을 사과껍질 벗겨가듯 하나씩 벗겨냈다. 항상 밤 마다 느끼는 거긴 하지만 저건 암만 봐도 그 방면의 전문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솜씨다. 그 증거로 어떤 마법도 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카 이엔은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험없는 저런 순수한 몸으로 저런 자극을 받으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달아오르겠지. 대체 마 나티는 저런 걸 어디서 배운 거야? "아으.... 아아..." 응? 아직 반밖에 안 벗긴 것 같은데 벌써 숨을 할딱거리냐? 하긴 처음은 다 누구나... 라기보다 왜 남자 녀석이 헐떡이는 숨이 왜 나까지 묘하게 자극시키냔 말이얏! 인간을 창조한 조물주도 참 웃기는 녀석이지.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대로 제대로 만들면 좋을 건데 왜 가끔씩 여자 뺨치 는 미소년에 남자가 주눅들 만한 터프걸을 만들곤 하는 거냔 말야. 뭐, 그 덕택에 나같은 성전환 전문가가 먹고 살지만 말이야. 타탁. "카이엔 씨를... 놔주십시오!" 시르젤이 내 앞에 [머신검]을 던지면서 말했다. 짜식. 줄려면 진작 줄 것이지. 그러길래 왜 쓸데없는 반항을 해서 못볼 꼴을 보게 만드는거냐. 그 래도 저 시르젤 놈의 괴로워하는 얼굴 표정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크핫핫. 나는 크게 만족하여 마나티에게 그만 두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나티. 그만둬라." "체에. 이제 겨우 재미있어질려 하는 참인데. 조금만 더 했으면 알몸이 되는 순간에 달아오르게 할 수 있었다구요!" "네가 해서는 능욕이 안되잖아! 내가 해야지!" "어라, 주인님 남색 취향? 징그러워라∼" "무슨 소릴 하는 거얏!" 왜 자꾸 날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려 하는 거야, 마나티! 너땜에 요새는 남자 둘이 서로 눈빛을 마주치는 모습이나 악수를 하는 장면만 봐도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잖아! 자꾸 멀쩡한 사람을 세뇌시켜려 들지 말라고! "약속대로... 카이엔 씨를 넘겨주십시오." 일단 빨리 시르젤 녀석과의 일부터 해결해야지. 마나티 땜에 자꾸 해야 할 일이 이상하게 휘말려서 큰일이야 큰일. "마나티. 넘겨 줘라." "싫어요!" 엥? 무시라? 니가 지금 나한테 반항이냣! 그렇잖아도 평소에 자주 개겨서 짜증나 패고 싶은 마음이 들때가 한두번이 아닌데 자꾸 그럴래? 하지 만 마나티는 내 화난 표정을 보고서도 자기 할 말을 다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싱싱하고 순결하면서도 이렇게 귀엽고 예쁜 아이를 넘겨 주다니, 그러면서도 주인님이 진정한 변태의 길을 간다고 자부할 수 있 는 거에요? 흑마법사라면 흑마법사답게 남과의 약속따위는 축산농가의 오물이 가득한 개천에다가 헌신짝처럼 휙 하고 던져버리란 말이에요!" "내가 왜 변태야!? 네 기준으로 날 평가하지 마!" 하지만 마나티 옆에 있는 카이엔이나 뒤에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는 시르젤, 시르쥬 모두 내 말보다는 마나티의 말에 더 수긍하는 듯 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흐으. 역시 마나티랑 다니면 절망과 공포로 세상사람들을 떨게 만들어야 하는 위대한 흑마법사인 이몸의 평판이 떨어 진다는 점이 큰 문제란 말이야. "...그럼 평소에 잠자리에서 저한테 하시는 짓들을 전부 폭로해 버리..." "하지맛!" 우욱! 그건 평소에 이몸의 S급 비밀사항으로 절대 존재사실조차 입밖에 뻥긋하지 말라고 그토록 주의를 주고 또 줬건만 그걸 말하려고 들면 어 떡해? 내가 마나티와의 소모적이고 의미없는 논쟁에 시간만 소모하고 있을 때 시르젤이 나섰다. 시르젤 녀석,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오늘만은 끝이 보 이지 않는 마나티의 수렁에 빠진 나를 항상 구출해 주는 구세주 역할을 해주는구나. "마나티라고... 하십니까? 만족하실지는 모르지만... 카이엔 씨 대신에 저를 마음대로 하실 수는 없으신지요?" 에엥? 저게 뭔소리다냐? 카이엔 대신에 자기를 마음대로 하라니... 설마 카이엔을 넘겨주는 대신 마나티한테 자기 몸을 팔아넘긴다는 이야기? 커 헉! 이놈들... 이놈들 정말 제정신인 거야? "시르젤 형!" "어머나∼♡." "시... 시르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카이엔의 당황스런 외침. 역시 나의 명석하고 뛰어난 두뇌에서 나온 계략은 맞아떨어졌다. 카이엔과 시르젤은 서로 애써 부정하고 있지만 녀석들 은 역시 시르젤의 엄마가 공언한 대로 그녀의 사랑스런 손자손녀를 낳아 오손도손 살아갈 운명을 지닌 한 쌍의 바퀴벌레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카이엔을 납치해 시르젤을 협박한다는 계획 자체가 애초에 성립이 안 되니까. "푸훗♡ 아깝지만 할 수 없네. 시르젤 오빠도 나름대로 색다른 맛을 줄 것 같은 사람이지만. 그냥 이대로 카이엔 님을 넘겨 드리죠. 제가 열심히 응원할테니까 힘내는 거에요. 알았죠?" 시르젤의 진지한 자세가 통해서일까? 다행스럽게도 마나티도 자신의 주장을 굽혔다. 물론 마나티가 카이엔을 시르젤에게 넘겨주는 이유는 나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구석이 있는 것 같아서 좀 찜찜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려면 어떠랴. 마나티는 카이엔을 시르젤 쪽으로 휙 밀어버 렸고 카이엔 녀석은 갑작스레 떠밀려서 그런지 비틀거리더니 그만 시르젤의 가슴에 푹 안겨버렸다. 뭐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치는데 말이지. 왜 그렇게 서로 껴안은 채 놔둘 생각을 하지 않는거야? 애정행각은 나중에 이 몸이 카이엔을 성전 환 시킨 후에 벌여도 충분하잖아! 남자들끼리 얼굴 붉히면서 저러고 있는 꼴을 보고 있으면 마나티의 양성애(兩性愛)논리에 나도 적응이 되어가 는 것 같아서 심히 기분나쁘다고! 정신은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몸은 남녀가 서로 유별해야 사랑이 되는 거잖아? "...자네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텐가? 보기에 심히 민망하군." 나는 땅바닥에 떨어진 머신검을 그제야 집어들어 품에 안고는 한마디 던졌다. 어찌나 정신이 없던지 지금껏 검을 주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 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시르젤은 반라의 카이엔에게 자기 망토를 벗어 건네주는 등 별 이상한 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흠... 그러고 보니 의외로 꽤 어울리는 장면일지도... 이건 절대 사랑에는 남녀 구별이 없다는 마나티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다. 오로지 거 의 여자나 다름없는 외모와 행동을 보이는 카이엔이기에 '그나마' 봐줄 수 있는 거다. "주인님. 늦으면 사람들한테 발각된다고요. 어서 가요." "마나티... 잠깐만, 꽤 괜찮은 구경거리니까 조금만 보고..." "꺄아∼ 주인님도 드디어 그 금단의 세계에 눈을 뜨셨군요! 다음 노예는 미소년이에요! 미소년! 아셨죠? 대륙 최고라는 카이엔님까지는 아니라도 샤방하고 귀여우면서 좀 피학적인 기질이 있는 미소년을 잡아와서 마도의 노예로 만든 다음에 3P를..." "마...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맛! 어서 가자, 마나티!" "에이... 진실한 속마음을 부정하실 것 까지야..." "빨리 따라왓! 안오면 놔두고 간다!" "알겠습니다. 푸훗♡" 우웁. 이제는 내가 창피해서 저놈들에게 제대로 얼굴을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물론 그녀석들은 나같은건 신경쓰지 않고 둘만이서 계속 이상한 오라를 주변에 뿌리고 있을테지만) 나는 아예 내가 앞자리에서 빗자루를 잡고 날 준비를 했다. 마나티가 양 팔로 날 뒤에서 꽉 껴안은 것을 확인 한 나는 빗자루를 급출발시켰다. "운전중에 더듬지 마." 내 배를 양팔로 꽉 두르고 있는 마나티의 손이 점차 아래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느낀 나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경고했다. "피잇. 어차피 주인님 요새 뱃살이 쪄서 거기까지 손이 가지도 않는다구요." "크아아아악!" 분명 나는 오래 살 운명은 아닌다싶다... 에휴. 제86화 : 부모 인사 -시르젤편- "으음..." 눈부셔... 눈을 뜨고 일어나자마자 새하얀 커튼 사이로 쏟아들어져오는 따스한 햇빛이 나를 맞이한다. 반쯤 열려진 창문사이로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막 일 어나 덜 깬 정신을 맑히고... 잠깐! 바닷바람? 틀림없어. 처음 맡아보는 냄새지만, 바람에 섞인 이 짠내는 분명 바닷바람이라구! 나는 창문을 덜커덩 열고 밖을 바라보았다. 집 코앞에 있는 백사장에서부터 한없이 넓은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었다. 시원한 파도소리가 규칙적으 로 고막을 두드렸고, 갈매기 울음소리가 마치 해운대라도 와 있는 양 정취를 더욱 돋구었다. "우와∼" 나는 절로 모르게 감탄소리를 내뱉었다. 제대로 된 바다를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남들은 여름휴가때 해수욕도 가고 한다지만 아빠 엄마 는 어느 계절이건 휴가라는 단어는 전혀 모르시는 분들이었기 때문에 본의아니게 나는 한번도 직접 두 눈으로 바다를 본 적이 없고 오직 TV화 면에서만 본 것이 전부였다. "깨어났니?" 내가 감동에 젖어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 바로 창문 옆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옆을 돌아다보니 약간 나이가 있어 보이는 아 주머니 한 분이 의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시집같아 보이는 작은 책을 읽고 계셨다. "누구세요?" 하지만 그 아주머니께서는 대답하지 않고 빙긋 웃을 뿐이었다. 마치 너에 대해서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웃음...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웃음이 전혀 기분나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평온하게 느껴졌다. "신기하구나... 나와 같은 운명을 지닌 아이를 만나게 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같은 운명이라니요? 그리고 아주머니는 누구세요?" 알아들을 수 없는 아주머니의 말에 나는 무심결에 반문했다. "이런이런. 인사가 늦었네. 내 이름은 티아라라고 한단다." "제 이름은..." "카이엔 브리타뉴지?" "어떻게... 그걸." "호호. 이 대륙에서 카이엔 브리타뉴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장님이 아닌 이상에야 아무도 없단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곳은 어디죠? 그리고 시르젤은?" 나는 시르젤의 초대를 받아 이곳으로 오던 도중에 시르젤의 등 뒤에서 그만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그 때문에 이 아름다운 해변이 보이는 여기가 어딘지 전혀 몰랐다. "여긴 대륙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시르팡의 본거지 중 하나인 '시아와세노 비치'란다. 그리고 내 손주녀석을 볼려면 조금만 기다리렴. 곧 올거 니." "네에? 시르젤이... 소... 손주요? 그럼 아주머니는..." "시르젤의 할머니란다. 호호호. 정확하게 말하면 외할머니지. 이런이런... 많이 놀랐니?" 놀라는 게 당연하잖아! 내가 시르젤의 나이는 잘 모르지만 대충 보기에 한 20대 초반쯤 되는 것 같은데 이 아주머니는 암만 관찰해 봐도 40대 초반보다 나이가 많다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40대 초반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어느 정도의 화장빨이 도와 주지 않으면 지금처럼 대단한 아름다움은 발하지 못할 정도의 연륜은 얼굴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시르젤 엄마도 원체 20대 중반처럼 보일 정도로 동안인지라 크게 놀랐으니 이정도로 놀랄 일은 아니지만... 대체 저 아주머니... 아니 할머 니는 몇 살인거야? "여∼ 형수님. 일어났어?" "누가 형수님이라는 거얏!"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제끼면서 시르쥬가 들어오면서 살살 내 신경을 건드렸다. "어라? 우리 형의 프로포즈를 받아서 우리 집에 온 거 아니었어?" "니 눈에는 그게 프로포즈로 보이냐?" "응." 태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시르쥬. 캭! 저걸 그냥! 나는 달려가서 뺨을 갈겨버리고 싶었지만 옷이 너무 헐렁헐렁해서 움직이기에 불편했다. 그 러고보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또 연한 핑크빛 물방울 무늬의 파자마... 이젠 이런 옷 입혀지는 데 너무 익숙해서 이런 일을 당하면 힘만 빠질 뿐 놀라거나 열을 낼 의욕도 없어진다. "옷 갈아입으러가자. 해가 떴는데 계속 잠옷 입고 있을수는 없잖아? 울 형이랑 맞선도 봐야 하고." "맞서언? 흥! 여자옷 입히려는 거라면 절대 안가!" "여자옷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는 또 저게 무슨 꿍꿍인지 궁금했지만 벌써 해가 중천에 뜬 마당에 이렇게 소녀틱한 잠옷을 계속 입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시 르쥬의 뒤를 따랐다. 그런 내 뒤로 할머니인지 아주머니라 불러야 할지 여전히 헷갈리는 티아라가 뭔가를 중얼거렸지만 나는 그 중얼거리는 내 용을 듣지는 못했다. "호호. 나도 저때는 많이 반항했었지... 지금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하긴, 스스로의 정체성을 바꿔야 하는 일이니까 어쩔 수 없는걸까..." 시르쥬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드레스 룸에는 수많은 옷들이 있었다. 나는 방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여자 옷들을 가볍게 무시한 후에 남성복들 이 쌓인 곳으로 향했다. 에에... 여기는 옷을 코디해주는 하인들도 없냐? 내가 직접 옷 골라본 적이 없어서 당황스럽잖아 이거? 나는 끙끙거리면 서 평소에 내가 입는 옷이랑 비슷한 종류에 사이즈가 맞는 것을 찾아냈다. 시르쥬는 뭐가 좋은지 그런 나를 재미있다는 듯 쭉 기분나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뭘 봐!?" "여자도 아니면서 남자끼리 보는게 어때서 그래? 헤헤헷." "그 눈빛이 묘하게 기분나쁘단 말이야, 당장 나갓!" "'어머 훔쳐보면 안돼요.'라고 귀엽게 말하면 나가 주지." "너 죽는다앗! 살리, 저놈 당장 태워 버렷!" 나는 당장에 불의 하급정령 살리를 불러서 시르쥬를 공격시켰다. 시르쥬는 깜짝 놀란 듯 정령의 공격을 피하더니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 와 중에도 날 놀리는 걸 잊지 않고 말이다. "형수님은 너무 부끄러워한다니깐∼" 어쨌건 시르쥬가 나가버리자 나는 낑낑거리면서 간신히 옷을 입었다. 으윽. 평소에는 하인하녀들이 다 차려입혀주는지라 간단하게 보였던 옷 입 는 게 왜 이렇게 힘든거야? 이 후크는 어디다가 채워야 하는 거지? 이 끈은 여기다 매면 되나? 왓! 단추를 잘못 끼웠잖아! 후우... 상대하기는 싫 지만 옷 다 입고 나면 시르쥬한테 좀 제대로 고쳐달라고 부탁해야겠다. 대충 옷을 챙겨입고 방 한쪽에 걸린 거울을 보았다. 조금 어색한 부분이 몇군데 보이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잘 입은 거겠지? 거울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내가 봐도 반할 것같은 아름다운 외모. 한번 미소라도 지으면 그야말로 웬만한 사람은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피를 토하고 넘어갈 것 같다. 남들이 보고 뿅 가서 이래저래 귀찮게 구는 것도 어쩔 수 없나... 내가 옷을 챙겨입고 나가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르쥬가 다가와서 내 옷매무새를 고쳐주면서 "형수님은 역시 신부수업을 좀 받아야겠어."라는 둥의 헛소리를 했다. 나는 조용히 시르쥬의 말을 웃으면서 듣기만 하다가 시르쥬가 내 옷을 가지런하게 만들자마자 물의 하급정령 엔디를 시켜 물을 뒤집어쓰게 말들었다. 우하핫. 그러니까 입을 싸게 놀리면 벌을 받는 거라고! 시르쥬의 뒤를 따라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가니, 시르젤과 시르젤의 엄마가 테이블 옆 소파에 앉아있었고, 상석에 아까 만난 시르젤의 외할머 니 티아라와 그녀의 남편, 즉 외할아버지로 추정되는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미중년 아저씨 한 분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카이엔 형 데리고 왔어요. 외할아버지." "수고했다. 거기 앉도록." 그 미중년 아저씨의 말은 짤막하면서도 좌중을 압도하는 위압감이 있었다. 얼굴에 새겨진 약간의 주름살마저도 멋으로 느껴질 정도로 멋있는 아 저씨이긴 했지만 표정은 웬지 무서워서 나는 위축된 분위기에서 어설프게 빈 좌석에 앉았다. "카이엔 브리타뉴 군." "네... 넵!" 잔뜩 긴장해서 필요 이상으로 큰 소리로 말해버렸다. 표정이... 무서운데 혹시 내가 무슨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짓이라도 한 걸까? 그러고보니 내 가 먼저 인사부터 해야 했는데 안 했고 자기소개도 먼저 했어야 하는... 으아악! 잘못투성이잖아! 혹시 날 나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잠깐... 그런데 내가 왜 시르젤의 외할아버지한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아저씨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시르젤을 어떻게 생각하나?" "네에?" "말 그대로다. 내 외손자 시르젤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느냐는 말이다." 잠깐! 표현이 너무 직설적인.... 게 아니라 왜 갑자기 그런걸 물어보냐구요! 나는 우물쭈물거리면서 대답을 회피하려 했지만 그러기에는 저 아저씨 의 눈초리가 너무 무서웠다. "그게... 저... 그건..." "말을 더듬는 걸 보니 틀림없군." 에?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저씨?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을때 시르젤의 할머니께서 거들듯 말했다. "그렇네요. 저도 저땐 한참 저랬었죠. 여보.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더 심했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고개도 못 들었다니깐." "어머. 이 사람도 짖궂기는..." 자기 아내인 티아라에게 말하는 시르젤의 외할아버지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띠었다. 그리고 난 동시에 긴장이 약간 풀렸다. 아주 무서운 사람 이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그래도 어쩐지 말하는 게 나한테 좋은 얘기는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같은데..? "아빠. 얼굴 좀 펴세요. 카이엔이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 "거 참. 허허허." 시르젤 엄마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짓는 시르젤 외할아버지. "본의아니게 자넬 긴장하게 만든 것 같군. 할 수 없지. 사실은 나도 긴장하고 있었으니 말이야. 이제부터 천천히 이야기를 해 보세. 카이엔 브리 타뉴 군." "네." 이상한 분위기에 말려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나이드신 분이 말씀하시니 일단 대답부터 하고 보는 나였다. "흠흠... 우선 여러가지 궁금한 점이 많을테니. 이야기부터 해주지." 아까의 무언가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시르젤을 어떻게 생각하는 질문이 스스로도 오버라고 생각했는지 시르젤의 외할아버지는 천천히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운을 띄웠다. "내 이름은 파라디스 케이리가. 현재 괴도 '시르팡'조직의 총수를 맡고 있다." "아빠!" "외할아버지!" 시르팡의 다른 가족들이 파라디스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 듯 외쳤다. 어? 왜 저러지? 이름을 가르쳐 준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그러고 보니... 성(姓)을 가르쳐 줬다. 지금까지 시르젤도 시르쥬도 절대 가르쳐주지 않았던 자신이 성을. 그렇다면 시르젤의 성도 케이리가일까? "가만히 앉아 있거라." "하지만 성을 가르쳐 주는 건...!" 가장 크게 놀라서 항의하는 사람은 의외로 시르젤이었다. 시... 시르젤, 왜 그래? 내게 숨기고 싶은 일인거야? "내가 알기로 카이엔은 기억을 잃었다고 들었다. 잘 봐라. 표정을 보아하니 그 성이 가지는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지 않느냐?" "그렇다고 해도 성급하셨습니다. 외할아버님. 카이엔 씨가 다른 사람에게 그걸 발설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발설이라니. 그가 왜 다른 사람들에게 발설한다는 말이냐?" "저는... 카이엔 씨를 여기에 초대한다고 말하고 데리고 왔고, 집까지 바래다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말이 새어나갈 소지는 충분히..." 쾅! 으헤헥! 놀랐다. 파라디스가 화가 난 듯이 탁자를 쾅 하고 내려쳤던 것이다. "카이엔 케이리가는 이미 우리 집안 사람이지 않느냐, 뭘 숨기고 말고 할 게 있느냐?" "에엑?" 카이엔 케이리가라니, 그게 뭔 소리냐?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는 결혼해도 성이 바뀌지 않지만 저 일본이나 서양 사람들은 결혼하면 여자쪽이 성 을 바꾼다고 들었다. 하지만 시르젤 외할아버지의 성이 케이리가인 건 여기에는 없는 시르젤의 아버지는 데릴사위로 들어온 걸까? 우욱...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내 성을 그렇게 바꿔부른다는 건 설마 양자로 들인다는 건 아닐테고... 그렇다면... "시르젤!" 사태를 파악한 나는 시르젤을 향해 소리치며 항의했다. 약속했잖아. 단지 집에 초대하는 것 뿐. 그것뿐이라고... 그런데 왜 이야기가 이렇게 가는 거야? 시르젤도 급박하게 전개되는 사태가 당황스러운 듯 파라디스에게 외쳤다. "외할아버님!" "응? 왜 그러느냐. 이제 남은 건 둘이서..." "그게 아닙니다! 전 단지 카이엔 씨를 집에 초대했을 뿐이라고요!" 시르젤이 상기된 얼굴로 외치자 일순간 집안에 갑자기 싸늘한 공기가 맴돌았다. 파라디스의 얼굴은 노기를 띤 듯 부르르 떨었고 티아라는 어쩔 수 없다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시르젤 엄마는 지금 얘가 뭔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 어리둥절했고 시르쥬는 재미있게 되었다는 모 습이었다. 어메, 어메. 이거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이거? 파라디스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럼 저번에 보냈다던 웨딩드레스 선물은 뭐냐. 카이엔의 방문은 그에 대한 화답(和答)이 아니었던 거냐?" 무겁지만, 날카로운 질책의 울림이었다. "죄송합니다. 외할아버님. 미리 언질을 드렸어야 했는데..." "자, 자. 물러나 있거라. 시르젤. 여보. 우선 머리를 식히고 차분하게 생각해보기로 하지요. 저 아이에게도 너무 갑작스런 일이 될 테니..." 티아라의 말에 파라디스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담기더니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 저편으로 걸어가버렸다. "어머나, 그러고보니 오늘이 콜렉팅한 물건들 총점검하는 날인데, 깜빡 잊었네. 오호호." 시르젤의 어머니는 이 애매한 상황에서 핑계를 대며 도망가버렸고, "쳇. 형은 너무 솔직한 게 탈이라니깐. 괴도까지 하면서 조금 융통성을 가질 순 없는거야?" 시르쥬는 어딘지 내가 엄청 당황해서 쩔쩔매는 꼴을 못 봐서 아쉽다는 투의 말을 던지며 종종걸음으로 거실을 나갔다. 거실에는 시르젤의 외할 머니 티아라와 시르젤, 그리고 나만이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남아 있었다. "자. 자. 너무 부담가지지 말고 편한 자세로 앉으렴. 시르젤, 여기 차라도 내오너라." "...알겠습니다." 시르젤은 티아라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내 얼굴을 슬쩍 한번 쳐다보고는 거실 밖으로 나갔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았지 만 티아라의 말을 듣고 상당히 안정된 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된단다. 카이엔. 늙은 영감탱이가 멋대로 잔뜩 상상해버렸다가 자기 마음대로 실망한 것 뿐이니..." "그래도... 괜찮을까요?" "걱정해주는거니? 착한 아이구나." 티아라는 내 옆에 다가와서 앉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는 평소에 누가 머리를 쓰다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티아라의 손길에는 어딘지 알 수 없는 편안함이 깃들여 있었다. 마치 시르젤에게서 느끼는 그런 편안한 감정 같이... "많이 힘들지?" "네에? 시르젤씨가 친절히 대해주셔서 그다지 힘든 건..." "아니, 우리 집안에서 너와 시르젤을 짝지어주려고 하는 것 말이야. 네가 우리 시르젤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머리가 꽉 찰 만큼 고민하고 있을텐데, 다들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으니, 많이 힘들겠지." "맞는 말이에요. 다른 건 둘째치고, 제가 좀 남자답지 못하게 생긴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여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다고요!" "그렇겠지." "차라리 나와 그렇게 결혼하고 싶다면, 시르젤이 여자가 되라고 하세요!" "호호. 그렇다면 시르젤에게 아주 마음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네?" "그... 그건." 윽. 생각해보니 오해의 소지가 엄청 있는 말이었잖아. 시르젤이 여자가 된다면 시르젤과 혼인해도 좋다는 승낙의 의미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으 니 말이야. 티아라가 너무 편하게 느껴지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이런 말 저런 말을 분풀이하듯 털어놔버렸다. 에구궁... 왜일까.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이는 티아라는 행동이나 말투 모두 평범한 아주머니나 할머니의 행동과 별다를 바 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성'에 게서 느껴지는 부담감이라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고 동성을 대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편하게 느껴졌다. "어쩐지... 신기하게도 티아라씨는 편안하게 느껴져요. 이렇게 불러도 되죠? 시르젤의 외할머니라는 걸 알았으니 마음대로 부를 수도 없고, 젊은 모습인데 할머니나 아줌마라고 함부로 부르는 것도 그래서 적당히 티아라 씨라고 불렀다. 다행히, 그녀는 그런 명칭으로 부르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호호. 그래? 그거 다행이구나. 그건 아마도 부담감이 없어서일거야." "부담감... 이라니요?" "카이엔 너는 대륙 전체에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사지? 그러다 보니 접근해오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어떤 목적을 띠기 때문이지. 듣기로는 가족 들 중에서도 너에게 대쉬해오는 사람이 있다고 하던데... 그러다보니 쉽게 마음을 쉴 안식처를 찾기 힘들었을 거야." 듣고 보니 티아라의 말에 맞는 면이 좀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가족들 중 가장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레이엔이었고, 학교에서 가장 잘 어울린 아이들은 치즈 패거리들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나에게 '특별한 무언가'를 절대 요구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부터, 그들과 동등한 '친구'는 절대 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이미 죽고 없지만, 이전 수학여행때 내게 접근했던 두 용병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었던 것도 산전수전 겪은 그들이 내게 넘지 않아야 할 선을 잘 알았던 게 아닐까. 이래저래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시르젤이 차를 나와 티아라의 앞에 각각 놓았다. 이제는 차에도 꽤 통달한 이몸이 무슨 차인지 흘낏 보니... 헉...! 이.. 이건... 이건! "시르젤. 손님에게는 좋은 차를 대접해야지. 이런 싸구려 레모네이드를 대접해서야 되겠니?" "죄송합니다. 제가 직접 만들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요. 다음에는 차 끓이는 방법도 좀 배워야 하..." "좋아요! 저 레모네이드 정말 좋아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레모네이드, 레모네이드다앗! 이 세상에 와서 음료수라고는 맨날 차 종류, 좀 시원한 거 찾으면 냉차밖에 못 먹어서 정말 질리던 상황이었는데 레모네이드라니! 기뻐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게다가 시르젤이 직접 만들어준거라니 그야말로 초 감동! 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레모네이드를 벌 컥 들이켰고 마지막 한 방울이라도 놓칠까봐 컵을 거꾸로 들어 잔을 완전히 비워버렸다. 너무 급하게 마시다보니 몇 방울이 입술 옆으로 흘러내 렸는데 나는 그것도 혀를 내밀어 완전히 핥아먹어버렸다. 맛있다아∼ "더 줘요!" "아, 네. 알겠습니다." 내가 레모네이드를 먹는 것이 뭐가 신기한지 시르젤은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다가 내 말에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대답하고는 다시 레모네이드 를 가지러 뛰어갔다. 정말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싸구려 탄산음료의 탁 쏘는 맛에 취한 나는 시르젤이 자기가 만든 음료를 정말 맛있게 먹어주는 나를 보고 가슴이 찡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제88화 : 로맨틱! 초여름밤의 바닷가 "와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TV에서, 비디오에서, 영화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그 바다. 바다가 지금 바로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양옆으로 넓게 펼쳐진 백사장에서 보이는 수평선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난 데 없이 평평했고, 드넓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짠내 가득찬 시원스런 바닷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나풀나풀거리게 만들었다. 나는 팔짝거리면서 끊임없이 백사장으로 밀려오는 바다로 뛰어가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이게 나 김상우... 아니 카이엔 브리타뉴와 바닷물과의 첫번째 접촉이었다. 시르젤의 외할아버지. 파라디스의 오해로 인해 생긴 시르팡의 집안, 케이리가 가(家)의 불편한 분위기 때문에 나까지 분위기에 말려 풀이 죽어 어쩔 줄 모르게 되자 티아라가 바다에 가서 해수욕을 하면서 기분을 풀라고 권했다. 시르팡의 본거지들 중 하나인 이 '시아와세노 비치'는 이런 경치좋은 바닷가에 위치한 점이나 아름다운 건물 외형으로 볼 때 별장 같다는 느낌 이 많이 들었다. 시르젤의 말로는 일단 주로 휴양지로 사용하는 건 맞다고 한다. 근데 그렇다면 무슨 다른 용도도 있는걸까? 나와 같이 수영을 하러 시르젤과 시르쥬가 같이 나왔다. 원래는 시르젤과 둘이서만 같이 가라고 했지만 내가 둘만 남겨지는 걸 거부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시르쥬도 같이 온 것이다. 시르젤과 둘이 같이 있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남들이 인위적으로 무언가 엮어 주려 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나는 정말 싫었다. 이런 세계에 우리 세계와 비슷한 수영복이 있다는 건 놀라웠다. 평소에는 겉에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지만 시르젤이나 시르젤 모두 널찍한 등빨에 탄탄한 몸매와 멋진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다. 같은 남자가 보아도 훌륭하다고 느낄 정도였으니까. 그렇다고 어디 미스터 코리아 선발하는 것처럼 근육과 기름으로 떡칠된 몸은 절대 아니었다.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멋진 남성배우들의 상반신 탈의 모습 같다고나 할까? 반면에 나는 남자면서도 수영복 외에 위에 헐렁한 셔츠를 하나 입고 있었다. 뭐 일부 여자들이야 귀엽다고 좋아할 지 모르지만 체격이 작고 어 깨도 좁은 나를 벗겨봐도 멋진 몸매가 나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고 실제로도 그러했으니까, 암만 생각해봐도 그대로 드러내는 건 창피 했다. 시르쥬는 따로 셔츠를 하나 더 입는 나를 보고 비웃더니 어디론가 달려가 뽕이 잔뜩 든 여자수영복을 가져와 내게 내밀었고 나는 시르쥬의 정강 이를 힘껏 걷어차주는 걸로 그의 호의에 화답했다. "자, 들어가. 들어가라구 빨리. 언제까지 밖에서 죽치고 놀거야?" "와앗!" 바닷물에 발만 살짝 담근 채 백사장에서 첫 해수욕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에 취해 있는 나를 시르쥬 녀석이 뒤에서 확 밀어버렸다. 우와아아악! 다행히도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몇 걸음 앞으로 떠밀려 갔고 깊어진 수심은 어느새 키가 작은 내 허리까지 물에 잠겼다. 그리고 때맞춰 몰아닥친 파도, 나는 순간 균형을 잃고 파도에 휩쓸려 넘어져 버렸다. "우와아악!" 넘어지면서 입안에 바닷물이 조금 들어왔다. 우엑∼ 짜다! 소금기가 몸에 둘러붙는것이 확실히 목욕탕이나 수영장에서의 감촉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카이엔 씨!" 화들짝 놀라 순식간에 첨벙거리며 바닷속에 뛰어들어와 나를 건져올리는 시르젤. 어어? 조금 놀라 넘어지긴 했어도 이정도 깊이면 충분히 혼자 서도 몸을 일으켜세울 수 있었는데. 역시 시르젤씨는 배려깊은 사람이다. 그에 비하면 저 시르쥬녀석은... 으드득! 형을 좀 본받으란 말이야 형을 좀! "시르쥬. 장난은 적당히 해." 꽤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시르쥬를 노려보는 시르젤. "칫. 그정도 장난가지고 뭘 그래?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은걸. 자기 애인이라고 되게 챙기네." "시르쥬!" 나와 시르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아. 아. 그래요. 그래. 방해꾼은 사라질테니까 둘이서 잘 놀라구." 뭐... 뭐야? 애초부터 이런 걸 노렸던 거야? 시르쥬는 우리가 항의하자 곧바로 바위 너머로 뛰어가 맞은편 바닷가로 사라져버렸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였던 사이엔 형에는 못 미치지만 뭐라고 얘기해 볼 틈도 없이 빠른 속도였다. 앗 하는 사이에 그만 시르젤과 나 단 둘만이 바닷물 속에 몸을 반쯤 담근 채 남아있게 되었다. "가버렸네요. 아하하." 어색하게 웃는 나. 으윽. 이 상황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해야 한단 말이야?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감 을 잡을 수 없다. 안돼. 안돼. 이러면 안돼.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내가 시르젤을 엄청 신경쓰고 있다는 증거잖아. 자연스럽게. 평소처럼 자 연스럽게 행동하면 될텐데 왜 그게 안될까. 으윽. "아직 초여름입니다. 조금 춥지 않으신지요?" "괘... 괜찮아요. 저... 전 전혀 문제없어요. 이렇게 바다에 와서 얼마나 좋은데요." 말투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는 나와 달리 시르젤은 과연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게 특별한 관심이 있는건지, 아니면 그냥 친절한 것 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와 같은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배려깊은 시르젤. 평소와 다름없는 그 모습을 보니 나도 평상심으로 되돌 아가는 듯했다. "수영할 줄 아십니까?" "아뇨... 바다는 처음이에요. 수영도 처음이고." "그렇습니까... 그럼 깊이 들어가지 말고 해변 가까이에서 놉시다." "알았어요." 하지만 이왕 바닷가에 온 거 이것저것 많이 놀고 싶은데 한가지 억울한 게 튜브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튜브가 있다면 바다에서 둥둥 떠서 여기 저기를 물장구치며 돌아다닐 수 있을텐데... 그때 문득 한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시르젤, 우리 모래성 쌓지 않을래요?" "모래성... 말입니까?" "네. 평소에 꼭 해 보고 싶었어요." 모처럼 바다에 왔는데 물에서 충분히 놀것이지 왜 모래성을 쌓느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동안 물과는 그다지 인연을 맺지 못한 나는 바다 에 와서 제일 하고 싶은 일이 모래가지고 장난치는 일이었다. 모래성을 쌓는다는지, 머리만 빼고 모래에 파묻힌다던지 하는 것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손도손(?) 모래성을 쌓는 시르젤과 나. 평소에 손놀림이 별로 좋은 게 아니라 이리저리 비뚤어진 부분이 많았지만 시르젤이 도와 줘서 그래도 꽤 모래를 성 비스무리하게 보이게 쌓을 수 있었다. 시르젤은 역시 괴도라 그런지 몰라도 손으로 하는 일에는 꽤 센스가 있었다. 그 리고 이제 비닷물을 끌어와서 해자(垓字)를 만들려고 하는데... 그때 갑자기 무심한 파도가 해변으로 밀어져 기껏 만든 모래성을 무너뜨려 버렸 다. "어. 어?" "슬슬 만조(滿潮)시간이군요. 바닷물이 여기까지 올라오는 걸 보니." 시르젤의 말을 듣고 주위를 살펴보니 해변 폭이 확실히 좁아져 있었다. 게다가 해도 거의 넘어가서 저녁놀이 지고 있었다. 어어? 벌써 시간이 이 렇게 된 건가? 얼마 논 것 같지도 않은데. 아무래도 모래성을 너무 열심히 짓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 같다. "늦었네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더 놀고 싶었지만, 초여름의 밤에 열대야가 있을 리는 없으니 아무래도 좀 싸늘하겠지. 시르젤은 그 런 나를 보고 한가지 제안을 했다. "시아와세노 비치에는 제가 아는 명소(名所)가 한군데 있습니다. 밤에 보면 정말 찬탄을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멋진 곳이죠. 가시겠습니까?" 에에? 밤에 단 둘이서만 어디로 가자고? 나는 순간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가 바로 머릿속에서 지웠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무리 주변 사람들이 시르젤과 나와의 관계를 띄워주고 여자로 만드니 어쩌니 해도 난 남자잖아? 남자 둘끼리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그 런 놈이 변태지. 하도 주변이 시끄러워서 내 스스로도 나자신을 반 여자쯤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뭐 세상에는 간혹 남색(男色)을 밝히는 괴팍 한 남자들도 있다지만 멋진 남자의 표상인 시르젤씨가 절대 그런 짓을 할 리 없잖아? "갈께요. 여기서 멀어요?" "조금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좋아요. 가요." 나는 시르젤의 뒤를 따라서 걸었다. 하지만 시르젤은 뒤에서 걷지 말고 나란히 같이 걷자고 제안했다. 나는 처음에는 무슨 생각이 있나 라고 잠 깐 의심했지만 시르젤은 내게 손을 맞잡자니 또는 팔짱을 끼자니 하는 느끼한 요구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다. 것봐. 역시 괜히 남자들끼리 이상 하게 엮어주려는 사람들이 변태인거라고! 시르젤은 이렇게 정상적인 남잔데 말이야. 나도 물론이고 말이지. "바위?" 한 30분쯤은 걸었을까? 시르젤과 나란히 걸어 도착한 바닷가 한구석에는 기묘한 모양의 바위가 하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꽤 큰 바위다. 아마 5층짜리 아파트 높이 정도는 되는 바위였다. 그리고 바위의 가장 높은 한 쪽 끝은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었다. "네. 저 바위 위가 그 명소입니다." 흠. 그렇다고 저 위에 올라간다 해도 경치가 달라 보이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든데. 그래도 시르젤이 허튼 소리를 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기 때 문에 나는 시르젤을 따라 바위 위로 올라갔다. 그 동안에 날은 완전히 어둑해져서 별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바위 꼭대기까지 올라왔을 때 "우와아."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와아." 단순히 조금 위에 올라온 것 뿐인데도 위에서 보이는 바다와 밑에서 보이는 바다는 어딘가 틀렸다. 별들이 가득찬 하늘도 주변 지형의 방해없이 달빛 아래서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경치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어떠한 인공적인 불빛의 방해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명화된 사회를 살아온 내게 있어서는 불빛의 방해를 받지 않는 밤의 아름다움이라는 건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도시는 항상 휘황찬란한 야경 이 어두운 하늘을 밝힐 정도로 난무하고 웬만한 시골에서조차 전기불과 가로등이 들어와 밤하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우리의 염원 을 물거품으로 만든다. 게다가 거 환경오염은 오죽 심한가? 남산타워에는 꼭 비온 다음날 올라가야만 서울 전경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게 현실이 잖아? "우선 여기 앉으십시오. 어떠십니까?" "멋져요. 너무너무... 이런 광경은 처음이에요." 단순히 위에만 올라왔는데 이렇게 기분이 달라지다니... 나도 꽤 센치한 측면이 있나 보다. 나는 우선 시르젤의 권유에 따라 바닥에 앉았다. 바위 꼭대기에는 꽤 넓적한 바닥이 있어 몇 명은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렇게 감상에 취해 파도소리를 들으며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고 있 을 때 시르젤이 말을 꺼냈다. "저는... 어릴 때 이곳에 자주 왔습니다. 아주 힘들고, 지쳤을 때였죠. 암살자 수업을 받다기 지칠 때면..." "아, 암살자라니요!? 시르팡... 그러니까 케이리가 가문은 괴도집안이 아니었나요?" "'시르팡'이라는 괴도의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듣지 못하셨나요?"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처음에 시르팡에 대해서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3년 전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정체불명의 괴도로 아무도 정체를 모르는 사람. 항상 왕 족이나 귀족, 또는 부자의 아주 값비싼 보물만 노리며, 범행 전에 반드시 노란 수선화와 함께 예고 편지를 보내는 대담함을 과시하며 그 시도는 엄중한 경비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그 전에는... 암살을 도맡았구나. "원래 우리 집안, 케이리가 가는 세상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정체를 아는 사람도 극히 드물고요. 하지만 음지에서 사는 사람이나 웬만한 지위와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 집안의 이름은 한번쯤 들어보았을 테지요. 브리타뉴 가의 분들도 거의 알고 계실 겁니다. [어둠의 암살기 계]라고 말이죠. 대륙에서 가장 이름높은 암살자 집단이었습니다." "그... 그렇다면 원래?" "네. 저희 집안은 원래 고액의 의뢰비를 받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시르쥬도 어릴 때부터 암살자가 되기 위한 수업 을 받았습니다." 헉. 너무나 놀라운 비밀이다. 내 동생 아이렌뿐만 아니라 전 대륙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정체불명의 괴도 시르팡의 집안이 원래 대륙 최고의 암살자집단인 케이리가였다니. 그래서 파라디스가 성을 밝혔을 때 그렇게 다들 놀랐었구나. 그런 건 절대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되는 비밀 일테니까. "그런 거... 가르쳐줘도 괜찮은 거에요?" "외할아버님처럼 우리 집안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만... 전 카이엔씨를 믿으니까요." "네에? 저를요?" "저번에 핀치에서 제 뒤를 쫓아오셨을 때 말씀하셨지요? 저를 믿으니까 납치당할 거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고요. 저도 마찬가지로 당신을 믿겠습니다." "시르젤 씨..." 시르젤이 나를 믿는다...라. 괴도 가문 시르팡이 사실은 추악한 암살자 집단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엄청 큰일이 나겠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날 믿고 그런 걸 가르쳐주다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시르젤은 정말로 좋은 사람. 믿고 신뢰할 사람인 것 같다. 물론 저번에 미렌 모습일때 날 덮친 나쁜 악한처럼 얼굴만 선량한 사람도 있지만 시르젤은 절대. 절대 그런 사람일 리가 없겠지? 시르젤과는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지금의 내 바람이다. "이야기가 많이 빗나갔군요. 암살자 훈련은 아주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었습니다. 카이엔 씨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을 많 이 겪었습니다. 네. 그랬습니다. 사실은 이곳에 온 것은 이 바위 위에서 그대로 바닷속에 뛰어내려 생을 마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랬군요." 암살자 수업이라. 내가 그런 걸 잘 알지는 못하겠지만 무슨 특수부대 훈련하는 것만큼 엄청 빡신 거겠지. 그런 훈련을 어릴때부터 받았으니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을 거야. 근데 그런 와중에서도 이렇게 곧게 자라나다니 대단한 사람이다. 나라면 반쯤 미쳐버리거나 시르젤의 말대로 자살해 버렸을텐데. "하지만 이 바위 위에 서서 드넓은 바다와 찬란한 별들을 바라볼 때마다, 격한 마음은 진정되고 피끓는 혈기는 가라앉아 그럴 마음이 없어졌습니 다. 그 뒤로 저는 마음 속 어디엔가 우울한 일, 슬픈 일, 괴로운 일이 생길 때마다 여기에 올라와서 하늘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곤 했습니다." 수영복에 소금기 젖은 셔츠 한 장으로는 조금 서늘해진 밤공기 위에 울리는 시르젤의 목소리는 말할 수 없이 편안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어딘가 모르게 안심이 된다고나 할까. "사실... 여기에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올라오는 건 처음입니다." "그... 그래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아닙니다. 꼭 한번 카이엔 씨를 데리고 올라오고 싶었습니다." "고... 고마워요." 괜찮아? 자기자신만의 추억이 어린 소중한 장소에 날 데리고 올라와도... 그만큼 날 소중하게 생각해준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파도치는 바닷가의 별밤의 분위기는 괜히 내 기분을 묘하게 두근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어? 왜... 왜?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걸까나. 여자와 같이 데이트하 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어쩐지 이상한 기분에 나는 시르젤 옆에서 일어서서 바다 쪽으로 다가갔다. 계속 옆에 있다가는 나도 모르게 기분이 아찔해질 것만 같았다. "위험합니다. 돌아오십시오." "괜찮아요. 좀더 가까이서 바다를 느끼고 싶은 것 뿐인걸요. 그리고 어둠이라면 문제없어요." 별빛과 달빛이 바다를 비추고 있었지만 이미 어둠이 깔린 바다는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둠 속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지지 않기 위해 빛의 하 급정령 위즈를 불러 주변을 밝히게 했다. 이제는 꽤 정령들 쓰는 것도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그래봤자 하급정령들뿐이긴 하지만... 불을 밝히자 시르젤이 걱정스런 표정이 눈에 비쳤고 나는 안심하라는 듯 싱긋 웃음지었다. 문득 레이엔의 예지의 귀걸이 생각이 난 나는 앞으로 시르젤과 나와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궁금증이 들어 한번 귀걸이를 작동시켜 보기로 결심했다. 설마 케이리가 가문 사람들이 말하는 데로 둘이 엮어지는 말도 안 되는 결과는 안 나오겠지 라고 비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와 바닷바람의 서늘한 감촉을 온몸에 느끼면서 나는 머릿속에 영상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보여줘... 어둠의 터널 저 끝에 어떤 영상이 들어왔다. 허거거걱? 저건 뭐냐? 영상속에 보이는 건 바로 내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머리를 감싸쥐고 흔들며 절규하고 있었다. 시르젤이 옆에서 날 말려보지만 나는 도통 말을 듣지 않고... 주변 집기를 닥치는 대로 때려부수면서 밖으로 달려나가는 나. 그런 나를 뒤쫓는 시르젤. 뭐야?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하지만 집중력의 머리띠도 집에서 안 가지고 나왔는 데 더 이상 정신 집중해서 영상을 보는 건 힘들었다. 그래도 더 봐야지. 더 봐야지 하고 보고 있는데... 윽. 더 이상은 못견뎌. 이젠 한계야. 눈을 뜨자 세상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 뭐지? 지진인가? 헉. 그러고보니 흔들리는 건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잖아! 개량형 예지의 귀걸이는 이 전처럼 강제적인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사용이 자유로운 대신 정신력 소모가 너무 컸다. "카이엔 씨, 위험합니다!" 황급히 놀라 달려오는 시르젤. 괜찮아. 조금 어지러울 뿐 이정도는 버틸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한 걸음 내딛었을 때 나는 곧 내 발에 밟히 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왁! 맞아, 그렇지. 나는 바위 위에서 바다 쪽 가까운 곳에 서 있었지! "우아아아악!" "카이엔 씨!" 나 살려어! 물론 이 높이에서 떨어져도 기혈환 덕택에 큰 상처를 입지 않고 많이 아프지도 않을 거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런 걸 알고 있다고 해 도 단번에 적응할 수는 없는 법이잖아. 엄마야. 무서워어! 풍덩. 내 몸이 바닷물에 빠지는 소리. 웁! 계산 착오다! 바다에 빠질 줄은 몰랐는데? 그러고 보니 저 바위 위는 바다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었지. 안돼! 난 수영 못한다고! 아무리 무한의 팔찌가 있더라도 물 속에서 숨을 쉬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뭔가 다른 마법무구를 이용하면 방법이 있지 않을 까... 하고 생각하려 했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더 이상 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던 것이다. 꼬로로록. 짜디짠 바닷물이 내 뱃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으으으... 괴로워. 고통스러워. 더이상 참을 수 없어 벗어나고 싶은데도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다. 흐 릿해져만가는 눈앞. 힘이 빠져가는 손발. 괴로움을 참지 못해 입을 열면 쏟아들어오는 바닷물에 더욱 괴로워만지고, 그렇다고 입을 닫고 있어도 괴롭고, 그런 가운데 나는 자꾸 밑으로 가라앉아갔다. 이런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죽고만 싶어... 나는 정신을 잃었다. "괜찮으십니까? 카이엔 씨?" "으음..." 뭐지? 으윽... 내가... 아직 살아.. 있나?" "다행입니다. 정신을 차리셨군요." "우... 우... 우웩!" 정신을 차려도 일어날 힘이 하나도 없는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바닷물을 토해냈다. 짜디짠 느낌이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지만 바닷물을 뱃속에 가득 채우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하아... 하아..." "괜찮으십니까?" "네... 하아... 시르젤씨가... 절 구해주셨나요?" 나는 바닷물을 한번 더 토해내고 입을 손으로 닦으며 말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펴보니 아까 올라갔던 바위에서 조금 떨어진 백사장 위였 다. "네. 정말 놀랐습니다. 정말 큰일날 뻔했습니다. 숨을 쉬지 않았으니까요." 숨을 쉬지 않았는데 지금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건... 설마!? "그... 그렇다면 시르젤 씨가... 인공호흡... 을 해주신 건가요? 제게?" "그... 그렇다면 시르젤 씨가... 인공호흡... 을 해주신 건가요? 제게?" "네... 그렇습니다. 숨을 쉬지 않았으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 혹시... 그 일에 대해서 기분나쁘시거나 하는 건..." "아, 아뇨. 생명을 구해주셨는데 저는 감사할 뿐이지요. 그런 건 전혀 신경 안써요. 아하하." 시르젤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왜그런지 내게서 시선을 피하고 있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에 피가 몰려드는 게 묘하게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것도 같았다. 묘한 기분. 인공호흡이라고는 하고, 나는 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러고 보면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입 술과 입술을 맞댄. 일종의 첫 키스가 아닌가? 평소라면 인공호흡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남자랑 입을 맞댄 찝찝한 기분이 들었겠지만 상대가 시르젤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파도치는 별밤의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인지 오히려 상기된 기분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나는 가만히 입술에 손을 대면서 그 감촉이 어땠는지 기억해내려고 했지 만... 잉? 근데 지금 내가 왜 그런 걸 기억해내려 하고 있는 거지? 여자랑 키스한 것도 절대 아닌데 말야. "돌아가죠." 어둠이라는 모든 것을 가려주는 마법의 시간 때문일까? 이대로 계속 어색하게 있다가는 기분이 이상해질 것 같고 무슨 사고(?)라도 터질 것 같 은 예감에 나는 돌아갈 것을 청했다. "그러지요. 일어서실 수 있겠습니까?" "네. 아무 문제 없... 앗!" 나는 자신있게 일어섰지만 곧이어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다시 균형을 잃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시르젤이 나를 받쳐주었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번 시르젤의 품안에 안기는 꼴이 되었다. 아아. 창피해. 왜 자꾸 이런 일만 생기는 거야. 나한테는. "무리하지 마십시오. 일단 제 등에 업혀서 갑시다." "네." 이대로 스스로 걸어가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싶어도 지금 상태로는 제대로 걸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새롭게 얻은 나의 육체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연약하고 가늘었다. 이전 한국에서 생활하던 걸 생각하며 육체를 움직이려 하면 당장에 몸에 무리가 가버리고 만 다. 나는 시르젤의 뒤에 업히면서 말했다. "빛의 정령... 불러드릴까요? 어두워서 길이 잘 안보일텐데." 사실 시르젤의 얼굴도 윤곽 외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단지 목소리만 듣고 그가 시르젤이라는 사실을 알 뿐이다. "괜찮습니다. 저는 어둠 속에서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암살자 수업을 받았다고도 할 수 없지요." "그렇네요." 하기야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암살자는 다른 사람보다 어둠을 보는 능력이 뛰어나지 않으면 안되겠지. 어둠 속에서 불안해할 나를 안심시켜 주 려는 목적인지, 시르젤은 나를 업고 걸으면서 계속 이야기를 꺼냈다. "괴롭기만 했던 암살자 과정입니다만, 오늘만은 그 괴로움을 이겨낸 보람을 느끼는군요." "보람요?" "네.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면, 저는 카이엔 씨를 구할 수 없었을테니까요." 아, 맞다. 지금은 밤. 불빛이 없기 때문에 밖에서도 이렇게 잘 보이지 않는데 바닷속은 당연히 바깥보다 훨씬 어두워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 을거다. 그런 와중에서도 날 건져내다니, 시르젤에게 다시 한번 고마운 감정을 느끼는 동시에 시르젤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시르젤 씨한테는 도움만 받고, 죄송하기 그지없네요." 지금의 내겐 이전에 시르젤이 나를 한번 납치했고 그래서 본의아니게 셰더놈한테 여자가 될 뻔했다는 사실은 기억의 저편 너머로 멀리멀리 사라 져 있었다. "아닙니다. 다 제가 원해서 하는 거니까요. 전혀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어째서... 시르젤 씨는 제게 이렇게 잘해주시는 거죠?" "하하. 아닙니다. 저는 항상 모든 사람을 이렇게 대하려고 노력..." "아녜요..." "네?" "아니라고요! 겉으로는 모든 사람들한테 친절하고 잘해주지만... 제게는 좀더 특별히..." "그렇지 않습니다. 특별히 카이엔 씨에게만 다른 사람보다 훨씬 잘 대해준 기억은 없습니다." "....." "카이엔 씨?" 뚝. 뚝. 왜그럴까? 단호하게 말하는 시르젤의 말에 나도 모르게 절로 눈물이 떨어졌다. 항상 친절하고 예의바른 사람. 물론 그게 시르젤의 기본 성격이라 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게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관심을 가지고 더 잘 대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 르젤은 내게만 딱히 친절하게 대한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그 말이 이렇게 슬픈걸까? 왜 이렇게 가슴이 아파 오는 걸까? 어째서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걸까? "흐흑... 으흐흑." "카이엔 씨. 왜 그러십니까? 말을 해보세요." 시르젤은 내가 울자 당황스러워하면서 날 모랫바닥에 내려놓고 물었다. "거짓말쟁이! 날 믿는다고 했으면서! 그 바위에 처음으로 초대해 줬다고 했으면서! 그런데 그게 다 거짓말이에요? 남들에게도 다 똑같이 그렇게 입바른 소리를 하는 거에요?" "카... 카이엔 씨!" "듣기 싫어요!" 시르젤이 쩔쩔매면서 날 말리려고 했지만 나는 말을 듣지 않고 시르젤의 팔을 뿌리쳤다. "그런 식으로 남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지 말... 읍!" 왜 분에 찼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창 울분에 젖어 징징대던 나를 말리기 위해 시르젤이 택한 방법은 입을 막아버리는 방법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입으로. 나는 더이상 울지도 못한 채 눈앞에 있는 시르젤의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모랫바닥에 같이 풀썩 넘어져 버렸다. 원래대로라면 팔로 시르젤을 밀쳐내야만 했겠지만 어째서일까? 갑자기 온몸의 손발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아∼ 이 상한 기분... 그런데 그렇게 몸에 힘을 탁 빼고 눈까지 살짝 감고서는 될대로 대라∼ 는 식으로 자포자기하고 있었는데 시르젤은 내 입에 맞닿은 입술을 떼냈 다. 어? 왜 차려 놓은 밥상을 거부하... 는게 아니라 에... 그게 뭐지? 헉! 그러고보니 시르젤한테 키스당했다아! 그것도 제대로 된 첫 키스르을! 물론 딥 키스가 아니라 아쉬운 기분이 있는... 게 아니라 뭐야, 이거? 어떻게 된거야? 기분이 딱히 나쁘기보다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어리벙벙한 상태랄까. "이제 진정되셨습니까?" "...네. 이젠 키스마저 남들과 특별히 다른 게 없는 거라고 하실 건가요?" 나는 입술을 쭉 내밀고 삐진 감정을 그대로 시르젤에게 내비쳤다. "후우... 기억나십니까?" "뭐가요?" "제가 카이엔 씨를 납치하러가기 전에 처음으로 보낸 예고장 내용 말입니다." "그게... 뭐였죠?" 시르젤 녀석. 말을 돌리는 건가? 하지만 정말로 내 나쁜 머리는 그 예고장의 내용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날 납치하러 온다고 쓴 게 아니었나?" "사랑하는 카이엔 브리타뉴에게. 오늘 밤 자정에 당신을 훔치러 찾아가겠습니다. 그대를 격렬히 사모하는 시르팡. 룬. 와크레이." 에엑? 첫번째 예고장이 저런 내용이었나? 왜 그때는 별로 신경 안쓰고 무심히 넘겼지? 하기야 그때까지만 해도 정체불명의 괴도, 시르팡이라는 존재는 별로 내 마음 속에 박혀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나에게 이런저런 어택을 가하는(지금도 별로 변한 건 없지만)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고 새 학교와 새 친구들에게 적응하는 일때문에 거기에 큰 관심을 쏟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설마 납치가 성공하리라고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말이야. "그때부터, 쭉 진심입니다." "뭐... 뭐가요?" 내가 되묻자 시르젤은 살짝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헛기침을 약간 했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어둠 속에서도 내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는 그의 눈동자에서는 불꽃이이 타오르는 듯했다. "처음부터, 당신을 좋아했습니다. 카이엔 브리타뉴 씨." "처음부터, 당신을 좋아했습니다. 카이엔 브리타뉴 씨." 그 말에 나는 얼어붙은 듯 굳었다. 몸을 움직이려 해도 움직일 수 없었고 숨이 막힐 듯한 복잡한 감정이 몸 전체를 휘감아쳤다. 좋아합니다. 남 녀를 불문하고 누구라도 사랑하는 이에게서 듣고 싶어하는 그 말. 물론 내가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세이렌 누나나 사이엔 형, 아 이렌, 그리고 학교의 다른 많은 여성들이 입에 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말이다. 내가 좋다고, 사랑한다고 말이야. 하지만 방금 들은 시르젤의 말은 단어는 같으면서도 다른 감정이 전해져왔다. 역시 같은 고백을 하더라도 분위기라던가 장소라는 게 중요하다는 말은 이래서 나온 걸까. 밤중에 바닷가에서 듣는 그의 말은 다른 사람의 말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진심과 나를 향한 마음이 느껴졌다. "지... 진짜에요?" 나는 그가 내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 거짓말이죠? 거짓말. 아무리 특별히 대해 준다 해도 같은 남자한 테 연애감정을 느낄 리는 없잖아? 다른 사람들이 주위에서 암만 충동질해도 시르젤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라니... 어쩌 지? 어떻게. 난 어떡해야 좋은 거야? "거짓말이 아닙니다." 확인 사살. 으아아아아악! 온몸이 전율로 떨렸다. 두려웠다. 말할 수 없이 두려웠다. 그가 진심이라는 걸 알기에 더욱 그러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시르젤이 내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시르젤의 충격발언을 듣고도 내가 전혀 싫거나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웠다. 자신있게 거부하기는 커녕 심장 박동수가 올라가고, 자꾸만 얼굴을 피하게 되는 나 자신의 모습이 난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다. "떨고 계시는군요..." 나는 시르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지만 어둠속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는 시르젤에게는 내가 보일 것이다. 이런 법이 어딨어! 불공평하잖아! 나 는 시르젤이 얼굴에 무슨 생각이 씌여 있는지 전혀 읽을 수 없잖아! "카이엔 씨는... 제가 싫으십니까?" "아... 아녜요! 그건 절대 아녜요! 전 시르젤 씨를 전혀 싫어하지 않아요!" 시르젤의 씁쓸함이 담겨 있는 듯한 말에 나는 황급히 그의 말을 부정했다. 내 자신이 시르젤을 연애상대로서 좋아한다고 인정하는 건 싫었지만 시르젤에게 미움을 사는 건 더욱 더 싫었다. 시르젤이 내게 관심을 쏟아줬으면 좋겠어. 시르젤이 날 바라봐줬으면 좋겠어. 시르젤이 날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시르젤이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전... 전... 전..." 더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텅 비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알수 없이 상기된 기분에 나는 넋을 놓고 시르젤의 앞에서 멍하니 바보처럼 앉아있는 것 뿐이었다. "...아무래도 괜한 말을 했나 봅니다. 제가 카이엔 씨를 힘들게 하고 있군요." "그...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만..." "오늘 했던 말은 잊어 주십시오." "시르젤!" 나는 깜짝 놀라 막무가내로 시르젤의 팔을 붙잡았다. 시르젤의 팔은 그렇게 굵지는 않았지만 근육은 안으로 단단하게 붙어 있다. 확실히 운동을 한 남자의 팔이다. 평소라면 남자의 팔에 매달리는 건 엄청난 꼴불견이겠지만 지금 이순간 나는 그런 것 따위는 거의 개의치 않고 있었다. 불타 오르는 젊음의 육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차라리 세이렌 누나나 양심에는 퍽퍽 찔리겠지만 아이렌 쪽을 상대하는 게 훨씬 나을 거다. 하지만 내가 시르젤의 팔에 매달린 건... 오로지 그를 놓치고 싶지 않은 내 진실한 마음이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하지만... 난 어떡해야 할지 정말로..."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무엇을 얻고 싶어서, 무엇을 잃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시르젤의 팔에 매달려 있는 걸까. 자꾸만 횡설수설하는 것이 나 자신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내 머리를 시르젤이 다른 손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진정하시고, 제 등에 업히십시오. 집으로 돌아가야죠?" "그렇지만 전 아직 대답을..." "전... 사실..." "네?" "저는 사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껏 많이 주저하고, 겉으로도 그런 인상을 전혀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카이엔 씨의 미움을 사고 싶지 않기에... 그래서 방금 전에 고백했을 때, 전 카이엔 씨가 절 미워하고, 외면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시르젤 씨를 미워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저야말로... 자칫 대답을 잘못 했다가 시르젤 씨가 저를 미워하게 될까봐..." ...엇갈리고 있었던 걸까. 지금까지 서로... "카이엔 씨가 저를 미워하지 않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저도... 시르젤 씨가 절 싫어하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그러니까...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시르젤 씨의 고백에, 반드시 대답할거에요. 만 약에 제가 거절하더라도, 시르젤 씨는 절 미워하지 않을거죠?" "네.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습니다. 당신만을..." 시르젤의 마지막 말은 지금까지 들은 그의 어떤 말보다도 굳은 결의가 넘쳤다. 아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걸까. 이상한 분위기에 취해, 이상 한 말만 떠벌여 버렸으니 말이야. 하지만 이상한 기분. 시르젤에게 그런 말을 듣고, 그런 말을 했는데도 위화감이라던지, 거부감이라던지 하는 게 전혀 들지 않으니 말이야.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결국 그 말들이 진실일런지도 모르겠다. 안되겠어. 지금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기에는 머리가 너무 복잡해. 조금 쉬고 나중에 생각해봐야지. 별들이 변함없이 어둠의 치마폭에 싸인 밤하늘을 수놓는 가운데, 나는 시르젤의 널찍한 등 위에 편안하게 업혔다. 초여름밤의 날씨가 아직 추워 서일까? 시르젤의 등은 서늘한 날씨 속에서도 더없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휴우. 오늘 하루 감정이 너무 왔다갔다 했더니 피곤하다. 자칫하면 바 닷물속에 빠져 익사할 뻔도 했고 말야. 나는 졸음을 느꼈고 시르젤의 등 위에서 금방 새근새근 잠들어 버렸다. - 다음 날 -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요. 여기서 저희 집까지는 금방인걸요. 시르젤 씨야말로 우리 집에 너무 가까이 왔다가 발각되는 날에는 그날이 제삿날이 될걸요? 집안 사람들이 저번 선물을 보고 죽여버리겠다고 벼르고 있는데..." "걱정 마십시오. 카이엔 씨의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절대 죽지 않을 겁니다." 우웁! 나는 고개가 시뻘개진 채 고개를 숙였다. 으아아아아아. 시르젤은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왜 거기에 장단을 맞춰 응답해 버린걸까? 이건 모 두 그놈의 밤바닷가와 별밤 때문이야. 그것 때문에 괜히 이상해져서 둘다 모두 쓸데없는 말을 꺼내버린거라고!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시르젤은 이미 진심을 고백해버렸고, 나도 일단 대답은 미뤄놨지만... 그에게 호감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 이제부터인가... 그 시르팡인지 케이리가인지 하는 집안 사람들의 뒷꿍꿍이가 실현되느냐 마느냐는 말이야. 휴우. 그만두자.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겠지. 지금 그걸 자꾸 생각하려면 머리가 복잡하고 피곤해.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겠지요? 시르젤 씨." "반드시 그렇게 될 겁니다. 카이엔 씨.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시르젤 씨도요. 그럼..." 혹자는 왜 작별의 키스 같은 걸 하지 않냐고 떠드는 사람도 있겠지만, 글쎄. 나랑 시르젤은 아직 그런 관계 아니라니깐! 어제는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뻘짓을 좀 하긴 했지만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지금은 절대 그런 로맨틱... 이 아니라 호모스런 상황은 있을 수 없는 일이얏! 그렇게 시르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는 우리 집 정문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10분 정도 걷자 우리 집 대문이 보였고 멀리서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날 알아보고 소리쳤다. "카... 카이엔 도련님!" 나를 보고 휘둥그레 놀라 뛰어오는 문지기. 그래도 문은 지켜야 하니까 두 사람 중 한명만 뛰어온다. 그래 셰더한테 납치당했다 갑자기 돌아왔으 니까 놀랍겠지. 그런데 문지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했던 말과는 좀 달랐다. '무사하셨군요!', '어떻게 되신 일입니까?'같은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다행입니다! 빨리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봐! 빨리 말 준비해!" 문지기가 급히 내 손을 잡아끌었고 다른 문지기는 옆에 묶어 놓은 비상용 말을 데리고 왔다. "무... 무슨 일 있어? 다들 왜 그래?" "서두르십시오! 레이엔 도련님이 위독하다구요!" "뭐... 뭐어?" 뒤통수로 머리를 한 대 두들겨맞은 느낌.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시아와세노 비치'에서 묵는 동안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나는 급히 말을 모 는 문지기의 뒤에 올라타서 우리 집 본관으로 향했다. 이놈의 정원이 너무 넓은 것도 일단 문제는 문제였다. 제92화 : 아시에, 기억을 찾다. 콰당 나는 황급히 문을 열어젖히며 외쳤다. "레이엔!" "아, 카이엔 형. 무사히 돌아왔구나." 너무나도 태연자약한 레이엔의 말에 나는 순간 몸을 휘청거렸다. 그리고는 헐떡거리는 나를 부축까지 해주며 레이엔의 방까지 데리고 온 문지기 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뭐? 위독이 어쩌고 어째? "저... 그것이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됐어요. 나가 있으세요." 나는 숨을 가다듬으면서 문지기를 보냈다. 방안에는 레이엔뿐만 아니라 엄마와 세이렌 누나가 레이엔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뭐 생명의 위기를 넘겼는지 안 넘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레이엔의 몸상태가 좋지 않은 건 사실인 것 같다. "어떻게 된 거야?" "카이엔 형이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셰더에게 납치당했다고 들었는데..." "으응... 그건... 나중에 말해줄께.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아프다니." 이야기하자면 길고 또 적당히 꾸며낼 말도 좀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내 대답을 뒤로 미뤘다. "레이는 셰더가 널 납치해가는 걸 봤는데 그때 셰더의 흑마법 공격을 받아 쓰러졌어. 녀석이 지나는 길에 있는 사람들마다 흑마법을 난사했거 든." 세이렌 누나의 설명. 그... 그런 일이 있었어? 하기야 나는 마나티의 어깨 위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는데다 마나티의 난폭운전 때문에 정신을 차리 지 못하고 있었으니 셰더가 그 와중에도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었다. "카이를 찾아 쫓아가던 길에 쓰러진 레이를 발견했단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큰일날 뻔했어. 이제는 간신히 한숨 돌렸지." 엄마가 병상에 누워 있는 레이엔의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엄마는 언제나 그렇듯이 얼굴에 띤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그 미소가 조금은 힘 이 없어 보였다. 레이엔을 회복시키느라 그만큼 고생했다는 이야기겠지. "그나저나 카이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그 극악무도하고 나쁜 셰더가 널 그대로 놔줄 리 없는데... 말해! 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거야!? 만약에 카이 네가 그 사악한 마법사에게 옷이 강제로 찢겨지고 추행당해 그렇고 저런 일에다 요런 일까지 당했다면 난... 난..." "그런 일 안 당했어!" "정말?" "정말이라니깐!" 으휴. 납치당했다 무사히 돌아온 남동생한테 물어보게 '안 당했냐?'라니! 그렇잖아도 요즘은 마음이 심란한데 그런 식으로 말을 함부로 하면 내 여린 마음은 상처받는다구! "진정하고 형.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히 말해줘." 오오. 그래 그나마 우리집에서 제일 제정상인 사람은 오직 너뿐이야! 나는 속으로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내가 셰더에게 납치당했던 후 겪은 일들 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셰더는 시르젤을 협박해서 머신검을 얻어낼 목적으로 날 납치했다는 건 제대로 말했지만 시르팡의 휴양지에 내가 원해서 갔다는 점과 그들의 진짜 정체 등은 숨겼다. 그런 걸 이야기해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음... 그렇다고 너무 시르젤이라는 그 사람에게 마음을 놓아서는 안돼. 그들은 분명 형을 납치했고, 분명히 우리의 적이야." 레이엔은 내가 시르젤에 대해 가능한 좋게 말하는 것을 보고는 주의를 주었다. "그나저나 아이보다 더한 애가 있다니... 놀랐어. 정말 무서웠겠구나. 카이." 세이렌 누나는 날 감싸안고 등을 토닥이면서 말했다. 누난 그 마나티라는 아이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누 나, 아이렌 본인이 없다고 해도 그런 말 함부로 해도 되는 거야? "그러고보니 사이엔 형과 아이렌은 어디 있어? 또 아시에는?" "아빠랑 사이엔 형은 머신검 도난 사건의 마무리 때문에 궁궐에 남아 있어. 아이렌은 아시에 누날 돌보고 있고." "아시에가...? 무슨 일이야?" 아시에한테 무슨 일이 있나? 또 아이렌이 아시에를 돌보다니 그것도 별일인걸. 아이렌은 아시에를 싫어했잖아. 내가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을 때 레이엔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이야기했다. "카이엔 형이 납치당하고 난 이후에 아시에 누난 엄마와 헤어져 따로 셰더를 쫓아갔어. 그리고 한참 후에 왕성에서 달아나는 셰더를 발견했는데 그때 형은 없었대. 형의 이야기와 합해 보면 아마 형이 시르팡 일당에게 넘어간 뒤의 일이겠지. 아시에 누난... 두려워하면서도 끝까지 셰더와 맞 서다가... 당했어." "그... 그래서 시엔 어떻게 됐어? 괜찮아?" "몸은 괜찮아... 마왕을 소환하고도 살아남은 아시에 누나가 흑마법 몇 대 맞았다고 죽진 않으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그 흑마법이 정신계 마법이라 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어." "흑마법사들이 마도의 노예를 만들 때 이전의 기억은 소거시켜버리지. 하지만 셰더 같은 강한 흑마법사들은 그 기억을 다시 깨울 수 있단다. 셰 더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몰라도 시에의 기억을 다시 깨운 거야." "그건 더 좋은 일이 아닌가요? 기억을 찾는다면... 조금 혼란스러워 하긴 하겠지만." 레이엔에 이은 엄마의 보충 설명에 난 의아함을 느끼며 물었다. 하지만 엄마는 고개를 돌리면서 내 말에 답변했다. "셰더 정도 되는 자의 기억소거는 너무 철저해서 나정도 능력을 가진 신관도 쉽사리 기억을 깨울 수 없어. 무리해서 깊숙히 묻혀 있는 기억을 억 지로 깨워버리면, 뇌조직에 큰 손상을 입어버리지. 결국 대부분 죽거나, 식물인간. 그나마 잘 되어도 폐인이 되기 십상이야." "그... 그런!" "그래서 나도 시에의 기억을 깨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거란다. 그런데..." 엄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와중에서도 쓸쓸한 미소를 흘리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슬플 때면 확실히 슬퍼하는 게 좋을텐데... 엄마는 왜 이런 상황에서도 항상 미소만을 유지하고 있는 걸까? "그럼..." "기적을 바랄 뿐이야." 누나가 짧게 이야기했다. "한번 가 봐야겠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머리가 썩 좋은 편은 아닌 탓에 설명을 100%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셰더가 고의적으로 무리해서 아시에의 기억을 깨 웠고, 그 때문에 아시에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말까지는 알아들었다. "같이 갈께. 레이는 무리하지 말고 몸조리 잘해. 알았지?" "응. 누나. 엄마도 있으니까 괜찮아." 세이렌 누나가 나랑 같이 갈 것을 청했다. 난 특별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누나와 함께 아시에의 방으로 향했다. 아시에의 병세를 보기 위해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는 다시 한번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했다. "카이... 별일 없었어? 무사히 돌아왔네?" 사경을 헤매고 있다던 아시에는 간호하다가 잠든 것 같아 보이는 아이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침대 위에서 태연자약하게 앉아 있었다. 그것도 이전보다 훨씬 밝고 건강한 표정으로.크아아아아악! 다들 짜고서 날 놀리려 드는 거 아냐? 정신을 잃고 생사의 기로를 헤매고 있다던 레이엔과 엄마의 말은 어떻게 된거야? "시... 시에야! 일어난 거니? 몸은 괜찮아?" 황급히 아시에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고 흔드는 세이렌 누나.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던가. 까마귀 날면 배 떨어진다는 말. 뭐 아까 문지기도 그렇 고 엄마와 레이엔도 거짓말을 한 건 아니겠지만 딱 상황이 갑자기 이렇게 변하다니 말이야. "전 괜찮아요. 그리고..." 아시에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기억이 완전히 돌아왔어요." 집에 오자마자 정말로 놀랄 일만 잔뜩 일어나는 것 같다... - 잠시 후 - 집에는 우리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아빠와 사이엔 형도 긴급호출을 받고 자기 일을 전부 쫄다구들한테 넘겨버리고 와서 지금 이 방에는 아시에를 중심으로 아빠, 엄마, 세이렌 누나, 사이엔 형, 나, 아이렌, 레이엔, 그리고 집사까지 중요 인물이란 중요 인물은 모두 모여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지켜보고 있자 아시에는 부담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세이렌 누나와 엄마가 토닥거리자 주눅이 천천히 풀리는 듯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21년 전의 이야기에요. 저는 저 북방 왕국 로템의 시골 마을에서 사는 평범한 여자아이였어요." "로템이라. 지금은 이미 멸망하고 없는 나라군. 근데 21년전이면..." 사이엔 형이 무의식결에 중얼거렸다. 세이렌 누나는 사이엔 형에게 아시에의 말을 막지 말라는 눈치를 주었고 사이엔 형은 더 이상 이야기를 하 지 않고 입을 닫았다. 나도 저번에 공부 좀 했기 때문에 알아듣는다! 오오∼ 로템 왕국은 국민맵 로스트 템플의 약자... 가 아니라 20년전 마왕 디크로드가 부활했을 때 마왕군 쪽에 줄을 섰다가 12용사에 의해 마왕이 박살난 후 대(對) 마왕 연합군에 의해 철저하게 박살난 나라라고 나와 있었다. 하지만 보잘 것 없는 평민의 딸이 준(準) 대륙 7대 미소녀급에 육박하는 외모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주변과 교 류가 뜸한 북방의 시골이라면 말이다. 그녀가 14세 되던 해, 늙은 동네 영주는 아시에를 첩으로 보낼 것을 아시에의 부모에게 통보한다. 그리고 원래 이런 이야기가 다 그렇듯이 영주의 얼굴은 미노년하고는 유리수의 플러스 우극한에서 마이너스 좌극한까지 거리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떼를 쓰거나 울고불고해도 이런 조그만 동네에서 영주의 말은 곧 법인 것. 흔히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는 하지만 그런 경우는 희망이나마 있다. 그렇지만 법과 주먹이 같은 편이라면 벗어날 길은 더이상 없는 법이다. "차라리 자결할까도 생각했지만, 죽기는 싫었지요. 그렇다고 그 영주의 첩으로 들어가느니 죽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폭설이 쏟아지 던 결혼식 전날 밤중에 저는 몰래 마을을 떠났어요." 하지만 추위에 익숙한 북방인들이라고 해도, 옷을 아무리 두껍게 입었다고 해도 때는 한겨울. 그것도 눈보라가 내리치는 산길을 밤중에 걷는 것 은 무리였다. 하지만 아시에는 추위에 손끝 발끝부터 몸의 감각이 점차 사라져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마을에서 멀 리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따뜻한 곳을 찾아 밤동안 쉬어버리면 다음날 발견되어 끌려가기 십상이다. 아직 어린 소녀인 아시에가 갈 수 있는 거리 는 뻔하니까. 폭설 때문에 발자국은 남지 않겠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 근방의 지리에 대해서는 빠삭하니까 자신의 행적은 금세 발견될 것이다. 때 문에 한 걸음이라도 더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야만 했다. 다시 잡혀 들어갈 바에야 차라리 얼어 죽겠다. 아시에는 그 정도의 각오는 하고 마을을 나왔다. 하지만 몇 시간을 걸었을까. 새벽녘이 되어 추위는 훨씬 심해져 뼛속까지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다. 벌써 손발이 감각을 잃고 새파래진 지 오래였 다. 지금까지 어떻게든 버텼지만 이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아시에는 눈폭풍 속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아시에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음침한 지하실 속 쇠창살 안에 갖혀 있었다. 그리고 분명 잘라야 할 정도로 심하게 동상을 입었을 팔과 발 등이 아무 고통 없이 멀쩡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볼살을 꼬집어 봐도 꿈은 아니었다. 아시에의 주위에는 많은 여자들이 있었고 남자들도 몇명 있었다. 하지만 모두 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고 또한 그들 모두 눈동자 가 뒤집어 진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차분히 살펴보았다. 그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것이 방 금 전에 죽임당인 듯했다. 물론 아시에 자신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끼아∼ 악!" 엄청난 공포의 감정이 아시에를 뒤덮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면서 시체들과 떨어진 벽 쪽으로 붙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 때, 살아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쇠창살 반대편 바깥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응? 아직 살아있는 녀석이 있었나?"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시에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마법으로 만든 듯한 빛을 공중에 띄우면서 감옥으로 다가온 사람은 이제 어린애 티를 간신히 벗어난 듯한 소년이었다. 아시에보다 기껏해야 한두살 정도 많아 보이는. 아시에는 알몸의 부끄러움도 잊은 채 쇠창살 너머 있는 ' 살아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들... 다 죽었어요!" "응. 그렇지. 흑마법의 제물로 사용했으니까. 그런데 넌 왜 살아 있냐?" 어린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자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너 꽤 예쁘다 그래? 헤에∼" 그 소년은 벌거벗은 아시에를 보고 묘한 눈길로 그녀의 몸을 쓸었다. 그제서야 자신의 나신이 그대로 소년에게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필사적으로 몸을 가렸다. 소년은 그런 아시에를 비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쳇. 어린애 몸 따위 별로 볼 것도 없다고." 아시에의 이야기중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아시에의 말을 듣고 궁금한 것이 있어 그녀에게 물었다. "저어... 시에, 그 소년, 혹시?" "으응... 어렸을 때의 셰더야." 흐음. 그놈에게도 소년 시절이라는 게 존재하긴 했구나. 뭐 그때부터 변태짓이나 해댔을 게 뻔하지만. 따악 "아악!" 셰더 소년이 그렇게 중얼거릴 때 뒤에서 무거워 보이는 지팡이로 셰더의 머리를 두들겨 땅바닥에 내려꽂는 노인이 있었다. "쯔쯔... 그렇게 눈이 삐어서야 무슨 큰일을 하겠느냐?" "으으... 왜 때려요!!!" "여자 나이는 어리면 어릴 수록 좋다는 세상의 진리를 모르다니... 아직 멀었어!" "아무리 어려도 최소한 빵빵하게 잡히는 게 있어야죠! 스승님 같은 로리콘과는 비교... 아악!" 셰더는 자기 스승이라는 노인의 지팡이에 머리를 한 대 더 맞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아시에는 영문을 모를 말에 여전히 몸을 웅크려 가린 채 몸을 떨면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 어떻게 다 기억하고 있어요?" 어딘가 변태적인 이야기가 나오자 아이렌이 이상하리만치 눈을 빛내며 아시에에게 물었다. 아시에는 아이렌의 번뜩이는 눈빛에 당황스러워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럼 이야기 계속할께." 살짝 맞아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를 정도의 위력이면 살상무기로 쓸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지팡이었지만 셰더는 불굴의 정신력을 발휘하면서 비 틀거리긴 했지만 다시 일어서 스승앞에 섰다. "누가 로리콘이라는 게냐! 어리고 순결한 여자 제물은 흑마법에 딱 걸맞는 최고의 재물이자 모든 흑마법사들의 로망이야!" "제물은 둘째치더라도 로망은 개뿔의 로망..." 셰더는 그래도 한대 더 맞기는 싫은지 스승에게 간신히 들리지 않을 만큼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쇠창살을 경계로 셰더 바로 옆에 있던 아시에는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흠흠. 하여간 이정도로 많은 사람을 제물로 써야 하는 흑마법 의식에서 살아있다니 놀라운 일이군... 일단 그건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셰더! 너도 이제 제법 흑마법 흉내를 낼 줄 아니 슬슬 노예가 필요할 시기다. 이 아이를 마도의 노예로 삼거라!" "우이씽. 이왕 줄려면 좀 쭉쭉빵빵한 미녀를 주지 왜 이런 꼬맹이를 줘요?" "너도 꼬맹이잖냐. 나이도 비슷하고 딱 좋구먼. 딱 '조교'하기에 좋은 샘플이다. 이제부터 이 아이는 니가 키우기에 달린 거다. 훌륭하게 교육시키 거라." "웬일로 마음을 곱게 쓰는 건지 모르겠네요? 평소에는 건드릴 기회도 안 주시던 분이 갑자기 이 아이의 육성은 너에게 달렸다 라니..." "흠흠... 요즘 나도 좀 나이가 든 지라..." "흑력환 드시면 되잖아요." "떼끼. 스승이 일찍 죽기를 바라는 게냐! 하여간 이 애는 너한테 맡길테니까 니가 알아서 해!" 그러면서 셰더의 스승은 그들을 내버려두고 성큼성큼 걸어가버렸다. 셰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아시에 쪽으로 눈을 휙 돌렸다. 어쩐 지 무서워보이는 그 눈빛에 아시에는 본능적인 공포로 몸을 떨었다. 저 소년과 노인이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당시의 아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 지만 셰더의 눈빛은 그녀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소년치고는 상당히 음흉했다. 흑마법사들에게는 아내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이미지가 아주 나쁘다는 것 때문이다. 제정신이 아 닌 사람이 많다라던지 마법에만 몰두하는 폐쇄적인 사람이 많다 등등 다른 이유도 많지만 이미지가 나쁘다는 게 결정적인 이유가 되는 원인은 일반 마법사 중에서는 아내와 자식 데리고 잘 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능력이 특출나지 않은 평범한 마법사들은 국가에서 월급 받아 먹는 평범한 직장인 비슷한 분위기가 강하니까 말야. 뭐 여자 흑마법사들도 있지만 일반 마법사의 남녀비율에 비하면 흑마법사의 남녀 비율은 9:1 정도로 심각한 남초 현상을 보인다. 왜냐하면 흑마 법이라는 것은 제물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즉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지 않으면 안되는 마법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심약한 편인 여자들은 그 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런고로 남성 흑마법사들은 대부분 여자를 강제로 납치해서 노예로 삼고 성노리개로 삼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어느 연구조사에 따르면 역사적 으로 남자가 성관계를 맺으면서 가장 짜릿함을 느낄 때가 '불륜'을 저지르거나 '하녀'와 관계할 때란다. 전자는 몰래 하는 스릴감에, 후자는 사회 적 권력이나 힘을 이용해서 자기 마음대로 별별 괴상한 짓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내가 없는 대다수 흑마법사들의 욕구분출은 대부분 후자에 속했고 따라서 절대 정상적인 관계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그 때문에 흑마법사들이 변태적이고 음란하다는 소문이 세 상에 널리 퍼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흑마법사들은 더욱 더 정상적인 아내를 가지기 힘들게 된다. "끄응..." 셰더가 준 검은 망토 하나를 몸에 두르고 아시에는 셰더의 뒤를 따라갔다. 셰더는 어떻게 하면 스승이 자신에게 떠맡긴 아시에를 제대로 '조교' 할 수 있을 것인가 열심히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게 고민한 끝에 셰더가 택한 방법은 바로 스승이 하던 대로 따라하면 되잖아! 였다. 스승의 방 식은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것 외에 본 것도 들은 것도 없으니까 셰더에게는 그다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편 아시에는 셰더의 뒤를 따라가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뭐가 어찌된 영문인지는 잘 알수 없지만 두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첫째는 자신이 살아났고 몸에도 전혀 이상이 없다는 점. 둘째는 그 못생기고 늙은 영주의 손길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점이었다. 아직 이곳이 뭐하는 곳 인지도 모르고 앞에서 걷고 있는 검은 옷으로 몸을 치장한 소년의 음흉한 눈길이 신경쓰이기는 했지만 아시에는 저 소년에게 나쁜 짓을 당한다 고 해도 그 영주보다는 낫지 하는 심정으로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면서 셰더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셰더가 어떤 방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뒤를 따라온 아시에는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그대로 입을 떡 벌리고 다리를 후들거리더니 곧 바로 기절해 버렸다. 몇 자루 촛불만이 어둠을 밝히는 그 방에는, 그녀가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끔찍하고 괴상한 도구들이 방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것이었다. 여기서 아시에는 말문을 닫았다. 그때를 회상하는 것이 끔찍한 모양이었다. 그 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우리도 더 이상 자세히 듣고 싶은 생 각도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아빠나 엄마,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 그리고 나이에 비해 변태적인 취향을 가진 아이렌마저 눈쌀을 찌푸리고 있 었다. 나도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 악우(惡友) 문길이 녀석한테 조금은 배운(?)게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상상은 할 수 있었다. 헉! 그렇다면 아... 아이렌은?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저렇게 질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차라리... 그 늙은 영주의 첩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았을 것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아시에. 엄마는 조용히 그녀를 끌어안고 품을 빌려주었다.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 은 분명 괴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내가 겪지 못해서 그녀의 기분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괴로워하는 아시에의 모습을 보는 것은 안쓰러 웠다. 힘든 결단이었겠지만 모든 과거를 우리에게 밝히는 길을 택한 사람은 아시에 자신이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과거와 자신이 아는 셰더에 관한 것 을 가르쳐줄테니 그 사악한 흑마법사를 반드시 처단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모두 셰더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올랐다. 그놈은 역시 사악한 흑마법사이자 신의 나라 미국을 위협하는... 이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축임에 틀림없다. 하기야 어차피 제물로 산 사람을 쓴다는 점에서 이미 흑마법의 도덕성은 원래부터 땅에 떨어져 있는 거 니까. 사람은 누구나 일탈을 꿈꾼다. 그것이 비록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일지라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그대로 실행하지 않는다. 인간 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완전히는 통하지 않는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서 서로 도와가고 의존하면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규칙을 정하고 그것을 어기는 사람은 처벌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비록 비정상적인, 남에게 괴로움을 주는 성적 일탈을 꿈꾸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것이 실제 실행되지 않는 이상은 큰 문제가 아니다. 다만 그것 을 떠들고 다니게 되면 변태 소리를 듣는 선에서 그친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게 되면 그 시점에서 이미 범죄가 되어 버린다. 범죄는 몰랐다고 해서 면제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예를 들면 저작권법을 모르고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출판소설이나 스캔만화책을 인터넷에 올리고 적발되어 소송이 걸리게 되면 몰랐다고 법적 처벌을 면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뭐 걸렸을 경우에 한하긴 하지만 말이다. 법에도 허점이 있을 수 있고... 즉, 셰더 놈이 올바르지 못한 스승 밑에서 제대로 된 윤리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유감이지만 그것이 그에 대한 면죄부는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게다가 스스로 회개하고 반성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한동안 엄마 품에 안겨 운 아시에는 눈물과 콧물을 손수건으로 다시 닦고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다시 차분히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시에는 그 후로도 몇 번이고 그 방에 들어가야만 했다고 한다. 계속되는 끔찍한 고통 속에 몸도, 마음도 완전히 피폐해진 그녀 앞에서 셰더는 드디어 주인과 노예를 규정짓는 마도의 계약을 맺었다. 그 이후로 아시에는 오늘 기억을 찾기 전까지 이전의 기억을 완전히 잃었다. 그 이후로 그 '조교'라고 불리는 끔찍한 일을 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때 당한 일만은 뼛속깊이 새겨져 지울 수 없었다. 아시에는 셰더를 '주인님'이라고 불렀고 그가 시키는 일이라면 무조건 따르게 되었다. 그것이 비록 아시에에게 수치스러운 일이라 할지라도. 이 미 정신이 피폐해진 상태에서 과거를 잃은 그녀는 인간 감정의 상당한 부분을 상실해 있었다. 그리고 1년 후. "스승님, 약속했잖아요! 이건 제 노예라고요! 제 꺼에요! 제 꺼! 그런데 멋대로 뺏아가다니 말이 되는 소리에요? 제가 얘 키운다고 얼마나 힘들었 는데요! 가사 전반뿐만 아니라 흑마법까지 가르키..." "잘 알지. 호르몬 약제 투여로 몸 굴곡 만드는 데만 정신 쏟았지? 게다가 가슴은 왜 또 저렇게 키운거야? 원. 1년 전에는 열 서너살정도로 보였 는데 이젠 열 일곱여덟정도로 보이잖아! 쯔쯔쯔... 참 귀여운 애였는데 저렇게 망쳐놓다니." "빈유취향 로리콘 할아범. 여자는 거유라고요, 거유!" 딱! 셰더는 스승의 지팡이에 얻어맞고 바닥을 뒹굴었다. 이 변태 사제는 1년이 지나도 둘다 별로 나아진 게 없었다. "하여간 쓰려면 딴 노예들도 많잖아요! 왜 하필이면 제 꺼냐고요!" "휴우... 지금 우리가 부활시키려는 게 뭔지 알고서 하는 소리냐?" "마왕요." "어떤 마왕인지 알고 있느냐?" "마파왕 디크로드라고 들었는데요?" "그런 마왕을 불러내려면 보통의 제물로는 소용없다는 걸 알지? 올바른 자격이 있는 제물이 아니면 소환자가 오히려 뒈지고 만다." "알아요. 그리고 그런 자격을 지닌 제물은 극히 드물죠." "네 노예 아시에는 지금까지 몇 번의 고위마족들을 소환해도 저렇게 멀쩡하고 이미 고위 흑마법사 여러 명이 공인했다. 그녀는 흑마법의 저주에 대해 지금껏 본 적 없는 엄청난 저항력을 가지고 있어. 마왕을 소환할 수 있는 제물은 그녀밖에 없다!" "하지만 마왕을 소환하면 아시에가 죽잖아요! 지금까지 마왕을 소환하고 살아남았다는 제물은 하나도 없어요!" "왜, 저 걔 좋아하냐? 뭐 얼굴도 엄청시리 예쁘긴 하지. 사실 그때는 내가 왜 쟤를 너한테 그렇게 쉽게 줬는지 모르겠다니까. 내가 가졌어야 하는 건데."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를 떠나서, 제가 얼마나 성심성의껏 육성한(?) 노옌데... 특히 가슴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셰더의 스승은 셰더의 말을 듣고 한대 더 때리려는 듯 지팡이를 들었지만 어느새 셰더는 저멀리 내빼 있었다. ".....하여간 방해하지 말고 골방에 박혀 있어. 중요한 의식이니까 쓸데없는 짓 하면 너라도 가만두지 않겠다." 이미 감정을 90% 이상 잃어버린 아시에는 자신을 두고 벌이는 셰더와 그 스승의 뻘짓거리를 옆에서 듣고 있었으면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계약에 따라 주인인 셰더에게 충실할 뿐. 단지 그것뿐이다. 셰더에게 거역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뼛속깊이 새겨진 셰더에 대한 공포심이 그녀의 행동을 당연하게 만들어 준다. "아시에, 내 스승님을 따라 가서 스승님의 말대로 해." 셰더는 결국 스승의 말에 따르고는 잔뜩 삐진 채 등을 돌려 나가버렸다. "잠깐! 그 셰더의 스승이라는 사람, 자코 이사크라는 흑마법사 아냐?" "네... 맞아요." 세이렌 누나가 순간 아시에의 말을 자르고 나서며 물었다. 자코 이사크... 누구더라? 저번에 공부하면서 본 것 같기도 한데... 아, 맞아. 마파왕 디 크로드를 부활시켰다는 장본인이랬지. 아시에도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아귀가 딱딱 맞는다. "셰더의 스승이 이사크였다니 놀랍군요. 누님. 귀축(鬼畜)이라고 불리는 악명이 거의 전설적인 수준인..." "휴우... 그렇네. 그런 놈 제자의 손아귀에 우리 귀여운 카이가 두번씩이나 잡혔었다니. 아무일도 없었던 게 신기할 지경이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 헐... 대체 어쨌길래 그러는 거지? 그리고 나는 한가지 의문을 또 하나 풀 수 있었다. 이전에 아 시에, 아이렌과 같이 한 침대에 자면서 본의아니게 아시에의 가슴을 만지작거릴 수 밖에 없었던 사건이 있었는데 가슴이 생각 외로 상당히 컸던 건 모두 셰더의 변태적인 취향 때문이었군.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원...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아시에는 마왕을 부활시키고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 충격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는지 감성뿐만 아니라 감각의 일부도 잃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받아들인 정보를 올바르게 표현할 수 없게 되었다. 가끔씩은 주인의 말도 듣지 않고 멍하니 있을 때가 많아졌고, 행동 자체도 굼떴다. 그리고 왜인지 마왕 소환에서 살아남은 이후에는 더 이상 몸이 성장하지 않게 되었다. 셰더는 궁극목표 F컵 달성을 구호로 담으며 열심히 아시 에를 원하는 대로 육성(?) 시키고자 애를 썼지만 한번 멈춘 성장은 무슨 짓을 해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봉인된 채 아시에는 20년의 세월을 보내 왔던 것이다. 우리 가족이 그녀를 구해 줄 때까지. 아시에의 이야기가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들은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같이 심각한 얼 굴이었다. 그런 분위기에 아시에가 오히려 어색함을 느끼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저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되요. 저는 여러분들 덕택에 살아났고, 그런 출신의 저를 양녀로까지 받아주셔서 너무나 감사..." "아시에. 여러분이라니. 그렇게 거리감 있는 말은 쓰지 않도록 하거라. 우린 가족이다." 웬일로 아빠가 단호하게 잘라 저런 말을 했다. "알겠... 알았어요. 아빠." 격식을 차려 인사하려던 아시에는 곧 아빠가 하는 이야기의 의미를 깨닫고 말을 정정해서 최대한 밝고 기운찬 목소리로 말했다. 뭐 가족들 일부 의 주장에 의해 조금 억지로 가족에 끼워넣어진 면이 없지는 않지만 일단 들어온 이상 절대로 '남'이라는 생각을 갖지 말라는 뜻이었다. 아시에 의 말과 표정을 보고 아빠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 사랑하는 내 딸아." ...둘이서 드라마 찍냐? 뭐 보기 싫은 장면은 아니지만 좀 그렇군. 어쨌건 아시에의 이야기가 끝나고 다시 한번 그녀는 확실히 우리 가족에 받아들여졌다. 아이렌이 '렌'자 돌림을 맞춰야 한다고 아시에의 이름을 '아시렌'으로 바꾸자고 했다가 구박을 받은 것 외에는 아무 이의가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셰더는 마왕 부활이 목적인걸까요?" 사이엔 형은 아시에의 아픈 사연보다는 셰더와 그 스승에 대해서 더 관심이 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사이엔 형을 비방할 수는 없겠지.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는 말 못하니까. "그렇군. 아시에, 거기에 대해서 기억나는 게 있느냐?" 아빠가 아시에에게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검에 있는 봉마석을 노리는 건 확실한데... 셰더도 그보다 더 위에 있는 누군가의 명을 받아서 행동하는 것 같았어요." "별일이네. 셰더 정도 되는 녀석이 누군가의 명령을 받아서 움직이다니." 세이렌 누나가 아시에의 말을 듣고 중얼거렸다. 분명히 대륙 7대 흑마법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셰더가 누군가의 명령을 듣는다는 건 상 상이 가지 않는다. 그 정도면 먼 바다 건너 흑마도 왕국이라고 해도 쉽게 여길 수 없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왕국이니 귀족이니 하는 혈연에 의 한 사회 체계를 갖지 않으니까. "셰더가 데리고 있는 다른 적, 래더와 마나티에 대해서도 말해줘." 이번엔 세이렌 누나가 물었다. "마나티는 일년전쯤에 셰더가 노예로 새로 계약한 아이에요. 원래는 평범한 여자아이였는데... 그 '조교'를 받은 이후부터 정신이 이상해진 듯 미 친듯이 색을 밝히기 시작했고, 왜인지는 몰라도 저처럼 몇 번이고 제물로 쓰였는데도 죽지 않았어요. 그리고 래더는 셰더의 클론이에요. 셰더는 래더를 흑마검사로 키워서 여러 가지 임무를 내리곤 했어요, 요즘은 주로 마나티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클론이 뭐지? 쿵따리 샤바라 부른 그 클론은 아닐테고 말야. 으윽. 저건 이번 중간고사 시험 범위에 없던 거라고! 잘 모르겠다. 근데 뭐? 래더가 마나티의 기둥서방? "기둥서방?" "아, 네. 셰더는 매일같이 마나티한테 시달리다가 제 명에 못 죽겠다고 생각하고는 래더를 붙여 줬어요." "....." 변태로 흥한 자. 변태로 망한다는 걸까. 뭐 암만 변태스런 놈이라도 남자가 퍼낼 수 있는 샘물의 양은 한계가 있는 법. 저게 바로 깨진 독에 물 붓기인가 보다. 그 깨진 독은 마나티일테고. 그렇다고 셰더를 절대 불쌍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말야. 오히려 그렇게 성격이 변한 마나티가 불쌍 하지. "흠흠. 하여간 봉마석 몇 조각을 가진다고 해서 마왕을 소환하기는 무리야. 일단은 조금 더 지켜보는 게 좋겠지. 게다가 이건 우리 문제라기보다 는 대륙 전체의 문제니까. 다른 쟁쟁한 이들에게 맡겨두자꾸나." "하지만... 조금 신경쓰이긴 하네요. 만약 그 마나티라는 아이가 아시에..." 엄마가 아빠의 말에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아시에에 대해서 뭐가 말하려다가 만 걸 보니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우리에겐 마왕 부활을 막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잖아요?" 세이렌 누나가 그렇게 말하면서 씨익 웃으면서 날 쳐다봤다. 그리고 다른 가족들도 모두. 뭐... 뭐야? 내가 뭘 어쨌는데? 내가 마왕 부활 막는 거 보다 훨씬 더 중요하단 말일까? 그렇게 대해주니까 고맙긴 한데 어째 모든 가족들이 나만 편애하는 기분이 들어서 조금 찜찜하긴 하다. 어찌보 면 무슨 다른 목적도 있는 것 같고... "왜... 왜들 그렇게 쳐다봐?" "아무것도 아니야. 신경 쓰지마. 카이엔 형." 우욱... 그렇게 말하니 더 신경쓰인단 말이야. 레이엔! 하지만 그렇다고 가르쳐줄 우리 가족들도 아니고... 얼마 전에 레이엔이 그랬었지, 내가 진 실을 모르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고. 그래.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는 호기심. 때로는 몸을 망치면서까지 충족시키려 하는 사 람도 있는 그 호기심. 솔직히 말해 알고 싶다. 그들이 내게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내가 그것을 알면 어째서 불행해지는지. 하지만 난 지금의 행복을 잃고 싶지 않다. 우리 가족이 내게 그 무엇을 숨기고 있더라도, 혹여나 지금의 행복이 허공 위에 떠있는 가식적인 행복 일지라도 나는 놓치고 싶지 않다. 지금 이대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끝났으면 좋겠어. 나는 말하고 싶다. 만약에 이런 황당한 내 이야기를 글로 쓰는 인간이 있다면 당장에 해피엔딩으로 연재종료 시켜버리라고! "자자, 그럼 심각한 이야기는 이제 됐고, 저녁밥이나 먹으러 가자꾸나!" 아시에한테 가장 관심이 없는 사이엔 형이 먼저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다른 가족들도 주춤주춤 일어났다. 나도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을 풀었다. 그리고 나도 슬슬 식당으로 향하려 할 때 그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던 집사가 내 쪽으로 다가와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이엔 도련님. 이거 끼십시오." 집사가 손에 들고 온 물건은... 집중력의 머리띠였다. 어? 저걸 왜 집사가 갖고 있지? 음... 하긴 난 귀걸이나 목걸이, 반지까지는 봐줘도 머리띠는 절대 평소에 못 끼고 다닌다고 선언했고 그래서 방 구석에 처박아 놨는데... 셰더에게 납치당해 시르젤과 같이 있을때도 집중력의 머리띠는 없었 고 말이야. "왜?" "왜라니... 도련님의 마법무구들 중에 이것만 항상 두고 다니지 않습니까?" "응. 그래." "왜 그러시는 겁니까?" "...암만 주변에서 그렇게 취급 안 해줘도 난 남! 자! 거든? 저런 거 절대로 낄 수 있을 것 같아?" "...그러지 마시고 부탁입니다. 한번만 껴 주십시오. 한번 시험해 볼 게 있어서 말입니다." "시험?" 어쩐지 미심쩍은 걸... 무언가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듯 의심스러웠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한번 끼었다가 다시 벗으셔도 됩니다." "뭐... 그렇다면..." 난 집사가 괜히 변태끼가 발동한 것 쯤으로 생각하고 뭐 그딴 소원 한두번 못 들어주랴 하고 단순하게 생각하면서 집사의 도움을 받아 머리에 머리띠를 맸다. "이제 됐지? 그럼 뺀다?" "네. 됐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나는 머리띠를 오래 끼고 있기 싫었기 때문에 머리띠를 쓰자마자 집사를 한번 휙 쳐다보고는 다시 머리띠를 빼려고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런 데... 그런데 머리띠가 빠지지 않는다! 허걱! 어떻게 된거야? 나는 머리띠를 피부로 밀어서 빼내려고 했지만 머리띠는 머리에 딱 달라붙은 듯 움 직이지 않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좀 빼줘." "못 빼준단다. 카이♡" "세... 세이 누나!?" "니가 이 누나가 준 소중한 생일선물을 안 하고 다니길래 너무너무 섭섭했어. 그래서 다른 마법무구처럼 절대 니 몸에서 떨어지지 않게 개조했단 다☆ 내가 끼라고 말하면 의심스러워 할 것 같아서 집사에게 부탁했지." 그런거 개조 안해도 돼! 흑흑... 집사마저 날 배신하다니. 으윽... 내가 무슨 제천대성 손오공이냐? 혹시 이거 누나가 무슨 주문 외우면 머리가 아 파져서 결국 절대적으로 누나 명령을 들어야 하는 상황에 오는 건 아니겠지? "누나. 이거 혹시 누나가 주문을 외우면 머리띠가 머리를 압박해서 고통을 주어 누나 명령에 따르게 하는 그런 건 절대 아니지?" 그래도 난 세이렌 누나가 그렇게 악의적인 목적을 가지지는 않았으리라 믿으면서 물었다. 난 절대 삼장법사 명령을 따르는 손오공 꼴이 되긴 싫 다고! "어머나! 그것 참 좋은 아이디어네? 잠깐 줘봐. 내가 머리띠에 손만 대면 바로 그 기능을 추가..." "돼... 됐어! 하지마!" 혹 떼려다 혹 붙인다는 경우는 이런 경우를 말하는 거겠지. 나는 필사적으로 세이렌 누나의 사정권에서 떨어졌다. "이래가지고 어떻게 밖을 나다니냔 말이야! 머리감는 건 어떻게 하고!" "머리감는 건 걱정마. 일시해제! 라고 외치면 20분 정도 머리띠가 다른 공간으로 사라지거든? 하루에 3번밖에 쓸 수 없긴 하지만..." "괜찮아. 카이. 잘 어울리는 걸." 아직 밥 먹으러 안 간 아시에도 옆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아... 아시에. 그런 말 해도 나 하나도 안 기쁘거든? 응? 에휴... 흑흑. 딴건 다 용서해도 이것만은 절대 하기 싫었는데. 엄청엄청 쪽팔린다고! 나 이런 걸 매고 학교에 가야 하는거야? 응? 나는 홧김에 차 라리 내 동정... 그러니까 순결을 내줄테니까 이 머리띠 좀 제발 빼줘라고 세이렌 누나한테 말할 뻔했다. 뭐... 첫경험을 아무렇게나 여기는 건 아 니지만, 내 근본은 남자고 지금도 남자라서 그런지 잃어도 그렇게 아쉬움은 없을거라고 생각하니까... 아마도. 이유는 잘 모르지만 세이렌 누나도 날 순결하게 놔두는 게 오히려 위험하다고 말했고. 그렇지만 왜일까. 마음속에서는 자꾸만 무언가가 걸렸다.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제96화 : 악우(惡友)와의 재회 "서... 설마 그 극악변태 오컬트 매니아이자 흑마법 유저(user) 손문길!?" "...니가 그 S시 K구 중고딩 여학생들이라면 모르는 녀석이 없는 야오이 팬픽 작가 김상우!?" 나. 카이엔 브리타뉴는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멍하니 서 있었다. 나와 마주보고 동시에 말을 꺼낸 사람은 아시에 브리타뉴였다. 그녀... 아 니 그라고 불러야 할까? 하여간 녀석 역시 놀란 표정으로 눈이 휘둥그레진 채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이야기는 오늘 아침으로부터 시작된다. 간만에 또 학교에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어제 세이렌 누나 때문에 꽃장식 달린 머리띠를 머리에서 뺄 수 없게 된 나는 쪽팔려서 도저히 학교에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아시에와 함께 집 뒤뜰을 산책하고 있었다. 우리 집 뒤뜰은 앞 정원보다는 작았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넓다. 웬만한 아파트 단지 한두 개 크기는 되니까. 내가 뒤뜰로 산책을 온 이유는 잔디 와 키 짧은 수목이 주로 심어진 정원과는 달리 숲을 조성해 놓았기 때문에 시원해서였다. 날씨도 슬슬 더워지고 있으니까, 앞에서 햇빛 쬐면 덥 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백옥같이 하얀 피부가 상한다고 가족들이 극구 만류한다. 아시에는 나무에 열린 이런저런 과실들이나 풀들이 신기한 듯 활기차게 돌아다면서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있었다. 셰더와의 계약이 엄마에 의해 강제로 끊기고 저주의 나이테를 모두 벗겨낸 후에도 소극적이고 의존적이었던 아시에는 기억을 되찾은 이후 눈에 띄게 활달해졌고, 표정도 밝아 졌다. 아마도 이게 본래 그녀의 성격이겠지. 이렇게 평범하고 꿈 많은 보통 소녀를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노예로 부렸다니 참 용서할 수 없이 나쁜 녀석들이다. "카이, 이 꽃 예쁜데 머리에 하나 더 꽂아줄까?" "괘... 괜찮아." "사양하지 말고. 자." 아시에는 내 거부를 무시하고 내게 다가와 머리띠 사이로 꽃을 한 송이 더 집어넣었다. 예전같았으면 내가 안된다고 말했을 때는 절대 그러지 않았을텐데... 그래도 저렇게 기운을 차리는 편이 좋겠지. 그녀는 이제 세이렌 누나나 엄마, 혹은 나와 따로 자거나, 떨어져 있어도 불안해하지 않 았다. 이제는 내가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해도 혼자서라도 학교에 갈 거라고 한다. "근데 시에, 학교에는 왜 안 갔어? 이젠 내가 같이 안가도 괜찮다며?" "으응. 사실은 할 말이 있어서." 아시에는 내 머리에 꽃을 하나 더 달아 준 후 등을 돌리고 길가의 돌을 툭툭 차면서 말했다. 뭐... 뭐야? 혹시 느닷없는 사랑 고백 같은 건 아니 겠지? 지금의 아시에는 기억이 돌아와 보통 여자아이처럼 되었고, 보통 여자아이들은 나를 보면 껌뻑 죽는다. 그러니까 내가 저런 추리를 하는 것도 전혀 근거없는 망상만은 아니었다. "카이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말고 다른 세상, 다른 차원의 세상이 있다고 믿어?" "아마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해?" 나도 엄밀히 말하면 다른 차원에서 온 거지. 몸은 아니고 영혼만 넘어온거지만 말야. 현실의 진짜 난 어떻게 되었으려나... 에잇! 신경쓰지 말자! 그런 건 신경 안쓰기로 오래전에 휘리리릭 날려버렸잖아!? "그냥... 궁금해서. 그러면 말야. 만약에 여기와는 아주아주 다른 이질적인 차원이 존재한다면 말이야. 사람이 그 사이를 왔다갔다 할 수 있을까? 그게 불가능하다면 영혼만이라도 이동할 수 있는 걸까?" 단순한 호기심 차원이 아니었다. 그런 말을 하는 그녀의 표정은 의외로 심각하고 진지했으니까. 그녀는 내게 답을 바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공 부 못하는 내가 그런 걸 알 턱이 없다는 걸 아시에도 아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녀의 고민을 내가 들어줬으면 하는 걸까나? 이럴 땐 맞장구쳐주 는 게 제일이겠지. "아마도 있다고 생각해. 이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게 훨씬 많으니까." "그럼 그 다른 세상에는 뭐가 있을까?" "글쎄..." "카이는 상상할 수 있어? 마법이 존재하지 않아서 인간의 힘과 지혜로만 세상을 헤쳐나가야 한다든지, 말 없이 저절로 달리는 마차나 기름을 태 워서 하늘을 나는 비행기, 도시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고 죽음의 재를 뿌리는 엄청난 폭탄같은 거 말야." 저거 어디서 많이 듣던 것들이다? 음... 저것들은 설마... 원래 내가 살던 세계에 있던 것들인데? 난 깜짝 놀라 아시에에게 말했다. 설마... 설마 이 런 걸 알고 있지는 않겠지? "혹시 먼곳에서도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휴대폰이라든지, 고층 건물을 한번에 올라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 하루종일 드라마나 뉴스가 흘러나오 는 TV같은 것도 알어?" 이번에는 아시에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이봐. 당황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라고? "어... 어떻게 그런 걸..." "넌 누구야?" "너야말로 누구야?" "너 먼저 말해!" "싫어. 카이 먼저 말해." 이러다간 끝이 안 나겠군. 할 수 없지. 착한 내가 양보할 수밖에. "...좋아. 난 한국에 살았어." "나도 한국에 살았어. 그리고?" "다음엔 니 차례야. 시에." "치이... 치사해. 난 S시 K구에 살았어." "에엑? 나도 S시 K구에 살았는데? 너 무슨 학교 다녔어?" "이번엔 카이 니가 말할 차례야." "좋아. H고등학교 2학년이다. 넌 어디야?" "나... 나도 거기..." 아시에는 적잖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떨면서 중얼거렸다. 엥? 나랑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잖아? 그런 녀석이 여기에 있다는 건... 생각해볼 수 있는 가정은 한가지 밖에 없다. 그날 나를 구석진 학교 창고에 불러내어 강제로 덮치려 한... 이 아니라 이상한 흑마법진에 끌어들여 나를 이 이상한 세계로 끌어들인 녀석. "서... 설마 그 극악변태 오컬트 매니아이자 흑마법 유저(user) 손문길!?" "...니가 그 S시 K구 중고딩 여학생들이라면 모르는 녀석이 없는 야오이 팬픽 작가 김상우!?" 녀석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하하. 뭐야? 문길이도 나와 같이 그 비뚤어진 마법진 위에 서 있었 기 때문에 녀석도 어디엔가 다른 곳에 떨어졌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동안 이런저런 일에 휘말려 통 잊고 있었는데. 가끔 녀석때문에 배운 변 태적인 단어가 나올때만 잠깐씩 생각나고 말이야. 그런데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오랜만... 이네." 난 어색하게 인사했다. "응. 21년만... 이야." 아시에, 아니 문길이의 대답을 듣고 나는 다시한번 놀랐다. 이... 이십일년만!? 어떻게 된 노릇이야? 왜 저렇게 많은 시간차가 나는 거야? 문길이가 이 세계에 떨어져서 어느 소녀의 몸에 빙의한 것은 21년 전이라 한다. 뭐, 그녀석이 평소에 원하는대로 초 극강 미소녀가 되었으니 좋 은 일이기는 좋은 일이지만 하필이면 별 힘도 빽도 없는 평민의 딸로 빙의한 게 문제라 할까. 하여간 그녀석이 정신차리고 나서 제일 처음 들은 말이 그 늙고 못생긴 시골 영주의 첩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원래 남자인 사람이 남자랑 관계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일 인데 그 상대가 다 늙어빠진 노인이라니 기겁할 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시에의 몸에 씌인 문길이는 바로 그 당일 밤에 도망가 버렸다. 거기가 추운 북방이고, 겨울의 눈 내리는 밤이 얼마나 추운지도 모르는 채. 그 뒤로는 우리 가족이 모여 들은 이야기와 동일하다. "잠깐, 그 돌아갈 바에야 얼어 죽겠다는 각오는 뭐야!? 거짓말이었어?" "아잉... 그건 말이지. 원래 이야기에는 각색이라는 게 필요한 법이잖아. 안그래? 사실은 너무 추워서 죽을 것 같아 그냥 집에 돌아가려 했는데... 길을 잃었었어. 밤이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안그래?" "....." 평소같으면 예쁘게 봐 주었겠지만 저녀석이 문길이라는 걸 알고나니 여자가 여자로 안 보이고 괜히 버거워지기만 한다. 기억을 되찾기 전에는 뭐 기억을 다 잃었으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기억을 되찾은 후에도 그 소녀다운 행동을 계속하는 건 무슨 만행이야!? "하여간... 고생했다." 그래도 몇달동안 행복하게 지내기만 한 나와 셰더 밑에서 20년간 온갖 죽을 고생을 한 문길이의 고생을 같은 선에 놓을 수는 없겠지. 마음이 웬 지 착잡해진다고 할까. 담배라도 있으면 이럴 때 한 모금 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응... 보고... 싶었어." 뚝. 뚝. 눈물을 흘리는 문길이.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아무리 날 만나서 반가운 건 좋지만 이건 오버잖아! 오버! 지금 이산가족 상봉하는 것도 아니 고... "왜... 왜이래? 그렇다고 이렇게 오버할 것 까지는..." 나는 주춤거리면서 문길이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그녀석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래... 넌 몇개월만이겠지만... 난 21년동안이나 이 외딴 곳에서... 끔찍한 지옥을 겪어가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왔어! 아무도... 아무도 날 생각해주 는 사람이 없는 여기서... 니가 그걸 알아? 여기 와서 가족들에게 사랑받기만 한 니가 그 고통과 슬픔을 말야!" "그래... 넌 몇개월만이겠지만... 난 21년동안이나 이 외딴 곳에서... 끔찍한 지옥을 겪어가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왔어! 아무도... 아무도 날 생각해주 는 사람이 없는 여기서... 니가 그걸 알아? 여기 와서 가족들에게 사랑받기만 한 니가 그 고통과 슬픔을 말야!" 문길이의 절규. 나는 그 절절한 외침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 아니 지금은 그녀가 된 문길이는 분명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 동안 괴로움속에서 살아왔다. 21년. 그 대부분의 시간을 기억조차 잃은 채 셰더의 노예로 지내왔던 것이다. 그 고통과 슬픔을 내가 알 수는 있다 고 할지라도 같은 꼴을 당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이해할 수는 없을 거다. "으흑... 얼마나... 외로웠는데....." 나는 조용히 울먹이는 아시에, 문길이한테 다가가서 녀석을 품에 안아 다독거렸다. 그녀의 마음에 완전히 공조할 수 없는 나는 이런 위로정도밖 에 해줄 수가 없으니까... 이걸로 네 마음이 한결 나아진다면 다행이련만. 조금 울더니 문길이는 다시 진정된 모양이었다. 내 겉옷이 녀석의 눈물 콧물에 좀 젖었기 때문에 난 일단 옷을 한 겹 벗었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좀 진정됐어?" "으응...훌쩍" "이전에 너라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절대 울지 않았을텐데..." 그랬다. 중학교 때 불량배 5명한테 싸가지없게 생겼다는 이유로 집단구타당했을 때도 문길이는 절대 울지 않았다. 오히려 불타오르는 분노를 미 세하게 컨트롤하면서 복수심을 궁극의 흑마법으로 승화시켜 놈들에게 저주를 걸었다. 그 양아치 놈들이 그 후에 조폭을 잘못 건드려 깨지고 단 체로 성병에 걸려버리고 술김에 차 훔쳐타다가 어디 다리 위에서 강에 떨어져 3명이 죽고 2명은 불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문길이는 원래 그런 녀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 자. 그만 울어. 남자가 울면 안되잖아?" "난 남자가 아냐." 문길이는 내 말에 단호하게 반박했다. "난 이미 남자였던 때보다 더 오랜 시간을 여자로 보냈는걸." 21년의 세월. 비록 온전한 몸과 정신으로 지낸 시간은 아니었지만 문길이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여성으로 보냈다. 하기야 그렇게 오랜시간동안 여자로 살아왔는데 자신을 남자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고집이나 자존심이 노인네만큼 센 게 아 니라면 솔직히 웃기는 얘기다. "사실... 잘 기억나지 않아. 내가 태어나고 살아왔던 세계 자체에 대해서도. 단지... 그냥 무엇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 기억하고 있을 뿐. 그 풍경 은 이젠 기억 속에 아득하게 남아있을 뿐인걸..." 그러면서 문길이는 날 바라보았다. 우수가 담긴 쓸쓸한 눈빛. 저절로 꽉 껴안아주고 싶을 만큼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묘한 눈빛이다. 그 눈빛이 이상하게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다는 점은 좀 신경 쓰였지만. "상우야... 아니, 지금은 카이엔이지? 카이, 날 구해줄 수 있겠어? 도와줄 수 있어?" "구해주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미 넌 셰더의 손에서 구해졌잖아?" 그녀는 살짝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를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너와 같이 있으면, 그 모든 슬픈 일들을 잊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더이상 어떤 외로움도 쓸쓸함도 없이..." 왜 그런지는 몰라도 문길이는 자꾸 동정심을 일으킬만한 발언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 원래 내가 알던 문길이가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면 잘근잘 근 씹으면서 가볍게 밟아 줬겠지만 녀석은 나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헤쳐나오면서 상상할 수 없을만큼 힘든 길을 헤쳐나왔다. 무엇보다도 문길 이는 이제 음침한 오컬트 매니아가 아니라 누가 봐도 미모를 인정하는 아리따운 소녀였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문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그 슬픈 미소에 끌려들어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멍하니 마음을 놓고 있을 때 그녀는 날 '덮쳤'다. 작은 나무숲 가운데 있는 풀밭 위에 나는 쓰러졌다.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나는 눈을 뜰 수 없었다. 이제는 문길이라는 것을 아는 아시에의 몸이 내 몸 전체에 밀착되었고 무방비 상태인 입술 위에 그녀의 입술이 그대로 내 입술 위에 겹쳐 왔다. "우웁!" 나는 버둥거리면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이미 아시에의 두 손에 잡힌 내 두 팔목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우웁! 이 자식 왜 이렇게 힘이 센 거야? 겉보기에는 그렇게 강한 것같이 보이질 않는데... 하기야 아시에의 힘이 강하기보다는 내 힘이 너무 약한 탓이겠지. 그녀의 혀가 조심스럽 게 내 입술을 핥으면서 안으로 파고들어오려는 시도를 했다. 우웁! 이번에는 기습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해도 그것만은 안돼! 하지만 그런 나의 필사적인 저항을 아시에는 간단히 찍어눌렀다. 그녀는 내 팔목을 잡고 있던 한쪽 팔을 풀어 내 가슴을 꼬집었고 내가 악 하고 입을 벌리는 사이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혀를 집어넣었다. 우익! 이건 너무 치사하잖아! 하지만 최후의 방어선이 뚫린 시점에서 나에겐 더 이상 무익한 저항(?)을 계속할 만한 힘이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이전 시르젤과는 달리 확실한 여자. 싫어도 몸이 멋대로 반응해서 달아오르고는 마는 것이다. 심장은 쉴새없이 펌프질을 해대고, 숨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가빠지고 있었다. 이성은 자꾸 힘을 잃어가고 본능적인 육욕만이 내 정신세계의 영역을 자꾸 넓혀 갔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다가는 내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녀 에게 달려들 판이었다. "푸아." "하아... 하아..." 문길이의 입이 내 입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는 바로 그럴 무렵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입을 맞대고 있었는지 서로의 입가에는 침이 가득했다. 그 녀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혀로 그것들을 핥아먹었고 덤으로 내 입가에 있는 침들도 핥아먹었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뿐이 었다. 지금은 당장 그녀의 옷을 벗겨버리고 싶은 내 육체적 욕구를 억제하는 것만 해도 너무 벅찼다. "후우....뭐야. 생각보다 순진하네? 너 '처음'이지?" 놀리듯이 말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도 잔뜩 상기된 터였다. 난 얼굴을 옆으로 홱 돌리면서 말했다. "남이사... 그건 그렇고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문길아?" "날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난 니가 알던 이전의 그 손문길이 아냐! 내 이름은 아시에야! 그 이름으로는 이제 돌아갈 수 없어!" "시에..." 문길이... 아니 아시에는 버럭 소리질렀다. 다시 한번 녀석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랬었지. 녀석은 이미 내가 알던 손문길이 아니다. 그때까지 살아왔던 세월보다 더 오랜 시간을 여자의 몸으로 살아온 '아시에'일뿐. 그래서 아까도 말했었지. '난 남자가 아냐'라고. 이전의 친구인 나를 만 나면서도 그 이름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지금의 정체성이 그때와 완전히 변해서일까? "카이... 내가 싫어?"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 "시... 싫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카이는 남자가 아냐?" "난 남자야!" "그럼 카이는 여자보다 남자를 더 좋아해?" "내가 왜 남잘 좋아해야 햇!" "근데 왜... 날 거부하는 거야?" ...벌써 내 첫 딥키스까지 뺏어간 주제에 참 뻔뻔스러운 말이다. 이런 건 20년이 지나도 도통 변한 게 없다. "내가 왜 널 받아줘야 하는데?" 나는 최대한 냉정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이런 건 아무래도 확실하게 끊어둬야 뒤탈이 없겠지. 비록 20년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문길이 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성격이 변했고 이전의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있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놈은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시에는 조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으음... 조금 동정심이 일긴 하지만 여기서 참아야 돼. 저 표정에 넘어가 면 안된다구!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녀석은 20년동안 엄청나게 연기력을 키웠다는 걸.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저 슬프고 쓸쓸한 표정만 보 면 계속 마음이 동하니... "역시... 그런거지?" 아시에는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역시... 카이는 내가 처녀가 아니니까 싫어하는 거지? 그런 거지? 그래... 알아. 네가 살아온 사회 분위기가 아직은 그런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지 못했다는 걸 알지만... 그래 알고 있지만 말야..." 슬픈 어조로 말하는 아시에의 눈가가 살짝 눈물이 고였다. 뭐... 뭐야? 갑자기 이야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는... "자, 잠깐! 거기서 처녀 문제가 왜 나와!" "에? 아냐? 처녀가 아니라서 싫은 게 아냐?" "나... 난 그런 건 신경 안쓴다구!" "다행이야... 그럼♡" 아시에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가슴을 쓸어내혔다. 그리고는 다시 내 몸 위로 몸을 겹쳤다. 이제야 기억난 거지만, 나는 아까 키스당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아시에 밑에 깔린 상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으윽! 간신히 몸 좀 진정시켰는데! 그만 좀 해! "아... 아이렌!" 그때 누군가의 당황스런 외침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나도, 아시에도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참고로 밑에 깔려 있는 나는 고개를 돌리 기가 아주 불편했다. 이 목소리는 레이엔의 목소리 같은데... "카이 오빠..." 울창하게 나무가 우거진 작은 숲 한켠에서 아이렌이 멍하니 이쪽을 보고 서 있었고 그 뒤로 레이엔이 헐레벌떡 아이렌의 뒤를 쫓아 달려오고 있 었다. "시에 언니... 지, 지금 뭐하는 짓..." 그렇게 말하는 아이렌의 말을 떨리는 동시에 매우 격앙되어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앗! 사르비아, 나와서 당장 시에언니와 카이 오빠를 떨어뜨려 놔!" 사르비아라면... 에또... 뭐더라? 헉! 불의 정령왕이잖아! 아이렌! 심정은 이해하겠지만 너무 과격한거 아냐? 게다가 난 지금 아이렌 밑에 깔려 있 다구! 아이렌은 넘어진 내 위에 올라타고 있고! "방(防)! 퇴.산.(退散)!" 그러나 아시에도 전혀 내 위에서 비킬 생각을 하지 않은 채 흑마법을 써서 맞섰다. 히익! 대체 이거 무서워서 버틸 수가 있겠어? "그정도로 정령왕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해!?" 아이렌의 분노가 겹쳐진 탓일까. 사르비아는 너무나 간단하게 아시에의 방어진을 뚫고 들어왔다. 하지만 아시에는 태연자약하게 너무나 침착한 표정으로 대응했다. "강.제.퇴.거(强制退去)!" 아시에는 코앞까지 다가온 불의 정령왕 사르비아에게 대담하게 손을 대더니 주문을 외쳤고 아시에의 주문을 정면으로 맞은 사르비아는 본래의 정령계로 강제소환된 듯 피시식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사라졌다. 그리고 정령왕 퇴거의 충격을 그대로 받은 아이렌은 아악하는 소리를 내면서 그 대로 쓰러졌다. 바로 아이렌 옆에까지 다가온 레이엔이 쓰러진 그녀를 부축했다. 그제서야 아시에는 일어났고 그 밑에 깔려서 당하고(?) 있던 나도 일어날 수 있었다. "아이렌! 정신차려! 아이!" 레이엔이 아이렌을 붙잡고 흔들었고 나와 아시에는 아이렌이 쓰러진 쪽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아이는.... 아이렌은 괜찮아?" "정신을 잃었어... 게다가 흥분한 상태였으니 쉽게 회복하기 힘들 거야." "미... 미안해. 레이. 난 단지..." 아시에가 머뭇거리면서 레이엔에게 사과한다. 으음... 아무리 봐도 아시에가 문길이라고는 믿기 힘든데 말야. 하기야 20년동안 여자로 살았으니 성격이 어느정도 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겠지. "아시에 누나가 정당방위였다는 건 나도 알아. 앞뒤 가릴 것 없이 바로 사르비아까지 불러내서 공격했으니까 그정도로 대응하지 않으면 본인이 위험하겠지. 아이렌도 참 머저리같이 말야... 정령왕한테 직접공격을 시키는 정령사가 세상에 어디 있어? 아무리 분별이 없다고 해도... 저번에도 그렇게 뻘짓하다가 셰더한테 시르케이안을 역소환 당했지. 하여간 재능만 많지 전투센스는 꽝이라니깐." 레이엔은 아이렌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히며 궁시렁거렸다. "그나저나, 카이엔 형. 아시에 누나. 둘이서 대체 풀밭에 누워 뒹굴면서 뭐 하고 있었던거야? 여기에 대한 해명은 꼭 하고 넘어가야겠는걸?" 곱지 않은 레이엔의 말투. 아시에는 조금 주눅이 든 듯이 대답했다. 야! 임마! 왜 자꾸 그런 반응이야? 나하고 이야기할때는 잘만 자신감넘치게 해놓고, 게다가 날 덮치기까지 해놓고 왜 그렇게 쭈빗쭈빗해? "미안해. 하지만 난... 정말 카이를... 갖고 싶어서 그랬어. 미안해. 다시는... 안그럴께." "그렇게 해도 돼." 에엥? 지금 아시에는 기절한 아이렌 대신 열심히 레이엔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그런데 레이엔 너 뭐라고 했냐? 그렇게 해도 된다니? 나도 아시에도 무 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아까 하던 거 계속 하라고." "....레, 레이엔?! 무슨 말이야!?" "그, 그래도... 되는거야?" "응." 당혹시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레이엔에게 소리지르는 나와 조심스럽게 그래도 되냐고 물어보는 아시에. 으윽... 레이엔! 지금 무슨 생각인거야? 혹 시 너 남들 하는 걸 훔쳐보는 취향이 있는거야? 하는 데 보는 사람이 있으면 엄청 신경쓰이... 는게 아니라 지금 무슨 짓이야! 오히려 아시에의 행동을 독려하려 하다니! 하지만 곧이어 이어진 레이엔의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나도 지금 아이렌을 가질 테니까." "....." 지금까지 전혀 그렇게 안 보였던 레이엔이 그런 말을 하니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서워 보였다. 이녀석이 원래 아이렌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설마 상대방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해치워버리는 그런 극단적인 짓을 저지르려고 할 줄이야. 쇼크! 쇼크! 초 쇼크! 암만 생각해도 충격적이기 그지없는 발언이다. 레이엔, 너 나이에 남자 구실 할 수 있기나 하니? 아이렌도 아직 초경조차 안했을 텐데... 에휴. 세상이 어떻게 돌 아갈려는지 모르겠다. 쯔쯔. 게다가 저녀석들은 이란성이지만 쌍둥이 아냐? "카이... 우리 집에 돌아가자." "어." 아시에, 문길이도 레이엔의 말에 할말을 잃고 내게 돌아가자고 말했다. 나한테는 다행히도 그녀는 날 가지고자 하는 의욕 자체를 잃어버린 모양 이었다. 하기야 암만 나보다 머리좋고 똑똑해도 저런 젖비린내 나는 애들앞에서 무슨 그렇고 그런 짓을 하겠냐. 레이엔도 아이렌도 둘다 어릴때 부터 나쁜 것만 잔뜩 배워가지고는. 하기야 나도 그런 식으로 말하면 할말은 없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야동'이란 걸 봤고, 5학년 때 처음으로 '야겜'이란 걸 해봤고 6학년 때 처음으로 '야설'이란 걸 봤으니까. 근데 사실은 그 나이 되면 웬만한 애들은 다 본다. 여자애들도 남자보다는 좀 늦지만 중학생쯤 되면 대강 은 알거 다 알게 된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아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가면 갈수록 그런 사람은 줄고 있지. 아시에와 내가 무시해버리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아이렌을 혼자서 낑낑대며 질질 끌고 오는 레이엔을 뒤로 하고 나와 아시에는 집으로 가는 짧 은 길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레이엔 녀석, 저렇게 말해도 막상 실행할 만한 용기는 없었나보다. 아니면 아시에가 내게 하는 짓을 그대 로 보고 따라하려 했다거나... "미안... 했어. 내 감정을 무리하게 너한테 강요한 건 아닌가 싶어서." "괘... 괜찮아. 이런 데는 꽤 익숙하니까." 나는 아시에, 문길이의 마음도 꽤 복잡할거라 생각하면서 이해해줘야겠지라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꽤... 익숙하다니? 너... 얼마나 해봤길래...!?" "무슨 소리야! 난 아직 아무하고도 한 적 없어!" 의아해하는 아시에의 말에 난 정색을 하면서 외쳤다. 그런데 내 외침을 들은 아시에는 키득거리며 웃고 있는게 아닌가? 헉... 다. 당했다! "아직 순진한 어린양이네. 내가 첫 키스를 뺏아버린 건 아닌지 몰라." "흥! 너같은 놈이랑 진짜 첫키스였다면 엄청 끔찍했을거야." "헤에. 해봤다는 거네? 누구랑 했어? 브리타뉴 가 가족 중에 있어? 세이렌 언니라든지..." "그... 그런 거 누가 가르쳐줄 줄 알고?" "누구랑 했을까나... 갑자기 되게 궁금해지네. 뭐 괜찮아. 반드시 내가 첫번째로 널 먹어줄테니까." "난 싫거든, 응? 제발 그만두지 그래?" "그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아시에의 중얼거림. 어라? 의외로 간단하게 포기하는 건가? 포기해준다면 안심이지만. "분명히...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거구나! 누구야? 응? 응!?" "왜... 왜 그래? 난 아직 그런 사람이 없..." 나는 황급히 외치다가 무의식중에 말을 멈췄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딘가 걸리적거리는 점이 있었다. 뭐지? 내가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이 있었나? 사랑이라는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안 가르쳐준다는 거네. 알았어. 나 반드시, 너한테 어울릴 만한 멋진 여자가 될 거야. 니가 좋아하는 누군가보다 훨씬 더 예쁘고 멋지게 되어서 말야." "...휴우. 니가 문길이라는 생각만 없다면 꽤 감동을 받았을 말일텐데 말야."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니? 하긴... 넌 아직 내 모습에 21년전의 나를 투영시키고 있을테니... 하지만 포기하고 싶진 않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아시에의 말대로 확실히 나는 이 세계에서 2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낸 문길이를 몇달전까지 나의 친구였던 그 문길이에 대입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바뀌지 않은 면도 있지만, 이미 그녀는 내가 알 던 그 문길이가 아니다. 진짜 그 변태놈이라면 절대 나같은 남자한테 대쉬할 리가 없으니까. 그 세월이라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바꿔놓은 걸까... "그동안 너무나 외로웠어. 그러니까 니가 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길을 찾을 수 없을 때 앞에서 손을 꼭 잡아 주고, 세상에 지쳐 힘들 때 품 에 꼭 안아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힘든 여정의 마지막에는 니 팔을 베고 니 얼굴을 보면서 잠들고 싶어. 이건 모두... 진심이야." 하지만 아시에인 문길이는 나에게서 김상우의 모습을 보고 있다. 아직 몇달밖에 지나지 않아 한국에 있을 때와 그렇게 많이 달라진 게 없는 나 를. 그녀의 생각이 어떻게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전에 편한 친구였던 내게 의존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확실히 전해져왔다. 이건 단지 추 측에 불과하지만 그녀는 내가 대륙 최고의 미소년이 아니었을지라도 나를 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산책이었지만 돌아올 때는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 때문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제99화 - 시르젤 이야기 [이 초상화에 나온 꼬마애 귀엽지? 유클리네의 브리타뉴 가의 둘째아들 카이엔이라는 아이야.] [헤에... 꽤 똘망똘망하게 생겼네?] [꺄아∼ 그림이 이러면 실물은 얼마나 예쁠까나∼] [치이. 그런 꼬마애보다는 내가 시레나 누날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후훗. 시르젤. 너도 꼬마잖아?] [그래도 그 꼬마애보다는 더 나이 많아! 내가 키도 더 크고, 힘도 더 세고, 책도 많이 읽었다구!] [그래. 그래. 넌 분명히 누구라도 한눈에 반할 만큼 멋진 남자가 될거야.] [그런데 왜 누난 미래의 멋진 남자를 무시하고 저런 꼬마애 그림이나 보는 거야?] [글쎄. 왜일까나.] 띠리리리리리∼ 특색없이 크게 울리는 알람벨 소리와 함께 시르젤은 눈을 떴다. 저도 모르게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바닥으로 뒹구려는 충동이 문득 일었지만 시 르젤은 실행하지는 않았다. '아직도 훈련받던 시절의 버릇이 남아 있는 건가?' 시르젤은 피식 웃으면서 일어나 이불을 차곡차곡 개었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그는 알람 시계가 없어도 정확하게 원하는 시각에 일어날 수 있었 고 자다가도 살기를 느끼면 바로 눈을 번쩍 뜨고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의 몸이라는 것은 항상 단련하지 않으면 감각이 무뎌 지는 것. 시르젤은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피식 웃었다. 지금은 그렇게 하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제와서 누나의 꿈을 꾼 걸까..." 계속되는 엄격한 훈련에 시달리던 고된 시절. 걸핏하면 시아와세노 비치의 바닷가 바위 위에서 뛰어내릴까 한참을 고민하고는 할 때 세 살 위 터울인 시레나 누나만이 그에게 유일한 힘이 되어 주었다. 불과 열 살에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항상 밝게 웃고 활기 찬 누나였다. 그런 그녀에게 항상 시르젤과 어린 시르쥬는 매달려 재롱을 부리곤 했다. 그렇지만 이제 누나는 여기 없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 무리한 훈련 때문에 앓아누웠을 때 죽을 끓여온다고 설치다가 태워먹었다며 누룽지를 만들어 와서는 머리를 긁적이던 모습도, 외할아버지한테 심한 꾸지람을 듣고 집 구석에서 울고 있을 때 다가와 말없이 부드럽게 껴안아주던 손 길도. 가끔씩 집안 식구들이 바빠 훈련 감독을 대신 맡았을 때 다 때려치우자면서 정말 오래간만에 신나게 설치고 다니며 놀았던 기억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은 소중한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 다시 새로운 추억은 만들어나갈 수 없다. 3년 전. 누나는 이미 영영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난 것이다. 시르젤은 오래간만에 그리운 누나 시레나 케이리가의 생각을 하면서 세면과 착의를 마친 후에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밖으로 걸어나왔다. 문득 식탁 한구석에 놓여 있는 시레나 누나의 초상화가 눈에 띄었다. 한손으로 브이자 마크를 그린 채 씨익 웃고 있는 누나의 그림이었다. 그 옆에는 팔에 매달려 자꾸 누날 귀찮게 보채는 시르쥬와 화가 앞에서 어색하게 근엄한 표정을 지었던 시르젤 자신의 모습도 있었다. '아, 맞아. 오늘이 시레나 누나의 기일이었지.' "일찍 왔구나 시르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할아버님, 어머님." 시르젤은 음식을 들고 와 식탁에 놓는 엄마와 거실에서 작은 책을 들고 식당으로 들어오는 파라디스를 보고 인사했다. "그래. 그런데 시르쥬는 왜 이렇게 늦는건지. 쯔쯔. 아무리 암살일을 포기했다고는 하지만 3년밖에 지내지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게을러지다니!" 파라디스는 다소 느슨해진 집안 분위기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하기야 평생을 암살에 관한 일만 왔던 외할아버지 에게는 3년이 지나도 여전히 달라진 집안 분위기가 쉽게 적응되지 않는 듯했다. "으하암... 엄마,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늦었어!" 시르젤의 엄마가 뒤늦게 나타난 시르쥬를 보고는 야단을 쳤다. 하지만 시르쥬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느긋하게 대답했다. "에이... 아직 할머니도 안 왔는데." "그래도 집안의 어른이신 네 할아버지보다 늦게 오는 게 말이 되니?" "알았어요. 알았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여전히 심드렁한 태도로 일관하면서 식탁에 앉는 시르쥬. 시르젤은 시르쥬의 태도를 보고 걱정이 앞섰다. 감정을 최대한 절 제해서 표현하는 시르젤과는 달리 시르쥬는 감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낸다. '녀석. 누나의 기일이다보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군. 별 사고 없이 넘어갔으려면 좋으련만...' 시르젤의 걱정은 그가 생각하자마자 바로 현실로 드러나버렸다. 파라디스가 시르쥬의 불량한 태도에 결국 역정을 낸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그를 말릴 수 있는 동반자 티아라도 아직 안 와 있었다. "네 이녀석! 예의는 어디다가 처먹은 게냐! 어른 앞에서 그게 무슨 태도야!" 다른 때라면 투덜대면서도 꾹 참으면서 넘어갔을 시르쥬였지만 오늘만은 그도 참지 않았다. "닥쳐! 시레나 누나가 누구때문에 죽었는데 그래!" "시르쥬! 그만해!"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일찍 금구(禁句)가 나왔다. 3년 전 그날 이후, 집안에서 일체 그녀에 관해 필요 이상으로 언급하는 것은 극도로 자제되 었으니까. 시르젤은 시르쥬가 너무 빨리 폭탄발언을 터뜨리자 깜짝 놀라 시르쥬를 만류했다. 하지만 시르쥬는 거친 언사를 멈추지 않았다. "형. 형도 제발 뭐라고 해. 언제까지 그렇게 속으로 삭이고만 있을거야!?" 하지만 시르젤은 대답하지 않고 희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시르쥬의 기분은 잘 알고 있다. 그때 그 장소에 시르젤은 시르쥬와 같이 있었으니 까.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회상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시레나 누나의 유언은 알지만 난 그걸 인정할 수 없다구! 없단 말이야...!" "시르쥬..." 격분한 시르쥬의 외침. 절절한 감정과 그리움이 사무친 그 울부짖음은 시르젤의 마음속에도 그대로 전해져 가슴을 갈갈히 찢어놓을 정도로 아프 게 했다. 어찌 시르젤도 그 사건에 대해 분노가 없겠는가. 하지만 시르젤의 멈춰진 감정은 쓰라린 상처의 회상에도 불구하고 쉽게 타오르지 않았 다. "잘들 하는구나! 약한 녀석들 같으니라구! 이런 놈들을 기재라고 키웠다니! 이런 놈들한테 일을 맡기느니 역시 암살업을 때려치우길 잘했지!" 파라디스 역시 시르쥬 못지않게 격분해서는 밥상을 뒤집어엎고 저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시르젤은 그 와중에서도 식탁 한쪽에 세워져 있던 시레나의 초상화를 성큼 낚아챘다. "어휴... 어떻게 만든 음식들인데..." 시르젤의 엄마는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색해진 분위기를 되살리고자 하기 위함인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뒤 늦게 식탁으로 들어온 그들의 외할머니, 티아라는 엉망이 된 식당을 보고는 고개를 젓더니 외손자들에게 말했다. "아직 용서할 수는 없겠지만... 자존심이 센 사람이니 너희들이 이해하거라." "할머님..." "그런 점에서 시르젤 네가 힘써야 하는 거, 알지?" "네. 알겠습니다." 시르젤은 자신있게 대답했지만 속마음이 영 편치만은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누나. 결코 우리에게 있어 다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누나. 시레 나 누나가 있으면 집안 전체에 활기가 돌았고 없으면 집안이 웬지 휑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케이리가 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종의 분위기 메이커랄까? 그런 그녀의 마지막 유언이 케이리가 가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창 밖으로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유리를 두들기는 시끄러운 빗소리에도 불구하고 시르젤은 창가에 서서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날도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었지...' 시르젤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시레나 누나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지금 당장에라도 뒤에서 눈을 가리면서 "누구∼ 게?"라고 장난을 걸 어올 것만 같았다. 그녀는 시르젤이 심각한 표정만 짓고 있을 때면 항상 와서 훼방을 놓곤 했으니까. 그녀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으면서도 평소와 다름없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장난이었어.'라고 말하며 벌떡 일어날 것 만 같았던 그 미소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누나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장면을 시르젤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비단 시르젤 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시르쥬도, 파라디스와 티아라, 시르젤의 엄마도. [크하하하! 어때! 어때? 슬프냐? 괴로우냐? 너희들도 나와 똑같은 고통을 느껴보라고!] 그리고 시레나 누나의 시신 뒤에서 미친 듯이 웃는 '그 자'의 반쯤 실성한 듯한 모습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레나 생각을 하고 있는게냐?" "외할머니..." 비오는 창가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 시르젤에게 티아라가 다가왔다. "그래. 절대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던 그 악몽의 날도 벌써 2년이나 지났구나."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말입니다." "후후... 아니야. 그 어떤 행복한 일이나, 괴로운 일도 언젠가는 전부 가볍게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추억이 되어버리지. 그래도 과거를 잊지 못하 고 그리워하거나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집착에 불과해. 과거에 얽매여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그런 집착." "...아직 할머님만큼 나이를 먹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쓴웃음을 지으면서 평온한 어조로 대답하는 시르젤. 티아라는 그런 시르젤을 흘낏 바라보더니 말했다. "시르쥬보다는 네가 더 걱정이구나. 시르쥬는 모든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가면서 세상과 부딪치고 있지만 넌 그 모든 감정을 안에 봉인해 버렸으 니..." 티아라의 말이 무슨 뜻인지 시르젤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3년 전의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시르젤은 누나에게 의존하고 때 로 반항하기도 하는 평범한 청소년이었다. 단지 어릴 때부터 혹독한 암살자 수업을 받아온 것만을 제외하고는. 하지만 그날 이후 시르젤의 감정 은 그대로 정지해 버렸다. "전 이대로도 괜찮습니다. 그보다는 할아버님이 더 걱정이시지요." "네 외할아버지는 내가 더 잘 아니까 걱정 말거라.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암살업을 청산할 정도의 결심을 한 사람이다.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 지만, 그이도 많이 괴로워하고 있단다." "주제넘은 참견이었군요." "가족끼리 참견이라는 말은 쓰는 게 아니지. 시르젤?" "죄송합니다." 끝까지 정중한 어조만 유지하는 시르젤의 모습을 본 티아라는 오히려 걱정을 거둘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정지한 그의 감정은 거기서 한발짝도 나아가려 하지 않고 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정중하다는 이야기는 결국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고 무관심하다는 말과 같은 것. 가족에 게조차 저런 가식적인 어조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어조가 의도하지 않고도 나올 정도로 생활화, 습관화되었을 정도니 말이다. "카이엔을 돌려보냈더구나." "네. 카이엔 씨에게는 그를 기다리는 소중한 가족들이 있으니까요. 우리 케이라가의 욕심에 강제로 떼어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네 욕심이 아닌 우리 가문의 욕심이라는 거네... 후후. 그를... 좋아하니?" "....." 시르젤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카이엔에게 끌렸고 결국은 그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해 버렸다. 하지만 완전히 자신있게 그렇다라고 말하기 에는 어딘가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시레나 누나의 유언이었다. 시레나 누나는 카이엔의 진짜 얼굴을 한번도 본 적이 없으면서도 그녀가 죽기 전 당시 어린 꼬마아이에 불과했던 카이엔을 너무나 좋아했다. 유언에 그런 구절을 남길 정도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알 수 없습니다." 한참을 고민한 시르젤은 티아라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을 말이니?" "이것이 제 스스로의 솔직한 감정인지, 아니면 시레나 누나의 유언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에 불과한지 말입니다." 시르젤은 스스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지만 티아라는 시르젤의 말을 듣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시레나는 그녀와 누구보다도 가까웠던 시르젤이 받을 충격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 카이엔은 미소년이다. 이 대륙 안의 그 어떤 남자도 그 미모를 따라갈 수 없는. 하지만 미소년이 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전 대륙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지는 않는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미소년이라는 것 이외에도 카이엔에 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티아라는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실물을 본 적은 없지만 시레나는 그 무언가의 정체를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녀는 암살자로서 전례없는 최상의 '감'이라는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글쎄. 나는 시레나가 너에게 일종의 계기를 만들어 준 거라고 생각한단다. 만남의 계기를 말이야." "그렇습니까..." 티아라는 쓴웃음을 짓는 시르젤을 보면서 빙긋 미소지었다. 지금은 감정을 극도로 틀어박은 채 옅은 웃음만 흘리고 있지만 그도 언젠가는 마음 의 봉인을 깨고 이전처럼 즐겁게 웃고 슬프게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이다. 카이엔은 거기에 필요한 필수적인 열쇠일 것이다. 그렇게 티아라는 생각하고 있었다. "해변에 가서 둘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 걸로 아는데, 어땠니?" "...남의 연애 이야기는 묻지 마십시오." "오호호호. 그래. 그래. 일단은 '연애'였지. 호호홋!" 시르젤은 티아라의 말을 듣고 카이엔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날 그는 바닷물에 빠진 카이엔을 구했고 나중에는 급기야 그에게 고백 에다 키스까지 해 버렸다. 카이엔은 엄청 당황하면서 좌충우돌하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지만 시르젤은 태연하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 감정 이 정지한 그는 상대가 남자냐 여자냐라는 것이 그렇게 신경쓰일 만한 일은 아니었다. 설사 마음속에 그런 거리낌이 남아 있었다고 해도 화사로 운 카이엔의 예쁜 얼굴과 갸날픈 몸매, 그리고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여성스러운 행동이 몸에 배여 가는 카이엔을 보면 오히려 그가 남 자라는 것을 믿기 힘들어질 정도였다. '카이엔, 당신은 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의문을 가슴에 품은 채, 시르젤은 비내리는 창가를 떠나 자기 방으로 향했다. 처음에 카이엔을 신경 쓴 것은 시레나가 카이엔을 매우 좋아해서 그의 초상화를 소중하게 다루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죽을 때까지 한번도 실물도 못 봤으면서 말이다. 누나 시 레나를 절대적으로 따르고 항상 누나 곁에 붙어 있으면서 누나를 위해 죽고 살겠다고 결심한 시르젤로서는 질투심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기보다 어린 꼬맹이가 단지 얼굴 좀 귀엽게 생겼다고 해서 위대한 누나의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다니. 그런 귀족집안의 건방진 애가 자신보다 강할 리도, 머리가 좋을 리도 없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절대 시레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는 없을텐데 말이다. 카이엔에 대한 시르젤의 생각이 바뀐 것은 시레나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그다지 호감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단지 누나 의 부탁이었기 때문에 카이엔에게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그녀석의 동향을 살피게 되었다. 시레나의 죽음 이후, 케이리가 가문은 업종을 암살업에 서 괴도업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의뢰자 같은 사람들에게 일정이 얽매일 필요가 없었고 그 덕택에 어렵지 않게 카이엔의 동향을 살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카이엔에 대한 감정이 수그러든 것은 아니었다. 카이엔을 이모저모 살펴보니 정말 싸가지 없는 놈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찢 어죽이고 싶은 분노마저 타오를 지경이었다. 물론 정지된 감정 때문에 밖으로 표출되지는 않았지만. 누나가 이런 자식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인정 하기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런 유언을 남긴 것인지 고민해봐도 도저히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카이엔에 대한 시르젤의 생각은 카이엔이 기억을 잃으면서 극적으로 변한다. 기억을 잃은 탓에 어딘가 여러 가지를 많이 잊어버린 듯 했 지만 인간성이 전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변해 버렸다. 한마디로 천하의 대악당이 천사로 변한 듯한 느낌이라고 할 까? 그렇게 카이엔의 성격이 바뀌자(실제로는 상우가 빙의해온 거지만) 시르젤은 그제서야 시레나 누나라는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카이엔 의 그대로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시레나가 죽은지도 이미 3년. 그때만 해도 꼬마아이였던 카이엔은 그때보다 체구는 그다지 많 이 성장하지 않았지만 어엿한 청소년이 되면서 이팔청춘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꽃피우고 있었다. 바람이 불때마다 춤을 추듯 찰랑거리는 머릿결에서부터 동그랗고 큰 눈매, 곧바로 키스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색기 넘치는 입술 같은 외양뿐만 아니라 희노애락의 감정을 표현할 때마다 꼭 껴안아서 돌봐 주고 싶은 감정이 절로 드는 카이엔의 모습 전체가 시르젤의 눈에 들어왔다. 너무 눈부셔서 다가갈 수 없는 그런 아름다움이 아닌, 마치 그의 몸 전체에서 핑크빛 오오라가 맴도는 듯한 사람의 감성을 끌어당기는 듯한 매력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시르젤 케이리가가 카이엔 브리타뉴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때는. 그리고 항상 카이엔에 대해서는 적의에 차 있던 시르젤의 눈이 어느새인가 동경과 감탄으로, 그것이 다시 호의에 찬 따스한 눈빛으로 바뀌어 가 는 것을 확인한 시르젤의 어머니는 파라디스와 티아라와 상의하여 마침내 카이엔에 대한 납치를 결정하게 되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그들의 괴도 예명 '시르팡'을 사용한 예고 형식으로 진행되는 납치였다. 시르젤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시르쥬마저 다른 가족들의 생각에 찬성하면서 어쩔 수 없이 납치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엔에게 자기도 모 르게 끌리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 시르젤이었지만, 시레나 누나의 유언은 여전히 신경쓰였던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의도대로 흘 러간 것이 아니었는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시르젤은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3년 전 시레나 누나의 죽음 이후로 굳게 얼어붙었던 그의 감정이 눈이 녹아가듯이 조금씩 풀 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TV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유명한 괴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실행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고장을 보내는 것이다. 혹시 그로 인해 목표물을 훔치는 것이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보낸다. 괴도조직 '시르팡'도 예외가 아니라서 항상 무언가를 훔치기 전에는 예고장을 보냈다. 기존 의 괴도와 차별화된 점은 시르젤과 시르쥬가 서로 역할을 맡아 협력하면서 일을 진행한다는 점이라고 할까. 시르젤은 예고장을 보내기 위해 지극히 황당한, 그러면서도 평범한 방법을 택했다. 자신이 시르팡의 상징인 노란 수선화와 예고장을 함께 들고 아침 일찍 카이엔의 집으로 찾아간 것이다. 물론 직접 찾아가기 전에 그들만의 어떤 비법을 활용해 얼굴 모양을 바꾸고 갔음은 물론이다. 카이엔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왔다고 말하자 문지기는 시르젤을 흘낏 바라보더니 안에 연락해서 집사를 불렀다. 문지기의 심드렁한 태도를 최근 브리타뉴 가를 자주 관찰해온 시르젤은 이해할 수 있었다. 카이엔에게는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선물이 꽤 많았기 때문이었다. 집사는 감사의 인사를 표하면서 시르젤의 꽃다발을 받았다. 무사히 예고장을 전달하는 일을 마친 시르젤이 돌아서서 발길을 옮기려고 할때, 낮고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잘 지냈나, 시르젤 케이리가?" 시르젤은 몸을 홱 돌렸다. 어디선가 분명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 동시에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당신은..." "이제 기억이 났나 보군. 이정도의 변용(變容)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암살자로서는 실격인데 그래? 나는 널 알아봤는데 말이지." 순간 시르젤은 뒤통수를 맞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속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깊은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어찌 이 자를 잊을 수 있겠는가. 만신창이가 된 누나를 짓밟고 자신도 피를 흥건히 뒤집어 쓴 채 광소를 터뜨리던 이 자의 모습을. 만약 이 자리에 있 는 것이 시르젤이 아니라 시르쥬였다면 당장에 주먹부터 먼저 날아갔을 것이다. 그것도 살의가 담긴. 하지만 시르젤은 증오섞인 눈빛으로 브리타 뉴 가의 그 집사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후후... 그렇게 노려보기만 하면 어쩔 텐가? 별일이군. 당장에 날 공격해올 줄 알았는데." "....." 가슴속에는 거대한 분노가 들끓으면서 갈 곳을 찾아 이리저리 용솟음치고 있다. 하지만 머리만은 너무나 차가웠다. 시르젤의 감정이 표출되는 것 을 막고 있는 절대빙벽은 거대한 분노와 증오의 용암에도 도통 녹지 않을 만큼 단단했다. 시르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절대 이 자 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더구나 지금 이 자는 브리타뉴가의 집사.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이 집 사람들이 몽땅 달려나올 것은 불 보듯 뻔했다. 타오르는 증오의 감정보다는 얼어붙은 이성 쪽이 시르젤의 정신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무슨 마음이 들어 이런 귀족 나부랭이 집안 집사나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군요." "너희 케이리가 가문도 마찬가지 아냐? 그 계집의 말이 그렇게 신경쓰였나. 결국에는 몇 대를 이어오던 가업을 전환할 마음까지 먹었으니 말이 야. 크크큭." '그 계집'이라는 구절에서 시르젤은 순간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지만 곧 힘이 빠졌다. 그의 닫힌 감성은 희노애락 어느 쪽으로도 한순간 의 감정만 느낄 뿐, 곧 강력한 빙벽에 막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수그러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감정을 희미한 표정으로만 드러낼 뿐 한순 간에 폭발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르젤도 그걸 알 수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는 군요. 너희 케이리가 가라니." "흥. 그 날 이후 나도 인연을 끊었고 너희도 마찬가지 아니냐? 새삼스러운 이야기를 꺼내다니... 하여튼 예고장을 전하러 온 것을 보면 뻔하겠군. 이번 목표는 물건이 아닌 사람이겠지?" "잘 알고 계시는군요." 시르젤은 긴장감을 늦추지 않으며 집사의 말에 대답했다. 원래 내부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자는 케이리가 가문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만약 이 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간신히 '시르팡'이라는 이름으로 괴도일을 시작한 케이리가 가문 전체를 말아먹을 수도 있었다. "거래를 하지." "무엇을 말입니까?" "시르팡이라고 했나? 너희들의 정체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로 하지. 대신에 너희 집안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 지 마. 망할 파라디스 노친네뿐만 아니라 전부 말야. 어차피 이제 너희 집안에서 나와 말로 통할 만한 녀석은 시르젤 너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할아버님은 무서운 모양이군요." 시르젤의 무감정한 말에 그 남자가 움찔거리더니 협박조로 말했다. "이 자리에서 죽고 싶나?" "...제가 감정이 죽었다고 해서 당신을 용서하고 있는 것이라 착각해서는 곤란합니다." 팽팽한 눈싸움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잠시 동안 시르젤의 굳은 눈동자를 바라본 그 남자가 먼저 눈을 떼며 말했다. "무의미한 싸움은 그만두도록 하지. 조건을 받아들이겠나, 말겠나?" "물론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섬기는 가문의 자제를 납치하겠다는데도 태연하군요." "난 이 집안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은 상관없어. 하지만 너희 계획은 결국에는 실패하고 말 거라는 건 알고 있지. 궁극비기 '마나폭풍'의 비밀 을 알아내어 쓸 수 있게 된 점은 칭찬하고 싶지만 이 집 사람들을 우습게 보지 않는 게 좋아. 이정도로 막강한 인물들만 모인 곳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니까." "상대의 정보쯤은 알고 있습니다. 확신이 섰기 때문에 실행하는 것이죠. 그럼, 꽃다발과 예고장 부탁드립니다." "그래. 약속한 것은 잊지 말도록." "그쪽이야말로요." 그렇게 꽃다발과 예고장을 집사에게 넘겨주고 시르젤은 발걸음을 돌렸다. 왜 그 자가 브리타뉴 가 밑에서 집사로 일하고 있는 거지? 무슨 꿍꿍 이인거야? 의문은 많았지만 속시원히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자신들의 정체를 숨겨주는 대가로 그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었기에 더욱 알 길이 없었다. 하기야 가족들 중 누구에게라도 발설했다가는 완전히 뒤집어 질 일이었다. 그가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시르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놈도 시르젤이 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 그 자' 역시 한때 같은 성을 쓴, 케이리가의 일원이었는데... 그리고 그날 밤이 왔다. 평소라면 시르쥬가 같이 가서 시르젤을 돕지만 시르젤은 굳이 혼자 가기를 고집했다. "시르젤 형, 왜 그래? 상대를 만만하게 보지 말라고, 온통 대륙 7대 어쩌구 중의 하나도 도배된 집안이잖아?" "그러니까 그러는 거다. 만약에 네가 잡혀 버리면 더 위험해, 너는 아직 비기 '마나 폭풍'을 자유자재로 쓸 수 없으니까." 후에 사람들이 시르팡 마나 케이아스라 부르는 것을 그들은 마나 폭풍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시르젤은 동생을 걱정하는 듯이 말했지만 실제 속 마음은 달랐다. 혹시라도 시르쥬가 브리타뉴 가의 집사와 마주치게 되고 무슨 일이 생길까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물론 시르쥬가 그의 변용을 알 아볼만한 안목은 없겠지만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할 수 없지. 형이 고집을 부리는 데는 항상 이유가 있으니까. 조심해서 다녀와." "초 큐티하고 귀여운 새색시 카이엔을 반드시 데려와야 해∼♡" 시르쥬와 엄마의 뜨거운 환호를 받으면서 시르젤은 시간에 맞춰 브리타뉴 가의 저택으로 향했다. 예상했던 대로 많은 사람들이 브리타뉴 저택 근처에 몰려 있었다. 취재진이나 3년 동안 활동을 벌이면서 생긴 예기치 못한 팬들. 그리고 왕립경찰들까지. 하지만 브리타뉴 가는 유클리네 왕 국에서는 왕도 쩔쩔맬 정도로 거대한 귀족 집안. 그들은 아예 집 전체에 겹겹으로 마법 배리어를 쳐 놓고는 타인의 출입을 원천봉쇄하고 있었다. 그들도 시르팡이라는 이름높은 괴도에 의해 많은 대비를 하는 듯 했다. '쉽지만은 않겠군.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냐.' 시르젤은 사람들 틈에 몰래 몸을 숨기고는 집 뒤쪽으로 돌아가 담을 넘고는 마나 폭풍을 제한적으로 사용해서 겹겹히 쳐진 마법 방어막을 통과 해 나갔다. 이정도로 거대한 방어막을 치게 되면 어딘가 위크 포인트(weak point)가 생기기 마련이었고 시르젤은 그곳을 찾아 시전자가 알아차리 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방어막의 마나를 일시적으로 흐트려 놓는 방법으로 방어막을 하나씩 돌파했다. 브리타뉴의 저택을 둘러싼 정원은 정말 넓었기 때문에 방어망을 통과하는데 다소의 시간이 걸렸다. 이대로라면 예고시각인 자정보다는 조금 늦 게 도달할 거 같았다. 하지만 어둠속에서 저택 뒤편의 작은 숲을 통과하는 데는 방어막을 제외하고는 거의 방해가 없었다. 보초를 서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사 있다고 해도 어둠과 나무, 수풀 등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방어막을 이렇게 빽빽하게 쳐놓으면 오히려 보초를 세 우기 힘들어진다. 아무래도 이 방어막을 친 자, 대륙 7대 마법사라고 하는 세이렌 브리타뉴는 스스로의 마법을 과신하고 있는 듯했다. 지나치게 방어막을 많이 친 까닭에 마나를 흐트려 미세한 틈을 만들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니 말이다. 시르젤은 어렵지 않게 저택 바로 뒤에 도착했다. 몇 명의 사병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시르젤은 잠깐 몸을 숨기며 마나의 흐름을 추적했다. 집 안에서 강력한 마나가 몰려 있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분명 그곳에서 브리타뉴 가의 사람들이 모여 카이엔을 둘러싸고 있겠지. 예고 시각인 자정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르젤은 앞으로의 행동 패턴에 대한 계획을 마치고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릴 때부터 힘든 암살자 수업을 받아온 시르젤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돌아다니던 보초 뒤로 슬쩍 다가가 목을 내리쳐 기절시킨 후 눈에 잘 안띄는 곳에 짱박아놓고 벽을 기어올라갔다. 다행히 잔뜩 낀 구름에 가려진 달과 별은 시르젤이 오늘 입은 검은 색 일색의 옷과 망토와 함께 그의 모습을 가리는 데 일조했다. 벽을 타고 오르던 중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원래 이때쯤 카이엔을 잡으러 진입했어야 하지만 방어막을 하나하나 주의깊게 통과하느라 시 간이 지체된 탓이었다. 시르젤이 카이엔과 그 가족들이 몰려있는 불이 켜진 방 근처까지 왔을 때, 그는 남색 깃털을 들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보통 사람들은 절대 눈으로 보거나 느낄 수 없는 현상이 시르젤의 주위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평소에 자연현상을 따라 일정한 흐름을 가지고 흐르는 마나가 브라운 운동(Brownian movement)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불규칙적인 마나의 흐름은 시르젤을 중심으로 심화되어 더욱 무질서하게 움직이 게 되었다. 마나가 이런 식으로 흐르면 마법사들은 마법을 전혀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기존의 마법 이론에 따르면 원래 마나는 파동성과 입자성을 동시에 지니는 극히 미세한 것으로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어서 확률로밖에 나타낼 수 없다. 하지만 마나는 태양과 달빛. 조류와 파도. 바 람과 비 같은 거대한 자연의 흐름에 따른 에너지를 타고 다니면서 거시적 세계에서는 일정량 이상이 모여 일정한 규칙성을 갖는다. 마법사는 그 규칙의 공식을 올바로 이해하고 응용하여 외부의 마나를 끌여들여 에너지로 삼고, 마법을 사용한다. 때문에 수준 높은 마법사일수록, 자연의 흐 름과 규칙을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마나가 규칙 없이 제멋대로 좌충우돌하게 되면 기존 상식에 의한 어떠한 공식으로도 마법사는 마나를 끌어들일 수 없다. 또한 교감을 위해서 마나를 일부 사용하는 정령사도 소환에 지장을 받을 수 있다.(물론 미리 소환해놓은 정령은 문제가 없다. 정령력은 마나와 관계가 깊기는 하지만 마나와 똑같은 식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힘을 사용하는 데 제약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기(氣)를 이용하 는 고위 전사들은 감을 다소 잃기는 하지만 큰 영향은 없다. 기는 마나와 유사하면서도 확연히 틀린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건 시르젤이 그들의 비기 '마나 폭풍'을 발동시키자 순식간에 혼란에 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르젤이 붙어 있는 벽과는 꽤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이라면 들을 수 없을 정도의 성량만이 그에게 전해져왔지만 암살자 코스를 마스터한 시르젤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었 다. "왓! 뭐야. 왜 갑자기 불이 나갔지?" "말도 안돼! 내 라이트 마법이 왜 듣지 않는 거지?" 이때다. 시르젤은 소리를 거의 내지 않은 채 순식간에 열린 창을 통해 어둠이 깔린 방 안으로 진입했다. 갑작스럽게 시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 들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어둠에 익숙한 시르젤은 금방 카이엔을 알아보고 그를 낚아챘다. "카이 오빤 어딨어? 최우선 확인 대상이야!" "카이엔! 대답해!" 카이엔도 잠깐 불이 꺼진 데 넋이 나가 있었는지 반항이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만은 없는 법. 시르젤은 카이엔의 입을 막고 말했다. 이미 그의 입을 막은 손에는 박하향이 나는 수면향을 뿌려놓고 있었다. 시르젤에게는 이미 오래전에 면역이 되어 있는 향이었다. "다소 무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용히 계셔주셨으면 합니다." 시르젤은 나직한 목소리로 카이엔의 귓가에 대고 중얼거렸다. 카이엔은 그의 말을 듣고 순간 움찔하는 듯했다. 그때 카이엔은 왜 그런지 모르게 귓가에 느껴지는 시르젤의 숨소리에 몸이 찌릿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지만 시르젤이 그걸 알 수는 없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마나의 흐름 전체가 제멋대로 소용돌이치고 있어!"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젠장!" 쿵쾅거리는 소리가 이제서야 들려왔다. 하지만 카이엔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너무 늦었다. 시르젤은 이미 천천히 정신이 몽롱해지 기 시작한 카이엔을 들쳐매고 빠른 속도로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시르! 제대로 못해?" [소리칠 시간 있으면 빨리 따라와! 저쪽에서 바람의 움직인 흔적이 남아 있으니까!] 빨리 이 저택을 빠져나가야 한다. 시르젤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까 카이엔을 납치해 올 때 거대한 정령의 기운을 느꼈다. 그 정도의 힘을 가지 고 있고 저런 이성을 지니고 있다면 분명 상급 정령이나 정령왕일 터였다. 아이렌이 미리 소환해둔. 마나 폭풍으로 정령력까지 봉쇄할 수는 없 다. 육감이 제 역할을 하지는 못할 테지만 사이엔도 무시할 수 없다. 만약 그와 정면으로 맞서게 되면 불과 몇 합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마나 폭풍 때문에 그가 시르젤의 기(氣)를 제대로 읽고 그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마나의 움직임은 기의 움직임과 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에 마나 폭풍은 기에도 영향을 끼친다. 다만 외부에서 마나를 끌어쓰는 마법사와는 달리 기는 전사들의 몸에 쌓여 있기 때문에 전사에게는 문제가 덜 생기는 것이다. '정말 한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임무다. 만약에 마나 폭풍이 덜 완성된 채 이 일을 했었다면...' 저도 모르게 긴장하는 시르젤. 그때까지도 카이엔은 수면향에서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가 가진 강력한 마법무구들 때문일까? "절대마력보호반지의 영향인가요? 과연... 작용이 늦군요. 죄송하지만 좀 많이 뿌리겠습니다. 악몽...을 꾸실지도 모르겠지만 사죄는 나중에 드리겠 습니다." 이 수면향의 부작용이 조금 과하게 맡으면 조금 어두운 기억을 꿈으로 끌어낸다는 사실이었다. 시르젤은 카이엔을 어깨에 맨 채 수면향 통을 꺼 내 손에 더 뿌리고는 카이엔의 얼굴을 감쌌다. 예상대로 카이엔은 금세 정신을 잃었다. 잠든 카이엔을 업고 정신없이 저택 안을 달리고 있을 때 눈앞에 브리타뉴 가의 집사가 있었다. 시르젤은 그를 일부러 외면한 채 계속 달리려고 했지만 집사는 그를 제지하면서 말했다. "저쪽 계단을 따라 가면 별채와 이어지지. 저쪽으로 가게." "...당신." "믿지 못하겠으면 관둬." 그래 아무래도 좋아. 만약 브리타뉴 가 사람들한테 잡히면 저 집사의 정체를 모두 폭로해버리면 되니까. 물론 시르팡의 정체가 들키는 것도 각오 해야 겠지만 애초에 고위 마법사들의 정신계 마법에 쉽게 버티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시르젤은 집사가 가리킨 방향으로 몸을 날 렸다. 열심히 계단을 내려가고 통로를 사뿐히 달리고 있을 때 시르젤도 간신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멀리서 소리가 들려왔다. "시르팡 자식, 어디로 갔는지 못 봤어?" "저쪽으로 갔습니다. 녀석은 길을 조금 헤메는 것 같더군요." "가자!" 그리고 카이엔의 가족들이 움직이는 소리. 그 소리가 커지지 않는 걸로 봐서 시르젤이 도망친 방향으로는 오지 않는 듯 했다. '그 자. 대체 무슨 꿍꿍이길래...' 시르젤은 그제서야 다소의 여유를 가지고 그 집사의 꿍꿍이에 대해서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쉽게 알 수가 없었다. 3년 전 '그 날'이후 홀연히 사라진 그는 완전히 인생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무언가를 시작할 마음이 생긴 걸까? 금방 대답이 나올 리 없는 의문을 뒤로 미뤄두고 시르젤은 자신이 납치해온 카이엔을 양 팔에 걸쳐 들고 정신을 잃은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주변은 완전히 어두웠지만 시르젤은 카이엔의 모습을 자세히는 아니라도 대충 볼 수 있었다. 완전히 축 늘어져 무방비한 카이엔의 모습은 어둠 속에서도 충분히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살짝 감은 눈에 힘없이 반쯤 열려 있는 입술이 시르젤의 마음을 자극했다. 암살수업의 결과로 원한 다면 언제 어느때라도 심장박동을 일정하게 유지시킬 수 있는 그였지만 이때만은 이상하게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시르젤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카이엔의 입술에 입을 가져다대려다 중간에 멈추었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 이상하게도 이 순간 갑자기 시레나의 얼굴이 카이엔의 얼굴 위에 겹쳤다. 전혀 닮은 점이 없는 두 사람인데도 말이다. 너무 좋아했던 누나. 그리 고 그 누나가 너무 좋아했던 카이엔. 어째서 이때 시레나 누나가 떠오른 것일까... [그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줘. 그는 단지 스스로의 슬픔과 분노를 돌릴 곳이 없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왜 누나가!!!] [후후... 하지만 이제와서는 어쩔 수 없잖아? 날 잊으라고 말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겠지..] [그런 말 하지 마! 누난... 누나가 절대 죽을 리 없잖아. 지금 장난치는 거지? 놀리는 거지? 언제나처럼 벌떡 일어나 농담이었어, 바보! 하면서 머 리싸대기를 잡아당길 거지? 으흑...] [시르젤... 울지 마. 난 니가 행복했으면 좋겠는걸. 누구보다도 훨씬 더.] [누나가 없으면 난 불행해!] [고마워... 하지만 이제 됐는걸. 그리고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부탁이 하나 있어...] [뭔데? 뭐야? 응? 말해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들어 줄 테니까. 그러니 제발...] [정말 염치불구한 부탁이긴 한데... 내가 좋아했던 그 애... 짝사랑뿐이었지만. 카이엔을 부탁해.] 사실 그때 시르젤은 꽤 충격을 먹었었다. 어째서 그런 꼬마아이 하나에 누나는 그렇게 집착하는 걸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누나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을 테니까.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카이엔을 부탁해'라는 누나의 말은 꽤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 같다. 진짜 진의는 여전히 미스테리인 채 세월의 흐름 속에 잊혀져 가고 있지만 말이다. 시르젤은 카이엔을 품에 안고 가면서 조용히 그의 뺨에 입맞추었다. 뒤로 멀어지는 저택 안에서는 여전히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시르젤이 마나 폭풍을 풀지 않는 한 카이엔의 위치를 추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유유히 시르젤은 브리타뉴 가의 저택을 빠져나갔다. <시르젤 이야기 끝> 제103화 : 학교로 Return! 이 세상에는 세 개의 대륙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중앙 대륙뿐만 아니라 서부 대륙과 동부 대륙이 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부르는 이름으로 그 지방에서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 테지. 하지만 각 대륙끼리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어떻게 기상이 변할 지 알 수 없는 변덕스러운 바다를 몇 달씩이나 항해를 하면서 건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각 대륙 사이에 여러 개의 섬이 중간 기착지로 존재하 기에 각 대륙간에 교류가 지속될 수 있었다. ...라지만 우리 유클리네가 위치한 곳은 중앙 대륙에서도 정중앙에 가까운 곳. 바다는 끼고 있지 않다. 이는 자하기니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요 즘 대륙지도를 본 나는 시르젤이 날 데리고 갔던 '시아와세노 비치'가 대륙의 어디쯤인지 심히 궁금해하고 있었다. 내가 아시에한테 당할(?) 뻔한 다음날 정신을 차린 아이렌은 혼자서 안되겠다 싶은 듯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을 데려와 아시에를 압박했지만 아시에는 오히려 당당하게 날 좋아한다고 고백함으로서 세이렌 누나의 호감을 얻었고, (세이렌 누나는 당당한 라이벌을 좋아한다. 예전에 피요르 공주 사건때도 그녀를 용납한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사이엔 형은 열변을 토하다가 실수로 어디 단란주점 광고 찌라시를 품에서 흘려 버리는 바 람에 세이렌 누나한테 또 열라 두들겨 맞았다. 아이렌은 혼자서 계속 발악했지만 아시에가 그녀가 쓰러진 사이에 레이엔이 그녀를 어떻게 해 보려고 했다는 사실을 슬쩍 흘리자 아이렌은 바로 태도가 변하면서 아시에에게 '언니, 정말 고마워. 레이엔 이 자식을.'이라고 말하면서 레이엔을 조지러 갔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머리띠가 쪽팔려서 학교 못 간다고 우겨서 집에 있었다. 그런 평상시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유클리네 왕국의 제1왕 자 다즐링 유클리네가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어서 오십시오. 다즐링 왕자님." "불시에 찾아오게 되어서 폐가 되지나 않았을련지는 모르겠습니다." "별 말씀을요. 왕궁보다는 초라하겠지만 편히 지내다 가십시오." 아빠 엄마와 다즐링 왕자가 나누는 담화. 일국의 왕자치고는 지나치게 저자세인 태도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집사에게 들었는데 우리 집안 이 원하면 바로 내일부터 유클리네 왕국이 멸망하고 브리타뉴 왕국이 세워질 수도 있다고 한다. 허허... "이전 머신검 사건에 진전은 있으신지요?" "그다지 진전은 없습니다. 브리타뉴 가의 여러분들 덕택에 셰더라는 자에게 머신검이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조사해 봤지만... 그다지 쓸모 있는 정보는 나오지 않더군요. 마법사의 탑에도 문의해 봤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마법사의 탑이!? 걔네들은 흑마도 왕국에 스파이도 보내 놨을 텐데?" 세이렌 누나가 대화에 끼어들면서 말했다. 참고로 누나도 일단은 유클리네의 마법사의 탑에 소속되어 있기는 했다. 상당한 직위를 차지하고 있다 는 말은 들었지만... "흑마도 왕국이라고 해도 셰더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자료 이외에는 구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는 흑마도 왕국의 일원은 아니니까요. 대륙 7대 흑마법사라고 인정받을 정도니까 흑마도 왕국도 함부로 할 수는 없죠. 그가 흑마도 왕국 자체를 적대시하지 않는 이상은." "흠..." 결국 아무 진전이 없다는 소리군. 하기야 머신검이고 봉인석이고 하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난 별 관심이 없기 때문에 모르겠다. 나같이 힘없는 사 람(?)이 어찌해서 될 일도 아니고.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 않아 나는 최근 납치 사건 빈발 때문에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내 방 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할일없이 침대에서 뒹굴고 누워 있으려니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이제는 천천히 잊혀져 가는 이전 세계에서의 생활에서부터 다들 빠방한 능력을 가진 우리 가족들.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괜찮은 학교 녀석들.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내 마음을 끄는 시르젤. 그리고 문길이로 밝혀진 아시에의 정체... 휴우. 이런 것만 생각하고 살기에도 난 너무 복잡하다구.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들어가도 돼?" 문길이... 아니 아시에였다. 카이엔과 김상우가 같지만 다른 것처럼 문길이와 아시에도 같지만 완전히 같은 존재는 아니니까 계속 아시에라고 불 러주는 편이 좋겠지. "이상한 짓 할거라면 들어오지 마."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오는 아시에. 어? 그렇다고 난 들어오라는 소리는 안 했는데? 휴우... 조금 데리고 다니기 번거롭긴 했 지만 이전의 아시에가 좋았지. 문길이의 기억을 가진 아시에는 날 너무 잘 아는 녀석이라 오히려 부담스럽다. 반면에 저녀석은 21년이라는 세월 을 아시에로 살면서 성격이 좀 변해 버렸기 때문에 나는 저녀석을 잘 알 수 없고... 씨잉 억울해! "카이 안녕?" "아침에 인사했는데 왜 또하냐?" "그냥 무안해서. 헤헤." "왜 왔어?" "뭐야.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할 것까진 없잖아. 정말이지..." "나 아직 화 안풀렸어!" "쑥쓰러워 하는구나. 푸훗. 고작 찐한 키스가지고도 저러는데 앞으로 무슨 반응을 더 보여주려나... 기대된다♡" "나가!" "왜그래? 나 니가 말한 대로 '이상한 짓' 전혀 안 했잖아?" "그것도 일종의 언어폭력에 의한 성희롱이잖아!" "그래? 니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그러면 내가 이전에 너에게 카피해준 야겜과 야시디 목록을 하나씩 공개해..." "스... 스토옵!" 나는 깜짝 놀라 아시에의 말을 막았다. 누구한테 공개한다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말을 꺼내면 단박에 나의 청순가련(?)한 이미지가 완전 히 박살날 것 같은 섬뜩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으으... 이전의 문길이녀석도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뻔뻔한 녀석이었는데 이제 아시에 로 업그레이드되면서 능글맞음까지 추가되어 더욱 더 내가 상대하기 힘든 강적으로 변했다. 자꾸 내가 저녀석의 먹이가 된 듯한 느낌이 드는 건 대체 뭐 때문인지... "왜, 이 자리에는 어차피 너랑 나밖에 없잖아? 공개해도 아무 상관 없을 텐데?" "...니 꿍꿍이를 모르겠어. 그러니까 절대 싫어." "소심하기는... 푸훗." 완전히 놀림당하고 있잖아. 이거. 이 세계로 오기 전에는 문길이 녀석한테는 조금. 아주 쪼오금 밀리기는 했어도 이정도까지 몰아붙여진 적은 없 었다. 아마 이렇게 당하고만 사는 것도 그녀가 20여년동안 쌓은 내공이 헛되지 않은 거겠지. 잠깐, 생각해보자. 잘 생각해보니 이 세계에 와서 내가 주체적으로 남을 갈군 적이 얼마나 있는지를. 생각해보니 나는 남에게 이리저리 당하기만 했지 내가 남의 눈에 피눈물을 뿌린 적은 전혀 없었다. 학교에서는 수학여행때 여장당해서 놀림당하기만 했고 집안 가족들에게 나는 항상 순결 의 위험을 감지하면서 살아야 했다. 우웁... 새로운 세계에서 풍족한 환경 속에 살게 되면서 결심한 것들이 완전히 허물어지고 있구나. 암울했던 과거 따위는 잊어버리고 내가 주체적 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이야. 그런데 한 가지는 변했지만 한 가지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무관심하고 외로웠던 상 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가지고 날 사랑해주는, 주제를 넘을 정도로 행복한 여건이 되었다는 것. 변하지 않은 것은 그 와중에서도 나 는 피동적으로 남의 행동과 반응을 받아들이기만 할 뿐, 내 스스로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움직일 수 없는걸지도 모르겠다. 휴우. 본래 내 소극적이고 소심한 성격은 어떻게 해도 고칠 수 없는 걸까? "뭘 그렇게 궁상맞게 고민해, 카이?" "이놈의 머리띠 땜에 고민이지. 뭐긴 뭐야." 세이렌 누나가 다른 마법무구들처럼 내 몸에서 안 떨어지게 강제 고정시킨 머리띠. 이 머리띠 때문에 이젠 학교에 갈 수도 없다. 이걸 당당히 쓰 고 학교에 가기에는 너무 창피하단 말야. 대체 어떤 놀림을 또 받을 지 모르는데... 이렇게 행동하는 내가 더욱 더 소심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모자를 쓰고 가면 어때?" "모자?" "응. 큰 모자를 쓰면 머리띠를 가릴 수 있잖아. 그 집중력의 머리띠는 작으니까." 하기야 집중력의 머리띠는 세이렌 누나가 붙인 생화가 크기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아담한 사이즈다. 그 때문에 끼고 자도 별다른 불편함이 없다. 자면서 이리저리 뒹굴다가 꽃을 완전히 뭉갰는데도 몇 분 지나지 않아 형상기억합금처럼 꽃이(그것도 생화가!) 원래대로 복원되어 새삼 세이렌 누나의 마법능력을 깨닫게 해 주었다. "흠... 그거 괜찮은 방법인데." 세이렌 누나가 이대로 쉽게 머리띠를 풀어 줄 리는 없다. 하지만 이대로 집안에 박혀 살수만은 없다. 그러면 나는 더욱 더 남에게만 의존하고 스 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 될 테니까. 학교에라도 가서 좀더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나는 이 세계에 대해서 완전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잖아? (물론 한국이라는 세계에 관해서 완전히 파악하고 있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지만...) 나는 아시에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좋아. 모자 쓰고 가기로 결심했어, 단!" "단?" "꽃이나 핑크색 리본같은 게 주렁주렁 달린 여성 취향의 모자라면 사양하겠어." "뭐... 알았어." 실망한 표정이 눈에 보인다. 이녀석아. 휴우. 하여간 또 오래간만에 학교에 가게 되는군. 저번 성적표 나온 이후에 셰더랑 시르젤이랑 얽혀서 꽤 빠졌지? 우리 가족들에게 맡기면 정상적인 것을 골라줄 리가 없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잘 아는 나는 집사를 닦달해서 브리타뉴 가 옷 '창 고'로 가서 직접 모자를 골랐다. 하지만 한국과 이 세계는 완전히 패션 센스가 달라서 온통 이상한 것들 뿐. 맘에 드는 걸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집사의 도움을 받아서 그래도 그럭저럭 쓸 만한 모자를 골랐다. 내가 모자를 쓰고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시에가 말했다. "역시 카이는 뭘 써도 어울리네. 우훗∼" 이전의 아시에였다면 분명 난 당황스런 반응을 보이며 부인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녀는 아시에이기도 하지만 또 그 이전에 나의 친구 문길이기도 하니까. 이전에 느꼈던 거리감이라든지 뻘쭘함이라든지 하는 게 이제는 없다. "그러고 보니, 시에 넌 요즘 모자 안 쓰네?" 아시에는 항상 몸에 맞지 않게 크고 뾰족한 검은 마녀 모자 쓰고 다녔는데 말이야. "응. 그 모자, 순전히 셰더 자식 센스거든? 그놈의 조교 때문에 그거 안쓰면 큰일나는 걸로 몸과 마음에 각인이 되버렸기 때문에 기억을 찾기 전 까지도 계속 쓰고 다녔던 거야. 솔직하게 말해서... 안 쓰고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답답해지고 불안해지곤 해. 하지만 어떻게든 견뎌내야지. 이젠 그놈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으니까." 아시에의 전쟁은, 아직 끝난 것은 아닌가보다. 그녀가 작은 주먹을 꽉 쥐면서 하는 말에는 원래 문길이의 흔적인 거친 말투와 20년간 쌓여온 여 성스러움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것만 봐도 그녀의 순탄치 않은 인생 역경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모르는, 이제는 그녀가 되어버 린 그의 삶을...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은 자신들의 소중한 생일 선물을 모자로 가려버리자 섭섭한 모양이었지만 이건 모두 그들이 자초한 거다. 그러길래 누 가 이런 걸 머리에서 안 떨어지게 만들랬어? 근데 주위를 살펴보니 레이엔이 보이지 않았다. 궁금해진 나는 아이렌에게 물었다. "제가 혼쭐을 좀 내줬어요. 세상에 자기 쌍둥이 형제를 쓰러진 사이에 덮치려는 변태 사이코가 어딨어요!? 걔가 쓸데없이 절 좀 귀찮게 굴어서 할수 없이 데이트 몇 번 해줬더니 기고만장해서는..." ...친오빠의 생일날에 최음제나 정력제 같은 걸 선물로 주는 사람이 할 말이 아닌 거 같은데...;;;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역시 세이렌 누나보다는 아이렌쪽이 훨씬 상대하기 부담스럽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고 아시에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아시에가 마차에 탑승하기 전 세이렌 누나와 묘 한 눈빛을 교환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내 마음은 오래간만에 가는 학교 때문에 들떠 있었으니까. 그리고 학교에 도착했을 때, 열렬한 반응이 내게 쏟아졌다. "끼야악! 카이엔 님이다아!" "정말? 어머! 어머! 대체 얼마만이야?" "무사한 것 같아 다행이야... 시르팡에게 납치당하는가 하면 이번엔 흑마법사한테 납치당했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정말 오래간만에 듣는 팬들의 열렬한 반응이다. 지금까지는 극성팬들이 부담스럽기만 했는데 이제는 고생을 조금 한 탓인지 마음에 알수 없는 여유가 생겨 그들의 성원이 마냥 고맙게만 느껴졌다. 아아 감동스러워라! "그런데 있잖아, 혹시 그 흑마법사가 나쁜 마음을 먹고 카이엔 오빨 덮치려 들거나... 한 건 아닐까?" "얘는... 무슨 소리야? 설마 그러려고?" "아냐.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흑마법사들은 대부분이 변태라잖아. 그런데 카이엔 오빠가 워낙 한 미모 하니까 그대로 내버려 뒀겠어?" "어머! 어떡해... 그렇다면 지금 저렇게 웃고 있는 카이엔님의 미소 뒤편에는 깊은 상처를 안고 있을지도..." "얘들아. 그렇다고 절망해서는 안돼. 이럴수록 우리가 더욱 더 힘을 모아 변함없는 애정을 펼쳐줘야 하는 거야. 카이엔 오빠 사랑해요오∼♡" 저... 저기. 성원 보내 주는 건 좋은데 웬만하면 이상한 소설은 쓰지 말아줬으면 좋겠거든? "인과응보네." 아시에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의 말이 묘하게 신경이 쓰여 고개를 돌렸다. "무슨 뜻이야?" "팬픽으로 흥한 자. 팬픽으로 망하리. 딱 니가 그 꼴이잖아." 나는 아시에의 말이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세계에 오기 전에 멀쩡한 연예인 남정네들끼리 연결시켜서 알콩달콩하거 나 또는 아슬아슬한 내용의 팬픽을 쓰는 것이 취미였으니까.(지금 고백하건데, 잘생긴 애들만 쓰다가 질려서 강호동♡유재석 같은 엽기적인 짓을 한 적도 아주 가아끔 있었다. 쿵쿵따 유행할 때다 -_-) 그런데 지금은 내가 여러 가지로 구설수에 올라 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날 소 재로 별별 이야기를 다 만들어 낸다. "변태짓을 좋아하는 사람은 변태짓으로 망하지... 내가 그 꼴이니..." 그렇게 혼자서 중얼거리는 아시에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지만 나는 방금 아시에가 했던 말을 생각하느라 그녀의 찰나의 변화를 미처 알 아차리지 못했다. 이제 마차에서 내려 학교 건물로 들어갈 시간이다. 나는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건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웬걸? 아시에 가 갑자기 내게 팔짱을 끼면서 기대오는 것이였다. 순식간에 플래카드까지 내걸면서 오랜만에 온 날 환영하러 온 여자애들이 그 모습을 보고 경 악했다. 그리고 지금 나와 있는 수는 절대적으로 적었지만 아시에의 팬이었던 남학생들도 절규했다. "마... 말도 안돼! 왜 아시에가 카이엔 녀석과!" "카이엔 님이 뭐가 어때서, 오히려 아시에 쪽이 카이엔 님에게 격이 떨어진다고!" 다소 싸움이 일어날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내 환영인파가 훨씬 많은 관계로 아시에 팬들이 절대적으로 밀렸다. 나는 어떻게든 팔짱을 풀려 했지 만 아시에는 내 팔을 놔주지 않았다. 젠장, 왜 이렇게 힘이 센거야? 아니 그것보다 내가 힘이 너무 약한 걸 한탄해야 되려나? "시... 시에, 무슨 짓이야?" "응? 당연하잖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당연히 이렇게 하고 다녀야지." 일부러 조금 크게 말한 듯한 아시에의 말이었다. 그리고 점차 얼굴색이 탈색되어가는 구경꾼들. 설마... 아시에 너... "너 설마..." "이렇게 기정사실화 시켜버리는 거지. 우후훗♡" 크윽! 이전에 날 덮쳐서 딥 키스를 이끌어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되는데! 아시에를 너무 얕보고 있었다. 간만에 학교가는 기쁨에 넘친 나머지 아시에가 같이 학교에 가고, 문길이의 기억을 되찾은 그녀가 무슨 짓을 할 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었다. 젠장! 이제와서 아시 에더러 집에 가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들을 그녀도 아니니. "자, 교실로 가자, 가자∼ 렛츠 고오!" "이거 안 놔아!?" 하지만 역시 강단있지 못한 나의 성격 때문에 난 그대로 아시에와 팔짱을 낀 채 그녀에게 교실로 질질 끌려갈 뿐이었다. 흐으∼ "이것 좀 놓으라니깐!" "싫어. 안 놓을 거야." 아시에에게 질질 끌려오다시피 교실로 들어오는 내 모습을 보고 우리 반 애들은 경악을 한 듯 입을 딱 벌렸다. 그리고 오랜만에 돌아온 날 보고 안부를 묻거나 인사를 하기 전에 수군거리기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쟤... 쟤네들 어떻게 된거야?" "아무리 가족이라도 아시에는 양녀, 같은 피가 흐르지는 않잖아? 한지붕 밑에 사는 두 청춘남녀가 눈이 안 맞는게 이상한 걸지도..." "그 논리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어. 그 극악무도하고 공포스러운 카이엔의 누나가 그걸 가만히 둘 리가 없잖아?" "연애라는 건 원래 다 몰래몰래 하는 거야. 안 들키면 장땡이지 뭐." 뭐... 뭐야? 아무리 지금 팔짱을 끼고 있다지만 그걸 보고 바로 '사귀고 있다'라고 박아버릴 것까지는 없잖아? 아시에는 반 애들의 반응을 보고 즐거운 듯 생글생글 웃으면서 날 바라보고 있다. 우잇... 그렇게 웃지 마! 자꾸 얄미워지잖아! 으... 생각은 아시에가 가증스럽다고 느끼고 있지만 직접 얼굴을 맞대면 꼭 그렇지만은 않으니... "카이엔 니임! 이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오오옷!" 갑자기 귀청이 떨리는 큰 목소리가 들려와서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려보니 시에나가 나와 아시에를 보고 풀썩 주저앉아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 옆으로 루카라가 와서는 시에나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실망하지 마. 시에나. 어차피 너에게 카이엔은 너무 높고 아득한 벽이었어..." "으흑... 알어. 알고 있지만... 내가 카이엔 님을 원한다는 게 얼마나 허황된 욕군지는 잘알고 있었지만... 그렇지만 다른 여자랑 행복하게 있는 꼴 을 보고 싶진 않았어!" ...누가 누구랑 행복하게 있다는 거야? 나는 완전히 아시에랑 나를 기정사실로 만드는 교실 분위기에 홱 돌아서 뭐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 직전에 아시에가 내 팔을 살짝 꼬집더니 귀에 속삭였다. "잘 됐지. 덕택에 니 모자에 관한 건 아무도 신경쓰고 있지 않잖아? 쓸데없는 말을 하면 모자를 확 벗거버린다!?" 우웃. 아시에녀석은 이제 나에게 협박까지 해 오고 있다. 으으... 이녀석은 역시 문길이의 기억따위는 되찾지 않는 편이 좋았어! 나는 순간 어느 쪽이 나에게 이득일지를 곰곰히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1. 절대로 아시에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부인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아시에는 내 모자 속에 감춰둔 꽃달린 머리띠에 대해 폭로한다. 2. 아시에의 협박을 따른다. 그렇게 하면 모자 속의 머리띠는 드러나지 않지만 대신 아시에와 커플로 못박히게 된다. 둘다 싫어엇! 제3의 선택지는 없는거야!? "하여간 흑마법사한테 납치당했는데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어디 다치거나 한 데는 없지?" "응." 그나마 키론이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며 날 걱정해주었다. 사실 내가 오랜만에 이렇게 학교에 왔으면 이렇게 사람 걱정부터 먼저 해 줘야 하는 게 당연하지. 그런데 왜 다들 아시에와의 관계에만 중점을 두고 떠들어대냔 말이다! 그때 키론의 옆에 린넬이 끼어들면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 했다. "혹시 그 흑마법사한테 당했다거나..." "안 당했어!" 난 정색을 하며 외쳤다. 린넬 너는 왜 그런 거부터 물어보는 거야? 셰더에 관한 것은 대외비였고 특히 시르젤에 관한 건 가족들한테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진상을 모른다. 단지 내가 흑마법사에게 납치당했다가 돌아왔다는 것만 알 뿐. 그래서 내가 흑마법사한테 당했느니 안 당했느니를 자꾸 따지고 드는 것이었다. 드르륵. "카이엔 왔다면서, 카이엔이!" 그때 치즈를 비롯한 우뉴, 이멜츠가 교실 문을 열고 뛰어들어왔다. 쟤네들은 다른 반이지만 평소에 나와 친하게 지내는 관계로 우리 반 출입허가 를 얻은 녀석들이다. "진짜 왔네? 아시에도 왔고 말야." "그럼 내가 진짜지 가짜냐?" "그래. 근데 아시에 너 아직도 카이엔한테 의존하고 있어? 에이. 웬만하면 그런 녀석한테 너무 붙어있지 말고 주체성을 좀 기르라니깐." 우리 학교 여자애들 중에 날 '그런 녀석'같은 말로 부를 수 있는 애는 분명 치즈밖에 없을 거야. 털털한 성격이 강점인 애니까. 그때 우리 반 녀 석들이 친절하게도 이번에 아시에가 내게 붙어있다는 건 전과 다르다는 걸 설명해 주었다. "그게 아냐, 치즈. 오늘 아시에와 카이엔은 너무 끈적끈적하게 붙어 있어. 팔짱을 끼고 서로 기대면서 사이좋게 교실로 들어오더라니깐?" 질질 끌려온 게 왜 '서로 기대면서 사이좋게'가 되는거야!? 나는 뒷일을 생각지 않고 참다못해 버럭 소리질렀다. "아, 글쎄. 나랑 시에는 아무 관계 아니라니깐! 그냥 가족일 뿐이라고!" "그럼 그 팔짱은..." "시에가 자꾸 끈질기게 부탁하길래 어쩔 수 없이 해준 것 뿐이야!" "냉정해라∼" "음. 역시 이전의 싸가지 없는 성격이 드디어 부활할 징조인가." 너네들이 자꾸 소설만 안 지어내도 내가 자꾸 욱하는 일은 없을거다. 이 놈들, 그리고 이 년들아. 그렇게 외치며 분을 삭일 때 시에나가 부담스 러울 정도로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면서 양 손을 맞잡고 내게 말했다. "꺄아∼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거죠? 정말이죠? 카이엔 님은 지금 애인 없는 거죠?" "그... 그래." "너무 기뻐요! 카이엔님이 딴 여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아서!" 그렇다고 내가 애인 없다고 하는 말에 기뻐하는 것도 어째 기분이 나쁘군. 그렇게 정신없는 분위기에 적응해갈 무렵 뒤에서 알 수 없는 어둠의 오오라가 풍겨져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다보니 그 기운은 아시에한테서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 느낌과는 반대로 그녀 는 활짝 웃고 있었다. 헉! 무슨 짓을 하려고? 불안하잖아 임마! 다른 애들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시에가 활짝 웃자 넋이 나가서는(특히 남정 네들) 그녀의 입술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시에는 조금 긴장한 날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자, 카이♡ 이제 교실에 들어왔으니 그 답답한 모자는 벗는 게 어때?" 역시...! 하지만 당할 쏘냐! "시... 싫어! 안 벗을 거야!" 나는 본능적으로 양 손을 모자 위에 대고 꼭 누르면서 뒷걸음쳤다. "그러고보니 모자 쓴 모습도 꽤 멋있네요. 카이엔 님." "카이엔이 싫어하는 데 억지로 벗게 할 건 없지 않아, 아시에? 아까 내 앞에 왔던 시에나와 옆에 서 있던 린넬이 날 보면서 말했다. 그래. 너네들이 날 도와주는구나. 흑흑. 앞으로는 내 팬들에게 잘 대해야겠 어. 하지만 아시에는 그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거침없이 말했다. "후훗. 그건 아니지. 사실 카이는 그 모자속에 너무 귀엽고 깜찍한..." "그만해애!" 나는 아시에의 입을 막기 위해 황급히 달려갔다. 그런데 웬걸? 아시에는 그녀의 입을 막으려던 내 팔을 한손으로 살짝 당기더니 그대로 날 잡고 뒤로 넘어지는 게 아닌가? 우와아악! 무슨 짓이야, 아시에! 쿠당탕. 아시에의 오노 액션에 그녀와 나는 동시에 교실 바닥에 쓰러졌다. 내가 위에서 아시에를 올라탄 형국이라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지만...(그렇지 않 아도 기혈환이 있으니 말이다.) 깜짝 놀라서 잠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왜 얼굴에 부드럽고 푹신한 감촉이 느껴지는 거지? "마... 말도 안돼애. 카이엔님이... 아시에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어. 우에엥!" "으히익!"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려 했지만 아시에가 그 사이에 묘하게 내 다리와 그녀의 다리를 얽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일어날 수 없었다. 오히려 일어서려다가 도로 넘어져 다시 한번 그녀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어야 했다. "카... 카이. 아무리 그래도 이런 곳에서 그런 짓은..." 얼굴을 붉히면서 요조숙녀처럼 말하는 아시에. 남자라면 누구나도 흥분할 만큼 붉게 물든 얼굴이었지만 나는 가증스러움과 함께 무럭무럭 솟아 오르는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반 애들은 울어대는 시에나를 필두로 수군수군대고 있었다. "카... 카이엔이, 결국..." "린넬, 실연이구나." "뭐... 뭐가 실연이라는 거야? 키론!" 지금 이 난국을 어떻게 해야 타개해낼 수 있을까 딸리는 머리를 가지고 열심히 끙끙대고 있을 때 교실 문이 열리더니 아침 조회를 하러 담임 선 생이 들어왔다. 제106화 : 전학생 시르쥬 담임 선생이 교실문을 열고 들어와서 가장 먼저 본 것은 내가 아시에 위에 올라타 있고 그 옆으로 반 애들 전부가 둘러싸서 구경하고 있는 모습 이었다. 그때 나는 낑낑대면서 간신히 아시에의 방해공작을 뚫고 얽혀있는 다리를 빼내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낑낑대는 모습이 옆에 서 보기에는 오히려 더 이상하게 야릇할 수 있는 풍경을 선보이고 있다는 것을 난 알 수 없었다. "카이엔 군. 수업시간에 앞서 우리 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살아있는 성교육 강의라도 보여주려는 겐가?" 참고 있다는 뜻이 역력한 주름살을 내보이며 담임 선생이 화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은 아시에가 했는데 왜 날 가지고 그랫!? 하지만 내 체위(?)가 상위인 만큼 뭐라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전혀 없었다. "오오... 살아있는 성교육! 그거 좋은데, 보여주..... 꾸엑!" 우뉴가 헛소리를 하다가 여자애들 몇한테 두들겨맞고 침몰했다. "게다가 또 그 모자는 뭔가? 예의가 아니니까 벗도록 하게." "그... 그건 절대 안되요!" "왜 안되는 건지 이유가 있나? 혹시 탈모라도 있는건가?" 그건 담탱이 당신 이야기지, 이 나이에 탈모는 무슨 탈모얏! 하지만 마땅히 댈 이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탈모라고 거짓말 해도 그것 나름대로 쪽팔리고... "어디 좀 벗어 보게." 담임은 아예 자기가 직접 내 모자를 벗길 작정인지 손을 내 머리 위로 뻗어왔다. 나는 그 손을 피하기 위해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그때 타이밍 좋게 다시 아시에가 날 슬쩍 건드려 몸의 균형을 잃게 만들었고 다시 나는 쓰러진 아시에 위로 자빠졌다. 또 말랑한 피부에 얼굴이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젠장! 왜 넘어져도 왜 자꾸 여기에만 넘어지는 거야! "카이... 그만해. 가슴이 너무... 아파." 정말로 아픈 듯 숨을 이상하게 헐떡이면서 내는 아시에의 목소리. 게다가 내용도 은근슬쩍 어딘가 야릇하다. 지금 18금... 아니 19금 성인 영화 찍냐? 아무래도 이녀석은 AV계의 여배우로 보내는 편이 훨씬 나을 거 같다. 나이도 상당히 먹었으니 연기력이 정말 만만치 않다. 실체를 아는 나니까 지금 이러는 거지 지금 남학생들은 날 엄청 부럽다는 시선으로 째려보고 있다. 뭐, 반대로 여학생들은 아시에한테 분노의 눈길을 퍼붓고 있으니 마찬가지긴 한 걸까? "됐으니까 애정 행각은 그만 벌이고 일어서서 제자리에 가서 앉아! 너희들도 빨리 가서 앉지 못해? 그리고 치즈 너네들은 여기 왜 있어? 빨리 교실로 돌아 가!" 담탱이가 뚜껑이 열리긴 열린 것 같다. 하기야 신성한(?) 교실에서 이런 불건전한 상황이 벌어졌으니 선생으로서 화내지 않는 게 이상하다. 뭐, 일본이라는 동네의 18금 겜들을 하다보면 교실에서 이상한 짓이 벌어지는 것도 별일은 아닌 듯 싶지만, 구경꾼의 유무라는 건 확실히 중요한 일 이다. 난 단지 아시에의 옛 친구 따먹기(?) 프로젝트에 코가 꿰여 걸려 들어간 것 뿐인데 애정행각이라니... 너무 억울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시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 교실에서!" 나는 자리에 앉아서 옆에 앉은 아시에에게 속삭였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아시에를 옆에 앉히지 않는 건데! 이 상황에서 왜 옆자리 야!? "...왜 어때서? 니가 먼저 내 말을 안 들었으니 난 그럴 수밖에 없었어. 또 니 마음대로 그런 소리 내뱉으면 진짜 모자 벗긴다?" 잘못은 지가 했으면서 오히려 나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는 아시에. 본인은 문길이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 절대 문길이라고 부르지 말라 고 한다. 그건 나도 인정한다. 진짜 문길이라면 여자가 되어도 여자를 탐했을 테니까. 하지만 21년동안 기억을 잃었다가 다시 찾으면서 그 성격 이 대체 어떻게 꼬인 건지 정말 최악의 성격만 조합해서 새로 성격이 형성된 거 같다. 하지만 저 협박 때문에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이 뻔뻔한..." "거기, 카이엔 군. 조용히 안 하나?" 저 담탱이 원래 짜증났지만 오늘은 더 짜증나네. 아시에도 같이 떠들었는데 왜 나만 가지고 난리얏! "흠흠. 불의의 사건 때문에 소개가 늦었는데, 오늘 우리 반에 새로운 전학생이 하나 오게 되었다." "우리 반 정원초과 아니었나?" "카이엔, 기억 안 나? 저번 수학여행에서 죽은 우리 학교 애들 중 한 명이 우리반 애였어..." 내가 중얼거리는 것을 옆에서 들은 아시에가 말했다. "그... 그랬나?" "신경 좀 쓰고 다니라구." 조금 찔리긴 한다. 원래 학교에 안 나오다 보니 그런 걸 미처 몰랐어. 그러고 보니 누군지 기억도 잘 안난다. 고작 20명 남짓인 한 반인데 말이 야. 나에 대한 남들의 무관심. 그리고 남들에 대한 나의 무관심. 나는 아직도, 남이 먼저 접근해오기만을 기다릴 뿐 누구에게도 먼저 다가가려 하 지 않는다. 본래 성격이 그렇긴 하지만... 이럴 때는 나 자신이 한심하다는 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시에도 학교에 안 나온 건 마찬가진데 그녀는 확실히 그걸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자신과 비교하면서 더 비참한 기분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담임은 우리를 째려보긴 했지만 더 이상 시비를 걸지는 않고 전학생 소개를 계속했다. "들어오너라. 쥬르시." "네, 선생님." 어딘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와 함께 들어온 전학생은... 으헉! 저게 누구야! 머리 스타일이 조금 바뀌긴 했지만... 시르쥬잖아! 시르젤의 동생 시르 쥬 케이리가. 저녀석이 여기 왜 오는 거야!? 시르쥬는 나를 보며 살짝 묘한 윙크를 짓고는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쥬르시 제이리가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러분들과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어째 저 녀석 답지 않은 표준적인 소개인사다? 저런 식의 인사는 시르젤한테나 맞을 거 같은데... 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저녀석이 우리 학교에 온 거냐고? 그것도 전학생으로 우리 반에! 무슨 꿍꿍이와 음모가 있을거야, 분명! 틀림없어! "쥬르시의 자리는... 얼마전에 죽은 하임달의 자리에 앉거라, 괜찮지?" "네." 그 수학여행에서 죽었다는 애 이름이 하임달이었나... 하지만 나는 같은 반이었으면서 얼굴도, 이름도 어설프게 떠오를 뿐 확실히 머릿속에 떠오 르지 않는다. 이 반에 온 지 몇달씩이나 지났으면서도 말이다. 물론 결석을 너무 많이 한 탓도 있지만 20명밖에 안 되는 한 반에서 얼굴과 이름 둘 다 기억이 가물하다는 건 기본적으로 나 자신의 무관심이 문제다. "그 죽은 애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마, 카이. 나도 영 기억 안나니까." "넌 중간에 들어와서 얼마 안된 후에 수학여행을 갔었잖아, 나와는 좀 다르지." "거기 그 변태 커플, 자꾸 떠들텐가?" 누가 변태 커플이라는 거얏! 그보다 왜 내가 아시에랑 커플로 찍혀야 하는 거냐구! 흑흑. 뭣 때문에 이렇게 꼬이게 된 건지... 그래. 이건 전부 셰 더 때문이야. 가만히 놔두면 될 아시에의 기억을 왜 되찾게 해 준거야? 안그랬으면 그 문길이 녀석도 전부 기억에서 지운 채 잘 먹고 잘 살수 있었을 텐데... 점심 시간. 나는 어떻게든 아시에와 다른 사람들을 따돌리고 시르쥬 녀석과 학교 으슥한 곳에서 독대했다. 왜 이녀석이 여기로 전학왔는지 엄청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녀석의 꿍꿍이를 알아내야겠다 생각했다. "뭐하러 온거야?" "그야 당연히 형수님이 바람피지 않나 감시하러 왔지." "너 자꾸 형수라고 부를래!" 나는 이리저리 주먹을 휘두르며 시르쥬를 패주려고 했지만 시르젤과 같이 암살기술을 익힌 그에게는 내 연약한 주먹은 애들 장난에 불과할 뿐이 었다. 계속 치고 또 쳐도 어째 때리는 내 손만 아픈거야? "그런데 바람을 피다니, 용납할 수 없어! 우리 형은 오직 카이엔 너만 생각하고 있는데!" "바람은 누가 바람을 핀다는 거야?" "다 들었어. 반 애들이 전부 보는 앞에서 그 옆자리에 앉은 아시에란 여자아이와 몸을 섞었다며?" "오... 오해야! 게다가 몸을 섞었다니, 언제 이야기가 거기까지 나간 거야?" "하여간 남자건 여자건간에 위험한 선을 넘는 것은 용서하지 않겠어." "내... 내가 뭘 하든 니가 무슨 상관이야? 그건 시르젤과 나 사이의 문제라고!" "동생으로서 당연히 형의 사랑을 응원하고 돕는 게 당연하잖아!" 내 목덜미에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시르젤과 내가 연애관계라는 게 성립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연애관계라는 건 남이 감 내놔 라 배 내놔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괜히 제3자가 끼어들면 방해라고! "그건 그렇고 어떻게 우리 학교로 전학을 올 수 있었던거야? 그것도 우리반에 딱 맞춰서." "훗. 당연하지. 난 괴도니까." "....." 어이없으면서도 무책임하지만 왠지 납득이 가는 대답. 하지만 난 이대로 물러서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정면으로 치고 나섰다. "괴도는 무슨 괴도? 그래봤자 시르젤 잔심부름이나 하겠지." "아냣!" "오호라. 정색을 하고 말하는 게 맞나 보구나." 앗싸아∼ 드디어 내 페이스에 끌여들였다! 흑흑. 그동안 남들에게 구박받고 당하기만 하면서 살았던 게 헛되지만은 않았구나. 드디어 나에게도 남을 제대로 갈굴 수 있는 날이 오다니. 좋아, 계속 이대로 나가는 거다! "어, 어쨌건 내가 여기 온 이상 우리 형을 놔두고 다른 사람이랑 바람피는 것은 용서하지 않겠어!" "니가 뭔데 남의 사생활에 이리저리 간섭이야? 당장 돌아가, 그렇지 않으면 너네 정체를 전부 까발려버릴테니까!" "까발려 봤자, 누가 믿어주는데?" "윽..." 여기서 다시 일시적으로 차지했던 우위는 사라졌다. 역시 내 말빨에는 한계가 있나벼... 흑흑. 어쨌건 생각해보니 그랬다. 내가 한 마디 하면 사슴 을 말이라고 해도(指鹿爲馬) 믿을 사람들이 잔뜩 있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지금 시르쥬가 괴도 시르팡과 관련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 다. 입학 절차가 까다로운 우리 학교로 전학올 정도라면 서류 같은 것도 완벽하게 준비해놨을 거다. 이름 자체도 쥬르시로 바꿨잖아? 게다가 그 들의 본거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고... 하지만 설득하기 어려운 점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다. 나는 직접 그들에게 납치당한 적이 있고 여러 번 관계(?)했으므로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르팡의 정체가 모두 까발려지면 시르젤이 피해를 입는다. 나를 믿어주고, 아껴준 그 사람에 대한 배신 행위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쳇. 시르젤 때문에 참는 줄 알어. 그렇잖았으면 너네들 정체 다 까발렸을 텐데..." 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시르쥬를 바라보았다. 시르쥬는 그 특유의 생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뭐, 아무래도 좋으니 빨리 우리 형의 고백에 답해줘. 원한다면 내가 언제든지 형을 불러줄테니."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시르쥬를 쳐다보았다. '시아와세노 비치'의 파도치는 한밤중의 바닷가에서 은은한 분위기 속에 시르젤이 달콤할 정도로 녹을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던 그 고백. 그때 분명 바닷가에는 시르젤과 나 둘 밖에 없었는데, 그걸 어떻게 시르쥬가 알고 있는 거야?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긴? 원래 형제는 일심동체이며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이해해주는 콤비..." "헛소리 집어치고 빨리 말해. 설마 시르젤이 직접 말해준거야, 응? 응?" 나는 시르쥬의 팔을 꽉 붙잡고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시르젤이 그대로 그걸 다른 가족들에게 모두 떠벌이고 다녔을려고? 그건 믿을 수 없 어. 시르젤이 그렇게 입이 가볍고 방정맞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걸. 설마 내 앞에서만 그렇게 가식적으로 행동한 건 아니겠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켠에는 의심하는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난 부인할 수 없었다. "글쎄..." 다그치면서 따져 묻는 내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인지 시르쥬는 말을 얼버무렸다. "사실대로 말해 줘. 너도 내가 시르젤에 대해서 오해하는 걸 바라진 않을 거잖아, 그치?" 솔직히 시르쥬가 내가 사실대로 말해 줄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케이리가 가문도 나름대로 내부 사정이라는 게 있을 수 있고 무리해서 내 가 거기에 끼어드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분명 나는 여기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 이건 분명 나에 관한 일이고 나와 시르젤 의 신뢰에 관한 중요한 문제니까. "...한 가지만 약속해 준다면." "뭔데?" "절대 울 형한테 이 사실을 말하지 말 것." 절대 시르젤한테 말하지 말라니... 시르젤에게 숨겨야 할 이야기인가? 나는 조금 미심쩍었지만 그래도 너무 궁금했기 때문에 시르쥬의 제안을 받 아들였다. "응. 말 안할께." "진짜 말 안하는 거다? 만약에 말하면 아시에라는 애와의 스캔들을 전부 형한테 말..." "말하지 마!" 내가 확실히 대답을 해줄 수는 없지만 시르젤이 날 좋아하고 있다고 고백했는데 내 본의는 아니었다고 해도 그런 사실이 알려지면 시르젤은 내 게 실망하겠지. 어쩌면 변심해서 [역시 여자가 더 좋으신 건가요. 할수 없군요. 제가 오히려 카이엔 씨에게 짐만 된 것 같습니다. 이젠 더 이상 당신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영영 떠나갈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 멋대로인 것 같은 마음이긴 하지만 그건 역시 싫은걸. "흠흠... 알았어. 절대 형한테 말하면 안된다?"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사실은 '시아와세노 비치'주변 영역에는 마법으로 동작하는 음성 탐지기, 그러니까 도청기가 설치되어 있어. 그걸로 우리 가족 전부가 모여서 두 사람의 사랑의 밀어를 다 들었지∼" "도... 도청기?" 나는 얼굴이 확 붉어오는 것을 느끼며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그럼 나와 시르젤이 나눈 그 이야기를 그 사람들 이 전부 다 듣고 있었단 말이야? 물론 나는 시르젤처럼 좋아한다느니 하는 말은 안했지만 그래도 꽤 창피할 정도로 유치한 말을 여러 번 한 걸 로 기억하는데... 우이씨. 도청은 범죄라고! 남의 사생활을 그렇게 엿봐도 되는거야? "앗, 카이엔 찾았다." "여기 있었네. 한참 찾았잖아. 어, 넌 오늘 새로 전학온... 누구더라?" "쥬르시라고 하던 걸로 아는데." 내가 고개를 숙이면서 시르젤과 함께 걸었던 바닷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 린넬과 키론이 날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내가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본 린넬이 깜짝 놀라더니 은근슬쩍 날 감싸며 시르쥬에게 물었다. "우리 카이엔한테 무슨 볼일이지? 무슨 짓을 한 거야?" 우리 카이엔이라니, 내가 니 애냐? 가족이냐? 린넬 이녀석 갑자기 웬 오버야? "글쎄. 고백이라도 하려던 참인데, 뜻하지 않게 방해자가 나타났군." 에엑? 시르쥬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고백이라니!? 나는 방금 전 시르쥬와 했던 이야기들에 그렇게 해석될 만한 구절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 다. 하지만 암만 생각해 봐도 고백은 커녕 그 비슷한 분위기도 전혀 없었다. 저 기분나쁠 정도로 생글생글한 얼굴... 역시 장난치는 거겠군. "뭐... 뭐라고, 이자식! 니가 뭔데 첫날 전학오자마자 카이엔에게 찝쩍대는 거야? 게다가 넌 남자잖아!" 하지만 린넬은 시르쥬의 말을 진담으로 해석한 듯 주먹을 꽉 쥐고 시르쥬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았다. "너는 카이엔의 뭐지?" "뭐?" "내가 카이엔에게 찝쩍대든 말든, 니가 뭔데 간섭하는 거지?" "난... 반 부반장이자 카이엔의 반 친구로서..." "오늘부로 나도 카이엔의 반 친구가 됐지. 안그래?" "윽..." 린넬. 그러니까 왜 그렇게 오버하고 난리야? 반면에 린넬과 같이 온 키론은 지나칠 정도로 생글거리는 시르쥬의 표정과 한숨짓는 날 보더니 시 르쥬의 말이 진담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린넬에게 말했다. "린넬, 괜히 열 내지 말고 가자. 점심시간 다 끝나간다. 카이엔도 빨리 와. 그리고 쥬르시라고 했나? 너도." "나도 같이 가." 의외의 곳에서 뜻하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없다고 으슥한 학교 체육창고 안쪽에서 들린 소리에 우리는 모두 놀랐다. 그리고 그 뒤에서 나오는 사람은... 아시에였다. 으아악! 쟤가 왜 여기에 있는거야? 분명 아까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는데. 설마 흑마법을 써서? 커억! 그렇다면... 시르쥬와 내가 한 이야기를 전부... 이거 최악이군. "아, 아시에. 니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나는 창고 뒤편에서 엉덩이를 탁탁 털고 일어나는 아시에를 보고 놀라 물었다. "왜? 내가 여기 있으면 안돼?" "그러니까 왜 이런 비좁은 체육 창고 구석에 있던 거냐구?" "너랑 쥬르신가? 하는 그 애는 그럼 왜 여기 있는 건데?" "그... 그건...." 윽. 또 하염없이 밀리는 말빨. 아아∼ 내 말빨은 왜 이토록 다른 사람한테 밀리기만 할까? 부족한 나의 어휘력과 표현력을 저주하면서 나는 말끝 을 흐렸다. 그때 시르쥬가 내 대신에 앞으로 나서서 아시에에게 말했다. 명백히 적의로 가득찬 도전적인 눈빛을 번뜩이며. "카이엔한테 접근하지마." "왜? '가족'끼린데 말이야." "가족끼리니까 더!" "푸훗. 억지부려봤자 안 통해. 완전한 '타인'이 간섭할만한 게 아니라고 보는데?" "으윽..." 으음... 역시 업그레이드 문길이인 아시에한테는 시르쥬도 상대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군. 시르쥬는 생각을 알기 어렵기는 하지만 젊은 열정은 역시 숨길 수 없는 듯 가끔 직설적이거나 어설픈 면도 종종 눈에 띈다. 반면에 아시에는 '연륜'이 쌓인 녀석답게 어떤 말을 들어도 당황하지 않 고 여유있게 상대해나갔다. 내공을 따지자면 린넬<시르쥬<아시에 가 되는 걸까? 시르쥬가 흘끔흘끔 린넬과 키론을 보고 있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그들이 들어서는 안되는 이야기인가 보다. 아시에가 그런 시르쥬 의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한 손을 들고 흑마법을 사용했다. "최. 면.(催眠)!" 아시에가 주문을 외자마자 금방 린넬과 키론의 눈이 풀렸다. 아무리 둘 다 마법같은 걸 배운 적이 없다지만 너무 쉽게 걸리는 거 아냐? 그렇잖 으면 아시에의 흑마법실력도 꽤 된다는 걸까? 하긴 한국에서부터 흑마법으로 남한테 저주를 걸곤 했던 녀석이니... "망. 각.(忘却). 거(去,GO!)" 아시에가 계속해서 외치자 키론과 린넬은 어딘가 얼빠진 사람, 마치 좀비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괜찮을까...?" "걱정 마. 카이. 10분쯤 있으면 원래대로 돌아오니까. 그건 그렇고, 전학생.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보시지?" 아시에가 도발적으로 손을 까딱까딱거리면서 시르쥬에게 말했다. 시르쥬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주먹을 꽉 쥐며 외쳤다. "카이엔은 우리 형 꺼야. 누구도 건들 수 없어!" 여기서 또 아시에가 반박을 할 줄 알았는데... 무슨 연유인지 아시에는 멍한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왜... 왜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 "카이... 설마... 설마했는데... 너어..." "무... 무슨 얘기를 또 꺼내려고 그래?" 나는 아시에가 말도 꺼내기도 전에 짐짓 쫄아서 뒷걸음쳤다. 엥? 그런데 내가 왜 쪼는 거지? 찔리는 게 있나? "역시... 사람은 변하는구나." "자꾸 뜸들이지 말고 말해!" 시르쥬도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어리둥절하면서 팔짱을 끼고 아시에가 무슨 말을 할지 가만히 기다렸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너의 본능. 너의 숨겨진 어두운 욕구. 하지만 어릴 때부터 주입받은 사회 윤리나 공중 도덕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런 생각을 마음속에서 인정할 수 없었지. 하지만 날이 갈수록 쌓여만 가는 금지된 욕망이 넘치지 않을 수 없지. 그래서 너는 선택한 거야. '글'이라 는 수단을 통해서 욕구불만을 자위하는 길을. 아쉽지만 그래도 만족했지. 하지만 지금 너는 '이곳'에 있어. 예전에 느꼈던 어떤 양심의 가책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는 이곳에. 여기서는 근친도, 로리도, 동성애나 수간. 그 어떤 것도 죄가 아니야!" ...갑자기 왜 저렇게 열변을 토하는 걸까. 나는 아시에의 말을 한 절반 정도밖에 못 알아들었다. 하지만 어딘가 나 자신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누 군가에게 전달하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좀 나빠지는 연설이었다. "...그래. 카이 널 포기하겠어. 너는 결국 연애의 대상으로 '남자'를 택한 거구나." "야, 임마! 난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어떻게 그런 근거없는 말을 함부로 지껄여대는거야?" "아냐?" "아냣! 난 정상적인 이성애자라고!" "그럼 저 전학생이 말한 애보다 내가 훨씬 더 좋지? 응?" 아시에는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묘하게 색기어린 표정을 짓고 내 목덜미를 껴안았다. 으윽! 아시에가 장황스럽게 연설한 건 바로 이런 내 반응을 이끌어내고 그 다음에 어택에 들어가려는 목적이었군. 그렇다고 시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야. "그 손을 놔! 카이엔이 너 같은 변태 계집애를 좋아할 거 같애?" "어머나∼ 최소한 남.자. 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카이?" "나... 난..." 뭐라고 말해야 할까. 할 말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시에는 대체 논지를 어떻게 전개해나가는 건지는 몰라도 그녀의 말을 부인하면 어떻게 든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호모'가 되도록 설정해버렸다. 물론 그런거쯤이야 억지부리거나 무시해버려도 되겠지만 옛날부터 이 녀석에게만은 지 지 않겠다는 쓸데없는 고집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이미 아시에로 업그레이드 된 문길이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 지 오래지 만... "형수님을 놔줘!" 아시에의 얼굴이 점차 내 뺨쪽으로 다가오자 참다 못한 시르쥬가 아시에를 향해 몸을 날렸다. 주먹을 꽉 쥐고 돌진하는 것이 아예 작정을 하고 덤벼든 것 같았다. "풍(風)!" 하지만 아시에가 손바닥을 앞으로 뻗어 흑마법 주문을 외자마자 시르쥬는 바람에 날아가 창고 구석에 처박혔다. "으윽..." "네 형 시르젤이라면 몰라도 니가 날 상대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우후훗." "시... 시에? 시르젤에 대해 알고 있어?" 나는 아시에가 어떻게 시르쥬와 시르젤에 대해 알고 있는지 깜짝 놀라 물었다. "응?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니가 처음에 시르팡에 납치당했을 때 내가 셰더와 함께 저녀석들의 집에 왔었잖아? 그러고 보니 그때가 너하고 나와 의 첫번째 재회였네." "아, 그러고 보니." 분명 그랬다. 변태스런 웃음을 터뜨리는 셰더 옆에서 존재감없이 커다란 검은 모자를 쓰고 있던 신비한 흑발의 소녀. 말도 없고, 수동적으로 셰 더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할 뿐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신경쓰였던 아이. 그 아이가 바로 아시에였다. 몸은 변했지만 나쁜 머리는 그대로군. 으윽. 벌써부터 치매 증상이 오려는 걸까? "처음부터 딱 알아봤어. 이름마저 쥬르시라니 좀 어설펐고. 그래서 둘이 같이 다른 사람들을 따돌리고 어디론가 가길래 몰래 뒤를 밟았지." 아시에의 흑마법 능력이라면 분명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기억을 완전히 찾은 그녀는 더 이상 개인의 이익을 위한 흑마법 사용을 두려워하지 않 는다. 남들 눈에 띄지 않을 만큼은 원하는 대로 자유자재로 흑마법을 사용하곤 했다. 하긴 마왕을 소환하고도 살아남을 정도로 저주에 대해 강한 저항력을 지니고 있으니 그렇겠지만. "근데 시르쥬 저 애의 말대로라면 시르젤이라는 그 키 큰 남자가 널 좋아한다는 거네. 응?" 어차피 아시에는 뒤에 숨어서 다 들었을 것이다. 이제와서 굳이 숨기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겠지. 아시에의 놀림만 살 뿐이다. "으응. 그런 거 같아." "그래서, 카이도 그 사람을 좋아해?" "그... 글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연애의 대상이 되는 사람으로는... 잘 모르겠어." "흐음..." 아시에가 묘한 눈빛을 지으면서 날 바라보았다. 어딘가 기분나쁠 정도로 신경쓰이는 눈빛인걸. 당황하는 날 요리조리 바라보더니 불쑥 코앞에 얼 굴을 가져다대고는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다시 한번 물을께, 카이는 내가 더 좋아? 아니면 시르젤이 더 좋아?" 제109화 : 언령의 약속 "다시 한번 물을께, 카이는 내가 더 좋아? 아니면 시르젤이 더 좋아?" "난..." 난 망설였다. 단순히 아시에랑 시르젤 둘 중 어느 쪽이 좋냐고 하면 당연히 시르젤이 더 좋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아시에가 묻는 질문은 '연애 대상'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즉 여기서 시르젤이 좋다고 말한다면 그건 '나와 시르젤이 사귄다.'라고 인정해버리는 꼴이 된 다. 설사 내가 그런 의도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녀는 그런 의도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저쪽에서 비틀거리면서 일어나는 시르쥬도 마찬가지일 거고. 그렇다고 아시에를 선택하는 것도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크윽... 당연히 카이엔이 너 같은 마도의 노예 따위를 선택할 리가 없잖아!" 어느 새 일어난 시르쥬가 외쳤다. 그 말과 동시에 아시에의 얼굴이 굳었다. 그... 그렇지. 어찌되었던 아시에는 한떼 셰더의 노예였고, 그것은 우 리 가족을 제외한 다른 누구에게도 비밀이다. 하지만 시르쥬는 그걸 알고 있다. 아시에가 셰더와 함께 그들의 본거지 중 하나, '미에나이 라비린 스'를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박(縛)!" 아시에의 손에서 어두운 기운이 쏟아져 나오더니 그대로 시르쥬의 몸을 묶어 버렸다. 예전에 셰더가 정령왕 시르케이안을 묶어 버렸을 때와 같 은 방식이었다. 아시에는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면서 시르쥬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크윽!" "미안하지만 죽어 줘야겠어." "그... 그만둬, 시에!" 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아시에에게 외쳤다. 지금 여기서 시르쥬를 죽이겠다고? 진심인 거야, 아시에? "왜? 가만히 두면 저 아이는 내가 마도의 노예였다는 사실을 다른 아이들에게 알릴 거야. 그러면 난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브리타뉴 가 에도 있을 수 없어. 카이는 그래도 좋아?"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시르쥬를 죽일 것까지는 없다고 봐. 그래. 아까 키론이나 린넬에게 그랬던 것처럼 기억을 잃게 만들면 되잖아, 응?"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 하지만... 난 짧은 시간의 기억은 지울 수 있지만 오래전부터 가진 기억은 지울 수 없어. 내가 쓸 수 있는 흑마법에는 어 디까지나 한계가 있으니까." "그러면 약속을 받아내면 되잖아. 절대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속." 하지만 아시에는 코웃음을 치면서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강제로 맺게 한 그런 약속이 신뢰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 오히려 저놈에게 약점을 잡힐 뿐이야." "시에..." 다소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아시에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어딘가 모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카이는... 아직 순수해. 아무것도 몰라. 이 험한 세상에 너만이 티없이 맑은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 같아.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20년 이 넘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 끝을 알 수 없을정도로 더럽혀지고 검게 물들었어. 변하지 않은 너. 그리고 변해버린 나. 그래.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건 단지 네가 나의 과거까지 모두 껴안아 줄 수 있는 친구일뿐만 아니라 내게 이젠 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추억의 과거를 떠올리고, 끝없이 돌 이키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몰라..." 나는 확실히 모른다. 그녀가 20년이 넘는 생활동안 기억마저 잃으며 결코 순탄치 않은 삶의 굴곡을 넘어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머리 속으로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문길이, 아시에를 걱정해 주는 건 내 스스로 생각해도 싸구려 동정심일 뿐 결코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진정한 마 음씀씀이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시에. 난... 결코 너를 진정으로 이해해 줄 수 없어. 너의 고통, 너의 슬픔, 너의 괴로움. 니 말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너의 모든 것을 마음 속 깊이 이해해주는 건 무리야." 그것이 나의 진심. 그녀의 저 말을 듣고서야 나는 내가 아시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고백을 거절하는 것이 되어 그녀에게는 약간 유감이지만... 내가 맥없이 말하자 아시에는 날 쓸쓸한 얼굴로 바라다본다. 어두운 창고에는 빛이 많이 들어오지 않는지라 확실히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 녀의 눈가가 살짝 젖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힘없게 입을 여는 그녀의 말. 생각해보니 이건 그녀에게 있어 어쨌건 실연이군. 하지만 아시에가 그렇게 쉽게 포기하리라고는 믿기 어려운걸? "야! 이년아, 이거 빨리 안 풀어엇!" 그렇게 우리 둘이 어색하면서도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아시에의 흑마법에 포박된 시르쥬가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아시에는 그런 시르 쥬에게 방긋방긋 웃음을 지으며 끔찍한 소리를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고통없이 바로 죽여줄께." "시에. 그만둬. 시르쥬를 죽이지 마." 아시에가 날 아직 완전히 포기한 건지 아닌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녀에 대해 막연했던 내 감정을 확실하게 정리하게 되자, 난 이도저도 아닌 어 중간한 태도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내 생각을 가지고 당당하게 그녀에게 말할 수 있었다. 아시에는 언제라도 시르쥬의 목숨을 뺏으려는 준비를 하면서 내게 물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저 아이를 살려줘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 "응. 왜냐하면 그녀석은 시르젤의 동생이니까." "그 사람을... 좋아해?" "좋아해. 정말 좋아해. 하지만 그건 한 인간으로서 좋아할 뿐 연애감정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해. 아마도..."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는데..." 한숨을 푹 쉬면서 말하는 아시에. 나도 그렇지만 그녀도 지금 머릿속이 엄청 복잡하긴 할 거다. 나는 아직 인정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분명 내가 결국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겠지. 하지만 오해가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속시원하게 털어놓고 나니까 오히려 막혔던 가슴이 뻔 뚫리 는 느낌을 받으며 시원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할 수 없지. 카이 네 말대로 시르쥬를 죽이지도 않을거고, 힘들겠지만 너를 연모하는 마음도 버릴께. 단... 약속을 해줘. 피로 계약하는 언령(言 令)의 약속을." "언령의 약속?" 시르쥬도 살려주고, 나도 포기한다니 너무 잘 된 일이다. 하지만 아시에도 그냥 물러날 수만은 없는 듯 조건을 달았다. 언령의 약속이라니 뭐지? 게다가 피로 계약한다니 어딘가 조금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어... 언령의 약속? 이년 제정시...." "침. 묵(沈默)!" 시르쥬가 뭐라고 말하려 하자 아시에는 손을 들어 흑마법을 사용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는 계속해서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 는 터라 입만 립씽크하는 가수처럼 뻥긋뻥긋거릴 뿐이었다. "자, 할래? 말래? 선택은 그거밖에 없어. 안 한다고 하면 아까 말했던 건 전부 취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긋방긋 웃으면서 말하는 아시에. 시르쥬의 입까지 막으면서 해야 한다니 어딘가 미심쩍고 찜찜했다. 무슨 음모를 꾸미 는 거야? "우웅... 그 피로 계약하는 언령의 약속이란 게 뭐야? 좀 알고 하자." "그건 말이지. 서로가 약속을 어길 수 없도록 마왕의 이름에 걸고 맹세하는 거야. 만약에 약속을 어기게 되면 마왕에게 영혼을 바쳐야만 해." "그... 그래? 그정도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시르쥬 저 녀석은 특히 해야 돼. 난 남에게 약점따위를 잡히고 싶진 않아. 그리고 너한테도 나쁠 게 없잖아? 더이상 너에게 작업 들어오지 않겠 다는 내용이니." "그렇긴 그런데..."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한테 나는 그 언령의 약속인지 하는 게 뭔지 모르지 전혀 알 수가 있나? 그래도 설마 내게 심하게 나쁜 일을 꾸미지는 않 겠지 싶어서 나는 아시에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나도 조건을 달았다. "할께. 하지만 시르쥬한테 먼저 해. 언령의 약속이라는 게 어떤 건지 직접 보고 결정할테니까." "의심도 많네. 알았어." 아시에는 내 말에 수긍했다. 그리고는 시르쥬에게 다가갔다. 으흠... 언령의 약속이라. 그러고 보니 마도의 노예라는 것도 일종의 일방적인 계약에 가깝다고 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마법보다 흑마법 쪽에 어떤 약속이나 계약을 빌어 하는 마법이 많은 것 같다? 아직 흑마법의 특 성에 대해 잘 모르는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시작해 볼까?" 아시에의 흑마법에 몸이 구속당하고 혀가 굳어 자꾸 다급하게 입만 뻥긋거리는 시르쥬 앞에 아시에가 섰다. "그럼 시작해 볼까?" 시르쥬의 앞으로 다가간 아시에는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단도를 하나 꺼내 시르쥬의 손목을 그었다. 그인 시르쥬의 손목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 왔다. 아시에는 그렇게 흐르는 피를 역시 언제 갖고 있었는 지 알 수 없는 작은 그릇에 담았다. 난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시... 시에! 뭐하는 짓이야?" "말했잖아. 피의 계약이라고. 그러니까 당연히 피가 필요한 거지. 걱정하지 마. 나도 피를 뽑아낼 거니까." "그... 그런 문제가 아니라..." 좀더 얌전한 방법은 없는거야? 주사 같은 걸로 피를 뽑아내는 방식같은 건. 저러다가 설마 죽게 하지는 않겠지? 에이. 설마... 근데 문길이 놈한 테는 설마가 사람잡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잖아? 믿어도 될까? 스윽 "허억!" 그런데 아시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손목을 그어 자기 피를 그릇에 찬 시르쥬의 피 위에다 떨어뜨리는 게 아닌가? 어둠 속에서 하는 아시 에의 행동이 어딘가 모르게 무섭게 느껴졌다. 역시 흑마법사라고나 해야 할까... 어느 정도 피를 봅아낸 듯하자 아시에는 시르쥬와 자신의 손목을 지혈시켰다. 거즈나 휴지 같이 지혈할 물건은 없었지만 아시에가 '지(止)'라고 외치자 신기하게도 거짓말처럼 피가 먿었다. 조그만 하얀 그릇에 담긴 두 사람의 피. 저걸로 언령의 계약이라는 것을 하는 걸까? 아시에가 주문 을 외우듯이 말을 중얼거렸다. "나 아시에 브리타뉴와 내 앞에 있는 시르쥬는 서로가 서로의 정체를 이 학교 학생 및 교직원들, 그 외 진실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절대 알리지 않기를 서로의 피에 걸고 마왕 '헬싱'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그 증거로서 지금 이 자리에서 서로가 서로의 피를 섞어 마시도록 한다." 아시에의 맹약(盟約)이 끝나고, 그녀는 그릇에 담긴 피를 한 모금 마셨다. 우엑... 어, 어떻게 저걸 아무 거리낌없이 마실 수 있어? 나도 피를 먹 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손가락이 좀 다쳤을 때 휴지 같은 게 없어 입으로 쭉쭉 빨아 본 게 전부라고! 그것도 아주 어릴 때 말야. 설마 나도 저렇게 피를 내고 피를 먹어야 하는 걸까? 그... 그렇다면 절대로 안해! 안 할거야! 무섭단 말야! "자, 먹어." 시르쥬의 눈 앞에 그릇을 갖다대면서 아시에가 말했다. 하지만 시르쥬는 절대 마실 의사가 없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아시에에 대한 증오 의 눈빛만을 쏘아보낼 뿐이었다. "반항해 봤자 소용없어." 아시에는 피식 웃으면서 한 손으로 시르쥬의 머리카락을 잡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자마자 시르쥬가 아시에를 향해 침을 홱 뱉었다. 갑작스럽 게 얼굴에 침을 맞은 아시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카이. 생각이 바꼈다. 이자식 죽일테야." "시... 시에! 참아! 내가 잘 설득할테니까, 응?" 분명 아까 아시에가 말한 내용의 계약이라면 시르쥬도 그렇게 손해 볼 것은 없을 거 같은데 왜 저렇게 철저히 거부의사를 나타내면서 반항하는 거지? "시르쥬. 내 얼굴을 봐서 그냥 참아. 응?" 내가 설득했는데도 불구하고 시르쥬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나오지 않는 말로 입을 뻐끔거릴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시에, 그냥 입만이라도 열어두면 안돼? 뭐라고 말 하려고 하는 거 같은..." "절. 대. 안. 돼!" 아시에가 손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침을 슥슥 닦으며 내게 무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상치 못하게 침을 맞은 그녀는 엄청 화가 나 있어 얼굴에 귀기(鬼氣)가 감돌 지경이었다. 나조차 공포를 느낄 지경이니 말해서 무엇하랴... 내가 아니었으면 당장에라도 시르쥬를 죽여 버릴 분위기였다. "반항한다고 못 먹일 줄 알구?" 무서워... 눈에 핏발이 서 있다구, 너. 아시에는 곧바로 그릇을 들어 피를 입안에 삼키더니 시르쥬의 머리를 붙잡고 마우스 투 마우스로 시르쥬한 테 피를 삼키게 했다. 허거걱. 입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섬뜩한 장면은 둘째치더라도 아시에 쟤는 아무하고나 키스하는 꼴이 되어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거야? 아무리 지금까지 고생을 해서 별 의식이 없다지만 너무 몸을 함부로 굴리는 것도 좀... "진작 말 들으면 될거가지고 고생시키긴..." 아시에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어찌 보면 귀신같기도 한 그녀의 모습에 난 움찔했다. "나... 난 그런 계약 안 할거야! 난 피 보기 싫어! 피 마시기도 싫어!" "어라, 진짜로? 그럼 나 계속 너한테 대쉬한다. 그래도 좋아?" "마... 마음대로 해! 아까도 말했듯이 어차피 난 널 받아들이지 않을테니까!" 어쨌건 아시에가 시르쥬를 죽이지 않게 됐으니까 상관없지. 뭐. 다만 아시에가 이전처럼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덮쳐 올 경우는 충분히 대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빨리 시르쥬나 풀어 줘." "알았어." 아시에는 그 건에 대해서는 아직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시르쥬의 침묵상태와 구속상태를 풀어 주었다. 그리고 시르쥬는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막무가내로 아시에한테 덤벼들다가 또 맞고 쓰러졌다. 쯔쯔... 덤비는 건 좋지만 힘의 차이를 알고 덤벼야지. 시르젤처럼 진정한 괴도로 각성하지 못한 니가 아시에를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점심 시간이 끝난지도 오래였다. 어차피 지금 교실에 들어가봤자 늦었고 해서 다음 쉬는 시간까지 우린 계속 여기 있기로 했다. 나는 아시에한테 얻어맞아 얼굴이 퉁퉁 부은 시르쥬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까 무슨 말을 자꾸 하려고 했어?" "...이제와서 해봤자 별 의미없어. 이미 피를 마셔버렸으니. 너라도 안 마셔서 다행이지만." "무슨 말이야?" "몰라도 돼." 아시에도 그렇지만 시르쥬도 별로 가르쳐 줄 생각이 없나보다. 아까 피로 맺은 언령의 약속에 어딘가 특별한 의미가 더 있는 걸까? "휴우.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시에한테 덤빈 거야? 내가 말려 주지 않았다면, 너 진짜 죽을 뻔했다구." "난... 용서할 수 없어. 귀여운 얼굴로 시커먼 속마음을 품은 채 강제로 널 앗아가려 하는 년을. 카이엔 넌 영원히 우리 형, 시르젤의 것이여만 한 다구." 시르쥬 이 녀석... 형을 생각하는 건 좋지만 그게 좀 광적인 측면이 있어 보인다? 설마... 시르쥬가 브라콘은 아니겠지? 여동생이 오빠한테 그러면 몰라도 남동생이 형한테 그런 감정을 가지는 건 좀 위험한 수준인데.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보이즈러브 팬픽을 쓴 경력이 있는터라 시르쥬의 말 을 듣고 별의 별 상상을 다 떠올렸다. "카이, 침 떨어져." "뭐... 뭐라고?" 깜짝 놀라 입안의 침을 후루룩 삼키며 손을 입에 댔지만 침이 흐른 흔적같은 건 전혀 느끼지 못했다. "쿡쿡쿡. 카이 너, 또 이상한 상상했지. 정말 못말린다니까. 넌 정말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이익!" 우쒸이. 또 놀림당했다아! 나는 그런 류의 생각을 할때는 갖가지 상상을 하느라 멍하니 넋을 잃은 채로 있는 버릇이 있는데 문길이놈은 내 그런 버릇을 잘 알고 있었다. 씨잉. 그다지 그런 생각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라구. 이건 직업병이야, 직업병! 어쨌건 시르쥬와 아시에 이 둘 사이에 절대로 넘을 수 없을만큼 두껍고 높은 벽을 만든 채, 간만에 등교한 학교 첫날은 끝났다. 이런저런 상황에 휘말려서 완전히 곤욕 치르긴 했지만 어쨌건 다른 사건에 신경쓰느라 내 모자에 대해 다들 관심을 잊었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하여튼 학교에서 다시 곤욕을 치른 나는 단체생활을 통해 소극적이고 소심한 성격을 탈피하자는 애초의 목표는 완전히 잊고 또 한동안 학교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지 라고 결심했다. "하여간 또 변덕이라니깐... 남자가 영 초지일관하지 못하니 말야." 아시에가 내 결심을 듣고는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하지만 나도 계속 구박당할수만은 없어 그녀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피이. 그런 날 좋아하는 넌 뭐가 되는데?" "훗. 남자는 원래 여자 하기 나름인 거야.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네 정신을 개조해 줄께♡" "됐네, 됐어! 차라리 내가 말을 안 하고 말지." 그렇게 또 하루가 흘러가버렸다... 제111화 : 문길이 이야기 대한민국 S시 K구 H고등학교. 강북 쪽에서는 '그럭저럭' 명문 고등학교 소리를 듣는 '그런대로' 전통있는 인문계 고등학교 중 하나다. 여기서 그럭저럭 이라는 말과 그런대로 라는 말을 잘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도저도 아닌 중간 정도 어디엔가 미그적거리고 있다는 의미니까. 그 말대로 H고등학교는 모든 면에서 중간 정도를 달리고 있었다. 명문대 진학 비율이나 흔히 '물이 좋다. 또는 나쁘다.'라고 평가되는 학생들이나 얼짱의 생김새. 교복 디자인. 반 평 균 학생수. 문제아들의 사고율에서부터 심지어 학교 근처 분식집이나 문방구, 책 대여점의 비율까지 딱 전국의 수많은 인문계 고등학교들 중에서 중간정도는 가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 학교에 내가 이렇게 전학을 오게 된 이유는 정말로 이 학교의 명성 그대로 '평범하고 중간 정도 가는' 삶을 살아 보기 위해서였다. 이번에 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2년도 채 가지 않아 계속된 끊임없이 전학으로 점철된 삶에 마침표를 찍겠다는 결심이었다. 춘천, 전주, 마산, 청주, 광주, 부산, 대구, 경주 등등 지금까지 전국의 별별 도시를 다 돌았다. 어디서는 한 달도 채 다니지 못한 채 전학 수속을 밟아야 했던 곳도 있었 다. 나는 마음을 바로잡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학교에서만은 절대 문제를 일으키면 안돼. 아무리 뭐 같은 선생들이 막가는 폭력을 휘두른다고 해도, 어설프게 깝치는 양아치들이 담배를 꼬나물며 위협을 한다고 해도, 참아야겠지. 나는 그렇게 결심하면서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내 이름은 손문길. 아는 사람은 드물지만, 흑마법 유저(user)다. "흐음... 전학을 자주 다녔구나." "네." 깐깐한 얼굴을 한 교무부장이 날 좋지 않은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지금까지 수없이 전학을 다니면서 항상 볼 수 있는 그런 류의 얼굴이었지만 아무리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경멸어린 표정이었다. 나는 억지로 미소짓는 표정을 만들려고 노력하며 서 있었다. 이 음침한 상판이 웃어봤자 얼마나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겠냐만... "흐음... 좋아. 너는 오늘부터 1학년 3반으로 가거라. 지금은 네 담임 선생이 수업 시간이니까 학교를 좀 둘러보던지, 여기서 쉬던지 마음대로 하 거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서류를 한쪽으로 치우더니 책상 밑에 있을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뭐, 분명 '인터넷 고스톱'이라도 치 고 있거나 야한 동영상이라도 보고 있겠지. 하지만 나도 괜히 불량학생 계도한답시고 고압적인 연설이나 영양가없는 잡설을 늘어놓는 사람보다 도 오히려 저렇게 무관심한 사람이 더 편하다. "그럼, 학교를 좀 둘러보겠습니다." "쉬는 시간 종이 치기 전에는 들어와야 한다." "알겠습니다." 나는 교무실을 나왔다. 교무실을 나와 이리저리 학교를 둘러보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모래바닥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이 배구수업을 받는 모습을 보았고, 아줌마 여럿 이 일하는 식당에서는 여전히 군대 짬밥보다 하등 나을 수준이 없을 허접한 식사가 주어지리라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저쪽 으슥한 담벼락 에서는 학교를 몰래 빠져나가려는 듯 월담하는 애들도 보였고, 으음. 정말로 딱 평범한 학교가 아닌가. 이 정도로 표준적인 학교에 있으면 정말로 평범한 삶을 살며 정상적으로 졸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이새끼야. 어디 좀 보자구. 큭큭." "그... 그거 돌려줘!"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경박한 웃음소리와 그에 비해 절박한 사정조의 목소리. 음. 별로 좋은 장면은 아니지만 이것 역시 평범한 학교라면 아주 없 을 만한 장면은 아니었다. 나는 별로 상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소리로부터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 때, 내 귀를 쫑긋거리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애가 어떻게 이런 글이나 쓰고 자빠져있는 거야. 한심하게 말이지." "어디 보자, '호영아, 나 널 사랑해. 너무...흑', '계상이가 울먹이면서 내게 말했다. 나는 손을 뻗어 계상이의 손을 만졌다. 차가워...' 크하하. 웃긴 다! 이게 뭐하는 글이냐. 대체?" "이... 읽지마!" "변태자식. 웃기는 놈 아냐, 이거? 야, 그거 찢어버려!" "안돼애!" 부욱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에 나는 돌아가려던 발걸음을 다시 돌렸다. 당연한 일이지만, 정의감에 가득 차 핍박받는 아해를 구하겠다는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다. 애초에 내가 쌈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관심을 가지는 놈은 지금 뭔가를 뺏기고 찢긴 '누군가'의 존재다. 세상에 하고 많은 사람이 있다지만 아직 '남자 연예인 동성 팬픽'을 쓰는 인간의 존재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대신에 여자 연예인들을 소재로 야설 쓰는 남자 들은 꽤 봤다.) 나는 오로지 '그 녀석'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들이 있는 학교 구석진 그늘로 향했다. 예상했던대로 썩 좋은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뭐라고 가득 적혀 있는 찢어진 종이가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리고 한 학생을 둘러싸 고 있는 여러 사람들... "넌 뭐야?" "지나가던 사람 A." 휘잉∼ 갑자기 찬바람이 불었다. 다들 어리벙벙한 눈을 하고 있는 걸로 봐서 내 개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한 사람만 빼고. "쿡쿡..." 웃은 녀석은 저녀석들에게 핍박받고 자기 글을 찢기는 수모를 당한 애다. 음... 의외로 코드가 맞는 녀석일지도 모르겠군. 꽤 재밌겠는걸? "저 녀석도 또라이군. 반쯤 죽여놔." 대장처럼 보이는 녀석의 말에 다른 놈들이 내게 달려든다. 나는 그에 맞서려고 애썼지만 옛날부터 그랬듯이 엄청 두들겨맞았다. 뭐, 하지만 맞아 도 아무 아쉬운 건 없다. 옛날부터 맞는데에는 익숙하니까. 게다가 맞는 동안에 녀석들의 교복을 보고 이름을 알아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쉬운 게 없었다. 얼굴을 알고, 이름을 알면 그 놈은 이제 내게 거의 반 죽은 거라고 해도 다름이 없다. 어쨌건 그 놈과 나는 둘이 같이 사이좋게 나란 히 땅바닥에 쓰러졌고 놈들이 가고 난 후에 대화를 나눴다. "...바보네. 뭐하러 끼어들어 맞고 지랄이야?" "지오디 팬픽을 쓰는 웃기는 머시마가 누군지 궁금해서 그랬다, 왜?" "그러고보니 본 적 없는 얼굴인데... 너 누구야?" "전학생이다. 오늘 전학왔지. 씨잉. 지금 1학년 3반에 들어가봐야 하는데 옷이 엉망이 됐으니 골치아픈걸?" "뭐어? 1학년 3바안?" "너도 1학년 3반인거냐..." "어... 어떻게 그걸!" "그렇잖으면 놀랄 이유가 없잖아. 하여간 반갑다. 나는 손문길이다. 좀 있으면 들어가서 다시 소개를 해야겠지만." "내 이름은... 김상우야." 김상우라... 별종답지 않게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름이군. 이것이 상우와 나의 첫만남이었다. 제112화 : 마나티의 셰더 미중년 만들기 프로젝트 안녕하세요, 여러분? 제 이름은 마나티랍니다. 성이 뭐냐고요? 나이는? 몸무게는? 신체 사이즈는? 아잉∼♡ 숙녀에게 그런 걸 물으면 실.례. 라고요! 실례! 네? 아무도 그런 거 안 물어봤다고 요? 히잉... 너무해요! 그렇게 저에 대해 관심이 없어요? 훌쩍. 역시 이 넓은 세상에 저 혼자만 외톨이로 남아 혼자 독야청청할 수밖에 없는 거에 요? 마나는 외로워... "마나티, 궁상 떨지 말고 빨리 와서 이거 좀 도와줘." "네에∼"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저는 셰더 님의 노예랍니다. 공식 용어로는 마도(魔道)의 노예(奴隸)라고 부르지요. 마도의 노예가 뭐냐고요? 마법사 들은 보통 '사악한 흑마법사가 한 인간의 인격을 말살하고 황폐화시켜 흑마법사의 명령에 무조건 따르게 된 노예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정의내 리고 있답니다. 하지만 실체는 조금 틀립니다. 음...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게 공평한 계약은 아니지만 이것도 일종의 '계약'관계거든요? 흑마법의 힘은 대부 분 어떤 댓가를 바탕으로 한 신실한 계약에서 나오니 말이지요. 간단하게 말하면 '시다바리'라고나 할까요? 예를 들면 저는 무조건 셰더 님의 명 에 따라서 행동해야 하는, 그분에게 종속된 존재지만 대신 셰더 님은 저를 책임져야 한답니다. 뭘 책임지냐고요? 하여간 책임져야 하는 것들이 많이 있어요. "여기다 마력 분배좀 해줘. 젠장. 아무리 봉마석이 들어 있어도 그렇지 이놈의 칼. 왜 이렇게 말썽이야?" 셰더 님은 요즘 시르팡 일당에게서 뺏아온 '머신검'에서 봉마석이라는 걸 추출해낸다고 진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사실 솔직하게 말해서 최근 셰 더님의 행동은 너무 이해가 가지 않는 일 투성입니다. 오죽하면 계약위반에 대한 소멸까지 각오하고 항명(抗命)을 했겠어요? 머신검인지 뭔지는 몰라도 아니 고작 이런 칼 하나 얻으려고 기껏 납치한 대륙 최고의 아이돌이자 초울트라큐티카와이미소년 카이엔 브리타뉴를 시르팡 일당한테 내준다는 게 말이 되냐구요! 게다가 그러고 나서 하는 짓이라는 게 멋있는 명검(名劍)을 분해시켜서 무슨 돌조각 몇 개를 얻겠 다니, 참 해도해도 너무한 짓이에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기분이 꿈을 꾸듯 몽롱해집니다. 제 어깨 위에서 허우적거리면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던 귀여운 카이엔 님의 모습. 옷 을 벗기던 저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아찔한 순간. 절정 직전까지 끌려간 카이엔 님을 구하러 나선 시르젤의 결연한 모습. 두 사람은 그 후로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마나티가 인정한 커플링이니까 뜨거운 밤을 불태우지 않는다면 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에 요! 설마 시시하게 키스 정도로 끝내는 바보같은 짓을 하지는 않았겠죠? 하지만 진정한 미소년의 가치를 아는 시르팡 사람들과는 달리 셰더 주인님은 그를 저런 칼 한자루와의 교환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은 것이 너 무 안타깝습니다. 휴우. 하지만 그래도 주인님인데 어쩌겠어요? 힘 없는 제가 참고 또 참을 수 밖에요. 아마도 카이엔 님이 미소녀였다면 주인님 은 카이엔 님을 내주지 않았을까요? 그건 그렇고 요즘은 주인님이 왜 그런지 저를 슬슬 피하시는 것 같아요. 자꾸 건드려도 반응도 심드렁하고 맨날 래더 오빠랑 가서 놀라고 하니 말이에요. 하지만 래더 오빠는 나랑 같이 안 놀아준단 말이에요. 이야기를 하고 이리저리 건드려 봐도 별 반응도 없구... 주인님이 명령을 해야 마지못해 놀아주는 게 너무 재미없어요. 마나는 그래서 요즘 너무너무 심심해요. 저번에 미소년 노예 하나 데려오자고 한 것도 기각당했고. 내가 나가면 무슨 사고 칠지 모른다고 해서 밖에 내보내 주지도 않고 말에요. 이전에 있던 아시에 선배는 시장을 본다던지 하는 이유로 밖에 마음대로 나갈 수 있었는데... 왜 나만 이렇게 골방에서 썩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니깐요? "크케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드디어 봉마석 조각이 내 손에 들어온다." 주인님이 항상 말하는 흑마법사의 미학이나 도(道)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저런 유치한 웃음과 일부러 음침하게 말하는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어요. 어차피 주인님을 알 만한 사람들은 전부 그 이름을 듣고 '아, 그 변태 흑마법사?'라는 반응이 나오는데 왜 저렇게 무리해서 이상한 엉터 리 이미지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걸까요? 이미 이미지는 다 깨지고 망가진지 오랜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인님은 이미 사람들에 의해 변태로 낙인찍혀졌고, 변태로 이름을 날리고 있으며, 실제로도 변태적 기질이 농후하지요. 그러므로 주 인님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진정한 변태로 각성하는 일이에요. 주인님은 확실한 변태임에 틀림없어요. 저와 아시에 선배를 주인님의 잠자리로 끌어들였을 때도 그렇고 때로는 우리 둘을 같이 끌어들여 별별 짓거리를 다 해봐서 안해본 게 거의 없을 정도랍니다. 하지만 주인님은 아직 진정한 변태로서 각성하시지는 못했어요. 왜냐하면 아직 주인님은 남자에게는 손을 대 본적이 없기 때문이거든요? 그 때문에 미소년 노예를 새로 들이자고 건의한 건데 주인님은 쉽게 넘어가주지 않네요. 그래서 저는 먼저 작전을 바꾸기로 생각했어요. 먼저 그림이 되게 만들자! 라고요. 에? 그게 무슨 뜻이냐고요? 말 그대로에요. 우리 주인님은 변 태에 걸맞는 너무나도 음흉한 얼굴을 하고 있지요. 그런 얼굴로 변태짓을 하는 것은 상대를 능욕하는 짓으로, 그런 장면도 나름대로 취향이 맞는 사람도 있긴 하겠지만, 그런 그림만으로 모든 앨범을 채운다면 사회가 너무 각박해지지 않겠어요? 저는 주인님이 저같이 귀엽고 예쁘고 깜찍한 미소녀, 그리고 카이엔 님같이 귀엽고 색기넘치는 미소년과 어울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멋있어졌 으면 좋겠어요. 주인님은 나이가 있으니까 아무래도 '미중년'이 가장 적당하겠죠? 이것은 진정한 변태의 길을 가는 데도 꼭 필요한 과정이지요. 진짜 변태는,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은 선량한 얼굴을 하고서 뒤에서 별별 짓을 다 한다죠? 우선 주인님은 그 경지에 이르를 필요가 있어요. 남 색(男色)의 욕구를 각성시키고 커플링을 해 보는 것은 그 다음으로 미뤄도 늦지 않을 거에요. 하지만 음흉하고 사악한 외모가(물론 제 눈으로는 음침하고 꾸질꾸질하게밖에 안보이지만요.) 흑마법사의 트레이드마크라고 믿는 주인님은 제 말 에 쉽게 따라 주지 않을 것 같아요. 자기 몸을 온통 까만색 투성이로 만드는 것도 모자라서 남한테까지 온통 다크한 옷들을 강요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작전을 기밀에 붙이고 몰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답니다. 오호호홋! "마나티, 마력이 밸런스를 못 잡고 흐트러지잖아. 집중 안 할 거야?" "히잉. 래더 오빠한테 시키지 왜 저한테 시키는 거에요?" "이런 일이라도 해야지, 평소에 니가 하는 게 뭐가 있냐?" 세상에! 제가 평소에 하는 일이 없다고요? 제 하루가 얼마나 바쁜지 몰라서 그런 말 하는 거에요? 하여튼 아무리 노예라고는 하지만 무심한 주 인님은 제 고충을 전혀 이해해주지 않는다니까요? 밤새 주인님의 곁에서 제대로 잠도 못자고 봉사해드려야 하지. 늦게 잠들어서 피곤하기 때문에 좀 늦게 일어나 보려고 해도 주인님은 자꾸 깨워 서 못 자게 하지. 사람 깨워놓고는 아침밥도 빨리 안 주지. 하여간 제 심정은 전혀 이해해주지 않는다니까요? 게다가 할 일이 없는 건 전적으로 주인님 탓이라고요! 제가 밥 짓고, 청소 하고, 설거지 하고, 빨래를 하겠다고 나서도 주인님은 저보고 하지 말 라고 하고는 자기가 다 해버린다니까요? 주인님이 제가 할 일을 전부 뺏아가 놓고는 저보고 하는 일이 없다고 구박하다니, 이게 말이 되냐구요. 제대로 일해보려고 예쁜 메이드복까지 구해 놓았는데 말이죠. 으음... 아무래도 누드 에이프런 정도는 입어야 주인님이 제대로 일을 시켜 줄까 요... "이잇. 자꾸 집중 안 할꺼야? 하여간 도움이 안 된다니깐. 그냥 저기 가서 놀아라." "놀아도 같이 놀 사람이 아무도 없는걸요. 주인님, 저랑 놀아요." "래더랑 놀아." "래더 오빠는 너무 재미없단 말이에요." "...그럼 난 재밌냐?" "네! 왜냐면 주인님은 변태니까요! 저랑 눈높이가 딱 맞잖아요." "주인님을 변태취급하는 노예가 어디 있어!" "여기 있잖아요♡ 헤헷." "그냥 가라. 응? 이거 [명령]이야!" 간만에 일을 시킬 것 같이 하더니 결국 또 일하지 말라고 쫓아냅니다. 하지만 명령이라는데 어째겠어요. 불쌍한 노예는 주인이 시키는대로 할 수 밖에 없죠. 까라면 까고, 벗으라면 벗어야 하는 것을. 아아∼ 우리에게는 근로기준법도 없는 것을 어찌 해야 할까요? 그렇게 노는 시간에 뒹굴거리면서 계획한 게 '셰더 주인님 미중년 만들기 프로젝트'랍니다. 어차피 남아도는 게 시간인 관계로 계획부터 실행에 이르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조만간 실행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우후훗∼♡ 기대하시라! [대륙 독신녀들의 필독서! 내 취향에 맞는 미중년 꾸미기] [꼬마에서 미소년으로, 미소년에서 미청년으로에 이은 키워서 먹기 시리즈 제3편, 미청년에서 미중년으로. 곧 4편인 미중년에서 미노년으로도 발 간 예정!] [미중년은 멋있었다. (속편으로 미중년은 맛있었다 / 미중년의 유혹 절찬리 연재중!) [로리 포터 시리즈 최신작! 로리 포터와 미중년 기사단] 주인님이 저랑 결국 안 놀아주자, 저는 제 방으로 돌아와서 이런 책들을 꺼내서 읽었어요. 이미 준비는 완료되었으니까 이제는 어떻게 꾸며야 가 장 제 맘에 쏙 드는 이상적인 미중년이 될 지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봐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이제와서 프로젝트를 실행하려니 너무 걸리는 게 많아요. 그 고민이 뭐냐하면 대체 어떻게 꾸며야 가장 환상적인 미중년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거지요. 그래서 일단 하나씩 안 어울리는 것부터 지워나가면서 생각중이에요. 일단 주인님은 변태에다 어두침침한 성격, 검은 색 투성이의 외모 때문에 절대 꽃미남이나 온미남 계열로 갈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냉미남 계열 로 갈 수밖에 없는데, 슬프게도 주인님에게는 그런 미남에게서나 볼 수 없는 카리스마를 전혀 찾을 수 없어서 말이죠. 그렇다고 어설프게 만드는 것은 제 자존심이 용서할 수 없어요! 이런 말도 있잖아요. 어중간한 미남 100명보다는 절세미남 한명이 낫다고요. 네? 이해할 수 없다고요? 그럼 반대로 놓고 생각해보세요. 어중간하고 개성없는 미녀를 박스째 갖다놓아도 절세미녀 한 명을 따라올 수 있을리가 없잖아요? 이것도 마찬가지에 요. 외모 설정뿐만이 아니에요. 마나는 이번 기회에 주인님의 옷 입는 습관을 완전히 고쳐놓을 예정이에요. 아무리 흑마법사라도 옷은 어울리게 입어 야 진짜 흑마법사다운 멋과 품격이 느껴지지 저렇게 아무렇게나 검은색으로만 입는 게 멋있다고 느낀다면 그건 착각이라구요. 하여간 옷도 지지 리도 못 고르면서 제가 코디해 주겠다고 하면 또 화내시니 원... 네? 노예는 노예답게 그냥 주인 말만 들으면 된다고요? 천만의 말씀! 마도의 노예 계약에는 이런 구절이 있어요. [노예는 주인이 특별히 시키는 일이 없더라도 주인을 위한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해야 한다.] [노예는 주인에게 '진심으로' 위해가 된다고 생각하거나, 유익한 일이라고 판단할 경우에는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 다.] 그냥 시키는 대로 일만 한다면 지능이 없는 기계나 하급생물들과 다를 게 없잖아요? 그래서 노예계약은 이렇게 노예에게 창조적으로 판단해서 주인을 도울 수 있도록 명시해 놓았답니다. 주인님을 미중년으로 만드는 일은 주인을 위한 일이고, 주인님에게 아주아주 유익한 일이잖아요? 때 문에 주인님이 거부하셔도 이건 실행될 수밖에 없는 일이에요. 다만 이걸 미리 아시면 시끄러워질 게 뻔하기 때문에 비밀로 하는 거지만요. "마나티, 여기 좀 와 봐!" 그렇게 한참 책을 읽고 있자니 주인님이 또 부르네요. 정말이지, 이번에는 또 뭘 도와달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래봤자 또 혼자서 열불내 고 저리 가서 놀아! 라고 할 거면서 질리지도 않으시는가... 그래도 저는 주인님게 성심껏 봉사하는 메이드... 는 아니지만 어쨌건 노예. 주인님 대 접은 깍듯이 해드려야죠. "네. 이번엔 무슨 일이세요?" 주인님께 가 보니 래더 오빠가 주인님께 무슨 서찰 같은 걸 전해주고 있었어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아시에가... 살아 있는 모양이다. 게다가 기억마저 돌아왔어." "아시에 선배가요?" 확실히 기억해요. 저와 주인님이 시르팡 일당과 만나 카이엔님과 머신검을 교환한 후에 왕궁을 빠져나오면서 아시에 선배님과 마주쳤었죠. 선배 님은 자기가 주인님께 상대가 안 되리라는 사실을 뻔히 아시면서도 무리하게 주인님과 맞서다가 주인님께 봉인기억해제공격을 받았어요. 제 주 인님 같이 강한 흑마법사가 봉인한 기억을 다시 풀었다가는 99%가 죽는데... "제길, 아시에 녀석. 대체 정체가 뭐냐고! 마왕 부활 후 살아남은 그녈 20년을 옆에 끼고 살았는데도 알아낸 게 아무것도 없다니!" "그건 그런데 말이죠. 저는 왜 불렀어요? 그거 가르쳐줄려고요?" "왜, 불러서 방해된 거냐?" "아녜요. 에헤헷♡" 저는 고개를 저으면서 웃음지었습니다. 의외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주인님이라고 나름대로 여러 가지 신경써 주는 것 같다니까요. 아시에 선 배님의 이전 기억따위는 전 모르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지만 그 후로 선배님의 인격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분명 옛 기억과 20년간의 기억이 섞 여서 상당히 꼬인 성격이 형성되었을텐데... 뭐, 저도 1년 전보다 이전의 일은 주인님이 지워버려서 전혀 기억이 안 나지만 말이죠. "그 하트 남발하지 말라니까. 부담스러워." 하지만 저는 오늘따라 유난히 초롱초롱하고 순진무구한 눈으로 주인님을 바라봅니다. 이제 기다리기도 지쳤어요. 모든 준비가 완료된 만큼 슬슬 프로젝트를 실행할 때입니다. "왜... 왜그래?"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주인님의 모습. 당장이라도 어디론가 도망갈 듯한 태세입니다. 하지만 그전에 저는 바로 주인님의 품으로 대쉬해 들어가서 부비적댑니다. "떠... 떨어지라니깐!" "아잉∼♡ 한두번 해 보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세요? 갑자기 앙탈은 왠 앙탈이에요? 그런 거 전혀 변태스럽지 않다구요!" 불과 1년 전만 해도 주인님이 적극적으로 저에게 달려드는 '공'이었는데 요즘 자꾸만 절 피하고 도망가는게 '수'쪽으로 변해버렸다니깐요. 옛날 에는 주인님이 제게 주로 '조교질'을 해댔는데 요즘에는 제가 주인님에게 이런 저런 짓을 잡다하게 해보고 있답니다. 하여간 본인이 주장하는 흑 마법사의 카리스마에는 영 어울리지 않게시리 왜 자꾸 주눅이 들고 고개숙인 남성으로 변해가는 걸까요? 하긴, 슬슬 기력이 쇠하기 시작할 나이 니까 어쩔 수 없는 걸지도 모르지만. 차라리 흑력환을 잔뜩 먹이고 마지막 밤을 뜨겁게 불사른 이후에 바이바이∼ 하고 저 먼 하늘나라로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노예로서 주인을 해하는 일은 할 수 없게 계약에 명시되어 있죠. 저는 어차피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이왕이면 멋지고 잘생긴 주인님을 모시고 살고 싶어요. 현실은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지만 저는 실망하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아요. 성심성의껏 잇쇼겐메이(一生懸命) 노력해서 꿈을 현 실로 바꾸고 말 거에요. 그것이 저를 위한 길이자 진정한 변태의 길을 걸어야 하는 주인님에게 유익한 일이니까요. 그림이 되어야 하는 것도 물 론이고... "응? 마나티, 뭐가 필요하니? 필요한 거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 다 해줄께." "말해봤자 다 안해주실 게 뻔하잖아요. 주인님을 위해 가사활동도 못 하고, 연구 도움도 못 되는 저같이 쓸모없는 노예는 오로지 몸으로만 봉사 할 뿐, 자, 주인님 어서 들어가요∼" 질질질질 "싫어어어!" "아잉∼♡ 좋으시면서 뭘∼" 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주인님을 끌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여간 예전에는 욕구를 솔직하게 드러냈고 말과 행동이 일치했는데 요즘 은 왜 자꾸 저러는지 모르겠다니깐요. 네? 주인님이 진짜 싫어하는 게 아니냐고요? 에이. 그렇다면 이렇게 제 손에 가만히 질질 끌려올 리가 없 잖아요. 말만 저렇게 하는 거지 뭐. 하긴 이전에도 친구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제 손에 걸리는 자는 어떤 '강공'이라고 해도 결국은 극상의 수로 변모한다 라고... 비틀. "으읏..." 어쩐지 잠깐 머리가 아프네요. 그러고보니 무심결에 봉인된 기억이 약간 새어나온 모양... 하지만 그 이상은 정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마나티, 왜 그래?" "우훗∼ 주인님 나 걱정하는 거에요?" "누... 누가 너같은 앨 걱정해!" 온몸을 검은 색으로 치장하는 괴팍한 변태 흑마법사 답지 않게 홍조를 띠는 얼굴. 지금은 음침스런 얼굴 때문에 그 빛이 바래지만 이 프로젝트 가 완전히 끝날 즈음에는 저런 얼굴도 정말 잘 어울리는 멋진 모습으로 변모할 거에요. 휘익 그리고 저는 주인님을 침대에 냅다 던졌어요. 제가 양손에 차고 있는 팔찌는 흑마법의 기운이 서려 있기 때문에 저같이 연약하고 가냘픈 순정파 소녀도 이정도 힘을 쓸 수 있지요. "자꾸 던질 거야! 주인을 무슨 물건으로 알어?!" 버럭버럭 화를 내는 주인님의 모습. 음. 오늘은 꽤 기운이 넘치는군요. 주인님이 진짜 피곤할 때는 화도 안 내고 조용히 구석에서 죽어 있답니다. 그런 경우에는 저도 주인님을 조용히 쉬게 내버려 두죠. 그나저나, 이제 시작해 볼까요? 저는 우선 주머니에서 자그만 사탕 한 알을 꺼냈습니다. 오호호홋. 작.업.개.시! 랍니다. 아자앗! "이번엔 또 무슨 맛이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딸기맛, 포도맛, 레몬맛, 오렌지맛 이런 과일 맛 종류는 절대 사절이야!" "까다롭게 구시기는, 오늘은 박하맛이에요." "커피맛이 더 좋은데..." 하여간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툴툴대는 주인님이세요. 설마 아직까지 제가 꺼낸 사탕의 용도를 짐작하지 못하는 분은 아무도 없겠죠? 저는 사 탕 봉지를 뜯어 사탕을 입에 넣고는 혀를 이용해서 입안 전체로 몇 바퀴 돌렸어요. 알싸한 박하맛이 제 입 전체를 자극하네요. 그리고 저는 침대 에 부딪힌 등짝을 문지르며 몸을 일으키는 주인님을 향해 걸음을 옮깁니다. 침대에 앉아 있는 주인님과 눈높이를 맞추고는, 저는 눈을 감습니다. 미형도 아닌 얼굴을 코앞에서 보고 감상하는 취미는 별로 없으니까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일련의 과정이 시작되요. 입을 서로 맞대고, 서서히 입술을 개봉하면서 부드러운 근육이 끈적이는 체액과 함께 서로를 애무하 지요. 쌉싸름한 박하향이 미각과 후각을 자극하면서 말초신경을 자극한답니다. 그리고 제 엉덩이로 다가오는 아주 숙련된 솜씨의 손길... 것봐요. 역시 지금까지의 행동은 앙탈이라니깐요. 하지만 가랑이 사이로 슬금슬금 미꾸라지처럼 기어오던 손길도 어느 순간 떨리더니 힘을 잃고 아래로 축 늘어집니다. "마나티... 너... 설마!" 으음... 슬슬 혼몽초(混夢草)가 들기 시작하는군요. 하기야 후각이 아니라 입을 통해서 직접 흡수되는 거니까 아무리 각종 여기에 내성을 가진 주 인님이라고 해도 금방 축 늘어집니다. 애초에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써 가면서 기절시키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저는 왜 멀쩡하냐고요? 그거야 당연히 미리 항혼제(抗混劑)를 먹어뒀으니까 그렇죠. 아무렴 그런 것쯤 미리 대비를 안 했겠어요? 주인님이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절 바라봅니다. 저는 주인님의 불안한 눈빛을 보고 안심시켜 주기 위해서 최대한 밝고 명랑한 표정으로 빙그레 웃었답니다. 그런데 그런 제 표정을 보는 주인님이 왜인지 더 불안하고 무서워하는 표정을 하고 정신을 잃는 것은 왜일까요? 뭐, 그런 건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우선 나중에 생각해보기로 하고. 이제부터 시술(施術)에 들어가야겠죠? 휘익 "끼야악!" 주인님을 침대에 가만히 눕히고 준비해온 도구들과 약들을 펼쳐놓을 때 등 뒤에서 날아온 단검이 제 귓가를 스쳐가더니 벽에 꽃혔습니다. 끼야 악! 이게 뭐에요! 슬슬 작업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깜짝 놀랐잖아요! 나는 화가 나서 버럭 고개를 돌렸어요. 거기에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래더 오빠가 서 있었어요. 아무래도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은데 뒤집어쓴 두건에 얼굴이 보이질 않으니 도통 알 수가 있나요. 하여간 주인님 의 클론인지 뭔지 하는 거라서 그런 진 몰라도 주인님보다도 훨씬 더 음침하고 옷 입는 센스도 최악이고 말도 별로 없는 사람이에요. 한가지 나 은게 있다면 주인님처럼 변태스러운 면모는 거의 없다는 점이지요. 게다가 주인님의 명령 이외에 다른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기 때문에 저한테 는 전혀 재미없는 사람이에요. 전에 있던 아시에 선배보다도 훨씬 더... "무슨 짓이에요!" 래더 오빠에게서 살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정도 협박 따위에 굴할 제가 아니지요. 저는 당당하게 손가락으로 래더 오빨 정 면으로 가리키며 따지고 들었어요. "무슨 짓을 하려고 드는거지?" 나이도 별로 안 많으면서 음침하기로 따지자면 주인님보다 훨씬 음침한 목소리. 남자 목소리라면 자고로 여자 마음을 녹일 듯 부드럽고 상냥하 면서도 믿음직스러운 힘이 있어야 하는데 저 목소리는 그 중 어느 것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오직 상대를 기분나쁘게만 하는 목소립니다. 오히려 주인님의 앙탈스런 목소리가 훨씬 더 좋다니까요. 우훗∼♡ "그야 당연히 주인님을 위해서 성심성의껏 봉♡사 하려는 거죠." "약을 먹여 쓰러뜨린 것이?" "당연하잖아요?" 저는 저자세로 나갈 하등의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감있게 소리쳤답니다. 제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은 모두 주인님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 저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잖아요? 하지만 래더 오빤 아무 반응이 없네요.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인님도 이런 제 모습을 보면 땀을 삐질삐질 흘리거나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이 는 게 보통인데 말이죠. 정말 저같은 천재적인 분위기 메이커도 같이 못 놀아줄만큼 재미없는 사람이라니까요. 래더 오빠는 말없이 검을 꺼냅니다. 아앗. 저것은 칼날이 제멋대로 튀어나가거나 회전하고는 하는 그 황당한 검. 이잇. 정말 해보겠다는 거에요? 얌전히 있으면 중간이나 가지. 아아! 주인님도 그렇고 래더 오빠도 그렇고 왜 아무도 저의 주인님을 위한 저의 활약상을 인정해주지 않는 걸까 요. 오히려 이렇게 오해만 쌓이니 마나는 너무 슬프답니다. "싸울... 거에요?" 저는 최대한 가련하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초롱초롱한 눈빛공격을 래더 오빠한테 날렸어요. 저같이 귀엽고 예쁘고 참한 숙녀가 이런 모습을 보이면 어떤 남자라도 마음이 동해서 관심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것이 인지상정... 그러나 래더 오빠같은 자아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무뇌아 (無腦兒)한테 통할 만한 게 아니죠. 무뇌아라니 너무하다고요? 아녜요! 무뇌충(無腦蟲)이라고 안 부르는것만 해도 많이 봐 주는 거에요. "아버님을 해하는 자는, 무조건 죽인다." 아버님... 인가요. 푸훗. 래더 오빠는 주인님이 실험 중 실수로 잘려나간 살점을 이용해서 만든 주인님의 클론(clone). 그러니까 주인님은 래더 오 빠에게 아빠같은 존재이긴 하지요. 주인님은 아내도 없는데 아들이 있으면 쪽팔린다고 절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는 하지만... 래더는 끝까지 아 버님이라고 부른답니다. 푸훗. 파더 콤플렉스일까나요? "어휴. 주인님을 해하는 게 아니라 주인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니깐요? 왜 이렇게 답답하고 꽉 막힌 거에요!" 얼마나 답답한지 평소라면 절대 안 내는 짜증까지 나려 하네요. 히유. "...더 이상의 이야기는 의미 없을 것 같군." 래더 오빠는 그러면서 꺼낸 검을 양 손에 듭니다. 되도록이면 싸움같은 건 안 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다짜고짜 절 나쁜 놈으로 몰아가는데 이제 와서 설명해봤자 저 무식한 바보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죠. 주인님은 래더 오빠에겐 판단력같은 건 별로 부여하지 않고 검술 실력과 명령 복 종만 주로 가르쳤으니까요. 싸움은 싫지만 어쩔 수 없네요. 저도 손을 들어 언제든지 흑마법을 사용할 준비를 합니다. "죽어라!" 동시에 래더 오빠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어요. 블링크(Blink)! 저는 주문을 욀 사이도 없이 곧바로 몸을 던져 바닥을 굴렸고 간발의 차이로 검이 제 머리 위를 스쳐갔답니다. 얼마 전에는 자하기니아의 무술 대회에서 이 기술로 소드 마스터를 벤 적도 있다지요? 저는 볼것 없이 바로 흑마법을 연사했어요. 시간이 없기 때문에 시동어가 긴 것보다는 시동어가 짧은 마법을 여러 개 연사하는 편이 더 나으니까요. "박(縛)! 망(網)! 파(破)!" 박은 상대를 포박하기 위한 마법. 망은 상대의 움직임을 봉하기 위한 마법. 파는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마법이랍니다. 세 개가 한꺼번에 콤비네 이션을 이루는 연환(連環) 마법이지요. 하지만 래더 오빠도 역시 만만치 않은 상태라 박을 맞고 망에 방해받으면서도 마지막의 파를 피해냈답니 다. 만약 제가 아니라 아시에 선배님이 이렇게 마법을 썼다면 분명히 래더 오빤 저쪽 벽에 놔뒹굴고 있을 텐데요. 20년이상을 근무(?)하다 은퇴 (?)한 아시에 선배와는 달리 전 아직 1년차라 그런지 아직 많이 미숙하답니다. 하기야 아시에 선배도 마력만 강하지 이런 마법간의 연계 능력이 나 응용 센스는 뒤떨어졌으니 래더 오빨 크게 압도하지는 못할 테지만... "끼약! 신(迅)!" 제 공격을 뚫고 래더 오빠가 쇄도해오자 저는 속도증강 마법을 사용해 황급히 몸을 피했어요. 피하는 순간 갑자기 검이 쭈욱 늘어나서 코앞을 스쳐갔기 때문에 깜짝 놀랐답니다. 저는 다시 반격하지만 래더 오빠는 가볍게 피해버리고... "이...씨이!" 아악! 짜증나! 제가 지금 밀리고 있잖아요. 흑흑. 제가 래더 오빠를 제압할 실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마법들은 발동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랍니다. "주인님 좀 미중년으로 만들어보겠다는데 왜 자꾸 방해하는 거에요! 그게 그렇게 불만이에요오!" 저도 이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어요. 마법이 잘못 날아가 주인님이 맞건 말건, 지금 이 장소가 부서지건 말건 이판사판 끝장을 보자고 결심 을 막 내리려는 차에 래더 오빠가 갑자기 공격을 멈추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미중년? 그게 무슨 말이지?" 역시 바보 오빠. 미중년이 뭔지도 모르다니. 주인님과는 다르게 변태의 길에서는 확실히 멀리 떨어져 있긴 합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모르 는 것이 저에게는 좋은 일이죠. 저의 환상적이고 뛰어난 화술로 저 바보를 설득시킬 기회가 왔으니까요. "그러니까 말에요. 지금 제가 하는 일은 주인님을 지금보다 훨씬 더 멋있게 변모시키려는 일이에요. 근데 그렇게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고 움직 이면 걸리적거리니까 이렇게 잠을 재워놓고 그 동안에 하는 거에요."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아버님께서는 허락하신 일인가?" 하아. 역시 무지한 바보 설득하는 일은 답답하군요. 하지만 지금 여기서 래더 오빠를 설득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요. 저는 필사적으로 말했답니다. "주인님께서는 평소에 흑마법사다운 카리스마가 온몸에 철철 넘치는 분이 되시길을 바라고 계셨잖아요. 래더 오빠도 기억하죠? 주인님은 그런 흑 마법사에 걸맞을 정도로 강하시죠. 뭐니뭐니해도 대륙 7대 흑마법사의 반열에 들어가잖아요? 서열은 뭐 시원찮기는 하지만... 그런 주인님께 필요 한 것은 바로 거기에 걸맞는 얼굴이에요. 이건 바로 흑마법사에게 꼭 필요한 카리스마 있는 얼굴을 만들기 위한 중요하고 역사적인 작업이에요." 저는 가능한한 말을 빙빙 꼬아서 헷갈리게 말했답니다. 뭐, 제 양심을 걸고 제가 한 말중에 거짓말은 없으니까 죄책감 같은 건 전혀 없어요. 래 더 오빠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어딘가 고민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항상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데다 후드로 얼굴을 가려서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지만 같이 살다 보니 얼굴표정 같은 거 안 봐도 저절로 그런 걸 대충 알 수 있게 되더군요. "아버님을 위한 일인게 확실한가?" 의심도 많으셔라. "물론이죠!" "...좋아. 나도 돕겠다." "셰더야, 가서 시체들 좀 치워라." "네." 망할놈의 영감. 그냥 지가 마법으로 치워버리면 될 거 가지고 꼭 나한테 일을 떠맡긴단 말이야. 아무리 제자는 스승의 뒤치닥거리를 해야 한다지 만 지가 손짓 한번으로 끝낼 수 있는 일을 내가 시체 썩는 냄새를 맡아가면서 일일히 소각장에다 실어 날라야겠냔 말이야. 게다가 시체 타는 냄 새는 왜 그렇게 고약한지... "끼아∼ 악!" 엥? 근데 이게 뭔 소리냐? 분명 여자 목소린데 왜 제물들을 쌓아 놓은 곳에서 들려오지? 스승님의 노예들은 이번 실험에는 동원되지 않은 걸로 아는데... 나는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황급히 제물들을 집어넣은 실험 장소로 향했다. 단단히 잠겨 누구도 빠져나올 수 있는 쇠창살 사이로 살아있는 듯한 여자아이가 한 명 보였다. "응? 아직 살아있는 녀석이 있었나?" "사...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들... 다 죽었어요!" 그 여자아이는 덜덜 떨면서 안에서 쇠창살을 붙잡고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애는 근데 언제 어디서 끌고 왔더라? 에이. 몰라 아무나 막 잡아 오다 보니까 그런 걸 어떻게 일일히 기억해? 근데 이 애 아직 분위기 파악 못하네? "응. 그렇지. 흑마법의 제물로 사용했으니까. 그런데 넌 왜 살아 있냐?" 나는 그녀가 왜 살아있을 수 있는지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별 생각없이 알몸인 그녀를 발에서 머리까지 쭈욱 흩어보았다. 흐음... 내가 여자를 본 적은 스승님의 노예들 말고는 많이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 애들보다는 예쁜 것 같은걸? "근데 너 꽤 예쁘다 그래? 헤에∼" 그 여자는 그제서야 자기가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달은 듯 땅바닥에 주저앉으면서 필사적으로 몸을 가리려고 애썼다. 그래도 꼴에 여자긴 여자라 고 생각하나 보지? 어린애 주제에 말야. "쳇. 어린애 몸 따위 별로 볼 것도 없다고." 그렇게 툴툴대며 스승님께 보고해야지 하고 돌아서려던 찰나 따악 "아악!" 뒤에서 갑작스럽게 내려치는 충격... 으윽! 쇳덩어리가 내리치는 듯한 이 충격은 분명 스승님의 돌보다 더 단단한 지팡이... [으음... 조금 괴로워하시네요. 혼몽초의 영향이에요. 약간 좋지 않은 꿈을 꾸는 것 뿐이니까 별 걱정 안해도 돼요, 래더 오빠.] [그렇다고 아버님 뒤통수를 때릴 이유는 없잖아, 마나티!] [아, 주인님이 갑자기 딴 여자를 생각하고 히히덕거리는 것 같아서 잠깐 충격 요법을 쓴 거에요. 저같이 주인님에게 충실히 봉사하는 노예가 세 상에 어디 있...] "쯔쯔... 그렇게 눈이 삐어서야 무슨 큰일을 하겠느냐?" 고통을 이기지 못해 바닥을 뒹굴다가 아픈 머리를 쓰다듬으며 일어나니 어느새 스승님이 다가와서 날 질책했다. 머리에 한대 맞았을 때 무슨 소 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환청인가? 어쨌건 난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때려? 나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으으... 왜 때려요!!!" "여자 나이는 어리면 어릴 수록 좋다는 세상의 진리를 모르다니... 아직 멀었어!" "아무리 어려도 최소한 빵빵하게 잡히는 게 있어야죠! 스승님 같은 로리콘과는 비교... 아악!" 나는 다시 스승님의 지팡이를 맞고 바닥을 굴렀다. 끄아악! 이번 건 아까보다 훨씬 세게 맞았잖아. 아퍼어! [왜 자꾸 아버님 머리를 내리치는 거야, 마나티!] [오호호. 이것도 모두 주인님을 위한 거에요. 이렇게 변태스런 표정으로 히히덕거리는 얼굴은 카리스마적인 흑마법사의 이상에는 맞지 않잖아요? 조금은 고통스런 과정을 거칠지라도 지금부터 길을 들여...] 또다. 어쩐지 음침한 남자 목소리와 어쩐지 들으면 소름이 돋는 코맹맹이의 여자아이 목소리. 내가 스승님한테 머리를 좀 많이 맞기는 맞았나 보 다. 이 나이에 벌써부터 환청이라니. 정말이지 이젠 참을 수 없다구!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죽을 땐 죽더라도 일단은 따지고 봐야 했다. 내가 바로 일어서자 스승님은 준엄한 목소리로 내게 호통쳤다. "누가 로리콘이라는 게냐! 어리고 순결한 여자 제물은 흑마법에 딱 걸맞는 최고의 재물이자 모든 흑마법사들의 로망이야!" "제물은 둘째치더라도 로망은 개뿔의 로망..." 나는 일장연설을 벌이는 스승님의 귀에 들리지 않을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승님의 노예들이 대체로 그렇지만 저렇게 빈약하고 어린 여자애들이 무슨 쓸모가 있다고 옆에 두고 조교시킨다고 생 지랄을 떠는건지 모르겠다. 여자가 남자와 다른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가? 여성의 무엇이 남자를 그렇게 유혹하는 줄 아는가? 그것은 바로 풍만한 가슴과 탄력있는 엉덩이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스승님은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서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다. 그게 달리고 안 달렸다는 차이 외에는 남자애랑 별 다를바 없는 꼬맹이 여자애들을 좋아하니 말이다. 몇 년 지 나면 아예 남자애를 침대에 끌여들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난 생각한다. 그리고 스승님은 내게도 마도의 노예가 필요할거라면서 그 아이를 내게 주었다. 쭉쭉빵빵한 미녀가 아닌 점은 좀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아직 어리니까 잘 키우면 그렇게 만들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스승님께 배운대로 그 아이를 조교시켰고, 노예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열심히 내가 노력해서 키운 그 아이를 -이름이 아시에라고 했다- 스승님은 마왕소환에 적합하다고 하면서 뺏아가 버렸다. 내 생돈을 들여 비싼 호르몬 제를 사용한 1년동안의 육성이 성과가 있어 그녀는 여자로서 완전한 몸의 굴곡이 자리잡아 가고 있었고 가슴도 한 손으로 충분히 만지작거리기 힘들만큼 커졌다. 이제 한 1년정도만 더 하면 내가 좋아하는 이상적인 여성의 몸을 만들 수 있는데 무슨 횡포냐구! 안될 것을 알면서도 나는 항 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승님, 약속했잖아요! 이건 제 노예라고요! 제 꺼에요! 제 꺼! 그런데 멋대로 뺏아가다니 말이 되는 소리에요? 제가 얘 키운다고 얼마나 힘들었 는데요! 가사 전반뿐만 아니라 흑마법까지 가르키..." "잘 알지. 호르몬 약제 투여로 몸 굴곡 만드는 데만 정신 쏟았지? 게다가 가슴은 왜 또 저렇게 키운거야? 원. 1년 전에는 열 서너살정도로 보였 는데 이젠 열 일곱여덟정도로 보이잖아! 쯔쯔쯔... 참 귀여운 애였는데 저렇게 망쳐놓다니." "빈유취향 로리콘 할아범. 여자는 거유라고요, 거유!" 딱!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냐?] [어머나, 래더 오빠.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니까요. 전부 주인님을 위한 일이라니깐요. 이런 경박한 변태스런 웃음은 안된다고 했잖아요? 하여간 주인님이 갑자기 거유 하고 중얼대는 걸 보니 제가 주인님이랑 노예계약을 맺은 첫날부터 호르몬제를 맞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는 저도 거의 절 벽...] ...이제 내 정신도 거의 왔다갔다 하나보다. 마나티의 환청이 들리는 걸 보니... 뭐어? 마나티!? 그래 맞아. 분명 1년 전에 들인 새 노예... 게다가 내 스승님은 옛날에 죽었어. 젠장! 이건 꿈인가! 벌떡 나는 갑자기 정신이 팍 돌아오면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침대 위에 있었고 그 옆에 마나티와 래더가 날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 에는 잡다한 마법도구들과 약들이 널려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맞아! 마나티 녀석이 날 잠재웠었지. "마나티, 무슨 짓을 한 거야?" "우후훗∼♡ 거기에 앞서 먼저 이걸 보세요!" 마나티는 그렇게 말하면서 노트 크기만한 거울을 내게 내밀었다. 거울같은 걸 봐서 어쩌라고? 내 얼굴에 낙서라도 했나?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헉!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지금 거울 속에 있는 이 사람은 누구야아! "이... 이 사람은 대체?" "바뀐 얼굴이 맘에 안 드세요? 사랑하는 제 주인님을 위해 제가 오랫동안 준비해서 실행한 건데." 나는 마나티가 뭐라고 하는지 듣지 못하고 단지 멍하니 거울만 쳐다볼 뿐이었다. 이건... 내 얼굴이 아냐. 내 얼굴이 아니라고. 제멋대로 자라 있 는 수염은 단정하게 깎여 있었고, 조금 비뚤했던 얼굴선은 가지런히 바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게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변해 있다는 것이었다. 조금 창백하고 사악해 보이자만 흑마법사다운 귀기가 서렸던 얼굴이 완전히 변해 있었 다. 흑마법사의 분위기를 잘 살리면서도 준수해 보이는 이 얼굴은 마치 처음에는 악역에 섰다가 나중에 주인공 편을 들어 배신할 만한 인상이라 고 할까나. "아버님은 맘에 안 들어하시는 것 같군." "에에? 그럴리가! 래더 오빠가 보기에도 주인님의 얼굴은 이전보다 1000배 정도는 훨씬 더 멋있어진 거 같지 않아요?" "멋지고 안 멋지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아버님의 마음에 드느냐 들지 않느냐지. 만약에 아버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당장에 너를 베 겠다." "에이. 걱정 마시라니깐요. 반드시 마음에 들어할 거에요. 그쵸, 주인님?" 래더와 마나티가 잡담을 나누는 가운데 나는 단지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뭐가 뭔지... 뜬금없는 일이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다. 마 나티가 날 고의로 정신을 잃게 하고 내 얼굴을 이렇게 바꾼 것은 알겠다. 원래대로라면 당장에 노발대발하면서 화를 내야겠지만 의외로 생각보 다 나쁘지 않은 터라서...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마법이 일정 경지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는 마법으로(또는 신력으로) 자기 외모를 뜯어고치는 사람이 꽤 많다. 남자들은 더 멋있게, 여자들은 더 예쁘게 만드는 욕구가 생기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흑마법사다. 흑마법사가 멋지고 잘생긴 외모를 가 져봤자, 어떻게 상대를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할 수 있겠냐? 그런데 마나티가 바꾼 이 얼굴은 미남이면서도 상대에게 위압감과 두려움을 줄 수 있을 정도의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대륙 7대 흑마법사의 일 인으로서 충분한 카리스마가 얼굴에서 서려나왔다. 이런 얼굴이 나올 수 있다니... 나는 솔직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같으면 절대 이런 얼 굴을 만들 수 없었을 거다. 이렇게 좋은 결과물을 이끌어 낸 것을 보니 마나티는 정말 노력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싫어하는 일은 영 시원 찮게 하지만 진짜 좋아하는 일은 엄청 열심히 하니까. "흐아암... 나 이만 잘래요. 마나 너무 힘냈더니 피곤해." 마나티는 그렇게 말하고는 옆으로 피식 쓰러져버렸다. 아마도, 이 일을 한다고 좀 많이 피곤했나보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고맙다고 하려고 했지 만 그때 갑자기 뒷골이 아파오면서 고마운 기분이 싹 사라졌다. 으음... 왜 이러지 나? 단지 꿈에서 이미 죽은 스승님한테 맞은 건데 왜 이렇게 뒷머리가 아픈 걸까나? "그 옷이 아니라니까요, 이 옷이에요, 이 옷!" "이건 검은 색이 아니니까 좀..." "으이구. 시커먼 색깔만 잔뜩 뒤집어쓴다고 무조건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면 그건 착각이에요. 주변 환경이나 자기 자신과의 조화와 더불어서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요! 게다가 주인님은 이제 미중년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더욱 더 그 외모를 돋보이게 하는 옷이나 장신구에 신경을 쓰셔야죠." 정말이지 한심하신 주인님이에요. 아무리 어릴 때부터 흑마법사들끼리만 알고 지내는 비좁은 인간관계와 편협한 세계관을 가지고 자라나셨다고 는 하지만 이토록 최악의 패션 센스를 가지고 계신줄은 지금껏 몰랐어요. 그런 주제에 저랑 아시에 선배한테도 자기 취향에 따라 옷을 제멋대로 입혀왔다는 사실에 대해 저는 분노를 느낄 지경이랍니다. 뭐, 그래도 저와 아시에 선배님의 미모가 워낙 빼어나니까 그런 엉터리같은 옷을 입어도 잘 어울렸지만요. 아시에 선배님은 성장이 멈춰서 그런 지 몰라도 절대 살같은 거 안 쪘기 때문에 전혀 외모 관리를 안 하는데도 불구하고 예뻤었죠. 근데 저는 왜 이렇게 자꾸 살이 찌는지 몰라요. 매 일마다 거울 보면서 몸을 샅샅히 뒤져 흑마법으로 군살을 제거해주지 않으면 이 날씬한 몸매가 유지가 안된다니깐요. 물론 제가 좀 많이 먹기는 하죠. 아마 밥을 주인님의 두세배 정도는 많이 먹을걸요? 음... 그러고보니까 요즘 주인님이 밤에 힘을 못쓰는 것도 밥을 적게 먹는 탓일까나? "자, 거울 좀 봐요." "헤에∼ 꽤 괜찮은데?" "것봐요. 진작 저한테 맡겨뒀으면 될 거가지고 왜 그렇게 처음부터 고집을 부린 거에요?" 저는 주인님이 자신의 새로운 미중년 얼굴을 꽤 맘에 들어하는 걸 계기로 주인님께 주인님 옷 코디를 맡겠다고 떼를 썼고, 주인님은 제 성화를 이기지 못해 지금처럼 시험할 기회를 주신 거랍니다. "그야 아시에라는 처절한 실패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지." "...하기야 그것도 그렇네요." 가사노동은 잘 하지만 패션이라면 주인님보다 훨씬 꽝인 사람이 아시에 선배였으니 말이죠. 주인님이 말해주신 사연에 따르면 이전 스승이 죽고 나서 그 그늘에서 벗어나 정식 흑마법사가 되어 흑마법계에 데뷔할 때 회합에 참석할 때의 옷 같은 지식에 대해 아는 게 전무하던 주인님은 그 역할을 아시에 선배한테 맡겼고 그 결과는 동종업계 사람들의 엄청난 비웃음을 사는 것으로 끝났답니다. 주인님이 오죽 화가 났으면 주인님이 노예계약 이후로는 노예를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계약 룰을 일시적으로 깨 가면서까지 조교실에 다시 집어넣었을 정도였을까요? "앞으로는 내 옷 입는데 대해서는 네게 맡기마. 고맙다." "뭘요. 매일 제 끼니를 책임지시는 주인님께 대한 당연한 보답이지요." "밥값이란 게냐... 정말이지 아시에만 있었으면 완벽한 콤비인데." 주인님께서는 갑자기 한숨을 짓더니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음. 음. 확실히 아시에 선배님이 지으시던 밥은 확실히 정말 맛있었지요. 지금 주인님 이 만드는 밥도 나쁘진 않지만 객관적으로 비교했을 때 아시에 선배님의 밥 쪽이 더 나은 건 사실이에요. 그 외에도 지금은 주인님이 책임지시 는 가사 전반을 완벽히 책임지던 살림꾼이었어요. 아무리 브리타뉴 가의 강적들을 맞아 경황이 없었다 해도 그런 쓸만한(?) 선배님을 버리고 오 시다니... 정말이지 한심하다니까요. 지금 이렇게 주인님이 가사노동을 하면서 하는 고생은 전부 주인님 스스로가 자초한 거나 다름없다구요. "좋아. 그렇다면 카리스마 넘치는 흑마법사로 새로 태어난 기념으로 가사 전반을 책임져줄 수 있는 미소..." "미소년 가정부를 납치하러 가는 거에요!" "엥? 갑자기 미소년은 웬 미소년이얏!" "주인님이야말로 무슨 말씀이세요? 미소 자로 시작되는 말은 당연히 미소년밖에 없잖아요?" "난 미소녀가 더 좋단 말이야!" "어머나. 여기 눈앞에 저같이 이쁘고 착한 초미소녀를 앞에 두시고 새로운 미소녀를 잡아오겠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마나티 너야말로 여기 처음 올때부터 미소녀는 아니었잖아! 지금까지 피부 잡티 제거, 얼굴 미용, 피부 미용, 지방 제거 등등의 명목으로 니가 내 연구실에서 훔쳐다 쓴 마법재료가 얼마나 되는지 알기나 해?!" "어머나. 그거 다 합쳐봤자 주인님이 제 가슴 키운다고 들인 호르몬제 가격에 비하면 발톱의 때만큼도 안되잖아요. 왜 그렇게 쫀쫀해요!" "그러지 말고, 각자 미소년 1명, 미소녀 1명씩을 납치해오면 되겠군요." 저와 주인님이 옥신각신 다투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래더 오빠가 말을 꺼냈어요. 이야. 머릿속에 든 거라고는 돌덩이밖에 없는 래더 오빠가 저런 의견도 내놓을 줄 아네요. 다시 봐야겠는걸요?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반드시 미소녀 쪽이 옳은 선택이었다는 걸 증명해주겠어." "오호호홋. 저야말로요. 제가 데려오는 미소년이 얼마나 각박한 이 장소에서 빛을 발할지 한번 두고보라고요." "승부다!" "승부에요!" 주인님의 날카로운 눈빛에서 미소녀를 향한 결연한 의지가 느껴져요. 이전의 주인님은 저런 눈빛을 해봤자 또 무슨 궁상스런 짓이야? 라는 생각 만 들었는데 확실히 미중년으로 변하고 나니까 같은 눈빛을 해도 훨씬 카리스마가 살아나네요. 그렇다고 해도 저도 질 수는 없어요. 결연한 의지 라면 나도 질 수 없다구요! 반드시 엄청난 미소년을 잡아와 미소녀에 대한 상대적 비교우위를 증명하겠어요. 제117화 : 카이엔에게로의 도전장 "흐음..." "이 차 괜찮은 걸. 지금껏 본 적 없는 새로운 맛이야." "마음에 드십니까? 이번 차는 동쪽 대륙 멀리서 가져온 희귀한 거랍니다. '디오'라고 불린다더군요." 시르쥬 전학 사건 이후 학교를 나가지 않는 나는, 가족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평소에 우리 집에 갖가지 신기한 차 를 구해다가 끓이고 하는 집사는 오늘도 새로운 차를 끓여놓고 있었다. 나는 우리 가족들이 차를 먹는 것을 보고는 조금 미지근해 보이는 차를 들어 찻잔에 입을 댔다. 우오오옷! 이 맛은! 어디선가 많이 마셔보던 맛인데, 뭐더라? "이 차는 미지근하거나 약간 차갑게 마시는 편이 좋다고 해서 그렇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자양강장과 피로회복에 좋은 차라고 들었습니다." 이... 이건 차가 아냐!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차(Tea)일리가 없어! 너무나도 익숙한 이맛... 이 세계로 온 지 여러 달이 지났다지만 아직까지 이 맛 을 잊을 단계는 아니다. 이 차의 맛은... 바로 박카스 맛이 났다. 우오오오! "우에... 카이 오빠도 맛 없지, 이거?" 아이렌이 다소 흥분한 내 표정을 보고 지레짐작해서 말했다. 아이렌은 애초에 차 향을 맡고서부터 눈쌀을 찌푸리더니 차에 입을 살짝 대 보고 는 얼굴을 찡그리며 찻잔을 내려놓은 터였다. 나는 간만에 맛본 추억의 맛에 잠깐 흥분해서는 외쳤다. "무슨 소리야,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군요. 하지만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십시오. 이 차에는 약간의 중독성이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집사가 빙그레 미소지으면서 이야기했다. 으음... 정말 좋다. 이제는 브리타뉴 가에서 항상 먹는 고급스런 음식에 익숙해졌으면서도 가끔씩은 옛 날 먹던 싸구려 음식들과 음료수를 먹고 싶어하는 심정은 왜일까나? 그렇게 가족끼리 즐거운 오전 티 타임을 보내고 있을 때 갑자기 우리 집 문지기A가 거실 대문을 쾅쾅 두들기면서 말했다. "집사님! 카이엔 도련님을 만나길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돌려보내라고 하지 않았나!" "그것이... 어떤 남자가 수백명의 여자들과 함께 대문 앞에서 죽치고 있습니다!" "뭐어?" 그게 무슨 말이야? 저게 과연 무슨 사태일까 하고 곰곰히 생각하기 전에 세이렌 누나가 먼저 행동에 나섰다. "카이. 같이 나가보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아." "알았어요." 나는 혹여나 내 머리띠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모자를 뒤집어썼다. "저도 같이 가요. 재밌는 일이 있을 것 같네요." 아시에가 슬쩍 끼어들었고 "세이 언니, 나도 같이 가! 둘이서 카이 오빠를 사이에 두고 무슨 짓을 하려 드는거야!" 아이렌도 막무가내로 끼어들었다. 어이, 이 세명 중에 니가 제일 위험하다고. 딴 사람은 둘째치더라도 니가 하면 범죄의 영역이 된단 말이야! 왜 누님이 연방이고 로리가 지온인줄 알아? 후자는 합법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잖아? "나도 갈테다. 사악한 여인들의 손에 내 동생 카이엔의 순결을 맡겨둘 순 없지!" 거기서 순결 이야기가 왜 나왓! 사이엔 형! "나도 가지 뭐. 저 멤버들 사이에 끼여있기에는 카이엔 형이 너무 불쌍해." 라면서 레이엔도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빠 엄마까지 이 극성스러운 형제자매들의 대열에 끼어들지는 않았던 것이다. 뭐, 어차 피 두 분은 내 형제들이 하도 극성을 부려서 그런지 평소에도 나를 크게 걱정하는 듯 보이지는 않은 것 같지만. 이런 난동에도 불구하고 "잘 다 녀오너라."한마디만 하고는 여전히 새로운 차를 즐기고 있었으니까. "으휴. 왜 이렇게 득실득실 달라붙는 거야? 하여간 간다!" 세이렌 누난 투덜대면서도 그 전원을 데리고 우리 집 대문 앞으로 텔레포트를 단행했다. 순식간에 주변의 풍경이 씻겨져내려가듯이 비뀌면서 우리는 폭이 수십미터는 될 거대한 집 대문 앞에 있었다. 대문 앞에는 우리 집 문지기들과 사병 몇이 서서 앞에 서 있는 수많은 여자아이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엥? 왠 여자애들이냐? 설마 내 팬들? 그리고 그 무리의 제일 앞에는 웬 남정네 하나가 폼을 잡으면서 서 있었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카이엔 브리타뉴!" 뭐야? 다짜고짜 보자마자 손가락을 가리키며 삿대질이라니? 나는 기분이 조금 나빠져서 그자를 확 노려보았다. 헉! 그런데... 그런데! 저게 뭐다 냐? 머리길이는 그다지 길지 않지만 준수하면서도 단정하게 가르마를 탄 갈빛 머리와 은빛 눈동자에 떠오른 진지한 표정이 너무 매력적일만큼 멋진 청년이었다. 생긴걸로 따진다면 사이엔 형보다 한 10배쯤, 시르젤 씨보다 한 3배쯤 더 잘생긴 것 같아 보였다.(이건 물론 나의 주관적인 판 단일 뿐이다.) 나는 도전적인 눈빛으로 날 노려보는 그 청년에게 무의식적으로 다가가서 선망의 눈빛으로 말했다. "끼아악! 오빠 너무 잘생겼어요. 싸인 좀 해주세요!" 싸인지나 펜은 없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냐! 이 사람은 이 세계에 와서 내가 본 사람들 중에 가장 멋진 미남이란 말이다!(나 자신은 일단 제외 한다.) 내가 남자를 이성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잘 생긴 '오빠'들은 그래도 '선망'의 대상이니까 나는 당연히 환호할 수밖에 없다. 슬쩍 흩 어봐도 알 수 있다. 저 오빠는 딱 '잘나가는 미남 연예인'형의 얼굴이다. "휴우... 직업병이니 할수 없네." 아시에가 뒤에서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뒤에 몰려있는 여학생들 가운데서 꺄아 하는 소리가 계속 터져나왔다. "암. 암. 그래. 착한 애구나, 이 오빠가 기꺼이 싸인을 해 줄... 이 아니잖아! 그렇게 위장 평화 공세를 펼쳐도 나한테 통할 줄 알고!" 저 오빠는 내 순진무구한 표정에 잠시 감화를 받은 듯 뿅갈 것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는 뒤로 몇 걸음 물러 나 다시 긴장된 얼굴을 하며 뭐라고 외쳤다. 뒤에 몰려 있는 여자애들 사이에서 실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지금 나는 제정신이 아니 었다. 저런 물건(?)을 코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흔한 게 아니었다. 확실히 저 자태를 두 눈에 박아두지 않으면 안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저 오빠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앞으로 걸으면 그 오빠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치는 이상한 상황이 펼쳐졌다. "야, 카이! 정신차려! 암만 글을 오래 안 써서 쌓였어도(?) 그렇지, 무슨 짓이야!" 아시에의 목소리. 아 시끄러. 괜한 참견 하지 말라고. 몇달 동안 연예계 관련 소식을 전혀 접하지 못하다 보니 저런 스타급 미모에 목말라 있었 다구. 물론 우리 집 가족들도 다 예쁘고 잘생겼긴 했지만 몇달 보니까 영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된 터였고 내 미모는 물론 저 오빠보다 예뻤지만 자기 외모에 자기가 뻑 갈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르젤 씨의 외모는 저렇게 화려하게 튀어 보이는 연예인 외모라기보다는 오히려 평범 한 편이다. 시르젤 씨의 진가는 외모가 아니까 편안한 분위기를 상대에게 주는 거니까. 이건 물건이야!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라구! 나는 그런 삘(feel)을 느끼면서 그에게 접근했다. 그때 뒤에서 사이엔 형이 내 목덜미를 잡아챘다. "아얏, 뭐 하는 짓이야, 사이엔 형!" "...나한테도 오빠라고 불러주면 안되겠니?" 말리려는 건줄 알았는데 이 인간은 대체... "싫어! 이거 놔!" 사이엔 형한테 들려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반항을 하던 차에 세이렌 누나가 나서서 그 오빠한테 물었다. 확연히 적의(敵意)가 깃든 무서운 표정이었다. "네놈은 누구지?" "보고도 모르시겠습니까?" 그는 세이렌 누나를 앞에 대하자 여자를 녹일 것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는 대답했다. 하지만 세이렌 누나의 표정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응. 모르겠어." 단호한 대답에 당황하는 것은 오히려 그 오빠 쪽이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상상하지 못한 듯 당황하면서 이야기했다. "저 위즈 하켄크로이츠를 모르신다는 말입니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사이엔 너 알어?" "저도 처음입니다. 누님." "나도 모르겠는걸." "나두." 아이렌과 아시에도 모두 고개를 저었다. 형제들이 전부 나를 쳐다보지만 사실은 나도 모른다. 그냥 갑자기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멋지고 잘생긴 사람이 눈앞에 있길래 무의식적으로 다가간 것 뿐이라구! 그럴 때 레이엔이 한 발짝 나서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도 있는 것 같아. 카이엔 형의 미모에 비해서는 발톱의 때만도 못미치지만 그래도 대륙 미소년 서열 2위라고 하는 사람의 이름이 위즈 하켄크로이츠라고 하던데..." 흐음. 그런 건가? 서열 1위인 내 미모가 워낙 뛰어나고 유명하다 보니까 2등은 저절로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버리고 만 게로군. 쯔쯔쯔. 불쌍 해라. 그래도 2등은 2등인지 정말 대단히 멋있게 생긴 사람이다. 린넬이나 사이엔 형 정도도 상당히 잘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그런 레벨을 아 예 몇 단계 초월한 것 같아 보인다. 마치 나의 미모처럼... "흠흠. 어쨌건 내가 내 팬들을 직접 이끌고 여기까지 온 이유는 단 하나, 카이엔 브리타뉴와 이 대륙의 진정한 미소년의 자리를 놓고 혈투를 벌 이기 위해서입니다!" 위즈 하켄크로이츠라고 이름을 밝힌 오빠의 일장연설과 더불에 뒤에서 그의 팬들로 보이는 여성들의 뜨거운 박수소리가 울려퍼지는 모습을 우리 는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휴우. 정말 한심한 쇼맨쉽이라니... 아앗, 카이!" 세이렌 누나의 한숨이 말해준 것처럼 우리 가족들은 모두 바보같다는 생각으로 위즈의 오버 액션을 지켜본 모양이었지만 나는 그들과는 다르게 위즈의 모습에 감탄을 퍼붓고 있었다. 대사 하나하나를 외치면서 움직이는 몸짓과 순간 포즈. 나는 단번에 그것이 하루이틀의 연습가지고는 절대 할 수 없는 끝없는 노력의 결과로 만들어진 연기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은 연기를 하더라도, 일반인들과 연기자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까. 그리고 거기에 맞춰 소리를 지르는 서포터즈(?)들의 구호도 상당한 연습을 한 모양이었다. 오늘의 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얼마나 준 비를 해야 했을까. "너... 너무 멋있어!" 나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솔직히 위즈의 연기력에 찬탄을 보내고 있었다. "카이 오빠. 왜 이래!? 정신차려, 응?" 아이렌이 내 옷깃을 잡아끌었지만 나는 이미 거기에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정말 대단해요, 위즈 오빠! 한번만 더 보여주세요!" "하핫. 이렇게 귀여운 동생이 요청하는데 당연히 해줘... 아앗! 같은 수법으로 또 날 회유하려고 들다니. 으음. 역시 카이엔 브리타뉴는 소문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군. 나의 진지한 도전을 이런 식으로 무산시키려고 들다니 말야."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위즈라는 오빠는 어딘가 헛소리같은 말을 지껄이면서도 항상 대사에 딱 알맞는 제스쳐를 취함으로서 날 감탄케 했다. 아까도 부드럽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을 것 같다가 갑자기 놀라서 뒤로 물러서면서 손을 흔들고는 턱을 괴고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냈다. "카이야. 니 취향에는 맞을 지 모르겠지만, 하는 짓을 보니 단순한 바보니까 신경쓰지 말고 들어가자." 아시에가 내 팔을 잡아끌면서 말했다. "우웅... 하지만 너무 아까운걸." "...대체 뭐가 아까워? 돌이가자! 세이 언니, 카이한테 바보 바이러스가 전염되기 전에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요." "그러자." 아시에는 짜증나는 어투로 외치면서 내 팔을 억지로 갑아 날 질질 끌고 갔다. "훗. 남자로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휘둘리는 한심한 꼴이라니, 무릇 남자라면 나처럼 이렇게 수많은 여자들을 카리스마로 휘어잡아야 하는 것 을!" "푸훗. 카리스마 같은 걸 필요로 하지않는 여자들도 있단다. 하켄크로이츠 군. 나는 오로지 샤방하고 귀엽고 말 잘들으면서도 가끔 앙탈을 잘 부 려주는 카이엔이 더 좋다고." "세이 누낫, 딴건 몰라도 내가 언제 앙탈부렸다고 그래요!" "설득력 없어. 카이, 나한테도 앙탈 부렸잖아, 안그래?♡" 아시에가 내게 앙증맞은 표정으로 윙크(...)하면서 말했다. 크아아악! 위험한 여인네들로부터 자기 한 몸 지켜보겠다는 필사의 노력이 어째서 앙탈 로 변해버리는 거야? 하지만 정작 나 본인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자기들끼리 떠들어대는 내 가족들이었다. "맞아. 카이 오빤 나한테도 앙탈부렸다니깐?" ...아이렌 너는 제발 좀 가만히 있으렴. 이 오빠를 로리콘으로 만들 셈이니? "이해할 수 없는 여자들..." 고개를 저으면서 위즈 오빠는 주먹을 꽉 쥐고 열변을 토했다. "남자는 남자다움으로서 비로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 저돌적이고 화끈한 성격! 지나치지 않으면서도 탄탄한 갑빠! 거기에다 수려한 미모 까지!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춘 나 위즈 하켄크로이츠야말로 진정한 대륙 제1의 미소년의 표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저렇게 작고 연약한데다 소 심한데다가 좀 예쁘긴 해도 완전히 계집애 외모인 카이엔 브리타뉴가 어째서 대륙 제일의 미소년의 지위를 얻어야 하는 겁니까! 저를 응원하기 위해 여기까지 어려운 걸음을 해 주신 저의 팬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맞아요!" "위즈 오빠 화이팅!" 전대물에 나올 듯한 온갖 포즈를 다 잡으면서 그야말로 열혈로 가득찬 열변을 토해 내는 위즈의 연설에 따라온 여성 서포터즈 군단에서 일제히 그에 답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으... 시끄럽다구! 그런데 잘 들어보니 어째 내용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꺄아∼ 맞아요. 남성형 미소년 중 제일가는 위즈 오빠와 여성형 미소년의 절정인 카이엔 오빠의 조합! 너무 잘 어울려요!" "둘이 커플 해요! 꺄우∼♡" "그럼 역시 위즈 오빠 쪽이 공이겠죠?" "저... 저기..." 위즈 오빠도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한 듯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자기 팬들이 예상외로 보여준 반응을 무시하며 날 손가락으 로 가리키더니 외쳤다. 그... 그렇다고 삿대질을 하다니 너무하잖아! "어... 어쨌건 간에 대륙 제일의 미소년 위치를 걸고 승부하는거다, 카이엔!" "시... 싫은데요, 오빠?" 나는 당황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뒤로 머물렀다. 나는 별로 미소년 자리 같은 거 걸고 싸움같은 건 하긴 싫어. 그냥 같은 최상급(?) 미소년이니까 서로 사이좋게 잘 지냈으면 좋을텐데. 이왕이면 지나칠 정도로 내 주위에 달라붙는 여자들도 절반정도쯤 떼 갔으면 좋겠고. "대륙 최고의 미소년이고 어쩌고 하는거, 양보해줄테니까 그냥 가져가면 안될까요?" "뭐얏! 나와의 승부를 피하는 거냐, 그렇게 내가 우습게 보였다니... 크윽!" ...대체 어떻게 해석을 하길래 그렇게 알아듣는 걸까나. 게다가 내 가족들이 내 말에 깜짝 놀라서 태클을 걸고 나섰다. "무슨 소리야, 카이? 이 누난 대륙 제일의 미소년인 네가 얼마나 자랑스러운데." "맞는 말이다. 너는 집안의 자랑이자 대륙을 밝히는 등불이야." "카이 오빠, 세상에 카이 오빠보다 더 뛰어난 미소년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고요!" "카이엔 형. 그런 건 자기가 마음대로 바꾸고 싶다고 바꿀 수 있는 게 아냐." 가족들이 한 마디씩 걸고 넘어졌고 "나도 이왕이면 대륙 제1의 미소녀였다면 좋았을걸..." 아시에는 어쩐지 불만 반, 부러움 반 섞인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치이. 나야말로 그냥 평범한 정도의 미소년이었으면 좋겠다구. 1인자의 위치 라는 건 왜 이렇게 트러블이 자꾸 생기는 건지 모르겠다니깐? "그리하여 나 위즈 하켄크로이츠는 카이엔 브리타뉴에게 대륙 제일의 미소년의 지위를 건 승부를 제안한다!" "그러니까 싫대두요!" 아아. 너무 슬프다. 이 세계에서는 분명 이전 한국에는 찾기 힘든 대단한 미소년 미소녀들이 넘치고 돌건만 왜 그 중에서 제대로 된 성격을 가진 사람을 찾기 힘든 걸까!? 아, 시르젤 씨 같은 경우는 예외로 하고 말야... ...라고 하는 나도 평범한 성격이라 볼 수는 없겠지만. "우선 그 모자부터 벗어라, 소문에 듣던 너의 진정한 미모라는 것을 드러내봐라!" 모... 모자? 그렇다. 나는 요즘 항상 모자를 옆에 두고 다니면서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빼놓지 않고 쓴다. 세이렌 누나가 내 몸에서 떨어지지 않 게 만든 꽃이 달린 집중력의 머리띠 때문이다. "절대 안 벗을거에요!" 아무리 멋진 오빠라 해도 이건 양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카이... 또 앙탈이야? 팬 서비스 차원에서 그냥 벗어. 이왕에 벗는 김에 하나하나씩 천천히 아슬아슬하게 벗어서 저 위즈라는 사람의 팬들을 모 두 네 팬으로 끌어들이는 게 어때?" 아시에의 놀리는 듯한 말. 아무리 내 기본 외모 탓에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나는 아무리 화를 내도 삐진 게 되어버리고 아무리 화가 난 표정을 지어도 그만 뾰로통한 표정이 되어버린다. 이건 내가 거울을 보고 직접 확인한 거니까. 그렇다고 해도 앙탈이라고 표현하는 건 너무하잖아! "벗기는 내가 왜 벗어!"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때 위즈 오빠가 손가락을 튕기면서 딱 이거다! 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 대륙의 진정한 미소년을 가리는 첫번째 승부, 서로 옷을 벗어 자기 몸매를 과시하고 어느 쪽이 더 많은 지지를 받느냐 하는 걸로 승부를 가 르는 거다!" "이 대륙의 진정한 미소년을 가리는 첫번째 승부, 서로 옷을 벗어 자기 몸매를 과시하고 어느 쪽이 더 많은 지지를 받느냐 하는 걸로 승부를 가 르는 거다!" "꺄아아아∼" 위즈 오빠의 드높은 목소리와 함께 울려퍼지는 서포터즈들의 환성 소리. 하지만 정작 이야기를 듣는 난 황당하고 당황스러워 어이가 없을 지경 이었다. 내가 벗기는 왜 벗어야 하는데, 응? "그...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거절하고 빨리 집 안으로 도망가려 할 때 나의 창창한 미래를 가로막은 사람들은 바로 아까까지만 해도 위즈 오빠의 열변 을 개무시하고 당장이라도 나를 집안으로 다시 데리고 가려고 했다는 내 가족들이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훗. 당장에라도 덮쳐 버리고 싶을 만큼 아리따운 카이엔의 몸매를 잘 보도록 해라!" 사이엔 형, 딴 사람도 아니고 왜 갑자기 형이 나와서 그런 이상한 얘길 지껄여 대는 거야? 퍼억 다행히도 세이렌 누나가 평소처럼 나서 사이엔 형의 헛소리를 잠재웠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누나의 말은 전혀 날 안심시켜 줄 수 있는 이야기 가 아니었다. "누가 누굴 덮친단 말야? 내 사랑스러운 카이를 덮치는 사람은 누구도 용서 못해! 하켄크로이츠 군. 니가 이 한심한 내 동생 사이엔보다는 한 열 배쯤 잘생겼다는 사실은 인정해 주겠지만 이미 화려함과 갑빠를 무기로 하는 미소년의 시대는 갔어. 넌 카이를 이기지 못해."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겠지요. 세이렌 브리타뉴 더 마요르카 오브 세븐 매직 마스터즈 여사님." 여사라는 말에 울 누나 눈썹이 약간 굼틀거렸다. 하기야 세이렌 누나 이제 겨우 스무 살인데 그런 소리를 듣자니 달갑지 않겠지... 그래도 위즈라 는 오빠, 역시 세이렌 누나 앞에서는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존재말도 꼬박꼬박 쓰고. 아무래도 우리 집 권력을 꽉 쥐고 있는 사람이 세이렌 누나 라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카이엔 브리타뉴 같은 힘없고 연약한 여성형 미소년상은 단순히 남성들의 그릇된 여성관이 일부 여성들에게까지 잘못 옮겨진 데 불과한 일부 사람들의 일시적 취향에 불과합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시대를 불문하고 만인의 인기를 얻는 완벽한 미소년을 단지 특정 취향을 가진 사람에게 만 환영받는 외모로 결정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요? 진정한 남자다움의 멋을 지닌 패션과 탄탄한 몸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처럼 평소에 는 부드러우면서도 무슨 일이 생길 때면 확실히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줄 수 있는 강인함. 이런 것이 진정한 미소년의 표상이라고 전 믿습니다." 위즈 오빠는 그 특유의 연기와 더불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저게 뭔 말이다냐? 난 잘 못 알아 듣겠는데... 결국 지가 잘났다는 건가? 그때 세이렌 누나가 넌 아직 멀었어 라는 미소를 지으며 위즈의 말을 반박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모성(母性)이라는 단어를 알아? 여자는 분명 험난한 세상속에서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든든한 남성을 원하지. 그렇지 만 여자에게는 감싸주고 보호해줘야만 하는, 지켜주고 싶은 존재도 있기 마련이야. 시대는 변했어. 중앙 대륙의 평균 여성 관료 비율이 45%, 여 성 지도자 비율이 30%, 심지어 여군 비율이 30%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아? 거기에다 남성 주부 비율도 전체의 20%에 달한다는 보고도 있지. 더 이상 대륙의 여성들은 일방적으로 남성에게 보호받기를 원하지 않고, 실제로 거기에 의존할 만큼 약하지도 않아. 여자와 남자를 굳이 구분하는 건 의미가 없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원하는 건 힘들고 지칠때 곁에서 위로하고 감싸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야." 무슨 이야긴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이렌 누나가 하는 이야기는 어딘가 엄청 대단해 보였다. 으윽. 난 머리가 나빠서 이런 장황한 말싸움 같은데는 영 익숙하지 않단 말이야. "카이엔에게 그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겁니까?" "물론이지. 지금까지 대륙 전체에 꾸준히 팔려나가고 있는 카이의 초상화나 피규어, 각종 캐릭터 상품들을 너도 한번쯤은 봤을 텐데? 많은 사람 들이 카이의 초상화를 보면서 웃고, 떠들고, 즐거워하면서 힘들고 지칠 때는 위안을 받지. 카이와 관련된 사건 하나하나가 금세 대륙 전체로 퍼 져나가 화젯거리가 되는 거 알고 있을 텐데?" 에엥? 갑자기 그게 뭔 소리다냐? 지금 세이렌 누나의 말을 들으면... 나 카이엔 브리타뉴는 나도 잘 알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대륙적 스타(Star) 라는 이야긴데. 물론 내 이름이 전 대륙적으로 알려져 있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자하기니아에 수학여행을 갔을 때 느꼈으니까. 피케나 노 비스를 비롯한 많은 내 팬들이 나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고 그들은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내 소식까지 상세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캐릭터 상품 이라니...! 대체 내 가족들은 왜 나한테 제대로 가르쳐주는 게 하나도 없냐구! ...하긴 생각해 보니 내가 물어본 적도 없구나. 나도 내가 유명하다는 데 별 관심이 없다 보니깐. "세이 언니, 말싸움은 뒤로 하고 빨리 승부부터 해요. 전 빨리 카이 오빠의 벗은 모습을 보고 싶어요.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걸요?" "아이렌, 내 몸매라면 얼마든지 보여..." "필요없엇, 레이엔 변태!" "흠흠. 그 전에 공정하게 심판을 볼 심판진부터 선정을 해야지. 그렇지 않아?" "글쎄, 그러니까 난 그런 거 안 할 거라니까요!" 나는 이미 승부를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리는 분위기에 저항하려고 애썼지만 그 말은 하늘에 공허한 외침으로만 울려퍼질 뿐, 아무도 귀담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그 사이에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각자 공정하게 심판을 볼 사람들 두 사람씩 뽑아 내보내기로 했다. 우리 쪽에서는 레이 엔과 바깥 상황을 확인하러 나왔다가 얼떨결에 끌려들어온 우리 집사가 심판진으로 나갔고, 저쪽에서는 엘리제라는 안경을 쓴 지적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슈가라는 키가 엄청 작은 꼬마아이가 나왔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지요. 흠흠. 경기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가지 의견을 종합해 본 결과 다 벗기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래서는 본인들의 매력이 잘 드러나지 않을 것이므로 자신이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만큼만 벗도록 하죠. 단순히 벗은 몸매 뿐만 아니라 벗는 과정도 평가할 예정입니다. 점수는 심사위원단이 10점 만점을 기준으로 평점을 내리겠습니다. 섹시함, 귀여움, 몸매 등등에 각각 평점을 부과하자는 의견도 있었 지만 부분적인 판단보다는 전체적인 조화가 중요시하다는 의견이 다수라서 기각되었습니다." ...우리 집 집사는 심판진 뿐만 아니라 어느새 해설까지 보고 있었다. "그럼 먼저 도전자인 위즈 하켄크로이츠 씨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벗으세요!" 휴우. 그나마 내가 먼저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지만 이 위기를 어찌하면 넘길 수 있을까! 그것이 문제로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 위즈 오빠 는 팬들에게 손을 흔들며 자기 셔츠 단추를 천천히 하나둘씩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단추가 풀리면서 안에 감춰진 몸이 드러날 때마다 팬들 사이 에서 끼약거리는 환호성은 더 커졌고 나도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우오오. 역시 멋있어. 나도 이렇게 맨날 당하기만 하는 연약한 미 소년보다는 저런 쪽의 진짜 남자다운 미소년에 빙의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마치 어떤 의식을 치르듯 천천히 단추를 풀어헤쳐 셔츠의 마지막 단추까지 끄른 위즈 오빤 갑자기 허공으로 셔츠를 벗어던졌고 허공을 펄럭이는 셔츠 아래에 태양을 뒤로 한 채 그의 등짝이 드러났다. 의도된 연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탄성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 는 그의 상체는, 직선과 곡선이 조화된 다비드 상 같은 한 조각의 예술품 같아 보였다. 주먹을 쥐고 똑바로 선 후 이를 내보이면서 웃는 그의 모 습은 마치 CF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미소 같았다. "훗, 저정도에 감탄하다니, 이 몸의 몸매도 거기에 결코 뒤지지 않..." 퍼억 "헛소리 하지 말고 가만히 찌그러져 있어. 니 몸매 따위 볼 시간 없어!" 사이엔 형은 헛소리를 하다가 또 세이렌 누나한테 얻어맞았다. 맨날맨날 얻어맞고 당하면서도 헛소리를 그치지 않는 걸 보면 사이엔 형도 대단 한 정신의 소유자란 말이야. 어쩌면 그렇게 얻어맞는 걸 즐기고 있는 것 같아도 보이니... 아쉽지만 사이엔 형은 몸매를 내보여봤자 별 볼일 없다구. 물론 사이엔 형은 든든한 덩치와 키에 남자답게 탄탄한 근육이 자리잡혀 있다. 하지만 내가 이전에 본 적 있는 사이엔 형의 상체에는 저 위즈 오빠와 비교해서 중요한 것 한 가지가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술성이라는 항목이 었다. 위즈 오빠의 몸은 겉보기만 봐도 만드는 데 엄청나게 공을 들인 흔적이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그는 나와는 달리 자신의 미모와 몸을 유지 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게 틀림없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스타성, 즉 가진 끼를 잘 활용할 줄 안다는 점에서 나는 절대로 쫓 아갈 수 없을 만한 노력파 같아 보였다. 지금까지 수많은 연예인들을 분석해서 80%이상의 적중률을 보여온 내 판단이었다. 거기에다 바지 끈까지 끄르고 있... 끼야아악! 나도 모르게 여학생들의 환호소리에 맞춰 소리를 지르고 있을 때... 그는 행동을 멈췄다. 에엥? 설마 끝? "이런 이런. 더 이상 하다가는 졸도하는 사람마저 생길 거 같군. 후후후. 어때? 멋지지?" "네, 멋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뭐가요?" "아무것도 아냐." 으응? 왜 그러지? 위즈 오빠의 모습은 마치 '내가 생각했던 반응이 아닌데'하는 표정이었다. 멋있냐고 물어서 솔직하게 멋있다고 대답해 준 것 뿐인데 뭐가 문제일까? "그나저나 이제는 카이가 벗을 차례네. 우훗∼♡" 아시에의 말 한 마디가 날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해 주었다. 헉! 그러고보니 그다음은 내가 벗어야 하지. 싫어! 나는 절대 벗는 데 동의한 적이 없 어. 누구 맘대로 남을 벗기고 자시고 하는 거야? 그때 심사위원들이 아까 위즈 오빠의 몸에 대한 평점을 매기고는 점수를 올렸다. 레이엔 : 8.5 집사 : 9.3 엘리제 : 9.7 슈가 : 9.5 합계 : 37.0 오오. 꽤 높은 점수를 줬군. 하지만 세이렌 누나나 아이렌은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세이렌 누나가 화가 나 소리를 질렀다. "집사 너, 왜 그렇게 점수를 크게 준 거야!" "죄송합니다. 세이렌 아가씨. 저 하켄크로이츠라는 친구를 보니 왕년에 한가닥 하던 제 몸매가 생각나서 말이죠." "....." 소리를 지르는 건 아이렌도 마찬가지였다. "레이엔 너 왜 그렇게 점수를 높게 주는 거야? 카이 오빠를 방해할 셈이야? "난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가했어. 아이렌. 채점은 자기 기분에 따라 하는 게 아니라고!" 한편 위즈 오빠 진영의 여자애들쪽도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항의하고 있었다. 이유는 왜 위즈 오빠에게 10점 만점을 안 줬냐는 그런 이야기였 다. 하지만 저쪽에서 파견된 여자 심판진들도 꽤 냉정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쯔쯔... 심판 판정은 수긍해야지. 그 다음은 내 차롄가... 근데 남자다 운 면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내 벗은 몸이 저런 사람과 대적할 수 있을 리 없잖아, 훗. 차라리 이 기회에 거추장스러운 1인자 자리 따위는 내 주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가족들은 방방 뛰겠지만 말이야. 아, 그 전에 내가 절대 옷을 벗을 리 없으니 상관없는 일인가. "자, 이젠 카이의 차례!" "기대되는 걸∼ 카이 오빠 화이팅!" 세이렌 누나, 아이렌. 암만 그렇게 응원해도 내 결심은 확고하다구. "기대했다면 미안하군. 난 절대 옷을 벗지 않을거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카이 니가 옷을 벗을 필요는 없어." "에엥? 무슨 뜻이야, 시에?" "니가 니 스스로 옷을 벗는 것은 별로 어울리지 않아. 네게 어울리는 옷 벗는 방법은 바로 '강제로 벗김당하는'거지." "니가 니 스스로 옷을 벗는 것은 별로 어울리지 않아. 네게 어울리는 옷 벗는 방법은 바로 '강제로 벗김당하는'거지." "....." 순간 5초간 나는 그 말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내가 마침내 그 말뜻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아시에는 내 앞에 서 있었 다. "싫... 업!" 뭐라고 외치려고 할때 어디서 났는지 아시에가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쓸데없는 말을 외쳐는 건 좋지 않아. 카이. 이럴 때는, 듣는 사람을 흥분시킬 만큼 야릇한 소리 정도로 충분해. 만약 또 뭐라고 하려고 하면 다 음에는 입으로 말을 막아버린다?" ...'입으로'라니. 어이, 아시에 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또 무슨 스캔들 일으키려고 그래! 학교에서 그런 짓 한 걸로 이젠 충 분하잖아! 하여간 그래도 다시 키스당하기는 싫었기에 나는 입을 닫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누가 그런 야릇한 소리 같은 거 낼 줄 알고!? "이잇, 세이 언니, 왜 막는 거야! 시에 언니가 카이 오빨..... 오빠를... 세이 언닌 카이 오빠가 시에 언니에게 만신창이가 되어도 좋아?" "진정해. 아이. 하지만 여기서 카이의 옷을 가장 므흣♡하게 벗겨낼 수 있는 사람은 시에밖에 없어." "내가 할 거야! 나도 알 건 다 안다구!" "넌 안돼. 그리고 나도 안돼." "왜! 어째서야!?" "우리는 그런 경험이 없는 '처녀'니까.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더라도 서투를 수밖에 없어. 반면에 시에는 그런 것들을 잘 알고 있지." "그... 그런... 하지만 카이 오빠는..." "걱정하지 마. 나도 카이가 시에한테 제멋대로 카이를 농락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깐. 시에는 단지 카이의 옷을 아름답게 벗겨내면 족해. 키스 같은 주제넘는 짓을 햇다가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세이렌 누나와 아이렌은 어딘가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다. 라지만 결론적으로 아시에가 내 옷을 벗기는 만행을 실 질적으로 용인해주겠다는 거잖아! 흑흑. 세이렌 누나만은 날 도와줄 거라 믿었는데. 그나마 이 상황을 기회로 키스같은 짓은 못 할테니까 다행이 라고 생각해야 하나? 그래도 이건 너무해! 배신감 느껴! 씨잉... 흑흑흑. "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걸?" 나는 고개를 숙였다.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아시에의 손에 붙들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항할 수 없는 나를 앞에 두고 아시에는 그녀가 가 진 괴팍한 미학에 따라 내 작은 육신을 겹겹히 둘러싼 천조각들을 벗겨내겠지. 나는 순간적으로 느끼는 모멸감과 창피함에 눈물을 떨궜다. "훌쩍... 이런 상황에서... 좋은 표정? 흑... 으흑..." 대체 모두들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나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걸까? 지금까지 친절하게 잘 대해주고 나를 위하는 것들은 모두 이럴 때 이런 쇼(show)를 보여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랬던 걸까? 이곳 세계 사람들은 왜인지 모르게 전체적으로 동인 성향이 엄청 강하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나, 어떻게. 카이엔 오빠 울고 있어. 너무 불쌍해 보여..." "그치만 그 우는 것조차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여." "안돼, 저런 연기에 넘어가지 마! 우리에겐 오직 위즈 오빠 뿐이잖아?" 내가 어떤 기분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단순히 나의 겉모양, 겉행동만을 보면서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여자아이들. 나는 위즈 오빠처럼 스스로를 갈고 닦아 남을 위해서 멋진 연기를 벌일 수 있는 사람이 아냐. 단지, 머물 곳 없는 서툰 마음을 혼자서 끌어안고 괴로워할 뿐. 남의 제멋대로인 기대 따위는 아무것도 충족시켜 줄 순 없어. 툭. 단추가 몇 개 떨어졌다. 아시에가 내가 입은 셔츠 목덜미를 일부러 잡아뜯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셔츠가 살짝 옆으로 흘러내리면서 여린 어깨선 이 드러났다. 모자는 이미 벗겨져서 꽃달린 머리띠가 드러난 지 오래였다. 동시다발적으로 양 귓속을 울리는 끼약거리는 함성소리. 어쩐지 그런 큰 소리조차 귀를 웅웅거리는 것 같았다. 아무 생각도 머리속에 없었다. 단지 눈물만 흘리면서 아시에가 이끄는 대로 조용히 따라갈 뿐이었다. "아앗." 아시에가 몸 어딘가를 건드리면서 몸에 확 하는 자극이 왔다. 그와 동시에 내 입에서 나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야릇한 목소리가 짧게 터져나왔다. 셰더에게 납치당했을 때 마나티가 내게 했던 짓과 똑같다. 다만 아시에는 마나티보다는 훨씬 서투른 것 같지만. 질리도록 기분 나쁜 경험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마음과는 반대로 몸이 제멋대로 열락(悅樂)에 취해 달아오르는 것은. "가고 싶어..." 나는 무의식결에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디로? 무엇 때문에? "벗어나고 싶어..." "카이?" 그제서야 아시에가 내가 심상치 않게 느껴진 듯 반문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나는 확신했다. 모두들 나를 위하는 척만 할 뿐, 진정으로 나를 위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는 아무도 없어. 그들이 내게 원하는 것은 단지. 나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그들의 삐뚤어진 욕구를 충족하고 싶은 것뿐이야.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내가 아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단지 한 사람의 곁으로 찾아가기로. 가고 싶어. 내가 쉴 수 있는 곳으로. 감싸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나는 강렬히 염원했다. 몸의 피가 들끓는 듯이 뜨거웠다. 온 몸의 세포가 녹아들어갈 것 같은 뜨거운 기운이 내 안에서 솟아나오는 것 같았다. 어딘지 괴로워... "이건..." "접근하지 마, 시에! 지금 카이는...!" "너무 몰아붙였나! 설마 이때 그것이..."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이 뭐라고 소리지르는 것 같긴 했지만 내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온 몸이 불타버릴 것 같은 뜨거운 괴로움 이 점차 커져만 갈 뿐, 그때 내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이전에 내 생일날, 정확하게는 카이엔의 생일날 처음 만나고 그 후로는 볼 수 없 었던 아이, 미렌의 목소리였다. [상우 오빠, 정신차려.] [미이? 지금 이건 뭐지? 너무 괴로워...] [괜찮아. 일단 마음을 진정시켜. 아무리 괴롭다고 할 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마. 만일 그런 마음을 먹게 되면, 그건 그대로 오빠에게 고통으로 돌아와.] [하지만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염원해. 단지 염원해. 자신이 가장 바라는 것. 열망하는 것. 원하는 것. 단 한가지에 모든 정신을 기울여서 소망하는 거야. 오빠가 진심으로 바라 고 있다면, 그건 이루어질 거야.] 내가 지금 바라는 게 뭐냐고? 원하는 게 뭐냐고? 다른 때 같으면 다른 대답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괴로움에 쌓여 있는 내 마음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 그리고 곁에 있고 싶어. 그리고...] 그 다음의 일은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그대로, 뜨겁게 타오르는 지옥도(地獄道)속에서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으니까. 제121화 : Broken Seal "....." 언제나 그렇지만, 나는 어디선가 비정상적으로 정신을 잃을 때마다 깨어나보면 어느덧 침대 위에 누워 있다. 나는 멍한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나 거울을 보았다. 이번에는 예쁜 곰돌이가 그려진 연분홍색의 여름 잠옷이다.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거울 속에 비치는 잠이 덜 깬 듯한 내 모습에 야릇한 색기가 느껴진다. 평소라면 이런 내 모습에 자괴감을 느끼며 절규했을 테지만 지금은 뭐라고 열을 낼 힘이 전혀 없다. 그래... 어차피 여자 모습이 더 잘 어울린다 면 그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지도... 후훗.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이제는 초월한 걸까나? 익숙하지 않은 나의 모습에 서서히 익숙해져 가는 하나의 과정일지도. 하지만 그 계기는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다. 암만 다시 생각해봐도 열불이 난다. 물론 그때는 막 당하던 입장에서 감정이 최고조에 달했던 탓도 있지만 이젠 주위 사람들의 성희롱(?)에는 질렸다. 신물이 난다. 나를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가는 건 좋지만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건 사절이라구! 창밖을 내다보았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바닷바람과 눈앞에 펼쳐진 백사장과 하얀 파도. 나는 얼마 전에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있었다. 시아와세노 비치. 나는 시르팡의 또 하나의 본거지이자, 휴양지에 와 있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에 나는 전혀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아니, 생 각하고 싶지 않았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어째서 집 앞에서 위즈 오빠와 괴로운 승부를 강요당하고 있는 내가 여기 있는지, 그때 내 몸을 휘 감아돌았던 뜨거운 기운은 무엇이었는지.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고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굳이 진실을 알면 불행해질 거라는 레이엔의 충고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내 정신은 너무나도 지쳐서 간절히 휴식을 원하고 있었다. "여어, 일어났어, 형수님?" 방문을 열고 시르쥬가 들어왔다. 언제나와 같은 장난스런 미소를 얼굴에 띄운 채 태연스럽게 나를 형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거 기에 맞대응해 줄 기분이 아니었다. "어... 그래." "...어라? 화 안내?" "화 냈으면 좋겠어?" 내가 힘없이 말하자 시르쥬는 입을 닫았다. 흐음... 드디어 저 녀석에게도 상대의 기분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려는 능력이 생긴 걸까? "그건 그렇고... 내 돈 물어내!" "엥?" 뜬금없는 이야기. 어이, 난 너한테 돈 빌려가고 한 적 없는데? "기억 안 나? 나랑 할머니랑 엄마랑 울 형이랑 고 스타르 게임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허공에서 공간이동을 해 오더니 판을 망쳐 버렸잖 아! 간만에 쓰리 고에 양박 씌우고 삼총사 흔들었을 타이밍이었는데!" 이 자슥이... 쓰러졌다 막 깨어난 사람한테 하는 말이 그 따위야?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전처럼 쉽게 열을 낼 기분이 아니다. 그래서 여유있는 표 정으로 피식 웃으면서 대답해 줬다. "돈 없어." "뭐어? 대륙 전체의 대 스타인 카이엔 브리타뉴가 돈이 없다는 게 말이 돼? 브리타뉴가가 니 캐릭터 상품만으로 버는 돈이 얼만데... 돈이 없으면 거기 착용한 마법무구라도 팔아서 물어주란 말야!" 하여간 억지 쓰기는... 라고 생각하면서 난 내 손을 흘낏 보았는데.... "허억!" "왜 그래?" "없어..." 나는 놀라 거울 쪽으로 달려갔다. 여전히 초 극강 미소년인 이쁘장한 내 모습이 거울을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없어 졌다. 얼마 전 생일 선물로 받은 집중력의 머리띠를 비롯해서 절대마력보호반지, 기혈환, 예지의 귀걸이, 정령왕의 목걸이, 무한의 팔찌 그 어느 것도 내 몸에 달려 있지 않았다. "뭐가?" "내 마법무구들이..." 그것들은 세이렌 누나의 마법으로 내 몸에 밀착되어 절대 떨어지지 않게 설계되어 있다. 그런 걸 대체 누가 훔쳐갈 수 있는 거지? 새로운 의문에 머리가 슬슬 아파지려 하고 있을 무렵 시르젤과 그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르젤 씨!" "카이엔 씨. 오랜만이군요. 반갑습니다." "저두요!" 시르젤 씨는 역시나 곁에 있으면 어딘가 든든하고 안심되는 사람이다. 그가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뭐해? 어서 빨리 달려가서 감격의 포옹을 하지 않고?" "맞을래!?" 나는 순간 부아가 치밀어올라 옆에 있는 시르쥬의 마빡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물론 애초에 시르쥬한테 그런 게 맞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지만... 퍽! 콰쾅! 시르쥬는 내 주먹을 정통으로 옆머리에 맞았고 어이없게도 공중을 날아 벽에 처박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시르쥬가 박힌 벽은 눈에도 보일 정도 의 금이 곳곳에 가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놀란 나머지 실없는 말을 던졌다. "시... 시르쥬. 그렇게까지 오버할 필요는 없는데..." "끄응...." 쓰러진 시르쥬가 머리를 슥슥 문지르면서 일어났다. 다행이다. 그래도 암살자 수업을 열심히 받은 탓인지 맷집도 꽤 좋은가 보다. 그런데 비틀거 리면서 일어난 시르쥬가 인상을 팍 찌그리며 이상한 말을 했다. "너... 카이엔 맞아? 가짜 아냐?" 뭐시라? 가짜아? 이자식이 머리를 좀 맞더니 정신이 돌아버렸냐? 농담치고는 그다지 질이 좋지 않은걸. "시르쥬. 진정하고 앉아. 그리고 카이엔 씨도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으십시오." 시르젤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평소에도 가볍거나 실없게 느껴지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오늘 내 앞에 앉아 있는 시르젤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훨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르쥬는 휴지를 꺼내 머리에서 나는 피를 지혈시키고는 툴툴대면서 시르젤의 옆에 앉았다. "어머니, 그걸 카이엔 씨에게 보여주십시오." "싫어. 또 카이엔이 돌려달라고 하면 어떡해?" "어차피 그것은 이젠 모두 기능을 잃은 것들. 소유주를 따지는 것 자체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시르젤의 설득에 그의 어머니가 머뭇거리면서 내게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이... 이건." "그렇습니다. 카이엔 씨가 착용하고 있던, 바로 그 마법무구들이죠." 마법무구들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 있다는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것들은 모두 깨지거나 부서져 있었다. 반지와 귀걸이, 팔찌는 조각났고, 목걸이는 가운데 박혀 있던 보석이 깨져 있었다. 그리고 머리띠는 절대 시들지 않는 마법을 걸어놓았다던 꽃이 시들어 말라 비 틀어져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죠?" "그건 저희가 묻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가족들끼리 게임을 하고 있는데 카이엔 씨가 갑자기 허공에서 툭 떨어졌으니까요. 깨진 마법무구들의 파편과 함께." 순간 나는 내가 정신을 잃던 순간을 떠올랐다. 대중들 앞에서 옷이 벗김당하던 순간에 나는 지금껏 느껴본 적이 없는 커다란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꼈다. 그 때 내 몸이 뜨거워졌고, 어디선가 미렌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원하는 것을 염원하라... 고 했던가. "하지만 방금 전 시르쥬를 때려눕힌 걸 보니 어딘가 짐작가는 게 있군요." "그게 뭐죠?" 그건 나도 궁금한 일이었다. 평소의 나라면 여자애들과 팔씨름을 해도 세 판중 한 판밖에 못 이길 정도로 근력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 자기 한대 친 거 가지고 시르쥬가 날아가 벽에 처박히다니... "아마도... 그 마법무구들은 카이엔 씨를 구속하는 일종의 봉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봉인?" "아,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입니다." 가설이라니... 하지만 그것만큼 나 자신의 상황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 없다. 나는 방금의 일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마음먹고 손 에 힘을 주고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침대 머리를 쾅 하고 내리쳤다. 나무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평소의 내 힘이라면 미동도 하지 않았을 침대 머 리는 내 주먹에 맥없이 부서져내렸다. "...아마도 시르젤 씨의 말이 맞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지금 내가 가진 어이없는 힘을 설명할 수 없다. "기물 파손이야. 그거. 물어내." 나는 시르쥬를 한대 더 칠 듯 째려보았고 시르쥬녀석은 흠칫 하면서 쫄았다. 아까 한방이 무서웠긴 무서웠던 모양이다. 녀석은 아직도 아까 상처 에서 나온 피를 지혈하고 있었으니까. 한가지 궁금증이 든 나는 시르젤에게 물었다. 만약에 봉인된 것이 힘뿐만이 아니라면... "시르젤 씨, 혹시 지금의 저는 마력(魔力)을 가지고 있나요?" 내가 알기로는 나는 극히 희귀한 무마력증(無魔力症)의 소유자. 마력같은 건 있을 턱이 없다. 마력이 들어있는 음식만 먹어도 금방 탈이 나지 않 던가? 하지만 만약에 그것도 마법무구들에 인위적으로 봉인되어 있던 거라면? "...있습니다." "그런가요..."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 나는 '아닙니다. 카이엔 씨는 전혀 마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설령 그것이 거짓 말이라고 할 지라도. 하지만 신실한 시르젤은 아예 대답 자체를 회피해 버릴지언정 태연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누굴까? 내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 걸까? 내 가족들은 나에게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어째서 진실을 알면 불행해지는 걸까? 겉으로 유 지되는 한없이 따사로운 평화 속에 그동안 마주보고 싶지 않았던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두려웠다. 끝없이 두려웠다. 숨겨진 사 실들을 한 꺼풀씩 벗겨내는 것으로 지금의 행복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릴까봐. 부서져버릴까봐 겁이 났다. 그래서 내가 마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 이 세계로 왔을 때 나는 우리 가족들처럼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는 데 대해 엄청 실망했었다. 나도 이야기책에서나 읽은 것처럼 자 신의 의지와 힘을 가지고 험한 세상을 헤쳐나가면서 신나는 모험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리어 힘이 없는 편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 다. 비록 힘은 없지만 언제나 날 위해주고 지켜주는 가족들이 있고, 나를 사랑해주는 전 대륙의 팬들이 있다. 예전의 나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에 게 둘러싸인 나는, 비록 그들을 조금 귀찮아한 건 사실이지만 덕택에 이전의 나처럼 외로움에 시달리는 일은 없었다. 비록 약간의 성적 희롱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아니 지금도 행복하다. 비록 어제는 조금 심한 일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들이 진심으로 무릎 꿇고 사과 하면 나는 충분히 그들을 용서할 수 있다. 좀 많이 삐지기는 하겠지만... 하지만 순간의 격정으로 나를 지키던 마법무구들은 전부 부서졌고, 지금의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이 부서진 마법무구들이 카이엔 씨에게 무슨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는 저희로서도 정확하게 알 길이 없습니다. 카이엔 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 까?" "어떻게... 라니요?" "집에 갈 거야, 아님 여기 있을 거야? 그걸 묻는 거야." 시르쥬가 아까 한대 얻어맞은 게 분한 듯 툴툴대며 중얼거렸다. 사내자식이 그깟 한 방 맞은 것 같고 화내기는. 하긴 그 한 방이 '그깟'이란 말 로 얼버무릴 수 있을 정도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난 그렇게 심하게 때리려는 전혀 없었다구! "여기... 있겠어요."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어. 만약에 진실을 알지 못했다면 나는 시르젤과의 헤어짐에 아쉬워하면서도 집으로 돌아갔겠지만 내 마음속에는 이미 의 문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는 상태였다. 레이엔의 말대로 진실을 알게 되면 불행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납득할 수 없는 현재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동시에 날 머뭇거리게 했다. "지금은 어떤 길도 선택할 수 없어요. 어느 쪽이든... 무서우니까요." 시르젤이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그의 손이 얹혀진 내 몸이 떨고 있었다. 언제나 가지고 있었 다.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남의 몸에 빙의해버린 나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불안감은. 항상 행복 속에 쌓여있으면서도 언제나 마음 한구석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언젠가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이런 행복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어쩌면 문길이가 만든 마법진 위에 섰던 그날부터 난 계속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덥석. 손가락을 부비적거리면서 내 정신이 암울한 상상 속을 헤메고 있을 때 시르젤이 갑자기 날 꽉 껴안았다. 아...아앗! 갑자기 그러면...! "시... 시르젤 씨?" "불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마음을 결정할 때까지, 언제나 제가 옆에서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네..." 아아... 어쩔 수 없다니깐. 나는 몸에서 쭉 힘이 빠져나가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비록 그는 나와 동성(同性)임에는 틀림없지만 나는 오히려 그가 남자이기에 더 마음을 놓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보다는 본능이 앞설 수밖에 없는 젊은 남자의 몸으로 여자와 이렇게 포옹한다면, 격동 하는 심장이 편안한 기분으로 날 놔두지 않을 테니까. "자, 나가자 시르쥬. 방해하면 안돼지." "어... 엄마. 조금만 더 보고!" "안 돼!" 시르쥬는 자기 엄마한테 질질질 끌려나갔다. 헤헹. 방해자는 빨리 나가버리라고. 그래도 이런 모습, 남한테 계속 보이고 있다가는 쪽팔린단 말야. 그렇게 시르쥬와 그 엄마가 방을 나갔을 때 내 눈앞에 마침 거울이 들어왔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아직 여름 잠옷을 입은 내 모습과 제대로 옷 을 갖춰입은 시르젤... "끼야악!" 나는 황급히 시르젤에게서 떨어졌다. 지... 지금 내가 저 꼴로 시르젤한테 안겨 있었단 말야? 일어나서 옷도 안 입고, 세수도 안 하고, 양치질도 안 한 채로? 으아아아앙! 어떻해! "아, 죄송합니다. 불안해하시는 것 같길래 어떻게든 안심시켜 드릴려고..." "아... 아녜요. 전 아무것도..." 갑자기 어색한 공기가 방안에 흘렀다. 이... 이런 분위기 별로 안 좋아하는데 난. 에이. 우선 좀 씻고 옷부터 챙겨입어야겠다. 그러면 어떻게든 되 겠지. "화... 화장실이 어디죠? 우선 좀 씻을래요." "저쪽에 있습니다. 그럼 저는 갈아입을 옷을 챙겨오도록 하지요." 시르젤은 방 한쪽에 있는 화장실을 가리키고는 옷을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 휴우. 시르젤이 나가고 나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마음은 편 안했지만 알게 모르게 내 가슴은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두근두근 뛰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 안겼을 때 시르젤은 이런 내 심장박동을 듣고 있었 을까? 우웁. 그러고보니 시르젤은 어땠을까? 신경 좀 쓸 걸... 휴우. 하여간 나는 시르젤이 돌아오기 전까지 제대로 다 씻기 위해서 화장실로 향했다. 이 긴 머리카락 다 씻으려면 고생 좀 해야겠군. 에구구.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힘차게 화장실 문을 열었다. 콰쾅 ...너무 힘차게 연 나머지 문짝이 작살나 버렸다. 이... 이런. 아무래도 이 힘에 익숙해지려면 꽤나 고생 좀 해야 할 거 같은걸. 근데 설마 문 좀 부서진 거 가지고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티 안나게 살짝 원래대로 세워둬야지. 오호호홋. 제123화 : 카이엔을 찾아서(カイエンを さがして)(1) 교실은 대체적으로 어수선하고 무질서했다. 카이엔이 학교에 며칠에 한 번씩 제멋대로 나오는 것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고 그가 학교에 입학한 이래 계속 이어져 온 터라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카이엔의 부재(不在)가 교실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히 컸다. 그가 교실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교실의 분위기는 크게 바뀐 다. 줄이 비뚤비뚤한 채 엉망으로 놓여 있는 책상과 걸상. 바닥을 제멋대로 놔뒹구는 쓰레기들. 남이 듣건 말건 옆에서 남 뒷다마를 까대는 여학생들 의 수다와 집안 문제를 학교에까지 가지고 와서 서로 주먹질을 하는 남학생들은 최소한 카이엔이 교실에 존재할 때는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 다. "듣고 있는 거야, 키론?" "아, 미안. 깜빡 딴 생각좀 하느라. 미안해, 린넬. 방금 뭐라고 했지?" "카이엔이 어디로 갔는지 짐작가는 게 있냐구!" "...있을 것 같아?" "하긴. 너도 모르는구나."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브리타뉴 가문 사람들이나 알겠지." "그래..." 린넬 녀석은 푹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뱉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전교가 시끌벅적하다. 카이엔이 어제 브리타뉴 가 자기 집 앞에서 그에게 도전장을 내민 위즈 하켄크로이츠라는 대륙 제2의 미 소년과 옷벗기 승부를 벌이다가 갑자기 빛을 뿜으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브리타뉴 가에서는 어떻게든 이 사건을 쉬쉬하면서 조용히 무마하려고 애쓴 모양이지만 위즈를 응원하기 위해 따라온 여학생들이 워낙 많았던 터라 애초부터 터진 사건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기는 무리였 다. 아마도 벌써 다른 나라에까지 퍼져나갔다지? 린넬은 지금도 카이엔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영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어제 소식을 듣고 카이엔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 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샌 듯 눈이 시뻘갰다. "적당히 해라. 카이엔이 니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 "...티가 나?" "주변사람들이 뻔히 다 알도록 어리버리하게 행동하면서 새삼스럽게 무슨 소릴 하는거야, 린넬? 니가 카이엔한테 끄떡하면 귀엽다느니 예쁘다더 니 하는 말을 걔 앞에서 해서 몇 번이나 문제를 일으켰는 줄 알아?" "키론 너도 인정하잖아. 카이엔이 귀엽고 예쁜 건. 그런데 그걸 솔직하게 말한 게 뭐가 문제야? 그런데 고작 그걸로..." "그런 말을 했을 때의 상황이 문제지. 에휴." 바보같은 녀석. 그냥 차라리 자기가 카이엔을 사랑해! 라고 인정해버리면 편할 것을 괜히 저렇게 고집을 부려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니깐. 어 차피 우리 학교에서도 카이엔 좋아하는 남학생들은 여럿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는데 말야. 하지만 녀석의 고민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카이엔은 린넬 녀석의 이상한 짓거리들 때문에 녀석과 몇 번 투닥거리면서 싸우기도 했지 만 그래도 아직 그는 린넬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자기 마음을 드러내었다가 카이엔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알 수 없 는 노릇이지. 에휴. 내가 왜 남의 고민거리 가지고 이렇게 신경을 써야 하냐. 차라리 저번 수학여행 때 술먹고 꼬장부린 대로 아예 여자로 성전 환 해 버리던지. 쓸데없이 끙끙 앓으면서 짝사랑만 한다니까 바보녀석. "아앗, 저길 좀 봐!" "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갑이야? 설마 카이엔이 온 건 아니지?" "아냐. 아시에가... 교문 밖에서 걸어오고 있어." "뭐? 아시에가? 카이엔과 함께야?" "아냐. 아시에 혼자뿐이야." 내 앞에서 한찬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린넬은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창문 쪽으로 몰려가 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아시에가? 그애 는 항상 카이엔과 같이 다녔는데 왜 오늘은 혼자 오는 거지? 카이엔이 실종된 것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 걸까? 이런저런 의문은 많지만, 결국 본인에게 묻지 않으면 알 수 없겠지. 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나 말고도 아시에에게 무언가를 묻고 싶어하는 녀 석들도 많은 것 같았다. 사실 저번에 그녀가 성격이 갑자기 변해서 카이엔에게 벌인 애정행각 때문에 반 전체적으로 그녀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곧이어 아시에가 문을 열고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아까 전까지만 해도 감히 카이엔 님께 손을 대는 건방진 계집애라고 폭언을 내뱉던 여 자애들이 사근사근한 표정을 지으며 아시에에게 다가가 묻는다. 휴우. 썩 그렇게 보기좋은 장면은 아닌걸? "저, 아시에. 카이엔이 어디 갔는지 알아?" "제발 가르쳐줘. 학교에 올 수 있는 거야?" "무슨 일이 생긴거야? 왜 브리타뉴 가에서는 아무것도 밝히지 않는거야?" 하지만 아시에는 그들의 질문 공세에 어느 것도 대답을 하지 않은채 그들 사이를 헤치고 교실 안쪽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아무 표정의 변화 없 이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와서는 내 앞에 섰다. 그리고는 검붉은색 편지봉투를 품 안에서 꺼내 내 앞에 놓았다. "이건 뭐야?"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고 몰래 읽어줘. 부탁이야." 그녀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꾸하고는 교실 밖으로 후닥닥 달려나가 버렸다. 어어? 지금부터 곧 담임 선생님이 들어와 아침 조회를 할 건데 어디 가는 거야? 그녀는 수업 받을 생각이 없이 그냥 이 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학교에 온 건가? "뭐야, 키론. 혹시 그거 러브레터 아냐?" "러브레터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에이. 보니까 뻔히 알겠던데 뭘. 아시에는 그 편지를 네게 전해주고 그대로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나갔잖아. 게다가 아무도 보여주지 말라고 하 니 말이야. 러브레터 맞지 안 그래?" 린넬이 장난스럽게 날 놀렸다. 하긴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이 편지는 절대 러브레터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 다. 아시에는 이 편지를 내게 건네줄 때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냥 사무적인 일 때문에 전해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간에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는 그 사람 앞에서 어디에든 마음에 틈이 있기 마련인데 아시에에게는 그런 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치이. 재수없는 계집애야. 카이엔 님이 없어지자마자 바로 딴 남자에게 꼬리를 쳐?" "맞아맞아. 키론. 그런 애는 상대해주지 마. 그 편지도 그냥 찢어버리라구." 하지만 아무래도 다들 이 편지를 러브레터라고 그냥 믿는 모양이었다. 생각같아서는 그냥 여기서 편지를 뜯어보고 공개해서 혐의(?)를 벗고 싶었 지만 아시에가 남들에게 보여주지 말라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거다. 아무래도 어제의 카이엔 실종 사건에 대해 무언가 가르쳐주려는 걸까? 나는 수업 시간을 통해서 몰래 편지봉투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방과 후에 학교 음악실로 와줘.] ...어라? 설마 이거 진짜 러브레터?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편지 구석구석을 확인해 보았다. 혹시 이 글에 무슨 암호나 보이지 않는 숨겨진 문구가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짤막한 그 문구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으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무리 아시에가 예쁘다고 해도 그녀가 나에게 사랑을 고백할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다니. 아시에가 카이엔이 실종된 지 하루밖에 안 지난 지금 이 시점에서 사랑고백 같은 걸 할 리가 없잖아? 아시에는 카이엔을 좋아했으니까. 그렇다면 무슨 일 로 날 부르는 거지? 카이엔 실종에 관한 이야기를 해 봤자 나는 아는 게 없는데 말야. 어찌되었건 간에 우선은 음악실로 가 보지 않으면 안 되 겠군. 수업이 끝나고, 나는 학교 음악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우리 학교 음악실은 학교에서도 상당히 구석진 곳에 있기 때문에 조금 멀리 걸어가야 한다. 음악실이 먼 이유는 음악실에서 나오는 음악소리가 다른 반 수업에 방해된다는 항의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음악실 앞에 멈춰섰을 때, 음악실 안에서 처음 듣는 감미로운 선율이 흘러나와 나의 고막을 울렸다. 음악부 애들은 요즘 며칠간 무슨 콩쿨 에 나간다고 여기 없을 텐데? 그럼 이 음악은 누가 연주하는 거지? 설마, 아시에가? 나는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음악실 문을 열었다. 음악실 가운데 있는 의자에 앉아 아시에는 가만히 눈을 감고 능숙한 손동작으로 활로 현을 켜 고 있었다. 나도 대륙의 웬만큼 유명한 노래는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연주하는 노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였다. 하지만 그 리듬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하게 가슴이 아파 올 정도로 슬퍼지는 음률이었다. 이렇게 내가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아는 지 모르는지, 아시에의 연주는 계속되었다. 몸을 가볍게 앞뒤로 흔드는 그녀의 검푸른 머리카락이 은은하 게 흔들리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매력적이었다. 나는 순간 내가 여기 왜 왔는지도 잊은 채, 넋을 읽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난 모든 것들을 잊어버려야만 해 돌이켜 질 수 없는 걸 나만큼 너도 알잖아 슬픈 뒷모습 네게 보이진 않을 거야 나보다 행복해야 할 널 위해 (서지원 2집, 이별만은 아름답도록 中) 자신의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아시에. 평소에 듣는 아시에의 말도 청아하고 예뻤지만 노래를 부르는 아시에의 노랫소리는 미묘하게 울리는 약한 진동의 흔들림이 마법에 걸린 것처럼 황홀한 음색을 띠었다. 그야말로 천상의 천사들이 부르는 노래소리같다고 해야 할까? 그녀가 부르는 노래는 어느 나라 노래인지는 몰라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언어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무엇을 바라는 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간절한 감정이 절절하게 휘몰아쳐내렸다. 어딘지 슬픈 표정을 짓는 그녀의 얼굴표정과 맞물려 그 슬픔과 괴로움이 내게까지 전해오는 것 같았다. 연주와 노래가 끝난 후, 아시에는 아까의 표정은 어디 갔냐는 듯 빙그레 웃으면서 멍하니 서 있는 날 바라보며 말했다. "바보 같지, 나?" "아... 아냐! 엄청 훌륭한 연주였어. 지금 그거." "고마워. 하지만 이런 노래 따윈... 오랫동안 내겐 과거를 떠올리는 단순한 위안거리였을 뿐이야.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좋아했던 노래들은 그 시절 에도 기억속에 남아있었으니까." 그녀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어쩐지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느낌. 아무래도 심리상태가 안정되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그렇지 않아. 방금 아시에의 연주와 노래, 난 아주 멋지다고 생각해." "정말로?" "응. 난 그 노래를 듣고,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슬픈 감정이 내게까지 전해져왔는걸. 무슨 일이 있는 거야? 할 말이 있어 나를 여기로 부른 거지? 말해봐." "정확하게 말해서, 카이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라는 게 더 궁금하겠지? 그렇겠지?" 아시에는 조금 노려보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솔직히 아시에를 카이엔 옆에 붙은 떨거지로 생각하는 경향이 전교에서 다수였고 나도 그런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았기 때문에 조금 뜨끔했다. "아, 아냐. 카이엔의 일이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방금 질문은 단지... 널 걱정해서 물은 거야." "정말?" "응." "다행이다." "뭐... 뭐가?" "다른 애들은 카이한테만 신경을 쓰고 날 방해물로 여기는 거... 알지? 그 중에서 키론 너만은 평소에 차분해 보이는 모습이 나를 그냥 카이 옆에 붙은 부속물이 아닌 한 인격체로 취급해 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아닌 널 부른거야." ...조금 찔린다. 윽. 우리 학교 애들. 특히 여자애들이 생각하는 아시에에 대한 악감정은 저번에 카이엔과 몸을 섞은(?) 이후로 걷잡을 수 없을 정 도로 불어났다. 오늘 아침에 그들은 단지 카이엔의 소식만을 알기 위해서 뻔뻔하게 그녀 앞에서 사근사근대며 질문하면서도 뒤에서는 그녀를 비 난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시에의 존재란 카이엔 옆에 붙은 떨거지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거기에는 아시에가 항상 카이 엔 곁만 따라다닌 탓도 있지만 하여튼 어느 누구도 그녀 자신을 카이엔과 다른 한 인간으로서 보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예쁘고 매 력적인 얼굴에 좋은 몸매, 그리고 신이 내린 듯한 목소리를 가진 그녀를 말이다. 하긴 아시에가 처음 왔을 때는 아시에를 좋아하는 남학생들도 꽤 있던 것 같았지만 카이엔 지지파의 목소리가 더 커서 어느샌가 묻혀버렸지. "그냥 난 단지... 카이엔 교(敎)를 믿지 않을 뿐이야." 카이엔 교란 카이엔에 대해 다소 냉소적인 시각을 지닌 일부 사람들이 카이엔을 광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그들에게 붙인 약간 시니컬한 의미를 지닌 말이었다. "후후. 그렇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몰라도 카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단 한사람만 있으면 족한가봐." "단 한 사람만 있으면 족하다니? 카이엔이!?" "카이는... 그 사람 곁으로 갔을거야. 아마." 카이엔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고, 그 사람에게로 갔을 거라고? 이건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다. 만약에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아마 목을 매 달 여자들이 상당히 많아 사회 문제거리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럼 너희 가족들은..." "나 말고 브리타뉴 가의 딴 사람들은 몰라. 뭐... 어쩌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지 모르겠지만 '그'가 '그들'의 일원이라는 것까지는 모르겠지." 아시에는 조금은 무언가를 얼버무리면서 말했다. 그녀가 브리타뉴 가에 카이엔에 관한 걸 숨기고 있다. 어째서? "말하지 않아도 돼?" "피장파장이지. 뭐. 브리타뉴 가 사람들도 내게 카이에 관해 중요한 걸 숨기고 있는 것 같으니까." 잘 생각해보니 아시에는 얼마 전에 브리타뉴 가에 들어온 양녀일 뿐이다. 브리타뉴 가에서는 아직 그녀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는 걸까? 그 래서 그녀도 브리타뉴 가에 카이엔에 관한 사실을 숨기고 있는 거고... "하여튼 카이엔은 어제 내 눈앞에서 나를 피해 달아난 거나 다름없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빛을 뿜으며 사라질 정도였으니까 완전히 차인 거라고 봐야겠지?" "....."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물론 알고 있다. 카이엔은 하나지만 그를 원하는 사람들은 수백, 수천 명.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을거다. 때문에 카 이엔이 한 사람을 선택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실망할 수밖에 없겠지. 카이엔을 인쇄기로 복사해낼 수 없는 이상은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그 렇다고 해도 아시에는 대륙 7대 미소녀라는 작자들을 제외하고는 내가 지금까지 본 여자애들 중에서 가장 예쁜 아인데, 이런 애가 실연의 아픔 을 겪어야 하다니 너무 안타까웠다. 방금 전의 그 애절하고도 슬픈 음률의 노래는 그녀의 찢어지는 듯한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리라. "아시에." "응?" "아직도... 카이엔을 좋아해?" "응. 너무너무." "그래서... 포기할거야?" "어쩔 수... 없잖아. 그 상대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지만서도... 카이의 마음이 그렇다면..." "무슨 소리야? 상대를 인정할 수 없는데도 포기하는 게 말이 돼?" "키... 키론?" 어쩐지 조금 화가 났다. 설마 카이엔 녀석, 아시에보다 훨씬 조건이 떨어지는 바보같은 여자를 선택해 버리는 건 아니겠지? 카이엔과 맺어지는 사람이 그녀석한테 걸맞는 절세미소녀가 아니면 목을 매다는 여자들이 몇 배는 늘 거라고! "어디 있는 지 알아? 카이엔이!?" "아... 아마도. 짐작뿐이지만 말야!" "당장 찾아가자, 그리고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내라고! 나같으면, 내가 인정할 수 없는 상대한테는 사랑하는 사람을 절대 양보하지 않을 거야!" "푸훗..." "왜... 왜 웃어? 난 진지하단 말야!" "키론한테도 이렇게 막 화를 내는 면이 있네?" "그... 그거야. 그건..." 그...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이렇게 흥분한거지? 평소에 친구 이상으로서는 그다지 신경도 안 쓰는 카이엔의 일에. 으윽. 나도 카이엔 광신도들의 멍청한 분위기에 전염되어 버린 걸까? "고마워. 덕분에 힘이 났어. 나 어떻게든 카이엔이 좋아하는 그 사람과 승부를 내볼께." 그래도 아시에가 기운을 차린 것 같아 다행이다. 방긋 웃으면서 아까 연주했던 악기를 정리하는 그녀 앞에서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 였다. "이건 답례야." 응? 내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아시에는 갑자기 발끝을 조금 올리더니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아... 아시에?" "시에. 라고 불러줘. 나도 키로라고 불러도 돼지?" "으... 응." 어쩐지 이상한 분위기. 예쁜 애한테 뽀뽀를 받아서 그런지 얼굴에 피가 조금 몰리는 것 같다. 이... 이런. 어쩐지 부끄러운데 이거? 물론 아시에가 내게 마음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이상하게 자꾸 신경쓰인다. 단지 그녀는 내게 고마움의 표시로 그런 걸 해 준 것뿐일텐데도. 콰당 아시에와 약간은 뻘쭘한 분위기속에서 서로 마주보고 서 있을 때 갑자기 문이 쾅 열리더니 린넬이 들어왔다. "그만둬! 너희들은 아직 학생이라고!"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 아니 그 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린넬? 나와 아시에가 갑작스런 상황에 잠깐 당황하고 있자 린넬이 숨을 고 르면서 입을 열었다. "후후훗. 키론.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몰래 사라지다니. 역시 용의주도하군. 게다가 데이트 장소가 학교 구석진 곳에 있는 음악실일 줄이야. 완 전히 허를 찔렀어. 내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두 사람 사이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아아! 두렵기만 하구나." ...뭔소리다냐? 아예 소설을 써라. 써. "우웅... 키로. 린넬이 원래 저랬어?" 아시에도 린넬의 행동이 나 못지않게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냅둬. 시에. 키론은 카이엔이 납치당했다는 이야길 들은 후부터 제정상이 아니거든." 나와 아시에가 나누는 이야길 듣고는 린넬이 눈을 반짝 떴다. "키로? 시에? 서로간에 애칭을 부르다니! 세상에! 벌써 그정도까지 관계가 진전되었단 말야? 설마 이미 금단의 선을 넘은 건..." "무슨 오해를 하는 거야! 단지 조금 더 친하게 지내게 되었을 뿐이라구." 하지만 린넬 녀석은 날 몰아붙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후응... 과연 친하게 지냈다는 말로 전부 설명이 되는 걸까나? 그렇다면 너와 나 사이는 왜 애칭을 쓰지 않지?" "징그럽게시리, 남자끼리 애칭 써서 뭐할려구!" 여자끼리는 서로 애칭을 사용하는 경우도 흔하지만 아무래도 남자끼리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 나라에서는 애칭은 잘못 사용하면 어쩐지 상 대를 얕보거나 놀리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린넬한테 추궁당하는 나를 구한 사람은 여전히 알듯 모를듯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시에였다. "린넬, 카이를 만나러 가지 않을래?" "엉? 아시에, 카이엔이 어딨는 줄 알아?" "으음...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짐작가는 장소가 있긴 해. 사실은 거기 가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 키로를 부른 거야." "그래? 흐음... 그래도 좀 수상쩍은걸?" 린넬은 묘한 눈빛으로 나를 계속 쳐다보았다. 아시에가 해명을 했는데도 그렇게 날 의심하는 거냐? 일 때문에 불렀다잖아 일! 러브레터는 무슨 러브레터란 말야? 하긴 뺨에 뽀뽀도 받고 서로 애칭을 부르게 되는 급진전...이라고 할만한 사건이 있긴 있었다만. "어... 어쨌건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빨리 카이엔 이야기나 하자구." "하근 그래. 아시에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카이엔은 어디 있는거야? 진짜 만날 수 있어?" 린넬이 황급한 목소리로 카이엔을 찾고 나섰다. 그러자 아시에는 조금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린넬이 자신의 존재를 오로지 카 이엔을 찾기 위한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해서 그렇겠지. 이 음악실에 린넬이나 다른 사람이 아닌 아닌 나를 부른 이유도 자신을 카이엔의 부속물이 아닌 별개의 인격으로 생각해주는 것 같기 때문이라고 했었지... "진짜 만날 수 있어. 하지만 그 전에 확실히 해 둬야 할게 있어." "뭔데?" "린넬... 넌 카이를 좋아해?" 아시에가 단도직업적으로 린넬에게 묻고 나섰다. 그리고 그 질문은 내가 항상 린넬에게 던져왔지만 녀석이 항시 얼버무려 온 화제기도 했다. 그 리고 이번에도 녀석은 평소와 마찬가지인 반응으로 나섰다. "조... 좋아하긴 하지만 사귀거나 연인이나 그런게 아닌. 그냥 친구로서 좋아하는 거지 뭐. 다른 쪽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친구?" 아시에가 코웃음을 쳤다. "정말로 카이에게 원하는 게 친구야? 그걸로 족해?" "무... 무슨 말이야. 아시에? 그럼 친구지. 또 다른 뭐가 필요해?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카이엔에게 느끼는 감정은 끈끈한 우정이라고. 왜 자꾸 다 들 이상한 쪽으로 결부시키려고 드는거야?" 린넬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자신의 감정을 조금 강한 우정으로만 치부할뿐, 끝까지 사랑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바보." 아시에가 내뱉듯이 말했다. 린넬의 변명이 그녀의 성에 차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내가 척 봐도 이미 린넬의 카이엔에 대한 감정은 우정이라는 말로 얼버무릴 수 있는 범주를 넘어 있었다. 그런데 끝까지 고집을 피우는 꼴이라니... "결정했어. 카이가 있는 곳으로 갈 때, 넌 데려가지 않을래." "어... 어째서! 나는 카이엔의 같은 반 친구야. 나도 카이엔을 항상 걱정하고, 염려하고, 생각하고 있다구!" "니가 카이를 알아? 친구라고는 말하고 있지만 카이의 깊은 곳까지 알아? 넌 잘 모르겠지만 카이가 '그 곳'으로 사라진 건 스스로의 판단이야. 진정 친구를 위한 우정을 가지고 있다면, 차라리 내가 카이를 데려오지 못하도록 비는 게 어때? 카이는 돌아오기를 원하지 않을테니 말야." "그... 그렇지만 키론은 데려가려고 하면서! 왜 나만...! 왜 날 뷁!" "7옥타브도 안올라가면서 이상한 소리 하지 마. 키로는 너와 달리 특별하니까 가르쳐주는 거야." "트... 특별!?" 아시에. 그렇다고 이상하게 오해할 만한 소리는 하지 말라구. 하지만 린넬은 아시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듯 나를 쏘아보았다. 녀석은 경우가 어찌되었건 나와 아시에 사이에 묘한 일이 있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키론 너 대체 아시에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그걸 믿을 것 같아!?" "안 믿으면 어쩔 건데?" 답답한 녀석. 아시에가 자기를 카이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지 않는다고 하니까 이제는 나한테 시비다. 아시에가 차가운 표정으로 린넬에게 한 마디 던졌다. 내가 아시에에 대해 받은 인상은 전학 초창기의 항상 수줍은 모습이나 얼마 전에 성격이 조금 변한 듯 카이엔에게 적극적으로 대 쉬하는 모습이 전부였는데 지금같은 날카롭게 상대를 깔아보는 아시에의 표정은 처음이었다. "한심해. 너는 카이를 만날 자격도 없어. 스스로의 마음을 인정하는 용기도 없으면서, 어떻게 상처받은 카이의 마음을 보살펴 줄 수 있겠어?" "너는 꼭 할 수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아마도 할 수 없겠지..." 린넬의 이죽거림에 아시에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전심전력을 다해서 내 마음을 카이에게 그대로 전할 거야. 지금까지 계속 거절당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열심 히 할거야. 아니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리고 그녀석의 존재를 똑바로 바라볼거야. 그 자가 정말 카이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지 시험 할거야." "그 녀석이라니... 누구야!?" 아, 그러고보니 린넬은 듣지 못했겠군. 아까 아시에가 내게 해준 '카이엔에게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길 말야. 하지만 아시에는 이 제 더이상 린넬에게 무언가를 대답해 줄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듯, 나를 잡아끌고 음악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린넬이 우릴 뒤쫓아오려 했 지만 어느 사이엔가 아시에와 나는 다른 공간. 학교 옥상에 와 있었다. 이... 이건? 어떻게 된 거지? "공간 이동 마법의 전단계 마법인 공간 걸음이야. 특별한 재능을 타고 난 전사들이 쓰는 블링크(blink)와 공간이동의 중간적인 개념의 마법이야. 근거리 이동에 쓰이지. 나는 원래 못 쓰던 마법이지만 최근에서 들어와서는 쓸 수 있게 되었어." "시에... 너 마법사였어?" "정확하게 말해서... 흑마법사야." 아, 그래쿠나. 흑마법사여쿠나. 그래서 저런 마법을 쓸 수... 근데 뭐? 흑마법사!? 흑마법사라고오!? 마... 말도 안돼! 흑마법사라면... 자연의 규칙을 일그러뜨리는 마왕의 힘을 끌어다 쓰는 사악한 존재들이잖아! 지금 농담하는 거지, 응? 저렇게 예쁘고 귀엽고 미성(美聲)을 지닌 아시에가 흑마 법사일리 없잖아? "농담이지?" "진짠데..." 하하하하.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요즘 어쩌다가 가끔씩 학교 내에 이상하게 시든 꽃이 한두개씩 보일 때가 있는 건 그 때문이었나. 학교 정원사가 그런 실수를 쉽사리 하지는 않을테고 말이다. 아시에가 흑마법사였다니...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건 차라리 모르는 편이 훨씬 더 나았는데! 나는 화가 나서 소릴 질렀다. "그런 걸... 왜 가르쳐주는거야! 어째서!" "믿으니까." "뭘?" "지금까지는... 오로지 카이만이 내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이해해줄 수 있다고, 감싸안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나와 카이 사이에 존재 하는 시간대의 차이를 카이는 결국 인정할 수 없었던걸까? 내가 겪은 일에 동정은 해주지만 결국 친구 이상으로는 생각해주지 않으니 말이야." 그녀에게는... 대체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 걸까? 그러고보니 나는 아시에에 대해 하나도 모른다. 어떻게 해서 브리타뉴 가문으로 들어가게 되었는 지, 그 이전에는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그래서, 처음으로 카이 외의 다른 사람을 믿어보고 싶어졌어." 그녀가 날 믿는다... 라. 어쩐지 가슴이 찡해오는 느낌이 들었다. 나 같은 사람을 정말로 믿는거야? 어째서? 그대로 널 외면해버리거나 다른 사람 들에게 일러버릴지도 모르는데!?" "...아직 쉽게 수긍하진 못해." "괜찮아. 카이를 찾으러 가면서 많은 걸 이야기해줄테니까. 이정도로 놀라서는 안된다구. 우후후." 그녀는 누굴까? 정체가 뭘까? 또 무엇을 더 감추고 있을까? 나는 아시에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 깊숙한 곳에 숨어있을 그녀의 비밀과 감춰진 슬픔과 아픔. 그리고 소중한 추억 모두를 공유하고 싶어졌다. 왜인지 모르게... 난 그녀에게 끌리고 있는 것 같다. 아시에는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카이엔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브리타뉴가에 대해서. 그것들은 하나같이 내가 접할 수 없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귀중한 정보였다. 그리고 그 정보들은 이런 걸 함부로 누설해도 되냐는 걱정에 앞서 아시에가 하는 말이 과연 사실일까 의심될 정도로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는 카이엔이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예전에 자하기니아로 수학 여행을 갔을 때 병실에 누워 있던 카이엔에게 편 지를 보냈던 사람인 시르젤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자는 괴도 '시르팡'의 일원이였다! 세상에... 그렇다면 설마... 그들에게 납치당 했을 때 사랑이 싹텄다는 어디 할리퀸 연애 소설같은 이야기란 말야? 한참 놀라서 입을 벌리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아시에가 카운터 펀치를 먹 였다. "아, 그리고 시르젤이라는 사람은 남자야." 쿠쿵. 뭐... 뭐시라? 남자? 나암자? 원하기만 한다면 세상의 그 어떤 미소녀라도 충분히 가질 수 있을 그 카이엔이 좋아하는 녀석이 남자라고오! 대략 정신이 멍해왔다. 엄청난 충격에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다른 남자애들은 자석에 쇳가루가 붙는 것처럼 여자가 달리붙는 카이엔을 얼마나 부러워하고 선망하고 질투하고 있는데 정작 녀석은 남자를 택했단 말야?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 시르젤이라는 사람... 진짜 남자야?" "응." "그리고 카이엔은 그 시르젤을 좋아하고?" "응." "그럼 카이엔은 남자를 좋아한단 말야? 사랑의 대상으로? 연인으로?"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어? 키로. 믿고 싶지 않는 건 알겠지만 엄연한 진실이라고!" 나는 아시에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몇 번이나 재확인했다. 아니, 아시에 같이 예쁜 애를 차버리고 택한 놈이 남자라는 걸 어떻게 믿으란 말야! 아냐. 조금 달리 생각해보자. 이래뵈도 난 냉철한 지성과 차분함을 무기로 삼고 있는 키론 모아라드니까. 지나치게 흥분했어. 카이엔은 어릴 때부 터 주위에 여성들이 넘쳐 나서 여자들한테는 질려 버렸고 따라서 남자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흐음. 생각해 보니까 전혀 있을 수 없는 시나리 오는 아닌걸? "카이엔. 그런 취향이었나..." "글쎄말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좀 이상한 녀석이긴 했지만 말야." "응? 처음 만났을 때가 어쨌는데?" "아... 아무것도 아냐." 아시에는 거기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얼버무렸다. 뭐, 아시에도 모든 것을 100%가르쳐 주진 않을테고 나도 그정도까진 기대하지 않았 으니 우선 그녀의 말을 계속 듣고 있기로 하지. 워낙 놀라운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이제는 더 이상 충격을 받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시에의 다음 이야기는 나를 또 한번 놀라게 하기에 충 분했다. 물론 지금은 카이엔의 엄마가 계약을 강제로 깨버렸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한때 '마도의 노예'였다는 것이었다. 흑마법사였다는 것도 모 자라 마... 마도의 노예?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를 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 그럼 브리타뉴 가에서는 그런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무려 '양녀'로 받아준거야?" "응. 날 구해준 사람들도 브리타뉴 가문 사람들인 데다가 세이 언니는. 예쁜 거라면 사족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니까. 그리고... 나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보통 사람하고는 엄청 다른가봐. 아마 그런 이유도 있을거야." "그야 흑마법사에다 한때 노예... 였다니까 다르긴 다르겠지만." 아시에는 내 말에 피식 웃었다. 그것 외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걸까? 하지만 아시에는 더 이상의 비밀까지는 가르쳐 주지 않으려는 건지 애매모 호한 말 한마디를 남겼다. "글쎄... 하여간 뭔가 있어. 나도 사실 내가 누군지 잘 모르니까." "아, 그건 나도 들은 적 있어. 마도의 노예는 예전 기억을 다 잃어버린다지?" 그렇다면 그녀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을 터. 하긴 그렇다. 마도의 노예는 세상으로부터 멸시받고 천대받아 정체를 숨기지 않으면 지금 처럼 일상 생활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실은 흑마법사들에게 뼛속까지 이용당하는 불쌍한 존재다. "혹시... 시에의 이전 주인은... 남자?" 나는 말해놓고도 내 질문을 후회했다. 도대체 뻔한 질문을 난 왜 묻는거지? 그것도 실례되는 질문을? 흑마법사들 대부분은 남자고 아시에를 주 인으로 삼은 그 흑마법사가 당연히 아시에를 그런 쪽으로도 이용했을 거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응. 정말 대단한 변태녀석이었어." 하지만 아시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빙긋이 웃는다. 어... 어이. 정말 괜찮은 거야? 그녀는 내가 과거의 아픈 상처를 건드렸을 텐데도 태연하게 미소지으면서 이야기한다. 이미 과거의 모든 사실을 극복했다는 걸까? 강하구나... 아시에는. 같은 또래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마 음을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설마... 카이엔이 널 내팽개친 건 과거 때문에?" "으응. 그건 아냐. 카이는 세이 언니와 같이 브리타뉴 가문의 다른 누구보다도 날 이해해주고 열심히 돌봐줬어. 카이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걸." 하지만 아시에가 카이엔을 변호하고 나설 때마다 왜 그자식한테 자꾸 짜증이 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예쁘고, 아름답고, 미성(美聲)을 지닌데다 흑마법이긴 하지만 마법도 쓸 수 있고, 과거의 상처도 굳세게 극복해내는 이런 강인한 여자애를 어째서 카이엔 녀석은 차 버린거냐구! 그녀의 과 거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대체 뭐 때문이야? 나도 정말로 가서 확인을 해 봐야겠다. 만약에 진짜 그 시르젤이라는 놈이 영 시원찮고 허접한 놈이면 카이엔 녀석을 가만두지 않을테야! "시에. 나도 너와 같이 갈께." "괜찮겠어, 키로? 어쩌면 그들은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을지도 몰라." "아냐. 몰랐을 때는 상관없지만, 이미 시에는 내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고, 너무 많은 걸 알려줬어. 왜 나한테 이런 진실들을 가르쳐줬는지는 모 르겠지만, 이제는 빠져나가기에는 너무 깊이 개입해버렸어." "고마워. 그리고 키로한테 이런 사실들을 상세하게 알려준 이유는..." "이유는?" "너한테서 도움을 얻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니가 맘에 들었으니까." 순간 얼굴이 귀밑에서부터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 어... 어라? 왜 이러지, 나? 아까 음악실에서 그녀의 음악을 들었을 때부터 그렇지만 자꾸만 그녀의 사소한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자꾸 신경이 쓰인다. 아까 카이엔에게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고 억지로 스스로의 마음을 부인하는 린넬을 보 면서 코웃음을 쳤는데, 혹시 나도 지금 내 마음을 억지로 부인하려고 드는 걸까? 그렇다면 난... "으... 응. 무... 무슨 도움이 필요한데, 말해봐?" "아, 맞어. 사실은 좌표식(座標式)을 계산할 사람이 필요했어. 키로는 공부를 잘하잖아?" "좌표식?" "응. 내가 얼마 전에 세이 언니한테 공간이동 마법을 배웠어. 그런데 아직 미숙해서... 계산을 잘 못해. 아까전처럼 공간 걸음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도저히 장거리이동은 무리야. 여기 식이랑 좌표값이 나와 있으니까 계산 좀 해줄래?" "알았어." 사실, 복잡한 마법에는 거의 수학이 들어가지 않는 분야가 없다. 때문에 어지간한 마법사들도 좀더 섬세한 컨트롤을 필요로 하는 분야에는 수학 자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물론 수학자들의 도움이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복잡한 식이 아닌 간략한 식을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미세하고 섬세한 분야로 가게 되면 오차가 커지게 된다. 여기서 그 오차를 바로잡아주는 것이 수학자들의 역할인 것이다. 예를들 면 원주율을 간략하게 3.14로 놓고 사용하는 것과 실제값 3.14159...로 끝없이 계속되는 실제값 π로 놓고 사용하느냐는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웬만한 경험을 가진 마법사라면 직감으로 커버하는 분야도 있지만 이런 장거리 이동을 사실 처음 해보는 아시에로서는 제대로 계산하지 않은 채 마법을 시전하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공간의 틈에 갖혀 버릴 위험도 있을 터였다. 나는 아시에가 내준 식이랑 좌표값을 가지고 계산을 시작했다. 좌표값이 나와있는 장소는 동쪽 쥬리딜 왕국의 어느 한적한 해안가... 여기서 상당 히 먼 곳이다. 아시에의 말로는 '시아와세노 비치'라는 곳이라고 한다. 카이엔은 어떻게 저곳까지 단번에 간 걸까? 녀석이 공간이동을 할 능력은 없을텐데. 계산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어려워서 한참 동안을 끙끙 앓아야만 했다. 내가 편법으로 비선형미분방정식을 선형미분방정식으로 고쳐 풀 줄 몰랐 더라면 나도 손을 놓아버리는 수밖에 없었을 거다. 하여간 각고의 노력끝에 간신히 좌표식에 좌표값을 대입해서 계산하는 데 성공했다. "후아. 힘들다." "고마워, 키로. 그런데 진짜로 따라갈거야? 진지하게 결정해." "난 진지해. 따라간다. 그리고 내 몸 하나는 내가 지킬 수 있다구." 나는 안주머니 속에서 단검을 하나 꺼내면서 말했다. 사실은 이런 거 학교에 들고 오면 불법이지만 말야... 뭐 수학여행 때 술도 잘만 빼내온 내 가 이런 단검 하나 숨기는 게 크게 어렵지만은 않지. 내가 왕년에 도박판에서 이름을 좀 날렸고 쪼오금 많이 따다 보니 내게 원한을 가지는 사 람도 꽤 많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내 스스로를 지키는 법 정도는 배워야했다. 보통은 비무장일때 불시에 습격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큰 무 기는 허가증 없이는 시내에서 함부로 가지고 다닐 수 없다. 그리고 군 관계자가 아닌 이상에는 나같은 미성년자에게 허가증을 내줄 일도 없고 말이야. 그래서 나는 이렇게 품에 쉽게 숨겨 다닐 수 있는 단검을 휴대해서 다닌다. "알았어. 그럼 갈께. 내 손을 꼭 잡아." "응." 처음으로 아시에의 손을 잡은 순간, 온몸이 전류가 흐르는 듯 찌릿거렸다. 아까 뺨에 뽀뽀당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손목을 타고 전해져 왔 다. 심장이 나도 모르게 자꾸 빠른 속도로 스피치를 올리고 있었다. 이런 내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시에는 손으로 수인을 맺으면서 영창을 하고 있었다. "그럼... 간다!" 그 순간, 나와 아시에를 둘러싼 풍경은 한번에 변해 있었다. 제127화 : 파국(破局) "지옥으로 가는 문 입구에 온 것을 환영한다. 아시에 브리타뉴 양." "쥬... 쥬르시?" "어라? 초대받지 않는 손님이 한 명 있군." 아시에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얼마 전에 우리 반에 전학을 왔던 쥬르시가 왜 저기 있는 거지? 게다가 지금 우리가 공간이동 을 해온 장소는 어디야? 아시에의 말에 따르면 어딘가의 해안가가 될 거라고 했지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어느 건물 안인 듯 커다란 홀 (Hall) 한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홀 저편에는 쥬르시가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걸까? 쥬르시가 계속 말을 이어갔고 그가 말을 계속함에 따라 아시 에의 표정은 자꾸만 어두워졌다. "널 기다리고 있었어. 아시에. 반드시 네가 여기로 올 거라고 확신했지. 애초부터 그럴 목적으로 나에게 강제로 언령의 약속을 시킨 거니까, 안그 래? 너 정도의 흑마법사라면 서로가 공유하여 마신 피를 이용해서 상대방의 위치를 파악할 수도 있을테니 말이야. 후후후." 언령의 약속? 피? 지금까지 아시에에게 웬만큼 중요한 이야기는 다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았다. 우욱. 이거 괜히 따라온 건 아닐지 몰라. 아니 애초부터 어설프게 조금 들은 정도가지고 브리타뉴 가문의 일에 참견하는 것이 어리석었을지도. "카이엔과 언령의 약속을 하지 못해서 유감이었지? 만약 카이엔과 서로의 피를 나눠마셨다면 카이엔의 위치를 곧바로 알 수 있었을테니 말이야." "목적이 뭐지, 시르쥬?" "목적이라고? 아마 짐작하고 있을텐데?" 시르쥬? 쥬르시는 그럼 진짜 이름이 아니란 말야? 혹시 저 녀석도 시르팡과 관련된 녀석인걸까? 연두색 머리빛깔에는 어울리지 않는 시르쥬라는 녀석의 검은 눈동자가 비웃음을 띠는 듯 빛났다. "우리 형에게 방해가 되는 네년의 말살이다." 마... 말살? 그렇다면 아시에를... 죽인다는 말야? 왜? 무엇 때문에? 아시에가 무슨 잘못을 해서? 그것보다, 저놈과 아시에는 무슨 관계야? 자기 형에게 방해가 된다니... 원한이라도 있는 걸까?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외치자 시르쥬라는 녀석은 나를 흘낏 돌아다보더니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키론이라고 했나? 네녀석은 여기 끼어들지 마라. 너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문제니까. 그렇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키로. 내 손을 잡아." 시르쥬라는 녀석의 위협 속에서 나는 아시에의 말대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내 손을 잡은 채 걸음을 몇 걸음 옮겼다. 하지만 걸음을 옮기 던 그녀의 얼굴이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새파래졌다. "공간 걸음이... 통하지 않아?" "소용없다. 이시에, 네년이 이곳으로 공간이동해 온 순간부터 우리는 이 공간을 닫아버렸으니까. 너도 알고 있겠지? 시르팡의 진(陣), 폐쇄계 (Isolated System)을 말이야. 공간이동 계열의 마법으로는 절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어." "완전히 함정에 걸렸나..." 아시에의 힘없는 목소리. 시르쥬가 손가락으로 딱 하는 소리를 내자마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검을 든 사람들이 10여명 가까이 나타나서 우리를 에워쌌다.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기를 내뿜는 것이 다들 검에 있어 어느 정도의 경지를 이룬 자들 같았다. 나도 단검을 가지고 있다지만 할 줄 아는 건 그냥 시정잡배들 가운데서 몸을 지키는 것 정도일뿐. 싸워서 이길 수 있을리가 없었다. "키로. 넌 가만히 있어. 내가 상대할 테니까..." "하지만...!" "내 일에 끌어들여서 미안해. 이럴 줄 알았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왔어야 하는건데. 완전히 판단 착오였어. 시르쥬가 이정도로 용의주도한 녀석일 줄이야." 그리고 아시에는 시르쥬를 노려보면서 한 마디 던졌다. "시르쥬. 키론은 무사히 유레카로 돌려보내 줘." "글쎄. 놈이 쓸데없는 방해를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 줄 용의도 있지. 내가 척살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네년뿐이니까." "그래? 그렇다면..." 아시에는 등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내게 무슨 마지막 말이라도 할 듯 그녀는 잠시 멈칫거렸다. "시에... 저 녀석은 대체..." "걱정하지 마. 단순한 브라콘 멍청이 자식일 뿐이니까. 날 믿어. 이래뵈도 흑마법, 꽤 잘 한다고.... 박(縛)!" 아시에가 내 이마를 툭 건드린 순간 내 몸이 찌릿해 오더니 마비에 걸린 것처럼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무... 무슨 짓을 한거야 아시에! 위험하 다고! 믿고 싶었다. 아시에는 분명 막강한 흑마법사라고, 저놈들도 꽤 강하기는 하지만 흑마법이라는 건 엄청 사악한 사술(邪術)이니까 저런 놈들 따위는 금방 처리하고 내 앞에서 웃어 줄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내 앞에서 지은 아시에의 미소는 자신감에 차 있는 미소가 아니었다. 상대를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자신감은 그녀의 말과는 달리 아시 에의 얼굴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무언가를 단단히 각오한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미소였다. 살아남아 돌아올 수 있을지 짐 작할 수 없는 전장으로 끌려가는 병사의 얼굴처럼. "시... 시에!" "난... 죽지 않을거야!" 아시에의 외침. 그녀의 외침은 날 안심시켜주려는 목적보다는 자기 자신을 향한 결의로 차 있는 것처럼 들렸다. "준비되었나. 아시에?" "비겁하긴. 결국 너 혼자서는 날 이길 수 없으면서. 역시 그때 거기서 죽여버렸어야 하는 것을. 그때 카이엔만 거기에 없었어도..." 아시에는 어딘가 분한 모습이었다. 내가 아는 그녀의 모습은 처음 카이엔의 손을 잡고 학교에 들어왔을 때 어딘가 어리숙하고 소심한 모습. 그리 고 최근에는 이전의 마음의 상처를 극복해낸 모양인지(나는 그녀의 변화를 그렇게 결론지었다.) 다소 밝아지고 여유만만해진 모습뿐. 이렇게 긴 장을 잔뜩 한 아시에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진짜로 지금 생명이 위험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저런 모습을 눈앞에서 보 여주지 않았을 거다.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었어." 딱 시르쥬가 손가락에서 딱 하는 소리를 내자 10여명의 전사들이 한꺼번에 아시에에게 덤벼들었다. 아... 아시에, 어떻게 할 거야!? "시... 시에, 피해!" "비(飛)!" 내 걱정과는 달리 아시에는 공중으로 떠올라 그들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홀의 끝으로 달려가 흑마법 공격을 그들에게 퍼부었다. "우! 마! 탄! (雨魔彈)" 아시에의 마력이 마치 속사포를 쏘듯 엄청난 위력으로 그들을 난타했다. 그들은 검을 치켜들고 버티려고 했지만 몇 명은 아시에의 공격을 버티 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버렸다. 하지만 그 공격을 어떻게든 버텨낸 나머지 전사들은 마력의 폭우를 뚫고나가 아시에에게 역공을 시도했다. 아시에는 황급히 손으로 수인을 맺어 방어막을 쳤다. 하지만 공격의 선두에 선 전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에에게 정면으로 마주쳤다. "즐(KIN)!" "반사(反射)!" 순간 나는 보았다. 아시에를 공격한 자의 검에 서린 연녹색 검기를. 소... 소드 마스터? 검기의 위력 앞에 아시에의 방어막은 맥없이 갈라졌다. 아 시에는 어떻게든 간신히 몸을 돌려 피하려고 했지만 원래 마법사의 움직임이라는 건 민첩하지 못하다. 단지 정면을 피해 팔을 베인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시에는 속(速) 마법을 통해 뒤로 재빨리 물러났다. 그녀의 팔에서 쉴새없이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지(止)" 아시에가 주문을 외었다. 순간 팔 전체를 적시도록 흐르던 피가 금세 멎었다. 지혈주문일까? 하지만 그녀가 상당한 타격을 입은 것은 분명해 보 였다. "...소드 마스터라니." "놀랄 것 없어. 아시에. 이전에 자하기니아의 무술 대회에서 우리 형이 돌린 예고장도 못 봤어? 정해진 소드 마스터의 안배를 위해서 시드의 검 을 훔치겠다고 한 거 말야." "그랬던가." 나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시르팡들이 시드의 검을 훔쳐간 이후로 갑자기 래더라는 녀석과 파인이란 놈이 난리를 치는 바람에 경기는 완전히 엉망이 되었었지. 그렇다면 아까 아시에를 벤 소드 마스터라는 놈이 들고 있는 검이 그때 도둑맞은 시드의 검이라는 이야기? "소드 마스터라는 걸 알았으면 즐 대신 무효(無效)를 사용했을텐데. 퉤." 하지만 의외로 아시에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싸움에 익숙해졌다는 뜻일까? 그러면서 언제든지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자 세를 취했다. 아까 아시에의 마법에 맞아 쓰러진 적들이 굼틀거리며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 아시에의 모습을 바라보는 내 가슴은 불 안과 걱정에 쿵쿵 뛰었다. 화려한 마법이나 치열한 격투 장면 따위는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저들과의 싸움에서 위태위태하게 버티고 있는 그녀가 살아남기만을 바랄 뿐. "공격해!" 아시에가 다소 긴 주문을 외우려고 하는 것을 눈치챈 시르쥬가 명령했다. 그러자 소드 마스터를 비롯한 10인의 전사들은, 아 아직 못 일어난 두 명을 제외한 8인의 전사들은 아시에를 향해 동시에 쇄도해 들어갔다. 아시에는 어쩔 수 없이 주문을 취소하고 비와 속을 이용해 홀 곳곳으로 뛰 어다니면서 간간히 반격을 시도했다. "생각보다 잘 움직이는 걸? 신성력으로 이 폐쇄계 공간을 체워넣었는데도 말야?" 시... 신성력 공간이라고? 여기가? 세상에... 신성력이라는 것은 흑마법사들에게는 치명적인 독이다. 면역이 약한 흑마법사라면 서 있는 것만으로 도 가슴이 답답해 질 듯 괴로워지는 게 신성력이다. 그런 힘이 이 공간을 메우고 있다면 그녀가 사용하는 흑마법의 위력은 평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다. 그런 공간에서... 소드 마스터가 섞인 파티를 상대로 저정도까지 싸우고 있다는 거야, 아시에!? 제발... 무사하기를. "혈. 겁.(血劫)!" 치명적이고 강력한 위력을 지닌 아시에의 흑마법이 또 한명의 전사에게 명중했다. 아시에의 흑마법을 정면으로 맞은 전사는 온 몸을 부르르 떨더니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하지만 시드의 검을 든 소드 마스터를 필두로 한 전사들은 한두 사람의 희생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아시에를 압박해 갔다. "하압!" 위잉 에메랄드 빛으로 푸르게 빛나는 검기가 서린 검격이 공간을 갈랐고 아시에는 아슬아슬하게 그 검격을 피해 냈다. 아시에는 신성력으로 찬 공간 속에서도 10명의 전사들의 공격을 버텨낼 정도로 잘 버티고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신성력의 흑마법 약화효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쓰러뜨리려면 막대한 마력이 소모될 터였다. 아시에는 다시 한번 필사적인 공격을 퍼부어 아까 그녀의 첫 공격에 부상을 입었던 전사를 한 명 쓰러뜨렸으나 이미 그녀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들도 막강한 그녀의 흑마법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은 꺼리는 듯 차례로 돌아가면서 공격을 하면서 그녀의 진을 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시... 시에." "헉... 헉... 하아." "뭐야... 시에가, 시에가 왜 죽어야 하는거야! 시에가 뭘 잘못했다고!" "방해되니까다. 우리 형한테 말이야." 나는 마비된 몸을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애를 써 보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시에가 뭘 잘못했길래? 놈의 형에게 방해가 된다니... 단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만으로 그게 죄가 될 수 있다는 말야? 그런 이유만으로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는거야? 저 녀석은... 웃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수하가 아시에의 필사적인 공격에 하나둘씩 죽어나가는데도 말이야. "너희들... 단순한 괴도 집단이 아니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군." 아시에가 시르쥬를 노려보면서 물었지만 시르쥬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하기야 일반적인 괴도가 이 정도의 전사들을 데리고 있다는 것은 뭔가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저 전사들은 무슨 기술 이름이나 기합소리를 외칠 때 말고는 한마디의 말도 서로 꺼내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의 과묵함... 마치 암살자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사. 면. 초. 가. (四面楚歌)!" 아시에는 다시 한번 필사적으로 흑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번에 사용한 흑마법의 타겟(target)은 그녀의 앞에서 합동공격을 해오는 전사들이 아닌, 시르쥬 놈에게 직접 흑마법을 사용했다. 시르쥬의 사방에서 빠른 속도로 사기(邪氣)가 솟아올라 그를 덮쳤다. 하지만 그를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한 어둠의 기운은 시르쥬의 몸에 닿자말자 힘없이 스러져갔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아시에도 충격을 받은 모양이지만 그녀보다 더 망연자실한 것은 나였다. 놈들의 실질적인 보스(boss)인 시르쥬를 노려 치명타를 먹인다면 승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르쥬라는 저 녀석 혼자로는 분명 아시에보다 약한 것 같으니 말이야. 시르쥬는 얼굴 한가득히 비웃음을 띠며 나와 아시에를 보며 말했다. "크크크. 나를 직접 노리는 공격쯤이야 벌써 한참 옛날에 계산했다고. 미리 항마(抗魔) 실드를 몸 주위에 둘러쳐뒀었다고." 쌔액 지나친 마력의 남발로 크게 지친데다가 회심의 일격마저 수포로 돌아가버린 아시에의 정면으로 잔상을 일으키며 그녀의 앞에 나타난 소드 마스터의 검이 그녀를 덮쳐 왔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엔 그 공격을 피해내지 못했다. "잘 가라, 아시에." "아.... 안돼애!" 나는 필사적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나의 외침도 부질없이 소드 마스터의 연두색 검기가 아시에의 그녀의 몸을 오른쪽 어깨로부터 왼쪽 허벅지까지 사선으로 갈랐다. 거대한 상처 사이로 피가 화산 폭발에서 화산재가 퍼저나가듯 뿜어져나와 주변으로 퍼져갔다. "시에에에에에!" 시전자가 빈사 상태에 이르는 타격을 받은 탓일까? 왜인지 아시에가 내게 걸어놓은 마비가 그대로 풀려 버렸다. 나는 황급히 쓰러진 아시에의 옆으로 달려갔다. 무슨 생각인지 그녀를 벤 소드 마스터놈과 다른 전사들은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듯 더 이상 그녀를 공격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든 상처를 지혈해보려 했지만 그녀의 상처는 너무 컸다. 날카로운 검기의 예기는 그녀의 상체를 완전히 가른 것이다. 심장을 피해 간 것과 두 동강이 나지 않은 것만해도 기적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였다. "미안... 쿨럭... 안 죽는다고 했는데..." "주... 죽지마! 시에! 넌 흑마법사잖아! 그런데 저딴 검사 나부랭이들한테 이렇게 어이없이 죽어도 되는거야?" 바로 그 '검사 나부랭이'들이 내 옆에 있었고 개중에는 소드 마스터도 있었지만 나는 거리낄 것 없이 말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놈들은 내가 무슨 말을 지껄이든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마치 자기들의 일은 다 끝났다는 듯 나와 아시에를 내버려두고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할 뿐이었다. 깊은 마음속에서 터져나오는 눈물이 눈시울을 적시고 뺨을 타고 뚝뚝 떨어져내렸다. 예쁘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으면서도 강한 마음을 가진 아시에가, 어째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야만 하는 거지? 그녀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식의 함정까지 파면서 그녀를 없애려고 한 거야? "만약... 카이를 만나면... 콜록... 전해... 줘.... 난... 카이를... 예전부터.... 쿨럭... 여기로... 오기... 전부터도... 쭈욱... 소중..." ".....시에?" 아시에의 말이 중간에 끊겼다. 길게 찢어진 상처에서 펌프질을 하듯 쉴새없이 쏟아져나오던 붉은 피가 더이상 콸콸 흘러나오지 않고 느릿하게 새어나왔다. 혈압(血壓)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는 그녀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그녀의 미약한 생명의 고동이 아직 꺼지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것은 단지 나의 소망일 뿐. 이미 일어나버린 현실이 염원에 의해 뒤바뀌지는 않는다. 그녀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고 생명의 박동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거짓... 말이지? 시에가... 죽었을리가..." 그녀가 죽었을 리가 없어! 아까 전까지만 해도 같이 웃고 떠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잖아? 지금 장난치는 거지? 아주아주 리얼하기 그지없는 연기를 하는 거지? 아냐.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단지 악몽(惡夢)일뿐. 깨어나서 학교에 가면 카이엔과 아시에가 함께 등교해서 한참 주변의 질투를 사고 있을 거야.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현실과 망상을 구별할 수 없는 바보는 아니다. 뜨겁게 타오르는 가슴과는 달리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주위의 정보를 냉철하게 받아들이고 판단하려고 애쓰는 머리가 저주스럽게 느껴졌다. 차라리 그냥 미쳐버릴 수 있으면 좋을텐데... "쯔쯔... 죽일테면 좀 깨끗하게 죽일 것이지."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피해를 입은 터라 그런 것까지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아쉽군. 저런 버러지같은 년의 시체를 시간(屍姦)으로 더럽혀주려고 했는데. 이왕이면 윤간(輪姦)으로 하면 더 좋겠군 그래. 쓰레기같은 년의 최후는 쓰레기같은 넝마주이 꼴이 어울리지. 그렇지 않아?" 뭐라고? 저 자식! 지금 무슨 말을 한거야! 뭐라고 생각할 여유가 하나도 없었다. 놈의 말 단 한마디에 내 머리는 지금까지 터질 것 같은 감정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있던 이성의 끈을 곧장 잘라 버렸다. "우와아아아아악!" 나는 가릴 것 없이 단검을 빼들고 시르쥬 녀석을 향해 무작정 돌진해 갔다. 거기에는 어떤 이성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계속해서 흘린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단지 증오와 분노에 가득 찬 마음만으로 놈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몇 걸음 달린 것도 잠시, 뒷목덜미에 느껴지는 강력한 충격에 나는 눈이 뒤집힌 채 그대로 넋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아아... 정신이 아득해... 이대로 나도 그녀를 따라가는 걸까... "응?" "왜 그러십니까, 카이엔 씨." "아... 아무것도 아녜요. 시르젤 씨. 그냥 어쩐지 신경이 예민해져서..." 기분 탓일까? 지금 어쩐지 엄청나게 안 좋고 불쾌한 느낌이 온몸을 감쌌는데 말야. "갑자기 큰 힘을 쓸 수 있게 된 탓이겠지요." 음... 아마도 시르젤의 말대로인 것 같다. 문짝 부순 건 아직 들통이 안 난 모양이지만 아직 힘을 완전히 컨트롤하지 못해 몇 가지 가벼운 사고가 일어난 터였다. 밥 먹다가 음식이 포크에 잘 안 찍혀서 힘을 줘서 콱 찍었더니 접시가 두 조각으로 갈라져 버렸다던가, 심심해서길가에 널부러져 있는 돌멩이를 찼더니 하늘 높이 날아가 빛이 되어 보이지 않는다던지 하는 일 같은 게 말이다. 신경이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진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그런데 시르쥬는 어디 갔지요? 같이 고 스타르 게임이라도 하려고 했더니." "글쎄 말입니다." 일단 도피하는 마음으로 시아와세노 비치까지 온 데다가 무슨 봉인이 풀렸는지는 몰라도 내 마법무구들이 전부 깨지고 나도 주체할 수 없는 이상한 힘을 가지게 되었지만 사건의 전말을 아무것도 모르는 이상에야 계속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오늘 다같이 고 스타르 게임이라도 같이 모여서 하려고 했던 것이다. 지금 시르젤과 함께 평온하고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불과 몇 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전혀 모른 채. "으음..." "산책이라도 가시겠습니까?" "네!" 어차피 별로 할 일도 없어 지루하던 차였다. 그래서 나는 시르젤의 제안에 따라 같이 이 별장 주위를 둘러보기로 했다. 바닷가는 저번에 가 봤기 때문에(거기서 이런저런 묘한 일은 있었지만) 이번에는 해안을 벗어나 안쪽 숲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시원하다. 기분 좋아∼" 햇빛을 차단해주는 나무들 밑은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아직 오전이라서 그렇게까지 더운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거의 여름에 들어서기 시작한 때라서 점차 태양빛이 따갑게 피부를 때리던 터였다. 물론 나는 시르젤이 옆에서 양산을 씌워줬기 때문에 직사광선을 직접 두들겨맞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시르젤이 내게 양산을 씌워주니 모양은 좀 그렇긴 하지만 자외선 차단제도 없는데 나의 섬세하고 여린 피부가 햇빛에 까맣게 타면 보기 좀 그렇잖아? 우하하핫. 게다가 나는 날씨 때문에 어깨가 다 드러나는 가벼운 셔츠 한장만 위에 걸치고 있는 데 말야. 그리고 요즘은 왜인지는 몰라도 시르젤이 옆에서 이런저런 거를 챙겨주는 게 굉장히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이 든다. 처음 만날때부터 예의바르게 깍듯이 대해줘서 그런 걸까? 하긴 집에서도 매일 하인하녀들에게 시중받으니까 자연스러운 게 당연할지도... "도시락을 좀 준비해왔습니다. 먹을까요?" "네!" 도시락이라니... 와아. 단지 집 뒤에 있는 숲에 산책을 나온 건데 그런 것까지 준비했단 말야? 정말 세심하게 이것저것 잘 챙겨주는 사람이라니깐. 시르젤은 어디서 가지고 온 건지 돗자리를 꺼내 바닥에 깔고 앉았다. "옆에 앉으십시오." "그럴까요?" 하지만 나는 시르젤의 옆에 앉지 않았다. 대신 그가 돗자리에 앉은 쪽하고는 반대쪽에 앉아 서로 등을 돌리고 앉은 꼴이 되었다. 왜 거기 앉았냐고 하면... 그냥 어쩐지 모르게 옆에 앉기는 좀 쑥쓰러워서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 둘은 아무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내 등 뒤에 앉아 있을 시르젤의 존재가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에 대해서 이상하게도 그렇게 많은 관심이 가지 않았다. 왜 그럴까? 평소에는 엄청나게 신경쓰이더니... 설마 시르젤이랑 내가 같이 있는데 내가 익숙해져가는 증거일까? 같이 지낸 시간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닐텐데? "그럼... 이제 도시락을..." "응, 저건 뭐죠?" 시르젤이 도시락을 먹자고 하려는 순간에 나는 저편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단지 이런저런 생각에 그냥 풍경이나 감상하자라는 생각에 주위를 살펴보던 내 눈에 작지도 크지도 않은 건물 하나가 눈에 띄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와 있는 조그마한 숲(사실 숲이라고 할 만큼도 못 되는 방풍림 정도 규모였다.)은 시아와세노 비치의 케이리가 가문 별장보다 조금 높은 지대에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숲 뒤편에 있는 건물을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아... 저것은!" "저건요?" "시르쥬와 제가 어린 시절 수련장소로 쓰던 장소 중 하나군요. 그러고보니 저 수련실을 보는 것도 오래간만입니다." "그래요? 한번 보면 안될까요? 시르젤 씨가 피나는 수련을 했던 장소라..." "그러도록 하죠." 시르젤이 시르쥬와 함께 어린 시절에 수련을 했다던 이 건물은 외관상으로 볼 때는 상당히 낡아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건물이 의외로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층수도 대략 3층 정도 되고 면적도 충분히 몇백 평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들어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도록 하지요." "설마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겠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제가 목숨을 걸고 카이엔 시를 지켜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런 시르젤의 말에 나는 조금 얼굴이 붉어져서는 고개를 약간 숙였다. 시... 시르젤? 난 그냥 장난스레 해 본 말인데 그렇게 진지하게 반응하면... 어쩐지 부끄럽잖아? 응? 그런데 내가 왜 부끄러워하는 거지? 지켜준다는 그 말에? 그야 시르젤은 날 좋아하고 이전에 저 숲 건너편의 백사장 바위 위에서 키스까지 한... 설레설레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처음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 여러 가지 야릇한 일이 있었고, 내가 날 감싸주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이곳으로 이동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런 거랑 시르젤을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인정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사실... 좀 그렇다. 내가 만약에 여자였거나, 또는 반대로 그가 여자였다면 나는 그를 사랑하는 연인으로 인정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성(同性)인 그를 상대로 그런 관계라고 생각하기에는 뭔가 좀... 찜찜하다고 해야 하나, 석연치 않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무언가가 좀 걸리적거렸다. 내가 호모도 아닌데 말이야. 물론 그렇다고 시르젤이 징그럽고 싫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이... 일단 들어가 보죠?" 하여간 창피한 마음을 감추며 시르젤과 함께 그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히에에엑! 뭐야? 설마 유령이야? 나는 깜짝 놀라서 무의식중에 뒷걸음질쳤다. 아마 지금이 밤이었다면 뒤도 안보고 도망쳤을 지도 모르지. "어...... 에에? 니가 왜 여기에?" "시... 시르쥬!? 너야말로 왜 여기 있는 거야?"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시르쥬였다. 이 자식, 오전 내내 안 보이더니 이런 낡은 건물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설마 여기서 어린 시절의 추억이라도 되새기면서 암살자 훈련이라도 하고 있던 건 아니겠지? "응? 나야 뭐... 그냥 여기서..." "시르쥬님. 시키신 대로 모든 일을 처리했습니다." 시르쥬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무언가를 얼버무리려고 할 때 다시 수련실의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나와서 말했다. 다소 녹색 기운이 감도는 검은 머리카락에 검푸른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었다. 옆에 검을 차고 있는 걸 보니 검사일까나? 시르쥬는 그 사람을 보더니 당황해서는 외쳤다. "나... 나오지 말고 들어가 있어!" "보란치!?" "시르젤 님!" "보란치,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시르쥬님의 명령을 받아 케이리가 준(準) 10인대를 데리고 왔습니다." "시르쥬가?" 웅... 무슨 일이지? 시르젤이 시르쥬 뒤에 있는 저 남자를 보고 깜짝 놀라다니 말야.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고 있는 사람은 시르쥬였다. 그녀석의 표정이 새파래지다 못해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흐음. 저게 바로 손발이 오그라진다는 걸까나? 뭐 잘못 먹은 것도 아닐테고 갑자기 똥이 급하게 마려운 것도 아닐테고 저 녀석 왜 저래? 어디 엄청나게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나? "시르쥬." "왜... 왜 그래, 형?" 시르젤이 시르쥬를 불렀다. 항상 평온을 유지하던 그의 얼굴에 약간의 노기가 서려 있었다. 시르쥬는 당황스런 표정으로 말을 더듬거리면서 시르젤의 말을 받았다. 음... 시르쥬가 뭔가를 잘못한 걸까나? 그것도 엄청 큰 잘못을 말이야. 시르젤은 왠만하면 저런 표정 안 지을텐데... "무슨 일로 보란치와 준 10인대를 불렀지?" "그... 그냥 사적인 일이야. 형은 신경 쓸 거 없어." "그렇다면 더욱 문책받아야겠군. 아무리 니가 외할아버님께 불만이 많다고 해도 저들을 니 개인적인 이유로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어." "....." "공적인 이유라도 마찬가지야. 원칙적으로는 우리 가족들 사이에 비밀로 하고 무언가를 하는 일은 없지. 만약 그랬다면 보란치가 여기 있다는 것을 내가 몰랐을 리가 없으니까. 시르쥬, 저들을 불러서 무엇을 했지? 아니면 지금부터 무언가를 하려던 참인가?" "그건... 그건..." "말하지 않을텐가? 니가 말하지 않아도 보란치에게 물어보면 다 나오게 되어 있어..." "그건... 전부 형을 위해서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길! 왜 이 시간에 여기 와 있는 거야!? 계획이 틀어지다니... 게다가 카이엔까지 여기에..." 형을 위해서라고? 시르쥬 녀석 갑자기 왜 저래? 무슨 큰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반쯤은 제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나와 시르젤이 여기에 와 있는 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 걸까?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길래... 횡설수설하는 시르쥬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다고 판단한 시르젤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넌 예전부터 그랬지. 자기 일이 잘 되고 있을 때는 한없이 느긋하고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유지하서도 무언가 일이 틀어지거나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는 쉽게 평정이 무너져버리고 격정을 내뿜곤 했으니 말이야." 음... 듣고보니 그렇네. 평소에 한창 생글거리면서 사람을 놀리는 듯한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저번에 학교에서 아시에한테 잡혀서 강제로 언령의 약속인지 뭔가를 당했을 때는 거의 아시에한테 죽으려고 용을 쓰듯 막 덤벼댔으니... "시르쥬가 저러니 보란치, 네가 이야기해 줄 수밖에 없겠군." "얘기하지 마!" 시르쥬가 급박하고 간절한 목소리로 보란치에게 외쳤지만 누가 봐도 케이리가 가문의 끗발은 시르쥬보다는 시르젤에게 있는 법. 보란치는 눈빛 하나 바꾸지 않고 시르젤에게 있는 진실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내가 결코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을. "저 투톱 보란치와 준 10인대는 오늘 아침 저 건물로 텔레포트 해 온 아시에 브리타뉴라는 여자 흑마법사와 키론 모아라드라는 남자를 맞이하여, 시르쥬님의 명령에 의해 그녀를 죽이고 남자의 신병을 구속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녀의 흑마법에 의해 준 10인대 인원 중 세 명이 죽고 두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저 투톱 보란치와 준 10인대는 오늘 아침 저 건물로 텔레포트 해 온 아시에 브리타뉴라는 여자 흑마법사와 키론 모아라드라는 남자를 맞이하여, 시르쥬님의 명령에 의해 그녀를 죽이고 남자의 신병을 구속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녀의 흑마법에 의해 준 10인대 인원 중 세 명이 죽고 두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에에?" "뭐?" 내가 저 보란치라는 사람의 말을 듣고 난 첫 반응은 이랬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아시에랑 키론이 거기서 왜 나오는데? 그리고 죽여?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시르젤도 갑작스러운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듯 보란치를 다시금 재촉했다. "천천히 다시 말해봐. 누굴 죽이고 누굴 구속해?" "시르쥬님의 명령에 따라 흑.마.법.사. 아시에 브리타뉴를 죽이고 키론 모아라드라는 남자를 구속했습니다. 그는 별일 아니라는 투로 간단히 이야기하고는 덧붙였다. "혹시 시르쥬님의 명령에 문제라도?" "지금... 시에가... 죽었다고요?" 보란치의 두 번째 말을 듣고서야 나는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결론은 말해서 저놈이 아시에를 죽였다는 말? 하지만 아시에는 유레카의 브리타뉴 가 집에 있을 텐데 이 장소를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아니면 혹시 저놈들이 납치해서 죽인 거야? 아냐아냐. 이 모든 이성적 판단에 앞서서 먼저 생각해야 할 건... 아시에가 죽...었...다? 보란치는 멍하니 중얼거린 내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가 상대하는 대상은 오직 시르젤과 시르쥬 뿐인 듯 나의 존재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내가 반쯤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반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자 시르젤은 항상 부드러웠던 표정에 걸맞지 않게 얼굴을 아까보다 더 찡그리고는 보란치에게 말했다. "안으로 안내해." "네." 보란치는 닫힌 수련실의 문을 다시 열었고 그쪽을 향해 걸었다. 나도 시르젤을 따라 걸으려고 했지만 왜인지 땅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고 싶지 않아. 보고 싶지 않아. 알고 싶지 않아. 마음속에 단단히 박힌 본능적인 공포가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아시에가... 아시에가 죽었다고?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응?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손과 발은 차츰 떨려가고 있었다. "카이엔 씨, 갑시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자. 시르젤이 착잡한 표정으로 내 옆으로 다가와서 내 손을 잡고는 말했다. "시르젤 씨... 진짜인거에요? 진짜로... 시에가." "들어갑시다. 확인해 봐야 알겠지요." "하지만... 진짜로... 그랬다면..." "확인해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시에 씨는 카이엔 씨의 소중한 가족이지 않습니까?" "그치만... 무섭... 무섭단 말에요. 가고 싶지 않아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시르젤? 아시에가 죽었다니. 그런 질 나쁜 농담 따위 시르젤이 할 리가 없잖아? 아, 그래. 시르젤은 아시에가 죽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이건 전부 장난꾸러기 시르쥬와 함게 짜고 치는 고스톱같은 거지? 그치? 그냥 장난치는 거지? 아니면 무슨 봉인을 풀기 위해 남을 시험에 빠지게 하려는 거 아냐? 그래. 무협지나 만화책 보면 자주 나오잖아? 무슨 최종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주인공의 죽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환영 속에서 보여주면서 그런 정신적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것 같은 거 말야. 그래. 아마도 그런 걸꺼야. "거짓말이죠? 거짓말이라고 말해 줘요! 제발!" "...가 봅시다." "끼약!" 시르젤은 거친 손길로 나를 들쳐메고는 보란치가 열어준 문을 따라 수련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잇. 이것 좀 놔! 평소에는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주더니 이번에는 왜 그래? 왜 그러는 거냐고! "여기입니다." "세상에..." 다소 놀란 듯한 시르젤의 목소리. 뭐... 뭐야?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래? 보통 사람이 이런 시르젤을 보면 그의 표정변화가 별로 크지 않아 보이지만 평소에 감정변화가 크지 않은 시르젤에게는 이 정도 목소리 변화만 해도 엄청 놀랐다는 걸 의미한다는 걸 나는 차츰 알아가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눈을 감고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시르젤의 등 뒤로 들쳐메어져 있던 나는 시르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다가 결국에는 '그 장면'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으아아아아악!" 쿵. 시르젤은 내가 '그 장면'을 보았다는 순간을 인지한 순간 나를 꽉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았고 나는 맥없이 바닥에 쿵 하고 쓰러졌다. 단단한 바닥에 무릎이 부딪혀 아팠다. 기혈환을 지금 착용하고 있었다면 전혀 느끼지 못했을 그런 고통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런 고통 따위를 느끼고 있을 만한 정신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창문으로 밝게 쏟아져들어오는 햇빛 아래 펼쳐진 장면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팔, 다리, 몸, 얼굴. 가릴 데 없이 날카로운 검으로 난자당해 있었다. 엉망으로 찢어진 교복은 고깃덩어리 사이에 흩어진 천쪼가리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말라붙은 피가 바닥과 옷가지에 제멋대로 엉겨붙어 있었다. 어찌나 심하게 시신이 훼손되어 있는지, 나는 하마터면 그녀가 아시에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왜 이미 죽은 사람의 시신을 훼손했나?" "...시르쥬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마른 하늘에 갑자기 내려닥친 날벼락이었다. 이렇게나 평화로운 날에 날아온 비보(悲報)였기 때문에 나는 쉽사리 믿을 수 없었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 눈앞에 그녀의 시신을 두고도, 아직 나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여전히 그녀의 죽음을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명확한 진실이자 쓰라린 현실. 몬스터에게 죽어도 살아나는 게임 속 가상현실 공간이 아니다. "으흑.... 으흑흑흑." 결국 마음 속으로 인정해버리고 나자, 그때까지 필사적으로 안간힘을 써서 막고 있던 눈물샘의 홍수가 둑을 삼켜버렸다.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내가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그때는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조금 친해진 사람들이라 그들이 죽을 때 눈물을 뿌리긴 했지만 다시 며칠 지나지 않아 곧 그 일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시에는... 문길이는 그렇게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껏 쭉 인정하지 않고 지내왔지만, 녀석은... 질리도록 외로운 생활을 해 왔던 내 삶에 있어서 나의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소중한 친구다. 비록 그놈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저주로 괴롭히고, 변태적인 놈인데다 결국에는 여자로 변해서 나한테 사랑을 고백해오는 황당한 짓까지 했어도 그녀석을 만날 때부터 나와 문길이... 아시에는 쭈욱 친구였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아시에가 문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조금은 부담스러우면서도 사실은 너무 기뻤다. 그녀석은 이곳으로 오면서 떠나보낸 원래 세계에 대해서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벗이었다. 나는 아직도 문길이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내가 쓰던 연예인 팬픽이 못된 양아치놈들한테 빼앗겨 제멋대로 읽혀지고 찢겨지고 있을 때 녀석은 갑자기 끼어들어 말했었다. [넌 뭐야?] [지나가던 사람 A] 쿡쿡... 양아치들이 전부 어이없는 눈길로 문길이를 바라보는 와중에서도 나는 웃었다. 처음부터 꽤 괜찮은 센스를 가진 녀석이었다. [별로 널 위해서는 아냐.] 문길이가 전학온 이후로, 소극적이고 소심한 성격을 가졌던 내게 날아오는 위해는 없어졌다. 악의적인 반 급우들이라던지, 괴팍하고 성질 못된 선생들은 하나같이 문길이의 저주에 의해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나는 문길이 녀석 덕분에 제대로 된 친구관계를 가지지 못했다고 불평했지만 애초부터 내게는 제대로 된 친구같은 건 없었다. 별로 나를 위해서 한 일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것들은 분명히 나를 향한 문길이의 호의였다. 그런 그에게 나는 충분히 감사하고 보답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지켜주지도 못했다. 약속했는데... 아직 문길이의 기억을 찾지 못한 아시에가 말했었다. [만약 내가 기억을 찾아 성격이 변해도... 카이는 날 지금처럼 보살펴줄거야?] [응. 보살펴줄께.] [약속하는... 거지?] [약속할께.] 바보같이. 약속해놓고는.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해놓고는! 아시에가 문길이의 기억을 찾은 이후에 나는 그녀를 내버렸다. 갑자기 날 좋아한다고 앵겨오는 그녀에게 깜짝 놀란 나는 그녀를 회피해왔던 것이다. 조금 귀찮게 굴어도... 20년이 넘는 기간동안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그녀는 내 친구 문길이고 소중한 가족인 아시에였는데... 좀 더 잘해줄 수 있었는데... 젠장! 결국 나는 문길이에게도, 아시에에게도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 그녀석은 고등학교에서 날 지켜주고 유일한 벗이 되었고, 이곳으로 와서도 핀치의 경기장에서 나를 구해주었다. 그런데 나는 그녀에게 뭘 해줬지? 씻을 수 없는 빚만 남기고 떠나버리면 어쩌란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이럴 줄 알았다면 그녀의 소원대로 하룻밤의 뜨거운 관계라도 가져주는 건데... 지금은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어. "으흐흐흑." 한참을 울었는데도 자꾸만 그치지 않고 울음이 나왔다. 몸 속의 수분을 모두 빼내는 것처럼 눈물과 콧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 울음이 간신히 수그러들 때쯤 시르젤이 내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여전히 친절하고 준비성이 뛰어난 사람.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시르젤의 친절에 감사를 표할 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시르쥬." "...어!" 아직 질질 짠 여파가 남아 있는 듯 내 말은 힘이 없고 울먹이고 있었지만 시르쥬는 잔뜩 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시에는 죽었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 우리 엄마가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피가 이미 말라붙은 걸로 봐서 죽은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죽은 지 시간이 오래 지난 시신은 엄마같은 고위 신관도 부활시킬 수 없다. "왜 시에를 죽였어? 왜! 어째서!" 나는 거의 울먹이다시피한 목소리로 시르쥬를 향해 물었다. 사실은 목소리를 낮게 깔고 살기로 가득찬 시선을 놈한테 뿌리면서 말하려고 했지만 지금의 격앙된 감정으로는 도저히 그렇게 말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나도 궁금하다. 시르쥬.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나... 난 단지... 형을 위해서?" "날 위해? 카이엔의 소중한 친구를 죽이는 게 날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나, 시르쥬?" "그... 그래! 왜냐하면... 그년은 날 협박하고 죽이려 했어! 게다가 형을 제치고 감히 카이엔을 차지하려고..." "시에를 '그년'이라고 부르지 마!" 나는 폭발해서 벌떡 일어나 시르쥬에게 주먹을 날렸다. 시르쥬나 시르젤뿐만이 아니라 나도 깜짝 놀랄 정도의 스피드였다. 시르쥬는 황급히 두 팔을 엑스자 모양으로 만들어 내 주먹을 가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압(拳壓)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날아가 벽에 박혔다. "우아아악!" 실내에 울리는 시르쥬의 비명소리. 엄살부리지 말라고. 이건 시작에 불과해. 봉인이 깨졌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지금의 나는 '힘'을 가지고 있어. 모든 사건의 전모를 그 더러운 입으로 들은 다음에 반드시 네놈을... 죽여버릴테야. 넌 아직 시에가 당한 고통의 10배는 더 받아야 한다구! "으으으." 바닥에 쓰러져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흘리는 시르쥬. 하지만 나는 적당히 하고 끝낼 생각이 전혀 없다. 시르쥬 녀석은 아시에를 죽였다. 놈은 시체까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손상했시킬 정도로 처음부터 악의적이었다. 만일 내가 저놈을 살려둔다면, 인간이 아냐! 나는 천천히 걸어가 시르쥬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내 키가 작았기 때문에 녀석이 공중에 붕 뜬다던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런 모양새 따윈 어찌되건 상관없었다. 여전히 울분이 가시지 않은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단지 증오심만이 계속해서 터져나올 것 같은 눈물을 막고 있는 가운데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왜 그랬어!" "...." "대답해!" "으윽... 후후후." 자조적이면서 반쯤은 자포자기한 듯한 묘한 웃음을 흘리는 시르쥬. 나는 그것이 비웃음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녀석의 멱살을 잡고 있는 상태에서 잔뜩 힘이 들어간 다른 쪽 주먹으로 놈의 아가리를 날려 버리려고 할 때 뒤로 젖혀진 내 팔을 누군가 잡았다. "그만 두십시오. 카이엔 씨." "놔요!" "놓지 않겠습니다." "놓지 않는다면, 아무리 시르젤 씨라고 해도 가만두지 않을 거에요!" 진심이었다. 시르쥬 놈을 죽인다. 손가락을 하나씩 밟아 부러뜨리고, 머리카락을 모조리 뽑아버리고, 팔다리의 관절을 반대로 비틀고, 이빨을 전부 뽑아버리면서 내 머리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놈에게 맛보게 한 후에 죽을 때까지 사타구니를 걷어차버릴 생각이었다. 시르젤뿐만 아니라 그 누가 말린다고 해도 한번 마음속에 각인된 내 결심을 뒤집을 수는 없다. 하지만 시르젤 역시 나를 막겠다는 생각은 확고한 듯 했다. "저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을 겁니다. 혈육을 잃는 슬픔을 다시 한번 맛보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혈육을 잃어?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변할 내 결심은 아니었다. 용서해주기에는 지나치게 큰 범죄를 시르쥬는 저질러버렸다. "저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보복할 거에요!" 나는 시르젤에게 붙잡힌 손을 힘껏 휘둘러 시르젤을 뿌리쳤다. 강력한 힘이 들어간 내 팔의 압력 때문에 시르젤이 뒤로 몇 걸음 주춤거렸다. 시르젤을 떼어내고 다시 한번 시르쥬를 패대기치려할 때 내 목덜미 밑으로 싸늘한 검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 검 주위에는 서슬퍼런 연두색 검기가 번쩍이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까의 그 보란치라는 검사였다. "시르쥬님의 몸에서 손을 떼도록." "소드 마스터인가... 그렇다면 시에를 죽인 건 네놈이겠군. 이 머저리의 실력가지고는 시에를 절대 죽일 수 없었을테니." "지금 내게 질문할 입장이 아닐텐데?" 보란치의 응답은 자신의 검을 움직여 내 목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검에 서린 검기가 아까보다 더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목이 다소 베인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아마도 피가 나는 듯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놈의 말이 별로 겁나지 않았다. 약간 긴장한 것만은 사실이었지만. "해볼테면 해봐." "그만 둬, 보란치!" 보란치가 내 말을 듣고 진짜로 할 것 같은 눈빛을 지었을 때 시르젤이 그를 말렸다. 하지만 그는 내 목을 짓누르던 검을 살짝 떼기만 했을 뿐, 여전히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시르젤 님. 제가 이 검을 치우게 된다면, 시르쥬님은 반드시 죽을 겁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카이엔 씨를 죽일 순 없어!" "둘 다 살려야한다라... 복잡한 문제로군요." "훗." 시르젤과 보란치가 이야기하는 사이에 나는 한 손으로 붙잡고 있던 시르쥬를 보란치 쪽으로 집어던졌다. 보란치가 그놈을 받으면서 잠깐 흠칫하는 사이에, 나는 몸을 옆으로 움직여 녀석의 검이 닿는 거리에서 빠져나왔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긴장감을 느낀 탓인지, 나의 울먹임은 점차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거대한 분노와 증오의 물길이 하나둘씩 자리를 채워갔다. 나는 아까보다는 훨씬 싸늘해진 목소리로 보란치에게 말했다. "너부터 죽여주지." "그만두십시오, 카이엔 씨!" "기본적으로 시르젤 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만, 저도 생명이 위험해지면 자위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시르쥬는 간신히 일어서 있었고 시르젤이 그를 부축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보란치와 조금 떨어져 있는 내가 마주보고 있는 형국이었다. 소드 마스터인 그를 내가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이길 것인지 하는 걱정 따위는 전혀 없었다. 나는 단지, 무조건 싸우고, 무조건 죽인다는 생각만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스스슥. 아까 준 10인대 어쩌고 하는 녀석들인가. 보란치 이외에도 다른 검사들이 하나둘씩 나타나 내 주위를 포위했다. 이놈들이 아시에를 죽인 놈들이군... 그래. 모조리 죽여주마. 설사 이 자리에서 내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시에의 죽음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수련실 내를 감싸고 있을 때 시르젤이 약간은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말했다. "카이엔 씨. 그만두십시오. 시르쥬 문제는 제가 어떻게든..." "어떻게 하겠다는 거죠?" "어떻게.... 말입니까?" "용서. 유배. 좌천. 유폐, 귀양. 대충 그런 단어들을 언급하고 싶으신가요? 웃기지 마요! 시르쥬놈의 숨이 붙어 있는 이상은 절대 복수는 끝나지 않아요!" "어떻게든... 마음을 돌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못난 동생을 둔 바보같은 형으로서, 제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겠습니다. 무언가 복수를 하고 싶다면... 저에게 하십시오." 어쩐지 쓸쓸해진다. 그야 형이니까, 동생을 생각하고 지키려 하는 건 당연하겠지. 하지만 그게 왜 그렇게 슬픈 걸까. 이렇게 격정에 사로잡혀 있는 때, 그가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사실이 왜 이렇게 아쉽고 안타까운 걸까? 순간 흔들리려는 마음을 나는 다시 가다듬었다. 만약에 내가 여전히 마법무구들에 둘러싸여 시르쥬를 죽일 힘이 전혀 없었다면,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했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이 소드 마스터를 상대로 통할지는 나도 모를 일이지만 힘을 가진 이상, 그 힘으로 내가 생각하는 의무와 결의를 시행해야만 했다. "시르젤 씨..."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보란치가 다소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시르젤이 그를 제지한 것이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두 손으로 시르젤의 얼굴을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얼굴을 내 쪽으로 끌어다 왔고 나는 발꿈치를 들었다. 어쨌건 시르젤의 키는 나보다 20센치 가량은 크니까. "카이엔 씨..." "사랑해요." 나는 그대로 시르젤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눈을 감았다. 그와 나의 입술이 서로 겹쳐지면서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이 내 입술에 전해져왔다. 나는 천천히 달라붙어 있던 입술을 떼면서, 그를 받아들였다. 미끈한 체액에 감싸인 말랑말랑한 혀끝이 내 입안을 부드럽게 휘저었고 그의 새하얀 이가 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나도 그의 깜짝스런 짓거리에 발맞추어 내 입 속으로 파고들어온 그의 혀를 살짝 깨물어주었다. 서로의 몸을 탐험하면서 쉴새없이 자극을 가하는 딥 키스는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 순간만은, 나는 내가 남자라거나, 시르젤 역시도 남자라는 사실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성별따위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졌다. 이미 우리는 서로의 몸을 격렬하게 껴안고 있었고, 그는 나의 입술을 강하게 빨고 있었다. 그의 반응에 발맞추어, 나도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와 함께 있는 힘껏 그를 빨아들였다. 하지만 키스가 클라이막스로 다가갈수록, 나는 점차 불안한 감정에 초조해지고 있었다. 미안해요... 시르젤 씨. 시르쥬를 지키고자 하는 당신의 마음은 알겠지만, 저는 하늘이 두 쪽나는 일이 있어도 녀석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키스를 끝내고, 서로가 헐떡이는 숨을 가다듬고 있을 때 나는 말했다. "미안해요... 시르젤 씨." "네?" 퍼억 시르젤이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내 오른손 주먹이 시르젤의 배에 꽂혀들어갔다. 조금 힘을 과하게 넣은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직까지 힘 조절이 완전하지 않단 말이야.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충격이 너무 지나치지도, 약하지도 않은 듯 시르젤은 푹 쓰러지면서 천천히 내 몸 위로 무너져내렸다. 나는 시르젤을 살짝 옆에 눕힌 다음에, 시르쥬를 보호하고 있는 보란치를 노려보았다. "뻔뻔하게도 남의 눈앞에서 잘도 변태스러운 짓을 하는군, 그런 예쁘장한 외모로 시르젤님을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건가?" "후후... 글쎄? 누가 누구에게 처음 빠졌는지는 시르젤 씨 본인이나 시르쥬 녀석한테 직접 물어보시지?" 아직까지 마지막 키스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지만, 나는 빠른 속도로 몸의 안정을 되찾아 갔다. 이제는 결과야 어찌 되었든, 격돌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까지 와버린 것이다. "보란치... 최악의 경우라도 녀석을 절대 죽이지 마." "시르쥬 님마저 그런 말씀을..." "시레나 누나에 이어 카이엔마저 죽으면... 형은 완전히 망가져 버릴테니까." "...알았습니다." 보란치가 시르쥬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가운데 나는 녀석들을 노려보았다. 솔직히 나는 누군가와 싸우는 방법 같은 건 전혀 모른다. 무기도 없는 데다가 있어도 쓸 줄 모르고, 그렇다고 맨손으로 싸우는 무술 같은 것도 전혀 해 본 적이 없다. 공격이 아닌 방어라도 마찬가지. 누군가에게 맞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문길이가 있었기에, 그것도 한때였다. 게다가 저런 검을 맞아 피하거나 막는 법 따위는 더욱 더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싸움을 결정했다. 이건 정체불명의 힘에 대한 과신이 아니다. 내 머릿속 깊숙한 곳에서 알 수 없는 기억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내가 한번도 보고 들은 적이 없는 기묘한 기억들이 말이다. 아직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이상한 기억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싸움에 임하는 내 마음을 편안하게 했고 자신감을 부여했다. 이제는... 혼신의 힘을 다해 부딪히는 것만 남았을 뿐. 제132화 : 학살(虐殺) 떠오른다. 하나둘씩 떠오른다.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동안 수면 깊이 잠들어 있던 기억이 수면 위로 천천히 부상(浮上)하기 시작했다. 나의 힘에 대해. 나의 능력에 대해.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먼저 공격해 오지 않을 텐가? 기껏 기회를 주려고 했더니 말이야." 보란치가 비웃음을 날리면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도발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를 노려보는 자세만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깊숙히 억눌러 오고 있는 분노의 목소리가 나에게 곧장 달려나가 그를 패대기치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아직 머릿속을 잠식해오는 혼란스런 기억의 파편들을 제대로 받아들여 융화시키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단칼에 제압해 주지." 보란치는 땅을 박차고 나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이전에 자하기니아의 무술 대회에서 보았듯, 눈앞의 소드 마스터 녀석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내게 달려왔다. 하지만 이상했다. 분명 빠르다는 걸 알고 있는데, 눈앞에서 그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데 내 머릿속에서는 그가 달려오는 것이 슬로우 모션으로 뛰어오는 것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그가 밟는 발걸음 한 걸음 한 걸음을 나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볼 수 있었다. 그는 달리면서 오른손으로 옆구리에 찬 검을 뽑았고, 나를 향해 검을 빼들며 돌진해 왔다. 휘익 나는 살짝 몸을 돌려 가볍게 그의 공격을 피해냈다. 의외의 일이라고 생각한 걸까? 보란치의 눈동자에 다소 놀란 듯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피한 것만으로 머뭇거릴 시간은 없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돌아서서 바로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공격은 한 박자 늦었고, 녀석 역시 어렵지 않게 내 공격을 피하고 검을 휘둘렀다. 내 옆구리를 향해 휘둘러오는 검. 검기는 서리지 않았지만 무시무시한 기세다. 평소의 나였다면 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몸이 양단되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달랐다. 검을 막을 만한 무기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는 매트릭스를 찍듯 몸을 뒤로 젖혀 아슬아슬하게 검을 피해냈다. 그리고는 순간의 지체도 없이 그 자세로 바로 보란치의 오른손목을 걷어찼다. 아까와 같이 타이밍을 놓치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내 몸은 점차 전투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보란치도 소드 마스터라는 이름값은 하는 듯 오른손목에 받은 타격에도 불구하고 검을 떨어뜨리지 않고 꼭 쥐고 있었다. 그가 불안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를 공격해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체조선수처럼 덤블링을 해서 그의 사정거리에서 빠져나갔다. "브리타뉴가의 이름높은 미소년 카이엔이 싸움에도 소질이 있을 줄은 몰랐군. 처음 듣는 이야기야." "그렇지. 나도 처음이니까." 우후후후. 왜일까? 두근거리는 가슴에서 강력한 아드레날린이 뿜어져나와 온 몸을 돌았다. 방금 전까지 수그러진 울분의 감정을 분노가 채우고 있었다면 이번에는 분노가 수그러지고 흥분이 모자란 감정을 채워넣고 있었다. 최초의 전투를 겪으면서 어딘지 모르게 아슬아슬하고 짜릿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용돈을 받고 어디에 쓸 지 몰라 즐거워하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흥분해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가지, 타앗!" "멍청한 녀석. 내 검의 간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보... 보란치. 저것 좀 봐! 카이엔의 눈이... 보통 때처럼 에메랄드 색이 아냐. 피빛처럼 검붉어!" "시르쥬 님은 물러나 계십시오, 위험합니다!" 후후. 뭐라고? 눈 색이 검붉어? 그게 어쨌는데? 그래서 무섭냐? 자기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 아시에를 죽였으면서, 자기가 죽는 것은 두렵냐? 아시에를 상대하다가 저 10인댄가 뭔가 하는 녀석들 중 몇 명이 죽고 중경상을 입은 자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내 주위를 에워싼 채 나와 보란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녀석은 서너 명에 지나지 않았다. 비겁한 자식! 암살자 집안인지 뭔지 몰라도 뒤에서 음모나 파면서 숨어서 일을 벌이는 능력은 잘 타고 난 모양이지? 보란치의 검 간격 안에 들어왔을 때, 나는 미끄러지면서 그의 아랫쪽으로 파고들어갔다. 간격 안에 들어오면 바로 검을 휘두를 생각이었던 그는 당황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나는 그럴 틈을 그에게 주지 않았다. 내 몸 속에서 들끓고 있는 뜨거운 피는, 전투에 있어서 어떠한 망설임도 거부하고 있었다. 보란치가 뒤로 물러서려고 백 점프를 한 순간,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녀석의 다리를 걸었다. 그가 쓰러진다면 바로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지만 그는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불안정한 자세로 바닥을 짚더니 뒤로 물러났다. 역시 괜히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는 건가. "방심할 수 없겠군." 보란치가 손을 털면서 검을 바로잡았다. 그의 검에서 지금까지 쓰지 않았던 연록색의 검기가 뿜어져나왔다. 후후. 지금까지는 봐줬다고 말할 셈인가? 상황이 더 나에게 불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겁먹거나 쫄기는 커녕 더욱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 그렇게 나서야지. 더 세게 공격해보라고. "하앗!" 보란치는 일정한 거리까지 내게 서서히 접근한 후에, 맨손인 나보다 긴 간격을 이용해서 찌르기와 베기로 나를 공격해 들어왔다. 영화에서나 보던 칼싸움보다 훨씬 신속한 검놀림이었다. 방금 전까지의 틈이 넓은 공격과는 달리, 약점을 노출하지 않는 정교한 검술에 나는 몇 군데 상처를 입었다. 여름의 더운 날씨 탓에, 나는 얇은 셔츠 하나만 걸치고 있었고, 그것도 양쪽 어깨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니까, 상대의 공격력을 감소시킬 수 있는 방어구라는 것은 나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뭐, 몇몇 RPG게임의 여성캐릭터들은 노출도가 더 심해지는 방어구일수록 방어력이 증가한다고 하지만, 나는 여성캐릭터가 아니라서 그런지 몰라도 보란치의 검기가 살짝만 피부를 스쳐지나가기만 해도 여린 피부가 갈라지면서 피를 뿌렸다. 무한의 팔찌도 없는 판에 흉터 남으면 안되는데... 하지만 몇 번 베인 것도 잠시 뿐. 그의 검술이 내 눈과 몸에 익숙해지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쾌검(快劍)도 그 동작 하나하나의 움직임은 물론, 다음에는 어디로 움직일 지 예측할 수 있었고, 나의 몸도 마치 무림고수처럼 유유히 움직이며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의 검을 피해갔다. 완전히 보란치의 검을 읽을 수 있게 된 시점에서 나는 외쳤다. "너의 공격패턴을 알아냈다!" 원래는 '강강약 강강강약 강중약이다'라는 말도 붙이려고 했지만 실제 보란차의 검 패턴은 그것과는 달랐기 때문에 헷갈릴까봐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그런 쓸데없는 말을 덧붙힐 여유도 없었다. 나는 찰나의 순간에 녀석에게 한껏 비웃음을 날려 준 후에 복싱선수가 적에게 접근해가듯 순식간에 그의 코앞으로 접근해서 어퍼컷을 날렸다. 퍼억 "크윽!" 하지만 보란치는 여전히 끈질기게 완전히 넘어지지 않고 낙법을 써서 충격을 완화시킨 다음에 데굴데굴 굴러서 나와 거리를 벌렸다. 그가 다시 빈틈없는 자세로 검을 세웠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공격해 들어가지 못하고 숨을 골랐다. 더운 여름날에 흐르는 땀이 그의 검에 베인 상처들 사이로 들어가서 따가웠지만, 그런 고통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나는 전투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누가 소드 마스터 아니랄까봐 되게 끈질기네 그거. 방금 전의 타격이라면 턱뼈가 날아갔을 텐데 말이야. 딱 보란치가 손을 까딱였다. 그와 동시에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다른 10인대라는 녀석들이 검을 빼들고는 내 주위로 압박해왔다. 숫자는 보란치를 포함해서 총 다섯 명. 10인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물론 시르쥬 녀석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초조하게 이 싸움을 지켜보고 있다. 한심한 녀석 같으니라고. 하여간 보란치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나를 쉽게 거꾸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왜일까? 다섯 명의 인원에게 포위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가슴은 더욱 더 두근거렸다. 더 강한 적들과 싸우게 되는 것이 즐겁게 느껴졌다. 이상하지? 지금까지는 남과 싸우는 것 따위는 엄청 하고 싶지 않았고, 정말 싫었는데 말이야. 내 안에 내가 모르는 본능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이상할 정도로 본능적으로 머릿속에 각인되는 전투 방법과 점차 익숙해지는 몸의 움직임이 내 정신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걸까? "잘 들어라. 카이엔을 죽이지 마라. 다시말해서, 숨만 붙어 있다면, 무슨 짓을 써도 좋다. 녀석을 제압해라!" 보란치가 명령을 내렸다. 흠. 생각보다 단단한 턱뼈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군. 나도 세게 때린다고 때렸는데 말이야. 그의 명령에 끝남과 동시에 다섯 명의 검사가 한꺼번에 내게 돌진해 왔다. 하지만 나는 녀석들이 동시에 나를 공격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는 단지 '감'으로 제일 약해 보이는 놈에게 돌진했고, 그놈의 검을 피한 다음에 바람이 흘러가듯이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그에게 접근해서 검을 쥔 손목을 비틀었다. 보란치만큼 강하지 못한 그 검사는 아악 소리를 지르며 검을 떨어뜨렸고, 나는 곧바로 떨어진 검을 쥐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놈을 베어 버리려고 했지만 다른 적들이 바로 등 뒤에서 칼을 내리치려고 하는 터라 황급히 내게 검을 뺏긴 녀석을 돌려서 방패로 삼았다. 동료를 찌르기 직전의 상황에서 그들이 멈칫하는 동안에, 나는 곧바로 녀석들과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나는 지금 눈앞의 적들에 대응할 수 있는 중요한 무기, 검을 손에 넣었다. 싸움은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거리와 파괴력의 한계가 있는 맨손과 맨발로는 수세적인 입장에다가 적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없었지만 이제는 적과 같은 거리에서 대등하게 맞설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그들도 그런 사실을 인지한 듯 흠칫하면서 공세를 멈췄다. 당연하겠지. 방금 전까지 맨손으로도 대등하게 소드 마스터인 보란치와 싸웠던 나다. 검까지 쥐여진 마당에 쉽게 공격해 들어갈 수 없겠지. "그러고보니 검을 제대로 쥐어 보는 것도 처음인걸?" 나는 보란치와 그 똘마니들을 향해 피식 웃어 보았다. 사실 정말로 진검을 제대로 쥔 것은 처음이었다. 그 전에 칼을 잡아 본 것은 오로지 사이엔 형의 명왕검을 만져 보았을 때인데 그때는 검의 무게 때문에 제대로 잡고 흔들지도 못했던 것이다. 기(氣)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보통 사람은 들 수도 없는 무거운 병장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으니까 말이야. "주눅들지 말고 공격해! 지금까지 힘들게 수련한 실력은 다 어디로 간 거냐!" 힘든 훈련이라... 그렇겠지. 저들도 저정도까지 검을 다루게 될 때까지는 분명 쉽지 않은 훈련 과정을 오랫동안 거쳤을 거다. 사이엔 형이나 파르스 가문의 실론같은 천재들도 있지만 그 사람들도 어린시절부터 부단한 노력을 해 온 사람들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검을 한번도 잡아본 적이 없고, 제대로 된 싸움조차 해 본적이 없는 그야말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반시민이다. 외모는 빼고 말이지. 후후. 최근까지만 해도 내 몸에는 마력(魔力)조차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내가, 지금까지 검술에 일정한 경지에 오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저들을 압도하고 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내가 말이다. 말도 안 될 정도로 불공평한 세상인걸? 하하하핫. 아까 나한테 검을 뺏긴 놈만 뺀 나머지 녀석들의 검이 일제히 나를 덮쳐 왔다. 나는 이 상황에서 나의 검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휘두른 검이 엄청난 피를 뿌리게 될 거라는 사실도. "살(殺)!"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황금빛 검기가 검에서 뿜어져나왔다. 넋을 잃을 정도로 반짝이고 빛나는 검광이... 그 다음 순간 내 앞에는 아까 공격에서 빠진 한 놈과 내 검을 간신히 피한 보란치를 제외한 세 명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죽였다. 사람을 죽였다. 아무런 망설임없이 단칼에 베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나는 내가 저지른 이 처참한 살육의 현장을 눈앞에서 보고도, 담담하게 서 있었다. 붉은 피가 흘러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검의 모습이 묘하게 식욕(食慾)을 자극했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설마 내가 피를 먹고 싶어하는 걸까? 문득 정신차리고 보니 내 몸과 옷 곳곳에도 피가 묻어 있다. "거... 검기!?" 보란치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면서 한 걸음 물러났다. 방금 내가 사용한 것이 검기인가? 그렇군. 황금빛으로 빛나던 그것은 검기였군. "보... 보란치, 도망쳐야 해! 녀석은 미쳤어! 눈을 봐! 마치 악귀같은 적안(赤眼)이잖아!" 도망가려고? 내가 네녀석을 도망가게 놓아 둘 것 같아? 내가 걸음을 떼자 시르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련실의 입구를 향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갔다. 나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녀석을 쫓았다. 보란치가 내 앞길을 막아섰지만 나는 나 자신조차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그녀석을 뛰어넘어 시르쥬를 쫓아갔다. 이 속도는 아마도...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사이엔 형의 속도에 근접한 스피드일지도 모른다. 빠각 시르쥬도 예전의 나라면 절대로 못 쫓아갈 정도로 빠른 속도였지만, 내가 달리는 속도는 일반적인 인간이 낼 수 있는 속도라는 개념을 크게 벗어나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도망가는 시르쥬의 등뒤까지 접근해 킥을 날렸다. 그다지 강한 위력은 아니었지만, 달려가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녀석은 금세 균형을 잃고 바닥에 넘어져 굴렀다. "으으..." "어딜 도망가려고 그래?" 아까전에 얻어맞은 데다가 땅바닥에 여러 번 부딪치고 끄인 탓인지 시르쥬는 군데군데 타박상을 입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한심한 녀석. 그것도 아프다고 그러는 거냐? 아직 아시에가 겪은 고통의 십분의 일도 돌려주지 못했다고! "시르쥬님!" 등 뒤에서 보란치가 소리를 외치면서 달려왔다. 놈과 함께 남아있던 다른 검사 녀석도 죽은 동료의 검을 빼들고 함께 달려왔다. 아. 귀찮은 녀석들인걸. 진짜. 이번에는 두번 다시 귀찮게 굴 수 없도록 숨통을 끊어놓아야겠어. "거기서 얌전히 누워 기다리고 있도록. 시르쥬 네놈은 다른 녀석들처럼 쉽게 죽여주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나는 다시 피묻은 검을 들었다. 정신을 집중하자 다시금 검에서 황금빛 광채가 솟아나왔다. 하지만 내게 돌진해오는 보란치의 검 역시 연두색 검기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검기(劍氣)대 검기의 대결이었다. 파지직 서로의 검이 마주치면서 연두색 검기와 황금빛 검기가 충돌을 일으키며, 아름다운 불꽃을 사방으로 튀겨냈다. 하지만 막상 싸우고 있는 나와 보란치는 그런 검광의 이름다움을 느낄 새도 없이 서로가 필사적으로 맞부딪치고 있었다. 그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불과 한두 합의 싸움에 전투에 완전히 익숙해진 나는 눈앞의 소드 마스터보다 기술과 힘 모두에서 앞서고 있었다. 내가 먼저 이 격돌에서 뒤로 몸을 뺀 것은, 단지 아직 살아있던 10인대 중 한 녀석이 옆에서 합공을 시도해왔기 때문이었다. 필사적으로 맞붙은 격돌에서 한쪽이 뒤로 빠진 절호의 순간을 보란치가 놓칠 리 없다. 내게 뒤지고는 있지만 분명히 그는 싸움에 잔뼈가 굵은 소드 마스터였다. 선명한 검기를 발하는 꽤 좋은 검이 나를 그대로 갈라버리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베어들어왔다. 문득 나는 갑자기 생각난 한가지 기술을 시도해보고 싶어졌다. "검풍(劍風)!" 순간 내 검에서 솟아나간 강력한 압력이 강력한 풍압으로 변해 보란치와 떨거지 한 놈을 덮쳤다. 떨거지는 갑작스런 바람에 휘말려 순식간에 저쪽 벽으로 날아가 부딪쳤고, 보란치는 곧바로 몸을 숙여 저항을 줄이는 방법으로 대항했지만 그래도 십여 미터 가량 뒤쪽으로 밀려나갔다. 어쩌나 강한 풍압인지 그 반작용으로 기술을 쓴 나조차도 뒤로 몇 걸음 물러나야만 했다. "흐음... 그런대로 쓸만한걸?" 이 기술은 이전에 학교에서 피요르 공주를 호위하던 기사 실론 파르스가 썼던 기술을 응용한 거다. 하지만 어떻게 기의 흐름을 조절시킬 것인가가 이미 머리속에 선명이 떠올라 있었다 해도 너무나 정확하게 생각대로 써져서 내가 놀랄 지경이었다. "어... 어떻게 그런 기술을...!" 보란치는 크게 당황했다. 저 표정으로 봐서 저놈은 이런 기술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저 소드 마스터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고급 기술인 것이다. 아마도 내 능력은 상급의 소드 마스터 정도에 속해 있는 걸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사이엔 형과 싸워서도 그렇게 밀리지 않을수도...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짜릿한 기분이다. 만날 주변사람들에게 힘없이 소극적으로 끌려다니기만 했던 내가 상대방을 무참히 짓밟고 있는 것이다. 처음 얻었을 때만해도 어리둥절하기만 했던 나의 힘이 이제는 절대적인 강함으로 탈바꿈되어 나에게 무한한 자신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이제 죽어라. 콜록. 콜록." 이런 젠장. 괜히 바람을 날렸더니 땅바닥의 먼지가 다 올라와서 공기를 더럽히고 있잖아? 이런 건 실내가 아닌 밖에서 쓰는건데. 쳇! 스타일 구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번 내뱉은 말을 시행하지 않을 수는 없지. 나는 검 끝에 검기를 집중했다. 황긍빛 검기가 보통 때보다 훨씬 강력하게 빛나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설마... 그건!" 파앙 보란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 끝에 모여 있던 검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초고속으로 방출되었고 빛은 그대로 그에게 직격했다. 검강(劍剛)이었다. 후두둑. ".....이런 건가." 검강을 맞고 죽은 그의 모습은 참혹하다는 생각조차 들 수 없게 만들 정도로 완전히 끝장이 난 모습이었다. 그의 몸은 내부에서부터 완전히 꽝 하고 터져 버려 곳곳에 타는 고깃덩이 냄새가 나는 육체의 파편들만이 실내를 뒹굴 뿐, 인간이라는 흔적조차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쩐지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기분이 묘한 죽음이었다. 누군가를 죽였다는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았다. 마치 게임에서 적들을 쏘아 죽이는 것처럼... "마무리를 지어야겠지." 눈앞에서 보란치의 죽음을 목격한 시르쥬는 거의 미친 사람과 같이 떨고 있었다. 마치 실성한 사람같이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서 나에게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시르쥬를 다시 한번 걷어찼다. 퍼억 "크억!" 이제 날 방해할 자는 전부 사라졌다. 그리고 시르쥬 네놈을 도와줄 사람도 이젠 아무도 없어. 네게 남은 길은 오직 하나뿐. 뼈와 살이 분리되는 고통속에서 참혹하게 죽어가는 것 뿐이다! 콰직 "크악!" "팔 하나." 뿌직 "끄아악!" "팔 둘." 빠각 "끄에엑!" "다리 하나." 콰콱 "끄어어어..." "다리 둘." "우우우우..." 나는 가볍게 발을 들어올려 중력과 내 근력을 합친 힘으로 시르쥬의 사지(四肢)를 전부 밟아 부러뜨려버렸다. 녀석이 괜히 도망가려하면 움직이기가 귀찮으니까 내린 조치였다. 평소의 나라면 할 수도 없을만큼 나는 잔혹한 짓을 서슴지 않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잔혹하고 광기(狂氣)에 찬 행동이 너무나 통쾌하고 시원했으며, 또한 즐거웠다. 후후후... 내 눈이 붉은 빛깔을 띠고 있다고? 그럴지도 모르지. 나도 내가 이런 행동을 서슴없이 할 수 있으리라고는 한번도 생각치 못했으니까. 이런 내 행동이 풀려진 봉인의 탓인지, 아니면 내 안에 원래부터 감춰져있던 음습한 욕망이었던 간에 그걸 깨운 것은 네놈이야. 네놈이 그 엉터리같은 복수심과 비뚤어진 형에 대한 애정같은걸로 아시에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난 계속 착하고 소극적이고 주위사람들한테 휘둘리는 보통의 귀여운 미소년으로 남아 있었을거야. 시르쥬는 엄청난 고통에 거의 입에 거품을 물고 늘어져 있었다. 한심하기는. 어린 시절부터 암살자 훈련을 받았다면서 고작 이 정도에 까무러치냐? 근성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네놈은 시르젤과는 다른 불량감자냐? 하긴 저 바보의 두뇌수준이 시르젤의 반만 따라갔어도 이런 멍청한 짓은 절대 저지르지 않았을테지. "일어나." 나는 시르쥬를 발로 툭툭 차서 건드렸다. 기절한 걸까? 녀석은 마치 죽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벌써 죽었을 리는 없겠지. 보통 팔다리를 부러뜨린다고 해서 죽지는 않으니까. 나는 신경질이 나서 시르쥬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어디, 네녀석이 이래도 안 일어나? "꺼어억! 끄으..." 다시 정신을 차린 것 같다. 나는 시르쥬의 앞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아 맥없이 늘어져 있는 녀석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프냐?" "으으..." "고통스럽냐?" "끄으..." "시에도 분명 고통스러워하면서 죽었겠지... 하지만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어. 살아있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앞으로도 쭈욱 시에를 잊지 않는 것 뿐. 그리고 이 복수는 내가 시에를 잊지 않고 있음을. 영원히 마음 속에서 잊지 않겠다는 사실을 맹세하는 증거야." 그리고는 난 웃음지었다. 보통 때라면 누구나 귀엽다. 예쁘다.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나의 천만불자리 미소를 시르쥬에게 선사했다. 시르쥬는 내 미소를 보고 어떻게 생각했을까? 악마의 미소라고 생각했을까나? 후후후후후. "아직 멀었어♡ 벌써부터 기운이 빠져버리면 재미없잖아, 안그래?" 나는 시르쥬의 머리채를 잡아 얼굴을 들어올리면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시르쥬의 눈빛은 살아 있지 않았다. 자신의 정당함을 끝까지 주장하는 의지나, 저항하겠다는 정신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죽은 눈빛이였다. 단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자포자기한 듯이 보이는 죽은 눈빛이었다. "이러면 재미없다구... 퉤." 실망한 나는 시르쥬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고작 이런 놈한테 아시에가 죽어야 했다고 생각하니 더욱 화가 났다. 그와 동시에 보란치와 싸우는 동안 내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었던 울분히 다시한번 솟아올랐다. "정말 이럴 거냐?" "으으으..." "정말 이럴 거냐구!" 하지만 시르쥬는 여전히 끝도 한도 없이 듣기 짜증나는 신음소리만 내뱉을 뿐이다. "대답하라구, 이 자식아!" 화가 난 나머지, 나는 그대로 시르쥬의 얼굴을 비틀었다. 울분이 치솟아올라 한껏 감정적인 기분이 고조되어가고 있던 나에게 '힘 조절'이라는 것은 완전희 잊혀져 있었고 그래서 그만 시르쥬의 목을 꺾고 말았다. 그리하여... 녀석 역시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죽었냐?...." 나는 고저가 분명치 않은 애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 눈에서는 아시에의 시신 앞에서 전부 흘려버렸을거라 생각한 눈물이 다시한번 폭포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죽어도 시에를 살려내고 죽으란 말야, 이 자식아!" 대답할 리가 없는 시신을 나는 축구공을 차듯이 힘껏 걷어찼고, 그것은 맥없이 날아가서는 저편 구석에 박혔다. 젠장! 젠장! 제엔장!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되었길래 이런 결말을 봐야 하는 거야? 복수는 끝났지만 마음속은 전혀 개운해지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 오로지 피와 시체로 가득찬 방 안에서 나는 절규했다. 즐거웠다.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었던 이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이 있기에 나는 행복했다. 하지만 나는 오늘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 옆에 있어 줬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친구의 공백은... 너무나 컸다. 나는... 복수의 길을 택했다. 또 다른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것을 각오하고서.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난 것일까? 한참 동안 울부짖고 절규하다가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계속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참혹한 비극으로 모든 일은 종결지어졌고, 나는 다음의 행동을 선택해야만 했다. 적어도... 더 이상 여기 있는 건 무리겠지. 내가 시르쥬를 죽였으니 말이야. 쾅쾅 희미한 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 보통 때라면 결코 들을 수 없을 만큼 희미한 소리가. 하지만 지금 나는 육체적으로 강해진 것 뿐만 아니라 온몸의 감각도 보통 사람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쾅쾅 나는 그 소리에 집중했다. 소리는 일정하게,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조금 집중하자 나는 그 소리가 들려오는 출처를 알 수 있었다. 불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그 소리를 따라 나는 몸을 일으켜세우고 걸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나는 그 소리가 문 두드리는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사람 목소리도 들렸다. "열어줘! 열어 달란 말야!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응? 이건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목소리인걸? 나는 발걸음을 좀더 빨리 했다. 누가 갖혀 있기라도 한 걸까? 그러고보니 그 보란치라는 녀석이 말했었지, 아시에뿐만이 아니라 키론도 같이 있었다고. 그래, 키론은 죽지 않고 여기 갖혀 있는 거구나. 키론은 시르쥬의 비뚤어진 행동의 표적이 된 사람은 아니니까. 그래도 그대로 보내줄 수도 없으니 일단 가두어 놓았겠지. 키론도, 아시에도 무엇 때문에 여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그를 구해야겠다. "키론 거기 있어?" 수련실 구석진 곳에 있는 쿵쿵거리는 문 앞에 도달했을 때 나는 외쳤다. "이 목소리는... 설마 카이엔이야?" "그래. 곧 구해줄께. 뒤로 물러나 있어." "알았어." 그리고 잠시간의 시간 여유를 두고 나는 곧바로 문을 발로 힘차게 걷어찼다. 나무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튼튼한 문이었지만 그런 것 쯤은 이미 소드 마스터의 능력을 넘어선 내 힘으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카이엔...! 진짜 카이엔이구나!" 문짝이 부서지면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우웅... 빨리 나가야겠어. 여기 계속 있다가는 호흡기 질환 걸리겠다. 부서진 문을 넘어서 저편에서 키론이 걸어나왔다. 다소 핼쓱한 모습이기는 하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괜찮아, 다친 덴 없어?" "응... 하지만 시에가..." "나도 알아..." 역시 키론도 알고 있구나. 어쩌면 키론은 아시에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대해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았다. 그녀석도 어딘지 모르게 나 못지않게 침울해 보였으니까. "우선 나가자." 나는 키론과 함께 우선 아까의 장소로 되돌아왔다. 키론은 수련실 곳곳에 널려져있는 10인대의 시체. 그리고 보란치와 시르쥬의 시체를 보고 경악하는 모습이었다. "이... 이건 대체 어떻게... 설마 니가 한 거야? 카이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드 마스터를 거꾸러뜨리다니... 너 카이엔 맞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는 키론. 그러고보니 아까 시르쥬가 내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는데 지금은 괜찮은 걸까? "지금... 내 눈동자 색깔이 어떻게 보여, 키론?" "응? 갑자기 그건 왜?" "괜찮으니까 빨리 말해 줘." "그냥... 평상시랑 별로 다른 건 없는데? 여전히 빨려들 것 같은 에메랄드빛..." "그래? 으음..." 그럼 아까 적안이라는 것은 시르쥬가 착각한 걸까? 아니면 내가 반쯤 폭주해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이유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색깔이 변한 걸까? 하지만 그걸 본 사람은 이미 다 죽었으니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군. "시에...! 어떻게 이렇게 심한 짓을!" 키론의 눈이 처참하게 난자된 아시에의 시신에 박혔다. 키론이 이렇게 놀라는 것을 보니 시체훼손은 역시 좀 더 나중에 시르쥬의 악의에 의해 이루어진 일 같았다. "으흑..." 키론은 울었다.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멍하니 이제는 알아보기도 힘든 시신을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키론에게도 나만큼 아시에가 소중한 사람이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키론은 아시에를 단순히 이름이 아니라 시에라는 아주 친밀한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으니까. 내가 모르는 동안 둘 사이에 어떤 썸씽이 있었을런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있었든, 있지 않았든 지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아시에가 죽어버렸으니까. "카이엔 씨..."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기절시킨 시르젤이 어느 새 정신을 차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의와 분노와 슬픔이 교차하는, 복잡한 감정이 겹쳐진 흔들리는, 나와 같은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선택 외에는 대안이 없었던 겁니까?" 시르젤은 내게 화를 내기보다는 아쉬움을 표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르쥬의 죽음이 그에게 있어 화나 슬픔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의 양 눈동자 가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혀 있는 모습을 나는 예전보다 훨씬 예리해진 안력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내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데도 왜 날 미워하지 않는거지? 왜 날 증오하지 않는거야? 난 시르쥬를 죽이기 전에 당신이 내게 베풀어준 모든 사랑과 은혜를 저버리고, 영원히 버림받을 각오를 했는데... "죄송해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나에게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원수가 되버린 시르젤이었지만 무슨 악독한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시르젤에게는 둘도 없이 소중한 동생. 이제와서 뭐라고 변명을 해 보아도 아무 의미가 없겠지. "카... 카이엔! 시에가..." "시에가?" 나는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키론. "몸이... 따뜻해. 식지 않았어." "뭐어!?" "하지만 심장은 뛰지 않아. 아니 그 전에 심장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남아 있지도 않지만..." 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달려가서 아시에의 시신을 만져보았다. 정말이다. 마치 아직도 피가 돌고 있는 것처럼 따뜻해... 이미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이게 어찌된 노릇이지? 이미 죽은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시체가, 그것도 이렇게 엉망이 되어 인간의 형체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운 시신이 어떻게 이토록 따뜻할 수 있는거지? 그때 내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아시에는 이전에 마왕을 불러내는 제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았다고. 설마... 이게 그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어쩌면... 아시에를 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이대로 시신을 놔둘 수만은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시에의 시신을 두 손으로 들었다. 예전의 약한 힘이라면 엄청 무거워서 제대로 들지도 못했을 그녀의 몸이 너무 가볍게 들렸다. 그리고는 저편에 열려 있는 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카... 카이엔! 어디로 가는 거야!" "어디로 가십니까, 카이엔 씨!" "어디로 가야 할까요. 후후후. 하지만 이곳에 있을 수 없는 것은 확실하겠죠. 나는 이제 어디로도 갈 수 없어요. 내 모든 마법무구가 박살났고, 나는 이전에 절대 가진 적이 없었던 거대한 힘을 손에 넣었어요. 무서울 정도로 막강한 힘... 하지만 정작 무서운 것은, 이렇게 사람을 죽여놓고도, 마음 속에 아무런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는 거에요. 마치 지나가는 개미를 밟아 죽인 것처럼... 나는 이제 집으로도 돌아갈 수 없어요." 나는 고개를 돌려 시르젤에게 쓸쓸한 표정으로 살짝 윙크해주면서 말했다. "안녕히 계세요. 시르젤 씨. 그리고 부탁컨데 키론을 유레카로 돌려보내주세요. 그럼." "기다리십시오, 카이엔 씨!" 시르젤이 날 멈춰세우려고 했지만 이미 나는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넘치는 아시에의 시신을 안고 도약했다. 나는 이 대륙의 지리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이곳 시아와세노 비치가 대륙 어디에 붙어 있는지, 그리고 내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래도 어딘가 가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끝임없이 태양을 향해 뛰었다. 패러디 번외편 - Darkness in Their Heart. <카이엔의 음습한 욕망> 빠각 "끄에엑!" "다리 하나." 콰콱 "끄어어어..." "다리 둘." "우우우우..." 평소의 나라면 할 수도 없을만큼 나는 잔혹한 짓을 서슴지 않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잔혹하고 광기(狂氣)에 찬 행동이 너무나 통쾌하고 시원했으며, 또한 즐거웠다. 내 눈이 붉은 빛깔을 띠고 있다고? 그럴지도 모르지. 나도 내가 이런 행동을 서슴없이 할 수 있으리라고는 한번도 생각치 못했으니까. "카이엔 씨..."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기절시킨 시르젤이 어느 새 정신을 차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호의와 분노와 슬픔이 교차하는, 복잡한 감정이 겹쳐진 흔들리는, 나와 같은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애처로운 눈빛이, 더욱 더 나의 마음을, 음습한 정복욕을 깨워 일으키고 있었다. 때리고 싶다. 부러뜨리고 싶다. 고통에 젖어드는 잔혹한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그 쾌감을 만끽하고 싶다. "우후후후후후." "카... 카이엔 씨? 무... 무슨?" 나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면서 옆에 놓여져 있는 낡은 채찍을 집어들었다.(어디서 났는지는 따지지 말도록 하자 -_-). 그리고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채찍을 감아들며 시르젤을 향해 녀려쳤다. "끄아악! 카이엔 씨, 이게 무슨 짓...." "꺄하하하! 아직 부족해! 더 크게 비명을 지르라고요!" 화창하고 맑은 날 어두운 실내에 두 사람의 끊임없는 비명소리와 신음소리, 그리고 한 사람의 웃음소리가 공간을 울리고 있었다... <시르쥬의 음습한 욕망> 삐그덕. 문이 열렸다. 그 소리는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만큼 작았지만 나도 어릴 때부터 암살자 수업을 받아왔는지라 이 정도는 금세 알 수 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평정을 유지하며 자는 척을 했다. 형에게 괜히 내가 깨어 있는 것을 들켜서 부담감을 느끼게 할 필요는 없었다. "시르쥬..." 형의 나즈막한 목소리. 다른 사람은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로 들릴테지만 나는 알 수 있다. 어딘가 형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침울하다는 사실을. 아마도... 또 죽은 누나 생각을 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니 나까지 기분이 음울해진다. "사랑하는 내 동생. 너만은 계속 이대로 있기를..." 형은 잠든 체 하는 내 머릿결을 슥슥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내 심장이 마치 잘못한 것을 들킨 어린아이같이 콩닥콩닥 뛰었다. 나는 그런 마음의 변화를 필사적으로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 하면서 자는 체를 계속하려고 애썼다. 쪽 내 이마에 형의 입술이 맞닿는 소리. 나는 순간 깜짝 놀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심장이 터질 만큼 두근거리면서 나는 완전히 동요하고 있었다. 이런... 깨어 있다는 걸 들켜버릴거야! 하지만 형은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내 방문을 열고 다시 나가버렸다. ...들켰을까? 언젠가는 입술에도 뽀뽀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무리겠지. 형은 내게 잃은 누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거다... 시레나 누난 항상 어린 나에게 마구 뽀뽀를 퍼붓곤 했고 나는 그걸 엄청 좋아했었으니까... 이 나이게 되어서까지 그런 게 좋냐고 하면 역시 좋다고나 할까... 어딘가 기분이 야릇해진다고나 할까...(쓴웃음) 다음에도 또, 뽀뽀해줬으면 좋겠다. <아시에의 음습한 욕망> "하압!" 위잉 에메랄드 빛으로 푸르게 빛나는 검기가 서린 검격이 공간을 갈랐고 아시에는 아슬아슬하게 그 검격을 피해 냈다. 아시에는 신성력으로 찬 공간 속에서도 10명의 전사들의 공격을 버텨낼 정도로 잘 버티고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아시에를 검으로 공격했지만 아시에는 유유히 그 검을 피했다. 하지만 아시에는 그 뒤로 들어온 연속동작인 발차기를 피하지 못했다. "흐압!" "꺄악!" 아시에는 발차기에 복부를 얻어맞고 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비틀거리면서 아시에는 간신히 일어섰지만 벽에 부딪친 충격으로 곳곳에 타박상을 입고 얼굴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10인대가 그런 아시에를 끝장내기 위해 다가갔을 때, 아시에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아앙♡" 아시에의 의도를 모르는 10인대는 혹여나 무슨 이상한 흑마법이라도 쓰는 걸까 라고 생각하며 방어대형을 취했다. 하지만 아시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딴판이었다. "더... 더 때려줘요! 꺄하하... 더 밟아줘요! 주인님! 흑흑. 앞으로는 이제 말 잘 들을께요. 그러니까 용서해주세요. 셰더 주인니임∼" 순간 난 멍해졌다. 나뿐만 아니라 10인대들과 시르쥬도 갑작스런 그녀의 변화에 넋을 잃고 실성한 듯 보이는 그녀를 바라다볼 뿐이었다. "꺄악! 마음껏... 학대해 줘요... 아앙♡ 하지만... 그것만은... 그것만은 제발 집어넣지 말아요! 그러니까 용서해 줘요! 주인님... 흑흑..." 뭔가 과거에 큰 충격이라도 받았던 걸까.... 어딘가 말이 엇나가고 있는 그녀였다. 제135화 : 레이엔 이야기(1) "아... 아이렌!" "저리 가! 보기 싫어!" 간신히 아이렌을 발견해서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아이렌은 여전히 날 무시하고 도망가버린다. 저번에 아시에 누나가 아이렌한테 저번에 했던 내 실언(失言)을 흘려준 이후로 계속 저 상태다. 한동안 관계가 계속 좋아져서 간신히 서로 애칭을 부르기 직전인 상태까지 갔었는데... 휴우. 일이 왜 이렇게 꼬인다냐. 물론 내가 전에 했던 발언이 잘했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심하게 삐질 줄이야... 히히힝∼ 따그닥따그닥 한시간 전쯤에 이어 또다시 말 울음 소리와 마차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12용사의 또 누군가가 우리 집을 방문한 것이다. 예지력을 가진 내 눈에는 그게 누구인지, 직접 보지 않아도 훤하게 보였다. 자하기니아에 사는 12용사인 쟈켄 파르스 씨다. 이번에는 그의 둘째아들이자 그랜드 소드 마스터인 그의 아들, 실론도 동행한 모양이었다. 그녀석은 전에 형을 뒤에서 찌른 경력(?)이 있어 싫은데... 대륙 제2위의 미소년이라는 위즈 하켄크로이츠라는 사람과의 대결에서 카이엔 형이 빛을 뿜으면서 사라진 이후 집에서는 큰 난리가 났다. 그것은 바로 형에게 걸어둔 마법무구들이 전부 박살이 나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해서 카이엔 형을 묶어두고 있던 구속의 사슬이 끊어져버린 것이다. 바로 얼마 전 생일에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이 집중력의 머리띠라는 또 다른 사슬을 더 걸어두고도 그것이 깨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나, 잘못한 걸까?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있었으면서도... 카이의 순결을 과감하게 뺏아버리지 못했어." "누나 잘못이 아냐." 카이엔 형에게 음기(陰氣)를 불어넣는 일을 실행하지 못했다고 해서 세이렌 누나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순 없다. 어차피 전체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것 역시 미봉책(彌縫策)에 불과하니까. 카이엔 형이 몸에 마나나 기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무마력증이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단지 구속의 사슬들이 형이 가지고 있는 모든 마력들을 빨아들여 각자의 기능에 걸맞는 힘을 발휘하고 있는 상태였을 뿐. 하지만 그렇더라고 해도 내가 카이엔 형에 대해서 예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카이엔 형은 애초부터 혼돈(混沌, chaos)의 속성을 띤 존재니까.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이 언제가 될 지인지는 예언하지 못했다. 지금 우리 집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이전 마왕 디크로드를 물리친 12용사 인원들을 주축으로 옛날의 그 비밀에 관련된,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헤에. 여기 있었구나. 니가 레이엔 브리타뉴 맞지? 불과 열 살의 나이면서도 대륙 7대 예언가의 반열에 올랐다는." "누구세요...?"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어떤 소녀가 서 있었다. 양쪽 머리를 묶지 않고 자연스럽게 풀어 둔 트윈테일을 한 보랏빛 머리와 오렌지빛 눈망울을 가진, 나보다 두세 살쯤 많아보이는 작은 안경을 코에 건 소녀였다. 아이렌만큼 귀여운 맛은 없지만 걔보다는 다소 성숙하고 상대적으로 지적인 면이 돋보이는 여자였다. 그래봤자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린 소녀로 비치겠지만... 내가 어린 꼬마아이로 다들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야. 근데 저 여자애는 누구지? 우리 집에 온 사람들 중에 저런 여자가 있었나? 내가 저 소녀의 정체를 알기 위해 예지력을 발동시키려고 했을 떄 그 소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굳이 예지까지 써 가면서 내 정체를 알려고 할 필요는 없어. 날 잘 모르겠지? 아마도 처음 봤을 테니까 말이야. 내 이름은 스테아 만슈타인. 들어본 적이 있지?" 스테아 만슈타인이라면.... 아! "그 천재소녀!" "어머 얘는... 그렇게까지 대단한 건 아냐." 스테아라는 이름의 그녀는 쑥쓰러운 듯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냥 재능으로 얻은 예지력으로 이름난 데다 카이엔 형의 후광에 덧붙여져서 이름이 알려졌지만 그녀는 천재적 재능과 동시에 실력으로 대륙 7대 현자의 직위를 꿰찬, 올해 12세의 진짜 천재소녀다. 그런 그녀가 우리 집에 와 있다. 그렇다면... 그녀도 역시 카이엔 형의 일로 왔겠군. 대륙 7대 현자라는 그녀가 카이엔 형의 일을 모를 리는 없을테니까. "그런데, 어떻게 절 바로 알아보셨죠?" "어머, 몰라? 대륙 곳곳에서 팔리고 있는 카이엔 브리타뉴의 캐릭터 상품에 덧붙여서 세이렌 씨나 레이엔 군의 캐릭터 상품도 덤으로 붙어 세트로 팔리고 있잖아?" 아, 참 맞다. 그랬었지. 그래봤자 카이엔 형 관련 상품이 팔리는 거에 비하면 10분의 1도 안되겠지만. 어쨌건 스테아가 날 보고 바로 레이엔이라는 것을 알아봤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아, 그렇네. 그런데 왜 저를 찾아온 거죠? 카이엔 형의 일이라면 먼저 엄마나 아빠, 아니면 세이렌 누날..." "얘는... 기껏 찾아온 사람한테 섭섭하게 굴기는. 그리고 존대같은 거 안 붙여도 돼. 아니 붙이지 마. 나는 레이엔이랑 격의(隔意)없이 친하게 지내고 싶으니까, 애칭 불러도 돼?" "그게... 안될 건 없지만." "꺄아. 잘됐다아∼ 그럼 지금부터 레이라고 부를께. 너도 티아 언니라고 불러." "아... 알았어. 티아 누나." "티아 누나가 아니라 티아 언니!" "엥? 하지만..." 갑자기 애칭을 서로 부르자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이게 무슨 말이다냐? 남자인 내가 불러야 할 정확한 명칭은 누나가 맞는데? "누나라고 하면 어쩐지 남녀 사이의 거리감 같은 게 느껴지잖아. 그러니까 서로 언니 동생하면서 아주 가깝고 친하게 지내자는 거야, 오케이? 알아들었어?" "으응... 티아..." "언니! 절대로! 반드시 언니라고 불러야 해! 안그러면 티아는 삐질거야!" "아... 알았어. 티아 언니!" 기세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언니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어딘가 좀 뻘쭘하다. 이거... 진짜로 이렇게 불러도 되는 거야? 누나라고 하는 게 무슨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그러는 건지... "그럼 그렇게 된 거다, 알았지, 레이?" "으응..." 이거 어쩐지 내가 스테아 누나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걸? 마치 카이엔 형이 세이렌 누나나 아이렌한테 마구 말려들듯이 말이야. 그래도 안돼지.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은 아이렌인데 이런 유혹에 흔들리면 안 돼! "그럼 얘기해줄래?" "뭘?" "뭘 말이긴, 나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을 브리타뉴가에 모이게 한 장본인이자, 대륙 제일의 미소년으로 널리 알려진 네 오빠, 카이엔에 대해서 말이야." "역시 그런 목적이었어?" "푸훗. 오해할 필요는 없어. 정보를 얻어낼 목적으로 레이한테 접근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여기 온 건 분명 그 사람, 카이엔 브리타뉴의 문제 때문이지. 그래서 나름대로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보고 싶은 것 뿐이야. 뭐... 굳이 이야기하기 싫다면 억지로 묻진 않을께." "아... 아냐. 굳이 이야기하지 싫다는 건 아냐." "그래? 그럼 이것저것 마음대로 물어봐도 괜찮아?" "물어보는 건 괜찮아. 다만 대답하는 건 내 마음대로겠지?" 잠깐 스테아 누나의 페이스에 휘말린 나는 이제 슬슬 중심을 잡고 적절하게 그녀를 상대하고 있었다. 기억을 잃은 다음에, 완전히 유약해져서 주변 사람들에게 곧장 휘말리곤 하는 카이엔 형과 난 다르다고! 나는 그녀의 집요한 캐물음에 장난스럽게 응답했다. "어쨌건 좋아. 레이. 난 카이엔 브리타뉴 씨를 음... 뭐라고 할까? 인간적인 관점에서 접근해보고 싶어." "인간적인 관점?" "응. 그도 그럴 것이 다들 카이엔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전제를 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잖아. 오로지 그 안에 감추어진 어떤 '존재'와 그 존재가 세상에 끼칠 영향력만을 생각할 뿐. 카이엔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무엇을 원하는 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하고 있지 않잖아? 하지만 나는 그들과는 생각이 달라. 나는 카이엔이라는 인간의 인격, 개성, 성격. 뭐 이런 것들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야말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키워드(keyword)가 될 거라고 생각해." "그렇구나..." 어쩐지 스테아 누나의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카이엔 형도 웃고, 울고, 떠들고, 장난치고, 화내면서 우리 가족과 같이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가족이고, 그동안 쭉 그렇게 생각해 왔다. 하지만 지금 카이엔 형을 카이엔 형답게 만들어주는 구속의 일단계가 풀렸다고 해서 곧바로 그렇게 괴물취급해버리는 건 분명 너무한 조치겠지. 물론, 엄마 아빠나, 세이렌 누나, 사이엔 형도 그런 것쯤은 잘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문제는 얼마 안 있어 열릴 회담에 참가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 분명히 강경책을 쓰자고 하는 사람들이 존재할 거다. 부작용을 감수하고라서도 카이엔 형을 소멸(消滅)시키자는 이야기는 형이 태어날 때부터 있어 왔으니까. 아빠 엄마가 필사적으로 막지 않았다면 분명 그렇게 되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대륙 최대의 미소년이라는 거대한 유명세가 그들이 카이엔 형에게 해꼬지하는 걸 막고 있지만, 구속의 일단계가 풀린 이상 그들이 다시 그런 주장을 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 이야기는 아빠 엄마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로 우리 가족들 중에서는 카이엔 형과 아이렌만이 모른다. 형 본인에게는 당연히 이런 이야기 할 수 없고, 아이렌은 어린 성격에 무슨 반응을 보이니까 알 수 없으니까다.(물론 그녀의 지능이나 지식은 같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뛰어나다.) 그럼 나는 어떻게 알고 있냐고? 글쎄... 어릴 때부터 가진 예지력이라는 것이 나를 같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훨씬 뛰어난 사고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표현해야 하나? 대충 말하자면 그런 거다. "그러니까 이야기 해 주겠어? 네 소중한 카이엔 오빠를 지금까지 옆에서 지켜본 이야기를 말야." "알았어." 스테아 만슈타인. 나는 그녀가 카이엔 형을 위해 힘써 줄 수 있는 조력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옛날 이야기를 하나둘씩 꺼냈다. 카이엔 형에 대한 나의 기억은, 내가 네 살 쯤 먹었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전에는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최초로 인상깊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가 그 때였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네 살이었던 그 무렵, 카이엔 형은 열 살이었고, 사이엔 형은 열 세살. 세이렌 누나는 열 네살이었다. "저리 가! 이건 내꺼야!" "형아∼ 그거 나도 쫌 조. 나도 먹고 싶단 말야. 우아아앙∼" "시끄러! 넌 딴 거 달라고 하면 되잖아!" "와앙∼" "이게 자꾸 시끄럽게 굴 꺼야?" 퍽퍽퍽 ...어느 여름날. 나는 카이엔 형이 옆에 잔뜩 쌓아놓고 먹던 과자를 몇 개 집어먹으려 하다가 화난 형한테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 어찌나 심하게 얻어맞았는지 나중에 엄마가 날 치료하는데 상당히 애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어린 내 눈에 비친 카이엔 형은 집안을 완전히 자기 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한마디로 말해서 양아치에 가까운 불량아였다. 재수없다는 이유로 하인을 때려도, 값비싼 골동품을 방해된다는 이유로 깨부숴도 엄마, 아빠는 카이엔 형을 한번도 질책한 적이 없다. 부모님은 나에게 카이엔 형한테는 잘 말해줬다고 다독거리면서 이야기했지만, 그 시절부터 발휘되기 시작한 예지력으로 인해 나는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뻔히 알 수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였다. 사이엔 형은 세 살이나 많은 주제에 맨날 카이엔 형한테 얻어맞고 다녔다. 사이엔 형은 그 시절 이미 검기(劍氣)를 일으키는 수준의 검술을 해냈는데도 왜 그렇게 맞고만 다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세이렌 누나만이 형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형에게 가지게 된 첫 감정은 증오. 분노. 질시. 질투. 이런 것들이었다. 카이엔 형은 어떤 나쁜 짓을 하더라도 결코 질책받지 않고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모두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내 쌍둥이 동생인 아이렌도 나는 안중에는 없고 온종일 카이엔 형이 있는 곳만 찾았다. 카이엔 형이 그 시절부터 제작되어 팔려나가고 있던 형의 캐릭터 상품 등으로 인해 대륙적으로 유명한 스타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자, 내 마음속에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증오의 감정뿐만 아니라 질투의 감정이 솟아났다. 어린 마음에 나도 카이엔 형처럼 제멋대로 굴면 다들 나도 저렇게 사랑해줄까? 하지만 어설픈 시도의 결과는 참담했다. 일이 백 퍼센트 잘못될 거라는 예언을 미리 보고 도 시도한 나의 어리석음을 뼈저리게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로서는 상당히 심한 처벌을 받은 것이다. 반면에 얻은 것도 있었다. 나는 그때쯤에야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나의 재능, 예언력의 절대적인 위력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카이엔 형을 따라하기 전에 몇번이고 예지를 통해 일어날 일을 시뮬레이션해 보았고 결국 그 시뮬레이션은 슬프게도 완벽하게 결과와 일치되어버렸다. 어쨌건 그 이후로 나는 집안에서 일어날 모든 일들이 내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고 나는 그 예언에 따라 화를 피하는 방향으로 행동하여 그렇게 큰 일 없이 살아올 수 있었다. 내가 다섯 살 때쯤 자신의 타고 난 정령력을 마구 뽐내던 아이렌을 본 엄마 아빠는 나에게도 무슨 능력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고 끈질긴 관찰 끝에 나의 예지력을 발견해 냈다. 그 이후로 나는 엄마 아빠의 도움을 받아 많은 성장을 이루었다. 일 년이 지나 여섯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이미 사춘기 소년과 비슷한 정신연령에 도달해 있었다. 점차 예지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보고 싶지 않은 많은 장면을 온몸으로 느껴야했고(나의 예언력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체험하는 류의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정신이 일찍 성장해 버린 탓이다. 뭐 어쩌면 내가 천재의 소질을 타고나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말야. "오호. 레이도 꽤 천재였네. 어릴 때부터 말야." "에이. 천재는 무슨 천재야. 티아 누... 아니 티아 언니의 천재성에 비하면 이건 어린애 장난 수준인 걸. 단지 정신연령이 또래보다 좀 높은 것 뿐이지." 으음... 스테아 누나는 좋아하는 것 같지만 나는 그래도 언니라는 다른 호칭을 사용하기가 미묘하게 망설여진다... 조금 찜찜하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내가 카이엔 형에게 다른 종류의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어." 그 시절. 내가 카이엔 형을 대하는 방식은 간단했다. 내 예지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되도록 안 마주치는 것.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는 말을 나는 최대한 실천하고 있었다. 마주치지 않으면, 서로 문제 생길 일도 스트레스 생길 일도 없으니까. 어찌보면 미로처럼 꼬여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고 넓은 우리집이었기 때문에 그건 가능했다. 카이엔 형도 나같은 꼬맹이한테 괜히 신경쓰거나 꼬투리를 잡을 생각은 없었다는 점이 다행이었지만. 하지만 나의 그런 행동이, 당연히 집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 어쨌건 어린애의 행동은 꽤나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편이니까. 엄마는 세이렌 누나와 함께 날 불러서 노골적으로 카이엔 형을 피하지 말라고 주문했고 나는 당연히 거부했다. 그리고 그동안 카이엔 형에게 쌓인 모든 감정을 숨김없이 그대로 털어놓고 만 것이다. 지금까지 쌓인 모든 감정을 한꺼번에 담아 나는 악을 쓰며 울분을 터뜨렸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어째서, 반반한 얼굴 하나 빼곤 잘난 것이 하나도 없는 카이엔 형만이 집안에서 특별한 존재인지, 왜 그렇게 제멋대로에 안하무인인 형을 그대로 놔두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한참 동안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떨어뜨리는 내게, 엄마가 말했다. "어쩔 수 없네... 가르쳐 줘도 되려나?" "엄마, 저와 사이엔한테도 불과 1년 전에 가르쳐 준 거잖아요. 레이는 아직 여섯 살인데...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라 생각해. 레이는 여섯 살이지만, 그보다는 훨씬 성숙하고 아는 것도 많을 거니까. 분명 카이를 이해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엄마는, 내가 지금까지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그런 엄청난 비밀의 전말을 나에게 설명해 주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예지력으로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계속하여 엄마에게 확인을 요구했다. 그만큼 그 비밀은 엄청난 것이었고 나는 한동안 끙끙대며 고민하느라 며칠 동안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일상 생활을 할 수 있었을 때는, 이미 카이엔 형에 대한 분노와 질투의 상당수가 날아가버리고 대신 새로운 감정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바로 '동정'이라는 감정이 말이다. "그 비밀이라는 건 역시 '그걸'말하는 거겠지, 레이?" "응. 여기 모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그 사실을 말야. 하지만 첨 들었을 때는 엄청 충격이었지." "알 만해." 그 이후로는 특별한 일 없이 잘 지내 왔다. 카이엔 형은 학교를 들어가더니 몇 번 사고를 치고는 꽤 조용해졌다. 물론 내 예지력으로 본 바로는 세이렌 누나가 학교에 몇 번 찾아가서 학교를 거의 말아먹을 뻔했지만서도... 하여간 학교에 가더니 철이 조금은 든 건지, 성숙해진 건지 예전보다는 훨씬 인간답게 변했다. 뭐, 그래도 제멋대로 구는 건 여전해서 인간성에 대한 평판은 여전히 안 좋았지만. 여기서 나는 카이엔 형 안에 들어있는 다른 인격. 미렌 누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다가 말았다. 카이엔 형의 생일날에만 나타나는 인격인 미렌 누나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오로지 집안 내부 사람들 뿐. 쓸데없이 발설하는 것은 좋지 못한 행동이겠지. 카이엔 형의 생일날마다 집안이 난장판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일년에 단 하루 나오는 날을 어떻게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보내고 싶어하는 미렌 누나와 미렌 누나의 존재조차 용납하지 않는 카이엔 형의 싸움이 타협도 없이 하루종일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어쨌건 이런 이야기, 스테아 누나한테는 할 필요가 없겠지. 나는 바로 카이엔 형이 기억을 잃게 된 이야기로 넘어갔다. "세번째로 생각이 변했을 때는, 카이엔 형이 어떤 흑마법사에게 저주당해서 기억을 잃고 난 후야." "그건 나도 들었어, 셰더라는 녀석이라며? 대륙 7대 흑마법사라는..." "티아 언니도 아네?" "후훗. 나름대로 이런저런 정보수집망이 있거든? 7대 현자라는 이름값 정도는 해야지 않겠어, 레이?" "뭐 자세한 건 둘째치고... 어쨌건 충격이었어.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지만, 성격이 예전과는 완전 딴판으로 변해 버렸거든?" 아마 그때는 나와 아이렌이 같이 외갓집에 가 있을 때였다. 카이엔 형이 셰더에게 당해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아이렌은 당장 가겠다고 졸랐지만 완고한 외할머니께서는 원체 허락하지 않아서 카이엔 형이 깨어난 지 며칠이 지난 다음에야 우리 둘을 집에 보내 주셨던 것이다. 성격이 완전히 변했다는 이야기는 듣긴 했지만, 그래도 직접 목도하게 되니 충격적이었다. 사이엔 형이 카이엔 형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기까지 하는데도 불구하고, 카이엔 형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사이엔 형을 쳐다보기만 할 뿐, 평소처럼 "이놈의 형이 미쳤나, 재수없는 말 하지 마! 게다가 어디다 손을 대고 흔들어대는 거얏!"같은 말을 하면서 사이엔 형을 마구 걷어차거나 하는 난폭한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렌은 그런 카이엔 형의 변화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자신있게 나서서 선언했다. 마치 카이엔 형이 기억을 잃고 유순하게 변한 일이 기회라도 되는 듯이 "카이 오빤 내 꺼야!"같은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게 아닌가! 평소에는 난폭한 카이엔 형한테 쫄아서 한 번도 제대로 이야기를 못했으면서... 사이엔 형과 아이렌이 투닥거리고 있자 나도 위기감을 느껴서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이야기야? 아이렌은 앞으로 커서 내 아내가 될 거라고!" 그때 스테아 누나가 내 이야기를 끊으면서 말했다. "헤에... 레이는 아이렌을 좋아하는구나." "으응... 맞어." "피를 나눈 형제에다가 쌍둥이인데도?" "그... 그런 건 관계없잖아?" 나는 스테아 누나의 말에 당황하면서 이야기했다. 사실 관계가 없다는 말은 사실이다. 애정에 관한 유클리네 왕국의 법률은 매우 관대한 편이라 동성간에 결혼하겠다고 설치는 사람만 아니라면 어떤 형태의 혼인도 허용되었다. 생식을 하여 2세 생산이 가능한 모든 형태의 결혼이 가능한 것이다. 다른 종족과의 혼인이나(앞서 말한 2세 생산의 이유로 몇몇 종족만 가능하다.) 딸과 아버지, 아들과 어머니, 형부와 처제, 누나와 남동생, 오빠와 여동생 같은 근친결합 같은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가문의 전통이나 순수혈통 유지라는 이유로 이런 식으로만 결혼하는 가문도 있었다. "흐음... 하여간 유클리네 사람들은 별나다니깐."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사람들한테 이상한 바람 불어넣는다고 지탄받기도 하지." "유클리네는 마법과 문화가 발전한 곳이니까, 그런 풍조가 다른 나라에 쉽게 전파되거든. 그런 걱정 하는 게 당연하잖아?" "쳇. 다른 나라 사람이 우리 나라에 무슨 상관이야?" 나는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어째서 다른 나라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형태에 일정한 제한을 두려고 하는 걸까?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2세 생산 가능이라는 조건을 둔 것도 사실 출산감소를 우려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조항일 뿐, 유클리네에서는 동성애자 같은 사람들도 타국보다 훨씬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굳이 사람이라는 틀에 사랑을 못박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애완동물이나 인조인형, 또는 이차원의 그림 등에 애정을 쏟아붓는 묘한 사람들도 꽤 있고 말이야... "그래서, 레이가 원하는 대로 아이렌과는 잘 될 거 같아?" "글쎄. 예지력으로 본 바로는 확실해. 그런데 요즘은 생각만큼 잘 안되고 있어. 아까도 말했듯이 아이렌은 카이엔 형을 좋아하고, 형의 성격이 순하게 바뀐 다음에는 더욱 더 큰 희망을 가지고 형에게 접근하고 있으니까..." "후후... 너도 나름대로 힘들구나." "티아 언니는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글쎄? 그건 비∼ 밀!" "있다는 이야기구나. 치사하기는." "오호호." 하긴 내가 스테아 누나가 누굴 좋아하던 간에 무슨 상관이랴. 게다가 오늘 처음 서로 만난 사이엔데 말야. 내가 카이엔 형의 이야기를 계속 하려고 할 때 스테아 누나가 다시한번 내 말을 막았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레이?" "뭐가?" "으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말야.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성격이 변할까?" "글쎄... 좀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른 가능성이 있을까? 게다가 셰더가 사용한 마법이 기억상실 마법이라는 것을 이미 엄마가 확인했어." "물론 그렇겠지만 다른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예를 들자면?" "기억을 잃은 것과 동시에 다른 인격이 카이엔의 몸에 빙의(憑依)했다거나 하는 거지." "빙의?" "빙의?" 빙의라니... 또 다른 누군가의 혼이 원래 사람의 몸에 씌여 다른 인격을 가지게 되는 그것 말야? "그래. 뭐,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지만 말야." "빙의라..." "앗,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레이. 너도 알잖아. 세상에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말야." 스테아 누나는 극히 드문 하나의 가정으로 언급한 듯한 눈치였지만 나는 묘하게 그 이야기에 신경이 쓰였다. 빙의라... 물론 그런 가정이 아주 근거없는 것만은 아니다. 기본적인 성격이 나무 많이 바뀌었으니까 말이다. 카이엔 형은 사이엔 형과 아이렌을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두 사람의 싸움에 휘말렸을 뿐만 아니라 세이렌 누나가 돌아왔을 때는 완전히 누나의 품에 안겨서 갈 데까지 갈 뻔 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었다. 내 예지를 이용해서 몰래 훔쳐본 거라 말하기에는 뭐하지만 학교에서도 집에서처럼 이전과 완전히 다른, 얌전해지고 순해인 모습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륙 제일의 인기인인 카이엔 형이다. 세상에 대한 난폭함이라는 방어껍질이 사라진 형은 그때부터 완전히 주위 사람들에게 휘말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형의 변화를, 나는 단지 모든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기억을 잃어서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거라고. 빙의라는 개념은 가족 중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다들 새롭게 변한 카이엔 형의 모습을 더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불량하고 싸가지 없지만 그래도 멋있는 남자였던 카이엔 형이 이제는 남의 말에 쉽게 혹하는 어리벙벙한 미소년으로 변했다. 그렇잖아도 여성스럽게 생긴 카이엔 형이다. 이제는 생긴 것과 성격이 일치해 버렸으니 다들 환영하는 것도 당연했다. 사실은 나도 새롭게 변한 카이엔 형이 더 좋았다. 세이렌 누나나 아이렌 등 다른 가족들에게 시달리는 카이엔 형이 형제자매 중 유일하게 흑심이 없고 나이에 비해 깊은 생각을 하는 나를 편하게 느끼고 자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새로운 카이엔 형은 자신에게 광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다소 피곤하고 짜증스럽다는 감정을 숨기지는 않았지만 예전의 형이라고는 믿을 수 없으리만큼 착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뭐니뭐니 해도 자기밖에 몰랐던 형이 남을 배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기억을 잃고 변한 형을 모두들 더 좋아했다. 카이엔 형의 기억을 되찾아주려는 시도조차 한 사람이 없다는 데서 그 사실은 잘 드러난다. 그러니 지금의 카이엔 형이 예전과는 인격뿐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다른 사람일거라는 생각은 한번도 해 볼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워낙 생각지도 못한 의문인지라 '빙의'라는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만약 카이엔 형이 이전의 그 카이엔 형이 아니라면? 그래도 우리는 그 사람을 계속 카이엔 형으로 생각하고 대해야 할까? 확실한 상황이 아닌데도 자꾸만 의심과 불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래두? 어디까지나 극히 낮은 확률의 가정이지. 그렇잖아? 게다가 진짜로 타인의 영혼이 빙의해온 거라면 진짜 자기 몸을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해야 정상 아니겠어? 굳이 기억상실증 같은 거짓말은 하지 않아도..." "본인이 카이엔 형의 몸이 아주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지." 나는 굳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레... 레이?" "미안. 티아 언니. 너무 지나친 상상을 해 버렸네. 그럼 이야기 계속할께." 나중에 '빙의'라는 현상에 대해 좀 자세히 알아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고는 난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카이엔 형이 기억을 잃은 이후에는 정말로 많은 사건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첫번째로 일어난 일은, 역시 시르팡이라는 작자들에게 카이엔 형이 납치당한 일이었다. 나는 카이엔과 시르팡이라는 예언이 불가능한 두 대상을 앞에 두고 무언가를 예지해보려고 애썼지만 뒤늦게 이끌어낸 예언은 너무 늦어 버렸다. 시르팡 마나 케이아스라는 정체불명의 현상에 휘말려, 그대로 카이엔 형을 눈뜨고 현장에서 빼앗겨 버린 것이다. 무력감(無力感). 항상 자신만만했던 나의 예언이다. 몇 가지 국제적인 거창한 예언을 성공시켜 대륙 7대 예언가라는 거창한 직함을 얻고 나서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때부터 나의 예언에는, 한 줄기 어둠이 스며들어오기 시작했다. 좋았다. 카이엔 형이 좋았다. 집안에서 나라는 존재는 거의 신경도 쓰지 않고 제 마음대로만 날 대했던 카이엔 형. 하지만 기억을 잃은 후에 달라진 카이엔 형은 확실히 날 봐주고 있다. 동생으로 인정하고, 제대로 이야기하고 자기 나름대로 배려해주고 돌봐주고 있었다. 그래서 너무 기뻤다. 카이엔 형에게 인정받은 것이 너무 기뻤다. 그렇기 때문에 카이엔 형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 너무 분했다. 어차피 예언이라는 것은 무형의 힘. 현재 공간에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세이렌 누나나 사이엔 형, 아이렌도 막지 못했던 일이기 때문에 내 책임만은 아니였지만 그래서 더욱 분했다. 카이엔 형이 납치당하는 순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철썩! 철썩! 철썩! 내가 자책하고 있을 때 갑자기 아이렌이 내 뺨을 철썩 치면서 말했다. "정신차려, 레이엔!" "아... 아이렌?" "카이 오빠가 납치당했는데 뭐하고 있는 거야?" "뭐...어?" "이제부터 카이 오빠를 구하러 가야지, 그렇지 않아?" "아...!" 그렇다. 이대로 자책하는 것은 현실을 타파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전심전력을 통해서 카이엔 형을 구하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일이었다. 이런 걸 미처 깨닫지 못하다니. 아이렌은 밝다. 조금 이상한 쪽으로 지나치게 일찍 성장해버린 감이 없지 않지만 밝고 명랑한 아이다. 아이렌은 절대 부정적인 쪽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항상 긍정적인 생각만 하고 행동을 실행에 옮긴다. 가끔씩 삐지기는 해도 그녀는 절대 '안 돼'라거나 '내 탓이야'라는 말은 하지 않으니까. 내가 아이렌을 좋아하게 된 것도, 예언을 통해 세상의 어두운 일면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나의 마음을 그녀의 순수한 열정에 기대고 싶어서일런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세 대씩이나 때릴 필요까진 없잖아! 나는 예언의 귀걸이에 걸어 놓은 부가기능을 통해 카이엔 형과 연락하려고 애썼고, 결국 카이엔형이 소환한 시르케이안을 통해 아이렌이 카이엔 형의 위치를 파악해서 세이렌 누나가 우리 모두를 시르팡의 본거지로 이동시켰다. 적들은 강력한 우리 멤버에 쫄아서 뒤로 도망쳤고 우리 가족들은 맹목적인 복수심에 불타 어쩌면 적이 파놓았을지도 모르는 함정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남아 있는 카이엔 형과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하지만 카이엔 형은 망설였다. 가족들을 따라갈 때도, 나를 따라 들어갈 때도 확실한 예언을 던져주지 않는 나를 못 미더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모자란 내 능력에 대한 자책감과 더불어 카이엔 형에게 화가 났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걸까? 사실은 이만큼 내게 관심을 가져 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인데... 관심과 사랑이라는 것은 한번 받기 시작하면 그것이 곧 당연한 것이 되고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된다는 말이 사실인 듯 나는 나를 믿어주지 않는 카이엔 형이 너무 안타까웠다. "답답한 소리 말고 따라와 형! 왜 그런 옷을 입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애 잠옷을 입었다고 해서 행동까지 소심한 기집애처럼 굴 참이야? 그렇지 않으면 난 누나나. .. 사이엔 형이나... 아이렌처럼 지켜줄 수 있는 강한 힘이 없다고 해서 날 믿지 못하는 거야? 나도... 나도... 카이엔 형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만은 딴 형제들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미안. 널 믿지 못해서." 카이엔 형은 곧바로 사과했다. 자신밖에 모르던 형이 이제는 서슴없이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는 것이다. 나는 기뻤다. 나는 카이엔 형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으니까... 결국 나도 다른 가족들처럼 알게 모르게 카이엔 형을 좋아하고 있었던 걸까? 어두운 미로가 흔들렸을 때 카이엔 형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를 꼭 껴안았고, 나는 그런 형의 품에서 묘한 따스함을 느꼈다. 떨어지기 싫은, 편안한 느낌... 얼굴에 왜 그런지 피가 몰렸다. "너... 얼굴이 이상해. 괜찮아?" "괘... 괜찮아! 이건... 형이 너무 예쁜데다 여자옷까지 입고 있으니까... 에... 왠지모르게 그냥... 그래서. 그래!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형. 내가 좋아하는 애는 오직 아이렌이니까 말이야." 필사적으로 나는 변명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열심히 변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진지했다. 후우. 이 정도 일에 말이 뒤엉키다니 역시 나는 아직 어린애일지도. "...외모만 제외하면 레이가 어린애라는 걸 아무도 안 믿을 거야." "그건 티아 언니도 마찬가지인걸?" "그런가? 하여간 그때는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는 거네? 만약 진짜 그랬다면 정말 볼만했을 건데. 형과 쌍둥이 여형제 사이에서 갈등하는 삼각 관..." "계속 놀릴거야? 그러면 나 더 이상 이야기 안 할 거라구!" "알았어. 알았으니까 계속 이야기 해 줘." 조금 마음이 동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건 역시 카이엔 형의 외모가 너무 예쁘고 귀여운 탓이 컸다. 게다가 그때는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여성용 파자마까지 입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역시 아이렌이였다. 정령왕 시르케이안을 역소환당하고 비틀거리는 아이렌을 본 나는 한발 앞서서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은 걸까? 아이렌... 나는 아이렌을 걱정했다. 카이엔 형도 마찬가지로 그녀를 매우 걱정했다. 아까도 흔들리는 미궁에서 날 감싸주었고 정말로 형은 달라졌다. 자기가 끼고 있는 마법무구들의 위력이 자신에게만 통해서 아이렌을 도울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는 그 놀라움이 절정에 달했다. 동시에 내가 그 마법무구들은 사실 형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속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형... 변한 것 같아." "응? 아, 그렇긴 그럴 수밖에 없지. 난 예전 일들은 하나도 기억할 수 없으니까." "아냐...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인격이 이렇게 변하리라고는 납득할 수 없어. 이전의 형이라면 남에게 받는 것을 당연스럽게 여기고, 남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혼마저도 변한 것은 아닐까... 그런 느낌이야." 그러고 보니 그때도 한때 그런 의심을 가졌었다. 하지만 단지 지나가는 말이었을 뿐인데다가 그때의 나는 다친 아이렌에게 더 관심이 쏠려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렌은 카이엔 형에게 부축받기를 원했고 형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레이가 업고 가지 않았어?" "사실은 내가 업고 가고 싶긴 했어. 그런데 아이렌이 자기보다 키도 작은 주제에 어떻게 업고 가겠냐고 하지 뭐야? 그래서 나도 홧김에 그만큼 무게도 니가 더 나가잖아 하고 되받아 쳐 버렸지." "푸후훗. 역시 형제자매라는 건 즐겁구나." "티아 언니는 형제자매가 없어?" "응..." 조금 쓸쓸해 보이는 스테아 언니의 얼굴. 하지만 그녀는 그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레이의 이야기가 끝나면 내 이야기도 해 줄께. 레이가 이렇게 자기 이야기를 열심히 해 주는데 나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되겠지?" "알았어." 그 뒤로 카이엔 형한테 업힌 것을 이용해서 어디서 배웠는지는 몰라도 갖가지 이상한 짓을 해가면서 형에게 작업에 들어가는 아이렌을 나는 애써 무시했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렌이 카이엔 형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분명 질투나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카이엔 형을 미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어쩔 수 없는 갈등이려나?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때 우리 앞에 흑마법사 셰더가 나타났다. 카이엔 형과 나는 원체 공격기술이 없고 아이렌은 지쳐 쓰러진 상태.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이했다. 아이렌이 아직 회복되지 못한 몸을 추스리고 나섰다. 하지만 나의 기지로 인해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을 불러와 셰더를 무찌를 수 있었고 우리는 폐쇄계로 이루어진 시르팡의 진을 뚫고 나올 수 있었다. 셰더가 깜빡 놓고 간 마도의 노예, 아시에 누나와 함께.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시에 누나에 관한 일도 스테아 누나에게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녀가 마도의 노예라는 사실 역시 우리 집안 내에서만 아는 비밀이니까. 그러고 보니까 아시에 누나는 대체 어딜 간 거지? 어제 학교에 간다고 집을 나간 이후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지금 우리 가족들 중 아무도 아시에 누나에게 신경쓰는 사람이 없잖아! "왜 그래, 레이?" "아... 아무것도 아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스테아 누나의 질문을 넘겼지만 속으로는 엄청 놀라고 있었다. 아무리 카이엔 형의 일로 다들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아무도 아시에 누나의 행방에 신경을 쓰지 않다니... 물론 아시에 누나는 반반한 얼굴 외에는 장점이 도통 보이지 않는 카이엔 형과는 다르다. 세이렌 누나의 명에 의해 다소 제약을 받고는 있지만, 그녀는 마도의 노예라는 과거 출신이 어쨌건 흑마법을 어느 정도 수준까지 쓸 수 있는 사용자인 것이다. 그런 그녀가 특별히 없어졌다고 해서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선은 조금 기다려보자. 섣불리 단정하긴 일러. 게다가 카이엔 형쪽의 일이 훨씬 더 급한 일인 게 사실이니까. 나는 우선 아시에 누나에 대한 걱정을 접었다. 만약 내일까지라도 연락이 되지 않고 행방이 묘연하면 그때 가서 다시 가족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켜도 늦지 않을 것이다. "흐음... 말하기 싫으면 안 말해도 돼. 그렇게 억지로 애쓸 필요는 없어." "으응..." ...내가 모든 사실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있구나. 역시나 대륙 7대 현자인 천재소녀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나의 거짓말이 많이 어설픈 걸까? 어쨌건 아시에 누나가 우리 집에 와서 엄마의 도움으로 쌓인 저주의 부작용들을 치료하고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나중에는 결국 기억까지 찾아냈다는 이야기는 그녀에게 할 수 없었다. "...실론 파르스... 뻔뻔하게 우리 집에 발을 들이미다니 말야." 나는 이를 살짝 악물었다. 카이엔 형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형을 뒤에서 찌른 남자. 그 때문에 사이엔 형과 서로 일대일로 생사를 건 싸움까지 했었다. 아버지의 친구인, 같은 12용사 쟈켄 파르스의 청으로 결국 한번은 용서해주는 걸로 하고 넘어갔지만 그렇다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앙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평소에 섭섭한 감정같은 걸 다른 사람에게 절대 드러내지 않는 엄마가 아빨 용서하지 못하고 며칠간 끌고 가서 벌을 주었을 정도니 말이다. "나도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같은 12용사 가문인 파르스 가와 싸움을 벌일 거야?" "우린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비단 파르스 가문 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해치려 드는 어떤 녀석들이라도 말이야." 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브리타뉴 가문은 국가급의 세력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 브리타뉴 가문 역시 그에 상응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알고 있다. 물론 진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실론이 형을 찌른 것은 실수였겠지만 진실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 중에서는 그때 카이엔 형이 죽었으면 좋았을걸...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은혜는 두 배로, 복수는 열 배로 라는 거지." "조금 이기적이네..." "알잖아? 카이엔 형의 엄청난 인기에 가려져 있지만 사실 뭣 좀 안다는 지식인들 가운데서는 우리 가문의 평판이 별로 안 좋다는 건..." "알아." "실망했어? 우리 브리타뉴 가문에?" "으응. 그런 건 아냐. 다만... 그렇게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 그 힘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게 스스로만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건..." "글쎄..."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스테아 누나와 나 사이에는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생각의 벽이 존재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뭐라고 해 보았자 스테아 누나의 생각이 변할 리 없겠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 이런 화제로 더 이상 이야기를 해 나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나는 실론에 대한 언짢음을 뒤로 하고 다음 이야기를 계속 진행시켰다. 카이엔 형이 수학여행에 다녀온 이야기. 왕궁의 머신검 도난사건에서 다시 한번 카이엔 형이 납치당한 이야기에서부터 오늘의 이야기까지, 아시에 누나나 미렌 누나의 이야기같은 민감한 이야기들을 제외하고는 차례차례 하나씩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스테아 누나가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카이엔은 그 시르젤이라는 사람이 있는 장소로 사라진 게 아닐까?" "티아 누... 아니 언니도 그렇게 생각해?" "다른 장소를 생각할 여지가 없어. 확신하는 건 아니지만 카이엔은 분명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으니까." "그렇지..." 왜일까?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걸까? 카이엔 형의 곁에는 많은 여자들이 있다. 집에는 세이렌 누나, 아이렌, 그리고 아시에 누나가 있고 학교나 대륙 각지에 형을 사모하는 여자들은 넘치다 못해 세상을 온통 카이엔 형의 팬들로 채울 수 있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왜...! 카이엔 형이 마음을 주고 있는 사람은 남자... 그것도 전에 자기를 납치해간 남자인 거지? 첫번째 납치에서 돌아왔을 때는 별다른 감정이 없이 그때의 일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두번째 납치에서 돌아왔을 때는 달랐다. 한 점 남김없이 모든 일을 털어놓던 첫번째 때와는 달리 어떤 중요한 사실을 숨기는 것 같아 보였고, 어딘가 필사적으로 시르팡의 사람들을 변호하려 한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동안, 거기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지? 별로 길지도 않은 만남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보고 싶다. 알고 싶다. 대체 무엇을 감추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카이엔 형을 상대로는 나의 예언은 아무 의미가 없다. 심안(心眼)을 뜨고 카이엔 형을 보아도 과거, 현재, 미래 어느 모습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혼돈만이 존재할 뿐이니까.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어떤 것도 알 수가 없어... "여기 계셨군요. 레이엔 도련님. 사모님께서 부르십니다." "엄마가?" 집사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무슨 일일까? "그럼 나도 이제 슬슬 가봐야겠네. 다른 사람들도 만나보고 인사를 드려야지. 그럼, 다음에 또 봐, 레이!" "아... 알았어, 티아 언니. 그럼 또 다음에!" 스테아 누나는 그렇게 인사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그런 나와 스테아 누나의 모습을 본 집사가 어딘지 흐뭇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오... 도련님께서 드디어 아이렌 아가씨 외에 다른 처자분들께도 관심을 가지는 겁니까? 긍정적인 현상이군요." "무... 무슨 말이야, 집사? 내가 생각하는 여자는 오로지 아이렌 뿐이라고, 너도 잘 알잖아!? 이건 분명 내 예언으로도 확인한 사항이라고!" "예언은 사람의 노력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한 사람도 레이엔 도련님이셨죠." "윽...!" "설마 정곡을 찔리신 겁니까? 농담이었는데..." "돼... 됐어! 난 아이렌 말고는 정말 아무 여자한테도 관심없으니까 괜히 삼각관계니 어쩌니 하는 엉뚱한 상상은 하지 마!" 나는 조금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집사를 뒤로 내버려두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었다. 이잇... 내가 다른 여자랑 이야기 조금 했다고 해서 왜 상황이 이런 식으로 흐르는 말야? 하지만 오렌지색 눈빛을 밝게 빛내면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스테아 누나의 명랑한 모습이 어째서인지 머릿속에서 자꾸 떠나가지를 않았다. 제139화 : 절망의 나락 끝에서 쏴아아. 비가 퍼붓고 있었다. 마치 저 하늘 위에서 거대한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듯 세차게 내리는 비는 뒤덮힌 먹구름 아래의 대지를 거세게 내려치고 있었다. 우르릉 쾅 반짝이는 빛이 지나가면 잠시 후에 우레소리가 헐레벌떡 빛을 뒤따라 뛰어온다. 빛과 소리의 불규칙한 시간 간격과 방향이 벼락이 내려치는 범위가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끄응..." 나는 어느 폐가(廢家)의 헛간 창고에 지친 몸을 누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여전히 만신창이인 아시에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이상하게도 아시에는 죽은 지 며칠씩이나 지나고도 전혀 썩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썩는 냄새 같은 것도 전혀 나지 않았다. 심장은 여전히 뛰지 않았지만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는 것도 전과 마찬가지였다. 지금 내 모습을 말해보라고 하면 온통 거지꼴이라고 말하는 편이 정확했다. 깔끔했던 옷은 때로 범벅이 되어 점차 누더기꼴로 변해가고 있었고 탐스럽고 부드러운 머리 역시 제멋대로 흩어져 귀신이 친구하자고 해도 괜찮을 정도였다. 며칠 동안 온 황야를 구르면서도 전혀 씻지 못했기 때문에 몸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머리에는 비듬이, 몸에는 이가 넘쳐서 나는 쉴새없이 온몸을 박박 긁어 댔다. 지금 내 꼴이 어찌나 엉망인지 아무도 내가 대륙 전역에 이름높은 카이엔 브리타뉴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한번 보기만 해도 끔찍한 시신을 메들고 다니니까 더욱 더 그렇겠지. "돌아갈까..." 이미 지쳤다. 가출 한 번 해 본적 없는 나에게 며칠 동안 황야를 떠돌아다니는 이런 가혹한 생활은 너무 힘들었다. 뭔가를 먹고 싶어도 깨끗한 물 한 잔을 먹을 수 없고, 옷을 갈아입고 싶어도 갈아입을 것이 아무것도 없고, 편안한 침대에서 자고 싶어도 내 몸 하나 편하게 누일 곳이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브리타뉴 가문의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식사와 온천, 그리고 잠자리를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어. 잘은 모르지만, 무언가가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마법무구가 모두 깨지고, 아시에가 죽었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갔다가는 또 무슨 충격적인 일이 터져서 나를 괴롭힐 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근거는 없지만, 단지 본능적으로 그런 예감이 들었다. "엣취!" 감기인가. 나는 비에 젖어서 땟국물이 흘러내리는 옷을 벗어서 짚 아무곳에나 잘 펴 두었다. 어두운 날씨에 작은 창으로 희미하게 새어들어오는 빛 아래서 작고 가냘픈 내 육신이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으음... 조금 어지럽다. 끼니를 제 때 먹지 못해서 그런걸까? 하지만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왜 이렇게 괴력(怪力)은 그대로인지 모르겠다니깐. 조금 추워서 나는 몸을 녹이기 위해 아직도 따뜻한 아시에의 육신을 껴안았다. 아시에는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옷이 거의 다 찢어졌기 때문에 나는 넓은 천을 하나 구해서 그녀의 시신을 싸고 있었다. 불론 지금은 그 천도 젖었기 때문에 말라고 있었다. 거의 알몸이나 마찬가지인 상태로 아시에의 나신을 껴안고 있었지만 성적 욕망같은 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정도로 그녀의 육신은 망가져 있었다. 오히려 어두운 날씨와 덧붙여 어딘가 으스스한 느낌마저 들었다. 지금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춥지 않았다면 절대로 아시에의 시신을 안는 일은 없었을 거다.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에게 전달되어오는 체온. 어쩐지 기분이 묘하다고나 할까? 나는 점차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으음... 아시에가 만약에 별다른 상처없이 죽음을 맞이하여 시신이 되었다면 나는 그녀에게 욕구를 느꼈을까? 아니, 그것보다 지금 내가 이 상황에서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다른 생각을 하자! 다른 생각을 말야! 뭐가, 어디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내가 시르젤과 결별할 것을 각오하면서 시르쥬를 죽였을 때? 아니면 시르쥬가 먼저 아시에를 죽였을 때? 또는 내가 위즈라는 사람과의 미소년 승부 때 아시에의 성희롱(?)에 절규해서 마법무구가 깨져나갔을 때? 그렇지도 않으면... 어쩌면 내가 이 세계로 와 이 몸에 빙의했을 때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걸까? 진실. 모든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진짜 진실. 궁금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냥 이대로 행복한 생활을 평생 영위하는 것, 그걸로 족했다. 굳이 레이엔이 말했던, 진실을 알게 되면 불행해진다는 이야기가 아닐지라도 나는 다시 외로움으로 가득 찼던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힘과 숙련된 전투 센스. 거부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쓰고는 있지만, 나는 점차 알고 싶어하지 않는 진실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삐그덕 헛간의 낡은 문이 별로 듣기에 좋지 않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나는 품에 안고 있는 아시에의 시신을 감출 생각도 없이 그대로 품에 안고 긴장한 채로 눈앞의 인영을 바라보았다. "누구지?" 이틀 전, 길가에서 아시에를 안고 있는 날 본 사람들 몇이 날 마녀(魔女)로 오인하고 도망갔고, 그 다음 날 어딘가 근처의 영지에서 기사들 몇과 마법사 하나가 나를 처단하기 위해 내 뒤를 쫓아왔다. 나는 도망갔지만 그들은 끈덕지게 나를 쫓아왔다. 그들이 나를 계속 추적하게 놔둔다면 그렇지 않아도 편안하지 못한 수면을 뜬눈으로 지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그들을... 죽였다. 어설프게 살려 두었다가 다시 다른 추적대를 불러들이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들에게서 약간의 돈과 식량을 빼앗았다. 식량이라고 해봤자 습기가 차서 푸석푸석한 빵조각과 육포였지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눈물젖은 빵이라고 할까... 이렇게 된 바에 힘으로 모든 것을 강탈하자는 생각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의 감성은 아직 무고한 사람들의 재산과 생명을 함부로 뺏을 정도로 잔인하지 못했다. 적이라고 판단되는 사람들은 이젠 거침없이 죽일 수 있게 되었지만... "카이엔 님!?" 어쩐지 들어본 듯한 아동틱한 여자 목소리... 누구지? 그 때 눈앞의 불청객과 나 사이에 빛이 떠오르면서 어두운 실내를 밝혀 주었다. 전과는 다른 짙은 초록빛깔의 가벼운 원피스를 입고 있는 자주색 머리카락의 여자아이는... "마나티?" "꺄아∼♡ 카이엔 님! 절 기억해주시는군요!" "으... 응." 상당히 인상깊은 애였으니까 넌. "그리고 많이 대담해지셨군요!" "뭐?" "시체를 상대로 그런 놀이...를 즐기고 계시다니 말에요. 그것도 그렇게 그로테스크하고 엽기적인 시체를... 그렇다면 혹시 카이엔 님은 시체가 아니면 할 맘이 드시지 않는..." "무슨 소리얏!" 여전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여자애다.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나를 변태로 몰아붙이고 있잖아! 하긴 그런 오해를 받을만한 상황에 있기는 하다. 속옷만 있고 있는 내가 제멋대로 칼질당하긴 했지만 나체인 아시에를 껴안고 있으니 말이다. "얘는... 시에라고...아시에." 나는 크게 소리지르려다가 곧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시에 선배요?" 마나티가 초록색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아시에의 죽음은 그녀에게도 역시 놀라운 일인가 보다. 선배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말야. "그렇군요... 그래서 주변에 사기(邪氣)가 이렇게나..." "사기(邪氣)?" "네. 저는 이 주변에 이상하게 퍼져 있는 사기를 느끼고 따라왔거든요. 그런데 그게 알고 보니 아시에 선배의 사기였군요. 흑마법사들은 보통 스스로가 가진 부정한 기운을 밖으로 퍼져나가지 않게 억누르고 다니는데 죽으면 억제된 그 기운이 밖으로 한동안 계속해서 빠져나가게 되지요." "그런가..." "그런데 아시에 선배가 왜...? 죽은거죠? 설마 카이엔 님이...!" "내가 뭘!" "복상사(腹上死)시켰다거나..." "그럴 리가 없잖아!" 하여간 저 애는 도통 사람 말은 듣지도 않고 제멋대로 결정해버린다는 점이 골치아픈 아이다. 세이렌 누나나 아이렌조차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야. 아니 이 시체의 대체 어느 구석이 복상사로 보이는 거냐구! "시르쥬... 시르팡 녀석들 중에 시르쥬가 시에를 죽였어." 나는 담담하게 사실을 마나티에게 털어놓았다. 이것은 마나티의 터무니없는 오해를 풀기 위해서 한 말이였지만 또한 나 스스로에게 그 사실을 다시 상기시키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다. 특히 다음에 이어질 말은. "그리고... 나는 시르쥬와 그 부하녀석들을 죽였어." "헤에..." 여전히 눈을 똥글똥글하게 뜨면서 내 이야기를 듣는 마나티. 그녀에게는 아시에에게 선배로서의 애정같은 건 없었던 걸까? 그녀는 처음에는 놀란 표정을 하고 다음에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했을 뿐이었다. 대체 이 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시르젤 씨는 어떻게 하고요?" "시르젤..." 마나티가 지금은 생각하기 괴로운 사람의 이름을 끄집어냈다. 시르젤... 이제는 다시 그 사람 곁에 있을 수 없겠지. 그 사람은 분명 착한 사람이니 나를 탓하지도, 원망하기도 않겠지. 하지만 그가 날 용서한다고 해도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시르쥬를 죽여 놓고 웃는 얼굴로 시르젤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뻔뻔한 놈이 못 된다. 만약에 그가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건 그것 나름대로 괴롭겠지만... "이젠 만날 수 없겠지. 아니, 만나서는 안 돼." 누군가 좋아하는 사람을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는 말은 분명 괴롭고 힘든 일일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부정적인 감정의 편린들을 확대재생산하지 않기 위해서는 결별의 길을 밟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제는 그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 질문 하지 마..." 더 이상 그런 걸 떠올리는 것은 괴로우니까. 그렇게 아프게 찌르지 말아줘. 마나티도 내 말 뜻을 알아들었는지 더 이상 시르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죽은 사람인데 왜 아시에 선배를 그렇게 껴안고 있는 거에요?" "그게 말이지..." 나는 마나티에게 아시에의 이상한 현상을 이야기했다. 분명 육체가 엉망이 된 데다 심장도 멎었지만 여전히 몸은 따뜻하고 시체는 썩지 않는다고. 나는 필사적으로 가능한한 자세히 옆에서 아시에의 시신을 지켜본 결과를 이야기해 주려고 애썼다.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나는 그 가능성을 잡고 싶었다. 그녀의 시신을 묻지 않고 그대로 들고 다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나티는 나의 그런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아시에 선배, 죽었어요. 백 퍼센트 확실하게." "아시에 선배, 죽었어요. 백 퍼센트 확실하게." "그럴 리 없어!"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깜찍하고 귀여운 표정으로 일관하는 마나타의 모습에 나는 무럭무럭 솟아나는 증오심을 그대로 목소리에 담아 외쳤다.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닥 남은 실낱같은 희망에 의지하여 헤메고 있었는데 그런 희망마저 앗아가는 잔인한 한 마디는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이렇게 따스한데..." 나는 다시 한번 아시에의 시신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얼굴 곳곳에 나 있는 칼자국과 덜렁거리는 살점이 나를 다시 한번 가슴아프게 했다. "카이엔 님도 알고 있죠? 아시에 선배는 마왕 소환의 제물이 되고도 죽지 않았고, 그 후에 성장이 멈췄다는 이야기를." "그래서?" "역사상 그런 현상이 보고된 바가 없기 때문에 제 주인님은 거기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하셨죠. 하지만 결국 그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알아내지 못하셨어요. 하지만 그 특징에 대해서는 몇 가지 밝혀냈죠." "특징?" "지금 카이엔 님이 알고 계시는 아시에 선배의 시신에 대한 것들이 바로 그거에요. 아시에 선배의 육체는 정지(停止)한거죠. 성장이 멈추고, 죽어도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죠. 마찬가지로 체온조차 사라지지 않게 된 거에요." "그럼 왜 죽은 거야! 애초에 성장이 멎었다면 죽을 리도 없잖아! 심장이 뛰지 않는데 어떻게 체온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이야, 말도 안 돼!" 나는 거의 광분하다시피하며 소리를 질렀다. 마음대로 휘두른 손발에 주변의 짚들이 흩날렸다. 우르릉 쾅. 다시 한번 울리는 천둥소리를 시발점으로 나는 다시 한번 눈물을 터뜨렸다. 사실은 핑계를 대고 있는거다... 어떻게 해서든지 아시에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핑계를... "시에가... 죽을 리가... 없잖아. 으흐흑." 인정하기 싫은 마음과 인정해야만 하는 현실. 두 가닥의 평행선 사이로 끝없이 만날 수 없는 공간의 틈새가 나의 마음을 불안정하게 뒤흔들면서 격동하는 감정의 파동을 격렬하게 휘저어댔다. "억지부리지 말아요. 보기 흉하니까." 처음으로 마나티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내 모습이 한심해? 그렇게 보여? 아하하... 그래. 나는 지금 내가 태어난 이래 최고로 한심하고 바보같은 몰골을 보이고 있는거야. 비난하고 싶으면 마음껏 비난해. 어설픈 충고나 위로따위는 지금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마나티는 금방 다시 에헤헤거리는 실없는 웃음을 짓더니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물을 담아 다니는 병 같은데... "맨정신으로 있는 건 많이 괴로울 거에요. 이걸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거에요." "이건..." "술이에요."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마나티의 손에서 술병을 낚아채고 그걸 단번에 입에 털어넣었다. 불이 붙은 것 같은 화끈한 느낌이 입안에서 식도를 타고 위장까지 전달되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동시에 몸이 이상하게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입안을 태워가는 느낌에 괴로워진 나는 물을 찾았다. "물!" "여기요." 나는 마나티가 뚜껑을 따고 건네주는 병을 다시 한번 꿀꺽꿀꺽 마셨다. 응? 그런데 맛이 좀 이상했다. 분명 술은 아닌데 물도 아니었다. 어째 달착지근한 맛이 느껴지는 게 음료수 종류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건..." "이온 음료에요∼ 에헷♡ 빨리 취하시라고 마나가 특별히 준비한 물건이랍니다!" 음료의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방금 전까지 뱃속에서만 들끓고 있던 열기가 핏줄을 따라 위장을 따라 심장을 지나 어깨를 거쳐 팔을 타고 손가락 끝까지 순식간에 도달해갔다. 술도 엄청 독한 술이었는지 금세 정신이 핑 하고 돌았다. "어지러워..." "기분이 어떠세요?" 여전히 동글동글한 눈을 크게 뜨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마나티. 몸에 술기운이 도니 더위가 느껴졌다. 나는 품에 안고 있던 아시에의 시신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런 간단한 작업도 점차 행하기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알코올이 중추신경계를 마비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뜻모를 분노와 설움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껍질을 깨고 폭발했다. "젠장! 쓰바알! 개 10 호로 색히같은 놈들아아!" 나는 원색적인 욕들을 정체도 불분명한 대상들을 향해 쏟아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단순히 감정을 쏟아내는 행동을 한동안 계속하고는 나는 중얼거렸다. 다소 힘이 빠질 때쯤 되자 머리가 더 핑핑 돌았다. 이온 음료를 같이 마셨다고는 하지만 고작 한 병 마시고 이렇게 어지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한번에 쏟아 넣는 바람에 그 맛을 완전히 느낄 새는 없었지만 아직까지 입안에 맴돌고 있는 술맛은 엄청 독했다. 양주보다 몇 배는 더 뜨거운 것 같았다. 문득 마나티를 바라보았다. 귀여워 보이는 머리핀을 여러 군데 꽂아 틀어올린 그녀의 진한 자줏빛 머리카락이 말할 수 없게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 밑에서 깜빡이고 있는 초록빛의 신비한 눈동자도, 하얗고 부드러워 보이는 자그마한 맨어깨도, 나시 원피스 위로 굴곡져 보이는 그녀의 가슴도, 짧은 치마 밑으로 보이는 가볍고 날씬한 다리와 어딘가 색기를 겹쳐지게 보이는 검은색 스타킹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와락 술기운에였을까? 점차 몽롱해져 가는 나는 일어나서 마나티를 꽉 껴안았다. 나는 지금 옷을 말리고 있었기 때문에 속옷만 걸치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런 것까지 일일히 신경쓰고 있을 것 같은 정신은 아니었다. 그리고 입에서는 나조차도 뜻을 모를 말이 술술 끊임없이 새어나왔다. "젠장... 뭐가 어쨌다는 거야. 시에가 죽어버렸는데... 소원도 못들어주고 죽어버렸는데... 행복해지건 불행해지건 그게 어쨌다는 거야. 주변에 나를 안고 싶어하는 계집애들이 잔뜩 널렸는데 이대로 아무와도 관계를 안 가지고 있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젠장! 이젠 멋대로 할거야! 내 멋대로 할 거라구!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나는 거칠게 마나티의 몸을 더듬어 가면서 말했다. 아마 침도 좀 튀었을 거다. 하지만 마나티는 자기 자신이 내게 제멋대로 농락당하고 있는데도 아무런 동요나 반응도 없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서투네요. 카이엔 님. 하아... 이래서야 처음부터 제대로 가르쳐드려야..." "시끄러!" "이제 그만해요..." "그만하라고 해서 그만 할 것 같아!?" 내가 계속해서 거친 행동을 계속하자 마나티가 내 손목을 붙잡으면서 말했다. 뭐냐? 이제와서 싫다고 말하려고? 그러기엔 이미 나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썅! 갈 때까지 가보는거야! 뒤는 어찌되건 상관없어? 혹시라도 저항하겠다는거냐? 나조차도 컨트롤 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넣은 내게 말야? 그러자 마나티는 나를 보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지었다. "하아... 카이엔 님 너무 취했어요. 물론 저야 카이엔 님이 절 택해주신다면 끝까지 물고 죽을 때까지 안 놓아줄 용의가 있지만요, 카이엔 님은 지금 완전히 죽어서 움직이지 않는걸요?" 죽어서 움직이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잠깐 행동을 멈추고 눈앞의 마나티가 두 개, 눈이 네 개로 보이는 상황에서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끙끙댈 때 그녀는 갑자기 내 사타구니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아앗! 지금 그 손으로 뭘 잡는 거야? "봐요. 저같이 큐티하고 섹시하며 귀엽고 아리따운 한 떨기 꽃같은 요조숙녀를 품에 안고도 아무 반응이 없잖아요. 많이 취했다니깐요∼♡" 큐티 어쩌고에서부터 꽃같은 요조숙녀 어쩌고라는 이야기는 일단 무시하고, 나는 그제서야 마나티가 이야기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젠장! 아무리 알코올의 힘을 빌려 그동안 굳세게 억눌러 왔던 욕정을 풀어내려 했건만 이제는 그 알코올이 너무 과해서 몸이 따라주질 않는 건가... "썅!" 나는 씩씩거리며 거칠게 마나티를 밀어내고는 애매한 짚들을 향해 마구 펀치와 킥들을 날렸다. 으아아아아아! 슬픔, 분노, 증오, 욕정, 한탄, 자책, 체념. 이 모든 복잡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실린 나의 한(恨)은 대체 어디에서 풀어야 하는 걸까. 세상 만사가 뜻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겠지만 요즘에는 왜 이렇게 멋대로 내가 피하기를 바라는 쪽으로만 상황이 흘러가는 걸까... "그러지 말고, 저희 집으로 오는게 어때요?" "집?" "네. 제 주인님이라면 아시에 선배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마음대로 해..."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풀썩 쓰러졌다. 더 이상은... 내가 머리로 무언가를 사고(思考)하고 행동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야. 으윽... 추석특집편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 추석 특집편- ------------------------------------------------------------------------- 추석이랍니다. 한가위라고도 하죠. 어디선가는 중추절이라고도 했던 것 같아요. 딴 건 둘째치더라도 5인 연속 스트레이트 휴식! 그거 하나만으로 충분한 가치를 지니는 정말로 좋아하는★ 명절이랍니다! 자, 이미 제목만 보시고 몇몇 분들은 제 의도를 파악하셨을런지도 모르겠네요. '그곳'으로 가지 않으면 안된답니다. 물론 종일 그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조금 연재 간격이 불규칙해질지도 모른답니다. ...그리하여 오래간만에 10문 10답 시리즈, 다섯번째랍니다. 마나티(Manatea)편...! 마나티 : 야호∼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귀엽고 깜찍하며 섹시하고 초 큐티한 아리따운 한 떨기 꽃같은 궁극의 초 미소녀, ♡마나티♡랍니다. 마나라고 불러주세요오오오오∼ YURU : 왜 제가 말도 꺼내기 전부터 먼저... 마나티 : (YURU의 말을 씹는다.) 그럼 지금부터 저에 대해 여러분이 궁금해하는 모든 것을 알려드리도록 할께요∼ 아참, 숙녀의 몸무게나 쓰리 사이즈 같은 민감한 사항은 물으면 안된다는 건 아시죠? YURU : 마나티이이이이이이! 마나티 : 어라,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딴청) YURU : 사람 말좀 들으라고요. 게다가 저 뻔뻔스러운 자기소개는...(퍼억, 마나티에게 뒷통수를 얻어맞고 기절한다.) 마나티 : 어머나, YURU님께서 요즘 글을 쓰느라 너무 과로하셨나 보네요. 그럼 할 수 없네요. 저 혼자서 북 치고 장구치며 이 10문 10답을 끌어나갈 수 밖에요. 1. 마나티 : (질문지를 펴든다.) 에에... 첫번째 질문은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느냐? 라는 말이네요. 아잉∼ 그런 걸 물으면 마나는 부끄럽잖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큰일이라니까요. 제 사랑스러운 뵨태 쥔님 셰더님을 비롯해서 래더 오빠, 시르젤 오빠, 카이엔 오빠, 아시에 선배 등등... 앗, 이 글을 써주는 YURU님도 정말 사랑한답니다∼♡ YURU :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그런 말로 전지전능한 작가를 패대기 친 걸 넘어갈 수 있.. 마나티 : 아잉∼ 제가 얼마나 YURU님을 좋아하는지 알면서, YURU님도 저 엄청 좋아하잖아요.(그리고는 멋대로 키스 세례를 퍼붓는다.) YURU : 끼얏... 그만둬요! 그리고 그 질문지도 돌려줘요! 마나티 : 히잉∼ 2. YURU : 좋아하는 만화나 게임은 뭐죠? 마나티 : 만화는 '여동생은 사춘기', '최유기' 게임은 '소년병동'과 '라그나로크 온라인'이에요. 그 외에도 좋아하는 건 너무 많지만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일단 이정도로 할래요. YURU : (뭔가 언밸런스한...-ㅅ-) 3. YURU : 분명 셰더씨의 '노예'인데 그렇게 제멋대로 굴어도 돼요? 듣기에는 누가 주인이고 누가 노옌지 구별이 안 갈 지경이라던데... 마나티 : 어머나, 누가 그런 말을 해요? 저처럼 주인님께 성심성의껏 봉사하는 착하고 성실한 노예가 세상에 어디 있다고 그래요? YURU : 밥과 빨래 등 가사 전반을 셰더 씨에게 맡긴다면서요? 마나티 : 그건 저도 이유를 모르겠다니까요. 분명 제가 할거라고 했는데 부득부득 우기면서 자기가 한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제가 너무 주인님께 봉사하느라 고생을 많이 해서 어느 정도 보답을 해 주시려는가봐요. 4. YURU : 셰더 씨는 카이엔을 여자로 만드려는 것 같은데, 반대한다면서요? 마나티 : 당연하죠! 카이엔 님 같은 미소년이 여자가 되면 그 아리따운 자태가 특별난 것이 아닌, 평범한 미소녀로 변해 버리고 말 걸요? 주인님은 아직 이해를 못하시지만 언젠가는 진정한 변태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여색(女色)이 아닌 남색(男色)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언젠가는 이해하실 날이 올 거에요. YURU : (그냥 미소년이랑 미중년 붙여서 같이 감상하려고 하는 거 아닌가...-_-+) 5. YURU : 마나티는 어떻게 해서 셰더씨의 노예가 된 거죠? 과거 경력이 뭐에요? 마나티 : 몰라요. 기억은 전부 주인님이 절 노예로 만들면서 완전히 지워버렸는걸요? 잘은 모르겠는데 지금과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달랐던 것 같아요. 뭐... 그 주인님이 스승님에게 물려받았다는 그 조교실이 워낙 인상깊은 경험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YURU : 조교실, 그건 뭐죠? 마나티 : 알면, 다친답니다. 우훗∼ 새로운 경험을 듬뿍듬뿍 할 수 있는 신비의 장소라고 할까요? 하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이전의 아시에 선배처럼 정신에 상처를 입기 십상이랍니다. YURU님도 들어가실래요? 제가 마음껏 요염한 자태를 뿜으며 농락해 드릴께요. YURU : ...절대 사양하죠. 6. YURU : 아시에씨는 마나티야말로 그 이후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는데요?(10문10답 아시에편 참조) 마나티 :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진 약한 사람의 변명일 뿐이에요. 누구나 마찬가지에요. 같은 시련을 겪고도 성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거를 영원히 씻지 못하고 괴로움에 정체(停滯)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YURU : 그렇다면 마나티 본인은... 마나티 : 저야말로 강한 마음을 지닌 철의 여인상의 표현이 아니겠어요?(당당) YURU : .....(어떤 면에서는, 그럴지도) 7. YURU : 왜 그렇게 미소년, 미청년, 미중년 등등에 열광하는 거죠? 세상은 외모만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마나티 : 이해하지 못하시겠어요? 남자들이 로리, 여고생, 미소녀, 누님, 메이드 등등에 열광하듯 커플링과 야오, 쇼타, 오지, 집사 등등은 여성들의 로망이라고요! YURU : 어느 쪽의 로망이든지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마나티 : YURU님, 억지로 순진한 척 하실 필요 없어요. 어서 본모습을 드러내라고요. YURU : 보... 본모습이라니요? 저는 대한민국 4000만 인구 중 평범한... 마나티 : 저라는 캐릭터의 존재 자체가 YURU님의 본성을 증명하는 증거라니깐요(므흣^ㅁ^) YURU : ....(졌다) 8. YURU :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기 자신이 좀 많이 특이한 캐릭터라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나요? 마나티 : (낯짝 하나 안바꾸며) 전혀요. 사람들이 가진 고정관념으로 이해한다면 그렇게 비칠 지도 모르겠지만, 이 글을 보는 독자분들 틈에 섞여들어가면, 저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캐릭터가 되버린답니다. YURU : 독자들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는 건 좀... 마나티 : 뭐 어때요? 이런 글을 여기까지 읽었다는 것이야말로 저와 코드가 일치한다는 확실한 증거! 코멘트 달아주시는 언니오빠들도 그렇게 생각하죠? >_<乃! 9. YURU :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뭔가요? 마나티 : 원석 발굴과 세공요! YURU : 네에? (어안이 벙벙함) 마나티 : 알아들으실 분들은 다 알아들었을 거에요. 그 '원석'이 뭘 말하는지 말이죠. 우훗♡ 10. YURU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말해주세요. 마나티 : 자, 여러분∼ 힘을 모아서 외칩시다! 그리고 열심히 작가에게 압박을 가하는 겁니다! 그리하여 원하는 결말과 커플링을, 로망을 성취하는 거에요! YURU : 독자들에게 이상한 바람 넣지 마! 마나티 : 휘둘리고 있으면서∼ 이미 휘둘리고 있으면서∼ YURU : 아냐아아아아아아! 마나티 : (토닥거리며) 그러지 말아요. 본인도 나름대로 즐기고 있잖아요? 냐하하∼ YURU : 즐기긴 뭘 즐긴다는 거... 끼약! (다시한번 마나티의 스킨쉽 공세에 쓰러진다) -------------------------------------------------------------------------- - 멋대로 대답해드리는 코멘트♡(이번화따라 심해진 하트의 압박 -ㅅ-) - 神武刀..&슈엘&셀레네스 님께 : 셰더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시는군요! 냐핫∼ 그런 류의 스토리도 검토중이랍니다.^^ _은빛마녀_ 님께 : ...그런 헛소리들로 양을 늘리는 겁니다. 와하하핫! §새콤달콤§ 님께 : 아무리 무뇌 코미디라도 기승전결은 갖춰야죠. 조금씩 조금씩 시리어스하게∼ 환상미궁 님께 : 미소년 노예는 담편에 나온답니다 시즈레얀 님께 : 저는 미(美) 자만 붙으면 뭐든지 상관 없.....(퍼억) 디레이유이나 님께 : 힘내세요. 저도 어릴 때는 컴터 사용을 엄청 제한당했답니다.(지금은 거의 중독 수준으로 써대지만 =_=) 러비마녀 님께 : 기대하시던 마나티의 특별편이랍니다∼♥ 마도의 길이라... 좋죠(머엉)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선택의 기로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41화 : 선택의 기로(1) ------------------------------------------------------------------------- "으윽..." 머리에 띵 하는 통증을 느끼면서 나는 잠에서 깨었다. 어제 마신 술이 무슨 종류인지는 몰라도 빈속에 독한 술을 쏟아부었는데도 신기하게도 게워낼 것 같은 느낌이나 속이 메스껍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 대신에 머리를 엄청나게 압박해서 깨고서도 내가 꿈 속에 있는지 현실에 있는지 몽롱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일어나야만 했다. 첫째로 내 방광이 두뇌경제의 악화는 생각지도 않은 채 당장에라도 소변을 쏟아내겠다고 막무가내식 불법 파업을 벌였기 때문이었고 두번째로는 내 목구멍 역시 모자란 수분을 보충해달라고 촛불시위를 벌이면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곳이 어딘지 생각할 틈도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더듬거리면서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시원하게 소변을 보고, 선반 위에 있는 주전자를 들어 담겨 있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하아..." 아직은 정신이 어질어질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이제서야 나는 주위를 살펴볼 여유를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크지는 않지만 아늑한 방에 자그만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반쯤 열린 창 바깥으로 신선한 바람이 불어들어왔다. 방 한 쪽에 걸려 있는 거울을 보니 나는 별 무늬가 박힌 연두색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여... 연두색!? 나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연두색이라니! 물론 이 파자마 역시 원피스 형태의 여.성.용.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지만 지금까지 어디 쓰러져서 일어날 때마다 입혀져 있었던 핑크빛 잠옷들의 압박에 비하면 정말 놀라운 변화였다. 어쩌면 난 엄청 사소한 데서 감동하는지도... 좀더 방 이곳저곳을 둘러본 나는 주전자가 놓여 있던 선반 위에 쪽지 하나가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읽었다. [깨어나시면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세상에서 제일 이쁜 마나티-] 그러고보니 기억이 난다. 나는 마나티가 주는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 술주정을 부리고 마나티를 안으려 하는 추태를 보이다가 쓰러져 버렸지... 으음. 내가 왜 그랬을까나? 지금 생각해보니 조금 쪽팔린다. 게다가 일을 저지르려다가 몸이 안 따라줘서 못했다는 걸 생각하니 더욱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창피함을 부릅쓰고서라도 일단 마나티를 불러야 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뿐만 아니라 지금 내 옆에 없는 아시에의 시신의 행방도 물어봐야 한다. "마나티." 나는 쪽지에 쓰인 대로 마나티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마나티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나티." 하지만 이번에도 응답이 없다. 소리가 작아서 그런가? 나는 작은 방 전체에 울릴 만큼 큰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나티! 어서 나와!"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조금 화가 나서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 큰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다시 한번 외쳤다. "마아! 나아! 티이이이이이! 안 나올 거야아아아아!?" 최대한 악을 써서 불렀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거 무슨 특별한 조건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마나티가 내게 사기를 친 것? 나는 다시 한번 쪽지를 읽어보았다. 쪽지를 읽어본 내 눈에 짧은 구절 중 굵은 글씨로 쓰인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그렇다면..." 반신반의하면서 나는 내가 생각한 것을 실행에 옮겼다. "세상에서 제일 이쁜 마나티!" "넵, 부르셨나요, 카이엔 님?" 부르자마자 뒤편의 벽 공간이 물결의 파문처럼 일그러지더니 왜곡된 공간을 따라 벽에서 나타났다. 마나티 설마 공주병이었던 걸까? 아무리 그래도 그런 구절을 부르도록 시키다니... 부르는 내가 왠지 쪽스럽잖아? "보아하니 정신이 드신 모양이네요. 자, 절 따라오세요. 제가 씻고 갈아입혀 드릴께요." "마... 마나티 잠깐! 이야기를 좀!" "이야기는 치장을 다 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으니까요, 어서요!" 마나티는 내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내 잠옷을 붙잡고 벽 너머로 질질 끌고 갔다. 우웃. 하지만 지금의 내가 힘으로 밀릴 줄 알고? 나는 나의 괴력을 다시 한번 발휘하여 날 끌고 가는 마나티의 손을 떨치려고 했다. 어?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왜 힘이 써지질 않는거야?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잘 써지는 힘이 어째서!? "반항은 용납하지 않는답니다♡ 그래도 계속하신다면 특별한 '조교'를 해 드릴테니까 가만히 계시는 편이 좋을 거에요." "조... 조교?" 하트를 섞어 말하는 마나티의 미소띤 표정 뒤편으로 웬지 불길한 어둠의 기운이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발버둥을 멈췄다. 하지만 그렇다고 궁금증까지 접어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내가 널 떨쳐낼 수 없는 거지? 나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야 어제밤 쓰러진 카이엔님을 씻기고 갈아입히면서 왼손 약지에 임시로 힘을 봉인할 수 있는 반지를 하나 끼워뒀거든요? 물론 제 주인님의 힘이 브리타뉴 가 사람들에게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일주일 정도밖에 못 가긴 하지만..." "뭐... 뭐야?" 마나티의 말을 듣고 왼손 약지를 보니 조금 뭉툭하고 멋없게 생긴 검은색 고리가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나는 그 반지를 빼내려고 시도해봤지만 예전의 기혈환이나 절대마력보호반지와 마찬가지로 손가락에 꽉 붙은 듯 전혀 움직이지 않고 손가락만 아팠다. "왜 이런 걸 끼운 거야!" "그야 당연하죠. 최근에 간신히 주인님을 설득해서 어두컴컴하고 침침한 집안을 제가 깔끔하고 예쁘게 새단장을 해 놨는데 정신상태가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카이엔 님께서 괜히 이야기하다가 열불나서 마구 때려부수면 어떻겠어요?" "...내가 그럴 인물로 보여? 못 믿는거야?" "갑자기 많은 사람을 처음으로 죽였죠. 겉으로는 그래도 아무렇지 않잖아 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몰라도 속으로는 갈등과 번민에 빠져 있을 게 뻔해요. 게다가 아시에 선배를 잃은 슬픔이 가시지 않았을 테니..." "니가 뭘 알어!" 나는 화를 내면서 마나티의 웃는 낯빛에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역시 힘이 다시 봉인된 것은 사실인 듯 내 작은 주먹을 마나티는 가볍게 팔로 쳐냈다. 우이씨! 기껏 뭔가 엄청난 힘을 얻었는가 했더니 이건 사기야아아아아아아! 어떻게 이렇게 허무하게 다시 봉인될 수가 있는 거냐구! "자, 자, 심각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어서 씻고 옷을 갈아입어요♡ 그렇지 않으면 진짜 한번 조교실로 데려갈꺼예요∼ 시즈야, 이리 온∼" "네에..." 시즈? 그건 또 누구야? 마나티가 휘익거리면서 시즈라는 이름의 아이를 부르자, 다소 창백한 표정의 작은 소년이 약간 몸을 떨면서 불안정한 자세로 마나티와 내 앞에 나타났다. 단발 길이의 연갈빛 머리카락에 초롱초롱한 은빛 눈망울을 한 다람쥐 같은 아이였다. "똑바로 부르겠지, 다시 그 방에 들어갈래, 응?" "부... 부르셨어요? 마나 누니임∼♡" 아직 불안감과 떨림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 아이는 필사적으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최대한 귀여운 말씨로 마나티에게 말했다. "그래. 그래야지." 마나티는 시즈라는 작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그 아이는, 계속해서 초조감을 감추지 못한 채 마나티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마나티가 무슨 무서운 짓이라도 했나? 자세히 뜯어보니 남자아이기는 하지만 꽤 예쁘고 귀엽게 생긴 아인데... "준비는 다 해 놨지?" "네... 네! 욕조에 카이엔... 님이 씻을 물을 받아 놓았고, 갈아입을 옷도 준비해 놨어요." 마치 뭔가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엄마한테 혼날까 걱정하는 듯한 아이의 표정. 나는 문득 내가 이 세계로 떨어졌던 초반부에 세이렌 누나와 나 사이의 관계가 생각나서 피식 웃었다. 설마 저렇게 귀여운 행동으로 일관하는 마나티가 저 아이에게 무슨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 단지 소심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그녀에게 휘둘린 것 뿐일거야 라고 나는 생각했다. "자, 그럼 같이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갈까요, 카이엔 님? 제가 머리를 감겨 드리고 씻어 드릴..." "자, 잠깐! 왜 너와 내가 같이 들어가야 하는 거야? 나 혼자서도 충분히 씻을 수 있..." "섭섭하게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어제의 적극적인 그 모습은 어디로 가신 거에요? 원하신다면 욕실 안에서도 어제처럼 화끈한 모습을 보여주세요. 색다른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거에요♡" "시... 싫어!" "앙탈 부리시긴...♡... 어머나?" 티격태격하면서 내 파자마 어깨끈(여자 거였으니까...)을 막 잡아끌어내리고 있던 마나티가 갑자기 멈춰 섰다. 엥? 무슨 일이지? "치이. 이런 좋은 때 주인님은 갑자기 왜 호출이람? 확 무시해버릴까...? 할 수 없지. 시즈. 니가 대신 책임지고 카이엔 님을 씻기고 갈아입혀 드려. 알았지?" 셰더가 그녀를 부른 걸까? 무슨 연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건 내게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저런 여자애를 앞에 두고 내가 제정신으로 목욕같은 걸 할 리가 없잖아? 물론 마나티는 시즈라는 아이에게 그 일을 맡겨두고 갔지만 그 아이는 남자니까, 별로 부담스러울 일은 없었다. "그... 그러면 카이엔 님, 옷을 여기 벗어 두시고 욕실 안으로 들어오세요." 시즈는 여전히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마나티를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내게 그렇게 말했다. -------------------------------------------------------------------------- ...여러가지로 큰집에 잡혀 있던 추석이었답니다. 심심해 죽는 줄 알았.... 그나마 동인 판타지계의 명작 소설 '콘도르니아의 반지'를 대략 5년만에 다시 본 데 위안을.....(그리고 쏟아지는 감동 ;ㅇ; ) 댓글 러시 감사해요☆ 재밌었답니다! 마나양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네요 (^ㅅ^b)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선택의 기로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42화 : 선택의 기로(2) ------------------------------------------------------------------------- 욕실은 빛이 많이 들지 않아 조금 어둡기는 했지만 크지도 작지도 않고 딱 몸을 씻기에 적당했다. 아침부터 탕 안에서 시간을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샤워만 하기로 하고 나는 시즈의 도움을 받아 긴 머리를 풀어 머리를 감았다. 샴푸를 풀어 긴 머릿결을 슥삭 문지르자 아직 숙취가 남은 듯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하지만 빨리빨리 끝내고 옷을 갈아입어야지. 그 동안에 마나티가 갑자기 알몸으로 욕실에 들어와 안겨들기라도 하면 낭패다. 머리를 다 감고 시즈가 타월에 비누거품을 묻혀 내 등을 밀어주면서 말했다. "저기... 카이엔님도 저 사악한 마녀에게 납치당하신 거에요?" "납치? 납치라니... 너 설마... 납치당한 거야? 마나티에게?" "쉬잇... 목소리가 커요." 그렇다면... 시즈라는 저 아이가 여기 있는 건 자의(自意)가 아니란 말야? 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가 시즈의 속삭이는 말을 듣고 목소리를 낮췄다. 욕실 안이라서 목소리가 크게 울렸던 것이다. 그런데 뭐? 마나티가 사악한 마녀라고? 뭐 하긴 마녀 맞기는 하다만... "납치당한 게... 아녜요?" "응. 뭐 여러가지 일이 있긴 하지만... 일단은 일이 있어서 자의로 왔지." 여기로 오면서 겪은 여러가지 일들을 설명해줄 필요도, 시간도 없었기에 나는 상황을 대충 때워 넘기면서 말했다. 그러자 시즈는 조금 안심한 듯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시즈 하켄크로이츠라고 해요." 흐음... 시즈 하켄크로이츠라. 그런데 하켄크로이츠?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이다? "하켄크로이츠?" "네, 카이엔님은 제 형을 만나보셨나요?" "으... 응." 그랬나. 이 아이는 그 대륙 미소년 서열 2위라고 하는 위즈 하켄크로이츠의 동생이구나. 확실히 같은 핏줄이라서 그런지 미인이다. 그러고보니 눈동자 색깔이 흔치 않은 은빛인 점도 닮았고. 하지만 아직 어려서 그런지 그 형에게서 느껴지던 남자다운 멋있음보다는 오히려 나와 유사한 종류의 예쁘고 귀여운 맛이 느껴지는 소년이었다. 핫, 내가 무슨 생각을!? "혹시... 실례되는 부탁일지도 모르지만... 절 여기서 구해주실 수 없나요!?" "뭐어?" 따스한 물로 내 몸을 씻고, 마른 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 주면서 시즈는 간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헉...! 그렇게 초롱초롱하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 괜히 마음이 동하잖아! 게다가 지금 나에게... 구해달라고 해봤자 내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이미 힘은 다시 봉인되어 버렸는걸... "하지만 어떻게..." "역시 안되나요..." 고개를 푹 숙이는 시즈. 으윽. 귀여운 얼굴로 그렇게까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토라진 말을 한다면 안 도와줄 수가 없잖아! 나는 되도록 확언(確言)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조심스럽게 시즈에게 말했다. "저기... 시즈 넌 어떻게 해서 마나티에게 납치된 거니? 만약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일단 노력해볼께." "...정말요?" 다시 밝은 표정으로 날 돌아다보면서 기쁜 듯이 말하는 시즈. 어이... 그렇게까지 기뻐하지 마. 아직 널 구해줄 수 있다고 확정된 것도 아닌데 말야. 하지만 시즈는 벌써 탈출이 확정되기라도 한 듯 몸의 물기를 다 닦은 나를 밖으로 데려가 선풍기 비슷한 걸로 내 긴 머리를 말리면서 말했다. "저는... 브리타뉴 가로 카이엔 씨와 대결을 신청하러 간 형을 다시 데려오기 위해 수행원들 몇 명을 대동하고 집을 나섰어요. 위즈 형은 주변 사람들이 다 카이엔 님을 이길 수 없다고 하니까 오기가 생겼던 것 같아요. 어쨌건 악명높은 브리타뉴 가와 문제를 일으키면 안되기 때문에..." "악명높은?" "아... 아녜요. 그냥 아무것도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악명이 높다니, 뭣 때문에? 의외로 신경쓰이는 말인걸. 우리 가문이 뭔가 잘못한 게 있나? "산길을 넘는 도중에 저는 소변이 마려워서 도중에 내려 일을 봤어요. 근데 제가 서서 소변을 보면 이상하게도 주변 사람들이 흘낏흘낏 쳐다보기 때문에 전 창피해서 약간 숲 안쪽으로 들어가서 소변을 봤답니다. 그때 갑자기 눈앞에 그 마녀가 나타났어요." [원석 발견, 캐치(catch)!]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내가 바지를 올릴 틈도 없이 그대로 날 커다란 포대자루에 집어넣고는 절 납치했답니다.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 포대자루는 대체 뭘로 만들어진 것인지 안과 밖의 소리가 전혀 통하지 않았어요. 질겨서 찢어지지도 않고... 제가 자꾸 안에서 발버둥을 치니까 그 마녀가 마법을 써서 절 잠들게 했지요." 원석 발견이라... 어딘가 참으로 마나티다운 대사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피식 웃으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여기 마나티에게 당한 불쌍한 피해자가 있는데 함부로 그런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되겠지. 시즈는 내게 옷을 하나씩 입혀 주면서 설명을 계속해나갔다. 다행스럽게도 여자 옷은 아니라 나는 안심했다. "무서워요...." "뭐가?" 뜬금없이 이야기 대신 무섭다는 말을 꺼낸 시즈를 나는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아까도 그랬지, 그가 마나티를 바라보는 눈은 분명 호감이나 안심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는 마나티 그녀에 대한 끝도 없는 불안감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변해 가고 있어요... 저는. 그 방에 들어갈 때마다. 죽을 것 같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 솟아나는 비참한 쾌락의 짜릿함이 내 몸을 스쳐지나갈 때마다 끔찍하도록 수치스러운 기분과 미칠 것 같은 괴로움을 느껴요... 그 방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저는 변해요. 그 마녀 앞에 설 때마다 프라이드와 저항과 반항, 그리고 분노조차 쥐구멍에라도 숨은 듯이 모두 사라지고 남는 것은 공포와 복종 뿐이죠.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제가 점차로 그런 상황에 익숙해가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거에요. 그래요. 무서워요. 끔찍하게 몸서리치는 끝없는 고통도, 그 고통 속에서 변해가는 자신도...!" 내 옷을 입혀주는 시즈의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림을 멈추지 않았다. 대체 무엇을 했길래 저렇게 몸서리치는 반응을 보이는 거지? "그 방이 대체 뭐길래 그래?" "분명... '조교실'이라고 써 있었어요." 그리고 나는 굳었다. 분명 나는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시에가 셰더에게 당했다고 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도 말했었지.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황폐해지게 되고 상대의 말에 절대복종하게 된다고... 마나티가 아까 내게 말했을 때만 해도 장난인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마나티! 네가 셰더의 노예라면 너도 분명 그런 일을 당했을 건데... 왜 그런 일을 또 다른 사람에게 반복하는 거야!? 시즈의 이야기를 들은 내 표정이 점차 굳어가고 있을 때 마나티가 여전히 활발하고 귀여운 표정을 지으면서 야단스럽게 욕실 입구로 들어왔다. "우잉... 하여간 주인님도 별 시덥잖은 일에 날 부른다니깐. 중요한 순간에 말야. 아앗! 카이엔 님! 버얼써 씻고 갈아입는 걸 끝냈단 말이에요? 뭐가 급해서 그렇게 서두른 거에요, 히잉∼ 조금만 더 오래 씻으시지. 시즈 너도 그래! 카이엔 님을 제대로 씻겨드리기나 한 거니?" "죄... 죄송해요. 누님."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마나티 앞에서 얼굴도 들지 못하고 사죄하는 시즈. 겁먹은 듯한 그의 행동을 보니 확실히 그녀에 대한 공포가 뼛속깊이 각인된 것 같아 보였다. "댓가는 지불해야겠지, 우리 사랑스런 시즈으?♡" "네... 네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윙크까지 하면서 이야기하는 마나티. 하지만 그녀가 입술을 떼어 이야기할 때마다 그렇잖아도 창백한 시즈의 얼굴이 더욱 사색(死色)으로 변해갔다. "어머나, 내가 말했잖아∼ 네 일거수 일투족은 모두 나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이야. 쓸데없는 말을 카이엔 님에게 많이 했잖아?" "그... 그건!" "'그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렴♡ 오늘도 누나가 많이 귀여워해 줄께에∼" "네... 네에." "그럼 갈까요, 카이... 어멋!" 나는 마나티와 시즈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올라 그녀의 멱살을 붙잡았다. 셰더의 노예라고 해서 아시에와 똑같이 생각해서, 불쌍하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셰더와 별 다를 바 없는 년이잖아! 자신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서 남이 불행해지는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시즈에게 뭘 하려는 거지?" "별거 아녜요. 누나로서 귀여워 해 주는 게 당연한 게 아니겠어요?" 그리고는 마나티는 가만히 그녀의 멱살을 잡은 내 손목을 붙잡고 한 손으로 비틀었다. "으윽!" "말했죠? 반항하신다면 카이엔 님도 같이 그 방에서 귀여워해드릴 거에요. 아마도 처음 맛보는 색다른 쾌락을 느끼실 수 있을 거에요." "이익..." 남에게 고통을 가하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웃음짓는 마나티의 표정이 위화감을 주었다. 나는 평소에 실없고 헤프며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마나티의 웃음이, 처음으로 무섭게 느껴졌다. 아시에가 이전에 말한 대로였다. 그녀는 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겉모습으로는 밝고 명랑하고, 약간은 변태적인 면이 있는 보통 소녀처럼 보이지만 분명 어딘가가 크게 엇나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시다면, 절 따라오시는 게 좋을 거에요. 제 주인님께 안내해 드릴테니." "으윽...! 그전에 이건 놓으란 말야!" 마나티는, 여전히 내 손목을 비튼 채 놓아주지 않은 채로 나를 끌고 갔다. 젠장! 힘만 봉인되지 않았더라면 여기서 금방 빠져나가고 시즈라는 그 아이도 구할 수 있을 텐데! 그 녀석이 제2의 아시에처럼 되는 모습을 나는 보고 싶지 않다구! 하지만 힘없는 나는 마나티가 잡아끄는 대로 질질 끌려갈 뿐이었다. -------------------------------------------------------------------------- ...오랜만에 돌아온 기념으로 연참★해요! 다시 P.S : 2차 오타수정 완료 -_-(헥헥)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선택의 기로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43화 : 선택의 기로(3) ------------------------------------------------------------------------- "주인님, 카이엔 님 데려왔어요오∼" "수고했다. 마나티. 그럼 이제 나가봐." "네에. 혹시라도 카이엔 님한테 이상한 짓 하진 않으시겠죠?" "내가 넌 줄 아냐!" 셰더와 마나티. 이 기묘한 주종관계의 두 사람을 보면 대체 어느 쪽이 주인이고 어느 쪽이 노예인지 구분이 모호해진다. 아무리 그래도 셰더가 남한테 막 휘말리거나 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보였는데... 왜 저렇게 마나티에게만은 저렇게 관대한 걸까? 뭐 거기까진 내가 신경쓸 게 아니지만... 마나티가 자꾸 뭔가를 궁시렁대면서 나갔고 셰더가 등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엥? 그... 그런데 저 자식 셰더 맞어? 원래대로라면 검은색 옷과 검은 악세사리로만 몸을 치장하고 약간은 어긋난 듯한 광소(狂笑)를 지어야 할 음침한 얼굴의 중년 아저씨 셰더는 간 데 없고, 처음 보는 호남형의 얼굴에 어딘지 모르게 상대를 압도하는 위압감을 주는 카리스마 있는 남자가 있었다. 게다가 온통 검은 색으로만 떡칠하던 과거와는 달리 살짝 회갈색을 띠는 검은 망토에는 금테가 달려 있고 악세사리도 은회색 브로치를 손에 끼는 등 색감에 변화를 주어 꽤 어울린다는 느낌을 주었다. "...당신 셰더 맞어?" "훗. 너무 멋있어져서 못 알아보겠나?" "....." 하여간 뻔뻔스런 녀석. 성형수술이라도 했나? 어떻게 갑자기 저렇게 변한 거지? 뭐... 성전환 같은 짓도 할 수 있는 녀석이니 저 정도는 오히려 쉬운 일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갑자기 저 나이 되어서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얼굴을 바꾼 걸까? 바꾼 쪽이 훨씬 더 보기 좋긴 하지만 말야. "여기 앉아. 그리고 소식 들었다. 시르쥬를 죽였다지? 게다가 소드 마스터까지." "...빠르기도 하군." "그 녀석들과는 인연이 있으니까." 셰더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 때의 감촉이 몸 안에서 되살아나는 것만 같아 소름이 끼쳤다. 내 눈이 검붉은 색으로 변했다고 했나? 기억난다. 나는 초인적인 스피드로 보란치라는 이름의 소드 마스터의 검세를 피해내고 오히려 그를 죽였다. 내 검에서 빛나던 황금빛 검기의 빛이 아직도 눈동자 속에 잔상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르쥬를 잔인하게 죽여버렸다. 분명히 내가 그랬다. 나의 의지로 그랬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그럴 수 있었지? 아무리 분노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고 해도 사람을 죽여보기는 커녕 제대로 때려본 적도 없는 내가!? 살인에 대해 망설임이 없었던 그 때의 나는 나이면서도 또 내가 아니었다. 마치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당연한 것처럼 망설임 없이 저지른 살육에 대한 회상은 미치도록 몸을 스멀스멀거리는 기분나쁜 감각을 선사해 주었다. "으윽..." 하지만 다시금 그 힘이 방출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놈의 셰더 자식이 비록 일시적이지만 다시 내 힘을 봉해 놓았으니까. "괴롭나? 누군가를 죽였다는 게? 아니면 조금 역겹지만 사랑하는 '남자'의 동생을 죽였다는 게?" 셰더는 싸늘한 얼굴로 날 비웃었다. 중년아저씨 주제에 갑자기 미형으로 변하더니 그 냉소도 어쩐지 멋있게 보였다. 그런 점이 어쩐지 내게 뒤틀린 듯한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후후..." "호오?" 그렇다고 이 자식 앞에서 약한 척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때의 감각을 잊으려고 애쓰며 몸을 추스리면서 셰더가 마련한 의자에 앉았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 남의 고통을 보고 즐거워하는 취미라도 있나? 흑마법사 아저씨?" "그냥 해봤다." ...정말 짜증났다. 하지만 내가 저 자식을 진지하게 상대해서 뭘 얻을 게 있겠냐?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불리한 입장에 있는 건 나다. 뭐니뭐니 해도 힘을 봉인되었으니까. "왜 내 힘을 봉인한 거지? 게다가 어떻게!?" "이유는 마나티에게 들었을 텐데? 너같은 골치아픈 놈이 힘을 가지고 설치면 곤란하다고. 방법은 뭐... 비밀로 해두지." "하아? 내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야? 뭐... 나도 모르게 소드 마스터를 아작내버리긴 했지만." "그러니까다. 제대로 힘 쓰는 방법도 모르는 놈이 각성하자마자 시르팡 녀석들에게 안배된 소드 마스터를 박살내버리다니 멀쩡하게 옆에 둘 수 있겠냐?" "대체 내 정체가 뭐야?" "글쎄." 어깨를 으쓱거리는 셰더. 하지만 저 여유있는 미소는 분명 뭔가를 알고 있다는 표정이다. "말해!" "진짜 알고 싶냐?" "아..." 진지하게 물어 오는 셰더의 말에 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사소한 계기이긴 했지만 분명 그 사건에 의해 봉인이 풀린 이후 나는 점차 숨겨진 비밀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가족들이 내게 숨기고 싶어했던 비밀이다. 명백한 불행(不幸)을 예고하면서. 어차피 알 일이기는 하지만 그 시기를 앞당길 필요가 있을까? 나는 혼란스러웠다. 알고 싶어하는 욕망과 그렇지 않은 두려움이. "커피 가져왔습니다."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청초하게 들리는 여자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보랏빛 긴 생머리의 메이드복을 입은 하녀가 커피를 내와서는 셰더와 내 앞에 놓았다. 그녀가 셰더를 흘끔 바라보았을 때 얼굴에 떠오르는 두려움의 눈빛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큰 키와 성숙한 얼굴에 펑퍼짐한 메이드복 위로도 눈에 띌 만큼 큰 가슴이 인상적이었던 그녀는 커피를 탁자에 놓자마자 종종걸음으로 이 자리를 빠져나갔다. "...노예는 아니지?" "뭐 아직까지는. 하지만 조만간 기억을 지우고 계약할 예정이다." "...마나티도 그렇고 너희들은 대체 뭘 하는거야?" 나는 마나티를 앞에 둔 소년 시즈의 떠는 얼굴에 방금 전 그 메이드복을 입은 여인의 얼굴을 오버랩시켰다. 틀림없었다. 셰더가 아시에에게 그랬던 것처럼, 마나티가 시즈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분명...! "알고 있을텐데? 내 손에서 벗어난 아시에게 듣지 못했나?" "그런 게..." 셰더는 나는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내저은 쓰디쓴 블랙커피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여마시면서 말했다. 내 얼굴에 비친 노기(怒氣)를 보고서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다니! 하지만 내가 화를 내고 뭐라고 말하기 전에 셰더는 먼저 내 말을 낚아챘다. "나는 흑마법사다. 흑마법사가 세상의 도덕이나 윤리 따위에 그렇게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하나? 그랬다면 애초에 비난의 대상이 될 필요도 없었겠지. 지금까지 죽인 인간 수만 해도 세 자리 수라고, 알겠냐, 애송아? 너도 이미 손에 피를 묻힌 주제에 내게 따지고 들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으윽..." 아아악. 궤변(詭辯)으로 자기 자신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셰더의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나는 원래 말빨이라는 게 엄청나게 딸렸기 때문에 청산유수처럼 내뱉는 셰더의 비웃음섞인 말에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하긴 애초에 내게 제대로 된 말빨이라는 게 있었으면 애초부터 남한테 막 휘둘려 다닐 일은 없었을 거다. 미안하지만, 시즈를 도와주는 일은 어려울지도... 저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걸 막기는 커녕 제대로 된 반박조차 할 수 없다니.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힘도 없는 주제에 너랑 관계없는 일에 신경쓴다고 뭘 할 수 있겠냐? 그래봤자 무력감만 느낄 뿐이라고. 그보다는 우리 일이나 생각하는 게 어때?" "우리 일이라니?" "아시에의 시신을 내가 가지고 있거든?" "뭐얏!" 나는 벌떡 일어나면서 외쳤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나는 마나티에 의해 이곳으로 이동되었으니까 마나티가 아시에의 시신도 같이 가지고 왔겠지. 하지만 마나티가 이미 아시에는 완전히 죽었기 때문에 살아날 수 없다고 했는데... 무슨 꿍꿍이야? "아아, 흥분하지 말라고. 나는 단지 거래를 하고 싶을 뿐이니까." "죽은 사람 시체로?"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아 커피잔을 들면서 말했다. 잔을 들긴 했지만 암만 생각해도 이 블랙커피는 너무 썼다. 음료를 내 오기 전에 먼저 손님의 취향부터 생각해줘야 하는 거 아냐? 불친절하기는... "산 사람으로 돌려주지." "뭐어?" 난 잠깐 셰더의 말을 이해하는 데 몇 초의 시간을 소비했다. 그리고 곧바로 외쳤다. "장난치냐! 시에는 완전히 죽었다며!" "이야기는 끝까지 들으라고, 소년. 이전에 시르팡 녀석들과 계약했을 때 받았던 물건이 있거든? 그게 뭔지 아나?" "뭔데?" "랜덤 리버스(Random Rebirth)라는 성물(聖物)이지." "그게 시에를 살릴 수 있다는 거야?" "아마도." "아마도... 라니?" "말 그대로 효과가 랜덤(Random)하거든, 살아나기는 하는데 어떤 형태로 살아날 지 알 수 없어. 알기 쉽게 예를 들자면 영혼이 없이 육신만 살아나는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인간이 아닌 다른 형태의 생물로 부활할 수도 있어. 뭐, 그래도 죽은 지 지나치게 오래 되지도 않았고 시신도 온전하니까 원래 모습 그대로 부활할 확률도 50%는 넘어가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셰더의 말을 들으며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저 성물인가 뭔가를 써도 살아날 수 있을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거잖아?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시에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한 가닥의 희망이다. 엄마같은 고위 성직자가 쓸 수 있는 부활(復活)조차 사후 12시간을 넘어가면 완전히 효력이 없어지니까. "거래라고 했지..." 나는 당연히 셰더 녀석이 공짜로 저런 일을 해 줄 리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셰더를 노려보며 말했다. 셰더는 완전히 자신이 주도권을 잡은 듯 여유있게 다시 커피를 들이키면서 입을 뗐다. "그렇지. 이 물건을 쓰려면 나도 꽤 여러가지로 수고스럽거든? 당연히 공짜로 해 줄 순 없어." "하지만 난 돈이..." "훗. 나같이 위대한 흑마법사가 고작 돈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할 거 같냐?" "그럼 뭐야?" "나도 저 물건을 받은 이상 시르팡 녀석들과 한 계약은 지켜야지. 내 조건은 그거야. 너 여자가 되라. 그리고..." "그리고!?" "네 첫경험을 받아가도록 하지." -------------------------------------------------------------------------- 매미씨가 정전을 때렸답니다. 할 말은 많지만 결국 요약하자면 그거죠. 그 때문에 연재가 지연되어 버렸답니다. 월야환담 너무 재밌어요...;ㅁ;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선택의 기로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44화 : 선택의 기로(4) ------------------------------------------------------------------------- "뭐... 뭐라고?"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아시에를 살려주는 댓가로 그가 내게 요구한 것은 여자가 되라는 것, 그리고... "귀가 먹진 않았을 건데? 아니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가? 다시 말하면 너의 첫 섹..." "충분히 알아먹었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진짜로 몰라서 묻나?" 그렇게 묻는 셰더의 표정에는 어쩐지 모를 진지함이 깃들여 있었기 때문에 나도 놀랐다. 이씨! 그런 얼굴로 안 어울리는 변태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란 말야! "대륙 제일의 미소년 카이엔 브리타뉴. 그런 너를 여자로 만들면 틀림없이 대륙 제일의 미소녀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지. 그런 여자를 품에 안고 싶어한다는 것은, 남자라면 당연한 욕망이지 않나? 너도 남자라면 알텐데?" "이익... 하지만 넌 굳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여자를..." "한 여자로 만족하는 남자는 흔치 않다는 걸 모르나? 흐음... 그런 것도 모르다니 역시 네게는 남자로서의 자질이 너무 부족해. 역시 여자로 변하는 편이 훨씬 낫겠어." "그게 왜 그런 이야기가 되냐구! 이 변태 흑마법사 자식!" 하지만 셰더를 변태자식이라고 씹으면서도 그의 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정상적인 남자니까. 아무리 미소년이라고 할지라도 예쁜 여자를 보면 파릇파릇한 젊은 혈기가 마음 속 심연에서 급히 솟구쳐 올라오는 것은 지금까지 지겨울 만큼 느껴봤으니까. 내 이성과 양심의 끈이 조금만 느슨했을 지라도 벌써 세이렌 누나나 아시에와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아이렌은 예외로 치자. 난 절대로 로리콘이 아니란 말야!) 그랬다. 사실은 안고 싶었다. 그리고 각종 야설이나 야동, 포르노 테이프에 나오는 갖가지 모든 짓들을 있는대로 해 보고 싶었다. 세이렌 누나를, 아시에를, 치즈나 루카라 같은 같은 반 여자애들과 한 침대에서 뒹굴고 싶었다. 지금껏 회피해왔던 일이지만 어린 아이렌이나 이곳의 새 엄마에게도 성적 충동을 느낀 일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여지껏 한 번도 여자와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때때로 그런 충동은 훨씬 강력하게 다가왔다. 어느 여성이 남성의 성욕이 어느 정도인지를 묻는 질문에 한 남자가 이렇게 대답했다던가? 당장 싸기 직전의 배변욕구와 흡사하다고 말이야. "젠장...!" 내가 남자이기에, 그래서 셰더의 저런 욕구를 이해할 수 있기에 나는 더욱 화가 났다. "싫으면 안 하면 되니까 그런 반응 보일 필요 없어." 셰더는 아예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발을 쭉 뻗어서 탁자 위에 놓았다. 이녀석은 내가 어떤 대답을 해도 상관없어 하는 것 같다. 오히려 내가 어떤 선택을 할 지 즐기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게다가 셰더는 알고 있었다. 내가 결국에는 그의 제안을 승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솔직히 말해서 엄청 망설여졌다. 물론 나는 김상우에서 카이엔 브리타뉴로 한 번 변하는 과정을 겪었지만 그 때는 주변환경도 완전히 바뀌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변 환경은 그대로 둔 채 성별(性別)이라는 중요한 정체성을 바꿔야 하는 것이다. 여태까지와의 생활과는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한달에 한 번씩 걸리는 마법이나 앉아서 봐야 하는 소변 같은 것처럼... 그래도 나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죽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아시에, 즉 문길이는 생각보다 훨씬 내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황량했던 젊은 날의 추억속에서 불과 1년이 조금 넘는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녀석을 만나고 나서야 나는 진정으로 친구(親舊)라 부를 수 있을만한 사람을 가질 수 있었다. 나의 깊은 곳까지 이해하고 배려해 줄 수 있었던... 그것뿐만이 아니다. 어차피 지금 다시 브리타뉴 가문으로 돌아가기 힘든 지금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인생을 살아가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수많은 여자들의 애정공세도 피해낼 수 있다.(이때 나는 대신 남자들의 애정공세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깜빡 잊고 있었다.) 게다가 어쩌면... 어쩌면... 만에 하나 시르젤에게 돌아갈 수 있었을 때... 아니 이 생각은 그만두자. 이제 다 끝난 일인걸... 셰더의 마지막 조건. 첫날밤을 그녀석과 보내야 한다는 조건이 조금, 아니 엄청나게 께름칙했지만 어차피 내가 딴 사람과 하룻밤을 자고 정절을 잃었다고 자결해야 할 조선시대 양가집 규수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랴. 단지 친구를 위해서 조금의 고통과 희생쯤은 감수한다고 생각하자.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길인데 편하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알았어... 받아들일께." "좋아 좋아." 히죽거리면서 웃는 셰더. 으음... 부탁이니 제발 그 미형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형태의 웃음은 짓지 마란 말이야. 하기야 변태스러운 웃음 없는 착실한 미중년이라는 것은 조금 딱딱해 보이기는 하지만서도... "그런데 물어볼 게 있어. 왜 나와 굳이 계약을 하는 거지? 지금 니가 원한다면 나를 강제로 여자로 만든 후에 범해버릴 수도 있을텐데..." "호오, 매저키스트였나? 그런 쪽이 취향이라면 그렇게 해 줄 수도 있어. 원해?" "....." 괜히 물어봤다. 하여간 이 자식은....! "그렇게 쏘아보지 말라고. 사실은 네 동의가 필요해서다." "동의?" "그래. 만약에 내가 강제로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너를 좋아하는 전 세계의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겠지. 그들 중에서는 나보다 강한 사람도 꽤 많으니까 그건 위험한 짓이야. 하지만 네가 동의하고 원한 일이라면 그들은 날 미워하면서도 공개적으로 처단할 만한 근거는 가질 수 없어. 흑마법의 계약이란, 딴 건 몰라도 약속의 신뢰성 하나만큼은 절대적이거든? 게다가 마나티도 시끄럽게 굴 테고..." "그런 건가..." 하긴 그렇다. 나는 대륙 전역에 이름난 초특급 스타(Star).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나를 지켜주고 도와주기를 원하는 사람은 대륙에 넘치고 넘쳤으니까 셰더가 거기에 위축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전에는 강제로 여자로 만들려고 했잖아? 그럼 그것도 시르팡과 약속해서 저 랜덤 리버스라는 것을 넘겨받으면서 했던 계약 때문이려나? 절대적으로 지키지 않으면 흑마법의 계약을... "그럼 계약을 할까? 언령의 약속이라는 것을 아나?" "알아." 이전에 아시에가 시르쥬한테 시도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분명 마왕의 이름에 걸고 맹세하는 절대적인 약속이었지. 약속을 어기게 되면 마왕에게 영혼을 바쳐야 하는...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서로의 피를 뽑아서 섞은 후에 약속의 내용을 말한다. 그리고 서로가 그 피를 나눠마시면 끝나는 간단하기 그지없는 의식이다. 피를 마시는 것 자체가 그 약속에 동의한다는 의사라고 한다. 나는 시르쥬가 언령의 약속을 할 때 엄청 꺼림직해 하는 것을 기억해서 셰더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웬만큼 뛰어난 흑마법사들은 상대의 피를 가지고 있으면 그 상대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어. 아마 아시에는 카이엔 네가 시르팡 녀석들에게 갔을 거라 짐작했겠지. 그래서 너를 찾아 시르쥬의 위치를 추적해 공간이동한 것 같군. 물론 시르쥬가 그걸 예측하고 함정을 파 놓은 것이 불운이었다만..." 그랬나. 그래서 그곳에 있을 리 없던 아시에가 있었던 걸까? 그림맞추기의 피스가 점차로 맞춰지면서 모양을 만들어 가는 것을 느꼈지만 피가 쏟아진 결코 리셋할 수 없는 퍼즐을 회상하는 것은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어? 잠깐! 그렇게 되면 앞으로 셰더가 항상 내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는 게 된다는 뜻? 오 마이 갓! 하지만 내가 셰더에게 항의하기 전에 먼저 셰더가 머리를 내 쪽으로 불쑥 내밀며 말했다. "그럼 시작해 볼까?" "뭐... 뭘?" "널 여자로 만드는 거!" "자... 잠깐! 시에를 되살리는 게 먼저야!" "그건 랜덤 리버스를 발동시키기 위한 재료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려. 이 사실은 아까 맹세했던 마왕 헬싱의 이름을 걸고 말하건데 진실이야. 그러니까 먼저 카이엔 너부터 시작하자구, 쇠뿔도 단김에 빼랬잖아, 안그래?" "이잇... 너무 갑작스럽잖아! 잠깐 생각할 시간을 주라구!" "이미 언령의 약속까지 끝냈으면서 무슨..." 셰더는 투덜거렸다. 하지만 뒤로 물러서는 것이 내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았다. "뭐, 남자로서의 마지막을 뒤돌아보고 궁상떠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만약에 남자로서의 뜨거운 마지막 밤을 불사르고 싶다면 언제든지 말해라. 마나티가 좋아라 하고 달려들 거다." "헷. 그건 사양하겠어." "진짜루? 후회 안 돼?" 우웃. 자꾸 그러지 마라고! 계속 날 유혹하면 내 안의 욕망이 이성을 자꾸 치고올라오려고 들잖아! 하지만 어딘가 지쳐 있는 지금의 나는 그런 유혹에 자꾸만 약해져 가고 있었다. 술에 취했다지만 바로 전날밤에만 해도 마나티를 안으려 들었잖아? 그때는 지나칠 정도로 취해서 어떻게 넘어갈 수 있었지만... "뭐, 대충 알겠군. 나중에 보내 주지." "보내 주지 맛!" "아아... 나도 마나티한테 입막음 대가 정도는 줘야 하거든? 와하하핫!" 셰더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입을 크게 벌려 웃으며 내 반응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저편으로 걸어가 버렸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저쪽으로 사라져 가는 셰더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나를 이 응접실에 혼자 두고 가면 난 어쩌란 말이야!? 중요한 결정을 내려서인지 허탈한 감정이 몸 속을 휘저었다. 내가 정말 저런 약속을 해도 되었던 걸까? 아무리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100% 부활이 확실한 것도 아닌데 괜히 내 인생을 처음부터 완전히 뒤집어엎는(뭐 벌써 한번은 뒤집어졌지만) 결정을 내린 게 아닐까? 후회하지는 않을 거라고 결심하고 내린 선택이지만 다소 미진한 구석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기... 혹시 카이엔 브리타뉴... 맞니?" 아무 생각없이 다 식은데다 쓰기까지 한 블랙커피를 홀짝이고 있을 때 아까의 그 메이드복 누나가 다가와서 말했다. 커피잔을 회수하러 왔나? "그런데요?" "혹시 너도... 저 사악한 흑마법사한테 납치당한 거니?" "그건 아닌데요." ...어째 이거 웬지 친숙한 패턴인데? "그럼... 날 여기서 구해줄 수 있어? 저 나쁜 흑마법사한테서 빠져나갈 수 있게만 해준다면, 돈이고 몸이고 줄 수 있는 건 다 줄께, 응?" "....." 처지를 동정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젠장!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했다. 시즈에게처럼 한 가닥 희망이라도 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키지 못할 약속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마왕 앞에서 확실한 언약을 맺는 흑마법사의 말이 그것보다는 훨씬 믿을만한 것을. 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마나티가 안내해 온 길로 되돌아갔다. "카.. 카이엔! 아니 카이엔 님!" 그녀가 날 가지 못하게 필사적으로 내 팔을 붙들었다. 힘이 다시 봉인된 나는 당연히 그 팔을 떨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감정없는 사무적이고 냉정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세상에서 제일 이쁜 마나티." "부르셨어요, 카이엔 님? 아앙... 아쉬워라. 조금만 더 하면 시즈한테 고통과 쾌락의 정점을 동시에 안겨줄 수 있었는데..." 부르자마자 공간이동이라도 한 듯 금세 눈앞에서 나타나는 마나티. 그녀가 시즈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궁금하지는 하지만 알고 싶은 생각도, 관심도 없다. 나는 차분하고 약간 힘없는 어조로 마나티에게 말했다. "혼자서 조용히 쉬고 싶어. 방으로 데려다 줘." "알겠습니다. 그럼 따라오세요∼" 그 메이드복 여자는 마나티가 나타나자마자 황급히 내 팔에서 손을 떼고 두려운 표정으로 마나티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인가... 훗. 다행인지 불행인지 생글생글 웃으며 나만 바라보고 있는 마나티는 가슴 큰 메이드 누나한테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내게 당당하게 팔짱을 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 역시 격렬한 반응들이네요. 음... 과연 고민되는 일이랍니다. 남자 모드이건 여자 모드이건 간에 소중한 첫경험을 누구에게 줄지는 말이죠 ^ㅅ^ ...조만간 뒤통수 한 방 먹일 준비를 하고 있어야. 우훗훗.(사악작가모드) 언제나 댓글들 즐기고 있답니다! 자 모두들 동인의 혼을 모아서 수꾸임∼(그리고 다굴당한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선택의 기로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45화 : 선택의 기로(5) ------------------------------------------------------------------------- "하아." 마나티가 내게 안내해 준 대략 웬만한 집 거실만한 방은 그다지 좁지 않았지만 브리타뉴 가의 대저택에만 익숙해진 내게는 이상할 정도로 비좁게 느껴졌다.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지. 내가 카이엔으로 변한 지도 여러 달이 지났고 나는 브리타뉴 가문에서의 매일같은 생활에 적응해 버렸다. 그런 편한 생활이 조금만 달라졌다고 해서 이런 꼴이라니. 할 말이 없었다. 아시에의 시신을 들고 황야를 헤메었을 때 나는 얼마나 도망쳐나왔던 그 집을 갈망했던가. 고작해야 며칠 뿐이었는데 말야. 아하핫. 그래. 적응하겠지. 만약에 내가 여자가 되고, 셰더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적응하고 말겠지. 나 자신도, 그리고 이 세상도 모두. 과연 그것이 잘한 선택이었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듯 선택에 있어서도 가지 않은 길을 돌아본다고 해서 놓친 기회비용을 잡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뭐, 남자로서의 마지막을 뒤돌아보고 궁상떠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셰더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뭐, 사실 그 때는 당황스러워서 엉겁결에 회피하긴 했지만 그래봤자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룬 것에 불과하다는 건 잘 알고 있다. 단지 기분나쁜 건, 암만 창조적으로 생각해보려 해도 그것들이 전부 결국에는 셰더의 말대로 궁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말 일을 저지르고 나서 후회하던지 어쩌던지 했으면 좋았을텐데.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나오는걸. 애초에 문길이의 마법진에 얼떨결에 빨려들어갔을 때부터 내 의지대로 된 적이 있기나 하나? 장난스러운 운명의 파도를 타고 휘말려왔을 뿐이지. 하긴 그렇게 생각해보면, 한국에서의 생활이라는 것도 남들의 뜻대로, 사회의 가치관대로 휘둘려 온 생활이기는 하다. 누구라도 벗어날 수 없는 영역이란 어디에든 있다는 건가.. 후후. 그것보다는 미래를 생각하는 게 좋겠지. 내가 여자가 되면 어떻게 될까? 한번도 생각해본 일이 없는 일이다. 변태 문길이자식은 이런 생각을 자주 했던 모양이긴 하지만. 그렇잖아도 저번에 수학여행 여장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 대륙 최상급의 미소녀가 한 명 탄생할 거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첫 경험을 셰더에게 바쳐야 할 거고... 아 이런 생각은 패스! 생각해봤자 별로 좋을 것 없는 상상이다. 쾅 내가 침대에 누워 팔로 머리베개를 베고 이것저것 궁상을 떨고 있을 때 아까 내게 방을 안내해주고 아까 하던 일을 마저 끝내야 한다며 돌아갔던 마나티가 문을 콰당 열고 들어왔다. 왜 저러지?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다급한 표정인데... "어떻게...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카이엔 님!" "뭐... 뭐가?" "왜 여자가 되겠다고 한 거예요? 그것도 마왕의 이름을 건 언약까지 해 가면서!" 아. 그렇구나. 분명 셰더에게 이야기를 들은 거겠지. 아무래도 그녀는 내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다. "이유, 셰더에게 못 들었어?" "납득할 수 없어요!" "납득 못해도 이미 결정내린 일이야." 나는 단호하게 마나티를 보며 말했다. 아무리 셰더마저 기게 만드는 기고만장한 마나티라도 할 수 없는 일도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셰더와 나 우리 둘만의 계약. 제 삼자가 끼어들어 간섭할 여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실망했어요. 카이엔 님." 마나티가 삐진 얼굴로 툴툴거리면서 날 쏘아보았다. 푸훗.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다 들어간 잘 빠진 몸매를 가지고 저런 어린애같은 행동이라니. 하지만 아무리 실망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내 목적은 오직 아시에의 부활 뿐. 남들이 내리는 제멋대로의 평가 같은 것은 이미 접어두기로 결정내렸으니까. "카이엔 님이라면 분명 아실 줄 알았는데... 그 도(道)를..." "도?" 마나티는 내가 누워있는 침대에 다가와서는 침대 한켠에 앉으며 말했다. "아니. 몰라도 괜찮아요. 하지만 정말 안타까워요... 카이엔 님의 절대미(絶對美)가 퇴색되고 마는 것은... 그건 결코 여자의 몸으로는 유지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요!"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나티도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이었던 걸까? 결코 내가 호응해줄 수 없는 그런 기대를... 하지만 마나티의 제멋대로같은 미학에 내가 맞춰줘야 할 이유는 없지. "하지만 어차피 부서질 아름다움이라면, 그렇게 되기 전에 제가 가지지 않으면 안되겠죠? 좋은 추억♡을 남기는 거예요!" 마나티가 한 손으로 부드럽게 내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순간, 그 말 속에 숨어있는 묘하게 하트풀한 어조에 깜짝 놀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순간 뭔가 하얀 것이 눈앞을 뒤덮으면서 나는 다시 쓰러졌다. "우우웁!" "그런 조건마저 없었더라면 전 이 계약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크아악! 셰더녀석, 마나티를 보내겠다더니 결국 나를 팔아넘긴 거냐아아아! 나는 다시 침대에 쓰러져서야 방금 전의 하얀 물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짧은 치마 속에 감춰져 있던 마나티의 속옷이었다. 그녀는 무식하게시리 자기 엉덩이로 내 얼굴을 깔아 뭉개버린 것이다. 꾸에엑! 침대 매트릭스 때문에 아프지는 않았지만 이게 무슨 짓이냐구! 빨리 안 일어낫! 나는 발버둥쳤지만 마나티의 팬티는 내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우욱. 숨쉬기가 갑갑하잖아. "후훗♡" "웁웁...(숨막혀!)" 보통 남자 하나에 여자 다수가 달라붙는 우렁각시 하렘물 만화책들을 보면 이런 상황이 종종 나오곤 하지. 하지만 그 느낌은 결코 만화책에서 나오는 것 같이 황홀감에 코피를 터뜨리는 상황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무슨 느낌이냐고? 그게 궁금하면 당장 당신 생식기를 직접 손으로 만진 다음에 냄새를 맡아 봐라. 무슨 냄새가 날 것 같냐? 그렇잖아도 좀 크고 묵직한 음식쓰레기를 버리는 곳이나 하수구 물 버리는 장소와 인접해 있는 그곳은 우리 몸에서 가장 심한 지린내가 나는 곳으로 통풍이 잘 되는 속옷을 입거나 매일매일 씻고 갈아입는 등의 관리를 기울이지 않으면 쉽게 습진이나 피부염 등을 일으키는 장소다. 수많은 남자들이 다대(多大)한 성적(性的) 의미를 부여하면서 스스로의 욕구를 부채질하는 여자의 팬티라는 것도 남자의 팬티와 다를 바 없이 하루종일 눈에 보이지 않게 묻어나는 수많은 분비물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우우웁∼(괴로워!)" "아이 차암∼♡ 너무 심하게 움직이지 마요. 간지럽잖아요∼" 하지만 왜일까? 처음 맡았을 때는 괴로웠던 지린내도 익숙해지니 조금은 살 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후각은 냄새를 맡은 지 조금만 지나도 감각이 마비되면서 적응되는 감각이니 말이야. 그와 동시에 어쩐지 습기가 약간 묻어 있는 팬티에서 나는 지린내가 이상하게 야릇한 느낌을 띠기 시작했다. 비록 역한 냄새이기는 했지만 분명히 남자 몸에서 나는 냄새와는 틀렸다. 해 본 적은 없지만 마약이라도 하는 것 같은 짜릿한 느낌이 온 몸을 감쌌다. 자꾸만 본의아니게 하반신으로 피가 쏠려나가 낭심에 에네르기를 모으고 있었다. 으으... 이런 게 바로 여자의 페로몬(pheromone)이라는 걸까? 어째서 전쟁터에 나가는 남자친구에게 안 씻은 자기 속옷을 줬다는 이야기도 웬지모르게 점차 수긍이 가고 있었다. 본드 냄새나 부탄가스 냄새같이 역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몸을 이상하게 자극하는 느낌이 있었다. "으읍, 읍!(뭐... 뭐야! 왜 갑자기 몸이!)" "꺄하∼ 좀 더 발버둥쳐 보라고요! 꺄하하하. 너무 간지러워∼♡" 점차 달아오르는 기분을 느끼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혀를 내밀어 마나티의 엉덩이를 핥으려다가 멈췄다. 허헉!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야!? 아무리 남자의 본능이라고 하지만... 나 왜 이렇게 변태적으로 되어가는 거지? 아니 원래부터 그런 기질이 있었는지도... 여러가지 의미로 진한 향이 점차 뇌를 마비시켜 가고 있었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이 조금만 더 있으면 육체가 정신의 제어에서 완전히 풀려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 뽀오옹 뽕뽕. 엥? 이게 무슨 소리야? 분명히 내 엉덩이에서 나는 소리는 아닌데... "어머나, 실수했네. 왜 하필 이럴 때 그게 나온담? 오호호호호." 끄아아아아악! 남의 코 앞에서 독가스를 뿌려놓고도 그렇게 뻔뻔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거야? 진짜로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빨리 이 엉덩이부터 치워달라고! 하지만 아무리 애를 쓰고 용을 써도 내 힘으로는 이놈의 무거운 엉덩이를 내 얼굴에서 도저히 치울 수 없었다. 그렇잖아도 몽롱한 정신에 카운터를 날린 암모니아 향을 흡입한 나는 그 자리에서 거품을 물고 가물가물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일단 카이엔을 향해 묵념(....) 예전부터 그랬지만 코멘트 다시는 분들의 상상력에는 경의를 표한답니다! 그 중에서는 다음 전개와 일치하는 것들도 간혹 있어서 당황스러울 때도 있죠^^ 한 가지 말하자면, 역시 미렌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겠죠. '선택의 기로'편 끝!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공지] 당분간 쉴께요. 아아... 뻗을 거 같아요. 요근래 며칠간 태풍 매미로 인한 피해지역 봉사활동(이라 쓰고 강제동원 또는 강제노동이라 읽는다.)을 계속 다녀오는 바람에 체력과 정신력이 바닥났답니다. 저같이 연약하고 가녀린 사람한테 그렇게 힘든 일들을 시키다니. 흑흑 ;ㅇ; 문제는 그게 언제까지 나가야 할지 기약이 없는...-ㅅ- 단순히 그런 이유 뿐만은 아니지만 이번 9월은, 꼬인 매듭이 자꾸만 더 꼬여가는 게 정말 머리가 아파요. 문제는 그게 자기 자신의 '서툼'과 '솔직함'이 불러온다는 거죠. 친목을 강조하면서도 실상을 파고들면 극도의 이기심과 능수능란한 거짓들이 판치는 이 세상에서 바보같이 거짓말 하나 제대로 못하는 자기 자신에 회의를 느낄 뿐... 그리고 예의와 상급자 눈치라는 이유로 법에 정해진 권리조차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그런 세상. 하아. 글을 쓰는 것도, 이렇게 쉰다고 공지를 때리는 것도 전부 도피에 불과한 일일까요? 몸도, 마음도 지쳤어요. 어려움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어줍잖은 약속이나 희망만을 가지고 참아 왔는데. 지금까지 몇번이나 그 약속과 희망이 공수표로 돌아갔을까요. 이번 달은 글렀답니다. 다음 달에는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겠죠. 아마 누군가 뒤에서 귀에 따스한 바람을 불어넣어주면서 껴안아 줄 사람이 필요한가봐요. 아하하핫.(...그러나 그럴 일은 없겠지... 체념) ...이번 달은 글이 없을 거에요. 착잡한 감정. 저도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네요. 조금만, 기다려 주셨으면 좋겠어요. 다시 한번 환한 월광이 사람을 미치게 하는 햇빛을 가르고 나타날 수 있을 때까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Der Dieglord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46화 : Der Dieglord (1) ------------------------------------------------------------------------- 웅성웅성.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북적대고 있었다. 당연하겠지. 아빠 엄마와 함께 예전에 어깨를 맞대고 싸웠던 동지들에서부터 명망있는 현자들까지 그때의 일에 관계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모여드는 것 같다. 덕택에 원체 커서 한산하기만 했던 이 저택도 오래간만에 활기를 띠고 있었다. 별로 좋은 의미에서의 활기는 아니었지만. "여기서 뭐해, 레이?" "아, 티아 누나." "언니라고 부르랬지!" 스테아 누나는 내가 무의식적으로 누나라는 말을 쓰자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우웅... 그렇다고 그렇게 화낼 것까지야 없잖아? "뭐 하고 있었어, 조만간에 회의가 시작될 텐데." "아, 아이렌을 찾고 있어. 아까부터 도통 보이질 않아서..." "예지력으로 찾으면 되잖아?" "소용없어. 아이렌도 그걸 알기 때문에 작정하고 없어질 때는 정령들로 자신을 에워싸서 예지를 방해하거든?" "흐음... 어쨌건 레이 너는 회의에 들어올 거지?" "응. 나도 일단은 관계자니까..." 아이렌. 사랑하는 내 쌍둥이 누이. 하지만 그녀는 이전에 내가 그녀에게 마수를 뻗치려 했던 사실을 아시에 누나가 고자질한 이후로 전혀 나를 상대해주지 않는다. 게다가 카이엔 형이 사라진 이후에는 대체 어디를 자꾸 쏘다니는 건지 얼굴 보기도 어려웠다. 아무래도 카이엔 형이 사라진 사실이 상당히 충격인 것 같았다. "같이 가자. 응?" 스테아 누나가 내게 윙크를 건네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할 수 없지. 회의 시간이 다 되었으니 일단은 들어갈 수밖에. 하지만 난 쉽게 아이렌을 포기하지 않아! 커다란 회의장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그 멤버들이 전부 이름이 쟁쟁한 사람들이다. 만약 이들이 힘을 합친다면 대륙의 절반 정도는 마음먹고 먹을 수 있을 터였다. 마왕 디크로드를 직접 머신검으로 봉인했던 우리 아버지, 섀도우 나이트(Shadow Knight) 지카니 브리타뉴를 비롯하여 씰드 네임 갓핸드(Sealed Name Godhand)의 칭호를 지닌, 이름이 봉인된 우리 엄마를 비롯하여 월야검제(月夜劍帝) 쟈켄 파르스, 아트 플래너(Art Planner) 시나 룬비너스 같은 과거 마왕 디크로드와 함께 맞서 싸웠던 12용사들을 주축으로 지금 나와 함께 들어와 내 옆자리에 앉은 어린 천재소녀 대륙 7대 현자 스테아 만슈타인. 나와는 격이 다른 대륙 제일의 예언가인 브라이트 아이(Bright Eye) 핑 슬레이트. 몇 년전 자취를 감춘 암살집단 케이리가를 대신해서 대륙 제일의 암살집단으로 자리잡은 분데스리가(Bundesliga)의 수장 차붐 분데스리가 등등 수많은 대륙의 명사들이 제각각 모여앉아 가벼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럼, 이제 안 온 사람들 빼고는 모든 사람들이 다 모인 것 같군요.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지방방송은 꺼주시고 집중해 주세요." 아빠가 준비된 연단 앞에 나가 이야기하자 웅성거리던 분위기가 수그러들었다. 이제부터 회의가 시작되는 건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비록 카이엔 형 한 사람으로 인해 열린 회의라지만 이 회의는 참석자들의 면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보통 회의가 아니다. 대륙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도 있는 회의인 것이다. "그럼 먼저 이번 일에 대한 간단한 개요를 마법사의 탑 부회장이신 '스엔 엘리오넬'님께서 설명하겠습니다." 마법사의 탑에서는 회장이 타 대륙으로 외유중인 관계로 부회장이 대신 나왔다. 하지만 그도 대륙 7대 마법사 중에서 당당히 서열 4위를 차지하고 있는 무시하지 못할 거물임에는 틀림없었다. 아, 참고로 울 세이렌 누나는 서열 6위라고 한다. "흠흠. 그럼 브리핑을 시작하도록 하지요. 태초에 주신 다르군트 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셨으니 세상에 빛과 어둠이 창조되었더라. 그리고..." 하지만 엘리오넬 씨의 연설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동용 교과서 첫 구절에 나오는 아무나 다 아는 뻔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의 연설에 다른 사람들이 태클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거 장난치쇼?"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 끌지 말라고! 사안의 심각성을 모르는 건가!" "미... 미안하오. 그럼 넘어가서 마신 베링거와의 결전에서 전설의 영웅 로또는 성소녀 토토와 함께..." "집어쳐!" "누가 저 머저리한테 연설을 시킨 거야? 마법사의 탑에서 하던 짓거리를 여기서까지 하고 지랄이냐구!" 연설자가 명망높은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참석자들은 노골적으로 그를 비난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하다가는 물병이 날아갈 듯히 격앙된 분위기였다. 하기야 내가 봐도 저런 뻔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건 너무하긴 했다. 배경 연설은 아무리 잘 봐줘도 20년 전 마왕 디크로드와의 격전부터 시작하는 게 원칙이다. 그것이 카이엔 형의 비극이 일어나게 된 시발점인데다가 그 이전의 이야기는 익히 전 대륙에 잘 알려져 있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마법솜씨나 연구 면에서는 뛰어나지만 강의 실력은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지. 오죽하면 마법사의 탑 학생들이 노골적으로 머저리 엘리라고 부르고 다닐까나. 20년 넘게 강의가 한번도 변한 게 없이 똑같다니까 글쎄?" 스테아 누나가 고개를 내저으면서 내게 귀뜀해 주었다. 흐음. 별로 학생들에게 좋은 교수는 못 되는 것 같군. "엘리오넬 님이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듯합니다. 제 자식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분들도 모두 알고 계실테니 우선 브리핑은 넘기고 바로 의제에 들어가도록 하죠." 울 엄마가 엘리오넬의 체면을 세워주면서 망가진 회의 분위기를 추스렸다. 20년전. 귀축(鬼畜)이라는 전설적인 악명을 지닌 흑마법사 자코 이사크가 마신의 육체조각이 봉인되어 있는 봉마석을 몇 조각 모아 아시에 누나를 제물로 해서 마파왕(魔破王) 디크로드를 대륙에 소환시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흑마력에 대해 강력한 저항성을 지니고 있는 데다 대단한 미소녀인 아시에 누나라면 그를 소환시키는 데 충분한 제물이었으리라. 미소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의외로 중요한 조항이다. 만약 납치당한 왕국의 공주가 예쁘고 아름다운 미소녀가 아니라면 과연 그녀를 구하러 갈 용사가 있을까? 물론 왕국의 사위라는 부대조항이 훨씬 더 땡기는 용사들도 많으므로 많은 지원자가 몰려들 것이다. 하지만 마왕이라고 해도 같은 값이면 예쁜 여자쪽이 더 나은 법이다. 이건 마왕을 불러냈던 역대 마왕소환자들의 기록에서도 나타나는 이야기이다. 마왕소환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제물을 준비했는데도 마왕이 소환되지 않는다면, 십중팔구는 그 제물이 미소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간혹 묘한 취향(?)을 가진 마왕이나 여마왕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미소년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진 상식이 하나 있는데, 소환되는 마왕의 제물로 쓸 여자는 꼭 처녀일 필요는 없다. 물론 남자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제물로 미소년이나 미소녀를 필요로 하는 이유 자체가 성에 눈뜨지 못한 어린 소년소녀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인데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마왕이라고 다 '공'인가? 마왕에 따라서는 자신을 리드해줄 수 있는 능숙한 파트너(...) 쪽을 선호하는 마왕도 있기 마련이다. 애초에 아시에 누나도 제물이 되었을 시점에는 셰더 놈한테 당할 거 다 당한 상태였잖아? 이상의 원칙은 마왕이 아닌 마족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제물이 미소년 미소녀일수록 보다 강력한 고위 마족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사크의 도움으로 소환된 마파왕 디크로드는 그 즉시 이사크에게 자신의 권능을 부여하고 수위(守衛)라는 직위를 하사했다. 그리고 자기 휘하의 3명의 부하들을 더 불러내었는데 이사크를 포함해서 그 4명의 마족은 후에 사천마(四天魔)이라 불리게 된다. 수위(守衛) 자코 이사크(Jacco Isaku) 일진(一進) 메이드캐슬(Madecastle) 얼짱(面長) 정 빅스타(Jung Bigstar) 칠음계(七音階) 치치피(Chichipy) 대륙에 재앙이 몰아닥쳤다. 칠흑같이 검은 구름이 태양을 가린 가운데 마왕의 군대가 대륙을 뒤덮었다. 대륙 서부의 건실한 나라들이었던 바르바로사, 마지노, 발칸 등의 나라들이 불과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근 200년만에 부활한 마왕에 맞서 대륙 각국에는 비상령이 걸렸고 그들에 맞서 싸우기 위해 전쟁준비를 서둘렀다. 대륙 중부와 동부에서 모두 긁어모은 병력들은 전투병력만 해도 200만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게다가 각국의 이름난 전사와 마법사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아무리 마왕군이 강력하다 하더라도 숫자는 불과 10만이 채 안되는 규모. 전사나 마법사들의 수준도 200년 전에 의해 상당히 향상된 상태였고 사람들은 여전히 태양을 가린 어둠에 불안을 느끼면서도 승리를 확신하며 병사들을 송별했다. 하지만 불과 한 달만에 200만에 달하는 병력은 그대로 붕괴해버렸다. 마왕군을 이끌던 이사크가 각국에 위치한 군대가 모두 집결하기 전에 그들을 각개격파해 버린 것이다. 어둠의 마물들로 이루어진 마왕군은 햇빛 아래만 아니라면 일반 병사들보다 몇 배는 강했고 이사크는 그 점을 십분 활용하면서 뛰어난 전사와 마법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대병력을 이루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대륙은 충격에 휩싸였다. 로템이나 유틀란트 등의 나라들은 오히려 마왕군과 손을 잡는가 하면 대륙의 반을 차지한 대륙 남부의 메리노아 제국은 지원에 소극적으로 나서면서 미그적거렸다. 마왕군이 대륙 중부로 진입하여 자하기니아 가까이에까지 진격해왔을 때, 유클리네의 수도 마법사의 탑에서 열린 대륙공회(大陸公會)에서 한 젊은 여마법사가 제안을 내놓는다. 나중에 12용사의 반열에 드는 시나 룬비너스였다. "더 이상 병력과 물자를 긁어모아 마왕군과 맞서 싸우는 일은 무의미합니다. 그들의 군대는 인간들의 군대보다 수는 적을지라도 훨씬 강한데다가 놈들을 지휘하는 자코 이사크는 노망이 나서 마왕을 소환하는 미친 짓을 저지르긴 했지만 병법(兵法)을 아는 자이지요. 지금 마왕은 그가 소환된 본거지에 숨어 계속해서 마왕군들을 추가로 소환해 내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의 군대만으로는 대륙의 나머지 부분을 완전히 먹어삼키기는 힘드니까요. 아무리 마왕이라고 할지라도 한번에 몇천 명 단위에 달하는 마족의 소환은 무리가 가는 일이고 마왕은 평소보다 약해져 있을 터입니다. 우리가 뛰어난 정예부대를 뽑아서 그 본거지를 습격한다면, 적은 희생으로 마왕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대담하지만, 쉽지 않은 제안이었다. 성공한다면 그야말로 더 이상 좋은 일이 없겠지만, 만일 실패한다면 마왕에 맞서 싸울 훌륭한 전사와 마법사들을 다수 잃어버리는 커다란 손실을 입게 되는 것이다. 대륙공회에서는 격론 끝에 다수결로 143:135라는 아슬아슬한 수치로 룬비너스의 제안을 통과시켰다. 좀 더 많은 토론과 검토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결정에 시간을 끌기에는 마왕군이 너무 가까이 와 있었다. 전사들의 성지인 자하기니아와 마법사의 탑이 있는 유클리네가 함락된다면 대륙 중부 전체가 마왕군의 손에 넘어가면서 대세가 절대적으로 기울 게 뻔했다. 룬비너스의 제안에 따라서 전 대륙에서 108명에 달하는 대륙 최고급의 전사와 마법사들이 이 위험한 임무에 나섰고, 격렬한 사투(死鬪) 끝에 이 임무는 성공한다. 12용사들은 이 임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리스트였다. 격렬한 전투 끝에, 지카니 브리타뉴가 머신검으로 마왕의 머리에 머신검을 꽂아넣고 봉마석에 그를 봉인했을 때, 카이엔 브리타뉴의 비극의 씨앗은 잉태되기 시작했다. -------------------------------------------------------------------------- 흐아아아아아. 간신히 몸 추스리고 한 화 올립니다만, 아직 수해복구지원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다음화는 언제 올라올지 미정이랍니다. (뿌듯하고 귀찮고를 따지기 전에 피곤해요오∼) 어떤 경우라도 수면부족->스트레스->기분Down으로 이어지는 연쇄고리 때문에..; I neeeeeeeeeeed more sleep ;ㅁ; (그러나 그렇다고 현찰 들어오는 과외를 포기할 수는 없..... 쿨럭) 아직 월광을 보려면 한참 멀었다죠...(먼산) 날씨는 소슬해지는데도... 글도 뭔가 잘 안 써지는 듯...(자기가 쓰면서도 지루해한다 =_=) 그래도 일단 개연성 유지를 위한 뒷배경 설명쯤은 해줘야겠죠. 저 사천마 이름들은 전부 패러디인데 다 아실까나? 어쨌건 걱정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P.S : 월야환담은 봤는데 더 로그를 못봤다죠....(무념) 월광을 볼 수 있기 전에는 책 읽을 시간도 없어요 ;ㅁ; 생각해보니 저거 디크로드가 아닌 디크로트로 읽어야 할 거 같은...-ㅅ- 독일식으로 지은 이름이었잖아! (...라지만 안면몰수하고 넘어간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Der Dieglord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47화 : Der Dieglord (2) ------------------------------------------------------------------------- "크르르르르..." "허억... 허억..." "대단... 하군. 인간... 이여." "허억... 천만의... 말씀... 지금까지... 너같은... 마왕들을 인간들은... 허억... 몇번이나... 허억... 봉인시키지 않았나." "알고... 있다... 그래서... 인간에게... 군의 지휘를 맡긴... 것인데..." 그랬다. 108명의 용사들이 마왕의 본거지에 난입하기 전까지 자하기니아의 국경선 근처에서 진격을 계속하고 있던 마왕군의 연이은 승전보는 암흑시대를 제외하고는 역대 마왕군이 거둔 승리 중 최상의 전적이었다. 마족들은 근본적으로 1:1싸움에는 능하지만 협력전투에는 서툴렀고 고위마족들 중에서도 전략 전술에 대한 개념이 잡혀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마계의 환경은 인간 세상과 판이하게 틀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디크로드는 인간에게 굳이 권능을 주어서면서까지 군을 지휘하게 한 것이었다. "허억... 하지만... 이젠 그것도... 허억... 끝이군." "크르르르... 끝이라고?" "언젠가는 다시 부활할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대에서 네놈이나 다른 마왕들의 더러운 면상을... 볼 일은 없겠지." "이제 그만, 당신의 세계로 돌아가요." 무너져가는 마왕의 육신, 마계로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마왕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지카니 브리타뉴의 곁에 실눈을 뜨고 미소지은 여인이 다가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싸움이 끝난 후에 지카니와 결합하여 후에 카이엔의 어머니가 되는 여인이었다. "봉인된 이름의 신관... 인가... 아르쥬나?" 코웃음치는 마파왕 디크로드의 말에 아르쥬나라 불린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웬만한 일로는 결코 미소를 잃지 않는 그녀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걸... 어떻게?" 씰드 네임 갓핸드(Sealed Name Godhand). 그것이 그녀에게 붙여진 칭호. 어릴 때부터 오로지 신관으로만 자라난 그녀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그녀의 진짜 이름은 오로지 주신 다르군트에게만 바쳐진 것. 그녀와 신 외에는 어느 누구라도 알아서는 안 되는 신성한 명칭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의 동료들은 그녀를 씰 이라는 가명으로만 불렀고 그것도 가능한 한 자제하는 편이었다. "설마...! 그것이?" 지카니는 디크로드의 말에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아르쥬나. 아마도 그것이 그녀와 주신 사이에 약속된 봉인의 이름일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그가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과 함께 하고 있는 동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다른 동료들의 안색도 눈에 띄게 나빠졌다. "왜 그러나, 브리타뉴? 그리고 다른 영웅 동지들? 그녀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된 것이 두렵나? 크크크." 마왕 디크로드의 육체는 소멸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결코 봉인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살아남아 있는 12명의 용사들은 깨달았다. 아직 그와의 전쟁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뭘 꾸미고 있는 거지? 이제와서 무슨 의미가 있다고..." "크크... 세상을 구하신 용사들께서 왜 그렇게 겁을 먹으시는겐가..." 디크로드의 모습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었다. 벌써 그의 육체의 상당부분이 먼지로 변해 허공에 비산하고 있었다. 그가 봉마석에 봉인되어감과 동시에 봉마석에서 띠고 있던 강력한 항마력도 중화되어가면서 번쩍이는 빛을 잃어갔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크으..." 봉마석이 평범한 돌처럼 변하는 것과 동시에 마왕 디크로드의 육체가 완전히 빛으로 산화하면서 소멸했다. 봉인이 완료된 것이다. 그들이 마왕 디크로드의 진의(眞意)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4년 뒤였다. "뭘 생각하고 있어, 레이? 뭔가 대단한 예언이라도 나올 것 같아?" "아무것도... 아냐. 티아 언니. 마파왕(魔破王)에 대해 뭣 좀 생각하고 있었어." "집중하고 잘 봐. 저쪽의 예언자 할아버지가 뭔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스테아 누나의 말대로 자주빛 긴 로브를 걸치고 막 연설을 시작하려는 샛노란 수염을 늘어뜨린 백발의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대륙 제일의 예언가이자 브라이트 아이의 칭호를 가진 핑 슬레이트.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음... 카이엔 브리타뉴는 예언이라는 것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상대. 나로서도 정확한 예언을 하기 힘들다만... 아무래도 별일 없이 끝날 확률이 대략 65%에 플러스 마이너스 3%정도의 오차가 있소." "으음..." "어려운 예언이구만." 다들 슬레이트 할아버지의 난해한 예언에 머리를 감싸쥐었다. 예언이라는 것은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한 가지로 콕 집어낼 수는 없는 것. 그런데 슬레이트 씨는 각각의 예언이 일어날 경우를 상정할 수 있고 거기에 대한 확률을 알아낼 수 있다. 정확도가 높기는 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골때리기 그지 없는 예언 방식인 것이다. "질문 있소, 그럼 나머지 35%는 뭐요?" ".....그건." 슬레이트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말을 주저하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더욱 궁금증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모든 사람들이 예상할 수 있었다. 16년 전, 카이엔 브리타뉴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예고된 사실이기도 했다. "재림(再臨)이지." 확률 35%. 결코 무시할 수 있는 확률은 아니다. 그가 예언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평소에 그렇듯이 오늘도 그의 확률론은 사람들의 머리에 쥐가 나게 만들고 있었다. 그 때, 내 예지력에 무언가 떠오르는 일이 있어 슬레이트에게 물었다. "슬레이트 할아버지." "오, 브리타뉴 가의 예언가 막내로군. 뭔가 떠오른 예지라도 있나?" "저기... 그 별일 없이 끝날 확률 중에서 카이엔 형의 죽음만으로 마무리될 확률은 얼마죠?" 별일 없다는 것은, 결국 재림을 제외한 모든 사건을 말한다. 큰 일은 아니라도 약간의 파문 정도는 퍼뜨려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65%중에 30%다. 오차는 플러스 마이너스 2%." "뭐... 뭐라고요!?" "그런!"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이 슬레이트의 말에 흥분해서는 벌떡 일어났다. 재림의 확률이 35%인 상황과 별개로 30%확률로 카이엔 형이 죽을 확률을 합치면 총 65%의 확률로 카이엔 형은 정상을 찾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하지만 슬레이트는 냉정하게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그리고 죽진 않아도 정신이상 또는 식물인간이 될 확률도 4%, 죽지 않고 실종될 확률도 3%다." "젠장! 장난치는 거야, 뭐야!?" 사이엔 형이 분통을 터뜨렸다. 핑 슬레이트는 대륙 최고의 예언가라는 명성은 얻고 있지만 그다지 일반의 평은 좋지 않은 사람이다. 사람이 예언을 찾는 이유는 미래를 불안해하기 때문, 점괘가 좋지 않아도 가능한한 좋은 쪽으로 말하고 희망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슬레이트는 예언을 학자와 같이 사무적으로 말한다. 확률이라는 딱딱한 수치까지 들먹이면서.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예언을 얻기 위해 그를 찾는 일은 별로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조건변화에 따른 확률변화를 말해주세요. 가능한한 '재림'의 확률을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30대 후반의 나이였지만 뛰어난 마법을 통해 젊고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는, 대륙 7대 마법사 서열 2위의 아트 플래너(Art Planner), 시나 룬비너스가 짧게 말했다. 그녀의 간략하지만 핵심이 담긴 이야기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률론으로 논해지는 예언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것이 현실이라면 가능한한 성공의 확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건 카이엔 브리타뉴 본인에게 달려 있소. 하지만 본인이 여기 없으니 뭘 알아볼 수가 있어야..." 슬레이트가 말을 얼버무렸다. 여전히 카이엔 형의 행방은 묘연한 데다 지금은 아시에 누나의 행방마저 끊긴 상태. 나는 예지력은 직감적으로 아시에 누나의 실종이 카이엔 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시에 누나의 성좌를 이용해서 카이엔 형의 행방을 찾으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그 행적이 끊겨 버리고 별의 조화가 빛을 잃었다. 분명히 무슨 큰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지를 하려 해 보아도 한 줄의 짤막한 문장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웅(雌雄)이 빛을 잃고 이인(異人)들이 역사의 도표를 돌린다."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장내의 사람들의 눈이 내게 집중되었다. 와... 와앗! 그렇게 쏘아보면 부끄럽다고요! "흐음... 레이, 그거 혹시 예언?" "으... 응." 나는 고개를 숙이면서 스테아 누나의 말에 응답했다. 그리고 장내에 모인 사람들의 주름살 갯수가 하나쯤 더 늘어난 것 같았다. 내 예언은 정확하기는 한데 내용이 애매하기가 짝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 뜻을 해석하기가 엄청 힘들다는 게 단점이었다. 때문에 내 예언의 경우에는 해석자에 따라 온갖 갖다붙이기식 예언이 나도는 것이 보통이었다. "결론은 원점인가... 카이엔 브리타뉴를 찾아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를 찾는 걸로 끝이 아니죠. 우린 결정해야 해요. 그를 다시 봉인할 것인지, 아니면..." "아니면, 뭐죠? 카이엔을 어쩌겠다는 거죠?" 세이렌 누나가 도끼눈을 뜨고 방금 말을 꺼낸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그 마법사는 세이렌 누나의 고압적인 말투에 주눅이 든 듯 다소 위축되어서는 말을 얼버무렸다. "단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과 카드를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 뿐이에요." 모 나라에 전쟁협박하는 어느 나라 사람들이 하는 듯한 투의 멘트였다. "확률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요인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하오만?"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분데스리가 가문의 수장, 차붐 분데스리가가 입을 열었다.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암살자 집단의 수장에 대한 그에 대한 좌중의 시선은 그렇게 우호적이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그가 가진 힘과 영향력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힘으로 최소한 여기서 '대륙 7대'자가 안 붙는 사람 정도는 능히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앨 수 있었다. 비록 그 수단이 정면승부는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 암만 봐도 뭔가 설정이 허접하다.....(;;;) 패러디 정답 공개 - 메이드캐슬->지은성(-_-;;;) 정 빅스타->정태성(;;;) 칠음계 -> 도레미파솔라시도. 저 책들 본적은 없지만 네타 찾기가 너무 쉽고 줄거리 요약이 간단해서 간단하게 뚝딱! (...사실 네이버 지식인 뒤져봤...) 어차피 글에 안나오는 설정상 지나가는 캐릭터들이므로 상관없다죠 =_= (어쨌건 이상한거 가지고 자꾸 패러디해먹는...) 간신히 추스려서 쓴 게 이 정도... 과연 이번 주에 더 올릴 수 있을지 저도 모르겠어요. 현재는 피곤해서 새로운 내용을 쓰기보다는 기존 글들의 수정에 치중하고 있답니다. (...라지만 수정해도 별로 바뀐 게 안보이는...-ㅅ-)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Der Dieglord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48화 : Der Dieglord (3) ------------------------------------------------------------------------- "재림(再臨)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껍질은 필요한 법이지요. 재림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봉마석이 필요하오. 도둑맞은 봉마석을 되찾을 수 있다면, 위험확률은 크게 줄어들 수 있겠지." "오오!" "과연!"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기뻐하는 사람은 없었다. 분데스리가의 말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월야검제 쟈켄 파르스가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현재 잃어버린 봉마석은 두 가지. 시드의 검과 머신검에 숨겨져 있던 봉마석이오. 그것들은 모두 괴도 시르팡 녀석들이 훔쳐갔지. 아직까지도 시르팡 녀석들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마당에 그들의 위치를 찾는다는 건 카이엔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보다 더 어렵지 않겠소?"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오." 분데스리가는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뭔가를 알고 있다는 걸까? 암살업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정보수집에도 뛰어난 면모를 보이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우리는 시르팡의 정체를 알아내었으니까." "뭐라고!" "그건...!"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눈이 단번에 휘둥그래졌다. 그들의 정체를 알아냈다고? 우리 브리타뉴 가문에서도 그들에게 한번 납치당했던 카이엔 형을 통해 시르젤과 시르쥬라는 두 젊은이가 시르팡의 핵심이라는 사실만을 알아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정보만으로 저렇게 자신만만할 수는 없을텐데... 차붐 분데스리가는 그 이상의 정보를 가지고 있단 말야? "괴도 시르팡이 활동하기 시작한 지 약 3년이 지났소. 그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정지하고 지하로 숨어들어간 집단이 하나 있지." "설마..." 몇몇 사람들이 분데스리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예지력을 발휘한 나도 그것을 미리 알고 입을 벌렸다. 이... 이건 우리 집안에서도 모르는 새로운 사실이자 엄청난 사실이다. "분하지만 우리가 열세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강력한 암살집단. 케이리가 가문이요. 아마 나는 그들이 괴도 시르팡의 정체일거라고 생각하오. 지금껏 우리는 괴도 시르팡의 수단과 흔적을 연구해 왔고 그들의 수법은 놀랄만큼 이전 케이리가 가문이 사용하던 수법과 흡사하오." 카이엔 형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모르고 있었을까? 만약 알면서도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심각한 일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가문을 불신(不信)하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되니까.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다. 완전히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심증은 거의 굳어져 가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분데스리가의 설명이 너무나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핑 슬레이트가 마지막으로 분데스리가의 말에 대한 예언으로 쐐기를 박았다. "시르팡이 케이리가일 확률... 98%요."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타도 대상이었던 자들. 우리 분데스리가 가문에서는 그들에 대한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소. 여러분이 도와 준다면, 그들을 찾아내어 입을 열게 할 수 있을 것이오." "괜찮은 생각인 것 같소. 만약 도둑맞은 봉마석을 되찾고 각국에 흩어져 보관된 봉마석을 엄중히 관리한다면 재림확률은 18%로 크게 줄어들 것이오. 그리고 카이엔이 죽을 확률도 17%정도로 감소하겠지." 슬레이트는 아까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의 격분이 신경이 쓰였는지 약간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엄마 아빠 역시 언급은 하지 않지만 카이엔 형을 염려하는 것이 얼굴표정에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그래도 1/3을 넘어가는 수치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위험도가 훨씬 낮아지겠지. "좋소. 그럼 차붐 분데스리가 씨의 의견을 들어 보도록 합시다." 아빠가 결정을 촉구하는 듯한 말을 꺼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빠의 말에 동의했다. 사람들의 안광에는 어떻게든 재림만은 막아야 한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재림(再臨) 어떻게든 마신(魔神) 베링거의 재림만은 말이다. 16년 전. 카이엔 형이 태어났을 무렵의 일이다. "헤에. 그럼 엄마, 여기에 내 동생이 들어있는 거야?" "그렇단다. 세이. 예쁘고 귀여운 동생이 태어나길 빌어주렴." "네에∼ 사이보다 착했음 좋겠다아. 어? 사이. 그 눈빛이 뭐야? 죽을래?" 퍽퍽퍽 아직 세이렌 누나가 사이엔 형에게 애칭을 불러줄만큼 서로 사이가 좋던(...;;) 시절이었다. 세이렌과 사이엔이 밖에 나가서 서로 싸우고 있을 때 만삭의 엄마에게 아빠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다가왔다. "휴우∼" "웬일이세요, 당신? 우리 귀여운 셋째가 태어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무슨 걱정이라도?" "아니오. 요즘 별로 꿈자리가 좋지 못해서 말이오." "그래요? 4년 전의 악몽이라도 꾸었나요?" "악몽 중에서도 최악의 악몽이지. 4년 전 쓰러뜨렸던 마왕 디크로드가 꿈에 나타났소. 그리고 말하더군. '곧 나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그거 예지몽일까요?" "그래서 한번 슬레이트 님을 찾아가 보려고 생각중이오." "그 할아버지 별로 좋은 소리는 안 해줄텐데. 맨날 숫자놀음이나 하는 늙은이잖아요?" "...하지만 정확성이라면 누구보다도 믿을 만하지." 대륙 최대의 예언가. 브라이트 아이의 칭호를 얻고 있는 핑 슬레이트 노인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대륙 12용사의 정점에 서 있는 아빠는 어떻게든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슬레이트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가질 충격적인 운명을 읽어내고야 만다. "그 꿈, 예지몽일 가능성이 87%야." "맞다고 봐도 무방하겠군요. 하지만 왜 이제 와서 이미 봉인된 디크로드의 꿈이?" "혹시 디크로드가 뭔가 저주를 남기고 죽지는 않았나?" "...제 아내, 씰드 네임 갓핸드의 진짜 이름을 알아내고 발설했지요." "그랬군. 자네는 자네 아내가 왜 이름이 봉인되어있는지 알고 있나?" "압니다." 아버지의 얼굴이 약간 어두운 표정으로 변했다. 어머니는 태어날 때부터 신전에 내려진 신탁에 따라서 이름 없이 자라다가 12살이 되던 해, 주신 다르군트와의 정신적 교감을 이뤄냄으로서 비로소 이름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그 이름은 절대로 공개되어서는 안 되는 이름. 어릴 때부터 마왕이 부활하는 그날의 싸움을 위해 혹독하게 훈련받은 그녀의 힘을 극도로 높여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그녀는 강했다. 마왕의 본거지를 습격하는 임무를 위해 결성된 108명의 용사들 중 그녀가 빠졌었다면 임무 성공은커녕 한 명도 빠짐없이 전멸되었을 거라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12용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마왕군과 이사크를 뺀 나머지 사천마와의 싸움, 그리고 쉴 틈 없이 이어진 마왕 디크로드와의 전투에서 그녀는 막 죽은 이를 살려내는 '부활'을 54번, 빈사상태의 아군을 치료하는 '회생'을 123번씩이나 사용했다. 대륙 열 손가락에 드는 고위 신관의 일반적인 능력을 10배 이상 초과하는 무시무시할 정도의 능력이었다. 오죽했으면 마왕군이 그녀에게 '사기 유닛'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겠는가. "신과의 교감이라는 것은 중대한 의미를 가지지. 자네 아내가 그런 중대한 사실을 스스로 발설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을거야. 그렇다면..." "그렇다면...?" "질서 자체에 틈이 생겨서 교감이 새어나갔을거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주신의 절대령으로 관장하는 질서에 빈틈이!? 설사 마왕이라고 할 지라도 질서에 손톱만큼도 흠집을 내는 건 불가능하다고요!" "그런 일이 역사상 딱 한 번 있었지." "설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럴 거야. 진실은 그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알게 되겠지. 물론 태어나자마자 강력한 능력을 쓸 순 없겠지만... 방심할 순 없어. 최악의 경우에는..." "사양하겠습니다." 슬레이트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챈 아버지는 굳은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저와 그녀의 소중한 아이를 빛을 보자마자 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줄 알았네. 자네가 아이를 죽일 거라고 대답할 확률은 0%였거든. 오래간만에 보는 확실한 확률이군. 하지만 만약 내가 이 사실을 다른 12용사들에게 알리면 어떻하겠는가, 그 아이를 죽이려는 자들도 분명히 있을텐데?" "그럴 때는, 목숨을 걸고 막겠습니다." "껄껄껄껄. 재미있군. 그래. 우선은 지켜보는 것이 좋겠지. 아직은 확률조차 결정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아이에 대한 것은 안개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니까... 하지만 명심해 두게. 그 아이는 결국 나중에 대륙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지도 몰라." 과거 주신 다르군트에게 저항했던 마신 베링거의 환생체. 그것이 슬레이트가 예언한 카이엔 형의 정체였다. 아마도 아빠 엄마는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낳은,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예쁜 아이가 나중에 세계를 멸망시킬지도 모른다니... 하지만 엄마 아빠는 카이엔 형을 지키기로 결심했고 결코 카이엔이 세계를 멸망시키게 놔두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동안 카이엔 형은 성격이 너무 나빴다. 만약에 각종 마법무구로 힘이 봉인되지 않았다면 대체 무슨 행패를 더 저질렀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다행히 기억을 잃은 이후에는 꽤 얌전해져서 우리 가족 모두 안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실종되다니... 카이엔 형이 얌전해졌다고 지나치게 놀려댄 것이 실수였을려나?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이 없는 걸... -------------------------------------------------------------------------- 기운 차렸답니다. 연참신공! 훗. 우리의 쥔공 카이엔이 고작 마왕일리가 없잖습니까? 에헤헷∼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카이엔, 혼돈 속으로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49화 : 카이엔, 혼돈 속으로(1) ------------------------------------------------------------------------- 알 수 없는 것들이 잔뜩 떠다니는 무의식의 세계,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나비가 나 자신이 되는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의 세계에서 나는 투명한 실들에 휘감겨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것도 천조각 한 점 없는 나신의 모습으로. 여... 여긴 어디지? 난 왜 이런 모습으로 있는 걸까? "카이야∼♡" 몽롱한 정신 속에서 세이렌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돌려 보니 세이렌 누나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서서 선정적인 자태를 마음껏 뽐내며 색정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웁! 뭐야? 왜 세이렌 누나가 저런 모습으로!? 아니 원래부터 저런 사람이었을지도 몰라 누나라면 말야. 당황한 나는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흔들거리는 부드러운 곡선에 고정된 눈은 감으려 해도 감을 수 없었고 혀가 딱딱하게 굳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으으윽! 이건... 이렇게 유혹을 하면 난 견딜 수 없다고! "우후훗♡" 꼼짝도 하지 못하는 나의 벌거벗은 육신 위로 역시 태초의 자태를 그대로 간직한 세이렌 누나의 육감적인 몸이 겹쳐졌다. 그리고 여태껏 전혀 움직이지 않는 내 몸은 천천히 상하반동을 시작했다. "아앙♡" "허억... 허억...." "좋아해... 카이..." "허억..... 끄으윽! 끄아아악!" 몸에서 힘이 쭈욱 빠져나가면서 한동안 전신의 신경을 격렬하게 흥분시키던 세이렌 누나의 나신이 눈앞에서 천천히 빛이 되어 흩어져 갔다. 하지만 이 괴현상에 대해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내 눈앞에는 곧바로 아이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 역시 세이렌 누나와 마찬가지로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우웁! 근데 왜 이래? 왜 이러는 거야? 암만 눈 씻고 봐도 남자를 자극시킬 만한 요소라고는 귀여운 얼굴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열 살 짜리 꼬마아이인 아이렌의 알몸을 보고 왜 다시 심장 박동수가 올라가는 거야? 난 로리콘이 아니라고오! "카이 오빠...♡ 나 오빨 정말 좋아해!"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 몸의 신경은 외부의 격렬한 자극만을 받아들이기만 할 뿐 내 두뇌에서 나가는 의지를 전혀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세이 누나가 난 너무 어려서 그런 짓을 하면 건강에 나쁘댔으니까 카이 오빠에겐 다른 서비스를 해 줄께." 그렇게 말하면서 아이렌은 내 뱃가죽 밑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어... 어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서비스는 무슨 서비스냐고오! 하지만 하반신에 느껴지는 뜨거운 자극은 정신의 의지에 따르지 않는 육신의 본능을 완전히 농락하고 있었다. "으으으윽.....!" 재차 절정이 찾아오면서 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아이렌 역시 세이렌 누나처럼 빛이 되어 사라졌다. 후아... 후아... 이제 그만... 충분하니까, 욕구불만의 해소라면 이미 충분하니까 꿈이라면 제발 좀 깨 줘. "상우야∼ 아니 지금은 대륙 제일의 미소년 카이지? 우후훗♡ 나는 지금까지 이런 상황을 원하고 있었어. 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번에는 아시에인가... 그녀 역시 움직이지 못하는 내 몸을 마음껏 농락하고 사라졌다. 그 이후로도 계속 여자들이 나와 내 기력을 극한까지 끌어내려는 듯 나를 괴롭혔다. 마나티, 치즈, 피요르, 그리고 심지어 미렌과 여장버전의 나 자신인 카렌까지. "제발... 그만해줘... 이젠..." 굳어있던 혀가 갑자기 풀리면서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던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그렇습니까. 카이엔 씨를 위해 기껏 준비해 나왔는데... 유감이군요." 엥? 이 목소리는... 시... 시... 시르젤!? 나는 깜짝 놀라 시르젤을 바라보았다. 내가 익히 아는 시르젤의 목소리와 부드럽고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 하지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은 남자의 것이 아닌 여자의 것이었다. "어... 어떻게 된..." "카이엔 씨를 위해서 전 이 길을 선택했습니다. 카이엔 씨를 아프게 하면 안되니까요." 빙긋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시르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말이지... "그럼 갑니다." 자... 잠깐 기다려! 나는 그렇게 외치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혀가 다시 굳어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암만 그래도 이건 너무 당황스럽잖아아! 그렇잖아도 극도로 지쳐서 죽을 것만 같은데 날 진짜 죽일거야? 시르제엘! "시르제엘!" 벌떡 나는 그제서야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났다. 허억. 허억. 아하하하핫. 그래. 지금까지의 일은 역시 꿈이었어. 암만 생각해도 현실감이... 아주 안 보이는 건 아니지만 어쨌건 그런 일이 생길 리 없잖아? 그런데 그런 꿈은 보통 한 두번 꾸면 잠에서 깨는 게 보통인데 오늘은 왜 이렇게 깨어나지 못하고 이렇게 몸을 힘들게 만들었을까? 일어나도 잠을 제대로 잔 것 같지 않잖아!? "어라, 생각보다 빨리 일어나셨네요. 카이엔 님? 아쉬워라..." 어? 이건 마나티의 목소리다. 그녀는 불투명한 붉은빛을 띠는 액체가 담긴 큰 병을 들고 있었다. 그 병에는 호스가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호스는... 맙소사! 내 사타구니 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게다가 난 지금 발가벗고 있잖아! 우아아악! 하지만 언제 그랬는지 내 사지에 줄이 묶여 있어서 나는 누운 상태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무슨 짓이야, 이건!" "그야 열심히 카이엔님의 중요한 정액(淨液)을 뽑아내는 중이죠. 색깔이 붉은 건 보존액 때문에 그렇답니다. 하여튼 이 작업을 위해 카이엔 님에게 비싼 낙몽제(樂夢劑)까지 주사했어요. 아마 좋은 꿈 꾸셨겠지요? 오호홋. 그나저나 마지막에 시르제엘! 이라니... 역시!" "역시는 뭐가 역시얏! 마음대로 생각하지 마!" "화를 내는 거 보니 역시 꿈에 나온 모양이군요. 오호호." "우잇... 그나저나 왜 이런...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나는 꿈에서 깨어나면서 외친 시르젤 이라는 단어와 마나티에게 알몸을 그대로 보이고 있는 창피함 때문에 얼굴을 완전히 붉힌 채 약간 말을 더둠으면서 말했다. 기계로 정액을 뽑혀지는 꼴이라니, 내가 무슨 젖소냐아! 우유 짜듯이 그걸 짜내게! "당연하잖아요? 대륙 절대미소년 카이엔 님은 지금부터 곧 여자가 되는 슬픈 운명을 맞이하게 되실 몸. 그렇게 되면 이건 구하고 싶어도 절대 구할 수 없을 텐데 구할 수 있을 때 가능한 많이 뽑아놔야 하지 않겠어요? 레어 아이템이라고요! 레어 아이템!" "그... 그런 걸 어디에 쓴단 말이야!?" "마시려고요. 건강식이잖아요." "....." "오호호호호. 그렇게 입을 쩍 벌리지 않아도 되요. 농담이니까." ...어째 니 말은 농담같이 안 들린단 말이닷! "음... 그러고 보니 어디에 쓸까요? 이걸 대륙 여자들에게 팔면 마도왕국에서 파는 흑력환 저리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떼돈을 벌 수 있겠지요? 그러면 카이엔 님은 수백 수천의 자손을 가질 수 있을 테고 여자들도 만족할 테고 저는 돈을 벌고 모든 일이 해피엔딩으로 끝나겠네요." "뭐가 해피엔딩이란 말야! 그런 짓 하지 마!" "에헤헤헷. 나도 카이엔님의 아이나 키워볼까나?" 하아. 그래. 내가 마나티를 설득하려 든다는 것 자체가 바보같은 짓이지. 내가 반쯤 자포자기 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면서 셰더가 들어왔다. "흐음. 깨어났군. 그나저나 생각보다 꽤 많이 모았는걸? 카이엔 녀석. 의외로 정력남인 모양이지?" 셰더가 빙긋 미소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 미형 얼굴에 그런 엉큼한 웃음 짓지 말란 말야! 보기 괴롭다구! 하지만 내 몸에서 나온 분비물을 가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음지으며 이야기하는 둘 사이에서 나는 한없는 창피함을 느껴야만 했다. 몸만 움직일 수 있으면 쥐구멍이라도 파고들어갈텐데... "그럼요. 게다가 남녀를 가리지 않는 것 같다니까요? 방금 전에도..." "말하지 마아!" 내가 거의 악을 쓰다시피하면서 큰 소리로 말하자 셰더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씨익 웃음지으며 말했다. "왜 그러나? 혹시 꿈에 내가 나왔나?" "그럴 리가 있겠냐!" 으흑흑. 그래. 내가 이 자식들한테 뭔가를 바란 게 잘못이었어. 저 두 사람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사람들 중에 최악의 변태 콤비라는 걸 잊었다니. "적당히 모은 것 같으니까 치워. 그 정도면 충분하잖아?" "네에. 그나저나 정말 다시 재고해주시면 안될까요? 카이엔 님을 여자로 만드는 건 너무 아까운데..." "절대 안 돼. 그거 먹고 떨어지기로 했잖아?" "피이." 그러면서 마나티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몸에서 호스를 뽑아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음흉한 얼굴로 내 몸 전체를 흩어보는 마나티를 보는 기분이란... 최악이다. 병원 간호사한테 농락당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대체 이게 뭐야? 그나저나 마나티! 날 절대 여자로 만들면 안된다고 그렇게 떼를 썼으면서 이제와서 허락하다니... 고작 그런 거에 날 팔아 넘겼다는 거야앗!? "그럼 곧 시술을 시작하도록 하지." "자... 잠깐! 너무 빠르잖아!" "과거를 돌아볼 시간은 이미 줬다고 생각하는데? 크크크큿. 오래간만에 해 보는 즐거운 시술이군. 기대되는걸?" "와아아아악!" 아무리 아시에를 살리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 순간만은 조금 후회되었다. -------------------------------------------------------------------------- 만약 2부라는 걸 쓴다면, 무협세계로 날아가볼까요? 동인 무협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여는 것도.....(어이...) 갑자기 연애소설 줄거리가 생각나서 쓰고 싶어진다는... 흐아. (함 습작란에다 써봐?)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카이엔, 혼돈 속으로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50화 : 카이엔, 혼돈 속으로(2) ------------------------------------------------------------------------- "자... 잠깐 기다리라고, 잠깐만!" "안 아플 테니까 걱정하지마. 전신마취에서 깨어나면 그때는 모든 일이 끝나 있을 테니." "젠장! 그게 아냐! 중요한 이야기라고! 진짜야!" 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자꾸 외치자 셰더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나를 노려보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중요한 이야기 아니면 바로 잠재워 버린다. 너." 휴우. 우선 위기를 넘겼다. 이제야 막 생각이 난 거지만, 어쩌면 수술같은 거 안 하고도 나는 여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 그런 생각을 했냐고 하면, 내 몸 속에는 내 생일마다 나타나는 미렌과 그녀의 육체가 있다. 그녀는 태내에서 내 육신에 흡수되었다고 했지. 별로 인정하기는 싫지만 셰더 정도의 마법사라면 혹시나 그녀를 나와 분리시킬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필사적으로 셰더에게 미렌에 관해 설명했다. "흐음... 그렇다는 말이지?" "그래. 그러니까 잘 하면 굳이 이렇게 번거롭게 수술 같은 건 하지 않아도..." "확실히 흔한 케이스긴 해. 집중 연구 대상이지... 하지만...!" "하지만?" "난 하루빨리 너를 안고 싶은걸." "커헉!" 암흑의 오라가 잔뜩 느껴지는 셰더의 말투에 묶인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무... 물론 그거야 약속했던 거니까 어쩔 수 없지만 이렇게 사람을 묶어놓고 무방비로 벗겨놓은 상태에서 그런 말을 하면 어쩐지 고개를 들 수 없단 말야. 하여간 이 변태자식 같으니라고! "무슨 소리에요, 주인님? 이런 기회를 놓친다는 게 말이 되는 거에요?" "기회라니, 무슨 뜻이냐, 마나티?" "이거 잘하면 남자로서의 카이엔 님과 여자로서의 카이엔 님, 둘 다 가질 수 있다는 뜻이잖아요. 즉 일석이조! 어느 쪽이건 원하는 대로 농락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요. 왜 그런 기회를 버리고 한 길만 택하겠다는 거에요?" "어이. 마나티. 다시 말했지만 나는 남자를 상대하는 취미는 절.대. 없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그런 어중간한 형태로 만들고 싶진 않아. 내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 절대미소녀라고!" 막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다시 들어온 마나티의 태클에 셰더가 약간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나티의 말도 안 되는 엉터리같은 이야기를 적극 지지하고 있었다. 물론 셰더랑 약속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른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알아보고 싶었다. "주인님도 이제 그만 이해해 주면 좋을텐데..." "난 별로 이해하고 싶지 않아." 아무리 마나티의 끗발이 세다고 해도 결국 주종관계는 주종관계. 이런 중요한 사항에서는 결국 셰더의 의견이 관철될 수밖에 없나 보다. 그래도 나는 필사적으로 어떻게 시간을 끄는 노력을 해보기 위해 말을 꺼냈다. "뭐... 뭘 이해한다는 거야?"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카이엔 님. 인간에게 있어 남자나 여자라는 육신이라는 건 겉껍데기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 그건 그렇지." "그런데 그런 겉껍데기만을 가지고 사랑이라는 것을 결정한다는 것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사랑에 있어 성별따위는 의미없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세요?" 물론 그런 생각. 엄청 많이 하기는 했다. 그런 생각이 없다면 애초부터 남자인 내가, 야오이 팬픽같은 걸 쓸 수 있었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런 취향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이 동성애자, 즉 호모와 동일시되는 건 아니다. 단지 문화적인 어떤 코드로서 좋아하는 것 뿐, 나 자신에게 적용하자면 난 엄밀하게 이성애자란 말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사랑의 상대는 남자 여자의 조합이 아니라 오로지 올바른 공과 수의 조합이 이루어져야 편안한 가정과 국가의 안녕, 그리고 세계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말이에요. 그렇지 않고 단지 육체적인 성별이라는 개념에 얽매여 무리하게 관계를 맺는다면, 결국에는 양쪽 모두가 불행해지는걸요." 에엥?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위험한 생각인 걸. 이 넓은 세상의 절반은 여자,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남자다. 굳이 동성에서 찾지 않더라도, 자신과 짝을 이룰 수 있는 이성은 무궁무진하다. 그 이상의 영역은 단순히 보고 즐기는 데서 끝내는 것이 올바른 동인의 자세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카이엔. 설마 마나티의 이상한 궤변에 말려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너도 충분히 알 텐데? 남자로서 여자에게 느끼는 강렬한 육욕(肉慾)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녀의 이야기는 단지 허황된 망상일 뿐이야. 생명이 태어날 수 없는 결합은, 그 자체가 신의 섭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래도 굳이 섭리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이 몸에게 성전환 수술을 받는 것이 그나마 합법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지." 글쎄... 둘 다 변태들이라는 점에는 변함없지만, 지금은 어쩐지 셰더의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의 호기심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분명 마나티가 말하는 것과 비슷한 생각에 빠졌었다. 사랑한다면, 성별이고, 나이고, 환경이고 뭐든지 관계없지 않겠냐는 그런 이상론 말이다. 겉으로는 계속 부정하면서도 시르젤에게 끌리는 마음. 어쩌면 그렇게 될 수 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셰더의 말대로 나는 남자로 있는 이상은 절대로 여성을 원하는 몸의 욕구를 거부할 수 없다. 그동안 참는다고 참아 왔지만, 이제는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비록 취했다고는 하지만, 내가 먼저 마나티 쪽으로 다가갔지 않는가. 내가 그녀를 절대 사랑하는 것이 아닌데도. 아까 전까지 꾸던 꿈들도 그렇고... 그래서 나는 셰더와의 계약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여자가 되면, 그런 딜레마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하여간 좀 더 생각해보자고요, 주인님, 네? 만약 그렇게 해주신다면..." "해준다면?" "XXXX에 △△△, 그리고 ○○○○○까지 해 드릴께요. 네에?" "으음... 그거 땡기는걸... 끄응." 허억.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마나티!? 네가 아무리 평범한 여자애와는 엄청 거리가 먼 변녀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암만 그렇다고 해도 저 정도로 저속하고 변태의 극한을 달리는 단어들을 태연하게 입으로 내뱉다니! "조금 미뤄도 상관없잖아요? 언령의 약속은 유효하니까. 카이엔 님을 여자로 만들지 말라는 것도 아니잖아요? 단지 그 미렌이라는 이중인격과 이중육체에 대해 좀더 조사해 보자는 거죠." "...정말 해줄거야?" "오늘 당장에라도." "...좋아." 엄청 심사숙고 하면서 말하는 것 같았지만 셰더의 얼굴에는 아주아주 능글맞고 변태스런 함박웃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으아아악! 아무리 미중년으로 변한다고 해도 역시 오리지날 변태성까지 감출 수 없나보다. 저런 얼굴로 저런 최악의 웃음이라니. 그러면서 마나티는 날 바라보면서 묻는다." "카이엔 님도 같이 하실래요? 3p도 언제든지 환영..." "시... 싫어! 절대 안 할거야!" 묶여서 꼼짝도 할 수 없는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면서 외쳤다. 그러자 마나티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면서 쿡쿡거리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저건... 절대로 거부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눈빛이다. 허억! 셰더같은 변태자식은 좋아할 지 몰라도 나는 XXXX에 △△△, 그리고 ○○○○○까진 절대 싫단 말이다아!" "그럴 줄 알았어요. 역시 앙탈수∼ 자아. 저와 같이 극락의 세계로..." "마나티, 거기에 왜 카이엔을 끌어드렷!" 마나티의 눈빛이 번뜩이고 있을 때 셰더가 그녀를 제지했다. 후아. 오늘 여러 번 죽다 살아난다. 셰더가 날 위기로 몰아갈 때는 마나티가 구해주고, 마나티가 날 몰아붙일 때는 셰더가 구해주는 꼴이니 말이야. "에이. 주인님도 참. 한번 해보면 재미있을 거라고요. 얼마나 즐거운지 아세요? 반항하는 미소년을 괴롭히는 것이.... 아 참! 그러고 보니 시즈도 같이 불러서 놀까?" "절대로 안 돼! 남자 하나에 여자 셋이면 몰라도 여자 하나에 남자 셋이라니 끔찍하단 말이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라고요. 도전 정신을 가지세요, 주인님!" "내가 싫다면 싫은 거야!" "치이..." 툴툴거리는 마나티. 나도 예전의 경력이 만만치 않은지라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는 꽤 익숙하다고 생각하지만 마나티가 생각하는 수준은 범인(凡人)은 물론이고 동인(同人)을 넘어 성인(聖人)의 단계에 와 있는 것 같다. 아무리 따라가려고 노력해봐도,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이잇... 그나저나 난 언제 풀어줄 거야아!!! 어라?" 계속 나를 발가벗은 채 묶어두고 저희들끼리만 이야기 하고 있자 난 순간 화가 치밀어올라서는 외쳤다. 그런데 내가 소리를 지르며 마구 몸을 뒤틀자 묶어놓은 줄이 툭 하고 끊어지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서 내 손을 보니 셰더가 내 손가락에 끼워 둔 검은 고리가 금이 가 끊어져 있었다. "여... 역부족이었나, 봉인이!" 예상하지 못한 사태인 듯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는 셰더. 그래. 너 딱 잘 걸렸다. 지금까지 내가 네놈의 변태짓에 당한 복수를 해 주마! 우후후훗. 봉인이 풀린 나는 막을 수 없을 걸? 나는 소드 마스터도 어렵지 않게 이겼어. 네놈이 대단한 흑마법사라고는 하지만, 지금의 나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고! 나는 입가에 미소를 흘리며 셰더 쪽으로 다가갔다. "자... 잠깐, 우리 둘은 언령의 약속을 했잖나, 카이엔, 응?" "거기에 상대방을 후드려패지 말라는 조항은 없었지, 아마? 걱정하지 마. 아시에를 살려내기 전에는 죽이지는 않을 테니." "오... 오지 마! 더 이상 오면 흑마법으로 널 공격할 테다!" "그딴 거 안 무서워!" 무섭지 않다. 근거는 없지만 왜인지 흑마법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봉인이라는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힘이 개방되었을 때에는 그 누구라도 무섭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 그 자신감은 힘을 잃으면 기어들어가게 되지만 말야... "카이엔 님, 채찍이랑 가죽장갑, 촛농 같은 거 안 필요하세요?" "넌 누구 편이야, 마나티이이이이!" 셰더의 절규가 온 방에 울려퍼졌다. -------------------------------------------------------------------------- ;ㅁ; 마나티... 저로서는 도저히 통제불능의 캐릭터로 커버렸답니다. 마나티 땜에 내용진행의 밸런스까지 흔들리고 있다는... 내용의 재미와는 별개로, 지금의 전개상황이 제 성에는 안 차네요. (어딘가 자꾸 변태글들로 이야기를 땜빵하는 것 같아서) 연재간격이 벌어지더라도, 조금 쉬면서 차후 스토리를 교정하렵니다. 요즘 글 쓸 시간도 많지 않고 말이죠. 그리고..... 소설 다음까페라도 하나 만들어볼까요? (...그래봤자 몇명이나 가입하겠냐만)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카이엔, 혼돈 속으로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51화 : 카이엔, 혼돈 속으로(3) ------------------------------------------------------------------------- 비틀 어어? 내가 셰더에게 하늘의 정의를 바로세우는 천벌(天伐)을 내려주려고 할 때 갑자기 눈앞의 초점이 흔들리면서 셰더가 둘로 보였다 하나도 보였다 했다.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눈이 어떻게 된 건가 해서 눈을 조금씩 비볐지만 그래도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고도근시를 가진 사람처럼 온 세상이 흐릿하게만 보이면서 머리가 어질어질해왔다. 으윽... 왜 이러지? 마나티 녀석이 내 몸의 진기를 다 뽑아가서 그런 걸까? 아니면 병약미소년미소녀의 필수 조건 중 하나인 빈혈이? "크크크크."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면서 나는 일어났다. 그런데 이 웃음소리는 뭐야? 내 입으로 냈지만 내가 내고 싶어서 낸 게 아니라고! 이런... 어느 시점에서부터 내 몸이 내 통제를 따르지 않고 있었다. 이건 마치... 그래! 미렌이 내 몸을 조종했을 때와 똑같은 현상. 분명 움직이는 건 내 몸인데 내 의지가 아닌 다른 의지가 몸을 움직인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다른 점은, 그때는 내 의지로 다른 의지의 행동을 제지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잘 있었나, 셰더?" "...결국 깨어난 건가." 내게 얻어맞을까봐 잔뜩 쫄아있던 셰더가 몸을 추스리면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일어나자마자 곧장 뒤로 몸을 날려 전투태세를 취했고 마나티도 심상찮은 기운을 느낀 듯 셰더와 함께 뒤로 물러섰다. 어... 어라라? 왜 저러지? "아아. 그래. 힘들었지. 원래 예정대로라면 16살 생일날 충분한 힘이 모여서 귀찮은 봉인들을 다 깨부쉈어야 하는데... 네 녀석 때문에 늦어졌지. 감히 이 몸에게 이상한 인격을 집어넣어?" 뭐... 뭐야?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지금 내 몸을 장악하고 있는 이 인격은 대체 누구냔 말이야? 내가 깜짝 놀라고 있는 시점에서 미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정해. 상우 오빠. 지금 우리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건, 예전의 오리지날 카이엔 오빠야.] 예전의 진짜 카이엔? 싸가지에 제멋대로인 행동으로 만인의 지탄을 샀다던 그 녀석? 얼마나 정도가 심했으면 사람들이 기억을 잃은 나를 오히려 반길 정도였던 그 자식 말야? 하지만 이제 와서 갑자기 잠들어 있던 그 인격이 깨어나다니... 으윽.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구! "흑마법의 정점에 서 있는 그분도, 마신(魔神)의 부활만은 원하지 않으시니까." "은혜를 모르는 것들 같으니, 그 마신의 찌꺼기들로부터 마력을 얻어 쓰는 쓰레기들 주제에!" "마나티, 준비해라!" "네!" "무슨 짓을!" 진짜 카이엔은 셰더의 행동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듯 셰더를 처단하기 위해 주먹을 꽉 쥐고 빠른 속도로 앞으로 돌진해나갔다. 빠르다. 며칠 전에 내가 소드 마스터 보란치를 처단했을 때의 그 스피드. 내가 전개했을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막상 중립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니 아찔할 정도의 속도였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손끝에 닿을 것 같은 카이엔의 주먹은 검을 들고 끼어들어온 누군가에게 막혔다. 검은 로브로 온몸을 뒤집어쓰고 있는 이 녀석은... 래더! "내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하지만 카이엔은 공격이 막히자마자 곧바로 오른발 돌려차기로 래더의 측면을 강타했다. 세상에! 내 발을 황금색... 기가 에워싸고 있었다. 검기를 육체에 발현한 것이다. 래더는 그 강력한 위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벽으로 날아가 내다꽂혔다. 하지만 래더가 번 짧지만 소중한 시간을 셰더와 마나티는 놓치지 않았다. "트랜스진(Transgene) 변(變)!, 개(改)!" "인. 격. 교. 체.(人格交替)!" "크아아악!" 마나티와 셰더가 동시에 가해온 흑마법 공격. 둘 다 평소에는 쓰지 않는 지팡이까지 가져다 쓰면서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으며 혼신의 힘을 다해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으아아악! 그런데 문제는 이놈의 카이엔 녀석이 받는 고통은 그대로 나의 고통으로도 돌아온단 말이야! 으으윽... [이때야, 상우 오빠, 우리가 나설 차례야, 어서 우리가 저 몸을 빼앗아야 해!] 뭐라고? 하지만 어떻게 해야 몸을 되찾을 수 있는 거지? 그건 가르쳐 줘야 할 거 아냐? [의지야. 강력한 의지. 할 수 있는 한 모든 힘을 써서 몸을 찾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라고!] 미렌의 말에 따라 나는 필사적으로 정신력을 소모해서 저 몸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내 의지를 가득 채웠다. 어찌되었건 한국이라는 곳에는 내가 더 이상 돌아갈 곳이 남아있지 않을테니까. 내가 있을 곳은 여기 외에는 없어! 반드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곳에서 저 몸을 가지고 살아갈 간다!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받기만 하는 네 녀석은 저 구석에 찌그러져 박혀 있으라고! [으으으... 역시 아직 충분한 힘이...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거야... 이젠...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크크크.] 성공한 걸까? 조금 자신 없이 의식의 심층에서 중얼거리는 진짜 카이엔.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나는 계속해서 정신을 집중시켰다. 몸을 장악하고 있던 카이엔의 의지가 무뎌진 것과 미렌 역시 나처럼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름대로 집중한다고 집중했는데도 내 의지는 미렌의 강렬한 의지에 비하면 미약해서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그야. 태어나서 한 번도 제대로 된 몸을 가져본 적이 없는 미렌의 필사적인 의지와 지금까지 제대로 된 고생이란 고생을 거의 해 본적이 없이 편한 생활을 해 온 나하고는 의지력이라던지 정신력의 차이가 클 수밖에 없겠지만... "후아..." 힘이 쭉 빠졌다. 그리고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는 내 몸을 보면서 간신히 나는 안도했다. 휴우. 겨우 원래대로 돌아왔구나. 다행이다. 하지만 그 안도감도 잠시, 갑자기 다른 쪽 손이 내 멋대로 위아래로 움직이는 게 아닌가? 그리고 내 입에서 예전에 생일 때 들어보았던 미렌의 목소리가 성대를 울렸다. "어? 생일도 아닌데... 내가..." "미... 미렌?" 두 가지의 이질적인 목소리가 시차를 두고 한 입에서 겹쳐져 나왔다. 그렇지만 미렌의 목소리건 내 목소리건 둘 다 여자 목소리라는 점에는 변함없었다. 나는 아까부터 여전히 벗은 채로인 내 몸을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았다. "끼야아아악!" 여... 역시 예상했던 대로 이 몸은 미렌의... 당황하는 내 귓가로 마나티의 울상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떻게 해요, 주인님! 카이엔 님이 여자로 변해버렸어요!" "당황하지 마라. 지금부터 모든 것을 설명할 테니. 하지만 지금은 옷부터 먼저 입혀야겠군. 그리고 카이엔. 열 손가락 전부에 이걸 끼도록." 셰더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음흉한 눈길은 이미 내 전신을 한 바퀴 돌아본 후였다. 저 변태녀석의 취향을 만족시켜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최대한 웅크려 몸을 가렸다. 이 점에 있어서는 미렌 역시 나와 생각이 일치하는 듯했다. 셰더녀석이 주머니에서 꺼내 내 앞에 던진 물건은 아까 부셔졌었던 검은 락지와 같은 종류의 것으로 보이는 검은 가락지 열 개였다. "...내 힘을 또 봉인하려고?" "그렇지 않으면 또 '그 녀석'이 네 몸을 차지하려고 올라올 테다. 그걸 바란다면 안 껴도 상관없어." "알았으니까 먼저 걸칠 것부터 줘." "알았다." 자신의 망토를 벗어 나에게 주는 셰더의 눈빛 저편이 야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보여 심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왕에 미중년 얼굴로 변했으면 좀 점잖으면서도 멋지게 굴면 어디가 덧나냐? 하긴 호박에다가 수박처럼 줄 긋어 놓는다고 해서 그 내용물이 수박으로 변하지는 않겠지만... "따라와.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마나티 너한테도." "카이엔 님을 남자로 돌려놓을 수 있는 거죠. 네? 네?" "그건 나도 모르니까 조용히 햇!" 무언가가 급작스럽게 돌아가는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지엽적이고 사소한 거에만 온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마나티를 바보같다고 생각해야할지 놀랍다고 생각해야 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원래 저런 애니까 뭐... 할수 없는 노릇일까? 어찌되었건 간에, 우선은 셰더의 말을 들어보는 수밖에 없겠지. 셰더는 내 안의 진짜 카이엔을 익히 잘 알고 있는 듯 했고 그녀석과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니까. 휴우. 이전에 생각했던 그대로다. 진실을 알게 되면 별로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 확실한 데도 어쩔 수 없이 나는 점차 진실에 접근해가고 있다. 나는 단지 나에 관한 그 진실들이 생각했던 만큼 충격적인 사실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나는 셰더가 말한대로 열 개의 가락지를 각각의 손가락에 끼워넣고 망토로 온 몸을 뒤집어 쓴 채 일어섰다. 진회색 톤의 두꺼운 망토는 다시 힘을 봉인한 내게 조금 무거운 데다가 자그마한 몸 전체를 완전히 가리고도 바닥에 약간 끌릴 정도로 컸다. 그리고 어깨도 비교할 수 없이 넓었고. 뒤에서 바라본 셰더의 몸이 생각보다 커다랗게 느껴졌다. 망토 아래 가려져 있어 지금까지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그의 육체가... 아니. 그의 육체가 크기보다는 내 몸이 너무 작은 거겠지. 하아... -------------------------------------------------------------------------- 다음 편에는 조금 밝혀질 게 많을 듯 하네요. 여전히 꼬이는 스토리의 압박...(과 버그들...-ㅅ-) To. 은빛마녀님 // 저도 SM세계같은 건 잘 몰라요. 모르니까 대충 XXXX같은 걸로 처리하고 때운다는...(쿨럭) 그리고 소개해주신 그 까페, 왠지 범접할 수 없는 오라가...(삐질;;) 갑자기 까페보다는 홈피를 만드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아냐아냐 그보다는 블로그(blog)쪽이 좋을지도..... 아악! 다 귀찮아! 귀차니즘!(이런 식으로 결국 때려치곤 한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카이엔, 혼돈 속으로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52화 : 카이엔, 혼돈 속으로(4) ------------------------------------------------------------------------- "흐음... 어디부터 시작해야 되려나." 지금 나는 응접실 소파에 셰더, 마나티와 함께 앉아 있다. 셰더는 내 반대편에서 아까 내게 구해달라고 했었던 누나에게 차를 가져오게 했고, 마나티는 내 옆에서 자꾸 내 몸을 더듬으면서 '믿을 수 없어. 카이엔 님이 여자가 되다니. 흑흑.' 이런 종류의 대사만 자꾸 중얼대고 있었다. 그... 그만 좀 더듬어! 아무리 같은 여자(?)끼리라지만 창피하잖아! 게다가 그 모습을 자꾸 므흣하게 바라보는 셰더의 시선도 신경쓰이고 말이야. "아까... 나타났던 '그 녀석'대해 잘 아는 것 같던데? 뭐 마신 어쩌고 한 것도 같고..." "그렇지. 그 녀석 마신이야." "아, 마신이구나... 가 아니라 뭐얏! 마신이라니... 그렇다면 마왕보다 더 쎈 놈이라는 거야?" 내가 깜짝 놀라 외치자 셰더가 날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더니 불쌍한 중생에게 지도를 내리겠다는 아니꼬운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훗. 무식한 거 티 그만 내라. 마신은 마왕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지. 이 세상의 모든 마왕은 마신의 육체 조각의 일부에 불과해. 무엇보다도 유일하게 주신 다르군트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존재다. 그가 정한 세상의 절대규율을 파괴할 수 있는 존재..." "그런 대단한 녀석을 니가 어떻게 아는데?" 이번에는 내가 셰더를 아니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맞잖아? 그렇게 대단한 존재하면 어떻게 저렇게 허접한(뭐 허접한 것까진 아니지만...) 변태 흑마법사랑 잘 아는 사이일 수 있는 거냐구? "네녀석이 그 몸에 빙의되기 전에 몇 마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지. 날 얕보지 않는 게 좋아. 어느 놈이 내가 변태라는 헛소문을 퍼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너나 다른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능력있는 흑마법사니까. 대륙 7대 흑마법사의 칭호가 괜히 있는 줄 아나? 엣헴." 내가 셰더를 실제보다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은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변태는 맞잖아? 게다가 그 변태성이 당신 평가를 그 정도로 깎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또 몰라? 어쨌건 셰더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깊숙히 개입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실들을 말이다. 셰더는 내가 카이엔의 몸에 빙의한 영혼이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 김상우를 이 몸에다 빙의시킨 장본인이 셰더라고 한다. 대외적으로는 셰더가 내게 이전에 걸었던 마법이 기억상실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한 육체에 다른 영혼을 겹쳐쓰는 마법이였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내가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인간이라는 사실조차 알고 있었다. 우욱. 그걸 알면서도 지금까지 모른 척 하다니. 내가 완전히 놀아난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미렌의 존재에 대해서는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확실히 셰더는 내가 미렌의 존재를 이야기하니까 좀 놀랐었지. "흐음... 아참. 미이. 너... 알고 있었어? 그가 마신이라는 거?" "아니. 몰랐어. 카이도 알다시피 우리 세 사람간에는 기억이나 의식의 공유는 불가능하니까..." "묻고 싶은 것이 있네. 미렌 양." 셰더가 날 보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우쒸! 저자식, 왜 나한테는 띠껍게 굴면서 미렌한테는 살갑게 굴어? 사람 차별하냐, 응? 서로 같은 몸에 들어있는 의식체인데 뭐가 불만이야? "뭐죠?" "미렌 양은 그럼 태어나서부터 16번 밖에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는 건데 어째서 그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거지? 마신 녀석이나 카이엔의 기억과 체험을 공유할 수 없는데도..." "저도, 카이... 즉 상우 오빠처럼 다른 사람에게서 이 몸으로 옮겨왔으니까요. 분명 의식은 꽃답고 순진무구한 소녀인데 갑자기 갓난아기의 몸에 빌붙어 있어서 당황했다니까요? 곧 다시 잠들면서 1년마다 나오게 되었지만..." "그런가..." 미렌과 셰더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더니 뭔가 알겠다는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나도 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라고! 왜 너네들끼리만 이야기하는 거야? 마나티도 나와 같은 생각인 듯 투덜대면서 항의하고 나섰다. "에에? 카이엔 님이 상우 오빠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주인님?" "거 지금부터 설명하려던 참이니까 나서지 말고 좀 가만히 있어." 그리고 셰더는 긴 설명을 이어갔다. 이야기는 셰더의 스승, 이사크가 마왕 디크로드를 부활시킨 때로 거슬러올라간다. 아시에를 제물로 마파왕 디크로드를 부활시킨 이사크는, 사천마의 일인이 되어 마왕군을 총지휘, 인간의 군대를 괴멸시키면서 대륙을 집어삼키기 위한 암흑의 행진을 계속해 갔다. 하지만 시나 룬비너스의 제안으로 결성된 대륙의 뛰어난 영웅 108명이 모여 마왕군을 지속적으로 소환해 오기에 바빠 힘이 약해져 있던 디크로드를 쳐부수는 데 성공했다. 마왕군을 지휘해야 할 마왕이 다시 봉인되었고, 마왕군들은 혼란에 빠졌다. 비록 디크로드로부터 권능을 얻었다지만 본래 고위 마족도 아닌 이사크는 마왕 봉인 이후 막대한 수의 마왕군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결국 뿔뿔히 흩어진 마왕군은 몇 년간 각지에 출몰하면서 사람들을 괴롭혔지만 결국에는 대부분 격퇴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살아남은 이사크는 포기하지 않았다. 봉인석만 모두 찾으면 다시 아시에를 제물로 해서 마왕을 부활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12용사들이 그것을 용인할 리 없었다. 그들은 봉인석을 수십 개의 조각으로 쪼개 여기저기에 분산시켜서 엄중한 보호를 가하게 했다. 이것으로 모든 상황은 끝난 듯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봉인된 마왕의 흔적을 쫓아가던 이사크는 결국 디크로드가 마지막에 남긴 유산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주신의 절대령으로 수호되는 세계의 질서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는 것을. 그 균열은 너무나 미약해서 우연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사크가 찾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비록 지금은 아닐지라도, 신화 시대 이후로 셀 수 없이 오랜 세월동안 잠들어 있던, 마신 베링거가 드디어 깨어날 때가 왔다는 것을. "미쳤어, 스승님은! 마왕 부활까지는 봐주려고 해도 마신을 부활시키려 들다니!" "미치긴 누가 미쳤다는 게냐. 내가 하는 일은 오로지 이 썩어빠진 세상을 올바르게 정화하려는 것 뿐." "웃기지 마, 이 로리콘 할아범! 당신같은 변태가 있기에 세상이 썩는 거야!" 휘익 "우웁! 아니 이 녀석이! 내 지팡이를 피해?" "헤헹. 이제 나도 많이 컸다고!" 당시 청년이었던 셰더는 마신 베링거의 일로 결국 스승 이사크와 결별하고 마도 왕국의 제2인자인 디트리히와 손을 잡았다고 한다. 디트리히를 비롯한 흑마도 왕국의 실권자들 다수는 마신 베링거의 부활을 반기지 않았기 때문에 셰더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그리고 셰더가 대륙 7대 흑마법사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이미 고령으로 마법 능력이 하락기를 달리고 있던 스승 이사크와 치열한 격전 끝에 승리한 후에, 그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셰더는 독자적으로 마신 베링거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여 결국에는 나, 카이엔 브리타뉴의 육체에 마신 베링거의 환생체가 깃들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마신의 환생체라... 나는 아니지만 지금 내 안에 잠든 그 녀석이 말이지? 아하하. 그래서 가족들이 내게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던 걸까? 지금 가족들의 행동을 생각해보면 그들은 내가 다른 세계에서 빙의해 왔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단지 그 마신의 환생체가 기억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다행인 걸까나? 하지만 내 가족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걸 알면서도 나를 적대적인 사람들로부터 지키고, 또한 보호했다. 12용사의 정점에 서 있는 우리 엄마와 아빠의 수호 아래 있는 나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 시르팡은 그러고 보면 성공한 케이스랄까? 셰더도 왕궁에 갔을 때는 성공했고 말야. 뭐야, 이거 알고보니 허점 투성이잖아!? 다행히 그들이 내 목숨을 노릴 생각은 없었다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나? 마나티 혼자만 이 이야기에서 왕따가 되어 자꾸 날 귀찮게 굴며 징징대는 가운데 셰더와 나, 미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론적으로 정리해 보자면 나는 셰더가 다른 세계에서 불러 이 카이엔의 몸에 빙의되었고, 미렌은 아무래도 카이엔과 태내에 같이 있던 쌍둥이의 몸에 빙의되었다가 카이엔의 몸에 흡수된 모양이었다. 목적은 아직 힘이 미약한 베링거를 어떻게든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한다. 물론 미렌을 여기에 집어넣은 사람이 누군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서도... 근데 나 같은 사람이 마신을 막는데 도움이 되긴 되려나?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왜 하필 내가 선택된 걸까? 그것도 다른 차원의 인간을 말이야. "에구구... 뭐가 이렇게 복잡하단 말야?" "나도 그래. 카이 오빠." 어떤 허접한 인간이 설정해 놓은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부족한 머리로는 당최 셰더의 설명을 알아듣기가 통 힘들었다. 미렌 역시 마찬가지로 전체적인 상황을 이해하는데 애로사항을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실을 알면 불행해진다는 말을 꺼내기 전에, 이해를 할 수 있어야 충격을 받던지 불행해지던지 할 거 아냐!? "맞아요. 쓸모없는 이야기는 그만 하고 빨리 카이엔 님을 남자로 돌려놓을 수 있는 방법이나 말하란 말에요, 주인님!" "오호라. 물론 가능하긴 하지. 아까전에 너와 썼던 마법도 미렌의 존재를 알고 육체를 강제로 트랜스하는 마법이었잖아? 하지만 지금은 곤란해. 지금 저 여자 육체는 미렌의 지배 쪽이 강하지만 남자 육체 쪽은 베링거의 환생체 쪽이 지금 더 강한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어. 저 상우라는 아이가 베링거보다 더 강한 의지력을 가지지 못한 이상 함부로 바꿔놓을 수도 없어, 게다가..." 셰더가 날 바라보면서 씨익 웃는다. 왜... 왜 그래? 어째 엄청나게 불길한 웃음... "그 계약은 아직도 유효한 거 알지, 카이엔?" "허걱!" 순간 나는 하도 복잡한 설명에 지끈지끈 머리를 싸매느라 잊고 있었건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나와 셰더는 분명 계약을 했었지. 셰더가 아시에를 살려주는 대신에 대신 날 여자로 만들고 첫날밤...을 가져간다고 말이야. 그... 그런! 일단은 지금 여자가 되었긴 하지만... "무슨 계약을 했길래 그래, 카이? 왜 그렇게 심리상태가 당황스러운 거야?" 윽. 그래. 나만이라면 내가 손해보면 되지만 지금은 미렌도 있다. 육체를 공유하고 있는 그녀가 있으니까 이 약속은... 그래! 그녀가 허락하지 않으면 괜찮을 거야! "셰... 셰더. 어제 그 계약은 미이의 허락이 없는 거니까 무효야, 무효!" "오호. 그럼 아시에를 이대로 죽게 놔둬도 괜찮다는 건가?" "그... 그건..." "어... 어떻게 된 거야, 카이? 시에가 죽었어? 내가 잠든 사이에 또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거야? 애초에 때가 되지 않았는데 이상한 곳에서 깨어난 것부터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인상은 받았지만..." "카이엔 님! 아시에 선배보다는 카이엔 님의 정절이 훨씬 중요한 문제에요! 정신차려요! 카이엔 님의 몸을 차지한 사람이 미렌님이든 상우님이든 마신이든 누구건 간에 상관없으니까 우선 정절을 지키라고요!" 아아아아악! 상황이 점차 복잡해져 간다. 제발 누가 이거 정리 좀 해줘. 한 명만 한 가지 주제만 가지고 이야기하란 말이야! 중구난방으로 떠들지 말고! 그렇잖아도 그 마신놈 문제만 해도 이해가 안 가서 머리아파 죽겠는데 나보고 어쩌라고오! "그마아아아안! 일단 상황정리부터 하자고오!" -------------------------------------------------------------------------- YURU : ...에에 역시 허접설정 정리하고 끼워맞추려니까 이상하게 되버렸답니다. 흐으..;ㅁ; 다음화에 다시 정리하죠. (스윽) 마나티 끼어든다. 마나티 : 그러니까 다 때려치우고 저한테 모든 걸 다 맡겨뒀으면 좋았잖아요! 아무리 제가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어서 질투하신다고는 해도 제 활약을 죽이다니 무슨 만행이에요!? 그리고 저 사랑해주시는 언니오빠들, 저도 너무너무 사랑해요.♡ 뭐라고요? 카이엔 님의 그거 좀 나눠달라고요? 어머나(갑자기 표정이 180도 변하면서) 당신들 누구세요? 저하고 언제 아는 사이였나요?(외면모드) YURU : 들어가! 제발 말 좀 들어! 너땜에 스토리가 폭주하고 있잖아! 마나티 : 그냥 능력부족이라고 시인하세요. 자, 독자의견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스토리를 진행시키고 있는 작가에게 테러를 가합시다. 미소년 메신저 fushigilove@hotmail.com으로 자꾸 압박을 넣는 거에요! 최근 접속시간은 평일 기준으로 보통 저녁 7시에서 9시 사이에요. YURU : 마나티이이∼ 그마안! 마나티 : 그리고 곧 출... 으읍. 읍읍 YURU : 그...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사와요.(삐질)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카이엔, 혼돈 속으로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53화 : 카이엔, 혼돈 속으로(5) ------------------------------------------------------------------------- "다른 사람은 전부 입 닫아 보고 보충만 해줘.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지 정리를 좀 해 볼테니까." 셰더는 내 말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미렌도 내 생각에 찬성했는지 별 말이 없었다. "에... 그러니까 모든 일의 시작은 제일 처음, 그 셰더 당신의 스승, 이사크가 마왕 디크로드를 부활시킨 데서 시작한 거지? 그리고 우리 아빠를 비롯한 12용사가 그를 다시 봉인했고..." 셰더가 말해 준 사천마(四天魔)니, 108영웅이니 하는 이야기는 나는 우선 생략하고 이야기했다. 우선은 상황을 가장 간략하고 알기 쉽게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리고 이사크는 다시 봉인석을 찾아 마왕을 봉인시키려다가 마왕 디크로드가 봉인되기 직전에 마신 부활의 씨앗을 남긴 것을 발견했어. 그 환생체가 바로 나였지." 셰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첫부분은 나 그런대로 제대로 이해한 거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의문점이 곳곳에 있기 때문에 헷갈리지 않게 주의해서 진행해 가야 한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누군가에 의해 미이의 인격이 내 몸에 들어왔고, 미이는 이후 카이엔에 흡수되어 1년에 한 번씩 나오게 되었어. 맞지, 미이?" "응. 그리고 나는 내가 깃든 몸의 인격이 마신의 환생체인줄은 꿈에도 몰랐어." "누구에 의해 빙의되었는지는 모르지?" "응. 몰라. 그리고 사실 빙의되기 전의 기억도 거의 나지 않아. 예전에는 꽤 많이 기억하고 있었는데 16년동안 16일을 빼고 남은 날들을 잠들어 있더니 그 동안 자꾸 기억이 사라져가더라고." "원래 그런 거다. 잠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죽음이라는 것과 마찬가지. 만약에 미렌이 10년만 더 계속 이런 식으로 잠들었다면 그녀의 존재는 점차 희미해진 끝에 사라지고 말았을거야. 16년이 지났는데도 이 정도로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 해도 기적적인 일이다." 셰더가 기억상실 증상을 겪고 있는 미렌의 상태를 설명했다. 그... 그런 거야? 미렌의 감정이 심하게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그럼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겨. 내가 마신의 환생체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어째서 내 가족은 날 죽이기는 커녕 아끼고 사랑해 준 걸까? 게다가 듣자 하니 그 마신의 환생체라는 녀석은 정말로 싸가지없는 못된 녀석이었다고 하는데." "에에? 그야 당연하죠! 카이엔 님 같이 엄청난 초미소년을 죽이려들다니, 전 세계가 용서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범죄라고요?" "마나티 말이 반쯤은 맞다." "에엥?" 나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미소년이라서 안 죽인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그럼 미소년이 아니면 죽여도 된다는 말이야? "물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카이엔 너를 죽였을 때 발생하는 부작용 때문이지. 아직 육신을 하나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지만 마신은 그 정신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세상의 균형에 큰 영향을 끼친다. 때문에 제대로 된 절차를 거쳐서 봉인시키지 않으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어. 알 수 없기 때문에 당장에 죽여서 화근을 없애자는 사람들도 있는 거지만..." "뭐, 그건 그럴 수도 있겠는데 미소년 이야기는 뭐야?" "너는 다른 세계 출신이라서 이해하지 못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세계의 주민들은 미소년 미소녀에 대해 각별한 애착을 갖고 있지." 음. 그건 나도 절실히 느끼는 바이다. 내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미소년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 대륙적으로 퍼져 있는 인기는 나도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점 중 하나니까. 내가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한 연기자도 아니고 가수도 아닌데 말이야. 아니 그들이라고 할지라도 이 정도로 미(美)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마치 세간에 사람들이 말하는 '빠순이 빠돌이'같은 사람들의 비율이 한국보다 몇십 배 가량 많다는 느낌이랄까? "대부분의 학자들에게서 부정되는 이야기지만, 전설 중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있지. 주신 다르군트는 궁극의 미소녀이고 마신 베링거는 궁극의 미소년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대륙적으로 미소년 미소녀의 서열을 정하는 것이 하루이틀 일은 아니지만, 통계를 잡기 시작한 이후 모인 미소년 중에서, 심지어 미소녀 중에서도 너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꽃은 찾아볼 수 없어. 그만큼 희귀한 존재다." "그것만으로... 나를 안 죽일 수 있는 이유가 된다는 거야? 미(美)를 추구하다가 세상이 멸망할 지 모르는데도?" "그 정도로 네 미모는 매혹적이라는 거지. 마치 촛불의 환함에 빠져 벌레들이 죽음도 모르는 채 그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뭐, 모든 벌레들이 그런 건 아닐지라도 말야. 덕택에 마신 베링거가 궁극의 미소년이라는 이론(異論)도 다시 힘을 얻고 있는 상황이지." 그런 걸까? 나도 확실히 거울을 볼 때마다 나 자신이 빨려들어갈 것 같이 알 수 없는 위험한 매력을 느끼곤 한다. 거울앞에 있는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나의 모든 것을 바쳐도, 심지어 죽어도 좋다는 그런 충동마저 종종 일어나곤 한다. 마치 마법에 빠진 것처럼...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 전부가 나를 보고 이런 감정을 느낀다면!? 나는 순간 섬뜩해졌다. "좀 알 것 같나?" "아마도..." "그렇게 자책할 필요는 없어.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이 무슨 흠결이 있더라도 사랑하고 아껴 주고 싶어하니까. 그런 이유따위를 같다 붙이지 않더라도 당연한거다." 아하하. 그렇겠지? 물론 아빠와 엄마는 진짜 나의 친부모도 아니고 또한 미렌의 부모도 아니지만 셰더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단지 기억을 잃어서 이렇게 된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니까. 부모니까... 아직 자식이 있을 만한 나이가 아니니까 잘 모르겠지만서도... 그러니까 당연히 자식을 위해서 모든 비난을 무릅쓰고 있다고 믿어도 되겠지? "일단 계속할께. 그럼 나, 아니 마신 베링거는 우리 가족들에 의해 힘이 봉해진 채 15년동안 그런 나쁜 성격으로 자라 왔다는 거군?" "그렇지. 하지만 아무리 너희 가족들이 강력하더라도 분명히 한계가 있어. 만약 16세 생일이 되었을 때까지 아무 방해가 없었었다면, 베링거는 그 봉인들을 모두 깨고 힘을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었을 거다. 비록 육체를 전혀 찾지 못한 상태에다 정신적으로도 미성숙된 상태지만, 그렇더라도 해도 웬만한 고위 마족의 힘에 필적하는 힘을 가질 수 있었겠지." "그럼 나를 굳이 다른 세계에서 불러다가 빙의시킨 게 그것 때문이야?" "그렇지. 우리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인간이라면 마신 베링거를 능가할 만한 의지를 겹쳐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디트리히와 나는 생각했다. 물론 결과는 보시다시피 지금처럼 시간을 끄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지금은 아까 마나티와 내가 쓴 트랜스 마법에 덧붙여 너와 미렌양이 힘을 합쳐서 이렇게 여자상태로 있는 게 고작이다. 아무래도 미렌양의 육체 상태일 때는 베링거가 간섭할 수 없는 것 같더군." "마신 베링거씨가 궁극의 미소년이라..." 순간 마나티의 중얼거림을 듣고 나는 흠칫 놀랐다. 내가 아는 마나티는 세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미소년 광. 궁극의 미소년을 위해서라면 마신의 편을 든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노릇이다. 셰더도 그걸 깨달았는지 마나티에게 나직한 경고를 날렸다. "만약 허튼 짓을 한다면 그날로 강제소멸이다 마나티." "어머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좋아하는 건 오로지 '수'모드의 카이엔 님이니까요." "아, 그래..." 활짝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마나티. 저거... 믿어도 되는 걸까나, 응? "내가 카이엔 너를 여자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그것 때문이다. 아무래도 마신 베링거는 궁극의 미소년이었다는 전설 때문인지 지금처럼 여자일 때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까." ...근데 그것만은 절대 못 믿겠다. 응? 너 같은 변태 마법사는 굳이 그런 이유가 없더라도 날 여자로 만들려고 애를 쓸 게 분명하잖아? 계약에도 첫날밤 어쩌니 하는 조항을 집어넣고 말이야... 으드득. "그럼 난... 그리고 미이는 어떻게 해야 해? 이대로 그냥 그 마신 베링거라는 자식한테 몸을 내줘야 하는 거야? 응?" 불안했다.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나는 다시 거기로 돌아갈 수 없는데, 그나마 이 몸마저 빼앗기면 내 영혼은 어디를 떠돌게 되는 걸까? 아까 말한 미렌의 최종운명처럼 끝없이 잠들다가 결국은 소멸하게 되는 걸까? 그... 그런 건 절대 싫다고! 레이엔이 말했던 진실을 알면 불행해진다는 말이 이런 의미였을까? 응? 하지만 셰더는 내 말에 일절 대답을 하지 않고 부유(浮游)마법으로 투명한 약병을 하나 선반에서 꺼내 왔다. 거기에는 언뜻 펑범하게 보이는 돌조각이 하나 있었다. 나와 마나티가 의아한 눈으로 그 돌조각을 바라보자 셰더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봉마석이라는 거다. 봉마석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설의 용자 로또가 마신 베링거를 쓰러뜨린 이후, 그 육체의 파편은 전세계로 흩어져 마왕의 씨앗이 되었고, 그 육신을 회수하기 위해 성소녀 토토가 죽기 전에 온 힘을 다해 만들었다는 강력한 항마력을 지닌 돌... 그런데 성스러운 돌 치고는 엄청 평범한데? "그런 거 너같은 흑마법사가 만져도 되는거야?" "괜찮아. 이것은 저번에 훔쳐 온 머신검에서 빼낸 거지. 이 작은 조각에는 토토가 남긴 항마력과 마신의 육체에서 나오는 마력이 끊임없이 충돌하여 그 힘을 중성화시키고 있어. 때문에 겉보기에는 평범한 돌로밖에 보이지 않고. 실제로 평범한 돌과 별 다를 바 없어." "그런데 그런 돌을 가지고 뭐 하려고? 지금까지의 행동을 보니까 마왕이나 마신을 부활시키려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지." "말 돌리지 마!" "흐음... 정확하게 말해서 나도 잘 몰라. 나도 일단은 명령을 따를 뿐이니까. 다만 이 봉마석이 문제를 풀어가는 키워드가 될 것은 확실해." "그 마도왕국의 디트리히라는 사람 말이야? 대륙 7대 흑마법사라고 자랑해 놓은 것 치고는 한심한걸? 그 정도 능력을 지녔으면서 타인이 시키는 대로 하다니 말이야." "시키다니! 마도 왕국 쪽에서도 마신 베링거의 부활은 심각한 문제로 보고 있다고! 나는 그곳의 일원이 아니니까 게스트 자격으로 그들의 일을 돕는 것 뿐이란 말야!" "그래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 하지만 목적은 일치하지." "그래서... 대체 날 어떻게 할 셈이야?" "으음... 일단은 여기서 당분간 머물러. 디트리히나 여러 사람들과 협의가 필요한 부분이니까. 일단 여기 머무르면서 기다려 봐. 당분간은 안심해도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리고 약속 지키는 거, 알지? 나도 아시에에 대해서는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그... 그건..." "그럼 오늘밤에 보도록 하지. 우후후후." 음흉한 웃음을 지으면서 셰더는 봉마석을 넣은 병을 들고 자리를 일어섰다. 야... 야... 야아! 진짜 할 거냐? 물론 내가 지금 미렌의 몸에 있고 여자가 되어 있는 건 맞지만 그... 그런 건! "으음... 아무래도 16일밖에 깨어 있어서 그런 지 몰라도 마신이고 어쩌고 하는 건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그건 일단 너한테 전적으로 맡겨 둘께. 카이. 하지만 아무래도 그 약속에 대해서는 설명해줘야겠는걸? 아까 내 허락이 필요하니 어쩌니 하던 걸 봐서 나하고도 관계가 깊은 일 같던데..." "으... 응." 큰일났다. 그걸 어떻게 미렌한테 설명해준담? 아시에를 살려주는 대신에 나의 여자 몸으로의 첫날밤을 셰더에게 주기로 했다는 사실을 말야. 어떡하지? -------------------------------------------------------------------------- 다음편엔 시르젤 쪽 이야기도 써봐야겠군요. (그쪽은 그야말로 대 위기∼ 랄까나? 와하핫) 휴우∼ 세계관 이야기 쪽 쓰려니 머리가 깨지는.....;ㅁ; 아, 마나티는 그거 달라는 열혈독자들의 원망을 피해 이 글 '촬영'끝나자마자 어디론가 도망갔답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케이리가의 비극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54화 : 케이리가의 비극(1) ------------------------------------------------------------------------- "끄응..."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시르젤을 괴롭히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런 두통이 찾아온 이래 3년만이었다. 시레나가 죽었을 때도 충격으로 며칠 동안이나 이렇게 심한 두통이 찾아왔었다. 두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시르젤은 누나의 죽음을 제대로 슬퍼할 만한 시간적 여유를 전혀 갖지 못했었다. 아마도 그의 감정이 정체한 이유는 그것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시르쥬는 시레나의 죽음에 따른 슬픔을 눈물로서 정화시키고 착실하게 한(恨)을 쌓았던 데 비해 병상에 누워 고통에 시달리던 시르젤은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와... 똑같아..." 그때도, 지금도 생각지도 못했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어이없는 사고. 그 사고 때문에 고삐가 풀려버린 소중한 사람의 분노. 그에 이어진 복수... "어디서부터... 잘못이... 으윽..." 시르젤은 끊임없이 두뇌를 두드리는 고통에 머리를 감싸메고 나뒹굴었다. 침대의 깔개와 이불이 제멋대로 헝클어졌지만 시르젤에게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어째서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로 어이없이 사라져가는 것일까...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자꾸 멀어져만 가는 불행에 그는 몸부림치고 있었다. 3년 전에 시레나를 죽이고 사라졌던 그 사람, 포워드 포메이션도 그랬었다. 케이리가의 암살단 중 핵심을 이루는 암살단이 케이리가 진(眞) 10인대였고 보조 역할을 하는 암살단이 케이리가 준(準) 10인대였다. 준 10인대를 이끌었던 사람은 지금은 카이엔에게 죽임당한 투톱 보란치였고, 진 10인대를 이끈 사람이 바로 포워드 포메이션이었다. 그는 진 10인대의 수장이라는 직함에서도 드러나듯, 시르젤의 외할아버지이자 케이리가 가문의 수장 파라디스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강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목표한 상대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이는 냉혹함이 있는 반면에 그 이면에는 길가에 피어난 이름모를 꽃 하나를 어여삐 여겨 보호하는 상냥함도 있는 이중성을 가진 암살자였다. 파라디스가 항상 포메이션의 그런 약한 마음을 질책하던 장면을, 시르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공적인 일에는 매우 엄격했지만, 사적인 일에 관해서는 자상했기 때문에 케이리가 가문의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하고 아꼈다. 특히 시르젤과 시르쥬에게 있어서는 장차 자신들이 도달할 목표에 이른 사람이자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런 자상함이 결국에는 그를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배신감이라는 감정. 좋아했던 사람이었기에 그 상처는 더욱 아프다. 하지만 시르젤은 그때 마음 놓고 포메이션을 증오할 수 없었다. 시레나가 죽은 충격으로 지금처럼 병상에 누워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르쥬의 죽음. 게다가 그 동생을 죽인 사람은 바로 자신이 좋아하던 카이엔. 그만큼 시르젤의 충격은 이전보다 훨씬 더 컸고 상처가 큰 만큼 고통도 배가되어 시르젤의 머릿속을 휘저어놓고 있었다. "아아아악!" "시... 시르젤. 정신차리거라." 옆에서 시르젤을 간병하던 티아라가 고통에 몸서리치는 시르젤을 붙잡았다. 하지만 티아라의 힘만으로는 건장한 청년 시르젤의 몸부림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티아라는 시르젤의 몸부림을 이기지 못하고 방 바닥에 주저않았다. "으으으윽..." "으윽... 이겨내야 한다. 시르젤... 우리 집안에서... 너마저 잃게 된다면... 고통스러워 하는 건 너만이 아니란다... 그러니까. 으흑흑..." 애처롭게 중얼거리는 티아라의 눈에서는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시르젤은 티아라의 말을 듣지 못한 채 여전히 고통 속에서 헤메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그 때, 방문이 열리고 시르젤의 어머니와 파라디스가 들어왔다. "시르젤은 괜찮나?" "보시다시피에요... 3년 전보다 증세가 더 심한 것 같아요." 시르젤의 어머니와 파라디스 두 사람 모두 어두운 표정으로 발작하고 있는 시르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상태의 아이를 무리하게 만들 수는 없었지만 지금 상황은 그다지 여유있게 돌아가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이곳이 발각당했소." "네에?" 티아라가 깜짝 놀라 파라디스에게 방문했다. 암살자들에게 있어 보안은 생명과도 같은 것. 물론 지금은 암살업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괴도 역시 보안이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때문에 그들은 대륙 곳곳에 위치한 그들의 본거지가 발각되지 않도록 같은 공작과 은폐를 그들의 적들에게 가하고 있었다. "어떻게..." "분데스리가 놈들이... 우릴 찾아냈고, 그 정보를 12용사들에게 흘린 모양이오. 우리는 지금까지 카이엔의 일에 관련해 왔으니 그의 실종에 발맞추어 우리를 찾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렇다고 12용사 전체가 나설 것이라고는... 어떻게 된 거죠, 여보?" "어쩌면 카이엔 브리타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물인 것 같소. 어쩌면 한때 흘려들었던 소문이 사실일런지도..." "무슨... 소문이지요?" "지금도 쉽게 믿기는 힘들다만... 그가 마신의 환생체라는 소문이 지하세계에서 잠깐 흘러나온 적이 있었소. 물론 그런 소문을 발설한 자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렇게 12용사들이 직접 나서서 이곳을 포위한 것을 보니 그 소문이 아주 근거없는 것만은 아닌 것 같소." "으으윽..." 시르젤이 머리를 감싸쥐며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시... 시르젤! 좀더 누워 있거라. 지금 안정을 취하지 않으면...!" "으윽... 외할머니. 전...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지금 어서 외할아버지를 돕지 않으면..." "미안하오. 더이상 이 아이를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으로서는..." "여... 여보!" 티아라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시르젤을 만류했지만, 시르젤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그를 시르젤의 엄마가 부축했다. "무리하면 안 된다... 얘야." 티아라가 근심 가득한 눈길로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로 고통과 맞서 싸우고 있는 시르젤을 내려다보았다. 시르젤은 그런 외할머니의 걱정을 덜어 주려는 듯 애써 웃으면서 엄마의 도움을 받아 방을 걸어나갔지만, 시르젤이 그렇게 행동할수록 티아라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파만 왔다. "그 완성되지 않은... 비기... 크으윽... 꺼내는 겁니까?" 두통 속에서 시르젤은 간신히 사고판단을 해내면서 파라디스에게 물었다. 티아라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방을 나서자마자 시르젤은 힘이 팍 풀려 지금은 거의 엄마한테 업히다시피 하면서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마나 폭주를... 시험하기 전... 으윽... 그날 기억하십니까?" 들릴 듯 말듯 희미하게 내뱉는 시르젤의 한 마디. 하지만 시르젤의 엄마도, 그녀의 아버지이자 시르젤의 외할아버지인 파라디스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저택의 지하로 통하는 끝없이 이어진 통로를 천천히 걸어내려갈 뿐이었다. 두통 속에서 혼재된 과거의 기억이 시르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하 실험실로 내려가 보는 것은 3년 전 그날 이래 처음이었다. '시아와세노 비치' 공식적으로는 아름다운 해변을 옆에 낀 케이리가 가문의 휴양지쯤으로 알려져있지만 실제로는 케이리가에 관련된 사람들 가운데서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각종 주술적 비기를 시험하는 실험실이었다. 이곳의 실체를 아는 사람들은 이곳을 이렇게 부른다. 히미츠 랩(Himitsu Laboratory)이라고. 현재 괴도 시르팡이라는 이름으로 암약하는 그들이 사용하는 핵심 기술이나 궁극의 비기 중 하나인 '마나 폭주' 공식적으로는 시르팡 마나 케이아스 현상이라고 불리는 기술도 이곳에서 완성되었다. 일정 공간 내에서 모든 마나의 흐름을 통제불능으로 만들어 흑마법을 제외한 어떤 마법도 듣지 않게 만드는 강력한 기술. 하지만 케이리가 가문에서 이 기술을 완성시키기까지는 꽤 많은 희생이 필요했다. "시레나 누나의 유언... 어길 수 밖에 없는 겁니까? 으으윽..." 여전히 파라디스는 대답이 없었다. [더 이상... 우리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는 짓은 그만둬주세요... 포메이션 씨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그리고 시르젤, 시르쥬. 너희들도 그 사람을 원망하지 말아줘. 그는 단지 스스로의 슬픔과 분노를 돌릴 곳이 없었을 뿐이니까...] 시레나 누나의 마지막 유언 중 한 구절이 시르젤의 머리 한 구석을 스쳐지나갔다. 머리가 깨져나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3년 전 그때의 일이 또렷하게 하나둘씩 기억 속에 떠올랐다. 케이리가 가문의 수많은 암살자들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받는 인재였던 포워드 포메이션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은 의외로 평범한 하녀인 소시에였다. 얼굴도, 몸매도 평범하고 돈이나 뒷배경 같은 것도 전혀 없었던 그녀였지만 항상 활기차고 밝은 표정으로 열심히 일하는 그녀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그런 그녀와 포메이션의 약혼식이 많은 케이리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거행된 지 3일 후였다. 갑자기 파라디스가 그녀를 마나 폭주 연구의 최종실험 멤버로 참여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평범한 하녀에 불과한 그녀는 히미츠 랩에 관해 알아서조차 안 되는 것이 원칙. 갑작스런 결정에 포메이션은 파라디스에게 항의했다. "단순한 보조 업무에 불과할 뿐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그 방에 접근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인력은 제한되어 있어. 우리는 이제 곧 자네와의 혼인을 앞둔 그 아이에게 조금 더 케이리가의 중심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자 했을 뿐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보조 업무라는 말에 포메이션은 다소 안심하고 물러났지만 그래도 불안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연구실 멤버가 부족해진 것도 최근 몇 번에 걸친 마나 폭주 연구 과정에서 사상자가 여럿 나왔기 때문이 아닌가. 실험 당일. 포메이션은 진 10인대 인원 몇을 이끌고 암살임무에 나섰다. 사실은 임무를 나가지 않고 소시에의 옆을 지키면서 처음 실험에 참여하는 그녀를 도우면서, 지켜주고 싶었지만 포메이션 없이 임무를 진행하기에는 상대가 만만치 않은 거물이었다.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위험하다면 암살 엄무에 나서는 포메이션 씨가 훨씬 더 위험하잖아요. 저보다는 오히려 더 포메이션 씨가 걱정되는걸요." 무슨 예감이라도 들었던 걸까? 일단 임무에만 나서는 냉철한 그답지 않게 포메이션은 나가기 직전 소시에에게 몇 번이고 몸조심하라고 다그쳤고, 그녀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밝게 웃으면서 오히려 포메이션을 달랬다. 그리고 임무에 나서는 그에게 작별 키스를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그 작별 키스가, 두 사람의 마지막 키스가 되고야 말았다. -------------------------------------------------------------------------- 게으른 작가, 간만에 리플 응답합니다아∼(제멋대로냐? -_-) 광현녀&밝은눈 님께 - 어느 성별이건 카이의 순결 날아가는 날이 소설 끝나는 날이 될듯 -_-;;;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껴 둘 거에요. 이것만은!) 神武刀.. & 디레이유이나 & 셀레네스 님께 - 훗∼ 시르젤은 카이엔을 구해줄만한 상황이 아니라죠. 냐하핫∼ 시르젤에게는 계속해서 비극을 선사해 줄 예정이랍니다.(...나 왜 이렇게 악취미일까나?) _은빛마녀_ 님께 - ...라지만 이 소설 역시 게임란에도 안 맞지요. 야오판타지로 보기에는 정도가 약하고(뭐가 약해? 퍼퍼퍽 이정도면 가볍지 뭘 그래? 사실은 더 하드한 걸 쓰고 싶었어!) 러비마녀 & 환상미궁 님께 - 저 마나티한테 사실 당하고 살아요 ;ㅁ; 에우로페 님께 - 전 간만에 마신다는 술이 꼭 소주가 되더라는... 네코~♡ 님께 - 흠... 그것도 좋은 생각(슥슥슥) 판타마녀 & 때구니 님께 - 짧은(-_-)리플 감사드립니다∼(휘리릭)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케이리가의 비극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55화 : 케이리가의 비극(2) ------------------------------------------------------------------------- 얼마나 계단을 내려왔던 것일까? 한참을 내려온 끝에 파라디스와 시르젤의 엄마. 그리고 시르젤은 시아와세노 비치의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히미츠 랩에 발을 디디고 서 있었다. 중앙에 위치한 마나를 집적시키는 용광로. 그리고 곳곳에 위치한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장치들과 마법진들이 그들이 서 있는 컨트롤 센터 창문 너머로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마나 폭주를 완전히 완성한 이후에는 그다지 쓰이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도 소규모 실험은 계속 해 왔기 때문에 실험실은 깨끗하게 유지되어 있었다. "걸을 수 있겠느냐?" "네에..." 거의 엄마에게 업히다시피 해서 걸어내려온 시르젤은 어떻게든 혼자서 두 발로 섰다. 아직도 머리가 아팠고 다리도 후들거렸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나아져서 어떻게든 서 있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무리하는 게 아닐까요... 아버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대로 우리 케이리가가 순순히 멸망할 수는 없다!" 3년 전 돌연 몸을 숨기고 자취를 감추기까지 대륙 최대의 암살집단으로 이름났던 케이리가다. 3년 전 그 사건 이후에 위세가 약화되고 괴도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에게 당한 희생자들이 대륙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이상 정체가 들킨다면 보복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아무리 많은 돈을 주더라도 정당한 명분 없이는 절대로 암살의뢰를 받아들이지 않는 엉터리같은 정의의 탈을 뒤집어쓴 분데스리가 패거리들을 제외한 모든 암살집단에 적용되는 원칙이었다. "3년 전 일만 아니었더라도..." 파라디스는 입 안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할 만큼 희미한 성량(聲量)으로 중얼거렸다. 분명 그날의 일은 사고였다. 그로서도 불가항력인 사고. 하지만 그 바보녀석은 결국 그녀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했고, 그 증오의 화살을 케이리가로 돌렸다. 모든 일은 잘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몇 번의 사고가 있었지만 케이리가의 연구진들은 이미 그때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고쳐 놓은 상태였다. 모든 사람들은 안전지대에 위치해 있었지만 설사 실험장소 코 앞에 있더라도 몸에 위해가 가해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마나 폭주라는 것은 언뜻 듣기에는 위험해 보이지 실제로는 마법사들의 마나 컨트롤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비기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포메이션과 약혼식을 올린 소시에는, 처음 보는 괴상한 기계들과 마법진에 호기심을 나타내긴 했지만, 실험에 함부로 참견하지 말고 자기 할 일만 조심해서 하라는 포메이션의 충고를 받아들인 듯 조용히, 하지만 열심히 제 맡은 일을 해내고 있었다. "아얏!" "괜찮아요, 소시에 누나?" "괘... 괜찮아요. 시르젤 도련님. 죄송해요." 위에서 필요한 몇 가지 소모품들을 가지고 내려오던 소시에와, 지루한 실험에 슬슬 싫증을 내고 위로 올라가려던 시르젤이 서로 부딪혔다. 소시에는 황급히 땅바닥에 떨어진 티슈나 도시락 등을 주워담으면서 시르젤에게 사과했다. 사실 소시에가 맡은 일은 정말로 체력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하찮은 일이었다. 실험 중에 필요한 것이 생기면 위로 올라가 그것을 가지고 오는 잔심부름이 그녀가 맡은 일의 전부였던 것이다. "얘는, 시르젤. 니가 사과해야지 니가 사과를 받으면 어떡해? 소시에는 실험에 필요한 물건들을 옮기는 중이잖아!" "시레나 누나 말이 맞아요. 사과해야 할 것은 오히려 저인걸요. 미안해요." 시르젤이 소시에가 미처 챙기지 못한 떨어뜨린 물건을 챙겨주면서 소시에에게 사과했다. "저... 전..." "어서 가봐요. 그럼 시레나 누나. 빨리 가자!" "조심해서 올라가! 또 아까처럼 덤벙대다가 부딪치지 말고!" 시르젤은 방금 전에 부딪힌 소시에와 그를 질책한 시레나. 두 사람 모두 얼마 있지 않아 다시 보지 못하게 될 사람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비극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되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마음을 단단하게 먹을 수도 있는 법. 예측하지 못했던 비극이었기에 사람들에게는 더욱 가슴아픈 사건이 되고 말았다. 퍼엉 실험이 거의 끝나갈 무렵. 노후한 관이 하나 폭파되어 정제되지 않은 극도의 불안정성을 띤 마나가 다량으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전지대에 있었고 실험장소에는 몇몇 사람들만이 남아 뒷정리를 하던 상황이었다. 그나마 사건 발생과 동시에 뒷정리를 하던 사람들도 재빨리 안전지대로 대피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사고 발생이 일어났기 때문에 히미츠 랩은 각국의 이름난 마법 연구실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안전 대책과 비상시 행동 원칙을 세워 놓고 있었다. "모두 빠져 나왔나?" 파라디스가 안전 지대를 한 바퀴 쭉 돌아보면서 말했다. 시레나와 시르젤은 방금 전에 위로 올라간 것을 확인했고 시르쥬는 아예 실험에 데려오지 않았다. 소시에가 보이지 않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녀는 심부름을 다니느라 시도 때도 없이 위아래를 들락날락거리므로 아마 위로 또 무언가를 가지고 올라갔을 것이라 파라디스는 생각했다. 그녀를 제외하면, 모든 사람들이 안전 지대로 대피해 있었다. "격벽을 닫아라." 파라디스의 명령과 함께 불안정성 마나가 퍼진 위험공간과 안전지대 사이에 물리적, 마법적 격벽이 차례로 내려왔다. 불안정성 마나는 그 특질상 안정하게 바꾸기보다는 소모시키는 편이 시간과 비용 면에서 훨씬 이득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소모 과정에서 생물체를 치사시키기에 충분한 방사선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완전히 소모시킬 때까지는 절대 근처에 접근하면 안 된다. 극히 사소한 사고. 이런 사고는 실험을 하다가 골백번도 더 겪어 봤을 만큼 사소한 사고였고 이런 사고로 인해 인명 피해를 입은 적은 거의 없었다. 파라디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위험지역 내에 퍼진 불안정성 마나를 소진시킬 것을 명했고 몇 시간의 소진 작업과 안전 확인 작업을 거친 이후에야 격벽을 올렸다. 다시 한번 내부 상태를 조사하러 실험 장소에 몇몇의 사람들이 들어갔을 때, 시레나가 상자 몇 개를 들고 계단을 뛰어내려오면서 말했다. "저기, 소시에 여기 없나요? 들고내려와야 할 물건이 잔뜩 쌓였는데 아까부터 도통 보이지 않길래 제가 대신 들고 내려왔어요." 시르젤의 말과 동시에 실험 장소에서도 비명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 파라디스님... 여... 여기에!" 실험 구역 내에서는, 치사량의 방사선을 맞고 절명한 소시에의 시체가 반쯤 열린 격벽 손잡이를 꽉 붙잡은 채 매달려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미처 빠져나오기 전에 격벽이 닫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가 위험구역인 실험장소 내부에 있었다는 말인가? 실험장소와 안전지대는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는데다 내부구조도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일부러 들어가려 하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소시에 양, 여기 있습니까?" 운이 나빴다. 상황이 한참 나빠도 최악으로 나쁠 때 막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포메이션이 소시에를 찾아 히미츠 랩으로 뛰어들어온 것이다. 그는 한창 혼란에 빠져 있는 연구진에게 상황을 캐물어 어렵지 않게 소시에의 죽음을 듣게 되었고, 곧바로 격분했다. "어떻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파라디스님!" "....." "말 좀 해보십시오! 어떻게 된 일이냐고요!" "...사고였네." 사고. 뜻하지 않은 사고. 왜 하필 그녀가 그때 거기에 있었단 말인가. 그것은 지금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였다. 이런 상황에 있어 누가 어떻게 그 이상을 말할 수 있을까. "사고라니요! 그럼 그녀가 왜 저 실험구역 안에 있는 겁니까! 분명 보조 인력으로만 활용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왜 그녀가 거기 있었는지는 모르네."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일리가 없었다. 하지만 파라디스도 그 이상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포메이션의 손이 점차 떨리고 있었다. 눈에 핏발이 섰다. 당장에라도 주먹이 날아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모두가 긴장된 눈으로 일촉즉발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포메이션은 진 10인대를 이끄는, 파라디스도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 혹시나 그가 감정에 휩싸인 나머지 파라디스를 상대로 무슨 짓을 하려고 한다면 당장에라도 모두들 달려들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아..." 포메이션의 눈에서 핏발이 걷혔다. 그리고 꽉 쥐고 있던 손에도 힘이 풀렸다.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상한 그였기에 상처는 크겠지만 그는 감성에 의해 판단을 그르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게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모든 이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보지 못한 포메이션의 분노섞인 감정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격렬했다. 게다가 그는 그 정도의 분노를 일시적으로 가라앉힐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모두가 그에게 어떻게 위로의 말을 던질까 고민하고 있던 상황에서 그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태도로 힘없이 터벅터벅 걷다가 눈앞에 마주친 시레나를 재빨리 낚아챘다. "시레나!" "무슨 짓인가, 포메이션!" "다가오지 마!" 그제서야 모두들 깨달을 수 있었다. 포메이션은 이성적인 판단으로 분노를 접어 버린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분노를 제때 폭파시키기 위하여 이성적인 판단으로 한 수 접고 들어갔다는 사실을. 지하공간을 울리는 포메이션의 사자후에 파라디스조차도 내딛으려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암살일이라면 파라디스를 제외하고는 케이리가 내에서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포메이션이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손 안에 잡힌 시레나의 목숨을 끊는 것 따위는 일도 아니라는 생각에 파라디스는 빠른 손속으로 시레나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억제했다. 하지만 곧 파라디스는 자신의 판단을 후회하고 만다. 스윽 포메이션이 살짝 시레나의 목을 그었고, 시레나는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모두가 기겁한 표정으로 포메이션을 바라보았다. 포메이션은 시레나를 인질로 삼을 생각으로 잡은 것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죽일 목적으로 잡은 것이었다. 비릿한 웃음을 흘리는 포메이션의 나이프 끝에 묻어있는 푸른 액체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고위 신관급 백마법사 없이는 절대 해독이 불가능한 몇 안되는 독액 중 하나였다. "레나 누나 안 올라오고 뭐해애∼?" "시르쥬. 넌 내려오면 안된다니깐!" 타이밍 나쁘게 시르젤과 시르쥬가 계단을 따라 위에서 내려왔다. 잠깐 심부름 간다면서 내려간 시레나가 돌아오지 않고 포메이션이 임무에서 돌아오자마자 황급히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본 시르쥬가 호기심을 느끼고 아래로 내려갔고, 시르젤이 시르쥬를 데려오기 위해 뒤를 따른 것이었다. "누... 누나!?" "레나 누나!" "왔네... 시르젤... 시르쥬... 에헤헷. 근데 어쩌나? 이런 꼴이니..." 시레나는 웃고 있었다. 독액이 핏줄을 따라 온 몸으로 퍼져갔고 독액의 영향으로 곳곳의 피부가 터져나와 온 몸이 피로 물들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모두의 경악한 표정을 지켜보고 있던 포메이션이 입을 크게 벌리고 광소(狂笑)했다. "크하하하! 어때! 어때? 슬프냐? 괴로우냐? 너희들도 나와 똑같은 고통을 느껴보라고!" 어느 사이엔가 위에 있어야 할 티아라와 시르젤의 엄마도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듯 히미츠 랩에 내려와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채 온 몸에서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는 시레나와 그 옆에 서서 미친 듯이 웃어대는 포메이션.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에 모두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볼 뿐이었다. 나직한 목소리로 파라디스가 말했다. "놈을 잡아." -------------------------------------------------------------------------- 으음... 짧은 리플을 탓하는 게 아니랍니다. 길게 쓴 리플에만 응답하려니 어쩐지 사람 차별하는 것 같아서 그랬는데 막상 짧게 쓴 리플에는 대답할 말이 없다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저야 리플을 먹고 살면서 기운을 내는 존재. 길든 짧은 간에 소중한 거랍니다 ^_^;; - 막간극- YURU : 마나 뭐하니? 마나티 : 제거 리스트 작성중이죠. 우훗♡ YURU : 제거 리스트? 마나티 : 제가 '정당'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손에 넣은 개인 사유재산을 갈취해가려는 '비열'하고 '치사'한 앵벌이꾼들을 제거하기 위한 블랙 리스... YURU : 그... 그런 짓 하지 마! 마나티 : 자, 저는 신경쓰지 마시고 은빛마녀님이 가르쳐주신 사이트에 가서 소설이나 잔뜩 읽으시라고요. 알았죠? ^ㅇ^ YURU : 야, 야아아! (바둥거리면서 끌려간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케이리가의 비극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56화 : 케이리가의 비극(3) ------------------------------------------------------------------------- "끄으윽..... 끄아악!" 정상이 아닌 몸을 이끌고 안전지대의 컨트롤 센터 앞까지 걸어온 시르젤은 또다시 발작을 일으켰다. 과거의 아픔이 서려 있는 이곳에 들어서니, 현재의 고통에 과거의 아픔이 덧씌워지는 것만 같아서 더욱 괴로웠다. 시르젤의 어머니가 깜짝 놀라 시르젤을 부축하고 나섰다. "시르젤!" "하아... 하아... 괜찮... 아요. 그보다 어서... 그걸... 작동시키지 않으면..." "그... 그래." 3년 전, 회상 속의 마지막 기억이 시르젤의 머리 속을 계속해서 스쳐지나갔다. 그 때 포메이션은 파라디스를 비롯한 케이리가의 쟁쟁한 실력자들의 추격을 받으면서도 결국 탈출에 성공했다. 아무래도 실력을 숨기고 있었는지, 폭주 상태에서 실력이 120%발휘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히미츠 랩을 탈주할 때 보여준 그의 실력은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뛰어났다. 포메이션이 탈출하고 그 자리에 남겨진 시레나는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기고 서서히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갔다. 그 때 그녀는 말했었다. [정말 염치불구한 부탁이긴 한데... 내가 좋아했던 그 애... 짝사랑뿐이었지만. 카이엔을 부탁해.] 하지만 그런 카이엔이, 또 다른 혈육인 시르쥬를 앗아갔다. 이번에도 그때와 마찬가지였다. 시르쥬가 준 10인대까지 동원해 가면서 아시에를 죽인 이유를 시르젤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분노한 카이엔을 시르젤은 결국 막지 못했다... 3년 전 그날 이후로, 절대로 소중한 사람을 잃게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 결국 시르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자기 잘못이 아니다.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다. 그건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랬기에 시르젤은 더욱 괴로워했다. 포메이션에 대해서는 단지 그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갈등을 해결할 수 있었지만 카이엔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시르젤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시작한다." 현재의 고통에 과거의 아픔이 겹쳐져 괴로워하는 시르젤의 상태를 뻔히 눈앞에서 지켜보면서도 파라디스는 냉정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힘들어 하면서도 파라디스의 말에 따라 시르젤은 하나씩 패널을 조작해 갔다. 포메이션이 케이리가를 떠나고, 보란치가 죽임당한 지금 케이리가에서 연구하던 여러 가지의 비기들 중 하나인 이것을 동작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현재는 파라디스와 시르젤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봉마석이 너무 부족하지만, 어쩔 수 없지. 어떻게든 해 보는 수밖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투입구로, 그들이 지금까지 모아 온 봉마석을 집어넣으면서 파라디스는 중얼거렸다. 쿠쿠쿠쿵. 그리고 히미츠 랩, 아니 시아와세노 비치 전체가 천천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멀었어요?" 세이렌 브리타뉴가 신경질나는 말투로 분데스리가의 수장, 차붐 분데스리가에게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괴도 시르팡이자 암살집단 케이리가의 최중요 본거지 중 하나인 시아와세노 비치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공간이동 관련 마법들도 완전히 봉쇄되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꼼짝할 수 없는 그물에 빠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남아있다면, 저들이 가진 비기. 시르팡 마나 케이아스 현상 뿐이다. 하지만 이곳에 대해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한 장본인이자 계획을 총지휘하는 차붐은 '아직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라며 최종공격 사인을 아직 내리지 않고 있었다. 세이렌이나 사이엔의 입장에서 보면 답답한 일이었다. 아무리 명성높았던 대단한 괴도 집단이라 할지라도 여기 대륙의 쟁쟁한 실력자가 몇이나 모였는데 이렇게 망설여야만 한단 말인가? 자칫하다 적에게 방비할 시간만 헌납하는 꼴이 될 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그것보다는 빨리 그들의 동생. 카이엔 브리타뉴를 되찾고 싶어서라는 것이 세이렌과 사이엔의 한결같은 마음이었다. 비록 카이엔을 찾지는 못하더라도 아마 결정적인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컸다. 이곳에 아이렌과 레이엔은 데려오지 않았다. 레이엔은 본래 전투능력이 없고, 아이렌은 숙련된 암살자들과 상대하기에는 전투센스가 영 아니었다. 상대는 정령들만 믿고 덤빌 만한 집단이 아닌 것이다. "벌써 '다키시메떼 호텔'이나 '미에나이 라비린스'같은 다른 본거지들은 함락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분데스리가 씨는 어째서 이곳에 대한 공격을 미루고 있는 겁니까?" "조금만 기다리시오. 브리타뉴 분들. 성격도 급하시구먼. 내가 이유 없이 공격을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니오." "그럼 뭐예요?" 세이렌과 사이엔이 도끼눈을 뜨고 차붐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여유있는 표정으로 피식 웃더니 고개를 돌려 저쪽 바닷가에 서 있는 시아와세노 비치의 전경을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슬슬 시작할 때가 되었을텐데..." "!?" 쿠쿠쿠쿵 "이... 이게 뭐야!" "지진!?" 차붐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 발밑을 살펴보았다. 땅이 갑작스럽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모두들 곧 지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진동의 근원은 시아와세노 비치로부터 퍼져나오고 있었다. 시아와세노 비치 가까이까지 접근했던 사람들 몇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하는 거죠? 분데스리가 씨?" 세이렌과 사이엔 뿐만이 아니라 차붐을 따라 이곳으로 온 다른 사람들도 궁금증을 참다 못해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차붐은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 광경을 한순간도 눈에서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파라디스 케이리가... 결국 이걸 동작시키고야 만 거냐..." 규칙적으로 계속되던 지면의 진동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몇몇 사람들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졌고, 갈라지는 바닥에 떨어질 뻔한 사람도 있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시아와세노 비치가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평범한 집 밑에서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물체가 함께 따라올라오고 있었다. "저... 저건 대체!" '그것'이 완전히 공중으로 떠올랐을 때 이 자리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이 눈을 부릅뜨고 놀랐다. 마왕과의 격전을 치루고 살아남은 12용사조차도 이런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마법과학의 원리를 무시하고 중력에 대항하여 공중에 떠 있는 저 거대한 물체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미 그 정체를 알고 있는 차붐조차도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전경이었다. "과연 굉장하군! 전설의 공중요새 '백야(白夜)'의 위용은 말야!" "백야?" "설마 백야가 '그' 백야를 말하는 건 아니겠죠?" 세이렌이 반신반의하면서 물었다. 하지만 차붐은 태양 아래 하늘에 떠서 지상에 둥근 그림자를 가리우는 공중요새를 보면서 그것의 출현에 기뻐하는 건지 유감스러워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어조로 소리쳤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둘 다 섞인 듯한 말투라고나 할까... "왜 아니겠소! 내 설마 살아 생전에 이걸 보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제길! 선조들도 보지 못한 건데 말이야!" "저런 걸... 어떻게 케이리가에서 가지고 있는 겁니까?" "아니 그것보다 저거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 거에요?" 난생 처음 보는 황당하면서도 두려운 광경에 굳어 있는 전사들과는 달리 마법사들은 차붐의 주위에 물려들어서 끊임없이 질문해댔다. 그들 역시 난데없는 공중요새의 출현에 놀라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학문에 종사하는 자들로서 원초적인 호기심은 어쩔 수 없는 직업병이었다. "젠장! 나한테 묻지 마쇼! 우리도 암살자 가문이고 저 요새에 관한 건 놈들과 우리 간에 가진 암묵적인 비밀 중 하나였으니까. 그렇게 저것에 대해 궁금하면 직접 때려잡아서 분해해 보면 알 것 아니오!" 차붐이 연이인 마법사들의 질문에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의외로 마법사들은 차붐이 무의식적으로 외친 말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아니 오히려 적극 찬동하는 분위기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렇군! 역시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 "무슨 마법으로 때려잡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까? 역시 저 정도 크기의 요새를 추락시키려면..." "거 우리 쪽으로 추락하거나 바다에 안 빠지게 계산 잘 해야 하네." "누구 수학자 없습니까? 빨리 질량이랑 마력량, 좌표 계산 안 하고 뭐하는 겁니까?" 마법사들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고 세이렌 역시 이 치열한 논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마법사들의 논쟁을 지켜보는 전사들 역시 서로 모여앉아 마법사들보다 선수를 쳐서 검기를 쏘아날리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여기 모인 마법사들과 전사들의 수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지만 다들 카이엔 브리타뉴의 비밀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될 정도의 거물들인 만큼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다소 놀라기는 했어도 겁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붐은 그냥 해 본 말이 진지한 논란의 주제로 변하자 조금 놀랐지만 곧이어 피식 웃고는 자세를 잡았다. '뭐 일단 손해볼 것은 없으니 두고보도록 하지. 자, 이제 어쩔거냐, 파라디스 케이리가? 충분한 봉마석 없이 무리하게 작동시킨다면 결과는 뻔할 텐데?' -------------------------------------------------------------------------- YURU : 으음... 때로는 남의 글들도 읽어줘야 할 텐데 말이죠. 이리저리 미루다 보니 항상 안된다는 게 문제... 그리고 저는 감성이 여려서 절대 사디는 못해요(방긋) 응? 마나티 난입하여 중얼거림 : 맞아요. 얼마 전에 테스트에서 천상수가 나와.... YURU : 야! 그건 일급 비... 마나티 : 참고로 저는 절대강공이랍니다. 엣헴. YURU : (그래서 어쩌라고 -_-)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케이리가의 비극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57화 : 케이리가의 비극(4) ------------------------------------------------------------------------- "하아..." 어지러웠다. 머리가 깨져 나갈 듯한 고통을 계속해서 무리해서 참다 보니 몸에 무리가 갔고 극도의 피로감이 여전한 두통과 동시에 육신을 괴롭혔다. 더 이상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시르젤은 자신이 무리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대로 일을 계속하다가는 정말로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도. 하지만 지금 이렇게 일하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외할아버지 파 라디스는 이대로 케이리가를 끝장낼 수는 없다는 필사의 의지를 보이고 있었지만 이미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둘씩 떠나보내 버린 시르젤이 지금 보이고 있는 의지력은 단지 자포자기 그 이 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으윽..." 다리가 휘청거렸다. 힘이 빠지고 있었다. 확고한 목적이 없이 발휘하는 의지력이란 사상누각에 불과한 것. 조금만 마음에 빈틈이 생겨도 쉽게 허물어지고 만다. 쿠웅 시르젤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시야가 좁아지더니 결국에는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귓가에 들리는 소리가 웅웅거렸으며, 피부감각도 무뎌져갔다. 시르젤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패널을 조작하 던 중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괴로운 표정으로 가쁘게 숨을 쉬는 모습이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였다. "시르젤! 정신차려라!" "시르젤!" 시르젤이 제어하고 있던 부분이 풀리면서, 요새의 균형이 심각하게 흐트러졌다. 파라디스가 전 력을 다해 균형을 잡으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한번 기운 균형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하다못해 저번에 머신검만 빼앗아왔었어도 그럭저럭 요새를 움직일 정도의 봉마석을 모을 수 있었을 텐데 ... 라고 파라디스는 생각했지만 이제와서 그런 걸 생각해봤자 어쩔 수 없다. "열이... 심해요. 이대로 가다가는..." 시르젤의 엄마가 파라디스에게 애원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파라디스는 이런 현실을 외면하려는 건지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이 공중요새를 지탱하는 데만도 바빠 다른 일에 정신을 쏟을 여력이 없는 것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건가요." 시르젤의 엄마가 피식 웃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힘이 없는 그 목소리가 어딘가 반쯤은 체념한 듯한 인상을 주는 묘한 어조였다. 파라디스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아니 일부러 그들을 외면하기라도 하듯이 고개를 돌리고 일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분명 시르젤은..." "....." 두통에 이어 갑작스럽게 찾아온 고열에 따른 충격이었을까? 시르젤은 엄마의 품에서 의식을 잃 고 쓰러져 있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면 시르젤의 엄마의 눈시울이 눈물로 적셔져 갔다. "얘야..." 어느 사이엔가 티아라가 히미츠 랩으로 내려와 있었다. 정신을 잃고 자기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시르젤을 본 티이라는 황급히 그쪽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시르젤의 엄마는 그녀를 접근하지 못 하게 막았다.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어머니. 이 아이를 마지막으로... 좀 더 볼 수 있도록..." "설마... 그걸...!?" 티아라의 눈빛에 당혹감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파라디스는 그녀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여전히 요새의 균형을 잡는 데에만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에헤헤... 원래 그럴 목적으로 절 입양하신 거잖아요. 잘 알아요. 그렇지 않으면 저같이 쓸모 없는 아이를 데려다가 이렇게까지 키워주셨을 리가 없잖아요?" "그런 건..." "알아요. 어머님도, 아버님도 정말로 절 아껴 주고 사랑해 주셨다는 걸. 그래서 전 두 분께 아 무런 원망도 하지 않아요." 시르젤의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했지만 이미 그녀의 두 뺨에서는 눈동자에 더 이상 채울 수 없게 될 정도로 쏟아져나오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결연한 의지로 수행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케이리가 가에 의해 억지 로 운명지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그렇게 된 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항상 밝고 명랑 한 좋은 며느리였다. 그런 그녀가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흘리는 눈물을 누가 탓할 수 있으랴. "마지막으로 가르쳐 드릴께요... 저의 씰드 네임(Sealed Name)은... 크리슈나... 에요." 씰드 네임(Sealed Name). 카이엔의 엄마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주신 다르군트에게만 이름이 바쳐지는 신전의 신관이었다. 하지만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신관들과는 달리 그녀는 이상하게 도 어떤 신성력도 발휘하지 못해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다. 신관들 중에서도 최고의 엘리 트 집단에 속하는 씰드 네임에서 아무 능력도 가지지 않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받은 핍박은 차 마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신전에서도 골칫거리로 등장한 그녀를 데려가겠다고 나선 사람이. 파라디스와 티아라였다. 원 래라면 씰드 네임은 신전에서 내달라고 해서 내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지만 일반 신관들도 조 금씩은 쓰는 신성력을 전혀 쓸 수 없는 그녀를 귀찮게 여긴 신관측에서는 거액의 돈을 기부받고 그녀를 케이리가 가에 팔아넘겼다. "크리슈나..." "저도... 사랑했어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여보." 티아라는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떠나는 사람 앞에서 나쁜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고, 그녀가 정말로 좋은 딸이었다는 것을 티아라도 인정하는 바였지만, 그래도 '여보'라는 두 음절의 단어를 듣게 되자 질투의 감정이 안에서 피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티아라 자신은 파라디스와 혼인하기까지 여러 가지 힘든 사건을 겪으면서 아이를 낳을 수 없 는 몸이 되어 있었다. 신전에서 그녀를 데려온 첫번째 이유는 씰드 네임이 필요했기 때문이지 만 실질적으로는 두번째 이유가 더 중요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티아라 대신 케이리가의 대 를 이어줄 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시르젤이나 시르쥬에게는 줄곧 여행중이라고 속이고 있었지만, 사실 그들 세 남매의 아버지는 모두 파라디스였다. 시르젤의 엄마, 크리슈나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눈부시지는 않지만 마 치 티끌 한 점도 묻어 있지 않을 것 같은 순수함과 경건함이 흘러나오는 빛이었다. "돌아봐주지 않을 텐가요, 여보?" 파라디스의 뒤에 선 티아라가 말했다. 요새의 움직임은 불안정했지만 파라디스는 어떻게든 추 락하지 않고 버텨내고 있었다. 완전히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닐 텐데도 파라디스는 여전히 그녀들 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눈이 마주치는 것을 꺼리고 있다는 느낌이었 다. "미안하오... 당신에게도... 그 아이에게도." 복잡한 감정이 섞인 말. 하지만 그는 여전히 콘솔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그 와중에서도 크리 슈나의 몸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녀의 모습은 천천히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못날 정도로 고지식한 사람. 그만큼 외길만 보고 달려왔던 사람. 어떤 희생이 따를지라도 끝까 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런 사람. 파라디스 케이리가. 그래서 티아라는 그를 동경했었고 결국에는 반해 버렸다. 오로지 그와 평생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갖은 고난을 무릅썼었고 나중에 는 성별마저 고쳤다. "어쩔 수 없군요..." 파라디스에게 이 정도의 반응을 끌어낸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강철같은 의지로 난관을 헤쳐온 사람의 고집이라는 것은 늙으면 늙을수록 강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쉽게 꺾이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의 고집이 약해진 것이 3년 전부터 벌어져온 일련의 사건들 때문이 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티아라는 오히려 고개숙인 그를 안타깝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파악 크리슈나의 몸에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빛무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따스하고 마음이 편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깊은 슬픔이 묻어나오는 강렬한 빛이. 빛이 번쩍인 것은 찰나 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으으응..." "괜찮니, 시르젤?" 시르젤이 깨어났다. 갑작스럽게 맑아진 머리에 이상함을 느끼며 시르젤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외조부모님인 파라디스와 티아라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이 한 명 보이 지 않았다. "어머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잠깐 뭐 좀 가지러..." 티아라가 무심결에 말을 돌렸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티아라의 눈빛에 나타난 짧은 당황의 감정 을 시르젤은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시르젤은 그런 티아라를 굳이 추궁하지는 않았다. 단지 방 금 전까지 그녀가 있었던 자리에 놓여져 있는 조그만 돌 조각 하나를 집어들고 서서 돌을 가만히 내려다 볼 뿐이었다. "이건... 봉마석...!" "시르젤, 돌을 이리 주거라. 그것이 없으면 '백야'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 "...꼭 사용해야만 합니까?" "네가 쓰러진 후부터 계속 추락궤도만을 따라 이동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무리야. 네 어머..." 그렇게 말하려다가 파라디스는 입을 닫았다. 원래는 '네 어머니의 희생을 무익하게 만들지 마라.' 라고 말하려고 했던 구절이었다. 하지만 이미 시르젤은 자기 엄마의 죽음을 인지하고 있는 것 같 았다. 정신적인 문제라 의사도 고치지 못했던 두통이 그새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으니까. 이런 건 거대한 규모의 신성력이 아니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효과였다. "어디로 갈 겁니까?" "별로 가고 싶은 곳은 아니지만, 거기 외에는 갈만한 곳이 없다. 이미 다른 본거지들도 전부 당했으니..." 시르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슈나가 자신을 희생시켜 가면서 사용한 강력한 신성력 때문인지 더 이상 두통은 없었지만, 시르쥬가 죽었을 때처럼 눈물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시레 나 누나가 죽은 이후로 감정업악의 상처가 미처 낫지 않은 시르젤에게는 울 때 울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괴로웠다. -------------------------------------------------------------------------- http://members.tripod.lycos.co.kr/i/icecastle13/test/tests.htm 여러가지 버전이 있지만 최근에 사용한 테스트는 이것..(쿨럭) 해보신 적 없는 분들은 한번 해보시고 코멘트 남겨주세요 ^ㅡ^ 태그로 음악 넣는데 잘 될지 모르겠네요. 하여간 시험중(게다가 용량관계로 언제까지 놔둘지는...) 사실 태그 삽질한다고 업이 늦어졌답니다^^;;; 화면이 이상하게 나와서 몇번이고 올리다가 지웠다는 -_-;; (이럴 시간에 글이나 쓸걸 그랬나...)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케이리가의 비극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58화 : 케이리가의 비극(5) ------------------------------------------------------------------------- 고오오오오 "움직이네요." "그렇군요." "거 큰일이군. 이동좌표까지 계산해야 한단 말야, 젠장!" "그러지 말고 차라리 유도계열 마법을 사용하는 게 어떨까요?" "흠. 그것은 우선 유도 마법으로 낼 수 있는 실질적인 타격력이 저 요새를 상처입히기에 충분한 지에 대한 고찰부터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난 계산 못해! 저거 궤도가 극히 불안정하다고!" "거 투덜대지 마쇼. π를 3으로 넣고 계산하면 될 걸 가지구! 어차피 덩치가 크니까 정확도는 좀 떨어져도 상관없잖소?" "하지만 저거 좀 위험한데요? 어떻게 버티고는 있는 것 같지만 저대로 가다가는 추락하겠는걸요?" 마법사들은 여전히 갑론을박을 벌이면서 중대하고 급한 상황에 걸맞지 않는 느긋한 토론을 계속해나가고 있었다. 반면에 전사들의 행동은 좀더 재빨랐다. 그들은 허공에 떠 있는 공중요새 '백야'를 누가누가 먼저 맞추나 하고 무작정 내기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푸슝 "젠장! 빗나갔잖아!" 이승엽이 홈런을 치듯 유려한 자세로 검강을 백야에 뿌렸다가 빗나간 사이엔은 혀를 찼다. 검강은 한번 날아가면 인간의 신체반응으로는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속도로 날아가므로 빗나갈 일은 없다. 하지만 빠른 만큼 중간에 궤도수정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검강을 사용할 시에는 정확한 위치 파악과 제구력이 가장 중요시되고, 파워는 그 다음의 일이다. 때문에 검강을 피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보고 날아올 위치를 예측할 수 있어야만 한다. "자, 브리타뉴! 다음에는 내 차례라구. 와핫핫핫." 붉은 안광을 하늘에 빛내고 있는 적발의 청년이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마치 깔보는 듯한 그 청년의 말투에 사이엔은 기분이 나빠져서 말했다. "흥. 내가 못 맞추는 걸 네가 맞출 수 있을 리 없지." "훗. 끝까지 허세는. 이 몸의 활약을 잘 보라고." 자신있게 검을 붕붕 휘두르면서 나서는 붉은 머리 청년의 이름은 이즈 크리스틴. 대륙 남부의 대제국 메리노아의 장군직을 맡고 있지만, 자주 현업을 비우고 놀러 다닐 때가 많이 말썽인 인물이었다. 그 역시 대륙 7대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대단한 전사로 사이엔 브리타뉴, 실론 파르스와 함께 그랜드 소드 마스터 공동 5위였다. 그만큼 그들의 실력은 우열을 가리기 힘든 백중세였다. 게다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들 중에서도 유난히 젊은 세 사람이라 '신세대 삼총사'라는 별명으로 한꺼번에 뭉뚱그려지곤 했다. "나의 화려한 필살기를 보여주기 전에 브리타뉴 네녀석의 문제를 지적해 주지." "어차피 얼토당토 않은 헛소리겠지만, 들어는 주마. 크리스틴." "저런저런. 날 아무리 질투한다고 해도 그것만은 곤란해." 사이엔은 저 놈부터 먼저 잡아패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면서 이즈를 노려보았다. 자신도 나름대로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하는 사이엔이지만 저 녀석은 그런 단계를 훨씬 넘어서 있었다. 남의 말을 제대로 듣는건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혼자서 노는 타입인 것이다. 이즈 녀석이 검술 실력이 형편없었다면 지금쯤 왕따가 되어 있을 거라고 사이엔은 생각했다. "너의 문제는 필살기 이름을 외칠 때 너무 평범하다는 점이야. 자고로 세상을 구하는 용사가 그 팔살기 이름을 외칠 때는 충분한 기합뿐만 아니라 말의 억양과 뉘앙스, 톤. 그리고 적절한 호흡을 통해서 그 아름다움을 극화시켜야만 제대로 된 훌륭한 필살기가 나올 수 있다고!" "....."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바보같은 말이었다. 이즈 녀석이 저런 데 신경 쓸 동안에 검술 실력 향상 쪽에 더 신경을 썼다면 지금쯤 자신을 능가하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사이엔의 머릿속을 잠깐 스쳐봤다. 뭐, 저녀석의 주장에 백번 양보해서 용사는 멋있어야 한다는 말이 옳다고 치자. 하지만 자고로 용사라는 건 진흙탕에 굴러도 음유시인이나 동화책에 쓰여지는 이야기에는 멋있게 묘사되는 법이다. 저런 식으로 자신의 싸움에 이상한 미학을 갖다 붙이면서 스스로의 행동을 제약하는 저놈이 왜 지금까지 한번도 뒤통수를 맞은 적이 없는지 사이엔은 궁금할 따름이었다. "어때, 너무 감동받아서 할 말이 없나?" "헛소리 집어치고 빨리 쏘시지 그래? 저 요새 자꾸 멀어지고 있잖아?" "아앗! 그렇군. 하지만 그럴 수록 나의 실력이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지. 간다! 신풍 굉명(新風轟鳴) 멸! 사! 봉! 파! 천! (滅邪封破天)!" 대체 평범한 검강 하나에 왜 저렇게 거창한 이름을 붙이는지 사이엔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다음에 쓸 때는 같은 필살기라도 필살기 이름이 달라져 있곤 했다. 어차피 본인이 지은 필살기 이름의 뜻도 모를거라고 사이엔은 결론지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건 이즈 크리스틴의 붉은 검강은 하늘에 붉은 궤적을 그리면서 공중요새로 날아갔고 지금까지 흔들리는 공중요새를 맞춰 떨어뜨리려고 시도했던 모든 전사들이 그랬듯 요새에는 전혀 맞지 않은 채 곧 하늘의 점으로 변하더니 사라져버렸다. "보통 필살기 멋지게 외쳐놓고 실패하면 더 쪽팔린다지." 사이엔은 꼴 좋다는 미소를 지으면서 빈정거렸다. 하지만 이즈는 전혀 기죽은 표정이 아니었다. "자고로 실패는 병가지상사라고 했지! 지금의 느낌을 살려 다음 공격에는 꼭 맞추면 되는거야! 그렇지 않아?" 사이엔은 더 이상 이즈가 장황하게 늘어놓는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 세이렌 누나가 있는 마법사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엉덩이 무거운 마법사들은 역시 공중요새가 불안정한 궤적으로 서서히 멀어지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답답한 논쟁만 계속하고 있었다. 성질 급한 세이렌은 아까부터 분통이 터져 화를 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법사들보다는 차라리 이즈 녀석이 이 상황에서 백배 도움이 되겠군." 사이엔은 혼자서 중얼거리고는 개인적으로는 마법사들에게 상당히 심한 욕을 했다고 생각했다. 파앗 "와앗!" "뭐야?" 그때 갑자기 공중요새에게 새하얗고 눈부신 빛이 뿜어져나왔다. 전사들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지만 마법사들 중에서는 멍하니 빛을 바라보다가 한동안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때문에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법사들은 한동안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으으윽! 이런 공격을 해 올 줄이야!" "누구 블라인드 큐어(Blind Cure)마법 좀 써 줘요!" 하지만 정작 회복마법을 써 줘야 할 카이엔의 엄마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공중요새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기운은... 설마?" "왜 그러시오, 브리타뉴 부인?" 차붐이 카이엔 엄마의 이상한 행동에 의아함을 느끼고 물었다. "분데스리가 씨. 혹시... 그 케이리가의 사람들 중에... 씰드 네임(Sealed Name)이 있나요?" "씰드 네임? 흠... 그러고보니 조사 와중에 결국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자가 한 명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 이상은 잘 모르겠소.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틀림없어요... 이 기운은... 씰드 네임의 세크리파이스(sacrifice)..." 거기까지 말하고는 카이엔의 엄마는 입을 닫았다. 그 이상의 내용은 씰드 네임만의 비밀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심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이 대륙에서 씰드 네임은 오직 한군데서만 양성되고 수가 극히 적기 때문에 그녀는 대륙의 모든 씰드 네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괴도 케이리가에 있는 저 씰드 네임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녀는 결국 백야에서 케이리가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산화한 씰드 네임이 예전에 누군가에게 팔려갔던 지진아라는 사실을 끝까지 기억해낼 수 없었다. 방금 전의 빛무리가 효과가 있었는지 곧이어 공중요새가 정상궤도를 찾고 속력을 내어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버렸다. 마법사들과 전사들은 깜짝 놀라 요새를 쫓아가려고 했지만 이미 백야는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거리까지 날아가버렸다. 진작에 공격했어야 했다고 마법사들은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이미 떠난 버스는 잡을 수 없는 법이었다. -------------------------------------------------------------------------- 시르젤 쪽 이야기는 여기서 끝! 다음 이야기의 제목은 Caien is in the flowers.이랍니다. 저게 무슨 뜻인지 알면 다음 전개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우후훗♡) 아아, 간만에 딱 취향에 맞는 글을 발견하고 독파했더니(5시간에 걸쳐) 너무 즐거워요. [마법사와 결혼하는 방법] 이라는 글인데 몇 번이나 뒤집어졌답니다. (...라지만 자기보다 잘 쓴 글 추천해도 되려나... 쿨럭) 그나저나 저번 화에 썼던 음악 태그가 잘 안나오는군요.(어쩌다가 한번 나오고...) 흐음...-ㅅ-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Caien is in the flowers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59화 : Caien is in the flowers(1) - 부제 : 마법에 걸린 카이엔 - ------------------------------------------------------------------------- "뭐야!? 그러니까 요지는, 저 흑마법사랑 하룻밤 잠자리를 같이하기로 허락했다는 거야?" "으... 응! 그... 그러니까... 미안해!" 더이상 뭐라고 변명할 거리가 없다. 나는 원래 어설픈 거짓말에는 아주 서투니까 그냥 사실대로 말하고 용서를 빌 뿐. 하지만 내 안에서 느껴지는 미렌의 감정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당혹스러워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화가 났던 당황해 하던 내가 잘못했다는 것은 변함이 없지. 지금 이 몸은 나만의 몸이 아니니까 내 마음대로 그런 걸 결정할 권리는 없다. 하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는 걸 미렌이 알아줬으면 했다. 그 마신 베링거의 환생체라는 놈과 트러블이 있었다고 치더라도 잠들어 있던 미렌의 육체 형태로 여자가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 뭐, 그놈이 아직 우리 몸 속에 잠들어 있는 한 완전히 여자로 살 수 있는 것도 장담할 수만은 없지만. "시에가... 그렇게 소중해?" "응..."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미렌이 말했다. "...할 수 없지. 어차피 남의 몸에 얹혀 사는 손님이 뭐라고 하겠어?" "미... 미이!" 약간은 체념한 듯한 미렌의 목소리.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 있어서인 걸까나? 근데 그렇게 따지자면 나도 손님이 되는 거잖아! 원래 이 몸의 주인은 마신 베링거의 환생체라니 말이야. 하지만 미렌은 내가 하려는 말을 미리 안 듯 내 말을 커트했다. "괜찮아... 나는. 나는 16년 동안이나 있으면서도 결국 이 몸을 가질 수 없었어. 하지만 카이엔은 몇 달 동안 완전히 그 몸의 주인으로 살아왔잖아? 지금도 마찬가지고. .. 나는 단지 불완전하게나마 내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몸을 가진 것으로 충분한걸?" 그렇게 말하면서 미렌은 방 안을 폴짝폴짝 뛰어다닌다. 미렌의 육체는 곧 나의 육체. 나와 그녀는 함께 방 안을 뛰어다녔다. 자기자신의 소중한 첫경험을 마음대로 결정지어버린 나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지금 자기 힘으로 자기 육체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 살아있다는 기분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생각까지는 공유할 수 없지만 그녀가 느끼는 모든 기분과 감정은 나와 섞여서 공유된다. 그녀의 넘치는 즐거움이 내게 잔뜩 흘러들어와 나까지 즐거워졌다. 그래. 단순히 삶을 대충대충 귀찮게 살아온 나로서는 절대 느낄 수 없었던 그런 감정이었다. 그녀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단순했지만 그만큼 그녀에게는 절박한 문제였기 때문에 행복감은 더욱 증대될 수밖에 없었다. "에헤헤... 너무 기분에 취해 뛰어다녔나? 귀찮지 않았어?" "아냐. 미이. 네가 기분이 좋으니까 나도 기분이 좋아지는걸? 이해해줘서... 고마워." "할 수 없지. 그건. 이왕에 일을 벌인 이상, 즐기자구!" "그... 그럴까?" "그래. 그 변태 흑마법사 자식. 나름대로 테크닉은 자신있는 모양이니까. 게다가 얼굴도 괜찮잖아?" "으응..." 우웅... 원래 미렌이 이런 성향이었나? 아니면 그냥 쌓인 게 많아서? 아님 자포자기? 하지만 나는 쭈빗거리면서도 미렌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뭐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가능한한 즐기면서 하는 편이 좋겠지. 하지만... 궁금하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싫다고, 절대 안된다고 거부했지만 실제로 여자로서 남자와 그걸 하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역시 처음에는 좀 많이 아플까? 아니면 감성적인 여자의 마음은 애정을 느끼지 않으면 역시 즐길 수 없는 걸까? 여성의 오르가즘이라는 것은 남자와 어떻게 틀린 걸까? 별에 별 잡다한 상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떻게 알겠냐.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종류의 거잖아 그건! 게다가 나는 남자로서 여자와의 경험도 가져 본 적이 없으니 더더욱 알 수 없는 문제다. 하긴 무경험이니까 이렇게 별별 상상을 다 떠올리는 거겠지만. "끄응..." 밥 먹고 지나치게 뛰어다닌 탓일까? 배가 슬슬 아파오면서 괴로워졌다. 미렌도 나와 같은 통증을 느끼는 듯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닌 것 같았다. 후후. 사람의 심성은 간사하다지? 금방 이렇게 기분이 변하다니 말야. "아파..." "응... 좀 있어보자." 조금 있으면 괜찮겠지 라고 생각하며 나는 침대에 몸을 기댔다. 하지만 이게 어찌 된 판인지 통증이 점차 심해져만 갔다. 배뿐만 아니라 가슴도 답답해지 듯 아파왔고 속도 갑자기 메스꺼워 지는 게 꼭 토할 것만 같았다. 뭐라고 잘 표현할 수 없지만 몸 전체가 괴로움에 신음하는 느낌이었다... 으윽. 이거 나 감기몸살이라도 걸린 걸까? 하지만 기침은 안 나오는데? 으윽... 하지만 정말 이거 상태가 안 좋다. 으윽... 미칠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어쩐지 아랫도리가 눅눅하게 느껴지는 것이 찜찜하다. 으음... 지금 내가 입은 건 치마라 옷을 껴입어서 땀이 찬 것도 아닌데... 아무래도 여름이라서 그런 걸까? 샤워를 하고 푹 쉬는 게 좋겠다. 마나티를 불러서 약이라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마나티의 정신사나운 수다를 듣고 있으면 어쩐지 더 증상이 악화될 것 같았다. "괜찮겠어, 카이?" "으응... 그리고 미이. 이건 네 몸이기도 해. 그렇게 남의 일 같이 말하지 말하줘." "미안. 아직 안 익숙해서 말야. 근데 너무 아프다... 그치?" "응..." 벌컥 그때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저 녀석은... 그래. 셰더다. 밤에 온다고 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원래대로라면 기겁을 하고 물러나야겠지만 몸이 아파서 그런지 상대하고 싶은 힘이 하나도 없다. 이 점은 미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셰더는 조금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준비는 됐나?" ".....지금은 몸이 아파서 못하겠어. 도저히..." 진짜 솔직하게 이대로는 무리다. 싫고 좋고를 떠나서 그런 것을 할 만한 몸 상태가 전혀 아니다. 하지만 저런 자기멋대로인 변태자식은 내 몸 상태를 세심하게 배려해 줄 만한 녀석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만약에 눈앞에 있는 사람이 시르젤이었다면 날 진지하게 걱정해 주었을 텐데... "꾀병부려봤자 소용없어."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있는 내 몸 위로 올라탄 셰더는 순식간에 내 블라우스를 걷어 벗겨 냈다. 능숙하고 재빠른 손길이 이미 이런 짓을 골백번은 더 해본 선수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컨디션이 너무나 나빠 저항할 힘도 나지 않았다. 미렌도, 나도 완전히 지금 육체를 포기한 상태였다. 내 가슴 위에 손을 얹으려다가 비리비리하게 나무토막처럼 움직이지 않는 날 의아하게 여긴 셰더가 물었다. "저항하지 않는 거냐? 재미없게..." "...진짜 몸이 아프단 말야. 내버려둬." 그쪽은 앙탈부리는 쪽을 덮치는 게 취향일런지는 몰라도 내가 그런 취향을 만족시켜줘야 할 의무는 전혀 없다고. 하지만 셰더는 다시 무언가에 자극받은 듯 내 가슴 위에서 손을 재빠르게 움직여갔다. 녀석의 손에 가슴이 제멋대로 주물러지는 느낌이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으음...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만 병약미소녀 쪽도 의외로 흥분되는군." ...에에, 뭐시라? 변태다! 역시 이녀석은 뼛속까지 변태다! 그렇게 촌철살인의 일구를 면상에 던져주고 싶었지만 셰더가 날 보고 흥분을 느끼든 말든 나는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호응해 줄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이미 내 상반신을 반쯤 벗긴 셰더는 내 치맛자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허벅지에 닿는 외부의 손길에 몸이 잠깐 움찔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 뱀 같은 손길이 허벅지의 곡선을 따라올라와 가장 민감한 부분인 끝부분의 속옷에 다다랐을 때, 셰더는 흠칫 하면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응? 왜 저래? 나도 조금은 의아함을 느끼고 셰더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아까 전부터 아랫도리가 눅눅하던 기억이 생각났다. 으음... 혹시 소변이라도 새어나온 걸까? 듣자 하니 여자는 남자보다 요도의 길이가 훨씬 짧아서 잘못하면 요실금 같은 게 생기기 쉽다던데... 이 젊은 나이에 벌써 그런 병이 생긴 건 아니겠지? 셰더가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내 치마 속에서 손가락을 꺼냈다. 꺼낸 손가락 끝에는 붉게 보이는 액체가 조금 묻어 있었다. 어... 저건? 설마 피? 그렇다는 것은... "너, 생리 중이였나?... 그럼 지금 몸이 안 좋다는 건... 생리통이고?" 에에에엑? 새... 새... 생리? 거기 뭐시냐. 여자들이 한 달에 한번 마법에 걸린다고 하는 그거 말이야? 다른 말로 월경 또는 달거리라고 하는... 아, 나는 처음이니까 초경이라고 해야 하나? 언뜻 믿을 수 없었지만 셰더의 손가락에 묻어있는 피를 봐서 사실인 것 같았다. 으윽... 아까 좀 찜찜한 기분을 느꼈을 때 확인을 해봤어야 했는데. 그나저나 생리통이라는 게 이렇게 아픈 거였나? 으윽... 진짜 죽을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셰더가 들리지 않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미렌에게 말했다. "미... 미이. 너 이거 생리라는 거 몰랐어? 넌 여자애잖아!" "에헤헷... 16년동안 잠만 자다 보니 까먹었어." 셰더는 일을 벌이지 못해 엄청나게 기분이 나쁜 듯 얼굴표정을 팍팍 찡그리면서 말했다. 세상에는 피를 보면서까지 일을 벌이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다행히도 셰더는 그쪽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 듯 했다. 나로서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젠장. 왜 하필이면 오늘이 그날이냐구. 젠자앙! 딴날이면 어디가 덧냐나아!" 셰더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절규했다. 저 꼴을 보아하니 나름대로 엄청나게 기대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셰더의 불만에 주파수를 같이 맞춰줘야 할 필요는 없지. 나는 부시시한 몰골로 주섬주섬 셰더가 벗겨 놓은 블라우스를 챙겨 입으면서 말했다. "그만 투덜거리고 약 좀 있으면 줘... 아파 죽겠어." "마나티한테 생리통에 잘 듣는 약과 생리대를 준비하도록 시켜두지. 하지만 명심해! 몸이 괜찮아지자마자 다시 재개할 테니까. 젠자앙!" 그러면서 문을 걷어차고 셰더는 나가버렸다. 아아. 정작 아파서 성질부리고 싶은 건 난데 왜 저녀석이 지랄하고 난리야? 끄응... 아무래도 좋으니 나 아픈 것 좀 고쳐 줘... 만약에 부서진 마법무구들을 내가 여전히 갖고 있었다면 생리통을 안 겪어도 되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갑자기 집 생각이 났다. 집에 있으면 세이렌 누나의 마법이나 엄마의 신력이 있어 괜찮았을 텐데... 세이렌 누나. 사이엔 형. 아이렌. 레이엔. 엄마와 아빠. 그리고 집안과 학교의 많은 사람들.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기말고사 시험도 끝나고 슬슬 방학에 들어갈 땐데...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에 몇 달은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월경 중이다 be in the flowers ] from 네이버 영어사전 우후후훗♡ (오네쯔 딸기(이치고)양의 웃음소리...) ...다음에는 마법에 걸린 카이엔의 히스테리를 써볼 까나요? 추천수 많으면 연참서비스를 해주는 방안 같은 것도 고려중이랍니다. (갑자기 추천을 막 받고 싶어졌다죠....하지만 비축분도 없는 상황에서 이건 자폭인데... 으음)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Caien is in the flowers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60화 : Caien is in the flowers(2) - 부제 : 마법에 걸린 카이엔 - ------------------------------------------------------------------------- "흐응..." "뭐...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마나티!" "신기해서요." "넌 여자 아냐!? 뭐가 신기하다고 그래?" "에헷♡ 저는 이런 거 안 하니까 그렇죠." "뭐... 뭐어?" "주인님이 그런 거 있으면 번거롭다고 없애 버렸어요. 그 덕택에 애도 못 낳죠. 하지만 언제든지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게 해놨으니까 괜찮아요." "그.. 그건 그렇다 치고...그나저나 빨리 가르쳐 달란 말이야!" "네엡♡" 셰더가 나간 이후에, 곧바로 마나티가 들어와서 내 옷을 벗기고 날 씻긴 다음에 내게 생리시 올바른 대처 방법에 대해 강의를 해 주었다. 지금 내 몸이 여자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마나티는 이전처럼 옷을 벗기면서 이상한 스킨쉽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다만 시작부터 '삽입형으로 할래요? 일반형으로 할래요?' 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져와서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해 주는 설명은 그럭저럭 알아들을 만 했다. 마치 중학교 여자 교실에서 성교육 설명 받는 것 같은 느낌... 근데 피가 묻어나온 걸 씻어주는 건 좋은데 왜 자꾸 거기... 를 뚫어지게 쳐다보냔 말이야! 물론 마나티는 여자고 나도 현재 같은 여자의 몸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보고 있으면 엄청나게 부담스럽단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흐음... 카이엔님에게 카이엔님의 정자를 수정시키면 어떻게 되려나? 한번 시험해볼까나?" "그런 짓 하지 마!" ...차라리 마나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모르는 편이 나을 뻔했다. 어떻게 저런 터무니없는 황당무계한 생각을 망설임없이 할 수 있는 거지, 저 계집애는? 하여간 여자의 몸이라는 건 꽤 귀찮은 것임에 틀림없다. 간단한 소변 하나 볼 때도 속옷을 걷어올리고 앉아서 해결해야 하는데다 남자처럼 툭툭 털어버릴 수가 없어 닦을 것을 항상 준비하고 다녀야만 한다. 게다가 오늘같은 일을 한달에 한 번씩 꼭 겪어야 한다니!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한번 시작하면 며칠은 이렇게 생리대를 차고 다녀야만 한단다. 이것도 입고 다니다 좀 더러워지면 계속 교환해 줘야 하고... 게다가 끝난 후에도 주기 같은 걸 미리 알아둬서 대비해야 한다. 으아아악! 왜 이렇게 번거로운 거야! 우쒸 신경질나! "하여간 여자의 몸이란 귀찮어." "인제 알았어, 카이?" 미렌이 이래서 남자들이란... 하는 것 같은 어투로 내 궁시렁거림에 응답했다. 그야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아냐? 남자들이 여자들한테 그런 거 물으면 너네들은 제대로 대답해 주냐? 응? 하지만 이렇게 여자가 되고 보니 지금까지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여자들만의 애환 같은 걸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생리대 값 좀 내려 달라는 여자들의 요구도 이해할 만 했다. 나는 하루에도 이걸 그렇게 자주 갈아줘야 하는 줄은 전혀 몰랐거든? 솔직히 말해서 나는 여자들이 이걸 한번 차면 하루종일 차고 다니는 줄 알고 있었다. "피잇... 역시 이왕에 나체를 감상할 거면 남자 버전의 카이엔님 걸 보고 싶었는데..." "흥. 유감인걸 그래?" 나는 마나티의 중얼거림에 빈정거렸다. 혼자서 멋대로 기대하는 건 상관없지만 내가 그걸 따라 줄 이유는 없으니까. "그래도 전 양성애자니까 카이엔님이 원하면 언제든지 덮쳐드릴께요♡ 첫경험은 주인님에게 예약되어 있기 때문에 안되지만..." "에엑? 여자끼리 덮치기는 뭘 덮친 단 말야? 그런 게 가능할 것 같아!?" "모르시는 말씀. '도구'라는 게 괜히 존재하는 게 아니랍니다. 원하신다면 구경시켜 드릴까요?" "됐어!" 마나티가 말하는 '도구'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모르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내 이성과 감정 모두가 동의했다. 내가 화를 내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마나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더니 쿡쿡 웃으면서 말했다. "생리중이라는 건 알겠지만 괜히 히스테리 부르는 건 좋지 않아요. 카이엔 님." "닥치고 어서 안 나가?!"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 아침에 씻고 갈아끼는 거 잊지 말구요∼♡" 아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신경질이 나는 거지? 마나티가 준 생리통 약은 효과가 꽤 좋은 지 먹은 지 십분도 지나지 않아 금세 증상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그런데 좀 몸이 좀 살만하니까 자꾸 짜증이 솟아올랐다. 대체 여자 몸이라는 건 왜 이렇게 불편한거야!? 나는 왜 여자가 되어서 이런 고생이냐구! 으드득... 그 마신인가 뭔가 하는 놈도 조용히 안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왜 괜히 나와서 나만 고생시키냐구! 어쨌건 밤이 늦었기에 나는 침대에 누웠다. 휴우. 일단 한동안은 생리대를 차고 다녀야 한다니까 적어도 셰더한테 당하는 일은 없겠지. 나중에 어찌되었건 간에 일단 한숨은 돌렸다. 이제는 셰더 녀석이 약속을 지키는 것을 봐야겠지? 아시에를 살려 달라는 그 약속 말이야. 랜덤 어쩌고인가 뭔가 하는 걸 사용한다던 것 같던데... 만약 아시에가 살아나지 못하면 그 약속은 무효라고! 복잡한 감정이 이리저리 뒤섞이는 가운데 나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랫도리에 느껴지는 익숙치 못한 느낌이 잠을 방해하는 주원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몸을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야 간신히 잠들 수 있었다. "카이엔 니임∼ 밥 먹어요!" 으음... 몰라. 난 몰라. 일어나기 싫어. 졸려. 더 잘거야. 음냐냐... 하고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을 작정이지만 나는 결국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미렌이 일어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흐아암... 귀중한 시간을 잠으로 낭비하는 건... 좋지 않다고, 카이." 하기야 미렌 넌 16년동안 잠만 퍼잤으니까 오죽하겠냐? 하지만 난 아니라고. 좀더 자고 싶단 말이야. 그래고 할 수 없지. 나는 날 깨우러 온 마나티의 도움을 받아 세수하고, 몸을 씻고, 어제 차고 잤던 생리대도 새 걸로 갈아끼고 머리를 손질한 후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었다. 끄응... "마나티...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거야?" "일찍이라니요? 저도 주인님이 9시에 절 깨우셔서 간신히 눈을 뜨고 일어났는걸요." "지금 몇신데?" "열시요." "....." 하기야 블라인드를 걷고 밖을 내다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기는 하다. 근데 대체 여기는 어디인 걸까? 지명 같은 걸 들어봤자 내가 알 리는 없겠지만. 창 밖을 보고 딱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여기가 어느 깊고 깊은 산 속 어디라는 사실이다. "늦어!" 준비가 다 된 후 마나티와 함께 식당에 도착하자 셰더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소리쳤다. "카이엔을 저 먼 서방대륙에서 데려오기라도 하는거냐? 왜 이렇게 늦어!?" "어머나. 여자아이는 준비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법이라고요!" 하지만 역시 셰더에 지지않고 맞서는 마나티. 하기야 내가 아무리 상상을 해봐도, 마나티가 셰더에게 당하는 그림은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하여간 다들 게을러터져서는 원... 쯔쯔." 나 게으른 데 당신 보태준 거 있수? 나도 왈칵 짜증이 났지만 그대로 꾹 눌러앉고 자리에 앉았다. 으음...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나 왜 이렇게 기분이 저기압인 걸까? 마나티 말대로 생리중이라서 그런 걸까나? 음식은 그 메이드복 누나가 만들어서 시즈라는 그 남자아이가 날라왔다. 브리타뉴 가의 호화로운 요리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조금은 초라해 보였지만 맛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나저나 마나티 쟤는 왜 저렇게 음식을 많이 먹어대는 거야? 나와 셰더가 밥 한 공기를 비울때 그녀는 서너공기를 비우고 반찬도 엄청 게걸스럽게 먹어대고 있었다. 무서울 정도의 식욕이었다. 저러고도 살 안 찌나 보통? 뭐,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제쳐두고, 나는 셰더에게 약속을 이행해 줄 것을 촉구했다. "셰더, 나야 뭐 알다시피... 사정이 그렇게 되었으니까 좀 미룰 수 밖에 없겠지? 그러니까 먼제 시에를 살려줘." "거 참. 내가 마왕 앞에다 대고 약정한 약속을 안 지킬 것 같아? 쫀쫀하기는..." "그래, 나 쫀쫀하다. 어쩔래! 너한테는 별 거 아닐지 몰라도 나한테는 중요한 일이라고!" 나는 확 밥그릇을 셰더에게 집어던지려다가 참았다. 으음... 이러면 안되는데. 평소하면 그냥 툭툭 짜증내고 넘어갈 일에 왜 자꾸 몸이 과격하게 반응하려 하지? 미렌 역시 나처럼 심기가 썩 편하지는 않은 듯 내 기분에 동조하고 있었다. "밥 다 먹었으면 따라와. 그녀를 보여 주마." 밤새 뭘 했는지 나보다도 더 밥을 깨작깨작 대충 먹은 셰더가 자리에게 일어서면서 말했다. 눈이 어쩐지 퀭한데. 어제 뭐 했냐? 나한테는 어제 일 못 벌였고 마나티도 나한테 성교육 시켜 준다고 늦게까지 나랑 같이 있었는데? "꽤 재미가 좋으신 모양이지요, 주인님? 제가 메이드복 입을 때는 코웃음치더니." "너야말로 새로 데려온 저 애를 갖고 노는 데 푹 빠져 있다며?" "우후훗♡ 그야 앞으로 주인님에게 시행할 테크닉들을 잔뜩 개발중이랍니다. 기대하셔도 좋아요." "무슨 소릴! 언제까지 당하기만 하고 살 줄 알아? 나야말로 다음에는 널 내 밑에 깔아뭉개줄테다!" "오호호홋. 아직 백년은 멀었다고요!" ...이 인간들은 대체. 하지만 정작 어제 밤 두 사람을 상대했을 메이드복 여자와 시즈는 이전과는 달리 의외로 표정이 무덤덤하게 보였다. 벌써 마나티가 말하는 그 '조교'라는 게 끝나고 계약을 맺어 기억을 잃어버린 걸까? "빨리 가자. 시에를 보여 줘." 나는 시덥잖은 일로 눈싸움을 하고 있는 셰더와 마나티의 사이에 끼어들어서 길을 재촉했다. 정말로 아시에가 살아날 수 있을까? 살아나야 해. 살아나지 않으면 안돼. 나는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중얼거렸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집에서 뛰쳐나온 지금... 내가 진심으로 의지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아시에뿐인걸. -------------------------------------------------------------------------- 어중간하게 넘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하나... 그렇지 않으면 앙탈수 카이엔군은 상당수의 캐릭터들에게 윤간당하고 말 겁니..(쿨럭) 19금 난교 파티라도 원하지 않는 이상에야 봐주세요옹♡ 기준 마련했답니다. 현재 올린 170여개에 달하는 (모든 글)의 추천수가 10이상이 되었을 때 연참. 그리고 15, 20 등 5단위로 올라갈때마다 할래요. (...라지만 이렇게 될 리가 없겠지? 하고 뒷짐진다... 이걸로 안심하고 놀자! 냐하하하)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Caien is in the flowers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61화 : Caien is in the flowers(3) - 부제 : 마법에 걸린 카이엔 - ------------------------------------------------------------------------- 나는 셰더를 따라 통로를 걸었다. 길지 않은 그 시간이, 나는 알게 모르게 초조했다. 그리고 그 초조함 이상으로... 걷기가 불편했다. TV에서 나오는 생리대 광고는 아주 날렵하고 편하고 안 샌다는 점을 광고하고 있는데 마나티가 채워 준 생리대는 치마를 입고 있으면서도 걸을 때 조금 신경이 쓰일 정도로는 불편했다. 하긴 이 시대에 제대로 된 생리대가 있다는 것만 해도 위안으로 삼아야겠지. 저 북녘 여자 동포들은 제대로 된 생리대 하나 구하지 못한다고 이전에 얼핏 들은 바가 있으니까. 잠깐. 그런데 마나티가 어제 분명 밑에다 차는 게 싫으면 삽입형으로 하겠냐고 물어봤는데 이 시대 기술력이 그 정도까지 되나? 새삼스럽게 느끼는 거지만 참 이상한 세계란 말이야. "끄응..." 또 몸이 조금씩 안 좋아졌고 그걸 눈치챈 마나티가 다시 약을 건네줬다. 이거 자꾸 약물에만 의존하면 안 될텐데... 아니 그나저나 왜 나만 이렇게 생리통이 심한 거냐고! 그런 게 있는 건지 없는 건지도 모르고 넘어가는 여자들도 많다는데... 으흑. "다 왔다." 잡동사니같은 기계와 약품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널려 있는 방에 들어서면서 셰더는 말했다. 고개를 들어 정면을 쳐다보자 원기둥형으로 생긴 커다란 유리병이 방 한가운데에 떡하니 놓여 있었다. 투명해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병 안에는 보글거리는 옅은 풀색의 액체가 가득 차 있었고 그 가운데 아시에가... 정확히 말해서 그녀의 시신이 둥둥 떠 있었다. "이건..." 나는 넋을 잃고는 살짝 유리병 표면에 손을 댔다. 나만큼 여린 아시에의 손끝이 두꺼운 유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아시에의 모습은 셰더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상태가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 심하게 자상을 입은 얼굴이나 짓이겨져서 그로테스크하게 보였던 그녀의 시신은 80%정도는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확실히 그녀가 아시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시에의 나신을 셰더가 어쩐지 므흣한 눈길로 감상하고 있는 듯해서 기분이 조금 나빴지만 그런 사소한 데까지 일일히 신경을 쓸 필요는 없는 일이다. 이상했다. 분명히 죽은 시신임에 분명한데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마치 당장에라도 눈을 뜨고 구해달라며 병을 깨고 나올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살아... 있는 것... 같아. 마치." 무의식중에 흘러나온 나의 중얼거림. 그러자 셰더는 가슴을 펴며 의기양양하게 자신이 아시에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자랑을 한껏 떠벌이기 시작했다. "후후후후. 놀랍지? 대단하지? 이건 마도실험을 위한 특별한 기계야. 저 안에 든 특별한 등장액(等張液, isotonic solution)을 통해서 생명체의 상태를 원하는 대로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지. 우선 그녀를 살리기 전에 칼로 난장판이 된 시신부터 돌려놔야 될 것 아냐?" "그래서 요지가 뭐야?" "나한테 감사하라는 거지." "고마워." "뭐야, 그 대충대충 하는 대답은!? 성의가 없잖아! 성의가!" ...왜 저렇게 열불을 낸다냐? 나까지 짜증나게 말이야. 어차피 계약이잖아 이거. 난 분명히 셰더에게 아시에를 살려주는 댓가를 지불하기로 했잖아? 셰더는 선불로 받기를 원한 모양이지만 불의의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아직 못 주었을 뿐인걸. "흠흠. 하지만 나도 놀랐어. 시신이 저 정도까지 복구될 수 있을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거든? 아무리 봐도 이상해. 심장이 뛰지 않는데도 생체조직이 저절로 저렇게 복구되어 가고 있다니..." "20년 넘게 데리고 있었다면서 몰라?" "몰라. 나도 궁금해." 셰더는 태연작약하게 말했다. 내가 마신의 환생체라는 사실을 알아낸 놈들이 어째 아시에의 정체도 제대로 못 밝히는 거냐. 아, 생각해 보니 셰더는 아시에가 내 친구 문길이라는 사실까지는 전혀 모른다. 그건 내 안에 있었던 베링거의 환생체나 미렌만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녀의 내부에도 원래 인격인 무언가가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내 안에 베링거가 들어 있었던 것처럼... "자, 그럼 시작해 볼까?" "뭘?" "약속했잖아. 아시에를 내가 살려주기로." "아." 맞아. 그랬지. 그러면 설명을 좀 미리 하고 데려오란 말이야. 뜬금없이 데려와놓고는 아시에를 살리주겠다니. 뭐, 좋은 일이니까 난 굳이 화내지는 않았다. "후후후. 시간이 좀 걸릴 테니 거기서 가만히 지켜보도록. 이 셰더 님이 얼마나 위대한 흑마법사인지 깨닫게 해 줄 테니." "시간이 좀 걸려? 어느 정도?" "몇 시간 정도면 충분해." "그럼 의자 좀 줘! 숙녀를 몇 시간 씩이나 이 자리에 세워 둘 셈이야?" "...카이엔 네 녀석이 언제부터 숙녀였나?" "흥. 나는 둘째치더라도 미이는 숙녀 맞지. 안 그래?" 쓸데없는 말에 시비를 건 셰더는 꼬치꼬치 따지고 드는 내 말에 별로 할 말이 없는 듯 고개를 으쓱했고 그 동안 마나티가 재빨리 구석에 처박혀 있는 의자 두 개를 가져와서 먼지를 툭툭 털었다. 으음... 슬슬 아랫도리가 눅눅해지는게 갈아줄 때가 되가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가 의자에 앉았을 때 셰더는 먼지를 날려가며 방 한쪽을 뒤지더니 사과 크기만한 붉은 수정구 한 개를 찾아냈다. "휴우. 어디 처박해 있었나 했더니 여기 있었군." "그게 뭐야?" "이게 바로 성물 랜덤 리버스(Random Rebirth)라는 거지." "헤에... 그걸로 시에를 살릴 수 있는 거야?" "적당한 조건만 만족되면. 야, 마나티 너 빨리 와서 안 도울 거야?" "에헤헷♡. 들켰다." 마나티가 머리를 긁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의자를 두 개 가져왔나 했더니 자기 주인이 일하는 것을 느긋하게 앉아서 구경하려고 한 모양이었다. "가서 준비된 재료 다 찾아와. 멜티 블러드(Melty Blood) 15리터. 식염수 1.4리터, 말보로(Marlboro) 13.2그램. 던힐(Dunhill) 3.5그램. 레종(Raison) 0.8그램. 공업용 루비 0.3그램. 환생초(還生草) 싱싱한 걸로 한 뿌리, 원숭이 손톱 하나, 실러캔스 비늘 조각 10여개. 그리고..." 뭐가 저렇게 많이 필요한 건지 셰더는 셀 수 없이 많은 재료 목록을 대고는 마나티에게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그것보다 마나티 쟤 저거 다 외울 수 있는 걸까나? 혹시라도 잘못 가져와서 아시에의 부활에 문제라도 생길지 염려스러웠다. 셰더가 모든 필요품목의 목록을 대고 마나티가 재료들을 가지러 옆 방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질린 듯이 말했다. "뭐가 그렇게 많이 필요해?" "모르면 가만히 있기나 해. 쓸데없이 간섭하지 말고. 내가 괜히 아시에 부활에는 시간이 걸린다고 한 줄 알아? 재료 구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단 말야." "치잇. 그래 나 아무것도 모른다. 어쩔래?" "흐음... 앙탈부리는 게 꽤 귀엽구만. 확 이대로 잡아먹어버릴까?" 갑자기 눈을 번뜩이는 셰더의 눈빛에 나는 흠칫 떨었다. 어... 어이? 갑자기 왜 이래? 분명 어제는 생리중에는 안 건드린다고 나갔잖아! 남자 마음이 줏대없이 하루만에 뒤바뀌는 게 말이 돼? "그... 그만 둬." 나는 의자를 뒤로 끌면서 흠칫했다. 그 모습에 더 자극을 받은 걸까? 셰더는 말할 수 없이 음흉한 안광을 뿜으며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어차피 한번은 해야 할 거 아니겠어?" 지... 진짜로 할 셈이야? 이... 이런 누울 자리도 없는 이상한 방에서? 노... 농담이지? 하지만 셰더의 눈빛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여차하면 진짜로 하려고 마음먹은 듯한 분위기였다. 야아! 너 어제 그 메이드복 누나랑 잘 놀았잖아! 그런데 얼마나 됐다고 또 나까지 건드리려 해! 이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어쩐 일인지 입에서 말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찰싹 그 때였다. 내가 갑자기 일어나서 셰더의 뺨을 휘갈긴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그의 뺨을 때린 것은 내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조용히 내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미렌이었다. 셰더는 갑작스런 공격에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얼굴이 살짝 돌아갔다. "이... 이..." "머저리같은 짓은 그만둬. 시에만 살아나면 몇 번이고 언제든지 상대해 줄 테니까." 그녀도 나처럼 역시 생리 스트레스를 상당히 받고 있던 걸까? 평소답지 않게 행동이 갑자기 과격해졌다. 같은 몸에서 나는 목소리라도 미렌이 내는 목소리는 나와 좀 틀리니까 셰더도 지금 뺨을 때린 사람이 미렌이라는 사실은 알 터였다. 미렌이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내게만 속삭였다. "어휴. 좀 확실하게 행동하라구. 셰더는 니가 그러는 모습에 더 자극받는 거잖아? 이 바보 앙탈수 자식아!" 커헉. 미렌 너마저 나를 앙탈로 몰아가는 거냐? 하지만... 하지만... 이 세계로 와서 내 과거 행적을 암만 뒤져봐도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별로 없었다. 흑흑. 그럼 내가 지금까지 했던 반항과 거부의 몸짓은... 전부 다른 사람들에게 좋아서 빼는 앙탈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다는 거야? "이제 알았냐?" ...미렌의 비꼬는 목소리가 살짝 열린 입을 통해 머리에 울렸다. 치잇! 그래 나 앙탈수 되는데 너 보태준 거 있냐, 흥? "크크크크." 뺨을 맞은 셰더는 웃고 있었다. 아니 쟤가 왜 저래? 보통 뺨을 맞았으면 화를 내거나 아니면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하는 게 아니던가? 그런데 왜 오히려 즐거워하고 있담? 의외로 메저키스트 취향이 있었나? 미렌과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셰더를 바라보고 있자 셰더는 크게 웃음지으면서 말했다. "크하하핫. 분명히 접수했다. '몇 번이고', 그리고 '언제든지' 상대해 준다고 했지. 좋아. 좋아. 앞으로가 기대되는 걸? 그걸 위해서 지금은 일단 물러나도록 하지." 미렌과 내 감정이 동시에 공조하면서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허걱! 그... 그러고 보니 그 말이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거야? 원래대로라면 첫 경험만 놈한테 줘도 되는 건데 방금 발언으로 인해 셰더가 원하는 대로 몇 번씩이나 해야 된단 말이야? 이거 완전히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태운 꼴이잖아! 싫어어어! 완전히 삽질했다. 미렌과 내가 지금 동시에 느끼고 있는 공조의 감정이었다. -------------------------------------------------------------------------- 음음. 추천해 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까다로운 조건을 클리어하려면 아직 멀었군요. (에치젠 료마 말투로 : 마다마다다네.) 인기작가가 아니니까 어쩔 수 없지만(웃음) 그럼 또 한편 올리고 애니나 감상하러 가야∼(룰루) ...and 파격조건 또 하나 선작수 1000넘으면 10연참!!!!! 역시 어렵겠죠? 냐하하∼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Caien is in the flowers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62화 : Caien is in the flowers(4) - 부제 : 마법에 걸린 카이엔 - ------------------------------------------------------------------------- "준비되었습니다아∼" 마나티가 셰더가 가져오도록 시킨 재료들을 커다란 구루마에 담아 끌고 들어왔다. 그때 셰더는 크게 웃으면서 즐거워하고 있었고 나와 미렌은 방금 전의 삽질에 고개를 파묻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으윽... 이를 어쩌란 말야. 응? "어라, 주인님? 무슨 좋은 일 있었어요? 설마... 이번에는 실험실을 무대로 자신의 변태성욕을 시험하신 건가요, 주인님!?" "왜 남녀간의 아름다운 결합이 꼭 내가 하면 변태짓으로 묘사되는 거냐, 마나티이! 그리고 그런 짓 안 했어!" "하지만 주인님이 그런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실 때는 주인님의 변태성욕이 충족되었을 때 외에는 전 본 적이 없는걸요?" "....." 역시 마나티는 무서우리만큼 셰더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녀석이다. 저 셰더녀석이 할말을 잃게 만들 수 있는 애는 마나티 외에는 아무도 없을 거야. "말해 봐요. 무슨 짓 했어요, 네?" "뭐 말해줘서 안될 것도 없는 일이지. 카이엔과 미렌이 나와 '몇 번이고', '언제든지' 상대해 준다고 약속했다." "그런 약속 안 했어!" 미렌과 내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하지만 마나티는 이번에는 셰더의 말 쪽을 더 신뢰하는 듯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마나티는 진실 여부에 관계없이 야시시한 말을 하는 쪽을 무조건 편들고 믿는 그런 인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 목덜미에 식은땀이 흘렀다. "세상에! 세상에! 카이엔 님! 언제부터 취향이 미청년에서 미중년으로 바뀐 거에요? 게다가 갑작스럽게 그런 적극적인 모습이라니! 꺄하하♡ 하지만 이왕이면 남자였을 때 제대로 된 씬을 한번이라도 보여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셰더. 준비되었으면 빨리 시에를 살려 줘." "응. 지금 곧 시작한다." 나와 미렌, 그리고 셰더는 혼자서 망상에 불타 별별 괴상한 상상의 오라를 내뿜는 마나티를 무시한 채 아시에를 먼저 살리기로 결심하고 작업에 들어갔다... 라지만 내가 할 일은 그냥 앉아서 구경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셰더는 마나티가 운반해 온 재료들의 라벨과 성분을 확인하고, 책상 위에 그것들을 종류별로 분류했다. 그리고 옛날 중학교 때 실습하면서 보던 거 같은 비커나 스포이드, 삼각 플라스크, 메스 실린더 등등의 도구들을 가지고 재료를 섞는가 하면 몇몇 재료는 잘라서 현미경으로 관찰하기도 하고 저울로 무게를 세심하게 재기도 했다. 흐음... 이렇게 보니 어째 흑마법사라기보다는 연금술사 같이 보인다? 하지만 진지한 셰더의 실험태도와는 별개로, 내게는 그 과정이 엄청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직까지 셰더는 나신으로 이상한 액체 속에 잠겨있는 아시에나 그녀를 살리는 데 쓴다는 랜덤 리버스라는 수정구에 아무 손도 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심심해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돌아다녔다. 셰더가 물건에 절대 손 대지 말라고 나직하게 경고한다. 헷. 내가 손 댈 리는 없잖아. 아시에를 살리는 중요한 일인데 망치면 큰일이지. 암. 암. 하지만 셰더가 날 실험대 근처에서 몰아낸 이유는 영 다른 이유에서였다. "월경중인 여자가 재료 근처에 있으면 부정탄단 말야, 저리 가 있어! 아니면 마나티랑 놀던지." 뭐야! 아직도 그런 시대착오적이고 여성차별적인 망발을 내뱉다니! 대체 대한민국 곳곳에서 실험현장에 종사하고 있는 여성 연구인력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서 그런 헛소리를 내뱉는게냐? 아, 그러고보니 여기는 한국이 아니지. 하지만 그래도 부정탄다니, 말이 좀 심하잖아! 게다가 애초부터 이 방으로 날 부른건 셰더 네놈이잖아! 근데 이제와서 뭐, 저리 가라고? "칫. 알았으니까 시에가 부활할 때쯤 되면 불러." 어차피 화장실에 가서 일도 보고 생리대도 좀 갈아끼울 필요가 있기에 나는 셰더에게 가운뎃손가락을 한번 치켜들어주고는 마나티와 함께 방을 나섰다. 헷. 전국의 수많은 공대생들을 폄하하거나 깎아내릴 생각은 전혀 없지만, 셰더 네녀석은 계속 골방에 처박혀서 구질구질하게 약품이나 만지고 있으라지! "자, 그럼 같이 화장실에 가요!" "가... 같이?" "어머, 원래 여자들끼리는 같이 가는 거에요. 몰라요?" "마나티 말이 맞아. 카이." 갑작스런 마나티의 말에 당황해하는 내게 미렌이 설명했다. 으음... 그런가? 그러고 보니 학교에서 봤던 여자들은 보통 떼로 모여서 화장실에 다니는 것 같기도 했다. 우웅... 여기 온지 꽤 시일이 지나기는 했지만 벌써부터 다 잊어먹으려고 들면 안 되는데... 나는 마나티의 존재에 조금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으음... 어쩐지 떨린다." "부담가질 거 없어. 조금 구조가 다를 뿐,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같은 인간인걸?" 나는 화장실에 같이 들어가려는 마나티를 억지로 문 밖에 떼어놓고 일을 보았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듯 어색한 동작으로 일을 마친 후 생리대를 갈아끼는 내 모습을 지켜보던 미렌이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하긴, 이런 짓도 한동안 하다 보면 익숙해 지겠... 그런데 나 계속 이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셰더와의 약속도 약속인데다 남자 모습이 되면 마신이 튀어나온다니 말야. 어찌되었건 나는 또 한 가지 남자로서 가지고 있었던 몰상식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남자들은 여자가 화장실에서 오래 박혀 있는다고 투덜대지만 그건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뭣하지만, 내가 직접 해 보니까 그걸 절절히 느끼는 바였다. 화장실에서 나와, 여전히 검은 두건으로 모습을 가리고 있는 래더를 만났다. 그는 평소의 음침한 이미지답지 않게 어딘가를 향해 서둘러 뛰어가고 있었다. 그를 마나티가 멈춰세우고 말을 걸었다. "어, 래더 오빠, 어디 가는 길이야?" "아버님한테 간다. 긴급사태가 발생했어." "뭔데?" "이상하게 생긴 게 우리 본거지로 다가오고 있다." "이상하게 생긴 거?" "자세한 건 와서 들어." "피잇!" 래더는 마나티에게 잡혀 있느라 낭비한 시간을 회복이라도 하듯 빠른 속도로 뛰어갔고 마나티도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쫓아갔다. 그리고 나는... "야, 좀 천천히 좀 가!" 그렇게까지 불편한 건 아니었지만 밑에 뭔가를 차고 있다는 건(그것도 처음으로) 아무래도 심리적으로 부담이 가는 일이라 마구잡이로 뛰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나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가 간신히 아시에의 시신이 있는 그 실험실에 도착했을 때 래더가 셰더에게 뭔가를 보고하고 있었고 마나티는 반짝이는 눈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내가 들어오자 마자 내게 달려들어 와락 안기면서 꺄악거렸다. "카이엔 님! 카이엔 님! 좋은 소식이에요. 기뻐하세요!" "조... 좋은 소식이라니?" "시르젤 님이 여기로 오고 있대요!" "시... 시르젤이?" 뭐어? 시... 시... 시르젤이? 그거 진짜야? 나는 깜짝 놀라 꺄악거리는 마나티를 진정시키고는 물었다. "시... 시르젤이 여긴 왜 오는 거야? 혹시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글쎄요?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거니까 그 이유는 모르죠." "없어! 난 절대로 시르젤을 볼 수 없어! 그러니까 절대 시르젤한테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은 하지 마! 셰더와 너네들도! 너희 노예들한테도 잘 입단속 시켜!" 시르젤은 뭐하러 여기 오는 걸까... 여기를 일부러 찾아올 정도면 역시 내게 할 말이 있는 거겠지. 나는 문득 내가 시르쥬를 죽였을 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평소의 나답지 않게 분노에 완전히 넋을 잃고 증오투성이의 마음에 빠져버렸었지. 평소에 소극적이고 소심한 나답지 않게 말야. 지금까지는 갑작스런 힘에 대한 지나친 자신이 마음의 균형을 깨어 버린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때는 마신 베링거의 의지가 내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었을런지도 모른다. 힘은 둘째치더라도 나같은 몸치는 절대 낼 수 없는 굉장한 전투 센스와 이상하게도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도 거의 느낄 수 없었던 죄책감을 그렇지 않으면 설명할 수가 없으니까. 시르젤도 많은 고민을 했을 거다. 아마도 지금쯤은 결론을 내렸을런지도 모르지. 다시 대면했을 때 그는 나에게 복수의 검을 겨눌까? 그렇지 않으면 용서의 손길을 내밀까? 하지만 그가 어느 길을 택하던간에 나는 멀쩡한 맨얼굴로 그의 앞에 서고 싶은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싫은데?" 아까 황급히 외친 말에 셰더가 능글맞게 대답했다. 뭐... 뭐어? "에휴. 이래서 카이는... 또 약점 하나 잡혔잖아?" 미렌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그렇다면... "그 소원을 들어주려면 또 댓가가 필요한데 말이지. 크크큭." 허거거걱! 그... 그런 거야? 아아악! 왜 나는 자꾸 남한테 약점 잡혀 이용당하고만 사는 거야! 어째서! 왜! 우히잉... 내가 싫다 정말. 바보! 머지리! 말미잘! 해삼! 멍청이 카이엔! 상우 빙신! ...라지만 자학해봤자 소용없나. 하지만 정말 시르젤과 마주치고 싶지는 않은데... 나 어떡해야 하지? 내가 끙끙대고 있을 래더는 아직 보고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듯 셰더에게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다. "약 20분 전에 동쪽 에어리어를 통과한 것을 확인했으므로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약 1시간 가량 소모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어떻게 대응할까요?" "연락도 안 하고 찾아오는 불청객한테는 조금 시련을 줘야겠지? 팬텀 이미지(Phantom Image) 정도는 띄워 줘." "알겠습니다.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찾아오겠습니다." "그래." 래더가 보고를 마치고 황급히 나가자 나는 셰더에게 물었다. "팬텀 이미지라니, 그건 또 뭐야? 시르젤한테 무슨 짓을 할 셈이야?" "시련을 주는 거지." "그런 건 줘서 뭐 하려고!?" "당연히 위대한 흑마법사를 만나기 위해서는 시련 하나둘쯤은 필요한 게 아니겠어?" "...진심이야?" "응. 진심이다." 셰더는 너무나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여서 내가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흐으... 역시 이 녀석이 생각하는 것을 물은 내가 바보였다. 아무래도 셰더와 마나티의 말은 마왕과 계약한 약속을 빼고는 진지하게 안 듣는 편이 낫겠어. 나까지 정신이 오염될 지경이잖아? "대체 무슨 시련인 거지..." "걱정하지 마세요. 카이엔 님. 시르젤 님 정도라면 충분히 넘길 수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카이엔 님은 믿고 기다리고 있으면 되요." "으응..." 그래. 역시 시르젤을 믿어야겠지? 믿고 기다리는 거야. 그를... 핫!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방금 전까지는 그를 어떻게든 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시르젤이 시련에서 탈락하기를 원하기도 좀 그렇고... 우우. 난 정말 어찌해야 하는 거야? 머리 아파 죽겠단 말야! "카이... 우선은 시에가 되살아날지에 대해서만 신경쓰자. 난 시르젤이라는 그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뭐라고 말은 잘 못하겠지만 어떻게든 될 거야." "어떻게도 된다라..." "그래요! 어떻게든 될 거에요!" 미렌에 이어 마나티도 방긋 웃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그 말은 상황을 타개하는 데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 말 자체는 이상할 정도로 신비하게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암. 암. 어떻게든 되고 말고." ...어이! 셰더 당신! 같은 마법의 주문이라도 니가 하면 전혀 효력이 없다고! -------------------------------------------------------------------------- 사실 추천수나 선작 연참이란 말은 일부러 불가능한 걸 잡고 해본 말이에요. 제 무덤을 팔 수도 없는 노릇에다가 근본적인 목적은 자기 자신을 좀더 채찍질하는데 있었거든요? (덕택에 몇달만에 비축분이라는 것을 확보.....타앙!) 뭐, 일단 내뱉은 말이니 먼 훗날에 이루어질 일이라도 약속은 유효하답니다. 따라서 가족들 명의로 돌리실 필요는 없답니다... 아하핫^^ To 은빛마녀님// 전 요새 시리어스 글쓰기 모드기 때문에... 대략 난감.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필독] 출판공지. 안녕하세요? (빙긋) 몇달 전에 저질렀던 만행이 드디어 결과물이 나오려고 합니다. 불쏘시개 양산에 일조하면서 동인정신의 함얌을 목적으로 중고등생들의 여가 선용(-_-;;)을 기본 목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에 따른 경제활동의 한 부분이 드디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헛소리는 이만 하고(방긋방긋) 저 출판했어요오... ;ㅁ; 빠르면 이달 늦으면 담달 중에 나올 듯 합니다. 암만 늦어도 올해를 넘기지는 않겠지요. 축하 환영! 내용 없는 비난은 즐! 개인적인 비판은 이메일 주소(fushigilove@hanmail.net)으로 띄워주시면 친절히 응답해 드립니다. ^_________^; 여러분께 드릴 말씀은... *. 책 나눠주기 이벤트 계획중입니다. 아이디어 제시해 주세요. *. 나오면 입소문 좀 내주세요...^^ (많이 팔리는 건 안바라지만 최소한 대여점에는 많이 진열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사소한 내용 수정이 여러 곳 있었습니다만... 대단치는 않습니다. *. 삭제는 책이 깔린 후 맞춰 천천히 이루어질 듯하니 당분간 걱정하지 마시길. (이라지만 선작해놓고 아직 안 읽고 계시는 분들은 좀 읽으셔야겠지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벽을 넘어서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63화 : 벽을 넘어서(To overcome the Broken-Heart) (1) ------------------------------------------------------------------------- 파라디스와 티아라. 그리고 시르젤과 남아 있는 케이리가의 사람들 여러 명이 탑승한 공중요새 '백야'는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대륙을 동에서 서쪽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공중요새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백야는 사실 요새라고 부르기에는 그 규모가 극히 협소하다. 하지만 대략 10여명에 이르는 남아있는 케이리가의 최중요 인물들과 암살업으로 긁어모은 방대한 자산, 그리고 괴도 시르팡의 이름으로 긁어모은 귀중한 보물들을 전부 보호하기에는 충분한 정도의 크기였다. 백야는 이제 대륙 서부의 산악지대로 접어들고 있었고 대지의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실질적으로 백야를 조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파라디스와 시르젤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자동조정으로 항로를 설정해 두었고 자동회피기능까지 설정되어 있었지만 대륙에서도 이름난 고산(高山)들이 밀집해 있는 이 산악지대를 빠져나가는 작업은 방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들조차도 백야의 기능을 완전히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백야(白夜) 전설에 따르면 마신 베링거가 거주하는 암흑성은 하늘 높이 떠 있는 천공의 섬이었다고도 한다. 전설의 용사 로또의 절친한 친구이자 대장장이인 바카라(baccarat)는 로또를 천공의 섬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하늘을 날 수 있는 요새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이름이 '백야'였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백야에 대한 전설은 용사 로또의 이야기에서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그냥 단순한 흥밋거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로또와 베링거에 대한 기록은 많은 부분이 소실되어 원형을 극히 알아보기 어려운데다가 현존하는 암흑성과 백야에 대한 명백한 증거는 지금까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동조종이기는 하지만 비행물체의 파일럿들에게는 항상 기체의 상황에 대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현재 백야의 조종을 거의 도맡다시피하고 있는 사람은 시르젤이었다. 시르젤이 기절한 동안 백야를 움직이느라 파라디스가 지나치게 무리한 탓도 있지만 어떻게든 일에 몰두하고 있지 않으면 시르젤은 최근에 연이어 겪은 괴로운 사건들의 소용돌이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터였다. 시르쥬의 죽음. 그리고 희생을 택한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 시르젤은 다시 악몽에 가까운 두통이 찾아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씰드네임의 최후권능의 위력은 역시 만만치 않은 듯 정신은 맑다못해 투명할 정도였다. 시르젤은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아직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엄마가 죽어가던 자신을 이렇게 살려놓은 뜻을 헛되게 할 수만은 없었다. "다 와가는군. 여기부터는 아마 그 녀석의 영역에 들어왔을 테다." "그렇습니까... 한시름 놓아도 되겠군요."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부터가 시작이겠지." "지금부터?" "그 자식은 변태에다, 악취미를 잔뜩 가지고 있으니까. 무슨 장난을 걸어올 지 몰라." "장난...!?" "하지만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가 죽을 수도 있는 법이다. 우리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돼." 셰더가 종잡을 수 없는 변태성 다분한 인물이라는 것은 시르젤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파라디스가 이야기하는 바를 시르젤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셰더와 케이리가가 서로 친하다고 보기에는 무리지만 그래도 꽤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면서 교류를 해 왔다. 그런데 어째서 장난같은 걸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 정확한 의미를 시르젤이 다시 한번 물어보기도 전에, 시르젤의 앞이 하얗게 변해갔다. "모두들 조심해! 셰더 놈의 시험이다! 지금부터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모두 환상이니까 마음을 굳게 먹고 자기자신을 유지해!" 파라디스의 황급한 외침소리를 마지막으로, 눈앞의 풍경이 지우개로 지워지듯이 깨끗하게 지워졌고, 다음 순간 시르젤은 새하얀 허공 위에 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백야의 시스템 중추부에 있었던 시르젤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곧바로 파라디스가 말했던 이야기를 상기하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시험이라니,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 옛 소설들에서 나오는 대로 가족, 친구, 연인 같은 거짓 사람들을 내세워 자신을 유혹하려는 걸까? 하지만 이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아는 이상 절대 그런 데 넘어갈 리 없겠지. 질 나쁜 유치한 장난일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시르젤은 피식 웃음지었다. 하지만 어떤 심한 장면을 보게 될 지 모르므로 마음을 굳게 먹지 앉으면 안 되는 일이다. "오랜만이네. 시르젤." 익숙하면서도 오랫동안 듣지 못한 목소리에 시르젤은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 바로 눈앞에서 사파이어색 눈동자를 빛내는 시르젤 누나가 방긋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그만 시르젤도 웃으며 인사하려다가 순간 굳었다. 셰더가 시험하는 공간에 들어선 이상 절대로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명제가 머릿속을 강하게 맴돌았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모두 네 마음속의 생각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 진실이 아냐. 그러니까 너의 감각을 믿으면 안 돼.] "얘는, 아무리 3년이란 세월이 지났다지만 누나한테 인사도 안 하니? 예전의 귀여운 모습은 어디로 간 거야?" 뾰로통해져서는 귀여운 말투로 툴툴대는 시레나. 시르젤은 당장에라도 굳은 얼굴표정을 풀고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그게 아니라고, 단지 어색했을 뿐이라고 눈앞에 보이는 누나의 환상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누나의 모습은 진실이 아니다. 내 마음 속 한켠에 남아있는 잃은 누나에 대한 환상이 만들어낸 모습일 뿐. 그 증거로 눈앞에 보이는 누나의 모습은 딱 3년 전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이 환상에 이겨낼 수 있을까, 너무나도 진실하게 보이는 눈앞의 환상에... 시르젤은 순간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면서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해 잔인한 부정의 말을 내뱉었다. 그 말이 밖으로 튀어나왔을 때, 자신의 마음 한구석이 도려져나가는 아픔을 느끼며. "당신은... 제... 누나가... 아닙니다. 누난... 죽었습니다... 눈앞에서... 분명히..." 뚝 눈물? 어째서인지 눈물이 나왔다. 시레나 누나가 죽은 이후에 마음이 닫혀 버린 시르젤은 그 동안 눈물을 거의 흘린 적이 없었다.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면서도 실제의 감정은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알아볼 수 없는 희미한 표정으로만 나타날 뿐. 폭발하는 정열의 감정 대부분은 냉정의 빙벽 안에서 힘없이 사그라들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르젤의 감정은 확실하게 요동치고 있었고, 터져나오는 수많은 감정은 3년 간 굳게 버텨온 벽에 심각한 균열을 만들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누나의 모습이, 귓가에 들리는 누나의 목소리가, 목덜미를 쓰다듬는 누나의 손길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부정하려니 시르젤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동시에 지금까지 굳게 버티고 있던, 그의 감정을 봉인하고 있던 철옹성이 서서히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눈앞의 시레나 누나가 그를 완전히 감싸안았다. 살랑거리는 청록색 머리카락이 시르젤의 뺨을 스쳐 갔다. 그녀는 시르젤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가볍게 숨을 쉬면서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울고 싶을 땐, 얼마든지 울어도 괜찮아. 응?" "으흑흑..... 우와아아앙!" 실제가 아닌 환상의 영역이라는 데 대해서 마음 한구석에서 어딘가 안도감을 느꼈던 것일까? 아니, 오히려 환상이라는 사실 때문에 덧없는 위안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일까. 시르젤의 마음은 무너져내렸다. "고작 그런 말로 나를 흔들려고 하다니, 백년은 멀었어!" 파라디스는 기분나쁜 표정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으며 눈앞에 서 있는 포워드 포메이션의 환상에게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다. 나의 행동은 옳았다. 그 신념에 변화는 없다. 파라디스는 마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무시해도 되는 환상뿐인 상대의 말에 굳이 소리를 질러가면서 응답을 한 것은 굳이 실체가 없는 상대를 설복시키기보다는 자기자신의 마음을 바로잡기 위함이었다. "정말... 그것으로 충분합니까? 다른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해도... 케이리가만 영속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합니까? 어차피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명멸(明滅)하는 것을..."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다. 애초부터 그런 말 한마디에 평생을 지녀온 신념이 무너질 것이라면 벌써 무너지고도 남았다. 여기서 셰더 같은 놈의 환상 따위에게 당한다면 평생의 수치가 될 것이다. "후후... 역시 형님은 강하군요. 이 모습을 보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아." "언제부터 내가 네놈의 형님이 되었지?" 역시 케이리가 내에서도 극히 아는 사람이 드문 일이지만, 포워드 포메이션은 사실 케이리가 가문의 서자(庶子)로 파라디스의 이복동생이었다. 물론 인정해 주는 사람은 거의 없는 쓸쓸한 처지였지만. "부정하시는 겁니까?" "물론 부정한다." 파라디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언제까지 이런 짜증나는 환상 속에 잠겨 있어야 하는지 파라디스는 슬슬 짜증이 났다. 하지만 아직 이 환상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틈을 찾지 못한 이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후후후. 하지만 겉으로야 그래도 속으로는 아닐 겁니다. 형님은 부러지지 않는 대나무같이 올곧지만 진실을 외면하는 얼간이는 아니니까요. 후후. 영원히 저로서는 당신을 이길 수 없나 보군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요? 과연 이 환상의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정곡을 찔렸다. 하지만 분명 이것도 자신의 마음 일부분이라는 것을 파라디스는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은 충분히 이런 환상을 물리칠 힘이 있지만, 아직 여린 시르젤이나 티아라가 이런 환상을 견뎌낼 능력이 있을까? 믿을 수밖에 없다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걱정이 없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후우... 고작 이런 것으로 내 마음을 흔들려고 하는가. 유치하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지만, 파라디스의 마음은 잠깐의 시간이나마 동요가 있었다. 파라디스는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을 비운 채 포메이션의 환상을 노려보았다. 어서 여기서 사라져라는 무언의 기운이 담겨 있는 눈빛이었다. "이미 많은 것을 잃으셨죠. 언젠가는 모든 것을 잃고 홀로 남겨지게 될 겁니다." 저주와도 같은 귀기(鬼氣) 담긴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희미하게만 들려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파라디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설령 잘못되더라도 자신이 믿는 길을 끝까지 관철시킨다. 아주 오래 전부터 변하지 않는 그의 신념이었다. "얼마 있지 않아 인정하실 수 밖에 없으시겠죠. 케이리가는 끝났다는 것을..." 희미한 메아리를 울리며 마지막으로 코웃음을 치는 포메이션의 형상은 모래가 바스라지듯이 공간에서 사라져갔다. 도통 사람을 기분나쁘게 하는 경험이었다고 파라디스는 생각하면서 정신을 더욱 집중했다. 같은 환상에 걸려 있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어서 빨리 공간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이 환상. 가볍게 생각할 수만은 없겠군.' 조급하게 굴면 안 된다. 그렇다고 초조해져서도 안 된다. 끝없는 부동의 평정심으로 난관을 헤쳐나갈 뿐. 지금까지 수많은 난관을 빠져나왔는데 고작 이런 환상에 당해서야 어찌 다른 사람들 앞에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그러던 어느 한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하나의 눈이 떠졌고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어 다시 백야의 조종실 앞에 서 있었다. "어떻게든 빠져나온 건가..."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다시금 백야의 비행방향과 위치를 파악하고, 아직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했다. 파라디스는 거대요새가 용케 비쭉비쭉 솟아 나온 산들과 충돌하지 않고 제 항로를 따라 셰더의 본거지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고 우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라면 오래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하지만 이 영역을 빠져나간다고 해서 걸린 환상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런 상황에 대처할 만한 지식들이 있는가 머릿속을 검색하면서 시르젤의 엄마가 그동안 모은 보물들을 보관해 온 콜렉팅 룸(Collecting Room)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환상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이 있을 터였다. -------------------------------------------------------------------------- 우후훗♡ 성원 감사드립니다. 그럼 더욱더 글을 열심히 쓰도록 노력해야죠^^ To. 은빛마녀님 // 표지 아직 안나왔어요. 하지만 최대한 예쁘게 해달라고 부탁해놨답니다. 저도 두근두근 기대중☆ To. 루시Lucy-빛님 // 아마 6권쯤 예정중이랍니다.(변동가능)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벽을 넘어서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64화 : 벽을 넘어서(To overcome the Broken-Heart) (2) ------------------------------------------------------------------------- 맑은 하늘 아래 자로 줄을 그은 듯 선명하게 보이는 수평선과 가볍게 파도치는 간조(干潮)의 바닷가. 뜨거운 햇살 아래서 시원한 바닷바람이 몸에 걸치고 있는 얇은 옷가지를 펄럭이게 만든다. 넓게 펼쳐진 백사장 한 쪽 끝에 툭 튀어나온 커다란 바위의 바닷쪽 끝에는 한 소년이 그리 길지 않은 연두색 머리카락을 바람에 나부끼면서 멍하니 바다 밑을 바라보면서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소년은 놀기 좋은 화창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듯 한숨을 쉬고 있었다. "하아..." 딱! 소년의 뒤에서 청록색 머리카락을 뒤로 땋아 묶은 소녀가 그를 한 손으로 내려쳤다. "아얏!" "또 여기 와서 괜히 멋있는 척 하고 있지, 시르젤?" "아... 아냐! 레나 누나! 그냥... 난..." 그는 소년 시절의 시르젤이었다. 시레나의 환상 속에서 울다 지쳐 잠들어버린 시르젤의 정신은, 분명한 퇴행(退行)증상을 보이며 어린 시절의 과거로 거슬러올라와 있는 것이다. 어린시절부터 계속되는 암살자 수업에 시달려 온 그의 삶은 결코 즐거움과 기쁨으로 점철된 삶은 아니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행복했던 순간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이제는 추억으로 남아 있는 아름다운 기억의 순간에는 항상 시레나가 곁에 있었다. 당연했다. 시레나가 옆에 있다는 것은 시르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기쁠 때마다 그와 함께 웃어 주었고, 슬플 때마다 따스한 말로 위로해 주었고, 지쳐 쓰러질 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다. "여기 올라오지 말랬잖아... 가능하면..." "미안..." "많이 힘들었던 거지?" 시레나는 알고 있었다. 시르젤이 정신적으로 훈련을 견딜 수 없는 극한상황으로 갈 때마다 이 바위 위를 찾아 바다를,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안정을 찾는다는 사실을. 하지만 최근에는 무슨 일인지 시르젤은 거의 매일마다 이 바위를 찾아왔기 때문에 누나로서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에헤헤... 난 누나만큼 강하지 못하니까... 한심하지?" "아냐. 시르젤 넌 분명히 나보다 강해질 거야. 그래도 사내자식인데 언제까지 누나한테 지고 살 수만은 없잖아?" "누나한테라면 져도 괜찮아. 다만 누나가 좋아하는 카이엔이라는 아이에게는 절대 안 지겠지만 말이야." "카이엔이라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사랑스러운 동생 시르젤뿐인걸?" 순간 지독한 위화감이 시르젤의 마음 속을 감돌았다. 지금 누나가 하는 말은 분명히 시르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이었다. 나만을 좋아한다고, 항상 내 곁에 있어 주겠다고. 하지만 무언가가 이상했다. "저... 저기... 하지만 누나 방에는 온통 카이엔의 캐릭터상품들로 가득 차 있지 않아?" "무슨 소리야? 내 방에는 그런 건 전혀 없는걸?" 아니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진짜 시레나 누나라면 절대로 그런 이야기를 할 리가 없다는 것을 시르젤은 잘 알고 있었다. 그제야 시르젤은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시레나는 자기자신이 원해서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동시에 또다른 욕망이 안에서 굼틀거렸다. 지금 눈앞의 시레나 누나가 거짓이라고 할 지라도 결코 다시 잃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환상에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 환상을 깨고자 하는 마음. 두 개의 마음이 시르젤의 안을 격렬하게 휘저었다. "왜 그래. 시르젤? 내가 혹시 그 카이엔이라는 애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질투한 거야? 에이. 그게 아니래도." 카이엔 브리타뉴. 그 이름이 가지는 의미가 두 가지 마음이 충돌하던 시르젤의 머릿속을 폭풍처럼 쓸고 지나갔다. 처음에는 단지 시레나 누나의 마음을 빼앗아간 질투의 대상일 뿐이었지만 누나가 죽은 후 어느 사이엔가 연모의 감정이 싹텄고 납치와 구출 등 여러 사연을 겪은 끝에 결국 고백하여 키스를 얻어낸, 그가 현재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시레나 누나 못지 않게 소중한 동생 시르쥬의 생명을 앗아간 장본인이기도 하다. 시르젤은 카이엔의 분노를 결국 막지 못했고 무력하게 시르쥬의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이제부터 과연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지? 카이엔 못지않게 시르젤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오랜 고심 끝에, 시르젤은 결론을 내렸다. 그가 거부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만나보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비록 스스로의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을지라도. 만나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고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그 만남이 새로운 시작을 만들 수 있을지, 상처만 남긴 채 종말을 맞을 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모든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 "미안... 레나 누나." "응?" "아무래도 나, 이제 가야 할까봐." "뭐어?" 시르젤은 빙긋이 웃으면서 시레나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바닷속으로 몸을 날려 점프했다. 수면에서 바다 위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지만 시르젤은 망설이지 않았다. 풍덩 하고 바다에 빠지는 것과 동시에 시르젤은 눈을 뜨고 깨어났다. "여긴..." "이제 일어났어, 시르젤? 좋은 꿈 꾸었니?" 사라진 시아와세노 비치의 풍경 대신에 주변에는 백지와 같은 새하얀 공간이 아직도 그의 주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환상이 만들어낸 또 다른 시레나의 모습도 사라지지 않고 자리에 남아 시르젤이 펑펑 울면서 생긴 눈물자국을 손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꿈에서 깨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환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아마도 환상 속에서 또 다른 꿈을 꾼 것 같았다. "그 꿈은... 당신이 만든 것입니까?" "당신이라니. 어머 싫다. 시르젤. 누나라고 부르지 않겠니?" "그건... 곤란합니다. 이미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제 마음속에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너무하네. 그렇다고 면전에서 죽었다고 할 것까지는 없잖아? 게다가 나는 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시레나의 모습이 맞으니까 잔말말고 누나라고 불러. 그리고 그 남을 대하듯 딱딱한 말투도 집어치우고. 정말이지 3년동안 정나미가 뚝 떨어지게 변했다니깐?" 보통 환상이 스스로 환상이라던 것을 시인하던가? 시르젤은 헛웃음을 흘리면서 허상 속의 누나의 말을 받아들였다. 평소라면 말투를 갑자기 바꾸기 어려웠을 테지만, 오래간만에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감정을 해소한 탓인지 의외로 쉽게 말이 나왔다. "변함없네... 누나는. 하긴 내 마음속에는 그런 이미지로 남아 있으니까." "자꾸 환상 환상 하지 마. 듣는 환상 기분 나빠." "아하하핫." 웃음이 나왔다. 아까부터 시레나 누나의 모습을 보자 자꾸 조금씩 웃음이 새어나왔지만 이제는 참을 수가 없어서 입을 아예 크게 벌리며 웃었다. 이것 역시 또 옛 모습 그대로다. 항상 밝고 명랑했기 때문에 그녀가 있으면 심각한 분위기도 화기애애하게 웃음 띤 분위기로 전환된다. 이것 또한 얼마만에 마음놓고 큰 소리로 웃어보는 건지 시르젤은 알 수 없었다. 이것이 현실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이 진실이었다면 얼마나 기쁠까. 지금 이 곳에서 영원히 그녀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Let me be with her... 하지만 이미 결론을 내렸다. 낙원의 꿈에서 깨어나는 것은 괴로운 일이지만, 그런 한심한 꼴을 보이는 것은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니겠지. "고마워. 누나." 시르젤은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흘리며 환상의 시레나에게 인사했다. 만약 그녀가 원한다면 시르젤을 영영 마음의 포로로 묶어둘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시레나는 비록 환상이지만, 시르젤이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죽는 순간에도,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았던, 자신보다 훨씬 강한 마음을 가졌던 시레나 케이리가. 그런 그녀를 시르젤은 미칠 정도로 좋아하고 있었고, 그녀의 죽음 때문에 결국 마음이 닫혀 버렸을 정도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야... 난 누나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아... 만약 누나가 아니었다면 난 아직도..." "으응. 꼭 그렇지는 않아. 네 마음은 이미 열려가고 있었으니까... 내가 아니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극복할 수 있었을 거야. 푸훗. 역시 마음의 상처를 감싸안아 줄 수 있는 소중한 사람의 존재는 중요하다니깐?" "아하하핫." 그녀가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시르젤은 알 수 있었다. 감정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나? 시르젤의 마음 속에는 시르젤의 죽음에 대한 명백한 분노와 슬픔이 자리잡고 있어서 가슴을 아프게 찔러대고 있으면서도 카이엔을 좋아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물어도 돼?" "응. 어떤 건데?" "내가 좋아. 아니면 카이엔이 더 좋아?" "그... 그건... 둘 다 좋아하면 안될까?"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눈웃음지으며 이야기하는 시레나의 말에 머뭇거리던 시르젤은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대답했다. 똑같이 소중한 존재에 우열을 말해달라니, 난감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게 양다리를 걸치겠다는 의도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역시 그 아이가 더 좋은거네..." 시레나는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시르젤이 당황스럽게 뭐라고 응답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시레나가 시르젤의 말을 끊고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알아. 똑같이 소중한 존재에, 우열을 가린다는 건 어렵겠지. 하지만 니가 그렇게 말했을 때 이미 이야기는 끝난거야. 죽은 존재와의 사랑이라는 것은,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 아이와의 관계는 앞으로 얼마든지 더 나아갈 수 있잖아?" 정곡을 찌르는 시레나의 이야기에 시르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과거 속에 묻힌 시레나 누나의 기억은 수채화같이 화려하게 채색되어 남아 황홀한 추억을 끝없이 마음 속에서 불러일으켜 주지만 있지만 정지된 영상 그것으로 끝일 뿐. 미래로 나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굳이 두 사람 중에 누구를 더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선택해야 할 길은 정해져 있었다. "너무해. 카이엔은 원래 내가 좋아하던 애였는데 뺏아가 버리다니 말야." "누나가 나한테 부탁한다고 맡겼잖아?" "그랬나? 그건 그렇고... 이제 갈 거야?" "응. 아쉽지만... 가야지." 비록 자기 마음 속에 남아있는 시레나 누나의 잔재들이 만든 환상이라고 할지라도, 시르젤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기에는 아직 살아가야 할 이유, 미래로 나아가야 할 중요한 이유가 남아 있었다. 아니, 이유를 되찾았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그럼... 잘 가. 레나 누나..." "난 언제나 네 마음속에 남아 있으니까... 바보같이 그만 울어. 너까지 3년 전의 철부지로 돌아간 거야?" "어라? 아하하하..." 상대가 환상이라고 할지라도, 진한 작별의 아쉬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자신도 모르게 절로 눈물이 새어나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무래도 오늘따라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것이, 3년동안 쌓여있던 눈물을 모두 쏟아내려는 지도 모르겠다고 시르젤은 생각하면서 눈물 흘리는 얼굴로 웃음지으며 환상 속의 누나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파라디스의 얼굴이 있었다. "외할아버님..." "일어났구나..." 비록 순간뿐이었지만 시르젤은 파라디스의 얼굴과 말투에서 지금까지는 보지 못했던, 진실한 염려의 감정이 들어가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파라디스는 다시 엄격한 얼굴로 돌아가 시르젤에게 말했다. "아직 다른 사람들은 깨어나지 않았다. 백야는 내가 확인했으니 너는 쓰러진 다른 케이리가의 사람들을 돌보거라. 나는 티아라를 깨워봐야겠다." "알겠습니다. 그건...?" 시르젤의 눈이 파라디스가 쥐고 있는 루비빛 펜던트에 멈췄다. 분명 어디선가 봤던 물건... 시르젤은 잠깐 머리를 굴린 끝에 1년 전에 시르팡의 이름으로 훔쳤던 한 물건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낼 수 있었다. "진실의 펜던트... 군요." 펜던트가 사용되는 대상에게 허상을 뚫고 진실을 바라보는 힘을 가져다 준다고 하는 물건이었다. 뭐, 그의 엄마는 단순히 펜던트가 아주 예뻐서 수집하려고 했다는 것 같다만. 이곳에 있는 콜렉팅 룸에는 그런 식으로 모아들인 진귀한 물건이 수십 가지 이상 존재하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이 깨어나는 데에도 저것의 도움을 받았을 거라고 시르젤은 결론짓고 셰더의 정신결계에 당한 사람들을 찾아 돌보기 위해 백야의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은빛마녀님 // ...키스씬을 왜 수정합니까... 그게 하일라이튼데! 저도 근간이고 찍혀 나온 걸 보고 하루종일 베헤헤 거리고 다녔다죠^^ 에우로페&러비마녀님 // ...잘팔리면 더 쓸지 모릅...(타앙!) 네코~♡님 // ...으음. 다시생각해보면 듀엣으로 넣어달라 할 껄 그랬나요? but [엣찌나노와 이케나이토 오모이마스!] 셀레네스님 // 사실 별로 수정한 것도 없답니다... 인물묘사 조금 더 넣고 버그 수정한 것뿐... 원래는 새 에피소드를 넣어볼까 했는데... 잘 안되더군요.(표지는 아직 안나온 거... 같습니다. 곧 나온다고 했는데... 꿍얼꿍얼) 밝은눈님 // 어쩐지 처절해 보이시는 대사...^^ 감사합니다. 그외에 코멘 달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귀차니즘 모드 발동 -_-;;; 항상 강조하지만 코멘 안달아준다고 차별하는게 아니랍니다... 그날그날 필이 꽂힐 때만 답변하거든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벽을 넘어서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65화 : 벽을 넘어서(To overcome the Broken-Heart) (3) ------------------------------------------------------------------------- "티아라..." 시르젤이 방을 떠나자, 파라디스는 쓰러진 티아라의 손을 꼭 잡고 그녀의 이름을 무슨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중얼거렸다. 성격상 자주 내색을 하지는 못했지만, 파라디스는 지금까지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그녀에게 정말로 감사하고 있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티아라는 정말로 괴롭고, 힘든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시레나의 환상이라도 본 건지 쓰러진 내내 눈물만 흘렸던 시르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아마 티아라가 무슨 환상을 보고 있을지 파라디스는 짐작하고 있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지금은 세월 속에 아픔이 씻겨졌을 테지만 그렇다고 기억 그 자체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 원인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파라디스는 알기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부디... 이겨내기를."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파라디스는 티아라의 가슴에 진실의 펜던트를 가져다 댔다. 퍼억 케이리가의 또 다른 근거지 중의 하나, '쿠루시이 프리즌'에서 한 소년의 주먹이 작렬했다. 진한 초록빛 머리카락에 차갑게 가라앉은 초록색 눈빛을 빛내고 있는 소년의 이름은 파라디스 케이리가. 차기 케이리가를 계승할 최고의 재목으로 평가받고 있는 소년이었다. 그는 혐오감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짧은 욕을 퍼붓고, 침을 뱉었다. "미친놈. 퉤!" 그리고 맞은편에 쾌속같이 날아간 주먹을 맞고 땅바닥에 힘없이 구르는 연두색 머리카락에 갈빛 눈동자를 지닌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티에리 더블리스. 케이리가 가에 속해있는 수많은 암살자 수업을 받고 있는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파라디스는 쓰러진 티에리를 퍽퍽 차더니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그의 고개를 쳐들었다. 입술이 터져 입에서 피가 흐르고, 코가 으깨져 있는 등 그의 얼굴은 완전히 엉망이 되어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해보시지, 이 또라이 새끼?" "저는... 파라...디스님을... 정말로... 좋아..." 빠각 파라디스의 킥이 잔인하게도 티에리의 사타구니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티에리는 눈이 뒤집어진 채 입에 거의 거품을 물다시피 하며 아랫도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져 뒹굴었다. "다음에도 헛소리를 나불댈 거라면, 거기 붙은 쓸모없는 물건은 떼고 찾아와!" 쿠루시이 프리즌의 차가운 쇠창살 안에 티에리를 남겨둔 채, 파라디스는 잔뜩 기분나쁜 얼굴로 궁시렁거리며 감옥 복도를 걸어갔다. 애초부터 예쁘장하게 생긴데다 남자답지도 못한 머저리가 뜬금없이 고백을 해 왔고, 그때마다 처절할 정도로 두들겨맞으면서도 지독하게 포기하지 않는 사실에 파라디스는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오죽하면 아빠에게 부탁해서 이렇게 감옥에 집어넣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지독한 소년이. 진짜로 그걸 떼버리고 나타날 줄은 파라디스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음모와 오해, 살육으로 점철된 케이리가의 계승자 분쟁 과정에서 그가 자신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되고, 결국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까지 빠지게 될 거라는 사실도. 돌아봐주지 않는 짝사랑은, 쓰라릴 만큼 괴로운 일이다. 게다가 그 당사자가 자신을 죽도록 혐오하니 한 가닥 희망조차도 보이지 않는 슬픈 사랑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감정이 그러하듯 티에리도 어째서 같은 남자인 그에게 사랑까지 느끼게 되었는지는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단지 동경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는데... "으그윽... 허억..." 지독한 고통을 참으며 몸을 뒹군 끝에 간신히 사타구니의 고통이 사그라들기 시작하자, 얻어맞았던 다른 부위의 상처가 통증을 티에리의 두뇌로 전달해왔다. 그렇지 않아도 그동안 워낙 파라디스에게 얻어맞은 터라 온 몸이 곪은 상처로 가득 차 있는 터였다. "그래도... 보고 싶은걸..." 절대로 그의 눈길이 자신에게 머물 리 없다는 것을 티에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바보같은 이 마음을 포기할 수 없었다. 티에리가 감옥에 갖히게 되면서 그의 부모님도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굳은 얼굴로 티에리에게 묵직한 주먹 몇 방을 날려 쓰러뜨리더니 의절을 선언했고, 그의 어머니는 참한 신부감을 소개해 주겠다느니 하면서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지만 결국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제는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서 너무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이룰 수 없는 연모의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막상 생을 마감하려고 몇 번이나 결심했으면서도 항상 마지막 순간에는 죽기 전에 한번만 더 파라디스를 보고 싶다는 감정이 왈칵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었다. 차라리 죽으려면 파라디스에게 죽임당하는 편이 나을텐데... 라고 티에리는 생각했다. 하지만 파라디스는 티에리를 반 죽음 직전까지 패기는 했지만 결코 죽음에 이를 만한 치명적인 상처는 남기지 않았다. 케이리가 내부 식구끼리의 살육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고, 파라디스는 감정에 휘말려 중요한 규칙을 깨는 실수는 행하지 않았다. 소년 시절, 아직 티아라가 되기 전의 소년 티에리로 돌아가 있는 그녀의 마음은 계속해서 잔혹한 어둠 속을 헤메고 있었다. "으으으..." "잘 안되는 건가..." 아무래도 진실의 펜던트가 잘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시르젤에게는 그런대로 잘 먹혔는데 역시 티아라에게는 잘 먹히지 않는 것 같았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만큼 그녀의 상처가 깊단 말인가...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만큼 파라디스도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무수한 상처를 그녀에게 주었는지 파라디스 스스로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내 욕심뿐인 부탁일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돌아와줘... 바보같고 고집스러운 나 자신이지만, 그래도 내겐 네가 필요해... 파라디스는 몸을 부르르 떠는 그녀를 조용히 자신의 품에 꼭 껴안았다. 티에리는 몇 달 동안 쿠루시이 프리즌에서 갖혀있다가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그리고 케이리가가 있는 본거지와는 한참 떨어진 변방의 기지에 배속되었다. 하지만 그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미 성적 정체성이 드러난 그에게 선배 암살자들과 수업을 받고 있는 동료들은 노골적으로 조소와 냉대를 퍼부었다. 하지만 티에리에게는 주위의 따돌림에 의한 외로움보다도 파라디스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슬픔에서 돋아나는 외로움이 더욱 괴로웠다. 그로부터 딱 1개월째에, 티에리는 무기한 휴가를 제출하고 길을 떠났다. '반드시... 파라디스님이 돌아볼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 돌아오겠어!' 몇 번이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절망을 겪었으면서도 티에리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길을 나선 티에리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대륙의 흑마법사들 중에서도 가장 성적인 기행(奇行)에 대한 악명이 높은 자코 이사크였다. 땡전 한푼 없었던 티에리는 자신을 여자로 만들어 주는 조건으로 이사크가 내린 위험하기 그지없는 암살 임무에 몇 번이고 홀홀단신으로 투입되었다. 비록 케이리가 출신이긴 하지만 견습생에 불과했던 그가 임무를 어떻게든 성공시키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거의 기적적인 일이었다. 이사크 자신도 버린 패(牌)로 활용하려고 했던 티에리가 끝까지 살아남자 놀라워했을 정도였으니까. 부정(不正)하기는 해도 흑마법사는 약속으로 그들의 힘과 권능을 발휘하는 사람들. 이사크는 어쩔 수 없이 티에리의 소원대로 그를 여자로 만들어 주고는 티아라라는 새로운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하지만 그녀를 놓아 준 것은, 몇 번이고 자신의 변태적 성욕을 충족시키면서 결국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으로까지 만들어 버린 후였다. 티에리. 아니 이제는 티아라가 된 그녀가 케이리가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두 번 놀랐다. 첫번째는 당연히 그의 성별이 바뀌어 그녀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고 두번째는 하급 수준의 정식 암살자로 손색이 없을만큼 일취월장한 그녀의 실력 때문이었다. 이사크에 의해 혹독한 실전에 그대로 내팽개졌어야 했던 그녀의 실력향상에 그녀 자신도 놀라워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라디스의 태도가 하루 아침에 바뀔 리는 없었다. 여자로 변한 티아라를 파라디스는 그에게 구애하는 여러 여자들 중 하나로 묶어버렸는지, 그래도 여자라고 때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이전처럼 폭력이나 욕설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다만 코웃음을 치면서 싸늘한 눈빛을 던질 뿐이었다. 오랜 고생을 거쳐 그동안 많이 성장한 티아라는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가 알아주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단지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 나갔다. 그렇다고 해서 파라디스를 향한 애정에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생일날 직접 만든 팬케이크를 선물로 보내는 등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꾸준한 애정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휘익! "크윽!" "괜찮나요, 파라디스님!?" "너나 걱정하라고, 머저리 계집. 방심했을 뿐이니까." 파라디스는 장딴지에 꽂힌 단검을 억지로 빼내면서 말했다. 짙은 어둠 속에서 검게만 보이는 피가 다량으로 흘러나왔다. 티아라가 긴급히 윗옷을 찢으며 파라디스의 상처를 감싸며 동여맸다. 가슴을 고정시키는 붕대를 제외한 그녀의 상반신 전체가 암흑의 공간 속으로 희미하게 새어들어온 빗줄기에 드러났다. 벽에 몸을 기대며 여전히 그들을 습격한 적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는 그녀의 유려한 상반신 곡선이 보일 듯 말듯한 명암 속에서 부드럽게 움직였다. 긴급히 사각지대(死角地帶)로 이동하기는 했지만, 그들을 노릴 수 있는 포인트가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바보년... 그렇게 하면 방어력이 떨어지잖아." "자기 걱정부터 하십시오. 파라디스님. 제 몸은 제가 지킬 수 있습니다. 어서 빨리 상처를..."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내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어!" 파라디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다리 부상은 필연적으로 기동력을 떨어뜨리고, 신속한 움직임을 자랑으로 하는 암살자에게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자신이 예전에 완전히 무시했었던 티아라의 현재 실력이 자신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기분나쁘긴 해도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짐이 되어 버리다니! 자기 자신을 한심하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파라디스는 왜 이런 습격을 받게 된 것일까? 발단은 쥬리딜의 왕위계승자 암살임무를 의뢰받고 일에 나선 파라디스 케이리가의 아버지, 델 파라디스가 그 나라의 수석마법사 루밀 아스트랄의 함정에 걸려 살해되면서부터 문제는 시작되었다. 이 경우에는 상대가 생각보다 훨씬 교활했고, 주도면밀한 것이 패인이었지만 그럴 지라도 대륙 최대의 암살집단의 총수가 직접 나선 임무가 실패하고 죽음까지 당한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케이리가 가문에 최대의 시련이 닥쳤다. 당장의 평판이 떨어지고 중요한 의뢰가 줄어든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내부의 분란이었다. 케이리가의 수뇌부는 비록 시기는 이르지만 전 총수의 의지대로 파라디스에게 총수를 맡기자는 파와, 파라디스의 자질은 인정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며 그의 숙부에게 중간다리 역할을 맡겨야 한다는 파로 나뉘어졌다. 권력을 둘러싼 두 파벌의 대립은 시간이 지날 수록 격화되어 갔고, 결국 규율을 깨면서까지 암습을 가해온 것이다. 슈욱 티아라가 어둠 속에서 파라디스를 노리는 또 다른 눈빛을 감지하고 선수를 쳐서 표창을 던졌다. 제대로 맞은 걸까? 반대편에서 희미하게 으윽 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쿵 하며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직 부근에는 몇 명의 암살자가 더 남아 있었다. 파라디스 앞에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티아라는 숨을 쉬지 않는 것일까 염려스러울 정도로 긴장의 끈을 풀지 않은 채, 적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상대는 자신보다 강하면 강했지 결코 약하지 않은 베테랑급의 암살자들이었다. 하지만, 부상까지 입은 파라디스를 자신이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지킬 수 없더라도 적어도 이쪽 편의 파벌들이 눈치를 채고 달려와 줄 정도의 시간은 끌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지가 티아라의 갈빛 눈동자에는 강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길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겨야 해.' -------------------------------------------------------------------------- ...사이드 스토리 진행중. 아시에 문제가 해결되면 그야말로 막가는 스토리가 될겁니...(냐하) 첫 경험은 조금 더어∼ 있다가아∼ 아잉♡(타앙!)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벽을 넘어서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66화 : 벽을 넘어서(To overcome the Broken-Heart) (4) ------------------------------------------------------------------------- "으흡... 으윽." 파라디스가 신음소리를 흘렸다. 케이리가 특유의 만능 해독제(mithridate)를 집어삼킨 모양이었다. 아까 그를 공격한 단검에 어떤 독이 발라져 있을지 모를 일이므로 당연한 대처였다. 티아라는 계속해서 벽에 몸을 기댄 채 주위의 기척에 정신을 집중했다. 현재 주변에 남아 있는 적으로 추산되는 인원은 모두 세 명. 그들 역시 티아라와 파라디스가 만만치 않다고 판단한 듯, 서로가 역할분담을 맡아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따라와라... 계집." "티아라라고 불러 주십시오." 파라디스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리를 다소 절뚝거리고는 있었지만, 기백을 잃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티아라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이 포지션에서 이동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판단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파라디스를 믿기로 하고 잠자코 그의 판단에 따랐다. 파라디스가 일부러 나쁜 장소에서 적와 맞서 싸울 바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딘가 빠져나가는 길이라도 있는 걸까? 팟! 팟! 파팟! 파라디스와 티아라가 자리를 벗어나자마자 여러 개의 암기가 시차를 두고 연속적으로 날아왔다. 티아라는 황급히 땅을 굴러 암기를 피했고, 파라디스는 몇 개는 피한 후, 나머지는 단검을 빼들고 쳐내버렸다. 상처 때문에 움직임은 다소 둔화되었지만, 선천적으로 타고 난 그의 전투감각은 전혀 무뎌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적들의 견제를 피해 반대편의 사각쪽으로 이동했다. 파라디스는 적들의 눈에 띄지 않는 그곳에서 망가진 벽돌 몇 개를 재빨리 불규칙적으로 배열했다. 그리고 벽을 가볍게 톡톡 세 번 두드렸다. 그러자 벽 밑에 개구멍에 가까운 좁은 구멍 하나가 열렸다. "여긴..." "따라와." 파라디스가 먼저 구멍 속으로 들어갔고, 티아라가 주변을 경계하면서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좁고 길게 이어진 통로를 어느 정도 기어가자 개구멍이 닫혔고 배열된 벽돌은 다시 제멋대로 흩어져 버렸다. 사라진 파라디스와 티아라의 낌새를 뒤늦게 눈치챈 적들이 잠시 후 그 위치에 돌입했지만, 그들은 두 사람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좁고 길며, 경사지고 거친 통로를 계속해서 기어나갔다. 보통 이런 종류의 비밀통로는 케이리가의 최고 수뇌부들이 아니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어떤 통로 중에서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사람만이 아는 곳도 있다. 티아라에게는 이런 비밀 통로의 존재는 막연하게 듣고 있기는 했어도 직접 통과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리는... 좀 어떠십니까?" "안 좋아." 파라디스는 짧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질문 자체를 귀찮아하는 태도가 역력해서 티아라는 그만 머쓱해졌다. 파라디스는 티아라와의 화기애애한 담소 같은 건 전혀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서로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은 채 차례대로 통로를 기어갔다. 하지만 암흑속의 정적이라는 답답한 환경 속에 먼저 질려 버린 것은 파라디스였다. "왜 날 도왔지? 티에... 아니 티아라?" "티아라라고 불러 주시는군요." 티아라의 앞에서 기어가고 있기 때문에 파라디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티아라는 마치 천상의 복음(福音)이라도 들은 듯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티에리였던 시절에도, 티아라로 다시 케이리가로 돌아온 후에도 파라디스는 그 혹은 그녀의 이름을 한 번도 제대로 불러준 적이 없었다. "음음... 도와준 사람에 대한 예의일 뿐이다." 파라디스는 자못 묵직한 말투로 말했지만 티아라는 그런 파라디스의 모습이 깜빡 실수한 것을 억지로 정당화시키는 것 같아서 쿡쿡 웃음이 나왔다. 어쨌건 앞으로는 계집이라든지 너라는 호칭으로 불릴 일은 줄어들 것 같았다. 이로서 조금은 그와 진전이 있게 된 걸까? "뭐가 우습나?" "아닙니다. 제가 파라디스님을 도와 준 건... 예나 지금이나 같은 이유에서지요." "...." 파라디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기어나갔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녀에 대해 온갖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마주쳐왔던 티아라의 대쉬가 드디어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독한 년.' 파라디스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몇 번이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 데다 나중에는 폭행을 가하고 감옥에 가두는 지독한 꼴을 당했으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은 그로서도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 악명높은 이사크에게 찾아서 결국 성별마저 바꿔오다니! 게다가 무슨 일을 하다온 것인지 실력마저 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급상승해 있었다. 여전히 그녀의 연모심을 스토킹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는 그였지만 그녀의 꺾이지 않는 의지 하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티아라는 파라디스가 이 암습의 위기를 탈출하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자기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사력을 다해 파라디스를 보호한 그녀가 "여기서 쉬어가도록 하지." 짧게 말하며 파라디스는 종이로 만든 짧은 담배연초를 꺼내 한 대 피워물었다. 어둠이 깔린 좁은 공간에 담배연기가 퍼져나갔고, 익숙하지 않은 냄새에 티아라는 얕게 콜록거렸다. 그 모습을 본 파라디스가 담뱃재를 톡톡 털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완전히 빠져나가고 난 후에 할 말이지만, 도와줘서 고맙다." "별 말씀을요. 제가 원해서 한 일입니다." 무뚝뚝해 보이는 말이지만,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은 티아라가 부드럽게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뭔가 원하는 게 있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 주지."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제게 키스해주실 수 있습니까?" "...." 파라디스는 아무 일도 아닌 듯 평상시의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무의식중에 담배를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마음에 동요가 일었던 것이다. 원하는 게 고작 그 정도냐? 라는 코웃음이 나왔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는 어딘지 모를 꺼림직한 감정이 존재하고 있었다. '젠장! 왜 이러지... 내가 왜 여자에게 키스해주는 것 같은 하찮은 일을 가지고 망설이는 거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장 박동 소리가 빨라지면서 마음이 흔들리는 것에 짜증을 느낀 파라디스는 이런 바보같은 짓 빨리 하고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거칠게 그녀의 몸을 껴안고 입술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웬걸? 그가 요즘은 초등학생도 키스라고 인정하지 못할 정도의 입맞춤을 후닥닥 끝내고 입을 떼려고 했을 때 티아라가 그를 꽉 끌어안고는 놔주지 않았다. "으읍! 읍!(왜 이래! 어서 놔!)" 하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의 팔을 붙잡은 티아라의 억센 손길을 파라디스는 뿌리칠 수가 없었다. 내가 힘으로 계집애한테 뒤지다니! 파라디스는 분통이 터졌다. 눈을 감고 있다가 살짝 뜬 그녀의 눈빛에 정체모를 기분나쁜 안광이 나빠져서 문득 섬뜩해졌다. 하지만 이미 그의 몸은 밀착한 그녀의 육체가 가져다주는 마약같은 짜릿한 느낌의 흥분감에 점차 무너져내려가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아직까지 여자경험이 전혀 없었고 따라서 면역력도 약했다...; 그랬다. 티아라는 사실 야비공이었던 것이다...(-_-;;;) 그리고 이후 파라디스는 갈수록 티아라에게 줄이 매여가게 된다. 티아라의 낯빛이 눈에 띄게 안정되어가고 있었고 숨소리도 점차 고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아직 환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파라디스는 우선 한숨을 돌렸다. 비록 괴로운 꿈이었겠지만 이미 그녀는 그런 고통을 여러 번 극복해내었으니까, 여기까지 상태가 호전되었다면 이제는 안심해도 되겠지. "파라군... 아잉♡ 너무좋아∼" "...." 파라디스의 이마에 힘줄이 불끈 돋았다. 이거 인제 고생은커녕 좋은 꿈을 꾸고 있잖아! 게다가 나이에 맞지 않는 교성이라니! 진심으로 걱정한 자신이 바보같아졌다. 그래서 잠시 후 마침내 티아라가 깨어났을 때, 파라디스는 일부러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일어났냐? 정신을 차리는 게 꽤 늦었군." "걱정해 줬군요. 고마워요. 여보." 티아라는 피식 웃었다. 일부러 아닌 척 해도, 그의 행동패턴은 이미 티아라에게 완전히 파악되어 있다. 두 사람이 부부가 된지도 벌써 몇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까... 귀엽게 행동하지 못하는 점이 의외로 귀여운 사람이라니깐? 이라고 티아라는 생각하면서 스스로 바닥에서 일어섰다. 곧이어 다른 사람들을 모두 깨운 시르젤도 올라와 합류했다. 백야는 이미, 셰더의 본거지 코앞에까지 와 있었다. -------------------------------------------------------------------------- 다음번에는 아이렌 나온답니다 ^_^ 그리고 변태 모드 on! (-_-);;; P.S : 티아라의 성전환은 이전 '부모인사 -시르젤-'편에서 살짝 언급했었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위즈는 로리콘?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67화 : 위즈는 로리콘? (1) ------------------------------------------------------------------------- 위즈 하켄크로이츠. 비록 카이엔의 위세에 눌려 있기는 하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대륙 서열 제2위의 미소년이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온몸에서 잡아먹어 달라는 러블리 큐티의 분위기가 펑펑 풍기는 카이엔과는 달리 그의 미모는 타고난 외모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완벽한 몸을 만들기 위해 계획적으로 운동을 하고, 몸에 기름을 바르는가 하면, 얼굴에도 화장을 하고 눈썹을 손질하는 등 그는 스스로의 외모를 꾸미는데 온갖 정열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외모뿐만이 아니다. 타고난 연기자로의 소질을 타고난 그는 갖은 연습을 거쳐 영화배우 뺨치는 연기 솜씨를 발휘하고 있었고, 교양도 상당한 그야말로 만능에 팔방미인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위즈의 기분은 최근 그다지 좋지 못했다. 나름대로 열과 성의를 들여 모처럼 카이엔 브리타뉴와 일전을 벌이려고 준비하고 쳐들어갔는데 정작 카이엔은 중간에 어디론가 뿅 하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브리타뉴 가에서 입단속을 시키고 자꾸 뭔가 쉬쉬하는 것이 아무래도 수상했지만,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자신을 찾아오던 동생 시즈가 갑자기 정체불명의 마녀에게 납치당했다는 비보를 얼마 전 접해야 한다. 상대가 흑마법을 쓰는 마녀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남아있지 않아 위즈는 사라진 동생에 대해 애만 탈 뿐, 마땅히 어떻게 찾을 방법을 강구해내지 못했다. "거, 오늘은 여자애들 안 데리고 왔소?" "그냥 단순히 개인적인 용무니까요..." 위즈는 브리타뉴가의 문지기에서 힘없이 말했다. 무력감에 빠진 위즈가 결국 찾은 곳은 브리타뉴가의 저택이었다. 카이엔은 어디로 가 버린 걸까... 그들이 대답해 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못 다한 승부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아 있었다. 만에 하나 사라진 동생의 행방을 알 지도 모르고... 시즈가 사라진 곳은 유클리네 왕국의 국내 어딘가였으니 말이다. "유감스럽지만 오늘은 두 내외분과 세이렌 아가씨, 사이엔 도련님이 모두 집을 비웠소. 집에는 집사님과 어린 도련님들밖에 없수다. 뭐 손님들도 몇 명 남아있긴 하지만..." "역시 카이엔 씨는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다들 카이엔 도련님을 찾으러 갔다는구만... 그래도 만날 사람이 있소?" "대륙 제일의 예언가, 브라이트 아이(Bright Eye)께서 이곳에 머물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만나게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보통 방법으로 시즈를 찾을 수 없다면, 예언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고 위즈는 생각하고 있었다. "역시 레이엔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시르케? 얼마 전에는 그거 제대로 서지도 않는 주제에 날 덮치겠다더니 하는 헛소리를 내뱉은 주제에 또 얼마 되었다고 다른 여자를 꼬셔서 히히덕대고 있는 거야!?" [글쎄....?] 아이렌 브리타뉴는 요즘 급작스런 분위기에 매우 당황스러워 하고 있었다. 갑자기 카이엔이 사라진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집을 방문했었다. 엄마 아빠와 세이렌, 사이엔, 심지어 집사와 레이엔마저 그 사람들 사이에 끼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심각하게 나누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카이엔 오빠를 구하기 위한 모임일거라고 아이렌은 생각했다. 카이엔의 정체가 어쩌니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들었지만 대체 그런 것이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이렌은 정체 같은 것 따위는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이 가진 카이엔의 환상이 깨지는 것은 원치 않았으니까. 어쨌건 그런 덕택에 아이렌은 한동안 무관심하게 집안에 방치되었다. 레이엔은 여전히 아이렌을 찾아 뭐라고 말을 붙이려는 것 같았지만 '그런 저질 따윈 사절이야!' 하면서 아이렌 쪽에서 피했다. 어느 쪽이 더 저질인지는 알 수 없겠지만... 홀로 남겨진 그녀는 대신 괜히 바쁜 정령왕들을 자꾸 불러내서 자신의 한풀이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바람의 정령왕 시르케이안이 시달리는 날이었다. [좀 많이 차였으니까, 포기하고 새 여자를 찾을 때도 된 게 아닐까? 아이한테는 귀찮은 사람이 사라졌으니까 더 좋은 게 아냐?] "그건 그렇지만..." 왜 그런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관심을 안 갖는 레이엔 쪽도 기분나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래나 저래나 밉다는 것은 스스로도 말이 안 되는 어린아이의 투정 같다고 아이렌은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런 감정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시르케 같은 정령왕들도 카이 오빠를 못 찾는 거야?" [어머나, 이전부터 얘기했잖아. 카이는... 우리 힘이 미치지 못하는 특별한 존재라고.] 이전에는 물론 몰랐었다. 하지만 16세 생일이 지나고 점점 부활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고 있는 마신 베링거의 존재를 정령왕들이 모를 리는 없었다. 하지만 시르케이안은 그 사실을 굳이 아이렌에게 알리지 않았다. 브리타뉴 가의 사람들 중에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진실을 아이렌에게 알리면 그녀가 어떤 상처를 받을 지 모른다. 이것이 브리타뉴가 사람들과 정령왕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감정이었다. 그 때 스테아와 레이엔이 서로 팔짱을 끼고 지나가는 모습이 멀리서 보였다. 자세히 보면 난감해하는 레이엔의 팔에 억지로 스테아가 팔을 집어넣고 끌고가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아이렌의 눈에는 단지 연인처럼 사이좋은 모습으로 보일 뿐이었다. 암흑에 가득 찬 질투단의 오라가 아이렌의 몸에 강림하여 질투의 불꽃을 피워올렸다. "저것들을... 그냥... 왜 저 스테아란 애는 계속 우리 집에서 머물러 있는 거야!" 아이렌은 괜히 바위를 툭툭 차면서 투덜거렸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스테아 만슈타인은 나이야 어쨌건 대륙 7대 현자 반열에 드는 중요한 손님이라는 것을 아이렌은 모르지는 않았다. 그 외에도 브리타뉴 가의 저택에는 아직 여러 손님들이 머물고 있었다. 대부분 전투력이 없어 케이라가를 공격하는 일에 나서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저기... 꼬마 아가씨?" "시르케! 난 꼬마가 아니라고 몇번이나 이야기했..." [내가 아냐. 아이] "에?" 아이렌은 뒤를 돌려 자신을 부른 사람을 찾아 뒤돌아보았다. 시르케이안이 아니면 누가 이런 데까지 와서 날 부른 거지? 집에 와 있는 손님들 중의 한 사람일까? 아이렌의 눈 앞에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신비한 은빛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는 살짝 가르마를 탄 갈빛머리의 아름다운 청년이 있었다. '헤에... 꽤 잘 생긴 사람이다?" 문지기의 허락을 받고 집안에 들어온 위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나게 넓은 브리타뉴 가의 집 안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집안이 여러 가지로 분주해서 사소한 손님까지는 안내를 해 줄 수 없었던 브리타뉴가의 사정도 있었지만 그래도 똑바로 난 길을 직선으로 따라 가기만 하면 본채가 나오는 데도 길을 잃어버린 데 대해서는 위즈가 상당한 길치라는 사실에 거의 모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원 한쪽에서 바람의 정령으로 보이는 것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꼬마의 모습을 보고 길을 묻기 위해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 꼬마 여자아이가 뒤를 돌아보면서 눈을 멀뚱히 떴을 때 위즈는 그 자리에서 바짝 굳었다. 어린아이답게 양 갈래로 땋아 묶은 귀여운 핑크빛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동글동글하고 호기심어린 황금빛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는 작은 꼬마아이는 그의 눈에 티없이 맑고 아름답게 비춰졌다. '아... 아름답다! 너무나 아름다워!' 그렇게 서로는 서로를 잠시 동안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다?' 아이렌과 위즈는 동시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눈앞의 상대에 대해 잠깐 생각의 시간을 가졌다. 잠시 후, 마침내 서로를 기억해낸 두 사람이 크게 소리쳤다. "아앗! 얼마 전에 우리 집에 왔었던 서열 2위 사이코!" "설마... 그 변태 여자들 사이에 있던....!" "내가 왜 변태얏! 실례라고!" "미... 미안." "뭐, 세이 언니나 시에 언니는 확실히 변태 맞지만 말이야..." "....."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었다. 어찌되었건 뜻하지 않은 두 사람의 단독회동은 그 동안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던 상대에 대한 재인식을 가져다 주는 계기였다. '헤에... 저번엔 도전 어쩌고 하면서 오버하는 바람에 자세히 못 봤는데 다시 보니 상당한 미남인걸? 아, 맞아. 서열 2위라고 했지? 확실히 카이 오빠보단 못하지만 꽤 날릴 만한 얼굴이긴 해. 카이 오빠가 잠시 정신을 못 차렸던 것도 이해할 만 한걸?' '아아... 어찌 이렇게 귀엽고도 아름다운 꼬마 여자아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숙적 카이엔과의 승부가 중요하다지만 이런 천사같은 아이를 제대로 보지 못하다니! 하마터면 천금을 줘도 바꾸지 못할 세기의 보석을 모르고 지나칠 뻔했구나! 아아...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 같이 욕탕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싶다! 서로 밀착해서 스트레칭 체조를 하고 싶다! 여러 가지 귀여운 옷들을 막 입혀보고 싶다!' 위즈의 상상은 이미 범인(凡人)의 범주를 벗어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보통 때는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며 결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지만 그는 사실 미성숙한 어린 여자아이 외에 다른 여자들은 성적 대상으로 보지 않는 중증 로리콘 환자였던 것이다. "꼬마 아가씨?" "꼬마가 아냐!" "미안... 그렇다면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 아. 저. 씨.!" 아이렌은 꼬마취급 당한 게 조금 분한 듯 가볍게 복수했다. 하지만 위즈 입장에서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객관적으로 봐서 아이렌은 분명 꼬마가 맞는데 왜 야단을 맞아야 하며, 자신은 아저씨와는 거리가 먼 나이스한 미소년인데 왜 그렇게 불려야 하는 거냐고 위즈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보자마자 먹은 결심이 무뎌진 것은 아니었다. 위즈는 잠깐 옷매무새를 바로잡은 후 살짝 이를 드러내고 가벼운 미소를 흘리면서도 진지한 자세로 아이렌에게 말했다. "나와... 결혼해주지 않겠어?" [어머나!] 시르케이안이 깜짝 놀라 가벼운 감탄사를 내뱉었고 아이렌은 잠시 동안 가만히 위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대답이 귀여운 그녀의 입에서 나올까? 위즈의 가슴이 긴장감에 두근거렸다. -------------------------------------------------------------------------- flow with love shining eyes I`ll follow you ... 냐함. 아포크리파나 구해서 해볼까나? (...하지만 일어압박은 귀찮은.....-ㅅ-) 러비마녀님 // 정곡을 함부로 찌르시면 암매장당할겁니다 (-_-)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위즈는 로리콘?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68화 : 위즈는 로리콘? (2) ------------------------------------------------------------------------- 부웅! 잽싸게 날아온 아이렌의 손바닥이 위즈의 뺨을 휘갈기려고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위즈는 비록 검과 활 같은 무기를 잡는 전사들만큼은 아니지만 오랜 연습으로 쌓인 발군의 운동 능력을 자랑하고 있는데다가 두 사람간의 키 차이 등도 있어 아이렌이 그의 뺨을 때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씨..." 하지만 위즈가 아이렌의 공격을 피한 건 실수였다. 아이렌은 단지 뜬금없이 헛소리를 내뱉는 위즈를 가볍게 한 대 먹여서 응징해주려고 했었을 뿐이다. 위즈가 진지하게 자기 공격을 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이렌은 화를 내며 소리쳤다. "시르케, 저놈 좀 잡아 족쳐!" [알았어.] "에헤헤엑?" 저... 정령? 그것도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의 의지를 가진? 그제서야 위즈는 기억 깊숙한 곳에서 그녀에 대한 자료를 끌어올렸다. 분명 브리타뉴 가에는 대륙 7대 정령 마스터 중의 한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설마 저 꼬마소녀가... 바로 그!? 아이렌 브리타뉴!? 휘이이잉 "와아아악!" 위즈는 시르케이안이 만든 바람에 휘말려 하늘을 뱅글뱅글 돌았다. 평소 남 앞에서 폼 재는 것을 일상사로 삼는 그에게는 볼썽사나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자리에 그에게 환호하는 팬이 없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잠시 후, 옷매무새가 완전히 망가진 상태로 땅바닥에 거꾸로 처박힌 위즈가 흙을 탁탁 털고 일어나면서 아이렌에게 말했다. "으윽... 아무리 마음에 안 든다 해도 이렇게까지 할 것까지야 없잖아?" "저리 가! 난 카이 오빠가 아니면 절대 아무한테도 시집 안 갈 거란 말야!" "뭐어!? 하아..." 결국 이 아이도 카이엔이 가진 마성의 미모에 빠진 사람 중의 한 명인 걸까? 위즈는 헛웃음을 지으면서 생각했다. 얼마 전에 여기 왔을 때 이상하게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조금은 의심스럽긴 했었다. 그렇다면, 거기 카이엔을 감싸고 있던 사람들 전부가 카이엔에게 대한 연애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새삼 위즈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사악한 녀석이다. 계집애같은 외모를 한 주제에 아무 노력도 없이 타고난 외모로 모든 사람들을 홀려버린다. 그런 녀석이 대륙 제1의 미소년으로 추앙받고 있다니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하다. 물론 위즈 자신에게도 많은 여자들이 따르고 있었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외모를 가꾸고, 센스있는 옷을 고르는 안목을 키워 왔다. 최고의 자리에 서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때문에 위즈는 억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귀엽고 예쁘고, 큐티하고, 카와이한 어린 소녀... 그것도 자기 동생을 홀려버리다니! 카이엔이 이런 아이를 매일같이 눈에 담고, 같이 풀밭에서 뒹굴고 놀며, 등에 업어 주고, 목욕탕에서 서로 발가벗고 물장난을 칠 거라는 생각을 하니(물론 카이엔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위즈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핏발이 섰다. "크윽...! 카이엔 녀석은 언제까지 내 앞길을 막을 셈이지!? 제길!"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목표로 삼은 거에요.] 시르케이안이 싱긋 웃으며 가볍게 바람을 일으켜 위즈의 몸 곳곳에 묻은 흙을 털어 주었다. 위즈는 당황하지 않고 금세 연기력 발동 모드를 발동시켜 자세를 잡고 시르케이안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오호호. 별 말씀을. 당신을 하늘로 날려서 돌린 것도 저인걸요.] "당신은... 아무래도 정령왕 같군요. 그렇다면 혹시 바람의 정령왕 시르케이안님인가요? 처음 뵙겠습니다." [오호호. 님 자는 붙일 필요 없답니다. 원하신다면 저를 시르케라고 불러도 상관없어요.] "야, 시르케! 저런 이상한 아저씨따윈 그냥 냅두라고!" 아이렌이 위즈의 옆에 다가가 눈웃음치는 시르케이안을 보고 눈쌀을 찌푸리면서 외쳤다. [알았어. 그럼 또 다음에 봐요∼ 위즈 하켄크로이츠 씨♡] "나참. 시르케는 잘생긴 남자만 보면 금방 살갑게 군다니깐." "자... 잠깐만!" "뭐야? 아저씨. 난 더 이상 아저씨한테 볼일이 없어." '아아... 저렇게 귀엽고 예쁜 아이가 어찌하여 저렇게 험한 말을 함부로 내뱉고 다닌단 말인가. 게다가 아저씨... 아저씨라니(ㅠ.ㅠ)! 내 나이가 몇인데 아저씨 소릴 한단 말야! 원래 어린아이는 좀더 어른에게 애교를 떨고 귀엽게 굴어야 용돈 한푼이라도 더 받고 사탕 한 알이라도 더 먹을 수 있는 것을 그녀는 모르는 걸까? 아마도 카이엔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이겠지. 크윽! 부러운 녀석!' 하지만 아무리 망상의 날개를 펼쳐보아도 슬프지만 보기 좋게 차이고 만 것이 눈앞의 현실이었다. 손에 쥘 수 없는 아름다움이란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일단은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위즈는 그렇게 생각하고 좀 더 아이렌의 모습을 눈 가득히 담아두려고 애쓰며 시르케이안에게 말했다. "시르케이안... 씨. 그게 무슨 말이죠?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상대라니...! 그런 건 전 인정할 수 없어요!" 위즈는 노력파다. 그 어떠한 일이라도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극복할 수 있고, 이겨낼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애초부터 이길 수 없다는, 운명지어졌다는 말은 오히려 더 전의를 자극하게 만들고 만다. 카이엔을 따라잡을 것을 포기하라는 시르케이안의 말은, 오히려 카이엔을 누르겠다는 위즈의 결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었다. [멋진 눈을 하고 있군요... 생동하는 젊음이 불타고 있는 듯한 그런 안광(眼光)이에요. 아직 젊으니까, 좌절하지 않고 꿈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도 좋지요. 하지만 세상은 결코 정의롭지도, 공평하지도 않다는 것을 언젠가는 이해할 날이 올 거에요. 그런데... 당신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음습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시르케이안은 뒤를 돌아 이미 저 멀리 가고 있는 아이렌의 뒤를 따랐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위즈는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설마... 저 정령왕은 눈치챈 걸까? 자신의 취미를? 취향을? 그리고 욕망을?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하켄크로이츠 저택 깊은 지하에는 위즈만 위치를 알고 있는 방이 몇 개 있다. 위즈는 고아원 같은 곳에서 귀엽고 예쁜 어린 여자아이들을 데려다가 그 방에 가두어 놓곤 했다. 방에는 그녀들이 가지고 놀 만한 각종 장난감이나 동화책뿐만 아니라 침대나 거울과 같은 생활 소도구들, 욕실과 같은 편의시설들이 전부 완비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어린 여자아이들과 함께 장난치고 노는 것이 위즈의 최대 행복이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위즈에게 가학성 취미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을 강제로 범할 만큼 썩은 정신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조금 비뚤어져 있기는 해도, 그는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그녀들을 아껴 주고 있었다. 물론 외부에 들통나지 않기 위해서 가둬두기는 하지만 그것도 몇 년이다. 소녀들이 점차 성숙한 몸매의 굴곡을 만들어 가기 시작할 때쯤에는 기억을 지우고 미련을 남기지 않고 떠나보냈다. 멍하니 서 있다가 아이렌과 시르케이안이 거대한 정원 저편으로 사라진 후에야 위즈는 그동안 깜빡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대륙 제일의 예언가 핑 슬레이트를 만나러 와서 브리타뉴 가 집 안으로 들어왔는데 길을 잃었던 것이다. "앗차! 본채로 가는 길을 물어봐야 하는데..." 아무래도 위즈는 누군가를 만날 때까지 한동안은 더 이 정원을 헤메야만 할 것 같다. -------------------------------------------------------------------------- ...위즈는 이런 놈이랍니다... 생각보다 훨씬 위험하죠?^.^ 다음 편에는 간만에 카이엔 이야기로 Back! 은빛마녀님//책 나오면 할 생각이에요. 현재 팬아트/팬픽/퀴즈 3개 분야를 기획중인데 다른 의견이라도 있나요? 글고 야오도 있는데 로리쯤이야..=_=;;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필독] 삭제공지. 생각보다 출판이 빨리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다음 주에 책이 나온다네요. 1권과 2권이 한꺼번에 나올 예정이랍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다소 촉박하게, 부득이하게 다소 많은 양이 삭제되게 되었습니다. 오늘(10/16)자정을 기해서 100편까지 삭제됩니다. 참조하세요. 그리고 3권이 나올때쯤 다시 삭제가 있을 예정입니다. 참조하세요. 제가 책을 받아보는 시점에서 이벤트를 시작할 계획입니다. 현재 팬아트에 4권, 팬픽에 3권, 퀴즈에 3권 배포 계획에 있습니다. 당첨자에게 책 전권을 줄지, 일부만 줄지의 여부를 놓고 고민중입니다. 응모기한은 다소 길게 잡을 예정이고요. 의견 있으면 코멘 달아주시거나 메세지 보내주세요. 참조하겠습니다. [필독] 삭제공지. 다음 주에 책이 나온다네요. 1권과 2권이 한꺼번에 나올 예정이랍니다. 참조하세요. 참조하세요. 현재 팬아트에 4권, 팬픽에 3권, 퀴즈에 3권 배포 계획에 있습니다. 당첨자에게 책 전권을 줄지, 일부만 줄지의 여부를 놓고 고민중입니다. 응모기한은 다소 길게 잡을 예정이고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강림(降臨)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69화 : 강림(降臨) (1) ------------------------------------------------------------------------- 아시에를 살리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셰더는 평소의 이미지답지 않게 진지해 보였다. 저래뵈도 스페셜리스트라는 걸까나? 하지만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나는 역시 심심했다. 하지만 저렇게 집중하고 있는데 방해하다가는 또 밖에 나가라고 쫓아낼 게 뻔해서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나티? 마나티는 떠들다가 또 방 밖으로 쫓겨난지 오래였다. "후우..." 셰더가 불투명한 우윳빛 액체가 담겨 있는 시험관을 손에 들었다. 다른 한 팔로 이마의 땀을 닦는 것을 보니 여기까지 오기까지 결코 쉽지 않았나 보다.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야?" 이쯤되면 한번쯤 물어봐도 되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셰더에게 말을 걸었다. "거의 마무리다." "정말?!" "그래. 그러니까 잠자코 보고만 있어." 셰더가 장갑을 끼고 성물 랜덤 리버스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시험관의 액체를 랜덤 리버스에 뿌렸다. 놀랍게도 우윳빛 액체는 딱딱해 보이는 표면을 따라 흘러내리지 않고 그대로 흡수되면서 점차 붉은빛이 사라지고 황금빛을 띠기 시작했다. "뭐... 뭐야?" "랜덤 리버스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촉매가 있어야만 해. 하지만 그 촉매를 만드는 것은 아주 어려운 과정이지. 나같이 훌륭하고 위대한 흑마법사가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 이 말씀!" "...잘났수 정말." 하여간 잘난 체는 엄청 한다니깐. 셰더 저 녀석. 하지만 내 가슴은 두근거리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아시에가 살아난다! 물론 효과가 랜덤이라서 완전히 살아난다고 보장할 수는 없지만 셰더의 말에 따르면 현재로서는 상당히 가능성이 높은 상태라고 한다. "그럼 잘 보시라!" 셰더가 작은 투입구에 랜덤 리버스를 집어넣었고 조그만 성물은 관을 타고 올라가 아시에의 시신이 떠 있는 유리병 안으로 들어갔다. 투명한 풀색의 액체 속에서 황금빛의 구가 더욱 더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랜덤 리버스의 빛이 강해지면서, 유리병 안에서 형체를 잃어갔다. 저건... 녹고 있다! 랜덤 리버스가 아시에를 감싼 액체 속으로 녹아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점차 유리병 내부의 액체를 금빛으로 물들여갔다. "아름다워..." 셰더는 약염기성 액체가 약산성으로 변하는 pH변화에 따른 효과일 뿐이며 방금 중화점을 지난 거라고 멋없는 설명을 옆에서 지껄여댔지만, 이미 황홀감에 빠져 있는 나는 아시에의 완전 부활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어 버리고 말았다. 저토록 아름다운 빛을 본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드디어 유리병의 액체 전체가 황금색으로 번쩍이고 있을 때, 액체 속에서 가만히 떠 있기만 할 뿐인 아시에의 몸 전체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 색깔이 갑자기 누렇게 뜨더니 금이 쩌억쩌억 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당황한 나머지 유리병 벽면에 손바닥을 대며 아시에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거의 죽은 색깔로 변한 피부 밑으로 새하얀 새로운 피부가 언뜻 보였다. 설마... 껍질이라도 벗는 걸까? 죽은 피부가 아시에의 몸에서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백옥같이 새하얀 아시에의 나신이 떨어져나가는 죽은 피부 아래로 점차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걸 환골탈태(換骨奪胎)라고 해야 하나? 놀라움에 가득 찬 나는 변해가는 그녀의 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뭐... 뭐야! 이런 현상은... 들은 적 없다고!" "뭐어?" "그냥... 눈을 뜨고 깨어나야 정상인데..." 무시라? 지금 아시에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셰더도 뭔지 모른단 말야? 와장창! "우와앗!" "으윽!" 내가 미처 셰더를 추궁하기 전에 갑자기 와장창 소리를 내면서 아시에가 담긴 유리병이 깨져나갔다. 나와 셰더는 화들짝 놀라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지만 유리병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물에 흠뻑 젖었다. 다행히 큰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유리병이 터져나오면서 깨진 조각들 때문에 몸 몇 군데 상처를 입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고 정면을 바라봤을 때. 눈앞에 알몸으로 서 있는 아시에는 눈을 뜨고 있었다. 눈을... 눈을 뜨고 있다! 정말로... 살아난 거야, 아시에? 문길아... 정말로... 하지만 무언가가 조금 이상했다. 눈앞에 있는 젖은 흑발을 늘어뜨린 여인의 모습은 분명이 아시에였다. 하지만 아까 껍질을 벗어낸 것 때문일까? 그녀의 빨려들 것 같은 연보라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마법이라도 띤 듯 더욱 사람을 홀리게 만들고 있었다. 비단 눈동자뿐만이 아니다. 오똑 선 코 먹어버리고 싶을 만큼 빨갛고 조그만 입술. 불빛 속에서 명암이 뚜렷히 드러나는 새하얀 얼굴. 갸날프면서도 긴 목덜미. 여전히 아름다우면서도 신비한 몸매. 그녀의 모든 외모가 이전보다도 훨씬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부활에 대한 인사도 잊은 채 멍하니 아시에의 모습을 바라보았고, 셰더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단지 셰더의 입가에 침이 줄줄줄 흐르고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저정도면... 대륙 제일의 미소녀 칭호를 줘도 되겠어... 카이엔 너와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외모다..." 그때 아시에가 나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날 빤히 쳐다보았다. 왜... 왜 그러지? 설마 깨어나자마자 날 덮칠 생각은 아니겠지? 아, 그러고보니까 지금 난 여자잖아? 그것도 지금 마법에 걸려 있는 상태고... "...역시 베링거, 너였어?" 아시에의 입에서 나온 갑작스런 말에 나와 셰더는 굳었다. 내 안에 마신의 환생체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 거야? 아니 그렇다고 해도 갑작스레 그런 말을 꺼내는 이유가 뭐야? "무... 무슨 말이야, 시에, 뜬금없이?" "시에? 흐음... 얼마 전까지 이 몸을 움직이고 있던 영혼을 말야? 그 영혼은 이미 이 몸을 떠난 지 오래인걸." "뭐... 뭐라고!? 그럼 넌 누구야!" 말도 안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 기껏해서 살려놓았더니 아시에가 아니라고! 웃기지 마! 그냥... 장난치는 거지? 아시에... 아니 문길아... 걱정한 나를... 짖궂게 놀리려고 그런거지? 어서 빨리 거짓말이라고 말해줘. 응? "나는... 응? 너, 왜 울어? 무슨 일 있어?" 숨이 콱 막히면서 갑자기 찢어질 듯이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서 있지 못하고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정말... 너 아시에가 아닌거야? 진짜로? 거짓말이... 아냐? 아픈 마음에 절로 눈에서 눈물이 펑펑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보다 당신의 정체를 밝히는 게 우선인 것 같군." 셰더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더욱 가슴이 아팠다. 20년을 그녀와 함께 보낸 셰더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그녀가 아시에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다는 뜻. 이제 난... 어떡해야 하지? 아시에가 살아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 역시 셰더에게 몸을 줄 필요는 없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희망조차 주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기대한 나는 더욱 큰 상처를 입고 맥없이 방울진 눈물을 계속해서 떨궜다. "우웅... 그건 얘한테 물어보는 게 제일 빠를 거야." "무슨 뜻이지?" 아시에의 몸을 빌린 정체를 알 수 없는 녀석과 셰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내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절망에 싸여 점차 내 마음은 어둠속에 파묻혀 가고 있었다. [정신차려, 카이! 이대로라면... 다시 그 녀석이...!] 하지만 미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몸의 피는 뜨겁게 끓어올랐다. 으... 으아악! 아파! 괴로워! 파파파파팍! 베링거의 힘을 봉인하기 위해 내 열 손가락에 셰더가 끼워 두었던 가락지들이 연쇄적으로 파쇄음을 내면서 부서져 나갔다. 점차로 내 정신이 카이엔의 몸에 대한 지배력을 잃어가는 것을 난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몸도 원래대로의 남자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뜨아아아아! 그 반지들 만드는 데 돈이 얼마나 든다고 또 부숴버려엇!" 셰더녀석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외쳤다. 잠시 후, 나는 내 육체의 지배권을 다시 베링거에게 뺏겼다. 유약하다고 미렌은 화내겠지만 미안하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그만큼 크게 그대를 걸었던 일인데 들은 것은 고작 아시에는 죽었다는 말이라니... 대체 저 놈은 누구란 말야! 뭐하는 작자길래 아시에의 몸을 뺏아서 건방떠냔 말이야! "후우..." "오래간만이네, 베링거." 그녀석이 마치 신과도 같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내 몸을 차지한 베링거에게 말했다. 대륙 제일의 미소녀가 짓는 미소인 만큼 그 아름다움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베링거, 나, 미렌 세 사람 모두가 공통적으로 저 녀석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나나 미렌은 둘째치고 왜 베링거가? 그것도 우리 둘보다 훨씬 더 강한 격렬한 증오과 살기로 가득차 있다니... "개자식. 역시 너도 나타났군. 다르군트! 이 씨x년! "푸후훗. 여전히 말이 험하네. 좀 더 말을 부드럽게 하지 그래?" "네놈이 한 짓을 생각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설과 저주를 퍼부어도 모자라!" 에에에에엑!? 나나 미렌은 화들짝 놀랐고, 특히 셰더는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더니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다... 다... 다... 다르군트라면... 이 세계의 주신(主神)이다. 신화에 나오는 대로라면 이 세계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 그리고 산천들과 생명체, 인간을 만든 조물주(造物主), 절대신인 것이다. 베링거가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아마도... 사실이겠지. 그런데 그런 사람... 아니 신이 어떻게 이 자리에, 그것도 아시에의 몸에 있는 거지? 내 몸에 있는 베링거의 존재를 알았을 때도 그랬지만 정말 터무니없는 일에 말려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죽어!" 베링거가 땅을 박차고 다르군트에게 돌진했다.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하이 스피드. 하지만 다르군트는 베링거를 놀리기라도 하듯 뒤로 덤블링을 하면서 가볍게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베링거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다르군트에게 돌진하여 그녀에게 몇 번이고 주먹을 내지르고 다리를 휘둘렀다. 하지만 다르군트는 베링거의 모든 공격을 물 흐르듯이 유유자적하게 움직이면서 가볍게 피해 냈다. 봉마석에 봉인된 자신의 육체를 찾지 못해 아직 힘이 미약하다고 해도 검강까지 사용할 수 있는 엄청난 실력자인 베링거의 공격이 전혀 먹히지 않다니... 신이라고는 하지만 상대도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 건 분명한데 말야. "잠깐! 둘 다 공격을 멈추고 대화로 해결합시다! 대화로! 이러다가 우리 집 다 부서지겠단 말입니다!" 베링거와 다르군트의 난전 중에 벽이 부서지고 셰더의 실험도구들이 깨져나가고 있었으니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난 피하기만 할 뿐인걸. 베링거 이 멍청이만 진정시키면 다 끝나." "누가 멍청이냐! 이 천사의 탈을 쓴 악마녀석! 날 방해한 흑마법사 네놈도 있다 처벌할 테니 기다리고 있어!" ...라고 외치며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끄응... 카이엔의 몸으로 싸우고 난리 굿을 치는 것까지는 좋은데 꼭 남자 몸으로 여자 속옷을 입고 싸워야겠냐, 베링거! 적어도 생리대는 벗고 싸우란 말야! 찜찜해! 상대인 다르군트도 유리병 안에 있던 그대로의 알몸이니까 뭐 피장파장일런지도 모르겠지만. "네놈이 진짜 주신이라면 내 주먹을 피하지 마라, 하앗!" "싫어. 너랑 싸우면 나까지 바보가 되는 것 같단 말이야." "왜! 왜 나와의 진검승부를 회피하는 거냐고! 날 죽이려면 직접 죽이고, 봉인시키려면 차라리 직접 봉인을 시켜 달란 말이야!" 울분. 베링거의 주먹이 실험실 벽 한 면을 또 박살낸 순간 스쳐간 감정을 나와 미렌을 느낄 수 있었다. 울분이라니... 베링거와 다르군트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신화에 나오는 다르군트와 베링거의 이미지는 단지 선과 악으로 양분되어 있을 뿐. 그 이상은 어떠한 사실도 알 수 없다. 다만 다르군트가 모든 신을 낳았다는 말에서 베링거 역시 다르군트에서 나왔고, 후에 그를 배신했다고 신학자들은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다. 애초에 신화에 대해서는 자료가 지나치게 부족한데다 여러 지역으로 갈수록 전해져내려오는 이야기가 전부 틀려 그 중에서 진실을 찾아내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난 그렇게 할 수 없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면서 말을 흘리는 다르군트. 그런 그녀에게 더욱 분노가 치밀어오른 베링거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 For the king for the land for the mountains For the green valleys where the dragons fly For the glory the power to win the black lord I'll search for the emerald sword ∼ 랄라라~ 다시 한번 언급합니다만, 오늘 자정에 대규모 삭제가 있습니다. 공지 참조하세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강림(降臨)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70화 : 강림(降臨) (2) ------------------------------------------------------------------------- 그 때... "쨔잔☆쨔쟈잔! 방금 도착한 케이리가 분들을 모시고 왔어요. 주인님! 어?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죠? 앗! 카이엔 님! 아시에 선배! 두 사람 갑자기 왜 싸우는 거에요! 친구잖아요! 그러면 마난 너무 슬퍼..." 마나티와 래더가 시르젤과... 누구지? 아! 그 때 그 시르젤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이름은 기억 안나지만 그 두 사람과 함께 들어왔다. "앗! 저 애는 설마!?" "말 돌리지 마, 다르군트!" "정말이지, 베링거 너 기억 안 나는 거야?! 에를 녀석이잖아! 에를!" "뭐어!? 그 에를리히!?" 에를리히? 그게 누구지? 하여간 그 이름이 효과가 있었는지 베링거는 다르군트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새로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베링거의 눈이 마나티, 셰더, 시르젤, 그리고 다른 두 사람에게 하나하나씩 초점이 맞춰졌다. 그리고는 머리를 쥐어싸매더니 중얼거렸다. "끄응... 다르군트 네 녀석은 그렇다쳐도 설마 에를리히가 부활할 줄이야... 이거 설마 세상의 모든 신들이 지상에 강림한 거냐! 어떻게 된 일이야! 앙!?" "음... 어쨌건, 표정을 보아하니 기억 못 하는 거 같은데, 깨울까, 베링거?" "미쳤냐! 절대! 절대 깨우지 마! 걔를 깨우느니 차라리 내가 스스로 날 봉인하고 말겠다!" 각각 주신과 마신이라는 두 사람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그제야 셰더는 간신히 두 신 사이에 끼어들면서 다시 한 번 싸움을 말렸다. "자, 자. 두 분 다 일단 진정하고 차라도 마시면서 얘기하시지요? 그리고 저희들에게도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셨습니면 좋겠습니다만." "흥! 내가 어째서 너희같은... 아야야!" "자. 자. 서두를 것 없어. 느긋하게 이야기하자고, 베링거." 다르군트가 베링거의 귀를 잡아당기면서 걸었다. 어? 그런데 왜인지 눈앞이 캄캄하고 힘이 쭉 빠지는 것 같다? 그 때문인지 베링거도 다르군트에게 전혀 반항하지 못하고 질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모두 알아둬. 베링거는 귀를 잡아당기면 힘을 못 써. 옛날에 로또한테 얘 봉인시키라고 시켰을 때도 여기 당했었지." "내 약점 퍼뜨리고 다니지 맛! 다르군트!" 귀를 잡아당기면 힘을 못 쓴다니... 무슨 꼬리를 잡으면 힘을 못쓰는 드래곤볼의 손오공이냐? 난 귀를 남에게 잡아당겨진 적은 없지만 잘 생각해보니 귀에 누가 바람을 불어넣었을 때 이상할 정도로 힘이 빠진 기억이 난다. 어찌되었건 그리하여, 아시에의 육체를 한 대륙 제일의 미소녀 다르군트. 나와 미렌을 마음 속에 안고 있는 대륙 제일의 미소년 베링거. 그리고 변태 흑마법사 셰더. 셰더의 노예이자 변녀인 마나티. 셰더의 클론인 래더. 방금 전에 셰더의 시련을 뚫고 날아온 시르젤과 파라디스, 티아라의 회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흠흠. 그럼 지금부터 상황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즈와 메이드복 누나를 시켜 모든 손님들에게 차를 내오게 한 셰더가 입을 열었다. 이 사건의 중심부에 위치한 핵심 인물일 뿐만아니라 이 집의 주인이기도 하니까 그가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베링거는 다르군트의 반대편에 앉아 여전히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었고, 다르군트는 그런 베링거에게 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유유자적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편 나의 정체가 사실 마신 베링거이고 아시에가 주신 파라디스라는 사실을 들은 시르젤과 파라디스, 티아라는 크게 놀라는 모습이었다. 래더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용했고 마나티는 꽃수인 카이엔 님쪽이 더 좋았는데... 라는 이상한 말을 중얼대면서 다소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시르젤... 나는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만 할까. 어쩌면 이런 형태로 그와 마주쳐서 다행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몸을 베링거가 차지하고 있는 이상 그는 나와 이야기할 수 없으니까. 베링거가 시르젤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의 얼굴을 그만큼 보지 않아도 되니까... 도망가는 거라는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잖아?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베링거가 다르군트에게 적개심을 보이는 한편으로 자꾸 마나티를 흘끔흘끔 쳐다본다는 점이었다. 엥? 이 녀석 혹시 마나티한테 관심이 있나? 왠만하면 마나티보다는 다른 여자를 찾는 편이 정신건강에 훨씬 좋을텐데... "먼저 주신 다르군트님과 마신 베링거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알기로는 다르군트님은 이 세상에 한번도 모습을 나타낸 적이 없고 베링거님은 용사... 에 하여튼 이런저런 일로 육체가 봉마석에 봉인당했지요. 지금은 그때 일은 신화로만 남아있을 만큼 인간들에게는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신 것은 어떤 연유에서입니까?" "어이. 베링거. 설명해." "왜 내가 설명해야 해!?" "그럼 내가 설명할께. 설명하기 전에 먼저 베링거의 어린 시절에 대한 간단한 프리젠테이션을..."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맛! 다르군트! 차라리 내가 설명한다!" "그러든지." 두 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베링거의 마음과 직접 접하고 있는 나와 미렌은 베링거의 마음 속에 주신 다르군트에 대한 애정과 증오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걸 알고 해결하지 못하면 나와 미렌이 육체를 되찾을 수 있는 길은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베링거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가끔씩 다르군트가 딴지를 걸어 베링거의 시선으로 편집된 이야기들을 바로잡기는 했지만 대체로 이야기는 원활하게 흘러나왔다. "사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내 본의가 아냐..." 그 옛날, 용사 로또와 성소녀 토토에 의해 마신 베링거의 육체는 봉마석에 가두어져 전 세계로 흩어졌다. 가끔은 때로 그 육신의 일부가 의지를 가지고 부활하여 마왕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들이 모여 베링거가 부활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5명의 마왕이 한꺼번에 부활했던 암흑 시대에도, 마왕들이 서로 모여 서로의 육체를 합체한다던지 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마신의 육체조각을 아무리 모은다고 해도, 그것을 결집시켜 줄 수 있는 강력한 혼이 없다면 마왕 이상의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 "지금이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영혼은 그동안 쭈욱 세계를 떠돌아다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수많은 차원을 돌아다녔다는 표현이 정확하겠군. 내 안에 있던 상우라는 녀석이 있던 지구계(地球界)도, 미렌이라는 여자가 있던 환염계(幻念界)도 가 본적이 있지. 하지만 아주 우연한 계기로 나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베링거에 이어 다르군트가 말을 시작했다. "베링거가 봉인당했다는 핑계로 팔자 좋게 차원 유람을 가니까 난 되게 심심했어." "누가 유람을 갔다는 거야!" 베링거가 항의했지만 다르군트는 들은 체 만 체 하며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둘은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그래서 나도 인간들의 틈에 섞여 세상을 구경하기로 했지. 그래서 나는 혼령체로 변한 체 여러 사람들 몸을 옮겨다니면서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았지. 오랜 세월동안, 많은 구경을 했어. 때로는 왕의 몸 속에서 국가의 흥망을 지켜보기도 하고, 장군의 몸 속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대회전(大會戰)을 구경하기도 했지. 때로는 세상을 떠도는 방랑자로서 밑바닥을 체험하는가 하면, 평범한 주부로서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는 삶을 보내기도 했어." "문제가 생긴 것은 이사크라는 흑마법사 녀석이 다르군트의 혼이 깃든 몸을 마왕 소환의 제물로 사용하면서다. 물론 더러운 색마(色魔) 흑마법사 따위가 알 리는 없겠지만. 소환 과정에서, 그녀의 몸 안에 깃들여 있던 다르군트의 성령(聖靈)에 문제가 생겨 버렸어. 그리고 깨어난 마왕, 그래봤자 내 일부긴 하지만 디크로드 녀석이 다르군트의 존재를 눈치채 버렸다. 마왕 주제에 어이없게 인간 특공대들한테 최후를 맞은 것도 거기에 너무 신경을 썼기 때문이지." 우웅... 이야기가 조금씩 틀려지네. 내가 듣기에는 마왕군을 소환해내느라 약한 틈을 노린 거라던데... 역시 진실이라는 건 사람을 지나면서 훼손되고 틀려지는 건가 보다. "놈은 인간계 정복은 이사크에게 맡겨두고 자신은 다르군트의 성령에서 알아낸 내 혼의 존재를 찾기 위해 여러 차원을 탐색했고, 결국 내 혼을 찾아내 놈이 죽기 전에 자신을 죽인 용사... 누구더라? 하여간 그 녀석의 씨에 그것을 심어두었다. 그 자의 아들이 바로 카이엔이지." "사실. 나도 이 아시에라는 아이에게 붙었을 때는 조금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어. 그래서 다른 차원에서 문길이라던가 하는 이름의 아이를 불러서 내 성령을 보호했지. 마침 그와 나는 파장이 공조하고 있었거든? 그래도 디크로드가 부활할 때 약간 훼손된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같이 부른 상우라는 아이와 또 다른 차원에서 불러낸 미렌은 시간차를 두고 베링거, 즉 카이엔 브리타뉴의 몸에다가 집어넣었어." 결국 나와 문길이를 이 곳으로 데려와 이런 몸에 빙의시킨 것은 저 주신 다르군트라는 녀석이었나? 아하하... 놀라운 진실들이 연이어 밝혀지고 있었지만 나는 쭉 힘이 빠져 뭐라고 생각할 기운도 나지 않았다. 뭐야! 그렇다면 나나 문길이 전부 저 녀석의 장단에 놀아났단 말이잖아! 나는 그나마 행복했지만... 문길이는 그 때문에 잔뜩 괴로운 일을 겪어야 했다고! 게다가 채 행복을 제대로 느껴보기도 전에 죽어버렸고... 새삼스럽게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물론 그런 얄팍한 감정의 폭발만으로 강력한 베링거에서 몸을 되찾는다는 것은 무리였지만. "원래대로라면 아시에라는 아이가 죽은 후 다른 몸으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시신을 들고나가길래 한번 쭉 지켜봤더니 흐음... 설마 랜덤 리버스라는 것을 쓸 줄이야. 덕택에 오래간만에 제 모습을 찾게 되었어. 이 정도면 지금 이곳에 있는 위대하신 주신 다르군트님과 떨거지 한 명에 대한 이해가 되겠어?" "누가 떨거지야!" 베링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하다가 누군가 뒤에서 잡아당겨 도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베링거가 눈을 휙 돌렸다. 건방지게도 마신을 뒤에서 잡은 주인공은 바로... 시르젤이었다. 베링거가 시르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와... 와앗! 베링거! 시르젤을 쳐다보지 마! 지금 내 몸을 조종하고 있는 녀석은 바로 베링거. 그런 베링거의 시선에 보이는 것은 내 눈에도 그대로 보인다는 말이 된다. 베링거의 생각만 읽지 못한다 뿐이지 육체의 감각은 나와 미렌에게도 그대로 공유되니까. 시르젤의 얼굴을 보면 난... 말할 수 없이 몰려드는 죄책감에 미쳐 버릴 것 같은 걸. "뭐냐, 네놈은!" 하지만 베링거가 갈기갈기 찢어질 것만 같은 내 마음을 이해해주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겠지. 그는 명백한 적의를 가지고 시르젤을 노려보았다. "카이엔은... 돌아올 수 없는 겁니까? 정말로!?" 그런 슬픈 얼굴은 하지 말아줘 시르젤. 니가 괴로운 걸 보면 나까지 마음이 아파지잖아. 널 생각만 해도 머릿속이 터져 버릴 것 같이 어지러운데 내 앞에서 그런 표정을 지으면 난... 난...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는걸. 물론 내가 내 몸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생각하든 소용은 없겠지만... "놈은 내 안에 남아있지... 하지만 영원히 다시 나오지는 못할거다." 베링거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어라라. 너무하잖아. 베링거. 시르젤이라는 저 청년 불쌍하지도 않아? 잠깐이라도 몸을 빌려주는 게 어때?" "웃기지 마. 다르군트. 이 몸은 원래부터가 내 것이었어. 내 몸 속에 이질적인 혼을 두 개씩이나 집어넣은 것은 네놈이잖아. 그들의 영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내가 아냐. 바로 너지." "매정해라아∼" 후우... 모르겠다. 이 세계의 신들이란, 생각보다 엄청 무책임한 존재인 것 같다. 게다가 싸우려면 자기네들 세계 안에서 싸울 것이지 왜 다른 세계 사람들을 불러다가 놓고 이 꼴로 만드냔 말야! 너네들 신 맞어? 그럴거라면 차라리 집어쳐! ...라고 말하고 싶지만 지금은 베링거의 몸 속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 어떻게든 나갈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일까... -------------------------------------------------------------------------- 베링거는 수..... 쿨럭 요즘 고민중..... 응응씬을 벌여야 할까요? 말까요? (원래는 쓰려고 했지만 책으로 나와 버리니 망설여지는...) 요즘 글 열라 안써짐... 갑자기 확 돌면 연중 들어갈 지도...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The Bridal Night!?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71화 : The Bridal Night!?(1) ------------------------------------------------------------------------- 파앗 순식간의 일이었다. 베링거가 다르군트에게 괜히 시비를 걸고 있을 때 시르젤은 무슨 결심을 했는지 갑자기 두 손으로 베링거의 귀를 꽉 잡았다. 너무나 신속한 행동이라 베링거는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꼼짝없이 당했다. 아아... 어지러워진다. 시르젤... 뭐 하려는 거야? "무... 무슨 짓이냐, 이놈..." "카이엔 씨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는다면 절대 손을 놓지 않을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몸은 내꺼다. 절대로 내 줄 수 없어... 으윽..." "그렇다면 저도 절대로 놓아 드릴 수 없습니다." 힘이 빠지고 몽롱한 와중에서 베링거가 얕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시르젤의 목소리가 단호한 것이 결심을 해도 단단히 한 것 같아 보였다. 괘... 괜찮아, 시르젤? 아직 봉마석에 봉인된 육신을 되찾지 못했다고는 해도 상대는 마신이란 말이야! 마왕보다 훨씬 졸라 짱 센 마신! 굳이 나를 만나게 해 달라는 시르젤의 강력한 의지와 간신히 되찾은 몸을 절대 내 줄 수 없다는 베링거의 결연한 의지가 서로 맞부딪혔다. 파라디스씨와 티아라씨는 긴장된 표정으로 조용히 시르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약점을 알았다고는 하지만 마신한테 개기다니,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셰더 역시 뜻밖의 일에 다소 초조해하는 모습이었다. 이질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꺄아!>_카이엔 목 매담->분노에 찬 시르젤 셰더와 싸워 사망... 이런 식으로 끝내고 때려치고 싶은 심정이라죠..... 휴우 ...누구 같이 술마셔 줄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그러나 이사와서 근방에는 도통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 -_-;;;)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Dress up!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79화 : Dress up!(1) ------------------------------------------------------------------------- "흐아암∼" 아 졸려. 어제는 시르젤과의 일 때문에 한참을 고민하다가 늦게 잠들었기 때문에 엄청 피곤하다. 그래서 좀 늦게 일어나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처음에 시즈가 나를 깨우러 왔을 때는 가뿐하게 무시하고 말았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마나티의 어택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대체 자기 팬티를 벗어서 남의 얼굴에 뒤집어씌우는 방법으로 잠을 깨우는 게 뭐냔 말이얏! 게다가 그 엽기성과 변태성은 둘째치더라도... 결정적으로 마나티 너 목욕이나 샤워는 하고 사는 거니? 왜 이렇게 지독한 꼬린내가 풍기는 거얏! 저번에 밑에 깔렸을 때도 냄새 엄청 나던데... 뽕뽕 하던 방귀 냄새도 무진장 지독했고 말이야. 어쩌면 마나티는 상당히 지저분한 여자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콰쾅 엥? 무슨 소리지? 어디선가 쾅 소리가 나면서 건물이 살짝 진동했다. 나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내 시중을 들던 시즈에게 시켜 셰더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찾아간 곳에 셰더나 다르군트는 없고 마나티 혼자서 날 보면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으윽! 나는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녀 앞에서는 항상 난 불안해지고 초조해진다. 왜냐하면 그녀가 내게 또 무슨 이상한 짓거리를 할 지 모르기 때문에... "좋은 밤 보내셨어요?" "별로..." "에이. 부끄러워하기는요..." "누가 부끄러워한다는 거얏!" 좋은 밤이라니....! 뭐가 좋은 밤이라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 반강제... 아니 완전 강제로 시켰으면서, 물론 그 화는 주신 다르군트에게 돌려야 하겠지만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하는 말을 증명하듯 거기에 동조한 마나티가 나는 몇 배나 더 밉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무슨 일 있어? 아까 좀 건물이 흔들리던데." "아, 브리타뉴 가문 사람들과 다른 떨거지들이 찾아와서 주인님과 다트 언니가 돌려보내러 갔어요." "뭐어?" 우리 집안 사람들이라면... 세이렌 누나나 사이엔 형 같은 사람이 왔다는 건가!? 잘도 내가 있는 곳을 찾아냈군. 휴우. 생각해 보니 그동안 가족들을 깜빡 잊고 있었다. 이거 미안한걸. 그렇다면 이젠 어떻게 하지? 이제 그만 화를 풀고 돌아가는 편이 나으려나? 하지만 마나티는 나의 고민을 금세 알아채고 먼저 선수를 쳐서 말했다. "다트 언니가 그 사람들 쫓아낸다고 했으니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되요. 카이엔 님." "뭐라고!?" 나는 깜짝 놀라 재빨리 우리 가족들이 왔다는 곳으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내가 밖으로 튀어나가려고 했을 때 다르군트와 셰더가 함께 방안으로 돌아왔다. "벌써 끝났어요? 언니?" "그래. 전부 다 집으로 돌려보냈단다." 마나티의 질문에 당당하게 콧대를 높이며 대답하는 다르군트. 하아... 이미 한발 늦었나. 이제는 베링거의 부활 걱정도 없고 슬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드는데 말이지. 게다가 지금 내 곁에 있는 다르군트와 마나티... 그리고 또 셰더. 최악의 인물 조합이다.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서 이전처럼 가족들의 어택이나 받으면서 사는 게 훨씬 더 정신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진짜로 할 거예요?" 마나티가 내 눈치를 보면서 무슨 비밀 이야기 같은 내용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걱정스럽게 다르군트에게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오호홋. 주신일언 중천금(主神一言 重千金)이란다. 나의 명령은 곧 절대령(絶對令)이니까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거든." "하지만 그랬다간... ...님이..." 마나티가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흘낏 쳐다보면서 말했다. 뭐... 뭐야? 너희들 또 무슨 이상한 짓 꾸미는 거 아냐? 나도 모르게 몸이 오싹해지면서 떨렸다.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지. 과연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궁금하지 않아?" "하지만 견뎌내지 못하면... 그대로 파멸이에요. 애초부터 강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강할 필요도 없는 분을 어째서...!?" "댓가...라는 거지." "댓가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많은 것을 노력 없이, 고통 없이, 댓가 없이 손에 넣었어. 그런 순진무구한 존재의 파... 흥미롭지 않아?" "언니... 설마 취향이...?" "하드(hard). 새드(sad), 비극(tragedy), 파멸(Ruin). 하지만 극복(overcome)도 싫어하지는 않아." "저기... 무슨 이야길 하고 있는 거야?" 내게 들릴 듯 말듯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다르군트와 마나티 사이로 나는 끼어들어 질문을 던졌다. 이야기를 잘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저 두 사람이 나누는 심각한 듯한 이야기는 분명 나와 관계된 중요한 일일 가능성이 컸다. 동시에 나를 쳐다본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한 신(神)을 본 나는 순간 경직했다. 나를 향해 유려하면서도 살짝 머금은 미소를 머금은 다르군트와 걱정 반, 기대 반의 눈길로 두 손을 기도하듯 맞잡고 나를 바라보는 마나티. 다르군트가... 뭔가 더 심한 걸 꾸미고 있는걸까? 어쩌면 어제 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런 거대한 시련과 고통이 내게 닥칠지도 모른다.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카이엔... 날 원망하지 마라. 난 단지 힘없는 흑마법사일 뿐이야." 내가 멍하니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셰더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기운 빠진 목소리로 한 마디 하고는 저편으로 힘없이 터벅터벅 걸으면서 사라졌다. 분명 뭔가가 있다. 내가 알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있다! 나는 예감했다. 내 스스로의 본능이. 내 안에 파묻혀 있는 베링거의 의지가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서 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나는 아무 힘이 없어... 눈앞의 창조주에게 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쳐 줘요! 무슨 일이죠, 다르군트님! 제게...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니가 죽거나 다치는 일이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는 있지만 입가가 꼬리쳐 올라가 있다고, 변태 창조주 당신! 날 어쩌려는 거얏! "마나티, 넌 알고 있지? 가르쳐 줘! 주신께서는... 내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건... 비밀이에요. 오호호호." 아무렇지도 않게 웃음지으며 뒤로 물러나는 마나티. 이잇! 지금까지 내가 진실을 알아서 좋은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이번에는 꼭 무슨 짓을 꾸미는지 알아야겠어! 나는 마나티를 붙잡고 다그치려고 했지만 마나티는 목욕재개하고 편히 쉬라는 말만 남긴 채 공간걸음으로 사라졌다. 나는 다시 한번 다르군트에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녀 역시 어느 새 여기서 사라져 있었다. 이이잇! 좋아! 너네들이 무슨 짓을 벌이려는 지는 몰라도 나 역시 순순히 당할 줄 알고!? "돌아가자, 시즈!" 저들이 뭘 꾸미고 있는지에 대해 시르젤한테라도 한번 상담해보고 싶었지만 어제 좀 좋게 헤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찾아가기는 망설여졌다. 휴우... 할 수 없지. 할 일도 없는 나는 시즈의 시중을 받으며 방 안에 처박혀 궁상과 고민, 걱정을 되씹는 수밖에... -------------------------------------------------------------------------- 상황은 개선된 게 없지만, 마음을 비우니까 어떻게든 되는군요. (한마디로 아씨 몰라 될 대로 되라 무책임 모드로 변함 -_-;;;) 요즘은 어떻게 해야 좋은 마무리를 지을 지 생각중이랍니다. 예상보다 너무 많이 썼어요. 끝내면 대략 10권에 달할지도 모르겠다는...; 아, 어디 사냐고 하면 김해에 산답니다. 작년에 이사온 동네라죠. 서쪽으로 진주, 북쪽으로 대구, 동쪽으로 울산까지 커버 가능합니다^^;;; 네코~♡님 // 은팔찌라니요...(삐질;;;) 대체 무엇을? (섬뜩) 밝은눈님 // 본인은 그렇게 살려고 하는데 윗사람들이 열라 태클건다죠. 아 짜증나 -_-; 발키리아님 // 괜찮아요^^;;; 환상미궁&에우로페님 // 훗, 술값 문제에는 인세라는 것이 있다죠(먼산;;) 사하리아&taira&때구니님 // 저는 중간내용은 희극이건 비극이건 상관은 없다만 끝이 비극인 것은 꺼려한답니다. 세월의 돌 읽고 울고, 드래곤 레이디 읽고 절규하고, 하얀 로냐프 강을 보고 책을 집어던진......;;; 러비마녀님 // 으음... 술은 가끔씩만 먹어주면 맛있죠^^ 과음은 금물! 神武刀님 // 애독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미/카보다 더 아끼는 글이랍니다. 디레이유이나&셀레네스&바비인형&유리에나님 // 격려 감사드립니다^^ myflywing님 // 저랑 성격 같으면 대략 안 좋...(퍼억)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Dress up!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80화 : Dress up!(2) ------------------------------------------------------------------------- "카이엔 님, 목욕하시겠어요?" 셰더의 본거지에서 내가 묵고 있는 방으로 들어왔을 때, 시즈가 말했다. 지금의 시즈는 기억을 잃고 완전히 마나티의 노예로 전락해 있는 상태. 예전처럼 마나티를 무서워하거나 내게 구해달라고 종용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마나티의 명령만을 태연한 표정으로 그대로 수행할 뿐. 이전의 아시에와 비슷한 상태 같아 보여서 그의 시중을 받는 나는 약간 섬뜩한 감정을 느끼곤 한다. "싫어." 평소에 나는 목욕을 좋아한다. 카이엔의 몸으로 변하고 나서는 약하고 부드러운 피부 때문에 너무 뜨거운 열탕에는 몸을 담글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따뜻한 물 속에서 몸을 데우고 온몸의 노폐물을 말끔히 씻어 버리는 목욕은 항상 나 자신이 과거를 벗고 새로 태어나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이곳에 오기 전에도, 온 후에도 특별한 사건 사고만 없으면 항상 목욕을 챙겨서 하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순간. 시즈의 목욕 제안만은 웬지 꺼려졌다. 목욕재개하고 기다리고 있으라는 마나티의 말이 심하게 마음이 걸렸다. 설마... 이번에는 마나티가 날 상대하려고 오는 걸까나? 좀 그렇긴 하지만 어제처럼 남자를 상대하라는 것보단 낫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하기에는 오늘 마나티의 모습이 좀 이상했다. 진짜로 그런 거라면 엄청 좋아하는 표정을 지었을 텐데 말이야. 그렇다면 혹시 시르젤과 다시... 아냐. 아마도 그건 아닐 거다. 그녀는 어제 다르군트가 시르젤과 내가 합방하라고 했을 때는 엄청 좋아했다. 그런데 갑자기 하루만에 태도가 180도 바뀔 리는 없을 테지. 으음. 암만 생각해도 알 수가 없네 이거. "하셔야 되요." "하기 싫다고 하잖아!" "하세요!" "싫어!" 나보다 조금 작은 시즈의 눈에 알 수 없는 독기가 서려 나를 좀 쫄게 했다. 우웃... 조교실에서 뭔 꼴을 당했는지 꽤 박력있어졌잖아? 이전에는 단지 유약하고 겁 많은 꼬마아이였을 뿐인데... "주인님께 이를 거예요." "우웁...!" 싸늘한 눈빛으로 시즈가 말을 꺼냈을 때 나는 순간 움찔했다. 시즈가 이야기하는 주인님이라는 것은 물론 마나티를 이야기하는 거다. 그럼 셰더는 뭐라고 부르냐고? 그냥 셰더 님이라고 한다. 마도의 계약이라는 것은 단순히 쌍방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셰더의 노예인 마나티가 시즈를 노예로 삼았다고 해도 시즈가 셰더의 노예가 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하나 묻지. 내가 지금 목욕을 해야 하는 이유를 최대한 짧고 갼략하게, 그리고 내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봐." "주인님의 명령이기 때문이죠." "....." 정말로 마나티의 완전한 노예가 되었군. 쳇! 하지만... 진짜 궁금한데? 그녀는 나를 목욕재개시켜놓고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주인님과 함께 목욕하시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께요." "멋대로 정하지 마! 왜 내 생각은 무조건 무시되고 마나티나 셰더의 말에만 따라야 하는 거야?" "쓸데없이 저항해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요. 목욕하든 안 하든, 결과는 같을 테니까요." "혹시... 마나티와 주신 다르군트님이 오늘 뭘 꾸미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거야?" "몰라요. 저는 단지 시키는대로 카이엔 님을 씻기고 갈아입힐 뿐이에요." 으휴. 이래서야 진전이 없잖아. 하지만 이대로 계속 시즈한테 저항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어서 나는 결국 그의 도움을 받아 옷을 벗고 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시즈 녀석도 마찬가지로 옷을 벗고 욕탕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나를 씻기기 위한 행동이고 지금까지 태연하게 그의 시중을 받아왔지만 어제 이상한(?) 일을 겪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어쩐지 시즈가 평소와는 다르게 보였다. 그런 내 눈길을 알아챈 시즈가 내 몸을 흩어보더니 조금은 당황한 어투로 말했다. "카... 카이엔 님. 그러시면 안 되요. 아무리 카이엔님이 원하신다고 해도 제 몸은 오로지 주인님만의 것... 그런 마음을 품으시면..." "무... 무슨 소리야! 누가 그런 마음을 품는대!" "하... 하지만 지금 카이엔님은..." 그러면서 나의 벗은 몸. 특히 아랫도리를 얼굴에 홍조(...)까지 띄우면서 곁눈질하는 시즈. 캬악! 뭐하는 짓이야! 하지만 나도 갑자기 내가 왜 이런지 잘 몰랐기에 그냥 미리 물 받아둔 욕조에 씻지도 않고 몸을 풍덩 담그며 말을 돌릴 뿐이었다. "구질구질한 남자보다는 여자한테 시중받는 게 더 기분 좋을 거라고 생각한 것뿐이니까 이상한 착각은 하지 마!" "그런가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이네요. 게다가 여자를 원하신다니... 알았어요. 내일부터는 저 대신 주인님께서 직접 카이엔님을..." "부탁한다. 시즈. 내 시중을 들어줄 사람은 너밖에 없어." 나는 금방 말을 바꿨다. 마나티 이야기만 나오면 한없이 약해지는 나 자신. 흐으... 이런 내가 정말 싫다. 어쨌건 괜히 어제 생각이 나서 몸이 이상하게 반응했고 시즈의 목욕시중을 받긴 했지만 그와는 조금 어색한 관계로 얼굴을 붉히면서 목욕을 끝냈다. 그런데 목욕이 끝나고 시즈가 가져다 준 옷은... "이게 뭐야앗!" "보면 아실건데요?" "이걸 나보고 입으라고?" "주인님의 명령이에요. 혹시 혼자 입기 불편하시다면 저도 같이 입을께요." "...." 시즈가 나에게 입히려고 가져다 준 옷은 바로 여.자.속.옷.과 가는 어깨끈이 달린 어깨가 다 드러난 연황색의 얇은 캐미솔. 그리고 조금만 고개를 밑으로 숙여도 바로 속옷이 보일 것 같은 붉은색과 검은색 체크무늬의 초미니스커트였다. 게다가... 저 검은 스타킹과 거기 달린 가터벨트는 또 뭐란 말이야! 여러가지 파란만장한 사건을 많이 겪은 탓에 웬만한 여장이라면 감수할 의사가 있었지만 저건 해도해도 너무하잖아! 내가 진짜 여자라도 저런 건 절대 안 입겠다! ...아 참고로 저 고양이 귀만은 꽤 마음에 든다. 게다가 시즈 너 뭐시라? 내가 혼자 입기 쪽팔리면 같이 입어 주겠다고? 성의는 고맙다만 이 상황은 같이 입으면 해결된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잖아! 이건! 나는 다시금 다르군트와 마나티가 내게 무슨 짓을 꾸미려고 하는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어떻게든 나를 농락하고 희롱하려는 것은 확실해 보이는데... 그냥 장난의 차원에서 끝나면 좋으련만. "그럼 입혀 드릴께요." "절대 안 입어! 딴 옷 가져다 줘!" "안 입으시면 벗은 채로 지내셔야 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치사하게시리... 게다가 너는 또 왜?" 딴 옷을 안 주는 건 내가 그녀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압박이더라 치더라도 시즈까지 옷을 안 입힐 필요는 없잖아!? "사실은..." "사실은 뭐?" "사실은... 주인님께서... 흑흑..." 시즈는 말을 꺼낼 듯 말 듯 하면서 망설이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주인님께서... 흑흑... 카이엔 님이 말을 듣지 않으실 때는 카이엔 님을 덮치라고 하셨어요! 흑흑... 제 몸은 오직 주인님을 위해 바치고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건데 주인님께서는 어째서 그런 명령을...!" ...아시에의 예전 상태에서도 알 수 있는 노릇이지만 그 조교실이라는게 정말 애 하나 철저하게 버려놓는구나. 어쩜 사람이 저렇게까지 변할 수 있을까. 만약에 문길이 대신에 내가 그런 운명을 겪었다면...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끔찍할 것 같다. "알았어... 입으... 면 되잖아!" 나는 시즈가 울먹이는 꼴을 보며 짜증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여간 나도 마음이 모질지 못해서 큰일이다. 미소년 하나가 약한 모습을 보이며 우는 꼴 가지고 마음이 약해지다니. "정말로?" 그때 곧바로 눈물을 그치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날 돌아다보는 시즈. 헉! 설마 너... 계획적이었냐? "그럼 곧바로 옷을 입혀 드리겠습니다." "허걱! 당했다아아아아아!" ...이제는 시즈한테마저 희롱당하고 있다. 으흑흑. 내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심한 신세로 전락한거냐구! 흐으... 빨리 집에 가보고 싶어... -------------------------------------------------------------------------- 뭐, 시르젤 씬이 다들 마음에 안 드신다니 출판본에서는 좀더 화끈하게(?) 수정하도록 하지요(-_-);;; 근데 부산 정모 같은 거 해도 모일 사람 있기나 하나요? 혼자 바람맞을까봐 겁나서 못하겠다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Dress up!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81화 : Dress up!(3) ------------------------------------------------------------------------- "카이엔 님. 잘 어울려요." "닥쳐." "저도 같은 거 입을까요? 그래서 카이엔 님과 커플 룩을..." "하면 죽어." "...혼자 보기 아까운데. 주인님을 불러서..." "그럴거면 차라리 알몸으로 있을 거야!" 으으으. 나는 지금 두 손으로 머리를 붙들고 전신거울 앞에 서서 절규하면서 점차 마나티화(化)되어가고 있는 시즈에게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지르고 있다. 미쳤어! 미쳤어...! 내가. 아무리 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졌지만 결국에는 이런 옷을 내게 입히는 것을 허락하다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참으로 오묘한 느낌을 주었다. 전체적으로 섹시한 계열의 옷이 귀여운 가운데에서 묘한 색기를 풍기는 내 외모의 밸런스를 깨 버리는 듯 하면서도 파격적이고 신선한 감각을 선사했다. 자신이 자기 모습을 보고 외모를 평가한다는 것은 우습긴 하지만 원래부터 절대미(絶對美)를 자랑하던 나의 모습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키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가늘면서도 균형잡히게 뻗은 다리에 살짝 맨살이 비치는 검은 스타킹이 허리에 찬 가터벨트에 달려 있는 가운데 스타킹 위에 속옷이 보일 듯 말듯 한 체크무늬의 미니스커트가 살랑거렸고, 양 어깨의 맨살을 완전히 드러낸 캐미솔은 생각보다도 길이가 더 짧아서 배꼽을 살짝 드러내고 있었다. 가늘면서도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앙증맞은 목선 위로는 홍시 색깔로 그라데이션을 그리며 채색되어가고 있는 얼굴과 마법으로 쫑긋거리는 고양이 귀를 머리에 단 나 자신의 모습.. 으아아앙! 으흑흑흑. 흑흑. 어머님. 아버님. 이 불초자식을 용서하십시오. 애초에 문길이라는 극악무도한 자식을 만났을 때부터 반쯤은 예정된 길이었지만 저는 드디어 사도(邪道), 아니 마도(魔道)의 길에 완전히 몸을 담아 버렸습니다. 흑흑. 원래의 저였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저항했겠지만, 여러 번의 저항이 모두 반항과 앙탈로 취급되어 수포로 돌아간 터라 더 이상은 버틸 힘이 없습니다. "이젠... 된 거지? 이제는 좀 정상적인 옷 좀 가져다 줘." 전신거울 앞에 서서 한동안 절규하고 침대 매트릭스에 머리를 몇 번이나 갖다 박았던 나는 조금 진정되자 힘없는 목소리로 시즈에게 말했다. 그나마 시즈 저 녀석까지 나와 같은 차림새를 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아무리 마나티에게 끔찍한 꼴을 당했다지만, 어떻게 성격이 저렇게까지 변하다니... 게다가 마나티와 비슷하게 변해가는 것 같아서 정말 최악이다. 마나티는 그래도 여자지만 넌 남자잖아! "안 되요." "그럼 계속 입고 있으라고!? 차라리 다 벗고 있을 거야! 보는 사람이 시즈 너 뿐이라지만, 더 이상은 쪽팔려서 절대 못 입어!" 어쩌면 그 괴팍한 변태 주신 다르군트가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지만 거기까지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불가항력인 부분에까지 지나치게 머리를 쓴다면 나는 분명 스토킹 스트레스로 압사당하고 말거다. "나도 보고 있지." "헉! 뭐야!?"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셰... 셰더!? 공간이동인지 공간걸음인지 하는 기술로 들어온 걸까? 그는 내가 돌아서자마자 그 특유의 변태스런 눈길로 내 몸을 스윽 흩어보았고 나는 깜짝 놀라 재빨리 침대로 다이빙해서 이불로 몸을 칭칭 감았다. "흠. 이것으로 시각공해는 그럭저럭 무마시킬 수 있을 거 같군." "시각공해라니... 무슨 말이얏! 갑자기 여긴 왜 들어온 거야!?" 내가 이불 속에서 얼굴만 빼꼼 내밀고 항의하자 셰더는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올리면서 말했다. 호오. 미중년 되더니 상당히 개폼잡는 건 많이 늘었단 말이야. 저것도 마나티가 지도해 준걸까? 그나저나 너 옷이 왜 그래? 셰더는 평소에 달고 다니는 각종 장신구나 망토 같은 옷으로 온 몸을 음침하게 치장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타이즈 비슷하게 보이는 바지에다가 연회색의 셔츠만을 입고 있었다. 요즘 날씨가 더워지니까 더 이상 못 견딘 걸까나? "일단 한 가지만 알려주지." "뭘 말이야?" "나는 절대로 남자를 품에 안는 취향이 아냐. 내가 좋아하는 것은, 손에 넣고 싶은 것은, 안고 싶은 것은, 오로지 여자, 여자, 그것도 예쁜 여자라고!" 셰더는 필요 이상으로 흥분해서는 큰 소리로 외쳤다. 쟤 왜 저래? 니가 변태 자식이라는 건 이미 만인이 알고 있는 사실인데 새삼스럽게 외칠 게 뭐가 있지? 하지만 셰더가 곧이어 내뱉은 말은 나를 석고상처럼 완전히 얼어붙게 만들었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풍만한 가슴도, 홀릴 것 같은 페로몬도, 빵빵한 엉덩이도 없고 쓸데없는 물건만 달려 있는 남자 따위를 안는 것은 이 몸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기는 하지만 세상을 살다보면 비록 쓰라리고 고통스럽기는 해도 어쩔 수 없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설마...!?" "...그리하여 난 너와 일을 벌일 수밖에 없다. 이건 절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다! 오로지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절대신이신 주신 다르군트님의 의지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 뿐! 카이엔, 나를 원망하지 말거라!"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지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셰더 너!? 그런 대사는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변태잖아... 너? 별 잘난 것도 없으면서 잘난 척 위대한 흑마법사라고 지껄여 대고, 여자를 탐하는 주제에 매일같이 마나티에게 당해버리고 힘 다 빠져버리면서... 이런 역할은 네게 어울리지 않아! 정신차리고 그만 둬! 하지만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몸이 잔뜩 굳어서 얼어붙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기자신의 각오를 추스리려는 듯 큰 목소리로 일장연설을 마친 셰더는 꽤 진지한 각오를 얼굴에 띄우면서 내가 이불을 둘러말고 앉아 있는 침대 위로 접근해 왔다. 나는 여전히 움직이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의 파편들이 맴돌았지만 갈라진 상념의 갈래는 광대한 두뇌 속의 사고 속에 펼쳐져 프로그램 에러를 일으켰고 그에 따라 발생한 푸른 빛깔의 치명적인 오류는 내 두뇌활동을 정지시켜 버렸다. 간략하게 말하면, 나는 단지 초점을 잃은 멍한 눈으로 그 자리에 못박혀 있었을 뿐이었다는 이야기다. 휘익 이미 행동의 의지를 상실한 내 앞에 선 셰더는 가볍게 한 손을 뻗어 이불을 휙 하고 걷어냈다. 그리고 침대 위에는, 짧은 스커트 안으로 비치는 속옷을 그대로 셰더의 눈앞 정면에 드러낸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발동하지 않을 까봐 걱정했는데 일부러 이런 옷을 입힌 보람이 있어. 별로 남자 따위한테 흥분하고 싶지는 않지만 말야..." "....." 셰더가 양 손을 내 어깨에 가볍게 얹었다. 순간적으로 몸이 움찔했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나는 지금 눈앞에서 나를 덮치려는 셰더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고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으며 아무런 움직임조차 보일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마비된 채 단지 몸의 감각만이 살아서 움직일 뿐이었다. "자포자기한 건가...? 흐음." 그러면서 셰더는 내 몸을 180도 돌려 등짝이 위로 가도록 만들고는 침대 위에 엎어뜨렸다. 그리고 곧바로 셰더의 손이 내 엉덩이를 만졌다. 조건반사인 듯 냐 두 손은 침대 시트를 꽉 붙잡았다. 문득 어제의 일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마음속이 공포감으로 가득 채워졌다. 셰더에게 시르젤같은 배려를 바라는 것은 무리겠지... 아직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눈앞의 시트는 점차 눈물로 젖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럼..." 셰더가 내 팬티를 벗기기 위해 잡아끌었다. "멈추십시오!" 그 때, 문이 콰쾅 하고 열리면서 누군가가 뛰어들어왔다. 나는 지금 뛰어들어온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자세였지만 목소리만은 너무나도 친숙했다. "시르젤..." 마비되어버린 몸의 감각 앞에 나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필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되새겼다. -------------------------------------------------------------------------- 질질 끈다... 인가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쓴웃음) 근데 카이엔은 원래 당하라고 만들어진 캐러기 땜에....-_-;;;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침잠(沈潛)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82화 : 침잠(沈潛) ------------------------------------------------------------------------- "셰더 씨, 더 이상 카이엔 씨에게 손을 대는 짓은..." "방해하지 마라! 갈(喝)!" 하지만 멋지게 등장한 장면도 잠시뿐, 시르젤은 들어오자마자 셰더의 흑마법공격을 받아 방 구석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크윽..." "...마나티가 일렀나 보군. 그래봤자 아무 소용없겠지만." "...으윽." 시르젤은 갑작스런 공격에 받은 충격이 꽤 있던 모양이었지만 어떻게든 몸을 추스리면서 일어났다. 하지만 마치 가위에라도 눌린 듯 움직이지 않는 내 몸은 나를 구하러 필사적으로 뛰어들어온 그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향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부탁드립니다. 그만... 두십시오." "흐음... 지금 자네가 하는 말이 얼마나 바보같은 말이라는 걸 알고 있나?" "그건..." "이유야 어쨌든간에 주신의 절대명령이다. 나는 따르지 않으면 안 돼. 게다가 자넨 어젯밤에 지금 내가 하려는 일과 똑같은 일을 카이엔에게 했지 않나? 그런데 이제와서 나를 막겠다고 나서다니 참으로 뻔뻔스럽기 그지없군."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막겠습니다."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 몸을? 옥(獄)! 쇄(鎖)!" "크윽!" 쿠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르젤의 사지가 보이지 않는 무형의 사슬에 결박되어 쓰러졌다. "박(縛)보다 한 단계 높은 연환 구속(拘束) 마법이다. 이건 정신력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수준의 마법이 아니지." "셰더 씨!" "시끄럽군. 그 나불대는 입도 좀 닫아 줘야겠어. 묵(默)!" 셰더의 마법과 함께 곧이어 시르젤은 조용해졌다. 등을 위로 하고 침대에 엎드려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그가 셰더에게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제압되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셰... 셰더 님..." 그때까지 옆에서 조용히 있던 시즈가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셰더에게 말했다. "뭐냐?" "도와... 드릴까요?" "필요없어. 넌 나가. 그렇지 않아도 이 방엔 남자들뿐이라서 칙칙한데 너까지 있으면 더 칙칙해져." "주인님은 시르젤 님 들어오면 4p를 하라고 하던데..." "...안 꺼지면 시즈 너부터 없애버린다. 확!" 셰더가 조금은 무서운 목소리로 성질을 낸 탓일까? 삐그덕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멀어져가는 시즈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셰더는 막 하려던 차에 방해가 연달아 들어와서 기분이 몹시 상한 듯 궁시렁궁시렁 투덜거렸다. "쳇. 카이엔한테 저런 야한 옷까지 입혀 놓으면서 간신히 할 마음이 들게 만들었는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잖아? 게다가 아무리 봉쇄시켜 놨다지만 누가 지켜보는 상황에서 일을 해야 하다니... 뭐 하긴 주신님과 마나티는 다른 영상으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으니 상관없나..." 뭐, 뭐어!? 주신 다르군트와 마나티가 지금 이곳을 보고 있다고!? 이렇게 민망한 옷을 입은 나와 그리고 나를 곧장 덮치려고 하는 셰더의 모습을!? 어찌나 깜짝 놀랐는지 나는 확 정신이 깨여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나는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다시 침대 위로 쓰러져 버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등 뒤로 셰더가 자신의 몸을 포개 왔기 때문에 그 무게에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하... 하지마!" "빨리 끝내는 편이 좋아. 너한테도, 나한테도 말이지." 다시 한번 치마 안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슥슥 쓰다듬는 셰더의 손길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해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감각인 걸까. 셰더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겠다는 듯 바로 팬티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속옷을 벗겨냈다. 손놀림이 아무래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매우 능숙했다. 기... 기다려! 이건 너무 급하잖아! 위에서 깔려 일어서지 못하는 나는 셰더가 바지를 내리는 소리를 듣고 공포감에 질색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최후의 순간이 왔을 때, 내 양손은 손톱이 부러질 정도의 악력으로 침대 시트를 꽉 부여잡았고, 작은 샘물에 가득 채워져 있던 눈물을 둑이 터져나가듯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왔다. [근데 상우야. 너 이세계로 가면 어떤 세계로 가고 싶어?] [사랑이 넘치는 세계. 그것도 금지된 사랑이 잔뜩.] 그때는, 사실 진지하지 않았다. 정말로 이세계로 가게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마음 속 어딘가에서 일탈을 원하는 마음은 있었다.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몽상의 영역이라고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꿈꿀 자유라는 것은 평등하게 존재하니까. 하지만 단지 꿈만으로도 그쳐야 하는 영역이 있다. 예를 들자면, 스케일 큰 화끈한 액션 영화에 감동하더라도 실제로 그런 상황이 오기를 바래서는 안 된다. 그런 종류의 상상이 현실화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게 될 테니까. 비록 덜 진지했더라고 하더라도, 분명히 내 마음속에 존재했던 꿈같은 상상. 그 상상은 이루어졌다. 금지된 것을 소망했던 나는 그 대가를 받고 있었다. 언젠가 문길이가 말했던 적이 있던 것 같다. [변태짓을 좋아하는 사람은 변태짓으로 망하지... 내가 그 꼴이니...] 아아... 그래. 녀석은 여자가 되는 소원을 이루었지만, 대신에 자기 자신이 그 '변태짓'의 대상이 되는 심한 꼴을 당해야만 했지. 얄궂게도 그런 꼴을 당하게 한 당사자가 나를 위에서 짓누르고 있는 놈과 같은 녀석이다. 흑마법으로 소원을 이룬 댓가(counter)인 걸까.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은... 공허한 정신과 지친 육체 넋을 잃었더라도 육체는 녀석의 움직임에 따라 격렬하게 요동쳤다. 입에서는 끊임없는 비명성이 터져 나오고 온 몸의 신경다발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마치 중추신경계 어딘가가 뚝 끊긴 듯이 나의 영혼에까지는 육신의 괴로움이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엉망으로 구겨진 침대의 눈물 젖은 시트가 아니라, 얼음장보다 차갑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어둠의 세계뿐. 나는 그곳으로 서서히 침잠(沈潛)해가고 있었다. -------------------------------------------------------------------------- ...1번이었답니다. =_=;;; 나는야 사악작가 랄라라♬ (이 다음은 어딘가 많이 보던 패턴이 될 가능성 농후) -요즘 보는거- *. 강철의 연금술사 (간만에 보는 아주 괜찮은 소년만화라고 생각) *. 풀 메탈 패닉! 후못후 (말없이 강추.....) *. 테니스의 왕자님 (...질질 끌지마라...) *. 최유기 리로디드 (여전히 후까시 빼면 아무것도 안 남는 바보 4인조) *. 이누야샤 (...언제 끝날거냐? 안 끝날거면 셋쇼마루님 용안이라도 좀 많이 보여줘!) *. 쪽보다 푸르게 -인연- (오로지 그림체가 맘에 들었다는 이유) 츠키히메는 유명해서 봤는데 하.나.도. 재미없고,(게임 안해봐서 그런가?) 어둠과 모자와 책 어쩌구는 내용을 도통 알아먹지 못하겠다는 -_-;;;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카이엔 구출단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83화 : 카이엔 구출단(1) ------------------------------------------------------------------------- "흐음. 그런가. 동생을 찾고 싶다고?" 대륙 제일의 예언가, 브라이트 아이(Bright Eye)의 칭호를 가진 핑 슬레이트가 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그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찾아온 위즈 하켄크로이츠는 한참동안 설명하느라 약간은 지친 듯 했다. 평소에 뛰어난 연기자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그답지 않은 급하고 서투른 행동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위즈가 시즈의 실종에 초조해하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리라. "꼭 슬레이트 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동생이 어디로 갔는지 단서가 될 만한 것이라고는 전무하다시피 하니까요." "하지만 자네 동생의 소재를 알아도 데려올 방법이 있나? 흑마법을 쓰는 마녀에게 잡혀갔다면서?" "그 마녀에게... 찾아가서 사정해 봐야겠지요. 돈이나 보석을 원한다면 어떻게든 마련해서..." 하지만 슬레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가르쳐 줄 수 없네." "어째서입니까!?" "자네가 그곳을 찾아간다면, 자네마저 그 마녀에게 속박당하고 말 거야. 형제가 나란히 마도의 노예로 묶이고 싶은가? 카이엔만큼은 아니겠만 자네가 사라지면 울 여자들이 제법 있을텐데?" "마도의.... 노예라고요!?" 위즈 역시 마도의 노예에 대해 알고 있었다. 흑마법을 쓰는 마녀에게 동생이 납치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어렴풋이 그렇게 될 지도 모른다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짐작하고 있었더라도 사실을 확인받을 때는 또 다른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이런. 이런. 쓸데없는 말을 해 버렸군. 어쨌건 자네가 대륙 7대 마법사나 그랜드 소드 마스터급의 조력자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장소를 알아도 가르쳐 줄 수 없어. 이만 가 보게나." "하지만!" 위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슬레이트는 그를 쳐다보러고 하지도 않았다. "좋습니다... 그 마녀를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거군요. 조만간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잠깐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던 위즈는 금세 예의바르고 절제된 태도로 전환하고는 슬레이트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나섰다. 하켄크로이츠 가문은 그럭저럭 부유한 편에 있는 가문이었지만 집안에서 대단한 전사나 마법사가 태어난 적이 없을뿐더러 권력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륙 7대급의 마법사나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도움을 받으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었다. '이런 건 좋아하지 않지만... 동생을 구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어!' 위즈가 그렇게 결심하면서 슬레이트가 묵는 방을 나섰을 때, 마침 슬레이트의 방으로 향하던 레이엔과 마주쳤다. "어? 형은... 저번에 카이엔 형한테 대결을 청했던 위즈... 하켄크로이츠 씨." "넌... 그..." 위즈는 레이엔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비록 입은 옷차림이나 머리모양 등은 남자 차림이었지만 가지런히 뻗은 핑크빛 머리색깔과 황금빛으로 초롱초롱 빛나는 눈망울을 비롯해서 전체적으로 생긴 모습이 오늘 아침에 브리타뉴가의 정원에서 마주쳤던 아이렌과 비슷했던 것이다. "레이엔 브리타뉴에요. 무슨 일이시죠?" 위즈를 바라보는 레이엔의 시선은 그렇게 호의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딱히 적의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엔을 바라보는 위즈의 시선은 달랐다. 아이렌과 닮은 레이엔을 바라보면서 위즈는 자기 취향인 아이렌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찬 것이었다. '으윽! 내가 왜 이래!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내가 꼬마 소년에게 이런...!' "저기... 괜찮으세요?" 조금 창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의아하게 느낀 레이엔이 말했다. 위즈는 노력파로 알려진 인물 적어도 레이엔이 알고 관찰한 바로는 마음이야 어쨌건 겉으로 쉽게 흔들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위즈는 조금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평소와 같은 태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그래. 괜찮다. 단지... 조금 걱정이 되서." "그렇군요. 소중한 사람이... 곁에서 없어진 거죠?" 순간 위즈는 깜짝 놀라서 레이엔을 쳐다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물음이 위즈의 얼굴에 띄워져 있었다. "슬레이트 할아버지에 비하면 한참 미숙하긴 하지만 저도 예언가니까요. 조금은 알 수 있어요." "그렇구나." 순간 위즈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이 아이도 예언가라면, 슬레이트만큼은 못해도 어느 정도 예언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생 시즈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방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묻고 싶은 말이 있는데... 들어주겠니?" 위즈는 진지한 태도로 레이엔에게 부탁의 말을 건넸다. 거기에 대한 레이엔의 첫 반응은 경계였다. "카이엔 형에 관한 건 아니죠?" "아니다. 아까 네가 말한 내 소중한 존재... 내 동생을 찾고 싶어서야." "흐음... 그럼 따라오세요." "고맙다." 레이엔은 위즈를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레이엔의 방 안에서는 스테아가 침대 위에 걸터앉아 레이엔 방 책장에 빼곡히 꽃혀 있는 책들 중 하나를 골라 읽고 있었다. "어라, 레이엔... 같이 오는 사람은?" "대륙 서열 2위의 미소년이라 불리는 위즈 하켄크로이츠 씨야. 하켄크로이츠 씨, 이 누... 아니 언니는 대륙 7대 현자 중 한 명인 스테아 만슈타인이에요." "언니?" "아, 신경 쓰지 마세요. 그건." 위즈는 레이엔의 말에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 이상의 관심은 보이지 않았다. 스테아가 먼저 방긋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하켄크로이츠 씨. 소문은 들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역시 대단한 미남이시네요. 확실히 카이엔 브리타뉴만 없으면 대륙 제일이라고 불러도 되겠어요." 위즈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사람들의 수식어구에는 항상 '카이엔보다는 좀 못하지만...', '카이엔만 없으면...'이라는 전제조건이 붙곤 했기 때문에 위즈는 스테아의 인사에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워낙 자주 듣는 말이라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태연하게 미소지었다. 매일같이 듣는 이야기에 흥분해서 감정 컨트롤을 잃는다면 위즈가 지금껏 쌓아온 연기력 배양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다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카이엔 브리타뉴에 대한 적대감 지수가 상승하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반가워. 어린 나이인데도 대륙 7대 현자라니... 굉장하네?" "별 말씀을요." 위즈는 사실 속으로 좀 놀라고 있었다. 이렇게 어린 꼬마 여자아이가 대륙 7대 현자라니... 하지만 그 놀람이 조금 가자 눈 앞에 보이는 새로운 풍경이 위즈의 은빛 눈동자 속에 비춰져 들어왔다. 트윈테일로 땋아 묶은 선명한 보랏빛 머리 아래로 호기심 많은 오렌지색 눈망울. 그 밑으로 코에 걸쳐진 앙증맞은 작은 안경. 레이엔이나 아이렌보다 나이는 약간 많은 듯 그들보다 조금은 성숙한 모양이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일단 충분히 위즈의 수비 범위 안에 들어가고 있었다. '아... 안경 로리다앗!' "하켄크로이츠 씨, 티아 언니에게... 무슨 이상한 게 있나요?" 레이엔이 스테아를 바라보는 위즈의 묘한 눈빛을 눈치챈 듯 질문을 던졌다. 그의 예지력이 위즈의 마음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어둠을 감지한 것이다. "아, 아무것도 아냐. 단지 저 나이에 7대 현자라는 건 역시 대단하잖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 "푸훗. 그렇게 띄워주지 않으셔도 돼요. 다른 쟁쟁한 분들에 비해 아직 저는 경험이 없고 모자란 걸요?" 위즈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스테아는 아름다운 미소년의 찬사를 받고 어쩔 줄 몰라하면서 얼굴을 살짝 붉히고는 손을 내저어 말했다. '와... 왕내숭!' 레이엔이 스테아의 모습을 보고는 생각했다. 레이엔한테는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이것저것 묻고 제멋대로 언니라고 부르게 하는데다가 자연스럽게 팔짱까지 끼고 다녔으면서 연상의 멋진 미소년을 만나게 되니 단번에 태도가 변해서 수줍은 태도로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라니! 레이엔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이렌도 내가 어려서 상대할 수 없다고 했지... 같은 나이인데도 말야. 어서 빨리 크고 싶다...' 아무래도 레이엔의 자그마한 육체는 벌써 훌쩍 성장해버린 그의 정신을 감안한다면 비좁은 것이 사실이었다. 레이엔은 자신도 빨리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스테아와 위즈 사이에 끼어들어 말했다. 조금은 두 사람을 떼어놓고 싶다는 마음이 작용한 행동이었다. "하켄크로이츠 씨, 제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요?" "아, 그랬지. 여기 의자에 앉아도 될까?" "그러세요." 스테아의 약간 의아한 시선을 레이엔은 애써 무시하면서 위즈가 꺼내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 ...다들 생각은 좋으신데요, 출판은 둘째치더라도 신고 들어오면 전 감당 못해요. 게다가 전 소심하잖아요. 아잉♡∼ 천천히 글의 끝마무리를 구상하고 있답니다. 더이상 미소년전기(라고 쓰고 변태전기라 읽는다.) 카이엔을 이끌어나가는 데 자기 자신의 역량의 한계가 너무나도 많이 보이는걸요. 게다가 생각보다 꽤 많이 썼답니다. 지금까지 쓴 것만 대략 여섯 권 분량 될 껄요? 조회수도 별 볼일 없으니 초인기작도 아닌데 무한분량 끌어봤자 좋을 것도 없.....(퍼억) 현재로서는 2부를 쓸 생각도 없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음이 바뀔 지도 모르겠지만요. 가능한 올해 안에 끝내도록 노력할 생각인데... 책이 안나오는군요 -_-;;; 다시 전화 걸어봐야겠습니다.(몇번째냐 이거...) 내년에는 후르츠♡판타지에만 집중할 생각이에요. 그 후로는 동인무협이나 동인게임소설 쪽을 건드려 볼까나 (-o-~) 시나리오는 있지만 누가 베낄까봐 미공개. 에헤헷♡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카이엔 구출단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84화 : 카이엔 구출단(2) ------------------------------------------------------------------------- 위즈가 레이엔에게 한 이야기는 그가 방금 전 핑 슬레이트에게 했던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유클리네 왕국 내에서 자신을 찾아오던 동생 시즈 하켄크로이츠가 정체불명의 마녀에게 납치당했다는 것. 구구절절한 이야기 속에 연기가 섞여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진실로 동생을 그토록 걱정하고 있는 것인지는 조금 구별하기 애매했지만 위즈의 설명과 심정 토로는 심금을 뒤흔들다 못해 뿌리 채 뽑아버릴 정도로 안타까워 보였다. 스테아는 이야기 중간부터 펑펑 울면서 울음을 그칠 줄 몰랐고 레이엔도 위즈의 이야기를 들으며 몇 번이고 눈물을 휴지로 훔쳐야만 했다. "흑흑. 너무 슬픈 이야기에요! 위즈 오빠!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뭐든지 도와드릴께요!" 어느 사이엔가 스테아는 위즈의 품에 안겨 훌쩍거리고 있었고 위즈는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스테아를 감싸안으면서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레이엔은 스테아가 생각보다 훨씬 헤픈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좀 삐진 상태였지만 우선은 꾹 참았다. 위즈의 이야기를 듣고 떠오른 예지는, 그보다 더 심각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즈의 동생을 데려간 사람은 셰더... 와 마나티 쪽인가... 이거 힘들겠는걸?' 레이엔도 슬레이트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이대로 위치를 가르쳐준다고 해도, 무작정 그곳으로 찾아간다면 역시 미소년 마니아인 마나티에게 아예 날 잡아 잡수시오 하며 자기 자신을 갖다 바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슬레이트처럼 완전히 외면하기에는 방금 위즈가 했던 이야기가 너무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아직 어린 레이엔은 슬레이트와 같은 연륜과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에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상대가 위즈와 같은 연기와 화술의 달인이라면 더욱 그랬다. "슬레이트 할아버지께도 들었을 테지만, 상대는 강력한 흑마법사... 대륙 7대 흑마법사를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되요." "알아. 나도 대책 없이 무작정 일을 벌이지는 않아. 나 자신의 일은 내가 책임진다. 그러니까 알려줘." 위즈가 상당히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레이엔은 그 눈동자 속에서 위즈가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상대하려고 생각하고 있는지 읽어낼 수 있었다. 위즈의 계획을 읽은 레이엔은 그 발상에 조금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지만 확실히 돈도 권력도 없는 위즈에게는 그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그 방법이라는 것은 미인계(美人計)였으니 말이다. '만약 카이엔 형이 그 방법을 썼다면 세계정복도 가능하겠지.' 그때 집 정원에 쿵쿵거리며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쿠쿵 쿵 레이엔은 갑작스런 일에 깜짝 놀라 창문가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었고 스테아와 위즈도 호기심에 레이엔의 뒤를 따랐다. "아... 아빠? 엄마? 그리고 세이렌 누나와 사이엔 형!?" 순간이동으로 집으로 돌아온 걸까? 하지만 중간에 무언가가 잘못된 듯 레이엔의 가족들은 모두 따로따로 떨어져 저택 앞의 넓은 풀밭과 각각 온 몸으로 부딪히는 키스씬을 연출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일에 놀란 집사와 몇몇 하인들이 밖으로 달려나왔고 궁금증을 느낀 몇몇 식객들이 창문을 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글쎄?" 대륙 7대 예언가라는 레이엔도, 대륙 7대 현자라는 스테아도 한눈에 척 보고 뜬금없는 상황을 파악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들은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방을 뛰쳐나갔고, 얼떨결에 남겨진 위즈도 허둥거리면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주신 다르군트님이..." 차붐 분데스리가가 거칠게 손톱을 씹으면서 중얼거렸다. 케이리가의 흔적을 쫓아 셰더의 본거지로 향한 일행들은, 주신 다르군트의 권능에 의해 자기 집으로 각각 떨어진 후에, 다시 한번 브리타뉴 가의 집에 모여들었다. 다만 이전에 모였을 때보다 두 명의 인원이 추가되었는데 흑마법사 서열2위와 3위의 네키시스와 오필리아 부부였다. 그렇잖아도 많은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몰려든데다 주신 다르군트가 직접 강림하여 출현했다는 놀랍고도 엄청난 소식이 전해져 왔다. 정숙을 예의로 삼는 교 양깊은 연장자들이라할지라도 흥분해서 사람들과 이것저것 떠들지 않는 편이 이상할 것이다. 지카니 브리타뉴와 아르쥬나는 그런 사람들을 간신히 조용히 시킨 다음에 상황을 정리했다. 간단한 브리핑을 마치고 난 후, 지카니는 사람들의 의견을 물었다. "거, 주신님이 직접 나선 이상 우리가 거기 저항할 수가 있겠소?" "마신 베링거도 직접 잡아 가두셨으니 만사 오케이 걱정 끝이지요." 사람들 대부분은 주신이 직접 내려와 마신을 처단했으니 이제는 아무 걱정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셰더의 본거지에 따라가지 않은 몇몇 사람은 주신의 신안(神顔)을 뵙고 싶다며 그곳으로 가보고 싶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애초에 이렇게 대륙의 쟁쟁한 사람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베링거의 환생체, 카이엔의 실종과 그를 봉인한 마법무구들이 전부 박살남에 따라 마신 부활의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신보다 훨씬 강하고 졸라 짱 센 세계의 창조주이신 주신 다르군트님이 직접 나서셔 처리하겠다니 더 이상 좋은 결말이 어디 있겠는가? 회의 분위기는 대체로 이제 해산하자는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물론 브리타뉴 가 사람들의 입장으로는 답답할 지경이었다. 마신 베링거 문제야 어떻게 해결되었다고 치더라도 여전히 그들의 소중한 아들이자 동생인 카이엔 브리타뉴는 셰더 패거리와 케이리가 가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각자 한 번씩 카이엔을 납치한 적이 있는 자들. 그들이 카이엔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때가 되면 돌려보내준다고 주신이 약속하기는 했지만... 걱정이 가시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브리타뉴의 사람들에게는 또 한가지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 지 모를 소식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주신 다르군트가 강림한 육체가 아시에의 육신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이전의 아시에의 인격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런 의문에 레이엔은 그녀의 별이 떨어진 지 오래라며 고개를 저었고, 핑 슬레이트도 68%의 확률로 아시에의 영(靈)이 적어도 이 세계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고 예지했다. 결국 몇몇 사람만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남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곧 뿔뿔히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님?" "어쩌긴 어째? 다시 가야지." 사이엔의 물음에 세이렌은 이를 갈면서 주먹을 꽉 쥐고 응답했다. 세이렌은 상대가 마신이든 주신이든 소중한 동생을 남의 손아귀에 놔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결연한 의지를 언어에 담아 외쳤다. "아직 카이와 한번도 자 보지 못했는데 쉽게 포기할 수는 없어!" "그... 그렇군요, 누님! 저도 반드시 카이엔과 뜨거운 밤을..." 퍼억 사이엔이 말을 내뱉자마자 세이렌의 유려한 돌려차기가 사이엔의 얼굴에 직격하면서 사이엔이 나자빠졌다. 세이렌은 주머니에 양 손을 집어넣고 담배라도 피워 꼬나물면 어울릴 듯한 불량스런 태도로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사이엔의 배때기를 연속으로 걷어차면서 말했다. "우리 카이 죽일 일 있어!? 변태는 너 혼자로 족해! 순진무구한 카이엔에게 어떻게 그런 파렴치하고 끔찍한 짓을 저지를 생각을 할 수 있어? 어쨌건 카이의 첫경험을 가져가는 건 나야! 아무도 건들지 못해!" 이미 순결이라는 명제에 관해서라면 카이엔은 이미 그것을 잃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는 세이렌과 다른 가족들이었다. "그렇게 놔둘 줄 알아, 세이 언니? 카이 오빠는 내 꺼란 말야!" "어머나. 아이. 아직 밑에서 피도 못 본 어린아이가 무슨 소릴 하는 거니?" "나도 그런 건 알아. 세이 언니. 하지만 성관계라는 것은 반드시 교합(交合)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고! 그래서 나도 요즘 매일같이 사탕을 빨면서 연습하고 있어! 카이 오빠를 위해서!" "사탕으로 연습하고 있다니... 아이 너..." "알잖아? 당연히 펠라치오(fellatio)지." "커헉!" "쿨럭!" "그... 그런!" 세이렌의 독주에 끼어든 아이렌이 결정적인 대사를 말한 순간 지카니와 아르쥬나, 사이엔을 비롯하여 아직 떠나지 않고 남아 있던 사람들 전부가 균형을 크게 잃으며 휘청거렸다. 레이엔은 거의 기절 직전까지 갈 정도로 까무라쳤고(결국 레이엔도 뭔지 알고 있다는 소리다. 아닌 척 하기는... -_-;;;) 세이렌도 얼굴낯빛이 순간적으로 싹 변했다. 위즈의 애절한 사연을 무시하고 거부했던 예언자 노인 슬레이트마저도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이렌의 말을 듣고 가장 절규한 사람은 위즈였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저토록 귀엽고 순수하며 사랑스러운 여자아이가 차마 교양인으로는 쓰지 못할 상스럽고 저속한 말을 쓰는 것인가, 아아! 참으로 개탄스럽구나! 아무리 요즘 애들이 갈 때까지 갔다고는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는 해도 위즈의 마음속에는 로리콘의 어둠이 잠들어 있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아이렌한테 그런 서비스를 한번 받아봤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입을 헤 벌리는 위즈였다. "어쨌건 의견은 정해진 것 같군. 우리 가족만이라도 가자." "잠깐만요. 여보. 주신님의 말씀을 거역해서는..." 아르쥬나가 지카니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미소에는 일말의 불안감이 깃들여 있었다. 지카니는 그녀의 손끝에서 가벼운 떨림의 기색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알잖아, 당신. 우리 애들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아이들이라는 것을 말야. 특히 카이엔에 관한 일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아르쥬나는 주신 다르군트에게서 이름을 받았고, 그의 권능을 빌어 세상에 신력을 발휘하는 씰드 네임의 신관. 당연히 그... 아니 그녀의 명령에 한치도 어긋나는 일을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온몸이 오그라드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 두려워졌다. 물론 세계의 창조주이신 다르군트는 상대에게 시련을 줄지언정(사실은 단순한 괴롭힘이지만) 웬만해서는 사람을 해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자칫 정말로 그녀를 화나게 한다면 마신의 강림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세상은 파멸로 향해 치닫을 터였다. 이 대륙의 누구보다도 다르군트와 가까운 정신적 교감을 이루었던 아르쥬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창조신이 발휘할 수 있는 궁극의 기술. [방법]의 위력에 관해서도... -------------------------------------------------------------------------- 요즘 D.N.ANGEL의 곡 ふたつのお願い(두사람의 소원)에 빠져 있답니다. 노래 너무 좋아요 ;ㅁ;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카이엔 구출단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85화 : 카이엔 구출단(3) ------------------------------------------------------------------------- "저도 따라가고 싶습니다." 아르쥬나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브리타뉴 가문의 사람들이 다시 한번 카이엔을 찾기 위해 셰더의 본거지로 찾아가기로 결정지었을 때, 위즈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그는 일련의 혼란 와중에 카이엔과 시즈가 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위즈의 목적은 두 가지, 사랑하는 동생을 되찾고, 그 다음으로 카이엔을 꺾어 아이렌에게 자신을 다시 보도록 만드는 것! "그건..." "가고 싶은 사람은 모두 가도록 하지요. 이런 상황이 된 바에야 비전투원이 있어도 별 상관은 없을 것 같아요. 게다가 무엇보다도 여기 주신 다르군트님의 모습을 직접 뵙고자 하는 분이 많잖아요?" 지카니가 난색을 표하자 스테아가 나서서 그를 설득했다. 사실 브리타뉴 가 사람들 외 여기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주신 다르군트의 모습을 직접 대하고자 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저희가 안내할께요. 모두 같이 가도록 하죠." "어이, 오피. 또 내 의견은 안 묻고 마음대로..." "괜찮아. 괜찮아. 이런 건 원래 사람 많고 떠들썩할수록 좋은 거야. 창조신을 직접 뵙는 일이잖아?" 오필리아가 재안내를 자청했고 네키시스는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그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따라가려는 이유를 사람들이 전부 주신을 뵈려는 걸로 생각한 것을 알게 된 위즈는 가벼운 쓴웃음을 얼굴에 띄웠지만 굳이 여기서 따지고 들 이유는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럼 사람이 좀 많으니까 워프 마법진을 그려야겠군요. 브리타뉴 양, 좀 도와주시겠어요?" "물론이죠. 오필리아씨." 오필리아와 세이렌이 힘을 합쳐 공간이동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비록 서로의 영역은 백마법과 흑마법으로 분야는 서로 달랐지만 마법이라는 학문은 깊이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공통적으로 인식되는 진리가 있기 때문에 의견을 조율해가면서 수식을 합치시키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둘은 마법진을 다 그리고 재검토를 시작하자마자 어두운 표정으로 돌변했다. "오필리아씨... 이건!" "난감하네요. 공간 차단(spatial isolation)이라니..." 오필리아의 중얼거림을 듣고 사람들은 상황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주신 다르군트는 셰더의 본거지가 있는 공간을 아예 공간분리시켜 다른 공간과 격리시켜 놓은 것이었다. 물론 파해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문의 시전대상자가 주신 다르군트라면 이야기가 틀려진다. 창조신은 세상의 질서를 일부 관장하는 다른 신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존재다. 세상의 절대적인 규칙(rule)을 자기 마음대로 정하고 바꿀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런 존재의 행위에 반하겠다는 사실은 물을 위로 흐르게 하고 해를 서쪽에서 뜨게 하겠다는 이야기와 같은 세상의 규칙을 바꾸겠다는 뜻이 되어버린다. 애초에 인간의 능력 범주를 벗어나는 행위라는 의미였다. "우선은 다같이 우리 집으로 가요. 셰더의 집과 저희 집은 둘다 몽환계곡 안에 있으니까... 그곳에서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오... 오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집에까지 끌어들이는 건..." "뭐 어때요? 남아도는 방이 수십 개나 되는데 야박하게 굴 건 없잖아요?" 여전히 오필리아에게 기가 눌리는 네키시스에게 사람들의 동정적인 시선이 모아지는 것을 레이엔과 스테아는 알 수 있었다. 저럴 거면 차라리 말을 하지나 말 것이지... 그들 모두가 네키시스가 공처가(恐妻家)라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이미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대륙 흑마법사 2위와 3위의 서열은 서로 바뀐 후였다. "그럼 공간이동을 시작할테니 같이 갈 사람들은 모두 마법진 위에 서 주세요." 세이렌의 외침에 따라 모여 있는 사람들이 모두 커다란 원 위에 섰다. "그럼 출발합니..." "잠깐만요!" 세이렌과 오필리아가 저택 정원에서 모두를 공간이동시키려고 할 때 저택 입구쪽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급히 달려오느라 좀 흐트러져 있었지만 독창적이면서도 산뜻한 디자인의 교복은 카이엔이 다니는 학교의 교복이었다. "너희들은...!?" "헉헉... 안녕... 하세요?" 숨을 헐떡이면서 급하게 달려온 학생들은 키론과 린넬, 그리고 치즈 3인방이었다. "누구니?" "누구세요?" 어리둥절한 얼굴로 브리타뉴 가의 사람들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사실 그들은 카이엔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을 쫓아내는 것 이외에는 카이엔의 학교생활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이었다. "저기... 저 기억 안 나세요? 저번에 중간고사 때 카이엔 공부 가르쳐주러 왔던 키론 모아라드에요." "아, 그러고보니!" 레이엔이 기억났다는 듯 키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하지만 세이렌과 사이엔, 아이렌 등은 그런 일이 있었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쟤들 누구야? 하는 사람들의 무관심 섞인 웅성거림을 뒤로 한 채 아르쥬나가 그 특유의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너희들은 어떻게 알고 온 거니?" "사실은..." 그녀의 물음에 키론은 아시에와 함께 시르팡의 본거지에 갔던 이야기와 아시에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말했다. 키론은 시르팡 일가의 사람에 의해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졌지만 그 후 카이엔의 실종에 대한 자체적인 조사를 나름대로 계속했고 아버지의 친구와 어떻게 연이 닿았는데 그 친구가 브리타뉴 가 사람들과 함께 셰더의 본거지까지 찾아간 사람들 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원래는 혼자만 올 생각이었는데 마침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하필이면 린넬과 치즈 패거리가 같이 있었던 탓에 같이 오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건 같이 갈 수 없을까요?" "이제와서 한두 명 더 늘어난다고 새삼 달라질 것도 없겠지. 그보다는 빨리 가자꾸요." 사이엔이 자꾸 늦춰지는 일정에 투덜거렸다. 이제는 더 이상 늘어날 인원이 없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세이렌과 오필리아가 주문을 외우려 할 때 지카니는 집사가 슬쩍 원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자네도 갈 텐가?" "죄송합니다. 주인님. 집사가 집을 비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평생에 단 한번 주신 다르군트님을 뵐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습니다. 대신 집을 지킬 준비는 확실히 해 두었습니다." "자네의 결심이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하게." "감사합니다." "에휴. 이제는 진짜 갈 거에요! 또 누가 끼어들면 절대 안 끼워줄거야!" 세이렌이 신경질을 내면서 머리를 뒤로 스윽 넘기고는 오필리아와 함께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평소에 한 두 사람을 이동시키는 일은 일도 아닌 세이렌이었지만 역시 수십 명의 사람을 한꺼번에 이동시키려면 제대로 된 마법진과 주문이 필요했다. 오필리아와 힘을 합치고 있지 않았다면 정말로 힘든 작업이 되었으리라. -------------------------------------------------------------------------- 요즘 글이 정말 안 써진답니다. 이전과 같은 연재간격을 바라기는 무리일 듯 하네요. 훗... 정말로 때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을 지닌 건 저라고요! 고1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PC통신망에 동인지나 Y물이 뭐냐고 질문 올렸던....-_-; (그러면서 이상한 단어 소개해서 순진한(과연 순진할까?) 10대들 버리고 있냐? -0-) 전 정말로 순진무구하답니다. ^^;;; 책 날개 문구에도 그 점을 강조해 놨는데.(아직 안나오긴 했지만)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Once upon a time...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86화 : Once upon a time...(1) ------------------------------------------------------------------------- 어둠. 정체를 알 수 없는 매질로 팔방이 둘러싸여져 있는 이상한 공간. 어디에서도 빛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나는 마치 맹인(盲人)과 같은 일체의 시각을 느낄 수 없는 이곳에서 허공의 존재감과 가라앉아 가는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샤샥 무언가가 머릿속으로 지나갔다. 짧지만 인상깊은 장면이었다.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끝없는 그리움이 솟구쳐오르면서 어둠 속에서 눈물이 반짝였다. "카이... 아니 상우야, 괜찮아?" 침잠된 공간 속에서 무릎을 꿇은 채 팔을 늘어뜨리고 힘없이 앉아 있는 내게 미렌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무언가 대답을 해야 할 텐데... 라고 생각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니 그 전에 앞서 전달할 말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두뇌의 사고 자체가 정지한 듯이 나는 초점 잃은 눈으로 어떠한 빛의 입자도, 파동도 존재하지 않는 소우주의 공간 속을 의미 없이 주시하고 있었다. "약하군." 미렌의 뒤로 또 다른 존재의 의식이 느껴졌다. 부활을 꿈꾸었지만 주신 다르군트의 손에 잡히는 바람에 다시 카이엔의 몸 속 깊은 곳에 봉인된 마신 베링거였다. "고작 그런 것도 견디지 못하는 거냐." "베링거 씨!" 미렌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베링거를 제지하며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애초에 물질계가 아닌 공간. 베링거는 가로막는 미렌의 정신체를 가볍게 스윽 통과하면서 낮은, 하지만 명백히 분노와 적의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그것은 나에 대한 마이너스의 감정은 아니었다. "다르군트는 원래 그런 놈이다. 옛날부터 그랬지. 녀석이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어." "당신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미렌이 끝에 퀘스쳔 마크가 달린 의문형 대사를 베링거에게 던졌다. 하지만 베링거는 미렌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전혀 딴 소리를 내뱉었다. "이렇게 나약하고 한심한 녀석의 몸 속에 갇혀 있어야 한다니... 정말 최악이야." "상우가 안으로 들어왔는데... 나갈 수 없는 건가요?" "불가능해. 인정하기는 싫지만, 놈은 이 세계에서 정말로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너야말로 나가지 않나?" "전... 여자 몸의 카이엔이 아니면 나갈 수 없어요." 등 뒤에서 베링거와 미렌의 이야기가 오고 가는 가운데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시체처럼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앉아 있었다. "어이. 이 때려죽어도 시원찮은 바보 자식을 정신차리게 할 수 있는 방법 없냐?" "글쎄요. 아무래도... 마음의 상처를 너무 크게 받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충격이었겠죠." "흥! 마음의 상처는 무슨... 물론 방황하고 헤맬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삶을 포기하는 태도라니... 한심할 뿐이지! 나는 이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든 고난의 세월을 견뎌 와야만 했다고!" 베링거의 언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화내봤자 곧 사태 해결에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어쨌건 이놈이 이렇게 인생을 포기하면 그 안에 있는 너와 나도 무사하지는 못해. 나는 수많은 세월을 맞는 그릇이 나타날 때까지 또 다시 끝없이 세상을 떠돌아야겠지. 너는... 이미 상당수의 기억을 잃었으니... 소멸되겠군." 미렌은 순간 흠칫 했다. 하지만 속일 수 없는 감정은 이 이상한 공간 속을 거칠고 격렬하게 맴도는 것이 모두에게 느껴졌다. 소멸이라는 것은 역시 두려운 것이겠지. "이 머저리자식은 소멸되어도 상관없을지 몰라도 우리한테는 다르지, 그렇지 않나, 미렌?"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지요?" "합일(合一). 그것밖에 없어." "그게 뭐지요?" "우리의 정신과 의식을 이 녀석과 합체시키는 거다. 애초에 한 육체에 세 개의 정신이 모여있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일이야."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예요?" 흔들리는 감정. 자신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파동이 미렌에게서 뻗어져나왔다. 하지만 베링거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 셋의 영혼이 모여 새로운 하나의 영혼이 탄생하는 거다. 영혼은 결국 언젠가는 소멸해. 하지만 동시에 재생하기도 하지. 불안한가?" "....."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이건 나보다는 네게 더 절박한 문제일거다. 너무 오랫동안 육체에 잠든 네가 얼마만큼의 기억을 완전상실했는지는 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미렌 너는 기억과 동시에 영혼을 잃어 가고 있어.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만." "전.... 저는...." "원하지 않는다면 넌 빠져도 좋아. 하지만 되도록 빨리 결정하는 편이 좋을 거야." 미렌은 잠시동안 생각에 잠겼다. 조금 긴 시간동안 고민이 이어지는 듯 했지만 베링거는 묵묵히 참고 기다렸다. 그리고 미렌은 마침내 결론을 냈다. "전 빠지겠어요." "그런가." 동참하지 않으면 완전히 사라질 지도 모르는데 어째서냐고 하는 질문을 베링거는 하지 않았고, 그런 결정을 내린 그녀를 설득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베링거는 단지, 고개를 살짝 끄덕여서 그녀의 말을 수긍했을 뿐이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할까." 베링거는 내 등 뒤로 손을 가져다대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육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단지 의식체일 뿐인데도 마치 베링거의 손이 내 심장을 부여잡고 있는 듯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끄으으윽....." 신경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정신을 미치도록 휘감아돌았다. 싫어! 싫어! 더 이상 괴로움과 아픔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이곳까지 찾아들어왔는데 또 다시 이런 고통스러움을 내게 주지 말아줘! 하지만 심장을 쥐어짜내는 듯한 고통은 수그러들기는커녕 점차 심해졌다. "끄아아아아악!" 무언가가 내 안에서 굼틀거렸다. 그리고 곧이어 머리에 대못을 박는 듯한 아찔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나 자신과 세상 사이에 놓여져 있는 경계에 틈이 생겨났고, 그 틈 사이로 다른 누군가의 의식이 흘러들어오면서 나 자신의 영혼과 섞여들어가고 있었다. 시... 싫어. 싫다고! "역시 본능적으로 거부하는군... 하지만 너같이 어리숙한 녀석이 나를 당해낼 수는 없어! 나도 너같이 한심한 영혼과 합일하기는 썩 내키진 않지만..." 합일이라니...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러면... 크으윽.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뿐, 무수한 상념의 파편들이 머리속으로 들어와서 영혼의 틈새로 박혀나가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나의 영혼에 무수히 많은 상처가 생겼다가는 또 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이런 건... 이젠 싫어. 이젠 싫다고오! "더 이상... 우는 소리는 하지 마, 이 머저리자식아!" 베링거는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외치며 나의 의식체 속으로 완전히 돌입했다. -------------------------------------------------------------------------- 베링거 과거편 개시.(분위기 꽤 암울) 여러분, 어른을 놀리면 못써요. 우후훗♡(방긋) 계속 그러면 싸가지전설 카이엔 같은 N세대 연애물(....)을 쓰는 수가 있답니다. 근데 읽으시는 분들 다들 로리로리한 초중등생분들이셨나요? (거의 10살 차이다... 나 늙었나벼. 으흑흑 ㅠ.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Once upon a time...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87화 : Once upon a time...(2) ------------------------------------------------------------------------- 행성 나츠리야드. 행성력 6432년.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태양계, 그리고 거기에 속한 행성들 가운데에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는 몇 안 되는 행성 중 하나에 나츠리야드라는 이름이 있었다. 이 행성이 항성으로부터 떨어진 거리, 대기 상태, 지표상에 존재하는 화학 물질들은 체계와 물질대사, 증식과 반응, 진화가 가능한 생명라고 부를 수 있는 복합 유기체가 탄생하기에 적합했다. 오파린의 화학진화설에 따라 간단한 유기물들은 고온의 환경 하에서 상호반응을 일으켜 아미노산, 단백질과 같은 점차 복잡한 유기물들로 진화했고, 단순한 물질대사와 자기복제가 가능한 다분자계를 거쳐 마침내 DNA와 RNA와 같은 유전정보와 미토콘드리아와 같은 기관들을 지닌 세포가 형성되었다. 단세포는 다세포로, 원핵세포는 진핵세포로 점차 진화해갔고, 억 년 단위의 세월이 흘러가면서 적자생존의 법칙 하에 유전정보들은 때로는 교차하고, 때로는 시행착오를 거쳐가면서 착실히 진화하여 점차 복잡한 생명체를 만들어갔다. 자연과 생물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양쪽을 모두 바꾸어 나가는 가운데, 생물의 진화는 그 정점에 이르러, 마침내 인간과 같은 지적생명체를 탄생시켰다. 힘은 미약했지만 지성을 가진 인간은, 농업 혁명과 산업 혁명, 정보 혁명을 순서대로 거치면서 자연을 이용하는 법을 배우고 서로 싸우고 죽이는 일을 반복하면서 빛나는 문명과 문화의 발전을 이룩했다. 그들이 다다른 문명의 극치는 너무나도 화려해서, 만약 다른 시대 사람들이 그 황금시대를 볼 수 있었다면 그 찬란함에 눈이 멀고 말았으리라. 하지만, 인류문명의 발전은 그 황금기를 마지막으로 종말에 도달하고 말았다. 해양자원의 이용, 우주로의 진출, 재활용기술 및 절감기술의 발전. 사람들이 파국을 막기 위해 애써 노력한 그 어느 것도 자원의 고갈이라는 종말의 서곡이 울려퍼지는 것을 늦추기만 했을 뿐 막을 수는 없었다. 아광속 항행 기술도, 워프 기술의 개발에도 실패한 인류의 행동은 태양계 안으로 한정지어졌고, 무질서를 향한 엔트로피의 법칙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의 효율적인 대체에너지원과 광물자원을 인류는 찾아낼 수 없었다. 아마겟돈은 없었다. 갑자기 원시사회처럼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회는 천천히 퇴락해 가고 있었다. 비단 석탄이나 석유 같은 에너지원 뿐만 아니라 철, 구리, 니켈, 아연, 알루미늄, 텅스텐, 마그네슘, 금, 은, 납과 같은 금속광산들도 고갈되었거나 고갈 위기를 맞고 있었다. 옛날 각국의 중화학공업을 이끌어가던 제철산업과 정유산업은 이미 쇠락한 지 오래고 다만 재활용 및 생명, 나노과학 기술만이 인류의 멸망이 아닌, 문명의 멸망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있었다. 쇠락해가는 사회와 더불어 사회는 더욱 퇴폐를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기존의 종교적 윤리나 사회적 금기 같은 것은 문명발달기에 개인의 자유와 창작 등의 권리 향상에 힘입어 유명무실해진지 오래였다. 무기력에 빠진 사회에서 인민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은 약화되었고, 폭력과 주류와 성적 향락, 그리고 마약이 서서히, 하지만 깊숙히 사회 속으로 암세포처럼 번져가면서 인류를 파멸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씩 나아가고 있었다. "끄응..." "이제 일어났나, 베링거?" "응... 멤브레인인가? 지금 시간이..." "벌써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네. 곧 영업시간이니 서둘러." "이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베링거는 술병이 나뒹구는 너저분한 방 한쪽에 굴러다니는 시계를 보면서 혀를 찼다. 아직까지 정신이 몽롱하고 어지러웠지만 그래도 베링거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머리카락과 얼굴을 씻고 손질하고는 몸 곳곳에 주렁주렁 매단 장신구와 피어싱을 점검하고 말끔하게 옷을 챙겨 입었다. 요즘 갈수록 기상 시간이 늦어진다는 것을 베링거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불과 수 년 전만 해도 점심때쯤이면 일어날 수 있었던 그였다. 베링거보다 한 발 빨리 옷을 챙겨입고 나갈 준비를 마친 멤브레인이 베링거에게 충고했다. "약 좀 줄여. 스트레스 받는 건 알지만 결국엔 몸 망친다고. 몸으로 벌어먹고 사는 일인데 몸 망치면 일도 안되잖아? 내가 걱정해줄 건 아닌 것 같다만, 자네를 택한 사람들의 애프터 만족도가 떨어지고 있다고." "알아..." 베링거는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거울을 보고 자신을 총점검한 후에 구두를 신었다. 그런 것쯤은 굳이 멤브레인의 충고가 아니라도 자기 자신이 가장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 바였다. 하지만 약 없이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오늘도 쇼에 나가나?" "그래." "돈도 좋지만 적당한 때에 그만두는 게 좋아. 그런 거 오래 했다가는 병원비만 더 나간다고." "후후... 돈따윈 상관없어. 난 원래 갈 데까지 간 몸이야." 베링거는 낮은 목소리로 힘없이 웃고는 방문을 나섰다. 등 뒤에서 안쓰러운 감정이 담긴 멤브레인의 충고가 허공을 공허하게 울렸다. "그래도... 몸조심해." 밖에 나오자마자 차가우면서도 탁한 도시의 공기가 숨이 막힐 듯 베링거를 압박해왔다. 한때는 환경오염 방지를 이유로 모든 자동차에 무공해연료만을 사용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자원이 고갈된 지금은 유명무실한 의미없는 법령일 뿐이었다. 오히려 도시오염이 크게 진척되지 않는 것은 에너지가격의 급등으로 인한 자동차 감소 및 자전거 이용 증가 때문이었다. 날이 어두워졌다. 전기료가 비싸기 때문에 불을 켜지 않는 집이 많아서 불은 드문드문 켜져 있었다. 황금시절과 같은 불야성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베링거가 걸음을 옮기고 있는 홍등가만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주머니에 양손을 불량하게 집어넣고 구부정한 자세로 걸음을 옮기는 베링거의 시선 사이로 벽면에 크게 붙여진 광고 찌라시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충격 대공개! 이름높은 품종의 종마와 두 젖소부인 간에 벌어지는 쇼킹한...] 베링거는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이 출근하는 바로 옆 클럽의 찌라시였다. 요즘은 어느 클럽에 가나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퇴폐적이고 변태적이며 비윤리적인 쇼들이 넘쳐난다. 막 무덤에서 파내 온 시신를 시간(屍姦)하거나 인신매매로 납치해 온 여인을 윤간하는 장면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일들이 버젓이 노골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사회였다. 이를 규제하고 막아야 할 공권력은 이미 업주들과 뗄 수 없을 정도로 찰싹 달라붙을 정도로 공생의 관계를 맺은 지 오래였다. '그나마 내 처지는 저 여자들보다는 나은 걸까...' 베링거는 자신이 출근하는 클럽 뒷문을 열면서 생각에 잠겼다. 비록 매일같이 설사나 치질에 시달리고 탈장 때문에 두어 번 수술까지 받아야 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수간(獸姦)을 강요당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크윽..."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워지는 것을 베링거는 간신히 참으면서 후들거리는 한쪽 다리를 다른 한 다리로 힘껏 걷어차고는 출근기록표를 향해 걸었다. 약을 상습 복용한 데 따른 부작용이었다. 하지만 남들에게 건강이 나쁘다는 것을 보여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앞으로 조금만... 조금만 돈을 모으면 돼.' 쇼에서 연기하는 남자들의 공수역할이 포주에게 바치는 뇌물의 양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은 공공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위로만 자금이 몰리는 이 바닥의 구조상 그만한 돈을 모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공을 향한 경쟁 역시 치열했다. 베링거의 목표 역시 우선은 어떻게든 공의 역할을 따내는 데 집중되어졌다. 그 자리만 따내면 어쨌건 체력적, 정신적인 부담은 훨씬 줄어들고 그러면 약도 줄일 수 있을 터였다.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 "괜찮습니다. 에를리히 여사님." "너무 무리하지 마. 베링거. 그리고 에를리히라고 계속 딱딱하게 부를 필요 없어. 마나라고 부르래도." "아닙니다. 그럼..." "알았어. 오늘도 그럼 수고해 줘. 오홋홋♡" 마나티 에를리히. 본래 이 클럽의 포주는 그녀의 아버지였지만 최근 중병에 걸려 병원에 장기입원해 있는 터라 현재는 그녀가 실질적인 주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에를리히는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귀여운 목소리로 베링거를 격려했지만 베링거는 그다지 에를리히의 행동에 반응하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그녀의 말은 친절했지만 실제 행동은 냉혹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베링거는 잘 알고 있었다. 하루를 쉬게 되면 당연히 공치게 되는 것이므로 급료가 나올 리 없었고, 아프다고 일을 제대로 못해도 급료를 안 주는 그녀였다. 게다가 에를리히 주변의 소문도 그다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동안 자기 아버지와 정을 통해 왔다는 소문은 너무 오래 되어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고, 평소에 데리고 다니는 수많은 미남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갖은 소문과 추측이 클럽 내부사람들에게 나돌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이 클럽에서 인기를 끄는 각종 독특한(?) 쇼 메뉴들의 개발에 그녀가 직접 참가했다는 사실만은. 조명이 켜진다. 화려한 무대의 막이 오른다. 수천 명이 들어갈 것 같은 관객석의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여성들이다. 특별고객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은 무대 바로 앞의 자리에서 테이블에 앉아 호스트들과 와인을 나누고 남자들도 얼굴을 붉힐 만한 이야기를 노골적으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미 익숙해진 분위기일텐데도 베링거는 선뜻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당당하게 무대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가 오늘 연극에서 맡은 일은 마녀의 저주를 받아 변태가 된 귀족집 도련님에게 괴롭힘당하는 남자 노예 역할이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무대에 올라가 같은 내용의 연기를 했기 때문에 익숙했지만, 할 때마다 부담스러운 일임에는 분명했다. 조명의 불빛이 자신을 비추는 순간, 베링거는 웃음지으며 관객들을 바라보았다. 억지로 만들어진, 거짓된 연기의 슬픈 웃음이었다. -------------------------------------------------------------------------- 으음... 미/카와 후르판 둘 다 며칠 정도 쉴 듯 하네요. 아아... 자꾸 암울모드로 나가면 안 되는데... 내용이 초 암울하네요. 아, 책문제에 대해서는 내일 다시 공지 띄울께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공지] 출판 지연에 따른 사과 네에. 죄송해요 ㅠ.ㅠ 한도 끝도 없이 지연되는 출판이 또 미뤄졌답니다. 다음 달 방학 시즌에 나온다고 하네요...(쿨럭) 밝히기 힘든 이런 저런 사정이 다 있지만 저도 나름대로 상당히 답답하고, 불안할 따름이랍니다. 나온다 해놓고는...;ㅁ; 그렇다고 출판삭제 해놓은 걸 되돌릴수는 없고 뭔가 난감해요. 덧붙여서 개시하려 했던 책 배포 이벤트도 연기할 수 밖에 없네요. 딴건 문제가 아닌데 뭔가 의욕이 꺾이는 상황이랍니다. 확 진짜 N세대 연애물이나 써버려? ㅡ0ㅡ;;; (나름대로 스토리까지 짜둔... 쿨럭... 하지만 구상만 하고 버린 게 몇개더라?) 설문조사 새로 들어갑니다. 꼭 알고 싶은 게 하나 생겼거든요. 오늘은 안올라오므로 미리 때리는 차회예고 >>>>>>>>>>>>>>>>>>>>>>>>>>>>>>>>>>>>>>>>>> "수는 수답게 놀아야지. 안 그래? 오호호홋." 구둣발에 걷어차이는 베링거. 그는 과연 무사할 것인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Once upon a time...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88화 : Once upon a time...(3) ------------------------------------------------------------------------- 무대의 막이 내렸다. 화려한 스포라이트는 꺼지고 덧없이 화려한 색채의 조명이 이미 나이트클럽 분위기로 변한 장내를 맴돌았다. 베링거를 포함한 쇼에 참여한 사람들은 반나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아래로 내려와 몰려든 여자들과 어울리며 팁을 받았다. 베링거의 주위에도 몇몇 여자들이 몰려와서 초롱초롱 빛나는, 하지만 어딘가 비뚤어진 선망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진하게 화장을 하고 어른처럼 차려입었다고는 하지만 중학생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녀들도 심심찮게 섞여 있는 것이 사회의 퇴폐성을 심히 짐작케 해 주었다. "꺄아∼ 공연 멋졌어요!" "그거 안 아파요? 많이 아팠을 거 같은데..." '당연히 아프지, 개뿔은...' 대체 그런 말을 하는 게 여인의 처녀성을 빼앗은 후에 안 아프냐고 묻는 남자들의 심리와 뭐가 다르냐고 베링거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출근했을 때부터 약 한 알로 고통을 간신히 참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그래도 베링거는 미소지었다. 그는 웃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웃어야만 했다. 직종은 어떨지라도 상대에게 웃음을 파는 것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의무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객'이니까... "잘생긴 오빠, 오늘 나랑 같이 가는 게 어때?" "한번에 두세 사람 상대할 수 있어?" 친구들로 보이는 여자들 몇 명이 다가와 반나신인 베링거의 몸을 여기저기 더듬고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물론 이러한 그녀들의 행동에는 속옷 사이로 넌지시 끼워주는 소정의 팁이 포함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움찔하거나 피하는 행동을 보인다면 그건 분명히 초보였다. "물론이죠." 베링거는 다시 한번 미소를 얼굴에 띄우면서 허리를 숙여 무릎을 꿇고 구두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들의 요청을 승낙한다는 표시였다. 퍼억 "크억!" 하지만 베링거가 막 일어나려고 할 때 그는 갑자기 날아온 강한 발길질에 강한 충격을 받고 홀 한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베링거가 그녀들의 구두에 키스했을 때 여인들 중 한 사람이 그의 얼굴을 구두로 걷어찬 것이다. 베링거는 비틀거리면서 간신히 몸을 일으켜세웠다. 입술 사이로 피가 새어나오는 것이 입 안이 터진 듯했고 이도 몇 개 부러진 듯 했다. "이헤 무흔 지....(이게 무슨 짓...)" 베링거가 뭔가 항의하려고 할때 그녀들 중 한 명이 두툼한 돈 뭉치를 던졌다. 보통 애프터를 나갈 때 받는 팁보다 대여섯 배는 많은 금액이었다. 일반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들의 봉급보다도 2배정도는 더 많은 돈이었다. "수는 수답게 놀아야지. 안 그래? 오호호홋." "그 정도면 병원비 제하고도 남을걸? 그럼 같이 가볼까? 우리 노예로서 말야." '젠장, 조때다!' 그제서야 베링거는 그녀들의 정체를 알아차리며 그녀들을 받아들인 것을 후회했다. '게다가 SM플레이어들... 쓰벌! 왜 하필이면 나한테 와서 x랄이냐구우!' 그것도 보아하니 같은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그런 부류의 여성들인 것 같았다. 베링거로서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여자들은 갖은 남자들을 상대하면서 받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이런 곳에 오기 때문에 행동이 다른 여자들보다 훨씬 더 격렬하고 막 나가기 마련이라 호스트들에게 있어서는 기피대상 1호였다. 남자들에게 받는 학대 때문에 쌓이는 한을 남자를 학대하면서 풀어나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녀들의 구두에 키스한데다 돈까지 선불로 받은 이상 베링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어떻게든 좀 더 서비스를 잘해서 팁이라도 더 받아내는 수밖에는... 터져나올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베링거는 돈을 주섬주섬 챙겨서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 어려운 삶. 고난의 삶. 가난의 삶. 힘든 삶들 속에서 수없이 눈물을 씹어삼키며 더 이상은 울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치욕의 삶 속에 몸을 던진 지 벌써 여러 해. 베링거는 울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몇 번이고 계속해서 마음을 다졌다. 이미 눈물을 참는 데에는 익숙하니까... "아야야야. 좀 안 아프게 해달란 말이에요." "에끼, 한두번 해 본 것도 아니면서 무슨 엄살이 그렇게 심해? 좀 참아!" 다음 날, 베링거는 일을 쉬고 단골 의사를 찾아갔다. 어제같은 그런 손님을 만나게 되면 돈은 엄청나게 많이 들어오지만 그보다 훨씬 더 몸이 괴로운 법이었다. "으윽. 하지만 좀 부드럽게 하라고요! 이렇게 무식하게 약 발라도 되는 거예요? 저는 고객이자 손님이라고요!" "전부 보험처리 하잖아! 너 같은 놈 100명 치료해봤자 남는 거 하나도 없어." "에에... 세금탈루..." "확 똥구멍에 그대로 쑤셔버린다?" "맘대로 해요. 하도 많이 헤집어져서 이젠 포기상태니까." 하도 많이 당해 면역이 된 건지, 베링거에게는 그것보다 오히려 아까 전에 했던 치아를 박아 넣는 치과 수술이 훨씬 더 아프고 무서웠다. 여린 잇몸에 인공치아를 박아 넣는 고통은 정말이지 질릴 정도여서 차라리 어제같은 쇼를 열 번 하는 게 훨씬 낫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멍청한 녀석. 어쨌건 이젠 그 짓도 적당히 해. 여기서 더 이상 악화되면 수술가지고도 못 고쳐. 인공항문 달아야 할거다." 의사는 베링거의 엉덩이를 한대 짝 때리고는 베링거의 몸 곳곳에 난 채찍 자국에다가 약을 발랐다. 한때는 첨단 기기를 이용해서 생체회복력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으로 찰과상을 순식간에 치료하기도 했지만 더이상 그런 기계를 이용하는 것이 사치가 된 지금은 단순한 연고에 의존하고 있는 터였다. "아무리 적어도 일주일은 푹 쉬고, 약도 꼬박꼬박 챙겨 먹어. 마약은 좀 자제하고." 베링거가 자기 충고를 지킬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사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는 듯 그에게 설교를 늘어놓았다. "거 맨날 같은 레퍼토리 하는 거 지겹지도 않아요?" "자꾸 흘려듣지 마. 요즘같은 삶을 계속해나간다면 몇 년 안돼서 진짜 죽어. 이왕 죽으려면 좀더 고상하고 편한 방법이 많다고." "하여간 고마웠어요." "또 오지 마...라고 하고 싶지만 또 오겠지. 되도록이면 자주 오지 마." 의사는 베링거가 옷을 입고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며 혀를 쯔쯔 찼다. 하지만 의사는 충고는 해도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좋아서 그렇게 된 건 아니었지만 그의 고객들은 죄다 저런 부류의 남녀들뿐이었던 것이다. 의사가 원했던 결과는 아니었지만 워낙 수많은 환자들을 다뤄본 덕택에 사람의 배꼽 아랫부분에 대한 치료능력만은 이름난 병원의 유명한 의학박사 못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 도와주러 가볼까나." 베링거가 허름한 병원 건물을 나선 후 의사는 다른 방에서 뜻하지 않게 임신해버린 한 룸싸롱 아가씨의 낙태수술을 하고 있을 조무사를 돕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사람은 뭔가를 희생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와 동등한 대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연금술에서의 등가교환의 원칙이다 그 때 우리들은 그것이 세상의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음... 재미있군요^^ 강철의 연금술사. 제 나이가 3살만 어렸어도 충분히 불타올랐을 -0-;;; 차회예고 >>>>>>>>>>>>>> "그나저나 잡소리를 많이 하는 걸 보니 안 먹을 텐가?" "...입으로 넣어준다면 고려해보지." Y모드 발동전개 *_* 우후후훗♡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Once upon a time...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89화 : Once upon a time...(4) ------------------------------------------------------------------------- "휴우." 베링거는 간만에 방안에 누워서 푹 쉬고 있었다. 평소에 무리하는 것은 익숙한 그였지만 어젯밤 같은 여자들을 상대하고 거기서 생긴 상처들 때문에 병원까지 갔다 와 놓고는 바로 일을 나갈 정도로 아직 정신이 돌지는 않았다. 의사는 적어도 일주일은 쉬라고 말했지만 베링거는 우선 오늘 하루 쉰 후에 좀 괜찮아지만 바로 일을 나가고, 그렇지 않으면 하루 정도만 더 쉴 생각이었다. "끄응..." 오래간만에 마음이 풀려서 그런지, 평소에 갖고 있던 지병들이 곳곳을 쑤셔왔다. 어제 채찍으로 맞은 상처나 직업병인 치질을 비롯해서 두통, 속쓰림, 뻐근한 허리 등등 아픈 것들이 이때다 싶어서 한꺼번에 찾아온 것 같이 괴로웠다. "괜찮나, 베링거?" 이른 새벽녘 그의 룸메이트 멤브레인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방에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베링거를 보더니 말했다. 베링거는 방 한구석에 걸린 낡은 시계를 흘끗 쳐다보더니 담담한 어조로 멤브레인에게 대답했다. "평소보다 일찍 왔군." "그래." 멤브레인의 손에는 진통제로 보이는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흔히 명품이라 불리는 비싸고 화려한 옷들을 망설임없이 방안에 대충 집어던지고 속옷만 입은 그는 뜨거운 물을 끓이고는 머그컵에 부어 약과 함께 베링거에게 건네주었다. "좀 먹게." "고맙군. 이런 것까지는 필요없는데..." 몸도, 마음도 한없이 쇠약해져 있어서 그런 걸까,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던 멤브레인의 따스한 마음 씀씀이가 오늘따라 가슴깊이 고맙게 느껴졌다. "별일도 아니잖아. 물이 뜨겁지나 않을까 모르겠군. 어서 약 먹게." "후훗. 어차피 약에 쩔어있는 판인데 이런 진통제따위가 제대로 통할까?" "위약(僞藥) 효과라는 게 있다고 하니 없어도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좋을 거야. 그나저나 잡소리를 많이 하는 걸 보니 안 먹을 텐가?" "...입으로 넣어준다면 고려해보지." 베링거가 말을 꺼내자마자 멤브레인은 곧장 뜨거운 물을 한모금 들이키더니 약을 입안에 넣고는 베링거의 입술에 갖다 붙였다. "우웁!" 베링거는 허를 찔렸다는 듯 경악한 표정으로 눈을 부릅뜬 채 멤브레인을 노려보았고 멤브레인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웃음지으며 베링거를 쳐다보았다. "젠장. 설마 진짜로 할 줄이야." 결국 멤브레인이 입으로 건네준 진통제를 삼켜버린 베링거가 한 손으로 입을 닦으며 투덜거렸다. 다소 부끄러움을 느낀 탓이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몸이 좋지 않은 탓이었을까? 베링거의 얼굴이 가벼운 홍조를 띠었다. "평소에 자주 해봐서 익숙할텐데 뭘 그래?" "그건 일이고! 지금이랑은 다르잖아!" "뭐 일단 그건 그렇다치고. 우리를 노예로 부리는 주인님이시자 악덕 사장님이신 에를리히 여사님이 네게 할 말이 있는 것 같더군." "그년이 나한테 왜? 갑자기 또 관심이 생겼나?" 베링거의 잘생긴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애초에 그가 이런 곳에서 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책임은 그녀에게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때는 자신이 한계에 몰렸다고, 모든 것을 각오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를 부추기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은 그녀였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선명하게 떠오른다. 마법의 색깔처럼 신비하게 반짝이는 자주빛 머리카락 아래로 순진과 천진난만을 가장하던 초롱초롱한 그 초록색 눈빛...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비즈니스 관련인 것 같던데? 하여간 몸 좀 괜찮아지면 바로 찾아오라더군." "그래?" "아, 그리고 그 진통제 꽤 효과가 좋다더군. 에를리히 여사가 준 건데 상당히 비싸다고 들었어." "뭐어? 왜 말 안했어?" "말하면 안 먹을 거 같아서. 이전에 넌 그녀에게.... 당했으니까." "쳇!" 베링거는 짧은 투덜거림의 단어를 내뱉고는 벽 쪽을 향해 돌아누웠다. 이제와서 예전 그녀와의 일은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악몽이었다. 순진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자신을 유혹했고, 결국에는 헤어날 수 없는 금빛의 스포라이트와 적빛의 등불이 교차하는 어둠의 세계로 자신을 끌어넣은 그녀였다. "뭐, 어쨌건 부담가지지 말고 푹 쉬어." 멤브레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돌아와서는 베링거의 곁에 누웠다. 고작 작은 화장실 겸 샤워실이 하나 붙어 있을 뿐인 원룸은 그다지 넓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업종에 종사하는 남자 둘이서 한이불을 덮고 잔다고 해서 뭐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덮치면 죽어." "설마." 시덥잖은 농담을 하면서 불을 끄고 잠드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깨어나보면 항상 베링거의 몸 위로 멤브레인이 포개져 있는 형상을 한 채 둘 다 깨어나기 일쑤였다. 왜냐하면 베링거는 자면서 무의식적으로 몸을 웅크리면서 주위의 이불을 끌어모으는 잠버릇이 있었고 멤브레인은 이불을 뺏겨 추워지면 이불을 되찾아오기 보다는 주위의 따뜻한 물체(...)에 찰싹 달라붙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였다. 베링거는 그답지 않게 며칠을 더 집에서 폐인생활을 하면서 푹 쉰 후에야 직장으로 향했다. 에를리히가 그에게 뭐라고 할 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너무나 순수하게, 하지만 비뚤어지게 웃음지는 그녀와 얼굴을 마주치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일, 베링거는 평소를 가장한 채 에를리히에게로 향했다. "어머, 베링거. 몸 좀 다쳤다는데 괜찮아?" "괜찮습니다. 이제 거의 다 나았습니다." 의사가 최소한 일주일을 쉬라는 조언을 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베링거의 몸은 오랫동안 무리한 나머지 많이 망가져 있는 터였다. 그런데 겨우 삼사일 정도 쉰 정도로 그가 몸이 많이 나아졌다고 느끼는 것은 평소에 무리하는데 익숙해 있어서일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절 부르셨습니까?" "아, 그렇지. 맞아. 베링거에게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는데 한번 만나 볼래?" "소개시켜... 줄 사람 말입니까?" "푸훗. 그런 거 아냐. 단지 베링거한테 볼일이 있는 사람일 뿐이야." 베링거가 좀 당혹스런 제스쳐를 취하자 에를리히가 부정하고 나섰다. "누구지요?" "곧 나올 거야. 다르군트 씨, 나오시겠어요?" 에를리히의 말이 끝나고 잠싼의 시간이 지나자 저편 방에서 한 여자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뒤로 묶은 긴 흑발의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넓은 목욕수건만 몸에 달랑 걸친 채 당당하게 걸어나왔다. 그 모습을 보니 방금 목욕을 마친 듯 했다. 이미 이 바닥에서 꽤 굴러서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는 여자들의 숨겨진 모습을 볼 건 다 본지라 그런 차림으로 나왔다고 해서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단번에 베링거의 아랫도리를 자극할 정도로 신비스러운 기색을 풍기는 여자였다. "아, 에를리히. 이 사람이 전에 니가 말하던 그 사람이야?" "네. 다르군트 씨. 제가 보기에는 다르군트 씨가 찾는 조건의 사람 중 가장 적합한 것 같아 보이는데 어떠세요?" "흐음... 글쎄. 면상은 꽤 괜찮은데? 하지만 시간을 두고 살펴보지 않으면 잘 모르겠지." 마치 음악을 타고 흐르는 듯한 투명하고 맑은 미성(美聲)이 다르군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베링거는 에를리히가 VIP고객에게 자신을 추천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랬으면 좋을 거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본성은 알코올이 들어간 후에 침대 위에서 드러나겠지만 신비스럽고 몽환스럽게 느껴지는 그녀의 분위기와 마음을 요동치게 만드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베링거는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었다. 베르카이 베링거. 마나티 에를리히. 디나 다르군트. 이 세 사람의 얽힘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 러비마녀님 // 집에서야 당연히 모범생으로 생각...(타앙!) 그나저나 갈수록 철면피 모드가 업글 되가시네요. -_-; 은빛마녀, 두문불출님 // 이해하기 힘드시면 외전격으로 생각해 주시면 된답니다.;;; 미/카와 후르판은 각각 깍지제로 격일업할 예정이랍니다. (즉 하루는 이거, 다음날은 저거 올린다는 이야기지요.) 逢いたい 逢えない 만나고 싶지만 만날 수 없고 思い 募るほど 그리움은 더해지고 この 祈りが 屆かないのは 이 기도가 닿지 않는 것은 何かも きっと 무언가가 분명 結うしなんてるから 이어져 있기 때문이야 냐핫♡ 이 애니 원작게임 구했답니다. (라지만 할 시간도 빡빡하고 일본어도 모르잖아 ㅠ.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Once upon a time...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90화 : Once upon a time...(5) ------------------------------------------------------------------------- 창조론이라는 이론이 있다.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큰 모 종교단체의 경전에 나오는 천지창조의 이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 행성 나츠리야드에서는 이미 백여년 전 어떤 과학자가 화학진화설을 성공적으로 증명해내는 바람에 근거없는 신에 대한 믿음으로만 점철된 종교적인 의미의 창조론은 위세를 잃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다르군트는 베링거에게 창조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앞서 말한 창조론이 아닌, 50여년전 콘자이트 교수가 주장한, 아직 증명되지 않는 한 가설의 이름이었다. 그 이론은 과학적으로 불합리한 점이 많고 실험적으로도 전혀 증명되지 않아 그해의 풍자잡지가 선정하는 엉터리 연구 베스트 목록에 들어가는 영예까지 안은 적이 있는, 그래서 결국에는 우스갯소리로밖에 치부하지 않게 된 이론이었다. 그 이론의 요지는 이랬다. [인간의 힘으로 세계를 창조할 수 있고, 그곳에서 신이 되어 무한의 세월동안 세계를 다스릴 수 있다.] 그 이론을, 다르군트는 그녀 특유의 청아하고 부드러운, 하지만 열정이 담긴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모르겠군요. 전 과학에 대해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상당히... 허무맹랑하고 터무니없이 들립니다만." 원래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는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다르군트와 에를리히간의 관계가 그리 가볍지만은 않아 보였기 때문에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표현 수위를 낮췄다. 하지만 다르군트는 베링거의 부정적인 반응과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읽고도 전혀 기죽거나 기분나빠하지 않은 채 잔잔한 미소를 띄웠다. "터무니없어 보이지? 콘자이트가 평생에 매달린 주제인데도 연구에는 미진한 부분이 많이 보이니까. 세계가 창조된다면 그 복잡한 메커니즘을 과연 인간의 유약한 정신만으로 구현 가능할 것인가. 그 세계와 지금 현재와의 세계의 시간적, 공간적 관계는 어떻게 설정될 것인가, 과연 인간의 인지능력과 사고능력 안에 있을 수 있는가. 이론은 장미빛이지만 많은 현실적인 과제들에 대한 해답을 콘자이트는 전혀 남겨두지 않았어. 그 덕에 많은 고생을 하고 있지만 말야." 다르군트는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었지만, 베링거가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뭐, 하긴 관계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네. 이해하는 편이 앞으로를 위해서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럼 내가 여기 온 목적을 말해 줄께. 널 고용하기 위해서 왔어." "고용... 이라고요? 무슨 일로..." "적어도 여기보다는 훨씬 편안한 환경에 급료도 높다는 것 하나는 약속할 수 있지." "하지만..." 베링거는 옆을 슬쩍 곁눈질하며 말했다. 아무리 자신이 간절히 원한다고 해도 에를리히의 허락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행성 나츠리야드에서는 노예 제도가 폐지된 지 500년이 넘었지만, 그래도 인신매매나 불합리한 계약에 의한 반노예 상태라는 것은 음성적으로 어디든 존재하는 것이었다. 베링거는 한순간의 유혹에 걸려든 죄로 그 반노예 계약에 사인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걱정할 것 없어. 에를리히와 나 사이를 보면 알잖아? 이미 이야기가 다 되어 있어. 그녀 역시 우리 연구에 참여할 예정이야." "에를리히 여사님이?" "어라, 너무하네. 에를리힌 아직 여사라고 불릴 만한 나이는 아닌데... 뭐 직종이 직종이라 그런 건가?" "그렇다면... 대체 저는 거기서 무슨 일을 하게 되는 거죠?" 이쯤되면 거의 넘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베링거의 눈이 전에 없이 생기가 돌고 반짝였다. 자포자기 상태로 인생을 흘려보내고는 있었지만,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이런 생활을 탈피하고자 하는 욕구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에를리히도 같이 일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믿을 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미 하나의 세계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냈어. 그래서 세계를 관리할 신이 필요하거든?' "그런데... 왜 저를?" "그 세계를 분야별로 관리할 신을 대략 100명 가량 뽑아 놓았어. 우리 연구진들은 되도록이면 다양한 인간 군상을 뽑기를 원했기 때문에 열살 남짓한 꼬마에서부터 환갑이 넘은 할아버지, 길가의 노숙자에서부터 근엄한 대학교수까지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을 선정했거든. 그 조건에 네가 부합된 거지."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거 정말 가능하기는 한지...?" "음... 뭐 이렇게 이야기해도 선뜻 받아들이기는 힘들겠지. 에를리히와 함께 우리 연구소로 한번 구경와 봐. 그녀는 이미 신이 되기로 결정했으니 말야." "진짜입니까?" 베링거는 깜짝 놀라면서 에를리히 쪽을 쳐다보았다. 에를리히는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나도 이런 세상따위는 질렸거든. 되든 안되든 한번 도전해보고 싶지 않아?" 그 말 뒤로 '무엇보다도 아빠와는 같은 하늘아래서 살고 싶지 않아.'라고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베링거는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뭐... 구경만 한다면야 큰 문제는 없겠지. 조건이 괜찮으면 받아들이면 되는 거고.' 베링거는 그렇게 마음먹고는 다르군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만족한 듯 미소짓으면서 베링거에게 와인을 권했고 에를리히도 와인잔을 하나 더 가지고 와 테이블에 끼어들었다. 다음 날. 베링거는 에를리히와 함께 마중나온 다르군트를 따라 자동차에 탑승했다. 다르군트가 운전사와 함게 가지고 온 차는 상당히 고풍스런 멋을 풍기는 고급 자동차여서 베링거를 놀라게 했다. 기름값이 지독하게 비싸기 때문에 요즈음에는 버스비조차 과거의 택시비와 맞먹는 현실에서 이렇게 비싼 차를 몰고 다닐 수 있다니... 베링거는 조수석에, 에를리히와 다르군트는 뒷좌석에 탔다. 싼 기름을 써서 털털거리고 흔들림이 심한 버스와는 다른, 중형 자동차의 편안함과 안락함. 그리고 부드러운 운행이 몸 전체로 느껴졌다. 자동차는 톨게이트를 지나 시외로 나가기 위해 고속도로로 빠졌다. 넓고 시원하게 뻗어있는 왕복 8차선 도로는 한때는 아침저녁으로 지독한 혼잡을 겪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차들도 거의 다니지 않는데다 유지보수도 제대로 안 되어 있어 오히려 황량하고 쓸쓸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얼마나 가야 합니까?" "서두를 필요 없어. 그렇게 멀지 않으니까." 베링거의 질문에, 다르군트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인간의 어두운 욕망이 만들어낸 붉은 불빛 아래의 삶을 몇년 째 살아온 베링거는 고속도로 바깥으로 펼쳐진 광활한 대자연이 익숙치 않은 듯 주변 경관을 감상했고, 다르군트와 에를리히는 일, 남자, 술, 최근 소식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끝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한 시간 정도를 가서 도착한 곳은 신식 건물로 지어진 거대한 공장과 첨단기술로 무장된 빌딩 몇 채였다. 페인트 같은 도료나, 자질구레한 소품조차도 심각한 원자재 부족 때문에 대부분의 공장이나 건물이 폭탄맞은 것처럼 낡고 허름한 상황에서 이렇게 깨끗하고 거대한 규모의 건물이라니... 베링거는 입을 쩍 벌리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본 장면들은 더욱 더 가관이었다. 최첨단 전자 장비로 자동으로 차량이 유도되는가 하면, 허공에 떠오른 3차원 입체 이미지가 반갑게 그들을 맞이하고 환영 인사를 했다. 제일 처음 유도된 곳은 구내 식당이었는데 인테리어나 음식 수준이 거의 고급 레스토랑 수준이 맞먹어 베링거를 놀라게 했다. "대체... 대체 여긴 뭐 하는 곳입니까! 어떻게 이런 규모의 사치스런 시설이!" "후훗. 놀라기는 아직 일러. 첨단장비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고급스런 멋을 풍기는 숙소, 이용자의 건강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최신형 운동 장비가 가득한 피트니스 룸. 내부에서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벨트웨이와 엘리베이터의 조합으로 짜여진 순환 교통망. 외부인들은 접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고급 정보가 가득한 내부 인트라넷. 놀랄 일들은 아직 한참 남았어." "그걸 묻는 게 아니잖습니까?" 베링거는 무의식결에 큰 소리를 질렀다가 다르군트의 옆에 앉은 에를리히를 보고 흠흠거리며 말을 낮췄다. 비록 다르군트와 새롭게 일을 시작한다지만 아직까지는 그의 상전인 에를리히의 눈치가 보이는 것은 그 동안 일을 하면서 저절로 들어버린 버릇이었다. 그녀에게 완전히 버림받은 남자들이, 어떤 꼴로 최후를 맞이했는지는 지금까지 수십 번이나 보아왔으니까. "잘 생각해봐. 이 정도의 시설을 갖출 수 있는 기관은 어딜 것 같애?" "그야 정부 아니면 빅 브라더스(Big Brothers)... 아!" "거봐. 잘 생각하면 나오잖아." 다르군트의 말이 맞았다. 물질적 풍요가 점차 사그라드는 문명퇴조의 세상에서 이정도 규모의 최첨단 시설을 지을 만한 거대한 단체는 정부 또는 빅 브라더스라고 불리는 몇몇 거대독점기업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와 딱히 인상에 남을 만한 빅 브라더스 계열의 기업명을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정부라고 추리할 수 밖에 없었다. "정부에서... 이런 것을 운영한다는 겁니까?" 베링거는 목소리를 약간 낮춰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당히 당황한 모양인지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곳은 듣도 보도 못했다. "일단은 비밀프로젝트니까 말야. 아무리 언론파워가 옛날에 비해 엄청 약해졌다지만 막대한 예산을 이런 황당한 연구에 쏟아붓는다는 게 알려지면 난감하겠지?" "정부에서 왜 이런 일을....!" "당연하잖아. 누구라도 종말은 피하고 싶은 법이라고." "아...!" 그랬다. TV도, 신문도, 그가 접대하는 손님들도, 어느 누구도 희망적인 메세지를 이야기하는 법이 없는 암울한 문명쇠퇴의 시대. 사회현실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그조차 '50년후의 비극'이라는 세상을 떠도는 잿빛 가득한 예언에 대해서는 수없이 들은 적이 있었다. 이미 바닥나기 시작한 자원을 아무리 아껴쓰고 재활용해도 한계가 오는 시점이 바로 50년후이고 전쟁과 기아에 의한 막대한 혼란과 인구감소 후에 결국 인간은 원시농경사회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라는 비관적인 전망에 관한 내용이었다. 인류의 종말은 아닐지라도 문명에는 충분히 종말이 올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정말로 정부에서 투자하다니...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입니까?" "말했잖아. 우리는 이미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고. 곧 보게 될 거야. 우후훗." 애피타이저로 나온 파이를 집어먹으면서 다르군트는 미소지었다. 겉보기에는 더없이 밝고 기운찬 웃음이었지만, 베링거는 그 웃음 사이에 알 수 없는 기분나쁜 시선이 담겨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확신할 수는 없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이제 돌아갈 길은 없었다. -------------------------------------------------------------------------- 미/카는 역시 쓰기 쉽지 않아요. (게다가 출판연기로 인한 의욕 다운..=_=) 이제와서 쓸데없이 설정에 후까시를 팍팍 집어넣고 있답니다. 그럼 후르판이나 더 쓸래요. 냠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신화시대의 종말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91화 : 신화시대의 종말(1) ------------------------------------------------------------------------- '이건... 베링거의 기억?' 거대한 의식의 흐름이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내 의식 역시 그 거대한 의식의 흐름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점차 그의 기억이 나의 기억과 혼합되기 시작했다. 어쩐지 묘한 기분. 마치 내가 베링거인것 같은 그런 느낌이 점차 들기 시작하고 있는 가운데 그의 기억은 끊임없이 흘러들어왔다. 신으로 선정된 114명의 사람들이 정신전이(精神轉移)라는 검증되지 않은 전후무후한 기술을 이용해 새롭게 창조된 신세계에 도착한 지도 벌써 1년이 흘렀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정신전이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114명 중 53명의 사람들이 새로운 육체에 전이되지 못하고 혼이 빠져나가 차원의 틈 속에서 헤매게 되어 버렸다. 다행스럽게도 다르군트와 에를리히, 베링거는 정신전이가 성공해 점차 새로운 육신에 적응되어가고 있었다. 새로운 육신은 기존의 정신이 가지고 있던 자아에 기초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이전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형태지만 그전보다 수백 퍼센트 정도 뛰어난 미인의 얼굴형상이 되었고, 남자들은 보다 튼튼하고 건장해졌으며 여자들은 하나같이 미형에다 잘 빠진 모습이 되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디나 다르군트가 새롭게 시작하는 이 세계에서 대장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 계획을 총괄했던 사람을 비롯해서 개발에 참여했던 핵심멤버 여러 명이 공간전이에 실패하는 바람에 제정신으로 깨어난 핵심 멤버는 그녀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창조된 세계로 넘어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론에 의해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많은 것들이 실행되지 않았다. 특히 치명적이었던 사실은, 기존에 그들이 있던 세계와 연락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1년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연락은 실패했고, 더 이상 원래 세계에서 사람이 오는 일도 없었다. [어쩌면, 공간전이로 우리들이 신이 된 순간, 창조된 세계는 모세계(母世界)와의 연이 끊긴 걸지도 모른다.] 후에 마음의 신으로 추앙받게 되는 철학박사 코코룰 교수는 막연하게 추측했다. 그는 핵심 멤버가 아닌 사람 중에서 가장 콘자이트의 세계창조론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다양성을 추구한 나머지 서로간의 공통점이 별로 없었던 사람들은 불안에 떨고, 서로 반목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 세계의 신으로 권능을 사용하기 시작한 그들의 충돌과 다툼으로 인해 세계는 하루도 바람잘 날 없이 격변에 시달려야만 했다. 다르군트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직접적이고 강력한 방법을 동원했다. 연구의 핵심 멤버였던 그녀는 이 세계가 돌아가는 메커니즘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지식을 이용해서, 모든 신들에게 골고루 분산되어 있던 권능을 축소시키고 대신 자신에게 그 모든 권능을 집적시켰다. 그리고 그녀는 그전까지 대표신(代表神)이라고 불리던 자신의 별칭을 버리고 주신(主神) 혹은 절대신(絶對神)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1인독재 체재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절대적으로 강력해진 그녀의 권능 앞에 다른 모든 신들은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코 무릎을 굽히지 않았던 몇몇 신들은 코카서스의 바윗돌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는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비참한 꼴로 봉인되었다. 우선 신들을 안정시키고 체계를 잡은 다르군트는, 하나둘씩 세상의 법칙을 만들어가면서 각종 생명체를 창조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세계의 신이 된 사람들은, 봉인될 수는 있어도 죽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생식력을 잃었기 때문에 좀더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인간의 창조는 필수적인 일이었다. 베링거가 처음부터 마신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마신이라는 신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베링거는 술과 쾌락과 도박의 신을 맡아 인간들의 감정 중 한 부분을 통괄하면서, 창조된 인간들을 보다 원래 그들이 살던 세계의 인간들에 가깝게 만드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고, 에를리히는 무려 생명의 신을 맡아서 이 세계의 모든 생물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다르군트의 최측근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다르군트의 안정된 독재 하에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는 새로운 창조에 몸을 던진 열정적인 신들의 노력에 힘입어 생태계와 인간의 진화 속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창조 1년만에 불을 사용하고, 10년만에 기초적인 농경이 시작되는가 하면, 100년만에 석기시대를 벗어나 청동기시대로 이행되었다. 창조 154년의 철기시대 개막을 거쳐 198년에는 이제는 신어(神語)가 되어버린 나츠리야드 공용어를 모델로 최초의 문자가 창조되었다. 이처럼 인류 사회가 점차로 확장과 교류를 거듭하면서, 신들은 자연에 대해 간섭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점차 줄여나갔고, 인류는 스스로의 손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행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아무 일도 없이 평온한 시대가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구백 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아야야얏!" "뭐하고 있어, 베링거?" "귀 잡아당기지 말라고요." "푸훗. 미안. 하지만 너무 재밌어서." "정말...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뒤에서 몰래 다가온 다르군트가 베링거의 귀를 슬쩍 잡아당기면서 물었다. 베링거는 귀를 잡아당기면 힘을 완전히 잃고 늘어져버린다. 절대신이 된 다르군트가 베링거에게 만들어 준 단 하나의 약점이었다. 베링거와는 경우가 조금씩은 틀렸지만, 다르군트는 다른 신들의 저항을 봉쇄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대다수의 신들에게 약점을 하나씩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베링거는 다르군트가 싫지만은 않았다. 물론 그녀가 독재체재를 갖추기는 했지만, 그것은 오로지 강력한 권능을 가지게 되자 자신들의 의무를 잊고 제멋대로 움직이려 드는 일부 몰지각하고 자격없는 신들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베링거는 이해하고 있었다. "오늘 같이 놀래?" 다르군트가 베링거의 귀에 입술을 대고 장난스럽게 말을 던졌다. 베링거는 힘이 빠지다못해 다리가 후들거렸다. 귀가 약점이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천의 목소리라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의 목소리는 절대신으로서의 언령의 힘까지 담겨 신성함을 더했다. "주신이신 분이 일은 안 하고 그렇게 매일 노셔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요." "뭐 어때, 처음 백년 동안은 정말이지 진짜 쉬지도 못하고 온종일 일했으니 푹 쉬면 뭐 어때서? 이제는 체계가 완전히 잡혔으니 신들이 안 나서도 잘 돌아가잖아?" "그건 그래도요..." "베링거도 별로 할 일 없잖아? 심심하지? 이 누나가 같이 놀아줄께. 우후훗♡" "하지만 에를리히는...." "어머 싫다. 여기 온지 천 년 가까이 지났는데 아직도 신경쓰여? 정말이지... 에를이 사랑하는 내 동생만 아니였어도 질투해서 죽였을거야. 오호호호." 베링거는 여자 신들에게서 인기가 많았다. 애초에 에를리히가 그를 꼬드기고 결국에는 속여서 퇴폐 호스트의 길로 접어들게 만든 것부터가 그의 수려하고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었다. 특히나 그는 태어날 때부터 유전적인 결함이 있어서 골격이 남자답게 자라지 못하고 여성스러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이쪽 세계로 오면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져서 신들 중에서도 베링거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신은 다르군트가 유일했다. "죄송해요." "아냐아냐. 죄송할 거 없어. 강요할 수는 없지만, 난 베링거가 나만을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역시 무리겠지?" "천년 만년동안 다르군트 님 생각만 하다보면 머리가 터져서 죽을 거예요. 후후." 베링거의 썰렁한 유머에 다르군트가 까르르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천 년 가까이 곁에서 보아왔으면서도 베링거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신이 둘 있었는데 바로 처음에 베링거를 이 세계로 끌고들어왔던 에를리히와 다르군트였다. 생식력이 없어졌다고 성욕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신들의 성생활이란 누구든 일편단심 민들레와는 거리가 멀었다. 몇몇 신들은 서로 부부를 이루기도 했지만 몇백 년이 지나는 동안에 결국은 깨져 버리고 다른 신들과 관계를 맺는가 하면 그들의 창조물인 인간과도 관계를 맺곤 했다. 거의 천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남신이건 여신이건 서로 관계를 갖지 않은 신들의 커플링 목록이 한 자리 숫자에 불과할 정도였다. 베링거나 다르군트, 에를리히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에를이랑 더 많이 했어, 아니면 나랑 더 많이 했어?" "그런 거 안 세어 봐서 모른다니깐요. 게다가 누가 천년동안 그런 거 횟수 세고 있어요?" "그래? 하여간 오늘은 내가 카운터 하나 올릴 테니까 준비해." "참 다르군트님도." "야압!" 다르군트가 스리슬쩍 베링거의 셔츠를 풀면서 그를 침대 쪽으로 잡아당겼고, 베링거는 그런 다르군트의 움직임에 못 이기는 척 침대 위로 쓰러졌다. 에를리히든 다르군트든 어찌되었건 골백 번도 넘게 상대해본 여자다. 이미 상대의 행동에 맞춰 주는 것은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고보니 요즘은 남자는 상대 안 해?" "다르군트 님마저 그걸 걸고넘어지세요? 정말이지... 짖궂다니깐." 베링거는 문득 과거를 회상했다. 이곳에 와서 신으로 보낸 세월이 훨씬 더 많았지만, 다들 이상하게도 모세계에서의 기억만큼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희망을 바라볼 수 없었던 시대. 행복을 잡을 수 없었던 자신.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때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으리라. 편안한 자세로 누운 베링거의 위에서 다르군트가 직각 방향으로 고개를 숙여 그와 입술을 맞췄다. 이대로 영원히 행복하기를... 베링거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무한한 세월이 이렇게 이어지기를... 뜨거운 열락의 세계로 빠져들면서 베링거는 빌고, 또 빌었다. 딱히 누구인지 지칭할 수 없는 모든 세계의 법칙을 지배하는 지배자에게... -------------------------------------------------------------------------- 축구 보고 홧병 걸려 죽을 뻔했던... 그게 왜 안들어가냔 말입니까아(버럭!) 날이 갈수록 골대 맞추기 신공이 위력을 더해 가는..-0-; 뭐... 그래도 한국 그 정도면 잘했지만요.(상대 수비가 너무 악독했을 뿐..-_-) P.S : 근데 댓글 다신 분들 표정이 와 다 -ㅅ-지요? ㅇ.ㅇ? 하긴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저로서는 반응을 짐작하기 힘들다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신화시대의 종말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92화 : 신화시대의 종말(2) ------------------------------------------------------------------------- "잤지?" 천궁(天宮)에서 멍하니 대지를 바라보면서 아무리 심한 자외선이 찔러대어도 절대 탈 리 없는 피부를 태우고 있는 에를리히의 옆에 베링거가 다가가자 그녀가 대뜸 물었다. "잘 아네." "다트 언니의 냄새라면 뻔하다고. 근데 무슨 일이야?" "그냥..." "그래." 예전에는 한때 주종관계나 다름없었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의 둘 사이는 완전히 동등한 관계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가면서 그녀에 대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던 두려움이나 눈치도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다. 다만 쓰라린 과거의 기억은 계속 남아있지만서도. 세월이 흘러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베링거는 그때 그녀가 자신에게 왜 그렇게 심한 짓을 하고 망가뜨렸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를리히는 정말로 상쾌한 듯이 대자연을 즐기고 있었다. 이전의 에를리히도 자주 웃음을 짓고 장난스러운 말들을 하곤 했지만 지금처럼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이제서야 느끼는 것이지만 그 당시의 에를리히는 분명 무리해서 밝게 지내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알고 있었으니까.... 밝음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는 없었던 그녀의 과거에 대해서. "베링거." "응?" "가끔은 말야. 잊고 싶어져." "뭘?" "모든 기억을 잃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아하핫. 하지만 신으로서의 역할은 어쩌고? 제멋대로 사라져버리면 다르군트님이 화낼걸? 다르군트님은 에를리히를 누구보다도 정말 좋아하니까." "뭐 어때. 요즘은 우리 신들이 할 일이 없어서 미칠 지경인걸. 요즘 몇몇 신들은 절대로 정체 안 드러나게 한다는 조건으로 다트 언니한테 허락을 받고 인간 세상에 놀러갔잖아?" "그래서, 에를리히도 놀러 가려구?" "음... 어떨까 생각 중이야." "내려가게 되면 같이 가자." "그럴까? 그때는 구백년만에 호스트 베링거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거다. 응?" "어... 어이. 에를리히. 그것만은 제발 좀 참아달라고." 에를리히는 당황하는 베링거를 바라보면서 생긋 미소지었고, 그 미소를 본 베링거 역시 미소로 답했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푸른 초원 위에서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쳤다. '역시나...' 그녀와 깊고 깊은 키스를 나누면서, 베링거의 마음속에 찌릿한 감정이 아려왔다. 구백 년 동안 수십 명에 달하는 신들과 많은 만남과 교분을 쌓아왔고, 잠자리를 같이 한 여자들도 있었지만 그 중에서 다르군트와 에를리히는 특별했다. 베링거는 둘 중에 딱히 누가 더 좋아고 결론내리지는 않았다. 애초에 신들은 서로가 한 사람에 묶여서 살기에는 그들의 수명이 너무나도 길었기 때문에 결합과 단절이 비일비재한 편이었다. 때문에 베링거는 굳이 선택을 강요당하지 않았고, 무리해서 결론지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저울추 위에 올라 있던 감정의 방향은 어느 한쪽으로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직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지만 연이어 가진 두 사람과의 뜨거운 정사에서 베링거는 진실한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쪽이 어디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으응... 왜 그래? 베링거? 설마 벌써 힘이 떨어진 거야?" "아... 아냐. 마나...티." 베링거가 무의식결에 에를리히의 이름을 부른 순간, 그녀의 표정은 굳었다. 마치 방금 전까지 완전히 옷가지가 흐트러진 채 격렬한 몸동작으로 생체열량을 배출시키고 있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그녀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이름... 처음으로 불렀구나." "으응..." 행성 나츠리야드에서는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상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경우는 상대가 피가 섞인 가족이거나, 배우자일 경우뿐이었다. 결혼하지 않은 상대에게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프로포즈와 같은 의미였다. "부르지 말았어야 했어." "에를리히!?" 에를리히는 베링거를 확 밀쳐내고는 몸을 빙글 한 바퀴 돌렸다. 동시에 벗겨지고 구겨진 채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던 옷들이 저절로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서는 깨끗한 맵시를 과시했다. 신으로서의 가벼운 권능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뒤로 팔짱을 끼면서 조용히 언덕 아래편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에를리히!" 베링거가 당황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에를리히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는 베링거가 간신히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선택하지 말았어야 했어... 베링거... 나는... 나는..." 하지만 에를리히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신의 권능으로 초고속으로 그녀의 뒤로 달려온 베링거가 그녀를 뒤에서 꽉 끌어안은 것이다. "미안해... 하지만... 선택해 버리고 말았어." "안돼..." 에를리히는 베링거의 품안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하지만 베링거가 그녀의 약점이 되는 부위를 꽉 잡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베링거의 귀와 마찬가지로 다르군트가 만들어 준 에를리히의 약점은 배꼽이었다. "어째서... 안된다는 거야?" "아... 알잖아!? 왜냐하면 다트 언니는... 널..." "난... 다르군트님이 아니라 네 생각을 묻고 있는 거야!" 베링거가 에를리히를 더욱 더 세게 껴안았다. 에를리히는 저항을 멈추었지만, 평소에는 거의 비추지 않는 쓸쓸한 빛이 그녀의 얼굴을 지나쳐갔다. "베링거는 몰라... 다트 언니의 진면목을... 언니가 화가 나면... 이 세상을 다시 무(無)로 돌려버릴 수도 있어." "지나친 생각이야. 다르군트님의 책임감이 그 정도밖에 안 되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든걸. 연애라는 건 개인의 문제라고." "결국, 어느 쪽이 다트 언니의 진실을 알고 있는 걸까... 우후후." 에를리히는 고개를 들었다. 천궁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를 마음껏 헝크러뜨리고 있었다. 아래로는 끝없이 펼쳐진 무한의 대지, 위쪽 역시 끝을 알수 없는 무한의 하늘. 이 세계의 법칙은 태양계의 행성으로 존재했었던 그들의 고향, 나츠리야드와는 전혀 다르다. 혼돈(chaos) 자체에서 만들어낸 인공의 세계. 그것이 꼭 대지를 둥글게 만들어야만 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신의 절대적인 권능과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이 아닌가. 아마도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무한의 끝을 알고 있을 사람... 아니 신 역시 다르군트뿐일 것이다. "헤헷. 난 모르겠다. 이제는 베르카이가 책임 지라구." 너무나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베링거의 이름을 불러주는 에를리히. 이름으로 시작된 프로포즈에 이름으로 대답하는 것이 그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의 표시였다. 그녀를 꼭 잡은 베링거의 손 힘이 풀리자마자 에를리히는 뒤돌아서 베링거 위로 점프해서 그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우와앗!" "에헤헤헷." 땅바닥에 쓰러진 베링거의 위에 에를리히가 올라탄 꼴이 되었다. 아니 이제부터는 마나티와 베르카이라고 불러야 할 두 사람이었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마나티?" "에이∼ 다 알면서. 자, 지금부터 앙탈 이외의 반항은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절대 꽃수 베르카이군♡" "누가 꽃수라는 거야아아!" "호스트 시절부터 그랬으면서 아직도 포기하지 못했어? 어쨌건 나한테 꿰이는 걸 선택했으니 그만한 각오는 되었겠지? 다트 언니도 그랬어. 내 손에 걸리는 자는 어떤 '강공'이라고 해도 결국은 극상의 수로 변모한다 라고 말야. 이힛♡" "그렇지만 열 번 중에 아홉번이 내가 밑에 깔리는 구도는 좀 너무하잖아!" "다트 언니한테도 마찬가지면서 뭘 새삼스럽게... 오호홋. 하지만 이제부턴 바람같은 거 피면 안돼. 알았지? 아, 남자는 예외로 해줄께. 베르카이의 호스트 시절 보여줬던 환상적인 연기. 나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야아...." 베링거는 자세를 뒤집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그의 약점인 귓가에 다가온 그녀의 입김은 그의 여린 몸을 가볍게 무너뜨리고 있었다. 영원히 젊고 아름답고 싱싱한 몸을 가진 신들의 육신은 어떤 쾌락이라도 쉽사리 질리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짧은 두 사람의 밀월(蜜月)이 지나가고 있었다. -------------------------------------------------------------------------- - 제멋대로 댓글 응답 시리즈 - 아기곰 님 // 상사 몰래하는 컴의 즐거움에 비할 바 못됩니.....(쿨럭) 환상미궁 님 // ♡♡♡♡∼∼ 후후. 역시 한번에 두 작품 쓰면 연참하기 힘들어요. 판타미녀 님 // 그렇죠. 『순♡수』한 작가의 글에 순수한 독자들이 달라붙는...(먼산) 요즘들어 잡다한 생각... 하지만 정리가 안 되네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신화시대의 종말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93화 : 신화시대의 종말(3) ------------------------------------------------------------------------- 베링거와 에를리히. 베르카이와 마나티가, 구백 년 만에 새삼스러운 신혼을 느끼고 있는 어느 날이었다. 갑작스러운 다르군트의 호출에 에를리히는 황급히 천궁의 중심부인 넥서스(Nexus)로 향했다. 그녀가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다르군트가 방긋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재미가 좋은 모양이구나." "으... 으응. 다트 언니." 용서하는 걸까? 용인하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되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는 걸까? 여전히 여유만빵인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도통 생각하기 힘들었다. 에를리히는 자신도 나름대로 남들에게 마음을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다르군트에 비하면 내공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베링거는 결국 에를리히의 진심을 알아버렸지만, 다르군트의 진심은 베링거뿐 아니라 그 누구도 알아낼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떨고 있니?" "아... 아무것도... 아냐." 한심스럽게도 말이 똑바로 나오지 않았다. 도둑이 제 발로 저린다는 것도 아닌 데 자꾸만 마음이 죄라도 지은 것처럼 불안했다. 아무것도 잘못된 것은 없다. 베링거는 그녀를 택했고 그녀 역시 그를 택했다. 딱히 구백년동안 다르군트가 그녀를 위협하거나 무서운 짓을 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된 이후 한층 예민해진 에를리히의 예감은 연이어 적색 사이렌을 울리고 있었다. "얼마 전에... 내게 이야기한 적 있었지? 가끔은 모든 걸 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진다고." "으응. 그런데... 왜?" "한번 그렇게 지상에 내려가봐." "하... 하지만." 에를리히가 난색을 표했다. 갑자기 자신을 부른 것이야 그렇다치더라고 난데없이 지상으로 내려가라니... 다르군트가 무슨 의도로 그런 짓을 하려는 것인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다르군트의 낯빛이 확 변했다. 구백 년 전, 세로운 세계의 신이 되기 전에 딱 한 번 보았던 표정이었다. 신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전해지는 그녀의 얼굴이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활화산을 보는 듯 무서워졌다. "이건... 명령이야." "어째서!" 에를리히의 항변. 그녀가 지금까지 이렇게 절실한 마음으로 다르군트에게 대들며 항의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에를... 언제부터 내 말을 듣지 않게 된 거야? 지금까지는... 내 말을 잘 들었잖아?" "언니야말로... 왜 갑자기 우릴 떼어놓으려고 드는 거야? 아무리 거역할 수 없는 절대신의 권능이라지만, 남의 마음을 마음대로 돌려놓을 수는 없다고!" "착각하지 마. 그 정도로 날 쪼잔하다고 생각한거야?" 비릿한 웃음을 입에 머금는 다르군트. 아마도 거짓말일거라고 에를리히는 생각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진의는 파악하기 힘들었다. "나 역시 베링거를 좋아하긴 해. 하지만 그보다도 더..." 다르군트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신들을 통솔하던 그녀답지 않게 복잡한 감정의 편린들이 하나둘씩 뒤섞인 얼굴을 보며 에를리히는 그녀가 오랫동안 고민을 한 흔적을 발견했다. 이유는 모르겠고, 물어볼 수도 없지만 쉽게 내린 결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냐. 하지만... 에를 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든 나는 너의 기억과 성격을 봉인한 채 지상으로 내려보낼 생각이야." 다르군트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에를리히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베링거가 이 사실을 알게되면 뭐라고 할까...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부디 다트 언니에 맞서 무리한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다르군트에게 저항해봤자 무익하다는 것을 에를리히는 잘 알았다. "알았어. 언닐... 믿을께." "미안..." 그것은 의례적인 인사였을 뿐일까. 그렇지 않으면 진실한 사과의 의미가 담긴 말일까. 어차피 무한의 시간을 가지게 된 그들에게 이 정도의 시련은 한 순간 스쳐가는 찰나의 번뇌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소 긴 이별이지만, 좋은 추억을 남기고 다시 돌아와서 웃으며 마주보는 것도 괜찮을거야 라고 생각하며 에를리히는 조용히 다르군트의 앞으로 걸었다. 그로부터 6시간 후. 무서운 표정을 한 베링거가 또각또각 바닥을 구둣바닥으로 울리며 넥서스로 걸어들어왔다. 그 때에도 여전히 다르군트는 그 자리에,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리면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서 와. 베링거. 무슨 일이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강렬한 안광으로 다르군트를 쏘아보는 베링거의 말투에 이전까지의 존대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움켜진 베링거의 손에 필요 이상의 힘이 꽉 들어가 부르르 떨렸다. 베링거는 흥분을 가까스로 억누르면서 다르군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르군트는 날카로운 베링거의 위협에 전혀 미동이 없이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칵테일을 들이키고 있었다. "좋은 경험이 될 거야. 베링거도 한 번 내려가보는 게 어때?"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베링거의 사자후(獅子吼)가 넥서스를 뒤흔들었다. 벽과 바닥틈이 제멋대로 갈라져 공간의 틈을 냈고 그 틈은 다르군트가 있는 곳까지 뻗어나갔다. 하지만 사방에서 다르군트를 향해 덮쳐오는 갈라짐은 그녀 주위에 다다를 무렵에는 무언가에 막히기라도 한 듯 그대로 멈춰버렸고 오히려 그녀 주위로부터 사방으로 갈라진 틈들이 원상태로 복구되어가고 있었다. "흥분하면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베링거도 한 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때? 주신(酒神)이기도 하잖아?" "...물어봤자 소용없을 것 같군." 베링거는 몸을 휙 돌려서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크게 구둣소리를 내면서 밖을 향해 걸었다. 베링거가 막 넥서스를 나가려고 할 때 다르군트가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한 마디를 던졌다. "찾아봤자 소용없을 거야. 기억에다가 성격까지 봉인했고, 외모도 완전히 바꿔놨으니까." "....." 베링거는 다르군트의 말에 잠시 발을 멈췄지만 곧 계속 걸어 완전히 공간을 빠져나가버렸다. 그 후, 베링거는 에를리히를 찾아 오랫동안 인간 세상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대체 다르군트는 그녀를 어디로 보낸 것인지 도저히 코빼기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을 조사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다르군트의 말대로 정말로 베링거가 알아볼 수 없게 완전히 위장한 것 같았다. 혹여나 하는 생각에 다르군트가 에를리히를 죽인 것이 아닐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지만 곧 그는 고개를 저었다. 설령 다르군트가 이 세계를 무(無)로 돌리더라도 그 혼들은 이 세계에 남아 있다. 아직까지는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연결시키는 통로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 '어디 있는 거야... 마나티.' 결국 에를리히를 찾아내지 못한 베링거가 향한 곳은 에를리히를 제외하고는 코코룰 교수였다. 다르군트를 제외하고는 새롭게 창조된 세계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주장한 세계의 연이 끊어졌다는 주장은 신들 사이에서 이미 정설로 굳어지고 있었다. "주신(主神)을 능가할 수 있는 방법?" 코코룰은 갑작스럽게 최고급 와인을 한 병 들고 찾아온 베링거의 질문에 깜짝 놀랐다.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지만 다르군트의 철저한 통제와 질서 속에서 돌아가는 세계에서 이런 종류의 질문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포기하게. 다르군트님께 대항한다는 것은 너무 위험해. 그녀에게 대항한 신들이 어떤 몰골이 되었는지는 익히 알고 있지 않나?" "왜 그렇게 겁먹고 있는 거지요. 코코룰 씨? 위험하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뜻 아닌가요!?" 베링거의 당돌한 외침에 코코룰은 안경을 고쳐 쓰고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혔다. "가까이서 그녀와 친하게 지낸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 속에는 냉혹한 칼날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조사해서 짐작하는 사실이지만... 그녀 이외에 연구에 참여한 핵심 멤버들이 전부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 "네에!? 그렇다면..." "게다가 그녀의 세계 컨트롤은 지나칠 정도로 완벽해. 별달리 손을 대는 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그녀가 독재체재를 구축하기 시작했을 때, 대체 어떤 방법으로 신들의 권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는지, 나는 오랫동안 연구했지만 전혀 알아낼 수가 없었어." "그런..." "꾹 참고 기다리는 편이 좋아. 그녀가 에를리히를 영원히 그렇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테니까." 코코룰이 절대신의 변덕에 연인을 잃어버린 베링거에게 위로의 말을 던졌다. 베링거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맥없이 중얼거렸다. "대체 그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코코룰은 대답하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물론 그녀가 이 세계의 절대신으로서 하나의 세계를 완벽하게 꾸려나가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특히 그녀 곁에서 조금이라도 일했던 신들은 그런 사실을 더 잘 알고 있었다. 대내외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녀는 걸핏하면 재미있을 거 같다는 이유로 세계의 법칙까지 바꿔가면서 무책임한 사고를 자주 치곤 했기 때문이었다. "...코코룰 씨." "하여튼. 경거망동하지 말게. 자네들은 특히 다르군트님과 절친했지 않나? 단순히 장난삼아 행한 행동은 아닐거야." '차라리 장난삼아 했다면 다행이게요!' 이번 일은 분명 장난이 아니다. 베링거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애초부터 종잡을 수 없는 그녀였지만 이번 일은 더욱 알 수 없었다. 어째서 그랬을까? 만약에 다르군트가 두 사람 사이에 불만을 품고 강하게 베링거를 요구했다면 에를리히는 두 말하지 않고 그를 내줬을 거다. 항상 가까웠던 세 사람이었지만, 특히 다르군트와 에를리히 사이는 더욱 더 가까워 베링거 자신이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때문에 단순한 질투심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그래. 힘내게. 이왕에 자네도 한번 모든 것을 잊고 지상으로 내려가 보는 건 어떤가?" "글쎄요." 베링거는 피식 웃고는 힘이 쭉 빠진 모습으로 터벅터벅 코코룰의 집을 걸어나갔다. 이럴 바에 방법은 자신이 찾아보는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생전에는 전혀 출입하지 않았던 신궁의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안타까운 마음으로 떠나는 베링거를 전송해주고 집 거실로 돌아온 코코룰은 거실 테이블을 한번 바라보고는 조금 기분이 나빠져서는 노성을 질렀다. "으윽! 이 자식, 선물로 가져왔으면 와인은 놓고 가야지 왜 다시 들고 간 거얏! 아무리 넋이 나갔어도 말이지... 에잉... 쯔쯔." -------------------------------------------------------------------------- 주말에 게임에 손을 대 봤어요. 왕자님 레벨 1을 해봤답니다. 일어의 포스가 느껴져요. 하지만 게임 진행은 간단! (다만 커플링 컨피그의 정확한 용도를 아직 파악못하고 있...)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신화시대의 종말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94화 : 신화시대의 종말(4) ------------------------------------------------------------------------- 이 세계가 창조되어 신들이 강림한 지, 정확하게 978년이 되는 해. 베르카이 베링거는 스스로를 마신(魔神)이라고 칭하고 주신(主神) 다르군트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다르군트의 집권 초창기에 일어난 반란 이후 최초의 반란에 천궁은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다르군트만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결국 일을 벌여 버렸네. 그 녀석." 넥서스의 신좌(神坐)에 올라앉아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짓고 있는 그녀의 표정에 어딘지 알 수 없는 깊은 공허의 감정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상황은 어때? 파라브나?" 천궁 중에서도 다르군트의 권좌가 있는 최중심부의 넥서스에 지금 있는 신은 단 둘뿐. 절대신 다르군트와 사랑의 신 파라브나 둘뿐이었다. 웨이브진 진분홍빛 머리카락을 뒤로 묶어세우고 타는 듯한 진홍의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오랫동안 다르군트의 곁에서 다르군트의 실무작업을 보조해왔다. 때로는 친한 친구나 연인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런저런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베링거와 에를리히에게는 도저히 드러낼 수 없었던 면을 간혹 드러낼 때가 파로 파라브나와 함께 있을 때였다. "다르군트님의 말을 수긍하기 힘든 모양이에요. 여전히 회의실에서 다르군트님의 의중과 베링거의 행동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어요." "후후... 그렇게 불안해하다니... 말이야 신이라지만, 결국에는 우리들도 모두 원래는 인간인 것을..." 어디서 났는 지 모를 적빛의 포도주가 담긴 잔을 가볍게 들이키며 다르군트는 피식 웃었다. 약간은 술에 취한 듯 보이는 다르군트의 얼굴에는 다소 홍조가 돌아 약간은 망가진 듯 보였다. 베링거나 에를리히였다면 이런 모습의 그녀를 믿을 수 없었으리라. "어쨌건, 이전에 다르군트님께 반란을 일으켰던 엉터리 신들보다는 훨씬 더 강력한 힘... 다르군트님과 반대되는 성질... 마(魔)의 극단(極端)을 추구했으니까요. 어지간한 신들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요." "그래서...?" "다들 다르군트님이 직접 나셔주셨으면 하는 바램..." 쨍그랑 다르군트가 던진 유리잔이 벽에 맞으며 깨졌다. 그리고는 어깨를 위아래로 들썩거리면서 웃었다. "난 못해." "하지만 이대로라면..." 여러 해 동안 이 세계의 도(道)를 연구한 끝에 깨달음을 얻어 혼자서 반기(反旗)를 세운 베링거의 움직임에는 서두름이 없었다. 천천히 이 세계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나가면서 다른 신들을 끌어들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다른 신들이 직접 다르군트에게 나서주기를 요청한 것도 어디에 붙는 편이 더 나을까 하는 고민이 없지는 않았다는 데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르군트의 독재체재 출범 이후, 그녀가 정한 절대율을 깰 수 있는 신이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세계 자체의 근간을 흔드는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번 시험해볼까..." "무엇을 말하시는 건지..." "로또를 불러. 그로 하여금 베링거를 상대하게 한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잖아요! 신들도 어쩌지 못하는 베링거를..." 이미 몇몇 신들이 베링거에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 나서 보았지만, 오히려 이전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베링거의 막강한 권능 앞에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도망쳐 와야 했다. "생각해 둔 것이 있어..." "무엇을...!?" "후훗. 그건 비밀이야." "다르군트님... 이 상황을 무리해서 즐기시는 것 같이 보여요. 게다가..." 파라브나가 다시 잔을 만들어 이번에는 샴페인을 마시는 다르군트의 풀린 모습을 걱정스레 지켜보면서 말했다. "게다가?"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걸요." "...그럴지도 몰라." '이건... 내 책임이 아냐. 에를. 베링거. 모두 너희들 책임이라고... 아하하. 나만의 욕심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진정으로 바랬던 건...' - 베링거의 암흑성 - 베링거가 마신이 된 이후,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지은 암흑성은 애초부터 다르군트의 천궁(天宮)에 맞서기 위해 건설된 만큼 어떤 인공물에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웅장한 규모로 하늘을 부유하고 있었다. 그는 인간들과 동식물들이 살아가는 육지에 먼저 자신의 세력을 차례차례 넓혀나가면서, 천궁의 신들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딱히 드러난 성과는 없었다. 초조했다.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초조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정확하게 말해 분기를 이기지 못해 반란을 결심했지만서도 막상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보니 불안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선 목표는 다르군트를 몰아내고 자신이 절대신으로 군림하는 것으로 세워놓았지만, 자신이 정말로 그걸 바라고 있는 것인지도 혼란스러웠다. "베링거님! 암흑성으로 무언가가 날아오고 있습니다." "신인가!?" "신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영상을 보내!" 베링거의 외침과 함께, 그의 앞에 펼쳐진 디스플레이에 암흑성을 향해 오는 조그만 비행선이 하나 있었다. 물론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크고, 그들의 과학력을 훨씬 뛰어넘는 물건이었지만 암흑성의 웅장한 규모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 비행선의 외곽에는 비행선의 이름인 듯 백야(白夜)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통신이 들어옵니다." "연결시켜." 베링거의 전면에 위치한 디스플레이 화면이 전환되면서 짧은 머리카락을 제멋대로 흩날리는 한 젊은 청년이 떠올랐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 때문에 베링거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네놈이 마신 베링거인가!?" "그렇다면?" "이 세계의 주신이신 다르군트님의 명을 받아, 천계와 인계를 어지럽히는 사악한 마신인 네녀석을 나 로또가 정의의 이름으로 응징하겠다, 각오해..." 베링거는 로또의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버튼을 눌러 로또가 등장하는 디스플레이 창을 꺼 버렸다. 실력은 모르겠지만 용기와 사명감으로 전신을 무장한, 이야기책에 나오는 용사의 표본과 같은 상대다. 하지만 그래보았자 결국 인간. 신인 그를 어떻게 죽일 수 있을 것인가? 다르군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할까요, 베링거님? 이대로 쏘아 격추시켜 버리면..." "생포해서 내 앞으로 데려와." 알고 싶었다. 지금 다르군트는 자신에 대해서 무슨 감정을 품고 있을까? 증오? 배신감?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까? 그녀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든 이제부터는 한 사람만을 바라봐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했으면서도 어째서인지 베링거는 여전히 그녀가 신경쓰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확실히 잘못되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그 어긋남이 시작된 것인지 베링거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셋 중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미 무한의 생명과 강대한 권능을 손에 넣은 지금조차도 마음 속의 빈자리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것을... -------------------------------------------------------------------------- 글 정말 안써지는 요즘이랍니다...ㅠ.ㅠ 하아아...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신화시대의 종말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95화 : 신화시대의 종말(5) ------------------------------------------------------------------------- 로또. 그는 세상의 모든 행운이란 행운은 독차지한 것 같은 사내로, 튼튼한 나라의 왕위 계승자라는 직위에 토토라는 아름다운 약혼자를 가진 청년이었다. 그는 깊은 신심, 다정하고 따스한 마음씨. 불굴의 용기. 불타는 정의감을 가진, 훌륭한 인간의 표본 같은 사람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남아 로또는 인간 세계에 대한 마신 베링거의 영향력이 확장되자 일찌감치 항마군(降魔軍)의 선봉에 써서 마신의 군대와 맞서 싸워 왔다. 또한 다르군트의 은총을 직접 받은 최초의 인간으로 인간답지 않은 강력한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첫번째 씰드 네임(Sealed Name)이기도 했다. 다르군트에게 암흑성을 공격하라는 무리한 명령을 받고도 자신의 신심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로또는 인간사에 유례없는 비행선마저 동원하여 암흑성까지 올라오는데는 성공했지만 지상의 마신군보다 훨씬 강한 베링거의 직속부하들을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역시 무리인 듯 결국에는 잡혀서 같이 온 동료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있었다. 그는 온 몸이 어지간한 칼로는 끊어지지도 않는 합성 끈으로 묶인 채 베링거의 앞으로 끌려왔다. "남자 용사인가? 뭐, 신기할 것까지야 없지만 별일이군." 로또를 본 베링거는 짤막하지만 간단한 감상을 던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세계는 애초부터 이상향(Utopia)를 목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신들 모두가 남녀평등의 이상을 추구했다. 때문에 남녀간의 신체능력 격차가 많이 줄었고, 모든 성 관련 사건사고의 대다수의 원인이 되는 남녀의 성욕 역시 재조정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과정을 다르군트의 명을 받은 에를리히가 총괄했다는 데 있었다. 남녀간의 능력차나 차별인식 등을 없애준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정도가 꽤 지나쳐서 남자들이 여자들의 기에 완전히 눌릴 정도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여성의 남성에 대한 성폭행 및 성추행 비율이 전체 성범죄의 25%를 차지한다는 비공식 통계가 그런 사실을 입증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각국의 훌륭한 지도자나 왕위계승자, 군 장성 등의 대다수를 남자 대신 여자가 꿰차고 있었고 오히려 남자들은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치장이나 꾸미기에 힘쓰는 것이 최근의 풍조였다. 몇몇 남신들이 이런 역차별적 현상을 우려하고는 주신 다르군트에게 집단으로 몰려가 시정해 줄 것을 항의했으나 다르군트는 '원래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수컷이 꾸미고 치장하는 것이 올바른 자연의 섭리다.'라고 하고는 단번에 그들을 쫓아냈다. 물론 베링거가 봉인되고 다르군트가 권좌를 비운 이후에는 어느 정도 재조정되긴 하지만 현 인간계의 상황이 그런 가운데 다르군트가 보낸 용사가 남자였으니 조금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르군트가 널 보냈나?"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마라! 이 악마!" 반항적인 눈이었다,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로또의 몸에서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베링거에게는 단지 우습게 느껴질 뿐이었지만. "그녀가 뭐라고 했지?" "세계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악을 행하는 네놈을 처단하라고 하셨다!" "어떻게? 고작 인간들이 쓰는 장난감 칼 따위로? 다르군트가 뭐 반짝거리는 검이라도 하나 주던가?" "그분은 나와 내 동료들에게 악과 맞서 싸울 진정한 용기와 희망을 주셨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광신자의 얼굴을 한 로또의 모습에 베링거는 한숨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오로지 신앙심과 정의감에만 가득찬 쓰레기를 자신에게 보내다니... "바보군. 다르군트가 고작 이런 멍청이를 보내다니..." "멍청이라니! 나는 주신님의 은총을 받아..." "그만해. 로또. 마신이 그 정도 말에 꿈쩍할 것 같지는 않아." 로또의 옆에 있던 한 소녀가 그를 말려 진정시켰다. 베링거는 그제서야 잡혀서도 제멋대로 설치고 드는 로또에게서 시선을 돌려 그를 말린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마 이름이 토토라고 했던가? "여자 쪽이 이야기가 더 잘 통하겠군." "뭐... 뭐야, 토토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괜히 넘겨짚지 마. 로또. 일단 마신의 말을 들어보자고." 확실히 옆에 있는 시끄러운 남자보다는 훨씬 마음에 드는 처자였다. 단정하고 침착한 모습이 오히려 깔끔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그녀는 조용하면서도 또박또박 명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다르군트는 왜 너희들을 보냈지? 너희들이 나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을텐데? 싸구려 환상따위만으로는 현실은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아." 로또가 또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토토가 그를 제지했다. "그 점에 관해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능하면 저희 둘과 마신님과 단독으로 이야기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흐음..." "안됩니다!" "위험합니다!" 토토의 말에 베링거가 관심을 보이자 베링거의 부하들이 당연히 말리고 나섰다. 하지만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부하들에게 웃어 보이며 이야기했다. "절대신에게 반기를 든 내가 고작 인간 둘에게 죽을 신으로 보이나? 그것도 비무장의 적에게?" "하... 하지만." "따라오도록." 결국 그들은 베링거의 응접실 안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애초에 베링거가 그들을 신경써줘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지만, 지금의 베링거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적을 유비무환을 위해 처치하는 것보다는 다르군트의 진정한 의중을 읽는 것이었다. "그럼, 주신님께서 저희들을 보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해 봐." "주신님께서는 당신의 약점을 잡으면 이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약점은 바로..." "귀 말인가?" "네." 상대의 약점을 보란 듯 말하는 토토. 별 일 아는 듯 그녀의 말을 웃으면서 수긍하는 베링거. 제3자가 보기에는 언뜻 기묘한 언밸런스가 존재하는 둘의 대화. "귀를 잡는다고 내가 죽을 것 같나?" "그건 아니지요." 베링거는 이 세상의 신. 아무리 자르고 베고 지지고 볶고 썰고 끓이고 조리고 데치고 비비고 사분오열시켜도 절대 죽지 않는다. 어떻게 해도 영혼은 그대로 남아 정체불명의 권능으로 육체를 재구성시킬 수 있었다. 이는 다르군트가 정할 수 있는 세계의 율법 이전부터 신들 자체를 신으로 있을 수 있게 해 주는, 이 세계를 나츠리야드에서 만들 때 정해진 룰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한번 귀를 잡게 해주시면 보여드리죠." "...." "두려우신가요? 아무 무장도 하지 않은 우리가 당신을 쓰러뜨릴 것이?" 당찬 얼굴로 베링거를 도발해오는 토토. 하지만 그 정도 계략에 넘어갈 만큼 무분별한 자존심을 가진 베링거는 아니다. 그는 딱 잘라서 토토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두렵지 않아. 두려운 것이 있다면 다르군트겠지."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아요. 두려우면서도 반기를 들다니..." "....." 베링거는 대답하지 않고 토토를 바라보았다. 토토 역시 베링거의 시선에 기죽지 않고 정면으로 눈싸움을 벌였다. 알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둘 사이를 감돌았다. 하지만 다르군트의 진의를 알아내기 위해 제대로 말이 통하는 토토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베링거는 로또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능력도 안 되면서 처음부터 베링거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로또가 토토가 이야기하는 동안 묘하게 조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압!" "으응? 와앗!" 방심한 사이, 베링거의 뒤로 돌아간 로또가 베링거의 뒤를 낚아챘고 베링거는 깜짝 놀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뒤를 잡혔다. 몸에서 힘이 쫙 빠져나가는 나른하면서도 의욕을 상실케 하는 기분이 베링거의 정신을 덮쳤다. "서... 성공했어! 토토!" "잘했어, 로또." 로또의 말은 자신이 직접 해 놓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엄청나게 들떠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들뜬 저들의 반응은 베링거로서는 헛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귀가 약점이라고는 하지만, 육체를 사용하여 펼칠 수 있는 능력만이 제약될 뿐, 정신만으로 동작할 수 있는 권능은 여전히 발현 가능했고, 그것만으로도 인간에 불과한 둘을 저승행 열차에 태우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마음 속 어딘가에 조금은 찜찜한 기분도 있었다. 과연 '그' 다르군트가 이런 허접한 작전으로 자신을 쓰러뜨릴 생각을 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단지 시험해본 것 뿐일까? 그렇게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베링거는 로또와 토토를 처단하고 미연의 사고를 방지할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럼 이걸 받으시지요!" 토토가 윗옷 단추를 약간 풀어헤쳐 패인 가슴 사이에서 약병같은 것을 꺼내서는 베링거에게 끼얹었다. 잠깐 이것이 무엇인지 의아해하던 베링거는 곧 피부에 느껴지는 스멀거리는 감촉을 느끼고는 모골이 송연한 감각을 느꼈다. "이... 이건...!" "모든 만물의 법칙을 지배하시는 절대신께서 내려주신 박령액(縛靈液)이에요. 육체의 신경을 파고들어가 영혼을 구속하는 약물이지요. 비록 상대가 당신같은 마신이라고 해도 10분 정도는 권능을 사용할 수 없을 거예요." 이로서 베링거의 행동은 완전히 봉쇄되었다. 하지만 10분 정도 자신의 행동은 봉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인 것일까? 베링거는 의아함을 느꼈다. 베링거 자신이 절대로 죽을 리가 없는데다가 인간의 능력으로는 고작 10분만에 자신을 봉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시작해볼까?" 갑자기 로또가 음흉한 얼굴로 키득거리면서 베링거를 쳐다보았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글쎄... 하지만 주신님께서는 말씀하셨지. 이건, 나쁜 마신에게 내리는 벌이라고. 솔직히 네놈을 상대하는 것을 불쾌하기 짝이 없지만, 주신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이 한몸을 희생하기로 했지." 로또는 토토에게 베링거의 귀를 맡긴 채 갑자기 갑옷을 다 벗어던지고는 웃통을 벗어제끼기 시작했다. 어쩐지 알 수 없는, 이곳에 와서 신이 된 이후로는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불길한,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추억이 서린 기분나쁜 느낌이 전신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 '.....' '다음 화... 어떻게 써야 하나아아아아아 ;ㅁ;' '(머엉)' '처음 시작할 때는 이런 내용으로 점철된 글을 쓸 생각이 없었어어어어어어.' '...(루비콘 강은 이미 넘었어. 돌아갈 수 없는 걸.)' Into the Deep, Dark World, with BoysLove... C U Next Time. My lovely Readers!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신화시대의 종말 미소년전기(美少年傳記) 카이엔 제196화 : 신화시대의 종말(6) ------------------------------------------------------------------------- "이잇!" 베링거는 어떻게 저항해 보려고 했지만, 토토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베링거의 귀를 강하게 붙잡고 있었다. 로또의 손이 베링거의 뺨을 훑고 내려갔다. 스멀거리는 감각이 베링거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름답군."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베링거를 바라보는 로또, 하지만 그 표정은 얼마가지 않아 거칠고 잔혹하게 변해갔다. 웅크린 새끼 고양이같은 베링거의 눈동자는 남녀의 성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 힘은, 로또를 상대로는 왜곡된 형태로 전해지는 것 같아 보였다. 퍼억 "크윽!" 로또가 베링거의 얼굴을 때렸다. 하지만 체중을 실어 강하게 내리쳤는데도 입술이 터져 약간의 피가 흘러나왔을 뿐 치아가 부러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약점인 귀를 잡혀 있어서 힘을 못 쓰는 것뿐이지 베링거는 육체적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두 사람을 압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부숴버리고 싶어... 무고한 사람들을 홀려 악마의 손길에 빠져들게 하는 이런 화사한 얼굴따위는...!" 로또는 무엇에 홀린 듯 몇 번이고 베링거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보통 사람이었더라면 두개골이 함몰되었을 충격에 베링거의 눈두덩이가 약간 찢어지고 꼬뼈가 약간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링거의 얼굴에서 풍겨나오는 매혹적인 아름다움은 조금도 퇴색하지 않는 듯 했다. "로또, 시간이 없어! 빨리 시작해!" "쳇...!" 로또는 거친 손길로 베링거의 옷을 잡아당겼지만, 베링거의 옷은 뭘로 만들었는지 늘어나기만 할 뿐 잘 찢어지지 않았다. 씩씩거리다가 결국 옷을 찢지 못한 로또는 벗어 놓은 옷가지들 틈에서 칼을 빼들었다. "로또!?" "힛. 장난감 칼이라고 했지? 어디 장난감 칼이 얼마만큼 먹히는지 볼까?" 로또는 망설이지 않고 베링거의 목덜미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칼을 좌악 내리그었다. 베링거의 옷은 그제서야 양쪽으로 좌악 갈라져나갔다. 하지만 로또가 어지간한 인간의 몸까지 양분시킬만큼 강한 힘으로 검을 그었는대도 불구하고 베링거의 육체는 칼이 그인 흔적만 있을 뿐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은 것 같았다. "...이헌(이런) 게 무흔(무슨) 희미(의미)가 있나?" 입안이 약간 터진 탓일까? 베링거의 발음은 다소 부정확했다. 다르군트는 이런 짓으로 자신을 죽이거나 혹은 봉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게 아니면 평소에 말하던 대로 자신이 구백 년 만에 남자를 상대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뿐일까? 아무래도 후자 쪽이 가깝다고 베링거는 생각하고 저항을 포기했다. 그런 걸 원한다면 보여 줘도 상관은 없겠지... 어차피 힘이 돌아오면 눈앞의 두 인간은 살아있지 못할 테니까. 베링거의 상념 속에는 눈앞의 로또와 토토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생각하는 것은 다르군트와 에를리히에 관한 일들 뿐. 다만, 어쩐지 마음에 걸리는 기억이 하나 있기는 했다. 자신은 다르군트와도, 에를리히와도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을 만큼 관계를 맺어왔지만, 셋이서 함께 관계를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르군트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았지만 신들에 대해서는 동성애(同性愛)를 금지했다. 만에 하나 다르군트와 에를리히간의 관계가 이루어진다면 위험하다는 이유였던 것 같은데... 기억날 것 같으면서도 잘 기억나지 않는 기억. '설마... 폴라 오버로드(Polar Overload)!?' 생각 끝에 베링거는 기억해냈다. 동극(同極), 정확하게 말해 동성(同性)의 신들끼리 교접했을 때 생기는 일종의 폭주현상. 그런 게 인간을 상대로도 가능하다는 말인가! ? 다르군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설마 이것이라면... 베링거는 다시 한번 귀를 잡은 토토의 손길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그녀는 쉽사리 귀를 놔주지 않았다. "크윽...!" "저항은 소용없다!" 베링거의 몸 크기보다 두세배 정도는 더 커 보이는 로또의 건장한 덩치가 베링거를 위에서 짓눌렀다. 질리도록 싫고 끔찍한 감각이 베링거의 안으로 파고 들어오고 있었다. 따스함이나 배려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아주 거칠고 파괴욕으로 가득 찬 난폭한 행동이었다. 쉽사리 상처입지 않는 베링거의 육체지만, 그래도 곳곳이 상처투성이었다. "로... 로또... 너무 심해..." 그 난폭함에는 토토조차 질릴 정도였다. 과연 눈앞에 있는 자가 로또가 맞나 의심될 정도였으니까. 그가 원래 아군에서는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하지만 적에 대해서는 한치의 용서도 없는 냉혹함과 잔인함을 보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로또는 상대를 부러뜨리다 못해 자신마저 함께 자폭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혹시...' 다르군트는 이 일에 앞서 그들에게 각각 선물을 주었다. 토토에게는 영혼을 구속하여 권능을 일시 마비시킬 수 있는 박령액을, 그리고 로또에게는 실제 행동에 들어갈 때 정신과 육신의 의지가 상반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 발기제를 주었었다. 다르군트는 말했었다. [너무 많이 쓰지 않도록... 자칫하면 자신마저 잃어버릴 수도 있어요.] "설마... 로또 그거... 다 먹은 건...?" "당연하지! 이놈을 완전히 파멸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한다!" "크아아악!" 로또는 거친 허리놀림으로 베링거를 계속 압박하면서 다시 칼을 들어 이번에는 베링거의 눈을 찔렀다. 칼은 맥없이 베링거의 눈에 박혔고, 베링거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어찌나 심하게 몸부림을 치던지 토토는 하마터면 붙잡은 베링거의 귀를 놓칠 뻔했다. 비단 눈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폴라 오버로드 현상으로 육체와 정신이 불균형을 이루기 시작한 베링거의 육체의 결합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고, 거듭되는 로또의 폭력에 베링거의 상처는 자꾸만 늘어갔다. "너... 너무 지나쳐, 로또!" "으하하하! 이것이 바로 세상의 정의라는 거다! 악은... 용서하지 않아!" "크아아아아악!" 로또는 미친 듯이 칼로 베링거의 얼굴을 난도질했고, 베링거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울부짖었다. 마신이 되어 손에 넣은 절대적인 힘. 다른 신들이 두려워했고, 절대신으로 세계의 규율과 법칙을 지배하는 다르군트와도 상대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강한 힘은 폭주 현상으로 제어가 불가능하게 되자 제멋대로 몸을 순환하면서 들쑤셨다. 정신을 태우는 듯한 그 고통에 비하면 로또가 일방적으로 가하고 있는 폭력은 간지럼타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강한 힘을 유지하게 위해서는 강한 정신력을 필요로 한다. 베링거는 새삼스럽게 어째서 다르군트가 에를리히의 3p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비록 여신들끼리의 교접은 남신들끼리의 그것에 비하여 폭주의 가능성이 낮다고 하지만, 낮은 확률이라도, 만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웃... 뭐야!" 베링거의 육체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그 형체가 괴악하게 변해갔다. 마(魔)의 힘에 손을 댄 결과였다. 폭주하는 강력한 마력에 로또는 튕겨나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치잇... 아앗, 토토!" 토토 역시 충격을 받은 탓일까? 그녀는 이미 형체를 잃은 베링거의 귀를 잡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베링거 님! 으아아아악!" 갑작스런 소란에 놀란 베링거의 부하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을 덮쳐오는 정체불명의 검은 마의 고깃덩이들뿐이었고, 그 순간이 그들의 최후였다. "크윽, 젠장!" 금방 정신이 깰 정도의 강력한 마력이 퍼져나왔다. 로또는 옷을 챙겨입을 여유도 없이 쓰러진 토토를 들쳐매고 창문을 깨고 방을 빠져나왔다. 온 몸이 치명적인 마력을 정면으로 쐬어 따끔거리고 쑤셨지만, 로또는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빠져나와 뛰고 또 뛰었다. 베링거의 육체는 붕괴하고, 허공에 뜬 암흑성은 크게 요동쳤다. 로또는 토토를 어깨에 들쳐맨 채 자신이 타고 온 백야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부터 3일 후. 정신을 차리고 깨어난 토토의 신성력에 의해 제멋대로 폭주를 거듭하던 마신 베링거의 육체는 봉마석에 봉인되어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그 직후 토토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세간에 알려지기로는 마신의 육체를 봉인하고 힘이 다해 죽은 거라고 전해져내려오고 있지만 아무도 그 진실은 모른다. 로또가 자신과 베링거 사이에 있었던 일을 은폐하기 위해 입을 막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녀가 그때 일에서 받은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컸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 역시 세월이 지나면서 모두 잊혀지고 만다. 그리고 육신을 잃고 잠든 베링거의 영혼은 정처없이 세계를 떠돌게 된다. 차원을 넘어서 쭈욱... 나는 베링거인가? 김상우인가? 그렇지 않으면 제3의 존재인가? 혼돈 속에서 점차 일체화되어가는 기억. 그리고 성격. 아직 혼란은 가라앉지 않았지만, 두 개의 인격은 통합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개체를 생성하고 있었다. [카이엔 씨?] 그때,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베링거도, 상우도 아닌, 카이엔 브리타뉴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