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1 [공지] 1부 알라나데일 =========================================================================                            마법사와 마녀를 배척하는 나라. 뮈엘라. 뮈엘라 한쪽구석, 작지만 부유한 영지 알라나데일 알라나데일의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 케이트와 영지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수사관. 그리고 범죄보다 더 수상한 하인 이안. ============================ 작품 후기 ============================ 새로 뵙는 분도, 다시 뵙는 분도 안녕하세요. 소설을 시작하면서 이런류의 글은 보통 뜰에 적었는데 아무래도 뜰은 보시는 분이 적은 듯 하여 이쪽을 할애하여 올리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지운건 아니니 걱정 마세요. 저 다섯줄이 본문의 전부입니다. "뮈엘라의 수사관"은 몇부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본문에 적은 다섯줄은 1부에 해당되는 줄거리입니다. 한부 연재 후 잠시 쉬고, 다시 한부 연재 후 잠시 쉬는 식으로 진행이 될것 같습니다. 그러니 함께 천천히 여유있게 즐겨주세요. 각 부는 순서에 상관없이 혹은 한 부만 보셔도 상관없도록 쓸 예정입니다. 현재로서 업뎃은 평일 주 5일. 빨간날을 제외하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에 한 편씩 올릴 예정입니다. 시간은 오후 7시부터 9시 사이. 최대한 맞추려 노력하겠습니다. 읽으시다가 궁금한 점, 이상한점을 발견하신다면 기탄없이 말씀해주세요. 00002 1. 알라나 데일의 저택 =========================================================================                            “그 남자 떠났대.” “그 남자?” 케이트는 데이지의 말에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계단 아래에서 데이지가 난간을 닦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남자가 누군데?” 그녀가 다시 묻자 데이지가 고개를 들었다. “수도에서 온 수사관 말야.” 아, 그 남자. 왜 그 남자라고 했는지 알겠다. 그녀들은 수사관이라고만 알고 있을 뿐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었다. 수사관이 아니라 배우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화려한 의상이 사람들의 눈을 모은 것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한몫했으리라. “언제?” “오늘 새벽에.” 케이트는 데이지가 다시 난간을 닦기 시작하자 자신의 손이 들린 왁스 걸레로 시선을 돌렸다. 좀 서둘러야겠다. 저택의 손님이 떠났으니 손님방을 정리하라는 명령이 내려올 것이다. “범인은 잡았을까?” 난간 손잡이에 왁스질을 하고 있는데 데이지가 물었다. 케이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수사관이라는 건 범죄를 조사하는 직업이라고 했다. “글쎄. 잡았으니까 간 거 아닐까?” 심드렁한 케이트의 말에도 개의치 않고 데이지는 손을 부지런히 놀리며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잡았다면 범인이 누군지 벌써 소문났을 거 아냐.” 그것도 그렇긴 하다. 하지만 케이트는 애초에 수사관이 잡으려 한 범인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부엌 애들은 뭐래?” 부엌 애들이란 부엌에서 일하는 하녀를 말한다. 아무래도 매일 식재료를 운반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데다가 필요한 재료가 있다면 재빨리 마을에 내려가 사오기도 하니 청소를 담당하는 케이트나 데이지보다는 정보가 빠를 것이다. 하지만 데이지는 고개를 저었다. “수사관이 떠난 것만 알던걸?” “점심식사 시간에 물어보지 그래?” “그럴까?” 데이지가 입을 다물자 정적이 찾아왔다. 어두운 계단에 쓱싹쓱싹 하는 헝겊으로 난간을 문지르는 소리만 반복해서 들려왔다. 알게 뭐람. 케이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난간 손잡이를 왁스질 하며 생각했다. 수도에서 온 수사관이고, 범죄고. 죄다 그녀와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가 다시 나온 것은 점심식사 후였다. “새벽에 나간 손님말야?” 부엌 하녀인 앤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물었다. “응. 수사관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범인은 잡은 거야?” “못 잡았을 걸?”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사용인들의 시선이 앤에게 몰렸다. 어머.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이 익숙지 않은지 그녀가 얼굴을 붉히는 게 보였다. “범인도 못 잡고 간 거야?” 누군가가 비아냥댔다. 케이트는 모른 척 차를 마셨다. “듣기로는 진짜 범죄가 일어나서가 아니라 범죄가 일어나는지 확인하기 위해 온 거라던데?” “범죄가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수사관이 왔다고? 왜?” “높으신 분들의 생각을 어찌 알겠어.” 또 다른 비아냥에 사용인들이 일제히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높으신 분들의 생각. 케이트 역시 픽 웃고 말았다. 그런 식으로 비아냥대는 걸로 불만이 풀어진다면 그걸로 됐다. 비아냥대는 사람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근데 수도의 남자들은 다 그렇게 화려하게 입고 다니는 모양이지?” “아니면 수사관이라 그런가?” 이야기의 주제는 수사관이 입고 있던 옷차림으로 바뀌었다. “그 파란색 스카프 봤어?” “끝에 노란색 선이 두 줄 들어간 거?” 여자들이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트렸다. 케이트 역시 슬쩍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문득 시선 끝에 남자가 걸렸다. 새로 들어온 남자 하인이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와 부딪치더니 가늘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리 없지. 케이트는 재빨리 시선을 피하며 생각했다. 이 저택에 들어온 지 보름. 말도 없이 그만둔 남자 하인 두 명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집사가 추천서도 없이 채용해 버렸다. 분명 집사가 돈을 받았을 거야. 그런 수군거림에도 남자는 상관하지 않는 태도였다. 술을 좋아하고 잔돈을 슬쩍하는 건 집사의 나쁜 버릇이었다. 그것 외에 크게 문제 될 게 없으니 케이트로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의 돈에 손대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새로 들어온 남자는 신경 쓰였다. 늘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차가운 표정에 군더더기 없는 태도. 그 정도라면 하인이 아니라 종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일반 하인보다는 주인을 곁에서 모시는 종자가 더 보수는 좋을 텐데 왜 이런 시골 마을까지 와서 하인을 하는 걸까. 훌륭한 종자는 구하기 어렵다고 들었다. 데일 남작에게 종자가 없었다면 새로 온 남자가 종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시골에 추천서도 없이 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무슨 문제라도 일으키고 도망쳐 온 게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케이트는 남자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의식하는 데이지의 얼굴을 발견하고 혀를 찼다. 데이지 뿐만이 아니다. 앤도 남자를 의식하는 게 보였다. 사람들의 태도란 케이트처럼 한걸음 떨어져서 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법이다. 이 남자가 들어온 날부터 저택의 여자 사용인들은 꺅꺅거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태도마저도 멋있다고 하니 그녀로서는 할 말이 없다. 이 정도 쯤 되면 보통 남자라면 으쓱해 할만도 한데 그는 그런 것도 없었다. 나와는 상관없다는 태도. 마치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그 태도가 케이트는 못 견디게 불쾌했다. “수사관이란 직업은 돈을 꽤 많이 버는 모양이지?” “왜? 하인 그만두고 수사관이 되려고?” “못할 것 없잖아?” “아서라. 시험을 세 번이나 봐야 한다더라.” 엑 하고 빌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자 다시 한 번 사용인의 휴게실은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대체 뭘 조사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걸까. 이런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범죄는 치안 관이 잡는 것 아니었나? 케이트의 생각은 떠난 수사관에게로 넘어갔다. 그녀는 새로 들어온 남자 하인이 자신을 유심히 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잠깐 집중하게.” 어느샌가 집사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말에 소란이 가라앉았다. 사용인들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 일정이 조금 바뀌어서 말이야.” 집사는 사용인들에게 앉으라는 말도 없이 본론을 꺼냈다. 자신을 대하는 사용인들의 태도에 자못 우쭐해 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다들 알겠지만 며칠 동안 묵고 계시던 손님께서 오늘 새벽에 떠나셨지. 그래서 손님방을 정리해야 하는데, 어차피 한동안은 손님이 올 일이 없어. 그래서 말인데.” 젠장. 케이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다음에 무슨 말이 올지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케이트와 데이지는 손님방을 전부 청소해 주게. 시트는 전부 세탁해야 할 거야.” 집사가 알겠냐는 듯 케이트와 데이지의 얼굴을 들여다봤기 때문에 케이트는 네에하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 말고는 집사가 딱히 지목할 하녀가 없기도 했다. “수사관이라는 건 무슨 일을 하는 걸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케이트는 손님방의 침대 시트를 걷어내며 데이지를 쳐다봤다. 그녀는 쿠션 커버를 벗겨 내고 있었다. “수사관이잖아. 수사를 하겠지.” “하지만 범죄가 일어나면 보통 치안 관이 조사하러 오잖아. 그럼 대체 수사관이라는 게 필요가 있는 거야?” “으음, 글쎄.” 케이트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부분이었다. 수사관이라는 건 대체 뭐지? 그녀 역시 수사관을 볼 때까지 그런 직업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가 범죄와는 관계없는 삶을 살았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대부분의 사람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말이지이~” 데이지가 쿠션을 동그랗게 부풀리기 위해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 정말 제대로 된 수사관이 맞기는 한 걸까?” “무슨 의미야?” “그렇잖아. 그 옷차림. 나, 그렇게 화려하게 입은 남자는 처음 봤어.” 시트를 걷어내고 장을 열어 그 안의 시트까지 전부 끄집어낸 케이트는 능숙하게 착착 시트를 접으며 웃었다. 확실히 스카프뿐 아니라 그 빨간색 레인 코트는 너무 눈에 띄긴 했다. 저 정도면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눈에 안 띌 수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일을 잘하고 못하고는 옷차림하고 상관없잖아.” “그렇긴 한데 좀 못 미덥긴 하잖아.” 뭐, 그렇긴 하지. 케이트는 가볍게 동조하며 옷장을 열었다. 가볍게 닦아낸 다음에 환기시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깊숙한 구석에 선명한 빨간색 천이 보였다. “그래도 생긴 건 잘생겼더라.” 데이지가 뭐라고 말을 거는 게 들렸지만 그녀는 대답 없이 그대로 옷장 안에 기어들어 가 천을 집어 들었다.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장갑이었다. 선명한 빨간색으로 보였던 게 꺼내고 보니 약간 짙은 와인색이었다. 와인색 장갑이라니, 확실히 새벽에 떠난 손님의 장갑이 분명하다. “이안도 잘생겼는데. 그치?” 케이트가 장갑을 손에 쥐고 옷장에서 나왔을 때 데이지는 등을 돌린 채 계속해서 말을 걸고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손안의 장갑을 내려다보다가 데이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수도의 남자들은 다 그렇게 멋진 걸까?” “데이지.” “분명 이안도 수도에서 왔을 거야.” “데이지!” “어?” 그제야 고개를 돌린 데이지는 케이트의 손안에 든 장갑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뭐야?” “손님이 놓고 갔나 본대” “세상에! 예쁘기도 해라.” ============================ 작품 후기 ============================ 즐거운 한주의 시작입니다. 다들 즐겁게 보내셨나요? 전....젠장 ㅜㅜㅜㅜ 00003 1. 알라나 데일의 저택 =========================================================================                            이걸 어쩐다. 케이트는 손끝으로 장갑을 만지작거리다가 그 안에 뭔가가 부스럭거리는 것을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에 뭐가 들었나? 그 순간 데이지가 장갑을 낚아챘다. “비싼 거겠지?” “그렇겠지.” “그런데 한 짝 밖에 없어?” “그런 것 같은데. 가방에 넣는 걸 잊어버린 것 같아.” 하긴, 장갑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지. 이런 건 그냥 집사에게 말하는 게 좋다. 그녀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며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케이트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호박색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뒤 이어 데이지의 환호성과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머, 이안!” 남자는 천천히 문을 틈을 벌리더니 한발 내딛었다. 움찔하고 케이트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한발 물러났다. 어라? 내가 왜 물러났지?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의아심을 느끼며 자세를 바로 했다. 때때로 이 남자의 태도는 맨몸으로 맹수를 마주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건 케이트만 느끼는 감정인지 오히려 데이지는 그에게 쪼르르 다가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예요?” “...시트 옮기는 걸 도와줄까 하고.” 거짓말이다. 케이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 정도로 사근사근한 성격도 아니거니와 그럴 거라면 왜 방 밖에서 문틈을 통해 그녀들을 지켜보고 있던 걸까. “어머, 정말요? 친절하네요. 고마워요!” 들뜬 데이지와 달리 이안은 표정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들어올 때와 같은 표정으로 케이트를 한번 훑고 데이지가 손에 쥔 장갑으로 넘어갔다. “그건?” “아, 이건 오늘 새벽에 떠난 수사관이 남기고 간 것 같아요.” 그의 시선이 떨어지자 케이트는 저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뭔지 몰라도 이 남자는 사람을 긴장하게 하는 게 있다. 가까스로 덫에서 풀려난 기분이 들어 그녀는 바닥에 놓아둔 시트더미를 끌어안았다. “손님이 놓고 가신 것 같아요. 집사님께 드리려고요” “내가 전해줄까?” 뭐? 케이트의 고개가 휙 들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이안을 쳐다봤다. 데이지의 얼굴이 빛나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정말요? 그녀는 이안이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게 마치 호감을 나타내기라도 한 것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반면 케이트는 순수하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저럴 리가 없는 남자다. 고작 이주의 시간이었지만 지금까지 그녀는 이안이 명령이 아닌 업무를 처리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며칠 전 앤이 생선요리에 레몬즙을 짜는 걸 잊었다고 대신 뿌려달라고 했을 때도 자신의 업무가 아니라며 거절하지 않았던가. 결국 빌이 대신 해주신 했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던 게 확실히 기억이 난다. 더욱 무서운 건 그런 못된 성미에도 불구하고 여자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는 여전하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먼저 나서서 일을 돕겠다고? 설마 이 장갑을 슬쩍하려는 건가? 그녀는 말도 안 되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한쪽짜리 장갑을 뭐에 쓴단 말인가. 게다가 일반적으로 잊어버린 물건을 돌려준다면 감사의 편지를 보내기 마련이다. 편지가 없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중간에 분실된 게 아닌가 하여. 케이트는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내고 장갑을 받아 드는 이안의 손에 시트 더미를 떠넘겼다. “그럼, 이거 부탁할게요.” 호박색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 봤다. 이건 뭐야? 라는 듯 한 그 내려다보는 시선에 움츠려드는 어깨를 바로하며 케이트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상대도 그녀와 같은 사용인일 뿐. 겁먹을 필요는 없다. “시트 옮기는 걸 도와준다면서요?” 여전히 이안은 그래서? 라는 표정이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지 데이지가 끼어들었다. “아이, 참. 케이트도. 이걸 혼자 어떻게 옮기라고.” 애교 있기도 하지. 케이트는 시트 더미를 나눠 들으려는 데이지와 이안에게도 등을 돌렸다. 부피가 크다고는 하나 시트다. 남자 혼자서 못 들 정도는 아닐 텐데 저러는 건 정말 무거울까봐 그러는 게 아닐 테지. 빌이나 톰이 장작을 옮길 때도 도와주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안은 시트 한 더미 옮기는 게 무거울까봐 도와준다고? 흥, 얼굴만 좀 잘생겼으면 되는 거냐. 자기도 모르게 삐딱한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생겼다고 이안에게 몰리는 여자들도 싫지만 그런 여자들의 행동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이안의 태도도 싫었다. 그래서 케이트는 다른 여자 하인들에 비해 의식적으로 이안을 피하고 있었다. 분명 내가 자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겠지. 반쯤은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 알바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었다. 훅하고 뜨거운 바람이 방안을 채웠다.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바다에 인접한 이 저택의 여름은 괴롭다. 덥고 눅눅하기 때문이다. 습기제거를 위해 숯을 갖다놔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케이트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재잘거리는 데이지의 목소리와 이안의 발걸음소리가 멀어졌다. 더워. 케이트는 잠옷 위에 가운도 걸치지 않은 채 비틀비틀 방 밖으로 나왔다. 좁은 복도 안에 뜨거운 공기가 밀집되어 있는 게 느껴졌다. 덥기도 하지만 답답하다. 이렇게 더운데 다들 참 잘도 잔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여자 사용인 숙소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숙소의 문을 열 수 있는 건 하녀장 뿐이지만 알게 뭐냐. 그녀가 이 저택에 일하게 된 것도 이럭저럭 이 년이나 되었다. 이정도 융통성 정도는 발휘해도 되겠지. 숙소의 문을 열자 새까만 어둠에 잠식당한 통로가 나왔다. 통로 끝에 계단이 있고 계단 중간에 꽤 넓은 계단참이 있어 그걸 경계로 반대쪽에 남자 사용인 숙소로 통하는 계단이 이어져 있다. 꽤 부유한 데일가의 저택이지만 사용인에게 이런 밤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넉넉하게 초를 지급할 정도로 관대한 편은 아니어서 케이트는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참에 커다란 창이 달려있다. 열이 식을 때까지만 창문을 열고 조금 쉴 생각이었다. “아, 살겠다.” 가운도 없이 잠옷차림에 남자와 여자의 숙소를 나누는 계단참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은 누군가 내려왔다가 그녀를 발견했다간 혼이 날게 분명했다. 그래서 케이트는 최대한 구석에 몸을 만 채 창문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려 애썼다. 저택 뒤로 꽤 넓은 공터가 있기 때문에 그곳에 누군가 있다면 단박에 들킬 테지만 공터의 끝이 절벽이다 보니 이런 밤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들키지 않을 거라는 계산도 어느 정도 있었다. 시계를 확인하지 않았지만 사위가 조용한 걸로 봐서 자정이 지난 것만은 확실했다. 지붕 아래로 쥐가 지나가는지 작은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내일 아침도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해야 할 테니 너무 오래 있지는 말자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멍하니 창밖을 쳐다봤다. 달이 밝아서 평소엔 보이지 않는 곳까지 보이고 있었다. 사위가 조용한 탓에 절벽 아래의 파도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빨리빨리 해.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 케이트는 펄쩍 뛸 뻔했다. 처음엔 집안에서 나는 소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녀는 주위를 살피다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절벽 아래에 뭔가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털썩하고 뭔가 무거운 걸 옮기는 것 같은 소리에 케이트의 목이 움츠려 들었다. 대체 이 밤에 뭘 하는 거지? 처음엔 어부들이 밤낚시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절벽 아래는 폭이 좁아 배가 드나들기 힘들다는 이유로 낚시가 금지되어 있었다. 남작의 영지에서 남작의 명을 어기고 밤낚시를 하는 거라면 여간 배짱이 좋은 게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여기까지 올라온 걸까? 그게 아니면 저택의 사람들? 케이트는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저택의 사용인들이 밤에 잠도 안자고 낚시를 한다고? 그 정도로 몸을 혹사 시켜도 멀쩡할 정도의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자연스럽게 남자 하인 쪽으로 생각이 옮겨갔다. 빌은 무리다. 그 녀석은 허우대만 멀쩡하다는 걸 부엌 하녀들이 속삭이는 걸 들었다. 키가 크긴 하지만 호리호리한 톰은 밤에도 낚시를 할 정도로 몸을 혹사했다간 픽 쓰러질 게 뻔했다. 빈혈기가 있어 보이는 창백한 피부 빛이 그 생각에 박차를 가했다. 그럼 남은 건, 이안. 그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케이트의 목덜미가 쭈뼛했다. 얼음장 같은 차가운 표정. 그가 희미하게라도 웃는 걸 본 적이 있던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군더더기 없는 몸가짐과 일처리. 그리고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태도. 과연 그도 찌르면 피가 날까? 사실 케이트는 그가 잠을 잔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남자들의 자는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은 한 번 도 없지만 어쨌든 그랬다. 하지만 그 남자라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큰 키에 넓은 어깨. 식사 시간에 접시를 나를 때, 혼자 접시 세, 네 개를 들고도 잃지 않던 균형감각. 거기까지 생각하고 케이트는 오후에 있었던 자신의 행동을 약간 반성했다. 다른 사람에게 보다 이안에게 유독 뾰족하게 군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원해서 빨간 머리로 태어난 게 아니듯, 그 남자도 원해서 그런 얼굴로 태어난 건 아닐 테지. 누군가 자신에게 빨간 머리라는 이유로 못되게 군다면 매우 화가 날 것이다. 그러니 이안이 너무 잘생겼다는 이유로 그를 적대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내일 아침에는 적어도 평범하게 대하도록 노력해야지. 흠. 케이트는 고개를 들고 절벽 아래를 살폈다. 더 이상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의 행동이 누군가의 이목을 끌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한동안 쳐다보고 있었지만 아무 변화도 없자 그녀는 흥미를 잃고 창문을 닫았다. 좀 더 가까이 간다면 확인할 수 있을 테지만 그런 수고스러움을 겪고 싶진 않았다. 이런 음모론도 재미있긴 하지만 중요한건 내일 아침도 그녀는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케이트는 이제는 익숙해진 어둠을 가르고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걸쇠를 걸었을 때 아래층에서 누군가가 소리 없이 올라왔다. 간발의 차로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채 지나갔다. ============================ 작품 후기 ============================ 날이 더워졌네요. 소설 속의 배경은 늦봄이나 초여름의 계절입니다. 딱 이맘때긴 한데 이 맘때보다는 한주정도 더 늦겠네요. 더워서 자켓을 벗었더니 추워서 다시 입었습니다. 추운것보단 더운게 낫겠죠 ㅜㅜ 외부에 나와있어서 대댓글은 자정이후에 달겠습니다. 00004 1. 알라나 데일의 저택 =========================================================================                            다음 날 아침, 데일 남작부인을 케이트를 불러 잠시 마을에 다녀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좋겠다. 마을에 내려가다니.” “좋긴 뭐가 좋아. 그래 봤자 심부름인데.” 데이지의 부러움 섞인 목소리에 케이트는 슬쩍 웃어버렸다. 휴가를 받지 않는 이상 사용인들이 마을에 나올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모든 게 저택 안에서 해결되니 집사 같은 경우는 굳이 나갈 필요가 없다는 태도마저 보이고 있다. “무슨 심부름인데?” “주문한 책이 도착했는지 확인해 달라셔.” “우우~ 좋겠다.” 좋긴 뭐가 좋아. 그렇게 말하는 케이트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다. 매일 눈을 뜨면 보이는 다른 얼굴이 아니라 새로운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기분 전환이 된다. “나도 글을 좀 배울걸.” 데이지의 칭얼거림에 케이트는 거울을 보고 모자를 고쳐 쓰며 말했다. “내가 가르쳐 준다니까.” “됐어. 글 같은 거 못 읽고 못 써도 사는 데 지장은 없잖아.” “지장이야 없지만...” “내가 편지 쓸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데이지의 말에 케이트는 입을 다물었다. 저택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용인은 가족이 없다. 다른 저택들은 고아를 고용하는 걸 기피하는 편이지만 데일가는 오히려 고아를 받아주는 편이었다. “좋은 분이지.” 오히려 고아들을 고용해주시다니 말야. 데이지의 말에 케이트는 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한다고 하면 지참금도 많이 주시고~” 그래그래. 그녀는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히는 데이지를 뒤로 하고 일 층으로 내려갔다. 그녀가 뒷문을 열었을 때 이안은 막 담뱃재를 털어내고 있었다. “엇.” 두 사람의 눈동자가 부딪쳤다. 호박색 눈동자가 햇빛에 반사되어 거의 금색으로 보였다.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또 그 기분이 든다. 위험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는 기분. 이 사람의 눈을 오래 보고 있어선 안 돼. 어떤 짐승은 오랫동안 눈을 마주치는 것을 적의로 판단한다. 저택의 여자들이 그의 눈을 오래 보지 못하는 이유를 알겠다.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케이트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려다가 멈췄다. 어젯밤에 분명 친절하게는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는 것처럼은 대하자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는 것처럼 대한다는 게 뭐지? 케이트의 머릿속에 몇 가지 예상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 어머, 이안. 여기서 쉬고 있었군요? 이건 너무 호들갑스럽다. - 쉬는 시간인가 보네요. 보면 모르나. 이건 너무 바보 같다. 그녀가 몇 가지 예상 대화를 떠올리는 사이 이안이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는 재를 털어낸 담배를 잔뜩 미간을 찡그린 채 빨아들였다. 담배의 끝이 새빨갛게 타들어 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미간의 주름을 펼 생각도 하지 않고 연기를 내뿜었다. 후우 하고 입술 사이로 하얀 연기가 내 뿜어져 나와 공기 중에 천천히 흩어졌다. 케이트의 초록색 눈동자가 연기를 따라 움직였다. 이안이 담배를 피웠구나. 그건 몰랐다. 아니, 이게 아니지. 시선이 다시 이안에게 돌아갔지만 인사를 건네기엔 이미 시간이 너무 지나 버렸다. 그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담배를 내려다보더니 다시 입에 물었다. 먹기 싫은 음식을 어쩔 수 없이 먹는 태도다. 젠장. 케이트는 결국 말 걸기를 포기하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평범하게 대하기는 개뿔. 생각해 보니 이안의 태도도 얄밉기 그지없다. 다른 남자 하인이라면, 예를 들어 빌이나 톰이라면 먼저 인사를 건넸을 것이다. 케이트, 어디가? 할 일 없으면 이거 좀 도와줘. 이런 식으로. 그런데 이안은 눈이 마주쳤음에도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했다. 그런 점이 특히 더 싫었지. 케이트는 투덜거리며 저택을 빠져나왔다. 그녀의 뒷모습을 호박색 눈동자가 쫓았다. 이안은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며 케이트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다.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냥 가버렸다. 그녀는 때때로 그런 태도를 보인다. 뭔가 할 말이 있다는 표정. 하지만 입안을 오물거리는 그 단어가 밖으로 나온 적은 한 번도 없다. 여상스럽게 여기던 행동이 계속되자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조심해야겠군. 이안은 반쯤 피운 담배를 바닥에 던졌다. 처음엔 담배를 바닥에 버리는 행위에 거부감이 들었으나 이제는 익숙해졌다. 빛이 뜨거웠다. 다행인 건 저택에서 마을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점이다.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면 마을까지 걸어갈 수 있다. 알라나데일은 그리 크지 않은 영지다. 작지만 부유한 영지. 그것이 최근 알라나데일에 대한 명성이었다. 케이트는 저택을 나간 지 얼마 안 돼 이안과의 기분 나빴던 조우를 잊어버리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걸었다. “아, 데일 남작 부인께서 주문한 책 말이지?” 우체국 직원은 다행히 케이트가 용건을 말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안 왔는데.” “한 달이나 지났는데요?” 남작부인이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네. 알겠습니다. 하고 갈 수는 없다. 케이트의 항의에 직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소포고 편지고 전부 늦어지고 있어. 배송 중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싶은데... 부인께 말씀 좀 잘해주게.” 케이트의 어깨가 늘어졌다. 그런 거라면 더 이상 뭐라고 할 수도 없다. 책이 도착하면 제일 먼저 보낼 테니까. 직원의 신뢰성 없는 약속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작은 우체국을 나섰다. 이것 말고는 그녀가 우체국에서 할 일이 없다. 그녀 역시 데이지처럼 편지를 보낼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지역에서 뭔가를 주문할 정도로 돈이 많은 것도 아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케이트는 상점가를 향해 걸어가며 생각했다. 데이지가 부탁한 게 뭐였지? 입술연지였다. 그리고 앤도 뭘 부탁한다고 했는데. 주머니에서 동전이 짤랑거리는 게 느껴졌다. 부디 약초 상에게 그녀가 앤과 데이지가 부탁했던 화장품을 잘 설명할 수 있기를. 케이트는 필사적으로 앤이 부탁했던 게 뭐였는지 떠올리며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데이지가 부탁한 입술연지는 이름도 해괴망측한 것이었다. 입술연지면 그냥 입술연지면 됐지, 봄을 닮은 딸기색은 대체 무슨 색이란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케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데이지가 이야기한 입술연지의 이름이 기억났다. 남은 건 앤이 이야기한 화장품인데. 이건 아직도 헷갈린다. 토마토 같은 피부였던가 투명한 피부였던가. 여관을 끼고 건물 뒤로 들어서자 뭔지 몰라도 달짝지근한 냄새가 났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찻집에 가서 차 한 잔 마시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여관건물을 향해 힐끔 시선을 던졌을 때였다. 노란색 줄이 두 줄 들어간 파란색 스카프에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스카프였다. 화려해서 기억에 남아있다. 이런 시골 마을에 저런 화려한 스카프를 맨 남자가 또 있다는 건가? 설마 저런 화려한 스카프가 어느새 유행되어버린 건가 싶어 케이트는 상대방의 얼굴을 살폈다. 스카프를 제외한 다른 옷차림은 평범했다. 어두운색의 상의와 검은색 줄이 들어간 바지. 아쉽게도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수사관이 저런 평범한 옷을 입었던가? 그녀가 기억을 더듬으며 여관 뒷마당을 살폈다. 어제 마을을 떠났다고 하지 않았나? 뒷모습만으로는 수사관이라고 확신할 수가 없다. 수사관과 키가 비슷했지만 생각해보니 그 화려한 의상에 시선이 빼앗겨 얼굴이나 태도에 신경을 써 본 적이 없다. 말이라도 하면 목소리로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잠시 그 장소에 서성거려봤지만 아쉽게도 남자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닌가? 케이트는 고개를 갸웃하고 약초 상을 찾아 걸었다. 어쩌면 그녀가 착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저 화려한 스카프가 최근에 유행한 것일 수도 있고, 수사관의 스카프를 본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 같은 걸 산 것일 수도 있다. “입술연지랑 분 사러왔는데요.” “어떤 거?” 제길. 약초 상의 질문에 케이트는 혀를 찼다. 수사관과 닮은 남자를 보는 바람에 기껏 기억한 이름을 잊어버렸다. 봄비 내리는 입술연지였나? 통통한 피부색? 어버버 거리는 케이트에게 약초 상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새로 나온 걸 보여줘 볼까?” ============================ 작품 후기 ============================ 좋은 하루 되셨나요? 전 중이염인지 귀가 지끈지끈 아프네요 ㅠㅠㅠ 좀만 참아보고 내일도 이러면 병원가야겠습니다 ㅠㅠㅠ 00005 2. 수상한 하인 =========================================================================                            “케이트, 이거 아니잖아.” 앤이 히잉하고 울상지으며 말했다. 케이트는 멋쩍은 표정으로 그녀의 손에 든 화장품을 낚아챘다. “아, 역시.” “역시? 지금 역시라고 했어?” “미안. 다음에 바꿔올게.” “역시 기억 못한 거지?” “미안, 미안. 통통한 피부색이라니까 어려 보이는 피부색 말하는 거냐고 이걸 권하더라고.” “투명한 피부색이 어떻게 통통한 피부색이 되는 건데?” 할 말 없다. 앤의 힐난에 케이트는 입을 다물었다. 통통한 피부색이 아니라 투명한 피부색이었구나. 토마토 같은 피부색이라고 말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앤! 그만 떠들고 움직여!” 주방장의 외침에 앤이 케이트의 손을 잡고 간곡히 부탁했다. “투명한! 피부색이야. 알았지? 꼭 바꿔줘야 해?” “앤! 여기 정신없는 거 안 보여?” 알았어. 알았으니까 얼른 가. 케이트는 그녀를 주방으로 들여보내고 올라왔다. 남작 부인에게 책이 도착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고 다시 일로 복귀해야 한다. 데이지의 입술연지는 같이 사용하는 방에 두면 되겠지. “배송이 미뤄지고 있다고?” 예상대로 남작부인의 얼굴에 실망이 차올랐다. 케이트는 죄책감이 들어 상냥하게 말했다. “오는 즉시 제일 먼저 알려달라고 신신당부하고 왔어요.” “고마워. 케이트.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녀의 말에 남작부인의 몸종 로더 부인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케이트를 쳐다봤다. 이크. 그녀는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흥. 로더 부인이 고개를 돌렸지만 남작부인은 두 사람의 신경전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나른하다는 표정으로 가보라고 손짓했다. 로더 부인의 못마땅한 시선이 따라오는 게 느껴진다. 하아. 등뒤로 문을 닫고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택에서 일한 지 이 년. 남작부인의 몸종은 케이트가 자신의 자리를 가로챌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때때로 그녀를 적대하는 태도를 취했다. 저택의 사용인 중 원활하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여자 하인은 하녀 장을 제외하면 그녀밖에 없으니 그 생각도 이해는 한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지 이런 식으로 사사건건 그녀를 견제한다면 피곤한 것만은 어쩔 수 없다. 그녀가 어깨를 늘어트린 채 발걸음을 내디뎠을 때 맞은편 방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소리 없이 나왔다. 케이트가 상대방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 상대방은 이미 멈춰선 다음이었다. “엇.” 이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마치 그녀가 복도에 장식한 조각상이라도 된다는 듯 한 번 쳐다보더니 무심하게 지나치려 했다. 문제는 케이트는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로더 부인의 견제를 털어내기 위해 생각을 바꿀 여지가 필요했다. “왜 거기서 나와요?” 이안의 발걸음이 멈췄다. 케이트는 그가 나온 방과 그의 뒷모습을 번갈아 가며 보며 다시 물었다. “거긴 마님 침실이잖아요. 왜 거기서 나와요?” 슥하고 이안의 얼굴이 돌아가는 게 보였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반듯한 뒷모습에 틀어진 옆얼굴이 마치 조각처럼 보였다. “...이안?” “아무것도.”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목소리였구나. 생각보다 낮았다.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목소리라도 이상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사람이란 너무 잘나면 반발심이 생기는 법이다. 그때 이안이 몸을 돌렸다. 할 수 없이 그녀는 한발 물러섰다. 너무 가까워서 위압적으로 느껴졌던 탓이다. “잘못 들어갔어.” “어딜 가려고 했는데요?” 그가 입을 다물었고 케이트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눈빛에 이안이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주인님 침실.” 케이트는 잠시 의심스럽다는 듯 그를 올려다봤다.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무심하게 그녀의 시선을 넘겼다. 그 태도에 케이트는 자신이 너무 예민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길 정도는 잊어버릴 수도 있지. 케이트는 좋은 쪽으로 생각했다. 저택에 들어온 지 고작 보름밖에 되지 않은 남자다. 어쩐지 상대가 이안이 되면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지는 것 같다. “주인님 침실은 반대편이예요.” 이안은 몸을 돌리는 그녀를 잠시 쳐다봤다. 케이트는 이미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따라오라는 말인가? 그는 그녀의 태도가 익숙지 않아 잠시 머뭇거렸다. “주인님 침실 가려는 거 아니었어요?” 케이트가 몸을 돌려 물었다. 이안은 음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다른 사람들 대하듯 평범하게. 어젯밤의 다짐이 다시 떠올랐다. 예상치 못한 기회가 왔다. 이번에야말로! 하고 케이트는 입을 열었다. “여기 오기 전에 어디서 왔어요?” 약간 뜸을 들인 뒤 케이트는 이안을 올려다봤다. 그의 눈동자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다시 위로 올라갔다. 어딜 보는 걸까. 키가 큰 탓에 그의 시선이 어디쯤 머무는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이안?” “어디 갔다 왔지?” “네?” “밖에 나갔다 왔잖아. 어딜 갔다 왔지?” 말을 돌리는 건가? 케이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나갔다가 온 게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알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알아도 상관은 없지만. “우체국이요. 마님께서 주문한 책이 도착했는지 확인하느라고요.” “그걸 네가 다녀왔다고?” 이안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간 게 보였다. 어라. 케이트는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닫혔다. 그리고 다시 열렸다. “음, 가끔 주문한 책과는 다른 책이 도착할 때가 있거든요.” 이안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야. 그의 어깨에 코가 부딪쳤다. 단단하기도 하자. 케이트는 코를 문질렀다. 분명 빨개졌을 것이다. “글을 읽을 수 있나?” 아, 그것 때문이었군. 그녀는 코를 문지르며 우물우물 대답했다. “쓸 줄도 아는 걸요.” “이 저택의 하녀들은 다들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건가?” “설마요.” 케이트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랑 집사님하고 하녀 장님만요.” “누가 가르쳐 준거지?” “엄마가요.” “하녀장이 되기 위해 배운 건 아니고?” “하녀장이요?” 흠. 케이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녀 장이 되고 싶은 건가? 하녀 장이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럼 하녀가 된 이유가 뭐야?” 이안은 약간 삐딱하게 물었다. “다른 여자들처럼 지참금을 바라는 건가?” 말 한 번 예쁘게 하시네. 케이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쎄요, 아직까진 그다지 결혼생각이 없어서.” “결혼생각이 없다고?” “뭐, 혼자 일해서 먹고살 만하기도 하고요. 일하는 거 싫어하지도 않거든요.” “평생 남의 집이나 청소하며 살겠다?” 허. 저도 모르게 케이트의 입이 벌어졌다. 이 남잔 대체 뭘 먹고 자랐길래 이따위로 삐뚤어 진 거지? “그러는 당신은 남의 짐을 드는 신세에서 벗어날 원대한 계획이라도 있으신가 보죠?” 이번에는 이안의 입이 벌어졌다. 아주 조금이긴 하지만. 한 방 먹였다는 기분에 케이트는 우쭐해진 기분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찾으시던 주인님의 침실입니다. 들어가시죠.” 명백한 비꼼에 이안은 그녀를 내려다봤다. 당돌하다는 건 알았지만 한 방 먹을 줄은 몰랐다. 그가 뭐라 하기 전에 케이트는 등을 돌려 떠나버렸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하녀라니. 글을 읽고 쓸 줄 알면서 고작 하녀를 한다고? 물론 하녀가 될 수 있다. 글을 읽고 쓸 줄 알면서 하녀를 한다는 건 하녀 장이나 주인마님의 몸종이 돼서 더 많은 지참금을 받아 결혼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케이트는 그 두 가지 중 어느 쪽도 아니라고 했다. 케이트가 그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 것처럼 그에게도 그녀에 대한 의구심이 자라났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이 저택의 구조 따위는 들어온 지 한 시간 만에 외워버렸다. 방을 잘못 찾을 리 없다. 생각해보면 다른 하녀들은 그가 어느 방에서 나오든지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하녀장만 조심한다면 거길 왜 들어갔다 나오냐는 질문은 지금까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다시 한 번 이안은 복도 끝으로 작아진 케이트의 뒷모습을 돌아봤다. 저 여자, 대체 뭐지? 그는 케이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천천히 일 층으로 내려갔다. 곧 있으면 점심시간이다. 식탁의 테이블을 정리하고 식기류에 문제없는지 확인 후 식사시간이 시작되면 음식을 확인하고 부엌에서 식당까지 날라야 한다. 때때로 부엌 하녀가 구운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혼동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돼지고기 위해 뿌려야 하는 꿀을 언급하는 걸 잊지 않는 다면. 그리고... 이안은 앤의 실수를 차례로 떠올리다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이안에게 넋을 잃는 바람에 실수가 잦은 것이지만 그로서는 그저 허둥거리는 정신없는 계집애일 뿐이다. 오늘 밤은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게 다행으로 여겨졌다. 아무리 그라 해도 밤낮으로 움직이는 건 지친다. ============================ 작품 후기 ============================ 이비인후과에 다녀왔습니다. 다행이 중이염은 아니라고 하네요. 근데 바이러스라 좀만 늦게왔으면 안면마비가 왔을 거랍니다. 허허허.... 여러분, 아프면 재깍재깍 병원 갑시다. 00006 2. 수상한 하인 =========================================================================                            데일 남작 내외에게는 자식이 셋 있다. 위로 딸 둘은 재작년으로 전부 시집갔고 아래의 아들은 저택에서 같이 살고 있다. 그 이야기는 케이트가 그를 볼 일이 많다는 말이다. 바로 지금처럼. “안녕, 캣.” 누가 캣이냐고 대꾸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케이트는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냈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데일가의 막내 아들 마이크는 점심시간이 지난 이제야 일어났는지 옷을 갖춰 입고 소파에 길게 기대있었다. 아침식사 뿐 아니라 점심식사에도 그의 음식은 식당에 내가지 않았으니 아픈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기는 했지만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소파에 기대있는 걸보니 단순히 어제 저녁 어느 저택의 파티에라도 초대받아 신나게 놀았던 모양이다. 케이트는 침대의 시트를 걷어내며 마이크의 몰골을 힐끔 살폈다. 옷만 갖춰 입었을 뿐 머리는 엉망이고 얼굴은 피곤으로 찌들어 있었다. 방안을 가득 채운 진한 커피향도 확실히 그의 숙취를 온몸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저렇게 마시고도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대단하게 여겨질 정도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저렇게 취했는데도 그를 돌려보냈다는 이야기다. 어느 저택의 파티였던 걸까. 문득 마이크의 평판이 떠올라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를 살폈다. 엉망인 얼굴이 아직 세수를 안 한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누군가 세면용품을 들고 올라올 것이라는 예측이 들자 그녀는 약간 긴장을 풀었다. “우리 집에서 일한지 얼마나 됐지?” 약간 컬컬한 목소리로 마이크가 입을 열었다. 이건 무슨 꿍꿍이지? 케이트는 걷어낸 시트를 끌어안고 대답했다. “이제 이 년이 좀 넘었습니다.” “흠.” 마이크가 까칠까칠한 턱을 쓰다듬었다. 귀하게 자란 티가 나는 도련님이다. 제법 말쑥하게 생긴데다가 옷도 꽤 잘 입는 편이어서 이안이 오기 전까지는 이 근방 최고의 미남으로 통했다. 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여자들에게 서글서글하게 대하곤 했다. 어디까지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슬슬 결혼을 생각해야 하지 않아?” 이거냐. 케이트는 약간 짜증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제 원대한 계획을 가진 누구씨도 물어보더니 이번엔 일하는 저택의 아들까지. 왜 다들 나한테 이러는 걸까. “지금은 없습니다.” “그래? 다른 하녀들은 다들 결혼하고 싶어 하던데.” 그야... 케이트는 입을 열려다 멈췄다. 이 저택의 사용인 중 고아의 비중은 높다. 어린 시절부터 외롭게 자라다보면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가 더 강해지는 모양이다. “전 아직 일하는 게 좋아서요.” “그래?” 흐응하고 나른한 표정을 짓는 게 지어미와 닮았다. 남작부인도 저런 식으로 소파에 길게 기대서 뭐든 귀찮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하지만 다른 점은 마이크는 다음순간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그는 한걸음 만에 케이트에게 다가와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깝게 붙었다. 두 사람 사이를 막는 건 그녀가 끌어안은 시트밖에 없다.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시트를 꽉 끌어안았다. “그럼 즐기는 건 어때?” 뭐? 이건 무슨 개소리야? 케이트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때 마이크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녀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뒤통수에 닿으려는 찰나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야?” 이안이 세면용품이 든 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살았다. 케이트로서는 만세라도 부르짖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마이크는 달랐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안을 노려봤다. “넌 눈치도 없어?” 아니야, 눈치 있게 잘 나타나줬어. 케이트가 입술을 벙긋벙긋 거렸다. 도와줘! 누가 보더라도 귀족에게 희롱당하는 가련한 하녀의 모습이었다. 케이트의 상태를 살피고 괜찮냐고 물어보지는 않더라도 당황할 법한 상황이다. 그런데 이안은 그대로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뭐? 케이트의 입이 딱 벌어졌다. 야, 임마!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호통이 목 안에서 맴돌았다. 센스 있게도 이안은 문까지 닫아주었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그녀가 어이없어 어버버 거리는 사이 마이크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눈치는 있는 녀석이군.” 아니, 없어. 절대 없어. 확실히, 완벽하게 눈치라곤 눈꼽 만큼도 없는 녀석이다. 마이크가 아니라 이안에게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케이트는 고개를 들고 마이크를 똑바로 쳐다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일이 많아서 그런데, 시키실 일이 없다면 가 봐도 될까요?” 이제부터 즐거운 시간을 가질 예정인데 운운하려던 마이크는 케이트의 눈동자에 활활 타오르는 살기를 보고 움찔했다. 아직까지 머릿속을 채우던 취기가 사라지는 게 느껴지자 그는 우물우물 몸을 틀어 그녀가 나갈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럼, 실례했습니다.” 자기 몸의 반만 한 시트를 끌어안은 채 케이트는 꾸벅 인사까지 하고 방 밖으로 나갔다. 달칵하고 문이 닫히자 마이크는 그대로 침대에 주저앉아 머리를 쓸어 넘겼다. “뭐였지?” 분기탱천한 케이트는 단숨에 일층까지 뛰어 내려갔다. 누가 뛰는 거니? 뒤에서 하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안!” 분노에 찬 케이트의 외침을 좁은 복도를 갈랐다. 지나가던 톰이 깜짝 놀라 돌아볼 정도였다. 정작 분노를 정면으로 받은 당사자인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뭐지?” 그의 뻔뻔한 얼굴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케이트는 끌어 안은 시트를 그에게 던져버렸다. 이안은 가볍게 시트를 받아들고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또 들어 달라는 건가?” “그게 아니라!” 케이트, 뭐하는 거야? 데이지가 부랴부랴 달려오더니 이안의 품에서 시트를 받아들었다. 그녀는 견습 하녀를 불러 시트를 넘겼다. “이것도 같이 빨아.” 견습 하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집안의 모든 시트를 여름용으로 바꾸려다 보니 오늘 하루만 빨래할 것들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거기서 그냥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거기라니?” “그...!” 도련님 방에서요. 그렇게 말하려던 케이트는 주변의 눈이 많은 것을 발견했다. 하녀 장은 물론 수습하녀에 요리장. 앤과 데이지에다 톰까지 쳐다보고 있었다. “볼 일들 보세요!” 결국 케이트는 이안의 손을 잡고 청소도구를 보관하는 작은 공간으로 끌고 갔다. 청소도구로 가득한 좁은 공간이 두 사람이 들어가니 꽉 낄 정도로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안은 어깨 위로 먼지가 푸수수 떨어지는 게 기분 나쁜지 인상을 쓰며 몸을 틀었다. “잠깐, 그렇게 움직이지 말라고요.” “네가 끌고 온 거잖나.” “금방 끝나니까 좀 가만히 있어 봐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안의 어깨에 먼지떨이개가 떨어졌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지는 걸 보자 케이트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움직이지 말랬죠.” “그걸 알려주려고 데려 온 건가?” 그건 아니다. 케이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짜증 섞인 한숨이 이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희미하게 숨결에 담배냄새가 묻어 나왔다. “빨리 끝내.” 불평을 말해야 하는 쪽은 이쪽이다. 케이트는 허리 위에 손을 얹으려다 팔꿈치로 그의 허리를 찌르고 당황해서 멈췄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이안의 허리가 숙여졌다. 그는 찔린 부위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얼굴위로 인상을 썼다. “죽일 작정이라면 좀 넓은 공간을 선택해줬으면 좋겠는데.” “나도 이런 곳에서 누군가를 죽일 생각은 없다고요.” “그럼 뭐야?” “아까 말예요.” “아까 뭐?” “모른 척 할거예요?” 아하. 이안이 알았다는 듯 허리를 펴고 그녀를 내려다 봤다. 덕분에 높은 선반에 삐죽 나오게 올려져있던 왁스 통에 뒤통수가 부딪쳤다. 빌어먹을. 그 다음에 뭔가 거친 욕이 흘러나왔지만 케이트는 못들은 척 해주기로 했다. “내가 거기서 뭘 어쨌어야 한다는 거지?” “그렇다고 그렇게 재빨리 도망칠 건 없잖아요. 엄청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곤란한 상황인지 아닌지 내가 알게 뭐야. 둘이 밀회라도 나누는 걸 수도 있잖아.” 밀... 어이가 없어서 케이트의 입이 벌어졌다. 먼지가 떨어지면 확실하게 들어가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이안은 빈정거렸다. “게다가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혼자서 충분히 빠져나왔잖아. 거기서 굳이 내가 나서서 미움 받을 필요는 없지 않아?”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너무 정론이라 할 말이 없다. 그의 말 대로다. 거기서 그가 나섰다면 마이크의 분노는 이안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 혼자서도 충분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러니 끼어들지 않는다는 이안의 선택이 맞았다. 얄밉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재빨리 자리를 피할 정도로 그렇게 매정하게 굴건 뭐란 말인가. 그런 식으로 따지면 어제 마을에 나갔을 때 케이트가 앤과 데이지의 화장품을 사다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굳이 빨래한 뒤 남자사용인들의 옷을 다려줄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고작해야 열네 명의 사용인이 있는 곳이니 가능하면 너무 딱딱하게 내 일 네 일 구분하지 말고 서로 돌보며 지내자는 게 케이트의 지론이었다. “그렇게 나오겠다는 거예요?” 케이트의 말에 이안이 흠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어깨를 펴고 그녀를 내려다 봤다. 좁은 공간에 딱 붙어있는 상황에서 이안의 키가 의식되자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려다 더이상 공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벽에 걸린 빗자루에 호되게 부딪쳤다. 아야야. 그녀가 뒤통수를 쓰다듬는 순간 이안의 입가에 미소 비스무레한 것이 스쳐지나갔다. 너무 찰나의 순간이라 확신하긴 어려웠다. 그는 문을 열고 좁은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다리가 스치면서 케이트의 몸이 움찔하고 굳는 게 느껴졌다. 약간 심술이 나서 이안은 몸을 돌려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는 그런 상황이 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기 보다는 그런 상황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기 전에 케이트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눈치 챘다. 남자와 둘이 좁은 공간에 스스로를 가두는 행위를 비꼬는 것이다. 젠장. 한 방 먹었네. 그녀는 손에 얼굴을 묻으며 투덜거렸다. 생각보다 뒤끝이 긴 남자인 모양이다. ============================ 작품 후기 ============================ 음, 나중에 아마 저택과 마을의 도면이라든지, 등장인물의 설명같은 걸 제대로 올릴것 같긴한데 일단 저택에 사는 사람이라도 미리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 후기에 적습니다. 간단하게...적고싶은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저택의 주인은 현재 총 세명입니다. 데일 남작 내외와 아들인 마이크. 위로 딸 둘은 본문에 나와있다 시피 삼년 전 첫째딸이, 이년전 둘째딸이 시집가면서 전부 나갔습니다. 저택의 사용인은 열 네명. 남자 하인과 여자하인이 있습니다. 원래 하인의 용어는 영어기 때문에 한국어 중 걸맞다 싶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저택에 상주하는 남자사용인 집사. 빌 : 데일 남작의 종자 (Valet) 톰 : 하인 (footman) 이안 : 하인 (footman) 마부 와 마굿간 지기는 별채에 삽니다. 저택에 상주하는 여자사용인 하녀장 (Housekeeper) 로더부인 : 데일남작부인의 몸종 (Lady‘s maid) 케이트 : 하녀 (House maid) 데이지 : 하녀 (House maid) 앤 : 부엌하녀 (Kitchen maid) 요리장 그리고 견습 하녀가 두명 있습니다. 그 밖에 나오지는 않았는데 저택에 손님이 두명 정도 있고요. 아, 돌아간 수사관 제외한 숫자입니다. 00007 2. 수상한 하인 =========================================================================                            더워. 케이트는 뒤척거리며 중얼거렸다. 사용인들의 침구는 바꾸지 않은 탓에 아직도 겨울용 이불을 덮고 있다. 그게 오늘따라 더 무겁고 눅눅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같은 방을 사용하는 데이지를 살폈다. 데이지는 이불을 전부 걷어차 낸 것도 모자라서 배를 내밀고 자고 있었다. 배탈 나겠다. 케이트는 그녀의 배까지만 이불을 끌어 올려준 뒤 조심스럽게 방 밖으로 나갔다. 초하나 없이 소리 나지 않도록 복도를 걸어 여자 기숙사 밖으로 나가는 일은 생각보다 수월한 일이다. 복도 자체가 일자로 되어 있기도 했지만 그녀가 이년이나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케이트는 이번에도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 커다란 창문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미리 기름을 칠해둔 덕에 창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작은 틈새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습기와 함께 들어왔다. “살겠다.” 아무래도 조만간 비가 내릴 모양이다. 뒤에 절벽이 있는 탓에 공기가 쉽게 눅눅해 지곤 한다. 그녀는 혹시라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최대한 몸을 말았다.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들렸다. “여기서 뭐 해?” 뒤에서 누군가가 낮은 소리로 소근 거렸다.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순간 상대방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쉿, 쉿. 케이트. 나야, 나.” 앤이었다. 뭐야, 젠장. 케이트는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샌가 기숙사를 나온 앤이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 “그럼 이 상황에서 안 놀라고 배겨?” 귀신이라도 나온 줄 알았다고 투덜거리는 케이트 옆에 앤은 작게 키득거리며 주저앉았다. 그녀 역시 시원한 바닥이 기분 좋은지 감탄을 내뱉더니 슬리퍼마저 벗어버렸다. “그러다가 걸리면 혼날 텐데?” 케이트의 조언에 앤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너도 같이 혼날 텐데 뭐.” 맞는 말이다. 케이트는 헛웃음을 지으며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시원한 바람이 한 줄기 살랑 흘러들어왔다. 그녀는 공기를 한껏 마시고 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나왔어?” “더워서 뒤척이는 데 누가 복도를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아하. 케이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녀가 더워서 나왔으니 남도 그러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희미하게 창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달빛이 앤의 금발 머리는 비추고 있었다. 주근깨가 가득한 그녀의 얼굴도 이 순간만큼은 장난기 가득한 요정으로 보였다. “너도 더워서 나온 거?” “음.” 흐응. 앤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케이트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포갠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하얀 손가락에 반창고가 붙어있었다. 부엌 하녀의 일은 고되다. 케이트라고 더 쉽기야 하겠냐 만은 저택의 다른 사용인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식재료를 다듬고 뜨거운 화로 앞에서 요리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조금만 있다가 들어가자.” 케이트의 말에 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물었다. “너 여기 들어 온지 이 년째인가?” 점심때 마이크의 방에서 일어난 일이 생각나 케이트는 잠시 욱했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군.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음. 일한 건 이년 째.” “나랑 비슷하네.” “너도 이년 째였나?” “난 거의 삼 년 다되어 가.” 그랬던가? 데이지가 이제 일 년. 이 저택에서 수습 하녀들은 삼 개월이 지나야 배정을 받는다. 그럼 여자 사용인 중 가장 오래된 건 로더부인과 하녀 장을 제외하면 앤이라는 말이 된다. “왜 다들 그렇게 빨리 떠나는 걸까.” 앤의 혼잣말에 케이트 역시 생각에 잠겼다. 이 저택의 사용인들은 이상할 정도로 빨리 그만둔다. 고아라 어쩔 수 없는 모양이라고 로더 부인이 심술궂게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올해만 해도 남자 하인이 두 명이나 그만뒀다. 그것도 일주일 텀을 두고. “너는 말 없이 그만두면 안돼.” 그 말에 케이트는 피식 웃었다. “내가 말없이 그만둘 일이 뭐가 있어?” “왜 없어? 전에 그만둔 애는 사랑의 도피를 했잖아. 너라고 안 그럴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니?” “사랑의 도피는 무슨.” 말도 안 된다. 케이트는 손사래를 치며 웃는데 앤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진짜로. 지금 좋아하는 남자 없어?” “없는데.” “어째서?” 아니, 어째서냐고 해도...그녀는 앤에게 한쪽 손을 잡힌 채 그녀가 만날 수 있는 남자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집사는 거의 할아버지뻘이다. 마부는 결혼해서 네 살짜리 딸도 있지. “괜찮은 남자가 없어서?” 케이트의 자신 없는 대답에 앤이 그럴 리 없다는 듯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이안있잖아! 이안!” “쉿! 앤, 조용히 해.” 누가 들을세라 케이트는 화들짝 놀라 앤의 입을 막았다. 두 사람은 잠시 그 자세로 귀를 쫑긋 세웠다. 조금 전의 소란으로 누군가 깨지나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다행히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붕 아래에서 쥐가 달려가는 소리가 들리자 앤과 케이트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정말.”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에헤헤 하고 웃는 앤의 얼굴에 케이트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어쨌거나 난 사랑의 도피 같은 건 절대 할 생각 없으니 걱정 마셔.” “왜? 이안이래도?” 그놈의 이안 소리 좀 그만해라. 어이가 없어서 케이트는 앤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안이 무슨 엄청난 사람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래 봤자 같은 하인인데 도피할 건 또 뭐람. 하지만 그녀는 앤을 비롯한 저택 내 여자들의 이안에 대한 선망을 알고 있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봤자 하인. 이라는 말은 그녀들에겐 통하지 않는다. 이안이 처음 저택에 들어오던 날도 그녀는 그래 봤자 하인이잖아? 라고 했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소리를 듣지 않았던가. 어느 귀족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둥, 왕의 숨겨진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둥 헛소리가 많았다. 단순히 잘생겼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배경을 상상할 수 있다니 여자아이들의 상상력이란 대단하다고 로더 부인이 심술궂게 말하는 걸 들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거기에 동감했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고 말을 돌렸다. “우리 부모님 말야. 네가 말하는 그 ‘사랑의 도피’를 하셨거든.” “뭐어?” 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서 집안에 연 끊겼대. 덕분에 엄마 돌아가시고 날 돌봐줄 가족이 있어도 찾아갈 수 없게 된 거지.” “두 분 다?” “으음.” 이 이야기는 남작 부인 말고는 모르는 이야기다. 하지만 케이트는 밤이기도 하고 달빛의 마법에라도 취한 것처럼 술술 이야기를 흘렸다. “아버지는 몰라. 떠돌이 화가였대. 그러니 엄마 집안에서 반대했던 거고. 두 분이 그렇게 사랑의 도피를 하셔서 내가 태어난 거지.” 그녀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내가 왜 사랑의 도피에 관심이 없는지 알겠지?” 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짓는 케이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저택의 사용인들은 대부분 고아다. 거기에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차피 거기서 거기니까. 평소 똑 부러진다는 평을 받고 있는 케이트였다. 로더 부인이 없었다면 그녀가 남작부인의 몸종이 되지 않았겠냐는 말도 공공연히 오갔을 정도다. 그래서 다들 그녀가 고아라는 건 알아도 이런 사정이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다. 가라앉은 분위기에 케이트가 분위기를 바꾸며 말했다. “그래서, 넌 사랑의 도피라도 하려고?” 그녀의 말에 앤의 입가가 올라갔다. “안되지. 그럼 지참금을 못 받잖아.” 그 대답에 케이트의 입가도 벌어졌다. 두 사람은 잠시 킬킬대며 앉아있었다. “이안은...” 앤이 입을 열었을 때였다.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하는 거야! 멍청한 녀석!” 들켰나?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곧바로 같은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똑바로 해.” 저택 안에서 들린 목소리가 아니었다. 뭐지? 두 사람은 살그머니 고개를 들어 창밖을 살폈다. 케이트의 눈에 절벽 아래에 뭔가가 움직였다가 사라지는 게 보였다. “저기...” “어디?” 다시 한 번 그 장소를 지목하려 하자 이번에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잘못 본 건가? 케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내렸다. “사라졌어.” “뭐였을까?” “글쎄.” “밤낚시라도 나온 걸까?” 저긴 낚시가 금지되어 있는 곳이잖아. 그렇게 말하려다가 케이트는 이상한 기분이 들이 입을 다물었다. 며칠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전 날 수사관이 떠났다. 마을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조사하기 위해 왔던 수사관이 떠나자마자 밤에 몰래 뭔가를 하는 장면을 본다는 게 우연일까? 수사관이 조사하려고 한 게 뭐였지? 이런 이야기를 앤에게 해도 괜찮은 걸까? 그녀가 머뭇거리는 것을 자신의 말에 동의해서라고 생각했는지 앤이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며 말했다. “그만 들어가자.” “어, 그래.” 케이트는 찝찝한 기분을 끌어안은 채 앤을 따라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 작품 후기 ============================ 어쩐지 이제와서 깨달았는데... 조아라는 후기도 그림삽입이 안되는 군요? ...와, 왜 난 그걸 이제 알았지? 덧. 저 카네이션 들어올때마다 클릭하게되는거... 저만 그런거 아니죠? 00008 2. 수상한 하인 =========================================================================                            다음날은 케이트의 예감에 맞게 비가 내렸다. 후덥지근한 날씨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견습 하녀들은 걸레를 들고 다니며 끊임없이 복도와 홀을 닦아내야했다. 혹시라도 누군가 미끄러져 넘어지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빨래 다시 해야 하잖아.” 데이지가 눅눅하게 마르다 만 시트를 걷어내며 투덜거렸다. “네가 한 빨래도 아니잖아.” 가벼운 힐난에 그녀가 히쭉 웃어보였다. “두 번째는 우리도 해야 할 거 아냐.” 그거라면 케이트도 할 말이 없다. 빨래라는 건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다. 비누를 녹인 물에 빨래거리를 넣고 불린 뒤 몽둥이로 두드린다. 그게 옷이라면 그 정도로 충분하지만 이불이 되면 두드리는 걸로는 언제가 되도 끝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비가 그치면 채 마르지 않은 지금의 이불빨래부터 시작해서 곧 갈아야 할 사용인의 이불빨래까지 세탁해야 할 것들이 두 배가 되어버린다. 결국 견습 하녀 둘이서 처리하기 어려울 테니 대부분의 사용인이 전부 달라붙게 되겠지. 그것도 나쁘지 않다. 케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부지런히 빨래를 모았다. 뭐든지 여러 명이 모여서 한다면 즐거워진다. “집사님 어디계신지 알아?”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빌이 물었다. 밖에서 빨래 걷어오는 우리가 그걸 어떻게 알아? 데이지가 투덜거렸다. “집사님은 왜?” 케이트의 물음에 빌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비가 새.” “에엑?” 신음과 같은 비명을 내뱉고 데이지는 시트도 내버린 채 위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지붕 바로 아래 있는 게 사용인의 방이니 그럴 만도 하다. “누가 뛰는 거니?” 복도 건너편에서 하녀 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이지, 혼나겠다. 케이트는 남의 일처럼 생각하며 데이지가 떨어트린 시트를 주워 들고 세탁실로 들어갔다. 일단 이곳에 두고 비가 그치면 다함께 빨아서 말려야 할 것이다. 그녀가 하녀 장에게 시트를 전부 걷어서 세탁실에 뒀노라고 고하는 사이 우당탕거리며 데이지가 뛰어 내려왔다. “완전 물바다야!” “뭐?” 놀란 건 케이트가 아니라 하녀 장이었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걷어 붇치고 달려 올라갔다. 어휴. 케이트 역시 두 사람을 따라 올라갔다. 그사이에 빗줄기가 거세진 모양인지 무서운 기세로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아악! 누군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데이지다. 케이트는 그녀를 살짝 밀고 함께 쓰는 자신의 방을 들여다봤다. “어머, 어머.” 팔자 좋게도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하녀 장은 남의 일인 것처럼 호들갑떨며 서 있었다. “세상에, 이거 한동안 여기선 못자겠네.” 천장 어딘가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케이트는 그 광경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아, 진짜 너무했다. 지난번에 지붕수리한 사람 누구야?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침대는 물론 바닥까지 흥건했다. 이 침대에서 자는 건 틀렸군. 하녀 장의 말이 맞다며 케이트의 머리 한구석에서 동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말곤 피해 없니?” “저...” 견습 하녀 하나가 몸을 내밀었다. “저희 쪽 방도...” 세상에. 하녀 장의 한탄이 마치 자신의 입에서 나온 소리 같아 케이트는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올해 들어 첫 비가 이렇게 엄청나게 올 줄은 몰랐다. 일단 안 쓰는 방이 한 개 남았으니 자신들과 견습 하녀들 중 한쪽이 거기서 자고... 그 다음은 어떻게 하지? “어떻게 된 거지?” 드디어 모습을 나타낸 집사는 불그스름한 얼굴을 하고 숨결에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어딘가에 틀어박혀서 술을 마시고 있었군. 재고조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그가 저택의 술을 꽤 많이 마신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여자 쪽은 이 인실은 전부 못쓰겠네요. 세상에. 남자쪽 은 어때요?” 하나 남은 빈 방의 상태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데이지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바람에 케이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 저택에 그녀들이 잘 방 하나 없을 리 없다. 집사를 선두로 남자 숙사의 문이 열렸다. 부랴부랴 달려온 톰이 방 상태를 확인했다. “남자 쪽 피해는 이 인실 하나뿐입니다.” 남자들은 전원 일 인실을 쓰고 있었다. 케이트는 그때 그 사실을 처음 알았다. 여자도 남자도 일 인실 세 개에 이 인실 세 개니 당연한 사실이긴 하다. 남자사용인의 숙사에 묵는 건 빌과 톰, 이안뿐이었으니. “그럼 남자 쪽 이 인실 두개는 쓸 수 있다는 거군요.” 설마.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하녀장과 집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더니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할 수 없죠. 오늘 밤은 이쪽 여자애들 네 명을 거기서 재우죠.” “꺅.” “에엑?” 두개의 입에서 두개의 다른 반응이 터져 나왔다. 볼 것도 없이 좋아라하는 건 데이지고 대놓고 싫어하는 건 케이트였다. “너희들은 잘 시간이 되면 복도를 어슬렁거리지 말고 꼭 안에서 문을 잠궈 둬야 한다. 알겠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여길 이용하는 거지만 여자애들을 남자숙사에 재운다는 건 영 찜찜한 일이니까 말야.” 그렇게 찜찜하다면 딴 데서 자게해달라고. 케이트의 소리 없는 항의는 그 조용함만큼이나 묻혀 버렸다. 데이지는 울 것 같은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좋아서 팔짝팔짝 뛰고 있었다. “일단 지붕은 누가 올라가서 더 이상 비가 새지 않게 막아두렴. 빌?” “전 허리가 안 좋아서.” 이안 옆방에서 잘 수 있을지도 몰라. 데이지가 즐겁다는 듯 귓가에 속삭였기 때문에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건 소름끼치는 거지 낭만적인 게 아니라고 한마디 하는데 하녀 장이 그 이름을 불렀다. “그럼, 이안?”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하녀 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부산스럽던 주변이 가라앉았다. 태도 하나만으로 주변을 조용하게 만들 수 있다니 저것도 대단한 능력이라고 케이트는 생각했다. “지붕 수리해 본 적 있니?” “없습니다.” “지붕에 올라가 본 적은?” 드물게도 이안이 머뭇거렸다. 그는 눈을 한 번 내리깔았다가 다시 하녀 장을 보며 말했다. “올라가죠.” 그건 대답이 아니다. 지붕이 올라가 본적이 있다는 걸까 아니라는 걸까. 그의 대답에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건 케이트뿐인 모양이었다. 하녀 장은 손뼉을 치며 재빨리 지시를 내렸다. “좋아. 그럼 일단 이안은 지붕 위에 올라가서 임시방편 해놓고, 수리공은 비가 그치면 부르는 걸로 하자꾸나. 너희들은 가서 어서 하던 일마치고.” 하아.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고 터덜거리며 아래 층으로 내려갔다. 어쩐지 어제 비가 내릴 것 같더라니. 그 사이 이안은 신발과 양말을 벗고 지붕 위로 올라갔다. 엄청난 비로군. 이렇게 비가 올 줄은 몰랐다. 이런 일도 해야 할 줄은 더더욱 몰랐고.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그의 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비가 내리면 저택의 사용인들은 평소보다 더 바빠진다. 겨우 청소를 끝낸 난로에 다시 불을 지피고 모포를 꺼냈다. 저택의 주인들이 움직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사소한 심부름이 늘어난다. 빌은 다섯 번 째 뜨거운 홍차를 나른 다음 휴게실에 앉아 한숨 돌렸다. 부엌에서 뭔가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오늘저녁은 스튜인 모양이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복도에서 촤악하고 물이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렸다. “톰!” 또 톰이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복도는 물바다였다. 빌과 견습 하녀들은 흥건하게 젖어 정신없이 바닥을 닦고 있었다. “톰이 양동이를 들어주다가 그만...” 아하. 그걸로 상황이 단번에 이해가 됐다. 뭘 해도 어리바리한 톰이다. 견습 하녀를 돕겠다고 나섰다가 물이 든 양동이를 엎질러버린 거겠지. 톰이 벌게진 얼굴로 뭐라 우물우물 변명하기 시작했지만 듣는 사람은 없었다. 데이지가 상황을 파악하고 걸레를 가지러 달려갔다. 자신이 나설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빌은 다시 휴게실로 돌아왔다. “또 톰이야?” 별로 다르지 않은 반응이 부엌에서도 이어졌다. 앤은 고개를 내밀고 복도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하녀 장이 다가와서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세상에, 톰. 며칠은 조용히 넘어가나 했더니.” 그녀는 걸레를 들고 달려오는 데이지를 보더니 손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데이지가 달리기를 멈추더니 걷기 시작했다. “됐으니 데이지는 저거 치우는 것 좀 도와주렴.”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업무실로 돌아가려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누가 이안한테 수건 좀 갖다 주고.” 이안. 일련의 사건에 다들 잊고 있었다. 그 말에 데이지와 앤이 고개를 들었다. 서로 가겠다는 태도에 하녀 장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앤은 부엌으로 돌아가고, 데이지는 그것부터 치우라니까.” 하필이면 그 순간 케이트는 또 톰이야? 라는 말과 함께 쓴웃음을 지으며 휴게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녀 장은 그대로 그녀를 지목하며 말했다. “케이트, 이안한테 수건 좀 갖다주렴. 고생했으니 뜨거운 차도 함께.” 에엑. 빌은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케이트의 얼굴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제가 가면 안돼요? 저요, 저요. 앤과 데이지의 얼굴이 잠시 빛났지만 하녀 장은 칼같이 잘라냈다. “케이트!” 그녀가 뜨거운 차를 담은 주전자를 들고 위층으로 사라지자 앤과 데이지도 실망한 표정으로 자신의 업무에 복귀했다.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본 로더 부인이 심술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계집아이들이란.” ============================ 작품 후기 ============================ 사용인의 방 도면을 서재에 올렸습니다. 공지에도 이번주까지는 올려둘게요. 귀 아픈게 안나아서 다른 병원을 갔더니 이번엔 딴 소리를 하네요;;; 귀에 바이러스 감염된게 아니라 목의 염증이 문제인것 같다고... 아놔;; 뭐든 좋으니 빨리 치료 해주세요ㅜㅜㅜ 00009 2. 수상한 하인 =========================================================================                            엄청난 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익숙지 않은 일을 끝낸 이안이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을 때 케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표정변화 없이 그녀를 쳐다봤다. 흠뻑 젖어 물을 뚝뚝 흘리는 이안의 모습은 위험한 걸 넘어 음산하게 보였다. 짙은 어둠을 뚫고 나라를 저주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사악한 마법사의 모습이 저러할까. 케이트는 침을 한번 삼키고 동요하지 않았다는 듯 그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닦아요. 애들이 열심히 치운 바닥 더럽히지 말고.” 더럽힌다고? 이안은 새삼스럽다는 듯 바닥을 내려다봤다. 평생 한 번도 바닥이 더러워지는 걸 신경 쓰지 않은 사람처럼. 그는 천천히 케이트에게서 수건을 받아들었다. 스친 손가락이 얼음장처럼 차가워 그녀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마치 진짜 사악한 마법사인 것 같다. 아니, 아니지.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안은 인간이고 그냥 평범한 하인이다. 그녀가 그에게 겁먹거나 주눅이 들 필요가 없다. 게다가 저렇게 차갑다면 필시 그도 감기에 걸릴 것이다. 그제야 손에 든 뜨거운 차가 생각났다. 그녀가 그것을 내밀었을 때 이미 이안은 자리를 뜬 후였다. “어? 뭐야?” 케이트는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고 이안이 남자 사용인의 기숙사로 들어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그의 뒤를 종종 따르다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열린 문 사이로 이안이 신경 쓰지 않고 젖은 셔츠를 벗는 게 보였다. “엑.” 너무 당황해서 오히려 여성스럽지 않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문틈 사이로 커다란 초록색 눈동자가 보였다. 이안은 상체를 벗은 채로 문을 열었다. 끼익하고 틈이 벌어지자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발 물러섰다. 이안이 문틀에 팔꿈치를 대고 상체를 기울였다. “버릇인가 보군.” 어? 뭐가? 그녀의 의문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이안이 말을 이었다. “겁도 없이 남자 방에 혼자 졸졸 따라 들어오는 게 말야.” 호박색 눈동자가 거의 붉은색으로 보였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멍하니 그의 눈동자를 보던 케이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멍청하다는 거야, 뭐야? 이안은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해지는 얼굴을 흥미롭다는 듯 쳐다봤다. 작은 빨간 머리 계집애. 케이트에 대한 이안의 첫인상은 딱 그 정도였다. 타닥타닥하고 잦아진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나른하게 들렸다. 집 안 어디선가 낮은 웃음소리가, 천장 너머로 쥐가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점점 신경을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 초록색 눈이. 얼굴을 붉히지도 않으면서 때때로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 작은 입술이 뭔가를 말하고 싶은 것처럼 오물거리다 닫히는 것이. 대체 뭐냐고 거칠게 움켜잡고 흔들고 싶은 욕망이 확 타올랐다 사그라졌다. 이 계집애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 알기나 할까. 이안은 천천히 몸을 펴고 뒤로 물러났다. 케이트는 그대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부끄러워하지도 겁을 먹지도 않았다. “이번엔 뭐지?” 그가 깨끗한 셔츠를 꺼내 입으며 말하자 정적이 깨졌다. 정신이 든 것처럼 케이트는 자신이 든 쟁반을 내려다봤다. 뭐였을까. 마치 마법에 홀린 것 같다. 거의 붉은색으로 변한 그의 호박색 눈동자를 본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어, 차요. 뜨거운 차를 가져왔어요.” 이안은 힐끔 쳐다보고 그녀의 손에서 쟁반을 받아들었다. 갑자기 손이 가벼워진 탓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한 손에 가볍게 쟁반을 들고 손을 내밀었다. 케이트는 움찔했지만 그는 그저 문 손잡이를 잡았을 뿐이었다. “아래도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문을 닫고 싶은데.” 어? 무슨 소린지 이해하기 전에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틈으로 호박색으로 돌아온 이안의 눈동자가 마주친 순간 케이트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세상에. 케이트는 붉어진 얼굴을 식히기 위해 손으로 부채질하며 복도를 걸었다. 내가 미쳤었나 보다. 그게 아니라면 앤과 데이지를 반하게 한 뭔가가 나한테도 통한 거였든지. 비틀비틀 계단을 내려가다가 넘어질 뻔한 케이트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손이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계단 중간에 주저앉아 있을 때 이안은 차를 따라 한 모금 마시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얼어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추위가 가셨지만 일단 마셔놔야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신 뒤 이상하다는 듯 찻잔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단번에 잔에 든 차를 전부 마셔버렸다. “뜨거운 차라고 하지 않았나?” 차는 미지근하다 못해 차갑게 식어 있었다. === 저녁식사시간이 마친 뒤 사용인들은 이번에는 주인들의 일이 아니라 자신들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바빠졌다. 남자사용인의 숙소에서 남는 방을 청소하고 네 명의 여자가 잘 수 있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담요는 어떻게 할까?” “몇 장이야?” “두 장.” 어쩔 수 없지. 빌의 대답에 케이트는 데이지를 쳐다봤다. 사람은 네 명인데 담요는 두 장. 그녀들이 쓰던 담요와 시트는 사용할 수 없어 여름용 시트를 꺼냈는데 오늘따라 비가 오는 바람에 여름용으로는 추울 게 분명했다. “저쪽 방에 둬.” 기운 빠진 데이지의 말에 케이트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신도 추울 텐데 수습 하녀들에게 양보한 것이다. 히잉. 추운 건 질색인데. 데이지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침대를 정리했다. 창문을 열어 환기해야 할 테지만 비가 와서 그것도 요원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떻게 잘 수 있는 수준으로만 만들어 놓고 며칠을 버텨야 할 터다. “그냥 침대 위에 올려두면 돼?” 옆방에서 복도를 통해 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정말. 데이지가 투덜거리더니 들고 있던 걸레를 놓고 옆방으로 갔다. 그녀와 교대하듯 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앤은 방을 둘러보고 흐응하고 감탄했다. 남자 숙소라고 다를 건 없구나. “남는 담요 더 없어?” 앤의 물음에 케이트는 바닥을 쓸어내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도 침대만 멀쩡하지 이불은 젖는 바람에 부족해.” “내가 혹시 남는지 보고 올게.” 고맙게도 앤이 몸을 돌렸다.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케이트는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그녀는 나가다 말고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그 남자들은 이렇게 비가 올 줄 알고 낚시를 한 걸까?” 그 얘긴! 케이트가 앤의 입을 막으려 몸을 돌리자 열린 문틈 사이로 누군가 방을 지나가는 게 보였다. 들렸나? “왜 그래?” 앤의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얘기 또 누구한테 했어?” “아무한테도 안 했는데? 왜?” “그럼 다른 사람한테는 하지 말자.” “왜?” “그야...거기 위험해서 낚시 금지된 곳이잖아.” 뭐? 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맞다. 그러고 보니 그쪽은 낚시 금지였지.” “응. 그러니까 괜히 떠들고 다니지 말자. 주인 나리 아시면 그 사람들 경을 칠 거 아냐.” “그것도 그렇지.” 다행히 순순히 수긍한 앤은 담요를 찾아보겠다며 방을 나섰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날이 추우니 난로를 피워야 할 것이다. 일손이 부족해서 아직 사용인 방의 난로까지 막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수습 하녀들이 쓸 방은 안 쓰던 방이라 막혀있을 게 뻔했다. 그녀는 허리를 펴고 에구구 소리를 냈다. 옆방에서 빌과 데이지가 뭔가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담요를 찾아보겠다며 간 앤은 아직 감감무소식이었다. 이상한데. 없다면 없다고 라도 이야기해주러 왔을 것이다. 케이트는 앞치마에 손을 닦고 걸레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걸레에 이미 검댕이 묻어있는 탓에 다시 손이 더러워졌다. 에이. 그녀는 혀를 차며 포기하고 더러운 걸레를 가득 들고 방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김에 걸레도 빨고 손도 닦아야겠다. 계단을 내려가는 데 남자와 여자의 숙소로 가는 길을 나누는 층계참에서 앤과 이안이 이야기하는 게 보였다. 그럼 그렇지. 왜 이렇게 늦나 했다. 케이트가 혀를 차며 다가가자 이안이 그녀를 발견했는지 고개를 들었다. 잠시 이안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변했다.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것 같던 그 표정은 금세 사라졌다. 뭐지? 케이트는 무시하고 앤에게 말을 걸었다. “담요 없었어?” “아, 맞다. 응. 없었어. 미안...헉?” 바람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앤이 자신의 앞치마를 잡아 들어 올렸다. 놀란 케이트가 뒤로 물러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앞치마로 케이트의 얼굴을 문질렀다. “세상에! 케이트, 난로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니?” 젠장. 그제서야 케이트는 이안의 표정이 이상했던 이유를 알았다. 그녀의 얼굴에 검댕이 묻어 우스꽝스러웠던 탓이다. 잠시 부끄러웠다가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이안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케이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앤의 손길을 받았다.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세게 문지른 다음에야 앤은 만족한 듯 미소 지었다. “됐다.” “고마워. 난 이제 걸레 놔두러 가야겠다.” 방금의 표정변화가 무색하게 이안은 또다시 무표정했다. 두 사람을 뒤로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케이트는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묻는 걸 잊었다는 걸 떠올렸다. ============================ 작품 후기 ============================ 날씨가 덥죠? 그래서 전 바밤바 먹었습니다. 바 : 바밥바 밤 : 밤이 들어있는 바 : 바밤바 죠 : 죠스바 스 : 스윽 꺼내보니 바 : 바밤바 누 : 누가바 가 : 가만보니 바 : 바밤바. 길지만 여기까지만 하죠. 판타지다보니 세계관 설정이 있는데 사실 모르셔도 크게 관계는 없는 부분이거든요. 아셔야 할건 제가 본문에 넣으니까. 그래서 저 설정메뉴를 한 번도 안썼는데 혹시 설정을 보시는 분 계신가요? 많으시다면 설정에 올려보려고 합니다. 00010 3. 사라진 하녀 =========================================================================                            더워서 일어났던 지난밤이 무색하게 그날 밤은 추워서 깨고 말았다. 으으. 양팔을 쓰다듬으며 케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돌리자 데이지는 누에고치처럼 담요를 돌돌 만 채 자고 있었다. 저건 어디서 난거지? 약간 얄미운 마음이 들다가 사라졌다. 추운데 별 수 있나. 담요 한 장을 찢어서 나눠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는 얇아서 버석거리는 이불을 둘둘 말고 난로 앞으로 걸어갔다. 장작이 전부 탔는지 불씨만 남아있었다. 아직 난로에 넣지 않은 장작이 몇 개 남아있을 것이다. 어디선가 달칵하고 문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어두운 밤이라 조용해서 더 잘 들렸다. 누가 화장실이라도 가려는 걸까. 저도 모르게 케이트가 귀를 기울이자 문을 아주 천천히 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까지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나? 누가 밤에 돌아다니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항의라고 했던 걸까. 아니면. 케이트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수습 하녀들. 혹시 그 여자애 중 하나가 여기 있는 남자와 만나는 걸까? 그래서 저렇게 소리를 죽이는 걸까. 그녀의 귀에 조심하는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수습 하녀 중 하나라면 더 안쪽에 있는 방이니 멀어졌다가 가까워진 다음 다시 멀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 발소리는 그저 멀어지기만 했다. 수습 하녀가 아닌가? 케이트는 고개를 갸웃하고 몸을 움직였다. 버석버석한 이불에 살이 닿아서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웠다. “네 담요 여기 있잖아.” 아침에 일어난 데이지의 말에 케이트는 이마를 짚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낡은 담요가 그녀의 침대 밑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몰랐어.” 이걸 알았다면 그 새벽에 추워서 덜덜 떨며 깨지는 않았을 텐데. 그녀의 표정을 본 데이지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일부러 내가 덮어줬는데 그걸 다 차내 버리고 추워서 떨었단 말야?” “응. 전혀 몰랐어.” 생각할수록 원통하다. 하기야 데이지가 그렇게 얄밉게 행동할 리가 없지. 잠시나마 그녀가 얄밉다고 생각했던 게 미안해 졌다. 어휴.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집어 들었다. 힐끔 본 데이지의 담요보다 훨씬 낡았다는 건 일단 논외로 치자. “어디서 난 거야?” “창고에서. 어제 빌이 찾았다며 가져다줬어.” 아무래도 버리려고 둔 게 아닌가 싶다. 평소라면 이렇게 낡은 담요는 안 덮었을 테지만 어젯밤은 정말 추웠다. 케이트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잠을 잔 데이지는 개운한 기분으로 문을 열고 나가려다 작게 비명을 지르며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야!” “뭐야, 왜?” 케이트가 땋은 머리를 동글게 말며 쳐다보자 데이지는 붉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밖에 이안이 있어.” “...그래서?” “그래서라니! 나 아직 세수도 안 했단 말야.” 얼씨구. 어이가 없어서 콧방귀가 나온다. 케이트는 데이지를 지나쳐서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꺅 하고 데이지가 얼굴을 가리려는 지 몸을 돌렸다. 이안은 손을 들어 올린 채로 멈춰서 있었다. 그는 그저 하녀 장이 시킨 대로 그녀들이 일어났는지 노크해서 확인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노크하기도 전에 그 빨간 머리 계집애와 방을 함께 쓰는 갈색 머리가 문을 열더니 그의 얼굴을 보고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문을 닫아버렸다. 뭐지? 그가 다시 노크하려는 순간 이번에는 케이트가 문을 열었다. 아차 했으나 이미 떠난 손은 문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부분을 가볍게 두드렸다. 콩하고 이마를 얻어맞은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나려다 발이 꼬여버렸다. 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었고 아차 싶었던 이안 역시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의 손이 맞잡았다면 참 좋았겠으나 그런 입맛에 딱 맞은 운이 아침부터 일어날 리 없다. 이안의 손은 케이트의 팔을 밀어내 버렸고 그 반동으로 케이트는 아침부터 격렬하게 바닥에 퉁겨졌다. 콰당탕! “꺄악!” 눈앞이 하얘진 케이트를 대신해서 데이지가 비명을 질렀다. 난감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선 이안은 잠시 입을 벌렸다가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어머, 어머! 어머! 어머! 어머머머!” 고장 난 것처럼 탄성을 지르는 데이지의 목소리에 찰나의 정적은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사라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라. 케이트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려다 멈췄다. 바닥에 부딪힌 어깨가 감각이 돌아오자 눈물날정도로 아팠다.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니?” 창피하게도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빌은 넥타이 매던 그대로 달려왔고 톰은 셔츠의 단추도 채 다 잠그지 않은 상태였다. 수습 하녀 둘은 둘 다 머리를 빗기 전이었는지 누가 누군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화룡점정으로 시차를 두고 하녀 장과 로더 부인까지 달려오자 케이트는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이안은 마치 남의 일인 양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자식을 죽이고 나도 죽어 버릴 거야. 그녀는 일어나려 애쓰며 중얼거렸다. “뭐라고?” 데이지가 그녀가 일어나는 걸 도우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냐.” 차마 데이지에게 그가 좋아하는 남자를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케이트가 끙끙거리며 침대에 걸터앉자 하녀 장이 사태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됐으니 너희들은 어서 가서 볼일 보렴. 케이트, 어때? 괜찮니? 대체 무슨 일이야?” 마음 같아서는 이안이 절 밀었어요 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케이트는 그렇게 약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사고였어요. 하녀 장은 허리에 손을 얹고 그녀를 쳐다봤다. 데이지가 그녀의 어깨를 살펴보자 벌써 멍들기 시작한 게 보였다. 아프겠다아. 데이지의 속삭임에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케이트도 짐작할 수 있었다. “어휴, 안 그래도 오늘 일손이 부족한데.” 하녀 장은 못마땅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말을 이었다. “일단 오전은 쉬렴. 그리고 이안.” 그녀의 부름에 이안이 방 안으로 한걸음 들어왔다. 케이트는 이안이 아직까지 거기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고 깜짝 놀라서 데이지가 드러낸 어깨를 감췄다. 넘어지는 걸 정면에서 보는 걸로도 부족해서 어깨가 드러난 것까지 다 봤다는 것 아닌가. 그에 대한 분노가 부끄러움이 더해지자 다시 타올랐다. 진짜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 원한은 반드시 갚아줄 테다. 소설 속에나 등장할 법한 삼류 악당 같은 대사를 중얼거리는 케이트를 무시한 채 하녀 장은 이안에게 지시했다. “마을에 가서 의사선생님 오실 수 있는지 확인하렴. 가능하면 모셔오고.” 이안은 고개를 끄덕하고 뒤 돌아 나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하녀 장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살다 살다 저렇게 말 없는 남자는 또 처음이네.” 다행히 이안은 의사를 데리고 돌아왔다. 케이트를 진찰한 나이 지긋한 의사는 뼈는 문제가 없으니 며칠 조심하면 나을 것이라고 진찰하고 돌아갔다. “엄청난 소리가 나던데, 무슨 일이지?” 아침 식사를 시중드는 이안에게 남작부인이 물었다. 그게...이안이 대답하려는 순간 집사가 먼저 대답했다. “하녀 아이 중 하나가 넘어졌습니다.” “어머나!” 데일 남작부인은 작게 자른 빵 조각을 입에 가져다가 말고 놀라서 탄성을 질렀다. “어떻게 넘어졌기에 그렇게 큰 소리가 난거지?” 빌과 톰이 이안을 힐끔 쳐다봤다. 집사는 두 사람을 무시하고 허리를 가볍게 굽히며 말했다. “그냥 사고였습니다. 마님.” “많이 다쳤나요?” “아니요. 뼈가 부러지진 않았다고 합니다.” 저런. 남작부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빵을 입안에 넣었다. 이안이 따듯한 홍차를 잔에 채우자 남작은 손을 들어 그만 따르라는 표시를 했다. “그러게, 사용인 방을 지붕 아래에 하는 건 무모하다고 했는데.” 남작이 잔을 들자 이안이 퉁명스럽게 경고했다. 뜨겁습니다. 그는 이안의 주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잔에 입을 데다가 아, 뜨거 하고 인상을 썼다. 반면 남작부인은 집사의 충고를 받아들여 천천히 차를 마셨다. 그녀는 잔에서 입을 뗀 뒤 대꾸했다. “그럼 어디에 만들라는 거예요?” “집을 증축하는 게 낫지 않겠어?” “날이 더워지면요.” 흥. 남작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쓰며 편지봉투를 집었다. 우편배달부가 오늘 아침에 전달한 편지였다. 빌이 봉투 칼을 건네자 남작이 봉투를 개봉해 읽기 시작했다. 이안은 부엌에서 달걀요리가 든 접시를 가져와 요리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가 남작의 접시에 계란 요리를 덜기 위해 허리를 숙였을 때 편지 봉투가 매우 가까이에서 보였다. 심지어 몇 줄은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잠깐 이안의 표정이 변했지만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케이트는 일어서려다가 어깨가 욱신거리자 끙하고 신음을 삼켰다. 빌어먹을 이안. 그는 끝끝내 사과 한마디 없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해도, 예상치 못한 사고였다 해도 피해자가 생겼는데 그는 끝까지 그 차가운 얼굴을 유지하다가 사라졌다. 생각해보면 이안과 연루된 일에서 좋았던 적이 없다. “좋아할 수가 없어.” 그녀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데이지가 점심을 가져왔을 것이다. 다들 바빴는지 식사를 가져다주는 사람이 없어서 아침도 걸렀다. 케이트는 고픈 배를 움켜잡고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문을 열었다. “데이지? 살았다. 배고파서 죽...” 문밖에 선 것은 그녀가 기대하던 데이지가 아니었다. 하얀색 하녀들의 옷이 아니라 검은색 하인의 옷이었다. 불길한 기분을 삼키며 그녀가 고개를 들자 지금 이 순간만은 절대 보고 싶지않은 얼굴이 서 있었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목요일 입니다. ...목요일!!! 목요일이예요!!! 전 오늘이 금요일인줄 알고 좋아했는데!!! 어휴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그래도 내일 쉬잖아요? 전 기쁨의 바밤바 먹으러 가야겠어요 덧. 댓글에 대한 답변은 전부 댓글 다신 해당 편에 댓글로 답니다. 설정을 입력할지 여쭤봤는데 등장이눔ㄹ이 궁금하다고 하셔서 한 편에 한명씩 쓰겠습니다. 일단 주인공 부터. 케이트 스미스 21세. 데일남작 저택의 하녀. 어린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데일남작가에 하녀로 일하다 삼년전 병으로 사망. 고아가 된 케이트를 남작부인이 하녀로 거둬주면서 하녀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하녀로 일하는 동안 집안일을 해왔기 때문에 거의 만능하녀에 가까울 정도로 집안일은 모두 잘 합니다. 머리가 좋고 돌보는데 능한 언니타입. 싫어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사람을 믿고 좋아하는 편입니다. 아담한 체구에 빨간머리, 초록색 눈동자. 머리카락은 약간 구불구불하고 날개뼈를 덮을 정도의 길이입니다. 일할 때는 딿아서 말아두지만 잘때는 풀어둡니다. 빨간머리에 초록색눈동자의 대부분이 그렇듯 하얀피부. 좀 예쁘장한 빨간머리 앤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과장하면 아담사이즈인 니콜키드만. 00011 3. 사라진 하녀 =========================================================================                            이안은 그녀가 주춤하는 사이 들어가도 되냐는 질문도 없이 방 안에 들어왔다. 뭐야, 이 남자. 왜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고 난리래? 케이트는 반항적으로 고개를 들고 말했다. “왜요? 아침에 부러지지 않은 게 아쉬워서 부러트리러 왔어요?” 이안은 그녀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든 쟁반을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았다. 그제야 케이트는 그가 그녀의 점심을 가져다준 것을 깨달았다. 이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을 위해서 여기까지 식사를 날라 준 남자에게 투덜거렸으니. 정작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아니, 아무렇지 않은지는 케이트가 알 수 없다. 저 남자의 얼굴은 시종일관 저런 표정이다. “저기...” 케이트가 까칠하게 굴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이안이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미안.” 케이트는 자신이 말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라기엔 너무 낮았고 훨씬 높은 곳에서 들려왔다. 이안은 초록색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을 지켜봤다. 잠옷 밖으로 보이는 팔이 이미 새까맣게 멍이 들어있었다. 그냥 넘어졌어도 멍이 들었을 텐데 그가 민 꼴이 됐으니 그 반동으로 더 세게 넘어진 것이다. 게다가 그게 이렇게 작은 여자애라면 아무리 그라고 해도 죄책감이 든다. 그녀는 그가 고개를 숙이는 걸 보고 깜짝 놀라 움찔했다. 으아, 왜? 뭐? 왜? 하지만 이안은 손을 들어 그녀의 상태를 살폈을 뿐이었다. 살짝 옷깃을 들춰 어깨를 살핀 이안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서 말했다. “피해에 대한 보상은 나중에 충분히 하지.” “...뭐?” 미안하다는 말까지는 이해했다. 그런데 보상은 충분히 하겠다고? 이것도 사과의 한 방법인가? 케이트는 몸을 돌리는 이안의 손을 저도 모르게 잡았다. “어, 그게...” 의외로 이안의 손은 따듯했다. 지난번에 스쳤던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에 대한 기억과 대조됐다. “뭐지?” 그가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에야 케이트는 정신이 들었다. 순간 당황해서 잡기는 했지만 생각해보면 뭔가 할 말이 있는 건 아니다. 사과가 뭐 그따위냐고 따질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것도 일부러 식사를 가져다준 사람에게. “식사를 가져다줘서 고마워요.” 드디어 할 말을 찾았다. 이안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지는가 싶더니 그가 딱딱하게 말했다. “가져다주라는 지시에 따른 것뿐이야.” 그렇겠지. 얄밉다는 생각이 들어 케이트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다른 애들한테 부탁하지 그랬어요.” 그러자 이안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방을 나가려던 태도에서 완전히 몸을 돌려 케이트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말했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나?” “뭐를요?” “...하긴. 다들 바빴을 테니.” 그러니까 뭐가? 의문만 증폭시키던 이안이 드디어 말을 끝냈다. “네 부엌 친구가 사라졌다.” 부엌 친구? 케이트의 머릿속에 금발머리인 앤이 떠올랐다. 저택에서 일하는 여자 사용인은 모두 일곱 명.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은 둘밖에 없으니 앤을 말하는 게 분명할 것이다. “앤이 사라졌다고요?” 케이트는 어깨의 통증도 잊고 이안에게 달려들 듯 물었다. 그의 제복이 구겨진다는 것도 잊었다. 자신에게 매달린 케이트의 얼굴을 이안은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래.” “어, 어디로?” 아니, 이럴 때가 아니다. 케이트는 이안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슬리퍼를 구두로 갈아 신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앤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방은 그대로였다. 사라졌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뭐가 달라졌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 어느새 뒤따라온 이안이 나직하게 말했다. 멍하니 방 안을 둘러보던 케이트는 그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봤다. 이안은 굳은 얼굴로 방 밖에 서 있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뭘 물어야 할지 몰라 케이트는 그대로 서 있었다. 이안은 밖에, 케이트는 안에. 열린 문을 경계로 두 사람이 마치 다른 세상을 사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 새벽에 도망간 것 같다는군.” “누가 그래요?” “하녀 장이.” 도망갔다고? 왜? 이해할 수 없어서 케이트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도망갈 리 없다. 그날 밤 그녀가 분명히 말했다. 도망가면 지참금을 못 받는다고. 아니. 케이트는 눈을 감았다. 그건 그냥 밤에 소녀감성으로 나누던 그런 이야기일 뿐이었나? 현실과는 다른 그런 거였나? 마음에 구멍이 뻥 뚫린 기분이 들었다. === “너한테도 아무 말 없었다고?” 오후 티타임 이후로 일에 복귀한 케이트는 데이지의 질문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그녀를 보러 오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앤이 사라지는 바람에 일손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원래 일손이 부족한 저택이었다. 두 사람분의 일을 하는 앤이 사라졌으니 그 빈자리는 터무니없이 컸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다른 하녀들에게 돌아왔다. “데이지! 손이 쉬고 있잖니!” 이크. 데이지는 요리사의 호통에 어깨를 움츠리고 부지런히 감자를 으깨기 시작했다. 케이트 역시 재빨리 통 안에 삶아지는 당근의 상태를 확인했다. 당장 오늘 저녁 식사 준비가 빠듯했다. 그리고 내일의 식사 준비도. “어떻게 되고 있죠?” 하녀 장이 부엌에 들어오며 물었다. 요리사는 두 팔을 들어 올리며 속 터진다는 듯 말했다. “주방 일을 할 줄 아는 아이가 한 명도 없는데 뭐가 어떻게 되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뒤돌아서서 오븐 상태를 살폈다. 완전 마녀 할망구야. 이러니 앤이 도망갔지. 데이지의 속삭임에 케이트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앤이 사라졌다. 아니, 도망쳤다. 그 사실이 믿을 수 없었다. “케이트.” “네.” 하녀 장은 오븐을 들여다보는 요리사를 무시하고 케이트에게 다가왔다. “어제 앤과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게 너라던데, 맞니?” “어, 네.” “그 애가 혹시 네게 뭔가 이야기하지 않았어?” 앤이 내게 이야기한 것? 케이트는 잠시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대화한 것. 담요를 찾아보겠다는 이야기였다. 그것 말고는 없었다. “없었어요. 저와 데이지를 위해 담요를 찾아다 준다는 말이었어요.” “그래?” 하녀 장은 약간 실망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 돌아섰다. “알았다. 어서 일하렴.” 그녀가 부엌을 나간 다음에야 케이트는 지난밤 앤과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게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대화한 사람. 이안이었다. 그때는 별생각 없이 지나갔다. 앤이 데이지처럼 이안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상황만 되면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도망쳤잖아? 왼손으로 스튜를 젓는 케이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앤이 왜 도망친 걸까. 남자가 있었나? 그녀와 이야기하면서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안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다? 그것도 지참금을 포기하고 도망칠 남자가? 마을에 나가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와 함께 도망친 남자의 존재를. 그게 아니라면... “식사 준비되었는지 확인하라고 하셨습니다.”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케이트는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국자를 떨어트렸다. 쨍그랑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국자가 바닥에 부딪히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 몰렸다. “어, 그게, 그러니까...”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앤과 마지막으로 대화한 남자. 앤이 마음에 두고 있던 남자. 지붕을 수리하고 내려왔을 때의 그 음산한 모습이 겹쳐서 보였다. “케이트, 괜찮아?” “정말이지, 쓸모 있는 애들이 한 명도 없다니까.” 데이지가 달려와서 국자를 대신 주웠다. 요리사는 투덜거리며 오븐에서 구운 닭고기를 꺼냈다. “됐으니 이리 와서 여기 위에 꿀이나 뿌려!” “아, 네.” 케이트는 불길한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꿀단지를 집어 들고 구운 닭고기 위해 고르게 뿌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등 뒤로 꽂히는 이안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냥 우연일 뿐이다. 최악의 상황은 이안이 고백을 받아주지 않아 실연의 견디지 못한 앤이 마을로 잠시 도망친 정도가 아닐까. 그녀가 모든 닭고기에 꿀을 뿌리자 이안이 집어 들었다. 그는 케이트를 한 번 더 쳐다보고 식당으로 올라갔다. 그가 사라지자 긴장이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케이트는 조리대에 기대 한숨을 내쉬었다. ============================ 작품 후기 ============================ 이제 생각났는데 전전화의 담요는 전부 모포였습니다. 왜 담요로 바꿨냐면 표준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쓰다보니 게슈탈트 붕괴가 일어나서... 00012 3. 사라진 하녀 =========================================================================                            다음 날이 돼도 앤은 돌아오지 않았다. 도망간 게 확실하다고 데이지는 중얼거렸다. “왜 도망간 걸까?” 케이트의 기운 없는 질문에 데이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쎄. 마을에 사귀던 남자가 있어서 같이 도망친 거 아냐? 마님물건 중에 사라진 게 없으니 뭔가 훔쳐서 달아난건 아니라는 것 같던데.” “앤은 그럴 애가 아냐!” 케이트의 분노에 데이지가 손을 들어 보였다. “미안. 내가 말실수했어. 어쨌건 내 말은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거였어.” “그럴까.” 케이트는 앤이 부탁한 분통을 손 안에 넣고 굴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부탁한 게 뭐였더라. 잘못 사오는 바람에 아직 바꿔오지 못한 거였다. 계획적으로 도망간 건 아니라는 말이다. 또 다른 증거로 앤의 방은 아직 그대로였다. 옷장에는 앤의 옷이 걸려있었다. 사라진 건 고작해야 그녀의 돈정도. 대체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급하게 도망치게 만든 걸까. 어떤 남자일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참, 미안.” 머리를 빗은 데이지가 난데없이 사과했다. “뭐가?” “어제 바빠서 네 식사 챙겨주지도 못했잖아.” 뭐야, 그게. 케이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요즘 어제 있었던 일을 이제 사과하다니 참 데이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은데. 어제 점심은 먹었거든.” “어? 진짜? 다들 바빠서 잊고 있었는데. 누가?” 응? 케이트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며 대답했다. “이안이. 나한테 갖다 주라고 누가 시켰다던데?” “어제? 누가 시켰지? 다들 바빠서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데이지는 전혀 모른다는 태도였다. 뭐지? 케이트는 고개를 갸웃하고 머리를 땋았다. 비가 그친 덕에 오늘 밤은 난로 없이 잘 수 있을 것이다. 날씨는 순식간에 뜨거워져서 젖었던 땅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말랐다. “어쨌든 이안이 식사를 갖다 줬다는 거잖아? 좋겠다.” “퍽이나.” 예상대로 데이지는 부럽다는 태도였다. 케이트는 코웃음 치며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불 끈다? 데이지가 난로위에 초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응. “그러고 보니 넌 이안 별로 안 좋아 하더라?” “어깨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놨는데 좋아할 수 없지.” “넌 어깨가 그렇게 되기 전에도 이안을 싫어했어.” 부인할 수 없다. 케이트는 끙하는 소리를 내며 돌아누웠다. “어딘지 모르게 기분 나빠.” “어딘지 모르게?” “응. 어쩐지 우리를 내려다보는 것 같아. 우리랑 대화도 안하려고 하잖아. 재수 없어.” 불만은 한번 시작하자 마치 터진 둑처럼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너 그 남자가 웃는 거 본적 있어? 맨날 이렇게 뚱한 표정에, 지가 뭐 잘났다는 듯 쳐다보고 있고. 데이지는 흔치 않은 케이트의 불만에 입을 딱 벌렸다. 이유 없이 남을 싫어하는 애가 아니다. 맨날 숨어서 술만 퍼마시는 저 집사조차도 관심 없을 뿐 싫어하지는 않는 케이트였다. “꽤 잘 관찰했네.” 케이트의 말이 끝나자 데이지가 중얼거렸다. 케이트는 어? 하고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어두운 방 맞은편 침대에서 데이지가 누워있는 모습이 어슴푸레 하게 보였다. “싫다, 싫다 하면서 한 번도 안 웃었다는 것도 알고. 난 이안이 담배 피는 지도 몰랐는데.” 그런가. 케이트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이안을 의식하고 있다. 싫어하는 사람은 무시하는 게 최고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를 의식하는 걸까. “너, 아닌 척 하면서 이안 좋아하는 거 아냐?” “뭐?” 이번에도 케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건 절대 아니다. “그게 아니라면 왜 그렇게 이안을 의식하는 건데?” 그러게. 그 말에 뭐라 대응할 말이 없다. 맞은편에서 데이지가 반대쪽으로 돌아눕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트는 그녀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살금살금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계단참에 웅크리고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지의 까칠한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앤이 사라졌으니 사랑의 라이벌이 줄었다고 생각했는데 예기치 않게 케이트가 이안을 의식하니 신경 쓰였던 것이다. 이런 건 질색이다. 케이트는 머리를 감싸 안았다. 이런 분쟁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남의 연애사는 남의 연애사일 때 재미있는 것이다. 괜히 방을 바꾸지 않겠다고 했나? 앤의 방이 비면서 그 다음으로 오래 일한 케이트에게 앤의 방을 쓰겠냐는 제의가 들어왔지만 그랬다간 데이지가 남자 숙사에서 혼자 이 인실을 써야 한다. 그래서 케이트는 거절하고 데이지와 함께 방을 쓰기로 했다. 적어도 여자 숙사의 방이 정리될 때까지는. 데이지가 걱정돼서 했던 결정이 후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데이지는 좋은 아이긴 하지만 자신의 것에 대한 소유욕이 엄청나다. 구빈원에서 내 것의 개념 없이 자라다보니 그런 것 같다고는 하지만 서로 좋을 때나 이해되는 성격이지 이런 경우에는 너무 싫어진다. 케이트는 하루 빨리 여자 숙사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했다. 비가 그쳤으니 흥건하게 젖은 카펫과 침대매트도 빠른 시일 내에 마를 것이다.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벌써 앤이 그리워졌다.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 결국 케이트는 앤이 자신에게 아무말없이 저택을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뭔가 사정이 있겠지. 어떤 이유로, 왜 말없이 떠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가버린 것. 부디 어디 가서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녀가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이안은 숙소의 문을 열다가 그녀를 발견하고 멈췄다. 달빛에 붉은 머리카락이 금발로 보이는 바람에 일순 앤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녀보다는 더 작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문 옆의 케이트는 마치 달빛에서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케이트가 올라오는 걸 보고 재빨리 창고 안으로 숨었다. 계단을 오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어느샌가 케이트는 문을 열고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몸이 가벼운 모양이군. 이안은 가볍게 감탄했다. 체구가 작은 만큼 발소리도 적게 나는 모양이다. 그는 문 틈 사이로 케이트의 맨발을 보고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차가울텐데. 게다가 복도는 나무로 되어있다. 거스라미에라도 찔리면 어쩌려고 그러지? 하지만 불빛 하나 없는 복도를 케이트는 능숙하게 지나갔다. 잠시 후 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가 안으로 들어갔다는 확신이 들자 이안은 자신이 아직도 인상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표정을 폈다. 남의 발이 차갑든, 거스러미에 찔리든 그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다음날 아침부터는 모든 사용인이 업무를 중단하고 빨래에 매달렸다. 아침에 빨아야 해가 높이 뜨는 정오부터 말릴 수 있다는 하녀 장의 지시였다. 케이트는 커다란 통 안에 희석시킨 잿물에 담궈 둔 시트를 맨발로 밟기 시작했다. 그녀 외에도 수습 하녀 둘과 데이지 역시 커다란 통에 든 시트를 밟고 있었다. 남자들은 물을 나르고 헹군 빨래를 잘 짜서 빨랫줄에 너는 일을 맡았다. “이안, 나 나갈 수 있게 잡아줄래요?” 데이지가 애교 있는 목소리로 이안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무슨 귀부인이라도 되는 듯 한 태도였다. 케이트는 그녀의 입술이 빨간색으로 칠해진걸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오늘따라 데이지의 화장에 기합이 들어가 있다. 이안은 표정 변화 없이 그녀가 통 안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부축했다. 데이지의 얼굴이 기쁨으로 환해졌다. 팔자 좋군. 연애질이나 하고. 빌이 지나가면서 투덜거렸지만 그 말도 데이지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지는 못했다. “케이트, 도와줄까?” 케이트는 톰의 제안에 약간 망설였다. 의욕은 넘치지만 실수연발인 톰이다. 하지만 곧 그녀는 설마 여기서 무슨 실수를 하겠냐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통 안에서 나가는 걸 도와주는 것 뿐이다. “고마워.” 케이트가 톰의 손을 잡고 통 안에서 나오기 위해 다리를 들었을 때였다. 남은 손은 치맛자락이 젖지 않도록 모아서 움켜쥐고 있었다. 톰이 그녀가 나오기 쉽도록 뒤로 물러나려다 발이 꼬이면서 비틀거렸다. 그에게 지탱하고 있던 케이트는 아차 했으나 이미 늦었다. 콰당하고 두 사람이 넘어지는 것과 동시에 통 안의 물이 쏟아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케이트와 톰은 한데 엉겨 붙은 상태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버렸다. “어머, 어머, 어머! 어머머머!” 또 냐. 케이트는 이를 갈며 일어나려 애썼다. 데이지의 고장난 것 같은 탄성이, 그녀의 밑에 깔려 허우적거리는 톰이, 웃음을 터트리는 빌이 다 짜증났다. “어, 미안. 미안, 케이트.” 두서없는 사과를 늘어놓으며 톰은 여전히 허우적대고 있었다.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 그녀가 먼저 일어날 수 있을 텐데. 짜증나서 한마디 해야 하나 고민하는 데 그녀의 몸이 휙하고 공중에 들렸다. “어? 어?” 톰은 멍청한 신음을 내뱉다 케이트를 들어 올린 이안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켰다. 고맙습니다. 왠지 이 남자는 같은 하인인데도 존댓말을 써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안은 그대로 케이트를 안고 걷기 시작했다. “어, 뭐하는 거예요?” “그 차림으로 일할 수는 없잖나.” 그 차림? 완전 물에 젖은 생쥐 꼴이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야?” 짜증난다는 목소리와 달리 이안의 팔은 단단하게 케이트를 감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세? 케이트는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애쓰며 말했다. “당신도 젖을 거 아녜요?” 이안은 발걸음을 멈추고 안아 올린 케이트를 올려봤다. 항상 그녀가 올려보기만 했는데. 내려다 본 이안의 눈동자는 호박색이라기보다는 황금색으로 보였다. 햇빛 아래라서 그런가? 검은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동자가 이질적으로 보였다. 케이트는 자신이 그를 의식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안은 마치 위험한 짐승 같다. 잠시라도 틈을 보였다간 목을 물어뜯길 것만 같다. 그런 위험한 짐승이 주변을 어슬렁거린다면 누구라도 의식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모르는 걸까? 이 남자가 이렇게 위험하다는 것을. 속을 알 수 없는 괴물 같다. 배가 부르다면 안전하지만 그가 지금 배가 부른 건지 고픈 건지 알 수 없으니 더 불안하다. “쓸데없는 신경 마라.” 그 말을 대답으로 이안은 다시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안에 들어왔으니 내려달라고 했지만 이안은 다시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걸었다간 열심히 치운 바닥이 더러워 질텐데?” 괴물의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런 생각이 들어 케이트를 입을 다물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일이 있어서 이제 돌아왔네요~ 그러고보니 어제 등장인물 소개가 없었군요. 어쩐지 뭔가가 이상하더라니... 오늘은 이안입니다. 이안. 추정나이 22세 ~ 26세. 검은 머리카락에 호박색 눈동자. 검은 눈썹인걸로 보아 체모가 검은색이라고 예상됩니다. 딱히 모델은 없습니다. 사실 케이트도 모델이 빨간머리였던게 아니라 쓰다보니 그렇게 되서 표현한거라...ㅎㅎㅎ 타인에게 무심. 앤과 데이지, 그리고 수습 하녀들이 사모하고 있는 점에 대해선 관심없는 듯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일하는 케이트를 빤히 응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건 "나한테 이러는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는 감정은 아니고요. 훤칠한 키에 근육이 적당히 붙은 몸으로 훌륭한 하인의 표본같은 자세를 취하곤 합니다. 서빙할때의 예절이나 손님을 맞이할때의 예정 등등이 몸에 배인것처럼 자연스럽고 완벽해서 빌만 없었으면 종자가 돼었을 거라는 평이 있습니다. 저택에 들어온지는 보름. 실제 나이가 몇인지 아무도 모릅니다.(집사는 알겠지만 딱히 물어보는 사람이 없음.) 여기 오기전까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역시 마찬가지로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머리카락은 귀를 덮을 정도의 길이. 앞머리는 정돈되어 있어야 하는 하인 답게 아침에 이마가 드러나도록 올백으로 빗어 두지만 자기전에는 흐트러둡니다. 하인과 종자. 이 부분은 아시는 분이 많으실테니 그냥 지나쳐도 상관없습니다. 하인 Footman 저택에서 일하는 남자 사용인입니다. 집사의 지시로 일하는 경우가 많으며 보통 만화책이나 영화, 드라마 등등에서 보시는 저택에서 제복입고 식사시중을 들거나 짐을 나르는 하인이 이 풋맨입니다. 손님 앞에 나서야 하기때문에 보통 체격이 좋고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를 채용했다고 합니다. 데일남작은 종자(valet)이 있지만 종자가 없는 마이크같은 경우 그가 옷입는 걸 돕거나 꽉끼는 부츠를 신는걸 도와주거나 그밖의 등등 일을 합니다. 종자 Valet 여자의 경우는 몸종이라고 썼습니다. 남작에게 붙는 남자하인으로 이 이야기에서는 빌입니다. 남작의 옷을 다리거나 옷을 입히거나 커프스 단추를 닦고, 고르는 등의 일을 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참석할 파티나 행사에 어울리는 옷을 조언하기도 합니다. 비서가 있다면 비서가 하겠지만 모든 귀족이 비서와 종자를 전부 둘정도로 부자는 아니기 때문에... 00013 4. 마조가 들다 =========================================================================                            케이트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이안 역시 옷을 갈아 입은 후였다. 그녀 때문에 앞이 전부 젖었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보다도 케이트는 그녀를 안고 거의 삼 층을 올라온 이안의 체력에 놀랐다. 그는 헐떡이지도 않았다. 대체 이 저택에 오기 전에 무슨 일을 한 걸까. “용병 단에 있었던 건 아니죠?” 케이트의 질문에 이안은 재미있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 봤다. “그렇잖아요. 일개 하인이 이렇게 힘이 좋다니.” 뮈엘라는 마법을 배척하는 나라다. 무인들이 인정받는다. 때문에 내로라하는 무인들은 뮈엘라의 수도로 모여든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보다 용병에 대한 대우가 좋다. 기사는 더더욱 좋다. 하지만 기사가 하인이 될 리가 없으니 하는 말이다. “쓸데없는 소리.” 이번에도 이안은 그녀의 말을 쓸데없다고 일축하며 돌아섰다. 무슨 소리만 하면 바보취급이야. 케이트는 투덜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옷을 갈아입으러 온 톰 역시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저도 놀랐어요.” 톰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케이트를 안고 여기까지 올라온다는 거,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무슨 의미야?” 날카로운 케이트의 반문에 톰이 어깨를 움츠리고 말을 고쳤다. “케이트가 무겁다는 게 아니라, 사람을 안고 올라온다는 게 쉽지 않다는 뜻이에요. 한, 두 층도 아니고.” 그 정도 라면야. 케이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케이트보다 어린 톰은 그녀가 아니었다면 몇 번이나 잘렸을지도 모른다. 빌은 남의 실수를 덮어줄 사람이 아니었고 데이지는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앤은 부엌에서만 일하니 자동적으로 그의 실수를 덮어줄 수 있는 건 케이트 정도였던 것이다. 지금의 실수만 해도 데이지나 빌이었다면 난리가 났을지도 모른다. 그녀였으니 아무 말 없이 지나가 줬다. “그렇군.” 앞서 가던 이안이 발걸음을 멈추자 이번에도 케이트는 그의 어깨에 이마를 부딪쳤다. 아, 아파. 그녀가 이마를 문지르는 것을 무시하고 이안이 입을 열었다. “이 저택은 왜 사용의 방이 지붕 아래에 있는 거지?” 보통 사용인의 방은 지하에 위치한다. 정확히 말하면 반지하다. 일 층이 지면에서 일 미터쯤 올라와 있고 그 아래 지하는 저택의 주인들이 내려올 일 없는 것들로 채워진다. 주방, 사용인의 방, 식료품 창고 같은 것들. 그런데 이 저택은 지하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건 주방과 사용인의 휴식실정도였다. 이안이 이상하게 여기던 점이었다. “원래는 우리 방도 지하에 있었어요.” 들어온 지 일 년 남짓인 톰이 알 리가 없다. 케이트의 대답에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창고를 증축하면서 사용인 방을 지붕 위로 옮긴 거라고 들었어요.” “창고를 증축한다고?” “사용인 방을 전부 터서 보관실로 만들고 지붕 아래에 새로 방을 만든 거죠.” 그래? 이안이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톰이 그녀의 곁에 다가와서 물었다. “케이트, 잘 알고 있네?” “아, 엄마가 여기 하녀셨거든.” “어, 그래? 여기서 살았어?” “아니, 마을에서. 엄마는 출퇴근했거든, 우왁!” 이번에도 예고 없이 이안이 걸음을 멈췄다. 두 번째로 이마를 박은 케이트의 등에 톰의 가슴이 부딪혔다. 나 오늘 일진이 엄청 안 좋은 게 아닐까. 케이트가 어디를 먼저 문질러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사이 이안이 그녀를 쳐다봤다. “출퇴근했다고? 원래는 다들 출퇴근했다는 말인가?” “어, 몇 명 빼고는요.” 오늘따라 말이 많네.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케이트는 먼저 이마를 문질렀다. 이안이 이렇게 말이 많은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하녀 장도 말하지 않았던가. 살다 살다 저렇게 말없는 남자는 또 처음이라고. 이안이 뭔가를 더 물으려 했을 때 계단 아래서 데이지가 외쳤다. “이안, 톰! 점심 식사 시중이요!” 아차! 톰이 깜짝 놀라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김없이 하녀 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톰! 뛰지 마라! 뭐였을까. 케이트는 계단을 내려가는 이안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키가 큰 덕에 달려 내려가는 톰과 달리 이안은 조금 빨리 걸었을 뿐인데도 그를 따라잡았다. 사용인의 방이 어디에 있는지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지? 일반적으로 창고를 확장한다면 저택 외부에 짓게 마련이다. 하지만 남작 부부는 그랬다간 일하는 사람들이 번거로워진다며 사용인의 방을 지붕 아래로 옮겨주고 지하를 창고로 만들었다. 지붕 아래를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드는 게 외부에 창고를 만드는 것보다 더 돈이 들어간다. 게다가 사용인이 외부 있는 창고를 이용하기 번거로울 걸 걱정해주는 주인이 어디 있는가. 대단히 관대한 주인이라고 마을 내에도 칭송이 자자하다. 씀씀이도 넉넉해서 마을에 일이 있을 때마다 큰돈을 거침없이 기부한다. 고아를 채용하는 것도, 결혼하는 하녀에게 넉넉한 지참금을 줘 보내는 것도 그렇다. 그런데도 다들 고마움도 모르고 밤에 몰래 도망가거나 지참금을 받고도 한번 찾아오지 않는다고 로더 부인은 투덜거렸다. “케이트, 아프다고 엄살 부릴 생각 말아라!” 주방으로 들어가자 요리사가 그녀의 손에 그릇을 쥐여주며 말했다. “빨리빨리 저어.” “뭘 만드는 건데요?” “수플레. 디저트로 내갈 거니까 어서 하렴.” 뭐?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그릇 안에 든 재료를 젓기 시작했다. 수플레가 디저트로 나가려면 식사 시작과 동시에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서 지체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정신없는 업무가 시작되면서 그녀의 생각은 중단되었다. 사용인의 점심 식사도 끝이 나고 약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톰과 빌은 휴게실에 앉아 카드놀이를 시작했다. 이안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수습 하녀들은 요리사가 시킨 감자 껍질 벗기기가 한창이었다. 케이트는 차를 마시며 톰에게 빌이 카드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 애썼다. “잠깐 여기 좀 보게.” 집사가 들어오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덕분에 빌의 소매에서 숨겨뒀던 카드가 팔랑 떨어졌다. “아, 치사하게!” 저도 모르게 톰이 소리치자 집사가 그를 쳐다봤다. “뭐가 치사하다는 건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데이지는 킬킬거리며 카드를 집어 톰의 손에 쥐여주었다. 젠장. 에이스잖아. 톰의 투덜거림을 무시하고 집사가 입을 열었다. “이틀 후에 남작님의 친구분들이 오실 예정이네. 다섯 분 정도. 그러니 손님방을 정리하고,” “잠깐만요!” 요리사의 난입이 시작됐다. 다들 흥미진진하게 보는 사이 그녀가 두 팔을 들어 올리며 거칠게 말했다. “주방에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손님이 다섯 명이라뇨!” “괜찮아. 이삼일 만 묵고 가실 예정이야.” “하루만도 식사만 세 번에 티타임도 있잖아요! 그걸 혼자 어떻게 감당하란 말이예욧!” “그것 말인데.” 집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마을에서 사람들이 도와주러 오기로 했네. 손님이 오시면 보통 그렇게 해 왔잖아.” 그렇긴 했다. 저택은 항상 손이 부족하다. 그러니 이런 일이 있으면 마을에서 약간의 돈을 받고 여자들이 도와주러 오곤 했다. 보통 주방일과 빨래 정도. 저택을 돌아다녀야 하는 청소를 시키는 일은 없다. “주방에서 일할 아이는 구하고 있는 거겠죠?” 요리사의 항의에 집사는 한숨을 쉬며 케이트를 쳐다봤다. 설마. 불안한 느낌에 그녀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구하고 있어. 그렇지만 구해지기 전까지는 케이트가 주방 일을 해주게.” 맙소사. 왜 불길한 느낌은 한 번도 틀리질 않는 걸까. “임시이긴 하지만, 케이트는 주방일도 할 줄 아는 걸로 아는데?” 케이트는 어깨를 늘어트리며 대답했다. 네에. 주방일 뿐이랴. 다림질도 할 줄 안다. 그녀가 뭘 할 줄 아는지 알면 다들 놀랄 것이다. 집사는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새로 주방에 사람이 구해지기 전까지는 케이트가 수고해 주게.” 주방 일은 전혀 좋지 않다. 빨래나 청소야 하루 이틀 미뤄도 되지만 식사는 삼시세끼 꼬박꼬박 먹어줘야 하니까. 고작 이틀 요리사의 지시를 따라 일해 봤지만 지옥이 따로 없다. 그녀는 케이트가 뭘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감자를 으깨는 것 하나에도 너무 으깼네, 덜 으깼네 하면서 트집 잡기 일쑤였다. “도와줄 사람 중에 남자도 포함됩니까?” 이번에는 빌이 손을 들고 말했다. 집사는 그를 쳐다보고 주의 깊게 말했다. “아니, 빌. 남자는 너희 셋뿐이야.” “그럼 그분들 종자도 따라오는 건가요?” “...그래. 그렇지.” 이윽고 집사는 빌이 말하려 한 게 뭔지 깨달았다. 방이 부족하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변했다. 생각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며칠 전 내린 비로 아직 방은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 제가 앤의 방을 써도 될까요?” 이 상황에 데이지가 손을 들고 말했다. 허. 케이트가 그녀를 쳐다봤지만 데이지는 케이트를 쳐다보지 않았다. 설마 어제오늘 일로 삐진 건가. 케이트가 당황하는 사이 데이지는 계속해서 말했다. “어차피 그 방, 케이트는 안 쓴다고 했잖아요. 저 쓸래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케이트에게로 몰렸다. 빌어먹을. 이렇게 얄밉게 굴 줄이야.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겠냐는 집사의 질문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쓸 수 있는 방은 어떻게 되지?” 집사의 질문에 빌이 대답했다. “비에 젖은 방은 앞으로 일주일은 더 있어야 할 겁니다. 지붕을 보수해야 해서요.” 이런. 집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손님의 종자를 여관에서 묵으라고 할 수도 없고. 여관이라는 말에 케이트는 여관 뒷마당에서 봤던 남자를 떠올렸다. 수사관. 그 남자가 아직 거기 있을까. “손님방에서 묵으라고 하면 안 되나요?” 이번에는 톰이 손을 들고 의견을 냈다. 모두의 시선이 한심하다는 듯 변했다. 어, 왜요? 당황한 톰에게 케이트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손님이 다섯 분 오신다면 종자도 다섯 명 온다는 말이거든.” 집사는 혀를 차며 부연 설명했다. “다섯 명이나 되는 사람을 손님방에 몰아넣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어...톰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불쌍한 톰. 케이트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때 이안이 뒷문으로 들어오다가 멈춰 섰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뭡니까?” 이안의 질문에 데이지가 나서서 설명했다. 손님이 다섯 분 오시는 데 그분의 시중을 들 사용인이 쓸 방이 없다는 것을. 열 명이나 되는 남자가 잘 방이 여관에 있을지 모르겠다며 데이지가 나름대로 농담을 던졌는데 그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흥. 그것 참 고소하다. 민망해 하는 데이지를 보며 케이트는 속으로 웃었다. 아까 그 얄미운 행동을 본 탓에 그녀를 동정하기는 어려웠다. “육아 실이 있지 않습니까?” 이안이 툭 내뱉었다. “거긴 안 쓴지 이십년도 지났어. 아무리 사용인이라지만 외부에서 온 사람을 묵게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집사의 반대에 이안은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건방져. 케이트는 주위를 둘러보고 그렇게 생각한 게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들 이안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은 안 되지만 우리는 상관없죠.” “우리?” 이안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케이트는 침을 삼켰다. 젠장. 불길한 기분이 오늘로 세 번째다. “마부는 여관에서 묵는 거고, 남은 다섯 명이 이 저택에서 묵을 방이 부족한 것 아닙니까? 그럼 저와 네 명 정도가 육아 실에서 하룻밤만 지내면 될 텐데요.” 엇하고 데이지가 신음하는 게 들렸다. 그렇게 되면 자동으로 수습 하녀 둘과 케이트, 이안이 육아 실을 쓰게 된다. 데이지는 이미 앤의 방을 쓰겠다고 손들었으니 인제 와서 결정을 번복했다간 우스운 꼴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집사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거기서 잘 수 있겠나.”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젠장. 케이트는 인상 쓰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게 최선이었다. 그렇게 결정되었다. ============================ 작품 후기 ============================ 그러고보니 현재 이 글을 업뎃하는 시간 기준으로 선작과 추천의 차이가 3개네요. 추천 두번 하신 세분 손들어 주세요. 제 사랑을 드릴게요. 아참, 또 까먹을 뻔 했네. 이번에 소개하는 등장인물은 앤 입니다. 빨간머리 앤이 아니라 금발머리 앤. 금발에 파란 눈. 빨간머리앤과 닮은 점은 주근깨가 가득합니다. 약간 푼수끼가 있긴 한데 상냥한 성격. 케이트보다 조금 먼저 저택에 들어왔습니다. 데이지와 마찬가지로 이안을 선망하는 부엌하녀로 요리솜씨가 꽤 훌륭합니다. 남작부인의 몸종인 로더 부인과 하녀장을 제외하고 가장 오래있었던 하녀 (그래봤자 삼년;;)이기 때문에 독방을 쓰고 있었습니다. 현재 시점으로 사라진 상태. 남자가 있어서 도망쳤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00014 4. 마조가 들다 =========================================================================                            뮈엘라에서 재수가 없다는 것을 마조가 들었다고 한다. 어원은 정확하지 않다. 고대 새떼가 나타나면 나라에 흉 운이라는 의미였다는 설도 있고 전쟁터에서 패전을 알리는 전서구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케이트는 분명 마조가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일주일 만에 방을 두 번이나 옮길 리가 없지 않은가. 이년이 넘게 살면서 단 한 번도 옮기지 않았던 방이다. 이게 다 이안 때문이다. 케이트는 자신의 짐을 들고 앞서 내려가는 이안의 등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저 녀석이 오고부터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앤이 도망쳤고 방에 비가 샜으며 방만 두 번 옮겼다. 거기에 어깨는 멍이 들었고 빨래하다가 넘어지기까지 했지. 하나하나 따지면 이안과 관련된 건 한 가지밖에 없지만 지금 이 순간은 마음이 삐딱해진 케이트가 이안의 탓으로 돌리기엔 딱 좋았다. 게다가 데이지가 나를 적대시하기 시작했지. 저 이안 때문에, 젠장. 케이트는 짐을 끌어안고 내려가다가 끙하고 소리를 냈다. 어깨가 아팠다. 어떻게 움직이면 멀쩡하다가도 어떻게 움직이면 움찔할 정도로 고통이 가해져 온다. 의사가 괜찮다고 했으니 문제없는 거겠지. 그녀는 애써 통증을 무시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 아래에서 이안이 그녀를 한번 쳐다보더니 몸을 돌리는 게 보였다. 뭐였지? 케이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남작의 자식들은 모두 성인이다. 막내인 아들 마이크가 올해 스물이니 마지막으로 육아 실을 쓴 게 최소 십 년 전이라는 말이 된다. 이안은 관리가 전혀 안 된 계단을 내려다봤다. 하기야 하녀가 고작해야 네 명이다. 그 중 두 명은 수습 하녀. 한 사람분의 일을 할 수 있는 건 두 명밖에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안 쓰는 육아 실까지 관리하기는 어려웠겠지. 그는 문득 생각나서 케이트를 쳐다봤다. 자기 몸의 반 만 한 짐을 안고 끙끙대며 내려오는 게 보였다. 계단은 먼지가 쌓여있고 망가져 있었다. 낡은 나무가 밟을 때마다 위험하다 싶은 소리를 냈다. 이안은 케이트와 눈이 마주치자 몸을 돌렸다. 여자의 치마란 생각보다 훨씬 걸리적거린다. 케이트는 조심조심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수습 하녀들은 먼저 방을 청소하겠다고 내려갔다. 주방 일을 하게 된 케이트와 식사 후 남작 내외의 오붓한 시간을 위해 술과 안주를 날라야 했던 이안은 조금 늦어 이제야 짐을 옮기게 된 것이다. 데이지는 이안에게는 도와주겠다고 나섰다가 차갑게 거절당했지만 케이트에게는 물어보지 않았다. 확실히 미움받고 있는 모양이다. 저택 안에 또래 하녀는 고작해야 네 명인데 그 중 하나에게 미움받는다니. 다시 생각해도 한숨이 나온다. 이게 다~ 누구 때문? 마음속에서 열렬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안 때문! 그 순간 열렬한 대답에 힘입었는지 케이트가 밟은 계단이 빠직하고 부서졌다. “엇.” 그녀의 몸이 기울어졌다. 으악, 끝장이다. 이상하게도 급박한 순간이었는데 주변의 모든 것이 하나하나 세세하게 들어왔다. 낡은 계단, 희미하게 켜진 불. 그리고 내려가고 있는 이안의 등. 뭐라도 잡기 위해 허우적대는 팔이 짜증날 정도로 느리게 움직였다. 계단을 구를 거야. 공포가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 여기서 구른다면 분명 어디 한군데 부러지는 걸로는 안 끝날 게 분명하다.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의 눈동자가 기우뚱하는 케이트를 포착했다. 그가 상황파악을 하기도 전에 케이트의 몸이 쓰러졌다. “악,”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려던 케이트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최소한 계단 모서리에 부딪혀 고통이 가해질 걸 예상하고 눈을 감았는데 아무런 감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그녀의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케이트가 슬며시 눈을 감았을 때 처음으로 이안의 표정이 확 달라져 있는 게 보였다.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하던 그의 차가운 얼굴은 믿을 수 없다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안은 믿을 수 없어 눈을 부릅뜨고 케이트를 봤다. 아니, 공중에 정지한 채인 케이트를 봤다. 계단을 구르려던 그 자세 그대로 그녀의 몸은 계단과 천장의 중간위치에 떠있었다. “...마법사?” 아니, 마법사라면 최소한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 그녀가 마법을 사용할 만한 매개체를 지니고 다녔던가? 그가 기억을 떠올리는 사이 케이트의 몸은 천천히 그의 앞으로 날아와 툭하고 떨어졌다. “악!” 이번에는 완성된 비명이 케이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천천히 이안의 시선이 내려갔다. 그는 자신의 발 앞에 떨어진, 말 그대로 공중에서 떨어진 케이트를 내려다봤다. 빨간 머리가 기울어지더니 그녀의 이마가, 곧이어 초록색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이게 무슨...?” 케이트의 중얼거림에 이안의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그대로 품에서 단도를 꺼내 케이트의 목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마녀인가.” “에? 어?” 난데없는 공격은 경황이 없던 케이트의 머리에 혼란을 가중시켰다. 갑자기 위협적이 된 이안의 태도에 당황한 그녀는 목에 닿는 서늘한 칼날에 놀라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어깨를 이안이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불길하게 느껴졌다. “대답해. 마녀냐.” “...마녀? 나?” 이 남자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질문과 이해할 수 없는 행동뿐이다. 대체 이 칼은 어디서 나온 거지? 평소에도 품속에 칼을 숨기고 다녔다는 건가?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이 남자 진짜 위험한 놈 아냐? 케이트가 다시 한 번 몸부림치자 이안은 그녀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아프잖아! 등에 계단 모서리가 닿아서 아팠다. 케이트는 인상을 쓰다가 목덜미에 닿은 칼날에 힘이 가해지는 걸 느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방금 날았잖아.” “날았다고요?” 모르는 척하는 걸까. 이안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그녀가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트는 그의 눈앞에서 날았다. 계단 윗단에서 그가 있는 아랫단까지 날아서 이동했다. 그는 바둥거리는 케이트의 몸을 내리눌렀다. 으으. 하고 그녀가 아프다고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뭐하는 거예요!” 케이트는 품 안으로 파고드는 이안의 손에 깜짝 놀라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 위로 내리누르는 남자의 몸에 이제는 셔츠 안으로 손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 남자가 미쳤나! 아까는 칼에, 이제는! “사람 살,” 비명을 지르는 순간 이안의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 남자 미쳤나 봐, 미쳤나 봐! 진짜 미친놈이야! 십 년간은 사용하지 않았던 계단 그리고 복도, 육아 실.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케이트는 있는 힘껏 반항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이안의 손을 깨물자 그가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미친개 같군.” 미친개? 케이트의 눈동자가 분노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따귀를 올려붙이려 했다. 하지만 여유 있게 이안이 몸을 틀어 피하면서 그녀의 등이 계단 모서리에 강하게 눌렸다. 헉하고 숨을 들이켜는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그녀가 깨문 자신의 손을 살폈다. 힘껏 깨물었는지 뚜렷하게 작은 치아 모양의 상처가 나 있었다. 검게 변하고 피가 고인 모습에 그는 다시 한 번 이맛살을 찌푸렸다. 손이 얼얼했다. 한동안은 장갑을 끼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안은 케이트의 목에 다시 칼을 들이댔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낙인을 찾으려는 것뿐이다.” “낙인?” 발버둥치느라 숨이 가빴는지 케이트는 헉헉대면서도 이안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낙인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야? 그 태도에 이안은 그녀가 등록된 마법사나 마녀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나라에 등록된 마법사나 마녀는 몸의 어느 곳에 낙인이 새겨진다. 보통은 보이지 않는 곳에 새기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몸을 살폈던 것이다. 등록되지 않은 마녀와 마법사는 그 즉시 병사에게 체포되어도 할 말이 없다. 불응할 경우 그 자리에서 바로 사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것들을 피해 뮈엘라의 마녀는 깊은 숲으로, 마법사는 타국으로 도망쳤다. 태어난 나라를 버릴 수 없어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는 도피를 선택한 소수의 마녀와 마법사도 있다. 그런 자들을 집시라 부른다. 집시인 걸까. 때때로 불법 마법사와 마녀가 생계를 위해 정체를 숨기고 일을 하는 경우가 있다. 마법에 관련된 일은 할 수 없으니 이런 하녀나 종업원과 같은 일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집시는 일한 저택에서 뭔가 돈이 될 만한 것을 훔쳐서 달아난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마녀가 아니야!” 그 말에 이안은 코웃음 쳤다. 이 나라에서 마녀와 마법사는 존재 자체가 불법이다. 스스로 마녀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그걸 믿을 필요가 있나?” 세상에. 그 냉정한 말에 케이트는 입을 딱 벌렸다. 호박색 눈동자가 이렇게까지 차갑게 보일 줄은 몰랐다. 그녀는 분을 못 이겨서 다시 한 번 이안을 때리려다가 저지당했다. 빌어먹을 자식! “그럼, 당신이 마녀가 아니라는 증거는 어디 있지?” 한 번 분노를 토해내자 머릿속이 가라앉았다. 이성적인 케이트의 반론에 이안은 흥미롭다는 듯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내가 마녀 따위일 것 같은가.” “그걸 내가 믿을 필요도 없지.” 똑같은 대꾸에 이안의 말이 막혔다. 케이트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렇군. 의외로 순순히 이안이 그녀를 놓아줬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자유가 된 케이트는 욱신거리는 몸을 끙끙거리며 일으켜 세워 최대한 이안에게서 멀리 떨어지려 애썼다. “네가 마녀가 아니라고 치지. 그럼 대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당신이 그런 것일 수도 있잖아.” 글쎄. 이안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계단에서 구를 뻔한 건 너야. 내가 굳이 너를 위해 마법을 쓸 필요가 없어.” “내가 마녀였다면 당신에게 들킬 위험을 무릅쓰려 했을까.” “스스로 능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마녀일 수도 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야.” 이거야, 원. 끝나지 않겠군. 이안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머릿속에 신경 쓰이는 작은 빨간 머리 계집애라는 케이트에 대한 분류는 짜증 나게 만드는 고집 센 빨간 머리 계집애로 변경되었다. ============================ 작품 후기 ============================ 요 며칠 자꾸 늦게 업뎃해서 오늘은 좀 일찍 올립니다. 지만 전 아직도 밖... 수사안 하인 이안. 이라고 했지만 사실 저 수상하다는 형용사 부터가 단서기때문에 대충 눈치 채셨을거 같은데 ㅎㅎㅎ 지금 이야기는 1부다 보니 등장인물의 관계 형성의 느낌이 더 크긴 해요. ㅎㅎ 딱히 설명할 등장인물이 있나 싶어서 살피다 보니 여러분의 미움을 받고 있는 데이지가 있군요. 데이지. 22세. 데일저택의 하녀입니다. 갈색머리에 갈색눈동자. 구빈원에서 자라서 이리저리 떠돌다 데일가에 하녀로 들어온 게 이제 일년이 좀 넘었습니다. 그 전에는 이런저런 일을 했습니다. 한번도 자기 소유의 것을 가진 적이 없기 때문에 (하녀로 들어와서도 케이트와 같은 방을 썼죠.) 자신의 것에 소유욕이 강한게 흠입니다. 좋은 남자 만나 빨리 가정을 꾸려 내 남편, 내 집, 내 아이 등등의 것을 갖는 것이 꿈입니다. 눈치가 빠르기 때문에 일년이 좀 넘었지만 하녀일을 꽤 잘하는 편. 00015 4. 마조가 들다 =========================================================================                            “정 그러면 남작님께 말씀드려 보자고! 치안 관을 부르면 되잖아요.” 이안이 말이 없자 다시 부아가 치민 케이트가 소리쳤다. 그녀는 이 마을에서 오 년을 살았다. 그녀가 마녀가 아니라는 건 마을 사람들과 데일 남작이 증언해 줄 것이다. 마녀라니 말도 안 된다. 이안의 이마에 주름이 생기는 게 보였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었다. 저것 봐. 남작에게 말하자는 말에 이안의 표정이 변했다. “이안, 거기서 뭐 해요?” 계단 위에서 누군가가 이안을 불렀다. 날카롭게 존재하던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이 깨졌다. 케이트는 뭔가를 들고 내려오는 데이지를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두자. 그에게 눌려 배긴 등이 아직도 욱신거렸지만 그녀는 참기로 했다. 어쨌거나 같은 저택에서 하루 종일 얼굴을 마주해야 할 상대다. 여기서 더 감정이 나빠져서 좋을 게 없다. 그녀는 굴러떨어진 자신의 짐을 들고 육아 실을 향했다. 뭐예요? 뒤에서 데이지가 이안을 향해 종알거리는 게 들렸다. 그녀의 등을 따라오는 이안의 시선도 느껴졌다. 모든 게 다 짜증 나서 케이트는 울고 싶어졌다. 앤이 보고 싶다. 데이지는 자신을 적으로 생각하는 듯하고 익숙지 않은 주방일은 고됐다. 수습 하녀는 아직 도움이 되기엔 부족하고 이안은 짜증 난다. “마조가 들었어.”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수습 하녀들이 치워놨는지 그녀가 쓰기로 한 방은 최소한 먼지가 가득하지는 않았다. 작은 방에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길어봐야 삼 일. 삼 일만 버티면 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케이트는 짐을 정리했다. 비가 샌 자신의 원래 방에도, 손님이 묶을 남자 숙소의 방에도 둘 수 없어 바리바리 싸들고 온 것이었다. 고작 한층 내려왔을 뿐이지만 환경은 훨씬 나았다. 숨죽일 필요도 없이 들리던 쥐가 달려가는 소리도, 얇은 벽 탓에 새어 들어오던 외풍도 없었다.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몰라.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에 누웠다. 조용했다. 수습 하녀들은 다 자는 모양이지. 깜빡깜빡 잠이 들려는 찰나 마치 누군가 귓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들렸다. “참, 이거 먹어요.” 뭐? 케이트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낯익은 목소리다. 하지만 둘러봐도 방 안은 그녀 혼자뿐이었다. 뭐지? 그녀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두운 복도는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귀신인가? 하지만 귀신이라기엔 목소리가 너무 낯익었다.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방에는 그녀 혼자뿐이었다. 잠결에 잘못 들었나? 그녀가 다시 침대에 눕자마자 낯익은 목소리가 귓가에 대고 말하듯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안 주려고 ...에서 가져온 거예요.” 이안이라고 했겠다? 케이트는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잘못들은 게 아니었다. 이건 확실히 데이지의 목소리였다. 애교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지? 그녀는 벽을 더듬어 가다 침대 머리맡에 환풍기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주방에서?” 이상하다는 듯한 이안의 목소리가 환풍로를 통해 흘러나왔다. 여기서 소리가 나잖아? 케이트는 입을 딱 벌렸다. 대체 이게 뭐지? 그러다 그녀는 여기가 육아 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밤에 아기가 깨서 우는 걸 듣기 위해 만들어진 환풍로인 모양이다. 맙소사.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두 사람의 대화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녀는 베개로 귀를 막고 잠을 청했다. 내일 아침도 일찍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서 스콘을 굽고, 쨈을 만들어야 한다. 젠장. 확실히 마조가 든 게 분명하다. 그녀의 불행은 다음날이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고 바구니를 쳐다봤다. 버터가 반이나 사라져 있었다. 아침에 상에 내가려고 남겨둔 버터였다. 문제는 마지막 버터였다는 점이다. “버터가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 아니나 다를까 요리사의 분노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쥐가 물어가기엔 너무 크다. 게다가 쥐가 버터의 반을 뚝 잘라 가져갈 리도 없지 않은가. 아껴먹는다면 세, 네 명은 빵에 발라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케이트! 대체 어떻게 된 정신머리니!” 그러게나 말입니다. 대체 이 저택에 왜 자꾸 이런 사건이 일어나는 거지? 요리사의 짜증을 한 귀로 흘리며 그녀는 이안을 생각했다. 그가 오고부터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마조가 들었다. 버릇처럼 중얼거리던 케이트는 요리사가 조리대를 손바닥으로 내려치자 고개를 들었다. “이거 어쩔거니! 오늘 주문해서 내일이나 올 텐데!” “할 수 없죠.” “뭐? 할 수 없어?” “없어진 걸 어떻게 해요. 일단 버터는 내가 지 말고 쨈만 세종류 내가야죠.” “그래, 말 잘했다. 쨈이 어디 세 종류나 있다던?” “아까 제가 만들었어요. 따듯해서 오히려 별미라고 이야기하면 될 거예요.” “오늘 점심에 쓸 버터는!” “제가 바로 가서 사올게요.” 그녀는 요리사의 말도 귓등으로 넘기며 앞치마를 벗었다. 마을은 그리 멀지 않으니 달려가서 얼른 사오면 점심식사까지는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일찍 일어나서 쨈을 만들어 두길 잘했다. 오후에 만들면 더울 것 같아서 아침에 만든 게 다행이었다. 케이트는 새로 만든 사과 쨈과 오렌지마멀레이드를 그릇에 덜어 내가라고 이야기 하고 문을 나섰다. 식사를 나르기 위해 계단에서 내려오는 남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 하나는 올라온 이안의 얼굴을 보자 뭔가가 탁하고 걸렸다. 재수 없어. 그녀는 가라앉은 기분을 날려버리기 위해 마을로 달음박질쳤다. 오늘치 우유를 배달할 때 주문하지 않았냐며 이상해하긴 했지만 목장주는 흔쾌히 버터를 내줬다. 큰 저택에서는 버터를 직접 만들기도 한다지만 데일 남작의 저택은 작다. 그리고 사람도 적다. 고작 두 명뿐인 주방에서 버터까지 만들 수는 없기 때문에 목장에서 사서 이용하고 있다. 다행히 데일 남작은 부유하기 때문에 넉넉한 돈을 주고 구입한다. 그러니 이런 일이 생겼을 때 하녀 혼자 와서 돈 없이 달라고 해도 주는 것이지만. 버터를 받자 케이트는 한시름 놓았다. 아침도 굶고 뛰어나온 탓에 시장기가 돌았다. 대체 주방에 있던 버터는 누가 가져간 걸까. 남작 내외는 어젯밤에 술안주까지 먹었으니 굳이 버터를 먹었을 것 같지는 않다. 두 사람의 아들인 마이크는 주방이 어디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먹고 싶다면 누군가를 불렀겠지. 케이트는 얼굴도 몇 번 본 적 없는 저택에 머물고 있는 손님 두 명을 떠올렸다. 시중을 드는 건 남자 사용인의 일이다. 청소와 주방 일을 맡는 여자 사용인이 만날 일이 없다. 손님의 요청으로 빌이나 톰이 먹을 것을 만들어 줬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케이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 없다. 빌이라면 그녀나 요리사를 깨웠을 것이다. 톰은 분명 뭔가를 떨어트려 주방 옆에서 자는 요리사를 깨웠을 테지. 어젯밤 이안이 방에서 나가는 소리가 났던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위치하는 환풍로때문에 이안이 뭔가 소리가 날 만한 행동을 했다면 케이트도 알았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며 걷던 케이트는 미처 앞을 보지 못하고 가로지르던 누군가와 부딪쳤다. “아야!” “으악!” 깜짝 놀란 상대 남자와 달리 오히려 작게 소리 낸 케이트가 뒤로 벌렁 넘어졌다. 남자는 부랴부랴 그녀를 일으켜 세우더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미처 확인을 못...” 남자의 목소리가 줄어들더니 이어지던 말이 끊겨버렸다. 케이트는 재빨리 버터가 망가지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 괜찮아요.” 그럼, 이만. 남자는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알아듣기 힘든 말투를 웅얼거리더니 모자의 챙을 잡아 내렸다. 어쩐지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은 그 행동에 케이트는 잠시 멍하니 쳐다봤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남자가 뒤돌아서자 어렴풋이 생각났다. “수사관님?” 남자의 등이 멈췄다. 그는 고개를 돌리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웅얼거렸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잘못 보기는 개뿔. 케이트는 한달음에 수사관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보려 했다. 남자는 깜짝 놀라 얼굴을 가리려 이리저리 몸을 틀었지만 그 행동은 오히려 긍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은 건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 “수도로 돌아가신 게 아니었어요?” “아, 그게...” 수사관은 모자에 손을 댄 채 웅얼거렸다. “다시 돌아왔다고나 할까.” “돌아왔다고요? 왜요? 범인이 이 마을에 있나요?” 생각해보면 대체 무슨 범죄였던 걸까. 그가 수사하던 게 뭐였는지 정확히 아는 사용인은 없다. 수도에서 수사관이 내려올 정도의 일이라는 건 대체 뭘까. “그게 그러니까.” 수사관은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다른, 다른 일로 왔습니다.” “어, 남작님께서는 아시나요?” “아뇨!”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우물거리던 수사관이 난데없이 케이트의 손을 움켜잡았다. 잡은 손이 너무 강해서 뿌리칠 수도 없었다. 케이트가 깜짝 놀라 멈추자 수사관 역시 자신의 행동이 너무 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손을 놨다. “정확해지기 전까지는 굳이 남작님께 말씀드려 걱정을 안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전에 왔던 일은 정확한 사건이었다는 말일까. 그런 것치고는 수확이 없었던 것 같은데. 수사관은 우물우물하더니 할 수 없다는 태도로 말을 꺼냈다. “실은 다른 범죄자가 이 마을에 숨어들어왔다는 제보를 받아서 왔습니다.” “범죄자라고요?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데요?” “극악무도한 녀석이죠.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상상초월? 케이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대체 무슨 범죄를 말하는 거지? 문득 머릿속에 어제저녁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던 이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맙소사.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남작님께 말씀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그 범죄자와 관계가 있는 건가요?” 수사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비밀입니다.” ============================ 작품 후기 ============================ 불금을 즐기고 계시겠죠? 저도 즐기느라 아직 집에 안들어 갔습니다. 전에 제가 추천 두번 하신 세분께 사랑을 드린댔더니 급 추천 누르신 분들. 귀여우세요 ㅋㅋㅋㅋㅋㅋ 뮈엘라의 수사관은 빨간 날 제외하고 평일 주 5회 연재됩니다. 즉, 내일과 내일모레는 쉽니다. 후후후후. 월요일날 뵈요~ 오늘의 등장인물은 빌입니다. 빌. 데일남작의 종자. 27세. 하인과 종자의 차이는 이안을 소개하면서 한번 언급했기 때문에 제외합니다. 젊은 남자 사용인 중에서는 가장 오래 일한 사용인 입니다. 이안과 비슷할정도로 키가 크긴 한데 좀 더 말랐고 뭔가 힘든일을 부탁할라 치면 늘 허리가 아프다는 둥 핑계를 대며 빠져나갑니다. 요령을 피우며 귀찮은 잡무는 톰에게 밀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안이 오면서 자신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난 그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연한 갈색에 잿빛에 가까운 눈동자. 00016 4. 마조가 들다 =========================================================================                            사실이구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걸 어쩌나. 어쩐지 데이지가 불쌍해졌다. 케이트는 수사관을 따라 주위를 살피고 물었다. “혹시 그 남자가 저택에 있는 남잔가요?” “의심스러운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의심스럽다마다! 케이트는 격렬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품에 단도를 숨기고 다니는 하인이 몇이나 있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앤이 사라지기 전에 이야기를 나눈 것도 이안이었다. 게다가 어제저녁. 케이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건 뭐였을까. 계단에서 구르려던 찰나 몸이 그대로 멈췄다. 이대로 죽는 구나 싶었는데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이미 계단 아래에 내려와 있었다. 다음순간 다가온 건 고통스러운 계단 모서리가 아니라 이안의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그녀는 마녀가 아니다. 스스로 마녀라는 걸 모르고 살아온 마녀도 있을 수 있나. 말도 안 된다. 그러니 그건 이안의 짓이어야 한다. 저택에 오기 전까지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 점도 그렇고 묘하게 사람을 겁먹게 하는 그 분위기도 그렇다. “스미스양?” 케이트는 오랜만에 듣는 자신의 성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수사관은 괜찮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음, 저기. 그게 그러니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케이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안이 수상하다고 말을 해야 하나? 하지만 그건 심증뿐인 것을 가지고 수사관에게 고해바치는 게 된다. 과연 수사관에게 이안에 대해 이야기해도 괜찮을까? 모든 게 그녀의 착각이라면? 혹은 이안이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면? 그녀가 주저하는 사이 수사관은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케이트에게 말을 걸었다. “불편하시다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전 저쪽 여관에 묵고 있을 테니 혹, 말씀하고 싶으시다면 조용히 찾아오시면 됩니다.” “네. 그럴게요. 죄송합니다.” 수사관이 웃는 얼굴로 사라지자 케이트는 그제서야 그가 오늘은 평범하게 옷을 입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색 셔츠에 푸른빛이 도는 검은색 바지. 하지만 옷이 무난한 덕에 얼굴을 기억하기가 더 쉬웠다. 서글서글한 얼굴이었다.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가 음산하다는 느낌마저 드는 누구씨와 달리 부드럽고 편한 느낌이었다. 케이트는 손에 들린 버터를 떠올리고 저택으로 재빨리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수사관의 이름이 뭐였지? 손님이 도착하자 저택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일손이 부족한 탓에 마을에서 도와주러 온 여자들에게 주방을 맡기고 케이트는 잠시나마 다시 원래 일로 복귀했다. 침실을 정리하고, 복도를 쓸고, 창문을 닦고. 일이 바쁜 탓에 이안과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바쁜 탓에 계단 사건도 그다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 일이 다시 생각난 것은 저녁 식사가 막 시작된 후의 일이었다. “케이트, 지금 시간 괜찮아?” “나?” 식사를 나르기 위해 주방에 들어온 빌이 물었다. 청소를 마치고 침실준비까지 마친 케이트와 데이지는 주방에 앉아 요리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리사의 트집은 저택의 사용인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었다. 마을에서 도와주러 올라온 아낙들에게도 기탄없이 가해진 탓에 주방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왜? 뭐 도와줘?” 케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녀가 할 일은 다 했으니 빌의 일을 좀 도와줘도 상관없으리라. 반면 데이지는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읽지도 못하는 잡지를 팔랑팔랑 넘기고 있었다. 전에 케이트가 한 번 읽어준 잡지였다. 대충 내용을 알고 있으니 삽화를 보면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다. “바빠 죽겠는데 이안이 몸이 안 좋다고 했거든.” 빌이 투덜거리며 접시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보였던 이안이 보이지 않는다. 케이트는 그녀가 바빠서 이안과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은 뭘 가져가죠?” 손님을 따라온 종자가 묻는 바람에 케이트는 테이블 위에 완성되는 족족 나열되는 요리를 살폈다. 어, 이거요. 그녀가 세 번째 요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종자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접시를 집어 들고 식당으로 올라갔다. “저것 봐. 다른 저택의 하인이 일하게 하고 있다고.” 그것참 실례이긴 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빌은 위층에서 내려오는 톰에게 자신이 든 접시를 넘겨주더니 손짓했다. 이거 가져가. 그리고 허리에 손을 얹었다. “가서 그 녀석 괜찮은지 좀 봐줄래? 괜찮으면 내려오라고 해줘.” 케이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왜 하필 나한테? 지금 당장 만나고 싶지 않은 순위 1위가 이안이다. 목덜미에 닿은 서늘한 칼날의 감촉이 생생해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목에 손을 갖다 댔다. 진짜 미친놈이 아닐까 싶었다. 가능하면 만나고 싶지 않다. 그녀가 대답 없이 얼어붙어 있자 데이지가 벌떡 일어났다. “내가 갔다 올게.” 그렇다면야. 케이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거야말로 일거양득 아닌가. 이안을 만나고 싶지 않은 그녀는 쉬고, 만나고 싶은 데이지는 이안에게 가고. 그녀는 자리에 앉아 껍질을 벗기기 위해 담아둔 콩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그럼 난 주방 일이나 돕지, 뭐.” “아냐, 케이트가 갔다 와.” 뭐? 왜? 하고 데이지와 케이트의 표정이 동시에 변했다. “데이지는 가서 손님 옷 좀 살펴줘. 오는 길에 흙이 튀었는데 종자가 손봐도 잘 안 진다네.” “그걸 케이트보고 하라고 하면 되잖아.” “세탁은 케이트보다 네가 더 잘하잖아.” 빌의 말에 데이지는 곧 표정을 바꾸더니 흥하고 주방을 나가버렸다. 하아.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또 나한테 불똥 튀는 거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케이트, 무슨 일 있어?” “뭐가?” “묘하게 너랑 데이지랑 이안의 사이가...” 아아, 젠장. 케이트는 주방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전부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이지와 이안의 문제에 자신도 어느샌가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빼달라고. 제발. 그런 미친놈 따윈 상대하고 싶지 않다. 케이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그럼 문제없지만.” 빌은 접시를 집어 들며 말했다. “부탁 좀 할게.” 이런 건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다. 케이트는 집어 들었던 콩깍지를 집어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확인만 하면 되는 거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빌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녀는 어깨를 늘어트린 채 천천히 이 층으로 올라갔다. 확실히 마조가 든 게 분명하다. 이렇게까지 피하려는 일만 빵빵 터지는 걸 보면. 그녀는 애써 올라가는 계단을 보지 않으며 육아 실로 통하는 복도로 접어들었다. 문득 주방에서 칼이라도 하나 챙겨서 왔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안이 칼을 가지고 있는 걸 아는 마당에 맨몸으로 그에게 접근하다니 너무 위험했다. 케이트는 살금살금 소리를 죽여 이안의 방에 접근했다. 진짜로 몸이 아픈 걸까? 귀 기울여 문 안쪽의 소리를 들어봤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손잡이에 손을 대고 아주 천천히 돌렸다. 살짝 안의 상황만 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었을 때였다. 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한 틈이 생기자마자 안에서 문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케이트는 그대로 안으로 벌러덩 넘어졌다. “악!” 여전히 그다지 귀엽지 않은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거리던 케이트의 손이 뭔가를 잡아당겼다. 부욱하고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마치 들어와서는 안 될 경계 안으로 들어와 버린 듯한 기분이 들어 케이트는 살그머니 눈을 떴다. 명백하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이안이 한쪽 소매가 찢어진 셔츠를 입고 문 옆에 서 있었다. “어, 아니, 이거 그러니까...” “뭐하나.” 이건 그러니까...그녀는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나 새삼스럽게 치맛자락을 털었다. 먼지 따윈 없었지만 민망함을 감추기 위한 행동으로 이것만큼 좋은 것도 없었다. “실은 잠깐...” 빌이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오라고 시켰다는 말을 하려는 때에 그녀의 눈에 이안의 찢어진 소매가 들어왔다.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 찢어진 옷을 입고 있어요?” 이안의 표정이 이번에는 확실하게 경멸의 표정으로 변했다. 아니, 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케이트는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방에 들어오 아니, 넘어지면서 잡았던 게 그의 소매였던 모양이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그녀는 말을 돌렸다. “근데 아프다더니 괜찮은 모양이네요.” 경멸로 물들어있던 이안의 표정이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는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갑자기 허리를 숙이더니 기침하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 “콜록. 콜록, 콜록.” 입으로 기침하면서 천천히 침대를 향해 걸어간 그는 자연스럽게 이불을 덮고 누웠다. 그리고 케이트가 얼굴을 볼 수 없도록 등을 돌렸다. “허...?” 이게 지금 뭐하는 거? ============================ 작품 후기 ============================ 즐거운 월요일입니다. 즐거운 한주의 시작이죠. 즐겁게도 비가 오고있어요. ...개뿔. 이번 편 퇴고를 거치면서 일석이조가 일본인이 만든 단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일거양득으로 쓰라네요. 저는 착하니까 시키는 데로 합니다. 00017 4. 마조가 들다 =========================================================================                            케이트는 말을 잃고 돌아누운 이안의 등을 쳐다봤다. 마치 의식한 것처럼 그가 간헐적으로 기침을 내뱉었다. 콜록, 콜록. “허, 참.” 케이트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탄성을 내질렀다. 연기를 하려면 제대로 하던가. 이렇게 티 나는 꾀병은 또 처음 본다. 그녀는 이안이 덮은 이불을 확 잡아 내렸다. “바빠 죽겠는데 꾀병이예요?” 호박색 눈동자가 기울어졌다. 그는 케이트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연기가 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안은 케이트가 대단히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했다. “일어나요, 어서.” 케이트의 채근에 이안은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고 침대 밖으로 나온 건 아니었다. 그는 그대로 침대에 앉아있었다. 침대에 앉은 이안과 케이트의 눈높이가 똑같아서 케이트에게는 그리 위압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마음이 풀렸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를 무서워했다는 것도 잊고 이안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아, 뭐해요? 일어나라니까?” 이안은 우습게 느껴지는 케이트의 힘에 별 반항 없이 순순히 일어났다. 때때로 여자들이 잡아끌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다른 점은 그때와 달리 지금은 애교가 섞여 있지 않다는 점이다. 케이트는 일어난 이안을 문으로 밀었다. 아픈 것도 아닌데 방에서 꾀병이나 부리고 누워있다니, 꼬맹이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하지만 문까지 순순히 밀려준 이안은 무슨 생각인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가슴까지밖에 안 오는 케이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못나가.” “왜요!” “옷이 이 모양이잖아.” 아참. 케이트는 자신이 찢어 먹은 이안의 소매를 생각해 냈다. 실밥이 밖으로 나와 흉하긴 했다. 손님도 있는데 이런 꼴로 내보낼 수는 없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이안의 몸에서 손을 떼고 물러났다. 다시 자연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어딘지 모르게 기분 좋아 보였다. “한 동안 못나가겠군.” 으음, 확실히 잘생기긴 했네. 입가가 부드럽게 풀어지는 걸 보고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앤과 데이지가 빠진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 밖에 마을에서 온 여자들이 수군거리는 이유도. 오뚝하고 날렵한 코와 갸름한 턱. 그리고 평소에는 날카롭다 느껴지던 눈이 부드럽게 풀어지자 깜짝 놀랄 정도로 다른 인상을 풍겼다. 호박색 눈동자가 거의 황금색으로 보였다. 그 탓에 그의 차가운 이미지에 일조하던 검은 머리카락이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데이지와 앤는 그의 이런 표정을 보고 반한 걸까. 하지만 남자란 자고로 다정한 게 최고다. 어린 시절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로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남자는 여자의 속을 무너지게 만든다. 그 다정하던 아버지도 결국은 먼저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의 속을 긁어냈다. 그렇다면 차가운 것보다는 다정한 게 낫지 않은가. “못 나가긴 왜 못 나가요.”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터진 소매 정도야 꿰매면 되죠.” “꿰맨다고? 바느질을 하라는 건가?” 꿰맨다는 말에 바느질 말고 다른 의미가 있는 건가? 케이트는 머리를 갸우뚱했다. 당연하죠. 하지만 이안은 속 뒤집어지는 대답을 내뱉었다. “나보고 바느질을 하라는 건가?” “...네에?” 케이트의 입이 떡 벌어진 걸 보고 이안은 그제야 자신의 대답이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이 남자 바느질을 할 줄 모르는 건가? 그건 정말 말도 안 된다. 평소 자신의 옷을 관리해야 할 뿐 아니라 종자가 되길 원한다면 주인의 옷도 관리해야하기 때문에 바느질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 옷 한 벌을 만드는 수준까지는 필요 없다. 떨어진 단추를 달고 뜯어진 부분을 꿰매는 수준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하인인 이안이 할 줄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갓 하인이 된 어린 소년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케이트는 문득 이안을 훑어봤다. 적어도 스무 살은 넘어 보인다. 열 살짜리도 아니고 단추 하나 달 줄 모르는 하인이라니. 그래서 이런 시골까지 와서 하인을 하는 걸까? 그렇다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깟 바느질은 배운다고 할 것도 없다. 다른 것도 아니고 단추 다는 수준이니까 그냥 바늘에 실을 꿰서 몇 번 꿰매면 되는 것이다. 케이트의 이상한 시선을 깨달은 이안은 그제서야 휴대용 반짇고리를 꺼냈다. 조그마한 바늘과 약간의 실이 있는 일반적으로 사용인들이 소지하고 있는 제품이었다. 아, 적어도 반짇고리를 가지고 있기는 하구나. 그녀가 안도했을 때 이안은 어설픈 손놀림으로 바늘을 꺼내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어디 한번 두고 보자. 그런 심정에 케이트는 도와주려 하지 않고 이안의 태도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한참을 바늘을 살피던 그는 반짇고리 안의 실을 발견하고 집어 올리더니 자연스럽게 바늘 끝에 묶기 시작했다. “잠까안.” 당황한 건 케이트였다. 그녀는 깜짝 놀라 이안의 손을 잡았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뭐하긴? 실과 바늘을 잇고 있잖나.” 아니, 잇는다는 게 그런... 한 가지 확실한 건 알겠다. 케이트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은 확실히 진짜 바느질을 해본 적이 없다. “여기 바늘귀가 있잖아요.” “바늘에 귀가 있다고?” 이 남자가 정말 모든 일을 척척 해내던 그 하인이 맞는 걸까. 믿을 수가 없어 케이트는 입을 딱 벌렸다. 그녀의 표정을 본 이안은 자신이 뭔가를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다시 묶은 실을 풀려 애썼다. “됐으니 주세요. 내가 할게요.” 그렇다면야. 이안은 냄새나는 쓰레기라도 버리는 심정으로 케이트에게 재빨리 내밀었다. 살다 살다 당신 같은 하인은 처음 본다고 구시렁거리면서도 그녀는 능숙하게 바늘귀에 실을 꿰었다. “옷도 주세요.” “...옷?” “입고 있는 채로 바느질할 수는 없잖아요.” 그것도 나쁘진 않다. 실수인척하면서 그의 살에 바늘을 찔러 넣을 수 있으니까. 케이트가 그렇게 생각하며 웃음을 흘리자 이안 역시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재빨리 셔츠를 벗어 건넸다. 날이 더운 탓인지 그는 속에 러닝셔츠를 입고 있지 않았다. 흠, 집사에게 들키면 한소리들을 텐데. 케이트는 그의 맨가슴을 힐끔 쳐다보고 생각했다. 이안의 방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케이트는 느긋하게 셔츠의 소매를 수선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나동그라지면서 잡은 탓에 꽤 많은 부위가 뜯어져 있었다. 이상한 것은 셔츠가 새것이었는지 수선한 부분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여기 오기 전에 산 건가 봐요?” 정적을 깨고자 그녀가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에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여기 오기 전?” “이 셔츠요. 이 마을 가게에서 만든 게 아닌데요?” “그런 것도 알 수 있나?” “알 수 있다기 보다는...” 케이트는 천안에 바늘을 찔러 넣으며 말을 이었다. “마감이 좀 다르네요. 마을의 옷가게는 이런 식으로 마감을 안 하거든요.” “마감이라고?” 아, 그렇지. 이 남자는 살면서 바늘을 손에 쥐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남자지.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고 셔츠의 마감된 부분을 잘 보이도록 두 손으로 잡아 그에게 보였다. “보여요? 여기 선이 세 번 지나간 거.” 이안의 고개가 숙여지면서 그의 머리카락이 케이트의 볼에 닿았다. 간질간질해서 그녀는 몸을 틀었다. “잘 모르겠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안은 모르겠다며 머리를 들었다. 그럼 그렇지. 너무 많은 걸 바랬다. 케이트는 알겠다며 머리를 들다가 너무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확하고 이안의 체온이 느껴졌다. 엇하고 케이트는 약간 물러났다. 생각해보니 좀 위험하게 느껴진다. 상반신을 벗은 남자와 나란히 침대에 앉아 바느질을 한다니.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깜짝 놀란 케이트와 반대로 이안은 침착하게 일어나 문을 열었다. “이안, 손님들 옷을 손보고 있는데 혹시 손봐줄 옷이 있다면...”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핑곗거리를 쏟아내던 데이지는 그의 팔 사이로 보이는 광경에 입을 다물었다. 상반신을 벗은 이안과 그의 침대에 앉아있는 케이트. 헉 하고 데이지는 숨을 들이켜며 뒤로 물러났다. “아니, 손 볼 옷은 없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이안이 안을 돌아보고 다시 데이지를 쳐다봤을 때 그녀는 복도를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뭐예요?” 케이트의 질문에 이안은 밖을 내다보고 문을 닫았다. 그도 모르겠다. 뭐였는지. 왜 말을 하다말고 도망치는 거지? 이안은 방 한가운데에 서서 허리에 손을 얹었다. “글쎄.” 글쎄라니, 뭐가 글쎄라는 거야?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케이트는 재빨리 남은 부분을 정리하고 이로 실을 끊었다. “다 됐어요. 입어 봐요.” 빠르군. 이안은 가볍게 감탄하며 그녀의 손에서 셔츠를 받아들었다. 수선하면 이삼일은 걸리는 걸로 알고 있던 그로서는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케이트는 이안이 셔츠의 단추를 채우자 제대로 수선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쭉 빼고 쳐다보려 애썼다. 급기야는 팔짝팔짝 뛰다가 포기하고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이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는 이안에게 짜증을 냈다. “좀 앉아 봐요. 잘 됐나 보게.” 사람이 눈치가 있어야지. 그의 가슴밖에 닿지 않는 케이트가 이안의 어깨솔기가 잘 수선됐는지 보려면 그가 앉는 수밖에 없다. 이안이 의자에 걸터앉자 케이트는 그제야 그의 어깨를 탁탁 털고는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급하게 한 것치고는 잘했다. 정식으로 하녀가 되기 전 약간의 품삯을 받으며 옷 수선하는 일을 했던 게 이런 식으로 실력이 되어 돌아왔다. “됐나?” “네. 됐어요.” 케이트의 대답에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훌쩍 커져 버리는 그의 키에 케이트는 당황해서 뒤로 물러나다가 책상에 부딪쳤다. 아야. 하고 물러나려는 그녀의 손에 책상 위에 있던 종이가 흩어졌다. 우수수 떨어지는 종이를 두 사람은 서둘러 집어 들기 시작했다. “엇, 미안해요.” “상관없어. 다 빈종이니까.” 확실히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빈종이 다발이긴 했다. 어딘가에 편지라도 쓰려는 걸까. 그러다 그녀는 종이 한 편에 쓰여 있는 문구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금발머리. 주근깨. 푸른색 눈동자. 나이는 이십 대 초반. 여자. 이게 뭐지? 그녀가 생각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에서 이안이 종이를 빼앗아 갔다. “고맙다.” 그 말과 함께 케이트는 이안의 방에서 내보내 졌다. 어? 어? 그녀는 뭔지도 모른 채 터벅터벅 아래로 내려갔다. “이안은 어때? 아직도 안 좋아?” 지나가던 빌이 물었지만 그녀는 으응. 하고 대충 대답했을 뿐이었다. 종이에 씌여 있던 게 뭐였지? 금발에 주근깨. 푸른 눈. 이십 대 초반. 누가 봐도 그건 앤의 특징이었다. 왜 앤의 특징을 편지에 쓰고 있었던 걸까. 앤이 사라진 것과 이안의 편지.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마을에서 지내는 수사관이 생각났다.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했지. 그에게 찾아가야 하는 걸까? 하지만 대체 뭘? 뭘 이야기한단 말인가. 그녀가 아는 거라곤 고작해야 이안이 품에 단도를 지니고 다닌다는 것. 그리고 앤의 특징과 유사한 점을 종이에 써놨다는 것뿐이다. 그리고...마녀 혹은 마법사일 수도 있다는 것. 불안감이 온몸을 잠식했다. 그가 마녀가 아니라면? 그녀가 마녀라면 어쩌지? 그럴 리 없다는 이성의 틈바구니에서 그럴 수 도 있다는 예외가 비집고 나오려 하는 게 느껴졌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평소보다 양이 쪼오끔 더 많죠? 나중에 양이 좀 적은 날이 있을 거예요. ㅋㅋㅋㅋ 1부 당 한권정도의 분량으로 잡았기 때문에 현재 이 이야기는 반정도 진행이 되었습니다. 근데 사건이 별로 안터진건 저의 실수 ㅠㅠㅠㅠ 30회 내외에서 1부 마무리 짓고 2부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이런저런 방법을 이용해 보고 싶어서요. 지난번 달무리도 상당히 실험적이기도 했는데 지금 아니면 제가 또 언제 이런식으로 여러가지 방법으로 써보겠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로 또 쓰고싶은건 19금 걸고 연재할법한 내용들도 있구요. 이런 이야기는 너무 빠른가;;; 00018 5. 증표 =========================================================================                            사업을 의논하기 위해 왔다는 손님들은 데일 남작과 함께 상품을 확인하기 위해 잠시 집을 떠나기로 했다. 처음부터 결정한 일이었는지 어느샌가 용병들까지 불러온 탓에 작은 데일 가의 저택 앞마당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저 사람들이 다 용병인가요?” 케이트는 창문에 코를 대고 마당을 쳐다보는 수습 하녀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창문을 닦던 중이었는지 손에 걸레를 쥐고 있었다. “그럴걸.” “여자도 있네요.” 뮈엘라는 전사의 나라다. 능력만 인정된다면 다섯 살짜리도 용병이 될 수 있다. 케이트는 그렇게 이야기하려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용병이 되는 데 성별은 필요 없어.” 묘하게 수습 하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뭐였을까. 케이트는 걸레를 들고 창문을 닦기 시작하는 소녀를 보고 다시 요리로 시선을 던졌다. 오늘 점심은 사람이 적어서 해야 할 요리의 양도 적다. 마이크 역시 아버지를 따라 손님과 함께 집을 비운 덕에 현재 이 집에 있는 건 사용인 여덟 명과 남작부인. 그리고 남작부인의 친구뿐이다. 고작해야 열 명. 손님이 오기 전보다 적은 수의 사람이었다. “케이트, 다 했니?” 요리사의 호통에 케이트는 고개를 들었다. 오늘 점심은 차가운 닭고기와 삶은 야채. 그리고 버터를 듬뿍 넣어 구운 바삭한 패스추리와 오렌지 마멀레이드다. 디저트로는 복숭아 셔벗. 과연 데일 남작가다. 셔벗이란 건 귀족들 사이에서도 꽤나 고급디저트에 속한다. 그녀가 식혀서 찢은 닭고기를 보이자 요리사는 으음하고 신음했다. 뭔가 트집을 잡고 싶은데 트집 잡을 거리가 없을 때의 버릇이다. 그 사실을 눈치챈 케이트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더 잘게 찢을까요?” “됐다! 넌 씹기도 전에 목구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길 바라는 거니?” 그 정도면 됐다. 케이트는 어깨를 으쓱하고 닭고기가 든 그릇을 조리대 위에 놓은 뒤 면보를 덮었다. 요리사가 뭔가를 트집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나중을 위해 더 낫다. 한번 터지고 나면 진짜 터졌을 때 그 분노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다시 앞마당이 시끌벅적해지더니 말발굽 소리가 요란했다. 케이트는 창문을 통해 힐끔 쳐다봤다. 출발하려는 모양이다. 그녀와 요리사를 제외한 다른 사용인들은 출타하는 주인을 배웅하기 위해 나가 있었다. 아, 수습 하녀 한 명도 있었군. 케이트는 창문을 다 닦았는지 걸레를 들고 복도를 지나가는 소녀를 보고 생각했다. 항상 둘이 한 쌍이라도 되는 것처럼 함께 다니더니 하녀 장이 그녀에게만 창문 닦기를 시킨 모양이다. “자넷, 다했으면 이리와.” 케이트의 말에 수습 하녀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걸레를 세탁실에 놓고 손을 닦은 뒤 다가와서 말했다. “저는 질인데요. 자넷은 언니구요.” “아, 그래?” 흠흠. 케이트는 민망함을 가리기 위해 찻잔을 꺼내 차를 따랐다. 초여름에 뜨거운 차라니 생각만 해도 등이 후끈해지지만 적어도 민망함을 가릴 수 있지는 않은가. 그녀는 질에게도 찻잔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소녀가 꾸벅 인사를 하더니 찻잔을 감싸 안았다. 따듯한 날씨임에도 차가운 물로 걸레를 빨다 보니 손이 얼어있는 모양이다. 언니와 착각할 만도 한 게 질과 자넷은 거의 똑같다 싶을 정도로 닮았다. 둘 다 빼빼 말라서 약간 들창코인데다가 코끝에 주근깨가 가득했다. 케이트는 질의 얼굴을 살피고 두 사람의 차이를 발견해냈다. 질보다 자넷의 주근깨가 더 적다. “구분하기 어렵죠?” 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약간 우울하다 싶었던 소녀의 이미지가 웃는 순간 천진난만한 또래의 느낌이 살아났다. 케이트는 어제 굽고 남은 쿠키를 꺼내 건넸다. “먹어.” “먹어도 되나요?” “응. 하루 지난 거거든.” 데일 남작 내외도 마이크도 하루 지난 쿠키 따위는 손대지 않는다. 어차피 오늘 저녁이면 버려질 것. 질은 조심스레 쿠키에 손을 뻗더니 눈치를 살피며 한입 베어 물었다. 하루 지난 탓에 바삭함이 덜한 쿠키의 가루가 푸스스하고 그녀의 앞치마 위로 떨어져 내렸다. “맛있어요!” 질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아아, 얘도. 케이트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려 다시 찻잔을 들었다. 쿠키를 먹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게 분명하다. 저 심술 맞은 요리사가 먹으라고 할 리가 없지. “다 먹어도 돼.” “정말요?” 한 소쿠리 가득한 쿠키를 쳐다보며 질은 또다시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음. 케이트는 연거푸 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버릴 거니까. 이걸 버린다고요? 쿠키는 거의 매일 굽는다. 먹지 않아도 손님방이나 응접실에 놓아둔다. 남는 것은 몇몇 사용인들이 집어 먹기도 한다. 보통 빌이나 데이지다. 톰은 그런 걸 집어먹기엔 겁이 많다. 게다가 오늘 저녁 분의 쿠키가 오븐에 들어있으니 상관없는 것이다. 질은 좋아하다 말고 눈을 내리깔더니 주저하며 물었다. “안 먹고 가져가면 안 될까요?” “그래. 가져가서 언니랑 나눠 먹어.” 뭐 때문에 가져가면 안 되냐고 묻는지 눈치챘기 때문에 케이트는 면보를 가져다 소쿠리에 든 쿠키를 전부 쏟아서 건넸다. 몇 살쯤 됐을까. 고아의 나이라는 건 그다지 신빙성 있는 게 아니다. 겉으로 보기엔 삐쩍 말라서 열네 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언니랑 헤어지지 않고 같이 잘 왔구나.” 케이트의 말에 볼이 터져라 쿠키를 먹고 있던 질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쿠키를 삼키고 입을 열었다. “어, 네. 언니랑 헤어지지 말자고 약속했어요. 그래서 이걸,” 소녀가 목덜미 셔츠 속으로 손을 넣더니 펜던트를 꺼내 보였다. 반원모양이었다. “잊어버리더라도 나중에 만나서 확인할 수 있는 증표예요.” “음, 머리 좋네.” 케이트는 씩 웃으며 칭찬해줬다. 자넷 역시 반원모양의 펜던트 목걸이를 가지고 있겠지. 대체 언제 적 물건인 걸까. 펜던트는 여기저기 닳고 마모되어 있어 거기 새겨진 무늬가 뭔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꽤 오래전에 산 걸 부모가 아이들에게 나눠 준 모양이다. “케이트! 셔벗 좀 확인해라!” “네에.” 요리사의 호통에 질이 허둥지둥 펜던트를 옷 속에 숨겼다. 근무 중에 장신구를 하는 건 금지다. 하녀 장에게 들키면 혼날 게 분명했다. 케이트는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고 말하지 않겠다는 시늉을 했다. 점심 식사가 끝나자 집사는 사용인들에게 반나절의 휴가를 선사했다. 만세! 톰은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가 시선이 몰리자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하지만 케이트만은 제외가 되었다. 주방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쉬면 저녁 식사는 어떻게 준비하냐는 요리사의 반대에 케이트는 나중에 따로 휴가를 받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데이지가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안을 따라나가자 케이트는 피곤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 개월 만의 휴가에 신이 난 수습 하녀들은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저택 밖으로 달려나갔다. 못생긴 쌍둥이들 같네. 로더 부인의 심술궂은 말은 다행히 그녀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 했다.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케이트는 신이 난 사용인들이 정리도 하지 않고 나가버린 휴게실을 치우고 일어났다. 누군지 몰라도 찻잔에 차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녀는 찻잔을 전부 설거지 한 다음 앞치마에 손을 닦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한 시간 뒤에 식사 준비 시작할 거다! 요리사의 호통이 들려왔다. 이안의 방은 비어있었다. 데이지가 신이 나서 그에게 매달리다시피 하고 나가는 걸 봤으니 비어있는 게 당연하다. 케이트는 조심스레 들어가서 책상을 살폈다. 지난번에 가득하던 빈 종이는 온데간데없었다. 그것은 서랍 안에 들어있었다. 하지만 서랍 안의 종이 중에 지난번에 본 앤의 특징을 적은 종이는 없었다. 흠. 케이트는 허리에 손을 얹고 손바닥만 한 방안을 둘러봤다. 간이침대. 책상과 간이 의자. 그리고 옷장 하나. 침대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안이 잠들었던 흔적인지 가운데가 가라앉아 있는 게 보였다. 침대는 아무것도 없겠지. 그녀는 시선을 옷장으로 돌렸다. 사실 이안이 이 저택에 오면서 가져온 거라곤 당시 입고 있던 옷과 깨끗한 셔츠 두어 벌 정도였다. 케이트는 옷장을 열어 그 사실을 확인했다. 여분의 셔츠와 제복이 걸려있었다. “뭔가 없을까.” 그가 수상하다는 증거가. 그녀의 심증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것. 케이트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옷장 아랫단의 서랍을 열었다. 보통 여기엔 속옷 등을 넣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망측하게도 남자의 속옷과 양말이 보였다. 이 장면이 들킨다면 난 완전 정신 나간 여자로 찍힐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케이트는 주저하며 서랍 안으로 손을 넣었다. 데이지가 이런 식으로 속옷 사이에 돈을 숨기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녀 역시 그녀가 모은 돈을 양말 안에 넣어둔다. 만져보지 않는다면 그 안에 돈이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양말 중 하나에서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안에 있는 걸 꺼내보니 큼지막한 반지가 나왔다. 이게 뭐지? 케이트는 별생각 없이 손가락에 끼웠다. 엄지손가락에도 헐렁한 게 분명 남자 반지였다. 금으로 된 링에 가운데 뭔가가 조각되어 있었다. ============================ 작품 후기 ============================ 약속이 있어서 후딱 올리고 나가봅니다. 00019 5. 증표 =========================================================================                            “자네 여기서 뭐 하나?” 난데없는 목소리에 케이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열린 문 사이로 집사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취하지 않았는지 눈이 또렷했다. 젠장. 케이트는 서랍을 닫으며 허겁지겁 변명했다. “아, 빨래를 넣어주려고요.” “그래? 문 앞에 놔두지. 오해살 수 있으니 어서 나오게.” 맞는 말이다.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 밖으로 나왔다. 집사는 집안을 확인하려는 차원이었는지 이안의 방 안을 살피고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수습 하녀들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으아, 살았다. 케이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미친 모양이야. 그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없는 자신의 행동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세상에, 어디 남의 방을 뒤질 생각을 했을까? 얼굴을 손에 묻으려던 그녀는 피부에 닿는 딱딱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엄지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헉!” 케이트는 화들짝 놀라 손을 털었다. 헐렁했던 탓에 반지는 그대로 손가락에서 빠져 바닥을 한 번 튕기고 떨어졌다. 엄마야. 그녀는 잠시 반지가 떨어진 구석을 응시했다. 세상에. 내가 도둑질을 했단 말야? 너무 놀라서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 그녀가 결국 반지를 집은 것은 몇 분이 지난 다음이었다. 생쥐가 물어갔으면 좋겠다는 기대는 기대로만 그쳤다. 그래서 사람은 평소에 동물에게 잘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돌려놓자. 그렇게 생각하고 케이트가 방 밖으로 나갔을 때 타이밍 좋게도 복도를 한 바퀴 둘러본 집사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가 무슨 일이냐는 듯 그녀를 쳐다봤기 때문에 케이트는 마치 볼 일이 있어 나온 사람처럼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했다. 젠장, 젠장.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이미 아래층으로 내려온 것 너무 일찍 올라가면 의심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탓에 케이트는 어영부영 쉬지도 못하고 아래층에서 시간을 지내다 요리사에게 잡혀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그러다 결국 이안이 돌아왔다. “나 좀 더 구경하고 싶었는데!” 이안이 일찍 돌아온 탓에 그를 따라 돌아온 데이지는 이안에게 아양 섞인 투정을 부렸다. 이안만 아니었다면 저녁식사 시간 전까지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톰과 수습 하녀는 마을을 거닐며 오랜만의 저택 밖의 광경을 즐기고 있었다. 흥. 데이지는 감자껍질을 벗기는 케이트를 보고 고개를 돌렸다. 앞에선 아닌 척하면서 뒤에서 꼬리 흔드는 얄미운 계집애. 반면 생각보다 이안이 일찍 돌아오자 케이트의 심장은 쿵쿵대고 뛰기 시작했다. 젠장. 이렇게 되면 내일 아침까지는 돌려놓을 시간이 없어져 버린다. 그걸 어떻게 돌려놓지. 케이트의 머릿속에 양말 속에 숨겨둔 반지를 돌려놓을 생각으로 가득 찼다. 손님들이 가기 전에 돌려놓는 게 낫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이안에게 솔직히 말하면 어떨까? 그 생각을 하자마자 케이트는 머리를 저었다.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자신이 남의 물건에 손댔다는 사실을 털어놔야 한다는 사실도 사실이지만 반지가 일개 하인이 갖기에는 너무 비싸 보였던 탓이다. 금으로 된 링에 뭔가가 조각된 동그란 판이 달려있었는데 뭘 조각했는지는 살피지 못했어도 거기에 보석이 달려있던 건 기억난다. 귀족이나 가지고 있음 직한 반지였다. 부모님이 물려 준거라고 하기엔 너무 비싸다. 질만 해도 오래돼서 닳은 펜던트가 전부였지 않은가. 대체 그 반지가 어디서 난 걸까. 케이트는 감자를 깎던 손이 멈춘 것도 모르고 생각에 잠겼다. 훔친 걸까. 그럴 수도 있다. 수사관이 위험한 범죄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누군가를 죽이고 그의 반지를 훔친 거라면...? “케이트! 감자는 어떻게 됐니!” 느닷없는 요리사의 호통에 케이트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르르하고 바구니에 담겨있던 감자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얘 좀 봐. 뭐 하는 거니, 너?” 요리사의 힐난이 날아오자 그녀는 부랴부랴 바구니에 감자를 담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감자를 깎던 칼에 손가락이 베였다. “아야.”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찝찔한 피 맛이 입안에 퍼졌다. 아, 미치겠다. 그녀는 투덜거리며 반창고를 찾았다. 주방에는 반창고를 늘 상비한다는 이야기를 앤에게 들은 적이 있다. 찬장을 뒤지던 그녀는 손이 닿지 않자 의자를 가져오려고 몸을 돌렸다. “뭐야?” “아야!” 이안의 목소리가 들린 것과 그녀가 그의 가슴팍에 부딪힌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아아, 아파. 성한 곳이 없네. 케이트는 코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이안이 찬장에 손을 올린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엇 하고 그녀가 놀라는 사이 이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뭐냐고.” “에, 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이안의 한숨으로 흔들렸다. “뭘 꺼내 주면 되냐고.” 그제야 케이트는 이안이 그녀를 도와주려는 것임을 깨달았다. “어, 반창고요.” 그는 말없이 찬장에서 반창고를 꺼내 내밀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이 짜증 나는 빨간 머리 계집애가 자신의 눈을 피하는 게 보였다. 케이트는 찬장과 이안 사이에 갇힌 상태가 되자 안절부절못했다. 안 그래도 그에게 찔리는 구석이 있다. 머릿속이 다시 그녀의 방에 있는 옷장 안 양말 속으로 날아갔다. 그 안에 숨겨둔 반지. “고마워요.” 재빨리 반창고를 잘라낸 케이트는 다시 그것을 이안에게 내밀었다. 그는 잠자코 그것을 찬장에 넣었다. 일련의 과정이 이어지는 동안 케이트는 여전히 이안과 찬장 사이에 끼어 있었다. 대체 뭐지? 점점 더 케이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녀가 반지를 가져간 걸 들킨 게 아닐까. 생각해보면 빈 저택에 남아있던 건 로더부인과 하녀 장, 집사. 그리고 요리사와 그녀뿐이다. 갑자기 이안이 식칼을 들자 그 생각은 더욱 견고해졌다. 악! 제 발 저린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몸을 말았다. 이안은 칼을 든 채 덫에 걸린 작은 동물처럼 몸을 말고 떠는 케이트를 내려다봤다. 이 여자가 정말 마녀일까. 위협을 가해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를 벽으로 밀어버릴 정도의 힘은 각오했는데 허탈했다. 지난번의 일은 그녀의 소행이 아니었던 걸까.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속눈썹에 가렸다. 그가 잘못 생각한 걸까. 어쩌면 그 마법은 이 계집애가 한 짓이 아닐지도 모른다. 무인의 시대가 열리기 전 뮈엘라는 마법의 전성기를 맞이했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마법을 부여했다고 들었다. 귀족들은 집안을 마법으로 도배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계단을 오르내리기 귀찮다고 계단에 마법을 부여해 사람이 올라서기만 하면 자동으로 계단이 움직여 위와 아래로 손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것을 마법의 타락이라고 한다. 그때의 마법이 이 집에 아직 잔류하고 있던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손안에 쥔 칼을 쳐다봤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글쎄. 그게 이 저택에 남아있는 마법이든, 이 계집의 마법이든 그에게는 아무상관없다. 그는 칼을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날카로운 칼에 찔릴 아픔에 떨며 기다리던 케이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이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뭐지? 내가 환각을 봤나?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에는 분명히 반창고가 붙어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었던 걸까.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에 그녀는 잠시 멍한 채로 서 있었다. 생각해보면 근처에 다른 사람이 있는 주방에서 그녀를 찌를 리 없다. 꽤 간단한 답이 나오지만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찔릴 거라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바보 같아.” 킥킥거리며 데이지가 지나갔다. 벙해 있던 케이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설마 나 바보취급 당한 거야? 별안간 분노가 솟았다. 이 멍멍이 자식이. 그녀가 이안을 쫓아 가려할 때 요리사의 호통이 들렸다. 케이트! 아, 젠장. 케이트는 씩씩대며 깎은 감자를 요리사에게 가져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고 한마디 하려던 요리사는 분기탱천한 케이트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 작품 후기 ============================ 1. 훗. 지난 화에 이안이 등장할거라 생각하신 분들이 많군요. 저 그렇게 쉬운 사람 아님ㅋ 2. 지금까지 대댓글을 해당 편 대댓글로 올렸는데 조아라 시스템이 바꼈는지 확인해 보니 띄어쓰기가 거의 안되네요;;; 보기 불편하실 것 같은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하시나요? 그 다음화 후기에 적으시는 분들이 많던데 전 후기가 길어지면 보시는 분들 불편할것 같아서 대댓글에 달고 있었거든요... 3. 오늘은 날씨가 참 좋았지요. 그래서 오늘은 체리마루를 먹었습니다. ...체리쥬빌레랑 맛이 비슷하다길래 먹었는데 체리가 없엉 ㅠㅠㅠㅠ 00020 5. 증표 =========================================================================                            저녁 식사 후 일이 끝나자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던 케이트는 계단 윗단에 선 이안을 발견했다. 아직도 낮의 분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처음엔 어디 한군데라도 걷어차려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어느 정도는 풀린 상태였다. 그래도 이안이 미운 것은 여전하다. 그녀는 이안을 모른 척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는지 그는 그대로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사과하면 그따위로 굴지 말라고 한마디 해줘야지. 케이트가 그렇게 다짐하며 그의 곁을 지날 때였다. 이안이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그가 뻗은 손은 케이트의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케이트의 몸은 계단 아래쪽으로 밀렸다. 부릅뜬 그녀의 눈에 이안의 얼굴이 보였다. 무서울 정도로 침착한 표정이었다. 실수가 아니야. 케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일부러 민 것이다. 공포에 젖은 비명일지 그를 향한 원색적인 욕일지 모를 것들이 목구멍을 통해 튀어나오려는 순간 이안이 다시 손을 뻗었다. “이 나쁜,” 새끼야! 라는 단어로 케이트의 말이 끝났을 때 그녀는 이안의 품에 안겨 있었다. 생사의 기로에서 제일 먼저 나온 건 상대에 대한 원망이었던 모양이다.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이안은 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한 손은 케이트의 허리에 두른 채 계단 중턱에 주저앉아 있었다. 다행히 구른 건 아니었다. 오히려 허리를 강하게 팔이 죄는 탓에 케이트는 숨 쉬는 게 힘들었다. “이, 지금, 어, 뭐,” 어버버 거리는 케이트의 귓전에 이안의 나직한 한숨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그게 귓가에 들린 한숨 때문인지 계단을 구를 뻔했다는 공포 때문인지 그녀도 몰랐다. 한동안 두 사람은 그대로 계단에 주저앉아있었다. 일렁이는 촛불이 좁은 사용인의 계단 위에 음울한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사악하고 차가웠던 손발에 다시 피가 흐르기 시작하자 감각이 돌아왔다. 케이트는 이안의 품에 안겨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났다. 그림자 탓에 이안의 얼굴이 위험하게 보였다. 뭐라고 말하려던 케이트는 순간 말을 잃어버렸다. 호박색 눈동자가 거의 붉은색으로 보였다. 비난이든 항의든 뭐라도 말해야 하는 데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결국 그녀는 치맛자락을 걷어붙이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방 안으로 돌아갔다. 대체 뭐였을까. 분명 그가 밀었다. 그리고 떨어지려 하자 다시 잡아 주었다. 뭐지? 미친놈인가? 대체 이유가 뭐지? 낮에도 칼을 들어 위협하려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 케이트는 깨달았다. 그는 그녀를 시험하고 있다. 오싹하고 다시 몸이 떨렸다. 계단에서의 사건을 그는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그녀를 위험으로 몰아넣고 그녀가 마법을 쓰는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맙소사. 케이트는 얼굴을 손에 묻고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위험한 놈이다, 위험한 놈이다 했지만 이 정도로 미친놈일 줄은 몰랐다. 조금이라도 그가 그녀를 잡는 게 늦었다면 어땠을까? 그대로 계단을 굴렀을 것이다. 최소한 목은 부러졌을 것이다. 죽었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목숨을 가지고 위험한 실험을 했던 것이다. 문득 앤이 생각났다. 혹시 앤도? 거기서 그녀가 죽었다면 어땠을까. 그 차가운 눈으로,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의 시체를 아무도 모르게 숨겼을까. 품 안이 썰렁해졌다. 이안은 손안을 내려다봤다. 작은 체구가 품 안에 들어왔다가 딱딱하게 굳던 감촉이, 체온이 돌아오면서 몸이 와들와들 떨리던 감각이 생생했다. 자신이 나쁜 놈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작은 동물을 괴롭힌 것처럼 입맛이 썼다. 최악이다. 그가 밀었을 때 공포에 젖은 케이트의 초록색 눈동자가 머릿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젠장.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간을 얼마나 세게 잡았던지 손이 펴지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낚아채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런 생각까지 미치자 손끝이 조금 떨렸다. 아마도 케이트는 그를 무슨 괴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안은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몸을 움직이며 생각했다. 모든 일이 끝났을 때 그녀는 그를 미워할 것이다. 처음부터 그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다. 이안의 주변에 있는 여자는 딱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아무 이유도 없이 오직 그의 얼굴만 보고 좋아하는 여자. 데이지같은 여자들. 그리고 드물게도 그를 싫어하거나 무서워하는 여자. 눈치가 빠르거나 머리가 좋은 건 상관이 없다. 그냥 그런 여자도 있다. 그는 힐끔 케이트의 방문을 쳐다보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낫다. 다음날 점심 식사 후 집사가 사용인의 휴게실에 들어왔을 때 케이트는 최대한 이안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아있었다. 톰은 남는 나무 조각을 가지고 뭔가를 만들어 보겠다며 낑낑대고 있었다. 대체 뭘 만들 생각인지는 몰라도 완성되는 건 분명 주사위일 것 같다고 휴게실 안의 모든 사람이 생각하고 있을 때 로더 부인이 심술궂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 다쳐서 피나 안 나면 다행이지.” 마치 그 말이 주술이라도 되는 것처럼 칼이 톰의 엄지손가락 옆을 가볍게 베고 지나갔다. 다들 우오오! 하고 놀라던 차에 집사가 입을 여는 바람에 톰의 상처는 그렇게 조용히 묻혔다. “주인님과 손님들은 내일 오실 걸세.” 톰은 피가 아롱아롱 맺힌 손가락을 입에 넣으며 울상을 지었다. 상처는 크지 않다. 그냥 약간 베인 수준이다. 찬장에서 반창고를 꺼내 줘야 하나. 케이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집사가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니 케이트가 마을에 가서 마을 여자들에게 내일 새벽부터 와달라고 전하고.” “아, 네.” 집사의 시선이 요리사에게 향했다. “자네는 마을 여자들에게 좀 친절하게 대하게.” “내가 뭘 어쨌다고요?” 그녀가 어떻게 대하는지 아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양파껍질 벗기는 것 하나까지 구박하는 요리사다. 집사는 한마디 하려다 그만뒀다. 좋은 기회였다. 케이트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마을로 내려갔다. 오후 업무를 시작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톰은 손가락을 빨며 일어났다. 피는 이미 멎어있었다. 그래도 반창고는 붙여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시중을 들 때는 장갑을 끼기 때문에 반창고 붙인 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던 이안이 그대로 넘어졌다. “어머, 이안!” 호들갑스러운 데이지의 비명이 휴게실을 갈랐다. 일을 시작하려던 사람들 모두 이안을 쳐다봤다. 그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었다. “왜, 왜 그래요? 네? 왜 그러는 거예요? 어디 아파요?” 안 아픈 사람도 아파지겠다. 로더 부인의 심술궂은 중얼거림을 무시하고 하녀 장은 이안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니?” “모르겠어요. 이안이 갑자기 넘어져서...” 데이지는 눈물마저 글썽거리고 있었다. 케이트가 봤다면 코웃음 칠 장면이었다. “계단에서 미끄러져서...” “저런, 어쩌다?” 하녀 장은 그렇게 말하며 톰을 불러 이안을 부축하라고 명했다. 나도 아픈데. 톰은 입에서 손가락을 빼고 이안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었다. “계단에서 어쩌다 미끄러진 거예요?” 데이지의 재촉에 이안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넘어질 뻔한 케이트를 잡아주느라.” “저런.” 하녀 장의 탄성과 동시에 데이지의 눈이 변했다. 톰은 똑똑히 봤다. 그녀가 눈에 독기를 품는 것을. 여자란 무서워. 방년 19세의 하인 톰. 여자의 무서움을 알았다. “이를 어쩐다.” 집사가 고개를 쭉 빼더니 혀를 차며 말했다. “걸을 수 있겠나?” “네.” 그렇게 말하며 일어서던 이안이 비틀거렸다. 으앗. 그를 부축하던 톰 역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데이지가 부랴부랴 톰의 반대편에서 이안의 팔을 잡았다. 그래 봤자 이안의 키가 커서 두 사람이 그의 양어깨에 매달린 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거 안 되겠군.” 집사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안이 다쳤다고 말한 발과 방금 비틀거리며 절뚝인 발이 다른 발이라는 것을. “의사를 불러보고, 자네는 좀 쉬어야겠어.” “...죄송합니다.” 어색한 말투와 목소리로 이안이 사과했다. 사람들은 죄책감과 부끄러움에 목소리가 굳었다고 생각했다. 한편 저택 안에서 이안이 자신에게 어떤 덤터기를 씌운 줄 모르는 케이트는 며칠 전 일을 도와주러 온 부인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내일 새벽부터 와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남작님을 돕는 거라면 얼마든지 하겠는데, 거기 요리사가...” “아, 그거라면 집사님이 이번엔 절대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어요.” “그럴까아?”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을 뺨에 대며 여자는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케이트는 재빨리 손을 모아 잡고 말했다. “보수도 지난번보다 조금 더 주신다고 하셨고요.” “그래?” 여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왔다. 이 정도면 넘어왔다.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게다가 남은 음식도 좀 싸갈 수 있잖아요.” “하긴...그것도 괜찮지.” 하, 피곤해애. 결국 지난번에 왔던 모든 여자에게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케이트는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상쾌한 표정으로 웃었다. 요리사 그놈의 성깔머리 고치지 않으면 조만간 고생 좀 할 거다. 하늘이 벌하지 않는다면 그녀라도 언젠가 뒤통수를 후려칠 생각이다. 수란을 하라기에 죽어라 만들어놨더니 이게 에그 스크램블이냐고 했었지. 수란이 얼마나 귀찮고 손이 많이 가는 건데. 결국 케이트는 짜증 내며 에그 스크램블 십 인분을 다시 만들어야 했다. ============================ 작품 후기 ============================ 불금이라 후딱 올리고 나가봅니다!! 다들 불금 즐기세요!! 아참, 눈치챘는지 모르겠는데 이번주는 7시 30분 이전에 업뎃이 되었습니다. 왜냐면... 다음주는 12시쯤에 업뎃해야 할지도 몰라서... 우리, 엄마한테 혼날일 있으면 일단 청소부터 싹 해놓잖아요. 그쵸? 다음주 월요일에 만나요~ 00021 5. 증표 =========================================================================                            케이트는 방향을 바꿔 중심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손바닥만 한 동네. 중심가라고 해도 뭔가 대단한 게 있는 게 아니다. 여관과 상점이 몇 개 있는 거리를 중심가라고 부른다. 보통 마을 축제나 행사가 그 거리에서 벌어진다. 수사관을 만나는 것은 의외로 쉬웠다. 어쩌면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게 애석할 정도로 그는 여관 뒷마당에 자리 잡고 앉아 뭔가를 읽다가 그녀를 발견하자 손을 번쩍 들었다. “스미스양! 여기예요.” 정말 남작이 그가 여기에 있는 걸 모르는 걸까. 케이트가 약간 주저하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수사관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차 마실래요?” “어, 네. 주세요.” 마을을 걸어 다닌 탓에 목이 말랐다. 살짝 식은 차는 원샷 해버리기 좋았다. 케이트가 한 번에 마셔버리자 수사관은 빙그레 웃더니 다시 차를 따랐다. 목이 많이 말랐나 봐요. 서글서글한 인상에 호감이 들었다. 조각같은 미모지만 조각처럼 차가운 인상의 이안과 달리 사람에게 사랑받고 사람을 좋아한다는 인상이 드는 남자였다. 케이트는 문득 찻잔이 어디서 난건지 궁금해졌다. 주점을 겸해서 운영하고 있는 여관이다. 제대로 된 차와 다기세트가 있을 리 없다. “날이 참 좋죠?” “네?” 수사관의 말에 케이트는 새삼스럽게 주변을 돌아봤다. 그 말대로 좋은 날씨이긴 했다. 약간 뜨겁다 싶은 태양도 처마 밑에 앉아있으니 가려져서 좋았다. 그렇네요. 그녀는 살며시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신가요? 수사관의 질문에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여기에 놀러온 게 아니다. 케이트는 몸을 기울였다. “저택에 좀 수상한 하인이 있어서요.” “...하인 말입니까?” 수사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팔짱을 끼며 물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품에 검을 소지하고 다녀요. 게다가.” 케이트는 품속에서 반지를 꺼내서 내밀며 말을 이었다. “이런 반지를 가지고 있더라고요.” 수사관의 눈이 빛났다. 그는 케이트의 손바닥 위에서 반지를 집어 들었다. “이걸 어디서 발견하셨습니까?” “어, 그게...” 남자의 방에 숨어 들어가서 훔쳤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사관은 직격탄을 날렸다. “훔쳤습니까?” “그게 아니라!”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케이트는 주점에서 대낮부터 얼큰하게 취한 남자가 쳐다보자 얼굴을 붉히며 앉았다. “그게 아니라...” 그녀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속삭였다. “훔치려고 훔친 게 아니라 어쩌다보니까...” “어쩌다 보니까 말입니까?” 수사관은 무슨 의민지 이해 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훔친 거면 훔친 거지 어쩌다보니까 훔쳤다는 건 뭐란 말인가. 자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훔쳤다는 건가? 그는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돌렸다. 금으로 된 링에 동그란 문장같은 게 붙어있다. 뭔가의 증표처럼 보이기도 했다. 꽤 비싸 보인다. 수사관은 씩 웃었다. “혹시 그 하인도 이걸 압니까?” “반지가 사라진 거요? 아니면 제가 가져왔다는 거요?”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군. 수사관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둘 다요. “아마 모를걸요.” “사라진 것도 모릅니까?” “모를 것 같은데. 찾는 소리를 못 들었거든요.” 케이트의 말에 수사관의 눈이 동그래졌다. “찾는 소리...라고요? 소리가 들린단 말인가요?” 아, 그게. 케이트는 어쩐지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이안의 방에서 나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다. 그게 그녀의 잘못은 아니지만 어쩐지 부적절한 일을 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네...그게 사정이 있어서 그, 이안의...아, 이안이라는 건 그 하인의 이름인데요. 제 방에 이어진 환풍로에 소리가 들려요.” “하아.” 명백하게 어이없다는 한숨에 케이트의 얼굴이 붉어졌다. 완전 이상한 여자로 찍혔다. 남자의 방을 뒤지고 반지를 훔친 것도 모자라 소리를 몰래 듣고 있다아아아잠깐! “제가 일부러 듣는 건 아니거든요!” “아, 네. 압니다.” 수사관은 발끈하는 케이트에게 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그냥, 이안...그 하인이 이 사실을 모른다고 하니 어쩐지...” 그는 쿡쿡대며 웃기 시작했다. 그게 웃긴가? 케이트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찻잔을 들었다. 흠,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 무뚝뚝하고 차가운 이안이 자신의 방에서 나는 소리를 그녀가 다 듣고 있었다고 한다면 대체 어떤 얼굴을 할까. 오싹하고 무서워지면서 반면 즐거워졌다. “그 밖의 다른 수상한 사람은 없습니까?” “그 밖의 다른 사람이라고 해봐야...최근에 저택에 온건 이안 밖에 없는 걸요.” “그렇군요.” 수사관은 흠하고 손을 들어 턱을 만지더니 재차 물었다. “최근에 오지 않았어도 예전부터 일하던 사용인 중에 이상한 행동을 한다거나...그런 사람은 없습니까?” “예전부터 일하던 사용인이요?” 케이트는 무슨 의민지 몰라 고개를 들었다. 가장 수상한 건 이안이지만... “최근에 사라진 하녀가 있기는 해요.” “하녀 말입니까?” “네. 저랑 친했던 아이인데...갑자기 사라졌어요.” “가족의 곁으로 돌아간 게 아닐까요?” “그런 문제라면 저한테는 얘기했을 거예요. 게다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은 대부분 가족이 없는 걸요.” “하지만 스미스 양은 어머니와 여기서 살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느새 조사를 마친 모양인지 수사관은 거침없이 이야기 하다 입을 막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고작 삼년 전에 돌아가신 것을 이제야 떠올린 모양이다. 케이트는 표면이 일렁이는 찻잔을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이런 것까지 물어보면 실례겠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잘도 물어본다. “양친 모두 친척이 없었나요? 보통 스미스 양 나이에 부모를 잃으면 친척에게 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 그건.” 어쩐지 정곡을 찌르는 남자다. 별로 숨길 것도 아니어서 케이트는 솔직하게 이야기 했다. “반대 때문에 도망치셨거든요. 그래서 그쪽하고는 전부 절연한 걸로 알아요.” “그래요?” 수사관은 다시 한 번 흠하고 턱을 쓰다듬었다. 그렇다 해도 어린 딸이 혼자 남게 되었는데 고향이 어디인지, 다른 가족이 어디사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기본적으로 사이좋고 평화로운 집에서 자란 수사관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아참, 그런데요.” 문득 케이트가 찻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입을 열었다.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실례지만, 성함이...?” “네?” 아직 제 이름 모르십니까? 수사관은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이드입니다. 제이드 킬리언이요.” 죄책감과 동시에 부끄러워 케이트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수사관에 손님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녀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을 알아 무엇 한단 말인가. 그런 안일한 생각이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하는 케이트에게 제이드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 이 반지는 어떻게 할까요? 가져가시겠습니까?”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제이드가 물었다. 가져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다가 케이트는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이안의 것이 아니라면? 그가 흉악한 범죄자일 경우 그 반지도 누군가에게서 강탈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것이라면 당연히 돌려주는 게 옳지만... 그녀가 주저하며 자신의 의견을 말하자 제이드는 한참 껄껄대고 웃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이렇게 할까요? 일단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누군가 이런 반지를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은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다음에 만났을 때 알려드리면 어떨까요?” 과연 그걸로 괜찮을까. 혹시라도 반지가 정말 이안의 것이라면 케이트는 대단한 실례를 한 것이 된다. 후회가 들었다. 이런 반지 가지고 오는 게 아니었다. 그의 방을 뒤지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몰상식한 여자가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돼버린 걸까.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킬리언씨가 찾는 사람이,” “제이드라고 불러주세요.” “어, 네. 제이드씨가 찾는 사람이 이안이 맞나요?” “글쎄요.” 제이드는 턱을 손에 괸 채 싱긋 웃어보였다. “이안이라는 하인이 흉악한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만.” “...지난번에도 범죄를 조사하러 오셨잖아요. 지난번사건과 이번 사건이 연결된 건가요?” 이것 봐라. 제이드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좋은 편이다. “지난번에 제가 뭐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모르십니까?” “음, 사용인들은 알 필요 없다고 해서요.” “그렇습니까?” 과연. 그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그는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밀수입니다.” “...밀수요?” 물건을 몰래 사고파는 걸 말하는 건가? 이 마을에서? 케이트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이 작은 마을에 무슨 밀수를 할 만한 게 있단 말인가. ============================ 작품 후기 ============================ 즐거운 월요일되셨나요? 이번편은 쪼오끔 더 깁니다. 자르기 애매해서 걍 붙여버렸습니다. 이번주는 지난번에 후기에 적은데로 이시간 쯔음에 업뎃할 것 같습니다. 불편하시겠지만 걍 아침에 출근하면서 읽어주시면.... 00022 6. 불행한 사고 =========================================================================                            저택은 떠나기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데일 남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식사가 끝났다. 응접실에 간단한 술과 안주를 준비해 놨다는 집사의 안내에 따라 손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손을 까딱하자 빌이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새로 온 하인이 안 보이는데.” “발목을 삐었답니다.” “...그래?” 어쩌다가? 라는 질문 없이도 빌은 조근조근 설명했다. 계단에서 넘어지려던 케이트를 구하느라 다쳤답니다. 흠, 그래? 남작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표정이 지어졌다. “그 녀석은 어떤가?” “이안...말입니까?” “그래. 괜찮은 녀석 같던데.” “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습니다.” 그래? 남작의 시선이 빌에게 향했다. 빌은 시선을 피하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일을 잘하기도 하지만 의심스러운 부분도 있다. 그 부분이 그리 큰 건 아니지만 빌은 최대한 부풀려서 말했다. “방을 여기저기 살피기도 하고요. 길을 잃었다고는 하는데.” 이건 질투심이다. 빌은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깔려있었다. 그는 남작이 이안을 더 총애할까 봐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남작은 그런 감정까지는 읽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 여기 오기 전에는 어디서 뭘하고 있었다고 했지?” “상인의 집에서 일을 좀 했다고는 했습니다만...” “좀 더 알아보게.” 빌이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서자 남작은 미소를 지으며 손님들과 합류했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하인은 가장 궂은일을 하기 마련이다. 케이트는 구운 메추리고기를 식히기 위해 창틀에 내놓다가 구두를 닦고 있는 이안을 발견했다. 허허. 꼬마애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구두 하나 닦느라 끙끙거리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그 옆을 데이지가 서성거리는 게 보였다. 괜히 아는 척하지 말아야지.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며 두 개째의 구운 메추리고기를 창틀에 내려놨을 때 톰이 지나가고 있었다. “...구두 닦아본 적 없어요?” 톰의 질문에 이안은 고개를 들었다. 구두를 닦아 본 적이라니. 한 번도 없다. 그가 말이 없자 톰이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이안은 자신보다 작은 톰이 능숙하게 구두를 닦는 걸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지난번 바느질도 그렇고 그가 가진 기술이라는 건 전혀 쓸모가 없는 모양이다. 때마침 지나가던 로더 부인이 심술 맞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허우대만 멀쩡한 녀석 하나 추가군.” “뭐라고요?” 발칵대든 것은 이안이 아니라 데이지였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시끄러워지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케이트 역시 구운 닭고기를 내놓다 말고 창문을 열었다. “내가 틀린 말 했어? 하인이 구두 하나 못 닦는다는 게 말이 돼?” “못 닦을 수도 있죠.” 얼씨구. 로더 부인의 입꼬리가 한쪽만 끌려 올라갔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말했다. “아주 몸이 다셨구만, 몸이 달았어. 네 서방이라도 돼? 치마 폭에 감싸고 놀지그래?” 와...적나라한 비난에 케이트의 얼굴이 화끈해질 정도였다. 그녀는 입을 딱 벌렸다. 그렇지 않아도 이안을 향한 데이지의 구애는 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다. 매일 밤 잠자기 전까지 이안의 방에서 들리는 데이지의 애교 어린 목소리가 익숙해지고 있었다. “아줌마가 뭔데 상관이야!” 데이지의 발악은 거의 절박하게 들렸다. 정작 원인이 된 이안은 그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싸우는 두 여자는 모른척하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헉, 뭐, 뭐예요.” 남의 싸움 구경하는 게 뭐 그리 좋은 일이라고 당황한 케이트는 재빨리 창문을 닫았다. 이안의 시선이 케이트를 한번 훑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시끄러워서.”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지? 자기 때문에 여자 둘이 싸우는데 지는 시끄러워서 도망쳤다고? 어이가 없어서 케이트의 입이 다시 한 번 벌어졌다. 그의 뒤를 톰이 구두를 들고 쫄래쫄래 따라 들어왔다. “와, 무섭네요.” 천진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케이트는 톰의 순진한 발언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무섭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대체 어떤 강철 심장이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나와는 상관없다는 태도인 이안이었다. “여기 있을 거면 채소라도 찢어줘요.” 당당하게 샐러드용 채소가 든 그릇을 이안 앞에 내려놓고 나니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안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혹은 저질렀을지 모르는) 남자다. 그런 사람을 이렇게 부려 먹어도 되는 걸까. 의외로 그는 잠시 눈앞의 채소의 산을 보더니 손을 뻗어 먹기 좋은 크기로 채소를 찢기 시작했다. “으아앗!” 그 모습을 본 케이트는 비명 아닌 비명을 질렀고 광 난 구두를 한쪽에 세우던 톰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손도 안 씻고!”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 케이트는 그런 표정을 짓는 이안을 끌어당겼다. 요리의 제일은 청결! 손부터 씻으라고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녀는 자신이 그를 피하려 했다는 것도 잊었다. 그 모습을 톰은 입을 벌린 채 쳐다보고 있었다. 데이지가 케이트를 미워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이런 식으로 이안을 거리낌 없이 다루는 건 케이트가 유일하다. 두 사람은 서로는 모르고 있지만 은연중에 상당히 가까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비누로 잘 씻어요!” 잔소리까지 마친 케이트는 재빨리 이안이 만진 채소를 버린 뒤 수건을 가지고 돌아왔다.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이안은 손을 다 씻은 채 서 있었다. 왕자님 나셨네. 케이트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이안의 손을 닦아 주었다. 딱히 닦아 주고 싶어서 닦아 주는 건 아니었다. 어딘가의 특정성향이 할법한 이야기지만 사실이다. 케이트가 수건을 내밀었지만 이안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멀뚱멀뚱 서 있었다. 결국 그녀가 이안의 두 손 위에 수건을 걸어줬지만 그래도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허우대만 멀쩡한 녀석이라고 했던가. 그 말이 딱이라고 생각하며 케이트가 이안의 손을 잘 닦는 것을 로더 부인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데이지가 발견했다. 그녀는 쿵쿵거리고 들어와 이안의 옆에 바짝 붙었다. “뭐하는 거야?” 마음 같아서는 뭐하는 것처럼 보이느냐고 되묻고 싶지만 참았다. 게다가 지금까지 이안을 피하려 했다는 게 생각났다. 옜다, 너나 가져라. 케이트는 수건을 이안의 손 위에 얹은 뒤 돌아서며 말했다. “네가 계속 닦아 주던가.” 남의 연애사에는 끼어드는 게 아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그냥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반면 이안은 최근 들어 더 심하게 알짱거리는 데이지가 거슬리던 차였다. 그의 입장으로는 차라리 케이트가 나았다. 원치 않는 호감이라는 건 진득진득하게 달라붙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는 그대로 수건 양쪽을 잡고 케이트의 목에 걸어 잡아당겼다. 후끼약! 하고 괴상한 소리와 함께 케이트가 뒤로 넘어지면서 이안의 품에 안겼다. “나는 이 빨간 머리가 좋다.” “뭐?” “뭐?” 눌린 듯한 목소리는 케이트의 것이었다. 케이트는 목이 꺾인 채로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뭐라고 짖어대는 거지, 이 자식이? “아, 아니...” 케이트가 아니라고 하기 전에 데이지가 비명처럼 외쳤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고?” 이안은 한쪽 눈썹을 추어 올리고 반문했다. 데이지는 진짜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지 허리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연기가 매우 허술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문제는 자신의 거짓말이 아니라 증거라고 생각했다. 케이트는 자신의 턱을 잡은 채 점점 다가오는 그림자를 불길한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그녀는 거의 뒤집어져 있다. 이런 자세로 그런 짓을 할 또라이가 세상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안은 그녀의 범주를 넘은 또라이 중에 상 또라이 인 모양이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부딪치자 데이지가 히익하고 신음했다. 오히려 너무 놀란 케이트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안이 케이트보다 훨씬 키가 컸기 때문에 가능한 자세였다. 그녀가 어버버 거리는 사이 이안의 입술이 그녀의 윗입술을 빨았다. 목이 꺾인 탓에 벌어진 입 사이로 말캉한 혀가 들어왔다. 살아있는 것이 입안에 들어오는 생소한 경험에 케이트가 버둥거리기 시작하자 이안은 한쪽 팔로 그녀의 몸을 끌어 안은 뒤 남은 손으로 턱을 움켜잡았다. 잠깐, 나 지금 키스 당하는 거야? 케이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이안의 혀가 그녀의 입안을 헤집고 있었다. 완전히 얼어버린 주방 안에 츄읍하고 질척이는 것이 빨리는 소리가 났다. “그만해애애애!” 데이지가 울음을 터트리며 달려나가 버리자 이안은 고개를 들었다. 엉켰던 혀가 풀리면서 두 사람의 입술이 타액으로 젖어 흥건했다. 흠. 이안은 수건으로 입술을 닦은 뒤 데이지를 떨어냈다는 만족감에 채소를 찢기 시작했다. 뭐, 뭐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그대로 무너진 케이트는 멍하니 주변을 돌아보다가 톰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손에 든 헝겊과 왁스가 떨어진 것도 모르고 그 자세 그대로 굳어있었다. 짜악, 찌직. 채소가 찢기는 소리 만에 공허한 주방 안에 울려 퍼졌다. 케이트도 울고 톰도 울었다. “무, 무서워어.” ============================ 작품 후기 ============================ 이번주 내내 12시 전후로 업뎃이 될것 같습니다. 좀 괜찮은 날이 생기면 12시 전에라도 업뎃하려고 했는데 그럼 괜히 또 헷갈리실까봐... 알라나데일의 이야기는 1부입니다. 1부는 다음주 정도면 끝날것 같네요~ 00023 6. 불행한 사고 =========================================================================                            “이안하고 키스했다면서?” 지나가던 케이트를 불러 세운 빌이 입술을 모아 내밀며 말했다. 케이트는 들고 있던 행주를 쥐어짰다. 사용인이 고작해야 열 명. 소문이라고 할 것도 없다. 죽여 버릴 거야. 그녀의 심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빌은 계속해서 낄낄거렸다. “그래서, 그 녀석 잘해?” “시끄러워.” 이 녀석과 이 녀석에게 이야기한 톰을 죽이고 이안은 꽁꽁 묶어서 창문 밖에 달아 둘 테다. 가능할 리 없는 이상이 상상이 되어 나타났다. 그날로부터 이틀. 밤마다 그녀는 칼을 들고 이안의 방에 들어가서 그를 찌르는 상상을 했다. 진짜, 진짜 죽여 버릴 거야. 이쪽은 말도 안 되는 구설에 휘말리게 해놓고 정작 가해자인 이안은 아무 일도 없다는 태도였다. 그녀의 손안에서 쥐어짜 지던 행주가 찌익하는 소리를 냈다. 불행히도 두 사람 다 그 소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뭐, 그래도 그 녀석 얼굴은 잘생겼잖아.” 허우대만 멀쩡해서 그렇지. 빌이 이어서 중얼거렸다. 케이트는 미친 듯이 행주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뭐? 잘생겼으니 됐다고? 잘생기면 다 용서가 된다는 거냐? 안 그래도 그 잘생긴 얼굴로 여자들의 구애가 당연하다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던 차였다. 데이지를 차는데 자신을 이용했다는 것도 눈치 빠른 케이트는 금세 알았다. 그게 더 기분 나빴다. 그럴 리 없지만 차라리 이안이 그녀를 좋아해서 그런 거라면 차라리, 아주 조금이지만 그래도 차라리 나았다. 나는 도구가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녀의 손안에서 행주가 너덜너덜하게 찢어졌다. “좋은 경험 했다고, 웁!” 말하던 빌의 얼굴에 정통으로 행주가 날아왔다. 반으로 찢어진 행주를 집어 던진 케이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 “계속 지껄여봐.” “뭐? 야, 너 진짜.” 빌은 행주를 바닥에 집어 던지더니 투덜거리며 사라졌다. 둘이 아주 잘 어울린다, 그래. 남은 한쪽도 같이 던져줄 걸 그랬다.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대던 케이트의 눈에 지나가던 이안이 포착됐다. 너 이 새끼 잘 걸렸다. 손님방에서 나온 시트를 옮기던 이안은 그를 향해 날아오는 것을 반사적으로 낚아챘다. 요즘 시대에 결투신청용 장갑인가 싶었는데 음식물이 묻은 젖은 천이었다. 이게 뭐지. 무심결에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시중을 들고 난 터라 장갑을 끼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는 젖은 천을 던진 상대를 확인하고 걸어갔다. 케이트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대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안은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케이트의 손 위에 행주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뭐야, 이거. 김이 빠져서 케이트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여기서 이안이 뭔가 반응을 보여야 그녀도 파다닥 튀어 오르는 건데 아무 반응이 없자 분출구를 찾지 못한 분노만 그녀의 몸 안에서 맴돌았다. “나한테 할 말 없어요?” 이안은 몸을 돌려 케이트를 쳐다봤다. 털을 잔뜩 세운 고양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지 몰라도 대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대충 뭐 때문인지는 예상이 가지만 그게 이 정도로 화낼 일인가 싶어 그는 입을 다물었다. 케이트는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그를 무서워했다는 것도 잊을 정도로 화내고 있었다. 한층 심해진 데이지의 적의는 그렇다 쳐도 빌의 조롱은 확실히 그녀가 허허허 하고 웃어 넘길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사과 정도는 하라고요.” 사과를 받는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지만 저렇게 뻣뻣하게 구니 사과라도 받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왜?” 하지만 이안의 태도는 당당했다. 이건 또 무슨 강아지 풀 뜯어 먹는 소리야? 그가 케이트의 턱을 한 손으로 쥐고 말했다. “말했잖아. 나는 네가 마음에 들어. 그러니 나는 사과할 필요 없다.” 거짓말하고 있네. 이안은 거짓말이 서툴다.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니 속기 쉽지만 케이트는 알았다. 그는 그녀에게 큰 관심이 없다. 지나가던 행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여자라면 누구라도 상관없이 키스했을 것이다. 그게 그녀였다는 건 그녀에겐 대단한 불운이었고 최소한 하녀 장이나 로더 부인 같은 아줌마가 아니었다는 점으론 이안에게 행운이었다. “거짓말하지 마요.” 케이트는 그의 손을 떨쳐내려 애쓰며 말했다. “사과할 필요 없다는 건 둘째 치고서라도 당신, 나 안 좋아하잖아.” 그녀뿐 만이 아니다. 이안은 이 저택에 있는 모든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그는 예리한 지적에 눈을 크게 떴다. 지난번도 그렇고 생각보다 머리가 좋은 여자다. 배짱도 있고. 지금까지 한 번도 정면에서 거짓말이라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뒤에서 수군대는 사람은 있어도 아무도 그의 앞에서 정면으로 비난하지는 못했다. 그건 그의 분위기 탓도 있지만 정면에서 대드는 자는 철저하게 무너트리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하던가. 이안은 한 손에 턱이 잡힌 채 눈을 부릅뜨는 케이트의 모습이 재미있어 씩 웃었다. 하녀로 있기엔 아깝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외모도 나쁘지 않고 영리하다. 눈치도 빠르고 잘 배운 티가 난다. 무엇보다 글을 읽고 쓸 줄 안다. 문인이 상대적으로 천시받는 뮈엘라에서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귀족은 생각보다 많다. “그래. 좋아하진 않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이안은 몸을 구부렸다. 지난번의 키스를 떠올린 케이트가 깜짝 놀라서 발버둥쳤지만 그의 손아귀 힘은 굉장했다. 으아, 싫어. 싫다고. 이 자식아. 다행히도 이안의 입술은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그렇다고 해서 관심도 없는 건 아니야.”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게 귓가에 나직하게 들린 듣기 좋은 목소리 탓인지, 그 말의 내용 때문인지는 몰랐다. 케이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가 마녀일지 몰라서?” “그래. 그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지.” 새삼 깨달았다. 케이트는 마녀일 가능성이 있다.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보내지는 않았다. 그가 손을 놓자 턱이 뻐근했다. 사람을 이렇게 미워할 수도 있구나. 케이트는 약간 몸을 떨었다. 그가 무섭고 싫었던 게 우스울 정도로 분노가 끓어올랐다. 진짜 밤에 몰래 들어가서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안이 복도를 돌아 사라지자 누군가 그녀의 뒤로 다가와 팔을 낚아챘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데이지의 말에 케이트는 눈을 깜빡였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방금 전의 상황이 대체 너한텐 뭐로 보인 거니? 그녀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데이지가 다다다 쏘아붙였다. “너도 이안이 좋으면 차라리 좋다고 해. 치사하게 아닌 척하면서 뒤에서 꼬리나 쳐대고. 적어도 앤은 너보단 나았어.” 이번에는 정말로 말이 막혀서 케이트는 입을 딱 벌렸다. 꼬리라고? 누가 꼬리를 살라앙사알라앙? 머릿속에 그 단어만 두둥실 떠다녔다. 꼬리를 살랑살랑. 순식간에 그녀가 여우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뭣보다 방금 전의 상황이 어떻게 꼬리를 치는 걸로 보였단 말인가. “잠깐,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오해? 오해가 아니면 뭔데? 앞에서는 난 관심 없어 라면서 뒤에서는 별짓 다 하고 있잖아, 너.” 벼, 별짓? 여우에 이어 이젠 자신이 더러워진 기분이 들었다. 억울하고 분했다. 내가 대체 뭘 어쨌단 말인가. 그녀는 최대한 이안을 피하려 한 것밖에 없다. 이제는 무섭지도 않다. 너 죽고 나 죽자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뭐라고? 뒤에서 별 짓 다 하다니, 내가? “그렇게 계속 치사하게 굴어봐, 어디.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데이지는 케이트가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사이 자기 할 말만 해버리고 뒤돌아 가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난리야. 그녀는 데이지를 쫓아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몸을 돌렸다. 데이지의 소유욕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복도를 돌자 이안이 기둥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을 보자마자 케이트는 그가 데이지와의 대화를 전부 들었다는 걸 알았다. “다 들었어요?” 호박색 눈동자가 긴 속눈썹에 가렸다. 이안의 시선이 케이트의 발끝에 닿아있는 것 같았다. “그걸 다 들었으면서도 가만히 있었어요?” “그럼 내가 거기서 뭘 어땠어야 하지?” “뭘 어땠어야 했냐뇨? 아니라고 부인해줬어야 할 거 아녜요?” “거기서 네 편을 들어주란 말인가?” “내 편을 들어달라는 게 아니라,” 이안은 손을 들어 케이트의 말을 막고 입을 열었다. “아니면 그 갈색 머리 하녀의 편을 들어줬어야 한다는 건가?” “갈색 머리가 아니라 데이지요.” 흠. 이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팔짱을 꼈다. 케이트는 정말로 그가 개입하지 않은 것에 화를 내고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그는 몸을 숙여 말했다. “생각해봐라. 내가 거기서 개입했다면 네 편을 들거나 그 계집애 편을 들어야 했을 테지.” 계집애가 아니라 데이지라고요! 케이트의 항의를 모른척하며 이안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 편을 들었다간 그 계집애는 더 널 적대시 했겠지. 그 계집애 편을 들었다면 기껏 때어낸 게 허사가 됐을 거고. 이해가 되나?” ============================ 작품 후기 ============================ 1. 내일은 즐거운 휴일이네요. 노는 것도 좋지만 현충일인 만큼 애국 선열과 국군장병의 넋을 기리는 하루가 되도록 합시다. 2. 이게 과연 12시 업뎃 빨인가... 아는 지인한테 쪽지 왔어요. 어디서 많이 본 이름이 투베에 보이더라고... 헐-_-;;; 다음주부터는 기존대로 7시부터 9시 사이에 업뎃됩니다. 그럼 이 현상도 사라지겠죠, 뭐. 3. 생각해보니 등장인물 소개하다가 중간에 잊어먹고 안했네요. 오늘은 어쩐지 귀요미가 된 톰을 합니다. 톰. 19세. 연한갈색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동자. 저택에 온지 육개월정도 되었습니다. 겁이 많고 늘 약간 기가 죽어있는 상태. 다른 사용인과 마찬가지로 고아입니다. 수습 하녀에게도 구박을 받는 어리바리 대마왕. 00024 6. 불행한 사고 =========================================================================                            뭐, 뭐 임마? 케이트의 눈이 불꽃이 튀었다. 그럼 이번에도 데이지를 떼어내기 위해 자신을 이용했다는 말이다.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짜악하는 경쾌한 파열음이 복도에 울렸다. 케이트의 손바닥이 지잉 울렸다. 그녀는 붉어진 손을 잡고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도 이안을 때릴 줄은 몰랐다. 세상에. 내가 이렇게 무식한 사람이었다니. 그녀는 이안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정작 맞은 그는 아무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가 돌아가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어, 저기...” “대가는 치렀다.” 그가 뭐라고 하는지 이해되지 않아 케이트는 눈만 깜빡거렸다. 대가라고? 이안을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 대가라는 게 데이지를 떼놓기 위해 그녀를 이용한 것에 대한 대가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이안의 모습은 복도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케이트는 열이 올라 뜨거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나쁜 건 이안인데 그녀가 더 나쁜 짓을 한 것만 같다. 이안의 뺨은 저녁때가 되자 조그마한 손바닥 자국을 드러냈다. 새빨간 그 자국은 누가 어느 모로 보나 훌륭한 여자의 손자국이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케이트에게로 몰리는 건 당연했다. “저기, 케이트.” “어, 미트로프 가져가면 돼.” “그게 아니라...” 식사 시간 때의 주방은 전쟁이나 다름없다. 으깬 감자에 다진 달걀노른자를 뿌린 케이트는 그제서야 톰의 얼굴을 쳐다봤다. “뭐? 왜? 빠진 거 있어?” 그게 뭔진 몰라도 부디 요리사에게만은 안 들키길 빈다. 그녀는 힐끔 요리사를 쳐다봤다. 요리사는 팔을 휘두르며 디저트로 내갈 퐁당 쇼콜라를 만들고 있었다. “저 이안의 얼굴 말인데.” “어?” 예상치 못한 이름에 케이트의 얼굴이 자동으로 톰에게 돌아갔다. 그는 미트로프가 담긴 접시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손자국, 진짜 네가 만든 거야?” 꽥. 놀란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주걱이 떨어졌다. 주걱이 접시 위에 떨어지기 전에 톰이 재빨리 낚아챈 덕에 으깬 감자가 망가지지는 않았다. “무슨 손자국?” 주걱까지 떨어트릴 정도로 당황한 주제에 케이트는 침착을 가장하며 반문했다. 그때까지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이안의 뺨에 손자국이 생겼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그녀가 때렸을 당시에는 생기지 않았다. 그러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타이밍 좋게도 이안이 주방으로 들어서자 톰과 케이트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그리고 케이트는 봤다. 이안의 왼쪽 뺨에 찍힌 작은 손바닥 자국을. 헉. 아니, 저게 왜 저기에 생겨났어? 갓 태어난 고양이 같은 케이트의 신음은 데이지의 호들갑에 묻혀 사라졌다. “어머, 어머, 어머! 어머! 이안!”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녀는 순식간에 이안의 앞까지 달려갔다. “뺨에 그거 웬 거예요?” 누가 봐도 손자국이었다. 그것도 뺨이 난 손자국. 당연히 상황은 치정극으로 연결된다. 여기에 이안과 치정극으로 이어질 만한 상대는 데이지와 케이트뿐인데 데이지는 모르는 태도니 당연히 시선은 다시 한 번 케이트에게로 향했다. 이번에는 확신의 시선이었다. 이안의 뺨을 때린 건 케이트구나. 그 시선에 케이트는 움찔 몸을 떨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절대 티 나는 곳은 때리면 안 된다. 그 중 미남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티가 많이 나는 장소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아프겠다아.” 호호 불어주기라도 할 것처럼 데이지가 깨끔 발을 서서 뺨에 손대려 하는 것을 슬쩍 피하며 이안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다음은 뭐지?” 마치 핑퐁게임이라도 보는 것처럼 사람들의 눈동자가 이안에게서 케이트에게로 옮아갔다. 으아아. 정신 차린 그녀는 접시를 가리켰다. “미트로프요.” 사람들의 기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안은 조용히 접시를 들고 위층으로 사라졌다. 아이참. 데이지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는지 애타는 눈빛으로 위층으로 올라가는 이안의 등을 쳐다봤다. “케이트! 이것 좀 오븐에 넣어라.” “엇, 네!” 데이지가 그녀를 흘겨보려는 순간 요리사의 지시에 케이트는 재빨리 주방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동그란 모양의 그릇에 담긴 걸쭉한 초콜릿 반죽이 달콤한 냄새를 풍겼다. 벌써 미트로프를 내갔으니 퐁당 쇼콜라는 빨리 구워야 할 것이다. 정신을 차렸는지 톰도 그녀가 만든 으깬 감자가 담긴 접시를 들고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사람들이 본연의 일로 돌아가자 데이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얄미운 계집애. 저런 타입이 제일 싫다. 아닌 척, 자신은 관심 없는 척하면서 뒤로는 꼬리 흔드는 부류. 차라리 정면에서 정정당당하게 자신도 이안이 좋다고 한다면 그녀도 이정도로 적의를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데이지는 케이트가 이안에게 관심 없다고 하는 게 전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이안의 버릇을 알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안과 너무 잦은 접점이 생기는 것도 불만이었다. 저택에서 이년이나 일했다는 점과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을 무기로 남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걸 봤다. 톰만 해도 케이트가 하는 말에 껌뻑 죽는다. 그녀가 부탁한 것은 귀찮아하면서도 케이트가 부탁하면 재빨리 처리해 주곤 했다. 그건 평소 데이지와 케이트의 행실의 차이에서 일어난 결과였지만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듯이 데이지 역시 그녀가 잘못하는 게 아니라 케이트가 뒤로 뭔가 다른 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뭔가 방법이 필요해. 데이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시 방을 옮기는 게 좋겠지?” 다음 날 아침 집사는 오랜만에 멀끔한 얼굴로 나타나 입을 열었다. 남아있던 다른 손님들도 전부 떠난 다음이었다. 다른 저택이었다면 애 저녁에 잘렸을 테지만 데일 가는 마음도 넓다고 이안은 생각했다. 집사가 하는 일은 많다. 집안 대소사를 살핀다는 건 말만큼이나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저택으로 오는 우편물을 검사하고 사용인에게 문제는 없는지,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지 관리하며 재산을 살펴야 한다. 그런데 이 저택의 집사는 재산을 살피는 건 둘째치고서라도 사용인의 관리가 전혀 되지 않고 있었다. 필요하다 필요하다 몇 번이나 말을 해도 충원되지 않는 사용인의 수만 해도 그렇다. 저택이 작고 사람이 적으니 망정이지 지난번 손님이 왔을 때만 해도 지금 인원의 두 배는 필요했다. 주방을 요리사와 케이트 단둘이 한다는 것도 어불성설. 관리되지 않는 방은 수두룩하고 사용인의 계단은 거의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집사는 이안이 날카롭게 자신을 평가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계속해서 말했다. “손님들이 전부 떠나셔서 좀 여유 있을 테니 오늘 저녁 식사 후 옮기도록 하게.” 으으.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이사다. 이사라면 이젠 진절머리가 난다. 적어도 다행인 건 이인실을 혼자 쓴다는 사실이겠지. 두 명이 쓰는 방을 혼자 쓴다고 생각하니 약간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아참, 빌.” 집사는 돌아서려다 말고 빌을 불러 말했다. 혹시 모르니 지붕 수리가 잘 됐는지 확인 한 번 해두게. 그는 빌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에이, 젠장. 빌은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귀찮게 시리. 점심때가 되자 이안의 뺨은 상당히 가라앉아있었다. 그 말은 정확히 말하면 여전히 손바닥 자국이 남아있었지만 그게 선명한 빨간색은 아니라는 말이다. 케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쿠키 반죽을 시작했다. 티 타임에 내가려면 부지런히 만들어야 한다. 이놈의 사람들은 매끼마다 식사도 꼬박꼬박 하면서 티 타임도 거르지 않고 가진다. 젠장. 그녀는 찬장을 뒤져 말린 과일을 꺼냈다. 혼자서 세 종류의 쿠키를 만드는 건 여간 손이 가는 게 아니다. 하나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것으로. 하나는 과일이 들어있는 것으로. 남은 하나는 뭘 해야 하지? 초콜릿 칩을 넣고 싶지만 그건 좀 특별한 날에 만드는 쿠키에나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데이지가 주방에 들어오더니 미리 구워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쿠키 한 접시를 집어 들었다. “이것 좀 가져갈게.” “뭐?” 그건 티타임에 내갈 거라고! 케이트가 깜짝 놀라 쫓아갔을 때에는 이미 데이지는 그 접시를 이안에게 내밀고 있었다. “데이지, 그거 티타임에 내갈 거야.” 데이지는 그녀의 반응이 예상외라는 듯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깟 쿠키 한 번 더 구우면 되잖아? 그거 하나 만든다고 유세 떠는 거니?” ...유, 유세? 케이트는 입을 딱 벌렸다. 얘가 지금 나랑 정말 해보자는 건가? 그녀가 허리 위에 손을 올리자 분위기가 안 좋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톰과 수습 하녀들은 좋은 냄새에 주방 쪽으로 걸어가다가 복도에 대치한 케이트와 데이지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드디어 케이트가 화내는 건가? 모두 그녀가 많이도 참는다고 생각했다. 이안이 데이지에게 관심이 없는 건 명백해 보였고 그럴수록 데이지는 더 이안에게 집착했다. 그녀는 이안이 자신에게 관심 없는 이유가 케이트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저택의 모든 사용인이 알았다. “톰, 나 지붕을 확인할 건데...” 빌마저도 톰에게 말을 걸며 다가오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와, 일촉즉발! 빌이 가장 좋아하는 거였다. 계집애들의 싸움. 하지만 그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케이트가 손을 늘어트리며 한숨을 내쉬자 팽팽한 긴장감은 순식간에 느슨해졌다. “됐다, 됐어. 먹어라.” 데이지의 말 대로다. 그깟 쿠키 한 접시에 이런 지저분한 싸움을 하는 건 꼴만 우스워진다. 이럴 시간에 돌아가서 쿠키를 다시 만드는 게 낫다. 그녀가 돌아서자 빌은 혀를 찼다.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길 줄 알았는데. 그는 톰을 불러 말했다. “지붕 위로 올라갈 거니까 따라와.” “어? 내가?”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또 있냐?” 톰이 울상 지었지만 빌은 이안보단 톰이 나았다. 한편 빌이 싫어해 마지않는 이안은 데이지가 억지로 넘긴 접시를 내밀었다. “과자는 별로 안 좋아해서.” 데이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작품 후기 ============================ 불금을 잘 지내셨나요? 저 역시 아주 잘 지냈습니다. 후후후후후 읽으시는 분들이 늘어서 그런가 의외의 댓글이 달리네요. 사실 소설이라는건 그 내용안에서 설득시키면 된다고 생각해서 내용에 대해서는 후기에 굳이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는데 생각해보니 이건 한권짜리 책이 아니잖아요? 불안해하시고 궁금해하시는 것도 당연하다 싶어 몇자 (좀 길게) 적습니다. 아래 부터는 앞으로의 내용전개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때문에 원치 않으신다면 그냥 넘어가 주세요. 특히 2번부터는요. 1. 데일가는 꽤 부유합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으셨다면 아실테지만(이라고 해도 한달쯤 지났죠?) 원래는 찢어지게 가난했는데 현대에 와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고 한번 언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사용인이 이렇게 적냐! 면 나중에 본문에 잠깐 나올테지만 뮈엘라가 전사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전사. 용병이나 기사만이 평민 남자아이들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이다 보니 남자아이들은 대부분 하인보다는 용벙이나 기사쪽으로 가려고 합니다. 때문에 하인을 구하려 해도 알라나데일같은 시골까지 굳이 하인이 되겠다며 찾아오는 아이는 없죠. 또 다른 큰 이유가 하나 있는데 이건 스포라 패스합니다. 2. 이안은 그다지 남의 감정에 동조하는 타입이 안됩니다. 감정적으로 보자면 역키잡...이 될 수 있겠네요. 3. 로맨스는 당연히 나옵니다. 하지만 달무리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실테지만 달무리보다는 더 나올거라는 말은...으음... 4. 달달물은 저한테 기대하지 말아주세요. "왕자님의 약혼녀"쓸때도 나름 달달하다고 썼는데 다들 언제 달달하게 되냐고 닥달했음-_-;;;; 5. 남자주인공은 훌륭한 집착남이 될 예정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6. 케이트가 답답한건 순진한 촌아가씨이기 때문입니다. 점점 변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2) 7. 또 뭐있지...? 음, 궁금한 부분이나 지적하실 부분이 있다면 기탄없이 댓글 달아주세요. 스포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면 그때그때 이쪽을 이용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답변이 없다면 "와, 난 역시 똑똑해. 정곡을 찔렀군." 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음주부터는 기존대로 오후 7시에서 9시 사이에 업뎃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00025 6. 불행한 사고 =========================================================================                            톰은 높은 곳은 질색이었다. 지붕에 올라가서 뛰어노는 건 열 살 내외의 사내아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심지어 톰은 그 나이일 때에도 지붕은커녕 나무 위에도 못 올라가는 소년이었다. 그는 울상을 지으며 빌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싫다는 말을 했다간 또 빌이 뭐라고 구박할지 몰랐다. 케이트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한창 주방 일에 바빠 정신이 없었다. 다른 생각. 뭔가 주의를 돌릴 생각을 하자. 그는 심호흡을 한 뒤 앞서 걷는 빌에게 말을 걸었다. “요새 무슨 일 있어?” “뭐?” 빌은 뒤 돌아보지도 않고 되물었다. 무슨 일이냐니? 같은 저택에 살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톰은 그가 옥상으로 올라가는 창문을 여는 것을 겁먹은 눈으로 지켜보며 입을 열었다. “그, 왜...밤에 항상 나갔다 들어오잖아.” 빌의 고개가 휙 안쪽을 향했다. 그는 창문을 열고 실수로라도 닫히지 않도록 고정하던 자세로 굳어 있었다. 눈동자가 놀란 사람처럼 튀어나와있었지만, 겁에 질린 톰은 그것까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잘못 들었겠지.” “아냐.” 애써 그가 착각 한 거라 치부하려는 빌의 시도를 무효화시키며 톰은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생각하지 말자. 저 옥상이 얼마나 높은지. 생각하지 말자. 떨어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우리 숙소엔 지금 우리 둘밖에 없잖아.” “그럼 이 저택에 유령이라도 있나 보지.” 빌의 농담에 톰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여기서 더 핼쑥해 질 수 있을까 싶었는데 가능한 모양이었다. 그는 창문을 통해 옥상으로 오른 빌을 따라 조심조심 발을 내디뎠다. “유령은 없어.” 빌은 불안하게 중얼거리는 톰을 내려다보며 히쭉 웃었다. 이 녀석 유령도 무서워하는구나. 톰은 공포심을 견디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왜 아니라고 해? 네가 나갔다 들어오는 거 봤는데.” 빌의 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라? 톰하고 빌은 어디 있어?” 케이트는 가까스로 남작 부인이 티타임을 갖겠다고 말하기 전에 쿠키를 굽는 데 성공했다. 거기에 애플턴오버는 오븐에서 부드럽게 부풀고 있다. 어차피 따듯할 때 내가는 게 좋기 때문에 가장 마지막으로 미룬 것이기도 했다. “톰과 빌이라면 옥상에 올라갔는데요?” “옥상?” 계단을 닦고 내려오던 자넷이 대답하며 지나가자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티타임 시중을 들어야 할 하인 두 명이 옥상에 올라가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럼 이안은? 그녀의 눈이 자동적으로 남은 한 명의 하인을 찾았다. 이안은 위층에 있었다. 그는 데일 남작 부인의 지시에 따라 손님이 주고 간 그림을 걸고 있었다. 외국의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라며 주고 갔는데 이안이 보기엔 괴상망측할 뿐이었다. 턱에 혹이 달린 볼품없는 남자가 험상궂게 생긴 남자들 사이에서 노래를 부르는 그림이었다. 흠. 취향 한번 이상하군. 그는 능숙하게 못을 박고 그림을 걸었다. 멀리 떨어져서 기울어지지 않았는지 살피는데 수습 하녀 중 하나가 지나가다 말고 그를 불렀다. “저기, 이안씨.” 드문 호칭에 그가 고개를 돌리자 늘 동생인지 언니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수습 하녀가 서 있었다. 주근깨가 가려질 정도로 얼굴을 붉힌 소녀는 앞치마 자락을 쥐고 배배꼬며 말했다. “저, 그게...곧 있으면 티 타임이라고 해서요.” 무슨 의민지 알겠다. 티 타임의 시중을 들라는 거겠지. 그가 주방이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하자 수습 하녀가 손을 휘두르며 말했다. “그 전에 지붕에 올라간 다른 분들도 같이 불러야 하는데요...” 그녀는 침을 한번 삼키고 마지막 용기를 쥐어짜내 중얼거렸다. 제가 물을 길러 가야 해서요. 이안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 위층으로 올랐다. 이안이 어렵기도 했지만 정말로 바빴던 모양인지 수습 하녀는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데일 남작가의 저택은 아직 수도공사가 되어 있지 않아 매 시간마다 물을 길어 와야 한다. 다행인 것은 뒷마당에 저택용 우물이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데이지가 왜 이렇게 늦었냐고 구박할게 두려워 걸음을 빨리했다. 뛰면 하녀 장에게 혼난다. “자넷, 고마워!” 주방을 지나는데 케이트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녀는 막 오븐에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빵을 꺼내고 있었다. 이거 챙겨둘게. 이안에게 말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다는 의미였다. 자넷은 씩 웃어 보였다.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 생각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이는 달콤한 빵보다 친절한 케이트의 태도가 더 기뻤다. 이안은 손에 망치를 든 채로 위층으로 향했다. 톰과 빌을 부른 뒤 같이 내려가서 도구함에 넣어두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으아아아아아악.” 남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데이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소리는 위에서 들려왔다. 그녀의 눈앞에서 하인 복장을 한 남자가 떨어졌다. 데이지의 입이 벌어졌다. 누구지? 누가 떨어진 거야? 그녀는 후다닥 저택 쪽으로 달려갔다. 하인 복장을 한 건 세 명밖에 없다. 톰과 빌, 그리고 이안. 제발, 제발 이안만은 아니길. 그녀의 기도는 떨어진 남자를 확인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림자에 가려져 머리카락색이 보이지 않았다. 이안보다 왜소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게 이 정도 거리이기 때문에 확인하기가 어려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떨어진 사람에게 다가가는 거지만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살았을까? 죽었을까? 덜덜덜 떨며 위를 올려다 본 데이지의 눈에 뭔가를 손에 쥔 이안의 얼굴이 들어왔다. 창문에 몸을 반쯤 걸친 이안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데이지는 그의 손에 들린 게 망치라는 것을 깨닫자 정신없이 손짓했다. 들어가요! 멀리서 뒤늦게 수습 하녀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유는 모르지만 이안이 밀었다. 밀어서 떨어트린 게 분명했다. 그렇게 보였다. 실수일까? 이안의 손에 들려있던 망치가 걸렸다. 어쩌면 떨어진 사람은 빌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빌만 없다면 남작의 종자는 이안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하인보다야 급여도 대우도 좋다. 그녀를 공상의 늪에서 건져 올리듯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습 하녀 중 한 명이 입을 막고 주저앉아있었다.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쪽이예요! 이쪽이요! 다른 수습 하녀의 소리를 들으며 데이지는 이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한쪽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고 했던가?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안다. 케이트가 책을 읽어주면서 설명해줬던 문구였다. 그 말이 맞다. 데이지는 몸을 돌려 수습 하녀들 쪽으로 다가갔다. 케이트. 똑똑한 척, 착한 척은 혼자 다하지만 어디 두고 보라지.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생각했다. 그녀는 이안만 괜찮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 저택에 온 지 일 년. 딱히 정이 든 것도 아니다. 약아빠진 빌과 어리바리한 톰따위 보다는 이안이 훨씬 낫다. 구빈 원에서 자란 게 십오 년. 그 이후 여러 가지 일을 하며 끈질기게 살아왔다. 케이트나 하녀 장은 상상도 못할 일들을. 남의 돈을 훔치는 정도는 험한 축에 속하지도 못한다. “무슨 일이야?” 집사와 하녀 장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내 남자를 지키는 거야. 그녀는 입을 한번 꾹 다물었다가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실수로 떨어졌나 봐요.” “실수라고? 누구니? 톰이야, 빌이야?” 하녀 장은 데이지의 어깨를 잡고 달려들듯이 묻더니 쓰러진 형체를 보고 숨을 들이켰다. 집사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몸을 뒤집었다. 머리카락이 빛을 받으면서 색채를 드러냈다. 짙은 색으로 보였던 그것은 갈색이었다. 집사는 잠시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탄식처럼 내뱉었다. “톰이군.” “톰이라고요?” 하녀 장은 기운이 빠져 주저앉았다. 약간 안도감이 퍼지는 듯싶더니 죄책감이 들었다. 빌이나 이안이 아닌 것을 안도 하는 건가. 그녀는 고개를 젓고 참회하듯 중얼거렸다. 가여운 것. 가여운 것. ============================ 작품 후기 ============================ 1. 즐거운 월요일 입니다. 는 개뿔. 아아 나의 사랑하는 주말님은 가셨습니다.... 2. 톰 인생 퇴갤... 이, 이게 아니라.. 제일 아끼는 캐릭터였는데 죽었어요 ㅠㅠㅠㅠ 엉엉 ㅠㅠㅠ 3. 애플턴오버 맛있겠네요. 본문에는 따듯할 때 내가는게 맛있다고 하지만 뻥입니다. 뭐든 사과 조림이 들어간건 차가운게 맛있습니다. 4. 슬슬 캐릭터 소개가 의미가 없는 것 같은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같은데 00026 7. 데이지 =========================================================================                            톰의 장례는 신속하게 이뤄졌다. 날이 더워져서 시체의 부패가 빠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수습 하녀 중 하나는 토하려는 듯 주방에서 뛰쳐나갔다. 원래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아이였다. 케이트는 침울한 표정으로 감자껍질을 벗기며 생각했다.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한 아이였다. 더 잘해주지 못한 게 죄책감으로 남아 그녀의 가슴에 달라붙었다. 주머니에 종이를 넣은 것을 잊고 빨아버린 것처럼 아무리 떼어내도 하얗게 흔적을 남기며 붙어있었다. 사인은 실족사. 지붕에서 창문을 통해 내려가는 걸 무서워 했다는 빌의 의견과 실수로 떨어진 것 같다는 데이지의 의견이 맞물려 톰의 죽음은 불행한 사고로 처리되었다. 어차피 고아. 죽음을 전할 가족도 없다. 들어온 지 반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탓에 깊은 관계인 사람이 있는 걸 우리가 모를 수도 있지 않냐는 말이 나왔지만 그랬다면 톰이 케이트에게 부탁해 편지를 썼을 것이라는 의견에 결국 그의 죽음을 알릴 사람은 없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입안이 씁쓸했다. 눈앞이 손쓸 새도 없이 뿌옇게 변해버려 케이트는 황급히 손등으로 눌러 닦아냈다. 사람이 죽었는데도 감자 껍질이나 깎고 있는 신세가 슬펐다. 하루를 온종일 그를 위해 슬퍼해 주지 못하는 게 슬펐다. 죽음을 알릴 사람이 없다는 게 슬펐다. 슬퍼서 슬펐다. 케이트는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허둥지둥 손등으로 닦아냈다. 눈앞으로 하얀 천이 내려왔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이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다른 때라면 필요 없다고 뿌리쳤을 텐데 지금은 이런 작은 행동이 필요했다. 그녀도 톰처럼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죽으면 누군가 지금의 그녀처럼 슬퍼해 주고 또 그 슬퍼해 주는 사람을 위로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줄 것이 필요했다. “고마워요.” 케이트는 중얼거리며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부드러운 천이 눈가에 닿았다.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그녀 안의 속물기질이 고급스러운 손수건이라고 감탄하고 있었다. 이렇게 부드러운 천이라니. 귀족이 아닌 이상 사람들의 손수건은 속옷을 만들고 남은 천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대충 마무리한 것에 불과하다. 누군가의 죽음은 사람에게 타인의 체온을 갈구하게 만든다. 케이트는 이전까지 이안을 미워했다는 것도 잊고 미소 지었다. 아니, 미소 지으려 했다. 입가가 일그러지면서 이상한 얼굴이 되었다. 이안은 그녀의 일그러진 미소를 내려다보며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엔 이 저택에서 톰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건 케이트밖에 없는 것 같았다. 수습 하녀들은 톰을 알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다고 쳐도 데이지나 빌의 태도는 그리 슬퍼 보이지 않았다. 하녀 장과 집사는 안타까운 일이라고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곧바로 손이 부족해진 것에 대해 투덜거렸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뮈엘라는 전사의 나라다. 말을 할 수 있게 된 나이부터 남자아이들이 원하는 건 용병 혹은 기사가 되는 것이다. 제복을 차려입고 저택의 비싼 장식품이 되고 싶어 하는 건 유약한 남자아이들이나 원하는 일이다. 결국 집안일을 물려받아야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남은 사람들은 용병과 기사단으로 몰렸다. 뮈엘라에서 신분이 상승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수도에서도 좋은 종자는 용병만큼의 돈을 줘야 한다. 하물며 이런 시골까지 내려와서 하인을 하겠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케이트는 수건을 빨아서 주겠노라고 말하려 입을 열었다. 빨고 다림질까지 해서 주는 게 예의가 아닐까. 그때 데이지가 주방에 들어왔다. “이안, 집사님이 부....” 요리사도 없이 케이트와 이안 단둘이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데이지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이안의 손수건을 숨겼다. “뭐하는 거예요?” 침착한 척 가장하려 했지만 데이지의 목소리엔 힐난이 묻어나왔다. 톰의 사망 이후 그녀는 이안의 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기 시작했다. 한시도 이안의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그가 다른 여자들과 대화라도 할라치면 눈꼬리를 잡아 뺐다. 이안이 대화하는 상대가 케이트가 된다면 그 태도가 더욱 심해졌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집사가 부른다고?” 이안은 그런 그녀의 태도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굴었다. 저택의 사람들은 결국 데이지가 성공했다고 혀를 찼다. 심지어 로더 부인은 여자가 저렇게 덤벼드는데 어느 남자가 뿌리치겠느냐고 의미심장한 미소로 중얼거렸다. 케이트는 모른 척 고개를 숙이고 감자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오늘 안에 한 포대를 전부 깎아야 한다. 그래도 이안과 데이지 덕분에 울적했던 기분이 약간이나마 사라졌다. “이런 식으로 굴면 재미없어요.” 이안은 주방 밖으로 자신을 따라나오며 윽박지르는 데이지를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뭐가 말이지? 데이지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톰 말이예요. 당신이 밀었잖아요.” 그런 거였나. 이안은 어쩐지 맥이 풀렸다. 고작 그런 걸로 자신의 약점이라도 잡은 것 마냥 굴었단 말인가. 그는 데이지의 갈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자신이 꽤나 영리하다고 생각하는 계집이로군. 가소로워서 코웃음이 나왔다. 세상 사는데 영리하게 구는 건 나쁘지 않지만 그게 약아빠진 걸로 보이는 건 좋지 않다. 그는 나지막하게 물었다. “너는 내가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인 살인마라 해도 상관없다는 건가.” 데이지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당신이 어떤 짓을 하더라도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건 변하지 않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더러운 것이라도 본 기분이 들어 이안의 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떤 짓을 하더라도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고? 고작 한 달 전에 알게 된 사이다.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빠르지 않은가. 그 빨간 머리 계집애는 어떨까. 이안의 생각이 케이트에게로 날아갔다. 자그마한 체구에 초록색 눈동자. 그가 톰을 죽인 살인자라는 걸 알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 할까, 욕을 퍼부으며 달려들까. 그 초록색 눈동자가 분노로 가장자리가 금색이 되는 것이 눈에 선했다. 그녀가 특이한 걸까, 이 저택의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걸까. 톰이 죽은 이후 케이트는 눈이 빨개지도록 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아침마다 보이는 얼굴이 팅팅 부어있었다. 빨간 눈과 코가 흡사 토끼처럼 보였다. 우는 여자만큼 못생긴 여자도 없다. 여자는 울고 있든 웃고 있든 늘 예쁘다는 그의 동료와 달리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는 여자만큼 못생긴 여자도 없다. 가식적인 미소.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한 뾰로통한 표정. 모두 거울을 보고 연습하기라도 한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한 표정들. 처음으로 그는 여자의 우는 얼굴이 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안은 집사의 집무실에 도착해서 문을 두드렸다. 어느 저택의 집사나 약간의 술버릇은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저택의 사용인 중 자택의 귀한 술을 마실 수 있는 가장 당연한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이다. 매일 저녁 식사에 같이 내갈 술을 선택하고 보관이 제대로 되었는지 변질이 없는지 맛을 본다. 이 저택의 집사 역시 다를 바 없다. 집사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와인을 디캔딩하고 있었다. 아직 식사시간이 멀었으니 본인이 마시려는 게 분명하다. 그는 이안을 보더니 앉으라는 말도 없이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저택에 손이 부족해서 말야.” 조르륵 와인이 디캔터 안으로 벽을 타고 내려가면서 집사의 말이 끊겼다. 이안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원래 마이크 도련님의 시중을 톰이 들었는데, 그게, 그러니까...” 알겠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의 주인이라 해도 결혼하지 않은 자녀들은 몸종과 종자를 가질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성인이 된 그들이 자기 스스로 몸치장을 할 수 없으니 순위가 높은 하녀와 하인이 도와주게 된다. 원래 톰이 하던 일이나 그가 없으니 이안에게 미리 말을 해두는 것이리라. “알겠습니다.” 이안을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이야기가 끝났으니 방을 나가려는 거였다. 하지만 집사가 그를 붙잡았다. 잠깐. 그는 약간 주저하더니 물었다. “톰이 떨어질 때 이상한 점은 없었나?” 톰이 떨어질 때 말입니까? 이안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상한 점이라고? “제가 그들을 부르려고 창문으로 몸을 내밀었을 때 톰이 떨어졌습니다. 이상한 일이라면 그 전에 있었겠지요.” “그런가.” 집사는 안심한 것처럼 눈을 감으며 손을 저었다. 알았네. 가보게. 마치 마이크의 시중을 들라는 말보다 지붕에서 톰이 떨어질 때 이상한 점은 없었냐는 질문이 본론인 것 같았다. 이안은 조용히 방을 나왔다. 그의 말은 사실이다. 그가 톰과 빌을 부르기 위해 창문으로 몸을 내밀었을 때 톰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기 전까지 떨어진 게 누군지도 몰랐다. 톰이라고 말했을 때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흔히들 겁이 많은 사람이 실수할 거라 생각하지만 반대다. 겁이 많기 때문에 조심 또 조심한다. 오히려 실수하는 건 겁이 없고 자신만만한 사람 쪽이다. 자신은 실수할 리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방을 나온 이안의 곁에 데이지가 달라붙었다. 집사님이 뭐래요? 이안은 그녀의 얼굴을 잠시 내려다봤다. 이런 얼굴에 익숙하다. 기회를 잡으려는 얼굴. 처음 그는 그녀가 뭔가를 알고 있는 줄 알았다. 반지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데이지가 반지를 가져갔다고 생각했다. 약간 마음을 놓고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곧 데이지가 가져간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조금 곤란하군. 이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했다. 누가 보더라도 그가 곤란해 한다는 것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일주일. 일주일 안에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좀 바쁜 일주일이 될 것 같다. ============================ 작품 후기 ============================ 이번 편은 짧은것 같죠? 안 짧아요. ...진짜로요. 뮈엘라의 수사관은 1부, 2부 이런식으로만 이야기를 생각해 둬서 각 부의 제목만 생각해 뒀더랬습니다. 그러니까 1부의 제목은 알라나데일의 저택. 2부의 제목은 OOO 뭐 이런식으로요. 근데 업뎃하다보니 소제목이 더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죠. 왜냐면 전 각 장마다 나눠서 쓰니깐효. 당황해서 결국 1장이외의 제목은 그자리에서 급조했습니다. 덕분에 소제목은 다 좀 별로예요. 글쵸? 그러다 오늘... 집에 돌아와서 손을 닦다가 (여러분, 집에 돌아오면 무조건 손부터 닦으세요. 바깥세상은 온갖 더러운 세균으로 득실대니깐요!! 라는 훌륭한 청결 공영후기.txt) 생각났습니다. 걍 숫자로 표시하면 되잖아.... 1부의 1장. 1부의 2장. 일케... Aㅏ... 바보같은 저. 다 함께 외치죠. 키아르네 바보 라고. 00027 7. 데이지 =========================================================================                            치즈와 훈제 햄을 두껍게 잘라 만든 샌드위치가 도시락 바구니 안에 들어갔다. 날이 더워서 재료를 많이 넣었다간 상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최대한 간단하면서도 푸짐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바구니 안에 와인까지 넣은 케이트는 이걸 마구간에 갖다달라고 부탁할 사람을 찾았다. “뭘 치즈 찾는 쥐새끼마냥 두리번거려?” “어, 이걸 갖다놔야 해서요.” 요리사는 의자에 앉아 흥하고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몸 사리지 말고 후딱 갔다 와. 다들 청소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케이트는 묵직한 바구니를 들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마이크는 며칠간 결혼한 누이의 집에 초대받았다. 재작년에 결혼한 데일 남작의 둘째 딸이 아이를 낳은 것이다. 일이 있어 남작 부부는 일주일 후에 출발하기로 했다. 일반적이라면 하인을 하나 딸려 보내야 하지만 현재 데일가에서 마이크와 함께 갈 수 있는 하인은 없었다. 빌과 이안 둘밖에 없는데 둘 중 하나를 보낼 수는 없으니까. 결국 데일 남작부인은 사랑해 마지않는 아들을 위해 특별히 비싼 용병에게 의뢰했다. 아는 사람을 통해 의뢰한 데다 비용도 톡톡히 쳐주기로 한 모양이다. 케이트는 혼자서 들기엔 꽤 묵직한 도시락 바구니를 들고 끙끙대며 마구간까지 걸어갔다. 마구간의 말 냄새 때문에 저택에서 꽤 떨어져서 지어져 있었다. 덕분에 그녀가 마구간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지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도시락은 어디에 둘까요?” 케이트의 질문에 남자들이 고개를 들었다. 우와아.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와 그녀는 입을 막았다. 눈빛부터가 달랐다. 남자들은 체격도 생김새도 달랐지만 눈빛만은 똑같이 형형했다. 가장 어려 보이는 남자가 히쭉 웃었다. “여, 아가씨. 그거 우리 점심인가?” “아, 네.” 그는 자연스럽게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그녀는 여기까지 가져오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는데 그는 마치 바구니 안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는 듯 휙 들어 올렸다. “여기 디저트도 있나?” “네.” 케이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애플턴오버요. 며칠 전에 만든 사과조림이 꽤 남았기 때문에 전부 애플턴오버를 만들었다. 남자는 씩 웃더니 말했다. “그건 아가씨만큼이나 달콤하겠지?”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다행히도 기가 막힌 탓에 이 말은 목구멍 안에서만 맴돌았다. 케이트는 어깨를 으쓱하고 돌아섰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마이크가 감싸 안았다. 그는 강한 용병들 사이에 있으니 자신도 강해졌다는 착각이라도 하는 것처럼 평소보다 더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우리 케이트가 머리카락색 만큼이나 강렬한 맛이 있지.” 얜 또 뭐라는 거니? 용병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마이크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난봉꾼이긴 했지만 도련님 난봉꾼이었다. 힘이 아니라 돈으로 으스대는 편이다. 여자에게 이두박근을 보여주며 유혹하기보다는 값비싼 팔찌를 선물하며 유혹하는 편이라는 말이다. 케이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말타기도 검술도 그리 연습하지 않는 마이크의 이두박근이라는 건 보잘것없다. 사실 그의 팔정도는 그녀도 뿌리칠 수가 있었다. 용병들은 마이크의 말이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렸다. 전사의 나라의 특징이다. 힘을 중시하는 만큼 평균 지능이 낮아진다는 것. 이래서 여기 오기 싫었어. 케이트가 몸을 돌리자 갑자기 마이크가 손을 미끄러트리더니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헉! 케이트의 몸이 지면에서 한 뼘은 떨어질 정도로 튀어 올랐다. 이 남자가 미쳤나! 그녀는 몸을 휙 돌리고 마이크를 쳐다봤다. 이런 행동은 주점에서 취한 난봉꾼이나 하는 행동이다. 마이크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여기서 뭐라고 해봐야 소용없겠군. 결국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이크는 그다지 줏대 있는 성격이 아니다. 집안이 부유하니 돈 많은 도련님행세를 하는 거지만 주변에 강한 사람들이 있으면 자신도 그들처럼 강한 전사라도 된 듯한 기분이 젖어버리는 것이다. 지금의 행동도 그런 기분에 젖어 별생각 없이 하는 행동에 불과하다. 물론 뺨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도련님이 엉덩이 좀 만졌다고 뺨을 때렸다간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케이트는 얌전히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언제가 될지 몰라도 그는 덜 마른 속옷을 입거나 너무 쓴 차를 마시게 될 것이다. 혹은 침대 밑에 거미가 한 마리 붙어있거나. “말 준비가 끝났습니다.” 마구간 안쪽에서 이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복수할 생각에 잠겨있던 케이트는 그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에 숨을 들이켜며 돌아섰다. 키와 체격이 큰데도 그는 마구간의 그림자에 녹아드는 것처럼 사라져있었다. 젠장. 케이트는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걸어갔다. 뛰지 않은 건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다. “데이지와 사귄다던데.” 마이크가 킬킬거리며 말했지만 이안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용병들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마구간 앞에 삼십 분 넘게 있었지만 그 안에 이안이 있는 줄은 몰랐다. 마이크 같은 일반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그들은 용병이 아닌가. “데이지가 더 볼륨이 있긴 하지만,” 마이크는 용병들의 시선이 흔들리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손으로 곡선을 그려내며 말했다. “케이트 쪽이 더 예쁘장하잖아?” 그런가. 이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마이크의 지저분한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생각했다. 케이트가 더 예쁘장한가? 잘 모르겠다. 그에게 그녀는 그저 조금 신경 쓰이는 빨간 머리 계집애일 뿐이다. 그 얼굴이 예쁘장한 얼굴인가? 데이지와의 얼굴을 비교하려던 이안은 선명하게 떠오르는 케이트의 얼굴에 비해 데이지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이크마저 떠나자 저택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위층에 거하는 건 데일 남작 내외뿐이고 아래층에서 일하는 사용인은 아홉 명뿐이다. 덕분에 식사 준비에 손이 덜 간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여유 시간이 남자, 케이트는 우체국에 가서 자신이 주문한 책이 도착했는지 확인해 달라는 남작부인의 요청에 따라 저택 밖으로 나갔다. 용병과 함께 떠난 마이크의 배웅에서 아직도 이안은 돌아오지 않았는지 데이지의 감시가 덜했다. 책은 도착하지 않았다. 우체국 직원은 정말로 미안해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게...최근에 산적들 때문에 중간에 사라진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럼 어떻게 해요?” 케이트는 놀라서 소리쳤다. 산적에게 빼앗겼다면 어찌할 방법이 없다. 그녀는 산적이 글을 읽을 줄 아는 걸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산적은 그냥 소포를 운반 중인 마차를 공격했을 것이다. 그 안에 데일 남작 부인의 책이 들어있었을 것이고.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하면 그녀도 읽을 수 있었을 텐데. “보험에 가입되어 있으니 어느 정도는 보상이 될 겁니다.” “하지만 책이잖아요. 구할 수 없으면 말짱 꽝이라고요.” “그래서 일차적으로는 동일한 상품을 구해서 배송하기는 하는데요...” 직원은 다시 한 번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확실하지 않다는 거겠지. 케이트는 어깨를 늘어트리고 돌아섰다. 이 이야기를 데일 남작 부인에게 어떻게 전하란 말인가. 그녀는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할 때는 매우 예민해진다. 몇 달 전 데일 남작이 수도에서 그녀가 원하는 최신 유행 모자를 잊어버리고 사오지 않았을 때가 생각났다. 어마어마한 히스테리를 부린 후 남작 부인은 약 하루 정도를 늘어져서 지내다가 결국 수도로 주문을 넣었다. 수도에서 알라나데일까지 왕복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봤을 때 한 달 만에 모자가 도착한 건 경이로운 속도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문득 케이트는 이안의 방에서 자기도 모르게 가져왔던 반지가 생각났다. 절대 훔친 게 아니다. 집사가 놀라게만 하지 않았다면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건 불행한 사고라 할 수 있다. 혹시 그 반지는 남작 부인의 것이 아니었을까. 그녀의 머릿속에 얼마 전 남작 부인의 침실에서 나오던 이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반지나 팔찌 같은 거라면 하인 복의 주머니 안에 넣어도 티가 나지 않는다. 케이트는 허리를 세우고 수사관이 머무는 여관으로 향했다. 그게 누구의 것이든 상관없다. 일단 받아서 이안에게 돌려주자. 그리고 한마디 하는 거다. 누구의 것인지 모르지만 주인을 돌려주라고. 자신도 이안에게서 훔쳤다는 것을 깨끗하게 잊어버린 채 케이트는 이것으로 그에 대한 죄책감을 털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흐뭇하게 웃었다. 여관 안으로 들어서자 강하게 내리쬐던 태양 빛이 사라지면서 시야가 어두워졌다. 창문을 열어뒀지만 약간 어두운 내부에 익숙해지기 위해 케이트는 잠시 멈춰 섰다. 괜히 익숙한 척 걷다가 아무렇게나 놓인 의자에 부딪히는 불상사를 겪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그 꼴을 본 주정뱅이가 낄낄거리는 소리도. 제이드는 여관 뒷마당에 있었다. 이 마을에 있다는 게 남작의 귀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란다면 그곳만큼 좋은 곳도 없을 것이다. 여관주인은 약간의 돈만 쥐여주면 어떤 범죄자가 있다 해도 입 다물어줄 테니까. 물론, 그 범죄자의 목에 현상금이 걸려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여관 뒷마당은 이 마을에서 오래 산 사람들만 아는 지름길에 인접해 있는데다가 사람 눈높이 정도까지 오는 울타리가 세워져 있어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기란 안성맞춤이었다. 그런 점도 다 계산하고 이 여관에 묵는 걸까. 케이트는 여관 안의 조명에 눈이 익숙해지자 안쪽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제이드가 잡으려는 범죄자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전에 왔던 건 밀수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잡으러 온 범죄자와 밀수는 어떤 연관이 있냐는 말에 대답하진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이안이 밀수와 연관되어 있는 걸까. 자연스럽게 생각은 반지로 연결되었다. 그럼 그 반지 역시 밀수한 물건인 걸까. 제이드는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케이트가 다가가자 남자는 일어나서 반대쪽 출구를 통해 빠져나갔기 때문에 그녀는 그를 보지 못했다. 언뜻 꽤 키가 큰 남자라는 것만 보였을 뿐이었다. “아, 스미스양.” 제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당황한 표정을 가렸다. 방금 나간 남자를 그녀가 봤을까. 케이트가 친구분인가요? 라고 묻자 그는 그녀가 남자를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네. 뭐, 저는 친구라고 생각하지만요.” 상대방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른다는 말이다. 제이드의 말에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친구면 친구고 아니면 아니지 한쪽은 친구라고 생각한다는 게. 시골 마을에서 자란 케이트의 인간관계는 단순하기 그지없다. 그녀는 친구이면서 라이벌이라는 관계도, 사랑하지만 미워한다는 감정도 겪어본 적이 없다. 남을 해하는 나쁜 사람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온 자신과는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알아온 이웃이 살인이나 강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전형적인 순진한 시골 아가씨였던 것이다. 제이드는 쓰게 웃으며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방금 그의 친구(라고 그는 생각하는 남자)가 앉은 자리였다. “차, 드시겠습니까?” “아뇨. 반지만 돌려달라고 온 거라서요.” “그렇습니까?” 제이드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반지 말입니까? 그는 케이트가 반지를 돌려받으러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되뇌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케이트의 질문에 제이드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문제라고?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건 아니고...몇 가지 확인하고 있어서요.” “뭐를요?” “그게,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지? 초록색 눈동자가 똑바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안이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물론 제이드는 이안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모르지만 알았다면 자신과 꽤 비슷한 감정이라는 점에서 놀랐을 것이다. 선명한 초록색의 눈동자는 가장자리로 가면서 조금씩 연해지고 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깊은 호수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에 제이드는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거기 있는 보석이 진짜인지 확인을 좀 하고 있습니다.” “보석이요?” 저도 모르게 케이트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반지에 작은 보석이 박혀있다는 건 안다. 그게 진짜인지 확인한다는 건, 밀수 혹은 장물인지 확인한다는 뜻이 아닐까? “보석이 가짜일 수도 있나요?” 케이트는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은 다음에야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했다. 가짜라고 해서 이안의 것이라는 증거는 없다. 반대로 진짜라고 해서 이안의 것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다. 늘 이안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그가 제이드가 말하는 흉악한 범죄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가느다란 믿음 한줄기가 서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케이트는 이안이 그녀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녀는 마녀로 몰고 협박하고 시험했던 남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어쩌면 그가 건넸던 손수건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장 우울할 때, 힘들 때 마치 기적처럼 그가 나타나서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사람이란 늘 차갑고 무섭던 사람이 딱 한 번 다정하게 대해준 기억을 더 도드라지게 기억하는 존재다. 갭이라는 게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가짜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럴 거면 왜 확인 하는거야. 케이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제이드가 서둘러 덧붙였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가능성 때문에요.” “어떻게 확인하는 건데요?” “아, 뭐...보석상에게 보내 확인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지만요.” 그는 씩 웃으며 주전자를 들어 잔에 차를 따랐다. 때때로 보석상이 바꿔치기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보석상을 부르는 방법을 선호하죠. 아, 그래서 데일 남작 부인이 저택으로 보석상을 불렀던 거구나. 보석만 보내면 운송비만 들 텐데 뭐 하러 출장비를 내고 보석상을 집으로 부르는지 알 수 없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다음에 만날 때는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아, 그럼요.” 그의 미소로 배웅받으며 케이트는 여관을 나섰다. 그러다가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마을은 보석상이 없다. 보석상이 필요했던 것은 몇십 년도 전의 데일가의 주인들이 영지를 유지하기 위해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보석을 팔아 치웠던 때다. 그 이후로는 현 데일 남작과 그 부인이 부를 쌓기 시작하면서 때때로 구입한 보석을 확인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전부 외부에서 불러오고 있다. 그렇다면 보석상을 부른다는 말은 다른 도시의 보석상을 여관으로 부른다는 이야기인가? 그리고 보석상이 오고 있다는 이야기인가? 어디서 오고 있다는 거지? 게다가 제이드는 분명하게 말한 게 아니었다. 그런 방법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는 그런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그가 사용할지 말지는 모른다는 말이다. 이안만큼이나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라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길죠? 길어요. 내일도 쫌 길거예요. 후후후후후후후후. 남은건 다섯편정도 입니다. 오늘이 수요일이니 다음주에는 1부가 끝나겠네요. 달달한 부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죄책감이 들어 번외편을 쓰고 있습니다. 근데 달달할지는...(이걸 어쩐다.txt) 지금 예상으로는 다음주안에 1부 끝내고 한주 정도 쉬다가 7월부터 2부를 시작할 생각입니다. 쉬는 한주동안 번외가 올라갈 거구요, (라고 해도 두편입니다) 끝나면 공지 한 번 올릴게요. 쉬는 동안 비축분 좀 더 쓰...을것 같져? 안써요. ㅋㅋㅋㅋㅋㅋ 완전 씐나게 놀거임. ㅋㅋㅋㅋㅋㅋㅋ 2부에는 표지를 바꿀 생각입니다. 눈을 떠주세요, 용자님. 00028 7. 데이지 =========================================================================                            뒷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데이지는 눈꼬리를 잡아 뺐다. 이안이 외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설마. 그녀는 거침없이 이안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나 몰래 뒤에서 딴짓하는 건 아니겠죠?” 무슨 의미냐는 듯 이안이 한쪽 눈썹을 추어올렸다. 젠장. 끔찍할 정도로 오만한 표정인데 그 표정마저도 잘생겼다. 데이지는 허물어지는 정신을 바싹 세우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위협적으로 말했다. “날 배신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요.” 배신이라고? 이안은 기분 나쁜 것을 그다지 티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약간 짙어졌다. 데이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케이트라면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데이지와 케이트의 또 다른 점은 이안의 표정변화 없는 얼굴에 대한 점이다. 데이지는 그의 변화 없는 표정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안의 얼굴은 마치 그녀가 읽지 못하는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삽화 같았다. 그녀는 그런 점이 좋았다. 한 편 케이트는 표정변화 없는 이안의 얼굴을 불안해했다. 그가 화를 내는 건지, 기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 반사적으로 그의 눈동자에 시선이 향했다. “나는 네게 배신 운운할 정도로의 뭔가를 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담담한 대꾸가 이안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데이지가 그의 말을 이해한 것은 그가 이미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케이트는 재빨리 실외 복을 벗고 하녀 복으로 갈아입은 뒤 주방으로 내려왔다가 불행하게도 이안의 대꾸를 이해하고 붉으락푸르락한 데이지와 마주쳤다. “이 나쁜 년!” 뭐? 케이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데이지를 쳐다봤다. 그거 나한테 하는 소리야? 나쁜 년이라니, 뭐가? 아주 잠깐 그녀는 데이지가 자신이 이안의 반지를 훔친 것을 아는 줄 알았다. 데이지는 케이트의 손목을 낚아채며 말했다. “계속 그래 봐. 나도 가만히 있진 않을 거니까.” 대체 뭘? 뭘 계속하라는 건지, 뭘 하겠다는 건지 어느 쪽을 물어봐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 데이지는 씩씩대며 사라져 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그녀가 낚아챈 손목이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빨갛게 자국이 남아있었다. 이쯤이면 마조가 들었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톰이 죽었고 데이지는 그녀를 미워하다 못해 증오한다. 이놈의 저택. 지긋지긋하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다 짜증 났다. 다 싫어졌다. 이안과 데이지뿐 아니라 이 저택과 마을마저도 싫어졌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살았던 마을이라 애착이 있었건만 그 애착은 물거품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그날 밤 데이지는 가만있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밤마다 케이트와 이안의 방이 매우 가깝다는 사실이 기분 나쁘던 차였다. 원래대로라면 두 사람의 방은 지붕 아래로 다시 올라와야 하지만 톰의 장례식 때문에 미뤄졌다. 그녀가 모르는 밤사이 두 사람이 인접한 곳에서 잠을 잔다는 사실이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했던가. 케이트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거 아닌가. 게다가 이안의 방이 다시 남자 숙소로 돌아가면 그녀가 밤에 이안을 만나러 가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그래서 데이지는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친 뒤 조심스럽게 이 층으로 내려갔다. 오늘은 절대로 그의 방에서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말아 올린 머리카락을 풀어 내린 케이트는 한숨을 쉬며 침대 위에 올라갔다. 오늘 하루는 너무 힘들었다. 차라리 몸이 힘든 게 낫지 마음이 힘든 건 최악이다. 너무 우울했다. 톰. 톰. 그리고 증오에 불타는 데이지의 눈동자. 우울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데 그녀를 건져 올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케이트는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는 것도, 스스로 빠져나오는 것도 포기했다. 아침이 오면 나아질 거야. 천천히 수마가 덮치기 시작했다. 늪에 가라앉는 것처럼 몸이 무거워졌다. 잠결에 이안이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은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더니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 시각에 왜 안 자고 저러는 거래. 케이트는 비몽사몽 간에 그렇게 생각하며 약간 짜증을 냈다. 몸이 나른한데 머리 한구석은 깨어있는 게 기분 나빴다. 이안은 서랍을 열었다가 닫기도 하고 뭔가를 들어 옮기기도 하는 듯 쿵쿵거렸다. 그런 소리가 나는 반대편에서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다가왔다. 그것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것처럼 이안의 방으로 걸어가더니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벌컥 열었다. 곧이어 환풍로를 통해 데이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아...뭐하는 거,” 놀라게 해주기라도 하려 했던 모양이다. 애교 섞인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하고 뚝 끊겨 버렸다. 흠. 지금이 남들 다 자는 밤이라는 걸 떠올린 모양이군. 케이트는 만족하며 다시 자세를 고쳤다. 약간의 발소리. 그리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곧 잠잠해졌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지?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의 방에 여자가 들어가고 말없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리다니. 그다지 즐겁지 않은 생각이 떠올라서 케이트는 눈을 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말자.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몇 번이나 되 내이면서 뒤척이던 케이트는 결국 입술을 깨물었다. 이놈의 환풍로. 전부 이것 때문이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일까지 알아버리게 되는 건. 결국 케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씩씩거리며 자신의 방을 나섰다. 덕분에 그녀는 그다음에 들려온 소리는 전혀 듣지 못했다. 이층에도 저택 뒷마당이 보이는 커다란 창문이 있다. 케이트는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높이가 낮은 탓에 이 창문에서는 계곡 아래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창문을 열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숫자를 세는 것보다 노래를 부르는 쪽이 시간을 재기 편하다. 다섯 곡만 부르다 들어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두 곡째에 접어들었을 때 창밖에 나지막하게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 어디 있지?” 작고 울려서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남자의 목소리이고 익숙한 목소리라는 점이었다. 그녀가 노래를 멈추고 시선을 돌렸을 때 검은 인형 하나가 재빨리 저택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엇. 케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밤중에 창문 앞에 얇은 잠옷 한 장만 입고 앉아 있는 건 그리 좋은 모양새가 아니다. 그녀가 소리 나지 않도록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이미 상대가 계단을 올라오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벼락 맞은 것처럼 두 사람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상대가 케이트라는 것을 알자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를 살폈다. 달빛이 비치는 바람에 얇은 잠옷 안의 케이트의 자그마한 체구가 드러났다. 여기가 그의 집이었다면 그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를 낚아챘을 것이다. 아니, 아니다. 이안의 이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그랬을 리 없다. 하녀 따위에게 손댄 적은 한 번도 없다. 그가 무심하게 몸을 돌리자 케이트는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는지 헉하는 신음과 함께 주저앉았다. 미쳤어. 미쳤나 봐. 사냥감이 된 기분이었다. 흉포한 짐승을 맞닥트린 작은 동물의 기분을 알 것도 같았다. 그녀는 이안이 복도를 걸어가자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그의 뒤를 따랐다. 부탁이니 이 어둠이 그녀의 뺨에 떠오른 홍조를 감춰주길 바랐다. 다행히도 이안은 뒤를 돌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발소리를 의식하며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밤중에 어딜 다녀오는 걸까. 그녀가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때 이안은 자신의 방 앞에서 몸을 멈췄다. 케이트가 멈추자 그는 그녀를 쳐다봤다. 왜 방으로 들어가지 않는 거지? 너무 멀어서 그녀의 모습은 복도의 어둠이 충분히 가려줄 것이다. 어둠. 그때 케이트는 그가 무엇 때문에 멈췄는지 알았다. 문을 연다면 방 안의 빛이 복도의 어둠을 몰아낼 것이다. 자연스럽게 아까와 같은 상황에 맞닥트리게 되겠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방을 나오기 전 저 방에서 데이지와 이안의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안이 계단을 올라왔다. 시간은 삼십 분도 안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차마 입밖에 내뱉을 수가 없었다. 데이지는요? 그 한 마디는 그녀가 그와 데이지의 관계를 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신경 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모른 척하자. 마음을 굳히고 케이트가 뒤로 물러나자 이안은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새까만 어둠으로 가득 찬 복도에 방에서 흘러나온 빛 한줄기가 퍼졌다. 문틀과 이안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빛으로 색채를 되찾아가는 것을 케이트는 쳐다봤다. 이안은 발을 내딛다 말고 멈칫했다. 그의 방 안에 믿을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되어 있었다. 뭔가를 느낀 건지 케이트가 다가왔다. 가슴에 팔을 두른 그녀는 빠른 속도로 다가와 이안의 방문을 잡고 휙 열었다. 나중에 이때를 떠올린 그는 그것이 여자의 감인지 아니면 마녀의 감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케이트의 눈이, 입이 벌어졌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간이침대의 시트는 갈가리 찢어져 있었다. 옷장과 책상의 서랍은 전부 제자리에서 빠져나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 안에 들어있던 종이와 옷은 전부 내팽개쳐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마치 인형처럼 갈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데이지가 쓰러져 있었다. 색이 바 랜 갈색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하고 벌어진 작은 입술 사이로 악몽 같은 심연이 도사리고 있었다. 헉. 케이트는 숨을 들이켜는 것과 동시에 몸을 돌렸다. 어떤 생각이 들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다리가 움직였다. 그런 그녀의 팔을 이안이 낚아챘다. 그녀가 도망치려 했다. 그 역시 어떤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아아아아악!” 절규와 같은 비명이 어둠을 갈랐다. 이안이 재빨리 케이트의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마다 불이 켜지고 구두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제일 먼저 나타난 빌이 본 것은 데이지의 시체와 그 앞에서 도망치려는 케이트를 붙잡은 이안의 모습이었다. ============================ 작품 후기 ============================ 어, 집에와서 저녁먹어야지~ 하고 기댔다가 잤네요. 데이지는 에이, 다들 이렇게 될 줄 아셨잖아요. 케이트와 이안을 간단하게 그렸는데 본문에는 안올라가네요. (이건 이미 알 고 있었음. ㅋ) 뜰레 올려뒀습니다. 관심있는 분은 물열어뒀으니 편한 시간에 방문해 주세요. 00029 8. 수사관 =========================================================================                            하녀의 아침은 빠르다. 그중에서도 가장 빠른 건 수습 하녀다. 티 나지도 않으면서 자질구레한 궂은일이 전부 떠 넘어오기 때문이다. 질은 누군가 몸을 흔들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건 누구나 힘이 든다. 나이가 들면 괜찮아진다지만 그녀는 과연 그 나이라는 게 그녀에게도 올지 알 수 없었다. “질, 가서 케이트 언니 일어났는지 봐.” 자넷은 이미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머리를 땋고 있었다. “우응.” 기지개를 켜며 질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텐을 젖혔다. 먼지투성이에 여기저기 낡은 방이지만 유일하게 지붕 아래 사용인의 숙소 보다 좋은 건 창문이 있다는 점이다. 벌써 파랗게 하늘이 밝아 오고 있었다. 어서 케이트 언니를 깨워야지. 그녀는 아직 차가운 바닥에 맨발이 닿지 않도록 구두를 찾아 신었지만 바닥이나 구두나 차갑기는 매한가지였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을 때 질은 평소보다 훨씬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조용한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을씨년스러웠다. 아침이 어쩌면 이렇게 불길할까. 파랗게 밝아오는 동쪽 하늘이 어떤 전조처럼 느껴졌다. 아직은 까만 복도 안으로 뛰어든 질은 재빨리 케이트의 방으로 걸어갔다. 케이트는 좋다. 로더 부인은 싫고 하녀 장은 무섭다. 데일 남작부인은 얼굴을 본 적도 몇 번 없다. 적어도 케이트는 이유 없이 짜증을 부리거나 실수했다고 혼내지 않았다. 자넷역시 그렇다고 말했다. 때때로 눈이 마주치면 따듯하게 미소 지어준다. 그럴 때마다 질은 기억도 안 나는 엄마가 생각났다. 그녀는 낡은 잠옷 위로 흔들리는 메달을 손에 감싸 쥐고 케이트의 방까지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아침이예요.” 안쪽에서 케이트가 잠에서 깨면서 침대가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 평소보다 두 배는 더 기운 없는 목소리였다. 어젯밤 사건을 들었다. 질은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녀들도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케이트는 더했을 것이다. 질은 케이트에게 도움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아침이 왔다. 끔찍하게 긴 밤과 새벽이 지나고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던 새파란 아침이 흘러들어왔다. 케이트는 뜬눈으로 지새운 탓에 버석거리는 얼굴을 대충 닦았다. 눈을 감으면 데이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는 탓에 졸다가도 깜짝깜짝 깨곤 했다. 그때 빌과 집사가 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몸이 부르르 떨렸다. 도망치려던 그녀는 낚아채던 이안의 손이 회상 속에서는 강철같은 발톱으로 변해있었다. 버둥거리고 뿌리쳐도 꿈쩍하지 않던 단단한 팔이, 몸이 무서웠다. 순식간에 그녀의 심장이 달칵거리며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세상에. 케이트는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입안에 모래가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이안은 손발이 묶인 채 빈방에 갇혔다. 갇히기 전에 빌과 집사에게 얻어맞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무서운 것은 린치가 가해졌음에도 그의 입에서 변명한 마디 신음한 마디 새어나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데이지가 사라졌어도 데일 저택의 아침은 똑같이 시작되었다. 케이트는 멍한 상태로 요리사의 지시에 따라 요리를 시작했다. 빵을 굽고 생선을 손질했다. 데이지 한 사람이 사라진 자리는 수습 하녀들에게 더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녀들은 식사시간을 제외하곤 끊임없이 저택 안을 쓸고 닦아야 했다. 원래 네 명이 하던 것도 버겁던 일이다. 케이트가 두 사람분의 일을 했으니 가능했다. 그런데 이젠 둘이서 한 사람 분의 일을 하는 수습 하녀들이 하려니 데이지의 죽음 따위는 신경도 안 쓰일 정도로 힘든 일이 되었다. 하녀 장은 혀를 차며 빨리 사람을 더 구해야겠다고 말했다. “주방은 어떻게 된 거예요?” “주방도 구하고 있는데.” 하녀 장은 말끝을 흐렸다. 이 저택의 요리사가 트집쟁이라는 건 이미 마을 안에 소문이 나서 지원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하기가 어려웠다. 구빈원에서 쓸만한 아이를 뽑아서 잘 가르쳐야죠. 그녀의 말에 요리사는 발칵 화를 냈다. “세상에! 그런 애들을 대체 언제 가르쳐서 써먹냔 말이예요!” 요리사의 투덜거림이 시작되자 하녀 장은 고개를 돌려 빌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에게 식사는 갖다 줬나?” “그 녀석이요?” 빌은 되물은 다음에야 하녀 장이 지칭한 게 누군지 알았다. 이안이다. “그깟 더러운 살인자에게 식사도 주라고요?” “내 음식을 살인자에게 주는 건 허락 못 합니다!” 빌과 요리사가 동시에 말했다. 하녀 장은 두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치안관이 오기 전까지는 살려놔야죠. 빌, 식사 갖다 주고 오너라.” 내가 왜 살인자의 시중까지 들어야 하냐고 투덜거리며 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녀 장은 집사의 부재가 원망스러웠다. 그의 술버릇은 이미 익숙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남자인 그가 좀 잡아줬으면 싶었다. “아참, 채소도 가져와야 하는데.” 요리사의 말에 하녀 장이 또 한 번 빌을 쳐다보자 빌이 발칵 화를 냈다. “몸은 하난데 일을 두 개나 하란 말입니까?” 요리사와 하녀 장은 잠시 침묵했다. 문제는 현실로 닥쳐왔다. 일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두 사람 다 사람을 하루빨리 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녀 장이 로더 부인을 찾았지만 그녀는 재빨리 위층으로 사라진 다음이었다. “제가 창고에 다녀올게요.” “안 돼.” “안 돼.” 케이트가 끼어들자 하녀 장와 빌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뒤따라 대답하려던 요리사는 입을 다물었다. 질과 자넷의 시선이 하녀 장과 빌에게 닿았다. 시선을 깨달은 두 사람은 헛기침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거운 걸 여자애에게 들게 할 수는 없잖니.” 이상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언제 요리사가 무겁다고 케이트가 쉬도록 배려해 준 적이 있던가. 질과 자넷도 같은 생각을 했지만 둘 다 현명하게도 입 밖에 내뱉지는 않았다. 결국 이안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는 건 케이트에게로 돌아왔다. 하녀 장은 최대한 그녀가 가려고 애썼지만 일이 너무 많아서 저녁때가 되어서야 이안에게 식사를 주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집사가 술통에 들어가 사는 이 저택에서는 하녀 장이 집사의 일까지 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져가.” 케이트는 숨 쉬는 것도 잊고 요리사가 내민 쟁반을 쳐다봤다. 버터나 쨈도 없이 하루 지나 쭈글쭈글해진 빵과 건더기가 하나도 없는 스튜. 빈약하기 그지없는 식사가 쟁반에 담겨있었다. 가난한 집에서나 먹는 음식이다. 부유한 데일 가의 저택에서는 한 번도 접해 본 적 없는 음식이었다. 케이트가 가져다주지 않는다면 이안은 하루를 꼬박 굶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내 알 바 아니지. 그녀는 약간 잔인하게 생각했다. 데이지는 이런 식사조차도 할 수 없다. 왜냐면 그가 죽였으니까. 얄미웠던 데이지에 대한 동정이 눈 밑에 스며 나왔다.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떤 미친 사람이, 얼마나 잔혹하기에, 왜 데이지를 죽인 걸까. 자신을 사랑한다고 매달리는 여자를.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해할 수도 없었다. 왜. 왜?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고 쟁반을 받아들었다. 달그락 소리가 나더니 끼익 하고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두운 방 안에 빛이 한 조각 들어왔다. 이안은 무심하게 방문자를 보다가 그게 케이트라는 것을 알자 미간을 좁혔다. 이 저택은 살인자에게 식사를 가져다줄 사람으로 여자를 선택하는 모양이군. 어둠 속에서 케이트의 초록색 눈동자가 빛났다. 적의. 분노. 경멸. 예상했던 것들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예상과 달리 따끔거렸다. 케이트의 눈동자에 담긴 분노가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케이트가 쟁반을 놓고 칼을 집어 들었다. 찌르려는 건가? 그녀는 찌를 것처럼 움켜잡더니 이안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꼬박 하루를 굶었을 텐데 이안의 태도는 변한 게 없었다. 양손이 각각 반대쪽으로 벽에 묶인 상태에서도 그는 허리를 세우고 어깨를 편 채 앉아있었다. 눈동자가 잘 벼린 칼 같아서 혼란스럽던 그녀의 머릿속이 딱 멈췄다. 데이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케이트는 그녀가 이안을 감당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가능할 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안의 타인에 대한 경멸에 가까운 무념 무심은 그 잘생긴 얼굴 가죽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지금은 다들 모르고 있지만 그건 시간이 지나면 원하지 않아도 알게 될 일이었다. 그는 연인을 외롭게 만들고 동료를 불안하게 만들며 적을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남자다. 그렇기 때문에 케이트는 이안때문에 데이지가 어떻게 행동해도 진심으로 화나지 않았다. 데이지는 눈치가 빠른 아이니 언젠가 그의 본색을 깨달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사라졌다. 밝게 빛나던 데이지의 미래는 어둠에 묻혀버렸다. 더이상 그녀의 경박스럽다 할만한 웃음소리도,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도 볼 수 없다.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고 이안의 왼 쪽 손목을 묶은 줄을 끊었다. 마음 같아서는 개처럼 엎드려 먹으라고 하고 싶지만 양손이 각각 벽에 묶인 상태에서는 허리를 굽힐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오른손을 풀어줬다간 상대가 그녀 혼자라는 점을 이용해 도망치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왼손만 풀었던 것이다. 여기서 케이트가 몰랐던 것은 이안은 왼손도 꽤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먹어요.” 그녀의 말에 이안은 쟁반을 내려다봤다. 열린 문에서 흘러들어오는 조악한 빛으로도 식사가 형편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스푼을 들었다가 끝 부분이 닳고 마모되어 있다는 걸 깨닫고 웃음을 흘렸다. 어디서 이런 걸 구했을까. 부유한 데일 저택이다. 일부러 구하기도 힘든 이런 스푼을 식기로 내준 건 일종의 심술이겠지. 저택의 사용인들은 그가 이런 조악한 식사에 투덜거리길 바랐겠지만 이안은 군말 없이 다 먹었다. 익숙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것보다 더 심한 음식도 먹은 적이 있다. 케이트는 왼손으로도 흘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식사하는 이안의 모습에 입을 딱 벌렸다. 대체 이 남자가 못하는 건 뭘까. 그는 하인이라기보다는 귀족에 가까워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케이트는 왼손으로 음식을 먹으면서 이안이 지저분하게 흘리는 모습을 보길 바랐다. 그가 실수하는 걸 보면 약간의 만족감이 들것 같았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못된 사람이었나 싶어 케이트는 입을 다물었다. 식사가 끝나고 케이트가 이안의 왼손을 다시 묶기 위해 달라붙자 그의 코끝에 그녀의 냄새가 맡아졌다. 주방에서 묻어온 요리의 냄새와 달콤한 쿠키의 냄새 사이로 부드럽고 향긋한 케이트의 살 내음이 잠시 현실을 잊게 만들었다. 이안은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안의 손목은 빨갛게 묶이고 긁힌 자국이 있었다. 빌인지 집사인지 몰라도 꽤나 세게 묶은 모양이었다. 케이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품에서 그의 손수건을 꺼냈다. 깨끗하게 빨아 다림질까지 한 것을 이런 형태로 돌려주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손수건을 이안의 손목에 두른 뒤 그 위에 줄로 묶어 고정했다. 이상한 여자로군. 그녀가 물러나려 하자 이안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들이 내 반지를 가져갔나?” 반지라고? 케이트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지금 상황에서 제일 먼저 찾을 정도로 중요한 거였나?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남자였다. 치안관이 오면 그는 즉결심판을 받을 것이다. 데이지가 그의 방에서 죽었다. 죽은 데이지의 시체를 케이트가 봤고 그가 그녀를 막으려 하는 것을 저택의 모든 사람이 봤다. 더이상 증거가 필요할까. 케이트는 한달음에 주방으로 달려갔다. ============================ 작품 후기 ============================ 1. 어제 여러분의 반응을 본 저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고, 고객님? 당황하셨어요? 2. 바밤바의 매력에서 벗어나 이젠 바나나맛 우유에 빠져 있습니다. 이, 마력의 바씨들 같으니. 거의 몇 년만에 마시는 건데 맛과 양은 그대로네요. 근데 가격은 두배라는거...또르르. 3. 별로 중요한건 아니지만 치안관과 수사관에 대한 설명입니다. 뮈엘라에는 크게 세가지 법 종사자가 있습니다. 판사, 수사관, 치안관. 판사는 두가지 입니다. 딱 한명있는 대법관과 고등판사. 대법관이 하는 일은 귀족끼리의 분쟁을 재판합니다. 귀족이 귀족을 죽였거나 재산 분쟁이 있거나. 쉽게 말해서 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범인이 귀족이라면 대법관이, 평민이라면 치안관이 재판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대법관은 보통 후작 이상의 집안에서 나옵니다. 그 이하에서 뽑히면 (물론 백작이 공작보다 힘이 센 경우도 있지만) 범죄자 가문이 대법관보다 힘이 샐경우 공정한 판결이 이뤄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는 해도 이 바닥이 뭐...) 고등판사는 국가 안보에 관련된 사건을 재판합니다. 평민이라 해도 반란을 꾀했다면 고등판사가 재판합니다. 간혹 귀족도 고등판사가 재판하기도 합니다. 참고로 평민이 귀족을 죽이는 사건 자체가 봉건제에서는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사관은 판사가 재판할수 있도록 사건을 수사합니다. 즉, 국가 안보에 관련된 사건을 수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밀수는 어떤 의미로는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사만 할뿐 판결은 할 수 없습니다. 귀족만 뽑는 판사와 달리 평민도 될 수 있습니다. 대신 머리가 꽤 좋아야 하므로 본문에 나왔던 것처럼 공개시험만 세번 봅니다. 치안관은 상급치안관과 하급치안관이 있습니다. 평민사이의 분쟁, 범죄 등등을 조사하고 판결을 내립니다. 쉽게 말해서 경찰(좀 다르지만..)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상급치안관은 경찰청장쯤 되겠네요. 변호사가 없는 세계이므로 죄의 경중에 따라 치안관이 판결을 내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보통 판결은 영주가 내리는게 정석이지만 치안관의 조언을 따릅니다. 본문에서 이안이 치안관이 온다면 즉결심판을 받을 거라는 게 그런 의미입니다. 아무리 모든 증거가 갖춰졌고 증인이 있으며 현행법이라 하더라도 치안관이 와서 수사하지 않으면 판결을 내릴 수 없습니다. 4. 불금 입니다. 전 불금을 불태우러 이 글만 올리고 나갑니다. 대댓글은 돌아와서 달겠습니다. 모두 즐거운 주말 되시길! 5. 덧의 덧. 어라...다들 케이트가 범인으로 몰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황하시는 것 같네요. 일차적으로 생각해 보면 1. 이안의 방에서 데이지가 죽어있었고 2. 비명은 케이트가 질렀으며 3. 저택의 사람들은 케이트와는 이년째 알고지냈지만 (이 마을에 산 게 오년이고 엄마도 여기서 일했으니 더 된 사람도 있지요) 4. 이안은 이제 한달도 채 안된 녀석이죠. 이안의 입장에서야 당연히 케이트가 범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뒤에 뛰쳐나온 저택의 사람들은 당연히 이안이 범인이라고 생각할겁니다. 00030 8. 수사관 =========================================================================                            “창고에 뭐가 있는 걸까?” 자넷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뒤따라오는 질은 피곤하지도 않은지 종알댔다. “여기 와서 창고는 한 번도 못 들어가 봤어. 거기서 식료품도 다 꺼내오는데.” “알게 뭐야. 중요한 거라도 있나 보지.” “창고에?” 하아. 자넷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해 죽겠다. 데이지의 부재는 그녀들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었다. 오늘만 해도 그녀는 침실 세 개와 거실 두 개, 서재를 쓸고 닦아야 했다. 거기 있는 온갖 장신구들을 닦느라 어깨가 빠질 것 같다. 질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계단 세 개를 쓸고 닦은 뒤 주방에 가서 설거지를 도왔다. 현관을 쓸고 기둥에 낀 이끼를 제거했다. 보수는 좋은 편이지만 이렇게 힘들어서야 좋다고 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고아를 고용하기 꺼리는 다른 저택에 비해 고아를 반긴다는 장점도 지금은 그다지 관심 없었다. 자넷은 계단 중턱에 주저앉았다. 하인용 계단은 좁고 가팔라서 중간에 누군가 앉아버리면 다른 사람은 지나갈 수가 없다. 질은 자넷 앞까지 와서 똑같이 주저앉았다. 그녀의 작은 등을 보며 자넷은 자신이 잘한 것인지 고민했다. 말라서 앙상한 질의 어깨에 먼지가 묻어있었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일한 지도 일 년. 열심히 벌어서 언젠가 두 사람의 가게를 내고 싶었다. “항상 빌하고 집사님만 들어가잖아.” “하녀 장하고 로더 부인도 들어가지.” 자넷의 지적에 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네 명 이외엔 요리사도 들어가지 못한다. 지나가면서 슬쩍 봤는데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처음엔 마을 사람들이 이런 저택까지 와서 식료품을 훔쳐 갈까 봐 그러는 건지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을 조심하는 거라면 요리사까지 들어가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두 사람은 똑같은 자세로 앉아 한숨을 흘렸다. 두 살 터울의 자매는 쌍둥이로 오인할 만큼 닮아있었다. 그건 자넷이 저택에 오기 전 굶어 죽기 직전에서도 자신의 몫을 동생에게 양보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질은 그대로 있었다면 둘 다 굶어 죽거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사창가로 팔려 버릴 뻔한 두 사람의 인생을 구해내는 것으로 갚았다. 때때로 자넷은 고민하곤 한다. 함께 도망치자는 질의 말에 따랐던 것이 잘한 일이었을까. 거기 남아 엄마를 기다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 “언니는 궁금하지 않아?” 질의 질문은 자넷을 상념에서 끌어내렸다. 엄마. 기억도 나지 않는 여자. 더이상 검을 쥘 수 없게 된 퇴역용병인 남편의 손에 두 딸을 맡기고 돈 벌어 온다며 집을 나간 여자. 사람들이 너희의 엄마는 용병이라고 말할 때마다 아버지는 술 내음을 풍기며 비웃었다. 용병은 무슨. 용병 단을 따라다니는 창녀지. “별로.” “어째서?” 자넷은 거무스름한 질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관심 없으니까.” 질과 자넷의 또 다른 차이점이었다. 열여덟 살인 자넷과 열여섯 살의 질. 둘 다 열네 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성격은 전혀 달랐다. 질은 호기심 많고 활발했다. 반면 자넷은 조용하고 어른스러운 성격이었다. 흐응. 질이 벌떡 일어나 치맛자락을 털었다. 하인용 계단은 요 며칠 전혀 쓸고 닦지 못했다. 케이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었다. 비가 오려는지 공기가 너무 습해서 잠옷이 몸에 달라붙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날이면 데이지는 잠옷을 벗고 자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 케이트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면 낄낄거리며 눈을 떴다. 젠장.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데이지의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다. 못해준 것만 생각났다. 그때 단호하게 이안에게 관심 없다고 말했다면 데이지가 좀 더 편했을까. 그랬다면 데이지가 이안의 방에 몰래 찾아가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이안이 데이지를 죽이지 않았을 테고, 그랬다면... 계속해서 가정의 일만 떠올랐다. 어쩌면 데이지의 목소리가 환풍로를 통해 들렸을 때 사람을 불렀다면 지금 그녀는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이안이 시끄럽게 굴었을 때 그녀가 먼저 가서 항의했다면 데이지는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케이트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들기는 틀린 것 같다. 지쳐서 피곤한데도 머릿속만은 또렷했다. 그날의 기억이, 이안의 방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던 때부터 데이지의 시체를 발견할 때까지의 기억이 계속해서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분명 그녀는 이안의 방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이안과 만났다. 어딘가 이어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계단에서 올라오는 이안을 창문 옆에 서 있다가 봤다. 그렇다는 말은 이안도 내려갔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내려가는 사람이 있었다면 창문 옆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케이트가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이안은 어떻게 내려간 거지? 창문을 통해서? 어째서? 데이지를 죽이고 그녀의 시체를 사람들 몰래 숨기기 위해서라면 창문을 통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여자 한 명을 안고 창문을 통해 나갈 정도로 힘이 세다면. 이안은 그 정도의 힘이 있지만 케이트는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데이지의 시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안의 방에 그대로 있었다. 게다가 데이지를 죽인 게 이안이 아니라면 데이지를 죽인 범인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케이트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안에게 물어봐야 하나? 하지만 뭘? 이런 이야기를 누구에게 한단 말인가.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펄쩍 뛰어올랐다. “...누구세요?” “자넷이예요.” 가느다란 목소리가 말했다. 자넷의 목소리가 맞다. 케이트가 문을 열자 삐쩍 마른 소녀가 목에 걸린 메달을 만지작거리며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여기저기 닳은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 위에 걸친 건 마찬가지로 얇은 담요였다. 숄이나 가운을 만들 천이 없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니? 케이트가 입을 열자 자넷은 얼굴을 찡그렸다. 질이 어디 아픈 걸까. “질이...” 거기까지 말한 자넷은 케이트를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용기를 사용한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 안 하실 거죠?” 적어도 질이 아픈 건 아닌 모양이었다.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야기 안 할게. 그래도 소녀는 마음을 놓지 못하겠는지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질이 창고에 들어간 거 같아요.”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창고에? 왜? 자넷은 서둘려 질을 옹호했다. 창고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니까 궁금했던 모양이예요. 보통 채소 같은 걸 보관했을 거라고 말 했는데...그녀는 말끝을 흐리다가 부탁했다. “같이 가주면 안 될까요?” 톰이 죽고 데이지가 죽었다. 작은 저택이라고는 하나 일주일 새에 사람이 둘이나 죽은 저택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혼자서 지하로 내려가기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케이트는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가운을 입고 초를 하나 들고 나왔다. 작은 불덩이가 일렁이며 음울한 명암을 만들어 냈다. 오랜 가난으로 저택 안에 남은 조각상은 여기저기 금이 간 낡은 것들뿐이었다. 부유해지면서 여기저기 손보고 그림이다 조각이다 사서 진열해 놨지만 사용하지 않는 육아 실 근처까지 꾸밀 필요성은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희미한 빛이 조각상의 얼굴에 내려앉을 때마다 마치 고대의 유령이 살아난 것 같은 환각을 불러일으켰다. 케이트는 자넷과 함께 복도를 걸어가면서 그때 만일 데이지를 죽인 범인이 이 복도에 남아있었다면 조각 사이에 서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안 쓰는 방에 들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때 그녀가 복도를 달려갔다가 범인을 만났다면 그녀 역시 데이지처럼 죽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쩌면 이안이 그녀를 잡았던 건 목격자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도에 숨어있을지 모를 범인에게서 그녀를 구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물론 이안은 도망치려는 사람을 반사적으로 잡은 것에 불과하지만 낙관적인 케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질이 창고에 간 게 확실해?” 케이트의 질문에 자넷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어둠에 묻혀 잘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걸 깨닫고 황급히 입을 열었다. “요 며칠 계속 그 얘기였거든요. 그 애 성격에 분명 갔을 거예요.” “갔다 해도 자물쇠가 걸려 있을 텐데.” “아, 그거라면...” 자넷을 입을 열었다가 부끄러워서 다시 닫았다. 이 이야기까지 해도 되는 걸까. 그녀는 케이트의 얼굴을 쳐다보고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시면 안되요. “질은 자물쇠를 꽤 잘 따거든요.” 뭐어? 케이트는 입을 딱 벌렸다. 이 애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걸까. 그녀는 순진하지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영리한 편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곧 질과 자넷이 어린 나이에도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엄마와 살았던 그녀에 비해 이 소녀들은 세상으로부터 그녀들을 지켜줄 벽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값싼 초는 쉽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지하에 내려왔을 때는 삼 분의 일쯤이 사라진 뒤였다. 계단 아래에서 누군가 초를 켜고 지나가는 게 보여서 케이트는 재빨리 바람을 불어 불을 껐다. 집사가 등불을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이 밤중에 어딜 가는 거지? 밤에 돌아다니는 건 금지기 때문에 케이트와 자넷은 입을 막고 집사가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만약 그가 몸을 돌려 계단 위를 쳐다본다면 두 사람의 모습은 들킬 게 분명했다. “설마 질이 들킨 건 아니겠죠?” 집사의 모습이 사라지자 자넷이 속삭였다. 그랬다간 저렇게 조용하진 않을걸. 케이트는 소녀를 다독이고 서둘러서 창고를 향해 걸어갔다. 집사의 방이 창고에서 가장 가깝다. 그런데 그가 나갔으니 소리가 나서 들킬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듯했다. 서두르기는 해야겠지만. “보세요.” 자넷이 바닥에 떨어진 자물쇠를 가리켰다. 초를 끈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창고문은 한 뼘정도 열려있었다. 케이트가 이 저택에서 일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넷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서 질을 불렀다. “질? 여기 있니?” 케이트 역시 그녀를 따라 들어가자 새까만 어둠이 덮쳐왔다. 식료품을 저장하는 창고로 알고 있었는데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썩은 채소의 냄새, 훈제한 고기의 냄새, 비린 생선의 냄새. 그 중 아무것도 나지 않았다. 그녀의 코끝에 닿는 건 나무상자의 냄새뿐이었다. 식료품을 저장하는 창고가 아닌가? 어둠이 눈에 익자 케이트는 천천히 방 안을 둘러봤다. 창고는 휑하니 비어있었다. 뭘 보관하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더 이상은 아무것도 보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중간 중간 커다란 나무상자가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질, 빨리 나와.” 아무래도 여기엔 질이 없는 것 같다고 케이트가 말하려던 차였다. 창고에 인기척은 두 사람 말고는 없었다. 큰 편이긴 했지만 아무렇게나 놓인 궤짝 말고는 텅 비어 있어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숨은 게 아니라면. 갑자기 자넷이 궤짝 하나에 달려들었다. 그녀가 그대로 주저앉았기 때문에 케이트는 자넷이 쓰러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궤짝에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억지로 잡아 뺀 것처럼 중간에서 끊어져 한쪽 끝은 궤짝의 뚜껑 사이에 끼어있고, 남은 끝에는 반달모양의 메달이 매달려 있었다. “질!” 자넷이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목걸이를 낚아챘다. 그러면서 궤짝의 뚜껑이 벌어졌다. 그것은 그대로 스르르 미끄러져 케이트가 손쓸 새도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하는 소리가 나서 케이트는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듣지 못하길 기도했다. 하지만 그 소리가 집사의 귀에 들리고 말고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넷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치 유령 같다고 생각하며 케이트는 그녀를 끌어당겼다. 이제 나가자.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삐쩍 마른 소녀는 꿈쩍도 하지 않고 한 곳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람 하나쯤은 들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한 나무상자였다. 자넷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 아니, 아니다. 자넷과 똑같이 생겼지만 자넷이 아니었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둘 다 하얗게 질려 누가 자넷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옆에 서 있는 게 자넷이니 저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건 질이 분명했다. 방금 전과 똑같은, 그러나 어조만은 분명히 다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질!!!!!” ============================ 작품 후기 ============================ 비가오려고 이러는 건지 제가 뭘 잘못했는지 며칠전부터 목이랑 어깨가 아파요 ㅠㅠㅠㅠ 최근에 이거 외전까지 싹 다 써버린다고 고양이 등에 거북이 목하고 타자를 쳐대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이번 달 안에 1부 완결 됩니다. 아마 이번주 목요일에 1부는 끝날거 같고요. 외전은 두편이니까 다음주에 두번에 걸쳐서 업뎃됩니다. 그럼 전 일주일 정도 여유가 있네영^ㅂ^ 못읽은 책 읽으려구요. 글 쓰는 동안은 해당 장르는 안읽어서 최근 읽고있는건 순 미스테리 수사물... 아니, 즐거워. 재미있다고. 에드 맥베인 완전 사랑해. 근데 취향이 너무 편향되어서 쉬는 동안 판타지랑 로맨스 좀 읽어서 판타지 로맨스 감을 채워야겠네요. 근데 일주일밖에 시간이 없어서 완결 난것만 읽어야 한다는 불편한 진실... 00031 8. 수사관 =========================================================================                            어둠 속에서 이안은 눈을 떴다. 마치 불을 켠 것처럼 눈앞이 잘 보였다. 시야가 어둠에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멍청한 사람들은 그를 묶어 두고 한 번도 확인하러 오지 않았다. 그의 두 손은 완전히 자유였다. 그는 손에 쥔 손수건을 내려다봤다. 그것은 깨끗하게 빨고 다렸지만 케이트의 품속에 간직한 탓인지 그녀의 냄새가 배 있었다. 케이트. 마녀일지도 모르는 여자. 그는 방금 그녀가 자신의 일과는 상관없다고 결론 내린 상태였다. 케이트는 진짜로 순진해 보였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저 멍청한 놈들은 그녀가 마녀라는 걸 모르는 게 분명했다.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몸 상태를 확인했다. 케이트가 순진하다는 것은 그의 손을 다시 묶기 전에 손목에 손수건을 대줬다는 점에서 확실했다. 덕분에 쓸데없는 힘을 쓰지 않고 손을 풀 수 있었다. 이안은 신경 거슬리고 짜증 나는 이라는 형용사 뒤에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신경 거슬리고 짜증 나며 순진한 계집. 그는 사건이 끝난 뒤에도 이 사실에 대해서는 케이트에게 알려주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케이트가 계속 순진하기를 바랐다. 사위는 조용했다. 이안은 소리 나지 않도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큰 키와 체구에도 불구하고 마치 어둠에 녹아든 것처럼 움직였다. 그가 눈뜨기 전 아래층에서 소리가 났다. 절규처럼 들린 그것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빌. 혹은 질. 빌일까. 그렇다면 그 목소리는 데일 남작 부인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저택에서 빠져나가야 할까. 그는 다시 한 번 고민했다. 처음 계획은 이대로 저택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지를 놓고 가는 건 찝찝하다. 반지의 주인이 뭐라고 징징댈 게 분명했다. 이안은 일단 반지를 찾기로 했다. 누군가의 방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케이트는 눈을 떴다. 뒤통수가 지끈지끈하게 아팠다. 뺨도 아팠다.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그랬다. “자넷?”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가 어디지? 하지만 곧 그녀는 여기가 그녀가 정신을 잃기 전의 창고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넷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도망쳤을 것이다. 부디 잘 도망쳤다면 좋을 텐데. 그녀는 한숨을 쉬며 도망쳤다. 뺨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는지 감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안을 때렸지.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도 이렇게 아팠을까. “일어났나 보군.”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케이트는 화들짝 놀랐다. 빌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공포에 젖은 몸이 뒤로 밀렸다. 빌이었다. 빌. 그녀는 좌절감에 눈을 감았다. 질의 시체를 발견한 자넷이 비명을 질렀을 때 케이트의 눈에 보인 것은 그녀의 뒤로 접근하는 빌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왜 빌이 자넷을 먼저 공격하려 했는지 몰랐지만 그건 그의 안에 남아있는 최소한의 인간성이었다. 상대는 여자라고는 하나 두 명. 그렇다면 정신이 없는 자넷보다는 케이트를 먼저 쓰러트리고 그다음에 자넷을 공격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는 이 년이나 함께 동고동락한 케이트를 때려눕히는 걸 주저했다. 그건 자연스럽게 자넷을 먼저 공격하려 한 행동으로 나타났고 그를 발견한 케이트가 자넷을 밀었다. 덕분에 케이트의 뺨에 빌의 손자국이 남았다. 도망쳐, 자넷! 마을로! 의지가 없는 것처럼 자넷은 비실비실 일어나 케이트의 말에 따라 저택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녀를 잡으려는 빌의 다리를 케이트가 붙잡고 매달렸다. 자신은 무사할 거라는 판단을 한 건 아니었다. 그녀가 유달리 정의감에 불타고 선한 사람이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본능적으로 빌을 막아야 한다는 행동이었다. 빌은 케이트의 머리를 후려쳤다. 하지만 그녀의 팔이 다리를 감고 있어 자넷을 잡으러 달려나갔을 때 이미 그녀는 사라진 뒤였다. 젠장. 빌은 투덜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데일 남작에게 이야기하자 그냥 두라고 말했다. 어차피 그딴 고아 계집의 말을 이 마을에서 누가 듣겠어. 그래. 그 말도 맞다. “네가 죽였어? 데이지랑...앤도?” 빌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케이트가 마음에 들었다. 싹싹하고 영리한 편이다. 얼굴도 예쁘장했다. 사람 귀찮게 만들고 영악하게 구는 데이지보다, 접점이 없는 앤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데일 남작 부인은 원하면 케이트를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일이 다 그르쳤다. 이건 전부 다 그 이안 때문이다. 멍청한 계집애들이 얼굴만 보고 마음이 들떠서 돌아다니다가 이렇게 된 거 아닌가. 그래서 밤에는 돌아다니지 못하게 단단히 주의를 시켰건만. “앤은 아냐. 지금쯤 델토스에 가 있겠지.” 델토스라고? 케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긴 바다를 한참이나 건너야 하는 나라가 아닌가. 빌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빌의 그림자에 가려져 케이트의 눈에는 그게 뭔지 보이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면 너도 거기로 갔을 테지만.” 더 운이 좋았다면 자신의 여자가 됐을 테고. 그는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 말하며 상자에서 뭔가를 꺼내 그었다. 칙하고 빨간 불꽃이 일었다. 성냥? 케이트는 혼란스러운 머리로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데이지를 죽인 건 빌이 맞는 모양이다. 그리고 앤은 델토스에 가 있다고? 운이 좋다면 그녀도 거기에 가 있었을 거라니,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톰은? 톰이 죽은 것도 사고가 아니었던 걸까? 케이트는 일어나려 애썼다. 머리가 안개라도 낀 듯 답답하고 몸이 무거웠다. “이렇게 되어서 정말 안타깝다.” 빌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성냥을 창고 안쪽으로 던졌다. 순식간에 확하고 불길이 일었다. 차라리 케이트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게 그녀에게 더 편할 것이라는 걸 알지만 처음에 공격하지 못했던 이유는 계속해서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가 그녀를 꽤 좋아했다는 점도 한 했다. “빌! 어떻게 됐지?”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케이트는 숨을 들이켰다. 하녀 장의 목소리였다. 빌은 돌아보고 끝났어요! 라고 외치더니 몸을 굽혀 케이트의 뺨을 쓰다듬었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케이트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게 그녀가 알던 빌이란 말인가. 믿을 수가 없다. 마치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후끈하게 열기가 느껴지는 불길과 그녀를 버려두고 창고 밖으로 나가는 빌. 그리고 문이 닫히고 자물쇠가 걸리는 소리까지. 케이트는 간신히 일어나 비척비척 문 앞으로 걸어갔다. 시야가 흐렸다. 팔다리가 짜증날 정도로 흐느적거렸다. 불길은 엄청난 속도로 증식하기 시작했다. 거짓말. 이건 전부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회색의 벽이 보이고 그녀의 침대에 누워있는 게 아닐까. 다시 눈을 떴지만 여전히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빌어먹을. 케이트는 빌이 나갈 때 더 빨리 정신을 차리고 따라나가지 않은 자신을 원망했다. 두 다리로 일어나있는 것도 힘든 상황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한층 맑아진 머리는 후회로 가득 찼다. “살려주세요.” 그녀는 주저하며 외쳤다. 이렇게 외친다면 그녀를 구해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빌과 하녀 장이 한패였다. 그렇다면 집사는? 로더 부인은? 데일 남작과 그 부인은 어떨까? 문득 이안이 떠올랐다. 이안. 그는 결백했다. 세상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가 등 뒤로 찌르르 흘렸다. 데이지를 죽인 건 이안이 아니었다. 그는 결백하다. 다행이야. 하지만 곧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이안은 감금되어 있다. 심지어 그녀보다 더 상황이 나쁘다. 손이 묶여있으니까. 이럴 줄 알았다면 왼 손을 묶을 때 그렇게 세게 묶지 말걸. 작은 후회가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살려주세요! 사람 살려요!” 약간의 희망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도망친 자넷 덕분이었다. 자넷이 무사히 마을로 갔을까. 저택에서 마을까지는 걸어서 십오 분 정도다. 뛴다면 더 빨리 갈 수 있을 것이다. 자넷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오는 데 얼마나 걸릴까. 케이트는 한 숨을 내쉬며 주 앉았다. 머릿속의 안개가 걷히자 두통이 오기 시작했다. 빌에게 맞은 탓이다. 잠깐 정신을 잃기까지 했으니 꽤 강한 힘으로 후려친 것이 분명했다. 두통은 밀물과 썰물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한 차례 두통이 사라지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갑자기 짜증이 일었다. 아니, 짜증이 아니라 히스테리였다.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 목숨의 경각이 달린 위험한 상황을 맞닥트린 평범한 여자의 당연한 반응이었다. 케이트는 주먹을 쥐고 몸을 부르르 떨다가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찔끔 흘러내렸다. 거짓말이야. 믿을 수 없어. 말도 안 돼. 부정하고 싶은 심정이 단어가 되어 머릿속을 두드리며 두통을 가중시켰다. 눈을 뜨면 내 방일 거야. 이건 전부 꿈이야. 하지만 고개를 들자 보이는 건 새빨간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불길이었다. 마치 저택을 전부 태우려고 작정한 듯 불은 창고의 벽 하나를 잠식하고 빠른 속도로 기세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케이트는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난 탓에 눈앞이 어질했지만 문에 매달린 덕에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주먹을 쥐고 문을 두드리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이 있어요!” ============================ 작품 후기 ============================ 이번편은 짧은것 같지만 짧지 않습니다. 용량기준으로 하면요... 다음편부터는 쫌 길어질거예요. ...그렇다고 이번편이 짧다는 말은 아닙니다. 쩜쩜쩜. 친구가 감자탕 먹으러 가재서 좀 일찍 올리고 나가봅니다. 비바! 00032 8. 수사관 =========================================================================                            데일 남작 부인의 침실은 비어있었다. 이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함정인가? 그런 것치고는 묘하게 조용했다. 생각해보면 비명소리가 들린 이후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건 데일 남작 부인의 비명이 맞았던 걸까? 뭔가 사건이 일어나서 다들 저택 밖으로 나간 걸까? 남작 부인의 보석함에도 반지는 없었다. 사실, 최근에 건드리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아래층으로 향했다. 서재에 숨겨둔 걸까. 하지만 아래층에 도착한 순간 그는 뭔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불이 난 것 치곤 저택 안은 너무 조용했다. 남작 내외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용인들도 모를 수는 없다. 다들 자고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가 알기로 저택의 사람들은 이틀에 한 번 꼴로 밤마다 배를 통해 조금씩 물건을 들여왔다. 거기에 연루되지 않은 건 앤과 데이지, 톰과 수습하녀 둘. 그리고 케이트. 이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데이지와 톰은 죽었다. 범인은 빌일 것이고 그 뒤에 데일 남작 내외가 있겠지. 정확하게 전후 상황을 파악하며 이안은 다시 아래층으로 향했다. 저들이 그를 잡아놨으니 남은 건 수습 하녀와 케이트뿐이다. 문제는, 케이트가 밤에 돌아다니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창문 옆에 서서 달빛을 받아 요정처럼 보이던 케이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살려주세요!” 닫힌 문 너머로 케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백 드래프트 현상 같은 걸 떠올릴 겨를도 없이 그는 문을 걷어찼다. 쾅 소리와 함께 창고 문이 들썩이더니 고정하고 있던 자물쇠와 걸쇠가 부서지면서 문이 뒤틀렸다. 틈 사이로 케이트의 눈물 젖은 얼굴이 보였다. 젠장. 이안은 다시 한 번 문을 걷어찼다. 그의 긴 다리가 멋지게 휘둘러졌다. 케이트가 뒤로 물러난 건 다행이었다. 일그러진 문이 안쪽으로 넘어졌으니까. 타오르는 불길을 배경으로 하고 케이트가 비틀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손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케이트를 안아 올린 이안은 자신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죽는 줄 알았어요.” 가냘픈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그는 여자를 안아주는 종류의 남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익숙지 않은 행동에 잔뜩 굳어있던 근육이 부드럽게 풀렸다. 이게 온전히 제대로 된 행동이라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이제 저택의 지하는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빌은 일을 제대로 했다. 창고뿐 아니라 주방과 이어지는 계단까지 기름을 뿌려놨던 것이다. 케이트는 이안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실신이라도 했나 싶어 그 역시 일부러 깨우지 않고 조심스럽게 불길을 헤쳐 저택 밖으로 나왔다. 완전 정신 나간 놈들이군. 저택을 통째로 태우다니. 그가 혀를 차는 소리에 케이트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 살았어요?” 기절한 게 아니었군. 이안은 헛웃음을 지었다. 죽는 줄 알았다는 말은 이제 살았다는 안도의 표현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생각보다 더 영리한 여자다. 저택 안에서 무섭다고 발버둥치는 대신 그의 어깨에 코와 입을 막고 얌전히 기다렸던 것이다. “글쎄.” 그는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케이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뜨거운 불길을 헤치고 나왔음에도 추운 것처럼 몸이 후들후들 떨려 떨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케이트는 얌전히 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집사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빌! 살아 있잖아!” 케이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처음 보는 무서운 얼굴의 집사와 빌이 다가왔다. 그 뒤로 귀신같은 얼굴을 한 로더 부인과 하녀 장이 보였다. 데일 남작 내외는 자신과 상관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안은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저택을 한번 쳐다봤다. 밤이기 때문에 연기를 발견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불길이 밖으로 치솟는다면 그때는 누군가 발견할 수도 있겠지. 그전까지 이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것이다. 밀수해온 물건들을 창고에서 빼놨는지 한쪽에 나무 상자가 쌓여 있었다. 빌이 거기서 검을 하나 꺼냈다. “그냥 그 안에서 죽는 게 나았을 텐데.” 삼류 악당 같은 대사라고 이안은 생각했다. 검을 든 빌의 자세는 볼품없었다.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뮈엘라에서 검술은 귀족의 기본소양이다. 일반 사람들도 아들에게는 검술을 가르친다. 그러나 빌은 아니었다. 집사는 여전히 술에 취해있었다. 그러니 그가 걱정해야 할 건 빌이 아니라 데일 남작이다. 이안은 데일 남작의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 생각하며 주변에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케이트는 빌이 검을 휘두르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비명이 새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랬다간 이안의 주의가 흐트러질까봐 참으려 애썼다. 형편없이 불리한 싸움이다. 이쪽은 고작 두 명. 부디 자넷이 제대로 사람들을 불러와 줬으면 싶었다. “빌, 왼쪽!” 집사의 말대로 빌이 왼쪽으로 검을 휘둘렀기 때문에 이안은 거의 장난치는 기분으로 몸을 움직였다. 아무리 검이 날카롭다 해도 사용하는 사람의 실력이 이렇게 형편없어서야 위기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검이다. 빈손으로 상대하기엔 문제가 있다. 가지고 다니던 단검은 방에 감금당할 때 빼앗겼다. 여차하면 각목이라도 써야 할 듯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저택을 돌아봤을 때 로더 부인이 혀를 차며 심술궂게 말했다. “하여간, 허우대만 멀쩡하다니까.” 검을 들고도 이안의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것을 비웃는 말에 빌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는 으아아아! 하고 소리를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이안이 슬쩍 몸을 피하자 검 끝이 땅에 꽂히면서 불꽃이 일었다. 이안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밀수품 중에서 꺼냈으니 일반적인 검은 아닐 거라는 건 알았지만 화염 검일 줄은 몰랐다. 한편 케이트는 능숙하게 검을 피하는 이안의 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보다가 하녀 장이 슬금슬금 그녀 쪽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이안이 놀라지 않도록 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잡힌다면 이안은 크게 불리해진다. 하녀 장의 의도를 파악하자마자 케이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안에게도 무기가 필요했지만 그녀도 필요했다. 하녀 장이 달려들자 케이트는 재빨리 저택 쪽으로 도망쳤다. 불길이 날름날름 일 층을 삼키고 있었다. 그녀는 불이 붙은 창틀에서 나무 조각을 뜯어냈다. 불이 붙은 덕에 떨어지긴 했지만 케이트의 작은 손에 자잘한 나무 조각이 박혔다. 아프지만 놓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불붙은 나무를 휘둘렀다. 그녀를 덮치려던 하녀 장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이 년이!” 하녀장의 머리카락에 불이 붙었다. 다른 때라면 그것참 고소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게 케이트 자신이었고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자 하나도 재미있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고 손발이 벌벌 떨렸다. 케이트는 사건이나 사고와는 관계없이 평온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목숨이 위협받고 누군가의 목숨을 위협한다는 건 그녀의 인생에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꾸만 눈물이 흘러서 눈앞이 흐려졌다. 울면 안 돼.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 안의 강한 부분은 이안에게 무기가 될 만한 걸 던져주라고 말하고 있었고, 연약한 부분은 울면서 주저앉고 싶어 했다. 머리는 강한 부분을 따르라 하는 게 몸은 자꾸만 연약한 부분을 따르려 했다. 케이트는 억지로 덜덜덜 떨며 창틀에서 나무 조각을 뜯어내려 했다. 손끝이 벗겨지고 손톱이 부러졌다. 손등이 잔뜩 긁히고 손바닥에 나무 가시가 박혔다.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는 거지? 케이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다시 한 번 손에 힘을 주고 나무 조각을 뜯어냈다. 못질을 제대로 했는지 나무 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창틀에 매달려있었다. 그 사이, 하녀 장이 다시 그녀에게 덤비려 했기 때문에 케이트는 미친 듯이 불붙은 나무 조각을 휘둘러야 했다. 케이트가 나무 조각을 떼 냈을 때는 빌의 검에 불이 붙은 다음이었다. 평범한 검으로 보였던 것은 빌이 흥분하자 점점 뜨거워지더니 불길을 뿜어냈다. 하지만 들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이었다. 미리 검을 빼앗아 둘걸. 이안이 후회했을 때 케이트가 그의 이름을 외쳤다. “이안!” 가까운 곳에 나무 조각이 떨어졌다. 이안은 케이트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하녀 장이 그녀를 공격하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대처를 잘하기에 내버려 두던 차였다. 잘했다고 칭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턱밑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져서 그는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불 한 조각이 그의 셔츠 단추를 맛보고 사라졌다. 그는 그대로 몸을 굴려 케이트가 던진 나무 조각을 집었다. 그 모습을 본 데일 남작이 검을 꺼내 들었다. 젠장. 스릉하고 날 선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오는 소리가 목덜미를 선뜻하게 만들었다. 이안은 무식하게 휘둘러대는 빌의 검을 나무 조각으로 막았다. 턱 막힌 검을 빼지 못하고 당황하는 사이 그는 긴 다리를 휘둘러 빌을 걷어찼다. 컥 하고 빌이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나동그라지자 바톤터치 하듯 데일 남작이 나왔다. “흥, 오냐오냐했더니.” 당신이 언제 오냐오냐했어! 케이트는 그렇게 소리치려다 요리사가 하녀 장에게 합세하자 기겁하며 몸을 숙여 두 사람의 합공에서 빠져나왔다. 약간 익숙해진 덕에 요리사의 펑퍼짐한 엉덩이를 걷어차는 여유도 잊지 않았다. “나쁜 년!” 요리사가 입안 가득 머금은 흙은 뱉어내며 이를 갈았다. 상대는 고작 허우대만 멀쩡한 하인과 조그마한 하녀 계집 애뿐인데 이렇게나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다. 뒤에서 초조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작 부인이 짜증을 부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불길이 치솟는 저택을 땀 삐질삐질 흘리며 구경하는 것도, 생쥐처럼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이안과 케이트의 모습을 더러운 땅바닥에 서서 구경하는 것도 싫었다. “모두 비켜요!” 그녀의 새된 목소리에 남작이 고개를 돌렸다가 그 손에 들린 책을 알아챘다. “부인, 그건!” “지금 가격이 문제예요?” 남작이 말하려던 건 가격이 아니었지만, 남작 부인은 화를 내며 책을 펼쳤다. 두 사람의 반응에 이안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책은 남작 부인이 펼치자 희미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스펠 북이다. 스펠 북이라고? 잠시 이안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뮈엘라의 경계가 스펠 북을 들여오도록 허락할 리 없다. 하지만 스펠 북의 진위에 걸기엔 그의 목숨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안은 덤벼 오는 빌을 슬쩍 피하고 나무 조각으로 그의 손을 툭 친 뒤 엉덩이를 차서 밀어버렸다. 사용자의 손에서 떨어지자 검신을 감싸던 불길이 마치 마법처럼 사라졌다. 아니, 마치 마법처럼이 아니라 마법 그 자체다. 간도 크군. 이안은 검을 집어 들었다. 빌의 땀이 묻어 손잡이가 끈적끈적했다. 최악의 검은 아니었지만 마법이 걸려있지 않았다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검이었다. 마법을 건 게 누군지는 몰라도 마법사인 것만은 확실한 모양이었다. 검을 보는 눈이 형편없었다. 데일 남작부인은 드디어 원하던 페이지를 찾자 지체 없이 부욱 찢었다. 찢어진 단면에서 글자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형형색색의 빛깔로 빛나더니 그녀의 머리 위로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공기를 찢는 소리가 났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악을 쓰던 요리사도 놀라 남작 부인을 쳐다봤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은색으로 빛나는 화살이 몇 개나 떠있었다. 그것은 그녀들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전에 빠른 속도로 쏘아졌다. “아악!” 가까스로 몸을 숙인 케이트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화살이 지나갔다. 비명을 지른 건 케이트가 아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화살이 지나간 자리의 공기가 얼어붙어 얼음결정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녀를 지나친 화살은 늦게 반응한 요리사의 가슴과 어깨를 관통하는 몇 개의 구멍을 남기고 사라졌다. 구멍 가장자리에 하얗게 성에가 껴서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젠장!” 데일 남작 부인은 처음으로 욕을 내뱉었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로는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천박한 단어였지만 쉽게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녀는 다시 책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뭔가 강력한 공격 마법이 필요했다. 이어지는 데일 남작의 공격에 이안은 검을 고쳐 잡았다. 빌의 손에서는 천천히 솟아오른 불길이 그의 손에서는 순식간에 화르륵 타올랐다. 하지만 검의 모습보다도 빌과 집사는 마법 공격에 쓰러진 요리사의 시체를 보고 물러났다. 마법은 정확하게 이안과 케이트만을 노리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다시 한 번 책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빽빽하게 적혀있던 글자가 찢어진 단면 사이로 흘러나오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남작 부인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이번 마법은 방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크기였다. 남작 부인의 주변에 바람이 일었다. 떠오른 글자는 한데 뭉치더니 사람 머리 두 배만 한 크기로 부풀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빨간머리!” 이안의 목소리에 케이트는 번쩍 고개를 돌렸다. 너무 느닷없는 요리사의 죽음에 그녀도 하녀 장도 몸이 굳어있던 상태였다. 그녀의 눈동자에 이안이 손을 뻗는 게 보였다. 뛰어! 그가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케이트의 몸이 움직였다. 그는 케이트의 손이 닿자마자 끌어 당기며 뒤로 넘어졌다. 퍼엉! 이번에도 간발의 차로 마법이 케이트와 이안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열기가 빌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케이트의 신발바닥이 녹아 흘러내렸다. 마법은 저택의 한쪽 벽에 부딪혀 반대쪽 벽까지 관통하고 사라졌다. 이 층까지 혓바닥을 내밀던 불길과 마법 공격으로 데일 저택에 균열이 일어났다. 젠장. 이안은 품 안의 케이트를 살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헝클어진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겁에 질린 초록색 눈동자가 보였다. 두 사람의 귀에 또다시 종이 찢는 소리가 들렸다. ============================ 작품 후기 ============================ 양이 쫌 늘었죠? 뿌듯뿌듯. 얼마나 늘었냐면 점점점 늘어서 마지막편이 두배가 되었습니다. 쩜쩜쩜. 초반에 너무 느긋하게 진행한 제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덧. 이안이 케이트를 빨간머리라도 부른거. 다들 속으로 알고계셨잖아요:) 잠깐 나갔다 와야해서 지난화의 대댓글은 돌아와서 달게요~ 00033 8. 수사관 =========================================================================                            기이잉 하고 자연적이지 않은 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어마어마한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안은 손에 쥔 검을 고쳐 쥐고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남작 부인을 본 순간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남작 부인의 머리 위에 새하얀 태양이 떠 있었다. 사위가 낮처럼 밝아져 그녀가 찢은 종이가 한 장이 아니란 게 보였다. 거의 책의 절반을 찢어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남작부인은 겁에 질린 케이트와 놀란 이안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이 책 한 권에 집 한 채 가격을 받을 수 있어 고작 쥐새끼 두 마리에 사용하기는 아까웠지만 문제가 될 소지는 없애는 게 좋다. 하지만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방금 찢은 페이지의 마법은 대 전투용 마법이다. 마을 한 개 정도는 간단하게 날려 보낼 수 있다. 이안은 크기를 보고 파괴력을 예상했지만 이미 찢어진 종이. 되돌릴 수 없다. 이제 틀렸어.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이안의 품에 파고들었다. 이안 역시 틀렸다고 생각했다.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이제 그 누가 온다고 해도 그들을 구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반지가 있었다면. 반지로 저 마법을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둘째치고서라도 반지를 잃어버린 게 분했다. 그는 자조하며 생각했다. 적어도 그 녀석이 징징거리는 소리는 듣지 않을 수 있겠군. 주위가 점점 밝아져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케이트는 눈을 감고 이안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녀 역시 너무 분했다. 이만큼이나 왔는데. 여기까지 도망쳤는데.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는데 저런 마법 때문에 죽다니! 그 순간 케이트와 이안을 중심으로 바람이 일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작된 바람은 케이트의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고 주위로 퍼져 나갔다. 파라라락 하고 남작 부인이 든 책의 종이가 빠른 속도로 넘겨지더니 표지가 덮였다. 동시에 그녀의 머리 위에 빛나던 하얀 태양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작아지더니 사라졌다. 말 그대로 소멸해버렸다. 열기도, 공기를 가르는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이안은 더 이상 바람 한 점 없음에도 케이트의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을 발견했다. 넓게 퍼지듯이 날리던 머리카락은 천천히 그녀의 어깨와 등에 안착했다. 남작부인의 마법이 사라졌는데도 사위가 밝아 케이트의 머리카락이 붉은색이 아니라 황금색으로 보였다. “이게 무슨...” 빛이 사그라지자 당황한 남작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안의 품속에서 케이트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을 위협하던 하얀 태양은 사라지고 없었다. 불타는 저택과 얼이 빠진 사람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이안의 얼굴뿐이었다. 사라졌어? 정말? 안심이 되는 순간 머리가 어질하더니 스위치를 끈 것처럼 그녀의 의식이 뚝 끊겼다. 이안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품에 쓰러진 케이트의 상태를 살폈다. 남작부인의 마법이 그녀에게 무슨 영향을 준건가 싶었던 것이다. 그녀 주위를 감돌던 빛도 사라지고 주위를 밝히는 건 저택을 삼키는 새빨간 불길밖에 없었다. 케이트의 얼굴에 일렁이는 불빛으로 그림자가 졌다. 뭔가 다른 점은 없어 보였다. 그는 곧 케이트가 기절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남작부인의 마법이 사라지고 케이트가 기절했다. 그녀가 뭔가를 한 것도 아니었다. 남작부인을 향해 저주의 말을 외치지도,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펼치고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다. 그저 이안의 품에서 겁에 질려있을 뿐이었다. 그가 보기엔 그랬다. 데일 남작부인은 펼쳐지지 않는 책을 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자기 멋대로 덮여버린 책은 마치 한 장 한 장 단단히 풀을 바른 것처럼 펼쳐지지 않았다. 이익! 남작부인이 그녀의 남편을 쏘아봤다. “뭐하는 거예요? 어서 저 쥐새끼들을 처리하지 않고요!” 데일 남작은 부인의 재촉에 검을 들고 앞으로 나왔지만 이안의 손에 들린 검신이 화르륵 불길에 휩싸이자 쉽사리 다가오지 못했다. 마법을 무효화시켜버린 것에 대한 공포에 덧붙여 그의 검술실력도 형편없었던 것이다. 말 발굽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사람들의 달려오는 소리도. 이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데일 남작을 응시하며 한 손에 케이트를 안고 일어났다. “데일 남작, 너를 나라에서 금지한 마법 물품 밀수 및 매매, 마법사용과 살인청부의 용의자로 구속한다.” 그가 손을 내리자 그의 지시를 받은 것처럼 검에서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던 불길이 사라졌다. “뭣?” 데일 남작은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입을 벌렸다. 누구를 뭐로 구속한다고? 어디 감히 천한 하인 따위가. 그런 종류의 말을 떠들어대려 할 때 뒤에 달려오는 남자들을 달고 말을 탄 사내가 도착했다. 그는 말에서 내려 깃털이 달린 모자를 벗더니 자못 과장된 태도로 인사했다. 그의 얼굴을 본 데일 남작의 표정이 하얗게 굳었다. “또 만나는군요. 데일 남작.” 님 자를 빼먹은 건 고의였다. 제이드는 싱글거리는 얼굴로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부릅뜬 데일 남작 내외와 그들의 사용인을 돌아보고 말했다. “소개하죠. 이쪽은 내 동료이자 파트너. 수사관 이안 로엔입니다.” 수사관. 뮈엘라의 수사관은 나라의 안보를 위협하는 사건을 수사하는 직위다. 도둑이나 사기, 싸움 등을 조사하고 중재하는 치안 관과 달리 그들은 반란, 밀수밀매, 귀족 살인 등과 같은 사회적으로 큰 소란이 이는 사건을 독자적으로 수사한다. 수사관이 되기 위해 치르는 공식적인 시험만 세 개. 대부분 평민 중에서 지독할 정도로 똑똑한 사람들이 시험에 통과하며 검술실력은 기사단에도 뒤지지 말아야 한다. 아니, 검술실력이 기사단에도 뒤지지 말아야 한다는 건 수사관이 될 조건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 수사를 하다 보면 닥치는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 조건 중 하나였다. 게다가 그 권한은 국왕으로부터 직접 받는다. 그들이 수사한 사건을 판사가 판결을 내리기 때문에 판결권만 없을 뿐 평민이라 해도 지위는 하급 귀족에 버금간다 할 수 있다. “연행해.” 제이드의 지시가 내려지자마자 그의 뒤를 따라온 남자들이 데일 남작 내외의 사용인들에게 덤벼들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케이트가 여관에서 주정꾼과 알콜 중독자라고 생각한 남자들이었다. 이안은 들고 있던 검을 제이드에게 건네고 케이트를 그가 타고 온 말 위에 올렸다. “다친 거야?” “아니.” 뭐라고 더 말하려다가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케이트가 왜 정신을 잃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갑자기 사라진 데일 남작부인의 공격 마법. 케이트가 진짜 마녀라면 그 정도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제이드에게 그녀가 마녀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게 주저됐다. 케이트의 하얀 얼굴은 눈물 자국과 그을음이 묻어 엉망이었고 더 앳돼 보였다. 사람 외견으로 판단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지만 이런 작고 순진한 여자가 마녀라니 어쩐지 그도 믿을 수가 없었다. 뭐야, 이 형편없는 검은? 제이드는 이안에게 건네받은 검을 들고 한번 휘두르다가 검신을 불길이 감싸자 깜짝 놀라 떨어트렸다.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거 마법 검이야.” 아, 그런 건 좀 빨리빨리 말하라고. 제이드는 투덜거리며 검을 들어 밀수품을 정리하는 남자에게 건넸다. 밀수품은 하나도 빠짐없이 목록 작성이 되어 수도로 송치될 것이다. 그건 현행범으로 잡힌 남작 내외와 사용인들도 마찬가지. 두 사람의 옆으로 남자들에게 잡혀 끌려가는 남작 내외가 지나갔다. 이거 놓지 못해? 내가 누군지 알아? 상투적인 대사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끌려가는 부부의 뒤를 사용인들이 따랐다. 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안을 쳐다봤지만 이안은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 뒤로 남자 세 명이 끙끙대며 들고 가는 요리사의 시체를 마지막으로 제이드가 입을 열었다. “참, 이거.” 그의 손에 들린 반지를 보고 이안은 잠시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언제? 누가? 여러 가지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이드가 신이 나서 이야기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의 예상대로 제이드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너 말야, 어떻게 반지를 잃어버릴 수가 있냐.” “잃어버린 게 아니야.” 도둑질 당한 거지. 뒷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제이드는 알고 있다는 듯 히죽대며 물었다. “누가 훔친 건지 알아?”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이 녀석의 장단에 맞춰주고 싶지 않다. 다행히 신이 난 제이드는 그가 맞춰주지 않아도 신나게 춤추기 시작했다. “스미스양이 가져왔어. 나한테.” “...언제.”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명백하게 기분 나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제이드는 반지를 자신의 손가락에 끼우며 대답했다. 삼, 사 일 전에? 이안의 시선이 말 등에 늘어진 케이트에게로 향했다. 앙큼한 것. 그의 턱이 단단하게 굳었다. 순진한 줄 알았더니 뒤에서 도둑질이나 하고 있었군. 손버릇이 나쁜 여자는 안 된다. 그는 케이트가 깨어나면 벌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쿠구궁. 먼지를 일으키며 균열을 견디다 못한 저택이 무너졌다. 제이드는 깜짝 놀라 저택을 바라보더니 혀를 찼다. 허 참. 저택은 더 이상 저택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새까맣게 타고 무너진 벽과 지붕. 마치 배를 갈라 죽인 괴물처럼 내장을 드러내고 쓰러져있었다. 데일가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안은 표정변화 없이 저택의 잔재를 힐끔 쳐다보고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무슨 생각으로 자기 집을 불태운 거지?” 제이드의 혼잣말에 이안은 말에서 떨어질 뻔 한 케이트의 몸을 바로 하며 대답했다. “우리가 의심을 품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깨끗하게 지우고 다시 시작하려고 한 거지.” “깨끗하게 지운다고?” “반지가 창고에 반응하더군.” 아하.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밀수품인 마법 물품을 창고에 숨겨놨으니 창고 안에 남은 마법 력에 반지가 반응했을 것이다. 수사관인 제이드는 접근할 수 없었지만 하인인 이안은 접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것도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게 해서 그 밖에서 확인만 가능했다. 데일 남작은 수사관이 찾아올 만큼 의심을 품고 있으니 다음번에 또 올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때 창고에 대한 수색영장이라도 가져오면 빼도 박도 못 하고 걸려버린다. 그러니 창고를 불 질러 버리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운 나쁘게도 창고에 들어갔다가 마법 스크롤이니, 마법 검이니를 발견한 질의 시체는 화재로 묻어버릴 생각이었을 테고. 그러니 이안이 데이지의 살인범으로 몬 것 역시 계획이었을지도 모른다. 데이지를 죽이고 잡힌 이안이 저택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불을 질렀다는 훌륭한 시나리오가 완성되니까. 저택이 화재로 전소하면 데이지와 질의 사망은 이안의 탓이 되고 창고에 남아있던 마법기운까지 깨끗하게 정리된다. 불행한 사고를 당한 데일 남작 내외는 저택을 새로 짓는다며 잠시 지인의 집에 머물렀을 테지. 그 지인이 마법 물품 밀수와 관련되어 있다는 건 의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건이 해결됐지만 찝찝한 것만은 어쩔 수 없다. 이안은 말 위에 정신을 잃은 케이트를 쳐다봤다. 그가 없었다면 케이트는 어떻게 됐을까. 운이 나쁘면 화재로 죽었을 테고 운이 좋다 해도 자신의 주인들이 참 관대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을 것이다. 흠. 이안은 문득 생각나서 제이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 모른 척하던 제이드는 이안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가자 싱글거리며 품속에서 담배케이스를 꺼내 내밀었다. 은으로 만든 작은 상자 안에 고급 담배가 채워져 있었다. 이안은 맛없는 담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뚜껑을 열었다가 인상을 썼다. “세 개 비는데.” 와, 귀신같은 놈. 고작 세 개 빈 걸 어떻게 아냐고. 제이드는 투덜거리며 돌아섰다. 고작 세 개라고 해도 고급품이기 때문에 가격이 상당했다. 이안이 신경 쓰는 건 가격이 아니었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변명했다. “정보 값이랑 입막음 값으로 여관주인한테 줬어.” 여관주인한테? 이안은 제이드를 한번 힐끔 쳐다보고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윽한 위스키냄새가 났다. 그리고 나무냄새와 꽃향기도. 이안의 입매가 부드러워졌다. 그의 유일한 낙이라고 할 수 있으니 당연하다. 하루에 한 개비. 어젯밤부터 묶여 있던 탓에 오늘은 아직 피우지 못했다. 그는 버릇처럼 주머니를 뒤져 성냥을 찾다가 주머니가 비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치 빠르게 제이드가 불을 붙여주며 물었다. “스미스양은 어떻게 할 거야?” 케이트는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다. 그녀는 고아이니 그녀가 찾아갈 가족도 없다. 고아가 된 것도 실업자가 된 것도 이안과 제이드의 탓은 아니었지만 제이드는 이미 한 명을 수도로 보내준 전례가 있으니 물었던 것이다. 이안의 입술 사이로 연기가 흘러나왔다. 저택을 삼키는 불길이 내뱉는 연기처럼 그것도 검은 하늘 위로 사라졌다. ============================ 작품 후기 ============================ 으으으, 덥네요. 오늘 아는 여자분들이 맛있는거 사준다길래 와, 진짜요? 하고 쫓아갔다가 지옥을 맛보고 왔습니다. 케이크를 네개...아니, 다섯개였나... 끄윽...케이크의 ‘ㅋ’만 봐도 토할거 같으니 이제부터 그것이라고 지칭합니다. 맛있는거 사준다며 ㅠㅠㅠㅠㅠ 저녁도 안먹고 그것만 먹었어요 ㅠㅠ 한, 두 개까지는 와아, 맛있다~ 하고 먹었는데 세개쯤 되니까 어, 이건 아닌듯? 네개, 다섯깨쯤 되니까 진짜...웩... 저 단거 좋아하거든요? 좋아하는 편이거든요? ...죄송합니다. 별로 안좋아합니다 유일하게 가족들이 한 홀을 다 먹은게 패션5였나? 거기 거... 한개까진 좋아요. 괜찮아. 견딜수 있어. 근데 어으으으으으으. 특히 가장 못견디는건 치즈그것. 필라델피아치즈그것은 정말 최악이죠. 여자분들. 제가 재미있는거 알려드릴게요. 치즈그것은 생크림그것의 칼로리 두배예요. 걍 생크림그것을 드세요. ======== 아참, 잊고 있엇는데 스펠 북에 대해서. 스펠북은 일반인도 마법을 사용가능하게 하는 마법용품중 하나입니다. 본문중에 한번 설명은 나올테지만 좀 진행이 되어야 해서 일단 이쪽에 설명합니다. 마법사가 제작한 것으로 보통 일회성입니다. 종이를 찢으면 해당 마법이 사용됩니다. 스펠 북은 말그대로 책인데요, 마법의 난이도에 따라 찢은페이지가 달라집니다. 목차같은게 있다면 아이스볼 - 1~2P 화이어볼 - 3~4P 라이징선 - 35~97P 뭐 이런식입니다. 앞장이 홀수 뒷장이 짝수겠죠. 라이징선같은 경우 35~36을 찢는다고 해서 마법이 발동되는게 아니라 35장부터 97장까지 전부 찢어야 발동이 됩니다. 이유는 워낙 강력한 마법이다 보니 마법사가 아닌 사람이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여러장이 필요하기도 하거니와 그렇게 엄청난 마법을 한장 찢었다고 사용할 수 있게 하면 큰일나니까요. 00034 8. 수사관 =========================================================================                            케이트는 마차의 덜컹거림에 눈을 떴다. 어느새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이안과 대화하던 제이드는 그녀가 일어난 것을 보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피곤하죠?” “어, 아뇨. 괜찮아요.” 거짓말이다. 케이트는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알라나데일에서 출발한 지 이틀째. 보통 알라나데일에서 수도까지 보름 정도 걸리지만 그건 건장한 사내들이 말로 이동했을 때의 이야기다. 마차로 이동하면서 느려진 속도는 거기에 케이트가 끼면서 더욱더 느려졌다. 제이드나 이안과 달리 케이트는 마차를 타고 버틸 수 있는 최대가 한나절 정도였던 것이다. 부드러운 천으로 덧댄 시트라고 해도 울퉁불퉁한 산길을 달릴 때면 사람들은 이리저리 흔들리기 일쑤였다. 심지어 체구가 작은 케이트의 경우 몸이 튀어 올라 몇 번이나 마차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는 탓에 머리 위에 쿠션을 덧대고 있는 게 낫지 않냐는 제안까지 받았다. 이 속도라면 보름이 아니라 삼 주쯤 걸릴 거라고 제이드와 이안이 대화를 나누던 차였다. 케이트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창문을 가린 커튼을 들어 바깥을 살피고 한숨을 내쉬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래서야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는 것도 불가능하다. 머리가 멍했다. 눈 뜬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어지럽고 미슥 거려 그녀는 등받이에 기댔다. 마차여행을 처음 하는 케이트를 위해 제이드는 정 방향 시트를 전부 그녀에게 내주고 이안을 끌고 맞은편에 앉았다. 흔들리며 뒤로 움직이는 기분은 상당히 이상할 텐데 두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서류를 보며 대화까지 나누고 있었다. “여기 마법 물품을 구해준 사람이 정확히 관계가 어떻게 되는 거야?” “잠깐, 남작 부인의 어머니의 동생의 딸이니까...” 으, 토할 것 같아. 케이트는 시트에 드러눕고 싶었지만 차마 남자들 앞에서 그럴 수 없어 최대한 등받이에 기댄 채로 늘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시트가 아니라 마차 바닥에 드러눕고 싶었다. 마차 안이라는 좁은 장소의 제약 탓에 이안의 다리에 무릎이 닿았다. 이크. 케이트는 재빨리 자세를 고쳤지만 이안은 그녀의 무릎이 닿았다는 것도 모르는 태도였다. 물론 그럴 리 없다. 이안도 치맛자락 속에 감춰진 케이트의 작은 다리가 그의 다리를 부드럽게 누르는 걸 느꼈지만 모른 척했을 뿐이다. 하지만 케이트는 이안이 느끼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태도에 제이드가 슬며시 웃었다. “여기 스펠 북에 대한 건 어디에 참조되어있지?” 마차 천장을 두드리는 나른한 빗소리를 가르고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눈을 감고 마차의 흔들림에 적응하려는 케이트의 귀에 쫑긋했다. “어, 잠깐... 삼십이 페이지에.” 팔락팔락 종이 넘기는 소리가 이어졌다. 뮈엘라는 마법을 배척한다. 즉, 허가된 자만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데일 남작 부인의 행동 역시 불법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대체 스펠 북을 어떻게 들여왔냐는 점이다. 뮈엘라는 마법에 엄격할 만큼 제재를 가하고 있다. 나라로 들어오는 마법은 모두 한 곳을 통해서만 들어올 수 있다. 다른 곳을 통해 들여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왕궁에서는 왕궁소속 마법사를 통해 나라의 경계에 경계 마법을 걸어두고 있었다. 일정수준 이상의 능력 혹은 마법을 반입하려 하면 즉시 군대가 출동한다. 남작부인이 사용한 스펠 북이라면 충분히 걸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안은 참조된 부분을 읽고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귀찮은 짓을 하는군. 데일 남작은 마법 스크롤을 한 장 한 장 따로 들여와서 책으로 이어 붙였던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사소하고 쓸데없는 짓에 집착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래도 그 책 한 권에 집 한 채 값은 받았을걸.” 제이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면 다음 장을 넘겼다. 제이드와 이안의 기준에서 집 한 채라는 건 적어도 하급귀족이 살만한 저택을 말한다. 마법이란 건 다른 나라에서도 돈 있는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만 뮈엘라에서는 돈이 없으면 평생 마법을 볼 기회도 없다. 이안은 스크롤을 이어 붙여 만든 스펠 북인 탓에 마지막 데일 남작 부인의 마법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것 같다는 요지의 보고서를 확인하고 다음 장으로 넘겼다. 저택에서 고아만 고용했던 것도 밀수와 관련이 있었다. 사용인의 숙소가 지붕 아래에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 숙소가 그대로 지하에 있었다면 같은 층에 위치한 창고에서 밀수한 물건을 옮기는 소리가 사정을 모르는 사용인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아무리 밤에 밖으로 나오지 말라 해도 케이트처럼 몰래 나오는 사람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사용인들을 처리하는 데는 물론 처리 방법도 중요하지만 처리 한 다음 그들의 행방을 궁금해할 사람이 없다는 것도 중요했던 것이다. 사용인의 숙소가 창문 없는 지붕 아래로 이동한 것도 그래서였다. 유일한 창문은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케이트가 나와서 머리를 식히던 계단참의 창문뿐. 이안은 새파란 얼굴로 쿠션을 끌어안고 눈을 감은 케이트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언제 집사나 하녀 장의 손에 처리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매일 밤이 아슬아슬 줄타기였을 것이다. 본인만 모르는. 보통 집사와 하녀 장은 저택의 비밀을 알게 된 하녀나 하인을 죽이기보다는 타국으로 팔아넘겼다. 죽여서 시체라도 발견되면 곤란하기 때문에 돈도 벌고 시체도 안 남는 처리방법으로 제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운 나쁘게도 톰은 낮이었고 지붕 위였다. 빌이 그를 밀었고 하녀 장과 집사는 사고사로 포장해 재빨리 장례를 치러 버렸다. 데이지의 경우는 이안의 방에 찾아갔다가 방을 뒤지던 빌을 맞닥트렸기 때문이었다. 빌이 이안을 의심해서 그의 방을 뒤진건 지 아니면 단순히 그를 질투해서 그런건 지 이안은 알 수 없었다. 관심 없기도 했고. “수습 하녀는 결국 못 찾았군.” 제이드의 말에 잠든 줄 알았던 케이트의 몸이 움찔 떨렸다. 자넷. 그녀의 기억이 그날 밤으로 되돌아갔다. 그때, 자넷과 케이트가 불을 끄고 숨죽이며 집사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던 그 순간. 질이 들킨 건 아닐까요? 라고 묻던 자넷의 걱정스런 목소리. 케이트는 쿠션을 꽉 끌어안았다. 들켰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 없어. 아니다. 그녀가 틀렸다. 케이트는 울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그때 질은 죽어 나무상자 안에 들어가 있었다. 두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가던 집사. 그가 창고에 몰래 들어와 스펠 북이니 마법 검이니를 발견한 질을 죽이고 나무상자 안에 넣어놨던 것이다. 두 사람이 그때 집사에게 들키지 않은 건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사람을 죽이고 당황한 집사가 주위를 살필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망치라는 케이트의 목소리에 자넷은 충실히 따랐다. 그녀의 모습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마을 어디에서도 자넷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제이드가 저택에 왔던 것은 그녀가 알려줘서가 아니었다. 저택을 태우는 불길을 봤던 것이다. “괜찮습니까?” 자상한 목소리로 제이드가 말을 걸어와서 케이트는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겁에 질려있었다. 생각해보면 저택에서 일한 이 년 동안 그녀는 그녀도 모른 채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었다. 도저히 이 마을에서는 살 수 없을 것 같다. 고 생각했을 때 제이드가 권했다. 우리와 함께 수도로 가지 않겠습니까? 일자리도 찾아드리죠. 원하신다면 이안의 집에서 일하셔도 좋습니다. 확실히 그때 이안의 얼굴은 그리 좋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케이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와의 마지막 기억이 남은 마을이지만 이제는 그저 살인마들 사이에서 눈을 가리고 살던 악몽으로 변해버렸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제이드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손수건으로 싸인 그것은 풀어보자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펜던트 목걸이였다. 이걸 왜? 케이트는 당황해서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약간 유행이 지난 물건이지만 사슬은 금이고 박혀있는 보석은 진짜다. “이안이 남작부인의 보석함에서 발견한 겁니다.” 그걸 왜 나에게?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케이트의 눈동자가 이안에게 향했다. 이안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케이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무릎이 맞닿았다. 이번에는 케이트가 피하기도 전에 꾸욱 눌리면서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안에서 목걸이를 집었다. 닿은 부분이 따듯했다. “주문 제작한 물건이더군.” 그래서 남작 부인의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이런 목걸이를 본 적이 없었다면 그것은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의심 좀 했지. 이안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펜던트 양 가장자리를 잡고 비틀었다. 그랬다간 망가져요! 케이트가 깜짝 놀라 말리려는데 달칵하고 뭔가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장식용 펜던트인 줄 알았는데 앞뒤로 열리면서 안에 초상화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그제서야 케이트의 머릿속에 퍼뜩 기억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지니고 다니던 목걸이다. 돌아가신 후 보지 못해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이, 삼십 년쯤에 이런 식의 로켓 목걸이가 유행했다고 하더군요.” 이, 삼십 년? 케이트는 제이드와 이안에게서 시선을 떼고 펜던트를 쳐다봤다. 그 안에 그녀와 닮은 여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너무 닮은 여자의 초상화. 이안은 처음 그것을 봤을 때 케이트와 데일 남작 부인이 어떤 관계가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그 얼마 후 케이트 스스로 자신의 엄마도 이 저택의 하녀였노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하녀의 초상화가 붙은 목걸이를 간직하는 여주인은 없다. 설령 그 하녀와 남 주인이 불륜 관계여서 이런 물건이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남작의 보석함이 아니라 남작 부인의 보석함에 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는 남작 부인이 목걸이에 숨겨진 초상화를 모른다는 이야기다. 남작 부인이 원하는 물건은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하녀의 물건을 빼앗았다는 걸까. 이안은 이게 밀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몰라 제이드에게 목걸이를 넘기며 조사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밀수와 아무 관련이 없었다. 그 욕심 많은 여주인은 죽은 하녀가 딸에게 남긴 유품마저 꿀꺽했던 것이다. 곧이어 케이트의 볼에 눈물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두 남자는 여자의 눈물에 딱 굳어버렸다. “...엄마의 초상화예요.” 그녀의 목소리에 정신 차린 듯 제이드가 헛기침 한 번 하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전에 제가 부모님에 대해 물어 본 적이 있죠?” 그랬어? 이안이 그를 힐끔 쳐다봤다. 제이드는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스미스 양의 어머니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신 게 아니었어요. 스미스 양을 위해 목걸이를 남겼더군요.” 그리고...제이드는 약간 주저하다가 말했다. “편지도 남겨서 남작 부인에게 맡겼던 모양입니다.” “편지요?” 케이트가 고개를 들며 반문하는 바람에 제이드는 움찔했다. 커다란 초록색 눈동자에 눈물을 담고 있었다. 그의 잘못이 아닌데 죄책감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남작 부인이 태웠다.” 이안이 불쑥 끼어들었다. 케이트의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이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덧붙였다. “우리는 네 다른 가족에 대해 썼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 그럼...” “스미스 양의 어머니는 스미스 양이 혼자가 되지 않도록 준비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걸 남작부인이 없애버렸다. 이유는 단순하다. 목걸이가 탐이 나서. 눈물이 말라버렸다. 이렇게 탐욕스러운 여자였던가. 케이트는 멍하니 제이드와 이안을 쳐다봤다. “원하신다면 수도에서 가족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가족을 찾는 다고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케이트는 앵무새처럼 제이드의 말을 되풀이했다. 가족을 찾는다. 나한테? 엄마와 아버지 말고 다른 가족이 있다는 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건가. 다시 눈물을 차올라서 목이 메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 작품 후기 ============================ 와, 1부 끝입니다. 불금이라고 밖에 나와있어서 다음주에 외전 두편 올라갑니다. 1부 완결과 2부에 대한 이야기는 그 다음에 공지로 올리겠습니다. 여러가지로 할 말이 많은데 일단 밖이라... 00035 [외전] 한 여름 밤의 꿈 =========================================================================                            나는 눈을 번쩍 뜨고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내 방이 아니었다. 아침이라면 으레 깨우는 질이나 자넷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엔 아직 밤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덮인 눈꺼풀 밖의 빛이 밝았다. 뭐지? 반사적으로 옆 침대에 누웠을 데이지를 찾았지만 데이지는커녕 침대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건 내 방이 아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라고 내뱉으려던 목소리는 내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거칠었다. 마치 밤새 노래라도 부른 것처럼 쉬어있었다. 대체 뭐야? 무슨 일이야? 온몸이 나른하고 뻐근한 게 근육통이라도 시달리는 것 같았다. 꿈인가?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다. 하지만 이게 꿈이 아니라면 말이 안 된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그대로 몸을 뒹굴 뒤집어 천장을 쳐다봤다. 침대의 네 기둥에 천이 교차하어 침대 주변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와, 이거 진짜 빨기 힘들겠다. 정말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아니 내일인가? 내일은 커텐 빨래를 하기로 한 날이다. 커텐은 물론 그 비스무레한 것은 전부 뜯어서 빨아야 하는데 이게 현실이라면 저 천도 같이 빨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내 손에는 닿지도 않을 것 같은데, 그럼 분명 빌에게 부탁해야 한다. 빌은 또 투덜 거릴테고. 으으, 꿈에서도 일 걱정이라니 스스로가 불쌍해졌다. 나는 다시 침대 시트에 얼굴을 대고 문질렀다. 좋은 냄새가 난다. 그리고 감촉이 좋았다. 아, 이건 확실히 꿈이구나. 라고 생각한다. 내가 언감생심 이런 시트를 사용할 리가 없으니까. 침대도 고급이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 기둥에 나선형으로 조각된 세밀한 장식부터 푹신한 매트리스와 부드러운 시트. 침대 주변을 흘러내린 캐노피 사이로 보이는 방 안의 광경도 멋진 방이었다. 전체적으로 갈색과 검은색을 사용한 벽지와 큼직한 가구들이 남자 방으로 보였다. 그것도 아주 고급스러운. 데일 남작의 방은 이 정도로 고급스럽지도 이 정도로 남자답지도 않다. “내 상상력이 참 좋은 모양이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뒹굴 몸을 뒤집었다. 갈색과 검은색의 캐노피에 짜인 무늬까지 하나하나 보였다. 사람의 상상력이란 정말 끝이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시트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열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아니 있는 줄도 몰랐던 문이 달칵 열렸다. 약간 차가운 바람이 익숙한 향기를 실어 왔다. 시트에서 나던 그 냄새라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캐노피 사이로 보이는 모습이 남자의 다리여서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웅크렸다. 남자? 남자라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잠깐, 남자라니? 꿈에 남자가 나올 정도로 나 상상력이 좋았던가? 그는 천천히 침대로 다가와 캐노피를 걷어 올리고 상반신을 굽혔다. 히이이익하고 억눌린 비명이 목안에 맴돌았다. 키 크다! 빌보다도 커 보였다. 체격은 더 좋아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은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젖은 머리카락 아래로 호박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숨이 멎는 듯 한 기분을 느꼈다. 잠깐, 이거 내 꿈 맞지? 이상한 기분이 든다. 그는 표정 변화 없이 나를 내려다보더니 손을 들었다. 움찔하고 놀란 것은 그가 손을 들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가운차림이었기 때문이었다. 벌어진 가운 사이로 남자의 맨가슴이 보였다. 아니, 남자의 맨가슴 따위야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그야 때때로 저택에서 고용한 일꾼들이 여름이면 덥다고 상의를 벗고 일하는 것도 간혹 봤으니까. 그럴 때면 데이지가 키득거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내가 매우 가까운 사이인 것처럼 행동했다. 천천히 커다란 손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왜 그래?” 무뚝뚝한 말투였다. 얼굴만큼이나 무뚝뚝한 말투에 목소리만큼은 근사했다. 와, 나 진짜 꿈꾸나 봐. 자기 전에 데이지가 남자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근사한 남자가 내 꿈에 나타날 리가 없다. 따듯한 손바닥의 체온이 뺨에 닿았다 떨어졌다. 응. 그래. 꿈이 확실해. 나는 다시 한 번 확신했다. 남자의 얼굴은 표정변화가 거의 없었다. 마치 소설 속에 나오는 미남의 삽화처럼. “어, 아니...”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는데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한쪽 무릎을 침대 위에 올려놓자 그 부분이 움푹 꺼지면서 몸이 흔들렸다. 와, 내 꿈 진짜 현실감 있는데? “못 일어나겠어?” 이상하게도 남자의 표정도 말투도 변화가 없었는데 나는 그가 나를 걱정한다는 걸 알았다. 그냥, 그냥 알았다. 꿈의 좋은 점이구나. 마치 나와 그가 굉장히 오랜 시간 알아온 사이 같은 기분이었다. 나쁘지 않은데.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내 꿈에 나오다니. 그가 내 몸 위로 올라오더니 한 손으로 내 턱을 쥐었다. 와.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꿈이 아니고서야 이런 망측한 일을 할리가 없다. 약간 부끄럽다. 내가 이렇게 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꿈이란 바라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던가. “왜 기분 나쁘게 히죽대?” 아, 성격은 별로 안 좋구나. 꿈이긴 해도 나름대로 현실적인 모양이다. 가벼운 실망에 나는 한숨을 흘렸다. 잘생긴 남자가 성격은 별로 안 좋다니. 이건 데이지의 취향인데. “난 좀 덜 생겨도 성격은 좋은 게 좋은데.” “뭐?” 남자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는 미간을 찡그리더니 곧바로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어라. 표정 변화가 있기는 하구나. 게다가 한쪽 눈썹만 치켜 올리다니,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꿈이라는 점 덕분인지 약간 대담해졌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눈썹을 더듬었다. 남자는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을 뿐 피하지는 않았다. “엄마가 인간은 이런 걸 할 수 없다고 했는데.” 남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는 내 턱을 놓고 대신 이마를 짚었다. “어디 아픈 건가?” “아프지 않은데요.” 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엄마가 이런 걸 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나면 도망치랬는데 별로 도망칠 생각은 안 드네요.” “도망친다고?” 어렸을 때 엄마가 웃으면서 말했다. 한쪽 눈썹만 치켜 올릴 수 있는 남자는 피하는 게 좋아. 그게 누굴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에 그때도 나는 왜 그런지 묻지 않았다. 아빠가 그랬다. 늘, 내가 뭔가 잘못하면 한쪽 눈썹만 치켜 올리고 날 쳐다봤다. 그리고 케이트. 라고 날 불렀다. 그러면 나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늘어트린 채 아빠에게 걸어간다. “넌 아직도 도망칠 생각인 건가.” 남자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천천히 내 이마를 짚은 손을 움직여 뺨과 턱을 스치더니 목과 어깨를 쓰다듬었다. 어라. 그제서야 나는 내가 옷을 입고 있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와, 이 꿈 좀 이상한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 잘생기면서 성격은 나쁜 남자를 떠올릴 정도로 세세한 꿈이 내 옷은 만들어 내지 못했단 말야? 방이 이렇게 멋지니 나도 최소한 귀부인들이 입는 레이스가 잔뜩 달린 잠옷을 입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대담하게 남자의 가운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내 레이스 잠옷은 어디 있어요?” “레이스?” 그는 또다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이스가 아닌가? 엄청 살랑살랑하고 부드러운 감촉의 그거. 몇 년 전에 데일 남작의 둘째 딸이 시집갈 때 만들어 갔던 그 레이스 잠옷은 한번 입어보고 싶었는데. “레이스 싫어하잖아.” “레이스를 싫어한다고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외쳤다. 말도 안 돼. 여자가 레이스 잠옷을 싫어 할 리 없다. 어울리지 않아 입지 않는 것뿐이지 대부분의 여자는 레이스 잠옷을 좋아한다. 입지 못하더라도 보는 것만으로도 탄성 나오는 그것. “잘 찢어진다고 싫어하잖아.” “레이스 잠옷이 왜 찢어지는 데요?” “그야-,” 남자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미간을 찡그리고 나를 내려다봤다. 설마 지난번에 찢은 걸로 아직도 화내는 건 아니겠지? 그는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천천히 입술이 닿았다. 와, 나 진짜 무슨 욕구불만인가 봐. 며칠 전에 데이지가 소설 속의 주인공이 꿈에 나왔다고 했을 때 비웃는 게 아니었다. 남자가 천천히 내 아랫입술을 빨았다.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부끄러우면서도 좋았다. 이게 진짜일 리가 없다. 그랬다면 불쾌했을 테니까. 나는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뒀다. 어차피 꿈인데 뭐. 일어나면 앤에게 엄청 이상한 꿈을 꿨다고 이야기해줘야지. 입안에 뜨거운 혀가 치열을 가르고 들어왔다. 어라. 이상한데. 나는 눈을 뜨고 남자를 살짝 밀었다. 예상외로 그는 가볍게 미는 내 힘에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담배 피우고 왔어요?” 남자는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어떻게 알긴요. 당연히 냄새가 나니까요.” 남자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는 한쪽 팔로만 몸을 지탱한 채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가운 자락이 벌어지면서 탄탄한 가슴과 복근이 보였다. 와. 나는 대담하게 그의 가슴을 쳐다봤다. 어차피 꿈이니까 상관없지 않을까? ============================ 작품 후기 ============================ 시기적으로 한여름은 아니지만 걍 생각나는 김에. 원래는 월요일날 올리려고 했는데 이번에 직장을 이직하면서 정신이 없어지는 바람에 어제 집에 들어오자 마자 잠들어 버렸더랬습니다. 2부는...으음... 7월 중반부터 시작할것 같네요. 쓰던 걸 갈아 엎어서. 기존대로 매일 업뎃하는게 가능할지 몰라서 일단 7월 들어간 다음에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새 직장이 기존 직장보다 통근시간이 두배쯤 더 걸리거든요. 공지는 다음주 쯤에 올리겠습니다. 2편은 이번주 안에 올라갑니다. 사실 언제 올린다고 딱 집어서 말씀드릴까 하다가 후후후후후후후후 늘 성실하게 업뎃했으니 한번쯤은 이렇게 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요. 00036 [외전] 한 여름 밤의 꿈 =========================================================================                            “피우고 샤워까지 했는데 냄새가 난다고?” 샤워하기 전에 피더라도 난다. 아주 희미하지만 난 알 수 있다. 흡연자들은 신기하다고 하지만 안 피는 사람들은 알 수 있다. 게다가 난 담배냄새가 싫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냄새도 안 좋고 몸에도 안 좋은 걸 일부러 돈 써가며 피우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니 담배를 피우는 남자가 내 꿈에 나온다는 건 더더욱 이상한 일이다. 흠. 진짜 이상한 꿈인데. “얼굴 빼곤 다 내 취향이 아니잖아.” 나는 약간 투정부리듯 말했다. 남자의 눈이 커지더니 입술이 잠시 곡선을 그렸다 제자리로 돌아갔다. “얼굴은 네 취향인가?” “사실 얼굴도 그다지 취향은 아니예요.” 나는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선을 따라 그렸다. 난 좀 자주 웃는 사람이 좋다. “자주 웃어서 입가에 주름진 남자가 얼마나 섹시한데요.” 아, 그래? 남자의 목소리가 약간 딱딱해진 것 같았다. 흠. 그래 봤자 넌 내 꿈에 나오는 남자일 뿐이잖아. 나는 거의 콧날을 따라 훑은 뒤 눈썹을 더듬었다. 검은색 눈썹은 좋다. 그 아래 호박색 눈동자라니 진짜 꿈이 아니고서야. 그는 마치 인큐버스처럼 보였다. “눈매도 좀 부드러운 사람이 좋아요.” 설마 진짜 인큐버스는 아니겠지. 약간 겁이 나서 나는 불안하게 몸을 움직였다. 어느샌가 나는 남자의 팔 안에 갇혀있었다. 이 남자가 인큐버스라면 지금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 아닐까? “네 말은, 제이드가 더 좋다는 건가?” 제이드가 누구냐고 묻기 전에 남자의 손이 또다시 턱을 움켜잡았다. 어, 어어어어? 나는 깜짝 놀라 팔을 휘둘렀다. 손끝에 남자의 가운이 걸리면서 휙 내려갔다. 그의 어깨에 흉터가 나 있었다. 칼로 베인 듯한 흉터였다. 깔끔한 선이 쇄골을 가로질러 겨드랑이를 향해 나 있었다. 세상에. 나는 깜짝 놀라 그가 인큐버스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잊고 손가락 끝으로 상처를 더듬었다. “아파요?” “...아니.” 남자는 간결하게 대답했지만 그 안에 알 수 없는 뭔가가 내포돼 있었다. 뭔지 몰라도 그 흉터는 그에게 꽤 큰 의미였던 모양이다. 어쩌다 다쳤냐고 묻고 싶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건 그가 나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는 걸 깨달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다친 건 그인데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여서 혼란스러웠다. 내가 왜? 진짜 이상한 꿈이다. 나는 처음 보는 남잔데 그는 마치 내가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조금 가슴이 아팠다. 이런 남자의 연인이라면 행복할까, 불안할까. 지금까지 나는 단연코 불안할 거라는 쪽이었다. 남자가 너무 잘생기면 좋지 않다. 게다가 이렇게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는 더더욱 좋지 않다. 그런데 지금 그가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가슴 아팠다. 내가 이 남자의 연인이라면 좋을 텐데. 그는 마치 내가 놓으면 사라질 것처럼 보고 있었다. 흠.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군. 그는 꿈속의 인물이니 내가 잠에서 깨면 사라지겠구나.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그를 끌어안았다. 단단한 몸의 뜨거운 체온이 닿았다. 슬프게도 그가 팔을 지탱한 채로 굳어있는 탓에 내가 그를 끌어안았다기보다는 그에게 매달린 꼴이 되어버렸지만 뭐 어떤가. “미안해요.” 절로 사과가 나왔다. 나는 곧 잠에서 깰 테고 이 잘생겼지만 위험한 남자는 달콤한 꿈의 뒤편으로 사라질 것이다. 남자가 픽 웃는 게 느껴졌다. 목덜미에 그의 숨이 닿았다. “네 탓이 아냐.”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오싹하고 소름이 돋으면서 뭔가가 찌르르했다. 와, 너무 현실적이잖아. 그의 뜨거운 입술이 목 뒤편에 닿았다. 그의 손바닥이 등을 어루만지다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허리의 움푹 팬 곳을 쓰다듬고 엉덩이를 쓸었다. 어, 이거 점점 야해지는데. 한쪽은 가운만 입고 한쪽은 완전히 벗고 있다는 건 둘째 치더라도. 그의 손가락이 허벅지 안쪽을 쓸기 시작했을 때 나는 눈을 퍼뜩 떴다. 회색으로 칠해진 벽이 보였다. 곧이어 누군가 문을 똑똑똑 두드리고 지나갔다. “아침이예요.” 옆에서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데이지가 돌아눕는 소리가 들렸다. “으, 졸려...” 그녀의 말과 달리 나는 꽤 개운했다. 허 참, 이상한 꿈도 다 있네. 내가 엄청 잘생긴 남자가 꿈에서 나왔다고 말하자 앤은 꺄르르 웃었다. 너 데이지 닮아가니?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런 말 하지 마. 나도 이상하다고. “어떻게 생겼든?” “글쎄.” “잘생겼다며? 어떻게 잘생겼는데?” 실은 그게 문제다. 나는 우물우물 고백했다. 잘생겼다는 거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어. 앤은 키득키득 웃으며 빵 반죽을 주물럭대더니 탁탁 쳐서 공기를 빼냈다. “하긴, 꿈은 깨면 곧 잊어버린다고 하더라.” “음, 그런가 봐.” 솜씨 좋게 앤이 빵 반죽에 건포도를 넣더니 틀에 담아 오븐에 쏙 넣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꿈에 나온 남자를 떠올리려 애썼다. 참 이상한 일이다. 꿈에서 그렇게 만지작댔는데 기억에 남는 게 한 가지도 없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뭐야? 무슨 생각 했는데 얼굴이 빨개?” “으, 그게...” 꿈일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생각해보니 나 참 대담한 짓을 했다. “막 남자 얼굴이랑 몸을 만졌어.” 휘익하고 앤이 휘파람을 불었다. 지나가던 톰이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우리 둘은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신호를 했다. “이야, 케이트!” “으, 나도 부끄러워.” 앤의 야유에 나는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지? 역시 꿈이라? 앤은 싱글거리며 말했다. “남자가 필요했던 건 아니고?” “그런 말 하지 마.”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 그런데도 한 편으로는 그 꿈의 분위기가, 그가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가슴이 아릿했다. “그러고 보니.” “역시 남자가 필요해?” “그게 아니라.” 나는 손을 들어 반대편 어깨를 만졌다. 이쪽이었나? “그 남자 어깨에 흉터가 있었어.” “흉터?” “음. 칼로 베인 흉터.” “헤에. 용병이었나 보네.” “용병이라고?” “그렇잖아. 싸우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흉터가 생길 일이 별로 없지 않아?” 그런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용병...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데이지가 주방 문으로 몸을 내밀고 외쳤다. “새로운 하인이 왔어!” “어? 진짜?” 앤은 고개를 번쩍 들더니 주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드디어 구했구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지난 달에 하인 둘이 일주일 차이로 그만두는 바람에 손이 부족하던 차였다. “키가 크네~” 데이지와 앤은 집사의 집무실을 훔쳐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안에서 집사와 새로운 하인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름이 이안이라고? 성은?” 남자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데이지와 앤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어머, 저 남자도 고아인가 봐. 고아로는 안 보이는데. 고아로 보이는 사람이 따로 있어? 어쩐지 죽이 맞아서 나는 피식 웃었다. 사소한 것에는 투닥거리는 두 사람이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기도 하다. 앤은 뒤편에 선 나를 끌어당겼다. 케이트, 이리 와서 봐.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데이지를 조금 밀어 틈을 만들어줬다. 데이지는 투덜거리더니 몸을 움직여 자리를 만들었다. “고개 좀 돌리지~” “그러게. 얼굴 좀 보자.” 두 사람의 요청에 화답하듯 새로운 하인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두 사람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 잘생겼어! 반면 나는 호박색의 눈동자를 본 순간 벼락 맞은 것처럼 몸이 굳었다. 낯설지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아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저렇게 잘 생긴 남자를 한번 보고 잊어버렸을 리 없다. 앤이 나를 잡아당기더니 속삭였다. “어때? 네 꿈에 나온 남자랑 누가 더 잘생겼어?” “글쎄.”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꿈에 나온 남자는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안 나는걸. “저 남자, 찜!” 데이지가 홀랑 말하자 앤이 분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으으, 나도! 나도 찜!” 얼씨구. 두 사람은 나를 쳐다보더니 물었다. “어때? 너도 도전?” 내가 말하려는 순간 남자가 우리를 쳐다봤다.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는 게 보였다. 심장이 달음박치기 시작했다. 엄마가...도망치라고 했다. “난 너무 잘생긴 남자는 별로야.” “어? 그래? 그럼 케이트는 안 끼는 거야?” 나는 고개를 저으며 발길을 돌렸다. ============================ 작품 후기 ============================ 1부 진짜로 끝났습니다. 와, 재미있게 읽었다고 해주신 분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너무 좋았네요. 로맨스판타지라고 해놓고 1부 내내 로맨스는 코빼기도 안보인게 죄송스러워서 좀 달콤달콤하게 해보자는 생각에 외전을 써봤습니다. 너무 좋아해주셔서 죄책감이 들었다는건 비밀... 글쵸...로맨스판타지래놓고 스릴러판타지였죠... 죄송합니다. 점점점 로맨스는 나올거예요. 문제는 이안의 성격과 케이트의 성격이죠. 얘들 성격에 보자마자 좋아! 사랑해! 알랍! 이러면서 쪽쪽거리지는 않을거라서 일단 외전의 단계까지 가려면 좀 걸릴수도 있습니다. ...의외로 빠를수도 있죠. 여기까지가 책으로 하면 약 1권분량정도 됩니다. 한 부당 가능하면 1권 분량에 맞추려고 노력중입니다. 분량 조절하는 연습도 할겸 연재라는 환경에서 1권분량씩 연재하는게 가능한가 하는 것도 시험중입니다. 지난 작 들이 전부 처음 시작할때 결심은 1권분량 이었음에도 2권 반, 3권까지 간 것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고요. 덕분에 초반은 너무 루즈하게 후반에는 너무 스피디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으으으으. 그래도 이번 경험으로 2부는 속도 조절을 어느 정도 할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2부때 다시 만나요! 참고로 너무들 궁금해하셔서... 외전의 이야기가 실제가 되려면 일반판에서는 못올라갑니다. 그러니 마음 내려놓으세요. 00037 [공지] 2부 검은 도시 =========================================================================                            힘의 나라 뮈엘라. 뮈엘라의 수도에서 벌어지는 수사관 이안과 하녀 케이트의 달콤살벌한 사건들. ============================ 작품 후기 ============================ 어, 죄송합니다. 사실 이 공지를 이번 주 중에 올렸어야 했는데 바빠서 잊어버렸네요. 사실 내일(월요일) 부터 업뎃하려고 했는데 비축분이 없네요. 쩜쩜쩜. 그래서 수요일부터 업뎃됩니다. 이틀동안 비축분을 얼마나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계획한건 1/3쯤 써두려고 했는데 너무 놀았나;;; 아니, 저 별로 안놀았는데... 억울해애애애. 출퇴근 시간이 왕복 두시간쯤 걸리다보니 집에오자마자 씻고 저녁먹으면 열시... 고대로 잠드는 나날들이었습니다. 억울해애애애. 어, 어쨋거나 수요일 (10일)부터 업뎃하겠습니다. 2부에서는 최대한 로맨스가 많이 들어가도록!!! ..잠깐, 이거 전에도 한번 다짐했던거 같은데. 아니, 진짜 이번엔 이안이 (어떤 의미론) 폭주합니다. 진짜로요. 덧. 1부를 읽지 않고 2부만 읽어도 내용을 이해하는데는 무방합니다. 00038 1. 타운 하우스 =========================================================================                            남자는 숨을 몰아쉬며 눈동자를 굴렸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낡아빠진 테이블과 의자. 그것만큼이나 낡아 벽지가 벗겨져 가는 벽. 눈앞에 고통으로 일그러진 익숙한 얼굴이 피로 뒤덮여 있었다. 부들부들 손을 들자 마치 남의 것처럼 손이 자신의 손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피로 묻은 손. 밖에서 누군가가 지나가는지 발걸음 소리가 나자 남자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자수할까? 치안 관에게 가야 하나? ....치안 관에게 가면? 남자의 눈이 분노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치안관에게 가면 무엇이 어떻단 말인가. 그저 그만 살인범으로 잡히고 말 것이다. 분노에 휩싸이기 쉬워진 몸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견디지 못하고 주먹으로 바닥을 쳤다. 쩍 소리와 함께 낡은 나무 바닥은 남자의 주먹만 한 크기의 구멍을 만들어 냈다. === 수사관의 사무실은 휑 뎅그레 하다. 대부분의 수사관은 전국으로 수사를 나가고 때때로 출장을 끝내고 돌아와 사건 일지를 작성할 때만 사용하는 곳이니 당연했다. 그러다 보니 사무실은 항상 깨끗한 바닥과 새것 같은 사무용품을 유지했는데, 그건 첫 번째로 모든 수사관이 동시에 자기 자리에 앉아있었던 적이 별로 없다는 점 때문이고 두 번째로 별의별 사건이 일어나는 탓에 오랜 시간 꾸준히 물품을 사용할 수가 없으며 세 번째로 수사관을 아들로 둔 부유한 상인의 부인이 사비를 들여 교체한 탓이었다. 알라나데일 사건이 손을 떠나고 나서 첫 출근인 이안은 사무실 문을 열었다가 사무실 안이 누군가의 노래로 가득 찬 것을 발견하고 다시 문을 닫았다. “어? 뭐야? 왜?” 뒤따라오던 제이드가 다시 문을 열자 노래는 더욱더 확실하게 들려왔다. 내 사랑, 오 내 사랑. 그녀의 아름다움은 운운하는 듣기에도 시답잖고 웃기지도 않은 가사를 가수가 그럴듯하게 불러대고 있었다. “누가 사무실에 가수를 불렀어?” 제이드는 싱글거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들은 저마다 자기 멋대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노래를 따라 부르는 자도 있어 작은 파티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긴 확실한 수사관 실이다. “이안 로엔. 축하한다.” 이안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누군가가 외쳤다. 그러니까 저 가수는 이안을 위한 선물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안은 입술을 굳게 닫고 자기 자리로 걸어갔다. 그 누군가는 손뼉까지 치기 시작했다. 3급 수사관에서 2급 수사관으로 승진한 것에 대한 축하다. 이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굴고 있지만 유례가 없다 할 정도로 고속 승진이었다. 3급에서 2급으로 올라가는 데는 사건해결에 대한 성사율도 중요하지만 시험도 한 번 보게 되어있다. 보통 삼사 년 정도 걸리는 것에 비해 이안은 일 년 만에 2급으로 갈아탔다. 대단한 일이다. 귀족들이 판을 치고 있는 다른 직책과 달리 평민으로 무장된 수사관은 그만큼 실력주의였다. 자부심도 대단하다.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수재에 검술실력까지. 그런 곳에서 유일한 귀족출신인 이안이 일 년을 버텼다는 건 일 년 만에 승진했다는 것만큼은 아니어도 대단한 일이다. “반지 좀 보자.” 2급 수사관 리코가 이안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카락은 곱슬기가 있어서 그의 통통한 얼굴 위로 둥글게 올라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동그란 빵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안에게 호의적인 몇 안 되는 수사관 중 하나다. 이안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이야, 반짝반짝하네. 아주.” 반지는 수사관의 상징이 조각되어 있고 가운데에 작은 보석이 박혀있었다. 케이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궁금해했던 보석이다. 이 보석은 마법을 담기 위한 매개체이기 때문에 가짜를 사용할 수가 없다. 케이트가 알았다면 수사관의 반지가 아니더라도 가격만으로도 충분히 놀랐을 테지만 불행히도 대부분의 수사관은 부유한 집에서 자랐거나 부유하지 않다 하더라도 꽤 많은 연봉을 받고 일하기 때문에 그리 놀라운 가격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좋아하시지?” 싱글벙글한 제이드의 말에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로엔 백작 부인은 매우 좋아했다. 얼마나 좋아했느냐면 파티를 열겠다고 한 걸 그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을 정도다. 수사관들이 예의 없이 대화를 지속했지만 가수는 마지막 소절까지 부른 뒤 이안의 앞에 다가가 꾸벅 인사했다. 그가 손에 들린 꽃다발을 내밀자 이안은 뱀이라도 내민 것처럼 가수를 쳐다봤다. “수고하셨습니다.” 재빨리 제이드가 나서서 꽃다발을 낚아채며 대신 인사했다. 수사관들은 별종들이라고 하더니 맞는 모양이다. 가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리코에게 남은 보수를 받고 나갔다. 여, 센스 좋은데? 제이드의 칭찬에 리코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귀여운 후배가 승진했는데 이 정도쯤이야.” 그 귀여운 후배가 자신보다 한 뼘은 더 크고 무뚝뚝한 얼굴이라는 건 상관하지 않는 태도다. 이안은 제이드와 리코의 대화를 무시하고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근 한 달 정도를 비웠지만, 책상 위는 깨끗하다. 변한 건 딱 하나. 책상 위의 이름표가 3급 수사관 이안 로엔에서 2급 수사관 이안 로엔으로 바뀌었다는 점뿐이다. 그는 사무실 내부를 둘러봤다. 모두 스무 명 정도의 책상과 의자가 놓여있는 꽤 큰 사무실을 채우는 건 고작해야 일곱 명밖에 없다. 없는 사람은 전부 수사업무를 위해 자리를 비운 것이거나 드물게도 휴가를 받은 것이다. 일곱 명 중에 2급 수사관인 제이드와 이안, 리코를 제외하면 네 명이 남는다. 남은 네 명은 1급 수사관 카이사, 2급 수사관 에일, 리온, 3급 수사관 니노다. 안타깝게도 이 네 명 모두 이안과 사이가 좋지 않다. 굳이 따지면 사이가 좋지 않다기보다는 네 명은 여러 가지 형태로 이안을 싫어하고 피하고 괴롭히지만 정작 이안은 무시하는 관계다. 문득 이안과 눈이 마주친 카이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또 무슨 횡포를 부리려나 싶은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안에게 다가오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수사관장님이 부르신다.” 카이사가 이안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은 흔치 않다. 휘익. 그가 자리로 돌아가자마자 제이드가 휘파람을 불었다. 리코는 낄낄거리며 제이드의 옆구리를 찔러 그만두라는 시늉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카이사의 눈매가 부리부리해진 참이다. “무슨 일일까?” 수사관장이 부른다니. 제이드의 의문에 이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새로운 사건이 내려온 모양이지. 맞는 말이지만 참 재미없는 이야기다. “케이트!” 계단 손잡이를 닦고 있던 여자의 빨간 머리가 움찔하더니 들렸다. 예쁘장한 얼굴이 자신을 부른 쪽으로 돌아갔다. 하녀 장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케이트는 손에 걸레를 쥔 채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청소 다했니?” 케이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녀 장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예쁘장하고 작은 여자는 - 여자라기보다는 소녀에 가깝지만 - 그다지 말을 하지 않는다. 전에 일하던 집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지만 입 밖에 내어 묻지는 않았다. 그냥 두고 보라는 로엔 백작 부인의 지시가 있기도 했지만 그녀가 케이트의 눈에서 불신을 봤기 때문이기도 하다. 뭘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하녀 장은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쉬는 시간이야. 다했으면 저녁 식사 시간까지는 쉬어도 좋아.” “네.”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등을 돌렸다. 로엔 백작의 저택은 그리 크지 않다. 알라나데일의 저택보다 조금 작다 싶은 수준이다. 하지만 이건 수도이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일 년에 몇 개월 정도만 수도에서 지낸다. 아가씨들의 데뷔가 시작되는 초여름에서 늦가을까지. 그 시기 동안만 지내기 위해 수도에 저택을 짓기 시작했다. 게다가 왕이란 가까울 수록 좋은 것. 모든 귀족 뿐 아니라 이름 좀 있다, 돈 좀 있다 하는 자들도 우르르 집을 짓기 시작하다 보니 수도의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결국 어마어마한 부자가 아니고서야 수도에 대저택을 짓는 건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래도 크게 상관은 없다.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에 대저택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니 수도의 저택은 일종의 업무용 저택인 셈이다. 그래서 이름이 타운하우스인가. 케이트는 옷을 갈아입으며 시니컬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규모가 작다고 해도 타운하우스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하지만 귀족들은 수도의 저택을 두고 타운하우스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케이트.” 막 저택을 나가려는데 하녀 하나가 그녀를 불렀다. 짧은 갈색 머리카락에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 고양이 같은 얼굴을 한 여자다. 메리라고 하던가. 케이트가 돌아서자 메리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나가는 김에 도련님께 식사하시고 오실 건지 물어봐 줘.” 도련님이란 이 저택에서 이안을 부르는 말이다. 그래. 이안은 도련님이었다. 케이트는 메리가 자신의 말을 마치자마자 그대로 돌아서는 걸 보며 생각했다. 일개 하인으로는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귀족이라니. 그것도 로엔 백작의 동생. 입맛이 썼다. 이상하게도 배신당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알라나데일에서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다. 그 저택에서 이안은 하인이었다. 재수 없고 건방지기는 했어도 하인이었다. 그런데 수도로 오자 그는 저 멀리 올라가 버렸다. 이제는 함부로 이안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도련님. 하고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것이다. 삭이지 못한 분노가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케이트는 분노한 표정이 누구에게 보일 새라 고개를 숙이고 저택 밖으로 빠져나갔다.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자 바로 도로가 보인다. 이것이 수도와 시골의 차이다. 저택은 그 저택을 둘러싼 정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수도의 저택은 보통 건물 뒤로 작은 정원이 있을 뿐, 현관 문을 열면 바로 도로가 인접해 있다. 어마어마한 부자가 아니고서야 수도에서 정원을 갖춘 저택을 소유하고 유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귀족들은 이런 저택을 타운하우스라고 부른다. ============================ 작품 후기 ============================ 1. 다시 1번으로 돌아왔네요. 전 제목의 숫자가 두자리를 넘어가면 어쩐지 장황하고 지저분하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제 소설이요.) 2. 지난 1부의 목표는 30편 안에 한 이야기를 완성할 것 이었습니다. 이번 2부의 목표는 빌드업 (초반 부분)이 너무 길지 않을 것 입니다. 아, 로맨스도요. 가능한 넣자! 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로맨스와 능욕의 차이를 모르겠네요. 로맨스 소설을 읽으면 로맨틱하다는 부분이 전 왠지 능욕이라;;; 3. 업뎃 시간 변경합니다. 빨간날 제외하고 평일 한편씩 올라갑니다. 빨간날이 없다면 주 5회 업뎃이 됩니다. 여기까지는 기존과 같은데 업뎃 시간이 7시에서 9시 사이였죠? 지난번에도 별로 많이 못지켰는데 이번에 출퇴근 시간이 길어지면서 더 힘들어져서;; 9시에서 11시 사이로 바꾸겠습니다. 느긋하게 11시쯤에 들어와서 보시면 될듯 싶어요. 근데 언제 지쳐 나가떨어져서 일주일에 두편 업뎃할게요! 할지도 모름;; 4. 새로운 배경에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등장인물입니다. 그래도 1부때 등장한 애들중 4명이나 등장하네요. 처음이니까 가볍게 질의 응답하나 할게요. 1부가 끝난 시점에서 이안에게 궁금한 것을 댓글 달아주세요. 내일 10시까지 달아주시면 11시에 업뎃하면서 후기로 답변하겠습니다. 왜 이안이 처음이냐면... 어차피 여러분 제이드보단 이안한테 더 관심 있잖아요... 00039 1. 타운 하우스 =========================================================================                            “케이크 먹을래?” 앤의 질문에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는 탓에 돈을 내고서라도 사 먹고 싶었던 참이다. 앤은 알고 있었다는 듯 웃으며 큼지막하게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 차와 함께 내왔다. “잘 지냈어?” 음, 뭐. 그렇지. 앤의 질문에 우물우물 넘기며 케이트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갑게 냉침한 홍차였다. 조금이나마 감정이 가라앉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 같은 도로를 걸어서 왔으니 뜨거운 건 감정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앉아있는 왼쪽 벽이 시원해서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기대며 물었다. “여긴 왜 이렇게 시원해?” “아, 거기 냉동고거든.” “냉동고라고?” 그게 뭐야? 케이트의 의문에 앤은 킥킥대며 문을 열어 주었다. 어두운 방 안쪽에서 훅하고 차가운 공기가 흘러나왔다. 우와, 시원해! 케이트가 감탄을 흘리자 앤은 누가 볼세라 재빨리 다시 문을 닫았다. “여름이니까 보관실에 매일 아침마다 얼음을 넣어두거든. 그래서 이렇게 차가운 거야.” “그런 것도 있어?” “뭐, 식당이니까.” 케이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앉아있는 공간을 훑어봤다. 식당이라는 곳은 수도에 와서 처음 와봤다. 그녀가 살던 알라나데일은 시골의 작은 마을이라 사람들이 밖에서 음식을 먹을 만한 곳은 주점밖에 없었다. 그 주점도 때때로 찾아오는 장사치들이 먹는 곳이지 케이트나 앤처럼 그 마을에 사는 사람은 갈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애초에 앤과 케이트는 멀쩡한 집을 두고 나가서 사 먹는 다는 외식의 개념이 없었다. 알라나데일은 자급자족의 비율이 큰 마을이었기 때문이었다. 수도에 와서 놀란 건 업무가 상당히 분할되고 전문화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 그녀가 일하는 타운하우스만 해도 하녀는 고작 일곱 명. 두 사람의 상식에서는 그리 많은 게 아니다. 크게 주방일과 세탁, 청소로 하녀의 일이 분할되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주방 일만 해도 매일 아침 빵을 만들고 잼이나 마멀레이드를 만들고 설거지를 하며 생선과 고기를 손질하고 감자와 양파를 깎는 등의 일이 필요하다. 손이 많이 가는 것이다. 하지만 수도에 오니 빵은 매일 아침 사오고 잼이나 마멀레이드도 전문점에서 사온다. 생선과 고기는 가게에서 미리 손질해서 주문하면 그 부위만 가져다준다. 말 그대로 주방에서는 요리와 설거지만 하면 되는 것이다. 빨래와 다림질은 세탁소라는 곳이 따로 있었다. 아침마다 수습 하녀들이 떠오던 물은 수도 시설이 집집마다 되어 있어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줄줄 나온다. 앤과 케이트에게는 큰 문화 충격이었다. 사람의 삶이라는 게 이렇게 편해질 수 있구나. 두 사람은 편한 한편 불안해졌다. 그렇다면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 게 아닌가. 하지만 반대로 전문적인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해졌다. 앤은 커다란 식당의 요리사로 들어갔다. 제이드의 주선이었다. 알라나데일에서 자는 도중 납치당해 외국으로 팔려갈 뻔한 그녀를 구해서 수도로 보내준 건 그 남자였다. 어딘지 모르게 화려한 의상과 싱글거리는 얼굴이 미덥지 않은 남자. 제이드는 앤을 수도로 보내고 더 이상 하녀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 주방 하녀로서의 경력을 살려 식당에 일자리를 주선해 줬다. 보통이라면 수습으로 설거지나 양파와 감자 깎는 일을 해야 하지만 앤은 몇 년간 주방 일을 한 경력을 제이드가 보증서 준 덕에 들어가자마자 요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친구가 왔다고 큼지막한 케이크도 한 조각 내올 수 있는 거겠지만. “맛있다!” 케이트가 감탄하자 앤은 싱글거리며 말했다. “내가 만든 신제품이야. 내일부터 디저트로 내가려고.” 케이크는 차갑게 얼린 것이었다. 부드러운 빵과 그 위의 차가운 무스가 올라가 수저로 떠먹기 되어 있었다. 입안에 넣으면 달콤한 무스가 스르르 녹아 사라졌다. “맛있어. 이게 어떻게 만드는 거야?” “알려줄 순 있지만, 일반 저택에서 만들 수 있을까? 냉동고가 필요한데.” 냉동고란 얼음으로 가득 찬 방을 말하는 것이리라. 케이트는 타운하우스에 냉동고가 있는지 잠시 생각하고 고개를 저었다. 무리다. 타운하우스는 얼음을 필요할 때만 주문해서 쓴다. 매일 얼음을 주문하는 식당과는 다르다. “냉동고만 있으면 생각보다 간단한 요리지만.” 지금처럼 더운 날씨에는 무스가 녹아 버릴 거거든. 앤은 그렇게 덧붙이고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냉동고 하니까 하는 말인데, 이안은 어때?” 차가운 냉동고에서 차가운 이안이 연상된 모양이다. 케이크를 입으로 가져가던 케이트의 손이 딱 멈췄다. 수도로 온 지 한 달. 이안의 집에서 일하지만 그를 만난 것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나마도 지나가는 것을 멀찌감치에서 지켜본 것 뿐. 정확히 말하면 이안의 어머니의 집이지만 그래서 두 사람의 거리감은 더욱 컸다. 차라리 앤처럼 식당에서 일한다면 느낌이 약했을 테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안 도련님이라고 지칭되는 그를 보는 건 더욱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뭐, 잘 지내지.” “하인으로는 안 어울리다고 생각은 했지만 수사관에 귀족이라니.” 놀랐어. 앤은 그렇게 말하며 찻잔을 입술에 댔다. 잘생긴 외모와 차가운 태도 때문만은 아니다. 이안은 어딘가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있었다. 주변에 벽을 치는 느낌. 모든 것에서 한계단 위에 올라가 있다는 느낌. 그런 그의 분위기는 이성에게는 선망과 연모를, 동성에게는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대화해봤어?” “내가 마이크랑 대화하는 거 봤어?” “마이크랑 이안은 다르지.” “뭐가 다른데?” 말을 한 다음에야 케이트는 자신이 너무 날카로웠다는 걸 깨달았다. 아차. 그녀는 눈을 깔고 재빨리 중얼거렸다. 미안. “괜찮아.” 앤은 차를 마시며 대답했다. 그녀는 알라나데일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제이드의 도움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납치를 당하고 인신매매를 당할 뻔했다는 경험 역시 잊기 쉬운 경험은 아니지만 케이트의 경험에 비하면 낫다. 그녀는 같이 일하던 동료가 살해당하는 걸 두 번이나 보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으며 종래에는 살해당할 뻔했다. 그 자리에 이안이 없었으면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했다는 경험은, 그들이 그녀를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죽이려 했다는 것은 사람을 흔들어 놓는다. 긍정적이고 싹싹하던 케이트는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새로운 생활과 새로운 사람들은 새 출발을 하기에 좋지만 바닥 없는 공간과 같다.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지금의 케이트는 의기소침해 있고 의심투성이였다. 자신이 알던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 역시 그녀의 불안을 부채질했다. 지금 그녀의 지탱이 되는 건 앤이 유일했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와. 달콤한 걸 먹으면 기운이 나니까.” 앤이 토닥이며 말하는 바람에 케이트는 거의 눈물이 날 뻔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앤도 마찬가지다. 위험한 일을 당한 건. 그러니 힘든 건 그녀뿐이 아니다. 케이트가 막 그걸 떠올리고 뭔가를 말하려 했을 때 바깥쪽에서 누군가가 쉬는 시간 끝났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앤은 다시 일터로 돌아갈 시간이다. 케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택으로 돌아가?” “아니. 이안...도련님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우리 둘이 있을 땐 그냥 이안이라고 해도 될 텐데. 하지만 앤은 굳이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건 케이트 나름의 거리를 두기 위한 방법 중 하나다. 여기는 알라나데일이 아니다. 여전히 케이트는 부모 하나 없는 고아에 일개 하녀일 뿐이지만 이안은 같이 일하던 하인이 아니라 그녀가 일하는 집의 그녀가 모셔야 하는 도련님이었다. ============================ 작품 후기 ============================ 으으으, 졸려요. 저녁 먹고 졸다왔음. 본편보다 후기가 길지 않나 모르겠네요;;; 레몬맛토끼님 : 이안은 차남인건가요? 그래서 수사관을 하고있는건가요? 그리고 이안의 이상형은 어떻게되나요?! 이안 : 한 번에 하나씩만 해라. 차남인것과 수사관이 무슨 상관이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이상형? 어떤 의미의 이상형을 말하는 건가. -> 어, 음...그러니까 차남이라서 작위를 이어받을 수 없으니 직업을 구한게 아니냐는 의미인거 같은데. 이안 : 작위를 이어받지 못하는 것과 직업은 아무 상관없다. -> 그, 그렇지;; 어, 음...이상형은? 이안 : 그러니까 어떤 이상형을 말하는 건가. -> 이상형이 여러가지야? 이안 : 결혼할 이상형. 데리고 다니기 좋은 이상형. 섹.. -> 거, 거기까지이이이!!! 어, 일단 결혼할 이상형? 이안 : 귀족여자면 됐다. -> 그거뿐? 이안 : 다음 질문. Cerulean님 : 이안에게 질문은...케이트에게 갖는 감정을 어떻게 생각하나요??ㅎㅎㅎ 이안 : 이 질문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 어? 왜? 이안 : 케이트라니, 그 빨간 머리를 말하는 건가? -> 응, 그렇지. 이안 : 빨간 머리에게 갖는 감정이라니. 내가 그 계집애에게 무슨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건가? -> 그러니까 보면 짜증나고, 뭐 그런거 있잖아. 그런 감정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이안 : 넌 상대방에 대한 감정에 일일히 의미를 부여하나? -> 아니, 그건 아니지만... 이안이 입을 다물었습니다. 핑구68님 : 이안이 케이트에게 무슨 벌을 줬나요? 이안 : 아직 안줬다. 무슨 벌을 줄 지 생각 중이야. -> 머릿속에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걸까... go green님 : 이안은 태어나서 울어본적은 있나요;;;;;없읋꺼같아서;; 응애응애 아가때는 제외하구요! 그리고 그 외모로 모쏠은 아니겠죠..전여친 여부도 궁굼합니다! 이안 : ...뭔가, 이 바보같은 질문은. -> 바보같다니;; 어느쪽이? 이안 : 둘 다 말이다. -> 울어 본적 있냐와 전 여친이 있냐는 질문이? 이안 : 당연히 울어 본 적 있다. -> 예를 들면? 이안 : .......(생각나지 않는 듯 하다.) -> 어, 그럼 전 여친은? 이안 : 알라나데일로 오기 전에 오래 걸릴것 같아. 정리하고 왔다. 지금쯤 다른 애인을 만들었겠지. -> 어? 진짜? 어떤 여자였는데? 예뻐? 이안 : 배우니 예뻤겠지. -> 예뻤겠지라니...어라...혹시 이녀석...정부를 말하는 건가? 이안 : 당연한 거 아닌가? -> 정부라는 건 물질적으로 제공해주는 관계를 말하는 거잖아. 이안 : 받는 것도 없이 남자의 욕망을 채워주는 여자는 헤픈 미망인 밖에 없다. -> 그런 의미의 여친을 물어본 게 아니야아아아 이부분은 부연 설명을 하자면, 귀족같은 경우 어차피 결혼은 집안이 맞는 상대와 하기 때문에 애인의 개념은 철저하게 즐기기 위한 상대밖에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결혼을 약속한 약혼녀겠죠. 때문에 여자친구라는 개념은 결국 일종의 정부입니다. 보통 가수나 배우같은 업에 종사하는 여자가 많으며 남자에게 집이나 용돈을 받는 대신 극장에 동반하거나 로맨틱한 저녁을 보내는 등의 일을 합니다. 개방적인 파티에 동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정식자리에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애인들은 더 많은 돈과 집을 제공하는 남자로 갈아타기도 했으며 때로는 남자에게 진심이 될경우 아무것도 받지 않고 사귀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는 적죠) 남자들도 어차피 귀족이기 때문에 서로 자신의 정부의 외모나 유명세등을 자랑스러워 합니다. 약혼을 하거나 결혼을 하면 애인을 다른 애인이 필요한 남자를 소개시켜주며 정리하는게 보통이지만 대때로 관계를 이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라바트님 : 이안에게 대신 질문하죠.. 제이드 여친은 있나요? 이안 : ...제이드? 그걸 왜 나한테 묻나. -> 너랑 친하니까. 이안 : (미간을 좁히며) 나와 제이드가 친한걸로 보이는 건가? -> 뭐, 일단은. 이안 : 흠. 이그리나님 : 이안은 저렇게 까칠한데 친구가 있나요;; 직장동료말고요 이안 : 이상한 질문이 많군. -> 그래? 이안 : 친구라는 게 뭐지? -> 응? 몰라서 묻는거야? 그야 네이버 국어사전을 따르면 1번.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2번. 나이가 비슷하거나 아래인 사람을 낮추거나 친근하게 이르는 말. 이안 : 그래. 그럼 거기에 맞는 사람은? -> ...제이드? 이안 : 일단은 제이드가 거기에 맞겠지. -> 어, 어라? 끝? 세리아나님 : 케이트를 위해 무얼 준비했나요? 설마 덜렁 타운하우스 하녀직만은 아니겠지요? 이안 : 케이트? 빨간머리를 위해 내가 뭘 준비해야 한다는 거지? -> 어? 그야...네가 수도로 데리고 가니까 뭔가 준비한게 아닌가 하고... 이안 : 고작 하녀 계집애 하나를 수도로 데려가 주는게 준비까지 해야한다는 건가. -> ...없다는 거지? 이안 : 흠. 파피로스님 : 제이드는 평민인건가요?? 이안 : 왜 자꾸 제이드를 내게 묻는 거지? -> 아, 미안. 그건 제이드한테 물어볼게. ============ 이상입니다. 생각보다 질문이 많아서 참 기쁘네요. 없으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는데. 답변이 없는건 본문중에 나올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와, 난 천재야! 라고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세요. 내일은 의외로 인기 좋았던 제이드 질의 응답을 할까요? 마찬가지로 내일 10시이전까지 댓글 달아주세요. 00040 1. 타운 하우스 =========================================================================                            “로엔 수사관님.” 이안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경비병이 그를 찾았다. 수사관의 사무실은 왕궁 내에 있다. 그러니 경비병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경비병이 이안을 찾는 일은 별로 없었다. 덕분에 사무실 내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쳐다봤다.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경비병은 약간 움찔하더니 말했다. 이안의 키에 압도된 모양이다. “저택에서 하녀가 찾아왔습니다.” 하녀? 이안은 저도 모르게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집에서 하녀가 올 일이 뭐가 있지? 지금까지 그의 어머니는 일하는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었다. 그래서 굳이 하녀를 보낸 적도 없다. 이안은 경비병을 따라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이안에게 하녀가? 리코는 혹시 아는 거 있냐고 제이드를 툭 쳤다. 나도 모르지.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저 녀석이 말해줄 리는 없고, 따라가자!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자그마한 빨간 머리 여자를 보는 순간 이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케이트다. 그녀가 이곳에 왜? 머릿속에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다. 알라나데일의 사건은 그의 손을 떠났지만 마무리된 건 아니다. 잡힌 죄인들은 재판을 받았고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몇몇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몇몇은 무기징역을 받았다. 아직 잡히지 않은 데일 남작 부부의 아들 마이크는 현재 수배 중에 있다. 설마 마이크가? 그의 불안한 기분을 북돋기라도 하듯 케이트의 표정 역시 불안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수도에 와서 얼굴을 맞대고 본 건 이번에 처음이다. 몇 번 일하는 모습을 지나가면서 본 적이 있다. 조금 말랐나. 이안은 능숙하게 케이트의 체형을 체크했다. 살이 빠지는 바람에 초록색 눈동자가 커다란 보석처럼 도드라졌다. “여쭤볼 게 있어서요.” 이안이 고개를 끄덕하자 케이트는 한번 숨을 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녁 식사를 드시고 오실건지 확인하라고 해서요.” 긴장했던 것에 비해 케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저녁 식사라고? 그게 중요한가? 케이트는 모르지만 로엔가는 그럭저럭 먹고살 만한 집안이다. 엄청나게 부자는 아니지만 야근하고 돌아온 주인을 위해 참 정도는 준비할 수 있는 재정을 갖추고 있다. “그래.” 케이트는 잠시 그 '그래'가 긍정의 의미인지 부정의 의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자신이 물어본 게 먹고 올 건지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등을 돌리는 케이트의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다. 거리를 두는 건 알겠지만 왜 거리를 두는지 몰라 이안은 약간 조급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케이트를 불러 세웠다. 잠깐. “네?” 케이트는 정중하게 몸을 돌렸다. 이것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게 당연하다. 게다가 이안은 케이트가 그래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마음에 드는지조차도 몰랐다. 그냥 케이트가 자신에게 정중하게 대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한 발짝 나서며 물었다. “그건, 어머니께서 물어보라고 시키신 건가?” “네?”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곧이어 두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젠장. 그제서야 그녀는 깨달았다. 함정이다. 아니, 함정이라기보다는 텃세였다. 이안의 태도로 보아 지금까지 로엔가는 도련님이 저녁을 먹고 올지에 대해서 이렇게 사람을 시켜 확인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 짧은 단발머리 사이로 생긋 웃던 입술이 떠올라 어질했다. 나, 미움받고 있구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뭘 어쨌다고? 로엔 가의 타운하우스에서 수사관의 사무실이 있는 왕궁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이나 걸린다. 이 더위에 왕복 두 시간을 걷게 하다니 심술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아뇨. 실례했습니다.” 케이트는 부끄러운 나머지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안이 붙잡기도 전에 도망치듯 그의 시선에서 빠져나갔다. 뭐지. 이안은 약간 당황해서 케이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다른 사람은 그가 당황한 게 아니라 불쌍한 여자를 겁줘서 쫓아 보낸 걸로 보이겠지만. “저거 스미스양 아냐?” 어느샌가 뒤따라온 제이드가 말을 걸었다. 그의 옆에서 리코가 휘익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예쁜 아가씬데?” “예쁘지? 케이트 스미스라고 이번에 재판한 데일 남작 가의 하녀였어.” “엉? 그래? 야, 어떻게 너네가 가는 저택은 저렇게 미인 하녀가 있냐. 난 순 아줌마 하녀밖에 없더만.” “쯧쯧쯧. 미인 하녀면 어쩌라고. 애 딸린 유부남이.” “유부남은 눈 없냐?” “집에 가면 엄청난 미인이 기다리고 있잖아.” 제이드의 지적에 리코는 잠시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빵을 연상케 하는 외모인 그와 달리 그의 부인은 굉장한 미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런 미인과 결혼한 게 삼십 년 가까이 솔로로 지낸 자신에게 보낸 하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두 사람의 대화를 무시하고 이안은 사무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이안의 무시가 익숙한지 어깨를 으쓱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근데 스미스 양은 왜 온 거야?”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갈 건지 물어보더군.” “저녁 식사?” 리코는 갸웃했고 제이드는 씨익 웃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올 건지 굳이 여기까지 와서 물어본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리코의 어깨를 감싸며 제이드는 기분 나쁘게 웃었다. “과연 저녁 식사 때문에 온 걸까?” 저녁 식사를 물어보러 왔으니 저녁 식사 때문이겠지. 이안의 무심한 시선이 그를 훑고 지나갔다. 제이드는 남은 손을 이안의 어깨에 올렸다. 그보다 이안이 훨씬 컸기 때문에 리코처럼 어깨를 감쌌다간 우스운 포즈가 되어버린다. “저녁 식사는 핑계인 거지.” “핑계라고?” 이안의 한쪽 눈썹과 제이드의 한쪽 입술이 낚싯줄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끌려 올라갔다. “척보면 모르냐? 다 널 보러 온 핑계다, 이거야.” “날 보러 온다고?” 이안은 이해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 보는 건 저택에서도 충분한 것 아닌가? 여기서 저택까지는 마차로 삼십분이나 걸린다. 케이트의 발갛게 익은 얼굴로 보아 마차를 타지 않고 걸어온 것 같다. 그런데 뭐 하러 여기까지 걸어와서 그를 보는 수고를 한단 말인가. “그래서 넌 아직 멀었다는 거야.” 제이드는 검지를 들어 흔들며 혀를 찼다. 확실히 그를 무시하는 태도였지만 이안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타인의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이런 부분에서는 그보다는 제이드가 확실할 것이다. “저택에서는 널 보기 어렵잖아.” “어째서?” 크으, 이 무심한 남자 같으니. 제이드는 과장된 태도로 이마를 짚었다. 리코 역시 제이드가 하려는 말을 이해했는지 같은 포즈를 취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상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무표정의 이안과 이마를 짚고 좌절한 두 명의 남자. “저택에서 넌 주인님이잖아. 스미스양은 하녀고. 그러니 함부로 쳐다볼 수 없는 거지.” 맞는 말이지만 틀리다. 이안이 주인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타운하우스의 소유주는 로엔 백작 부인이었다. 그러니 이안은 주인의 아들이 된다. 그리고 케이트는 주인님이라고 해서 쳐다보지 못하는 여자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자. 거창한 헛다리 짚기는 계속되었다. “그러니 널 보고 싶은 마음에 저 더위에도 가련한 스미스양이 열심히 왕궁까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왔다, 이거야.” 제이드는 '가련한' 케이트가 더운 걸 무릅쓰고 이안을 보기 위해 한 시간이나 걸어오는 모습을 상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제이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명백하게 어쩌라고? 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결국 제이드는 버럭 화를 냈다. “야, 넌 사랑스럽지도 않냐? 저 자그만 한 여자가 널 위해 그런 고생을 했다는데?” 사랑스럽다고? 이안은 제이드가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더운데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라서 가늘어진 팔과 허리가 떠올랐다. “제이드의 말은,” 결국 리코가 중재를 위해 끼어들었다. “여자들에게 좀 친절하게 대하라는 거겠지.” “아니, 아니지. 스미스 양이잖아? 한번 끌어안으라고!”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안의 차가운 시선이 제이드에게 향했다. 리코 역시 에이, 그건 오버다. 라는 표정으로 제이드를 쳐다봤다. “너 설마 너한테 호감 있는 모든 여자를 끌어안아 주는 거냐?” “뭐 어때? 난 너처럼 유부남도 아닌데.” 굳이 진지하게 들으려 노력한 게 무상했다. 이안은 결국 다시 그를 무시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리코 역시 제이드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고 이안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허망한 제이드의 외침만 두 사람의 단단한 등에 부딪혔다. “아, 왜? 뭐?” ============================ 작품 후기 ============================ 즐거운 불금 되셨나요? 전 집에 와서 저녁먹고 씻은 다음 잤습니다. 후후후후. 잠이 최고임. 이 아니라 내일 점심때부터 저녁때까지 쭉 약속이 있어서 오늘 저녁때 비축 좀 쌓고 느긋하게 있으려고요. 그럼, 제이드에 대한 질의응답시간입니다. 레몬맛토끼 : 제이드에게 질문! 1. 제이드는 평민인건가요? 2. 수사관 경력은 어떻게되나요? 3. 애인잇나요?ㅋㅋㅋ! 제이드 : 평민이지. 수사관중에 귀족은 이안, 저녀석밖에 없다고. 이래뵈도 오년 경력의 베테랑이라구. 에헴. 애인은 어디보자...레몬맛토끼처럼 귀여운 여자가 애인이 되준다면 좋은텐데. -> 꺼져. 비앤비 : ㅎㅎㅎㅎㅎ@제이드 이안이랑 일 하는데 힘들지 않아??그게 아니라면 좀 껄끄러운 면이라도 알려줘ㅎㄹ 제이드 : 이안? 저녀석 무뚝뚝한거야 뭐, 유명하니까. 이미 난 익숙하기도 하고. 껄끄러울것도 없지. 아, 물론 가끔 사람들 앞에서 변치 않는 저 뻣뻣한 태도탓에 내가 대신 사과하는 경우가 왕왕있긴 한데. 괜찮아. 난 좋은 사람이거든. 후후후후 이안 : ... 우왕ㅋㅋ : 제이드는엄마가좋아요아빠가좋아요? 제이드 : 네가 제일 좋아. 우왕ㅋㅋ : 제이드는붕어빵을먹는다면(세계관상있을지없을지모르겠지만있다면요!)머리부터먹나요꼬리부터먹나요? -> 그래서! 붕어빵을 준비해 봤습니다. 제이드 : 음? 뭐야? 이 이상하게 생긴 빵은? 아, 나 먹으라고? 이야, 잘먹을게. (빵을 반으로 잘라 내민다.) 자, 너희도 먹으라고. 헤윰입니다 : 그래요 제이드 케이트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발음도 비슷한사람끼리.. 제이드 : 어? 그러고보니 발음이 정말 비슷한데? 하핫. 음, 스미스양은 예쁘지. 좋은 하녀라고 생각해. 우왕ㅋㅋ : 얄밉지만정면대결이힘든상대에게제이드는어떻게대응하나요?그냥참는다거나뒷공작을한다던가? 제이드 : 예를들면 이안을 말하는 거지/ 후후후. 다 아는 수가 있지. 별다른 짓은 안해.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는 거지. 리코 : ...거짓말. -> 잠깐, 리코, 당신은 왜 여기에 나온거야? 여긴 1부 시점이라고! 슈가펀치 : 제이드의 수사관으로써 직책이 이안보다 높나요? 작위는 있는지요? 그리고 이상형이 어떻게 됩니까! ㅋㅋ 이안같이 굴지말고 구체적으로!! 제이드 : 어? 뭐야, 작가. 수사관에 대해 설명 안했어? -> 어? 그러고보니 안했나 보네. 제이드 : 쯧쯧쯧 (검지를 흔든다) 안되지, 안돼. 내가 설명할게. 수사관은 세가지 단계가 있어. 1급 수사관, 2급 수사관 3급 수사관. 1부에서 이안은 3급 수사관이었지. 나는 2급 수사관이었고. 3급에서 2급으로 승진하려면 사건 성사율이 기준치 이상이고 시험에 합격을 해야해. 보통 삼, 사년쯤 걸려. 2급에서 1급으로 승진하는데는 더 까다롭지. 그러니 1부 시점으로는 내가 이안보다 직책이 높은거지. 후후후후. 수사관은 공무원 같은거야. 그러니 작위는 없어. 이상형은 어디보자...슈가펀치같은 여자면 딱 좋을텐데. 핑구68 : 상콤한 제이드야. 화려한 옷 좋아하는 이유가 모니? 시선을 옷으로 분산시켜서 얼굴을 기억 못하게 하려고? 걍 조아서? ㅋㅋ 그리고 왜 이안 담배 몰래 피니? 이안 긁는게 좋아서니? 절약을 위해서니? 혹시 이안 약점 아는 거 없니? 너무 쿨하게 답해서 괴롭히구시퍼...싱그러운 제이드야. 네 이상형은 뭐니? 이안보다 네가 공략하기 쉬울 것 같앜ㅋㅋ 제이드 : 화려한 옷이라고? 모르는 말씀. 이거 수도의 최신 유행이거든? -> 아닙니다. 제이드 : 극장의 유명 배우와 가수가 입는 옷이라고. 남들 이야기는 다 부러워서 저러는 거야. 후후후. 담배는 이안 몰래 피운 적 없는데? 난 담배는 안피워. 아가씨들 중에 담배연기를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 이안의 약점? 안 알려주지. 이안 : ...그게 뭔데? 제이드 : 후후후후 Cerulean : 제이드에게 물어볼 질문은...이안의 첫인상이 어땠나요?? 제이드는 어떤 정부?나 약혼녀가 있는지ㅎㅎ 제이드 : 이런, 이런. 난 정부는 없어. 돈을 주고 사람의 마음을 사다니. 너무 저질이잖아. 안그래? -> 안그렇습니다. 나딘a : 제이드가 케이트의 초록눈을보면서 이안과 같은느낌받았다는 문장봤던것같은데 그때 느낌이 정확히 뭔지 궁금해요 제이드 : 음? 언제? -> 처음 케이트를 만났을 때. 제이드 : 아. 그때. 음...세상에 나와 스미스 양만 있는 느낌? 이그리나 : 제이드는 이안의 유일한 친구가 되었는데 기분이 어떤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저 까칠남과 어떻게 친해지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특유의 친화력인가요??ㅎㅎ 제이드 : 이안의 유일한 친구가 된 기분? 저녀석이 날 친구로 생각할까? 하하하하. 좀 뿌듯하기도 하지. 이안과 친해진건 아카데미에서 였는데 저녀석 로엔백작의 아들이잖아. 나같은 평민이 거기가 아니면 어떻게 저녀석과 친해졌겠어. 그런 의미로 아카데미는 최고야! 여러 계층의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어쨌든 거기서 오대 오로 아가씨들과 만나기로 했는데 원래 가기로 한 녀석이 아파서 못가게 된거야. 그냥 머리수나 채워줄 녀석 없나 생각하던 차에 기가 막힌 녀석이 생각난거지. 이안, 입만 안 열면 잘생겼잖아? 그래서 가자고 했지. 어? 다들 말리지 않았냐고? 그야 말렸지. 엄청. 그런데 이안도 의외로 순순히 가자고 하더라고. 나중에 알고보니 그녀석 어머니가 친구가 없는건 아닌지 걱정하는 바람에 동행한거더라고. 운이 좋았어. 라바트 : 제이드 애인이 없으면 내게로 오시죠?^^ 제이드 : 그래? (씩 웃으며) 잠깐 쉬어갈까? 파피로스 : 제이드..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능글 맞은 것이 어리진 않을 것 같아서요..;;ㅋㅋㅋㅋㅋㅋ 제이드 : 난 스물 여섯. 이안보다 한살 많아. go green : 제이드한테는 케이트 첫인상 어땠는는지? -> 첫만남은 위에 한번 언급되어서 패스합니다. 제이드 : 뭐? 난 몇번이든 말해줄 수 있는데. -> 그럼 후기가 본문보다 길어져 버려 ㅜㅜㅜㅜ 제이드 : 알았어, 그래, 그래. 음, 스미스양의 첫인상이라...글쎄. 처음 만난게 알라나데일을 찾은 나를 집 앞에서 마중하던 사용인들 사이에 선 모습이었으니까 별 생각 없었던거 같은데? 그냥 얌전하고 예쁜 하녀 정도? 샤테이 : 일단 자기소개부터 시작해주세요. 취미,취향,신체 사이즈는 물론 여성 편력까지! 어린 시절에 기억나는 일화가 있나요? 왜 수사관이 되었나요? 왜 옷을 화려하게 입습니까? 언제부터 그랬나요? 진짜 평민 맞으세요? 이상형은 다른 분들이 물어보셨지만...전 좀 더 구체적으로 물어볼게요. 어떤 사람과는 사귀고 싶지 않은가요? 반대로 어떤 사람과 결혼하고 싶으세요? 가족계획 있으신가요? 왠지...제이드는 남자랑도 잘 사귈..크흠. 이게 아니라 이미 사귀어 봤을...죄송해요. 근데 진짜 제이드는 여자를 더 선호하긴 해도 오는 남자도 안 막을 것 같아서..그리고 제이드가 봤을 때 이안의 이상형은 어떤 사람으로 보입니까? 이안은 자기 감정을 깊게 생각 안 하는 성격 같아서 이안보단 주변의 말이 때로는 더 신빙성 있을 것 같거든요. 제이드가 볼 때 이안은 케이트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으세요? 제이드는 앤과 케이트를 어떻게 생각해요? 아 배터리가 없어서... 제이드 : 워, 워. 아가씨. 진정해. 며칠이든 답해줄테니 말야. -> 안됩니다. 제이드 : 음, 이름은 제이드 킬리언. 스물여섯에 2급 수사관이고 취미는 연극관람. 신체사이즈는 어디보자...내 집으로 오면 알려줄게. 구석구석 (그러면서 명함을 슬그머니 내민다) -> (명함을 가로채면서) 안됩니다. 제이드 : 어린시절에 이웃집에 살던 여자아이와 소꿉놀이 한거? 내가 아빠고 그 애가 엄마였지. 후후후. 수사관이 된 건 그냥. 재미있어 보였거든. 난 차남이라 집안일을 이을 일도 없고 말야. 옷은 화려한게 아니라니까. -> 화려한 게 맞습니다. 현실에서도 연예인이 입은 옷을 따라 입으면 화려해보이잖아요? 그런 맥락입니다. 제이드 : 이상형은 샤테이 같은 아가씨라면 참 좋을것 같은데. 후후후. 장미는 장미 나름대로, 진달래는 진달래 나름대로 예쁘잖아. 안그래? 참고로 남자새끼가 들이대면 씨를 말려버릴거니까 착각하지 말아줘. 후후. 이안의 이상형은 어디보자...글쎄. 생각 안해봤는데. 작가가 써둔거 읽어도 돼? -> 헉? 안돼! 안돼! (노트를 뺒으려 하지만 팔이 닿지 않는다.) 제이드 : 음, 어디보자...완벽하게 자신의 것이 되 줄 수 있는 여자. 라는데. 이게 무슨 의민지 모르겠어. -> 으아앙 ㅜㅜ 안된다고, 이 바보자식아 ㅠㅠㅠ 제이드 : 이안은 케이트를 어느정도 의식하고 있는건 확실한것 같아. 난 지금까지 그녀석이 정부를 제외하고 곁에 두는 걸 본 적이 없거든. 앤과 케이트는...음? 이건 무슨 의미야? -> 나한테 묻지마, 이 배신자야 ㅠㅠㅠ 샤테이 : 제이드는 연애 할 때 어떤 남자 타입입니까??? 이안은 나쁜 남자와 짖궂은 남자 사이를 오갈 것 같은데 제이드 : 난 최고의 남자 타입이지. 후후후 -> 이사앙!! ==== 대단히 한쪽으로 편중된 질문이었습니다. ㅎㅎㅎㅎ 그런데 보세요. 이안일때랑 댓글 수가 다름 ㅋㅋㅋㅋㅋㅋ 여러분이 아무리 이안보다 제이드가 마음에 든다해도 결국 제이드는 마이너였어요 ㅋㅋㅋㅋ 음, 다음편 질의 응답은 케이트 갈까요? 마찬가지로 월요일 10시까지 달아주세요. 00041 1. 타운 하우스 =========================================================================                            시골에서 올라온 신입은 발갛게 익은 얼굴로 저택에 돌아왔다. 저녁 식사가 시작되기 삼십 분 전이었다. 저택에서 왕궁까지는 가는데 한 시간, 오는데 한 시간. 모두 두 시간이나 걸린다. 이 뜨거운 날씨에 녹을 것 같은 도로를 걸어 다니느라 고생 좀 했을 것이다. 메리는 케이트를 보지 못한 척 하인이 하는 이야기에 웃음을 터트렸다. 딱히 케이트가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니다. 그냥 조금 텃세를 부리고 싶었을 뿐이다. 로엔 백작 부인의 저택은 하녀가 많은 수도에서도 인기가 높다. 보수가 좋고 바쁘지 않은데다가 백작부인의 성격이 까다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 저택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하녀 학원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해서 추천서를 많이 받아야 했다. 덕분에 수도에서 로엔 백작 부인의 저택에서 일한다고 하면 하녀 중에서도 꽤 좋은 축에 속한다. 그런데 케이트라는 여자는 출신이 확실한 것도 아니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다. 전에 일한 곳 역시 그저 시골이라고만 이야기 할 뿐 밝히지 않고 있었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여자인지 몰라도 메리는 케이트가 들어오는 바람에 로엔 백작 부인의 저택도 수준이 많이 떨어졌다는 소리를 듣기는 싫었다. 두고 보면 알 일이지. 메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저녁 식사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견디지 못하고 그만둔다면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는 증거일 테니까. 어느 곳이나 신입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처음엔 신고식을 하게 마련이다. 케이트는 옷을 갈아입으며 씁쓸하게 생각했다. 뜨거운 거리를 걸어오면서 이글이글 타오르던 분노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덕분에 지금은 꽤 침착한 상태였다. 이런 텃세는 보통 한 명이 하는 게 아니라 여러 명이 하게 마련이다. 누구누구가 가담해 있을까. 제일 먼저 생각난 건 그녀에게 왕궁에 다녀오라고 시킨 하녀였다. 메리라고 했다. 갈색의 단발머리가 약간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잘 어울리는 여자. 지금까지 케이트가 살던 곳은 여자들이 머리카락을 그렇게 짧게 자른 적이 없었다. 잘라서는 안 되는 어떤 규칙 같은 게 있어서가 아니라 긴 머리가 예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도에 오니 짧은 머리를 한 여자도 꽤 많았다. 단발머리는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인기랍니다. 제이드가 귀띔한 게 기억났다. 저택의 하녀는 케이 까지 모두 일곱 명. 알라나데일의 저택에서 네 명의 하녀로 어느 정도 꾸려 나갈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여긴 상당히 여유 있는 편이다. “어디 나갔다 왔어?” 막 케이트가 머리에 모자를 쓰려는 순간 빨간 머리 하녀가 방에 들어오며 물었다. 같은 방을 쓰는 애니다. 케이트는 거울을 보고 머리카락이 삐져나오지 않았는지 살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잠깐 볼 일이 있어서.” “무슨 볼일?” 애니는 케이트가 대답하지 않으려는 걸 모르고 눈치 없이 되물었다. 그냥, 좀. 다시 케이트의 성의 없는 대답이 이어졌지만 애니는 그다지 눈치 있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냥 좀?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그런 애니가 케이트는 성가셨다. 왜 자꾸 꼬치꼬치 캐묻는 거지? 내가 어딜 다녀오든 무슨 상관이야?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걸 눌러 참으며 그녀는 방문을 열었다. “커텐 정리하면 되지?” “어? 으응.” 애니는 재빨리 방을 나가는 케이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자신을 피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새로 온 저 신입 하녀는 늘 저런 느낌이다. 사람을 피하는 태도. 뭘 물어봐도 어물쩍 대답할 뿐 제대로 대답해 주질 않는다. 그런 태도는 예쁘장한 외모에 더해져 신비롭다는 평을 자아냈다. 저택의 세 명뿐인 하인들은 저마다 예쁘장한 신입 하녀와 이야기해봤는지 열을 올리고 있었다. 문득 애니는 자신의 주근깨와 심한 곱슬머리가 너무 싫어졌다. 평소에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더더욱 싫다. 같은 빨간 머리인데 누구는 부드럽고 결 좋은 머리카락에 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고, 누구는 아침마다 뒤집어져서 난리가 나는 곱슬머리에 주근깨투성이 얼굴이라니. 게다가 그게 같은 방을 쓰는 사람. 이건 너무 불공평하다. === “ 피해자는 너즈 자작이라고 합니다.” 치안 관이 천을 들추며 이야기했다. 나이는 쉰여섯. 자식과 아내는 없다고 합니다.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은 탓에 목소리가 뭉개져서 나왔다. 더운 날씨에 시체라는 조합이니 그런 그를 탓할 수도 없다. 엄청난 냄새다. 카이사 역시 손수건을 꺼내 입과 코를 막았다. “사망 날짜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안이 물었다.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지도 않은 상태였다. 지독한 녀석.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카이사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 지독한 냄새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가. 치안 관은 이안이 코를 막지 않았음에도 아무렇지도 않자 감탄해야 할지 당황해야 할지 몰라 잠시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 정확한 건 옮겨서 확인해야겠지만 이, 삼일쯤 된 것 같습니다.” 그 정도는 이안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시체를 살폈다. 누군지 몰라도 범인은 이 피해자에게 대단한 적의를 품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옷이 갈기갈기 찢어진 건 날카로운 것, 예를 들어 칼 같은 것으로 그어댄 것이 분명했다. 그가 시체를 덮은 천을 좀 더 들추자 시체에 앉아있던 벌레들이 붕붕거리며 날아올랐다. 으악! 하고 치안 관이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심약하기는. 카이사가 냉정한 눈으로 치안 관을 쳐다보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은 어디 갔지?” “네? 아, 손...말입니까? 그거라면 저쪽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치안 관이 가리킨 곳은 시체로부터 두, 세 발자국 떨어진 곳이었다. 흠. 카이사는 주변을 살폈다. 저택과 저택 사이의 골목. 여기서 손목이 잘려나갈 정도의 사건이 있었다면 양쪽 집에 사는 사람이 듣지 못했을 리 없다. 그때 갑자기 이안이 입을 열었다. “두 손 다 말인가?” “두 손이요?” 이안의 질문에 치안 관은 내키지 않다는 듯 시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발견된 건 한쪽 뿐이었다. 왼손. 그러니 당연히 오른손은 붙어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오른팔은 시체 몸 아래에 깔려 있는 탓에 오른손이 없다는 걸 쉽게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시체가 발견되고 그가 귀족이라는 걸 알자마자 수사관에게 알렸기 때문에 치안 관도 아는 건 그다지 없었다. “아니요. 발견된 건 왼손 뿐입니다.” 흠. 하고 카이사가 턱을 쓰다듬었다. 손이 사라졌다. 오른손만. 이건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다른 건 없고?” 또다시 이안의 질문에 치안 관은 약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네. 이상입니다. 이상한 일이군. 이안은 장갑 낀 손으로 시체의 얼굴을 돌리며 생각했다. 그런 그의 행동에 치안 관은 이번에도 기겁했다. 치안 관이지만 비위가 약한 모양이었다. 땅에 닿은 시체의 반대쪽 뺨은 너덜너덜했다. 이것 역시 칼로 그어댄 게 분명했다. 피로 범벅된 이 얼굴로 너즈 자작임을 확인한 게 더 대단했다. 문득 생각나서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치안 관이 이번에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모자의 이니셜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모자를 내밀자 카이사는 모자 안의 이니셜을 확인하고 이안에게 넘겼다. 과연. 너즈 자작의 이름 머리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확실하게 너즈 자작이라는 걸 알기는 어렵다. “이것만으로 어떻게 너즈 자작이라는 걸 알 수 있지?” “아, 그리고 어제 너즈 자작의 행방불명 신고도 들어왔기 때문에 확인이 쉬웠습니다.” “행방불명 신고가 들어왔다고?” 이안과 카이사의 눈이 빛나는 바람에 치안 관은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포식자 앞에 선 기분이 들어 목소리가 떨렸다. “아, 네.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까는 너즈 자작에게 부인도, 자식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누가 신고했지?” 이번에도 그가 실수한 모양이다. 치안 관은 침을 한 번 삼켰다. ============================ 작품 후기 ============================ 멍하니 개콘의 두근두근을 보다가 나는 왜 내 시간을 쪼개서 즐거워 지는 것도 아닌 이런걸 보고있는가...라는 깊은 회의감을 느꼈습니다. 그런 이유로 케이트와 이안! 너네도 썸따윈 없다!!! 후기가 본문보다 안 길었음 좋겠는데... 덜덜덜... 샤테이 : 케이트는...뭘 물어볼까? 일단 이상형. 누구씨들처럼 대답하지 말고 외모, 성격, 가족 및 교우관계까지 그대가 생각하는 이상형에 대해 적어줘. 그대도 역시 자기 소개를 부탁하지. 혹시 평민이 아닌 귀족이었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어? 장래희망이라던가 노후계획 같은것도 궁금한데. 남자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어? 결혼하면 아이는 몇 명 낳고 싶어! 만약 케이트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어떻게 살았을지 생각해본 적 있어? 반대로 이안이 여자였다면....좀 끔찍할지도 모르겠다. 완 전 여왕님이었을 텐데. 그것도 얼음 여왕..남자고 여자고 추종자들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엄청 질투 받는. 음 여왕하니까 생각난 건데 케이트가 여왕이었다면 데이지 꽃 같은 여왕이었을 거라 생각해. 그럼 케이트는 어떤 정치를 했을까? 이안 같은 얜 철혈정치일게 분명한데. 케이트가 왕하면..너무 어려운 얘기 하는 건 아니겠지? 케이트 : 안녕하세요. 케이트 스미스 입니다. 스물 두 살이었지만 스물 네 살이 되었습니다. -> 어, 그게 왜냐하면;; 원래 예정이 스물 네 살이었는데 왠지 내가 쓰는 애들은 전부 나이가 많은것 같아서 죄다 두살씩 짤랐거든. 그래서 제이드 나이도 스물 여덟입니다. 죄송합니다. 케이트 : 괜찮아요. 순식간에 나이를 두살이나 먹었지만, 뭐...(주먹을 꽉 쥔다) 이상형은 평범한 남자요. 용병이나 기사같이 쓸데없이 목숨걸거나 힘자랑 할 일 없는 직업이 좋아요. 하인(풋맨)도 괜찮죠. 솔직히 말하면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않고 한 곳에 정착해서 일할 수 있는 남자가 좋아요. 평범한 외모가 좋죠. 마주 앉아서 같이 밥먹을 수 있을정도만 되면 된다고 생각해요. 백마탄 왕자님을 꿈꾸던 것도 열살까지나 하는 짓이니까요. 성격도 평범하게 착한 사람이 좋아요. 웃음이 많고 정이 많은 사람이요. 남자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나요? 그렇지도 않은데요. 주변에 그럴만한 상대가 없어서 그런걸지도요. 귀족이었다면...음, 모르겠네요. 생각 안해봐서. 귀족이었다 해도 뭔가 일을 하고 있었을 것 같아요. 보통 귀족여성들은 일을 하지 않지만요. 남자였다면...이것도 생각 안해봤어요. 이뤄질리 없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편 입니다. 제가 여왕이라면...도 마찬가지예요. Cerulean : 케이트 질문은... 자신의 결혼계획이 있나요?? 있다면 몇살에 결혼하고 애는 얼마나 낳고싶은지...? 결혼하면 이건 꼭하고싶다! 같은 결혼 로망이 궁금합니당ㅎㅎ 옛직장에선 다들 지참금 받고 결혼하니까 케이트도 그런생각 한번쯤은 하지않았을까 해서요ㅎㅎ 케이트 : 아, 그렇군요. 음...알라나데일에서는 지참금보다는 은혜를 갚는다는 느낌으로 일해서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거기서 많이 도와주셨거든요. 의사도 불러주시고. 그래서 지참금은 생각 안해봤어요. 결혼은 서른이 되기 전에는 하고 싶어요. 아이도 많이 낳고 싶어요. 저, 혼자라서 조금 외로웠거든요. 가끔 형제가 있었다면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에도 조금은 서로 의존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샤테이 : 이안과 제이드 중에 같이 일할 사람과 사귈 사람 또는 결혼할 사람을 각각 하나씩 반드시 고른다면 누굴 고를거야? 케이트 : ...꼭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나요? 그냥 혼자 일하고 평생 혼자사는 선택지는 없는 건가요? -> 토닥토닥. 핑구68 : 케이트는 하녀와 도련님의 로맨스를 어떻게 생각하니? 하녀가 아니었다면 어떤 직업을 가졌을 것 같니? 혹시 앞으로의 인생 계획이나 포부, 꿈 같은 게 있니? 첫사랑...이 있었다면 알고싶어!!!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 없니? 케이트의 이상형! 많이 웃어서 입가에 주름진 사람말고! 성격적 측면에섴ㅋㅋ 케이트 : 하녀와 도련님의 로맨스는 전혀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해요. -> 단호박 뫄이쪙. 케이트 : 주위 반대가 많을게 예상되는 길은 가지 않는게 현명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녀가 아니었다면...노부인들의 말상대나 대필해주는 직업을 갖는것도 괜찮을것 같아요. 가능하다면 말이죠. 일단은 수도에 가서 가족을 찾을 생각이예요. 일 년만요. 찾아보고 찾게되면 그들을 만날거예요. 못찾는다면 글쎄요. 가정교사가 되는 길도 있겠죠. 그런 학교가 있다고 들었어요. 첫사랑은 음...다섯살 때? 그게 첫사랑인지도 가물가물하지만요. 이안 : ... -> 뭐, 왜? 왜 날 쳐다 봐? 슈가펀치 : 케이트 이안네 집에 들어가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소는 어디인가요! 그리고 마법을 쓸 줄 안다는 거에 대한 간결한 소감 한 마디..저도 마법 쓰고 싶음.ㅋㅋㅋㅋ -> 1부시점이라 아직 이안의 집에는 들어가지 않은 상태입니다. 케이트 : 마법을 쓸 줄 안다고 할 수 있는 건가요? 하하. 전 제가 마법을 썼다는 감각도 없는 걸요. 핑구68 : 케이트는 레이스잠옷 말고 갖고 싶은 옷이나 장신구, 물건이 있니? 마른 몸매의 비결 좀... 노동의 대가인가ㅜㅠ 케이트 : 음, 리본이요. 예쁜 리본이 갖고 싶어요. 무명천을 잘라 만든것 말고요. 마른몸매의 비결이요? 글쎄요. 전 좀 쪘으면 좋겠는데요. -> 이 세계에는 좀 통통한 여자가 미인입니다. 후후후후후후후 헤윰입니다 : 케이트 왤케 이쁘나요(징지) 케이트 : 감사합니다. (꾸벅) 하지만 과찬이세요. 수쟈 : 케이트ㅎㅎ자녀계획은어떻니??? 힘닿는데까지후훗???? ㅋ 케이트 : (얼굴을 붉히며) 네. 전 외동이라서 아이들이 많은 게 좋아요. 제가 죽더라도 제 아이들은 형제끼리 서로 의존이 될 수 있을테니까요. 시아에나 : 케이트야 여기있는 등장인물들에게 제대로 된 답변은 들을수 없는것 같아 너는 이부분에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케이트 : 그런가요? 이안...수사관이 말이 없는건 다들 금방 알아차릴 정도니까요. 하지만 제이드씨도 그런가요? 신데렐라 콤플렉스 : 케이트양!! 케이트양은 이안이 좋나여 제이드가 좋나여 ㅎㅎ 만약 둘중에 한명 고른다 하면???둘 다 안고르는건 없으용! 케이트 : 아, 그럼 제이드씨요. 제이드 : 자, 잠깐, 잠깐! 잠까아아아안!! Cey : 케이트에게는 하녀말고 다른 하고싶은 일이 있는지 묻고 싶어요! 1부에서 보면 앤 대신 주방일도 했는데 요리사쪽도 맘만 먹으면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케이트 : 요리사는 경력이 있는 게 아니라서요. 그리고 겨울이면 모를까 여름에 아궁이 앞에 서서 스튜를 젓는건 더이상은 사양이예요. 파피로스 : 케이트는....글도 읽을 줄 알고 머리도 좋은데..왜 하녀일을 하는건지 궁금하네요. 하녀말고는 다른일을 할 수 없어서 그런건가요???ㅎㅎ 케이트 : 음, 네. 제가 가정교사나 비서일을 하겠다고 나서도 절 고용해주실 마음좋은 노부인은 없을 거예요. -> 이부분은 나중에 한 번 언급을 할텐데, 케이트는 똑똑하다 해도 결국은 고아입니다. 친척도 없고 그녀가 일하던 집안은 몰락했죠. 결국 케이트가 다른 일을 할 수 있다고 추천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앤의 경우는 주방하녀로 일한건 사실이니 제이드가 별 무리없이 경력을 보증해줬지만 케이트가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에게 "나, 이러이러한 일을 할 수 있으니 할 수 있다고 보증해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00042 1. 타운 하우스 =========================================================================                            “네. 제가 신고했습니다.” 너즈 자작 가의 늙은 집사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주인의 사망에도 크게 충격 받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늙은 집사만큼이나 자작 가의 저택 역시 낡아 있었다. 초는 응접실과 현관에 이어진 복도에만 켜져 있는 것이 재정적으로 얼마나 궁색한지 알 수 있었다. 적은 수의 촛불이 일렁이며 응접실 안에 우울한 음영을 만들어 냈다. 색이 바랜 커튼과 쿠션으로 소파의 닳아빠진 부분을 가리려 애쓴 게 보였다. 밝은 낮에 왔다면 참혹할 정도였을 것이다. “어제 신고하셨더군요.” 카이사의 말에 집사는 이해했다는 듯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하룻밤 정도는 연락 없이 귀가하지 않으시는 일이 종종 있어서 이틀까지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삼 일째에 신고했다?” “네. 아무리 주인님이라지만 이틀이나 귀가하지 않으시는 건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닌가 해서요.” “너즈 자작이 귀가하지 않는 일이 자주 있었나?” 이안의 질문에 집사가 잠시 망설였다. 사망했다고 하나 주인의 사생활을 이야기하는 게 걸렸던 것이다. 그는 결국 마음을 고쳐먹고 입을 열었다. 주인의 명예를 더럽히는 이야기이기는 하나 이미 모르는 자가 없는 이야기다. “주인님께서는...약간의 여흥에 집중하고 계셔서 하루 정도는 집에 돌아오지 않으시는 일이 잦았습니다.” “여흥이라고?”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귀족의 여흥은 여러 가지가 있다. 무난하게는 사냥, 검술훈련, 활쏘기 같은 것들. 하지만 그런 것이라면 여흥이라고 둥글게 돌려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집사 입장으로는 주인의 추문을 이야기하기가 어려웠을 테지만 이안이 그걸 이해할 리 없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집사는 결국 눈을 내리깔고 실토했다. “내기에 흥미를 두고 계셨습니다.” 내기라고? 이안이 곱씹는 사이 카이사가 입을 열었다. “즉, 도박을 말하는 겁니까.” 희미하게 집사가 고개를 끄덕하자 카이사는 이어서 물었다. “어떤 도박을 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집사가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카이사도 물어본 것이다. 도박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간단한 카드게임 같은 건 클럽에서 자주 벌어지지만 남자들 사이에선 도박이라고 불리지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선 경마도 마찬가지였다. 뮈엘라에서 도박은 불법이지만 이 두 가지는 예외다. 카드 게임은 클럽에서 소규모로 시간 때우기 삼아 벌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경마는 허가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남는 건 싸움 종류일 것이다. 집사의 입에서 나온 것은 예상대로의 말이었다. “검투장에 조금...” 카이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검투장은 최근 뮈엘라에서 가장 각광받는 볼거리였다. 수도에만 검투장이 세 개나 운영되고 있다. 힘의 나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너즈 자작이 사망한다면 가장 이득을 보는 자가 누군지 알고 있나?” 이안의 질문에 집사는 곤경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어깨를 펴고 말했다. “주인님은 슬하에 자녀분이 없기 때문에 이 경우에 작위와 토지는 친척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그 친척의 이름은?” 집사는 자작에 대해서 대답할 때와는 달리 쉽게 대답했다. 자작이 죽었으니 앞으로 그가 모셔야 하는 주인이 될지도 모르지만 벌써부터 충성심이 생기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은퇴를 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카이사는 늙은 집사의 얼굴을 살펴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재정적으로 곤궁한 저택에 충성심 하나만으로 홀로 남은 집사. 모시던 주인마저 죽었으니 이 저택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가장 가능성이 높은 상속자는 누구지?” 이안의 질문에 집사는 약간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아마도 한스 너즈 경 일 겁니다. 그리고 재빨리 덧붙였다. “기사는 아닙니다.” 그렇다는 말은 평 귀족이라는 말이다. 이안과 카이사는 한스 너즈 경의 주소를 확인하고 자작 가를 나섰다. 관리되지 않아 낡은 외부 벽을 담쟁이덩굴이 휘감아 가리고 있었다. 보수할 돈이 없으니 덩굴을 제거하지 않는 것이리라. 어떻게 보면 운치 있지만 어떻게 보면 폐가처럼 보이기도 했다. 몰락한 귀족의 전형이다. “작위를 위해 친척을 죽이다니.”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카이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경멸의 의미로 말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카이사는 순수하게 믿을 수 없어서 하는 말이다. 그는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다른 사람에 비해 돈이나 명예에 집착하는 것을 싫어했다. 이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방향은 다르지만 그는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그를 제외한 다른 수사관들은 모두 평민이다. 유일한 귀족인 이안이 못마땅한 사람도 있다. 어떤 의미로는 그도 케이트와 마찬가지로 텃세를 당하고 있었다. “귀족 가에 늦은 시간에 방문하는 건 예의가 아닐 테니 그만 돌아가지.” 귀족이 아닌 다른 사람도 늦은 시간에 방문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이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하고 마차에 올랐다. 우선 수사관실에 들렀다가 퇴궐하기 위해서였다. 제이드와 함께 일할 때는 이런 면에서는 융통성 있었지만 카이사는 융통성 없기로 유명하다. 이안이 타운하우스에 도착한 건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잠자리에 들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문을 열어주며 물었다. “식사하셨습니까?” 이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했다. 참을 준비할지 물어보려던 집사는 입을 다물었다. 그만큼이나 말이 별로 없는 집사였다. “마님께선 침소에 드셨습니다.” 알겠다고 이안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니 당연했다. 그렇다면 그도 바로 방으로 돌아가면 될 것이다. 집사가 문단속하는 것을 뒤로 한 채 계단을 오르던 이안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인형을 발견했다. 익숙한 뒷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따라갔다. 문단속을 마친 집사가 뒤를 돌았을 때 이미 이안은 사라지고 없었다. 케이트는 모퉁이에 숨어 이안이 돌아오는 모습을 확인했다. 딱히 이안이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이건 일종의 하루를 완성하는 어떤 예식에 가깝다. 이안이 돌아왔다. 그럼 됐어. 케이트는 안도가 되었다. 그의 안전을 걱정하는 것도 아니다. 우스운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이안의 귀가는 케이트에게 이 집이 안전하다는 보증처럼 느껴졌다. 알라나데일에서의 사건은 아직도 그녀의 생활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그녀와 이안을 제외한 저택의 모든 사람이 적이었다. 거기서 그녀가 믿을 수 있는 건 이안뿐이었다. 그때의 믿음은 이안의 정체가 바뀐 지금에 와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다. 케이트는 스스로의 바보 같은 믿음에 자조했다.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전에 이안이 귀가하는 모습을 보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다. 이건 다음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자정이 넘어서 돌아오는 이안을 보고 잠자리에 들면 다음날 피곤하다. 그러니 다음날을 위해서라도 자정 전에 잠들어야 한다. 몇 번 이안을 보지 않고 잠자리에 든 적이 있다. 그때마다 케이트는 새벽에 불안에 떨며 일어났다. 언제 누가 그녀를 죽이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바보 같아. 케이트는 다시 한 번 자조했다. 그녀가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누군가가 성큼성큼 뒤에서 다가왔다. 집사인가? 케이트가 존재를 눈치채기가 무섭게 이안은 그녀의 팔꿈치를 휙 낚아채 끌어당겼다. 엇, 하고 케이트의 몸이 기울자 그녀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이안의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남은 팔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쉿.”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여지자 귀가 찌르르했다. 목소리의 주인을 깨닫자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안이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다시피 하고 서 있었다. 작은 케이트의 체구는 이안의 품에 쏙 들어가 뒤에서 본다면 누구도 이안의 품에 그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집사는 케이트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물었다. “간단하게 참을 내올까요?” 이안은 케이트의 옆얼굴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긴 속눈썹이 콧잔등까지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아니, 됐네.” 평소라면 거기까지만 이야기했을 테지만 이안은 케이트의 얼굴을 보고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만 들어가 보게.” 보일 리 없지만 집사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가 저벅저벅 걷는 소리가 멀어지면서 이안의 팔에 닿은 케이트의 가슴이 거세게 뛰는 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 개가 작은 새를 물어 온 적이 있다. 그 새는 살아있었고 이렇게 빨리 뛰다간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세게 뛰는 심장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 새를 어떻게 했더라. 이안은 문득 어린 시절의 잔상을 떠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집사가 방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트는 그제야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일순 시원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다. 한낮의 더위는 밤까지 이어져 잠을 이루기 어려운 날들이었기 때문에 그 바람은 매우 반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케이트는 덥다고 생각했다. 공기가. 뒤에서 감싸져 오는 체온이. “뭐, 뭐하는 거예요?” 이안이 천천히 그녀의 입에서 손을 떼자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져 나왔다. 케이트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그가 그녀를 감싼 팔에 힘을 주지는 않았지만 뿌리칠 수 없는 어떤 위압감이 있었다. 불안하게도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케이트의 뒤통수에 이마를 댔다. 딱히 어떤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사람의 한 조각을 본 순간 이상할 정도로 그게 케이트라는걸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낮에 제이드가 한 말이 떠올랐다. 스미스 양이잖아? 한 번 끌어안으라고! 그래서 끌어안았다. 그뿐이었다. “그냥.” 그냥 끌어안은 것치고는 공을 많이 들였다. 케이트의 입을 막았고 아무것도 아니라며 집사를 들여보냈다. 평소의 이안이라면 케이트가 어떤 해괴망측한 소리를 내건, 집사가 보건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한 번 남의 눈에 신경 쓰지 않고 케이트의 입술을 빼앗은 전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던 것은 역시 제이드가 한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택에서 이안은 주인님이고 케이트는 하녀라는 것.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서 이안은 케이트의 뒤통수에 이마를 댄 채 씩 웃었다. 그와 동시에 알 수 없는 오한이 들어 케이트는 잘게 몸을 떨었다. 잠옷만 입은 탓에 얇은 옷감 안으로 부드러운 그녀의 몸이 느껴졌다. 이안은 나직하게 물었다. “추운가?” “그게 아니라...” 이건 너무 가깝고 친밀하다. 게다가 누가 볼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케이트의 몸이 다시 한 번 가늘게 떨렸다. 누군가 용변 때문에, 혹은 더워서 밖으로 나올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위험한 일이다. 타운 하우스에서 이안은 도련님이다. 그녀는 일개 하녀, 그것도 신입이 불과하다. 이런 장면을 누군가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안이 덮치고 있다고 생각하던, 케이트가 유혹했다고 생각하던 이런 류의 추문에 타격이 큰 것은 여자 쪽이다. 번쩍 정신이 들어 케이트가 몸부림치려는 순간 마치 알고 있다는 듯 이안이 스륵 팔을 풀었다. “어?” 케이트가 고개를 돌렸을 때 이안은 이미 몸을 돌려 반대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복도 저편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상황파악 되지 않는 케이트만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느 정도로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냐면 이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케이트는 자신이 꿈을 꾼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말이 안 된다. 저 이안이 갑자기 나타나서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사라진다고? 내가 헛것을 봤나...케이트는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 ============================ 작품 후기 ============================ 어... 사실은 11시 전에 바로 연참이예요~ 라면서 올릴 생각이었는데 깜빡 잠들었어요. 지금 일어났네요... 바로 다시 자러 가야 하므로 음... 질의응답을 했더니 후기가 길어지면서 쪽수보고 기대했다가 실망하신 분들께 바칩니다. 바나나 우유...아니, 바밤바...음... 어쨌든. 혹시 깜빡하고 묻지 못했다거나 지나고 나니 묻고싶은게 떠올랐다거나 제이드, 케이트, 이안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묻고 싶은게 있다거나 한다면 댓글 달아주세요. 그것도 내일 10시쯤에 업뎃하면서 달게요. 전 자러 갑니다. 좋은 밤...바...바밤바!!! 00043 2. 사라진 아이들 =========================================================================                            “슈미트와 다녀보니 어때?” 그게 무슨 의미냐는 듯 이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식당 안은 시원했다. 여기저기에 놓인 얼음 덩어리들이 줄줄 녹아내리면서 냉기를 뿜어낸 덕분이었다. 이 얼음이 있으니 제이드도 식당에 오자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굳이 가까운 왕궁 직원식당을 두고 이 더운 날씨에 번화가까지 나와서 식사를 할 이유가 더 있었다. 제이드는 어깨를 으쓱 해 보이고 삶은 감자를 포크로 찔렀다. “그 사람 앞뒤 없이 꽉 막혀 있잖아. 그래도 나만 한 파트너가 없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이안은 뭔가를 기대하는 표정의 제이드를 힐끔 보고 다시 접시로 고개를 돌렸다. 파인애플소스를 곁들인 부드러운 송아지 고기는 이 식당의 가장 인기 있는 메뉴 중 하나지만 이안의 입에는 어차피 먹는 것일 뿐. 이런 걸 세간에서 말하는 부드러운 식감에 고급스러운 맛이라는 건 알지만 딱히 즐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조용해서 좋더군.” 원하던 대답이 나오지 않자 제이드는 쳇하고 혀를 찼다. 무심한 녀석. 한 번쯤은 그래도 역시 그와 파트너 할 때가 좋았다고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알라나데일의 사건이 두 사람의 손을 떠나고 이안에게 너즈 자작의 살인사건이라는 새로운 사건이 내려온 것처럼 제이드에게도 다른 사건이 내려왔다. 수사관은 기본적으로 2인 1조로 움직이게 되어 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자주 파트너가 되는 사람은 있어도 그게 절대적인 건 아니고 제 1 수사관은 혼자서 수사를 진행할 수도 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새로 들어온 제 3 수사관의 파트너가 되어 가르쳐주고 돌봐주는 건 제 2 수사관이 맡게 되었다. 안하무인에 귀족출신인 이안의 파트너가 되어 주려는 제 2 수사관은 없었다. 오직 제이드만이 그의 파트너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아무리 이안이 일 년 만에 승진할 정도로 유능하다 해도 제이드의 지원과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 분명하다. 흥. 제이드는 고이고이 키우던 아기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는 기분이 들어 입맛을 다셨다. 누가 안다면 어느 부분을 지적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말도 안 되는 감정이지만. “사건은 어때? 잘 진행되고 있어?” 이어지는 제이드의 질문에 이안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너즈 자작은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사인은 과다출혈이었다. 자작을 공격한 무기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검으로 뮈엘라라면 잡화점에서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너덜너덜한 너즈 자작의 시체를 떠올리며 송아지 고기를 씹었다. 두 손은 잘렸고 뺨은 여러 번 그은 흔적이 있었다. 온몸에도 무수한 자상이 나 있었는데 전부 살아있을 때 생긴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발견된 왼손으로 너즈 자작이 검을 피하려 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글쎄.” “글쎄라고?” 이안의 대답에 제이드는 음식을 입에 넣다 말고 물었다. 글쎄라니? 사건이 잘 진행된다는 이야긴지, 아닌지 모르겠다. 여전히 이안은 우물우물 송아지 고기를 잘도 씹어 먹고 있었다. 아무도 그가 머릿속에 피에 젖은 너즈 자작의 시체를 떠올린다는 것은 알지 못할 것이다. “원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은 다시 입안으로 들어오는 고기에 가려 나오지 못했다. 카이사는 너즈 자작의 작위와 땅을 원하는 친척 중 누군가가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럴 거라면 굳이 그렇게 난도질할 필요성이 있을까? 깨끗하게 비운 접시가 종업원을 통해 치워지자 제이드는 메뉴판을 받아들고 후식을 골랐다. 이안은 이번에는 집사 쪽으로 생각을 옮겼다. 땅과 작위를 원하는 친척만큼이나 집사도 용의자 안에 들어가 있다. 카이사는 집사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지만 이안의 생각은 달랐다. 재정적으로 궁색한 자작 가. 도박에 빠져 집에 오는 것도 잊는 주인. 집사란 종족들은 일하던 저택에서 나가는 길은 한 가지 뿐이라고 알고 있다. 은퇴. 이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집사에게도 나름대로의 명예가 있고 그건 일하는 저택에 뼈를 묻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하지만 너즈 자작의 상황으로 보건대 집사에게 급여를 주는 것도 힘겨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주인을 죽이려 하지 않았을까. 자작이 죽는다면 너즈 가는 다른 사람이 물려받게 된다. 집사는 제대로 된 주인으로 갈아타거나 적당한 퇴직금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안은 늙은 집사가 검을 들 수 있는지 가늠해봤다. 너즈 자작은 오십 대 초반. 집사는 최소한 칠십 대로 보인다. 오십 대 초반의 자작이 집사의 검을 피하는 게 어려웠을까. “너도 먹을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을 싹둑 자르고 제이드가 끼어들었다. 그는 수저로 듬뿍 푼 뭔가를 내밀었다. 어쩌라는 거지? 이안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가 아앙~ 하고 받아먹기라도 하라는 건가? “이 식당 신제품이라는데, 이거 맛있네.” “됐다.” 이안은 차가운 홍차를 홀짝이며 홍차만큼이나 차갑게 말했다. 그렇다면야. 제이드는 두 번 권할 생각도 없이 재빨리 자신의 입으로 넣었다. 부드러운 빵과 차가운 크림이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신제품으로 내놓은 후식은 인기가 좋은 모양인지 여기저기 다들 하나씩 먹고 있었다. “그나저나.” 제이드는 수저로 그릇을 싹싹 긁어먹으며 입을 열었다. 다음엔 이것만 먹으러 와야겠어. “스미스 양은 어때?” 케이트?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돌아가서 끌어안아 줬어?” “아아.” 담담하게 대답하는 이안과 달리 제이드는 히죽 웃었다. 아무래도 그의 친구는 그가 시키는 데로 잘한 모양이다. 알라나데일에서 데리고 온 케이트의 일자리를 알아봐 주기 전에 우스갯소리로 너네 집에 취직시키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한 제이드의 말에 이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제이드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수도는 일자리가 많다. 대우가 좋은 일자리도 제이드가 손을 쓰면 얼마든지 구해줄 수 있다. 앤도 그렇게 구해줬던 게 아닌가. 그런데 케이트는 자신의 집에 데려다 놓겠단다. 저 이안이. 이 정도면 충분히 의심을 품어도 되는 상황 아닌가? 그는 수저에 묻은 달콤한 크림을 핥으며 배부른 고양이처럼 웃었다. 가장 인기 있는 미녀 배우도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이안이 저 정도면 꽤 마음에 든 게 분명하다. 그는 친구의 연애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너, 그렇다고 사람들 보는 데서 덥썩덥썩 안고 그러지 마라.” 뭐? 이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렇잖아. 스미스 양은 하녀라고. 일하는 저택의 도련님이 남들 다 보는 데서 끌어안고 그래 봐. 너야 상관없겠지만 나중에 고생하는 건 스미스 양이라고.” 고생한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안의 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 고생한다는 거지? 그런 그의 태도에 제이드가 답답하다는 듯 덧붙였다. “구설수에 오른단 말이다. 그건 너도 싫을 거 아냐.” 이안은 아카데미 시절을 떠올렸다. 그 역시 무수한 구설수에 휘말린 학창시절을 보냈다. “난 별로 상관없었어.” 너야 그렇겠지. 제이드는 속으로 혀를 차며 생각했다. 아카데미 시절 이안은 여러 가지 의미로 유명했다. 잘생긴 얼굴과 그의 출생. 거기에 안하무인격의 태도는 소문을 부풀리고 또 부풀렸다. 그래. 정말 상관없었던 게 분명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의 상황에서 아카데미에 남아있을 수 없었을 테니까. 제이드는 물끄러미 이안의 얼굴을 응시했다. 생각해보면 거의 십 년째 알아오고 있다. 감정이 있는 건 지 의심스러운 무표정한 얼굴은 시간이 갈수록 더하고 무심한 태도는 여전했다. 그 시간동안 이안은 자신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기나 할까. 문득 입맛이 썼다. 물어보기엔 너무 자존심 상하는 질문이다. 에라, 친구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랴. 제이드는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뜨거운 도로를 지나 궁전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이안은 요란스럽게 일어나는 파트너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의 존재를 의식하던 여자들의 시선이 그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자연스럽게 몰렸다. 여자들의 선망과 남자들의 시기의 시선. 그는 마치 바위처럼, 나무처럼 무심히 그것을 비켜내며 식당 밖으로 걸어나갔다. ============================ 작품 후기 ============================ 핑구68님 제이드에게:몇다리까지 걸쳐봤니...?ㅋ 이안에게:케이트에게 해본 질문인데, 주인님과 하녀의 연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ㅋㅋㅋ 제이드 : 워, 워. 아가씨. 무슨 그런 섭한 소릴. 몇 다리라니. 난 한번에 한 아가씨만 상대한다고. 이안 : 주인과 하녀의 연애라고? 이해가 안되는데. 주인이 하녀를 갖고 노는 걸 말하는 건가? 시아에나님 이안어머님께 질문 :며느리로 케이트는 어떤가요? 며느리정안되겠다면 이안의 정부로선? -> 어, 아직 실라는 안나왔는데...일단 불러보겠습니다. 실라 : 어머, 어머. 안녕하세요. 실라 로엔입니다. -> 안녕하세요. 시아에나님의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실라 : 음, 케이트라는 아이는...? -> 그, 최근에 들어온 빨간 머리 하녀요. 실라 : 아아. 그 예쁘장한 아이 말이군요. 글쎄요. 며느리라고요? 결혼이라는건 이안이 결정할 문제니까요. -> 이안이 선택한 여자라면 받아들이겠다는 건가요? 실라 : 제가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가 중요할까요? 후후. -> 어, 어떤 의미론 강적인데? 그럼 정부로는요? 실라 : 네? 정부라고요? 이안의 정부라니, 왜 그 아가씨는 그런 시간 낭비를 하려는 거죠? -> 저, 시간낭비라는건 무슨 의민가요? 실라 : 그야...이안 그아이 성격상 정부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텐데요. 육체적인 관계만으로 돈을 받는 여자들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케이트라는 아가씨는 그런 아가씨인가요? -> 어, 하지만 이안이 정부를 사랑할 수도 있잖아요? 실라 : 어머, 후후. 사랑하는 여자를 정부로 삼고싶다는 남자가 과연 제대로 된 남자라고 생각하는건가요? -> ...끄응. 레몬맛토끼님 제이드 현재 케이트의 친척들에 대해선 어느정도 조사가되었나요? 제이드 : 뭐? 케이트의 친척은 무슨. 아직도 그 펜던트를 만든 사람을 찾고있는 중이야. -> 이건 본문에 한 번 나올텐데 이십년도 전에 만들어 진거라 우선 만든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그거부터가 어렵습니다. ==== 이번편은 별로 질문이 없었던 걸로 봐서 이제 궁금한게 없으신 듯. 이런 이벤트 괜찮네요. 나아중에 한 번 더 비슷한 걸로 해야겠습니다. 관계가 좀 더 변한 다음에요. 다른 이야기지만 문X아라는 곳에도 업뎃 중에 있는데 거기선 본문에 그림을 넣을 수 있게 해서요. 어제와 오늘 삽화가 한 장 들어있습니다. 대단한 그림은 아니고요. 삽화가 들어갈 경우 PC로 보시면 공지에 올라갑니다. 다음날 그림이 교체되어 전 그림을 못보셨다면 제 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관심있으신 분은 PC로 한번 보시는 것도... 아, 그리고 설문 하나만 할게요. 클릭 부탁드려요. 00044 2. 사라진 아이들 =========================================================================                            케이트는 끙끙거리며 통풍구를 닦고 있었다. 키가 작은 그녀가 닦기엔 너무 높았기 때문에 의자도 하나 질질 끌어다 올라서 있었다. 덕분에 손이 닿기는 했지만 통풍구를 닦은 뒤 이걸 또 옮겨놓을 걸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 “어, 음...저기...케이트?”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케이트는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비틀거렸다. 빨간 머리가 달려들어 그녀가 넘어지지 않게 잡아주었다. 빨간 머리? 케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다음에야 상대방의 얼굴을 살필 수 있었다. 이 저택의 사용인 중 빨간 머리는 세 명이나 된다. 여자가 둘, 남자가 하나. 상대방은 그 남자였다. “고, 고마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케이트는 의자 위에 쪼그리고 앉으며 감사를 전했다. 폴이라고 했던가. 호리호리한 체격에 키만 커서 위아래로 쭉 늘려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남자였다. 솔직히 말하면 폴은 거기 있는지 없는지 잘 의식되지 않는다. 같은 저택의 키가 큰 또 다른 남자와 비교하면 대단한 차이다. 둘 다 멀대같이 키는 큰데 하나는 그냥 잡아 늘인 것처럼 가느다랗고 존재감이 옅은 반면 한쪽은 체격도 크고 주위를 압도한다. 아, 또 이안을 생각하고 있네. 케이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지난밤의 일 때문일 것이다. 수도로 온 지 한 달여의 시간 동안 아는 척도 하지 않던 남자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녀를 한 번 끌어안고는 가버렸다. 안겼을 때의 느낌이 떠올라서 케이트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빨개졌을 것이다. 단단한 가슴이 등을 누르는 것이, 강한 팔이 감쌌던 것이 떠올랐다. 하필이면 그녀는 잠옷만 입고 있어서 그도 그녀의 굴곡이 고스란히 느껴졌을 것이다. 와, 와아아아아악! 케이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해보니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 미쳤나 봐. 왜, 왜 그랬을까? 알라나데일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억지로 뒤집어서 입을 맞췄더랬지. 그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대체 무슨 이유가 있단 말인가. 보는 사람도 없었고, 그럴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대체 그 남자는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궁금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폴은 허리를 굽히며 희미하게 웃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훨씬 예뻤다. 이번에 로엔 가에 새로 들어온 하녀, 미인이던데?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가 생각나 저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음, 왜 통풍구를 닦고 있어?” “...어?” 케이트는 뭔가를 깨닫고 벌떡 일어났다. 의자 위에 올라가 있는 탓에 폴보다 훨씬 키가 커져 그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젠장. 속았다. 그러고 보니 이 일을 시킨 게 메리였다. “신입이 하는 일이라던데...아니야?” “어, 음...그거 남자들이 하는 일인데.” 어쩐지. 케이트는 맥이 탁 풀려 쥐고 있던 걸레를 떨어트렸다. “음, 여자들이 하기엔 너무 높잖아.” 그래. 어쩐지. 이쯤 되니 웃음이 나온다. 메리에게 당한 것도 벌써 두 번째다. 얼마나 바보 같은지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고 메리가 하는 이야기를 죄다 의심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영악하게도 그녀는 케이트에게 열에 아홉 정도는 제대로 알려줬던 것이다. 젠장. 케이트는 혀를 차며 의자 위에서 내려왔다. 그래도 지나가던 폴이 알려줘서 이 정도에서 끝났다. “어, 음, 저기...도와줄게.” 폴은 케이트가 의자를 옮기려 낑낑대는 걸 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그에게도 꽤 무거운지 폴의 팔뚝에 힘줄이 솟아났다. 그래도 케이트보다는 들 만할 것이다. “음, 그게...힘들지?” 무슨 소린지 몰라 케이트는 어리둥절했다. 그게 힘들다는 말인가? 그게 뭐지? 다음 순간 그녀는 그게 폴의 말버릇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말하기 전에 주저하면서 뜸을 들이는 것. “견딜 만해.” 케이트의 대답에 폴은 후후 웃었다. 이제 한 달. 겨우 수도에 산다는 것에 겨우 익숙해졌을 것이다. “어, 음...메리도 저러다 말 거야.” 폴의 말에 케이트는 걸음을 멈췄다. 그는 케이트를 괴롭히는 게 메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아?” “음, 그게...으음...메리가 성격이 좀 그래. 어...그래도 나쁜 애는 아니니까.” 알고 나면 나쁜 사람 하나 없다. 케이트는 픽 웃어버렸다. 그래도 모두 메리의 행동을 동조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의자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나서 두 사람은 계단으로 향했다. 벌써 열 시가 넘었다.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어, 그러니까...신경 쓰지 마. 음, 메리는 하녀 학원 출신이거든. 그게...나름대로 자부심이 있는 거지.” “하녀 학원?” “아, 그게...모르겠구나. 음...표준 여자 사용인 학원이라고 있어. 어, 그게...우린 그냥 줄여서 하녀 학원이라고 하거든.” 처음 듣는 이야기다. 수도엔 별게 다 있구나. 하녀 학원이라니. 대체 뭘 배우는 걸까. 그러고 보니 메리는 일 처리가 꽤 좋았다. 타운 하우스의 사용인들은 기본적으로 일을 잘 하는 편이기도 하다. 눈치가 빠르고 영리한 케이트는 그들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효과 좋은 청소 방법을 금세 배웠다. 예를 들어 잉크가 묻은 셔츠에 레몬즙을 뿌리고 닦아내면 쉽게 지워진다거나 그런 것들. “다녀오셨습니까.” 복도 건너편 현관에서 집사가 문을 열며 말하는 것이 들렸다. 폴과 케이트는 깜짝 놀라 쳐다봤다. 음. 하고 이안이 집사에게 모자를 건네주고 있었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 이안의 시선이 한순간에 복도를 뛰어넘어 두 사람을 향하자 케이트와 폴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자세를 바로 하고 허리를 숙였다. 다녀오셨습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두 사람은 허리를 숙인 상태로 서로를 쳐다봤다. 열 시. 그러게. 오늘은 빠르네. 시선을 교차하는 두 사람의 태도를 이안은 이채롭다는 듯 쳐다봤다. 케이트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금세 깨달았다. 요 한 달 간 그가 느꼈던 이상하다고 생각한 케이트의 태도. 알라나데일 에서와는 확연히 느껴지는 거리감. “식사는 하셨습니까?” “됐네.” 이안은 무심하게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그의 시선은 더 이상 케이트와 폴을 향하지 않았다.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집사는 당황했다. 평소와 똑같았지만 딱 한 가지가 달랐다. 로엔 백작 부인의 안부. 저녁 식사 시간 이후에 귀가하는 이안은 반드시 로엔 백작 부인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고 하면 그녀에게 돌아왔노라고 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안의 태도에 전혀 변화가 없었던 데다가 집사가 보기엔 집안에서 이안이 행동에 변화를 보일만 한 상황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라고 어렴풋이 추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케이트와 폴은 이안이 위층으로 사라지자 허리를 세웠다. “어, 음...참 무시무시한 남자야.” 한숨 같은 폴의 말에 케이트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렇지도 않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안의 어설픈 연기나 태도에 대해서 아는 건 그녀뿐이다. 하지만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알라나데일의 사건과 이안과의 친분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걸 친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폴, 거기서 뭐 해?” 어슴푸레한 계단 아래쪽에서 고양이 같이 치켜 올라간 갈색 눈동자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 아, 그게...어, 방금 도련님께서 귀가하셔서.” 메리는 폴의 대답에 생긋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건 마치 입술만 공중에 떠올라 휘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미소였다. 폴이 약간 당황하는 게 느껴져 케이트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쳐다봤다. 뭐 때문에 메리를 저렇게 어려워하는 거지? “이제 할 것도 없잖아? 내려와.” “어? 어, 어...어, 그래. 음. 그래야지.” 뭔지 몰라도 폴이 대단한 약점을 잡힌 것처럼 보였다. 하얗고 가느다란 팔이 앞으로 쭉 내밀어 지는가 싶더니 그 끝에 붙은 작은 손이 위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어서.” 가르랑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폴은 케이트를 한 번 보더니 침을 꿀꺽 삼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동안 메리는 한순간도 케이트를 쳐다보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비가와서 그런지 날씨가 꽤 선선했죠? 내일도 비온대요. 다들 우산 꼭 챙겨가시고. 전 졸려서 골골대고 있습니다. 오늘만 커피를 세잔 마셨는데 왜 이럴까요...음... 00045 2. 사라진 아이들 =========================================================================                            “조금 이상해서 연락드리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호리호리한 인상의 치안 관은 빨간 모자를 쓴 제이드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다가 그가 내민 명함을 받아들고 나서야 그렇게 말했다. 그러게 그 빨간 모자는 좀 튄다니까. 리코의 말에 제이드는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받아쳤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 절대 부러운 게 아니다. 챙 넓은 모자는 전체적으로 빨간색에 하얀 깃털까지 하나 달려있었다. 뻔지르르한 극단의 배우들이나 쓰는 모자였다. 하지만 수사관들은 자유 복장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제이드의 모자를 가지고 트집 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트집 잡지 않는다는 말이 그게 괜찮다는 말은 아니다. 평민으로 이뤄진 수사관 집단은 그만큼 배경만큼이나 성격도 달랐다. 꽤 자유로운 분위기기 때문에 제이드의 화려한 의상이 묵인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자유로운 분위기의 득을 보는 건 제이드뿐이 아니었다. 이안 역시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그 자유로운 분위기 덕에 튀고도 남는 성격이 묵인되고 있었다. “이쪽은 고층거리입니다.” 치안 관은 리코와 제이드를 좁은 골목으로 이끌며 입을 열었다. 더러운 땅바닥과 구석구석 숨은 아이들의 눈동자가 빛나는 것이 뒷골목에 모인 들 고양이를 연상시켰다.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훅 풍기는 역한 냄새에 제이드는 반사적으로 코를 감싸 쥐었다. 다행히 리코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는 이 층 삼 층으로 얼기설기 올려놓은 집을 찬찬히 살폈다. 바람이라도 불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래서 고층거리라고 부르는 거군. 제이드의 태도에 치안 관이 쭈뼛거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아무래도 그, 뭐라고 해야 할까요?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보니 깨끗하지는 못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층민이 사는 곳이라는 말이다. 카이사가 봤다면 그가 갔던 너즈 자작 가는 새 발의 피라고 했을 것이다. 창문은 창살만 남아 있었고 문도 없어서 천을 달아 임시 문을 만들어둔 집도 많았다. 그 천도 그나마 누덕누덕 기운 것으로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었다간 찢어질 것이 분명했다. 제이드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치안 관을 따랐다. 평민이라고 해도 제이드는 부유한 집 아들이다. 그의 본가는 수도에서 제일가는 포목상이다. 장남인 형이 이어받았기 때문에 그는 가게와 관련된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굳이 수사관이라는 직업을 갖지 않아도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재산을 부모에게서 물려받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런 제이드에게 이런 골목이 낯선 것은 당연했다. 다행히 리코와 치안 관은 이런 하층민이 사는 골목에 익숙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능숙하게 골목을 누볐다. “...생각보다 아이들이 없군.” “그렇죠?” 리코의 말에 치안 관이 맞장구쳤다. 뭐? 아이들이 없다고? 이게? 제이드는 뜨악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무너질 것 같은 건물과 건물 사이마다 아이들의 동그란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비쩍 말라 눈동자만 커다랗게 보이는 꾀죄죄한 얼굴이 삼삼오오 모여 적의와 공포심을 가지고 이쪽을 응시하는 건 낮이라 해도 음울하고 무서운 장면이다. “어른은 떠날 수 있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지.”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거야?” “먼저 죽는 경우도 있고.” 제이드는 문득 리코의 집안을 떠올렸다. 수사관이 부유한 집이 많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평범한 집도 있고 천애 고아도 있다. 리코는 후자였다. 가족이 왜 죽었다고 했지? 떠올려봤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 걸로 봐서 이야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 제이드에게 리코가 다시 말을 걸었다. “옷이 좀 멀쩡한 애들은 부모가 있는 애들이겠지.” 제이드가 보기엔 멀쩡한 옷을 입은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전부 지저분하고 닳아빠진 옷이었다. 남이 입던 옷을 물려받은 건 물론이고 어디서 버린 옷을 주워 다 입힌 것 같은 옷도 있었다. 부유한 축에 속했던 그이기에 옷을 물려받아 입거나 수선해가면서까지 입어본 적이 없다. “어느 쪽인지 구분이 안 되는데.” 제이드의 중얼거림을 들은 리코가 피식 웃었을 때였다. 치안 관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입니다.” 다 쓰러져 가는 집이었지만 주변의 집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라 오히려 평범하게 보였다. 흠. 제이드는 문으로 보이는 뻥 뚫린 구멍을 가늠하며 생각했다. 난 저 안에 절대로 안 들어갈 거야. “하만, 나다, 진저.” 누군가 살고 있다면 분명 쥐나 바퀴벌레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 집 안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제이드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가 주위를 살피고 자세를 바로 했다. 집집마다 눈동자들이 이쪽을 응시하는 게 보였다. “거참, 귀찮게 하시는구만.” 바위틈 같은 구멍으로 보인 얼굴은 비쩍 마른 남자의 얼굴이었다. 꾀죄죄하기론 아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얼굴에 깊게 자리 잡은 주름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보면 마흔 살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일흔 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살아가는 동안 그 손에 쥐어질 것이 먼지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자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쪽은 왕궁에서 오신 수사관님들이시다.” 치안관의 소개에 하만이라는 남자가 느리적 느리적 리코와 제이드를 살폈다. 리코에게서 변하지 않았던 시선이 제이드에게 닿자 잠시 탐욕스럽게 변했다. 그는 제이드의 고급스러운 옷과 화려한 모자를 훑었다. 그제야 제이드는 자신의 옷이 튄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으로 가려는 손을 억지로 참으며 그는 부러 의연하게 웃어 보였다. 흠. 하만은 제이드의 허리춤에 걸린 검을 보고 시선을 거뒀다. 수사관은 강하다지. 사라진 왼팔이 쑤셨다. “무슨 말을 하러 오셨소.” “자네 아들 말이야.” “내겐 아들이 없는데.”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제이드와 리코는 치안 관과 하만의 대화를 지켜보며 머리를 굴렸다. 치안관이 수사관에게 도움을 요청한 건 아이들이 사라진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대화를 보아하니 하만의 아들도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 아버지는 아들이 없다고 한다. 사라지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그냥 없다고? 누가 봐도 수상한 냄새가 풍겼다. “거짓말 좀 그만해!” 치안 관은 벌컥 화를 내다가 리코와 제이드의 존재를 깨닫고 멈췄다. 그는 하만의 아들을 만난 적이 있다. 이런 동네의 아이들이란 건실하게 살아봐야 신문팔이나 구두닦이다. 보통은 소매치기를 하거나 작은 사기를 치며 산다. 하만의 아들은 소매치기하는 것을 그가 몇 번이나 잡았던 것이다. “자네 아들을 내가 본 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잖아.” 치안 관의 말에도 하만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결국 지친 치안 관이 다른 집으로 향했으나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제이드와 리코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치안 관을 따라 집집마다 따라다녔다. 모두 일곱 집이 자신에겐 자식이 없다고 말했다.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에 사는 다른 사람들은 치안 관과 수사관의 얼굴을 보자마자 안으로 들어가 버려 뭔가를 물어볼 수도 없었다. 수도의 뒷골목에 뭔가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제이드와 리코는 그걸 직감했다. “사라진 건 아이들뿐인가?” 리코의 질문에 치안 관은 고개를 저었다. 아이들은 떠날 수 없다. 아이들보다 먼저 사라진 건 어른들이었다. 그는 다 쓰러져 가는 집을 하나 손가락질했다. “저 집에 사는 남자도 사라졌습니다.” 누가 사는 집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리코는 안을 살폈다. 어차피 무너질 것 같은 건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다. 낮에 왔으니 그나마 안을 확인하는 게 가능했다. 밤에 왔다면 이 거리의 사람들이 초를 살 돈이 있을 리 없으니 확인하느라 고생했을 것이다. “자네는 아이들이 사라진 사건과 이 집의 남자가 사라진 것이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나?” 리코의 질문에 치안 관은 잠시 우물쭈물했다. 사실 수사관을 부른 것만으로도 그는 상급 치안 관에게 몇 마디 말을 들었던 것이다. 국가 안보에 관련된 사건을 수사한다고는 하나 평민의 일에도 수사관이 개입하는 경우가 있다. 다섯 명 이상이 죽었을 경우. 혹은 다섯 명 이하라 해도 연쇄살인마의 소행이라는 게 확실할 경우이다. 하지만 이번 아이들의 행방불명 사건은 아이들이 죽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저 사라졌을 뿐, 시체가 발견된 것도 아니고 그 아이들의 부모는 정작 자신에게는 처음부터 아이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고작 뒷골목의 애새끼 몇 명 사라진 걸로 수사관을 요청했다고? 자네 제정신인가? 상급자의 호통이 귓가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애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어봐야 결국 강도가 되거나 사기꾼이 된다. 사회의 암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치안 관 아니, 진저는 땅바닥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올렸다. 그도 구빈원 출신이다. 죽을 만큼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다. 출발선이 다르다고 해서 달릴 필요도 없는 건 아니다. “네. 저는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흠, 그렇군.” 리코는 턱을 쓰다듬더니 씩 웃었다. “그럼 확인해보자고. 무슨 일인지 말야.” 에이, 옷 갈아입어야겠네. 제이드의 투덜거림과 함께 진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어, 수사해 주시는 겁니까?” “뭐야, 우리가 수사하길 원해서 부른 것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상급자에게 혼나고 나니 그도 고작 뒷골목의 아이들이 몇 명 사라진 사건을 수사해 줄 거란 희망이 사라진 참이었다. 그런 진저의 등을 탁탁 치며 리코는 껄껄대고 웃었다. ============================ 작품 후기 ============================ 이번화의 삽화는 걍 모자라서 공지쪽에서는 변경하지 않겠습니다. 크게 중요한건 아니고, 걍 제가 그리고 싶어서 그린거라 궁금하시면 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도 덥네요. 에효... 내일은 바밤바를 먹을 거예요. 00046 2. 사라진 아이들 =========================================================================                            “아, 큰아버지 말이죠?” 한스 너즈 경은 멀끔하게 생긴 남자였다. 나이는 삼십 대. 카이사가 보기엔 죽은 너즈 자작과 그다지 닮은 데가 없어 보였다. 큰아버지라고 부르는 걸로 봐선 그의 아버지가 너즈 자작의 동생인 모양이었다. 그는 시계를 한 번 확인했다. 좋은 시계다. 카이사는 그것이 그가 큰 맘 먹고 산 시계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혹시 죽은 너즈 자작과 사이가 어땠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별로 사이랄 것도 없어요. 그다지 왕래가 없었으니까요.” “큰아버지라면 아버지의 형님 아닙니까?” 그런데도 왕래가 없었냐는 뉘앙스의 질문에 너즈 경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무너져가는 너즈 자작에 비해 그의 옷은 좋아 보였다. 낡아 보이지도 않고 천을 덧댄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귀족인 큰아버지와 달리 평 귀족인 조카는 경제적으로 충분한 게 분명했다. 우스운 일이군. 카이사는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귀족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이안에 대해서도 그리 호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귀족보다 평민이 더 잘산다는 것을 보고 고소하다고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매번 쫓아와서 돈 달라는 친척이 얼마나 성가신지 아십니까? 그것도 귀족이라고 거들먹거리면서 말이죠.” 아하. 카이사가 힐끔 이안을 쳐다봤지만 이안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는 문득 이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생각해보면 수사관이 된 일 년 동안 이안은 그를 싫어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텃세도 당하고 시기도 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늘 무표정에 거리를 둔 태도. 그런 이안의 행동에 시비 걸던 무리의 반은 포기하고 떨어져 나갔고 나머지 반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해 여전히 시비를 걸고 있다. 무시한다는 생각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이안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본의 아니게 무시하는 거겠지. 카이사는 다시 너즈 경에게 주의를 돌렸다. “매번 손 벌리는 친척이라니 성가셨겠군요.” 약간의 함정이었다. 그런데 너즈 경은 시계를 한 번 확인하던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큰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더 이상은 도와줄 수 없다고 못 밖은 게 두 달 전이니까요. 실제로 큰아버지도 요 두 달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순순히 물러나던가요?” “그럴 수밖에 없죠.” 너즈 경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을 이었다. “귀찮게 굴면 돌아가신 다음 그 같잖은 작위도 팔아버릴 거라고 했으니까요.” “작위를 판다고?”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작위를 판다고? 그게 가능한가? 그런 그의 태도에 너즈 경은 생각났다는 듯 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아 참,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명함은 유려한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변호사 한스 너즈. 아하. 이안에게서 명함을 건네받은 카이사는 그제서야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변호사라면 이런 유의 일에 익숙할 것이다. 유산이나 귀족 작위를 물려받는 등의 일들. 너즈 자작이 죽기 전에 그는 이미 자작이 죽을 경우 자신이 물려받을 작위와 토지를 확인한 게 분명하다. “자작에게 남은 재산이 얼마 없었던 거로군.” 이안의 말에 너즈 경은 시계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씩 웃었다. “남은 재산이라는 말이 우스울 정도죠. 토지는 전부 압류당한 상태더군요. 빛을 전부 갚고 나면 남는 건 작위뿐인데 이름뿐인 작위를 가지고 뭘 하란 겁니까.” 흠. 이안은 팔짱 끼고 너즈 경의 모습을 살폈다. 카이사가 확인한 데로 경제적으로 풍족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다른 친척도 경제적으로 충분할 거란 보장은 없다. 토지를 팔아 빚을 갚고 나면 남은 건 작위밖에 없다. 재정적으로 힘든 친척이라면 작위를 유지하느니 팔아서 가계에 보태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작위를 파는 게 가능하다면. 그는 속으로 작위를 판매하는 게 가능한지 돌아가서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너즈 자작은 다른 친척은 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군.” “그렇죠. 사실 제 입으로 하긴 좀 부끄러운 말이지만 친척 중에 저보다 더 성공한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러니 죽은 너즈 자작으로서는 작위를 팔 가능성이 높은 다른 친척보다 유지할 능력이 되는 너즈 경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집안 대대로 이어저온 작위를 자기 손으로 넘긴 친척이 팔아버린다면 조상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 귀족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반대로 그 말은 너즈 자작의 작위를 팔아 얻게 될 돈이 필요한 사람도 있다는 말이군.” 좋은 지적이다. 이안의 말에 카이사는 그 사실을 떠올리지 못한 게 부끄러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작위를 받으려면 제가 유산을 포기해야 합니다.” 너즈 경은 시계를 보며 덧붙였다. 아니면 제가 죽거나요. 살해 목적은 작위에서 돈으로 가능성이 옮겨갔다. 카이사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당신이 죽는다면 다음은 누구에게 넘어가게 됩니까?” “하하. 무서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너즈 경은 다시 한 번 시계를 확인했다. 시계를 자랑하려는 목적이 아닌 건 확실하다. 이안이 입을 열었다. “바쁜가?” “아, 네. 십 분 뒤에 재판이 있어서요.” 그렇다면야. 두 사람은 재빨리 그가 죽거나 포기할 경우 유산을 받게 될 사람의 이름을 받아 적었다. 친척의 이름을 불러준 너즈 경은 약간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사관님들은 친척들이 작위 때문에 저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글쎄. 카이사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 이안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런 이유로 너즈 자작을 죽인 범인이라면 한 명 더 죽이는 건 상관하지 않겠지.” 그 말에 너즈 경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 가능성은 생각치 못한 모양이었다. 카이사는 재판소로 비틀비틀 걸어가는 너즈 경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굳이 그런 말을 했어야 했나?” 그보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큰 이안이 한번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범인이 정말 작위를 노린 그의 친척이라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척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잖아.” “어째서?” 이안이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는 분노도, 조롱도 보이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명예와 작위를 위해 자작을 죽일 수는 있어도 돈을 위해 죽일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정곡이다. 카이사는 첫날 자신이 한 말이 떠올라 얼굴을 붉혔다. 귀족이 작위 때문에 친척을 죽일 수 있다면 평민 역시 작위를 위해 죽일 수 있다. 돈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이안에게 시비를 건 건 아니지만 반대로 공격을 받고 보니 자신의 말이 생각 없는 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수사관들이 이안을 싫어하는 이유가 떠올랐다. 처음엔 귀족이라서 싫어했다. 평민만 모인 수사관실에 귀족 출신 수사관이 들어왔으니 능력도 없는 녀석이 운 좋게 들어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심한 태도, 무표정한 얼굴. 상대방보다 항상 한층 위에 올라서 있는듯한 그 말투와 행동이 수사관들을 건드렸다. 어디 가도 똑똑하단 소리는 늘 들어온 자들이다. 수사관이란 집단이 그렇다. 일등 이하로는 해본 적 없는 자들이다. 집안에서도 받들어지고 집안을 빛낼 재원이라는 칭찬을 받으며 자라왔다. 그들은 내심 귀족들은 머리에 든 것도, 노력도 없이 운 좋게 귀족으로 태어난 주제에 거들먹거린다고 깔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이안이 나타났다. 그들이 그렇게 귀족들은 노력도 없이 출신 하나만으로 거들먹거린다고 깔볼 수 없는 남자가. 똑똑한 머리에 내로라하는 검술. 거기에 귀족. 신은 불공평하게도 큰 체격과 잘생긴 얼굴까지 이안에게 하사했다. 이안이 평민이었다면 나았을 것이다. 이런 잘난 남자가 귀족이 아닌 평민이라는 건 그들에게 자부심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귀족이란다. 이안의 존재 자체는 평민으로 이뤄진 수사관들에게 그래 봤자 너희는 결국 평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보였다. 이안에게 시비를 거는 자들은 모두 평소 귀족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다. 카이사는 머리를 젓고 이안의 뒤를 따랐다. 이래서 그의 파트너가 되는 게 싫었다. 이안에게 보이는 모든 감정이 열등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감정이 이안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스멀스멀 퍼져 나와 마음을 잠식한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불금 보내고 계신가요? 어제 예고한 바밤바가 아니라 팥빙수를 먹었습니다. 바나나 우유를 넣어 먹으니 완전 맛있네영. 바나나 우유 짱...하악하악... 늘 그렇듯 공지에 삽화가 올라가 있습니다. 오늘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 입니다. 관심있으신 분은 누구인지 맞춰보시길. 00047 3. 하녀와 도련님의 로맨스 =========================================================================                            타운하우스에 파티 준비가 시작되었다. 케이트는 타운하우스에 와서 처음 겪어보는 파티 준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하던 일이 달라진 건 아니지만 조용하던 집 안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파티 준비를 위해 로엔 백작 부인이 부른 재단사와 플로리스트가 천과 꽃을 들고 찾아와서 본을 보이고 떠나간 것이다. 요리사가 미리 주문한 재료가 속속 도착하면서 결국 타운하우스의 보관실에도 얼음을 놓게 되었다. 비쩍 마른 요리사는 매우 즐거워하더니 바로 얼음을 이용한 디저트를 내놨다. 강판에 얼음을 간 뒤 과일과 쨈을 얹어 먹는 것이었다. “도련님도 드셔야 하는데.” 그녀는 저녁 식사까지 귀가하지 않는 이안을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요리사의 말을 듣다 보면 이안이 백 구십에 달하는 커다란 남자가 아니라 작은 소년처럼 생각돼서 케이트는 잠깐 어지러웠다. 저 남자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을까. “아비게일, 너무 많이 먹으면 나중에 배탈 난다.” 인심 넉넉한 요리사가 많이 만든 덕에 사용인도 차가운 디저트를 먹을 수 있었다. 아비게일이라고 불린 통통한 금발 머리 하녀는 흥하고 웃었다. “이거 너무 맛있는걸.” “게일은 단 걸 좋아하니까.” “단 거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 와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케이트는 조용히 차가운 얼음알갱이를 우물거렸다. 입안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는 달콤한 얼음이 가슴까지 시원하게 느껴졌다. “케이트, 맛없어?” “어? 아니.” 맞은편에 앉아있던 하인이 대뜸 말을 거는 바람에 케이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존은 씩 웃으며 한입 가득 얼음 알갱이를 퍼먹었다. 새로 온 이 예쁘장한 하녀는 조용하고 얌전한 성격인 모양이었다. 예쁜데다가 얌전하기까지. 여자란 자고로 조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존으로서는 마음에 쏙 드는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 “많이 먹어라, 케이트.” “왜요, 무티? 케이트는 시골에서 와서 이런 걸 못 먹어 봤을 거 같아요?” 요리사의 말에 메리가 심술궂게 물었다. 요리사는 허리에 손을 얹더니 흥하고 말했다. “시골이랑 상관없어. 사람은 맛있는 걸 먹어야 행복한 거거든.” “아, 그건 맞는 말이야.” 아비게일은 씩 웃으며 마지막 한 스푼을 입안에 넣고 빈 그릇을 닥닥 긁기 시작했다. 난 빼놓고 이야기해달라고. 케이트는 약간 어깨를 움츠리며 생각했다. 조용히 살 생각이다. 친척을 찾을 때까지. 친척을 찾은 다음엔? 모르겠다. 그녀의 목걸이는 제이드가 가져갔다. 수도에서 목걸이를 만든 사람을 찾으면 그녀의 가족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수도로 온건 그래서였다. 가족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서. 올해까지만 수도에 있자. 케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가족을 찾아보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 그다음엔 어딘가 조용한 시골에 갈 생각이었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알라나데일에서 일어났던 그녀의 힘은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그날, 정말 계단에서 날아 오른 건 그녀의 힘이었을까.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녀는 어렴풋이 이안이 자신의 집으로 그녀를 데려온 게 마녀인 그녀를 감시하기 위해서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만약 내가 마녀라는 게 확실해진다면 어떻게 될까. 문득 겁이 나서 케이트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어쩌면 그날 이안이 갑자기 자신을 끌어안은 건 그녀가 마녀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라나데일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마녀인지 확인하기 위해 이안은 그녀를 계단에서 밀었다. 그것과 연장선이 아닐까. “케이트, 뭐해?”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외쳐서 케이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휴게실의 모든 사람이 다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어, 뭐야? 시선을 내리자 그릇에 담겨있던 얼음알갱이가 녹아서 물이 되어 있었다. “로렐라이만큼이나 멍하네.” 메리의 심술궂은 말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요리사 옆에 멍하니 앉아있는 검은 머리 하녀를 쳐다봤다. 로렐라이라고 불린 주방 하녀는 얼음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우물우물 먹고 있었다. 그때 집사가 휴게실에 들어왔다. 멍한 것처럼 보이던 로렐라이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요리사가 입을 열었다. “알프레드도 드실 건가요?” 은발의 노신사는 꼿꼿이 서서 고개를 저었다. 이가 시려서 말야. 그는 폴을 보고 말했다. “도련님 오셨다. 간단히 드실 참을 가져가거라.” “아, 네.” 먹던 그릇을 내팽개치다시피 놓으며 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샌가 로렐라이는 주방으로 들어가 뚝딱거리며 뭔가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폴이 옷 가짐을 바로 하자마자 주방에서 나온 로렐라이가 샌드위치가 놓인 접시를 내밀었다. 엄청 빠르잖아.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멍해 보이는데 일처리 하나는 끝내줬다. 고작 일이 분 정도의 시간이었는데 로렐라이는 빵을 자르고 채소를 손질하고 차갑게 식힌 닭고기를 잘라 샌드위치를 만든 것이다. 거기에 차갑게 내린 홍차도 곁들여 있다. 폴이 허둥지둥 계단을 올라가자 요리사가 생각났다는 듯 로렐라이에게 말했다. “얼음 남지 않았니?” 그뿐이었다. 로렐라이는 고개를 끄덕하더니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그극그극하고 강판에 얼음을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안에게도 먹이고 싶다더니 만드는 모양이었다. “케이트, 드리고 오너라.” 로렐라이가 간 얼음 위에 과일과 쨈을 뿌린 디저트를 들고 나오자 하녀장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 나? 케이트는 약간 당황했다. 보통 남자 주인의 방에는 남자 사용인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녀보고 가라고? 이것도 텃세의 일종인가? 재빨리 존과 필립을 쳐다봤지만 그들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어, 텃세구나. 떨떠름하게 쟁반을 받아들며 케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파티라고?” 이안은 타이를 풀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막 집사가 타운하우스에서 파티를 열 예정이라고 이야기한 참이었다. 폴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두 명뿐인 주인. 로엔 백작 부인과 이안도련님이다. 백작 부인이야 몸종이 있지만 이안은 독립하지 않는 이상 종자를 둘 수 없다. 그러니 폴이 이안의 종자 비스무레한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의 곁에 있는 다는 건 아무리 해도 익숙지 않은 일이다. 그는 부랴부랴 이안에게서 타이를 받아 손질해야 하는지 살폈다. 타이는 문제없다. 하지만 셔츠는 그가 소매를 걷은 탓에 주름이 잡혀서 세탁해야 할 모양이다. 부츠는 문제 없고. 재빨리 이안의 옷차림을 확인한 폴은 침대에 걸터앉은 이안의 부츠를 벗겨 냈다. 사용인들이 이안의 곁에 오는 걸 피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그가 어렵기 때문이다. 차가운 태도는 물론이고 위압적인 분위기가 더 그랬다. 폴은 반대쪽 발에서도 부츠를 벗겨 낸 뒤 서둘러 물러나느라 거의 넘어질 뻔했다. “일주일 후에 열릴 예정입니다.” “일주일 후라고?” 너무 급하다. 아무리 빨라도 보름 전부터 준비하는 게 아니던가? 그런 이안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집사가 입을 열었다. “사실 보름 전부터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마님께서 이야기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어째서? 이안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걸 굳이 그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는 뭐야? 집사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도련님의 승진 축하파티라 그렇습니다.” 이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으아아. 폴은 부츠를 끌어안고 뒷걸음질 쳤다. 이안의 기분이 나빠 보인다. 그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나쁘게 구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사용인들에게도 나쁘게 굴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물론 지금까지 이안에게 혼나거나 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겁에 질린 폴에게 지금 이안은 거의 악마로 보였다. “...알았네.” 약간 체념한 것처럼 보였다. 집사가 고개를 끄덕하고 물러났다. 쉬십시오. 폴 역시 집사가 나가면 이안과 단둘이 될까 두려워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이안의 방은 이 층에 있다. 방이 이층에 있다는 것부터가 주인이라는 말이다. 케이트는 약간 복잡 미묘한 기분으로 복도를 걸었다. 그림과 태피스트리가 걸린 복도를 따라 비슷한 문을 몇 개쯤 지나고 나면 이안의 방이 나온다. 그녀가 문 앞에 멈춰 섰을 때 집사와 폴이 방 안에서 나왔다. “응?” 집사는 케이트의 얼굴을 보고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요리사님이 새로 만든 디저트를 꼭 가져다 드리라고 해서요.” 무티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그는 들어가라고 손을 저었다. 재빨리 폴이 문을 열어주었다. 남자의 방에 하녀가 들어가는 데도 집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들 이안의 방에 들어가는 걸 꺼리기 때문이다. 다들 피하는 일은 신입이 하기 마련이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월요일이죠? 전 너무 즐거워서 아침에 출근하는데 배가 살살 아프더라구요^ㅂ^ ........... 아참, 한 편 더 있어서 연참할게요. 근데 지난번처럼 또 시간을 두고 올리면 분명 잠들것 같아서... 으음...무슨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아, impress님께서 팬아트를 선물해 주셧습니다. 현재 공지에 올라가 있으며 원본은 방명록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00048 3. 하녀와 도련님의 로맨스 =========================================================================                            집사가 나가자마자 다시 문이 열려서 이안은 집사가 다시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등을 돌린 채 셔츠를 벗으며 말했다. “뭔가?” 숨 쉬는 소리가 달랐다. 기척도 좀 더 부드럽고 작았다. 집사라면 조용하고 거기 멈춰선 듯한 느낌인데 이건 좀 더 젊었다.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린 이안은 문 앞에 선 케이트를 발견했다. “어, 그게...” 셔츠를 벗은 바람에 맨가슴이 보였다. 케이트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내려갔다가 이게 아니지! 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이안의 맨 가슴은 전에도 본 적이 있다. 남자가 셔츠 좀 벗었다고 안절부절못할 정도로 순진한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최대한 당당한 척 턱을 들었다. “디저트입니다.” 디저트라고?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이건 무슨 장난인가 싶었던 것이다. 아카데미 시절 그의 기숙사에 매춘부가 들어와 있던 적이 있다. 옷을 벗고 그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동급생들이 장난치기 위해 돈을 주고 일을 시켰던 그녀는 이안은 문 앞에 서서 빤히 쳐다보자 울음을 터트리며 뛰쳐나갔다. 그때 이안은 그녀가 왜 울음을 터트리며 도망쳤는지는 몰랐지만, 제이드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배를 잡고 웃어서 동급생들의 장난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기숙사에 여자를 데리고 들어오는 건 금지다. 그를 시기한 동급생들이 꾸민 짓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아카데미가 아니다. 케이트는 매춘부가 아니고. 그가 그녀를 향해 한 발 짝 내딛자 열기가 훅 끼쳐왔다. 케이트는 이안이 뭔가 오해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뭘 오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는 거의 붉은 기를 띄고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자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내밀었다. “녹기 전에 드세요.” 그녀의 말은 약간의 시간이 걸려서야 이안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녹기 전에 먹으라고? 그는 그제야 케이트의 손에 들린 쟁반을 알아차렸다. 그릇 속에 차가운 얼음이 과일과 쨈에 버무려져 있었다. 훅하고 초를 불어 끈 것처럼 희미하게 실망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연기는 순식간에 공중에 흩어져 두 사람 중 누구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이안은 수저를 들어 얼음을 떴다. 케이트가 쟁반을 들고 있는 채였다. 이 남자 지금 뭐하는 거야?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거나 말거나 이안은 얼음과 과일을 입안에 넣었다. 달고 차가웠다. 이제 받아가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케이트를 조롱이라도 하듯 이안이 다시 한술 떴다. 아니, 이 남자가 지금 뭐하는 거야? 나 벌주는 것도 아니고? 마치 케이트의 손이 식탁이라는 듯이 자연스럽게 서서 그녀의 손에 들린 그릇에서 차가운 얼음을 떠먹는 모습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처음엔 스물멀스멀 올라오던 짜증도 그게 다섯 번, 여섯 번이 되자 포기가 되기 시작했다. 에라, 모르겠다. 네 맘대로 해라. 이게 바로 갑의 횡포에 반항할 수 없는 불쌍한 을이라는 거다. 케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서 있었다. 점점 무게가 줄어가는 덕에 쟁반은 그리 무겁지 않았다. 문제는 점점 더워진다는 점이었다. 뒤는 방문이, 앞은 상의를 탈의한 이안이 있는데다가 꼼짝도 못 하고 서 있어야 하는 게 점점 후끈후끈해지기 시작했다. 창문이라도 열었다면 바람이라도 들어 올 텐데 이안이 들어오자마자 케이트가 디저트를 들고 오는 바람에 창문도 닫힌 상태였다. 게다가 이안의 몸에서 나오는 열기도 한몫했다. 케이트는 점점 비어가는 그릇을 내려다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다 먹어간다. 이쯤 와서 생각해보니 정말 모르겠다. 대체 이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저택의 사용인들에 이어 이젠 이 남자도 텃세를 부리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이안은 눈앞의 케이트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걸 봤다. 그는 마지막까지 남겨둔 가장 커다란 얼음을 입안에 넣었다. 더운지 케이트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가 자신이 들고 있던 쟁반을 뺏어 들자 케이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입술에 시원하고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그게 뭔지 깨닫기도 전에 케이트의 입술을 가르고 차가운 덩어리가 들어왔다. “헉?” 정신을 차렸을 때 입안에 얼음이 들어있었다.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안을 쳐다봤다. 이걸 뱉어야 하나? 차가워서 기분이 좋았다. 이안은 그녀가 얼음을 뱉어야 할지 계속 물고 있어야 할지 고민하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슬쩍 웃었다. 아니, 웃었다고 생각했다. 다시 이안의 입술이 다가왔다. 케이트는 뻣뻣하게 굳은 채 서 있었다. 입안에 물컹한 혀가 들어와 헤집고 다녔다. 입안의 것을 자신의 것이 아닌 혀가 휘감고 끄집어 가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혀가 달려들었다. “...응!” 츄웁하고 입술이 떨어졌다. 입안이 허전했다. 케이트는 이안이 다시 얼음을 가져갔다는 걸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얼음을 빼앗겼다는 것보다 그걸 뺏기지 않으려 반사적으로 달라붙었던 자신의 행동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안은 반으로 줄어든 얼음을 입안에 굴렸다. 그의 입안은 이미 차갑게 식어서 별로 녹지 않았다. 이만큼이나 녹은 건 케이트의 입안에서였다. 이안은 케이트의 턱을 움켜잡고 서늘하게 식은 입술에 엄지를 대고 눌러 벌렸다. 초록색 눈동자가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케이트는 진짜로 놀랐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호박색으로 돌아갔던 이안의 눈동자는 다시 붉은색을 띠기 시작했다. 그대로 이안은 손가락을 살짝 입안에 밀어 넘었다. 입안이 얼음으로 시원해져서 기분 좋았다. 약간 심술궂은 기분도 들었다. 이대로 손가락을 전부 넣고 턱 위쪽을 문질러 볼까 하는 가학적인 생각이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이게 뭐하는 거예요?” 케이트는 고개를 흔들며 이안의 손을 떼 내려 애썼다. 어느새 쟁반을 책상에 올려둔 이안은 남은 손으로 문을 짚어 열리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그대로 이안이 엄지손가락에 힘을 주자 케이트의 입이 벌렸다. 눈동자가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한순간 잡아먹힌다고 생각했다. 케이트의 손톱이 문에 닿아 그그극 소리를 냈다. 이안의 혀가 입안을 헤집는 바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케이트는 다음 순간 차가운 것이 입안으로 넘어와 눈을 번쩍 떴다. 작아진 얼음 덩어리가 이번엔 그녀의 입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반항하려는 케이트의 입안을 헤집던 이안이 그대로 얼음을 그녀의 목구멍에 미끄러트렸다. 차가운 덩어리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이 느껴져 케이트는 몸서리쳤다. “뭐, 뭐하는 거예요!” 결국 켁켁거리며 케이트가 발칵 화를 냈다. 만족감이 들었다. 이안은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가 물러났지만 거리감은 오히려 가까워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수도에 오면서 이안을 밀어내는 것처럼 보이던 케이트의 태도가 무너졌다. 제이드의 말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이안은 한 번 안아주라는 그의 말을 떠올렸다. 적어도 여자에 관해서는 그보다 제이드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지금 그의 행동은 거의 희롱에 가깝지만 이안은 두 개의 차이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안은 케이트의 차가운 태도를 무너트리고 싶어 하는 이유는 모르고 있다. 그냥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케이트는 그가 불쑥 내미는 쟁반을 황망한 눈으로 쳐다봤다. 사람을 있는 대로 희롱할 때는 언제도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깨끗하게 비운 쟁반을 그녀에게 내밀고 있었다. 가져가라는 건가? 그녀가 조심스럽게 쟁반을 받아들자 이안이 문을 열었다. 볼일 다 봤으니 나가라는 거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아직도 목으로 미끄러져 넘어간 얼음 때문에 목안이 간질간질했다. 이안은 케이트를 내보내고 바로 샤워실로 들어갔다. 제이드가 봤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테지만 이안은 하녀를 건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편 방 밖으로 쫓겨난 케이트는 믿을 수 없어서 멍하니 서 있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이거 혹시 소문에나 듣던 나쁜 주인에게 농락당한 하녀가 된 건가? 별의별 생각이 떠올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대체 저 남자 정체가 뭐지? 케이트는 쟁반을 들고 비틀비틀 주방으로 내려갔다. 그 사이에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는지 휴게실은 텅 비어있었다. 주방 안에서만 로렐라이가 멍하니 서서 커다란 솥을 주걱으로 젖고 있었다. “...그냥 둬. 설거지는 아침에 할게.” “...응.” 똑같이 멍한 얼굴로 대답한 케이트는 멍하니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로렐라이는 멍한 표정으로 케이트를 쳐다보다가 다시 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 지금 그 남자한테 희롱당한 거야?” 케이트는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는 것도, 로렐라이가 들었다는 것도 모르고 중얼거렸다. “미친 거 아냐?” “...누가?” “으아아악!” 설거지를 마치고 수도꼭지를 잠그며 중얼거리는 데 어느샌가 다가온 로렐라이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누가 미쳤다는 건데?” “어? 아니...” 차마 이안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케이트는 결국 최후의 수단을 선택했다. “저거 넘치는 거 아냐?” “...어?” 반 박자 느리게 고개를 돌린 로렐라이의 눈에 멀쩡한 솥이 들어왔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케이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작품 후기 ============================ 댓글 열개달리면 올린다고 할까, 11시에 올린다고 할까 고민하다가 지난 편에 그냥 올렸네요. 그리고 전 또 졸았다는 불편한 진실... 많이 안기다리셨죠? 이번편은 여러가지로 임팩트가 크므로 더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00049 3. 하녀와 도련님의 로맨스 =========================================================================                            다음 날 아침, 로엔 백작 부인이 부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이안의 방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는 보장은 없다. 혹시라도 이안이 무슨 말을 한 걸까? 혹은 로렐라이가? 불안한 마음을 갖고 백작 부인의 방으로 들어간 케이트를 맞이한 건 백작 부인과 그녀의 몸종이었다. “어서 오렴, 케이트.” 실라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케이트를 맞았다. 처음 봤을 때보다 조금 마른 게 보였다. 수도가 맞지 않는 걸까. 아니면 전에 일하던 저택에서 힘든 일을 겪었다더니 그 일이 그녀를 누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초록색의 눈동자가 불안감으로 흐려진 게 보여서 실라는 약간 가슴이 아팠다. 그녀를 오랜 시간 돌봐 온 실비아는 묻지 않아도 자신이 키운 여주인이 이 고아 하녀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이 많고 선량한 분이다. 그래서 실비아는 조금 독하게 마음먹고 케이트를 지켜보기로 결심했다. 실라는 현명한 여자지만 부모가 없는 아이에게 마음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그런 단점을 누가 어떻게 파고들지 모르는 일이다. 저 예쁘장한 하녀도 그렇다. 어떻게 냉정하고 무심한 작은 도련님을 구워삶았는지 모르겠지만 타운하우스의 하녀로 들어왔다. 흥.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남자도 미인에게는 약한 모양이지. 실비아는 속으로 코웃음 치며 생각했다. 그녀는 이안을 마음에 들어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것은 그가 여섯 살, 로엔 가의 저택에 찾아와 로엔 백작의 사생아라고 말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하지 않는 감정이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불안해하는 표정이 달리 목소리는 당당했다. 곧은 자세와 주저하지 않는 태도가 시골에서 아무렇게나 자란 여자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흠. 실라는 맞은편의 의자를 권하며 자리에 앉았다. 사실 타운하우스는 일손이 부족하지 않다. 손질된 고기와 가공된 버터를 파는 수도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주방은 두 명으로도 충분하고 간혹 설거지만 도와주면 될 뿐이다. 케이트가 오기 전까지도 충분했다. 그런데도 실라가 굳이 그녀를 하녀로 고용한 것은 이안이 요청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안이 요청한 건 아니지. 그녀의 아들은 그저 ‘사건의 피해자를 데리고 왔다.’고 말했을 뿐이다. 아들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 것도 처음이거니와 피해자를 데리고 왔다는 게, 그것도 여성 피해자라는 게 실라는 놀라웠다. 그래서 일자리를 알아볼 것 없이 그녀가 고용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음, 실은 네가 글을 읽고 쓸 줄 안다고 들었거든.” 그녀가 손을 내밀자 실비아가 재빨리 테이블 위에서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다른 사람들은 초대장을 인쇄사에 주문하는 모양이다만, 나는 가능하면 자필로 써왔어. 그런데 최근 내 손힘이 약해져서.” 그렇게 말하며 실라는 종이를 케이트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부르는 대로 써보렴.” ..이건 또 무슨 일이지?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로엔 백작 부인을 쳐다봤다. 화사한 금발에 푸른 눈. 호리호리한 몸매에 우아한 몸짓. 이것이 바로 귀부인의 표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여자였다. 케이트는 자세를 바로 하고 그녀가 부르는 대로 쓰기 시작했다. 문구는 간단하고 솔직했다. 모월 모일 우리 집에서 파티하니까 오세요. 라는 요지였다. 그녀는 다 쓴 종이 위에 몇 번 입으로 후후 바람을 분 뒤 팔랑팔랑 흔들고 다소곳하게 백작 부인에게 내밀었다. “흠.” 기대 이상으로 훌륭한 솜씨였다. 뮈엘라는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귀족 대부분은 대필자를 곁에 두고 있는 실정이었다. 심지어는 읽고 쓸 줄 모르는 귀족도 많아 대필자는 읽어주는 일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케이트의 글씨는 당장 어느 귀부인의 대필자가 되어도 손색없는 솜씨였다. 여성 특유의 세밀하고 유려한 글씨가 종이 위에 마치 수를 놓은 것처럼 보였다. “누구에게 배운 거니?” 실라는 실비아에게 종이를 넘기며 물었다.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실비아의 눈에도 케이트의 글씨는 훌륭했다. 화려하게 꾸민 글씨는 아니었지만 단정한 것이 실라의 대필로 딱 맞아 떨어졌다. “...부모님께 배웠습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케이트는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실비아가 이 녀석이 어디서? 라는 표정으로 눈꼬리를 치켜세웠지만 실라가 먼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친척은 없고?” “찾고 있는 중입니다.” 흠. 이번에는 실라도 입을 다물었다. 스승을 따로 둔 게 아니라 부모에게 배운 것이라면 부모도 어느 정도 학식이 있다는 말이다. 그 말은 케이트가 모르는 그녀의 집안이 여염집은 아니라는 말도 된다. 귀족이 아닌 이상 일반 사람이 부부 둘 다 글을 쓸 줄 안다는 건 쉽지 않다. 그것도 이렇게 훌륭한 글씨체를 갖도록 아이를 가르친다는 건 더더욱 어렵다. 최소한 상인. 어쩌면 지식인층일지도 모르겠다. 전자가 더 가능성이 높겠지. 상인이라면 글씨체를 예쁘게 가다듬지 않겠지만. 실라는 가볍게 한숨 쉬며 생각했다. 뮈엘라에서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다. 인정받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이 뭐지?” “계단과 복도 청소를 맡고 있습니다.” 청소 중에서도 티가 나지 않으면서 힘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 실라가 실비아를 쳐다보자 그녀는 알겠다는 듯 끄덕하더니 방 밖으로 나갔다. “실비아를 통해 하녀 장에게 널 잠시 빌려달라고 말하마. 오늘부터 내 일 좀 도와다오.” “초대장 쓰는 일 말씀이신가요?” “그것 말고도 다른 일도.” “다른 일이라면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 텐데요.” 실라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녀가 원하는 건 지금의 초대장을 쓰는 단기적인 게 아니었다. 좀 더 찬찬히 지켜보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손힘이 떨어져 하루에 편지 두, 세 장 만 써도 손이 떨리던 차였기 때문에 비서를 구할 생각이었는데 아들이 읽고 쓸 줄 아는 예쁘장한 하녀를 데려온 것이다. 일을 시켜보고 잘하면 그대로 비서로 쓰고, 못하면 다시 하녀로 돌려보내면 된다. 케이트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잘하면 하녀에서 귀부인의 비서로 올라가는 것이고 못한다 해도 잠시 더 쉬운 일을 더 많은 보수를 받고 일한 것뿐이다. 그래서 실라는 케이트가 바로 하겠다고 할 줄 알았다. “내 일을 도와주는 건 싫으니?” “...그건 아니지만.”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앤처럼 자신의 경력을 쌓아나갈 수 있다. 평생 하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건 하녀 장을 노릴 때의 이야기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이 수도에 언제까지 있게 될지 몰랐다. 언제 가족을 찾아 그들을 만나러 움직일지 알 수 없다. 혹, 찾지 못한다 해도 그녀는 수도에서 살 생각은 없었다. 너무 번잡하고 부산스러웠다. 무엇보다 이안의 곁이라는 게 싫었다. 그를 생각한 순간 분노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뺨이 붉어지고 초록색 눈동자가 끝으로 갈수록 금색으로 변했지만 고개를 숙인 덕에 로엔 백작 부인은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얼마나 쉬워 보였으면 그런 짓을 했을까. 뿌리치지 못한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무심한 얼굴로 자신을 가지고 놀던 이안도 싫었다. 차가운 얼굴만큼이나 차가운 얼음의 감촉이 아직도 입안에 맴도는 것 같다. 가족을 찾고 있다고 했지. 실라는 문득 그 사실을 떠올렸다. “가족을 찾으면 떠날 생각이구나.” “...죄송합니다.” 성실한 타입이다. 책임감이 뭔지도 알고 있다. 실라는 슬그머니 웃었다. 마음에 들었다. 예쁘장하고 머리 좋은 계집들은 책임감이라는 게 별로 없다. 기회를 잡으면 재빨리 날아가 버린다. 뒤처리할 생각도 없이. “그럼 그전까지는 도와줄 수 있겠지.” 실라의 단언에 케이트는 고개를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떠날 수 있지만 고용주 측에서는 가능한 한 오래 일할 사람을 원한다. 그래서 케이트는 가족을 찾으면 가족에게 갈 거라는 것을, 찾지 못해도 일 년 후에는 수도를 떠날 거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약간 죄책감이 들었지만 로엔 백작 가라면 그녀를 대신할 하녀를 찾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로엔 백작 부인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나서도 아랑곳없었다. “당장 지금부터 시작하자. 내일까지는 부치고 싶거든.” “아, 네.” 어쩐지 아들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모양이야. 케이트는 펜을 집어 들고 그녀가 부르는 대로 적으며 생각했다. 자기 마음대로 밀어붙이는 게.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게 싫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덥네요... ...깜짝이야... 대댓글 달려다가 잠이 확 달아났네요. 여러분, 저 댓글 수 뭐죠? 네? 제가 뭐 잘못한 줄 알았어요;;; 아참, 빙수는 슈퍼의 팥빙수 아이스크림입니다. 거기에 전 바나나우유를 부어먹는데 딸기우유도 괜찮다고 하시네요. 00050 3. 하녀와 도련님의 로맨스 =========================================================================                            너즈 자작의 집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무고하다고 주장했다. 범인이라고 지목한 게 아니라는 카이사의 말에도 그의 얼굴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건 옆에 선 이안의 냉정한 표정 때문이었을 테지만 두 사람 다 이안때문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한스 너즈 경이 아니라면 빚쟁이일 수도 있습니다.” 목소리에 급박함이 담겨 있었다. 첫날 주인의 치부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그야 자신이 범인으로 몰린다고 생각한다면 누구라도 그렇겠지. 카이사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아직 한스 너즈 경이 용의자에서 빠진 게 아니다. 그의 말대로 최근 두 달 정도 너즈 자작이 손을 벌리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그전까지 행해진 자작의 행동에 너즈 경이 불만을 품고 있던 건 사실이다. 그게 어떤 이유로 터져 나와 자작을 살해하게 만들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집사 역시 마찬가지. 그와 이안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너즈 자작 가는 사용인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전부 최소 두, 세 살 정도의 임금 체납 끝에 그만두고 떠나갔다. 집사는 그 와중에 유일하게 자작 가에 남은 사람이었다. 이런 귀족 집안에서 집사는 일개 사용인이 아니다. 집안 자체에 묶여 버리는 경우가 많다. 집사가 노예라거나 그런 의미가 아니라 집안의 대소사는 물론 재정적인 부분까지 관여하다 보니 일종의 가족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세상에 돈 받는 가족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는 힐끔 이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퍼렇게 질린 집사의 얼굴과 태도를 보고도 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저 일상적인 것을 보는 것처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이 남자가 지금 집사의 기분을 이해하고 있기는 할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몇 시간 전 어쩌면 임금을 받지 못하고 그만둔 사용인들의 불만일 지도 모른다고 의견을 내봤는데 바로 부정당했다. 냉정할 정도로 딱 잘라서 이안은 ‘그랬다면 굳이 자작의 손을 자르고 하나를 가져갈 귀찮은 짓을 할 리가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처음엔 화가 났지만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는 카이사도 이안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고작 한, 두 달의 임금을 받지 못했다고 칼로 그어 댈 리는 없다. 자작의 시체는 증오로 불타는 자가 범인이라는 걸 확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가지.” 이안이 몸을 돌리자 카이사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집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노인을 저 정도로 몰아세우고도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독한 놈 같으니. 그는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뭔가 알아낸 거라도?” 이안이 힐끔 쳐다봤다. 마치 카이사가 딴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목덜미에 땀이 솟아올랐다. “자작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지 않으냐고 물었다. 시체의 상처는 누가 봐도 감정이 실려 있었으니까.” 그래, 자작의 시체는 끔찍하다고 할 정도였다. 더워서 부패가 시작된 탓에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깊숙이 들어간 자상만 스무 군데가 넘는다고 했다. “그래서?” “빚이 문제일 수 있다는데.” 집사는 지난번과 말이 달라졌다. 약간 과하긴 하지만 문제없는 유흥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위협을 당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말이 변한다. 마음을 바꾸고 태도를 뒤집는다. 이안은 그런 사람들의 태도에 익숙했다. 한때는 그게 싫었다가 우스워졌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는 카이사와 함께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그가 다음 행선지를 말하자 카이사의 눈이 커졌다. 마차가 덜그럭대며 굴러가기 시작했다. “검투장?” “음.” 카이사는 작은 창문에 달린 커튼을 쳐서 햇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막았다. 남자 둘이 타니 선선했던 마차 안도 순식간에 후끈해졌다. “검투장의 도박에 손을 댔다고 한다.” 검투장이라니. 카이사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뮈엘라의 검투장은 합법이다. 힘의 나라는 더 큰 힘을 끌어모은다. 나라 안에서뿐 아니라 밖에서도 소문을 듣고 더 강한 자와 겨루기 위해, 배우기 위해 찾아왔다. 하지만 사람이 늘어나는 데에 비해 일자리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았고 그들은 한낮 깡패로 전락했다. 골칫거리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돈벌이로 사용하기로 한 것은 어느 천재적인 상인이었다. 그는 검투장을 세우고 귀족과 왕에게 검투장의 장점을 열거해 설득시켰다. 그 와중에 사례가 오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상인의 예상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졌다. 자신의 수준을 알아보고 싶었던 자들, 자신이 꽤 강하다 생각하는 자들, 돈이 필요한 자들은 검투장으로 몰려들었다. 그에 따라 강한 자와 겨루고 싶다는 자들도 몰렸다. 그래서 검투장의 검투사 중에 노예는 거의 없다. 검투장에서 싸우는 노예는 스스로 검투장에서 돈을 벌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겠다는 결심을 한 자들이다. 초반 약간의 사고는 검투장을 좀 더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 했다. 나라에서는 검투장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자 재빨리 몇 가지 규칙을 만들었다. 이 규칙은 검투사들이 싸우는 데 있어서 철저하게 지켜진다. 사람을 죽이는 것 금지. 신체를 절단하는 행위도 금지. 싸우려는 의지가 없는 자에게 공격하는 것도 금지. 타의로 검투장에 세우는 것도 금지. 상처가 날 경우 바로 대기하고 있던 의사에게 치료를 받게 한다. 의사가 상시대기하고 있지 않은 검투장은 허가증을 박탈당한다. 누군가 다치거나 죽을 경우 상대 검투사뿐 아니라 검투장을 소유한 사람 역시 처벌을 받는다. 대부분 그리 높지 않은 입장료를 받지만 검투장의 수익은 승패에 돈을 거는 것에서 나온다. 경마와 마찬가지로 합법인 것이다. 이런 검투장의 체계적인 관리와 합법화는 그것을 뮈엘라의 명물로 만들었다. 싸우려는 자뿐 아니라 좀 더 격렬하고 자극적인 볼거리를 원하는 사람들이 국내외에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국고로 차곡차곡 저장되었다. 인간의 흥미에 국가라는 힘이 더해지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증거다. 씁쓸한 시대다. 카이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검투장으로 향하는 동안 마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제이드는 리코와 함께 검투장을 나서던 차였다. 경기라는 게 매일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오늘은 조용했다. 관리하는 사람만 나와서 청소하고 부서진 물건을 수리하고 있었다. “저거 누구지?” 수사관의 마차가 문 앞에 서자 리코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검투장 밖은 햇빛이 쨍쨍하게 내리쬐고 있어 제이드도 처음엔 마차에서 내리는 두 사람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이안인데? 그럼 옆에 있는 건 슈미트라는 말이군.” “저 녀석들 수사하는 게 뭐였지?” 제이드는 리코의 질문에 대답 없이 이안에게 다가갔다. 그와 리코는 검투장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더워서 헥헥 대고 있는 데 반해 이안과 카이사는 마차 안에 있었다 해도 더운 도로 위를 달려왔음에도 땀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지독한 녀석들이로고. 리코는 서늘한 얼굴의 카이사와 이안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이안이야 원래 인간같지 않은 녀석이라지만 카이사는 어깨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에도 멀쩡해 보였다. 리코였다면 벌써 자르거나 묶었을 것이다. 두 팀의 옷차림 역시 확연히 차이 나서 가장 위의 단추까지 꼼꼼하게 잠근 카이사, 이안 팀과 달리 리코와 제이드는 수수하고 화려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단추 두 개를 풀고 소매를 걷어 올린 상태였다. “여어! 무슨 일이야?” 제이드의 얼굴을 본 이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러는 너는 무슨 일이냐. 라는 의미에 제이드는 씩 웃었다. “너부터 말해주면 알려주지.” “...” 이안은 제이드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왓, 잠깐. 잠깐, 잠깐.” 그럼 그렇지. 리코는 슬쩍 웃었다. 이안과 제이드의 사이는 언제 봐도 신기하면서 우습다. 이안의 저런 태도에 화 한번 안내는 제이드도 신기하지만 늘 저렇게 무반응으로 일삼는 이안도 신기했다. ============================ 작품 후기 ============================ 아, 어제부터 진짜 안좋은 일만 생기네요. 오늘 오탈자 잡고 올려야지~ 하는 찰나에 컴퓨터가 멈췄습니다. ...헐 백업을 해두긴 했는데 문제는 오탈자를 안잡은 버전이라는 거... 이거 어째야 하나 하고 몇번 재부팅 했으나 컴퓨터는 눈뜰 기미가 없고... 설마 이대로 사망하는 건가...설마!! 라며 이 늦은 밤에 청소기 가져다가 급한대로 먼지 빨아들이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파워버튼을 누르자 기적처럼 생환하신 컴퓨터님.... 여러분은 지금 기적을 보고 계신겁니다. 00051 3. 하녀와 도련님의 로맨스 =========================================================================                            날은 어마어마하게 더웠다. 케이트는 연신 손부채 질을 하는 앤을 힐끔 쳐다보고 웃었다. “마차를 탈 걸 그랬나?” “걸어서 이십 분 거리를 무슨 마차야. 사치야, 사치.” 그렇게 말하면서도 앤의 시선은 지나가는 마차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고작 이십 분 가면서 마차를 부르는 건 확실히 앤과 케이트에게는 사치다. 하지만 이렇게 더워 버리면 그게 과연 사치인 것일까? 라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아, 후딱 끝내고 차 마시러 가자.” “그거 마차값이랑 생각하면 비슷하지 않아? 그것도 결국 사치잖아.” “전혀 비슷하지 않아. 어차피 마차를 탔어도 차는 마셨을 테니까.” 아, 그래. 케이트는 쓰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앤의 행동도 이해가 된다. 전에 살던 마을은 작은 마을이었다. 찻집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건 여관을 겸하는 작은 주점이었기 때문에 남의 손으로 우려낸 차나 스콘 같은 건 친구의 집에 손님으로 가야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작은 마을에서 하녀로 일하던 두 사람이 손님으로 갈만한 친구가 있을 리 없으니 두 사람에게는 점원이 우려내서 날라다 주는 차와 스콘이 있는 찻집이라는 것은 상당히 신기한 것에 속했다. “그러니까 난 꼭 차를 마실 거야. 거기에 케이크도!” “그래, 그래. 두 개 먹자.” 앤의 말에 웃으며 동조하면서도 케이트는 뭔가 꺼림칙한 느낌을 버릴 수 없었다. 나는 왜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케이트는 우체국 계단을 오르며 미간을 찡그렸다. 주점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을 보고 사치를 부린다고 하던가? 그렇지 않다. 주점이라는 건 필수불가결한 가게 수준이다. 알라나데일처럼 작은 마을에도 주점은 있다. 왜냐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하루의 회포를 풀어낼 장소가 필요하니까. 그렇다면 술을 마시지 않거나 마시지 못하는 케이트같은 여자들은 어떨까. 그녀들은 주점에 갈 수 없다. 아니, 간다고 해도 물 한 잔, 우유 한 잔 시켜놓고 앉아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쪽이 더 사치가 아닌가? 쓸모없다는 점에서는. 불현듯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의 나라라는 건 그만큼 힘이 강한 쪽이 유리하는 것이다. 용병들은 하루 훈련을, 일과를 마치고 찻집에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찻집은 약한 자들이 가는 것인가? 약한 자들이 앉아서 음료를 마시는 것 자체가 사치가 되는 것인가? 머리가 멍해서 케이트는 더 이상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강한 자. 자연스럽게 그것은 이안에게 연결되었다. 이안은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했다. 그때도 그녀의 머릿속에 들었던 생각은 이 장면을 보면 치도곤을 당하는 건 나겠지. 였다. 이안이 덮친 것인데 그랬다. 그건 그녀가 약해서 그런 것일까. “어떻게 오셨습니까?” 우체국 직원의 말에 반사적으로 걸어왔습니다. 라고 말하려던 케이트는 너무 더운 나머지 정신이 멍해진 것을 깨달았다. “편지를 보내려고요.” “일반배달과 긴급배달이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긴급배달? 앤은 재빨리 긴급배달의 가격을 묻고는 실망했다. 내일 오후까지 배달된다고는 하지만 너무 비싸다. “언제까지 보내야 하는데?” “담당자가 이번 주 안에 받아야 해.” 이번 주면 이제 삼 일 남았다. 그때 두 사람의 대화에 직원이 끼어들었다. “혹시 요리 대회 신청서인가요?” “아, 네.” “요리 대회 신청서면 긴급으로 보내는 게 좋을 거예요. 지금 우편 량이 많아서 일주일쯤 걸릴 수 있거든요.” 히잉. 앤은 울상을 지었다. 좀 일찍 보낼걸. 너무 바빠서 잊어버렸다. “아, 그럼 전부 긴급으로 보내주세요.” 케이트는 자신의 편지봉투를 올리며 말했다. 어? 앤의 얼굴이 그녀에게 향했다. 케이트의 편지는 전부 로엔 백작 부인의 초대장이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긴급배달로 보내라는 말을 듣고 왔던 것이다. 금액은 로엔 백작 가에 달아주세요. 케이트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지갑을 꺼냈다. “네 신청서를 보내는 우편료는 내가 좀 보태줄게. 그러면 되지?” “정말?” 그 정도야, 뭐. 찻집에서 먹기로 한 케이크를 포기하면 된다. 차가운 홍차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급료 받으면 꼭 갚을게! 앤이 그렇게 외쳤다. 픽 웃으며 돈을 꺼내던 케이트의 시선이 신이 난 앤에서 옆에 선 여자에게 향했다. 처음엔 무심히 지나치려 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여자는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마치 울음을 참는 것처럼. 모자를 눌러 쓰고 있어 단순히 피곤해 보인다고 생각한 얼굴의 반쪽이 퍼렇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앤도 그녀의 얼굴을 본 다음이었다. “호건 가의 하녀야.” 찻집에 마주 앉아서 차가운 홍차를 시키자마자 앤은 대뜸 그렇게 말했다. “호건 가?” 그건 어느 귀족이냐고 묻기 전에 앤이 재빨리 대답했다. “호건 가를 모른다고 하진 말아줘. 호건 상회의 그 호건 가잖아.” 모른다. 케이트가 고개를 젓자 앤은 입을 딱 벌렸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니?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설명했다. “호건 군수(軍需), 호건 무역 못 들어 봤어? 웬만한 귀족들도 벌벌 긴다는,” 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주위를 살폈다. 때마침 직원이 차와 케이크를 가지고 돌아왔다. 여기까지 왔는데 케이크 하나 안 먹는 건 아쉽다며 결국 앤이 약간 부담을 지고 시켰던 것이다. 그녀는 직원이 자리를 뜨자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나라보다 더 부자라는 말이 있어. 호건 상회의 허가 없이는 수도에 가게를 낼 수 없다는 말도 있고. 거상이라는 말도 부족하지.” “그 정도로 부잔데 귀족이 아냐?” “응. 귀족은 아냐. 귀족이라고 다 잘사는 건 아니잖아.” 그렇군. 케이트는 차가운 홍차를 한 모금 넘기며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는 앤이 더 잘 알 것이다. 식당에서 일하니 들리는 소문도 많을 것이고 사람들의 돈 씀씀이로 그들의 재정상태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며칠 전에 시끄러웠는데 결국 떠나는 모양이네.” “우체국에서 본 여자?” “응.” 앤은 케이크에 포크를 꽂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 호건 가의 하녀인데 도련님 눈에 든거지.” “호건 가의 도련님이라면 그 아들?” “아니, 아냐. 손자.” 비스마르크 호건. 맨손으로 지금의 호건 가를 일으킨 남자. 앤은 간단하게 그에 대해 들리는 풍문을 이야기했다. 악착같이 벌어서 스무 살에 자기 가게를 차린 그는 무인이 많은 뮈엘라의 특성상 좋은 무기를 판매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걸 점점 키워 군수사업으로 발전시켰고 뮈엘라의 무기를 국내외를 넘나들며 수출입하는 무역사업까지 세웠다. 뮈엘라의 모든 사람의 돈을 합친 것보다 돈이 많다는 말이 있다. “문제는 자식 복이 없대. 부인은 막내딸을 낳고 죽었는데 그 막내딸과 둘째 아들은 가출했다지. 첫째 아들은 죽었고.” 콩가루 집안이다.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럼 도련님은?” “죽은 첫째 아들의 아들. 그러니까 비스마르크 호건의 손자인 거지.” 흐음. 그다지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케이트는 입을 다물었다. 자식이 셋인데 남은 건 손자 하나. 어떻게 보면 차라리 운이 좋은 것일 수도 있다. 재산이 그렇게 많다면 분명 자식들이 재산 싸움을 했을 테니까. “그런데 며칠 전에 소문이 쫙 난 거야.” 앤은 그제야 재미있는 이야기가 시작된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 호건 가의 상속자가 왠 하녀랑 사귄다는 거지.” “허.” 그것 참 소문 거리다. “그다음에 손자의 엄마...그러니까 호건씨의 며느리가 소문을 들었어. 그 하녀를 찾아내라고 난리난리를 쳤다고 하더라고.” 케이트는 멍하니 잠깐 스쳐 지나간 여자의 퍼렇게 물든 얼굴을 떠올렸다. 그 일로 치도곤을 당한 걸까. 순식간에 케이크가 사라졌다. 앤은 우물우물 케이크를 먹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문제는 그 호건 가의 손자가 그 여자랑 결혼할 생각은 없었던 거지.” “그게 잘못은 아니잖아.” “뭐, 그렇지.” 냉정한 케이트의 말에 앤은 쓰게 웃었다. 순진한 태도에 비해 그녀는 묘하게 현실적인 구석이 있다. “반드시 결혼할 생각을 하면서 사귀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런데 내 말은 호건 가의 상속자가 그 여자를 갖고 놀았다는 데에 있어.” “그건 상대적인 거 아냐? 어떻게 알아?” 케이트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연인 관계의 일은 두 사람만 아는 것이다. 너도 먹어. 혼자 케이크를 먹던 앤은 사용하지 않은 포크를 들어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음, 어머니한테서 연인을 감싸주지 않았대.” “어, 그럼...?” “일하는 집의 도련님을 꼬신 나쁜 년으로 몰린 거지.” 허어. 입맛이 싹 달아났다. 문득 냉정한 이안의 얼굴이 떠올라 케이트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입술에 닿던 감촉이, 등에서부터 감싸 안던 두 팔이 생생하다. 하녀와 도련님의 로맨스. 그것 참 로맨틱하기도 하다. 냉소적인 마음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그래놓고 지금은 귀족들 중 사이에서 여자를 고르고 있다지.”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다. 당장은 손에 닿는 하녀에게 마음이 끌릴 수는 있어도 더 좋은 조건의 여자가 나타나면 잘못 쓴 편지처럼 구겨서 버려버린다. 이건 남자든 여자든 관계없다. 하지만 문제는 누구나 이기적인 상황에서 피해자는 항상 여자가 된다는 점이다. 도련님을 유혹한 하녀라는 꼬리표를 다는 것도, 일꾼에게 낚인 생각 없는 아가씨라는 꼬리표를 다는 것도 사양이다. “그 정도로 부자면 평민이라고 해도 귀족과 결혼하는구나.” “그 정도 부자면 귀족 쪽에서 손잡으려고 애쓸걸?” 뮈엘라는 힘의 나라다. 하지만 그 힘을 갈고 닦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무기와 방어 구를 사는 데에는, 특히 좋은 제품을 사기 위해선 더더욱 돈이 필요하다. “너 설마 이안이랑...” 입술을 깨문 케이트의 태도가 이상해 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냐, 그런 거.” 케이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안과 상관없어. 그냥...그 여자가 불쌍해서 그래.” “응, 그렇지.” 두 사람의 테이블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울음을 참는 것처럼 꼭 깨문 입술. 얼굴 절반을 덮던 퍼런 멍. 잠시 마음을 설레게 했던 달콤한 연애는 그녀의 영혼을 할퀴고 지나간 것처럼 보였다. ============================ 작품 후기 ============================ 아, 졸려.... 오늘도 졸립니다. 왜 늘 졸린지 모르겠네요. 컴퓨터님은 오늘도 무사하십니다. 잠시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주인공이 케이튼데 왤케 케이트는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죠? ...안되겠어... 00052 4. 또다른 시체 =========================================================================                            갑자기 우당탕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여자의 놀란 비명이 들렸다. 꺅! 하는 그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몰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남자의 외침에 직원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보였다. “죄, 죄송합니다.” 직원은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며 남자의 바지에 묻은 홍차를 닦아내려 애썼다. 다행히 차가운 홍차였는지 남자는 화상을 입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남자는 순간 욱했던 숨을 가라앉혔다. 직원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손이 벌벌 떨리는 게 그가 누군지 아는 모양이었다. 후우. 그는 손을 저어 직원을 멈추려 했지만 당황한 모양인지 여자는 계속해서 행주로 그의 바지를 닦아 내려 애썼다. “어, 여기서 보네.” “...누군데?” 앤이 속삭였다. 호건 가의 상속자. 저 남자가?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을 남자치고는 그다지 귀티가 흐르지 않았다. 분명 비싸고 고급스러운 옷일 텐데 그가 입으니 그다지 태가 나지 않았다. 금발 머리였는데 너무 가늘고 옅은 색깔 탓인지 언뜻 보면 대머리처럼 보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됐어. 괜찮으니 가봐.” “정말 죄송합니다...흑...” 남자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다는 듯 손짓했지만 여전히 직원은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별로 부자처럼 안 보이는데.” 앤은 후계자의 비서가 직원을 달래서 데려가는 걸 보다가 케이트의 말에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 말이 맞다. 앤도 처음 식당에 온 남자를 봤을 때 믿지 못했던 것이다. 좀 그렇지? 두 사람은 킥킥대며 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동이 정리되고 있었다. “어? 튄 거야?” 앤은 케이트의 치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랫단에 작게 홍차 얼룩이 생겨 있었다. 치마에만 튀는 바람에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 그러네.” 홍차 얼룩이 지워지던가? 케이트가 멍하니 생각하며 얼룩진 곳을 만졌다. 여차하면 이 부분에 장식이라도 달면 된다. 몇 벌 없는 외출복을 얼룩이 안 지워진다고 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때 남자가 다가와서 말했다.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군요. 사과 드리죠.” “...네?” 호건 가의 후계자였다. 그는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씩 웃어 보였다. 멋있는 척하려는 모양인데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케이트가 멍하니 그를 쳐다보자 남자의 눈이 반짝였다. “우리, 혹시 어디서 만난 적 없나요?” 이거 혹시 헌팅인가? 어느 잡지에선가 남자들이 이런 식으로 여자들에게 말을 건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한 번도 겪어 본 적은 없지만. 어라? 그러고 보니 그 잡지가 언제 거였지? 케이트가 상당히 오래된 잡지였다는 걸 떠올렸을 때 남자의 비서가 다가왔다. “도련님, 가시죠.” “아, 자네 그거 있지?” “...네?” “아, 그거 말야. 그거.” 대화가 그다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비서는 뭔지 몰라 손수건이요? 하고 말했고 남자는 짜증을 내며 그거 말고, 그거! 라고 말했다. 대체 그거가 뭐란 말인가. 주변의 모든 사람이 혼돈에 빠지려는 찰나 비서가 땀을 흘리며 품 안에서 봉투를 꺼냈다. “이, 이거 말입니까?” “그래. 그거.” 남자는 날카로운 태도로 비서에게서 봉투를 낚아채더니 케이트에게 내밀었다. “레이디의 옷을 망친 것에 대한 작은 보상입니다.” 뭐래니? 케이트가 입을 딱 벌리는 사이 남자는 훗하고 웃으며 봉투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 뒤돌아서서 가버렸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앤은 배를 잡고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미치겠다. 푸하하하.” “...그만 웃어.” “넌 그게 안 웃겼어?” 여기서 안 웃겼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앤은 눈물을 닦으며 가게를 나서는 케이트를 따라잡았다. “열어봐, 뭐가 들었나.” “부자라며. 돈이 들었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케이트도 궁금하던 차였다. 작은 보상은 대체 얼말까? 속물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케이트는 약간의 기대감을 안고 봉투를 열었다. 묵직하지 않은 걸로 보아 수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 든 건 하얀 수표가 아니라 칙칙한 색의 표 두 장이었다. 이게 뭐지? 그녀가 표를 꺼내는 것을 기대 가득한 얼굴로 보던 앤은 금세 실망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에이, 돈이 아니잖아.” 그러게 말이다. 거무스름한 색의 표는 하얀 글씨로 작게 날짜와 장소가 적혀 있었다. 종이의 종류나 형태는 표인데 무슨 용도로 쓰는 표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잘못 줬나 봐.” 그거 그거 그러더니. 앤이 다시 한 번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 검투장에서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그건 이안 팀이나 제이드 팀이나 똑같았다. 너즈 자작은 빚이 있기는 했지만 대단치 않았다. 차 한 잔 값 정도였기 때문에 위협을 한 적도 없다고 했다. “너즈 자작이라고? 그 도박광?” 리코의 말에 이안이 흥미 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입을 연 건 카이사였다. “도박광이라고?” “뭐, 유명하지. 제이드도 알지 않나?” 제이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나야 여기저기에서 소문을 잘 들으니까. 도박으로 전 재산을 날린 귀족 나리로 유명하지. 그렇게 혼나고도 도박을 못 끊어서 그 집 친척들이 아주 곤란하다더군. 뭐, 그런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느냐만.” 너즈 경의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 정도로 유명한 남자였나. 유산에만 집중했던 두 사람은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였나...” 허탈하다는 카이사의 목소리에 리코가 위로하듯 말했다. “이런 구설수는 관심 없는 사람은 모르게 마련이니까.” 그렇다. 이안이나 카이사나 구설수에는 관심 없는 남자들이다. 흠. 두 사람은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게 두 사람의 성격이긴 하지만 이럴 때는 곤란하다. 구설수라는 건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이안과 카이사 같은 부류의 사람에게는 도통 입을 열려 하질 않는다. 무게감 있는 두 남자 앞에서 가벼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정 그러면 술집이라도 가던가.” 가벼운 제이드의 놀림에 카이사가 그를 한번 노려봤다. 융통성 없는 카이사가 술집에 가서 작부들과 시시덕거릴 수 있을 리 없다. 반면 이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굳이 그가 작부들과 시시덕거리지 않아도 시시덕거리는 제이드가 와서 미주알고주알 다 이야기해주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그런데, 자네들은 검투장에 무슨 일이지?” “어? 아, 그게...” 카이사는 숨기려는 노력도 없이 말을 돌렸다. 리코와 제이드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사건도 검투장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해서.” “자네들 사건이라면...” 고층 거리의 아이들이 사라진 사건일 것이다. 카이사는 고층거리에 대한 인식을 떠올렸다. 은퇴한 창녀, 고아, 마약 중독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마약 중독자들은 구걸하는 거지가 되기 마련이고, 은퇴한 창녀는 돈을 모으지 못했다면 닳고 닳은 몸만큼이나 닳고 닳은 건물 안에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숨을 붙잡고 사는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도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고, 부모가 죽거나 버림받은 아이들이 흘러들어 간다. 그들은 다시 도둑, 사기꾼, 소매치기, 매춘부가 된다. 운이 좋다면 용병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다시 고층거리로 돌아가 생을 마감한다. 그런 곳이다 보니 아이들이 사라진다는 수사요청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라진 아이들이 사실은 학대와 생활고에 못 이겨 가출했다는 건 드문 일도 아니다. 혹은 어쭙잖은 소매치기가 되어 벼르던 치안관에게 잡혀 어딘가의 감옥에 수감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카이사의 생각을 읽었는지 리코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다수의 아이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일은 아무래도 수상하잖아.” 뭐, 수사하기로 결정했다면 더 이상 그가 뭐라 할 일은 아니다. 그는 생각을 멈추고 물었다. “그래서?” “음, 아이들이 죽기 전에 상처가 많이 생겼다는 말을 들어서 혹시 이쪽에 왔던 건가 하고 와 본 건데...” 뒷말은 듣지 않아도 뻔하다. 그들도 아무 소득이 없다는 거겠지. “하지만 검투장에 미성년자가 서는 건 불법 아닌가?” 카이사는 당연한 사실을 지적했다. 성인이 몸에 상처가 많이 생겼다면, 그리고 그 상처가 무기에 의한 것이라면 돈이 궁해서 검투장에 섰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타당하다. 그러나 아이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이들은 자의든 타의든 설 수 없다. 제이드는 순순히 동의했다. “그렇지.” “그럼 왜 온 거지?” “감 같은 거지, 뭐.” 감이라 해도 리코도 동의해야 한다. 그러니 이건 그저 감만으로 일축하기엔 뭔가가 있다는 말이렷다. 하지만 카이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 사람은 조용히 카이사와 이안이 타고 온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사 인승이라고는 하나 건장한 남자 넷이 이 더위에 마차 은에 차곡차곡 쌓여 있어야 한다니 찜통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가장 안쪽에 앉은 이안은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쓸데없는 호승심이 남은 세 남자의 발목을 잡았다. “으아, 더워!” 제이드는 창문을 열고 바람을 들이치게 하려 애썼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남자 넷이 꽉꽉 들어차서야 공기도 흐를 틈이 없어 보인다. “괜히 탄다고 했나.” 리코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슬쩍 웃어 보였다. 카이사는 힐끔 이안의 동태를 살폈다. 다행히 인간 같지 않던 이안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하나 맺혀 있었다. 음. 그는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빌어먹을 녀석들 같으니. 왜 마차를 가져오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니 고층거리를 들렀다가 오는 바람에 그랬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리 수사관이라 해도 그들이 없는 마차가 고층거리에서 무사할 리 없다. 지난번만 해도 귀신같이 바퀴를 빼갔다는 것이다. 결국 카이사는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차라리 밖이 더 시원하겠다!” 시내에 들어서면서 마차의 움직임이 더뎌지자 제이드는 그렇게 소리치며 문을 활짝 열었다. 다행히 마차가 멈춰있던 상태라 굴러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마차 옆을 지나가던 사람이 깜짝 놀라 물러났다. “여기까지 왔으니 난 걸어갈 테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마차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마차 안을 향해 소리쳤다. “이안, 같이 걷자고.” 내가 왜?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린 이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의외일 정도로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가장 안쪽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그가 나가기 위해서는 리코와 카이사가 최대한 무릎을 끌어당겨야 했다. 이안이 나오자마자 지나가던 여자에게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느니 이 더위에도 시들지 않는 미모를 가지고 있다느니 떠들던 제이드는 마차 문을 닫고 외쳤다. “출발하게!” 뭔가 있는 모양이군. 카이사는 창밖으로 사라지는 제이드와 이안을 보고 시선을 리코에게 돌렸다. 리코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뭐지?”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마차가 멀어지자마자 이안은 입을 열었다. 파트너인 리코가 아니라 콕 집어 그를 지목해서 같이 걷자고 한다는 건 그에게 할 말이 있기 때문이리라. “잠깐 술 집에 들릴까 해서.” 이안은 다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술집이라고? 거기서 이야기를 하자는 건가? 제이드는 씩 웃으며 앞장섰다. ============================ 작품 후기 ============================ 지난 화에 제가 넣을지 말지 고민하던 부분이 빠지면서 그대로 올라가는 바람에 내용 상에 이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초반이니 여유있으신 분들은 다시 한 번 확인 부탁드립니다. 맹점이라는게 참 무서운 거라 저는 그게 빠졌다는 인식도 없었네요;;; 지적해주신 두 분 감사드립니다. 아참, 이번 편에 등장한 수표에 대해서. 어차피 판타지기때문에 수표가 이 시대에 존재했느냐 아니냐라는 논쟁 자체가 말도 안되기는 하지만 어쩐지 이런건 조사 해줘고 지나가야 할것 같아서 조사했습니다. 수표는 14~15세기 경 이탈리아의 예금자가 은행에 대하여 사용한 예금지불지시서가 그 기원이라고 합니다. 본문의 수표는 현재의 수표라기 보다는 이 예금지불지시서에 더 가깝습니다. 근대의 수표는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어 영국에서 발달하였는데, 17세기 초부터 암스테르담과 안트베르펜의 금융업이 성하여 예금이 집중되고, 예금자가 수시로 예금을 환급받는 방법으로서 수령서식의 수표가 널리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이상, 네이버 지식인 검색이었습니다. 00053 4. 또다른 시체 =========================================================================                            “이십 년 전부터 장신구를 만들던 장인...말입니까?” 늙은 바텐더는 충분히 깨끗한 컵을 닦으며 말을 흐렸다. 아무래도 그게 습관인 모양이다. 제이드는 의자에 삐뚜름하게 앉아 바텐더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안은 술집 안을 휙 살폈다. 오래된 곳이지만 보수를 잘해놔서 낡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날이 뜨거운 탓에 시원한 맥주를 한 잔씩 하려는 남자들이 자리를 반쯤 채우고 있었다. “글쎄요.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기억이 가물가물하군요.” 그럴 줄 알았다. 제이드는 씩 웃으며 돈을 건넸다. “맥주 두잔 주게.” 맥주 가격치고는 큰돈이다. 바텐더는 돈을 품 안에 넣고 재빨리 맥주 두 잔을 내놨다. 순식간에 잔 외부에 물방울이 송글 송글 맺혔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가 있군요.” “몇 살인데?” “나이 말입니까? 마흔 살쯤 됐을걸요.” “아니, 아니. 그 사람 말고 더 나이 먹은 사람은 없어?” “더 말입니까?” 제이드의 요구에 바텐더는 이상하다는 듯 눈을 치켜뜨더니 다시 컵을 닦기 시작했다. 누가 있으려나.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몇 명 있군요. 두 명은 은퇴했고, 세 명은 아직 일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 이름이랑 가게 주소 좀 알려줘.” “그게 또 가물가물한데....” 바텐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제이드의 손이 올라갔다. 그는 이번에도 돈을 건네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안주가 없네.” 바텐더는 씩 웃으며 안주를 꺼냈다. 기껏 해봐야 익힌 콩이었다. 그는 그 후에 무심하게 다섯 명의 이름과 주소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두 개는 근처니까 지금 가볼까?” 제이드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했다. 케이트의 목걸이를 만든 사람을 찾으려는 것이다. 목걸이만으로 가족을 찾을 수 있겠냐는 케이트의 질문에 제이드는 일단 장인을 찾아야겠다고 대답했다. 케이트의 목걸이는 (정확히 말하면 케이트의 어머니의 목걸이지만)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것이었다. 금줄의 한가운데에 달린 로켓만으로도 손이 많이 간 세공품이지만 로켓 주위를 둘러싸듯 달려있는 보석 역시 가짜가 아니었다. 최소한 상급 품은 될 거라고 호언장담한 제이드는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이 목걸이를 내밀며 이 목걸이의 주인을 아느냐고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목걸이에 욕심을 낼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글쎄요. 그걸 왜 물어보십니까?” 아니나 다를까 세공사는 목걸이를 보이며 만든 사람이냐고 묻는 제이드와 이안을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척 보기에도 무서운 이안이 곁에 있으니 뭔가 안 좋은 일에 휘말릴까 걱정한 것이리라. “아, 그게 사실은 아버지께서 이걸 정부에게 줘버렸지 뭡니까. 어머니 거였는데 말이죠. 완전 난리가 나서 똑같은 걸 만들어서 정부에게 주려고 그럽니다.” 뭣이라?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자신의 아버지를 팔면서 죄책감도 없는지 제이드는 그저 싱글벙글 웃었다. 세공사는 그런 제이드의 얼굴을 보고 옷차림을 보더니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두고 가면 내가 만들어 두죠.” “에헤이, 그건 안 되죠.”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제이드는 손가락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일단 제가 가지고 있겠다고 말씀드려서 가져오긴 했는데요, 매일 밤마다 상대방에게 준건 아닌지 확인하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한번 만들었던 사람을 찾으려는 거예요. 따로따로 건네주면 서로 진짜인 줄 알 테니까요.” 허. 일리 있다. 이안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잔머리 하나는 비상하게 돌아가는 녀석이다. 어쩌면 그게 완전 거짓말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드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이야기가 아닐까. “전혀 아니거든.” 가게를 나온 뒤 제이드는 이안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진짜 아버지 이야기야.” “네 어머니와 정부 사이에서 목걸이 때문에 싸움이 났다는 건가.” “뭐, 정확하게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반지였지만.” 흠. 복잡했겠군. 이안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제이드는 여전히 싱글벙글하며 떠들었다. “그래도 이 목걸이는 고작해야 이, 삼십 년 전이잖아? 그 반지는 무려 백 년 전에 만들어 진 거라서 똑같이 다시 만들 수도 없는 거였다니까. 어휴,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러고는 어때, 궁금하지 않아? 어떻게 해결했는지 어서 물어봐. 라는 눈빛으로 이안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한결같이 관심 없는 이안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반대편 거리에 익숙한 게 보였다. 배를 잡고 웃는 앤과 곤란한 표정의 케이트였다. “어?” 제이드는 두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싱글벙글하며 재빨리 다가갔다. 반면 이안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잠시 걸음을 멈췄다. 케이트는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늘 머리를 묶어 올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풀어 내리고 있었다. 붉은색 머리카락이 강렬한 태양 때문에 거의 금색으로 보였다. 그것은 그녀의 하얀 얼굴과 선명한 녹색의 눈동자를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그는 곧 앤과 케이트를 한 번씩 쳐다보고 지나가는 남자들의 시선을 눈치챘다. “어쩐 일이세요?” 앤이 호들갑스럽게 묻자 제이드는 씩 웃으며 말했다. “발걸음이 향하는 데로 왔더니 아름다운 꽃 두 송이를 발견했군요.” 미친놈. 이안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제이드의 이런 행동에는 익숙했다. 그런데 이번만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안은 고개를 젓고 제이드 옆에 가서 섰다. 고개를 끄덕하는 예의상의 인사도 없었다. 앤은 그를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웃어 보였다. 피해야 할지 아는 척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반면 케이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한번 숙여 보였다. 눈동자가 잠깐 흔들리는 걸 이안은 놓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커다란 벽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댈 뻔 했다. “두 분은 어쩐 일이십니까?” 제이드의 질문에 앤은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누군가 자신을 레이디로 대우하는 게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즐거운 태도였다. “케이트와 잠깐 차를 마셨어요.” “이렇게 훌륭한 요리사를 만족하게 할 수 있는 찻집이 있었나요?” “어머.” 순식간에 앤은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웃었다. 말을 잘하는 남자군. 케이트는 그런 앤의 얼굴을 보며 냉정하게 생각했다. 누구 씨와 전혀 다르다. 이안이 행동이 먼저 나가고 말이 전혀 없는 타입이라면 제이드는 청산유수 같은 언변으로 여자의 마음을 먼저 차지하는 타입이었다. “괜찮은 찻집이었어요. 좀 비싸긴 했지만요.” “이제 돌아가실 건가요?” “그러려고 했는데...” 앤은 그렇게 말하며 케이트를 곁눈질했다. 제이드가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자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왜?” “그 표 말야. 돌려준다며.” “표라니요?” “아, 음...” 케이트는 가방을 뒤졌다. 아무래도 호건 가의 상속자가 잘못 준 게 분명하다. 그러니 돌려줘야 할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돌려줘야 하느냐였다. 그녀는 가방 속에서 표가 든 봉투를 꺼냈다. “아무래도 잘못 준 것 같아요.” “잘못 줬다고요?” 이해하지 못하는 제이드에게 케이트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찻집에서 일어난 약간의 소동과 거기에 따른 작은 피해. 그리고 호건 가의 후계자가 보상이라고 준 봉투. 문득 이안의 시선이 그녀의 치마로 향하는 게 느껴졌지만 케이트는 모르는 척했다. 홍차가 튄 곳이 아랫단이었기 때문에 이안의 시선은 아래로 내려갔다. 마음에 드는 외출복이었는데 괜히 너무 짧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게 무슨 표인지 아세요?” 앤의 질문에 제이드는 찬찬히 표를 살폈다. 거무스름한 색에 하얗고 작은 글씨로 날짜와 장소만 적혀 있었다. 인쇄한 게 아니다. 일일이 손으로 쓴 것이었다. 흠. 제이드의 시선을 따라 이안이 고개를 숙였다. 무슨 공연인지 몰라도 꽤나 비밀스러운 공연인 모양이다. “확실히 아가씨들이 가서는 안 될 쇼일 수도 있겠군요.” 그의 말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앤은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 제이드는 얼굴을 붉히고 헛기침을 한 다음 배신자를 보듯 이안을 쳐다봤다. “아, 뭐? 왜?” ============================ 작품 후기 ============================ 11시 쯤에 한 편 더 올라 갑니다. 00054 4. 또다른 시체 =========================================================================                            두 번째 살인사건이 발생하자 수사관실은 비상이 걸렸다. 귀족 살인일 뿐 아니라 연쇄 살인이었다. 귀족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이 범인일 수도 있다. 최대한 비밀리에 처리하려 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힘 있는 귀족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수사관 장은 쏟아지는 편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에 로엔 가에서는 파티를 열겠다는 초대장까지 보내왔다. 저 성난 귀족들이 이 사건을 수사하는 수사관이 파티를 연다고 하면 뭐라고 할까. 그는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쉬운 일은 이안에게 파티를 중지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이안이 주최하는 파티가 아니다. 로엔 백작 부인이 주최하는 파티다. 로엔 백작이나 이안이나 자신들의 어머니와 사이가 좋은 편에 속한다. 그다음은 이안을 이번 사건에게 빠지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일부 귀족들에게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귀족 연쇄 살인인데 왜 하나뿐인 귀족 수사관을 빠지라고 하느냐. 게다가 정작 그 이안이 순순히 사건에서 빠질지도 미지수였다. 그렇다고 귀족들의 불만을 무시할 자신도 없었다. 슬슬 은퇴를 생각할 때다. 그는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통감했다. 몇 년 전이라면 이런 일 따윈 신경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 “파트론 남작입니다.” 치안관의 말에 카이사는 고개를 숙여 시체를 덮은 천을 걷어내려 했다. 치안관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게 보였다. “음.” 치안 관이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카이사는 천 아래의 모습에 신음을 흘렸다. 너즈 자작의 시체에 비하면 더하면 더했지 부족하지는 않았다. 시체는 상반신은 벗고 있었는데 자잘한 자상으로 피부가 너덜너덜했다. 깊게 들어간 상처가 양팔과 어깨에 난 것으로 보아 파트론 남작이 살아있을 때 이런 짓을 당한 게 분명했다. 얼굴은 양호했다. 적어도 뺨에 그어댄 흔적은 없었다. 다만, 양 귀가 사라지고 없었다. 귀가 없는 얼굴이다 보니 묘하게 허전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발견한 것이다. “얼굴은 손대지 않아서 신원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치안 관은 신원확인을 도와준 하녀가 바로 기절했다는 말은 내뱉지 않고 삼켰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이다. “얼굴은 왜 손대지 않은 거지?” 카이사의 말에 그는 모르겠다고 대답하려다가 그게 자신을 향한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간발의 차로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이안이 다시 천을 들췄다. 파트론 남작은 일찍 발견된 덕에 더 신선한 상태에서 발견되었다. 사람에게도 신선하다는 말을 써도 된다면. 이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신선하다는 말을 써도 된다고 결정했다. 냉혈한과 탱탱하다는 말도 쓰는데 신선하다는 말은 못 쓸게 뭐란 말인가. “너즈 자작의 재산을 노린 건 아닌 모양이군.” 파트론 남작과 너즈 자작의 재산을 동시에 받을 사람이 있다면 모르지만. 이안의 말에 카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생각했던 유산상속이라는 목적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목격자의 진술을 듣기 위해 하녀를 불러왔다. 그녀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숙이고 흐느끼며 들어왔다. “어, 어제, 어제 집에 다녀왔어요. 오늘 오후부터 일을 하기로 했는....했는데...” 울컥하고 하녀는 눈물을 토해냈다. 약간 나이가 든 그 여자는 흐느끼며 더듬더듬 이야기했다. 정확히 말하면 하녀가 아니라 하녀 장이었다. 최근 혼자 남은 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 주말부터 잠시 집에 다녀왔다고 한다. 오후부터 일을 하기로 했지만 그녀가 없는 동안 일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침실을 제외한 모든 방을 확인하던 차였던 것이다. 그녀는 당연히 남작이 그 시간에 자신의 방에서 잠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별생각 없이 들어간 서재에서 주인의 시체를 발견 했다. “다른 사람은 없나?” 하녀 장을 보내고 나자 이안은 지체 없이 물었다. 치안 관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작 부인은 친정에 가 있다고 합니다. 연락을 취해 놨습니다. 자식들은 나가 살고요. 사용인들은 여기서 살기는 하는데...” 하는데? 카이사와 이안의 말 없는 재촉에 치안 관은 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너무 더워서 다들 근처 술집에 가서 술 한 잔씩 하고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 소리도 못 들었고요.” “집사도 말인가?” “집사는 귀가 어두워서 잘 듣지 못합니다.” 카이사의 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결국 귀족이 자신의 집에서 살해당했는데 사건은커녕 범인을 본 자도 없다는 말이다. 사용인이 범인 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 주인에게 반발한 사용인에 의한 살해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러려면 혼자서는 벌일 수 없다. 그들은 사용인을 한 명 한 명 따로 불러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는 식상할 정도로 일관적이었다. 집사는 이른 저녁부터 잠이 들었고 귀가 어두워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다른 사용인들은 술집에 갔다가 늦게 돌아왔는데 불이 전부 꺼져 있어 다들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남작은 평소 아침잠이 많은 편이었고 그래서 이 저택의 아침은 늦은 편이라 했다. 더구나 어젯밤 술까지 마셨으니 하녀 장의 비명이 들리기 전까지 방에서 나온 사람은 주방 하녀 둘 뿐이었다. “외부에서 범인이 들어온 걸까.” “그럴 가능성도 있다.” 이안의 말에 카이사는 턱을 쓰다듬었다. 남작의 몸에 난 상처는 모두 검에 의한 상처로 보였다. 그렇다면 검을 쓸 줄 아는 자라는 말이다. 그건 지난번에 발견된 너즈 자작의 시체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는 뮈엘라. 검을 쓸 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을 골라내는 게 더 빠를 것이다. “남작에게 원한을 가질만한 사람이 있나?” “주인님은 좋은 분이셨습니다. 다만,” 다만, 그다음이 가장 중요한 말이 나온다. 카이사는 냉정한 얼굴로 집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무래도 검투장을 운영하시다 보니 본의 아니게 적을 두셨지요.” “...검투장이라고?” 요즘 여기저기에서 많이 등장하고 있다. 카이사는 저도 모르게 이안을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감정을 보이지 않은 채 집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검투장에서 진 검사나, 그런 검사를 옹호하던 사람들이 때때로 주인님 탓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전에도 그런 이유로 협박을 받은 적이 있었나?” “...있었지만 주인님께서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셨죠.” 왜 그랬냐는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카이사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수사관으로 일을 하다 보면 여기저기에 적을 만들기 마련이다. 범인도 인간이다. 누군가의 자식이고 부모인 것이다. 아버지의, 아들의 복수를 하겠다며 덤벼드는 놈들도 있다. 문득 생각나서 카이사는 집사에게 물었다. “파트론 남작의 검술 실력은 어땠지?” “주인님의 검술 실력 말씀이십니까?” 집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글쎄요. 평소엔 검을 쓸 일이 없으셔서 전성기 때만큼은 아니겠지요.” “전성기?” 이안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 모습을 본 집사가 서둘러 덧붙였다. “훌륭한 실력이라고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과연 그럴까? 카이사와 이안은 이 부분은 좀 더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사란 종족은 자신이 모시는 주인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그렇다면 협박은 물리적이지 않았다는 말이군?” 네? 카이사의 질문에 집사가 그를 쳐다보더니 생각났다는 듯 입을 벌렸다. “아, 아닙니다. 상대가 검투사인 경우도 있어서 평소엔 호위를 고용해서 다니셨습니다.” “그럼 그 호위는 어디 있지?” 이안은 잠시 이 집사가 치매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늙은 집사는 처음에는 또렷해 보이던 정신이 점점 이안과 카이사의 질문에 한 박자 늦게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흠 하고 팔짱을 꼈다. 집사가 치매라면 그의 증언은 좀더 깊이 검토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어, 그...그러니까....그 호위가...닐! 주인님의 호위는 어디 있지?” 집사가 소리치자마자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 하나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침울한 표정이었는데 카이사와 이안을 한 번 쳐다보더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호위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카이사 역시 같은 표정을 지었다가 이안을 보고 재빨리 표정을 바꿨다. 둘 다 같은 표정이라니 너무 바보 같지 않은가. 그는 닐이라고 불린 하인을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집사는 슬픔에 잠겨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그가 주인을 잃은 슬픔에 잠겨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파트론 남작은 평소 집 안에도 호위를 두나?” “아뇨. 호위들은...집에 오면 보통...그러니까 평소엔 일 층에서 있습니다.” “그 이야긴 집안 까지 남작의 적이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는 뜻인가?” “많은 건 아니지만, 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있는 일이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그렇게 많은가?” 하인은 침을 한 번 삼키고 불안한 표정으로 카이사와 이안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뭔가 실수를 해서 이 수사관들에게 미움을 받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카이사는 이안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치 조각상처럼 그는 그대로 꼿꼿하게 서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 더욱더 그를 조각상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 작품 후기 ============================ 약속대로 한편 더 올립니다. 오늘은 안 잤어요!! 이유는...딱 올리는데 지인한테 전화가 와서... 무려 한시간 동안 통화 했다능!! 휴가받아서 지인한테 놀러갈랬는데 지인이 놀러오지 말래요 ㅠㅠㅠ 바빠서 못놀아 준다고 ㅠㅠㅠ 00055 4. 또다른 시체 =========================================================================                            이안의 머릿속은 케이트가 점령하고 있었다. 잊을 만하면 그녀가 생각났다. 모르는 남자에게 표를 받았다고 했겠다. 미세하게 미간에 주름이 생겼지만 그건 카이사가 발견하기 전에 사라졌다. 하지만 이안은 대체 뭐가 자신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카이사의 시선이 이안을 상념에서 깨어나게 했다. 그는 잠시 머릿속을 점령하던 케이트의 모습을 한쪽으로 몰아내고 입을 열었다. “그 호위들을 찾아봐야겠군.” 남작이 죽었는데 그를 호위하던 자들이 그 이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니 이건 확실히 이상했다. 어쩌면 호위들이 고용인을 죽이고 도망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째서? 카이사는 몇 가지 질문을 더 하고 파트론 남작의 저택을 빠져나왔다. 검투장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너즈 자작과 파트론 남작은 비슷한 곳이 전혀 없었다. 무너져가는 너즈 자작의 저택과 달리 파트론 남작의 저택은 수도에서 흔치 않게 규모가 컸다. 하얗게 빛나는 벽과 건물을 둘러싼 정원. 두 사람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마부가 마굿간 지기의 도움을 받아 마차를 끌고 나타났다. 이안이 타운하우스에 도착했을 때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용병 길드에서는 파트론 남작의 호위로 간 용병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기는 했으나 그들이 알려준 주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럴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카이사와 이안 중 실망한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은 남작의 사라진 호위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 헤맸고, 결국 저녁 식사 시간도 놓친 채 돌아다니다가 다음날을 기약하고 귀가 했다. “식사하셨습니까?” 타운 하우스에 돌아온 이안은 집사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바로 드실만한 것을 준비하겠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척 만 척하며 이안은 로엔 백작 부인의 방으로 향했다. 복도의 창문을 열어뒀지만 후덥지근한 바람이 들어와서 그리 시원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루 종일 돌아다닌 탓이 몸이 끈적끈적한 기분이 들었다. 하녀를 불러 먹을 것을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이안을 따라오기엔 집사의 속도가 너무 느렸기 때문에 이안은 기다리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네. 하고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먼저 들어가 있는 공간의 문을 열 때는 집사나 하인이 알려야 하지만 이안이 들어가려고 하는 곳은 그의 어머니의 응접실이었다. 그래서 집사는 이안의 가벼운 무례를 모른 척하기로 했다. 하녀를 불러 간단한 참을 준비하라고 이른 뒤에야 그는 백작 부인의 응접실에 백작 부인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떠올렸다. “......” 다녀왔습니다라는 말은 목구멍으로 쑥 들어갔다. 이안은 어머니의 응접실에 앉아있는 작은 여자를 보고 입을 닫았다. 마치 요정이 함정을 설치한 것처럼 케이트는 그가 방심한 순간 바로 그곳에 나타나고 있었다. 이건 뭐지? 이안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로엔 백작 부인의 책상에 앉아 있던 케이트는 문을 열고 들어온 게 이안이라는 것을 알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벌린 채 있었다. 등허리를 곧게 편 채 한 손에는 펜을, 한 손은 종이 위에 얹고 있는 모습은 마치 그림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이안의 어깨너머로 향했다. 그게 누가 있기를 바라서였는 지, 아니면 없기를 바라서였는 지 이안은 궁금했다. “도련님.” 이안이 방 안으로 한 발짝 들이밀자 케이트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말했다. 말에는 힘이 있다. 그 단어는 케이트와 이안 사이에 벽을 만들었다. 단단하고 높은 벽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안과 케이트 둘 다 느낄 수 있었다. 흠. 이안은 억지로 한 발 짝 더 내밀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지만 벽이 그를 밀어내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이안의 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안이 다가오는 걸 보면서도 케이트는 물러나지 않았다. 물러난다면 도망치는 것처럼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포식자였고 목표물이 그를 두려워하는 걸 즐길 것 같았다. 하지만 케이트는 먹잇감이 아니었고, 이안은 그녀를 잡아먹는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만지려는 건지, 잡으려는 건지 그도 알 수가 없었다. 케이트는 인형처럼 표정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손이 가까워진 순간 케이트의 눈동자가 거부의 빛을 보였다. 팍 하고 불꽃이 일었다. 이안의 손끝에 파란 불이 옮겨붙었다. “헉!” 불꽃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이안의 손을 감쌌다. 케이트가 놀라 뒤로 물러나는 데도 이안은 흥미롭다는 듯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쳐다봤다. 마녀의 힘인 걸까. 그가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을 때 로엔 백작 부인이 들어왔다. “찾았어, 케이트...어머, 이안.” 순식간에 이안의 손에 붙어있던 불이 사라졌다. 실라는 그 불을 보지 못했는지 천천히 아들에게로 다가왔다. 호리호리하고 훤칠한 실라에게도 이안은 컸기 때문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다녀왔습니다.” 가볍게 실라의 손이 이안의 등을 다독였다. 그 뒤로 실비아가 따라왔다. 그녀는 들고 온 상자를 케이트 곁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잠깐 케이트의 손을 빌리고 있단다.” 그렇습니까. 라는 의미로 이안은 케이트를 한번 쳐다보고 다시 실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만 있을 때 느껴지던 벽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케이트가 내 일을 도와줘도 괜찮겠지?” 이안은 무심코 안 된다고 말하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트는 어머니의 하녀다. 그녀에게 무슨 일을 시키든지 그건 어머니 마음이다. 실라는 영리하게도 케이트가 '언제까지' 그녀의 일을 도울 건 지 말하지 않았다. 케이트는 상자를 열고 편지를 꺼냈다. 모두 올해 실라에게 온 초대장이었다. 참가하지 못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의 답장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비서가 하는 것이다. 아직도 그녀는 자신이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케이트는 초대장을 꺼내 읽으며 이안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가 돌아오면 자신의 어머니에게 가서 차 한 잔 마실 시간을 보낸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길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이렇게 길었던가. 아들의 흔치 않은 긴 방문이 즐거워서 실라 역시 이것저것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오늘 점심때 먹었던 메뉴부터 장미꽃이 핀 이야기까지. 이안은 지루한 티도 내지 않고 얌전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지루해했다 하더라도 그의 무표정에 드러났을 리 없다.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집사가 나타나서 이야기하자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힐끔 케이트를 쳐다보고 방 밖으로 나갔다. 처음으로 그의 인생에서 누군가가 복잡하게 굴고 있었다. 그게 실라인지, 케이트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후덥지근한 날씨는 실라를 더욱 힘들게 만든다. 입맛이 없어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는 탓에 쉽게 피곤해지곤 했다. 그녀는 소파에 피곤한 몸을 묻으며 싱긋 웃었다. 아들의 반응이 약간 달라졌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좀 더 일찍 오기를 바랐지만 슬슬 그녀가 죽기 전에는 오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마저 생기고 있던 참이었다. 문득 케이트가 고아에 하녀라는 게 떠올라 실라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케이트는 등줄기를 곧게 펴고 능숙하게 펜을 놀리고 있었다. 그 우아한 태도는 그녀가 하녀라는 걸 믿기 힘들게 만들었다.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안을 위해서 케이트는 하녀도, 고아도 아니어야 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왜 그녀의 작은 아들 앞에는 쉬운 길이 펼쳐지지 않는 걸까. 다음 날 아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기는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쓸려 내려갔다. 제이드는 창밖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러다가 퇴근 못 하는 거 아냐? 리코가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우울하게 말했다. “오늘 저녁은 송어요리 랬는데...” “여기서 더 비가 오면 분명 강이 범람해서 물고기가 떠내려올 테니 잡아서 요리해주지.” 농담이었는데 진담으로 들었는지 리코는 매우 슬픈 눈을 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름다운 아내가 해주는 송어요리 대신 범람한 강에서 떠내려오는 이름 모를 물고기를 사내 녀석이 요리해준다니, 끔찍하기 이를 데가 없다. 결국 비가 그친 것은 며칠이 지난 다음이었다. 리코의 아름다운 부인은 현명하기까지 해서 비가 거세지자 송어를 요리하지 않고 보관실에 넣어두었다. 그녀의 현명함은 여기서 빛을 발하는데 보관실에 얼음을 구비해 놓은 덕에 송어는 최소한 며칠간은 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안과 카이사는 비가 그치자마자 수사관 장에게 불려 가 빨리 사건을 해결하라는 꾸지람을 듣고 나왔다. 제이드와 리코가 혼나고 난 다음이었다. 제이드와 리코가 고층거리의 아이들이 사라진 사건을 수사한다는 것을 안 수사관장은 화를 꾹 참는 표정으로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더 중요한 사건에 주의를 돌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중요한 사건이 귀족 살인사건이라는 건 굳이 누군가 집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리코는 그럼 고층 거리의 아이들이 사라진 일이 귀족 나리가 죽은 것보다 덜 중요하냐고 반박하려다 제이드가 옆구리를 쿡 찌르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제이드가 리코를 말리지 않았다면 두 사람 역시 카이사와 이안만큼 오랜 시간 혼이 났을 것이다. 이안은 기분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이었지만 카이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훌륭한 수사관인 그는 수사관장에게 사건 해결이 느리다는 이유로 꾸지람을 듣는 게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뭐래?” 두 사람이 나오자 제이드는 쪼르르 달려가 물었다. 쾅하고 문이 닫히기 전에 수사관장의 표정이 험악한 게 보였다. 이거 위에서 압박이 심한 모양인데.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카이사는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화난 걸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했다. 누구랑 표정이 똑같네. 제이드는 힐끔 창밖을 쳐다보는 리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 말 없이 나왔지만 리코가 이번 사건에서 손을 뗄 리가 없다. 수사관장도 위에서 압력이 들어오니 저러는 것이다. 이번 사태에 영향을 받지 않은 건 (표정만 보고 봤을 때) 이안 하나였다. “어서 빨리 범인을 잡으라는군.” 그거야 이미 예상한 일이다. 제이드가 다시 물으려 했을 때 수사관실 문이 벌컥 열렸다. ============================ 작품 후기 ============================ 회사에 들고양이가 많아서 꼬셔보려고 소세지를 사가지고 출근했는데 자꾸 직원들이 탐내길래 그거 고양이 용임. ㅇㅇ 했더니 키 180 넘는 남직원이 야옹야옹. 하더니 하나 집어 먹고 감. ................ ...쫌 이상한 회사인듯. 00056 4. 또다른 시체 =========================================================================                            “검투장에 연관된 사건을 물어본 녀석이 누구냐!” 새파랗게 젊은 치안 관이 숨을 헐떡이며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있는 힘껏 외친 다음에야 수사관실 안을 쳐다봤다. 비가 그친 지 얼마 안 된 탓에 거의 모든 수사관이 앉아있었다. 지방으로 출장 간 두 명을 제외한 열일곱 명의 남자들이 일제히 자신을 쳐다보자 치안 관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더듬더듬 변명하려 애썼다. “어, 아니, 그러니까, 그게...” 곧 수사관들은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제이드는 킬킬거리며 젊은 치안 관에게 다가갔다. 신입인 모양이다. 때때로 신입에게 이런 식의 신고식을 치르게 한다. 수사관들은 거칠고 무서운 녀석들이니 처음부터 기가 눌리지 않으려면 이런 식으로 나가야 한다고 잔뜩 겁을 줘서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을 보내는 것이다. “그래, 검투장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젊은 치안 관은 마치 극단의 배우 같은 차림을 한 남자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남자도 수사관인가? 수사관은 개성이 강하다고 들었지만 이렇게 경박한 차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인 것이 제이드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네. 며칠 전에 검투장과 관련된 사건이 일어나면 알려달라고 요청하신 수사관이십니까?” “아니, 난 아닌데.” 뭐? 치안 관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렇다면 굳이 그에게 물어본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가 원망스럽다는 듯 쳐다보자 제이드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그냥 궁금해서.” 그리고 수사관실 안쪽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검투장에 관련된 사건 일어나면 알려달라고 한 사람? 진짜 이상한 곳이다. 치안 관은 점점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선배들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어쩐지 과도하게 겁을 주더라니. 곧이어 남자 셋이 고개를 돌렸다. 세 명이나 요청했어? 치안 관은 다가오는 남자들의 다채로움에 더 당황했다. 하나는 평범하게 생겼는데 통통한 얼굴 위에 곱슬곱슬한 머리가 마치 빵처럼 보였고, 하나는 심기 안 좋은 표정에 어깨를 넘는 긴 머리카락이었으며, 하나는 조각상처럼 잘생긴 남자였다. “어, 뭐야. 리코도 요청했어?” 나한테 언급은 해주지. 제이드의 말에 리코는 어깨를 으쓱하며 변명했다. “사건이 있을지 없을지 몰라서.” “그쪽은 뭐야?” “당연하잖나. 죽은 사람이 둘 다 검투장과 관련되어 있으니.” 세 명의 대화를 무시하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뭔가.” “아, 시체가 발견됐습니다.” 치안 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은 세 명의 눈빛이 변했다. “누구?” “브리지라는 이름의 사낸데, 도박장의 바람잡이였답니다.” “가세.” 그걸로 끝이었다. 더 묻지도 않고 제이드는 수사관실 문을 열었다. 네 명의 수사관과 한 명의 치안 관은 그 길로 왕궁을 나섰다. 비가 온 탓에 시체는 젖어 있었다. 카이사는 시체를 보자마자 자신들의 사건과는 관계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통수에 둔기로 후려친 상처를 제외하곤 멀쩡했던 것이다. 그들의 사건피해자들은 너덜너덜할 정도로 참혹한 상처를 가지고 있다. 한 방에 죽여 버리는 방법은 오히려 자비롭다 할 수 있다. “도박장에서 바람잡이였다고?” “네, 경마나 카드게임 등 어디에나 등장했다고 합니다. 최근에 출몰했던 건 검투장이었고요.” 과연. 카이사는 치안 관이 그들에게 알리러 온 이유를 알았다. 그는 힐끔 다른 사람들을 쳐다봤다. 검투장과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사건과 관계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제이드와 리코 역시 관심 없는 표정이었다. “바람잡이면 적이 많겠는데.” 제이드의 말에 리코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박장에서 도박꾼들이 더 많은 돈을 걸도록 바람을 잡는 바람잡이는 그 특성상 미움받기가 쉬웠다. 그들 때문에 돈을 잃은 사람은 언제나 생기기 마련이고, 그중에 과도하게 돈을 잃은 이유가 자신의 부족한 자제력과 부실한 판단력 때문이 아니라 바람잡이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늘 나오기 마련이다. 카이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잡아야 할 범인은 귀족을 증오하고 검을 쓸 줄 아는 자다. 바람잡이에게 분노를 표출한 자가 아니다. 그건 리코와 제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남자는 고층 거리의 사라진 아이들과도 비슷하지 않았다. 세 사람이 치안 관에게 수고했다고, 알려줘서 고맙다고 말하려 했을 때였다. 이안이 입을 열었다. “이 자가 죽은 건 언제지?” 치안 관은 바로 생각나지 않는지 약간 틈을 두고 대답했다. “상태를 봐서는 비가 오기 전에 죽은 것 같습니다.” 삼 일 전이라는 말이다. “계속 여기 있었나?” “비가 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봤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이 남자의 죽음이 어떤 관계가 있을까? 바람잡이는 앞서 살해당한 두 명과 어떤 공통점도 없어 보였다. 검투장만 제외하면. 하지만 이 시기에 검투장에 연관된 사람이 죽었는데 아무 관련이 없을 리가 없다. 검투장에 그가 모르는 일이 일어나는 걸까. 생각해보면 이안은 검투장을 가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니까 검투사들이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이 남자의 가족은?” “없습니다.” “친구도?” “네. 도박장의 바람잡이였으니까요. 아마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 이안은 다시 바람잡이의 시신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묘한 시선에 치안 관은 다시 바짝 긴장했다. 뭔가 이상했다. “무슨 일이지?” 카이사의 물음에 이안은 고개를 들었다. “이 자가 사라져도 아무도 찾지 않았을 거다.” “그야, 그렇겠지.” 제이드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세 사람은 동시에 깨달았다. 브리지가 사라져도 찾는 사람이 없다. 그의 시신이 발견되기 전까지 아무도 그가 죽은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사람을 죽인 범인은 그 시신을 숨기려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의 시체는 비가 오기 전, 그러니까 거의 삼 일을 이 거리에 놓여 있었다. 어째서? 이안은 그 점이 이상했다. 뒤통수의 상처는 우발적인 범행이라는 증거다. 우발적인 범행이라면 누구든지 시신을 은폐하려 할 것이다. 그런데 범인은 이 시체를 삼 일간이나 빗속에 내버려 뒀다. 마치 보란 듯이. 이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 아무래도 이번에도 메리에게 당한 것 같은데. 케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우울한 표정으로 커다란 통을 끙끙거리며 끌었다. 지독한 냄새는 그렇다 쳐도 윙윙거리는 하루살이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결국 그녀가 멈춰서 서 숨을 헐떡이며 손을 저어 하루살이를 쫓아내기 시작했을 때 그녀를 발견한 폴이 달려왔다. “어, 저기, 저, 케이트?” “안녕.” 케이트는 무표정하게 인사했다. 짜증 난다고 아무에게나 짜증 낼 수도 없는 것 아닌가. 폴은 생각났다는 듯 안녕하고 인사를 하는 바람에 그녀를 픽하고 웃게 만들었다. “그거, 음, 그, 통말야. 그거 음식물 쓰레기 아냐?” “응. 맞아.” “어, 저기, 그거, 음, 그게...” 폴의 더듬거리는 말버릇은 슬슬 익숙해지던 차지만 오늘은 더욱 심하다. 심지어 그다지 기분도 좋지 않았다. 케이트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음, 그, 그, 통 말인데...그거, 어, 그거, 청소부가 음, 저기, 치우는 걸로, 음, 아는데.” “아, 맞아. 그런데 메리가 오늘은 청소부가 쉬는 날이라고 우리가 치워야 한다고 해서.” “아, 그, 어, 음, 그거, 음, 메리가, 음, 그랬다고?” 폴의 말버릇의 좋은 점은 항상 더듬기 때문에 당황했다고 해서 더듬는 게 더 티 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통의 반대편을 잡았다. “도, 도와줄게. 같이 들자.” “어, 정말?” 위아래로 잡아 뽑은 것 같은 폴은 그리 힘이 세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케이트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케이트 혼자 들 때 보다도 나았다. 두 사람은 케이트 혼자 흔들흔들 끙끙거리며 옮길 때와는 달리 느리지만 꾸준히 쓰레기가 담긴 통을 들고 이동했다. 타운하우스는 케이트가 지금까지 살던 다른 어떤 저택과 달랐다. 정문은 도로에 인접해 있는 대신 후문에는 작은 뜰이 달려 있었다. 뜰은 가장자리에 사람 얼굴까지 오는 펜스나 관목을 심어 사생활을 지켰다. 땅값이 비싸 넓은 부지에 집을 지을 수 없는 수도의 특성상 발달한 건물 모습이었다. 폴과 케이트는 쓰레기를 옮기는 모습을 저택 창문을 통해 메리가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끙끙거리며 도로 끝을 향해 걸어갔다. 수도의 쓰레기는 보통 청소부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수거한다. 그들은 큰 마차를 끌고 구역을 나눠서 일주일에 여섯 번 찾아온다. 하지만 오늘처럼 일주일에 하루는 쉬는 날이 있다. 그럴 때는 사용인들이 정해진 구역에 모아두게 되어있다. “그럴 거면 매일 청소부를 기다릴 게 아니라 우리가 직접 갖다 두는 게 낫지 않아?” “어? 그, 저, 그게 더 낫다고? 음, 그래?” 폴은 역시 케이트는 신기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일주일에 한 번 쓰레기를 옮기기만 하는 것뿐이지만 청소부들이 해야 할 일을 자신이 한다고 싫어했을 것이다. “어, 하지만, 음, 매일 이 쓰레기들이 여기에 모여 있으면, 음, 그, 이, 이 근처가, 음, 그, 그 냄새가, 냄새가 심하지 않을까?” “아, 그렇구나.” 저택이란 한 집에 사용인까지 최소 열 명이 넘는 사람이 산다. 많은 사람이 사는 만큼 많은 쓰레기가 나오는 것이다. 매일 그런 쓰레기를 한곳에 모아둔다면 냄새가 심할 수밖에 없다.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멈췄다. 확실히 엄청난 냄새가 여기까지 나고 있었다. 벌써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주변을 윙윙대며 도는 하루살이들은 흡사 대규모 파티라도 연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다시 통을 들어 올렸다. 저 쓰레기의 산이 타운하우스에서 나온 쓰레기를 포함해야 한다. 쓰레기를 다 붓고 나자 케이트의 손이 통에서 떨어져 나간 게 느껴져 폴은 고개를 돌렸다. “으아아아악!” 저승사자가 서 있었다. 하마터면 쓰레기 산에 넘어질 뻔했다. 폴은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고 저승사자, 아니 이안을 쳐다봤다. “뭘 하는 거지?” “쓰레기를 버리고 있습니다.” 당황하면 오히려 더듬지 않는구나. 케이트는 감탄했다. 이안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리고 케이트를 쳐다보더니 가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했다.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한 건 지 모르겠지만 폴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죽여서 시체가 된 그를 저 쓰레기의 산 꼭대기에 던져놓지 않은 걸 감사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 뒤를 따르던 케이트의 손을 이안이 낚아챘다. ============================ 작품 후기 ============================ 어, 어제의 후기에 의외로 다들 좋아하셔서 당황했습니다. 그거 진짜 문득 생각나서 쓴건데... 음...오늘은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드려야 할것 같은 압력을 느껴야 할것만 같은 생각이 있을것도 같지만 저는 지금 자다 일어났기 때문에 하품을 해대고 있습니다. 안녕... 안녕...여러분.. 안녕.... 00057 5. 빗 속에서 =========================================================================                            “지금 뭐하는 거야?” 저택 안을 들어오던 폴의 손을 낚아채며 메리가 날카롭게 물었다. 폴은 침을 한 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뭐, 뭘?” “왜 걜 도와주냔 말야!” 히스테릭한 메리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리는 바람에 폴은 깜짝 놀라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저녁 식사시간 전의 휴식 시간이라 아무도 없었다. “그, 그럼, 어, 어떻게 해.” “어떻게 하냐니? 그냥 두면 되잖아.” 고양이 같은 메리의 눈동자가 짜증으로 물들었다. 폴은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피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그리고 누구도 지나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인한 다음 메리를 끌고 구석으로 향했다. “이거 놔!” “자, 잠깐, 기, 기다려 봐.” 확실히 폴은 케이트와 대화할 때보다는 조금 덜 더듬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구석까지 와서 메리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메리는 모른 척 신경질적으로 치맛단을 털었다. “너, 너야말로 이, 이제 그, 그, 그만둬.” “뭘?” “그, 저, 케, 케이트를 괴롭히는 거 마, 말야.” 순식간에 메리의 얼굴에 억울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폴은 잘 알고 있다. 그녀가 얼마나 여우처럼 표정을 잘 바꾸는지. 그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저, 저 쓰, 쓰레기도 처, 청소부가 안 오면 우, 우리가 하는 일이잖아.” 케이트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청소부가 오지 않으면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남자 하인들이 처리하곤 했다. 워낙 무겁기 때문에 남자 두 명이 달라붙어 옮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케이트 혼자 하라고 했으니 이건 확실히 심술이었다. 하지만 그걸 굳이 케이트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건 케이트가 상처받을까 봐서가 아니었다. “왜, 왜 자꾸 모, 못되게 구는 거야?” 폴은 진짜로 안타까워서 물었다. 그는 이런 메리가 싫었다. 메리는 약간 영악한 구석이 있지만 싹싹하고 좋은 여자다. 말을 더듬는 폴을 다른 사용인들이 답답하다고 말 거는 걸 피할 때 그녀가 개의치 않고 먼저 다가와서 대화를 나눠준 덕에 이 타운 하우스에 녹아들 수 있었다. “하지만,” 메리는 폴이 진짜로 화내려는 것 같자 눈을 올려 뜨며 애교 있는 표정을 지었다. “저 계집애가 남자들한테 꼬리 치고 다니잖아.” “그, 그렇지 아, 않아.” “아니긴! 방금 너도 말 더듬었잖아!” 폴은 당황했다. 그가 말 더듬는 건 원래 그렇다. 메리는 토라진 것처럼 흥하고 팔짱을 끼더니 돌아섰다. 이쯤 되자 폴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졌다. 그는 메리가 좋았다. 그녀가 왜 케이트를 미워하는지는 알지만 어떻게 해야 기분이 풀릴 지는 모른다. 그가 곤란해하는 걸 아는 것처럼 돌아선 메리의 입술이 둥글게 휘었다. “뭐하는 거예요?” 케이트는 같은 시각 저택 안에서 누군가가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말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말했다. 이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약간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설마 손에 불낸 것 때문에 화내려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아차 싶어 시선을 내렸다. 자신의 손을 잡은 그의 손을 깨끗했다. 분명 파란 불꽃이 그의 손을 감싸고 있었는데 멀쩡했다. 이상한 일이다. 그 불은 자신의 힘이 아니었던 걸까. 케이트는 자신의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만지려는 순간 저도 모르게 속으로 만지지 마!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을 만지는 게 싫었다. 자신이 약하다는 것이, 그냥 건드리면 얌전히 당해야 한다는 것이 싫었다. 자신은 정말로 마녀인 걸까. 몇 번이고 생각해 본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생각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너는...” 이안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내가 싫으냐고? 그가 그걸 신경 썼던가? 살면서 단 한 번도 신경 써 본 적이 없다. 그의 인생은 온통 그를 싫어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그를 좋아한 사람보다 싫어한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 확신했다. “너는 내가 무서운가.” “무섭....?” 뜬금없는 질문에 케이트는 입을 벌렸다. 이게 무슨 말이야? 무섭냐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 걸까. 그녀는 그의 얼굴을 살피려 했지만 여전히 무표정이었기 때문에 생각을 읽기는 어려웠다. “무섭지는 않아요.” “그럼 싫은 건가.” 이번에도 이상한 질문이다. 케이트는 점점 더 알 수 없는 질문에 미간을 찡그렸다.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녀는 잡힌 손을 빼내려 애썼다. 하지만 끙끙거리는 그녀와 달리 이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케이트는 손을 빼내려는 걸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싫어하는 사람한테 그런 짓을 당하고도 얌전히 있을 만큼 멍청한 여자는 아니예요.” 누가? 이안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가 그게 그녀를 지칭한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날 좋아한다는 건가?”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그런 말은 아니었어요.” “내가 싫다는 말은 아니었잖나.” “그게 좋다는 말은 아니죠.” 슬슬 이 말도 안 되는 말싸움이 짜증 나기 시작했다. 케이트는 다시 손을 빼려 애썼다. 그 마녀의 힘인지 뭔지는 몰라도 이젠 안 나오는 모양이다. 왜 필요할 때는 안 나오는 거야! 그녀가 막 짜증을 낼 때였다. 이안이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좋다.” 케이트의 고개가 휙하고 위로 들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처럼 부풀어 오른 채 정지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이안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기분이 표정에 다 드러나는 사람이 주변에 있던가. “거...” 이안의 고개가 왼쪽으로 십오 도 정도 기울었다. 그는 약간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거?” 그 사이 케이트의 모습은 다시 놀라기 전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얼굴과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거짓말이예요.”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말에 이안은 잠시 말을 잃었다. 케이트의 눈동자는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당신은 날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당신은 싫어하지 않는 것과 좋아한다는 걸 같은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정곡이다. 이안은 다시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게 정답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는 분명 싫어하지 않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싫어하지 않는 정도면 만족해 왔다. 그 정도면 좋아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 케이트의 말처럼 그게 좋다는 말은 아니다. 이안은 손의 힘을 풀었다. 손안에 들어 있던 작은 온기가 스르륵 풀려나갔다. 지금 이안의 케이트에 대한 감정은 확실히 싫지 않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지금 그걸 설명할 수가 없었다. 케이트는 너무 쉽게 손이 풀리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안은 조각상처럼 거기에 서 있었다. 그는 늘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희로애락을 판단하기 어려운 무표정한 얼굴.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케이트는 이안이 조금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내가 뭐 잘못했나? 그녀는 잠시 이안에게 말을 걸어야 하나 싶어 발걸음을 멈췄다. 이번에도 이안이 그녀를 가지고 논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그녀를 가지고 논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지만 가지고 논다는 감각도 없이 그냥 별 생각 없이 하는 행동이 그렇지 않은가. 그냥, 어딘가에서 주워듣고 하는 행동들. 그런 것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다. 뭐라고 다시 말을 해야 하나. 케이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물러났다. 이안이 포식자라면 그녀는 먹잇감이다. 먹이사슬에서 먹잇감은 포식자를 걱정해주지 않는 법이다. 풀려났을 때 재빨리 도망쳐야 한다. 그녀는 몸을 돌려 타운하우스 쪽으로 걸어갔다. 중간에 다시 고개를 돌려 이안을 돌아봤을 때에도 그는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 ============================ 작품 후기 ============================ 저 오늘부터 휴가였는데 올렸어요. 왜냐면... 어제 거기서 잘랐더니 여러분의 댓글이 제 머리끄댕이 잡고 끌고 갈거 같은 분위기라... 00058 5. 빗 속에서 =========================================================================                            어쩌면 파티를 미뤄야 할지도 모른다고 실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초대장을 다 보냈는데 이걸 어쩐다. 그녀의 옆에서 안부 편지를 보낼 지인 목록을 정리하던 케이트가 고개를 들었다. “네가 번거롭겠구나.” “괜찮습니다.” 그 정도쯤이야. 케이트는 편지지를 꺼낼까요? 하고 물었다. 하녀 일을 하던 것에 비하면 대필을 하는 건 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들이야 저녁이면 손에 감각이 없고 팔이 후들후들 떨릴 정도가 되겠지만 케이트는 그 정도로 많이 쓰는 것도 아니다. “아마 새 편지지는 서재에 있을 거야.” 실라의 말에 케이트는 네. 하고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엔 백작 부인의 건강은 생각보다 나쁘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무리가 없지만 오랜 시간 앉아있는 것도 피곤해하곤 했다. 그런 그녀가 이 층의 자신의 방에서 일 층의 서재까지 편지지 하나 꺼내겠다고 움직이는 건 무리일 게 분명했다. 케이트는 복도를 건너가며 실라에 대해 생각했다. 현 로엔 백작은 이안의 형이라고 했다. 저 로엔 백작 부인의 장남.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고, 이야기만 들어서는 이안과는 상반된 분위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로엔 백작은 어머니를 닮은 걸까. 이안은 그의 어머니를 전혀 닮지 않았다. 생각은 자연스럽게 이안에게로 옮아갔다. 그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어제 그렇게 헤어진 후로 마음이 답답한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잘못한 게 없어. 케이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안은 그가 하인인 줄 알았을 때도 연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귀족이라고? 너무 잘생긴 외모에 귀족인데다가 그녀가 일하는 집의 도련님이다. 연애를 한다면 가장 먼저 도망쳐야 할 상대에 속한다. 눈앞에 사다리가 지나가는 바람에 케이트는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어, 케이트.” 그다지 말을 해보지 않은 하인이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 해 보였다. “어디가?” “서재에.” “마님 심부름?” “음.” 케이트가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사이 필립은 들고 있던 사다리를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았다. “여기서 지낼만해?” “응, 뭐.” “다들 좋은 사람이니까. 마님도 참 좋은 분이시고 말야.” 케이트가 대충 얼버무린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필립은 신이 나서 말했다. “물론 이안 도련님은 좀 무섭긴 하지만 너는 만날 일이 별로 없으니까 상관없을 거야.” 이안의 이름이 나오자 케이트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케이트가 겁을 먹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대한 이안에 대해 좋은 말을 해주려 애썼다. “무서운 분이긴 하지만, 대단한 분이야. 귀족인데 수사관을 하고 계시잖아. 내가 아는 다른 귀족들은 다 놀고먹으려고 하던걸. 사실 그분이 마님의 친자식이기만 했어도 고등 판사가 됐을 거라고.” 뜻밖의 사실에 케이트는 깜짝 놀라 필립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봤다. 이안이 실라의 친자식이 아니라고? 이게 무슨 소리지? 그녀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 할 때 뒤에서 다른 하인이 다가왔다. “야, 필립! 너 지금 뭐 해?” “어? 아, 잠깐 케이트와 이야기 좀...” “누가 너보고 쉬어도 된대?” “뭐 어때. 급한 것도 아닌데.” “내가 급하면 급한 거야.” 때때로 케이트에게 말을 걸던 하인이었다. 불행히도 케이트는 그의 이름 역시 기억하질 못했다. 존이었나, 숀이었나. 폴이 이안과 비슷하게 큰 키에 비해 비쩍 마른 것과 달리 존은 이안과 비슷한 덩치에 비해 키는 더 작았다. 어떻게 보면 오랑우탄처럼 보이기도 했다. 존은 필립을 구박해 사다리를 들고 가도록 하더니 케이트를 보고 씩 웃었다. “지금 지붕을 보수하고 있거든.” “아, 그래?” “장마가 오기 전에 미리 보수 해 놔야 무사히 장마를 지낼 수 있으니까 말야. 우리가 이렇게 보수하지 않으면 매년 여름 이 저택은 물바다가 될걸?” 으스대는 말투였지만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녀의 귀에 그런 말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이안이 실라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사생아라는 말인가? 케이트가 자신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자 존은 약간 심통이 났다. 뭐야? 그는 손을 뻗어 케이트의 턱을 잡으려 했다. “뭐하는 거야?” 케이트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눈동자의 가장자리가 황금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명백한 분노의 표시였지만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탓에 존은 그저 그녀가 당황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쪽에 집중 좀 하라고.” “집중하라고? 뭐에?” “그러니까 내가 지붕을 보수하지 않으면...” 그제야 존은 자신의 말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지 깨달았다. 으스대는 말은 넌지시 말하고 상대방이 한 번에 물어줘야 하는 법이다. 그게 두 번이 되고 본인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한 편의 코미디가 되어 버린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손을 털었다. “됐다, 됐어.” 케이트는 건들거리며 사라지는 존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돌렸다. 이성에게 다가가는 것에 순수하고 소극적이었던 시골과 달리 수도는 좀 더 적극적이고 교묘했다. 그녀는 그런 점에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예쁘장한 하녀에 일가친척 없는 고아라는 점은 그녀를 건들이기 쉬운 타겟으로 보이게 만든다. 알라나데일에서는 그래도 그녀를 어린 시절부터 알아 온 사람들이 있었지만 여기는 아무도 없었다. 케이트는 불행하고 고독하다고 느꼈다. 불현듯 그녀를 그렇게 만든 이안이 미워졌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그녀의 인생이 들어온 순간부터 케이트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젠장.” 제이드는 이안이 욕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들어 쳐다봤을 때 이안은 입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굳게 닫혀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래?” “글쎄.” 오늘의 이안은 한층 지독했다. 주변에 검은 오라가 보이는 것도 같아 제이드는 눈을 비볐다. 표정도 행동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데 저렇게 달라 보이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로엔, 가지.” 카이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안을 불러 나가자고 말하자 오히려 제이드와 리코가 놀랐을 정도였다. 말없이 카이사의 뒤를 따르는 이안을 보며 리코가 중얼거렸다. “저 분위기를 모르는 걸까, 모르는 척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대단 한 거야.” 카이사는 옆에서 성큼성큼 걷는 이안을 쳐다봤다. 표정도 행동도 평소와 같다. 무표정한 얼굴에 무뚝뚝한 행동. 그런데 오늘따라 어두워 보였다. 어디가 어떻게 어둡다고 딱 집어 말 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랬다. 마차에 올라탄 다음에도 그런 느낌이 지속되자 카이사는 자신의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지?” 카이사의 질문에 이안은 고개를 들었다. 오히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느낌에 물어본 사람이 민망할 분위기였지만 카이사는 굴하지 않았다. “뭔가 달라 보이는데.” “달라 보인다고?” 이안은 진짜 모르는 것처럼 말했기 때문에 카이사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착각이 아니었는지 되돌아봤다. 아니다. 확실히 이안은 뭔가 달랐다. 그리고 그건 이안과 수사관실에서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 뭔가 달라 보인다.” 달라 보인다고? 이안은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생각했다. 달라진 게 없는데 달라 보인다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건강도 문제가 없고, 옷도 그의 나이와 지위에 맞는 옷이다. 바로 오늘 아침에 이발을 했으니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랐을 리도 없다. 그래도 이안은 턱을 한번 쓸었다. 솜씨 좋은 이발사는 깔끔하게 수염을 밀어놓은 덕에 턱이 맨질맨질 했다. 살이 빠지거나 키가 큰 것도 아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카이사는 어제도 그를 보지 않았던가. 하루 사이에 키가 그렇게 많이 클 리가 없다. 아카데미에 들어갔을 때는 그런 소리를 자주 들었다. 일 년에 거의 십 센티씩 컸으니 당연하다. “달라진 건 없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카이사는 이안이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질문하기를 단념했다. 그와 파트너가 되기 전에 카이사는 이안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파트너가 돼서 일 좀같이 했다고 친한 척 굴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이안이 깜짝 놀랄 질문을 던졌다. “너는 내가 싫은가?” “뭐?” 카이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런 질문은 사춘기에 접어든 십 대 소녀들이 새끼손가락 걸면서 나 싫어하면 안돼잉~ 할 때나 하는 질문 아니던가? 그는 잠시 이안의 얼굴을 쳐다봤다. 수사관장에서 혼날 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더니 사실은 그 압박 때문에 약간 머리가 이상해 진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 싫어하는 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렇다. 최근에 들어서 이안이 듣던 것 만큼 무례하고 건방진 녀석이 아니란 걸 알게 되면서 변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소릴 서른 넘어서 하는 건 거의 수치에 가깝기 때문에 카이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카이사의 눈이 튀어나왔다. 아니, 적어도 카이사는 튀어나왔다고 생각했다. 튀어나오지 않았다면 튀어나갔으면 좋겠다. 좁은 마차 안에서 자신보다 덩치도 키도 큰 남자한테 저따위 말을 듣고 싶지 않다. 그는 혹시 이게 신종 고문방법인가 하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차라리 새로 나온 고문 방법을 네게 시험해봤다. 라고 한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이번화의 부제는 카이사의 멘붕일듯요. 사실 어제 오늘 이틀 쉬려고 했는데 그랬다간 토, 일까지 내리 나흘을 쉬게 되잖아요. 본의 아니게 나흘을 쉬게 되면 당연히 업뎃이 안되는 날이지만 안보시는 여러분의 체감 시간은 길어지겠죠. 고로 저는 저의 머리카락의 안녕과 여러분의 손을 수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다음주 월요일까지는 올리고, 화, 수 안올라 올지도 모릅니다. 뭐, 어떻게 될지는 월요일날 다시 올릴게요. 제 친구가 결혼한다고 주말동안 저한테 뭘 부탁해서... 오타났네요. 수정하는 김에 하나 더. 그리고 설국열차도 봤습니다. 근데 전 봉준호 감독거는 괴물 말고는 하나도 안봐서 괜찮았어요. 제가 충격적인 사실 하나 알려드릴게요. 설국열차에 나오는 냄궁민수가 사실은... 남궁민수예요!!! 00059 5. 빗 속에서 =========================================================================                            차라리 마차 문을 부수고 튀어 나가고 싶은 정적을 뚫고 이안은 나직하게 말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어렵군.” 카이사는 약간 얼떨떨했다. 당연한 말을 의외의 인물에게 들은 기분이었다. 그가 맞장구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마차는 순조롭게 길을 지나 목적지에 도달했다. 새 시합이 열리는지 검투장 앞에는 포스터가 나붙어 있었다. [델토스에서 온 괴물 같은 검사 헤라클레스에게 도전하는 신비의 청년!] [흥미진진 한 결투가 시작됩니다!] 과하게 느낌표를 사용한 포스터의 내용을 가볍게 훑으며 카이사는 미간을 찡그렸다. 검술이라는 건, 전투라는 건 신성한 것이다. 이런 한낮 유흥거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검투장 안은 그들이 지난번에 왔을 때와는 달리 꽤 많은 사람이 있었다. 남자들은 더운 날씨를 몸소 보여주려는 것처럼 상반신을 벗고 땀을 뻘뻘 흘리며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이! 그쪽 문은 어떻게 된 거야?” 남자의 호통에 젊은 남자가 반쯤 열린 문으로 달려가더니 몇 번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고는 소리쳤다. “경첩이 망가졌습니다.” “그럼 고치라고, 이 멍청한 자식아!” 소리친 남자가 대장인 모양이다. 카이사는 짜증을 부리며 다른 남자들에게 호통치기 시작하는 그에게 다가갔다. 이안은 새로운 시합을 준비하느라 바쁜 남자들을 훑어 봤다. 대부분이 목수로 보인다. 중간중간 제복을 입은 직원이 의자를 날랐다. 마치 거대한 연회장 같았다. 가운데에 검사 둘이 싸울 수 있는 공간을 두고 그 주변에 테이블이 놓인다. 여기서 식사라도 하는 걸까. 이안은 유심히 직원이 옮기는 테이블과 의자를 살폈다. “엇!” 테이블을 옮기던 두 직원 중 한 명이 비틀거렸다. 그건 반대쪽을 잡고 있던 다른 직원에게도 여파가 닥쳤다. 두 사람은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으려 애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넘어졌다. 콰당탕하고 요란한 소리가 나자 검투장 안의 남자들이 무슨 일인가 하여 고개를 돌렸다. “어이, 조심하라고!” “괜찮아?” 직원 둘은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이 넘어지면서 주변에 쌓아둔 목재며 의자도 함께 쓰러져 있었다. “멍청한 자식들!” 갑자기 벼락같은 소리가 났다.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불같이 화를 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 병신들!” 쯧하고 누군가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제복 입은 직원들은 일어나서 물러나려 했지만 회색 머리의 남자가 더 빨랐다. 그는 오크같은 얼굴을 하고 주먹을 휘둘러대며 외쳤다. “너희 병신들이 다 부숴놨잖아!” 용병의 입이 가장 거칠 거라고 생각하지만 목수의 입이 더 거친 경우도 있다. 카이사는 굳은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분노한 남자를 잡았다. “어이, 진정해.” “씨발, 별 병신 같은 것들이!”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그만하라고. 고골리.” 남자의 주먹이 허공을 휘둘렀다. 직원들은 재빨리 안쪽으로 꽁지가 빠지라 도망쳐 들어갔다. “정신이 없군. 늘 이런가?” 카이사의 말에 대장으로 보이던 남자는 눈썹을 찡그렸다. “...오늘 저녁 시합 때문에 다들 긴장해서 그렇지. 무슨 일이오?”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회색 머리의 남자를 억지로 끌고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이안은 그들이 비틀거리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카이사에게 다가갔다. 대단한 힘이다. 대여섯 명이 달라붙어서도 끙끙거릴 정도라니. 닫힌 문 너머로 분노한 남자의 욕설이 들려왔다. 카이사와 대화하던 남자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살인 사건이라면 조사가 끝난 게 아니었소?” “또 한 건 발생했다.” “또 라고? 누구?” 남자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카이사가 브리지라고 말하자 그는 아 하고 알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 녀석 최근에는 못 봤는데?” “최근이라는 건 언제를 말하는 거지?” “보름...아니군. 이 검투장에서 마지막으로 본 게 적어도 두 달은 된 것 같은데.” “보름 전이라는 건?” “아, 그건...지나가다가 잠깐.” 그럴 수 있다. 카이사는 늘 지니고 다니는 수첩에 적으며 생각했다. 수도가 크기는 해도 사람의 행동반경은 정해져 있다. 직장이 같거나 생활방식이 같다면 행동반경 역시 겹칠 가능성이 있다. “보름 전에 만났을 때는 이상한 점이 없었나?” “이상한 점? 브리지야 원래 항상 이상한 놈이오.” “어떻게 말이지?” 이안이 끼어들었다. 남자는 그를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간사하고 허풍이 심하지. 브리지가 도박장의 바람잡이라는 건 알고 있소?” 카이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흠 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그렇다면 잘 알 텐데? 그런 놈들이 어떤지.”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렇소.” 이래서야 정보가 안 된다. 카이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이안이 입을 열었다. “사장이 죽었는데 시합을 하는 건가?” “사장이 죽었다고 예정된 시합을 취소할 수는 없는 것 아니오?” 남자는 심술 맞게 말하고는 아차 싶었는지 재빨리 덧붙였다. “게다가 새로운 사장이 왔으니 굳이 취소할 필요도 없고 말이지.” 새로운 사장이 왔다고? 카이사와 이안은 서로 쳐다봤다. 금시초문이다. 검투장의 새 사장은 금발 머리의 쭉정이 같은 남자였다. 금발이 너무 밝고 모발이 가늘어 언뜻 보면 대머리처럼 보였다. “호건, 제프리 호건이네.” 비서가 한번 소개했음에도 제프리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카이사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일급 수사관 카이사 수미트네. 이쪽은 내 파트너 이급 수사관 이안 로엔이고.” “나라를 위해 고생하시는군. 위스키?” 잰체하는 폼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의 옷을 입고 어른인척하는 것 같았다. 카이사는 고개를 저었다. 술을 즐기지도 않지만 지금은 근무시간이다. “흠. 나중에 후회 하지 말라고. 꽤 좋은 술이니 말야.” 좋은 술이고 뭐고 이안과 카이사는 관심 없었다. 두 사람은 제프리가 권하는 대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사장의 방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왔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훨씬 고급스러운 가구로 채워져 있었지만 그 위에 올려진 장식품들은 하나같이 어울리지 않았다. 이안은 마호가니 협탁 위에 올려진 황금 흉상이 제프리의 얼굴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실물보다 훨씬 잘생기게 조각해 놔서 누구인지 한참을 쳐다봤던 것이다. “그래서, 살인 사건 수사라고 했나?” 비서가 호박색 액체가 담긴 잔을 건네자 제프리는 다리를 꼬며 물었다. 덕분에 셔츠가 벌어지면서 살짝 나온 배가 드러났다. “전 사장인 파트론 남작의 살인사건에 대해 조상 중이네. 원한을 가진 자의 소행으로 보이는 데 검투장에 관련이 있는 것 같아서.” “그럴 리 없을 텐데. 우리 검투장에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검투장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카이사는 저도 모르게 이안을 쳐다봤다. 그는 이런 타입의 남자가 질색이었다. 잰체하는 남자.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잘난 줄 아는 남자. 하지만 이안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젠장. 결국 카이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파트론 남작과 너즈 자작에 브리지라는 바람잡이까지. 공통점은 이 검투장 밖에 없으니 검투장에서 일어난 사건에 연루되어 있거나 혹은 범인이 검투장과 관련된 자가 아닌가 하는 거지.” “아니, 없네.” 딱 잘라 거절하는 말에 카이사는 잠시 멍해졌다. 제프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살인사건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검투장과는 관계없어. 게다가 나 역시 파트론 남작이 검투장을 새울 때 초기자금을 빌려준 연이 있어서 잠시 사장 자리를 맡고 있는 것뿐이라 알고 있는 게 전혀 없네.” 그가 문 앞에 가까이 가자 비서가 재빨리 문을 열었다. 제프리는 손을 내밀어 나가라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래서 해줄 말이 없어.” 명백히 내쫓는 태도에 카이사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그가 뭐라 항의하기 전에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검투장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는 말인가?” 그가 입을 열기 전까지 제프리는 이안을 단순한 수사관 부하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압도적인 분위기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수사관 나부랭이. 그는 헛기침을 하고 대답했다. “그래. 나는 검투장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 전혀 몰라.” “자네가 손대는 건 이 검투장 뿐이고?” “그, 그래.” 그렇다면야. 이안이 문밖으로 나가자 팽팽하던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제프리는 어깨를 늘어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문득 화가 나서 중얼거렸다. “뭐, 뭐야? 그래 봤자 수사관 주제에.” ============================ 작품 후기 ============================ 어려운 말씀 드립니다. 제가 지난 주에 휴가인데 올렸잖아요? 그래서 비축분이 없어요. 고로 화, 수 쉽니다. ...아이, 좋아~ 주말에 썼어야 하는데 곧 결혼하는 친구가 "셀프 웨딩사진 찍을건데 그 때 쓸 코사지 만들어 줘." ........... 주말 내내 공단으로 코사지 만들었다는 슬픈 전설이... 셀프웨딩한다는 친구 있으면 죽일거다. 코사지 만들어 달라는 친구 있어도 죽일거다. 00060 5. 빗 속에서 =========================================================================                            검투장에서 나오자마자 카이사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재수 없는 녀석.” “그런가?” “그래. 잘난 척이나 해대고, 무례해.” 그렇게 투덜거리다가 카이사는 문득 자신이 이안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바로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이안을 재수 없고 잘난 척하며 무례한 녀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조금 알게 됐다고 그 마음이 변한 건가? 그렇지 않다. 카이사는 고개를 저으며 마차를 올라탔다. 이안을 알기 전에는 그런 녀석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알고 나니 듣던 것 만큼 최악의 녀석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제프리 호건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띵하고 충격이 몰려왔다. 카이사는 스스로 줏대 있게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에게 들은 이야기만으로, 첫인상 만으로 상대를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부끄러움에 얼굴이 확하고 달아올랐다. “수상해.” “뭐, 뭐가?” 난데없는 이안의 말에 카이사는 약점을 잡혔다는 기분이 들어 목소리를 높였다. 이안은 그런 그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제프리 호건말이다. 자신이 검투장의 사장직을 맡은 게 파트론 남작이 검투장을 세울 때 초기자금을 빌려준 연이라고 했지.” 그랬다. 카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나라에 처음 검투장을 세운 건 호건가가 아니었나?” 뭐? 카이사는 얼굴이 붉어졌다는 것도 잊고 몸을 내밀었다. 분명 어느 천재적인 상인이 처음 세운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직후 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검투장에 손을 댔지만 현재까지도 운영되고 있는 검투장은 고작 셋. 이유는 당연하다. 돈이 될 때까지 들어가는 비용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건물을 짓고, 검투사들이 싸울 링을 세우고, 그 주변에 관람석을 만든다. 혹, 검투사들의 무기나 흥분한 검투사들이 링 밖으로 나와 관람석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안전장치까지 꼼꼼하게 만들어야 한다. 초기에 이 부분이 부실한 탓에 부상자가 생겨 막대한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문을 닫은 검투장이 속출했던 것이다. 거기에 검투장의 수익은 입장료가 아니라 승패에 걸린 내기에서 대부분이 나온다. 결국 사람들이 누가 이길지 도박을 하도록 돈을 걸도록 하기 위해서는 바람잡이는 물론, 흥미로운 싸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모든 것에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간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제프리 호건은 검투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지.” 카이사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이상하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사장직을 맡았다는 것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집안에서 처음 시작한 사업이다. 심지어 파트론 남작이 검투장을 세울 때 투자하기까지 했다면 어느 정도는 조사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경기가 언제 있다고 했지?” 이안의 질문에 카이사는 미간을 좁혔다.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귀담아듣지 않았던 탓이다. “오늘 저녁...이라고 한 것 같은데.” “오늘 저녁 표를 구할 수 있나?” 가려고? 카이사의 질문은 입이 아닌 표정으로 드러났다. 결국 카이사는 절대 싫다고 했기 때문에 이안은 제이드에게 물었다. 이럴 때 이용하기엔 친구라는 건 어쩌면 참 좋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그가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제이드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검투장 표라면 있지.” “한 장 필요하다.” “한 장? 카이사와 둘이 가려고?” “한 장인데 왜 둘이 간다는 거지?” “검투장 표는 한 장당 두 명이 들어가게 되어있어.” 그럴 리 없다. 만약 그렇다면 검투장의 노름꾼들은 매번 누군가와 동행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안은 의심스럽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을 뿐 군소리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이거 비싼 거야. VIP석이라고.” 과연.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석은 한 명씩, VIP석은 두 명씩 판다는 말이다. “일반석이면 충분해.” “모르는 소리.” 제이드는 두 번째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오늘 저녁 표가 남아있을 리 있어? VIP석이니까 남아있는 거지.” 요컨대 비싸서 늦게까지 남아있다는 말이다. 이안은 말없이 제이드가 내민 표를 잡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제이드는 표를 놓지 않고 말했다. “내 말 알아들었어? VIP석이라고. 여자 한 명 데려가.” “어째서?” 이유를 알 수 없다는 표정의 이안에게 이번에도 제이드는 두 번째 손가락을 흔들었다. “VIP 라고 V.I.P. 다들 여자 한 명씩 데려오는데 너넨 시커먼 남자 둘이 앉아있어 봐. 얼마나 튀겠어. 이거 수사 아냐? 그럼 튀지 말아야지.” “카이사는 안 간다.” “뭐? 왜?” 글쎄. 이안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제이드가 고개를 돌리자 카이사는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었다. 흠. 저 성격에 검투장을 싫어하는 게 당연할 수도 있다. 융통성 없기는. 그는 이안의 어깨를 툭툭 치며 속삭였다. “스미스 양 있잖아. 데려가.” “안돼.” “어째서?” “그녀는 내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해.” 싫어한다가 아니라 싫어하지 않는 다였지만 어쨌든 이안에게는 그게 그거였다. 제이드는 잠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서 있더니 말했다. “무슨 짓을 했는데?” “아무 짓도.”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왜 네가 싫어한다고 생각해!” 일순 수사관실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됐다. 제이드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컸던 것을 깨닫고 빙글빙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아, 아무 일도 아닙니다아~ 볼일들 보세요. 그는 한숨을 내쉬며 표로 이안의 가슴을 툭툭 쳤다. “뭔 진 모르겠지만, 분명 네가 무슨 짓을 했을 거다. 그러니 이걸로 사과해.” 이안은 그러니까 자신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항변하려 했지만 제이드는 이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손에 쥐어진 표를 내려다 봤다. 금색의 종이에 V.I.P석 이라고 찍혀 있었다. 케이트는 로엔 백작 부인의 성격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잠시 하녀 한 명을 빌려 가도 되겠느냐고 묻자 이유도 묻지 않고 흔쾌히 허락했던 것이다. 그 이유가 검투장에 동행할 여자가 필요해서라는 말에도 로엔 백작 부인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케이트와 이안 두 사람에게 즐겁게 보고 오렴. 이라고까지 말했다. 검투장 안은 후덥지근했다. 여기저기에 얼음장식을 놓긴 했지만 열기를 몰아내기란 턱없이 부족했다. 여름의 열기와 검투장 관객들의 열기는 이글이글 타는 것 같았다. 케이트는 마음 같아서는 치마를 끌어 올리고 싶은 것을 참고 조심스럽게 펄럭거렸다. 그녀는 이런 유의 장소에 올 때 입을만한 옷이 없어 결국 지난번에 입은 외출복을 다시 입었다. 치마 단에 묻은 홍차 얼룩이 지워진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으하아앗!” 이미터는 됨직한 덩치 큰 남자가 거대한 검을 휘둘렀다. 휘두른 검에서 일어난 바람이 느껴지는 것 같아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살짝 뒤로 물러났다. 남자에게 도전한 도전자는 호리호리하고 키가 큰 청년이었는데 그 거대한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와아아하고 사람들의 함성이 들리는 바람에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주변을 쳐다봤다. “아,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냈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중계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역시 신비의 청년도 헤라클레스에게는 이길 수 없는 모양이라고 외쳤다. 사람들이 헤라클레스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정말 수사 맞는 거죠?” 이안은 눈동자만 케이트를 향했다가 다시 정면으로 돌아갔다. “그래.” 수사를 위해 주인님이 필요하다는데 하녀가 싫다고 할 수는 없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무식하게 검을 휘둘러대는 것도, 아슬아슬하게 그 검을 피하는 것도 그녀는 다 싫었다. 헤라클레스의 검이 횡으로 휘둘러졌다. 청년은 몸을 굽혀 공격을 피해냈다. 그의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아슬아슬하게 검을 피해 갔다. 이안은 흠하고 턱을 쓰다듬었다. 청년은 계속해서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있었다. 한 번이라면 그럴 수 있지만 매번 저렇게 피하는 건 쉽지 않다. 그는 자연스럽게 배당률이 적힌 알림판을 쳐다봤다. [ 1.04 : 24 ] 헤라클레스에게 건 사람들은 헤라클레스가 건 돈의 1.04배의 돈을 받는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도전자에게 건 사람은? 무려 24배의 돈을 받는다. 그 이야기는 도전자가 이길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그만큼 적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안이 보기엔 도전자가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지는 것처럼 보였다. 착각일까. 이안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착각이 아니라면 도전자가 이길 경우 그에게 건 사람이 이상한 일이다. 이안은 팔짱을 끼고, 불안한 듯 꼼지락거리는 케이트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그녀는 경기장에서 무기가 날아와 자신의 몸에 꽂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지 몸을 최대한 뒤로 내밀고 있었다. “으아아아앗!” 헤라클레스가 힘찬 함성과 함께 무기를 집어 던졌다. 히익 하고 사람들의 겁에 질린 함성이 터져 나왔다. 케이트 역시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이안이 재빨리 그녀의 등을 손으로 받쳐주지 않았다면 분명 의자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텅! 경쾌한 소리와 함께 경기장에 둘린 가느다란 줄에 무기가 부딪쳐 다시 경기장 안쪽으로 떨어졌다. 어어어?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지자 이안이 나직하게 말했다. “미스릴로 만든 줄이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이틀 되셨나요? 전 별로 안 즐거웠습니다. 회사에 일복이 터져서...하아... 덕분에 비축도 많이 못쌓았네요. 젠장. 날씨도 덥고. 회사가 있다는 유일한 좋은 점은 매달 월급이 나온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런 더운 여름날 내돈 걱정하지 않고 에어컨을 켤 수 있다는 거죠. 그것도 물론 국가 관련된 회사면 어렵습니다만. 슬슬 2부도 끝나갑니다. 아마 6장에서 끝날 듯요. 2부 끝나면 좀 쉬고... 3부 안쓰고 다른거 쓰려고요. 30회 내외정도의 분량으로 다른 이야기 쓸 생각입니다. 그러려고 뮈엘라의 수사관을 이런식으로 구도를 잡아둔거기도 합니다. 수사관은 꽤 장편이 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는 보통 100회 전에 끝났는데 얘는 아마 100회는 훌쩍 뛰어 넘을 거예요. 근데 제가 쭉 이것만 쓸 근성도 없고, 그렇다고 끝내지도 않고 다른걸 손대면 읽으시는 분들께도 예의가 아니죠. 그래서 나름대로 중간 합의점을 찾은게 하나의 이야기를 30회 내외정도의 분량으로 끊자. 입니다. 드라마로 하면 미드 식이고, 소설로하면 (굳이 따지자면) 라노벨 구성입니다. 쫌 스릴러나, 판타지 부분이 전혀 없는 순수한 로맨스도 써보고 싶고 공포물도 써보고 싶고 순수한 추리물(이라는게 과연 존재할까요?)도 써보고 싶고요. 남장여자물, 동양판타지, 이계진입물 등등 사실 쓰고싶은게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여기 써놓은거 전부 시놉은 물론 대부분의 줄거리, 구성, 어떤건 심지어 반권 분량을 이미 써둔 상태입니다. 뮈엘라가 좀 길기때문에 가능한 짧은 걸로 가고싶어요. 뭘로 갈지는 앞으로 한장 더 남았으니 좀 더 고민해 보려고요. ...이틀 쉬었더니 뭔가 주절주절 말이 많았네요. 내일 하루만 버티면 즐거운 주말이네요. 00061 5. 빗 속에서 =========================================================================                            남자는 진득한 눈으로 어두운 도시를 밝히는 타락한 성소를 쳐다봤다. 술에 취한 남자들이 비틀거리며 골목에서 빠져나오고 어리숙한 신출내기 치안 관들은 그런 그들이 어떤 사고라도 치지 않을까 주시하며 지나갔다. 그도 저들처럼 한 때는 검의 신성을 믿었다. 검의 정의로움. 힘 있는 자가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바닥에 떨어져 넝마처럼 버려지고 밟혔다. 마지막 한 조각 자존심마저도 정신을 차렸을 때는 비웃음과 조롱이 끈적하게 늘어 붙어 검게 부패해있었다. 다시 한 번 그 순간이 떠올라 남자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저도 모르게 입안에서 그르르 하고 짐승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어이, 거기.” 뒤떨어졌던지 치안 관 한 명이 서둘러 앞서 간 치안 관들을 따라가다가 남자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당신, 괜찮나?” 치안 관이 손을 뻗자 그의 손에 쥔 검이 반짝하고 빛을 냈다. 그게 남자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크르르르....” “뭐, 뭐야!” 눈 깜짝할 사이에 남자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흔한 단발 마도 없이 치안 관의 몸은 천천히 무너졌다. 잠시 그르륵하는 거품 일어나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서 있기만 해도 주르륵 땅이 흘러내릴 정도로 후덥지근한 날씨는 곧바로 쿠르르 쾅쾅하고 천둥벼락을 동반했다. 남자가 천둥소리에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불쌍한 치안 관은 숨을 거둔 상태였다. 한 방울, 두 방울. 톡톡 시체 위로 떨어지던 빗방울은 순식간에 투두두둑 하고 떨어지더니 쏴아아 내리붓기 시작했다. === 케이트는 치마를 걷어 올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창밖을 쳐다봤다. 비가 엄청난 기세로 쏟아지고 있었다. 거세게 내리는 비 덕에 더위는 한풀 꺾이긴 했지만 마차 안의 열기는 여전했다. 아니, 밖보다 훨씬 더웠다. 그녀는 슬쩍 이안의 눈치를 보며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려 바람이 들어가도록 팔랑거리다가 이안의 시선이 움직이자 손을 딱 멈췄다. 치맛자락이 약간 공중에 뜬 채로 멈췄다. 주르륵 땀 한 방울이 목 뒷덜미를 타고 내려갔다. 마차는 사 인용인데도 이상하게 좁았다. 그건 함께 탄 사람이 이안이기 때문일 게 분명하다. 그는 다리를 쭉 뻗지 않았음에도 맞은편에 앉은 사람과 무릎이 맞닿았다. 상대가 체구가 작은 케이트가 아니라 제이드나 카이사였다면 아니, 하다못해 로엔 백작 부인 정도만 됐더라도 닿았을 게 분명했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며 다리를 쭉 뻗었다.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무릎 옆에 이안의 종아리가 위치해 있었지만 신경 끄기로 했다. 덥다. 검투장의 싸움은 헤라클레스의 승리로 끝이 났다. 결국 도전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다. 덕분에 이안은 약간 기분이 나빴다. 뭔가 잊어버리고 지나간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잠시 케이트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케이트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을 때 또다시 천둥이 쳤다. 우르르 쾅! 뭔가 어슴푸레하게 보이던 것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창틀에 달라붙었다. 잘못 본 게 아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그 주변만 희미하게 밝았다. “잠깐만요!”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마차 벽을 두드리며 외쳤다. 이안이 고개를 들어 무슨 일이냐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깜짝 놀란 마부가 마차를 멈추는 바람에 그녀는 꺅 소리와 함께 이안의 품으로 굴러 넘어졌다. “무슨 일입니까?” 마부가 밖에서 외치자 이안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도 케이트가 갑자기 왜 정신 나간 여자처럼 굴었는지 몰랐다. “사, 사람이 있어요.” 케이트는 이안의 허벅지 위에서 일어나려고 애쓰며 말했다. 한번 구른 탓에 머리카락과 치마가 뒤집어져서 엉망이었다. 저러다가 어디 한군데 찢어질 것 같다고 이안이 생각했을 때였다. “좀 도와줘요!” 더운데다가 산발이 된 머리카락과 치맛자락에 짜증이 배가된 케이트가 결국 폭발해서 외쳤다. 흠. 이안은 손을 그녀의 허리에 감았다. 바르작거리던 몸이 가볍게 들어 올려졌다. “여기 있어.” 밖은 거세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케이트 같은 작은 체구의 여자가 나갔다간 비에 맞아 짜부라들 것만 같았다. 이안은 혹시 몰라 집사가 늘 챙겨두는 레인 코트를 대충 걸치고 마차 밖으로 나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하늘이 뚫린 것 같은 비가 내리붓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비에 멀리 내다보기 어려웠다. 이안은 주변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케이트가 봤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사람이...” “꺅!” 그가 마차에 머리를 들이밀고 입을 열자 케이트가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레인 코트. 누가 봐도 동화 속에나 나오는 사악한 흑마법사였다. 하지만 차마 그래서 놀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케이트는 이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자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거지?” “저기 있잖아요.” 케이트는 열린 문 사이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안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답답한 나머지 그녀는 한 발짝 마차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엄청난 폭우가 달려들었다. 이안은 코트를 벌려 그녀가 비에 쓸려가지 않도록 했다. “저기요.” 케이트의 눈에 희미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이던 남자의 몸은 이안이 그를 발견하자마자 사라졌다. 어? 그녀는 자신이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불이 꺼지듯 새까매질 리가 없지 않은가. 남자의 몸은 골목 입구에 늘어져 있었다. 이미 손가락 한 마디만큼 올라온 빗물 때문에 이안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케이트를 마차로 다시 데리고 돌아갔다. “왜요?” “여기서 기다려.” “하지만...” 케이트가 뭐라고 항의하거나 말거나 그는 그녀의 몸을 마차 안에 집어넣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의 예상대로 남자는 사망한 상태였다. 부릅뜬 눈과 일그러진 얼굴이 예기치 못한 공격을 당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치안 관 복장. 치안 관이 당했다. 범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치안 관들이 눈에 불을 켜고 그를 잡으려 할 것이다. 그의 사건과 관계없다. 이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마부를 시켜 치안 관에게 시체의 존재를 알리도록 했다. 그게 관례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예요?” 쏟아지는 비로 마차 지붕이 뚫리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떨면서 케이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그의 검은색 머리카락이 창밖의 칠흑 같은 어둠처럼 다가왔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마부는 어딜 간 건데요?” “아무것도 아니다.” 그 말밖에 할 줄 모르나. 케이트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남자 죽었죠?” “...그래.” “살인 사건인가요?” 이안은 어떻게 알았느냐는 듯 고개를 들었지만 케이트는 모른 척 시선을 피했다. 당연한 일이다. 살아있다면 저 빗속에 아무리 이안이라 해도 손도 안 대고 버려둘 리 없다. 죽었으니 의사를 부르러 간 건 아닐 테고, 치안 관을 부르러 간 것이라는 말인데 단순한 사고사라면 이안과 케이트가 마차 안에 앉아 시체를 지켜보고 있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시간이면 타운하우스에서는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할 시간이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빨리 마부가 치안 관을 데리고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런 케이트의 모습을 이안은 새삼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빗소리 때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세상에 그와 케이트 단 둘만 남아있는 것 같다. 싫어하지 않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했던가. 무심히 넘겼던 이야기가 선명하게 눈앞에 떠올랐다. 과연 그럴까.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싫지 않다는 것과 좋다는 것의 차이가 뭐지? 케이트를 싫어하지 않는다. 그건 좋아한다와 다른가? 그는 그의 어머니를 좋아한다.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다른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감정이냐고 하면 그건 또 다르다. 다른 여자들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그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케이트가 갑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입을 벌린 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케이트?”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한 비명이 공포가 되어 공간을 채웠다. 이안이 그녀를 잡기도 전에 케이트는 마차의 문을 열고 빗속으로 달려나갔다. “케이트!” 이안이 레인 코트를 낚아채는 사이 케이트는 저 멀리 마차가 달려온 거리를 되 집어 달려가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마부가 치안 관을 데리고 돌아온다는 것도 잊고 이안은 케이트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케이트는 절박하게 중얼거리며 달렸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아파, 괴로워. 부정적이고 절박한 감정이 그녀를 채웠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쏟아지는 비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녀는 마치 앞이 보이는 것처럼 달려나가고 있었다. 마침내 이안이 그녀를 붙잡았을 때 케이트는 두 사람이 몇 시간 전 빠져나간 검투장 후문에 서 있었다. 검은색 후드를 눌러쓴 남자가 두 사람을 보더니 고개를 들고 나직하게 말했다. “표.” ============================ 작품 후기 ============================ "잠시만요! 케이트 언니, 표! 끊고 가실게요!" 으어어어어, 더워요오오오오오오오오오. 진짜 덥네여 오늘 하루 종일 더워어어어어 졸려어어어어어 이러고 있습니다. 내일은 시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민어ㅏㅓ마처먀처먀ㅓ침ㄴㅊ ...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죠? 00062 6. 검은 도시 =========================================================================                            “이건가?” 이안이 품속에서 몇 시간 전 들어갈 때 검표원이 자르고 돌려준 반쪽짜리 표를 꺼내 내밀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쏴아아 하고 내리는 비에 방금 그가 했던 말을 잘못들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남자는 이안이 한 발짝 내딛자 허리춤에 손을 갔다 댔다. 보지 않아도 거기에 검이 달려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표가 없으면 들어올 수 없다. 그런 확고한 의사표현이 행동만으로 충분히 전달되었다. 이 남자와 싸우고라도 돌아가야 할까. 이안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는 케이트를 돌아봤다. 그녀는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 안고 떨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그는 그녀가 마녀라는 걸 확신하고 있다. 이 행동이 그녀가 마녀인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두 팔이 아파서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잘려나간 것 같다. 그럴 리 없다. 그 끝에 달려있는 손으로 더듬어 만져보면 확실히 느껴진다. 그렇다면 이 고통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몸을 떨며 검투장을 올려다봤다. 경기가 끝나고 불이 꺼졌을 게 분명한데 그녀의 눈에는 검투장이 희미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가슴 쪽에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녀의 왼쪽 가슴에서도 희미한 빛이 보였다. 이게 뭐지? 지금 입고 있는 외출복은 가슴 쪽에 약간의 돈을 넣을 수 있도록 숨겨진 공간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안에는... 케이트는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서 봉투를 꺼냈다. 비에 젖어 그 안에 든 종이가 보였다. 이 옷을 마지막으로 입었을 때 호건 가의 후계자를 만났다는 게 기억났다. 그가 준 표다. 검은 색 종이에 하얀색으로 작게 날짜와 장소가 적혀 있었다. 오늘 날짜와 이곳이었다. “여기...” 케이트는 조심스럽게 표를 내밀었다. 남자는 손을 내밀어 표를 받아들더니 유심히 살피고 그대로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옆으로 비켜섰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왔다. 케이트가 검투장을 올려다봤을 때 검투장을 둘러싸고 있던 그 빛이었다. 다시 한 번 건물을 올려다봤지만 아까의 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안과 케이트는 천천히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좁은 복도를 걷는 동안 알 수 없는 울림이 들려왔다. 뭐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고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불쾌한 기분이 들어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앞서 가는 이안의 코트를 잡았다. 그녀의 손에 잡힌 코트 자락에서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복도는 두 사람이 지나가는 대로 흥건한 물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길고 좁은 복도를 지나는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 울림이 점점 커지고 또렷해 지난 것으로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복도의 끝에는 마찬가지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을 보더니 무기를 달라고 했다. 이안은 한참을 가만히 그를 노려보다가 검을 내밀었다. 생각해보면 몇 시간 전에도 들어갈 때 무기를 맡겨뒀었다. 파앗하고 희미한 조명에 익숙해진 두 사람의 눈에 너무 밝은 빛이 파고들었다. 와아아아아 하고 사람들의 함성에 이끌리듯 케이트와 이안은 문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이 몇 시간 전에 빠져나간 바로 그 공간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두 사람이 관람할 때는 경기장 주변에 VIP를 위한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그 주변엔 일반석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의자는 전부 치워지고 경기장 주변에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었다. “죽어! 죽어! 죽어!” 이상한 울림의 정체가 드러났다. 경기장 주변에 둘러싼 사람들은 광기 그 자체였다. 그들은 발을 구르고 주먹을 쳐들며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죽어! 죽어! 죽어!” 이안은 사람들을 헤치고 안쪽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들이 뭘 보고 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케이트는 그의 코트 자락을 잡은 채 힘없이 끌려갔다. 무섭고 괴로웠다. 속이 미슥 거렸다. 광기가 공기를 통해 전염되는 것 같았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 사람들이 발을 구르는 것이, 주먹을 쳐드는 것이 그녀에게 향하는 공격 같았다. “죽어! 죽어! 죽어!” 사람들의 외침은 더욱더 격렬해졌다. 케이트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그들은 분노하는 것도, 즐거워하는 것도 같았다. 그 외침에 기묘한 광기와 쾌감이 섞여 있었다. 쿵쿵하고 울림이 케이트의 몸속까지 파고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깨닫지 못했지만 이안의 한쪽 팔에 매달려 있었다. 이안은 눈앞의 여자가 치켜든 손을 잡고 옆으로 휙 뿌리쳤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넘어졌지만 광기에 물든 사람들은 누군가 넘어졌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넘어진 여자마저도 다시 일어나 주먹을 치켜들고 죽어! 를 외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경기장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둘 다 피를 뒤집어쓴 것 같은 형상이었다. 이안은 잠시 후 체구가 작은 쪽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게 아니라 꼬마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는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부여잡고 있었다. 등허리가 덜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이의 왼쪽 어깨 아래부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뱀에게 먹히기 직전의 생쥐처럼 아이는 굳은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가 손에 든 검을 가볍게 흔들자 검 날에 맺혀 있던 붉은 것이 주변에 가볍게 뿌려졌다. 와아아아아. 사람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피. 피의 함성이었다. 그들은 얼굴과 팔에 묻은 피를 더듬으며 황홀해했다. 죽어! 죽어! 죽어! 이안은 깨달았다. 그 외침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가 케이트를 돌아봤을 때 케이트 역시 깨달은 다음이었다. 녹색의 눈동자가 공포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때 경기장 안의 남자가 검을 세웠다. 사람들은 기쁨에 젖어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 죽어라! 아이의 목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이안이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그는 코트를 열어 케이트 감쌌다. 자그마한 아이의 몸에 피로 묻은 검이 휘둘러지는 순간 케이트의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와아아아아아! 아까 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함성이 공간을 갈랐다. 케이트의 몸이 움찔하고 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으아아아아아아!” 경기장 안의 남자가 천장을 바라보고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소리를 냈다. 이안은 냉정한 눈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볼거리를 원한다. 상대방을 죽이면 안 됨. 둘 중 한 명이 다치는 순간 경기 중단. 이런 규칙은 검투장을 양지로 이끌어냈을지 몰라도 더욱더 선정적이고 잔인한 경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걸린 게 돈과 명예인 것보다는 자신의 목숨이라는 쪽이 검투사들을 더욱더 치열하게 싸우도록 만든다. “이번 도전자가 버틴 시간은 이 십삼 분입니다!” 누군가가 외쳤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배당률이 적힌 알림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가 이기느냐가 아니었다. 저 어린 소년이 검투사의 공격에서 얼마 동안이나 살아있을 수 있느냐에 따른 내기였다. 가장 높은 배당률은 십 분대였다. 대체 얼마나 많은 아이가 이 경기장에서 죽어갔던 걸까. 직원인 듯한 남자들이 안쪽에서 나오더니 아이의 시신을 수습해갔다. 몸과 오른쪽 팔. 그리고 몇 가지 작은 조각들. 이안은 경기장 안으로 사람들이 앞다퉈 손을 내밀어 아이의 떨어져 나간 귀를 낚아채려는 것을 발견했다. 무대가 치워지고 또 다른 아이가 억지로 끌려 나왔다. 겁에 질린 아이의 얼굴은 경기장을 둘러싼 사람들의 광기 어린 모습에 순식간에 창백해 졌다. 이안의 품속에서 케이트가 꿈지럭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코트 자락을 열자 경기장 안의 아이와 똑같은 표정의 케이트가 고개를 내밀었다. 녹색의 눈동자가 붉어져 있었다.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었다. 그녀는 경기장을 보고 또 다른 아이가 나온 것을 발견하더니 이안에게 매달렸다. “도와줘요.” 뭐? 이안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여기서 그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경기장은 미스릴 줄로 둘러싸여 있다. 아무도 그 안에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다. 사람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귀! 귀! 귀! 경기장 안의 남자가 검을 가볍게 휘두르자 끈적하게 굳은 핏방울이 투둑 떨어졌다. 히익하고 그 모습을 본 아이가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귀! 귀! 귀! 귀! 누군가 목청이 터지라 외쳤다. “귀부터 잘라!” 경기장 안의 아이와 케이트의 얼굴이 동시에 핼쑥해졌다. 그녀는 이안의 셔츠를 꽉 움켜잡고 속삭였다. “도와줘요! 저 애를 살려줘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당신 수사관이잖아.” 케이트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안은 약간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죽는 건 그녀가 아니다. 그녀가 아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자신과 상관도 없는, 지금 처음 보는 아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저렇게 눈물이 나온다는 게 그는 그저 신기했다. 제발요. 케이트는 절박한 기분으로 경기장의 아이를 한번 보고 다시 이안을 올려다봤다. 이 안의 사람들은 모두 광기로 물들어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다. 어떻게 저런 어린아이를 죽이려 한단 말인가. 왜, 어째서 죽이려 하는지도 몰랐다. 저런 아이를 죽이기 위해 돈을 내고 표를 산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알라나 데일에서 곁에 있던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이 다시 떠올라 목구멍을 틀어 막았다. 숨을 쉴 수가 없어, 케이트는 헐떡였다. “뭐든지 할게요. 제발요.” 이안의 황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는 나직하게 물었다. “뭐든지?” 지금 당장 필요한 그 빌어먹을 마녀의 힘은 나올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부탁할 수 있는 건 이안 밖에 없었다.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요.” ============================ 작품 후기 ============================ 악마와_계약.txt 이번화는 쫌 잔인한게 아닌가 싶긴한데...음... 더워서 그런거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전 이번화와 다음화를 쓸때 엄청 시원한 곳에서 한번에 쫙 써내려 갔습니다. 00063 6. 검은 도시 =========================================================================                            남자가 검을 들어 올렸다. 사람들의 흥분이 고조된 순간 중계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은 남자를 발견했다. 마계에서 나타난 흑마법사 같은 모습은 남자는 그에게 뭔가를 제의했다. 중계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런 미친놈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검투장으로서는 더 좋은 일이다. 경기라는 이름의 살육이 중단되자 사람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피에 미친 것처럼 사람들은 어째서 빨리 저 아이를 죽이지 않느냐고 투덜거렸다. 케이트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이안의 곁에 서 있었다. 이 남자가 미친 게 아닐까. 그녀는 아직도 그가 중계자에게 그런 짓을 제의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여러분, 겁 없는 도전자가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도전자는 그리 많지 않다. 비밀 검투는 둘 중 한 명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도전자는 말 그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야 한다. 처음 한두 번은 목숨값을 받고 죽으러 오는 자들도 있었으나 그 목숨값이 충분치 않다는 것은 쉽게 깨달았다. 단번에 죽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경기를 보러온 사람들은 최대한 도전자가 오랜 시간 괴로워하다가 죽기를 원했다. 처음에는 귀 그다음은 팔, 눈, 다리 순으로 베어 가며 도전자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즐거워했다. 더욱더 잔인한 것, 더욱더 선정적인 것, 더욱더 많은 피. 검투사는 그들의 욕구를 맞추기 위해 최대한 치명상을 피해서 공격했다. 그것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 하나의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케이트는 몸을 떨었다. 이건 아니다. 그녀는 아이가 죽기를 원하지 않지만 이안이 죽기를 원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의 셔츠를 움켜잡자 이안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지?” “그, 그냥 수사관이라 하고 이 경기를 중단시키면 안 돼요?” “이걸 중단시키면 이 사람들이 그냥 물러날 것 같은가?” “그렇다고 당신이 싸울 필요가!” 이안은 불안한 표정의 케이트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괜찮다. 나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검을 가지고 왔다. 그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 좋은 검은 아니지만 쓸 만했다. “사람이라도 불러,” 갑자기 이안이 그녀의 뺨을 손바닥으로 쓰는 바람에 케이트의 말이 멈췄다. 그는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뭐든 지라고 했다.” 뭐든지? 케이트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동안 이안은 검투장의 직원이 경기장의 문을 여는 것을 기다렸다. 뭐든지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안은 아무 상관도 없는 아이 때문에 우는 케이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케이트는 오히려 이안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그녀가 뭐든지 하겠다고 한 것 때문에 도전했다는 말인가? 어린아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정의감이나 수사관이 지녀야 할 직업정신이 아니라? 경기장 안에서 직원들이 아이를 빼내려 하자 마치 짐승을 상대로 먹잇감을 빼앗아 가려는 듯한 형세가 만들어졌다. 검투장의 직원이 책을 들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더니 한 장을 부욱 찢었다. 한 번 본 모습이다.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안의 시선이 직원이 손에 든 책으로 향한 것 역시 말할 것도 없다. 검투사의 몸이 딱 멈췄다. 마치 조각처럼. 그 사이를 이용해 검투장의 직원들은 아이를 경기장 밖으로 끌어냈다. 아이는 지친 모습으로, 살았다는 듯 남자들에게 이끌려 빠져나왔다. 교대하듯 이안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 축 늘어져 끌려 나오는 아이를 보자 케이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이안을 들여보내기 위해 직원이 열어둔 문을 닫기 전에 재빨리 달려갔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려는 게 아니다. 경기장과 이어진 도전자 대기실로 들어가려는 거였다. 지금까지 도전자들은 경기장에 들어가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문은 닫혀있지 않았다. 이안은 경기장 안에 들어가면서 레인 코트를 벗었다. 안에 입은 옷은 조금 덜 젖은 덕에 움직임의 불편함이 덜했다. 그는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평소 그가 쓰는 검보다 가볍다. 표준형이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방인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경기장 밖에서 관객으로 있을 때와는 느낌이 확실히 달랐다. 구경꾼들은 한목소리로 이안이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이들은 여기서 먼저 기가 죽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어린 시절부터 그의 실수만을 바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란 남자다.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앞에 선 상대에게만 집중했다. 뭔가 이상했다. 남자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검을 쥔 손은 나른하게 내려와 있었다. 싸울 의지가 없어 보였지만 반면 그의 몸에서 나오는 기운은 명백한 적의였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자 밖에서는 들리지 않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으으...” 케이트는 희미한 복도를 정신없이 따라 걸었다. 너무 밝은 경기장과 달리 복도는 어슴푸레 했다. 혹시라도 경기장 밖에 빛이 새어 나가 이 비밀 검투가 들킬까 조심하는 것이리라. 복도 끝에 여러 개의 문이 보였다. 케이트는 문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아이들이 자의로 검투장에 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아이들이 도망칠 것을 우려해 뭔가 장치를 해놨을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가장 끝에 있는 문에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감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냐고 물었을 것이다. 케이트는 주변을 살폈다. 뭔가 이 문을 부술만한 것, 혹은 자물쇠를 딸만 한 것이 필요했다. 그때 복도 끝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그녀를 발견한다면 어떨까. 케이트는 재빨리 자물쇠가 걸린 문의 옆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역한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냄새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발걸음 소리는 가까워졌다. 이안이 검을 세워 들자 어떤 전조도 없이 남자가 덤벼들었다. 그르르 하고 이안이 비키는 순간 스쳐 지나가며 보인 얼굴은 충혈된 눈과 벌어져 침이 흐르는 입이었다. 제정신이 아니다. 그는 가볍게 검 손잡이 뒤쪽으로 남자의 목덜미를 찍었다. 분명 꽤 강한 힘이었는데 남자는 벌레에라도 물렸다는 듯 돌아봤다. 이런 상태는 처음이다. 이안은 눈썹을 찡그렸다. 어디 아픈 녀석이나 멍한 녀석과는 차원이 달랐다. 반사적이었고 행동도 빨랐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적의와 투지는 그가 겨뤄본 어느 검사 못지않았다. 남자의 검이 아래에서 쳐 올라왔다. 이안은 검을 대 막았다. 챙! 하고 강한 소리가 났다. 검을 잡은 손이 찌르르 울렸다. 엄청난 힘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게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데 이 정도 힘이라니. 이런 실력자가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그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뒤로 물러났다. 남자는 이안이 검을 떼고 물러나자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약간 비틀거리더니 씩씩거렸다. 관객들의 함성이 이어졌지만 이안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런 사람과 겨루는 게 처음이었다. 약간의 호기심마저 들었다. “크으아악!” 남자가 포효하더니 거세게 덤벼들었다. 챙! 하고 검과 검이 부딪혔다. 그그극하고 검 날이 긁히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남자의 검 날에 달라붙어 있던 굳은 피가 떨어져 나갔다. 이안은 그대로 다리를 휘둘러 남자의 무릎을 걷어찼다. 일반인이라면 넘어 졌을 텐데 남자는 휘청하고 말았다. 하지만 덕분에 남자의 검이 미끄러지면서 이안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힘으로 덤비는 자에게 힘으로 대응할 생각은 없다. 이안은 천천히 남자의 주변을 걸었다. 어디를 어떻게 봐도 남자는 빈틈투성이였다. 하지만 이안이 공격하면 기묘한 각도에서 그 공격을 막았다. 뒤에서 공격하면 허리를 틀어 공격을 막는 식이었다. 관절이 꽤 아플 텐데 표정은 여전히 벌어진 입에서 침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십 분 지났습니다!” 중계자의 말에 사람들이 우우 하고 야유했다. 이안이 십 분이 되기 전에 죽을 거라는 데에 건 사람들이다. 검투장의 경비원은 복도를 걷다가 대기실의 문이 열려있는 걸 발견했다. 죽은 아이의 시신을 둔 곳이다. 그는 혀를 차며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때때로 죽은 아이의 신체 일부를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들어와 잘라가는 경우가 있다. 어차피 어딘가 묻어버릴 거니 그건 상관없지만 대기실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건 곤란하다. 피가 흘러나오면 그걸 닦아내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천을 걷어 올린 순간 뒤통수에 뭔가가 부딪혔다. 퍽 소리와 함께 손부터 팔까지 찌르르 울렸다. 케이트는 숨을 몰아쉬며 픽 쓰러진 남자를 내려다봤다. 그가 걷어 올린 천 아래에 피투성이의 죽은 아이가 있었다. 역한 냄새는 이것 때문이었다. 맙소사. 케이트는 비명이 나올 것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다. 아이는 고작해야 열두 세 살 정도로 보였다. 비쩍 말라서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케이트는 눈을 감았다. 지옥이란 곳이 있다면 여기일 것이다. 그녀는 천을 찢어 경비원의 몸을 묶었다. 제발 경비가 이 사람 외에는 없길 기도하면서. 운 좋게도 경비의 허리춤에 열쇠가 짤랑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누구 있어요?” 케이트가 자물쇠를 따고 문을 열자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복도에서 비치는 빛으로 깡마르고 더러운 발이 보였다. 그녀가 램프를 가져다 안을 밝히자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이 눈을 감으며 괴로워했다. “괜찮니?” 아이들은 모두 손과 발이 묶인 상태였 다. 생각보다 많았다. 너무 많았다. 케이트는 두, 세 명 정도 일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방 안에 있는 아이들은 모두 스무 명이 넘었다. 이 많은 아이을 어디에서 데려온 걸까. 그녀는 다시 경비원의 품을 뒤져 단도를 찾아냈다. 그녀가 아이들의 줄을 끊어주는 동안 아이들은 서로 눈치만 볼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걸을 수 있어?” 답답할 정도로 아이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케이트는 아이 중에도 한쪽 팔이 없거나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 아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얘들아, 나가자.” 그녀가 아무리 재촉해도 아이들은 그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앉아있거나 서 있을 뿐이었다. “얘들아?” 그녀가 다시 한 번 재촉하자 가운데에 있던 가장 어린아이가 입을 열었다. “안돼요.” “안된다니, 왜?” 다시 아이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구석의 가장 큰 아이가 속삭였다. 말하면 안 돼. 어린아이는 약간 주저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도망가면 다시 쫓아와서 죽인댔어요.” ============================ 작품 후기 ============================ 으 졸려요... 햄버거... 불고기... 회냉면... 삼겹살... 닭강정... 하아... 00064 6. 검은 도시 =========================================================================                            누가? 라고 물어보려는 순간 케이트는 아이의 눈이 어떤 감정으로 물드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공포라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쾅! 둔탁한 것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한번 구르면서 바닥에 닿은 무릎과 손바닥에 느껴지는 진동은 그 때문이리라. 그녀는 공격한 자를 확인하기도 전에 다시 몸을 굴렸다. “쥐새끼 같은 것!” 남자는 욕설과 함께 아이들의 겁에 질린 신음이 방안을 채웠다. 아슬아슬하게 무기를 피한 케이트는 뒤로 물러났다. 남자는 검집에서 빼지 않은 검을 그대로 든 채 케이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얘들아, 나가.” “크흐흐. 어디 나가봐라, 더러운 쥐새끼들아.” 단어에 포함된 경멸에 케이트의 몸이 떨렸다. 남자는 아이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디 한군데 부러지고 싶으면 나가보라고.” 몇몇 아이가 몸을 움츠렸다. 아이들의 몸에 든 멍은 검투장에서 생긴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검집에 묻은 피 역시 그가 정당한 싸움으로 얻은 것은 아닐 것이다.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많은 아이들이 사라졌는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녀는 도망갈 곳을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행방불명된 아이들을 찾기 위해 수사관이 수사하고 있다고요!” “수사관?” 남자는 기분 나쁘게 웃었다. 절망의 틈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신음 같은 웃음소리였다. “멍청한 소리. 행방불명된 아이를 찾는다고?” 남자는 휙 하고 검집을 휘둘러 아이들을 가리켰다. “부모가 팔아넘긴 애들을 누가 찾을까, 응?” 쫓아오는 게 무서워서 도망치지 못하는 게 아니다. 케이트는 어렴풋이 이해했었다. 단지 그 이유라면 쫓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치면 된다. 아이들의 사고는 단순하다. 나를 지켜줄 부모에게 도망치면 된다. 그렇지 않다는 건 둘 중 하나다. 지켜줄 부모가 없거나. 부모가 지켜주지 않거나. 그래서 케이트는 아이들이 고아일 거라 생각했다. 도와줄 사람이 없는 아이들. 그런데 아니었다. 부모가 팔아넘긴 아이들이었다. 그것도 검투장에 피에 미친 관객들에게 죽이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케이트는 그대로 딱 얼어붙었다. 아이들의 나이가 열 일고 여덟만 됐어도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분노했을 것이다. 부모 자격도 없다고 치를 떨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가장 어린아이는 열 살도 안 되어 보였다. 가장 나이 많은 아이가 열세, 네 살로 보인다. 이런 어린아이를 죽이라고 돈을 받고 파는 부모가 있다고? 순진하지만 그녀도 알건 안다. 가난한 집안에서 입을 하나라도 덜고자 일할 나이가 되면 부잣집의 허드렛일을 하는 견습하녀나 하인으로 들어가는 건 운이 좋은 경우라는 것을. 버려지거나 고아가 되어 거리의 꽃 파는 소녀가 되거나 소매치기, 창녀가 되는 아이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건 아니다. 이건 진짜 아니었다. 말도 안 된다. 믿을 수 없다. 케이트는 목을 쥐어 짜내며 말했다. “거, 거짓말이예요.” 남자는 히죽 웃었다. 그는 검집 채로 검을 흔들며 말했다.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진짜예요!” “야!” 가장 어린아이가 목청껏 외쳤다. 진짜로 엄마가 날 여기에 팔았어요. 그만해. 주변의 다른 아이들이 아이의 입을 막았다. 종래에는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앙. 그 울음소리가 지이잉하고 케이트의 귀를 울렸다. 맙소사.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질 것만 같았다. 이 애들을 구해주면? 그다음은? 아이들의 목숨값을 받고 팔아넘긴 부모다. 자식이 돌아왔다고 기뻐할까? 그때 어깨에 파열음과 함께 고통이 밀려왔다. 퍽!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남자는 히죽히죽 웃으면 한걸음 내밀었다. 검집채로 후려친 덕분에 베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잠시 사라졌던 감각은 비명을 지르고 싶은 통증을 동반하고 나타났다. “...헉!” 케이트는 엉금엉금 기어서 남자에게서 멀어지려 애썼다. “그러니 네년은 헛짓거리했다는 거다.” 남자는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그는 천천히 케이트를 따라와서 뼈가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강도를 조절해 그녀의 몸을 검집으로 후려쳤다. 퍽! 소리와 함께 케이트는 윽 하고 신음을 삼켰다. 일어나서 두 다리로 움직여야 하는데 충격 때문인지 고통 때문인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 녀석들은 쓸모없는 벌레들이거든.” 남자가 검집채로 내려치는 것을 가까스로 몸을 굴려 피하며 케이트는 숨을 헐떡였다. 사람에 대한 증오심이 생겨났다. 몇 년간이나 그녀와 함께 살아와서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을 그녀를 죽이려 했던 알라나데일의 사람들. 그녀에게 텃세를 부린 타운하우스의 사용인들. 이런 어린 자식들을 죽이라고 돈을 받고 판 부모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사서 죽이는 장면을 돈을 주고 보여주는 자들. 아이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에 열광하던 사람들. 그리고 아이가 죽는 걸 보면서도 움직이려 하지 않던 이안. 케이트는 증오를 품고 생각했다. 그녀가 정말 마녀라면 이 나라 따윈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그 생각에 공명하듯 그녀의 마음속에서 뭔가가 일렁였다. 그것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워 가슴이 터질 것 같다고 느꼈을 때 가장 나이 많은 아이가 달려와서 남자에게 부딪히며 외쳤다. “누가 벌레야, 개자식!” 모두 놀랐다. 남자도, 아이들도, 케이트도. 심지어 달려와서 부딪힌 아이도 놀라서 얼어붙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케이트 였다. 그녀는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이 쥐새끼 운운하기 시작했을 때 아이의 손을 잡고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도망쳐!” 케이트와 소년이 달리면서 외치자 다른 아이들도 한두 명씩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너 이 새끼, 잡히면 죽...” 아이 하나가 달려가면서 남자의 팔을 툭 치고 지나갔다. 그가 욕을 내뱉으며 뒤를 돌아본 순간 다른 아이들도 우르르 남자를 치고 지나갔다. 이안은 기묘한 시선으로 검투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다섯 번은 기절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걸어 다닐 수 없거나. 그런데 남자는 멀쩡했다. 이건 일반적인 반응이 아니다. 그는 그와 맞서기 전에 검투장의 직원이 들고 왔던 책을 떠올렸다. 그건 역시 스펠 북이었을까. 그렇다면 저건 대체 무슨 마법인 거지. 생각에 잠긴 이안에게 검투사가 화내는 것처럼 괴성을 지르며 덤벼들어 왔다. “그아아아!” 초점이 없는 벌건 눈과 벌어져서 침 흘리는 입. 하지만 검술실력은 상당했다. 이안은 뒤로 물러나며 남자의 검을 받아냈다. 챙하고 부딪힌 검은 그그극하고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달라붙었다. 이번에도 엄청난 힘이다. 사람들은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원한 건 짜릿한 경기 따위가 아니다. 피, 상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었다. 그런데 이안과 남자의 싸움은 그런 게 전혀 없으니 당연했다. 남자는 이안의 머리카락 하나 건들지 못하고 있었고 이안은 남자의 몸에 상처를 입히기 보다는 그를 관찰하는데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아, 죽이라고!” 참다못한 누군가가 외치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이딴 싸움 보러 온 줄 알아? 팔 하나 자르란 말야! 이안의 턱이 굳었다. 개중에는 좋은 옷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전부 도박에 미친 사람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귀족도 있고 지식층도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렇군. 그는 빨리 이 남자를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들이 원해서가 아니다. 이런 저열한 자들의 눈요깃감이 되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안은 경멸스런 표정으로 사람들을 보고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와중에도 남자는 이안에게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나같이 훌륭한 솜씨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날카롭지 못했다. “거기 안 서!” 이안이 남자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을 때 복도와 이어진 문에서 케이트가 뛰쳐나왔다. 그의 손이 딱 멈췄다. 케이트의 뒤로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경기장에서 대기실로 옮겨갔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중계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대기실이 있는 복도에서 뛰쳐나온 여자가 경기장의 문을 열어버린 것이다. 열쇠는 직원이 가지고 다닐 텐데? 믿을 수 없어 하는 중계자의 눈앞에서 케이트는 바로 경기장 바깥쪽 문까지 열고 아이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저, 저 여자 잡아!” 무슨 상황인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사이로 직원들이 달려나갔다. 이안은 그들이 노리는 게 케이트라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케이트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이안과 대치 중이던 검투사는 그런 이안을 따라왔다. “으악! 문! 문 닫아!” 소란이 일어났다. 피에 물든 검투사가 경기장 밖으로 나왔다. 그는 이안을 쫓아 나왔음에도 움직이는 모든 사람을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검에 찔리고 베이는 것을 즐기던 사람들은 그 행위가 자신을 향하자 기겁하며 도망쳤다. “아아아악!” “사람 살려!” 아비규환이었다. 검투장은 흥분한 관객이 싸움을 벌이는 것을 막기 위해 입장 시 무기를 압수했기 때문에 관객 중 무기를 지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허가되지 않은 비밀 검투였기 때문에 정문은 봉쇄된 상태였다.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정문을 향해 달려갔고 멀쩡히 사슬로 감겨있는 문을 보면서도 열어 달라 비명을 질렀다. “책 가져와!” 끝장이다. 중계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되어서야 이 검투장에 오는 사람은 더이상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다치고 죽는 것을 보는 즐거움은 그것이 내 일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을 때 즐거운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이 검투장은 문을 닫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함다.... 회사에서 회식을 해서 맥주 한잔 해쑴다. 설문 하나 등록했습니다. 현재 업뎃시간이 9시에서 11시 사이인데 기존의 7시에서 9시 사이로 바꾸면 안되냐는 문의가 들어와서요. 가시기전에 한번씩 눌러주세요. 내일은 쉬는 날입니다. 모두 금요일날 보아요~ 00065 6. 검은 도시 =========================================================================                            두 명의 입만 다물게 하면 된다. 그는 스펠 북을 뒤적이며 안쪽에서 몇 명의 남자들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했다. 검투장의 주인은 도망쳤다. 어차피 관객들은 아무 곳에도 이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보는 것부터가 불법인 경기다. 아이들은 부모가 팔아넘긴 아이들이니 도로 잡아와서 다시 무대에 세우면 된다. 그렇다면 검은 남자와 조그마한 계집애 둘만 죽이면 된다. 우선 검투사부터 잠재우자. 그가 프리즈(freeze) 마법을 찾아 을 때 비명이 들렸다. “꺄아아아아아아악!” 검투사는 비명을 지르는 여자의 등에 검을 꽂아 넣고 있었다. 여자의 비명이 잦아들면서 간헐적인 신음이 섞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그토록 열광하던 장면임에도 이번만큼은 숨을 죽이고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축 늘어진 여자의 시체가 남자가 검을 박아 넣을 때마다 들썩였다. 하아, 하아. 반사적으로 내리찍던 남자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여기는 어디지? 그는 눈앞이 새빨간 것을 깨달았다. 아아, 또다. 그에게 걸린 마법이 풀리고 있었다. 하지만 더 문제는 다른 때와 달리 그가 있는 곳이 대기실이나 경기장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눈앞에 미스릴 줄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열광하는 표정이 아니라 겁에 질린 표정을 보자 그는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이, 아이들이 그를 괴물 보듯 보고 있었다. 그는 삼 년 전까지 용병이었다. 외국의 몬스터가 많은 지역에 가서 몬스터를 토벌했다. 강한 자들이 많은 뮈엘라는 몬스터 피해가 적지만 다른 나라는 그렇지 않다. 참혹한 곳은 눈뜨기 힘든 곳도 많았다. 몬스터는 사람을 먹는다. 마을을 습격하고 남자를 죽이고 어린아이와 여자를 잡아먹는 것이다. 그런 몬스터를 볼 때의 마을 사람들의 표정. 눈빛. 잊을 수 없는 그 표정과 눈빛이 지금 그를 향하고 있었다. “아, 아니...” 고골리는 입을 열어 말하려 했다. 하지만 목 안쪽에서 그르륵거리는 소리가 섞여 나오는 바람에 그의 말은 인간의 말로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움찔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가 손을 내밀자 우와아아아 하고 멈춰있던 사람들이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고골리는 입술을 깨물고 여자의 시체에서 검을 뽑았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다. 처음 그가 그의 파트너라는 녀석에게 마법에 의해 조종당한다는 것을 알았던 날부터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니 어차피 죽을 거라면 자신을 이렇게 만든 놈을, 죄 없는 아이들을 검투장의 제물로 바친 썩어 빠진 녀석을 최대한 많이 죽이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고골리는 검을 들고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등을 보였다.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죽여야 할 녀석. 이 검투장의 안쪽에 숨어있는 녀석을 죽여야 한다. 이안은 케이트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남자를 발로 걷어차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케이트는 소년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소년은 이안을 보고 겁을 집어먹었는지 어깨를 움츠렸다가 곧 케이트를 지켜야 한다고 마음먹었는지 그녀의 앞에 나서려 했다. “괜찮나.” 그의 말에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괜찮다. 숨 쉴 때마다 갈비뼈가 조금 아프긴 하지만 아직은 견딜 만하다. 문제는 아이들이었다. 몇몇 아이들은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녀를 공격하는 남자들을 피해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인 아이들을 남자들이 잡아내기란 쉽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가 검을 뽑게 만든 걸 후회해라.” 난데없이 나타난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검집을 집어던졌다. 케이트와 소년은 대기실에서부터 쫓아온 남자의 모습에 서로 끌어안고 어깨를 움츠렸지만 이안은 눈썹을 치켜 올렸을 뿐이었다. “왜 후회해야 하지?” 그는 그렇게 물으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이 녀석은 뭐야? 남자는 이안이 다가오자 당황해서 뒤로 물러났다. 가까이 오자 이안이 얼마나 큰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키가 크고 마른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어느 정도 체격이 있는 이안은 가까이에서 보지 않으면 그가 얼마나 큰지 그다지 인식이 되지 않는다. 그건 그가 주로 입는 검은 색 옷의 덕도 있었다. 남자는 이안이 검을 휘두르자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막았다. 챙하고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마, 막았다. 그가 안도하는 순간 엄청난 힘에 밀려났다. 그그극하고 검 날이 긁히다가 이안이 한 번 더 힘을 주가 남자는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그가 이안에게 당하는 것을 본 다른 남자들이 다가왔다.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소년을 끌어당겨 뒤로 가리려 했다. 삼 대 일. 수적으로 불리하다. 이안은 첫 번째 남자를 발로 걷어차더니 그대로 검을 돌려 두 번째 남자의 어깨를 베었다. 남자가 으악하고 비틀거리자 그는 그대로 남자를 밀어 세 번째 남자와 부딪히도록 했다. 우당탕하고 세 남자가 한 덩어리가 되어 넘어졌다. 어깨의 피를 흘리는 남자가 물러나고 새로운 남자 세 명이 합세했다. 이제 오 대 일. 이안이 검을 가볍게 흔들어 피를 떨궜다. 피가 묻은 채로 굳으면 검 날이 무뎌진다. 다섯 명의 남자가 동시에 덤벼들었다. 조마조마한 케이트와 달리 이안은 그다지 걱정없는 표정이었다.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경우가 별로 없으니 어쩌면 저게 걱정하는 표정일지도 모른다. 케이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물러났던 남자가 어깨를 다치지 않은 반대쪽 손에 검을 고쳐 잡고 다가왔다. 중계자가 프리즈 마법이 적힌 종이를 찾아 부욱 찢었을 때와 케이트가 그녀와 소년을 향해 검을 내리 꽂으려는 남자를 발견한 건 동시에 일어났다. “안돼!” 케이트는 소년을 끌어안으며 외쳤다. 중계자가 찢은 종이의 갈라진 틈에서 검은 글자가 빠른 속도로 떠오르더니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이안은 세 번째인지 네 번째인지 모르는 남자를 걷어차고 그다음 남자의 복부에 검을 꽂아 넣고 있었다. 푹 눌러 넣는 검의 감촉에도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놀라서든 고통스러워서든 발버둥 치기 마련이다. 이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그는 굳어있었다. 이안이 검을 꽃은 남자뿐이 아니었다. 그의 주변을 둘러싼 다른 남자도 마치 그대로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굳어있었다. “뭐, 뭐야 이거?” 먼저 입을 연 건 중계자였다. 그는 자신이 타겟으로 정한 고골리가 그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스펠 북이 불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옆에 선 다른 남자 두 명이 굳어있었다. 불량인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스펠 북을 뒤적였다. 때때로 찢어도 마법이 발동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마법이 반대로 발동한다는 건 처음이다. 팔락이며 스펠 북을 뒤지는 그의 목덜미에 서늘한 것이 닿았다. 불안한 표정을 짓는 그의 머리 위에 이안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거 이리 내놔.” 마부가 치안관을 불러오던 중이었기 때문에 케이트와 소년은 빠르게 사람들을 불러올 수 있었다. 폐쇄된 검투장 안의 사람들은 고스란히 연행되었다. 빈 사장실 안에서 가구를 맨손으로 박살내고 있던 회색 머리의 남자를 발견한 건 이안이었다. “젠장.” 연락을 받고 달려온 제이드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욕을 내뱉다가 옆에 케이트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사과했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저도 욕하고 싶은 심정이니까요.” 살아있는 아이들은 모두 스물두 명. 그중에 팔다리가 멀쩡한 아이가 열다섯 명이었다. 검투장 안에서 발견된 시체는 모두 세 구. 케이트와 이안이 입장하기 전에 이미 두 번의 살인 쇼가 끝났던 것이다. 엄청난 비는 잦아들고 있었다. 비 비린내와 피비린내가 합쳐져 검투장은 역겨운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제이드는 케이트와 이안에게 갈아입을 옷을 내밀었다. 리코는 치안관과 함께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표는 어디서 난거지?” 카이사의 질문에 케이트는 이름을 떠올리려 애쓰다 그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건 가의 후계자요.” 이안과 카이사의 눈이 마주쳤다. 이번 사건의 배후에 호건 가가 있다는 건 확실하다는 말이다. 리코가 투덜거리며 다가왔다. “씨발.” 그리고 그는 제이드의 발자국을 따르듯 재빨리 케이트에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이젠 익숙하다. 케이트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욕이 나오지 않는 게 이상하다. “이 비밀검투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열렸다는군. 그리고...” 리코는 케이트를 보고 제이드에게 속삭였다. 하루에 평균 다섯 명 정도의 아이가 죽어 나갔다는 것 같아. 제이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하루 평균 다섯 명? 그럼 일주일에 평균 열 명이 죽었다는 말이 된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지? 그 많은 아이가 사라졌는데?” “대부분 고아였지. 그러다 고아로 부족해지니까 고층거리의 주민들에게 아이를 사들이기 시작한 거고.” 결국 이들이 계속 고아를 경기장에 세웠다면 아이들이 사라진다는 걸 눈치 챌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라는 말이 된다. 그때 젊은 치안관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불금 보내고 계십니까? 저는 불금 보내고 들어와 바로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2부는 아마 다음주 화요일이면 끝날것 같습니다. 예상은 오늘 끝날걸 예상했는데 초반에 페이스가 느린 탓에 후반 두회분 정도가 늘어났네요. 아직 3부 전에 쓸건 정하지 못했습니다. 근데 동양판타지도 땡기고...(이녀석은 근데 무리일듯요. 시리즈물이라 최소 6부작입니다.) 수사관이 너무 로맨스가 적어서 약간 성인취향의 로맨스로 현실물 짦은거 하나도 생각해둔게 있거든요. 이거로 갈지, 아니면 호러로 갈지 (요건 라노베 분위기입니다.) 고민중입니다. 호러는 근데 여름 다 지나서...으음... 어느게 좋으세요? 라고 물어봐도 어차피 여러분은 뭐든 상관없음. ㅇㅇ 이런 반응이실듯... 00066 6. 검은 도시 =========================================================================                            여기서 더 큰 일이 날 게 있나? 제이드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가? 치안관은 숨을 헐떡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비 때문에 토사가 무너졌는데 그 안에서...” 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최소 백구는 될 거라는 말이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었다. 검투장에서 죽은 사람들을 몰래 묻어버렸던 것이다. 빌어먹을. 제이드는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그와 똑같은 표정의 리코가 서 있었다. “아이들은 어떻게 되나요?” 케이트의 질문에 제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어, 음...아마...그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 애들 부모는 인신매매 죄로 감옥에 갈 겁니다.” “...아이들은요?” 제이드는 입을 다물었다. 아이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 부모가 있으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구빈원에서 살게 될 것이고 몇 년이 지나 부모가 복역을 마치고 찾으러 오면 다시 부모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말도 안 돼요!” 제이드와 리코는 시선을 마주쳤다. 어쩔 수 없다. 그게 법이니까. “그아아아악!!” 갑자기 괴물 같은 소리가 나서 곤란한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네 명의 수사관과 하녀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회색 머리의 살인마가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 다섯 명의 치안관이 달라붙었는데도 쩔쩔매는 게 보였다. 어디서 본 장면이다. 카이사는 그제야 그 살인마가 한번 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두 번째인가 검투장에 왔을 때 검투장 직원이 실수하자 미친 사람처럼 화내던 목수였다. “이름은 고골리. 삼 년 전까지만 해도 용병이었습니다.” 치안관 하나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다 은퇴하고 모은 돈으로 주점을 차렸는데 장사가 변변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돈을 빌렸는데 그 빚을 갚지 못해서 돈을 벌기 위해 목수 일도 했답니다. 지난번에 시체로 발견된 브리지가 그와 예전에 용병 일을 함께하던 놈인데 목수로 일하는 고골리를 어떻게 꾀어냈는지 검투사로 서게 했다더군요. 처음 이 비밀 검투장에 선 게 석 달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안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갑자기 저런 이상한 모습이 된 이유가 뭐란 말인가. 치안관은 부랴부랴 다음 장으로 넘기더니 읽기 시작했다. “검투사에게 마법을 썼던 것 같습니다. 증거로 압수하신 스펠 북 말인데...살펴보니 버서커(berserker)마법과 프리즈 마법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하. 네 명의 수사관은 동시에 이해했다. 고골리라는 남자의 상태가 저랬던 것은 버서커 마법에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고골리에게 마법을 건 자들은 그 마법이 마법에 걸린 대상의 분노조절을 약하게 만든다는 건 몰랐다. 마법에 걸릴수록 고골리는 화를 참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결국 마법에 걸리지 않아도 버서커 마법에 걸린 것과 비슷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케이트는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가 그의 주변에서 희미하게 빛이 나는 것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저거였다. 그녀가 처음 죽은 치안관을 발견한 이유가. 그리고 이 검투장을 들어갔던 이유가. 케이트는 마녀다. 그녀 스스로 마법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이나 사용된 장소가 가까이에 있다면 그녀 역시 알아볼 수 있다. 그녀가 마차에서 갑자기 반응했던 건 버서커 마법과 관객들의 흥분, 그리고 살해당하는 아이의 공포심이 결합한 결과였다. 하지만 아직 케이트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입 다물고 있기로 했다. 설령 그 사실을 안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만한 것은 아니다. “여기, 왜 이런 거지?” 옷을 갈아입고 나온 케이트에게 이안이 그녀의 팔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이들을 풀어줄 때 남자에게 맞은 팔이 시간이 지나자 검게 물들고 있었다. “아...맞았어요.” “...누가?” “우리를 따라오던 남자요.” 누군지 알겠다. 이안은 몸을 휙 돌려 걸어갔다. 뭐야. 케이트는 그런 그의 태도에 입을 벌렸다. 왜 물어본 거람? 하지만 이안이 물어본 덕분에 인사해야 할 것이 하나 생각났다. 그녀는 재빨리 아이들이 모인 곳으로 다가갔다. 가장 나이 많은 소년에 작은 아이들을 끌어안고 앉아있었다. 아직 비가 내리는데 아이들은 낡은 옷을 입고 젖은 바닥에 앉아 있었다. “괜찮아?” 케이트는 치안관이 자신에게 주고 간 담요를 아이들에게 건네며 물었다. 그건 그녀가 수사관의 일행이었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호의였다. 이 아이들에게 그런 호의를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으아아악!” 갑자기 비명이 들렸다. 케이트는 또 검투사가 난동을 피우는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거기엔 검을 든 이안과 치안관들 만 있었다. 치안관들은 반은 이안의 팔을 잡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고 반은 귀를 부여잡은 검투장 직원을 부축하고 있었다. 별일 아니다. 제이드는 그런 의미로 어깨를 으쓱하고 치안관들에게 담요를 받아와서 아이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꽤 의젓한 목소리로 소년이 대답했다. 밝은 곳에서 보니 소년은 팔다리는 멀쩡하게 붙어있을지 몰라도 얼굴에 흉터가 있었다. 왼쪽 눈썹 끝에서 콧방울까지 칼에 베인 흉터였다. 케이트는 왼쪽 눈이 보이느냐고 물어보려다 그만뒀다. 그거까지 물어볼 주제는 없는 것 같았다. “그때 도와줘서 고마워.” 그, 방에서. 케이트가 덧붙이자 소년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웃었다. 부끄러운 것 같으면서도 슬픈 것 같은 그런 미소였다. “당신을 도운 게 아니예요. 내가 살고 싶었던 거지.” 건방진 말이었지만 그게 더 어울렸다. 케이트는 씩 웃었다. “살고 싶었다면 그 남자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도망칠 수도 있었어. 그렇지?” 소년은 머리를 긁적였다. 감사를 받는 것에, 그리고 호의를 표하는데 익숙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 이름은 케이트야. 너는?” “제인이요.” “제인.” 케이트는 제인의 감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소년은 그를 어린아이인 것처럼 대하는 이런 친밀한 행위가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 로엔 백작 가에 작은 파티가 열렸다. 초대된 사람은 모두 로엔 백작부인과 친한 사이였다. 채 백 명이 되지 않은 손님이었지만 실라는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것만으로도 피곤해져서 양해를 구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파티를 연 건 그녀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그녀의 아들이다. 실라는 긴 소파에 기대며 미소 지었다. 배로 낳지 않아도 가슴으로 낳았다. 깨물면 가장 아픈 손가락이 이안이었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언제나 그 자리에 가문과 그녀를 위해 지탱해주는 아르고와 달리 이안은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아들이다. “부르셨습니까.” 똑똑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예쁘장한 빨간 머리 하녀가 들어왔다. 실라는 몸을 반쯤 일으키며 손짓했다. “이쪽으로 오렴.” 케이트는 불안한 표정을 감추며 지친 기색의 실라에게 다가갔다. 긴 소파에 나른하게 기댄 자태도 우아하다. 밝은 금발의 머리카락은 둥글게 말아 위로 올려 고정하고 하얗고 긴 목은 아무 장신구도 없었다. 화려한 보석 없이 그 모습 그대로도 실라는 한 마리 백조 같았다. “이안의 수사에 큰 도움을 줬다면서.” 아, 그거였나. 케이트는 고개를 숙였다. 뭔가를 이유로 혼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장 생각해 낼 수 있는 이유는 아주 많았다. 그녀와 이안의 실랑이를 본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아무도 못 봤다 생각했지만 이안이 그녀에게 키스하는 걸 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검투장에서 그녀가 이안에게 매달리는 걸 누군가 오해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케이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안쪽 방에서 실라의 몸종 실비아가 옷을 몇 벌 들고 나타났다. “듣기론 이안의 수사를 돕느라 네 외출복이 망가졌다더구나.” 그날 입고 간 옷은 피와 비로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결국 케이트는 옷을 뜯어 작은 주머니를 몇 개 만들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실비아는 꺼낸 옷을 케이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죠? 케이트의 질문에 실라는 미소 지었다. “내 옷 한 벌 지어주마. 네 옷을 내 아들이 망가트렸으니 말야. 하지만 옷을 짓는데 일주일 정도 걸린다니 혹, 그동안 네가 입을 옷이 없을까 해서.” 옷을 지어 준다고? 그럴 필요는 없다.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고마운 말이긴 하지만 버린 외출복은 삼 년이나 입은 옷이다. 좀 더 조심했다면 이, 삼 년 정도는 더 입을 수 있었을 테지만 헌 옷을 버린 대가로 옷을 지어준다는 건 너무 과하다. “괜찮...” “내가 괜찮지가 않아. 우리 집 아이가 내 아들의 일을 돕다가 옷을 버렸다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구나. 게다가 험한 일이었다지.” 실라의 말에 케이트는 입을 다물었다. 그 일이 있었떤 후 케이트는 밤잠을 설쳐가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녀는 운이 좋았다. 어린 시절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에 가난하긴 했어도 엄마의 사랑을 받았다. 약간 생활력이 부족한 엄마였지만 그녀를 사랑해줬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고아가 된 다음엔 그녀를 이용하고 죽이려는 알라나데일에서 살아남았다. 목숨이 노려졌는데 영구적으로 남는 상처는 단 한 개도 없었다. 알라나데일을 떠나고 나서도 그녀의 친척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친척을 찾아주겠다며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 그녀에게 일자리를 구해준 사람도 있다. 먹고 자고 입는데 부족하지 않은 돈을 벌고 있으며 때때로 친구와 카페에 가서 수다를 떨 여유도 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생활이다. 그동안의 움츠러들었던 생활이,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 작품 후기 ============================ 어, 지난주에 제가 본의 아니게 여러분을 낚았네요;; 별 큰 일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제이드쪽에게는 큰일이지만요. 내일이면 2부 끝납니다. 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 주말은 잘 보내셨나요? 전 토요일이 생일이었는데 사촌의 아이 돌잔치에 다녀왔습니다. 뭐, 비싼 음식점이라 걍 내 생일상이다 하고 먹었는데 돌아오며 생각해보니 사촌의 아이와 제 생일이 같더군요. 헐킈... 00067 6. 검은 도시 =========================================================================                            “내가 입던 옷이라 좀 미안하지만, 새로 옷을 지을 때까지 고쳐서 입기엔 괜찮을 거다.” 실라의 말에 케이트는 두 손에 들린 옷을 내려다봤다. 누군가 입던 옷이고 유행이 좀 지났다고는 해도 좋은 천으로 만든 옷이다. 재봉질도, 달린 장신구도 모두 훌륭했다. “이걸...주신다고요?” “내가 젊을 때 입던 건데, 이 나이에 입기엔 너무...알지?” 미소 짓는 실라의 얼굴에서 다시 옷으로 시선을 돌린 케이트는 당황스러운 기분에 눈을 깜빡였다. 확실히 실라가 입기엔 무늬도 길이도 너무 화려하고 짧다. “입어보렴. 수선해야 하는지 봐줄 테니.” “아, 아니, 괜찮습니다.” “어차피 수선하려면 누군가가 봐줘야 하잖니.” 그렇다면. 케이트는 염치 불고하고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길이가 길고 가슴이 조금 작은 것을 제외하면 괜찮았다. 소매가 한때 유행하던 스타일인지 과도하게 부풀어있었다. 여기저기 조금씩 고치고 장신구를 떼면 지금 입어도 예쁜 옷이 될 것이다. “마음에 드니?” 좀 옛날 거라 미안하긴 하지만. 실라가 그렇게 덧붙였을 때 케이트가 안쪽 방에서 나왔다. “어머.” “...안 어울리나요?” “아니야. 잘 어울려. 내게 딸이 있다면 이렇게 옷을 물려주고 싶었거든.” 실비아가 시침 핀을 들고 와서 부지런히 고쳐야 할 곳에 꽂아 주었다. 케이트는 실라가 준 옷을 모두 갈아입고 나와 수선해야 할 곳을 확인한 뒤 다시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고 허리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대도. 내일 의상실에서 사람이 오면 부르마.” 케이트가 다시 한 번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방 밖으로 나가자 실라는 저도 모르게 손을 입가에 대고 중얼거렸다. “하녀복만 입었을 때는 몰랐는데, 저 애 그 여자랑 많이 닮았네.” “그 여자요?” “실비아, 기억 안 나? 내 남편과의 혼처를 두고 나랑 겨룬다는 소문이 나던 여자애 있잖아.” 실비아는 코웃음 치며 입을 열었다. 전 로엔 백작은 멀끔하게 생긴 외모 덕에 바람 잘 날 없는 나무였다. “마님을 두고 전 백작님과 혼처를 겨룬 여자가 어디 한둘인가요?” “그렇긴 한데...그, 예쁘장하게 생겨서...이름이 영 생각이 안 나네. 화가와 도망쳤다고 소문났던.” “세상에, 망측하기도 하지.” “용감한 여자였지. 같은 옷을 두 번은 안 입는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런 여자가 화가와 사랑의 도피를 하다니 말야.” “어휴, 마님. 그건 용감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예요.” 실비아가 손사래 치며 방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실라는 픽 웃으며 다시 몸을 등받이에 기댔다. 그녀보다 나이가 몇 살 어렸던 걸로 기억한다. 벌써 이십 년도 전의 일이다. 케이트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그 여자의 얼굴로 희미하게 뭉개졌다. === 이안은 표정없는 얼굴로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위스키를 홀짝이고 있었다. 오늘 초대된 사람은 모두 그의 어머니의 지인들이다. 그도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알고 있지만 친하지도, 친해질 생각도 없었다. 그런 그의 태도를 손님들도 알고 있는지 주최자가 없어도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때 하인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주저하며 말을 걸었다. “저, 도련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이 파티 중에? 이안은 하인의 얼굴을 보고 그가 케이트와 사이좋은 남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폴은 불안한 나머지 오른손으로 왼손을 쥐어짜고 있었다. 마치 한 시간은 걸리는 것 같던 몇 초가 지나고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재에는 수사관장이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안의 질문에 수사관장은 깍지를 풀고 이안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늘 어떤 압력에 눌린 듯한 얼굴이 오늘은 약간 풀어진 것처럼 보였다. “자네, 혹시 검투장 사건의 배후에 다른 범인이 있다고 주장했나?” 그 말만으로도 이안은 수사관장이 왜 이 시각에 타운 하우스까지 왔는지 눈치 챘다. 위에서 압력이 가해진 것이다. “그랬나?” 수사관장의 질문에 이안은 고개를 한번 까딱했다. 평소라면 불같이 화를 낼 남자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나는 괜찮아. 어차피 은퇴하려던 참이었고 퇴직금이 좀 줄었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네.” 은퇴라고? 이안은 표정없는 얼굴로 수사관장을 내려다봤다. 어딘지 모르게 한결 편해진 얼굴로 그는 이안을 올려다봤다. “호건 가에서 펄펄 뛰고 난리가 났네. 자네와 카이사를 자르라고 말야.” 그래서? 그런 의미로 이안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의 태도를 예상했다는 듯 수사관장은 다시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호건 가가 어떤 집안인지 모르고 건드린 건 아닐 테지. 자네도 예상하고 저지른 일인가.” 이럴지 몰랐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도 몰랐다. 그래도 수사관인데 수사관의 수사를 뒤엎고 수사관장과 수사관 세 명의 목을 자르겠다고 펄펄 뛸 줄이야. “증거는 어떻게 됐습니까?” “전부 사라졌네.” “증인도 말입니까?” “이번 사건의 범인은 사라졌네.” 이번에는 이안도 놀랐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 드러나지는 않았다. 수사관장은 혼잣말하듯 말을 이었다. “관련된 사람 모두 사라졌어. 용병은 그렇다 쳐도 사라지지 않은 증인들 모두 말을 바꿨지.” 호건 가의 짓이다. 돈으로 사람들을 매수한 것이다. 이안은 미간을 좁혔다. 상황이 안 좋아졌다. 수사관장이 은퇴한다는 것도 그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범인이 사라졌다. 뒤에 배후세력이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쨌거나 잡아둔 범인이 도주했으니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럼 어떻게 처리되는 겁니까.” “자네와 카이사 둘은 일단 정직이네.” 최소 일주일은 말이지. 수사관장의 말을 가로막으며 이안이 제안했다. 그 말에 수사관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심인가?” “네.” “그럼 자네 혼자 뒤집어쓰겠다는 말 아닌가.” “네.” 무슨 인형 같군. 정신 차린 수사관장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인 걸까. 그는 때때로 이안이 인간이 아닌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냉정한 판단과 뛰어난 검술실력. 변하지 않는 표정과 태도. 하지만 그런 게 아무려면 어떤가. 수사관장이 생각해도 그보다 나은 방법은 없었다. 그는 어차피 은퇴할 예정이었다. 카이사와 이안 둘 다 죽을 지경에서 한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알겠네.” 그는 주저하다가 이안의 어깨를 한 번 툭 치고 나갔다. 이안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수사관장은 이안이 희생한다 생각했지만 이안은 달랐다. 그는 가장 피해가 작은 쪽으로 판단했을 뿐이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이안이 서재 밖으로 나서자 케이트가 한 뭉치의 천을 들고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준 옷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그저 천 뭉치로 보였다. “꺅!” 이안은 반사적으로 케이트의 팔꿈치를 잡고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를 계단과 벽 사이로 밀어붙였다. “뭐, 뭐예,” 당장에라도 죽을 사람처럼 이안은 급하게 케이트의 입술을 빨았다. 그녀가 버둥거린 탓에 끌어안고 있던 옷더미가 발밑으로 떨어졌다. “폴! 위스키 부족해!” 한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버둥거리던 케이트의 몸이 딱 멈췄다. 이 상태로 들켰다간 그녀의 평판은 끝장이다. 계단 위에서 내려오는 한스의 발소리가 들렸다. 계단과 벽 사이에 있으니 더 내려왔다간 두 사람의 모습은 들킬 게 분명했다. 그때 천운처럼 폴의 목소리가 위층에서 들렸다. “벌써 가져왔어.” “아, 뭐야.” 반쯤 내려오던 한스의 발걸음 소리가 다시 올라가자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이안이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뭐예요!” 케이트가 발칵 화를 내자 이안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쓸었다. 거칠게 빤 탓에 금세 부풀어 올랐다. “뭐든지라고 했지.” “...네?” 이 남자 뭐라고 하는 거야? 어리둥절해하는 케이트의 머릿속에 그날 밤 검투장에서 이안에게 매달리며 한 말이 떠올랐다. 저 아이를 살려줘요. 뭐든지 할게요. 케이트의 입이 딱 얼어붙었다.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점점 황금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내가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것도 사실이다. 케이트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롭다는 듯한 이안의 표정은 점점 즐거워 보였다. 가라앉았던 케이트의 심장이 팔짝팔짝 널뛰듯 뛰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뭔지 몰라도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괴물의 기분이 과도하게 좋아 보였다. 새를 잡아먹으려는 고양이처럼 아니, 이안을 고양이에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어쨌거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나직하게 말했다. “어디 내가 널 좋아하게 만들어 봐.” ============================ 작품 후기 ============================ 2부 끝입니다. 와....끝나긴 하는 군요. 약간 중간에 끊긴 모양새같기도 해요. 3부에서는 카이사와 이안의 관계 (응?) 이안과 케이트의 관계. 그리고 케이트의 집안에 대해서 언급이 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저는 다른걸 쓰러 갑니다. 그러려고 한 부씩 이야기를 구성해 두기도 했구요. 대충 뭘 쓸지는 정해놨는데 아직 제목을 못정해놔서...(예상 제목이 그XX, 나쁜여자, 나쁜상사, 두번째 연애, 연애에 대한 두가지 측면 뭐 이래요.) 나중에 공지 한 번 올릴게요. 아직도 고민이라능. 걍 현대 로맨스로 가려고요. 동양판타지도 완전 끌리는데 이건 너무 길어서... 제가 어디까지 쓸수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아, 걍 동양판타지로 갈까...하악... 근데 현대로맨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거 수위가 어디까지 가능할까요? 제가 어디까지 쓸수있나 궁금하기도 하고요 좀 가벼운 기분으로 쓰고싶기도 해요. 달무리랑 뮈엘라 전부 피튀기는 부분이다보니까 쓰는 제 머릿속이 피가 튀겨있는것 같아서 그런거 없이 달다구리하고 느물느물한걸로 쓰려구요. 아, 그래도 한 부 끝났으니 외전 하나 더 올라갈거예요. 뭘 쓸지 고민중이긴한데 생각중인데 한 개...두 개...쯤 있어요. 그러고보니 외전올리때 올리면 되는데 너무 먼저 설레발친듯. 일단 이번주는 쉬고 외전은 이번주 주말이나 다음주에 올라갑니다. 00068 [외전] 뮈엘라 마법학교 =========================================================================                            “평안하세요.” “마법 안에서 평안을.” 케이트는 익숙한 인사를 건네며 학교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이상한 광경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검은 머리에 검은 재킷. 검은 바지. 심지어 구두까지도 검은색이었다. 학생은 아니다. 그녀는 키만큼이나 큰 남자의 체격에도 겁먹지 않고 몸을 돌려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남자는 케이트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호박색의 눈동자가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위험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남자다. 그런 분위기를 느낀 것처럼 학생들도 그의 주변을 피해서 지나가고 있었다. “너는 다른 교복이군.” “네?” 느닷없는 말에 케이트는 자신의 교복으로 시선을 내렸다. 디자인은 같지만 다른 학생들과 달리 그녀는 검은색이었다. 군계일학이라 하던가. 하얀색의 교복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검은색 교복인 케이트와 검은색 일색의 옷차림은 남자는 눈에 띄었다. “마법력을 가진 학생은 검은색 교복을 입어요.” 케이트의 말에 남자의 눈빛이 변했다. 그래? 노골적인 흥미에 그녀는 순간 아차 싶었다. 때때로 마법력을 가진 학생을 노린 유괴범들이 등장한다. 마법력을 가졌다는 건 마법에 대한 지식이나 기술, 매개체가 없이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뮈엘라 마법학교는 기본적으로 마법사를 배출해내기 위한 학교다. 마법에 대한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친다. 매개체를 사용하는 법, 마나를 모으는 법,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계산법이나 수식 등등. 그러나 케이트는 그런 모든 것들을 초월한 존재였다. 그러니 그런 유괴범들의 타겟이 된 적이 몇 번쯤은 있었던 것이다. 반사적으로 케이트는 몸을 긴장시켰다. 마법력을 가진 한 명의 사람은 하나의 기사단과 맞먹는다. 노리는 자들이 많지만 지금까지 납치가 성공한 적인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은 그 이유였다. 그러니 지금 케이트가 걱정하는 건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등교하고 있는 다른 학생들이었다. “네 이름은?” 남자는 흥미가 담긴 눈동자와는 달리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케이트 스미스입니다.” “이안 로엔이다. 오늘부로 부임한 검술교사다.” 이안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딱히 타인의 피부에 닿을 마음은 없지만 눈앞의 작은 소녀가 마법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알자 궁금해졌다. 마법력을 지닌 사람을 만지면 그도 마법력을 느낄 수 있는 걸까. 마법력을 지닌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가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케이트는 약간 주저하며 남자의 손을 잡았다. 크고 단단하게 굳은살이 박여있었다. 확실히 검사의 손이다. 놀라운 것은 따듯했다는 점이다. 마치 조각 같은 얼굴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어 손도 차가울 거라고 생각했다. 바보같은 생각이다. 사람의 체온이 차가울 리가 없지 않은가. 케이트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교무실로 안내해 드릴까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모르겠지만 친해지기 어려울 것 같다. 케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긴장한 채 두 사람을 지켜보던 학생들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 검술교사가 온다는 말을 들었지.” 케이트가 교무실까지 이안을 안내하자 목 부분에 큼직한 보석이 박힌 셔츠를 입은 남자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발을 책상 위에 걸치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교장한테 미리 이야기 들었다고. 나는 제이드. 교감을 맡고 있지.” 교감치고는 너무 젊다. 이안의 한쪽눈썹이 올라가자 제이드는 키득대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교장이 우리 삼촌이거든.” 낙하산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 해도 그 사실을 참 쉽게도 이야기하는 남자다. 표정이 일그러지는 케이트와 달리 이안의 표정은 본래대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흠, 자네 괜찮은데. 자알 생겼어.” 경박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말하며 제이드는 허리에 척하고 손을 얹었다. 검은색 일색의 옷과 위험한 분위기에 큰 키와 체격 때문에 사람들이 힐끔 보고 시선을 피해서 눈치채기 어려웠지만 이안은 상당히 잘생긴 남자였다. 조각 같은 얼굴과 움직임 없는 태도는 마치 삽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느낌을 들게 만들었다. 제이드는 다시 의자에 앉아 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더니 케이트를 향해 말했다. “스미스 양은 수업이 없지?” “있는데요.” “뭐? 특례학생이 수업을 들어?” 케이트의 얼굴이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그 특례학생이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녀는 특례학생이라는 말보다는 마법력을 지닌 학생이라는 말이 더 편했다. 특례라는 건 특례의 이유까지 설명해야 하지만 마법력을 지닌 학생은 그 말만으로 모든 게 설명되기 때문이었다. 마나를 모으는 방법을 연습하지 않아도, 기술과 매개체가 없어도, 복잡한 수식을 계산하지 않아도 케이트는 의식대로 마법사용이 가능하다. 다른 사람들은 화이어 볼이라는 마법을 배워야 불로 이뤄진 공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케이트는 그냥 원하기만 하면 불로 이뤄진 공뿐 아니라 검이나 새, 방패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게 마법력을 지닌 사람의 대단함이었다. “안 들어도 별로 상관없잖아?” 가벼운 제이드의 말에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이 맞다. 사실 듣는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다. 비교하자면 물고기가 헤엄치는 법을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제이드도 딱히 악감정이 있어서 빈정거리는 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마법력을 가졌다면 수업 따윈 제쳐놓고 놀러 다녔을 것이다. 그는 원래 가볍고 놀기 좋아하는 성격이다. 그런 그의 방탕한 생활을 지켜보다 못 한 가족이 삼촌이 교장이고 할아버지가 이사인 학교에 교감이라는 직책으로 집어넣어 버린 것이다. “상관없는 건 아니예요.” “마법 방어나 마법 공격 수업 같은 건 안 들어도 되잖아?” “어, 그건...” 곤란해 하는 케이트를 이안은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다지 도와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케이트는 주변을 힐끔 돌아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필요 없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여긴 교무실이다. 마법 방어 교사와 마법 공격 교사가 같은 장소에 있는데 네, 사실 필요 없죠. 호호호 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러니 스미스 양이 한동안 이안선생님을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네에?”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펄쩍 뛰어올랐다. 절대 싫다. 이런 친해지기 어려운 타입은. 하지만 이, 삼 미터 떨어진 곳에 앉아있는 마법 방어와 마법 공격 교사를 의식해서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한 케이트가 바로 옆에 남자가 서 있는데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아으으으으. 케이트가 차마 싫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사이 제이드는 손바닥을 짝하고 치며 결정했다. “그럼, 잘 부탁해. 스미스 양. 이안선생님은 필요한 게 있으면 여기 스미스 양에게 말하시면 됩니다.” 누구 마음대로 결정한단 말인가. 케이트가 곤란한 표정을 짓는 것을 모른척하고 이안은 불쑥 입을 열었다. “필요한 건 뭐든지?” “음?” 슬슬 말을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꾹 닫은 이안의 입에서 말이 나오자 제이드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뭐든지요. 하지만 우리 학교는 학생과 교사의 교제는 금지입니다.” 순식간에 공간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무슨 바보 같은 말을 하는 거야? 라는 케이트의 표정과 전혀 반응 없는 이안의 태도에도 제이드는 싱글싱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히려 주변에 앉아있던 다른 교사들이 몸을 움츠릴 정도였다. “...학교 안내를 해드릴까요.” 교무실을 나온 케이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솔직한 심정은 이안이 필요 없다고 말해주길 바랐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그녀는 참담한 심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안은 너무 눈에 튄다. 그리고 케이트는 그 교복 때문에 튄다. 그녀는 튀는 게 싫었다. 조용하게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었다. 그건 그녀가 마법력을 지녔다는 게 확인된 순간부터 이미 무너진 소원이긴 했지만. 수업 시작 십 분 전을 알리는 벨 소리가 울려 퍼지자 복도를 서성이던 학생들이 사라지면서 한산해졌다. “검술수련장부터 갈까요? 거기서 수업을 진행하실 테니까요.” 케이트는 그렇게 말하고 이안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검은색 치맛자락이 팔락였다. 이안은 물끄러미 그 치맛자락과 그 밑으로 곧게 뻗은 다리를 보고 그녀가 유난히 튀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피부가 희다. 하얀 교복을 입었어도 어울렸을 테지만 검은색 교복을 입은 탓이 하얀 피부가 도드라졌다. 거기에 붉은색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동자라니. 눈에 너무 띈다. 그도 한 번에 그녀의 존재를 눈치챘을 정도다. “여기예요. 좀 낡았지만요.” 케이트가 공터로 이안을 안내하며 말했다. 교무실이 있는 건물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공터는 말 그대로 그냥 공터였다. 낡았다는 말은 어긋났을 정도다. 지붕도 없어서 이안은 비가 오는 날은 과연 어떻게 수업을 할지 궁금해졌다. “다른 검술수련장도 있는 건가?” “아뇨. 검술수련장은 여기 하나인데요.” 이안은 그럼 날이 궂은 날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가난한 집이나 사정이 좋지 않은 곳은 날이 궂어도 야외수련장에서 수련한다 들었다. 여기도 그런 걸까. 하지만 마법사들이란 체력이 약하기 그지없다. 일반인보다도 약한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이안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네?” 케이트의 당황한 태도만으로도 이안은 날이 궂으면 검술수업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연. 낡다는 말을 한 이유를 알았다. 이 학교에서는 검술수업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그게...사실 검술은 저희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아요.” “필요하지 않다고?” 이안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케이트는 검술수련장이라고 불리는 공터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태도변화를 깨닫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여긴 마법 학교니까요. 체력유지를 위해 운동을 하기는 하지만 검술이라는 건 쓸모가 없죠.” “검술이 쓸모없다?” 대단히 실례되는 말이다. 그것도 검술교사 앞에서 하기에는. 뮈엘라 마법 학교는 한동안 검술교사자리가 공석이었다. 사실 케이트는 검술수업이 있는 줄도 몰랐다. 며칠 전부터 학교 안에 새로운 검술교사가 부임한다는 소문이 돌지 않았다면 이안이 검술교사라고 자신을 소개했을 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트가 자신이 실례되는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미 그녀의 몸은 바닥에 쓰려져 이안에게 깔린 상태였다. “헉!” 등이 부딪히면서 가해지는 고통에 케이트는 신음을 내뱉었다. 바로 앞에 이안의 얼굴이 보였다. 금색으로 변한 호박색 눈동자도. “이래도 쓸모없나.”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당황한 케이트의 입이 딱 벌어졌다. 지금까지 외부에서 공격당한 적이 몇 번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빠르게 공격한 사람은 없었다. 전부 그녀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 반사적으로 케이트는 이안을 밀어버리려 했다. 그녀의 손이 아니라 마법으로. 마법력을 지닌 자의 장점이다. 손발이 묶여 있고 입이 막혀있다 해도 의식만 있다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이안은 그를 밀어버리려는 힘을 느꼈다. 그건 신기한 기분이었다. 그의 아래에 깔린 소녀는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몸을 밀어내려 하고 있었다. 이안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케이트를 내려다봤다. 마법력을 가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냥 평범한 사람. 그것도 여자애다. 힘으로 이안이 질 리가 없다. 굳이 땅바닥에 쓰려트려 내리누르지 않아도 힘 차이를 깨닫게 하는 건 쉬웠다. 그램에도 과도하게 반응했던 건 그 마법력이 어떤 건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케이트는 이안의 몸이 꿈쩍도 하지 않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벌써 밀려났을 것이다. 그녀는 좀 더 의식을 집중했다. 아까보다 훨씬 강한 힘으로. 그제야 이안의 몸이 들썩였다. 그는 겁먹은 표정도, 놀란 표정도 짓지 않았다. 여전히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쩌억하고 뭔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이안이 손을 들자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의 알이 깨져있었다. 그것은 그대로 부스스 먼지가 되어 떨어졌다. 그 순간 이안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헉!” ============================ 작품 후기 ============================ 지난번에 오늘이나 다음주쯤에 외전 올린다고 했는데 이 외전을 쓰다보니 길어지는 거예요;;; 최소 3,4편은 되겠더라구요. 절대 2편으로 안끝남. 흑흑...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덜덜덜.... 이상태로 이번주 내내 지내다가 하나 더 생각한 게 성별 변환 버전...근데 이건 스토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결국 걍 이걸로 번외 갑니다. 분위기가 좀 밝아지겠죠, 뭐... 아참, 중간에 제이드가 학생과 교사의 교제 금지라는건 학생이 미성년자면 굳이 넣을 필요가 없는 부분입니다. 왜냐면 학생이 미성년자면 이미 법적으로 금지니까요. 근데 굳이 저 말을 한건, 뮈엘라마법학교는 나이불문하고 입학이 되서 그래요. 돈있고 재능있는 애들은 최소 일곱살부터. 만학도도 있습니다. 50살인데 학생. 뭐 그래요. 고로 여기 등장인물의 나이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안나올것 같아서... 라는 아유로 아청법을 피하려는 저의 눈물겨운 노력... 아참, 그러고 보 2부 마지막 이안의 대사가 인소주인공 대사 같다는 평이 있었는데 인소주인공이 저런 대사를 하나요? 헐킈... 이게 원래 제가 쓸 때는 좀 긴 대화였는데 3부에서 나오느라 2부에서는 조기서 딱 자른거거든요. 원래 대화는 대충 이안 : 내가 널 좋아하게 만들어봐. 케이트 : ...당신이 날 좋아하게 만들라고요? 이안 : 그래. 케이트 : 그러니까 당신이 날 좋아하게 만들라고요? 이안 : ...그래. 케이트 : 그러니까 지금 당신이, 이안 : 그만. 어느 부분이 이해가 안 되는 거지? 케이트 : 어,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좋아하라는 게 아니라 당신이 날 좋아하게 만들라는 거잖아요. 이안 : 그래. 이 대화 몇 번이나 반복하는거 같은데. 케이트 : 그냥 나보고 당신을 좋아하라고 하는 게 더 쉽지 않아요? 이안 : 어려워서 못한다는 건가? 케이트 : 아니, 그게 아니라...그러니까...내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당신은 날 좋아하게 만들라는 거잖아요. 이안 : 날 좋아하고 싶다는 건가? 케이트 : 그건 아니예요! 그게, 그러니까...내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거죠? 이안 : 이젠 이쪽이 이해가 안 되는데. 넌 내가 명령하면 날 좋아할 수 있는 건가? 케이트 : 어, 아니, 그건 아니죠. 이안 : 하지만 내가 널 좋아하게 노력할 수는 있지. 케이트 : 어, 그, 그렇죠? 이안 : 그러니까 하라는 거다. 케이트 : ...에? 이안 : (한숨 쉰다) 영리한 줄 알았는데... 이안 : 너는 내가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는데 날 좋아할수 있나? 인간은 그런 존재인가? 케이트 : 어? 아, 아니죠? 이안 : 그러니 내가 널 좋아할 수 있도록 하라는 거다. 이제 이해가 되나? 케이트 : 어, 음...으으음? 뭐, 요런 대화입니다. 이게 3부에선 좀 축약될거예요. 설명이랑 묘사가 들어가니까. 00069 [외전] 뮈엘라 마법학교 =========================================================================                            이안은 반사적으로 검을 꺼내 땅바닥에 꽂았다. 그그극하고 검이 땅에 꽂힌 채 지면에 금을 만들어냈다. 그대로 날려갔다면 위험했을 것이다. 케이트는 새파란 얼굴을 하고 이안에게 달려갔다. 처음 가볍게 넘어질 정도로만 힘을 사용한 게 통하지 않자 좀 더 세게 날려버린 탓이다. 설마 그가 아티팩트를 사용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괘, 괜찮아요?”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아들었다. 검신이 지면에 거의 다 박혀 있었던 걸 그는 수월하게 뽑아냈다. 하지만 그의 몸을 지탱하면서 지면에 갈려 날이 망가져 있었다. “아티팩트가 있는 줄 몰랐어요.” 이안은 검을 한번 휘둘러 흙을 털어냈다. 하지만 여전히 날은 망가진 채였고 털어지지 않은 흙은 남아있었다. “공격할 땐 상대를 봐주지 마라.” “...네?” 느닷없는 말에 케이트는 이안을 올려다봤다. 방금 꽤 위험할 뻔했는데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날이 망가진 검을 손에 든 채 계속해서 말했다. “만약 내가 너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분명히 죽였을 거다.” “하, 하지만 날 죽일 생각은 없었잖아요.” “그걸 어떻게 알지?” “어, 그러니까...당신은 선생님이잖아요. 전 여기 학생이고요.” “선생은 학생을 죽이면 안 되는 건가?” “...네에?”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케이트는 멍해졌다. “그 교감이라는 남자는 교사와 학생의 교제만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니 죽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게 말이야, 방구야?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이안은 진지했다. 그는 검을 바닥에 꽂아 넣고 허리를 숙여 케이트와 시선을 마주했다. “죽이지 않는다 해도, 네가 망설이는 순간 나는 네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너는 오늘 처음 보는 내가 네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믿는 거지?”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실이다. 여기는 학교고 그녀는 마법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건 케이트에게 심리적으로 많은 방패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학교 안에서는 타인을 쉽게 믿고 긴장을 풀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고 판단하라는 말인가요?” “그래.” 그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그렇게 살라는 건가. 케이트가 뭔가 반박하려 입을 여는 순간 이안이 그녀의 턱을 움켜잡았다. 그대로 입술이 부딪쳤다. 케이트가 깜짝 놀라 휘두른 손이 이안이 지면에 꽂아 놓은 검의 손잡이에 닿았다. 타악하고 부딪혔지만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안이 부드럽게 케이트의 손을 움켜잡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받쳤다. 입안으로 젖은 혀가 들어왔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버려 케이트의 몸이 딱 굳었다. 그의 혀가 입안을 헤집는 동안 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후...하아, 하...” 입술이 떨어지자 상쾌한 공기가 들어왔다. 산소가 공급되자 얼어붙었던 뇌가 깨어났다. 케이트는 부끄러워해야 할지 당황해야 할지 화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이안을 얼굴을 올려다봤다. “봐라. 방금도 넌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다.” 어디서 개가 짖어도 이것보단 알아듣기 쉬울 것이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냐고 소리 지르려는 케이트의 입술을 이안이 손등으로 문질렀다. 입술이 젖어있는 탓에 선명한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분노일지 흥분일지 모를 감정으로 두 뺨이 달아올랐고 초록색의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고 부푼 것처럼 보였다. 이안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녀에게 왜 키스했더라. 별다른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다. 굳이 죽이거나 몸에 상처를 내는 방법이 아니더라도 마법사의 마법을 막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려주려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과연 그 이유뿐이었나? 그는 더이상 말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마법력을 가진 자는 이성에게 인기가 많다고 알고 있다. 그들이 품은 마력에 주변 사람들이 매료되는 것이다. === 마법학교에 난데없는 검술수업이 진행되었다. 케이트는 수련장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수련장 가운데에서 이안이 남학생에게 덤비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대여섯 명의 학생이 그의 검에 나뒹군 후였다. 이번 상대는 망설이지 않고 덤벼들었다. 그 후로 이안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양호실과 마법 수련 실까지 알려주고 난 뒤 그도 기숙사에서 살게 되었다고 하여 같이 기숙사로 돌아왔지만 대화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 이후로 이안이 말하는 걸 듣는 건 처음인 셈이다. “되게 무서운 선생님이네.” 앤이 속삭이자 케이트는 수긍해야 할지 아니면 그보다는 미친놈이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서른 살도 넘는 남학생이 공격을 피하려다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마법사치고는 체격도 체력도 좋다고 자신하던 학생이었다. 이안은 그대로 학생의 목을 비켜 땅에 검을 찔러 넣었다. 진검도 아니고 목검이었는데 지면에 반이나 들어가자 남학생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다음.” 이안이 말했지만 섣불리 나서려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넘어진 학생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일어나지도 못했다. “저건 무서운 걸 뛰어넘은 거지.” 케이트가 중얼거리자 앤은 키득댔다. “잘생긴 것만큼이나 성격도 완전 칼이다, 칼이야.” “잘생긴 거랑 성격이랑 무슨 상관이야.” “내 이론대로라면 잘생길수록 성격이 칼이더라고.” “그건 또 무슨 이론이야?” “카이사 선생님도 잘생겼는데 칼이잖아.” 케이트는 며칠 전 수업 시작 십 분 전을 알리는 종이 울렸음에도 복도에서 서성거리던 학생이 혼나던 것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 선생님은 칼이라기보다는 그냥 융통성 없는 것뿐이잖아.” “어쨌든 성격이 좋은 건 아니잖아. 그리고 리코 선생님은 평범하지만 성격이 좋지.” 그것참 리코가 들으면 서운해할 소리다. 케이트는 어이가 없이 앤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어?” “응? 당연하지. 문제는 예외가 하나 있는데 훈훈하게 생겼는데 성격도 좋은 제이드 선생님이야.” 케이트는 제이드도 절대 성격이 좋은 건 아니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그는 성격이 좋은 게 아니라 그냥 노는 게 좋은 것일 뿐이다. 그 순간 학생들이 헉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케이트가 수련장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안이 한 손으로 넘어진 학생을 들어 던져버렸다. 엄청난 힘이다. 친구를 도우러 왔던 남학생 둘도 끙끙대던 덩치였다. “거기, 노랑머리.” “...에?” 이안의 지목에 앤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노랑머리라니, 금발이다. 하지만 그런 항의를 하기엔 이안이 너무 무서웠다. 그는 그대로 손짓했다. 나와. 앤은 울상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도 목검을 하나 받긴 했다. 하지만 남자들도 다 나가떨어진 이안을 상대로 그녀가 뭔가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공격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케이트는 입술을 삐죽였다. 여긴 마법 학교다. 차라리 마법으로 공격하라고 말하란 말이다. 그녀는 왜 마법 학교에서 검술을 배우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어, 으, 진짜로요?” 겁먹은 앤의 말에 이안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가짜로 덤비는 것도 있나?” 그런 의미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저 선생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앤은 울상을 짓고 케이트를 돌아봤다. 케이트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둘이 덤벼도 되나요?” 케이트의 말에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 그래도 되나? 와, 역시 케이트다. 용감해. 이안은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라고 해도 어차피 마법사 계집아이들이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케이트는 바닥에 던져둔 자신의 목검을 들고 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른 의미로 몰려들었다. 마법력을 가진 학생과 냉정한 성격의 검술교사. 지금까지 케이트는 한 번도 교사에게 덤빈 적이 없다. 그건 그녀가 마법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보니 교사와 접점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온화하고 조용하게 살길 원하는 그녀의 성격이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케이트가 나서자 자연스럽게 앤은 케이트의 뒤로 물러나며 속삭였다. 고마워. 앤에게는 목검도 너무 무거워 보였다. 케이트는 그녀의 귀에 대고 일단 물러나 있으라고 속삭였다. “공격해라.” 케이트는 두 손으로 검을 잡았다. 살면서 검술을 배운 건 수업 시작하고 삼십 분이 전부다. 그러다 보니 검을 잡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안은 검잡는 법만 가르쳐 주고 바로 학생들에게 덤비라고 말했던 것이다. 덕분에 그녀의 태도는 완전히 엉성했다. 어디든지 이안이 가볍게 툭 치기만 해도 뒤로 벌렁 넘어질 것처럼 보였다. 수련장이 조용해졌다. 웅성거리던 소리도 사라지고 학생들은 모두 케이트가 어떻게 공격할 것인가를 기대에 차서 지켜봤다. “설마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누군가가 속삭였지만 너무 조용한 탓에 이안과 케이트의 귀에도 들렸다. 여기저기에서 그 말을 들은 학생들이 키득대기 시작했다. 이안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시간은 지나가는데 케이트는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저 학생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고 이안은 생각했다. 다시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는데 케이트는 표정 변화 없이 서서 이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의 뒤에 선 앤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트, 어쩌려고 그래?” “기다려봐.” 케이트는 이안을 주시하며 속삭였다. “어쨌든 저 남자를 검으로 공격하면 되는 거잖아.” 그렇긴 하지만 과연 어떻게? 앤은 조금씩 불안해졌다. 문득 그녀는 조용하고 늘 이성적인 케이트가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나선건지 궁금해졌다. 어떤 계획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트가 움직이지 않자 이안은 검을 들고 천천히 다가왔다. 마치 궁지에 몰린 쥐처럼 케이트는 얼어붙어 있었다. 너무 무서워서 몸이 굳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안은 생각했다. 가볍게 해야겠군. 그는 무표정인 채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얼어붙어 버린다면 수업을 하는 의미가 없다. 검술수업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친 마법사들이 그 순간의 대응방법과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한 수업이다. 이안이 가볍게 검을 케이트의 어깨에 갖다 대자 케이트는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이안이 그녀를 과소평가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격할 땐 상대를 봐주지 말라고? 흥이다. 그녀는 그대로 마치 검에 세게 맞은 것처럼 쓰러졌다. “꺅!” 일부러 과도하게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학생들은 케이트가 심하게 다친 줄 알고 깜짝 놀라 일어났다. 이안이 그녀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몸을 숙였을 때 앤이 다가와 검을 찔렀다. 아니, 내밀었다. 뭉툭한 목검의 끝이 이안의 등에 닿으려는 순간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앤의 검을 쳐냈다. “꺄악!” 이번에는 꾸며내지 않은 비명이 울려 퍼졌다. 손에서 검이 튕겨 나가자 앤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법사들은 일반인보다도 약하다. 이안은 약간 어이가 없어서 앤을 쳐다봤다. 앤의 손에서 벗어난 목검은 공중에 궤도를 그리더니 케이트의 상태를 보려고 일어선 학생의 머리에 부딪혔다. “으악!” 예상하지 못한 검의 공격을 받은 학생은 그대로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허우적거리다 그 주변에 있던 다른 학생들의 옷을 잡는 바람에 동그랗게 거기 서 있는 학생들이 모두 넘어지는 진풍경이 발현되었다. 이 무슨 바보 같은 상황이란 말인가. 이안이 말을 잃었을 때 뭉툭하고 딱딱한 것이 그의 늑골을 찔렀다. “공격할 땐 상대를 봐주면 안 되는 거, 아니었어요?” 이안이 고개를 돌리자 넘어졌던 케이트가 그대로 목검으로 그의 늑골을 찌르고 있었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가장자리로 갈수록 밝아진 게 보였다. 즐거운 목소리로 케이트는 계속해서 말했다. “선생님이 망설이는 순간, 나는 당신에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복수 닷. 케이트는 한 번 더 목검으로 이안의 늑골을 찔렀다. 꽤 아플 텐데 그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케이트를 응시했다. 이 작은 계집애는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야근중이라 일단 부랴부랴 올립니다. 퇴근 한시간 남기고 일이 터진 흔한 직장인의 비애... 여기서 잠깐 나왔지만 마녀는 이성에게 (때로는 동성에게도) 매력적입니다. 본편에서 케이트에게 똥차들이 집적댄 이유...미안, 케이트... 케이트가 예쁘장하기는 하지만 특출난 미인은 아니예요. 얘가 마녀다보니 이성을 끄는 매력이 풍기는 데다가 고아라는 단점때문에 남자들이 집적댄 겁니다. (도화살과는 달라요. 요즘 도화살이 이상하게 와전되고 있는데 도화살이라는 건 성욕과 색욕으로 망하는 상을 말합니다. 전혀 좋은거 아니예요.) 마법을 배척하지 않는 세계였다면, 그러니까 다른 나라였다면 아마 케이트는 이런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로 케이트 다시 미안. 외전은 격일로 업뎃됩니다. 다음 업뎃은 수요일이고요, 총 4화기 때문에 이번주 금요일에 진짜 끝나겠네요. 00070 [외전] 뮈엘라 마법학교 =========================================================================                            “너 진짜 겁도 없더라.” 앤은 샐러드를 먹으며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다른 학생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트는 한숨을 감추기 위해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특례학생이 신참 검술교사에게 한 방 먹인 사건(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졌다.)은 벌써 며칠 전의 일인데 아직도 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심지어 교감인 제이드까지 싱글벙글하며 다가와서 대단하다는 둥 케이트를 치켜세우고 가버렸다. “그냥 그 사람이 한눈팔고 있길래 갖다 댄 것뿐이야.” 갖다 댔다는 것치고는 분명 이안의 옆구리에는 멍이 들었을 테지만 케이트는 담담하게 말했다. 일부러 힘껏 찌르기도 했다. 그에게 당한 망언이나 강제적인 행위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래도 대단한 거지. 난 무서워서 그것도 힘들었다고.” “그 사람이 우릴 과소평가하고 있기도 했어. 그냥 운이 좋았던 거야.” 그래도~. 앤이 뭐라고 다시 말하기 시작했지만 케이트는 우유병을 들어 꿀꺽꿀꺽 마셔버렸다. 진짜로 운이 좋았다. 그녀가 시도하면서도 될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것 때문에 이안은 케이트가 완전히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고 학생들의 소란 덕분에 이안의 주의가 흩어졌다. 그 덕분에 케이트가 이안의 옆구리에 멍을 만들 수 있었던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는 것은 그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수업시간에 이안의 몸에 손끝 하나 댈 수 없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안은 더이상 학생을 과소평가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태도가 변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무표정에 무뚝뚝한 태도로 냉정한 말만 골라서 해댔다. “그래도 말야, 난 왜 우리가 검술수업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큼직한 샌드위치를 한입에 반이나 먹어치운 존이 입을 열었다. 그 주위에 앉아있던 학생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니,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은 상상조차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면 이미 정신을 잃었다는 말이잖아. 그 상황에서 검을 잡는 건 가능하냐고.” 누군가의 말에 푸하하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맞는 말이다.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학생들보다 케이트가 더 그랬다. 매개체가 없거나 마나가 부족해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케이트는 그녀의 의식만 있다면 사용할 수 있다. “몬스터를 만났을 때 매개체가 망가지면 예비용을 꺼낼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하니까.” 누군가의 지적에 존이 대꾸했다. “대체 어떤 몬스터가 매개체를 망가트리냐.” “...사람?”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사람이라고 대꾸한 학생은 가라앉는 분위기에 당황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며칠 전에 10학년 학생 하나 납치됐대.” “...어? 10학년?” 뮈엘라 마법학교는 나이가 아니라 실력으로 학년을 나눈다. 그러다 보니 한 학년에 일곱 살짜리와 오십 살의 만학도가 같이 공부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실력이 된다면 학년을 뛰어넘는 것도 가능하다. 일 년에 두 번 학년 시험을 보기 때문에 육 개월 동안 열심히 노력한다면 1학년에서 단번에 10학년이 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입학하면 1학년이고 12학년에 도달하면 졸업할 수 있다. “누구지?” “그, 안경 쓰고 탈색한 것 같은 갈색 머리 남자 있잖아.” “어린애?” “아니, 많은 쪽.” 케이트의 머릿속에 순식간에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10학년에 안경 쓰고 탈색한 것 같은 갈색 머리의 남자는 둘 뿐이다. 그녀와 비슷한 또래와 사십 대의 남자. 어린애가 그녀 또래의 남자고 사십 대가 많은 쪽인 모양이다. “어떻게 됐어?” “몰라.” 심한 곱슬 인지 머리가 엉망으로 뻗은 붉은 머리의 여학생이 머리카락을 손으로 끊임없이 만지며 물었다. “구조대는? 구조대가 결성되지 않아? 학교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잖아.” “나도 잘 몰라. 그 학생네 집이 우리 집 거래처라 우연히 들은 거라.” “돈을 노린 게 아닐까?” “마법사를 돈을 노리고 납치하는 바보가 있어?” 다시 조용해 졌다. 마법사를 돈을 노리고 납치하는 바보가 있냐는 말이 케이트의 귓가에 울리는 듯 했다. 마법사를 납치하는 건 그 마법사의 능력을 원해서이다. 돈을 노리고 납치할 거라면 마법사보다는 부잣집 어린 자식이 훨씬 손쉽다. 결국 마법사들은 납치당하면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적다. 그 마법사 자체를 원하기 때문에 마법사를 돌려줘야 한다면 차라리 죽이고 말기 때문이다. 공격할 때는 상대를 봐주지 마라. 이안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리는듯해서 케이트는 눈을 감았다. 그 말이 맞다. 마법사를 공격한다는 건 납치하거나 죽이기 위해서다. 어느 쪽이든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다. “학교에 적응은 됐습니까?” 야외 테이블에 앉아 샌드위치를 꺼내는 이안에게 제이드가 다가오며 물었다. 그는 이안에게 묻지도 않고 자신의 도시락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으쌰하고 가방을 풀어 도시락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이가 천차만별이더군.” “아아, 마법학교는 일곱 살부터 쉰 살까지 받으니까요.” 그런가. 이안은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고 무심하게 시선을 돌렸다. 샌드위치는 학교 식당에서 구입한 것이다. 식당에서 먹어도 되지만 오늘처럼 날씨가 좋은 날은 야외에 준비된 테이블에 앉아 먹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바로 저쪽의 케이트와 그 친구들처럼. 제이드는 이안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케이트가 있는 것을 보고 씩 웃었다. “특이한 학생이죠.” 무슨 소리냐는 이안의 눈빛이 돌아왔다. 제이드는 도시락통에서 예쁘게 깎은 과일을 꺼내 우물우물 먹기 시작했다. “스미스양 말입니다. 입학한 지 삼 년째인데 10학년이거든요.” “마법력을 가진 자라면 당연한 거 아닌가.” 제이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 말은 아직도 10학년이라는 겁니다.” 나이에 구애받는 학교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 살짜리 아이도 졸업이 가능하다. 능력만 된다면. 그런 의미에서 마법력을 가진 자들이 마법학교에 머무는 시간은 상당히 짧다. 평균 십 년 정도를 머문다고 한다면 그들은 고작해야 일, 이년 정도다. 기본이라는 걸 쌓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마나 수련, 공격 마법, 방어 마법. 이런 수업들이 마법력을 가진 자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지금 케이트에게 도움이 되는 수업은 마법역사와 예술 마법 정도 일 테니까. 이안은 다시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옆에는 다른 종류의 샌드위치가 하나 더 있다. 마법사들에 비해 검사인 그가 먹는 양이 훨씬 많기 때문에 샌드위치 한 개로는 부족했다. “그녀가 마법학교를 졸업할 생각이 없다면 어쩔 셈입니까.” 제이드의 질문에 이안이 고개를 들었지만 그는 모른 척 샐러드를 입안에 넣고 있었다. 이안은 첫 번째 샌드위치를 깨끗이 삼키고 두 번째 샌드위치의 포장을 풀며 말했다. “그녀가 마법학교를 졸업할 생각이 없다는 건가.” “삼 년째인데 아직도 10학년이니까요.” 모호한 암호 같은 대화가 오갔다. 이안은 힐끔 케이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학생들과 대화하면서 느리게도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고작 샌드위치 하나로 한 시간은 먹을 모양이다. === 리코는 케이트가 멍하니 창밖을 보는 것을 발견하고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 그만뒀다. 마법방어수업. 방어할 수 있는 크기와 버틸 수 있는 힘에 대한 작용 반작용에 대한 강의 중이었지만 케이트에게는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수업을 듣는 이유는 다른 마법사들이 방어마법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기 위해서라고 했던가. 정작 들어야 할 녀석들은 땡땡이치는 마당에 꼬박꼬박 들어오는 성실함이 마음에 들던 차였다. 케이트는 수업을 귓등으로 들으며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뒤도 너무 앞도 아닌 딱 중간의 창가 자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게 튀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이쪽과 저쪽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그녀의 입장과 맞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학교가 좋았다. 졸업한다면 그녀는 바로 왕궁마법사로 스카우트될 것이 뻔하다. 마법력을 가진 마법사라는 건 흔치 않은 만큼이나 귀하게 대접된다. 평생 왕궁에서만 살아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들을 노리는 건 다른 나라만이 아니니까. 국내의 범죄 집단, 반역을 꿈꾸는 집단도 마법사를 원한다. 특히나 마법력을 가진 마법사라면 큰 전력이 된다. 멀리 검술 수련장에서 이안이 덤벼드는 학생을 가볍게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문득 그가 처음 왔을 때보다 학생들의 몸놀림이 좋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뚝뚝하고 냉정한 교사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꽤 잘 가르치는 교사인지도 모른다. 그때 이후로 이안은 그녀에게 손대거나 하지는 않고 있었다. 공격하지 않아도 마법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고 했던가. 다른 학생에게도 그런 짓을 하는가 싶어 주의 깊게 살펴봤지만 아직까지는 발견하지 못했다. 변태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마법력을 가진 자에게 치근덕거리고 싶었나? 그 정도로 생각 없는 남자로는 보이지 않는데. “케이트.” 누군가가 목소리를 낮춰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몇 번이나 불렀지만 그녀가 딴생각을 하는 통에 이제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케이트가 고개를 돌리자 빌이 손짓하고 있었다. 뭐야? “오늘 바빠?” 바쁠 리가 있나. 특례학생이다. 오늘 수업은 마법방어와 검술수업뿐인데 그녀로서는 둘 다 딱히 듣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저 튀지 않으려 적당히 수업을 듣고 있을 뿐이다. “수업 하나 남았는데. 왜?” “아까 이야기 한 10학년 말야.” 납치당했다는 학생의 이야기다. 그 학생의 집이 빌의 본가와 거래하고 있다고 했던가. 케이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빌은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 집하고 아는 사이기도 하고 그래서 수업 끝나고 잠깐 가볼까 하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 “...나도?”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녀와는 학년이 같다는 걸 제외하면 접점이 거의 없던 학생이다. 그런데 같이 가자고?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빌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실 그 형, 부인도 있고 자식도 있거든. 네가 가서 이야길 좀 들어주면 부인도 약간이라도 걱정이 덜하지 않을까 해서.” 마법력이 있다 해도 학생이다. 케이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존은 다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어려우려나? 내가 가서 위로 해줘 봐야 난 학생이니까...” “나도 학생이야.” “그렇긴 하지만 넌 보통 학생이 아니잖아. 집에 들렀다가 오는 길에 납치를 당했다니까 너도 갔다 오는 길에 뭔가 발견할지도 모르고.” 케이트는 탐정 같은 게 아니다. 탐지견 같은 것도 아니다. 오는 길에 뭔가를 발견한다니. 말도 안 된다고 말하려는 케이트에게 빌이 재빨리 말했다. “아, 검술 수업 들어가야 하나?” 검술 수업. 이안을 또 봐야 한다고 생각하자 케이트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시간에 그녀가 그의 옆구리에 멍을 하나 만들어 놨다. 그 후로 부딪친 적은 없지만 때때로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눈길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수업에 들어갔다가 무슨 보복을 당할지도. 그런 남자가 아닐 거라고 이성이 속삭였지만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남자다. “아니, 괜찮아. 같이 가자.” “엇, 정말?” 빌의 얼굴이 환해지자 케이트는 약간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빌과 납치된 학생의 가족을 위로해주려고 동행하는 게 아니다. 그저, 새로 온 저 검술 교사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마법 학교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하는 땡땡이의 이유가 참 별것 아니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 이안은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케이트의 모습을 찾았다. 검은 교복에 붉은 머리카락은 어디에서나 쉽게 눈에 띈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어딜 들렀다 오는 건가 싶어 기다려봤지만 여전히 그녀는 수업에 참가하지 않았다. “케이트 스미스는 어디 있지?” 이안의 질문에 학생들은 잠시 웅성거리더니 침묵했다. 어디 있는지 대충 알지만 말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이안은 잠시 누군가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다가 결국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는 사람 없나?” 여전히 학생들은 조용했다. 그건 케이트의 인망이 꽤 괜찮다는 의미다. 다른 곳이 아니고 학교 안에서 사라진 학생의 자취를 다른 학생들이 자진해서 숨겨준다는 건, 그런 의미다. 하지만 이안은 관심 없었다. 그는 학교에 다니는 동안 친구라는 걸 사귀어 본 적도, 말없이 수업을 빠진 적도 없는 학생이었으니까. 이안은 출석부를 꺼내 들고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미 케이트가 땡땡이쳤다는 걸 아는데 출석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학생들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대답했다. 그리고 곧 케이트말고도 한 명 더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빌 피셔맨도 없군.” 다시 한 번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안은 출석부를 내려놓고 학생들을 둘러봤다. 수련장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앉은 학생들이 한결같이 이안의 눈길을 피할 때 용기 있는 학생이 손을 들었다. “저, 빌이라면 잠깐 집에 다녀온다고 하던데요.” “빌 피셔맨이 어디 사는지 알고 있는 사람 있나.” 이번에도 다들 웅성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학생들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이안을 쳐다봤다. 마법학교의 학생들은 저마다 각각의 이유를 가지고 수업을 빠진다. 하지만 학년을 올라가지 못하면 졸업이 미뤄지고, 졸업이 미뤄진다는 건 수업료를 더 낸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들은 수업을 빠지는 학생이 있어도 대부분 알아서 하라는 투였다. 마법학교의 수업료는 그리 저렴하지 않고 어지간한 부잣집에게도 부담되는 가격이다. 정말 피치 못한 사정이 있거나 케이트처럼 몇 년 동안 무료로 학교에 다닐 수 있는 특례학생이 아니고서야 함부로 빠지지도 않았다. “내려치기 천 번.” 뭐? 이안의 말에 학생들은 무슨 소린가 하여 눈만 깜빡였다. “내가 올 때까지 내려치기 천 번하고 있도록.” “헉?” “에에엑?” 여기저기에서 말도 안 된다는 항의의 말이 터져 나왔다. 이 학생들은 모두 마법사다. 검사가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이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학생들의 항의를 종식 시킨 뒤 성큼성큼 학교 밖으로 빠져나갔다. ============================ 작품 후기 ============================ 1. 며칠전 점심시간에 점심먹는다고 신나서 가다가 넘어졌더랬습니다. 일어나보니 무릎에서 피가... 근데 흙바닥에 넘어졌더니 피를 닦아보니 그 안에....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 금요일 한 편이면 외전도 끝나네요. 사실 거의 5화까지 나눌 수 있었는데 외전이잖아요. 너무 길어지면 안됌. 00071 [외전] 뮈엘라 마법학교 =========================================================================                            머리가 무거워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끄응하고 신음을 냈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고 둔하게 느껴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려는 노력조차 들지 않았다. “일어났나 본대.” 동료의 말에 빌은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고 케이트에게 다가갔다. 약효는 확실했다. 저 마법력을 가진 여자가 완전히 늘어져 있었다. “케이트, 내 말 들려?” 케이트는 다시 한 번 끙 소리를 냈다. 그게 들린다는 건지 아니면 그냥 나는 소린지 몰라 빌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귀한 몸에 대우가 형편없어서 미안하군.” 그는 낡은 담요 위로 흘러내린 케이트의 붉은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며 말했다. “좀만 기다리면 널 공주님처럼 대우해줄 곳으로 데려가 줄 테니까.” 빌은 히죽 웃으며 일어났다. 케이트에게도 나쁜 조건은 아닐 것이다. 좋은 옷과 가구에 둘러싸여 여생을 살 수 있다. 평범한 여자라면 누구나 꿈꾸던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다. 물론, 자신이 그런 좋은 상황에 놓여있다는 걸 인지할 수는 없을 테지만. 몸은 천근만근 무거운데 머리는 구름 위를 흘러 다니는 것 같았다. 케이트는 이대로 있고 싶은 유혹에 눈뜨기를 포기했다. 주변의 소리가 한쪽 귀로 들어와 반대쪽 귀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신을 못 차리는데, 그 약 괜찮은 거야?” “멍청하긴. 정신을 못 차려야 하는 거다.” 동료의 말에 빌은 혀를 차며 술병을 꺼내 목을 축였다. “이 여잔 팔다리를 잘라놔도 정신만 남아있다면 우릴 다 죽일 수 있다고.” “마녀라는 게 그 정도야?” 마녀라는 건 마법력을 가진 자를 부르는 속어다. 이안은 거기까지 듣고 창문에서 몸을 떼고 이동했다. 안이 어두운 탓에 케이트의 검은 교복은 거의 묻힐 뻔했지만 그녀의 하얀 피부와 붉은 머리카락 덕분에 찾아낼 수 있었다. 가장 안쪽에 쓰러져 있는 케이트와 그 주위를 둘러싼 남자들. 이안은 소리 나지 않도록 이동하며 지나치는 창문을 통해 상대의 수를 파악했다. 넷, 다섯, 여섯...모두 여덟 명이다. 혼자서 상대하기엔 많은 수지만 이안은 지원군을 부를 생각이 없었다. 저들은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누군가의 지시를 받거나 의뢰를 받아 케이트를 납치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넘겨주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녀를 넘겨받을 자가 오기 전에 케이트를 구해내야 한다. 납치범의 배후에 있는 범인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안에게 가장 중요한 건 케이트의 안위였다. 이안은 품에서 스크롤을 꺼내 찢었다. 가볍게 찢어진 종이의 단면 사이로 검정색 잉크가 새어나오는 것처럼 흘러나오더니 공중에 원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것은 일정 높이까지 올라가자 더이상 올라가기를 멈추고 부풀어 오르더니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위치를 알리는 마법이다. 이안은 검을 뽑아들고 문에 몸을 기댔다. 운 나쁜 남자 둘이 문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가장 중요한 건 속도다. 그는 남자들을 죽이느라 시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그대로 문을 벌컥 열어 한 명을 넘어트린 뒤 남은 한 명을 크게 베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억!” 어깨부터 골반까지 비스듬하게 베인 남자는 그대로 칼을 놓치고 쓰러졌다. 이안은 앞으로 나서는 남자의 목을 가볍게 베어버렸다. 찔러버리는 게 더 확실하지만 그랬다가 뼈에 박히면 빼느라 시간을 잡아먹는다. 세 명이 순식간에 당했다. 다섯 명의 남자는 재빨리 전열을 가다듬었다. 앞으로 두 명이 나서고 그 옆으로 세 명이 펼쳐졌다. 이안은 그대로 가운데로 돌진했다. “이놈이!” 휘익하고 검이 공간을 갈랐다. 이안은 몸을 돌려 피하면서 반대쪽에 선 남자의 다리에 검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으아아악!” 더럽고 어두운 건물 안에 절규가 울려 퍼졌다. 케이트는 움찔하고 놀랐다. 마치 피곤해서 늦잠을 잘 때처럼 움직이기 싫은데 불안했다. 천근만근 무거운 눈을 뜨지 못한 채 그녀는 끙하고 머리를 들었다. 주변이 소란스러운데 명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와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뭔지 몰라도 대단히 화가 난 것 같다. 일어나지 않는 그녀에게 화가 난 걸까. 케이트는 비척대며 눈을 뜨려 애썼다. 바닥이 미끄러운데다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계속해서 비틀거렸다. “이 새끼가!” 문에 부딪혔던 남자가 두 손으로 검을 잡고 내리쳤다. 이안은 몸을 숙여 공격을 피해냈다. 그는 일어나지 않은 채 남자의 발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으악! 이, 이 개...” 남자의 욕은 완성되지 못했다. 이안이 그대로 목을 그어버렸기 때문이다. 피가 가볍게 분출된 목은 남자가 손을 들어 움켜잡기도 전에 보글보글 소리를 냈다. 이안은 발로 그의 가슴을 걷어차 밀어냈다. 그 뒤에 달려오던 남자가 그 몸에 부딪혀 멈칫했다. 동료를 구해야 할지, 아니면 포기해야 할지 갈등하는 모양이었다. 그게 실수였다. 이안은 그사이에 몸을 돌려 등을 노리는 검을 쳐냈다. 강한 힘에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아 남자는 검을 놓쳐버렸다. 튕겨 나온 그것은 낚아챈 이안은 양쪽으로 팔을 벌려 검으로 남자 둘을 동시에 찔러버렸다. 순식간에 납치범은 여덟 명에서 세 명으로 줄어버렸다. 젠장. 빌은 검을 든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흐느적거리는 팔다리를 가누지 못한 케이트가 엉금엉금 기어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다, 다가오지 마!” 남은 두 명의 팔과 다리를 베어내 버린 이안은 미간을 찡그리며 빌을 쳐다봤다. 늦었군. 그가 가장 우려하던 상황이었다. 놓친 녀석이 케이트의 목숨을 가지고 협상을 시도하는 것. 이안은 빼앗은 검을 던져버리고 빈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일곱 명을 죽이고 다치게 했는데 그의 몸에 묻은 피는 몇 방울뿐이었다. “물러나라고, 이 개자식아!” 이안은 고개를 흔들며 검을 흔들어 피를 털어냈다. 아직 식지 않은 피가 먼지로 덮인 바닥에 떨어졌다. 그가 빌을 처리하는 건 쉽지만 케이트의 몸에 상처가 나서는 안 된다. 이안은 거리를 가늠했다. 이정도 거리라면 빌이 케이트의 몸에 검을 대기 전에 그의 숨을 끊을 수 있을까. “일어나봐, 마녀.” 빌은 케이트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저 녀석을 죽이면 잠잘 수 있게 해주지.” 어떤 소리가 들렸지만 케이트의 머릿속까지 들어오지는 못했다. 그것은 한쪽 귀로 들어와 반대쪽 귀로 빠져나갔다. 날 내버려 둬. 케이트는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입술을 달싹이는 것으로 끝났다. “일어나라고, 이 마녀야.” 마지막 말만은 또렷하게 들렸다. 마녀. 마법력을 가진 자를 낮춰 부르는 말. 저도 모르게 케이트의 눈이 떠졌다. 마녀라고? 날 마녀라고 부른 거야? 눈앞에 번쩍이는 날붙이가 보였다.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은 힘이 있다. 비몽사몽 간에 주위를 둘러보려는 케이트의 귀에 대고 빌이 말했다. “저 녀석을 죽여.” 윙윙하고 머리가 엉킨 것처럼 느껴졌다. 뭐, 뭘 하라고? 케이트는 빌이 끈질기게 말하는 대로 눈앞의 남자를 죽이려 했다. 스스로 판단하려는 이성은 발목에 추를 달고 바닷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죽...” 케이트의 입술이 달싹이는 순간 펑하고 이안의 오른쪽이 폭발했다. 그가 반사적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오른팔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을 것이다. 빌은 폭발로 먼지가 일어나 날리는 것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나쁘지 않다. 반응이 느리긴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 좀 더 약을 투여해서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하는 인형이 된다면 완벽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그리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이안은 몸을 굴려 케이트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빌이 다시 그에게 공격하라고 소리 질렀을 때 케이트의 눈은 반쯤 감긴 상태였다. “일어나, 이 멍청한 년아!” 멍청? 불행히도 그 말은 케이트의 귀에 쏙 들어갔다. 그녀는 억지로 눈을 뜨고 빌을 쳐다봤다. 이 자식이 나한테 지금 욕한 거야? “어서 저 남자를 죽이라고!” 약효가 떨어지면서 케이트의 정신이 아주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성이 발버둥 치며 수면을 향해 느리게 나아갔다. “...멍, 청...?” “뭐?” 케이트가 입술을 달싹이며 말하자 빌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보려 했다. 약효가 떨어져 가는 건가! 그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미 그의 몸은 공중으로 치솟은 상태였다. 거대한 힘이 들어 올린 것처럼 날아오른 빌의 몸은 그대로 천장에 부딪혔다. “큭!” 쾅하고 지붕에 그의 몸이 부딪히면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케이트는 억지로 고개를 들고 지붕을 본 뒤 아직도 빌이 건물 안에 남아있는 것을 확인했다. 평소라면, 그러니까 제정신이라면 케이트는 이 정도로 누군가를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약이 취한 탓에 제대로 된 판가름이 어렵다는 게 빌에게 해가 되었다. 봐주지 말랬지. 케이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빌을 밀어냈다. 퍽퍽하고 헝겊 인형처럼 빌의 몸이 천장에 부딪혔다. 윽, 큭, 악! 하고 빌이 비명을 질렀지만 케이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몸이 둔한 탓에 짜증이 났다. 케이트가 다시 한 번 힘을 높이자 쩌적하고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빌의 몸이 지붕을 뚫고 날아갔다. 지붕에 구멍이 뚫리면서 건물 안에 한 줄기 빛이 새어들어 왔다. 케이트는 그대로 무너졌다. 몸이 너무 무거워서 더 이상 일어서려 노력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반대로 정신은 또렷해졌다. 이안은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갔다. 빌이 지붕을 뚫고 나가면서 균열이 일어난 탓에 기와가 흔들흔들 하다 툭 떨어졌다. 그는 몸을 숙여 기와를 등으로 받아냈다. “...어?” 케이트는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가 이안을 발견했다. 눈앞이 선명해지면서 후각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역겨운 냄새가 났다. 뭔가 묵은 듯한 냄새와 비린 냄새. 오염된 강에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일어날 수 있나.” 무리다. 케이트가 고개를 젓자 이안은 그녀의 몸 아래로 손을 넣어 한 손으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이, 이게 뭐예요?” 바닥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검붉은 피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닥과 이안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봤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이안은 검을 검집에 넣은 뒤 빈손으로 케이트의 뒤통수를 감싸 눌렀다. 억지로 얼굴이 그의 가슴에 눌렸지만 반항할 기운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저 투덜거렸다. “땀 냄새나는데요.” 당연하다. 케이트가 사라졌다는 걸 아는 순간 도시를 가로질러 달려왔다. 거기에 여덟 명을 상대로 싸우기까지 했으니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면 이안은 인간이 아니다. “괜찮습니까?” 두 사람이 건물 밖으로 나가기가 무섭게 기사단이 달려왔다. 늦군. 이안의 한마디에 맨 앞에 선 기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날린 위치 표시 마법을 본 순간 달려온 거라는 변명을 하려 했지만 그는 이안의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도시의 반을 가로질러 기사단이 출동했는데 이 정도면 빠른 축이 속한다. 하지만 상대가 이안이라면 그것도 변명이 되고 만다. 불세출의 기사라고 불리는 남자다. 현재 이 나라에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없다. 기사는 이안의 품에 안긴 케이트를 보고 입을 열었다. “제 말에 태울까요?” “됐다.” 이안은 그의 제안을 거부하고 케이트를 자신의 말에 태웠다. “...속이 안 좋아요.” “내 옷을 더럽히지 마라.”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케이트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인상을 찡그렸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미슥 거렸다. 약효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 부작용인 것이다. 하지만 상황을 모르는 케이트는 그저 괴롭기만 했다. 그녀의 표정을 본 이안은 품에서 약병을 꺼냈다. 기사단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살아있는 납치범의 신병을 확인하고 있었다. 혼자서 일곱 명을 상대한 건가. 질렸다는 투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게 뭐예요?” 케이트의 질문을 무시한 채 이안은 병 안의 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날 주는 게 아니었어?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순간 이안이 그녀의 턱을 움켜잡았다. “흡, 응...” 목 안으로 쓴 약이 넘어갔다. 이번에도 케이트는 변변한 반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탓에 그의 손을 뿌리치려는 시도도 할 수 없었다. 이안은 케이트가 약을 전부 삼키자 입술 뗐다. 입안에 씁쓸한 약 맛이 돌았다. “어, 이게 뭔...” 눈 앞에 흐려지면서 머리가 무거웠다. 말을 끝내기도 전에 케이트의 몸이 무너졌다. 이안은 그대로 그녀의 몸을 품에 안은 채 말을 달려 학교로 돌아갔다. === 케이트가 정신을 차린 건 다음 날 저녁때였다. 어마어마하게 배가 고팠기 때문에 그녀는 식사를 하면서 제이드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는...스미스양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기사입니다.” “...저를 보호해요?” “최근 마법사를 노리는 납치가 빈번해지면서 납치된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에게 보호자가 붙게 되었거든요.” “그런 말 처음 들어요!” “그야, 여긴 학교니까요. 사람들이 모르는 게 스미스양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 얄밉기 그지없다. 그러니까 제이드는 처음부터 알고 그녀를 이안과 붙여놨던 것이다. 케이트는 제이드를 노려보던 눈빛 그대로 이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듯이 샌드위치를 우물우물 먹고 있었다. “그래서 이 남자가 절 보호하게 된 거예요?”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기사입니다. 스미스양은 마법력을 지닌 사람인데다가 학생이라는 특성상 가장 납치될 가능성이 높거든요.” 전혀 즐겁지 않은 이야기다. 만 하루를 굶은 식욕도 이런 이야기 앞에서는 씻은 듯 사라져 버린다. 케이트는 포크를 내려놓고 우울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 없어요?” “그러려면 로엔 경이 돌아가고 새로운 기사가 검술교사로 부임해야하기 때문에 안 됩니다.” 즉, 학교 안에서 케이트의 호위라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 교사로 부임해 왔다는 말이다. “그럼 제가 학교를 졸업하면 바꿀 수 있는 건가요?” 약간의 희망을 안고 케이트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제이드는 그녀의 표정에 쓴웃음을 지었다. “바꿀 수는 있지만 로엔 경 만한 실력의 기사는 없어요. 다른 마법사들은 최소 세 명의 기사와 함께 움직이고 있고요.” 결국 케이트의 자유는 이안이 곁에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안 한 명이 곁에 있거나, 최소 세 명의 기사가 곁에 있거나. 이건 악몽이야. 절대 꿈이라고. 케이트는 머리를 감싸 안으며 절망했다. 그런 그녀에게 제이드는 고개를 갸웃하고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다른 마법사들은 그의 보호를 받고 싶어 하는데 스미스양은 왜 그렇게 그를 싫어하는 거죠?” 이젠 아예 숫제 이안이 이 자리에 없다는 투다. 케이트는 고개를 번쩍 들고 외쳤다. “하지만 이 남자 저한테 두 번이나...!” 거기까지 말했을 때 정신이 들었다. 케이트는 입을 벌린 채 얼어붙었다. 이안은 한번 케이트를 보더니 남은 샌드위치를 한입에 넣어버렸다. “...두 번이나?” “...그, 야, 약을 먹였다고요.” “약...말입니까?” 무슨 소리냐는 듯 제이드가 쳐다보자 이안은 여전히 마이페이스대로 입안의 음식을 전부 씹어 넘기고 입을 열었다. “속이 나쁘다길래 내 옷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수면제를 준 것뿐이다.” 그렇다고 그런 짓을! 팡하고 터져버린 케이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테이블이 덜컹거린 탓에 제이드는 재빨리 자신의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는 새빨개진 케이트의 얼굴과 두 번째 샌드위치의 포장을 푸는 이안을 번갈아 보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두 분 다, 교내에서 교사와 학생의 연애는 금지입니다.” ============================ 작품 후기 ============================ 와, 외전도 끝났습니다. 1부 외전과는 달리 상큼 발랄하게 끝났네요. 역시 학교하면 이런 분위기죠. 3부는 아마 올해 말...이미 올해 말이구나. 음, 그럼 11월이나 12월 쯤에 시작할 듯 싶습니다. 그 전에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다른걸 쓰고 싶어서요. 현대로맨스로 생각하고 썼는데 (책으로) 열장쯤 쓰다가 막혀버렸습니다. 며칠을 끙끙거려도 진도가 안나가서 설정을 고대로 두고 배경만 동양 판타지로 바꿔서 써봤는데 오늘 하루에만 (책으로) 스무장 썼네요. 와, 난 정말 설정덕후야...젠장. 하루 종일 앉아서 관이 어쩌고 복식이 어쩌고 이랬는데 스무장이라니요... 내가 설정덕후라니! 내가 설정덕후라니!! 그러고보니 왕자님의 약혼녀때도 남자주인공 나라의 건국역사부터 짜기 시작해서 조상 이름을 하나하나 지어주고 있었죠. 어쨌거나, 제가 앞으로 일주일간 또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동양판타지로 갈것 같습니다. 원래 고민하던 동양판타지는 다른거구요. 사내연애비스한 분위기였는데 그게 그대로 동양판타지로...어엄... 문제는 제목을 아직 못지었어요. 어째야 하나... 연재 시작은 10일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 공지 한번 올릴게요. 00072 [공지] 3부 큐바인 하우스 =========================================================================                            선 연재 후공지가 되었는데 뮈엘라의 수사관 시작합니다. 공지를 하나 더 올리면 게시판이 지저분해져서 전에 사용한 다른 이야기 홍보용 공지를 수정합니다. 3부의 제목은 큐바인 하우스 이고, 이안과 케이트의 입장도 아주 약간이지만 바뀌게 됩니다. 그래도 ASKY 재미있게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뮈엘라의 수사관은 빨간날 제외하고 주 5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후 9시에서 11시 사이에 업뎃됩니다. ====================== 제후가 통치하는 현무국의 마을 수향에서 성실하게 살아온 하급관리 서희. 어느날 그녀가 일하는 관아에 감사가 내려오는데 서희의 동생과 소싯적 사고 꽤나 치고다녔던 남자. 게다가 십년전 몰래 사귀다 그녀가 차버린 과거까지. 성실하게만 살아온 인생에 난데없는 풍랑이 일기 시작한다. ============================ 작품 후기 ============================ 고객님, 새글이 떴는데 공지라 당황하셨죠? 저도 공지로 올리면 여러분께서 확인이 될지 몰라 많이 당황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린 대로 한달에서 두달 가량은 다른 이야기를 씁니다. 30화정도의 분량으로 (동양)판타지 로맨스입니다. 제가 어디까지 쓸 수 있는지 저도 궁금해서 이번 이야기는 수위를 좀 높게 잡았습니다. 그렇다곤 해도 씬 부분만 노블로 옮기는 방법을 귀띔해 주셔서 미성년자 분들은 그대로 보시면 되고, 성인이신 분들은 (원하신다면) 노블로 오셔서 보시면 됩니다. 씬부분이 5화는 안넘을 거예요. 아마. 노블쪽은 그때 따로 해당 글에 후기에 적을게요. 제목은 "검은 소야곡"이고 9월 10일(화요일) 부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처럼 오후 9시에서 11시 사이에 업뎃됩니다. 10일 자정쯔음에 검색해보시면 나올거예요. 관심있는 분들은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00073 1. 큐바인 하우스 =========================================================================                            “도련님 말야. 사퇴했다고는 하지만 쫓겨 난거지?” 애니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타운하우스의 사용인들은 백작 부인의 배려로 준비된 마차를 타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날이 쌀쌀해졌지만, 마차 안은 사람들이 꽉 찬 탓에 열기로 후끈했다. “2급 수사관으로 승진했다고 마님께서 연회를 연 지 고작 일주일 만에 수사관을 그만두다니 말도 안 돼.” 이번에도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메리가 그만 떠들라고 눈치를 줬지만 애니는 그녀의 주의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그닥 다그닥하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덜컹덜컹 마차가 포장된 길을 지나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얼마나 실망이 컸던지 타운하우스의 사용인들은 아무도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백작 부인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녀가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백작 부인은 이미 슬퍼하고 있었고, 그건 사용인들의 기운을 빠지게 만들었다. “진짜 호건가가 그렇게 힘이 세? 그래 봤자 상인이잖아. 호건가 때문에 도련님이 집을 나가셨다는 게, 진짜야?” “애니!” 결국 참다못한 메리가 소리쳤다. 애니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리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려는 듯 주위를 둘러봤지만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그녀는 눈알을 굴리고 입을 다물었다. “실비아.” 타운 하우스에서 안쪽 방에서 파리한 안색의 실라가 드디어 입을 떼자 실비아는 허겁지겁 그녀에게 다가갔다. 실의에 빠져 죽는 게 아닐까 싶던 마님이다. 사람이 실의에 빠져 죽는 건 불가능하다고 반박할 사람에게 지금 실라의 얼굴을 보여준다면 바로 자신의 의견을 철회할 것이라고 실비아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다 돌아왔어?” “아직이요. 하지만 곧 돌아올 거예요.” 방금 심부름꾼이 출발 할 테니 저녁 식사를 준비해 달라는 전언을 전했거든요. 실비아의 말에 실라는 다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 일련의 행동이 마치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 같아 실비아의 심장이 다시 한 번 철렁 내려앉았다. 빌어먹을 호건가. 살면서 욕이라고는 그다지 입에 올려본 적이 없는 실비아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게 모두 다 호건가 때문이다. 왜 하필 호건가의 기분을 건드린 건지 이안에 대한 미움도 있었지만 이안은 실라의 아들이다. 미워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고작 상인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는 이유로 수사관장과 2급 수사관이 사퇴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그게 호건가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호건가가 마음만 먹으면 나라를 사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 있다. 즉, 왕을 바꿀 수도 있다는 말이다. 호건가는 뮈엘라에서 권력이라는 걸 귀족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알려주는 존재였다. 결국, 연회 이틀 만에 이안은 실라에게 이 집을 나가겠노라 통보했다. 의논이 아니었다. 통보였다. 그는 예의 표정 없는 얼굴로 침착하게 말했다.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타운 하우스를 나가겠습니다. 한동안 자신과 연을 끊는 게 좋다는 말에 실라는 그대로 쓰러졌다. “마님.” 실비아는 부랴부랴 따듯한 차와 스콘을 가지고 돌아왔다. 하지만 실라는 차만 조금 마시고 다시 소파에 기댔다. 장성한 아들이지만 아직도 그녀에겐 로엔가의 본가 저택 현관 앞에 서있던 다섯 살짜리 아들로만 보였다. 그런 아들이 곤란해졌는데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속상했다. 그건 실라의 마음을 좀먹고 있었다. 부디, 백작님이 이 소식을 들으셨기를. 실비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실라를 쳐다보며 기도했다. 실라는 벌써 이틀째 차 외의 것은 입에 넣지 않고 있다. 실라의 아들이자 이안의 형. 현 로엔가의 당주 아르고. 그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할지도 모른다. === 천장 위로 작은 동물이 다다다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트는 고개를 들어 천장에 구멍이 하나도 없음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설거지하는데 위에서 쥐가 떨어지는 것만은 사절이다. 그녀는 머리 위로 들쥐가 떨어지는 상상을 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게 그녀의 단순한 상상이 아닐 정도로 이 집은 상당히 낡았다. 타운하우스보다 약간 작고 심지어 더 후에 지어졌음에도 관리가 전혀 안 되어 있었는지 여기저기 낡고 녹이 슬어 난리도 아니다. 그녀는 설거지를 마친 뒤 앞치마에 아무렇게나 손을 닦고 돌아섰다. 지금쯤 타운 하우스의 사용인들은 집에 도착했을 것이다. 고작해야 몇 주 정도의 기간이었지만 타운 하우스의 사용인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약간 섭섭하면서 시원했다. 메리의 적대적인 태도와 존이 추근덕 거리는 것이 불편하던 차였다. 거기에 애니의 눈치 없음도 한몫했다. 연회로부터 일주일. 고작 일주일 만에 이안은 케이트를 데리고 타운하우스를 나와 이 집으로 들어왔다. 일주일 만에 집을 구했다는 것에 놀란 그녀는 집에 들어서자 전혀 관리되지 않는 집의 상태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먼지가 쌓인 건 그렇다 쳐도 천장과 바닥까지 벗겨진 상태였다. 결국, 사용할 수 있는 건 일 층뿐 이었기 때문에 타운 하우스의 사용인들은 간신히 응접실과 식당을 사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거기에 서재인 듯한 방을 이안의 침실로 만들어야 했을 땐 아무도 새어나오는 한숨을 막지 못했다. 주인의 침실이 일 층이라니. 언어도단이다. 일 층은 쉬는 장소가 아니다. 사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안은 여전히 표정없는 얼굴로 상관없다 결정했다. “하아.” 케이트는 이안을 떠올리자 화를 내야 할지, 어이없어해야 할지, 동정해야 할지 몰라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됐지? 고작 몇 달 사이에 그녀의 인생은 구십도 바뀌고, 다시 구십도 바뀌었다. 합계 백팔십도인데 별로 좋아진 것도 극적으로 바뀐 것도 아니다. 타운 하우스에서 다시 독신자 하우스로. 이 집을 뭐라고 불렀더라. 그녀는 기억을 더듬다가 이 거리가 큐바인 거리라는 것을 떠올렸다. 거리와 이름이 같다고 했으니 큐바인 하우스 겠구나. 찌링찌르륵. 반쯤 고장 난 벨이 울리자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어느 방인지 확인하려다 실소를 터트렸다. 확인할 만큼 방이 많은 것도 아니다. 응접실 아니면 그의 침실로 만든 서재일 것이다. 저녁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응접실 일테지. 그녀는 부엌에서 빠져나오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보니 일주일동안 갑자기 너무 바빠진 탓에 이안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게 그 날로부터 처음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그날. 그날의 일을 제대로 되짚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천장을 쳐다봤다. 천장 너머로 다시 쥐가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다닥. “뭐, 뭘 어쩌라고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케이트는 벽과 이안의 사이에 가로막힌 채 멍청하게 되물었다. 가능하면 멍청한 표정은 짓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의 이안의 말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 “이해가 안 되나?” 이안은 멍청하다는 지적 한마디 없이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시 말했다. “어디 내가 널 좋아하게 만들어봐.” 아무래도 지금 이 상태가 꿈을 꾸는 건 아닌 모양이다. 이게 꿈이라고 해도 너무 끔찍하다. 케이트는 눈만 깜빡깜빡 거리며 이안을 응시했다. 나를 좋아해. 도 아니고 내가 너를 좋아하게 만들라니.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란 말인가. “저기, 그러니까. 제가 당신을 좋아하라는 건가요?” 이안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는 케이트에게로 고개를 기울이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귀가 안 들리나?” 히익. 목 뒤로 솜털이 솟아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아니요. 결사적이다 싶을 정도로 고개를 젓는 행동에 이안은 다시 뒤로 물러났다. “내가 널 좋아하게 만들라는 말이다.” “어, 그러니까 제가 당신을 좋아하라고요?” 이안의 한쪽 눈썹이 다시 치켜 올라갔다. 그는 케이트의 턱을 움켜잡고 물었다. “내가 널 좋아하게 해보라는 말이 그렇게 어려운가?”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호박색 눈동자의 끝이 불그스름해지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당신이 날 좋아하게 만들라고요?” “그래.” 드디어 이 작은 빨강머리 계집애가 그의 말을 이해한 모양이다. 이안이 그녀의 턱을 놓고 뒤로 물러나려 했을 때 케이트가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날 좋아하도록 하라는 거죠?” “그래.” “어, 그러니까 당신이 날 좋아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 “어, 음, 그러니까….” “그만.” 결국 이안은 손을 뻗어 케이트의 입을 덮어 버렸다. 그의 손안에 케이트의 얼굴이 쏙 들어왔다. 그녀는 눈만 손 밖으로 내놓은 채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느 부분이 이해가 안 되는 거지?” “어, 그러니까 당신 말은 당신이 날 좋아하도록 만들라는 거잖아요?” “그래. 이 대화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것 같은데.” 보통 때의 케이트라면 그가 비아냥거린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런 걸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저기, 잘 이해가 안 되는데. 그냥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게 더 쉽지 않아요?” “어려워서 못한다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잊고 있었다. 그와는 대화가 통한 적이 별로 없다는 것을. 케이트는 답답해서 주먹을 쥐며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고 말고는 상관없이 당신은 날 좋아하게 만들라는 거잖아요.” 이안이 머리를 갸우뚱하더니 물었다. “날 좋아하고 싶다는 건가.” 이 남자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케이트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려다 벽에 뒤통수를 박고 끙끙거렸다. 아파라. 얼마나 놀랐는지 뒤에 벽이 있다는 것도 잊었다. “그, 그건 아니거든요? 그냥. 그게,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이번엔 이안이 이해가 안 되기 시작했다. 그는 케이트에게서 한걸음 물러나더니 허리에 손을 얹고 물었다. “설마 넌 내가 명령하면 날 좋아할 수 있다는 건가?” “어, 아니, 그건 아니죠.” 그렇다면 대체 뭐란 말인가. 이안의 미간에 한줄기 주름이 생겼다. 그는 아마 죽을 때까지 이 작은 빨강 머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머리가 좋은 줄 알았는데 때때로 이렇게 멍청하게 굴 때가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유혹할 수는 있어도 다른 사람을 강제로 좋아할 수는 없는 걸로 아는데. 아닌가?” 뭔가 아닌 것 같은데 맞는 말이다. 케이트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하라는 거다.” “…에?” 하아. 이안은 급기야 한숨을 내쉬었다. 그 태도에 케이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 이 남자한테 바보 취급받는 거야? 심지어 그가 영리한 줄 알았는데. 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지금, 다 들렸거든! 케이트가 발칵 화를 내려는 순간 이안이 입을 열었다.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 때문인 거 아닌가? 너는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는 남자를 좋아할 수 있나?” “어? 아, 아니죠?” “그러니 내가 널 좋아할 수 있도록 행동을 하라는 거다. 이제 이해가 되나?” 뭐라 반박학고 싶은데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케이트가 눈알을 굴리는 사이 이안은 자신의 말을 마쳤다는 듯 그녀의 눈앞에서 휙 하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일주일 후. 케이트는 이안과 단둘이 큐바인 하우스에서 살게 된 것이다. ============================ 작품 후기 ============================ 오랜만 입니다아~ 아마 검은 소야곡을 따라오셨던 분이라면 ...아, 그래도 오랜만이구나. 즐거운 휴가였습니다. 하아하아... 내게 휴가를 더 줘. 기브 미 더 야스미. 1부에서 이안과 케이트는 하인과 하녀였고 2부에서 이안과 케이트는 도련님과 하녀였고 3부에서 이안과 케이트는 주인님과 하녀가 되었습니다. 주!인!님! 비바! 빨강머리에 하얀 피부. 녹색 눈동자의 미녀가 하녀복을 입고 “주인님, 일어나세요.” 라며 저를 깨워준다면 그대로 수갑을 차...응? 아니, 아니죠. 케이트는 성인이니까요. 이런 환상은 합당한 겁니다. 고로 저는 계속 망상 하러 갑니다. 덧, 아래의 공지는 제목을 변경하였습니다. 00074 1. 큐바인 하우스 =========================================================================                            이 남자의 속을 모르겠어. 케이트는 투덜거리며 이안이 부른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응접실 의자에 앉아 편지를 읽고 있었다. 아직도 그에게 편지를 보낼만한 친분을 유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랍다. 호건가에 미움을 받게 된 그 때문에 로엔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타운 하우스를 떠난 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왜 사용인을 그녀 하나만 데리고 나왔다는 말인가. 귀족이라면 최소한 종복과 집사가 있어야 한다. 식사는 주변 식당에서 배달시키고 빨래는 외부에 위탁한다. 대청소는 일주일에 한 번 청소하는 사람을 부른다. 상주하는 사용인을 부릴 경제적 능력이 안 되거나, 혼자 사는 독신자의 경우 그런 식으로 집안일을 처리한다고 들은 적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하다못해 시중을 드는 종복 겸 집사 한 명과 간단한 청소와 음식을 할 하녀. 그리고 접객할 하인. 이렇게 최소한 세 명은 고용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케이트는 현재 독신 남성의 집에서 일하는 유일한 사용인이다. 그녀는 이게 부디 주변에 이상한 소문으로 퍼지지 않길 바랐다. “부르셨습니까.” 케이트가 말을 걸자 이안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내밀었다. 그 손끝에 찻잔이 들려있었다. 차를 따르라는 건가? 케이트는 테이블 위의 차 주전자에 손을 댔다.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런. 그녀가 다시 차 주전자를 채워 가져왔을 때도 이안은 손을 내민 채 앉아있었다. 팔이 아프지도 않나? 케이트는 조심스럽게 차를 따르려다 멈칫했다. 그를 유혹하라고 했지. 뭔가 다르지만 대충 그런 뉘앙스의 대화였다. 그녀는 길게 뻗은 손끝에 매달린 찻잔과 차 주전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유혹해야 하지? “서, 설탕도 넣을까요?” 케이트의 질문에 이안은 드디어 편지에서 눈을 뗐다. 그는 차에 설탕이나 우유를 타지 않는다. 그건 타운하우스의 사용인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모시는 주인들이 입맛은 꿰고 있어야 하니까. 그가 쳐다봤을 때 케이트의 얼굴은 약간 달아올라 있었다. 어쨌거나 그가 그녀를 쳐다보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유혹을 하건 뭐를 하건 일단 상대가 그녀를 봐야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저지른 일이었다. “아니.” 이안은 평온하게 대답하고 다시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이러면 안 되지! 케이트는 재빨리 다시 물었다. “아, 저, 그러면 우유를 넣을까요?” 음? 이안의 고개가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뒤로 물러났다. 그녀도 모르겠다. 사실 그가 그녀를 보도록 한다는 데만 집중해서 이다음은 어떻게 할지 생각도 안 해봤다. 이안은 달아오른 케이트의 얼굴을 보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별로 덥다는 생각은 안 해봤는데 그녀는 여기가 꽤 더운 모양이다. 심지어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아니.” 아까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대답에 케이트의 기운이 쭉 빠졌다. 그래, 상대는 저 이안이다. 대체 뭘 기대한 거란 말인가. 그녀는 한숨을 쉬며 찻잔에 차를 따랐다. 향기로운 홍차 내음이 방안에 가득 찼다. 문득 의심이 들었다. 설마 처음부터 유혹을 받아줄 생각 따윈 없었던 것 아닐까? 어디 한 번 유혹해 봐. 난 절대 널 좋아할 생각이 없으니. 이안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케이트는 차 주전자 위에 티 코지까지 덮은 뒤 그의 앞에 가서 섰다. 이안은 시선 가장 가리에 검은색의 심플한 단화가 보이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내가 해야 할 일 말인데요.” 해야 할 일? 이안은 머릿속에 케이트가 해야 할 일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녀가 뭘 해야 하지? 그는 사용인들이 보통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관심도 없고, 의식주에 크게 신경을 써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케이트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지도 모른다. 그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타운 하우스에서는 그녀 말고도 다른 하녀가 몇 명 쯤 더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에게 하녀라는 존재는 케이트 이외엔 관심 밖이라 확실하진 않지만 적어도 두 명쯤 더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곱 명이지만 이안은 진심으로 두 명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금발 머리와 갈색 머리. “타운 하우스의 두 배를 주지.” “…네?” 난데없는 제안에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안은 찻잔을 테이블에 놓고 일어서더니 자신의 방으로 꾸민 서재로 들어갔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케이트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그는 손에 두툼한 책을 한 권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펜을 꺼내더니 책을 펼쳤다. “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책의 내부에 케이트는 그것이 수표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안이 뜯어서 건넨 종이가 수표라는 것도. 수표 안에는 깜짝 놀랄 만큼 많은 숫자가 적혀있었다. 타운하우스에서의 급료도 꽤 많은 편이었다. 그런데 그 두 배라고? 수표를 받아든 그녀는 그 액수가 두 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두 배가 아니잖아요!” 마지막 말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이안은 몸을 기울여 케이트의 손안에 든 수표를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아, 몰랐다.” 그리곤 펜을 들어 두 줄 긋더니 그 밑에 다시 숫자를 적어넣는데 이번엔 더 많았다. “자, 잠까안!”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수표를 찢어버리며 외쳤다. “너무 많다고요!” 아, 그래? 이안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펜을 수표책에 갖다 대며 말했다. “그럼 얼마를 주면 되지?” 이건 아니야. 너무 황당한 일에 케이트의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 어느 천지의 주인이 하녀에게 급여를 부르라고 한단 말인가. 보통 귀족들은 하녀장이나 집사가 사용인들의 급여를 결정하고 지급한다. 그러니 이안은 한 번도 사용인들에게 돈을 줘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잠깐. 그럼 식료품비 같은 건 어떻게 처리하는 거지? 문득 케이트는 단순한 의문이 떠올랐다. 식료품비나 의상비 같은 것들은 모두 가게에서 저택으로 지급요청이 들어오면 집사나 하녀장이 처리한다. 지금의 이안을 봤을 때 그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이안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는 잠시 수표책을 내려다보더니 케이트에게 내밀었다. “가져가.” “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케이트는 입을 벌리고 이안을 올려다봤다. 그는 펜을 다시 제 자리에 돌려놓더니 여상하게 말했다. “나보다는 네가 쓸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닌가?” 사용인이라고는 케이트 하나뿐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수표책을 집사나 하녀장도 아니고 하녀에게 줘버린다고? 이건 상식 이하니, 이상이니 하는 것을 넘어선 문제였다. 케이트가 수표책을 받아들려 하지 않자 그는 그것을 억지로 그녀의 가슴에 안기다시피 넘겼다. 그리고 아 참. 하고 생각난 것처럼 제자리에 돌려둔 펜도 내밀었다. “이제 됐지?” 뭐가 됐단 말인가. 케이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며 편지로 다시 시선을 던지는 이안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 남자,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니야. 아니, 제정신이 아닌 정도는 이안이라는 남자에게 너무 부족한 형용사다. “이게 아니라!” 케이트는 수표책과 펜을 테이블 위에 탁하고 올려놓으며 소리쳤다. 펜이 충격을 받아 데구르르 굴러가더니 테이블 밑으로 툭 떨어졌다. 이안은 떨어진 펜에서 케이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당신이 날 좋아하게 만들라는 거요!” 아, 그거. 이안은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할 일이 꽤 많군. “그런데?” “정말 절 좋아할 생각이 있는 거예요?” 이안은 조용히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온 케이트는 얼굴을 붉혔다. 맙소사.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한 거야? 아무래도 오늘 밤 잠들기 전에 침대 위에서 부끄러움에 몇 번쯤 몸부림쳐야 할 것 같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머릿속에서 더이상 말하지 말라고 이성이 말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한번 터진 입은 멈출 줄 몰랐다. 케이트는 초조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 당신이 날 좋아하지 않으면요?” 이번에도 이안은 그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그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내가 언제까지 당신이 날 좋아하게 만들어야 하는 거죠? 한 달? 두 달? 기한이 있을 거 아니예요?” “없다.” “기한이 없…, 기한이 없다뇨? 그럼 난 평생 당신을 유혹해야 하는 거예요?” “평생 걸린다면 평생 해야겠지.” 이게 말이야, 방구야? 케이트는 말을 잃고 이안을 쳐다봤다. 평생이라니. 말도 안 된다. 그녀가 막 그렇게 반박하려 할 때였다. 이안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네가 분명 뭐든지 하겠다고 했다.” 타이밍을 놓친 케이트의 입이 하릴없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이건 너무 불리한 계약이다. 아니, 이게 계약이긴 한 건가? 그녀는 다시 편지로 시선을 던지는 이안의 태도가 얄미워서 종이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럼 난 당신이 날 좋아할 때까지 평생 당신 곁에 있으라는 말이잖아요.” 이안은 못마땅하다는 듯 편지를 덮은 케이트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들었다. 호박색의 눈동자가 빛나는 것처럼 보여서 움찔했지만 케이트는 손을 치우지 않았다. “여기 있다.” 뭐? 잠시 무슨 소린지 몰라 어리둥절하던 그녀는 곧 그것이 그런 게 어디 있냐는 자신의 말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이 남자가! “이건 불공평해요!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약속을 지켜야 할 이유는 없다고요!” 이안은 천천히 케이트의 손을 잡더니 자신의 편지에서 떼어냈다. 그녀가 아무리 매달려도 이안의 힘을 이길 방법은 없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편지로 시선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나는 네 부탁을 들어줬고, 너는 뭐든지 한다고 했다.” 마치 그게 케이트가 약속을 지켜야 할 이유라는 듯이. ============================ 작품 후기 ============================ 어, 늦어서 죄송합니다. 연말이잖아요? 31일이잖아요? 사실도 아직 노는 중인데 문득, 아차, 나 오늘 안올렸지! 해서 부랴부랴 모바일로 올립니다. 아니, 근데 댓글이... 덜덜덜.... 여러분, 제가 진짜 연참 안하는데;;; 오늘이 아니라 내일은 원래 빨간 날이라 안올리잖아요? 내일 (아마 새벽;;) 에 집에 들어가서 한 편 더 올릴게요. 이런 분위기에서 연참하지 않으면 제 머리끄댕이 잡아당길 사람 분명히 나타날것 같아요... 00075 1. 큐바인 하우스 =========================================================================                            큐바인 거리는 과거, 귀족이나 부호의 정부가 살던 동네였다. 아이를 낳는 것도, 누군가의 앞에 부인으로 떳떳하게 나설 수 없는 여자들. 그녀들을 위해 그녀의 남자들은 사용인 몇 명을 두고 아늑하게 살 수 있는 집을 지어줬고, 남자가 없는 정부들은 큐바인 거리라는 공동체로서 동네를 깨끗하고 아늑하게 가꿨다. 자연스럽게 여러 편의시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마구간. 집집마다 다니는 세탁서비스. 포장과 배달을 주로 하는 식당.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큐바인 거리는 독신 귀족과 전문직종사자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동네로 변해있었다. 하나, 둘 의사, 변호사, 가수, 독신 귀족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이사해 들어오면서 정부들이 사는 곳이라는 인식이 가득했던 큐바인 거리는 어느새 조용하고 깔끔한 동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네의 모든 부분이 다 바뀐 건 아니었다. 아직도 큐바인 거리에는 조용히 살아가는 정부가 있었고, 과거 큐바인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던 주택도 남아있었다. 대부분의 큐바인 하우스는 주인이 바뀌면서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지만 안쪽의 큐바인 거리에서 큰 축에 속하는 주택 하나만이 오랜 시간 주인 없이 빈집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큐바인 하우스에 며칠 전부터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저것 봐, 로즈! 저 집에서 사람이 나와!” “아가씨, 창밖으로 남을 훔쳐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요.” “이리 와서 보라니까.” 약간 거무스름한 피부에 화려한 금발을 풍성하게 부풀린 미녀가 창밖으로 쳐다보며 손짓했다. 그 손짓에 로즈는 한숨을 쉬며 미녀의 두 배쯤 됨직한 큰 체구로 소리 없이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시나몬 아가씨.” “저기 봐. 저기 저 빨간 머리 보여?” 아무도 본명이라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굳이 설명하자면 시나몬은 그녀의 본명이 아니다. 갈색 피부에 시나몬이라는 이름이라니, 비정상적으로 맞아떨어지는 이름이다. 시나몬은 로즈가 창밖을 볼 수 있도록 한쪽으로 비켜섰다. 시나몬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그녀와 달리 로즈는 일부러 난센스를 지향하는 것처럼 이름과 외모가 어울리지 않았다. 웬만한 남자보다 큰 키와 체격. 약간 낮은 톤의 목소리. 밝은 피부는 오히려 너무 창백한 것처럼 보였고, 갈색 머리카락은 바짝 당겨 묶은 탓에 두피에 딱 달라붙은 것처럼 보였다. “저 애, 저 집에서 나왔어.” “큐바인 하우스 말이군요.” 로즈는 허리춤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시나몬을 만류하긴 했지만, 그녀도 호기심이 동했던 것이다. 큐바인 하우스. 이제 이 거리에서 큐바인 하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집은 저 집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새로 온 주인이 알고 있을까?” 시나몬의 질문에 로즈는 심술 맞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이름에 걸맞는 여자일 지도 모르죠.” 누군가의 정부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큐바인 하우스는 한눈에 봐도 낡았다. 지붕은 반쯤 썩어 무너질 것처럼 보였고, 이 거리에서 가장 큰 집답게 붙어있는 앞뜰도 잡초가 무성했다. 안쪽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 바닥은 떨어져 나갔을 것이고, 벽은 금이 갔을 것이다. 아이들이 있는 동네라면 순식간에 모험의 장으로 전락할 테지만, 큐바인 거리는 다행히 독신자들이 대부분이라 단순한 폐가로 끝난 상태였다. “정부라면 누구의 정부일까?” 시나몬은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을 들어 로즈를 바라보며 물었다. 뭔가 사연이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로즈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저런 낡은 집을 보수도 하지 않고 이사 올 정도라면 단단히 미움받은 게 분명해요.” 부호나 귀족이 단순히 마음이 식은 탓에 어딘가 조용한 동네 구석에 처박아 버리는 정부는 흔하게 널렸다. 젊고 똑똑한 여자라면 다른 남자를 찾기 마련이기에 그러지 못하고 저런 낡은 저택으로 쫓겨났다는 것은 늙은 여자일 게 분명하다는 게 로즈의 지론이었다. “아닐 수도 있잖아.” “맞을 거예요. 그러니 이사 오고 나서 집 주인은 코빼기도 안 보였죠.” 그건 단순히 이안이 밖으로 나가지 않아서였지만 로즈의 생각은 타당한 것처럼 들렸기 때문에 시나몬은 흐응하고 생각에 잠겼다. “내기할래?” 로즈의 얼굴이 움찔하고 일그러졌다. 그녀가 모시는 시나몬 아가씨는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내기나 도박 같은 것들을 좋아했다. 그러니 그 많은 돈을 벌고도 이런 작은 집에 로즈와 요리사, 청소하녀만 두고 사는 것이겠지만. “나는 젊은 여자라는 데 걸래. 로즈는 늙은 여자라는 거지?” “자, 잠깐만요. 아가씨!” 로즈가 손을 뻗었을 때 이미 시나몬은 숄도 걸치지 않고 실내복 차림으로 계단을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창문을 내다보고 빨간 머리가 시나몬의 집 현관에 다다르기 직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가씨, 조심해요!” 사용인이 한 명뿐이라는 것은 집안일 대부분을 그 한 명이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청소나 빨래, 요리는 외부에 맡긴다 해도 그건 굵직굵직한 일일 뿐, 자잘한 일은 엄청나게 많았다. 케이트는 우울한 기분으로 아침부터 큐바인 하우스를 나와 걷고 있었다. 한적한 거리는 길 좌우로 깔끔하게 정리된 소형저택이 나열되어 있어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집 대부분이 정원 없이 현관문을 열면 바로 도로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꺅!” “어머!” 그 사실에 익숙하지 않던 케이트는 안쪽으로 걷다가 문을 벌컥 열고 나오는 사람과 부딪혔다. 나동그라진 건 상대방보다 체구가 작은 케이트 였다. “그러니까 제가 문 열기 전에 밖을 확인하시라고 했죠!” 케이트와 부딪힌 여자의 뒤로 덩치가 큰 여자가 잔소리를 퍼부으며 나타났다. 어머, 어머. 부딪힌 여자는 케이트를 보더니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스커트를 움켜쥐고 부랴부랴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아픈 건 둘째 치고 창피하다. 케이트는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세게 부딪혔던지 보도의 연석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시나몬은 케이트의 손을 잡고 그녀가 보도 위로 올라올 수 있도록 도왔다. 계단 한 칸 정도의 높이였지만 이 작은 빨간 머리의 움직임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웠다. “다쳤어요?” 모르겠다. 케이트는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 감각에 눈썹을 찡그렸다. 무릎이 얼얼하다. 넘어질 때 부딪혔는지도 모른다. “걷어 봐요!” “앗!” 시나몬은 손을 뻗어 케이트의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아무리 여자들 앞이라지만 한낮의 거리에서 치맛자락을 걷다니, 싸구려 창부 같은 짓이라 케이트는 깜짝 놀라 그녀의 손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시나몬이 케이트보다 한 박자 빨랐다. 그녀는 케이트의 치마를 무릎위로 들어 올리더니 어머.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스타킹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사이로 새하얀 피부가 바닥에 쓸려 피가 몽글몽글 새어나오고 있었다. 헉. 어쩐지 아프더라니. 케이트가 숨을 들이켰을 때 쿵하고 뭔가 엄청나게 큰 것이 떨어진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시나몬과 케이트,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을 때, 로즈가 현관에서 기절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넘어져서 다쳤는데, 로즈를 옮기는 걸 돕게 만들어서.” “그렇게 아프지 않아요. 게다가,” 케이트는 소파에 뉘인 로즈를 내려다보며 뒷말을 삼켰다. 로즈의 다리가 종아리부터 발까지 소파 밖으로 삐쭉 튀어나와있다. 거의 이안만큼이나 큰 것 같다. “더 도와드릴 건 없나요?” 제발 부탁이니 없다고 했으면 좋겠다.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케이트는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침부터 너무 사건이 많이 터져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무릎은 아프고, 저 로즈라는 몸종은 너무 무거웠다. 시나몬과 그녀 둘이서 끙끙거리며 옮기는 데 거의 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참고로 로즈가 쓰러진 현관과 그녀를 뉘인 소파까지의 거리는 채 삼 미터가 되지 않는다. “저기, 그, 스타킹 말인데요!” 케이트가 일어나려 하자 시나몬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스타킹? 그제야 케이트의 안색이 변했다. 젠장. 내 소중한 스타킹인데. 아닌 게 아니라 진짜 소중했다. 스타킹이라는 건 하녀의 급료로 마음껏 살만큼 저렴한 게 아니다. 특히나 이제 곧 겨울이 될 시기라면 스타킹은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그런데 그 소중한 스타킹 중 하나가 완전 넝마가 되어버렸다. 빌어먹을. “저 때문이니까 보상하고 싶어서요. 어디로 보내면 될까요?” 어, 정말? 뜻밖의 행운에 케이트의 얼굴이 밝아졌다. 낡은 스타킹을 새것으로 교체 받을 수 있다니. 궁핍하지만 다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기서 제일 안쪽에 있는 집이요. 큐바인 하우,” “큐바인 하우스요?” 시나몬의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게 올라갔다. 그녀는 최대한 호기심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어머~, 큐바인 하우스에 사나 봐요?” “어, 네.” 이 반응은 뭐지? 뭔가 거칠거칠하게 손가락 끝에 걸리는 느낌이라 케이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거기 집주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시나몬이 그녀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집주인? 케이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빌어먹을 놈이지. 치사하게도 이안은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어. 난 지켰지만.’이라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가 ‘난 약속을 지켰으니, 너도 지켜!’라는 태도라면 케이트도 무시해 버렸을 테지만 이런 태도라면 무시할 수도 없다. 심지어 수표책까지 그녀에게 억지로 맡겨버리지 않았나. “치사한 사람이요.” 차마 놈이라고 하지 않은 건 마지막 자제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말만으로도 시나몬의 충격은 충분했다. 치사한 사람?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지만 케이트는 시간을 너무 오래 지체했다는 것을 깨닫자 허둥지둥 몸을 돌렸다. “어, 죄송해요. 전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잠깐, 치사하다니, 에?” 빨간 머리를 휘날리면 작은 체구의 여자는 마치 요정처럼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시나몬은 케이트를 잡으려던 모습 그대로 멈춰서 있었다. “내기는 무효군요.”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로즈가 끙차하고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직 아니야.” 시나몬은 허리에 손을 얹으며 외쳤다. “젊은 여잔지, 늙은 여잔지. 알아낼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고!” “네에, 네에. 그만 나갈 채비 하시죠?” 심술궂은 로즈의 말에도 시나몬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흥 하고 케이트가 사라진 쪽을 향해 응시하더니 한마디 더 던졌다. “꼭 큐바인 하우스에 초대받고야 말겠어!” ============================ 작품 후기 ============================ 연! 참! 하아...힘들다... 저 아직 술에 취해있어요. 하하하하. 숨쉬기 힘들어라. 전 왜 술에 취하면 숨쉬기 힘들어 질까요? 폐나 목이 붓나? 응??? 오늘 연참을 했으니 전 이제 내일 부터 미친듯이 써야 합니다. 하하하하하 아이, 행복해. 00076 1. 큐바인 하우스 =========================================================================                            이안은 아침 식사로 나온 것은 빵과 차 한 잔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귀족이었다면 이게 무슨 짓이냐고 난리가 났을 테지만 그는 의식주에 크게 비중을 두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찻잔을 들어 올렸다. 사실, 그가 비중을 두는 게 있기야 하느냐마은. 케이트는 머뭇거리며 어제 먹다 남은 쿠키가 담긴 접시를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상관없다는 투의 이안과 달리 정작 케이트의 얼굴은 달아올라 있었다. 주인의 아침 식사가 고작 빵 한쪽과 차 한 잔. 그리고 쿠키 한 접시라니. 큐바인 하우스의 유일한 하녀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정이 있었어요.” 케이트의 입에서 뜻밖에도 변명 조의 말이 튀어나오자 이안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게, 그러니까. 우물우물 뭐라고 변명하려던 케이트의 얼굴은 그가 빵을 집어 들고 바를 잼이나 버터를 찾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침에 사러 가려고 했는데!” 잼도 버터도 없다는 말이다. 이상한 일이다. 이안은 그제야 이런 일이 태어나서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가난한 저택이라 해도 하녀들의 식사에 잼과 버터가 나왔다. 그러니 지금 이 식탁은 사용인만도 못한 식탁이라는 말이 된다. “돈이 부족했나?”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물었다. 살면서 잼이나 버터를 사 본 적이 없으니 어쩌면 상당히 비싼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그의 의중을 읽지 못한 케이트는 그가 비아냥거렸다고 생각하고 울컥 소리쳤다. “아, 아니거든요!” 아차. 지금 이 상황은 그녀가 감히 화를 낼 상황이 아니다. 케이트는 뒤로 주춤 물러나며 이안의 얼굴을 살폈다. 돈이 없다니, 천만의 말씀이다. 며칠 전 이안이 건네준 수표책은 아직도 그녀가 가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응접실 책상 서랍에 넣어 놨다. 아무리 이안에게 받았다 해도 수표책을 자신의 방에 둘 만큼 뻔뻔하지 못하다. “아니면 금식 기간인가?” 뮈엘라에서는 일 년에 한 번 일주일 정도 금식 기간을 갖는 풍습이 있다. 그건 뮈엘라를 세우기 전 초대 왕 에드워드가 이 땅을 차지하고 있던 사악한 오크와 오거를 물리치면서 고작 빵 한쪽만으로 일주일을 버텼다는 데서 그의 용맹함과 노력을 기리기 위한 풍습 중 하나였다. 금식이라고 해서 음식을 전혀 먹지 않는 것은 아니고 초대 왕 에드워드처럼 빵 한쪽과 차 한 잔을 한 끼로 해서 하루에 두 끼만 먹는 것을 말한다. 금식 기간이 지나갔던가, 안 지나갔던가. 이안은 확신하지 못했다. 의식주에 대한 그의 기억력은 실로 대단해서 그는 그 금식 기간에 그가 뭘 먹었는지 혹은 금식 기간이 지나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타운 하우스의 주방장 무티가 때때로 하는 말이 있는데, 그건 이안 도련님은 이틀 묵은 빵과 새로 구운 빵을 구별하지 못할 거라는 말이었다. “그게 아니라, 사러 가려고 했는데.” 케이트는 스스로 생각해도 변명 같은 말에 스커트 자락을 쥐어짜며 말을 이었다. “가는 길에 넘어져서 다녀오질 못했어요.” “넘어졌다고?”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드디어!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저 이안이 뭔가 반응을 보였다. “…왜?” 이안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었다. 넘어지다니, 왜 넘어진단 말인가. 케이트가 갓 걸어 다니는 아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왜 멀쩡한 두 다리로 걷다가 넘어 진 거지? 그의 표정에 케이트는 화를 내야 할지 부끄러워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사람이 걷다가 넘어질 수도 있는 거지! 언젠가 저 남자의 발을 걸어서 계단에서 구르게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문득 이 집의 계단을 적어도 한동안은 사용할 일이 없다는 것이 떠오르자 문득 그가 얄미워졌다. 원래 분풀이할 수 없는 것일수록 더 화가 나기 마련이다. “그런 것보다.” 아무리 분풀이할 방법을 강구해 봐도 그는 주인이고 그녀는 하녀다. 케이트는 손을 내저으며 이야기를 바꿨다. “하다못해 심부름꾼이라도 한 명 더 고용해요.” “어째서?” 느닷없이 바뀐 이야기에도 당황하지 않고 이안이 물었다. 그는 지금 이 상태로도 불편함이 없다. 지붕과 벽이 있어서 바람 들지 않고 비가 새지 않으면 충분하다. 식사는 빵과 차 한 잔이면 됐고, 옷은 더러워지면 새로 사면된다. 하지만 그건 전부 케이트의 노동을 기반으로 해서 이뤄진 최소한의 편안함이다.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받아쳤다. “혼자서는 집안일 만으로도 바쁘단 말이예요.” 이안의 눈썹이 다시 한 번 치켜 올라갔다. 그는 다시 식탁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바쁠 만큼 일이 많은 건 아니잖아.” 너무 평온하게 말을 해서 그 말이 얼마나 모욕적인지는 천천히 케이트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바쁠 만큼 일이 많은 게 아니라니! 파르르 화를 내려는 그녀에게 이안이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여전히 평온하게 말했다. “이 집의 일층만 사용하고 있으니 훨씬 일이 준 것 아닌가?” 사용하는 집의 면적이 삼 분의 일로 줄었으니 하는 일도 줄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건 어떻게 보면 타당한 생각이다. 하지만 집 전체의 일을 일곱 명의 하녀가 하는 것과 삼 분의 일을 한 명의 하녀가 하는 것은 단순한 산수계산으로 해 봐도 한 명 쪽이 힘들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안은 타운 하우스에서 일하던 하녀가 두 명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심지어 모시는 주인 가족이 두 명에서 한 명으로 줄었으니 더 편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집안 일에 대해 설명하는 건 의미가 없다. 이안이 펑 하고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난다고 생각했을 때 케이트가 몸을 돌려 식당 밖으로 나가버렸다. 저 빌어먹을 자식이. 케이트는 이를 갈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수사관에서 잘렸다는 소문과 본가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집에서 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불쌍하다고 잠시나마 동정했던 그녀다. 물론 큐바인 하우스의 유일한 사용인으로 그녀에게도 불똥이 튀었다는 걸 생각하면 동정할 일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이안 로엔이라는 젊은 귀족 가의 도련님이 하루아침에 하녀 한 명만 데리고 낡디낡은 집으로 들어간다는 건 사람들의 시선으로 봤을 때 충분히 불쌍한 일이 맞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그녀도 불만이 있어도 맞춰주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뭐? 바쁠 만큼 일이 많은 게 아니라고? 케이트는 이를 갈며 대걸레로 조리대 밑의 먼지를 박박 닦아대기 시작했다. 최소 십 년은 청소하지 않은 것처럼 먼지와 때가 바닥과 한몸이 되어 있었다. 빨래만 해도 세탁소에 맡긴다 해도 그 밖의 옷 관리는 그녀가 해야 한다. 한번 입고 세탁소에 맡겼다간 돈이 문제가 아니라 옷이 상해버린다. 결국 이안이 입고 벗은 셔츠는 주름이 가지 않도록 정리하고 얼룩이 진 곳은 그때그때 바로 부분 세탁을 해야 한다. 그뿐이랴. 뮈엘라 수도 곳곳을 누빈 그의 부츠는 진흙이 얼룩이 생기지 않도록 털어내고, 솔질해준 뒤 광까지 내줘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매일 저녁, 남자 사용인이 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아무리 가난한 귀족이라 해도 아니, 귀족이 아닌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마저도 최소한 세 명의 사용인을 고용한다. 그런데 저 남자는! 케이트는 그가 깨끗하고 구겨지지 않은 셔츠와 부츠를 신을 수 있는 게 누구 덕분인지 생각해 보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대걸레로 힘차게 바닥을 문질렀다. 그녀 혼자 세 명분의 일을 하고 있다. 바닥을 얼마나 힘차게 문질러댔는지 며칠 전 타운하우스의 사용인들이 달라붙어도 닦이지 않던 때가 지워졌다. 케이트는 개운한 기분으로 깨끗해진 바닥을 내려다봤다. 하, 노동의 보람이군. 이안은 식당과 부엌을 연결하는 통로에 서서 바닥을 개운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케이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이상한 남자라고 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케이트가 이상한 여자다. 그를 무서워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말끝마다 바락바락 대드는 것도 이상하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큐바인 하우스까지 따라왔다. 정확히 말하면 따라온 게 아니라 끌려왔다고 해야겠지만 이안이라면 그만두거나 로엔 백작부인에게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는 벽에 기댄 몸을 똑바로 세웠다. 곁에 데리고 온건 호기심 반, 의심 반이었다. 그녀는 마녀가 확실하다. 부인하고 있지만, 그동안 그녀의 능력을 보면 누구라고 마녀라고 생각할 것이다. 큐바인 하우스로 데려오는 건 어느 사용인이든지 상관없지만 그가 없는 타운 하우스에서 케이트의 마녀의 능력이 발현된다면 어머니께 폐를 끼치게 된다. 어쨌거나 그가 데려온 여자가 아닌가.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 빨간 머리 작은 마녀가 그에게 무슨 저주를 건 게 아닌가 하는 호기심이 있었다. 때때로 그는 길을 걷다가 빨간 머리를 보면 이 작은 마녀가 떠올랐다. 저주라. 이안은 몸을 돌려 다시 식당으로 돌아왔다. 저주라고 하기엔 너무 보잘것없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접시에 담긴 쿠키에 머물렀다. 어제 티 타임에 내놓았던 쿠키다. 빵은 근처 식당에서 사온 것이지만 이 쿠키만은 남은 버터가 상하기 전에 케이트가 만들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이안은 쿠키를 입에 집어넣으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쿠키를 사올 시간이 있다면 어째서 다른 건 사오지 않은 거지? 이게 반항이라는 건가. 그는 상당히 위험한 추론을 하며 쿠키를 하나 더 입에 집어넣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때때로 사용인들이 불편한 자신의 심경을 표현하기 위해 쓸모없는 짓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침구를 제대로 세탁하지 않는다거나, 셔츠를 다리지 않는 다거나. 그게 반항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깨끗한 침구나 셔츠에 관심 없는 이안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이 쓸모없는 달기만 하고 배도 부르지 않는 작은 음식도 마찬가지다. 반항을 하는 것 = 쓸모없는 짓을 하는 것. 즉, 이안의 머릿속에 케이트가 쿠키와 같은 디저트를 만드는 건 반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악!” 갑자기 식당 밖에서 케이트의 비명과 함께 우지끈하고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을 메우던 생각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이안은 재빨리 식당 밖으로 달려나갔다. ============================ 작품 후기 ============================ 와, 깜짝 놀랐어요. 여러분, 이제부터 댓글은 이십개만 달도록 합시다. ...는 농담이고요. 오늘 정말 우울한 일이 있었어요... 야근해야 할 일이 있어서 얼른 집에 가서 밥먹으려고 저녁 안먹고 8시 반에 집에 왔는데 밥이 없어... 밥이 없어... 밥이 없어어어어어 근데 돌아와서 댓글을 보니 안먹어도 배가 부르네요. 컵라면 하나 먹었지만. 김치도 곁들여 먹었지만 김치에 굴이랑 배가 들어있어서 두배로 맛있었지만. 오늘 참 행복하네요. 그게 꼭 라면을 먹어서 배가 부른 덕에 행복한건 아니예요. ...넹. 00077 1. 큐바인 하우스 =========================================================================                            저택의 주인들이 사용인들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 보통 침구가 깨끗하지 않거나 셔츠가 다려져 있지 않을 때를 말한다. 혹은 계단이 더럽거나. 케이트는 걸레와 물통을 들고 계단 아래에 섰다. 사용하지 않는 계단이라 해도 주인이나 손님이 온다면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게 바로 이 계단이다. 그래서 사용인들이 가장 신경 써서 청소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녀는 후웁 하고 심호흡을 한 뒤 물통과 걸레를 들고 계단 위로 올라섰다. 삐걱대는 소리가 약간 불안하게 들렸지만 괜찮다. 며칠 전에 이 층에 쥐덫을 놓는다고 올라갔었다. 그러니 케이트의 무게 정도는 지탱할 수 있다. 그녀는 가장 아랫단부터 꼼꼼하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물걸레질은 자주 하지 않는 게 좋지만 이렇게 더러워서야 한 번쯤은 물로 닦은 다음 쫙 말려서 다시 왁스질을 하는 게 좋다. 그렇게 그녀가 계단 중간쯤 갔을 때였다. 낡아서 삐걱대는 계단에 케이트의 무게와 합쳐져 물이 가득 든 물통의 무게까지 가해졌다. 빠지직하고 작게 금이 간 계단은 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순식간에 우지끈하고 무너져 내렸다. “아악!” 철퍽 하고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케이트의 발은 땅에 닿지 않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팔에 힘을 주고 계단에 매달려 있었다. 계단 가운데가 무너지면서 구멍이 났는데 그 안에 쏙 빠져버렸던 것이다. 계단 한 칸 정도의 넓이는 그리 넓지 않아서 케이트가 일 층으로 곤두박질치는 건 피할 수 있었지만, 구멍에 하반신이 쏙 빠져버렸다. “아, 아파….” 허벅지 양쪽이 계단에 꽉 끼어서 눈물이 날 만큼 아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엉덩이에 걸려서 더 이상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팔에 힘을 빼면 하중이 쏠리면서 걸리는 엉덩이 부분이 엄청나게 아팠다. 아, 맙소사. 그녀는 부른 적도 별로 없는 신을 간절히 부르기 시작했다. 뮈엘라는 신전의 힘이 그리 크지 않다. 그러니 그녀 역시 살면서 신전에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신의 가호가 절실히 필요했다. 아니면 도와줄 사람이라 던지. 화가 났었다는 건 접어두고 일단 이안을 부르려 했을 때였다. 어느새 그가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중간에 낀 케이트와 이안의 키가 얼추 비슷해서 얼굴이 정면에서 보였다. “그,” 케이트는 또 이안이 뭐라고 빈정거릴까 봐 입을 열었다. 넘어지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남잔데 계단 중간에 끼어 있는 건 더더욱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가 무섭게 이안이 계단을 걷어찼다. 우지끈하고 계단 몇 단이 순식간에 부서졌다. “꺅!” 아랫단이 무너지면서 계단 전체가 흔들렸다. 부서진 부분이 뾰족하게 케이트의 허벅지를 찔러대고 있었다. 아프지만 견딜 만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픈 건 아니어서 공포가 더 크게 다가왔다. 그녀의 몸이 덜컹하고 흔들렸을 때 이안이 재빨리 그녀의 어깨 밑으로 손을 넣고 안았다. “놔.” 뭐, 뭐를? 눈을 뜬 케이트는 아직도 자신이 계단 사이에 끼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나 세게 지탱하고 있었던지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안은 관절이 하얗게 될 정도로 난간을 붙잡은 케이트의 손을 내려다보며 다시 말했다. “손을 놓으라고.” 그래도 되나? 케이트는 머뭇거리며 펴지지 않는 손을 억지로 계단 난간에서 떼어냈다. 그 순간 다시 몸이 흔들렸다. 허벅지에 압박이 가해지면서 그녀가 작게 신음을 질렀다. 이안은 케이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주먹으로 계단을 때렸다. 낡은 나무는 주먹질에도 쉽게 부서졌다. 빠직하고 부서진 계단에 케이트의 몸이 다시 덜컹 흔들렸다. “헉!”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이안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안은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을 때 케이트는 겁이 덜컥 나서 눈을 꼭 감았다. 찌지직하고 뭔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계단에서 빠져나왔다.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용했고 뭐가 무너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케이트는 이 집이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눈을 뜨는 데 용기가 필요했다. 공포에 질린 숨소리가 잦아드는 동안 이안은 그대로 그녀를 끌어안고 서 있었다. “어, 어…?”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았다. 케이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내려 너덜너덜한 계단을 쳐다본 뒤 고개를 올렸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녀를 쳐다보고 있던 호박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 안 무너졌네요?” 멍청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솔직한 심정인 만큼 쉽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케이트의 얼굴이 붉어지려는 찰나 이안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가 널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서 목숨을 버릴 필요는 없어.” 뭐라는 거야, 이 남자? 케이트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아직도 그녀가 그의 팔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피한 나머지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케이트는 씩씩대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아니거든요!” “하나밖에 없는 하녀가 그 정도로 멍청한 건 아니길 빌지.” 이 남자가 점점! “내려줘!” 그녀가 그의 팔 안에 안긴 채 발버둥을 치거나 말거나 이안은 성큼성큼 걸어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내려놓으라고, 이 자식아!! 이안은 버둥대는 그녀를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아니, 내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발버둥 친 탓에 케이트의 몸이 뒤로 벌렁 넘어졌다. 머리카락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케이트는 씩씩대며 자세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이안이 먼저 그녀의 발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뭐, 뭐하는 거야!” 찢어진 스커트와 그 안의 스타킹은 버려야 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하지만 이안의 눈에 그런 건 들어오지 않았다. 여기저기 긁혀서 피가 몽글몽글 솟아나고 있었다. 아침에 넘어지면서 생긴 상처까지 합세하자 케이트의 다리는 보기 불쌍할 정도였다. “의사를 불러오지.” 케이트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이안이 몸을 휙 돌려 나가버렸다. 어? 뭐? 그녀가 몸을 일으켰을 때 현관문이 탁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 “뭐, 괜찮을 겁니다.” 나이 지긋한 의사는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이트는 고작 긁힌 것 때문에 의사까지 불러왔다는 사실이 창피해서 얼굴을 붉히고 앉아있었다. “하루, 이틀 정도는 물 닿지 않도록 하고, 약 바르게. 열이 나거나 하면 다시 연락하고.” 그는 케이트를 향해 말하고 이안에게 눈인사를 한 뒤 큐바인 하우스를 나섰다. 이 폐가에 누군가 들어와 산다고 하더니 웬 젊은 남자와 하녀 둘이었다. 척 보기에도 귀족티가 나는 남자와 예쁘장한 하녀. 사랑의 도피라도 한 건가. 그는 지레짐작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판단하며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의사를 부를 필요까진 없었어요.” 두 사람만 남자 케이트는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세상 어느 주인이 하녀가 좀 긁혔다고 의사를 부른단 말인가. 이안은 문틀에 기대고 서서 케이트의 모습을 묵묵히 쳐다보고 있었다. 스타킹을 벗은 탓에 하얀 다리에 생채기가 도드라져 보였다. “다쳤잖아.” “당신이 이렇게 다쳤어도 의사를 불렀을 거예요?” 이안의 입이 닫혔다. 그는 잠시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곧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와 케이트는 다르다. 그는 어디 한군데 정도는 부러져도 괜찮다. 하지만 케이트는 여자지 않은가. 바람만 좀 차가워도 열이 나서 드러눕는 로엔 백작부인을 보고 자란 이안에게 여자란 때때로 마치 유리 같은 존재였다. 그게 그와 관계없는 사람이라면 깨지거나 말거나 상관없지만 케이트는 아니었다. “…심부름할 하인을 하나 구하지.” 어, 정말? 케이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이안은 거기 없었다. 아니, 뭐하자는 거야? 자기 할 말만 하고 휙 하니 가버리는 게 특기인가 보지? 그녀가 속으로 비아냥거리며 응접실 밖으로 나왔을 때 콰직, 쾅! 하고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예요?” 나무가 와르르 쏟아지며 먼지를 자욱하게 피워 올렸다. 케이트의 눈앞에서 너덜너덜하게 남아있던 계단이 무너져 있었다. 이안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더니 가장 위에 붙어있는 계단을 손으로 잡아 뜯어 버렸다. 그래, 너 키 크고, 힘세다. “이러면 쓸데없이 이 층에 올라갈 수 없겠지.” “쓸데 없…?” 누구보고 쓸데없대? 그녀가 입을 딱 벌리고 시커멓게 구멍만 남은 이 층을 바라보는 사이 이안은 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낡은 집인 만큼 계단이 붙어있던 자리만 하얗게 남아 보기 흉했다. 이거야말로 진짜 폐가잖아. 케이트는 뭘 어째야 할지 몰라 계단이 붙어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저거 닦일까? 아니, 닦이고 말고가 아닐 거 같은데. 하아.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불금이라 친구랑 노느라. 아무래도 다음주 중에 여행을 갈것 같아서 열심히 비축분을 쓰고 있습니다. 여행중에는 시간이 좀 규칙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즐거운 금요일입니다. 아니, 삼십분 있으면 토요일이군요. 보고싶은 영화도 많이 개봉했던데 다들 행복한 주말 보내시고 우리 모두 더 행복한 월요일에 만나요. 후후후후후 덧. 먹이 주는 길고양이가 다른 길고양이에게 관심을 줬더니 제 옷 소매를 물어 뜯어 놨는데 길고양이도 질투를 하나요? 완전 깜짝 놀랐어요. 게다가 아무래도 고양이 냄새가 옷에 묻어서 그런가 고양이가 몸을 비빈 날은 다른 고양이들도 경계를 안하는데 안 비빈 날은 도망치거나 경계하더군요. 설마 몸을 비빈게 “이 닌겐은 내 사료 셔틀이다옹~” 을 표시한걸까요... 덧. 댓글은 전부 읽어봅니다. 대댓글은 해달화에 달고 있으니 관심있으시다면 해당화를 확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후기가 길어지는게 싫어서 가능한 짧게 쓰는 편인데 이안이 하녀를 인식하는 부분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할것 같아서 덧붙입니다. 타운 하우스는 하녀는 모두 7명으로 하녀장, 백작부인의 몸종, 주방장, 주방하녀를 포함한 숫자입니다. 그 중 이안의 눈에 자주 보일 만한 사용인은 하녀장과 백작부인의 몸종, 케이트와 같은 일을 하는 하녀 세 명입니다. 하녀장과 몸종은 일반 하녀가 아니므로 제외됩니다. 케이트와 같은 일을 하는 하녀 세명은 아비게일, 메리, 애니로 본문에 나온 금발머리와 갈색머리는 아비게일과 메리입니다. 애니의 경우 케이트를 제외하면 하녀 중 가장 늦게 들어왔고 손끝이 여물지 못해 메리와 아비게일의 일을 돕고 허드렛 일을 하는 수준입니다. 당연히 이안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다는 건 이안이 안본다는 게 아니라 이안의 시야에 얼쩡거리지 않는 다는 이야기 입니다. 귀족의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은 사용인만 사용하는 계단이 따로 있을 정도로 필요하지 않는 한 주인들의 시야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청소 하녀가 아니라면 응접실이나 식당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설령 그 공간에 아무도 없더라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귀족의 시중은 동성 사용인이 드는게 일반적 입니다. 여색을 탐하는 호색한 귀족이라면 모를까 제대로 배우고 도덕심 있는 귀족이라면 일하는 하녀를 굳이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이안은 도덕심이 있는 귀족은 아니지만 제대로 배웠고 하녀에게 관심 없는 귀족이므로 일하는 하녀는 두 명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 모든 귀족 남자가 이러진 않습니다. 오히려 이안이 특이하다는데에 가깝죠. 어느 남자가 자기 집에 또래 젊은 여자가 들어와 사는데 관심을 안갖겠습니까. 그 만큼 이안이 하녀에 관심이 없다는 표현 중 하나입니다. 덧의 덧. 와, 순위권 댓글이 달렸네요. 스샷찍어서 간직할게요. 그리고 매 화마다 순위권 댓글 다신 분들 순위 떨어지는지 안떨어지는지 지켜볼겁니다. 후후후후후 00078 2. 사라진 것 =========================================================================                            “이야기는 들었어.” 이안은 한 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누구에게 들었는지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그의 어머니와 형님이겠지. 그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두 사람이 이 남자에게 연락할 정도의 사안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맞은 편에 앉은 남자는 씩 웃었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지만 참 여전하다. 그는 이안 만큼이나 변하지 않는 남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내게 임시 수사관장 직이 들어오기도 했고 말야.” 그는 조용히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불법 도박장 사건 이후로 은퇴한 수사관장 실은 새 단장한 상태였다. 전보다 훨씬 깔끔하고 고급스럽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고급스럽고 화려한 것은 수사관실 안에 앉아있는 이 남자였다. 잘생긴 외모. 그리고 여유롭게 늘 입가에 머무는 미소. 그것만으로도 남자는 타인의 호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그게 아니다. 에드워드 에반스. 현 왕위 계승 1위인 남자였다. “자네 어머니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더군. 덕분에 내 어머니도 걱정하시더라고. 어머니들이란 늘 그렇잖아.” 그는 동의를 구하려는 듯 다시 한 번 씩 웃어 보였지만 이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어렸을 땐 그의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었는지 궁금했던 때도 있었다. 어쩌면 인간이 아닌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은 이안의 출생을 듣고 더욱 도드라졌다. “자매애란 참 대단하지. 형제애와는 또 다른 뭔가가 있는 것 같아.” 에드워드는 느긋하게 말했다. 뭘 말하려는지 대충 알 것 같아 이안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에드워드의 어머니와 이안의 어머니 실라에 대한 이야기다. 두 사람은 상당히 사이좋은 자매다. 병약한 동생을 걱정한 에드워드의 어머니가 좋은 약초다 음식이다 해서 보내주고 있다. 지금도 종종 편지를 교환하거나 실라의 상태가 좋을 때면 만나서 다과를 나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모든 걸 해주라고 얼마나 날 닦달하시던지.” 웃음 섞인 에드워드의 말에도 이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결국, 에드워드는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두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더니 말했다. “그래, 그래.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그는 이야기를 빙빙 돌려 하는 버릇은 없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그런 버릇이 있는 사람들이 이해될 것 같았다. 에드워드는 결국 자세를 고쳐 앉고 진지하게 말했다. “로엔가의 저택을 나간 건 잘한 일이다. 호건 가는 네가 그만둔 것으로 더 이상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어. 그쪽이나 이쪽이나 어차피 더 긁어봐야 문제가 될 게 뻔하니 이 정도 하는 게 적당하겠지.” 추가로 전 수사관장의 은퇴도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었지만 에드워드는 그 부분은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가 너를 버린 게 되겠지. 뭐, 그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말야. 게다가 귀족들의 반발이 너무 심해. 아무리 호건가라고 해도 고작 상인의 압력에 못 이겨 우리가 널 잘라냈다는 건 자존심이 상한다는 거야.” “그렇습니까.” 그래. 그렇고말고. 에드워드는 결국 이안의 반응을 이끌어 대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의 나이는 그다지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이안 앞에 서면 자신이 상당히 늙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귀족 집단에서 그는 상당한 눈엣가시였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평민들 사이에선 환영받는 존재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출신을 모르는 여자 배에서 나온 사생아. 능력을 인정받은 것도 아니고 마음 약한 정실 덕분에 인정받아 귀족으로 자란 천한 서자새끼. 그 정도가 이안에 대한 귀족과 평민 둘 다에 공통된 반응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호건가 때문에 그가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사람이란 참 이상하다고 이안은 생각했다. “뭐, 그래서 일단 임시변통이긴 하지만 생각해 낸 게, 너를 수사관으로 복직시킨다는 거다.” 복직? 이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게 가능할까? 호건가는 이안이 그만두는 조건으로 더 이상의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를 다시 복직시킨다면 조건이 사라지는 것 아닌가. 그런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에드워드가 손을 내밀며 설명했다. “겉으로 너는 여전히 수사관이 아니지. 하지만 귀족들은 네가 여전히 수사관과 연결되어 있기를 바라. 그렇다고 널 드러내고 복직시킬 수는 없고, 네가 우리 쪽 사람이라는 이어야 한다는 거지. 결국 새로운 수사관 직을 만들어 내기로 했다.” 복잡한 짓을 하는군. 이안의 이맛살이 찌푸려졌지만 금세 사라졌다. “적당히 비밀 수사관이라고 하자. 너는 내 직속 수사관이고, 네가 어떤 사건을 조사하는지는 내게만 알려주면 되는 거다. 이해되지?” 이해하고 말고 할 정도로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안이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이야기 기반에 깔린 사람들의 감정과 반응이었다. “그런 형태를 통한다 해도 결국 밖에서 보기에 제가 호건가의 압력에 그만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겁니까?” 수사관장 실에 들어오고 이안의 입에서 처음으로 질문이 흘러나왔다. 에드워드는 씩 웃었다. “정신승리라는 거지.” 정신승리라는 게 무슨 의민지 몰라 이안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에드워드는 이야기를 전환했다. “지금까지와 다른 사건을 수사하게 될 거다. 여기 보고서를 보니 알라나데일에서 사건을 수사한 게 자네라고 나와 있더군.” 이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마법 스크롤과 아티팩트를 발견했다지.” 알라나데일. 고작해야 몇 달 전의 사건이다. 그런데 이안은 꽤 먼 옛날 일처럼 생각되었다. 거기서 만난 빨강 머리 여자. 케이트와 만난 게 고작 몇 달밖에 되지 않았던가. “데일가의 재정상태를 조사해 보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금도 제대로 내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더군. 그런 가난에서 단시간 안에 벗어났다는 게 놀랍지 않아?” 에드워드의 질문에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이해했다. 데일가의 단시간에 이뤄낸 부와 마법 물품들. 며칠마다 한 번씩 사람들 눈을 피해 실어 나르던 것들. 데일 가가 마법 물품을 밀수해서 뮈엘라 내부에 팔아치운 것이 몇 년 전부터 이어진 일이라는 말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안과 제이드도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그 이상의 일은 그들의 일이 아니라 한쪽으로 치워두고 있었을 뿐이다. 마법에 관련된 사건은 일개 수사관이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위에서 회의를 거쳐 처리한다. 군대가 나서는 경우도 있고 아주 조용히 은밀하게 처리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든지 이안과 제이드가 왈가왈부할 사항이 아니다. 이안의 성격상 신경 쓰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첫 번째 할 일은 데일가로부터 마법 물품을 구매한 사람들을 찾아내서 마법 물품을 파괴하는 것이네.” “파괴합니까?” 이안의 질문에 에드워드는 다시 한 번 씩 웃었다. 그런 반응이 당연하다. 수사관은 찾아낸 증거품을 파괴할 권한이 없다. 그들은 목록을 만들고 재판관에게 넘길 뿐이다. 지금까지 수사관들이 발견한 마법이 관련된 사건은 범인을 잡고 나면 더이상의 개입은 허용되지 않았다. 때로는 범인을 잡기 전에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네게 독자적인 권한을 줄 거야. 네 판단하에 처리해도 좋아. 내게는 사후 보고를 하는 것도 허가하지.” 너무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안은 잠시 말을 잃었다. 고작 수사관 하나가 사건을 단독으로 수사하고 판단하고 처리한다는 건 너무 큰 권한이었다. 제1 수사관도 이런 권한은 가지고 있지 못한다. “비용처리는 어떻게 합니까.” 이어진 이안의 질문은 현실적이었다. 에드워드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별도로 처리하지.” 그 기반에 에드워드의 개인적인 자금뿐 아니라 이안을 내세워 호건가에 정신 승리하려는 귀족들의 자금도 깔려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안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가 알겠다는 태도를 보이자 에드워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가져가. 이게 필요할 거야.” 에반스 가문의 문양이 찍힌 검이었다. 여성용 검처럼 작고 세밀한 조각에 이안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 모습에 에드워드는 멋쩍게 웃었다. “나도 좀 더 멋진 걸 주고 싶지만, 사라져도 눈치 못 챌만한 게 이거밖에 없었다구.” 진짜 여성용 검이었던 모양이다. 말이 여성용 검이지 결국 귀부인의 자결용 검이다. 이안은 물끄러미 검을 바라보다 품 안에 갈무리해 넣었다. 모양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 검에 찍힌 문장이다. 이안은 가도 되냐는 의미로 에드워드를 쳐다봤고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수사관장 실에서 나오자 수사관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전과 달리 그 눈빛에 담긴 의도는 저마다 달랐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이안때문에 수사관장도 은퇴하게 됐다고 미워하고 있었고, 이안이 먼저 나서서 그만두겠다고 말한 덕분에 피해가 수사관장과 이안 둘만으로 끝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다시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제이드가 걱정과 호기심을 한꺼번에 드러내며 다가왔다. 이안은 그의 눈에서 약간의 희망을 읽었다. 혹시 복직된 거야? 자신의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호기심을 드러내는 걸까. 이안은 여전히 그를,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별일 아니다.” 에드워드는 비밀수사관이라고 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는 안 되는 일이겠지. 그의 말에 제이드가 욱해서 말했다. “별일도 아닌데 사람을 왜 오라 가라 한 건데?” 그 사람은 제이드가 아니라 이안이다. 왜 자신의 일처럼 구는 걸까. 이안은 물끄러미 제이드를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냥 친척으로서 이야기 할 게 있었을 뿐이다.” “친척이라고? 에드워드 에반스 공작이?” 이야기를 들은 리코가 다가왔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묻더니 새삼스럽다는 듯 말했다. “너 귀족이었지.” 아무리 귀족이라 해도 제 1 왕위 계승자와 단둘이 만날 정도로 친한 친척은 흔치 않지만 이안은 부인하지 않았다. “뭐야, 에반스 공작과 친척이라면 빽으로 복직시켜 달라 그래.” 제이드의 말에 리코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뭐? 왜?” “야, 임마. 빽으로 들어 올 수 있으면 여기 다 빽으로 들어온 귀족으로 가득 차있지!” “에반스공작이 그냥 빽이야? 현 왕이 죽…,” 다행히 재빨리 리코가 입을 틀어막은 덕분에 다음 말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에드워드 에반스는 선왕의 동생의 아들이다. 즉, 현 왕의 사촌이라는 말이 된다. 하지만 현 왕은 고작 십칠 세. 병약해서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 에드워드가 제1 왕위계승자인 것이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이안은 두 사람의 실랑이를 힐끔 내려다보고 몸을 돌렸다. 그는 이제 대외적으로 수사관이 아니니 수사관 실에 올 일은 없을 것이다. 수사관실을 나가는 그의 뒤를 카이사가 따라 나갔다. 그는 한참을 이안을 따라가다가 궁전 정문에 다다라서야 이안을 불러 세웠다. “이안 로엔!” 그는 걸음을 멈춘 이안에게 다가가 한참을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뭐가?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 태도에 카이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안만 희생해서는 안 되었다. 그도 그만두었어야 했다. 사임한 전 수사관장의 간곡한 설득과 주변 수사관들의 만류로 그만두지는 않았지만 이안의 희생으로 자신이 자리를 부지하고 있다는 게 자존심 상하면서 죄책감이 들었다. 차라리 이안이 고마워하라는 태도를 보였다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그는 카이사가 왜 사과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이안은 정말로 몰라서였지만 카이사는 그가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그런 태도를 보였다고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어.” 카이사는 남의 희생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강직하고 융통성 없는 남자였다. 그는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안은 그런 그의 태도에 고개를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어젯밤에 늦게 잤더니 졸려죽겠네요. 오늘은 얼른 올리고 자야겠습니다. 제 평균 수면시간이 하루 8시간인데 2시까지 글쓰다 자고 7시에 일어나서 출근하거든요. 그럼 하루 5시간이니까 부족한 세시간은 주말에 채워야 합니다. 결국 토, 일 내내 잔다는 즐거운 사실! 비바! 그랬더니 정작 일요일에 잠이 안와서 월요일이 두배로 죽겠어요. 아놔... 00079 2. 사라진 것 =========================================================================                            “먹여주고 재워주시기만 하면 돼요.” 제인의 말에 케이트는 입을 딱 벌렸다. 이 남자가 정말. 나가서 한참 후에나 돌아온 이안은 그녀가 아는 소년을 데리고 돌아왔다. 얼굴 한쪽에 흉터가 있는 소년. 갈색 머리카락과 한쪽 눈만을 가진 제인은 어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원래 고아라고 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눈치가 빠른 덕에 얼굴의 흉터만으로 끝날 수 있었다고 덤덤하게 말하는 아이 앞에서 케이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괜찮아?” “네.” 제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약간 절박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이제 열네 살이에요. 고아원은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올해까지만 있다가 나가야 해요.” 올해가 지나면 제인이 있을 곳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가 덧붙였다. “그리고 다른 곳은 받아주지 않고요.” 다른 곳이라는 데가 고아원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케이트는 금세 눈치 챘다. 열네 살이라면 다른 저택의 심부름꾼이나 하인수습생으로 들어가고도 남을 나이다. 제인은 영리해 보이지만 그보다 먼저 보이는 건 그의 얼굴에 난 흉터였다. 결국 제인이 다른 곳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얼굴의 흉터 때문에 저택에서 받아주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안타까우면서도 저택에서 일해 본 케이트는 제인의 상태가 이해가 되었다. 남자 하인이란 저녁 식사 시중을 들거나 손님맞이를 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키와 체격, 얼굴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남자아이들은 용병이나 기사를 꿈꾸잖아.” 그녀의 말에 소년은 목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검은 싫어요.” 정확히 말하면 검을 든 남자가 싫다. 한동안 어른들 전부 무서웠다. 특히 옷을 차려입은 어른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지금도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은 차려입은 사람이나 무기를 든 남자를 보면 울음을 터트리거나 공황상태에 빠진다. 제인은 불법 도박장 사건에서 살아남은 피해자 중 가장 상태가 양호한 피해자라 할 수 있었다. “식사는 나와 할 거야. 잠잘 곳은 보다시피 방이 없어서 부엌에서 자야 할 거고. 괜찮겠어?” 케이트의 말에 제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고층거리에서, 고아원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현관문을 두드리기를 여러 차례. 간신히 얻어냈다. 그것도 익히 아는 사람의 집에서. 인맥 덕이었지만 제인은 개의치 않았다. “부엌이라 춥진 않을 거야. 그리고 주급은,” “괜찮아요.” 케이트의 말에 제인은 재빨리 끼어들며 말했다. “난 돈을 보낼 가족이 없으니까요.” 그 말에 케이트는 빤히 소년을 쳐다봤다. 가르칠 것이 많구나.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을 다른 하인들에게서 몇 번 본 적 있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태도. 그건 전혀 좋지 않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었다. 제인은 열네 살 치고는 키도 체격도 큰 편이었다. 그냥 두기엔 너무 아깝다. “첫째로 '나'가 아니라 '저'야.” “네?” “다시 말해. 난 돈을 보낼 가족이 없으니까요. 가 아니라 저는 돈을 보낼 가족이 없으니까요.” “어, 음….” 제인에게 그런 걸 지적하고 가르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년이 머뭇거리며 케이트가 시키는 대로 말하자 그녀는 손가락을 펴 보였다. “둘째로 나는 널 엄청나게 부려 먹을 거야. 이 집에 사용인은 너와 나뿐이니 네가 할 일은 심부름뿐만이 아니야. 때로는 도련 아니, 주인님의 시중도 네가 들어야 해. 알겠니?” “네.” “많은 일을 하는데 고작 먹여주고 재워주는 걸로 됐다는 말로 네 가치를 떨어트리지 마. 이 집의 주인은 너를 먹여주고 재워줄 뿐 아니라 네 노동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제공할 의무가 있어.” 가치, 노동, 합당한 대가, 의무. 제인이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단어였지만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셋째로 나는 널 교육 할 거야. 네가 이 집을 나가도 충분히 한명의 일꾼으로 먹고살 수 있도록. 그러니 너는 내게 존경을 갖추고 말을 따라야 해. 알겠니?” 말을 따르라는 말은 제인에게 약간 부당하게 느껴졌다. 소년은 지금까지 어른의 말을 따라서 좋았던 기억이 없다. 제인의 표정에서 그것이 읽히자 케이트는 재빨리 덧붙였다. “할 말이 있거나 다른 의견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 이해가 안 되면 몇 번이든지 물어봐. 모르고 하다 잘못 배우는 것보다 느려도 제대로 배우는 게 훨씬 좋은 거니까.”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좋은 직장을 구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건 케이트가 제안한 급료를 들었을 때 입이 딱 벌어짐으로 확고해졌다. “주인이 제공하는 건 일할 때 입는 옷뿐이야. 그러니 네 사복을 사거나, 놀러 나가서 쓰는 등의 사적인 비용으로 써야 해. 하지만 다 쓰지 말고 절반은 모아두렴.” 다시 한 번 돈을 보낼 가족이 없다는 제인의 말에 케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네 주인이 너를 평생 고용할 거라고 믿지 마. 네 미래는 네가 책임지는 거야. 당장 거리에 나앉게 된다면 다음 직장을 구하기까지 버틸 저금이 필요해.” 그런 걸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가지고 있는 돈은 빼앗기기 전에 재빨리 써야 한다. 음식도 마찬가지. 옷은 최대한 낡아 보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남들보다 좋아 보이면 힘세고 나이 많은 자에게 빼앗기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온 제인에게 큐바인 하우스에서 케이트가 가르쳐 주는 것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제인에게 임시로 이안이 입지 않은 옷을 고쳐 입힌 케이트는 일거리를 일러주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인이 해야 할 일들. 제인이 케이트의 지시에 따라 이안의 부츠를 닦기 시작했을 때 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주방으로 몸을 내밀었다가 사이좋은 제인과 케이트의 모습을 발견하고 멈췄다. 케이트는 어딘지 모르게 밝아 보였다. 이안과 있을 때보다 훨씬. 자신에 차 있었고 눈동자에 생기가 도는 거였지만 이안은 그 차이는 알지 못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잠시 그대로 멈춰 케이트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다 문득 그는 그녀의 저런 모습을 그전에도 봤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이안의 미간에 잠시 주름이 생기다 사라졌다. 몇 달 전 알라나데일에서 하인으로 정체를 속인 이안에게 그녀는 저런 태도를 취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처지가 다르다. 그녀는 여전히 하녀고, 이안은 도련님에서 주인님으로 더욱 상승했다. 지금은 비록 직장을 잃고 집안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귀족으로 치면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라 해도 케이트에게는 여전히 처지가 다른 주인님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같은 반응인 이안이 그걸 알 리는 없다. “안녕하세요, 스미스양.” 이안의 집에 방문한 제이드는 제일 먼저 나타난 케이트의 모습에 잠시 놀라는가 싶더니 인사를 건넸다. 그 표정에서 뭔가를 읽은 케이트는 쓰게 웃었다. “잊고 계셨군요.” “아, 아닙니다.” 케이트의 목걸이. 그걸로 그녀의 가족을 찾아 주겠노라 공언해 놓고, 요 며칠 이안의 일에 놀라 찾기를 게을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사관인 그가 케이트의 가족 찾기에 온종일 힘을 쏟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래도 손을 빌려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주제를 바꿔 물었다. “이안은 안에 있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안은 겉에서 생각한 것 이상으로 엉망이었다. 평민이라고는 하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자란 제이드는 제일 먼저 보이는 무너진 계단과 그 위에 2층으로 통하는 검은 구멍에 놀라 주춤했다. “…좀, 낡았네요.” 이걸 좀이라고 표현하다니, 성격 한 번 좋다. 케이트는 대꾸하지 않고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뭐라 대꾸해야 할지도 모르겠거니와 이건 좀의 정도가 아니다. 심지어 2층에 난 검은 구멍에서 쥐가 지나가는 게 보이자 케이트는 죽고 싶어졌다. 창피해. 이 집은 너무 낡았다. 이안이 이 정도의 집에 살아야 할 정도로 가난한 것도 아니다. 로엔 백작가가 몰락한 가문도 아니고 설령 가문의 힘을 빌리지 않는 다 해도 수사관으로서 이안이 벌어둔 돈도 꽤 있다. 하지만 이안은 굳이 고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의식주라는 건 최소한으로만 채워진다면 그 밖의 것들은 아무 상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셨다고 전할게요.” 케이트가 응접실 밖으로 나가자 곧이어 소년 하나가 들어왔다. 갈색 머리의 소년은 하인이라기엔 어려 보였는데 아슬아슬하게 차 주전자와 잔이 든 쟁반을 들고 걸어 들어오면서 여유 있는 척하는 게 보였다. “지낼 만해?” “…네.” 제인은 약간 머쓱해하면서 대답했다. 이안이 큐바인 하우스에서 일할 하인을 하나 구한다는 말에 제인을 권한 사람이 제이드였던 것이다. 그는 어설프게 차를 따르는 제인의 태도를 약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앞머리를 길러 한쪽으로 넘긴 스타일이 소년이 몸을 숙이자 흔들거렸다. 하인으로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제이드는 왜 케이트가 깔끔하게 시키지 않았는지를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문득 소년의 한쪽 얼굴에 난 흉터를 떠올렸다. 그걸 가리기 위해서구나. 그때 제인이 움찔하고 몸을 움츠렸다. 제이드는 고개를 들었다가 이안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이런. 그 사건 후 피해 아이들은 무기, 특히 검을 무서워했다. 어른에 대한 공포심은 당연했다. 잘 차려입은 사람들은 죽임당하던 아이들을 구경하던 잔인한 사람들이, 검을 지닌 남자들은 아이들을 죽이고 감시하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안은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히 아이들이 무서워할 만 한 남자였다. 이게 평생 가는 트라우마가 되지 말아야 할 텐데. 제이드는 응접실을 빠져나가는 소년의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뮈엘라에서 무기와 전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들이다. 전사를 무서워한다면 뮈엘라에서 살기란 꽤 어려울 것이다. “설마 이 집에 일하는 사람은 저 두 사람이 전부야?” 늘 그렇듯이 먼저 입을 연 건 제이드였다. 그는 제인이 이안에게 주춤주춤 다가가 차를 따르고 재빨리 도망치는 것을 지켜본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음.” 보면 모르냐는 듯한 태도에 제이드의 입이 닫혔다. 긍정적인 제이드도 할 말이 없을 때가 있다. “여자 한 명과 꼬마가 일하기엔 일이 너무 많을 텐데.” 그가 알았다면 제인을 하인으로 추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안은 심부름꾼으로 쓸만한 하인을 원했고, 제인이 떠올랐던 것이다. 제이드의 걱정에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일 층만 쓰고 있고 세탁이나 요리는 외부에 위탁하고 있다. 그러니 할 일은 별로 없어.”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 제이드는 뭐가 문제냐는 이안의 표정을 보고 잠시 말을 잃었다. “세탁이나 요리 말고도 할 일은 많잖아.” 이어진 제이드의 반론에 이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없다.” 알라나데일에서 사용인으로 몇 주간 잠입했던 경험에서 우러나온 당당함이었다. 사용인의 업무는 기본적으로 주인가족의 쾌적함과 우아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주인의 옷을 갈아입히고 관리하고, 보좌업무를 하는 종복은 필요 없다. 이안은 스스로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 이 집에서 연회나 파티를 열 생각이 없으니 손님의 시중을 들 남자 하인도 필요 없다. 음식은 식당에서 사올 테니 식료품을 옮기거나 물건을 나를 사람도 필요 없다. 굳이 무거운 걸 옮겨야 한다면 그가 스스로 나서면 된다. 여기서 음식은 사와도 먹고 난 설거지는 생각하지 못한다는 게 이안답다면 다웠다. 문제는 이것이 남들 눈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점이었다. 세상의 상식으로 귀족이 스스로 짐을 나르고 보좌를 두지 않는 건 가난한 걸 넘어서서 괴팍한 짓으로 인식한다. 남의 시선이나 세간의 이야기를 신경 쓰지 않는 이안이니 가능한 일이다. “없을 리가 없잖아.” 이안은 제이드의 지적을 못 들은 척하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가 사용인으로 일해 본 결과 사용인들의 업무 대부분은 꽤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복도나 계단 청소 같은 건 먼지가 쌓이면 하면 된다. 매일 깨끗한 시트와 셔츠를 사용할 필요도 없다. 그걸 모르는 케이트는 지금 이 순간 이안의 침대 시트를 정리하고 있겠지만. 제대로 된 하녀장이라면 듣는 순간 거품 물고 넘어갈 일들을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있었다. 사실 이안은 알라나데일에서 일하기 전까지 사용인들이 얼마나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리고 알게 된 지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구운 꿩고기에 샤프란을 올리던, 블루베리 소스를 올리던 상관 없었다. 샤프란을 올리기 위해서는 가을에 딴 샤프란을 잘 씻은 뒤 꽃 모양을 유지하도록 말려 보관하다가 구운 꿩고기 위에 올려 김을 쐐 줘야 하고, 블루베리 소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블루베리를 따서 깨끗하게 씻은 다음에 설탕과 일대일 비율로 뭉근하게 하루 종일 끓이며 저어줘야 한다. 하지만 그래서 뭐? 집안의 커텐과 쇼파의 커버는 일 년 삼백육십오일 같은 걸로 걸어놔도 크게 문제 될 일이 아니다. 그는 상관없었고 그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제외하면 사용인의 업무는 상당히 줄어든다. 결국 사용인의 업무란 주인가족이 우아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네 부츠의 흙은 누가 닦아 내는데?” 제이드의 질문에 이안은 뭘 그런 것까지 신경 쓰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새로 산다.” 케이트가 들으면 뭐? 그래도 돼? 라고 소리 지를 대답이었지만 제이드는 약간 찝찝한 기분으로 수긍했다. 이안이라면 그럴 수 있지. 상당한 부자가 아니라면 상상도 못 할 발상이다. 아니면 이안같은 녀석이거나. 소시민인 케이트라면 한 번 신은 부츠가 흙 좀 묻었다고 새로 산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다. “그러라고 돈도 줬다.” 돈? 뜬금없이 무슨 돈? 이안이 케이트에게 수표책을 통째로 줘버렸다는 것을 모르는 제이드는 결국 손을 저어 주제를 바꿨다. “그건 그렇고, 도박장 사건은 나와 리코, 슈미트가 맡고 있어.” 그래? 이안이 반응으로 보이자 제이드도 흥이 났다. 이건 아직 흥미가 있는 모양이군. 제이드는 씩 웃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세 명이라 다행이지, 안 그래? 슈미트 혼자였으면 엄청 고생했을 거야. 서류가 산이라고, 산.” 그 말과 함께 제이드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이안이 보기엔 하릴없이 허우적거리는 걸로 보였지만. ============================ 작품 후기 ============================ 현재 타지에 나와있어서 시간을 못맞출 거라 생각했는데 읭? 맞췄네요? 내일도 못맞출지 맞출지 모르겠는데, 최대한 맞추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참, "정신승리"는 소설 "아큐정전"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아큐정전은 중국소설로 아큐라는 좀 찌질한 남자가 여기저기 맞고 무시당하면서 "내가 봐준거야. 흥"한다는 당시의 중국인들의 정신적 승리를 꼬집기 위한 작품 이라고 인터넷에 나와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큐정전은 1921년 작품입니다. 사실 우리가 쓰는 요새 유행어들은 어디서 갑자기 나온게 아니예요. 대부분 예전에 쓰던걸 다시 사용하는 게 많지요. 00080 2. 사라진 것 =========================================================================                            “아, 그리고 그 사건 들었어?” 이야기가 무르익을 때쯤 제이드가 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무르익었다는 건 어디까지나 제이드만의 이야기다. 이안은 처음과 표정, 태도하나 변하지 않은 채 제이드의 맞은편에 앉아 케이트가 제인을 시켜 테이블 위에 놓은 차와 과자를 반복적으로 씹고 있었다. “시체를 발견했는데 이 시체 상태가 기묘했다는 군.” 어느 시체인들 안 기묘할까. 이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래서 뭐? 하지만 제이드는 그런 태도에도 불구하고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기울였다. “시체에 아무 흔적도 없었대.” 몸을 기울이고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하는 것이 흡사 시장 통의 소문을 떠벌리는 아낙네들 같다. 이안은 습관적으로 과자 접시에 손을 뻗었다가 과자가 다 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흠. 사실 과자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그는 간식을 챙겨먹는 타입이 아니다. 체격이 있고 검을 다루니 많이 먹는 편이긴 하지만 없다고 해서 아쉬울 건 없다.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제이드의 헛소문은 귓등으로 흘리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검시를 해봤더니 글쎄!” 제이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안은 너 아직도 거기 있었냐 라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고 제이드는 잠시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좀 들어봐!” “해.” “성의 있게 들으란 말야!” “성의 있게 듣고 있다.” 이안의 말에 제이드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거짓말! 그러면서 책은 왜 집는 건데?” 이안의 시선이 제이드가 오는 바람에 중단 되었던 페이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성의 있게 듣는 것과 시선은 관계없어.” 와, 하나뿐인 친구에게도 저딴 식이구나. 케이트는 문틈으로 이안에게 삿대질을 시전하는 제이드와 무시라는 철벽 방어를 친 이안을 지켜보며 혀를 내둘렀다. 큰소리가 난 탓에 제인이 겁을 먹었다. 그녀는 긴장한 표정의 소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괜찮아, 제인. 그냥 장난치는 거야.” 장난이라고? 전혀 장난으로 안 보인다. 제이드는 얌마! 날 봐! 날 보라고! 라고 소리치고 있었고 이안은 그 와중에도 책을 읽고 있었다. 소년의 시선이 제이드의 허리춤에 매달린 무기로 향했다. 저러다가 저 남자가 검을 뽑으면 어떻게 하지? 수사관은 검을 소지할 수 있다. 자연히 제이드는 검을 소지하고 있지만 집 안인 만큼 이안은 아니었다. “두 사람 치, 친, 친하거든.” 제인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꺼낸 말이 거짓말 같아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이드와 이안이 친한가? 모르겠다. 제이드는 이안을 친구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이안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미지수다. “그런데,” 긴장을 풀기 위해 제인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주인님은 과자를 좋아하시나 봐요.” “아닐걸?” “하지만, 저 과자. 다 먹었어요.” “제인, 먹었어요가 아니라 드셨어…응?” 케이트의 시선이 다시 이안에게로 향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안 곁에 있는 테이블 위로. 제인의 말대로 테이블 위의 과자는 깨끗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어머, 별 일이네. 케이트는 혼잣말을 하며 부엌으로 돌아갔다. 이안은 뭐든지 주는 대로 군소리 없이 먹는 남자긴 하다. 이틀 된 빵도, 좀 탄 스테이크도, 심지어 겨자를 너무 발라버린 샌드위치도 군소리 없이 싹 먹어치웠다. 하지만 디저트는 그다지 좋아한다는 느낌은 못 받았다. 그는 티 타임같은 걸 즐기는 타입도 아니었고 실제로 타운하우스에서도 쿠키나 케이크 같은걸 즐겨 먹는 걸 본 적이 없다. 뭘 줘도 잘 먹긴 하지만 특별히 좋아하는 건 없다는 게 이안에 대한 타운하우스 요리사의 평가였다. 식사가 부족했나. 케이트는 이안이 바로 전 식사에서 해치운 스테이크와 두 사람은 넉넉히 먹을 듯 한 으깬 감자, 데운 야채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우뚱 했다. 다음 식사부터는 좀 더 많이 준비해야 할 것 같다. 남자들은 참 많이 먹는 구나. …그럴 리 없지. 케이트는 함께 일했던 하인들의 식사량을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정도쯤 먹으면 웬만한 사람은 간식을 거부하기 마련이다. “어, 스미스양.” 제인이 도저히 응접실 안에는 못 들어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케이트는 과자를 몇 개 쥐어 주고 복도를 닦으라고 시킨 뒤 쟁반을 들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안은 여전히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제이드는 케이트가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이 녀석 좀 보라고! 내 이야긴 전혀 듣질 않아.” 그녀에게 그렇게 하소연해봐야 곤란할 뿐이다. 케이트는 당혹스런 미소를 띤 채 과자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녀인 그녀가 주인인 이안에게 손님 이야기를 성의 있게 들으란 말야! 라고 혼 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무슨 이야기인데요?” 결국 케이트는 제이드의 주의를 자신에게 돌렸다. 이안은 기다렸다는 듯 과자 접시로 손을 뻗었다. “얼마 전에 시체가 발견됐는데 이 시체의 상태가 기묘하단 말이지.” 제이드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어지간히 이야기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 케이트가 쓴 웃음을 짓는 순간 그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상대가 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이런 이야기를 여성분께 하는 건 좀 그렇지.” 실컷 떠들어 놓고 말은 잘한다. 케이트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실제로 시체를 본 적도 있는 걸요.” 아, 그렇지. 그제야 제이드는 케이트가 목격한 살인사건이 그 만큼이나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이안을 뒤돌아 보며 호통 쳤다. “넌 어떻게 된 녀석이 여성분에게 시체를 보이고 다니는 거야.” 이안은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그는 우물우물 과자를 먹으며 책장을 넘길 뿐이었다. 결국 어색해진 제이드는 주춤주춤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이야기를 돌렸다. “혹시 모르니 스미스양도 듣는 게 좋을지도 모르죠. 워낙 흉흉한 세상이니까요.” 그는 찻잔을 들어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이상한 건 아무런 흔적이 없다는 거예요. 나이는 이십대. 병마에 시달렸다면 아픈 기색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더군요. 이상하게 생각해서 검시를 했답니다.” 이런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건 저질이다. 약간의 죄책감이 케이트의 양심을 찔렀다. 남의 불행을, 그것도 누군가의 죽음을 호기심이 동해 수근 거린다는 건 전혀 옳지 않다. 그럼에도 케이트는 궁금했다. 병색이 있는 것도, 죽음에 이를만한 부상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 대체 왜 죽은 걸까. “없었답니다. 가장 중요한 게.” “가장 중요한 거요?” 제이드는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다. 그는 적당히 이야기의 강약을 조절할 줄 알았다. 케이트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기울이자 그는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왼쪽 가슴에 대고 말했다. “심장이요.” 뭐? 케이트의 몸이 뒤로 휙 물러났다. 심장이 사라졌다니 잔혹한 그 말에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 그럼. 범인이 그 여자의 심장을 가져 간 건가요?” “이 부분이 더 이상한데요.” 제이드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는 물러난 케이트에게로 몸을 내밀며 말했다. “심장을 도려낸 흔적이 없더랍니다.” 무슨 이야긴지 모르겠다. 케이트는 멍한 얼굴로 제이드를 쳐다봤다. 이안도 책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쳐다봤다. 심장을 가져갔다면서 심장을 도려낸 흔적이 없다는 건 무슨 소린가. 두 사람의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에 제이드는 답답해하며 말했다. “아, 그러니까 외견상 아무 흔적도 없는데 열어보니 심장이 있어야 할 부분이 비어있더라니까.” 웩. 케이트의 얼굴이 다시 한 번 하얗게 질리더니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토할 것 같다. 케이트가 응접실 밖으로 재빨리 빠져나가자 제이드 역시 아차 싶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뒤로 제인이 뒤 따라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하지? 제이드는 난처한 표정으로 이안을 쳐다봤지만 이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한 소리였다. “몬스터의 짓이 아니라는 증거는?” “뭐?” 몬스터가 여기서 갑자기 왜 나와? 그러다 제이드는 이안이 심장이 사라진 시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자식 보게. 김이 빠지기도 하고 어이도 없어서 그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귀족들이 사용인의 상태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케이트는 이안이 일부러 알라나데일에서 데려왔고 타운하우스에 고용했으며 그곳을 나올 때도 데리고 나왔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뭔가가 다를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그렇지. 케이트에게 걸었던 약간의 희망이 사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몰라.” “그럼 대체 그런 이야기를 왜 한 거지?” “요즘 이 사건이 완전 유명하다고. 그래서 그냥 알려주려고 한 거다, 왜!” 이해할 수 없다. 이안이 책으로 시선을 내리더니 다시 제이드를 보고 말했다. “너는 마치 다과회의 여자들 같군.” 뭐, 뭐 임마? 씨근덕거리는 제이드를 무시하고 다시 이안의 시선이 손에 든 책으로 떨어졌다. ============================ 작품 후기 ============================ 어, 아직도 타지에 있어서... 오늘은 한층 더 바쁘네요. 대댓글다는 것과 오타 수정등등은 이번주 안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00081 2. 사라진 것 =========================================================================                            요즘 들어 손님이 자주 오는군. 케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타운 하우스에 있을 때 이안의 손님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일주일에 세, 네 번은 손님이 찾아올 정도로 로엔 백작 부인은 인기가 있었지만, 그녀의 아들은 인간관계가 영 꽝이올씨다였던 것이다. 그런데 큐바인 하우스로 옮기자 꽤 잦은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오늘도 제이드가 왔나. 그런 생각에 어서 오라고 이야기 하려던 케이트는 눈앞에 보이는 낯선 남자의 얼굴에 입을 닫았다. “이안을 찾아왔는데.” 화사한 금발 머리에 파란색 눈동자. 약간 호리호리하다 싶은 남자는 귀공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확실한 귀족이다. 그녀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누구시라고 전해 드릴까요?” “나 말인가?” 그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씩 웃었다. 어디서 본 표정이다. 낯익은 그 얼굴과 분위기에 케이트가 어리둥절할 때 남자의 입에서 깜짝 놀랄 이름이 흘러나왔다. “아르고 로엔. 이 집 주인의 형이야.” 맙소사. 케이트는 얼굴을 붉혔다. 익숙하다 느낀 이유가 다 있었다. 아르고는 그의 어머니와 판박이였다. 실례했습니다. 그녀는 응접실로 아르고를 안내했다. 그의 시선이 낡은 집 안 이곳저곳을 살피는 게 느껴지자 제이드가 왔을 때의 딱 열 배쯤 더 창피하기 시작했다. “저 구멍은 뭐지?” 아르고가 무너진 계단 위쪽에 위치한 이 층 공간을 보며 묻자 케이트는 이 공간에서 사라지고 싶어졌다. 제인에게 심부름만 시키지 않았어도 그녀가 손님을 맞이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귀족의 집에서 하녀가 손님을 맞이한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데 이런 낡은 집이라니. 그것도 상대는 이 집 주인의 하나뿐인 형이다. “계단이 낡아서….” 케이트의 말은 끝으로 갈수록 기어들어갔다. 계단이 낡았다고 부숴버리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 집엔 있다. 창피해 죽을 것 같다. 하지만 아르고는 아, 그래? 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과연 그의 동생이다. 의식주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태도. 그러니 수사관을 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만. 아르고는 예쁘장한 빨간 머리 하녀의 안내를 따라 응접실인 듯 한 곳을 들어갔다. 낡은 벽지는 그대로 뒀지만 의자만큼은 쓸 만했다. 적어도 사람이 앉는 바람에 부서지지는 않겠군. 그런 생각에 아르고는 피식 웃어버렸다. “아가씨 이름은?” “케이트 스미스 입니다.” “그래, 스미스양. 이 집에 사용인은 아가씨뿐인가?” “아니요. 제인이라는 하인이 한 명 더 있습니다.” 아, 그래. 아르고는 약간 안심했다. 적어도 이 예쁘장한 하녀 하나만 데리고 사는 건 아니군. 남자 주인의 침실에 하녀가 들어가는 것만큼 볼썽사나운 짓은 없다. 말 그대로 침실에 들어가는 건 동성의 사용인뿐이다. 세면도구나 아침 식사를 나르는 등 주인이 방에 있을 때 이성의 사용인이 시중을 드는 일은 없다. 이성의 사용인이 시중을 든다는 게 들키면 문란하거나, 가난하다는 소문이 돈다. 게다가 저 하녀는, “오셨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르고의 생각이 멈췄다. 케이트가 응접실 밖으로 나가자 그는 장갑을 벗으며 응접실 안을 둘러봤다. 모자와 재킷, 장갑을 받아들 하인이 없다. 그가 대동한 종복은 큐바인 하우스의 몰골을 보더니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하하. 그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정말이지 이안답군. “오셨습니까.” 이안은 늘 그렇듯 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반가워하는 것도 아니고 싫어하는 것도 아닌 무표정한 얼굴로 어느샌가 문 앞에 나타나서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그런 동생의 태도에 익숙한 아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손을 내밀었다. “어리석은 짓을 했더구나.” 비난의 단어였지만 혼내는 건 아니었다. 그는 자신보다 덩치 큰 동생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 얼마나 놀라셨던지 당장 오라고 전보를 보내셨단 말이다.” “죄송합니다.” 별로 미안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아르고는 더이상 동생을 혼내지 않기로 했다. 원래 감정 표현이 적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뭐,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다마는.” 이게 잘 지내는 거라고? 케이트는 응접실 밖으로 나가다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떻게 이게 잘 지내는 거란 말인가. 하지만 이안도 그저 네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내가 좀 더 일찍 알았다면 널 더 빨리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하다.” 진심이 담긴 그 사과에 이안조차도 말을 잃었다. 그는 찻잔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고르자면 그의 형 아르고도 순위 안에 들것이 분명하다. 열 살 때 갑자기 집 앞에 나타난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온 동생. 누구라도 미워할 것이다. 어린아이의 이기심이든, 집안을 잇고 재산을 물려받을 장자로서든. 그런데 아르고는 이안을 진짜 동생처럼 대우해 주었다. 진짜 동생이라는 게 뭔지 이안은 잘 모른다. 하지만 아르고의 태도를 보고 있노라면 이안이 진짜 동생이라 해도 이 정도로 잘해주지는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응접실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괜찮습니다.” 이안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는 괜찮다. 정말로. 로엔 백작가의 서자로 자랄 수 있었다는 건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았다. 사람들의 시선, 가쉽에 시달릴지언정 잘 먹고, 잘 잘 수 있었다. 거기에 지금의 그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지식, 검술. 이런 것들은 사생아 이안은 절대 배울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검술은 아닐 수도 있군. 이안은 속으로 정정했다. “언제까지나 형님과 어머니께 의지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을 뿐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안답지 않게 기특한 말에 아르고는 씩 웃으며 동생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주마.” 그 말 요즘 자주 듣는 것 같은데.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사람이란 미워하던 자도 바닥으로 떨어지면 동정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카이사도 그런 말을 한 걸 보니. “그런데.” 분위기 전환을 위해 헛기침을 한 아르고가 씩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 하녀는 네가 다른 마을에서 데려왔다던데.” “네.” 아니, 그게 아니라. 아르고는 오랜만에 당황했다. 보통 사람은 이정도 말을 꺼내면 당황해서 변명하거나 그럴만한 사정을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안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이라고 답할 뿐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 어머님은 네가 저 하녀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시더라.” 마음? 이안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럴 리가요.”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 곧 입을 다물었다. 이것도 어떤 마음이긴 하다. 마녀에 대한 경각심과 호기심. 하지만 아무리 이안이라 해도 실라가 이야기하는 마음이 그런 마음을 말하는 게 아닌 것은 안다. 그는 아르고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제가 하녀를 손대지 않을 거라는 건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건. 아르고가 뭐라 말하려 했을 때 제인이 차와 다과를 쟁반에 담아 가져왔다. 소년은 익숙하지 않은 태도로 찻잔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설마 이 집의 사용인이 저 작은 하녀와 소년 둘뿐인 건 아니겠지. 아르고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자는 눈여겨본 여자가 골목길 안쪽으로 접어들자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가로등 대부분이 꺼져 있어 사위는 어두웠다. 다른 나라라면 마법으로 대로변은 가로등의 불을 유지했을 테지만 마법을 금하는 뮈엘라는 횃불을 이용하고 있었다. 결국, 날씨가 궂거나 건조한 날씨 탓에 불이 날 위험이 있다면 가로등의 불을 꺼두는 것이다. 여자는 자신의 뒤를 따르는 자가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쌀쌀한 날씨에 몸을 움츠리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어두운 길에는 익숙하다. 늘 이 시간쯤이면 밭을 살피고 돌아간 덕이다. 얼른 집에 돌아가서 따듯한 침대 속에 파고들고 싶다. 그녀가 두 번째 골목에 접어들었을 때 어둠이 몰려왔다. 희미하게 비치던 먼 곳의 가로등의 빛마저도 여기까지는 닿지 않았다. 늦은 밤. 어두운 거리를 밝히는 건 별빛뿐이다. 그녀를 따르던 자는 뭔가를 중얼거리며 여자에게 접근했다. 손등까지 검은 천으로 감싼 팔이 뻗어 나갔다. 그 끝에 달린 앙상한 손가락이 여자의 몸에 닿는가 싶더니 푸르스름한 빛이 그 손가락 끝에서 여자의 몸으로 둥실 옮겨졌다. “!” 갑자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는 입을 벌려 신음을 내뱉으려 했지만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놀란 나머지 부릅뜬 눈동자는 그대로 굳어 눈알이 시큰시큰해지기 시작했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자가 천천히 여자의 앞으로 돌아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그때까지도 여자는 자신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뭐지? 왜 이러지? 이 사람은 누구지? 혼란스러운 그녀의 머릿속과는 정반대로 주위는 벌레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어디선가 멀리서 개가 짖었다. 컹! 컹! 컹! 앙상한 하얀 손가락이 여자의 왼쪽 가슴에 닿았다. 무, 무슨 짓이야? 머릿속에서 울려 퍼진 고함은 밖으로 새 나가지 못했다. 여자는 눈을 부릅뜬 채 앙상한 손가락 다섯 개가 자신의 가슴에 파고드는 것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게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앙상한 손가락이 깊숙이 들어와 뭔가를 찾는 듯 안을 헤집었지만, 여자에게 느껴지는 건 없었다. 마치 푸줏간에서 고기를 다듬는 장면을 보는 것 같아 여자는 자신이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가슴에 파고들었는데 고통은커녕 아무런 감각이 없을 리가 없다. 내가 너무 피곤해서 잠이 든 거야. 여자는 계속해서 속으로 생각했다. 얼른 일어나자. 이건 악몽이 분명해. 이렇게 추운 날씨에 어디서 잠든 걸까. 그때 앙상한 손가락이 다시 들어가던 것과 반대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빈손으로 들어갔던 그것은 검붉은 뭔가를 움켜쥐고 빠져나왔다. 이건 꿈이야. 이건 꿈이야. 이건 꿈이야. 여자는 끊임없이 속으로 되뇌었다. 어서 일어나야 해. 검은 후드 아래로 입술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손에 쥔 것은 여전히 생생하게 뛰고 있었다. 두근두근 뛰는 그것을 바라보며 여자는 가슴이 허전하다고 느꼈다. 앙상한 손가락 안에 갇힌 그것이 안타깝게 역동했다. 여자는 검은 주머니 안에 들어가는 자신의 심장을 보며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게 말로만 듣던 마법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스쳐 간 생각이었다. ============================ 작품 후기 ============================ 아직 타지에 있어서... 댓글은 잘 읽고 있습니다. 모바일이라 대댓은 내일 돌아가서 달겠습니다. 아마 내일 점심때쯤에 돌아가지 않을까 싶어요. 그나저나...비축분이 점점 떨어져 가네요...어흐흐흑.... 00082 3. 앙상한 손 =========================================================================                            이번 주에만 손님이 세 번째 찾아오자 케이트는 자신의 상식을 가다듬기로 마음먹었다. 저런,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인간에게도 일주일에 세 번이나 손님이 찾아오는구나. 제인이 문을 열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남자들의 검에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녀가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이안 로엔경의 집 맞습니까?” 심각한 표정의 남자가 먼저 물었다. 용병은 아닐 것이다. 케이트는 남자들의 허리춤에 걸린 검을 보고 남자의 정체를 짐작하려 애썼다. 기사 복을 입고 있지 않으니 기사도 아니다. 어쩌면 귀족에게 고용된 경호원일지도 모른다. “네. 맞습니다.” 그녀가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남자의 뒤에서 또 다른 남자가 얼굴을 드러냈다. 반짝이는 금발에 파란 눈동자. 그리고 어디서 본 얼굴. 어제 방문했던 이안의 형, 아르고와 같은 설명이지만 이 남자는 귀공자라기보다는 왕자님처럼 보였다. 두 차이가 뭐라고 묻는다면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아르고가 좀 더 호리호리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였다면 눈앞의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격식을 차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 케이트는 남자의 얼굴을 보자 입을 벌렸다가 재빨리 닫았다. 이 남자, 이안을 닮았다. 마치 빛과 어둠처럼, 이안의 빛 버전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설마 이안에게 형이 또 있었나? 그녀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전에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에드워드가 왔다고 전해 주게.” 네. 알겠습니다. 케이트는 에드워드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의 뒤를 따르던 경호원들은 에드워드의 지시에 큐바인 하우스 밖에 대기했다. 뭔가 기분이 묘했다. 에드워드의 시선이 아르고와 마찬가지로 집안을 둘러보다 무너진 계단과 그 위에 검게 뚫린 이 층으로 향하는 구멍을 발견하자 케이트는 이번 주에 걸쳐 다섯 번째 죽고 싶어졌다. “….” 에드워드는 입을 벌렸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다물었다. 앞서 걷는 하녀의 얼굴이 새빨개진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예쁘장하고 작은 빨강 머리 하녀라니. 그의 사촌의 취향이 이런 타입인 건가? “오셨다고 전하겠습니다.” 예의 바르게도 에드워드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는 그 순간까지 눈에 보이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천장 위로 쥐가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는데도!!! 이 집을 당장 수리하자고 할 거야. 케이트는 분노 반 창피함 반으로 저택 뒤뜰로 향했다. 다른 저택의 뜰과 구분하기 위해 심은 관목으로 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점을 이용해서 집주인들은 뒤뜰에서 일광욕하거나 야외의 다과를 즐겼지만 이안에게 그런 건 쓸모없는 짓이었다. 케이트는 뒤뜰로 난 문을 열고 이안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찾기도 전에 이안이 먼저 그녀에게 다가왔다. “당장 이 손님을 수리하라고요!” “뭐?” 아니, 이게 아니라. 손님이 오셨단 말과 집을 수리하라는 말이 섞였다. 케이트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창피하다. “그, 손님이 오셨는데, 집이 무너, 아니, 계단이 무너져서 쥐가 창피하다고요. 아니, 잠깐.” 이게 무슨 소리야.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안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딘가 잘못되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는 대뜸 케이트에게 물었다. “어디 고장 난 건가?” “아니거든요!” 하아. 창피하다. 케이트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손님이 오셨어요. 에드워드라는 분인데 성은 말씀 안 하셨고요.” “그 손님을 고치라는 건가?” “사람을 어떻게 고쳐요! 계단을 고치자고요!” “계단을? 왜?” “왜라뇨! 다들 쳐다본다고요!” 저택 외부를 수리하지 않은 건 이해가 된다. 어쨌거나 이안은 호건 가의 압력으로 수사관을 사퇴하고 로엔 가를 나왔다. 그러니 자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 당분간은 큐바인 하우스의 망가진 외관을 유지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는 건 케이트도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굳이 안까지 폐가로 만들어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보지 말라고 해.” “어떻게 안 봐요?” “그럼 신경 쓰지 마라.” 이 자식이. 대화를 나눌수록 복장 터지는 남자다. 케이트는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정말 한 대만 갈겼으면 소원이 없겠다. “여기서 사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내 집이다.” 와, 씨. 진짜, 와. 케이트는 진저리치며 몸을 돌렸다. 내가 아주 돈만 벌면 이딴 집 싹 뜯어고치고야 말겠어. 가능성 희박한 공상에 가까웠지만 케이트는 잠시 분을 참기 위해 공상에 빠졌다. 그녀가 아주 아주 돈을 많이 벌어 이 집을 산 뒤 이안을 뻥 내쫓고 집을 깨끗하고 멋지게 꾸미는 상상을. “즐겁게 사는군.” 에드워드는 이안이 나타나자 씩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이안은 여상 하게 대답했지만, 에드워드가 말한 즐거움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이 저택에 하인은 그녀뿐이야?” 어째서 다들 제일 먼저 그걸 묻는 거지? 이안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아니요. 하인이 한 명 더 있습니다.” “집에 사용인이 둘 뿐이라고?” 에드워드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엔 가가 그렇게 가난했던가? 그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려 했지만, 입 밖으로 흘러나가는 질문을 막을 길이 없었다. “고작 두 명으로 집안 관리가 가능한 건가?” 일반적으로 몇 명의 사용인이 있어야 원활한 관리가 가능한지는 에드워드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두 명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 에드워드의 질문에 이안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대답했다. “손님이 오지 않으니 접대할 필요가 없고, 집을 수리하지 않을 테니 유지할 필요가 없어서 괜찮습니다.” 그런가? 에드워드는 뭔가가 걸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다. 뭐, 그런가 보지. 사용인을 관리하는 건 남자가 할 일이 아니다. 사용인은 집 안의 일이고 집 안은 여자들의 일이다. 일차적으로 하녀장과 집사가 처리하고 사후 확인을 받거나 미리 권한을 위임받는 게 일반적이다. 이 확인을 받거나 미리 권한을 받는 것도 남주인이 아니라 여주인에게 받는다. 에드워드 역시 다른 귀족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사용인의 업무가 어떻게 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당당한 이안의 태도에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말을 돌렸다. “오늘 신문이네.” 이안은 에드워드가 품에서 꺼낸 신문을 받아 들었다. 오늘 아침에 이미 읽은 신문이다. 그다지 이상한 것은 없었다. 에드워드가 시킨 일은 알라나데일의 데일 남작이 팔아넘긴 마법 아티팩트을 찾아내서 파괴하는 일이다. 마법 아티팩트가 신문에 나올 리는 없지만 어쨌거나 신문은 매일 읽고 있다. “여기 살인사건 말인데.” 에드워드는 이안에게 다가가 몸을 굽혔다. 그의 손가락이 신문 어느 한 면을 짚었다. “실례하겠습니다.” 타이밍 좋게도 케이트는 차를 가지고 들어오다 가까이 붙은 에드워드와 이안을 보고 문 앞에서 멈췄다. 어머.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가 재빨리 닫혔다. 검은 머리카락에 호박색의 눈동자, 무표정한 얼굴의 이안과 금발 머리에 푸른색의 눈동자, 여유 있는 표정의 에드워드. 정말 어둠과 빛 같다. 에드워드는 재빨리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뭐지? 케이트는 본능적으로 두 사람이 뭔가를 숨긴다고 느꼈다. 그게 여자의 감인지, 마녀의 능력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지만, 호기심이 일자 케이트는 차를 내려놓으며 이안의 손에 든 신문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매일 아침 이안이 식사를 하며 읽는 신문이다. 뮈엘라의 수도에는 신문이 세 종류뿐이기 때문에 케이트는 금세 신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뭐야, 신문에 나온 가십을 이야기하려고 온 거였어? 그녀는 약간 김이 새서 부엌으로 돌아갔다. 오늘 자 신문이라면 그녀도 읽었다. 슬슬 그녀는 이안이 집안이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침대 시트가 구겨져 있었는데도 신경 쓰지 않는 투였다. 그렇다면야. 케이트는 약삭빠르게도 매일 하던 청소를 이틀에 한 번꼴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정도만 해도 그녀의 일은 상당히 줄어든다. “제인. 오늘 신문 어디 있는지 아니?” 부엌 한쪽에서 바느질 연습을 하던 제인이 고개를 들었다. 소년은 여가에 제대로 된 하인이 되기 위해 케이트의 지시에 따라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고 있었다. 간단한 수선방법이나 고급스러운 주인의 옷 손질법. 그리고 글까지. “여기요.” 제인은 신문을 들고 케이트에게 다가왔다. 소년은 어미 새 곁을 떠나지 않는 아기 새처럼 신문을 펴는 케이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뭔가를 읽을 때 옆에 앉으면 그걸 소리 내어 읽어준다. “잠깐만.” 케이트는 신문을 짚어가며 이안이 들고 있던 장을 찾았다. 날이 점점 추워진다는 소식부터 호건 가의 나이 많은 가주가 요즘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몸이 안 좋은 게 아니냐는 추측성 기사까지. “이건가?” 제인은 아직 읽지도 못하면서 호기심에 몸을 내밀어 신문을 쳐다봤다. 케이트의 하얀 손가락이 신문의 어느 한 지점을 짚더니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도의 여성들은 모두 밤길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최근 끔찍하고 잔인한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어디서 들은 사건이다. 케이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때 제인이 입을 열었다. “연이어가 뭐예요?” ============================ 작품 후기 ============================ 어, 늦어서 죄송합니다.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업무가 밀려서 처리하고 친구랑 늦은 저녁 먹고나니 이시간이네요. 아참, 다른 이야기 지만 수도 이름 모집합니다. 원래는 걍 ‘에반스’라 하려고 했는데 나라이름도 아니고 수도 이름을 왕의 성으로 한다는게 좀 그렇지 않나 싶어서요. 보통은 실제 지명을 긁어오거든요. (알라나데일은 실제 있는 곳 입니다.) 뮈엘라는 이유가 있고요. 그러니 괜찮은 것 임으면 걍 간직했다가 나중에 소설 쓰실때 쓰시고 안쓸만한 시원찮은 걸로 추천 해 주세요. 00083 3. 앙상한 손 =========================================================================                            이미 읽은 사건이다. 이안은 다시 한 번 신문기사를 눈으로 읽었다. 골목에서 여자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기사다. 며칠 전 발견된 또 다른 여자의 시체를 생각하면 여자만 노리는 살인사건일 수도 있으니 뮈엘라 수도의 여자들은 모두 조심하라는 요지의 기사였다. 며칠 전에 제이드가 시장통의 아낙네처럼 떠들고 갔던 사건도 이 사건이 아니었나. 그는 다시 신문을 내려다보고 다른 사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연쇄살인이 될지도 모른다. 평민의 살인사건에 수사관이 투입되는 경우는 다섯 명 이상 동일한 범인에게 살해당했다고 판단될 경우다. 제이드가 떠들고 간 사건을 포함하면 두 번째. 에드워드가 가지고 온걸 보면 알려지지 않은 시체가 또 있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이안은 또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마법 공격을 받은 겁니까?” “그럴 거라 예상해.” 예상이라고? 이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에게 가지고 올 정도라면 뭔가 확실한 게 있어서가 아니었나? 그런 그의 태도에 에드워드는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두 명의 여자가 심장이 없이 시체로 발견되었어. 외부에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고, 심장을 어떻게 빼내 갔는지 아무도 몰라. 그러니 마법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 거지.” 확실히 이안이 알기로도 아무 흔적 없이 심장만 빼내 가는 방법은 마법 외엔 없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심장을 노리는 몬스터가 있던가. 동물의 내장을 즐기는 몬스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라 변방도 아니고 수도 한복판에 그런 몬스터가 출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둘째치고서라도 몸에 아무 흔적도 없이 심장만 빼는 방법은 마법 외엔 없어 보인다. “제게 이미 데일 남작의 마법 도구를 조사하려 하셨는데, 이번 사건이 그 마법도구가 이용되었으리라 판단하신 겁니까?” 아, 그거라면. 에드워드는 저도 모르게 끄응하고 소리 냈다. 사실 그도 잘 모른다. 마법이 관여된 사건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 그 이야기는 수사하는 사람도 적은 게 좋다는 말이다. 가능하면 최소한의 인원이 투입되어 조용히 묻어버렸으면 좋겠다는 게 사람들의 의견이었다. 여기서 사람들은 귀족 중에서도 상당한 힘을 가진 몇 안 되는 사람들을 말한다. 결국 이안의 비밀수사관이라는 직위는 좋게 말해서 비밀수사관이지, 힘을 가진 고위귀족들이 알리고 싶지 않은 마법에 관련된 사건을 묻어버리는 업무를 하는 일이다. 그걸 아는 에드워드는 약간 입맛이 썼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이런 일에 자신의 사촌을 부린다는 게 어딘지 모르게 껄끄러웠다. 하지만 반대로 이안이 재활하기엔 이 방법이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다. 이안은 왕위 계승 1위인 에드워드 에반스의 친척이다. 에드워드의 어머니와 이안의 어머니 실라가 사이가 좋다는 건 사교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 비밀 수사관 일을 잘 수행해 낸다면 이안을 능력 없이 동정심으로 서자가 된 남자로 인식하던 고위귀족의 시선이 달라질 것이다. 물론 이안은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 없겠지만. “뭐,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 에드워드는 크흠하고 헛기침을 한 뒤 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둘 중 하나야. 이 사건에 마법 도구가 연관되어 있거나, 별도의 사건이거나. 별도의 사건이라면 이 사건을 먼저 수사하라고 제안하는 거지.” 제안이라고 했지만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부할 생각은 없지만. 이안은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이 사건은 저만 수사하는 겁니까?” “현재로서는.” “지원이 있습니까?” “없어.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까. 입이 무거운 자들이라면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건 말리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이안의 대답에 에드워드는 약간 안도했다. 잠시나마 그가 싫다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왜 그랬는지 자신도 모르겠다. 이안은 어딘가 돌발행동을 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안에게 첫 번째 사건과 두 번째 사건의 피해자에 대해 조사한 서류를 넘겼다. 첫 번째 사건의 피해자는 고층거리에 사는 매춘부였다.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다. 그래서 지난주에 시체가 발견되었음에도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건 바로 어제였다. 두 번째 사건의 피해자는 농부의 딸이었다. 그녀는 밭을 보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딸이 돌아오지 않자 찾아 나섰던 부모는 처음 딸의 시신을 발견하고 기절했다고 생각했다. 둘 다 옷도 멀쩡했고 상처도 없었다. 반항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 피해자가 농부의 딸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시체가 발견되지도 않았을 테고, 두 번째 피해자가 아니었다면 에드워드도 연쇄살인이라는 것을 눈치채는데 좀 더 오래 걸렸을지도 모른다. “이 사건이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안의 지적에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피해자처럼 다른 피해자도 고층거리에 사는 사람이라면, 일정한 직업 없이 혼자 살거나 노숙자라면 눈치채지 못하고 단순한 심장마비나 동사, 아사 등의 상태로 죽었다는 판단하에 매장해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 이야기는 이번 사건의 범인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범행을 저질렀는지, 피해규모가 얼마인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결국 연쇄살인이라는 말이다. 에드워드가 떠나자 이안은 나가기 위해 코트를 입었다. 케이트에게 배운 대로 제인이 모자를 들고 허겁지겁 다가갔지만, 그는 이미 다른 모자를 쓰고 있었다. “엇.” 제인은 어쩔 줄 몰라서 모자를 든 채 서 있었다. 이안은 그런 소년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말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민망하고 창피해서 입술을 깨무는 제인을 보고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 두 번째 시체가 발견된 곳은 큐바인 거리에서 좀 떨어진 곳이었다. 밭이 있는 수도 가장 가장자리 동네라 수도로 치지 않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행정구역으로 치면 수도가 맞다. 이안은 타고 온 마차를 돌려보내고 동네 안으로 접어들었다. 고층거리보다는 훨씬 낫지만 귀족의 기준으로 보면 작고 초라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어디선가 퇴비로 쓰기 위해 짚이나 낙엽을 부식시키는지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거침없이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에드워드가 준 서류에는 이 골목에서 두 번째 피해자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법한 골목부터 수레를 끌고 지나갈 만한 약간 넓은 골목까지. 제일 넓은 곳도 마차가 지나가기란 힘들어 보인다. 그는 지붕의 색과 골목의 모양을 보고 조금 헤매다가 서류에 나와 있는 장소를 발견했다. 몇 갈래로 갈라지는 좁은 골목. 농부의 밤은 이르다. 따로 가로등이 없으니 사람들이 잠들었다면 이곳은 새까맸을 것이다. 이안은 주변을 둘러보고 범인이 우연히 피해자를 발견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누군지 몰라도 피해자를 따라 이 골목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심장을 빼앗고 돌아갈 때는 길을 헤맸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안이 그랬던 것처럼. “잠시 말 좀 묻지.” 그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말을 걸었을 때였다. 여자는 이안의 모습을 보더니 꺄아악하고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 버렸다. 뭐지? 이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잠시 여자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범행 장소 주변을 탐문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러나 그가 가까스로 만난 다른 사람을 붙잡았을 때도 상대방 역시 처음 여자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며 도망쳐 버렸다. 바로 어제 발견된 시체에 대한 이야기는 순식간에 동네를 휘감았다. 심지어 심장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신문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쉬쉬하며 소문이 돌던 터였다. 거기에 검은 옷을 입은 검은 머리카락의 큰 남자가 나타났으니 사람들의 경계심은 하늘을 찔렀다. 결국 이안은 문을 두드려 불러낸 어느 집 주인이 댁이 제일 수상하외다. 라는 대답을 내놓고 문을 탁 닫아버리자 혼자서 탐문하는 게 문제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전까지는 서글서글한 제이드가 사람들과의 대화를 맡았으니 문제가 없었던 거였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 이안은 마지막으로 피해자의 집을 찾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는 이안에게 적의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의 뒤로 여자의 울음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사건을 수사 중이다. 몇 가지 질문 좀 하지.” “수사 중이라고요?” “그래.” 남자의 눈에 의심이 섞였다. 수사를 한다고?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수사관 나리가 우리 애 사건을 수사한단 말입니까?” 거기서 이안은 남자가 피해자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다. 할아버지라 해도 믿을 정도로 남자는 단 이틀 사이에 갑자기 늙어버렸다. “그래.” “수사관 나리들은 귀족 나리 사건만 수사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그렇지는 않다.” 남자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고쳤다. 수사관의 업무에 대해 사람들이 아는 건 고작 해봐야 귀족 나리의 사건을 수사한다는 점이다. 그는 물어 볼 테면 물어보라는 투로 입을 열었다. “뭐가 궁금하신 겁니까.” “피해자가 늘 그렇게 늦은 시간에 다녔나.” “착한 앱니다. 아니, 착한 애였습니다. 매일 밤 자기 전에 늙은 부모대신 밭을 살피겠다고 다녀오곤 했습니다.” “즉, 매일 피해자가 다녀왔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어쩌면 범인은 처음부터 피해자를 노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일정한 시간이었냐고 묻고 수첩을 꺼내 적어 넣었다. “주변에 피해자를 미워하거나 문제가 있었던 사람은 없나.” “착한 애라니까요. 그렇게 착한 아이를 누가 미워한단 말입니까.” 그건 부모의 시선에서 봤을 때뿐이다. 기숙학교를 다닌 이안은 사건을 일으킨 자식 때문에 불려 온 부모가 우리 아이는 착하다고 소리치는 것을 몇 번 봤다. 하지만 바로 얼마 전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네 자식이 네 생각만큼 착한 아이는 아닐 거라고 말하는 게 현명하지 않다는 건 안다. “이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은 없나?” “착한 아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습니까! 누가 이런 짓을 한 것이든 천벌을 받을 겁니다!” 천벌이란 건 없다. 하지만 이안은 그 말도 내뱉지 않았다. 수상한 사람은 못 봤는지, 피해자가 아니라면 부모나 형제에게 해를 끼치려는 사람은 없었는지 몇 가지 질문을 더 한 이안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더 했다. “고층거리에 아는 사람이 있나?” “고층거리요?” 뜬금없는 질문에 남자가 잠시 말을 잃었다. 여기서 고층거리까지는 꽤 떨어져 있다. 게다가 농부인 그나 그의 딸이 고층거리의 사람과 알 일이 없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글쎄요. 도박에 빠진 사람이 밭까지 팔고 도박을 하다가 결국 고층거리에 산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그 사람과 잘 아는 사이인가?” “아니요. 모릅니다.” 결국, 첫 번째 피해자와의 접점은 없다는 말이다. 이안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벌써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바로 고층거리로 가는 게 좋을까. 이안은 마차를 잡아타기 위해 큰 거리까지 걷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으으, 졸려. 오늘 날씨가 많이 춥네요. 다들 건강 조심하시고. 수도 이름에 많은 분들이 의견을 주셨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울릴 만한 것으로 골라서 잘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사용하지 않는 것 중에서는 엑스트라나 명사가 필요할 경우에 사용할 것 같은데 불편하신 분은 댓글 달아주시면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댓글 안다시면 제가 씁니다. 후후후 그래서 제가 그랬잖아요. 제일 예쁜건 나중에 소설 쓸때 쓰기 위해 보관하시고 그 다음으로 괜찮은거 알려달라고요. 후후후. 00084 3. 앙상한 손 =========================================================================                            이안이 마차를 잡지 못하고 결국 고층거리를 향해 걷고 있을 때 큐바인 하우스에 편지가 도착했다. 제인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갔다가 제복을 입은 남자의 모습에 놀라 뒤로 물러났다. “이안 로엔경의 댁입니까?” “네? 네. 맞는데요.” “드윈가에서 왔습니다.” 남자는 편지를 내밀며 말했다. “초대장입니다. 꼭 참석해 달라 하셨습니다.” 뭐를? 제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편지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무너진 계단의 공간을 어떻게 가려볼까 하고 무릎 꿇고 앉아 걸레질하던 케이트가 고개를 들었다. “뭐였어?” “꼭 참석해 달라던데요.” 응? 뭐를? 그녀는 드윈가라고 인쇄된 편지를 받아 들었다. 드윈가라고? 어렴풋하게 기억이 난다. 예전에 로엔 백작 부인의 편지를 대필해 줄 때 몇 번 드윈가의 안주인에게 편지를 썼던 기억이 있다. 케이트는 봉투를 뜯어보려다 멈칫했다. 아차. 이건 그녀의 편지가 아니다. 이안에게 온 것이다. 하지만 드윈가가 이안과 친분이 있던가? 케이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잘못 전달된 게 아닐까. 우체국에서 그런 실수를 하던가? 봉투를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소인이 찍혀 있지 않았다. “이거 우체부가 가져왔니?” “아뇨. 그, 하인 옷을 입은 남자였는데요.” 하인 옷이 아니라 제복이라고 고쳐주지 못할 정도로 케이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걸 이안에게 전달해줘야 하나, 아니면 로엔 백작 부인에게 다시 전달해줘야 하나. 에라, 모르겠다. 그녀는 편지를 앞치마 주머니에 집어넣고 다시 복도 바닥에 앉으며 생각했다. 이안이 돌아오면 일단 전달해줘야겠다. 고층거리에서도 이안은 소득이 거의 없었다. 그는 수사관에 맞는 타입이 아니었던 것이다. 타인에게 관심이 있는 것도,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도 아니었다. 관심이 없는 것이라면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거나 기억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그가 수사관으로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건 수사관은 기본 이인 일조로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제이드와 함께 수사할 때 이안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 이외의 것을 맡았다. 탐문을 할 때는 나쁜 수사관과 좋은 수사관으로 자연스럽게 역이 분담되었다. 상대방을 위협하고 무시해서 겁을 먹게 하고 화나게 하는 게 이안, 그런 상대방을 다독이고 편을 들어 이야기를 터놓게 하는 것이 제이드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일련의 행위들은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이안은 그런 점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탐문방법이 나쁠수록 있다는 것은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죽은 여자? 여기 죽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 줄 아시오?” 늙은 남자는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제이드였다면 여기서 어떻게 해서든 남자를 얼렀을 것이다. 카이사라면 좀 더 조심스럽게 접근했을 것이고. 하지만 이안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남자에게서 이야기를 듣기란 어렵다고 판단하고 바로 몸을 돌려 버렸다. “흥.” 남자는 지체 없이 돌아서는 이안의 뒷모습을 보며 코웃음 쳤다. 꼭 저런 치들이 있다. 고층거리의 사람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 쓸모없는 인간이니 자신보다 한 단계 낫다고 판단하는 자들. 이안은 그렇게 생각해서 남자에게서 뒤돌아선 건 아니었지만, 그는 지금까지의 경험상 이안도 마찬가지 일 거라 생각했다. 다음 곳도 마찬가지였다. 주점주인은 이안을 쳐다보려 하지도 않았다. 흠. 이안은 후줄근한 주점 카운터에 앉아 가게 내부를 둘러봤다. 후줄근한 건 이미 들어오면서 확인한 사항이니 두 번 확인할 필요도 없다. 고층거리의 주점인 만큼 손님은 전부 알콜 중독자였다. 코가 새빨간 사람들이 남녀 할 것 없이 손에 술잔을 들고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지금이 몇 시더라. 약간 출출해지는 것으로 보아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지는 모양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하는 것만은 피하려 할 것이 분명하다. 이안은 평범해서가 아니라 오늘은 더 이상 소득이 없으리라 판단하고 주점을 나섰다. 마시지도 않은 잔 옆에 약간의 팁을 놓아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층거리의 주점에서 팁을 주는 사람은 흔치 않았지만 어쨌거나 이안은 귀족으로 자라왔다. 이런 습관은 쉽게 버릴 수 없는 종류다. === 케이트는 앤이 일하는 식당에서 차를 한잔 대접받고 있었다. 아직 식사 시간 때가 아니라서 식당 안은 손님이 한 명도 없었던 덕분이었다. 하지만 요리사는 손님이 들어오기 전에 해야 할 준비라는 게 있다. 바쁘게 재료를 손질하는 앤과 대화하기 위해 식당의 홀이 아니라 주방 카운터에 기대서서 차를 마셔야 했다. “그 정도로 엉망이야?” “말도 마.”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며 차를 홀짝였다.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외관에 내부는 더더욱 가관이다. 이 층은 무너져 내릴까 봐 사용할 수 없다는 건 이미 설명한 터였다. 앤은 케이트의 모습에 심각한 표정으로 으깬 허브를 고깃덩어리 표면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엉망이면 다른 곳으로 가지, 그래? 굳이 그 남자 밑에서 일할 필요는 없잖아.” 그러게나 말이다. 사실 그녀도 모르겠다. 케이트의 시선이 찻잔으로 떨어졌다. “다른 곳으로 가도 되지.” “하지만?” 눈치 빠르게도 앤은 케이트의 말 뒤편에 숨겨진 의도를 알아차렸다.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지만 안 간다는 것. 케이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해.” “말해. 귀는 열려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앤의 손이 허브를 바른 고기를 실로 묶기 시작했다. “음, 우선은 난 어차피 내년 봄이면 여길 떠날 거거든.” “그거 마음 안 바꿨어?” 앤은 고기를 종이로 싼 뒤 숙성시키기 위해 한쪽에 치워두고 케이트를 쳐다봤다. 케이트는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이런. 그녀는 손을 허리에 올렸다. 이안과 큐바인 하우스라는 곳으로 거처를 옮긴다고 했을 때 수도를 떠날 생각을 접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 지금까지 잘 살아왔잖아. 수도를 떠나려는 이유가 뭔데?” “여긴 너무 번잡스러워.” 그렇긴 하다만. 앤은 다시 채소가 담긴 바구니를 잡아당기며 케이트를 설득하려 애썼다. “그래도 여기가 일자린 더 많잖아. 번잡스러운 것도 곧 익숙해지지 않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케이트는 다시 찻잔으로 시선을 떨어트리며 중얼거렸다. 수도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매일 아침 물을 길러 가지 않아도 되는 점은 좋다. 버터를 만들어 파는 가게가 있고 고기를 부위별로 손질해서 판매하는 가게가 따로 있는 것도 좋다. 하지만 사람들은 좋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남자들이 이렇게 쉽게 여자들에게 추파를 던진다는 걸 수도에 와서 알았다. 여자들의 텃세가 그렇게 무서울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녀가 조용하고 작은 마을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일했다는 것도 한몫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이러니라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가족 같은 분위기? 웃기고 있네. 그 가족 같은 분위기가 바로 알라나데일의 저택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있잖아.” 뜻밖의 고백에 앤의 고개가 휙 하고 돌아갔다. 그녀는 채소를 다듬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 남자? 이안? 지금 이안 때문에 수도를 떠나고 싶다는 거야? 왜?” “그게…,” “그 남자가 너한테 무슨 짓 했구나! 무슨 짓을 당한거야?” 생각도 못 한 격한 반응에 케이트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손을 저으며 강하게 부인했다.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어! 우린 그런 사이도 아니거든!”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지?” 못 믿겠다는 표정에 케이트는 거의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라니까. 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케이트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다시 채소를 다듬기 시작했다. “그런 사이도 아니라니까.” “그거야 네 생각이고.” 어쩌면 이안은 케이트에게 마음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렴풋이 그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안에 대한 마음이 식고 나서였다. 마음이 가라앉자 머리가 냉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를 좋아할 때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일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이 떠올랐다. 때때로 케이트를 쳐다보던 이안의 눈동자. 그건 아무 생각 없는 남자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면서 이안 때문에 수도를 떠나고 싶다는 건 무슨 소리야?” “그게,”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이안이 자신을 유혹하라 했던 일을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 이야기를 앤에게 해도 괜찮은 걸까. 구설수에 오르는 게 두려운 게 아니다. 지금은 아닌 것 같지만 앤은 예전에 이안을 좋아했었다.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자신을 유혹하라고 했다는 말을 한다면 분명 기분이 상할 것이다. 결국 그녀는 그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냥, 가끔 무서워.” “…이안이?” “응.” “왜?” 뭔가 거짓말을 하려던 케이트는 문득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안은 가끔 무섭다. 그건 알라나데일에서부터 느꼈던 감정이었다. 그는 때때로 흉포한 짐승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몬스터를 맞닥트렸을 때 이런 기분일까. “케이트?” 앤은 케이트가 한동안 말이 없자 채소를 다듬다 말고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케이트는 멍하니 서 있었다. 얘 좀 봐? 그녀는 케이트 눈앞에서 손가락을 퉁겼다. “이야기하다 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음, 아니.” 문득 케이트는 이안에 대한 느낌이 그녀만 느끼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저기, 앤. 너는 이안이 무섭지 않아?” “무섭냐고? 그야, 그 키에 그런 태도면 좀 무섭다는 느낌도 들긴 하지.” 아니, 아니다. 케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이안에 갖는 공포는 그런 종류가 아니다. 키나 태도 같은 게 위협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게 잡아먹힐 거라는 공포감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를 응시하노라면 케이트는 마치 그가 거대한 몬스터처럼 느껴지곤 했다. 잡아먹힐 거야. 갈가리 찢겨 버릴 거야. 그런 생각이 잠깐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이다. 케이트는 그 이야길 하려다 멈췄다. 아니, 됐다. 그녀만의 생각이라면 굳이 앤에게 털어놓을 필요는 없다. 그런 그녀에게 앤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럼 너는 이안이 무서운데 그 사람 집에서 일하는 거야? 왜?” 그러게. 케이트는 찻잔으로 시선을 떨어트리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무서운데 왜 나는 그의 집에서 일하는 걸까. ============================ 작품 후기 ============================ 우선, "드윈"을 제안해 주시고 사용 허가해 주신 팅탱님께 감사드립니다. 혹, 지난번 댓글에 적은 명칭을 사용하길 원치 않으시는 분께서는 해당 댓글을 삭제해주시거나, 이쪽에 원치 않는다고 댓글 달아주시면 사용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어, 그리고 후기 본문(?)으로 와서. 늦어서 죄송합니다. 일이 좀 있어서 밥도 못먹고 돌아다녔네요. 아아아 배고파. 내일도 일이 있어서 늦을것 같은데 어째야 할지 모르겠네요. 가능하면 맞출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대댓은 가능하면 해당 화의 댓글에 답니다. 후기에 다는 분도 계시는 모양인데 그러면 후기가 길어지잖아요? 조아라는 후기도 페이지수에 포함되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해당 화가 길다는 혼란을 드릴것 같아서 해당 화 댓글에 달고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어, 그리고 예에전에 구관이 너무 좋아서 알아보다가 도저히 관리가 안될것 같아서 돌플을 선택했는데, 요즘 또 구관이 탐나고 있습니다. 하...큰일났어요. 00085 3. 앙상한 손 =========================================================================                            흠. 앤은 채소를 다 다듬고 나자 손의 물기를 앞치마에 닦아내고 몸을 돌렸다. 케이트는 심각한 표정을 찻잔을 쳐다보고 있었다. 앤이 생각하기에 케이트가 이안의 집에서 일하는 건 그녀가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알라나데일에서도 그랬다. 사용인은 시키지 않는 일을 하지 않는다. 스스로 찾아서 일을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열심히 일하건, 누가 시키는 일만 하건 어차피 급료는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녀 장과 집사는 시시때때로 사용인들을 살피며 꼼꼼하게 일을 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케이트는 큐바인 하우스에서 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매일 복도를 청소하고 창문을 닦았다. 심지어 이안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자, 꾀를 쓴 게 고작 이틀에 한 번 꼴로 청소한다는 거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누군가 지적하기 전까지 전혀 치우지 않았을 것이다. 제인의 일만 해도 그랬다. 부리는 것과 일을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 후자 쪽이 훨씬 신경 쓰이고 시간도 많이 잡아먹는다. 심지어 케이트는 제인이 나중에 다른 집에 가서도 훌륭하게 일할 수 있도록 수선과 식사 시중 예절까지 가르치고 있었다. 글을 가르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안이 휴가는 줘?” “어?” 케이트는 느닷없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휴가? 그러고 보니 그녀는 휴가를 가진 적이 없다. 알라나데일에서 수도로 오는 기간이 휴가라면 휴가였을 것이다. “휴가를 받아. 너 휴가도 꽤 밀렸을 것 같은데.” 그럴까. 케이트는 다 식은 차를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휴가가 며칠이더라? === 제이드와 리코, 카이사는 고층거리의 유일한 주점에서 빠져나오는 이안을 발견했다. 이안 같은 남자는 잘못 볼 래야 잘못 볼 수가 없다. 세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더니 이안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어이, 이안!” 제이드의 외침에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세 남자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발을 멈췄다. “여긴 무슨 일이야?” 트집 잡으려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궁금해서다. 그들이 알기로 이안은 더이상 수사관이 아니다. 그러니 고층거리에 오는 이유가 수사관으로서의 업무 때문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안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비밀수사관으로 일하는 건 말 그대로 비밀이다. 다행히 그는 원래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고 남자들은 그의 그런 성향을 알고 있었다. “여기에 술을 마시러 온 건 아닐 테고.” 고층거리에 술을 마시러 올 정도로 바닥까지 떨어진 건 아니다. 이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기 전에 제이드가 끼어들었다. “도박장 사건이 어떻게 처리됐는지 궁금해서 찾아왔군?” 여전히 이안은 입을 열지 않았다. 수사관들은 그걸 자기 멋대로 긍정이라 받아들이고 떠들기 시작했다. “하긴 궁금하기도 하겠지.” “거의 처리 됐다. 보고서도 거의 작성했다.” “아, 보고서 작성! 진짜 짜증 난다고!” 이안이 보고서 작성은 잘했는데. 제이드가 투덜거리자 리코가 타박했다. 너 설마 그동안 전부 이안에게 맡긴 건 아니겠지? 이쯤 되자 이안도 궁금해졌다. 그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범인 중 한 명이 사라졌다고 하던데.” 세 남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들은 서로 눈치만 보더니 결국 제이드가 나섰다. “음. 그 녀석은 못 찾았어.” 그러더니 주변을 살피고 목소리를 낮춰서 말을 이었다. “우리는 배후가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건 찾을 방도가 없지.” 호건가 때문이다. 범인이 호건가와 어떤 연관이 있든 없던 상관없다. 호건가는 자신들을 들쑤시는 게 싫다는 것이다. 범인과 연관이 있다는 의심을 받아도 상관없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런 의심을 할 테면 어디 해보라는 태도가 무서울 정도로 건방지다. 귀족도 아니고 무인도 아니다. 감히 일개 상인이 그런 태도를 취한다면 귀족이 나서기도 전에 기사와 용병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나. 여기는 무인의 나라, 뮈엘라다. 하지만 기사와 용병은커녕 왕도 쉽게 명령을 내릴 수 없는 게 호건가다. 왕궁에서 기사에게 주는 급료보다 호건가가 고용한 용병의 급료가 더 많다는 건 이미 비밀도 아니었다. “이대로 끝나는 건가.” 이안의 말에 남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동시에 그들은 이안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이안이 수사관 자리를 내놓은 덕분에 수사관들의 피해가 작았다는 것을 세 명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희생을 했음에도 그들은 사건을 중간에 덮어버려야 했다. 마치 뽑은 검을 한 번 휘두르지도 않고 검집에 집어넣은 것처럼 기분이 찝찝했다. “미안하다.” 정적을 깨고 카이사가 입을 열었다. 이안은 무슨 말인지 몰라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하지만 카이사는 그게 자신을 생각해서 말을 아끼는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널 희생시켰어.” 뼈저리게 고통스러운 말에 리코와 제이드도 입을 다물었다. 이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다들 그를 희생시켰다고, 그가 희생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애초에 이안은 수사관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는 수사관에 맞는 성격도 아니다. 타인와 주변에 무관심하고 정의실현은 더더욱 관심 없다. 게다가 사건을 수사한건 그다. 그러니 그만둬야 한다면 그가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여기서 괜찮다고 말해야 하나. 이안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배고프지 않아?” 무거운 분위기를 깬 건 리코였다. 그는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저녁 먹으러 갈 건데, 너도 괜찮으면 같이 가지?” 아주 잠깐 이안은 집에 있는 케이트를 떠올렸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제인과 함께 있던 즐거운 듯한 모습이 이어졌다. “그러지.”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도 이안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케이트는 투덜거렸다. 저녁을 먹고 온다면 먹고 온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하지만 혼자 사는 사람이 사용인에게 갑자기 생긴 약속을 일부러 전달해주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이안이 미리 이야기를 했던 건 어머니인 실라에 대한 예의였다. 케이트는 그것까지는 몰랐다. 이상하게도 그가 다쳤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서 걱정되지 않자, 케이트는 이안의 식사로 앤의 식당에서 사온 구운 닭고기를 잘라 제인에게 내밀었다. “우리 주인 나리는 안 오실 모양이니 우리가 먹자.” “먹어도 돼요?” 큐바인 하우스의 식사는 괜찮다. 매일 가게에서 사온 빵과 치즈. 고기도 나온다. 어제는 심지어 과자도 얻어먹었다. 그래서 식사에 불만족스러운 점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건 그런 것과 완전 다르다. 아무리 훌륭한 식사라 해도 처음부터 사용인을 위해 준비된 식사와 주인을 위해 준비한 식사는 다른 것이다. 제인은 눈을 반짝이며 케이트가 내민 닭고기를 쳐다봤다. 바삭하게 구운 닭 껍질 위에 바른 오렌지 마멀레이드의 향이 군침을 돌게 했다. “내일 아침 식사는 따로 있으니까, 괜찮아.” 게다가 안 괜찮으면 어쩔 거냔 말이지. 흥하고 케이트는 삐딱하게 생각하며 자신의 몫으로 닭고기를 잘랐다. 앤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좀 여유를 가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끝내준다!” “맛있어요. 겠지.” 케이트의 주의에 제인은 입안 가득 음식물을 우물거리며 가르친 대로 다시 말하려 했다. 마시써여. “제인, 입안에 음식이 있을 땐 다 먹고 말하렴.” 제인은 성장기의 소년답게 꽤 많이 먹었다. 이안만큼은 아니지만. 케이트는 정신없이 먹는 제인의 모습에 놀라 자신의 몫을 양보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먹고 씹을 땐 소리 내지 말라는 주의도 잊지 않았다. 달그락거리며 식사를 하느라 케이트와 제인 둘 다 이안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큰 체구에도 불구하고 놀랄 정도로 소리 없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세 명의 수사관은 보고서 마무리를 해야 한다며 식사를 마치자 다시 수사관실로 돌아갔다. 이안은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 들어오다 부엌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부엌 한쪽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서 제인과 케이트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고기를 자를 땐 포크로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하면 편해.” 케이트의 손이 포크를 움켜쥔 제인의 손에 닿았다. 그녀는 소년에게 식사를 제공하면서 동시에 식사 예절도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이프로 이렇게,” 거기까지 말했을 때 이안이 한걸음 내디뎠다. 그는 케이트의 손을 낚아챘다. “헉!” 으악 하고 깜짝 놀란 제인이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가 잡힌 손 때문에 비틀거렸다. 그런 그녀의 허리를 잡으며 이안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거, 내 식사는 아니겠지?” 꿀꺽하고 제인이 음식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적어도 케이트는 이안에게 등을 돌리고 있어서 당황한 표정을 들키진 않았다. 그녀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말했다. “아닌데요.” 부엌 안에 정적이 흘렀다. 어으으. 제인은 케이트를 돕고 싶지만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이안이 케이트를 공격하는 거라면 지난번처럼 몸을 부딪쳐서 그녀를 놓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 집의 주인이었고 케이트는 하녀였다. 게다가 그런 것보다 제인의 눈에는 케이트가 이안에게 잡힌 걸 벗어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 그래.” 말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그걸 눈치챈 것은 케이트뿐이었다. 불길한 기분이 들어 그녀가 침을 삼켰을 때 이안이 케이트의 턱을 잡고 위로 휙 올렸다. “헉?” 턱이 들리면서 목이 꺾였다. 위를 향한 얼굴이, 눈동자가 이안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케이트의 머릿속에 과거, 이와 비슷한 상황이 떠올랐다. 그땐 손이 아니라 수건이었지만. 으아, 싫다고. 이놈아! 케이트가 발버둥 치기 시작하자 이안은 선뜻 그녀를 놓아 주었다. 덕분에 케이트의 몸이 비틀거렸다. 다시 한 번 이안이 손을 뻗었고 그녀는 이안의 품에 안겨 있었다. “뭐하는 거예요?” “넘어질 것 같아서 잡아준 거다.” 어라, 혹시. 제인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이안을 쳐다봤다. 저런 비슷한 태도를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본 적이 있다. “괜찮으니까 놔줘요.” 하지만 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그의 팔이 케이트의 허리와 등을 감은 채 고정되어 있자 케이트는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놔 달라니까요?” 이안의 시선이 제인에게 향했다. 소년은 움찔하고 뒤로 물러났다. 케이트가 알았다면 제인에게 겁주지 말라고 소리쳤을 테지만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건 이안의 가슴뿐이었다. “이안!” 주인님이나 도련님이 아니다. 그 말에 이안이 눈을 돌렸다. 경고가 담긴 시선이 드디어 거둬지자 제인은 숨을 헐떡였다. 긴장한 나머지 숨을 멈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안은 케이트를 놔주고 작은 의자에 앉더니 말했다. “가져와.” “뭐, 뭐를요?” “내 음식.” 이 남자가 미쳤나.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안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지금 이게 내 음식이 아니라면 내 음식은 따로 있을 테지. 그러니 가져와라.” 가져올 수 있을 리 없다. 이게 바로 이안의 음식이니까. 제인은 당장 먹은 걸 토해내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비명처럼 말했다. “저녁 안 먹었어요?” 어, 먹었어요가 아니라 드셨어요인데. 제인이 지적했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없었다. ============================ 작품 후기 ============================ 으음, 2부에서 너무 분위기도 어두워지고 케이트도 가라앉은 것 같아서 3부에선 좀 밝게 되돌려 보려고 밝은 씬을 많이 넣었는데 이러니까 사건하고 좀 동떨어진 느낌이 드네요. 수사냐 로맨스냐. 이 부분을 적절하게 배합하는게 가장 난제인 것 같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손이 많이 베이네요...왜 그러지? 음? 후기에 쓸 말이 별로 없네; 궁금한 점 있으면 기탄없이 남겨주세요. 00086 3. 앙상한 손 =========================================================================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훅하고 그 바람이 가로등을 꺼버리자 사위는 어스름해졌다. 가슴을 반쯤 드러낸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주변이 갑자기 어두워지자 어리둥절해서 몸을 돌리다 그대로 쿠당탕하고 넘어졌다. “에이, 씨발.” 주름진 입가가 거친 욕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움직였다. 진한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주름과 불그스름한 코가 여자를 더욱 추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애썼다. 손에 쥔 병에서 찰랑거리며 액체가 흔들렸다. 씨발, 씨발. 욕과 함께 지독한 악취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몇 번이고 발이 미끄러졌다. 밑창이 닳아빠진 구두가 비틀거리는 여자의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벗겨져 나가자 여자는 다시 쿠당탕 넘어졌다. “병신같은 구두가,” 그녀는 푸념처럼 욕을 내뱉으려다가 멈추고 대신 한숨을 내뱉었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가슴을 반쯤 드러낸 천박한 드레스와 패티코트 하나 없는 차림에도 술에 취한 여자는 추운 줄 몰랐다. 지친다. 살아있다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나 무겁고 힘든 것인 줄 몰랐다. 어린 시절에는 모든 것이 그녀를 향해 미소 짓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를 향하던 수많은 남자의 구애. 그 수 만큼이나 있었던 여자들의 질투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던 인생이 어느 순간부터 꼬이더니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남아있는 삶의 무게가, 내일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고민이 그녀의 등을 짓눌렀다. 이제 서른이 겨우 넘은 나이에도 그녀는 삶의 무게에 눌려 쉰처럼 보였다. 여자는 손에 든 술병을 그제야 눈치챘다는 듯 쳐다보더니 히쭉 웃었다. “요 녀석이 남아있었네.” 멀리서 싸움이 일어났는지 고약한 욕설이 공중에 두둥실 떠올랐지만, 여자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술병을 입에 대고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의 등 뒤로 검은 구두가 소리 없이 바닥을 밟았다. “크으.” 라벨로 없는 병이 그녀의 입에서 떨어졌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돈 주고 사지 않을 저급 주였지만 여자는 취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차라리 겨울이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거리에서 잠들었다가 얼어 죽을 수 있을 테니. 몸을 의탁할 곳도, 그녀의 죽음을 신경 쓸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살아있는 것은 죽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다 먹었잖아.” 술병이 비자 여자의 기분이 갑자기 나빠졌다. 그녀는 있는 힘껏 병을 집어 던졌다. 퍽하고 바닥에 부딪히며 병이 깨지자 그 소리에 어디선가 개가 놀랐는지 컹컹컹하고 짖기 시작했다. “시끄러워, 이 개새끼야!” 여자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개를 향해 욕을 퍼부었다. 캥! 깨갱! 마치 여자의 욕설에 채인 것처럼 개가 끙끙대더니 짖기를 멈췄다. 개 짖는 소리가 멈추자 여자는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깔깔거리더니 급기야 바닥을 뒹굴었다. 더러운 바닥에 몸을 굴리자 그렇지 않아도 더럽던 드레스가 완전히 엉망이 되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길바닥에 대자로 누운 채 하늘을 쳐다봤다. 고층거리는 얼기설기 얽힌 건물 탓에 하늘도 아주 조그마하게 보였다. “빌어먹을.” 드디어 검은 구두가 움직였다. 뚜벅뚜벅하고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여자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이 그녀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그 사람은 여자를 향해 몸을 기울이더니 씩 하고 웃었다. 얇은 입술이 마치 줄에 꿰어 끌어 올라가듯 곡선을 그리는 모습에 여자는 경계심도 잊고 그 얼굴을 쳐다봤다. “네 심장을 줘.” 거칠면서 쉰 목소리였다. 마치 노파 같기도 하고 어린아이 같기도 한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여자는 검은 후드를 쓴 사람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바보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뭐?” “네 심장을 줘. 당장.” 아무래도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고객이 좋은 거라고 하나 준 게 이상한 약이었던지. 여자는 눈을 비비다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미친놈이 어디서 지랄이야? 확 창자를 뽑아내기 전에 썩 꺼져!” 걸쭉한 욕에도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은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더니 다시 말했다. “네가 미워하는 놈을 죽여줄게. 대신 네 심장을 줘.” 술과 약에 절은 머리는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굳어있는 머리로 어리둥절해하는 여자를 향해 후드를 쓴 자는 다시 말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야. 내가 대신 죽여줄게. 그러니 네 심장을 줘.” 인간은 누구나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 그 말에 여자의 정신이 조금이나마 돌아왔다. 누구나 내가 이 꼴이 된 건 누구 때문이야.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여자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제일 먼저 떠오른 이름에 인상을 썼다. “정말로?” 그녀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자 후드를 쓴 자는 다시 씩 웃었다. “그래. 네 심장의 대가로 죽여줄게.” 흠. 나쁘지 않은 협상에 여자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어차피 망가진 인생이다. 내일 눈을 뜬다는 것 자체가 끔찍한 삶이다. 자신의 심장을 대가로 그 새끼를 죽일 수 있다면. 아니, 아니다. 여자의 눈이 희열로 차올랐다. “죽이는 방법 말고 다른 건 안 돼?” 혀 꼬부라진 소리가 술 냄새와 함께 흘러나왔다. “보통은 안 되지만, 너는 해주지.” “좋아, 그럼 내 심장을 줄게.”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무리 죽고 싶다 해도 막상 죽음이 다가오면 두렵기 마련이다. 여자가 긴장한 채 죽음을 기다리는 데 다시 거칠고 쉰 목소리가 그녀를 흔들었다. “이봐, 누굴 어떻게 해달라는지 말을 해야지.” 아 참. 여자는 눈을 뜨고 후드를 쓴 자에게 속삭였다. 말이 끝나자 후드 아래로 얇은 입술이 다시 호를 그렸다. 로브 소맷자락 안에서 앙상한 손이 빠져나왔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마치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 다섯 개가 축 처진 여자의 가슴에 닿았다. 술에 취해 추위를 느끼지 못하면서 여자는 손가락이 닿자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것이 천천히 여자의 가슴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피도, 상처도 없었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앙상한 손은 여자의 가슴에 들어가더니 뭔가를 찾는 것처럼 한번 안을 더듬었다. 곧 뭔가를 움켜쥔 것처럼 손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일련의 행위 동안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지난번 농부의 딸과 달리 여자는 아무 느낌도 느끼지 못했다. 심장이 빠져나온 다음에도 허전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가슴은 이미 텅 비어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 케이트가 이안에게 편지를 건넨 것은 그가 부랴부랴 꺼낸 쿠키와 파운드 케이크를 전부 먹어치운 다음의 일이었다. 이게 내 저녁 식사라고? 이안은 한마디 하려 했지만, 어차피 배가 불렀기 때문에 고기 같은 걸 먹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부엌 한쪽에 놓인 사용인용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 견과류가 든 파운드 케이크에 곁들여 나온 홍차를 홀짝이며 편지를 뜯었다. 의자는 사용인들이 휴식할 때 사용하는 종류기 때문에 이안이 앉기에는 튼튼하지도 편안하지도 않았다. “너도 더 먹을래?” 케이트는 제인에게 홍차를 따라주며 물었다. 쿠키가 아직 조금 남아있다. 소년은 이안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 온 건가요?” 제인에게 쿠키 한 접시를 더 갖다 주며 케이트가 물었다. 이안은 편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자연스럽게 제인이 먹고 있던 쿠키 접시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아니.” 어. 제인과 케이트 둘 다 입을 벌렸다. 제인은 자신의 쿠키에 이안이 손을 대서. 케이트는 이안에게도 초대장이라는 게 온다는 게 신기해서. “아, 그리고 전달해 주는 사람이 꼭 참석해 달라고 했어요. 그렇지?” 마지막 말은 제인을 향한 거였다. 소년은 이안이 세 번째 쿠키를 집어 들자 안 되겠다 싶어 양손에 쿠키를 잡고 먹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조용히 찻잔을 내밀었다. 케이트는 속으로 혀를 차며 찻잔을 채웠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긴 부엌이고 이안은 이 집의 주인이다. 어느 주인이 부엌에 와서 사용인들과 쿠키를 나눠 먹는 단 말인가. 그녀는 나중에 제인에게 이 상황이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안에게 물었다. “옷을 준비할까요?” “옷?” 이안은 고개를 들었다가 아아. 하고 편지로 시선을 던졌다. 작은 파티의 초대장이었다. 문제는 일반적인 초대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직접 쓴 편지였고 그 저택의 하인이 직접 가지고 왔다. 그건 드윈가에서 이안을 상당히 신경 썼다는 증거였다. 이안의 어머니인 실라와 드윈 남작부인은 꽤 친하다. 그러다 보니 아들의 일로 상심한 친구를 위해 이런 수고를 한 것이다. 일을 하는 귀족도 흔치 않은데 그 일을 잘리다시피 그만두고 집에서 나왔다. 그게 사교계에서는 이안이 로엔가에서 쫓겨났다고 보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엔 백작부인과 친한 드윈 남작부인은 이안을 자신의 파티에 초대함으로써 그가 아직 로엔가와 연이 끊어진 것이 아님을 알리려 한 것이다. 아마도 가야 할 것이다. 이안은 홍차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그는 별로 가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이런 초대에 응하지 않으면 실례의 문제가 아니라 실라의 얼굴에 먹칠하게 된다. “그래.” 이안의 말에 케이트는 초대장을 읽어보더니 다시 물었다. “무슨 옷으로 준비할까요?” 무슨 옷? 이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파티에 참석할 옷이며 야회복이면 된다. 그 외에 무슨 옷이 또 있단 말인가. 그는 케이트가 내민 초대장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가장 아랫단에 무심히 넘긴 한 줄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 가장무도회입니다. 가면을 꼭 착용해 주세요.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번주 내내 약속이 있어서... 아마 내일도 늦을것 같은데, 으음... 맞출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다음 화는 소제목이 바뀝니다. 무려 가장무도회. 무엇을 기대하든 실망시켜 드립니다. 하하하하 아참, 언급했나 기억 안나는데 뮈엘라의 수사관은 초기에 5부까지 설정 및 시놉이 완성된 이야기 입니다. 처음 구상은 3부로 시작하는 거였는데 이안과 케이트의 관계가 부족해서 1부와 2부를 추가해서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즉, 5부까지는 스토리가 다 짜여져 있고 두 사람의 관계와 나올 사람들, 어떻게 변할지가 다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한 부당 30회기준으로 계산했을 때 최소 150화까지 연재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흑흑... 5부가 끝은 아니기 때문에 6부에 대한 이야기도 현재 조금씩 구상하고 있으니 걱정마세요!! 00087 4. 가장무도회 =========================================================================                            가장무도회라면 굳이 이안이 참석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분장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이안이 드윈 남작부인의 파티에 초대되었다는 이야기뿐이다. 그런 이안의 생각을 정면으로 대응하고 나선 건 실라였다. 그녀는 편지를 통해 이안에게 피할 생각 말고 드윈 남작부인의 무도회에서 만나자는 말을 전해 왔다. 자신의 아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아주 잘 알고 있는 행동이었다. 케이트는 어머니의 편지를 읽고 이맛살을 찌푸리는 이안의 얼굴에 속으로 웃었다. 이 남자, 분장하는 걸 아주 싫어한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밤, 가장무도회라는 문구를 발견한 순간 얼굴이 딱딱하게 굳더니 옷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고소해라. 약간 들뜬 기분으로 케이트가 입을 열었다. “어떤 옷을 준비할까요?” 가장무도회라면 기존에 있는 옷을 입을 수 없다. 그럼 어서 빨리 사람을 불러 옷을 맞춰야 할 것이다. 타운 하우스에 있을 때, 케이트는 이안이 옷을 맞추기 위해 실라가 사람을 부르자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이 남자는 가장무도회도, 옷을 맞추는 것도 싫어하는 모양이다. 그것참 쌤통이다. 이안의 시선이 케이트에게로 향했다. 그 표정이 심각할 정도로 무서워서 케이트의 웃음이 쏙 들어갔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추려 애썼다. “기분 좋아 보이는 군.” 이안의 목소리는 기분 탓인지 음산하게 들렸다. 케이트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그럴 리가요.” 좋아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로 좋다. 하지만 지금의 이안 앞에서 그렇게 깐족댈 생각은 없었다. “너는 마녀로 분장하면 되겠군.” 응? 케이트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누가 마녀로 분장한다고?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마녀로 분장하려고요? 여장은 좀 더 힘들 텐데요.” 이안이 바보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나한테 한 말이야? 그제야 케이트는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남자 너무 싫어서 잠깐 미친 거 아냐? 하지만 훌륭한 하녀인 케이트는 정중하게 말했다. “뭔가 착각하셨나 본데, 초대받은 건 주인님이예요.” “상관없다.” “아니, 이건 상관없다는 문제가 아니라,” 드윈 남작부인이 초대하고 안 하고의 문제다. 하지만 이안은 상관없다는 투로 말했다. “내 파트너로 가면 된다.” 이안답지 않게 정론이라 한순간 케이트의 입이 막혔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가 왜 가요?” “내가 데려갈 테니까.” 네가 뭔데 나를 데려 가냐 마느냐고 소리치려던 케이트는 입을 다물었다. 이 남자는 진짜로 그녀를 데려갈 생각이다. “왜요? 날 꼭 데려가야 할 필요가 없잖아요.” “내가 필요해.” 이번에도 케이트의 입이 막혔다. 와, 이 남자 오늘 어디 아픈 거 아냐? 이상하게 너무 정론이라 오히려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머리를 흔들고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넌 내 하녀잖아. 내가 필요하면 거기 있어야지.” “그건 이 집 안에서만이라고요. 집 밖에서도 내가 그래야 할 이유가 어디 있어요?” “넌 이 집을 나가면 하녀가 아니게 되나?” 이번에도 케이트의 입이 막혔다. 이상하게 이안의 논리는 어딘가 중요한 게 어긋나 있는 것 같은데 그걸 모르겠다. “하, 하녀의 일에 주인의 파티를 따라가는 건 포함 안 되어 있거든요?” “수표 써.” “이, 이 미….” 다행히 그 뒷말은 이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쳐다봤기 때문에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케이트는 새빨개진 얼굴로 입을 가렸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싫어요! 전 안 가요!” “상관없다.” 그는 케이트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넌 그대로 있어. 가면만 쓰면 다들 하녀분장이라고 생각할 테니.” 이 미친놈이! 결국 이안과의 말싸움은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케이트는 쿵쾅거리며 응접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안은 오늘 아침에 전달된 새로운 편지를 집어 들었다. 수신인도 없는 편지 봉투에는 이안 로엔이라는 이름만 달랑 쓰여 있었다. 최소한 케이트를 가장무도회에 데려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이안은 종이나이프를 꺼내 편지 봉투를 뜯었다. “누나 어디 가요?” 부엌에서 은 식기를 닦고 있던 제인은 케이트가 쿵쾅거리며 걸어 들어오자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녀가 워낙 큰소리를 친 탓에 부엌까지 들렸던 것이다. “안 가.” 케이트는 한쪽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진짜 그녀를 데려갈 생각은 없을 것이다. 아니, 그건 모르는 일이다. 무도회가 싫은 건 아니다. 그것도 가장무도회라니, 소설 속에서나 읽었던 것 아닌가. 문제는 그게 귀족들의 가장무도회라는 점이다. 귀족의 가장무도회에 이안의 파트너로 참가한다는 건 생각도 안 해봤다. 아니, 생각을 안 해 본 건 문제가 아니다. 귀족들의 무도회에 하녀가 참가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케이트는 상상을 하긴 해도 현실적인 성격이었고 말도 안 되는 걸 선망할 정도로 어리지도 않았다. 정말 데려갈 생각은 아니겠지? 케이트는 은 식기를 반짝반짝 빛나도록 닦는 제인을 보며 우울하게 생각했다. === 로웨나 벨링스는 마차 안에서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랗게 빨갛게 물든 가로수 밑으로 바싹 말라버린 나뭇잎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건물 밑으로는 사람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낙엽 같네.” 로웨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바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 뭐라고 호객을 하는 상인과 제복을 집은 하인들. 허리에 찬 무기를 으스대듯 흔들며 지나가는 전사들. 그 모든 사람이 그녀의 눈에는 마치 굴러다니는 낙엽처럼 보였다. “뭐라고 했니?” 맞은 편에 앉은 벨링스 자작이 딸의 혼잣말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불그스름한 얼굴에 건장한 체격의 자작은 혼기가 꽉 찬 딸이 있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건재해 보였다. “아무것도요.” 로웨나는 딴생각하던 것을 접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마차는 시내를 통과해 한가한 주거구역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 십 분 정도면 그녀와 약혼할 남자의 집에 도착할 것이다. 굳이 약혼할 남자라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여성스러운 마음에 그녀는 거울을 꺼내 화장을 살폈다. 마차를 타느라 흔들리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몇 가닥 삐져나와 있었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정리하자 마차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주거구역에 접어든 모양이었다. 창밖으로 심부름을 위해서인지 사용인이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꽃 사세요.” 창문을 통해 여자가 말을 걸었다. 로웨나는 깜짝 놀라 몸을 젖혔다. 이 여자, 어디서 나타났지? “꽃 사세요.”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꽃 파는 여자다. 보통은 시내에서 판매를 하지만 저택을 돌아다니며 사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그녀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꽃 파는 여자는 마차를 따라오며 간절하게 말했다. “조금만 사 주세요, 아가씨.” 마차의 속도가 느린 탓이다. 저런 여자가 따라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몰아서야 어쩌란 말인가. 로웨나는 여기가 주거구역이라는 것도 잊고 마차 속도를 높이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벨링스 자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잠깐 세우게. 마차 천장을 검집으로 툭 치자 마부는 재빨리 마차를 멈췄다. 꽃 파는 여자가 부랴부랴 마차 창문에 매달리며 사정했다. “한 송이만 사 주세요, 인자하신 신사님.” 신사는 무슨, 웃기고 있네. 로웨나가 콧방귀를 뀌거나 말거나 벨링스 자작은 품에서 동전을 한 닢 내밀었다. 꽃 파는 여자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기, 아름다운 아가씨를 닮은 장미꽃을 드릴게요.” 꽃 파는 여자의 손이 장미 꽃 몇 송이를 골라잡더니 창문 안으로 내밀었다. 벨링스 자작은 딸에게 너그러운 목소리로 일렀다. “받아들렴, 스위티.” 그녀는 그 스위티라고 부르는 게 너무 싫었다. 약혼자가 될 남자를 만나기 전에 침착한 마음을 유지하고 싶었는데 다 어그러졌다. 로웨나는 애꿎은 꽃 파는 여자를 노려보며 꽃을 낚아채듯 받아들었다. 따끔하고 장미 가시가 손바닥을 찔렀다. “아야!” 재수가 없으려니까. 그녀는 아버지를 한 번 노려보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느새 꽃 파는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 뮈엘라의 수도 에바니엘은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 도시다. 사람이 많은 수도라는 점도 한몫했지만, 무인의 나라라는 점이 더 컸다. 전사를 우대하는 나라. 그 점은 무기를 다루는 자들을 끌어들였다. 모여든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끌어모으기 마련이다. 실력 있는 전사가 많다는 소문에 실력을 확인하고 싶은 전사가 또 모여들었다. 길거리에는 네 명에 한 명꼴로 무기를 다루는 자가 돌아다녔다. 그들은 지는 것을 싫어했고 사소한 언쟁에도 무기를 뽑아들었다. 뽑힌 무기는 뭐라도 잘라야 집 안으로 들어갔다. 피해자를 줄이기 위해 거리마다 치안관이 삼삼오오 돌아다녔지만, 골목 구석에서 벌어지는 싸움까지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뮈엘라의 사람들은 시체나 전투에 대해 비교적 공포심이 적었다. 시체를 발견하는 건 무서운 일이고 비전투원은 전투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디서 싸움이 일어났다고 해서 필요 이상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뮈엘라의 수도에서 사람들의 공포심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늦은 밤에 돌아다니지 않으려 애썼고 문을 닫아걸었다. 그냥 일반 시체였다면 이런 반응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고작 시체 세 구에 이 정도로 반응하게 된 건 어느 순간 시체의 안에 장기가 없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악한 마녀가 나타났다. 소문은 어린아이들로부터 시작했다. 너, 엄마 말 안 들으면 사악한 마녀가 널 잡아간다. 이렇게 시작되던 협박이 네 배를 가르고 장기를 꺼내 간다라는 식으로 구체적이면서 잔인하게 변화되었다. “누나, 내장이 뭐예요?” “내장?” 케이트는 방금 도착한 이안의 옷을 살피다 제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소년은 주인의 부츠를 닦고 있었다. “음, 몸속에 있는 걸 말하는 거야.” “예를 들면 심장 같은 거요?” 제인은 자신이 아는 유일한 장기 이름을 대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심장.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커다란 셔츠의 상태를 살폈다. 박음질도 괜찮고 얼룩도 없다. “그런데 그건 왜?” “테론이 그러는데요, 아, 우유 배달하는 애요.” 응, 알아. 케이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인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녀가 사람들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가져간대요.” “뭐?” 아이들의 상상력이란 대단하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제인은 진지했다. “진짜예요. 테론의 형이 마녀한테 잡힐 뻔했대요. 긴 손톱으로 배를 찌르려는 걸 뿌리치고 도망쳐 왔대요. 그 후로 테론의 형을 노리는 마녀가 밤중에 게네 방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대요.” 일단 형을 노리는데 왜 방 창문을 두드리는지는 둘째 치고 긴 손톱으로 배를 찌르려는 걸 뿌리쳤다는 점에서 케이트는 테론의 형이 동생을 놀리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 방 창문을 어떻게 두드리는데?” “누가 툭 툭 하고 치는 소리가 나서 창문을 열어보면 아무것도 없대요.” “테론의 방은 일 층이고?” “아뇨, 다락방이요. 게넨 형제가 많아서 남자애들은 다락방에서 잔대요.” “다락방은 높겠네.” “네. 그래서 테론네 형은 그게 마녀가 하늘을 날아와서 손톱으로 치는 거라고 했대요.” 거기까지 말한 제인은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테론네 집은 여기서 머니까 그 마녀가 여기까진 안 날아오겠죠?” 하하하. 하마터면 케이트는 소리 내서 웃을 뻔했다. 그녀는 웃음을 꾹 참고 말했다. “테론에게 전해 주렴. 다음에 또 누가 창문을 두드리면 창문 밑으로 물을 뿌리라고 말야.” “네? 왜요?” 그야 테론네 형이 동생을 골리기 위해 돌을 던지는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케이트는 거기까진 말하지 않고 시치미를 뚝 뗐다. “마녀를 쫓을 수 있거든. 냄새가 심한 것일수록 좋아. 네 친구 테론은 요강을 쓰니?” 네.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그 안에 있는 걸 뿌리라고 전해주렴.” ============================ 작품 후기 ============================ 어,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번주 내내 이러네요...흑흑... 다음주는 상황이 좀 나아져서 괜찮아 질듯도 합니다. 우선, "로웨나"를 지어주신 ChristmasEVE님과 "벨링스"를 지어주신 페페로이님, "테론"을 지어주신 팅탱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수도이름으로 "에바니엘"을 선택하였습니다. 만들어 주신 검은깨두우님께 감사드립니다. 다른 이름도 아마 지명이나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할 예정입니다. 불편하거나 우너치 않으시는 분께서는 댓글 달아주시면 사용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름 지어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 00088 4. 가장무도회 =========================================================================                            “말 좀 묻지.” 넓은 가게 내부 안으로 화려한 차림의 남자가 들어왔다. 은색과 청색의 체크무늬 모직과 그 안에 받쳐 입은 셔츠를 본 귀금속점 비에르쥬의 주인 탈린은 단번에 옷이 고급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원단 자체가 꽤 고급이다. 이거, 좋은 손님이 오셨군.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띤 그가 가게 안에 가장 비싼 보석이 뭔지 떠올렸을 때였다. “이 목걸이를 만든 사람을 찾고 있네.” 탈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젠장. 안 살 거면 꺼져. 그런 의미를 말을 주워 삼키려던 그는 남자가 내민 목걸이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자의 옷차림보다 훨씬 고급이다. 금으로 된 사슬과 커다란 펜던트 주변을 감싸듯 박혀있는 보석 하나하나가 다 상당한 값어치를 하는 물건이었다. “수리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렇다고 하면 자신이 수리하겠다고 해서 보석을 다른 걸로 바꿔치기할 생각에 탈린의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까지 그는 그런 식으로 고객의 보석을 빼돌린 적이 있다. 하지만 남자는 이번에도 그의 계획을 도와주지 않았다. “아니, 그럴 일이 있어서 묻는 거네.” 젠장. 결국 목걸이의 보석을 빼돌릴 기회는 그에게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탈린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탈린이 관심 없다는 태도를 취했지만, 제이드는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목걸이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목걸이를 만든 사람을 찾아다닌 지 며칠 째다. 목걸이가 최소한 이십 년 전에 만들어졌을 테니 만든 사람도 지금쯤 상당히 나이를 먹었을 것이다. 어쩌면 벌써 죽었을 수도 있고 은퇴해서 다른 지방으로 내려갔을 수도 있다. 그는 이럴 때를 위해 준비한 종이를 동전 한 닢과 함께 내밀며 말했다. “혹시라도 목걸이의 그림을 보고 알아보는 자가 있다면 내게 알려주게. 킬리언 포목점으로 연락해주면 되네.” 동전을 받는 순간 탈린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빛났지만, 그는 곧 목걸이가 그려진 그림을 품속에 아무렇게나 집어넣었다. 이 남자가 연락할 일은 없겠군. 제이드는 속으로 혀를 차며 비에르쥬를 빠져나왔다. === 이안의 가장무도회를 위한 의상은 타운하우스의 로엔 백작 부인이 지어서 보냈기 때문에 케이트가 신경 쓸 일은 없었다. 백작 부인은 단골 가게에서 이안의 치수를 가지고 있으니 따로 잴 필요 없이 그걸로 만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케이트를 데려가겠다고 처음 말한 이후로 더이상 가장무도회에 대한 언급은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거의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케이트. 이거 어떤 여자가 전해주라는데요.”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갔다 온 제인이 케이트에게 꾸러미를 내밀었다. 누가? 꾸러미는 크기에 비해 가벼웠다. 이게 뭐지? 포장지에 무슨 상표가 찍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상표를 자세히 쳐다봤다. 이게 무슨 그림이지? 어떻게 보면 유니콘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꽃을 든 소녀 같기도 했다. “내 거 맞아?” “네. 그리고 그 사람이 들어가도 되는지 물어보래요.” “뭐?” 그럼 가져온 사람이 밖에 있단 말야? 케이트는 깜짝 놀라 꾸러미를 든 채 현관으로 향했다.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그렇게 말하자 제인은 죄송해요.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아마 향기가 나는 예쁜 포장지에 쌓인 꾸러미인 데다가 큐바인 하우스에서 사용인에게 처음으로 온 소포라 흥분한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케이트는 서둘러 사과를 하며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화려하게 빛나는 금발을 풍성하게 부풀린 거무스름한 피부의 여자가 서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이름이 무슨 향신료였는데. 케이트가 이름을 묻는 실례를 저지르기 전에 시나몬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기억나죠? 시나몬이예요.” 그래 기억난다. 케이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나몬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들어가도 될까요?” “아, 지금 주인이 안 계신대요.” “어머, 그래요?” 아쉬워라. 시나몬의 눈동자가 저택 외관을 훑었다. 멋지다. 이렇게나 망가진 집이 남아있을 수 있다니. 그녀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손을 모아 잡았다. “혹시 안을 구경할 수 없을까요?” 이렇게 훌륭한 폐가의 안도 궁금하거든요. 그런 말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들어갔다.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다 통하는 애교다. 손을 모아 잡고 눈을 반짝이는 포즈.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풍성한 레이스가 겹겹이 달린 소매 밖으로 쑥 빠져나온 가느다란 손목이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여기는 그녀의 집이 아니다. 주인 허락도 없이 손님을 들여보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죄송해요.” 케이트의 거절에 시나몬은 에이. 하고 손을 풀었다. 괜히 애교를 부렸다.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허리에 얹더니 당당하게 물었다. “그럼, 이것만 알려줘요.” 주인의 나이가 적은지 많은지를 물으려 할 때였다. 로즈가 봤다면 깜짝 놀라 말렸을 정도로 심각한 실례를 저지르기 전에 그녀의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 시나몬은 케이트가 자세를 바로 하자 자신의 뒤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큐바인 하우스의 주인이렷다! 신이 난 그녀가 몸을 돌렸을 때 보인 건 적어도 여자는 아니었다. 시꺼멓고 큰 남자였다. “뭐지?” 목소리는 낮고 무뚝뚝했다. 에이, 정부가 아니었네. 그렇게 생각하려던 시나몬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눈을 빛냈다. 이 남자가 이 집의 주인이라는 보장은 없다. 남자도 정부일 수 있지만, 시나몬은 로즈와 한 내기를 기반으로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아, 저, 시나몬…,” 거기까지 말한 케이트는 자신이 시나몬의 성도, 결혼 유무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가 시나몬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을 때 이안은 시나몬을 무시하고 지나쳐 케이트에게 다가가더니 말했다. “내 건가?” 사람이 아니라 케이트의 손에 들린 꾸러미를 말하는 거였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시나몬과 케이트의 눈동자가 같은 의미로 동그래졌다. “아, 그거라면.” 시나몬이 설명하려 했지만 듣지 않고 이안은 케이트의 손에서 꾸러미를 잡아들었다. 그는 마치 시나몬이 이 자리에 없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케이트가 꾸러미를 뺏기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찌익 하고 포장이 찢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찢어진 틈으로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 거 거든요!” 아, 그래? 이안은 케이트의 말에 손을 놓더니 그제야 시나몬을 쳐다봤다. 시나몬은 휘둥그레한 눈으로 이안과 케이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 하녀와 주인이 아니었다. 주인에게 저렇게 건방지게 말하는 하녀는 없다. 어쩌면 이 집의 하인일지도 모른다. 저런 하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케이트의 태도는 시나몬의 생각을 더욱 그녀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 그녀를 그제야 아는 척하며 이안이 물었다. “이 여자는 누구지?” 두 사람을 소개하는 걸 잊었다. 케이트는 시나몬에게 이안을 소개하려 했다. “아, 이분은,” 이안의 시선이 케이트의 손안으로 돌아갔다. 틈 사이로 보이는 레이스와 망사에 이안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무도회에 이걸 입고 갈 생각인가?” “네?” 틈 사이로 보이는 건 여성용 스타킹이었다. 검은색과 흰색 두 가지로 전부 상당히 고급스러운 제품이었다. 한눈에 좋은 제품이라는 걸 알아본 케이트와 달리 이안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무슨 분장이길래 이것만 입는 거지?” 이 남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케이트는 잠시 이안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분장? 무도회? 한참 후에야 그녀는 이안이 가장무도회를 말하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무도회 말하는 거예요?” 비명 같은 케이트의 목소리에 제인도 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이예요? 그렇게 고개를 내민 소년은 이안의 모습에 엇하고 얼어붙었다. “가장무도회?” 제일 먼저 반응한 건 시나몬이었다. 가장무도회가 열린단 말야? 그녀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설마 이 집에서 가장무도회를 여는 거에요?” “어? 이 집에서 파티가 열려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래서 설명이란 중요한 거다. 케이트는 딴소리를 하고 있는 세 사람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제인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아니야, 제인. 우리는 파티를 열지 않아. 시나몬, 그러니까,” “그냥 시나몬이예요.” 정말? 성도 없이 그냥 시나몬이라는 말인가? 케이트의 입이 한번 열렸다가 닫혔다. 에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녀는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시나몬양. 이 집은 파티를 열지 않아요. 그리고 이, 아니, 주인님.” 이안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케이트는 그런 그에게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가장무도회는 혼자 가세요. 이상.” 순식간에 상황을 종료한 그녀는 제인에게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이안과 시나몬은 끝난 게 아니었다. 제일 먼저 풍성한 금발을 흔들며 시나몬이 말했다. “잠깐, 이 집의 주인이 남자예요?” 아, 그렇군. 케이트는 이제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 것 같아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가장 중요한 걸 잊었다. 소개하다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이안을 가리키며 시나몬에게 말했다. “큐바인 하우스의 주인인 이안 로엔경이세요. 이분은 아래쪽에 사시는 시나몬, 그, 양이고요.” “젠장.” 내기는 무효잖아. 저도 모르게 내뱉은 단어에 케이트는 물론 시나몬도 놀랐다. 그녀는 케이트와 이안을 향해 어머, 호호호. 하고 웃으며 변명을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라, 이 집 이름 때문에 당연히 주인이 여자인줄 알았거든요.” “이 집의 이름이요?” 케이트의 질문에 대답한 건 이안이었다. 그는 무심하게 말했다. “큐바인 하우스. 컨큐바인 하우스에서 바뀐 이름이다. 이 거리의 원래 이름이기도 하지.” 컨큐바인? 케이트의 얼굴은 약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당황으로 물들었다. 첩, 정부를 이르는 말이다. “왜, 왜 그런 이름을?” 당황하는 그녀를 보며 이안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 날 낳아준 어머니에게 주려고 세운 집이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오늘 폭설이었는데 무사히 집에 돌아오셨나요? 저는 며칠전 부터 목이 아프던데 속이 미슥거리고 어지러우며 목이 아프고 기침을 합니다. 훌륭한 몸살 감기입니다. 비축분이 몇 화 없으므로 이번주 안에 안나으면 다음주까지 아플 경우 하루이틀정도 쉬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얼른 이불속에 들어가서 미드나 좀 보다가 자야겠습니다. 오늘 귀금속점 이름으로 사용한 "비에르쥬"를 지어주신 페페로이님과 귀금속점의 사장인 "탈린"을 지어주신 "소노빈"님께 감사드립니다. 00089 4. 가장무도회 =========================================================================                            이안이 실라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케이트는 이안이 그 사실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했기 때문에 당황했다. 그녀는 큐바인 하우스가 그런 집이라는 것도, 이안이 너무 쉽게 자신의 친모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것도 당황스러웠다. 사실 큐바인 하우스라는 건 누군가가 이름을 지은 게 아니다. 그냥 정부와 첩이 사는 동네다 보니 사람들이 뭉뚱그려 컨큐바인 거리, 그녀들이 사는 집을 낮춰서 컨큐바인 하우스라 부르던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큐바인 거리와 큐바인 하우스로 바뀐 것이다. 시나몬은 케이트가 당황하자 덩달아 당황했다. 있어서는 안 될 장소에 와있다는 건 알겠다. 두 여자 사이에서 유일하게 침착한 이안은 시나몬을 보면서 말했다. “이 집의 주인은 나다.”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이야기다. 그 기세에 시나몬은 내기가 무효가 됐다고 투덜거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지는 것보다 더 싫은 건 내기가 무효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안의 입에서 나온 당황스러운 말은 시나몬이라 해도 투덜거리기 힘들었다. “음, 전 그만 가볼게요.” “아, 시나몬양. 고마워요.” 시나몬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케이트는 꾸러미를 들어 보였다. 틈 사이로 스타킹의 밴드 부분이 드러났다. “어, 네. 다음에 놀러 올게요.” 진심일지 모르겠다. 이안의 시선이 케이트에게로 향했다. 그는 그녀의 손에 든 꾸러미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무도회엔 그 차림으로 가는 건가?”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케이트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이안을 쳐다봤다. 방금 혼자 가라고 한 말은 어느 구멍으로 들었단 말인가. 그녀는 꾸러미를 흔들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난 안가요.” 하지만 이안은 안 간다는 대답은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파티는 딱 질색이었고 춤을 춰야 하는 무도회는 더더욱 싫었다. 거기에 가면까지 쓰고 있으라고?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상관없다.” 뭐가 상관없다는 건지 몰라서 어리둥절해하는 케이트를 뒤로 하고 이안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무도회는 오늘 저녁이다. 그리고 그가 기억할 수 있는 건 어제오늘에 걸쳐 타운 하우스에서 실라가 잊지 말라는 전언을 보냈기 때문이고. 제인은 이안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안이 옷 갈아입는 걸 돕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소년이 받아 들기 전에 재킷을 침대에 던지며 말했다. “필요 없어.” 드윈 남작부인의 집은 무도회를 열기에 적당했다. 상당히 유서 깊은 집안인 드윈 가는 수도 에바니엘에 귀족 주거지가 조성되던 초기에 저택을 지었기 때문에 주거지 외곽에 위치해 있었고, 저택을 지을 때만 해도 상당히 부유했기 때문이 지금은 낡았지만 크기는 본가의 저택과 비교해도 격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데려왔어야 했어.” 실라의 한숨이 섞인 푸념에 아르고는 그녀의 팔꿈치를 잡아 소파로 안내하며 말했다. “이안도 어린아이가 아니잖아요. 알아서 온다고 했으니 오겠죠.” “그애가 무도회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잖니.” 잘 안다. 하지만 아르고는 맞장구를 치기보다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기로 결심했다. “어쨌든 온다고 했으니까요. 자기가 한 말은 지키는 녀석이잖아요.” “그걸 자기 나름대로 지킨다는 게 문제지.” 역시 이안의 어머니답게 아들을 잘 파악하고 있다. 실라는 이안이 무도회가 끝나갈 시간이 돼서야 어슬렁어슬렁 걸어들어올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아르고의 생각으로도 이안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그는 어머니를 위해 지나가는 하인에게서 음료수를 건네받았다. 실라는 최근 상태가 조금 나아진 덕분에 가장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었지만 역시 오래 서 있으면 지친다. 드윈 남작부인의 배려였는지 무도회장 안에는 여기저기 쉴 수 있는 의자가 많았다. 앉아있는 사람이 많으면 무도회 분위기가 가라앉기 때문에 의자를 그다지 놓아두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리면 이건 확실히 드윈 남작 부인의 배려가 맞다. 갑자기 사람들의 소리가 멈췄다. 가장무도회라는 특성상 몰래 숨어들어온 사람도 있어서인지 무도회장 안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많으니 이야기하는 소리가 끊어질 리가 없다. 그런데 지금은 잠깐 소근 대는 소리를 제외하고 다들 조용했다. 아르고는 이안이 도착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의 동생은 그런 능력이 있다. 어느 공간에 들어가는 순간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행동을 멈추고 쳐다보게 만드는 능력. “어머니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입니다.” 실라가 일어서서 현관 쪽을 쳐다보자 아니나 다를까 남들보다 머리 하나쯤 큰 남자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누구야? 누구지? 사람들의 수근 거림이 시작되자 실라는 뿌듯해졌다. 내가 낳은 아들은 아니지만 참 잘 컸다. 아르고도 마찬가지지만. 문득 자신의 배로 낳은 큰 아들을 잊었다는 게 미안해서 그녀는 아르고의 손을 잡고 생긋 웃었다. 코 위로 가리는 반 가면을 쓴 덕에 아르고의 눈에도 그녀가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아가씨, 그건 규칙 위반 아닌가요?” 큐바인 거리에서 로즈가 시나몬에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시나몬은 득이 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어쨌거나 내가 이겼잖아. 자, 돈 내놔.” “어휴,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그 하녀는 무도회에 안 갔을 수도 있다고요.” “어쨌든 갔잖아.” 내, 다신 시나몬 아가씨와 내기를 하나 봐라. 로즈는 지갑을 열어 동전을 꺼냈다. 말도 없이 큐바인 하우스에 다녀온 시나몬이 그 집 하녀가 가장무도회에 간다고 하기에 말도 안 된다고 코웃음 친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그녀는 그럴 리 없다고 했고, 시나몬은 당연하게도 내기를 하자고 했다. 어디 하녀가 귀족나리의 파트너로 무도회를 간단 말인가. 아무리 가장무도회라 해도 하녀라면 복장도 없을 것이 분명하다. 라는 게 로즈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대가 내기에 이기기 위해서라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옷을 빌려줄 정도로 열중하는 시나몬이라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공연 의상을 빌려줘요?” “뭐 어때. 어디 사는지도 알겠다, 돌려받으면 되지.” 미치겠네. 이 주인님을 어찌해야 하지? 로즈가 그런 생각에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다른 곳에도 그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하녀가 있었다. 케이트는 옷자락에 발이 걸리는 바람에 비틀거리다가 단단한 손이 붙잡자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꽂히는 게 불안했다. 당장 누군가 한 명이 저 여자는 하녀라고 소리칠 것 같았다. 알아보지 못할 거라는 건 그녀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실라와 아르고는 이안의 모습에 입을 딱 벌렸다. 체격과 키는 이안이 맞다. 하지만 이렇게 분장해 두니 실라도 아들을 못 알아 볼 정도였다. 거기에 옆에 같이 걸어 들어오는 여자까지 있으니 이건 무슨, “…해적?” “어, 어머.” 실라 조차도 말을 잃었다. 저게 왜 해적 의상으로 보이지? 그녀는 몇 번이나 이안이 입은 의상을 확인했지만 그녀가 보내준 게 맞았다. “어머니, 해적 의상을 보내신 거예요?” “아니야, 내가 보낸 건 네 라이벌 의상이었어.” “라이벌이요?” 아르고는 어이가 없어서 다시 말을 잃었다. 라이벌 의상은 뭐지? 라이벌 의상이라는 게 따로 있어? 그는 새삼 자신의 복장을 내려다 봤다. 푸른색 계통의 기사복은 뮈엘라의 기사복과는 디자인이 달랐다. 그 역시 실라가 만들어서 입으라고 건내 준 것이다. 그런 아들의 생각을 읽은 듯 실라가 그의 손등을 토닥거리며 다시 말했다. “바다의 바람이라는 연극에, 아, 원작은 소설이거든. 거기에 남자가 두 명 나오는데 하나는 책임감 강한 기사고 하나는 자유로운 바람둥이란다. 바람둥이라도 굉장히 멋진 바람둥이거든. 극 중에 나오는 여자를 전부 유혹하는 그런 남자란다.” 일단 그런 남자의 이미지가 이안과 맞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왜 그런 남자의 의상을 이안에게 만들어 준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실라는 부끄럽다는 듯 덧붙였다. “이안하고 정반대니까 분장 효과가 좋을 거라 생각했거든.” 그런 생각이라면 성공이다. 아르고는 새삼 이안의 모습을 다시 봤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실례한다는 말도 없이 지나오고 있었다. 그의 옆에 따라오던 여성이 비틀거리자 재빨리 손을 내미는 모습은 낯설기까지 하다. 금발에 눈만 가리는 하얀 반가면. 잠근 것보다 풀어둔 게 더 많은 단추가 달린 하얀 셔츠와 감색의 바지. 셔츠 사이로 보이는 그의 맨가슴에 여자들의 눈이 돌아가는 게 보였다. 대놓고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부인들을 보고 아르고는 이안이 해적으로 보이는 게 그의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옆에 따라오는 여성도 한몫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여성분은 누구죠?” “모르겠는데. 저런 여자가 이안 주변에 있었나?” 여자? 순간 실라와 아르고의 머릿속에 이안 곁에 있는 유일한 여성이 떠올랐다. 빨간 머리의 예쁘장한 하녀. 하지만 지금 저 여자는 검은 머리에…, “설마.” 아르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안도 금발가발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그 하녀가 검은 머리 가발을 사용하지 못할 건 없다. 문제는 어디서 저런 의상을 구해왔느냐는 것이다. 케이트는 마치 이국의 공주처럼 보였다. 넓은 소매와 가슴 바로 아래에서 묶은 띠. 그 밑으로 쏟아지는 것처럼 퍼지는 치맛자락.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렸다. 저 의상을 어디서 봤더라. 지나가는 이안과 케이트를 본 사람들은 저마다 어디선가 본 의상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 이국의 공주를 납치한 해적, 아니 이안이 실라에게 와서 말을 건넸다. 옆에 선 케이트는 정말 해적에게 납치당한 것처럼 보였다. 사실 끌려오다시피 왔으니 틀린 비유는 아니다. “왔구나.” 실라는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선이 케이트에게로 향했다. 아르고의 시선도 마찬가지라 케이트의 고개가 숙였다. 당장에라도 넌 하녀가 여길 왜 왔니. 라고 할 것 같았다. “동반한 사람은 음, 그러니까, 케이트, 맞지?” “죄송합니다.” 실라는 대뜸 사과부터 하는 케이트의 태도에 당황해서 손을 내밀었다. “아니, 난 그냥 물어본거야.” 어디서 구한 걸까. 케이트의 의상은 빌린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입기엔 조금 크다. 소매도, 치맛자락도 길었다. 하지만 이국적인 의상이다 보니 그게 흠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억지로 끌려 온데다 겁을 먹은 케이트의 기분 탓에 처량하고 가련하게 보였다. “내가 원한 건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다소 실망하는 실라의 태도에 아르고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는 슬그머니 몸을 돌리고 웃었다. 건방지고 경직된 태도의 이안에게 자유로운 바람둥이의 느낌이 날 리가 없다. 건방지고 오만한 해적으로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어, 바다의 바람인가요?” 케이트는 아르고의 의상을 보고 어디서 나온 건지 금방 눈치챘다. 그만큼 유명한 작품이라는 말이다. 그녀의 말에 실라가 반색하며 말했다. “너도 그 연극을 봤니?” “아니요, 저는 소설을 읽었어요. 거기 삽화에서 봤거든요.” 하녀가 글을 읽을 줄 안단 말야? 아르고의 시선이 이안에게 향했고 이안은 그냥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신기한 하녀로군. 그 사이 실라와 케이트는 바다의 바람이라는 작품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기 나오는 아우트가 멋있어요.” “그래? 난 피델이 좋았는데.” “너무 바람둥이잖아요. 멋진 남자긴 하지만.” “그래도 나중엔 르티엔에게 헌신하잖니.” “아우트는 처음부터 르티엔밖에 안 봤는걸요.” 이러이런. 케이트와 실라의 수다가 길어질 듯하자 아르고는 이안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저쪽에 음료 있던데, 가지러 가자.” 케이트와 실라는 이안과 아르고가 음료수를 가지고 오겠다고 하는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바람의 바다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어제 아파서 못올렸는데 공지를 많이 못보셨을 것 같아 죄송스럽네요. 몸살에 장염이 겹쳐서 눈앞이 도는 바람에 오타, 오문 검사만 하면 되는 데 그것도 힘들더라고요. 죄송합니다. 오늘은 "르티엔"을 사용하게 해주신 "로베리안"님과 "아우트", "피델"을 사용하게 해주신 "백운, 힘멜"님께 감사드립니다. 00090 4. 가장무도회 =========================================================================                            “백작님의 의상은 부인께서 고르신 거군요.” “둘 다 금발이니까 말야.” 바다의 바람에 등장하는 두 남자주인공 모두 금발 머리다. 케이트는 그 사실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다의 바람은 해적을 소탕하는 해군에 대한 소설이다. 아우트와 피델, 둘 다 해군인데 두 남자의 성격이 판이하다. 처음엔 맞지 않아 다투기만 하던 두 남자가 점점 서로를 겪어 가면서 둘도 없는 친구가 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그 두 남자 사이에 아리따운 처녀 르티엔도 등장하기 때문에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피델이 좋으시다면 백작님 의상을 피델로 하시지 왜 아우트로 하신 건가요?” 케이트의 당연한 질문에 실라는 헛웃음 지었다. 이애도 몰랐구나.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건 이안이 입었잖니.” 네? 케이트의 입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두리번거리다 멀리 음료수대에서 아르고와 이야기하는 이안을 쳐다보고 신음을 삼켰다. 몰랐다. 일단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저건 어디로 봐도 위험한 해적이다. “제가 생각한 피델과는 상당히 다르네요.” 실망한 듯한 케이트의 말에 실라는 자신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잊고 웃음을 터트렸다. “저 아이가 사람들이 원하는 걸 준적은 별로 없지.” 실망스러운 말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것에 가까워서 케이트는 새삼 실라를 다시 쳐다봤다. 이안의 친모가 아니라고 했다. 귀족은 서자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로엔경을 아끼시는군요.” 저도 모르게 새어나온 말에 케이트는 순간 아차 싶었다. 실라는 자신의 말에 놀라 경직된 그녀를 보고 가만히 웃었다. “저 애가 내 친자식이 아니라는 건 에바니엘 사람 전부가 알걸? 그러니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 차라리 자신의 친자식이었다면 좋았을걸. 실라는 이안을 제 배로 낳아주지 못한 게 미안했다. “이안이 집 앞에 나타난 건 그 애가 여섯 살 때의 일이었어.” 실라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주변 사람들의 귀를 의식한 것이다. 케이트는 낮아진 실라의 목소리에 빠져들어 이곳이 사람들로 가득 찬 무도회장이라는 것도 잊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섯 살짜리 아이가 혼자 집 앞에 나타난 거야. 보자마자 나는 그 애가 죽은 남편의 아들이라는 걸 알았지.” 실라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이안은 아버지를 똑 닮았다. 그건 전 로엔 백작이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전 로엔 백작은 실라가 보기 전에 이안을 쫓아 보내려 했다. 이안 역시 아버지라고 뭔가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어린 소년이었던 그는 약간의 돈만을 원했고 받자마자 떠나려 했다. 죽은 백작과 어린 이안이 생각하지 못한 건 실라가 아이를 원했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때,” 거기까지 말한 실라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세 번째 유산을 한 상태였다. 그녀는 원래 몸이 약했고 우여곡절 끝에 아르고를 낳았지만, 그 이후로 임신한 아이는 단 한 명도 낳지 못했다. 아르고 이후 세 번의 유산. 의사는 그녀에게 더이상 아이를 낳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나는 아주 많은 아이를 원했거든.” 실라는 그저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이 작은 하녀에게 그녀의 속사정을 다 말할 필요는 없다. 그때 그녀가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아르고를 보는 것조차 괴로울 정도로 우울증에 시달렸는지. 그런 것들은 케이트가 알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때 이안은 야생 동물처럼 보였다. 아무도 믿지 못하고 아무것도 의지하려 하지 않는 어린 소년. 지금의 이안이라면 위험해 보일 테지만 여섯 살짜리 이안은 실라에게 모성애를 불러일으켰다. 내 아이야. 그녀는 이안을 보는 순간, 아이의 눈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내가 돌봐야 해. 내가 사랑해 줘야 해. 전 로엔 백작과 그녀는 사랑으로 이뤄진 관계는 아니었지만 실라는 그에게 이미 후계를 낳아줌으로써 의무를 다했고 매우 힘든 상태였기 때문에 죽은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그러니 저 애는 내 아들이야. 아끼는 게 당연하지.” 당당한 고백에 케이트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실라는 진짜로 이안을 아끼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안에게로 향했다. 그는 어떤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케이트는 보나 마나 이안은 대꾸도 안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아가씨.” 실라와 케이트 사이를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두 사람은 남자를 보고 다시 서로를 쳐다봤다. 실라는 케이트에게 한 말이라고 생각했고, 케이트는 실라에게 한 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제가 두 분 중 한 분과 춤출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이상한 말투네. 케이트는 처음 겪는 일이니 그렇게 생각했지만, 귀족들의 무도회에서 모르는 여자에게 춤을 청할 때는 격식을 갖추기 마련이다. 실라는 케이트의 등에 살짝 손을 대며 속삭였다. “무도회에 왔으니 춤도 춰봐야지.” 어, 하지만. 케이트가 뭐라 말하기 전에 실라가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오래 서 있어서 피곤했다. 드윈 남작부인에겐 미안하지만 오랜 시간 머무르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라가 물러나 앉자 남자는 케이트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나는 아가씨가 아니야.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왔다. 케이트는 실라를 향해 속삭였다. “전 춤 출 줄 몰라요.” 어머. 실라의 눈이 커졌다. 글을 읽을 줄 안다고 해서 춤도 출 줄 아는 건 아니다. 케이트의 행동이 다른 하녀들과 달라서 잠시 잊고 있었다. 이를 어쩌나. 케이트는 하녀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실라는 남자에게 케이트는 선약이 있다고 말하려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적이 나타났다. “그녀는 나와 선약이 있다.” 음악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짝을 이뤄 무도회 장 가운데로 나아가는 바람에 케이트와 남자 주변에 남은 사람은 이안과 실라 뿐이었다. 어머, 어머. 실라는 아들의 돌발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입니까?” 케이트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모르는 남자와 춤을 추는 것보다는 낫겠지. 남자는 이안과 케이트를 한 번씩 번갈아 보더니 이안이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깨끗하게 물러났다. “가자.” 이안이 손을 내밀었다. 어딜 가자는 거야? 케이트는 그가 가자는 곳이 무도회 장 가운데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 전 춤을 출 줄 몰라요.” “상관없다.” 늘 그렇지만 이번에도 당당한 목소리였다. 그러다면야. 케이트는 이안이 이끄는 대로 그의 손에 잡혀 나갔다. 살면서 귀족들이 추는 춤은 한 번도 춰 본 적 없지만 춤이라는 게 대충 어떤 건지는 안다. 무엇보다 춤이라는 건 여자보다는 남자의 실력이 더 중요한 종목이다. 여자가 어지간히 못 하지 않는 이상 남자가 리드만 잘하면 크게 티가 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런 케이트의 생각은 이안이 그녀의 허리를 조금 세게 끌어안는 순간 불안하게 흔들렸다. 설마. 음악과 함께 이안의 스텝이 시작되었다. 어느샌가 실라에게 다가온 아르고가 팔짱을 낀 채 쿡쿡대고 웃었다. 실라는 그런 아들의 어깨를 쿡 찌르며 힐난했다. “웃지 마라, 아들.” “아, 하지만 어머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아르고가 다시 풋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실라가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그녀 역시 곧 이안과 케이트의 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둘이 같이 배웠는데 왜 저 아이는 저렇게 못 하는 거니?” 믿을 수 없다. 케이트는 눈을 부릅뜨고 이안을 올려다봤다. 굳게 닫힌 입술. 다른 사람이 보기엔 예의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그 얼굴에서 이안이 머쓱해 한다는 것을 느꼈다. “설마…이안, 춤을 모,” 케이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제멋대로 휙 돌아갔다. 맙소사! “제 생각엔 말이죠.” 멀리서 작은 체구의 케이트가 마치 인형처럼 휙하고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며 아르고가 느긋하게 입을 뗐다. “이안은 음악성이 전혀 없는 것 같아요.” “저게 과연 음악성이 없다는 정도의 문제일까?” 나직한 탄식과 같은 실라의 목소리에 아르고는 다시 피식 웃었다. 이안의 검술 실력은 대단하다. 그는 어린 시절 아르고의 검술교사가 한 번 보여준 스텝을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정도로 우수하다. 검을 그렇게 잘 다루는 자가 몸치일 수는 없는 거다. 결국 아르고는 이안이 음악에 몸을 맞춘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에게 있어 아마 음악은 주변에서 들리는 소음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왈츠를 퀵스텝처럼 출 수는 없다. “켁!” 누군가와 등이 부딪히자 케이트의 입에서 이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프진 않았지만 당황스러웠다. 이 남자는 음악이 귀에 안 들리나? “이안, 잠…,” 또다시 몸이 공중에 휙 들어 올려지더니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맙소사! 발끝에 뭔가가 걸린 느낌으로 보아 누군가를 걷어찬 게 분명했다. 케이트는 부디 그게 이안이길 빌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이안을 제대로 된 스텝으로 이끌려 노력했으나 전부 허사로 끝났다. 애초에 귀족들의 춤이라는 건 리드하는 남자의 실력이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아무리 여자의 실력이 좋아도 리드하는 남자의 실력이 나쁘면 소용이 없다. 반대로 여자가 아무리 못 춰도 남자가 리드에 능숙하다면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거기에 케이트와 이안은 체격차이부터 꽤 나기 때문에 케이트가 그를 제대로 된 스텝으로 이끈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는 고작해야 이안에게 달라붙어 자신의 다리가 주변 누군가를 후려갈기지 않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끔찍하게 긴 한 곡이 끝나고 케이트가 정신을 차리자 그녀와 이안의 주변으로 반경 이미터 정도의 공터가 생겨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창피해 보기는 처음이다. “춤, 못 춰요?” 자리로 돌아오면서 케이트는 힐난하는 어조로 이안에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가 속삭이는 것에 귀 기울이더니 눈썹을 치켜 올렸다. “잘한다고 한 적 없다.” 그 말도 맞다. 케이트는 뭐라 반박하려다 어깨를 늘어트렸다. 지금까지 이안은 모든 일에 너무 능숙했다. 심지어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고 상관없는 일까지 척척 해내니 당연히 춤도 잘 출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한동안 아파서 정리를 못했더니 방이 완전 돼지 우리가 됐습니다. ...돼지우리가 제 방보다 다섯배 정도 더 나을듯. 사실 돼지는 똑똑한 동물이라죠. 엄, 아직 겨울 왕국을 못봐서 이번 주 주말에 꼭 보러가려고 생각중입니다 근데 왜 다들 4D를 보자는 거지...난 멀미나서 싫은데... 참고로 엘사가 Let it go부르는 장면을 프로모션으로 보고 엉엉 울었기 때문에 좀 걱정되긴 합니다. 00091 4. 가장무도회 =========================================================================                            “괜찮아?” 케이트가 비틀비틀 다가오자 아르고가 제일 먼저 물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아직도 미소가 남아있었고 이안은 실례라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당신의 그 춤 솜씨가 실례야. 그렇게 말하고 싶은 케이트의 마음을 아는지 실라가 그녀를 끌어당겨 자신의 옆에 앉혔다. “괜찮니?” 무슨 어린아이 손에 들린 인형처럼 그렇게 흔들리고 나면 누구라도 안색이 안 좋아지게 마련이다. 눈치 빠르게도 아르고는 케이트에게 물을 한 잔 건넸다. “어, 네.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케이트는 일단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와 형 앞에서 그 아들이자 동생을 욕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들은 이안의 춤 실력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세상에, 누구에게 배운 걸까요?” “가엽기도 하지. 저 아가씨 완전히 지친 모양이예요.” “저 남자 누구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이안은 꿋꿋했다.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 케이트의 옆에 서 있었다. 그가 춤을 권해주길 기대하고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여자들도 싹 사라졌다. 한마디로 케이트는 그런 여자들에게 본보기가 된 셈이다. 이 남자랑 춤추면 너도 이렇게 된다는. “저 잠시 손 좀 닦고 올게요.” 이안에게 휘둘리면서 긴장한 탓에 손에 땀이 나서 끈적끈적했다. 게다가 속이 안 좋다. 케이트의 말에 실라와 아르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다녀오렴, 이안.” “괜찮아요. 저 혼자 다녀올 수 있어요.” “가장무도회잖니. 혹시 모르니 같이 가렴.” 가장무도회가 뭐기에 혹시 모른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케이트는 아르고도 나서서 같이 다녀오라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가던 하인에게 화장실의 위치를 물으며 케이트는 정말로 왜 화장실 위치도 모르는 이안과 같이 다녀오라고 했는지 궁금해졌다. “저기, 먼저 돌아가도 돼요.” 이안은 문 앞에서 케이트를 내려다보더니 딱딱하게 말했다. “아니, 저기 휴게실에 있을 거다.” 휴게실은 화장실과 붙어있었다. 케이트는 휴게실을 쳐다보고 그 안에 있는 게 여자만이 아니라는 점에 약간 안도했다. 적어도 이안이 거기에 있는 다고 해서 더 튀지는 않을 것 같다. 화장실 안은 이미 여러 여자가 있었다. 그녀들은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고치고 있었는데 케이트를 한번 돌아보더니 흥미가 없는 듯 다시 자신들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 서자가 왔다며?” “남작 부인이 초대했다던 걸.” “왔어?” 케이트는 여자들이 누구를 이야기하는지 몰랐다. 그녀는 수도꼭지를 틀어 차가운 물을 받아 손을 닦았다. “남작 부인하고 친하니까.” “친하다고 해도 그 남자까지 초대할 건 없잖아.” “난 그 남자한테 청혼이 들어올까 봐 겁나.” “겁날 게 뭐 있어? 그냥 거절하면 되지.” “그런 남자한테 청혼을 받다니,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 “본인도 알겠지. 자기 같은 서자의 청혼을 받아들일 여자가 없다는 걸.” “어머니가 하녀였다며?” 어머. 여자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야유했다. “저질이야.” “난 내 남편이 하녀한테 손대면 죽어 버릴 거야.” “로엔 백작 부인은 진짜 이상한 여자라니까.” 케이트의 귀가 저도 모르게 쫑긋했다. 로엔 백작 부인? 실라에 대한 이야기다. 그녀는 곧 그녀가 들어올 때 여자들의 주제가 이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 남편이 하녀한테서 낳은 아이를, 능력이 검증도 안 됐는데 받아주다니. 말도 안 돼.” “능력이 검증이 안 됐어?” “그렇다니까. 열 살도 안 된 애가 무슨 능력을 보였겠어?” “어머. 난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기에 그걸로 받아준 줄 알았는데. 열 살짜리를 받아 준거야?” “일곱 살인가, 그랬을걸. 하여간 로엔 백작 부인은 마음이 약한 건지, 특이한 건지 알 수가 없어.” 뮈엘라에서 사생아를 서자로 받아주는 경우는 단 한 가지뿐이다. 집안에 도움에 되는 경우. 방법은 여러 가지다. 전사로 능력을 보이거나 장사에 능력을 보여 가계에 도움이 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안은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서자로 인정되었다. 그건 그 당시 상당한 스캔들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유로 케이트의 턱은 딱딱하게 굳었다. 이안의 친모가 하녀였구나. “하지만 잘생겼잖아.” “전 로엔 백작을 닮았다고 하던걸.” “어머, 정말? 그럼 지금 로엔 백작은 어머니를 닮은 거네?” “그렇지. 어머니가 그러시는 데, 전 로엔 백작도 스캔들이 장난 아니었대.” 그만 됐다. 케이트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도 잊고 화장실 문을 나섰다. 무도회의 화장실이라는 건 이렇게 저질이구나. 귀족이나 하인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마치, 휴게실에서 하인들의 수다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어서 여길 떠나고 싶다. 마치 더러운 것이 묻은 것처럼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케이트는 휴게실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이안을 찾았다. “도와드릴까요, 아가씨?” 혼자 있는 케이트를 보고 남자가 다가왔다. 얼굴 전체를 가린 가면과 가죽 갑옷. 그리고 허리춤의 검까지. 유명한 전사로 분장한 모양이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사람을 차,” 케이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목소리도 아름다우시군요. 그 가면 아래의 얼굴이 목소리만큼이나 아름다운지 궁금합니다.” 뭐라는 거야?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휴게실 근처의 사람들은 케이트와 남자를 보고도 모른 척하고 있었다. 여긴 가장무도회다. 모든 사람이 가면을 쓰고 있으니 익명성이 보장된다. 그제야 케이트는 혹시 모르니 이안과 함께 가라고 한 실라의 의도를 깨달았다. 가면 뒤에 숨은덕에 용기가 난 사람들이 싫다는 사람에게 쉽게 치근덕거릴 수 있는 것이다. “돼, 됐어요.” 케이트가 좀 더 능숙하게 남자를 거절할 수 있었다 해도 상대가 물러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그런 상대에게 서툴게 됐다는 거절의 말은 오히려 남자의 호승심을 부채질하는 꼴이 되었다. “하하, 다들 그렇게 한 번쯤은 튕기기 마련이죠.” 튕기는 거 아니거든? 케이트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려고 팔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긴 사람이 많으니 잠시 밖으로 나가실까요?” 문득 그녀는 남자의 목소리가 어디서 들어본 적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케이트를 끌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상대의 이름을 내뱉었다. “제프리 호건?” 남자의 손이 케이트의 팔에서 떨어져 나갔다. 가면 속에서 그의 눈이 케이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날 알아?” 아는 건 아니다. 그냥 우연히 만났을 뿐이다. 제프리는 케이트를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케이트는 그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멍든 얼굴을 가리던 여자. 그녀에게 표를 건네주던 제프리. 케이트는 제프리 호건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녀를 손댔고, 귀족 집안에서 결혼할 상대를 물색한다 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가장무도회에서 모르는 여자에게 치근대다니, 잡혔던 부분이 더러운 것이 묻은 것처럼 느껴져서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를 쟁반을 든 사용인이 지나갔다. 잠시 두 사람의 사이에 사용인이라는 벽이 생겼다. “무슨 짓이야!” 제프리는 뭔가가 자신과 부딪히자 반사적으로 고함쳤다. 사용인의 손과 부딪힌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거칠고 기죽은 듯한 목소리의 사과가 하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흥.”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는 사용인을 야단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다시 마음에 든 여자에게 말을 걸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젠장. 짜증이 솟구치자 제프리는 하인을 야단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을 잊어버렸다. 어딘가 화풀이가 필요하다. 그가 몸을 돌리자 그와 부딪힌 하인이 약간 떨어진 곳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음료를 건네는 게 보였다. “이봐, 잠깐.” “어머!” 그가 하인의 어깨를 낚아채자 하인에게서 음료를 받아들던 여자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잔에 담겨 있던 액체가 그녀의 가면과 드레스에 튀었다. “죄송합니다.” 하인의 입에서 거친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가장무도회답게 서빙 하는 하인들도 반 가면을 썼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하는 건 어려웠지만, 제프리는 그가 갓 하인이 된 청년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제프리의 행동에 음료를 뒤집어쓴 여자는 하인과 제프리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소리쳤다. 이 여자는 뭐야. 짜증이 가득 찬 제프리의 눈에 그녀의 피해가 들어 올 리 없다. 그가 좀 닥치라고 화를 내려는 순간 여자가 가면을 벗었다. “다 젖었잖아!” 제프리의 눈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멀리서 소동이 벌어졌는지 작은 비명이 들려왔지만 케이트는 신경 쓰지 않고 이안을 찾고 있었다. 저런 소동이 벌어진 게 오히려 고맙다. 자꾸만 그녀에게 치근대던 남자들의 행동이 잠시나마 멈췄던 것이다. 이안은 어디 있는 거지? 여기 있겠다고 했잖아. 휴게실에서 날 기다린다고. 그런데 어디 있는 거야? 그가 미우면서도 필요했다. 이안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를 찾는 케이트를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 어떤 남자가 케이트에게 접근했을 때 이안은 반사적으로 움직이려다가 문득 자신의 몸이 긴장했다는 것을 느끼고 멈췄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무도회에 오면 그의 어머니는 늘 누구라도 좋으니 한 번은 춤을 추라고 권하곤 했다. 그래서 케이트를 데려온 것이다. 케이트와 한 번 춤을 추면 실라도 더 이상 누군가와 춤을 추라고 권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저 작은 여자가 여기서 무슨 짓을 당해도 상관없다. 그렇게 판단하고 데려왔다. 그리고 그 판단은 아직도 건재하다. 이안은 멀찌감치 서서 케이트에게 남자들이 말을 건네는 것을 방관하고 있었다. “저 여자 괜찮지 않아?” “이국 옷을 입은 여자 말이지?” “괜찮은데.” 그의 주변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들이 이야기하는 게 들렸다. 남자들은 케이트를 보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너무 작지 않아?” “저렇게 작은 여자도 나름대로 괜찮다고.” 외설적인 대화 사이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안이 그들에게 힐끔 시선을 던졌지만, 가면에 가린 탓에 그걸 깨닫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랑 같이 온 거야?” “아까 어느 멍청이와 춤추던 것 같은데?” “같이 온 사람이 아닐 수도 있지.” “난 어떤 여자랑 둘이 있는 걸 봤는데.” 흠. 이안은 손에 든 꽁초를 남자들을 향해 던졌다. “으앗, 뭐야?” “뭐지?” 주변에 흡연자들을 위해 재떨이가 비치되어 있었지만, 남자들은 사용하지 않고 바닥에 재와 꽁초를 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안이 꽁초를 던졌다는 걸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뭔가 휙 지나갔는데?” “벌레 아냐?” “벌레 치곤 뜨거웠다고.” 낄낄거리며 투닥거리는 남자들을 뒤로하고 이안은 아치형의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섰다. 케이트가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 작품 후기 ============================ 위경련깨문에 하루종일 죽하나 먹고 슬퍼서 겨울왕국 보러왔습니다. 90화 대댓도 주말에 답니다. 하하하하.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아프지 마요. 어떤 아픔도~ 00092 4. 가장무도회 =========================================================================                            케이트가 이안을 발견하기 전에 그가 먼저 그녀에게 다가왔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자 케이트는 본능적으로 그게 이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몸을 돌리자 눈앞에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드러난 남자의 맨가슴이 있었다. 그래서 케이트는 이안에게 화를 내려는 걸 잊었다. 하마터면 거기에 부딪힐 뻔했던 것이다. 그녀가 다시 화를 내려고 했을 때 이번에는 이안이 그녀의 가면을 벗겨 냈다. “뭐, 뭐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얼굴 위로 뭔가가 덮였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얼굴을 덮은 그것을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얼굴형을 본뜬 딱딱한 가면이었다. “이게 뭐예요?” 거기까지 말한 케이트는 덜컥 겁이 났다. 설마 내 가면이 부서졌나? “나, 들켰어요?” “아니.” “그럼 왜 가면을 바꿔 온 건데요? 아니, 잠깐. 이 가면은 어디서 났어요?” 주최 측에서 가면을 가져오지 않거나 잃어버린 사람을 위해서 준비한 가면이다. 그래서 케이트가 쓰고 온 것보다 조악하고 밋밋했다. 그녀는 이안의 손에 들린 가면을 돌려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이거 별로예요. 그거로 다시 줘요.” “그걸로 쓰고 있어.” “이건 얼굴 전체를 가리는 바람에 답답하단 말이예요.” “괜찮다.” 누가 괜찮은 건데? 케이트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리고 그를 쳐다보다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내놔요!” 얄밉게도 이안은 가면을 든 손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얼굴을 다 가리니 오히려 그게 낫잖아.” “이건 불편하다고요.” “춤을 출 것도 아니니 상관없다.” 케이트가 생각하기엔 오히려 춤을 또 춘다면 이런 가면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얼굴을 전부 가릴 수 있으니까. 그녀가 얌전해지자 이안은 케이트가 자신의 설득에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드윈 남작 가에서 준비한 가면이 케이트에게 너무 컸다는 점이다. 가면의 눈구멍이 케이트의 눈 위치와 맞지 않았다. 그녀는 발을 내딛자마자 눈앞이 가면으로 가려지는 바람에 비틀거렸다. 재빨리 이안이 잡아주지 않았다면 꼴사납게 넘어졌을 것이다. “걷는 법을 잊었나?” 이 인간이. 울컥한 케이트가 이안에게 팔꿈치가 잡힌 채로 그를 올려다봤다. 가면이 주르륵 미끄러져 다시 눈을 가렸다. 이익! 손으로 가면을 들어낸 그녀가 소리쳤다. “당신 때문이라고요!”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가면으로 케이트의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고맙단 말을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잡아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먼저 표하라는 말이다. 케이트는 어이가 없어서 다시 가면을 벗으려 했다. 하지만 이안이 한 손으로 가면을 얼굴에 내리누르고 있어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 손 놓지 못해요?” 버둥거리는 케이트와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의 이안. 사람들은 이안의 태도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지나쳐갔다. 케이트가 도움을 받은 건 두 사람이 돌아오지 않자 걱정된 아르고가 찾으러 왔을 때였다. “두 사람, 뭐해?” 케이트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이안은 변함없이 침착하게 말했다. “넘어지려고 해서 도와주던 참이야.” 케이트의 입이 딱 벌어졌지만, 가면에 가려져서 그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르고는 이안의 품에 안긴 케이트와 그 케이트의 가면에 손을 대고 있는 이안을 보고 팔짱을 낀 뒤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말하니 도와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만 그 아가씨를 놓아주는 게 어때?” 여기는 사람들의 눈이 많은 무도회장이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남자 품에 오래 안겨있는 건 그리 좋은 행실로 보이지 않는다. 가면을 썼기 때문에 두 사람이 부부인지, 연인인지 몰라서 사람들이 나서지 않았을 뿐이었다. 게다가 가장무도회다. 아르고의 말을 들은 케이트가 다시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이안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아르고는 당연히 보지 못했다- 케이트를 한 번 들어 올린 뒤 그녀를 자신의 앞에 내려놓았다. “죄, 죄송합니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케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과였다. 아르고의 입이 재미있다는 듯 일그러졌다. 피해를 받은 건 케이트인데 아르고에게 사과를 하고 있다. 자신이 하녀이고 이안은 귀족이라는 것을, 그리고 아르고가 이안의 형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파티에 처음 참석하는 아가씨들은 들떠서 예의를 살짝 잊어버리는 게 보통이다. 아르고는 케이트가 소심해서 그런 건지 예의가 발라서 그런 건지 궁금했다. “사과는 제가 해야죠.” 그는 케이트에게 씩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제 동생이 결례를 범했으니까요. 돌아가시죠. 어머니께서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는다고 걱정하시더군요.” 아르고가 팔꿈치를 내밀었다. 잡으라는 뜻이다. 에스코트하겠다는 태도에 케이트는 정신없이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어머, 동생과 달리 형은 상당히 예의가 바르잖아. 이번에도 가면 속에서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닮지 않은 건 외모뿐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렇게 닮지 않은 형제일까. 그녀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실라는 훤칠한 금발 머리 남자 두 명이 사람들을 헤치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케이트와 이안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다 그녀는 아르고에게 에스코트 받는 케이트의 모습과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턱이 단단하게 굳은 이안의 얼굴을 발견했다. “어머.” 두 사람, 싸우기라도 했나? 어머니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는지 실라의 눈에 늦은 것을 사과하는 케이트가 이안을 의식적으로 무시하는 게 느껴졌다. “무슨 일 있었니?” 실라가 아르고를 향해 소곤소곤 물었다. 아르고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겠다. 이안은 이 작은 하녀 아가씨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 그는 이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다가 실라도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을 떠올렸다. 어떻게 될까. 어머니가 동생을 사랑한다는 건 알고 있다. 심지어 이안이 수사관이 되겠다고 했을 때도 반대하지 않았다. 귀족이 수사관을 한다는 건 주변에 많은 구설수를 만들어 낸다. 그가 아는 것만 해도 이안이 수사관이 되었을 때 상당한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은 때때로 실라를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실라는 이안이 하는 일을 반대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건 이안이 실라나 로엔가의 명성에 누가 되는 일을 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안에 대한 실라의 무한에 가까운 애정을 보여준다. 하긴. 어머니는 내게도 반대한 적이 없으셨지. 그는 씩 웃으며 생각했다. 실라가 크게 반대한 건 그와 이안이 전 로엔 백작인 아버지의 명에 따라 기숙학교에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아들 둘을 기숙학교에 보내고 방학에만 잠시 본다는 건 실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 반대도 결국 전 로엔 백작의 설득에 무위로 돌아갔다. “아르고, 더 추고 오지 그러니?” 실라의 권유에 아르고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 이안의 그 엄청난 춤 실력에 대항할 자신이 없어서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실라가 그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동생을 놀리는 거 아니다.” 엄한 실라의 힐난에도 불구하고 케이트는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결국 실라마저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시 한 번, 스미스양. 미안하다.” 실라의 사과에 케이트는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저 애는 어렸을 때부터 유독 춤만은 못 췄거든. 예술계통엔 영 재능이 없는 모양이야.” 그건 재능이 없다는 말로 용서가 될 수준이 아닌데.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꾹 눌러 삼키며 케이트는 다시 한 번 괜찮다는 태도를 취해 보였다. 이런 남자가 자랐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뜻밖일 정도로 상냥한 어머니와 좋은 형이다. 케이트는 대체 이안은 어디서부터 저런 성격이 형성된 건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 아르고는 실라와 사이좋게 대화하는 케이트와 이안을 번갈아 보며 미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안이 케이트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아직까지는 실라와 아르고만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니 이안을 위해서라면 이쯤에서 저 마음을 끊어두는 게 좋다. 서자인 이안이 하녀인 케이트와 결혼이라도 한다면 사교계의 말이 엄청날 테니까. 하지만 과연 그걸로 됀 걸까.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동생이 그가 눈치 챌 정도로 누군가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이안은 사교계와는 떨어져 사는 사람이 아닌가. 아르고는 아주 조금이지만 실라의 심정이 이해가 되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사교계의 구설수는 그와 실라만 조금 고생하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이안이 행복해진다면, 그것도 괜찮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다. 과연 케이트가 이안을 좋아할 것인가이다. 실라는 이렇게 잘생기고 훌륭한 남자인 내 아들을 케이트가 싫어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아르고의 생각은 좀 달랐다. 이안은 귀족 아가씨들은 대부분 피하게 하는 뭔가가 있다. 그가 서자라서 라는 이유도 있지만, 말이 없고 상대방의 감정에 그다지 동조하지 않는다는 점이 아가씨들을 겁먹게 하는 듯하다. 과연 케이트는 이안을 좋아할까. 아르고의 시선이 자꾸만 흘러내리는 가면을 고쳐 잡는 케이트에게로 향했다. 케이트가 이안을 좋아하는가. 그건 그녀만 알 것이다. 자신도 이안을 좋아하는지 모르는 케이트는 문득 시선을 느끼고 아르고를 쳐다봤다. 로엔 백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케이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게 뭔가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아르고가 웃으며 대답했을 때 그 사이를 이안이 끼어들었다. 그는 케이트의 팔꿈치를 움켜잡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그만 가지.” “네? 어딜요?” 케이트의 질문에 대답도 없이 이안이 몸을 움직였다. 그에게 팔꿈치를 잡힌 케이트는 그대로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잠깐, 인사는 하고 가야지! 케이트는 고개를 돌려 실라와 아르고에게 인사를 하려 했지만 긴 치맛자락에 발이 걸려 비틀거렸다. “아!” 가까스로 다른 발을 내디뎌 넘어지는 것을 피했지만, 그 발도 치맛자락을 밟는 바람에 케이트는 또다시 비틀거렸다. 연달아 세 번쯤 비틀거리자 이안은 혀를 차며 케이트를 들어 올렸다. “지금 혀를 찬,” 뭐라고 화를 내기도 전에 몸에 들어 올려지자 케이트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비명을 지를 타이밍도 놓쳐 버렸다. 이안은 케이트를 들어 올려 한쪽 팔로 감싼 채 성큼성큼 드윈 남작 부인의 저택을 빠져나갔다. “저걸 어떻게 생각하니?” 실라의 질문에 아르고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사람이 많고 이안이 워낙 빠르게 나가버린 탓에 사람들은 그가 케이트를 들어 안고 나갔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글쎄. 실라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은 사교계와 맞지 않는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이질적인 부분이 있다. 그러니 정 케이트가 좋다면, 마음에 들어 결혼하고 싶다면 둘이 어딘가 시골로 내려가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게 실라로서는 유일한 불만이었다. ============================ 작품 후기 ============================ 으으, 뭘 또 잘못먹었나 속이 울렁울렁 거리네요. 표지 변경했습니다. 레몬맛 토끼님께서 그려주신 팬아트 입니다. 감사합니다. 최소 일주일 이상 유지될 예정입니다. 다른 곳에서 후기에 올렸던 문답을 이쪽에도 올립니다. 그런 의미로 이번 후기는 깁니다. 기대하셨던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Q. 케이트의 부모님의 신분. A. 뮈엘라는 법으로 이 신분은 이 신분과 결혼해야 한다는 게 없습니다. 전부 사회적인 계층간의 압박일 뿐입니다. Q. 케이트의 어머니가 편지를 남작부인에게 맡긴 이유. A. 케이트가 어리고 물려준 목걸이가 워낙 고가의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남작부인은 케이트도 그렇지만 이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인것 처럼 보였고, 케이트의 어머니가 죽자 딸인 케이트를 하녀로 거둬줄 정도로 겉으로 보기엔 사려깊고 상냥한 사람이었습니다. Q. 공인된 마법사란? A. 아직 언급이 안되었지만 뮈엘라의 공인된 마법사란 일종의 국가 공무원 입니다. 궁정에만 소속되며 일부에 한 합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같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배신자라는 인식이 있으며 이미지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Q. 로맨스가 퇴보된 느낌인데 다시 진전이 있는지? A. 퇴보된 이유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뮈엘라의 수사관은 한 부 한 부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즉, 한 사건후에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주가 지나게 됩니다.그 시간동안 이 두 사람은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즉, 너무 바쁘거나 뭔가 일이있어서 만나거나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던 겁니다. 두 사람은 연애하는 게 아니고 요즘 말로 하면 썸타는 도중이라고 볼 수 잇습니다. (그것보다 더 전이라고도 볼수 있죠^^;;) 누구라도 썸타다가 연락이 시들해지면 로맨스가 퇴보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부가 지날때마다 케이트와 이안의 상황은 상당히 달라졌습니다. 1부에서 로맨틱했던 두 사람의 감정이 2부에서 하녀와 주인의 아들이라는 입장이 되면서 좀 더 소극적이 된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1부에서도 이안은 좀 더 적극적인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건 그가 수사관이고 귀족의 입장이라는 수도에서 벗어나 아무도 그를 모르는 곳에 고아인 남자 이안으로 살게 되었기 때문에 약간은 (스스로는 느끼지 못하지만) 개방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치빠르시거나 예민하신 분들은 눈치 채셨을 수도 있지만 1부 초기, 중기, 후기의 이안의 대사를 비교해 보시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건 2부에서 더욱 딱딱해 지는데 1부 중 후반에서 시간된 이안의 다나까 말투는 2부에서 더욱 엄격해 졌습니다. 3부에서는 조금씩 풀어지고 있습니다. 로맨스 진전은 당연히 잇습니다! 외전 "한 여름 밤의 꿈" 보셨잖아요? 언젠가 그렇게 됩니다. 그게 언젠가일 뿐이죠. 하하하하. 00093 5. 뮈엘라의 마녀 =========================================================================                            사교계의 아침은 늦다. 늘 어디선가 파티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른 저녁 시작된 파티는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지게 마련이고, 참석자들은 늦은 새벽에나 집에 돌아가 잠을 자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평균적으로 점심때다. 그렇기 때문에 사교계 사람들이 신문을 읽는 것도 종종 점심때를 지난 이른 오후였다. 케이트가 빌린 옷을 돌려주기 위해 나가자 이안과 단둘이 큐바인 하우스에 남게 된 제인은 불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소년은 이안이 무서웠다. 그래도 케이트가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이안과 이 폐허같은 집에 단둘이 남게 되면 그가 무서워서 피해 다니게 된다. 그래서 소년은 손님이 찾아왔을 때 뭔가 배달된 것이라 생각했고, 그게 뭐든 상관없었다. 손님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평소라면 약간 겁을 내며 문을 열었을 것을 이번에는 반색하며 맞이할 수 있었다. “이안 로엔경의 집입니다.” 케이트가 가르쳐 준 대로 주워 삼킨 소년이 뿌듯해하는 것을 보고 에드워드는 씩 웃으며 물었다. “그 로엔경 집에 있나? 에드워드가 왔다고 알려주게.” 어린 소년이 아니라 한 사람의 어엿한 사용인에게 하는 것 같은 말투에 제인은 자신이 잘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얻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용인은 집 안에서 달려서는 안 된다. “주인님! 에드워드가 왔다고 알려주래요!” 케이트가 들었다면 깜짝 놀랐을 테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현재 이 집에 케이트는 없었다. 이안은 응접실에 앉아 신문을 읽다가 제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 그게….” 뭔지 몰라도 잘못한 것 같다. 제인은 깨달았지만 이안이 신문을 덮은 후였다. 그는 신문을 협탁 위에 올려놓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안으로 모셔.” 에드워드는 어딘지 모르게 소년이 자신을 반기는 것 같은 기분에 신기하다는 듯 제인을 쳐다봤다. 전에 봤을 때는 날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나? 이안은 응접실에 서 있었다. 그는 에드워드가 맞은편 의자에 앉는 것을 보고 자신도 의자에 앉았다. 제인은 차를 내와야 한다는 걸 생각하고 허둥지둥 부엌으로 달려갔다. 케이트가 손님이 오면 차를 내가야 한다고 알려줬던 것이다. “드윈 남작가의 가장무도회에 참석했다면서?” 에드워드는 제일 먼저 궁금했던 질문을 뱉어냈다. 가장무도회라니, 이안과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뭐로 분장했지? 신문에 특이하게 분장한 사람이 몇몇 나왔는데 그중 누가 자네인지 모르겠어.” 신문에 드윈 남작 부인의 가장무도회가 나왔다고? 이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대체 무슨 신문을 읽는 걸까. 가장 유명하고 사건이 일어난 파티에 대해서 신문에 언급되기는 하지만 누가 무슨 분장을 했는지까지 자세하기 언급되는 건 사교계 소식밖에 없다. 그리고 그건 왕위 계승 후보 1위인 공작이 읽기엔 너무 천박한 신문이다. 이안은 그걸 지적할 정도로 예의를 중히 여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반대로 지적할 정도로 예의를 중히 여기는 사람도 아니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고? 그럼 누가 알아?” “어머니께 물어보시죠. 저는 주시는 대로 입었을 뿐입니다.” 하긴 그렇겠군. 에드워드는 혀를 차며 이곳에 온 본론을 꺼냈다. “시체가 발견됐어. 이번에도 고층거리야.” 그는 소파에 기대며 씁쓸하게 말했다. “입단속을 시키고 있긴 한데 이미 시체에 심장이 없다는 소식은 다 퍼졌더군. 범인이 마녀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 “마녀라고요?” 이안은 반사적으로 케이트를 떠올렸다. 그녀가 그 모르게 이 집을 나가서 사람들의 심장을 훔치고 다닐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 케이트의 방은 안쪽에 있기 때문에 밤에 집 밖으로 나가려면 이안의 방을 지나쳐야 한다. 아무리 그녀가 작고 가벼워서 발걸음소리가 나지 않는다 해도 이 집의 바닥은 소리가 날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에드워드는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이안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 말은 안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이안이 자연스럽게 꺼낼 질문을 받아야 하는 게 에드워드는 걱정스러웠다. “간혹 사람의 심장을 노리는 마녀가 있다는군.” 이번에도 이안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마녀가 사람의 심장을 노린다고? 그건 어린아이들을 겁주기 위해 하는 헛소문이 아니었나? 손톱이 길고 뾰족한 사람이 행인을 덮쳐 심장을 파내간다는 이야기는 뮈엘라에서 아이들 사이에서 떠도는 괴소문에 가까웠다. 우스갯소리로 심장을 노리는 마녀를 만나면 ‘저는 심장을 매일 씻어서 널어놓고 나오기 때문에 지금은 심장이 없어요.'라고 대답하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있다. “이건, 그러니까. 음.” 에드워드는 약간 뜸을 들인 후 헛기침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간혹 불사를 원하는 사악한 마녀들이 다른 사람의 심장을 훔쳐낸다고 해.” 이안의 자세가 움직였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에드워드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물었다. “불사를 원하는데 왜 다른 사람의 심장을 원하는 겁니까?” “심장이 불사의 마법을 부리는 재료가 된다더군.”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에드워드의 행동이 딱 멈췄다. 그는 드물게도 우물쭈물 망설이기 시작했다. 이안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늘 자신만만하던 남자가 어쩐 일인지 망설이고 있으니 이상하다고 생각할 만했다. “알고 지내는 사람이 있어.” “마법사입니까?” 이안의 질문에 에드워드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가 아니다. 하지만 더이상 묻지 말라는 그 태도에 이안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 사람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물어보면 내가 전달해주도록 하지.” “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어쩌실 겁니까? 그때마다 이 집과 그곳을 다니시며 말을 전달해 주실 겁니까? 그 정도로 한가하진 않으실 텐데요.” 에드워드의 말이 막혔다. 그 말이 맞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데리고 다니고 싶지 않았다. 으음. 고민에 빠진 에드워드와 그를 지켜보는 이안. 그들이 있는 응접실에 제인이 달그락달그락 쟁반을 들고 들어섰다. “차입니다.” 차 덕분에 시간을 벌 기회가 생겼다. 에드워드는 제인이 따라준 찻잔을 들고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시다가 멈칫했다. 그의 행동에 이어 이안도 제인이 따라준 찻잔을 들더니 눈썹을 치켜올렸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맛본 그는 찻주전자를 들어 뚜껑을 열었다. 차가운 물 위에 우러나지 않은 찻잎이 둥둥 떠 있었다. === “실례합니다.” 케이트는 문을 두드리자마자 나온 로즈의 모습에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뒤로 한 남자가 복도로 나오고 있었다. “당신은 큐바인 하우스의….” “케이트 스미스 입니다. 빌려주신 옷을 돌려드리려고 왔어요.” “들어오세요.” 하지만 아직도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로즈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 분은 곧 가실 거예요. 그러니 들어와요.” 응접실 안에는 시나몬이 멋진 옷을 입고 앉아 있었는데 화려한 무늬의 천과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에 풍성하게 부풀린 금발 머리에도 꽃이 몇 송이나 꽂혀 있었다. 케이트는 그녀의 모습에 자신이 잘못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어머, 케이트. 어서 와요.” 남자가 우물쭈물 그럼 다음에 또. 하고 인사하는 게 들렸다. 시나몬은 그에게 손을 팔랑팔랑 저어 보이더니 케이트는 끌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저, 저분은?” “아, 친구예요. 친구.” 친구라고 하기엔 별로 안 친해 보인다. 어쩌면 시나몬은 아는 모든 사람을 친구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케이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교계에서는 결혼을 승낙하지 않은 남자를 적당히 친구라고 부르고 있지만 케이트는 거기까지는 몰랐다. “옷을 돌려드리러 왔어요.” 케이트는 옷이 든 꾸러미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감사했습니다. 세탁은 해두었지만 확인해 보시고 다시 세탁하고 싶으시다면 비용은 저희 쪽에서 부담할게요.” “아, 괜찮아요. 괜찮아.” 시나몬은 케이트에게 꾸러미를 받아들고 로즈에게 건네며 싱긋 웃었다. 굳이 세탁했으면서 또 세탁할 경우의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할 필요는 없는데. 그녀는 그런 케이트가 마음에 들었다. “그보다, 가장무도회는 어땠어요? 갔다 온 곳, 드윈 남작 부인의 가장무도회 맞죠?” “네. 어떻게 알아요?”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지자 시나몬은 손을 저으며 깔깔깔 웃었다. “그야 파다한걸요. 소문이.” 소문이 벌써 돌았단 말야? 드윈 남자 부인의 파티가 열렸던 건 이틀 전이다. 그게 벌써 소문이 났던 것이다. “파티 참석은 처음이죠? 어땠어요?” “어, 잘 모르겠어요. 정신이 없어서.” “저도 공연이 없었으면 참석 했을 텐데. 재미있는 사건 없었어요?” “공연이요?” 무슨 공연? 케이트의 눈이 또다시 동그래졌다. 어머, 몰랐구나. 시나몬은 다시 손을 저으며 웃었다. “그냥 가수예요. 다음에 제 공연에 한번 오세요. 초대장 줄게요.” 과연 큐바인 하우스. 의사나 독신귀족도 살지만, 가수도 산다. 그 사실을 몰랐던 케이트는 난생처음 만난 가수의 모습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시나몬이 빌려준 이국의 의상도 이해가 간다. 공연의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파티에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시나몬은 뭔가 궁금한지 끈질기게 물었다. 그러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이상한 짓 하다 걸린 커플도 없었고요?” “이상한 짓이요?” 케이트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시나몬이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남녀 간의 그런 것 있잖아요. 그녀의 설명에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런 건 모르겠어요.” “아, 그래요?” 에이. 실망한 시나몬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녀는 방금 도착한 신문을 쳐다보며 말했다. “신문에 지난 가장무도회 이야기가 실려 있다는데, 대독자(代讀者)가 예약이 밀려있어서 내일 아침까진 못 온다지 뭐예요.” “대독자가 뭐예요?” “어머, 대독자를 몰라요?” 대독자. 대필자와 겸임하는 경우가 많다. 말 그대로 신문이나 잡지. 때로는 편지도 대신 읽어주는 것이다. 문맹률이 높은 뮈엘라에 있는 직업이다. 대필자는 글씨가 예뻐야 하지만 대독자는 글씨를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대필자가 대독자를 겸하는 경우는 있어도 대독자는 대필자를 겸하지 못하곤 한다. 시나몬의 설명을 들은 케이트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수도는 사람이 많고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하인을 고용할 여력이 안 되는 사람도 글을 읽고 써야 할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런 직업이 있다. 그래서 시골에서만 살아온 케이트는 처음 듣는 직업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신문에 실리면 대독자가 예약이 밀리는 경우가 있거든요.”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야죠, 뭐. 그렇게 투덜거리면 시나몬이 문득 눈을 반짝이며 케이트에게 물었다. “우리, 대독자가 내일 아침에 올지 점심때 올지 내기할래요?” 맙소사. 로즈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케이트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으며 신문을 집어 들었다. “내기는 그만두고, 제가 읽어드릴게요. 의상을 빌려주신 보답이라 긴 좀 그렇지만요.” 시나몬과 로즈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건 로즈였다. “글을 읽을 줄 알아요?” “네.” 어머. 로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신문을 펼치는 케이트 앞에 다가와서 앉았다. 케이트가 입을 열어 신문을 읽기 전에 시나몬이 투덜거렸다. “에이, 이럴 줄 알았으면 당신이 글을 읽을 수 있는지 없는지 내기할걸.” ============================ 작품 후기 ============================ 연초라 회사 일이 바빠서 큰일났어요. 한동안 아픈데다가 바빠서 비축분이 없어...없어요...흑흑...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겠죠?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참, 자주 하고 싶지 않지만 합니다. 연재 란의 댓글에 쓰시는 글은 작가에게 하시는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답변하기 어렵거나 뜬금없는 반말 등등은 신경쓰지 않습니다. 되도록 예의를 지켜주시면 감사하나, 편하신 쪽으로 쓰시는 게 더 자연스러운 댓글이 나올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악플은 다릅니다. 악플과 비평을 착각하시는 분이 계시는 것 같은데 "케이트 답답하네요. 왜 저렇게 소극적이죠? 저 같으면 한 대 때리겠어요. 보다보면 짜증날 정도예요." 이 정도까지가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케이트 짜증나네요. 저능아도 아니고." 이건 악플이고요. 악플 다시는 분은 정중하게 말씀드리지만 보지 마세요. 식당도 손님을 거부할 권리가 있고 택시운전기사도 손님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저도 당연하고요. 저는 댓글은 제게 하는 말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답변을 다 해드리려 합니다. 소설 쓰는 걸 무기 삼아 "댓글 안쓰면 안쓸겁니다. 추천 몇개 이상 올라가면 연참할게요."이런 말도 안합니다. (안쓸거면 그런 협박없이 그냥 안올립니다.) 그게 옳지 않아서가 아니라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입니다. 빨간날 제외하고 평일 하루 한 편.굳이 여러분이 제게 뭔가를 해주시지 않아도 저는 하루에 한 편씩 올리기로 했으니까요. 그게 처음 연재를 시작하면서 여러분께 드린 유일한 약속이니까요. 그것만은 가능하면 지키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댓글이 몇개든, 추천이 몇개든 상관없이 무조건 평일 하루 한 편씩은 올립니다. 여건이 된다면 연참도 하고 싶고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예의를 지킨 분들께 한하는 겁니다. 악플 달아놓고 그럼 보지말라면 "어떻게 작가가 그런말을 하느냐"고 하시지 마세요. 그건 식당에 가서 진상 부려놓고 사장이 나가주시죠. 하니까 "어떻게 손님에게 그런말을 하느냐"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비평이든 전부 받아들이려 하고 몇번을 후기에 설명했다 해도 질문이 들어오면 후기를 할애해서 설명을 다시 하려고 합니다. 이해가 안되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의문 제기를 해주세요. 정중하게요. 극단적인 단어, 보기 싫은 단어, 얼굴 맞대고는 내뱉을 용기도 없는 단어를 쓰시면 그 내용이 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당해도 결국은 악플입니다. 물론 악플도 개인적인 의견 중 하나입니다. 난 저년이 꼴보기 싫어서 죽었으면 좋겠어. 이것도 개인적인 의견이죠. 하지만 그걸 면전에 대고, 굳이 남이 연재하는 게시판 댓글에 대고 하시면 그게 악플인 겁니다. 이게 마지막으로 말하는 거였으면 좋겠네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주세요. 악플 다실 분은 보지 마세요. 저는 그런 분이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쓰면 꼭 "그럼 비판도 하지 말라는 거냐"고 오독하시는 분이 계실것 같아 두려운데 악플을 비판이라고 착각하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늘부로 면전에 대놓고 하기 힘든 단어를 쓰신다면 악플로 판단, 대꾸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댓글이 잦아지면 경고 없이 해당 댓글 삭제하고 해당 분을 차단하겠습니다. 불편한 글을 드려 죄송합니다. 덧. 댓글을 보니 제가 오해를 부르게 쓴 것 같아 추가합니다. 택시도 승차 거부 할 수 있습니다. 행선지를 제대로 말하지 못할 정도의 만취했거나 예약되어 있는 택시 영업지역이 아닌 타지역을 가자고 하는 경우, 위험물질이나 이동장 없는 애완동물이 있을 경우 승차거부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00094 5. 뮈엘라의 마녀 =========================================================================                            신문 내용은 그야말로 구설수를 그대로 정리해서 옮겨 놓은듯한 내용이었다. 케이트는 읽다가 몇 번이나 눈을 동그랗게 뜨거나 얼굴을 붉혔다. 어느 기사나 어느 남자부인과 그렇고 그런 관계인데 그걸 남작만 모른다거나, 이름만 내면 아는 부유한 상인 집안의 후계자가 또 다른 하녀를 손댔다거나. “흐응. 평범하네.” “평범이요?” 이게 평범한 거야? 케이트는 깜짝 놀라 시나몬을 쳐다봤다. 대체 이 신문, 이름이 뭐기에 이렇게 노골적이고 말초적인 기사만 있는 거지? 그녀는 반사적으로 신문 앞면으로 돌아갔다. <에바니엘 우물가> 응? 케이트는 이상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에바니엘이야 수도 이름이라고 하지만 우물가라니, 뜬금없이 웬 우물가? “끝났어요?” 시나몬이 물어봤기 때문에 케이트는 다시 신문을 넘겼다. 이게 반쯤 읽었을 뿐이다. 그녀는 로즈가 세 번째 따라준 찻잔을 들어 입에 댔다. 대독자라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문맹률이 높은 뮈엘라답지 않게 신문은 장수가 꽤 많았기 때문에 케이트는 다시 읽던 장으로 돌아오는데 몇 번이나 큰 신문을 펄럭펄럭 넘겨야 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에바니엘 우물가>의 장수가 많은 이유를 눈치챘다. 삽화가 반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삽화를 많이 넣어서 삽화만으로 대강 눈치챌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과연. 어떤 기사에는 노인이 그려져 있기도 했고 어떤 기사에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그려져 있기도 했다. “마녀가 심장을 노린다.” 그녀가 그다음에 읽은 것은 매부리코에 흉측하게 일그러진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노파의 그림이 실린 기사였다. 소리 내서 읽은 다음에야 그게 무슨 뜻인지 깨달은 케이트의 심장이 빠르게 달음박치기 시작했다. “어머.” 시나몬이 신음을 흘리더니 소리 낸 것과 반대로 눈을 반짝이며 케이트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모두가 알지만 접근하려 하지 않는 그곳, 고층 거리에서 어제저녁 또다시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불행한 사건을 전해야 하는 필자의 마음을 알아주기 바란다.” 문체는 웃음이 나올 것처럼 길고 거추장스러웠지만, 응접실에 앉은 세 여자 중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다시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 여자는 그래, 필자는 여자라고 썼다.” 이게 무슨? 기사의 내용이 심각하지 않았다면 케이트의 손이 오그라들었을 것이다. 너무 드라마틱했다. 내용은 대충 고층거리에서 한 여자의 시체가 발견됐는데 그녀에게도 심장이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아무 흔적도 없이 사람의 심장을 빼낼 수 있는 것은 마녀밖에 없으니 지금 에바니엘에 마녀가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케이트는 기사가 거의 끝나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남은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이 얼마나 기구한 인생인지, 마녀에게 심장을 빼앗긴 여자는 과거, 이름만 대면 우리 모두가 아는 그 엄청난 상인 집안의 후계자에게 희롱당하고 쫓겨난 하녀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것은 필자의 정보원에게 단독 보고받은 것으로 죽은 여자의 명예를 위해 그녀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기로 하겠다.” 잠시 응접실에 정적이 가득 찼다. “세상에.” 제일 먼저 소리를 낸 것은 로즈였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이 이렇게 창백해질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신음을 흘렸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일이 있을 수 있죠?” “마녀라잖아.” 시나몬의 말에 로즈가 눈을 흘겼다. “마녀가 흔적도 없이 심장을 빼낼 정도로 강한 힘이 있을 리 없잖아요.” “하지만 기사에선 마녀가 했다고 하는걸.” “아가씨, 아가씨께서 보시는 건 에바니엘 일보가 아니라 에바니엘 우물가라고요. 확인된 사실을 실을 리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말이지.” 투덜거리는 시나몬을 무시한 채 로즈가 결연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쟁반에 다 마신 찻잔과 찻주전자를 옮겨 들더니 말했다. “어쨌든 전 마녀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 안 해요. 이건 분명 무슨 음모가 있을 거라고요.” 케이트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로즈를 올려다봤다. 그녀가 응접실을 빠져나가자 시나몬이 말했다. “로즈는 유령을 안 믿거든.” 그런가. 케이트가 간단히 수긍하려 했을 때 멀리서 로즈가 우렁차게 외쳤다. “다 들립니다. 유령을 안 믿는 게 아니라 없는 거라고요.” 저것 봐요. 시나몬과 케이트는 서로를 마주 보고 키득대며 웃었다. === 그녀가 큐바인 하우스에 돌아온 것은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서였다. 돌아오는 길에 식당에 들려 식사를 사왔기 때문에 케이트는 조금 느긋한 기분이었다. 오늘 저녁은 미트볼과 삶은 채소, 애플파이였다. 미트볼도 넉넉하게 샀으니 제인이 먹어도 남을 것이다. 푸짐하게 산 식사 때문에 넉넉했던 그녀의 마음은 큐바인 하우스에 들어서는 순간 무너졌다. “케이트, 손님이 왔어요.” “뭐?” 연락도 없던 손님이다. 이안에게 연락 없이 올 손님이라면 제이드와 그의 형 정도지만. 아르고라면 연락 없이 왔으니 식사를 하지 않고 돌아갈 것이다. 다시금 약간이나마 솟았던 희망은 제인의 뒤이은 말에 처참하게 무너졌다. “저녁 드시고 간다던데요.” 하마터면 제인 앞에서 욕을 뱉을 뻔 한 케이트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미치겠네. 그래도 아직 시간이 있다. 제인에게 식당에 가서 좀 더 음식을 사오라 하면 될 것이다. 아니, 아니지. 케이트는 음식 봉투를 내려다보고 생각을 바꿨다. 손님에게 미트볼이라니, 아무래도 좀 그렇다. “저, 그리고.” 그녀의 생각을 가르고 제인이 다시 말을 걸었다. 소년은 부끄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아직 차를 안 드셨어요.” “뭐? 왜?” “음, 모르겠어요. 한번 가져갔는데 필요 없다고 하셨거든요.” 제인의 말에 케이트는 머리를 갸웃했다. 차가 필요 없다고? 누구기에 차는 필요 없지만 식사는 하겠다는 거지? 그녀가 응접실을 힐끔 들여다봤을 때 익히 아는 얼굴이 보였다. 금발에 이안을 닮은 남자. 에드워드는 곤란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었다. “심장을 사용한단 말입니까.” 나직한 이안의 목소리가 응접실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에게 대답한 것은 에드워드가 아니라 여자의 목소리였다. “정확히 말하면 사용하는 건 아니고요.” 여자는 에드워드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다. 갈색 머리가 그녀가 말할 때마다 흔들렸다.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갑자기 몸을 내밀었다. 그 순간 케이트와 여자의 눈이 마주쳤다. 나이는 열 여섯 일곱 정도. 갈색 머리카락을 묶어 위로 틀어 올린 게 나이 들어 보이려고 애쓴 티가 났다. 케이트가 당황해서 뒤로 물러났을 때 이안과 에드워드도 고개를 돌렸다. “죄, 죄송합니다. 필요 없다 하셨지만 그래도 차는 내가야 할 것 같아서.” 아, 차. 에드워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태어나서 그런 차는 처음 마셔봤다. 차가운 물에 우리지도 않은 차라니. 너무 상상 초월이라 웃음이 나올 정도다. “안녕하세요! 저는 로즈마리예요.” 에드워드 옆에 앉아있던 소녀, 로즈마리가 인사를 건넸다. 케이트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말했다. 아, 네. 저는 케이트예요.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문틀에 손을 짚고 섰다. 그는 뭔가 마음이 안 드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뭘 잘못했나? 케이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에드워드 에반스 공작과 그의 약혼녀다. 오늘 저녁 함께 식사할 거야.” 약혼녀라고? 다시 케이트의 눈동자가 로즈마리에게로 향했다. 다시 봤지만, 여전히 그녀는 열 여섯 일곱 살 정도로 보인다. 그에 비하면 에드워드는? 이안과 비슷할 것이다. 그와 나이가 같거나 혹은 많다. 마치 왕자님 같은 에드워드에 비해 로즈마리는 평범한 소녀처럼 보였다. 하지만, “당신도 같이 식사할 건가요?” 로즈마리가 너무 밝게 물어서 케이트는 다시 당황했다. 공작의 약혼녀라면 역시 귀족일 텐데 이 소녀는 너무 스스럼없이 하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뇨, 전….” “같이 하지.” 케이트가 거절하기 전에 이안이 딱 잘라 말했다. 해도 돼. 가 아니라 같이 하라는 명령의 말에 케이트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사용인과 겸상하는 귀족은 없다. 이안이야 상식을 신경 쓰지 않는 남자니 그렇다 쳐도 에드워드가 거절할 것이 분명했다. 케이트의 생각대로 에드워드가 나섰다. “마리. 스미스 양은 우리와 따로 먹는 게 좋을 거야.” “왜요?” 로즈마리의 갈색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소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사람이 많을수록 좋잖아요.” “마리,” 에드워드가 로즈마리를 가라앉히려 했지만 소녀는 듣지 않았다. “또 그렇게 치사하게 굴 거예요?” 치사? 왕위 계승 1위인 남자에게 서슴없이 치사하다고 할 수 있다니 과연 약혼녀의 힘일지도 모른다. 케이트가 입을 벌리고 쳐다보는 동안 이안 역시 에드워드와 로즈마리의 다툼을 말릴 생각이 없는지 문틈에 비스듬하게 기대서서 지켜볼 뿐이었다. “어서 나한테 따로 먹으라고 해요.” 케이트가 속삭였다. 이안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물었다. “어째서?” “난 하녀라고요! 귀족들과 겸상할 수 없어요.” “누가 그러지?” “누가 그런 게 아니라….” 케이트의 입이 딱 막혔다. 누가 그러라고 한 건 아니다. 그저 그게 사회적인 규칙이기 때문이다. 귀족은 사용인과 겸상하지 않는다. 그러니 에드워드의 태도가 당연한 거다. 케이트는 답답해서 이안의 팔을 잡아당겼다. “당신 때문에 두 분이 다투잖아요.” “두 사람이 다투는 건 두 사람의 의견이 다르기 때문이지 나 때문이 아니야.” “의견이 다르게 불을 놓은 건 당신이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의견이라는 건 중간에 누군가가 없어도 달라지게 되어있어.” 진짜 한 번을 안 지는 구나. 이익하고 케이트가 이안의 팔을 다시 잡아당겼다. 그리고 응접실 안에도 로즈마리가 에드워드의 팔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어?” 응접실이 소란스러워 지자 무슨 일인가 하고 들여다 본 제인은 이안과 케이트가, 로즈마리와 에드워드가 다투고 있자 눈을 깜빡였다. 남녀는 대화가 안 통한다더니 진짜였구나. 소년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걸 모르고 로즈마리와 케이트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 가짜 왕자!” “이번엔 당신이 틀린 거라고!” ============================ 작품 후기 ============================ 즐거운 하루 보내셨나요? 내일 부터 나흘을 쉰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즐거운 하루였을 것 같지만 생각해보니 명절이라는 건 지옥으로 기어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경우가 많지요. 개인적으로는 “너 애인은 있니? 결혼은 언제 할래?” 라는 질문이 들어오면 “어, 소개 해 주시게요? 전 연봉 육천에 집이랑 차 있는 사람이 좋아요. 퇴근하면 청소랑 밥도 해놔야 하고요.” 라고 말합니다. 하하하하. 여러분도 이용해 보세요. 시험 잘봤냐고 하면 못봤으니 공부하게 문제집 값 좀 주세요. 라고 하신다거나 여러가지 응용편이 있습니다만 여러분은 씽크빅 돋으시니 더 좋은 방법을 사용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조카나 어린 사촌동생이 노리는 소중한 소장품을 그냥 쥐어 주세요. 그리고 그애들 부모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하세요. “신나게 가지고 놀아^^ 그거 한국에서 구할 수도 없는 거고 일본(미국)에서 직구해야 해서 가격이 00만원정도지만 흠나면 너네 아빠가 하나 사주시겠지, 뭐.” 그럼 즐거운 구정 보내시고. 저는 2월 3일에 돌아오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00095 5. 뮈엘라의 마녀 =========================================================================                            로즈마리는 맞은편에 앉은 케이트를 보고 생긋 웃었다. 케이트의 지친 표정과 무덤덤한 이안의 눈빛과 그걸 쓰게 웃으며 지켜보는 에드워드. 하지만 로즈마리는 그런 걸 눈치챌 정도로 눈치 빠른 소녀가 아니었다. “케이트는 수도에 왜 오게 된 거예요?” “아, 저는 가족을 찾으려고요.” “가족을 잃어버렸어요?” 케이트는 손 하나 대지 않은 자신의 식사를 쳐다보며 쓰게 웃었다. “마리, 초면에 그런 걸 물어보면 실례야.” 에드워드가 부드럽게 얼렀다. 로즈마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얼굴을 붉히며 사과했다. “저기, 미안해요. 난 숲에서 혼자 살아서 또래 여자를 만나기 어려웠거든요.” 이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숲에서 혼자 살았다고? 케이트 역시 로즈마리를 새삼 다시 봤다. 단순히 철없는 소녀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숲에서 혼자 살았어요?” “네. 고모님과 단둘이 살았는데 몇 년 전에 고모님도 떠나셨어요.” 어라. 케이트는 다시 말을 잃었다. 지금 고모님이라는 분이 돌아가셨다는 거죠? 이안에게 속삭여 봤지만,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다시 정적이 내려앉을 것 같자 에드워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어쨌든, 로즈마리는 혼자 사람들과 떨어져 살아서 사교를 잘 몰라. 그러니 약간 실수해도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괜찮습니다. 케이트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과 함께 살아도 사교를 모르는 사람이 바로 옆에 앉아있다. “마녀가 심장을 노리는 이야기를 하시죠.” 주제를 바꾼 건 이안이었다. 그는 제인이 부랴부랴 사온 스테이크를 썰며 말했다. “마녀가 사람들의 심장을 가져가는 이유가 있다고 했잖습니까.” “아, 네.” 로즈마리가 자세를 바로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케이트는 더욱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데 내가 들어도 되는 거야? 그런 의미로 이안을 쳐다봤지만, 그는 그녀를 무시한 채였다. “때때로, 사악한 마녀에 한하지만요. 마녀가 사람의 심장을 노릴 때가 있어요.”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다. 케이트는 여전히 접시에 손도 대지 않은 채 로즈마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작은 소녀는 마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갑자기 어른스러워 보였다. “아, 먼저 이걸 이야기해야겠네요. 뮈엘라에서 마녀라고 부르는 건 세 종류예요.” 마법사, 주술사. 뭐든 상관없다. 뮈엘라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자는 마녀라고 낮잡아 이른다. 케이트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이안과 에드워드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해서 로즈마리의 설명을 끊으려 하지 않고 있었다. “제일 먼저 마법사가 있고요, 그다음에 주술사가 있어요.” 마법사는 마법을 학식으로써 배운 자를 말한다. 마나의 사용을 계산하고 어떤 형태의 마법을 내보이기 위해서 수식을 만들어야 한다. 스스로 마나를 한곳에 응집시킬 수 없으므로 매개체가 필요하다. 케이트는 뜻밖의 이야기에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깜빡였다. 훨씬 어리게만 봤던 로즈마리는 그녀보다 지식이 많았다. 마법사에 대한 설명을 흘려들으며 케이트는 접시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약간 안도감이 들었다. 마녀가 그런 거라면 그녀는 마녀가 아니다. 그녀는 마법을 배운 적도 없고 마나의 사용도 계산하는 법도 모른다. “주술사는 주술을 사용하기 위해 몇 가지 조건이 있어요. 보통은 주술을 사용하기 위한 재료와 주술어(語)가 있는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람의 심장이나 개구리를 모으는 마녀는 이런 주술사의 주술 사용방법을 말하는 거예요.” 마법사와 달리 주술사는 학교나 단체에서 가르치지 않는다. 한 명의 주술사는 한두 명의 주술사만 길러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게 마력보유자인데요.” 로즈마리는 거기까지 말하고 말을 멈췄다. 이 마력보유자라는 자가 뮈엘라에서 가장 강하게 배제하고 핍박하는 자들이다. 마녀에 속하는 세 가지 부류 중 가장 희귀하면서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법사와 주술사에 비교했을 때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어떤 매개체도 필요 없다는 점이예요.” 이안의 눈이 순간 케이트를 향했다. 하지만 바로 다시 로즈마리에게로 향했다. “제대로 된 마력보유자는 별로 없어요.” 그것뿐이다. 로즈마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안이 그것뿐? 이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접시로 시선을 내리더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뭐야. 에드워드가 집중이 깨졌다는 듯 새삼 자신의 접시를 내려다봤다. 로즈마리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은 탓에 그 역시 식사가 반이나 남아있었다. 한편 케이트는 안도해야 할지 불안해해야 할지 몰라 입맛이 사라져 버렸다. 어떤 매개체도 없이 마법사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건 그녀의 힘과 비슷하다. 그게 진짜 그녀의 힘이 맞는다면. 하지만 로즈마리는 바로 제대로 된 마력보유자는 별로 없다고 했다. 그러니 별로 없는 마력보유자가 그녀일 리 없다. 그렇게 자신을 위안해 보지만 가슴 한쪽이 지끈지끈하게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지금 마녀는 이 마력보유자라는 말입니까.” 이안의 질문에 로즈마리가 고개를 들었다. 아까까지의 진지한 이야기와 달리 그녀는 입가에 소스를 묻히고 있었다. “음, 사실 잘 모르겠어요. 심장을 흔적 없이 빼가는 건 셋 다 가능해요.” 에드워드가 손을 뻗어 그녀의 입가를 문질렀다. 그는 소스를 닦아낸 엄지손가락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더니 핥아버렸다. “엣?” 깜짝 놀란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 버렸다. 세 사람이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자 케이트는 지금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자신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가 약혼녀라고 해도 여자의 입에 묻은 소스를 닦은 손을 핥는 게 자연스러운 건가? 이건 너무 친밀한 행동인데. 하지만 두 사람은 분명 약혼한 사이라고 했다. 약혼한 사이에 너무 친밀한 행동을 해서 놀랐다는 것도 우습다. 결국, 케이트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그래서, 마녀가 심장을 가져가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이번에는 에드워드가 물었다. 로즈마리는 반쯤 남은 접시를 배부르다며 밀어냈다. “사람은 스스로 마나를 한곳에 모을 수가 없다는 건 알고 있나요?” 모른다. 케이트는 고개를 저었지만 모르는 건 자신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뮈엘라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마법에 대한 지식이 전무 하다. 알고 있는 에드워드와 이안이 특이한 경우다. “음, 그래서 마법사들이 마나를 모으기 위해 매개체를 사용한다는 건 아까 이야기했죠. 주술사도 같은 이유로 주술을 사용할 때 이런저런 재료가 필요한 거고요.” 유일하게 마력보유자 만이 마나를 모을 매개체가 필요 없다는 말이다. 케이트는 거기까지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사람이 의식하지 않게 마나를 모으고 있는 기관이 하나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로즈마리는 자신의 접시를 에드워드 쪽으로 내밀었다. 그녀가 먹다 남긴 음식을 왕위 계승 1위인 남자가 먹어치우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케이트는 다시 한 번 놀랐지만, 또다시 놀라는 건 자신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자리에서 평범하게 반응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심장이요. 심장은 생명력 그 자체거든요.” 식사가 끝나자 케이트는 애플파이를 내왔다. 다행이다. 애플파이 한 판이면 네 명이 족히 먹을 수 있다. 그녀는 혼자 부엌에 남아 은 식기를 닦는 제인에게 큼지막하게 한 조각 잘라줬다. “사실 주술사가 주술 재료로 사용할 때도 동물의 심장은 상당히 자주 사용해요. 보통은 심장만 꺼내기 힘드니까 작은 동물은 그 자체를 다 써버리지만요.” 작은 소녀 입에서 끔찍한 이야기가 줄줄 쏟아져 나왔다. 케이트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 로즈마리는 자신의 몫으로 나온 애플파이 한 조각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이거 더 없나요?” 심지어 기세 좋게 하나 더를 외치기까지 했다. 에드워드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남은 걸 전부 주겠어? 그녀는 이런 걸 좋아하거든.” 방금 배부르다고 저녁 식사를 반이나 남기지 않았나? 케이트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남은 애플파이를 전부 가져왔다가 로즈마리가 포크 하나만을 이용해 순식간에 먹어치우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급기야는 에드워드가 손도 대지 않은 자신의 애플파이를 양보하기까지 했다. 케이트는 이걸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몰라 이안을 쳐다봤지만, 이 자리에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다. 이안은 뭔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애플파이를 깨작거리고 있었다. 넌 또 왜 그래? 케이트가 내미는 간식은 전부 먹어치우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앞에는 혼자 애플파이 한 판을 다 먹어치우고도 부족하다 할 것 같은 작은 여자가, 옆에는 혼자 애플파이 한 판을 다 먹던 평소의 모습과 다르게 한 조각을 가지고 깨작거리는 남자가 앉아있다. “저, 어제 만든 파운드 케이크가 좀 남아있는데요. 그거라도 내올까요?” 케이트의 말에 에드워드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파운드 케이크? 로즈마리의 표정이 밝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두 번째 차를 따른 케이트는 부끄러워하며 파운드 케이크를 내왔다. 처음 내놨던 애플파이와 달리 이건 그녀가 남은 버터를 사용하기 위해 만든 거라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어, 그래서 그 심장 말인데요.” 파운드 케이크는 내오기가 무섭게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하나는 로즈마리가 하나는 이안이. “애플파이도 남겼잖아요.” 케이트가 나직하게 힐난하자 이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그건 네가 먹어.” 그런 말이 아니잖아. 이 남자야. 마음 같아서는 식탁 아래에서 정강이를 걷어차고 싶지만 이안은 옆에 앉아있어 그게 어렵다. 케이트는 억지로 웃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로즈마리가 입가에 부스러기를 묻히고 물었다. 에드워드는 다시 손을 뻗어 부스러기를 닦아내며 대답했다. “심장이 생명력 그 자체라는 데까지.” 그리고 그는 다시 자연스럽게 로즈마리의 입가를 닦은 엄지손가락을 핥았다. 이제 그만둬. 케이트는 이 자리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하고 몸을 들썩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정상이 아닌 것 같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구정 보내셨나요? 전 매우 즐거운 구정을 보냈습니다. 와, 주말이 이틀이 아니라 나흘로 늘어난 기분이었어요. 로즈마리와 에드워드는 사실 뮈엘라의 수사관 이전에 구상한 이야기의 주인공들 입니다. 나중에 얘네들이 주인공이 이야기도 쓰고 싶기때문에 수사관에서는 자세히 언급이 안될 예정입니다. 흠, 뮈엘라 3부 끝나고 얘네 이야기를 쓰지는 않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같은 세계관이니까요. 아직은 뮈엘라생각만으로 한가득이라 이 다음에 쓰고 싶은건 머릿속에 없네요. 잘하면 3부에 이어서 4부로 갈 수도 있고요. 1부와 2부가 30화 정도의 분량에 이야기를 전부 넣을 수 있는지에 집중했다면 3부는 2부에서 완전히 침몰해 버린 분위기를 띄우는데 집중할 예정이라 아마 좀 길어질 것 같습니다. 벌써 25화쯤 왔는데 이야기는 이제 절반이니까요. 전에 언급을 했던 것 같은데, 아니, 안했나? 뮈엘라의 초기 설정은 가족을 찾기 위해 수도로 온 케이트가 제이드의 마차와 부딪히면서 시작되는 거였습니다. 그때 가지고 있던 물건을 전부 잃어버리고 어머니의 유품인 목걸이 하나만 남은 케이트를 불쌍히 여긴 (죄책감도 합세해서) 제이드가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가족과 절연하고 폐가에 박혀 지내는 이안에게 하녀로 써달라고 부탁하면서 이안과 케이트가 만나게 되는 거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주 이야기는 1. 이안이 가문과 절연당하고 폐가에 쳐박혔는가 (호건가와의 사건때문이죠?) 2. 제이드가 친구인 이안을 밖으로 끌어내고자 해결이 어려운 사건을 던져주고 (이 역할은 좀더 힘이 강한 에드워드로 대체되었죠?) 3. 케이트가 자기 가족을 찾는 것 (현재 진행중) 이었습니다. 지금하고 몇가지가 달라졌죠? ㅎㅎㅎ 이게 죽 쓰다보니 처음부터 하녀였던 케이트와 주인인 이안의 입장상 케이트가 정말 건방진 성격이 아닌이상 때때로 덤빈다는 게 말이 안되기도 했고 이안의 과거 이야기를 그냥 회상정도로 넘기기엔 설득력이 떨어질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등장인물의 케미가 부족하겠더라고요. ㅎㅎㅎ 그래서 원래 1부였던 이야기 앞에 두개의 이야기를 더 해서 케이트와 이안의 케미를 만들고 이안의 과거를 현재로 옮겨버렸습니다. 그러다보니 초기 제가 설정한 이야기의 시작이 3부가 되어버렸어요. 왜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하냐면 오늘치 분량이 짧아서는 절대 아니고요. (궁서체) 새로운 등장인물이 잔뜩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하하. 00096 5. 뮈엘라의 마녀 =========================================================================                            매우 부자연스러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걸 느끼는 건 아마 케이트뿐인 것 같았지만. 슬슬 케이트가 저러다가 에드워드가 로즈마리를 먹어치워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할 때였다. 누군가가 큐바인 하우스의 문을 힘차게 두드렸다. “올 사람 있어?” 시각은 열 시가 넘은 상태였다. 제인을 잠자리에 들여보낸 상태였기 때문에 케이트는 느닷없이 찾아온 손님을 확인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요.” 이안의 대답에 에드워드가 로즈마리를 잡아당겼다. 아야! 하고 작은 여자는 투덜거렸지만, 그가 당기는 대로 순순히 그의 품에 안겼다. “누구세요?” 에드워드의 긴장한 모습에 케이트도 몸을 움츠린 채 문을 살그머니 열자 그 밖에는 제이드가 서 있었다. “스미스양! 이안 있죠?” 엇. 케이트는 당황해서 문을 탁 닫아버렸다. “엥?” 제이드는 손에 술병을 든 채 굳어있었다. 나 지금 문전박대 당한 거야?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케이트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안에서는 케이트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굳어 있었다. 나 무슨 짓을 한 거지? 에드워드 때문이다. 그리고 제이드 때문이다. 에드워드 때문에 덩달아 긴장한 상태에서 경쾌하게 소리치니 반사적으로 누군지 확인하게 전에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케이트가 무례한 건 변하지 않는다. 그런 케이트대신 이안이 다가와서 문을 벌컥 열었다. 제이드는 이안의 얼굴을 보자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뭐야. 난 또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잖아.” 무슨 일 있다. 있고말고. “들어 와.” 어, 정말? 케이트는 깜짝 놀라 이안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 친밀한 행동에 제이드가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그녀는 이안을 향해 속삭였다. “안 되죠! 우린 손님이 있잖아요!” “우리?” 과연 제이드. 그는 손님이 있다는 말보다 케이트가 지칭한 우리라는 주어에 집중했다. 벌써 우리라고 서로를 묶는 사이가 된 거야? 그가 휘파람을 불거나 말거나 이안은 에드워드에게 제이드를 소개했다. “이쪽은 제이드 킬리언. 2급수사관 입니다. 제이드, 이쪽은 에드워드 에반스 공작. 내 사촌이다.” “어?” 에드워드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주 잠깐이었기 때문에 그걸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제이드는 입을 딱 벌리고 에드워드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왕위계승 1위인 에반스 공작님이신가요?” “그래.” “진짜 이 녀석 사촌인 겁니까?” 에드워드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는 먼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믿기지 않지만, 그래.” 제이드는 약간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안과 에드워드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이 녀석이 말했을 때도 반신반의했는데, 진짜 사촌이었군요. 만나서 영광입니다. 공작님.” “나도 만나서 영광이네.” 서글서글한 표정과 친밀감 있는 태도. 이상적인 왕자님 같은 모습에 제이드는 그의 손을 놓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다. “이안과 전혀 안 닮았네요.”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 반쯤은 웃자고 하는 말이었지만 진심이기도 했다. 에드워드 역시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우린 어머니 쪽 사촌이거든. 둘 다 아버지를 닮아서 별로 안 닮았지.” 응? 케이트는 에드워드의 말에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그럴 리가. 마치 쌍둥이 같을 정도로 닮았는데 별로 안 닮았다니! 하지만 곧 그녀는 에드워드의 말에 제이드뿐 아니라 이안도 동의한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이상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에드워드와 이안은 정말 비슷하게 생겼다. 그때 케이트는 에드워드 뒤에 가려져 얼굴만 내민 로즈마리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케이트를 새삼 신기한 생명체인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손님이 계신지 모르고 찾아왔네요.” “아니, 우리는 곧 갈 생각이네.” “바쁜 일 없으면 같이 하시는 건 어떨까요? 사실 이 녀석하고 마시려고 술을 가져왔는데요.” 제이드가 손에 든 술병을 내밀었다. 에드워드는 술병을 받아들고 라벨을 읽더니 흠 하고 소리를 냈다. 상당한 고급술이다. “그럼, 조금만.” 이런 술을 거부하고 가는 건 애주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쉽지 않다. 에드워드가 다시 몸을 돌리자 로즈마리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제이드에게 소개를 받은 뒤 자연스럽게 케이트 곁으로 다가왔다. 에드워드와 제이드가 이안의 뒤를 따라 응접실에 향하는 동안 로즈마리가 속삭였다. “어째서 그를 돕지 않아요?” 응? 뭐를? 케이트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로즈마리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바로 에드워드가 그녀를 불렀기 때문에 그녀는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에드워드에게 달려갔다. “저기, 안주가 없어요.” 이안이 힐끔 내려다보자 응접실에 컵과 얼음을 내려놓은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있는 건 미트볼과 데운 채소인데 그걸 술안주로 내놓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파운드 케이크도 이안과 로즈마리가 다 먹어버렸다. 사과가 좀 있긴 하지만 멍이 들어서 손님에게 내놓기는 어렵다. 이렇게 밤늦은 시간까지 손님이 있는 경우도, 손님이 찾아오는 경우도 처음이라 케이트는 당황한 상태였다. 그녀는 지금 시각에 연 식당이나 가게는 없다는 것도 잊고 말했다. “나가서 사올게요.” “아니, 괜찮습니다.” 제이드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막았다. 오늘, 호건가가 얽힌 도박장 사건이 완전히 마무리됐다. 정확히 말하면 흐지부지 무마돼 버렸다. 그가 엉망으로 써 갈긴 보고서를 수사관장 실에 두고 오는 길이다. 씁쓸한 기분에 이안과 술이나 한잔 할까 하고 느닷없이 찾아온 것이다. 손님이 있는 줄도 몰랐고, 이안과 단 둘이 술 한 병만 마실 생각이었으니 안주도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밖에는 사람의 심장을 빼가는 마녀가 돌아다니고 있다. 지금까지 피해자는 전부 여자. 제이드는 그걸 믿고 혼자 큐바인 하우스에 온 것이니 여자인 케이트를 내보낼 수는 없다. “저, 그럼, 저기.” 케이트는 얼굴을 붉히며 속삭이듯 말했다. “미트볼이 좀 있는데 그거라도.” 창피해서 죽을 것 같다. 술안주로 미트볼이라니. “정말 괜찮습니다.” 터질 것 같은 케이트의 얼굴에 에드워드마저 손을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 “저, 그,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애플파이를 구워올게요.” 멍이든 사과와 버터가 조금 있다. 밀가루는 상비하고 있으니 얼른 만들면 가능할 것이다. 그녀의 말에 로즈마리가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애플파이 만들 수 있어요?” “아까 내간 것보단 맛없을 테지만요.” 술안주에 애플파이라니. 그것도 웃기긴 하지만 미트볼보다는 낫다. 일반 주점이나 평민들은 술안주로 뭐든 먹지만 케이트는 귀족 가에서 지내왔다. 술안주는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나 과일, 조각 케이크같이 한 입 거리가 보통이다. 부랴부랴 애플파이를 준비하는 케이트 곁에 로즈마리가 눈을 반짝이며 따라왔다. “난 뭘 하면 돼요?” “네?” 케이트는 로즈마리의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일에 공작의 약혼녀를 돕게 할 수는 없다. 로즈마리는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시무룩하게 말했다. “다들 난 손도 못 대게 한단 말이예요.” 과연 이 아가씨가 과일을 깎을 줄은 알까? 케이트는 의심스럽게 생각했지만 로즈마리는 다 할 줄 알았다. 디저트류는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과일도 깎을 수 있고 물을 끓이는 법도 알았다. “그러시면 틀에 버터 칠을 해주실래요?” 가능한 다칠 위험이 없고 쉬운 일을 맡긴 케이트는 재빨리 파이지를 반죽하기 시작했다. “아까도 물어봤지만요.” 케이트가 재빨리 파이지를 만들어 면 보에 덮어 창가에 내놓았을 때였다. 파이 틀에 버터 칠을 다 한 로즈마리가 사과를 깎으며 입을 열었다. 케이트는 그녀의 행동에 깜짝 놀랐지만 뜻밖에 로즈마리의 칼솜씨는 괜찮았다. 어느 쪽이냐 하면 귀족이라 보기 어려웠다. 그녀는 로즈마리가 최대한 과육을 남기며 멍든 곳을 도려내는 것을 보고 가볍게 감탄했다. 누가 봐도 과일 아까운 것을 아는 태도였다. “왜 로엔씨를 돕지 않아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케이트는 로즈마리 맞은편에 앉아 사과를 깎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전 이미 이안, 아니 로엔 경을 돕고 있는 걸요.” 로엔 경. 자신이 호칭을 잘 모른다는 사실보다 케이트가 이안을 로엔 경으로 부르는 것 때문에 로즈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그녀는 다시 사과를 깎으며 생각했다. 모르는 걸까. 하지만 저렇게 눈에 보일 정도인데? 결국 로즈마리가 다시 입을 연 건 케이트가 조각낸 사과를 졸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달콤한 설탕과 계피 향이 부엌을 가득 채웠다. 아, 행복해. 로즈마리는 케이트 옆에 붙어 달콤한 향을 한껏 들이마시며 말했다. “이대로라면 당신도 힘들고 이안도 힘들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뭐를? 케이트의 손이 잠깐 멈췄다. 이 여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아까부터 왜 안 돕느냐고 묻더니 이젠 둘 다 힘들 거란다. 케이트는 불을 약하게 두고 파이지를 집어 들었다. “저기, 아까부터 무슨 소릴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로즈마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몰라요?” “뭐를요?” 정말 모르는구나. 로즈마리는 케이트의 표정에서 그걸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이 아는 것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그녀도 전부 다 아는 건 아니다. 아주 일부분일 뿐이고 에드워드 때문에 알고 있을 뿐이다. “에드워드와 이안,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케이트는 파이지를 밀어 틀에 넣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착각이 아니었나? 하지만 남자들은 전부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갑자기 겁이 벌컥 들어 케이트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 여자, 뭘 알고 있는 거지? 그녀는 짐짓 모른 척하기로 결심했다. “무슨 말씀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식은 사과조림으로 파이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우음, 아닌가.” 로즈마리는 계피와 설탕으로 졸인 사과 조각을 하나 꺼내 우물거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럼 굳이 말하지 않는 게 나을까. 에드워드는 늘 로즈마리에게 그녀가 마녀인 것을 말하지 말라고 했다. 뮈엘라는 마녀에게 적대적인 나라다. 그녀가 보기엔 케이트는 마녀일 가능성이 높다. 본인이 모르는 것뿐이라면 괜찮다. 자신이 마녀라는 것을 알려주는 게 앞으로 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마녀에게 적대적이라면? 다른 뮈엘라 사람들처럼 자신이 마녀라는 것을 부인한다면? 그건 오히려 로즈마리와 나아가 에드워드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로즈마리는 더이상 케이트에게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로즈마리가 조용해지자 케이트의 불안감이 고조됐다. 대체 뭐지, 이 여자? 뭘 알고 있는 거지? 그녀는 파이를 구워내는 오븐을 쳐다보며 초조한 기분을 감추려 했다. 나는 마녀가 아니야. 그런 게 아닐 거야. 그녀는 주술사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니다. 마력보유자는 희귀하다 했다. 그런 희귀한 것이 자신일 가능성은 더욱더 낮다. 두 사람의 생각이 오븐 속 파이만큼이나 노릇노릇하게 익어갔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약속이 있어서 이제 집에 왔어요. 오늘 참 추웠죠? 내일은 더 춥다니 다들 옷 든든히 입으세요. 아니, 이걸 읽으실때는 이미 출근 하고 계실때려나. 표지 변경했습니다. 리넬샤님께서 그려주신 팬아트입니다. 감사합니다. 최소 일주일 이상 유지될 예정입니다. 00097 5. 뮈엘라의 마녀 =========================================================================                            제이드는 큐바인 하우스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케이트는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드워드와 그의 약혼녀는 자정쯤에 모시러 온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로즈마리는 무슨 말을 했던 걸까. 케이트는 그녀를 떠올리며 불안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녀는 응접실 소파에 늘어진 제이드에게 약간의 죄책감을 가지고 떨어진 담요를 덮어주었다. 이 집은 손님이 묵을 방이 없다. 아니, 그냥 방이 없다. 그래서 술에 취한 제이드를 응접실에 두는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제이드가 취해 곯아떨어지자 무정하게 혼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사람을 부르거나 데리고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냐는 케이트의 말에 그는 나보고 이 녀석과 한침대를 쓰라는 건가? 라고 대꾸했다. “와, 엉망이네요.” 제인의 기가 차다는 말투에 케이트는 조용히 수긍했다. 세 남자는 어젯밤 제이드가 가져온 브랜디뿐 아니라 큐바인 하우스에 몇 병 없는 술까지 전부 마셔버렸던 것이다. 거기에 로즈마리는 케이트가 구운 애플파이 세 판을 이안과 둘이 누가 더 많이 먹었다 할 것 없이 먹어 치워버렸다. 그 작은 몸에서 애플파이가 한 판 이상 들어간다는 게 그저 놀라울 뿐이다. “제인, 두 분께 세면도구를 챙겨줄래? 난 아침 식사를 사러 가야겠어.” “미트 볼 있잖아요?” “어제 술을 그렇게 마셨으니 미트 볼은 무리일 거야.” 속이 풀릴 만한 것을 사야 한다. 손질한 닭고기를 사다가 스프를 만드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녀가 겉옷을 챙겨 입고 문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이렇게 이른 시각에 손님이? 케이트는 당황해서 문을 열었다. “어, 음. 혹시 여기 제이드 있나요?” 문밖에 있는 건 평범하게 생긴 여자였다. 다갈색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땋아 내리고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안경? 자기 또래의 여자가 안경을 쓰고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라 케이트는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안경은 얼굴을 가리고 화장을 망가트리기 때문에 외모에 관심이 많은 젊은 여자들은 눈이 나빠도 그리 사용하지 않는다. 눈을 가늘게 뜨는 한이 있어도.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외모에는 그리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누구시죠?” 케이트의 물음에 여자가 허리를 세우더니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아, 죄송해요. 저는 조세핀 코트라고 합니다. 제이드를 찾으러 왔어요.” 설마 제이드와 사귀다 차인 여자는 아니겠지. 케이트는 곧 자신이 상당히 실례되는 생각을 했다는 걸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안에 계세요. 아직 주무시고 계신 데, 깨울까요?” 조세핀의 얼굴이 심술 맞게 변했다. 그녀는 손에 든 것을 내밀며 물었다. “죄송하지만, 들어가도 될까요?” “이 집 주인이 아직 안 일어나서,” 그때 조세핀이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태도에 케이트는 지금까지의 경험상 이안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맙소사. 제발 그가 말끔한 상태이길 바라며 몸을 돌리자 멀끔한 얼굴의 이안이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뭐지?” “킬리언 씨를 찾아왔다고 하는데요.” 제이드를? 이안의 시선이 조세핀에게 향했다. 조세핀은 다시 뒤로 물러났다. 잘생겼지만 위압적이다. 그녀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조세핀 코트입니다. 제이드의 친구예요.” “여긴 무슨 일이지?” “오늘 제이드가 가게에 나와 봐야 해서요.” 가게? 케이트는 무슨 소린지 몰라 이안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뒤를 돌아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저 남자가! 케이트는 조세핀을 향해 들어오라고 말한 뒤 제이드를 깨우기 위해 응접실로 걸어갔다. “킬리언씨, 누가 찾아왔어요.” 케이트가 말했지만, 제이드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잠꼬대를 중얼거리며 소파 위에서 몸을 뒤집었다. 담요가 다시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킬리언 씨.” 케이트가 다시 그를 불렀을 때 조세핀이 앞으로 나서며 들고 있던 바구니를 케이트에게 넘겼다. “이거 입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드세요.” 케이트가 바구니 안을 들여다보자 갓 구운 빵과 스프가 들어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서 케이트의 위가 꼬르륵하고 요란한 소리를 울려댔다. 먹으라고? 아무래도 아침 식사를 갖다 준 모양이다. 조세핀은 그대로 제이드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그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제이드, 일어나.” 그녀의 목소리에 제이드가 눈을 반쯤 뜨더니 팔을 들었다. 앗 하는 순간 그의 팔이 조세핀의 어깨를 감고 끌어당겼다. 어머. 케이트가 놀라는 것과 동시에 조세핀의 몸이 끌려가 제이드의 몸 위로 넘어졌다. 어제부터 왜 이래? 케이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재빨리 뒤로 돌았다. 이런 남녀 간의 친밀한 모습은 개인적인 장면이라 그녀가 보는 건 예의가 아니다. “제이드.” 조세핀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제이드를 불렀다. 잠이 덜 깼는지 그가 히죽 웃었다. 그 순간 조세핀은 닭을 노리는 매와 같이 빠른 손놀림으로 그의 귀를 잡고 힘껏 당겼다. “으아아악!” “이, 술꾼이! 취해서 남의 집에 실례를 저지른 것도 모자라서 손님을 기다리게 해? 어서 그 게으른 몸을 일으키지 못해?” “아파, 아파, 아프다고! 조!” 이게 무슨 일이야. 제이드의 엄청난 비명에 제인이 응접실로 뛰어들어왔다. 자기 방으로 돌아갔던 이안까지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내밀었을 정도였다. 케이트는 너무 놀라서 말리지도 못하고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좀 통통한 체격이지만 남자인 제이드에 비하면 조세핀은 작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한 손에 제이드를 휘두르는 장면은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저 여자분이 저분 엄마인가요?” 제인의 속삭임에 대답해줄 생각도 못 하고 케이트는 화려한 솜씨로 제이드의 귀를 잡아당기는 조세핀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저런 기술을 배운 걸까. 그러다가 케이트는 그냥 두면 제이드의 귀가 떨어져 나갈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어 이안에게 말했다. “말려 봐요.” “내가 왜?” 거의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제이드가 잘못했다고 사정하는 것을 배경으로 들으며 이안은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 “저 녀석은 고작 여자에게 죽을 정도로 약하지 않아.”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 “그냥 둬.” 이안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돌려 응접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수사관이 고작 여자 하나에 휘둘릴 리가 없다. 남녀의 힘의 차이도 있고, 범인과 몸싸움에서도 자신의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도록 단련하기 때문이다. 저건 이안이 보기엔 제이드가 그냥 봐주는 걸로 보였다. 하지만 봐주고말고 전에 케이트가 보기엔 제이드의 귀는 위험할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결국 그녀는 조세핀을 말렸다. “저, 코트양. 그만두시는 게 좋겠어요.” “네?” 조세핀은 케이트를 쳐다보고 아차 하고 손을 놓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귀를 붙잡고 제이드가 응접실 바닥을 굴렀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현란한 손놀림으로 제이드의 귀를 잡아당기던 모습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세핀의 태도는 얌전해졌다. 제이드는 얼마나 아팠는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넌 악마야.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처럼 들렸지만 조세핀이 쳐다보자 그는 재빨리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해요. 이 바보를 데리고 갈게요.” 바보라니. 케이트가 중얼거리거나 말거나 조세핀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 끝이 노리는 것은 누가 봐도 제이드의 귀였기 때문에 제이드가 히익 하고 뒤로 물러났다. “네가 손님을 직접 맞겠다고 했잖아!” 조세핀의 힐난에 케이트가 나섰다. 여성들에겐 늘 여유롭던 제이드가 이렇게 여유가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게 불쌍하기도 했고, 숙취에 시달리던 그가 식사는커녕 씻지도 못했다는 게 가엽기도 했다. “무슨 손님이요?” “아, 킬리언 포목점이요.” 케이트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킬리언 포목점? 그게 뭐? 분명 케이트의 옷과 이안의 옷도 킬리언 포목점에서 사온 옷감으로 만든 것이긴 하다. 이안의 옷이 월등하게 좋은 천이었지만. 하지만 그건 로엔 백작 가에서 주문해줬기 때문이다. 그녀가 직접 천을 사러 간 적은 없다. 그러니 옷감이 킬리언 포목점 것이라는 말은 들었어도 어떤 곳인지는 몰랐다. 조세핀은 케이트의 태도에 잠시 당황했다.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에바니엘에서 킬리언 포목상은 상당히 유명하다. 질 좋은 천뿐 아니라 가죽도 판매한다. 직접 짠 천과 염색에도 손을 대고 있어서 부유한 사람뿐 아니라 가난한 서민을 대상으로도 저렴한 천을 판매하고 있다. 상당한 규모로 성장한 본점뿐 아니라 도시 반대쪽에 몇 년 전 분점까지 냈는데 본점은 큰아들 내외가, 분점은 막내아들이 경영하고 있다. 조세핀은 거기까지 겸손한 어조로 설명한 뒤 제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분점의 사장님이랍니다.” “에엑?” 그런 엄청난 집의 아들이었어? 노골적으로 놀라는 표정에 제이드가 쓰게 웃었다. 굳이 킬리언 포목점이 아니다 해도 포목점이란 꽤 부유한 장사에 속한다. 좋은 옷감이란 건 먹고살기에 충분해야 떠오르는 기준이다. 그러니 주 고객층이 부유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고, 부유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장사는 마찬가지로 부유한 장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뭐, 이름뿐인 사장이니까.” “이름뿐이 아니지. 수익금은 다 네 주머니로 들어가잖아.” 조세핀이 손바닥을 부딪쳐 짝하는 소리를 냈다. 크윽. 갑자기 나는 큰 소리에 머리가 울려 제이드가 머리를 소파 쿠션에 박았다. “일어나, 사장님.” “사장님에게 하는 태도치고는 너무 불손하잖아.” “그 불손한 직원 덕에 예의를 지킬 수 있는 거야.” 어, 어라. 케이트는 두 사람의 대화에 입을 벌렸다. 그럼 조세핀이라는 여자가 제이드 가게의 직원이라는 말인가? 사장님과 직원치고는 너무 허물없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보이자 조세핀은 재빨리 변명했다. “아, 저와 제이드는 소꿉친구예요.” 제인과 케이트의 입에서 동시에 아~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설명 없이 제이드를 닦달했으니 상당히 이상한 모양새였던 것이다. 조세핀은 얼굴을 붉히며 제이드의 팔을 잡아당겼다. “죄송해요. 얼른 이 짐승을 데리고 나갈게요.” 짐승이라니, 나 상처받았어. 잠과 술이 덜 깬 상태로 제이드가 중얼거렸다. 그사이 케이트는 제인을 시켜 세면도구를 가져오도록 시켰다. “지켜보기만 하는 여자 둘 앞에서 면도하기는 처음인데.” 숙취에 시달리면서도 제이드의 유머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말에 케이트는 얼굴을 붉히며 부엌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기 전에 간단한 요기라도 챙겨줘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부엌으로 가는 길에 지나친 식당 안에 이안이 앉아있는 게 보였다. “뭐, 뭐해요?” “아침 식사 먹으러 왔다.” 케이트의 몸이 굳었다. 시계는 일곱 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래, 평소 이안이 아침 식사를 하는 시간이 여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오늘은 좀 늦긴 했다. 하지만 제이드가 저 꼴이 될 정도로 마셨는데 같이 마신 이안은 멀쩡해 보였다. 이 사람은 인간이 아닌 게 아닐까. 케이트는 투덜거리며 조세핀이 가져온 스프와 빵을 내놓았다. 조세핀 덕분에 아침부터 허둥대지 않을 수 있었다. 결국 약간 정리된 모습으로 식당에 나타난 제이드까지 식사를 마치자 조세핀은 그를 끌고 큐바인 하우스를 나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케이트에게 실례를 저질러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그녀는 문이 닫히자마자 다시 제이드의 귀를 잡아당겼다. “아, 아파! 아프다고!” “어머, 아파? 난 또 손님이 아침 일찍 온다는 것도 잊고 친구 집에서 술 마시느라 늘어진 짐승이라 그런 감각이 없는 줄 알았지.” ============================ 작품 후기 ============================ 지난 화 “우린 어머니쪽 사촌이라 별로 안 닮았지.” 라는 에드워드의 대사를 “우린 어머니 쪽 사촌거든. 둘 다 아버지를 닮아서 별로 안 닮았지.” 로 수정합니다. 아무래도 혼동이 있으실것 같아서요. 오늘 등장한 조세핀이라는 캐릭터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어느 캐릭터는 안그러겠느냐만은요) 캐릭터 입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셨나요? 어제보다는 좀 덜 추웠던 것 같아요. 카카오톡으로 매일 점심때쯤이면 오는 웹툰이 하나 있는데요, 그 웹툰 마지막 장은 항상 명언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아는 분이 많으실 것 같은데. 오늘 명언은 "일어나서 잠들기 전까지 하고싶은 일을 하나라도 했다면 그날은 성공한 하루다." 이런 글이었습니다. 그런 의미로 저는 먹고싶던 참치김밥을 먹었으니 성공한 하루...는 아니고요. ㅎㅎㅎ 매일 한편 올리기.를 성공했으니 성공한 하루인 것 같습니다. 00098 6. 돌아온 아가씨 =========================================================================                            <사교계 철도 지난 마당에 문전성시를 이룬 저택이 있다. 본 필자는 그 저택이 다름 아닌 벨링스 자작가라는 사실에 당황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벨링스 자작가에 혼기에 다다른 사람은 단 한명 뿐이고 그 한 명은 심지어 얼마 전 약혼했기 때문이다. 그래, 이 필자는 전혀 잘못 쓰지 않았다. 약혼한 사람에게 늦은 구애가 밀려오고 있다니, 에바니엘 사람들의 눈이 멀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도덕심과 예의는 바닥에 떨어졌단 말인가. - 에바니엘 우물가> 로웨나는 자기 방 창문에 드리워진 커텐을 들추고 밖을 힐끔 내려다봤다. 초대가 허락되지 않은 남자들이 한 손에 꽃을 들고 집 앞에서 서성대는 게 보였다. 그 들 중 한 명이 고개를 들자 그녀는 재빨리 커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그럭저럭 예쁘장한 얼굴, 귀족 아가씨답게 약간 거만한 태도. 베링스 자작은 실력 있는 무인으로 여자는 그저 예쁘고 남편의 말에 순종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남자였으므로 자신의 딸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더 좋은 집안과 혼담을 나눌 것을. 그는 갑자기 자신의 딸이 인기를 끌게 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이미 결정한 약혼이 못내 아쉬웠다. 제이드가 떠나자 이안은 케이트를 끌고 고층거리로 향했다. 이번에 발견된 시체를 조사하기 위해서다. 이유도 모르고 이안에게 끌려 따라간 케이트는 도착한 곳이 고층거리라는 것을 알자 놀라서 그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하녀의 옷도 이들에게는 좋은 옷이다. 깨끗하게 닦은 구두를 빤히 바라보는 비쩍 마른 여자아이를 보자 그녀는 신발을 벗어주고 싶은 갈등에 시달렸다. 그녀가 구두를 준다면 다른 어른들이 아이를 때리고 빼앗아 갈 테지만 케이트는 몰랐다. 다행히 케이트는 신발을 주면 자신이 이 고층거리를 맨발로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단념했다. “저기, 로엔경.” 이안은 케이트의 말에 잠시 그게 누군지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케이트에게 로엔경이라는 말을 듣는 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냥 이안이라고 불러.” “하지만 주인님인데 어떻게 이름을 불러요.” 그녀의 대답에 이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자 케이트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미 그녀의 태도는 주인을 대하는 태도를 넘어선 적이 몇 번이나 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호칭 하나로 주인님 운운한다는 건 웃기는 짓이다. 이안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럼 주인님이라고 해.” 주인님 혹은 이안. 너무 상반된 호칭이라 케이트는 잠시 고민했다. 어느 쪽을 불러도 이상하다. 아니, 맞나? “저기, 그럼 주인님.” 이안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는 케이트를 힐끔 쳐다보고 딱딱하게 대답했다. “뭔가.” “여긴 왜 온 거예요?” “네가 도와줄 게 있다.” 이안의 태도는 딱딱해져 있었다. 케이트는 그가 왜 그러는지 몰라 멈칫했다.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나? 잠시 고민에 빠진 그녀는 이안의 태도가 경직된 것이 하녀인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 싫어서일 거라고 넘겨짚었다. 어쩐지 이안답다. 케이트는 열심히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싫어하는데도 그녀를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면 도와줄 수 있는 게 그녀뿐이라는 말일 테니까. 고층거리의 사람들은 확실히 이안보다는 케이트에게 더 사교적이었다. 묻는 말에 그럭저럭 대답해 준다는 것을 사교적이라고 할수 있다면. 케이트는 이안을 대신해서 그가 궁금해하는 것을 물었다. “그 여자 이름을 아세요?” “도망간 마누라 이름도 모르겠는데 죽은 년 이름은 잘도 기억 하겠수.” 으음. 케이트는 이안을 한번 힐끔 쳐다봤다. 다른 사람도 비슷하게 대답했다. 결국 죽은 여자의 이름은 모른다는 뜻이다. “저, 그럼 그 여자가 언제부터 여기에 살기 시작했는지 아세요?” “보이기 시작한 건 몇 주 안 된 걸로 아는데.” “그럼 그전에는 어디 있었는지도 아세요?” 술집 주인은 이상하다는 눈빛을 던졌다. “모르나?” “뭘요?” “거참, 그 유명한 이야기도 모르다니, 아가씨 대체 어디 사는 사람이야?” 케이트는 무슨 소린지 몰라 눈만 깜빡였다. 설마 돈이 부족하다는 뜻인가? 이런 주점에서 소문 같은 걸 듣기 위해서는 술을 사거나 약간의 돈을 쥐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오자마자 주인에게 몇 푼 쥐어 줬던 것이다. 그녀가 품에서 다시 동전을 꺼내려 하자 주점주인이 손을 저었다. “됐어. 이런 곳에서 장사한다고 다 아는 얘길 돈 받고 할 만큼 치사한 건 아니니까.” 다 아는 이야기라고? 케이트와 이안이 무슨 의민지 몰라 눈빛을 교환하는 사이 주점 주인이 말을 이었다. “호건 가의 하녀였다고 하더군. 몇 달 전에 유명했던 걸로 아는데. 호건 가의 개자식이 가지고 놀다가 버린 하녀 계집 말야.” 케이트의 얼굴이 굳었다. 기억난다. 호건 가에서 쫓겨난 하녀. 우체국에서 봤던 여자의 얼굴은 큰 모자로 가려서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하녀에서 바로 고층거리로 떨어지다니, 말도 안 된다. 이미 이 전에 왔던 사람들에게서 여자가 창녀였다는 정보를 들은 다음이었다. 하녀에서 창녀라고? 너무 갑작스러운 변화다. “어, 호건 가의 그 하녀라고요? 하지만, 하녀였는데요?” 주점 주인의 얼굴이 비리한 미소가 흘렀다. 그의 시선이 케이트의 작은 몸을 훑었다. 그게 덜컥 겁이 나서 케이트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이거 순진한 아가씨구만. 하녀는 아무나 하는 줄 아나?” 어느 집이나 자신이 부리는 하녀는 최소한 행실이 바르길 바란다.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면 그게 소문이라도 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그녀는 소문이 그냥 난 것도 아니고 에바니엘 전원이 알게 돼 버렸다. 그것도 하필이면 소문이 안 좋은 제프리 호건의 계집이라는 소문이. 하녀 일을 못 하게 되더라도 행실이 나쁘다는 소문만 없다면 어딘가 점원으로 들어가거나 시집을 갈 수도 있다. 아니, 소문이 났다 해도 상대방이 호건이 아니었다면, 그녀를 쫓아낸 사람이 호건 부인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건 가는 에바니엘 전체에 걸쳐 힘을 가진 집안이었고 호건 가에 미움을 받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를 하녀로 받아들이는 곳은 없었다. 충격에 말을 잃었던 케이트는 이안이 뒤에서 툭 치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그럼 그녀를 싫어할만한 사람은 없었나요?” 남자가 다시 낄낄대고 웃었다. “이봐, 순진한 아가씨. 여기가 어딘지 잊었어? 여긴 빵 한쪽에도 서로 죽자고 달려드는 곳이라고.” 그 말에 케이트가 다시 말을 잃었기 때문에 이번엔 이안이 나섰다. “그래도 더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 아닌가.” 이안이 나서자 남자의 태도가 눈에 띄게 적대적으로 변했다. 사실 케이트에게 이상할 정도로 호의적이었던 것뿐이지만 이안의 눈에는 남자가 케이트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흥. 알게 뭔가.” 이번에도 케이트가 나서는 수밖에 없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상냥하게 말했다. “부탁드려요. 최근에 그녀와 사건이 있었던 사람이나, 그녀가 언급한 사람은 없었나요?” 남자의 시선이 다시 케이트에게 향했다. 이상한 여자다. 천박한 색기나 건방진 매력이 보편적인 고층거리에선 보기 힘든 매력이 있었다. 예쁘장하긴 하지만 절세미녀는 아니다. 하지만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매력이 있었다. 작은 체구에 상냥한 태도가 남자의 경계심을 허물었다. 이런 곳에 올 여자가 아니다. 도와주고 싶고 잘 보이고 싶다는 남자 특유의 허영심을 닳고 닳은 남자에게도 불러일으키는 매력이 있었다. “흠. 죽은 여자가 가장 욕한 자라면 있지.” “있어요?” 케이트가 눈을 반짝이자 남자의 어깨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컵을 행주로 닦으며 말했다. “호건 가에서 쫓겨난 다음 어떻게 어떻게 들어간 저택이 있다는군. 거기서 쫓겨났는데 그 집 주인을 그렇게 싫어했어. 여기 와서 술만 취하면 나쁜 년이라고 욕하곤 했지.” 나쁜 년. 여자라는 말이다. “그 여자가 누군지 혹시 아세요?” 남자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쎄. 말하는 걸로 봐선 귀족인 것 같던데 나도 관심 없어서 자세히 안 물어봤어. 여긴 순 그런 술꾼들뿐이니까.” 귀족이라니. 귀족이 굳이 그 하녀를 죽이고 심장을 빼 갈 이유가 있을까? “그럼 혹시 그녀 주변에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나요?” 남자는 다시 한 번 웃었다. “바보 같은 질문이군. 죽은 여자가 어떻게 먹고살았는지 생각해 보라고.” 아, 그래.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접근하는 사람은 어마어마하게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접근한 대부분의 사람이 이상한 사람일 테지. 케이트는 몰랐지만, 고층거리의 창녀는 창녀 중에서도 가장 바닥에 속한다. 돈이 없거나 일반적인 취향이 아니거나. 어느 쪽이든 수상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밖에 몇 가지 질문을 더 했지만 특기할 사항은 없었다. 여자는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사람도 없었고 시골에 내려갈 생각도 없는 듯했다. 하기야, 시골에 내려갈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고층거리에서 굴러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케이트가 주점을 나왔을 때 그녀가 얻은 건 이안을 위한 정보 외에도 사람의, 여자의 인생이 그렇게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서워서 케이트의 몸이 떨렸다. 그녀는 더 조심해야 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케이트는 이안을 올려다봤다. 큐바인 하우스에서 제인이 있다고는 하나 성인은 이안과 케이트 둘 뿐이다. 그녀는 도와줄 가족도, 도망칠 고향도 없다. 죽은 여자와 다를 게 없다. 케이트가 멈춘 것을 모르고 걸어가던 이안은 그녀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멈춰 서 서 뒤를 돌아보고 다시 돌아왔다. “뭔가.” 나는 더 조심해야 해. 케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안과 너무 가까운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오늘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를 이렇게 열심히 도우려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주인과 하녀가 단둘이 거리를 걷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그게 사람들의 시선에 나쁘게 보일 수도 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예요.” 케이트는 다시 고개를 젓고 이안과 약간 떨어져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케이트의 태도가 경직되자 이안이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 작품 후기 ============================ 어제 수정한 부분이 이해가 안간다는 분들이 수정 전보다 더 많아OTL “우린 어머니 쪽 사촌이거든. 둘 다 아버지를 닮아서 별로 안 닮았지.” 본문에 한 번 언급했는데 이안의 어머니인 실라와 에드워드의 어머니는 자매입니다. 두 사람은 외사촌이 되는 거고요. 그러니 에드워드의 이야기는 우린 외사촌인데 둘다 아버지를 닮아서 안닮았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안은 실라의 친 자식이 아니니 당연히 안닮았고, 에드워드와는 피가 이어져 있지 않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일찍 왔습니다. 퇴근 하는 길에 회사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고양이들이 신경쓰여서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 걸로 알지만) 사료를 들고 갔더니 누가 그릇에 우유를 부어놨더군요. 한동안 챙겨주는 분이 안오신 모양이예요. 지나가는 사람이 마시라고 부어준 모양인데, 개나 고양이는 우유 마시면 탈납니다. 주지 마세요. 어쨌든, (자주 안봐서) 절 보면 경계하는 녀석인데 제가 사료를 붓기 시작하자 번개같이 다가오더니 붓고 있는 와중에도 허겁지겁 먹더군요. 많이 배고팠던 모양이예요. 자, 이제 은혜를 갚거라. 00099 6. 돌아온 아가씨 =========================================================================                            케이트가 이안과 함께 고층거리를 나섰을 때, 마차 한 대가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안이 재빨리 그녀를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마차와 부딪히고 말았을 것이다. 이안은 케이트를 끌어안은 채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약간 창백해지긴 했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충격받은 탓에 케이트는 이안을 멀리해야 한다는 자신의 다짐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품에 안겨있는 동안 마차가 멈추더니 그 안에서 여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다친 사람 있나요?” 위로 말아 올린 뒤 부풀린 금발 머리와 어깨를 감싼 모직 숄에서 풍기던 귀부인의 느낌은 그녀의 허스키한목소리 때문에 이질적이었다. “다쳤어요?” 재차 묻는 말에 케이트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이안의 품에서 제대로 서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린 탓에 후들후들 떨렸다. 두 사람 다 아무 말이 없자 마차 안에서 귀부인이 빠져나왔다. 그녀는 어깨의 모직 숄을 손으로 잡아당기며 케이트와 이안에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여자는 케이트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그녀의 눈에는 케이트만 보였다. 빨강 머리의 자그마한 여자. 그녀가 케이트에게 다가갔을 때 그제야 그녀를 감싼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황금색 눈동자가 여자를 응시했다. “괜찮아요. 그냥 좀 놀란 것 뿐이예요.” 이윽고 케이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여자와 이안 사이에 흐르던 차가운 기운이 사라졌다. 정신을 차린 귀부인이 케이트를 향해 상냥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어딘지 모르게 좋은 느낌이 드는 여자라고 케이트는 생각했다. 약간 그리운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녀가 귀부인 쪽을 향해 한 발짝 내디뎠지만 이안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 남자 왜 이래? 케이트의 시선이 이안에게 향했다. 그는 평소의 무뚝뚝한 표정보다 훨씬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어느 정도냐면 거의 무서워 보였다. 때때로 케이트는 자신을 응시하는 이안의 눈동자를 발견하고 겁에 질리는 때가 있다. 지금 이안의 표정은 그럴 때와 비슷했다. 아니,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왜 그래요?” 케이트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내려다봤다. 귀부인은 이안의 기에 질린 것처럼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서 있었다. 그녀는 케이트가 정말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때 이안이 몸을 굽혔다. 그의 입술이 케이트의 귓가를 스치더니 천천히 목덜미를 따라 내려왔다. “힉!” 이 남자 뭐하는 거야? 여긴 거리다. 그것도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거리다. 거기에 두 사람의 눈앞에 웬 귀부인이 서 있기까지 하다. “뭐, 뭐하는 거예요?” 케이트는 깜짝 놀라 이안에게서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허리를 감은 이안의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하는 거냐고요!” 소리치면 사람들이 돌아볼까 봐, 주의를 집중시킬까 봐 무서워서 케이트의 목소리는 낮았다. “아무것도.” 이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케이트에게서 몸을 떼고 물러났다. 이게 무슨 짓이래? 케이트가 이안을 노려보다가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귀부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맙소사.”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케이트의 입에서 나직한 한탄이 흘러나왔다. 사람을 칠 뻔하는 바람에 놀라서 나와 보니 상대방은 대낮에 대로에서 낯 뜨거운 행위를 보이고 있다. 그녀가 저 귀부인이었다면 분명 수치도 모르는 커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케이트는 문득 이안과 커플로 묶여 생각되는 게 더 부끄러운 건지, 모르는 사람 앞에서 이안에게 휘둘린 게 더 부끄러운지 궁금해졌다. 모르겠다.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케이트가 경고를 날렸다. 진심이다. 고층거리에서 이안을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한 게 불과 삼십 분 전이다. 한 시간도 안 되서 이 꼴이라니. 하지만 케이트의 나름대로 단호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털끝 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마차를 잡기 위해 큰길로 걸어갔다. “내 말 못 들었어요?” 케이트가 화를 내며 따라갔지만 이안의 걸음은 느려지지 않았다. 지나가던 마차가 멈추자 이안은 문을 열고 몸을 돌렸다. 뒤따라오던 케이트는 이안의 걸음을 좇느라 거의 뛰어오고 있었다. 그대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챈 그의 눈에 그녀의 눈이 깜짝 놀라 커다래지는 것이 보였다. “앗!” 정말 앗 하는 순간 케이트의 몸은 마차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마차 시트에 반쯤 뒹굴다시피 올라가 있었다. 치마! 치마가 뒤집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케이트는 허겁지겁 몸가짐을 바로 했다. 이 남자가! 그녀가 화를 내려고 입을 벌렸을 때 이안은 팔이 쭉 뻗더니 손으로 마차 천장을 때리며 외쳤다. “길드 거리로!” 뮈엘라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길드가 있고 길드가 모여 있는 거리가 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마법 길드가 없다는 점이다. 뮈엘라의 수도 에바니엘은 대륙에서 가장 큰 검사 길드가 있는 도시다. 전사 길드로 통합해서 유지하는 타국의 도시에 비교하면 검사, 궁수, 무사등으로 세부적으로 나뉘어 있을 뿐 아니라 규모도 상당하다. 하지만 이안이 향한 곳은 검사 길드가 아니었다. 수도에 온지 고작 두어 달. 길드거리를 갈 일도, 필요성도 없었던 케이트는 처음 접하는 길드 거리의 모습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거리에 무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흔한 것이 뮈엘라기는 하지만 길드 거리에서는 무기를 들고 다니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려웠다. “저기, 어딜 가는 거예요?” 케이트는 마차에서 내려 이안을 따르며 물었다. 그는 잠시 멈춰서 케이트를 돌아보더니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디나 무기를 든 사람들뿐이다. 질이 나쁜 사람이 무기까지 들면 어떻게 되는지 이안은 잘 알고 있었다. “정보 길드.” 정보 길드. 정보를 수집, 분류하여 보관하고 판매하기도 한다. 어디가 정보 길드가 하는 일은 비슷하다. 물건, 사람을 조사하고 원하는 사람에게 판매한다. 하지만 모든 정보를 다 파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호건 가에 대한 정보라면 판매하지도, 수집하지도 않고 있었다. 돈 몇 푼 벌겠다고 호건 가의 미움을 받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케이트는 어깨를 감싼 이안의 팔을 의식하고 몸을 움츠렸다. 마음 같아서는 이러지 말라고 외치고 싶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 중에 위험한 눈초리를 하는 사람도 있어서 이안의 품에서 벗어나는 게 무서웠다. 그녀는 몰랐지만 길드 거리 안에는 몇 가지 위험한 길드가 숨어 있다. 도둑 길드나 용병 길드가 그렇다. “정보 길드는 왜요?” 대신 케이트는 어깨를 감싼 팔을 의식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의식하면 지는 거야. 그녀의 그런 다짐은 우락부락한 체구의 남자가 지나가는 바람에 이안이 그녀를 더 가깝게 끌어당기면서 무산됐다. “심장을 훔치는 자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지 확인할 거다.” 케이트는 이안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왜 이렇게까지 범인을 찾는 걸까. 그녀는 아직 에드워드가 이안을 비밀수사관으로 임명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안은 타인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이 아니다. 전쟁이 났다 해도 그는 무심한 태도로 응접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을 것이다. 이젠 수사관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범인을 찾으려 하는 이유가 뭐지? “어제 에반스 공작님이 하신 이야기 때문인가요?” 이안의 황금색 눈동자가 케이트를 향했다. 그는 그제야 그녀가 자신의 에드워드로부터 비밀수사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케이트가 다시 어깨를 움츠렸다. “범인이 마녀일지 모르는데 정보 길드에서 알려줄까요?” 다시 이안의 입이 닫혔다. 범인은 마녀일까. 마녀일 가능성이 높다. 뮈엘라는 마녀를 배척한다. 그렇다면 정보 길드도 그럴까? 마녀일 수 있다던 로즈마리의 말이 떠올라 이안은 다시 케이트를 쳐다봤다. “너는 마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느닷없는 질문에 케이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최근 몇 년간 케이트는 마녀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뮈엘라에서 마녀라는 건 그런 존재다. 어렸을 때는 괴담의 주인공. 어른이 되면 나와는 관계없는 존재. 때때로 어느 시골에서 마녀가 잡혔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곤 한다. 진위에 상관없이 바람결에 흘러들어오는 그 이야기는 앞뒤를 잘 맞춰보면 몇 년 전에 잡힌 마녀의 이야기가 돌고 돌아 다시 들려온 이야기인 적도 많았다. “생각 안 해봤어요.” “어째서?” “그건, 내가 마녀일지 몰라서 인 건가요?” 케이트가 이안을 찌릿 노려봤다. 초록색 눈동자의 테두리가 금색으로 물들었다. “아니.” 이안은 케이트를 끌어안은 채 정보 길드의 문을 열며 중얼거렸다. “그냥 네 생각을 물어본 거다.” 솔직한 대답에 케이트의 말이 막혔다. 그녀는 이안의 팔과 몸 사이에 끼인 채로 문을 통과하려 했다. 그때 삐익 삐익하고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지? 그녀가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자 어디선가 무기를 든 사람들이 달려 나왔다. 그들 중 가운데에 선 남자가 이안과 케이트 앞에 공격자세로 외쳤다. “아티팩트가 있다면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녀라면 인장을 보이십시오.” 순간 케이트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마녀다! 그녀는 역시 마녀였다. 세상에. 저들이 그걸 알았어! 난 이제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다 죽을 거야! 절망적인 심정에 그녀가 눈을 꼭 감은 사이 이안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그것을 내보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안티매직 아티팩트다.” “앞에 놓고 물러나십시오.” 이안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순순히 반지를 내려놓고 물러났다. 케이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가 내려놓은 반지를 쳐다봤다. 남자가 걸고 있던 목걸이를 벗어 반지에 갖다 대자 목걸이가 파란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헉. 케이트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다시 통과해 보시죠.” 남자의 말에 이안이 케이트를 끌고 문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이번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반지를 집어 이안에게 내밀며 말했다. “들어 오셔도 좋습니다.” 마법을 배척하는 나라의 수도답게 길드들은 저마다 마법을 감지하는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마법을 배척하기 위해 마법이 필요하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더욱더 아이러니한 것은 자신들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마법을 쓰기 위해 마법사가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나라에 승인된 마법사들은 이런 식으로 마법을 탐지하고 배제하기 위한 마법을 걸고 보수하는 일에 투입된다. 그들은 나라로부터 딱 먹고 살만큼 만의 보수를 받는다. 그러니 이런 수도가 아니라면 마법을 볼 일이 없다. 케이트에게는 상당히 놀라운 경험이었다. ============================ 작품 후기 ============================ 컴퓨터 앞에서 뭘 하다가 들고있던 걸 떨어트리는 바람에 산지 얼마 안된 키보드의 받침대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 순간은 들고 있던게 더 비싸서 으악! 했는데 키보드 받침대가 부러지니 와, 이거 진짜 귀찮네요. 산지 얼마 안됐는데 또 사긴 아깝고... 어째야하나 고민중입니다. 아, 어제 은혜 갚으라고 한 길고양이는 오늘 퇴근하면서 한번 더 들렀는데 마치 "여어, 어제는 과인이 신세를 졌네." 라는 듯 제 앞으로 걸어오더라고요. 오늘은 사료셔틀이 왔니? 하고 봤는데 그릇이 좀 차있었어요. 그래서 그래도 주말이니까 사료 좀 더 주고 갈까? 했더니 "아니, 불충한 셔틀이 오늘 와서 충분히 공양하고 갔으니 그만 됐네. 내 어제 부끄러운 꼴을 보였군." 제 다리에 몸을 비비더군요. 그래서 그릇에 사료를 좀 부어주고 오는데 마치 "자네의 정성, 잘 받겠네. 그대의 앞날에 포스가 함께하길." 이라는 듯 제가 사라질때까지 앞에 앉아서 절 쳐다보며 똥꼬를 핥았습니다. 00100 6. 돌아온 아가씨 =========================================================================                            탈린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고객의 집 안에 서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호건 가는 가장 통이 큰 고객이다. 그 명성답게 늘 집 앞에는 만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이 자신의 사업에 투자하라는 사기꾼에 가까운 자들이었지만. 그는 우월감에 젖은 눈으로 호건 가의 사람을 한 번이라도 만나기 위해 낮이나 밤이나 기다리는 사람들을 훑어봤다. 이 사람들과 그의 다른 점은 그는 출입이 허락되었을 뿐 아니라, 초청받았다는 점이다. 물론 당주(當主)인 비스마르크 호건이 그를 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그의 며느리인 에스메랄다 호건은 단골손님이었다. 마차 한 대가 마차 출입로를 통해 빠져나가자 전령에게 이야기를 전해 받은 문지기가 탈린에게 들어가라며 문을 열어주었다. 부러운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탈린은 발걸음도 의기양양하게 호건 가 저택으로 발을 내디뎠다. “안녕하십니까, 부인.” 탈린은 하인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에 들어서며 싹싹하게 인사했다. 돈이 될 만한 고객에게는 간도 빼줄 수 있다는 게 탈론의 모토다. 게다가 에스메랄다는 약간 바가지를 씌워도 눈치채지 못하는 좋은 고객이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에스메랄다 호건은 키가 크고 뺨이 홀쭉한 여자였다. 평소에는 심술궂게 빛나던 검 갈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짜증이 차올라 있었다. 이크. 재잘대려던 탈린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오늘따라 호건 부인의 기분이 안 좋다. “이것들은 서재에 둬.” 그녀가 손짓하자 하인들이 고개를 꾸벅하고 응접실에 세워둔 액자를 들어 옮기기 시작했다. 탈린의 눈이 반사적으로 하인들이 옮기는 액자로 향했다. 호건 가이니 액자도 보석으로 꾸미거나 금박을 입히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그의 기대대로 액자는 화려하고 그 틀만으로도 값어치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다음 그의 눈을 사로잡은 건 액자가 아니었다. 액자에 들어있는 그림. 정확하게는 한 여자의 그림이었다. 아직 소녀티가 나는 아름다운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금발 머리는 위로 올리고 어깨가 파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약간 유행이 지난 것들인 것으로 보아 호건 가의 조상인 모양이었다. 어쩌면 사라진 호건 가의 셋째 딸인지도 모르지. 그는 호건 가의 딸이라면 얼마나 화려한 장신구를 했을지 궁금해 자세히 관찰했다. 화려한 귀걸이와 목걸이. 그 나이 대의 여자가 하기엔 너무 비싼 귀금속으로 보였지만 그녀는 자연스러워 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호건 가가 아닌가. 탈린은 그림 속의 여자가 호건 가의 사라진 막내딸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비스마르크 호건이 가출한 자식들과 절연했다는 것은 에바니엘 아니, 뮈엘라 전체에 걸쳐 유명한 이야기다. 그는 가출한 딸과 아들에게 일절 연락하지 않으며 금전적인 도움을 주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심지어 자신의 저택에 자식들이 들어간 초상화를 전부 치우게 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그렇다면 저 초상화는 일부러 창고에서 꺼내왔다는 말이 된다. 초상화가 전부 응접실에서 빠져나가자 에스메랄다는 소파에 앉으며 탈린에게 말을 걸었다. “가지고 왔나요?” “아, 네.” 탈린은 소중하게 가지고 온 보따리를 응접실 테이블에 풀어놓았다. 안에 송아지 가죽을 댄 상자를 열자 그 안에 화려한 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봐요.” 에스메랄다가 길게 손톱을 기른 손을 내밀었다. 창백하다 싶은 그녀의 피부에 금 사슬이 올라가자 창백한 피부가 조금이나마 생기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보석을 좋아한다. 어떻게 해도 생기 있게 바꿀 수 없는 피부를 보석으로 가릴 수 있으니까. 잘 선택하면 창백한 피부가 분홍색을 띤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루비인가요?” “제가 부인께 고작 루비를 보여드리겠습니까.” 탈린은 붙임성 좋은 웃음을 띠며 말을 이었다. “붉은 다이아몬드입니다.” “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에스메랄다의 눈동자가 커졌다. 마음에 든다. 붉은 다이아몬드라니, 이걸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연회장에서 붉은 드레스를 입고 이 붉은 다이아몬드를 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주변의 선망과 질투의 눈빛도. 아니, 아니지. 그녀는 곧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바꿨다. 붉은 다이아몬드처럼 귀한 보석에 입던 붉은 드레스를 또 입을 수야 없다. 당장 사람을 불러 드레스를 맞춰야겠다. 그녀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또 뭐가 있죠?” 붉은 다이아몬드를 손에 쥔 상태였다. 탈린의 입가에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그는 다음 상품으로 넘어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 케이트는 시나몬의 집에 초대받아 따듯한 차가 담긴 찻잔을 손에 들고 응접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슨 차인지 몰라도 계피 향이 났다. 로즈는 무뚝뚝하게 차를 따라주며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차랍니다. 시나몬이 가장 좋아하는 계피차라니, 무슨 농담 같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시나몬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 왜 케이트를 부른 거람?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행동은 몇 분 후 밝혀졌다. “늦어서 미안해요!” 호들갑을 떨며 집 안에 뛰어들어온 시나몬이 코트를 벗기도 전에 응접실 테이블에 신문뭉치를 내려놓으며 외쳤다. “아가씨, 집 안에서 뛰지 마세요.” 로즈는 기다렸다는 듯 시나몬의 차를 내오며 가볍게 힐난한 뒤 그녀의 코트를 솜씨 좋게 벗겨 내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나몬은 케이트에게 신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읽어줘요!” “네?” 대뜸 읽어달라니. 상당한 결례다. 케이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을 벌리고 그녀를 쳐다봤다. “아가씨, 부탁합니다는요?” “아, 맞다. 미안해요. 부탁할게요.” 이건 또 어느 집의 아이와 자식이야기지? 무뚝뚝한 태도의 로즈가 케이트를 향해 몸을 돌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의 결례에 대신 사과드릴게요.” 하인의 결례에 주인이 사과하는 법은 있어도 주인의 결례에 하인이 사과하는 법은 없다. 아니, 있나? 뜻밖의 상황에 케이트는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로즈는 테이블의 신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사실 어제 아가씨의 새 공연이 있었거든요. 그 반응을 알고 싶으신 거예요. 악의가 있으신 건 아니고, 너무 흥분해서 그러신 거니 이해 부탁드립니다.” 저도 모르게 케이트는 피식 웃어버렸다. 진짜로 시나몬은 미안합니다. 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장갑을 쥐어짜는 걸 보니 케이트는 이 제멋대로인 아가씨도 신경 쓰이는 일이 있기는 했구나. 싶었다. “돈은 대독자에게 주는 만큼 줄게요.” 시나몬의 제의에 케이트는 손을 저었다. 맛있는 차와 케이크를 대접받았으니 됐다. 그러다 그녀는 작은 호기심에 입을 열었다. “왜 대독자를 부르지 않고요?” “아, 오늘 대독자가 다 예약이 엄청 밀려있다지 뭐예요. 제일 빠른 시간이 내일 오후라잖아요.”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난 걸까? 케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신문을 펼쳤다. 큰 사건이 벌어진 날은 대독자를 찾는 사람이 많다. 다들 신문에 무슨 사건이 벌어졌는지 궁금해하는 것이다. 신문을 한 부 들자마자 케이트는 왜 이렇게 대독자의 예약이 많은지 깨달았다. 1 면에 큰 글자로 이렇게 찍혀 있었다. [성녀 출현!] “어머.” 케이트의 감탄에 시나몬이 그녀에게 몸을 빼고 물었다. “뭐예요? 무슨 일인데요?” “아, 성녀가 출현했다네요.” “성녀요? 로즈! 들었어?” 마법을 배척하는 나라 뮈엘라가 타국의 마법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성녀의 존재. 초대 왕 에드워드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성녀. 그녀의 이름을 따 이 나라의 이름은 뮈엘라가 되었다. 즉, 초대 성녀의 이름이 뮈엘라였던 것이다. 항간에는 나라를 세우는 데 에드워드보다 뮈엘라의 공헌이 더 컸다는 말도 있다. 뮈엘라의 초대 왕이 여왕이 아니라 왕이 된 것은 그녀가 왕위에 오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녀 뮈엘라는 나라를 세우고 나라가 안정되자 홀연히 자취를 감춰 버렸다. 나라 곳곳에서 성녀의 도움을 받은 백성들의 이야기가 전해지고는 있지만, 그녀가 왕의 곁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 이후 성녀는 뮈엘라만의 상징이 되었다. 마법사도, 주술사도 아닌 성스러운 힘을 가진 미혼의 처녀가 짧게는 몇 년에 한 번, 길게는 몇십 년에 한 번씩 등장했다. 그녀들은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뮈엘라를 위험에서 구해주었다. 그것은 한때 뮈엘라가 마법의 나라라 일컬어지던 때부터 마법의 타락시대를 지나 전사들이 타락한 마법사를 단죄하고 기울어지던 나라를 구해낸 지금에 이를 때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마법사가 거의 사라져 버린 뮈엘라를 타국의 마법 공격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성녀가 나타났다고요? 진짜래요?” 로즈는 시나몬의 코트를 걸어둔 뒤 돌아와 물었다. 성녀가 등장했다고 해서 모두 성녀로 인정되는 게 아니다. 때때로 아니, 상당히 자주 마녀가 스스로 성녀라 칭하며 나라를 어지럽히기 위해 나타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아뇨, 이제 첫 번째 시험에 통과했다네요.” “첫 번째 시험은 거의 다 통과하잖아요.” “그렇죠.” 케이트는 남은 기사를 훑어 본 뒤 신문을 넘겼다. 성녀 시험이 몇 가지나 있는지는 그녀도 모른다. 하지만 보통 세 번째 시험에서 떨어져 가짜라는 낙인이 찍힌 채 쫓겨나곤 했다. 시나몬의 기사는 에바니엘 일보 가장 마지막에 올라가 있었다. 케이트는 재빨리 기사를 훑었다. 평이 나쁘다면 대충 얼버무릴 생각이었다. 다행히 기사는 나쁘지 않았다. “괜찮았다네요.” 케이트는 우선 그렇게 말하고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역시 시나몬, 괜찮은 공연이었다는 요지의 짤막한 기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나몬은 케이트가 기사를 다 읽기가 무섭게 두 번째 신문을 내밀었다. 뮈엘라 일보. 거기도 비슷했다. 오히려 뮈엘라 일보에 기사를 쓴 기자는 시나몬의 팬이었는지 상당한 칭찬을 늘어놓고 있었다. “좋은데요? 정말 좋은 무대였나 봐요.” 기사를 다 읽은 케이트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걸었지만, 시나몬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녀는 결연한 태도로 세 번째 신문을 내밀었다. 에바니엘 우물가. 가십 전문 신문이 아닌가. 케이트는 어리둥절하면서 에바니엘 우물가를 넘겼다. 여기도 1면을 장식한 건 성녀가 나타났다는 기사였다. 그녀는 천천히 시나몬의 기사를 찾으며 신문을 넘겼다. 가십 전문 신문이다 보니 기사가 대부분 어느 부인이 어느 기사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느니, 어느 귀족 가의 셋째 딸이 사실은 부인이 바람피워 생긴 아이라느니 하는 이야기였다. 굳이 이런 신문의 평을 봐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케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신문을 넘겼다. 약간 크게 호건 가의 셋째 딸이 돌아왔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제목은 [돌아온 아가씨] “뭐예요?” 케이트의 시선이 조금 오래 한곳에 머물자 시나몬이 다시 몸을 내밀며 물었다. “아, 아뇨. 음, 그 호건 가의 막내딸이 돌아왔다네요.” “어머, 그래요?” 시나몬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호건 부인 속이 말이 아니겠는데? 로즈, 한동안 호건 가 예약은 잡지 말아줘.” 그녀의 말에 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트는 무슨 소린지 몰라 시나몬을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이예요?” “에이, 호건 가에 남은 게 제프리 호건뿐이잖아요. 당주인 비스마르크 호건이 죽으면 그 재산이 다 어디로 가겠어요? 손자인 제프리 호건에게 가겠죠. 그럼 제프리의 엄마인 호건 부인도 더이상 시아버지 눈치 안 보고 돈을 펑펑 쓸 수 있을 테고요.” “어, 그럼. 속이 말이 아니라는 말은?” 시나몬이 둘째손가락을 까딱이며 심술궂게 말했다. “돌아올 재산이 반으로 줄었는데 어느 누가 기분이 좋겠어요.” 그런가? 케이트는 갸웃하며 다시 신문을 넘겼다. 그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진 게 별로 없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렇게 부자인 호건 가의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 돈이 반으로 줄었다고 해서 속이 상한다는 건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다. 돈이라는 건 먹고 살만큼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케이트의 생각을 읽은 시나몬은 로즈를 보며 쓰게 웃었다. 그녀는 케이트가 마음에 들었다. 크게 욕심이 없다는 점도 현실을 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순진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케이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시나몬은 그녀가 자신의 기사를 읽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가십 전문 신문이긴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공연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를 하는 것은 에바니엘 우물가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읽어줘요. 요약하지 말고, 전부 다요.” 어, 정말요? 케이트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내용일지 알 것 같아 시나몬은 씨익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그 신문의 기사가 가장 중요해요. 다 읽어줘요.” 케이트는 더듬더듬 안 나오는 목소리를 쥐어짜며 기사를 읽어 내렸다. 평은 혹독하다 할 만큼 나빴다. 기자는 무대의상과 머리스타일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는 말로 시작했다. 호흡은 엉망이었으며 때때로 가사를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고 썼으며 심지어 클라이맥스에서 음 이탈을 했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가장 심한 건 가수 시나몬의 얼굴은 아무 감정 없이 웃기만 하는 인형 같았다는 문단이었다. 하지만 악의적으로 보이는 기사는 아니었다. 누군지 몰라도 이 기사를 쓴 사람은 시나몬에 대해, 그리고 시나몬의 실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인 게 분명했다. 그는 시나몬이 실수한 부분과 부족한 부분을 거침없이 지적했으며 마지막은 이렇게 고치라는 충고까지 곁들이고 있었다. “후아.” 케이트가 기사를 전부 읽자 시나몬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로즈가 기다렸다는 듯 차가운 물을 내밀었다. 단숨에 물을 들이켠 그녀는 심호흡하더니 케이트를 향해 기운 없이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스미스양.” “케이트라고 하세요.” “음, 케이트. 놀랐죠?” 놀랐다마다. 케이트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시나몬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어깨를 폈다. “그 기사가 다 맞아요. 공연 전에 몸 관리를 못 했고, 실수했어요. 그걸 알아차릴 만한 실력이 세 신문 중 어느 쪽인지 궁금했을 뿐이예요.” 전사의 나라 뮈엘라. 예술을 즐기고 평가하는 문화가 이뤄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케이트는 고작 가십지라 생각했던 에바니엘 우물가에서 제대로 된 평이 올라갔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예술에 대해 이제야 눈을 돌리는 뮈엘라의 특성상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음악, 미술, 춤. 그런 것들은 뮈엘라에서 신문을 읽는 자들의 관심분야가 아니었다. 아니, 신문을 대독시키는 자들의 관심분야가 아니었다. 그래서 뮈엘라 일보와 에바니엘 일보에 실린 기사는 대부분 용병과 기사의 무훈이나 살인 사건 같은 게 더 많았다. “어떤 분야에서는 제대로 된 기사를 보려면 에바니엘 우물가가 낫다는 말이군요.” 그렇죠. 시나몬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찰랑하고 소리를 냈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전 차라리 눈뜨고 싶지 않을만큼 행복한 주말이었어요. 흑흑... 해당 편에는 현재의 주인이라는 의미로 "당주"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국어사전에 검색해보니 딱히 일본어라는 말이 없기도 하고 현재의 주인이라는 말보다는 어울리다 생각해서 사용했지만 일본어느낌이 나서 별로 좋아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러니, 부디 당주가 일본어라는 증거를 보여주시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로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제보 부탁드립니다. 뮈엘라가 왜 마법사를 천대하였느냐가 예에전에 아주 잠깐 나왔었는데 그때도 살짝 언급만 하고 지나가서 기억하는 분이 거의 없으실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언급하긴 했지만 두세줄 정도라 후련한 설명은 아닐 것 같습니다. 처음 이번 편을 쓸 때 뮈엘라의 역사를 간단히 서술했는데 그러다보니 조판버전으로 대략 다섯장 정도가 할애되더군요;;; 현 이야기에서 크게 필요한 부분은 아니라 생각해서 삭제해 버렸습니다. (저는 보통 연재 할때 총 연재 분량의 1/5정도는 다 써놓고 삭제하는 편입니다.) 나중에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현재까지로는 예정이예요. 또 그때 되면 쓸모없다는 판단하에 자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본문에 언급이 안되면 후기를 할애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딱히 내용이 누설이나 복선같은건 아니지만 저는 본문의 사건과 크게 관계없는 나라의 역사나 신이야기 같은걸 서술하는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거니 너무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궁금하신 분이 많다면 나중에 게시판을 이용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번편은 많죠? 쓰다보니 한 회로 자르기가 애매해서 약간 길게 잘랐습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다음편은 어떨까요? 하하하하하. 00101 6. 돌아온 아가씨 =========================================================================                            이안을 멀리하기 위한 케이트의 노력은 큐바인 하우스에서 조금씩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그에게 다가가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이안의 차 시중을 제인에게 전담했다. 사실 그건 대단한 일이 아니다. 원래 식사 서빙이나 차 시중 같은 것은 남자 하인이 하는 것이다. 접대 하녀라는 건 사용인이 적은 가난한 집에서나 쓰는 직책이다. 큐바인 하우스는 사용인이 적기는 하지만 가난한 집은 아니다. 이안은 수사관으로 일하는 동안 받은 급여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그의 대부분의 의식주는 큐바인 하우스에 오기 전까지 로엔 가에서 부담했고 그건 로엔 가의 차남으로서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안이 부유할 수 있는 이유는 고작 일 년 여간 받은 수사관으로서의 급여 때문이 아니라 집안 덕분이었다. 로엔가는 그럭저럭 괜찮은 가문이었고 로엔 백작부인은 제 배로 낳지 않은 둘째 아들을 위해 자신의 은행 저금 중 일부를 이안의 이름으로 돌려놓은 상태였다. 게다가 이안은 현재 비밀수사관으로서 적지 않은 돈을 지원받고 있었다. 그러니 마음만 먹는다면 다 무너져가는 이 집을 수리하고 새로운 사용인을 두, 세 명 쯤 더 고용하는 건 일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좋아. 이제 잘하네.” 케이트의 칭찬에 제인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입이 귀에 가 걸리는 걸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제인에게 물 끓이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을 케이트가 깨달은 것은 며칠 전 시나몬에게 신문을 읽어주고 큐바인 하우스에 돌아왔을 때의 일이었다. 때마침 소년은 자신의 주인에게 차를 내놓고 있었는데 꽤 싸늘한 날씨임에도 주전자에서 김이 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케이트는 응접실에 들어가 차를 확인하는 실례를 저지르기보다는 제인을 불러 살그머니 물었다. 혹시, 물 끓이는 법을 아니? 소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다음의 일은 꽤 볼만했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응접실로 달려간 다음 마악 이안이 집어든 찻잔을 빼앗았다. “실례했습니다!” 엄청난 기백에 이안마저 입을 벌리고 도망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정도였다. 그녀는 찬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찻잎을 한참이나 멍하니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제인에게 천천히 차 우리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영리한 소년이다. 찻주전자에 찻잎을 넣고 물을 넣는다는 것을 어깨 넘어 본 것만으로 배우지 않았던가. 눈치가 빠르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제인은 케이트가 그럭저럭 합격점을 줄 만한 홍차를 끓여냈다. 원래대로라면 열네 살 소년이라면 누구나 할 줄 아는 일이다. 귀족이나 부잣집 여식이 아닌 이상 아이들은 물을 끓이는 법쯤은 안다. 그래서 케이트는 제인도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소년이 고아이고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는 것을 종종 잊어버리곤 했다. 그만큼 제인이 빨리 배우고 영리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음엔 밀크티를 만드는 법을 알려 줄게.” 케이트는 그렇게 말하며 다기를 정리했다. 우유가 응고되지 않도록 끓이는 건, 물을 끓이는 것보다 좀 더 힘들다. 그건 좀 천천히 배워도 될 것이다. 이안은 응접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는 에바니엘 우물가를 제외한 두 개의 신문을 구독하고 있는데 케이트가 쟁반을 내려놓으며 힐끔 쳐다보니 지금 읽고 있는 건 뮈엘라 일보였다. 그가 읽고 있는 면에 가장 크게 찍힌 기사의 제목은 이거였다. [돌아온 아가씨] 어머, 어디서 본 제목이네?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이안은 그녀가 쟁반을 내려놓기 위해 허리를 굽힌 상태에서 멈춰있자 고개를 들었다. 가까운 곳에 케이트의 얼굴이 보였다. 초록색의 눈동자가 기사를 읽느라 정신없이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마치 초록색 보석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뭔가.” “꺅!” 아주 가까운 곳에서,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이안의 얼굴이 보이자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주인을 마치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반응하다니, 상당한 실례다. 이 정도쯤 되면 아무리 이안이라 해도 기분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워 보였다. “어, 그게. 죄송합니다.” 케이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세상에. 접근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게 바로 며칠 전인데 또 이렇다니. 하지만 이번 일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더듬더듬 변명을 시작했다. “그, 신문에 신경 쓰이는 제목이 있어서요.” “어느 거?” “거기 호건 가의 아가씨가 돌아왔다는 이야기요.” 이안의 시선이 신문을 향했다. 그는 기사를 한번 읽더니 다시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래서? 라는 뜻이라는 게 보여 케이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그거랑 같은 기사를 다른 신문에서 봤거든요.” “어떤 신문?” “에…,” 반사적으로 에바니엘 우물가라고 말하려던 케이트의 입이 닫혔다. 에바니엘 우물가라는 신문을 이안이 알까? 라는 걱정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에바니엘에 있는 신문은 고작 세 개뿐이다. 이안이 아무리 주변에 관심이 없다 해도 모를 리가 없다. “에바니엘 우물가요.” 케이트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기어들어갔다. 이안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 채 그녀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그건 우물가에서 떠드는 아낙네들 용 아닌가?” 아, 그래서 에바니엘 우물가였구나. 깨달음도 잠시 케이트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얼마 전에 시나몬에게 신문을 읽어주러 갔었거든요.” 다시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케이트는 그가 시나몬이 누군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이게 이안이라는 남자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금발머리를 이렇게 부풀린 가수 말이예요.” 모른다. 이안은 여전히 케이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난번에 가장무도회 의상을 빌려줬던… 아, 이건 직접 가져온 게 아니지.” 그때는 로즈가 대신 전달해주고 갔다. 결국 케이트는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전에 그, 스, 스타킹을 선물해 준….” 이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케이트의 치마 아래로 내려갔다. 으아! 반사적으로 케이트는 뒤로 물러났지만 이안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그날 받은 스타킹은 아직 한 번도 안 신었다. 이 남자의 속은 정말 알 수가 없어. 케이트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다시 한 발짝 내디뎠다. 그동안 제인에게만 맡기던 차 시중을 일부러 그녀가 한 이유가 있다. “저기, 주인님.”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신문에서 다시 케이트에게로 향했다. 왜? 라거나 뭔가? 라는 말도 없었다. 케이트는 약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오후에 자리를 비워도 될까요? 친구와 만나고 싶어서요.” 친구와 만나는 건 점심시간이나 한가할 때 잠깐잠깐 나가서 만나고 온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다르다. 약간 시간이 필요한 일을 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이안의 고개가 기울어지자 케이트는 재빨리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식사는 배달해주기로 했고요, 집안일은 다해놨으니 더 이상 할 일은 없을 거예요. 제인도 이제 식사 시중은 그럭저럭 잘할 수 있고요.” 샐러드용 포크와 고기용 포크를 헷갈리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 말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케이트는 이안의 허락을 기다렸다. 그는 케이트를 조금 오래 쳐다보는가 싶더니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래.” 주인의 허가가 떨어졌다. 케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응접실 밖으로 나섰다. 이안은 이런 부분에서는 너그러운 주인이다. 하지만 휴가허락이라는 건 언제 받아도 긴장할 수밖에 없다. 케이트가 신이 나서 옷을 갈아입고 큐바인 하우스를 빠져나가고 나서 한 시간쯤 뒤, 제이드가 찾아왔다. 제인은 생각보다 빠르게 자신의 실력을 보일 기회가 등장하자 신이 나서 차를 내왔다. “어, 뭐야? 스미스양은 어디 갔어?” “케이트는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나갔어요.” 아, 그래? 제인의 대답에 그는 찻잔을 받아 들었다. 그럭저럭 합격점인 차가 그의 입안에 들어가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인을 쳐다봤다. “네가 한 거니?” “네.” “맛있는데? 훌륭하다.” 제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소년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뜻하지 않는 기회에 실력을 발휘하고 칭찬까지 받은 소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제인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응접실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제이드는 제인의 뒷모습을 싱글벙글 웃으며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무시하는 것이 분명한 이안의 얼굴이 있었다. “어, 뭐야?” “아니. 아무것도.” 이안으로서는 오지랖도 넓다는 생각이 드는 행동이지만 제이드의 행동이니 그의 마음이다. 이안과는 상관없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찻잔에 입을 댔을 때 제이드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스미스양은 옷 사러 간 모양이지?” “그걸 어떻게 알아?” “그야, 들었으니까.” 이안이 다시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뭘? 어디서?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한 그 표정에 제이드는 씩 웃었다. “스미스양 또래는 슬슬 시집가야 할 나이잖아.” 귀족이나 부잣집 여식이라면 십 대 후반에 결혼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십 대 중반쯤에 결혼한다. 이십대 후반이 되면 아차 하는 거고, 삼십 대는 너무 늦다. 제이드는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손끝 야무지고 예쁘장한 여자는 어딜 가서나 인기가 좋으니까 말야. 신랑감을 소개해준다는 사람이 많지.” 정확히 그 손끝 야무지고 예쁘장한 여자가 케이트라는 말은 하지 않고 있다. 제이드는 그렇게 운을 띄운 뒤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능청스럽게 손톱 끝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참다못한 이안의 심기 불편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제이드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걸렸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더니 물었다. “어? 뭐가?” 이안이 제이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끝으로 갈수록 붉은색으로 물들었지만 제이드는 거기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그는 두 손바닥을 마주쳐 짝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아, 소개? 응. 남자를 소개받기로 해서 그날 입을 옷을 사러 간다는 말을 들었거든.” 제이드의 말이 끝났지만 이안은 여전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결국 참다못한 제이드가 두 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난 들은 이야기를 전한 것뿐이거든?” 그러니 그에게 화풀이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안은 떨어지지 않은 시선을 억지로 때내어 읽고 있던 책으로 떨어트렸다. ============================ 작품 후기 ============================ 후후후. 어제는 백화가 아니었습니다. 사이사이에 공지 쓴게 있어서 정확히 말하면 이번주 목요일이 백화지요. 보통은 아침에 머리를 감는데 요새 너무 추워서 밤에 머리를 감고 잤더니 아침이 점점 더 늦어지고 있습니다. 머리를 감는 시간보다 말리는 시간이 더 걸리는데 두 시간 다 안써도 되니까요. 걍 그시간만큼 더 자야지~ 이러고 있어요. 출퇴근 하는 길에 새로운 빵집이 생겼는데 우와! 엄청 맛있는 거예요. 회사 근처에도 의외로 너무 맛있는 빵집이 있고! 그래서 요즘 점심때 계속 빵만 먹었더니 이젠 밥이 먹고싶어졌어요. 이건 뭐.... 00102 6. 돌아온 아가씨 =========================================================================                            “케이트, 저길 봐.” 케이트는 앤이 턱 짓 하는 곳을 쳐다봤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음유시인이라도 온 건가? 케이트는 고개를 쭉 빼고 쳐다봤지만 음악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전기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낭랑한 목소리 대신 웅성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저게 왜?” “저 사람들 가운데에 여자 보여?” 앤의 설명에 케이트는 다시 사람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사람들 틈으로 금발 머리가 보였다. 여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케이트는 어라? 하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다. “저 여자가 엘리자베스 호건이래.” “엘리자베스?” “호건가의 막내딸말야.” 아, 그래? 그녀는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여자를 살폈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다 했더니 며칠 전 고층거리를 빠져나오면서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칠 뻔한 그 귀부인이었다. 케이트는 재빨리 앤을 붙잡고 뒤를 돌았다. 다시 생각해도 부끄럽다. 이안이 엄청난 짓을 저 여자 앞에서 하지 않았던가. 그녀의 행동에 앤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 왜 그래?” “어, 아니. 옷가게 문 닫기 전에 서둘러야 하잖아.” “아, 지금 몇 시지?” 앤은 케이트의 설득에 넘어가 다음 가게를 향해 전투적으로 걸어갔다. 날이 어두워지면 옷가게들은 문을 닫는다. 그러니 어두워지기 전에 앤이 원하는 옷을 찾아야 한다. 케이트는 앤을 따라 다음 가게를 들어가다가 다시 한 번 귀부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다. 그건 지난번에 만났을 때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두 사람이 다행히 원하는 옷을 찾아 치수를 재고 수선을 부탁했을 때는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도시란 좋구나. 케이트는 원하는 옷을 찾아 치수만 고치면 되는 가게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예전 지방에서 살 때는 옷가게에서 옷을 맞추거나 천을 사서 틈날 때마다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약간 더 비싸긴 하지만 훨씬 빠른 시간에 스스로 만든 것보다 더 나은 옷을 살 수 있다. “쇼핑하는 데 따라와 줬으니 저녁이라도 사주고 싶은데.” 앤은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조금 있으면 치안관이 돌아다니며 가로등의 불을 밝힐 것이다. 그전에는 돌아가는 것이 좋다. 아직도 사람의 심장을 훔치는 범인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케이트는 손에 든 종이가방을 흔들며 웃었다. “밥은 나중에 먹어도 되잖아. 나도 덕분에 좋은 리본을 샀고.” 예쁜 리본을 좋은 값에 살 수 있었다. 나중에 옷에 달거나 머리를 묶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앤은 그런 케이트의 얼굴에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 내가 진짜! 진짜 맛있는 거 사줄게!” “응. 다음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그렇게 말해도 케이트는 얻어먹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옷을 사느라 지출이 큰 앤에게는 더더욱. 그걸 아는 앤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사주지 않으면 이 친구는 더 얻어먹지 않으려 할 텐데. 다음에 식당에 불러서 케이크라도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앤은 케이트와 헤어졌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두 사람 다 서둘러 집에 돌아가야 한다. 케이트가 큐바인 하우스에 도착했을 때는 치안관이 가로등의 불을 붙인 다음이었다. 그녀는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다가 문 앞에 선 사람의 모습에 멈춰 섰다. 큰 사람이 문 앞에 서 있는 건 아무리 봐도 위협적이다. 그녀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상대가 몸을 움직이자 이안이라는 것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녀왔습니다.” 이안은 다가오는 케이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러지? 그녀는 의아한 생각에 이안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오기로 한 사람이라도 있나? 하지만 이안은 누가 온다고 해서 밖에서 기다릴 남자가 아니다. “왜 밖에 서 있어요?” 그는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대신 손을 내밀어 케이트를 잡아당겼다. “어, 뭐, 뭐예요?” 순식간에 케이트의 몸이 집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탁하고 큐바인 하우스의 현관문이 닫혔다. 케이트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이안이 잡아당긴 탓에 그녀의 허리를 이안이 한쪽 팔로 지탱하고 있었다. 뭐지? 케이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를 돌아봤다. 설마 마녀가 사람들의 심장을 빼앗아 간다는 이야기에 날 걱정해 준건가? “어딜 다녀왔지?” 걱정한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럼 그렇지. 케이트는 약간 실망했다. 이 사람이 누굴 걱정할 그럴 사람은 아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굳이 집 밖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을 필요는 없다. “음, 쇼핑하러요. 친구 만나러 간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이안의 눈이 케이트의 손에 들린 종이가방을 향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아가씨들을 위해 종이가방에는 글자 대신 리본이 그려져 있었다. “옷 사러 말인가?” 케이트의 얼굴에 어라? 하고 놀란 표정이 스쳤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건 이안에게 그렇다는 말보다 확실한 대답이었다. 이안은 굳은 표정으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남자를 만나러 간단 말이지.”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제이드가 큐바인 하우스에 왔다는 것을 모르는 케이트의 눈에는 이안이 자신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이안의 팔에서 빠져나오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옷까지 샀으니 만나러 간다는 거겠죠.”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끝으로 갈수록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그는 간발의 차로 케이트의 팔꿈치를 낚아챘다. “간다고?” 나직하게 이르는 목소리가 무서워 케이트는 숨을 죽였다. 왜 화가 난 거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그가 화가 났다고 느꼈다. 문제는 왜 화났는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앤이 남자를 소개받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부럽다고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일반적으로 하녀의 결혼은 일하는 집의 주인마님이 괜찮은 남자를 소개해준다. 만나는 남자가 있다면 주인에게 허락을 받는다. 주인에게 허락받지 못하면 결혼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용인을 돌봐주는 건 더 이상 부모가 아니라 주인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뮈엘라에서 여성사용인은 남자를 잘못 만나면 인생을 망치기 쉽다. 손끝 야무지고 좋은 일군이 망나니 같은 남자에게 속아 넘어간다면 오랜 시간 그 아이를 봐온 주인으로서도 안타까운 일이니 괜찮은 남자인지 주변에 알아보고 결혼선물로 지참금을 내어주는 것이다. 남자가 도박에 빠졌거나 손버릇이 나쁘다는 소문이 있다면 제대로 된 주인으로서 결혼을 막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주인의 허락을 받지 못한 사용인의 결혼은 일반적으로 행복하지 못하다. 케이트가 아직 타운 하우스에서 일하고 있었다면 로엔 백작 부인이 알아봐 주었을 테지만 여기는 큐바인 하우스. 이안이 그런 걸 살펴줄 리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남자를 소개해줄 만큼 신경 써주는 사람이 주변에 있는 앤이, 그런 관심을 받는다는 점이 부러웠던 것이다. “이안 아니, 주인님.” 케이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 “혹시 앤을 좋아했어요?” 무겁게 내려앉은 기운이 순식간에 변했다. 이안은 굳은 얼굴을 푼 채 그녀를 내려다봤다. 케이트는 팔꿈치를 잡은 손아귀의 힘이 약해진 것을 깨달았다. “뭐?” “앤을 좋아했냐고요.” 이안은 어이가 없어서 눈을 깜빡였다. 여기서 그 이야기가 왜 나오지? 하지만 케이트의 생각은 지극히 논리적이었다. 앤과 만나러 갔는데 그 이유는 앤의 옷을 사는 걸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앤이 옷을 사는 이유는 남자를 소개받아서 만날 때 입을 옷을 산 것이다. 이안은 옷 사러 간 것도, 남자를 소개받은 것도 안다. 그러니 케이트는 당연히 그가 앤이 남자를 소개받는다는 사실 대문에 화가 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앤이 누구지?” 이안은 정말로 모른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그는 정말로 몰랐다. 앤이라고? 그는 잠시 눈앞의 붉은 머리 여자의 이름이 앤이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아니, 케이트다. 아니면 설마 가운데 이름이 앤인가? “네에?” 당연하게도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이안을 노려보다가 설명했다. 여기 주근깨가 있고 금발 머리 말이예요. 하지만 이미 앤의 외모는 이안의 뇌리 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다. 알라나데일에서 앤을 만난 건 몇 달 전이다. 그가 아직도 그녀를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 이안은 흠. 하고 팔짱을 낀 채 허리를 폈다. 어두운 현관 앞에서 그가 몸을 펴자 위압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네 말은 남자를 소개받기로 한 게 앤이라는 금발 머리 여자라는 말인가?” 앤이라는 금발 머리가 아니라! 케이트는 발칵 화를 내려다 심호흡을 했다. 어떻게 자기가 도와준 사람 이름도 잊어버린다는 말인가. 문득 그녀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내 이름은 알아요?” “…안다.” “뭔데요?” “케이트.” 어머, 아네. 케이트는 놀랍다는 듯 이안을 쳐다봤고 그는 실례라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심지어 그는 예전에 케이트의 이름을 부른 적도 있다. “옷을 사러 갔다는 것도 알고, 남자를 소개받았다는 것도 알면서 그게 앤이라는 건 모르길래 물어본 거예요.” 약간 빈정대는 말투가 이안을 자극했다. 그는 케이트의 손에서 종이가방을 낚아챘다. “너는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는 말인가?” “앗! 돌려줘요!” 내가 언제 아무것도 안 샀다고 했어! 케이트는 이를 갈며 이안의 손에서 종이가방을 돌려받으려 애썼다. 하지만 작은 그녀가 이안에게서 뭔가를 돌려받으려면 팔짝팔짝 뛰는 수밖에 없다. 그 사이에 이안은 종이 가방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들어있는 건 리본뿐이지만 남의 물건을 마음대로 뒤지는 건 실례다. 케이트는 이안의 셔츠를 잡아당기며 외쳤다. “그건 나쁜 짓이예요!” 이안의 행동이 딱 멈췄다. 케이트 역시 아차 싶어서 얼어붙었다. 마치 어린아이를 혼낼 때 같은 말투였다. 세상에. 어디 하녀가 감히 주인을 가르치려 든단 말인가. 그녀는 이안이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삐걱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이안은 자신의 셔츠를 두 손으로 꼭 잡고 달라붙은 채 얼어붙은 그녀를 내려다봤다. 이 여자는 마녀다. 그는 케이트의 초록색 눈동자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마녀와 마법 아티팩트를 골라내는 탐지마법에는 그녀가 걸리지 않았던 걸까. 정보 길드에 탐지마법이 걸려있다는 건 이안도 몰랐다. 그는 살면서 정보 길드에 가본 적이 그전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아는 한 마녀와 마법 아티팩트를 골라내는 탐지마법은 나라의 경계에 걸려있다. 마녀는 허가 없이 나라밖으로 나갈 수도, 나라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다. 그러니 정체를 숨기고 도망쳐 살아야 하는 것이다. 마녀가 아닌가? 이안은 자신의 생각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분명 눈앞에서 봤다. 케이트가 마법을 쓰는 것을. 그 장소, 그 시간에 마법을 썼다면 그건 케이트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가 평소에 마법을 쓰는 것을 봤던가? 없다. 일부러 그녀를 시험하기 위해 알라나데일의 계단에서 밀었을 때도 케이트는 마법을 쓰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나는 이 여자가 마녀가 아니길 바라는 건가. 이안은 문득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케이트가 마녀가 아니길 바란다.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을 바란다는 건 그에게 있어 익숙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품 안에 매달린 작은 몸을 두 팔로 감았다. 케이트의 얼굴 위로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 스치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이 드리워졌다. 시시각각 잘도 변하는 얼굴이다. 그는 그대로 케이트의 얼굴 위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 작품 후기 ============================ 수정 완료. ㅎㅎㅎㅎ 라고 하면 나중에 오신 분들이 뭐지? 하시겠죠. 오타 수정하고 표지 변경했습니다. 00103 6. 돌아온 아가씨 =========================================================================                            케이트의 눈이 저러다 눈알이 굴러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커졌다. 입술이 뜨겁고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그것은 천천히 케이트의 입술을 비비더니 덥석 물었다. “으?” 덩달아 케이트의 몸도 이안의 품속에서 펄쩍 튀어 올랐다. 이안은 바르작거리는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커다란 손이 케이트의 머리칼을 헤집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종이가방이 툭 떨어지면서 그 안에 들어 있던 리본이 밖으로 굴러 나왔다. “으, 응.” 입술이 떨어지고 난 다음에도 케이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앞에 불그스름하게 물든 눈동자가 보였다. 이 남자의 눈이 원래 무슨 색이었지? 그녀가 멍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이안은 케이트의 몸을 놓고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쓸었다.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입술이 잘 익은 과일처럼 보였다. “나는 하녀는 건드리지 않아.” 나직하게 이안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서 케이트는 처음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무, 뭐라고? 잠시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바보처럼 물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이안은 약간 초조한 기분에 휩싸였다. 하녀만은 건드리지 않을 거다. 그건 당연하다. 그를 낳아준 어머니가 하녀였으니까. 로엔 백작가에 임시로 일하던 하녀는 전 로엔 백작을 유혹해 아이를 임신하고 사라졌다. 그렇다면 조용히 아이를 키웠어야 했다. 고작 네 살짜리 아이를 두고 책임감 없이 죽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케이트에게서 가까스로 손을 떼고 물러났다. 부푼 입술과 달아오른 얼굴.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음으로 여성을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황했다. 이건 무슨 감정이지? 그는 자신이 감정을 깨닫지 못했다. 왜냐면 주변에서 예쁘다, 아름답다고 여성을 지칭할 때는 항상 그녀가 화려하게 꾸미고 있었으니까. 거의 화장기 없는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 단정하고 소박한 차림새. 케이트는 타운하우스에서와 달리 하녀 복을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의상에 레이스 하나, 리본 하나 달리지 않았다. 감정을 이론으로만 알고 있던 이안은 오히려 엉망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케이트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느낀 감정이 예쁘다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녀를 그만둬.” “네?” 케이트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녀를 그만두라고? 그녀는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 “내가 뭐 잘못했어요?” “아니.” “그런데 왜 날 해고하는 거예요?” 해고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말하려던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하녀를 그만두라는 말이 해고하라는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는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좋으니까.” 케이트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한참을 가만히 서서 이안을 쳐다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나, 그럼 약속 지킨 거예요?” 약속? 이안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 모습에 케이트는 약간 머뭇거리며 설명했다. “전에, 내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그, 당신이 날 좋아하게 만들라던, 그, 약속 있잖아요.” 아. 이안의 몸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케이트를 내려다봤다. 잊고 있었다.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게 만들라던 그 명령. 그는 약간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취소하지.” 뭐를? 케이트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약속이요?” “아니.” 이안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종이가방을 집어 들었다. 밖으로 튀어나온 리본도 그 안에 쑤셔 넣고 그는 그것을 케이트에게 내밀며 말했다.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거. 취소한다.” “네에?” 그게 취소가 가능한 거였어? 할 말을 잃은 케이트의 손에 종이가방을 쥐여준 이안은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하더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뭐야, 저 남자? === 호건 가의 막내딸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에바니엘에 조심스럽게 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이면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 그녀의 초상화를 가지고 있거나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닮았다고 말했다. 약간 세월의 흔적은 있어도 사라진 호건 가의 막내딸 엘리자베스 호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호건 가의 어마어마한 재산은 과연 어떻게 될까. 현재 가주인 비스마르크 호건이 사망할 경우 재산은 모두 제프리 호건에게 돌아가게 된다. 에스메랄다 호건의 남편이자 비스마르크 호건의 첫째아들인 한스 호건이 이미 몇 년 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엘리자베스 호건이 등장한다면 재산은 이등분으로 나뉘어 물려받게 된다. 혹시 엘리자베스 호건에게 자식이라도 있다면? 그 자식에게도 재산이 분배된다. 에스메랄다 호건은 두 눈 뻔히 뜨고 온전한 재산을 인원수대로 나뉘어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현재 호건부인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넘어섰다는 것은 모르는 에바니엘 사람은 없다. 그 증거로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루던 호건 가의 문 앞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있는 사람들은 전부 재산을 보호해주겠다는 사기꾼이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탈린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물건이 들어왔나요?” 에스메랄다 호건은 소파에 비스듬하게 기대서 나른하게 물었다. 느닷없이 나타나 자신이 엘리자베스라 칭하는 여자 때문에 속이 상하다 못해 기운이 빠진 상태다. 저 짜증 나는 영감탱이를 참은 세월이 얼만데 재산을 반으로 나눈단 말인가. 탈린을 집 안에 들인 것은 보석을 사면 이 우울한 기분을 좀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비스마르크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보석을 산단 말인가. 하지만 탈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사실은 제가 지난번에 이 집에 왔을 때 우연히 초상화를 하나 봐서 말입니다.” “초상화?” 에스메랄다는 짜증 난다는 듯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물었다. 무슨 초상화? 그러다 그녀는 곧, 며칠 전 스스로를 엘리자베스라 칭하는 여자가 나타나자 생김새를 확인하기 위해 창고 깊숙이 넣어뒀던 초상화를 꺼냈던 사실을 떠올렸다. 또 생각났다. 생글생글 웃으며 저, 엘리자베스예요. 오랜만이예요, 에스메랄다. 라고 말하던 금발 머리 여자의 얼굴이 떠올라 그녀는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지끈지끈 두통이 이는 것 같다. “쓸데없는 소리 하려면 가요.” “아닙니다.” 탈리은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부인한 뒤, 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를 꺼냈다. 그는 에스메랄다가 신경질 난다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는 앞에 종이를 펼쳐 보였다. “뭔지 아시겠죠?” “이게 뭔데요?” 종이에는 화려한 목걸이가 그려져 있었다. 새로운 상품인 건가? 에스메랄다는 잠시 그림을 지켜보다가 종이를 내밀었다. 화려하기는 하지만 구식이다. 탈린은 심드렁한 에스메랄다의 주의를 끌기 위해 과장된 태도로 말했다. “이 목걸이와 똑같은 걸 지난번에 초상화에서 봤단 말입니다.” “초상화에서?” 에스메랄다는 다시 종이를 받아들고 목걸이를 살폈다. 얼굴만 확인하려 한 것이니 어느 초상화에 이런 목걸이가 있었는지는 기억날 리 없다. 그런 그녀에게 탈린이 신이 나서 설명했다. “며칠 전에 한 남자가 이 목걸이를 만든 사람을 알고 싶다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며칠 후에 자신을 엘리자베스 호건이라고 칭하는 여자가 나타 난거죠. 이건 너무 타이밍이 맞지 않습니까?” 무슨 타이밍? 에스메랄다는 욕심이 많고 눈치가 빠르지만 그다지 영리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해한 척 계속하라고 손짓했다. “그 여자가 진짜 엘리자베스 호건이라면 목걸이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가짜니까 자신이 진짜 엘리자베스 호건이라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 이 목걸이를 만든 사람을 찾는 거죠. 똑같은 걸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에스메랄다 호건의 눈동자가 커졌다. 탈린은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씩 희망이 솟아나는 걸을 보고 싱글벙글 웃었다. 이게 엘리자베스 호건이 가짜라는 증거다. 에스메랄다는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쳤다. “누가! 엘리자베스의 초상화를 가져와!” 곧이어 하인들이 커다란 초상화를 응접실 안으로 날라 왔다. 사람들을 물린 탈린과 에스메랄다는 종이에 그려진 목걸이와 초상화에 그려진 목걸이를 비교했다. 똑같은 목걸이다. 그녀는 다시 호건 가에서 가장 오래 일한 집사를 불러왔다. 머리가 하얗게 센 남자가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초상화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목걸이! 지금 어디 있지?” 집사는 안경을 몇 번 썼다가 벗었다가 하면서 그림을 살피더니 조용히 말했다. “그 목걸이라면 엘리자베스 아가씨께서 집을 나가시기 전에 사라졌습니다.” 그 말에 에스메랄다는 다시 실망에 빠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엘리자베스가 가져갔다면 지금 이 목걸이를 가지고 있다는 말 아닌가. 하지만 탈린은 싱글벙글 웃으며 손뼉을 쳤다. “잘 됐군요.” “잘됐다고?” 에스메랄다가 앙칼지게 외쳤다. 누군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인데 뭐가 잘됐다는 말인가. 탈린은 손바닥을 내보이며 설명했다. “진짜 목걸이를 가지고 있다면 뭐하러 굳이 만든 사람을 찾겠습니까? 본인이 알고 있을 텐데요. 일부러 만든 사람을 찾는 다는 건 없다는 뜻입니다. 가짜라는 말이죠. 진짜라는 증거로 사용하기 위해 목걸이를 만든 사람에게 가서 똑같은 걸 만들려는 거라는 말입니다.” 뭐? 에스메랄다는 한참 후에나 그 말을 이해했다. 그녀는 기쁨에 차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탈린을 놀라게 하더니 재빨리 에헴하고 자세를 잡고 자리에 앉아 말했다. “그럼 이 목걸이를 보여 달라고 하면 되겠군요.”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지요.” 탈린은 씩 웃으며 자신의 방법을 조근조근 설명했다. 이해하지 못해 두 번이나 다시 설명해야 했지만 어쨌거나 에스메랄다는 이해했다. 그녀는 탈린과 마찬가지로 손뼉을 치며 깔깔대고 웃었다. “좋은 생각이예요. 당신 말대로 잘 해결된다면 내가 이 사례는 후하게 하죠.” “그럼 제가 기일을 정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탈린은 그가 올 때와 반대로 기분이 좋아진 에스메랄다 앞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 잘 될 겁니다.” 그 말에 에스메랄다 호건의 기분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탈린은 심지어 호건 가의 마차를 타고 가게로 돌아오는 호의를 받기까지 했다. ============================ 작품 후기 ============================ 표지 변경했습니다. 달리는mp3님께서 그려조신 팬아트 입니다. 감사합니다. 최소 일주일 이상 유지됩니다. 어제는 회식하느라 새벽에 들어왔는데 오늘은 야근하느라 이제 들어왔어요. 젠장... 이번 편이 100화 입니다. 그런 의미로 키스씬을 넣었...을리가 없죠. 원래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하하하. 두 사람의 로맨스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하하하하. 00104 7. 엘리자베스 호건 =========================================================================                            이안의 태도는 그 이후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케이트는 부엌과 식당 사이에 난 문 뒤에 숨어서 식당 안의 이안을 훔쳐봤다. 제인이 아슬아슬하게 튀긴 닭고기를 얹은 샐러드를 내가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채소 위에 올라간 튀긴 닭고기가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옮기더니 결국 이안 앞에 탁하고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미,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미안이 아니다. 케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말버릇이라는 건 쉽게 고쳐지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제인은 상당히 잘 해내고 있었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탓에 뭔가를 들고 걸을 때 균형이 잘 잡히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지만, 그건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다. 잘 먹이고 잘 뛰어논 덕에 제인은 점점 근력이 붙어가고 있었다. 몇 년만 지나면 훌륭한 한사람 몫을 해낼 것이다. 아니, 한 사람 몫이 아니지. 케이트는 문틈에 기대며 생각했다. 훌륭한 청년이 될 것이다. 제인은 얼굴에 난 상처를 두고서라도 괜찮은 얼굴이고, 키도 또래보다 크다. 금방 배우고 눈치가 빠르다. 그녀는 그녀가 떠나고 이안이 타운 하우스로 돌아가서 최악에는 제인이 다른 곳으로 일하러 간다 해도 잘해낼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날이 그녀의 생각보다 빠를지도 모른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이 그녀를 좋다고 고백하고 취소한 지 이틀. 그게 취소가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안은 취소했다. 그리고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게 맞는지도 모른다. 그 날의 고백과 취소를 들은 건 케이트뿐이다. 그러니 그녀만 잊어버린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맞다. 하지만 그게 과연 맞는 걸까? 취소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되나? 케이트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끌어안았다. 저 남자,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자신은 하녀를 건드리지 않는다던 말도, 하녀를 그만두라는 말도 이제야 이해가 간다. 하녀를 건드리고 싶지 않으니 케이트가 하녀가 아니면 된다는 말이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 욱하고 이안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다. 이기적인 개자식. 아니, 아니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기적인 남자인 건 맞아도 개자식까지는 아니다. 그는 그녀를 몇 번이나 도와줬다. 그러니 그냥 이기적인 자식 정도로만 하자. 아니, 근데 왜! 다시 치솟는 복잡한 감정에 케이트는 끄응하고 소리를 냈다. 분하면서도 짜증 나고 이해가 되면서도 안 된다. 빚을 진 게 있으니 고마우면서도 얄밉고 정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어쨌거나 저 남자가 나 좋다고 한 거 맞지? 케이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소리 없이 이안이 다가와 그녀 뒤에 서 있었다. 문틀을 사이에 두고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악!” 너무 생각에 빠져있느라 그가 다가오는 것도 몰랐던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이안이 실례라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어, 아니, 그, 뭔가 필요하신 거라도?” 이틀 동안 그녀는 이안을 열심히 피해 다녔다. 식사 시중도, 차 시중도 제인이 들게 하고 있으니 그녀가 그의 앞에 나설 일은 없었다. 청소할 때도 이안이 자리를 비울 때만 서둘러 하고 사라진다. 그러니 두 사람이 그날 이후로 얼굴을 마주한 건 이틀만이라는 이야기다. “아니.” 이안은 그녀가 자신을 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 층만 쓰는 작은 저택에서 이틀 동안 상대방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면 아무리 이안이라 해도 상대방이 자신을 피한다는 것을 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그 상대방이 다른 사람이라면 이안은 아무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실제로 타운 하우스에서 몇 명의 하녀가 있는지, 안 보이는 하녀가 왜 안 보이는지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어두운 탓에 케이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안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허리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이틀 전을 떠올렸다. 이, 이 남자가! 그녀의 손이 위로 올라가 내려오는 이안의 얼굴을 막았다. 그는 케이트의 손에 입이 막힌 채로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게 무슨 짓이지?” 손바닥에 뜨거운 입술이 움직이는 감촉이 느껴졌다. 케이트는 당황하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해서 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이안이 더 빨랐다. 그는 케이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손안에 가뒀다. 작은 손이 꼼지락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 이러지 마요.” 다시 이안의 눈썹이 올라갔다. “뭐가?” “이렇게 만지는 거요. 하지 마요.” 흠. 그는 손안에 든 작은 손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조금만 힘을 주면 똑 하고 부러질 것 같다. “왜?” “왜라뇨.” 뻔뻔스러운 물음에 케이트는 잠시 말을 잃었다. 내가 뭘 착각하고 있나? 이 남자가 나한테 이런 짓을 해도 되는 합당한 이유라도 있나? 잠깐 그런 고민에 빠졌던 그녀는 곧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아, 안되니까요.” “그러니까 왜?” 뭐든 논리적인 대답을 요구하면 말이 막히는 법이다. 하물며 상대가 이안이라면 더더욱. 케이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이런 건 결혼할 사람들만 하는 거니까요.” “그럼 해.” “하면 되지만, 네?” 케이트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뭐를 하자고요?” “하자고. 결혼.” “제정신이예요?” 그녀는 이익하고 자신의 손을 빼려고 힘을 줬다. 하지만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힘을 주는 케이트에 비해 이안은 무덤덤한 표정이었는데도 그의 손에서 그녀의 손을 빠져나오지 않았다. “당신, 나 좋아하는 거 아니라면서요?” “…그래.” “근데 무슨 결혼이예요?” “결혼을 좋아해서 하나?” “당연히 좋아해서…,” 케이트의 입이 막혔다. 좋아해서라는 건 케이트같은 사람들이나 해당하는 말이다. 귀족들은 좋아해서가 아니라 조건이 맞아서 한다. 결혼해서 아이가 한둘 쯤 생기고 나면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는 것이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 다른 쪽을 공격했다. “그럼 왜 하자는 건데요?” “만지고 싶다면 결혼하자며.” “내가 언제!” 펄쩍 뛰려던 케이트는 다시 이안에게 말려든 것을 깨닫고 멈췄다. 이 남자가. 그녀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만지고 싶으면 결혼하자가 아니라 결혼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니 하지 말라는 거였단 말이다. “만지고 싶어서 결혼한다는 것도 말이 안 돼요.” “그럼 어쩌라는 거야?” “하지 말라고요.” 이안의 입이 굳게 닫혔다. 그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더니 케이트의 손을 들어 자신의 입에 갖다 대고 말했다. “싫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손바닥에 생생하게 느껴졌다.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입김이 빠져나가자 이상한 기분이 들어 케이트는 다시 펄쩍 뛰어올랐다. “네가 내 하녀인 이상 나는 널 만질 권리가 있어.” “그런 거 없거든요?” “수표 써.” 이런 미친놈을 봤나? “날 만지는 대가로 돈을 주겠다는 말이예요?” “네가 결혼은 싫다며.” 아, 맙소사. 결국 케이트는 이안과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 사람은 정상적인 대화를 할 생각이 없거나 불가능한 사람이다. “됐고, 만지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며 케이트가 있는 힘껏 손을 빼자 의외로 그녀의 손이 쑥 빠져나왔다. 그 탓에 케이트의 몸이 뒤로 휙 빠져버렸다. 그 짧은 찰나에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대로 뒤로 넘어지면 굴러 넘어질 것이다. 아, 안 돼. 그녀는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나 아플까.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 그리고 잠시 후 케이트는 그녀의 소원대로 몸이 멈췄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마법처럼 케이트의 몸이 뒤로 빠진 그대로 멈춰 있었다. 아니, 마법처럼이 아니다. 이건 마법이다. 이안은 눈을 크게 뜨더니 손을 뻗어 케이트의 허리를 잡았다.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았을 때 마법이 풀린 것처럼 케이트의 몸이 뒤로 밀렸다. 하지만 이미 이안의 품에 안겨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헉….” 케이트는 이안의 가슴에 손을 댄 채 숨을 헐떡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녀가 고개를 들자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래도 마녀가 아니라고 할 건가?” 오싹하고 케이트의 몸이 떨렸다. 난 아냐. 나는 그런 게 아냐.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놀란 탓에 그녀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아니, 난….” 가까스로 나온 말도 변명의 말은 아니었다. 그녀도 자신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한 건지 알지 못한다. 진짜로 마녀인 걸까. 케이트는 덜컥 겁이 나서 이안의 품에서 발버둥 쳤다. “놔 줘요!” 이안이 순순히 풀어주자 그녀는 정신없이 큐바인 하우스 밖으로 빠져나왔다. 케이트? 뒤에서 제인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괜찮아?” 앤이 내미는 뜨거운 차를 받아드는 손이 아직도 떨리고 있어, 케이트는 소매를 끌어당겨 손을 감췄다. “응, 괜찮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앤은 아직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케이트를 쳐다봤다. 따듯한 차의 온기가 손을 통해 퍼지자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누그러지는 게 보였다. “이안이야?” “어?” 케이트는 느닷없는 앤의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반사적으로 도망쳐 나오게 된 상황이 떠올랐다. 그녀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지자 앤은 이안의 탓이라고 지레짐작했다. 그 자식! 무슨 짓인가 했구나! “그 나쁜 놈이!” 어, 어? 케이트는 버럭 화를 내는 앤의 태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쁜 놈인 건 맞지만, 그녀가 왜 화를 내는 건지 모르겠다. “무슨 짓 했어? 때렸어?” “어? 설마!” 아닌가? 케이트는 잠시 이안이 사용인에게 손 댄 적이 있었는지 떠올렸다. 없다. 성격이 더러운 주인을 만나면 간혹 얻어맞는 경우도 있다. 특히나 제인같이 어린 남자아이라면 더더욱. 앤은 맞아 본 적은 없지만 맞는 걸 본 적이 있다. 어린 남자 하인이 차를 나르다 자신의 옷에 튀었다는 이유로 뺨을 때린 주인도 있다. “때린 게 아니면,” 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지자 케이트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며 만류했다. “아냐, 아냐. 그 사람 날 때린 적 없고, 가혹하게 대하지도 않았어.” 가혹? 앤은 잠시 머리를 갸웃했다. 때때로 케이트는 어려운 단어를 쓸 때가 있다. 나쁘게 대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케이트를 쳐다봤다. 그럼 대체 무슨 일이기에 케이트가 일하다 말고 저택에서 뛰쳐나온 걸까. “설마.” 설마? 케이트는 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한테 손댔니?” “아니, 때린 적 없다니까.” “그게 아니라.” 앤은 검지를 펴더니 쯧쯧하고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이상한 곳을 만졌다거나.” 이상한 곳? 케이트는 여전히 무슨 소린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앤이 자신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탁탁 쳐 보였다. “세상에! 앤!” 여자의 엉덩이를 함부로 만지다니, 난봉꾼이라는 말로 설명되는 행동이 아니다. 아무리 이안이라 해도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한 케이트의 얼굴이 갑자기 달아올랐다. 엉덩이를 만지는 그런 저질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억지로 입술을 빼앗기긴 했다. 그것도 몇 번이나. 앤에게 아무 짓도 당하지 않았다는 것도 이래선 거짓말이 되고 만다.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흠. 다른 건 있구나?” 눈치 빠르게도 앤은 케이트가 다른 일을 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찻잔을 들더니 한 모금 마시고 여유 있게 말했다. “끌어안겼어?” “뭐?” “널 끌어안았냐고. 그 남자. 그 정도쯤은 할 것 같은데.” 케이트는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도 곧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달아오른 얼굴로 시무룩해진 그녀에게 앤은 여전히 여유 있는 태도로 물었다. “싫었어?” 싫었냐고? 뜻밖의 질문에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앤은 여전히 여유 있었다. 그녀는 큼지막하게 잘라온 케이크를 포크로 한입 크게 잘라 입에 넣더니 씩 웃었다. “좋았어?” “저기, 앤. 나는 그 사람하고…,” “알아. 아무 사이도 아닌 거.” 앤은 케이트가 이안과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딱 잘라 말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케이트는 하녀인 자신과 귀족인 이안은 어울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한편 한때 그를 좋아했던 앤을 배려하는 것이다. 바보 같긴. 앤은 피식 웃었다. 그게 언제 적 이야기란 말인가. 심지어 그녀는 며칠 후에 다른 남자를 소개받기도 했다. 그런데 친구가 전에 좋아했던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언급조차 하지 않으려 하다니. 융통성 없고 성실한 태도다. “케이트, 난 이제 이안한테 아무 생각 없어.” 뜻밖의 고백에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앤이 갑자기 무슨 고백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해 입까지 벌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앤은 다시 한 번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나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말이야.”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뭐? 케이트의 입이 막혔다. 그녀는 확실히 앤을 신경 써서 이안에 대한 언급을 피해왔다. 지금은 아니라 해도 전에 좋아하던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 입으로 듣는 건, 심지어 그 친구에게 좋다고 했다는 이야기는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케이트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메말랐던 입안을 축인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나랑은 상관없는 사람이야. 그 사람은 귀족이고,” “알아. 위치가 다르다는 거. 근데 말야, 전혀 아무 관심 없는 거야? 아니면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거야?” 다시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위치가 다르니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고? 내가?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앤은 그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어쩌면, 어쩌면 이안과 케이트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안이 서자라는 이야기는 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케이트보다 먼저 알았다. 그녀는 소문이 퍼지는 식당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이안이 서자라서 라기보다는 이안의 성격 때문에 앤은 케이트와 이안이 가능성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의 눈에 신경 쓰지 않는 남자니까. 그만 좋다면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케이트를 데리고 시골로 내려가 사는 것도 한 방법이니까. 알라나데일에서 위험한 일을 겪고 수도에서 몇 달을 일 했음에도 앤의 동화적인 상상은 그다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이안이 모든 방해를 물리치고 케이트를 데리고 둘만의 저택에서 사는 상상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케이트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해서야 아무 소용없다. 앤은 다시 찻잔에 입을 대며 조용히 생각했다. 이 성실한 친구에겐 이 정도만으로도 충격이 상당할 게 분명하다. 다른 방향도 있다는 걸 알려줄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발렌타인 데이잖아요? 데이트하고 왔습니다. 커피숍에서 친구랑 만나서 친구는 일하고 저는 작업하고. ...흑흑...빌어먹을 세상. 사형선고일은 안받아 드립니다. 오늘은 좀 길어요. 자르기 애매해서 걍 올립니다~ 고로, 다음화는 과연 하하하하하하 아참, 그리고 말하는 걸 잊었는데 3부 얼마 안남았어요. 3부가 엄청 길어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많이 길어지진 않겠네요. 보통 30화 내외로 한부를 구성하고 있는데 저는 9장까지 갈거라 생각했거든요. 잘해봐야 8장까지 가겠네요. 어쩌면 7장에서 끝날지도 모르고요. 음, 아마 3부 끝내고 외전 두어편 올린다음에 한달가량 쉬고 바로 4부 들어갈것 같습니다. 뭐, 그렇다고요. 00105 7. 엘리자베스 호건 =========================================================================                            실라는 엘리자베스와 대화를 한 적은 없지만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었다. 호건가의 자제쯤 되면 사교계에 참석이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유명인사가 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엘리자베스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호건 가의 미인 영애. 그 명칭은 그녀를 사교계의 꽃으로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실라는 얼굴만 아는 엘리자베스가 선택할 수 있는 모든 부와 지위를 버리고 떠돌이 화가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에 대해 더욱더 또렷하게 기억하게 되었다. “괜찮으세요, 어머니?” 아르고가 넋을 잃고 있는 실라에게 말을 건넸다. 몸이 약한 어머니를 위해 가벼운 산책에 동행한 것인데 그게 그녀에게는 그다지 가벼운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실라는 아들의 물음에 멍하니 대답했다. “방금 지나간 여자 말야.” “누구요?” 아르고는 실라가 쳐다보는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상당히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대화를 나누는 금발 머리 귀부인이 보였다. 소문의 아가씨다. 아가씨라고 하기엔 나이가 많지만. “엘리자베스 호건말이군요.” 어머. 실라는 탄성을 금치 못했다. 정말 엘리자베스였구나. 어디서 본 얼굴이다 했다. 그녀가 기억하던 엘리자베스가 나이를 먹는다면 저럴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모습이었다. “친분이 있으셨어요?” “아니.” 실라는 한숨을 내쉬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벤치를 가리켰다. 좀 쉬었다 가자. 아르고는 어머니의 요청에 흔쾌히 그녀를 벤치로 안내했다. 점심때는 따사로운 햇살이 있지만 그래도 날씨는 쌀쌀하다. 두툼하게 실라를 감싼 코트와 머플러가 없었다면 산책은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호건 가가 시끄러워지겠구나.” 실라의 말에 아르고가 나직하게 수긍했다. 실라와 엘리자베스.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같은 시기에 사교계에 데뷔했고 활동했다. 호리호리한 미인과 자그마한 미인은 친분은 없어도 서로에 대해 의식하고 있었다. 언제 시간이 되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실라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집을 나가 어떻게 살았던 걸까. 고생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그 얼굴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가 호건 가라는 대 재벌의 부가 아니었어도 충분히 잘 살았을 거라는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어마어마한 부를 버리고 맨몸으로 도망친 소녀가 고생한 흔적 없이 다시 돌아왔다는 건 사람이 사는데 부라는 게 그리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 제이드는 신이 나서 큐바인 하우스를 찾았다. 그는 제인이 문을 열자마자 대뜸 안을 향해 소리쳤다. “스미스양! 찾았어요!” 그의 목소리에 청소를 하고 있던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걸어 나왔다. 손에는 여전히 걸레를 든 채였다. “어서 오세요, 킬리언씨.” 케이트의 인사에 제이드는 자신의 결례를 깨달았다. 그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멋들어진 동작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네. 잘 지냈어요. 로엔 경은 지금 자리에 안 계신데요.” 이안은 정보 길드에 요청한 정보가 들어왔는지 확인하러 나갔다. 마지막 사건 이후 며칠이 흘렀지만 더이상 심장이 사라진 시체는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범인이 사라진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 무슨 목적으로 사람들의 심장을 적출해 갔는지 모르는 상태니 더이상의 피해자가 없는 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 원하는 심장을 손에 넣은 범인이 무슨 짓을 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로즈마리의 말대로 마녀라면 그 심장을 가지고 어떤 마법을 부릴지 모르는 상태 아닌가. 게다가 사람들은 단순하게 더이상 피해가 없다는 사실만으로 위기감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에드워드는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안에게 계속해서 조사할 것을 당부했다. “괜찮아요. 이안을 만나러 온 게 아니니까요.” 제이드는 모자를 다시 고쳐 쓰며 말했다. 오늘 쓴 모자에는 챙 주변에 프릴이 달려 있는 모자였다. 남성모자에 프릴이라니, 연극에 나오는 이상한 왕자님이 쓰는 것 같은 모자였다. “목걸이를 만든 사람을 찾았답니다. 지금 만나러 가려는데 시간 괜찮을까요?” 목걸이 만든 사람? 케이트는 반가운 마음에 걸레를 든 채로 나가려다가 멈췄다. 나 좀 봐. 그녀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서 나갈 준비를 마쳤다. 기껏 해봐야 앞치마를 벗고 손을 닦은 정도지만 거울을 보고 머리카락이 조금 흘러내린 것 같아 다시 묶기도 했다. 오늘 아침, 이안은 그녀가 며칠 전 새로 사온 리본으로 머리를 묶고 나왔지만 한번 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예쁘다는 말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새로 산 리본이 아무 반응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건 여자의 마음에 약간 상처가 된다. 할 수 없지, 뭐.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며 현관 앞으로 나갔다. 이안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게 잘못된 거다. 그 남자는 상정 외니까. 제이드는 현관 앞에 서서 처음과 같은 태도로 케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안과 달리 케이트의 머리를 보더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새로 산 리본인가요? 스미스양에게 잘 어울리는군요.” 원래 이성의 마음을 북돋는데 능숙한 남자다. 케이트는 그걸 알면서도 기분이 좋아졌다. 감사합니다. 제이드가 케이트를 데리고 안내한 곳은 시내 한복판에 있는 커다란 귀금속점이었다. 비에르쥬. 케이트는 속으로 가게 이름을 읽었다. 외부부터 벌써 화려해 보이는 곳이다. 번쩍번쩍 광을 낸 간판부터 시작해서 외벽에도 빨갛고 노란색 칠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이드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은 오늘따라 한산했다. 손님은 고작 두 명과 탈린이라는 가게의 주인뿐. 그는 목걸이를 만든 나이 든 장인을 기대했다가 장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없자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티 내지 않고 능숙하게 케이트를 안으로 안내했다. “어서 오세요, 킬리언씨.” 탈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옆에서 나이 지극한 신사도 일어났지만 여성은 일어서지 않았다. 그녀는 심지어 제이드와 케이트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목걸이를 만드신 분은 안 오셨나요?” 이상하다. 제이드는 탈린이 안내하는 자리에 앉지 않은 채 물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나이 지극한 신사는 귀금속세공사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옆에 있는 커다란 서류가방도 그런 생각을 뒷받침했다. 그는 신사의 옆에 앉은 여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의 옷이 전부 최고급 천으로 만든 게 제이드의 눈에도 보였다. 킬리언 포목점에 거의 신경 쓰지 않는 그지만 자신의 가게에서 파는 가장 비싼 천이 뭔지 정도는 안다. “자자, 그러지 마시고,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만드신 분이 늦으시는 겁니까, 안 오시는 겁니까?” “더 좋은 이야기일 수 있어요.” 더 좋은 이야기가 뭐지? 케이트의 귀에 쫑긋했다. 목걸이를 만든 사람을 찾는 것보다 더 좋은 이야기라면 자신의 가족을 찾는 이야기다. 그녀의 가족을 찾은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곧 머리를 저었다. 가족을 찾은 거라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지 않은가. “더 좋은 이야기가 뭡니까?” “우선 목걸이를 보여주시고 이야기를 진행하죠.” 제이드는 탈린과 다른 사람들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더니 케이트를 자신의 등으로 가리며 한 발짝 물러났다. “아니요. 우선 세공사부터 만나봐야겠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그 목걸이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봐야…,” “목걸이가 있는지 없는지는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닐 텐데요. 저희는 세공사만 만나면 됩니다.” 제이드와 탈린의 실랑이가 격해졌다. 일단 목걸이부터 보자는 탈린과 세공사를 소개해달라는 제이드. 두 사람의 실랑이를 보던 여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이지, 짜증 나서 못 듣겠네! 그 망할 목걸이를 내놓으라고!” 뭐? 제이드는 깜짝 놀라서 여자를 쳐다봤다. 놀란 건 케이트와 탈린도 마찬가지였다. 탈린이 여자에게 다가가 부인, 진정하시죠. 라고 말했지만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쳤다. “이것 보라고요, 맥! 그 여자는 가짜인 게 분명해요. 목걸이가 없잖아요!” “하지만 부인, 목걸이가 없다고 해서 가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이 지극한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케이트와 제이드는 서로를 쳐다봤다. 무슨 소린지 알겠어요? 아뇨, 모르겠는데요. 두 사람이 눈으로 대화하는 사이 신사는 여자를 달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엘리자베스라고 나선 그 사기꾼을 도와주러 온 사람들이 분명해요! 내, 당장 그 여자를 사기꾼으로 고발해 버릴 거야.” 여자는 손가락으로 제이드와 케이트를 가리키며 뒤이어 소리쳤다. “당신들도! 가만두지 않을 테니, 그렇게 알아!” “잠시만요.” 제이드의 목소리가 격양된 여자의 목소리를 갈랐다. 그는 침착하게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시죠?” 그의 질문에 세 사람의 행동이 멈췄다. 그들은 먼저 나서기 망설이는 것처럼 서로를 쳐다보더니 결국 여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내 이름은 에스메랄다 호건. 내 이름을 모르지는 않겠죠.” 에스메랄다 호건? 이름보다 그 뒤에 붙은 성의 의미가 제이드에게 크게 다가왔다. 케이트조차 눈을 크게 떴다. 아는 이름이다. 호건 가. 악명 높은 대상인 아닌가. 하지만 어리둥절해 하던 것도 잠시 제이드는 바로 다시 물었다. “저희 목걸이와 호건 가가 무슨 상관이죠?” 다시 세 사람의 입이 닫혔다. 세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 누가 나설 것인지 눈빛만으로 대화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나이 지긋한 신사가 나섰다. 그는 제이드에게 명함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저는 막스 로건. 변호사입니다. 예전부터 호건 가의 업무를 맡아왔습니다.” 제이드는 막스가 내민 명함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과연 변호사 막스 로건이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문맹이 많은 뮈엘라의 특성상 명함을 교환한다 해도 명함에는 글자보다 그림이 더 많다. 때문에 그는 약간 신기한 기분으로 명함을 받아들었다. “그 목걸이는 어떤 사람을 특정할 수 있는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그 목걸이를 가지고 계시다고 하신 분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막스의 말에 케이트가 앞으로 나서려 했다. 하지만 제이드가 한발 빠르게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그 어떤 사람은 엘리자베스 호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다시 침묵이 흘렀다. 제이드는 눈치 빠르게 사태를 파악하고 씩 웃었다. 자기들의 패는 전혀 보여주지 않으면서 우리 패는 내놓으라는 말인가? 말도 안 된다. 그는 이미 에스메랄다의 행동과 호건 가의 변호사의 등장으로 상황을 대충 파악한 상태였다. 호건 가에서 최근 엘리자베스라며 자청한 여자가 가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케이트의 목걸이가 진짜 엘리자베스의 목걸이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쩌면 스미스양의 친척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대단한 집일 수도 있겠는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케이트를 돌아봤다. 나만 믿으라는 그 미소에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같이 웃기는 했지만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돼서 어리둥절했다. 변호사는 그녀가 가진 목걸이가 어떤 사람을 특정하는 물건이라고 했다. 그리고 제이드는 그 어떤 사람이 엘리자베스 호건이냐고 물었고. 그게 말이 되는 건가? 그녀의 어머니가 엘리자베스 호건이라고? 케이트는 품에 지닌 목걸이를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엄마. ============================ 작품 후기 ============================ 으으, 졸려요. 주말동안 내내 잤더니 어째 더 졸린것 같습니다. 사담이지만 저는 현재 8장을 쓰고 있습니다. 고로, 늦어도 다음주면 3부는 끝날것 같아요. 그래서 외전을 뭘쓸까~ 하고 고민중인데 어떤 게 좋을까요? 기탄없이 말씀해 주세요. 라고 적었지만 사실 생각해 둔건 있어요. 하하하하하. 00106 7. 엘리자베스 호건 =========================================================================                            “그래요.” 긴 침묵을 깨고 이번에 말을 꺼낸 건 에스메랄다 호건이였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고 공격적으로 말했다. “그 목걸이는 엘리자베스의 것이예요. 그러니 그 목걸이를 가지고 있다면 엘리자베스 본인일 가능성이 높아요.”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탈린은 에스메랄다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 목걸이가 엘리자베스라는 징표라고 말하면 안 된다. 엘리자베스가 누군가에게 줬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거기까지 생각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여자가 아니었다. 제이드는 변호사를 향해 물었다.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막스는 지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니 그 목걸이를 진짜로 가지고 계신다면 보여주시죠. 이 지루한 공방을 끝낼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한 가지만 더요.” 제이드는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그럼 호건 가에서는 지금 나타난 엘리자베스 호건을 가짜라고 생각하신다는 겁니까?” 그때 에스메랄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 여잔 가짜야! 생각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맙소사. 탈린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래서야 완전 엉망이지 않은가. 변호사도 끙하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 태도에 여유가 있어진 건 제이드였다. 그는 자신의 뒤에 숨긴 케이트를 내보이며 말했다. “여기 이 아가씨가 목걸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목걸이는 이 아가씨의 어머니물건이고요.” 어머니라고? 변호사의 눈이 커졌다. 그는 쓰고 있던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보여주시죠. 케이트는 주저하며 품에서 목걸이를 꺼내 내밀었다. 제일 먼저 그걸 낚아챈 것은 에스메랄다였다. 하지만 그녀가 봐서 그게 진짜인지 알 리가 없다. 결국 탈린이 받아 들어 확인하기 시작했다. 전부 진짜다. 알이 빠진 흔적조차 없었다. 심지어 그가 가운데에 로켓을 비틀어 열자 그 안에서 작은 초상화가 나왔다. 탈린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케이트와 초상화를 번갈아가며 확인했다. “어떻습니까? 진짜입니까?” 변호사의 질문에 탈린은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를 보고 변호사를 본 순간 말이 채 나오지 않았다. 사람을 앞에 두고 거짓말을 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제이드는 탈린의 손에서 목걸이를 집어 변호사에게 넘겼다. 그는 초상화를 보더니 크게 놀라며 케이트를 쳐다봤다. “이건!” 케이트와 초상화의 여자는 닮아있었다. 이렇게 초상화를 보니 확실히 닮은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초상화는 그도 익히 아는 얼굴이다. 막스는 떨리는 손으로 에스메랄다에게 목걸이를 내밀었다. 에스메랄다 역시 초상화를 보자 같은 반응을 보였다. “거, 거짓말!” 그녀가 반사적으로 목걸이를 집어 던지려 했기 때문에 제이드는 재빨리 달라붙어 목걸이를 빼앗았다. 그것을 안전하게 케이트에게 넘긴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이제 확인된 거겠죠? 여기 있는 이 아가씨가 엘리자베스 호건의 딸이라는 것이요.” 거짓말. 에스메랄다는 경악한 얼굴로 케이트를 쳐다봤다. 초상화를 보고 다시 보니 알겠다. 확실히 저 빨간 머리 계집애는 엘리자베스를 닮았다. 금발 머리가 아니라 빨간 머리고 좀 더 엘리자베스보다 똑똑해 보이긴 하지만 닮았다. 변호사는 안경을 고쳐 쓰며 케이트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실례지만, 아가씨의 어머니 성함이 엘리자베스가 맞습니까?” 케이트는 목걸이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엄마의 이름은 엘리자베스가 아니었다. 그녀는 초상화를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요. 사람들은 모두 엄마를 베스라고 불렀어요.” 베스라고? 잠깐 희망에 차오르던 에스메랄다의 눈에 절망이 차올랐다. 그녀는 힘없이 소파에 주저 앉았다. 베스. 엘리자베스의 애칭이 아닌가. 변호사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며 말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아버지 성함은요?” “사람들은 닉이라고 불렀어요.” 그는 서류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엘리자베스 호건이 사라지기 전 그녀를 유혹한 떠돌이 화가가 있었다. 딸을 유혹한 나쁜 벌레를 조사하라는 비스마르크 호건의 명에 따라 당시 변호사는 모든 것을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 <엘리자베스 호건은 떠돌이 화가 니콜라스 스미스라는 남자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 문구를 본 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스와 닉. 호건 가의 영향을 피하기 위해 본명을 사용하지 않고 애칭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엘리자베스, 아니 아가씨의 어머니는 어디 가셨죠?” “어머니는,” 약간 울컥해서 케이트는 고개를 숙였다. 마치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다. 길을 잃어버리고 울고 있으니 어른들이 다가와서 꼬마야, 이름이 뭐니? 엄마는 어디 있니? 하고 묻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은 엄마가 어디 있다고 말해도 만날 수 없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힌 채 대답했다. “돌아가셨어요.” 저런. 변호사의 표정이 측은하게 변했다. 엘리자베스 호건이라면 그도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가 젊은 시절 다른 남자들처럼 아주 잠깐 그녀를 마음에 품은 적도 있다. 그래서 그는 눈앞의 엘리자베스의 딸이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미안하다.” “잠깐만!” 막스와 케이트의 가라앉은 분위기 사이로 에스메랄다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는 케이트에게 비명처럼 물었다. “엘리자베스가 죽었다는 거죠?” 엄마를 말하는 거라면 확실히 돌아가셨다. 재차 묻는 질문에 케이트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스메랄다는 손뼉을 짝하고 치더니 기분 좋게 외쳤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데 그럴 줄 알았다니, 상당한 실례다. 물론 에스메랄다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지금 나타난 엘리자베스가 가짜라는 의미였지만 그 안의 모든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한 언행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어떤지 상관하지 않고 에스메랄다는 얄미운 엘리자베스가 가짜라는 사실에만 기뻐서 보석점 밖으로 뛰어 나갔다. 당황한 변호사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그 가짜 계집을 쫓아내야죠!” 그대로 타고 온 마차에 뛰어 오른 에스메랄다가 변호사를 향해 외쳤다. “아, 뭐해요? 어서 타요! 그 사기꾼 계집을 쫓아내야 할 거 아니예요?” 이게 무슨 일이지? 케이트와 제이드는 당황해서 서로를 쳐다봤다. 케이트는 지금까지 벌어진 일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엄마가 엘리자베스 호건이라는 말인가? 그럼 지금 나타난 엘리자베스 호건은 누구지? 그런 그녀에게 제이드가 손을 내밀었다. “우리도 가볼까요?” 무슨 일인지 몰라도 케이트가 얽혀있는 건 분명했다. 그녀는 제이드와 함께 타고 온 마차에 올라탔다. 호건 가로 돌아가는 에스메랄다의 마차를 뒤쫓는 제이드의 마차 안에서 케이트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 어머니가 엘리자베스 호건이라는 이야기인가요?” “그런 것 같군요.” 믿을 수 없다. 그녀는 다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지금 있는 엘리자베스 호건은 누구일까요?” “글쎄요. 아마 사기꾼이 아닐까 싶은데요. 가서 물어봐야죠.” 차라리 케이트는 자신의 엄마가 엘리자베스 호건이 아니고 지금 나타난 엘리자베스 호건이 진짜인 게 나을 것 같았다. 호건 가가 내 친척이라고?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그녀가 생각한 친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어딘가의 하녀, 혹은 용병. 하루 벌어 하루 먹기 힘든 가난한 집이라 해도 호건가 보다는 나을 것 같다. 제이드는 어두운 케이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원하던 친척을 찾았는데, 그 친척이 호건가라는 대상인인데 케이트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오히려 근심으로 가득 차 보였다. “괜찮으신가요?” “어, 잘 모르겠어요.” “친척을 찾은 게 기쁘지 않아요?” “호건 가가 제 친척이라는 게 과연 기쁜 일일까요?” 제이드는 거기서 케이트의 영리함에 감탄했다. 다른 평범한 여자라면 자신의 친척이 호건 가쯤 되면 대 상인이라는 말에 그저 기뻐했을 것이다. 평생 손에 물 하나 묻히지 않고 살 권리를 찾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그게 그저 즐거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호건 가의 상속녀가 된 이상 이상한 무리가 따라붙는 일도 종종 일어날 수 있다. 비스마르크 호건의 형제 상태로 보아 유산분배라는 어마어마하게 더럽고 귀찮은 일에 휘말릴 가능성도 있다. 차라리 찾은 친척이 귀족인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를 정도다. 두 사람이 말을 잃고 생각에 잠긴 사이 마차는 호건 가에 도착했다. 에스메랄다는 나이도 체면도 잊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를 부축하려도 마차에 가까이 붙었던 하인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을 정도였다. 하인들의 놀란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치마를 걷어붙인 채 저택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바로 현관 앞에 마차를 세웠다 해도 현관에서 엘리자베스가 묵는 방까지는 꽤 멀다. 그녀가 헉헉거리며 발걸음을 늦췄을 때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따라잡았다. 엘리자베스 호건은 그녀가 사라지기 전 사용하던 그녀의 방에 묵고 있었다. 삼 층에 위치한 엘리자베스 호건의 방은 호건 가 영애의 방답게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꽃과 나무, 새를 조각한 커다란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제일 먼저 커다란 소파와 테이블을 놓은 응접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이 사기꾼.” 에스메랄다가 헉헉거리며 신음처럼 내뱉었다. 자신의 응접실에 앉아 차를 마시던 엘리자베스는 난데없이 들이닥친 에스메랄다의 행동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빙그레 웃었다. “어머, 에스메랄다. 무슨 일이예요?”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 태도에 누구도 그녀가 가짜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뒤이어 나타난 제이드와 케이트의 모습에 엘리자베스는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인가요?” 어쩌면 사람들이 잘못 안 것인지도 모른다. 케이트는 엘리자베스의 태도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엄마는 엘리자베스 호건이 아닐 것이다. 지금 눈앞의 여자가 진짜 엘리자베스 호건인 것이다. 하지만 에스메랄다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엘리자베스라고 자청한 여자에게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내 집에서 썩 나가, 이 사기꾼!” “어머, 내 집이라뇨. 정확히는 내 아버지의 집이죠.” 에스메랄다보다 더 우아한 태도. 케이트는 그녀가 익숙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의 마차에 치일 뻔해서가 아니다. 눈앞의 엘리자베스 호건은 그녀의 어머니를 닮아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케이트의 어머니가 전혀 고생하지 않고 우아하게 살았다면 이렇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외모였다. 돌아가시기 전 케이트의 어머니는 병에 시달린 데다 고된 일에 지쳐, 나이보다 늙어 보였고 바싹 말라있었다. 그럼에도 케이트의 눈에는 퍽 아름다웠다. 그리고 눈앞의 엘리자베스 호건은 돌아가시기 전 그녀의 어머니보다 젊어보였고 생기 있어 보였다. 윤기 흐르는 피부와 고운 손. 저건 그녀의 어머니가 가질 수 없었던 것들이다. 마치 어머니의 자매를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케이트는 입을 벌리고 엘리자베스 호건을 응시했다. “닥쳐, 이 가짜!” 에스메랄다의 고함에 엘리자베스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녀는 못 말리겠다는 듯 에스메랄다를 보며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정말이지,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 심하잖아요.” 엘리자베스는 진짜처럼 보였다. 케이트는 자신의 엄마와 닮은 외모임에도 엘리자베스 호건의 태도가 너무 능숙해서 혼란스러웠다. 단순히 엄마는 엘리자베스를 닮았던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생각을 잘라내듯 에스메랄다가 케이트의 손목을 우왁스럽게 잡아당겼다. “헉!” “여기 증인이 있는데 끝까지 그럴 셈이야?” 케이트의 신음은 에스메랄다의 고함에 묻혀 사라졌다. 에스메랄다의 손아귀 힘이 어찌나 좋던지 케이트는 손목이 아파서 눈물을 글썽일 정도였다. 게다가 길게 기른 손톱이 살을 찌르고 들어오는 바람에 피까지 났다. 아, 아파. 엘리자베스는 케이트의 얼굴을 보고서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어머, 예쁘장한 아가씨네. 그 아가씨가 무슨 증인이라는 거죠?” ============================ 작품 후기 ============================ 다들 외전에 왜이렇게 노블을... 여러분, 이 상황에서 노블가면 케이트 억울하잖아요. 게다가 이미 전 뭘 쓸지 정해놨는데. 후후후후후후후 이렇게 될 바엔 순수하게 액션 미스테리만 넣어서 로맨스를 싹 빼버리겠어. 라고 다집해도 될 리가 없죠. 꼭 쓰면 로맨스가 들어가더라고요. 이상하다... 00107 7. 엘리자베스 호건 =========================================================================                            에스메랄다는 더욱 우왁스럽게 케이트를 끌어당겼다. 그 때문에 케이트는 거의 넘어질 뻔했다. 비틀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억지로 잡아 엘리자베스에게 보이며 에스메랄다가 외쳤다. “이 여자가 진짜 엘리자베스의 딸이야! 진짜 엘리자베스는 죽었다고! 이래도 거짓말할 셈이야?” 어머.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실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우아하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건가? 사람들 모두 그렇게 생각했을 때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운이 좋았어, 호건.” 그녀는 에스메랄다를 향해 그렇게 말하고 허리가 끊어지라 웃어댔다. 다들 느닷없는 엘리자베스의 행동에 깜짝 놀란 채 얼어있었다. 엘리자베스의 웃음소리가 점점 너무 웃어서 쉰 것처럼 걸걸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헉!” 제일 먼저 변화를 깨달은 건 케이트였다. 뒤이어 에스메랄다가 신음을 내뱉었다. “세상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고운 얼굴도, 풍성하게 빛나던 금빛 머리카락도 밑으로 흘러내렸다. 배를 움켜쥔 손도 무너져 내렸다. 마치 옷만 그대로 두고 안에 든 사람만 썩는 것처럼, 모래로 만든 성이 무너지는 것처럼, 눈사람이 녹는 것처럼. 그렇게 엘리자베스는 무너져 내렸다. “아, 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광기에 찬 웃음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걸걸한 목소리가 허스키하게 울려 퍼져 마치 두 사람이 웃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미친 듯이 웃는 엘리자베스를 눈앞에 두고 사람들은 모두 얼어붙어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웃음 멈추고 고개를 들자 사람들 앞에 선 것은 더 이상 엘리자베스가 아니었다. 해골 그 자체인 것처럼 뼈 위에 마른 가죽만 씌워 놓은 듯한 얼굴이 있었다. 다 빠진 머리카락과 앙상한 손이 옷 사이로 빠져나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사람이 엘리자베스의 옷을 입고 서 있었다. “맙소사!” 탈린의 신음과 동시에 덜컹하고 엘리자베스 등 뒤에 있던 커다란 창문이 열렸다. 커텐이 펄럭이며 나부꼈다. 창밖에는 나무가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나뭇가지 하나가 방 쪽으로 뻗어 있는 게 케이트의 눈에 보였다. 나무를 타고 내려갈 생각일까? 그녀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이 방의 문은 사람들로 막혀있다. 그렇다면 엘리자베스가 도망칠 수 있는 탈출구는 저 창문뿐이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여긴 삼 층이다. 나무를 타고 내려간다 해도 곧 잡힐 것이다. 호건 가의 저택은 정문에서 현관까지 마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마녀!” 갑자기 변호사가 외쳤다. 케이트가 자신을 가리키는 줄 알고 흠칫 놀라 쳐다보자 그는 손가락으로 엘리자베스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녀다!” 그제야 케이트는 아무 이유도 없이 창문이 열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친 듯이 웃는 엘리자베스의 행동부터가 너무 기괴해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갑자기 엘리자베스가 휙 날아오르더니 순 식간에 창틀에 올라서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낄낄거리며 에스메랄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너.” 앙상한 손가락이 에스메랄다를 가리켰다. 그 뾰족한 손가락 끝에서 이상한 마법이 흘러나올 것만 같은 공포에 에스메랄다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겁에 질렸다. 마녀는 엘리자베스로 변해있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원하는 건 절대 네 손에 들어오지 않을 거야.” 그건 말이 아니었다. 단정이었고 예언이었다. 담담한 목소리 안에 들리는 저주의 언어가 방 안의 사람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히익하고 에스메랄다가 새된 신음을 내뱉었다. 멀리서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마녀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은 게 분명했다. 우당탕 쿠당하고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마녀는 여유 있었다. 그녀는 손을 거두더니 씨익 웃어보였다. 그리고 케이트를 향해 말했다. “또 만나자, 달콤한 아가야.” 달콤한 아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케이트가 어리둥절한 사이 마녀가 뒤로 몸을 던졌다. 그대로 마녀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보여서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으악!”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탈린이나 변호사 둘 중 하나가 낸 비명이었다. 에스메랄다는 눈을 크게 뜬 채 그대로 얼어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괜찮으십니까?” 저택에 상주하고 있던 용병들이 뛰어들어왔지만 이미 마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제일 먼저 나타난 용병이 열린 창문을 발견하고 달려갔다. 그는 창문 너머로 몸을 내밀고 살폈지만, 바닥에 떨어진 사람은 없었다. 마녀는 너무나 마녀답게 사라져 버렸다. 에스메랄다는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네가 원하는 건 절대 네 손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던 마녀의 마지막 저주가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이럴 수가. 그녀는 너무 심한 절망에 손님이 있다는 것도 잊고 끙끙대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상황이 이러니, 확인은 다음으로 미루는 게 어떨까요?” 변호사의 제안에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이상 여기에서 머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제이드는 기운이 빠진 케이트를 이끌고 다시 자신의 마차에 올랐다. 탈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살피다가 터덜터덜 걸어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괜찮습니까?” 제이드의 질문에도 케이트는 멍하니 앉아있었다. 호건 가의 저택을 들어갈 때와 같은 질문인데 이번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 케이트를 위로하기 위해 제이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친척을 찾았으니 다행이죠. 좋은 일만 생각하자고요.” 과연 그럴까? 케이트의 마음이 우울해졌다. 에스메랄다를 향하던 마녀의 저주. 그리고 그녀를 향한 말. 그것도 저주였을 까. 마차가 큐바인 하우스에 멈추자 케이트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차라리 찾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후회가 머릿속을 스쳤다. 아니, 아니다. 케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친척이다. 나쁜 일에 얽혔다고 해서 나 몰라라 해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야?” 이안은 문 앞에서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제이드와 케이트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손을 뻗어 케이트를 끌어당겼다. 기운 없던 탓에 그녀는 쉽게 이안의 품에 안겼다. 엇하고 뿌리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싱글벙글하던 제이드가 입을 열었다. “좋은 일이 있어.” 이안이 무슨 일이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신이 난 제이드는 이안보다 먼저 큐바인 하우스의 문을 열며 말했다. “스미스 양이 친척을 찾았다고.” 아차. 그 순간 케이트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이안의 품에서 빠져나와 제이드에게 달라붙었다. “자, 잠깐만요.” “네?” “말하지 말아 주세요.” “하지만 이건 좋은 일이잖아요? 감출 필요가 있습니까?” “나중에, 나중에 제가 말할게요. 그러니까,” 갑자기 케이트의 몸이 뒤로 끌려갔다. 힉하고 신음을 내뱉은 케이트는 자신의 허리를 감은 이안의 팔을 발견했다. 그는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케이트를 한 손으로 끌어안고 있었다. “뭐, 뭐하는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안은 기분 나쁘다는 티를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케이트가 제이드와 필요 이상으로 달라붙는 것도, 그를 제외하고 둘이서만 속닥거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이드는 당황한 얼굴로 필사적인 케이트와 기분 나빠하는 이안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녀를 만났어.” 그 말의 파급효과는 대단했다. 이안은 케이트를 응시하던 시선을 제이드에게 돌렸다. 팔은 여전히 그녀의 허리에 단단히 감겨있었지만, 주의가 제이드의 이야기로 돌아간 것만은 확실했다. 제이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능청스럽게 응접실로 걸어 들어가며 말했다. “아, 피곤하다. 차 한 잔은 마셔야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데.” “차, 차 내올게요.” 다시 한 번 케이트가 이안의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시도했지만 이번에도 실패했다. 그는 바동거리는 케이트의 뒤통수에 턱을 대고 눌렀다. 머리를 묶은 리본이 살랑거려 코끝이 간지러웠다. 킬리언씨가 있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고, 케이트가 한마디 하려 했을 때 그녀의 머리카락이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어리둥절한 그녀의 눈앞에 이안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커다란 손안에 케이트의 머리카락을 묶고 있던 리본이 들려있었다. “이, 이게 무슨!” 남의 머리를 마음대로 풀다니, 이게 무슨 짓이야! 라는 긴 항의는 너무 놀라 짧은 신음 같은 단어로 대체되어 흘러나왔다. 그는 케이트에게 리본을 넘기더니 그녀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붉은색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을 감싸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안?” 케이트가 움직이면서 그의 손안에서 붉은색 머리카락이 스르륵 빠져 나왔다. 어딘지 모르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이안은 머리카락 몇 가닥을 가볍게 잡았다. “아야!” 때때로 부인이나 애인의 머리카락을 잘라 품에 지니고 다니는 남자들이 있다. 용병이나 기사들이 그렇다. 그들은 그 머리카락이 거친 싸움과 전쟁터에서 자신을 머리카락의 주인에게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믿는 듯했다. 이안은 여전히 머리카락 따위에게 그런 힘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케이트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 가지고 있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녀 만난 이야기 안들을 거야?” 제이드의 재촉에 이안은 케이트를 놓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단단하게 받치고 있던 힘이 사라지자 케이트의 몸이 잠시 휘청거렸다. 그녀는 바닥에 주르륵 주저앉아 손안의 리본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제이드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한 건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안은 그녀를 만지기 위해 하녀를 그만두라고 한 사람이다. 그녀가 호건 가의 사람이 되어 일할 필요성이 없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하고 생각만 해도 몸이 오싹하고 떨려왔다. 지금도 그는 자기 마음대로 케이트를 휘두르고 있다. 그런데 그가 정한 하녀는 건드리지 않는 다라는 구속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모르겠다. 케이트는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생각했다. 이안은 무엇에나 담담하고 무신경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때때로 그녀를 응시하는 눈빛이 무서울 때가 있다. 자신이 흉포한 괴물 앞에 놓인 한 입 거리로 느껴질 때가 있다. ============================ 작품 후기 ============================ 아참, 표지 변경했습니다. 달리는mp3님께서 선물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큰 화면으로 보시면 깜짝 놀랄 반전이 숨어있습니다. 제 뜰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ㅎㅎㅎㅎ 와, 오늘 제가 먹이주는 길고양이들이 싸우길래 먹이 봉투 흔들면서 싸우지마! 그랬더니 저한테 캬악! 하는 거 있죠. 세상에...깜놀했어요. 얼룩이, 넌 이제 밥 없다. 드디어 이안이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안은 그냥 쩌리일뿐...하하하. 자꾸 이런 얘기해서 죄송한데 다음주에는 3부 종료됩니다~ 안끝나도 내가 끝내겠어. 후후후 라는 느낌으로 쓰고 있습니다. 외전은 아마 달콘 끈적은 아니고... 최대한 두근두근한 느낌으로 쓰겠습니다. ...눈 앞에서 칼이 왔다 갔다하는 것도 두근두근 하는 거 맞죠? 00108 8. 녹색 리본 =========================================================================                            “무슨 일이예요?” 제프리는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 안에 들어왔다. 그는 에스메랄다가 침대에 몸져누워있다는 집사의 말을 들었지만 그다지 걱정한 투는 아니었다. 진짜 아프다면 벌써 의사가 다녀가고 난리가 날 것이다. 의사가 붙어있지 않다는 건 별거 아니라는 뜻이다. 다년간에 걸친 병석에 누운 비스마르크 덕분에 제프리는 심각하게 아픈 것과 심각하지 않게 아픈 것을 의사의 존재여무만으로 구별해 내고 있었다. “왔니.” 에스메랄다는 힘없이 말하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병색이 있지는 않고 그저 창백해 보인다. 근심이 있는 얼굴이다. 제프리는 그 얼굴이 얼마 전 엘리자베스가 찾아온 직후 보인 얼굴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는 마녀였다면서요. 그럼 더이상 문제는 없는 거 아니예요?” 더 이상 문제가 없다니. 제프리의 말에 에스메랄다는 끙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그녀의 아들은 아직 케이트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젠장, 젠장. 그녀는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돌아누웠다. 엘리자베스가 가짜면 어떻단 말인가, 다시 엘리자베스의 딸이 나타났는데. 결국 에스메랄다와 제프리가 받을 호건 가의 재산은 반 토막이 나는 건 마찬가지다. 그러다 그녀는 문득 케이트를 이 저택 밖으로 내보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보내지 말았어야 했나? 괜히 내보내서 호건 가의 상속녀라고 떠들어 댈 걸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에스메랄다의 안색이 나빠지자 제프리가 허리를 굽혀 그의 어머니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뭔데요?” “엘리자베스가 죽었댄다.” “그럼 잘 된 일이잖아요?”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제프리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눈에 가시던 엘리자베스가 죽었다면 더 좋은 일 아닌가? 그런 아들에게 에스메랄다는 기운 없이 대답했다. “대신 엘리자베스의 딸이라는 계집애가 나타났어.” “무슨 소리예요, 어머니.” 제프리는 낄낄대고 웃었다. 엘리자베스가 죽었다고 하더니 이젠 엘리자베스의 딸이 나타났다고? 그들의 앞에 나타난 엘리자베스는 가짜고? 가짜를 쫓아냈더니 진짜가 나타났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된다. 그런 생각에 웃던 제프리는 에스메랄다의 얼굴이 심각하자 웃을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 진짜예요?” “그래.” 뭐 이런 재수 없는 일이! 그는 어머니 앞이라는 것도 잊고 욕을 내뱉었다. 평소라면 호되게 혼냈을 에스메랄다는 마녀의 저주와 케이트의 존재 탓에 상심에 빠져 제프리를 혼낼 기력도 없었다. “그 애는 몇 살이예요?” “누구?” “엘리자베스의 딸이요. 어린애면 대충 꾀어서 재산포기 각서에 서명하게 만들죠.” 상당히 단순한 생각이다. 설령 케이트가 어리다 해도 그 정도로 어린아이가 보호자가 없을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제프리는 그리 영리한 편이 아니었고 자신의 생각이 상당히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네 또래더구나.” 에스메랄다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게다가 웬 남자가 옆에 붙어있었다. 보호자 이거나 연인, 어쩌면 남편일 게 분명하다. 상당히 잘못된 착각이지만 에스메랄다가 보기에 케이트옆에 붙어 그녀를 도와주는 제이드의 존재는 연인 혹은 남편이라는 위치로 타당해 보였다. === “케이트.” 이안은 차를 따르는 케이트를 나직하게 불렀다. “정보 길드에 다녀온다.” 케이트의 고개가 휙하고 올라갔다. 그녀는 불안한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이안은 어제, 제이드로부터 엘리자베스 호건이 마녀라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심장을 훔치는 범인과 마녀의 관계를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편리한 건 정보 길드일 것이다. 적어도 갑자기 나타난 엘리자베스 호건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으니까. 함께 가자고 한 건 아니지만 더 이상 자신이 마녀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케이트는 정보 길드라는 말만 들어도 두려웠다. 처음엔 어떻게 빠져나갔을지 몰라도 그녀가 진짜 마녀라면 정보 길드에서 그녀를 색출해 낼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이안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확실히 조사할 때 혼자 다니는 것보다 케이트와 함께인 편이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케이트가 이렇게 싫어한다면, 게다가 그녀가 마녀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정보 길드에 억지로 데려가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가 차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케이트는 제인을 불러 좀 더 두툼한 코트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오늘 밤은 좀 더 추울 것 같다. 쌀쌀한 공기가 아침저녁으로 창문에 서리를 만들고 있었다. 현관 앞에 서서 제인이 코트를 가져오기를 기다리던 이안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케이트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녀가 움찔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케이트의 뺨을 쓸더니 손끝으로 그녀의 귀를 더듬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의 손끝이 케이트의 뒤통수를 더듬기 시작했다. 머리가 한 손에 쏙 들어 올 것 같은 기분에 이안은 좀 신기한 기분에 케이트의 머리를, 정확히는 머리통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너는 뭐든 작군.” 응? 느닷없는 말에 케이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안을 쳐다봤다. 남의 뒤통수를 실컷 만져놓고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야? 하지만 이안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로 묶은 케이트의 머리카락을 잡더니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머리를 묶은 리본이 살랑거리며 그의 손등을 간지럽혔다. 녹색 리본은 테두리에 하얀색 레이스를 달고 있었다. 며칠 전 앤과의 쇼핑에서 새로 산 리본이다. 그때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깨고 제인이 달려왔다. 소년은 커다란 이안의 코트를 품에 안은 채 달려와 헐떡이며 자신의 주인에게 내밀었다. “다녀오세요!” 이안은 제인과 케이트를 번갈아 보더니 코트를 걸치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가 사라지만 케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요즘, 이안이 그녀를 만지는 빈도가 늘어난 것 같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리고 케이트는 그것 때문에 심란했다. 때때로 무서웠고 때때로 설렜다. 그가 귀족이기 때문에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려는 것 아니냐던 앤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가족을 찾았다는 사실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녀는 가족이 수도에 있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렇다면 가족을 핑계로 이안에게서 멀어질 수 있다. 이안의 모습이 큐바인 거리를 떠나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가 큐바인 하우스의 문을 두드렸다. 네에~ 하고 나갔던 제인은 멋진 옷을 입은 하인과 마차에 얼어붙었다. 하인들 사이에서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제인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여기 케이트 스미스라는 여성분이 사신다고 들었는데.” 케이트는 긴장된 태도로 호건 가의 응접실에 앉아있었다. 호건 가는 그녀가 일했던 그 어떤 저택보다도 큰 응접실을 자랑했다. 벽지부터 소파, 장식장 같은 가구까지. 비싸 보이지 않는 게 없었다. 그녀는 장시간 앉아있으면 오히려 불편한 소파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취향 한번 이상하네. 비싸 보이긴 하지만 소파인데 이렇게 불편해서야 아무 소용없는 것 아닌가. 등받이에도 보기 좋게 하기 위해서 인지 몰라도 조각된 부분이 너무 커서 오히려 앉는 폭이 좁았다. 소파라기보다는 소파처럼 생긴 장식처럼 보였다. “기다렸죠?” 안쪽에서 문이 열리면서 에스메랄다가 나타났다. 그녀는 마치 연회라도 참석하려는 것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높이 말아 올린 머리카락과 큼지막한 귀걸이. 그 귀걸이와 한 세트인 목걸이가 에스메랄다의 얼굴보다 먼저 눈에 띄었다. “아닙니다.” 케이트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진짜 엘리자베스 호건이라면 에스메랄다는 그녀의 큰 외숙모가 된다. “칼에게 불편하지 않도록 데려오라고 했는데 괜찮았는지 모르겠어요.”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삼십 분 전 큐바인 하우스에 그녀를 데리러 왔던 나이 지긋한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칼은 자신을 호건 가의 집사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보내준 마차를 타고 오라는 에스메랄다의 전언을 전했던 것이다. “편했어요. 마차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보내줘야죠. 내 조카인데.” 에스메랄다는 케이트를 엘리자베스 호건의 딸로 확인한 것처럼 생긋 웃었다. 그 바람에 케이트는 어리둥절해졌다. 마녀로 밝혀진 엘리자베스 호건의 등장 때와 태도가 너무 달랐다. 이건 무슨 일이지? 그런 그녀의 태도에 에스메랄다는 다시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요. 진짜 호건 가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친해져야 하지 않겠어요? 알려주고 싶은 것도 있고요.” “알려주고 싶은 거요?” “캐서린이라고 했죠?” “케이트요.” 아, 그래. 에스메랄다는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전혀 미안하지 않은 것 같은 얼굴에 케이트는 그게 진심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케이트는 모르겠지만 호건 가는 보통 상인 집안이 아니예요. 그냥 부자도 아니고. 그러니 당신이 호건 가의 사라진 엘리자베스의 딸이라는 걸 사람들이 알면 분명 당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날 거예요.” 뜻밖에도 너무 일리 있는 말에 케이트는 오히려 말을 잃었다. 에스메랄다는 케이트가 수긍했다고 생각했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 가족인 우리가 돕지 않으면 누가 돕겠어. 안 그래?” 그게 사실이라면 상당히 고마운 이야기다. 쉽게 믿기 힘들어서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에스메랄다는 조심스럽게 케이트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조심스러워진 태도에 케이트가 적응하지 못했을 때 그녀의 입에서 엄청난 말이 흘러나왔다. “난 캐서, 아니, 케이트가 우리 제프리와 결혼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은데.” “네?” 너무 놀란 나머지 케이트의 입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차 싶었지만, 너무 늦었다. 에스메랄다는 약간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알아, 너무 갑작스럽다는 거. 하지만 캐, 케이트가 우리 제프리와 결혼하면 우리가 지켜주기도 쉽고, 케이트도 호건 가에 적응하는 게 더 쉽지 않겠어? 안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말하려다 멈췄다. 왜 에스메랄다가 그녀를 호건 저택으로 불러왔는지 깨달은 것이다. 여기는 호건 가의 저택이다. 케이트의 행동을 강제하기가 쉽다. 그래서 케이트는 바로 싫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생각하는 척하며 입을 열었다. “감사한 제안이네요.” “그렇지?” 활짝 웃는 에스메랄다의 표정이 가증스러웠다. 누가 봐도 제프리와의 결혼은 케이트에게 이득이 전혀 없다.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제프리와 결혼하라는 말이다. 케이트는 에스메랄다의 검은 속내를 읽고 속으로만 어이없어서 코웃음 쳤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놀랍게도 에스메랄다는 활짝 웃으며 선뜻 대답했다. “그래요. 내 말이 너무 갑작스럽긴 했어. 그렇지?” 어라, 정말 그냥 제안이었나? 호의적인 대응에 케이트의 적개심이 누그러졌다. 그녀의 굳은 표정이 풀리자 에스메랄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천천히 생각해보고, 이왕 왔으니 캐, 케이트의 어머니의 방을 한 번 구경해 보지 않겠어요?” 엄마의 방? 그 말은 케이트의 구미를 당겼다. 그녀가 모르는 엄마. 엘리자베스가 화가와 사랑의 도피를 하기 전에 살던 방을 볼 수 있다. 그녀는 적개심도 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고 싶어요.” “이리 와요. 안내해 줄테니.” 에스메랄다는 케이트에게 손짓하더니 들어온 문을 열었다. 케이트가 응접실로 들어왔던 문과는 다른 문이었다. ============================ 작품 후기 ============================ 와, 어제 비축분 쓰다보니 새벽 2시인거예요. 평소라면 얼른 자자! 할텐데 어제는 김연아경기가 있었잖아요? 일부러 좀 기다렸다가 김연아 차례만 봤어요. 오오, 잘하네. 이러고 오늘 아침. 별 생각없이 아사다 마오 경기를 보고 나서 다시 김연아 경기를 보니... 김연아는 저를 책임 져야되요... 스케이트는 개뿔 아무것도 모르는 제 눈만 높아졌어요...아놔.... 00109 8. 녹색 리본 =========================================================================                            엘리자베스 호건의 방은 삼 층에 있었다. 케이트는 그 방이 어제 마녀가 도망쳤던 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새와 나무를 조각한 커다란 문을 열자 어제의 난장판은 거짓말인 것처럼 깨끗해진 응접실이 눈에 들어왔다. “보고 싶은 만큼 봐요.” 에스메랄다는 케이트를 방 안에 둔 채 문을 닫고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 이미 문은 닫힌 뒤였다. 일부러 엄마의 방을 혼자서 천천히 구경할 수 있도록 혼자 두고 나가주다니.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좋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케이트는 에스메랄다의 배려에 감사하며 천천히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어제 마녀가 도망친 창문에는 쇠창살을 달아 놓은 것이 보였다. 마녀가 이런 쇠창살을 달았다고 들어오지 못할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지만, 그녀는 모른 척했다. 약간 구식이지만 화려한 소파와 장식장은 낡은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케이트는 소파를 쓰다듬고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녀의 엄마가 여기에서 처녀 시절까지 지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생각해보면 케이트의 엄마는 금전감각이 부족했다. 그녀는 때때로 저녁거리 대신 예쁜 리본이나 신발 같은 걸 사오곤 했다. 그때는 그냥 엄마가 철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단지 철이 없는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와!” 응접실 안쪽에 방이 딸려 있었다. 커다란 침대와 화장대. 침대는 엘리자베스의 취향을 반영한 듯 분홍색과 레이스가 치렁치렁 달려 있었다. 여기서 살고 싶은지에 대한 것과는 별도로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는 그런 침실이었다. 케이트는 레이스를 만지작거리다가 침대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그녀가 살면서 본 가장 좋은 침대인 것 같다. 엄마는 이런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아빠와 사랑의 도피를 했던 거야. 케이트의 머릿속에 엄마와 아빠의 사이좋은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그녀의 부모님은 항상 사이가 좋았고, 항상 연인처럼 보였다. 니콜라스가 사망하고 혼자 힘으로 십 년이나 케이트를 키워야 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죽을 때까지 그를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는 늘, 자신의 딸에게 남편을 만난 것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한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재력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난 것이 가장 큰 행운이라고 말하는 여자에게서 자란 케이트가 돈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계속 있다가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케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큐바인 하우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이안의 식사가 늦어진다. 호건 가의 상속녀가 되었음에도 케이트는 하녀로서 이안의 저녁 식사 준비를 걱정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녀가 커다란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자 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하인의 복장이 아니다. 갑옷을 입고 있지도, 무기를 들고 있지도 않았지만 케이트는 금방 그가 용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호건 가에서 집 안을 지키는 용병은 무장하지 않은 상태였다. “저, 그만 집에 돌아가려고요.” 케이트의 말에 용병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기가 아가씨의 집이잖습니까.” 뭐? 케이트는 놀라서 대답했다.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아요. 전 여기 사는 게 아니예요.” 하지만 용병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그녀가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문 앞을 막고 서서 말했다. “호건 부인께선 아가씨께서 여기서 사실 테니, 저택 밖으로 나가시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이 잘못 아신 거예요. 전 여기서 산다고 한 적이 없어요. “전 그저 지시를 따를 뿐입니다.” 맙소사. 케이트는 당황해서 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밖에서 용병이 잡고 있는 탓에 문은 열리지 않았다. 십여 분을 용병과 실랑이하던 그녀는 결국 포기하고 말했다. “호건 부인께서 잘못 알고 계신 거예요. 그분과 이야기하고 싶어요.” 하지만 에스메랄다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하녀를 통해 케이트의 말을 전달받더니 손을 저으며 무시하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거였다. 그녀는 케이트와 함께 온 제이드가 그녀의 연인일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연인이 있다면 제프리와 결혼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한동안은 이 저택에 붙잡아 두고 연인을 만나지 못하게 해서 두 사람을 헤어지게 한 다음 실의에 빠진 케이트를 설득해서 제프리와 결혼을 시킬 생각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에스메랄다와 제프리가 보기에는 괜찮은 생각이었다. 두 사람은 케이트의 방문을 지킬 용병을 고르고 그녀가 어디를 가던지 따라다니라고 지시했다. “몸이 좋지 않다고 하십니다.” 하녀의 전달에 케이트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렸다. 그녀와 이야기할 때만 해도 그런 기미는 없었다. 그녀와 잠깐 대화하는 게 어려울 정도로 몸이 좋지 않을 리가 없다. 결국 케이트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맙소사. 그녀가 순진했다. 아니, 상대방이 너무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다. 케이트는 호건 가에서 그녀를 저택에 붙잡아 둘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차라리 그녀를 쫓아내면 쫓아냈지, 그녀를 저택에 묶어 둘 거라고 누가 생각한단 말인가. “저기, 그럼 제가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보내주세요.” “안됩니다.” 용병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는 케이트의 방문 앞에 서서 그녀가 나오지 못하도록 막으며 말했다. “저희는 호건 부인의 지시를 우선합니다.” 용병은 호건 가에 고용된 사용인과 달리 호건 부인에게 고용되었다는 말이다. 다른 사용인들이라면 호건 가에 고용된 것이니 케이트의 지시를 따를 수도 있다. 하지만 호건 부인에게 단단히 지시받은 용병이 케이트가 이 저택을 나가도록 도와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아, 세상에. 케이트는 기운이 빠져 소파에 주저앉았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조금만 기다려 보면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이안이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케이트는 곧 머리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녀는 이안이 없을 때 호건 가로 안내받았다. 잠깐 이야기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어디로 간다고 말하지 않고 나왔다. 그러니 이안이 그녀가 호건 가에 있다는 걸 알 리가 없다. 이럴 수가. 케이트는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어떻게 하지? 정말로 날 여기에 가둘 생각일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에스메랄다의 행동을 보면 그럴 의도가 있었다. 언제까지? 제프리와 결혼할 때까지. 갑자기 소름이 돋아 케이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프리. 그런 남자와 강제로 결혼해야 한다니. 그것도 재산을 위해서. 말도 안 된다. 아니, 말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싫다. 너무 싫다. 그런 남자와 결혼할 바라면 차라리-. 거기까지 생각한 케이트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이안을 생각해 버렸다. 제프리에 비하면 이안은 훌륭할 정도다. 적어도 그는 사랑한 여자를 이용하고 버리지 않는다. 억지스럽고 어딘가 어긋나 있기는 하지만 그녀를 많이 도와줬다. 케이트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이안이 싫은 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아닌가? 모르겠다. 케이트는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그녀가 이안에게 어떤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는 지금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여기서 어떻게 나가느냐였다. 호건 가의 가주.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어쩌면 할아버지일지도 모를 사람이 떠올랐다. 비스마르크 호건이라 했던가. 에스메랄다 호건보다 윗사람이니, 그에게 이야기하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용병은 케이트가 다시 문을 열자 재빨리 말을 걸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태도에 케이트는 실소를 흘렸다.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어요.” “할아버지 말입니까?” 남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더니 곧 할아버지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아, 가주 말씀이시군요.” “네.” 용병은 확인해 보거나 생각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지금 주무시고 계셔서 만날 수 없습니다.” “어, 어떻게 알아요?” “혹시라도 아가씨께서 할아버지를 보고 싶으시다면, 주무시고 계시다고 알려드리라 했습니다.” “누가요?” “호건 부인께서요.” 케이트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녀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다가 용병이 문을 닫으려 하자 서둘러 물었다. “그럼 한 번 더 확인해 주세요!” “무엇을 말입니까?” “할아버지께서 아직 주무시는지 확인해 주세요. 지금은 일어나셨을지도 모르잖아요.” 남자는 케이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은 아가씨다. 그는 그런 걸 부탁하는 케이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에스메랄다에 의해 감금된 거라는 걸 모르는 용병에게 어차피 이 집에 살게 된 이상 천천히 만나 봐도 되는 할아버지를 굳이 지금 당장 만나고 싶다는 케이트의 태도는 부잣집 아가씨 답게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것으로 보였다. “기다려보시죠.” 그는 좀 빈정거리며 대답한 뒤, 문을 닫았다. 잠깐. 케이트는 다시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 그것은 돌아갔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밖에서 누군가가 열리지 않도록 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뭐 이런 경우가. 케이트는 당황해서 당겨도 보고 밀기도 하며 문을 열려 애썼다. 이들이 무슨 권리로 그녀를 가둔단 말인가. 문이 열렸으면 좋겠어! 자신이 마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뒤부터 케이트는 때때로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에는 이런 식으로 기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늘 그렇듯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결국 애꿎은 곳에 힘만 쓴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물러났다. 문이 안 된다면 다른 곳으로 나갈 수 없을까? 분명 이렇게 큰 방이니 창문도 여러 개일 것이다. 케이트는 문에서 몸을 돌려 가장 가까운 응접실의 창문으로 달려갔다. 어제, 마녀가 달아난 창문이다. 들어오면서 본 대로 쇠창살이 달려있었다. 손을 뻗으면 창문 밖의 나뭇가지를 잡아끌어 올 수 있을 테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케이트는 응접실을 비롯한 침실, 옷 방, 곁방, 목욕실을 숨이 차도록 돌아다닌 다음에야 에스메랄다가 이 방의 모든 창문에 쇠창살을 달아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맙소사. 기운 없이 침대에 풀썩 주저앉은 그녀는 그제야 저 쇠창살이 마녀를 두려워해서 달아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건, 혹시라도 케이트가 창문을 통해 달아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달아 둔 것이다. 조금씩 이 저택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거라는 절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 케이트는 고개를 떨구고 심호흡을 했다. 이건 말도 안 돼. 문득 머릿속에 이안이 떠올랐다. 주책 맞게도 이런 상황에서, 분명 더 이상 생각하기를 거부했음에도 이안이 생각났다. 그가 보고 싶었다. 느닷없는 포옹과 키스.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무장된 억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과 무뚝뚝한 태도. 늘 이해할 수 없다, 이상한 남자라고 투덜거렸지만 이런 순간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오직 이안뿐이었다. 케이트는 눈을 감은 채 신음처럼 말했다. 이안. “아가씨.” 갑자기 누군가가 말을 하는 바람에 케이트는 깜짝 놀라 튀어 올랐다. 언제 들어왔는지 호건 가의 집사가 침실 문 밖에 서서 케이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 무슨….” “죄송합니다. 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기에. 주인님은 현재 주무셔서 만나실 수가 없다는 말을 전해 드리러 왔습니다.” 나이 지긋한 집사는 케이트에게 예의를 갖춰 말했다. 하녀로 일한 케이트는 집사에게 하대 받는 것에 익숙해진 터라 집사의 그런 행동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괘, 괜찮아요. 저, 그…,” “칼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네에, 칼.” 그녀는 곧 에스메랄다가 집사를 칼이라고 부르던 것을 깨달았다. 집사. 어쩌면 용병과 달리 내보내 달라는 그녀의 요청을 들어줄지도 모른다. 케이트가 나가게 말하려 했을 때였다. 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단히 실례입니다만, 엘리자베스 아가씨의 목걸이를 볼 수 있을까요?” 목걸이?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품에 넣은 목걸이를 손으로 잡았다. 혹시 몰라서 가져오긴 했다. 그렇다 해도 에스메랄다에게 보여줄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는 칼을 보고 다시 목걸이를 쥔 손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이걸 보여줘도 될까? 에스메랄다가 그녀를 호건 저택에 감금한 이상 믿을 사람은 없었다. 그런 그녀의 망설임을 이해했는지 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이것도 그녀를 속이려는 행동인지도 모른다. 에스메랄다처럼. 하지만 그럼에도 케이트의 사람을 믿는 부분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칼이 발걸음을 멈췄다. 케이트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제가 들고 있는 채로 보셔도 상관없다면요.” 돌아선 칼의 표정은 처음과 똑같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 작품 후기 ============================ 하...누군가가 사둔 석류가 있길래 깠는데 다 썪음... 먹기힘들어서 다들 안먹었나봐요. 이럴수가... 그리고 매우 화가 났으므로 피겨관련 댓글은 금지합니다. 보면 또 열받아요... 즐거운 불금 보내시고, 다음주에 봐요. 00110 8. 녹색 리본 =========================================================================                            어딘지 모르게 이안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케이트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칼은 케이트의 손에 들린 엘리자베스의 목걸이를 꼼꼼하게 살폈다. 그는 메달 안에 든 엘리자베스의 초상화까지 확인하더니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 한걸음 물러났다. “이 목걸이는 엘리자베스 아가씨의 목걸이인데 왜 그분의 초상화가 들어있는지 아십니까?” 모른다. 케이트는 그제야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목걸이 안의 초상화는 보통 본인의 초상화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넣는 데 사용한다. 그것도 이렇게 숨겨진 메달이라면 더더욱. 딱딱하던 칼의 얼굴이 느슨하게 풀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는 모르겠다고 고개를 젓는 케이트에게 상냥하게 설명했다. “그 목걸이는 엘리자베스 아가씨의 생일 선물로 받은 겁니다. 그걸 아가씨께서는 연인에게 선물했지요. 거기 들어있는 초상화는 아가씨의 연인이 그리신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칼이 이해했느냐는 듯 케이트의 얼굴을 들여다 봤다. 자그마한 체구와 초록색 눈동자. 엘리자베스를 닮은 그녀의 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약간의 이해와 혼란스러움이 담겨있는 게 보였다. “아가씨의 아버지께서 그리신 겁니다.” 케이트의 눈동자가 커졌다. 약간의 안타까움에 칼은 한숨을 흘렸다. 사랑스러운 아가씨다. 엘리자베스가 집을 나가지 않았다면 그의 눈앞에 선 이 아가씨의 어린 시절을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케이트와 함께 응접실로 나와서 쇠창살을 댄 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엘리자베스 아가씨께서 사라지시기 며칠 전부터 주인님께서는 이 방의 창문에 이렇게 쇠창살을 달아 두셨던 걸 아십니까?”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케이트는 감탄 어린 눈으로 쇠창살을 댄 창문을 쳐다봤다. 칼은 나직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때도 이런 창살이 있었지만 엘리자베스 아가씨는 그 목걸이를 연인에게 전달하셨죠.” “네?” 칼은 마치 농담을 하듯 웃으며 말했다. “자정이 되면 집 안의 경비들이 자리를 교체합니다.” 여전히 이해 못 할 소리에 케이트는 다시 한 번 네? 라고 반문하려다 멈췄다.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지만 칼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는 시계를 보더니 한 발짝 물러나며 말했다. “이런, 벌써 일곱 시군요. 곧 식사를 가져다 드리라 이르겠습니다.” 일곱 시. 그리고 자정. 케이트의 머릿속에 천천히 정보들이 조합되기 시작했다. 창살이 있어도 목걸이를 전달했다고? 어떻게? 그녀가 창문을 쳐다본 사이 칼은 방문으로 걸어가 있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쳐다보자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다시 돌아오시길 기다리겠습니다.” 탁하고 문이 닫혔지만 케이트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태로 서 있었다. 칼이라는 집사를 믿어도 될까? 그가 해준 이야기들. 그건 과연 그녀를 위한 정보였을까? 모르겠다. 케이트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엄마가 목걸이를 저 창살이 있는 상태에서 전달했다고? 밖이 조금 시끄러워진 건 그녀가 저녁 식사를 마친 후였다. 입맛이 없었지만 케이트는 억지로 먹었다. 여기서 빠져나가려면 힘이 필요할 것이다. 그녀가 식사를 싹 비우자 용병은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어쨌거나 호건 가가 아닌가. 이런 부잣집 딸이 될 수 있다면 영혼도 팔 수 있다는 계집애들은 뮈엘라에 널렸다. 밖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소리가, 내용은 모르겠지만, 목소리는 익숙해서 케이트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살 때문에 고개를 내밀지는 못했지만 저 멀리 정문 앞에 불을 켜둔 덕에 경비와 실랑이하는 두 사람이 보였다. 보라색인지 붉은색인지 모를 모자를 쓴 남자와 검은 옷을 입은 큰 남자였다. 저런 화려한 모자를 쓰는 사람은 에바니엘에서 제이드 외엔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런 제이드와 함께 다니는 검은 큰 남자라면 이안정도 일 것이다. 케이트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여기예요!” 그녀가 소리치기 시작하자 남자가 문을 열고 들여다봤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멀기 때문에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케이트가 제이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듯이. 용병이 문을 닫고 나간 다음에도 케이트는 몇 번이나 소리를 질렀다. 한 번은 제이드가 몸을 돌려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기는 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는 못하는지 다시 몸을 돌렸다. “안 들리나 봐.” 케이트는 창살을 붙잡은 채 체념했다. 그녀도 제이드가 경비와 뭐라고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만, 정확히 뭐라고 하는지는 안 들린다. 저들도 그런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하지? 케이트의 머릿속에 문득 손을 뻗으면 나뭇가지가 닿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창살을 봤을 때부터 들었던 생각이다. 그녀는 손을 뻗어 나뭇가지를 잡고 끌어당겼다. 탄성을 가진 그것이 약간 묵직하게 휘어졌다. 손을 놓자 나뭇가지가 탁하고 반대쪽으로 튕겨 나갔다. 그녀의 머릿속에 같은 상황에서 아버지에게 목걸이를 전달했다던 엄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거구나. 케이트는 재빨리 종이와 펜을 찾았다. 뭔가를 적을게 필요하다. 다행히 펜은 찾았지만, 이번엔 쓸 만한 종이가 없었다. 서재까지 가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케이트는 곧 머리를 저었다. 서재에 왜 가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결국 케이트는 자신의 리본을 풀었다. 종이와 달라서 글을 쓰는 게 어렵긴 했지만 어쨌거나 쓰기는 했다. 그녀는 바로 뭔가 무거운 것을 찾았다. 이대로 리본을 날렸다간 정문까지 닿지 못하고 떨어질 것이다. 어떻게 하지? 케이트의 마음이 급해졌다. 지체했다가 이안과 제이드가 떠나면 큰일이다. 그녀는 품속의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가 놓았다. 이건 안 된다. 너무 위험하다. 결국 케이트는 화장대를 뒤져 작은 귀걸이 한 쌍을 발견했다. 뭔지 몰라도 진짜 보석인 것 같았다. 약간 묵직하고 크기도 적당히 작다. 그것을 리본으로 칭칭 감은 케이트는 나뭇가지를 지렛대 삼아 정문 쪽으로 날려 보냈다. 제발, 이게 무사히 도착하기를. === “저놈들 거짓말하는 게 분명하다고!” 제이드는 투덜거리며 몸을 돌렸다. 제이드와 이안의 진입을 저지한 용병들은 뭐라고 욕을 내뱉으며 자리를 정비하고 있었다. 아휴, 저것들을 그냥! 케이트가 누군가의 마차를 타고 나간 지 몇 시간. 저녁 식사 시간이 돼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이상하다고 여긴 이안이 제인에게 상황을 확인했을 때 제이드가 찾아왔다. 그는 어제의 사건 후로 케이트가 어떨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케이트가 왜 여기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어, 그게. 제이드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안은 케이트가 찾은 가족이 호건 가라는 걸 모른다. “이 사람들이 굳이 그녀를 데려갈 이유가 있나? 재산을 보호할 목적이라면 차라리 멀리 보내려 하는 게 일반적이잖아.” 이안의 이어진 질문에 이번에는 제이드의 입이 딱 벌어졌다. “어, 아, 알고 있었어?” 바보를 보는 시선으로 제이드를 내려다본 이안이 말했다. “친척을 찾았다고 했고, 여기로 왔을 것 같다고 했잖나.” 대충 도출해낼 수 있는 결과긴 하다. 제이드는 어깨를 늘어트렸고 이안은 멍청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 녀석이나 그 녀석이나 이해할 수 없다. 친척을 찾은 걸 감춘단 말인가. 설마 하녀 일을 계속 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 이안의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 작은 계집애는 하녀 일을 좋아하는 건가. 다른 일도 아니고 하녀 일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한편 제이드는 호건 가에서 케이트를 데려간 이유를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집안의 재산을 나눠 받을 사람이 나타나면 쫓아내려 하지 집 안에 들이려 하지 않는 게 보통 아닌가? 집안에 들이는 이유가 뭐지? 그러다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 설마.” 이안이 왜 그러냐는 듯 제이드를 돌아봤다. 제이드는 그대로 멈춰선 탓에 이안보다 몇 발자국 뒤에 있었다. 그가 이안을 향해 다시 입을 벌렸을 때 뭔가가 그의 모자 위로 툭 떨어졌다가 튕겨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으아! 뭐야?” “새똥은 아니다.” “뭐?” 새똥은 아니라는 말에 제이드가 기겁해서 바닥을 살폈다. 자기 눈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안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그런 그에게 동그랗게 뭉친 녹색 덩어리를 발견한 건 잠시 후의 일이었다. “이거 뭐야?” 제이드는 그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처음엔 녹색이라 새 똥인 줄 알았는데 새 똥이 아니었다. 애들이 던졌나? 그냥 무시하려는 찰나 이안이 난입했다. 그는 힐끔 녹색 뭉치를 보더니 재빨리 집어 들었다. 어디선가 본 천이다. 녹색 천과 가장자리에 달린 하얀 레이스. 케이트의 눈동자와 닮은 색이라고 생각했다. 이안은 꽁꽁 싸맨 리본을 풀었다. 안에 나온 처음 보는 귀걸이에 잠깐 당황했지만 그는 곧 리본에 휘갈긴 글을 눈치챘다. <오늘 자정> “뭐야, 뭐야?” 제이드가 끼어들었다. 그는 리본에 갈겨쓴 글을 보더니 눈을 깜빡였다. 오늘 자정? 무슨 소린지는 알겠다. 하지만, “이거 스미스양 글씨야?” “몰라.” 케이트가 실라의 대필을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땐 종이에 쓴 글이었고 이건 리본에 쓴 글이다. 비교가 안 된다. 이쪽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니까. 게다가 안에 든 귀걸이는 처음 보는 것이다. 과연 이게 케이트가 한 일일까? “어떻게 생각해?” 제이드의 질문에 이안은 리본을 감아 품에 넣으며 대답했다. “자정에 다시 온다.” “이걸 믿는단 말이야?” “그래.” 이안이 생각하기에 굳이 호건 가에서 이런 귀찮은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케이트를 가뒀거나 안 가뒀거나 일부러 케이트의 리본에다가 이런 글을 써서 보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그는 이게 케이트의 짓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제이드는 한번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한 시간 전에 데리러 갈게.” 너는 왜? 라는 이안의 눈빛에 제이드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말했다. “무슨 짓을 하든지,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더 나을 거 아냐. 게다가, 너 마차도 없잖아?” 사실이다. 큐바인 하우스는 마차나 말을 둘 곳이 없으니 큐바인 거리의 공용마구간을 이용하고 있다. 이안은 흠 하고 고개를 돌렸다. 호건 가의 저택은 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가로등 불빛을 받아 더욱 거대하게 보였다. 여길 자정에 침입한다는 말이다. 케이트가 그 안에 있건 없건 상관없이 이 일은 이안과 제이드에게 꽤 위험한 일이 될 것이다. 케이트가 있어 무사히 구해낸다면 호건 가로부터의 비난은 피할 수 있을 테지만 그건 그 안에 포진한 용병들을 따돌린 다음의 일이다. 제이드는 집에 가서 무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검도 좀 더 좋은 걸로 챙기고, 거기까지 생각한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검술은 수사관이 되기엔 간신히 턱걸이 수준이다. 사실 수사관 시험에 합격한 것부터가 그는 거의 기적이었다. 2급 수사관이 된 건 오기였다. 하아. 제이드는 이안을 힐끔 보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주말보내셨나요? 전 월요일 아침부터 일이 터져서 스트레스 때문에 편두통이 왔어요. 아아, 아파아... 너무 다행이게도 3부 본편은 다 써서 업뎃에 큰 문제는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딱 하나 문제가 외전이 최소 4편쯤 될것 같아요. 아놔... 여러분, 손가락 잘리고 피 좀 튀어도 되죠? 00111 8. 녹색 리본 =========================================================================                            집사의 말대로 자정이 되자 호건 가의 저택을 지키던 용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십 분 전부터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트는 창문 너머로 정문 쪽으로 몇몇 용병이 걸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십 분 후면 자신의 업무시간이 지나는 용병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약간 긴장하며 물었다. 케이트는 졸린 표정으로 말했다. “자기 전에 우유를 마셔야 잠이 오거든요. 따듯하게 데워서 갖다 주세요.” 용병의 시선이 케이트의 옷을 살폈다. 그녀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하녀가 가져다준 잠옷을 입고 그 위에 숄을 걸친 상태였다. 레이스가 달린 화려한 잠옷은 그녀가 살면서 본 것 중 가장 비싸 보이는 잠옷이었다. 이런 걸 입다니. 하는 감탄도 잠시. 케이트는 의외로 레이스라는 게 상당히 거추장스럽다는 걸 깨달았다. “하인을 부르죠.” 용병은 약간 짜증 난 목소리로 말하고 문을 닫았다. 그도 당연한 것이 모든 저택에는 방마다 사용인을 부르는 줄이 달려있다. 그걸 당겨서 사용인을 부른 뒤 우유를 가져다달라고 시키면 되는 걸 지금까지 케이트는 계속 이 용병에게 일을 시켰던 것이다. 씻고 싶으니 물을 가져오라는 말도, 심심하니 책을 가져다달라는 말도, 심지어 베개가 마음에 안 드니 바꿔달라고 까지 했다. 케이트는 문에 기대 백까지 센 뒤 다시 문을 열었다. 용병이 짜증 난다는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물었다. “또 무슨 일입니까?” 또 라는 말이 유독 크게 들렸지만 케이트는 모른 척하고 말했다. “아, 잊어버렸는데 우유랑 같이 쿠키도 먹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용병이 투덜대는 소리가 닫힌 문 너머로도 들려왔다. 가지가지 하네. 진짜 까다로운 아가씨구먼. 약간 죄책감이 들었지만 케이트는 다시 문에 기댄 채 문밖으로 귀 기울였다. 하인이 왔다가 쿠키도 가져오라는 말에 투덜거리며 떠나는 게 들렸다. 그녀는 다시 오십까지 센 뒤 문을 열었다. “뭡니까?” 무례한 태도였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케이트는 최대한 건방진 어조로 말했다. “아, 그리고 물 한잔도 같이요. 우유랑 쿠키를 먹은 다음 입가심을 해야 하니까요. 레몬도 띄워달라고 전해주세요.” 용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는 화를 참으려는 듯 어금니를 꽉 물고 물었다. “한 번에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었습니까?” “당신이 있는데 무슨 상관이예요?” 잠시 케이트는 남자가 그녀를 후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잘 참아냈다. 그 말은 그녀가 듣기에도 그만큼 건방진 말이었다. 용병이 참는 것을 본 케이트는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자야 하니까 빨리 가져오세요.” 호건 가의 아가씨만 아니라면 여자라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한 대 때렸을 것이다. 용병은 그만큼 화나 있었다. 그는 살면서 이렇게 건방지고 짜증 나며 재수 없는 여자는 만난 적이 없다. 곧 있으면 그를 대신할 다음 순번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만 참자.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시 문이 열렸다. 케이트는 가능한 화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늦어요? 얼른 갖다 달라고요!”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한 번도 남을 부려본 적 없는 그녀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못되게 군적도 없었다. 그래서 손이 덜덜덜 떨렸다. 그녀는 그게 남자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문 뒤로 감췄다. “하인이 와야 시킬 것 아닙니까?” 용병이 짜증 난다는 투로 말했다. 케이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대꾸했다. “하인이 올 때까지 기다려서 또 시킨단 말이예요? 당신 진짜 게으른 사람이군요?” 뭐? 이 조그마한 계집애가, 뭐라고? 남자의 눈에 불꽃이 튀는 것이 보였지만 케이트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건방지게 말했다. “당신 여기서 일하는 사람 아니예요? 얼른 갔다 와요. 날 얼마나 기다리게 할 생각이예요?” 용병은 잠시 케이트를 한 대 때릴까 하고 생각했다. 거의 손이 움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곧 눈앞의 작은 계집이 호건가의 아가씨라는 것을 간신히 떠올렸다. 저 재수 없는 에스메랄다도 이 정도로 까다롭고 짜증 나지는 않았다. 남자는 이를 갈더니 케이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금방 다녀오죠, 아가씨.” 마지막 아가씨라는 단어가 필요 이상으로 힘주어 발음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남자는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가 사라지는 것을 보자마자 케이트의 다리가 휘청했다. 너무 긴장한 탓에 온몸에 힘이 풀려버렸다. 시간이 없다. 도망치려면 지금 도망쳐야 해. 케이트는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목걸이만 품에 지닌 채 방에서 빠져나왔다. 맨발인 탓에 발바닥이 차가웠지만 호건 가의 저택은 바닥을 대리석으로 한 덕에 나무 조각에 찔릴 걱정은 없었다. 잠옷 차림에 숄을 걸친 채로 그녀의 몸이 복도를 따라 움직였다. 늦은 시간인 탓에 복도를 돌아다니는 사용인은 보이지 않았다. 이 층으로 내려갔을 때 이대로 일 층까지 내려가서 정문을 통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솟은 그녀의 눈에 현관 앞을 지키는 용병의 모습이 비쳤다. 문을 통해서는 무리다. 케이트는 다시 몸을 돌렸다. 삼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누군가가 올라가는 게 보였다.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 곧 그녀가 방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케이트는 이 층 복도를 헤매며 빠져나갈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어느 곳을 살펴도 일층에 있는 문은 모두 용병이 지키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그렇게 생각 했을 때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켰다. 케이트의 심장이 다시 달음 박치기 시작했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삼 층으로 우르르 달려가는 게 보였다. 혹여 일 층이 비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다시 내려다봤지만 문을 지키는 인원은 아까보다 두 배로 늘어 있었다. “아, 어떻게 해.” 케이트는 절망감에 탄식처럼 내뱉었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일 층의 모든 문은 용병이 지키고 있다. 이제 방법은 창문을 통해 뛰어내리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도 과연 가능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층에서 뛰어내린다 해도 결국 저택의 정원에 떨어질 뿐이다. 정원에서 정문까지는 꽤 멀다. 그녀가 달려서 용병에게 잡히지 않고 도망친다는 게 가능할까? 어쩌면 이안과 제이드가 그녀가 날려 보낸 리본을 봤을지도 모른다. 이미 자정이 되었으니 그들이 저택 근처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간절한 바람이 케이트의 마음에 가득 찼다. 제발 그러기를! 그러면 어떻게 해서든 정문까지만 도망치면 된다. 정문에서 이안과 제이드를 만난다 해도 용병들을 따돌리고 그들과 도망칠 수 있을지도 문제였지만 지금 케이트에게 그 점까지는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떠오르지 않는 게 다행인지도 모른다. 정문에서 이안과 제이드를 만나도 용병을 따돌려야 한다는 문제점을 깨달았다면 그녀는 호건 저택에서 도망치는 것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케이트는 남자들의 발걸음소리가 가까워지자 눈앞에 보이는 모든 문을 다 열어보기 시작했다. 문이 잠겨있거나 살짝 열었을 때 안에 사람이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중간에 사람이 많은 방이 하나 있어서 케이트는 깜짝 놀라 문을 닫았다. 다른 방의 문을 열었을 때 문득 그녀는 그 방이 비스마르크 호건의 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아쉬운 마음이 들어 케이트의 몸이 멈췄다. 그게 비스마르크 호건의 방이라면 그녀는 할아버지를 만날 기회였다는 말이다. 돌아갈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복도에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리자 케이트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창문을 찾았다. 제발 여기는 창살이 없기를! 어두운 탓에 그 방이 어떤 용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단단한 것에 부딪힌 다음에야 그것이 책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창문을 찾아 커튼을 젖히자 밖에서 빛이 흘러들어와 안을 비췄다. 창문에 창살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케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안을 둘러봤다. 책장으로 둘러싸인 벽과 책상. 그리고 의자. 서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서재라는 건 보통 일 층에 있기 마련이다. 왜 서재가 이 층에 있지? 지식이나 배움을 중시하지 않는 에스메랄다와 제프리는 비스마르크 호건이 쓰러지자 바로 서재를 이 층으로 올려버리고 그 방을 다과 실로 만들었다. 손님에게 호건 가의 부를 자랑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케이트는 그 사실을 모르니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어쨌거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시간이 있다면 괜찮을 책을 찾을 수 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케이트가 창문을 열려는 순간 문이 쾅하고 열렸다. 얼굴을 들이민 용병은 커튼이 젖혀진 덕에 들어온 빛으로 케이트를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여기다!” 그가 소리치자 케이트의 심장이 한 번 크게 요도였다. 헉하고 숨을 들이킨 케이트는 창문을 열려고 애썼다. 걸쇠가 걸려있어 열기가 힘들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아가씨.” 남자는 그녀의 방을 지키던 용병이 아니었다. 그는 케이트에게 다정하게 말하며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케이트는 필사적으로 창문을 열려고 할 뿐이었다. 빌어먹을 걸쇠! 왜 이렇게 빡빡한 거야? “아가씨, 쓸데없는 데 서로 힘 낭비하지 말죠.” 용병은 가볍게 빈정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케이트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태도였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케이트는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걸쇠를 잡아당겼다. 이윽고 열린 문틈으로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이 아가씨가 정말. 누군가 짜증 내는 소리를 필두로 남자들이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야, 얼마나 순진하시냐. 귀엽구먼. 거의 모욕에 가까운 말에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가씨, 거기서 뛰어내리면 그 예쁜 얼굴에 흉 나요.” 누군가 빈정거리자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다시 터졌다. 남자 한 명이 다가오려 했기 때문에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가, 가까이 오지 마세요!”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아무거나 집어 들어 남자들을 향해 던졌다. 어이쿠! 하고 피하기는 했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문 앞에 포진하고 있어 피할 수가 없었다. 결국, 맨 앞에 있던 남자의 가슴을 맞은 책이 뚝 떨어지면서 그의 발등을 콱 찧었다. “으악! 이, 이 계집애가!” “야, 참아, 참아.” 뒤에서 다른 남자들이 말렸지만 발등을 붙잡고 끙끙댄 남자는 순간 화가 치솟았다. 주변에서 그걸 본 동료들이 낄낄거리고 비웃은 탓에 부끄러움도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어 케이트를 낚아채려 했을 때 가까스로 그녀는 걸쇠를 풀고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휙 하고 안으로 불어 닥치는 바람에 어깨를 감싼 숄이 날아가 버렸다. “우왓! 이게 뭐야?” “이거 안 치워?” 케이트의 숄이 남자들의 얼굴을 덮은 덕에 약간의 틈이 생겼다. 케이트는 재빨리 창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어이, 아가씨. 멍청한 짓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손을 뻗어 케이트를 잡으려 했다. 케이트는 창백한 얼굴로 창문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두운 탓에 아래에 있는 게 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저게 부디, 가시덤불 같은 게 아니길. 여기서 떨어지면 어디 한군데는 부러질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용병들 뒤로 또 다른 목소리가 났다. 제프리는 난데없는 야밤의 소동에 짜증을 내며 내려온 터였다. 눈앞에 잔뜩 몰린 용병들 탓에 그는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가 손을 저어 그들을 비키게 하자 간신히 창틀 위에 올라간 케이트의 모습이 보였다. “이건 또 뭐야?” 제프리의 등장에 케이트는 손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창틀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싫다. 진짜 싫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프리는 케이트의 모습을 보고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이런, 이런. 내 신부님은 너무 위험한 행동을 하는군.” 누가 네 신부야! 케이트가 그렇게 소리치려 했을 때 아래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케이트!” ============================ 작품 후기 ============================ 본격 케이트 싸가지 없는 아가씨 코스프레. 다음 편이면 끝납니다. 수요일에 끝나네요? 헐... 목, 금은 쉬고 그 다음 주에 외전 나눠서 올리고 몇 주 쉬다 오겠습니다. 그 전에, 보통 한 부가 끝나면 등장인물 감정선이나 상태같은걸 재정비 하기 위해서 인터뷰 처럼 쓰는 게 있었거든요. 이번에도 그럴 예정인데 그 인터뷰 질문을 여러분께 받으면 어떨까 싶어요. 대답이 너무 스포가 되는 부분이 아니라면 각 캐릭터 들이 답해줍니다. 이건 1부에서 했는데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ㅎㅎㅎ 궁금한 점같은거 달아주세요^^ 00112 8. 녹색 리본 =========================================================================                            제이드는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잃은 채 이안 옆에 서 있었다. 정문을 지키던 용병은 여섯 명. 그중 다섯 명을 이안 혼자 해치웠다. 아니, 이게 말이 돼? 그는 피하나 묻지 않은 자신의 검과 대조적인 이안의 검을 보고 혀를 찼다. 그의 검술 실력이 수사관중에서 그리 좋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안과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이야. 쓰러진 용병들의 신음이 두 사람의 실력 차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이 정원을 가로질러 달려갈 때 케이트의 몸이 열린 이 층 창문에 보였다. 저기구나! 적어도 그녀를 찾기 위해 저 큰 저택을 뒤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제이드를 휘감았다. “케이트!” 이안이 소리쳤다. 케이트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손을 펼치며 말했다. “이리 와.” 제이드의 눈이 커졌다. 야, 이 미친놈아. 저긴 이 층이라고! 그가 말하기도 전에 케이트의 몸이 기울어졌다. 아니, 저 아가씨가! 제이드의 머릿속에 몇 가지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케이트는 이안이 손을 벌리자 반사적으로 몸을 던졌다. 여기가 이 층이라는 것도, 그가 한참 아래에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안이 왔다. 잠옷의 레이스가 걸쇠에 걸리면서 부욱 하고 찢어졌다. 몸을 아래로 던진 탓에 잠옷이 위로 휙 들렸다. 아차.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치마 자락을 두 손으로 내리눌렀다. 밑에서는 속이 다 보였을 것이다. 아, 세상에! 그녀의 머릿속이 여러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때 이안의 팔에 케이트의 몸이 닿았다. 그는 케이트를 끌어안은 채 바닥을 굴렀다.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지만 케이트는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몸 위에 그가 올라갔다가 마지막에는 그녀가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잠옷이 찢어진 탓에 등이 서늘했다. 그 위로 이안의 뜨겁고 커다란 손바닥이 느껴졌다. 맙소사. 케이트는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레이스 잠옷 따윈 질색이야.” 이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그녀를 올려다봤다. 아,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케이트는 탄식처럼 신음을 내뱉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 그가 눈치채지 못하고 안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안에 갇혀 끔찍한 제프리와 결혼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 난 케이트는 그제야 부들부들 떨며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이안은 그녀의 등을 쓰다듬다가 잠옷이 찢어져 등이 드러난 것을 깨닫더니 자신의 코트를 벗어 그녀의 몸을 감쌌다. “가지.” 이안이 그렇게 말하자 제이드는 마차를 가져오려 몸을 돌렸다. 그때 이 층에서 제프리가 얼굴을 내밀더니 소리쳤다. “이 새끼들! 감히 누굴 납치하려는 거야!” 납치는 네가 한 짓이 납치지. 제이드와 케이트의 머릿속에 반사적으로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입을 연 건 이안이었다. 그는 케이트를 끌어안은 채 제프리를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내 것을 돌려받으러 온 것뿐이다.” 뭐, 이 새끼야? 제프리가 뭐라고 욕을 하며 난리를 피웠지만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 품 안에서 케이트가 고개를 들더니 힘없이 말했다. “누가 당신 거예요?” 아, 진짜? 제이드는 고개를 저으며 마차를 가지러 달려갔다. 진짜 그 상황에서 그 말을 하는 거야?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지금까지 이안만 밀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런 답답한 커플 같으니. 케이트가 눈을 뜬 건 다음 날 점심때가 지나서였다. 온몸이 다 뻐근했다. 지난밤에 복도를 달리고, 이 층에서 뛰어내리고 난리도 아니었으니 당연하다. 그녀는 몸을 감싼 두툼한 코트를 먼저 깨달았다. 나무냄새와 꽃냄새가 섞인 냄새가 났다. 그 뒤를 따르는 위스키 냄새에 케이트는 그게 이안이 피우는 담배냄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렴풋하게 어젯밤 이안이 그녀에게 코트를 벗어 둘러줬던 것이 기억난다. 안을 보자 찢어진 레이스 잠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잠옷이 말려 올라간 탓에 속옷이 다 드러나 있었으니 코트를 감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행이다.” 어젯밤의 모험이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케이트는 침대에 웅크린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화려한 감옥에서 빠져나왔다. 다시 큐바인 하우스로, 그녀의 방으로 돌아와…, 거기서 케이트는 여기가 자신의 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 어? 여기 어디지? 방은 그녀의 방보다 훨씬 컸다. 갈색과 검은색의 벽지와 커다란 침대. 낯익은 방의 모습에 케이트의 마음에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물들기 시작했다. 설마! 케이트는 벌떡 일어나서 방 안을 둘러봤다. 이건 그녀의 방이 아니었다. 이안의 방이다. 나, 이안하고 잔 거야? 케이트의 얼굴이 당황으로 얼어붙었다. 진짜? 아니, 잠깐. 옷은 그대로 있다. 그녀가 잘 모르기는 하지만 옷을 전부 입고 있다는 건 아무 일 없었다는 거 아닐까?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끌어안고 끙끙대고 있을 때 문이 달칵하고 열렸다. 그대로 케이트의 몸이 얼어붙었다. “헉.” 이안이었다.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방 안에 들어왔다가 케이트가 일어나 있는 것을 보자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나, 당신하고 무슨 일 있었나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입안이 말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케이트는 멍하니 이안을 보며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그녀가 멍하니 있는 걸 보고 잠시 멈췄다가 그대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 어어어어. 이안이 다가올수록 케이트의 심장이 달음 박치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을 때 케이트는 눈을 꼭 감으며 외쳤다. “저, 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이안의 행동이 멈췄다. 그는 그녀를 감싼 자신의 코트로 손을 내민 상태로 멈춰있었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뭐?” “그, 그러니까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케이트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이런 말을 해야 하다니, 비참하고 창피해서 죽고 싶다. 이안은 흠. 하더니 그대로 그녀를 감싼 코트 주머니에서 자신의 담배를 꺼내며 말했다. “호건 가에서 나온 게 기억이 안 난다는 건가?” “어?”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그것뿐? 그녀가 얼어붙은 사이 이안은 담뱃갑을 열더니 담배를 한 개비 꺼냈다. 오늘 치 한 개비를 피울 시간이다. 그때 누군가가 이안의 방문을 똑똑 두드리더니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이안, 스미스양 일어났, 어, 일어났군요.” 제이드였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들어오더니 잘 잤느냐고 물었다. “어, 네. 잘 잤어요. 그런데 이게….” 이안과 달리 제이드는 케이트가 궁금해하는 게 뭔지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두 손을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아, 방 말이군요. 혹시라도 호건 가의 용병들이 다시 스미스양을 노릴 걸 우려해서 어젯밤에 이안의 방에 눕혔습니다. 스미스양의 방보다는 이안의 방이 보호하기 쉬워서요.” 케이트의 방은 안쪽에 있는 온실에 딸린 곁방이다. 온실을 침입하면 들어올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에 비해 이안의 방은 서재였던 방이기 때문에 출입할 만한 곳이 별로 없다. 케이트는 그 사실을 떠올리며 이해하려 했지만 한 가지 걱정되는 점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저기, 그럼 두 분은 어디서….” 케이트가 말을 흐리자 제이드는 알아들었다는 듯 말했다. “아, 저와 이안은 응접실과 문 앞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같이 자지 않았으니 걱정마세요.” 그렇다면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케이트는 곧 자신이 상당한 실례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절 도와주셨는데 이런 의심이나 하고.” “아, 아닙니다. 당연한 걱정이죠.” 두 사람의 훈훈한 광경을 지켜보는 이안의 표정은 불쾌해 보였다. 그는 제이드와 케이트 사이로 자리를 이동해 제이드의 시야에서 케이트를 가린 채 입을 열었다. “너는 무슨 일이야?” “뭐?” 느닷없는 말에 제이드는 무슨 소리인가 하고 눈을 깜빡이다가 이 방에 들어온 이유를 깨달았다. “아, 맞다. 스미스양 손님이 왔어요. 막스 로건이라고. 기억나죠? 변호사요.” 케이트의 머릿속에 에스메랄다와 함께 목걸이를 확인하던 변호사가 떠올랐다. 그 사람이 찾아왔다고? 잠시 망설여졌지만 케이트는 그를 만나기로 결심했다. 혼자 있을 때 만나는 것보다 제이드와 이안이 있을 때 만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케이트가 옷을 알아 입고 응접실로 가자 막스는 반가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번엔 제대로 인사를 못 했죠? 막스 로건. 호건 가의 변호사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지난번처럼 제이드를 향한 게 아닌, 케이트를 향한 정중한 인사였다. 어젯밤에 호건 가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는 모르는 눈치였다. 하긴 당연하지. 제이드는 쓰게 웃었다. 엘리자베스가 가짜였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거기에 엘리자베스의 진짜 딸이 나타났고 그녀를 감금했다가 탈출하는 소동이 벌어졌다는 건 호건 가로서 그리 좋지 않은 소문이다. 호건 가에서 일하는 용병도 마찬가지다. 고작 두 명의 남자에게 호건 가의 경계가 뚫렸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어, 케이트 스미스예요. 그런데 무슨 일로…?” 막스는 케이트 양옆에 선 제이드와 이안을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먼저 움직인 건 제이드였다. 그는 몸을 돌렸지만 이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막스가 이안을 쳐다보자 케이트가 입을 열었다. “아니요. 이 두 분도 같이 듣고 싶어요.” 제이드는 목걸이를 확인하기 위해 케이트와 함께 온 남자다. 어쩌면 두 남자가 그녀의 보호자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한 막스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그는 케이트가 글을 읽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제이드나 이안에게 서류를 넘기려 했다. 하지만 케이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어머니의 재산인가요?” 아, 글을 읽을 줄 아는군. 그렇다면 일이 더 쉬워질 것이다. 그는 케이트를 약간 경탄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뮈엘라에서 글을 읽는 사람은, 특히 글을 읽을 줄 아는 여자는 많지 않다. 엘리자베스와 니콜라스는 자신들의 딸을 훌륭히 교육한 모양이었다. “엘리자베스 호건양은 처녀 시절 소유한 재산이 좀 있었습니다. 이건 그녀의 아버지가 물려줄 유산과는 별도의 재산이죠.” 알겠느냐는 듯 막스가 웃었지만, 케이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그녀의 표정을 읽은 막스는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그 서류를 보면 알겠지만 호건 양이 집을 떠나기 전에 약간 가져가서 줄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자가 붙어서 그녀가 가져가기 전보다 더 늘어났습니다. 엘리자베스 호건 양이 사망했으니 이제 이 돈은 스미스 양의 것이 됩니다.” 이게?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류의 금액을 확인했다. 대체 0이 몇 개지? 어마어마한 돈이다. 이 정도 돈이면 큐바인 거리에 집 정도는 몇 채나 살 수 있다. “아주 많지는 않지만 호건 가의 유산을 받기 전까지 충분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정도가 아니다. 케이트는 막스의 얼굴과 서류를 번갈아가며 살폈다. 이 정도 돈이면 부유하진 않아도 평생 어떻게든 먹고살 수 있다. 기술이 있다면 자기 가게를 차릴 수도 있다. 결혼도 하기 전의 여자가 이 정도의 돈을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니, 호건 가는 대체 얼마나 부자인 거지? 케이트는 그제야 자신이 호건 가의 사람이라는 게 아주 조금 실감되기 시작했다. 제이드가 그녀의 손안에 든 서류를 보더니 휘익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상당히 큰 포목점의 아들인 제이드가 보기에도 상당한 돈이다. “엘리자베스 호건의 딸이라는 서류를 작성하는 대로 이 돈은 스미스 양에게 넘어갈 겁니다.” 막스는 서류를 작성할 때 다시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어도 대필자를 대동할 필요는 없겠군요.” 그는 웃으며 케이트의 읽는 능력을 칭찬했지만 그녀는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이 돈이 있으니 그녀는 굳이 하녀로 일할 필요가 없다. 아니, 돈이 있어도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케이트는 굳이 하녀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작품 후기 ============================ 와, 끝났습니다. 진짜 회사 일이 어마어마하게 바쁜데다가 스트레스에 요즘 무슨 공기에 편두통때문에 죽을거 같았는데 그래도 무사히 완결 되었다는 게 놀랍네요. 4부는 좀 만 쉬다 오겠습니다. 외전이 4편정도 예정되어 있어서 그거 올리고, 비축 좀 쌓고 3월 중후반쯤에 오겠습니다. 문답은... 이안에 대한 질문만 반이 넘네요. 헐... 그래서 후기에 안쓰고 다음 화로 올리겠습니다. 00113 [후기] 캐릭터 문답 =========================================================================                            Q 이안 너님은 언제쯤 케이트를 덮칠 예정임?(팅탱님) 이안 : 무슨 의민지 모르겠다. 케이트를 강간하라는 건가? 키아르네 : 아니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남의 소설을 위험 범죄물로 만들지 말라고! 이안 : 덮치라고 하잖나.아니면 공격하라는 건가? 키아르네 : 아니야, 아니라고! 그러니까, 그, 케이트와 언제 사랑을 나눌거냐는...그런... 이안 :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건 나한테 물어볼 게 아닌거 같은데? 우리는 결혼할 사이도 아니고 교제하는 사이도 아닌데 케이트가 원하지 않는걸 내가 억지로 범할수는 없는거 아닌가. 키아르네 : 와, 너 의외의 곳에서 정상적이구나? 이안 : 무슨 의미지? Q 이안!이안! 너! 무슨 촉이있길래 마녀의 마차에 부딪칠뻔한 케이트 그녀를끌어안고,뒤도안돌아보고 마차안에 그녀를 쑤셔넣다시피하고 정보길드로간거니? 그리고 정보길드를 어찌그리잘알아? 연줄있는거지.. 요?(손님1님) 이안 : 촉이 있을리가 있나. 그냥 그 여자가 싫을 뿐이다. 게다가, 키아르네 : 그마안! 스포입니다. 정보길드와 연줄이 있습니까? 이안 : 없다. 주변에서 이용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야. Q 케이트가 사라졌을때 이안은?혹시 막 보고싶다거나,금단증세라거나 (민트초코우유님) 이안 : 고작 반나절 떨어져 있었다. 대체 무슨 바보같은 소리를 하는거지? Q 이안은 언제야 호구짓 그만하고 자기감정 깨닫고 케이트한테 들이댈까요? 이제는 결혼할 생각이 생겼을 까요? (리쥬아님) 이안 : 호구짓이 뭐지? 키아르네 : 아, 이건 무시해도 돼. 이안 :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내 감정을 깨달으라는건 무슨 소린가? 키아르네 : 어, 그러니까 케이트에 대한 지금 너의 감정이 어떠냐는 거지. 이안 : ... 키아르네 : 이, 이안? 이안 : 잘 모르겠다. 키아르네 : 오오, 솔직? 이안 : 그 녀석이 하녀여서 다행인것 같기도 하고, 하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키아르네 : 어째서? 이안 : 글쎄. 검 훈련을 할때 베기를 천번 쯤 하는거 알고있나? 키아르네 :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이안 : 한번 해봐라. 검술 뿐 아니라 정신력에도 도움이 된다. 천 번쯤 하면서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지만 내 한계를 확인하기 위해 계속하는 상태가 될때가 있다. 케이트를 보고 있노라면 그 상태가 된것 같은 기분이 들어. 키아르네 : 어, 그러니까 네 말은 케이트를 언제든지 가질 수 있지만 갖지 않는 상태에서 스스로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다는, 어? 어디가는 거야? Q 이안은 앞으로 케이트와 어떻게 지내려는지, 비스마르크씨는 손녀(?)인 케이트를 영영 볼수 없는건지 궁금합니다 (신이지기님) 이안 : 뭘 어떻게 지내겠나. 그냥 이대로 지내겠지. 키아르네 : 아, 하지만 케이트가 호건가의 상속녀가 되면서 더이상 하녀가 아니게 됐잖아. 지금까지처럼 못지낼걸? 이안 : 내가 변한게 아니라 케이트가 변한거 아닌가. 그럼 그 질문은 내가 아니라 케이트에게 해야지. Q 현재 이안은 케이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ID신룡님) 키아르네 : 이건 이안이 설명하기엔 말주변(뿐 아니라 모든게)에 문제가 있는 녀석이라 대신합니다. 이안은 현재 케이트를 다이어트 하는 사람이 케이크 보듯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무슨 소리냐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지만, 난 다이어트를 하잖아? 저걸 먹으면 안돼! 아, 하지만 진짜 먹고싶다~ 맛있겠다~ 뭐, 이런 느낌입니다. Q 이안은 뮈.수 내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이라 생각하는지 (Hanaryn님) 이안 : 이 같잖은 소설안에서 말인가? 키아르네 : 가, 같잖다니이이... 이안 : 내가 남자주인공이 잖나. 더이상 무슨 역할이 있다는 거지? Q 케이트와 이안은 애를 몇이나? 성별과 이유까지 (Hanaryn님) 자녀계획은 어떻게되나요? (레몬맛토끼님) 키아르네 : 아, 이거 이안에게 물어보면 안될거 같은데... 이안 : 난 아이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키아르네 : 크흑...그럴줄 알았어. 케이트, 부탁해. 케이트 : 네에에에? 이안하고 아이를요??? 제가요??? 왜요???? 키아르네 : 아니, 뭐, 너네 일단은 좀 썸 탈랑말랑하잖아. 케이트 :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은 썸타는 남자와 아이를 몇명이나 낳을지를 생각하고 타세요? 키아르네 : 아, 응. 미안. Q 이안은 무슨 생각으로 케이트에게 입맞추었나요? ㅎㅎㅎㅎㅎ (희븜님) 이안 : 하고싶었으니까. 키아르네 : 와, 이씨. 왜 내 남자주인공들은 이런데서 당당하냐... 일단 1부에서는 데이지를 떨궈내기 위해서 였고 2, 3부에서는 말 그대로 걍 하고싶어서. 였습니다. 하...미아내, 케이트...이런 남주라 미아내... Q 자신이 생각할 때 자신의배우자가 갖춰야할 세가지 (비무님) 이안 : 예전에는 귀족 여자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키아르네 : 지금은? 이안 : 글쎄. 지금은 굳이 귀족이 아니어도 될것 같다. 키아르네 : 그것 뿐? 어, 어디가! Q. 이안) 하인은 안건드린다는건 다 개뻥이고 사실은 고학력자라서 그런거 다 앎. 이의 있음? (HORSEILC님) 이안 : 고학력자라는 게 뭐지? 키아르네 : 어, 그러니까 많이 배운 사람을 말하는 거야. (뮈엘라는 고학력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ㅎㅎㅎ) 이안 : 잘 이해가 안되는데. 하인을 안건드린다는 게 내가 고학력자라서 라는 건가? 키아르네 : 으, 음...음...그런것 같아. Q 자, 케이트를 좋아한다는 자각까진 됬습니다! 바로 없는걸로 하긴했지만 본인은 알고있잖아요? 그 좋아한다는 마음의 정도!는? 예를들면 이사람을 위해 모든것을 포기하겠어 or 그냥 한번 사귀어보는거지 등등등 (하티이리안님) 이안 : 내가 하녀를 두고 그냥 한 번 사귀어 보겠다는 마음으로 건드릴정도로 나쁜 놈으로 보이나? 키아르네 : 아, 그럼 케이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 이안 : 넌 너무 극단적이야. 키아르네 : ...와, 되게 모욕당한 느낌이다. Q 케이트의 가족을 알게되셨는데요, 호건가라니 조금 꿀리게되셨어요ㄷㄷ 케이트가 호건가 아가씨라는 것을 알게됬을때의 감상이랑요, 만약 비스마르크 할부지가 너 사생아라 우리 케이트는 못준다!! 이러면 어떻게 하실래요?ㅋㅋ (하티이리안님) 이안 : 아직 잘 모르겠다. 변한건 내가 아니라 케이트 아닌가. 이 대답 상당히 자주 하는거 같은데. 키아르네 : 알았어, 알았어. 비스마르크가 케이트를 못준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 이안 : 무슨 소리 하는 건가. 할아버지가 주고 말고 할정도로 케이트가 물건인가? 키아르네 : 논점을 벗어난거 같은데... Q 너 왜르케 케이트 지분대요? 말도없이 의견존중없이 이러면 성희롱인거 아세요? 공무원이 그래도 됨? 정말 짐승이라 케이트 앞에 있으면 개념이 사라지면서 손이 먼저 나가는건아요, 아님 몸정(?) 들게하려는 고도의 술수로 일부러 그러는거?!ㄷㄷ (하티이리안님) 이안 : 이건 또 무슨 바보같은 소리지? 키아르네 : 어, 이건 그러니까...전자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정도로 고도의 술수를 쓰는건 아니고요 ㅎㅎㅎㅎ Q 이..이안 어... 키,키,키스 이상 진도 나가고 싶었던 적 있어요? 있으면 언제였나요? 마,막 케이트 끌어안고 키스 했을 때 무슨 생각했어요? (샤테이님) 이안 : (눈썹을 들어올리며) 왜이렇게 바보같은 질문만 하는 거지? 키아르네 : 아, 대신해서 설명하자면 늘 그렇답니다. 하하하. 이안 :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Q 이안 케이트에게 결정적으로 반하게 된 부분이 뭐죠? (테이푸) 이안 : .... 키아르네 : 이안이 말이 없습니다. Q 케이트에게 질문: 자신이 마녀라면 제일 먼저 해보고 싶은 마녀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나요? (kaiden07님) 케이트 : 어, 전 마녀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요. 뮈엘라에서 마녀는 전혀 좋은 게 아니잖아요. 키아르네 : 마녀라고 가정했을 때 말야. 하고싶은거 없어? 케이트 : 아, 그렇다면... 부모님을 다시 한 번 보고싶어요. 마녀는 그런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키아르네 : 음, 뭐, 가능할 수도 있겠지. 희생이 커서 그렇지. Q결혼식을 하게 된다면 어디에서..어떻게하고싶은지,그리고 상상을 했다면,그 상상속 남편이 누구였는지..케이트에게 물어보고싶어요 (마타하시타님) 케이트 : 음, 결혼식은 역시 가족들의 축하를 받고 싶어요. 부모님은 축하를 받지 못하셔서. 작은 마을에서는 결혼식이 축제에 가까웠거든요. 그런식으로 흥겹고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모든 사람들의 축복을 받고요. 키아르네 : 남편은? 케이트 : 아, 남편은...생각해 본적은 없는데요. 사려깊고 친절한 사람이었으면 좋겟어요. 다정한 사람이요. 제이드 : 와, 딱 나네에에에에에엑! 잠깐! 이안!!! Q 자신이 생각할 때 자신의배우자가 갖춰야할 세가지 (비무님) 케이트 : 음, 사려깊고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건 변치 않았지만요. 좀 현실적이었으면 좋겠어요. 아버지도 뭐라고 해야하나...좀 낭만적이셔서. 역시 세가지만 꼽는 다면 책임감이 있고 다정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가장 중요한건 제가 사랑하고 절 사랑해줄 사람이겠죠. Q 프로포즈를 받는다면 이건 정말 싫다와 부러운 프로포즈(비무님) 케이트 : 음,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프로포즈라면 뭐든 좋지 않을까요? 정말 싫은 프로포즈는 역시...싫어하는 사람이 하는 프로포즈요. 아, 그리고 (이안을 한번 본 뒤) 마음 없는 프로포즈도 싫어요. Q 케이트가 그런 성격이 된 이유가 궁금해요 (베르니아님) 케이트 : 음, 엄마는 좀...뭐라고 해야 하나. 낭만적이시라고 해야 하나. 그랬거든요. 사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지만요. 두분 다 낭만적이고 좀...그러시다 보니까 엄마가 알라나데일에서 일하시게 될때까지 음식도 좀 부족하고...아, 이런 얘긴 좀 그러네요. 키아르네 : 케이트를 대신해서 설명하자면, 케이트의 부모는 둘 다 좀 철이 없고 로망을 쫓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본문에도 한 번 나왔지만 케이트의 엄마는 그날 저녁거리를 사와야 할 돈으로 마음에 드는 구두나 리본을 사오는 사람이었구요. 케이트의 아버지 같은 경우도 크게 다르지가 않아서요. 며칠 굶더라도 마을 축제에서 노는게 더 즐겁지 않니? 라는 주의 였습니다. 이건 엘리자베스가 워낙 부짓집에서 자라다 보니 소비 감각이 부족했던 것도 있고요. 그 밑에서 자란 외동딸이다 보니 케이트가 이런 성격이 되었습니다. Q 진짜 가족이라면 외할아버지인 비스마르크 뿐인데요. 직접 만나면 어떠실것같아요? 그리고 특별히 하고싶은 말이나 같이 하고싶다고 생각한 것이 있나요? (하티이리안님) 케이트 : 음, 할아버지를 만나면 묻고싶어요. 왜 엄마와 연을 끊었는지요. 손녀도 보고싶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화가 나셨는지요. Q 마녀란걸 알았을때 뮈엘라가 아닌 다른 나라로 가야겠다는 생각은 안했나요? 사실 그때는 친인척도 없어서 떠나기 더 쉬웠을거 같은데ㅎ (하티이리안님) 케이트 : 저, 저 마녀로 확실해 진거예요? 키아르네 : 어, 음. 그런거 같아. 케이트 : ...세상에... 키아르네 : 멘붕 온 케이트를 대신해서 이야기 하자면 마녀는 뮈엘라를 떠날 수 없습니다. 본문에 잠깐 언급 되었는데 그래서 다들 숨어 산다고 나와 있습니다. Q 처음부터 하녀가 장래희망이었던 사람은 거의 없잖아요? 케이트도 엄마일 도와주면서 자연스레 하녀가 된거구..어렸을때 하고싶었던 일이나 꿈이 뭔가요? (하티이리안님) 케이트 : 사실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아요. 지금도 제인에게 집안 일을 알려주면서 대리만족 하는 것 같아요. 하하. Q 큐바인하우스에서 일할때 제일 하기싫은일은 무엇인가요! 예를들어 쓰레기비우기 걸레질같은~ 그리고 청소하기 제일 싫은 구역은? (JaRn님) 케이트 : 사실 큼직큼직한 일은 제가 안해서요. 제일 귀찮은건 역시 이안의 부츠를 손질하는 거죠. 진흙같은게 말라붙으면 그거 빼기가 정말 힘들거든요. Q 케이트~:호건가가친척이란걸알았을때. 처음으로든생각은? 물론정신없었겠지만ㅋ~:주관적인?이안의 외모.성격.평가좀해주세요ㅋ~: (수쟈님) 케이트 : 음, 이제 일 안해도 되나? 이런 생각이요. 아, 너무 속물이죠? 부끄럽네요. 이안의 외모와 성격은...음...외모는 잘생긴거 같아요.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거니까요. 기에 눌려서 그렇지 찬찬히 살펴보면 확실히 잘생겼는데...너무 부담스럽죠. 성격은 다들 아시지 않나요? 그냥 이상하잖아요. 진짜 이상해요. Q 제이드, 자네도 꽤 속이넓어? 분명 상사잖아? 이안이 하급직원이었음에도 왜 늘 져주는걸까? 자네의 정체가궁금해.(손님1님) 제이드 : 응? 하하하. 무슨 소리야. 내가 속이 넓은건 사실이지만 별로 져주는 건 아니야. 이안 이녀석과는 아카데미때부터 친구였거든. 원래 한 번 결정하면 여간해선 안바꾸는 걸 아니까 그냥 내가 져주는 거지. 하하. Q 제이드에게 봄날은 찾아오는가.......또르르 (Hanaryn님) 제이드 : 응? 왜 울어, 아가씨. 하하하. 난 항상 봄날이지. 키아르네 : 흑흑...미아내 제이드 제이드 : 뭐, 뭐야? 왜 둘 다 우는 건데? 키아르네 : 널 위해 인연은 이미 결정해 놨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찡긋 제이드 : 아니, 난 지금도 봄이라니까? Q 이안과어떻게 친해졌는지 궁금해요 (찰밥님) 제이드 : 아, 내가 그 얘기 안했나? 오대오로 아가씨들하고 만나기로 했는데 원래 가기로 한 녀석이 아파서 못가게 된거야. 그냥 머리수나 채워줄 녀석 없나 생각하던 차에 기가막힌 녀석이 생각난거지. 이안, 입만 안열면 잘생겼잖아? 그래서 가자고 했지. 어? 다들 말리지 않았냐고? 그야 말렸지. 엄청. 그런데 이안도 의외로 순순히 가자고 하더라고. 나중에 알고보니 그녀석 어머니가 친구가 없는거 아닌지 걱정하는 바람에 간거 같았지만 말야. 어쨌든 그날 데이트는 완전 꽝이었지만 덕분에 이안하고 친해졌지. Q 하티이리안님의 제이드에 대한 질문의 답변은 본문에 나올 내용이라 패스합니다. Q 마녀와 로즈마리는 서로 만난적이 있죠? (손님1님) 로즈마리 : (호두타르트 한조각을 손에 들고 먹으며) 어? 저 말인가요? 마녀라니, 무슨 마녀 말씀이세요? 키아르네 : 음, 그러니까 3부에서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거든 (설명중~) 로즈마리 : 아, 그렇군요. (벌써 타르트를 다 먹었음) 음, 글쎄요. 만났을 까요? 모습을 바꿀 수 있다면서요? 어떤 모습이었을지 모르니까요. 만났을 수도 있고 못만났을 수도 있지요. Q 제인에게도 질문 만약 케이트랑 이안이 결혼하는데 그 집의 집사로 일할의향이있는지 궁금해! (레몬맛 토끼님) 제인 : 어? 저도요? 우와. 질문이 올줄이야. 되게 감격쩌네요. 음, 집사까지 가면 좋구요. 근데 전 아마 안될듯요. ㅋ 키아르네 : 응. 넌 일단 말투 좀 고치자. 집사도 어느정도 가문이나 소개장을 보기 때문에 제인이 하고싶다고 해서 무조건 할 수 있는건 아니고요. 본인은 할 수 있다고 하고싶어 합니다. Q 작품 내용에 대한 질문은 아니구요 뮈엘라 읽으면서 늘 드는 생각인데 수사물 (완전한 수사물은 아니지만...!)쓰게 되신 계기가 궁금하네요ㅋㅋ (서에이미님) 키아르네 : 헉...저한테 질문이 있을 줄이야... 음, 원래 저는 미스테리나 수사물을 좋아합니다. 읽는 책의 90%가 추리소설이고 보는 미드의 80%가 수사물이거든요. 그런걸 소설로 쓰고 싶은데 가능하면 판타지 세계관이었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제가 가지고 있는 소재 노트 중에 "마법을 배척하는 나라의 마녀와 저주에 걸린 왕자"라는 게 있었습니다. 이게 로즈마리와 에드워드의 이야기 인데, 에드워드는 왕자(정확히는 왕위 계승 1위인 공작으로 변경했지만요)기 때문에 수사관이라는 직업을 갖기는 무리가 있었어요. 처음엔 수사관과 그의 조수이자 연인의 이야기였는데 배경이 마법을 배척하는 나라잖아요? 마법을 배척하는 나라에서 마법사건만 수사하는 수사관의 이야기면 재미있겠다! 싶었습니다. 그 다음은 다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구상한건 재작년 여름부터였습니다. 작년 여름에 연재 시작하기까지 다른걸 쓰면서 틈틈히 이야기를 익혔습니다. 이런저런 설정을 덧대고 이렇게 하면 좋겠다는 부분을 넣고. 그래서 만들어 진 게 뮈엘라의 수사관입니다. Q 비스마르크 할부지랑은 언제 대면하게 되나효 (침정환님) 키아르네 : 사실 비스마르크를 만나느냐는 부분은 이야기에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서요. 비스마르크라는 존재가 중요한거거든요. 일단 4부 중반까지는 안 만납니다 만, 쓰다가 필요해 지면 넣을 수 있습니다. Q 완결까지 얼마나남았나요? (헬리크리즘님) 키아르네 : 음, 처음 구상은 7부 였습니다.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5부까지는 등장 인물까지 다 결정되어 있는 상태고, 7부까지의 진행 방향이나 줄기같은게 결정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 작품 후기 ============================ 본문보다 긴 후기가 될 뻔 했어요. 하하하하 그래서 한 회를 사용했습니다. 이해 부탁드립니다. 여기 나오지 않는 문답은 이쪽에 적어주시면 추가하거나 번외편 을 올릴때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번외는 일단 이번주는 안 올라가고요. 다음주부터 비정기 적으로 올라갑니다. 00114 [번외] 세이렌 =========================================================================                            ** 후기가 좀 깁니다. ===== 아버지는 내가 배를 타기는커녕 바다에 대해 공부하는 것도 싫어하셨다. 그러니 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바닷가에서 살았지만, 배를 타는 건 태어나서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멀미가 나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선원이 건네준 컵을 내려다봤다. 생강냄새가 지독하게 풍기는 노르스름한 액체는 이걸 마시면 멀미가 가라앉는 게 아니라 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셔봤자 뭘 더 하겠어. 이미 울렁거리는 속이니 심해 봐야 토하는 정도겠지. 어쩌면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한참의 고민 끝에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뭔가 배에 툭 하고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배가 한번 요동치더니 와아아 하는 함성과 함께 투두둑하고 커다란 우박이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뭐지?” 나는 익숙하지 않은 긴 소매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을 내다보려 했을 때였다. 누군가가 소리 질렀다. “해적이다!” 그 순간 배가 다시 한 번 요동쳤다. 해적이란 말에 놀라 달아났던 멀미 기운이 다시 도졌다. 욱. 토할 것 같아. 해적이 문제가 아니다. 진짜 토할 것 같다. 아니, 해적이 문제긴 하다. 당연히 가장 큰 문제는 해적이다. 하지만 그걸 걱정할 여력이 없었다. 진짜로 위가 울컥하고 역류하는 게 느껴졌다. 선실 밖으로 달려나가려는 데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해적이, 윽!” 델토스의 군복을 입은 해군 뒤로 커다란 남자가 나타나더니 능숙하게 해군의 목을 팔로 감아 죄었다. 순식간에 우리 편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 게 보여 나는 다시 입을 딱 벌렸다. “찾았다.” 나직한 목소리는 거의 음산하기까지 했다. 검은 머리카락, 호박색의 눈동자. 황야에서 늑대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부인하려 입을 벌렸다. 하지만 남자에게 잡힌 해군의 얼굴이 눈동자에 들어왔다. 이건 아니다. 가까스로 나는 내게 주어진 의무를 떠올렸다. 델토스의 공주. 바다 건너 뮈엘라 왕자의 부인이 되기 위해 가는 길. 한동안 숨 쉬는 걸 잊었던지 숨이 가빠왔다. 남자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날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이, 눈동자가 무섭다. 여기서 내가 델토스의 공주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짧은 시간에 머릿속에 갖가지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밖에서 사람들의 함성과 비명이 어지럽게 들려왔다. 진짜로 배에 해적이 침입했구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저 사람들이, 우리 편이 나를 지키려다가 다칠 거야.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나는 델토스의 공주예요. 내가 따라갈 테니 다른 사람들은 놔주세요.” 남자의 눈이 이채롭다는 빛을 띠었다. 다시 한 번 그의 시선이 나를 훑었다. 아, 세상에. 나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올 것 같아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무섭다. 그는 한 손만으로 해군을 잡은 채 내게 다른 손을 내밀었다. “이쪽으로 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무섭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죽는 건가? 이대로 바다에 빠져 물고기의 밥이 되나? 어린 시절 들었던 갖가지 해적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까와 다른 점은 이번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는 점이다. 나는 억지로 발걸음 떼어 그에게 다가갔다. 내가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내 몸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다리가 움직이지 않을 리가 없다. 해적에게 손을 닿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남자는 해군을 던져버리고 나를 휙 잡아당겼다. 헉! 하고 내 입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신음이 흘러나왔다. 몸이 타의로 움직인 탓에 다시 위가 요동쳤다. “이안! 어떻게 됐어?” 밖에서 다른 남자가 소리쳤다. 나를 붙잡은 남자의 이름이 이안이었던지 그는 나를 끌어안은 채 선실 밖으로 나가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찾았다.” 그의 말에 빨간 모자를 쓴 남자가 씩 웃더니 쾌활하게 말했다. “대장이 목표물을 찾았다! 퇴각!” 대장? 목표물? 내가 반응하기 전에 이안이라고 불린 남자는 팔에 힘을 주더니 나를 고쳐 안았다. 힉! 다시 신음이 흘러나왔고 위가 요동쳤다. 잊어버렸던 멀미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아, 안 돼. “잠깐, 놔줘요.” 바동거려봤지만 남자의 팔은 단단하게 나를 붙잡고 있었다. 안 된다고, 이 남자야! 결국, 나는 최대한 그에게서 떨어지려 애쓰며 몸을 숙였다. “우, 웨에엑.” 투둑, 투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오늘 아침에 먹었던 걸로 추정되는 소화 되다 만 음식물이 내 입에서 해적의 부츠 위로 쏟아져 내렸다. 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창피해서 죽고 싶었지만 위는 계속해서 뭔가를 게워냈다. 누군가 헐. 하고 혀를 차는 소리까지 들렸다. “으, 그러니까 놔달라고 했는데.” 다 토해버린 탓에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대로 그의 팔에 몸을 축 늘어트리며 중얼거렸다. 죽어도 곱게 죽지는 못하겠구나. 정신이 좀 들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화가 날까. 나라도 화날 것이다. 덜컥 겁이 나서 나는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서 빠져나가려고 몸을 움직였다. 남자는 한참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나를 고쳐 안더니 강제로 내 얼굴을 들어 올렸다. 뺨이라도 때릴 작정인가! 겁에 질려서 눈을 질끈 감았는데 입가에 천이 닿았다. “고양이 같네.” 빨간 모자를 쓴 남자가 낄낄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누군가가 고양이? 라고 묻자 그가 덧붙여 설명했다. “고양이가 뭘 자꾸 토하잖아.” 주변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차, 창피해. 그러거나 말거나 나를 안은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지 소매로 내 입가를 꼼꼼하게 닦고 있었다. 얼마나 꼼꼼하게 닦는지 박박 문질러서 아플 것 같다. “저기, 괜찮아요.” 내가 말하자마자 남자는 나를 안은 채 몸을 돌려 배와 배를 연결한 줄을 잡았다. 어떻게 하려는 거지? 라는 걱정도 무상하게 그는 한 손만으로 줄을 잡고 해적선으로 이동해 버렸다. “맙소사.” 나는 해적선으로 넘어간 채 내가 탔던 배와 연결된 줄이 끊어지는 걸 보며 나직하게 탄식했다. 나, 진짜로 해적선에 탄 거구나. 진짜로 해적에게 잡힌 거구나. 각오는 했지만 무섭다. 이제 어떻게 될까? 해적선의 노예가 되는 걸까?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릴지도 모른다. 어느 날 단순히 재밋거리로 상어 떼의 밥으로 나를 던져버릴지도 모른다. 운이 좋다면 인질이 되어 많은 돈을 받는 대신 풀어줄지도 모른다. 눈물이 예고도 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훌쩍거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이 정도는 각오한 거잖아. 안 그래? 처음 저 배를 탔을 때부터 해적에게 잡힐 수 있다는 걸, 그런 위험이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는 것과 직접 당하는 건 다르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눈물을 멈추려 애썼다. 해적들에게 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잡히자마자 토하더니 이젠 질질 짠다고? 그것만은 사절이다. 하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숨이 가빠지면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자 나는 얼굴을 숨기려 애썼다. 남자가 나를 끌어안은 채 머리를 자기 어깨로 밀었다. 해적의 셔츠를 눈물로 적셔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고민할 기운도 없다. 부츠 위에 토하고 셔츠를 눈물로 물들이다니, 민폐 끼치는 여자라고 생각할 게 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이 남자가 날 잡고 안 놔주고 있으니까. 정신을 차린 건 어둑어둑해진 시간이었다. 토하고 울다가 기절하다니 어쩌면 이렇게 전형적인 민폐 아가씨 같을까 싶어서 부끄러워졌다. 나는 눈만 뜬 채 주변을 살폈다. 이제 어떻게 하지? 해적에게 잡히면 어떻게 해야겠다는 상상을 몇 번이나 했다. 갑판에 있을 때라면 바다에 몸을 던진다거나, 주변에 있는 걸로 덤비는 해적을 때린다거나. 하지만 그런 건 전부 공상이었을 뿐이다. 현실에서 나는 얼어붙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공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자 내 계획은 대폭 쉬워졌다. 검을 찾아서 가장 가까운 해적을 찌른 뒤 마치 암살자처럼 어둠에 몸을 숨긴 채 다가오는 해적을 전부 찔러버린다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은 재빨리 버려버렸다. 나를 잡았던 남자의 힘을 생각하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장 이상적인 건 나를 감시하는 시선이 없을 때 빠져나가서 바다 위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다음엔 가까운 섬이나 다른 배를 찾아서 구조요청을 하는 거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주변이 어둑어둑한 탓에 방 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커다란 선실인 것이 분명했다. 나는 의자나 테이블 같은 것을 피해서 빛이 보이는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저게 문일 것이다. 그 문 뒤에 아무도 없다면, “부츠는 어때?” 문에 다가갔을 때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손으로 입을 막았다. 문 바로 뒤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생각보다 가깝다는 것을 알렸다. “상관없다.” 이윽고 나직한 목소리도 흘러들어왔다. 아, 젠장. 문 뒤에 남자가 둘이나 있는 모양이다. 목소리로 보건대 빨간 모자와 검은 남자겠지. “뭐, 저들이 잡으라는 공주님이 저 아가씨잖아. 아냐?” 응? 나는 물러서려다가 빨간 모자의 목소리에 문에 가까이 붙었다. 공주라는 건 날 지칭하는 거지? 날 잡으라고 했다고? 저들이 누구지? 검은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는지도 모른다. 이윽고 빨간 모자의 말이 다시 흘러들어왔다. “나도 모르겠다. 네 마음대로 해. 저쪽은 결혼을 방해하고 싶은 거고, 우리가 의뢰를 받은 건 바다에서 공주님을 납치하는 데 까지니까. 우리가 할 일은 다 했으니, 그다음은 네 마음대로 하라고, 선장.”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기울였다. 그다음에 마음대로 하라고? 날 놔줄 수도 있다는 건가? “강제로 안을 생각은 없어.” 검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희망이 무너져 내렸다. 세상에. 몸이 다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나를 보자마자 검은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찾았다고 했다. 처음부터 저들은 나를 노린 거였어. 누군가 나를 위해 돈을 내면 나를 풀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사그라졌다. 어떻게 해도 저들은 날 풀어줄 생각이 없는 것이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제 방법은 정말 내 힘으로 탈출하는 수밖에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나는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방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뭔가,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걸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몸에 손을 대려 한다면 있는 힘껏 찌를 수 있는 거. 테이블 위와 장식장을 뒤진 다음에야 나는 커다란 뿔 같은 걸 찾아냈다. 원하는 만큼 뾰족하지는 않지만 있는 힘껏 찌르면 어떻게든 무기가 되지 않을까? 더 뾰족한 무기를 찾아봤지만, 단검 같은 건 없었다. 운이 좋다면 식사를 할 때 나이프 같은 걸 줄지도 모른다. 나는 뿔을 품에 안은 채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날 만지면, 이걸로 찔러 버릴 거야. 식사 시간에도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빨간 모자가 가져온 음식은 빵과 스프였다. 쟁반에 놓인 식기는 스푼뿐이라 나는 약간 맥이 빠졌다. 이런 건 나보다는 저들이 더 잘 알고 있겠지. 약간 맥이 빠진 채 음식을 바라보고 있자니 빨간 모자가 말을 걸었다. “음식이 마음에 안 드시나요?” 사람을 납치한 주제에 친한 척 말 걸지 말란 말야. 나는 그를 노려보려 애썼다. 나는 네가 싫다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싱글싱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검은 남자만큼이나 속을 알 수가 없다. “먹고 싶지 않아요.” “아, 뱃멀미?”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창피해. 나는 고개를 떨궜다. 그놈의 뱃멀미 때문에 검은 남자의 부츠 위에 잔뜩 토했던 걸 생각하면 얼굴을 들 수가 없다. 남자는 낄낄 웃더니 다시 말했다. “창피할 거 없어. 해적 중에도 아직도 뱃멀미하는 녀석이 있으니까.” 흠, 날 위로해 주는 건가? 이상한 해적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빨간 모자를 쳐다봤다. 빨간 모자가 워낙 강렬해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빨간 모자의 얼굴은 그럭저럭 괜찮은 얼굴이었다. 평소 생각했던 해적의 인상과 달리 부드럽고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었다. “제 이름은 제이드입니다만, 공주님 이름은?” 묘하게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는 남자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케, 케이트요.” “좋아요, 케이트. 멀미 때문이라면 더더욱 식사를 해두는 게 좋아. 빈속에 멀미하는 쪽이 더 괴롭거든.” 그런가? 배를 탄 게 며칠 전이 처음이니 알 리가 없다. 나는 음식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뜨거웠던 스프는 딱 먹기 좋을 만큼 식어 있었다. “저기, 제이드는 안 먹나요?” “아, 나도 물론 아리따운 아가씨와 먹고 싶죠.”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 대장이 아가씨와 단둘이 너무 오래 있으면 질투를 해서.”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며 검은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제이드에게 말했다. “제이드, 내가 음식만 놓고 바로 나오라고 하지 않았나?” 봐. 제이드는 그런 의미인지 나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가 떴다. 검은 남자가 마음에 안 드는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화, 화났나 봐.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는 내 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가 싶더니 바로 나가버렸다. 그 모습에 제이드가 장난처럼 말했다. “봤지?” …뭘?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검은 남자가 화난 거? 이해할 수 없는 내 심정을 눈치챘는지 제이드가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 대장이 아가씨한테 반해있다고.” ============================ 작품 후기 ============================ 집에 올리자마자 오타 수정해서 올렸더니 너무 늦었네요. 월요일이 아니라 화요일에 올렸다고 쳐주세요...흑흑... 외전은 비 정기적으로 업뎃됩니다. 코멘트 보고 결정할게요. 는 아니고요. 이 말 한 번 해보고 싶었어요. ㅎㅎㅎ 4편이 길어져서 5편으로 나눌지 좀 길더라도 4편으로 끝낼지 고민중인데 5편이면 다다음 주까지, 4편이면 다음 주까지 끝날 예정입니다. 4부는 4월 초, 혹은 3월 말에 시작됩니다. 다른거 안쓰고 바로 4부로 갈게요~ 너무 길어지면 달무리를 풀어둘까 했는데 별로 안 길어져서 그대로 갑니다~ 표지는 초록요플레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래는 문답이 있습니다. 그래서 후기가 좀 깁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Q. 질문. 호건가 가주가 병석에 있다했잖아요. 의식이 없는건가요,있는 건가요? 왜냐면 이안이 수사관서 잘린 사건이 호건가에서 압력이 들어와서였는데, 만약 가주가 일처리를 하기힘든 상태라면 그 압력은 가주가 내린 게 아니란 거잖아요. 전 이제까지 가주가 그랬다고 생각했거든요.(가야가님) -> 네. 압력은 가주가 내린게 아닙니다. 이게 스포가 될지 안될지 애매해서 저도 좀 말씀드리기 애매하네요. 의식은 있다 없다 합니다. Q. 이안이 케이트가 물건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러면 왜 이안은 케이트의 의사는 신경도 안쓰고 물건마냥 지 멋대로 해요? 게다가 케이트가 이안 좋아한다고도 안했는데 케이트는 자기거라고도 하고... 남주라고 여주 막다루는거 아니에요ㄱ- (차이란님) -> 괜찮습니다. 나중엔 케이트가 이안을 막다룹니다. 하하하하. 나름대로 어느정도 선을 그어놓고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케이트가 진짜로 싫어한다. 그럼 그만 둡니다. 이안 입장에서야 싫으면 당연히 거부하겠지. 거든요. 케이트 입장에서는 2부까지 너무 뜻밖이라 반응을 제때 못한거구요. 그래서 정신차린 3부에서는 하지말라고 했죠. ㅎㅎㅎ Q. 질문이요! 뻔할지도 모르는데ㅠ 낭만이 많으신 부모님들이라면 자신들의 아기가 태어났을때 이러저러해야지~하는 계획이랑 입덧이나 태명같은걸...ㅎㅎ 이건 주인공들 모두에게 질문하고 싶어요! (WINo3o님) 케이트 : 태명이요? 그게 뭐예요? 아, 뱃 속에 있을 때 부르는 거요? 음, 보통 아가야. 라고 부르지 않나요? 저는 대부님께서 태어나기 전에 지어주신 이름이라서요. 입덧은 없으셨다고 들었어요. 계획은...음, 들은 적이 없네요. 이안 : 모른다. 다섯 살 전에 돌아가셨는데 알게 뭐냐. 제이드 : 음? 내 이름을 보면 모르겠어? 보물이었지. 하하하. 입덧은 꽤 심하셨다고 들었는데, 덕분에 고생 좀 하셨다고. 내가 태어났을 땐 아, 이녀석을 위해 돈 좀 벌어야겠구나! 하셨다고 하시더군. 나 이래뵈도 사랑받고 자란 이남 일녀중 막내라고. 하하하. Q. 작가님이 후기에 가끔 등장하는 고양이들! 이름도 있던데ㅎㅎ몇마리라던가 이름이라던가 (WINo3o님) -> 음, 그냥 내키는대로 부르는 거라...몇마린지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하도 얘들이 왔다 안왔다 해서. 젤 예뻐하는 애가 돼지(삼색이)구요, 제일 미워하는 녀석이 대빵(얼룩이). 이녀석이 돼지를 못살게 굴거든요. 가끔 오는 못난이도 있네요. 처음 봤을 때 꼬리가 휠만큼 말라서 못난이라고 지었는데 이젠 나름 통통해졌어요. 그리고 최근에 등장한 엄마도 있어요. 치즈태빈데 나이가 꽤 많아 보이는데 세마린가 네마리의 엄마예요. 대빵하고 몸집은 비슷한데 까매서 흑막도 있고, 내키는 대로 부릅니다. Q. 뮈엘라를 책으로 만드신다면 가격을 예상해주시면 (WINo3o님) -> 하하하. 올해 안에는 안끝날거 같은데. Q. 쏘수님 1. 고학력자는 심영의 늘임말입니다... -> 하아...이거때문에 친구한테 대체 심영이 뭐냐고 물어봤어요. 2. 담배는 어디서 어떻게 누가 사오나요? -> 직접 사기도 하고 귀족이나 부자들은 보통 담배를 파는 업자들이 주기적으로 저택에 옵니다. 3. 이안과 제이드는 아이 생기면 담배를 끊을까요? -> 사실 18, 19세기에 담배는 건강물질이라고 오히려 의사들이 피라고 권했답니다. 하하하하 미친 세기였어...아, 새끼가 아니라 세기라고요. 하하하 4. 뮈엘라 밖의 나라들이 궁금해요. 외국의 마녀 취급도요. -> 나중에 나올지 모르겠는데 평범한 판타지 세상과 비슷합니다. 다른 나라는 마녀라는 게 우리가 아는 그 마녀가 맞아요. 뮈엘라만 마법사, 주술사, 마력보유자를 마녀라고 낮잡아 부르는 거라서요. 5. 나름 생각하는 모습이 있지만, 작가 님이 생각하시는 대략의 등장인물들 외모도 궁금해요. 사진/실존인물/짜집기 대조 부탁해욤... -> 이건...제가 배우나 모델을 잘 몰라서요. 일단 1) 이안은 180~190정도의 키. 검은 머리카락에 호박색 눈동자. 어둡다기 보다는 검다는 느낌입니다. 눈매가 옆으로 찢어진 느낌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늑대라는 느낌.체격도 좋습니다. 2) 케이트는 전에 한번 후기로 말했던 것 같은데, 좀 덜예쁜 니콜키드먼 느낌입니다. 아, 덜 예쁘고 작아요.니콜키드먼보다 좀더 순한 인상이기도 하고요. 키는 155,6정도. 빨간머리 초록색 눈동자 좀 예쁜 빨간머리앤과 좀 덜 예쁘고 작고 순한 니콜키드먼의 중간 단계정도? 3) 제이드는 일반적인 훈남입니다. 175~179 사이. 갈색머리에 갈색눈동자. 생긴것보다는 성격으로 인기좋은 타입. 또 누가 있죠? 4) 아, 제인. 제인은 갈색 머리카락에 감색 눈동자. 얼굴 왼쪽에 흉터가 있습니다. 왼쪽 눈썹 끝에서 콧망울까지 이어진 칼에 베인 흉터. 열 네살치고는 키도 크고 체격도 큰 편. 아, 유일하게 모델이 있는 캐릭터인데 제레미 섬터라고 영화 피터팬(2003년작)의 피터팬 역 배우와 미드 멘탈리스트의 주인공 사이먼베이커가 모델입니다. 제인이라는 이름도 멘탈리스트에서 따왔습니다. 음, 나머지는 어느 캐릭터가 궁금한지 달아주시는 분이 있다면 후기가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분할해서 올리겠습니다. 6. 현대화 제이드는 반짝이 호피무늬 양복을 입을까요;; 번개머리+빽구두+썬글라스라던지... 밤무대 트로트 가수입니까, 아님 짐승돌 차림입니까? -> ㅎㅎㅎㅎ 그정도는 아니고요. 굳이 따지면 외국의 패셔니스타가 입는 의상을 입을거예요. 노홍철씨 의상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7. 팬아트들 보면 19세기 영국 같은데, 코르셋도 딸려오는지요? 속옷은,,,///// (복식 설정 진짜 궁금하거든염...) -> 코르셋 완전 좋아하는데 좀 간소화한 디자인을 사용한다는 설정입니다. 뷔스티에에 가깝습니다. 속옷은 현대의 속옷과 거의 비슷합니다. 다만 여성의 경우 상의 속옷은 와이어가 없습니다. 8. 이안과 제이드의 여성편력. 만남과 과정. -> 하하하하. 이건 너무 길어지니까 패스할게요. 9. 사촌끼리 결혼이 가능하군요... -> 대부분의 외국은 가능한 걸로 알고있습니다:) 10. 마녀는 다른 여자들 소원도 들어줬나요? 이 분도 남자에게 치인 경험이? -> 이건 본문에 나올지 안나올지 몰라서 패스할게요. 11. 마력을 뺀 케이트는 이안과 인연이 없었을까요? ㅜㅜ -> 흠, 글쎄요. 없지 않았을 까요? 12. 근데 진짜, 케이트가 하녀 안 하면 무슨 일을 시도할까요? 교사 하고 싶댔으니 일단 늦깍이 학업생? 개인사업 재목인지? 얜 월급쟁이 내지 관리직이 천직 같아서, 학교 직접 운영하긴 힘들어 보이던데... -> 하고싶은 일과 할 일은 다릅니다. 하하하. 무슨 일을 할지는 4부를 봐주세요. 13. 천 번 하는 수련 몇 가지 해봤는데, 그런 맥락으로는 이해 못 하겠음... -> ㅋㅋㅋㅋㅋ 요점은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겁니다. 14. 이안: 케이트 이사간다고 하면 후속전략은? 소원으로 끌 생각? 결혼해달란 말은 해볼 생각? 이안 : 네가 신경쓸게 아니다. -> 그건 아니지. 뭐, 여러가지가 있으니까요. ㅎㅎㅎ 이것도 4부를 봐주세요. 15. 애초에 좋아하는 건 왜 "취소"했어요? -> 6.돌아온 아가씨의 6편을 읽고 오세요:) 16. 앤의 소개팅 후기는... -> 나올 까요? 쓰고 싶은데. 00115 [번외] 세이렌 =========================================================================                            기대하던 순간은 밤이 되자 찾아왔다. 검은 남자는 어두운 방에 들어오더니 램프를 켰다. 나는 침대에 웅크리고 누운 채 숨을 죽이고 자는 척했다. 내 몸에 손을 대면 찔러 버릴 거야. 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옷을 벗는 소리가, 물을 가져왔는지 가볍게 씻는 소리가 들렸다. 확인하고 싶었지만 자는 척하는 게 들킬까 봐 눈을 뜨지는 않았다. 나는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 애썼다. 제이드는 이 남자가 내게 반해있다고 했지만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그러니 내게 반해있다는 말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일 것이다. 나를 좋아한다고 하면 내가 호의를 가질 거라 생각했나? 바보 취급당한 것 같아 화가 치솟았다. 누굴 바보로 아나! 부글부글 끓는 속을 끌어안고 누워있자니 검은 남자가 침대 위로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매트리스가 움푹 꺼지면서 몸이 굴러갈 뻔했다. 그가 이불 속으로 들어오자 그의 맨다리가 몸에 닿았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잡을 것 같아 나는 재빨리 몸을 굴려 뿔로 찌르려 했다. “에잇!” 뿔의 뾰족한 부분이 그의 가슴에 닿았을 때 그가 내 손을 낚아챘다. 순식간에 손에 쥔 뿔을 빼앗겨버렸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호박색 눈동자가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바보 같은 짓을 하는군.” 남자는 손으로 내 턱을 단단히 잡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비웃는 어조는 아니었다. 그 담담한 말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고 있어, 나는 내 행동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깨달았다. “이걸로 찔러봐야 멍밖에 안 들어. 고작 그런 걸 노리기엔 손해가 너무 크지 않나.” 마치 가르치는 어조였다.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지? 나는 잡힌 손을 빼내려 애썼다. 그제야 그가 내 위에 올라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거 놔!” “너는 생각보다 행동력이 있군.” 응? 나는 이어진 남자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칭찬이야, 뭐야? 그는 몸을 굴리더니 내 옆에 누웠다. 어라? 이걸로 끝? 어안이 벙벙해 몸을 일으키는데 그의 팔이 내 몸을 감았다. 역시 이걸 노린 거였어! 잠시나마 마음을 놓은 게 문제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발버둥 치는데 남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 얼른 자.” 아무 짓도 안 한다고? 믿을 수 없다. 그러다 나는 그가 진짜로 눈을 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짜 자려는 거야? “내가 아무 짓도 안 할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흠 하고 남자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쉽게 나를 끌어당겨 품에 안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이건 무슨 자신감이지? 나는 눈을 감은 남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 남자도 내가 생각하던 해적과는 인상이 전혀 달랐다. 날렵한 콧날과 풍성한 속눈썹이 그의 얼굴에 음영을 만들었다. 어, 이 남자 생각보다 잘생긴 얼굴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해적이 잘생겼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런데 어쩌면 그는 무서워 보이는 인상만 빼고 보자면 꽤 잘생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의 얼굴을 빤히 보는데 갑자기 그가 눈을 번쩍 떴다. 호박색 눈동자가 드러나면서 나를 꿰뚫는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야.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어라, 내가 왜 눈을 감았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늦었다. 이제 와서 다시 눈을 뜨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남자의 몸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눈꺼풀 밖이 어두워졌다. 아, 램프를 끈 모양이군. 다시 그의 몸이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커다란 손과 팔이 내 몸을 단단하게 휘감았다. 반사적으로 몸이 뻣뻣해졌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믿기 힘들게도 몇 분 지나지 않아 그의 숨이 차분해졌다. 거짓말. 나는 눈을 뜨고 그를 쳐다봤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 검은 남자는 정말로 자고 있었다.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지? === 해적선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아니, 그보다 해적선이라고 전에 탔던 배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어쨌거나 선원들은 바빴고 나는 하는 일이 없었으니까. “케이트.” 검은 남자가 멀리서 나를 불렀다. 나는 그를 쳐다봤다가 고개를 돌렸다. 흥. 내 활동 영역은 예상보다는 자유로웠다. 나는 원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이안의 시야 안에 있다면. 검은 남자, 해적선장의 이름은 이안이라고 했다. 그는 배 안에서 내게 일부분의 자유를 제공했다. “어, 움직였어요.” 나는 낚싯줄의 찌가 움직이는 걸 보고 리코에게 속삭였다. 푸근한 인상의 리코는 내 말에 낚싯대를 살피더니 고쳐 잡았다. “왜 들어 올리지 않아요?” “미끼를 건드리기만 한 겁니다. 아직 물진 않았어요.” 아, 그래? 그는 나를 향해 씩 웃더니 다시 바다로 시선을 던졌다. 해적선이라고 해서 항상 전투를 하는 건 아니었다. 상당히 자주 이들은 낚시를 하거나 갑판을 청소했다. 내가 리코 옆에서 움직이지 않자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케이트.” 이안이 나직하게 말했다. 목소리를 변함이 없었지만 내 감은 그가 좀 짜증 났다는 것을 알았다. 하아. 한숨을 쉬는 것과 동시에 그의 팔이 내 허리를 감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힘으로 그가 나를 당겼다. 등에 이안의 가슴이 닿자 그가 말했다. “불렀잖아. 못 들었나?” “들었어요.” 나는 약간 심통 난 어조로 말했다. 이 남자는 내가 자기 애완조인 줄 아나. 부르면 가게.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내 턱을 잡더니 들어 올렸다. “그런데?” “내가 당신이 부른다고 가야 해요?” 이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 저거. 저거 진짜 싫어.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저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의 표정에서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는 표정이 저거뿐이라는 말이다. 이제는 예상할 수 있게 된 그다음의 변화가 찾아왔다. 이안은 나를 들어 올려 안았다. 발이 대롱대롱 공중에서 흔들렸다. 나는 균형을 잡기 위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눈높이가 같아지면서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당신 시야에서 벗어나도 어차피 배 안이라고요.” “배 안이건 아니건 상관없어.” 억지 좀 부리지 마.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무슨 억지람? 어차피 갑판 위에 있으니 열 명도 넘는 남자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데 굳이 자기 시야에서 벗어났다고 잡으러 오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이 남자의 생각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힐끔 리코를 쳐다보자 그는 실실 웃고 있었다. 뭔가 대단히 재미있는 모양이군. 제이드는 이안이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리코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걸 믿는 척하기로 했다. 내가 제이드와 이안의 대화를 엿들어 그들의 속내를 안다는 걸 알리는 것보다 그들의 거짓말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게 이 배에서 도망치기 더 쉬울 테니까. “케이트.” 이안이 다시 나를 불렀다. 응? 또 왜? 그를 쳐다보자 이안은 나를 안은 채 이동하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널 묶어둬야겠군.” “네?” 그건 안 된다. 나는 깜짝 놀라 이안에게 매달렸다. 묶인다면 도망갈 기회를 놓치게 된다. 나는 약삭빠르게 말했다. “잘못했어요.” 이안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나를 안은 채 그대로 나를 쳐다봤다. “미안해요. 당신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을게요.”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아, 또 왜? 나는 그 표정으로 그가 나를 믿지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간절하게 말했다. “묶지 마요. 아프단 말예요. 네?” 이안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나를 한참이나 쳐다봤기 때문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아, 진짜 무슨 말이라도 해라!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때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어? 이거 무슨 상황이지? 입술이 부딪힐 것 같았다. 피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여긴 이안의 품 안이다. 내가 피할 곳은 없었다. 아, 이건 불공평하잖아. 상대가 피할 구석이 없는데 공격하다니.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입술에 곧 닿을 느낌을 기다리는 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흔들렸다. 아니, 이안이 흔들렸다. 배가 흔들렸다. “침입이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턱턱턱 하고 갈고리가 날아오더니 선체에 걸렸다. 배가 기우뚱하고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갈고리에 이어진 줄을 타고 해적들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갑판으로 뛰어들어왔다. 해적이라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 자들은 이 배의 해적이 아니다. 다른 해적이었다. 아, 설마 나 또 납치당하는 거야?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참 불운한 바다여행이다. “제이드!” 이안이 나를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나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선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전투에서 나는 전혀 쓸모가 없다. 그러니 방해가 안 되도록 어딘가에 숨어 있어야 한다. 제이드가 검을 던지자 이안은 검 손잡이를 낚아채더니 공중에 한번 휙하고 흔들었다. 그 반동으로 검집이 빠져나갔다. …머, 멋지잖아. “케이트! 선실로!” 넋을 잃고 보는 내게 이안이 소리쳤다. 아차. 나는 재빨리 선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저 여자를 잡아!” 누군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신음을 흘렸다. 젠장. 결국 목표물은 나였다. 이놈의 공주. 인생이 순탄하지 않군. 선실로 가는 길에 덤비는 해적들은 제이드가 처리해 주었다. 그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잘도 검을 휘둘렀다. 뭐? 거기서 나는 나도 모르게 멈춰 섰다. 진짜 검이었다. 아니, 진짜 피였다. 검이 지나간 자리마다 새빨간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억지로 선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눈앞에서 검이 반짝 빛나면서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의 비명과 함께 피에 젖은 손가락이 발밑에 툭 떨어졌다. “헉!” 다시 위가 요동쳤다. 지금은 안 돼. 그렇게 생각했지만 처음 이안에게 잡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황파악도 못 하고 구역질이 나왔다. “잡았다!” 그때 뭔가가 내 소매를 낚아챘다. 소매가 잡히면서 내 몸도 기우뚱 기울어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큰일 났다. “케이트!”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게 누구지? 하지만 그런 생각보다 소매에 대한 원망이 먼저 들었다. 이놈의 소매 이럴 줄 알았어! 이렇게 길기만 한 소매 따윈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속이 울렁거렸던 것도 입고 소매를 잡은 남자의 손을 있는 힘껏 물었다. “으아악!” 눈앞에 별이 튀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뺨이 얼얼했다. 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잠시 후에야 나는 나를 잡았던 해적이 내 뺨을 때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뺨에서 피가 흐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팠다. 나는 차마 뺨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자리에서 비틀대며 일어섰다. 눈앞에 해적들에게 둘러싸인 사람이 나를 때린 남자에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안?” 머리보다 입이 먼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안은 양쪽 팔에 사람을 두 명씩 매달고 나를 때린 해적에게 검을 휘두른 뒤 그를 발로 차버렸다. 비명소리도 내지 못하고 해적이 배 밖으로 떨어졌다. 어, 이건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아까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선실로 들어가면 됐다. 하지만 지금은 눈앞에 사람들에게 공격당하는 이안이 있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하지? 이안을 모른 척 하고 선실로 들어가면 되는 건가? 아니면 이안을 도와야 하나? 이성은 내가 필요 없으니 그냥 선실로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는 누군가가 떨어트린 검을 집어 들고 이안에게 매달린 남자를 향해 휘둘렀다. “세상에!” 검이란 게 이렇게 무거운 거였구나. 내가 휘두른 검은 남자를 베지 못했다. 아슬아슬하게 그의 어깨를 때린 뒤 튕겨 나갔다. 그 반동에 몸이 휘청거렸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이번에는 검 날로 공격하려 했다. “이년이!” 남자가 팔을 휘둘렀다. 검이 부딪히면서 나는 그대로 뒤로 주르륵 밀렸다. 아, 젠장. 갑판 난간에 허리가 걸렸지만 시퍼렇게 빛나는 검 날이 눈앞에 번쩍이자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그대로 배 밖으로 튕겨 나가면서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내 주제에 도움은 무슨, 그냥 선실로 도망쳤어야 했다. ============================ 작품 후기 ============================ 어, 내일 올릴까 하다가 생각해 보니 내일도 일때문에 늦더라고요. 그래서 걍 오늘 올립니다. 구멍이 좀 보이지만...외전이기도 하고, 이런 설정도 한 번 써보고 싶었던거라 관대하기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설정은 본편의 가장무도회에서 이안과 케이트의 의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지난화 문답에서 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어서 좀 더 덧붙입니다. 타국의 마녀에 대한 평은 나라마다 다릅니다. 판타지 소설마다 마녀나 마법사에 대한 평이 다르듯 나라마다 다릅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가 아는 그 마녀라고 말씀드렸던건데 제 설명이 부족했네요. 굉장히 두려워 하는 나라도 있고, 약사비슷하게 여기는 나라도 있고. 그렇습니다. 엘리자베스(케이트의 엄마) 의 재산에 대해서 4부에 나올지 모르겠는데 가짜 엘리자베스는 진짜로 밝혀진 게 아니었습니다. 에스메랄다가 가짜라는 증거를 찾고 있는 중이었고, 마녀는 찾아볼테면 찾아보시지. ㅎㅎ 정도의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의 재산은 고스란히 있습니다. ㅎㅎㅎ 아, 저도 이안과 케이트는 여러가지 버젼으로 쓰고싶어요. 근데 일단 어느 버젼이든 이안 특성상 너무 위험해 져서...쩜쩜... 케이트가 이안에게 지금 이상의 호감이 있고, 그걸 이안이 아는 순간 이 소설 노블 갑니다. 하하하하. 책에 대한 문의가 잦은데 7부니까 7,8권 정도 되지 않을까요? 다른 분들은 얼마에 파시는 지 모르겠지만 권당 만원정도 예상하시면 되지 않을까...싶습니다. 어, 그리고 "왕자님의 약혼녀" 가 현재 리디북스에서 제공되고 있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이북 계약을 맺어서 3월 부터 서비스 되고 있습니다. 18일까지 할인 한다니 리디북스 이용하시는 분들 중 관심 있으신 분은...음... 현대물이고, 평범한 한국의 직장인인 세희가 이국의 왕자의 약혼녀가 되는 이야기 입니다. 일단은 아침드라마같은 설정과 할리퀸 같은 상황속에서 현실적인 성격의 주인공이 주변 사람들에게 엿먹인다는 내용...이라고 하면 돌 맞겠죠? 다른 곳에서는 천천히 서비스 된다고 하니 리디북스를 이용하지 않으시는 분중 혹, 관심 있으신 분은 다른 곳에 서비스 될 때 다시 후기 남기겠습니다. 00116 [번외] 세이렌 =========================================================================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 정신없이 콜록거리고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차갑고 검은 바닷속에서 구조되자 절로 눈물이 나왔다. 나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기침을 해대며 속으로 생각했다. 능력이 안 될 때는 그냥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게 옳은 거다. “괜찮아?” 누군가 내게 모포를 덮어 주었다. 커다란 팔이 어깨를 감싸고 있었지만 몸이 떨렸다. 그제야 나는 여기서 바다를 통해 도망치려던 내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는지를 깨달았다. 바다에 뛰어든 순간 위, 아래가 사라져 버린다. 게다가 나는 수영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 주제에 바다에 뛰어들어 가까운 섬까지 헤엄쳐 간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케이트.” 이안의 목소리였다. 나는 물을 토해내며 고개를 끄덕이려 애썼다. 그는 나처럼 홀딱 젖어 있었다. 그러니까 나를 바다에서 구해준 게 이안이라는 말이다. 죄책감과 창피함이 공포심과 함께 나를 휘감았다. 나는 민폐를 끼친 정도가 아니었다. 내게 이들이 혼내지 않은 건 오로지 단 하나, 내가 죽을 뻔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창피해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아니, 거짓말이다. 그래도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바보같이.” 이안이 그렇게 말하자 참았던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울면 안 돼. 나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뜻밖에도 그는 나를 더 이상 혼내지 않고 들어 올렸다. 담요에 감싸인 채 번데기 상태로 나는 그에게 안겨 선실로 들어갔다. 다행이다. 마음이 편해졌다. 너무 춥고 지쳐서 따듯한 데서 자고 싶었던 차였다. 혼나더라도 저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혼나는 것보다 단둘이 있을 때 혼나는 게 낫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그는 나를 침대에 앉히더니 담요 속에서 나를 발굴해냈다. 말 그대로 담요 더미에서 나는 발굴되었다. “하하하.” 내 웃음소리에 그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게 보여서 더 웃겼다. 그는 손을 들어 내 뒤통수를 쓰다듬더니 중얼거렸다. “어디 부딪힌 곳은 없는데.” 지쳐서 그렇지 다친 것은 아니었다. 뒤통수에 커다란 손이 닿으니 잠이 몰려왔다. 아, 머리만 대면 잔다는 게 이런 뜻이구나. 눈이 스르르 감기는 게 느껴졌다. “케이트?” 이안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나직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뭔가가 몸을 잡아당겼다. 아니, 아니네. 나는 실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안이 매듭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어, 저거 내 옷이잖아? 눈앞에서 매듭이 스르르 풀리는 게 보였다.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천이 커다란 손이 잡아당기자 떨어져 나갔다. 저거 내 손인가? 나는 내 손을 들어 올리려다 포기했다. 온몸이 무거워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자고 싶은데. 스르륵 눈이 감겼다가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등에 뭔가가 닿아있었다. “계속 자.” 어, 그래도 되나? 언뜻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곧 등에 닿는 것이 침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나 자던 중에 일어났나 봐. 어쩐지 머릿속이 흐렸다. 바다에 빠졌던 게 꿈이었나? 온몸이 젖어서 기분이 나빴던 것 같은데 아니었다. 피부에 닿는 천에 물기는 하나도 없었다. 악몽을 꿨나 봐. 그럼 그렇지. 내가 배를 탄 것도 꿈일 것이다. 내가 뮈엘라의 왕자와 결혼한다는 것도 전부 꿈일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나는 눈을 감은 채 히죽댔다. 아버지는 소설 좀 그만 읽으라고 했지. “다행이다.” 나는 몸을 돌려 옆에 누운 사람을 끌어안았다. 언제 엄마가 내 침대로 왔지? 엄마는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내 침대에 와서 날 놀라게 했다. 나보다 바닷가에 오래 살았으면서 엄마는 바람이 심하게 부는 밤을 무서워했다. “바람이 부나 봐요?” 나는 습관적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엄마의 등을 쓰다듬었다. 잠결에 엄마의 등이 이상하게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다. “엄마?” 어둠 속에서 호박색 보석 두 개가 두둥실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무시하며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어둠이 눈에 익었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일순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아직도 악몽인가? “계속 자라니까.” 남자가 손을 들었다. 그는 내 뺨을 쓰다듬더니 목과 어깨를 쓸어내렸다. 딱딱하게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에 맨살이 닿는 느낌이 기묘했다. 응?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생각하기도 전에 남자는 다시 손을 올려 내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군.” 응? 이게 무슨 상황이지? 엄마가 아니라 웬 남자가 내 옆에 있었다. 그가 상체를 일으키자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팔꿈치가 벽을 찧었다. 가볍게 쿵하는 소리가 나면서 윽하는 신음이 나올 정도의 고통이 이어졌다. “괜찮나?” 남자가 내가 몸을 숙였다. 그의 손이 내 팔꿈치를 잡자 겁이 덜컥 났다. 세상에, 이게 뭐지? 우리 집에 누군가 침입했어! 나는 남자를 피하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 지르려 했다. “도, 도둑,” “쉿.” 남자가 나를 잡아당겼다. 그의 손이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숨이 막혔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 세상에. 엄마! “케이트, 나야.” 남자가 나직하게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기억이 빠르게 쏟아져 내렸다. 어라.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그대로 멈췄다. 그제야 생각났다. 여기가 어딘지,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델토스의 공주로 뮈엘라의 왕자와 결혼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 이 해적에게 잡힌 거였지. 머릿속에 잠들기 전까지의 상황이 펼쳐졌다. 악몽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이안의 배에 다른 해적이 침입했고 나는 주제도 모르고 그를 돕겠다고 나서다가 바다에 빠졌다. 그런 나를 구해 준 게 또 이안이었다. 아, 바보 같아. 잠이 깨자 정신이 들었다.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탓에 꿈이라 생각했다. 내일 아침 내 방, 내 침대에서 일어난 다 해도 놀랍지 않다. 뮈엘라의 왕자와 결혼하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도, 해적에게 납치당하는 것도. 전부 내 인생에 일어날 리가 없는 일들이다. “괜찮아?” 이안이 나를 끌어안은 채 다시 물었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내가 악몽을 꿨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악몽이 맞지. 지금 이 상황이 악몽이라 그렇지. “육지에 도착하면 의사에게 가보지.” “괘, 괜찮아요.” 그냥 너무 놀란 것뿐이다. 눈앞에서 피 튀기는 전투를 보는 것도, 해적에게 잡히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라 그렇다.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것도 그렇다. 아버지는 내가 바다에 가는걸, 관심을 두는 걸 싫어하셨다. 이런 일 때문이었을까. 아버지를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거기에 온몸이 아픈 게 더해졌다. 아버지. 어떻게 지내실까. 나는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케이트?” 이안이 억지로 내 얼굴을 들어 올렸다. 이 바보 같은 남자가! 나는 눈물을 글썽이는 걸 숨기려는데 남의 기분도 모르고 이런다. “놔줘요.” 나는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이 울렁거리는 배도 싫고 해적도 싫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이안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가 내 말을 잘못 해석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손을 놔달라는 게 아니라, “이 배에서 내리게 해줘요.” 이안이 자세를 고쳤다. 그래서 침대가 출렁거렸다. 중심이 그쪽으로 기우는 바람에 내 몸이 무너졌다. 윽. 나는 그의 팔에 얼굴이 부딪친 다음에야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안 돼.” 어째서! 라고 말하려다가 나는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숨을 들이켰다. 바로 위에 호박색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얼굴이 다가왔다. 어, 어어어? 어? 이거 익숙한 상황인데? 뒤는 벽이고 앞은 이안이다. 아래는 침대다. 내가 날아오르지 않는 한은 도망칠 길이 없잖아. 갑자기 내 등에서 날개가 돋는다면, 운운하는 헛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입술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흑, 하고 나는 숨을 들이켠 상태로 굳었다. 따듯한 입술이 문질러지는 감각이 이상했다. 부끄러웠다. 피하려는 턱을 커다란 손이 잡아 고정하는 게 느껴졌다. 그는 능숙하게 내 아랫입술을 빨더니 입술을 떼고 내 얼굴을 응시했다. “숨 쉬어.” 그제야 나는 아직도 내가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우.” 몰아쉰 숨이 입술이 벌어지면서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다시 이안의 입술이 다가왔다. 헉하고 숨이 들이켜지면서 입술 사이로 말캉한 혀가 파고들었다. “응?” 거친 손이 어깨를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 느꼈던 기묘한 감각을 확실히 알겠다. 나는 완전히 벗고 있었다. 내가 왜 벗고 있지? 입안을 헤집는 혀와 남의 몸을 마음대로 더듬는 손 때문에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으응, 흑, 하아.” 입술이 떨어져 나가면서 신선한 공기가 흘러들어왔다. 지금 키스가 문제야? 나는 시트를 끌어안으며 외쳤다. “나, 나 왜 벗고 있어요?” 이안의 눈동자는 황금색으로 보였다. 그는 뜨거운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기억 안 나?” “무, 무슨 기억이요?” 나 설마 이미 이 남자랑, 그러니까. 화악하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난 기억에 없는데? “자, 잠든 사람을 덮친 거예요?” 이안의 표정이 굳었다. 그의 눈동자가 다시 천천히 호박색으로 돌아오는 게 보였다. 뭔지 몰라도 그가 화났다는 건 알겠다. 이안은 한 손에 턱을 괴더니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그렇게 나쁜 놈으로 보이나?” “당신 해, 해적이잖아요.” 그의 눈썹이 올라갔다. 이안은 뭔가 말하고 싶은 표정을 짓더니 잠시 후에 말했다. “해적이 뭐하러 잠든 여자를 덮쳐? 안 잠든 여자도 덮칠 수 있는데.” 아니, 지금 논점은 그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입이 딱 벌어졌다. 지금 농담한 거지? 그치? 그의 얼굴은 그렇지 않아도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가 없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의 표정을 살폈다. “저기, 그러면 당신 말은…?” 우리가 안 했다는 거지? 이안은 대답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 그 표정은 뭐야? 응? 무슨 의민데? 나는 시트를 끌어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저기, 나 다른 데서 잘게요.” 원래 이랬어야 했다. 애초에 결혼도 안 했는데 남자와 한침대를 쓴다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감옥에 넣지 않은 건 감사하지만, 잠깐, 해적선에도 감옥이 있나? 감옥에 가는 게 싫어서 이안과 한 침대에서 잔 건 아니다. 해적한테 딴 데서 자겠다고 주장하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다. 싫어? 그럼 죽어. 이럴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다른 거 맞지? 나는 이안의 얼굴을 살폈다. 이 정도 친해졌는데 내가 다른 데서 잔다고 날 죽이지는 않을 거 아냐. 그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늘 그렇듯.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다른 데, 어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던 그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나는 시트를 끌어안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갑판 위에 해먹도 있던 걸요. 거기서 자도 돼요.” “거기서 자도 된다고 누가 허락했지?” 뭐? 나는 깜짝 놀라서 그를 내려다봤다. 그의 몸을 밟고 지나가야 하나, 아니면 빙 돌아서 지나가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어디서 자는지도 허락을 받아야 해요?” “당연한 거 아닌가?” 그가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예기치 못한 공격에 몸이 무너졌다. 나는 시트를 끌어안은 채 그의 몸 위에 쓰러졌다. 아예 황금색으로 변한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마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안의 손이 내 턱을 움켜잡았다. “이 배도, 너도 내 것이다.” 이게 무슨 헛소리냐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전에 나는 그의 몸 아래에 깔려 있었다. 입술이 닿기 전에 이안이 중얼거렸다. “해적 짓 좀 해볼까.” ============================ 작품 후기 ============================ 내일 올리려다가 생각해보니 내일은 일이 있어서 집에 늦게 오더라고요. 그래서 걍 오늘 올립니다. 하하하하하 이말...언젠가 한 기억이... 꽃샘추위라는데 너무 춥죠? 전 추워도 곧 봄이 온다는 생각에 참았는데...흑흑... 너무 추워요. 지난번에 케이트가 지금 이상의 호의가 있고 그걸 이안이 알게 되는 순간 노블간다는 말은 지금 이상의 호의가 있다는 걸 절대 들키게 하지 않겠어! 라는 저의 의지 표명이었는데...이럴수가.... 여, 여러분.... 어, 그리고 설문 합니다. 보름에서 한달이나 그냥 쉬면 읽으시는 분들이 너무 기다리시기만 해야 하기도 하고, 다른 걸 쓰고 싶은 욕망(?)을 이정도로 대충 때울 수 있어서 뮈엘라의 수사관은 보통 패러렐 월드 느낌으로 외전을 쓰고 있었는데 그게 흐름을 깬다는 의견이 있어서요. 흐름을 깨는 거면 걍 외전 쓰지 말고 다른걸 쓰고 오거나 이쪽만 외전을 올리지 않거나 그런 방법을 강구 하고 있습니다. 귀찮으시겠지만 설문 해주세요~ 설문 종료 되었습니다. 많은 의견 정말 감사드립니다. 보통때라면 대댓글을 전부 달아드리지만 의견이다 보니 제가 전부 비슷한 댓글을 달게 되더군요. 그렇다고 어느분만 달고 어느분은 안다는건 불공평한것 같아서 정말 죄송합니다만, 이번편 대댓은 쓰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00117 [번외] 세이렌 =========================================================================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 전에 입술이 닿았다. 아까 한 키스가 부드러운 거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거칠고 강압적이었다. 입술이 물어뜯기는 것처럼 빨렸다. 아파, 그런 신음과 함께 그를 밀어내려고 손을 내밀자 그대로 손이 잡혀 침대 위로 내리눌렸다. “응, 아,” 목덜미가 세게 빨렸다. 이 남자 사실은 흡혈귀 아냐? 그런 걱정이 솟았다. 생각해보면 검은 머리카락에 호박색 눈동자에, 이건 흡혀, 더 생각하기 전에 눈이 번쩍 떠졌다. 굳은살 박인 커다란 손이 가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 그게 내 가슴인데? “잠깐, 이, 흑!” 손톱으로 긁는 느낌에 몸이 펄쩍 뛰어올랐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막으려 애썼다. 이러지 마요. 그렇게 그의 어깨를 밀어 봤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욱신거릴 정도로 가슴을 괴롭혔다. “이안, 잠깐, 싫어.” 숨이 차올랐다. 나는 힘없이 그를 밀어내려다가 커다란 손이 배꼽까지 내려오자 깜짝 놀라 뛰어올랐다. 아, 안 돼. 안 돼! 결혼도 안 했는데 이런 짓 하면 안 되는 거다. 하지만 아무리 그만두라고 해도 그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허벅지 안쪽에 거친 손이 파고들어 오자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싫어, 싫어요. 이안. 제발.” 입에서 애원하는 말이 터져 나왔다. 눈앞이 눈물로 흐려졌다.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왜 내가 싫다는데, 하지 말라는데 계속하는 거지? 무섭고 억울했다. “이제 쓸데없는 짓 말고 자라.” 갑자기 몸이 가벼워졌다. 나는 눈물 때문에 뿌옇게 된 시야로 이안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리자 얄밉게도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옆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몸 여기저기가 얼얼했다. 세게 빨린 목덜미가 피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에 손으로 쓸어 봤지만 피는 나지 않았다. 진짜? 진짜로 그만두는 거야? 나는 떨면서 이안에게서 최대한 떨어졌다. 이 남자가 그렇게 무서웠던 건 처음이다. 지금까지 그가 나를 얼마나 다정하게 대해줬는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렇게 거칠고 강압적으로 굴 수도 있는 남자였다. 나는 약간의 두려움과 경계심으로 시트를 끌어안고 그를 쳐다봤다. 이게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기, 나 그러면 밖에서…,” “하던 거 계속 할까?” “아니요. 그냥 잘게요.” 두려운 데 잠이 올 리가 없다. 이안의 몸이 움직이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그가 몸을 돌려 내게서 등을 보였다는 것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로 그만둔 모양이었다. 얼얼한 감각이 사라지면서 그가 만질 때마다 느꼈던 감각이 떠올라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약간의 허탈감.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잠깐이지만 정말 마음의 준비도 했다. 조금만 더 다정하게 대해준다면 이안이라면 괜찮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부끄러워서 몸을 웅크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 두려움과 수치심에 반발심이 생겼다. 이 남자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심심하면 여기저기 더듬어도 되는 여자라고? 응? 내가 그렇게 쉽냐, 이 나쁜 놈아! 잠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퍼뜩 눈을 뜨니 방 안이 밝아져 있었다. 이안은 없었다. 그가 누웠던 자리가 서늘했다. 어젯밤의 일이 어디부터가 꿈인지 몰라서 나는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어느샌가 나는 커다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내가 입은 게 아니니까 누군가 입혀준 걸 테지. 그게 이안일 거라고 생각하니 화가 나면서도 부끄러웠다. 이 남자, 정말 나를 가지고 노나? 셔츠는 너무 커서 단추를 전부 잠갔는데도 가슴골이 드러났다. 멍하니 셔츠 속을 보던 나는 가슴 위에 불그스름한 반점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이게 뭐지? 그러다 곧 그게 뭔지 깨달았다. 세상에. 얼굴이 터질 것 같다. 그게 아니면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갑자기 이안이 미워졌다. 나쁜 놈. 그는 내가 무서워하니까 멈췄다. 그게 더 미웠다. 그 정도의 상식은 있는 남자라는 게 더 미웠다. 차라리 완전 나쁜 놈이면 마음 놓고 미워할 텐데 그럴 수가 없으니 미웠다. 나쁜 놈. 차라리 그냥 나쁜 놈이었으면 좋을걸. 나를 납치하고 억지로 자기 곁에 둔 해적인데 내가 물에 빠지자 구해줬다. 내가 하지 마라니까 멈췄다. 옷도 입혀줬다. 젠장. 어쩌라는 거야.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네가 하지 말라는데 멈추는 남자는 괜찮은 남자다. 그 전에 하지 말라는데 안 멈추면 거기를 걷어차라는 말도 하셨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두 손안에 얼굴을 묻었다. 피해자는 난데 이 상황에서 이안은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하는 게 너무 싫었다. 이건 다 이안 때문이야. 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배가 고픈데 무릎까지 내려오는 셔츠만 입고 나갈 수는 없었다. 이 상황에서도 배는 고프구나. 우울해졌다. 궤짝을 뒤져 바지를 주워 입은 뒤 나는 갑판 위로 나섰다. 바지는 입은 것보다 걷어붙인 게 더 많은 것 같지만 넘어가자. 선원들이 나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던졌다. 괜찮아요? 잘 잤어요? 그런 일을 겪고도 잘 잤지. 나는 힘없는 미소도 화답했다. 갑판 위는 평소보다 더 부산스러웠다. 이안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주변을 살펴 이안이 갑판 위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제이드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 있어요?” 제이드는 나를 보더니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그 웃는 얼굴은 내가 그의 곁에 서자 이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내가 입은 게 이안의 옷이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는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우물거리더니 말했다. “몇 시간 후면 항구에 정박합니다.” 항구라고? 그래도 되나? 해적선이 어떻게 항구에 정박할지 궁금했던 내 호기심은 배의 깃발을 교체하는 것으로 해소되었다. 선원들은 바쁘게 깃발을 바꾸고 선수에 붙은 조각상을 떼어냈다. 아, 저거 뗄 수 있는 거구나. 거대한 조각상을 일사불란하게 떼어내는 장면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뭘 조각한 거예요?” 나는 떼어낸 조각상을 옮기고 다른 조각상으로 교체하는 것을 보며 제이드에게 물었다. 그는 나를 힐끔 보더니 다시 뭔가 말하고 싶다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래. 나 이안 옷 입었다. “세이렌인데. 몰라요?” 아, 그거였구나. 어쩐지 감격스러웠다. 아름다운 여자의 상체와 두 개로 갈라진 지느러미를 가진 존재. 실제로 있다고 하지만 뱃사람이 아닌 이상 만날 가능성이 없다. 인어와 다른 존재라고 하던데. 나는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뱃사람을 홀린다고 하던가? “왜 하필 세이렌이예요?” 뱃사람을 홀리는 세이렌을 왜 하필 선두를 장식하는 조각상으로 사용하는 걸까. “보통 여자 조각을 붙이는데, 세이렌도 여자니까.” 거기까지 말한 제이드는 나를 보더니 씩 웃었다. 세이렌도 여자라서 세이렌 조각을 붙이다니 너무 대충 대충이잖아.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우리 선장 취향입니다.” 아, 그래? 그렇다면 어쩐지 이해가 된다. 나는 선실로 사라지는 조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상한 사람이라면 하고많은 여자조각 중에 세이렌으로 배를 장식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곧 고개를 돌린 나는 제이드가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더 할 말 있어? 그런 표정을 짓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말을 이었다. “알아요? 간혹 부두에 너무 예쁜 여자가 있으면 그게 세이렌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는 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부두잖아요. 게다가 사람과 세이렌을 헷갈릴 리가 없을 텐데요.” “그러니까 너무 예쁜 여자가 앉아 있으면.”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제이드는 진지했다. 어라? 혹시. 나는 설마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그거 경험담이예요?” 그 순간 제이드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난 아니예요.” 원래 이런 일은 자기 친구가 겪은 일이라고 말하는 법이다. 나는 모른척 해주기로 결심하며 씩 웃었다. “얼마나 예쁜 여자기에 세이렌으로 착각하는지 한번 보고 싶네요.” 제이드가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을 때 방해자가 끼어들었다. “무슨 이야길 하는 거지?” 기분이 좋은 탓에 나는 그에게 화난 것도 잊고 대답했다. “너무 예쁜 여자를 세이렌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는 말이요.” 이안은 나를 힐끔 보더니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바보 같은 소리군.” 그러시겠지. 나는 제이드를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 모습에 제이드가 피식 웃었다. 이안이 그런 우리 둘을 보더니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 또 왜?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모르겠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가 나를 끌어당겼다. 저절로 몸이 굳었다. 어젯밤의 일이 다시 떠올랐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이안은 그저 나를 끌어당겼을 뿐 금세 내 몸에서 손을 뗐다. “옷 갈아입고 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이상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 옷 말랐어요?” 이안의 입이 닫혔다. 어, 방금 머뭇거린 거 맞지? 그는 잠시 후에 다시 입을 열더니 말했다. “다른 걸 입고 와라.” 이 사람이 나랑 무슨 장난 하나. 내가 다른 옷이 있으면 네 옷을 입겠냐? 나는 최대한 얌전하게 말했다. “다른 거 뭘 입을 깝쇼?” 제이드의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그는 당황하는가 싶더니 웃음을 참으려는 듯 몸을 돌렸다. 이안이 못마땅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 자세를 취하려 할 때였다. 휙 하고 몸이 들어 올려졌다. 이안은 나를 들어 올려 안더니 성큼성큼 안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몸부림치는 내게 이안이 나직하게 말했다. “아무 짓도 안 해.” 어? 나는 움직이던 것을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 이안은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탓에 검은 속눈썹에 호박색 눈동자가 가려져 눈빛을 읽기가 힘들었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뒤에서 제이드가 나를 향해 살랑살랑 손을 흔들고 있는 게 보였다. “화, 났어요?” 이안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니.” “그래요. 당신은 화낼 자격 없어요.” 다시 이안이 머뭇거리는 게 느껴졌다. 신기한 일이네. 이 남자가 머뭇거릴 때도 있다니. “네게 화를 내는 게 아니다.” 그야 당연하지. 당신이 나한테 화낼 일이 뭐 있어? 내가 피해잔데. 여전히 이안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는 나를 보더니 나를 안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내 뺨을 만졌다. 다시 밤의 일이 떠올라 몸이 굳었다. 그는 뺨에서 목덜미로 손을 쓸어내리더니 중얼거렸다. “이렇게 표시가 날 줄은 몰랐는데.” 무슨 소린지 깨닫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세상에! 제이드가 날 보고 이상한 표정을 지은 이유가 그거였구나! 나는 창피해서 이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진짜 싫다. 너무 창피해서 죽고 싶었다. 다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는 바닷가에서 자란 것치고는 피부가 흰 편이다. 원래 흰데다 내가 바다에 가는 걸 아버지가 싫어하셨기 때문이다. 가슴에 보이던 불그스름한 반점이 목덜미에도 있었을 것이다. 맙소사. 나는 이안의 가슴을 때리면서 중얼거렸다. “당신, 진짜 싫어.” ============================ 작품 후기 ============================ 화이트 데이를 맞이하여 가족들과 고기를 먹으러 갔습니다. 왜냐면 고기느님은 모든 시름과 고통을 잊게 해주시니까요. 아, 그리고 지난번 설문은 종료하겠습니다. 외전이 불편하시다는 분이 어느정도 되시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볼까 했는데 다른 방법이라는 게 별도의 게시글에 올리거나 뜰에 올리는 방법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방법도 불편하시다는 의견이 많아서... 대신 외전을 읽고싶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외전이 페러렐월드 일경우 그 전편 후기에 페러렐월드라고 적도록 하겠습니다. 의견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00118 [번외] 세이렌 =========================================================================                            배가 정박한 곳은 뮈엘라의 유명한 항구도시, 알라나데일이라고 했다. 언젠가 알라나데일이라는 항구도시에 갔었다는 기억을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번화한 도시를 살펴보며 너무 들뜨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런 큰 도시는 처음인가 보죠?” 고개를 들자 제이드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사실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자란 곳은 작은,” 아차. 거기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작은 뭐? 어느 나라 공주님이 작은 마을에서 산다는 말인가. 작은, 작은, 그다음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나는 몇 번이나 입안에 작은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작은 마을은 가봤, 어라?” 내가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제이드는 더 재미있는 일을 발견한 모양이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여자들이 몰려있는 쪽으로 손을 벌리며 걸어가는 게 보였다. “아가씨들~, 나 보고 싶었어?” 맙소사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리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술집 여자들인 게 뻔한 아가씨들이 꺅꺅거리며 제이드를 반기고 있었다. 확실히 큰 항구도시답게 사람들의 의상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제이드가 다가가는 술집 여자들만 해도 처음 보는 의상은 물론, 뮈엘라인데도 내게 익숙한 델토스의 의상을 입은 등 가지각색이었다. 그래서 내 옷이 튀지 않는군. 나는 덜 마른 내 옷을 내려다봤다. 특히나 소맷단이나 치맛단같은 데는 덜 말라서 걸을 때마다 다리와 손목에 휘감긴다. “옷, 사줄까.” 느닷없이 이안이 물었다. 그는 내게 바짝 붙어서 걷던 중이었다. 지금까지 한마디도 안 했던 주제에 내가 뭘 보는지 다 확인하는 모양이다. 흥. 나는 뾰로통하게 말했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나는 돈을 목적으로 납치한 공주님이고 말야. 언제 옷이 완성될 줄 알고 기다린단 말인가.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내뱉지는 않았다.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는 게 보였다. “또 뭣 때문에 뾰족 한 거지?” 뭐가 뭣 때문이야. 그럼 내가 네가 뭘 해주던지 와,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야 한다는 거야?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쳐다봤다. 이안이 밉다. 아니, 모르겠다. 나는 그를 속이고 있다. 그건 그도 돈을 노리고 날 납치한 거니까 피차일반이라 논리로 불편한 내 마음이 가라앉히지 못할 정도로 죄책감을 들게 만들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해적임에도 불구하고. 젠장. 해적인 게 뭐 어때서? 나는 짜증을 부리며 돌을 걷어찼다. 나는 지금까지 해적이 나쁘다고만 생각하고 살았다. 바로 몇 달 전까지. 그런데 갑자기 그 생각을 바꿔야 한다. “케이트.” 갑자기 강한 힘이 내 허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생각에 잠겨 있던 탓에 나는 깜짝 놀라 바르작거리다 그게 이안이라는 것을 깨닫고 멈췄다. “뭐예요? 놀랐잖아요.”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마치 뭐든 다 안다는 듯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내 턱을 잡더니 강제로 한 곳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이 남자가? “하나 사줄 테니 골라 봐.” 시선이 향한 곳에 노점상이 있었다. 여자들 액세서리를 파는 곳. 나는 어이가 없어서 다시 이안을 쳐다봤다. 이 남자 나랑 무슨 데이트 하는 줄 아나? “필요 없어요.” 거절의 말도 소용없었다. 그는 나를 끌어안은 채 강제로 노점상 앞에 서더니 무뚝뚝하게 말했다. “골라.”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내 의견을 간단히 무시할 수 있는 남자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싫다고 하면 억지로 내 손에 쥐여줄 거예요?” 이안이 나를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허리를 감은 손의 힘이 약해졌다고 느꼈을 때였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니.” 그는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그저 뭔가 사주고 싶을 뿐이야.” 어라. 나는 입을 벌리고 그를 올려다봤다. 이 사람,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야? 너무 의외의 모습이라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설마 어젯밤의 일로 미안해하는 걸까? 다른 곳을 향했던 호박색 눈동자가 다시 내 쪽으로 향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어쩐지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빤히 보고 있으면 더 부끄러워하거나 화낼 것 같다. “골라.” 어, 그렇다면. 나는 부랴부랴 노점상의 물건을 살폈다. 이 어색한 기류를 날려 보내기 위해서라면 옷을 사준다 해도 좋다고 했을 것이다. 항구도시라 그런지 물건은 대부분 자개제품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살던 마을에 이런 걸 잘 만드는 아이가 있었는데. 나는 귀걸이 하나를 들어 올렸다가 가격을 듣고 깜짝 놀라서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그 애에게 만들어 달라고 하면 나중에 과자 몇 개 구워주면 끝인데. 너무 비싸다. “이게 좋아?” 귀걸이를 내려놓는 손 위로 커다란 손이 덮였다. 이안은 내가 가격을 듣고 깜짝 놀라 내려놓은 귀걸이를 집어 들었다. “아뇨, 아니예요!” “노점상 물건이 싫으면 가게로 들어갈까?” 노점상도 이렇게 비싼데 저런 휘황찬란한 가게면 더 비쌀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서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이 핀! 이걸로 할게요.” 허겁지겁 집어 든 머리핀은 자개로 장식된 커다란 종류였다. 이런 장식용 머리핀은 돈 주고 사 본 적이 없다. 나는 노점상 주인이 말하는 가격을 듣고 좌절했다. 귀걸이와 그리 다르지 않은 가격이다. 그러니까 난 내가 살던 마을에 돌아가면 그 친구에게 부탁하면 된다고. 그렇게 투덜거리는 사이 이안은 주인에게 돈을 지불하며 말했다. “해 봐.” “아, 필요 없,” 필요 없다고 말하기도 전에 가게 주인이 유리 뒤편에 칠을 한 거울을 꺼내 들어 보였다. 아, 젠장. 하는 수 없이 나는 이안의 눈치를 보며 머리핀을 손에 들고 머리에 꽂는 시늉을 했다. 푸른색과 은색이 섞인 자개 머리핀과 내 빨간색 머리카락은 그럭저럭 잘 어울렸다. 이런 건 진짜 과자 몇 개 만들어 주고 부탁하면 되는데. 그렇게 투덜거리던 나는 내 머리카락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머리카락이 빨간색이었다. 아, 그래. 내 머리카락 색은 원래 빨간색이 맞다. 하지만, “뭐지?” “아니, 아니예요.” 그는 모르는 걸까. 나는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델토스의 공주님은 검은 머리카락이다. 그래서 나는 그 배에 타기 전에 머리카락을 염색했다. 물에 빠지지 않는 한은 괜찮은 거라고 했는데! 염색한 사람을 원망하려다가 내가 물에 빠졌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 맙소사. 물에 빠졌었다. 이안이 나를 구해줬고 내 머리카락을 닦아줬다. 세상에. 모를 리가 없다. 그전까지 나는 검은 머리카락이었다. 물에 구해놨더니 붉은색 머리카락이 드러났을 테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을 때 검은색이 묻어나왔을 게 분명하다. 머릿속에 텅 비어버렸다. 들켰다. 내가 델토스의 공주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하지? 도망쳐야 하나? 이 남자는 델토스 공주와 뮈엘라 왕자의 결혼을 방해하기 위해 날 납치한 자다. 내가 진짜 델토스의 공주가 아니란 걸 알았으니 나는 이게 필요가 없어졌을 것이다. “케이트?” 이안의 목소리에 나조차도 이상할 정도로 몸이 흔들렸다. 나는 삐걱삐걱 몸을 돌려 그를 쳐다봤다. 이안은 방금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어제와도 달라지지 않았다. 설마 눈치채지 못했나? 진짜 델토스 공주의 검은 머리카락이 염색한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느 쪽이지? 이 남자의 표정으로는 감정을 읽기가 힘들다. 눈치챈 걸까, 눈치채지 못 한 걸까? 눈치챈 거라면 배로 돌아가자마자 나를 바다에 빠트려 물고기 밥으로 줄지도 모른다. 무서운 상상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디 아,” 펑! 펑! 이안의 목소리는 갑자기 들려온 폭죽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사람들이 와아아 하고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나는 커다란 불꽃이 수 놓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무슨 일 있나?” 어느샌가 이안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 들렸다. 상인은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 왕자님의 결혼 발표로군.” “결혼 발표?” 이안의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뮈엘라 왕자의 결혼발표. 상대는 틀림없이 델토스의 공주겠지. 나는 임무를 완수했다. 단 한 가지 문제점은 내가 아직 해적의 손아귀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상인은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덧붙였다. “어제 델토스의 공주님이 성 안에 들어가셨거든. 자네들은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군. 이 소식을 모르는 걸 보니.” 끝장이다. 몸에 피가 사악하고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다리가 움직였다. 나는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쳐야 해. 델토스의 공주는 뮈엘라로 가기 위한 여행길에서 두 나라의 결혼을 방해하려는 세력을 걱정했다. 그들은 공주를 납치하거나 죽이는 방법으로 결혼을 방해하려 할 것이 분명했고, 그런 그들을 따돌리기 위해 미끼가 필요했다. 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자원했다. 내가 할게요. 제가, 공주님의 미끼가 될게요. 머리를 염색하고, 한 번도 타지 않은 배에 탔다. 사람들은 공주님이 해상을 이용할 것이라 알고 있었지만, 해상을 이용한 건 공주님으로 분장한 나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팔이 붙잡혔다. 나는 바로 앞에 있던 골목 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안에게 잡혀 들어 올려졌다. “놔, 놔줘요!” 커다란 손이, 강한 힘이 나를 잡고 놔주지 않았다. 제발, 놔줘요. 내가 발버둥 쳤지만, 왕자와 공주의 결혼소식에 기뻐하는 행렬이 길을 메우기 시작한 탓에 내 목소리와 발버둥은 금세 가려졌다. “놔줘! 놔달라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엄마. 아버지. 다시는 못 만나겠지. 이 남자가 화가 나서 나를 죽여 버릴 것이다. 아니면, 어쩌면 그동안의 정이 있으니 목숨만은 살려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래도 결국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가 없다. 눈물이 흘러넘쳤다. 이럴 줄 알고 있었다. 아니, 아니다. 알고 있던 것과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 “케이트.” 나를 부르는 이안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내게 화가 나지 않은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 누구라도 화가 날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떨어지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나를 옭아맨 이안의 팔은 더욱 단단해질 뿐이었다. “케이트, 날 봐.” “죽이지만 마세요. 제발.” 숨을 헐떡이면서 하는 소리라곤 제발 살려달라는 말이었다. 바보 같은 나. 공주님의 미끼가 되기로 자원했을 때 이런 상황이 오면 의연하게 죽여보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이안에게 안겨 부끄러움도 모르고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케이트.” 어느새 우리는 정박해 둔 배를 향해 가고 있었다. 나를 배에 가둘 셈인가! 더 크게 발버둥 치려는 데 이안이 나직하게 말했다. “얌전히 있지 않으면 어젯밤에 못한 걸 여기서 할 거야.” 어젯밤에 못한 거? 천천히 귓가에 스며든 그 말은 번개처럼 뇌리에 꽂혔다. 여, 여기서? 나는 눈물 젖은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여긴 심지어 아직 배 안도 아니다. 배를 수리하던 선원들이 나와 이안을 보고 무슨 일인가 하고 모여드는 게 보였다. “어젯밤?” 심지어 제이드가 싱글거리며 되묻는 바람에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 남자, 미쳤나 봐! “델토스 공주는 검은 머리카락에 너보다 키가 커.” “네?” 이안은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했다. “나는 그녀를 알아. 그리고, 네 아버지도 안다.” 뭐? 너무 얼떨떨해서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눈물을 닦는 것도 잊고 그를 쳐다봤다. 아버지를 안다고? “내가 해적이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제일 처음 탄 해적선이 네 아버지의 배였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니, 알겠다. 아니, 모르겠다. 나는 이해가 되는 것 같으면서도 안 되는 것 같아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너는 나를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알아.” 나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아 멍청하게 이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해적이었다. 아니, 해적이다. 나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어부라고 알고 살았다. 그 믿음이 깨진 건 고작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몇 달 전, 어부로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로 나갔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해적으로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엄마는 쓰러지셨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안의 어깨를 짚은 손이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날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무슨 짓이든 할 생각이었다. 아버지를 구할 수만 있다면. 치안대에 달려가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고 매달렸다. 사람들은 나를 무시하고 상대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그대로 돌아가시게 만들 수는 없었다. 몸을 버릴 각오도 했다. 아버지 대신 죽을 각오도 했다. 어쩌면 둘 다 당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공주님의 미끼가 된 건 말 그대로 운이 좋아서였다. 공주님의 해상로를 짜고 있던 기사가 우연히 나를 봤다고 했다. 그는 내게 공주님의 미끼 자리를 제안했다. 이안의 손이 다가왔다. 흠칫 놀랐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손이 내 볼을 문질렀다. “그래서 바다에서 너를 따라왔지.” “내가, 델토스의 공주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 “그럼, 왜 나를 납치했어요? 내가 공주가 아니란 걸 알았다면 어차피 날 납치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을 거잖아요.” “나는 알지만 다른 녀석들은 모르니까.” 무슨 소린지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보다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다른 해적들이 납치하지 않도록 날 지켜 준거라는 말인가요?” “그래.” 하지만. 입이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다. 하지만 왜? 어째서? 그는 해적이잖아. 어째서 자신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짓을 하지? “내 아버지에게 빚이 있어요?” “없다.” “그럼, 왜?” 이상한 일이다. 주변의 선원들이 한숨을 쉬는 게 보였다. 어떤 사람은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왜들 저러는 거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제이드가 짜증 난다는 말투로 말했다. “왜긴, 이 아가씨야. 우리 선장이 아가씨에게 반해있으니까 그렇지.” 어, 하지만. 나는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물끄러미 그를 보던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말했다. “난 당신을 며칠 전에 처음 봤는데요?” 어쩐지 내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이안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나는 널 예전부터 알았어.” “어, 어떻게요?” “말했잖나. 네 아버지의 배에 탔다고.” 어, 어어어? 뭐라 말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그 말이 진짜였어? 이 남자가 내게 반해있다고? 이안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는 내 볼에 입술을 대는가 싶더니 그대로 미끄러져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처음 봤을 때 네가 세이렌인 줄 알았지.” 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안을 쳐다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내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그 비슷한 이야기를 오늘 아침에 들은 것 같은데. 그거, 제이드의 경험담이 아니었어?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몸이 반응했다. 화악하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엄청나게 부끄럽잖아! “케이트?” 이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젠 알겠다. 저 목소리가 부끄러워 하는 목소리라는 걸. 나는 조용히 물었다. “날 처음 본 게 언제였는데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멈춰있던 그의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안은 자신의 선실로 들어가 나를 침대 위에 앉히더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십 년 전.” 말도 안 돼. 나는 깜짝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이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배 위에서 너를 지켜본 적도 있어.” “진짜로요?” “그래.” 와, 그것참 오싹하다. 아니, 로맨틱하기도 하다.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그의 커다란 손이 내 허벅지 위에 놓였다. “어, 그럼 날, 진짜로 십 년 전부터 그러니까, 좋아했다고요?” 이안의 얼굴이 다가왔다. 약간 어두운 선실 조명 아래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져서 음영을 만들어 냈다. “그래.” 속삭임이, 숨결이 가까웠다. 입술이 닿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 작품 후기 ============================ 진짜로 외전 끝났습니다. 원래는 이 편을 두개로 나눠서 다음주에 올릴까 했는데 가능하면 보름안에 끝났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고 지금 아니면 제가 언제 연참을 하겠냐는 기분도...잠깐, 이 후기를 쓰는 사이 12시가 지났네요...흑흑... 연참 인정해주세요. 게다가 116화에서 댓글을 많이 써주셨는데 다들 의견을 써주신 거라 제가 평소대로 대댓을 달면 일관된 내용을 달게되서 그 화만 대댓을 패스한 부분도 있고. 감사하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한 마음에 한 편 더 올렸습니다. 외전은 진짜로 이렇게 끝나요. 이안과 케이트가 러브러브...아니구나, 이안이 케이트에게 러브러브하게 굴면 어떤지 대충 느낌이 오셨을것 같네요. 4부는 다음주 한 주 쉬고 별 문제 없으면 26일 (수요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24일 월요일부터 시작할까 했는데 아직 비축 쌓아둔게 별로 없어요. 항상 함께 달려주시고 댓글 달아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제 마음 아시죠? 00119 [공지] 4부 빨간 머리 =========================================================================                            마법을 배척하는 나라 뮈엘라 호건가의 상속녀 케이트와 로엔백작가의 서자 이안의 수도 에바니엘에서 벌어지는 달콤 살벌한 사건. ============================ 작품 후기 ============================ 처음 연재할때의 기분을 다시 한 번 느껴볼까 해서 작품 소개처럼 적어봤습니다. 그래도 작품 소개는 그대로 갈 예정이예요. 미리니름이 될 수 있어서. 새 글이 떠서 읭? 하고 기대하신 분께는 죄송합니다. 매 부 마다 이런식으로 공지를 띄워서 경계선을 만드는데 이번에는 그걸 깜빡 했더라고요. 4부는 예정대로 3월 26일(수요일) 부터 시작합니다. 보통 비축분을 5 ~ 10화정도 써놓고 시작하는데 이번 4부는 상황이 바뀌는 게 많아서 설명을 주절주절 하다보니 고치고 뜯어 고치고, 날리고 이러고 있네요. 아놔... 뮈엘라의 수사관은 빨간날 제외하고 평일 오후 9시에서 11시 사이에 업뎃됩니다. 아참, 쓴다 하고 까먹어서 수정합니다. 검은 소야곡은 뮈엘라의 수사관 4부 시작하는 날자 (3월 26일)에 습작으로 돌리겠습니다. 이제 슬슬 보실분은 다 보신것 같아서요. 뮈엘라 올리면서 습작으로 돌릴게요. 노블쪽 게시판도 같이 습작화 하겠습니다. 00120 1. 큐바인 하우스 =========================================================================                            빨간 머리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마녀는 그녀가 주기적으로 변호사를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후에 찾아와서 두어 시간쯤 후에 돌아간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늦어버린 모양이었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겨울이라 낮이 짧다는 점도 한몫했다. 여자가 추위에 몸을 떨더니 종종걸음으로 걷기 시작하는 것까지 지켜본 마녀는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다. 마녀는 어둑하고 사람이 없는 길에서도 그녀를 덮치지 않은 채 생각했다. 처음 봤을 때의 달콤한 향기는 미약했다.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 심장에서 흐르던, 몸 밖까지 풍겨 나오던 그 달콤한 향기는 어떨 때는 느껴지고 어떨 때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녀는 입맛을 다시며 빨간 머리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문이 열리자 검은 남자가 나오더니 그녀를 끌어당겼다. 여자는 잠시 거부하는가 싶더니 곧 순순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 잠깐이지만 여자에게서 다시 달콤한 향기가 풍기기 시작했다. === 이안은 케이트에게서 손을 떼고 물러났다. 케이트의 얼굴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호건 가는 그녀와 비스마르크의 만남을 거부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가주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였지만 진짜 이유가 그게 아니라는 건 케이트도 알았다. 비스마르크가 케이트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재산을 나눠 줘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잠시 들렀지만 에스메랄다의 입장은 여전했다. 이곳은 비스마르크의 집이지만 현재 와병생활 중인 비스마르크의 대리는 제프리이므로 미혼인 케이트를 들일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린가 했던 케이트는 변호사에게 찾아가 자세한 설명을 듣고 입을 딱 벌렸다. 한 집에 미혼인 남녀 단둘이 지내는 것은 사회 통념상 허용되지 않는다. 에스메랄다는 그 점을 들어 케이트의 입장을 거부한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누워있고 에스메랄다는 집을 자주 비우기 때문에 제프리와 케이트 단둘만 지내야 하므로 케이트가 제프리와 결혼할 게 아니라면 호건가의 저택에서 지낼 수 없다는 것이다. 호건가의 저택에서 머문다니 말도 안 된다. 잠시 할아버지를 만나기만 하고 돌아갈 것이라는 케이트의 입장에도 에스메랄다는 그녀가 찾아올 때마다 비스마르크가 취침 중이거나 의사 진료 중이라는 이유를 들어 문전박대했다. 변호사인 막스는 할아버지를 만나게 해달라는 케이트의 부탁에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대답했다. 어쨌거나 현재 호건 가의 실세는 에스메랄다니까. 대신 그는 엘리자베스와 니콜라스가 도망쳐서 결혼한 마을에 가서 결혼증명서를 가지고 왔다. 법원에 제출해 그 결혼이 인정된다면 케이트는 확실히 호건 가의 사람으로 법적으로 인정된다. “케이트!” 부엌에 있던 제인이 케이트에게 달려왔다. 그녀는 지친 기색을 지우고 제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늦어서 미안해. 저녁 먹었니?” “네. 내가 처리했어요.” 제가 준비했어요. 케이트가 부드럽게 지적하자 소년은 따라 말하더니 씩 웃었다. 이안은 사이좋은 오누이 같은 두 사람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면접은 어땠어요?” 이윽고 케이트가 이안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그는 대답 없이 몸을 휙 돌려 응접실로 들어가 버렸다. 뭐니? 케이트가 제인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그녀가 코트를 거는 사이 제인이 쫑알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 명 왔는데요, 둘 다 찔찔 짜면서 도망쳤어요.” 찔찔 짜는 게 아니고 울면서라고 고쳐주며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줄 알았다. 새로운 하녀를 구하는데 이안이 면접을 보게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 바빴고, 면접자 중 그 두 명은 오늘 오겠다고 연락해왔다. 게다가 케이트가 면접을 봐서 채용한다 해도 새로운 하녀들은 그녀가 없는 큐바인 하우스에서 일해야 한다. 지금 상태대로라면 사람을 구해도 일주일도 못 가 도망쳐 버릴 것이다. “이안, 잠깐만요.” 케이트는 옷을 갈아입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이안과 이야기를 해야 할 시간이다. 그녀는 곧 큐바인 하우스를 떠날 것이다. 더이상 하녀로 일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래서 케이트는 요즘 상당히 바빴다. 그녀가 살 집도 구하는 동시에 그녀가 나간 다음 큐바인 하우스를 관리할 사용인도 채용해야 했다. 거기에 그녀가 엘리자베스와 니콜라스의 딸이라는 것을 입증할 서류를 살펴보고, 엘리자베스의 재산을 물려받는 법적 절차도 밟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엘리자베스의 재산에 접근하는 데 필요한 것은 그녀가 가진 목걸이뿐이라는 점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재산에 접근할 수 있는 허가를 오직 목걸이를 소지한 사람으로 정해 두었던 것이다. 은행에 알아보니 일 년 전에 목걸이를 소지한 여자가 약간의 돈을 인출한 기록이 남아있었다. 케이트는 그 여자가 데일 남작 부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목걸이와 함께 데일 남작 부인에게 맡겼던 편지가 떠올랐다. 약간의 돈만 인출한 것은 정말 목걸이만으로 돈에 접근할 수 있는지 확인한 것이겠지. “뭐지?” 그렇게 대답했지만 이안의 시선은 책을 향해 있었다. 그만둘 거라는 말은 이미 며칠 전에 했다. 케이트는 그때 그 말이 가장 힘든 말이라고 생각했고 그게 사실이었다.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면접 보는 사람들에게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주면 안 돼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안 그러면 여기서 일할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상관없다.” 그건 네 생각이고. 케이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새로운 사용인이 구해질 때까지만 여기서 일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안이 죄다 쫓아 보내서야. 설마 이 남자 일부러 그녀가 그만두지 못하도록 면접 보러 오는 사람들을 죄다 겁줘서 쫓아내는 건 아니겠지. 진실에 근접한 생각을 한 케이트는 머리를 저으며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이안이 이상한 남자라 해도 뭐하러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전에도 말했지만, 전 곧 그만둘 거예요. 그러니 다른 사용인들을 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아침을 굶고 싶지 않다면.” 이안은 책에서 시선을 떼고 케이트를 쳐다봤다. 이 작은 빨간 머리 여자는 더이상 얌전하지도, 소극적이지도 않았다. 그가 처음 알라나데일에서 만났을 때의 케이트와 근접해가고 있었다. “나와 한 약속은 어쩔 생각이지?” 무슨 약속? 그렇게 물으려던 케이트는 바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떠올렸다. “지, 지켰잖아요!” “언제?” “당신, 나 좋다면서요!”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천천히 말했다. “취소했다.” 그게 무슨 지나가던 고양이가 멍멍하는 소리란 말인가. 케이트는 어이가 없어서 눈을 깜빡이다가 반박했다. “취소하기 전에는 성공했다는 말이잖아요. 언제까지 좋아하게 만들라는 말은 없었으니 어쨌거나 전 성공 한 거죠.” 이안은 케이트를 빤히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취소했으니 좋아했던 것도 사라진 거다. 그러니 네 성공도 사라진 거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안 그래도 지쳤는데 이안까지도 이렇게 나오자 케이트는 짜증이 솟구쳤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그가 앉은 소파의 팔걸이를 손으로 짚고 말했다. “어린아이처럼 떼쓰지 마요!” 두 사람의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호흡이 느껴질 정도였다. 평소라면 스스로 놀라서 물러났을 테지만 짜증이 난 케이트는 움직이지 않고 이안을 노려봤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그런 그녀의 태도에 이안은 흠하고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는 이런 케이트의 태도가 더 좋았다. 당돌하고 당찬 면이. 하지만 너무 떽떽거리는 건 별로다. 이안은 길게 뻗어 있던 다리를 슬쩍 움직여 케이트의 다리를 툭 쳤다. “꺅!” 다리가 흔들리면서 케이트의 몸이 무너졌다. 그녀의 이마가 이안의 어깨에 부딪쳤다. 아야 하는 신음은 그의 가슴에 막혀 흘러나오지 못했다. 이안은 나직하게 웃었다. 알라나데일에서 청소도구함에 갇혔을 때가 생각났다. 케이트는 한참을 버둥거린 끝에 그에게서 떨어질 수 있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화나기도 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무슨 짓이예요?” 이안은 화가 난 케이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웃은 탓에 그의 얼굴은 부드럽게 풀려있었다. “여기 있어.” 뜻밖의 말이 이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녀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남자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여기 있으라고? 재미있게도 이안 역시 말을 한 다음에야 자신의 진심을 알았다. 그는 케이트가 그의 곁에 있기를 바랐다. 더이상 하녀가 아니라면 더더욱 좋다. 케이트는 멍하니 이안을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안 돼요.” “어째서?” “나는 하녀가 아니니까요.” 그녀는 이제 하녀가 아니다. 주종관계도, 부부관계도 아닌 남녀가 단둘이 한 집에 머무는 건 사회 통념상 부도덕한 일이다. “다른 집을 구해서 혼자 살 건가?” 이안의 지적에 케이트는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린 시절 꿈은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과 사는 거였다. 하지만 당장 어디서 남편을 구한단 말인가. 적당히 안전하고 조용한 거리에 작은 집을 구해 사는 방법도 있다. 큐바인 거리가 조용하고 안전하긴 하지만 여긴 사용인을 둔 전문직이나 독신귀족들이 사는 동네다. 여기서 사용인 없이 혼자사는 게 가능할까. 게다가 지금은 겨울이고 사교계 시즌이 아니어서 매물로 나온 건물이 없었다. 나온 건물은 죄다 여름용이라 겨울을 나기엔 불편했다. 그렇다고 큐바인 하우스에서 살 수는 없다. 여긴 그녀의 집이 아니고, 그녀는 이곳에서 일하는 사용인도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다른 집을 구해서 나가야 한다. “그럴 거예요.”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분 좋아 보이던 조금 전과는 대조적으로 상당히 불쾌한 표정으로 그는 입을 열었다. “호건 가의 상속녀가 혼자 산다고?” 케이트는 곧 그가 하려는 말을 이해했다. 호건 가의 상속녀라면 돈을 노리는 범죄에 희생될 수 있다. 지금이야 알고 있는 사람이 변호사와 호건 가의 사람들뿐이니 혼자 돌아다녀도 안전한 것이지만 앞으로는 혼자 돌아다니는 게 어려울지도 모른다. 케이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세상에. 그런 점은 생각하지 못했다. 집을 구하는 것과 큐바인 하우스의 새로운 사용인을 구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했던 탓이다. 호건 가의 저택을 지키던 많은 용병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도 그렇게 집을 지키는 용병을 고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게 가능할까? 그녀는 눈앞에 이안이 있다는 것도 잊고 생각에 잠겼다. 용병을 고용한다면 매달 혹은 매주 그들에게 급여를 줘야 한다. 집을 사는 것만으로는 지출이 끝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의 저금은 상당했지만 화수분은 아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이안이 손을 뻗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낚아채 끌어당겼다. 헉하는 사이 다시 케이트는 그의 무릎에 넘어졌다. “뭐하는 거예요!” 발칵 화를 내며 올려다보는 초록색 눈동자에 대고 이안이 말했다. “여기 있어.”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4부의 1장 이름은 3부와 마찬가지로 큐바인 하우스가 되었습니다. 오오, 놀라워라. 아, 그러고보니 제가 먹이를 주는 길고양이 중 가장 예뻐하는 돼지를 대빵이 괴롭히는 지난 한달이었는데 며칠전에 결국 돼지를 괴롭히는 대빵을 혼내는(이라기 보다는 쫓아가면서 그러지 마! 라고 외치는) 걸 포기하고 대빵을 회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제 우연히 대빵과 단 둘이 만났길래 들고 있던 소고기 져키를 주면서 "돼지와 친하게 지내렴." 이라고 마치 자식을 괴롭히는 동네 아이를 다루는 마음으로 말을 걸었더니 오늘 드디어 돼지와 대빵이 (약간 거리는 있지만)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착하다 라고 중얼거리면서 사료를 잔뜩 뿌려주고 왔어요. ...지나가던 사람이 보면 전 어딘가 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거라는 걸 한참 지난 뒤에 깨달았습니다. 00121 1. 큐바인 하우스 =========================================================================                            “가족 찾기는 잘 돼 가고 있어?” 스프 위에 두툼하게 자른 빵 한 조각을 올리며 앤이 물었다. 케이트는 빵을 집으려다가 멈칫했다. 아직 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가족을 찾았다는 것을. 그녀를 속이려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녀도 아직 전부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호건 가의 상속녀라니. 케이트는 며칠 전 이안이 제기한 문제점을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용병을 고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앤은 한숨 쉬는 친구의 태도에서 가족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아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에라. 그녀는 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잔뜩 넣어 내밀었다. 단 건 언제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법이다. “사실은,” 케이트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가족을 찾았다는 말을 앤에게 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소문이 도는 건 싫다. 앤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여긴 식당이다. 그녀는 저녁 식사 시간이 막바지라 손님이 적은 식당 안을 살폈다. 손님은 적지만 직원은 여전히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집을 나가려고.” “그 집? 큐바인 하우스?” 당연하게도 앤은 놀란 기색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케이트는 말을 이었다. “하녀 말고 다른 일을 해볼까 해.” 아아. 앤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트는 글을 읽고 쓸 줄 안다. 대필자나 대독자를 한다면 정기적이지는 않아도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거기에 성실하니 어느 노부인의 대필자가 된다면 정기적으로 급여를 받고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럼 이안은?” 잔을 받던 케이트의 손이 잠깐 멈췄다. 어제, 여기 있으라는 이안의 말에 한마디도 못하고 도망쳐 버렸다. 여기 있으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대꾸할 말을 잃었을 뿐이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했던 게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와 마주쳤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잊어버리려 애썼다. “일할 사람을 구하고 있어.” 그렇구나. 앤은 홍차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과 하녀의 금단의 로맨스가 사라지다니 좀 섭섭했다. 하지만 더이상 케이트는 하녀가 아니니까 오히려 더 맺어지기 쉬운 거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잠시 어깨를 늘어트렸다. 하지만 이젠 두 사람이 자주 볼 수 없다는 말이잖아. “보고 싶겠네.” “자유시간이 많이 생겨서 널 보러 더 자주 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 나 말고 이안.” 응? 거기까지 이야기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앤은 케이트가 이야기하는 것이 그녀와 자신의 관계라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앤.” 케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앤은 민망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 나야 물론 보고 싶지.” “그런 관계 아니라니까.” 또 저 소리다. 앤은 씨익 웃어 보였다. 그래, 그래.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친구의 모습에 케이트는 모른 척 찻잔을 입에 댔다. 진짜로 그런 관계가 아니다. 이안이 취소했으니까.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좋다고 했다가 취소라고 했다가. 당시엔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 새삼 생각해 보니 우스웠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도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네. 케이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이안을 보는 것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짜증 나고 이상한 남자. 하지만 도와줬고 구해줬다. 고마운 남자다.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면, 마음이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녀는 예전에 앤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두 사람의 위치가 달랐다면 어땠을까. 그 말은 마치 예언처럼 맞았다. 더이상 그녀는 하녀가 아니다. “호건 가라면 귀족과 결혼해도 손색이 없겠지?” 느닷없는 케이트의 말에 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웃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가. 겉으로 보기엔 훌륭히 사랑 때문에 고민하는 아가씨의 모습이기에 그냥 뒀더니 진짜였던 모양이다. 설마 호건 가의 아가씨였다면 하는 상상을 하는 걸까. 그 상상이 진짜라는 것을 모르는 앤은 케이트도 자신과 같은 상상을 했다는 사실이 기뻐 약간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럼, 당연하지! 호건 가라면 왕자님과도 결혼할 수 있을걸?” 그렇다면 정말로 이안과 케이트의 사이를 막는 벽이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이안과의 관계가 마치 둑이 터진 것처럼 흘러넘쳤다. 문득 케이트는 궁금해졌다. 그와 비교했을 때 비슷한 위치에 도달한 그녀를 이안이 어떻게 대할지. 강제로 안거나 키스를 했다. 그건 하녀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까. 그렇게 생각하자 케이트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녀가 호건가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이안의 태도가 바뀐다면 슬플 것 같았다. 이안이라는 남자에게 실망할 것 같았다. 마지막 손님이 식사를 마쳤다. 이야기를 나누던 케이트와 앤은 홀과 이어진 통로를 통해 마지막 손님이 식기를 내려놓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의 티타임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 가야겠다.” “응. 다음에 봐.” 케이트는 코트를 집어 들고 약간 무거운 발걸음으로 주방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친구가 나가자 앤도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부주방장이 되어 이런 뒷정리는 하지 않아도 되지만 늦은 시간까지 남은 사람들에게 자신과 친구가 먹고 마신 테이블을 정리하게 하는 건 좀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자리를 옮기자 통로를 통해 홀에서 식사를 마친 남자도 계산을 마치고 직원의 도움을 받아 코트를 입고 있는 게 보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키가 큰데 호리호리한 체격은 유연해 보였다. 남자가 앤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앤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했다. 남자는 식당을 나가기 전에 직원에게 뭔가를 묻더니 고개를 끄덕해 보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고 돌아온 직원은 앤이 남자가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남자, 엘프라는 거 알아요?” 앤이 일하는 식당은 꽤 유명한 곳이다. 손님으로 드워프나 엘프가 오는 경우가 간간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앤은 드워프 손님보다는 엘프 손님이 좋았다. 양이 적다고 투덜거리지 않으니까. “그래? 나가기 전에 뭘 물어 본 거야?” “아, 그거요?” 직원은 머리를 긁적긁적하더니 갸우뚱하며 말했다. “사람을 찾는대요. 스무 살 중반에 빨간 머리 아가씨라는데.” 빨간 머리 아가씨라니 케이트가 생각난다. 하지만 케이트는 인간이니까 엘프가 찾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앤은 장단을 맞춰주기 위해 물었다. “이름은 뭔데?” 직원은 우물우물하더니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말했다. “카티야? 카테아? 뭐 그런 이름이었는데요.” 식당 직원이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다니. 한심스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앤은 장난삼아 말했다. “그거 혹시 케이트 아니었어?” “에이, 앤. 내가 아무리 그래도 케이트를 카티뭐로 듣겠어요?” 그건 그렇지. 앤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에바니엘에 스무 살 중반의 빨간 머리 아가씨는 많다. 케이트는 식당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멈춰 섰다.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저건 이안이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가갔다. “이안?” 멍하니 서 있는 것처럼 보이던 남자의 몸이 움직였다. 이안은 케이트를 보더니 가지. 하고 몸을 돌렸다. “여긴 무슨 일이예요? 오늘 타운 하우스에 간다고 안 했어요?” 그는 오늘 아침 실라로부터 저녁 식사를 함께 하지 않겠느냐는 초청을 받았다. 그 편지를 꺼내 준 게 케이트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이안이 저녁 식사를 어머니와 할 것이라 생각해서 이런 늦은 시간까지 앤과 함께 있었다. “갔다 왔다.” “여긴 무슨 일이예요?” 타운 하우스는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 큐바인 하우스로 가는 길이라 해도 번화가에 들리려면 조금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케이트는 그가 번화가에 들른 목적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제이드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인가? 이안은 잠시 케이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실라가 오늘 그를 부른 것은 큐바인 하우스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어느 건축가가 다 무너져 가는 큐바인 하우스를 허물고 다시 짓고 싶다며 큐바인 하우스를 사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집의 소유주는 실라였지만 살고있는 사람은 이안이다. 게다가 그 집은 언젠가 이안의 생모가 찾아오면 살게 할 생각으로 사뒀던 집이니 실라는 큐바인 하우스를 처분하는 데 이안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냥? 케이트는 이안의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이드를 만나러 온 게 아니라는 말인가? 하지만 이안이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케이트는 조용히 그의 곁에서 걷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밤에 혼자 걸어 가야 했는데 이안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심장이 사라진 사건의 피해자는 대부분 고층거리의 주민들이다 보니 사람들은 그 사건을 빠르고 쉽게 잊기 시작했다. 마녀가 사라지고 더이상의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자, 이안과 에드워드는 그 사건의 범인이 마녀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 마녀를 잡은 건 아니다. 마녀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그래서 이안은 혼자 마녀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타운 하우스에서 저녁 식사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그는 약간 돌아가더라도 케이트를 기다렸다가 함께 가기로 결심했다. 이안은 자신의 옆에서 종종거리며 따라오는 케이트를 힐끔 쳐다봤다. 그녀의 변화는 여기에도 있었다. 예전의 케이트는 이안과 옆에서 걷기는 거부했다. 그녀는 하녀니까. 주인과 함께 걸을 수 없다는 무의식의 발로였으리라. “로엔 백작 부인은 잘 계시죠?” 조용한 시간이 이어지자 케이트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안은 그녀를 힐끔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어머니는 케이트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아직 케이트가 호건가의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적었다. 실라는 여전히 케이트가 하녀라고 알고 있다. 그런 와중에 그녀가 이안에게 케이트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래. 네 안부를 물어보시더군.” “그래요?” 케이트는 이안을 보며 미소 지어보였다. 로엔 백작 부인이 자신의 집에서 잠깐 일한 하녀를 기억하고 안부를 물어봐 준다는 게 기뻤다. 그건, 그녀가 이안에게 가장무도회에 끌려갔다는 기억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너는 내 어머니를 좋아하는 모양이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케이트는 이안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의 걸음 속도가 느려졌다. “좋은 분이시잖아요?” 그래. 이안은 그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라도 같은 말을 했다. 그 애, 좋은 아이잖니? 그가 입을 다물자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메워졌다. 뭐지? 케이트는 이안의 느닷없는 말을 더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걸었다. 그가 이상하게 행동한 게 어디 하루 이틀의 일이던가. 멀리서 다가닥 다가닥하고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를 따르는 덜커덩하는 바퀴 소리에 이안은 손을 뻗어 케이트를 끌어당겼다. 화악하고 이안의 냄새가 강해지자 케이트의 몸이 굳었다. 어, 나 오늘 입술연지 발랐는데. 그런 생각이 든 것은 그녀의 얼굴이 그의 가슴에 부딪힌 다음이었다. 덜커덩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지나갔다. “아, 고마워요. 아니, 미안해요.” 케이트의 말에 이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케이트는 손을 들어 연지가 묻은 부분을 문지르며 말했다. “여기 묻었어요.” 작은 손이 늑골 아랫부분을 문지르는 게 느껴졌다. 이안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쳐다봤다. 순수하게 지워질까 싶어 문지르는 거였지만 마치 유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조끼가 검은색이라 티가 많이 나지는 않는다. 잘 빨면 지워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케이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이안의 얼굴이 다가왔다. 헉? 케이트는 깜짝 놀라 손을 내밀려 했지만 그가 더 빨랐다. 입술이 닿았을 때도 잠시 얼어붙었던 케이트의 머릿속에 제일 처음 든 생각은 나 입술연지 발랐다니까? 였다. “응…,” 순식간에 숨이 가빠왔다. 케이트는 곧 그에게서 벗어나려 몸을 움직였다. 순순히 놔주는 이안의 입술은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화를 내려고 그의 얼굴을 쳐다본 케이트는 그만 기회를 놓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는 거지?” “아, 하하하, 그야,” 말을 잊지 못하고 깔깔대는 그녀의 태도에 이안의 기분이 불쾌해졌다. “하하하, 입술이 빨개요. 아하하하.” 이안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문질렀다. 사실이다. 그제야 그는 오늘 케이트의 얼굴이 평소보다 화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흠. 배를 잡고 웃는 케이트를 내려다보며 이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화내는 것보다 웃는 게 더 좋다. 하지만 너무 즐거워한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허리를 끌어당길 때까지도 웃고 있었다. 저 이안의 입술이 불그스름하다니. 혼자 보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녀는 그가 강제로 자신의 턱을 들어 올리자 그제야 웃음을 멈췄다. “어, 어?” “꽤나 재미있어하는 군.” 아차, 바보 취급당한다고 생각한 지도 모른다. 자신이 실례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케이트는 어두운 밤거리를 동행하기엔 심장을 빼앗는 마녀 다음으로 위험한 남자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안은 케이트의 입술을 빨았다. 입술에서 이상한 맛이 났다. 그가 가볍게 깨물자 케이트가 깜짝 놀라 입술을 벌렸다. 그 안에는 달콤하고 향긋한 맛이 났다. 케이트가 마신 설탕과 우유를 가득 넣은 홍차의 맛이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 회식이 있어서 늦었어요~ 초반은 좀 달달하죠? 하하하하하 이게 다~ 훼이큽니다. 아, 검은 소야곡 아직 다 못읽었다고 댓글 남겨주신 분이 계셔서 다시 풀어놨습니다.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12시에 습작화할게요~ 00122 1. 큐바인 하우스 =========================================================================                            입술이 떨어졌을 때 케이트는 달아오른 얼굴로 이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좀 화사하던 입술의 색이 벗겨져 있었다. 이안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문질러 거기 묻은 것을 닦아냈다. “어, 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화를 내야 하지만, 그녀가 그를 기분 나쁘게 만든 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래도 된다는 법은 없잖아? 거기까지 생각하는데 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안이 케이트의 입술을 문지른 엄지손가락을 핥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뭐, 뭐하는 거예요?” 케이트는 깜짝 놀라 그에게 매달렸다. 저런 태도를 전에 본 적이 있다. 로즈마리의 입가에 묻은 걸 핥아 먹던 에드워드에게서. 이 남자, 그걸 보고 배운 건 아니겠지! 하지만 이안은 케이트가 물어본 게 다른 이유라고 생각했다. “키스했다.” 케이트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안은 그녀의 뒤통수를 탁 치면 눈동자가 굴러 나오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아니, 그게 문제긴 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그러게. 케이트는 화도 나고 속상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 남자는 왜 항상 이런 식인거지? 그러다 문득 그녀는 그녀가 하녀였을 때와 지금, 이안의 태도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녀였을 때도 실컷 휘두르더니 호건 가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도 마음대로 끌어안고 키스한다. 적어도 하녀였기 때문에 그녀를 함부로 한 건 아니었다. 아니, 하지만 그게 용서가 될 일은 아니잖아. 결국 케이트는 이안에게 주의를 주기로 결심했다. “전에 말했죠? 하지 말라고.”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전에? 잠시 후에 기억이 났다. 아, 그거. 그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결혼하자고 했더니 싫다고 하지 않았던가?” 청혼을 거절당한 게 그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태도에 케이트는 입을 딱 벌렸다. “그, 이게 무슨,” 잠시 패닉을 일으킨 케이트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정신을 차렸다. 침착하자. 저 남자의 페이스에 말려선 안 돼.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고 당당하게 말했다. “아니죠! 내가 당신 하녀인 이상 당신이 만질 권리가 있다는 헛소리를 했잖아요.” “아.” 이제야 기억났다는 투다. 결국 그때 그의 말은 진짜 헛소리였다는 뜻이다. 케이트는 어이가 없어서 아아? 하고 그의 말을 흉내 냈다. 이 남자가 정말? “난 이제 당신 하녀가 아니니까 그런 권리 없는 거예요. 그렇죠?” 흠. 이안은 팔짱을 끼더니 케이트를 삐뚜름하게 내려다봤다. 또 무슨 헛소리를 늘어놓으려고 저러지? 그 시선에 케이트가 불편해지기 시작했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아직 너는 내 하녀잖아. 그렇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띵하고 머리가 울려왔다. 그녀가 반박하기도 전에 이안의 손이 그녀의 허리에 닿았다. “네가 그만두기 전까지는 내 마음대로 만질 수 있다는 말이군.” “아니, 아니, 아니죠!” 케이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그녀를 들어 올려 안았다. 몸이 휙하고 들어 올려지자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같은 높이에서 그의 얼굴이 보였다. 호박색 눈동자가 강렬한 빛을 띠고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보자 케이트는 잠시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마음대로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내려줘요.” 하아. 하고 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적반하장인 태도에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그다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입을 딱 벌렸다. “넌 정말 불평이 많아.” 누가 할 소릴! 케이트가 어이없어 말이 막힌 것도 모르고 이안은 그녀를 내려놓았다. 슬슬 케이트는 그녀가 비정상인지 그가 비정상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 변호사 막스 로건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온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의 일이었다. 케이트는 두 명의 새로운 사용인 면접을 끝내자마자 이제는 익숙해진 변호사의 사무실을 찾았다. “지난번에 살 집을 찾는다고 했잖아요?” 혹시 몰라서 그에게도 여자가 살만한 괜찮은 집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둔 차였다. 괜찮은 집이 나왔나? 케이트는 기대감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몰라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막스는 헛기침을 한 뒤 손에 든 펜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왜 저러는 거지? 참다못한 케이트가 물었다. “안 좋은 집인가요?” “위치는 참 좋은데 말이죠.” “아, 그럼 집 상태가 안 좋은가요?” 그렇다 해도 겨울을 지낼 수 있다면 됐다. 그 사이에 보수하면 되니까. 하지만 막스는 선뜻 말하기 어려운지 뜸을 들였다. “판매자가 스미스양에게 먼저 기회를 주고 싶다고 해서 말이죠.” 나한테?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날 아는 사람인가? 어째서? 그녀는 막스를 재촉하듯 몸을 내밀었다. “이게, 그 평범한 집이 아니라. 아, 평범한 집이긴 한데 스미스양에게는 좀 특별하다고 해야 하나.” “어디 있는 집인데요?” “큐바인 거리입니다.” 어라? 케이트는 눈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겼다. 큐바인 거리에 매물로 나온 집이 있었던가? 나왔다면 그녀가 모를 리 없다. 시나몬에게도 혹시 괜찮은 집이 나오면 알려달라고 말해둔 상태였으니까. “나온 지 얼마 안 된 집인가 보죠?” “어, 네. 오늘 아침에 매물로 나왔어요. 판매자도 어제저녁에 사자마자 바로 파는 거라더군요.” “어머, 왜요?”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런 케이트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막스가 입을 열었다. “건축가가 기존의 집을 무너트리고 다시 지으려고 샀는데 갑자기 자금 사정이 안 좋아졌답니다. 그래서 판다는군요.” “그럼 원주인에게 다시 파는 게 낫지 않나요?” “글쎄요. 원주인에게는 팔고 싶지 않다는군요.” 어째서? 케이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사실 이해가 안 되는 건 막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그동안 변호사로서 일한 경험으로 쓸데없는 자존심이라는 게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일도 그런 종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살 때 거들먹거리고 샀는데 다시 파려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뭐 이런 게 아닐까요?” 그래?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거들먹거렸길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에 내뱉지는 않았다. “어딘데요? 큐바인 거리에 있는 집이면 대충 제가 알 것 같은데요.” “아, 아주 잘 알 겁니다.”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그렇게 갸우뚱하던 케이트의 머리는 막스의 다음 말에 딱 멈췄다. “지금 스미스양이 살고 있는 집입니다. 큐바인 하우스라고 부르죠.”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큐바인 하우스? 그 큐바인 하우스? 이안이 살고 있고 그녀가 하녀로 일하는 그 큐바인 하우스? 큐바인 하우스가 매물로 나왔다니, 거기서 일하고 있는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이건 너무 하잖아! 분노는 놀람 다음에 찾아왔다. 그녀는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이안에게 덤벼들었다. 응접실엔 이안뿐 아니라 제이드도 앉아있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 집 팔았어요?” 이안은 찻잔을 집어 들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래? 그래라고 했어요?” 그녀가 덤벼드는 바람에 찻잔이 흔들렸다. 이안은 차가 흘러 바지를 적시는 것을 본 뒤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제이드가 재빨리 내민 손수건을 무시한 채 말했다. “이 집은 내 어머니의 소유로 되어 있다. 그분이 자기 소유를 파셨다는데 그게 그렇게 큰일인가?” 큰일이지! 난 여기서 일하고 있단 말야! 최소한 말은 해줘야 할 거 아냐! 그렇게 소리치려던 케이트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그녀는 하녀를 그만두려 하지 않았나. 집을 구해 하녀를 그만두고 나가려 했다. 그러니 이 집을 팔건 말건 그건 그녀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다른 문제가 생긴다. 그녀는 오늘 아침에도 큐바인 하우스에서 일한다는 지원자를 면접했다. “알려줬다면 일부러 사람을 구하느라 면접을 보지 않아도 되잖아요.” 아, 그렇군. 이안은 그제야 그 사실을 떠올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남자가! 케이트는 이안의 무관심함에 치를 떨었다. 바빠 죽겠는데 면접까지 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거기에 그녀가 살 집은 영 구해지지 않아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었다. 하지만 톡 건드리면 빵! 하고 터질 것 같은 게 뻔히 보이는 케이트에게 이안은 찻잔을 자신에게서 최대한 멀리 내려놓으며 무신경하게 말했다. “그래. 이 집을 팔았다. 다음 주 안에 집을 비워달라더군.” 다음 주! 케이트는 이번에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일주일 안에 어떻게 짐을 싼단 말인가. 그런 그녀를 이안은 뻐끔뻐끔 거리는 게 마치 붕어 같다고 생각했다. 좀 예쁘장한 붕어. “그러니 너도 이사할 준비를,” 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케이트가 탕하고 이안이 앉은 의자를 걷어찼다. 제이드의 눈이 뒤통수를 탁 치면 눈동자가 굴러떨어질 정도로 커졌다. 그는 처음으로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글이글 불타는 표정으로 케이트가 입을 열었다. “전 이사 안 가요.” 무슨 말이냐는 듯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케이트는 묘하게도 화난 기색인데 표정은 웃고 있었다. 이건 뭐지? 그가 어리둥절해할 때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 집, 제가 살 거거든요.”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제이드는 마치 깜빡 잊어버린 약속이 있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현관문 밖에서 배웅 나온 케이트에게 물었다. “정말로 살 생각입니까?” 큐바인 하우스를 사겠다는 그녀의 선언에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잠깐 이안의 눈이 반짝였지만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케이트가 큐바인 하우스를 사게 되면 타운 하우스로 돌아 가야 하는 이안과 헤어지게 된다. 물론 그녀가 더 이상 하녀가 아니라는 점은 이안으로서 좋아할 일이지만 헤어지게 된다는데 눈을 빛낼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음, 잘 모르겠어요.” 케이트는 옆에 선 제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수줍게 대답했다. 욱해서 한 말이지 깊게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다. “수리비도 생각해야 하고, 제가 혼자 살기엔 너무 커요.” “케이트, 그냥 이 집 사면 안 돼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인이 매달려 왔다. “나, 주인님이랑 둘이 살기 싫단 말예요.” 나가 아니라 저라고 했지. 그 와중에도 그녀는 제인의 말투를 고쳐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부터 이런다. 제발 큐바인 하우스를 사서 자신과 있어 달라는 제인의 부탁은 소년으로서는 당연했다. 제인은 이안을 무서워하니까. 제이드는 겁을 집어먹은 제인의 모습에 흠 하고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뭐, 너무 큰 게 문제라면 해결할 방법은 여러 가지 있으니까요. 좀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요.” “해결할 방법이요?” “하숙을 치는 방법도 있고요.” 하숙이라니, 생각도 안 해 본 방법에 케이트의 얼굴이 멍해졌다. 시골에서 산 케이트로서는 그런 게 있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지만 수도인 에바니엘은 하숙이라는 게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에바니엘에 있는 큰 검술학교는 나라 안이 아니라 나라 밖에서도 학생들이 몰려든다. 그러니 하숙이라는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도 잇는 것이다. “하숙이 너무 번거롭다면 그냥 방만 빌려주는 방법도 있지요.” 이 방법은 번화가에 있는 건물에서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제이드는 큐바인 하우스도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다른 이유로 번거롭긴 할 것이다. “자금이 여의치 않은 젊은이들 사이에선 요즘 이 두 가지 방법이 인기가 있다더군요.” “그렇군요.” 케이트는 한숨처럼 대답했다. 큐바인 하우스를 산다니. 자신이 한 말이지만 그다지 와 닿지는 않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안을 쳐다봤다. 여기저기 깨진 바닥. 칠이 벗겨지고 금이 간 벽. 일하면서 여길 그녀가 원하는 대로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응접실은 크림색으로 다시 칠하고 싶다. 가죽이 갈라진 소파는 싹 내다 버리고 좀 더 넓고 편안한 걸로 바꾸고 싶다. 하지만, 그녀는 제이드를 쳐다보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백작 부인께서 허락할까요?” “그분이 허락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그의 말이 맞다.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집은 더 이상 로엔 백작 부인의 소유가 아니다. 그녀가 산다고 해도 실라가 뭐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트에게는 예의 문제였고 기분 문제였다. 자신이 판 집을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하녀가 말도 없이 산다니.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좀 괘씸할 것 같았다. 그리고 케이트는 로엔 백작 부인을 꽤 좋아했다. ============================ 작품 후기 ============================ 친구와 만나기로 해서 건물 앞에서 기다리는데 건물에 입점한 가장 큰 식당 이름이 友家村 이더라고요. 읽으면 우가촌이죠. 벗 우, 집 가, 마을 촌 해서. 그래서 친구에게 "나 지금 우가촌에 있어." 라고 메세지를 보내야 하는데 머릿속에 뭐가 꼬였는지 벗우를 붕우로 생각을 한거예요. 사실 붕우자체가 벗이란 뜻이니 크게 다르게 생각한 건 아니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나 붕가촌에 있어." 이게 제가 친구에게 보낸 메세지 입니다. ...친구는 바로 전화해서 대체 어디 있는 거냐고 물어보더군요. 즐거움 금요일 입니다. 뮈엘라의 수사관은 빨간 날 제외하고 평일 한편씩 올라갑니다. 즉, 주말인 내일과 모레는 쉽니다. 월요일날 뵈어요. 00123 1. 큐바인 하우스 =========================================================================                            타운 하우스의 집사 알프레드는 예고도 없이 찾아온 손님에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그는 오랜 시간 로엔 가를 위해 봉사한 집사였고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당황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스미스 양?” 외출복을 입은 케이트가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몇 가지 불안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기 전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백작 부인을 만나고 싶어요.” 알프레도의 입이 벌어졌다가 재빨리 닫혔다. 이렇게 약속도 없이 찾아와서 대뜸 만나고 싶다는 건 예의가 아니다. 게다가 케이트는 한낮 하녀가 아닌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내게 말한다면 전해 드리마.” “아니요.” 케이트는 불안한 표정을 지우고 단호하게 말했다. “백작 부인을 만나고 싶어요.” 괘씸한 것. 알프레도는 건방진 하녀의 행동에 잠시 말을 잃었다. 이렇게 건방진 계집애가 있었던가. 어디 감히 하녀 주제에 제가 일했던 저택의 마님을 약속도 없이 만나겠다고 당당히 요구한단 말인가. 도련님이 데려왔다고 마님께서 너무 오냐오냐하신 탓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라도 이 건방진 하녀를 교육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건방지군.” 차가운 집사의 말에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련님과 마님께서 조금 친절을 베푸셨다고 너무 기어오르지 말게. 자네는 기껏 해봐야 하녀일 뿐이야.” 기껏 해봐야 하녀. 그 말이 상처받지 않는 건 이제 그녀가 호건 가라는 재력을 가지게 되어서일까. 그 말에 화가 나는 건 기껏 해봐야 집사인 남자에게 그런 말을 들어서일까. 하지만 케이트는 알프레도에게 덤비지 않았다. 그는 그녀보다 연장자이고, 집사로 오랜 시간 단련된 사람일 테니까. 대신 케이트는 좀 더 정중하게 말했다. “건방지게 구는 게 아닙니다. 단지 백작 부인께 여쭙고 싶은게 있어서 만나고 싶다는 거예요.” 알프레도는 케이트의 말에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그녀를 응접실에 남겨둔 채 사라졌다. 때때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손님을 집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는 집사가 있는 것을 생각하면 알프레도는 자기 일에 감정을 개입하지는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케이트는 소파에 앉지 않은 채 두 손안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내쉬었다. 알프레도의 말대로 그녀가 건방지게 구는 것인지도 모른다. 로엔 백작 부인인 그까짓 집 한 채. 누가 사던지 크게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돌아갈까.” 한숨처럼 내뱉었을 때였다. 누군가 노크와 함께 들어왔다. “케이트.” 메리의 단발머리는 약간 길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본 것이 케이트와 이안이 큐바인 하우스로 이사하던 날이었으니 벌써 몇 달이 지났다. 하지만 반가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어쩌니. 마님께서 피곤하셔서 널 만날 수 없다고 하시는데.” 아, 그래? 하마터면 케이트는 알겠다고 말할 뻔했다. 그녀 성격에 알려줘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곧 그녀는 메리가 이런 훼방 전문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렇다고 그녀의 말을 대놓고 부정하기엔 정말로 집사가 그녀에게 말을 전하라 시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케이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 메리의 입술이 호를 그렸다. 그녀는 케이트가 포기하고 타운 하우스를 떠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케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예상과는 달랐다. “여기까지 왔으니 다른 분들께 인사를 드려야겠다. 다들 어디 계신지 알아?” 메리의 얼굴에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재빨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다들 바빠서 너랑 인사하기 어려울 거야.” “그래?” 케이트는 거기서 메리의 말이 거짓말임을 눈치챘다. 정말로 백작 부인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케이트의 방문을 거절한 거라면 다른 사람과 인사하겠다는 그녀를 서둘러 보내려 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쉬운 것을 왜 당하기만 했을까. 케이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집에 있을 때 왜 그렇게 소극적이었을까. 왜 그렇게 움츠러들어있었을까. 그건 알라나데일에서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죽임당할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케이트가 생각해보면 그때의 자신은 너무 바보 같았다. “그만 가보지그래?” 케이트가 타운 하우스에서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조바심이 들었는지 메리가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처음 수도로 올라왔을 때는 메리가 멋있고 세련돼 보였다. 하지만 그녀도 결국은 나이 어린 아가씨에 불과하다는 것을 수도에 익숙해진 다음에 깨달았다. “뭐가 웃겨?” 달라진 케이트의 태도에 초조해진 메리가 날카롭게 물었다. 움츠러들어 입을 열지 않던 여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의 케이트는 놀라울 정도로 여유 있었다. 이게 내가 알던 그 케이트인가? 메리는 당황한 나머지 평정심을 잃고 있었다. “아니, 그냥.” 케이트는 자신의 태도가 실례라는 것을 깨달았다. 메리가 괴롭히려 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면전에서 비웃는 것 역시 옳지 못한 태도였다. “재미있는 일이 생각나서.” 그렇게 둘러대긴 했지만 메리는 눈치가 빠르다. 그녀는 케이트가 자신을 비웃고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웃었다는 것보다 상대방을 비웃는 게 결례라는 것을 알고 말을 돌리려 한 태도가 더 화가 났다. 차라리 그냥 비웃고 말았다면 싸움을 거는 거니 응대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 케이트의 태도를 메리가 보기엔 수준 낮은 사람에게 알량한 배려를 베푸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여기서 수준 낮은 사람은 메리다. “재미있는 일이 뭔데?” 메리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마치 한 대 때릴듯한 태도에 케이트는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때 집사가 돌아왔다. “스미스 양, 마님께서 만나겠다고 하시는군. 메리? 여긴 무슨 일이지?” 분노에 차있던 메리의 표정이 당혹으로 일그러졌다. 들켰다. 그녀는 케이트가 집사에게 자신의 거짓말을 고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케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아, 잠깐 인사를 나누고 있었어요.” 그래? 알프레드는 메리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두 사람이 친했던가?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메리의 표정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금세 평정심을 가장하긴 했지만 능숙한 집사의 눈에는 인사를 나눴다는 케이트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이 보였다. “그래? 스미스 양은 나를 따라오게. 자네는 마님 방으로 차를 가져오고.” 거짓말이라 해도 메리가 케이트에게 심술을 부린 거겠지. 알프레드는 메리를 잘 알았다. 일을 잘하기는 하지만 질투심이 좀 강하다는 점도. 케이트가 타운 하우스에 있을 때 몇 번이나 그녀를 골탕먹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두고 봤던 건 자신이 끼어들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은 당사자들끼리 해결해야 하는 법이다. “어서 와요, 스미스 양.” 로엔 백작 부인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조금 나아 보였다. 파리한 안색에 조금이나마 혈색이 돌았다. 그녀는 긴 의자에 비뚜름하게 기대앉아 있었는데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오래 앉아있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이런 모습으로 맞이해요.” “아닙니다.” 케이트는 실비아가 준비해 준 의자에 앉으며 얌전하게 대답했다. 곧이어 메리가 문을 두드리더니 다과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녀의 시선이 케이트를 스쳐 지나갔다. 로엔 백작 부인 앞에서도 케이트는 주눅이 든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흥, 언제까지 그럴 수 있나 보자. 메리는 속으로 이를 갈며 생각했다. 오늘 아침, 로엔 백작 부인이 큐바인 하우스를 팔았다는 이야기를 실비아를 통해 전해 들었다. 그 이야기는 이안 도련님이 다시 이 타운 하우스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결국 케이트도 데리고 오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톡톡히 혼 내줄 거야. 메리는 자신이 기대하는 상황이 닥칠 리 없다는 것을 모르고 이를 갈았다. “날 만나고 싶다고 했다던데. 무슨 일이지?” 실라가 입을 연 건은 메리가 나가고 실비아가 그녀와 케이트의 잔에 차를 따른 다음의 일이었다. 향긋한 냄새가 방안에 퍼졌다. “큐바인 하우스 때문입니다.” 케이트가 말했을 때 실라는 아직 이안에게 큐바인 하우스를 팔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며칠 전, 팔 생각인데 어떻겠냐고 의향을 물었을 때 이안은 어머니 좋으실 대로 하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실라는 이안이 다시 타운 하우스로 들어오기를 바랐다. 그게 아니라면 하다못해 적어도 제대로 된 집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다 쓰러져가는 폐가가 아니라. 그래서 그녀는 이안이 원한다면 큐바인 하우스를 판 돈으로 다른 집을 구해줄 생각도 있었다. 타운 하우스에서 함께 산다면 좋지만 요즘 젊은 남자들은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다 들었다. 그녀는 자기 아들이 친구를 사귀고 세상을 즐기며 살기를 바랐다. 그녀의 죽은 남편처럼 방탕하게는 아니어도, 적당히 사냥도 하고 클럽도 가면서. “그 집에 무슨 문제라도 있니?” 실라는 큐바인 하우스를 팔았다는 이야기를 하면 케이트가 당황할 거라 생각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케이트가 당황하지 않도록 이안과 함께 타운 하우스로 들어와서 일하면 된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케이트가 먼저 선수 쳤다. “그 집, 제가 다시 사려고 합니다.” 실라는 입을 벌린 채로 굳었다. 응? 뭐라고?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바로 이틀 전 큐바인 하우스를 그녀가 팔았다. 그런데 이 예쁘장한 하녀가 어디서 그런 돈이 났는지는 둘째치고서라도 산다고? “스미스 양, 그 집은 내가 얼마 전에 팔았어요.” 침착한 말에 침착한 대답이 돌아왔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산다고요?” 케이트는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녀가 호건 가의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말할까? 실라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케이트는 슬쩍 눈을 들어 실비아를 쳐다봤다. “저, 사실은 가족을 찾아서요.” “어머,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케이트가 말을 이었다. “일도 곧 그만둘 거예요. 그래서 후임자를 구하고 있었고요.” 일을 그만둔다고? 실라는 놀라서 실비아를 쳐다봤다. 실비아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케이트를 보고 있었다. 이게 좋은 일인가? 그 이야기는 케이트가 이안의 곁을 떠난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케이트가 더 이상 하녀가 아니라면, 찾은 가족이 괜찮은 집안이라면 더 좋을지도 모른다. 실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가족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봐도 될까?” “아, 그게.” 케이트는 조금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장사를 조금.” 거짓말은 아니다. 죄책감에 가슴이 따끔따끔 아팠다. 그에 반해 실라의 얼굴은 누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기대에 차서 물었다. “그럼 혹시 집을 사겠다는 돈도 가족들이 준 건가요?” “네.” 케이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실라는 흐뭇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큐바인 하우스라 해도 그 정도의 집을 살 수 있는 돈을 선뜻 내놓을 수 있는 친척이라면 장사가 상당히 잘된다는 뜻이다. 그 이야기는 갑자기 나타난 젊은 친척에게 집을 살 돈도 줬으니 지참금도 충분히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충분한 지참금을 가진 신붓감은 다소 지위가 낮다 해도 세간에 크게 흉이 되지 않는다. 실라는 이안이 케이트를 원한다면 자신의 돈을 써서라도 도와줄 생각이었다. 그녀는 사교계의 소문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안과 케이트가 시달리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경 쓰는(것처럼 보이는) 여자다. 그녀는 케이트가 그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 해도 이안 곁에 있게 하고 싶었다. 물론 케이트가 그걸 원한다면. 그럴 생각으로 시골에 땅과 저택을 알아보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까지는 손을 쓰지 않아도 된다. 마음이 편해지자 입맛이 돌아왔다. 실라는 다과로 내놓은 스콘을 하나 집으며 물었다. “지금 이 이야기, 이안도 알고 있나요?” “네.” 과연. 그녀는 아들이 큐바인 하우스를 판다고 말했을 때 좋으실 대로 하라고 대답한 이유를 알았다. 케이트가 더 이상 하녀가 아니니 어디에서 살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리라. “아, 미안해요. 그래서 그 집을 산다는 건 무슨 이야기지?” ============================ 작품 후기 ============================ 즐거운 월요일입니다. 다들 주말 잘 보내셨나요? 전 어제 밤 11시 55분에 지구를 멸망시켜야 한다고 울부짖었습니다. 바로 몇주전만해도 춥다고 찡찡거렸는데 지난주부터 참 놀라울 정도로 따듯하네요. 슬슬 퇴근길을 걸어와도 괜찮을 것 같아요. 표지 변경했습니다. 앤앤님께서 그려주신 드레스를 입은 케이트 입니다. 무려 이안이 선물해 준 옷이라는 설정입니다. ㅎㅎㅎ 감사합니다. 00124 만우절 특집 =========================================================================                            케이트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큐바인 하우스를 산 건축가는 자금사정이 나빠지자 다시 그 집과 땅을 팔겠다 했다. 다른 사람에게. 로엔 백작 부인과의 거래에서 어떤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로엔 백작 부인이 판 가격보다 더 높게 받고 싶은지도 모른다. “큐바인 하우스를 산 건축가가 그 집을 다시 매물로 내놓았어요.” 실라의 눈이 커졌다. 그건 건축가가 큐바인 하우스를 다시 매물로 내놓았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케이트가 매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단어를 사용할 줄도 안다. 그건 지식을 하찮게 여기는 뮈엘라에서 흔치 않은 능력이었다. 다시 한 번 그녀는 케이트가 탐이 났다. 하녀를 그만둔다면 무엇을 하려는 걸까. 그녀가 대필자겸 비서로 데리고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가 말이, 음, 로엔가에는 팔지 않을 생각이라고.” 응? 다시 한 번 실라의 눈이 커졌다. 로엔가에 팔지 않을 생각이라고? 어째서? 그녀는 이해할 수 없어서 손에 든 스콘을 내려놓고 몸을 내밀었다. “그 말은 건축가가 한 말이니?” 정확하게는 원래 주인에게 팔 생각이 없다고 했다.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주제넘은 짓인지도 모르지만, 저는 살 집이 필요해요. 지금 계절에 괜찮은 집을 구하기는 어렵고요.” 케이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실라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몸을 뒤로 기댔다. 가족을 찾았지만 같이 살지는 않는다는 말이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족과 함께 살지 않는 대신 그 가족이 집을 구할 돈을 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사고 싶은 건 큐바인 하우스라는 말이다. “부시겠다고 해서 팔았는데.” 실라는 못마땅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건축가라고 했고, 그 위치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건물은 전부 부시고 다시 지을 거라 했다.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그래서 팔았던 것이다. 누군가 거기서 살기위해 팔라고 했다면 팔지 않았을 것이다. 앙상하게 마른 건축가의 손이 생각나서 그녀는 눈썹을 찡그렸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팔았던 거지? 팔게 된 경위도 사실 실라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빠른 시일 내에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매매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거기서 살 수 있겠니?” 실라의 질문에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집을 수리하는 데 최소한 한 계절은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일단 이번 겨울은 참고 봄이 되자마자 수리할 생각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그리 하렴.” 실라의 허락이 떨어졌다. 얼굴이 밝아진 케이트는 감사합니다. 하고 연신 중얼거렸다. 골치아픈 일을 덜었으니 기쁜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실라는 케이트의 열정적인 반응에 당황했다. 네 돈으로 사는 거잖니? 그런 실라의 말에도 불구하고 케이트는 나는 듯 실라의 방을 빠져나왔다. “케이트.”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응? 케이트가 고개를 돌린 순간 상대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헉!”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와중에 케이트는 그 상대가 메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여자가! 참아왔던 분노가 터졌다. 그녀 역시 메리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려고 손을 뻗었다. 메리는 이를 악물로 케이트의 머리카락을 쥐고 흔들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조금 예쁘장하다고 남자들이 죄다 쳐다보는 것도, 폴마저도 그녀를 신경 쓰는 것도. 한 번 크게 혼내주려고 했다. 이렇게 무식하게 싸우는 건 그녀성격과 맞지 않지만 분을 참지 못했던 탓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누군가 그녀의 손을 잡더니 케이트에게서 떼어냈다. 메리는 소리도 없이 다가온 이안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도,” 도련님. 이라는 단어는 그녀의 입 밖으로 채 나오지 못했다. 이안은 마치 담배꽁초를 버리듯 메리를 가볍게 내던졌다. “꺅!” 쿵하고 메리의 몸이 바닥에 부딪혔다. 그 소리에 사람들이 놀라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트.” 이안은 케이트를 일으켜 세우고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메리가 쥐고 흔든 탓에 단정하게 빗은 머리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는 대롱대롱 매달린 리본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괜찮나?” “어, 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이안은 왜 여기에 있지? 케이트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그에게 매달려 있었다. 여기가 어디더라? 너무 놀라서 잠깐 주위 환경을 잊어버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실라에게 큐바인 하우스를 사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왔는데? 그녀의 눈에 바닥에 쓰러진 메리가 보였다. 저 미친 여자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케이트가 메리에게 달려 들려하자 이안은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 “무슨 일이야?” 일층에서 달려 올라온 사용인들은 바닥에 쓰러진 메리와 이안에게 안긴 케이트를 발견했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그들이 혼돈상태에 빠진 가운데 이안은 케이트를 안고 유유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거 놔 봐요. 나, 진짜 저 계집애 그냥 안 둘거야!” “그만 하면 됐다.” “되긴 뭐가 돼요? 한 대라도 때려야지 안되겠어!”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인지 케이트가 발버둥쳤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진짜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진짜로 가만 안 둘거야. 죽여 버릴 거야! 부글부글 끓는 상태로 발버둥 치는 케이트를 안은 이안은 마치 동물을 안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인간에게 안기는 게 익숙하지 않아 빠져나가려고 하는 동물. “케이트.” 이안은 그녀를 자신의 침대에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불렀지만 케이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방 밖으로 나가려 했고 이안은 그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여자들 싸움이 더 대단하다고 하더니 그런 모양이지. 작은 몸이 빠져나가려고 바동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만하면 됐어.” 그가 그렇게 말할 때까지도 케이트는 헐떡이며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안이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밀어 등에 침대가 닿자 정신이 돌아왔다. “…어?” “진정해.” 아니, 이번엔 다른 의미로 진정을 못하겠다. 케이트는 바로 위로 보이는 이안의 얼굴에 숨 쉬는 것도 잊고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여긴 어디야? 당황해서 다시 벌떡 일어나려던 케이트 자신의 어깨를 이안이 단단히 잡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어, 이안, 저기, 저, 이게…,”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묻고 싶다. 하지만 이안은 여유 있었다. 그는 케이트가 바동거리지 않자 느긋하게 옆에 누워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저기, 이, 이안?” 정신 똑바로 안 차리고 있다가 괴물 소굴로 잘못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어 케이트는 아주 신중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괜히 여기서 그를 도발했다간 아주 큰 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편 이안은 불안한 케이트의 심정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케이트의 허리를 쓰다듬다가 봉재 선을 따라 손가락으로 훑었다. 힉. 케이트는 옷감 너머로 느껴지는 묘한 감촉에 가볍게 몸을 떨었다. 케이트의 기준으로 결혼도 안 한 남자와 한 침대에 누워있는 것도 부도덕한 일인데 이렇게 친밀하게 만지는 건 엄청나게 부도덕한 행위였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이안의 손을 잡았다. “자, 잠깐만요.” 이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뒤로 넘긴 검은 머리카락이 스르륵 흘러내리는 게 마치 한 장의 삽화 같아 그녀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이, 이러면 안돼요.” “…어째서?” 어째서라니! 케이트는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키려다 누르는 이안의 힘에 의해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붉은색 머리카락이 시트 위로 넓게 퍼졌다. “이러면 안 되니까요.” “그러니까, 어째서?” “우, 우린 결혼도 안했고,” “해.” “그야 물론 한 다음엔 상관 없, 어어어어업?” 뭐시라? 상황에 맞지 않는 이안의 대꾸에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초록색 눈동자가 놀랄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이안은 그대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응? 케이트는 마치 사고처럼 그녀의 의지와 관계없이 벌어지는 이안의 행동에 놀라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마에 닿은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니, 저, 더 이상 내려오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케이트의 두 손은 저도 모르게 이안의 옷깃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이마 사이를 천천히 지나친 입술이 콧등에 닿았다. 이안은 작은 코를 꽉 물어버리고 싶은 욕구를 참기 위해 코끝에 입술을 대고 한참 가만히 있었다. 품 안에서 작은 몸이 굳어있는 게 느껴졌다. “이, 이안?” 입술이 코끝에 한참이나 머물러 있자 케이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응?” 이안이 고개를 들자 약간 불그스름해진 호박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케이트는 그 선명한 눈동자에 잠시 말을 잃었다. 뭔가 이상했다. 아니, 평소에도 충분히 이상하지만 오늘의 이안은 평소 이상으로 이상했다. “저기, 나 그만 일어나면….” “아아.” 마치 그녀가 누워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투다. 그 무신경한 태도에 케이트는 눈만 깜빡 거렸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거지? 이 남자 무슨 양판가 봐. 까도 까도 끝이 없어. “키스해 줘.” 눈만 깜빡거리던 케이트는 그래서 자신이 잘못 들었다 생각했다. 그녀는 한참을 가만히 이안을 쳐다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네?” “키스해 달라고.” 아니, 잘못들은 게 아니다. 이거 설마 꿈인가? 케이트는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꼬집으려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녀의 손을 이안이 잡아 깍지를 꼈기 때문이었다. 케이트의 머릿속에 수 만 가지 생각이 떠오르다가 종래에는 두 가지 갈등으로 치열하게 다투기 시작했다. 그냥 해주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나을까? 하지만 그랬다가 더한 걸 요구하면 어떻게 하지? 이안은 그녀의 눈동자에 떠오른 수많은 감정을 읽고 가볍게 감탄했다. 이 작은 머릿속에 엄청나게 많은 생각이 들어있는 모양이다. 그는 그녀를 좀 더 압박하기로 결심했다. “아니면 이대로도 괜찮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케이트가 입을 열기도 전에 긴 손가락이 단추 사이를 파고 들어왔다. “헉!” 잠깐, 잠깐. 눈앞에서 단추 사이가 위험할 정도로 벌어졌다. 그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유로운 한 손을 들어 이안의 목을 감았다. 가볍게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졌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이안이 입술을 밀어붙였다. 사이가 벌어지고 뜨거운 혀가 가르고 침입했다. “응!” 입 안을 침범하는 과격한 행위에 케이트는 눈을 꼭 감았다. 뭔가에게 잡아먹힌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입안을 헤집는 과격한 혀와 달리 뺨을 감싸는 손바닥은 부드러웠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입술이 떨어져 나왔다. 그 다음에 엉킨 혀가 풀렸다. “읏.” 이상한 기분이 들어 케이트는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오늘의 이안은 확실히 뭔가 다르다. 평소보다 훨씬, 너무 다르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어 간신히 물었다. “왜, 왜 이러는 거예요?” 이안은 케이트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더니 벌어진 틈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집어넣었다. 응? 입 안에 침입한 손가락을 뱉지도, 물지도 못한 케이트는 깜짝 놀라 굳어버렸다. 그런 그녀에게 이안이 기분좋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만우절 기념이야.” ============================ 작품 후기 ============================ 원 내용은 자정에 올라갑니다 00125 1. 큐바인 하우스 =========================================================================                            케이트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큐바인 하우스를 산 건축가는 자금 사정이 나빠지자 다시 그 집과 땅을 팔겠다 했다. 다른 사람에게. 로엔 백작 부인과의 거래에서 어떤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로엔 백작 부인이 판 가격보다 더 높게 받고 싶은지도 모른다. “큐바인 하우스를 산 건축가가 그 집을 다시 매물로 내놓았어요.” 실라의 눈이 커졌다. 그건 건축가가 큐바인 하우스를 다시 매물로 내놓았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케이트가 매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단어를 사용할 줄도 안다. 그건 지식을 하찮게 여기는 뮈엘라에서 흔치 않은 능력이었다. 다시 한 번 그녀는 케이트가 탐이 났다. 하녀를 그만둔다면 무엇을 하려는 걸까. 그녀가 대필자 겸 비서로 데리고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가 말이, 음, 로엔 가에는 팔지 않을 생각이라고.” 응? 다시 한 번 실라의 눈이 커졌다. 로엔 가에 팔지 않을 생각이라고? 어째서? 그녀는 이해할 수 없어서 손에 든 스콘을 내려놓고 몸을 내밀었다. “그 말은 건축가가 한 말이니?” 정확하게는 원래 주인에게 팔 생각이 없다고 했다.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주제넘은 짓인지도 모르지만, 저는 살 집이 필요해요. 지금 계절에 괜찮은 집을 구하기는 어렵고요.” 케이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실라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몸을 뒤로 기댔다. 가족을 찾았지만, 같이 살지는 않는다는 말이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족과 함께 살지 않는 대신 그 가족이 집을 구할 돈을 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사고 싶은 건 큐바인 하우스라는 말이다. “부수겠다고 해서 팔았는데.” 실라는 못마땅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건축가라고 했고, 그 위치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건물은 전부 부수고 다시 지을 거라 했다.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그래서 팔았던 것이다. 누군가 거기서 살기 위해 팔라고 했다면 팔지 않았을 것이다. 앙상하게 마른 건축가의 손이 생각나서 그녀는 눈썹을 찡그렸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팔았던 거지? 팔게 된 경위도 사실 실라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빠른 시일 내에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매매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거기서 살 수 있겠니?” 실라의 질문에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집을 수리하는 데 최소한 한 계절은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일단 이번 겨울은 참고 봄이 되자마자 수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라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 집에서 겨울을 나는 게 걱정되던 차였다. 그런데 이번엔 여자 혼자 그런 망가진 집에서 산다니. 그녀는 가능하면 케이트를 말리고 싶었다. 그렇다고 하녀 일을 계속하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나는 가능하면 말리고 싶구나.” 실라의 말에 케이트의 얼굴이 굳었다. 팔았다곤 해도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하녀가 사는 건 역시 불편한 모양이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실라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 엉망인 집에서 네가 산다니. 이안이야 남자니까 그냥 내버려뒀지만, 거긴 여자 혼자 살기엔 좋지 않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케이트는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실라를 쳐다봤다. 이안은 본인이 상관없다고 했으니 그냥 둔 거지만 케이트는 달랐다. 부술 거라고 해서 팔았던 집에서 산다니 미안하기도 하고 걱정되는 것이다. 그런 실라의 배려를 읽은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일개 하녀를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는 사람은 없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부끄러웠다. “저, 괜찮아요.”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이야기하렴.”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네 친척 이름을 알려주련?” 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케이트의 몸이 굳었다. 그녀는 당황한 태도에 실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떤 분인지 만나고 싶어서 말이야.” “어, 아니, 백작 부인께서 만나실 정도의 분들은 아니세요.” 응? 실라는 뜻밖의 대답에 멍하니 물었다. “내가 만날 정도의 사람이 따로 있니?” “그건 아니지만,” 자신의 친척이 호건 가라는 걸 밝히는 건 좀 부끄럽다. 케이트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아직 정식으로 가족으로 확인된 건 아니라서요. 확인되면 말씀드릴게요.” 정식? 점점 더 알 수 없는 말에 실라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케이트는 인사를 남기고 재빨리 도망쳐 버렸다. 그녀는 다기를 정리하기 위해 들어온 실비아에게 말을 걸었다. “실비아, 물어볼 게 있는데.” “네, 마님.” “실비아가 잃어버린 가족을 찾았다고 한다면 정식으로 가족으로 확인해야 할 절차가 있을까?” 실비아는 잔을 치우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녀는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어휴, 마님.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가족으로 확인하는데 정식 가족은 뭐고 절차가 무슨 필요예요.” “그런 게 있나 싶어서.” “물려받을 작위나 재산이 있다면 또 모르지만, 평민들에게 그런 게 있을 리가요.” 그렇지? 실라는 실비아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집을 사고 수리할 정도의 돈을 준 친척인데 정식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혹시 하는 희망이 생겼다. 그녀의 생각보다 케이트가 찾은 친척이 더 괜찮은 집안인 게 아닐까. 귀족은 아니더라도 준 귀족에 달한다거나, 상당한 재산을 쌓은 상인이라거나. 상인도 괜찮아. 실라는 실비아가 채워준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생각했다. 이안과 케이트가 사교계의 구설수에 심하게 오르내리지 않을 정도라면 그녀는 아무래도 좋았다. 호건 가정도는 문제가 되겠지만. 그녀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픽 웃었다. 그럴 리가 없다. 호건 가는 곤란하다. 너무 크다. 뮈엘라를 쥐락펴락하는 집안이라면 집안도 복잡할 게 분명하다. 호건 가에 비하면 오히려 이안이 부족할 정도였다. 물론 실라는 이안이 어느 집 여식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의 시선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안은 그녀가 아무리 감싸고돌아도 서자고 그 능력을 알리기 전에 입적되었다. 뮈엘라는 서자를 인정하지만 그건 자신의 능력을 세상 사람들이 인정할 정도로 드러냈을 때의 일이다. 검술대회에 나가 입상을 한다거나, 장사수완이 좋아 재산을 불려준다거나. 하지만 이안은 그런 능력을 보이기도 전에 실라가 받아들였다. 어쩌면 자신이 너무 성급했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죄책감이 실라의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그녀는 이안을 모른 척하지 못할 것이다. 고작 다섯 살짜리 소년을 쫓아낼 정도로 실라는 모질지 못했고 이안을 보는 순간 사랑에 빠져버렸으니까. === 조세핀은 그다지 예쁘지 않았다. 평범한 얼굴에 심지어 눈이 나빠 안경까지 쓰고 있는데다 다갈색의 머리카락은 결이 좋거나 부드럽지도 않았다. 십몇 년을 매일 아침 사방으로 뻗는 머리카락과 씨름을 하다 보면 자연히 양 갈래로 땋아 내린 머리 모양을 선호하게 된다. 체격도 날씬하고 가슴만 풍만한 체격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통통했다. 그래서 그녀는 포목점에서 일하고 있어도 예쁜 옷을 입어 본 적이 없었다. 왜냐면 그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으니까. 예쁜 옷이라는 건 예쁜 아가씨에게 어울리는 것이다. 못생긴 나에겐 어울리지 않아. 그게 조세핀의 생각이었다. “…해서 내가 사기로 했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남자는 한껏 거들먹거리며 이야기하다가 조세핀이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내밀었다. 엇하고 놀랄 새도 없이 그는 조세핀의 눈앞에서 딱 하고 손가락을 부딪쳐 소리를 냈다. “내 말 듣고 있어?” 꽤 무례한 태도였지만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이쪽도 무례한 태도였기 때문에 조세핀은 순순히 잘못을 시인했다. “아, 미안해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남자가 쳇하고 혀를 찼다. 그는 들고 있던 포크를 식탁에 툭하고 던지다시피 놓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봐, 조심해. 못생긴 여자가 멍청하기까지 한 건 못 참아.” “멍청하다뇨!” 말도 안 되는 비난에 그녀가 욱해서 반발했을 때였다. 남자가 나이프를 휘두르며 거칠게 말했다. “어디 건방지게. 난 여자가 덤비는 게 딱 질색이야.” 그건 알고 있다. 조세핀은 상대의 나이프가 날아올 것이 두려워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남자, 에디가 결혼을 세 번이나 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 세 번의 결혼 중 두 번은 폭력에 견디다 못한 부인이 도망친 거였고 한번은 병에 걸려 죽었다는 것도. 다행인 것은 이런 남자를 아버지라 부를 아이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그녀는 도망친 에디의 부인이 둘 다 아이를 갖기 전에 도망친 게 그나마 현명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난 당신 부인이 아니예요.” 조세핀은 차갑게 대꾸하며 손에 쥔 식기를 내려놓았다. 애초에 에디와 이런 식당에 오는 것부터가 아니었다. 그녀의 부모님이 경영하는 식당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비싼 가격을 자랑하는 음식이 앞에 있었지만, 상대가 에디라는 점에서 입맛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음식이 반이나 남은 접시를 밀었다. 부모님이 권해서 오기는 했지만 에디는 데이트 상대로는 영 꽝이었다. 주먹을 휘두른 탓에 부인이 도망쳤다는 점은 둘째치고서라도 그녀는 에드의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가 너무 싫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에드를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도 그리 원하지 않지만 어쩌겠어.” 에디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다시 포크를 집어 음식을 입 안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에디의 입이 벌어졌다. 입안에 음식을 넣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예의는 에디 사전에 없었다. 그는 음식을 튀거나 말거나 한껏 거들먹거리며 이야기했다. “네 부모님께서 너와 결혼해 준다면 식당을 물려준다고 하셨거든. 너는 여자로서는 꽝이지만, 식당을 받을 수 있다면 참을 만하지.” 뭐? 조세핀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진짜? 그녀의 머릿속에 부모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거짓말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더 슬펐다. 왜냐하면 그녀의 부모님은 그러고도 남을 분들이었으니까. ============================ 작품 후기 ============================ 여러분... 제가 더 놀랐어요... 댓글 수 뭐죠...세상에... 다들 만우절에 속고 싶으셨던 거구나. 그쵸? 이안과 케이트의 배드씬을 원하셨던 아니죠?? 2편 연속으로 남주가 등장하지 않아서 만우절이라는 이벤트 형식을 빌어 이안을 등장시켜 봤습니다. 는 뻥이고요. 만우절 장난 한 번 치고 싶었어요. 근데 본편보다 긴 이벤트 편을 쓰고 말았습니다... 저의 잉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실 수 있습니다. 내년에는 부디 뮈엘라에서 만우절편을 올리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작년에도 같은 수법으로 달무리에서 써먹어서 내년에는 안속으실것 같아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어...후후후후. 00126 2. 어떤 사건 =========================================================================                            “멋진 집이 되었네요.” 오랜만에 방문한 제이드는 크림색으로 벽을 칠한 응접실을 둘러보며 아낌없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하라던 실라는 케이트가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로엔 가와 대대로 거래한 목수를 소개해주었다. 목수는 로엔 백작가의 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최우선으로 처리해 주었던 것이다. 뜻밖에도 뜯어보니 골격은 그대로 유지해도 될 만했기 때문에 지붕만 다시 얹고 나머지는 보수하는 수준에서 마무리되었다. 바닥을 깔고 벽을 보수한 뒤 칠을 하자 폐가였던 큐바인 하우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해졌다. 이안이 뜯어낸 계단도 이번에는 한층 튼튼하게 만들었다. 날이 갈수록 몰라보게 변하는 큐바인 하우스의 모습은 케이트를 뿌듯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직 가구는 다 안 들어왔지만요.” 케이트는 수줍게 대답하며 제이드에게 의자를 권했다. 과연. 바닥과 벽을 새로 한 응접실에 의자만은 예전 그대로의 것을 사용하고 있었다. 둘러보니 몇몇 가구들이 사라져 텅 빈 공간이 보인다. “쓸만한 건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라고 내놨어요.” 케이트의 설명에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그 말은 지금 남은 가구는 못 쓰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그의 무게가 실리자 의자가 끼익하고 듣기 싫은 비명을 질렀다. 이거, 무너지는 거 아니지? 제이드의 얼굴 가득 의심이 퍼지자 케이트가 재빨리 말했다. “그거 로엔경도 앉는 거예요.” “아, 그래요?” 이안이 앉는 거라면 제이드는 괜찮을 것이다. 이안이 그보다 키도, 체격도 더 크니까. 제이드는 완전히 마음 놓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의자에 앉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끼익 끼익 하고 의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제인이 재빨리 차를 내왔다. 큼지막하게 자른 호박파이가 곁들여 있었다. 케이트는 소년이 실수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다기를 내려놓는 것을 보고 상냥하게 말했다. “위층에도 갖다 드릴래? 좀 쉬시면서 하시라고.” 위층? 제이드는 곧 케이트가 말하는 사람들이 위층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흠. 그는 찻잔을 집이 들었다. 뚝딱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로 보아 칠을 하거나 정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남자들이 뭔가 이야기하는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언제쯤 완성이 될까요?” 그렇지 않아도 큐바인 거리의 주민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것을 알고 있던 케이트는 얼굴을 붉혔다. 심지어 시나몬은 틈날 때마다 찾아와서 내부진행 상황을 구경하다 가곤 했다. 큐바인 거리의 사람들과 이 집을 두고 내기를 하는 모양이지만 그녀는 모른척했다. “이번 주 안에는 끝날 것 같아요. 가구만 들여 놓으면 되거든요.” “그렇군요.” 그렇게 말한 제이드는 찻잔을 입에 갖다 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난데없는 부탁이라 선뜻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는 완곡하게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이 집, 혼자 살 예정인가요?” “잘 모르겠어요.” 고심 끝에 꺼낸 말이었지만 케이트의 대답은 빨랐다. 그녀는 손에 든 잔을 천천히 돌리며 말했다. “혼자 살기엔 좀 크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둘 정도는 아닌 거 같아서요.” 음식은 그녀가 한다지만 청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동안 간단한 청소는 그녀가 했다. 하지만 그건 일 층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이제 삼 층까지 수리가 끝났으니 청소해야 할 면적이 세 배로 늘어났다. 거기에 조만간 완전히 망가져 버린 지하실로 손볼 예정이다. “혹시 지난번에 제가 한 이야기, 생각해 봤나요?” “지난번에 한 이야기요?”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이드를 쳐다보다가 그가 지난번에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숙을 하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 이야기는 결국 그녀가 하숙하는 사람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녀 일을 그만 뒀는데 하는 일은 하녀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저, 이제 남을 위해 청소하는 건 그만두려고요.” 과연.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홍차가 평소보다 더 쓰게 느껴졌다. 곤란한 표정이 명백한 제이드의 얼굴에 케이트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부탁하신다는 건 무슨 이야기인가요?” “아, 그게.” 제이드는 다시 찻잔에 시선을 떨어트렸다. 케이트가 혼자 살기엔 큐바인 하우스는 꽤 크다. 그래서 일이 쉬울 거라 생각하고 찾아왔던 것이다. 그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알죠? 조세핀이라고,” 그가 더 말을 잇기 전에 케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갈색 머리카락과 안경을 쓴 여자. 등장이 꽤 강렬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다. 제이드는 조세핀을 설명해야 할 필요성이 사라지자 약간 가벼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낼 곳이 없어서요. 혹시 큐바인 하우스에서 지낼 수 있을지 물어보려고요.” 응?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물어보고 싶은 건 꽤 많은데 뭘 먼저 물어봐야 할지 몰라서 그녀는 조금 망설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본가가 에바니엘이 아닌 모양이죠?” “아, 본가는 여기가 맞아요.” 그럼 어째서? 케이트는 고개를 기울였다. 수도로 돈을 벌기 위해 올라온 게 아니라면 여자들은 보통 결혼하기 전까지 가족과 살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낼 곳이 필요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런 그녀의 의문을 읽은 제이드는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집에 일이 있어서 나왔다는군요.” === 평소라면 가게에 잘 들르지도 않는 제이드다. 이른 아침과 늦은 밤은 더더욱 그렇다. 그가 새 코트를 맞출 생각에 아침 일찍부터 가게에 들르지 않았다면 거기서 조세핀을 봤더라도 평소대로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세핀은 킬리언 포목점의 가장 성실하고 유능한 직원이니까. 제일 먼저 나와서 제일 늦게 돌아간다. 그녀가 가게 한쪽에서 지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이른 아침 그가 올 거라는 생각을 못 한 조세핀이 미처 치우지 못한 담요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집을 구하지 못해서 그래. 금방 구할 거야.” 조세핀은 당당하게 말했지만, 제이드는 알고 있었다. 이 계절에 일가족이 죽어서 빈집이 생기지 않는 한은 살만한 집이 생길 리 없다는 것을. “집은 왜 나왔는데?” 늘 싱글거리던 제이드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조세핀은 어깨를 움츠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게 또 묘했다. 그녀는 그의 앞에서 항상 한참 나이가 많은 누나처럼 굴었다. 사실 제이드의 친누나보다 조세핀이 더 누나처럼 굴 때도 잦았다. “그냥.” “코트씨도 아셔?” 조세핀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안다는 말이야, 모른다는 말이야? 제이드는 혼란스러워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 조세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금방 나갈게. 가게 열기 전에 일어나서 치우니까 아무도 몰라.” “나한테 들켰잖아.” “이 시간에 올 줄 몰랐으니까 그렇지.” “나도 왔는데 다른 직원도 안 올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어?” 제이드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조세핀은 겁먹지 않았다. 그녀는 제이드를 잘 알고 있다. 누구와 달리 그는 여자에게 손을 대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다. 자신을 여자로 본다면. 약간 씁쓸한 생각을 덧붙이며 조세핀은 다시 한 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다들 열 시가 넘어야 출근해. 돈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 근무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올 이유가 뭐 있어?” 타당한 말에 제이드의 입이 막혔다. 하지만 그는 곧 입을 열었다. “너는 항상 두 시간 먼저 오잖아.” “그야, 나는 관리자니까.” “그래서 매일 두 시간 일찍 출근하고 제일 늦게 퇴근하는 걸로 부족해서 아예 가게에서 지낸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면 그렇게 생각하고.” 제이드의 턱이 굳었다. “조세핀 코트.” 그가 답지 않게 엄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위압적인 태도였지만 조세핀은 겁먹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깔깔대며 웃었다. “나, 내 이름 안 잊어버렸어.” “재미있으라고 부르는 거 아니야. 여자가 가게에서 혼자 밤을 지낸다는 게 말이 돼?” 그가 화가 난건 그 사실 때문이었다. 여자가 혼자 가게에서 밤을 지낸다니. 너무 위험하다. 특히나 킬리언 포목점이 장사가 잘 된다는 건 에바니엘 사람 모두가 안다. 한밤중에 돈을 노린 도둑이 침범하면 어쩐단 말인가. 하지만 조세핀의 태도는 침착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도둑이 들어도 돈만 가져갈걸?” “조!” “알았어. 알았다고.” 조세핀은 손사래를 치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렇게 싫으면 여관으로 갈게.” 그게 아니다. 제이드는 당황해서 조세핀의 팔꿈치를 잡았다. 여자 혼자 여관이라니, 더더욱 안 될 말이다. 모르는 여자가 혼자 여관에 간다 해도 제이드는 말릴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그 상대가 조세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혼자 여관에서 묵겠다고?” 조세핀은 제이드의 손을 뿌리치려고 팔을 한번 흔들었다가 그게 쉽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대신 제이드의 손을 매단 채 담요를 집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장님이 가게에서 지내지 말라면서요.” 명백히 비꼬는 말투에도 제이드는 화가 나지 않았다. 조세핀은 그의 소꿉친구였고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했다. 친누나보다 더 남매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제이드의 심정을 아는 조세핀은 오히려 더 삐뚤게 반응했다. 자신의 상황에서 제이드의 호의는 더 비참하게 느껴진다.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집으로 돌아가.” “돌아갈 거면 나오지도 않았거든?” 그녀는 다시 한 번 팔을 흔들어 제이드의 손을 뿌리쳤다. 담요를 차곡차곡 접어 한쪽 구석에 밀어 넣은 그녀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제이드를 정면에서 쳐다봤다. 적어도 제이드가 오기 전에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땋아서 다행이다. 매일 아침 엉망으로 뻗는 이 다갈색 머리카락은 부모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 그걸 제이드에게 보여주지 않은 건 이 비참한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금방 나갈 테니까, 눈감아 줘.” 부탁하는 말에 불구하고 조세핀의 태도는 당당했다. 제이드의 눈에는 당당한 걸로 보였다. 하지만 그가 좀 더 자세히 봤다면 조세핀이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허리에 손을 얹은 거라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제이드가 가게에서 지내지 말라고 한다면 그녀로서는 정말 나갈 수밖에 없다. 여관으로 가야 한다니, 끔찍하다. 더 끔찍한 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녀는 제이드가 자신을 내쫓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조세핀이 숨기고 싶어 하는 그녀의 소극적인 마음은 불안에 떨었다. “집을 구하면 되는 거지?” 제이드의 말에 그녀는 응? 하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의미야? “네가 지낼 곳 말야. 얼마나 지낼 정도면 되는데?” 조세핀은 제이드를 멍하니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얼마나 지낼 정도면 되냐고? 그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일주일? 한 달?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지내면 되잖아.” “안 돌아 갈 건데?” 이번엔 제이드의 말이 막혔다. 그는 무슨 의민지 몰라 조세핀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검지로 안경을 치켜들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나, 청혼받았어.” 어? 제이드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바보같이 상처받아서 조세핀은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청혼받은 게 그렇게 의외야? 라고 묻고 싶은 마음에 굴뚝같았지만 참았다. “우리 식당에서 일하는 에디라는 요리사인데, 부모님도 허락하셨어.” “그런데?” “그런데?” 조세핀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라니, 무슨 의미야? 그 표정에 제이드가 다시 물었다. “부모님도 허락하셨다며? 그런데 왜 집을 나온 거야?” 울컥하고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조세핀은 손을 들어 제이드의 가슴을 밀어냈다. 느닷없는 공격에 밀려나긴 했지만, 그는 비틀거리지는 않았다. 제이드는 조세핀의 손을 잡고 다시 물었다. “결혼하는 게 싫어서 그래? 그럼 그냥 싫다고 말하면 되잖아.” 이게 문제다. 조세핀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고개를 숙였다. 여자를 선택해서 만날 수 있는 제이드와 그녀는 다르다. 킬리언 포목점의 막내아들. 수사관에 호감 있는 얼굴. 서글서글한 성격. 인기 있는 제이드와 그녀는 다르다. 그 사실을 제이드에게 자신의 입으로 말해야 하는 게 비참했다. 조세핀은 입술을 깨물었다. 너는 몰라. 잘생기고, 인기 있고, 사랑받는. 너는 몰라. 그에 대한 호감이 순식간에 증오로 바뀌어 버릴 정도의 비참함이 그녀의 몸을 잠식했다. 조세핀은 입안에 찝찔한 피 맛이 나자 입술에 피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너와 달라.” 제이드는 고개를 든 조세핀의 얼굴을 보고 당황했다. 붉어진 눈과 피가 나는 입술. 그는 자신이 뭔가를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건드린 게 뭔지 몰랐다. “나는 식당이라는 덤이 없으면 청혼할 가치도 없는 여자야.” 그녀 스스로를 비하하는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은 제이드의 심장도 콕콕 찔렀다. 조세핀의 표정이 담담했지만 제이드는 어딘지 모르게 그녀가 처연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아니, 식당이 덤이 아니라 내가 덤이지.”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조세핀은 마치 한 대 맞은 것처럼 움찔하고 뒤로 물러났다. 더이상 그녀는 제이드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양팔로 자신의 몸을 감싼 채 그녀가 중얼거렸다. “너는 몰라.” 그제야 제이드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조세핀을 실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제가 영화를 보러 와서 집에 돌아가면 12시가 넘겠더라고요. 걍 12시에 올릴까했는데 연 3편 남주가 등장하지 않았는데 늦기까지 하면 더 화내실거잖아요. 그쵸? 후후후후후후. 전 참 제 목숨 부지하는 법을 잘 알아요. 00127 2. 어떤 사건 =========================================================================                            문 앞에 뭔가가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제인은 재빨리 현관문을 열고 그 앞에 놓인 신문을 집어 들었다. 하나, 둘 셋. 어라? 소년의 눈이 동그래졌다. 세 개? 큐바인 하우스에서 구독하는 신문은 두 가지뿐이다. 뭐가 잘못 온 거지? 제인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빵을 자르던 케이트가 고개를 돌렸다. “신문 왔니? 가서 코트양에게 식사하라고 전해줄래?” 큐바인 하우스는 무사히 소유하게 된 케이트는 제이드의 부탁이자 조언대로 동거인을 받아들였다. 말이 좋아 동거인이지 하숙생이나 마찬가지다. 처음엔 하숙생을 위해 그녀가 밥을 하고 청소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불만이 있었던 케이트는 하숙생이 내는 방값으로 사용인을 고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하숙생을 구한 게 아니니까. “신문이 세 개나 왔어요.” “세 개가 아니라, 세 부.” 케이트는 접시에 잼과 버터를 덜며 중얼거렸다. 어서 하녀를 고용해야 하는데. 오늘도 한 명의 여자가 면접을 보겠다고 연락해 왔다. “미안해요. 나도 도울게요.” 이윽고 큐바인 하우스의 첫 번째 하숙생이 등장했다. 조세핀은 땋은 머리카락 끝을 묶으며 부엌으로 뛰어갔다. 작은 체구의 빨간 머리 여자, 케이트가 손을 저었다. “다했어요. 기껏 해봐야 빵과 달걀뿐이예요.” 접시를 식당으로 나르는 그녀를 보며 조세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커다란 집이 그녀의 것이라 했다. 거기에 예쁘고 자그마한 체구. 부지런한데다가 억울하게도 성격도 좋다. 세상은 정말로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며 조세핀은 남은 접시를 들고 식당으로 뒤따라 들어갔다. “주인, 아니, 로엔경. 신문이예요.” 이안을 주인님이라 부르는데 익숙했던 제인이 로엔경이라는 어색한 호칭으로 부르며 신문을 내밀었다. 이안은 늘 아침 식사와 함께 신문 한 부를 읽는다. 그리고 남은 한 부는 식사 후 응접실에서 느긋하게 읽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케이트는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은 뒤 이안에게 다가갔다. 어제 방을 정리하고 조세핀이 들어왔다. 그러니 오늘 아침부터 큐바인 하우스는 케이트의 집으로서 새로운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안, 식사할 땐 신문 금지예요.” 순식간에 작은 손이 그의 손에서 신문을 낚아 채갔다. 이안은 감히 자신의 신문을 낚아챈 손의 주인을 응시했다. 힉. 겁을 집어먹은 건 조세핀과 제인이었다. 두 사람은 새파란 아침부터 벌어지는 험악한 기류에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침묵했다. “내놔.”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이안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케이트는 신문을 등 뒤로 감추며 당당하게 외쳤다. “여긴 내 집이예요. 내 말을 따르지 않겠다면 여기 있을 수 없어요.”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케이트를 응시했다. 제인은 반사적으로 케이트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도망칠 거라면 식탁 반대편으로 움직이는 게 나았을 것이다. 케이트의 등 뒤로 숨을지언정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건 소년이 그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 조세핀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크고 검은 남자는 이안 로엔이라 했다. 로엔 가의 그 서자. 그녀는 이안을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최근 사교계 화제의 인물 중 하나다. 로엔 백작 가의 서자. 고작 다섯 살의 나이에 서자로 인정된 남자. 잘생기기는 했지만 껄끄럽다는 게 세간의 평이었다. 이안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조세핀은 이안이 재수 없거나 냉정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만나고 보니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이안은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건 그가 냉정하고 재수 없는 것과는 별도로 어딘지 모르게 무섭다는 느낌이 드는 분위기였다. “식사가 끝나면 읽어도 되나?” 이윽고 이안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온화한 말의 내용에 조세핀과 제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케이트는 네에 하고 이안의 찻잔에 차를 따른 뒤 제인에게 말했다. “제인, 너도 이제 식사시간에 신문을 전달하는 건 그만두렴.” “아, 하지만.” 제인은 억울하다는 듯 어깨를 움츠리며 말을 이었다. “신문이 하나 잘못 온 것 같아서요. 나, 아니 저는 뭐가 뭔지 모르니까.” 신문? 그제야 케이트는 소년이 신문이 세부나 왔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건 한 신문사에서 두 부를 보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게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다. 하지만 조세핀의 반응은 달랐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한 부는 제가 신청한 것일 거예요.” 세 사람의 시선이 조세핀에게 향했다. 뜻하지 않게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게 된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적은 사람이라 해도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는 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 코트양, 신문 읽어요? 하지만 어차피 이 집은 다 읽으니 따로 구독할 필요가,” 거기까지 말한 케이트의 입이 멈췄다. 그녀의 손에 들린 신문은 에바니엘 일보, 뮈엘라 일보. 그리고 에바니엘 우물가였다. 에바니엘 우물가? 가십 신문을 발견한 케이트의 시선이 조세핀을 향했다. “네, 그, 그거예요.” 조세핀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케이트는 그런 그녀의 얼굴에 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신문을 읽는 게 부끄러운 일인가? 그녀는 신문을 식당 장식장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코트양도 식사하고 읽으세요.” 단호하네. 조세핀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그 단호한 행동이 자신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저런 무서운 사람에게도 단호할 수 있다니. 어쩌면 케이트 스미스라는 여자는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사실 어제 이 집에 올 때만 해도 그녀는 자신 말도 또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건 제이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안이 곧 타운 하우스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이안도 이 큐바인 하우스에 머무는데 맞는 모양이다. 조세핀은 눈치를 보다가 식사가 끝나자마자 케이트에게 살그머니 물었다. “저, 이안 로엔경도 이 집에 같이 계시는 건가요?” 그가 원래 이 집의 주인이었다는 건 안다. 그리고 케이트가 하녀였다는 것도. 하지만 하녀가 산 집에 머물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케이트도 마찬가지였다. 가구가 들어오고 이 층에 자신의 방을 꾸밀 때까지 이안은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그녀가 타운 하우스로 돌아가야 하지 않느냐고 묻자 예전과 똑같은 짓을 했다. 수표책을 떠넘겼던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야? 케이트는 당황했지만 이안의 태도는 확고했다. “그럴 것 같네요.” 애매한 케이트의 대답에 조세핀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럴 것 같다니. 그럼 저 로엔 백작 가의 둘째 아들이 하숙을 한다고? 어째서? “뭐, 상관없지 않나요?” 점심때가 지나 찾아온 제이드는 유쾌하게 말했다. 한 명이나 두 명이나 크게 문제는 없잖아요. 케이트는 어느 쪽을 지적해야 할지 몰라 입을 딱 벌렸다. 한 명이나 두 명이나 크게 문제없다니. 제이드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조세핀이 있으니 한 집에 미혼 남녀 단둘이 사는 것도 아니고요. 저도 여기서 살고 싶은 걸요.” “진심은 아니죠?” 의심스럽다는 케이트의 말에 제이드는 크게 웃었다. 물론 농담이다. 밤새 파티를 하고 놀러 다니는 제이드가 누군가와 함께 살 수 있을 리 없다. 그는 케이트가 큐바인 하우스를 산다고 했을 때 이안의 눈이 반짝였던 것이 잘못 본 게 아님을 이제야 확신했다. 그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 “그냥 두는 게 어때요, 스미스양. 여자 둘이 사는 것도 안전하진 않잖아요.” 제이드의 설득에도 케이트의 얼굴에 의심스럽다는 표정은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찻잔을 집어 들며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보겠어요?” 하숙한다는 건 사용인을 둘 경제력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그런 면에서 로엔 가는 그 정도 경제력은 있다. 그런데도 굳이 큐바인 하우스에서 하숙이라는 형태로 머문다는 게 케이트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상한 놈으로 보겠죠.” 제이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로엔 백작 가의 서자가 또 이상한 짓을 한다더라. 뭐 그런 소문이 돌겠지. 하지만 소문이라는 건 신경 쓰는 사람에게나 타격이 되는 것이다. 제이드는 이안이 그런 소문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거라는 것에 지금 쓴 아끼는 노랑 모자를 걸 수도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큐바인 하우스를 케이트에게 팔고 자신은 하숙생 신분으로 살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인지도 모른다. 흠, 가능한가? 제이드는 머릿속에서 가능성의 주사위를 휙 하고 굴렸다. 건축가를 대리로 세우고 어머니를 속여서 팔게 한다? 이안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가 그런 귀찮은 짓을 할 것 같진 않다. 단순히 운이 맞아 떨어졌는지도 모른다. 케이트가 큐바인 하우스를 떠나려는 때에 건축가가 나타나서 큐바인 하우스를 사들인 다음 케이트를 지목해 팔겠다고 한다. 잠깐, 이게 운으로 설명되는 이야기인가? 그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 때 누군가 큐바인 하우스의 문을 두드렸다. 케이트는 습관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녀는 더이상 사용인이 아니다. 손님이 오면 제인이 안내해 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제인이 손님과 뭔가 이야기하더니 그녀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케이트! 어떤 여자가 면접 보러 왔데요!” “그래?” 반가운 마음에 케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난번에 이안이 쫓아낸 여자들 이후로 처음 모집한 하녀다. 지금은 심지어 이안도 없으니 자신 있다. 그녀는 제이드에게 잠깐 면접을 보고 와도 괜찮겠냐고 양해를 구했다. 제이드는 손을 저으며 괜찮다는 표시를 해 보였다. 이안을 만나러 온 것인데 그가 자리를 비웠기에 잠시 케이트와 이야기를 나눈 것뿐이다. 그런데 굳이 양해까지 구하다니. 그는 케이트의 사람 좋음에 미소를 지었다. 약속 없이 느닷없이 찾아오는 건 예의가 아니다. 제이드는 늘 이안과 만날 때 그렇게 만나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미리 연락하지 않고 와버렸지만 큐바인 하우스는 더이상 이안의 집이 아니니 케이트가 그를 쫓아냈더라도 할 말이 없다. 그걸 들여보내 주고 이안이 올 때까지 말상대를 해준다는 게 케이트가 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연락없이 찾아간다고 해도 대놓고 쫓아내는 집은 없다. 하지만 완곡하게 돌아가 줄 것을 권하는 집이 대부분이고, 설령 집 안에서 기다리는 것을 허락한다 해도 집 주인이 말상대를 해주는 경우는 별로 없다. 제이드는 앞으로 큐바인 하우스에 올 때는 미리 연락하고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 작품 후기 ============================ 어제부터 제 얼굴에 뾰루지가 났습니다. 이런건 손대는게 아니라고 해서 건들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거울을 보거나 세수를 할때 굉장히 신경 쓰이네요. 괜히 건드렸다가 흉질까봐 일단 참고 참고 참고 있기는 합니다만. 최근 이런 뾰루지 같은 분들이 유입되고 있네요. 안건드리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한데 거슬리는 분들이요. 악의가 없다고 해서 아이가 때린 게 아프지 않은건 아니죠. 적당히 하세요. 제 얼굴의 뾰루지는 며칠 두고보다가 짜버릴 생각입니다. 00128 2. 어떤 사건 =========================================================================                            “데이지 입니다.” 젊은 여자의 말에 케이트는 흠칫 놀랐다. 데이지. 알라나데일에서 죽은 데이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여자는 케이트의 표정이 좋지 않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무슨 실수를 했나요?” “아, 아니예요. 제가 아는 사람과 이름이 같아서.” 이름만 같을 뿐 생김새는 다르다. 하녀 면접을 보러 온 데이지는 어두운 금발 머리에 푸른색 눈동자였다. 조금 말랐지만, 뼈마디가 굵었다. 잘할 수 있을까. 케이트는 보자마자 데이지가 마음에 들었지만, 면접을 위해 물었다. “여긴 저를 포함해서 세 명이 살고 있어요. 삼 층이고 대청소나 빨래 같은 건 외부 가게를 이용하지만 매일 해야 하는 청소나 간단한 옷 관리는 데이지, 성이 뭐죠?” “성은 없어요.” 이런. 그녀와 마찬가지로 고아인 모양이었다. 케이트는 데이지가 더욱더 마음에 들었다. 죽은 데이지와 같은 이름이라 그런지 낯익은 느낌도 들었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동지네요. 나도 그래요.” “어머, 진짜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조개를 만들며 미소 짓는 얼굴이 미인은 아니었지만 매력적이었다. 그 미소에 이끌려 케이트도 같이 미소를 지었다. “네. 아까 말하던 건데, 매일 해야 하는 청소나 옷 관리는 데이지가 해야 할 거예요. 식사는 준비하지 않아도 돼요. 알아서 먹을 거니까.” 큰 청소와 빨래는 외부에 맡긴다는 건 케이트가 일할 때와 같다. 하지만 그녀가 일해야 한 곳이 일층 뿐이었던 것에 비하면 새로운 하녀는 삼 층을 전부 일해야 한다. 그래서 케이트는 새로 요리사도 구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고민했다. 그 일로 이야기했을 때 조세핀은 점심과 저녁은 알아서 챙겨 먹는 경우가 많으니 상관없다고 했다. 식사를 알아서 챙겨 먹는 건 케이트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안뿐이기 때문에 케이트는 요리사는 좀 천천히 구하고 음식을 주변 식당에서 사오기로 결심했다. 큐바인 거리는 혼자 사는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포장해 주는 곳이 꽤 많다. 그녀 혼자 살았다면 이렇게까지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매번 음식이나 청소로 돈을 쓰단,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하숙비로 돈을 벌 생각이 없는 이상 이안과 조세핀에게 받은 돈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었다. “전에 일한 곳이,” “세비앙입니다.” 세미앙? 처음 듣는 지명이다. 그녀가 아는 지명은 상당한 규모의 도시뿐이니 당연하다. 데이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덧붙였다. “아마 잘 모르실 거예요. 세비앙 가의 영주인데 저는 그 세비앙 남작 가에서 일했답니다.” 세비앙 남작이라니. 마찬가지로 금시초문이다. 하지만 시골에서 자란 케이트가 귀족 가의 이름을 잘 알 리가 없다. 케이트는 데이지가 내미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봉투 안에는 세비앙 가문의 인장인 것처럼 보이는 도장이 찍힌 종이가 들어있었다. 도장이 세 개. 좋은 사용인이었다는 뜻이다.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 많은 뮈엘라에서 귀족이나 부자들은 대필자를 이용하지만, 사용인의 추천서까지 대필자를 고용해서 써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종이에 자신의 가문 인장을 찍어 주는 것으로 대신한다. 세 개면 좋은 사용인. 두 개면 괜찮은 사용인. 한 개면 여기서 일하긴 했지만 그다지 쓸모 있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아주 가끔 절대 고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로 가위표를 그려서 넣어주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추천서를 필요로 하는 사용인들에게 이렇게 종이에 찍어서 봉투에 넣어 주는데 그 봉투는 밀봉되어 있는 게 보통이다. 케이트는 봉투가 밀봉되어 있지 않은 것을 발견했지만 대단하지 않게 생각했다. 도장을 세 개나 찍혀 있으니 데이지가 전에 일한 세비앙 가에서 밀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일 테지. 굳이 밀봉하는 이유는 사용인이 추천서를 보려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고, 추천서를 뜯어보는 걸 막고 싶은 건 도장이 하나거나 가위표가 그려진 경우다. “세비앙에서 에바니엘에 올라온 이유가 뭐죠?” 케이트의 질문에 데이지는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세비앙 가의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 사용인 몇 명을 해고하게 되었다는 것. 젊고 고아인 그녀가 가장 먼저 해고되었다는 것. 세비앙에 다른 사용인을 고용할 만한 저택이 없기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했다는 것. 그럴 바엔 차라리 사람이 많은 수도로 오면 고용될 가능성이 더 높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 케이트라 해도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데이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어딘지 모르게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녀는 데이지를 고용하기로 결심하며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질문했다. “우리 집은 급여가 조금 높은 대신에 일이 많아요.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전 수도에 처음 와서 시간이 남아봤자 할 일도 없는 걸요. 그 시간에 돈을 버는 게 더 이득이예요.” 그렇다면.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데이지에게 추천서를 돌려주며 미소 지었다. 데이지가 조금만 더 어렸다면 그러지 말라고 말했을 것이다.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주변을 좀 더 살펴보라고. 하지만 데이지는 그녀가 그런 걸 알려주기엔 나이가 있었고 주제넘은 행동이었다. 그래서 케이트는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언제부터 일할 수 있나요? 전 오늘부터 해도 좋은데. 데이지의 얼굴에 보조개가 움푹 파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데이지가 큐바인 하우스의 청소를 담당하게 되자 가장 좋아한 건 제인이었다. 소년은 같은 사용인이 한 명 더 늘어났다는 사실과 데이지라는 존재 자체를 좋아했다. 재미있는 건 큐바인 하우스에 살지 않는 제이드까지도 데이지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점이다. “아가씨, 수도에 언제 올라왔지?” 나직한 목소리와 빛나는 눈동자. 제이드의 진지한 얼굴에 데이지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그가 여자를 유혹하는 장면을 처음 본 케이트는 어이가 없어서 잠시 말을 잃을 정도였다. “어서 오세요, 로엔경!” 때마침 이안이 돌아왔기 때문에 케이트의 주의는 제이드에게서 이안으로 향했다. 그는 최근 에바니엘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녀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아무런 흔적도 없다. “무슨 일이지?” 이안은 집 안에 사람이 늘어난 것을 보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데이지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이안은 가만히 있어도 그 키와 체격 때문에 상대를 압도하곤 한다. 그 태도에 익숙한 제이드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이 집에 새로운 하녀를 환영해 주고 있었지.” “새로운 하녀라고?” 믿을 수 없다는 태도에 케이트가 앞으로 나섰다. 큐바인 하우스는 이제 케이트의 집이지만 이안도 살고 있으니 어쨌거나 소개를 해줘야 할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데이지를 소개했다. “이안, 이쪽은 오늘부터 이 집의 청소를 담당하게 된 데이지예요. 데이지, 이쪽은 우리 집의 음,” 이안을 뭐라고 소개해야 하지? 그녀의 머릿속에 고민이 스쳤다. 손님이라기엔 언제까지 묵을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하숙생? 그녀는 그를 하숙생으로 인정할 생각인 걸까? 케이트가 머뭇거리자 이안은 데이지를 완전히 무시하고 그녀에게 말했다. “하녀를 네 마음대로 고용한 건가?” 응?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안의 주의가 케이트에게 쏠리자 데이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났고 제인은 그런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당연히 내 마음대로 고용하죠.” “난 싫어.” 이건 또 무슨 지나가던 강아지 야옹야옹하는 소리란 말인가. 케이트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이안을 올려다봤다. “여긴 내 집이거든요?” “하지만 나도 살고 있잖아.” “당신 집일 때 내 의견 반영해서 저 계단 고쳐줬어요?” 타당한 지적이다.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오오. 하는 감탄사와 함께 손뼉을 쳤다. 이안은 케이트를 물끄러미 보다가 손을 뻗었다. 헉하고 사람들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케이트는 그가 자신에게 손댈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겁을 집어먹지 않고 이안의 모습을 빤히 쳐다볼 수 있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볼을 감싸더니 귀를 쓰다듬으며 뒤통수를 감쌌다. “이게 무,” 보는 사람도 있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고 화내려 했을 때였다. 이안이 그대로 그녀의 머리를 묶은 리본을 잡아당겼다. 휙하고 하나로 질끈 동여맨 붉은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이게 무슨 짓이예요?” 케이트는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하지만 이안은 손끝에 매달린 리본을 그대로 들고 떠나버렸다. 어. 다들 입을 딱 벌리고 이안이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응시했다. 저게 지금 무슨 짓이지? 네 사람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걸 입에 담는 사람은 없었다. === 시나몬이 찾아온 것은 데이지가 큐바인 하우스에서 일하게 된 지 며칠이 지난 다음이었다. 최근 지방으로 공연을 떠났던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에바니엘 우물가를 들고 케이트를 찾아왔다. “그래서 사용인이 한 명뿐이예요?” “정확히는 두 명이죠.” 그야 그렇지만. 시나몬은 청소를 돕는다며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제인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음식과 세탁은 가게에서 해결한다. 사실 혼자 사는 독신자들이 많이들 그렇게 해결하기는 한다. 시나몬 역시 잦은 여행으로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는 게 더 편하고 돈이 덜 들지만 일부러 요리사를 고용했다. 식당은 저녁 아홉 시가 되면 문을 닫지만, 요리사를 고용하면 새벽이라도 배고프면 식사를 할 수 있으니까. 그녀는 조만간 자신의 요리사에게 뭔가 요리를 해서 갖다 주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때? 그 사람이 쓴 기사는?” 그 사람이 쓴 기사? 시나몬의 재촉은 케이트는 그녀가 찾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에바니엘 우물가의 기사 중 시나몬이 마음에 들어 하는 기사를 쓰는 사람을 찾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케이트가 신문을 읽어주기 시작하면서 시나몬은 에바니엘 우물가에서 마음에 드는 기자가 생긴 모양이었다. “음, 잠시만요.” 케이트는 신문을 팔랑팔랑 넘기며 기사를 살폈다. 삽화가 많아 오히려 찾기 힘들었지만 어쨌거나 찾았다. “무명. 여기 있네요.” “있죠? 기사 읽어줘요!” 무명이라. 이름이 없다는 뜻인 걸까. 케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본 기자는 뮈엘라 사람 누구나 아는 상인의 행동에 누구라도 놀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어라. 기억에 남는 문체다. 케이트는 다시 고개를 갸웃하며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기사 내용은 단순했다. 이미 약혼까지 한 귀족 아가씨를 부자 상인이 보기 흉할 정도로 노골적인 구혼공세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가씨와 약혼한 상대 집안에서는 상당히 불쾌해하고 있는데 정작 아가씨의 집안에서는 그걸 흐지부지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누구라고 돈 앞에 서면 마음이 약해지지만, 결혼이라는 가장 고귀하고 강렬한 약속마저도 무시하는 행태는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세상에! 약혼한 귀족 아가씨에게 노골적인 구혼이라니, 역시 호건 가라니까.” “네?” 시나몬의 말에 케이트의 심장이 툭 떨어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기사를 몇 번이나 읽었지만, 그 상인이 호건 가라는 말은 없다. “당연히 누군지는 말 안 하죠. 귀족 가도 누군지는 말 안 하잖아요?” “그, 그럼 어떻게 알아요?” “사교계에 유명하니까요. 호건 가의 후계자가 벨링스 자작의 딸에게 들이대고 있다는 건.” 호건 가의 후계자. 케이트는 무슨 얼굴을 해야 할지 몰라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제프리. 그녀의 사촌. 그 남자가 약혼한 자작 가의 영애에게 노골적인 구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자작 영애에게 반한 걸까요?” “글쎄요. 호건 가의 후계자는 여러 여자한테 손을 대는 걸로 유명하거든요. 아, 스미스 양은 모르겠구나. 그래도 귀족 영애에게는 이렇게 대놓고 들이대지는 않았는데.”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케이트는 제인이 가져다준 찻잔을 입에 대며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에스메랄다와 제프리는 케이트와 결혼하려 했다. 그런데 이번엔 웬 자작 가의 영애에게 구혼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도 이미 약혼한 영애와. 문득 케이트는 무명이라는 기자가 제프리보다 벨링스 자작 가를 더 비판하는 어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더 곤란한 건 벨링스 자작 가일 텐데. “이 무명이라는 기자는 결혼에 대해서 상당히 고귀하게 생각하고 있나 봐요.” “그렇죠?” 시나몬은 싱긋 웃으며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다른 사건은 그다지 비판적이지 않는 사람인데 결혼이나 연애관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이더군요.” “생각보다 나이가 많은 분인 모양이예요.” 케이트의 말에 시나몬은 다시 빙그레 웃었다. 결혼이나 연애관에 고리타분하고 배신한 남자보다 여자를 더 질타한다. 그녀 역시 기자가 나이가 많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도 꽤 나이가 많은 노신사일 것 같다. ============================ 작품 후기 ============================ 1. 표준어는 에요/이어요 가 맞습니다. 저는 이 "이어요"는 절대 안쓰고 "에요"도 이게 표준어긴 한데 대사에서는 "예요"로 다 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상하게 이 에요/이어요 가 싫더라고요. 너무 싫어요;;; 그래서 매번 맞춤법 검사를 하면서 아, 이걸 고쳐야하는데...아아, 진짜 싫다아...하면서 모른척 눈감고 있습니다. 좀더 에요/이어요 가 좋아지면 그때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2. 거슬리는 부분에 대한 지적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정중하게 지적해주시는 분들은 그렇게 적어주시기 힘드셨을텐데 써주것에 대해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는건 정도를 지켜달라는 겁니다. 비난과 비판도 구분못하는 분들이 계신데 아무리 비판이 내용이라 해도 포장지가 비난이면 결국 그건 그냥 비난입니다. "오타 있어요. 는데 가 아니라 은데 입니다." 로 쓴다고 손가락 안부러 지시잖아요? "이 작가도 겁나 멍청하네. 은데, 는데도 구분못하고. ㅋ" 요딴식으로 쓰시면 저는 당연히 뭐지, 이 똥멍청이는? 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댁들도 누가 면전에 대고 저런식으로 말하면 열폭하실거잖아요. ㅋ 그래놓고 저한테 멘탈이 약하네 어쩌네 찌질대지 마시고 꺼졍. 두번 꺼졍. 3. 2번의 마지막 부분은 농담입니다. ㅎㅎㅎ 웃자고 한 말이니 웃으시고 진지하게 생각해보세요. 4. 수표책은 본문에 언급이 안될것 같아서. 이안은 수표에 미리 서명"만"해 놨습니다. 거기에 액수만 써서 은행에 가져가면 됩니다. 백지수표 ㅋ 5. 뾰루지는 아직도 붙어있습니다. 열심히 참고 있는 중입니다. 00129 2. 어떤 사건 =========================================================================                            벨링스 자작 가의 사용인들은 폭풍 전의 고요함을 느끼고 있었다. 벨링스 자작의 손에 방금 편지가 한 통 배달되었던 것이다. 편지를 읽는 동안 자작의 얼굴이 위험할 정도로 붉어져 가는 게 보였다. “로웨나! 썩 내려오지 못해?” 드디어 터졌다. 벨링스 자작이 자랑해 마지않던 딸은 고작 몇 주 만에 천덕꾸러기로 변해 있었다. 그래도 몇 달 후면 좋은 가문에 시집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위안 삼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방금 전의 편지로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로웨나!” 자작은 분에 견디지 못해 들고 있던 편지를 갈가리 찢어발기고 씩씩거리며 이 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쿵쿵 하고 아버지가 올라오는 소리가 가까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로웨나는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파혼. 그녀와 약혼한 집에서 파혼을 알리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로웨나! 이 부끄러움도 모르는 것!” 불같은 성정으로 유명한 벨링스 자작의 앞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로웨나의 방을 열자마자 수많은 꽃병에서 지독한 향이 풍겨왔다. 전부 그녀에게 구혼하는 남자들이 보낸 꽃이다. 이젠 꽂을 병도 없어 방 한쪽에 아무렇게나 쌓아 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구혼자가 바로 제프리 호건이었다. “이런 더러운 것!” 벨링스 자작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꽃병을 들어 집어 던지며 외쳤다. 약혼한 몸으로 이 남자 저 남자 유혹하더니 결국 이 꼴이다. 와장창 하고 꽃병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리자 로웨나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녀의 뺨을 따라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 아래층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눈을 번쩍 떴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잠들지 못하던 차였다. 그건 고된 집안일에서 벗어난 덕에 밤에 바로 잠들 정도로 피곤하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오늘 낮에 만난 막스의 이야기 때문이기도 했다. 케이트가 호건 가의 사람으로 인정받도록 법적 절차를 밟고 있던 변호사는 케이트를 불러 그녀가 엘리자베스 호건의 친딸이라는 증거를 찾고 있다고 했다. 케이트가 알려준 지역에서 엘리자베스 호건과 니콜라스 스미스의 결혼증명서를 발견되었지만 케이트가 태어났다는 증거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그동안 살았던 지역을 적어주긴 했지만, 만약 거기서 그녀가 엘리자베스의 딸이라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면 그녀는 호건 가의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꽤나 길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목걸이만으로 엘리자베스의 딸이라고 볼 수 없다고 에스메랄다와 제프리가 지독하게 달라붙을 거라는 충고를 들었던 것이다. 과연 그런 시간을 보낼 정도로 호건 가의 사람이라는 게 의미가 있는 걸까. 케이트는 그런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쨍그랑하고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케이트는 벌떡 일어났다가 어째야 할지 몰라 멈췄다. 나가도 괜찮은 걸까? 도둑이 든 거면 어쩌지? 큐바인 하우스는 최근 깨끗하게 개축했으므로 도둑의 표적이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녀가 아직 하녀였다면 숨어 있는 것으로 충분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하녀가 아니고 집주인이다. 그녀는 하숙생과 사용인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결국 케이트는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살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무서워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제발, 이안이 일어나 있길!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전에 이안의 방으로 향했다. 알라나데일에 비하면 훨씬 짧은 거리였음에도 이안의 방으로 가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이안은 그녀가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문을 열어 케이트를 잡아당겼다. 헉하고 그녀가 숨을 들이켰지만 방 안쪽이었기 때문에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 어떻게 해요?” 작은 목소리로 그녀가 속삭였다. 이안은 케이트를 끌어안은 채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어둠 속에서 걱정으로 흐려진 케이트의 초록색 눈동자와 무덤덤한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부딪혔다. 그제야 케이트는 이안이 상의를 입고 있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뺨에, 손에 맨 가슴이 닿았다. 엄마야! 팔짝 뛰어오르려는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이안이 속삭였다. “쉿.” 마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케이트의 몸이 잠잠해졌다. 이안의 눈동자에 재미있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괜찮은 방법이다. 하지만 나중에 써먹도록 하자. 그는 문을 살그머니 열고 침입자가 이 층까지 올라왔는지 확인했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전문적인 솜씨는 아니다. 그는 케이트가 눈을 뜨기 전부터 잠에서 깨 있었다. 침입자는 큐바인 하우스를 침입하기 전에 몇 번이나 집 주변을 살폈던 것이다. “나오지 마.” 이안은 케이트를 자신의 방 깊숙이 남겨두고 다시 문을 열었다. 문을 열기 전 그가 집은 건 검뿐이었다. 케이트는 그가 바지만 입었다는 사실에 놀라 부랴부랴 그의 상의를 집어 들고 다가갔다. 휙하고 호박색 눈동자가 뒤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거기 있어.” 그녀도 안다. 뒤에 숨어 있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을. 하지만 대놓고 거기 있으라니, 약간 상처받았다. 케이트는 이안의 상의를 끌어안고 물러났다. 가득 이안의 냄새가 난다. 그런 그녀를 뒤에 두고 이안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침입자가 복도를 조심스럽게 걷는 모습이 보였다. 침입자는 속으로 혀를 차며 걷고 있었다. 소리 내지 않으려 했는데 창문을 깨는 바람에 조금 시끄러웠다. 하지만 아직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이 집에 사는 멍청이들은 듣지 못한 모양이다. 자신이 훌륭하게 침입했다는 생각이 들어 자부심이 든 침입자는 습관적으로 휘익하고 휘파람을 불려다 가까스로 멈췄다. 멍청이들이라도 휘파람 정도는 들을지 모른다. 그는 계단을 천천히 오르며 일 층과 이 층을 살폈다. 생각보다 큰 집이다. 흠. 도박에서 잃은 돈만 다 모으면 그도 지금쯤 이런 집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젠장. 도박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더러운 새끼들. 그가 식당을 가질 수 있다고 하자 기한을 늘여주는 여유를 보였던 자들은 그 계집이 집을 나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의 목을 죄어오기 시작했다. 그 건방진 계집년만 잡으면 도박 빚을 싹 갚을 수는 없어도 기한을 늘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촌스럽고 못생긴 년이지만 그년과 결혼하면 받을 수 있는 식당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갚을 수 있다는 걸 그들도 알 테니까. 아니면 식당을 팔아도 되고. 침입자는 제일 먼저 보이는 문을 살그머니 열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여자냄새가 났다. 이 방이겠군. 그는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그가 찾는 여자가 이 집에서 하숙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이틀 전. 이런 좋은 집을 가진 여자와 친해졌다고 했던가, 집주인의 친구와 친하다고 했던가. 그는 귓등으로 흘렸던 이야기를 떠올리려 애쓰며 어두운 방 안으로 한걸음 내디뎠다. 흥,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자가 노파의 기분을 맞추는 데는 소질이 있는 모양이다. 하긴, 이 집주인이라는 늙은이도 그 여자처럼 노처녀인지도 모른다. 늙은이들에게서 이런 여자 냄새가 날 리 없으니 이 방은 확실히 주제 파악도 못하는 건방진 계집년의 방일 것이다. 다시는 그에게서 도망친다는 생각을 못 하도록 두드려 패줘야지. 그는 검집 채 손에 든 검을 다른 손으로 바꿔 들었다. 멍청한 계집들은 조금만 틈을 보여도 기어오른다. 이안은 담담하게 침입자의 뒤로 다가갔다. 이 남자가 집 주변을 살필 때 깨달았지만, 그는 그다지 훌륭한 도둑은 아니었다. 심지어 검사도 아니었다. 제대로 된 검사라면 그가 문을 열고 방에 들어와 자신의 뒤로 다가오는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검사가 아니라고 해서 손에 든 검이 무기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지. 이안은 가볍게 침입자의 등에 검을 검집 채로 대고 눌렀다. “흐억!” 침입자는 생각보다 훨씬 더 놀랐다. 그는 거의 펄쩍 뛰어오르더니 검을 든 손을 휘둘렀다. 멍청한 녀석이군. 이안은 냉정하게 생각하며 상대의 손에 들린 검을 피해 몸을 돌렸다. 퍽 하고 휘두른 검이 침대 기둥에 부딪혔다. 바로 옆방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리자 케이트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싸, 싸우는 건가? 귀를 기울여봤지만 비명이나 신음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이안은 괜찮은 걸까. 그러다 그녀는 이 집에 이안과 그녀 외에 다른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조세핀, 데이지, 제인. 케이트는 순서대로 이름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집 안은 도둑이 들었다는 걸 믿기 힘들 정도로 조용했다. 간헐적으로 그녀의 방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아무도 이 집에 도둑이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조세핀?” 케이트는 조세핀의 방문을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늦은 밤이니 조세핀은 자고 있을 것이다. 저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하지만 조세핀은 금세 문을 열었다. 케이트는 조세핀의 방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을 통해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던데….” “안 잤어요?” “저기, 무슨 일이예요?” 조세핀은 안전한 모양이다. 케이트는 도둑이 들었다고 말하려다 멈췄다. 괜한 걱정을 하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 “로엔 경이 확인하러 갔어요. 혹시 모르니 문 잠그고 있어요.” 창백한 얼굴로 조세핀이 문을 닫았다. 달칵하고 안에서 걸쇠가 걸리는 소리를 들으며 케이트는 다시 몸을 돌렸다. 제인과 데이지를 확인해야 할 차례다. 하지만. 그녀는 복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 있었다. 일 층에 또 다른 침입자가 있으면 어떻게 하지? 다시 한 번 그녀의 방에서 하는 소리가 났다. 케이트가 흠칫하고 놀라서 쳐다보자 문을 열고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어두웠지만 그게 이안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침입자는 케이트를 발견하지 못하고 계단으로 구르다시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시차를 두고 이안이 뒤쫓았다. “이안.” 무사했구나. 케이트의 마음에 안도가 퍼졌다. 이안은 케이트를 돌아보더니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우습게도 케이트의 눈에 어두컴컴한데도 이안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들어가.” 그는 손을 한번 저어 보이더니 침입자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 남자가? 케이트는 그대로 그의 뒤를 따랐다. “케이트.” 한숨처럼 이안이 케이트의 이름을 불렀다. 케이트는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데이지와 제인만 확인할게요.” 그렇게 말했지만 이안이 있으니 안심하고 내려가는 것이다. 그녀 혼자였다면 일 층으로 내려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케이트는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끝까지 따라오지 말라고 한다면 돌아갈 생각이었다. 와장창 하고 어딘가의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트와 이안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어디지? 뒷문이 있는 주방 쪽에서 난 소리다. 이안은 또 다른 침입자가 없는지 살피며 주방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에 케이트의 손이 잡혀 있었다. ============================ 작품 후기 ============================ 이번표지는 LAZ님께서 그려주신 팬아트 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일주일정도 유지됩니다. 지난번 에요/이에요에서 제가 맞다고 하신 분들이 있으신데 그럼 걍 넘어가겠습니다. 후후후후 이, 에요/이에요 와 예요에는 몇가지 법칙이 있는데 제가 안지킨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자세한 설명은 직접 찾아보시고. 뮈엘라가 지식을 하찮게 여기는데도 불구하고 사기같은 번죄로 쫄딱 망한 사람이 없는 이유에 대해 댓글 달아주신 분이 있어서 이쪽에 간단히 설명합니다. 본문에 안나올 가능성이 있어서요. 뮈엘라의 부자와 귀족들이 사기로부터 무사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기꾼들도 조폭은 안 건드리잖아요? 그겁니다. 보통 현대에는 실력이 월등한 해커나 사기꾼을 정부기관에서 일정기간의 댓가를 치루게 한 뒤 데려가서 직원으로 삼는 경우가 있지만 뮈엘라는 그딴거 없어요. 실력이 월등한 사기꾼? 잡히는 순간 반 죽습니다. 실력을 인정하고 말고가 없습니다. 타짜에서 나와서 다들 알고 계시는 (저는 안봤지만)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부분 있잖아요? 뮈엘라에서는 그렇게 떠들기 전에 한대 때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기꾼이 뮈엘라에는 그리 많지 않다는 설정입니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적당히 넘어갈 수준에서 끝내는 거고요. 집안 말아먹을 정도로 사기를 친다면 그 집안에서 소속된 기사, 검사, 용병 등등이 세상 끝까지 따라가서 죽일거라는 걸 알거든요. 저는 지식의 수준이 높을수록 도덕적 해이가 강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이유 말고도 뮈엘라의 도덕이 생각보다 꽤 높다는 점도 한몫합니다. 쓰레기 깡패같은 놈들도 있지만 도덕성 높고 기사도를 가슴에 품은 실력있는 기사, 검사사도 있어서 어느정도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수사관이다보니 나쁜 사건만 집중되어서 도박장 사건 같은 어두운 단면이 더 부각되기는 합니다만... 00130 2. 어떤 사건 =========================================================================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은 열려 있었다. 이안은 그 옆에 난 창문이 깨진 것을 발견했다. 당황한 나머지 옆에 문이 있는 것도 모르고 창문으로 나가려 깬 모양이었다. 이안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뒷문을 열었다. 달빛 탓에 밖이 오히려 안 보다 밝았다. “여기서 기다려.” “하지만,” 케이트는 뭐라고 반박하려다 이안의 얼굴을 보고 멈췄다. 커다란 손이 떨어지자 온기가 사라졌다. 불안하고 두려워서 잠시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그녀는 곧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이 집의 주인은 그녀다. 이안에게 기대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는 우선 데이지와 제인이 안전한지 확인하기 위해 사용인들의 방으로 달려갔다. “스미스양!” 케이트가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겁에 질린 데이지가 문을 열고 케이트에게 매달렸다. 괜찮아요? 그녀는 데이지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예요?” “도둑이 들었던 모양인데, 이안이 쫓아갔으니 괜찮을 거예요.” “도둑이요?” 데이지의 몸이 굳었다. 그녀는 충격이 큰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안 되겠어. 케이트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방 안쪽으로 이끌었다. 데이지를 침대에 앉혔을 때 뒷문 쪽에서 뭔가가 우당탕 뛰어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케이트가 깜짝 놀라 문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달려가던 침입자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에 어린 표정을 보자마자 그녀는 그가 이 방으로 들어오려 한다는 것을 느꼈다. 안 돼!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쾅! 엄청난 소리와 함께 데이지의 방문이 침입자의 눈앞에서 닫혔다. 어? 케이트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문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문을 의자로 막았다. “이 년들이!” 문밖에서 남자가 쾅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케이트는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 이안이 곧 올 것이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데이지를 쳐다봤다. 그녀는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게 무슨 표정이지? 케이트는 데이지에게 말 걸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하지만 적어도 겁을 집어먹은 표정이 아니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침입자의 몸이 뒤로 휙 하고 들어 올려졌다. 이안은 한 손으로 남자의 옷을 잡아 던져버렸다. 우당탕하고 남자의 몸이 벽에 부딪히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케이트가 고심해서 고른 액자가 그 충격에 흔들리다가 뚝 떨어졌다. 큐바인 하우스의 사람들은 새벽부터 때아닌 티 타임을 가졌다. 침입자가 정신을 잃자 제인이 치안관을 데리러 달려갔다. 케이트는 이안과 도둑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찻잔이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 소파에 앉았다. 어디서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기까지 생각한 케이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뒷문 쪽의 창문이 하나 깨져있다. 다른 곳은 멀쩡하리란 보장이 없는 것이다. 때마침 어디론가 사라졌던 이안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케이트는 벌떡 일어나 이안에게 차를 따른 잔을 내밀었다. 하녀일 때의 버릇과 그를 보자 생긴 안도감 탓이었다. “뒷문 옆과 현관 옆의 창문이 하나씩 깨졌다. 복도의 액자가 하나 떨어졌고, 네 방의 침대 기둥이 망가졌다.” 응? 잠시 눈을 깜빡이던 케이트는 이안이 집안의 피해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음을 깨달았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사라졌던 것이다. 세상에. 다리가 후들후들 거렸다. 비틀거리는 케이트를 이안이 부축했다. “고마워요.”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별말씀을. 그가 있어 다행이었다. 이안의 부축을 받아 소파에 앉으며 케이트는 생각했다. 이 남자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몸이 떨리려는 찰나 제인이 치안관을 데려왔다. 범인은 여기 있습니다. 이안이 범인을 묶어서 던져둔 다용도실로 치안관을 안내했다. 조세핀은 데이지와 제인을 따라 치안관 뒤를 쫓았다. 다들 이 집에 침입한 도둑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했던것이다. “에디?” 조세핀의 목소리에 범인이 고개를 들었다. 아는 사람이야? 사람들의 시선이 조세핀을 향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당신이었어요?” 에디는 조세핀의 얼굴을 보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여자! 저 여자 때문에 이 꼴이다. “아는 사람입니까?” 치안관의 질문에 조세핀은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는 사람인 건 분명하지만, 오히려 싫어하는 쪽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에디가 소리를 질렀다. “그래, 아는 사이야! 이 멍청한 여자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너 이년, 가만두지 않겠어!”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건 또 뭐지? 그녀는 조세핀을 힐끔 쳐다봤다. 그녀는 겁에 질려있었다. 그리고 매우 부끄러웠다. 여기서 사라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어야 했다. “모르는 자다.” 이안이 시끄럽게 구는 에디를 걷어차며 말했다. “윽!” “이 집은 케이트의 집이다. 그녀는 이런 녀석을 모르고. 그러니 데려가.” 어, 정말입니까? 치안관이 케이트를 쳐다봤다. 케이트는 조세핀의 얼굴을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와 조세핀이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도둑이 들었다고요?” 케이트의 초대를 받아 도착한 제이드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물었다. 소문 한번 빠르다. 케이트는 데이지에게 차를 부탁하고 소파에 앉으며 쓰게 웃었다. 치안관이 에디라는 이름의 남자를 끌고 간 뒤 조세핀은 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집안을 살핀 케이트는 도둑이 손댄 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았다. 도둑이라면 부엌에 있는 은 식기에 먼저 손댔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부엌에 들어온 흔적은 없었다. 대체 뭘 노린 거지? 의문을 품는 케이트에게 이른 아침 내려온 조세핀은 깨진 유리창 값을 자신이 물어내겠다고 했다. 그녀가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해도 조세핀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면서 무슨 사정인지도 전혀 말하지 않았다. 결국 케이트는 제이드에게 시간이 나면 방문해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음, 그게 말이죠.” 케이트는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하고 잠시 고민했다. 때마침 데이지가 차를 들고 나타났다.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고 응접실을 빠져나가자 제이드가 씩 웃으며 말했다. “하녀를 잘 뽑았네요.” “그래요?” “보면 볼수록 괜찮은 것 같아요.” 고작 며칠이지만 데이지는 일도 잘하고 싹싹했다. 그보다. 그녀는 찻잔을 들며 주제를 바꿨다. “혹시 코트양이 왜 집을 나왔는지 알아요?” “글쎄요.” 제이드도 모르는구나. 조금 실망한 탓에 케이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라면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일인데요?” 제이드 역시 케이트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심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조가 그녀에게 뭔가 말한 걸까. 그렇지 않아도 그도 궁금하던 차였다. 조세핀은 책임감 있고 영리한 여자다. 그런 그녀가 단순히 결혼하기 싫다는 이유로 집을 나왔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던 차였다. “뭐냐.” 그때 이안이 응접실에 모습을 나타냈다. 어라, 제이드는 실내복 차림의 그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집에 있는 줄 몰랐는데. 이안이 성큼성큼 걸어와 제이드와 케이트 사이에 놓인 소파에 앉자 케이트는 다시 데이지에게 차 한 잔을 요청했다. “있었어?” “내가 없는 줄 알고 온 건가?” 아니, 그건 아니지만. 제이드가 우물거렸다. 분위기가 나빠지는 것 같자 당황한 케이트가 나섰다. “어, 로엔 경은 오늘 아침까지 치안대에 있다가 왔거든요. 킬리언씨는 제가 여쭤볼 게 있어서 와달라고 부탁드렸어요.” 분위기가 약간 누그러졌다. 정확히 말하면 이안의 분위기가. 그러고 보니 난 왜 이 상황을 설명한 거지? 케이트는 데이지가 이안의 차를 가져오자 퍼뜩 생각했다. 여긴 그녀의 집이다. 누가 오건 이안이 상관할 바가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그런 불만은 금세 사라졌다. 지난 새벽, 이안의 도움이 매우 컸다. 그가 없었다면 더 큰 일이 일어날 뻔했다. 게다가 아침까지 그는 치안대에 가서 상황을 설명하는 역할까지 수행했다. 젠장. 케이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이 이 집에 있어야 할 이유가 생겨버렸다. “그래서, 뭘 물어보려고 한 거지?” 데이지가 사라지자 이안이 입을 열었다. 케이트는 아차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제 도둑이 들었는데,” “네. 알고 있습니다.” “그 도둑이 코트 양을 알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도둑을요?” 케이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드는 흠하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조세핀이 도둑을 안다고? 그는 조세핀이 그런 사람들과 알 만한 일이 있나 하고 고민했다. 어쩌면 코트 부부의 식당에서 알게 된 지도 모른다. 조세핀은 전에 부모님 식당에서 일을 도왔다. “이름이 에디라고 했는데, 마치 자신이 집에 침입한 게 코트 양 때문인 것처럼 굴더군요.” 에디? 제이드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디서 들은 이름인데? 기억이 날 것 같으면서도 영 떠오르질 않는다. 그 사이에 케이트가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제가 이상하게 생각한 건 그다음 코트 양의 태도인데요.” 제이드의 시선이 케이트를 향했다. 그녀는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다시 말했다. “그 도둑이 유리창을 두 장 깨트렸거든요. 그런데 오늘 아침, 코트양이 자신이 피해보상을 하겠다고 하더군요.” “조가?” 제이드의 눈이 커졌다. 더더욱 모르겠다. 대체 왜? 조세핀이 뭣 때문에 도둑이 망가트린 큐바인 하우스에 대한 수리를 해야 한단 말인가. “저, 그래서. 킬리언씨는 코트양과 소꿉친구라고 했으니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요.” 케이트는 손해에 대한 배상보다 조세핀의 태도가 더 신경 쓰였다. 혹시라도 그녀가 잘못된 일에 휘말린 건 아닐까. 하지만 제이드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정말로 조세핀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적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혼하기 싫다는 이유로 집을 나온 조세핀과 딸이 가출할 정도의 혼사를 시키려는 코트부부. 그는 이 년 전을 마지막으로 코트 부부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조세핀이 그의 가게에서 일을 한 것도 이 년 정도 됐다. 젠장.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제이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제가 한 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 대답에 케이트는 제이드 역시 알고 있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이번화 중반부까지 이안은 상의를 벗고 있습니다. 후후후후. 즐거운 화요일입니다. 전 어제까지 너무 떨어서 오늘은 에잇! 하고 코트를 입고 갔더니 더웠...으흐흐흐흐흐흑 00131 3. 빨간머리 =========================================================================                            로웨나 벨링스의 방은 레이스와 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여성스러운 방을 둘러봤다. 더이상 놓을 곳이 없어 한쪽에 쌓아둔 꽃다발. 화장대 가득 쌓인 풀지도 않은 선물 상자. 뮈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배우라 해도 이 정도로 선물 공세를 받지는 못할 것이다. 거기에 검푸른 코트를 입은 검은 머리카락의 큰 남자, 이안은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방주인이 그를 발견했다면 비명을 질렀을 테지만, 지금 방주인은 없었다. “어떻게, 알겠소?” 벨링스 자작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뒤로 사용인들이 지나갔다. 그들은 아가씨의 방에 웬 검은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고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남자는 뭐지? 그렇지 않아도 벨링스 자작이 사람들 몰래 로웨나를 시골로 내려보낸 일 때문에 벨링스 가의 저택은 싱숭생숭한 상태였다. 기가 세고 까다로운 성격이라 해도 사교계에 크게 소문이 날 만한 일은 하지 않던 로웨나는 한순간에 남자들을 유혹하는 요물이 되더니 급기야는 약혼자로부터 파혼당했다. 어리고 생각 없는 남자 한두 명이 약혼한 여자에게 구애하는 건 그렇다 치겠지만 어떻게 사교계의 남자들이 미혼 기혼을 가리지 않고 로웨나에게 구애를 한단 말인가. 로웨나의 약혼자뿐 아니라 사람들 모두 그녀가 남자들을 유혹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추문을 견디다 못한 벨링스 자작이 로웨나를 시골로 내려보낸 것은 사람들에게 어쩌면 당연한 일로 비쳤다. “좀 더 찾아봐야겠군요.” 이안은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장식장을 살폈다. 그가 보기엔 전부 이상하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여자의 물건은 뭐가 이상하고 뭐가 이상하지 않은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장식장 위에 놓인 오르골을 집어 들었다. 정정하자. 이안이 보기엔 이런 오르골 하나도 충분히 이상했다. 노래가 나오는 상자라니, 대체 이런 걸 왜 가지고 있는 거지? 벨링스 자작은 초조한 마음으로 이안을 쳐다보다가 열린 문 사이로 지나다니는 사용인들이 로웨나의 방을 힐끔거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그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재빨리 방문을 닫았다. 그날 아침, 로웨나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 벨링스 자작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남자들을 유혹하고 파혼을 당하더니 이젠 가출이라고?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벨리스가의 명예는 끝을 모르고 추락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딸을 노리던 남자들에게 납치를 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 몇 주간 로웨나는 이상할 정도로 남자들의 광적인 구애를 받았다. 그들은 온종일 벨링스가의 저택 앞을 서성이거나 하루에도 몇 번씩 꽃을 보내거나 했다. 하지만 가출이나 납치나 결국은 다를 게 없다. 결국 로웨나로 인해 사교계에는 벨링스가의 추문으로 가득 찰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사용인들에게 로웨나를 사람들 몰래 시골로 보냈다고 일렀다. 그동안 그녀로 인해 저택 안팎으로 시끄러웠으므로 사용인들은 의심을 품지 않았다. “좀 빨리 찾아보게.” 서두르는 벨링스 자작의 태도에 이안은 그를 힐끔 쳐다봤다. 알음알음으로 사람들 몰래 조사해줄 사람을 구한 자작은 에드워드가 이안을 소개하자마자 그가 벨링스가의 저택에 오는 것도 재촉했다. 가출이든 납치든, 벨링스 자작으로서는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로웨나를 찾아 데려오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이안은 흠 하고 손에 든 오르골을 열었다. 푸쉬. 오르골 안에서 작은 연기와 함께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별생각 없이 오르골을 열었던 이안도, 벨링스 자작도 놀라 몸을 굳혔다. “마법이군.” 차가운 목소리로 이안이 말했다. 마법이 불발된 상태와 매우 비슷했다. 무슨 마법인지는 좀 더 조사해 봐야겠지만 마법이 걸린 오르골을 가지고 있는 귀족 영애라니, 심각한 문젯거리다. “무, 무슨, 마법이라니?” 벨링스 자작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이안에게 다가갔다. 마법?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로웨나의 행동거지와 파혼이 그의 가장 큰 골치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엔 이 칠칠치 못한 딸이 사라지더니 이젠 마법이란다. 벨링스 자작의 머리가 빨리 돌아가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이안은 그런 그에게 오르골을 내밀며 담담하게 말했다. “벨링스 자작. 이 집에서 마법 물건이 발견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럴, 그럴 리가 없어!” 벨링스 자작이 이안의 손에 든 오르골을 탁 쳐냈다. 그것은 바닥에 툭 떨어지더니 데굴데굴 굴러 장식장 아래로 숨어버렸다. 물끄러미 그 장면을 지켜보는 이안에게 그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모르는 일이야! 헛소리 말고 당장 내 집에서 나가!” 이럴 줄 알았다. 이안은 담담하게 벨링스 자작을 쳐다봤다. 누구라도 자신의 집에서 마법 물건이 발견된다면 이렇게 반응할 것이다. 뮈엘라에서 마법은 불법이다. 마법 물건 역시 마찬가지. 귀족이라면 수사관의 수사를 받아야 하는 문제다. 하지만 그는 더이상 수사관소속이 아니다. 에드워드 직속이지. 이안은 흠하고 잠시 생각했다. 예전이었다면 바로 상부에 보고했을 것이다. 이번 일 역시 마찬가지다. 에드워드와 이야기를 해봐야겠군. === “아가씨.” 막 주방에서 나가려던 차였다. 케이트는 데이지가 손을 맞잡고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얼굴이 심각했다. 케이트는 일순 데이지가 그만두겠다고 말하려는 건가 하고 겁을 먹었다. 데이지는 괜찮은 하녀다. 그녀가 그만둔다면 더 괜찮은 하녀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집에 도둑이 들었던 것을 생각하며 나가겠다는 그녀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도둑. 케이트의 머릿속에 도둑이 들었던 날 새벽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때 데이지의 눈앞에서 케이트는 마법으로 문을 닫았다. “저, 여쭤볼 게 있어요.” 어쩌면 그만두겠다고 말하려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케이트의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때 문을 닫은 게 그녀라는 것을 데이지가 눈치챘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마녀라는 것을 알게 됐는지도 모른다. “아가씨, 혹시 마녀인가요?” 케이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데이지가 알아버렸다. 들켰다. 아니야. 아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부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니,” “괜찮아요! 저도, 마녀거든요.” “뭐?” 데이지는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맞잡은 손을 풀어 케이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더니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다. 제인은 오늘 저녁 음식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킨 차였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케이트를 보고 씩 웃었다. “아가씨가 마녀인줄은 몰랐어요! 저도 그래요. 수도로 오면 다른 마녀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기뻐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케이트의 머릿속이 엉킨 것처럼 제대로 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녀? 다른 마녀라고? 수도로 오면? 그녀는 데이지에게 손을 잡힌 채 되물었다. “저기, 수도에 오면 다른 마녀를 만날 수 있다고요?” “네. 수도엔 마녀 모임이 있잖아요.” 처음 듣는 말이다. 그보다 케이트는 그녀가 마녀라는 것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사실 아직도 자신이 마녀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날 새벽, 문을 닫은 게 정말 그녀였던 걸까. 케이트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아, 아닐 거예요.” “네?” “전 마녀가 아닐 거예요.” “아니예요, 아가씨는 마녀가 맞아요!” 데이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깜짝 놀라 주변을 살펴보는 케이트와 달리 데이지는 신이 난 것 같았다. “문을 닫았잖아요? 아가씨는 마녀라고요.” “그건 그냥 바람이…,” “아가씨, 부인하지 마세요. 문이 닫힐 정도로 바람이 세게 불지도 않았잖아요.” 데이지의 강한 믿음에 케이트는 울고 싶어졌다. 아니야, 나는 아니야.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도 데이지는 케이트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잡힌 손이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떼어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케이트는 멍하니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낮은 목소리가 들리자 분위기가 전환됐다. 데이지는 깜짝 놀라 케이트의 손을 놓더니 고개를 숙이고 반대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안을 무서워했다. 그 행동에 익숙한 이안은 데이지를 신경 쓰지 않고 케이트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저 여자가 뭐라고 했나?” 케이트는 복잡한 기분으로 이안을 응시했다. 뭐라고 했냐고? 자신이 마녀라고 했고 그녀도 마녀라고 했다. 마치 확인 사살당한 느낌이다. 스스로 마녀임을 밝힌 여자가 케이트도 마녀라고 했다. 더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할까. 억지로 막아두었던 둑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저기 난 구멍을 억지로 손과 발로 막고 있었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감정의 뭔가가 같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케이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안은 케이트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반사적으로 한 발짝 발을 내디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저 하녀가 뭐라고 했지?” 초조한 탓에 이안의 말은 취조하는 것처럼 들렸다. 욱하고 서러운 마음이 들어 케이트의 눈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어이. 그녀에게로 향하던 이안의 손이 멈췄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몸 전부가 딱 굳어버렸다. “모, 몰라도 돼요!” 울먹거리는 목소리와 눈물로 젖은 뺨. 이안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쩌란 말인가. 케이트의 눈물은 주체를 못 하고 흐르기 시작했다. 어, 어? 이게 아닌데. 그녀조차도 당황해서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뭔가 대단히 실망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무너진 느낌. 바닥이 무너진 것 같다. 이안은 그런 그녀를 끌어안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차에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어라. 하는 사이 입술이 부딪혔다. “읏!”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입술 사이를 비집고 혀가 침입해 들어왔다. 그녀가 발버둥 치지 못하도록 이안은 한 손으로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고 있었다. 뒤통수를 단단하게 붙잡은 손 탓에 케이트는 입안을 헤집는 혀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으응,” 숨이 가빠올 때까지 키스가 이어졌다. 머리가 어질해질 정도가 되어서야 이안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무슨 짓이예요!” “울지 마.” “안 울었거든요!” 언제 그랬냐는 듯 케이트가 울컥해서 외쳤다. 이안은 그런 그녀의 얼굴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직도 눈 주위가 불그스름하다. 그는 손을 들어 케이트의 눈물을 닦아냈다. 움찔 물러서던 케이트는 뜻밖에도 뺨에 부드럽게 닿는 커다란 손의 감촉에 멈춰 섰다. “저 하녀가 싫으면 해고해.” “그런 거 아니예요.” “울었잖나.” 그렇긴 하지만 데이지가 싫어서 운 건 아니다. 그녀가 마녀라는 확인사살 탓에 운 거지. 케이트는 그 이야기를 이안에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때 이안이 손가락에 묻은 케이트의 눈물을 핥았다. 눈물은 짜다고 하던데 그다지 짜지 않았다. “뭐, 뭐하는 거예요?” 키스한 것보다 자신의 눈물을 핥는 모습에 기겁한 케이트가 달려들었다. 이 남자, 지난번에도 이런 짓 하지 않았나? 당황하는 케이트에 비해 이안은 당당하게 말했다. “눈물은 어떤 맛인지 먹어봤다.” 덕분에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케이트는 웃어야 할지 화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이안의 얼굴을 쳐다봤다. “어, 어떤 맛인데요?” “글쎄.”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생각보다 짜지 않아.” 어쩌면 양이 너무 적어서 맛을 못 느낀 걸 수도 있고. 덧붙이는 말에 케이트는 말을 잃었다. 그래서 더 울어보라는 건가? 좀 더 맛보게? 어쩌면 이 남자에게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방법으로 주의를 시키는 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른 데선 이러지 마요.” “다른 사람에게 이러지 말라는 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네게 이러지 말라는 건가?” “둘 다요!” “아.” 그제야 알겠다는 듯 이안이 케이트의 턱을 잡았다. 호박색 눈동자가 빛나는 것처럼 보여 케이트는 숨을 들이켰다. “별로 다른 사람의 눈물 맛이 궁금한 적은 없는데.” 그럼 내 눈물 맛은 갑자기 왜 궁금해 진 거냐고. 케이트는 이안을 노려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 작품 후기 ============================ 이번 소제목은 바꿀지도 모르겠네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오늘 점심을 먹고 우체국에 갈 일이 있어서 우체국 근처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좀 줬는데 그 중 한마리가 임신했더라구요. 오, 넌 임신했으니 더 먹어야겠구나. 하고 사료를 더 주려는데 암컷 : 동작그만. 밑장빼기냐? 저 : 뭐야? 암컷 : 내 사료를 한주먹 뺐지?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닝겐. 저 : 증거있어? 암컷 : 증거? 증거 있지. 너는 내게 사료를 두주먹 줬을 거시여. 그 중에 한주먹을 빼서 저 고양이에게 주려는 거지. 이거이거, 밑장빼기 아니여? 다 모두들 보쇼. 새끼도 벤 내 사료를 빼서 딴 고양이를 준다, 이거 아니여? 저 : 시나리오 쓰고 있네. 미친 냥이가. 수컷 : 예림이, 그 사료 봐봐. 진짜 줄었어? 암컷 : 사료 건들지마. 손모가지 날아가붕게. 손톱다듬어 와. 저 : 정말 이렇게 까지 해야 돼? 수컷 : 잠깐, 그렇게 피를 봐야겠어? 암컷 : 줬다 뺏으면 피보는 거 안배웠냐? 저 : 좋아. 이 주먹에 사료가 없다는데 내 사료 모두하고 내 손모가지 건다. 쫄리면 뒈지시던지. 암컷 : 이 시벌놈이 어디서 약을 팔어? 저 : 천하의 길고양이가 혓바닥이 왜 이렇게 길어? 후달리냐? 암컷 : 후달려? 니양, 냥냥, 내 발톱하고 혀를 건다. 수컷 : 준비 됐어? 까볼까? 니양냥냥냥 야옹. 암컷 : 비었네? 수컷 : 비었어? 저 :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라 이런 거 안 배웠어? 뭐해? 니 암컷 발톱 안 넣고? 암컷 : 야, 이 닝겐 손 할켜! 00132 3. 빨간머리 =========================================================================                            코트 부부가 사는 집은 반지하가 있는 이 층짜리 건물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면 두세 걸음 정도의 마당이 있다. 그 마당을 벗어나면 인도가 있는데 두 사람 정도가 지나갈 수 있을만한 넓이의 인도를 벗어나면 마차가 다니는 도로가 있다. 그 도로 위 마차 안에서 제이드는 창백한 안색의 조세핀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집에 도착한 지 삼십 분이 지났는데 조세핀은 들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이드도 본가에서 나와 살고 있기는 하지만 본가에 돌아가는 건 항상 행복해지곤 한다. 비록 가족들이 좀 귀찮고 짜증 나게 굴더라도. “들어가야지.” 제이드의 재촉에 조세핀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머뭇거리더니 그에게 물었다. “여기서 기다릴래?” 혼자 들어가고 싶었다. 조세핀은 집에 들어가면 어떤 것을 보고 듣게 될지 뻔히 알았다. 하지만 제이드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는 에디가 이미 폭행과 도둑질로 치안대에 잡혀간 전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화가 난 상태였다. “안돼. 나도 같이 들어가서 이야기할 거야.” “네가 들어가 봐야 아무 소용없다니까.” “네 부모님, 그 남자가 어떤 놈인지 알면서 너와 결혼시키려 하셨겠어? 내가 가서 제대로 이야기할 거야.” 제이드가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는 것보다 그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세핀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그녀의 부모님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던 보물을 잃은 뒤 다른 건 아무 가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됐으니까 내가 이야기한다니까.” “그럼 나 혼자 따로 만날게.” 그건 더더욱 안 된다. 조세핀이 없다면 코트 부부에 제이드에게 할 말 못할 말을 하는 순간을 막을 수 없다. 차라리 그녀가 좀 창피한 게 나았다. 그동안 제이드가 자신의 부모를 만나지 못하도록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모든 게 물거품이 돼 버렸다. 조세핀은 한숨을 내쉬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마차 안을 나왔다. 정말 싫다. 코트 부부는 조세핀과 제이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이 년 전이지만 훨씬 늙어 보여 제이드는 내심 놀랐다. 계절마다 커텐을 바꾸고 소파의 천갈이를 해서 관리하던 응접실은 그저 쓸고 닦기만 했을 뿐 계절과 맞지 않은 커텐이 달려 있었다. 그는 문득 소파와 커텐이 그가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와 똑같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다. 코트 부인은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여자였다. 그녀가 가장 꾸미기 좋아한 것은 물론 그녀의 딸이었다. 제이드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코트 부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무슨 일인가.” 되돌아오는 말은 딱딱했다. 제이드는 당황했고 조세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부부는 심지어 제이드에게 앉으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이렇게까지 푸대접은 처음이라 제이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제이드는 절 도와주러 온 거예요.” “널 도와준다고?” 코트 부인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그녀는 두 손을 잡고 비틀고 있었는데 창백하고 딱딱한 얼굴과 어울려 매우 예민하게 보였다. 이 년 전에도 조금 예민한 여자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제이드는 뭐라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이런 사람들이,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좀 더 밝고, 화사한 분위기였다. “널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니, 조! 응? 너와 결혼해줄 남자를 소개라도 해준다니?” 히스테리컬한 코트 부인의 목소리에 조세핀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너무 싫다.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자마자 코트 부인이 냉정하게 말했다. “조세핀 코트! 또 그러는구나! 그 얼굴을 더 못생기게 만들어서 어쩔 생각이니?” 뭐? 난데없는 상황에 제이드는 깜짝 놀라 조세핀을 쳐다봤다. 더 못생기게 만든다고? 고개를 숙인 조세핀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의기소침한 모습은 처음이라 제이드는 더욱 놀랐다. 어디서나 당당하던 조세핀이었다. 아니, 적어도 그의 앞에서는 당당했다. “그보다 말씀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제이드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이야기했다. 그때까지도 코트 부부는 제이드에게 의자에 앉으라고 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는 수 없지. 제이드는 선 채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조와 결혼시키려 한 에디라는 남자 말인데요.” 한 번의 사별과 두 번의 이혼. 그것도 부인이 도망쳤다고 했다. 하지만 제이드는 이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도박 빚이 매우 많더군요.” 하지만 코트 부부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놀랄 상황이 아닌가? 제이드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 빚을 갚기 위해 조와 결혼하려 했다고 합니다. 결혼하면 식당을 팔아 빚을 갚으려 했다고요.” 여전히 코트 부부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 지고 있었다. 제이드는 눈알을 굴리고 말을 이었다. “며칠 전, 조를 노리고 그녀가 사는 집에 침입하기까지 했습니다. 치안대에 넘기고 보니 도박에 폭력전과까지 있는 놈이었고요.” 이정도면 됐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제이드를 조롱이라도 하듯 코트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네?” “에디가 좀 문제가 있기는 해.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 식당이 잘 운영되고 있단 말이네. 사람은 누구나 문제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야.” 조세핀은 귀를 막고 싶었다. 누구나 문제가 있다. 타인에게 그렇게 배려심 넘치고 아량 넓은 부모가 딸에게만 그렇지 않다는 건 가혹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남자와 조를 결혼시킨다는 건….” “걱정해 줘서 고맙지만, 제이드.” 코트는 귀찮다는 듯 말했다. “우리도 고심 끝에 고른 남자라네. 우리 조를 봐. 저렇게 못생긴 노처녀를 누가 데려간단 말인가. 그래도 에디 정도 되니 우리 딸을 감수해주겠다고 나선거란 말일세.” 뭐? 제이드는 지금 이 상황이 믿을 수 없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노, 농담이시죠?” “농담이냐니? 내가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한단 말인가.” “조세핀은 못생기지 않았어요.” 제이드의 말에 코트 부부가 흥하고 비웃었다. “그럼, 자네가 데려갈 텐가?” “아버지!” 제이드를 대신해서 만류한 건 조세핀이었다.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두 손을 꼭 쥐고 말했다. “그만 하세요.” “네가 멍청한 짓을 해서 그런 거 아니냐! 네 주제 파악을 해야지! 너같이 못생긴 노처녀를 누가 데려간다고!” 잠깐, 이거 진심이야? 제이드는 깜짝 놀라서 조세핀을 잡았다. 이게 부모라는 사람이 딸에게 할 말인가? 그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말조심하시죠!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집안에 정적이 흘렀다. 말을 꺼낸 제이드마저도 일순 숨 쉬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 젠장.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잘못 건드렸다. “어떻게 그런 말을!” 먼저 터져 나온 건 코트 부인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감히, 감히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너만 똑바로 처신했으면 우리 에이미는 안 죽었어!” “여보.” “그렇잖아요! 저 녀석이 똑바로 처신해 줬다면, 우리 불쌍한 에이미가 그렇게 죽지 않았을 거라고요!” 이게 무슨. 제이드는 말을 잃고 코트 부부를 쳐다봤다. 그가 똑바로 처신했으면? 그러면 에이미가 안 죽었다고? 눈앞이 하얘졌다. 그때 조세핀이 나섰다. “그만 좀 하세요!” 그녀는 제이드 앞에 나서서 소리쳤다. “처신을 똑바로 했다면 에이미가 안 죽었을 거라고요? 어떻게 처신해야 약혼한 몸으로 다른 남자와 밀회를 즐길 수 있는 거죠? 어떤 여자가 약혼자를 두고 다른 남자와 놀아날 수가 있냐고요!” “조세핀 코트! 그 입 닥치지 못해?” “말은 바로 하자고요. 약혼자를 두고 다른 남자와 놀아난 건 에이미예요. 제이드가 무슨 처신을 잘못했는데요?” “조세핀!” 코트 부인의 손이 올라갔다. 위험하다 싶은 순간 제이드는 조세핀을 감쌌다. 철썩하고 그의 어깨에 코트 부인의 손바닥이 부딪혔다. 꽤 매서운 손이었지만 제이드는 내색하지 않았다. 코트 부부는 부인이 때린 게 제이드라는 것을 깨닫자 얼어붙었다. 그 틈을 타서 조세핀이 제이드의 품을 빠져나왔다. “이제 됐어!” 조세핀이 몸을 돌려 집 밖으로 달려나가 버렸다. 제이드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코트 부부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 한 뒤 따라나섰다. 그녀는 마차 안에 들어가 있었다. 동그랗게 만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이드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잠시 멍하니 앉아있었다. 이 년 사이에 변한 코트 부부. 그리고 조세핀. 그는 멍하니 조세핀의 어깨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마차 천장을 두드렸다. 조세핀이 입을 연 것은 마차가 큐바인 하우스 앞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창밖을 보던 제이드에게 그녀가 사과했다. “미안해.” 제이드는 아니라고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멈췄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사과하는지 몰라서였다. “에이미는, 너도 알겠지만. 우리 집 유일한 자랑이었거든.” 유일한 자랑인지는 모르지만 코트 부부의 자랑거리였다는 것은 안다.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일 수도 저을 수도 없어 가만히 있었다. 에이미. 에이미 코트. 코트 부부는 평범하게 생긴 사람들이다. 그 부부에게서 태어났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를 보는 모든 남자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다. 한 떨기 꽃과 같고 눈동자는 마치 별을 박은 것 같다고 했다. 동그란 얼굴, 연한 갈색의 머리카락과 푸른색의 눈동자. 커다란 눈동자를 빛내며 작고 붉은 입술로 이야기하면 남자들은 내용과 상관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하곤 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에이미 코트. 그런 딸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코트 부부. 거기까지 과거를 떠올린 제이드는 문득 이상한 점을 떠올렸다. 그 사이에 조세핀은 없었다. 코트 부부가 에이미를 데리고 소풍을 다니고, 쇼핑하러 다니는 것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 화기애애한 가족 안에 조세핀은 없었다. “그래서 그분들은 에이미가 잘못해서 죽은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은 거야.” 에이미와 제이드는 소꿉친구였다. 그건 조세핀도 마찬가지였다. 그다지 부유하진 않았지만 코트 부부의 식당은 그럭저럭 괜찮았기 때문에 킬리언가에서는 제이드의 배우자로 에이미를 낙점했다. 두 사람은 어디에서나 사랑받는 한 쌍이었으니까. 하지만 에이미는 사랑받고 자란, 사랑받을 줄만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호의와 사랑이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조세핀은 제이드와 약혼해서 좋지 않으냐는 그녀의 질문에 꺄르르 웃던 에이미의 대답을 떠올리고 눈을 감았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제이드랑 결혼하면 예쁜 옷을 마음껏 입을 수 있잖아. 당연히 좋지. 제이드가 좋은 게 아니라? 놀란 조세핀의 말에 에이미는 마치 그녀를 비웃는 것처럼 말했다. 제이드가 딱히 더 좋은 건 아냐. 그냥 가장 부자니까 결혼하는 거야. 천진하고 잔인한 소녀. 에이미는 자신이 중심이 되는 것이 당연해서 한시라도 중심이 되지 않고는 못 배겼다. 언니인 조세핀이 부모님의 식당에서 일을 도울 때도 그녀는 다른 남자들의 초대를 받아 산책하러 가거나 뱃놀이를 했다. 그건 그녀가 제이드와 약혼한 다음에도 변하지 않았다. 약혼하고도 에이미는 그녀에게 구애하는 남자들과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결국 마차 사고를 당해 밀회를 즐기던 상대 남자와 그 자리에서 즉사할 때까지. 원래대로라면 킬리언가에서 코트가에 화를 내도 할 말이 없는 사건이었다. 약혼자가 다른 남자와 단둘이 마차 안에서 죽다니, 대단한 추문이다. 하지만 킬리언 가는 소꿉친구였다는 점과 아직도 제이드와 조세핀이 친구라는 점을 들어 아무 말 없이 넘어갔다. 그게 문제였다. 조세핀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때 차라리, 킬리언 가에서 화를 냈더라면 상황이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인생의 낙이자 보물을 잃은 코트 부부는 에이미가 다른 남자와 마차사고를 당한 것이 에이미를 즐겁게 해주지 못한 제이드의 탓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딸이 에이미에 비하면 훨씬 못한 조세핀이라는 점에 불행해 하기 시작했다. 그야 에이미는 예쁘니까. 어디서나 주목받고 구혼이 물밀듯 들어왔으니까. 그에 비해 평범한 조세핀은 주목받지도, 구혼이 많이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나마도 그녀가 나이를 먹자 그녀에게 구혼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다. 때때로 식당을 보고 구혼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조용하고 안경을 쓴 조세핀에게 진심으로 흥미를 느끼는 남자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하나뿐인 딸이 에이미 발끝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게 싫으신 거지.” 조세핀은 그냥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너무 예뻤던 에이미에 비하면 내놓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건 에이미가 죽기 전에도 가해지던 비교였다. 조세핀이 에이미의 반만큼만 예뻤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린 시절에도 그녀의 부모가 그렇게 말한 것이 생각난다. 그리고 이제는 죽어버린 에이미는 그 미모뿐 아니라 자기 멋대로에 이기적인 성격마저도 미화되어 있었다. 그녀는 평생 가도 그녀의 부모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을 길이 없을 것이다. 조세핀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차라리 그때 죽은 게 에이미가 아니라 그녀였다면. “미안해.” 조세핀은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우리 집 일에 말려들게 해서 미안해. 이제 네게 불똥이 튀지 않을 거야.” 무슨 소리냐고 제이드가 되묻기 전에 조세핀의 말이 이어졌다. “가게는 조만간 그만둘게. 에디가 가게까지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 너도 더이상 날 찾아오지 마.” “뭐? 잠깐, 조!” 제이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세핀은 마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는 데이지가 문을 열자마자 집안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 작품 후기 ============================ 아아, 목요일입니다. 다행이다. 아아아아아아....맙소사. 다행이다. 내일만 버티면 주말이예요. 발이 좀 건조한 편인데 뛰어 다녔더니 발바닥 힘 주는 부분의 피부가 갈라졌어요. 딱딱하게 굳은살이 박히고 갈라진 탓에 좀 나을만하면 다시 찢어지고, 다시 찢어지고..으으.. 친구가 추천해준 힐팩을 붙이고 있는데 낮에 걷다보면 마찰때문에 밀리고 떨어지고, 죽겠네요. 00133 3. 빨간머리 =========================================================================                            같은 시각. 케이트는 막스의 연락을 받고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뮈엘라의 변호사가 하는 일은 보통 유산이나 이혼 등 재산에 관련된 조정이다. 그러니 케이트는 어머니가 엘리자베스 호건이라는 걸 몰랐다면 평생 연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한 번 들어갈까 말까 한 변호사 사무실 앞에서 한숨을 내쉬고 문을 두드렸다. “어서 와요. 스미스양.” 막스는 긴장한 표정으로 케이트를 맞았다. 무슨 일이지? 오라는 이유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케이트 역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다른 일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가 사실은 호건가의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케이트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차라리 호건가의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호건가라는 집안은 차라리 다시 가족을 찾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부담스러웠다. “사실 스미스양이 태어난 마을에서 할머니 한 분을 모셔왔어요.” “할머니요?” 막스는 케이트의 안쪽으로 안내하며 계속해서 말했다. “산파로 일하신 분인데 시기상으로 이 분이 스미스양이 태어났을 때 봐주셨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럼…?” 그 산파가 케이트를 엘리자베스의 딸이 맞다고 확인하면 된다는 말이다. 케이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산파는 족히 구십 세는 넘어 보였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 가늘게 뜬 눈. 과연 이 분이 자신을 알아볼 수나 있을까.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쪽은 케이트 스미스입니다.” 막스는 산파에게 케이트를 소개하며 말했다. “제가 말씀드린 여자분, 기억하십니까?” 산파의 입이 오물오물 대기 시작했다. 약간 뜸을 들인 후 그녀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응, 알지. 알고말고.” “잘 봐주세요. 할머니께서 그때 받아낸 아이가 이 아가씨가 맞습니까?” 주름투성이 얼굴이 케이트에게 다가왔다. 케이트는 숨 쉬는 것도 잊고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산파는 숨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그녀의 얼굴을 살피더니 손을 들어 그녀의 빨간 머리카락을 한 줌 잡았다. “으음.” 마치 영원일 것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노파는 케이트의 머리카락을 손에서 놓더니 호호호 하고 웃었다. “맞네, 맞아. 제 어미와 똑같구먼.” 노파의 호호호 하는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유쾌하게 들렸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막스는 긴장을 풀지 않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동안 산파로서 받아낸 아이들이 상당히 많을 텐데요. 이 아가씨가 베스라는 여인의 딸인 걸 확신하십니까?” “응, 그럼. 그럼.” 노파는 입을 오물오물하며 한 발짝 물러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기억에 남는 아이가 있지. 이 아가씨가 태어난 날도 참 이상한 날이었거든.” “이상한 날이요?” 케이트가 참다못해 물었다. 노파는 케이트를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느릿느릿 말했다. “아가씨가 태어난 날, 참 맑았는데 말이야. 아가씨가 태어나기 전부터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지 뭐유? 마른하늘에 그렇게 천둥번개가 요란한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지.” 운이 좋았구나. 케이트는 무심코 생각했다. 그녀가 태어난 날 날씨가 그토록 이상하지 않았다면 이 노파는 케이트를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그 이야기, 다른 사람들이 물어봐도 똑같이 이야기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럼, 그럼.” 노파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돌렸다. 오랜 시간 서 있어서 피곤했던 탓이다. 그러다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케이트를 쳐다봤다. 그래. 확실히 기억에 남는다. 마른하늘에 천둥번개가 그렇게 요란하게 치던 날은 그녀의 생에서도 특이한 날이었다. 노파는 다시 손을 내밀어 케이트의 빨간 머리카락을 한 줌 쥐었다. “그런데 우째 그 고운 머리를 염색했누?” “네?” 무슨 말인지 몰라 케이트가 반문했다. 염색했다고? 어리둥절해하는 그녀가 답답한 듯 노파가 말했다. “아, 금발 머리를 뭐하러 이런 새빨간 색으로 칠했느냔 말이야. 이것 때문에 헷갈렸잖아.” “어, 제 머리카락이 원래 금발이었어요?” 응? 노파는 고개를 들어 케이트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말로 모른다는 표정이다. 그녀는 머리를 갸우뚱하며 케이트의 머리카락을 놓았다. “그래. 자네 어머니 머리카락을 닮아서 참 고운 금발이었는데.” 처음 듣는 이야기다.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원래 금발이었어? 노파는 다시 몸을 돌려 의자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자라면서 머리카락 색이 변하는 아이들이 있기는 하다만은,” 그럼 그렇지. 케이트는 빙그레 웃었다. 자라면서 머리카락 색이나 눈동자 색이 변하는 아이들은 그리 드물지 않다. 태어날 때는 어머니를 닮아 금발이었다 하더라도 자라면서 빨간 머리로 변했을 것이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그녀의 머리카락은 항상 빨간 머리였으니까. 케이트가 큐바인 하우스에 돌아왔을 때 제이드는 떠난 다음이었다. 데이지는 조세핀이 매우 어두운 얼굴로 돌아와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녀가 이 층에 올라가 조세핀을 불러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조세핀은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나쁜 일이 있었던 모양이야. 케이트는 그렇게 생각하고 일 층으로 내려왔다. 조금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일찍 귀가했으니 요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케이트가 주방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아가씨.” 데이지가 다가왔다. 그녀를 보자 케이트는 잊고 있었던, 잊으려 했던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마녀. 케이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이 마녀라고 생각하자 그녀를 마녀라고 확신하는 데이지도 살짝 부담스러웠다.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청소는 끝났어요?” 케이트의 질문에 데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자신과의 사이에 벽을 세우는 게 느껴졌다. 누구라도 자신이 마녀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당황하고 겁을 집어먹을 것이다. 그곳이 뮈엘라가 아니라 하더라도. 데이지는 잠시 케이트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기다렸다. 자신이 마녀인 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뮈엘라는 마법을 배척한다. 평생 마법은커녕 마법에 대한 간단한 정보도 접할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마녀라는 것을 알려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마녀로서의 재능이 약한 경우라는 좀 낫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고도 적고 인력도 약하다. 그저 자신이 좀 운이 나쁘다고 느끼며 살 뿐이다. 데이지가 보기에 케이트의 마녀로서의 능력은 상당했다. 지금까지 그녀의 주변에서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게, 이성이 꼬이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마녀는 그 존재자체가 이성을 유혹한다. 마녀의 마력은 매력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이성이 반응하는 것이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케이트의 마녀로서의 자질은 지금까지 가려져 있었다. 그냥 뒀다간 더 엄청난 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데이지는 그녀에게 자신의 힘을 깨닫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케이트에게 말을 걸려 했을 때 불안한 기운이 바깥쪽에서 느껴졌다. 데이지는 움찔하고 멈춰 섰다. 현관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제인이 어서 오시라고 인사를 건넸지만 그 목소리는 작은 탓에 주방까지 들리지 않았다. “데이지?” 데이지가 정신을 차리자 케이트가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 그녀는 이안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저, 청소를 마쳤는데 더 시키실 일이 없다면 그만 쉬어도 괜찮을까요?” 각오했던 것과 다른 말이 데이지의 입에서 나오자 이번에는 케이트가 당황했다. 그녀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 네. 뭐. 그렇게 해요.” 감사합니다. 데이지는 허리를 숙인 뒤 재빨리 주방을 벗어났다. 마치 교대하듯 이안이 주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케이트는 이안을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 남자, 원래 이렇게 주방에 출몰하는 남자였나? 알라나데일에서야 하인이니 그랬다 치지만 타운 하우스에서 이안은 그다지 집에 붙어있지 않았다. 케이트는 타운 하우스에서 이안이 주방에 나타났던 적이 있던가 하고 생각하다가 포기했다. “무슨 일이예요?” “아니.” 이안은 문틀에 기대서 케이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냥 발걸음이 주방으로 향했다. “뭘 하는 거지?” “요리 좀 하려고요. 저녁 식사, 먹을 거죠?” 케이트의 질문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능숙하게 냄비를 꺼내 물을 담아 끓도록 내버려 두고 감자를 꺼냈다. 문득 여전히 문틀에 기댄 이안이 눈에 들어왔다. “이리 와요.” 이안은 그녀의 손짓을 따라 주방 안으로 들어섰다. 케이트는 그의 손에 감자를 쥐여주며 말했다. “벗겨요.” 이안의 눈이 깜빡였다. 뭘? 이라고 묻기 전에 케이트가 이번엔 칼을 내밀며 말했다. “얼른요.” 상황을 보아하니 감자 껍질을 벗기라는 뜻인 모양이다. 허. 이안은 좀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서 있다가 케이트가 자신을 무시하고 두툼하게 자른 고기를 조리대 위에 으챠 하고 올려놓자 얌전히 감자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난 이런 것도 다 맡기는 조건으로 돈을 냈는데.” “싫으면 나가요.” 이안의 입이 닫혔다. 케이트는 부지런히 창가에 놓은 화분에서 허브를 몇 개 따오더니 슬쩍 웃었다. 진짜로 나가면 케이트도 곤란하다. 배짱 한 번 튕겨본 건데 나가라는 말이 대단히 무서운 공격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안은 얌전히 서서 감자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혹시 내가 마녀면 어떻게 할 거예요?” 사각사각하고 이안이 감자껍질을 벗기는 소리와 찰싹찰싹하고 케이트가 고기에 허브를 문지르는 소리사이로 질문이 흘러나왔다. 이안은 그저 껍질을 벗길 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케이트가 불안해지기 시작했을 때, 그가 깨끗하게 깎은 감자 한 그릇을 내밀었다. 흠. 잘 깎았잖아. 케이트는 보글보글 끓는 물 속에 감자를 집어 넣고 작은 호박을 내밀었다. “속을 파내요.” 이안은 이번에는 아무 말 없이 케이트가 시키는 대로 호박을 자르고 속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는 케이트가 허브를 문지른 스테이크용 고기를 밀어놓고 파이용 반죽을 시작했을 때 갑자기 입을 열었다. “모르겠다.” 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던 케이트는 속을 깨끗하게 파낸 호박과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를 발견했다. “지난번에 내가 마녀라고 했을 때, 당신, 날 죽이려고 했잖아요.” 지난번? 이안은 잠시 기억을 떠올린 뒤에야 그 지난번이라는 게 알라나데일에서의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그때. 그는 호박을 끓는 물에 넣고 삶은 감자를 건져내는 케이트의 부지런한 손놀림을 시선으로 쫓았다. 조그마한 몸이 요리조리 잘도 움직인다. “죽이려고 한 건 아니야.” 케이트는 삶은 감자와 주걱을 내밀며 명령했다. 으깨요. 그가 순순히 시키는 대로 하기 시작하자 케이트는 잠시 미뤄둔 스테이크를 집어 예열한 오븐 속에 집어넣었다. 오늘 저녁 식사는 으깬 감자와 스테이크. 그리고 호박파이다. “적어도 날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잖아요.” 그래. 그 말이 맞다. 이안은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감자를 으깨며 생각했다. 불법 마녀는 그 자리에서 사살당하거나 왕궁에 고발당한다. 최소한 그는 케이트를 왕궁에 끌고 갔을 것이다. “그래.” 이안이 순순히 수긍하자 케이트는 허리를 숙여 오븐 속의 스테이크를 확인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한참 위에 있는 이안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위압적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흠. 그녀는 오븐을 닫고 파이 반죽을 밀기 시작했다. 적어도 솔직하긴 하군. 하지만 곧이어 이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냐.” “지금은 어떤데요?” 이안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다 으깬 감자를 내밀었고 케이트는 으깬 감자에 버터와 후추를 넣고 섞었다. 호박은 적당하게 삶아지고 있었고 스테이크는 오븐 속에서 익어가고 있었다.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그녀는 괜히 삶고 있는 호박을 포크로 쿡쿡 찌르며 이안의 대답을 기다렸다. “모르겠다.” 드디어 이안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보글보글 끓는 물소리도, 타닥타닥하는 오븐의 소리도 일순간 들리지 않았다. 이안다웠다. 무슨 대답을 기대했던 걸까.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실망해서인지, 안도해서인지는 그녀도 몰랐다. “으깨요.” 다시 다 삶아진 호박을 내밀며 케이트가 말했고 이안은 얌전히 그것을 으깨기 시작했다. 주방 안에 흐르는 소리는 오븐 속에서 스테이크를 굽는 타닥타닥하는 불 소리뿐이었다. 군침 도는 고기와 향긋한 허브의 냄새가 어우러져 주방을 가득 메웠다. 로즈마리. 케이트는 향긋한 허브의 이름을 떠올렸다. 고기에 문지른 건 로즈마리다.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가 생각났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불금이라 이제 집에 왔어요. 즐거운 불금 보내셨나요? 주말 즐겁게 보내시고 다음주에 봬요! 00134 3. 빨간머리 =========================================================================                            에바니엘의 에반스 공작가는 어마어마했다. 방문 허락을 받은 케이트는 호건가의 저택과 비교해서 전혀 부족하지 않은 에반스 공작가의 저택에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과연 로열패밀리답다. 그녀는 그제야 에반스라는 성이 가진 힘을 이해했다. 에드워드 에반스. 현 왕의 사촌이다. 즉, 선왕의 동생이 그의 아버지인 것이다. 그런 대단한 사람의 약혼녀와 이렇게 쉽게 만나도 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케이트의 속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안의 사촌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그저 귀족이기 때문에 느껴졌던 거리감이 이제는 아주, 아주 멀게 느껴졌다. 본관에 가까워지자 케이트는 옷매무시를 살폈다.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옷을 입었지만 어쩐지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정신없이 치마를 정리하고 레이스를 손으로 몇 번이나 편 그녀는 문득 도착에 걸리는 시간이 그녀가 예상한 것보다 오래 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지? 그녀가 고개를 내밀자 마차는 본관이 아니라 별관을 향해 진로를 바꿔 달리고 있었다. 약혼자라 해도 한 건물에서 생활할 수 없으니 로즈마리는 별관에서 생활하는 모양이다. 적어도 케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차가 별관 앞에서 멈추자 세 명의 여자가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와요, 케이트!” 가운데 있는 건 케이트가 만나러 온 로즈마리였다. 긴 갈색 머리를 가진 작은 소녀. 아니 소녀에 가까운 여자. 그녀의 양옆으로 다른 여자 둘이 마치 그녀를 지키듯 서있었다. “이쪽은 케이트양이예요.” 로즈마리는 양옆의 여자들에게 케이트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케이트가 인사를 건네자 여자들이 어떤 신호도 없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앞으로 한 발짝 나왔다. “어서 와요, 스미스양. 저는 에일린이예요. 그리고 이쪽은,” 어깨까지 닿는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가진 에일린이 말을 끊자마자 짧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진입니다.” 약간 딱딱한 말투에 케이트의 기가 죽었다. 한눈에 봐도 그녀는 기사였다. 정복을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허리춤에 달린 검이 그 추측의 기반이 되어주었다. “들어와요. 케이트가 온다기에 맛있는 걸 만들어 달라고 했거든요.” 케이트의 눈에 로즈마리가 말할 때 진이 이상한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지? 그녀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과 실로 안내된 케이트의 눈에 세 개의 티 테이블에 가득 펼쳐진 디저트류가 들어왔다. “앉아요.” 신이 난 것처럼 의자를 탁탁 치는 로즈마리와 달리 진은 거북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어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처럼 숨을 참고 있었다. 케이트는 에일린이 안내하는 대로 로즈마리의 맞은편에 앉으며 테이블 가득 펼쳐진 케이크와 타르트를 쳐다봤다. 엄청난 양. 어마어마한 냄새. 그 다디단 냄새가 아직 홍차를 내리지 않은 탓에 여과 없이 다과 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설마 맛있는 거라는 게 이 달짝지근한 것들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약간 불길한 기분이 들어 케이트는 경직된 표정으로 테이블 위를 쳐다봤다. 그녀라고 케이크나 타르트같은 달콤한 걸 싫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테이블 세 개를 이어 붙여야 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디저트를 보면 누구라도 질릴 것이다. “잘 지내죠?” 하녀들이 홍차를 따르고 나가자 잠시 의례적인 인사가 시작되었다. 로즈마리는 신이 나서 제일 먼저 뭘 고를까~ 하고 눈을 빛내고 있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진은 마치 도망치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일린은 케이트의 앞에 산딸기 시럽을 올린 브라우니를 한 조각 놓아주며 빙그레 웃었다. 로즈마리의 친구가 온다고 해서 약간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케이트는 예의 있었고 평범해 보였다. 적어도 완전 숲에서 자란 로즈마리와 달리 격식이나 세상에 전혀 무지하지는 않았다. 처음 로즈마리를 에드워드가 데려왔을 때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에일린은 이제는 케이크를 먹을 때 입가에 덜 묻히고 먹는 로즈마리를 보며 새삼 감회에 잠겼다. 스스럼없이 에드워드의 무릎 위에 올라가는 걸 봤을 때는 심장이 툭 떨어졌었다. 이런 말 하면 참 미안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의 로즈마리는 무슨 고양이 같았다. “그런데 로즈마리와는 어떻게 알게 됐어요?” “아, 그게.” 케이트는 케이크 한 홀을 다 먹어가는 로즈마리를 곁눈질하며 생각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로즈마리의 약혼자의 사촌이 그녀의 주인이었다고? 그런데 지금은 그녀가 집주인이 되고 주인님이 하숙생이 됐다고? 그녀가 망설이는 사이 케이크를 우물우물 꿀꺽한 로즈마리가 입을 열었다. “에드워드 사촌의 연인이야.” 어머. 에일린은 입을 손으로 가리며 여성스럽게 놀랐다. 진은 움찔해서 저도 모르게 케이트를 쳐다봤고 당사자인 케이트는 얼어붙었다. “어, 아니, 아니예요!” “응? 같이 살잖아요? 에일린, 같이 사는 건 부부나 연인이나 하는 거라며?” 아, 맙소사. 에일린과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디 서부턴지 모르겠지만,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케이트는 두서없이 설명을 시작했다. “그, 그게 아니라, 제가 하녀 일을 했거든요. 그때 이안이 아니, 로엔경이 저를 고용해서요.”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집을 제가 샀는데, 로엔경이 하숙을….” 하녀였다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다. 전 주인인 이안이 하숙생으로 함께 살고 있다는 게 부끄러운 거다. 에일린과 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에일린은 재빨리 표정을 바로 했지만, 진은 달랐다. 그녀는 풋 하더니 벽에 기대서서 킥킥대며 웃기 시작했다. “진.” 한숨 같은 에일린의 지적에 진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음을 참으려 했다. 그 일련의 행동이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멋있었다. “아, 하지만, 그 로엔경이 하숙을 한다잖아.” 어머, 생각보다 딱딱한 사람이 아니었네. 어딘지 모르게 경직되어 보이던 인상이 그 행동으로 쉽게 무너졌다.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을 쳐다봤다. 그녀는 배를 잡고 끅끅대다가 케이트와 눈이 마주치자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로엔 경과는 같은 아카데미를 다녔거든요.” “같은 아카데미요?” 학문이 주가 되는 다른 나라의 아카데미와 달리 뮈엘라의 아카데미는 검술과 교우관계가 주가 된다. 학문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분명 수업과정에 들어있지만, 비중이 작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귀족이나 부자인 경우 아카데미를 가지 않아도 더 실력 있는 전사를 고용해 배울 수 있다. 하지만 굳이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이유는 여러 실력과 겨룰 수 있고 단체 전투를 경험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거기에 실력 있는 자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점도 큰 이유다. “제가 이 학년 후배지만요.” 이안의 아카데미 생활은 어땠을까. 케이트는 상상이 가지 않아 갸우뚱하며 물었다. “어땠어요? “로엔 경이요? 아는 사람은 아는 전설이죠.” “아는 사람은 아는 전설이라고요?” 음. 진은 단 냄새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굴렸다. 이안은 입학부터 소문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 인정도 받지 않은 사생아가 서자로 인정됐으니까. 아카데미에서 기사도를 배우기도 하지만 모든 학생이 그 기사도를 따르는 건 아니다. 어디 가나 물을 흐리는 멍청한 놈들이 있다. 그런 멍청이들이 이안을 노린 건 그리 이상하지 않다. 이상한 건 그들이 이안을 노렸다는 이야기만 들릴 뿐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아카데미에 이안이 화두로 떠오른 것은 그가 입학하고 첫 번째 시험에서 수석을 했을 때였다. 그때까지 이안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조용히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수석을 할 때까지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뿐. 그다음 시험에서 이안은 보기 좋게 중간 정도의 성적을 거뒀다. 정확히 말하면 중간에서 약간 상위. 사람들에게 흠 잡히지 않고 집안에서 그럭저럭 괜찮다 할 정도의 성적. 다들 첫 번째 성적은 요행이었다 생각했을 때 진이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녀 역시 로엔가의 이안이라는 서자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의식하게 된 건 그가 검술 시간에 교사를 이길 뻔한 사건 때문이었다. 대부분 이안이 운이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은 다르게 생각했다. 이안은 검술교사를 이겼다. 하지만 구설수에 오를 것을 의식해, 그리고 교사의 명예를 위해 일부러 마지막 순간 실수를 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진은 이안이 검술교사를 이겼다고 생각했다. 그 직후 그 검술교사는 기묘할 정도로 이안을 싫어했으니까. 항상 꼬투리를 잡아 자신의 수업시간에 이안에게 벌을 주거나 수업을 듣지 못하도록 하곤 했다. “대단한 사람이었죠.” 진은 자신이 아는 이안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누군가는 이안의 친어머니가 마녀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건 사실이건 거짓이건 소문을 낸 사람에게도 대단히 위험한 말이기 때문에 아주 잠깐 수면으로 떠올랐다가 재빨리 사라졌다. “로엔경은 그러니까, 수석졸업을 했거든요.”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그래? 아카데미에서 수석졸업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엔 대단하다. 진은 그녀의 표정에 씩 웃어보였다. “더 놀라운 게 뭔지 알아요?” “뭔데요?” “그전까지 로엔경의 성적은 중간에서 약간 상위였어요. 그런데 졸업할 때 마지막 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거죠.” “어, 운이 좋거나 그냥 단기간에 열심히 노력했나 보죠.” 케이트의 말에 진은 고개를 저었다. 원래 상위에서 놀던 학생이라면 이해가 된다. 다른 나라의 아카데미라면 필기시험이 있으니 과외를 받거나 벼락치기를 해서 점수를 단기간에 올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뮈엘라의 아카데미는 다르다. 필기시험의 비중에 매우 낮다. 시험 대부분이 대련이고 토너먼트형식이다. 지난 몇 년간 중간 정도의 실력을 보였던 이안이 마지막 시험에서 느닷없이 엄청난 실력을 뽐내며 당당하게 수석을 차지한 것이다. 그건 그동안 그가 자신의 실력을 감췄다는 말이 된다. 진은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검술시험에도 요령이나 운으로 성적이 좋을 수는 있지만, 갑자기 수석이라는 건 말도 안 된다. 아무리 운이라 해도 중간 정도의 실력자가 자신의 위에 있는 실력자들을 전부 이길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요.” 진은 벽에 등을 기대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로엔경이 일부러 아카데미에 재학하는 동안 실력을 숨겼다고 생각해요.” 어째서? 케이트의 입술이 벌어졌다. 실력을 숨긴다고? 왜? 하지만 그건 진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진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안 로엔이 수사관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역시 확신했다. 실력을 숨긴 거라고. 어쩌면 그는 자신이 서자이기 때문에 그늘에 가려져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적자인 형을 뛰어넘는 실력으로 보임으로써 형의 자리를 위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보다, 물어볼 게 있다고요?” 진과 케이트의 대화를 자른 건 로즈마리였다. 케이트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로즈마리는 케이크와 타르트를 각각 한 홀씩 먹은 다음이었다. 그게 다 어디로 들어가는 거지? 케이트는 자신보다 더 작은 여자를 보며 경악하지 않으려 애썼다. 아니, 이쯤 되면 양이 문제가 아니다. 단것만 가득 먹는다니 생각만 해도 속이 거북해진다. 케이트는 무심코 물었다. “저기, 그렇게 많이 먹어도 괜찮아요?” 내 말이. 진이 중얼거렸지만, 다행히 그 말은 남은 세 명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로즈마리는 갸우뚱하더니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전 당분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네? 당분이요?” “규칙적으로 에드워드에게,” “잠깐, 마리.” 에일린은 깜짝 놀라 로즈마리의 입을 막았다. 이 아가씨가 또! 그녀는 케이트의 눈치를 보며 로즈마리에게 속삭였다. “그 이야기 아무에게나 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아무나 아닌데. 로즈마리는 눈동자를 굴렸다. 케이트는 마년데. 에드워드와 이안이라는 남자가 닮지 않았다고 말할 때 그녀는 확실히 놀랐다. 그 이야기는 케이트의 눈에 에드워드와 이안이 닮아 보인다는 뜻이다. 로즈마리는 에일린이 주의를 시키고 손을 떼자 머리를 한번 흔들고 입을 열었다. “편지에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잖아요? 뭐예요?” 케이트는 입을 다문 채 진과 에일린을 쳐다봤다. 그녀가 마녀라고 말 할 수는 없다. “저, 마녀에 대해서 말인데요.” 그녀가 입을 떼자마자 에일린과 진이 눈빛을 교환했다. 로즈마리가 마녀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에드워드와 진, 에일린을 포함해서 다섯 명뿐이다. 거기엔 심지어 로즈마리도 들어간다. 에일린은 긴장한 채 창문이 열리거나 해서 누가 엿듣는 건 아닌지 확인했고 진은 재빨리 문에 다가가 밖에서 누가 듣고 있진 않은지 확인했다. 두 사람은 어디까지나 에드워드의 사람이다. 로즈마리의 친구이기도 하지만 에드워드의 부탁에 따라 그녀를 지키고 돌봐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혹시라도 케이트가 위협이 된다면 그녀의 입을 다물게 해야 한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월요일입니다. 는 개뿔. 진짜 출근하기 싫었는데 출근한 월요일입니다. 심지어 난 야근했지. 후후후후후 짜장면 드셨나요? 덧. 표지는 LAZ님께서 그려주신 팬아트입니다. 감사합니다. 표지는 보통 일주일 정도 유지됩니다. 00135 3. 빨간머리 =========================================================================                            “마녀라는 걸 알 방법이 있나요?” 응? 로즈마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입안에 든 애플파이를 꿀꺽 삼키고 말했다. “마녀라는 걸 알 방법이요? 마녀라는 증거를 말하는 거예요?”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어, 네. 증거라고 할까, 그런 게 있나요?” 로즈마리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이 여자는 정말 마녀에 대해 전혀 모르는구나. 어쩐지 신기했다. 숲에서 자란 그녀는 사람들의 세상에 대해 잘 몰랐다. 그런데 오히려 이쪽 사람들은 그녀의 세상을 잘 모른다. “그런 게 있으면 뮈엘라의 마녀들은 모두 위험할 텐데요.” 엇. 하고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맞는 말이다. 마녀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면 뮈엘라의 마녀들은 벌써 잡혀갔을 것이다. 로즈마리는 당황하는 케이트의 얼굴에 찻잔을 들어 입을 가시고 천천히 말했다. “마녀라는 증거를 알고 싶은 이유가 뭔데요?” 진와 에일린은 케이트와 로즈마리의 대화를 말려야 하는지 눈빛을 교환했지만 일단 두고 보기로 했다. 두 사람은 마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지 로즈마리가 마녀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 대화가 불편한 것은 사실이라 두 사람은 다시 다과 실을 엿듣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어떤 식으로든 마녀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는 건 구설수에 오를 수 있다. 케이트는 물끄러미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데이지는 자신이 마녀라고 했다. 사실일까? 그녀의 고백에 의문을 품은 건 케이트로서 상당한 발전이다. 알라나데일의 케이트였다면 데이지가 자신이 마녀라고 고백했을 때 놀랐을지언정 그 발언을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건을 겪은 케이트는 사람들의 호의가, 관계없는 것 같은 발언이 어쩌면 두 번째 의도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데이지의 마녀라는 고백도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마녀로 의심되는 사람들에게 접근해서 나, 마년데. 너도 마녀지? 라는 식으로 고백을 받아내려는 게 아닐까. 아니, 너무 바보 같은 소리다. 말도 안 된다. 하지만 그런 의심이 들 정도로 본인이 스스로 마녀라고 나서는 건 너무 위험한 행동이다. “스스로 마녀라고 나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진짜 마녀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하잖아요.” 나름대로 돌려서 말하긴 했지만, 그 탓에 오히려 이야기는 알 수 없어졌다. 케이트를 제외한 세 사람의 눈이 커졌다. “일단, 마녀인지 확인할 방법은 제쳐놓고.” 에일린이 찻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달칵하고 작은 소리가 났다. “뮈엘라에서 스스로 마녀라고 나설 사람이 있어요?” 아차. 케이트의 얼굴이 붉어졌다. 뮈엘라에서 스스로 마녀라고 나설 사람은 없다. 진짜 마녀라면 오히려 도망칠 것이다. “음, 마녀를 잡으면 마녀인지 확인을 해야 하잖아요. 확인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케이트의 질문에 세 사람이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마녀라고 보고받는다 해서 바로 마녀로 확정 짓지는 않는다. 문득 진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성녀 감별법이 있지 않아?” “성녀?” 무슨 소린지 모르는 케이트와 로즈마리와 달리 에일린은 바로 알아들었다. 아, 맞다. 그녀는 손뼉을 짝하고 치더니 말했다. “성녀라고 나선 여자들이 마녀인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감별법이 있어요.” “어떤 방법인가요?” “그건 저희도 잘….” 응? 감별법이 있다더니 잘 모른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케이트가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자 에일린이 얼굴을 붉혔다. “그건 성녀를 감별하는 장로 단만 알아요. 그래서 비밀로 부쳐져 있죠.” “어째서요?” “감별법이 널리 퍼지면 마녀가 성녀인척하기 쉬워지니까요.” 지금도 뮈엘라에는 성녀라고 나섰다가 마녀로 밝혀진 여자들이 많다. 보통 몇 년에 한 번씩은 나타난다. 케이트의 어깨가 축 처졌다. 어쩌면 데이지는 진짜 마녀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조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마녀가 아니라면? 그녀를 속여서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어쩌니? 문득 케이트의 머릿속에 데이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데이지는 싹싹하고 솔직한 편이다. 그런 그녀가 케이트를 속이고 이용한다는 게 오히려 믿기지가 않는다. 최근 겪은 사건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데이지를 쉽게 믿었을 것이다. 나, 의심병인 걸까. 케이트는 씁쓸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그럼 마녀는 겉보기에 마녀라고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이 없다는 거죠?” 진과 에일린이 로즈마리를 쳐다봤다. 적어도 로즈마리는 없다. 그녀는 겉으로 보기엔 엄청나게 평범하고 왜소한 여자일 뿐이다. “그런데 그걸 왜 알고 싶어 하는 거죠?” 에일린은 질문을 케이트에게로 돌렸다. 로즈마리가 하나 더 먹어볼까~ 하고 집은 딸기 케이크를 입에 넣고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게.” 케이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슨 핑계를 대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로즈마리와 단둘이 이야기할 줄 알고 왔던 것이다. 로즈마리와 단둘이라면 좀 더 솔직하게 대화할 수 있을 텐데. 그녀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로즈마리가 불쑥 말했다. “자신이 진짜 마녀인지 알고 싶은 거예요?” “뭐?” 엘일린은 손에 든 찻잔을 떨어트릴 뻔했고 진은 허리춤에 찬 검을 거의 반쯤 뽑을 뻔했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려다 말았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에일린이었다. 그녀는 로즈마리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마리,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음, 케이트양은 마녀일 가능성이 높거든.” “아니,”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진과 에일린이 그녀를 쳐다봤다. 도망쳐야 하나? 그녀가 마녀일지도 모른다는 건 이안과 데이지만 알고 있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각오는 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케이트. 진과 에일린은 믿어도 돼요.” 로즈마리가 그렇게 말했지만 케이트는 쉽게 믿기 어려웠다. 그녀는 여차하면 던지고 도망칠 생각으로 쿠션을 집었다. “나도 마녀고, 에드워드도,” “마리!” 에일린과 진이 소리쳤지만 로즈마리는 평온했다. 그녀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어차피 케이트도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속이려 해봤자 소용없지 않아? 이야길 하고 도와달라고 솔직히 말하는 게 낫잖아.” 숲에서 살아온 로즈마리는 케이트보다 더 순수했다. 그녀는 숲에서 에드워드에게 발견되어 그대로 에드워드의 집으로 들어왔다. 철저하게 보호된 그녀가 사람과 닿고 검은 속내를 배울 기회가 있었을 리 없다. “도, 와달라고요? 뭘요?” 어리둥절한 케이트를 보며 에일린과 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드워드의 비밀은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된다. 그녀들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다. “시리우스가 알면 화낼 거예요.” 진의 경고에 로즈마리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 남자 무서워. 맨날 진지한 표정으로 로즈마리를 보면 못마땅하다는 듯 잔소리를 퍼붓는다. “스미스양, 본인이 마녀일지도 모른다고 했죠?” 에일린은 재빨리 이야기를 케이트로 돌렸다. 그녀가 진짜 마녀라면 그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여차할 때 약점으로 쥐고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으니까. 케이트는 굳은 얼굴로 앉아있었다.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건 케이트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경계하는 게 보이자 에일린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스미스양, 어차피 당신은 마리가 마녀라는 걸 알잖아요. 우리도 보험으로 당신이 마녀라는 사실을 알아둬야겠어요.” “로즈마리양이 진짜 마녀라는 건가요?” 에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진짜로 에드워드 에반스 공작의 약혼녀가 마녀라는 거예요?” 확실하게 인정된 건 아니지만. 진이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에일린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맞아요. 마리는 마녀고, 에드의 약혼녀예요. 당신처럼 말이예요.” “저, 저요?” “당신도 마녀라면서요.” 딱 자른 그 말은 여리게만 보이는 에일린의 외모와 달리 그녀의 내면이 상당히 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케이트가 입을 다물고 있자 로즈마리가 나섰다. “케이트, 에드워드와 이안씨가 닮았다고 생각했잖아요.” 이안씨가 아니라 로엔경이라니까. 에일린이 지적했지만 케이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에드워드와 이안은 닮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닮지 않았다 한다. 케이트는 필사적으로 반박했다. “그, 그게 마녀와 무슨 상관인데요?” “에드워드와 이아, 로엔경은 닮지 않았어요. 그치?” 로즈마리의 질문에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는 금발에 파란 눈이잖아? 로엔경은 흑발에 호박색 눈이었지.” “물론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은 다르지만 다른 건 굉장히 닮았잖아요.” 케이트가 용기를 내서 반박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에일린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말했다. “로엔경은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던걸요? 게다가 두 사람은 혈연관계가 아니라서 닮았다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케이트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안은 실라의 친자식이 아니다. 에드워드는 실라의 언니의 아들이다. 두 사람은 이안이 로엔가의 서자로 인정받지 않았다면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케이트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보기에 이안과 에드워드는 닮았다. 하지만 그걸 입 다물어서 자신이 마녀가 아니게 된다면 평생 모른 척할 수 있다. 문득 케이트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잠깐, 그럼 로즈마리의 눈에도 에반스 공작님과 로엔경이 닮았다는 말인가요?” 엇? 진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로즈마리는 빙그레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로엔경은 꼭 에드워드의 검은 버전 같죠.” 케이트의 생각과 똑같다. 그녀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잠깐, 에드의 검은 버전이라고?” 진이 달려들듯 물었다. 그녀는 테이블 가까이 다가오다가 코를 잡고 물러났다. 으웩, 달아. 이제는 익숙해 질만도 하건만 그녀는 도통 이 단 냄새에 적응을 못 하고 있었다. “와, 그 얼굴이 나란히 있으면 좀 당황할거 같은데.” 사실이다. 케이트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꼭 쌍둥이 같아.” 로즈마리가 말했다. 와, 싫겠다. 진의 말에 에일린이 눈을 흘기긴 했지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로즈마리는 신이 나서 말했다. “내 생각엔 로엔경도 에드워드와 같은,” “잠깐. 로즈마리.” 에일린이 깜짝 놀라서 로즈마리의 입을 막았다. 무슨 일이지? 당황한 케이트의 얼굴을 보며 에일린은 자신이 이 자리에 동석해서 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로즈마리는 달랐다. 에드워드는 저주에 걸려있다. 그건 그의 피에 관련된 저주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저주를 풀 방법을 찾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비슷한 저주에 걸린 자가 또 있다면 저주를 풀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에일린의 입을 치우며 말했다. “하지만 로엔경도 저주에 걸렸는걸.” 세 여자의 표정에 경악이 어렸다. 저주? 너무 위험한 발언에 진과 에일린은 다시 주위를 살폈다. 로엔경이 저주에 걸렸다니, 누가 듣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한 건데?” 상황이 진정되자 진이 물었다. 로즈마리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에드워드만 저주에 걸렸다면 두 사람이 닮았을 리가 없으니까.” “잠깐, 로즈마리.” 에일린은 막으려 애썼던 말이 로즈마리의 입에서 나오자 당황해서 말했지만 이미 늦었다.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반스 공작도 저주에 걸렸다고? 하지만 그녀는 입 다무는 쪽을 선택했다. “내 생각엔 로엔경과 에드워드가 비슷한 종류의 저주에 걸린 것 같아. 저주가 비슷하니까 우리 눈에 두 사람이 닮은 것처럼 보이는 거지.” 그렇죠? 로즈마리가 동의를 구하듯 케이트를 쳐다봤지만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진과 에일린은 놀라운 사실에 로즈마리를 말리는 것도 잊고 멍하니 있었다. 로엔경이 에드워드와 비슷한 저주에 걸렸다고?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한 뒤 케이트를 쳐다봤다. 케이트는 엄청난 소식을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녀가 알아선 안 될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그럼 마녀의 눈에는 에반스 공작님과 로엔경이 닮아 보인다는 건가요?” “저도 그랬으니까 가능성이 있죠.” 좋은 정보다. 데이지가 진짜 마녀인지 확인할 수 있는. 케이트는 이제 데이지에게 어떻게 이안과 에드워드를 동시에 보여 줄 수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오늘 날씨가 초여름 날씨라더니 참 더웠어요. 그래놓고 밤엔 안개가 끼는 센수! 00136 4. 로웨나 벨링스 =========================================================================                            곤히 잠든 케이트를 깨운 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그녀는 하녀일 때의 버릇대로 아침이 되었다고 생각해 일어났다가 어두운 조명과 커다란 방에 어안이 벙벙했다. 여긴 어디? 난 누구? “케이트, 일어났나?” 지금이 대체 몇 시지? 드디어 여기는 큐바인 하우스이고 자신은 하녀가 아니라 이 집의 주인이라는 것이 떠오른 케이트는 엉금엉금 침대에서 기어 내려갔다. 아직도 잠이 덜 깨서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문밖에 나는 소리는 이안의 목소리다. “무슨 일 있어요?” 이안은 케이트의 목소리에 마악 문에 부딪히려던 손을 멈췄다. 일어난 모양이다. “갈 곳이 있다.” 어딜? 케이트는 위에 가운을 걸쳐 입고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난 걸까? 이안은 방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얌전히 서 있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케이트가 문을 열더니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딜 가요?” 잠이 덜깬 얼굴 위로 빨간색 머리카락 한 가닥이 올라가 있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머리카락을 그녀의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검은 옷 있나?” 검은 옷? 케이트는 우물우물 대답했다. “장례식용 옷을 말하는 거예요?” “검은 거면 상관없어.” 음, 그거 좀 작은데. 케이트가 중얼거리더니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이 덜 깬 탓에 그녀는 이안의 말에 의문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건 옷장을 뒤져 검은 옷을 꺼낸 다음이었다. 수수한 검은색 원피스는 조금 작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맞기 때문에 장례식 때 입고 있었다. 가슴이 좀 작지만, 위에 숄을 걸치면 티가 안 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녀는 어라? 하고 정신을 차렸다. “저기, 검은 옷은 왜 찾는 거예요?” “갈아입고 나와. 갈 데가 있어.” “어딜요?” “네가 봐줘야 할 게 있다.” “낮에 보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 방 안쪽에서 케이트의 한숨이 아주 크게 들려왔다. 새벽부터 잠에서 깨는 바람에 피곤하고 짜증났다. 이안이 눈치가 있다면 알아들으련만 그는 눈치가 없는 건지 신경 쓰지 않는 건지 당당했다. “다 입었나?” “으으, 뭘 보길래 굳이 검은 옷을 입고 봐야하는 건데요?” 이안은 투덜거리는 말에 문을 휙 열었다. 당연히 옷을 갈아입었으리라 생각한 케이트가 옷장 앞에서 검은 옷을 꺼낸 채 주저앉아 있었다. “꺅! 뭐하는 거예요?” 케이트는 잠이 깨기 전에 가운을 벗어놔서 잠옷만 입은 상태였다. 복도의 불빛이 방안까지 침범했다. 당황하는 그녀와 달리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안 갈아입고 뭐 했어?” 잠옷은 물론 반쯤 찢어진 잠옷만 입은 모습도 봤다. 고작 이 정도 가지고 당황한다는 게 이안의 입장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케이트는 달랐다. 그녀는 이안에게 등을 보인 채 말했다. “그러니까 대체 뭐길래 장례식용 옷을 입고 봐야 하냐구요.” “봐야할 게 있다고 했잖나.” “그걸 내가 왜 봐야 하는데요?” “내가 봐서는 모르니까.” 아오. 케이트는 짜증이 나서 옷을 꽉 끌어안았다. “지금 당신이 못하는 일을 나한테 대신해달라는 거예요?” “그래.” “그럼 최소한 부탁한다는 말이라도 하시죠!” “부탁해.” “그럼 적어도 기분은, 응?” 케이트는 멍하니 이안을 올려다봤다. 지금 저 남자가 부탁한다고 했어? 이안은 불쑥 그녀의 방안에 들어가더니 케이트를 일으켜 세웠다. “입고 나와.” 옷을 갈아입은 케이트가 이안과 함께 도착한 곳은 어느 집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케이트는 불안한 표정으로 제이드의 얼굴을 살폈지만, 그도 불안한 표정이었다. “진짜 들어가게?” 제이드의 말을 듣고서야 케이트는 이안이 봐야 한다고 말한 게 이 집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에?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한 케이트의 입을 이안이 손으로 막았다. “쉿.” 잠깐, 잠깐마안. 케이트가 버둥거렸지만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제이드에게 침입할 만한 창문이 있는지 살펴보라고 말했다. “이거 들키면 큰일이라고.” “안 들키면 되잖아.” 말은 쉽다. 제이드는 투덜거리며 창문을 살피기 시작했다. 잠금을 깜빡 잊은 곳을 찾는 것이다. 이안은 제이드가 확인하기 시작하자 살그머니 케이트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이게 뭐하는 거예요?” 케이트의 목소리가 뾰족했다. 이안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조사할 게 있어서 왔다.” “조사하는데 왜 이 밤에 왔는데요? 좀 낮에 오면 안돼요?” “이 집주인이 조사를 거부했어.” “잠, 집주인이 조사를 거부했는데 왜 굳이 조사하려고 하는 건데요?” “마법사용이 의심되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케이트는 결국 허리에 손을 얹었다. “처음부터 말 해봐요.” “너무 길어.” “부탁하는 건 당신 아니예요?” 이안은 케이트의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입김이 한가득 나와 흩어졌다. 그는 빠르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라진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와서 가보니 딸이라는 여자 방에서 마법을 사용한 흔적을 발견했다.” 멀리서 제이드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이안은 그를 힐끔 보더니 더 빠른 속도로 말했다. “그런데 이 집 주인이 조사를 거부해서 낮에는 조사할 수가 없어서 밤에 찾아왔다.” “조사를 거부했는데 굳이 밤에 몰래 와서 조사하는 이유가 뭐예요?” “마법 흔적을 발견했다고 했잖아.” “그걸 당신이 조사해야 할 필요가 왜 있는데요?” 이안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직 그녀가 자신이 에드워드의 요청에 따라 마법 물건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설명해야 하나. 그가 입을 열었을 때 제이드가 도착했다. “한군데 발견했는데 너무 작아.” 이안은 한숨을 내쉬고 케이트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부탁해.” 케이트의 눈동자가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제이드의 뒤를 따라 움직이는 이안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저, 저 남자가 정말? 부탁해가 무슨 모든 요청을 들어주는 만능열쇠라도 되는 줄 아나? “그렇군.” 제이드가 자신이 발견한 창문을 보여주자 이안이 말했다. 그는 창문을 들어 올려보더니 제이드가 생각한 것처럼 힘을 주면 부서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멈췄다. “부수면 시끄럽겠어.” 걸쇠가 걸려있지는 않았지만, 실수가 아니라 그럴 만해서였다. 창문이 반쯤 열리다가 마는 것이다. 이 정도 크기면 체격이 상당히 왜소해야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창문까지의 높이가 꽤 있어서 키가 상당히 크고 비쩍 마른 사람이 아니라면 들어가기 어려워 보였다. 그는 손을 집어넣고 그 안에 부딪힐 만한 게 없는지 확인한 다음 케이트를 쳐다봤다. 그녀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뭐, 뭐예요?” 케이트는 이안의 표정에 놀라 뒤로 물러났다. 뭔지는 몰라도 그다지 그녀에게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더 빨랐다. 이안은 케이트를 들어 올리더니 말했다. “들어가서 문을 열어줘.” “잠깐,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부탁해.” 케이트는 어이없어서 이안을 내려다봤다. “당신, 그게 무슨 만능열쇠라도 되는 것처럼 남발하고 있다는 생각 안 들어요?” “말이 만능열쇠가 된다면 더 좋은 거 아닌가?” 그 말이 아니잖아. 케이트가 좌절할 새도 없이 제이드가 끼어들었다. “그냥 빨리해버리죠, 스미스 양.” 그러고 보니 제이드도 이안에게 끌려왔다. 그는 매우 피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으니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포목점은 조세핀이 그만두자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직원을 적시 적소로 관리하고 손님을 그 부류에 따라 응대하던 조세핀이 사라지자 그녀의 일을 제이드가 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제이드는 영업보다는 노는데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조세핀이 오기 전까지 상당히 여유 있게 운영하고 있었고 조세핀이 일하기 시작한 이 년 동안 제이드의 포목점은 상당히 바빠졌던 것이다. “이거 들키면 큰일 나는 거잖아요?” “안 들키면 된다.” 미치겠네. 케이트는 이안에게 들어 올려진 채로 발을 꼼지락거렸다. 그러고 보니 발이 땅에서 떨어진 지 오래됐다. 그녀는 진지하게 물었다. “이거 할 때까지 나 안 놔 줄 거죠?” “그래.” 아, 젠장.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고 열린 창문 사이로 팔을 집어넣었다. 제이드 말대로 빨리해치워버리는 게 나을 것 같다. 잠시 들키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들어가려다 말고 이거 범죄 아니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이안이 그녀의 엉덩이를 잡았다. “힉! 뭐, 뭐하는 거예요?” “쉿.” 쉿이 아니잖아, 이 남자야! 케이트가 바동거렸지만 이안은 그대로 그녀를 창문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으아아아. 케이트의 어깨가 아슬아슬하게 들어가더니 가슴에서 살짝 걸렸다. “잠깐,” 이안은 케이트의 발언을 허락하지 않고 그대로 그녀의 몸을 밀었다. 가슴이 쑥 빠져나가자 휙 하고 허리까지 들어갔다. “꺅!” 엉덩이가 턱하고 걸렸다. 이번엔 가슴처럼 조금 힘을 준다고 들어갈 것 같지 않다. 케이트는 아프다기보다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지만 차마 소리를 지르지는 못했다. 남의 집 창문에 몸이 반쯤 걸쳐져서 소리를 질렀다가 들키면 그다음이 더 끔찍하다. “이안,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요.” 케이트가 속삭였다. 이안은 그녀의 엉덩이를 잡은 채 꾹꾹 밀어 넣었다. 힘이 가해짐에 따라 창문 안쪽에서 케이트가 윽! 흑! 하고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나 잠 다 깼어.” 옆에서 제이드가 중얼거리자 이안은 무슨 소리 하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냐, 아무것도.” 제이드는 손을 저은 뒤 창문에 다가갔다. 그가 창문을 힘을 주고 살짝 들어 올리자 약간 틈이 생겼다. 이안이 다시 힘을 주자 케이트의 엉덩이가 쑥 하고 빨려 들어가듯 빠졌다. “윽!” 케이트는 다행히 바로 앞에 있는 장식장에 걸린 덕에 바닥에 넘어지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다. 내가 미쳐. 그녀는 그대로 잠시 숨을 몰아쉬다가 일어서서 조심스럽게 장식장 밑으로 내려갔다. ============================ 작품 후기 ============================ 아직 밖이라 모바일로 올립니다. 오타는 내일 중에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수정했습니다.- 라고 해도 후기 안읽고 오타 지적하시는 분은 꼭 있을거야, 우리 내기할까요? 전 두 분 있다는데 제 음란마귀를 걸겠습니다. 00137 4. 로웨나 벨링스 =========================================================================                            케이트가 상기된 얼굴로 현관문을 열었을 때 이안이 얄밉게 말했다. “오래 걸리는군.” 케이트는 있는 힘껏 이안의 발을 밟았다. 꽤 아팠을 텐데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 정도로는 부족했지만, 제이드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기 때문에 그녀는 밟는 걸 멈추고 말했다. “아까 소리가 꽤 났을 텐데, 아무 기척도 없네요.” 세 사람이 나름대로 조심했다고 해도 소리가 전혀 나지 않을 수는 없다. 심지어 케이트는 창문을 통과하면서 꽤 소리를 냈다. 그런데 확인하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사용인들은 오늘 휴가다.” “그래요?” “집사와 요리사만 남았는데 두 사람은 밤에 업어가도 모른다는군.” 그걸 어떻게 알아? 제이드와 케이트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이드라면 여기저기 소식통이 있지만 이안은 없다. 두 사람의 표정에 이안은 바보 같다는 듯 말했다. “정보 길드가 있잖아.” 아, 정보 길드. 그제야 케이트는 요 며칠 이안이 정보 길드를 거의 매일 찾아갔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서 오늘 느닷없이 그녀를 깨워서 온 거구나. 케이트나 제이드나 정보 길드와는 연이 없는 사람들이다. 제이드는 굳이 정보 길드가 아니어도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였고, 케이트는 정보를 사고판다는 개념이 없었으니까. 두 사람은 이안을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갔다. 세 사람이 한 방에 들어갈 때 제이드는 스미스양은 그렇다 쳐도 저 녀석은 왜 소리가 안 나는 거야? 라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케이트.” 이안이 손을 내밀었다.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잡자 이안은 그녀를 휙 끌어당겨 방 가운데로 데려왔다. 레이스와 꽃으로 한껏 치장한 여성의 방이었다. “이상한 걸 찾아봐라.” 이 남자는 내가 무슨 자기가 키우는 갠 줄 아나 봐. 케이트는 울컥해서 허리에 손을 얹었다. “나, 당신 부하 아니거든요?” “부탁해.” “그 말이 만능이 아니라고 했죠?”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이번엔 이안이 허리에 손을 얹었다. 제이드는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방 안으로 들어와 살피기 시작했다. “뭘 어쩌라는 게 아니라,” “부탁한다고 했잖아.” “그게 무슨 만능인 것처럼 굴지 좀 말라고요.” 하아. 이안이 한숨을 내쉬자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쭈, 점점? 그때 이안이 허리를 숙였다. 그는 케이트와 눈을 맞춘 뒤 말했다. “그럼 수표를 써.” “나 돈 별로 필요 없거든요?” 어두운 방 안에서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묘하게 떠오른 것처럼 보였다. 케이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안은 덤덤하게 말했다. “그래. 그렇지.”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자신이 호건가의 사람이라는 걸 자랑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게 아니다. 케이트는 당황해서 이안의 셔츠를 잡았다. 그녀는 원래 돈에 크게 구애받는 편이 아니었다. 돈이 필요한 건 안다. 자신도 돈을 벌기 위해 하녀가 된 만큼 자신이 제공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는 받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뿐. 그녀는 돈이란 그녀가 먹고살 만큼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온 말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네가 필요해.” 케이트의 말을 자르며 이안이 속삭였다. “여긴 여자 방이고, 나는 여자들 물건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 그러니 지금 네가 필요해.” 케이트는 말하려는 것도 잊어버리고 이안을 쳐다봤다. 어? 이 남자가 지금 뭐라고 했지? 이안은 케이트의 대답을 기다리듯 얌전히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랑 고백이라도 들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곧 케이트는 그녀가 필요한 게 아니라 그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그녀가 지금만 필요하다는 말이었음을 떠올렸다. 이런 말로 얼굴을 붉히는 건 자존심이 상한다. 하지만 이안이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고백이기도 했다. “뭐, 뭘 찾는데요?” 케이트는 애써 모른 척 뒤돌아서며 물었다. 일단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뭔가 수상한 것.” “여긴 어딘데요?” “벨링스 자작의 집이다. 이 방은 자작의 딸 방이고.” 그럼 귀족 영애라는 말이잖아?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작영애의 방을 뒤지려는 이유가 뭔데요?” “자작이 며칠 전 자신의 딸이 사라졌다고 연락이 왔다. 조사하러 왔더니 마법아이템이 있더군.” “그럼 내가 찾아야 할 게 마법아이템인가요, 영애가 사라진 것에 대한 힌트인가요?” “둘 다.” 이런,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며 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협탁 서랍이나 옷장. 제이드는 무릎을 꿇고 장식장 아랫부분까지 살폈다. “어, 뭔가 있는데?” 제이드가 발견한 건 이안이 집어 들었던 오르골이었다. 자작은 이안을 쫓아낸 다음 아무도 이 방에 들어오지 말라 이르고 자신도 그대로 나가버렸던 것이다. 달칵하고 오르골을 열자 음악이 잠깐 흘러나오다 끊어졌다. 이안이 말했다. “거기서 마법이 발현됐다.” “마법?” 제이드는 깜짝 놀라서 오르골을 장식장 위에 던지다시피 올려놓고 물러났다. “발현되다 실패했지.” 아, 그래? 실패했다는 말에 제이드는 약간 안도하긴 했지만, 여전히 오르골 근처로 다가가지는 않은 채 말했다. “무슨 마법인지 알 수 있어?” “몰라.” 뮈엘라에서 암암리에 마법아이템이 팔리고 있다. 마법을 배척한다고 하지만 그 편리성까지 무시하지는 못한다. 뒷골목에서, 소수의 귀족이 쉬쉬하며 이용하는 것이다. 알라나데일에서도 마법 스크롤을 밀수해서 팔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런 마법 물건들의 특징은 불완전하다는 점이다. 발현이 안 되는 경우도 있고 효과가 약해지는 경우도 있다. 어차피 불법으로 구한 것이니 불량품이라고 해서 어디에 호소할 수도 없다. 그런 이유로 뮈엘라 내에서 유통되는 마법아이템은 타국에서 유통되는 마법아이템보다 불량품이 많았다. 케이트는 옷장을 살피고 있었다. 남의 옷장을 뒤지다니, 생각해보니 그녀는 알라나데일에서도 이안의 옷장을 뒤진 적이 있다. 남의 옷장을 두 번이나 뒤지다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뭔가 찾았나?” 갑자기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히익! 케이트의 몸이 뛰어오르려는 순간 이안이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입을 막았다. “쉿.” 쉿이고 뭐고 간에, 이 남자야.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케이트 막힌 채 눈동자만 굴려 이안을 노려봤다. “찾은 게 있나?” 허리를 감은 손은 떨어질 줄 몰랐다. 케이트는 고개를 젓다가 문득 제이드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잠깐, 이거 놔요.” 이안은 뜻밖에도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고 물러났다. 한쪽에서 제이드가 반사적으로 휘익하고 휘파람을 불려다 멈췄다. 꽃다발이 잔뜩 쌓여 있었다. “대단한데?” “뭐가?” “꽃 말야. 시든 게 없어. 이 많은 게 전부 받은 지 며칠 안 됐다는 말이지.” 케이트는 두 사람의 대화를 한귀로 들으며 옷장에서 화장대로 넘어갔다. 화장대는 척 보기에도 비싼 화장품으로 즐비했다. 피부를 더 하얗게, 젊어 보이게 해준다는 크림을 발견했을 땐 저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벨링스 자작은 부자인가 보군요.” 케이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크림 뚜껑을 닫았다. 그 소리에 제이드가 무슨 소리냐는 듯 다가오며 말했다. “벨링스 자작이요? 그렇게 부자는 아닐 텐데요.” “이것 보세요.” 케이트가 방금 닫은 크림의 뚜껑을 다시 열었다. 그 안에 몇 번 쓰지도 않은 크림이 고스란히 들어차 있는 게 보였다. “이 크림, 비싼 거거든요.” “그런데요?” 아껴 쓴 것일 수도 있잖아? 그런 의문이 담긴 말에 케이트가 그의 코끝에 갖다 댔다. 훅하고 인공적인 향과 함께 불쾌한 냄새가 풍겼다. “썩었어요.” “아, 화장품이 썩습니까?” “당연하죠.” 이런 부분은 남자들은 모를 것이다. 케이트는 으음 하고 다른 화장품을 집어 들며 말했다. “화장품도 사용하는데 기한이 있어요. 아끼면 썩기 때문에 이런 비싼 크림은 양을 조절해서 쓰는 게 관건이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몇 번 쓰다 말고 버리는 경우는 정말 드물어요.” 아, 그래요? 제이드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여자들이 화장품을 주기적으로 사는 거구나. 그런 그에게 케이트가 다른 화장품을 내밀었다. “이것도 썩었네요.” “화장을 별로 안 했나 본데요?” “전부 얼마 안 쓴 것들이예요. 안 쓸거면 왜 이렇게 큰 걸 산거지?” 굳이 안 쓸 화장품을 사서 썩힌다는 건 케이트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다시 화장품을 화장대 위에 내려놓았다. 화장을 잘 안 하는 모양이지. 그때 제이드의 머릿속에 로웨나 벨링스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최근 사교계에 벨링스양이 상당히 아름답다는 찬사가 돌고 있는데, 아름다운 사람은 오히려 화장을 안 하는 모양이군요.” “그래요?” “네. 벨링스양에게 구혼한 남자가 스무 명이 넘는다는 소문이 있어요.” 과연. 케이트는 방에 꽃이 어마어마하게 쌓인 이유를 알아차렸다. 전부 구혼한 남자들이 보낸 꽃이다. “굉장히 아름다운 여자였던 모양이네요.” 케이트는 가볍게 감탄했다. 알라나데일에서 일할 때 데일 남작의 딸 둘도 시집을 갔지만, 그녀들에게 온건 꽃다발 두어 개와 인형 몇 개였다. “글쎄요. 예쁜 편이긴 했지만.” 제이드는 몇 달 전 봤던 로웨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스무 명이나 앞 다퉈 구혼할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약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매달릴 정도는 더더욱. “최근 파혼했다지.” 뒤에서 이안이 나직하게 말했다. 어, 알고 있었어? 제이드의 말에 케이트는 그녀만 로웨나 벨링스라는 여자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잠깐. “혹시 그 신문이 사실이예요?” “무슨 신문이요?” “에바니엘 우물가에 어느 약혼한 귀족 아가씨에게 부자가 구혼한다는 기사가 있었거든요.” 에바니엘 우물가?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반면 제이드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는 신문이죠?” “킬리언씨도 읽어요?” “그럼요.” 어쩌면 뮈엘라 일보보다 읽는 사람이 더 많은지도 모른다. 케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화장대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은 아가씨. 얼마 안 쓴 화장품과 그녀의 인기에 특별한 연관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삼단 보석함을 건드렸다. 딱히 보석함에 뭔가가 있을 것 같아서는 아니었다. 그저 확인 차 열었을 뿐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단에 반지와 귀걸이를 확인한 그녀는 세 번째 단에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석함인데 카드가 들어있다. “뭔가 찾은 것 같아요.” 제일 먼저 다가온 이안은 보석함 안의 카드를 쳐다보더니 물었다. “종이잖아?” “그렇죠.” 뮈엘라는 귀족이라 해도 글을 쓰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적다. 그러니 이야기를 전할 상대의 수가 적다면 카드를 보내기보다는 전령을 더 선호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선호한다는 말이지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안이 뭐가 이상하냐고 물으려 했을 때 케이트가 조심스럽게 카드를 꺼내 펼치며 말했다. “보석함에 넣어둘 정도로 소중히 여기는 카드라는 말이잖아요?”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는 얌전히 케이트의 행동을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가 카드를 열어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편지는 아니었다. “이게 뭐지?” 조용히 내민 카드의 내용을 살핀 이안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조악한 그림이었다. 그는 카드를 뒤집어 달빛에 비춰보고 그것이 도장으로 찍은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글을 쓰고 읽을 줄 모르는 뮈엘라에서는 구혼자들이 흔히 쓰는 방법이다. 꽃이나 작은 선물을 보낼 때 카드에 가문의 인장을 찍거나 표시가 될 만한 것을 그려 보내는 것이다. 케이트는 남은 카드를 모조리 꺼내 그것이 한 사람이 보낸 카드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의 눈에 한쪽에 쌓인 꽃다발이 들어왔다. “저 꽃다발들에 카드가 있어요?” “잠깐만요, 아, 있네요.” “여긴 없다.” 이안이 확인한 것은 꽃병에 꽃아 둔 꽃다발이었다. 모두 다섯 개의 꽃병엔 카드가 없었다. 케이트는 자신이 발견한 카드를 확인했다. 이쪽도 다섯 장이다. “이건 있어요.” 제이드는 벽에 걸린 꽃다발을 확인하며 말했다. 벽에 걸린 두 개의 꽃다발은 그 사이에 카드가 들어있는 상태였다. 그는 카드를 열어 그 안에 찍힌 인장을 확인했다. 벨링스자작과 약혼했던 가문의 인장이다. 약혼자가 두 개. 카드가 없는 꽃다발이 다섯 개. 누가 봐도 보석함에서 발견한 카드는 꽃병에 꽃은 꽃다발에서 나온 게 확실했다. 문제는 이 꽃다발을 누가 보냈느냐는 사실이었다. “약혼자가 보낸 걸까요?” “파혼했잖나.” “집안끼리는 파혼했지만, 영애를 잊을 수 없었다거나….” 글쎄. 제이드와 이안은 케이트의 낭만적인 말에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그렇다면 카드의 내용이 이렇게 다를 리가 없다. “우선 확인은 해두죠.” ============================ 작품 후기 ============================ 자, 여러분. 긴장하지 말고 들어요. 우리 예전에 제가 했던 말, 기억하죠? 네. 맞아요. 제가 좀 아파요. 자자, 괜찮아요. 금방 좋아진댔으니까 다시 자리에 앉아요. 이쯤 되면 제가 뭐라고 말하려 하는지 대충 눈치챘을 것 같은데.. 맞아요. 의사가 나한테 엿 아니, 졸린 약을 줬어요. 젠장. 아침점심저녁 약 구분없이 그냥 다 먹으라고 해서 믿었는데!! 집에 와서 저녁 먹고 약을 먹었는데 미친듯이 졸린거예요. 눈 살짝 감았는데 일어나보니 이시간이예요. 목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온 몸이 다 아픈데 졸려. 젠장. 그래서 내일은 쉽니다. 즐거운 주말 잘 보내시고, 다음주에 봐요. 아참, 제 음란마귀를 지켜주느라 노력하셨는데 2분에 제 음란마귀를 건다는건 두분만 달면 두배, 그 외의는 제가 잃는 다는 뜻이예요. 하하하하하. 00138 4. 로웨나 벨링스 =========================================================================                            로웨나 벨링스의 방에서 그밖에 이상한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카드를 챙겨 날이 밝기 전에 서둘러 빠져나온 세 사람은 큐바인 하우스에 늘어졌다. 아니, 세 사람 중 두 사람만 늘어졌다. “에라, 모르겠다. 오늘 가게 쉬지, 뭐.” 제이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큐바인 하우스의 소파에서 눈을 감았다. 케이트가 주문한 소파는 큼직하고 편안했다. 여차하면 여기서 자도 되겠는데? 그의 생각이 가물가물해질 무렵 이 층에서 조세핀이 내려왔다. 응접실로 통하는 문에 소파 밖으로 삐죽하게 튀어나온 남성용 구두가 보였다. 로엔경이 소파에 누워있나? 조세핀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이안은 소파에 눕거나 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그는 항상 바른 자세로 앉아 신문이나 책을 읽곤 했다. 무슨 일이 있나? 그렇게 생각하며 주방으로 들어가던 조세핀은 주방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꺅!” 이안은 차를 내리다 말고 조세핀을 돌아보더니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고 자신의 뒤를 살폈다. 주방에 여자가 놀랄만한 게 있던가?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이어서 제이드가 주방으로 구르듯 들어왔다. 그는 반사적으로 들고 온 램프를 손에 쥔 채 조세핀과 이안을 번갈아가며 살폈다. 주방에 있는 건 이안과 조세핀뿐. 두 남자는 조세핀이 놀라 비명을 지른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차마 이안을 보고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던 조세핀은 부랴부랴 두 사람을 말리며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예요. 창밖으로 커다란 벌레가 지나가서.” 그래서 놀라 비명을 질렀다는 거다. 이상한 여자로군. 이안은 마저 차를 내려 응접실로 이동했다. 주방에 제이드와 조세핀만 남자 제이드가 팔짱을 끼고 물었다. “벌레라고?” “엄청나게 컸어.” 조세핀은 벌레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제이드는 그녀가 포목점에 나왔던 엄청나게 거대한 거미를 맨손으로 잡아 창밖으로 던져버리는 걸 본 적이 있다. 흐응. 그는 붉어진 얼굴로 주방에서 벗어나려는 조세핀을 뒤따르며 중얼거렸다. “그 벌레의 눈이 호박색이었겠지?” “시끄러워.” 제이드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조세핀이 그의 말에 대꾸해준다는 게 즐거웠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최근 이 정도로 즐거운 적이 있었던가. 제이드는 호감을 주는 인상이고 타인에게 밝게 대하는 편이지만 그만큼 비틀린 부분도 있었다. 그런 그의 비틀린 부분을 가장 잘 받아주는 게 조세핀이었다. “웃지 마, 실없어 보여.” 조세핀이 싱글거리는 제이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녀는 그가 유일하게 이성으로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여자다. 누나보다 더 누나 같은 여자. 그녀의 비난에도 제이드는 기분이 좋아 싱글거리며 조세핀을 잡아당겨 응접실로 함께 들어왔다. 제인이 응접실을 들여다보더니 눈치 빠르게도 차를 준비했다. “이거 놔. 난 올라 갈 거야.” “어차피 차 마시려고 내려온 거잖아. 같이 해.” “나한테 상관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조세핀의 목소리에 경고가 어렸다. 제이드는 재빨리 그녀의 몸에서 손을 떼고는 불쌍한 척 말했다. “나랑 같이 있기 싫어?” 그녀는 이안의 눈치를 살피고 제이드를 흘겨봤다. 어디서 되지도 않는 수작이야? 하지만 곧 제인이 차를 내왔기 때문에 조세핀은 날카로운 눈길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있어. 가게 때문에 묻고 싶은 것도 있고.” 가게라는 말에 조세핀의 마음이 약해졌다. 별로 원해서 일하게 된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부모님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도왔던 식당일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때 그녀를 도와준 건 제이드였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세핀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열 살부터 부모님의 식당에서 일했다. 그녀가 할 줄 아는 건 식당 일밖에 없었다. 에이미를 생각하면 제이드가 그녀를 미워하거나 무시해도 할 말이 없다. 그녀는 제이드에게 빚이 있다. 그 수 많은 수치스러운 일에도 불구하고. 조세핀은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제이드 역시 찻잔을 집어 들었다. 문득 그의 눈에 조세핀의 손이 들어왔다. 작은 손이 찻잔을 감싸는 게 보였다. 손끝에 거무스름한 얼룩이 묻어있었다. “뭐 묻었다.” 자연스럽게 그가 그녀의 손가락을 문질렀다. 커다란 손이 아무 전조도 없이 자신의 손에 닿자 조세핀은 깜짝 놀라 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어, 미안. 손가락에 검은 게 묻었길래.” 조세핀은 반대쪽 손으로 더러운 손을 덮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만지는 남자는 제이드뿐이다. 그는 늘 그럴 것이다. 그녀는 문득 씁쓸해졌다. 누구에게나 이렇게 다정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만지고 대할 것이다. 제이드가 그녀의 손을 만졌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설레는 한편 그 행위에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아서 슬펐다. “가게에 무슨 일 있어?” 그녀는 서둘러 이야기를 돌렸다. 킬리언 포목점 2호.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본점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손님은 끊이질 않는다. 조세핀의 말에 제이드는 재빨리 묻고 싶은 점을 떠올렸다. 많지. 아주 많다. 그는 이 년 동안 포목점에 손을 떼다시피 했으니까. 가볍게 눈을 붙인 케이트는 출출해지자 자신의 방에서 나왔다. 새벽을 돌아다닌다는 건 체력소모가 여간 큰 게 아니구나. 그녀는 나른한 몸을 펴며 중얼거렸다. 일 층으로 내려오자 응접실에서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어라? 케이트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니까 유진씨가 말하는 가격에서 더 저렴한 걸 보여줘야 한다는 거지?” “응, 그 사람은 좀 허풍이 있다고 해야 하나. 그렇거든. 말한 것보다 더 저렴한 걸 사 가.” 제이드가 머리를 긁고 싶은 듯 손을 머리에 대는 게 보였다. 뭔가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모양인데. 케이트가 끼어들어도 될지 몰라 망설이는 사이 제인이 다가와서 물었다. “차, 준비할까요?” “응, 부탁해.” 데이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딜 간 걸까? 집안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청소를 마치고 볼일을 보러 나간 모양이다. 그녀의 업무는 청소와 아침 식사뿐이다. 청소만 마쳤다면 언제 무엇을 하든 케이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 에녹이라는 사람 말인데.” “아, 그분.” “엄청나게 깐깐해.” 아, 고마워. 케이트는 제인에게 차를 받아들며 미소 지었다. 제이드와 조세핀은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익숙한 명칭이 몇 개 나왔지만 남의 가게 이야기라 그녀는 끼어들지 않고 이안이 읽고 있는 책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뭐예요?” 이안은 조용히 책을 들어 표지를 보였다. <뮈엘라에 존재하는 귀족 가문 문장에 대한 그림과 설명>.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이런 책도 있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넘겼다. 귀족 가문의 인장에 대한 책은 귀족집안이라면 어느 집에나 있기 마련이다. 귀족가의 자식이라면 어린 시절부터 이 책을 읽고 문장을 익힌다. 물론 직접 읽는 게 아니다. 대독자를 고용해 문장을 암기하도록 한다. 반대쪽에선 흥분한 제이드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괴팍한 노인네일 거야! 무명 대신 비단을 가져다줬다고 길길이 날뛰는 바람에 배달한 애가 울었다니까?” “그야 당연하지.” 흥분한 제이드에 비해 조세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분 엘프니까.” 손을 허공에 휘젓던 제이드의 행동이 멈췄다. 그는 어라? 하는 표정으로 조세핀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엘프인 거와 비단을 안 쓰는 거와 무슨 상관인데?” 이 바보 녀석이. 조세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엘프는 무명만 쓴다는 거, 몰라?” 그러고도 네가 포목점 아들이냐는 비난의 어조였다. 제이드는 얼굴을 붉혔다. “어, 몰랐는데.” 맙소사. 조세핀은 킬리언 가에서 막내아들을 얼마나 귀엽게만 키웠는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포목점 아들이 엘프는 무명만 쓴다는 것도 몰랐다는 건 언어도단이다. “그럼 지금부터 머릿속에 집어넣어. 엘프는 무명만 써.” 엘프이 말에 의하면 옷에 쓸 만큼의 비단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누에가 신선하지 않은 나뭇잎을 제공받고 사육당한다는 것이다. 비단에는 사육되는 누에의 괴로운 감정이 들어가 있다나 뭐라나. 무명은 목화를 채취한 것이니 나눠 받는 개념이라는 말이다. 인간인 조세핀으로서는 벌레를 학대한다는 등, 목화를 나눠 받는 다는 등,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녀의 모토는 손님이 원하는 건 손해만 없다면 다소 기이해도 들어 주자였다. “거기 우리가 찾은 그림이 있어요?” 케이트는 제이드와 조세핀에게서 이안에게로 신경을 돌렸다. 그는 꽤 빠른 속도로 책을 넘기고 있었다. 제대로 확인하는 거 맞아? 의심스러운 생각에 그녀는 벨링스 자작가에서 챙겨온 카드를 꺼냈다. “글쎄.” 이안은 여전히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기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 남자 왜 이렇게 심드렁해? 케이트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을 깜빡였다. 새벽에는 여자가 여자의 방을 더 잘 살필 수 있다는 이유로 그녀를 깨워 억지로 데려갔던 사람이 낮이 되자 이젠 벨링스 자작가의 영애를 찾는 데 관심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왜 그래요?” 이안은 고개를 들어 케이트를 쳐다봤다. 뭐가? 그런 표정에 그녀는 이안의 손에 들린 책을 손으로 덮으며 말했다. “영애를 찾을 생각이 없어 보여요.” 이안은 책 위로 얹은 작은 손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케이트를 쳐다봤다. 그녀의 말이 맞다. 로웨나 벨링스를 찾으려던 생각은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영애의 방에서 마법 흔적을 발견했을 때 그는 그게 심장을 훔친 마녀와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케이트가 찾아낸 카드로 마녀와의 관계보다는 단순히 영애가 사랑에 빠져 가출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지금 보고 있는 <뮈엘라에 존재하는 귀족가문 문장에 대한 그림과 설명>도 사실 크게 뭔가를 기대하고 찾는 건 아니다. 말 그대로 귀족 가문 문장을 실은 책이기 때문이다. 카드를 보낸 사람이 귀족이 아니라면 여기에 없을 것이다. 그는 제이드와 조세핀을 쳐다보고 케이트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와. “나는 그 여자의 행방을 찾으러 간 게 아냐.” 케이트가 다가가자 이안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직한 목소리와 따듯한 숨이 귀에 닿아 간지러웠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 여자가 마녀와 관련이 있는지 찾으러 간 거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오 주말 잘 보내셨나요? 내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상태가 아직도 메롱입니다. 주말에 일이 있어서 좀 바쁘게 돌아다녔더니 오늘은 회사에서 완전 헤롱거렸어요. 죄송하지만 내일 하루만 더 쉬겠습니다. 오늘 쉬고 내일 부터 올릴까 하다가 그럼 텀이 너무 길어져서... 이번 표지는 빠따를내리처님께서 선물해 주신 이안과 케이트 입니다. 아픈 와중에 케이트 참 예쁘네요. 흑흑... 감사합니다. 수요일에 봬요. 00139 4. 로웨나 벨링스 =========================================================================                            케이트의 몸이 움찔했다. 마녀라는 말에 반응한 탓이다. 하지만 먼저 이안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눈치챌 정도로 크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왜, 왜 그런 생각을?” 제이드와 조세핀을 의식했는지 케이트 역시 속삭였다. 이안은 그녀가 그의 얼굴에 대고 소근 대는 것을 잠시 즐겼다. “정보 길드에서 벨링스 가의 영애에 대해 조사를 요청해서 받았는데, 마녀로 의심될 상황이야.” “어, 어떻게요?” “최근 갑자기 인기가 높아졌는데 그녀의 인기가 높아질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고 한다.” 케이트는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인기가 높아지는 데 이유가 필요해요?” 이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래. 그도 사실 그게 이해가 안 되던 차였다. 인기가 높아지고 낮아지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케이트나 이안이나 본인들이 느끼기엔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이 접근하거나 멀어진 경험이 있다. “로웨나 벨링스양 말이죠?” 갑자기 두 사람의 대화에 조세핀이 끼어들었다. 케이트가 고개를 돌리자 제이드와 조세핀이 그녀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차. 아직 이안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다. 케이트는 재빨리 이안에게서 떨어졌다. “알아?” 제이드가 물었다. 조세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여자를 모르는 사람이 에바니엘에 어디 있어?” 여기 있다. 제이드는 이안과 케이트를 쳐다봤고 케이트는 얼굴을 붉혔다. 이안은 눈썹을 들어 올렸을 뿐이다. “어머.” 조세핀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이 집의 사람들은 소문과는 그리 연이 없는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기도 했다. 킬리언 포목점은 각계각층의 손님이 온다. 그들과 수다를 떨다 보면 정보 길드 못지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음, 일단 로웨나 벨링스는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인기 있는 편이 아니었어요. 예쁘장하긴 했지만 성격이,” 부랴부랴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이야기를 시작한 조세핀은 거기서 머뭇거렸다. 예쁜데 성격이 안 좋다니, 어쩐지 그녀를 질투해서 비난한다는 생각을 할까 봐 걱정돼서였다. 하지만 제이드가 그녀의 그런 걱정을 불식시키듯 나섰다. “나도 그 이야긴 들었어. 좀 오만한 아가씨라고.” 조세핀은 자신을 도와준 제이드에게 감사의 의미로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음. 그랬다고 하더라고. 어느 하녀가 좀 인기 있다고 창녀라고 호통 치며 쫓아낸 사건도 유명했고.” “인기 있다고요?” 케이트가 끼어들었다. 조세핀은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자극적이지 않게 이야기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하녀 한 명이 벨링스가에서 일하게 됐는데 남자들의 인기를 얻었던 모양이예요.” 하녀 이름이 뭐더라? 조세핀은 잠시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긴, 이런 이야기에서 이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법이다.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전에 있었던 집에서도 집주인이었나, 집주인 아들이었나.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추문이 있어서 쫓겨났다고 하더라고요.” “어머.”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추문이라니. 에바니엘 우물가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다. 그렇게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고 하는데, 그야 여자들이 하는 말이니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조세핀은 정확한 사실만 머릿 속에 떠올렸지만 소문이라 정확하다고 단정 지을만한 게 별로 없다. “남자들 말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고 해요. 어딘지 모르게 끌린다고 해야 하나. 나는 남자가 아니라 모르겠지만요.” 너는 어때? 조세핀이 제이드에게 공을 돌렸다. 제이드는 잠시 당황하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난 만난 적 없어서 모르겠는데.” “확실해?” “내가 아는 여자가 그런 엄청난 사건에 휘말렸는데 내가 모를 것 같아?” 아, 그렇군. 조세핀은 결국 제이드의 지식을 포기하고 이야기를 이었다. “벨링스양은 아까 제이드가 말했지만 좀 오만한 데가 있었거든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녀가 보기엔 천한 것들이나 마찬가지죠.” 천한 것이라고 말할 때 조세핀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케이트는 키득 웃었다. “아까 말했듯이 예쁜 편이긴 했지만 성격이 좀 오만한 벨링스 양은 구혼자가 별로 없었어요. 기가 센 여자는 모르지만 남편 쪽 식구를 턱짓으로 부리려는 여자를 뮈엘라에서 좋아할 리가 없잖아요?” 조세핀이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귀족은 좀 덜하긴 하지만 뮈엘라에서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힘을 최고로 치는 나라에서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여자는 남자보다 힘이 약하니까. “소개받는 남자마다 구혼하지 않아서 초조해한다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그 하녀는 꽤 인기가 있었던지 주변남자들이 저마다 구혼을 했던 거죠. 물론 벨링스 양은 쳐다보지도 않을 남자들이었지만, 여자 마음이란 게 또 그렇잖아요?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하녀가 주인 아가씨보다 인기가 좋은 것도 마음에 안 드는 데 전 집에서 남자주인과 사건이 있었다고 하니 벨링스 영애가 난리를 부렸다고 하더군요.” “난리요?” “천한 창녀와 같은 지붕에서 지낼 수 없다고 했대요.” 세상에. 케이트의 입이 벌어졌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자극적인 이야기다. “그뿐이 아니죠.” 조세핀은 말도 말라는 듯 손짓하며 말했다. “자기 친구들에게 전령을 보내서 절대 고용하지 말라고 손을 써뒀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지 않아도 전 저택에서 미움을 받아 일할 곳이 마땅찮았던 하녀인데 더더욱 일할 곳이 없어진 거죠.” “어,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하녀요?” 네. 케이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세핀은 눈을 굴렸다. 그녀는 정말 이 이야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부정확하기도 하거니와 찝찝한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고층거리에서 봤다는 사람이 있어요.” 케이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맙소사. 그녀가 알고 있는 불운한 하녀가 또 생각났다. 호건가에서 쫓겨난 하녀. 모자로 멍을 가리고 있던 여자.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고층거리에서 이안과 함께 심장을 빼앗긴 여자가 호건가에서 일한 하녀라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조세핀이 말하는 하녀도 벨링스가에서 일하기 전에 일한 집 주인과 추문이 있어서 쫓겨났다고 했다. 호건가에서 쫓겨난 다음 일한 집주인을 나쁜 년이라고 욕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집주인이 여자였구나 하고 생각해서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케이트는 이안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 그 여자 같아요!” “그 여자?” 이안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케이트는 조세핀 앞에서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고층거리에서 심장이 없이 발견된 여자 말이예요.” 이안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답답해진 케이트가 그에게 매달리다시피 다가가서 속삭였다. “고층거리에서 죽은 그, 매춘부 말이예요. 마녀가 심장을 가져간 거 기억나요? 그때 거기 주점 주인이 그랬잖아요. 호건가에서 일하다가 쫓겨난 하녀라고.” 그제야 이안이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기억났다. 고층거리에서 발견된 매춘부. 호건가에서 쫓겨난 뒤 다른 집에서 일했지만 역시나 쫓겨났다고 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쫓겨난 뒤 매춘부가 된 여자가 술에 취하면 나쁜 년이라고 자신을 쫓아낸 마지막 주인을 욕했다는 게 떠올랐다. “그 나쁜 년이 로웨나 벨링스라는 건가?” “가능성 있지 않아요?” 케이트와 이안이 소근 거리며 대화를 나누자 견디다 못한 제이드가 끼어들었다. 뭔데? 그는 약간 싱글거리면서 호기심을 보이고 있었다. “전에 네가 이야기해준 사건 중 심장이 없는 시체에 대해 기억나나?” “아, 그거?” 조세핀도 기억났다. 심장이 없는 시체라니, 에바니엘에서 최근 그것보다 더 무서운 사건은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그 사건을 조사하다가 피해자 중 하나가 호건가에서 쫓겨난 하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호건가에서 쫓겨난 다음에 일한 집에서도 쫓겨나 고층거리의 매춘부가 되었다고 하더군.” 어머. 조세핀이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녀가 한 이야기와 이어진다.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기묘한 우연이네. 네 사람은 동시에 그렇게 생각했다. 심장을 빼앗기고 죽은 하녀였던 매춘부. 그녀가 매춘부가 되는데 일조한 저택의 아가씨가 구설수에 시달렸다. 좀 더 사건을 아는 세 사람은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이상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던 로웨나 벨링스. 그 인기는 그녀에게 복이 되지 못했다. 결국 가까스로 체결한 약혼이 파혼당했다. “벨링스가에 자식은 로웨나양 뿐인가요?” “네.” 귀족에 대한 이야기지만 이안보다 제이드가 더 잘 알았다. 그는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더니 단숨에 말했다. “벨링스 자작은 좋게 말하면 호탕하고 나쁘게 말하면 과격한 구석이 있는 남자거든요. 아내는 십 년 전에 사별했고 자식은 로웨나양 뿐이었습니다.” “하나뿐인 딸이 파혼당했으니 상당한 수치였겠군.” “그렇지.” 제이드는 이안의 말에 동의했다. 하나뿐인 딸이 가까스로 그의 입맛에 맞는 집안과 약혼했다고 어찌나 으쓱대고 다니던지 우스울 정도였다. 그런데 그 딸이 남자들을 유혹하고 다닌다는 추문에 이어 이젠 파혼까지 당해버렸다. “벨링스 자작이 수치스러워서 딸을 시골로 보냈다고 하던데, 역시 아니었군요?” 조세핀이 끼어들었다. 제이드는 사실대로 말해도 될까 하고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다른데 말 안 할 거지?” 그때 조세핀이 잠시 망설이는 게 케이트의 눈에 보였다. 그녀는 머뭇거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 “사실은 자기 딸이 어디 있는지 벨링스자작도 모르는 모양이야. 어제 이안과 내게 딸이 사라진 단서를 찾아달라고 의뢰했거든.” 조세핀의 눈이 커졌다. 그렇지 않아도 로웨나에 대한 이야기는 에바니엘에서 무성한 소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엄청난 수의 구혼은 당사자가 약혼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눈을 끌게 마련이다. “가출했다는 거야?” “납치됐을 수도 있고.” 제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덧붙였다. 광적인 구혼자가 납치했을 가능성도 있잖아? 조세핀은 그 말에 부인했지만 표현하지는 않았다. 로웨나는 소문이 고조되자 두문불출했다. 최근 몇 주간 그녀의 얼굴을 봤다는 사람이 없다. 그녀가 자주 가던 찻집이나 거리에서도, 그녀의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도 그녀를 보지 못했다 했다. 누군가 봤다면 벌써 소문이 났을 것이다. 그 정도로 로웨나 벨링스는 최근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도 아파서 안오는 줄 알았죠? 후후후 기침이 심한걸 빼면 어지럽거나 숨쉬기 힘든건 가라앉았어요. 근데 오늘 야근했다는거...젠장. 야근 빨리 끝내고 집에와서 밥먹으려고 급하게 일 처리 하고 컵에 물이 남았길래 홀랑 마시고 회사를 나오는데 그대로 체했어요. 하하하하하 젠장. 회사 근처 약국은 8시밖에 안됐는데 죄다 문을 닫질 않나...흑흑... 집에 약이 있긴 한데 집까지 가면 상태가 심해질것 같아서 가능하는 집에 가는 길에 양국에서 사서 먹으려고 슬금슬금 집쪽으로 오다보니 집까지 한시간 정도 걸려서 끙끙거리며 걸어왔다는거. 저, 대학때 심하게 몸살에 걸렸는데 과, 과제 해야해...이러면서 컴퓨터 앞에서 쓰러지는 바람에 퇴근하신 부모님께 몇시간 뒤에 발견된 적이 있을정도로 둔하다고 해야 하나, 무식하다고 해야하나. 00140 5. 우슬라 =========================================================================                            “없어요?” 시나몬이 근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케이트는 에바니엘 우물가의 마지막 장까지 꼼꼼히 훑어 본 다음 고개를 들었다. “네. 없네요.” “무슨 일이지…?” 한 손으로 볼을 감싸고 걱정하는 모습이 퍽 아름답다. 케이트는 약간 신기한 기분이 들어 물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인데 걱정이 돼요?” “전 그 사람 기사가 좋거든요.” 케이트도 책과 잡지를 읽지만, 특별히 어떤 기자를 좋아해 본 적은 없다. 그녀로서는 한 기자를 꼼꼼히 찾는 시나몬의 행동이 그저 신기하게만 보였다. 심지어 시나몬은 재차 묻기까지 했다. “혹시 왜 기사가 없는지 그런 내용도 없어요?” 없다. 케이트는 유명이라는 기자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찾았다. 신문 뒤에 짤막하게 신문사 소식이 실려 있기는 하지만 다음 호는 몇일이라는 정도의 이야기뿐, 어느 기자의 기사가 왜 없는지는 실려 있지 않았다. “어디 아픈가.” 진지하게 시나몬의 모습에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제안을 했다. “신문사에 물어봐요.” “알려줄까요?” 그건 잘 모르겠다. 케이트는 으음 하고 고민하다가 다시 제안했다. “편지를 써보면 어때요?” “편지요?” “무명이라는 기자한테 편지를 보내는 거예요.” “하지만 그 기자의 집 주소를 모르는 걸요.” “신문사로 보내면 전해주지 않겠어요? 기자에 대해 이야기해주진 않아도 편지 정도는 전달해 줄 것 같은데요.” 정말요? 시나몬이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더니 눈을 반짝였다. 케이트로서는 엄두도 못 낼 애교다. 이윽고 제인이 종이와 봉투를 가지고 오자 케이트는 시나몬의 요청대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시나몬이 편지를 담은 봉투를 소중히 품에 안고 떠나자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꽤 할 말이 많았던지 그녀는 편지지 한 장을 빼곡하게 채울 정도로 내용을 불렀다. 이래서야 대필자는 무리일 것 같다고 생각하며 케이트는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고작 편지지 한 장을 썼을 뿐인데 손이 피곤했다. 기자에게 쓰는 편지라 더 신경 써서 그런 것도 있다. 그녀는 손끝에 거무스름하게 묻은 잉크를 발견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손을 닦아야겠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데이지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손님이 가신 것 같은데, 정리해도 될까요?” “아, 그래요.” 데이지는 능숙하게 흩어진 잔과 차 주전자를 쟁반 위에 올리더니 신문을 접기 시작했다. 시나몬의 요청에 따라 무명이라는 이름의 기자를 찾느라 신문도 흩어진 상태였다. 신문을 차곡차곡 접자 제일 첫 번째 장이 드러났다. “어머.” 응접실을 나가려던 케이트는 데이지의 놀란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신문 첫 장에는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금발에 푸른 눈. 신문치고는 흔하지 않게 컬러가 들어가 있다. 케이트는 무심코 신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분, 로엔경이 아니신가요?” “네?” 데이지의 질문에 케이트는 재빨리 기사를 읽었다. 일단 금발의 남자는 이안이 아니었다. 이안과 닮지도 않았다. 그건 그림 속의 남자가 흑발에 호박색 눈동자라 해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안과 닮았다면 케이트가 알아차렸을 것이다. 신문을 전부 읽은 건 아니지만 그림은 신문 첫 장에 크게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시나몬은 그녀가 찾는 기자의 기사가 몇 번째나 실리지 않자 오늘 신문은 상심해서 읽어달라고 하지도 않은 채 떠났던 것이다. “에바니엘 최고의 신랑감?” 에바니엘 우물가 운 제목으로 시작한 기사의 요점은 간단했다. 에바니엘에 남아있는 미혼의 남자 중 신랑감 순위를 발표한 기사였다. 어느 기준으로 누가 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등은 에드워드 에반스공작이었다. 에반스공작? 케이트는 그녀가 기억하는 에드워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림 속의 남자는 에드워드와 닮았다. 하지만 이안과는 닮지 않았다. 어머. 그녀는 이어서 자신과 로즈마리에게만 이안과 에드워드가 닮아 보인다는 말을 떠올렸다. 에드워드와 이안이 닮아 보이는 건 마녀의 특징일 수 있다. “데이지, 이 남자가 로엔경처럼 보여요?”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처음엔 굉장히 비슷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데이지의 말에 케이트는 다시 한 번 신문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안과 그다지 닮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에드워드를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녀가 아닌 사람의 눈에는 에드워드가 이렇게 생겼다는 말인가? 그녀는 신문을 꼼꼼히 읽어 내렸다. 최고의 신랑감으로 일 등은 에드워드 에반스였다. 남은 아홉 명에는 놀랍게도 제이드도 들어가 있었다. 제프리 호건까지 읽은 케이트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어느 기준인지 알겠다. 재산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안은 순위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이안의 평가가 사교계에서 그만큼 좋지 않다는 뜻이다. 제프리는 난봉꾼인 것을 고려하더라도 그 정도 재산이라면 신랑감으로 합격점이라는 뜻이겠지. “어라?” 기사를 읽던 케이트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에드워드는 로즈마리라는 약혼녀가 있다. 그녀도 소개받고 얼마 전에 초대받아 방문하기까지 했다. 로즈마리는 에반스 공작의 저택에서 지내고 있다. 한집에서 같이 지내는 약혼녀가 있는데도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어쩌면 말 그대로의 뜻인지도 모른다. 약혼 여부와 상관없이 조건이 가장 좋은 남자. 배우자를 조건으로 순위를 매긴다니, 케이트로서는 좀 거부감이 들지만 에바니엘 우물가라는 신문의 특성상 불만을 품기는 어렵다. 어차피 흥미 위주로 읽는 가십 신문이 아닌가. “로엔경이 아닌가요? 그냥 닮은 사람인데 제가 착각했나 봐요.” 데이지는 얼굴을 붉히며 변명하듯 말했다. 케이트는 기사를 끝까지 읽은 다음에야 고개를 들었다. 기사는 <이토록 훌륭한 신랑감을 소개했으니 에바니엘의 용감한 아가씨들이여, 도전하세요!>라는 식으로 끝맺고 있었다. “어, 네. 로엔경이 아니라 로엔경의 사촌이예요.” “어머, 그래요?” 데이지는 새삼 신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 모습에 케이트는 어느 정도 확신이 들었다. 데이지의 눈에도 에드워드가 이안과 닮아 보인다는 건 그녀가 확실히 마녀라는 뜻이다. 케이트의 눈에는 그림속의 에드워드가 이안과 닮아 보이지 않지만 그건 데이지와 케이트의 마녀로서의 능력이 다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이안은 출타 중이고 제인은 보이지 않았다. 이야기하려면 좋은 기회였다. “전에, 데이지도 마녀라고 했죠?” “아, 네.” 테이블을 정리하던 데이지는 케이트의 질문에 허리를 곧게 펴고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케이트가 피하는 것 같아서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 기다리던 차였다. “여기에 마녀의 모임이 있다고 했고요?” “큰 도시에는 숨어 사는 마녀들이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모임을 하는 것으로 알아요.” “데이지도 그 모임에 참석해 봤어요?” 케이트의 질문에 데이지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예전에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케이트는 가장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숨을 골랐다. 하지만 언제 제인이나 다른 사람이 들이닥칠지 몰랐기 때문에 시간이 별로 없었다. 결국 그녀는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나도 마녀라고 했고요?” “네. 맞아요.” 약간 열성적이다 싶을 정도로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흠. 좀 낫군. 한 걸음 내딛자 케이트의 마음이 좀 편해졌다. “확실해요?” “네. 확실해요.” 이상하게도 그렇게 각오를 했는데 케이트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뮈엘라에서 마녀라는 건 범죄자다. 살면서 범죄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던 케이트로서는 심장이 덜컥 내려 앉을 만큼 충격적인 일임은 여전했다. 물론, 이안의 소지품을 뒤졌던 일을 빼고. 그녀는 속으로 덧붙였다. “그럼, 다른 사람도 내가 마녀라는 걸 알 수 있어요?” 데이지는 단박에 케이트가 한 질문의 요지를 깨달았다. 데이지가 알아차릴 수 있었다면 다른 사람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케이트는 그게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 질문은 케이트가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의미기도 했다. 데이지는 씩 웃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를 거예요. 전 아가씨와 가까이 있어서 눈치챌 수 있었던 거니까요.” “그 이야기는 다른 사람도 나와 가까워지면 알 수 있다는 의미 아니예요?” “아니예요!” 데이지의 금발이 흔들렸다. 그녀는 온몸을 이용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표현한 뒤 말을 이었다. “저는 운이 좋았던 것뿐이거든요.” 그건 내게는 전혀 운이 좋지 않은 일 같은데. 케이트가 그렇게 생각하는 가운데 데이지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아가씨의 마녀로서의 능력은 가려져 있는 것 같아요.” “가려져요?” “가둬져 있다고 해야 하나. 간혹 그런 마녀가 있다고 들었어요. 자각을 못 해서 능력이 발휘되지 않는 마녀들이요.” “어, 그건 저한테는 좋은 일인 것 같은데요.” 어느새 케이트는 데이지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데이지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자각하지 못해서 능력이 발휘되지 않는 건 위험해요. 언제 어디서 자각할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광장에서 수백 명의 사람 앞에서 자각해 버린다면 큰일이 난다고요.” 데이지는 거기까지 말하고 재빨리 덧붙였다. 역사적으로 그래서 처형당한 마녀가 꽤 많아요. “어, 그러면 지금까지 저는…?”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케이트를 쳐다보며 데이지가 위협적으로 말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우유병이나 마찬가지예요.” 한여름에 때때로 마개를 너무 꼭 막은 채 오래 둔 우유병이 손대자마자 팍하고 터지는 경우가 있다. 터질 때의 충격과 상한 우유의 지독한 냄새가 떠올라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데이지의 말 대로다. 자각하지 못한 힘이라는 건 언젠가 자각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시간과 장소가 좋기보다는 나쁠 가능성이 높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케이트가 그녀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었다는 것을 깨달은 데이지는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케이트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다른 마녀들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자각하면 돼요.” “다른 마녀라면 당신이요?” “아뇨. 나 혼자서는 아마 안 될 거예요.” 이야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케이트는 실망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 애썼다. 데이지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케이트의 손을 토닥였다. 그 일련의 행동은 마치 그녀가 케이트보다 한참이나 오래 산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요.” “당신이?” “수도에 온 지 얼마 안 됐지만 다른 마녀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수도에는 마녀의 모임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케이트의 마음에 희망이 솟았다. 데이지의 말대로 다른 마녀의 모임을 찾을 수 있다면, 그래서 그녀가 그 마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지금까지처럼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득 다시 불안감이 들어 케이트는 데이지의 손을 꼭 잡은 채 물었다. “자각하면 지금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는 건가요?” 데이지는 그녀의 질문에 깜짝 놀라는가 싶더니 진지하게 대답했다. “조금 달라질지도 몰라요. 마법을 탐지하는 곳은 피해야 할 테니까요. 피하는 방법을 알려줄게요.” “정말, 정말 고마워요.” 아직 데이지가 도와준 건 아니지만 케이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그녀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사람이 많은 곳에서 갑자기 마녀라는 게 들통 났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게다가 지금까지처럼 갑자기 튀어나오는 그녀의 힘을 제어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회식이 있어서 이제 집에 들어왔네요. 여러분, 제가 아주, 아주 중요한걸 알려드릴게요. 체하거나 장염이거나 뭔가 위나 장에 관련되서 앓았잖아요? 그럼 한 이틀간 커피는 드시지 마세요. 알겠죠? 진짜로 위를 바늘로 콕콕 찌르는 감각을 느낄수 있어요. 우와, 신기해. 하하하하하하 아참, 가슴 바로 아래 있는게 위 맞죠? 00141 5. 우슬라 =========================================================================                            데이지는 그날 저녁 바로 행동 개시했다. 그녀는 마차도 없이 빠른 속도로 걸어서 고층거리를 향했다. 하녀 복을 입지 않은 그녀는 평범한 여자였기 때문에 그녀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뒤쫓는 사람이 없는지 몇 번 확인한 데이지는 고층거리 안으로 겁 없이 접어들었다. 제정신인 사람들은 도박을 하기 위해 도박장에 몰려가 있었고, 어두운 고층거리에 남은 건 약과 술에 전 중독자와 길을 잘못 든 애송이 손님이라도 유혹할까 싶어 길에 나선 싸구려 매춘부 뿐이었다. 매춘부들은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 데이지는 주위를 둘러보지도 않고 마치 길을 잘 아는 것처럼 거침없이 고층거리를 누볐다. 꼬불꼬불한 길을 헤매지도 않고 척척 걸어간 그녀는 작은 공터가 나오자 무너져 가는 벽에 손을 대고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손이 움직이면서 빛은 벽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아주 잠깐 벽에 남아있던 푸르스름한 빛이 데이지가 손을 떼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렸다. 데이지는 그녀가 한 행동을 지켜본 사람이 없는지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고 이번에는 다른 길을 택해 큐바인 하우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어서오세요!” 막스는 그를 맞이하러 나온 소년을 보고 당황한 기색을 내지 않으려 애썼다. 이십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귀족과 부자의 변호사로 일하다 보면 별의 별일이 다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남자 하인이 얼굴의 반에 걸쳐난 흉터를 가진 소년인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막스 로건, 변호사다. 스미스양과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제인은 막스가 들어오기 쉽도록 문을 더 열더니 그가 들어온 것을 확인하기도 전에 문 손잡이에서 손을 놓고 몸을 돌렸다. 가까스로 막스의 엉덩이가 육중한 문과 부딪히는 불상사를 피했을 때 소년은 안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런 이런. 변호사는 고개를 저으며 제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봤을 땐 눈치채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이 집의 남자 사용인은 저 소년뿐인 모양이다. 게다가 저 소년의 한쪽 눈이 안 보인다는데 그의 변호사 선임료를 걸 수도 있다. “안녕하세요.” 빨간 머리를 틀어 올린 작은 여자, 케이트가 소파에서 일어서며 그를 맞이했다. 막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얼마 전에 나타난 이 빨간 머리 케이트는 엘리자베스와 닮았다. 엘리자베스가 좀 더 선이 얇았다는 것과 머리카락 색이 다르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는 케이트가 가리키는 대로 완전히 환골탈태한 큐바인 하우스의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무너져 가는 큐바인 하우스는 고작 몇 주 만에 깔끔하게 변했다. 막스는 이 집을 케이트에게 팔겠다던 수상쩍은 건축가의 제안을 그녀에게 전달해 준 것이 잘한 일이라고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안녕하십니까, 스미스양. 그리고 킬리언씨” 막스가 그렇게 인사를 건네자마자 제이드 역시 씨익 웃었다. 안녕하세요, 로건씨. 막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이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지난번에 큐바인 하우스에 왔을 때도 케이트의 옆을 지키고 있던 남자다. 그가 이안 로엔일 거라는 가능성이 높지만 정확하진 않았다. 변호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안 로엔경이시죠?” 이안이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그는 제이드와 케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막스를 맞이할 때도 홀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과연 귀족이군. 이안의 행동이 귀족이라서는 아니었지만 막스는 그렇게 판단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지난번에 만났던 산파 기억하시죠?” “네.” 케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긴장한 나머지 오른손으로 왼손을 쥐어짜고 있었다. 어떤 말이 나와도 기분이 상쾌하지는 않을 것 같다. 찾은 가족이 호건가가 아니었다면 좋았을걸. 몇 번이나 그렇게 생각해봤지만 가족은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윌링턴 판사가 산파의 이야기를 듣고 인정하셨습니다.”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케이트는 이해할 수가 없어 되물었다. “어, 뭐를요?” “스미스양이 호건가의 사람이라는 걸요.” 와! 제이드가 케이트의 손을 잡고 흔들었지만 정작 그녀는 얼떨떨했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어쩐지 와 닿지는 않았다. 그녀는 한 손을 제이드에게 잡혀 흔들리는 채 막스에게 물었다. “어, 그럼 다 끝난 건가요?” “다 끝난 건 아닙니다.” 응? 케이트의 팔을 흔들던 제이드의 움직임이 멈췄다. 판사가 인정했다는데 다 끝난 게 아니라니, 무슨 소리야? 막스는 제인이 가져다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상대가 저 호건가니까요.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스미스양이 호건가의 사람이 된 건 호건가의 재산을 물려받을 자격을 갖게 된 것 뿐입니다.” “자격이라고요?” “호건가의 가주가 유언장에서 스미스양의 이름을 넣지 않을 경우 소송을 걸어야 할 테니까요.” “저기, 전 재산 같은 거 필요 없는데요?” 어머니의 유산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케이트의 그런 생각을 부인하듯 고개를 저으며 막스가 말했다. “호건가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겁니다.” 마치 불길한 예언처럼 들려 케이트는 어깨를 움츠렸다. 어느새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있던 이안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음? 막스는 케이트와 이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지난번에 이 아가씨의 보호자로 보였던 남자 둘 중 제이드쪽이 케이트와 가까운 사이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케이트의 손을 잡거나 가볍게 미소를 짓는 빈도가 잦은 제이드쪽이 더 가능성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제이드가 입을 열었다. 그는 찻잔을 든 채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로건씨는 호건가의 변호사시죠.” 막스는 그 말만으로 무슨 질문이 나올지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호건가 쪽에서는 돈을 나눠 가질, 그러니까 새로운 상속자가 나타나는 걸 별로 안 좋아할 텐데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케이트는 이해할 수 없어 제이드를 쳐다봤다. 반면 이안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는 같은 장소에 있긴 하지만 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킬리언씨만으로 충분한데, 왜 여기에 앉아 있는 걸까? 케이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뱉지는 않았다. “그렇죠.” “그리고 스미스양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맞죠?”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스미스양을 도와준 당신도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제이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한 케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알고 있었냐는 듯 이안을 쳐다봤다. 이안은 케이트의 시선에 고개를 들더니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런데 괜찮을까요?” “무엇을, 말입니까?” 중년의 변호사는 여유 있어 보였다. 오히려 초조해진 건 제이드 였다. 여기서 더 완곡하게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그가 입을 열기를 주저할 때 이안이 나섰다. “제이드의 말은, 호건가에서 케이트를 도와준 일로 앙심을 품고 당신을 해고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케이트를 도와준다는 건 쉽게 믿기 힘든 일이고.” 꽤나 노골적인 말이었지만 막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한 건 케이트와 제이드였다. 변호사는 그런 두 사람을 보고 빙그레 웃어 보였다. “위험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째서죠?” “저는 호건가의 변호사입니다. 즉, 호건가의 사람들을 위해 일한다는 뜻입니다. 스미스양도 호건가의 사람이니 제가 엉뚱한 일을 하는 건 아니지요.” “하지만 호건가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텐데요?” “에스메랄다와 제프리 말씀이시군요.” 변호사의 입에서 존칭 없이 에스메랄다와 제프리의 이름이 나오자 케이트와 제이드는 내심 놀랐다. 자신이 일하는 집의 사람인데 그들을 부르는 목소리에 존경심 같은 건 담겨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경멸에 가까웠고, 그게 사실이었다. 막스는 에스메랄다와 제프리를 경멸하고 있었다. 호건가에서 워낙 많은 돈을 주니 호건가의 변호사로 일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게 에스메랄다와 제프리를 존경한다는 뜻은 아니다. 아니, 호건가의 가주인 비스마르크 호건은 꽤 존경하고 있다.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남자기는 하지만 호건가를 이만큼이나 이룩해 낸 사업 수완만큼은 존경받을 만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와 제프리는 그렇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저 호건가의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돈을 물 쓰듯 쓰고 호건가의 사업을 망치고 있었다. 물론 비스마르크가 있으니 사업은 더욱 상승세이긴 하지만 막스가 보기에 비스마르크가 사망한다면 호건가의 사업은 지금처럼 호황을 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업이라는 건 신용이라는 것도 필요하다. 주문한 물건을 약속한 시일 내에 약속한 수준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신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와 제프리는 신용이 없다. 게다가 두 사람의 인격 역시 저질이다. 막스가 변호사가 되고나서 해결한 제프리의 난잡한 추문 사건만 해도 손가락으로 다 꼽기 어려울 정도였다. 가장 최근에 해결한 하녀는 에스메랄다가 무지막지하게 폭력을 가하긴 했지만 그나마 나은 축에 속한다. 폭력과 그동안 일한 것에 대한 대가만 지불하면 됐으니까. 그전의 여자 중에는 배 속에 아이를 가진 여자도 있었다. 에스메랄다라고 다를 건 없었다. 제프리가 여자때문에 문제를 일으킨다면 에스메랄다는 그 특유의 허영심이 문제였다. 막스는 이마에 주름이 생겼음을 깨닫고 재빨리 얼굴을 폈다. 아무래 에스메랄다와 제프리에게 불만이 있다한들 그걸 타인에게 말하는 건 옳지 않다. “괜찮습니다.” 막스는 애써 미소 비슷한 것을 지으며 말했다. “제 계약은 비스마르크 호건 어르신과 맺은 겁니다. 그분의 후계자가 아닌 이상 이런 일로 저를 해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호건가는 현재 제프리라는 후계자가 있다. 제이드가 그걸 지적하려는 순간 막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프리는 정확히 말해서 후계자가 아닙니다.” 제이드와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심지어 이안마저도 심드렁한 표정을 내려놓고 막스를 쳐다봤다. 변호사는 쓰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현재 호건가의 핏줄을 이어받은 사람이 제프리뿐이나 다들 그가 후계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 어르신은 제프리를 후계자로 지목하지 않으셨습니다. 아까 제가 호건가의 사람들은 스미스양이 재산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라 말했죠?” 케이트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입니다. 호건가의 후계자는 언제라도 어르신이 지목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메랄다도 스미스양과 어르신의 만남을 방해하고 있는 거고요.” 그래서였구나. 케이트는 입을 벌렸다. 그래서 그녀가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요청을 번번이 거부했던 것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사용한 것도 그래서였다. 비스마르크가 손녀를 만나서 그녀를 후계자로 지목할까 봐. 케이트는 문득 변명처럼 말했다. “어, 하지만 전 호건가의 후계자 자리 같은 건 관심 없는 걸요.” “그걸 저들이 믿을 것 같습니까?” 케이트가 입을 다물자 막스 역시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어두워지자 그는 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일어나야겠군요. 시간을 오래 잡아먹어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예요.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해요.” 거기까지 말한 케이트가 약간 주저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선임료는….” 변호사 선임비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호건가의 변호사다 상당한 돈을 요구할 것이 분명했다. 케이트는 그가 지금까지 한 번도 선임료를 달라고 하지 않은 이유가 아직 일이 다 끝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막스는 케이트의 얼굴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엘리자베스와 닮았지만, 성격은 달랐다. 엘리자베스는 돈에 구애받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영수증이라거나 얼마냐는 질문을 한 적이 없다. “변호사 선임료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가방을 집어 들며 여유 있게 말했다. “스미스양은 호건가의 사람이니까요. 호건가에 청구할 겁니다.” “하지만 그, 분들이 그걸 지불하실까요?” “그럼요.” 케이트를 안심시키기 위해 막스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에스메랄다와 제프리는 영수증 명세를 확인하는 인물들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그걸 괜히 케이트에게 말해서 그녀의 부담을 지워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에스메랄다나 제프리보다는 케이트가 더 마음에 들었고 그녀도 어차피 호건가가 아닌가. 호건가의 업무를 처리했으니 호건가에 청구하는 게 당연하다. ============================ 작품 후기 ============================ 불금! 입니다. 전 졸려서 일찍 자고싶은게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흑흑... 다음주에 어딜 가야해서 업뎃이 어찌될 지 모르겠네요. 월요일에 한편 더 올릴 수 있으면 월요일 후기에 이야기 하고 안되면 공지로 남길게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00142 5. 우슬라 =========================================================================                            세 사람은 막스와 함께 집을 나섰다. 제이드는 가게를 들렀다가 수사관실로 들어간다고 했고, 이안과 케이트는 로웨나 벨링스에 대해 좀 더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어디부터 갈까요?” 케이트는 코트를 여미며 물었다. 한겨울 날씨는 이가 부딪칠 정도로 추웠다. 덜덜 떠는 그녀의 모습에 이안은 손을 들어 마차를 잡았다. 운 좋게도 지나가던 마치를 쉽게 잡을 수 있었다. “벨링스 자작가의 사람과 만날 거다.” 마차 안은 춥긴 했지만, 밖보다는 나았다. 케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자작이 조사를 거부했다면서요?” “자작과 이야기할 생각은 없어.” “그럼요?” “거기 사용인과 이야기할 생각이다.” 과연 사용인들이 쉽게 입을 열까? 케이트는 걱정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마차는 차가운 거리를 다가닥 다가닥 말발굽 소리와 함께 빠르게 나아갔다. 눈이 내릴 것 같군. 이안은 창밖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하늘이 빠른 속도로 회색빛으로 물드는 게 보였다. “무,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으신 건데요?” 두 사람의 앞에 앉은 하인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불안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벨링스 자작가와 조금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불안한 모양이었다. 이안은 조용히 테이블 위로 은화를 내려놓았다. 하인의 눈이 커졌다. 저 돈이면 당장 급한 도박 빚을 갚을 수 있다. 그가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케이트의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로웨나 벨링스 주위에 특별한 남자가 있었나?” “특별한 남자요?” 일단 하인은 모르는 척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동자는 테이블 위의 은화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안이 모르는 척 손을 뻗어 은화를 덮어버렸다. 돈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남자의 시선이 그와 케이트에게로 돌아왔다. “특별히 만나는 남자가 있다거나.” 하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있다면 몇 주 전에 이야기한 신문기자에게도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세간에 떠다니는 엄청난 소문과 달리 로웨나 벨링스에게 구혼하는 남자 중 그녀가 실제로 만나는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구혼한 사람 중 특이한 사람은 없었나요?” 케이트의 질문에 하인의 머릿속에 몇 명이 스쳐 지나갔다. 화가, 용병, 상인. 특이하다면 전부 특이하고 평범하다면 전부 평범하다. “전부 특이한 사람이라서….” 말꼬리는 흐리는 하인의 대답에 케이트가 다시 나섰다. “예를 들자면요?” 꼬치꼬치 캐묻기는 신문기자랑 다를 게 없다. 그는 예쁘장한 빨간 머리 여자를 새삼 쳐다봤다. 예쁘장하고 자그마한 게 그의 마음에 든다. 하지만 그가 연락처라도 물어보는 순간 옆에 앉은 남자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았다. “화가도 있었고, 용병도 있었죠. 귀족도 몇 명 있었고요.” 귀족이라고?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약혼이 파혼됐다고 들었는데 구혼한 귀족이 있다면 그 귀족과 다시 약혼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아, 뭐, 평범한 귀족이라면 그렇죠.” 남자는 우물우물 말을 이었다. “근데 유부남 아니면 몰락귀족이어서 말이죠. 어디 우리 주인님과 아가씨의 눈에 차겠습니까?” “귀족은 전부 유부남이거나 몰락 귀족이었단 말인가?” “네. 그렇죠. 운도 참 없는 게, 구혼하는 남자들이 하나같이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하인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로웨나에게 구혼이 쏟아지긴 했지만 그게 좋아 보였던 건 처음 한두 번 정도였다. 귀족은 전부 유부남이 아니면 몰락한 귀족이었고 그 밖의 남자들은 용병, 화가, 상인이었다. 귀족이긴 해도 벨링스 자작 역시 젊은 시절 무인이었으니 용병이라고 나쁠 것은 없다. 약간 기울긴 해도 용병이 괜찮은 평가를 가지고 있다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벨링스 자작이 조사해 본 결과 로웨나에게 구혼한 용병은 제각각 문제가 있었다. 도박문제는 물론이고 살인 혐의가 있는 용병도 있었다. 용병이라고 살인이 허락된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허락된 건 어디까지나 전쟁터였고 뮈엘라 용병이라고 하면 타국에서 인기 높다. 때때로 호위 업무를 하는 용병이 강도나 암살자를 죽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도 방어 대응으로 인정된다. 그러니 살인 혐의가 있다는 건 용병으로서 일한 게 아니라 개인적인 이유로 민간인을 죽였다는 뜻이 된다. “소문에는 호건가에서 구혼을 했다던데요?” 하인의 이야기를 듣던 케이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문제가 있는 남자들뿐이라고 하지만 제프리는 유부남도, 살인 혐의도 없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도 괜찮은 구혼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트의 질문을 들은 하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프리 호건님 말이죠? 그분은 구혼한 적이 없습니다.” “네?” 그럴 리가 없다. 에바니엘 우물가에서 기사화되지 않았던가. 거기까지 생각한 케이트는 자신이 가십 지를 진지하게 읽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그분이 아가씨를 만나려 한 건 맞지만 다른 분들처럼 주인님께 정식으로 구혼을 한 건 아닙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케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안마저도 흥미가 생겼는지 자세를 고쳤다. 남자는 침을 한 번 삼키고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분은 좀, 뭐랄까. 적극적이긴 하셨죠. 몇 번이나 아가씨를 공연이나 식사에 초대하셨는데 아가씨께서 전부 거절하셨습니다. 보통 다른 분들은 그러면 정식으로 구혼하고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싶다고 주인님께 말을 전하는데 그러지 않으시더군요.” 로웨나를 만나고 싶어는 하는데 구혼은 안 한다? 귀족사회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그냥 친구로 지내고 싶다는 사람도 있지만 제프리는 친구가 아니라는 부분을 확실히 했다. 정열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꽃을 보내기도 했고, 노골적으로 스타킹 같은 걸 선물하기도 했다. 로웨나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가 스타킹을 선물한다면 질색할 것이다. 으으. 케이트가 얼굴을 찡그리자 이안이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전에 너도 스타킹을 받지 않았나?” “네에? 받은 적 없거든요?” “받았어. 가장무도회 전에 말야.” 아, 그거. 케이트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남자에게 받은 적은 확실히 절대적으로 없다. 그녀는 이안을 흘겨보며 말했다. “시나몬은 남자가 아니잖아요. 게다가 자기 때문에 스타킹이 망가졌다고 생각했으니까 대신 사준 거구요.” 흐음. 이안은 턱을 감싸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럼 여자에게 받는 건 괜찮다는 건가?” “뭐, 상대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그렇죠.” 그렇군. 호기심을 해결한 이안이 하인에게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재촉했다. 남자는 케이트와 이안의 친밀한 대화에 눈을 깜빡이고 있다가 자신이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 잊어버려 허둥거렸다. “스타킹선물 뿐이 아니라 좀 더 뭐라고 해야 하나….” 하인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제프리의 행동은 마치 로웨나를 고급 창부 대하는 것 같았다. 스타킹이나 구두 같은 걸 보내기도 했고 갑자기 들어와서 만나게 해달라고 화를 낸 적도 있었다. 심지어 세간에 알리지는 않았지만 로웨나가 파혼당한 데에는 제프리의 소행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로웨나의 약혼자에게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아 싸움을 걸었던 것이다. “좋게 말해서 적극적이었죠.” 남자의 말에 케이트는 그건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았다. 그건 아무리 좋게 말해도 적극적이 아니다. “그런데 그분이 좀 더 강하게 나왔을 뿐 다른 분들도 비슷하게 행동하셨어요.” 로웨나가 친구를 만나거나 쇼핑을 하면 몰래 뒤따르는 무리가 있었다. 찻집에서 우연을 가장해 만나거나 공연장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기도 했다. 이안은 점점 케이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자 남자의 말을 중단시켰다. 이 정도면 됐다. 로웨나 주변에 이상한 남자들이 많았다는 건 충분히 알았다. “그 말은 호건가에서 구혼만 했다면 벨링스 영애는 호건가와 결혼했을 거라는 말이군.” 뭐, 그렇죠. 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호건가에서 구혼을 들어오면 아까워서 어쩌나, 지금 한 약혼을 거절하고 호건가와 결혼시켜야 하나 하고 싱글벙글 기분 좋은 고민을 하던 벨링스 자작은 호건가에서는 구혼할 생각이 없고 약혼자 쪽에서 파혼을 해오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손에 들어올 거라 생각한 건 물론 이미 들어왔다고 생각한 것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는 로웨나의 방에 가서 아껴 마지않던 딸을 우왁스럽게 잡아끌며 어서 가서 그 매력으로 호건가에서 구혼을 받아오라고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건 콧대 높은 로웨나에게 상당한 수치가 되었을 것이다. “저, 한 가지 더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케이트는 마무리하려는 대화의 끝을 붙잡고 물었다. “거기서 일한 하녀 중에 제프리, 그러니까 호건 가의 후계자와 일이 있었던 여자가 있다고 하던데. 알아요?” 아. 하인은 바로 우슬라를 떠올렸다.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도 잠시 우슬라에게 반한 적이 있다. 아마 다른 남자들도 그럴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네. 압니다.” 예쁜 여자였지만 여자 사용인들은 평범하다고 입 모아 말했다. 남자사용인들은 여자들 특유의 질투심일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들의 눈에는 매력적이었고 충분히 예뻤다. 객관적으로 보면 우슬라는 코가 너무 크고 얼굴이 길어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몸짓이, 표정이 못 견디게 매력적이었다. “그 하녀와 벨링스 영애의 사이에 뭔가 일이 있었나요?” 남자는 잠시 망설였다. 로웨나가 불같이 화를 내며 하녀를 내쫓은 사건은 유명하다. 그걸 말하는 걸까? “해고한 것 말입니까?” “그때 아무 일도 없었나요?” “아가씨가 하녀를 해고하는데 특별한 일이라고 해봐야….” “하지만 일방적인 해고였잖아요?” 사용인들의 위치가 귀족에 비해 낮다고는 하나 일방적인 해고가 용인되는 건 아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용인을 해고한다면 나쁜 소문으로 사용인을 구하기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아주 드문 일이지만 수사관에게 상습적으로 사용인을 해고하여 퇴직금 지급을 거부한 귀족이 고발당한 사건도 있다. “뭐, 그렇죠.” 우슬라가 해고당하고 나서 불만을 가진 남자사용인들이 있기는 했다. 그렇지 않아도 까다로운 아가씨의 성격이 불만이었는데 그게 겉으로 불거져 나왔던 것이다. “그래도 그걸 표현한 사람은 없는 걸로 압니다.” 케이트가 이안을 쳐다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참, 이 사람 귀족이지. 알라나데일에서 한 계절 하인으로 일했다 해도 그가 사용인에 대해 모든 것을 파악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케이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물었다. “해고되고 그, 음, 고층거리로 갔다고 하던데, 하녀에게 가족은 없었나요?” “고아라는 말을 얼핏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남은 물건을 다 태워버렸죠.” “남은 물건이요?”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인은 그들이 모르는 이야기가 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아가씨께서 우슬라를 해고하고 쫓아내실 때, 거의 맨몸으로 쫓아내셨거든요.” 그건 너무 가혹한 처사다. 케이트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맨몸이라니, 자기 물건은 하나도 못 가져갔다는 말인가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 입고 있는 옷뿐이었던 걸로 압니다.” 당시 우슬라는 벨링스가 저택의 모든 남자가 연모하는 상태였고 그걸 다른 여자 사용인들이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쫓겨난 하녀라면 주어졌을 다른 하녀들의 도움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간신히 어느 착한 하녀가 우슬라의 방에서 모아둔 돈만 빼다가 벽 뒤로 던져줬을 뿐이었다. “그럼 그 여자의 소지품을 아직도 벨링스 가에서 가지고 있나?” 드디어 이안이 끼어들었다. 하인은 케이트와 대화하느라 이안의 존재를 거의 잊고 있었기 때문에 깜짝 놀라 새삼스럽게 그를 쳐다봤다. 케이트를 향하던 남자의 호감이 조금 사그라졌다. 그는 이안을 보고 케이트를 본 다음 등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말했다. “전부 태웠습니다.” “누가요?” “아가씨가요.” 이안과 케이트가 서로를 쳐다봤다. 두 사람은 죽은 하녀와 로웨나가 사라진 데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둘 다 제프리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너무 빈약하지만, 계급이 다른 두 여자 사이에 연관성은 그것밖에 없었다. “태울 때 이상한 일은 없었나?” “아니요, 없었는데요.” 다시 한 번 케이트와 이안이 서로를 쳐다봤다. 하인은 문득 시간을 너무 오래 잡아먹었다는 생각이 들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휴식시간이 끝났을 것이다. 그는 이안이 덮은 은화를 쳐다보며 말했다. “필요하시면 우슬라의 물건을 태운 하녀와 만날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그 여자와도 만나두는 편이 좋겠지.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화를 손에 쥔 채였다. 그러다 그는 하인이 자신을 쳐다보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돈이요.” 케이트가 속삭였다. 아. 이안은 은화를 남자의 손바닥 위에 떨어트렸다. 그리고 몸을 돌리려다 아차하고 다시 품에 손을 넣어 은화를 꺼냈다. “이건 그 하녀를 불러와 주는 데에 대한 대가다.” 순식간에 돈이 두 배로 늘어났다. 하인의 얼굴에 싱글버글 웃음꽃이 피어났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월요일이지만 전 즐거워요 왜냐하면 저! 내일부터 휴가를 가거든요. 하하하하하 그런 이유로, 내일부터 6일까지 업뎃이 중단됩니다. 여행을 가게되서... 음, 여행지에서 업뎃할 수 있으면 할게요. 하, 신난다... 근데 조금만 신나할게요. 여기서 너무 신나하면 여러분이 절 결박한다음 머리끄댕이 잡아서 끌고다닐거 같아.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5월 7일에 봬요! 아참, 표지 변경했습니다. 리쥬아님께서 그려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00143 5. 우슬라 =========================================================================                            차가운 날씨에 케이트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코트를 단단히 여미고 목도리를 잡아당겨 한 바퀴 더 둘렀다. “추운가?” 당연하다. 찻집에서 나온 지 고작 몇 분인데 케이트의 입술이 새파래지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이 작은 여자는 그보다 훨씬 추위를 타는 모양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훈련으로 단련된 이안의 몸과 케이트가 추위를 견디는 수준이 다른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상식을 생각하기 전에 대답도 듣지 않고 그녀를 끌어당겼다. “엇.” “마차를 잡지.” 이안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는 코트 자락을 벌려 케이트의 몸을 감쌌다. 자연스럽게 그녀가 그의 코트 안쪽으로 들어갔다. “잠, 이러면 당신이 추워요.” “괜찮아.” 괜찮지 않을 것이다. 몇 번 이안을 밀어내던 케이트는 결국 포기하고 얌전히 걸었다. 이안의 몸에서 열이 난 덕에 코트 안은 따듯했다. 곧이어 조그마한 눈송이가 사르륵 떨어지기 시작했다. 속눈썹에 붙은 눈꽃에 놀라 눈을 깜빡인 케이트는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오네요!” “그래.” 케이트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본 이안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내렸다. 정말로 행복해 보이는 케이트의 얼굴이 바로 아래에 보였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혹시, 눈 처음 보나?” “네.” 케이트는 살랑거리며 떨어지는 눈송이를 잡으려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살았던 곳은 눈이 온 적이 없거든요.” 그런가? 이안은 머릿속에 뮈엘라의 지도를 떠올렸다. 확실히 에바니엘 아랫지방은 기후가 따듯한 편이다. 지역적으로 보면 눈이 오는 건 대충 에바니엘 정도부터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케이트를 품에 둔 채 코트를 닫았다. 덕분에 케이트는 추위를 잊고 정신없이 눈이 내리는 광경을 지켜볼 수 있었다. “눈은 천천히 내리는군요.”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는 천천히 대답했다. “빠르게 내리는 눈도 있어.” “아, 그래요?” “그러면 눈이 쌓이게 되지.” “아, 엄마한테 들었어요.” 케이트는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엘리자베스 호건은 에바니엘 태생이다. 그러니 눈을 오는 것을 자주 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호건가의 사람답게 눈이 오는 것만 봤지 눈이 오는 날 밖에서 추위에 떨어 본 적은 없었다. 때때로 몹시 추운 밤에 그녀는 자신의 딸에게 눈이 오는 광경을 이야기해준 적이 있다. 그래서 케이트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이렇게 눈이 내리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녀가 살던 곳은 눈이 거의 내리지 않거나 내린다 해도 밤사이에 잠깐 내리다 그치고 사라져버렸다. 눈이 쌓인다는 건 이야기만으로 상상하기가 어렵다. 차갑고 하얀 얼음이 소복소복 쌓인다니, 어쩐지 기대가 되어 케이트는 빙그레 웃었다. 그녀의 행복한 표정에 이안은 눈이 쌓이면 일어날 불편한 상황에 대해서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마차가 움직이기 어렵고, 밤에 잠이 들기가 어렵다. 감기는 쉽게 폐렴으로 발전하고, 노약자 사망률이 높아진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이대로 있는 게 좋겠지. 두 사람이 마차를 타고 큐바인 하우스에 도착했을 때 문이 열리면서 제인이 뛰어 나왔다. 소년은 마차 밖으로 나오는 이안과 케이트에게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기, 손님이, 아직 안 계시다고 했는데, 억지로…,” 제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당황하는 케이트와 이안 앞에 다시 큐바인 하우스의 문이 활짝 열렸다. 안에서 나온 건 처음 보는 남자였다. 케이트는 순간 그 집이 자신의 집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졌다. “케이트 호건양이 십니까?”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활기차게 물었다. 케이트는 조용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남자는 대꾸 없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대단히 무례한 태도다. 케이트는 어이가 없어서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팔을 잡은 이안이 그녀를 자신의 뒤로 잡아당기더니 집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큐바인 하우스의 응접실에는 아까 나왔던 콧수염을 기른 남자 외에도 세 명의 남자가 더 있었다. 남자들은 마치 자신의 집인 양 거드름을 피우고 앉아있었다. 콧수염 난 남자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아니라는군.” “대체 언제 오는 거지? 어이, 하녀!” 소파에 비스듬하게 기댄 남자가 소리쳤다. 그는 빨간색 타탄체크 무늬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케이트의 눈에 그렇게 천박해 보일 수가 없었다. 집 주인이 온 줄도 모르고 타탄체크 무늬를 입은 남자가 데이지를 향해 소리쳤다. “이 집 아가씨는 대체 언제 오시지?” 데이지는 남자를 향해 대답하려다가 케이트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들이 들이닥친 지 한 시간. 벌써 그녀는 지쳐가고 있었다. “아가씨, 손님 오셨습니다.” 아가씨라고? 남자들의 눈이 응접실 문으로 향했다. 거기에 빨간 머리의 예쁘장한 여자와 커다란 남자가 서 있었다. “잠깐, 당신, 아까 케이트 호건이 아니라고….”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말을 흐렸다. 케이트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케이트 스미스입니다. 제 어머니가 호건가셨죠.” 남자들의 표정에 낭패가 스쳤다. 그 말은 그들이 케이트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들은 케이트가 케이트 스미스가 아니라 케이트 호건일 거라고 넘겨 집었던것이다. “무슨 일이시죠?” 타탄체크 무늬 재킷을 입은 남자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 “허락도 없이 집주인이 없는 집에 들어오기도 하셨고요.”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케이트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집에, 허락도 없이 누군가가 침입했다. 그건 에디라는 남자가 침입했을 때와 이어져 케이트의 분노를 이끌어 냈다. “밖이 추워서 그만….” 남들이 변명처럼 중얼거렸지만 케이트는 단호했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그렇다면 돌아가셨어야지요.” 응접실에 정적이 흘렀다. 이안은 흥미롭다는 듯 케이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네 명의 남자를 훑어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 방문허락을 위한 연락조차 못 할 정도로 급히 오신 이유는 들어보죠.” 남자들의 표정이 멍해졌다. 하지만 그들 중 케이트가 자신에게 빈정거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안은 케이트의 뒤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아직까지는 그녀가 상황을 주도하고 있지만, 저들이 혹시라도 그녀에게 덤빈다면 나설 생각이었다. “어, 호건양. 저는,” “스미스입니다.” 허둥지둥 입을 열었던 남자가 케이트의 차가운 지적에 찔끔 놀라 입을 닫았다. 그는 뒤를 돌아 다른 남자 셋을 보더니 다짐한 것처럼 다시 입을 열었다. “어, 그러니까 스미스양. 저는 어, 그러니까 데릭 에버딘이라고 합니다. 그, 에버딘 상회라고 에바니엘에 들어오는 모든 수산물이 저를 통해서 들어온다고 할 수 있죠.” “네에.” 데릭은 잠시 네에라는 말이 케이트가 한 말이었는지 생각했다. 맞나? 케이트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은 상태 그대로였다. 만만치 않은 여자일지도 모르겠군. 네 사람 중 일부는 그렇게 생각했고, 일부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행히 데릭은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는 멈칫하고 다시 뒤를 돌아봤다. 세 명의 남자가 데릭이 포기하면 자신이 나설 것처럼 어깨를 들썩거리는 게 보였다. 선수 필승. 제일 먼저 나서는 게 원하는 것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그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호건가의 상속녀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제일 먼저 들었는데 이런 좋은 기회를 날리는 바보가 될 수는 없지. 데릭은 재킷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의 정부가 사달라고 조르던 것이다. “이건 제 마음입니다.” “이게 뭔데요?” 케이트는 받아들지 않은 채 냉담하게 물었다. 이게 뭔지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데릭은 그렇게 생각하며 상자를 열어 보였다. 검은 천에 쌓인 하얀 보석 반지가 나왔다. 케이트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이게 아닌가? 데릭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케이트가 입을 열었다. “이 게 뭐죠?” 데릭의 몸이 굳었다. 보석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남자들의 머릿속에 각각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데릭이 준비한 선물보다 가격이 낮은 것을 준비한 두 명은 만지작거리던 선물상자에서 손을 놓았다. 정신을 차린 데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 호거, 아니, 스미스양. 물론 스미스양이 보시기에 부족한 것이겠지만요. 그래도 젊은 여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거랍니다. 재미삼아 하나 정도 가지고 계셔도 나쁘진 않을 겁니다.” 이 남자가 뭐라고 하는 거지? 케이트는 미간을 찡그린 채 데릭과 반지를 번갈아 쳐다봤다. 설마 내가 반지가 가격이 싸서 거절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손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맙소사. “뭔가 착각하신 모양이군요. 이게 아니라 더 비싼 거라 해도 제가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고 데릭의 얼굴은 붉게 변했다. 뒤의 세 남자의 얼굴에 기쁨이 스쳤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케이트에게 데릭이 쥐어짜 낸 목소리로 물었다. “제, 제 구혼을 거절하기는 겁니까?” “구혼이라고요?” 케이트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흘러나왔다. 그녀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그녀는 이 일련의 사건이 구혼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혼자들이 여자의 빈집에 들어와 앉아있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남자들은 예의가 없었고, 케이트는 이런 상황에 무지했다. “어, 네. 그러니까 저는, 아니, 저희는 스미스양께 구혼을 하려고 온 겁니다.” 데릭이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듯 다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보통은 스미스양의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지만요.” 케이트의 얼굴이 굳었다. 아버지. 그녀에게는 남자들이 구혼을 넣을 아버지가 없다. 호건가 역시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거절하겠습니다. 돌아가시죠.” 케이트가 뒤로 한걸음 물러나며 냉정하게 말하자 기회조차 잡지 못한 남은 세 명의 남자들이 조바심이 났다. 그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케이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잠깐, 아직 저에 대해서는 모르시지 않습니까?” “제게도 기회를 주세요.” 반사적으로 이안이 앞으로 나섰다. 케이트는 시야가 그로 인해 가려졌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그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여러분도 저에 대해 모르시면서 오신 거잖아요. 그러니 저도 거절하겠습니다.” “그건 차차 알아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아니요.” 케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온 이유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호건가라는 이유만으로 구혼하려는 거라면 거절하겠습니다.” 남자들의 몸이 멈췄다. 일부는 케이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도 못 하는 듯했다. 그들은 케이트에게 다시 다가가려다 이안이 앞으로 나서자 정신을 차렸다. “잠깐, 그럼 이 남자는 누구죠? 스미스양과 무슨 관계인 겁니까?” “그는,” 케이트가 잠시 망설였다. 이안과 그녀의 관계. 뭐라 말하기 복잡하다. 이안조차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결국 케이트는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것을 깨닫고 서둘러 대답했다. “친구예요.” 친구?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 작품 후기 ============================ 오랜만 입니다아~ 즐거운 연휴 보내셨나요? 저는 매우 힘들면서 즐거운 휴가를 보내고 왔습니다. 재미있었어요...하지만 힘들었어... 새벽 네시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떠나는 패키지 여행...하아하아... 전 영혼부터 좀 느긋한 사람이라 그런 타이트한 여행은 좀 힘들었어요. 그래도 짧은 시간안에 넓은 곳을 살피기엔 패키지 여행이 짱이긴 하죠. 어, 그러고보니 7일날 돌아온다고 했는데 오늘 돌아왔네요. 죄송합니다. 6일 밤 11시에 한국에 도착해서 7일 출근... 그리고 퇴근하자마자 시차를 견디지 못하고 씻지도 못하고 잠들었어요. 정신차려보니 새벽... 결국 씻고 다시 잤습니다. 지금도 시차적응중이라 너무 졸려요... 하지만 오늘도 안 올리면 진짜 내 머리끄댕이는 남아나질 않겠지... 00144 5. 우슬라 =========================================================================                            데릭은 마치 덤빌 것처럼 이안에게 다가가다가 그가 훨씬 크다는 것을 깨닫고 멈칫했다. 어쩌면 그가 결투를 할 상대인지도 모른다. “당신의 이름은?” 그 건방진 말에 이안은 가소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안 로엔. 로엔 백작의 동생이다.” 로엔 백작? 벌써 귀족까지 나섰는가? 그런 생각에 데릭과 떨거지들의 표정이 굳었다. 케이트는 이상한 분위기에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몰랐지만 이안이 스스로를 로엔 백작의 동생이라 소개하는 일은 드물다. 이 상황에서 그런 소개가 필요하다고 이안이 판단했기 때문이지만 케이트는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몰랐다. 상황은 남자들이 보기에도 자신들에게 불리했다. 이안 로엔이라는 남자는 케이트와 가까워 보였고 그들은 실수 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데릭은 여기서 기회를 달라며 머물면 더 나쁜 이미지를 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이미 더 나쁠 수도 없었지만.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남자들이 인사와 함께 떠나자 케이트는 이안에게 물었다. “방금, 뭐였어요?” 아직 코트도 벗지 않은 상태였다. 이안은 케이트의 코트와 자신의 코트를 제인에게 건네며 여상하게 말했다. “네가 나를 구혼자라고 소개했다.” 불을 지핀 난로가로 다가가던 케이트의 몸이 멈췄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내가 뭘 어쨌다고요?” “나를 친구라고 소개했잖아. 그들은 그걸 구혼자라고 받아들인 것 같다.” “잠깐, 어째서 친구가 구혼자가 되는데요?” 이안은 난로에서 가까운 소파에 케이트를 눌러 앉히고 자신도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사교계에서 보통 구혼자인 남자를 소개할 때 친구라고 소개한다. 아까의 상황에서 그 남자들이 날 구혼자로 생각할 만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생각? 생가악? 케이트는 제인이 그녀에게 찻잔을 건네주는 것도 모르고 멍하니 이안을 쳐다봤다. 이 남자 제정신인가? 결국 그녀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왜 가만히 있었어요?” “뭐를?” 얄밉게도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제인이 건네준 찻잔을 입가에 대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당신이 내 구혼자로 착각하고 있었다면서요? 아니라고 했어야죠.” “내가?” “네!” 케이트의 손 안에서 찻잔이 흔들렸다. 이안이 재빨리 그녀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지 않았다면 엎질렀을 것이다. “틀린 말도 아니잖아.” 당당한 이안의 대답에 케이트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의 말도 안 되는 언행은 몇 번을 당해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녀는 천천히 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라고요?” “그래.” 케이트는 저 입에 닿는 찻잔을 빼앗아 입을 벌리고 아주 그냥 뜨거운 차를 콸콸 쏟아 부어주고 싶은 욕망을 참으며 다시 물었다. “당신이 내 구혼자라고요?” “한 번 했잖아. 청혼.” 바로 취소했지만. 그 말은 찻잔에 닿은 입술의 달싹임으로만 끝났다. 덕분에 케이트는 이안의 그 말도 안 되는 청혼이 떠올라 버렸다. 그러고 보니 그 청혼이 그녀가 생애 처음으로 받은 청혼이었다. 갑자기 우울해져서 케이트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태어나서 처음 받은 청혼이 그따위라니, 우울하다. 그녀도 남들처럼 그녀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남자가 달이 뜬 밤에 세레나데를 불러주는 그런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대로 만지고 싶으니 결혼하자는 청혼은 아니었어야 할 것 아닌가. 차라리 데릭이라는 남자를 쫓아가서 다시 구혼해 달라고 해볼까? 그럼 최소한 그녀가 받은 유일한 청혼이 그런 최악의 청혼은 아닐 것 아닌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정도로 케이트는 자신이 받은 첫 구혼이 이안의 그런 구혼이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그녀의 복잡한 심정도 모르는지 이안은 차와 함께 제인이 내놓은 머랭쿠키를 맛보고 있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머랭쿠키는 최근 가장 인기 있는 디저트라 제인이 일부러 멀리까지 가서 사온 거였지만 이안의 입맛에 너무 달았다. 그는 하나를 맛보고 조용히 접시를 밀었다. “어디 아픈가?” 응접실 밖에서 제인이 으음, 저건 아니네. 하고 중얼거리는 것을 모른 척 하며 이안이 물었다. 최근 제인은 뭘 먹어도 심드렁하면서 잘 먹는 이안의 입맛을 연구하는데 심취해 있었다. 이안은 주는 대로 잘 먹긴 하지만 맛있게 먹지는 않는다. 특히나 단 종류의 디저트는 지난번에 전부 먹어치운 게 착각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거의 즐기지 않았다. 참고로 지난번에 제인이 사왔던 디저트는 주꼬또. 안에 크림과 과일이 잔뜩 들어간 동그란 케이크였다. “내가 받은 청혼이 그런 청혼이라니 우울해서요.” “우울하다고?” 이안은 이해할 수 없어서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는 우울하다는 걸 모른다. 하지만 그게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는 않다. 우울하다며 무기력해진 사람들을 봤다. “내 청혼이 널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말인가?” “뭐, 무기력해질 것 까진 없지만, 비슷하죠.” 우울하게 대답하며 케이트는 머랭쿠키로 손을 뻗었다. 분홍색 쿠키 하나를 입에 넣자 바삭하게 부서진 쿠키가 순식간에 사르르 입 안에서 녹았다. 어머, 신기하네. 달콤한 맛이 기분을 조금 좋아지게 만들었다. “청혼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이안이 다시 질문을 던졌을 때 약간 기분이 좋아진 케이트는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였다. “마음이 안든 것도 있고요.” 거기까지 말한 케이트는 아차해서 이안을 쳐다봤다. 대놓고 나, 네가 한 청혼 마음에 안 든다. 라고 말한 것 아닌가. 이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케이트는 서둘러 덧붙였다. “전 그러니까, 청혼이라는 건 좀 친해진 다음에 받고 싶었거든요. 방금처럼 일면식도 없는 상태에서 달려와서 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도 좀 하고, 식당에서 식사도 좀 하고. 그런 식으로 친해진 다음에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런가. 이안은 찻잔을 입에 대며 생각했다. 보통이라면 케이트의 말대로 진행되는 게 맞다. 하지만 귀족의 결혼이란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집안끼리 어린 시절 미리 정해진 경우도 있고 남자가 마음에 든 여자의 집에 가서 가주에게 먼저 허락을 구한 뒤 여자와 친해지는 경우도 있다. 사실 여기서 친해지느냐 아니냐는 선택일 뿐이다. 많은 귀족 부부가 결혼하기 전에 친해지지는 않는다. 결혼식 날 처음 얼굴을 제대로 보는 부부도 많다. 아이를 한, 둘 쯤 낳은 다음에야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부분도 있다. 케이트가 생각하는 건 평민들의 기준이다. 집안이나 재산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자들. 큰 문제가 없다면 서로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상대방을 고를 수 있는 자들. 그런 식으로 보면 케이트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는 상당히 독특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부모님의 영향을 받은 걸지도 모르겠군. 이안은 난로 불빛에 반사되는 케이트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그녀가 호건가라는 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호건가의 가주인 비스마르크가 그녀를 받아들인다면 방금 말한 그녀가 바라는 구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호건가라는 엄청난 집안의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남자들이 그녀의 환심을 사려 하겠지. 이안은 찻잔을 든 채 소파에 등을 기댔다. 따듯한 난로 가에 나른해 진 케이트가 멍하니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을 쳐다보는 게 보였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주황색 불빛 탓에 마치 금발로 보여, 이안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그가 처음 느낀 것 같으면서도 언젠가 느낀 적이 있는 것 같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그런 감정이었다. ============================ 작품 후기 ============================ 불금입니다. 회사 업무 차 현재 타지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분량이 짧은 건 아니고. 이쯤에서 잘라야 할것 같아서 잘랐으니 다음주 월요일은 좀 길게 갈 수도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그럴수 있다는 거. ㅎㅎㅎ 오타등등은 주말에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으, 졸려... 아무래도 소제목도 바꿔야 겠네요, 여기까지가 한 3화 분량일 줄 알았는데 이럴수가...쩜쩜... 즐거운 주말 보내시고, 다음주에 만나요! 00145 6. 마녀의 방 =========================================================================                            “아가씨.”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자 데이지가 케이트를 불렀다. 이안은 제일 먼저 식사를 마치고 나간 후였고 조세핀은 내려오지도 않았다. 데이지가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고 불렀지만, 대꾸도 없는 걸로 보아 어젯밤에 아주 늦게 잠든 모양이었다. 케이트는 자신의 접시를 포개 그녀가 가져가기 쉽도록 한 뒤 고개를 들었다. 데이지는 약간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무슨 일이예요?” “저어,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 말인데요.” 지난번에 말한 것? 케이트는 언뜻 생각나지 않아 데이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안과 제인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수도의 마녀와 만난 것 말이예요.” 아, 그거. 그제야 케이트의 머릿속에 수도의 마녀들과 만날 방법을 강구해 보겠다던 데이지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그랬었지. 몇 가지 사건들 때문에 잊고 있었다. 그녀가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자 데이지는 한걸음 물러났다. “잊고 계셨군요.” “미안해요. 최근에 사건이 많아서.” 그렇다곤 해도 실례인 것만은 사실이다. 케이트는 솔직하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괜찮아요. 그저, 이제 준비가 끝났다는 걸 알려드리려 했을 뿐이에요.” 지난밤, 데이지가 확인했을 때 그녀가 그린 원안에 세모가 그려져 있었다. 이건 이 지역의 마녀가 마녀의 부름을 확인했다는 뜻이다. 그녀가 할 일은 케이트를 데려가 도형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면 언제든지 수도의 마녀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인가요?” 케이트의 질문에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케이트는 섣불리 가자고 하기 전에 생각에 잠겼다. 데이지의 도움은 정말 고맙지만, 덜컥 따라가는 건 걱정이 된다. 데이지를 믿을 수 있느냐는 것부터 그녀가 만나기로 한 마녀가 정말 마녀인지까지. 하지만 이렇게까지 그녀를 도와주려는 데이지에게 이제 와서 널 믿지 못하겠다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케이트 역시 마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잠깐만 시간을 줄래요?” 케이트의 제안에 데이지는 약간 실망했지만 억지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네. 그렇게 하세요.” “기껏 준비해줬는데, 미안해요.” “괜찮아요. 아가씨. 누구라도 조심스러울 거예요.” 데이지가 케이트가 포갠 접시를 들고 주방으로 사라지자 케이트는 그대로 식탁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실수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저렇게 그녀를 도와주려는 데이지를 믿지 못한다는 건 죄책감이 든다. 다른 사람이라면 케이트의 이런 행동에 기분 나빠할 수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도움을 주려는데 못 믿는다고 하는 꼴이니까. 그녀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을 때 제인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소년은 가득 찬 바구니를 끌어안다시피 하고 헐떡이며 케이트를 불렀다. “케이트! 이것 봐요!” 봐요가 아니라 보세요. 다. 하지만 케이트는 고쳐주는 것을 일단 보류하고 고개를 돌렸다. 뭔지 몰라도 소년을 고무시킨 사건이 있는 모양이다. “무슨 일이야?” “편지가 잔뜩 왔어요!” 편지?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인의 호들갑에 응접실에서 신문을 읽던 이안도 고개를 내밀었다. 두 사람의 시선 아래 제인이 바구니 안에 담아온 편지를 식탁 위에 올리기 시작했다. “이것 봐요! 케이트에게 온 편지가 이렇게 많아요!” 어떻게 알았느냐고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최근 제인은 케이트와 이안의 이름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큐바인 하우스에 도착한 편지 중에서 이안의 것과 케이트의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소년이 골라낸 편지 중 하나를 집어 든 케이트는 그것이 초대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얇은 봉투는 가문의 인장을 밀랍에 눌러 봉한 상태였다. 타운 하우스나 알라나데일에서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어 초대장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누구지?” 그렇다곤 해도 그녀에게 초대장을 보낼 만큼 일면식이 있는 집안이 있는 게 아니다. 큐바인 하우스에 도착한 초대장은 무조건이라 해도 좋을 만큼 이안에게 보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나마도 한 달에 두 번 정도 오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지금처럼 많은 초대장이 밀려오는 건 제인에게 상당히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휘슬가? 휘슬가라고 알아요?” 케이트의 질문에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는 그녀의 손에서 초대장을 받아들더니 가볍게 내용을 읽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무리한 사업으로 가세가 기운 집안이다. 무리하게 사업을 진행한 게 휘슬가의 장남이라고 하더군.” 그는 초대장을 다시 케이트의 손에 건네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가세가 기울면서 파혼을 당해 현재 미혼이다.” 케이트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이런 남자 아니었잖아? 그는 이런 소문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는 남자가 아니다. 그녀의 표정에서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이안이 다시 무뚝뚝하게 말했다. “제이드가 쉴 새 없이 떠들더군. 아마 우린 같은 학교를 나온 모양이야.” 제이드가 쉴 새 없이 떠든 이유는 그가 동문이라서가 아니다. 아카데미에서 호시탐탐 이안을 괴롭히려 노리던 녀석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안은 그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케이트는 초대장을 하나하나 살피며 고민에 잠겼다. 전부 무슨 의도로 그녀를 초대한 건지 알겠다. 어제 찾아온 남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호건가의 상속녀라는 이유.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케이트가 갑자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거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케이트의 질문에 이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초대장을 거절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 그는 거절할 만큼 초대가 온 적도 없었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그가 아니라 실라가 처리했다. “어머니께 여쭤보도록 하지.” 실라라면 부드럽게 거절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안의 대답에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 위에 쏟아진 초대장을 한데 그러모았다. “나중에 답장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이건 한 곳에 잘 놔줘.” 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케이트가 건넨 초대장 뭉치를 받아들었을 때였다. 케이트의 눈에 바구니에 담긴 커다란 봉투가 보였다. “이건 뭐야?” “아, 이거요? 아마 조세핀양에게 온 것 같아요.” 조세핀양이 아니라 코트양. 부드럽게 명칭을 고쳐주며 케이트는 봉투로 손을 내밀었다. 뭔가 가득 담은 모양인지 묵직했다. 어디서 온 거지? 그런 호기심에 주소를 읽으려던 그녀는 자신이 꽤 무례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봉투를 바구니 안에 넣었다. 그녀도 누군가 그녀에게 온 편지의 주소를 읽는다면 기분이 나쁠 것이다. 가족도 아닌 타인이 그런다면 더더욱. 편지를 본 덕분에 그녀도 편지를 써야 한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케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데이지와 마녀를 만나러 가기 전에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 이번에는 단둘이 만나고 싶다는 케이트의 요청이 받아들여졌는지 로즈마리는 작은 방에서 혼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트는 문 바로 옆에 선 짧은 머리카락의 여자, 진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스미스양.” 자신의 성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군. 케이트는 진이 마음에 들었다. 지난 며칠간 사람들은 케이트를 케이트 스미스가 아니라 케이트 호건으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호건가의 핏줄이기는 하지만 성은 호건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그만큼 호건가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건 어떤 면으로는 차라리 나을 수도 있었다. 지금 당장은 과연 케이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케이트는 화가인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세상 사람들은 다를 것이다. 호건가의 금지옥엽 하나뿐인 딸을 훔쳐간 화가. 뮈엘라에서 화가는 그다지 인기가 좋지 못하다. 그들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귀족이나 부자를 위해 초상화를 그려주는 것으로 근근이 먹고사는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마리는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거기까지 말한 진이 좌우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마리와 단 이 만나고 싶다고 한 게 고마운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녀를 혼자 두는 건 걱정되지만 난 저런 단 냄새는 정말 질색이거든요.” 지난번에 그녀가 매우 괴로워하던 모습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케이트는 열린 문을 통해 테이블 위에 가득 쌓인 케이크와 진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단 걸 싫어하는 사람이 정말 존재 하는구나. 그런 사람이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그녀의 상상 속에 디저트를 싫어하는 사람은 심술 맞고 옹고집인 노인이었다. 그런데 이런 젊고 활기찬 아가씨가 단 걸 싫어한다니. “다음에 제가 그다지 달지 않은 디저트를 만들어 드릴게요.” 케이트의 제안에 진은 놀라는가 싶더니 씩 웃어 보였다. “디저트 중에 안 단것도 있어요?” “그럼요.” “흠. 그거 스콘은 아니겠죠?” 진은 차와 함께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간식을 말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것도 로즈마리가 먹는 걸 보면 입맛이 싹 사라져 버린다. 로즈마리는 스콘에 잼을 잔뜩 발라먹기 때문이다. “그럼요.” 두 사람의 대화가 오래 지속 되자 기다림을 참지 못한 로즈마리가 문밖으로 달려 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내밀고 진과 케이트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기다리기 힘들다는 듯 재빨리 물었다. “진도 들어올래요?” 그때 케이트는 확실하게 봤다. 겁에 질린 표정을. 진은 방 안을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즐거운 대화 나누시죠. 아가씨들.” 어딘지 모르게 말하는 거나 태도가 제이드가 생각나는 여자다. 케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로즈마리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섰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전 지난주 여행과 금요일 출장으로 체력이 완전 방전돼서 하루종일 침대 위에서 미드보다 자다 깨서 미드보고 다시 자다 깨서 미드보는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좀 체력이 돌아왔어요. 아, 행복해... 아참, 그리고 소제목 변경했습니다. 5장 마녀의 방을 우슬라로 6장이 마녀의 방이 됩니다. 제가 이야기를 짜면서 분량을 제대로 파악을 못해서...흑흑... 죄송합니다. 표지 변경했습니다. 호리옌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00146 6. 마녀의 방 =========================================================================                            방 안은 지난번보다 규모가 작은 다과상이 차려져 있었다. 케이트는 곧 테이블 위에 쌓인 케이크뿐 아니라 협탁에도 케이크가 하나씩 올라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테이블을 더 놓아둘 공간이 없어 협탁이나 장식장 위에 올려둔 모양이었다. 이런 걸 로즈마리 혼자 다 먹을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녀는 지난번에도 로즈마리 혼자 대부분의 케이크와 타르트를 먹어치웠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우유 넣을까요?” 로즈마리의 질문에 케이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설픈 손놀림으로 로즈마리가 차를 따르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에일린이 차 시중을 들었다. 제가 할게요. 케이트는 로즈마리의 손에서 찻주전자를 받아들었다. “우유랑 설탕?” “설탕만요.” 케이트는 차에도 설탕을 가득 집어넣는 로즈마리의 식성에 놀라지 않으려 애썼다. 이렇게 단 차와 다디단 케이크를 같이 먹는다는 말이지. 아무래도 로즈마리의 입맛은 그녀의 성격만큼이나 범상치 않은 모양이었다. “미안해요.” 차를 다 따르자마자 로즈마리의 입에서 사과가 흘러나왔다. 케이트는 찻주전자를 든 채 눈을 깜빡였다. “어, 뭐가요?” “지난번에 진과 에일린 앞에서 당신이 마녀일지도 모른다고 말한 거요.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는 걸 알았어요. 미안해요. 내 생각이 짧았어요.” 과연.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던 이유를 알았다. 사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케이트는 약간 느긋한 기분이 들어 찻주전자를 내려놓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로즈마리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하던가요?”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로즈마리의 성격은 케이트가 아는 바로는 천진했다. 그녀는 실수하고도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사람이다. 그게 악의가 있는 게 아니라 화를 내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다행인 점은 누군가 가르쳐 주면 그걸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타인의 지적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덕목이다. 아무리 훌륭하고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쉽게 지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 케이트는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 “에일린하고 진이요. 그런데 저도 이해했어요. 아무리 제가 마녀라 해도 다른 사람이 마녀라는 걸 여러 사람 앞에서 입 밖에 내는 건 위험한 행동이죠.” 순순히 사과하는 로즈마리에 대한 호감만큼이나 케이트 안에 진과 에일린에 대한 감정도 좋아졌다. 딱딱해 보이고 적대적으로 보이던 태도들은 모두 로즈마리와 에드워드를 지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게 케이트에게 적대적이었던 이유를 정당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케이트 역시 이해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저도 이해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도와줄게요!” 죄책감이 더해지자 로즈마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녀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잊고 두 손을 맞잡은 채 초롱초롱한 눈으로 케이트를 쳐다봤다.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단둘이 만나고 싶다고 요청한 상태다. 이렇게 적극적인 태도라니 케이트에게는 더욱 좋았다. 케이트는 물어볼 것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시간을 갖고자 찻잔을 들어 올렸다. 뭘 먼저 물어봐야 하나. === 벨링스 가의 하인은 이안과의 약속을 지켰다. 우슬라의 물건을 태운 하녀와의 만남을 성사시켜 준 것이다. 벨링스 가에서 떨어진 거리에서 케이트와 이안은 하녀와 마주 앉아 있었다. 약간 거무스름한 피부의 여자는 턱이 길고 눈이 가늘었다. 그다지 미인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불안한 나머지 두 손을 맞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우슬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쏠쏠한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만나기는 했지만 거기에는 분명 로웨나에 대한 질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로웨나가 사라졌어도 그녀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했다. 로웨나는 상당히 까다롭고 사용인을 함부로 대하는 주인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의 아버지인 벨링스 자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신이 우슬라의 물건을 태웠다고요.” 케이트는 하녀에게 차를 권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이안과 함께 와서 다행이었다. 눈앞의 하녀는 이안과 단둘이 있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지금도 이안을 힐끔 쳐다보곤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이 남자는 신경 쓰지 마세요.” 케이트의 말에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 상황에서 케이트에게 맡기는 게 가장 좋다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저, 정말로요?” 하녀의 입이 열리자 케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의 시작이라기엔 너무 미약하지만 이 정도인 게 어디인가. 그녀는 하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럼요. 일종의 제 경호원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이번에도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지만 여전히 입은 다물고 있었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케이트를 내려다봤다. 그런 그의 태도가 케이트의 말에 신빙성을 더했는지 하녀는 약간 더 안심하는 태도를 보였다. “저기, 뭐가 궁금하신데요?” “당신이 우슬라의 물건을 태웠다고요.” “네. 맞아요.” “물건을 태울 때 이상한 일은 없었나요?” “이상 한 일이요?” “네. 사소한 거라도 좋아요. 생각나는 건 전부 다 이야기해 주세요.” 으음. 하녀는 잠시 이안을 힐끔거렸다. 호박색의 눈동자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거기에 검은 머리카락. 겁을 집어먹게 만들었던 남자의 외관은 케이트가 자신의 경호원이라고 하자 이해가 갔다. 저런 경직된 태도와 표정이라니. 실력 있는 경호원인 게 분명하다. 이안을 힐끔거리던 하녀는 곧 그가 꽤 잘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머. 딱딱한 태도와 위압적인 분위기 탓에 남자는 마치 삽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다. 연애 소설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이라는 느낌이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한 달에 한 번 오는 대독자가 읽어주는 소설을 들으며 삽화를 보는 것이 그녀의 큰 즐거움이다. 가장 최근에 읽었던 소설 중 사람에게 배신당한 상처로 커다란 고성에 조용히 사는, 감정을 잃은 귀족과 고성에서 일하게 된 아름다운 하녀의 로맨스가 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마치 그 소설에 나오는 귀족처럼 생겼다. 하녀는 얼굴을 붉히다가 케이트를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예쁘게 생긴 여자였다. 남자와 무슨 관계일까. 경호원이라고 하니 어쩌면 아가씨인지도 모른다. 아가씨보다는 하녀와 귀족의 연애가 더 좋은데.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여자의 물건은 별로 태울 것도 없었어요. 옷가지 정도. 리본 같은 건 남은 게 없었거든요.” 그 여자. 케이트는 우슬라에 대한 그녀의 호칭을 새겼다. 아무래도 우슬라는 여자 사용인들에게 그리 호감을 얻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다른 하녀들이 가져갔군요.” “하녀들만 가져갔게요?” 하녀가 코웃음 치며 말을 이었다. “겁쟁이들도 많이들 가져갔죠.” “겁쟁이?” “뒤에서는 좋아한다 어쩐다 하던 놈들이 그 여자가 쫓겨날 땐 아무 말도 못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소지품을 태운다니 기억으로 가지고 있겠다며 어찌나 리본을 가져가던지. 흥.” 그녀의 불만은 우슬라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우슬라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하인들이 정작 로웨나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했다. 정말 우슬라를 좋아했다면 우슬라를 쫓아가 그녀를 지켜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와 결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슬라를 좋아한다던 남자 중 그런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우슬라는 고층거리까지 흘러들어 가 몸을 팔았다. 남자의 사랑이란 고작 그 정도다. 연애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 현실 속에서 남자의 사랑이란 빵 한 조각의 가치만도 못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녀는 연애 소설을 좋아하는 만큼 현실 속의 사랑에는 비판적이었다. “그 리본을 가져간 사람들에게 뭔가 이상한 일이라도 일어났나요?” “이상한 일? 아니요?”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뿐이다. 케이트는 실망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런 뭔가 다른 일은 없었나요? 이상하지 않더라도요.” 이상하지 않지만 다른 일. 문득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하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요.” 그녀는 이안을 한 번 힐끔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 여자의 물건중에 카드가 몇 장 있었어요. 아마 남자한테 받은 카드인 모양인데. 워낙 남자들한테 이것저것 받는 여자라 카드를 그보다 더 많이 받았을 텐데 가지고 있는 건 고작 몇 장밖에 없더라고요.” 손으로 뭔가를 그린 엉성하기 짝이 없는 솜씨의 카드였다. 밀랍에 가문의 인장을 찍은 고급스러운 카드를 받는 것도 몇 번 봤다. 그런데 그런 어설픈 카드라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가씨께 어떻게 할 건지 여쭤봤다가 호되게 혼이 났어요.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요. 바로 태워버렸죠.” 혹시 그 카드 아직도 가지고 있냐고 물어보려던 케이트는 여자의 마지막 말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태웠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하지만 여자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말이죠. 그것과 비슷한 카드를 그 후에 또 봤다는 거예요.” 똑똑히 기억한다. 화려하고 비싼 꽃다발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 없는 카드를. 밀랍으로 찍은 인장이 아니면 도장이나 대필자를 동원해 멋들어진 글귀를 적은 카드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그린 것처럼 조악한 그림인지 글자인지가 그려져 있는 거였는데.” 거기까지 말했을 때 케이트는 뭔가가 반짝 떠올랐다. 그녀는 앞으로 몸을 내밀며 물었다. “그 카드! 벨링스 영애에게 온 거 맞죠?” “어, 어떻게 알았어요?” “누구한테 온 건지 알아요?” 케이트의 질문에 하녀는 창백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이 이야기를 해도 될까. 그런 걱정에 잠시 주변을 살피던 여자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 여자와 아가씨 둘 모두에게 카드를 보낸 남자는 그리 많지 않죠.” 응? 그게 무슨 소린지 몰라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안마저도 흥미가 생겼는지 자세를 고쳤다. 여자는 심술궂은 표정으로 다시 속삭였다. “제프리 호건이요.” ============================ 작품 후기 ============================ 으어어어. 월요일보다 힘든 화요일입니다. 야근하고 왔더니 피곤해서 모니터를 오래보기가 너무 힘드네요. 전 얼른 씻고 자야겠어요. 아, 그리고 후원해 주신 모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곧 여름이 되면 혼자 집에 있을 땐 더워서 글쓰기 힘든데 이걸 모아서 시원한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써야겠어요. 저의 쾌적한 작업 환경에 일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00147 6. 마녀의 방 =========================================================================                            하녀는 그 이후 제프리 호건에게 온 카드를 다시 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창녀라고 매도해 쫓아낸 하녀와 같은 상대에게 카드를 받다니, 로웨나가 매우 수치스러워했을 거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수치스러운 카드를 어째서 보석함에 넣어둔 거지?” 돈을 주어 하녀를 보낸 뒤 이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렇게 수치스럽다면 버리면 되잖아?” “그냥 버릴 순 없었을 거예요.” “어째서?” “벨링스 영애가 직접 쓰레기를 치우진 않았을 테니까요. 방을 치우는 하녀에게 그 카드를 들킨다면 더욱 수치스러웠을 거예요.” “그럼 태우면 되잖아.” “이안. 벨링스 영애는 귀족 아가씨에요. 혼자 난로에 불을 지필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케이트의 지적에 이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안타깝게도 이안은 난로에 불을 지필 수 있다. 그는 다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하녀에게 불을 지펴달라고 하면 되잖아?” 그렇지 않아도 케이트도 그 점을 생각하던 차였다. 하녀를 시켜 난로를 피우면 되는 일 아닌가. “어쩌면, 그 카드를 받았을 때는 그리 춥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일부러 불을 지펴달라고 해서 하녀가 이상하게 생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죠.” 그러니 불을 피워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때까지 카드를 숨겨둔 것 아닐까. 그런 점에서 보석함은 딱 좋았을 것이다. 방을 청소하는 하녀들도 화장대나 보석함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을 테니까. “잘 이해가 안 돼서 말인데.” 이안은 차를 다시 주문하며 말했다. “제프리 호건이 구혼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는 벨링스 영애에게 빠져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벨링스 영애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그도 구혼했을 것 같은데. 아닌가?” 그걸 나한테 물어봤자. 케이트는 새로운 찻잔과 뜨거운 차를 가져온 직원에게 가볍게 고맙다고 말하며 생각했다. 남자가 여자한테 빠져있을 때 여자가 어느 정도로 나서야 구혼할지 그녀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저야 모르죠. 구혼할지 안할 지.” “아니, 내 말은 말야.” 이안은 케이트의 찻잔에 우유를 넣으며 중얼거렸다. “벨링스 영애가 조금만 적극적이었다면 호건가와 혼인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제프리 호건의 카드를 숨긴 거지? 마치 구혼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찻잔의 액체가 부드러운 베이지색이 되자 이안의 손이 멈췄다. 그는 자신의 차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입가에 댔다. 케이트 역시 이안을 따라 찻잔을 들었다. 차가운 우유를 넣은 덕에 차 온도가 적당히 따듯해서 마시기 좋았다. “구혼을 받기 싫었을 테니까요.” “어째서?” “우리가 들은 그녀의 입장 상 구혼을 받는다면 벨링스 자작이 그녀를 결혼시키려 했을 거예요.” 이안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기울였다. 호건가라면 벨링스영애에게 오히려 과분하다 싶은 집안이 아닌가. 귀족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뮈엘라를 좌지우지하는 집안이다.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이안의 말에 케이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는 모를 것이다. 그는 상대방에서 위협을 느껴본 적도 없을 게 분명하다. “제프리 호건의 그런 애정표현이라면 다들 겁을 먹었을 거예요.” “겁을 먹는다고?” “그건 애정표현이 아니죠. 폭력에 가깝다고요.” 폭력이라고? 이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케이트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이 받아들일 수 없는 애정표현은 부담스러울 뿐이예요. 게다가 상대가 나보다 강하면 그건 공포가 돼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케이트는 그런 이안의 표정에 크게 마음먹고 다시 말했다. “당신은 킬리언씨가 당신이 좋다고 쫓아다니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이안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화난 것 같으면서도 공포스럽다는 것도 같았다. 뭔가 기억났다는 표정도 있어 케이트는 그의 얼굴을 보고 어라? 하고 생각했다. 한참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소린지 대충 알 것 같다.” “그런 거예요.” 잠시 그의 얼굴에 스친 표정을 물어볼까 했던 케이트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걸 물어볼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이안이 정적을 깨고 물었다. “너도 그런가?” “그렇죠.” “그래서 며칠 전 그 남자들도 내쫓은 건가?” 그 남자들? 케이트는 잠시 그 남자들이 누군지 생각했다. 아. 그 남자들. “비슷해요.” “그럼 넌 어떻게 하길 원하지?” 케이트는 따듯한 실내의 분위기와 향긋한 홍차에 취해 나른하게 대답했다. “전에 말했잖아요. 같이 식사도 하고, 공연도 보고. 친해지는 게 먼저라고요.” 문득 정신 차린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이안은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 내리던 눈이 그치긴 했지만, 추위는 여전했다. 케이트는 다른 날로 바꾸자고 할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쇠가 뜨거울 때 치랬다고 이왕 가기로 한 거 빨리해치우는 게 좋다. 그녀는 코트를 단단히 여미고 목도리까지 두어 번 감은 뒤 데이지를 돌아봤다. “갈까요?” 한 걸음 뒤에서 데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트는 주머니 속의 목걸이를 손으로 만져 확인했다. 로즈마리에게 이야기하러 간 날, 케이트는 제일 먼저 자신의 힘을 깨닫지 못하는 마녀가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럼요, 있어요. 마력보유자는 자신의 힘을 깨닫지 못하고 자랄 수도 있다고 들었어요. 아주 강한 사람이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지만, 저처럼 있는 둥 없는 둥 한 사람은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깨닫지 못할 거예요.” 저처럼 있는 둥 없는 둥 한 사람이라고 했다. 케이트는 어라? 하고 물었다. “어, 그 말은, 그럼 로즈마리도?” “네. 약하지만요. 그러니 에드워드와 음, 그, 로엔경? 로엔경의 저주도 눈치챌 수 있는 거구요.” “로엔경과 에반스 공작님의 저주는 마력보유자만 알 수 있다는 건가요?” 작은 여자는 한입 가득 케이크를 베어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케이트는 데이지 역시 그녀와 같은 마력보유자라는 사실에 안도해야 할지, 놀라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마력보유자는 매우 드물다고 하지 않았었나? 어째서 그녀의 주위엔 마력보유자가 두 명, 그녀까지 세 명이나 되는 거지? 그런 그녀의 의문에 케이크를 꿀꺽 삼킨 로즈마리가 으음하고 생각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마력 보유자끼리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그런 게 있어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있거든요.” 그렇다면, 그녀의 어머니로 변했던 그 마녀도 마력보유자였던 걸까. 케이트는 그녀가 마녀라는 것도, 엘리자베스 호건으로 변장했다는 것도 모르고 고층거리에서 나서자마자 부딪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마녀에게서도 매우 그리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단순히 엄마와 닮은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는 마력보유자를 벌써 세 명이나 본 거네요.” 케이트의 중얼거림에 로즈마리는 우물거리다가 입을 닫았다. 뮈엘라는 백여 년 전 마법의 나라였다. 마법의 황금기. 마법사가 존경받고 지식이 범람하던 시대. 한순간 무인의 나라로, 지식과 마법이 배척받는 시대가 되어 버렸지만 뮈엘라는 처음부터 마법사의 손으로 일궈진 나라다. 그 말은 뮈엘라에 마법사의 혈통이 많이 흐른다는 뜻이다. 핍박을 피하고자 마법사라는 혈통을 지우고, 감추고, 잊고 살고 있지만 뮈엘라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마법에 대한 지식이 방대하고 마법사가 많이 배출된 나라다. 그만큼 다른 나라보다 마력보유자가 많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마법사를 배척하다 못해 사악한 마녀라고 이야기하는 뮈엘라에서 사실은 다른 나라보다 마녀 혈통이 많다는 것이 밝혀지면 난리가 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뮈엘라에서는 마녀가 발견되면 낙인을 찍고 왕궁의 관리 아래에 둔다. 마녀는 자식을 낳는 것도, 거주지를 옮기거나 사람을 사귀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결국 백여 년이 흐르는 동안 뮈엘라의 마력보유자들은 자신의 뿌리를 잊고 살았다. 자신이 마력보유자라는 것을 거부하고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마저 차단한 채 살았다. 지금의 케이트에게 이런 이야기는 혼란만 줄 뿐이다. 지금은 그저 뮈엘라에서 마녀라는 것을 들키면 안 된다는 것만 알면 된다. 그래서 로즈마리는 일단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야기를 함부로 하지 말라고 진과 에일린에게 단단히 주의를 받은 다음이었다. “아가씨.” 데이지가 케이트에게 말을 걸었다. 멍하니 로즈마리와의 대화를 다시 떠올리던 케이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마차는 멈춰서 있었다. 그녀가 마차의 문을 열자 밖에서 데이지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움직여야 하지만 걸어가기엔 너무 추운 탓에 마차를 한 채 대여했던 것이다. 그리고 데이지가 운전했다. “괜찮아요? 돌아갈 땐 제가 운전할게요.” “전 괜찮아요, 아가씨.” 파랗게 질린 얼굴로 데이지가 미소를 지으려 하는 게 보여 케이트는 죄책감이 들었다. 아무리 하녀와 주인이라 해도 데이지가 이런 추운 날씨에 혼자 마차를 모는 건 옳지 않다. 돌아갈 때는 정말 그녀가 운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케이트는 마차에서 내렸다. “어디예요?” “고층거리예요. 이제부턴 저를 잘 따라오셔야 해요.” 고층거리라는 말에 케이트의 몸이 얼어붙었다. 이런 추운 밤에 고층거리라니, 절대로 가고 싶지 않은 때와 장소다. 하지만 데이지는 그런 그녀를 응원하듯 손을 펼쳐 보였다. “괜찮아요, 아가씨. 제가 지켜드릴게요.” ============================ 작품 후기 ============================ 오늘도 어김없으 야근 day! 아, 너무 힘드네요. 모니터를 보는게 너무 힘들어서 지금 이 후기는 눈을 ㅏㅁ고 치고 있습니다. 가능한 이 오타는 수정하지 않고 올릴 생각입니다. 와, 신나라. 과연 얼마나 엉망이 도리ㅣㅈ 아쥬 그냥 두근두근 합니다. 00148 6. 마녀의 방 =========================================================================                            “마녀와 접촉하는 방법은 있어요.” 에반스 공작의 저택에서 로즈마리는 두 개째의 케이크를 먹어치우며 말했다. “저는 사용해 본 적 없지만요.” “어째서요?” “그러게요. 왜일까요?” 케이트는 차가 식어가는 것도 잊고 로즈마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애타는 케이트의 마음도 모르고 케이크 한 조각을 냠냠 먹어치우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절 길러주신 고모님은 별로 좋아하질 않으셔서요. 사람이 많은 곳을 가는 걸 즐기지 않으셨거든요. 그래서 그랬던 것 같아요.” 생각보다 대단한 이유는 아니다. 적어도 마녀를 만나는 게 위험하다거나 나빠서는 아니라는 이유에 케이트는 안도했다. “그럼 로즈마리는 다른 마녀를 만날 생각이 없어요?” “으음, 지금은 그래요.” 사실 로즈마리로서는 다른 마녀를 만나야 할 필요성이 별로 없다. 에드워드가 왕궁 마법사를 만나게 해주기도 하고, 바로 옆 저택에 마법사가 살고 있으니까. 그녀가 마법사를 만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에반스 공작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은 사람과 교류하는데 제한이 붙는다. 하지만 에반스 공작의 경우 공작이기도 하거니와 그의 아버지가 현 왕의 삼촌 즉, 에드워드가 현 왕의 사촌이라는 이유로 약간의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케이트는 약간 망설이다 다시 물었다. “다른 마녀를 만나면 위험할까요?” “다른 마녀를 만날 생각이예요?” 로즈마리의 질문에 케이트는 으음 하고 찻잔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하지? 그녀는 이미 로즈마리라는 마녀를 만났다. 그런데 굳이 데이지를 따라서 다른 마녀를 만나야 하는 걸까. “사실은, 제가 마녀라고 확인시켜준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 말이, 제가 마녀라는 걸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마녀들을 만나서 자각할 수 있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아. 로즈마리는 포크를 손에 쥔 채 몸을 내밀었다. 그래, 그거구나. 그녀는 자신이 케이트에게 어째서 이안을 돕지 않느냐고 물어봤을 때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케이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자신이 마녀가 아니라는 것처럼 행동하는 게 이상했다. 로즈마리가 보기에 케이트는 확실히 마녀였다. 이렇게나 친근한 느낌. 그리고 이안과 에드워드가 닮은 것처럼 보이는 현상. 그게 다 그녀가 마녀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해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해가 되네요. 네. 가끔 자신의 능력을 자각하지 못한 마녀가 더 큰 사고를 불러일으키기 전에 마녀들이 모여서 능력을 개방시켜주는 경우가 있다고 알고 있어요. 고모님도 도움을 주기 위해 몇 번 가셨었구요.” 그녀에 비하면 그랜디 고모님은 대단한 마녀였다. 그녀는 못 하는 게 없었고 모르는 게 없었다. 로즈마리는 고모님이 보고 싶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저 같은 경우가 많은 건가요?” “많은 건 아니지만요. 네. 있어요.” 데이지의 말이 사실이라는 뜻이다. 케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지를 의심해야 하는 게 괴로웠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게 밝혀졌다. “저기, 그럼. 마녀들이 모인다는 건 무슨 의미죠?” 케이트의 질문에 로즈마리는 눈을 크게 뜨더니 어, 음. 하고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개방시켜줄 능력에 따라 힘을 더해줄 마녀의 수가 달라져요. 능력이 큰 만큼 여러 명이 달라붙어야 하니까요.” “그럼, 마녀들을 어디서 모으죠?” 큰 도시는 마녀 집단이 있다. 비밀리에 활동하는. 그녀들은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지역마다 표식을 만들었다. 한 가지 표식으로 뮈엘라에서 전부 사용하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로즈마리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인적이 드문 곳 벽에 표식을 그려요. 최소 두 명의 마녀가 표식을 완성하는 거죠. “에바니엘같은 경우는 꽤 많을 거예요. 적어도 열 명 정도.” 열 명이 꽤 많다는 건 뮈엘라에서 자신이 마녀라는 것을 알고 활동하는 사람이 그만큼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실을 눈치챈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녀를 만나 그녀의 능력을 개방시키는 것도, 인적이 드문 곳에 표식을 그린다는 것도 데이지의 말과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데이지가 사실을 말했다고 해서 그녀가 만날 마녀가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다. “마녀를 만나는 건 안전해요?” 케이트의 질문에 로즈마리는 차를 한 모금 홀짝 마시고 대답했다. “네. 상당히 안전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마녀, 그러니까 마력 보유자와 마법사가 아니면 소환되지 않아요.” “소환이라고요?” “인적이 드물다고 해서 보통 길거리에서 모임을 할 순 없으니까요. 마녀의 모임이 이뤄지는 장소를 마녀의 방이라고 불러요.” “마녀의 방은 괜찮아요?” 로즈마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도 모른다. 그녀는 마녀 모임에 간 적이 없으니까. 그저, 마녀의 모임을 보호하기 위한 공간이라고만 알고 있다. “초대받지 않은 자에게는 자동으로 안티 매직 셀이 걸린다고 알고 있어요. 그 밖에도 몇 가지 마법이 더 걸려 있을 텐데.” 더이상은 그녀도 잘 모른다. 로즈마리는 망설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요.” 로즈마리가 문을 열자 진이 고개를 내밀었다. 다 끝났어? “여기예요, 아가씨.” 데이지의 말에 케이트는 생각에서 벗어나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어둡고 막다른 골목이었다. 벽은 낡았고 더러웠다. 무슨 표식이 있다고 했는데. 케이트는 골목 안을 살폈지만 어두운 탓에 벽이나 바닥에 뭔가를 그렸어도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 제가 문양을 완성시킬 거예요. 그러면 문양을 완성한 사람은 마녀의 방으로 소환되게 돼요. 마녀의 방이란 건,” 데이지의 설명이 이어졌다. 케이트는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해야 하나 하고 망설였지만 열심히 설명하는 데이지의 말을 끊는 게 미안했다. “그러니 문양을 그리자마자 저는 뒤로 물러날 거예요. 아가씨 혼자 다녀오셔야 해요.” “데이지는 안 가요?” “이 소환은 문양을 그린 사람을 우선으로 소환해요. 그러니 제가 있으면 아가씨는 소환되지 않아요.” 혼자 가야 한다. 그 사실이 케이트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녀는 데이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꼭 혼자 가야 해요?” “이건 제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예요, 아가씨.” 데이지는 케이트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기온 탓에 데이지의 손도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괜찮아요, 아가씨. 거기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 말은 주문처럼 케이트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데이지가 그런다면 정말 그럴 것 같았다. 케이트는 다소 안정된 기분으로 데이지와 함께 골목에 서서 그녀가 벽에 손을 대는 것을 지켜봤다. 데이지가 벽에 손을 대자마자 마치 벽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빛이 흘러나왔다. 커다란 원과 그 안을 메운 세모. 어쩐지 원과 세모의 빛색이 다르다고 케이트가 생각했을 때 데이지의 손이 움직였다. 그녀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원안에 또 다른 세모가 그려졌다. “아가씨.” 손을 떼기 전에 데이지가 케이트를 한 번 불렀다. 그녀는 케이트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손을 떼자마자 골목 밖으로 달려 갔다. 케이트가 돌아봤을 때 데이지는 골목 밖에서 그녀를 응시하며 서 있었다. 다시 벽으로 시선을 돌리자 원과 그 안의 육각별의 빛이 천천히 섞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종래에는 완전히 하얀색 빛이 되더니 화악하고 케이트를 덮쳐왔다. 아니, 케이트는 그 빛이 덮쳤다고 느꼈다. 케이트가 눈을 떴을 때 새까만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아주 큰 것 같으면서도 아주 작은 것 같기도 한,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이상한 곳이네.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다지 무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공간에 혼자 서 있는데도. “흠.”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듯한 소리를 냈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으면서도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한 소리에 케이트가 당황해서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지만, 여전히 주위는 새까맣고 그녀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아이네.” 이번에는 다른 소리였다. 약간 나이가 든 목소리에 케이트는 다시 주변을 둘러봤지만,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허둥댈 필요는 없어. 우리도 네가 잘 보이는 건 아니니까.” 마치 케이트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처럼 또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이번에는 약간 까칠한 목소리였다. 적어도 이곳에 그녀를 제외하고 세 명의 여자가 있다는 뜻이다. 케이트는 더이상 목소리의 주인을 찾는 것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우리가 누구냐고 묻기 전에 자신이 누군지 밝혀야지.” 까칠한 목소리가 말했다. 이런 곳에서 예의를 거론한다는 사실이 뜻밖이면서도 부끄러워 케이트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케이트입니다.” “처음 보는 아인데.” “에바니엘에 사는 아이는 아니야.” “에바니엘에 사는 아인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알아?” 처음 목소리와 까칠한 목소리가 다투기 시작했다. 케이트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네가 에바니엘의 마녀를 다 알아?” “적어도 이런 아이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거든?” “이런 아이가 어떤 아인데?” “딱 봐도 특이하잖아. 마력이 전혀 안 느껴지는데 익투스를 그렸다는 것부터가 신기한 것 아냐?” 익투스? 그녀가 그린 거라면 원안에 육각별이 있다. 물론 그녀가 아니라 데이지지만. 거기에 대해 케이트가 설명하려 입을 열었을 때 나이 든 목소리가 말했다. “그만해. 둘 다.” 뭔가를 더 말하려던 까칠한 목소리가 그 말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거기서 케이트는 나이 든 목소리가 세 명 중 가장 높은 사람일 거라 짐작했다. 조용해지자 나이 든 목소리가 케이트를 향해 물었다. “우릴 만나려 한 이유가 뭐지?” 케이트는 자신이 여전히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추워서 그런 거였지만 여기는 춥지 않아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대로 손을 빼지 않고 주머니에 든 것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여차하면 이걸 이용해야 할지 모른다. 어떻게 이용하는지 모르지만. 케이트와 이야기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로즈마리는 자신의 방에서 칼을 가져다주었다. 도움이 될 거라는 말과 함께. 마녀를 만나는 데 이런 작은 칼이 도움될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케이트는 받아서 코트 주머니 안에 집어넣어 왔다. 코트 주머니가 크고 깊었고, 칼이 그 안에 들어갈 만큼 작다는 게 다행이었다. “제가 마녀라고 하던데요.” 케이트는 칼을 손에 쥔 채 입을 열었다. 이미 마녀의 방에 들어와 버렸고, 그녀는 여길 나가는 법을 모른다. 그러니 부딪혀 볼 수밖에. “제 능력을 개방해야 한다고 해서요. 절 도와주실 수 있나요?” 그녀의 말에 끝났지만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녀들은 입을 다문 채 꽤 오랫동안 있었고 그건 케이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저, 마녀 여러분?” “잠깐만 기다리렴, 아가.” 케이트의 재촉에 나이 든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리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마치 어두운 방에서 빛 안으로 빠져나오는 것처럼 나타났다. ============================ 작품 후기 ============================ 아..드디어 마녀의 방 나왔습니다.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요. 날씨가 참 더운것 같으면서도 쌀쌀하고 그러네요. 이럴 때 감기 조심해야 합니다.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아참, 최근에 여행을 다녀오느라 회사근처 고양이에게 밥을 주지 못했는데 여행 다녀온 다음날 출근해서 먹이를 주려고 사료를 들고 나가서 고양이를 부르니 얼마나 급했는지 입에 먹던 뼈를 물고 달려오더군요. ....미아내... 00149 6. 마녀의 방 =========================================================================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은 으음. 하며 케이트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녀는 케이트의 옆과 등까지 돌아보더니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말했다. “그래. 마력이 약간 느껴지는구나.” 약간이라는 말에 케이트는 안도했다. 그녀의 마녀로서의 능력은 약한 모양이었다. 그래. 그 정도면 다행이다. 케이트는 눈앞의 사람이 나이 든 마녀라는 것을 깨달았다. 목소리가 나이 든 목소리였다. 그녀는 케이트를 살피며 머리를 갸우뚱했다. 약간이라고 하는 건 관대할 정도였다. 이 작은 빨간 머리 여자에게서 마력은 끊어질 것처럼 약하게 느껴졌다. 이런 마력으로 익투스를 그렸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누군가 도와준 걸까. “익투스를 그리는 건 누가 알려줬지?” “익투스라는 게 원안에 육각별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게 익투스라는 것도 모르고 그린 거냐?” 그 표식의 이름이 익투스가 맞구나. 케이트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익투스라는 건 마녀가 다른 마녀에게 연락을 취하는 모든 표식을 일컫는 단어다. 에바니엘의 익투스가 원 안의 육각별일 뿐인 것이다. 잠시 케이트는 데이지에 대해 말해도 될지 고민했다. “제가 사는 집 하녀가 마녀거든요. 그녀가 알려 줬어요” “네가 사는 집?” 마녀가 정체를 감추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일은 드물지 않다. 마력보유자는 이성이 잘 끌린다는 장점이자 단점이 있다. 하지만 뮈엘라에서 그건 그저 단점일 뿐이다. 불필요하게 많은 이성의 관심을 받는 건 마녀를 위험하게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녀는 한 장소에서 일정 기간 머물고 나면 다른 장소로 떠난다. 그런 과정에서 하녀로 일하는 하녀는 상당히 많다. 마녀는 케이트가 말한 하녀도 그런 마녀일 거라 생각했다. “만난 지 얼마나 됐지?” “몇 주 됐어요.” “그녀의 이름은?” “데이지요.” 데이지. 흔한 이름이다. 그녀는 이번에는 데이지의 생김새를 물었고 케이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디서 왔지?” 거기까지 물었을 때 케이트가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왜 이렇게 데이지에 대해 자세히 알려 하시는 거죠?” “왜냐면, 아가씨. 그녀가 진짜 믿을 수 있는 마녀인지 알아야 하니까.” 그게 무슨 의민지 몰라 어리둥절하던 케이트는 문득 얼마 전 에바니엘을 떠들썩하게 했던 심장을 훔치는 마녀를 떠올렸다. 그녀는 케이트의 엄마로 변했었다. 정확히 말하며 꽤 비슷하게 변했었다. 그 모습은 케이트가 본 엘리자베스의 마지막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지만 오랫동안 보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속이기에는 충분했다. 케이트는 데이지가 말한 지역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무슨 남작가라고 했는데. “세비앙이요. 세비앙 남작가에서 일했다고 했어요.” 마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빨간 머리에게 익투스를 알려준 마녀의 정체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빨간 머리의 능력을 살펴보는 건 그다음의 일이다. 그녀는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뒤에 숨은 두 명의 마녀 중 한 명이 이미 세비앙의 데이지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좋아. 아가씨. 나중에 우리가 연락하도록 하지.” “지금이 아니고요?” 여자의 입가가 곡선을 그렸다. 그녀는 손을 들어 케이트의 턱을 가볍게 스치듯 만졌다. 스친 손이 따듯해서 케이트는 내심 놀랐다. “우리도 네가 우릴 속이려는 게 아닌지 조사해 봐야 하지 않겠니?” 대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케이트를 하얀빛이 덮쳤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원래대로 더러운 골목 안에 서 있었다. 문득 그녀는 마녀가 연락한다고 했지만 어디로 연락할지는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때요?” 기다렸다는 듯 데이지가 다가오며 물었다. 케이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대답했다. “그냥, 음. 생각보다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이상했어요.” 데이지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원래 그래요. 마녀의 방은 생각한 것보다는 평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이 이상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케이트는 새삼 추위를 깨닫고 몸을 떨었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 알려주세요.” 온 길을 되짚어 돌아가면서 데이지가 물었다. 케이트는 어깨를 움츠린 채 음 하고 마녀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딱히 별 대화는 없었어요. 제 능력을 개방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더니 마력이 약간 느껴진다고 하더라고요. 다행히 제 능력이 그리 강한 건 아닌 모양이예요.” “아, 그래요?” 데이지는 흥미진진하다는 듯 케이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나이 든 마녀가 케이트에게 데이지의 이름과 살던 곳을 물어보더라는 부분까지 듣자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요?” “세비앙에서 왔다고요. 전에 그렇게 말했잖아요.” 이런. 데이지는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사실, 세비앙에서 제 이름은 데이지가 아니었거든요.” 케이트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때 추천서가 봉해져 있지 않았던 사실이 떠올랐다. 데이지가 글을 읽고 쓸 줄 알던가? 케이트는 재빨리 생각했지만 데이지가 글을 읽거나 쓰는 걸 본 적은 없었다. “마녀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야 하니까요. 수도로 오면서 이름을 바꿨어요.” “그런 일이 자주 있는 편인가요?” “이름을 바꾸는 일이요? 마녀들은 그런 편이죠.” “어쩌죠? 전 그걸 모르고 데이지라는 이름을 알려줬는데요.” 세비앙의 데이지라는 사람이 있을까? 데이지는 걱정하는 케이트에게 괜찮다고 웃어 보였다. 세비앙의 금발 머리 데이지라는 여자를 찾아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녀가 이동하면서 이름을 바꾸는 행위는 그리 드물지 않다는 건 마녀들 사이에서는 익숙한 일이다. “그런데 왜 이름을 바꿨다는 건 말하지 않았어요?” 케이트의 의심이 데이지에게 향했다. 의심이라고 하기엔 약했지만 오래지 않아 뚜렷해질 의심이었다. 데이지가 뭐라 대답하려 입을 열었을 때 남자가 말했다. “가진 걸 다 내놔.” 케이트는 놀라서 굳었고 데이지는 그를 돌아봤다. 얼굴이 불그스름한 남자가 손에 검을 쥐고 서 있었다. 한물간 용병처럼 보였다. 케이트가 정신을 차리는 사이 데이지가 먼저 나섰다. 그녀는 품 안에서 지갑을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이게 다예요!” 남자가 검을 케이트를 향해 겨누며 데이지에게 다가왔다. 그 사이에 케이트는 주머니 속에 로즈마리가 준 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있었지. 도움이 될 거라고 했지만 어떻게 도움이 될지는 모른다. 게다가 그녀는 검을 다룰지 모른다. 케이트가 주머니 속의 칼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남자가 데이지의 손에서 지갑을 낚아챘다. 차라리 꺼내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상대는 검을 다룰 줄 아는 남자고 케이트와 데이지는 검을 다루지 못한다. 케이트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갑자기 데이지가 강도에게 달려들었다. “아가씨! 피하세요!” “이 년이!” 남자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고 그게 데이지의 팔을 크게 베는 게 케이트의 눈에 보였다. 맙소사. 그녀가 놀라 눈을 크게 떴을 때, 펑! 하고 남자의 몸이 거센 바람을 맞은 것처럼 뒤로 밀렸다. 그가 쥐고 있던 검도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케이트는 허겁지겁 데이지에게 달려갔다. “데이지!” 바닥에 쓰러진 데이지는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창백한 얼굴에 케이트의 심장이 떨어졌다. “데이지, 데이지. 정신 차려 봐요!” 고층거리에 오는 게 아니었다. 케이트의 마음속에 죄책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녀 때문에 데이지가 죽는다면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알고 지내던 데이지 두 명이 다 죽다니, 이 정도면 저주에 가깝다. 그녀가 울먹이기 시작했을 때 데이지가 눈을 깜빡였다. “아가씨?” “데이지, 괜찮아요?” 데이지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가냘픈 목소리로 물었다. “그 남자는요?” 그제야 케이트는 강도를 찾았다. 남자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었다. 죽은 걸까? 데이지는 케이트의 시선을 따라 남자를 쳐다보더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가씨께서 또 절 구해주셨군요.” 또라고? 케이트는 일어서려는 데이지를 부축하면서도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내가 그런 건가? 강도가 데이지에게 검을 휘둘렀을 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게 자신이 한 거라는 느낌도 없었다. 케이트는 데이지를 일으켜 세운 뒤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정말 내가 한 일일까? “데이지가 한 거 아니예요?” “전 아가씨가 하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어, 제가 한 일일까요?” “그럼요! 아가씨는 아직 자신의 능력을 깨닫지 못해 능력을 발휘하고도 잘 알지 못하시는 것 뿐이예요.” 과연 그럴까. 케이트는 멍하니 생각했다. 예전에 마법을 사용했을 때는 약간 힘이 부친다거나 하는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저게 정말 그녀가 한 일이 맞는 걸까. 케이트가 깊이 생각하려는 찰나 강도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케이트는 당황해서 데이지를 잡아당겼다. “뛸 수 있겠어요?” “노력할게요.” 데이지는 창백한 얼굴로 대답하고 케이트를 따라 고층거리는 뛰기 시작했다. 두 사람 뒤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난 남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 난 지 몰라 어리둥절한 상태로 서 있다가 떨어진 검을 집어 들었다. 여기가 어디지?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좁고 더러운 길. 얼기설기 얹어놓은 건물. 고층거리처럼 보였다. 고층거리라고?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여기에 왜 있는 거지? 그는 마치 마녀에게 홀린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재빨리 고층거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제인! 의사선생님 모셔 와!” 데이지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정신없이 마차를 달려 집에 돌아온 케이트는 비틀거리는 데이지를 부축하며 소리쳤다. 막 잠이 들려다 시끄러운 소리에 나와 본 제인은 피투성이의 데이지와 케이트의 모습에 놀라 얼어붙었다가 케이트의 지시에 잠옷 위에 코트만 껴입은 채 뛰쳐나갔다. “무슨 일이지?” 서재에서 이안이 나왔다. 그는 서늘한 표정으로 케이트와 데이지를 보더니 케이트에게 달려들듯 다가오며 물었다. “다쳤나?” “저 말고 데이지가요.” 케이트의 말에도 불구하고 이안의 시선은 그녀의 몸을 훑었다. 그는 그녀의 몸에 묻은 피가 날 만한 상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케이트가 데이지를 부축해 방으로 옮기는 것을 도왔다. 이안의 손이 데이지의 몸에 닿자 반응이 없던 데이지가 작게 신음했다. “데이지, 의사선생님을 부르러 갔으니 괜찮을 거예요.” 케이트의 말에 데이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케이트는 가위를 들고 달려와 의사가 데이지의 상처를 살피기 좋도록 그녀의 옷을 잘라냈다. 어차피 피가 묻어 버려야 할 것이다. 그녀가 물을 가져와 피를 닦아내자마자 의사가 도착했다. 왕진 가방을 들고 나타난 의사는 이런 일에 익숙한 것처럼 움직였다. 전사의 나라인 뮈엘라의 의사다. 검 상에는 익숙한 것이 당연하다. “괜찮아?” 의사가 데이지의 상처를 봐주는 동안 이안은 케이트를 데리고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케이트는 겁에 질리고 지쳐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피 묻은 자신의 옷을 갈아입지 못한 상태였다. 그는 생각났다는 듯 주방으로 가 물 잔을 들고 돌아왔다. “마셔.” 케이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물 잔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안이 다시 질문했다. 처음보다는 좀 더 부드러운 어조에 케이트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안을 쳐다봤다. “데이지가 절 구하려다 죽을 뻔했어요.” ============================ 작품 후기 ============================ 마녀의 방 장 끝났습니다. 으으으으 다행이다. 생각보다 길어져서 힘드네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저는 불금을 보내고 집에 들어왔습니다. 하하하하. 00150 7. 저주를 푸는 법 =========================================================================                            데이지는 무사했다. 팔의 상처가 팔을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동안은 팔을 쓰지 못할 것이다. 케이트는 그녀가 나을 때까지 쉴 수 있도록 아침 식사는 자신이, 청소는 한동안 외부에서 사람을 고용했다. 심지어 그녀는 데이지의 상처를 치료한 치료비를 전부 자신이 부담했다.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데이지는 감동했다. 한동안 큐바인 하우스는 조용했다. 케이트를 찾아왔던 무례한 구혼자들은 그녀가 호건가의 사람이라는 정보를 자신들만 가지고 있기로 결탁했고 그건 케이트가 조용히 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안은 로웨나 벨링스를 찾기 위해 돌아다녔고, 조세핀은 자신의 방에서 나오는 일이 별로 없었다. 시나몬이 케이트에게 찾아와 기자에게 받은 편지라며 읽어달라고 한 일 외에 사건은 별로 없었다.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일신상의 이유로 잠시 쉬고 있다는 것. 이렇게 기억해줘서 감사하다는 것. 시나몬은 그 내용만으로도 만족하며 돌아갔다. 제이드가 찾아온 것은 그런 평온한 며칠이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스미스양. 이안 있습니까?” 추운 날씨에도 제이드는 화려한 의상을 포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감색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 위에 새빨간 머플러를 걸고 있었다. 목을 두르는 게 아니라 걸기만 했기 때문에 그게 목을 따듯하게 해주지는 못할 것처럼 보였다. 케이트는 감색 코트 가장자리에 하얀색 자수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잠시 이 코트의 가격이 얼마일지 생각했다. 상당히 비쌀 것이다. 과연 킬리언 포목점의 아들이자 분점의 사장. “잠깐 나갔는데, 약속하셨나요?” “어, 티타임에 잠깐 들른다고 했는데요.” 그렇다면 상당히 잘 맞췄다. 케이트는 오븐에서 막 스콘을 꺼낸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안들 돌아보고 제이드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좀 더 열었다. “로엔 경이 잊어버린 모양이네요. 곧 돌아오겠죠.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제이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집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화악하고 고소하면서 부드러운 스콘 냄새가 풍겼다. 그렇지 않아도 출출한 시간이다. 자연스럽게 그의 위장이 조여들었다. 그의 표정을 읽은 케이트가 나직하게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스콘을 좀 구웠어요. 앉아 계세요.” 이안이 돌아온 것은 제이드가 스콘 다섯 개를 먹어치우고 여섯 개째에 마멀레이드를 바르고 있던 도중이었다. 제인에게 모자와 목도리를 건네고 코트를 벗으며 안으로 들어오던 그는 케이트와 마주앉아 차를 마시는 제이드의 모습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 어서 와.” 누가 봐도 손님인 이안을 맞이하는 집주인 제이드의 모습이다. 이안은 대꾸하지 않고 코트도 제인에게 건넨 뒤 케이트의 옆자리에 앉았다. “스콘 먹을래요?” 오븐에 한 판 더 들어 있다. 케이트는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이드는 케이트가 가져온 스콘을 전부 자신이 먹어치웠음을 깨닫고 비실비실 웃어 보였다. “벨링스 영애말인데.” 제이드는 케이트가 차와 스콘을 더 가지고 오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케아트는 잠시 자신이 이야기를 같이 들어도 되는지 고민했지만 이안도 제이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얌전히 앉아 있었다. “이상한 소문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더군.” 제일 커다란 스콘을 집은 이안이 제이드를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스콘에 잼을 바르기 시작했다. 관심을 보였으니 이야기를 계속 해도 되겠지. 제이드는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느 무도회에선가 벨링스 영애와 동시에 이야기한 다섯 명 중에 네 명이 영애에게 반했다는 거야. 아마 누군지 너도 알 텐데.” 그렇게 말하며 제이드가 이름을 불렀지만 이안은 반응하지 않았다. 기억에 없는 이름이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제이드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네 명 다 그전까지는 베링스 영애에게는 크게 관심이 없었거든. 심지어 어떤 남자는 그녀가 너무 거만하고 콧대가 높다고 험담 가까운 이야기까지 하던 사람이라 주위에서 놀랐다고 해.” 제이드는 계속해서 이야기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이 스콘에 닿기가 무섭게 이안이 힐끔 그를 쳐다봤다. 어라. 그는 애꿎은 우유만 집어 차에 추가했다. “그럼 여기서 반하지 않은 한 명은 누구냐면 약혼녀가 있는 남자야. 그럼 네 명 중에 약혼녀나 부인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까?” 이건 또 뭐야? 난데없는 질문에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는 제이드를 한 번 쳐다보고 두 개째의 스콘을 집었다. 케이트는 제이드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어, 있었나요?” “네! 맞아요. 스미스양. 여기서 놀라운 점은 네 명 중에도 약혼녀와 부인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놀라울 것도 많다. 케이트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시치미 떼며 맞장구쳤다. “와아, 놀랍네요.” 어쩐지 아이처럼 다뤄지는 느낌에 제이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케이트를 쳐다봤다.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진 케이트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이안이 먹는 걸 보고 있었다. 맛있어요? 스미스양이 그럴 리 없지. 다시 기분이 좋아진 제이드가 신이 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 그럼 벨링스 영애에게 반하지 않은 남자의 차이가 뭔지 여기서 저는 상당히 고민했습니다. 대체 이유가 뭘까. 벨링스영애가 취향이 아니었던 걸까?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오히려 벨링스 영애를 싫어한 남자들마저도 그녀에게 반했단 말이죠. 이건 단순히 취향이니 아니니 하는 것도 맞지 않다고 봤습니다. 그렇죠?” 이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두 개째의 스콘을 전부 먹어치운 상태였다. 이어서 그의 손이 잔을 들었다. 목을 따듯한 차로 가시고 다시 새 스콘을 집는다. 일련의 행위가 매우 절도 있게 이뤄졌다. 케이트는 반응을 원하는 제이드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손바닥을 부딪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그래서 전 반대로 벨링스 영애에게 반하지 않은 남자를 조사해 봤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부분이 있더군요. 그 남자, 약혼녀가 평민이었습니다.” 평민이라고? 케이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녀의 반응에 기분이 좋아진 제이드가 마치 무대의 배우처럼 극적인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 잦은 일이 아니죠. 귀족 남자가 평민 여자와 약혼하는 일은요. 물론, 귀족 아가씨가 평민 남자와 결혼하는 것보다야 많지만요. 그렇지 않아도 남자의 집안에서 상당히 반대했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민인 약혼녀를 뒀다는 겁니다. 여기서 도출할 수 있는 이야기는 한가지죠.” 정략결혼이 많은 귀족의 결혼과 달리 그 남자는 정말로 평민 여자에게 반해있다는 것이다. 제이드는 차로 목을 축이고 바로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뿐이면 아무것도 아니죠. 벨링스 영애에게 반한 네 명의 남자의 집안에서도 이런저런 수를 다 써봤다고 합니다.” 벨링스 자작가에 가지 못하게 감금도 해보고, 더 예쁜 여자를 불러 하룻밤을 지내게 하기도 했다. 로웨나에 대한 나쁜 소문을 하인들을 시켜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자들의 눈에 씐 콩깍지는 벗겨질 줄을 몰랐다. 오히려 남자들은 그럴수록 비쩍비쩍 말라 갔다. 남자들을 진료하러 온 의사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으며 진단을 내렸다. 상사병입니다. 사교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상사병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자신의 아들이, 형제가 그럴 줄은 몰랐던 집안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남자들을 살리기 위해 벨링스 가로 달려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벨링스 자작은 콧대 높은 남자였고 그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딸은 수치스러운 짐이 아니라 복덩어리였다. 한 번만 아들을 만나게 해달라는 부모의 간청에 자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입에서 입으로 벨링스영애는 남자를 홀리는 나쁜 년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네 명 중에 한 명이 약혼녀가 있었는데 어린 시절 약혼한지라 마지막으로 만난 게 오, 륙 년 전이었다는 군요.” 당시 약혼녀의 나이는 열네, 다섯 살. 그 나이부터 피어나는 여자도 있지만 그녀는 안타깝게도 좀 늦게 피어나는 타입이었던 모양이다. 약혼녀는 자신의 약혼자가 웬 여자에게 반해 상사병에 걸렸다는 소문을 듣자 분노해서 길길이 날뛰며 만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마음을 추슬렀고 눈앞에서 약혼 파기를 직접 해 주겠다며 먼 지방에서 수도 에바니엘까지 며칠을 달려왔다. “스미스양. 여자가 가장 아름다운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난데없는 질문에 케이트는 어리둥절해서 눈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사랑에 빠질 때요?” “아닙니다.” 제이드는 씨익 웃으며 검지를 들어 보였다. 손가락을 흔들며 그가 말을 이었다. “실연했을 때죠.” 엄밀히 말하면 실연은 아니지만 이야기에서 약혼녀의 상태는 실연과 비슷했다. 약혼자인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반해 상사병으로 죽어가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약혼자가 상사병으로 죽어간다는 사실까지는 몰랐고, 그저 엉뚱한 여자에게 반해 자신을 등한시한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약혼을 파기 당하느니 내가 파기해주지. 그런 마음으로 달려온 약혼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아름답게 치장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남자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자리에서 털고 일어난 겁니다.” “잠깐, 그럼 자기 약혼녀를 보고 벨링스 영애를 잊었다는 말인가요?” “그렇죠.” 케이트는 입을 딱 벌렸다. 이건 무슨 사랑의 힘이지? ============================ 작품 후기 ============================ 오늘 사람마다 친해지는 고양이가 따로 있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이 일년간 먹이준 고양이가 열마리도 넘는데 현재 남아있는 녀석은 카오스 고양이 돼지 뿐이거든요. 근처에 워낙 고양이가 많은 환경이라 가끔씩 생각나면 먹이 주머니 들고 털레털레 걸어가서 주곤 하는데 대부분 바뀌더라고요. 가장 규칙적으로 먹으러 오는 돼지야 제가 버릇을 잘못 들여서 같은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매일 꼼짝없이 주지만요. 그런데 오늘 제가 몇 주 전에 먹였던 아이고양이 세 마리 중에 카오스 한마리가 또 나타났더라고요. 지나가다가 우연히 본거라 먹이가 없어서 "안녕? 배고파서 왔니? 밥줄까?" 하고 얼른 사무실에 가서 먹이를 들고 왔는데 창문으로 아직 있나? 하고 힐끔 쳐다보니까 이녀석, 제가 서서 말 걸던 장소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냄새맡고 있었어요. "저 닌겐이 가고나면 항상 먹이가 있었는데...이상하다..." 뭐 이런 느낌이었는데 제가 나가자마자 파다닥 뛰어서 도망치더니 제가 멈추니까 땡글땡글한 눈으로 또 멈춰서서 절 쳐다보더라고요. 세 마리 중에서 제일 작고 눈도 땡글땡글해서 이상하게 이녀석만 다른 형제들은 다 절 피하고 도망치는데 안전거리만 유지되면 서서 절 빤히 쳐다보는게 신기했거든요? 먹이 주고 멀리서 먹는 걸 흐뭇하게 보다가 문득 응? 난 어째 삼색이만 오는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해보니, 얘도 삼색이 돼지도 삼색이 (카오스) 못난이도 삼색이. ...아, 아니구나. 카오스만 땅기는 게 아니라 짐승조차도 내겐 수컷은 안붙는 거구나. 후후후후후후. 00151 7. 저주를 푸는 법 =========================================================================                            “어쨌거나 그 덕에 그 남자는 다음 달에 결혼한답니다.” 그 일이 알려지자 남은 세 명의 남자 집에서도 비슷한 일이 시작됐다. 약혼녀가 아주 예쁘게 꾸며서 나타나거나 화가 나서 친정으로 돌아갔던 부인이 차려입고 나타났던 것이다. 극적으로 세 명의 남자들도 벨링스 영애에서 벗어났다. 사람들은 사랑의 힘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웨나에게 반하는 남자들이 점점 늘어났다. “이쯤 되자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겠죠.” 그렇다고 해도 로웨나가 남자를 홀린다는 소문은 널리 퍼지지 않았다. 일이 잘 해결된 이유도 있었지만 벨링스 자작이 욱하는 성격인 탓에 조심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건 여자들뿐이었다. 이때까지도 남자들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젊은 여자들만 남편이 로웨나와 부딪치지 않게 조심했고, 자신의 약혼자가 로웨나와 말을 섞지 않기를 바랐다. “문제는 결혼도, 약혼녀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다시 로웨나에게 반한 남자들이 늘어났다. 네 명의 남자에게 일어났던 일이 다시 반복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제이드는 여기까지 말하다 입을 다물었다. 케이트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도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약혼녀도, 부인도 없는 남자들을 로웨나에게서 벗어나게 하려고 남자의 가족은 고급매춘부를 고용했다. 그녀들은 저마다 아름답게 꾸미고 남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남자들은 로웨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뭐, 여러 가지 방법을 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고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제이드는 그렇게 말하며 이안을 힐끔 쳐다봤다. 이안은 네 개째의 스콘을 우걱우걱 먹고 있었다. “결국 부랴부랴 결혼할 상대를 찾아서 만나게 했다는군요. 덕분에 올해 사교계는 꽤 풍작이었습니다.” “풍작이요?” “약혼한 커플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풍작이었느냐면 나쁘게 말해서 사교계의 재고로 남았던 아가씨들도 혼약 처가 정해졌다. 어떻게 보면 좋은 일일수도 있다. 로웨나가 없었다면 사교계의 노처녀로 남았을지도 모를 여자들이 혼처가 정해진 거니까. 그걸 잘된 거라고 볼 수 있다면 말이지만. “하지만 그게 모든 해결은 아니었죠.” 제이드가 다시 극적으로 말했다. 이안은 고개를 들었고 케이트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났을 지에 대한 호기심에 몸을 내밀었다. “결혼 상대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 말입니다.” 아직 사교계에 나오지 않은 아가씨들에게까지 구혼을 넣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게다가 여자 쪽에서도 구혼을 거절하기 마련이다. 결혼 상대를 구하지 못한 남자들은 여전히 로웨나의 마력에 빠져있다. “어, 그럼 지금도 구혼자들이 있다는 말인가요?” 케이트의 질문에 제이드는 쯧쯧 하고 혀를 찼다. 모르는 소리.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벨링스 영애가 시골로 내려갔다는 말에 그 시골이 어딘지 찾아내는 사람과 말을 타고 쫓아가는 남자들이 매일 한 명씩 있을 정도예요.” 뜻밖의 사실에 케이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직까지? 그녀는 그 정도 일 줄은 몰랐다. 케이트는 사교계의 소식에 어두웠으니까.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거군요.” 케이트의 말에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이안은 스콘을 먹고 있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다. 그걸 제이드의 입을 통해 재확인하는 것뿐이다. “그걸 벨링스 영애도 알고 있을까요?” 케이트의 질문에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제이드와 그의 시선이 부딪혔다. “글쎄요.” “알 거다.” 두 사람의 대답이 상반되게 나왔다. 케이트는 이안과 제이드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제이드는 손을 벌리더니 놀랍다는 듯 이안에게 말했다. “어떻게 알아?” “벨링스 영애가 바보라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알 거라는 말이다. 제이드는 이게 벨링스 영애를 향한 모욕인지 자신을 향한 모욕인지 몰라 잠시 멍하니 있었다. “야, 임,” “그럼, 이 상황에서 도망치려 한 걸 수도 있겠네요?” 가까스로 파악한 제이드의 분노는 타이밍 좋은 케이트의 말 때문에 가로막혔다. 에이 씨. 투덜거리는 제이드를 무시하고 이안이 말했다.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케이트는 새로운 사실이 더해지자 새로운 가정을 떠올렸다. “가족에게 의지할 수는 없고, 멀리 갈 수도 없었겠군요. 남자의 도움이 필요했을 테니까요.” 이안의 눈이 반짝였다. 로웨나의 친구들도 모두 조사했다. 로웨나를 숨겨주는 사람도 없었고 그녀의 행방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사실, 로웨나는 친구가 그리 많은 편도 아니었다. 그녀의 건방진 행동 때문에 별로 많지 않았던 친구는 최근 그녀에 대한 소문 때문에 전부 떨어져 나간 모양이었다. “친구들도 모른다더군.” 그의 말에 케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다. 지금의 로웨나는 남편이나 가까운 남성이 있는 여자라면 가장 피하고 싶은 상대일 테니까. “신전은 어때요?” 케이트의 질문에 제이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벨링스 영애의 상태가 저주라고 보시는 겁니까?” 저주를 푸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이고 대중적인 방법은 신전에 가서 성직자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안이 생각했던 방법이었다. 그는 수도에서 큰 신전 몇 군데에 가서 벨링스 영애가 온 적이 없는지를 알아봤던 것이다. “신전에서는 벨링스 영애가 온 적이 없다고 했다.” 케이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신전에 가지 않았다면 어딜 간 걸까. 저주를 풀지 않더라도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신전이 유일하다. “신전이라는 게 신만 모시는 건 아니잖아요?” 이안과 제이드가 무슨 의민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케이트는 음 하고 망설이다가 말했다. “제가 어렸을 때 잠깐 살던 마을에서는요, 그 마을에서 성녀가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성녀를 모시는 작은 신전도 있었거든요.” 잠시 응접실에 정적이 흘렀다. 제이드와 이안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동시에 말했다. “뮈엘라 신전?” “뮈엘라.” === 뮈엘라. 뮈엘라를 세운 성녀의 이름이다. 그녀는 초대 왕 에드워드가 나라를 세울 때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공신이었으며 항간에는 에드워드의 연인이었다고도 전해진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초대 왕 에드워드가 자신의 이름이나 성이 아니라 뮈엘라의 이름을 나라 이름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전해지는 이야기다. 나라를 세울 당시 이미 에드워드에게는 장래를 약속한 여인이 있었던 것이다. 연인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설은 분분하지만 확실한 것은 나라가 안정되고 에드워드를 도운 친구들은 모두 그 공을 인정받아 귀족 작위와 영토를 하사받았으나 뮈엘라만은 모든 것을 거부하고 나라를 떠돌며 나라 깊숙한 곳에 남아있는 전쟁의 상처를 보듬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의 경애와 감사의 마음으로 뮈엘라가 활동했던 마을에서는 저마다 뮈엘라를 기릴 수 있는 동상이나 신전을 세웠다. 그리고 그건 수도 에바니엘도 다르지 않았다. 케이트는 약간 불안한 기분으로 이안을 쳐다봤다. 로웨나와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남자들은 그녀에게 반했다고 한다. 이안은 괜찮은 걸까. 그렇다고 그에게 로웨나와 이야기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케이트는 뻔뻔하지 못하다. 그녀는 그저, 불안한 기분으로 이안을 쳐다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고르지 못한 길을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수도에는 뮈엘라를 기리는 신전이 여러 곳 있다. 그중 사람이 숨어 있을 만한 규모의 신전은 세 개 정도. 지금 가는 곳이 마지막이니 이곳에 로웨나가 없다면 그녀의 행방은 그야말로 미궁 속에 빠지게 된다. 마차가 심하게 요동치자 케이트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멀미가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날이 추웠지만 참지 못하고 뱃속에 든 것을 전부 게워내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다 문득 쳐다본 맞은편에 일그러진 표정의 이안이 있었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창에서 몸을 떼고 물었다. “멀미예요?” 이안은 그렇다고 대답하려다 잠시 머뭇거렸다. 멀미와는 약간 다르다. 답답하고 점점 숨쉬기가 힘들었다. 악취를 맡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창문을 열어둔 탓에 분명 공기가 차갑고 가벼워야 할 텐데 무겁고 끈적끈적한 느낌이었다. “괜찮아요?” 그가 말이 없자 케이트는 몸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작은 손이 그의 손을 감싸자 답답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공기에는 희미하게 풀냄새가 섞여 있었고 바람이 차가웠지만, 기분이 좋았다. 이안은 놀란 표정으로 케이트를 쳐다봤다. 그녀의 힘인 걸까. “너,” 케이트는 전혀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이안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힘이 아닌 걸까. 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타이밍이 딱 맞아 떨어졌다. “너는, 괜찮나?” “길이 험하죠?” 아무래도 케이트는 공기가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안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뭐지? 케이트는 이안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시선을 떨어트렸다. 어쩌면 그 역시 로웨나와 부딪히는 것을 걱정하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생각에 잠긴 사이 마차는 험한 길을 달려 신전 앞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도 이안은 케이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덜그럭덜그럭 하고 밖에서 마부가 마차 문을 열었다. 나가기 위해 이안이 케이트의 손을 놓았다. 다시 공기가 그 무겁고 답답한 공기로 바뀌는 게 느껴졌다. ============================ 작품 후기 ============================ 이안의 기분이 좋아진건 단순히 케이트가 손을 잡아서 일수도 있습니다. 하하하하. 비축이 똑! 떨어져서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으아으아으아으아으아... 슬슬 4장이 끝나가는데 이런저런 고민을 좀 하다보니 정작 비축은 못쌓는 사태가... 내일 안 올라오면 아, 결국 못썼구나. 라고 생각해 주세요. 표지 변경했습니다. 리난님께서 그려주신 케이트 입니다. 감사드립니다^^ 00152 7. 저주를 푸는 법 =========================================================================                            뮈엘라에서 신전의 세력은 그리 강하지 못하다. 지금은 전사의 나라라고는 해도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마법사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마법사는 신성력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견제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보통 신전이 지식의 요람인 타국에 비해 뮈엘라는 마법사와 마법사의 탑이 그런 역할을 전부 수행했기 때문에 신전은 오로지 신에게 기원하는 역할만 맡게 되었다. 신전의 가장 큰 장점인 신성력은 남아있었으나 마법의 나라답게 높아진 상아탑은 의학의 발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신전에서 제공하는 신성력은 값비싼 사치품으로 전락했다. 결국 뮈엘라에 남아 있는 신전은 뮈엘라가 세워진 다음부터 끊이지 않고 발현한 성녀의 기적을 기록하고 그녀의 유해를 모시는 장소로서만 남아버렸다. 그러니 마법사와 전사의 입장이 바뀌고 전사의 나라가 되었어도 신전의 영향력이 커지지 못한 건 당연했다. 전사가 늘어나면서 타국에서 흘러들어온 전사들이 자신의 나라에서 모시던 신을 전파하면서 주신인 아도나이가 오히려 뮈엘라를 몰아내고 더 영향력을 가졌을 정도다. 그나마 아도나이 신전도 전승을 기원하려는 전사와 그의 배우자가 찾아오는 장소에 불과했다. 그런 역사 속에서 뮈엘라 신전이 에바니엘에 세 개나 있다는 건 성녀 뮈엘라를 향한 뮈엘라 사람들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뭔가 좋은 느낌이 들었다. 케이트는 마차에서 내리자 멍하니 신전 건물을 쳐다봤다. 신전은 이안과 케이트가 이전에 다녀온 두 곳의 신전에 비하면 훨씬 작았다. 다른 곳처럼 성녀 뮈엘라의 상이 서 있거나 뮈엘라의 이름을 조각해 놓지도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지나간다면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여기까지 올라온다면 말이지.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케이트의 손을 잡았다. 공기가 상쾌하게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뭐하는 거예요?” 당황한 케이트가 작게 힐난했다. 신전 앞에는 사제 두 명이 서 있었다. 오기 전에 아무 기별도 보내지 않았지만 누가 온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안은 주위를 살피고 그들이 손님의 방문을 알아차린 이유를 알았다. 신전은 산 위에 있었다. 마차가 다닌 흔적이 다듬어지지 않은 길에 나 있었다. 위에서 보면 신전을 향해 올라오는 마차가 보이는 것이다. 마차를 타고 일부러 이렇게 높이까지 올라올 사람이 없으니 성직자들은 신전의 방문객이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라는 말은 없었다. 마치 지나가는 사람에게나 건넬 것 같은 인사에 이안은 흠 하고 사제를 쳐다봤다. 두 사람 다 여자였다. 키는 훤칠한 편에 얇은 로브를 두르고 로브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성전사인 모양이군. 그는 여자들의 허리와 등에 달린 무기를 보고 생각했다. 한 명은 검을, 한 명은 봉을 차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여기에 이들과 싸우러 온 게 아니다. 이안은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벨링스 영애를 만나러 왔다.” 여자들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이안과 비슷한데? 케이트는 가볍게 감탄하며 그녀들의 얼굴과 이안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비교했다. 세 사람 다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 있다는 근거가 있다.” 이안의 당당한 말에 여자들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근거 말씀이십니까?” 그러게? 궁금한 건 케이트도 마찬가지였다. 여기 있다는 근거가 있다면 처음부터 여길 먼저 오는 게 쉽고 빨랐을 것이다. 세 여자의 채근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여유 있게 말했다. “로웨나 벨링스가 갈만한 곳은 신전 정도다. 다른 신전은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여기에 있는 게 확실하다.” 케이트는 너무 당당한 억지에 입을 딱 벌렸다. 소거법? 지금 이 남자 소거법을 근거라고 댄 거야?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 달리 성직자들에게는 그럴듯하게 들린 모양이었다. 여자들은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설령 그녀가 이 신전에 있다 해도 아무나 만나게 해줄 수는 없습니다. 그녀가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신전으로 온 것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그녀를 만날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매우 정중한 질문에 이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벨링스 영애에게 저주를 건 마녀를 쫓고 있다. 마녀를 잡는 데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 엇. 하고 여자들이 놀라는 게 보였다. 그녀들은 이안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이더니 곧 몸을 돌리며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아무래도 무사히 입장한 모양이다. 케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려다가 손이 아직도 이안에게 잡혀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남자가? 그녀는 사제들을 따라 신전 안으로 들어가면서 이안에게 잡힌 손을 빼려 애썼지만 빠지지 않았다. “남성분은 안 됩니다. 여성분만 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알고 있겠지요? 여자가 그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저주에 걸린 여자를 만나러 케이트 혼자 보낼 수는 없다. “쳐다보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쳐다보지 않아도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저주가 닿아버린 경우가 있습니다.” 뜻밖의 소식이었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사제를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에 여자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벨링스양이 이곳에 오고 이틀 후, 수련하던 남자 사제가 벽을 사이에 두고 몇 마디 말을 섞었을 뿐인데 저주가 닿아서 신전을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어, 그럼 지금 벨링스 영애는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나요?” “주변에 여자들만 있을 때는 간혹 산책을 겸해서 나오기는 합니다.” 이안의 말이 맞았다. 로웨나는 자신의 저주가 남자에게만 통용된다는 것을,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남자가 결혼하거나 그 정도로 진지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할 수 없죠.” 케이트의 말에 이안이 다시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케이트는 이안을 쳐다보고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일단 아는 게 있는지 물어보고, 들은 걸 돌아와서 당신한테 전달할게요. 그걸 당신이 듣고 추가로 질문하고 싶은 게 있다면 내가 다시 다녀오면 되잖아요?” 상당히 번거로운 방법이다. 하지만 로웨나의 저주가 어디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지금, 이안이 무턱대고 접근하는 것 어리석은 짓이다. 하는 수 없이 이안은 미간을 찡그리며 케이트의 손을 놓아주었다. 곧이어 그는 끈적끈적하고 답답한 공기가 자신을 덮쳐 올 것이라고 각오했다. 하지만 변한 건 없었다. 이상한 일이군. 그가 의구심을 떠올렸을 때 케이트는 성직자를 따라 로웨나가 기거하는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 여기서 그녀는 잘 지내나요?” 신전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한다. 한낮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느라 사제들도 바빴다. 다들 밭을 살피는지 그리 크지 않은 신전 안은 케이트와 그녀를 안내하는 성직자를 빼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네. 들어올 때 조금 고생했을 뿐. 지금은 육체적으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들어올 때 고생했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요?” 케이트의 질문에 여자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이곳은 뮈엘라 신전 중 가장 특별한 곳입니다. 가장 처음에 세워진 신전이고, 성녀님께서 직접 축복을 내리고 가신 곳입니다.” 그래서 에바니엘의 뮈엘라 신전 중 가장 작았군. 케이트는 성직자의 설명에서 그녀가 갔던 세 곳의 뮈엘라 신전 중 가장 작고 가장 낡았으며 가장 인가와 떨어져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축복 덕분에 이곳에는 사악한 힘이 접근하지 못합니다. 불경한 힘이 접근하면 매우 괴롭다고 합니다.” “괴롭다고요? 그럼 벨링스 영애는 지금도 괴롭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그건 신전 안에 들어올 때까지의 고통입니다. 신전 안에서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어, 그럼, 벨링스 영애는 들어올 때 많이 힘들었나요?” “그건 불경한 힘의 세기에 따라 다릅니다. 아주 강한 저주라면 신전에 접근조차 못 할 정도로 고통스러울 테지요.” 와, 그렇구나. 케이트는 감탄스러운 기분에 눈을 빛내며 성직자를 쳐다봤다. 신전에 내려진 축복이 그런 역할을 한다는 건 처음 알았다. 그녀의 순수한 감탄에 성직자 역시 기분이 좋아졌는지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좀 더 상냥해진 어조로 말했다. “이곳입니다. 벨링스 양에게 손님이 왔다고 전하지요.” “어, 네. 저는 케이트예요. 이안, 아니, 함께 온 남자는 마녀를 쫓고 있는 수사관이고요.” 알겠습니다. 성직자가 그렇게 말을 남기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케이트가 선 문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벨링스 영애?” 케이트의 질문에 안쪽에서 들리던 소리가 얼어붙은 것처럼 멈췄다. 아닌가? 바스락거린 소리는 자신의 착각이었나 하고 생각했을 때 안쪽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자는 없죠?” 벨링스 영애의 목소리다. 케이트는 그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이렇게 겁에 질리고 힘없는 목소리는 그간 저주에 시달린 여자의 목소리일 거라 생각했다. “네, 없어요.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케이트의 요청에 로웨나는 잠시 망설였다. 신전의 여 사제들은 그녀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하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 저주는 여자에게는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전에 틀어박혀 겁에질려 지낸 탓에 로웨나는 소심해져 있었다. “진짜 남자는 없는 거죠?” “네. 없어요.” 두 번이나 케이트에게 확인받고 나서야 로웨나가 문을 열었다. 끼익하고 문이 열리면서 어둠 속에서 로웨나 벨링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척해진 얼굴. 푸석푸석한 머리카락. 로웨나의 상태는 한눈에 봐도 좋지 않아 보였다. 겁에 질린 몇 주간의 시간은 건방지고 까다롭던 아가씨의 높은 콧대를 꺾기엔 충분했다. “안녕하세요, 벨링스 영애. 저는 케이트 스미스예요.” ============================ 작품 후기 ============================ 4부가 슬슬 끝나고 있습니다. 예상보다 더 길어지면 안되는데...하면서 떨고있어요. 4부가 종료되면 한달정도 놀고 다른 이야기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현재 생각하고 있는건 현대 호러 로맨스 인데 좀 가벼운걸 쓰고 싶기도 해요. 가벼운 에로틱 코미디 로맨스...음...로맨스가 다 들어가는데...? 둘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현대 호러 로맨스 판타지 에로틱 코메디 로맨스. 00153 7. 저주를 푸는 법 =========================================================================                            로웨나는 힐끔 케이트를 살폈다. 예쁘장한 빨간 머리 여자였다. 여자다. 그녀는 재차 케이트가 여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좀 더 문을 열고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케이트는 그녀에게 의자를 권했다. 사제가 차를 들고 나타나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희 밭에서 재배한 찻잎이랍니다.” 감사합니다. 케이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찻잔을 입술에 댔다. 큐바인 하우스에서 실라가 마시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맛이다. 그녀는 몰랐지만 이 신전에서 재배하는 찻잎은 애호가들에게 상당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반면 로웨나는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삶에 희망을 잃은 그녀의 눈에 차가 들어올 리가 없다. “마녀를 쫓고 있다고요?” 케이트는 차를 마시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로웨나는 급한 마음에 사교계의 예절도 잊고 매달리듯 다시 물었다. “그, 마녀를 잡을 수 있나요?” “잡는다는 건,” “당연히 그 괴물을 죽여 버리는 거죠!” 로웨나가 흥분하면서 테이블 위에 몸을 기댄 탓에 테이블이 덜컹거렸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자신의 잔을 들어 올렸지만 로웨나의 잔은 차가 넘쳐 흘러내렸다. “잡으려고 하고 있어요.” “당신이?” 네가 어떻게 마녀를 잡을 수 있냐는 뉘앙스였다. 케이트는 서둘러 덧붙였다. “수사관이요. 같이 온 수사관이 마녀를 잡으려 하고 있어요.” 로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수상하다는 듯 케이트를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수사관의 조수인가요?” “네. 비슷해요.” 정확히 말하면 수사관의 집주인이지만. 케이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수사관의 조수나, 수사관의 집주인이나.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그 괴물을 잡으면 내 저주가 풀릴까요?” 그건 케이트도 모른다. 케이트는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저주를 풀 수 없었나요?” “없으니까 아직 여기 있지!” 느닷없이 튀어나온 날카로운 목소리에 케이트는 깜짝 놀랐다. 로웨나는 멍청하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아직 여기에 숨어있는 걸 보면 모르겠어요?” 날카로운 태도가 이런 힘든 상황에서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과연. 케이트는 그녀에 대해 불평이 많았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이런 성격이라면 주변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는 게 힘들었을 것이다. “왜 신전으로 온 건데요?” 케이트 역시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했다. 그녀는 로웨나의 얼굴에서 망설이는 기색을 읽고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렇잖아요. 단순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이유라면 집에서 나오지 않는 게 더 좋은 방법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왜 집을 나와서 신전으로 온 거죠?” “별장으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마부를 고용해야 해서,” “그건 알아요.” 케이트는 다시 겁에 질리려는 로웨나를 다독이며 말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일부러 집을 나온 이유예요. 호건가와 결혼하는 게 그 정도로 싫었어요?” 로웨나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케이트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입술이 떨려서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케이트가 말했다. “당신 방에서 카드를 발견했어요.” “내 방을 뒤졌다고?” “당신의 아버지가 사라진 당신을 찾아달라고 수사관에게 요청했어요.” 그래서 당신의 방도 뒤졌던 거예요. 케이트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로웨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벨링스 자작은 조사 의뢰를 철회했으니까. 케이트의 가슴이 죄책감으로 짓눌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망나니와 결혼하는 게 싫기도 했지만,” 가까스로 로웨나가 입을 열었다. “밤마다 마녀가 꿈에 나타나서 날 조롱했어요.” 언제부터 마녀가 나타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로웨나에게 반한 남자들이 늘어났을 때쯤 그녀의 꿈에 마녀가 나타났다. 밤새도록 마녀는 로웨나를 보며 비웃거나 쉰 목소리로 저주를 퍼붓거나 했다. 매일 나타난 건 아니었다. 이틀에 한 번, 삼 일에 한 번. 처음엔 악몽이겠거니 했던 로웨나도 꿈에서 마녀에게 목이 졸린 후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자신의 목에 선명하게 남은 손자국을 보고 경악했다. 그건 더이상 단순한 악몽이 아니었다. “집에 있다간 마녀가 날 죽일지도 몰라요.” 케이트는 놀랐지만 티 내지 않았다. 마녀가 꿈에 나타난 것까지는 심적으로 고통받은 나머지 나쁜 꿈을 꾼 거라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꿈에서 졸린 목에 마녀의 손자국이 남아있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마녀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걸까. 케이트는 곰곰이 생각했지만 마녀의 저주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었다. 기껏 해봐야 어린 시절 밤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어른들이 만들어 낸 괴담이 전부다. 문득 케이트의 머릿속에 저주를 받은 건 로웨나 뿐이 아니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반한 남자들도 어떻게 보면 저주에 걸린 게 아닌가. “그럼, 당신에게 반한 남자들은요? 그들의 꿈에도 마녀가 나올까요?” 케이트의 물음에 로웨나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말했다. “무슨 상관이예요? 그 남자들은 결혼을 하면 풀리잖아요.” “결혼 상대를 찾지 못하면요?” 그거야말로 내 알 바 아니다. 로웨나는 이를 갈며 말했다. “그 멍청이들을 풀어 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긴 하더군요.” “뭔데요?” 로웨나는 케이트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뭘 잘못했나? 당황하는 케이트에게 그녀가 말했다. “마녀를 잡으려 한다면서 당신은 마녀나 나보다 그 남자들에게 더 관심이 많군요.” 다시 까다로운 로웨나로 돌아왔다. 케이트는 당황해서 다른 질문을 던졌다. “당신 방에서 발견한 오르골 말인데요. 거기서 마법을 사용한 흔적이 발견됐어요. 혹시 그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나요?” “마법.” 로웨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내가 저주에 걸렸다고 마녀가 됐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건 아니다. 케이트는 질문을 돌렸다. “그럼, 그 오르골을 어디서 산 건가요.” “난 오르골 따위는 사지 않아요.” 그런 건 어린아이들이나 좋아하는 것이다. 로웨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선물 받은 거예요. 어느 멍청이에게.” “그 사람 이름도 기억하나요?” 어렴풋이 기억한다. 로웨나는 생각나는 이름 몇 개를 던져줬다. === “내려가면 저녁 식사 시간이겠군.” 산에서 내려가는 마차 안에서 이안이 중얼거렸다. 케이트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그는 우선 로웨나가 말한 이름의 주인을 찾아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판단했다. 오르골이 로웨나가 말한 대로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은 거라면, 선물을 준 사람이 마법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내일 찾아간다고 전령을 보낼까요?” 로웨나가 말해준 이름 중에는 귀족도 있다. 방문예고도 없이 들이닥쳐도 문전박대하지 않는 건 로엔가 정도일 것이다. 손님이 이안일 경에만. 케이트가 언제 방문한다고 해야 할지 시간을 계산하는 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이안이 불쑥 말했다. “저녁 먹고 가지.” “저녁이요?” 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기는 하다. 하지만 저녁을 먹고 간다니, 어디서? 어리둥절해 하는 케이트의 의견도 묻지 않고 이안은 마차 천장을 손으로 툭툭 치더니 식당 이름을 말했다. “어, 진짜 밖에서 저녁을 먹고 가자는 거였어요?” “그럼 어디서 먹을 생각이었지?” 으음. 케이트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킬리언씨나, 타운 하우스에서 초대한 줄 알았어요.” “너는 제이드나 내 어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고 싶은 건가?” “그건 아니지만요. 아, 그렇다고 킬리언씨나 백작부인과 식사하는 게 싫다는 말은 아니예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다시 물었다. “식사를 하고 싶다는 건가, 안 하고 싶다는 건가?” “그러니까 내 말은, 그 두 분과 식사하는 걸 좋아하니까 같이 식사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고요.” “안 해도 된다고? 그럼 왜 물어본 거지?” 그야. 케이트는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그야, 댁이 같이 식사할 만한 사람은 어머니 아니면 하나뿐인 친구밖에 없으니까. 라고 말하기엔 케이트는 예의를 아는 여자였다. 케이트가 말이 없자 이안은 더 묻기를 포기했다.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녀가 벨링스 영애를 노린 이유가 뭘까. 그건 아마도 벨링스 자작가에서 쫓겨난 하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벨링스 자작가에서 쫓겨난 하녀의 복수를 한 걸까. 하지만 왜 마녀가 그 하녀의 복수를 해준 거지? 이안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머리가 복잡하기로는 케이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이안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안이 선택한 식당에 들어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말이 없었다. 식당은 이안과 케이트 둘 다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앤이 일하는 식당이었던 것이다. 제이드와 함께 몇 번 식사하러 왔던 이안은 메뉴판을 보고 인상을 썼다. 내가 먹었던 게 뭐였지? 그가 왔을 때는 항상 제이드가 주문했다. “여기서 먹은 것 중에 맛있었던 게 뭐였어요?” 먼저 말을 꺼낸 건 케이트였다. 그녀는 메뉴판을 진지하게 몇 번이나 정독하는 이안을 보고 뭐가 문제인지 눈치챘다. “아무 거나 좋다.” “그럼 난 소고기로 먹을래요. 당신도 그럴래요?”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케이트는 능숙하게 메뉴판을 살폈다. 문맹률이 높은 뮈엘라답게 메뉴판은 그림이 크고 글씨는 작았다. 하지만 그림은 어디까지나 그림. 실제 음식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케이트는 그림과 메뉴의 이름으로 어떤 요리인지 파악하고 능숙하게 주문했다. 주방장 특선 스프에 통 계피 안심 스테이크와 데친 아스파라거스. 마늘을 문질러 재운 소고기에 흰 빵. 이안은 직원이 케이트의 주문을 받고 떠나려 하자 그를 불러 말했다. “와인도 가져오게.” 응?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안, 와인은 왜요?” “술, 못 마시나?” “한, 두 잔 정도는….” 케이트는 알라나데일에서 집사가 술 저장고에서 훔쳐낸 술을 다른 사용인들끼리 다시 훔쳐서 마신 적도 있다. 마을 축제 때도 와인 한잔 정도는 했으니 전혀 못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훔쳐 마셔도 모를 정도로 비싸지 않은 술이었다. 그리고 이런 식당에서 파는 와인은 꽤 고급일 게 분명했다. “그럼 됐잖나.” “오늘 무슨 날인가요?” “아무 날도 아닌데,” “그럼 어째서 술까지 시킨 건데요?” 케이트의 질문에 이안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네가 데이트를 하고 싶어 했잖아.” ============================ 작품 후기 ============================ 어제 다른걸 쓰려고 한다고 했더니 다들 대동단결하여 에로를 원하시던데. 여러분, 진정하세요. 검은소야곡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게 제 에로씬의 한계예요. 내일 회사에 일이 있어서 못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내일은 기대하지 마시고. 가능하면 11시전까지 올릴게요. 11시 지나면 아, 회사에 잡아먹혔구나. 라고 생각해 주세요. 흑흑... 00154 8. 카티야 =========================================================================                            어라. 그제야 케이트는 식당의 태도를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이유를 알았다. 식당에 들어올 때 이안이 자신의 이름을 댔던 것이다. 지배인은 이안의 이름을 듣더니 장부를 살펴보고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시간이 될 줄 알고 식당을 예약한 거예요?” “그래.” “당신이 식당을 예약했다고요?” 상상이 안 되는 장면에 케이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안은 직원이 가져온 와인의 상태를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케이트는 그게 그녀를 향한 건지, 직원을 향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직원이 알겠다며 떠난 걸로 보아 직원에게 한 행동일 거라 판단했다. “어, 우리가 언제 도착할 줄 알고 예약한 거예요?” 식당 안은 손님으로 가득했다. 이렇게 인기 있는 식당이라면 예약을 시간당으로 받을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이안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시간은 말 안 했다.” “시간을 정하지 않고 예약했다고요? 그게 가능해요?” 아예 하루 종일 테이블 하나를 통째로 예약한다거나, 식당을 통째로 예약하는 부자가 있다고는 들은 적 있다. 하지만 이안이 그렇게까지 했을까? 케이트의 의문을 풀어주는 것처럼 이안이 대답했다. “모른다. 내가 한 게 아니니까. 제이드가 대신해줬어.” 바로 이어서 음식이 나왔다. 케이트는 더 묻지 않고 식기를 집었다. 제이드의 능력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다. 앤을 이 식당에 자리를 잡아준 것도 제이드니까. 식당 주인과 무슨 관계가 있거나 그렇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두 사람은 직원이 잔에 따라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이안은 제이드의 누나가 큰 양조장으로 시집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잊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지금 마시고 있는 와인이 제이드의 누나 가게에서 납품한 상품이라는 걸 몰랐다. “이안, 미안한데. 좀 빨리 먹고 돌아가도 될까요?” 잘 익은 스테이크를 자르던 케이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식당에 마음에 안 드나?” “그게 아니라, 집에 데이지양이 혼자 있잖아요.” 이안은 그게 뭐? 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고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저녁 식사는 알아서 한다고는 하지만 환자인 데이지를 혼자 두고 식사를 한다는 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그녀의 설명에 이안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코트양에게 부탁해 놨다.”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이안이 이렇게 사려 깊은 남자였어? 하지만 그녀의 놀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제이드가 그렇게 하라고 하더군.” 그럼 그렇지. 이안이 그렇게 사려 깊을 리가 없다. 이제 와선 실망할 것도 없어서 케이트는 얌전히 식사를 시작했다. 이안은 원래 그런 남자고 그녀가 데이트를 하고 싶어한다는 이유로 - 제이드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 자체가 괄목할 발전이다. “백작부인은 잘 계시죠?” 긴 정적 끝에 케이트가 입을 열었다. 이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왜 실라의 안부를 그에게 묻는 거지? 때때로 그를 만난 사람들이 그에게 형 아르고나 어머니 실라의 안부를 물어볼 때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왜 묻는 거지?” “네? 그야, 당신 어머니니까요?” “내 어머니라서 내게 묻는 다는 건가? 그럼 어머니께는 내 안부를 물을 건가?” “어, 백작부인이 저보다 당신을 더 자주 만난다면, 그렇죠.” 흠. 이안은 고개를 갸웃해 보이고 입 안에 음식을 넣은 뒤 천천히 씹었다. 그는 입 안의 음식이 전부 넘어간 다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이 내 어머니의 안부를 내게 묻는 건, 나보다 내 어머니를 덜 만났기 때문이라는 건가?” “보통은요. 아무래도 당신은 백작부인과 주기적으로 연락을 할 테니까요. 어제도 백작부인께서 편지를 보내신 걸로 아는데요. 그렇지 않나요?”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그는 그녀가 실라의 안부가 정말 궁금해서 물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타인의 안부가 정말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예의상 묻는다고 알고 있다. 묘한 감정이 생겼다. 그녀는 그를 낳은 여자를 궁금해 하지 않는 걸까? 아카데미에서 그에게 그를 낳은 여자를 궁금해 한 사람은 많았다. 심지어 제이드 조차도 궁금해 했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는 물어보지 않는 걸까. “너는 내 친모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군.” 와인을 마시던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사레가 들렸는지 콜록콜록 하더니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조용히 물었다. “내가 물어봤으면 좋겠어요?” “별로 상관없다. 지금까지 언급하지 않은 건 너뿐이라 궁금한 것뿐이지.” 식당 안은 조근조근한 대화 소리로 적당히 시끄러웠고 적당히 조용했다. 케이트는 와인 잔을 들고 식당 안을 살폈다.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에 빠져 있어 케이트와 이안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잔에 든 것을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물어봐도 돼요?” “아니.” 잠시 케이트의 귀에 식당 안의 소음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 남자가 지금 뭐하는 거야? “나랑 장난해요?” “물어봐도 별로 할 이야기가 없어. 그뿐이다.” “어떻게 생긴 분이었어요?” “잘 기억 안 난다.” 거짓말이다. 이안은 또렷하게 그녀를 떠올릴 수 있다. 갈색의 머리카락과 갈색의 눈동자. 객관적으로도 예쁘장한 얼굴이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아이에게 자신의 어머니는 세계 최고의 미녀지만, 이안을 낳은 여자는 꽤 예쁘장한 여자였다. 그러니 로엔 백작을 유혹할 수 있었겠지. “병으로, 돌아가신 거였어요?” “그래.” 케이트의 어머니와 같다. 그녀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의 친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묻지 못한 건 그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처럼 호박색 눈동자였어요?” “아니, 흔한 갈색이었지.” 거기서 케이트는 기억나지 않는다던 이안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 눈동자는 그럼, 아버지를 닮은 거군요.” 이안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 눈동자 말이에요. 호박색이잖아요. 그런데 어머니는 갈색이면 아버지를 닮은 거 아니에요?” “그럼 네 빨간 머리는 아버지를 닮은 건가.” 그건 아니다. 케이트는 잠시 의기소침해서 입을 다물었다. 빨간 머리는 마녀의 증표. 뮈엘라에는 그런 말이 있다. 몇십 년 전에나 나돌던 이야기라 지금은 덜하지만 시골에서 살던 때에 그런 말을 들었었다. 반면 그녀의 아버지는 갈색 머리카락이었다. 이안 말을 빌자면 흔한 갈색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갈색이었다. 윤기 흐르는 갈색 말의 갈기처럼 멋지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처럼 갈색이었어도 좋았을 것 같아요.” 정적을 깨고 케이트가 먼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안은 손안에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물었다. “내 눈이?” “내 머리카락이요!” “아아. 무슨 소린가 했다. 내 아버지는 검은 눈이었지.”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이요?” “그래. 못, 넌 못 봤겠군.” 못 봤냐고 물으려던 이안은 타운 하우스에 전 로엔백작의 초상화가 한 점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말을 고쳤다. 전 로엔백작이 죽고 그의 형 아르고가 로엔백작이 되자 실라는 남편의 초상화를 본가를 제외하고 전부 치우라 명했던 것이다. 전 로엔 백작은 그의 아내를 존중했지만, 사랑한 건 아니었다. 그건 실라도 마찬가지였지만. 전 로엔백작이 사랑한 건 아마 자기 자신뿐이었을 것이다. 그는 살면서 많은 애인을 두었지만, 그걸로 집 안팎을 시끄럽게 만들지는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실라가 남편의 행위를 무시로 일관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사업 실패로 재정적으로 크게 곤란에 처했을 때 실라가 자신의 재산으로 백작가를 지탱했기 때문이었다. 사랑하지는 않지만, 아들을 낳아준 부인이 재정적으로 곤란한 로엔백작가를 되살려 주기까지 했으니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게 몸이 약한 실라의 눈에 단 한 명의 백작의 정부도 보이지 않은 이유였다. “날 싫어했지.” “누가요?” “내 아버지.” 그래서 전 로엔 백작은 처음 이안이 로엔백작가의 저택에 나타났을 때 약간의 돈을 쥐어 주고 쫓아내려 했다. 그게 그로서는 최소한의 부인에 대한 존중이었다. 하지만 운이 나쁘게도 그가 어린 이안을 쫓아내려는 장면을 실라가 발견했고, 마음씨 착한 백작부인은 남편의 사생아를 받아들였다. 아니, 그때 실라가 유산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백작부인께서 보시니 그런 척하신 게 아닐까요?” 순진한 케이트의 질문은 이안에게 미소를 이끌어 냈다. 그는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그래. 그렇다고 해두지.” 갓 여섯 살의 어린 아들을 계단에서 떨어트리거나, 펜으로 눈을 찌르려 했던 이야기는 그녀에게 숨기도록 하자. 이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그 당시에도 실라에게 말하지 않았고 이 사실을 아는 건 전 로엔 백작과 그. 그리고 지금은 은퇴해서 고향으로 돌아간 전 로엔백작의 종자뿐이다. 전 로엔백작은 자신의 눈에 보였다는 이유로 이안의 뺨을 때리는, 그런 남자였다. 반면 아르고에게는 약간 거리감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아버지처럼 굴었다. 이안이 서자로 로엔백작가에 받아졌을 때 아르고는 이미 열 살이었고 네 살이나 어린 남동생을 괴롭히기에 충분한 힘과 머리를 가진 나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런 심한 차별에 동화하지 않고 어머니처럼 이안을 감쌌다는 점에서 열 살의 아르고는 훌륭한 인격을 가진 소년이었다. 심지어 막 아카데미에 입학한 상태였던 소년은 기숙사에 있었지만 새로 생긴 동생과 병약한 어머니를 위해 주말마다 집으로 돌아왔다. 반면 열 살이 되어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안은 주말에 집으로 돌아오는 게 허락되지 않았다. 전 로엔백작은 방학 때 이외엔 돌아오지 말라 했으나 실라의 요청에 한 달에 한 번으로 제한했고, 아르고는 그렇다면 자신도 한 달에 한 번만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실라의 재산과 그녀의 언니가 왕의 동생과 결혼했다는 사실 때문에 전 로엔백작은 실리와 아르고에게는 항상 한 발짝 물러나는 형세를 취하곤 했다. ============================ 작품 후기 ============================ 음, 4부 슬슬 끝나갑니다. 4부 끝도 좀 애매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어요. 00155 8. 카티야 =========================================================================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케이트는 서둘러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당신 어머니께서 당신을 백작가에 보내주신 거잖아요. 자기 아들을 떼어내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만큼 당신을 아끼셨다는 뜻 아닐까요?” “내 어머니? 날 낳은 여자 말인가?” “아, 네.” “그녀가 날 로엔백작가로 보내줬다고 생각하는 건가?” 물론이다. 그렇지 않으면 고작 다섯 살짜리 소년이 어떻게 백작가를 찾아올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실라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이안이 십 대를 다 지날 때까지 이안의 친모가 죽었다는 것도 몰랐다. “날 낳아준 여자가 보낸 게 아니야.” 이안의 말에 케이트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런 누가 보냈다는 말이지? “어머니 쪽 형제가 있었나요?” “내 기억엔 없는 걸로 아는데.” “그럼 누가 보내줬는데요?” 이안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음식을 먹는 것도 잊고 앉아있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에바니엘의 고층거리보다 조금 더 나은 곳이었다. 임신한 상태로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아둔 돈이 바닥난 여자가 갓난아이를 데리고 집시들이 사는 촌락으로 흘러들어 간 것이다. 집시는 일정한 주거 없이 이리저리 이동하며 사는 자들을 일컫는다. 결국 여자와 갓 태어난 이안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화가, 마녀, 광대였다. 사람들은 이안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들은 이안을 피하거나 싫어했다. 이안을 낳은 여자는 이안을 사랑한 게 아니라 전 로엔백작의 씨가 갖고 싶었던 것뿐이었기 때문에 이안을 돌보지 않았다. 그녀는 이안의 얼굴을 보며 입버릇처럼 말했다. 눈동자도 검은색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내가 찾아갔지. 대충 어느 지방인지는 들었으니까.” 이안의 친모가 죽자 집시들은 이안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어차피 집시가 머무는 촌락은 여기저기 떠도는 그들이 잠시 머무는 장소에 불과하다. 잠시 이안에게 호의적인 사람이 있어도 그들은 곧 사라져 버린다. 그의 기억에 의하면 일부는 소년을 전염병 보듯 피했고, 일부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광대만이 간혹 이안과 놀아주거나 먹을 것을 줬다.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몰랐다. 어린아이에 가까웠던 소년은 차라리 아버지라고 알고 있는 남자를 찾아가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면, 서자로 인정해 줄 거라는 기대는커녕 서자라는 개념도 없었지.” 이안은 와인 잔 입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귀족은 사생아가 찾아가면 돈을 좀 쥐여 보낸다는 말을 들었다. 그뿐이었다.” 케이트는 잠시 그 당시 이안의 나이가 몇 살일지 생각했다. 다섯 살? 네 살? 고작 그 나이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그 정도로 불운한 유년시절을 보낸 것을 동정해야 할지, 그 정도로 영리했다는 점에 놀라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잠깐, 그럼 그렇게 어린 나이에 백작가를 찾아간 거예요? 어떻게?” 걸어서? 이안이 어린 시절 산 곳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다섯 살짜리 아이의 걸음으로는 마을을 가로지르는 것조차 며칠이 걸릴 것이다. “처음엔 마차에 숨어들었다. 지금 생각엔 어느 상인이었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내가 살던 곳이 바닷가라 생선을 소금에 절여서 가져가던 상인이 아닌가 싶다.” 짜고 비린 소금에 절인 생선의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생생했다. 이안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무표정인 것 같으면서 슬픈 것도 같았다. 생각에 잠긴 것도 같았고, 평안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잔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을 감쌌다. “며칠쯤 가다가 들켜서, 들켰는데 어느 용병이 도와줬지.” 들켜서 맞았다는 말은 뺐다. 케이트의 표정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이안은 계속 듣고 싶냐고 물었고,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용병이 나를 로엔백작가의 영지로 데려가 준다고 하더군.” 그걸 믿었다. 용병이 착해서가 아니라 어린 나이에도 이안은 용병이 백작가의 사생아를 데려다 주고 입막음 조로 돈을 받으려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환경이 불운할수록 거기서 자라는 아이의 눈치가 빨라진다. 좀 더 영악해진다. 그래서 어린 이안은 용병과 자신의 목적이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아버지로부터 돈을 받는 것. “며칠이 지나고 황야에서 밤을 지내야 했는데 그 용병이 나를 죽이려 했지.” “당신을 요? 왜요?” “모른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하지만 이안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성인이 되고 성인의 뒷골목을 알게 되면서 이안은 어린아이에게 흥분하는 변태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도 케이트에게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몰랐으면 좋겠다. 그는 문득 로즈마리를 순진한 채로 두는 에드워드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부지깽이로 찌르고 달아났다. 한밤중에 황야를 헤맸지.” 용병은 죽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에 와서야 이안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후 생각해 본 적 없다. 그가 어떻게 됐는지.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해도 그다지 속이 시원하지는 않았다. “호, 혼자서요?” 이안의 손을 감싼 작은 손의 힘이 강해졌다. 그는 케이트의 손을 한번 쳐다보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예쁘장한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지나가던 여행객이 도와줬다.”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 밤에 여행객이 혼자 황야를 지나간다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웠지만, 그녀는 어린 이안을 보듬어 안고 함께 황야를 지나가 주었다. 그녀역시 마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 와서 이안의 뇌리에 떠올랐다. 마녀가 아니고서야 그 밤에 황야를 혼자 지나갈 리가 없으니까. 다행이다.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이안은 다시 케이트를 쳐다봤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안은 그대로 몸을 내밀었다. “엇, 잠깐, 뭐하는 거예요?” 입술을 닿을 찰나에 케이트가 그의 얼굴을 밀어내며 속삭였다. 다행히 이쪽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어 아직 이런 부도덕한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다. 이안은 약간 물러나서 말했다. “키스해달라는 줄 알았다.” 이건 또 무슨 멍멍이 소리야? 케이트는 눈물이 나던 것도 잊고 눈을 부릅뜬 채 속삭였다. “내가 언제요?” “내 손을 만지작거렸잖나.” 확하고 케이트의 얼굴이 붉어졌다. 조금 이안에게로 기울었던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그럼 그렇지. 케이트는 투덜거리며 이안에게서 손을 뗐다. 아니, 떼려고 했다. “이거 놔줘요.” “잠깐만.” 이번에는 이안이 그녀의 손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케이트는 누가 볼까 싶어 주변을 살폈다. 식당에서 손을 너무 오래 잡고 있는 것도 그리 좋지 않다. 그리고 그녀 생각에 최소한 십분 넘게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가 불안해 질 때쯤 이안이 손을 놓아 주었다. 디저트를 먹을 생각도 사라진 상태라 케이트는 디저트를 주문하겠냐는 직원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집에 가고 싶어요.” 문 앞에서 직원이 코트를 가지고 돌아왔다. 마차를 잡아오지. 이안이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가자 열린 문 사이로 잠깐 차가운 바람이 들이쳤다. 케이트는 멍하니 서서 이안의 이야기를 곱씹고 있었다. 불운한 어린 시절. 그의 어린 시절에 비하면 케이트는 천국이었다. 가난하긴 했지만,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다. 춥고 배고팠지만 두려움에 떨었던 적은 없었다.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그녀의 부모님이 돌아올 거라고, 그녀를 찾으러 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케이트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밤의 황야를 헤매는 어린 이안.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다시 한 번 문이 열렸는지 차가운 바람이 들이쳤다. 접수원이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십시오, 레인포레스트경.” “안에 있소?” “네.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키가 훤칠한 청년은 고풍스러운 말투를 쓰며 케이트를 지나가려 했다. 그는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케이트를 쳐다봤다. 붉은 머리카락, 하얀 피부. 그리고 푸른색의 눈동자. “카티야?” 생각에 잠겨있던 케이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안만큼이나 키가 큰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젊은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낯익었다. “카티야, 맞느냐?” 남자가 덤벼들 것처럼 말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양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푸른색의 머리카락이 넘실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청록색의 눈동자. 뾰족한 귀.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에, 에녹 아저씨?” “맞구나!” 순식간에 에녹이 케이트를 끌어안았다. 세상에! 케이트도 반가운 마음에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아저씨! 여긴 어떻게, 아니, 어떻게 지내셨, 아니, 잠깐.”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은 에녹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허리를 숙인 채 케이트를 쳐다보며 두서없이 말했다. “하나도 안 변했구나. 네 어미를 똑 닮았어! 그래, 어떻게 지냈느냐? 베스는, 그녀는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그때 자리를 안내하겠다던 직원이 에녹이 따라오지 않자 당황해서 다시 돌아왔다. “레인포레스트경,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일행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제야 에녹은 자신이 약속이 있어 이 식당에 왔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가 일행에게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 하려 했을 때였다. 케이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전 큐바인 하우스에 있어요. 큐바인 거리요. 시간 나실 때 언제든지 오세요.” “뭐? 너 지금 이곳에 있느냐?” “네. 아저씨는 어디에 계세요?” 에녹이 대답하려 할 때 안에서 남자가 나타났다.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남자는 에녹과 케이트, 안내 직원을 번갈아 쳐다보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다 에녹에게 물었다. “레인포레스트경, 무슨 일이십니까?” 이래서야 일행을 버려두고 케이트와 이야기를 하러 가긴 다 틀렸다. 에녹은 남자에게 손을 들어 보이고 케이트에게 말했다. “큐바인 거리의 큐바인 하우스라고 했느냐?” “네. 꼭 오세요.” “그래. 내 조만간 찾아가마.” 에녹이 다시 한 번 케이트를 끌어안았다. 케이트 역시 팔을 그의 목에 감았다. 어린 시절엔 까치발을 해야 했는데 이제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아는 여성분입니까?”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에녹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푸른 머리카락의 엘프는 청년의 외모에 어울리지 않은 고풍스러운 말투로 흐뭇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 대녀일세.”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번 주 내내 회사에 일이 좀 있어서 바쁘네요. 이번주에 하루정도는 업뎃을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00156 8. 카티야 =========================================================================                            큐바인 하우스의 일 층에는 데이지와 제인의 방이 있다. 사용인의 방은 지하나 지붕 밑이 일반적이지만 케이트는 지하에서 살아봤기 때문에 그곳의 단점을 잘 알고 있었고 아직 소년인 제인을 지하로 내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집은 일 층에 두 명 정도의 사용인이 지낼 수 있는 방이 있다. 데이지의 방은 주방과 가까워서 따듯했다. 조세핀은 데이지의 식사를 도울 겸 그녀의 방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식사를 마친 데이지가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손이 불편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조세핀의 도움 없이 식사를 끝낼 수 있었다. “괜찮아요. 나도 적적하던 참이니까.” 조세핀은 사람 좋게 말하며 데이지의 식사와 자신의 식사를 담았던 접시를 치웠다. 그녀는 따듯한 차까지 가져와 데이지의 손에 쥐여주었다. “감사합니다.” “따듯한 차를 마시는 게 잠자는 데 도움을 준다네요.” 그렇군요. 데이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찻잔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조세핀 역시 데이지의 침대 옆에 앉아 멍하니 찻잔을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느닷없이 데이지가 물었다. 조세핀은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얼굴이 별로 안 좋아 보여서요. 무슨 고민이 있으신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조세핀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렇지 않아도 걱정이 가득하던 상황이었다. “슬럼프같은 거예요.” “슬럼프요?” “슬럼프가 뭐냐면, 그러니까 하던 일이 갑자기 잘 안될 때가 있죠? 그런 거예요.” 아, 그렇구나. 데이지는 천진한 표정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아가씨는 아는 게 많으시군요.” “아니예요.” 놀람으로 가득 찼던 조세핀의 얼굴에 어딘지 부끄러운 듯한, 기쁜 듯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뮈엘라는 지식을 경시 여긴다. 아는 게 많은 걸 대단하다고 여기기보다는 잘난척한다고 오해받기에 십상인 나라다. 그녀는 살면서 아는 게 많다고 이렇게 천진하고 순수한 감탄을 받은 적이 없다. 그녀의 부모는 못생긴 게 아는 척까지 하니 남자들이 싫어한다고 핀잔했다.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조세핀은 내심 그녀가 남자들에게 인기 없는 게 부모의 말대로 못생긴 데다가 아는 척까지 해서가 아닐까 하고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결국 조세핀은 대외적으로 수줍음을 타고 재미없으며 동생에 비해 못생기기까지 한 노처녀로 전락해 버렸다. “아는 게 많은 건 아무 쓸모 없어요.” 죽은 사람을 비난하거나 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조세핀의 여동생은 이기적인 데다가 뮈엘라 기준으로 봐도 멍청한 축에 속했다. 한 번은 동생의 이기적인 행동에 진력난 조세핀이 네 매력은 백치미라고 빈정거리자 백치미가 뭐냐고 되물어본 전적도 있다. 빈정거리기나 말싸움도 어느 정도 상대가 응수할 수 있어야 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에이미는 조세핀의 빈정거림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십 대가 지나면서 그 사실을 깨달은 조세핀은 에이미를 빈정거리거나 미워하기보다는 거기에 악의가 없음을 깨닫고 순응했다. “예쁜 게 좋죠.” 조세핀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남자들의 구혼이 끊이질 않던 에이미를 떠올리며 조용히 말했다. 제이드 역시 에이미와 약혼하지 않았던가. 물론 집안끼리 말이 오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제이드와 에이미의 약혼이 결정된 것은 조세핀에게도 큰 상처였다. “예쁜 게 좋아요?” 데이지는 조세핀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조세핀은 여전히 자신의 찻잔을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그렇잖아요. 뮈엘라에서 여자는 미모가 전부고 남자는 전투능력이 전부죠.” “하지만 아가씨, 미모는 그 미모를 지키지 못하는 환경에서는 독이랍니다. 장미에 가시가 없다면 어땠겠어요?” 데이지의 위로도 조세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예뻤다면, 죽은 에이미의 반만이라도 예뻤다면 제이드는, 거기까지 생각한 조세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헛된 꿈이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에이미의 반만이라도 예뻤다면 킬리언가에서 혼사를 꺼낸 게 에이미가 아니라 그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에이미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에이미가 죽지 않았으면 해서 제이드와의 약혼을 원하는 게 아니다. 조세핀의 가슴이 따끔따끔해져 왔다. “상관없어요. 한 번이라도 좋으니 미모가 독이 될 정도로 아름다워 봤으면 좋겠어요.” === 이안과 케이트는 로웨나와 만나고 온 다음 날부터 그녀가 이야기 한 오르골을 보낼 만한 사람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오르골에 마법이 걸려있었으니 그건 마법 아티팩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마법 아티팩트는 어떤 마법이 걸려있으며 어디서 구했는지 조사해야 하는 게 이안의 일이다. 하지만 로웨나가 불러준 사람의 명단을 거의 다 지워갈 때까지도 로웨나에게 오르골을 보내준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오르골에 마법이 걸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잖아요.” 미리 약속을 잡지 못해 만나지 못한 명단의 몇 명을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오며 케이트가 말했다. 차가운 날씨에도 이집저집 전전하느라 그녀의 코끝이 빨갰다. 거기에 손을 대고 눌러보려던 이안은 그녀가 호 하고 두 손을 비비며 입김을 불자 시선을 그녀의 손으로 떨어트렸다. “춥나?” 보면 모르냐? 그런 시선으로 케이트가 그를 쳐다보자 이안이 헛기침을 하더니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케이트의 작은 손이 그의 두 손안에 쏙 들어갔다.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지.” “그럼 어떻게 찾아요?” “일단은 오르골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도 중요하다.” 손을 뺄까 했지만 얼어붙었던 손끝이 사르르 녹는 게 느껴져 케이트는 그대로 있기로 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어째서요?” “마법 아티팩트라는 걸 몰랐다가 아니라 그런 물건을 가진 적이 없다 라는 말이 되니까.” 여전히 모르겠다. 케이트의 표정에서 그것을 읽은 이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오르골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는 어떻게 해서든 찾아내게 될 거다. 사람이 하는 일에 완전무결하게 증거가 없을 수는 없으니까. 그럼 오르골을 보낸 사람을 찾았을 때 제일 먼저 물어볼 게 뭐라고 생각하나?” “어, 어디서 구했는지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런데 마법 아티팩트인 걸 몰랐다. 라고 한다면 오르골을 산 가게를 제외하고 이 사람에게 물어볼 수 있는 게 없을 거다. 하지만 자신이 보내지 않았다고 했다면 처음부터 거짓말을 한 게 되지.” 거짓말을 했으니 그걸로 추궁할 빌미가 생긴다.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 이안은 단순히 오르골을 보낸 범인을 찾는 것뿐 아니라 그 범인을 조사할 방법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그런 대화를 나누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훈훈한 공기가 집 안에 가득 차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제인이 문을 잡은 채 인사를 건넸다. 최소한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에게 하는 인사와 예의는 확실하게 갖췄다. “별일 없었니?” 케이트는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펴며 물었다. 이어서 그녀는 장갑과 목도리를 벗어 현관 옆 겉옷 보관장에 걸었다. 제인이 씩 웃으며 물었다. “편지랑 선물 빼고요?” 반사적으로 케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부터 케이트가 호건가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편지니 선물이니 하는 것들을 보내고 있다. 전달하는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언제 방문해도 되는지 물었고 케이트는 그 모든 요청을 거절하고 있었다. “선물은 거절하라고 했잖니.” “다 거절했는데 한 개는 그냥 두고 갔더라고요.” 곤란한데. 케이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선물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제인은 이안의 코트까지 겉옷 보관장에 건 뒤 부리나케 달려가 케이트에게 온 선물상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거예요.” 선물 상자는 예상보다 작고 가벼웠다. 구혼자들이 보내는 선물은 인형이거나 보석인 경우가 많아서 부피가 크거나 무겁거나 둘 중 하나다. “뭐지?” 상자를 살핀 케이트는 제인이 이 선물만 돌려보내지 못한 이유를 알았다. 상자 겉에 보내는 사람 이름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통 편지나 소포에는 긴 숫자가 나열되어 있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여기엔 아랫부분에만 숫자가 쓰여 있고 윗부분은 도형이 그려져 있었다. 원 안의 육각별. 낯익은 도형이다. 어디서 봤지? 갸우뚱하고 기억을 떠올리던 케이트는 곧 그것이 어디에서 본 건지 떠올렸다. 데이지와 함께 마녀를 만날 때 데이지가 벽에 그렸던 도형이다. “어, 이건 내가 알아서 할게.” 케이트의 가슴이 달음 박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상자를 손에 쥐고 계단을 올라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풀었다. 솔직히 말하면 상자를 여는 순간 펑! 하고 마녀가 등장하는 것까지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자에 들어있는 건 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조각이었다. 이건 뭐지? 케이트는 손가락 두 개만으로 조심스럽게 조각을 집어 들어 올렸다. 동그란 눈과 수염까지 솜씨 좋게 표현한 쥐 모양이었다. ============================ 작품 후기 ============================ 이번 달까지 회사가 너무 바빠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내일, 내일 모레 이틀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어떻게든 이틀간 한 편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흑흑흑... 퇴근 하고 싶어요... 00157 8. 카티야 =========================================================================                            케이트가 호건가의 사람이라는 소문이 에스메랄다의 귀에 들린 것은 에바니엘의 귀족이 전부 알게된 다음이었다. 에스메랄다가 케이트가 호건가의 사람이라는 걸 모를 리 없으니 그 소문이 그녀의 귀에 들어왔다는 건 에바니엘의 귀족들이 케이트의 존재를 알았다는 걸 그녀가 알게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본래 소문이라는 건 당사자의 귀에 가장 늦게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에스메랄다의 귀에 에바니엘 귀족들이 케이트가 호건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온 것은 꽤 빠르다 할 수 있다. 다과회에서 그 소문을 이야기 하던 눈치 없는 남작부인은 특성을 적절히 살려 에스메랄다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닫지 못하고 떠들어 대다가 옆에 앉은 자작부인이 옆구리를 쿡찌르자 어머! 하고 소리까지 내 지른 다음에야 입을 다물었다. 고 계집애가 골치아파지기 전에 처리했어야 했다. 에스메랄다는 속상한 마음에 짜증을 내며 집으로 돌아왔다. 자기 방 응접실에 앉은 그녀에게 하녀가 따듯한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가, “내가 지금 뜨거운 차를 마실 기분처럼 생겼어?” 핀잔을 받고 뜨거운 차를 뒤집어 쓸까 싶어 부리나케 도망쳤다. 이년이나 저년이나 마음에 안들기는 매한가지다. 에스메랄다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소파에 몸을 기대려다 벌떡 일어났다. 마음편히 퍼질러 있을 때가 아니다. 그러게 고 빨간머리 계집애를 잡았어야 했다. 저 녀석만 아니었으면! 에스메랄다는 씩씩거리며 문을 벌컥 열고 복도로 나갔다. 차가운 물을 가지고 오던 하녀가 어머나! 하고 놀라서 물러섰다. 그 덕에 물이 하녀에게 쏟아졌지만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차라리 하녀에게는 다행인 일이다. 물이 에스메랄다에게 닿았다면 지금 상태로 보아 뺨 한두대로는 끝나지 않았을테니까. “제프리!” 에스메랄다는 노크도 없이 제프리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녀의 아들은 자신의 방 응접실 소파에 늘어져서 술을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차라리 다른 귀족 자제들과 어울려 도박을 하러 다닐때가 나았다. 그녀는 무기력한 아들의 모습에 속에 열불이 차올랐다. “당장 일어나지 못해?” 에스메랄다의 고함에도 제프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슬쩍 들어 어머니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다시 축 쳐졌다. 이런 한심한 놈을 봤다. 에스메랄다는 쿵쾅거리며 안으로 들어가 아들의 등을 찰싹 소리나도록 때렸다. “아, 아파요!” “당장 가서 그 빨간머리 계집애를 데려와!” “빨간머리요?” “아, 걔 있잖아! 캐서린인가, 캐시인가 하는애! 당장 걔 데려와서 결혼 해!” 또 그소리다. 제프리는 짜증난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케이트가 호건가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게 된 뒤부터 에스메랄다는 제프리에게 당장 그녀를 데려와 결혼하라고 성화였다. 하지만 제프리는 그럴수 없었다. 그는 만나고 말았던 것이다. 운명의 상대. 그의 소울메이트를. “로웨나랑 결혼시켜 주면요.” 제프리의 말에 에스메랄다는 다시 한 번 아들의 등을 철썩 때렸다. 멍청한 소리다. 뮈엘라는 법적으로 일부일처다. 두번째 부인부터는 법적으로 인정이 안된다는 말이다. 법적으로 인정이 안되면 케이트 몫으로 재산을 나눠줘야 한다. 에스메랄다는 숨을 고르고 아들을 부드럽게 얼렀다. “일단 그 빨간 머리 계집애랑 결혼하면 시켜주마.” 제프리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에스메랄다를 보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거짓말.” 로웨나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전장을 휩쓸던 무사였다. 그러니 그 울컥하는 성격에도 그를 존경하고 친한 지인들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딸을 첩으로 내줄리 없다. 아들의 태도에 에스메랄다의 복장이 뒤집어 졌다. 그녀는 다시 한번 아들의 등에 철썩하고 손바닥을 내리쳤다. === 케이트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꽃밭에 서 있었다. 어머, 여기가 어디지?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면 케이트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향기가 나지 않았다. 부드러운 꽃의 감촉이 맨발에 느껴지는데 향기만은 아무 향도 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시야 저편에 티 테이블이 보였다. 티 테이블의 의자에는 후드를 눌러쓴 여자가 앉아있었다. “어서와.” 익숙한 목소리. 케이트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보다가 그녀가 마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마 전 데이지의 도움으로 만났던 나이든 마녀였다. 그녀가 케이트를 향해 손을 뻗자 그녀의 맞은편에 케이트가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생겼다. “이건 제 꿈인가요?” 의자를 내려다보며 케이트가 물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하던 때였다. 향기는 없는 꽃밭 위에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녀와 앉아있다니, 꿈이 아니고서야 가능할 리 없다. “그래.” 마녀는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잠깐 솜씨를 부려봤지.” “그런 마법도 있나요?” “다른 사람의 꿈에 들어가는 마법도 있지. 매개체가 필요하지만.” 마녀의 말에 케이트는 그 날 받은 소포를 떠올렸다. 원 안에 육망성. 그 안에서 나온 건 훌륭한 솜씨로 조각한 쥐 조각이었다. “쥐 조각이요?” 마녀는 다시 한 번 웃었다. “밤하면 쥐잖아.” 어, 그런가. 케이트는 잠시 고민했다. 확실히 쥐가 밤에 자주 출몰하기는 하지만 수리하기 전의 큐바인 하우스는 낮에도 쥐가 돌아다니는 소리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그게 제 꿈에 들어올 수 있게 도와주는 건가요?” “그래. 누군가의 꿈에 들어가고 싶다면 그 사람 주변에 매개체가 있어야 하지.” 그렇다면. 케이트는 로웨나의 방에서 발견한 오르골을 떠올렸다. 이안이 만졌을 때 어떤 마법인지는 몰라도 마법이 실패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했다. “그 매개체가 조각이 아니어도 상관없나요? 예를 들면, 오르골 같은거요.” 케이트의 질문에 마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상한 아이다. 마녀로서의 능력을 깨닫고 도와달라고 연락한 줄 알았는데 매개체에 대한 질문만 계속하고 있다. 그녀가 자신을 수상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은 케이트는 당황해서 손을 흔들며 변명했다. “아, 저, 사실은 마녀에게 시달리는 꿈을 꿨다는 사람을 알아서요. 그녀도 오르골을 받았다고 했거든요.” “마녀에게 시달리는 꿈을 꿨다고?” “꿈에서 마녀가 괴롭히다가 종래에는 목을 졸랐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목에 흔적이 남아있더래요.” 흠. 마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뮈엘라의 마녀는 배척받고 숨어 살지만 개중에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를 마법을 이용해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거나 의뢰를 받고 괴롭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뮈엘라에서 마녀는 존재부터가 불법이니 꼬리를 밟히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을 해야 한다. “질이 나쁜 마녀에게 걸린 모양이구나.” “그럼 그게 사실인가요? 마녀가 누군가의 꿈에 나타나서 괴롭힐 수도 있다는 게?” “내가 지금 네 꿈속에 들어와 있잖니?” 지금 마녀의 행동도 상당한 위험 부담을 안고 하는 행동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는 케이트가 마녀라는 것을 확인했다. 한 배를 탄 이상 자신을 신고하지는 않을 거라는 그런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행동이기도 했다.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는 거죠?” 케이트의 질문에 마녀는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마녀에 대한 소문이 있잖니? 예쁜 아가씨를 질투해서 저주를 내린다거나, 어린 아이의 심장을 먹는다거나. 그런 것들 말이야.” 케이트의 얼굴이 핼쑥해 졌다. 어린 시절, 그녀도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냐고 물어볼 때마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저 소문일 뿐이라고 그녀를 다독이곤 했다. 게다가 에바니엘에 와서 만난 마녀는 심장을 빼앗는 마녀를 제외하곤 전부 좋은 사람들이었다. 로즈마리, 데이지. 하지만 눈앞의 마녀도 좋은 사람이라는 보장이 없다. 그녀는 침착하려 애쓰며 물었다. “당신도 어린아이의 심장을 먹나요?” 마녀는 바로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후드에 가려져 케이트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그건 아주 나쁜, 아주 나쁜 마녀의 짓이란다.” “나쁜 마녀요?” “사람이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마나를 모을 수 있는 기관이 심장이란다. 그걸 먹으면 자신의 능력이 더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로즈마리에게 들은 이야기다. 케이트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물었다. “그럼 그게 사실이라는 건가요?” 능력을 올리기 위해서 타인의 심장을 빼앗는 마녀가 진짜로 있냐는 의미로 물어본 거였지만 마녀는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 “제약이 있지만 가능하지.” “제약이요?” “타인의 마나를 자신의 것으로 하는 게 그렇게 쉽다면 심장을 노리는 마녀가 꽤 많을 것 아니니? 타인의 마나를 내 것으로 하려면 조건이 있단다.” “무슨 조건이요?” 마녀가 머뭇거리더니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다시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너는 이상한 아이구나.” 케이트가 고개를 들었다. 마녀는 손을 휘둘렀다. 꽃밭이었던 주변이 순식간에 어둠으로 변했다. “보통은 자기 자신에 대해 더 궁금해 하는데 말야.” 자신이 마녀라는 걸 알게 된 아이들은 그녀를 만나면 이제 어떻게 되는지,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묻곤 했다. 그녀는 신입 마녀를 발견하고 도와주는데 도가 튼 마녀였지만 이 빨간 머리 여자만큼은 예상과 달랐다. “제가 마녀라면,” “너는 마녀야.” 가정을 확신으로 바꾸는 마녀의 말에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고쳤다. “마녀니까 마녀에 대해 좀 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네 말도 일리가 있지. 하지만 기억해 두렴. 나쁜 마녀는 그렇지 않아도 위험한 우리 마녀세계를 위협하는 존재란다. 그리고 우린 나쁜 마녀를 환영하지 않아.” 예상 밖의 반응에 케이트는 조금 놀랐다. 뮈엘라는 마녀를 배척한다. 시골에서 마녀라는 확신이 드는 여자는 치안관을 부르기도 전에 사람들이 죽여 버리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마녀끼리는 서로 돕고 살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쁜 마녀는 환영하지 않는다니. 예상 밖이다. “나쁜 마녀는 어떤 마녀인데요?” “뮈엘라에 혼란을 가져오는 자.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는 자.” 마녀들을 배척하는 뮈엘라인데도 그런 뮈엘라에 혼란을 가져오는 마녀는 나쁜 마녀라고 하다니, 애국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한 케이트는 문득 그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마녀가 뮈엘라를 혼란하게 한다면 마녀에 대한 적대심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몇 십 년 전 일어났던 마녀사냥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 뮈엘라에 혼란을 가져오지 않는 것은 뮈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뮈엘라에서 무사히 살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최근에 사람들의 심장을 빼앗는 마녀가 있는데, 알고 있나요?” 케이트가 물었다. 마녀는 두 손을 티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말했다. “그래. 알고 있어.” “어째서 나쁜 마녀를 환영하지 않는 다면서 그 마녀는 그냥 두시는 거죠?” “나쁜 마녀를 잡기 위해 우리의 정체를 드러내는 건 너무 위험하니까.” “하지만 그 마녀는 사람의 심장을 빼앗았잖아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지 모르잖아요?” “아가, 그 마녀가 아무나 노린 건 아니란다.” 아무나 노린 건 아니라고?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케이트는 눈을 깜빡였다. 피해자는 농부의 딸, 상인, 고층거리의 매춘부 등 전혀 연관성이 없는 여자들이었다. 마녀는 케이트를 보고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말했다. “아까 타인의 마나를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선 조건이 있다고 했지?” 케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녀는 계속해서 말했다. “타인의 마나를 받는 대신 타인의 소원을 하나 들어줘야 한단다.” “소원이요?” “그래. 가져갈 마나의 양이 많다면 그만큼 들어줘야 할 소원도 커지지.” “그렇다면 최근에 심장을 훔쳐간 마녀도 죽은 사람의 소원을 들어줬다는 건가요?” 마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줬거나 들어주려 애쓰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녀가 가져간 마나의 양과 비례해서 큰 피해가 돌아올 테니까. 마녀의 세계에서는 이것을 등가교환이라고 말한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실 올릴까 말까 고민을 했는데 목, 금 이틀 중에 한 편은 꼭 올리겠다고 지난화에 말씀드려서... 오타등등은 주말에 수정하겠습니다. 00158 8. 카티야 =========================================================================                            문득 케이트는 냄새뿐 아니라 바람의 흐름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냄새가 나지 않을 뿐 아니라 바람도 불지 않았다. 꿈이라서 그런 걸까. 그녀는 마녀를 향해 다시 물었다. “당신의 말은 마녀가 죽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마나가 많았다는 뜻인가요?” 마녀가 테이블 위로 손가락을 톡톡 규칙적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그래.” “그걸 그 마녀가 알 수 있었다는 말이군요?” 질문이 많은 아이다. 마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빨간 머리가 마녀가 아니었다면 이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냥 마녀기만 했더라도 그녀를 만나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보기에 케이트의 마력은 보잘것없었다. 약하고 흐릿해서 스스로 마녀들을 찾지 않았다면 마녀들은 그녀가 마녀라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마녀들이 몰랐을 정도니 에바니엘에 곳곳에 걸려있는 안티매직 구역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정도로 약한 마력은 뮈엘라에서 흔하다. 뮈엘라가 마법사의 나라였기 때문에 마법사의 피는 다른 나라보다 뮈엘라에 많이 퍼져있었다. 고위 귀족은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마법사의 나라인 뮈엘라를 전사의 나라인 뮈엘라로 바꾸면서 그 사실을 은폐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뮈엘라에 마법사의 시대가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했고 그렇기 때문에 마법사 말살정책을 펼쳤지만, 백성의 대부분이 마법사의 피가 흐르는 나라에서 모든 마법사를 말살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뮈엘라에서 색출해 내는 마법사는 일정이상의 힘을 가진 자들이다. 현재의 케이트라면 평생 그 선에 걸릴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케이트를 찾아온 이유는, 그녀를 마녀라고 못 박아 준 이유는 그녀의 출생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호건가의 상속녀. 다른 사람이었다면 무시되었을 테지만 호건가의 상속녀가 아주 미약하나마 마녀라는 사실은 숨어 사는 마녀들의 사회에 작은 희망이 되었다. 저 호건가에 마녀가 있다면 마녀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마녀들은 케이트와 접촉하기로 결정했다. “아가, 나쁜 마녀가 노리는 건 일정이상의 마력을 가진 여자들일 거란다. 한 방울의 물을 모아서 언제 컵을 채우겠니? 최소한 한 모금은 되어야 하지 않겠니?” “당신 말은, 죽은 여자들이 전부 저처럼 마녀라는 뜻인가요?” 흠. 마녀는 케이트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래.” 충격은 바람이 없는 이곳에 돌풍처럼 몰려왔다. 케이트는 눈을 부릅뜨고 마녀를 쳐다봤다. 마녀가 죽인 여자들. 그 모든 여자가 전부 마녀였다는 것이다. 그 여자들은 뮈엘라 전체에 흩어져 사는게 아니라 오직 에바니엘에서 살고 있었다. 마녀라는 건 아주 적은 소수가 아니었나? 뮈엘라에서 마녀는 이단아, 돌연변이. 그런 것들이 아니었나? 마녀는 케이트의 충격을 이해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마녀 역시 십몇 년 전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이 거짓이라는 충격. 그 모든 것을 은폐한 정부에 대한 배신감. 박탈감. 자신이 불공평하게 박해받고 있었다는 억울함. “마녀가 그렇게 많은 건가요? 저는 소수라 알고 있었는데요?” “잠깐만 진정하렴, 아가.” 마녀는 손을 들어 흥분해서 달려들려는 케이트를 멈추게 한 뒤 말했다. “내가 천천히 전부 알려줄 거란다. 그러니 진정하렴. 오늘은 그저, 네가 마녀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을 알려주러 왔을 뿐이야.” 전부 알려준다고 했다. 그 말이 케이트를 진정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떨어졌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였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사실이 전부 무너져 내린 기분이 들었다. 마녀는 케이트가 진정한 것처럼 보이자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엔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꾸나.” “만나자고요?” 불안한 기색이 케이트의 목소리에 묻어나왔다. 지금은 꿈이고 옆방에 이안이 있으니 겁도 없이 이것저것 물어본 것이지만 직접 만나는 건 말이 다르다. “그래, 네게 알려줄 것이 많아.” 마녀가 보기에 케이트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이 정도 능력의 마녀는 평생 자신이 마녀인 것을 모르고 살기 때문에 그게 당연하기도 했다. 그녀 역시 케이트가 호건가가 아니었다면 그냥 내버려 뒀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트는 스스로 마녀를 찾아왔다. 그녀는 마녀들의 구원자가 될지도 모른다.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를 이야기하려는 순간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 케이트는 갈라지기 시작하는 검은 공간을 둘러보며 당황을 금치 못했다. 무슨 일이지? 재빨리 마녀를 쳐다봤지만, 그녀 역시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무슨?” 마녀가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케이트는 몸이 뒤로 튕겨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헉하고 숨을 들이켠 다음 순간, 그녀는 자신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어?” 꿈에서 깼다. 벌떡 일어난 케이트는 그녀가 꿈에서 깼다는 것을 알았다. 곧이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케이트.” 똑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이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깨워서 잠에서 깬 거구나. 케이트는 어렴풋이 그 사실을 이해했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힌다. 그녀는 절묘한 순간에 자신을 깨운 이안이 얄미웠다. 그러면서 동시에 고마웠다. 마녀가 직접 만나자고 할 줄은 몰랐다. 직접 만나도 될지 안 될지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안이 그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케이트는 부랴부랴 가운을 걸치고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설마 이번에도 어느 집에 숨어들자고 깨우는 건 아니겠지? “잠깐만요.” 이안은 다시 문을 두드리려다가 문이 벌컥 열리는 탓에 아슬아슬하게 케이트의 이마에 부딪힐 뻔한 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그는 문득 예전 일이 떠올라 케이트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무슨 일 있어요?” 케이트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안에게 다가가려다 그가 상의를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해서 뒤로 물러났다. 적어도 지난번처럼 어딜 가자는 건 아닌 모양이군. 그녀는 억지로 시선을 이안의 얼굴에 고정하며 다시 물었다. “이안?” 이안은 말없이 케이트가 잡은 문을 열더니 열린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케이트의 방 안을 살폈다. 마치 그 안에 뭔가 있지 않느냐는 듯한 태도였다. 당황해서 한 발짝 물러난 케이트는 이안의 행동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한밤중에 사람을 깨우더니 왜 깨웠는지 말도 하지 않고 남의 방 안을 살핀다는 건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다. 그녀는 문을 잡은 이안의 팔을 찰싹 때렸다. “뭐하는 거예요?” 단단한 팔에 가볍게 빨간 자국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이안은 문 뒤까지 꼼꼼히 살핀 뒤에야 케이트를 쳐다보고 말했다. “무슨 일 없었나?” “무슨 일이요?” 무슨 일인지 콕 집어서 말하기가 어렵다. 그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때때로 그는 그럴 때가 있다. 남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뭔가를 느낄 때. 그걸 케이트에게 설명하기란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냥 무시하고 갈 수도 없다. 다른 사람이라면 나와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안은 케이트를 빤히 쳐다봤다. 초록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마법을 사용했다거나.” 초록색 눈동자가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자 그는 자신이 정곡을 찔렀다는 것을 알았다. 이 여자는 거짓말을 못 한다. 그는 침착하게 물었다. “뭐였지?” “뭐, 뭐가요?” “마법 말이다.” “마법 사용한 적 없어요.” 목소리 끝이 약간 떨리긴 했지만 케이트는 눈을 피하지 않는 것에는 성공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그녀가 마법을 쓴 게 아니니까.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게 케이트의 눈에는 마치 어린 시절 그녀가 어떤 잘못을 했을 때 자, 어서 시인하렴. 이라고 말하던 아버지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젠장.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렸다. “그런 표정 싫어요.” “무슨 표정?” “지금 그거요.” 이안의 손이 케이트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가 약간 젖어있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지금 표정이 무슨 표정인지, 왜 싫은지 모르겠다.” “아버지를 생각나게 해요.” 다시 한 번,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난 네 아버지가 아니야.” “나도 당신 같은 아버지는 사절이거든요?” 아, 그래?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불길한 기분에 케이트가 물러나려 했지만 어느샌가 그의 다른 쪽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그거 다행이군.” 입술이, 얼굴이 다가왔다. “자, 잠깐.” 아슬아슬한 순간, 케이트가 손을 들어 이안의 입을 막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너무 가까워서 잠옷 천 밖으로 느껴지는 이안의 맨살이 뜨거웠다. “이거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뻔뻔하게도 이안은 그랬나? 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당당한 것도 능력이다. 케이트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이거 희롱이예요.” “이게?” 손바닥에 닿은 입술의 움직임이 간지러웠다. 케이트는 재빨리 손을 떼고 허리를 감은 그의 팔을 찰싹 내리쳤다. “한밤중에 갑자기 사람을 깨워서 이러는데 그럼, 희롱이 아니면 뭐예요?” 그래? 이안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물었다. “그럼 낮에 안 잘 때 하면 되나?” 아니, 그런 말이 아니다. 이 남자랑은 말이 안 통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고 이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용건 없으면 가서 자요. 내일 가봐야 할 곳이 있어요.” “명단 말인가?” 로웨나가 불러준 사람을 적은 명단을 말하는 것이다. 케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 말고요.” 이안이 팔에 힘을 풀자 빠져나온 케이트는 씩 웃으며 이안을 밀고 문을 닫았다. 문을 닫기 전에 틈 사이로 보인 초록색 눈동자가 속삭였다. 잘 자요. ============================ 작품 후기 ============================ 이번 표지는 로네안님께서 선물해 주신 팬아트 입니다. 감사합니다. 일주일 정도 유지 됩니다. 4부도 거의 끝나갑니다. 사실 좀 더 길어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제가 구상한 4부 마지막 장면까지 얼마 안남아서 다행이네요. 4부 끝나면 잠깐 다른 이야기를 쓰고 오겠습니다. 다른이야기는 아마 6월 말이나 7월 초에 시작할것 같고요. 뮈엘라 5부는 이 다른 이야기 끝난 다음에 다시 이어집니다. 4부는 음, 이번주 안에 끝날것 같아요. 다음주에 외전이 한 편정도. 하나 한회분량으로 끝날것 같아요. 00159 8. 카티야 =========================================================================                            “오르골 말입니까?” 아침에 찾아온 제이드는 옷을 갖춰 입고 나가려던 케이트와 이안을 만났다. 그는 이안을 만나러 왔다가 혹시 시간 있느냐는 케이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에 올라탔다. “벨링스영애에게 온 선물 말이예요. 우리는 그녀의 구혼자가 보낸 거라고 생각해서 구혼자 명단을 찾고 있었잖아요?” 케이트의 설명에 이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드는 손을 모으고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었다. “오르골은 그렇게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잖아요? 적어도 어느 정도 지급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말이 되고요.” 그런 판단하에 어제 이안과 케이트도 귀족이나 부자를 찾아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 직접 선물을 가져다줄까요?” 어. 케이트의 지적에 제이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말이 맞다. 구혼자들은 선물을 직접 보내지 않는다. 시종을 시키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시종을 시켰다면 구혼자가 시킨 걸 테니 시종도 알 거 아닙니까?” “음, 여기부터가 제가 킬리언씨께 여쭤보고 싶은 거였는데요.” 케이트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킬리언씨는 친구분들께 선물을 많이 보내보셨죠?” 그 완곡한 표현에 제이드는 씨익 웃었다. 친구라는 건 여자 친구를 말하는 거겠지. 구혼은 아니라 해도 호감 있는 여성에게 선물을 보내보지 않았느냐는 뜻이다. 그는 부인도 긍정도 아닌 상태에서 씩 웃었다. “그, 선물을 보내실 때 전부 시종을 시키셨나요?” 이제 케이트가 무슨 의도로 질문하는지 알겠다.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시종을 시킬 필요 없이 큰 가게라면 직접 배달해 주기도 합니다. 배달비를 추가로 받지만요.”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유나 치즈를 살 때도 많은 양을 사면 그냥 배달해 주지만 약간의 돈을 두면 심부름꾼이 배달해 주기도 한다. 그녀는 선물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르골을 파는 가게에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벨링스 자작가에 오르골을 배달해 준 적이 있는가. 하고 하지만 케이트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어떤 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어제 그녀에게 배달된 마녀의 매개체로부터 시작됐다. “만약 가게에서 배달을 부탁할 사정이 있다면요?” “사정이요?” “그러니까, 음, 직접 주려고 샀는데 직접 줄 수가 없다면요? 시종을 시킬 수 없다면요?” 그런 상황이 있으려나? 제이드는 머리를 갸웃하며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예전에 아는 녀석이 음, 그러니까 배우자가 있는 여성과 교제한 적이 있었는데요.” 거기까지 말한 제이드는 이안과 케이트의 시선을 보고 손을 저으며 부인했다. “아, 제 얘긴 아닙니다. 전 유부녀는 안 건드려요.” 그러시겠지. 이안은 무시했고 케이트는 알겠으니 계속 이야기하라고 재촉했다. 제이드는 진짠데. 하고 중얼거리다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게에 바로 배달을 부탁하면 혹시라도 그 남편이 받았을 때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물어볼 수가 있잖습니까? 그래서 우체국을 이용한다더군요.” “그거예요!” 케이트는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고 이안은 진심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뮈엘라에서 불륜이 큰 죄인 건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이야기를 저렇게 반색하는 건 케이트답지 않았다. 물론 그녀는 불륜을 반색한 게 아니었다. 케이트는 엉거주춤 일어서서 마차 천장을 두드렸다. “우체국으로 갈 거예요.” 하지만 그녀의 힘이 약해 마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안이 대신 천장을 두드리고 외쳤다. “우체국으로!” 사실 이안은 에바니엘에 우체국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우체국을 사용해 본 적이 없으며 많은 귀족이 그러할 것이다. 파티 초청장을 돌릴 때 그 많은 집에 하인이 일일이 다닐 수 없으니 가깝거나 중요한 집만 하인이 가고 나머지는 우체국에 맡겨버린다. 그때 초청장을 우체국으로 가지고 가서 맡기는 것도 시종의 일이다. 적어도 에바니엘에서 하인을 해본 적 없는 이안이 우체국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건 당연했다. 반면 우체국에 몇 번 온 적 있는 제이드는 두 사람을 이끌고 척척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저기를 살피는 두 사람과 달리 안쪽으로 향하던 그는 익숙한 얼굴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리코?”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동그란 얼굴 위에 올라간 빵을 연상케 하는 외모. 리코가 우체국에 있었다. 그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제이드를 보고 반색하다가 그 뒤를 따라오는 이안과 케이트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이드? 이안? 어쩐 일이야?” “너는 어쩐 일이야?” 제이드의 질문에 리코가 직원을 한 번 쳐다봤다. 그의 앞에 앉은 직원이 소포를 받아 들고 있었다. “오전에 일이 있다더니 이거였어?” 며칠 전부터 제이드는 리코와 파트너가 되어 사건을 수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가 잠깐 일이 있어 늦을 거라는 전갈을 보냈던 것이다. 그 덕에 시간이 남아 이안을 보러 간 거지만. 제이드의 질문에 리코는 씩 웃어 보였다. “보내실 물건이 파손 위험이 있나요?” 직원의 질문에 리코가 대답했다. “아니요. 곰 인형입니다.” “곰 인혀엉?” 제이드가 이죽대기 시작했다. “누구한테 보내는 거야? 이 사람 큰일 낼 사람이네. 그 엄청난 미인을 두고.” “부인한테 보내는 거야.” “부인한테? 직접 전해주지 않고?” “가끔은 예전처럼 이런 소포를 받는 즐거움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 다정한 말에 케이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결혼한 부인에게 구혼을 받던 시절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 소포를 보낸다는 말이다. 공처가가 따로 없다. 제이드는 푸핫 웃으며 리코의 옆구리를 찔렀다. “보내시는 분 성함과 반송될 경우 받을 주소도 말씀해 주세요.” “반송받을 주소는 궁정 수사관실로 해주시고요.” 직원이 소포 위에 숫자를 쓰기 시작했다. “보내는 사람은,” 리코가 머뭇거렸다. 그는 제이드와 이안을 힐끔 쳐다보더니 직원을 향해 속삭였다. “당신의 포로.” “푸하하하하하하하!” 안타깝게도 리코의 말은 뒤에 선 세 명에게 들려버렸다. 제이드는 폭소를 터트렸고 리코의 귀까지 빨개졌다. 케이트마저 얼굴을 붉혔다. 직원은 가볍게 기침을 하더니 소포 위에 적었다. 여기서 아무렇지도 않은 건 이안뿐이었다. “양심도 없다. 그걸 우편배달부보고 읽으라고 이러는 거야?” 제이드가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뮈엘라에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적으니 우편배달부가 읽어주는 수밖에 없다. 문득 케이트는 우편배달부가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건가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아, 아냐. 내 아내, 글 읽을 줄 알아.” “오, 정말? 이야, 그런 미인이 똑똑하기까지 하단 말야?” 제이드의 감탄에 리코는 그게 아니라, 하고 가볍게 말했다. “말하고 듣질 못하니까. 글을 읽고 쓰는 걸 배우는 수밖에 없지.” 엇. 하고 한순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런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는 듯 리코가 껄껄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생각해 봐라. 그런 미인에 똑똑한 여자가 말도 잘하면 이 세상 여자들 억울해서 살 수 있겠어?” 다행히 분위기가 밝아졌다. 화제도 바꿀 겸 그 틈을 타서 케이트가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우체국에서 일하는 사람은 전부 글을 읽을 줄 아나요?” “아, 아닙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반 정도예요. 그것도 간단한 단어 정도고 유창하게 읽는 사람만 세면 몇 명 안 돼요.” “그럼 우편물의 주소는 어떻게 확인하시나요?” “아, 그거라면.” 직원은 접수하던 리코의 소포를 보여줬다. 소포 윗면에는 숫자가 길게 쓰여 있었는데 한 줄은 왼쪽 위에, 한 줄은 오른쪽 아래에 써져 있었다. “이게 주소랍니다.” “이 숫자가요?” “네. 여기 1이라고 쓴 것 보이시죠?” 직원이 아랫 쪽에 쓴 숫자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에바니엘을 뜻하는 거예요. 뮈엘라는 모든 도시와 마을에 숫자를 부여했거든요.” 그녀는 다음 숫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도시를 이루는 구역에 부여한 숫자, 그다음은 그 구역을 이루는 거리에 부여한 숫자. 암호 같던 긴 숫자들의 이유가 밝혀졌다. 사실 그건 뮈엘라가 마법사의 나라이던 시절부터 사용되던 방법이긴 했다. “그럼 숫자를 알면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있다는 뜻이네요?” “네, 그렇죠.” 이거다. 케이트는 이안과 제이드에게 웃어 보이고 직원에게 다시 물었다. “얼마 전에 여기서 배송한 소포 말인데요. 반송받기로 한 주소를 알 수 있을까요?” 직원의 눈동자에 의심이 깃들었다. 그녀는 방어적인 태도로 물었다. “죄송하지만 그런 정보를 함부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재빨리 제이드가 나섰다. 그는 수사관 신분증을 내보이며 말했다. “왕궁 수사관 제이드 킬리언입니다. 수사를 하는 중이니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사라고요? 무슨 수사인데요?” 제이드는 직원에게 몸을 기울이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수사내용은 기밀이지만 특별히 말씀해 드리지요. 어디 가서 이야기하시면 안 됩니다.” 직원이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드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살인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증거를 찾고 있는 중인데 여기서 배송된 소포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아서요.” 살인사건이 발생한 건 맞지만, 그 증거가 우체국의 소포와 관련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제이드는 그 증거를 찾는 중이라고 했으니 나중에 누가 물어보면 소포가 증거가 아니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그 약은 태도에 리코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제, 어디로 배달된 건지 알고 계십니까?” 직원의 질문에 다시 케이트가 나섰다. “날짜는 정확히 모르지만 한 달에서 보름정도 되었고, 발송된 곳은 벨링스 자작가예요.” “벨링스 자작가면 꽤 많은데요.” “배달된 건 오르골이예요.”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네 사람에게 손짓해 보이며 말했다. “한 번 찾아보죠. 따라오세요.” ============================ 작품 후기 ============================ 여러분 내일 투표하고 노세요~ 전 부재자라 투표를 미리 해서 그냥 놀겠습니다. 하하하하. 4부는 한편 남았습니다. 좀 길어서 두 편으로 나눌 까 하다가 걍 한 편으로 올리려고요. 내일을 빨간날로 봐야하나, 말아야 하나 모르겠는데... 어차피 한 편 남은 거 내일 올리겠습니다. 그 다음주에 외전 한편 올라가고 쉬는 사시에 잠깐 달무리 공개하겠습니다. 제가 최근에 캐나다 드라마 비튼을 보는 중이라 막 추억이 모락모락 나서요 ㅋㅋㅋㅋ 달무리는 9일에 공개로 돌리고 다른 소설 시작하면서 닫을 거예요~ 00160 8. 카티야 =========================================================================                            네 사람이 직원의 도움을 받아 로웨나에게 배달된 오르골의 반송 될 주소를 찾은 것은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수사관실로 가야하는 리코와 제이드를 보내고 두 사람은 바로 직원이 불러준 주소를 향했다. “결국 여기네요.” 케이트가 심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층거리. 이안이 없었다면 케이트 혼자 올 리가 없는 곳이다. 이안은 잠시 기억을 헤집어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이 우슬라가 죽은 채 발견되었던 장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벨링스 가에서 쫓겨난 하녀가 죽은 곳이군.” “그녀의 짓이라는 말인가요?” “설마. 그 여자는 죽었다. 내가 시체도 확인했어.” 시체라는 말에 케이트는 몸을 가볍게 떨었다. 더러운 고층거리는 쌓였던 눈이 질척이며 녹아 흙과 함께 뒤엉키는 바람에 더욱 더러워 보였다. 우슬라는 확실히 죽었다. 그렇다면. 케이트는 그녀가 발견된 장소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죽기 전에 가장 증오한 게 벨링스 영애라고 했죠.” 술집 주인 말로는 어떤 여자를 욕했다고 했다. “벨링스 영애일 가능성이 높지.” “등가교환.” “뭐라고?” 그녀의 중얼거림이 작아 이안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케이트는 입술을 한번 깨물고 다시 말했다. “타인의 마나를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심장이 필요하대요. 하지만 그냥 가져가서는 안 되고 대가를 줘야 한다더군요. 우슬라의 심장을 빼앗은 마녀에게 그녀가 바란 대가는 복수였던 것 같아요.” “그걸 어떻게 알지?” “마녀가, 설명해 줬어요.” 이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케이트의 팔을 낚아채며 물었다. “그 마녀와 만났나?” “아니, 그 마녀가 아니였어요.” “그 마녀가 아니면 누구지?” “좋은 마녀요.” “마녀에 좋은 마녀는 없어.” 케이트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선명했다. “나는요?” 차가운 바람을 뚫고 더 차가운 목소리가 이안을 향했다. “나도 나쁜 마녀예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이안은 케이트를 잡아당겼다. “다른 곳에서 이야기하지.” 그 말에 그녀는 주위를 살폈다. 낮의 고층거리는 한산하다. 아무도 없기는 하지만 저 무너진 건물에 누가 듣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어른 대부분은 곯아 떨어지고 아이들은 구걸이나 소매치기를 하러 갔을 테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케이트는 순순히 이안을 따랐다. “마녀를 어디서 어떻게 만났지?” 마차에 타자 이안의 취조아닌 취조가 시작되었다. 케이트는 입을 다물었다. “케이트.” 한숨처럼 이안이 그녀를 불렀다. “마녀는 위험해. 쉽게 믿어서는 안 돼.” “나는요? 나도 믿을 수 없어요?” 케이트의 초록색 눈동자가 끝으로 갈수록 황금색으로 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화났다는 걸 알지만 이안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너는 믿어.” “어째서요? 나도 마녀잖아요?” “쉿.” 생각보다 커진 목소리에 이안이 그녀에게 덤벼들었다. 그는 케이트를 끌어안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마차 안에 있지만, 마부에게 들릴 수 있다. 그때 케이트가 이안의 손을 꽉 물어버렸다. 이안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케이트를 내려다 봤다. 아프다는 표현은 인상을 쓰는 것뿐이었다. “어린애처럼 굴지 마.” “당신은 얼마나 어른스러워서요? 다른 마녀는 믿으면 안 된다면서요? 그럼 나는 뭔데요?” “그냥 그 마녀를 어디서 만났는지 말해.” “싫어요.” 케이트. 이안이 다시 한숨을 쉬며 타이르는 것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케이트는 그게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궤변투성이다. 다른 마녀는 전부 나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마녀인 그녀는?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 태도가 그녀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당신과 말하고 싶지 않아요.” 때때로 여자들이 이런 행동을 한다는 걸 이안은 알고 있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느냐고 주변에서 사람들이 고충을 토로하는 걸 들었다. 그때는 그냥 무시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했었는데 직접 당하고 나니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이안은 다시 한숨을 내쉬고 케이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 마녀가 널 속이는 게 아니라는 보장이 있어?” 어깨를 타고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몸을 간지럽혔다.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가 대답했다. “그냥 궁금한 걸 물어봤을 뿐이예요. 왜 마녀가 사람의 심장을 훔치는지에 대해서요.” “그 외엔, 아무것도 없어? 뭔가 한 건?” 없다. 케이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려다 자신의 어깨에 느껴지는 중량감에 입을 열어 말했다. “없어요.” “받은 것도?” 케이트의 입이 닫혔다. 있군. 이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시 말하지만 케이트는 거짓말을 못한다. “케이트.” “조각을.” “무슨 조각?” “그녀를 해치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요. 그녀는 나를 도우려고 그런 거라고요.” “너를 도우려는 건지 이용하려는 건지는 모르잖아.” “그러니까 더더욱 약속해 줘요.” 다시 한번 이안의 한숨이 케이트의 어깨에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마녀가 네게 해를 가할 것 같은 기미만 보여도 이 약속은 무효야.” “쥐 모양이요. 그걸로 제 꿈에 들어온다고 했어요.” “꿈이라고?” “벨링스 영애가 말했던 거 기억나요? 마녀가 꿈에 나타나서 자신을 괴롭힌다고요.” 벨링스 영애와 대화하고 온 케이트가 그 말을 전한 건 기억난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방법이었던 모양이예요. 내 생각엔 그 오르골이 제가 받은 쥐 조각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그 여자를 찾아간 마녀는 목을 졸랐다고 하지 않았나?” 케이트는 잠시 침묵했다. 그랬다. 목을 졸랐다는 건 꿈의 행동이 현실에서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꿈만으로 죽이는 게 가능하다면 지금쯤 이유 없이 자다 죽은 사람들이 엄청날 거예요. 내가 만난 마녀는 날 죽일 이유도 없구요.” “하지만 위험할 수 있었지.” “그러니까 날 죽일 이유가,” “그만.” 목소리에 화가 났다는 게 느껴졌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이안은 그리 감정표현이 많지 않은 남자다. 빈정거리거나 재미있어하는 건 봤지만 유쾌하게 웃거나 슬퍼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지금처럼 화를 내는 건 더더욱. 마차 안이 한동안 정적으로 가득 찼다. 케이트는 이안의 눈치를 살폈고 이안은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있었다. 달칵 이는 마차의 바퀴 소리와 말발굽 소리.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음만이 들려왔다. “저기, 이안.” “돌아가자마자 그 조각은 부숴 버릴 거다.” “하지만,” “그런 위험한 짓은 한 번으로 충분해.” “심장을 뺏는 마녀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였잖아요.” “그 기회 하나에 네 안전을 걸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 일도,” “케이트.” 이안은 케이트를 돌려 안으며 경고했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호박색 눈동자가 불그스름했다. 기백에 눌려있던 케이트의 정신이 돌아왔다. “잠깐, 걱정하게 한 건 미안하지만, 당신이 내게 이래라저래라 할 이유는 없어요.” “이유가 필요해?” “필요한 게 아니라, 없다고요.” “이유 따윈 만들면 돼.” 마차가 덜컹거리며 큐바인 하우스로 돌아가는 내내 마차 안의 실랑이는 계속됐다. 큐바인 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케이트는 씩씩거리며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당신 이유는 전부 기각이예요!” “상관없어.” 화가 나서 팔짝팔짝 뛰는 케이트와 침착한 이안의 싸움은 누가 봐도 기묘했다. 제인은 마차가 도착하는 소리에 손님이 도착했다고 알려주려고 부리나케 달려 나왔다가 두 사람의 싸움 아닌 싸움에 얼어붙었다. 열린 문을 통해 손님이 집 밖으로 걸어 나왔다. “난 당신 소유물이 아니라고요!” 벌컥 화를 내는 케이트에게 파란 머리의 청년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카티야?” 에녹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케이트의 손을 잡았다. 좋지 않았다. 케이트의 상태가 엉망이었다. 그건 그녀의 기분이나 얼굴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이윽고 그는 마차 안을 빠져나오는 커다란 검은 남자를 발견하고 인상을 썼다. “아는 자냐?” “별로 알고 싶지 않아요.” 케이트는 화가 난 상태였고 에녹은 이안과 케이트의 관계를 몰랐다. 그는 그녀를 끌어 자신의 뒤에 숨기며 말했다. “이 괴물. 감히 내 대녀에게 접근하려 하다니, 건방지구나!” 괴물? 난데없는 호칭에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당황한 건 제인과 케이트도 마찬가지였다. 케이트는 에녹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잠깐만요, 아저씨. 제가 화가 나서 그런 거예요. 이안은 괴물이 아니예요.” 그 친밀한 태도가 이안의 신경을 건드렸다. 하지만 그건 에녹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케이트를 뒤돌아보며 엄한 어조로 말했다. “어떤 관계인지는 상관없다. 이 괴물과 만나서는 안 돼!” “저, 하지만 손님. 로엔경은 이 집의 하숙인인데요?” 제인이 끼어들었다. 소년의 설명에 에녹이 인상을 쓰며 이안과 케이트와 큐바인 하우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게 무슨 소린지 아느냐?” 고풍스러운 말투에 제인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케이트를 만나러 왔다며 찾아왔을 때부터 소년은 에녹의 말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케이트는 에녹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설명했다. “여긴 제집이고, 이안은 제 하숙인이예요.” 에녹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하숙인? 저 괴물과 함께 산다는 소리인 게냐?” “어, 다른 여자 하숙생이랑 하녀가 한 명 더 있지만요.” 여자 하숙생과 하녀는 못 봤다. 두 사람 다 에녹이 오기 전에 볼일이 있어 나갔던 것이다. 에녹은 그대로 케이트를 끌고 자신의 마차를 향했다. “허락할 수 없다. 네가 남자와 동거한다니, 괴물이 아니다 하더라도 용납할 수 없어.” 케이트를 억지로 끌고 가려는 것처럼 보이자 이안이 말없이 다가왔다. 그가 케이트를 잡은 에녹의 팔을 잡으려 했을 때였다. 어느샌가 이안의 목에 검이 겨눠져 있었다. “더러운 손 치워라, 괴물.” 언제 검을 뽑았는지 행동은커녕 소리도 듣지 못했다. 엄청난 실력이다. 하지만 그보다 괴물이라는 말이 불쾌하던 차였다. 이안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가 행동하기도 전에 에녹이 다시 말했다. “나는 이 아이의 대부다. 후견인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아이는 내 허락 없이 아무 남자나 만날 수 없을 것이야.” “잠깐만요, 아저씨.” “특히나 너 같은 더러운 괴물은 더더욱 용납할 수 없다.” 에녹은 그대로 케이트를 마차에 태우고 떠났다. 어리둥절한 제인과 불쾌한 이안을 남겨두고. ============================ 작품 후기 ============================ 뮈엘라의 수사관 4부 끝났습니다. 다들 여기까지 읽으시고 뭐? 진짜? 여기서? 이 사람이 미쳤나? 하시는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아요. 하하하 변명같지만 이야기 하자면 원래 이렇게 끝낼 예정이었습니다. 중간에 생각보다 늘어지면서 양이 많아졌지만요. 3부가 원래대로라면 1부라는 이야기는 전에 했던것 같은데 에녹의 등장은 1부가 3부로 밀리면서 늦어졌습니다. 그래서 2부에 자알 찾아보시면 에녹이 한 번 등장했습니다. 혹시 돌아겨서 다시 읽어보신다 하시는 분은 2부에서 찾아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원래 제 계획은 1부 쓰고 다른걸 쓰고 다시 돌아와서 1부 쓰는 식으로 진행이 되는 거였습니다. 아마 글을 쓰시는 분들은 이해 하실텐데 한 이야기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으면 지치잖아요? 그걸 좀 환기시켜볼까 해서 생각한 방법입니다. 뮈엘라는 현재 7부정도로 예상되어 있고 4부가 끝났으니 이제 3부가 남았습니다. 5부는 다른 이야기를 쓰고 돌아오겠습니다. 여름이라 간직한 호러물을 쓰고 싶은데 저도 호러가 무서워서 약한 호러물이 될것도 같고요. 그 전에 뮈엘라 외전 한편정도 더 올릴거니 다음주까지는 같이 달려주세요. 외전은 아마 한편정도로 짧을것 같아서 어쩌면 리퀘를 받아서 한 편 정도 더 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정확한건 아니라... 안나와도 돼! 하는 분만 리퀘 달아 주세요. 외전부터는 다음주에 찾아오겠습니다. 00161 [외전] 한 겨울 밤의 꿈 =========================================================================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이 뺨에 스쳤다. 나는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칠흑 같은 어둠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눈에 어둠이 익자 사물이 희끄무레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끝없이 펼쳐진 벌판과 장막처럼 드리워진 새까만 하늘. 마치 누가 콕콕 찍어 붙여 놓은듯한 별이 하늘이라는 비단에 달려 있었다. “하늘?” 나는 깜짝 놀라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건물은커녕 마차가 지나간 흔적조차 없었다. 이게 뭐지? 이것도 마녀의 힘인 걸까. 나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거기 서서 멍하니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한 행동이 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여기 있을 리가 없다는 것만은 안다. 몽유병에 걸려서 밤에 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지만 단순히 몽유병으로 이런 황야까지 걸어올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펴 건물이나 마을의 흔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나는 땅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맙소사.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뭘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코트는 입고 있군.” 내 입 밖으로 나왔지만 내가 듣기에도 그 말은 냉소적이었다. 부츠와 코트. 속에 입은 건 다행히 잠옷이 아니라 평상복이었다. 마법일까. 모르겠다. 수 백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게 마법이라면 대체 누가 그런 걸까. 심장을 훔치는 마녀가 이런 짓을 한 게 아닐까. 생각이 거기까지 흘렀을 때 나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마녀의 소행이라면 상당히 위험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저 어둠 속에 마녀가 녹아들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두려움이 온몸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황야 끝에 매달려 있다고 생각한 별이 내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녀?” 마녀일까? 알 수 없다. 나는 도망쳐야 할지 맞서야 할지 가늠하지 못한 채 빛을 지켜봤다. 마녀가 나를 죽이려 한다면 지금 당장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무력하고, 도와줄 사람도, 지켜줄 어느 것 하나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저런 형태로 내게 접근하는지 이상했다. 희미한 빛은 조금씩 조금씩 내가 가까워지면서 사그라지고 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별이라 착각할 만큼 빛나던 것이 지금은 검은 어떤 형체를 희미하게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 형체의 존재를 내게 알리려는 것처럼 생각됐다. 마녀의 짓일까. 나는 조그마한 형체가 어린아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상을 썼다. 마녀가 아이를 이용하는 걸까? 아니면 아이의 모습으로 내게 접근하려는 걸까. 하지만 어느 쪽으로 생각해 봐도 그럴 필요가 없다. 나는 지금 당장 마녀에게 습격을 당해도 방어하지 못할 만큼 무력했다. 이 코트는 두껍기는 했지만, 마녀가 내게서 심장을 빼앗는 데 티끌만큼의 방해도 되지 못할 거라는 걸 안다. “저기,” 내가 말을 걸자 아이는 내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는 듯이 화들짝 놀랐다. 그래. 인정하자. 이 아이가 마녀가 변장한 거라면 그 마녀는 정말 연기를 잘한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눈동자는 아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고 경계로 가득 차 보였다. 어둠 속에서 그 호박색 눈동자가 떠오른 것을 보는 순간, 기이한 감각에 휩싸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아이는 마치 들개처럼 나를 노려보며 몸을 낮췄다. 천천히 발이 뒤로 밀리는 것이 보였다. “얘. 너, 괜찮니?”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이는 여섯, 일곱 살 정도. 그보다 더 어릴지도, 더 많을지도 모른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엉망인 옷은 그렇다 쳐도 아이의 몸 여기저기에 더러운 것이 묻어 있었다. “너, 혼자니? 부모님은?” 이런 어린아이가 혼자 벌판을 헤맬 리가 없다. 어딘가 가까운 곳에 아이의 일행이 있을 것이다. 아까 내가 본 그 빛은 아이가 떠난 곳에서 보인 불이었을 것이다. 그게 왜 희미해지면서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약간 억지긴 해도 그럴듯한 가설이 떠올랐다. 아이가 떠날 때는 활활 타오르던 불이 나무가 없어 조금씩 사그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완전히 꺼진 것일 테지. “일행이 어디 있니? 길 잃어버렸니?” 아이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마, 말을 못하는 걸까? 그렇다면 더더욱 큰일이다. 날이 밝을 때까지 아이를 데리고 있다가 부모를 찾아줘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나는 아이가 오들오들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낡은 신발은 한 짝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추위에 혼자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던 거지?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잠깐, 아가.” 내가 손을 내밀어 아이의 손을 잡으려 했을 때였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아이가 내 손을 탁 쳐내더니 뒤로 물러났다. 이를 드러내는 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오싹했다. “아니야, 아니야, 아가. 널 헤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어두운 황야를 혼자 헤매고 있는 어린아이가 이 정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는 건 한 가지 결론을 떠올릴 수 있다. 이 애의 일행은 산적을 만나 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이 애만 도망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저 작은 몸에 묻은 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아이를 잡아당겼다. “다쳤니? 응? 어디, 어디 피가 나는 데라도 있니?” 아이의 몸에 묻은 건 역시나 피였다. 여기저기 튄 피가 거무스름하게 묻은 채 굳어 있었다. 세상에. 이런 어린애가 칼을 맞고 여기까지 걸어왔다니, 말도 안 돼! 나는 발버둥 치는 아이를 간신히 붙잡고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어딘가 다친 곳이 있다면 지혈을 해야 한다. 이런 추위에 피를 흘리며 걸어 다닌다는 건 생명에 위협이 되기 마련이다. “이거 놔!” 어린아이답지 않을 정도로 똑 부러진 목소리가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억지로 아이의 검은 머리카락을 헤집어 상처가 없는지를 확인한 다음에야 아이를 풀어 주었다. “피는 안 흘린 것 같구나. 어디 아픈 데는 없니?” 이상하다는 표정이 아이의 얼굴에 스쳤다. 천진해야 할 그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묘한 냉정함과 어른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당신은 누구야?” “나? 나는,” 반사적으로 길을 잃었다고 하려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길을 잃었다고 대답하는 게 이 아이에게 안정감을 주지 못할 것이다. 결국, 나는 거짓말을 내뱉었다. “여, 여행자야. 여길 지나서 마을로 가려고 하고 있어.” “…혼자?” 와. 나오는 감탄을 눌러 삼키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 꼬마인 주제에 정곡을 찌를 줄 알잖아? “말은? 마차는?” “어, 음. 오는 길에 산적을 만나서 빼앗겼어.” “산적?” 어린아이의 눈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호박색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아이는 나를 빤히 보더니 다시 물었다. “날 죽일 거야?” 천진한 만큼 가슴이 내려앉을 정도로 충격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기를 반복했다. “아니, 아니야.” “정말로?” “내가 너를 왜 죽일 거라고 생각하니?” “그 남자도 날 죽이려고 했으니까.” “그 남자? 산적?” 아이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너무 많은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몸을 돌려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만, 아가야.”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아까까지만 해도 이 아이가 마녀가 변장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면서 나는 아이를 따라가며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니? 가는 길을 알고 있어?” 마음 한구석으로 이 아이는 마녀가 변장한 게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다. 나는 쉽게 아이를 따라잡아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 “아가, 잠깐만. 날 못 믿으면 혼자 가도 좋아. 하지만 이건 가져가.” 산적에게 일행을 잃었다면 나를 못 믿는 것도 당연하다. 아이치고는 경계심이 많았지만 철이 일찍 들어 그런 아이들도 가끔 본 적이 있다. 나는 부랴부랴 코트를 벗어 아이에게 내밀었다. “이거 입고 가.” 이상하게도 코트를 벗었지만 각오한 만큼 춥지는 않았다. 아이는 내 손에 들린 코트를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왜?” “왜라니? 뭐가?” “그걸 주는 대신 뭘 가져갈 건데?” 뭐 이런 애가 다 있지? 철이 일찍 든 아이를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그중 누구도 이 애만큼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거나 남을 심각하게 경계하지는 않았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코트를 든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무것도. 나는 어른이니까, 어린 너를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호박색 눈동자가 기묘한 감정으로 물드는 게 보였다. 아이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내게 다가왔다. “아가가 아니야.” “응?” “이안이야.” ============================ 작품 후기 ============================ 즐거운 휴일 보내셨나요? 이번 외전은 두편 정도 입니다. 더 길게 쓸 수 있는데 그게 딱히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 두 편 정도에서 잘랐습니다. 원래 쓰려고 한 가벼운 공포물이 처음부터 막히고 있어서 어쩌면 외전을 다른 버전으로 하나 더 쓸지도 모르겠네요. 어쨌거나 다음 이번 외전 2편은 수요일에 업뎃합니다. 표지 변경했습니다. Lapz님께서 그려주신 팬아트입니다. 감사합니다. 달무리 공개합니다. 00162 [외전] 한 겨울 밤의 꿈 =========================================================================                            어? 뭐라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발목을 타고 엉덩이와 등을 스물스물 기어 올라와 목덜미를 간질이고 사라졌다. “이안이라고?” 아이가,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덥수룩하고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 아래 호박색 눈동자가 어둠속에 선명했다. 동글동글한 얼굴형에 어린아이였지만 이안이었다. 아니, 아니면 설마. “음, 네 아버지 이름도 혹시 이안이니?”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나 해서 물었다. 귀족 남자들이 정부에게서 낳은 자식이 있는 경우가 있다 들었다. 그래서 결정된 혼인이 깨지거나 깨지진 않아도 한바탕 뒤집어졌다는 이야기는 꽤 흥미위주로 널리 퍼지곤 했다. 물론 내가 아는 그 이안에게 요만한 아이가 있다니, 믿을 수 없지만 적어도 두 번째 가설보다는 현실감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눈 앞의 작은 이안이 진짜 이안이라는 가설. “아버지?” 하지만 이안이 바보냐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저 표정도 똑같네. 이 꼬마 이안은 꼬마인 주제에 내가 아는 이안과 똑같은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 “아닐걸.” 어린아이답지 않게 냉정하게 말을 자른 이안이 몸을 휙 돌려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 이것도 이안이랑 똑같아. 부랴부랴 그 뒤를 따르면서 나는 그럴 리 없다는 생각과 그럴 수 있다는 생각 사이에서 갈등했다. 이 아이가 진짜 이안이라면. 내가 아는 이안에게 들은 그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식당에서 그는 로엔 백작가로 찾아 온 여정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 해 준 적이 있다. 황야에서 헤맨 적이 있다고 했다.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내 눈 앞에 어린 이안이 있다면 끌어안아 줬을 거라고, 보호해줬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왜 헤맸다고 했더라? 이야기를 떠올린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내 눈 앞의 이안을 살폈다. 몸에 묻은 피. 저건 그의 피가 아니었다. 그를 해치려던 용병을 찌를 때 묻은 피였던 것이다. 이렇게 작은 아이가 용병을 상대로 부지깽이로 찌르고 도망치다니. 경계심 가득했던 이유가 이해가 됐다. 아니,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과거로 왔다는 말이잖아. 그게 가능해? 아무리 마법이라 해도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나는 그럴 리 없다는 생각과 아니, 어쩌면…, 이라는 생각 사이에 망설이며 이안의 뒤를 따랐다. 음, 잠깐. 아이가 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호박색 눈동자가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너, 몇 살이니?” 이안은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오른손을 들어 손을 쫙 폈다. “다섯 살.” 아, 귀여워. 라는 생각도 잠시.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야, 이건 아니지. 무슨 다섯 살짜리가 저렇게 똑똑해? 저건 열 살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하지만 진짜로 다섯 살이라면 체격도 또래보다 크고 영리한 꼬마인 것만은 틀림없다. 게다가 그 사실은 눈앞의 이안이 진짜 내가 아는 이안이 맞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음, 저기. 이안. 네 어머니는 어디 계시니?” 꼬마는 손을 내리더니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마치 대답하기 싫다는 듯이. 그러고 보니 이것도 이안과 똑같다. “이안.” 나는 이안을 따라가며 재차 물었다. 그러고보니 이안의 어머니는 어떻게 된 걸까? 진짜 이안은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어머니가 자신을 보낸게 아니라 스스로 아버지를 찾아갔다고 말했다. “엄마가 걱정 하실 거야.” 이안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다섯 살 짜리 가 무슨 고집이 이렇게 세담? 나는 투덜거리며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어둡고 추운 황야를. 나는 그리 춥지 않았지만 입김으로 날씨가 상당히 춥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렴풋이 이게 마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때 이안의 걸음이 느려졌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인 모양이지. 벌써 별의 위치가 변한 게 보였다. 응? 잠깐만. 나는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별자리 같은 걸 읽을 줄은 모르지만 별이 이렇게나 이동했다는 건 시간이 꽤 흘렀다는 말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나는 전혀 지치지 않았다. 이것도 마법의 일종인가? 아니면 단순히 지금은 내가 이안에 비해 어른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나는 약간 우월한 느낌에 죄책감을 느끼며 이안을 불렀다. 고집스럽게도 발을 질질 끌며 앞으로 걸어가던 이안은 내가 손을 잡아 멈췄다. “좀 쉬자.” 이안이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우물우물 하는 게 보였다. 왜 그래? 내가 묻자 그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 남자가 쫓아 올 지도 몰라.” “그 남자가 누군데?” 다시 이안이 입을 다물었다. 보면 볼수록 내가 아는 이안과 똑같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이안을 안아 들었다. “누가 쫓아온다는 건지 몰라도 한참 걸어왔으니 우릴 찾기 어려울 거야. 조금만 쉬자.” 이안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할 것이다. 나는 주위를 살피다 커다란 바위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품에서 이안이 꿈지럭 거리는 게 느껴졌다. 배가 고픈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먹을 건 어떻게 구하지? 황야에서 음식점이 있을 리 없다. 나는 사냥을 할 줄도 모르고, 할 줄 안다 해도 황야에 사냥할 만한 것이, 사냥도구가 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없어.” 불편하게 내게 몸을 기댄 채 이안이 말했다. 작은 몸에서 조용하게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느낌이 기묘했다. 나는 고개를 내려 아이를 쳐다봤다. “엄마가 없다니?” “죽었어.” “응?” 죽었다고? 이안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이 작은 아이가 그 말을 안다는 게 더 놀라웠다. 내가 다섯 살 때 죽음이라는 걸 알았던가? 나는 잠시 이안을 끌어안고 있다가 물었다. “누가 그랬니?” “아무도. 사람들은 엄마가 하늘에 올라갔다고 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어째서?” 다시 이안이 입을 다물었다. 이 애 진짜 이안이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작은데도 이안과 똑같다. 내가 한숨을 내쉬었을 때 이안이 중얼거렸다. “배고파.” 문득 안타까워졌다. 이런 작은 아이에게는 빵 한 덩어리면 충분할 텐데.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최근에 빵을 남겼던 게 기억났다. 배불러서 남긴 거였는데 지금은 그게 절박할 정도로 아쉬웠다. 하지만 정작 나는 배고프지 않았다. 나는 이안을 끌어 안은 채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날이 밝으면 먹을 만한 걸 찾아보자.” 피냄새와 함께 어린 아이 특유의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뻣뻣하던 몸이 천천히 부드럽게 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크고 위압적인 남자한테도 이런 어린 시절이 있었던 거다. 단단하던 몸과 달리 어린 이안의 몸은 작고 부드러웠다. 나는 이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경계하더니 피곤한 모양이구나. 나는 피식 웃으며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딱히 뭔가를 기대하고 손을 집어 넣은 건 아니었다. 그냥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한 거였다. “응?” 코트 주머니 안에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던 뭔가가 들어 있었다. 나는 조심조심 몸을 움직여 그것을 꺼냈다. 뜬금없게도 빵 한 덩어리가 주머니 안 에서 나왔다. “이게 무슨…?” 나는 코트 안에 이런 걸 넣어 놓고 다니지 않는다. 벌레가 꼬일 수 있고 더러우니까. 게다가 이런 게 들어 있었다면 주머니가 불룩해서 눈치 챘을 것이다. 그때 호박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이안이 눈을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묘한 깨달음 같은 게 있었다. 이건 내 것이 아니구나. 이안을 위한 거였다. 이게 마법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여기에 온 건 이안을 돕기 위해서라는 걸 그 순간 어렴풋하게 깨달았다. “배고프지 않니? 빵 먹을래?” 이안은 빈손이었던 내가 빵을 들고 있는 건 의심스럽지 않은 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나도 이렇게 어릴 때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디서 나는지 몰랐던 것 같다. 그리고 그건 내게도 이안에게도 다행일 것이다. 나는 이안에게 빵을 건네고 그가 오물오물 먹는 것을 지켜봤다. 문득 진짜 이안이 황야를 지날 때 어떤 여행자가 그를 도와줬다고 했다는 게 생각났다. 여행자. 그 여행자를 만나야 하는데 내가 이안을 먼저 만나버려서 이안이 여행자를 만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었을 때 이어서 내가 꼬마 이안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나도 모르게 지나가는 여행자라고 했었지. “나구나.”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이안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빵을 반으로 잘라 내게 내밀었다. “아니, 아냐. 난 배 안고파. 너 다 먹어.” 내 말에 이안은 머뭇거리더니 다시 허겁지겁 빵을 먹기 시작했다. 허겁지겁이라고 해도 어린 아이라 오물오물에 가까웠다. 이안도 이렇게 어렸을 때는 귀여웠구나. === “벌의 노래라는 게 뭔지 알아요?” 사용인 휴게실에서 데이지가 눈을 빛내며 이안에게 물었다.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저러는 거다. 앤은 그게 얄미워서 이안이 대답하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전에 들어봤잖아? 음흠흠~ 흠음~. 이거 말야.” 데이지가 앤을 노려봤다. 누가 너한테 물어봤어?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앤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이 참, 그게 뭐지 모르겠는데. 이안~. 벌의 노래라는 거 알아요?” 애교어린 목소리로 데이지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이안은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 멀찌감치 앉아 바느질을 하는 빨간 머리 여자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의 대답에 데이지가 실망하는 게 보여 빌과 요리장이 쿡쿡 대고 웃었지만 이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저 빨간 머리 여자가 어딘지 모르게 낯익어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어디서 분명 봤는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그가 어디서 봤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꽤 있지만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다 됐다. 다음부턴 조심해.” 제일 어린 하인이 빨간 머리에게서 셔츠를 받아들며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톰과 케이트라고 했던가. 실과 바늘을 치우기 위해 케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이안과 케이트의 시선이 부딪혔다. 온화하게 풀어졌던 초록색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깨닫자마자 딱딱하게 굳는 게 보였다. 그럴 리가 없다. 이안은 문득 떠오른 사람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그 어린 시절 황야에서 헤매던 그를 돌봐준 여자. 그 여자도 빨간 머리에 초록색 눈동자였다. 하지만 그를 도와준 그녀는 지금의 케이트보다 더 어른스러웠고 더 컸다. 그녀의 품은 크고 따듯하고 부드러워서 그가 황야를 가로지르는 며칠 동안 훌륭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빨간 머리는 그의 기억에 있는 여자에 비교하면 더 어리고 너무 작았다. 게다가 그를 도와준 여자는 지금쯤 중년일 것이다. 비슷하지만 그녀일 리가 없다. 역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이안은 머릿속의 생각을 지워버렸다. 어디 다른데서 비슷한 얼굴을 봤거나 한 거겠지.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에게 기대는 데이지를 피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빨리 이 알라나데일에서의 사건을 해결하고 에바니엘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음, 외전을 한 편 더 쓸까 말까 고민중인데 일단 그건 쓰게 되면 이번주 주말에 쓰게 될 것 같아요. 쓰면 다음주 월요일에 올리겠습니다. 안 쓸 경우는 다른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쓸 게요. 그리고 잊을 만 하면 한번씩 등장하셔서 저도 잊을만 하면 한 번씩 이런이야기를 하게 만드시는 분이 계시는데 본인은 비평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하고싶은 말을 하는데 뭐가 문제냐고 생각하실지 몰라도 그걸 비난, 비웃음 등등으로 포장하셨으면 아무리 제게 도움이 되는 댓글을 남기셨어도 그냥 악플입니다. 님들 아니어도 좋은 방법으로 온건하게 제게 비평해주시는 분들 많아요. 그러니 쓰잘데 없는 자기만족에 찌든 비평인척하는 악플은 혼자 많이 드시고 제 눈에 안보이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댓글 쓰는건 내 자유다라는 같잖은 생각을 하시는 초딩분들은 님들 블로그, 싸이, 페이스북, 트위터에서 많이 하세요. 난 님들 SNS는 관심 없어요. 간혹 착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댓글은 제게 하는 말입니다. 제게 할 말이 아니라면 굳이 댓글을 쓸 필요가 없죠. 당장 생각나는 게 있는데 눈앞에 댓글창이 있어서 쓴다? 그딴 소리는 당장 생각나는게 있는 제가 님들 얼굴에 유성매직으로 "꺼졍 두번꺼졍"이라고 쓸 때고 입으로 나오나 한번 봅시다. 제 면전에 대고 할 수 없는 말은 댓글로도 안쓰는데 정상인거예요. 어느 더러운 곳에서 놀다 오셨는지 모르겠는데 제 소설게시판은 그런 더러운 곳 아닙니다. 놀던데서 노시고 여기 오지 마세요. 아님 아닌척 위장이라도 잘하시던가. 난 면전에 대고 말할 수 있는데? 라시는 분은 그냥 지금처럼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벌레 골라낼 수 있어서 좋아요. 아, 벌레가 그 벌레 아니니까 진짜 벌레분들은 욱하지 마세요. 세상엔 벌레 소굴에 살지 않아도 벌레같은 새끼들 많거든요. 즐거운 한주 보내시고, 다음주에 봽겠습니다. ===추가=== 평소에는 단 한번도 댓글이나 읽는 다는 티를 안내시다가 꼭 제가 댓글 자제좀 해달라는 글만 쓰면 튀어나오는 분들이 계시네요. 1번. 님들이 생각하는 그런 엄청난 악플들은 보는 족족 제가 다 지우고 있으니 님들이 못보시는 겁니다. 2번. 캐릭이나 작품에 대한 안좋은 인상 정도의 댓글은 그냥 남겨두고 있습니다. 즉, 여러분이 보시는 댓글은 제가 그냥 넘어가는 수준만 남아있는 겁니다. 3. 후기에 댓글 자제해 달라는 글이 보기 불편하시다면 댓글에 보기 불편한 글을 남기시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불편하지만 작가니까 참아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글쓰는게 뭐 그리 엄청난 죄입니까? 4. 전에도 비슷한 일로 쪽지를 보내드렸는데 그땐 분명히 답변을 "아, 제가 잘 몰랐네요, 악플 맞네요." 라고 하셔놓고 이제 와선 뒤에서 딴 생각하셨다는 건가요? 조아라 10년 넘게 쭉 봐온 사람들은 다 그렇게 위선적이고 이중인격입니까? 5. 찔리는 거 있으십니까? 왜 댓글 자제해 달라는 말만 하면 핏대 세우면서 나타나시는 지요? 6. 평범한 독자라면 위의 후기로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습니다. 7. 저도 조아라에 십년 넘게 있었습니다. 지난번에도 조아라에 십년 넘게 있었다 운운하시던데 나이먹은티를 내고 싶으신건지, 이 사이트에 오래있었다는 게 대단한 벼슬로 생각하시는 지 모르겠지만 제 주변 사람들 모두 한 소설 사이트에 십년 이상 있는 사람들 입니다. ㅎㅎㅎㅎ 아, 이부분은 귀여워서 웃은거지 화내지 마세요. 중, 고등학생들이나 할법한 생각을 하시는게 귀엽네요. 8. 전에도 이미 악플은 지운 상태라는 걸 모르고 날뛰시길래 그냥 잘 몰라서 저러시나 보다...하고 조용히 넘겼는데 스스로 두각을 드러내 주시니 특별히 불량이웃 등록 해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9. 제가 후기에 이러저러하니 악플은 자제해 주시죠. 라고 이야기하는건 이미 댓글은 지운 상태입니다. 해당 댓글을 지우는 이유는 독자분이나 제가 보기 싫어서 이기도 하지만 해당 댓글을 지우지 않은 상태로 그런 후기를 적어버리면 당연히 저격이 되니 지웠던 거고요. 해당 댓글을 다는 분들은 당연히 불량이웃처리 해 버립니다. 하지만 그런 후기를 굳이 남기는건 본인이 왜 불량이웃이 됐는지 모르고 쫓아다니는 찌질이 들이 있어서 경고차 남기는 겁니다. 더불어 댓글 수준이 점점 낮아지는 분들이 간혹 있어서 그분들을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10. 이 글을 보시고 혹시 나인가?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구나! 하는 분들은 네. 너요, 너. 00163 [외전] 고양이는 나무를 탈 줄 안다 =========================================================================                            “깜짝이야.” 케이트는 뒷마당으로 통하는 후문을 열었다가 노란 고양이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멈췄다. 어디로 들어왔는지 고양이 한 마리가 후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누가 키우는 고양인가?”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들 고 있던 빨래를 빨래 줄에 널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양이는 불청객인 주제에 당황하지도 않고 나른하게 앉아 마치 누군가를 기다린 다는 듯 하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습만 봐서는 고양이가 이 집에 사는 사람 같다. 케이트는 빨래를 널며 근처 사는 사람 중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이 있는지 떠올렸다. 큐바인 거리는 독신자의 비중이 큰 만큼 외로움에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도 꽤 있다. 개는 산책을 시키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개와 함께 걷는 모습도 몇 번 봤다. 하지만 고양이라? 그녀는 마지막 남은 이불을 탁탁 털어 빨래 줄에 넌 다음 다시 한 번 고양이를 쳐다봤다. 노란색 털이 선명한 고양이는 그 파란 눈으로 케이트를 빤히 쳐다보더니 곧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녀가 다시 고양이를 발견 한건 그 날로부터 며칠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구걸하러 온 아이들에게 남은 빵을 나눠주기 위해 후문으로 나갔던 케이트는 나무 위에서 야옹하고 작게 우는 소리를 들었다. “제인! 사다리 좀 찾아볼래?”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를 거실에 앉아 편지를 읽던 이안도 들었다. 사다리라고? 이 집에 사다리가 필요할 일이 있었던가?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그가 부순 이후 큐바인 하우스에서 사다리가 필요한 일은 거의 포기한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난데없이 사다리가 필요하다는 케이트의 목소리는 이안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없는데, 옆집에서 빌려올까요?” 이어진 제인의 목소리를 따라 가자 케이트는 뒷마당 나무 옆에 서서 근심어린 얼굴로 나무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애초에 사다리라는 건 높은 곳에 있는 뭔가를 보수할 때 쓰는 것이다. 보수할 생각이 전혀 없는 그의 집에서 필요할 리가 없으니 구비해 두지도 않은 건 당연했다. “무슨 일이지?” 이안의 물음에 케이트의 고개가 그를 향했다가 잠시 밝아졌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녀가 자신을 이렇게 반기는 일은 거의 없다. 아니, 큐바인 하우스에 와서 거의 처음이라 해도 좋았다. “잠깐 도와줘요.” 뭐를? 이라는 의미로 다시 한 번 눈썹을 들어 올려 보인 이안은 조용히 케이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한동안 관리 하지 않은 큐바인 하우스의 마당엔 식물이 제멋대로 자라고 있었지만 그것도 케이트가 틈틈이 관리해서 지금은 꽤 깨끗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이렇게 커다란 나무만은 어쩔 수 없었던지 그대로 남아있었다. 사실 케이트로서는 이렇게 큰 나무를 잘라내기 아쉬워서 그냥 둔 거지만 이안은 그녀가 어쩔 수 없어서 내버려 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 나무 탈 줄 알아요?” 질문이지만 확신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녀는 그가 알라나데일에서 지붕위에 올라가 지붕을 수리하는 것도 봤다. 나무도 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안은 말없이 케이트를 내려다보다가 나무 위를 쳐다봤다. 나뭇잎으로 가득한 그곳에 노란 뭔가가 보였다. “야옹.” 고양이가 작게 울었다. 고양이?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설마 하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나보고 나무를 타고 저 고양이를 꺼내오라는 말은 아니겠지.” “바로 그거예요!” 반사적으로 이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는 한동안 케이트를 노려보다가 다시 고양이를 쳐다봤다. 그것은 발톱을 세우고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아니, 서 있었다고 해야 하나. “고양이잖나.” “네. 고양이예요.” 아니, 그게 아니다. 이안은 이마를 짚으려는 걸 꾹 참으며 한숨처럼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 말은, 고양이란 말이다.” 그럼 저게 고양이가 아니면 뭐로 보인다는 거지? 케이트는 이해할 수 없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바보처럼 네. 고양이라니깐요? 라고 말하지 않고 물었다. “그래서요?” “고양이가 잘하는 게 뭔지 아나?” “쥐 잡는 거요.” 그래. 그것도 맞다. 이안은 결국 참고 참던 한숨을 내뱉은 뒤 말했다. “나무를 타는 거다.” 이안의 말에 케이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그거야 보면 알아요. 나무를 탈 줄 아니 올라간 거겠죠.” 아는 사람이 그러냐고 몸을 흔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이안은 인내심 있게 말했다. “내 말은, 나무를 탈 줄 아니 알아서 잘 내려올 거라는 말이다.” “그건 아니죠!” 예상외로 케이트에게서 반발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나무를 손으로 집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혼자 못 내려오니까 저기서 저러고 있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저건 고양이,” “고양이가 나무를 탈 줄 안다고 혼자 내려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닌가요?” 이안의 입이 닫혔다. 그는 조용히 케이트를 내려다 봤다. 자연스럽게 흥분이 가라앉은 케이트는 얼굴을 붉히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건방졌다. 아무리 편하다고는 하지만 이안은 이 집의 주인이고 그녀는 하녀가 아닌가. 감히 하녀가 주인에게 이기적이니 뭐니 설교를 늘어놓는 건 건방진 행동이다. 이안은 흠 하고 몸을 돌렸다. 느긋한 오후에 쓸데없는 소란으로 시간낭비만 했다. 반면 곤란한 표정을 지은 케이트는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제인에게 몸을 돌려 말했다. “제인, 방금 내가 한 행동은 아주 건방진 행동이야. 이런 모습을 네게 보인 게 부끄럽지만 너도 타산지석으로 삼으렴.” 제인은 케이트와 이안의 실랑이에 익숙해서 신경 쓰지 않고 나무 위의 고양이를 향해 손을 내밀어 달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려 물었다. “타산지석이 뭐예요?”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이안의 눈앞에서 제인이 끙끙대며 의자를 들고 지나갔다. 일이 심상치 않아졌다는 것을 깨닳은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이트, 여기에 둘까요?” “으, 아니, 조금만 뒤로…,” 케이트의 목소리가 이안을 보자마자 줄어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설마 못 내려오는 건가.” 의자를 든 제인도 얼어붙은 듯 그대로 멈췄다. 이안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물었다. “고양이는?” 제인과 케이트의 눈동자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또르르 또르르. “저 쪽에….” 제인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과연 노란 고양이가 수풀 위에 앉아 앞발을 핥고 있었다. 이안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 나무 곁으로 다가갔다. “이리 와.” 으. 케이트는 얼굴을 붉힌 채 입술을 깨물었다. 있는 대로 잘난 척을 했는데 이 꼴이라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녀가 망설이자 이안이 발을 들어 나무를 걷어찼다. 퍽 소리와 함께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헉!”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나뭇가지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뭐하는 거예요?” “스스로 안내려오면 떨어트려야 할 거 아닌가.” 이 남자가 미쳤나. “내려갈게요! 내려간다고요!” 잠시 후 케이트는 이안의 품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무 위는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이안에게 가해지는 충격도 적었다. 그는 그녀가 떨어질 때 눈을 꼭 감은 채 숨을 참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뭘요? 그런 질문을 담은 초록색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이안은 그녀를 고쳐 안으며 말을 이었다. “고양이는 나무를 탈 줄 안다고.” ============================ 작품 후기 ============================ 외전을 두개나 쓰게 될 줄 몰랐는데 다음에 쓰려고 구상한 게 영 안풀려서 하나 더 씁니다. 이건 나아중에 외전 쓸게 없으면 쓰려고 킵해둔건데...흑흑... 그래도 덕분에 이야기가 풀렸어요. 후후후 다음달 1일 부터 시작할것 같아요. 현대물이고 로맨스도 좀 들어갑니다. 공포물인데 별로 공포수위는 별로 안높을것 같습니다. 만 이건 저도 모르겠어요. 하하하 제목은 아직 안 정했는데, 여기 공지로 적으면 읽으시는 분들께 알람이 가지는 않죠? 올리면서 이쪽에 한회 공지로 올리고 나중에 삭제한다거나 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할것 같네요. 더 좋은 방법 있으신 분들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덧. 이번 외전은 3부...케이트가 큐바인 하우스에서 하녀일때의 이야기입니다. 덧2. 표지는 로베리안님께서 선물해주신 팬아트 입니다. 감사합니다. 00164 [공지] 5부 레인포레스트의 아가씨 =========================================================================                            힘의 나라 뮈엘라 레인포레스트의 새로운 아가씨 케이트와 괴물이라는 비난과 함께 케이트와의 접촉이 금지된 이안. 수도 에바니엘의 뒷골목에 흩어진 불법 마법을 찾아 처리하던 그에게 닥친 위기. ============================ 작품 후기 ============================ 공지 재활용을 좀 해봤습니다. 뮈엘라의 수사관은 빨간 날 제외하고 평일 하루 한 편씩 올라갑니다. 업뎃시간은 보통 오후 9시에서 11시 사이 더 늦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00165 1. 레인포레스트의 아가씨 =========================================================================                            달칵하고 작은 소리가 났다.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가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던 하녀와 눈이 마주쳤다. “실례했습니다.” 뭐가 실례라는 건지 일순 이해가 되지 않아 그녀의 벌려진 입은 그대로 굳었다. 하녀는 찻잔에 설탕과 우유를 따른 뒤 찻주전자를 보온 주머니로 감싸기 시작했다. 소리를 내어 실례했다는 의미였다. 그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괜찮다고 말할 타이밍이 아니라 케이트는 멍하니 하녀의 행동을 지켜봤다. 능숙한 행동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시골에서 하녀로 일했던 케이트도 나름대로 능숙하게 일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곳에 와서 깨달았다. 시골 하녀와 도시 하녀의 차이점이다. 그녀는 아주 조금 타운하우스에서 겪었던 메리의 텃세를 이해했다. “고마워요.”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는다는 게 익숙지 않다. 하지만 케이트는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에녹은 그녀가 호건 가의 상속녀가 아니다 하더라도 이런 생활을 지속할 것이라 말했다. 그가 그녀의 대부이기 때문이다. 타닥타닥 벽난로에서 나무가 타는 소리만 방 안을 메웠다. 화려하다 싶은 차 향기에 케이트는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찻잔을 집어 들었다. 창밖에 어느새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케이트는 찻잔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훈훈한 안의 공기 탓에 유리창에 김이 서려 있었다. “아가씨, 제가,” 케이트가 손을 내밀자마자 하녀가 쫓아오더니 그녀를 만류했다. 그리고 품에서 천을 꺼내 창문을 닦기 시작했다. “제가 해도 괜찮은데요.” “아니에요. 날이 추워서 산책도 못 하시고. 답답하시죠?” 사실이다. 케이트의 아가씨 생활은 그녀가 알던 거보다 훨씬 답답했다. 틀에 박힌 건 물론이고 혼자서는 방 밖도 나갈 수가 없었다. 이유는 당연했다. 에녹 때문이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에녹은 그동안 그가 해주지 못한 것들이 전부 보상이라도 해주려는 듯 케이트를 싸고돌았다. 그녀를 데려온 다음 날 바로 옷을 몇 벌이나 맞춰주고 사교계에 데뷔해야 한다며 사교계 교육을 시작했다. 케이트는 생활은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이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멍하니 창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던 케이트는 무심코 이안을 떠올렸다. 에녹이 큐바인 하우스 문 앞에서 그녀를 데리고 떠날 때 이안이 짓던 불쾌한 표정이 마지막이었다. 벌써 한 달째다. 처음엔 이안을 떠올렸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던 케이트도 이제는 여유가 있으면 반사적으로 이안을 떠올리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그 아래 보이는 호박색 눈동자. 날카로운 얼굴이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게 한 달 전, 마지막으로 본 얼굴이었다. 어쩐지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를 떠올리자 케이트는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 한쪽이 답답해졌다. 그녀는 하녀를 향해 물었다. “저한테 온 편지는 없나요?” “오늘은 없어요, 아가씨.” 화난 걸까. 케이트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하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조세핀이나 제이드로부터는 편지가 도착하는데 이안에게는 한 통도 없었다. 당연히 만나러 오지도 않았다. 어쩐지 좀 섭섭한 기분이 들어 케이트는 멍하니 창밖을 쳐다봤다. 에녹아저씨는 왜 이안을 괴물이라고 한 걸까. 이 저택으로 온 첫날 물어봤지만 에녹은 조금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다 이야기해 줄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달라고. 무슨 이야기이기에 마음의 준비까지 필요한 걸까. 괴로움과 궁금증이 뒤섞여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 흐렸다. “케이, 스미스 양을 만나러 왔다.” 같은 시간, 저택 밖에서 같은 소리를 세 번 째 반복하는 이안이 있었다. 문지기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문지기에게 두 번, 집사에게 한 번. 성격 급한 사람이라면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는 거냐고 화를 낸다. 나이 지긋한 집사만이 여유롭게 행동하고 있었다. “네. 로엔 백작 가의 이안 로엔 경이시군요.” 집사는 이안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한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아가씨께서는 현재 바쁘셔서 만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언제 만날 수 있다는 건가.” “글쎄요.” 집사의 시선이 저택을 향했다. 에녹은 그가 없을 때 찾아오는 손님을 아무도 받지 않는다. 케이트를 찾아오는 손님은 여자만 허용하고 있었다. 특히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이안 로엔 경은 절대 들이지 말라 명했다. “지금 아가씨께서 바쁘셔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안의 입이 열렸다. “그러니까 언제는 되는 건지 물어보는 거 아닌가.” 곤란한 상황이지만 집사는 내색하지 않았다. 엘프 주인을 모시고 살다 보면 더한 일도 일어나는 법이다. 그는 고개를 들고 이안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때가 되면 아가씨께서 연락하실 겁니다.” 이안의 손이 검으로 향했다. 아주 잠깐, 문지기와 집사는 그가 집사를 벨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안은 검 손잡이를 잡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물었다. “바쁘다는 건가, 아프다는 건가.” 그 질문에 걱정이 내포돼 있었다. 집사는 이안이 케이트를 걱정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안 로엔. 로엔 백작 가의 서자가 이 저택의 아가씨를 걱정하고 있다. 한 달 동안 겪은 수많은 방문 거부에도 이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집사의 “아가씨께서는 지금 바쁘십니다.”라는 말에 군말 없이 물러나고 했다. 다른 사내였다면 지금쯤 화를 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 무슨 모욕이냐며 공식적으로 항의하거나 성격이 급한 자라면 검을 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안은 달랐다. 그는 늘 서늘한 표정을 하고 스미스 양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고 어김없이 거절당했다. 그리고 언제 만날 수 있는지 부질없는 질문을 건넨 뒤 조용히 물러나곤 했다. 그런 그가 오늘 처음으로 감정 비슷한 것을 내보였다. 그것도 집사와 문지기가 예상한 분노나 수치가 아니라 걱정을. 어쩌다 주인어른께 미움을 받은 걸까. 집사는 이안의 얼굴을 뜯어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황금색 눈동자가 흔하지 않아 이질적인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에녹 역시 엘프다. 약간 특이한 정도로 사람을 배척하는 사람이 아니다. 결국 집사는 약간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만나실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대답에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이안은 몸을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마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못 만났나 보네.” 이번에도 이안이 일찍 돌아오자 제이드가 안 됐다는 듯 말을 건넸다. 그는 대답하지 않는 이안의 태도에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게 편지를 쓰지 그러나.” 그 말은 몇 번이나 들었다. 케이트는 제이드와 조세핀의 편지를 받고 심지어 답장도 몇 번 해 주었다. 제이드의 방문은 거절했으나 조세핀의 방문은 받고 있으니 바빠서 방문을 거절한다는 것도 거짓말일 게 분명하다. 에녹이라는 자는 누가 봐도 확실하게 케이트에게서 이안을 잘라내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 편지를 보내도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설령 전달된다 해도, 뭐라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안은 움직이는 마차 안에 앉아 창문 너머로 저택을 응시했다. 눈이 내리는 저택의 모습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저 안에 케이트가 있다. 그의 머릿속에 케이트의 빨간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하얀 피부, 부풀어 오르던 초록색 눈동자. 자그마한 체구. 이안 하고 그를 부르던 목소리가 귓가에 스치는 것 같아 이안의 몸이 움찔했다. 그의 시선이 저택의 이 층을 훑었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안타까운 연인이 따로 없군. 제이드는 두 사람이 연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끗하게 무시한 채 생각했다. 이안이 이 정도로 누군가에게 집착한 건 처음이다. 만날 수 있는지 묻고 안 된다 하면 바로 돌아서 버리기는 하지만 그게 한 달간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가 아는 한 이안이 이 정도로 누군가를 만나러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조는 만나주는 모양이던데.” 그렇게 말하는 건 제이드도 방문이 거부됐기 때문이다. 에녹은 케이트에게 접근하는 남자를 철저하게 구분했다. 케이트에게 구혼을 해도 괜찮을 만한 남자와 아닌 남자. 제이드는 아닌 남자였다. 그래서? 라는 듯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제이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말했다. “조를 통해서 이야기를 전달하면 어떨까 해서 말야.” “그 여자가 너와 만나 주나?” 이안의 말에 제이드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조세핀은 여전히 제이드를 거부하고 있었다. 만나주기는커녕 편지조차도 무시하고 있었다. 처음엔 가게를 운영하는 일로 조세핀의 도움이 절실했지만 가게 일이 어느 정도 손에 익고 나자 제이드는 조세핀의 존재가 그것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술에 잔뜩 취하면서 다음날을 걱정하지 않았던 것도, 어려운 사건이 있을 때마다 마음 편하게 푸념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조세핀 덕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세핀의 존재는 제이드를 철없는 시절에 묶어 두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사라지자 그는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자신이 철없을 수 있었던 것,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데에는 조세핀의 존재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각자 사정을 다르지만 여성에게 거부당한 가련한 두 남자가 탄 마차가 조용히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키아르네 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날이 많이 춥네요.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뮈엘라의 수사관 5부 시작했습니다. 뮈엘라의 수사관은 빨간날 제외하고 평일 하루 한 편씩 올라갑니다. 업뎃은 보통 오후 9시에서 11시 사이에 되지만 더 늦는 경우도 있습니다. 후작과 수리공쓰다가 이거 쓰니까 분위기가 갑자기 확 가라앉아서 당황스럽네요. ㅎㅎㅎㅎ 이번 표지는 로네안님께서 선물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00166 1. 레인포레스트의 아가씨 =========================================================================                            “주인 나리께서 귀가하셨습니다.” 하녀의 알림에 케이트는 재빨리 방을 나섰다. 그가 이렇게 일찍 돌아온 건 며칠만의 일이다. 지난주에는 다른 지방에 가 있는 바람에 저녁은커녕 아침에도 만나지 못했다. 서두르는 케이트의 뒤를 에녹이 붙여준 그녀의 몸종, 마사가 따랐다. “다녀오셨어요.” 에녹은 코트를 벗어 집사에게 건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위로 말아 올리고 귀족 영애들에게 인기 있다는 옷가게에서 새로 맞춘 드레스를 입은 케이트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능숙하게 메인계단을 사용하는 폼이 하녀 케이트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잘 지냈느냐.” 에녹이 손을 내밀었다. 케이트는 서늘한 그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엘프는 크게 추위나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저씨가 이 추운 날씨에 밖을 돌아다녔다고 생각하면 조금 안쓰러웠다. “식사하셨어요?” “너와같이 하려고 일찍 왔단다.” 에녹은 케이트의 손을 쥔 채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미소 지었다. 바빠지는 바람에 집에 데려와 놓고 이야기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아끼는 대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솟았다. “아저씨에게 인사해 주려무나.” 케이트는 허리를 숙인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마치 어린 소녀처럼 그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갖다 댔다. 젊은 청년과 처녀의 인사였지만 마치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와 어린 손녀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오늘 하루는 즐거웠느냐?” 솔직히 말하면 답답했지만 케이트는 그를 섭섭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네에.” “수업은 잘 받았고?” 다행히 수업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있었다. 에녹이 팔을 내밀자 케이트는 배운 대로 그의 팔을 안으로 잡았다.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반대편 손으로 케이트의 손등을 토닥이며 안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늘 승마 수업을 받으려 했는데 눈이 와서 취소했어요.” “그래, 잘했다. 이런 날씨에 나가기는 어렵지.” “대신 피아노를 쳤어요.” “오, 그래?” 저택 안에 에녹과 케이트가 나누는 대화가 도란도란 울려 퍼졌다. 얼어붙은 것 같던 저택에 봄이 왔다고, 집사는 생각했다. 이윽고 어설픈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사용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싱긋 웃었다. 에녹의 피아노 실력은 수준급이다. 이 저택에 일하는 사람들도 일 년에 한 번 들을까 말까한 정도지만 그가 악기에 조예가 깊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 어설픈 실력은 에녹의 실력이 아닐 것이다. 새로 들어온 아가씨, 케이트의 실력이다. 어설픈 피아노 실력이 이렇게 가슴이 훈훈해지기는 처음이라고, 집사는 생각했다. 이 작은 빨간 머리 아가씨가 저택에 들어오자 늘 겨울 같았던 저택에 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나직하게 에녹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케이트의 피아노 실력을 봐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가 잘….” 에녹은 피아노 건반을 보고 다시 웃었다. 케이트의 손이 작아서 건반의 한 옥타브를 치기가 힘들다. 그는 케이트의 손 위에 자기 손을 펼쳐 올렸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문제로구나.” 케이트는 자기 손 위에 펼쳐진 에녹의 손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비해 손이 컸다. 그는 갸름하고 커다란 손을 그녀의 손 위에 펼쳐지더니 능숙하게 건반을 눌렀다. 순식간에 어린아이들이 연습 삼아 치는 음악이 멋진 연주로 변했다. “식사 준비가 되었습니다.” 어느새 집사가 문 앞에 서서 말했다. 웃음기 띤 케이트와 에녹의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집사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 다시 말했다. “저녁 식사하시지요.” “오, 그래. 고맙네.”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케이트는 에녹이 내민 그의 팔을 잡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하러 가는 여성을 에스코트하는 건 요즘은 만찬 모임에서나 지키는 예절이지만 에녹은 여전히 지키고 있었다. 케이트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녀의 아버지와 친구였다고 했으니 최소한 케이트의 아버지뻘일 것이다. 몇 살일까. 케이트는 사소한 호기심을 품으며 집사에 당겨주는 의자에 앉았다. 겉으로 보기엔 케이트보다 몇 살 차이 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이안보다 젊어 보일 정도다. “아.” 반사적으로 떠올린 이안 생각에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바보 같아.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먹는 단계도 이미 지났다. 이젠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생각해야 하는 단계였다. 이게 무슨 실연한 여자도 아니고.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왜 그러느냐?” 케이트의 한숨에 에녹이 물었다. 그와 동시에 하인이 음식을 날라 오기 시작했다. 고기 스튜입니다. 케이트의 음식을 내려놓으며 하인이 말했다. 그녀의 귀에 맞은편에서 에녹에게 음식을 내려놓으며 말하는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콩과 당근을 넣은 채소 스튜입니다. 스푼을 집어 들며 케이트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나이를 묻는 건 상대가 엘프라 하더라도 예의가 아니다. “음, 아저씨는 요즘 신사답지 않으신 것 같아서요.” “요즘 신사?” 에녹의 눈이 커지더니 곧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행동과 말이 노인네 같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다. 꽤 나이 지긋한 귀족에게도 놀랍다는 말을 듣고 있으니 젊은 케이트가 보기엔 더욱 신기할 것이다. 그는 얼굴이 달아오른 케이트를 향해 자상하게 말했다. “아가, 나는 엘프란다. 그게 무슨 소린지 아느냐?” 오래 살았다는 뜻일까. 케이트가 그렇게 말하자 에녹은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래. 내가 오래 살았다는 뜻이기도 하지. 엘프는 수명이 길어. 그러니 모든 것을 인간처럼 빠르게 배우고 빠르게 잊어야 할 필요가 없단다. 무슨 소린지 알겠느냐?” 몇십 년만 지나면 한세대가 바뀌어버리는 인간과 다르다. 엘프의 시선으로 보면 인간의 예절과 인습은 마치 유행처럼 스쳐 지나간다. 고작 백 년만 지나면 구시대의 유물이라 하찮게 여길 것을 당시에는 목숨 줄이라도 잡고 있는 것처럼 중하게 여긴다. 에녹은 네에 하고 작게 대답하는 케이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천천히 배우는 만큼 오랫동안 지킨단다. 네가 보기엔 내가 고리짝 적 노인네처럼 구는,” “아니에요!” 케이트는 당황해서 거의 소리치다시피 말했다. 에녹을 비난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반응에 놀란 에녹과 집사를 보고 얼굴을 붉혔다. “그, 그게 아니라. 전 그저 아저씨의 그런 모습이 참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예요.” 놀란 에녹의 얼굴에 미소가 차올랐다. 문밖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집사도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고맙구나.” 젊은 청년이 노인처럼 행동하는 건 구설수에 오르기 마련이다. 그건 결국 에녹이 엘프더라 라는 대화로 이어진다. 엘프는 마법의 종족이다. 마법을 배척하는 뮈엘라에서는 흔히 보이지 않는 종족이다. 수도에 사는 드워프는 그래도 어느 정도 그 수가 있다. 무인의 나라인 만큼 훌륭한 무기와 장비에 대한 수요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프의 수는 턱없이 적었다. 에녹은 현재 뮈엘라의 수도 에바니엘에 남아있는 엘프가 그를 포함해 한 손에 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케이트의 말은 에녹에게 고작 말 한마디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빠른 인간 사회에서 느리게 살아가는 엘프의 삶도 좋다고 말해주는 것. 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훌륭하게 자라주었다. 에녹은 흐뭇한 미소로 식사하는 케이트를 쳐다봤다. 마지막으로 봤던 게 열 살이었던가, 열두 살이었던가. 그의 허리에 간신히 닿았던 게 기억난다. 닉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케이트와 베스를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너무 단단히 봉인한 탓이다. 적어도 단단히 봉인했으니 케이트의 능력이 발현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아저씨.” 식사가 끝나고 응접실로 자리를 옮긴 케이트와 에녹의 앞에 하녀가 차를 가져왔다. 하녀가 떠나고 나서야 케이트는 입을 열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에녹은 한동안 바빠서 살피지 못했던 편지를 뜯다가 고개를 들었다. 케이트의 얼굴이 결연했다. 그는 그제야 케이트에게 이야기해줘야 할 것들이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저씨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셨지만, 벌써 한 달이나 지났어요.” 케이트가 이 저택에 온 지 한 달. 벌써 한 달이나 되었나. 그는 속으로 자신의 시간 개념을 욕했다. 인간 사회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도 인간에 비하면 한참이나 느리다. 닉이 죽고 케이트를 이제야 찾은 것만 해도 그렇다. 그는 집어 들었던 편지를 내려놓고 자세를 고쳤다. 케이트에게 이야기를 해줘야 할 때가 왔다. ============================ 작품 후기 ============================ 하... K모 패스트푸드에서 새로나온 치킨을 사서 먹었는데... 맵다며...짜기만 해.... 심지어 그 패스트푸드점은 치킨이 주력 매뉴인데!!! 이럴수가... 한조각 먹고 버렸어요... 이건 신성 모독이예요 흑흑. 00167 1. 레인포레스트의 아가씨 =========================================================================                            마녀는 이를 갈고 있었다. 작은 빨간 머리 계집이 결계 안으로 들어간 지 한 달째다. 한 달 동안 저 계집은 저택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레인포레스트. 마녀는 그 이름을 이를 갈며 뱉어냈다. 저 재수 없는 엘프. 그의 결계는 부정한 자를 막는다. 신전의 힘과 그 방법은 달랐지만 목적은 같았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마녀의 눈이 저택을 꿰뚫기라도 할 듯 노려봤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케이트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다른 수를 써야 한다. 마녀는 바스러지는 손끝을 내려다봤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 난로 안에서 나무가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었다. 날이 추운 탓에 방마다 난로가 켜져 있었다. 에녹은 추위를 크게 타지 않지만, 이 저택에 사는 사람은 에녹을 제외하고 전부 인간이기 때문에 장작을 아끼지 않는 편이었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셔 입을 축인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 아버지는 마녀였단다. 알고 있느냐?”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아버지가? 그녀는 어렴풋이 마녀의 힘이 유전이라면 어머니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마녀라는 단어 자체가 여성을 뜻하기 때문에 케이트의 생각은 어쩌면 당연했다. “몰랐느냐?” “저, 전 부모님 중 한 분이 마녀라면 어머니일 거라 생각했어요.” 에녹은 어째서? 하고 되물으려다 마녀라는 단어가 여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그렇군. 많은 사람이 마녀가 오로지 여성일 거라 생각한다. 아니, 단어 자체가 이미 여성을 뜻한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마녀는 보통 여성이지만 아주 가끔 남성 마녀도 있단다.” 아주 가끔. 그 가끔에 케이트의 아버지가 속한다는 거다. “남성 마녀의 수가 워낙 적다 보니 굳이 남성 마녀를 지칭하는 단어는 필요하지 않았을 게다. 음, 이 이야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 넘기도록 하마.” 케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에녹은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빙그레 웃었다. “네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랑의 도피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게 나라는 걸 알고 있느냐?” 뭐?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몰랐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에게 그런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모, 몰랐어요.” “어느 날 닉이, 네 아버지가 내게 수도를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을 묻더구나. 웬 여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거기까지 말한 에녹은 그 여자가 네 어머니란다 라고 말했다. 젊은 닉과 젊은 베스. 베스는 지금 케이트 나이 정도였다. “그녀의 집에서 그녀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키려 한다고 하더군.” “아저씨는 어머니가 호건 가 사람이라는 걸 모르셨나요?” 에녹은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몰랐다. 알았다면 말렸을까. 뭔가 다른 방법을 구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뭔가 다른 방법을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닉이 베스라고 소개한 여자는 엘리자베스 호건이었고 그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베스와 닉이 수도를 도망치고 난 며칠 뒤의 일이었다. 한동안은 딸의 도망을 숨기고 찾아 데려오려 했던 호건은 그게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자마자 바로 딸과 절연했노라고 공표했다. 그건 호건이 얼마나 냉정한 자인지를 알리는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보통 자식이 사랑의 도피를 하면 집안에서는 감추기 마련이다. 아프다거나 공부하러 갔다거나.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변명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그런 핑계를 댄다는 점이다. 하지만 호건 가는 아무 변명도 핑계도 대지 않았다. 그저 딸과 절연했다고 공표했을 뿐이다. 소문은 삽시간에 수도를 달궜다. 사람들은 호건 가의 막내딸이 사랑의 도피를 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고, 막내딸이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했다. 아버지들은 철없는 자식들에게 호건 가 사건을 예로 들며 자신도 절연할 수 있다고 협박했고 자식들은 그게 낭만적이라 생각해 절연을 불사하고 사랑의 도피를 하려는 자도 있었다. 그만큼 엘리자베스 호건의 도망과 절연은 수도에 큰 사건이었다. 수도의 시끄러움을 뒤로하고 에녹은 바로 닉을 찾아가 그 사실을 확인했다. 그의 친구가 데리고 도망치고, 그가 도피를 도와줬던 여성이 엘리자베스 호건이 맞는지. 그때의 엘리자베스와 눈앞에 앉은 케이트의 모습이 겹쳐졌다. 미인이었다. 금발에 호수 같은 눈동자. 전형적인 철부지에 부잣집 아가씨라고 생각했던 엘리자베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닉을 사랑하고 있으며 이미 그의 아이를 가지고 있노라고. 그게 과연 사랑이었을까. 에녹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때부터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입 밖에 낼 생각이 없었다. 마력보유자의 마력은 이성에게 페로몬과 비슷한 효과를 보인다. 힘이 강력할수록 그 유혹 역시 강력하다. “사랑이었겠지.” 에녹은 케이트에게 들리지 않도록 중얼거렸다. 베스는 닉이 죽은 다음에도 수도로 돌아오지 않고 케이트와 단둘이 살았다. 그는 그게 사랑이었다는 증거이길 바랐다. 아니면, “아저씨?” 에녹의 상념이 길어지자 케이트가 그를 불렀다. 그녀는 불안한 표정을 하고 앉아있었다. 에녹은 재빨리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미소 지어 보였다. “피곤해 보여요.” 하루빨리 부모님과 자신의 능력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 싶지만 케이트는 에녹이 피곤해 보이는 게 신경 쓰였다. 그녀는 에녹을 만났고 앞으로 오래오래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가족을 찾으면 수도를 떠나려던 생각도 사그라졌다. 그녀의 가족은 수도에 있었다. 만나지 못한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만날 때까지 그녀는 수도에 있을 생각이었다. 할아버지를 만난 다음에도 수도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할아버지와 에녹이 수도에 있으니까. 대부라고 해도 남이나 다름없다. 아버지와 친한 친구라고 하지만 그는 엘프고 케이트는 인간이니 혈연으로 이어져 있을 리도 없다. 그런데 에녹은 케이트를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와 좋은 옷과 음식을 주고 아가씨로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방법이 약간 강압적이긴 해도 그 기반에 자신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 있다는 것을 케이트는 알았다. “네 어머니가 엘리자베스 호건이라는 걸 내가 알았다 해도 일이 달라지지는 않았을 게다.” 에녹은 반쯤은 그런 바람을 담아서 말했다. 이미 엘리자베스의 배속에 케이트가 있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배속에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품고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을 리 없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네 부모님은 서로 행복했고 아주 사랑했다는 점이란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소파에서 내려와 에녹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의 손이 에녹의 손을 감쌌다. “알고 있어요. 제 기억에도 부모님은 참 행복하셨거든요.” 에녹은 빙그레 웃더니 재미있는 일이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카티야라는 이름은 내가 지어줬다는 건 알고 있지?”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 어라고 하셨죠.” “그래.” 고대 어로 카티야. 지금은 쓰이지 않는 그 단어를 현재 사용하는 글로 바꾸면 케이트라고 한다. “편지로 딸이 태어났다고 내게 대부가 되어달라고 하더구나. 나는 그때 여기 있었고 네 가족이 있는 마을까지는 마차로 한 달이나 걸리는 거리였단다.” 그 자리에서 에녹은 편지를 썼다. 카티야. 단어 하나뿐이었지만 그는 친구를 믿었다. 알 것이라고. 두 달 후에 만난 친구는 그에게 아주 작은 아기를 보여주며 말했다. - 에녹, 내 딸 카티야야. 푸른색의 눈동자와 보송보송한 금색 머리카락이 아주 아름다운 아기였다. 에녹의 손이 케이트의 붉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너를 보자마자 한 눈에 알았단다.” 케이트가 고개를 들었다. 에녹은 손을 멈춘 채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아주 강력한 마력보유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케이트의 눈이 부풀어 올랐다. 살짝 벌어진 입술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하지만 혹시나 하고 각오했던 충격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가 충격과 체념으로 정처 없이 흔들리는 것을 내려다보며 에녹은 안타까운 한숨을 흘렸다. 뮈엘라는 마법을 배척한다. 강한 마법이라면 더더욱. 그는 케이트를 보는 순간 한 가지 결정밖에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네 마력을 봉인했다.” 흔들리던 케이트의 눈동자가 멈췄다. 그녀는 입술을 다물고 에녹을 응시했다. 잠시 방안에 정적이 흘렀다. 타닥타닥하고 나무가 타는 소리를 인식했을 무렵 케이트가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케이트의 말에 에녹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영리한 아이다. 정말로. “…그 이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케이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에녹의 손이 다시 케이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카티야 말이냐?” “네. 그 이름이요.” 케이트를 카티야라고 부르는 건 세상에 단 세 사람뿐이었다. 닉, 베스, 에녹. 그리고 지금은 단 한 사람만 남아버렸다. 케이트는 에녹의 무릎에 손을 대고 그 위에 머리를 얹었다. 에녹이 가만히 쓰다듬는 손길이 기분이 좋았다. 아주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들을 때 이렇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작고 어두운 방이었지만 행복했다. 마치 그때의 어린 소녀로 돌아간 것 같았다. “감사해요, 아저씨.” ============================ 작품 후기 ============================ 내일이 빨간 날인 줄 알고 진짜 좋아했는데.... 큽 ㅠㅠㅠㅠㅠㅠㅠ 왜 빨간 날이라고 생각했나 모르겠어요 ㅠㅠㅠ 아 어제 치킨은 안버렸어요. 냉장고에 던져놨습니다. 걱정마세요. 00168 1. 레인포레스트의 아가씨 =========================================================================                            “잠시 기다리시면 아가씨께서 나오실 겁니다.” 집사의 안내에 따라 조세핀은 가까운 소파에 앉았다. 이번이 세 번째인데 여전히 저도 모르게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게 된다. 레인포레스트의 저택은 수도에서 큰 저택 중에서도 상위에 속했다. 이번에 안내받은 응접실은 지난번 응접실과 다른 응접실이었다. 손님용 응접실이 몇 개나 있는 거다. 귀족이라면 보통 두 개 이상의 손님용 응접실이 있다. 혹시라도 서로 껄끄러운 사람 둘이 동시에 방문한다면 나눠서 접대해야 하고 간단한 파티라도 열게 되면 식사 후 여성과 남성으로 나뉘어 대화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부유한 킬리언 가도 응접실이 두 개였다. 하지만 에녹의 저택은 훨씬 고풍스러웠고 오래된 느낌이 들었다. 저택 자체가 지은 지 최소 백 년은 되었다는 소문이다. 케이트보다 먼저 하녀가 다과를 가지고 들어왔다. 두 종류의 차와 다섯 종류의 과자. 하녀는 소리 없이 다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가씨께서 친구분이 오셨으니 극진히 대접하라 하셨어요.” 말끝에 상냥한 웃음이 붙는다. 아, 네에 하고 대답하는 조세핀의 가슴 한 부분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코트 양!” 케이트는 조세핀이 보기에 완벽하다 싶을 정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그녀가 입은 상아색의 드레스는 최근 사교계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이었다. 아무 장신구도 하지 않았지만 사랑스러운 얼굴을 관리를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어서 와요.” 케이트는 스스럼없이 조세핀을 끌어안았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처음 저택에 찾아왔을 때 이런 환대에 조세핀은 당황스러워서 몸을 굳혔다. 그녀에게 케이트는 조금 친해진 집주인 정도였다. 예쁘장하고 성격도 좋은 집주인. 약간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여자. 하지만 케이트에게 조세핀은 수도에서 생긴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게다가 한 달 동안 저택에 갇히다시피 생활하다 보니 외부에서 오는 손님은 전부 반가웠다. “잘 지냈어요?” “네에. 스미스 양도 잘 지냈어요?” 케이트는 작게 웃으며 가지고 온 주머니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천에 수를 놓은 것을 보이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가 한 거예요. 선물이에요.” 또 이러네. 조세핀은 물끄러미 주머니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세 번 째인데 세 번 다 선물을 받았다. 첫 번째는 쿠키였고 두 번째는 케이크였다. 그녀는 주머니를 내려다보며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고민했다. 쿠키와 케이크라면 집에 돌아가 나눠 먹으면 되니 받았지만 주머니라니. “안에 체리 씨를 넣었어요. 오븐에 데워서 품에 넣으면 따듯할 거예요.” 아, 그런 용도였군. 작년 겨울에 포목점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가지고 다녔던 것도 같다. 최근엔 집 밖을 나서지 않으니 몰랐다. 게다가 이 주머니를 만든 천이 보통 주머니를 만들 때 쓰는 천과는 달랐다. “천이,” 비싼 거네요. 라고 말하려던 조세핀은 입을 다물었다. 고작 보온주머니용으로 쓰는 천을 이렇게 고급스러운 걸 쓰다니. 케이트의 처지가 실감 나게 다가왔다. “아, 혹시 이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케이트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주머니를 몇 개 더 내놓았다. 꽃을 수놓은 거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그녀는 귀여운 곰과 찻잔을 수놓은 것을 보이며 다시 물었다. “원하는 걸 고르세요.” 이상한 일이다. 조세핀은 케이트가 늘어놓는 보온주머니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케이트처럼 예쁜 아가씨가, 이런 커다란 저택에 사는 아가씨가 자신을 이렇게 배려해주는데, 자신을 이렇게 좋아해 주는데 자꾸만 마음이 불편할까. “저, 그럼 이걸로.” 조세핀이 주머니를 고르자 케이트는 활짝 웃어 보였다. 아, 역시 꽃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거구나. 여성도 꽃무늬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고 남성도 꽃무늬를 좋아할 수 있다. 케이트는 자신의 편견을 탓하며 남은 것을 하녀에게 잘 싸달라고 부탁했다. “남은 건 큐바인 하우스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전해주세요.” 그 말뜻은 이안과 제인, 제이드에게도 전해달라는 의미다. 조세핀은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제이드와 제인이 부탁한 편지였다. 둘 다 제인을 통해서 받았지만. “편지예요.” 케이트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조세핀은 저도 모르게 한마디 얹었다. “로엔 경은, 없어요.” 일순 케이트의 얼굴이 흐려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 실망한 기색을 지우고 밝게 말했다. “이안은 편지를 쓸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 말에 두 사람은 같이 웃었다. 케이트는 섭섭함을 지우기 위해, 조세핀은 따끔하고 찔린 죄책감을 지우기 위해. “제인 말로는 제인도 방문허가를 안 해준다고 하던데요.” 조세핀의 질문에 케이트는 쓰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아저씨께 여쭤봤어야 했는데 가족 이야기를 하느라 잊어버렸다. 그녀는 음하고 말을 골랐다. 잘못하면 제이드나 이안을 위험한 남자로 생각했다는 식으로 조세핀이 받아들일 수가 있다. “저 혼자 있으니 아저씨께서 걱정되는 모양이세요.” “그렇다 해도 제인까지 방문 허가를 안 내 주시는 건,” 조세핀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너무 공격적으로 나가버렸다. 하지만 케이트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제인의 방문까지 거절하는 건 좀 심하지 않나 하고 생각했으니까. “아저씨 말씀으로는, 한 명을 허용하면 다른 사람도 허용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제인을 허용하면 이안도 허용해야 한다. 에녹과 케이트는 그런 의미로 한 말이지만 조세핀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남자들의 방문을 허용하지 않는 거구나. 다시 조세핀의 가슴이 따끔했다. 소중하게 대해주는 거구나. 부모도 아닌데. 케이트와 대화를 나눈 뒤 저택을 빠져나오면서 조세핀은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다. 가슴이 따끔하고 자꾸만 불편해지는 건, 질투 때문이다. 예쁘장한 얼굴에 자그마한 체구. 조세핀처럼 조금 알고 지낸 사람도 친구라고 생각하는 저 싹싹함. 그녀가 고아에 하녀일 때는 조금 나았다. 큐바인 하우스의 집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괜찮았다. 아니, 무시할 수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그런데. 그녀는 케이트가 타고 가라고 내어준 마차에 올라타며 한숨을 흘렸다. 쌍두마차는 에녹이 케이트를 위해 준비해 준 마차였다. 에녹은 마차를 타지 않으니 케이트가 손님용으로 혹은 나중에라도 저택을 나갈 일이 있을 때 사용하라고 준비해 주었다고 들었다. 유서 깊은 저택에 살면서 유행하는 드레스를 입고, 내킬 때면 원하는 차와 디저트를 내오는 하녀가 있다. 게다가 그녀의 부모처럼 남자라면 아무라도 좋으니 딸을 데려가길 바라지도 않았다. 아무 남자나 접근하지 못하도록 남자의 방문을 전부 거절하고 에녹이 있을 때만 고르고 골라 받아들인다고 했다. 친딸도 아닌, 대녀를. “젠장.” 조세핀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미칠 것 같다. 부러워서, 질투심이 나서. 그녀를 부러워하는 자신이 너무 초라해서. 누구는 저렇게 예쁘고, 몸매도 좋은데! 돈 많은 대부가 있는데 심지어 그 대부가 아껴주기까지 한다. 더 화가 나는 건 케이트의 성격이 좋다는 점이다. “성격이라도 나쁘던가!” 조세핀은 품에서 케이트가 선물한 보온 주머니를 꺼냈다. 작은 곰이 수 놓여 있었다. 수가 엉망이라면 기분이라도 좀 나을 것 같았다. 케이트가 하나라도 그녀보다 못한 게 있다면 그걸로 위안 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완벽하네. 조세핀은 멍하니 생각했다. 케이트가 선물하려고 만든 거니 가장 잘 만든 걸 챙겨준 게 당연했다. 나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우울했다. === 케이트는 조세핀이 떠나자마자 제인이 썼다는 편지를 뜯었다. 큼직하고 삐뚤빼뚤한 글씨가 제일 먼저 눈에 보였다. -캐이트 버거 시퍼요 다 틀렸잖아. 케이트는 피식 웃었다. 동시에 가슴이 따듯해졌다. 이안에게 철자가 틀리지 않았는지 물어볼 용기는 없었던 게 분명하다. === “다녀오셨어요?” 데이지는 마차 소리에 문을 열고 돌아오는 조세핀을 반겼다. 데이지의 주급은 우편을 통해 꼬박꼬박 도착하고 있었다. 케이트는 사용인의 임금을 모른척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아, 네에.” 어디인지 모르게 기운이 빠진 모습에 데이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이트 아가씨를 만나러 다녀온다고 했는데? 생각해보면 조세핀은 케이트를 만나고 오면 늘 어느 정도는 기운이 빠진 상태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데이지는 그녀의 코트를 받아 들며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뇨.” 그렇게 말하면서도 조세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을 부러 하는 게 얼마나 최악인지 안다. 그녀는 이미 경험했다. 부모님의 자랑, 인기를 독차지하던 아름다운 에이미. - 언니, 밖에서 아는 척 하면 안 돼. 알겠지? 일순 에이미의 얼굴과 케이트의 얼굴이 겹쳐졌다. 아니야. 조세핀은 고개를 저었다. 에이미와 케이트의 얼굴은 전혀 다르다. 두 사람의 아름다움은 전혀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이다. 그런데 지금 조세핀에게는 두 사람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아가씨?” 조세핀은 문득 눈앞에 선 데이지를 발견했다. 이 무거운 마음을 누군가에게 라도 토하고 싶었다. 너는 나쁜 게 아니야. 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데이지는, 누군가가 너무너무 질투 날 때가 있어요?” 뜻밖의 질문에 데이지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잠시 조세핀을 쳐다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조세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럼요. 누구나 그렇죠.” 따듯한 차를 내어 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데이지는 조세핀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 작품 후기 ============================ 오늘 많이 춥죠? 몸살기운이 있나 어째 자꾸 깔아지는거 같아요. 흑흑... 아 맞다. 추가합니다. 후작과 수리공때도 한번 후기에 적긴 했는데 공방 피어나의 카페를 만들었습니다. 주소 : http://cafe.naver.com/bloomingnest 저를 포함한 9명의 작가들이 함께 하고 있고 저는 연재는 조아라에 계속하지만 근황이나 이벤트 형식으로 외전같은게 올라가기도 합니다. 이게 예정보다 많은 분들이 가입해 주셔서 이번주 금요일(12일)에서 토요일(13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비공개 카페로 전환할 예정입니다. 일년에 한두번 다시 열어서 가입을 받을테니 미성년자분들은 다음기회를 노려주시고 관심있으신 분들은 그 전에 가입 부탁드립니다. 당연하게도 성인만 가입이 가능합니다. 에, 그리고 몇 번 발견했는데... 아버지나 어머니 민번으로 가입한 아이디로 가입신청하지 마세요. 50대 남자인데 닉이 "시우민와이프" 뭐 이런거면 미성년자가 부모님이나 조부모의 아이디 도용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어요OTL 위에 든 예시는 전부 예시입니다. 전 시우민이 누군지도 몰라요. 00169 1. 레인포레스트의 아가씨 =========================================================================                            또 찾아왔네. 이안의 얼굴을 보자마자 문지기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난번보다 찾아오는 기간이 짧아졌다. 이안이 걸어오는 모습에 문지기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케, 아니. 스미스 양을 찾아왔다.” 매번 말하면서도 이안은 버릇처럼 케이트라고 말할 뻔 한다. 그는 전달하겠다는 문지기에게 신경 쓰지 않고 정문 너머 있는 건물을 응시했다. 에녹의 저택은 수도에 있는 큰 저택 중에서도 상위에 속한다. 그건 그의 저택이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에 사람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을 때 세워진 덕분에 넓은 땅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신식인 큐바인 하우스보다 훨씬 고풍스럽다. 반대로 그건 외풍이 심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난로를 아무리 활활 태워도 넓은 방을 데우기는 역부족이라 케이트는 탕파와 보온주머니를 끼고 살았다. 거기에 따듯한 차를 곁들이면 움직이기 싫어진다. 그녀는 수를 놓다가 차가운 바람이 한 줄기 들어온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들어온 모양이지? 슬쩍 몸을 일으키자 옆에서 같이 수를 놓고 있던 마사가 따라 일어났다. “그냥 있어요. 궁금해서 한번 쳐다보려는 것뿐이니까.” 그렇게 말해도 마사는 케이트의 뒤를 따라 방을 나왔다. 케이트는 이왕 일어난 거 일부러 앉으라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단까지 나가서 난간 너머 아래층을 내려다봤다. 문지기가 집사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는 게 보였다. “알겠네.”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치 케이트가 거기 있는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어머.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던 케이트는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미리 연락하지 않은 손님이 왔다고 합니다.” “그래요?” 과연 에녹 아저씨의 집이구나. 케이트는 순진하게 생각했다. 그녀가 이 저택에 머무는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손님이 찾아오곤 했다. 연락 없이 오는 손님은 전부 돌려보냈다는 걸 케이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히려 연락 없이 오는 게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돌려보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케이트는 에녹이 이안의 방문을 아예 허락하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안이 찾아온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제가 가서 아저씨는 안 계시다고 말씀드릴게요.” “아닙니다. 제 일이니까요.” 집사는 코트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제 얼굴을 알고 계시니 제가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겁니다.” 그것도 그렇겠네. 케이트는 깔끔하게 단념했다. 처음 보는 여자가 나와서 아저씨는 안 계시다고 말하는 것보다 집사가 나가서 말하는 게 나을 것이다. 집사는 깔끔하게 물러나는 케이트의 태도에 속으로 안도하며 건물을 나섰다. 이안 로엔 경이 다시 찾아왔다는 소식을 막 받았기 때문이다. 에녹은 집사에게 자신이 없을 때 케이트를 찾아오는 모든 남자의 방문을 거절하라고 말했다. 그중에서도 이안과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안 된다고. 그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건물을 나섰다. 어디까지 막을 수 있을까. 교육과 추위를 이유로 저택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의 문제다. 케이트는 영리했고 에녹이 준비한 교육을 빠르게 습득하고 있었다. 사교계에서 보여야 할 기본적인 예의에서 귀족 가의 영애들이 기본 소양이라고 부를만한 춤이나 그림, 악기 연주도 잘 따라오고 있었다. 원래 기본적인 예의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던 데다가 심지어 이 아가씨는 글을 읽고 쓸 수까지 있다! 집사는 케이트가 전달받은 편지를 아무렇지 않게 읽는 것을 보고 기절할 뻔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글을 읽고 쓸 줄 안다. 케이트 스미스라는 아가씨는. 다음 순간 집사는 어째서? 라는 의문을 떠올렸다. 뮈엘라는 힘의 나라. 글을 읽고 쓰는 것을 가벼이 여긴다. 그런 가볍고 자잘한 일은 비실비실한 녀석에게나 맡기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여성이라면 차라리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게 나을 것이다. (물론 케이트는 그림도 그릴 줄 알지만.) “안녕하십니까.” 정문에 도착하자 집사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는 오른손을 가슴 아래쪽에 대고 인사를 건넸다. 눈이 내리지 않을 뿐 여전히 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이안은 아랑곳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스미스 양을 만나고 싶다.” 이 남자는 인간이 아닌 게 아닐까. 집사는 잠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며칠 전과 같은 장소, 같은 자세, 같은 목소리로 같은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내뱉는 이안을 보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바쁘셔서.”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저택을 향했다. 잠시 멈춰있던 공간을 깨고 집사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만나실 수 있을 때 연락드리라 전해드리겠습니다.” 전에도 그 소릴 했다. 케이트가 거부하는 건 아닐 것이다. 이안은 그녀와 만나지 못하게 막는 게 에녹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달 째다. 케이트를 만나지 못한 것이.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달 만에 이안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그대로 다리를 들어 정문을 걷어찼다. 문지기는 그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쩡! 하고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는 음파가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뇌리에 울려 퍼졌다. 문지기와 이안의 손이 반사적으로 검 손잡이를 향했다. 집사는 귀를 막고 움츠린 상태로 이안과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은 정문을 쳐다봤다. 우웅웅 하고 정문을 감싼 막이 일렁이는 게 사람들의 눈에 보엿다. “마, 마법?” 문지기가 흠칫 떨며 중얼거렸다. 이 저택의 주인이 엘프라는 것을 모르는 자로군. 집사는 냉정한 눈으로 문지기를 쳐다봤다. 그들은 에녹이 케이트를 데리고 오면서 고용한 자였다. 수도의 저택에는 문지기가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다. 호건 가의 저택 정도일 것이다. 에녹의 저택도 문지기가 생긴 것은 한 달 전부터였다. 전부 케이트를 보호하기 위한 에녹의 생각이었다. “마, 마법이!” 문지기가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한 달 전에 고용한 문지기들을 제외하면 저택의 사용인들은 전부 에녹이 엘프라는 것을 안다. 고용하기 전에 몇 번이나 교육을 한다. 엘프의 특성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수나 대우가 후하기 때문에 사용인들도 한번 들어오면 그다지 쉽게 나가지 않는다. “조용히 하게.” 집사의 일갈에 문지기는 입을 다물었지만 당장 신고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는 눈치였다. 귀찮아지지 않도록 문지기들에게도 교육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마법은 대체 언제 건 걸까. 아무도 문에 손을 대지 않았다. 마법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만 있어도 이 마법이 이안에게만 향하는 마법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오늘 아침 에녹이 출근할 때 문지기가 손을 댔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그 직후 집사가 몇 번 왔다 갔다 하면서 손을 댔지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집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에녹과 케이트뿐이지만 케이트는 자신의 능력을 자유자재로 다루지 못하고 그녀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 역시 에녹뿐이다. 그러니 이 마법은 에녹이 최소한 오늘 이전에 걸어놨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문지기는 물론이고 집사도 마법에 대해 아는 게 없었기 때문에 약간 겁을 먹은 상태였다. 이안은 잠시 문을 쳐다보다가 검을 들어 문을 툭 쳤다. 다시 한 번 징~ 하는 음파가 사람들의 뇌리에 올려퍼졌다. 아까와는 강도가 약하지만 같은 느낌이었다. “문 열게.” 이안의 말에 집사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죄송하지만 주인님께서 안 계시는,” “안 들어갈 테니 열어.” 안 들어갈 테니 열라고? 문지기와 집사의 시선이 부딪쳤다. 문지기는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갖다 댔다. 여차하면 이안을 공격해야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안 로엔 경의 실력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다. 그러니 실력 때문에가 아니다. 이안이 로엔 백작 가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백작 가의 서자에게 한낱 용병 문지기가 검을 휘두르는 건 아무리 힘의 나라 뮈엘라라 해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집사는 속으로 한숨을 한번 내쉬고 문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여차하면 이안을 잡으라는 눈짓도 잊지 않았다. 이안은 문이 열리자 저택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뭔가가 그를 밀어내는 게 느껴졌다. 딱딱한 벽 같은 느낌이 아니라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느낌이었다. 정문을 기점으로 그 안으로 손을 뻗거나 발을 내밀면 가벼운 저항감만 느껴질 뿐 내밀어 지기는 했다. 문제는 몸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안은 뒤로 물러나서 텅 빈 공간을 응시했다. “어라?” 이안의 행동을 보고 있던 문지기가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앞으로 나섰다. 이안을 불러오기 위해 방금 들어갔다 온 문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밀었고 아무 방해물 없이 저택의 영지로 들어갔다. “어랍쇼.” 놀란 소리는 문지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이안 로엔 경만 막았다는 말인가? 집사가 고개를 돌렸을 때 이안은 이미 저택을 떠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후후후후 여러분 즐거운 금요일입니다. 오늘 제가 사는 동네는 눈이 많아 오던데 다들 추위 조심하세요 다음주에 봬요 00170 2. 쉴드 =========================================================================                            “정말로 몰랐습니다.” 머리가 벗겨진 남자가 이안의 앞에 앉아 간청하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럴 리 없다고 큰소리치던 자다.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아무 감정도 담지 않고 남자를 응시했다. “진짜입니다. 몰랐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마법 스크롤이 두어 장 놓여 있었다. 뭐에 쓰려 했던 건지 이안은 스크롤을 힐끔 보고 예상했다. 대상자를 잠들게 하는 마법과 몸이 공중에 뜨는 마법이다. 효과가 어느 정도 일지 모르겠지만, 범죄에 사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이고, 수사관님.” 이안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애가 탄 남자가 매달려왔다. 그는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자 흠칫해서 잡았던 손을 놓았다. 젊은 놈이 혼자 와서 수사관이라 하길래 얕봤는데 귀신같이 그가 숨겨둔 마법 스크롤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지 못한 점은 뮈엘라의 수사관들은 숨겨진 것을 찾는 게 일이라는 점이었다. 이안은 남자의 벗겨진 머리를 보며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다. 에드워드는 그에게 판결할 수 있는 권한까지 줬다. 그건 어지간히 무거운 사건이 아니면 자신에게 가져오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이안은 경고로 넘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문제는 그가 발견한 것이 생각보다 적다는 점이었다. 처음 그의 계획은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발견한 것은 마법 스크롤 두 장뿐. 남자를 캐봤지만 정말로 이 두 장뿐이었다. 아무리 뮈엘라라 해도 마법 스크롤 두 장으로 재산을 몰수하는 건 가혹하다. 벌금형 정도가 좋겠지. 재산의 반 정도. 그때 이안의 눈에 문밖을 스쳐 지나가는 붉은 머리 여자가 들어왔다. 검은색과 하얀색의 하녀 복을 입고 하얀 리본으로 붉은 머리를 묶어 올린 뒷모습이 익숙했다. 반사적으로 이안의 몸이 움직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문밖으로 한 발짝 내디딘 상태였다. “죄, 죄송합니다.” 하녀가 이안을 보고 머리를 조아렸다. 아니다. 기이한 감정이 이안의 가슴에 한 줄기 연기처럼 날아올랐다가 흩어졌다. 아니다. 케이트가 아니다. 그저 빨간 머리일 뿐 케이트와 전혀 닮지 않았다. 그녀와 생긴 건 물론, 분위기조차 달랐다. 이 여자는 케이트에 비하면 밋밋할 정도였다. 이안은 말없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때 남자의 눈이 빛났다. 그는 완전히 상황을 오해하고 이안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저 아이가 마음에 드십니까?” 이안의 차가운 눈동자가 남자를 향했다. 그는 비열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고 속닥였다. “마음에 드신다면, 드리겠습니다.” 뭐를? 이라는 질문은 가까스로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고 잠시 남자를 쳐다봤다. 하녀를 주겠다는 건가? 여자를? 저 빨간 머리 계집을? 다시 한 번 가슴을 채우는 감각에 이안은 당황했다. 뭔가가 욱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핏줄이 불거져 나올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한 일이다. 불그스름하던 이안의 눈동자가 다시 호박색으로 돌아왔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보통 때와 같았다. “재산 몰수.” 남자의 일그러진 얼굴을 뒤로하고 저택을 나오면서 이안은 기분이 이상했다. 저 정도면 재산 몰수는 과하다 싶은데 오히려 부족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꽉 쥔 손안에 손톱자국이 초승달 모양으로 나 있었다. 문득 이안 하고 누군가 그를 부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안.” 케이트는 온실에 앉아 저도 모르게 한숨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하다. 다른 사람들은, 심지어 제인마저도 편지로 근황을 알리고 있는데 이안의 소식만은 깜깜하다. 제이드는 이안의 소식에 대해서는 아무 정보도 편지에 적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도 이안은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지 못했다. 그건 이상한 싸움이었다. 궁금한데 먼저 물어보면 지는 것 같은, 그런. 그런 마법은 없나. 보고 싶은 사람을 보여주는 마법.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케이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서 꽃을 자르던 마사가 물었다. “아, 이 꽃은 싫으세요?” 마사가 꺾고 있는 꽃은 케이트의 방을 장식할 꽃이었다. 에녹은 방을 장식하기 위해 꽃을 꺾는 걸 허락하지 않았지만 케이트의 방을 꾸미기 위해서라면 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덕분에 신이 난 건 마사였다. 케이트는 꽃을 꺾어 방을 장식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잠시 마사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하던 케이트는 자신의 표정을 그녀가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뇨, 아니에요. 마사가 좋아하는 걸로 하세요.” 꽃을 꺾어 장식하는 데는 관심 없다. 좋아하지 않느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굳이 온실의 꽃을 꺾어서 장식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현재 사교계의 젊은 아가씨들 사이에 유행하는 게 바로 꽃을 꺾어 방을 장식하는 것이었다. 많은 아가씨가 꺾어서 장식하기 위해 정원사를 고용했고 누가 더 비싸고 화려한 꽃으로 장식했는지 경쟁하곤 했다. “아가씨도 하시면 좋을 텐데.” 마사의 말에 케이트는 그저 빙그레 웃고 말았다. 에녹이 장식하기 위해 꽃을 꺾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가 허락한 건 그게 사교계에서 젊은 아가씨들 사이에 유행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케이트는 더 꽃을 꺾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굳이 그녀까지 합세해서 쓸데없이 많은 꽃을 꺾고 싶지 않았다. 다시 시선을 내린 책에 가문의 문장이 있었다. 귀족 가에서 어린아이들에게 각 가문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하는 책이다. 케이트의 손끝이 닿은 곳에 로엔 백작 가의 문장이 있었다. 이것 때문이다. 이안이 생각난 건. 그녀는 한 번 더 문장을 내려다보고 책장을 넘겼다. === 실라 로엔은 평소와 다를 게 없는 이안의 얼굴을 보면서 핼쑥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몸종인 실비아가 알았다면 마님이 더 걱정이라고 투덜거렸을 게 분명했다. “집에 돌아오는 게 어떻겠니?” 느닷없는 말에 이안의 눈동자가 어머니를 향했다. “집으로 말입니까?” “그래. 거기 스미스 양도 없다면서.” 이안은 잠시 어머니가 그 소식을 어떻게 알았을지 궁금했다. 케이트가 에녹에게 끌려간 것을 아는 사람은 제인과 이안밖에 모른다. 하지만 큐바인 하우스를 드나드는 사람이 제인과 이안뿐인 게 아니다. 데이지도 있고 조세핀도 있다. 주기적으로 놀러 오는 제이드도 있다. 하지만 소문을 낸 건 이 다섯 사람이 아니었다. 매일 식자재를 공급하는 배달부였다. 그들은 한 달째 케이트를 보지 못하자 큐바인 하우스의 여주인이 집을 떠난 게 아니냐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소문은 빨리 퍼져나가기 마련이다. “돌아올 겁니다.” 이안의 말에 실라는 아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머니의 귀에 그건 대답이라기보다는 소망으로 들렸다. “왜 집을 나간 거니?” “집을 나간 게 아닙니다.” 이안은 구운 닭고기를 입안에 넣고 씹으며 생각했다. 케이트가 호건 가의 사람이라는 걸 어머니에게 이야기해도 되는 걸까. 안 된다.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런 이야기는 케이트가 직접 하는 게 옳다. “대부를 만나서 그 댁에 잠시 간 것뿐입니다.” 마치 부인이 친정에 잠시 머물러 갔다는 투다. 더 이상 반론을 받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에 실라와 실비아는 눈빛을 교환했다. “대부를 만났다고?” 실라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대부라니 처음 듣는 소리다. 그녀는 케이트가 가족을 찾았다고 한 말을 떠올렸다. 가족이란 게 대부를 말하는 거였을까. 드물게도 이안이 망설였다. 그는 실라에게 어디까지 이야기해도 될지 고민했다. “네. 우연히 대부를 만나서 그쪽 집에 잠시 가 있습니다.” “대부는 어떤 사람인지 아니?” 이번에도 이안이 망설이자 실라와 실비아의 눈이 커졌다. 어머, 무슨 일이래요? 실비아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잘, 모릅니다.” 실라는 이안이 그가 말하는 것보다는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아들이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뭘 숨기는 걸까. 실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월요일입니다. 흑흑... 월요일따위...월요일 따위!!!! 표지 변경했습니다. JaRn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분위기와 달리 너무 밝고 사이좋은 이안과 케이트네요. 얘네도 언젠가 그렇게 돼야할텐데...(소망) 00171 2. 쉴드 =========================================================================                            에녹과 이안은 의외의 장소에서 우연히 만났다.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고 에녹은 모른 척하려 했다. 안타깝게도 왕궁 내에 있는 마법부는 매우 한산했고 작았기 때문에 서로의 존재를 무시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뮈엘라에도 마법부가 있다. 마법을 배척하는 나라이기는 하나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뮈엘라는 마법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때의 마법 건물을 관리하고 아직도 내려오는 마법 혈통을 관리하기 위해 마법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에녹.” 회색에 가까운 은발 머리를 가진 여자가 낡은 문을 빠져나와 에녹에게 인사를 건넸다. 에녹은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지만, 그녀의 눈에 그건 확실히 이상한 태도였다. “무슨 일 있으세요?” 에녹은 상냥하고 친절한 엘프다. 마법부의 사람 중에 에녹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정도는 너무 약하다. 어떤 식으로든 에녹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자는 없다는 게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 에스텔의 눈에 인사를 무뚝뚝하게 받는 에녹이란 이상하고도 남을 사건이었다. “아니, 아닐세.” 에스텔은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에녹에게 다가갔다. 어디 아프신가? 엘프는 인간의 병에 걸리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엘프의 병에 걸린 거라면 사람은 고칠 수가 없다. “어디 편찮으신 건가요?” “아니, 아니야.” 무슨 일이지. 아무리 물어도 에녹이 아니라니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다. 에스텔은 문득 이안 때문에 에녹이 더 말을 못하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안 로엔 경. 그리 자주 오는 건 아니지만 올 때마다 마법부의 직원들을 불편하게 하는 남자. 뭔가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게 아닌데 묘하게 그의 존재 자체가 불편하다. 하지만 이안은 사교계에서도 워낙 불편하다는 평이라 에스텔은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로엔경, 어떻게 오셨나요?” 이안은 말없이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를 받아 든 에스텔은 그 안에 든 마법 스크롤 두 장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거한 물품이군요. 폐기할까요?” 이안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폐기하기 위해서는 서류작업을 먼저 해야 한다. 에스텔이 이안이 작성해야 할 서류와 펜을 가져다주는 것을 에녹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에녹.” 마법부장은 여자였다. 아마 뮈엘라에서 여자가 한 기관의 장을 맡고 있는 경우는 한 손에 꼽을 것이다. 밀레디가 미소 짓자 그녀의 입가에 난 자국을 따라 주름이 생겼다. “잘 지냈느냐.” “그러문요.”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말아 올린 밀레디가 존대하고 젊은 청년으로 보이는 에녹이 하대하는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마법부에서는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밀레디는 다기를 꺼내 에녹을 위해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드세요, 동방에서 구한 차랍니다.” “동방에서?” 구수한 향과 함께 모락모락 김이 올랐다. 에녹은 한 입 마시고 흠하고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좋지요? 두 번째 잎만 사용한다더군요.” “그런 것 같구나.” 잠시 여상스러운 이야기가 흘러갔다. 잘 지내는지, 가족은 어떠한지. 밀레디는 키우는 개가 얼마나 영리한지 이야기했고 에녹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에녹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 말인가?” “에녹은 인간사회에서 인간과 살고 계시잖아요. 제가 블랙에게 느끼는 감정을 에녹은 우리에게 느끼시겠죠.” 이야기가 갑자기 그렇게 되나. 에녹은 쓰게 웃었다.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최초로 만났던 인간. 그리고 마지막으로 케이트까지. 인간사회는 때때로 그를 절망하게 만들곤 했다. 마법의 황금시대부터 힘의 나라가 된 지금까지. 하지만 그때마다 인간사회를 떠나려던 그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 건 이런 사람들이었다. 밀레디, 케이트. 그리고 아까 만났던 에스텔. 아름답고 가슴 아픈 사람들. “그래. 그럴 때도 있었지.” 에녹은 잠시 감회에 젖었다. 니콜라스가 죽었다는 걸 알았을 때, 그가 느꼈던 슬픔. 그리고 케이트를 다시 만났을 때의 기쁨.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잃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도 있는 법이라네.” 그렇죠. 밀레디는 진심 어린 그 말을 받아들였다. 잃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도 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었다. 그녀가 마법사라는 걸 알았을 때 약혼자가 떠났다. 젊은 시절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던 남자들은 그녀가 마법사라는 것을 알자마자 몸을 돌렸다. 남자뿐 아니다. 밀레디는 부모님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왕궁 소속 마법사라 해도 마법사에 대한 뮈엘라의 인식은 달라지지 않는다. “밖에 괴물이 있더구나.” “괴물이요?” 밀레디는 잠시 무슨 소린가 하고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아아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이안 로엔 경 말씀이시군요.” “알고 있느냐.” “유명한 사람이지요.” “유명하다?” “수사관이었습니다.” 에녹이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뮈엘라의 수사관이 조사한 사건 중 마법이 결부된 경우도 적지 않다. 마법이 결부될 경우 마법부와 협력하게 된다. “헌데, 수사관이었다는 말은 지금은 아니라는 말이냐?” “아, 그게.” 밀레디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사건을 수사하던 중 호건 가의 미움을 받아 자진해서 사퇴했다고. 여기서 에녹의 눈빛이 변했다. 호건 가라고? “하여, 특수수사관으로 임명됐습니다. 이 사실은 마법부에서도 저와 에스텔만 알고 있는 이야기고요.” “호건 가의 미움을 받은 자를 특수수사관으로 임명하다니, 누군지 몰라도 알면 호건 가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아, 그것이….” 밀레디는 잠시 망설이다가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다. “에드워드 에반스 공작입니다.” 에드워드 에반스? 잠시 그게 누군가 하고 생각하던 에녹의 눈동자가 놀람이 들어섰다. “에반스 가의 괴물 말인가?” “네에.”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지만 밀레디는 조용히 수긍하고 말았다. 어차피 마법부에 올 사람도 없다. 설령 누가 들었다 해도 에녹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 아니, 엘프다. “허어.” 말도 안 된다는 듯 에녹의 손이 자신의 턱을 감쌌다. 두 괴물이 만났단 말인가? 어떻게? 그의 궁금증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밀레디가 말했다. “에반스 공작의 모친과 로엔 경의 모친이 자매라는군요.” “로엔 백작 부인 말인가?” “네. 정확히 말하면 양어머니겠지만요.” 에녹의 입이 벌어졌다. 그렇군.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두 괴물이 아는 사이였다. 그가 아는 한 지금까지 나타났던 두 명 이상의 괴물이 서로의 존재를 알지언정 이런 식으로 연관된 경우는 없었다. 문득 그는 이안과 에드워드가 사촌이라면 그 사실을 케이트도 알지도 모른다는 걸 떠올렸다. 그리고 이어서 이안이 왜 괴물인지, 왜 그를 만나선 안 되는지를 그녀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도. 생각만 해도 불쾌한 감각에 에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에녹, 괜찮으세요?” “…그래. 괜찮다.” “아프실 분은 아니지요.” 밀레디의 농담에 에녹은 피식 웃었다. 인간 사회에서 엘프가 걸리는 병에 걸릴 일은 별로 없다. 하지만 반대로 만에 하나라도 걸리면 죽을 가능성이 높다. 치료할 수가 없으니까. “이만 일어나야겠구나.” “네?” 밀레디는 이게 무슨 일인가 하여 에녹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직 본 이야기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일어난다니 놀랄 만도 하다. “여기 온 용건은 다음에 다시 와서 하마.” 역시 용건은 꺼내지도 않은 게 분명하다. 밀레디는 그러시라며 에녹을 배웅했다. 이미 마법 스크롤을 접수한 이안은 떠난 다음이었다. 그는 에스텔의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마법부 건물을 떠났다. 케이트에게 괴물과 마녀에 대해 이야기해줘야 할 때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아, 오늘 진짜 추웠어요. 걍 집에 갈까 하다가 이 폭설을 뚫고 카페에 가서 글을 쓰면 뭔가 억울해서라도 많이 쓸거 같아! 라는 생각에 강행했는데 어깨가 아파요. 00172 2. 쉴드 =========================================================================                            “엘프 에녹말야?” 에드워드는 뜬금없이 왜 묻느냐는 투였다. 이안이 어쩐 일로 찾아왔다 했더니 다짜고짜 에녹이라는 엘프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 안다면 알지만. 그는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엘프 에녹의 존재는 딱히 비밀은 아니었지만 약간 미묘한 부분이 있었다. “갑자기 왜 묻는 건데?” “그자가 스미스 양의 대부입니다.” “스미스 양?” 에드워드는 곧 스미스 양이 케이트라는 것을 떠올렸다. 이안이 입에서 나올만한 여성이라면 케이트 밖에 없다.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고 보니 스미스 양이 호건 가의 사람이라면서?” 이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소식은 들었지만 확인을 받으니 또 새로웠다. 에드워드는 입을 딱 벌렸다. “그 아가씨가 호건 가의 상속녀에 엘프 에녹의 대녀란 말이지?” 그렇게 나열하고 보니 그렇다. 이안은 거기에 마녀라는 사실도 덧붙였다. 케이트 스미스. 마녀에 호건 가의 상속녀. 그리고 엘프를 대부로 가진 여자. 마녀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케이트는 내년 사교계의 가장 떠오르는 꽃이 될 것이다. 아니, 될 것이다가 아니다. 그녀가 마녀라는 걸 아는 사람은 이안 뿐이다. 적어도 이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내년 사교계에서 케이트는 가장 떠오르는 꽃이 될 게 분명하다. 문득 이안은 에녹이 케이트가 마녀라는 것을 아는지 궁금해졌다. 아마 알 것이다. 에녹의 저택에 걸려있던 그것. 마법이 분명하다. 어떻게 이안만 골라서 거부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아는 한 그런 힘이 가능한 건 마법뿐이었다. “그 정도면 나도 탐이 날 정돈데.” 에드워드가 씩 웃으며 말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호건가의 상속녀에 엘프 에녹의 대녀라면 말야, 나도 탐이 난다고.” “진심입니까?” 이런. 에드워드는 혀를 차며 물러났다. 어쩐지 전에 스미스 양을 보는 이안의 눈빛이 좀 묘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촌이 호건 가의 상속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 사실 농담은 반쯤이고 반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이안, 농담이 통하는 자가 아니다. 에드워드가 케이트를 탐내는 건 당연했다. 호건 가의 상속녀에 에녹의 대녀라니. 이만큼 구미가 당기는 여자가 또 있을까. 케이트를 손에 넣으면 호건 가의 부와 에녹의 마법이 손에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다. 뮈엘라가 마법을 배척한다고는 하나 과거 마법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나라인 만큼 마법을 완전히 배제하기란 어렵다. 과거의 잔재인 마법들을 관리하기 위해 아직도 왕궁에서는 마법 부를 운영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마법이란 편리하다. 뮈엘라에서 조차도 마법이 편리하지 않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저, 위험하다고 말할 뿐이다. 귀족들도 뒷문으로는 마법을 슬쩍슬쩍 쓰고 있다. 알라나데일에서 팔린 마법 아이템이 아직도 뮈엘라 전역에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귀족의 비밀방일 것이다. 에드워드는 손을 저으며 부인했다. “농담이야. 그만큼 스미스 양의 위치가 대단하다는 거지.” 그럴까. 이안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케이트는 알라나데일에서 만난 자그마한 빨간 머리 여자일 뿐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케이트는 왕조차도 한걸음 양보하는 호건 가의 사람이다. 그것도 현재 남은 유일한 미혼여성. 그것만으로도 사교계에서 케이트가 어떤 입장일지 이안은 깨달을 수가 있었다. 이 정도 배경이면 케이트가 팔다리 하나가 없더라도 구혼이 물밀 듯이 들어올 것이다. “아, 이제 알았나?” 이안이 생각에 잠기자 에드워드는 장난처럼 말했다. 그의 사촌은 스미스 양이 얼마나 귀한 몸인지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런 이런. 안됐다고 생각하면서도 에드워드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에게는 로즈마리가 있다. 그는 로즈마리를 절대로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것이다. 그렇다면 스미스 양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스미스 양에게 공작부인의 자리를 준다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로즈마리를 놓치게 된다. 로즈마리는 누군가의 첩으로 살겠다고 생각할 타입이 아니다. 그가 자신을 첩으로 두려 한다는 걸 아는 순간 떠날 것이다. 가둬두는 방법도 있지. 이성은 로즈마리가 살아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달랐다. 자신을 미워하는 로즈마리를 감당할 수 있을까. 못할 것이다.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자신을 첩으로 곁에 묶어두는 그를, 로즈마리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증오하고 거부할지도 모른다. 그건 안 된다.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에드워드는 간단히 케이트를 단념했다. 아깝긴 하지만 로즈마리를 어떤 방법으로든 잃을 위험을 감수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위치에 두는 것이다. “이안.” 에드워드는 나지막하게 이안을 불렀다. 호박색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했다. 이안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궁금하다. 그는 약간 주저하다가 물었다. “자네, 스미스 양을 원하나?” 사랑하느냐고 물었다면 이안은 아니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사랑은 상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주는, 그런 감정이다. 하지만 케이트에 대한 감정은 그런 자애로운 게 아니었다. 사랑하니까 놓아준다거나, 사랑하니까 행복을 기원한다는 그런 물렁물렁한 감정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범주의 것이었다. 이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네.” 그는 케이트를 원한다. 케이트를 보고 있으면 손끝에서 뭔가가 스멀스멀 타고 올라오는 감각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이게 원하는 감정일 거라고 이안은 생각했다. 그는 지금까지 무언가를 두고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 두 가지로만 나누었다. 가질 수 없다면 아무리 원해도 소용이 없다. 그 사실을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깨닫고 있었다. 친부모의 애정. 타인의 호의.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하는 것이 부질없는 짓이다. 영혼을 깎아 먹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영혼은 지금 조금씩 소모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이안은 생각했다. 에드워드는 이안의 눈을 보고 턱을 쓰다듬었다. 쉽게 내가 도와주겠다고 나설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 차라리 케이트가 하녀일 때 결혼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안은 서자이긴 하나 백작 가의 사람이고 천애 고아인 하녀와 결혼했더니 그 하녀가 호건 가의 상속녀더라 라는 이야기는 이안의 안목과 운이 뛰어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두 사람의 입장이 뒤바뀌어 버렸다. 아니, 그보다. 에드워드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잠깐, 스미스 양도 자넬 마음에 들어 하나?” 이안의 몸이 굳었다. 케이트가 그를 마음에 들어 하나?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문제다. 사실 이안으로서는 지금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기도 했다. 케이트에 관한 한 이안은 원한다 뿐이었다.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인생 최초로 가질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원한 건 케이트가 유일했다. 아니, 두 번째일 것이다. 그러니 케이트도 그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허?” 에드워드는 어이가 없어서 신음만 흘렸다. 아, 이 친구야. 그게 문제지! 그럼 일단 스미스 양이 그의 사촌을 좋아하게 만드는 게 중요했다. 그는 이안을 빤히 쳐다봤다. 검은 머리카락과 호박색 눈동자가 좀 강렬하기는 하지만 남성적이고 잘생긴 얼굴이다. 무섭다는 평은 이안의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 일단 얼굴은 호감형이군. 에드워드는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전혀 아니라고 말할만한 생각을 한 뒤 손뼉을 짝하고 쳤다. “그럼 스미스 양과 친해지라고. 둘이 같은 집에 살고 있으니 더 쉽잖나.”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 이안은 조용히 말했다. “아닙니다.” “엉? 뭐가 말인가?” “같은 집에서 사는 거, 아닙니다.” 어라? 에드워드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하지만 거기에 대답해줄 이안이 아니다. 에드워드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같은 집에서 사는 게 아니라는 의미가 무슨 의민지 설명 좀 해주게.” “대부에게 끌려갔습니다.” “대부?” 잠깐. 에드워드의 머릿속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스미스 양의 대부가 엘프 에녹이라고 했다. “젠장.” 에드워드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엘프 에녹. 좋게 말해도 친하다고 할 수 없다. 서로 꺼린다고 할 수 있다. 에녹은 에드워드를 피했고 에드워드는 자신을 피하는 에녹을 싫어했다. 결국 에드워드는 얼굴을 손에 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거 일이 어려워지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뭘 좀 하느라 시간이 이렇게 가는 줄도 몰랐네요. 00173 2. 쉴드 =========================================================================                            “이리 와 보거라.” 저녁 식사 시간을 마치고 에녹은 케이트를 서재로 불렀다. 집사는 눈치 빠르게 차를 준비하고 물러났다. 케이트는 대부가 자신이 궁금해하던 것을 이야기 해주려는 것임을 눈치챘다. 긴장해서 입안이 마르기 시작했다. 지난번에는 아버지가 마녀라고 했다. 또 얼마나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까. “지난번엔 네 아버지가 마녀라는 이야기를 했지.” “네에.” “마녀는 이성을 유혹한다는 것, 알고 있느냐?”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그런 소문이 있기는 했다. 마녀는 사람을 유혹해서 잡아먹는다. 그건 아이들을 겁주기 위한 괴담이라고 생각했는데. “마녀는 이성을 유혹한단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란다.” 에녹은 어떻게 이야기 해야 할지 몰라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케이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마녀의, 마력보유자의 마력은 매력적이다. 특히 이성에게 매력적이다. 마녀 스스로가 원하지 않아도 이성을 유혹하기 마련이다. 과거, 뮈엘라가 마법의 황금기일 때는 마력보유자라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평범한 외모와 성격의 아가씨가 유독 남자들에게 인기가 좋으면 그녀는 마력보유자이기 때문이었다. 마법이 배척받고 마녀가 사냥당하면서 마녀의 매력은 다른 쪽으로 변질되었다. 그게 마력 때문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이유 없이 남자에게 농락당한 여자는 행실이 헤펐다며 손가락질당했다. 마법의 황금기에는 딸이 마력보유자라면 철저하게 교육을 했다. 남들보다 배는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마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에녹은 케이트의 붉은 머리카락을 한 줌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기억을 못 할 테지만 네 머리카락은 매우 아름다운 금발이었단다.” 에녹의 말에 케이트의 입이 벌어졌다. 문득 기억났다. 그녀가 태어날 때 그녀를 받았다는 산파의 말이. “절 받아준 산파가 그랬어요. 왜 금발을 염색했느냐고요.” “그래. 그래.” 에녹의 손에서 케이트의 머리카락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네 부모가 동의한 일이었단다. 네 마력을 봉인하는 것 말이다.” “네, 마력이요?” “카티야, 아가. 너는 내가 최근 백 년 동안 본 마녀 중 가장 강한 마녀란다.” 케이트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마녀라는 것은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녀가 들은 이야기와 달랐다. “잠깐만요, 아저씨. 제가 만난 마녀들은 제가 아주 약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어요.” “마녀?” 에녹의 손이 케이트의 손을 잡았다. 그는 그녀에게 몸을 내밀고 급하게 물었다. “마녀라니, 어떻게 말이냐?” “어, 그러니까.” 케이트는 그에게 마녀에게 들은 이야기를 했다. 매개체를 받아 꿈에서 만난 세 명의 마녀가 그녀에게 이야기했다는 것을. 마력이 아주 약간 느껴진다고 했던 것을. “위험한 짓을 했구나.” 에녹이 나지막하게 꾸짖었다. 위험한 행동을 했다. 마녀가 어떤 짓을 할지도 모르는데 접근을 허락했다는 건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매개체가 있어야만 꿈에 나타날 수 있잖아요. 그 매개체, 바로 버렸는걸요.” “그들이, 너를 마녀 사냥꾼에게 넘기면 어쩌려고 그랬느냐?” 에녹의 말에 케이트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건 생각도 못 했다. “하, 하지만, 그 사람들도 마녀인데 마녀 사냥꾼과 연결되어 있을까요?” “카티야, 세상엔 상상도 못 할 악당이 많단다.” 케이트의 순진한 말에 에녹은 안타까워졌다. 그녀를 잃어버려서는 안 되었다. 이 순진한 대녀를 그의 울타리 안에서 가르쳤었어야 했다. 케이트는 다른 사람들처럼 마법과 마녀에, 그 뒷면에 성행하는 악의 모습에 무지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그녀는 상황이 더 나빴다. 마녀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그 검은 무리에 끌려가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아가.” 에녹은 안타까운 마음에 케이트의 손등을 토닥였다. 지금까지 케이트가 수도에서 이렇게 무사했던 건 기적에 가까웠다. 케이트는 날뛰는 말 위에 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다. “아가,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 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죄송해요, 아저씨.” “내 탓이란다. 너를 잃어버려서는 안 되었어.” 비록 봉인되어 있었어도 말이지. 에녹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는 네가 강한 힘을 가진 마녀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단다. 너를 그대로 두면 너무 위험했지.” 강력한 마력에 어느 질 나쁜 남자에게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마녀라는 사실이 밝혀져 사형을 당하거나 왕궁에 끌려가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닉은 에녹에게 딸의 마력을 봉인해주길 부탁했다. 뮈엘라에서 마녀의 마력을 봉인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에녹밖에 없으니 케이트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네 마력을 봉인했단다.” 에녹은 케이트의 붉은 머리카락을 다시 쓰다듬었다. “이 머리카락은 그 증거란다. 알고 있느냐?” 빨간 머리는 마녀의 증거. 그런 말이 있다. 케이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런 말이 있긴 했다. 어린 시절 그 말로 놀림을 당하면 울면서 집에 뛰어들어오곤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린아이일 때의 이야기다. 나이를 먹자 아무도 그 이야기를 믿는 사람이 없었다. “그 말이 진짜였어요?” “그 말?” “빨간 머리는 마녀의 증거라는 말이요.” “아아.” 에녹은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아직도 남아있을 줄은 몰랐는데. “예전에, 마녀의 힘이 너무 강하면 봉인을 하곤 했단다. 너처럼 말이다.” 에녹은 케이트의 머리카락을 놓고 다시 그녀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마력이 봉인된 마녀들은 전부 머리카락이 붉게 변했지. 그래서 그런 말이 생겼던 건데 아직도 그 말이 있느냐?” 네.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말이 진짜였던 거구나. 어쩐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겁이 났다. “그럼, 제 머리카락이 붉은 걸 보고 마녀라는 걸 사람들이 알지 않을까요?” 대녀의 질문에 에녹은 껄껄대고 웃었다. 그런 두려움이 생길 만도 하다. “아가, 그럼 이 세상 모든 빨간 머리는 잡혀가지 않겠느냐? 걱정하지 말거라.” 아, 그렇구나. 안도의 한숨이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다행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날아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에녹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력을 봉인하면 평범한 여자와 다를 게 없다. 마법의 황금기에는 마력보유자라는 것 자체가 굉장한 메리트였다. 아무것도 없는 고아 소녀가 강력한 마력보유자라는 이유로 귀족과 결혼한 선례도 있었다. 마력은 혈통을 따라 이어진다. 마법의 나라 뮈엘라에서는 엄청난 선물이었던 것이 힘의 나라 뮈엘라에서는 저주가 되어버렸다. “아가, 오늘 그 남자를 봤단다.” “그, 남자요?” 케이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남자라니 누굴 말하는 걸까. 에녹이 집에서 타인에 대해 그 남자라고 지칭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안 말씀이세요?” 에녹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래, 그 남자. 그는 케이트가 이안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법의 황금기였다면 이안은 기피당했을 것이다. 마법이 배척당하고 그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묻혀버리자 이안과 같은 자들에 대한 기피도 사라졌다. 아니, 그런 자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 사람이 사라졌다. “그자를 알게 된 지 얼마나 됐느냐?” 얼마나? 케이트는 이안을 만난 게 언젠지 떠올렸다. 올해 늦봄에 만났다. 세상에. 그거밖에 안 됐네. 몇 년이나 된 것 같았는데 고작 몇 달이라는 게 놀라웠다. “올해 봄에 만났어요.” “일 년이 안 되었구나.” 고작 일 년도 안 되는 기간 만에 이 정도란 말인가. 에녹은 어쩌면 이안이 그가 아는 다른 괴물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가, 그 남자는 괴물이란다. 나는 네가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약속해 주겠느냐?” “…괴물이요?” 이것도 설명해 줘야 하는 구나. 에녹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다시금 실감났다. 인간 사회에 살면서의 단점이다. “한 세대에 한두 명 그런 괴물이 나타나곤 한단다.” 다시 에녹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말을 골랐다. 최대한 케이트가 겁먹지 않도록 이야기 하고 싶었다. ============================ 작품 후기 ============================ 으으. 늦어서 죄송합니다~ 내일도 늦은것 같은데 어떻게 할 지 고민중이예요... 어쨌거나 오늘도 추웠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내일도 늦을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중이예요. 아참, 지난 화에 에드워드를 전부 에드먼드로 쳐놨더군요;;; 아직도 제가 왜 그랬나 모르겠습니다. 정체를 알수 없는 외계인에게 잠시 조종을 당했던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어요. 여러분도 모두 여러분을 조종할 지 모르는 외계인을 조심하세요. ...는 뻘쭘해서 한 번 헛소리 해봤어요. 00174 2. 쉴드 =========================================================================                            과거, 마법의 황금기에 마력보유자가 큰 영향력을 가졌던 것은, 그리고 현재 힘의 나라 뮈엘라에서 마력보류자를 가장 위험한 자로 낙인찍은 것은 그들이 염원만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하다. 큰 마법일수록 그 조건은 훨씬 복잡하다. 마법을 쓰기 위해 마력을 태워야 하는데 마력이 없는 사람들은 보석이나 약초 같은 것을 마력으로 변환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 방법이 마법 도구, 주술, 마법 진 등이 있다. 쉽게 말해서 등가교환이다. 마력보유자의 가장 큰 장점은 등가교환에서 자유롭다는 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쁜 마음을 품는 사람들이 생겼단다.” 에녹의 이야기는 마치 옛날 이야기 같았다. 케이트는 실감 나지 않는 이야기들. 그녀는 입을 벌리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생각해보렴. 마력보유자의 마력은 무한하지 않단다. 무한한 사람도 있지만 아주 약한 마력을 보유하고 태어난 사람들은 자제하지 못하면 마력이 고갈되어 버리고 말아.” “마력이 고갈되면, 어떻게 되나요?” 에녹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묻는 대녀를 쳐다봤다.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겠다. “마력이 고갈된 마녀는 아주 빨리 늙는단다.” 케이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그녀의 손등을 다독이며 부드럽게 덧붙였다. “걱정 마라, 아가. 욕심내서 마법을 남발하지 않는 한 그런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단다.” 마법의 황금기 때에나 몇 번 있었던 일이다. 마력이 고갈되어 일찍 늙는 마녀는 특히나 지금 힘의 나라 뮈엘라는 거의 없다. 마력을 사용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에녹은 조금 고민하다가 다시 덧붙였다. “게다가 너는 그런 걱정할 필요가 없단다. 내가 있으니까.” 케이트의 마력은 펑펑 써댄다 해도 그녀가 사는 동안 고갈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게 더 위험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마력을 노릴 자들은 아주 많았다. 에녹이 케이트의 마력을 봉인했기 때문에 케이트는 지금까지 안전하게 살 수 있었다. 이안을 만나기 전까지. 어떻게 만난 걸까. 문득 에녹은 이안과 케이트가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에녹의 봉인마법은 완벽했다. “아가, 뭐 좀 묻자꾸나.” “네. 아저씨.” “그 괴, 아니, 로엔 경과는 어떻게 만난 게냐?” “로엔 경이라니, 이안이요?” 에녹이 로엔 경이라 부를만한 사람은 이안뿐이다. 이안의 형인 아르고는 로엔 경이 아니라 로엔 백작이니까. 케이트는 순순히 대답했다. “알라나데일에서요. 거기서 하녀로 일하고 있었거든요. 이안은 새 하인으로,” 거기까지 말하던 케이트는 주춤하고 말을 고쳤다. “이안은 하인으로 위장해서 들어왔어요. 그는 그때 수사관이었거든요.” “수사관? 알라나데일을 수사한 사람이 로엔경이었던 것이냐?” “알고계세요?” 에녹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그는 조악한 마법아이템을 보고 마법이 이 정도까지 바닥에 떨어졌느냐며 마법부 사람들과 펄펄 뛰었었다. “로엔 경이 수사관이었다는 말은 무슨 소리냐?” “어, 그게.” 케이트도 자세한 상황은 몰랐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음, 수사하다가 호건 가를 거슬러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고 들었어요.” 호건 가를 입에 올릴 때 케이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는 몰랐다. 호건 가가 그녀의 가족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더더욱 로엔 백작 부인에게 빚을 진다는 생각이 들어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호건 가 말이냐?” 에녹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표정이 스쳤다. 그 괴물이 호건 가의 심기를 건드려서 수사관 자리를 내놓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케이트가 그 호건 가의 사람이라니. 엘프의 눈에도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네에.” 케이트의 얼굴에 죄책감이 어렸다. 차근차근 생각해보니 성실한 케이트는 이안에게 미안해졌다.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고 신경도 안 쓸 테지만. 그녀의 얼굴을 본 에녹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본 것을 이야기 해줘야 할 것 같다.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 “제가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 호건 가 때문에 그가 피해를 당한 거니까요.” “괜찮아. 오늘 보니 수사관 업무에 복귀했던 모양이더구나.” “어, 진짜요?” 언제 그랬지? 케이트는 갸웃했다. 그녀가 그를 봤던 그 한 달 사이에 많은 일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뭔가 놓친 게 많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쿠웅! 하고 저택이 울렸다. 아니, 공기가 울렸다. 에녹과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이건….” 에녹이 중얼거렸다. 뭔지 안다는 눈치에 케이트는 그에게 매달렸다. “아저씨?” “넌 나오지 말거라.” === 문지기는 어둠 속에서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소리에 긴장했다. 낮이라면 모를까 어두운 저녁에 걸어서 이 길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다. 근처 저택에 사는 사람이라면 전부 마차를 타고 이동한다. 하물며 이 추운 겨울에 일부러 걸어서 올 사람이 없을 것이다. 긴장한 문지기 앞에 검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그 형체는 실제보다 훨씬 커 보였다. “히익….” 저도 모르게 문지기의 몸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검은 남자의 입에서 하얗게 김이 흘러나왔다. 호박색 눈동자가 공중에 둥실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케이트를 만나러 왔다.” 스미스 양도 아니었다. 케이트라는 말에 문지기는 그게 누군가 하고 머뭇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케이트는 아가씨로 불렸다. 문지기가 케이트가 누군지 떠올렸을 때 이안은 이미 검을 꺼내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을 뽑은 그는 거대한 문을 검으로 내리쳤다. 우웅! 하고 공기가 울렸다. 검과 문 사이에 손가락 한 마디만큼의 틈이 있었다. 그 사이에 있는 마법이 이안의 진입을 막고 있었다. “헉!” 문지기가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쿠웅! 하고 저택을 울리는 소리가 났다. “자, 잠깐!” 이 남자가 미쳤나! 밤에 찾아와서 느닷없이 남의 집 문을 검으로 내리치고 있으니 누가 보기에도 훌륭히 미친 남자였다. 이안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공기의 진동을 타고 그의 검은 코트가 휘날렸다. 사악한 마법사의 모습이 따로 없다. 문지기가 이안의 옷을 잡았을 때 집 안에서 에녹이 나타났다. 이안이 가볍게 손을 털자 문지기는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졌다. “이게 무슨 짓인가.” 에녹은 문지기가 각오한 것보다 화난 태도가 아니었다. 그는 여유로운 태도로 정문으로 다가와 철창 사이로 말을 걸었다. 이안은 아직 검을 거두지 않은 상태였다. 문지기는 그의 손에 들린 검이 신경 쓰였으나 에녹과 이안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케이트를 만나러 왔습니다.” 정적이 이어졌다. 두 남자는 철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문지기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치를 구경했다. 에녹이 나왔으니 더 이상 그의 소관이 아니었다. “내가 카티야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에녹의 말에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는 검을 검집 안에 갈무리하더니 비웃듯 말했다. “제가 두려우십니까?” 으아. 문지기는 그 순간, 이 공간에서 사라지고 싶어졌다. 이런 분위기, 전혀 좋지 못하다. 부담스러웠다. 금방이라도 두 사람이 검을 부딪칠 것 같았다. 에녹의 검술 실력이 어떻지? 문지기가 에녹을 도와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을 때 다시 안에서 문이 열렸다. “아저씨!” 케이트가 어깨에 숄을 걸치고 뛰쳐나왔다. 에녹은 인상을 썼고 이안은 저도 모르게 문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괜찮으, 어?” 에녹이 나오지 말라고 한 뒤 공기의 떨림은 몇 번이나 이어졌다. 케이트는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집사의 만류도 뿌리치고 숄을 걸치고 뛰쳐나왔다. 문 앞에 의외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한 달 만이다. 한 달 만의 이안이었다. 반가운 나머지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섰다. “이안,” 그 순간 쿠웅! 하고 공기가 울렸다. 저택을 감싸고 있던 반투명한 막이 출렁였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즐거운 금요일입니다. 아 그리고 검은 소야곡이 이북으로 출간 되었습니다. 타지에 나와있어서 후기에만 간단히 언급합니다. 19금으로 씬과 외전 몇개 추가되었고 조아라에서 연재때 같이 달리신분들은 거의 보신 거지만 이벤트로 쓴외전 두세편 정도 더 추가되어 있습니다. 그래 출판으로 예스24, 알라딘, 유플러스, 티스토어, 네이버북스, 반디앤루니스 ...맞나? 이렇게 세곳에 풀렸다고 합니다. 00175 3. 괴물 =========================================================================                            이안은 마법 스크롤을 테이블에 던졌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귀족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옆에서 겁을 집어먹은 부인과 딸이 울먹이는 소리를 빼면 방 안은 조용했다. “이게 다인가?” “다, 다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귀족은 그렇게 말했지만,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마법 스크롤이 세 개. 이안은 마법 스크롤을 펴서 내용을 살폈다. 일시적으로 힘이 강하게 만들어주는 마법과 일정 범위 안에는 소리가 나지 않는 마법이었다. 세 번째는 마법 스크롤이 아니었다. 종이질이 마법 스크롤 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귀족은 몰랐으리라. 그는 종이를 펼쳐서 내용을 훑었다. 마법 아이템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요컨대, 아이템을 사용하는 설명문이라는 말이다. “거짓말을 하는군.” 고저가 없는 담담한 목소리에 귀족은 허리를 더욱 깊이 숙였다. 카펫에 이마가 닿을 정도였지만 수치보다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아니, 아닙니다. 진짜로 그게 전부입니다.” “마법 아이템이 하나 더 있다.” 어떻게 알았지? 귀족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이안이 진짜로 마법사가 아닌가 하고 잠시 생각했다. 며칠 전부터 귀족들 사이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웬 수사관이 귀족이 소유하고 있는 마법 물품을 수거하고 다니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설마. 알 리가 없다. 소문을 들었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안은 그런 그의 생각을 조롱이라도 하듯 늦은 오후 그의 저택 문을 두드렸다. 거부할 수도 없었다. 에드워드는 이안을 불러 아예 비밀수사관 신분증까지 만들어 주었고 그는 그걸 무시할 정도로 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아, 아닙니다. 진짜로 없습니다.” 귀족의 말에 이안이 검을 뽑았다. 스릉하고 뽑히는 소리에 세 가족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진짜로 없습니다!” 필사적인 말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검은 휘둘렀다. 그가 검은 다시 집어넣자 그제야 장식장 위에 올라가 있던 조각상의 목이 스륵 떨어져 내렸다. 툭 떨어진 조각상의 목이 데구르르 귀족 앞까지 굴러갔다. “히익!” 귀족에 눈에 그 조각은 그도 그렇게 되리라는 암시 같았다. 그는 카펫에 머리를 대고 정신없이 외쳤다. “진짭니다! 아이템이 두 개 있었는데 전부 선물로 보냈습니다!” “선물?” “네, 네. 선물로 바쳤습니다.” 이안은 허리를 숙였다. 남자가 고개를 들자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어디에 보냈지?" “윽….” 귀족은 결국 어디로 보냈는지 이실직고했다. 마법 스크롤 두 개와 아이템구매 및 소지. 불법 마법 아이템의 유포에 대한 벌을 담담하게 내린 이안은 초상집처럼 가라앉은 저택에서 빠져나왔다. 손가락에 낀 반지의 색이 사라졌다. 이안은 색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수거한 마법 스크롤을 왕궁 마법 부에 제출해야 한다. 귀족이 언급한 곳은 호건 가였다. 그는 무슨 이유로 호건 가에 잘 보이기 위해 선물을 보냈다고 구구절절 설명했지만 이안의 머릿속에서 호건 가라는 정보 외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또다시 호건 가의 이름이 나왔다. 알라나데일에서 퍼져나간 불법 마법 아이템을 수거하면서 호건 가의 이름이 지금까지 총 세 번 나왔다. 이안은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날이 어두워지는 탓에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그의 눈 앞에 붉은 머리 여자가 스쳐 지나갔다. “…….” 케이트일 리 없다. 이안은 주춤하던 자세를 가다듬었다. 마차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간 여자는 케이트보다 컸다. 그리고 머리 색도 케이트에 비해 보기 싫은 붉은색이었다. 케이트 스미스. 어머니가 호건 가의 상속녀인 여자. 그리고 레인포레스트의 대녀. 그의 얼굴에 표정을 알 수 없는 감정이 희미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자신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멈춰.” 이안은 마차 천장을 두드리며 외쳤다. 마부가 말을 멈추자 그는 마차에서 빠져나와 삯을 던지고 어디론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 “으헉!” 제일 먼저 소리를 낸 건 문지기였다. 이 저택의 주인이 국가에 공인된 마법사인 것과 나쁜 마녀를 막기 위해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도록 쉴드를 쳤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놀라웠다. 그는 뒷걸음질치다가 발이 걸려 그대로 철퍽 하고 주저앉았다. 이안은 출렁거리는 반투명한 막을 주저함도 없이 손을 뻗어 만졌다. 힘을 주자 막을 뚫고 손이 저택의 영지로 들어갔다. “어!” 케이트가 달려들었다. 그녀는 부랴부랴 철문을 열고 이안을 안으로 들였다. 팔다리는 수월하게 통과했지만, 몸은 약간 빠져나오는 데 힘이 필요했다. 그 모습을 보고 에녹은 혀를 차면서도 마법을 해제하지 않았다. “오, 오랜만에요.” 오랜만이었다. 한 달. 드디어 만났다. 케이트의 마음에 반가움과 동시에 서운함이 차올랐다. 한 달 동안 어떻게 연락 하나 없을 수 있었냐는 투정 아닌 투정이 그녀의 목까지 차올랐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에녹의 말에 문지기가 괜찮겠냐고 물었다. 에녹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왕 들어왔으니 어떻게 하겠나.” 쫓아낼 수 없어 들인다는 말투였다. 문지기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이안은 케이트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잘 지냈어요?” 이안은 케이트를 내려다봤다. 한 달 동안 보살핌 받고 잘 가꿔진 케이트는 활짝 피어난 꽃과 같았다. 하지만 이안의 눈에는 똑같았다. 여전히 작고 붉은 머리였다. 다만 좋은 집의 아가씨답게 연하게 화장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케이트의 입술을 훔쳤다. 연한 입술연지가 이안의 손등에 묻어났다. 다행히도 에녹은 앞서 걷느라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 케이트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안의 손을 잡아 떨어트렸다. 집사는 눈치 빠르게도 간단한 다과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술을 내오느냐는 질문에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별로 술을 마실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여기까지 오게 된 자신의 행동에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이런 식으로 돌발행동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삶에서 돌발 행동은 전혀 좋지 못한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앉아요.” 케이트가 손을 내밀어 자리를 권할 때까지 이안은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의 맞은편에 에녹이 앉았다. 이안은 그 중간에 앉는 케이트의 행동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티 내지 않았다. 오히려 한 달 전 에녹의 태도를 생각하면 케이트가 그와 같은 방에 있는 것을 허락한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어떻게 왔어요? 마차는 안 보이던데.” 차가 준비되는 시간동안 케이트가 얼어붙은 분위기를 누그러트리고자 이안에게 말을 걸었다. “걸어서.” “어, 어디서부터요?” 잘 모르겠다.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번화가였을 것이다.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으니까. 그는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의 걸음으로 삼십 분은 족히 걸었다. “제인은 잘 지내죠?” 케이트는 탐탁지 않은 표정의 에녹을 의식하며 계속해서 이안에게 말을 걸었다. 이안은 눈앞에 에녹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계속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게 조금 부끄러웠다. “이안?” 이안이 대답하지 않자 케이트는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이안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자신의 손등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가 문지르는 바람에 묻은 입술연지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었다. “그래. 잘 지내.” “데이지 양도 괜찮고요?” 거기서 이안은 입을 다물고 에녹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 데이지 양 이야기는 하기 싫은 가 보구나. 케이트는 약간 시무룩해서 입을 다물었다 이안의 목소리를 좀 더 듣고 싶은데 그는 여전히 무뚝뚝했다. 에녹은 케이트가 이안에게 말을 거는 게 싫었다. 저 괴물에게 사랑스럽고 아까운 대녀가 친하게 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안이 케이트의 말을 무시하자 그건 그것대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스로도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면서 에녹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곁에 있었어야 했다. 순진한 그의 대녀는 저 남자가 그녀에게 얼마나 위험한 자인지 모른다. “우유를 넣을까요?” 이안은 하인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하인은 케이트의 잔에만 우유를 조금 따르고 사라졌다. “로엔 백작 가의 사람이더군.” 에녹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의 호박색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네.” 자신보다 어려 보였지만 이안은 일단 존대했다. 상대는 엘프 레인포레스트. 몇백 년이나 살아왔는지 모른다. “타계한 로엔 백작과 몇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지.” 그렇습니까. 라는 듯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렇군. 에녹은 눈앞의 남자가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계한 전 로엔 백작과 똑같이 생겼다. 오히려 현 가주인 로엔 백작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 “아버지를 닮았군.” “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대답이었다. 서자라면 친부를 닮았다는 말에 어떤 감정을 보이게 마련이다. 기쁨, 분노, 슬픔. 이안은 그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이 애의 어머니와 자네 아버지 사이에 결혼 이야기가 오갔다는 것, 알고 있나?” ============================ 작품 후기 ============================ ...오늘이 월요일이었어요. 세상에...제 주말...제 주말 어디로 사라진거죠? 이상해요! 이건 음모가 분명해!!! 내 주말이 어디로 사라진거지??? 누군가 저에게 저주를 건게 분명하다고요!!(끌려감) 표지 변경했습니다! 로네안님께서 표지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00176 3. 괴물 =========================================================================                            일순 케이트는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녀의 어머니와 이안의 아버지 사이에 결혼 이야기가 오갔다고? 어, 어라? 케이트의 시선이 이안을 찾았다. 이안은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저 에녹을 향해 물었을 뿐이다. “그렇습니까?” 이안도 몰랐구나. 케이트는 약간 안도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남자는 왜 당황하지 않지? 라고 생각했다. “잠깐만요, 이안. 당신 아버지와 우리 어머니가 결혼 이야기가 오갔다고 하잖아요.”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케이트를 향했다. 이안은 무덤덤하게 물었다. “그런데?” “어, 그건, 그러니까, 당신 아버지와 우리 어머니가 결혼 이야기가 오갔다는….” “그 이야긴 안다.” “어, 어어, 그러니까 그게, 당신 아버지와 우리 어머니가,” 케이트는 패닉에 빠져 필사적으로 설명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했던 말의 반복일 뿐이다. 이안은 케이트의 말을 듣는 것을 포기하고 에녹에게 물었다. “그게 어떻다는 말씀이십니까?” “자네와 이 아이가 남매가 됐을 수도 있다는 말일세.”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드물게도 어이없다는 기색이 묻어 나오는 말투였다. 하지만 케이트는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패닉에 빠져 어버버 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에녹은 에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저 아이의 대부니까 그 정도는 생각해야 하지 않겠나?” “어느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생각해 보게. 자네와 카티야가 결혼이라도 한다면,” 에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케이트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아저씨!” 케이트의 얼굴은 터질 것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결혼이라니, 이안과 결혼이라니! 그녀는 부끄러워서 이안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이안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거지.” 아, 못살아. 케이트는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에녹은 그런 케이트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이안도 그녀를 바라본다는 사실을 깨닫고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와 카티야가 결혼이라도 한다면 자네 어머니가 이 애를 좋게 생각할 수 있겠나?” 이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네.” 실라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케이트 역시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서 낳은 아이를 자기 자식으로 기른 분이다. 오히려 에녹이 당황했다. “아, 그래?” “네. 어머니라면 기뻐하실 겁니다.”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에녹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고 케이트는 피식피식 흘러나오는 웃음을 찻잔을 들어 감췄다. 이안만 여전히 변화 없는 태도로 앉아있었다. “이안 로엔 경, 자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 결국 에녹은 근엄한 투로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애썼다. 다행히 이안은 따라주었다. 케이트는 키득키득 거리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카티야를 찾아오는 이유가 뭐냔 말일세.”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이안은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이번에도 에녹은 당황했다. 이, 이놈 봐라? 그의 태도에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의 저런 태도는 누구 앞에서나 마찬가지구나. “우리 카티야를 그렇게 쉽게 대하지 말란 말이라네.” “…쉽게 대한 적 없습니다.” “그럼 왜 찾아오지 말라는 데 찾아오는 건가.”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들은 적 없습니다.” 다시 정적이 흘렀다. 이안은 늘 있는 일이라 아무렇지도 않았고 케이트만 안절부절못했다. 이안과 대화하는 상대는 늘 이렇게 대화가 단절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와는 제대로 된 대화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히 에녹의 집사는 이안에게 오지 말라고 한 적이 없다. 에녹도 이안과 제대로 대화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케이트는 이 집에 들어와서 이안과 연락한 적 없으니 아무도 이안에게 오지 말라고 말한 적이 없는 게 맞다. 하지만 몇 번이나 반복되는 방문 거부는 통상적으로 오지 말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그럼 찾아오지 말게.” 에녹이 탁하고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찰랑하고 넘친 차가 그의 손을 타고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거의 다 식어서 뜨겁지 않았지만 케이트가 깜짝 놀라 손수건으로 그의 손을 닦았다.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손수건으로 에녹의 손을 닦는 케이트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에녹의 입장은 확실했다. 이안이 이 집에 오는 것이 싫다는 것이다. “케이트.” “네?” 케이트는 이안의 목소리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케이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너도 나를 만나고 싶지 않아?” 어? 케이트는 당황해서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두 남자는 붕어처럼 뻐금대는 케이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며 기다렸다. “어, 아니, 저, 그게….” 에녹은 케이트가 이안과 만나는 것을 싫어한다. 접근하지도 말라고 했다. 그녀는 에녹의 눈치를 살폈다. 이안과 만나고 싶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다고 막 엄청나게 만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아닌가.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케이트는 골똘히 내면탐구를 시작했다. 이안을 만나고 싶었던 걸까. 그건 맞다. 지난 한 달 동안 그녀는 이안에게 연락이 오지 않는 것을 섭섭해했다. 매일 사용인들에게 편지가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이안이 편지를 기다렸다. 그가 저택 문 앞에 있는 것을 봤을 때는 저도 모르게 달려갔을 정도다. 그러니 만나고 싶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엄청나게 막 만나고 싶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애매해지는 것이다. 이안이 엄청나게 만나고 싶었다면 한다면 그건 그녀가 이안에게 마음이 있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또 마음이 없는 건 아닌데. 케이트의 생각이 길어지자 당황하는 건 남자들이었다. 에녹은 이안을 쳐다봤고 시선을 받은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카티야? 아가.” “어, 네?” 에녹의 부름에 고개를 든 케이트는 두 남자가 자신의 대답을 기다렸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곤란한 상황에 부닥친 케이트를 구해준 것은 집사였다. 그는 가볍게 문을 두드리고 나타났다. “손님께서 묵으실 방을 준비할까요?” “네.” “아니.” 케이트와 에녹의 입에도 상반된 대답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집사는 표정변화 없이 지시를 기다렸고 이안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아저씨. 로엔 경은 마차도 없이 걸어왔는데 자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집사는 에녹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봤지만 모른 척했다. 에녹은 이안을 집에 들인 것만으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케이트의 곁에 이안이 있는 것 자체가 싫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맞았다. 시간은 늦었고 이안은 마차도 없이 찾아왔다. “마차를 부르면,” “이 시간에요?” 이안의 말을 케이트가 잘라 먹으며 끼어들었다. 이안은 다시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케이트는 에녹의 팔에 매달렸다. “아저씨, 네?” 그걸로 모든 이야기는 끝났다. 에녹은 고개를 끄덕였고 집사는 이안이 머물 방을 준비하러 자리를 떴다. 신이 난 건 케이트였다. “감사해요, 아저씨!” 케이트는 활짝 웃으며 에녹에게 달려들었다. 에녹의 목을 끌어안는 그녀의 모습에 이안의 한쪽 눈썹은 다시 올라갔다. 오누이 혹은 연인처럼 보인다. 반사적으로 이안의 손이 케이트의 허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어!” 케이트의 발이 공중에 대롱대롱 흔들렸다. “케이트.” 에녹은 이안에게서 케이트를 빼앗으며 말했다. “오늘 밤은 방문을 잠그거라.” 노골적인 적대에 케이트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저씨, 로엔 경은 그런 나쁜 짓을 하지 않아요.” 그 순간 이안과 에녹의 시선이 부딪쳤다. ============================ 작품 후기 ============================ 이안이 왜 괴물인지는...이번 5부 안에 나와요... 이분들... 이안이 왜 괴물인지 나오는 순간 좋아, 완결이야! 이러면서 덮으실것 같아... 00177 3. 괴물 =========================================================================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은 에녹의 걱정대로 그녀의 방에 불쑥 들어오지 않았다. 밖에서 얌전하게 문을 두드렸다. 이 남자한테 내가 뭘 기대한 거지. 그녀는 가운을 여미며 생각했다. 당연히 하녀가 문을 두드린 줄 알았다. 무슨 일이라도 났나 싶어 부랴부랴 문을 열어보니 어둠 속에서 호박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어, 이안?” 이안은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본인이 찾아와 놓고 케이트가 문을 열자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케이트는 추워서 발을 비볐다. 슬리퍼를 신었지만 드러난 발목이 시렸다. “들어가도, 되나?” 당연히 안 된다고 말하려던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라. 이안은 그녀에게 들어가도 되느냐고 물어볼 사람인가? 케이트가 주춤한 사이에 이안은 발을 내디뎠다. “어어!” 당황한 케이트가 팔을 들어 그를 막았다. 이안은 발을 내딛던 모습 그대로 우뚝 멈췄다. “어딜 들어오는 거예요?” “그럼 여기에서 이야기할까?” 그것도 확실히 문제가 있다. 복도에 서서 이야기하는 건 춥기도 하지만 누가 볼 수도 있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고 뒤로 물러났다. “음, 음, 저기 앉아요” 이안은 케이트가 권한 분홍색에 레이스와 리본이 가득한 의자에 앉았다. 그 어울리지 않음에 케이트는 얼굴을 붉혔지만, 오히려 이안은 무표정했다. “저기, 차는….” “차가 있나?” 없다.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한 달이나 떨어져 있었더니 어쩐지 어색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케이트는 침대 옆에 있던 쿠키 병을 가져왔다. 아마도 내일 그녀의 침실을 정돈하던 하녀들은 어쩐 일로 아가씨가 쿠키를 먹었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쿠키라도 먹을래요?” 이안은 물끄러미 쿠키병을 쳐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한 개 집어 입에 넣더니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어, 왜 그래요? 상했어요?” 그럴 리 없는데. 매일 새로 구워서 넣어준다. 쿠키를 하나 집어 맛을 본 케이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맛있는데요?” “…아니야.” 이안은 고개를 저으며 케이트를 잡아당겼다. 쿠키 병을 품에 안은 케이트는 그대로 그의 무릎에 앉았다. “아, 잠깐, 이안.” 얇은 잠옷 위에 가운 하나만 입었을 뿐이다. 이안의 커다란 손이 허리를 감는 감촉에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건 너무 위험하다. 케이트는 이안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쳤다. “케이트.” “으, 이안, 이것 좀 놓고….” “나를 만나고 싶지 않았나?” 엇 하고 케이트의 움직임이 멈췄다. 주뼛 쭈뼛 고개를 돌리자 같은 높이에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있었다. 선명한 호박색 눈동자에 케이트는 잠시 숨이 막혔다. 이 남자 눈이 이런 느낌이었나.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말했다간 이안은 또 자기 멋대로 생각할 게 뻔했다. “당신은요?” 케이트의 당돌한 질문에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먼저 질문한 건 난데.”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건 그렇지만. 그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허리를 톡톡 건드렸다. 손끝에 닿은 가운에 케이트의 피부에서 나오는 열기가 묻어났다. “으, 이안.”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케이트가 손으로 막으려 했을 때 이안이 입을 열었다. “보고 싶었다.” “하지, 응?” 케이트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뭐가 어쨌다고? “네?” “보고 싶었다.” “어, 네?” “…보고 싶었다고 했다.” “뭐, 뭐가요?” 이안의 한족 눈썹이 올라갔다.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전에? 그 순간 케이트의 머릿속에 이안이 말한 게 무슨 의민지 정확하게 이해됐다. 그녀의 얼굴이 펑하고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아, 으, 그러니까, 제, 제가 보고 싶었….” “그래.” 이 남자는 어째서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까.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케이트는 생각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걸까. 생각해보면 무슨 말이든 덤덤하게 하곤 했다. 그래서 그게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진심. 케이트는 이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는 싫어하지 않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같은 것이라 생각하는 남자다. 케이트는 침을 한 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나는 싫어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그러니까,” 거기까지 말하고 케이트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보고 싶었다는데 싫어하지 않느냐니, 대체 무슨 소리인가. “케이트?” “모르겠어요, 이안.” 케이트는 얼굴을 두 손에 묻은 채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묻히긴 했지만 조용한 방안에 밀착해있는 이안의 귀에는 잘 들렸다. “난 당신을 모르겠어요. 그리고 나도.” 이안에 대한 그녀의 감정. 그리고 그녀에 대한 그의 감정. 둘 다 모르겠다. 이안도 모를 거라고 케이트는 생각했다. 그는 감정에 둔한 타입이다. 케이트는 자신도 감정을 모르면서 상대방에게 감정을 정확하게 확인해 달라고 요구할 만큼 뻔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안과 같이 있으면 불편하던 것도 사라졌다. 지금은 같이 있는 게 당연한 것 같이 느껴진다. 한 달간이나 떨어져 있었다는 게,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어색했다는 게 무색할 정도로. 그는 그녀에게 은인이다. 그리고 친구에 가까웠다. 하지만 제이드나 조세핀같은 친구와는 달랐다. 때때로 그녀를 설레게 만들었고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나를 모르겠다는 건가?” 벽난로의 불이 일렁이면서 두 사람의 겹친 그림자가 춤췄다. 이안은 그것을 보고 마치 사랑을 나누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무릎 위의 여자는 잠이라도 든 것처럼 얌전했지만. “왜 그동안 연락 한 통 없었어요?” 케이트의 질문에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너무 솔직했나. 그녀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이건 마치 왜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앙탈 부리는 것 같다. “찾아왔어.” “찾아왔다고요?” “그래. 이 집에 찾아왔다.” “어, 저는 한 번도….” “전달하지 않았겠지.” 집사의 소행인지 아니면 에녹의 명령인지 모른다. 어느 쪽이든 이안의 예상대로 그의 방문은 케이트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몰랐어요. 미안해요.” 케이트는 몰랐을 뿐이지만 그게 더 미안했다. 방문도 알리지 않았다면 편지도 그녀에게 전달해 주지 않았겠구나. 편지 한 통 없었다고 서운해했던 게 미안해졌다. 물론, 이안은 단 한 번도 편지를 보낸 적이 없지만 케이트가 왜 편지를 안 보냈느냐고 물은 게 아니므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안, 날 보고 싶었다는 게 진짜예요?” 그는 잠시 케이트가 또 스무고개를 시작하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그래.” 이상하게도 케이트는 그 대답을 듣자 마음이 편해졌다. 그걸로 됐다. 당장은. 그녀도 그가 보고 싶었으니까. 그냥 서로 보고 싶었다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 “저도요.”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너도 내가 보고 싶었다는 건가?” “네.” 좀 솔직해지니 마음에 편하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로서든 다른 뭔가로서든 그녀는 이안이 그리웠다. 그때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이안의 턱을 밀어냈다. “뭐, 뭐하는 거예요?” 꽤 부끄러운 상황인데도 이안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대답했다. “키스해달라는 표정인 줄 알았어.” “아니거든요!” 이 남자는 왜 툭하면 키스야. 케이트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으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낸 다음 일어났다. 그녀 잘못이 크다. 상대는 이안. 그의 무릎에 너무 오래 앉아있었던 그녀 잘못이다. “이제 가서 자요.” 이안은 순순히 케이트에게 이끌려서 그녀의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기 전에 그녀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침에 만나요.” 아침에 만나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당연하던 것이 특별한 인사가 되었다. 그건 심지어 이안에게 조차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문이 닫히고 이안이 몸을 돌렸을 때 그는 벽에 기대고 선 인형을 발견했다. “내 말 못 들었나?” 에녹이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 전 이제 자러 갑니다. 26일 0시에 일어날 거예요. 00178 3. 괴물 =========================================================================                            “무슨 말 말입니까?” 에녹에게 케이트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들키고도 이안은 침착했다. 에녹은 손가락으로 따라오라고 신호를 보내고 등을 돌렸다. 희미하게 켜둔 불빛이 두 사람의 모습을 음울하게 비췄다. 에녹을 따라가며 이안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용한 밤이었음에도 이안은 에녹이 거기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엘프인 그가 힘의 나라인 뮈엘라에서 이런 큰 저택을 지니고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엘프는 마법의 종족이기 때문이다. 마법을 배척하는 뮈엘라에서 사는 건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뮈엘라에, 수도 에바니엘에 사는 이유가 무엇일까. “앉게.” 에녹은 서재에 들어가 의자를 권했다. 서재는 약간 서늘했다. 불을 끈 지 좀 된 모양이었다. 이안은 얌전히 에녹이 권하는 대로 앉았다. “로엔 백작 가라고 하던데, 맞나?” “네.” “자네 부모님이 자네를 낳아주신 친 부모님이신가.” “아닙니다.” 그럴 거라 생각했다. 에녹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카티야를 만나지 말라고 하는지 모르겠군.”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말하면 만나지 말라고 한 게 아니라 아예 만나지 못하게 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에녹은 장식장을 열어 술을 꺼냈다. 손님용으로 준비해 둔 것이지만 지금은 그가 마시고 싶었다. 이안은 에녹이 권하는 술잔을 거부하지 않고 받았다. 화사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엘프의 술인가.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엘프가 주는 술이다 보니 엘프의 술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자네, 어머니가 마녀였나?” 느닷없는 질문에 이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잘 모릅니다.” 사실이다. 이안을 낳아준 여자는 그가 다섯 살 때 죽었다. 이안을 키우며 그녀는 마녀 같은 능력을 보여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마녀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에녹은 이안의 친모가 마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네도 잘 모르겠군.” 이안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에녹은 그에게 약간 미안해졌다. 이안은 아무것도 모른다. 케이트와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괴물이라고 매도했다는 감각이 에녹을 덮쳤다. “후우.” 결국 에녹은 참지 못하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백 여년 전까지만 해도 마법의 나라라 불렸던 뮈엘라가 이 정도까지 마법에 무식해 지다니, 놀라운 일이다. 인간사회가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는지 에녹은 쫓아가기가 버거울 정도다. “자네는,” 거기까지 말한 에녹은 잠시 단어를 골랐다. 이안이 적의나 고의가 있었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이안은 케이트가 마녀라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지만 에녹은 그 사실을 몰랐다. “자네는 우리 카티야에게 독일세.” 이안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독이라니, 무슨 뜻일까. 에녹은 술을 한 모금 넘겼다. 이안에게는 지금이 마법을 배척하는 나라라 다행이었다. 그는 과거 마법의 나라였다면 철저하게 관리되고 배척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마법사들이 그러하듯이. “주변이 생명력을 흡수하는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가?” “흡혈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흡혈귀라. 그래 비슷할 수도 있겠군.” 생명력을 흡수한다는 점에서 흡혈귀와 비슷할 것이다. 아니, 비슷한 정도가 아니군. 에녹은 생각을 정정했다. 실제로 마력 흡수자들은 강력한 마력보유자의 피를 흡수함으로 주변의 마력을 흡수하지 않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있지만 에녹은 그의 이름은 꺼내지 않았다. “로엔경. 자네는 주변의 생명력을, 마력을 흡수하는 존재일세. 내 생각엔 자네도 알고 있었을 거라고 보네.” 생명력을 흡수한다고? 이안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실라가 떠올랐다. 그녀를 거둬준 양어머니. 그의 은인. “생명력을 흡수한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야.” 에녹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력 흡수자들은 주변의 마력을 흡수한다. 가지고 있는 양에 비례해서. 공기 중에 녹아있는 극소량의 마력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몸속에 있는 마력까지 전부. 마력이 약한 보통 사람들은 깨닫지 못할 정도지만 마력보유자들에게는 달랐다. 마력보유자들은 그들의 마력 자체가 생명력과 결부된다. 그가 케이트에게 설명했던 것처럼 마력을 고갈한 마력보유자는 아주 빠르게 늙는다. 그리고 곧 죽는다. 마력 흡수자는 근처에 마력보유자가 있으면 마치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마력을 빨아낸다. 과거 마법의 나라였을 때 마력보유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마력 흡수자였다. “제가, 제 주변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안은 사고로 사망한 전 로엔 백작을 떠올렸다. 그의 죽음은 사고였지만 거기에 그가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는 걸까. 그리고 그의 어머니. 원래 몸이 약한 사람이긴 했다. 그러나 그게 이안의 등장으로 더 가속화된 건 아닐까.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야.” 에녹은 술을 홀짝이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자네에게 빼앗기는 것이 아주 미미해. 하지만 카티야는 달라. 그 애에게 자네는 독이나 다름이 없어.” 현재 뮈엘라에서 케이트는 마녀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야 한다. 에녹은 엘프지만 오랜 시간 인간사회에서 산 덕분에 인간사회의 룰을 잘 알았다. 인간은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고 싶어 한다. 좋은 집안의 딸이라면 더 좋은 집안에 시집보내 평온하게 사는 것이 가장 큰 복이다. 마법을 향유하고 지식을 쾌락이라 여기던 과거의 뮈엘라와 다르다. 약한 자는, 특히 여성들은 강한 남자와 결혼해 평온하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은 인생이 되어버렸다. 그러기 위해서 케이트의 능력은 봉인되어 있는 것이 좋다. 적어도 그녀가 에바니엘에 사는 동안에는. “제가, 케이트에게만 독이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에녹은 남은 술을 마저 마시고 씁쓸하게 말했다. “그래.” 다음 날 아침, 케이트가 눈을 떴을 때 약간 늦은 아침이었다. 밤에 갑자기 찾아온 이안 때문에, 그리고 그와의 대화에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늦잠을 자 버렸다.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온 케이트는 집사로부터 이안이 가버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 갔다고요? 그냥?” “네. 아침 식사도 필요 없다 하셨습니다.” “저한테 남긴 건, 없나요?” “죄송합니다.” 속이 나빠져서 케이트는 아침 식사를 건너뛰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당황스러우면서 설레고 좋았다. 이안의 관한 감정을 일단 이 정도만 만족하자. 라고 유예했는데 눈을 뜨니 완전히 다른 당황스러움만 남아버렸다. “아가씨, 스콘이라도 드세요.” 마사의 말에 케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림이라도 그리면 마음이 좀 풀릴까 싶어 이젤을 꺼내놨지만 영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케이트는 창밖을 보고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손이 시리다 했다. 그녀는 다리가 아픈 것도 잊고 서서 멍하니 창밖을 쳐다봤다. 회색 하늘에 하얗게 내리는 눈은 겨울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침에, 만나자고 했는데.” === 에드워드는 느닷없이 나타난 이안의 모습에 당황했다. 오늘은 눈이 많이 내려서 손님이 없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들도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약속을 취소하자는 부탁을 전해왔다. 물론 그는 전부 기분 좋게 허락했다. “무슨 일이야?” 이안은 눈으로 완전히 젖어있었다. 에드워드는 그를 이끌고 난로 가까이에 앉혔다. 수사관 장의 집무실은 그가 가지고 있는 집무실 중 가장 작았지만 덕분에 오늘처럼 추운 날은 더 따듯했다. 손에 럼을 넣은 차를 들려준 다음에도 이안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생각에 빠진 것처럼 골똘히 난로를 쳐다봤다. 안 좋은 일이 있나? 에드워드의 머릿속에 몇 가지 불길한 상상이 스쳤다. “제가,” 이윽고 입을 연 이안은 거기까지 만 말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제가? 제가 뭐? 네가 뭘? 에드워드는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물었다. “제발 귀족 살해만 아니라고 말해주게.” 귀족 살해만 아니라면 그가 대충 수습할 수 있다. 그는 그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 사촌이 마음에 들었다. 이안은 무슨 소리냐는 듯 에드워드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다행이다. 그제야 안도가 된 에드워드는 자신의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안이 오고 나서 지금까지 두 사람 다 찻잔을 들고만 있을 뿐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있었다. 이안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에녹의 말대로라면 그는 괴물이 맞았다. 타인의 생명력을, 특히 케이트의 생명력을 빨아들인다고 했다. 아침 일찍 레인포레스트 저택을 나선 그는 큐바인 하우스에도, 타운 하우스에도 가지 않고 길을 걸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점심까지 꼬박 길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생명력을 빨아들인다는 게 사실일까. 에녹은 그를 싫어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가 괴물이기 때문이라면 말이 된다. 이안은 케이트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괴물이니, 케이트의 대부인 에녹이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와 지내면서 케이트는 상태가 나빠진 적이 없었다. 생명력을 빨아들이는데 케이트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아니, 있어도 그가 몰랐던 걸까. 진짜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괴물이 있는 걸까. 문득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에녹이 그를 싫어하는 게 다른 이유라면, 그래서 그런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가능성은 적지만 이안은 그럴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는 상대를 찾아왔다. 에드워드는 약간 안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궁에는 마법 서적만 둔 도서실이 있는 걸로 압니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연 이안의 말에 에드워드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 서적? 그는 비밀 수사관 업무 때문인가 하고 생각했다. “금지 서적 말인가.” “네.” “있긴 하지.” “들어가고 싶습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자마자 오타확인하고 올려요~ 이안이 왜 괴물인지 나왔습니다아~ 00179 3. 괴물 =========================================================================                            과거 마법의 나라라 불렸던 만큼 뮈엘라에는 마법 서적 보유도 어마어마했다. 동서고금에서 수집한 서적부터 뮈엘라의 마법사들이 자체적으로 저술한 것까지. 하지만 마법의 나라에서 힘의 나라로 뒤집어지면서 마법과 관련된 것은 소각하기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왕궁에서 소지하고 있던 마법 서적도 소각될 위기에 처했지만, 왕궁의 물건은 함부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따라 금서로 지정되었다. 마법 서적은 전부 외딴 건물로 옮겨졌으며 철저히 봉해졌다. “금서를 말인가?” 에드워드는 끙하고 소리를 냈다. 심각한 표정으로 찾아오더니 또 어려운 부탁을 한다. 그의 사촌은. 비밀 수사관의 직을 수여하는 것과 금서 구역에 들어가게 하는 건 다른 문제다. 몇 달 전이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좀 곤란했다. “당장 필요한가?” “네.”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안의 모습에 에드워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현왕의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았다. 원래 지병이 있는 그는 몇 년 전 가까스로 왕위에 올랐으나 오래 누리지 못할 거라는 예측이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후사가 없는 지금, 현 왕이 타계하면 왕위를 이을 가능성은 에드워드가 가장 높았다. 에드워드는 왕위에 오르고 싶었다. 그는 야망이 있는 남자였고 군림하는 데 익숙했다. 그는 또 다른 사촌인 현왕이 죽기를 바라면서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정도로 사교술도 뛰어났다. “이유를 물어도 되나?” 이안은 에드워드의 질문에 잠시 망설였다. 그가 괴물이라는 것을 에드워드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떤 핑계를 대야 금서 구역에 들어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괴물, 이라고 아십니까?” “…괴물?” 결국 이안은 반만 솔직하기로 결심했다. “타인의 생명력을 흡수하는 존재를 아십니까.” “그거, 흡혈귀 아닌가?” “흡혈귀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주변의 생명력과,” 이안은 그다음 말을 하기 전에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문밖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신한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마력을 흡수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에드워드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아주 잠깐. 이안은 그것을 봤으나 티 내지 않았다. “…그래?” 처음 듣는 것처럼 굴고 있지만 처음 듣는 게 아니다. 이안은 그것을 확신했다. 에드워드는 그 괴물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존재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게 수사관 업무와 연관이 있나?” 이안은 아무 죄책감 없이 거짓말했다. “네.” “알아보지.” 이안이 떠나고 혼자 남은 에드워드는 다 식은 차를 홀짝 마셨다. 그는 수사관업무와 관련이 있다는 이안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괴물에 대해 모르는 척한다는 걸 이안이 안다는 것도 알았다. 무슨 일일까. 에드워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마력 흡수자에 대해서 왜 궁금해하는 걸까. === 남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조세핀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은 적이 없어서 무서웠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 내 옷이 이상한 걸까? 거울이 있다면 확인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가 창문에라도 얼굴을 비춰보려 걸음을 멈췄을 때 술집 앞에 서 있던 남자가 휘익하고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예쁜이, 어디가?” “네?” “어디 가냐고. 술 한잔 하고 가. 내가 살게.” 껄렁대는 남자의 태도는 처음 겪는 일이라 당혹스러웠다. 예쁜이라니, 나한테 한 말인가? 조세핀이 그녀에게 한 말이냐고 물어보려는데 갑자기 다른 남자가 끼어들었다. “아가씨, 괜찮습니까?” “네?” “이 남자가 치근덕대던가요?” 치, 치근덕? 조세핀의 눈이 커졌다. 방금 그게 치근덕댄 거야? 나한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치근덕댄 남자가 소리쳤다. “넌 뭔데 지랄이야? 안 꺼져?” “숙녀분 앞이야, 말 조심해!” 남자 둘이 그녀를 앞에 두고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처음 겪는 일에 조세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결국 누군가 싸움 났다고 소리를 지르자 그녀는 깜짝 놀라 도망쳐 버렸다. 처음 겪었다. 그냥 걷는 것뿐인데 남자가 치근덕대는 것을. 그리고 그런 그녀를 도와주려 누군가 나서는 것도. 조세핀은 한참 뛴 다음에야 숨을 헐떡이며 멈춰 섰다. 그녀가 헉헉대자 지나가던 남자가 가던 길을 멈추고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아가씨?” “아, 네에. 괜찮아요.” “어디 가요? 내 마차로 태워줄게.” 난데없는 친절에 조세핀의 눈이 커졌다. 괘찮으냐고 묻는 경우는 있어도 목적지까지 마차로 태워준다는 친절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감사합니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던 조세핀은 의상 샾의 전면 유리 앞에서 멈췄다. 깨끗하게 닦인 유리창에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커다란 눈, 오뚝한 코. 모양 좋은 입술과 갸름한 턱선. 늘 이리저리 뻗어 어찌할 바를 몰랐던 갈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그녀의 어깨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몇 번을 봐도 감탄이 나온다. 이게 자신의 얼굴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조세핀은 유리창에 바짝 붙어 자신의 외모를 감탄했다. “예쁘다.” 죽은 에이미와 닮은 것 같으면서도 더 예뻤다. 아까 남자들의 친절은 이 외모로 비롯된 것이다. 조세핀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미가 그런 성격이었던 것도 당연하네.” 이기적이라 생각했던 동생의 성격이 이해가 됐다. 당연한 친절. 대가 없는 호의. 에이미의 인생은 그런 것들로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의상 샵 안에서 중년 여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남의 가게 앞에서 뭐하는 거냐고 트집 잡을까 싶어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녀에게 가게 주인이 친절하게 말했다. “어휴, 예쁜 아가씨네. 마음에 드는 옷 있어? 내가 싸게 줄게.” 세상에. 조세핀의 발이 딱 얼어붙었다. 예쁜 외모는 여자들도 좋아하는구나. 인생이 밝아지면서 동시에 마음은 가라앉았다. 외모가 바뀐 것뿐인데 모르는 사람들의 태도가 백팔십도 변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싶을 정도로. “응? 들어갔다 가. 내 싸게 줄게.” 조세핀은 못 이기는 척 의상 샵으로 들어섰다. 불을 피워둔 덕에 따듯한 내부의 온기에 얼어붙었던 몸이 사르르 녹았다. “차 한잔 해.” 의상샵 주인인 심지어 조세핀에게 차까지 내려주었다. 손님으로 의상 샵에 가서 차를 얻어 마시기는 처음이다. 그녀는 따듯한 찻잔을 손에 감싸 쥐고 홀짝홀짝 마시며 가게 내부를 둘러봤다. 여기저기 걸어놓은 완성된 옷이 보였다. “어때? 뭐 마음에 드는 거 있어?” “저, 저거….” 조세핀은 조심스럽게 드레스를 가리켰다. 분홍색에 가슴에 핀 턱이 들어간 여성스러운 드레스였다. 허리 아래에서 가볍게 부풀어 올라 밑단을 레이스로 장식했다. 너무 예쁘지만 예전의 그녀라면 네 주제에? 라는 경멸 어린 시선이 두려워서 차마 쳐다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휴, 잘 골랐네. 아가씨한테 딱이야, 딱.” 중년 여자는 손뼉까지 치면서 옷을 재빨리 가져왔다. 허리를 장식한 구슬이며 가슴의 핀 턱까지 손이 많이 간 게 분명했다. 이 정도면 가격도 꽤 나가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조세핀은 여자의 말에 입을 딱 벌렸다. “어, 진짜 그렇게 싸요?” “원래는 그거에 다섯 밴데, 아가씨는 내가 진짜 싸게 줄게.” “진짜요?” “그렇다니까. 대신 알지?” 안다니 뭘? 조세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조세핀의 얼굴을 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디 가서 우리 옷 입었다고 말 좀 잘해줘, 알았지?” 고작 그것뿐이야? 조세핀은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어휴, 딱이네, 딱이야. 이거 완전 아가씨 옷이네.” 여자의 말대로 옷은 조세핀에게 완벽하게 어울렸다. 이런 여성스러운 드레스가 어울리다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조세핀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레인포레스트 저택에서 봤던 케이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모습. 그리고 늘 이런 드레스를 입고 남자들 사이를 누비던 에이미의 모습이. 지금 그녀라면 케이트나 죽은 에이미와 견줘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더 아름다울 것 같았다. “살게요.” 잠시 후 조세핀은 뿌듯한 얼굴로 새로 산 드레스를 입고 가게 밖으로 나섰다. 약간 수선이 필요했는데 여자는 무료로 바로 수선해 주기까지 했다. 예뻐진다는 건 이런 거구나. 거리를 걷는 조세핀의 행동이 당당해졌다. ============================ 작품 후기 ============================ 그동안 뮈엘라의 수사관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는 농담이고.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전 주말동안 밤낮이 바뀌는 바람에 오늘 일찍 자려고 일찍 올립니다. 후후후 벌써 다 씻었지요. 오늘은 10시에 잘거예요. 후후후 표지 변경했습니다. 호리옌님께서 선물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00180 4. 엇갈리는 마음 =========================================================================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에녹은 케이트가 저택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했다. 단, 어디로 가는지 에녹에게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하고 최소 두 명의 용병과 함께 나가야 했다. “아가, 네가 호건 가의 사람이라는 걸 알면 나쁜 생각을 가질 사람이 많단다.” 그 말에 케이트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녀를 이렇게 아끼는 에녹의 말을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 불편하지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며칠 뒤 케이트는 결국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 외출하는 것을 포기했다. 늘 두 명 이상의 용병과 함께해야 한다는 건 상당한 불편을 초래했다. 방문하는 가게나 집에도 폐를 끼쳤고 함께 움직이는 남자들에게도 미안했다. 그녀는 화실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부터 꺼내놓은 이젤에는 하얀 종이만 걸려있었다. “아가씨, 차 내올까요?” “괜찮아요.” 케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외출을 줄이는 건 괜찮았다. 문제는 이안의 태도였다. 일부러 큐바인 하우스를 찾아갔는데 이안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집을 지키는 건 제인 뿐이었는데 그는 오랜만에 케이트를 만나자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고작 한 달 만에 소년은 또 자라있었다. “케이트! 보고 싶었어요!” “잘 지냈니?” 제인은 케이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가 뒤에 선 남자들을 보고 놀라서 물러섰다. 그는 곧 케이트의 옷이 상당히 고급스러워졌다는 것도 깨달았다. 결국 제인이 너무 무서워했기 때문에 케이트는 이안의 행방만 묻고 큐바인 하우스를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이안은 아침에 나가 저녁 늦게 돌아온다고 했다. 바빠서 그런 걸까. 케이트는 제인도 이안을 자주 보지 못한다는 말에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그날 그녀에게 아무 말 없이 레인포레스트 저택을 떠난 것도, 그 직후로 아무 연락이 없는 것도. 전부 바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보고 싶었다고 했으면서.” 케이트의 머릿속에 그날 이안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보고 싶었다. 라고 했다. 그렇게 말해놓고 코빼기도 안 비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다녀오셨습니까.” 에녹은 집사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하고 코트를 벗었다. 집 안이 조용했다. 그는 코트를 받아드는 집사에게 물었다. “카티야는?” “화실에 계십니다.” 또? 에녹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요 며칠 케이트는 화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무슨 그림을 그리는지 넌지시 물어봤지만, 그저 이젤 앞에 넋을 놓고 앉아있을 뿐. 한 점도 완성한 건 없다. “카티야.” 케이트는 에녹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가 오는 줄도 몰랐다. 그녀는 부랴부랴 에녹에게 달려갔다. “다녀오셨어요?” “바쁘냐?” “아니에요. 그냥 생각을 좀….” “생각?” 케이트는 에녹에게 이야기할까 하다 말았다. 그녀가 이안이 연락하지 않아 섭섭하다고 말하면 에녹이 그 감정을 더 깊은 것으로 오해할까 봐 두려웠다. “그냥, 좀….” 또다시 수심이 짙어지는 케이트의 얼굴에 에녹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집 안에만 있는 게 답답해 보여 안전을 확보한 상태에서 돌아다녀도 좋다고 허락했는데 그의 대녀의 얼굴은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 지난 방문 이후 로엔 경이 그의 이야기를 이해한 듯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는 이안에게 한 이야기는 케이트에게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이야기는 케이트를 필요 이상으로 겁먹게 할 가능성이 있었다. 에녹은 케이트를 보호하고 싶었다. 세상의 무섭고 위험한 것을 최소한으로 알고 살 수 있도록. “아가, 무슨 일인지 이 아저씨에게 말하면 안 되겠니?” “죄송해요, 아저씨. 그냥, 별거 아니에요.” 에녹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대녀는 그에게 이야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결국 그는 포기하고 케이트의 어깨를 다독였다. “말할 기분이 들면 제일 먼저 이야기해주겠다고 약속해 주겠느냐?” “네. 그럴게요.” === 이안은 마법 스크롤 사이에서 향유 병을 집어 들었다. 기사의 부인이 힉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남편의 물건이 아니라 부인의 물건인 모양이다. 그는 병뚜껑을 열지 않고 주의 깊게 확인했다. 병에 붙은 라벨은 화살이 꽂힌 심장이 그려져 있었다. 심장을 멈추게 하는 약인가? 그는 부인을 향해 물었다. “이건 뭐지?” “그, 그건….” 부인은 갑자기 남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남편을 독살하려 한 건가? 남편은 부인의 태도에 놀라 소리쳤다. “당신, 설마?” “잘못했어요!” 여자가 자신이 아닌 남편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자 이안은 이게 남편을 죽이려 한 독이라고 확신했다. 부부 관계란 역시 겉으로 봐선 알 수 없는 일이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마법 아이템을 수거하다보면 부부관계가 대충 보인다. 저로 상대방의 물건이라며 떠넘기는 부부도 꽤 있었다. 이 부부는 그래도 서로를 위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왜, 왜 그런 짓을 했어? 뭐가 불만이었던 거야!” 배신감에 치를 떨며 남편이 울부짖었다. 자신의 집에서 부인이 마법아이템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충격보다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게 더 충격인 모양이었다. “잘못했어요, 여보! 전 그저, 당신의 관심을 받고 싶었을 뿐이에요!” 여자의 변명에 이안은 다시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관심이라고? 이윽고 남편이 소리쳤다. “관심이라니! 내게 독을 먹이면서 어떻게 관심을 얻겠다는 거야!” “도, 독이라뇨? 아니에요, 저건 독이 아니에요!” 막장으로 치닫는 듯했던 드라마는 갑자기 반전을 맞이했다. “저건 그냥, 사랑의 약이라고요!” 울부짖던 남편도, 무덤덤하게 한 편의 드라마를 구경하던 이안도 행동을 멈췄다. 두 사람 다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떨떠름한 남편의 표정에 여자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저건 당신에게 사랑받는 향유일 뿐이라고요!” “…사랑?” 얼떨떨한 목소리가 기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안은 다시 한 번 병을 내려다봤다. 심장에 꽂힌 화살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 그러니까, 저걸 바르고 남편 앞에 서면 그, 그, 남편의 그….” 여자의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무슨 말인지 이해한 남편의 얼굴도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안만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남편의 뭐지?” 때아닌 수치에 여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남편의 뭐라는 건가?” 이안의 질문은 냉정했다. 부인이 부끄러움에 견디다 못해 엉엉 울기 시작하자 기사는 달아오른 얼굴로 떨떠름하게 말했다. “제 부인 말로는 그게, 그, 남자의 성욕을…흠! 불러일으키는, 크흠, 향유인 것 같습니다.” 뭘 불러일으켜? 이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는 향유 병과 기사의 부인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가 마지막에 기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발라보게.” “…네?” “자네 부인 말이 맞나 확인해야겠으니 발라보란 말일세.” 이안의 요구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기사는 부인을 쳐다봤다. 부인은 눈물로 얼굴이 엉망이었다. 그녀는 이안에게 주춤주춤 다가오더니 향유 병에서 기름을 덜어 손목과 목에 발랐다. 그동안에도 그녀가 훌쩍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상한 향이 났다. 이안은 다시 한 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추해 보이기까지 한 부인의 얼굴을 보는 기사의 눈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허.” 처음으로 이안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너무 바보 같아서 그조차 김이 빠졌다. “이걸 어디서 구한 거지?” “그, 그게….” 부인은 달아오르는 남편을 힐끔거리며 대답을 거부했지만 이안이 고개를 기울이자 재빨리 대답했다. “야, 약방에서….” “효과는 그것뿐인가?” “네, 네에. 그저, 부부관계를 개선해주는 향유일 뿐입니다.” 이안은 물끄러미 향유 병을 내려다봤다. 기사는 부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건 부부 사이에서만 가능한 건가?” “이, 이이가! 아, 네. 부부 사이만 통합니다.” 흠. 이안은 향유와 기사 부부를 다시 한 번 쳐다보고 냉정하게 말했다. “벌금형.” 금액을 들은 부인의 얼굴은 안도로 물들었다. 반면 기사는 이미 형벌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안은 나직한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기사의 집을 나섰다. 그의 손에 들린 향유 병은 알라나데일에서 팔린 게 아니었다. 약방이라고? 그는 향유 병을 갈무리하고 지나가던 마차를 불러 세웠다. 이윽고 기사의 집에 불이 꺼졌다. 그가 들어간 집중에 유일하게 행복한 집이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소... 아니 죄송하지 않아요 연말이면 다 그렇죠 뭐 흥. 00181 4. 엇갈리는 마음 =========================================================================                            “으하암.” 제이드는 늘어져라 하품하다가 재빨리 입을 가렸다. 그리고 곧 아무도 자신에게 뭐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렸다. 예전이었다면 조세핀이 뭐라고 했을 것이다. 그녀를 제외하면 킬리언 포목점에서 킬리언 가의 막내아들인 제이드에게 대놓고 타박할 사람은 별로 없다. 조세핀이 보고 싶었다. 그는 그대로 카운터 위에 늘어졌다. 추워서 손님이 별로 없었다. 수사관으로서의 업무 역시 한가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엔 귀족들도 몸을 사리는 모양이라고 수사관실에서 누군가 농담을 한 게 떠올라, 제이드는 혼자 피식 웃었다. “사장님, 손님 오신다고 안 했어요?” 직원의 질문에 제이드는 시계를 확인했다. 곧 도착할 시간이다. 그는 자세를 고쳤다. 수사관 업무가 한가한 이유도 있지만 그가 포목점에 나와 있는 이유는 중요한 손님이 올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저, 안녕하세요?” 딸랑하고 문이 열리면서 거기 달린 종이 울렸다. “어서오세요.” 제이드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가 기다리던 손님은 아니다. 웬 미인이 혼자 들어왔다. 이런 미인이 혼자 다닐 것 같지 않은데. 따라 들어오는 사람이 있나 살피던 제이드는 여자를 보고 다시 생긋 웃었다. “무슨 일로 오셨죠?” “어, 그러니까, 그, 음, 천을 좀….” “천이야 많죠. 어떤 용도로 쓰실 건가요? 파티용 드레스? 커텐? 침구?” 여자는 약간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제이드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다시 싱글싱글 웃었다. 미인이다. 커다란 눈과 오뚝한 코.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누가 봐도 미인이라고 할 만한 여성이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 역시 꽤 값이 나가는 물건이라 제이드는 여성이 꽤 사는 집 여식일 거라 판단했다. 이상한 점은 꽤 사는 집 여식이 혼자 포목점을 올 리가 없다는 점이다. “파, 파티용 드레스요.” 여자가 간신히 말을 하자 제이드는 씨익 웃으며 직원을 불렀다. 드레스용 천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직원이었다. 킬리언 포목점은 최근 인기 있는 디자인부터 시작해서 체형에 따른 어울리는 무늬까지 꼼꼼하게 파악해서 손님에게 권유하도록 하고 있었다. 전부 조세핀 덕분이다. 조세핀은 킬리언 포목점에서 다루는 모든 천에 능통했고 안목도 있었다. “아니, 저,” 직원이 다가오자 여자가 제이드에게 말했다. “제이, 킬리언씨가 해주실 순 없나요?” “저요?” 제이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활짝 웃었다. 방금 이 여자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 같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제이드는 상점가의 인기인이었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제가 해드리고 싶은데, 약속이 있어서요.” 제이드는 상냥하게 대답하고 직원에게 손짓했다. 여자는 약간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제이드에게 호감이 있는 아가씨인가? 직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치 교체하는 것처럼 제이드가 미인을 직원에게 넘기자마자 딸랑하고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는 케이트의 얼굴을 보자 활짝 웃으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스미스 양.” 케이트는 제이드와 직원들의 환대에 인사하다가 직원에게 천을 설명듣는 여자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손님이 있으신가 봐요.” “아, 괜찮아요.” 제이드는 여성을 한번 돌아보고 천천히 돌아보라는 상인다운 멘트를 남겼다. 처음 봤을 땐 몰랐는데 어딘가 낯익은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미인을 예전에 봤다면 모를 리가 없지. 그는 깨끗하게 고개를 돌리고 케이트는 접객 실로 안내했다. 케이트는 그녀보다 먼저 와있던 손님을 한 번 쳐다보고 제이드의 뒤를 따랐다. 미인이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케이트의 질문에 제이드는 의자를 권하며 대답했다. “아뇨.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에요.” === 조세핀은 케이트와 함께 접객 실로 들어가는 제이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나, 그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반쯤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반쯤은 아쉬웠다. 제이드가 그녀를 알아봤다면 곤란했을 것이다. 조세핀이 이렇게 아름다워 진 건 누가 봐도 마법이다. 마법이 불법인 이 나라에서 마법으로 예뻐진 조세핀은 그 미모를 누리기도 전에 감옥에 끌려갈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조세핀은 제이드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게 섭섭했다. 그녀가 최근 제이드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녀와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였다. 조세핀이 그를 좋아하는 것처럼 그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 정도로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다면 조금쯤은 알아차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이기적인 섭섭함이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아가씨, 이 천은 어떠세요?” 직원은 조심스럽게 천을 꺼내 보여주며 물었다. 조세핀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가 가르친 직원이다. 하지만 제이드도 그녀를 못 알아보는 와중에 직원이 그녀를 알아볼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갈색도 보고 싶은데요.” “갈색도 잘 어울릴 거예요.” 익숙하지 않은 말에 조세핀은 눈을 깜빡였다. 예전에 이 직원에게 그녀의 머리카락 색 때문에 갈색은 조심해서 입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예뻐지자마자 머리 색 따위는 상관없게 되었다. 조세핀은 멍하니 서 있다가 직원이 건네주는 천을 떨어트렸다. 아차 하고 허리를 숙였을 때 직원이 재빨리 집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죄송해요. 아가씨가 들기엔 좀 무거웠나 보네요.” 그건 어디까지나 직원으로서 손님에게 하는 서비스용 멘트였다. 하지만 조세핀에게는 전혀 다르게 들렸다. 그녀가 예쁘기 때문이다. 예전의 조세핀이었다면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것도 놓쳤느냐며 장난 섞인 타박을 받았을 것이다. 예뻐지자마자 세상이 변했다. 그녀를 향한 모든 대우가 상냥하고 조심스러워졌다. 조세핀의 내부는 조금씩 비틀리기 시작했다. 예뻐야 하는구나. 알고 있던 사실을 체감하자 씁쓸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케이트를 접객 실로 데려간 제이드를 떠올렸다. 제이드만 반응이 달랐다. 이렇게 예뻐졌는데도 제이드는 스미스 양에게 집중했다. 그도 스미스 양을 좋아하는 걸까. 문득 과거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제이드는 조세핀과 이야기를 하다가 에이미가 산책을 가고 싶다고 조르자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의 에이미와 케이트의 얼굴이 조세핀의 눈앞에서 겹쳐졌다. “또 빼앗길 거야.” 무심코 조세핀의 입에서 생각하던 것이 그대로 흘러나왔다. 직원은 다른 천을 집어 들다 말고 그녀를 쳐다봤다. “네?” 직원이 되묻자 조세핀은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말로 내뱉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아니에요.” 그녀는 허둥지둥 서두르며 몸을 돌렸다. 그저 여길 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다음에 오겠다는 말도 간신히 남기고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머,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 데이지는 달려오느라 헐떡이는 조세핀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침에 공들여 꾸민 머리카락이 달리는 바람에 엉망이었다. 조세핀은 비틀거리며 응접실로 들어갔다. 이안은 케이트가 사라지자 잠을 잘 때만 큐바인 하우스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제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데이지는 조세핀에게 담요를 덮고 있었다. “제인, 이 아가씨를 위해서 난로에 장작 좀 더 넣어줄래?” “네.” 처음 보는 얼굴에도 제인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데이지와 조세핀은 제인에게 조세핀의 친구가 조세핀의 방에 잠시 머물 거라고 말을 해둔 상태였다. 공식적으로 조세핀은 시골에 있는 친척 집에 간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가씨? 제게 말 해보세요.” 제인이 난로에 장작을 더 넣고 사라지자 데이지가 조세핀에게 따듯한 차를 건네며 물었다. 조세핀은 그녀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망설였다. 데이지는 그녀를 이렇게 아름답게 바꿔주었다. 그녀는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 대모였다. 조세핀은 데이지를 믿었고 의지했다. “제이드를…보러 갔어요.” “어머, 어땠어요?” 자기 일처럼 눈을 반짝이며 기대하는 데이지에게 조세핀은 힘없이 말했다. “안돼요. 이렇게 예뻐져도, 전 그 여자한테 못 이겨요.” “그 여자요?” “스미스 양이요. 이 저택 주인.” 데이지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너무 서둘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차근차근 설명해 봐요.” 이렇게 예뻐져도 제이드는 그녀를 봐주지 않는다. 조세핀은 절망적인 기분으로 킬리언 포목점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 작품 후기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00182 4. 엇갈리는 마음 =========================================================================                            케이트는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들뜬 모습에 사용인들의 기분도 좋아졌다. 평소와 달리 적극적으로 의상과 머리스타일을 확인하는 그녀의 모습에 마사가 미소 지었다. “많이 기대되세요?” “이런 큰 음악회에 가는 건 처음이에요.” 작은 규모나 술집에서 열리는 음악회를 가본 적은 있지만, 미리 표를 구매하고 가야 하는 음악회는 처음이었다. 케이트는 마지막으로 마사가 그녀의 머리카락에 꽃 모양 핀을 찔러주는 것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저 어때요?” “예뻐요. 아가씨.” “아저씨와 함께 있어도 부끄럽지 않으시겠죠?” 케이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거였다. 에녹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인가. 에녹과 함께 처음으로 공식선상에 참석하는 것이니 그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에녹의 명성에 누가 되지는 않길 바랐다. “당연하죠, 아가씨!” 마사는 케이트의 손을 꼭 잡았다. 누가 봐도 오늘의 케이트는 예뻤다. 그녀는 케이트를 위해 망토를 꺼내 조심스럽게 어깨 위에 덮어주었다. “다녀오세요.” 사용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케이트는 에녹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감사해요, 아저씨.” “무엇이?” “전부 다요. 옷도 사주시고, 절 위해 마차도 타 주셨잖아요.” 엘프는 마차를 타지 않는다. 그들은 더위와 추위를 인간보다 덜 타고 몸으로 받아낸다. 그렇기에 마차가 필요 없다. 그들은 말을 타야 한다면 말에게 조용히 요청한다. 말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순종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엘프의 요청을 거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케이트는 그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레인포레스트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게 되는 사실이었다. 한여름이나 한겨울에도 긴 팔 셔츠와 조끼를 입고 다니는 에녹의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당황하기 때문이다. 에녹은 케이트의 손등을 다독이며 미소 지었다. 케이트가 감사히 여기는 것은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당연한 일들이다. 그녀보다 더 오래 인간사회에서 살아온 에녹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녀의 예의 바름에 더욱 흡족했다. “음악회 경험은 있느냐?” “작은 음악회는 몇 번 가봤어요. 음유시인이 하는 공연 같은 거요.” 에녹도 그런 공연을 즐기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바빠서 광장을 돌아다니며 음유시인의 공연을 즐길 여유가 없지만. 그는 아주 옛날 일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즐거운 날들이 떠올랐다. 그가 좀 더 젊었을 때. 인간들이 현명하고 발전하던 시절. 생활은 어려웠지만 더 즐거웠다. “그럼 큰 음악회에서 지켜야 할 예절에 대해 알고 있느냐?” 에녹의 질문에 케이트는 아니요 라고 대답했다. 대충 알고 있기는 하지만 아저씨에게 제대로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그리고 에녹도 케이트를 가르치는 것을 꽤 즐거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케이트가 에녹에게 음악회 예의에 대해 열심히 듣는 동안 마차는 음악회가 열리는 홀에 도착했다. 단장한 신사숙녀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마차가 건물 앞에서 멈췄다가 손님을 내보내고 앞으로 나아가면 그 뒤를 따르던 마차가 건물 앞에 멈춰서 손님을 내보냈다. 덕분에 케이트는 다 왔다! 라고 외쳤음에도 삼십 분 후에나 마차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으, 추워.” 날은 어마어마하게 추웠다. 그녀가 입고 있는 망토가 고급품이 아니었다면 몸이 덜덜 떨렸을 것이다. 에녹이 마부에게 음악회가 끝나면 언제 어디로 데려오라고 이야기하는 사이 케이트는 음악회가 열리는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성냥 사세요.” 작은 목소리가 그녀의 주의를 돌렸다.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가 시선을 떨어트렸다. 낡은 숄 하나만 걸친 여자아이가 덜덜 떨며 서 있었다. “성냥 사세요.” “어머.” 케이트는 재빨리 여자아이에게 다가갔다. 엄청나게 추워 보인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고 물었다. “하나에 얼마니?”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다. 케이트는 바구니 안에 든 성냥의 수를 대충 헤아렸다. 그녀 수중에 돈으로 성냥 한 바구니 정도는 살 수 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이 애에게 좋은 일일까. 그녀는 이런 생활을 경험하지 않았지만 대충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성냥을 받아 팔고 그 돈을 상납한다고 한다. 그녀가 전부 사준다 해도 그게 이 아이에게 가지 않는다. 여름에는 꽃을, 겨울에는 성냥을 파는 여자아이들. 죽지 않고 성장하여 운이 좋으면 하녀가 되지만 매춘을 하는 경우도 꽤 많다. 케이트 역시 그녀의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그녀를 포기하지 않은 덕에 가난했어도 사랑받으며 자랄 수 있었다. “바구니 채로 살게.” “…네?” 여자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케이트는 품에서 작은 손가방을 꺼냈다. 출발하기 전에 마사가 향수 뿌리 손수건과 입술연지, 그리고 약간의 돈을 넣어 준 덕분이다. 에녹이 돌아왔을 때 케이트는 성냥이 가득 든 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 “성냥을 좀 샀어요.” 에녹은 바구니를 확인하고 무슨 일인지 쉽게 간파했다. 그는 케이트에게서 바구니를 받아들며 혀를 찼다. “그걸 다 사주는 게 그 애에게 좋지만은 않단다.” “알아요.” 케이트는 에녹의 팔을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렇게 추운 날 하나도 못 파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 여자아이가 좀 더 영리하다면 바로 돌아가지 않고 어딘가 숨어 있다가 나올 것이다. 돌아가 봐야 더 팔고 오라고 내몰릴게 뻔하니까. 케이트는 성냥이 가득 든 바구니를 쳐다보며 우울하게 생각했다. 얄팍한 동정이다. 장기간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녀의 마음을 달래는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제가 더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좋겠어요.” 다정한 말에 진심이 느껴져 에녹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코트와 함께 성냥을 맡긴 뒤 두 사람은 에녹의 좌석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홀 이 층에 그의 전용 좌석이 있었다. 에녹은 능숙하게 오페라글라스를 집어 들었다. “꽤 공을 들였구나.” 에녹은 그렇게 말하며 오페라글라스를 케이트에게 내밀었다. 시작시각이 삼십 분 정도 남아있었음에도 좌석은 거의 빈틈없이 차 있었다. 케이트는 오페라글라스를 통해 홀을 살폈다. 수도에 와서 이 건물을 지나간 적이 있지만 들어온 적은 처음이다. 안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고 화려했다. 빨간색과 검은색의 카펫을 두툼하게 깔아 사람들의 구두 소리를 흡수했고 의자도 편안했다. 무엇보다 케이트와 에녹이 있는 곳은 박스석이라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오페라글라스 너머로 맞은편에 있는 박스석에서 로즈마리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어머.” 케이트는 로즈마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뒤로 에드워드가 쓴웃음을 짓는 게 보였다. “아는 사람이냐?” “로즈마리와 에반스 공작이에요.” 에녹의 표정이 가볍게 굳었다. 그는 맞은편을 보고 에드워드를 확인했다. 에드워드가 가볍게 인사를 건네는 게 보였다. “에반스 공작을 알고 있느냐?” “네. 이안, 로엔 경의 친척이에요.” 과연. 에녹은 이안과 에드워드가 친척이라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이안이 그의 말을 이해하고 떠나줘서 다행이었다. 케이트가 이안과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한다면 에드워드와의 접점도 더욱 깊어질게 당연했다. 직원들이 부지런히 다니면서 불을 끄기 시작했다. 어두워지자 케이트는 무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말솜씨가 좋은 남자가 후원자의 이름을 낭독하고 박수를 올린 뒤 공연자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어머.” 다시 한 번 케이트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방금 나온 이름, 시나몬이었다. 진짜 시나몬이 맞는 걸까? 그녀의 궁금증은 음악회가 시작되고 순서가 좀 지난 다음에 해소되었다. “시나몬이네요.” “유명한 가수란다. 알고 있니?” 알다마다. 케이트는 무대에서 노래하는 시나몬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진짜 가수였구나. 심지어 엄청난 실력이었다. “굉장히, 잘…부르네요.” 케이트는 얼떨떨한 나머지 보잘것없는 감상을 내놓았다. 시나몬은 잘 부른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녀가 고음을 낼 때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고음과 저음을 힘 하나들이지 않고 자유자재로 오가는 와중에 슬그머니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세상에!” 시나몬의 노래가 끝나자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손뼉을 쳤다. 이렇게 아름답게 부르는 사람인 줄 알았으면 지난번에 초대장을 줄 테니 한 번 오라고 했을 때 고맙다고 받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최근 가장 인기 있는 가수란다.” 에녹은 시나몬을 정부로 두고 싶어 하는 남자들이 아주 많다는 사실은 쏙 빼놓고 이야기했다. 그녀가 인사를 하고 무대 뒤로 들어간 다음에도 사람들의 박수를 끊어지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선물을 드릴게요. 한 살. 거부는 거부한다! 00183 4. 엇갈리는 마음 =========================================================================                            “아가, 난 잠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다녀오마.” 시나몬의 순서 다음은 휴식시간이었다. 그야 당연하겠지. 케이트는 조용히 수긍했다. 그녀 다음에 다른 누군가가 노래를 불러야 한다면 대단한 부담일 것이다. 휴식시간이 되자 다시 직원들이 돌아다니며 불을 밝혔다. 케이트는 로즈마리와 인사라도 나눌까 해서 좌석에서 빠져나왔다. “케이트예요!” 에드워드는 로즈마리의 말에 맞은편을 보고 케이트와 에녹을 발견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안이 케이트의 대부가 에녹이라고 했지.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그는 에녹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케이트를 확인했다. 확실히 여자는 꾸미기 나름이다. 청초하던 하녀 케이트는 꽃이 피어난 것처럼 아름다워져 있었다. 원래 예쁘장하긴 했다. 하지만 지금 케이트의 외모는 사교계의 상위에 속할 만했다. “고생 좀 하겠군.” 그가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 이안이 나타났다. “어서 오세요, 이모님.” 이안과 함께 로엔 백작 부인도 나타났다. 실라는 에드워드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함께 보자고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제겐 어머니 같은 분인데 별말씀을요.” 이안은 어머니가 의자에 앉도록 도운 뒤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에드워드는 이안의 인사를 받으며 넌지시 이야기했다. “맞은편 자리에 스미스 양이 있네.” “그렇습니까.” 그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 시작하려면 시간이 좀 있으니 인사라도 하고 오는 게 어떻겠냐고 권하려던 에드워드는 에녹을 떠올리고 그만두었다. 괜히 잠자코 있는 에녹을 건드릴 필요는 없지. 문득 그가 괴물에 대해 물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알아봐 준다고 했는데. 괴물. 그리고 에녹. 에드워드의 머릿속에 몇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설마? 그가 이안에게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려 입을 연 순간 음악회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 과연 에반스 공작의 박스석이라 아무나 출입할 수가 없었다. 케이트는 자신의 이름을 대고 함께 간 용병들을 밖에 둔 다음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스미스 양.” 에드워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케이트를 반겼다. 그녀가 입을 연 순간 로즈마리가 달려들었다. “케이트!” “안녕하세요?” 로즈마리의 체구가 작았지만 케이트의 체구도 작았다. 덕분에 두 사람이 뒤로 넘어질 뻔한 것을 재빨리 이안과 에드워드가 부축했다. “감사하, 이안?” 케이트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안은 손을 떼고 물러났다. 그가 있는 줄 몰랐던 만큼 케이트는 당황해서 말을 잃었다. 만나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한소리 하려 했는데 이안을 보자마자 잊어버렸다. “오랜만이에요, 스미스 양.” 이안이 물러나자 실라가 보였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더듬더듬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백작 부인.” 실라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다. 그녀의 당황한 모습에 실라가 나직하게 웃으며 말했다. “에반스 공작이 함께 앉자고 불러줘서 왔어요.” “잘 지내셨어요?” “나야 늘 그렇죠. 스미스 양은 어때요? 친척 집에 가 있다던데.” 엇 하고 케이트가 이안을 쳐다봤다. 에드워드도 이안을 쳐다봤기 때문에 상황을 모르는 로즈마리만 천진하게 물었다. “케이트, 친척을 찾았어요?” “아, 네. 찾았어요.” “잘됐네요!” 마냥 잘됐다고 할 수 있으면 좋겠건만. 케이트는 무난하게 대답했다. “네. 대부를 찾아서요. 아저씨 댁에 있어요.” “잘됐네요.” 실라의 대답과 함께 정적이 흘렀다. 케이트와 에드워드는 상자를 열면 나오는 것이 독뱀이라는 것을 알기에 손대지 못하는 심정이었고 이안은 초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부는 어떤 분이에요?” 실라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케이트의 드레스와 장신구는 훌륭한 수준이었다. 그녀는 케이트가 지금 입고 있는 모든 것이 대부가 지원해 준 것이리라 예상했다. 이 정도 수준을 친 딸도 아닌 대녀에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재력이 괜찮다는 의미이리라. “좋은 분이세요. 음, 예절에 엄격하시고요.” 케이트가 그렇게 말한 건 에녹이 없을 때 남자들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에녹이 굉장히 예절에 엄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쯤은 맞는 생각이긴 했다. “어머, 그래요?” 실라의 눈이 반짝였다. 재력이 충분하고 예절에 엄격하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그녀는 케이트에게서 떨어져 있는 이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이 에드워드의 눈에 들어왔다. 이모님도 스미스 양을 며느리로 점찍어 두셨군. 에드워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혀를 찼다. 어머니에 사촌 형까지 도와주려고 하는데 정작 본인인 이안만 자신과는 관계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대부의 성함이,” 실라가 그렇게 물었을 때 예비종이 울렸다. 휴식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었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죄송해요. 제가 오래 있었네요.” 부랴부랴 인사를 남기고 떠나는 케이트를 보며 실라와 에드워드는 아쉬워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넨 그런데 왜 그러고 있는 거야?” 에드워드의 말에 이안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가 말했잖아. 스미스 양과 친해지라고.” 이안은 이미 사라진 케이트의 흔적을 찾는 것처럼 시선을 입구로 던졌다. 확실히 방금전 이안의 태도는 지금까지와 좀 달랐다. 그가 케이트에게 거리를 두는 게 로즈마리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이안.” “네.” “스미스 양을 좋아하지 않니?”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 “재미있었느냐?” 음악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케이트는 어딘지 모르게 넋을 놓은 것처럼 보였다. 에녹은 휴식시간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대녀의 모습이 걱정스러웠다. “네. 너무 재미있었어요. 데려와 주셔서 감사해요, 아저씨.” 케이트는 음악회가 정말로 재미있었다. 하지만 휴식시간 이후로는 통 음악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녀는 에녹에게 에드워드에게 인사하러 갔다가 이안을 만났던 것을 이야기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가 말없이 떠나고 처음으로 만난 건데 이안은 아무 말도 없었다. 사과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건 섭섭한 걸 넘어섰다. “무슨 일인 게냐, 아가.” 에녹의 재촉에 결국 케이트는 입을 열었다. “휴식시간에 이안, 아니, 로엔 경을 만났거든요.” 에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케이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봤을 때요, 인사 없이 가버려서…. 원래 그런 사람이긴 하지만, 그게, 그러니까….” 사과를 기대한 건 아니다. 그냥, 뭔가 행동을 할 줄 알았다. 내심 기대도 했다. 그는 늘 그랬으니까 가볍게 한 화장이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훔치는 사람이니까. 이번에는 좀 더 화사하게 화장을 했고 평소보다 화려한 핀을 꽂았으니까. 눈물이 핑 돌 것 같아서 케이트는 재빨리 눈을 깜빡였다. 어머, 나 왜 이래? 에녹을 보기 민망했다. 이래서야 자신이 이안을 아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냥, 속상해요. 절 피하는 것 같아서.” 에녹의 입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그는 이유를 알고 있다. 이안이 케이트를 피하는 이유를. 그가 그날 밤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가 케이트에게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그 말을 이안에게만 한 이유는 케이트를 위해서였다. 이안이 케이트에게 조금이라도 감정이 있다면, 케이트를 놓아 주길 바랐다. 자신이 한 말을 케이트에게 알리지 않기를 바랐다. 이기적인 생각이다. 이안은 상처를 받을지언정 케이트만은 지키고 싶다는. 이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케이트에게 이안이 그녀를 피하는 이유는 이러이러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게 가장 좋다. 지금 뮈엘라에서 마력보유자와 마력흡수자 중에 누가 더 위험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마력보유자다. 에녹은 애써 이기적인 마음으로 생각했다. 케이트는 뮈엘라에서 단 두 명의 남자만 조심하면 된다. 그 두 남자가 친척 관계라는 것은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바꿔 생각하면 그 집안만 피하면 된다는 말이 된다. “널 피하는 건 아닐 게다.” 에녹은 다정하게 케이트의 손등을 다독이며 위로했다. “지금까지가 이상했던 거란다. 아무 관계도 아닌 남녀가 한집에서 살다니 말이다.” 에녹의 말에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의 말이 옳다. 조세핀이 있었다고는 해도 미혼인 남녀만 한지붕 아래에서 사는 건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케이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속상한 건 속상한 거다. 어쩌면 이안도 그녀가 먼저 말을 걸기를 바란 걸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로엔 백작 부인과 에반스 공작이 있으니 나름대로 예를 갖춘 걸 수도 있다. 케이트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주말이 지났습니다. 흐규흐규... 전 잉여잉여한 주말을 보냈습니다. 이제 굴러다녀야겠어요. 후후... 표지 변경했습니다. 로베리안님께서 그려주신 여신 케이트예요~ 감사합니다^^ 00184 5. 괴물과 마녀의 상관관계 =========================================================================                            “엇.” 조세핀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얼굴에 당황해서 물러났다. 제이드가 서 있었다. 그 역시 문을 두드리려던 자세 그대로 멈춰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아, 네. 안녕하세요?” 제이드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 얼굴에 잠시 뛰었던 조세핀의 마음은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자 재빨리 굳었다. “여기 조세핀 코트라고 살고 있는데, 혹시 안에 있나요?” 역시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조세핀은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라 더듬더듬 이야기했다. “아뇨. 없어요.” “아, 나갔습니까?” 어린 시절, 부모님이 에이미와 그녀를 동등하게 사랑했던 시절. 그때 들었던 이야기 속에서는 아름다워진 주인공을 왕자님이 단번에 알아보고 프러포즈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아니고 제이드는 왕자님이 아니다. 조세핀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아름다워졌어도, 그녀는 주인공이 아닌 모양이다. “조세핀은 없어요.” 그녀의 말에 제이드는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멍하니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말 그대로예요. 없다고요.” 예전의 조세핀이라면 타인에게 이렇게 냉정하게 구는 건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뻐진 다음에는 알았다. 미인은 좀 냉정하게 굴어도, 못되게 굴어도 용서해준다는 것을. “자, 잠깐만요. 조세핀, 집으로 돌아갔습니까?” “아뇨. 돌아가지 않았어요” “그럼 어디로 갔습니까?” 짜증이 났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녀는 제이드와 친구로 지냈다. 그 십 년이 넘는 기간에서 십 년 가까이 그를 짝사랑해왔건만 그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날 알아보지도 못하면서 걱정하는 척하지 마. 그런 비틀린 생각이 조세핀의 내부에 단단히 자리 잡았다. “아, 모른다고요. 알게 뭐예요? 그딴 계집애.” 조세핀은 발칵 화를 내며 문을 탕하고 닫았다. 나가려던 것도 잊었다. 그저 화가 났다. 그딴 계집애. 못생기고, 사랑받고 싶어서 필사적이던 계집애. 그러나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계집애. “조세핀은 죽었어.” 그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조세핀 내부에 뭔가가 그녀의 심장을 찢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 킬리언씨?” 케이트는 큐바인 하우스 앞에서 망연한 채 선 제이드를 발견했다. “아, 안녕하세요? 스미스 양.” 제이드는 어딘지 모르게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다가갔다. “무슨 일이에요? 어디 안 좋으세요?” “아뇨. 아닙니다.” 잘 모르는 상대가 갑자기 화를 내는 건 당해본 사람만 아는 충격이다. 처음 겪는 제이드는 자신이 왜 놀랐는지도 잘 몰랐다. 그는 삐걱삐걱 손을 들어 다시 문을 두드렸다. “아, 킬리언 씨도 들어가던 참이었군요.” “들어가기보다는 쫓겨난 것에 가깝지만요.” “쫓겨나요?” 케이트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기 전에 문이 열렸다. 다시 조세핀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까처럼 분노에 찬 태도는 아니었지만 냉정했다. “무슨 일이죠?” “안녕하세요. 케이트 스미스라고 하는데요. 코트양 대신 묵는다는 분 맞으시죠?” 제이드가 그랬어요? 라는 표정을 지었다. 몰랐다는 투라 오히려 케이트가 당황했다. 그녀에게는 편지를 통해서 알렸기 때문에 제이드에게는 제대로 알렸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예 말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네.” 조세핀은 침을 한 번 삼키고 말했다. “마거릿이에요.” 편지 상에도 마거릿이라고 했다. 케이트는 가볍게 인사하고 물었다. “혹시 로엔 경, 집에 있나요?” “아뇨. 없어요. 지금 집에 있는 사람은 저뿐이에요.” 아, 그래요? 케이트는 뭐라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물러났다. 조세핀은 들어와서 기다리겠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녀는 케이트가 불편했다. 그녀가 보기에 케이트는 완벽해서, 아름다워진 지금도 곁에 있다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 드러날 것 같아 두려웠다. “제가 지금 나가봐야 해서요. 다음에 다시 오시겠어요?” 조세핀의 말에 케이트와 제이드는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킬리언 씨, 어디 가세요? 태워 드릴게요.” “그다지 가야 할 곳은 없는데요. 차라도 한 잔 마실까요?” 이왕 나왔는데 이안을 만나지 못했다고 집으로 돌아가기는 아쉽다. 케이트는 제이드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큐바인 하우스의 문을 닫던 조세핀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딘지 모르게 불쾌한 감각이 흘러들어왔다. === 에드워드는 이안이 가져온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그는 다 읽자마자 난로에 보고서를 던져 넣었다. “집시라고?” 보고서에는 알라나데일에서 판매된 마법 아이템 외에 다른 마법 아이템이 유통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주 구매자는 여성으로 사랑을 이뤄주는 약이나 미용에 효과 있는 크림 같은 게 대부분이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뮈엘라에서는 마법 자체가 불법이다. 잡아야 한다. 지금까지 잡지 못한 건 유통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인명 사건과는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안은 보고서에 집시가 의심된다고 적었다. 마법의 효과 때문이다. 집시들이 점을 보거나 주름이 줄어드는 크림이라며 여성들에게 팔곤 한다. 전부 마법과는 상관이 없다. 주름이 줄어드는 크림은 비법 크림이라지만 대부분 두꺼비 기름에 꽃물을 섞은 수준이고, 점을 보는 건 별자리를 보고 대충 주워 삼키는 것뿐이다. 그래서 이안은 마법 아이템 역시 집시와 어떻게든 연관이 된 마녀의 행위가 아닐까 하고 판단했다. “겨울이라 집시의 이동이 줄었을 겁니다. 수도에 남은 집시와 마녀가 결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결탁씩이나 했을까 싶지만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 있다. “알라나데일에 이어 집시인가.” “아직까지는 대상이 여자뿐이고 인명피해는 없지만 혹시 모르니 계속해서 조사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하지.” 에드워드는 팔을 뻗어 찻잔을 채웠다. 이제는 좀 더 개인적인 대화를 할 때였다. “그런데, 지난번 음악회에서 말야.” “음악회 말입니까?” 그는 후룩하고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넘겼다. 이안은 허리를 세우고 앉아있었다. “스미스 양에게 잘해주라고 했잖나.” 아. 이안은 그제야 에드워드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이해했다. 음악회에서 우연히 마주친 케이트에 대한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소리다. “설마,” 에드워드는 미적지근한 이안의 태도에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스미스 양에게 마음이 사라졌나?” 그러면 곤란한데. 그는 정말로 케이트가 탐이 났다. 그녀가 가질 가능성 높은 재력과 그녀로 인해 얻을 레인포레스트와의 관계가. 이안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었다. 케이트에게 마음이 사라진 게 아니다. 에드워드의 좌석에서 케이트를 본 순간 그는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고 싶었다. 하지만 거기엔 실라가 있었고 무엇보다 그가 케이트에게 독이라고 했다. 만지면 저 자그마한 여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지금까지는 별 다른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독이라고 했으니까. 그게 쌓이고 쌓여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안은 어린 시절부터 약한 실라를 보고 자랐다. 케이트가 실라처럼 하루의 반나절도 움직이는 걸 힘들어할 정도로 약해진다면, 기분이 아주 이상했다. “그건 아닙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이안이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는 카펫의 무늬에서 시선을 돌려 에드워드의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냉정하게 군건가? 싸웠나?” “싸운 것도 아닙니다.” “스미스 양을 화나게 했나?” 놀라운 일이지만 남자들은 싸우는 것과 여성이 화내는 것을 별개의 사건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에드워드는 자신 때문에 로즈마리가 화를 내면 그걸 싸웠다고 안 하고 로즈마리가 화났다 라고 표현했다. “지금은 화났을 겁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에드워드는 턱을 쓰다듬었다. 케이트가 지금은 화났을 거라니? 이안은 에드워드의 호기심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드물게도 자신의 행동이 케이트를 화나게 했을 거라는 걸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 보자고 하고 인사도 없이 떠나 버렸으니까. 그가 아는 케이트라면 매우 섭섭해하고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 작품 후기 ============================ 아아아 추워요. 00185 5. 괴물과 마녀의 상관관계 =========================================================================                            “어, 뭐야?” 약방에 제이드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이안. 오랜만이야.” 사람 좋은 얼굴을 한 리코가 인사를 건넸다. 리코와 제이드. 두 사람이 약방을 왔다는 건 뭔가 수사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오랜만이군.” “요새 집에도 없더라?” 제이드의 말에 리코가 놀랍다는 듯 물었다. “뭐야, 집에도 찾아갔었어?” “심심해서 놀러 가면 없더라고.” 그랬나.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오니 당연하다. 그는 케이트가 두 번이나 그를 만나러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제이드도 찾아왔는지는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세핀이 제이드에 대한 이야기는 피하고 있으니까. “무슨 일이지?” 자신을 두고 리코와 제이드가 한도 끝도 없이 이야기할 것 같자 이안이 끼어들었다. 리코는 제이드와 파트너가 되면 수다가 좀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무슨 일이긴, 심심해서 놀러 갔다니까.” 결국 제이드는 딴소리를 했다.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자 리코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안 말은 우리가 이 약방에 무슨 일로 왔냐는 것 같은데.” 바로 그거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제이드는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랬어? 결국 이안은 제이드가 큐바인 하우스에 찾아온 건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아, 이번 사건에 관련해서 뭘 좀 묻느라.” 이안은 무슨 사건이냐고 물어보려다 멈췄다. 그는 더이상 수사관이 아니다. 비밀 수사관이긴 하나 엄밀히 말하면 왕궁 소속이 아니라 에반스 공작 소속이다. 그러니 현재 진행되는 사건에 대해 리코와 제이드가 그에게 말해줄 수 없다. 그러나 상대는 제이드. 그는 그런 사소한 일은 모른다는 듯 자기 멋대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시체가 발견됐는데 몸에 좋은 냄새가 나더라고.” “그 말은 귀족이나 부자가 아니라는 말이군.” “딩동댕.” 귀족이나 부자의 시체라면 좋은 냄새가 나는 걸로 이렇게 찾아다닐 이유가 없다. 향유를 바르거나 향수를 뿌렸을 게 당연하니 자택에서 사용하는 향유를 확인하면 된다. 자택에 동일한 향유가 없을 경우 교제하는 상대 혹은 죽기 전에 만난 사람을 확인하는 게 일반적이다. 리코와 제이드가 시체에서 나는 좋은 냄새를 찾아 약방까지 왔다는 건 향유의 비밀을 파헤치지 못했다는 뜻이고, 그건 평소 향유를 바르지 못하는 계층의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타인이나 사회에 관심 없는 이안이라지만 수사관으로 일한 경험이 있으니 쉽게 추론 가능한 이야기였다. “냄새 맡아볼래?” 제이드의 제안에 리코는 포기한 표정을 지었다. 카이사라면 그런 걸 주절주절 이안에게 다 말하지 말라고 훈계했을 것이다. 제이드는 품에서 천을 꺼내 이안에게 내밀었다. 이안은 물끄러미 천을 내려다보다가 제이드가 재촉하자 고개를 숙였다. 코끝에 달짝지근한 향이 닿았다. 저도 모르게 불쾌한 기분이 들어 이안은 뒤로 휙 물러났다. “하하하, 거봐. 저럴 줄 알았어.” 일순 이안은 제이드가 자신을 놀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코는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뭐지?” “우리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차야. 묘하게 불쾌한데 기다려봐.” 기다려 보라고?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러다 그는 다시 그 냄새를 맡고 싶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중독성 있지?” “…그렇군.” “이런 향유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 그래서 조사하는 중이야.” 그렇군. 이해했다. 달짝지근한 향은 처음 맡았을 때는 불쾌한 느낌이 들었는데 자꾸만 맡고 싶어지게 된다.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이런 향유를 바른 시체라니, 충분히 수상했다. 세 사람은 약방에 서로 찾는 것을 확인하고 나왔다. 가게에서 나오자 제이드는 기다렸다는 듯 이안에게 붙어 속삭였다. “더 놀라운 게 뭔지 알아?”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이드는 궁금하지? 궁금하다고 말해! 궁금하잖아! 라고 재촉하듯 발을 동동 구르다가 제 풀에 지쳐 말했다. “시체가 전부 여자애들이었다는 거야.” “여자애들?” “전부 십 대 중반 정도 여자애들이었어.” 이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리코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향유를 바른 십 대 여자애들의 시체라니,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이 되는 건 세 사람이 수사관이기 때문이다. 리코는 이럴 때마다 세상의 더러운 부분, 어두운 부분을 너무 많이 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는 약방에 무슨 일이야?” 제이드가 어두운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질문을 돌렸다. 그는 이안이 대답하기 전에 먼저 다시 물었다. “스미스 양한테 선물 주려고?” “아니.” 즉답에 제이드가 잠시 멈칫했다. 그렇게 바로 대답할 것까진 없잖아. 그렇지 않아도 조세핀이 그에게 아무 연락 없이 사라져 버려 조금 상처 입은 상태였다. 화가 풀리면 다시 얼굴을 보여줄 거라 생각했는데 지난번 방문 때 마주친 미인은 조세핀이 말없이 떠났다고 말했다. 그가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뜻인 걸까. 제이드는 시무룩해서 입을 다물었다. “어, 그럼 무슨 일이야?” 보다 못한 리코가 끼어들었다. 이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 “수사? 하지만 넌,” 수사관을 그만뒀잖아. 리코가 차마 맺지 못한 말을 대신 끝내듯 이안이 말을 이었다. “직후 에반스 공작에게 임무를 하달받았다.” “에반스 공작?” 리코의 머릿속에 이안과 에드워드가 사촌 간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군. 약간 부럽기도 했다. 어쨌거나 에반스 공작이 사촌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부러움도 잠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사관 전체가 그의 희생으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카이사는 보기 불쌍할 정도라 이 사실을 알려주면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비밀이다.” “비밀이라고?” 카이사에게 알려줘야겠다던 리코의 다짐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안은 담담하게 말했다. “표면적으로 난 수사관을 그만둔 상태여야 하니까, 이 사실은 비밀이다.” “그게 무슨,” 그러다 리코는 다시 떠올랐다. 이안이 수사관을 그만둔 이유. 호건 가 때문이다. 에반스 공작은 호건 가가 수사관들에게 시선을 떨어트리면 이안을 다시 수사관으로 복직시키려는 걸까. 리코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올렸다. 그게 불가능한지 가능한지조차 모르겠다. 지금까지 그런 전례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무슨 사건인데?” 정신 차린 제이드가 끼어들었다. 이안은 생각났다는 듯 대답했다. “불법 마법 아이템을 수거하고 있다.” 처음엔 알라나데일에서 판매된 마법 아이템만이었지만 지금은 그 범위가 좀 늘어났다. 이안은 향유를 판매한 약방을 조사해 그 약방도 다른 약방에서 구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가 발견한 향유는 이런 향유가 있다는 말을 들은 귀족 부인의 요청에 약방 주인이 건너 건너 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구해다 준 약방 주인은 모르는 일이라 잡아뗐다. 사정은 제이드와 리코도 다르지 않았다. 약방 주인은 모른다고 했고 세 사람 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나와야 했다. “우린 다른 약방으로 갈 건데.” 같이 가겠냐는 의미를 품은 리코의 질문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쟁하는 가게에서 이야기할 수도 있다. === 이안이 그녀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은 점점 사실로 다가왔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큐바인 하우스에 찾아간 게 오늘로 세 번째다. 한 번 들러달라는 편지도 보냈지만 이안은 대답이 없었다. 이유가 뭘까. 케이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녀가 잠들어 있을 때 이안과 에녹이 어떤 이야기를 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에녹이 이안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날 이안을 집에 들이기에 좀 나아진 줄 아니었는데 사람 마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 게 맞는 모양이다. 아니, 에녹의 말대로라면 엘프는 변화가 느리다 했으니 더더욱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아저씨께서 날 만나지 말라고 하신 걸까.” 케이트는 속상한 마음에 소리 내서 말했다. 조세핀도 그녀에게 편지 한 장만 보내고 떠나 버렸다. 제인은 큐바인 거리의 다른 하인들과 친해졌고 데이지는 그녀가 찾아가면 늘 뭔가를 사러 갔거나 일을 하느라 바빴다. 외로웠다. 처음 에바니엘에 올라왔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외로움이 케이트를 잠식했다. “어, 케이트? 식사하러 왔어?” 앤이 일하는 식당에 찾아갔던 케이트는 정신없이 바쁜 앤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앤과 이야기라도 할까 했지만 그녀는 대단히 바빠 보였다. “오늘 소고기가 대단히 좋아! 그걸로 시켜. 내가 아주 맛있게 해줄게.” “정말? 고마워.” “먹고 내 특제 후식도 다 먹어야 해, 알았지?” 그 말을 끝으로 앤은 케이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주방으로 뛰어가 버렸다. 이미 주방 쪽에선 앤 어딨어? 라는 고함이 들리던 차다. 케이트는 달려가는 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남자 둘 중 한 명만 그녀와 함께 테이블에 앉았다. “뭐 드실래요? 제가 살게요.” 그녀가 용병과 함께 메뉴를 고르고 있을 때였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테이블에서 에스메랄다가 고개를 들었다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잠깐, 내가 저 계집애를 어디서 봤더라?” 에스메랄다는 좋은 옷을 입은 케이트를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에게 있어 케이트는 초라한 옷을 입은 촌스러운 계집애였다. 어머니와 함께 식사하던 제프리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저거 그년이잖아?” “그년?” “베스의 딸이요. 캐, 케, 캐서린이었나?” “저게 그 캐서린이라고?” 에스메랄다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케이트를 잊은 게 아니다. 여전히 케이트는 변호사를 통해 할아버지인 비스마르크 호건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스메랄다가 그녀를 알아차리지 못한 건 그녀가 사람을 옷차림으로만 판가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거지?”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저렇게 좋은 옷을 입고 이런 고급 식당에 오다니, 부자 남편이라도 만난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지금까지 두 사람이 케이트를 무시했던 건 그녀가 엘리자베스의 유산을 받긴 했지만 호건가에 정면으로 대립할 만한 보호자가 없어 무시해도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케이트에게 강력한 보호자가 생겨 호건 가가 그녀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상황에 부닥친다면 에스메랄다와 제프리는 매우 곤란해진다. “정말이지, 귀찮은 계집애라니까. 그러게 내가 그날 처리하라고 했잖니?” “도망치는 걸 어쩌라고요?” 두 사람의 언성이 커졌다. 제프리와 에스메랄다를 발견한 케이트의 용병 두 사람이 케이트의 보호에 더욱 주의를 기울인 건 말할 것도 없다. ============================ 작품 후기 ============================ 졸려요... 00186 5. 괴물과 마녀의 상관관계 =========================================================================                            “앉게.” 에드워드의 말에 이안은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하인이 술과 안주를 놓고 갈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졌다. 난로에 타오르는 불과 램프의 불이 일렁이며 벽 위에 수많은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전에 요청했던 것 말인데.” 전에 요청했던 거라면 금서에 접근을 허가해 달라는 요청이다. 이안은 에드워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일부러 에드워드가 자택까지 부른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도서관 접근은 안 될 것 같아.” “그렇습니까.” 이안은 능숙하게 실망을 감췄다. 그리 쉽지 않을 거라고 각오하기도 했다. 하지만 궁금한 건 단순히 안 된다고 거절할 거라면 그를 자택까지 부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이안의 표정에 에드워드는 쓰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이안의 생각 대로다. 거절만 할 거라면 그를 부를 필요도 없었다. “그 괴물에 대해서 말인데, 어쩌다가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된 건지 이야기해 줄 수 있나?” 어쩌다가? 이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괴물이라 더 알고 싶어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에녹의 말을 무조건 믿을 수도 없었다. 에녹의 말이 앞뒤가 맞기는 하지만 그게 대녀인 케이트에게 그가 접근하는 게 싫어서 꾸며낸 이야기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에드워드는 이안의 침묵을 다른 쪽으로 이해했다. 에녹은 에드워드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가 마력을 흡수하는 자라는 것을. 에녹은 케이트의 대부이고, 이안은 케이트를 원한다. 두 사람에게 접점이 있는 것이다. 에드워드는 이안이 에녹에게 그가 마력흡수자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레인포레스트 경에게 들었습니다.” 이안의 말에 에드워드는 잔에 든 술을 전부 마셔버렸다. 에드워드가 마력흡수자라는 건 비밀이다. 그건 그만의 비밀이 아니다. 왕족 내의 비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드워드는 왕위 계승후보자이고 현왕은 병약한 상태에 후사도 없다. 차기 왕으로 가장 유력한 자가 괴물이라는 것은 마법을 배척하는 뮈엘라에서는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어쩌다가?” 에드워드의 질문에 이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에드워드는 괴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이안도 몰랐다. 에드워드가 마력을 흡수한다는 것을 아는 자는 뮈엘라 내에서도 손꼽힌다. “괴물에 대해 어떻게 들었는지 궁금해 하는 건, 괴물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까?” 이안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에드워드의 몸이 일순 굳을 정도였다. “무슨 의미지?” “말 그대로입니다. 괴물에 대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짧은 탐색이 이어졌다. 에드워드는 이안이 어디까지 알아차렸는지 파악하려 했고, 이안은 에드워드가 뭘 숨기고 있는지 생각했다. 먼저 손을 든 건 에드워드였다. “좋아. 어디까지 알고 있지?” 그의 수하가 곁에 있었다면 기겁할 일이지만 에드워드는 이안을 믿었다. 이안이 타인과 반응이 다르기는 하나 그가 자신의 어머니를 아낀다는 건 알았다. 또한 케이트를 원한다는 것도. 이안에게 가장 중요한 두 여자. 그 여자들을 가질 수 있고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게 에드워드라는 것도 이안은 알고 있다. “괴물이 마력을 흡수한다는 것을 압니다. 상대가 마녀일수록 피해가 크다는 것과,” 그리고. 이안은 잠시 말을 골랐다. 컵 안에 얼음이 다 녹은 게 보였다. 그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의 약혼녀라는 여자가 마녀라는 것도.” 에드워드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알았지?” 이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케이트와 느낌이 비슷합니다.” 에드워드는 잠시 말을 잃었다. 어렴풋하게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긴 했다. 로즈마리는 케이트를 만나고 오는 날이면 케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멈출 줄 몰랐다. 원래 의심을 못 하는 성격이고 사람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케이트는 유독 좋아했다. “그렇군.” 그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에녹이 이안에게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한 걸까. 그가 이안의 사촌이니까? 그건 너무 뜬금없다. 그러다 그는 문득 깨달았다. “잠깐, 케이트와 로즈마리의 느낌이 비슷하다고?”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에드워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공작께선 안 느껴지십니까?” 안 느껴진다. 에드워드는 케이트와 로즈마리의 느낌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아니, 해봤구나. 그는 재빨리 정정했다. 하지만 그건 느낌이 아니라 생긴 게 비슷해서다. 둘 다 자그마하고 사람을 잘 믿는다. 그게 마녀의 종특같은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에드워드는 피식 웃었다. 절대 그렇지 않다. 그가 만난 마녀 중에는 로즈마리나 케이트와 스타일이 완전 반대인 여자도 있었다. “아니, 난 안 느껴지는데.” “그렇습니까.” 이안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이건 괴물의 특징인 걸까하고 생각했을 때였다. 에드워드가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마녀를 구분할 수 있나?” 이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이상한 느낌이 드는 여자들이 있었는데, 최근에 그게 마녀이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건 스미스 양 때문인가?”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알라나데일에서 케이트를 만나던 순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차이점은 그전에도 그 후에도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여자들은 있었지만 케이트처럼 강력한 여자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군. 마녀를 구분할 수 있다는 건가.” 에드워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런 능력을 가진 자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어렴풋이 생각났다. 아주 옛날에. 아마 지금도 있을지 모른다. 다만 본인도 모르고 주변 사람들도 모를 뿐이지. 지금 이안의 입장을 생각했을 때 그건 훌륭한 장점이 된다. 현재 뮈엘라에서는 숨어있는 마녀를 잡으려 하고 있으니까. 문제는 케이트도, 로즈마리도 마녀라는 점이다. 에드워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녀가 많은가?” 이안은 대답 대신 질문했다. “어느 기준으로 많다고 합니까?” 그렇군. 에드워드는 다시 물었다. “열 명 중에 몇 명 정도인가?” “네, 다섯 명 정도 됩니다.” 상당히 많다. 에드워드는 다시 턱을 쓰다듬었다. 많긴 하지만 예상하고 있었다. 뮈엘라는 과거 마법의 나라였다. 성녀의 나라였고, 마법사의 나라였다. 마법과 지식을 향유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녀의 혈통이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 왕족인 에반스 가 역시 마녀의 핏줄이 흐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녀를 잡아내지만 잡아낼 수가 없다. 마녀를 잡기 위해 관공서에 마력을 가진 자들이 들어오면 알람이 울리는 마법이 걸어 놨지만 그 마력의 수준을 낮추면 안 걸리는 사람이 없다는 건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이었다. 케이트와 로즈마리가 에바니엘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건 그런 이유였다. 로즈마리는 마력 자체가 크지 않아서, 케이트는 봉인된 탓에. “놀랐겠군.”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그렇구나 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간혹 그에게 이상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있었다. 대부분이 여자였다. 그래서 그는 그 기분이 타인이 말하는 욕망이나 색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케이트를 만나고 변했다. 그가 지금까지 만난 여자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전에 그에게 이상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던 여자들이 작은 강이나 시내였다면 케이트는 바다였다. 바다에 표류한 자가 갈증을 견디지 못하고 바닷물을 마시면 갈증이 더 심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안은 그 이야기가 케이트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다에 표류했고 그 바다가 바로 케이트였다. 바닷물을 마시면 갈증이 더욱 심해진다는 것을 알지만 마시지 않을 수가 없다. “잠깐, 괴물과 마녀를 알아보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에드워드가 물었다. 이안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녀를 알아보는 것이 괴물이라 그런 것이 아닙니까?” ============================ 작품 후기 ============================ 오는길에 고양이를 만났어요. 얼룩이였는데 머리의 무늬가 5:5 가르마.... 00187 5. 괴물과 마녀의 상관관계 =========================================================================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에드워드는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이안을 쳐다봤다. 마녀를 알아보기 때문에 괴물이라고? 그럴 리가. 괴물이라는 말은 과거 뮈엘라가 마법의 나라일 때부터 사용된 단어다. 마녀를 존중하고 나라의 인재로 보던 당시에 마녀를 알아보는 힘을 가졌다고 괴물이라고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음, 내 생각에 자네는 좀 다른 계통인 것 같아.” 에드워드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도 그, 괴물이라고 부르는 계통인데. 마녀를 알아볼 수는 없거든.” “그렇습니까.” 응.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던 에드워드는 멈칫 몸을 멈추고 이안을 쳐다봤다. “잠깐, 그렇습니까 라니. 놀랍지 않아?” “뭐가 말입니까?” “그러니까, 내가 괴물이라는 게.”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저도 괴물입니다만.” 아, 그렇지. 에드워드는 머쓱하게 턱을 쓰다듬었다. 쓸데없이 놀라지 않아서 좋았지만 저렇게 무심하니 뭔가 섭섭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크흠, 그러니까 괴물이라는 건 결국 사건과는 관련이 없었던 거군?”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사건? 그러다 그는 전에 에드워드에게 괴물에 대해 물어볼 때 사건 때문이라고 거짓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아.” 그제야 기억났다는 태도에 에드워드는 기가 찼다. 이 자식 봐라? 하지만 그런 이안의 태도는 에드워드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이안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과도하게 친한척하지도, 적의를 보이지도 않았다. 왕위 계승자로, 공작으로 있다 보면 이런 태도가 고맙게 느껴진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이안의 건방진 태도에 대해 문제 삼지 않고 넘기는 편이었다. “좋아,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고. 레인포레스트 경이 자네에게 괴물이라고 했고 마녀의 마력을 흡수하니 스미스 양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겠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네는 그 말이 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날 찾아온 거고 말야.” “그렇습니다.” 흠. 에드워드는 다시 턱을 쓰다듬었다. 이안이 에드워드는 찾아온 건 그럴 수밖에 없긴 했지만 대단히 잘 찾아온 것이기도 했다. 이안이 마법에 관한 정보를 요청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을 가진 사람이 에드워드이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을 확인하고 술병을 열었다. 퐁하고 경쾌한 소리가 정적인 서재 안에 울려 퍼졌다. “오늘 시간 많나?” 시간이야 많지만 늦어서 돌아가야 한다. 이안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에드워드가 말을 이었다. “자고 가게. 방을 준비하라고 하지.” 그가 줄을 당기자 집사가 나타났다. 안주와 이안이 자고 갈 방을 준비하라는 말에 집사가 떠나자 에드워드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대충 설명해 주겠네. 알겠지만 이 이야기는,” 에드워드는 말을 멈추고 이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리는 이안의 태도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밀이라고.” 이안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 왜 그걸 굳이 물어보는 거지? 그 표정에 에드워드는 입맛을 다셨다. 그래. 이안은 이런 녀석이지. “괴물이라기보다는 흡수자라고 부르는데, 뮈엘라에서는 한두 명 정도지만 끊이지 않고 나타났던 걸로 알고 있어.” 에드워드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한 세대에 반드시 한두 명은 있었다. 마법의 시대에는 흡수자를 발견하면 격리하거나 국가의 지배하에 두었다. 마녀에게 위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나처럼 왕족 중에 흡수자가 태어나면 평생 유배되어 살았다고 하더군.” 에드워드는 그렇게 말하며 쓰게 웃었다. 그도 이안과 같았다. 이 시대에 태어나서 다행이다. 다른 흡수자들처럼 과거, 마법의 나라에 태어났다면 평생 갇혀 살아야 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무래도 나는 정보가 좀 더 많은 편이지. 흡수자라 해도 왕족이니까 말야.” 범죄자라 해도 왕족, 귀족은 특별대우를 받는다. 흡수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평생을 갇혀 살지만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지냈다. 그게 평생 감금되어 사는 것을 보상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흡수자는 마녀의, 그러니까 마력보유자의 마력을 흡수한다네. 이건 알지?”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에녹이 케이트에게서 떨어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평상시에는 크게 문제가 없어. 약간 제약이 있을 뿐이지. 나만 봐도 그렇잖아?” 이안 역시 그랬다. 그는 에녹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괴물이라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 이안의 동의에 에드워드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문제는 말야, 다칠 때야.” “다칠 때 말입니까?” “다치거나 아플 때.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약해졌을 때를 말하는 거겠지.” 에드워드는 몇 번 위험한 순간을 떠올렸다. 그 자신도 기억나지 않는 순간. “우리의 그, 힘이라고 해야 할까, 몸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부분이 위험한 순간에 주변의 마력을 흡수해서 살아남으려 한다는 걸세. 평소에는 목숨에 위협이 되지 않으니 주변에서 미량을 흡수하는 걸로 충분하지만, 몸이 약해진 순간 마력이 집약된 것을 공격한다고 하더군.” “…무엇을 말입니까?” “그러니까, 마력이 집약된 것을 말야.”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마력이 집약된 게 뭐지? 에드워드는 목소리를 한껏 낮춰서 말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마녀를 공격한다는 말이야.” 그 순간 집사가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그는 이안과 에드워드를 위해 가져온 안주를 내려놓은 뒤 이안의 방을 준비했다고 말하고 나갔다. 그 사이에 입을 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안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가 위험한 순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마녀를 공격한다는 말은 곱씹고 있었다. 에녹이 이안에게 케이트에게서 떨어지라고 한 이유를 알았다. 이안이 위험한 순간 그는 마녀를 공격할 것이다. 그녀의 마력을 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케이트를. 기이할 정도로 그는 안도감을 느꼈다. 에녹의 말을 듣고 혹시나 하면서도 케이트에게서 떨어지길 잘했다는 안도감.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이안의 눈앞에 피로 범벅이 된 케이트의 모습이 떠오른 순간 에드워드가 입을 열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마녀를 공격한다고 했습니다.” “아, 음. 그랬지.” 에드워드는 다시 술을 따랐다. 무거운 분위기가 서재 안에 퍼졌다. 그때 이안이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에드워드가 술병을 내밀었다. 술 더 따라주느냐는 행동에 이안도 컵을 내밀며 물었다. “그렇다면 왜 그 마녀를 곁에 두고 계시는 겁니까? 일종의 비상용입니까?” 비상용이라니. 에드워드는 쓰게 웃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가 그의 측근 중에도 한 명 있다. 실제로 처음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지금은 아니야.” 너덜너덜해졌던 로즈마리의 가느다란 목이 아직도 가끔 그의 꿈에 나온다. 그 작은 몸이 얼마나 쉽게 꺾이는지 기억하고 있다. 이안은 지금은 아니라는 말의 의미를 간단히 파악했다. 예전엔 그랬다는 말이다. 케이트에게 로즈마리를 에드워드의 약혼자라고 소개했지만, 현재 사교계에서는 로즈마리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신문에 가장 인기 있는 미혼 남성으로 에드워드가 실렸던 것이다. “그녀를 보호할 방법은 없습니까?” 이안은 케이트를 지칭한 것이지만 에드워드는 로즈마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괴물이라고 해도 군대가 덤비면 어쩔 수 없어. 마녀가 마법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도 있지.” 이안이 자신을 공격하려 한다면 케이트가 마법으로 자신을 지키면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쉽지 않았다. 에드워드의 푸른색 눈동자가 칠흑처럼 검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문제가 두 가지 있어.”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첫 번째로 여긴 뮈엘라라는 점이고,” 뮈엘라. 마법을 쓰지 않고 이안에게 공격당하거나, 마법을 쓰고 국가에 끌려가거나. “두 번째로, 우리의 목숨이 위험할 때 그녀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우리를 공격할 수 있느냐는 점이야.” ============================ 작품 후기 ============================ 아 오늘도 춥네요~ 다음주에 만나요~ 00188 5. 괴물과 마녀의 상관관계 =========================================================================                            “엇, 실례했습니다.” 제이드는 나가려다가 들어오는 여자와 부딪칠 뻔하고 멈췄다. 본적이 있는 얼굴이다. 이런 미인을 잊을 리가 없다. 그는 문을 잡고 여자가 들어올 수 있도록 비켜섰다. “어서 오세요, 킬리언 포목점입니다.” 반사적으로 생글생글 웃는 제이드의 얼굴을 조세핀은 멍하니 쳐다봤다. 그녀를 손님으로 맞이하는 제이드의 모습은 두 번 째지만 익숙하지 않았다. “들어오세요.” 제이드가 재촉하자 정신을 차린 조세핀이 안으로 들어왔다. 주 사람은 가게 안으로 한걸음 들어온 다음 마주 보았다. 제이드가 다시 한 번 영업용 스마일을 보이자 조세핀도 엉겁결에 따라 웃었다. “찾는 게 있으신가요?” 그때 조세핀 뒤로 여자가 나타났다. 제이드는 낯익은 얼굴에 엇 하고 놀랐다. “안녕하세요, 데이지양.” “안녕하세요.” 데이지는 조세핀의 옆에 서서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찾던 건 있나요?” “아, 아직 안 찾아봤어요.” “어머, 그래요?” 그러더니 데이지가 제이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 뭐? 제이드는 데이지와 조세핀이 둘 다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발견하고 당황했다. 왜 그러지? 하지만 그는 당황한 것을 티 내지 않고 물었다. “뭔가 찾으시는 거라고 있나요?” “연말이니까 코트를 하나 만들려고 하는데요.” “아, 코트용 천을 찾으시는 거군요.” “네에.” 조세핀이 조심스럽게 한걸음 다가왔다. 지난번에 산 드레스와 한껏 꾸민 머리카락과 공들여 한 화장이 빛이 났다. 예뻐지고 나서 조세핀은 자신의 새로운 외모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이 마법으로 예뻐진 것을 알아차리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던 것도 잠시. 아무도 이게 마법의 힘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전보다 훨씬 더 쉽게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삶에 적응했다. 친구들을 전부 포기해야 했지만 괜찮았다. 아니, 괜찮지 않다. 하지만 괜찮다. 못난 조세핀보다 예쁜 조세핀이 사람이 더 많았다. 친구는 다시 친해지면 돼요. 데이지의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고 실제로 사실이었다. 조세핀과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새로운 미인과 친해지는 것을 단 한 명도 꺼리지 않았다. “제이드, 천 고르는 걸 도와줄래요?” 미인이 살그머니 팔을 잡으며 요청하자 제이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 그는 조세핀과 함께 코트용 천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뒤에서 데이지가 응원하듯 손을 흔들었다. “성함이?” “마거릿이요.” “마거릿. 예쁜 이름이네요.” 제이드의 칭찬에 조세핀은 생긋 웃었다. 조세핀일 때는 유일하게 예쁘단 소리를 듣는 게 이름이었다. 그녀는 제이드의 팔에 매달리듯 기대보았다. 에이미가 전에 이렇게 하는 걸 몇 번이나 봤다. “겨울용 코트라면 어떤 천을 원하시나요? 양털도 있고, 얼마 전에 좋은 토끼털이 들어왔답니다.” 제이드는 자연스럽게 천을 꺼내기 위해서라는 듯 조세핀에게서 팔을 빼내며 말했다. 조세핀은 어라 하고 제이드를 쳐다봤다. 여기 오기 전에 몇 번 시험해 봤는데 이렇게 빼낸 남자는 없었다. “토끼털로 보여주실래요?” “자, 여기 있습니다.” 약간 어색하게 토끼털을 보여주는 모습에 조세핀은 하마터면 지적할 뻔했다. 그렇게 펴주면 안 되지. 여길 이렇게 잡아야 할 것 아냐. 하지만 지금은 조세핀이 아니라 마거릿이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손을 입에 대고 살그머니 웃었다. “저한테 어떤 게 어울릴까요?” “색 말씀인가요? 이 색도 괜찮을 테고요.” 그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따듯한 색을 원하신다면 이 색이 좋지만, 지금 유행하는 색은 이 푸른색이 섞인 회색이랍니다.” 하지만 조세핀은 제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제이드가 말을 멈추자마자 다시 그의 팔에 손을 얹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 근처에 맛있는 식당이 있나요?” 은근한 유혹 역시 에이미가 하던 것을 본 대로 따라 한 것이다. 문제는 제이드도 그걸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킬리언 포목점의 막내아들에 수사관. 서글서글한 성격과 괜찮은 외모. 그는 이런 유혹을 꽤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익숙했다. 제이드는 깔끔할 정도로 담백한 어조로 말했다. “나가서 오른쪽으로 가면 두 번째 가게가 맛있어요. 전 거기서 파는 콘도그를 추천합니다.” 어라. 조세핀은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른 반응에 눈을 크게 떴다. 다른 남자들은 이렇게 물어보면 식사를 사줘도 되겠냐느고 물었다. 그녀는 더이상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속상하고 부끄러웠다. 이렇게 예뻐졌는데 왜 제이드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는 걸까. 에이미보다 훨씬 예뻐졌는데. 그때 딸랑하고 종이 울리면서 케이트가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는 직원들이 소리 높여 그녀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스미스 양!” “날이 춥죠? 어서 들어오세요.” 케이트는 코트를 받아주겠다는 직원의 말에 곧 나갈 거라며 손을 흔들었다. 가게 앞에서 제이드를 만나기로 했는데 어쩐 일인지 제이드가 나와 있지 않기에 들어와 본 것뿐이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제이드는 다른 직원에게 조세핀의 안내를 부탁하고 코트를 집어 들었다. 조세핀은 당황해서 그에게 매달리며 물었다. “하지만 저한테 천을 보여주시기로 했잖아요.” “아, 죄송합니다. 선약이 있어서요.” 케이트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한쪽에 서서 제이드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저도 미리 약속을 잡을게요. 이틀 뒤에 다시 올 테니까, 그때 꼭 직접 알려주세요.” 제이드는 코트를 입다가 물끄러미 조세핀을 쳐다봤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왜 그에게 이러는 걸까. 간혹 여자들이 그가 포목점의 주인이라는 말에 엄청난 부자일 거라 생각하고 접근하는 경우가 있다. 제이드는 그런 여자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수사관으로 일하면서 성공하기 위해서 사람도 죽이는 사건을 봤기 때문에 여자들의 접근 정도는 귀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걸 받아주는 건 다르다. 그는 예쁜 여자라면 이미 경험했다. 에이미 코트. 마거릿은 에이미와 어딘지 모르게 비슷했다. 생긴 건 달랐지만, 행동 같은 것이. 조세핀이 에이미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한 것이니 행동이 비슷한 건 당연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제이드는 오히려 그런 점이 별로였다. 다른 남자와 마차여행을 하다가 사고로 죽은 전 약혼녀를 떠올리게 하는 여자라니. 그는 매달리는 듯한 조세핀의 손을 떼어내고 담담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틀 후는 이미 선약이 되어 있고, 저는 포목점의 직원이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조세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니, 그런 뜻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은 그렇게 오해하기 딱 좋았다. 그녀가 물러나자 제이드는 케이트에게 다가갔다. 그는 자연스럽게 팔을 내밀며 케이트에게 말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가 볼까요?” “아니에요, 제 일을 도와 달라 해서 제가 미안하죠.” 제이드와 그의 팔에 손을 얹은 케이트, 두 사람의 모습은 사이좋아 보였다. 두 사람이 나가자 직원들이 나직하게 수군대기 시작했다. “스미스 양, 요즘 자주 오네.” “사장님 만나러 온 거 아냐?”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어, 뭐야. 두 사람 사귀나?” 그런가?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조세핀의 심장이 철렁했다. “잘 어울리지 않아?” 누군가 그렇게 말했을 때 딸랑하고 종소리가 울렸다. 손님이 들어왔나 하고 직원들이 쳐다봤지만 들어온 사람은 없었다. 조세핀에게 천을 보여주기 위해 창고에서 여우 털을 가져온 직원이 조세핀과 데이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야, 왜 나간 거지? 웅성웅성하는 와중에 직원이 여우 털을 다시 정리하며 투덜거렸다. “하여간 예쁜 것들은 싸가지가 없어.” 조세핀은 가게에서 한참 떨어진 곳까지 정신없이 달렸다. 데이지가 그녀를 몇 번이나 불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마거릿, 마거릿.” 헐떡이는 조세핀을 등을 데이지가 위로하듯 쓰다듬었다. “난 안돼요.” “무슨 소리예요.” 데이지의 위로도 조세핀의 기분을 나아지게 만들지 못했다. 조세핀은 쪼그리고 앉았다가 치맛자락이 더러워진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예쁜 애들은 치맛자락이 더러워지는 것 따윈 신경도 안 쓰던데. 그녀는 가짜로 예뻐서 그렇다. 그런 생각이 조세핀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내가 가짜라 그래요.” “가짜라뇨.” “데이지 탓을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진짜 예뻤다면 좀 더 당당했을 거예요. 내가 당당하지 못하니까….” 조세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케이트의 자연스러운 모습. 당당한 모습이 자꾸만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왜 그러지 못할까 하는 자괴감이 그녀의 마음을 좀먹었다. 데이지가 그녀를 아름답게 바꿔줬을 때도 그녀는 믿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 사람들이 그녀를 아름답게 볼 때도 어딘가 한구석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통하지만 잘 아는 사람에게는 통할까? 제이드도 그녀를 아름답다 생각해 줄까? 그런 두려움이 현실로 닥쳤다. “마거릿, 그러지 말고 한 번 더 해봐요. 네?” “안돼요. 제이드는 이제 날 안 만나 줄 거에요. 내가 그런 소릴 해서…….” 누구라도 사람을 접대부 취급하면 기분 나쁠 것이다. 예전의 조세핀이라면 입으로 꺼내지도 못할 말이었다. 아름다운 마거릿은 꺼낼 수 있었지만 아직도 마음은 조세핀이다. 그녀는 자신의 작은 실수에도 벌벌 떨었다. “괜찮아요, 마거릿. 내가 도와줄게요.” 데이지의 말에 조세핀은 고개를 들었다. 공들여 한 화장이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데이지는 그녀의 눈물을 닦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내가 도와줄게요, 마거릿.” 조세핀은 멍하니 데이지의 얼굴을 쳐다봤다. 상냥하고 다정한 데이지. 그녀에게 데이지는 성녀 그 자체다. 조세핀은 데이지의 손을 잡았다. 추운 날씨 탓에 손이 차가워져 있었다. “데이지, 왜 이렇게 나한테 잘 해주는 거예요?” 데이지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서로 돕고 사는 거니까요.” ============================ 작품 후기 ============================ 아아아... 어제 안 왔었죠? 죄송합니다. 12시쯤에 한 편 더 올릴게요. 00189 6. 저주 =========================================================================                            저쪽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이쪽이 찾아가면 된다. 그 쉬운 사실을 떠올린 건 케이트의 드레스를 맞추기 위해 재봉사가 레인포레스트 저택을 방문했을 때였다. 에녹의 집에 오기 전까지 케이트는 의상 가게에 가서 사거나 천을 사서 직접 만들었기 때문에 재봉사가 방문한다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도 두 번째라고 처음보다는 여유 있게 응대할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떠올랐다. 이안을 찾아가면 되지! 여기서 찾아간다는 건 큐바인 하우스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안이 참석할 만한 행사를 말하는 것이다. 이안은 파티에 그다지 참석하지 않지만 공연에는 종종 참석하곤 했다. 어머니인 실라가 좋아했기 때문이다. 뮈엘라의 공연은 대부분 전쟁 물이나 결투 물과 같은 것들이지만 간혹 악기를 연주하는 공연도 있었다. “아가씨, 공연 가시려고요?” “네. 뭐 괜찮은 것 있을까요?” 갑자기 적극적이 된 케이트의 모습에 마사는 신이 나서 같이 초대장을 살폈다. 겨울이라 유흥거리가 없는 탓에 공연이 많았다. 마사는 맨 앞에 놓인 초대장을 보고 대규모 전쟁을 재연한 공연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바로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대규모 전쟁을 재연한 공연은 야외공연장에서 열린다. 이 추위에 아가씨를 야외에 앉아있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런 마사의 생각은 케이트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몸이 약한 실라가 너무 춥거나 더운 공연을 버틸 수 있을 리 없다. 너무 공연 시간이 긴 것도 마찬가지로 제외다. 몇 장이나 되는 초대장을 자세히 살핀 끝에 마사와 케이트는 두 개의 공연을 골라낼 수 있었다. === 뮈엘라는 오래된 연극이나 뮤지컬의 수가 적다. 전부 최근에 다시 만든 작품이다. 케이트가 이번에 참석한 공연은 드물게도 아주 옛날부터 있었던 뮤지컬이었다. 케이트는 공연이 시작한 다음에야 이 뮤지컬이 살아남은 이유를 알았다. 마법이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과거 마법의 나라였던 만큼 뮈엘라의 공연에는 마법이 빠지지 않았다. 수많은 마법효과들은 공연을 더욱 풍족하게 만들었지만 나라가 완전히 뒤바뀌면서 살아남지 못했다. 마법사용을 금지하기도 했지만 마법 효과를 처리해줄 마법사도, 아이템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마법의 황금기에 있던 그 많은 공연은 뮈엘라 내에서 사라지거나 마법을 제외한 형태로 재가공되었다. “어머, 저 동물 분장은 정말 대단하네요.” 마사의 말에 케이트는 힐끔 무대를 쳐다봤다. 공연은 그녀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내용인지도 몰랐다. 무대 위에 막대기에 올라탄 남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네요.” 신기한 광경에 시선이 잡혔다. 배우들이 각종 희귀한 동물로 분장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케이트는 잠시 무대를 멍하니 보다가 다시 관객석을 살폈다. 공연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그녀는 이안을 찾아야 한다. 그리 멀지 않는 곳에 남들보다 머리 하나 큰 검은 남자가 보였다. 케이트의 가슴이 달음박질 치기 시작했다. 이안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녀는 공연 중이라는 것을 깨닫고 엉거주춤 멈췄다. 중간 휴식시간이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이안을 빨리 찾은 덕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녀는 다시 자세를 고쳐 무대로 시선을 던졌다. 휴식시간에 찾아가자. 그렇게 생각했다.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까지. “어?” 한참 공연을 관람하다가 이안에게 시선을 돌린 케이트는 그의 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자리를 옮겼는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 주변에 검은 머리를 한 남자는 없었다. “아가씨?” “마사, 저 잠깐,”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안을 만나려고 일부러 공연까지 보러왔는데 이렇게 쉽게 그를 놓칠 수는 없다. “죄송합니다.” 사람들 틈으로 빠져나오면서 케이트는 이안의 모습을 찾았다. 다행히 출구로 향하는 큰 남자는 쉽게 발견됐다. “이안!” 출구에 도착해서야 이안을 붙잡은 케이트는 그의 재킷 락을 꼭 쥐고 숨을 헐떡였다. 이걸 놨다간 그가 그냥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케이트?” 이안은 별안간 자신에게 향하는 사람의 기색에 몸을 돌렸다가 그게 케이트라는 것을 깨닫고 몸을 멈췄다. 실라의 몸 상태가 안 좋아져서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스미스 양?” “안, 녕 하세, 요.” 헐떡이면서도 케이트는 실라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러더니 실례를 저질러 죄송하다가 사과까지 하려 애썼다. “괜찮아요. 이 애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녀는 아들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먼저 돌아갈 테니 대화하고 오렴.” “하지만,” “이안.” 파리한 안색에 실라의 눈빛만은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의 어깨를 두어 두드렸다. 하지만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이안에게는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헐떡이고 억지로 허리를 세웠다. 아들의 연애사업을 방해할 수는 없지. “마차는 내가 가져가마. 너는 알아서 오렴.” 실라가 떠나자 두 사람 사이에 공연음악만 흘렀다. 케이트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이안은 한 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가 뭐라고 했지만 들리지 않는다. 케이트가 뭐라고요? 라고 말하자 이안이 고개를 숙였다. “뭐라고 했냐고 물었다.” 고막을 뚫고 이안의 낮은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어왔다.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미안하다고 했어요.” 다시 한 번 이안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 음악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는구나.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녀가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 이안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 출구가 열리고 두 사람의 모습이 공연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케이트는 몸을 떨기 시작했다. 건물 안이라고는 하나 공연장 밖은 추웠다. “뭐라고 했지?” 이안은 언제 케이트의 팔을 잡았느냐는 듯 재빨리 그녀의 팔을 놓고 물러났다. 그가 물러난 거리만큼 냉기가 흘러왔다. “미안하다고 했어요.” “미안해?” “저 때문에 백작 부인이 혼자 돌아가셨잖아요.” 아, 그거. 이안은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어머니는 괜찮을 것이다. 마부는 최대한 빨리 타운 하우스로 향할 것이고 사용인들은 주인마님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미안하다고 말하려 날 잡았나?” 그럴 리가 없다. 케이트는 울컥해서 뭐라 하려다 묘하게 냉정해진 이안의 태도를 깨달았다. “그건 아니고, 지난번에 말없이 갔잖아요.” “지난번?” “지난번에요. 아저씨 댁으로 찾아왔을 때.”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그녀를 왜 피하고 있는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가 알게 된 건 에녹이 이야기한 것보다 더 나빴다. 그의 상태가 위험해지면 케이트를 공격한다고 했다. 이안은 다시 한걸음 케이트에게서 물러났다. “이안?” 물러난 거리만큼 케이트가 다가왔다. 이안은 다시 뒤로 물러났다. 케이트는 이해할 수 없어 다시 그에게 한걸음 내디뎠다. 주춤주춤 물러나는 이안과 성큼성큼 다가가는 케이트 사이에 한걸음 정도의 간격이 두 걸음으로 늘어났다가 다시 한 걸음으로 줄어들길 반복했다. “이안?” 이안의 등에 차가운 벽이 닿았다.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짓을 하고 있군. 그는 손을 내밀었다. 따듯한 케이트의 몸이 닿았다. “물러나.” “어째서요?” 아무것도 모르는 케이트의 얼굴이 이안에게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그건 익숙한 기분이었다. 케이트를 만나고 나서 때때로 그녀를 향해 느껴지던 기분. 그건, 그가 괴물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처음으로 그 감정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안?” 손에 따듯한 체구의 감촉이 강해졌다. 케이트가 몸을 내민 순간 부드러운 향기가 살랑였다. 갖고 싶다. 그의 내부에 있는 욕망이 격렬하게 끓어올랐다. “으, 응.” 케이트가 눈 깜빡할 순간에 이안이 덤벼들었다. 그는 밀던 케이트의 어깨를 잡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가는 허리에 손을 감고 작은 체구를 끌어안았다. 마치 잡아먹을 것처럼 키스했다. “아, 이안.” 부드러운 입술은 달콤한 맛이 났다. 이안은 정신없이 입술을 빨고 작은 입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케이트는 잡아먹히는 것 같은 감각에 몸을 떨었다.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가 침입했다. 이안에게 안겨있지 않았다면 넘어졌을 것이다. “이안.” 입술이 떨어졌다. 케이트는 그의 어깨를 밀었다. 누군가 이런 꼴을 보기라도 한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이안은 케이트의 옷깃을 잡아당겨 드러난 목에 입을 댔다. 키스 같은 게 아니었다. 그는 그대로 케이트의 목을 물었다. “아야!” 이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케이트에게서 손을 떼고 물러났다. 제멋대로 휘둘린 케이트는 더듬더듬 목에 손을 갖다 댔다. 얼얼하게 아프지만 피는 묻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잇자국은 남았다. “지금, 뭐한 거예요?” “다가오지 마.” 그의 얼굴은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웠다. 케이트의 눈이 놀라서 휘둥그레졌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이안의 행동은 늘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오늘은 더 심했다. “다음번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다.” 망연한 케이트를 뒤로 하고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는 코트도 없이 건물을 빠져나갔다. 정문이 열렸다 닫히면서 건물 안에 눈보라가 몰아쳤다. “이게, 무슨….” 케이트는 덜덜 떨면서 다시 목을 쓸었다. 물린 곳이 뜨거웠다. ============================ 작품 후기 ============================ 저, 죄송합니다 잠들었어요... 아 맞다... 표지 변경했습니다. 한숨자리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00190 6. 저주 =========================================================================                            이안은 작은 찻집 앞에 서 있었다. 테이블이 많지 않고 찻잎이나 다기를 파는 것을 주로 하는 가게였다. 그는 창문 너머로 안에서 일하는 여자를 쳐다봤다. 일하는 여자는 마녀였다. 케이트와 그가 그동안 마녀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여자들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문을 열자 딸랑하고 종이 울렸다. “어서 오세요.” 여자는 이안을 보고 영업용 미소를 짓다가 그가 가까워지자 흠칫 놀랐다. 이안은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것을 알았다. 잘 찾아왔군.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를 보고 두려워한다는 건 그가 흡수자라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마녀는 그를 두려워하지만 왜 두려운지 몰랐다. 케이트처럼.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자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다. 현명한 행동이다. 힘의 나라가 된 뮈엘라는 흡수자가 태어나도 본인이 흡수자라는 것을 모른다. 그러니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는 게 가장 옳은 선택일 것이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 이안은 여자 뒤에 있는 선반을 훑어보며 말했다. 선반 위에 있는 것은 평범한 찻잎으로 보였다. “여기서 다루는 건 차뿐인가?” “다기도 다루고 있어요.”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가 말하는 건 다기가 아니다. 그는 가게 안을 둘러보고 모녀로 보이는 손님이 두 명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는 품에서 향유 병을 꺼냈다. 여자의 표정이 굳었다. “이것, 본 적 있나?” “없습니다.” 대답하고도 여자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답이 너무 빨랐다. 이안은 그녀를 응시했고 여자는 눈을 피했다. “이런 걸 다루는 곳은 모르나?” “약이라면 약방에서 다루겠지요.” 흠. 다시 두 사람 사이에 눈치 게임이 시작되었다. 여자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고 이안은 그녀의 반응을 읽으려 애썼다. 하지만 이안에게는 무리다. 그는 여자의 반응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케이트라면 쉬웠을 텐데.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이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케이트. 또다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험상궂은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다시 딸랑하고 종이 울리면서 이안이 가게를 나가자 여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이 입을 열어 한마디씩 했다. “어디서 저런 괴물이 나타났대?” “어휴, 깜짝 놀랐네.” “로라, 괜찮아?” 응. 괜찮아. 로라라고 불린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세 사람의 시선은 이안이 다시 돌아올까 싶어 가게 밖을 향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들고 온 거, 우리가 만든 거 맞지?” “응. 부부 향유였어.” “어떻게 된 거래?” 나이 든 여자의 말에 마른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어떻게 되긴, 들킨 거지.” 세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사간 부인이 스스로 나설 리는 없고 대체 어떻게 들킨 걸까. 아무래도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다. 수사관이 수색한다던 소문이. “슬슬 이곳을 떠나는 게 좋지 않을까?” 로라가 물었다. 난 싫어. 마른 여자가 짜증을 내자 나이 든 여자가 어르듯 말했다. “그래. 잠시 몸을 숨기는 게 좋을 것 같아.” “가게를 맡아줄 사람을 구할게.” “잠깐, 그리고 또 하나 있잖아.” 나이 든 여자의 말에 두 여자가 무슨 일이냐는 쳐다봤다. “그 빨간 머리 아이 말야. 우리가 도와주기로 한 거, 잊었어?” 아, 그 애. 세 사람의 머릿속에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떠올랐다. 자그마한 체구에 예쁘장한 외모. 힘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마녀인 게 분명하다. “지금 우리 코가 석 자인데, 걔를 챙길 여력이 어디 있어?” “적어도 우리가 손을 댔으니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고는 가야지.” “누구한테 부탁하려고?” 나이 든 마녀의 눈이 반짝였다. 부탁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 레인포레스트 저택의 사용인들은 아가씨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신이 나서 공연을 관람하러 갔던 케이트가 완전히 기가 죽어서 돌아왔던 것이다. “마사, 무슨 일인지 몰라?” 그렇게 며칠째 질문 공세에 시달리는 마사야 말로 미칠 노릇이다. 그녀는 케이트를 따라 공연을 갔다 왔을 뿐이다. 케이트는 잠깐 일이 있다며 사라지더니 공연이 끝나고 그녀가 찾았을 때 완전히 기가 죽어 있었다. “모른다니까.” “아가씨 곁에서 뭐했어?” “아, 진짜!” 마사는 이를 박박 갈며 그때를 반추했다. 공연 도중에 케이트가 갑자기 자리를 떴다. 따라 나가려다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기에 저 사람과 대화하려 했구나 싶어서 안도했다. “익숙한 사람인데.” “익숙한 사람?” “금발에 날씬한 부인이었어. 귀족 부인이었는데, 그 남편을 사별하고….” 그런 귀족 부인이 한두 명이 아니다. 사용인들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는 가운데 마사가 드디어 기억해 냈다. “아, 로엔 백작 부인이었다.” “로엔 백작 부인? 잠깐.” 사용인들의 눈이 커졌다. “얼마 전에 밤에 찾아온 사람이 로엔 경 아니었어?” “로엔 경?” “그, 왜. 검은 머리카락에 키 크고, 무섭게 생긴 남자 말야.” “아, 아아.” 기억났다. 다들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 로엔 경. 로엔 백작 가의 서자. 냉정하고 무뚝뚝한 남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무섭다는 평이 많았다. 무섭긴 했지. 다들 그 날의 이안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밤에 느닷없이 찾아오다니. 주인님이 그의 방문을 거절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나,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뭐?” “그, 우리 아가씨와 로엔 경이 상당히 사이가 좋다고….” 응? 진짜? 다들 의외라는 반응인 가운데 젊은 하인도 끼어들었다. “어어, 나도 비슷한 소문 들었어.” “진짜?” “응. 로엔 경이 웬 빨간 머리 아가씨에게 마음이 있는 거 같다던데.” 빨간 머리 아가씨. 그 수식어는 케이트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사용인들은 케이트가 넋을 놓고 있는 온실로 시선을 던졌다. 젊은 하인이 떨떠름하게 말을 이었다. “근데 상대 아가씨는 크게 생각 없어 보인다고 했는데.” “크게 생각 없어 보인다고?” 그야 당연하다. 누가 봐도 이안이 밀어붙이는 걸로 보였을 테니까. 케이트는 온실에 앉아 멍하니 수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체리 씨를 넣을 주머니를 또 만들 생각이었는데 한 땀도 못 뜨고 있었다. 이안이 이런 걸 들고 다니면 웃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케이트는 반쯤 완성된 앙증맞은 곰으로 초점을 맞췄다. 그가 주머니에 이런 걸 넣고 다니면 얼마나 웃길까 싶어서 시작한 거였다. -다가오지 마. 이안의 냉정한 말이 다시 귓가를 울렸다. 눈앞이 흐려졌다. 케이트가 의식하기도 전에 눈물이 곰돌이 위로 똑 떨어졌다. 물린 곳이 뜨겁게 달아올라서 케이트는 부랴부랴 눈을 닦으며 손으로 목을 감싸 쥐었다. 물린 자국 대신 그 위에 붙인 거즈의 부드러운 감촉이 손가락에 느껴졌다. 그 이후로 며칠이나 지났지만 물린 자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머리를 빗겨줄 때마다 누가 발견할까 봐 마사에게 묶지 말라고 말해야 했다. 심지어 목욕할 때도 누가 볼까 싶어 거즈를 떼지 않았다. 잇자국이 사라지지 않는 게 불안하면서 반대로 사라질까 봐 무서웠다. “나 바보 같아.”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안 생각만 하고 있었다. 왜 그런 걸까. 갑자기 왜 나한테 화가 난 걸까. 그는 저택에 몇 번이나 찾아왔지만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고 했다. 그래서 화가 난 걸까. 아니면 역시 그날 키스를 거부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문득 화가 나서 케이트는 수틀을 집어 던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수 없어!” 방문을 거절한 건 미안하지만 그녀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과했잖아. 게다가 키스를 거부한 건 당연한 거 아냐? 고작 그거 때문에 그런 짓을 할 거라면, 이안 로엔. 가만두지 않을 거야! 침울해 있다가 투기를 불태우는 아가씨를 보는 사용인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아무리 봐도 저건 크게 생각이 없는 게 아닌데?” “그러게….” ============================ 작품 후기 ============================ 와인을 사왔습니다. 후후후후 00191 6. 저주 =========================================================================                            빨간 머리의 봉인을 풀기 위해 준비한 도구가 떠나려 하고 있었다. 젠장. 마녀는 이를 갈았다. 저 더러운 엘프 때문이다. 저 엘프가 빨간 머리를 데려가지 않았다면 세 마녀는 지금쯤 빨간 머리의 봉인을 풀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녀가 빨간 머리의 신선한 심장을 먹을 수 있었겠지. 분통이 터져 마녀는 결국 벽을 걷어찼다. 탕하는 소리에 가게 안에서 세 마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금, 그거 뭐야?” “잠깐만.” 로라는 창문으로 밖을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마녀는 이미 지붕 위로 날아오른 뒤였다. 그녀는 다시 돌아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애들이 돌 같은걸 던졌나 봐.” “어휴, 깜짝 놀랐네.” 세 마녀는 다시 부랴부랴 약을 처분하기 시작했다. 향유, 크림, 차. 전부 그녀들이 비밀리에 팔던 마법 용품들이다. 이걸 가지고 갈 수 없다. 가게를 맡아주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남길 수는 없다. “계획은 어떻게 됐어?” “아, 안 그래도 그거 도와줄 사람이 생겼어.” “도와줘? 누가?” “놀라지 마.” 나이 든 여자가 이름을 나직하게 속삭이자 남은 두 여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분이 도와준다면 이제 걱정할 건 거의 없다. 가게를 떠난 마녀는 이를 갈며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시간이 별로 없다. 전부 그 괴물 때문이다. 괴물의 존재는 마녀에게 더 큰 영향을 끼쳤다. 마녀는 바스러지는 손끝을 내려다보고 주먹을 꽉 쥐었다. 하는 수 없다. 시간이 없으니 위험을 감수하는 수밖에. === “도와주실 수 있나요?” 밀레디의 말에 에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수도에 정체가 발각될 위험에 처한 마녀가 세 명이나 있다고 이야기했다. 도와줄 사람은 에녹과 밀레디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계획은 어떻게 되지?” “새벽을 이용해서 셈즈로 이동할 거예요. 셈즈에서 이삼일 숨어있다가 이동하면 어떨까 해요.” “그렇군.” 에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도 수도에서 자리를 비워야 한다. 그리 드문 일이 아니지만 케이트가 걱정됐다. 얼마 전 공연을 보고 온 케이트는 이삼일 정도 풀이 죽어 있는가 싶더니 기운을 차렸다. 하지만 그게 또 묘하게 과한 느낌이 들었다. 일부러 즐거운 척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에녹은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뭐라고 말한단 말인가. 네가 친하게 지내는 로엔 경이 사실은 네게 독이 되는 존재라고? 어느 순간 널 말 그대로 잡아먹을 것이라고? 케이트는 겁을 집어먹을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괴물의 타겟이 된 마녀를 몇 번이나 봤다. 노이로제에 걸리고 히스테릭해졌다. 가장 나쁜 점은 괴물과 사랑에 빠지는 경우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에녹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괴물과 사랑에 빠진 마녀도 있었다. 왜 없겠는가. 그 수많은 세월 동안 괴물은 끊임없이 존재했다. 괴물을 격리하고 해결방안을 연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선 마녀도 있었다. 개중에 인간 대 인간으로 사랑에 빠지는 마녀도 있었다. 에녹은 이안을 보는 케이트의 시선과 행동에서 불길한 기억을 떠올렸다. “에녹?” “음?” “그리고 한 가지 더요.” 밀레디는 말을 멈추고 찻잔을 들었다. 오늘은 향긋한 꽃차다. “그들이 한 가지 더 부탁할 게 있다고 했어요.” “그래?” “네. 얼마 전에 젊은 마녀를 만났다고 해요.” 에녹은 담담하게 잔을 들었다. 뮈엘라는 자신도 모르는 마녀가 많다. 하지만 현재 뮈엘라의 상태로는 그 힘이 크지 않다면 평생 모르고 사는 편이 훨씬 낫다. “그 아이도 돌봐달라는 거겠지.” 에녹의 말에 밀레디는 생긋 웃었다. 에녹이라면 눈치챌 줄 알았다. 마법 부의 마녀들도 에녹이 거둬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네에. 하지만 놀라운 게 있어요.” 푸른색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밀레디는 목소리를 낮췄다. “호건 가의 사람이라는 군요.” “호건 가?” “네. 알고계시죠? 호건 가의 도망친 막내딸이요. 그 여자의 딸이라는군요.” 에녹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는 천천히 턱을 쓰다듬었다. “외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더냐?” “네. 작고 예쁘장한 아가씨라더군요. 그리고 빨간 머리라고 했어요.” 거기까지 말하고 밀레디는 나직하게 웃었다. 빨간 머리는 마녀의 증거. 그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아이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다.” 에녹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케이트가 마녀들을 만났다고 했을 때 걱정했는데 이렇게 이어질 줄은 몰랐다. 나쁜 마녀 쪽은 아니었구나.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가 되었다. “내 대녀란다.” “어머.” 밀레디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에녹을 응시하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그 마녀의 봉인은….” “내가 한 것이야.” “아아.” 밀레디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을 요청한 마녀 셋이 풀 수 없었다고 한 이유를 알았다. 에녹이 한 것이라면 마녀 셋으로는 어려울 것이다. “그 아이에게는 다행이네요.” 저택을 돌아온 에녹은 세 마녀를 수도에서 빼내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세 마녀의 출입증서도 만들어야 했고 그가 자리를 비우는 것에 대한 타당한 이유도 있어야 했다. “아저씨, 일찍 오셨네요.” 잠시 마실 갔던 케이트가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에녹은 밝아진 케이트의 모습이 좋으면서도 안타까웠다. “재미있게 놀고 왔느냐?” “네. 앤이 오늘 휴일이라서요. 같이 쇼핑도 하고 케이크도 먹었어요.” 케이트는 에녹이 업무를 보는 책상 맞은편에 서서 즐겁게 이야기했다. 마치 새가 재잘대는 것 같은 느낌에 에녹은 슬며시 미 지었다. “쇼핑했다며. 뭘 샀느냐? 이 아저씨에게도 보여주련?” “안 샀어요. 앤이 리본을 사고 싶다고 해서 리본만 좀 봤고요. 아저씨 드리려고 케이크는 사왔어요.” “이런. 너도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려무나.” “사고 싶은 건 이미 아저씨께서 다 주셨는걸요.” 사랑스러운 대답에 에녹의 입가에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그는 케이트의 손을 쥐고 가볍게 토닥였다. 이안의 일로 케이트를 힘들게 했다는 죄책감이 어느 정도 상쇄되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대녀가 무사할 수 있다면 그는 몇 번이라도 그 괴물을 잘라낼 수 있었다. “아가, 내가 잠시 수도를 떠나 있어야 할 것 같구나.” “떠나신다고요? 얼마나요?” “오래 안 걸릴 거란다. 길면 한 달 정도겠지.” 한 달.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외롭지만 괜찮다. 앤도 있고 저택의 사용인들도 있으니까. “내일 약속 있느냐? 나와 식사를 하자꾸나. 맛있는 곳에서 말이다.” “전 이 집의 식사도 맛있는 걸요. 하지만 내일은 약속이 있어요.” “그래?” 에녹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수도를 비우기 전에 대녀와 천천히 식사를 하고 싶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케이트가 재빨리 말했다. “내일모레는 어때요, 아저씨? 언제 출발하시는데요?” “모레 저녁때 출발할 것 같구나.” “그럼 저랑 이른 저녁을 먹어요. 제가 일찍 돌아올게요.” “그러련?” 네. 케이트는 빙그레 웃었다. 아저씨가 한 달이나 자리를 비우는데 식사도 하지 않고 헤어지는 건 아쉽다. 그러다 문득 에녹이 물었다. “그런데 내일 약속은 무엇이냐?” “아, 마거릿 양이 지난번에 미안했다고 식사를 대접하겠대요.” “마거릿?” “코트 양의 친구예요. 지금 코트 양 방에 묵고 있거든요.” “그래?” 마거릿은 지난번에 찾아온 케이트를 쫓아내다시피 보낸 것을 사과하고 싶다고 연락해 왔다. 그때 정신이 없어서 그랬다는 말과 함께. 그렇지 않아도 케이트도 살짝 기분이 나빴던 차라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이걸로 마거릿이라는 여자와 친해지면 좋겠다는 희망도 있었다. 에녹은 마거릿이라는 여자를 조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케이트가 성을 부르지 않는다는 건 그녀도 성을 모른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케이트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케이트가 온실 속의 화초처럼 눈이나 비 같은 걸 모르고 살기를 바랐다. 인간은 그렇게 살기에도 너무 짧은 존재들이다. ============================ 작품 후기 ============================ 고구마가 너무 많아서 고구마양갱을 만들었습니다. 00192 6. 저주 =========================================================================                            딸랑하고 가게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나이 든 여자가 쳐다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이안은 여자가 마녀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뿐만 아니라 가게의 분위기도 뭔가 많이 달라졌다. 겉으로 보기에 판매하는 물품이 달라지거나 외관이 달라진 건 아니다. 하지만 이 가게 곳곳에 느껴지면 희미한 마녀의 기운이 사라져 있었다. “가게 주인은 어디 갔지?” 대뜸 이안이 물었다. 여자는 찻잎을 고르다 말고 그를 힐끔 쳐다봤다. 차를 사러 오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약간 겁을 집어먹고 우물우물 대답했다. “오늘 저녁때 나올 거예요.” 진짜로?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과연 그럴까. 마녀의 기운이 사라졌다. 이건 심상치 않다. 그는 마녀가 도망쳤다고 판단했다. “주인 이름이 뭐지?” “누구요?” “주인이 여러 명인가?” “네. 주로 가게를 보는 쪽은 로라예요.” 그렇군. 이안은 그가 추적해야 할 마녀가 다수라는 것을 확인했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또 누가 있지?” 그의 질문에 여자는 별다른 의심 없이 순순히 대답했다. “수잔하고 귀네비어가 있죠. 귀네비어가 좀 나이가 있고요.” 여자의 말에 이안은 그가 찾아왔던 날 안쪽에 앉아있던 여자 둘을 떠올렸다. 그들도 마녀였던 게 아닐까. 마녀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마녀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케이트같은 마력보유자와 약품을 제조하는 마녀. 마력보유자를 비하하는 단어가 마녀가 되었기 때문에 현재 뮈엘라에서는 둘다에게 구분 없이 마녀라 칭하고 있다. “그렇군.”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여자가 너무 순순히 알려준 탓에 확률은 반반이 되었다. 마녀들이 도망친 것일 수도 있지만 여자의 말대로 단순히 저녁때 돌아올 수도 있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이안은 큐바인 하우스로 돌아왔다. 어느 쪽이든 큐바인 하우스에 돌아올 필요가 있었다. “앗, 잠시만요.” 집에 돌아온 그를 조세핀이 붙잡았다. 이안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세핀이 이렇게 생겼었나? 그는 조세핀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지?” “아, 그게.” 조세핀은 잠시 망설였다. 이래도 되는 걸까. 데이지는 케이트와 제이드가 사이가 좋은 것이 속상하다는 그녀에게 그렇다면 케이트를 다른 남자와 이어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안 로엔 경이 스미스 양에게 관심 있어 보였다는 것이다. 조세핀이 신경 쓰이는 건 케이트도 이안에게 관심이 있는지였다. 관심이 없다면 이렇게 주변 사람이 나서는 건 지나친 일이 아닐까. 하지만 이게 아니면 다른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이안과 만날 수가 없어 케이트에게 약속을 좀 미루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케이트는 내일 약속이 있다고 했다. 조세핀은 케이트가 잡은 내일 약속이 제이드와의 약속일 거라 생각했다. 케이트와 제이드가 자꾸 만나기 전에 막아야 한다. 한편 이안은 조세핀이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녀를 무시하고 방으로 올라가려 했다. “잠깐만요.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계단 난간을 잡은 채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조세핀을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 눈에는 내가 하인으로 보이나?” 조세핀은 상대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입에서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스미스 양 일이에요.” “케이트?” 이안이 반응을 보였다. 그가 완전히 자신에게 몸을 돌리자 조세핀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뭔가 거짓말을 해야 한다. 조세핀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스미스양과 오늘 만나기로 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요. 저 대신 나가주시면 안 될까요?”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는 빤히 조세핀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싫다. 그런 건 하인을 시켜라.” “잠깐, 잠깐만요.” 조세핀이 매달리자 이안의 미간이 주름이 생겼다. 그는 조세핀을 탁 쳐서 떨어트렸다. “이게 무슨 짓이지?” “제인은 심부름을 갔고 데이지는 볼 일이 있어서 나갔단 말이에요. 제발요. 가서 제가 못 온다고 말만 해주셔도 돼요.” 조세핀은 필사적이었다. 데이지는 이안과 케이트가 그녀가 지정한 장소에만 도착하면 된다고 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나머지는 그녀가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이안에게 매달리면서도 그녀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로엔 경은 스미스 양에게 마음이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스미스 양과 만날 기회를 버리는 거지? 하지만 조세핀의 필사적인 부탁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몸을 돌렸다. 그는 케이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만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만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잠시만요! 오늘 춥다고 했는데, 아무 말도 없으면 스미스 양이 추운 데서 한 시간은 떨면서 기다려야 하잖아요!” 그 말이 이안을 흔들었다. 그의 머릿속에 눈이 오는 것을 보고 좋아하던 케이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여자는 눈이 올 정도로 추운 것을 모른다. 젠장 하고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고 했을 것이다. “어디로 가면 되지?” === 케이트는 찻집에 앉아있었다. 그녀와 함께 온 용병 두 명은 한 명은 가게 밖을, 한 명은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녀가 안타깝게 생각했을 때 직원이 주문한 차를 내왔다. “저, 한잔 더 주시겠어요? 그건 가게 밖에 서 계신 남자 분께 주셨으면 해요.” 직원은 이상하다는 표정은 지었지만 곧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들어갔다. 같이 앉은 용병이 쓰게 웃었다. “그렇게 안 해주셔도 됩니다, 아가씨.” “하지만 춥잖아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려, 가게 안으로 들어서기 전까지 케이트는 하얀 입김이 재미있어 몇 번이나 하아 하고 입김을 내뱉었다. 그런 곳에 혼자 서 있는 다는 건 아무리 일이라 해도 괴로울 것이다. 직원이 밖에 선 용병에게 차를 가져다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케이트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차를 받은 용병이 창문을 통해 가게 안이 케이트를 확인했다. 케이트는 자기 잔을 들고 고개를 끄덕했다. 용병도 고개를 끄떡해 보였다. 자신을 위해서 고생하는 사람이니 이 정도는 해줘야 옳을 것 같았다. 그때 밖에 선 용병 뒤로 마차가 지나가다가 서는 게 보였다. 마거릿인 걸까? 케이트는 마차의 문장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익숙한 문장이다. 호건 가의 마차였다. “어라?” “왜 그러십니까?” “아뇨. 저거, 음.” 마차가 섰지만 안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이 찻집에 들어오려는 게 아닌 모양이다. 케이트는 무슨 일일까 하고 생각했다. 누구를 만나려는 걸까. 그런 것치고는 외곽이다. 그렇지 않아도 마거릿이 지정한 장소가 외곽이라 좀 특이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숨겨진 맛집 인걸까. 그럴 수도 있다. 에바니엘엔 숨겨진 맛집이 꽤 있다. 은퇴한 용병이 작은 가게를 차렸는데 입소문이 났다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 케이트가 가기엔 너무 거친 곳이라 혼자 들어간 적은 없지만 간혹 앤이 맛있는 식당이라며 데려간 곳은 대부분 골목 구석구석에 있었다. 마차의 주인이 누군지 알자 케이트의 시선은 마차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같이 앉은 용병도 그녀를 따라 창밖의 마차로 시선을 던졌다. 곧이어 다른 마차가 맞은편에서 다가오더니 호건가의 마차 옆에 멈췄다. 마차 문이 열렸다. 하지만 케이트가 있는 쪽에서는 마차 안쪽은 보이지 않았다. 뭔가가 두 마차의 문 사이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호건 가의 망나니 후계자가 정부라도 만나는 건가. 용병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망나니 후계자가 정부를 만나는데 저렇게 비밀리에 움직일 것 같지도 않다. 케이트와 용병의 시선이 부딪쳤다. “무슨 일일까요?” 케이트의 질문에 용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아니, 그건 아니에요.” 그냥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묘하게 이안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네. 케이트는 씁쓸하게 웃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문득문득 떠올랐다. 이안. 아무리 케이트라도 지난번은 좀 심했다. 그녀는 다시는 이안을 보러 먼저 찾아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기 전까지는 만나지 않을 거야. “차, 식겠네요. 드세요.” 케이트의 권유에 용병은 찻잔을 들었다. 케이트 역시 자신의 찻잔을 들었다. 둘 다 식어서 미지근해져 있었다. 두 사람은 미지근한 차를 후륵 마셨다. 적당히 식어서 마시기 더 쉬웠다. 찻잎을 너무 우렸는지 좀 떫고 쓴맛이 났다. “어머.” 케이트는 찻잔을 내려놓고 직원을 불렀다. 이건 너무 했다. 다시 내오라고 해야겠다.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직원이 나타나지 않았다. 용병은 그녀를 대신해서 직원을 찾으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눈앞이 흐릿했다. 그는 자신이 무릎을 꿇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트를 돌아봤을 때 그녀는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아가,” 말 끝나기 전에 그의 몸이 무너졌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금요일입니다. 우리 다음주에 만나요~ 00193 6. 저주 =========================================================================                            누군가 큐바인 하우스의 문을 두드렸다. 제인은 문을 열었다가 제이드의 등장에 소리쳤다. “아저씨!” 제이드가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짓자 제인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고쳤다. “가 아니라 형.” “그래. 형님이라고 해야지.” 양심도 없다, 진짜. 조세핀은 계단을 내려오다가 마치 형제 같은 두 남자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그녀를 본 제이드가 모자를 벗어 인사를 건넸다. “좋은 오후입니다. 이안 있나요?” 이안은 지금쯤 케이트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조세핀은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아직 안 들어오셨어요. 추운데 들어와서 기다리시겠어요?” 지난번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제이드는 어라? 하고 조세핀을 쳐다봤다. 그의 표정에 조세핀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에 제가 실수를 했죠? 만회할 기회를 주세요.” 그렇다면야. 안 그래도 추워서 따듯한 차 한 잔이 간절하던 때다. 제이드는 모자와 코트를 제인에게 넘기고 조세핀을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이안은 금방 올까요?” 모른다. 조세핀은 이안이 늦게 들어오기를 바랐다. 케이트와 사이가 좋아진다면 더더욱 좋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을까요?” 조세핀의 대답에 제이드는 그렇다면, 하고 의자에 앉았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조세핀이 차를 가지고 돌아왔다. “데이지 양은 어디 갔나 보죠?” “네. 볼 일이 있어서 나갔어요.” “그렇습니까?” 제인도 식기를 닦기 위해 주방으로 가버렸다. 응접실은 제이드와 조세핀 둘 뿐이었다. 다음에 다시 올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조세핀에게 물었다. “아, 혹시 조세핀이 어디 갔는지 알고 있습니까?” 달칵하고 조세핀의 손에서 찻잔이 소리를 냈다. 느닷없이 나온 자기 이름에 조세핀의 손이 떨렸다. 하지만 제이드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친척 집에 간 줄 알았는데 편지를 보내보니 친척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아차. 조세핀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제이드가 조세핀의 친척 집으로 편지까지 보낼 줄은 몰랐다. 실제로 그녀의 부모조차도 편지로 그녀가 진짜 친척 집에 있는지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조세핀과 친했나 봐요?” “친하다기보다는,” 조세핀이 제이드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아,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며 받아든 그는 말을 이었다. “거의 남매나 다름이 없었죠.” “어머, 하지만 남매는 아니잖아요.” “그렇죠.” 제이드는 쓰게 웃었다. 그는 남매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라는 걸 이번에 확실히 알았다. 그의 친누이와 달리 조세핀은 얼마든지 연이 끊어질 수 있는 관계였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관계긴 했죠.” 이상한 관계다.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다 죽은 약혼녀의 언니와 자기보다 훨씬 인기 많은 여동생의 약혼자. 주변에서 뭐라고 말이 나왔을 법도 하다. 그리고 그런 말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많이 하는 법이다. 조세핀이 사라지고 제이드는 그녀가 어떤 마음일지 계속해서 생각했다. 왜 그와 함께 있었던 걸까. 왜 그를 돌봐주고 다독여줬던 걸까. 자신이 조세핀을 이용한 게 아닐까 라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녀의 여동생이 약혼자인 그를 두고 다른 남자와 놀아나다가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죄책감을 가진 조세핀을 이용한 게 아닐까. “한편으로는 조는 절대로 날 버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도 있어요.” 어렴풋하게 제이드는 조세핀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도 같다. 아니, 이건 정확하지 않다. 제이드는 자신에게 호감을 느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누군가의 호감에 너무 익숙했다. 마치 에이미처럼. “내가 조를 괴롭게 만들었군요.” 제이드는 독백처럼 말했다. 그녀의 호의를 이용했다. 그녀는 나를 버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조세핀의 호의에 기대 태평하게 살았다. 그녀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건 에이미도, 조세핀의 부모도 아니다. 제이드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조세핀을 찾아서 어쩌려고 했던 걸까. 모르겠다. 그냥 항상 곁에 있으니까. 손 내밀면 거기 있으니까 억지로 그녀를 끌고 와서 옆에 앉혀두려 했던 것 같다. 그가 다른 여자와 연애하고 사건을 수사하는 동안 조세핀은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인형처럼 거기 앉아 쓸쓸히 늙어야 했다. “그만 가겠습니다.” 제이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이 얼마나 잔혹한 짓을 했는지, 얼마나 이기적인지 깨달았다. 조세핀은 그를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조, 조세핀 때문에요?” “네.” 조세핀은 제이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상한 희망 같은 게 생겼다. “혹시 조세핀을 조,” 아니, 이건 아니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그녀가 외모가 변했다 해도 이런 뻔뻔한 질문은 할 수가 없다. 조세핀은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킬리언씨는 스미스양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제가요?” 제이드의 눈이 커졌다. 그는 누가 들었을 가봐 주위를 살폈다. 이안이라도 들었으면 큰일이다. 하지만 꼭 이럴 때만 나타나던 이안이 이번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스미스양과 저는 그저 친구일 뿐입니다.” “하지만 최근 자주 만났잖아요.” 최근에? 제이드는 턱을 쓰다듬다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최근 케이트의 상담에 응해줬다. 그는 아 하고 빙그레 웃었다. “스미스 양의 선물을 고르는 걸 돕고 있던 걸 말씀하시나 본데요.” “선물이요?” “연말이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을 돌리고 싶다고 해서요. 제가 같이 골라주던 것뿐입니다.” 제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걸 안다는 건 조세핀이 그와 케이트를 유심히 봤다는 뜻이다. 설마. 제이드의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이 스쳤다. 조세핀이 정말 그를 좋아했나? 그래서 조세핀의 친구인 마거릿이 그와 케이트가 무슨 관계인 건가 하고 지켜 본 걸까. 조세핀은 뭔가가 팍하고 깨진 느낌이었다. 그녀는 제이드의 태도와 말로 흐릿하던 눈앞이 밝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제이드와 케이트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문득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거지? 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제이드에게 매달리듯 물었다. “그럼, 내일도 스미스양의 선물 고르는 걸 도와주는 건가요?” “내일요?”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이드가 말했다. “내일은 약속하지 않았습니다만.” 조세핀의 손이 제이드에게서 떨어졌다. === “젠장.” 마녀는 이안을 묶다가 움찔하고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칼에 찔리기라도 한듯한 태도였다. 마녀는 이안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묶었다. 생각을 잘 못 했다. 그를 여기까지 끌고 온 용병을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큭.” 다시 이안의 몸에 손이 닿자 마녀는 뒤로 펄쩍 뛰어올랐다. 마녀의 힘이 일순 약해졌다 ===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거지? 마녀의 저주가 조세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후들후들 떨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앞에 가늘고 모양 좋은 손이 보였다. 화려한 드레스와 레이스 스타킹으로 감싸인 다리도 보였다. 외모는 이렇게 아름다워졌는데 그녀의 내면은 추하기 그지없었다. 정신이 돌아오면서 자신이 한 행동과 말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아무 관심 없는 남자에게 유혹하는 것처럼 말하던 것. 아무 죄 없는 케이트에게 재수 없게 굴었던 것. 케이트를 향한 열등감. 제이드를 향한 집착. 데이지는 왜 그녀를 도와줬던 걸까. 당연히 품었어야 할 의문이 이제야 떠올랐다. 자신이 왜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도 의문이었다. “제이드! 오늘 로엔 경과 만나기로 했어?” 갑자기 달라진 조세핀의 행동에 제이드는 깜짝 놀라서 움찔했다. 그렇지 않아도 갑자기 주저앉은 그녀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상황이었다. “어? 네?” “오늘 로엔 경과 만나기로 했냐고!” “어, 네. 원래대로라면 삼십 분 전쯤에 만나기로,” 제이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세핀은 집 밖으로 뛰어 나갔다. 뭘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뭔가 크게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마거릿양!” 뒤에서 제이드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왔다. 조세핀은 정신없이 뛰다가 멈춰서 다시 제이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로엔 경은 스미스 양에게 거칠게 구는 사람이야?” “네? 어? 아니 그건 아닐걸, 아니 그걸 왜…?”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흐릿하던 머리가 안개가 걷힌 것처럼 맑아졌다. 설령 이안이 케이트에게 거칠게 구는 사람이 아니라 해도 두 사람을 속여서 만나게 하는 건 옳지 않다. 케이트를 만나지 않으려던 이안의 태도도 걸렸다.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 조세핀은 혼잣말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제이드와 약속한 지 삼십 분이 지났다. 그저 두 사람이 잘 돼서 이야기가 길어졌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뭔가가 그녀를 불길하게 했다. 두 사람을 만나게 한지 반나절이 지났다. 아직도 둘 다 아무 연락이 없다는 건 뭔가 이상했다. 두 사람을 만나게만 하고 돌아오겠다던 데이지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것도 수상했다. “미쳤었나 봐.” 조세핀은 두 손을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수상하고 이상한 일인데 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걸까. 생각해보면 데이지가 마녀라고 이야기했을 때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저 아, 그렇구나 했을 뿐이다. 그녀의 머릿속에 어릴 때부터 들었던 사악한 마법사와 마녀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 저주에 걸린 걸까?” ============================ 작품 후기 ============================ 오늘도 춥네요. 00194 7. 상처 =========================================================================                            케이트가 눈을 떴을 때 사위가 어두웠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이 자신의 방 침대에서 자다 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가 달랐다. “어?” 두 팔이 머리 위에 모여 묶여 있었다. 손목을 묶은 끈의 끝이 대들보에 이어진 것을 보고 케이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게, 무슨…?”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서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주변을 살피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거기, 누구예요?”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지도 않아서 그녀는 자신이 착각한 걸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시야가 또렷해지자 그녀는 사람의 형체를 확실히 알아보았다. “이안?” 이안은 케이트가 아닌 그녀의 등 뒤를 쳐다보고 있었다. 앙상하게 말라 마치 뼈에 가죽만 씌워 놓은 것 같은 사람이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입이 막히지 않았다 해도 딱히 그가 할 말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저, 마녀가 케이트를 해할까 싶어 마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잘 잤니, 아가야?” “당신은!” 귓가에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지만 두 팔이 위로 고정된 상태에서는 쉽지 않았다. 케이트의 행동에 마녀가 깔깔깔 하고 웃었다. “당장 먹어치우고 싶지만, 조금만 참으렴.” 먹어치운다니, 뭘? 기괴한 마녀의 행동에 케이트가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마녀는 키득키득 웃으며 케이트의 턱을 움켜쥐었다. 앙상하게 마른 손이 턱을 쥐자 섬뜩한 기분에 케이트는 몸을 떨었다. 너무 차갑고 너무 뾰족한 손이다. 이 마녀는 살아있긴 한 걸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마녀는 케이트의 예쁘장한 얼굴을 요리조리 구경하다가 그녀의 뺨에 코를 같다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희미하던 마력의 냄새가 강렬해져 있었다. “정말 재미있는 조합이야.” 마녀와 괴물이 서로 공감하다니. 마녀는 즐거워서 다시 깔깔대고 웃었다. 남자 목소리 같기도 하고 여자 목소리 같기도 했다. 도저히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 목소리에 케이트는 목을 움츠렸다. 귀를 막고 싶은데 막을 수가 없었다. “날 실망시키지 말아주렴, 아가.”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마녀는 그렇게 말하고 케이트의 턱을 놓았다. 위험하지만 이제 이 방법밖에 없다. 마녀는 천천히 이안에게 다가갔다. 호박색 눈동자가 마녀를 뚫어버릴 것처럼 강렬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괴물의 눈이다. 마녀는 이안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해서 그의 주변을 살폈다. 이안은 케이트와 달리 양팔을 각각 따로 묶어 놓았다. 줄 하나로 두 팔을 묶었다가 마녀가 수를 쓰기 전에 그가 벗어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흠.” 괴물의 자제력이 강하길 빈다. 마녀의 경험상 반 시간 정도가 최대였지만. 마녀는 이안의 입을 막은 손수건을 꺼내려다가 아차 하고 벽에 기대놓은 검을 집어 들었다. “순서를 잊어버릴 뻔했네.” 순서?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약간 긴 단검을 손에 쥔 마녀는 손잡이의 감각이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몇 번 만지작대더니 그대로 이안의 허벅지에 찔러 넣었다. “!”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깜짝 놀란 케이트만 바르작댔을 뿐이다. 마녀는 이안의 눈동자가 불그스름해진 것을 보고 씩 웃었다. “그래, 그래. 참아야지.” 마녀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비틀어 뽑았다. 작게 억눌린 신음이 이안의 목에서 흘러나왔다. “흠, 흠흠~”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이안의 허벅지를 찌른 마녀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가 보는 가운데 마녀는 다시 단검을 고쳐 쥐더니 이안의 반대쪽에 가서 섰다. “안 돼!” 케이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마녀는 이안의 다른 쪽 허벅지에 검을 찔러 넣었다. 이안의 몸이 잠깐 휘청했다. 마녀가 검을 비틀어 빼내자 케이트에게까지 피 냄새가 풍겨왔다. “왜, 왜 그러는 거예요! 당신!” 마녀는 이안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의 입에 욱여넣은 천을 빼내 케이트쪽으로 던졌다. 힉 하고 케이트가 몸을 틀어 피하자 마녀는 깔깔대고 웃으며 말했다. “다 널 위해서란다, 아가.”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날 위해서라니? 그녀의 의문을 알아차린 것처럼 마녀는 케이트에게로 다가왔다. “이게 다, 널 위해서란다. 아가.” 뼈만 남은 앙상한 손이 케이트의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그 손이 금세라도 가슴을 뚫을 것 같아 케이트는 움찔했다. “걱정 말렴. 아직은 꺼낼 생각이 없단다.” 마녀는 기분 좋다는 듯 웃으며 손에 든 검을 떨어트렸다. 탱 하고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투박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살아남으렴.” 마녀는 그렇게 말하고 방 밖으로 나갔다. 끼익하고 문이 닫히고 밖에서 철컥철컥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녀가 문을 잠갔다는 것을 알자 케이트는 신음을 흘렸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왜 이안을 찌르고 그녀는 묶어두기만 하는 걸까? 이안이 출혈 과다로 죽고 케이트는 굶어 죽길 바라는 걸까? 둘 다 죽길 바란다면 왜 그런 시간도 오래 걸리고 귀찮은 짓을 하는 거지? 케이트의 머릿속이 공포와 의문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보다 이안의 상태가 먼저였다. “이안,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없다. 소리 낸 다음에야 케이트는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소리를 했는지 깨달았다. 혀라도 깨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다. 이안의 허벅지에서 줄줄 흘러내린 피가 그의 발밑에 고이기 시작했다. 젠장. 이안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마녀가 무엇을 노렸는지 정확히 알았다. 그가 케이트를 공격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그가 케이트를 공격해서 케이트가 죽는다면, 대체 무슨 이점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이안은 고개를 들고 케이트를 쳐다봤다. “케이트.” “네, 네?” 마녀는 케이트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게 이안의 유일한 안도였다. 묶인 팔만 뺀다면. “그 검을 잡을 수 있나?” 이안의 말에 케이트는 발끝으로 마녀가 던지고 간 검을 끌어오려 애썼다. 너무 당긴 탓에 어깻죽지가 아팠지만, 발이 검에 닿기는 아슬아슬하게 부족했다. “안될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케이트는 검을 끌고 오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에 이안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가볍게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과다출혈을 일으키기 쉬운 부위를 찔렀다. 그는 줄로 팽팽하게 묶인 팔을 잡아당겼다. 다리에 난 상처 탓에 평소보다 더 힘을 주는 게 힘들었다. 고통을 무시하고 억지로 힘을 줬다가 울컥울컥 하고 상처가 더 많은 양의 피를 토해냈다. “케이트.” “이안, 정신 잃으면 안 돼요.” 잃고 싶지 않지만 벌써 어질어질하다. “내 말 잘 들어라.” 케이트는 피 냄새 때문에 토할 것 같았다. 벌써 팔에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간신히 발끝으로 검을 끌어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더 이상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무거워서 발가락으로 검을 잡는 건 불가능했고 허리를 숙일 수도 없었다. “케이트.” 이안은 검에서 그녀의 주의를 자신에게로 돌렸다. 초록색 눈동자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패닉을 일으키지 않았다. “내가 만약 이 줄을 끊고 네게 다가가면.” 이안은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눈앞이 잠깐 핑 돌았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그 줄 끊을 수 있어요?” “아니.” 지금 뭐하자는 거야? 급박한 상황에 농담하나? 케이트가 뾰로통한 표정을 짓자 이안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웃어요? 지금 웃겨요?” “그럼 우나.” 차라리 우는 게 낫다. 케이트는 발로 집어지지 않는 단검 때문에 짜증이 나서 발로 바닥을 굴렀다. 그녀의 스커트가 펄럭이면서 케이트의 냄새가 주변에 퍼졌다. 이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젠장. 그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정신 차려야 한다. “케이트.” “왜요!” 히스테릭해진 케이트가 소리쳤다.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적어도 아직 케이트의 기운은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그는 바짝 마른 목에 침을 한 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5부는 이번주 안에 끝납니다. 6부는 아마 다음주 쉬고 2월 1일부터 하지 않을까 싶어요. 00195 7. 상처 =========================================================================                            “뭐야?” 문을 지키던 용병은 미친 듯이 달려오는 마차를 보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마차에서 제이드가 내리자 안도했다가 뒤따라 내리는 조세핀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엄청난 미인이었다. 그는 조세핀의 미모에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도 잊어버렸다. “스미스 양 있나요?” “네? 어, 누구요?” 용병은 여전히 조세핀의 얼굴에 넋을 잃고 있었다. 제이드가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케이트 스미스 양이요. 이 저택 주인의 대녀 말입니다.” 대녀? 용병은 그제야 조세핀에게서 시선을 떼고 제이드를 쳐다봤다. “아니요, 지인을 만나러 간다고 나가셨습니다.” 용병의 말에 제이드가 조세핀을 쳐다봤다. 그도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몰랐다. 그저 조세핀이 빨리 케이트를 확인해야 한다 해서 함께 왔을 뿐이다. 어쩌지? 조세핀은 발을 동동 굴렀다. 아무 일도 아닐 수 있지만 찝찝했다. 데이지가 마녀라는 게. 데이지가 정말 좋은 마녀라서 그녀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외모를 주고 케이트와 이안의 사이를 이어주려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라면? 조세핀은 사람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의 부모님도 에이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렇게 좋은 사람 일 수가 없었다. 오직 조세핀, 그녀에게만 가혹했다. 그것도 본인들이 가혹하다는 의식도 없이. “그럼 저택 주인을 만날 수 있을까요? 말씀드릴 게 있어요.” 조세핀의 말에 용병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안에 들어가서 방문객이 있음을 알렸다. “들어오시랍니다.” “저도요?” 제이드의 물음에 용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트가 없는 걸 알고도 찾아온 데다가 에녹은 그녀가 요 며칠 제이드에게 선물 고르는 데 도움을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럼, 실례.” 한 번도 들어가지 못했던 저택이다. 제이드는 기대감에 차서 정문을 통과했다. 정문 안쪽은 그가 예상한 것보다 넓었다. 오, 좋은데. 그렇게 생각한 제이드가 조세핀을 확인하려 뒤를 돌았을 때였다. “어?” 뭔가가 조세핀이 들어가는 걸 막고 있었다. 투명하고 말랑한 막 같은 게 정문을 감싸고 있었다. “이게 무슨?” 조세핀이 통과하지 못하는 걸 보고 용병과 제이드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용병은 이안이 통과하지 못하는 걸 한 번 본 덕에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조세핀 옆에 서서 손을 뻗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악한 것을 막는 막이라 했는데? 용병의 눈이 조세핀의 몸을 훑었다. === “네 그 마법은 쓸 수 있을 것 같나?” 이안의 말에 케이트는 입을 딱 벌렸다. 저 남자가 지금 나한테 마법을 쓸 수 있냐고 물어 본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게 그녀 마음대로라면 여기에 이렇게 묶여 있을 리도 없다. 하지만 이안은 냉정하게 말했다. “써라.” “아니, 못쓴다니까요.” “못 쓰면 안 된다.” 이 남자가 나랑 지금 장난치나. 손이 자유로웠다면 당장 달려가서 그가 심하게 다쳤거나 말거나 한 대 후려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케이트는 이를 박박 갈며 말했다. “못 한다고요.” “긍정적으로 생각해.” 긍정이 다 얼어 죽었나. 아이러니하게도 케이트는 이안의 덤덤하고 뜬금없는 말에 마음이 안정되고 있었다. 그의 행동 덕분에 그다지 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만약 이 줄을 끊고 네게 가면, 마법을 써라.” “아니, 그러니까 못쓴다고,” “머리를 노려.” 케이트의 몸이 이안의 말에 얼어붙었다. 이해했는데 이해할 수 없었다. “뭐라고요?” “머리를 노리라고 했다.” “머리를 뭘로 노리라는 거예요?” “네 마법으로.” “내 마법으로 당신 머리를 노리라니, 어떻게요?”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여자는 왜 이럴 때까지 이렇게 멍청하게 구는 걸까. 가끔은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은 아니다. 그는 좀 날카롭게 말했다. “네 마법으로 내 머리를 날리라고 했다. 대체 여기서 뭐가 이해가 안 되는 거지?” “당신 머리를 노리라니, 당신을 죽이라는 말이에요?” “그래. 심장을 노리는 게 가장 좋겠지만 네가 조준하기엔 심장보단 머리가 더 확실하겠지.” 끝이다. 케이트는 완전 한계였다. 그녀는 소리를 빽 질렀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이안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붉은색 머리카락에 둘러싸인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어둠 속에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가 분노에 차있는 게 그의 뇌리에 선명했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가까운 곳에서 보면 눈동자 가장자리가 노르스름하게 물들었을 것이다. 그는 다리에 힘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자세를 고쳤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점점 케이트를 향한 욕망이 끓었다. 색 같은 게 아니었다. 저 작은 몸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따듯하지 기억하고 있었다. 이안은 머리를 흔들어 그 기억을 떨쳐내려 애썼다. 저도 모르게 발이 움직이면서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부드러운 몸을 끌어안고 목에 이빨을 박아 넣고 싶었다. 펄떡이는 동맥에 흐르는 뜨겁고 달콤한 피가, “젠장.” 거기까지 생각한 이안은 혀를 찼다. 머리가 몽롱해서 반쯤은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 그는 케이트에게 빠른 속도로 설명했다. “내가 정신을 잃으면 널 공격할 거다. 그러니 넌 나를 죽여야 할 거야.” “죽,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네 대부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가 그거야. 나는 널 잡아먹을 거야. 네 살과,” 거기까지 말하고 이안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삐걱하고 그의 손을 묶인 줄이 걸려있던 기둥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케이트는 잡아먹는다는 말에 얼굴을 붉혔다가 그게 성적인 뉘앙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날, 잡아먹는다고요?” 물었지만 이안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정신이라도 잃은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덜컥 겁이 났다. 죽은 건 아니겠지? 케이트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이안?” 발에 닿은 검이 덜그럭하는 소리를 냈다. 케이트는 발가락으로 검을 집어 올리려다가 쥐가 나는 바람에 인상을 찡그렸다. “이안!” “…마법을 써. 빨리.” 그게 그렇게 쉬우면 그를 죽이는 게 아니라 저 문을 뚫고 나가면 된다.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날 잡아먹는다는 게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다. 내가, 정신을 잃으면,” 이안의 말이 끊어졌다. 그의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 케이트는 몸을 비틀었다. 손목에 묶인 줄이 꽉 조이면서 살에 파고들었다. 아프다. 하지만 그것보다 이안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그가 죽으면 어떡하지? 케이트는 몸을 빙글빙글 돌리며 줄이 끊어지길 기도했다. “이안?” 대답 대신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무슨 일이지? 케이트는 겁에 질렸다. 상태가 많이 아픈 걸까? 숨소리가 들리니 죽은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거친 숨소리는 불안했다. 상태가 너무 안 좋아진 건 아닐까. 케이트는 불안감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이안과 달리 줄이 고정된 기둥은 케이트의 힘 정도로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안, 이안. 말 좀 해봐요? 네?” 그녀의 말에 대답하듯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다행이다. 안도한 것도 잠시. 그녀는 그의 눈동자가 선명한 황금색인 것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마치 빛을 받아 빛나는 금처럼 이안의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변하는 걸 몇 번 봤지만 이 정도로 기괴한 건 처음이었다. 케이트는 머뭇거리며 다시 그를 불렀다. “이안?” 초점이 사라진 황금색 눈동자가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시선만으로 찔리는 감각에 케이트는 작게 힉 하고 신음했다. 그녀의 숨결에서 공포가 섞여 나왔다. 이안은 아니, 괴물은 그것을 감지했다. 달콤한 마력과 부드러움 살 내음이 강력해서 괴물은 눈을 감고도 마녀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괴물의 몸이 케이트를 향해 움직였다. 그와 함께 끼기긱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대들보가 휘어졌다. 괴물은 자신의 손이 묶여있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드러냈다. 눈앞에 진수성찬이 있는데 묶여있다니.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당장 달려들어서 먹고 싶다. 최상의 마력이 작고 부드러운 몸 안에 갇혀있었다. 다시 한 번 괴물이 손을 휘두르자 줄이 고정된 대들보가 휘어졌다. 엄청난 힘에 케이트는 눈을 크게 떴다. 이안이 아니다. 이안인데 이안이 아니었다. 그녀의 내부에서 뭔가가 술렁술렁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저것은 위험하다고 몸이 느끼고 있었다. 털 하나하나가 솟아오르고 피가 손과 발로 몰렸다. 도망쳐야 해. 괴물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마녀였음에도 괴물에 대한 공포는 본능적이었다. 케이트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줄에 잡혀 멈췄다. ============================ 작품 후기 ============================ 표지 변경했습니다. Miawesome님께서 선물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00196 7. 상처 =========================================================================                            “무슨 일인가?” 에녹이 나왔다. 조세핀의 상황을 본 용병이 그를 불러왔다. 에녹은 제이드와 용병을 보고 묻다가 문밖에 선 조세핀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욕심이 화를 불렀군.” 조세핀의 눈이 커졌다. 제이드는 아직도 무슨 상황인지 몰라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엘프가 그냥 오래 살기만 하는 건 아니라네.” 에녹은 조세핀이 들어 올 수 있도록 정문을 감싼 실드를 걷었다. 보자마자 조세핀 코트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케이트를 만나기 위해 이 집에 몇 번 드나들었으니까. 마력이 전혀 없는 여자다. 그런 여자가 주변에 마력을 두르고 있었다. 조세핀의 아름다운 외모는 마녀가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마녀가 죽으면, 조세핀의 마법도 풀린다. 저것은 영구적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들어오시게.” 에녹은 제이드와 조세핀을 데리고 집 안으로 향했다. 손님맞이할 준비를 마친 하녀들이 곧바로 차를 날라 왔다. “그 마법을 풀어달라고 온 건가?” “마법이라고요?” 제이드가 끼어들었다. 그는 에녹의 말에 조세핀이 대체 누구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체 누구지? 마법으로 마거릿이 된 조세핀이 그가 알던 조세핀이 아니었다. 그래서 제이드는 누군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조세핀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풀고 싶지 않다. 이 아름다운 외모로 살고 싶다. 하지만 이건 마녀의 힘이다. 달콤한 것은 독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안 풀면 어떻게 되나요?” 조세핀의 질문에 에녹은 흠하고 찻잔을 들어 올렸다. 마녀에게 속아 넘어갔다고 생각했는데 맞았다. 이 아가씨는 그녀의 소원이 어떤 대가를 받는지 모르고 있었다. “대가는 마녀에 따라 다르다네. 어떤 마녀였는지 알고 있는가?” 그 말에 조세핀의 생각은 다시 마녀에게로 돌아갔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조세핀은 급한 마음에 상체를 내밀었다. “그보다! 중요한 게 있어요!” “그보다?” 에녹은 시계를 확인했다. 자신에게 걸린 마법보다 중요한 게 뭘까? 그는 세 마녀의 도피로를 확인하기 위해 나갈 예정이었다. “그게,” 조세핀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멈칫했다. 데이지가 나쁜 마녀라는 건 확인된 게 아니다. 그녀가 케이트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것 역시 확인된 게 아니다. 케이트와 이안은 지금쯤 좋은 분위기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도 모른다. === 우드득 하고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먼지가 풀썩 피어올라서 케이트는 힉하고 뒤로 물러났다. 이안의 손목에 묶인 줄이 팽팽하게 당겨진 게 보였다. 끊어지기 전에 그의 손이 다치지 않을까. 이 상황에서도 케이트는 이안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안, 이안?” 혹시나 하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케이트는 작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이안을 불렀다. 뭔가에 홀린 게 아닐까. 저게 마녀의 저주인 게 아닐까. 하지만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케이트의 마음속에서 점점 또렷해졌다. 마녀의 태도. 이안을 괴물이라 부르던 에녹. 그리고 지금 변해버린 이안. 이안을 괴물이라고 부르는 건 지금의 이안을 두고 말하는 게 아닐까. 그가 괴물이 되는 방법은 피를 많이 흘리는 걸까. 케이트는 몸을 빙글빙글 돌리다 숨이 차서 멈췄다. 두 손목을 고정한 끈은 튼튼해서 끊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다. 그녀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참으며 반대쪽으로 돌았다. 이안은 그녀에게 그가 저 끈을 풀고 다가오면 자신을 죽이라고 했다. 머리를 노리라고, 거기까지 생각한 케이트는 흑하고 신음을 삼켰다. 울고 싶다. 이안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다가도 그의 상태를 보면 원망이 사그라졌다. “이안, 나 마법 못 써요.” 케이트는 이안이 들리는 것처럼 그에게 말을 걸었다. 여전히 괴물은 팔에 힘을 주고 줄을 끊으려 하고 있었다. 그의 손목에 줄이 파여 피가 송글송글 새어나왔다. 마녀는 왜 이안을 괴물로 만든 걸까. 그가 그녀를 공격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래서 마녀가 얻는 게 뭐지? 눈물을 삼킨 케이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돌렸다. 마녀의 의도를 파악하면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안이 피를 많이 흘리면 저런 상태가 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왜? 왜 이안을 이용해 그녀를 죽이려 하는 걸까. 그리고 그녀가 죽길 바라는 거라면 왜 이안을 묶어 둔 걸까. “살아남으라고 말했지.” 케이트는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여 중얼거렸다. 살아남으라고 말했다. 그녀가 죽길 바라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그럼 대체 뭘 원하는 거지?” 그그극 하고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핑하고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날아서 벽을 후려치고 늘어졌다.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이안의 한쪽 팔이 풀렸다. 그는 양쪽 다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 케이트에게 다가오려 하고 있었다. 괴물이 손을 뻗자 그의 손은 케이트의 얼굴에서 고작 한 뼘 정도 부족할 뿐이었다. “힉.”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팽팽하게 당겨진 줄 탓에 몸이 다시 앞으로 튀어나왔다. “헉!” 그녀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아슬아슬하게 팔 안쪽까지 들어왔던 케이트의 몸을 움켜잡으려던 괴물의 손이 허공을 쥐었다. “이안.” 케이트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보고 호소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저건 인간의 눈이 아니다. 기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괴물이 묶인 팔을 끌어당겼다. “그러지 마요.” 케이트의 목소리에서 울음이 묻어났다. 엄청난 피가 흘러나와서 이안이 죽을 것 같았다. 그의 안색이 파래지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이러다 이안이 죽을 것 같다. 케이트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마녀는 이안이 죽길 바라는 걸까? 어째서? 마녀가 어째서 이안을 미워하는 거지? 그것도 말이 안 된다. 이안을 일부러 괴물로 만들어서 죽일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녀는 이안을 붙잡고 있는 하나 남은 줄을 겁에 질려 쳐다봤다. 팽팽해진 줄 끝이 바르르 떨렸다. 저게 끊어지면 어떻게 될까. 이안이 그녀를 덮칠 것이다. 그가 그녀를 잡아먹는다고 했다. 말 그대로. 케이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살아있는 채 잡아먹히다니. 공포가 따로 없다. 공포심 때문에 그녀의 안에서 뭔가가 더욱 크게 술렁거렸다. 케이트는 그게 마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력은 뭔가에 갇힌 것처럼 몸 이곳저곳을 술렁이며 요동쳤다. 금세라도 탁 터질 것 같으면서 동시에 아무리 용을 써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케이트는 고개를 들어 팽팽해진 자신의 줄을 쳐다봤다. 그녀가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이 줄을 먼저 끊고 달아날 것이다. 이안을 죽인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줄을 끊을 수 없다면? 이안에게 죽는 것과 이안을 죽이는 것.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 걸까. “이안,” 케이트는 목멘 소리로 그를 불렀다. 여전히 이안은 반응하지 않았다. “나, 마법 못 써요. 안 쓸 거예요.” 쓸 수도 없지만 쓸 수 있다 해도 안 쓸 것이다. 두 사람 다 아무 문제 없이 살아남을 거라는 낙관적인 희망 따위를 품은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애써 목소리를 냈다. “내가 당신을 죽이는 거보다, 차라리 당신한테 죽는 게 나아요.” 그 순간 우두둑하고 괴물을 묶어두고 있던 줄이 달린 기둥이 부서졌다. 핑하고 반동으로 날아오른 줄 끝이 케이트의 몸을 스쳤다. “힉.” 케이트는 깜짝 놀라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재빨리 이안을 확인했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피가 왈칵왈칵 흘러나왔다. 이 정도로 흘렸는데 아직도 쓰러지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지금쯤 이미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천천히 발을 끌며 그가 케이트에게 다가왔다. 역한 피 냄새가 후각을 마비시켰다. 그녀의 내부에서 술렁이는 마력 때문에 온몸이 아팠다. “윽.” 괴물의 손이 목에 닿았다. 그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 케이트는 신음을 삼켰다. 하지만 케이트에게 닿은 손끝부터 조금씩 열기가 피어올랐다. 단단한 댐에 아주 작은 금이 생긴 것처럼 닿은 곳을 통해 케이트의 마력이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이안, 이안. 내 말 좀 들어봐요.” 케이트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정신이 또렷했다. 괴물의 손이 케이트의 몸을 더듬었다. 가는 목과 어깨를 커다란 손이 우왁스럽게 쥐었다. 이 몸을 찢으면 안에서 달콤한 마력이 흘러나온다는 걸 괴물은 알고 있었다. 그이 귓가에 자꾸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그게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괴물은 케이트의 몸을 잡아당기다가 그것이 줄에 달려있는 것을 깨달았다. “아, 아파.” 괴물이 그녀의 몸을 잡아당기자 양 손목에 줄이 파고들었다. 손목이 끊어질 것 같다. 거기서 피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그는 줄을 잡아 뜯고 케이트의 손목을 핥았다. “윽.” 아프다. 고통 때문에 공포가 잠시나마 빛을 바랬다. 괴물은 살갗이 까진 케이트의 손목을 핥으며 기뻐했다. 이거다. 그가 원하는 것이. 손목에서 몇 방울의 피를 맛본 괴물은 그보다 더 피가 많이 흐르는 부위를 찾았다. 그가 코를 몸에 대고 냄새를 맡듯 움직이자 케이트는 상황도 잊고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이안.” 케이트의 손이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다. 괴물은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그녀의 목에 코를 박았다. 부드럽고 달콤한 향이 났다. 펄떡이는 동맥에서 세차게 흐르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 작품 후기 ============================ 하...콜라비 생채...실패한거 같아요... 내일까지 하면 5부 끝납니다. 6부는 일주일 쉬고 2월 2일인가...? 부터 올거예요. 00197 7. 상처 =========================================================================                            조세핀은 에녹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데이지라는 하녀가 마녀이고 자신을 도와줬다는 것을. 마치 홀린 것처럼 그녀의 말이 전부 옳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잠깐, 그럼 당신 아니, 너,” 경악한 제이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조세핀을 새삼 다시 쳐다봤다. 조세핀의 눈과 조세핀의 머리카락이지만 전혀 달랐다. 누구도 그녀가 조세핀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맞아. 나야.” 조세핀은 담담하게 말했다. 제이드는 이해되지 않아 소리쳤다. “왜? 왜 그랬어? 왜 그런 짓을 한 건데?” “잠깐.” 에녹이 끼어들었다. 그는 흥분한 제이드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제이드는 조세핀이 눈을 떼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그녀를 응시했다. “그래서, 그 마녀는 아직도 거기 있는가?” “아, 아뇨. 안 들어 왔어요. 하지만,” 조세핀은 제이드를 한번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스미스 양 말로는 남자들의 방문을 전부 거절했다고 하더군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레인포레스트 경께서는 스미스 양에게 남자들이 접근하는 게 싫으신 거죠?” 에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다시 말했다. “그런데 데이지, 마녀는 스미스 양과 로엔 경을 반드시 만나게 해주고 싶어 했어요. 그게 무슨 이유가 있을까 싶어서,” 조세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녹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집사에게 말을 준비하라고 소리쳤다. “지금 카티야가 그 남자와 있다는 건가!” 지금까지의 점잖은 태도와는 백팔십도 다른 모습이었다. 조세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런 것 같아요.” “안내하게. 어서.” 어디로? 라고 아무도 묻지 않았다. 조세핀은 재빨리 에녹을 따라 건물 밖으로 나갔다. 이안과 케이트에게 나오라 했던 장소라면 알고 있다. 그저 두 사람이 그 식당에서 이야기하는 것뿐이면 좋겠지만. “잠깐.” 제이드가 조세핀의 허리를 잡았다. 그녀가 깜짝 놀라 바르작거리자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너 말 탈 줄 모르잖아. 나랑 같이 타.” “하지만,” “네 모습에 대해서는 이 일이 해결된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해.” 으응. 조세핀은 어깨를 움츠렸다. 늘 싱글싱글 웃기만 하던 제이드가 강압적으로 나오는 건 흔치 않았다. === 케이트의 목에 얼굴을 묻었던 괴물이 킁킁대며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이미 이 마녀에게 마킹해 놓았다. 이안이 며칠 전에 낸 잇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보다 더 약한 자라면 무시하고 물어뜯었을 테지만 먼저 마킹한 자는 그와 비슷한 자였다. 당연하다. 바로 그 자신이었으니까. 괴물이 그 흔적이 익숙하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 케이트가 입을 열었다. “이안, 난 당신 안 죽일 거예요.” 케이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지만 눈동자만은 또렷했다. “당신이 나 죽이고 평생 후회하고 살아요.” 괴물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난 당신 죽이고 후회하면서 살 자신 없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고생해요.” 괴물이 이상하다는 듯 케이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반쯤은 악에 받쳐서 한 소리다. 그녀가 이안을 죽여도, 이안이 그녀를 죽여도 살아남은 사람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케이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남편을 지극히 사랑했던 엘리자베스는 죽을 때까지 니콜라스를 그리워했다. 살아남은 사람이 더 괴로운 법이다.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를 보고 어머니마저 잃고 남아버린 케이트는 잘 알았다. “마지막까지 남지 않을 거야.” 케이트의 말에 괴물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호박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 멍청한 여자.” 이안의 입에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케이트는 눈을 크게 떴다. “이안?” “머리를 공격하라고, 했잖아.” 쉰 목소리였다. 숨이 찬 것처럼 말이 끊어졌다. 그는 케이트를 놓으려다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당장 그녀의 목을 물어뜯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안은 끙하고 신음을 삼켰다. 바닥에 케이트가 집어 들지 못한 검이 떨어져 있었다. “이안, 내가 사람 불러올 테니까,” 케이트가 그렇게 말하며 일어서려 했지만 이안의 손이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이안, 이것 좀 놔줘요.” 이안의 입술이 비틀렸다. 무리다. 그는 지금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조금만 삐끗하며 그는 자신이 케이트를 갈가리 찢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마법, 쓸 수 있나?” 케이트는 몇 번 더 그의 손에서 손을 빼내려 애썼다. 꽉 잡혀서 빠지지 않는다. 마치 이안의 목소리와 몸이 따로 노는 것 같았다. “나, 당신 안 죽인다고 했잖아요.” 이안은 피식 웃었다. 이 여자는 멍청한 건지 영리한 건지 모르겠다. 남을 죽이고 죄책감을 떠안고 사느니 죽임당하겠다는 생각은 너무 연약한 생각이다. 하지만 반면 죄책감을 떠넘기겠다는 협박이 주효하기도 했다. “도망칠 수 있으면, 도망쳐.” 이안의 말에 케이트는 다시 손을 흔들었다. 어찌나 꽉 잡고 있는지 빠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손톱이 박혀서 아팠다. 케이트는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손을 잡아당겼다. 그럴수록 그녀의 손에 그의 손톱이 파고들었다. 줄이랑 다를 게 뭐야. 여기까지만 해도 케이트의 낙관적인 성격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이안이 정신을 차렸으니 됐다. 그가 당장은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지만 좀 있으면, “뭐, 뭐하는 거예요?” 케이트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높아졌다. 이안은 집어 든 검으로 자신을 찌르려 했다. “이안!” 검은 목과 심장 중간쯤 되는 쇄골을 찔렀다. 이안은 고통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순식간에 그의 입술이 피로 물들었다. 목이든 심장이든 어느 쪽이라도 찌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힘이, 괴물의 본성이 아직 몸을 차지하고 있었다. 쇄골을 파고든 검이 목을 향하는 것보다 심장으로 내려가는 게 너 나을 거라는 판단에 이안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안, 이안, 하지 마요!” 검 날을 타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만큼 빠져나가고도 나올 피가 남아있는 걸까. 케이트는 이안의 행동을 막으려 애썼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두 손목은 그의 손안에 잡혀있었다. 마치 검을 쥔 손만 이안의 손인 것 같았다. 이안의 눈동자가 호박색에서 황금색으로 번졌다. 검을 누르던 손이 멈칫했다. 하지만 다시 그의 눈동자가 호박색으로 변했다. 케이트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눈동자가 점멸하는 것처럼 호박색과 황금색으로 변하는 것을 응시했다. “왜, 왜 그렇게까지 해요?” 피가 후두둑 케이트의 가슴팍으로 떨어졌다. 뜨거운 피의 느낌에 케이트는 몸서리쳤다. 그녀는 어깨로 이안의 손을 막으려 애썼다. 차라리 날 죽이라고! 이안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검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는 말이 그의 뇌리에 각인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법을, 써. 빨간 머리.” 그의 말이 현실감이 없어 케이트는 눈을 크게 떴다. 마법을 쓸 수 있다면 벌써 썼을 거다. 이안을 멈추고 그를 구할 수 있는 마법을 쓸 수 있다면. 그녀의 손목을 묶은 줄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지만 두 사람 다 깨닫지 못했다. 줄은 점점 뜨거워져서 그 뜨거움에 괴물이 반사적으로 손을 놓았다. 케이트가 그것을 깨달은 순간 펑하고 줄이 터져나갔다. 그녀는 그 것을 확인하기도 전에 두 팔을 벌려 이안을 끌어안았다. “이안, 이안.” 울음 섞인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검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심장을 비켜 겨드랑이까지 상처를 벌리고 있었다. 쿠르릉 하고 천지가 진동했다. 벽이 쩌적쩌적하고 금이 가더니 천장이 먼지를 내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에녹이 제이드와 조세핀을 데리고 케이트를 찾아냈을 때 그녀는 무너진 폐허 가운데에서 이안을 끌어안고 있었다. 새파란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었다. “카티야!” 에녹이 케이트를 끌어내려 했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이안을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살려주세요.” 그가 그 말이 이안을 살려달라는 뜻임을 이해하기 전에 케이트도 픽 쓰러졌다. ============================ 작품 후기 ============================ 제가 프린세스 메이커를 참~ 좋아하는데요. 꼭 하고싶지만 못한 엔딩이 있어요. 아버지와의 결혼. 그걸 뮈엘라에서 이뤄볼까 합니다. 2월 2일에 만나요~ 00198 [공지] 6부 위험한 남자 =========================================================================                            마법을 배척하는 나라 뮈엘라. 마녀의 흉계에 빠져 크게 다친 이안과 그런 이안에게 죄책감이 커지는 케이트. 피식자 케이트와 포식자 이안의 달콤살벌한 이야기. ============================ 작품 후기 ============================ 집에 인터넷이 끊겨서.... 11시 전까지는 올라갈거예요...흑흑... 00199 1. 상처 =========================================================================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앙칼진 고함이 넓은 식당에 울려 퍼졌다. 점심때가 지나서야 일어난 제프리는 지난밤의 술기운이 가득한 채로 식탁에 앉아 스프를 마시고 있었다. 아이고. 제프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에스메랄다의 고함이 숙취로 괴로운 머리를 흔들었다. “뭐가요?” “뭐긴 뭐야! 캐서린인가 키티인가 하는 년 말야!” 아, 그 빨간 머리. 게슴츠레하던 제프리의 눈이 좀 또렷해 졌다. 그는 얼마 전 케이트는 식당에서 봤던 것을 떠올렸다. 하녀라고 들었기 때문에 괜찮은 옷차림을 하고 식당에 들어선 케이트를 봤을 때의 충격은 꽤 컸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녀가 어느 늙은 부자의 첩이 됐다고 생각했다. 제프리는 그럴 거면 자신과 결혼하자 할 때 할것이지. 하고 케이트를 조금 불쌍하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에스메랄다는 분을 못 이겨 발을 쿵쿵 구르며 말했다. “어느 엘프가 돌봐 준대!” “엘프요? 엘프의 첩인가 보죠?” 그거 참 괴상한 취향이다. 제프리는 저속한 상상을 하며 히죽이죽 웃었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아니었다. 그녀는 커다란 식탁을 탕하고 치며 말했다. “첩이 아니야! 엘프가 후견인이랜다!” 하지만 제프리는 여전히 느긋했다. 그는 스프를 후루룩 소리내어 마셨다. 엘프가 후견인이라면 어쩌란 말인가. “엘프정도야 우리가 깔아뭉개면 되잖아요.” “그게 안 되니까 하는 말이지! 레인포레스트래!” “레인포레스트요?” 어,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머리를 굴리던 제프리가 어?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 엘프말하는 거예요?” “그래, 그 엘프!” 제프리의 표정이 드디어 심각해졌다. 에녹 레인포레스트. 작위가 없지만 모두들 그를 레인포레스트경이라 부르며 존경한다. 그 레인포레스트가 후견인이라면 호건 가에서도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에녹, 뮈엘라, 에드워드. 뮈엘라를 건국한 세 용사의 이름이다. === 이안이 정신을 차린 건 에녹이 두 사람을 구하고 나서 일주일이 지난 다음이었다. 낯선 천장이 보였다. 여긴 어디지? 그는 반사적으로 벌떡 상체를 일으키려다가 자신이 묶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팔다리가 어딘가에 묶여 있었다. 아직도 그곳인가! 얼굴을 찌푸린 그는 곧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팔 다리가 침대 기둥에 줄로 묶여 있었다. “허.” 안전한 걸까. 알 수 없다. 줄을 끊어보려 꿈지럭 대자 손 위에 작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케이트가 거기 있었다. 그녀는 이안의 손을 꼭 잡고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온몸이 성한 곳이 없는 이안과 달리 그녀는 멀쩡했다. 그날이 흔적은 손목에 앉은 딱지뿐이었다. “으음.” 케이트가 몸을 뒤척이다가 푹 꺼진 이안 쪽으로 주르륵 굴렀다. 그녀의 숨결이 피부에 닿았다. 이안은 움찔하고 물러났다가 한 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괜찮습니까?” 케이트를 향해 물은 것이 아니다. 방 한쪽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에녹을 향해 물은 것이었다. 그는 인기척조차 없었다. 그저 두 사람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관찰당하는 기분이다. “글쎄.” 그렇게 말하고 에녹은 몸을 일으켰다. 훤칠하고 호리호리한 몸이 침대로 다가왔다. 그가 케이트에게 손을 뻗었을 때 이안은 그의 손이 상처투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이렇게 가까운 건 안 되겠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케이트를 안아들었다. 케이트의 팔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녀의 손이 이안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케이트의 손으로 향했다. 에녹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침대 끄트머리에 눕혔다. “요새 통 잠을 못 이루더군. 이대로 좀 자게 두세나.” 그렇다면. 이안은 에녹이 자신을 묶은 줄을 풀어 주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일어 날 수 있도록 다리와 한쪽 팔은 풀어 줬지만 다른 팔 한쪽은 풀어주지 않았다. 괴물이었던 그의 상태를 떠올린다면 현명한 행동이다. “제가 곁에 있어도 됩니까?” 침대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으며 이안이 물었다. 에녹은 다시 케이트를 내려다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아직도 여기 있다는 것에 에녹역시 이안만큼이나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에녹은 그를 타운하우스나 큐바인 하우스로 보내려 했다. 하지만 케이트가 그렇게 두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물은 건 이안의 안위였다. 그녀는 이안의 곁에서 떠나지 않으려 했고 에녹이 이안을 보내면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하지만 이안이 묻는 건 그의 허락에 대한 것이 아니다. 에녹은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 그도 확신하지 못했다. 이안은 정신을 잃은 동안 믿을 수 없는 행동을 보여줬다. 괴물은, 마력 흡수자들은 정신을 잃으면 본능적으로 마력을 섭취하려한다. 레인포레스트의 저택으로 운반된 괴물은 케이트와 떨어지기 전에 정신을 차렸다. 혹시 몰라 그의 손발을 묶어 두긴 했으나 에녹은 깜짝 놀라 케이트를 지키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괴물은 케이트에게 눈길하나 주지 않았다. 그의 황금색 눈동자는 마치 케이트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에녹에게 달려 들었다. 마력으로 친다면 이 저택에서 에녹이 가장 강할 것이다. 하지만 더 가까운 곳에 더 익숙한 케이트가 있음에도 괴물은 케이트를 인식하지 못했다. “카티야와 함께 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지?” 에녹은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이안은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문지르려다가 그 손이 케이트에게 잡혀있다는 것을 다시 떠올렸다. 한쪽 손은 케이트에게, 한쪽 손은 침대에 잡혀있다. “그건 풀어줄 수 없네.” 이안이 묻기도 전에 에녹이 딱 잘라 말했다. 한쪽 손만큼은 절대 풀어줄 수도, 생각도 없다. 케이트를 그의 곁에 두는 것도 에녹으로서는 대단한 도전이었다. 그것도 전부 이 일주일간 괴물이 케이트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이안은 갑자기 달라진 에녹의 태도가 당황스러웠다. 그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얄미운 자식. 에녹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안전이 확인된 괴물이라 해도 그는 이안이 싫었다. 살과 피를 생으로 먹는 괴물이라니. 엘프로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부정한 존재다. 하지만 그가 싫은 건 그 이유뿐이 아니었다. 그가 이안을 견디는 이유이자 싫어하는 이유. 케이트 때문이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지?” 이안의 시선이 케이트를 향했다. 보드라운 뺨 위에 붉은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려와 있었다. 그걸 귀 뒤로 넘겨주려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다가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이 두 손 모두 잡혀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마녀가, 저를 이용해서 그녀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건 알고 있다. 에녹은 재빨리 물었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아나?” “케이트에게 살아남으라고 하더군요.” 에녹의 예상은 확신이 되었다. 그는 조세핀과 케이트에게 들은 이야기로 마녀가 케이트의 마력을 노리고 있다고 예상했다. 케이트는 마녀가 두 사람이 서로를 공격해서 죽길 바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당장 눈앞의 문제가 시급했다. 이안은 일주일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괴물은 방 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공격하려 했다. 유일하게 무사한 건 케이트뿐이었다. “제 예상이지만,” 이안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마녀가 노리는 건 케이트의 심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에녹의 눈이 반짝였다. 이안은 아무것도 몰랐던 주제에 예리하게 집어냈다. 그는 모르는 척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예전에, 다른 생명체의 마력을 흡수하는 방법은 심장을 먹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이안의 시선이 다시 케이트를 향했다. 케이트는 뭔가 안 좋은 꿈을 꾸는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작은 눈썹과 콧등이 움찔움찔했다. 다시 한 번 반사적으로 손을 내미려던 이안은 멈칫했다. 심장을 먹는다. 그는 자신이 정신이 잃었을 때를 드문드문 기억하고 있었다. 케이트를 향한 강렬한 욕구. 그때의 그는 정말로 케이트의 몸을 찢고 그 심장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안은 슬그머니 케이트에게 잡혔던 손을 뺐다. “으응.” 케이트가 손의 온기를 쫓아 그에게 굴러왔다. “이 애를 옮기고 이야기 해야겠군.” 에녹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케이트가 반짝 눈을 떴다. 그녀는 여기가 어디인지 몰라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가 고개를 들어 이안을 쳐다봤다. “이안?” “잘 잤나.”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이안, 이안.” 반가움에 케이트가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이안이 움찔하고 물러나는 게 에녹의 눈에도 보였다. 안타깝게도 이안의 등은 침대헤드에 막혀 물러나지 못하고 케이트에게 잡혀버렸다. “다행이다.” ============================ 작품 후기 ============================ 6부 시작했습니다. 으으, 오늘 갑자기 집 인터넷이 똑! 끊어지는 바람에 어케어케 올리네요. 오타는 인터넷(...)문제로 수정하지 못했습니다. 내일 인터넷 고친뒤...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00200 1. 상처 =========================================================================                            케이트는 이안의 목을 끌어안고 훌쩍였다. 다행이다.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평생 괴물인 상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주일간 이안은 이안이 아니었다. 괴물은 자거나 먹거나 둘 중 하나였고 어느 쪽도 케이트를 무시했다. 다행이면서도 괴로웠다. 괴물의 황금색 눈동자는 케이트를 향하지 않았다. 케이트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안이 평생 그런 괴물로 살아가는 것과 그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어느 쪽이 더 괴로운 걸까. “케이트.” “아, 미안해요. 아프죠?” 케이트는 자신을 밀어내는 손길에 놀라 이안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반가운 나머지 이안에게 덤벼들어 버렸다. 레인포레스트 저택에 실려 왔을 때 이안의 상태는 어마어마했다. 양쪽 두 다리와 쇄골부터 겨드랑이까지 이어진 상처가 가장 심했다. 거기에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인간이었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안을 살린 건 첫 번째로 그가 괴물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에녹 덕분이었다. “미안해요.” 케이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작은 손이 이안의 어깨를 감은 붕대 위에 살짝 닿았다. 케이트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찔렀다. 그 사실은 케이트뿐 아니라 에녹조차도 한 수 물러나게 만들었다. 복잡한 기분에 케이트는 붕대를 매만졌다. 고작 일주일인데 이안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다. 두 다리는 이미 걸어 다닐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어깨의 상처는 더뎠다. “에헴.” 두 사람만의 세계에 빠진 것 같자 에녹이 헛기침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어머.” 케이트는 에녹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서 침대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안과 한 침대에서 잠을 잔 걸로도 부족해서 너무 친밀하게 있었다. “아저씨 계셨어요?” “내가 있어서 다행이지.” 엄한 에녹의 표정에 케이트는 고개를 숙였다. 결혼한 부부도 아닌데 한 침대에 있었다니. 에녹의 말대로 그가 있어서 다행인 상황이었다. “내가 미리 말을 해주는 게 좋았겠구나.” 케이트가 옷을 갈아입고 돌아오자 세 사람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졌다. 집사는 다과를 놓고 방 밖으로 물러났다. “아저씨, 그 전에 이안의 손을,” “안 된다.” 케이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녹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안은 한 손을 의자 팔걸이에 묶인 채 앉아있었다. “하지만 왼손으로는 차를 마실 수가 없잖아요.” 케이트의 호소에도 에녹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안은 능숙하게 왼손으로 잔을 들어 차를 마시고 케이크는 한 조각 맛보기까지 했다. “아, 당신은 왜 또 능숙한 건데요!” “내가 왼손이 능숙한 게 불만인가.” 하아. 케이트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이안은 더이상 차도 케이크도 먹지 않았다. 어깨에 난 상처가 욱씬 욱씬 쑤셨다. 왼손으로 억지로 차를 마신 건 에녹을 향한 일종의 오기였다. 그걸 모르는 케이트는 투덜거렸고 아는 에녹만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그가 이안의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을 풀어준 건 작은 심술이었다. “어쨌거나, 카티야. 네게 미리 말하지 않은 건 용서를 구하고 싶구나.” 용서? 케이트는 무슨 말인가 하고 에녹을 쳐다봤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로엔 경에 대해 네게 알려주지 않은 것 말이다.” “하지만, 아저씨도 마녀에 대해선 모르셨으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용서하고 말 문제가 아니다. 지금 가장 큰 손해를 입은 건 케이트가 아니라 이안이니까. 그녀는 이안을 슬그머니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래. 마녀가 로엔 경을 이용해서 널 공격할 줄은 몰랐지. 하지만 내 잘못이 크구나.” 침울한 고백에 케이트는 에녹의 손을 잡았다. “아저씨께서 알려주셨어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어요. 오히려, 제가. 이안에게 미안하다고 해야 해요.” 그녀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네 탓이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야.” 그녀의 사과는 몇 번이나 들었다. 케이트는 이안이 의자에 앉아 손이 팔걸이에 묶이는 그 순간에도 끊임없이 사과했다. 미안해요, 이안. 나 때문에. 미안해요. 정말로 미안해요. 이안의 기분이 불쾌해졌다. 그는 그녀의 사과 따위를 듣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에 눈물을 뚝뚝 흘리던 케이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엉망이 된 얼굴과 피범벅이 된 가슴. 이안, 이안하고 애절하게 부르던 목소리. 그의 손이 움찔 움직였다가 멈췄다. 자신이 뭘 하려고 한 걸까. 이안은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이제는 알겠지만, 궁금한 게 있다면 알려주마.” 에녹의 말에 케이트가 몸을 내밀었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이안의 그, 그 상태는 어떻게 된 건가요?” 그러면서도 이안을 힐끔 쳐다본다. 에녹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전에 말했지만, 너를 마력보유자라고 한단다. 그렇다면 그 반대로 마력 흡수자가 있겠지.” 그 반대로? 케이트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자 에녹은 한숨을 쉬었다. 마법의 기본이 되는 건데 지금의 뮈엘라는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다. “카티야, 마법의 기본은 등가교환이란다. 쉽게 말해서 마법을 쓰기 위해 마력이 필요하고 그 마력을 쓰려면 마력과 교환할 뭔가를 돌려줘야 하는 거야.” 여기까지는 이해했니? 하고 에녹이 물었다. 쉽게 말해서 그렇다는 것이지 딱 잘라 저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케이트에게는 이 정도 설명이 나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력을 누구에게 무엇과 교환한다는 말입니까?” 이안이 물었다. 에녹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래. 그게 문제다. 쉽게 말해서 교환이라고 했지만 사실 교환이라고 하기엔 어렵다. “그건 쉽게 말해서 그런 거라네. 마력은 어느 곳에나 있어.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중에도 있지. 모든 생명은 마력이 있어야 한다네. 마법을 쓰기 위해 주변에 있는 마력을 끌어온다고 생각하면 돼.” 마력을 끌어오면 마력이 빠져나간 곳은 비게 된다. 빈 곳은 뭔가 대체할 것을 찾아서 채우려 한다. 그걸 위해 마법사들은 약초를 쓰거나 보석을 이용한다. 주문진이나 주술로 잠시 속이기도 한다. 마력이 빠져나가 그곳이 비었다는 것을 숨기는 것이다. 주문진이 강할수록 오래 속일 수 있다. 하지만 영원히 속일 필요는 없다. 마력은 시일이 지나면 회복되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여기 그 등가교환에 어긋나는 존재가 있지.” 에녹은 그렇게 말하며 케이트를 쳐다봤다. 마력보유자는 존재 자체가 등가교환에 어긋난다. 주변의 마력을 끌어모아 마법을 사용할 필요 없이 자신이 가진 마력만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건 어마어마한 특혜란다. 백 년 전이었다면, 모든 마법사가 널 부러워하고 질투할 거야. 너는 마법을 쓰기 위해 어떤 주문도, 보석도, 약초도 필요 없어. 네가 쓴 마력을 대체할 그 어떤 것도 돌려줄 필요가 없단다.” 왜냐면, 에녹은 케이트의 손을 감싸 쥐며 말을 이었다. “네가 바로 마력 그 자체니까.” 케이트의 눈이 부풀어 올랐다 경악과 공포가 그 안에 가득 찼다. 에녹은 위로하듯 그녀의 손등을 토닥였다. “마력보유자는 등가교환의 법칙에서 유일하게 위배되는 존재란다. 그런 존재가 많지 않은 곳에서는 무시할 수준이지만 뮈엘라는 달라.” 뮈엘라는 과거, 마법의 나라였다. 마법사가 몰려들었고 마력보유자 혈통이 결합하고 결합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졌다. 한 공간에 마력보유자의 수가 과도하게 많아지자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 “세상은 공평한 법. 마력이 무한한 존재가 있다면 그 무한한 마력을 흡수해 균형을 맞출 존재도 있어야 하겠지.” 마력 보유자가 늘어나자 마력 흡수자가 생겨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마력 보유자에게서 태어났다. 에녹이 이안에게 친모가 마녀라고 말한 것은 이런 이유였다. “그들은 로엔 경처럼 목숨이 위험해지면 마력을 흡수하는 괴물로 변했다. 목숨이 위험하지 않아도 주기적으로 마력을 흡수해야 했지.” 에녹과 케이트의 시선이 이안에게 향했다. 주기적으로? 케이트가 이안과 함께 지낸 시간이 일 년 정도지만 그가 마력을 흡수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 의도를 깨달은 이안은 무덤덤하게 물었다. “흡수라는 게 저도 모르게 이뤄지는 겁니까?” “그렇지 않네. 흡수하는 행위에 대단히 자제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죽을 수도 있다더군.” 이안은 이해했고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자신이 그때 까딱 잘못했으면 지금 이 자리에 케이트가 앉아있지 못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는 살면서 한 번도 마력을 흡수한 적이 없습니다.” 에녹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입에 담기도 싫다는 게 역력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생명의 피를 마신 적은 없나?”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요, 아저씨. 그럼 마력 흡수자는 주기적으로 피를 마셔야 한단 말이에요?” 에녹은 고개를 끄덕였고 케이트는 그가 이안을 괴물이라 부르며 싫어하는 이유를 확실하게 이해했다. 고기도 먹지 않고 마차도 타지 않는다. 실크도 쓰지 않는다. 그런 엘프에게 다른 생명체의 피를 주기적으로 마셔야 하는 마력 흡수자는 부정한 존재다. ============================ 작품 후기 ============================ 에이, 5부 끝날 때 말한 "아버지와의 결혼"은 드립이죠 ㅎㅎㅎㅎ 하, 어제 인터넷이 갑자기 뚝! 끊겨서 소설도 간신히 올렸거든요. 6부 시작부터 이러다니...액땜했다고 치려고요. 표지변경했습니다. 느므쯔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00201 1. 상처 =========================================================================                            제이드는 어두운 표정으로 소녀를 내려다봤다. 파랗게 변한 피부와 아무것도 담지 않은 동공이 그녀를 마치 인형처럼 보이게 했다. “몇 번째라고?” “세 번째.” 카이사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세 번째 시체다. 전부 평민이었다. 수사관은 평민이 다섯 명 이상 동일수법으로 살해당했을 때만 수사에 착수한다. 그전까지는 치안관 소관이다. 그러나 세 번째 만에 수사관이 개입한 이유가 있었다. “세 명 다 빨간 머리였단 말이지?” “그래.” 어떻게 된 일일까. 제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 여자. 나이는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까지. 붉은 머리에 예쁘장하게 생긴 외모였다. “치안관 말로는 시체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는군. 다른 지방에서 온 게 아닐까 싶어.” 이시기에? 제이드는 회색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이 내릴 것 같다. 이 추위에 지방에서 수도로 상경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아직 봄이 오려면 몇 주나 남았는데 무엇 때문에 이시기에 이동한 걸까. “친척을 찾아온 걸 수도 있겠군.” “음.” 두 사람은 한숨을 내쉬고 시체 앞에 허리를 숙였다. 죽은 사람의 나이가 어릴수록 안타까움에 시체를 살피는 것을 미루게 된다. 하지만 더 미룰 수도 없어 제이드는 시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 제이드의 눈이 커졌다. 익숙한 향이 스쳤다. 카이사가 무슨 일이냐는 듯 그를 쳐다봤다. “잠깐만.” 그는 소녀가 입은 옷자락을 쥐고 가볍게 펄럭였다. 그게 무슨 짓이냐고 말하려고 일그러졌던 카이사의 얼굴이 펴졌다. “아니?” “이 향….” 익숙한 향이다. 리코와 제이드가 더 이상 찾을 길이 없어 중단한 사건에서 찾았던 향이다. 여기서 맞닥트릴 줄이야. “다른 시체에도 이 향이 날까?” “확인해보지.” 그 외에 별다른 건 없었다. 카이사는 자신이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괜찮은 집 여식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손톱이 다듬어져 있어. 옷도 괜찮고.” 하지만 제이드의 표정은 달랐다. 그는 리코와 수사했던 사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도 그랬다. 어린 소녀였고 손톱과 머리카락이 다듬어져 있었다. 하지만 귀족 여식은 아니었고 평민인 듯했지만 소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기분 나쁜 생각이 들었다. “아닐 수도 있지.” 제이드는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카이사가 고개를 들었다. “뭐 발견한 거 있나?” “아니, 그건 아닌데.” 그는 멀리 떨어져 구경꾼을 막고 있던 치안관을 손짓으로 불렀다. “리코도 불렀으면 하는데.” 카이사가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다른 수사관을 부른다는 건 둘이서 해결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사건일 때의 일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었고 있다 해도 수사관이 자기 능력 밖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고 억지로라도 두 사람으로 해결하곤 했다. “네. 무슨 일이십니까.” 후다닥 뛰어온 치안관에게 제이드는 다른 두 구의 시체를 어디에 두었는지 물었다. 처음 발견된 시체는 이미 무덤에 들어갔고 두 번째 시체만 남아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두 번째 피해자를 보러 가세.” 마차에 탈 때까지 제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차 안에서 카이사와 두 사람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지난달에 리코와 수사하다가 중단된 사건이 있어. 알고 있지?” 카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더 이상 수사할 수가 없는 사건은 중단되곤 한다. 상황에 따라 아예 묻어두는 경우도 있고 다른 증거가 나오면 재개된다. 드물지 않은 일이다. “그때도 같은 냄새를 맡았거든.” 같은 냄새? 시체에서 맡은 냄새를 떠올린 카이사는 갑자기 다시 한 번 그 향을 맡고 싶다는 격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저도 모르게 마차를 멈추려 한순간 이성이 퍼뜩 돌아왔다. “대단한 향이지?” 제이드는 카이사의 놀란 표정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도 그랬다. 처음 맡았을 때. 일반적인 향이라면 그런 힘을 가졌을 리 없다. 마녀의 힘이라 생각했는데 더 이상 수사할 방법이 없었다. 그 향에 대해서 아는 사람도, 향을 품은 시체를 아는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았다. “새로운 증거가 나타난 거군.” 카이사의 말에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 “제가 피를 마신 겁니까?” 침묵을 깨고 이안이 물었다. 에녹은 생각도 하기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력 흡수자는 마력을 흡수해야 한다. 생명체의 심장을 먹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에녹은 괴물에게 많은 고기를 제공했다. 괴물이 잠들었을 때 자신의 마력을 나눠주기도 했다. 이안을 구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마력이 흡수되어야 괴물이 이안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위험할 때도 몇 번 있었다. 에녹은 괴물의 공격을 막느라 생긴 상처를 문질렀다. “그래.” 이안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자신의 상태를 반추했을 때 피 정도는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물었다. “사람의 피였습니까?” 케이트가 깜짝 놀라 그의 손을 잡았다. “아니. 인간들이 먹는 고기였네.” 그렇다면야. 이안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별일 아닌 게 아니다. 짐승이 마력을 많이 보유하는 건 인간보다 불가능하다. 짐승이 가진 마력으로 괴물을 잠재우려면 어마어마한 수의 짐승이 필요했다. 이 일주일 동안 이안이 먹은 고기는 소 열 마리, 돼지 열다섯 마리에 닭이 오십 마리에 달했다. “자네는 지금까지 다른 생명체의 피를 마신 적이 없다는 거지?” “네.” “흐음.” 에녹은 손을 들어 턱을 쓰다듬었다. 그가 알던 마력 흡수자와는 약간 달랐다. 마력 흡수자는 주기적으로 마력을 흡수해야 한다.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 그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케이트가 끼어들었다. “아저씨, 혹시라도 앞으로 이안이 그런, 상태가 되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 않을까요?” “괴물, 아니 마력흡수자 앞에 너와 소가 있으면 반드시 너를 택할 거다.” 케이트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이안은 그런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그녀는 소파 등받이에 등을 대고 쿠션을 끌어안았다. “로엔 경은 운이 좋은 경우야. 우리가 그를 막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음에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단다.” “하지만,” 에녹의 입에서 또다시 이안과 만나지 말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아 케이트는 몸을 내밀었다. 뭔가, 뭔가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 마녀가 저와 닿는 걸 두려워하더군요.” 담담한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이안은 남의 일인 것처럼 말했다. “저를 찌를 때 최대한 제가 닿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 맞아요.” 케이트 역시 동조했다. 이안의 다리에 칼을 찔러 넣던 행동이나 그의 입에서 천을 꺼내던 동작을 떠올리면 최대한 이안에게 닿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에녹이 천천히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구나.” “무슨 이야기인데요?” “타인의 마력을 강제로 취한 자는 마력 흡수자에게 마력을 빼앗기기가 더 쉽다는 말이 있단다.” 그리고 에녹은 재빨리 덧붙였다. “확실하진 않아.” 그는 조세핀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큐바인 하우스에 하녀가 있다고 했다.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가 큐바인 하우스를 갈 때마다 데이지는 심부름이나 다른 이유를 대고 집을 나갔다. 생각해보면 큐바인 하우스에서 케이트를 위해 편지나 물건을 전달해 주러 오는 건 늘 조세핀이었다. 데이지는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 “네 하녀 말이다. 데이지라고 하는 여자.” “네.” 케이트는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데이지도 본지 오래되었다. 그녀는 아직 그녀와 이안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꾸민 사람이 데이지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상한 구석은 없더냐?” “이상한 구석이요?” 케이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데이지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제인인은 그녀를 무척이나 좋아했고 주변에 평도 괜찮았다. 뭣보다 데이지는 그녀를 도와서 마녀들을 만나게 해주었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를 보호하려다 다치기까지 했다. “좋은 사람이에요. 마녀이기도 하고요.” “자기 입으로 말하더냐? 자신이 마녀라고?” “네에.” 케이트는 솔직히 말했다. 조세핀에게 집착한 남자가 큐바인 하우스에 침입했을 때 데이지 앞에서 마법을 사용했노라고. 그걸 본 데이지가 자신도 마녀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을. “네가 마법을 사용했다고?” 에녹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물었다. 그는 믿을 수 없었다. 케이트의 마력은 그가 봉인했다. 그녀는 지금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네. 제가, 저도 잘 모르겠지만, 그 방에 저와 데이지 밖에 없었는걸요. 데이지는 자신이 아니라고 했으니까요.” 그럴 리가. 에녹은 턱을 쓰다듬었다. ============================ 작품 후기 ============================ 어, 지난화가 200화였군요...음... 공지랑 이것저것 더해서 200화지 사실은 아직 200화가 아니어서 누가 말해줄 때까지 몰랐네요... 감사합니다. 우리 300화까지는 안가고 끝내봅시다! 00202 1. 상처 =========================================================================                            “네가 마법을 사용한 적이 이전에도 있느냐?” 케이트의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이안 역시 그녀를 쳐다봤다. “네. 있어요.” “그건 로엔 경과 함께 있을 때였겠지?” 엇.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에녹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그녀가 마법을 사용한 순간, 늘 이안이 곁에 있었다. 아니, 단 한 번을 제외하고. “제가 케이트의 마력을 조금씩 흡수 한다고 하셨죠.” 잠자코 있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에녹과 늦은 밤에 단둘이 대화를 할 때, 그가 그런 말을 했다. 이안은 케이트에게 독이라고. 그녀의 마력을 조금씩 빼앗는다고. 에녹은 케이트와 이안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카티야, 내가 네 마력을 봉인한 건 알고 있지?” “네.” “그 봉인은 네가 원하더라도 풀리지 않는단다. 그건 나와 닉이 합의한 내용이기도 하지.” 하지만 케이트는 몇 번이나 마법을 사용했다. 에녹은 그녀의 손을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단 한 가지 변수가 있다면, 흡수자의 존재란다.” 이안이 케이트의 마력을 흡수하기 위해 그녀에게 건 봉인을 파괴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전 아직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걸요.” 이안이 그녀의 봉인을 파괴했다면 케이트는 계속해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녀가 마법을 쓸 수 있었던 건 그 순간뿐. 에녹은 끙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몇 가지 가설이 존재했지만 그건 아직 입 밖에 낼 수준이 아니다. 가장 가능성 있으면서도 불가능한 건 이안과 케이트가 서로 공명할지도 모른다는 가설이었다. 마법을 쓰려는 케이트와 케이트의 봉인을 깨려 하는 마력 흡수자로서의 이안의 능력이 서로 원하는 게 우연히 맞아떨어지는 순간 시너지효과를 보인 게 아닐까. 하지만 마력 보유자와 마력 흡수자가 공명이라? 그런 일이 가능하던가. “이 이야기는 좀 더 미뤄두자꾸나.” 에녹은 그렇게 케이트와 이안의 공명설을 뒤로 미뤄두었다. 케이트와 이안이 그런 일을 당한 후로 그는 그녀에게 그녀가 알아야 할 것들을 이야기 해주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오래 생각하고 결정이 느린 엘프의 특성이 쉽게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 내 생각엔 데이지라는 마녀가 카티야의 심장을 노린 게 아닌가 싶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에녹의 말에 케이트는 깜짝 놀랐다. “데이지가요?” 그럴 리가요! 케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데이지는 그녀를 도와줬고 심지어 목숨을 구해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에녹과 이안의 태도는 냉정했다. 두 사람은 묵묵히 케이트가 진정되길 기다렸다. “하지만 데이지는, 절 도와줬어요! 마녀들과 만나는 걸 도와줬는걸요? 뭐하러,” 정신없이 떠들어대던 케이트의 입이 멈췄다. 그녀는 에녹을 쳐다봤다. “마녀는 네 마력이 봉인되어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구나. 어떻게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에녹은 잠시 말을 멈추고 이안을 쳐다봤다. 두 사람이 공명한다면, 그리고 공명하는 순간 마녀가 두 사람을 봤다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케이트가 엄청난 마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봉인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안이 그것을 깰 수 있다는 것을. “그럼, 저와 이안을 납치한 건,” 케이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안이 피를 흘리게 해서 괴물로 만든 건 그녀와 이안이 죽길 바라서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마법을 쓰는 건 항상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마녀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알았던 게 분명하다. 케이트의 목숨을 위협하면 그녀가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이안.” 케이트는 이안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이 이안의 무릎에 닿았다. 그는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봤다. “미안해요.” 그녀 때문이다. 이안이 이런 꼴을 당한 것은. 케이트가 아니었다면 이안은 평온하게 살았을 것이다. 두 다리가 찔리고 자기 스스로 자해하지 않았어도 됐다. 케이트의 가슴에 자책이 가득 찼다. “나 때문이에요.” 이안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의 어깨에 댄 붕대를 보고 케이트가 눈물을 글썽였다. 초록색 눈동자가 색이 번진 것처럼 흐려졌다. “네 탓이 아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무슨 말을 뭐라고 해야 할 지 몰라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신의 손이 케이트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것을 깨닫고 손을 뗐다. “너를 노리는 마녀가 나쁜 거지.” 마녀. 케이트의 눈에 눈물이 싹 사라졌다. 이안은 좀 신기한 기분으로 케이트의 얼굴을 응시했다. 죄책감으로 흐려졌던 눈동자가 분노로 선명해졌다. “그 마녀가 데이지가 확실한가요?” 에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사람도 뼈 위에 가죽을 씌워 놓은 듯한 외모의 마녀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어렵지만 그게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을법한 외모인 데이지일 거라고 생각하기란 더더욱 어려웠다. 케이트는 다른 사람들처럼 마녀라면 노파거나 엄청난 미인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로는 에녹의 말이 이해가 되지만 마음으로는 납득이 되질 않는다. “안다. 아가. 그 여자와 몇 달을 살았으니 아닐 거라고 믿고 싶겠지.” 케이트는 힘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데이지가 마녀라니. 그래서 아저씨가 수상한 점이 없느냐고 물어보셨던 걸까. 그녀는 에녹을 한번 쳐다보고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데이지는 절 구하기 위해 칼에 찔리기까지 했는 걸요.” 처량한 목소리에 에녹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게 마녀의 계획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케이트의 신뢰를 두껍게 하기 위해 일부러 찔렸을 것이다. 그러나 케이트에게 그런 이야기를 굳이 해야 하는 걸까. 케이트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고 타인에 대한 호의를 가지고 있다. 알라나데일에서 험한 일을 겪고 에바니엘에 와서 이안과 몇 가지 사건을 겪었다 해도 케이트의 기본 심성은 변하지 않았다. 에녹은 그런 그녀를 지켜주고 싶었다. “아가, 이미 코트 양이 이야기했단다. 데이지라는 하녀가 그녀를 속여 저주를 걸었더구나.” “저주요?” 생각해보니 조세핀에 대해서 잊고 있었다. 케이트는 그녀가 보낸 친척 집으로 간다는 편지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조세핀이 나쁜 상황에 부닥쳐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저주라니, 무슨 저주요?” === 저주는 풀렸다. 하지만 저주가 풀렸다고 해서 모두가 행복한 건 아니다. 조세핀은 끙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몸이 무겁고 관절이 아팠다. 그녀는 물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세수를 마치고 숄로 머리를 둘둘 감았다. “아침 드세요.” 방 밖에서 제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년은 한참을 기다렸다가 끼익하고 문이 열리자 재빨리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조세핀의 얼굴을 보면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기 때문에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나았다. 어두운 방 안과 달리 복도는 빛이 들어와 밝았다. 햇빛 아래 주름진 조세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는 밝은 것에 익숙해지느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다. 백발로 변한 머리카락이 몇 가닥 빠져나와 있었다. “잘 주무셨어요?” “잘이 아니라 안녕히.” 제인의 말투를 고쳐주는 조세핀의 목소리는 노인의 목소리였다. 아직도 낯선 자신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욕심을 부린 죗값이다. 이야기에도 있지 않은가. 욕심을 부린 처녀가 순식간에 추하게 늙었다는. “손, 잡으세요.” 제인이 손을 내밀었다. 조세핀 혼자서 내려가기엔 계단이 좀 힘들기 때문이다. 소년의 손을 잡은 손 역시 노인의 손이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고작 한 층을 내려왔을 뿐인데 조세핀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손에 배어 나온 땀을 닦으며 그녀는 앞으로 일 층에 있는 거실에서 자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으어...저녁먹고 미드보다가 잠들었어요. 청색광차단 프로그램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그런거 잠이 참 잘오네요... 00203 1. 상처 =========================================================================                            마녀는 지붕 위에 서서 멀리서 보이는 레인포레스트 저택을 향해 이를 갈았다. 멍청하고 쓸모없는 계집 같으니. 마녀는 케이트의 빨간 머리를 전부 쥐어뜯고 싶은 충동에 주먹을 쥐었다. 강제로 흡수한 생명력 덕에 손의 바스라짐이 느려졌다. 하지만 이건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고작해야 유예되는 것 뿐이다. “그 마력만 있었다면…!” 마녀는 피토하듯 중얼거리고 고개를 숙였다. 원통하다. 원통하고 또 원통했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그 마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순수하고 강력한 마력을. 마지막 순간 괴물이 이상한 짓을 하는 바람에!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그게 최후의 방법이었다. 마녀는 골목으로 여자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소리 없이 그녀의 뒤에 내려앉았다. 미미한 마력을 가진 여자였지만 지금으로써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소원을 들어주지.” 여자는 갑자기 들린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가 마녀를 발견하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미친 사람이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원은 그거지? 예쁜 옷을 입는 거.” “뭐?” 그야 예쁜 옷을 입고 싶기는 하지만 그건 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바라는 거 아닌가? 여자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녀의 옷이 화려한 드레스로 변했다. “어머!” 여자는 기뻐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몰라 중얼거렸다. 반들반들한 천은 희미한 가로등의 불빛을 받아 빛났다. 저도 모르게 드레스를 내려다 본 여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설마, 마,” 여자의 말은 이어지지 못하고 끝났다. 마녀의 손이 여자의 가슴에 파묻혀 있었다. 여자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천천히 마녀의 팔이 가슴에서 빠져나가면서 그 손에 두근거리는 심장이 쥐어져 있었다. “소원을 들어줬으니 대가를 줘야지.” 키키키. 그렇게 웃으며 마녀는 손에 쥔 심장을 그대로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손에 묻은 살점과 피까지 아깝다는 듯 핥은 다음에야 마녀는 어깨를 펴고 목을 좌우로 돌렸다. 기운이 난다. 마력과 생명력이 손끝까지 흘러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부족해.” 마녀는 자기 손을 쪽쪽 빨며 중얼거렸다. 그 빨간 머리의 마력을 차지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 이런 꼴로 있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다시 이를 드득 가는 소리가 조용한 골목에 울려 퍼졌다. 마녀는 골목에 쓰러진 여자의 시체를 치우려고도 하지 않고 비틀비틀 자신의 아지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빨간 머리….” 그녀의 마력만 있었다면. 분노 때문에 주먹이 쥐어졌다. 마녀가 가질 수 없다면 아무도 가질 수 없다. === “조세핀!” 제이드는 제인이 문을 열자마자 안으로 들어서며 외쳤다. 그는 현관을 둘러보다가 제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니? 조세핀은 어때?” “어, 음….” 제인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조세핀이 노파가 됐다는 걸 아는 사람은 제인뿐이다. 조세핀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제이드뿐 아니라 에녹에게도. 그녀는 자신의 상태가 욕심을 부린 대가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다행히 그녀가 하는 일은 사람을 만날 필요도, 밖을 나갈 필요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조세핀 위에 있지?” 제이드가 소년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계단을 올랐기 때문에 제인은 깜작 놀라서 그의 뒤를 따랐다. 어쩌지? “조세핀! 나와 봐!” 제이드는 그녀의 방문을 쿵쿵 두드리며 소리쳤다. “다음에 이야기 하자고 했잖아. 지금이 다음이야.” 쿵쿵쿵 두드리는 소리에 조세핀은 깜짝 놀라 황급히 일어났다가 끙하고 신음을 흘렸다. 갑자기 일어난 탓에 허리가 지끈 하고 아팠다. 제이드라면 다음에 이야기 하자고 했으니 진짜로 다음에 이야기 할 거라고 각오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마법이 풀리고 대가를 내기 전의 이야기다. 이런 모습으로 제이드의 앞에 서고 싶지 앟았다. “다, 다음에.” 방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묘하게 쉰 것 같아서 제이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 어디 아파?” “아니야.” “목소리가 이상한데.” 사람 목소리는 그렇게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조세핀은 제이드의 예리함에 혀를 내둘렀다. “조. 나와 봐.” “다음에 만나. 돌아가 줘.” 다음에 언제? 조세핀은 대답하면서도 그 생각에 숨이 막혔다. 언제 만난다는 말인가. 이 모습을 하고? 절대로 만날 수 없다. 무엇보다 조세핀이 두려운 건 자신이 수명이 어느 정도인가 였다. 외모만 노인으로 변한 걸까, 아니면 수명까지 줄어들어 버린 걸까. 이 모습으로 죽을 때까지 산다면 그건 어느 정도일까. 몇 년? 몇 십 년? 생각할 게 너무 많다. “조.” 화난 듯한 제이드의 목소리에 조세핀은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 아픈데 자꾸 나오라고 하는 제이드에게 화가 났다. “다음에! 다음에 보자고! 다음에 오란 말야!” 이렇게 소리를 친 것만으로도 숨이 차서 헐떡이게 된다. 조세핀은 우울하게 생각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앗 하고 소리치는 게 들렸다. 조세핀이 소리치자 아무리 제이드라 해도 화가 치솟았다. 누가 화낼 차례인데? 그는 울컥해서 뒤로 물러났다가 다리를 휘둘렀다. “앗!” 제인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쾅!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가 제이드가 다시 걷어차자 우지끈 하고 문에 구멍이 났다. “뭐, 뭐하는 거야?” “안 열면 부수고 들어갈 거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이드가 다시 다리를 들었을 때 조세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놀라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화 내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게 아니라? 그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알겠다고 대답했다. 다시 머뭇거리는 시간이 지나고 조세핀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픈 것도 아니면 왜 안 나온 거냐고 화를 내려 했던 제이드의 입이 조세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얼어붙었다. “놀라지 않겠다고 했잖아.” 주름진 얼굴에 눈물이 글썽였다. 제인은 조용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눈치 빠른 소년은 자신이 있을 장소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조세핀?” 조세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놀라지 않겠다고 약속했지. 반사적으로 부인하려던 제이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놀랐다. 놀라지 않을 리가 없잖아. “너, 이게 무슨 일이야?” 조세핀은 안으로 들어가서 숄을 찾았다. 백발이 된 머리카락과 주름진 얼굴. 한번도 자기 얼굴이 그리울거라 생각한 적이 없는데 그리웠다. “조.” 제이드가 그녀를 따라 들어왔다. 방 안은 어두침침했다. 밝은 곳에서 보이는 자신의 손이 보고 싶지 않아서 조세핀은 초 하나만 켜고 생활하고 있었다. “욕심 부린 대가지, 뭐.” 애써 마음을 다스린 그녀가 비아냥거렸다. 욕심 부려서 그렇다. 내 주제에 그런 미모를 바래서 그렇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제이드의 질문에 조세핀은 침대에 걸터 앉았다. 제이드는 그녀의 책상 의자를 끌고와 맞은 편에 앉았다. 조세핀은 에녹이 케이트와 이안을 구하고 난 다음부터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케이트와 이안을 구하는 것을 보고 큐바인 하우스로 돌아온 조세핀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이런 모습이 되어 있었다. “벌 받는 거야.” 나직하게 내뱉는 말이 제이드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 작품 후기 ============================ 제가 지금 밖이라...오타 등등은 돌아가서 수정하겠습니다. 다음 주에 만나요~ 00204 2. 과한 대가 =========================================================================                            용병은 급하게 말을 달리던 남자가 그의 앞에서 멈추자 자세를 고쳤다. 이 동네는 저렇게 말이나 마차를 빠르게 달리는 사람이 없다. 그는 말에서 내리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에 유례없이 마차를 빠르게 달려서 왔던 남녀 중 한 명이다. 제이드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물었다. “레인포레스트 경은 계십니까?” 미리 약속하지 않은 방문이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당장 조세핀의 일로 머리가 가득했다. 그는 용병이 안에 들어가 방문을 알리는 것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들어오시랍니다.” 문이 열렸다. 제이드는 말을 탄 채 들어서려다 멈칫하고 말에서 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말을 탄 채 빠르게 들어가고 싶지만 에녹이 엘프라는 것에 생각이 쏠렸다. 엘프니까 말을 타고 들어가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생각이 그를 말에서 내리게 만들었다. “어서 오게.” 에녹은 서재에서 그를 맞이했다. 응접실은 손님이 올 예정이 없었기 때문에 불을 피우지 않아 썰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류를 정리하며 제이드를 맞이했다. “나가보지 못해 미안하네. 방문할 줄 몰라서.” 미리 방문을 알리지 않았다는 은근한 비난이었으나 제이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그는 에녹이 자리에 앉으라고 말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차를 가져왔습니다.” 집사가 문을 열고 다과를 내려놓았다. 제이드는 그가 나갈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급하게 찾아온 이유가 뭔가?” 집사가 나가자 에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이드는 목이 말라서 차를 홀짝 마셨다가 뜨거움에 인상을 썼다. “조세핀, 코트 양의 일로 왔습니다.” 에녹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마녀의 꼬임에 넘어가 아름다운 외모를 받았던 여자. 그는 조세핀에게 그리 좋은 마음이 없었다. 마녀에게 속는다는 건 그의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본인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 노력 없이 뭔가를 바라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대가가 없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순진하거나, 대가가 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멍청하거나. 에녹은 어느 쪽이든 둘 다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조세핀은 케이트에게 피해를 줬다. “무슨 일인가.” 그는 자신의 잔을 집어 들며 모른 척 물었다. 조세핀을 봤을 때 이미 예상하기는 했다. “조 아니, 조세핀을 도와주십시오.” “무엇을 말인가.‘ “조세핀이, 마녀의 저주에 걸린 것 같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에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세핀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제이드는 케이트를 구하는 데 도움을 줬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호의적으로 말했다. “그 아가씨는 원래 마녀의 저주에 걸렸던 걸로 아는데.” 조세핀의 예쁜 외모를 말하는 거다. 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지금 완전히, 그러니까…, 조를 한번 보시면 아실 겁니다.” “그 코트 양은 오지 않은 것 같네만?” 조세핀은 에녹에게 가자는 제이드의 말을 거부했다. 자신의 상태가 대가를 받은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제이드는 그냥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조가, 그러니까….”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제이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그녀의 말대로 대가라고 해도 너무 가혹하다. 조세핀은 고작 몇 주 예뻐졌을 뿐이다. “나이를 먹었겠지.” 에녹의 말에 제이드의 눈이 커졌다. 그가 몸을 앞으로 내미는 바람에 테이블 위에 있던 접시가 달그락하고 서로 부딪쳤다. “아, 알고 계셨습니까?” “마녀가 원하는 건 마력이니까 말이야.” 마력은 생명력. 마력이 고갈된 마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늙어 죽는다. 마력이 없는 조세핀에게서 마력을 받으려면 그녀의 생명력을 받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녹이 착각하는 게 한 가지 있었다. “마력을 잃은 것만으로 그렇게 늙는 겁니까?” “코트양은 마력이 없으니 생명력을 가져갔겠지.” “고작 몇 주 예뻐진 것만으로 그렇게 늙는 건 너무 하잖습니까!” “그럼, 마녀의 소원이 아무 대가도 없을 거라 생각했나?” “하지만,” 제이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에녹의 말이 맞다. 냉정하지만 사실이다. 그도 조세핀에게 화가 나지 않았던가. 그 화가 사그라진 건 노파가 되어버린 조세핀을 봤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가혹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 지속해서 화를 내는 건 쉽지 않다. “그렇다고 그렇게 늙어버리는 건 너무 하잖습니까.” 번명처럼 중얼거리는 말이 에녹의 주의를 끌었다. 그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렇게 라니?” 제이드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완전 노파가 됐다고요. 그건 너무 하잖아요.” “노파가 됐다고?” 어라. 에녹이 처음 듣는다는 목소리라 제이드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에녹은 조세핀이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을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마법은 공짜가 아니니까. 하지만 노파가 될 정도라니? 그건 과하다. “네. 노파가 됐습니다. 혼자 힘으론 계단도 내려갈 수 없을 정도예요.” 그의 말에 에녹은 턱을 쓰다듬었다. 그 정도로 나이를 먹었다는 건 마녀가 조세핀의 생명력을 과도하게 가져갔다는 말이다. 그건 등가교환의 법칙에서 어긋난다. 마녀가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지. 에녹은 그렇게 생각했다. 조세핀의 소원을 들어준 대가로 가져간 생명력을 제외하고 더 가져간 생명력 부분에 대해서는 마녀에게 또 다른 등가교환의 법칙이 이뤄진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에녹이 관심을 보이자 제이드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그는 어떻게든 조세핀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글쎄….” 확실하지 않은 방법이라 에녹은 말을 아꼈다. 가장 좋은 것은 마녀에게서 조세핀의 마력을 빼앗아 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게다가 가능하다 해도 에녹은 조세핀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았다. 조세핀이 불쌍하다고는 하나 자업자득이다. 그녀 때문에 이안과 케이트가 위험했다. “그럼 제 수명을 나눠줄 수는 없습니까?” 에녹이 미적거리자 제이드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자신의 생명이라도 나눠줄 수 있다면. 그런 행동에 에녹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진심인가?” 제이드는 진심이었다. 자신의 생명을 나눠줄 수 있다면. 조세핀이 사라지고 그는 조세핀의 빈자리를 절감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말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자신이 그녀와 그 정도 관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슬펐다. 조세핀이 마녀의 꼬임에 넘어간 것도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미가 죽고, 힘들었던 건 제이드뿐만이 아니다. 딸을 잃은 부모도 힘들었을 테지만 언니였던 조세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조세핀의 부모는 에이미가 죽은 후 모든 잘못을 제이드에게 돌릴 정도로 에이미에 대한 사랑이 어긋난 사람들이었고, 그걸 알면서도 그는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신경 쓰지 않았다. “조가 그 정도로까지 몰린 데에는 제 잘못도 있습니다.” 제이드의 말에 에녹은 한참이나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조세핀은 자업자득이라는 게 에녹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구하려는 제이드의 필사적인 행동은 그런 에녹의 마음을 녹였다. “인간의 그런 부분을 좋아하지.” 그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멍청하고 이기적이었던 조세핀. 하지만 그런 조세핀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나눠주겠다는 제이드의 행동으로 보아 조세핀이 그저 멍청하고 이기적이기 만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트 양을 좀 만나봐야 할 것 같네.” 제이드의 얼굴이 환해졌다. “도와주실 겁니까?” “약조할 수는 없네. 일단 만나보고 이야기하지.” 그걸로도 충분하다. 제이드는 케이트와 이안을 구하던 날 에녹의 능력을 봤다. 그는 그 폐허 속에서 손쉽게 이안과 케이트를 빼내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 작품 후기 ============================ 오랜만이...인가요? 어제 갑자기 쉬어서 죄송합니다~ 감기기운때문에 안좋아서... 어제 좀 쉬었더니 괜찮아 졌습니다. 근데 오늘 업뎃 시간되니까 또 머리가 아픈 이유는...? 아마 휴재 공지나 이런건 트위터를 통해서 알릴것 같아요. @tw_kiarne 입니다. 표지 변경했습니다. 김설마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 원본은 제 뜰에 가면 있으니 가서 보세요! 여기까지 보신 분들이라면 아, 저거! 하고 아실만한 장면입니다. 00205 2. 과한 대가 =========================================================================                            “진짜 내가 해도 되는 거예요?” 케이트는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작은 칼인데 무게가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 이거 원래 이렇게 무거웠나? 그녀는 손에 쥔 칼을 한번 쳐다보고 다시 이안의 얼굴을 쳐다봤다. “사람을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이 저택의 사용인들은 이안이 괴물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하녀들은 물론이고 하인들도 가능하면 이안에게 가까이 가지 않으려 했다. “이발사를 부르면 안 돼요?” “싫다.” 대답 한 번 단호하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이 저렇게 싫어하는데 불러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내가 해도 괜찮겠어요?” “그래.” “피날지도 몰라요.” “괜찮다.” 상처 날지도 모르는데. 케이트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중얼거렸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이 남자는 대체 뭘 믿고 맡긴 걸까. “다쳐도 몰라요?” 그렇게 말해도 케이트는 이안이 다치면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다.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턱을 들어 올리고 눈을 감았다. 하. 미치겠네. 케이트는 거뭇거뭇하게 올라온 이안의 턱을 보며 마지막까지 망설이고 있었다. 손에 쥔 것은 작은 면도용 칼. 그리고 협탁에 뜨거운 물이 식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뜨거운 물에 수건을 담갔다가 물기를 짜고 그걸 이안의 얼굴에 올렸다. “뜨거워요?” 당연하게도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기도 힘들 것이다. 뜨거운 수건이 입 위에 올라가 있으니까. 잠시 두라고 했겠다. 케이트는 기다리는 동안 비누로 거품을 만들었다. 수건을 치우고 거품을 꼼꼼히 바르면서 케이트는 이안의 얼굴을 관찰했다. 눈 감고 있으니 날카로운 인상이 덜하다.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 흐트러져 있었다. 머리카락이 좀 자랐나. 케이트는 따듯한 피부 위에 거품을 꼼꼼하게 바르며 생각했다. 심하게 다친 흔적이 얼굴에도 남아있었다. 눈 밑이 조금 거무스름하다거나, 턱이 야위었다거나. “해요?” 호박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케이트는 가볍게 숨을 들이켜고 면도칼을 그의 목에 갖다 대었다. 다치면 어떻게 하지. 그런 고민과 함께 칼날을 위로 조심스럽게 문질러 올리자 짧은 수염이 듬성듬성 깎여 나왔다. “어.” 이거 나름 재미있네. 몇 번 칼을 움직이자 감이 잡혔다. 좀 더 깔끔하게 면도를 해주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케이트는 의욕적으로 이안에게 매달렸다. 이안은 열중하는 케이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면도라는 건 이발사에게 맡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 작은 칼은 생각보다 훨씬 날카롭다. 목을 한 번 휙 그으면 그대로 치명상이다. 그래서 이발사는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이발사에게 그다지 맡기지 않는 편이다. 살면서 그 정도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자기 손으로 면도했다. 일주일이 넘도록 레인포레스트 저택에 머물면서 자란 이안의 턱수염을 먼저 지적한 건 케이트였다. 그녀는 하녀였던 기억을 살려 면도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이안은 그녀에게 부탁했다. “이안, 몸을 좀,” 그렇게 말하던 케이트는 끙끙대다가 그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이안의 키가 큰 탓에 자세가 불편했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케이트의 허리를 잡으려 손을 내밀었다가 손이 묶여있는 것을 깨닫고 멈췄다. 왼팔은 움직이려 할 때마다 어깨에 찌르르한 통증이 피어올랐다. 통증이 있어서 다행이군.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통증이 없었다면 이미 그의 왼손은 케이트의 몸에 닿아 있었을 것이다. “어때요?” 한 시간이나 걸려서 면도를 끝낸 케이트가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물었다. 그의 몸에 매달려서 면도하는 건 꽤 힘들었다. 그녀는 이안이 팔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 얼굴을 붉혔다. “어, 어때요?” 케이트는 그에게 뺨의 감촉을 알려주기 위해 자기 손으로 그의 뺨을 문질렀다. 까슬까슬한 느낌은 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게 좀 부끄러웠다. 어쩐지 쓰다듬는 것 같아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뺨을 좀 세게 문질렀다. “이안?” “글쎄.”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호박색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 같아 케이트는 숨 쉬는 것도 잊고 멍하니 바라봤다. “케이트.” “네?” “손이 멈춰 있는데.” 아.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아직도 이안의 무릎 위에 올라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미안해요.” 무거웠겠네요.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려왔다. 심지어 그의 가슴에 기대고 있었다. 케이트는 능숙하게 이안의 셔츠 안쪽을 열어 붕대에 피가 배지 않았나 확인했다. 그 일련의 행동이 너무 거침없어서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 왜요?” 가끔 이 여자가 일부러 이러는 건지 몰라서 이러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이안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케이트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젖은 수건으로 그의 얼굴에 묻은 거품을 닦아냈다. 꼼꼼히 한다고 했는데도 덜 깎인 부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아, 여기 남았는데.” 턱 쪽에 거뭇하게 아직 남아 있었다. 케이트는 별생각 없이 면도칼을 들어 그 부분에 갖다 댔다. “헉!” 날카로운 날이 닿는 순간 피가 스르르 베어 나왔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수건으로 이안의 턱을 꾸욱 눌렀다. 이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미안해요!” 젖은 수건인 탓에 피가 쉽게 물들었다. 케이트는 분홍색으로 번진 수건을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이안의 턱을 문질렀다. 이쯤 되면 피를 막는 게 아니라 더 짜는 수준이다. “그렇게 해서 죽겠나?”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한참 후에나 이해했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못됐어. 케이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수건을 떼어냈다. 가볍게 베인 수준이라 피는 금세 멎어 있었다. 결국 이안의 턱은 약간 부족하게 면도가 되었다. 아쉽지만 더 칼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아 케이트는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닦아내고 목에 건 천을 벗겨주는 수밖에 없었다. “끝났어요. 그리고 미안해요.” 이안은 턱을 만져보려다가 멈췄다. 오른손이 묶여있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왼손으로 턱을 만져보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정도면 됐어.” 애초에 케이트에게 깔끔한 면도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처음 하는 건데 이 정도면 꽤 잘했다. 턱의 상처는, 그의 용감한 도전에 대한 대가라고 치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케이트가 재빨리 그의 가슴을 지탱했다. 거의 다 낫기는 했지만 두 다리를 다쳤기 때문에 그녀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부축하고 있었다. 왼쪽 어깨를 다친 데다가 오른손은 늘 묶여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안은 케이트를 내려다보고 그녀가 자신을 부축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가 조금만 더 기댄다면 케이트는 그대로 무너질 것이다. “침대로 갈 거죠?” 케이트는 순수한 의도였다. 하지만 이안은 아니었다. 그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어?” 이안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그가 넘어진다고 생각한 그녀는 오히려 이안을 부축하기 위해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녀의 착각은 입술이 거의 닿을 때가 되어서야 깨어졌다. 거부하기에도 이미 늦었다. 그녀가 눈을 감았을 때 펑하는 소리가 나더니 에녹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헴.” “헉!” 케이트는 깜짝 놀라 후다닥 뒤로 물러났고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방 안에는 그와 그녀 둘밖에 없었다. 다들 이안 곁에 오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에 문을 열어놓고 반대쪽 방에 마사가 있는 것으로 타협하고 있다. 케이트는 주변을 살피고 에녹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이안을 쳐다봤다. “방금, 그거 아저씨 목소리 맞죠?” 이안은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대답했다. “그래.” “당신도 들은 거죠?”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열린 문 사이로 마사가 고개를 내밀었다. “부르셨어요?” “아니요, 안 불렀는데. 마사, 혹시 아저씨가 지나가셨어요?” “주인님이요?” 마사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을 이었다. “아뇨. 안 지나가셨는데요. 왜요?” 내가 착각했나. 케이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안을 침대로 부축하고 돌아섰다. “책 가져올까요?” 케이트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방 밖으로 나가버리자 이안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지식한 노인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이 수요일이죠? 좋아.. 이제 이틀남았어... 00206 2. 과한 대가 =========================================================================                            그게 마법이라는 것을 케이트가 깨달은 것은 비슷한 일이 한 번 더 일어난 다음의 일이었다. 이안의 상처를 봐주던 도중이었다. 더러워진 거즈를 버리기 위해 하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 순간 또다시 에녹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헴!”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주변을 살폈지만, 여전히 에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침 거즈를 버리고 돌아온 하인에게 물었지만 이 근처에서 에녹을 본 적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설마.”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의 마법은 아니겠지.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맞을 것 같다. 이건 너무 하시잖아. 사생활 침해다. 케이트는 주먹을 꼭 쥐었다. 참을만했던 아저씨의 보호가 너무 심해졌다. “아저씨 어디 계신지 알아요?” “주인님께선 지금 서재에 계십니다.” “이안, 잠깐 있어 봐요.” 이안은 씩씩대는 케이트를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어쩌려고?” “말씀드려야죠! 이건 너무 하셨다고!” “케이트.” “왜요!” 울컥한 케이트를 보고 이안은 피식 웃었다. “뭐라고 말씀드릴 거냐.” “뭐라고 라뇨. 그야 당연히 이런 거 그만하시라고,” “이런 게 뭔데?” “아저씨 목소리가 나는 거요.” “언제 목소리가 났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할 거냐.” 그야! 거기까지 말하려던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것 보라는 듯 이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에녹은 이런 부분도 예상하고 그런 마법을 걸었을 것이다. 케이트와 이안은 그에게 항변할 수가 없다. 하아. 어이가 없어서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미안해요, 이안.” 이안은 케이트를 구하기 위해 자해했다. 에녹도 그걸 알고 있다. 케이트가 말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에녹이 이안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에녹이 건 마법을 보면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안은 시무룩해진 케이트에게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가 멈췄다. “케이트.” “네?” 이안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이만 돌아가야겠다.” “네? 어디로요?” 여기가 이안의 방인데? 케이트는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하인은 눈치 빠르게 재빨리 어질러진 방을 정리하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는 문을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그의 눈빛에서 케이트는 그가 말한 돌아간다는 의미가 큐바인 하우스를 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직 다 낫지도 않았잖아요.” “이 정도면 움직일 수 있어.” “상처는 누가 봐주고요?” “의사에게 오라고 하면 된다.” “거기 지금 데이지 아니, 하녀도 없는 거 알죠?”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침묵에서 그래도 돌아가겠다는 고집을 읽은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큐바인 하우스에는 지금 제인과 조세핀 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조세핀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녀는 조세핀이 저주에 걸렸다는 것밖에 모른다. 에녹의 만류로 만나러 가지도 못했다. 제이드 역시 만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 했다. 왜일까. 케이트는 잠시 생각했다. 조세핀이 그녀를 만나기 싫어하는 걸까. 어째서. 어떤 저주이기에? 그런 그녀의 생각을 가르고 이안이 말했다. “여긴 내 집이 아니야.” “제 집도 아니에요.” “그런가?” 호박색 눈동자가 마치 마음을 꿰뚫는 것 같았다. 케이트는 시선을 돌렸다. 여긴 그녀의 집이 아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케이트는 처음으로 반문했다. 나는 이 집을 나갈 생각인가? 에녹은 그녀가 결혼할 때까지 곁에 두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녀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가 말을 하진 않았지만 케이트와 만날 수 있는 남성을 제한하는 데에서 느끼고 있었다. 이안은 입을 다물었고 케이트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쩐지 이안이 좀 멀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숨을 쉴 때마다 하얗게 김이 올라왔다. 소녀는 하나도 팔지 못한 바구니를 내려다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추워서 몸에 감각이 없다. 하지만 그보다 걱정되는 건 오늘 성냥을 하나도 팔지 못했다는 점이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꽃을 팔고 겨울에는 성냥을 판다. 고층거리의 여자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앞으로 이삼 년 만 더 지나면 사창가에 보내버린다는 린젤의 목소리가 떠올라 소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몸을 파는 것만은 하고 싶지 않다. 그녀의 가장 큰 소원은 린젤과 그의 늙은 남편이 그녀를 사창가에 팔아버리기 전에 어느 집 하녀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하녀로 들어가는 것조차 고층거리의 아이들에게는 사치나 다름없다. 하녀 일도 쉬운 건 아니라고 이야기 들었지만 상관없다. 이른 아침 일어나 언 발로 사람들에게 성냥을 파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리고 사창가에서 손님을 받는 것보다는 더더욱 나을 것이다. 차라리 빨리 자라서 사창가로 가는 게 낫겠다고 하는 여자아이도 있었지만 소녀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언젠가 자기 집을 갖고 누군가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이렇게 추운 겨울에 작고 낡았어도 따듯한 부엌에 서서 스튜를 끓이고 싶었다. “흑.” 따듯한 스튜와 주황빛 부엌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소녀는 재빨리 눈을 문지르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성냥을 몇 개 팔지 못했다고 린젤에게 호되게 혼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시각은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오늘은 더 이상 성냥을 팔 가능성이 없었다. 지난번처럼 마음씨 좋은 손님을 만나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소녀는 재빨리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지워냈다. 그런 운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붉은 머리카락에 예쁜 드레스를 입은, 드레스만큼이나 예쁜 여자였다. “린젤, 저예요.” 소녀는 린젤이 사무실이라고 부르는 낡은 건물로 들어서며 말했다. 구두쇠인 린젤은 저녁때도 초를 켜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책상에만 초를 하나 켜놓을 뿐이고 난로의 불도 아주 조금만 지피고 자기가 그 앞에 앉아 있었다. 린젤에게 혼나는 동안 난로의 불을 조금이라도 쬘 수 있지 않을까. 소녀는 희미한 희망을 품고 천천히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같은 붉은 머리인데 지난번에 만난 친절한 여자와는 전혀 다른 린젤. 린젤의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소녀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난로의 불이 꺼져 있었다. 린젤은 이미 들어간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소녀는 부랴부랴 바구니에서 성냥을 꺼내 곱은 손으로 불을 지폈다. 화악하고 작은 성냥에서 불이 타올랐다. 불씨를 난로에 던져 넣고 후후 불러 불을 살린 소녀는 난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꽁꽁 언 손과 발을 비볐다. 린젤이 돌아오면 누구 마음대로 불을 지폈느냐고 혼날 것이다. 문득 떠오른 두려움에 소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누가 다가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너무 삭막하다. 마치 누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녀의 시야 한쪽에 뭔가가 걸렸다. 인형? 아니, 아니다. “린젤?” 소녀는 주춤주춤 쓰러진 여자에게 다가가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잠든 걸까. 하지만 이 추위에? “린젤?” 여전히 린젤에게서는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등 뒤에 뭔가가 살금살금 따라오는 것 같다. 고개를 돌리면 그 뭔가가 덤벼들 것 같은 공포감. 소녀는 억지로 린젤에게 다가갔다. 확인하고 싶지 않은데 확인해야 할 것 같은 기분. “린젤, 자요?”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녀는 린젤의 팔을 짚었다가 그 서늘함에 놀라 손을 뗐다. 팔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했다. “!” 죽었다. 소녀는 정신없이 밖으로 뛰어 나갔다. 사무실 안에 그대로 있다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입을 벌리고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크헉, 콜록, 콜록, 콜록!” 밖에 나가자마자 폐에 차가운 공기가 들어가는 바람에 밭은기침이 터져 나왔다. 소녀는 허리를 굽히고 정신없이 기침을 하다가 눈물을 토해냈다. 린젤의 죽음이 슬픈 건 아니었다. 무서웠다. 린젤의 남편에게 그녀의 죽음을 알려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소녀는 그대로 쪼그리고 앉아 엉엉 울었다. 그녀를 억압하던 린젤이 죽었어도 소녀는 자유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다. ============================ 작품 후기 ============================ 뭐가 이틀 남았냐면, 주말이요! 아싸, 이제 하루 남았다! 00207 2. 과한 대가 =========================================================================                            “어떻게, 급하시다는 일은 해결되셨나요?” “아아.” 에녹은 입에서 찻잔을 떼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다행이네요. 밀레디가 말했다. “카티야, 내 대녀에게 좀 일이 있었단다.” “어머나.” 밀레디의 눈이 커졌다. 에녹의 대녀라면 호건 가의 상속녀인 케이트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녀는 조용히 에녹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은 괜찮아. 단지,” 거기까지 말한 에녹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짜증 나는 것 같으면서도 즐거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에녹은 바쁜 사람이다. 뮈엘라가 마법을 배척한다고는 하나 모든 마법을 없앨 수는 없는 노릇. 사람들은 모르지만 뮈엘라의 오래된 건물 중에는 마법이 걸린 게 많았다. 그 마법을 풀 방법을 모르거나 풀어버리면 건물이 무너질 위험을 가진 경우도 있다. 뮈엘라에서는 결국 소수의 마법사를 관리하기로 결정했다. 마법사는 위험하다. 그러나 안 쓸 수는 없다. 그러니 국가 차원에서 마법사의 수를 조절하겠다는 것이다. 에녹은 그 방침을 반대했지만 마법사를 관리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가 도움을 주는 편이 낫다. 마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전사가 마법사를 관리하겠다며 나섰다가 마법 부의 마법사들이 전부 앓아누운 적도 있다. 그런 이유로 에녹은 꽤 바빴다. 매일 아침에 나가서 저녁때 즈음에나 돌아온다. 현재 마법 부의 마법부장도 밀레디지만 에녹이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에녹은 이안과 케이트를 떠올렸다. 이안이 케이트의 곁에 아직 남아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안이 그의 대녀를 구하기 위해 엄청난 행동을 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에녹에게 있어서 이안은 부정한 자였다. 고맙지만 가까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게 에녹의 속마음이었다. 하지만 케이트는 이안의 곁에서 떠나지 않으려 했고, 에녹은 매일 아침 입궁해야 한다. 그는 케이트와 이안을 자신의 눈 밖에 두는 것을 못 미더워 했고 이안이 케이트를 피하는 걸 알면서도 그를 믿지 않았다. “내가 그 녀석을 못 믿어서.” “그 녀석이요? 대녀분 말씀이신가요?” “대녀? 아, 아니. 카티야는 아니라네.” 그는 케이트에게 걸어둔 마법을 떠올리며 슬그머니 웃었다. 그가 건 마법은 과거 마법의 나라일 때 혼기가 찬 딸을 둔 집안에서 많이 사용하던 마법이었다. 그 당시에 그걸 우회하는 마법도 팔릴 정도로 마법에 대한 정보가 많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밀레디는 에녹의 말을 기다리다가 그가 더 이상 그 주제로 말하지 않으려는 것을 깨닫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에녹의 대녀가 별 문제 없으면 이제 됐다. “그럼 제가 부탁드린 건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될까요?” 그녀의 말에 에녹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밀레디가 부탁한 마녀의 도주에 대한 건이다. 원래대로라면 케이트와 이안이 마녀에게 속아 다친 그날 세 마녀는 수도 에바니엘을 벗어났어야 했다. “면목이 없네.” 지금 당장은 수도를 떠날 수 없다. 그는 아직도 이안에게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이안은 미심쩍은 구석이 너무 많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피나 마력을 흡수하지 않았다는 것도 그렇다. 괴물이 아닌 걸까. 에녹은 이안을 떠올리며 고민했다. 아니, 괴물이 맞다. 이안은 주변의 마력을 자연스럽게 빨아들인다. 어느 정도 숙련된 마법사라면 이안이 주변의 마력을 흡수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당장은 수도를 떠날 수 없어.” 에녹의 말에 밀레디는 음 하고 입을 닫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세 마녀는 지금도 언제 에바니엘을 뜰 수 있느냐고 물어보고 있다. 밀레디는 도와주겠다 약속했고 에녹이 도와줄 수 없다면 그녀라도 행동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에녹 역시 마찬가지. 그도 약속의 무게를 잘 알고 있다. “다른 방법을 알아보지.” 먼저 입을 연 건 에녹이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지? 마녀인 게 들켰나?”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밀레디는 조용히 말했다. 마녀들의 말에 의하면 마녀인 게 들킨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다. 상대는 괴물. 마녀라는 걸 알았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가게를 차리는 게 위험했어요.” 밀레디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게를 차리는 건 좋다. 하지만 그 가게에서 마법 용품을 파는 건 위험했다. 알음알음 마법 용품을 파는 마법사들은 꽤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장소를 고정하지 않는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찻집을 차렸다는 건 이야기 드렸지요?” 에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찻집을 차려 거기서 몇 가지 물품을 알음알음 찾아오는 부인들에게 팔았다고 했다. “하필 사간 부인의 남편이 마법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최근, 수사관이 그 아이템을 수거하고 있거든요.” 그도 알고 있는 이야기다. 엘라나데일에서 마법 아이템이 불법으로 쏟아져 나왔을 때 에녹은 데일 남작 부부의 무식함에 혀를 찼다. 마법 북을 분해해서 마법 감지가 가장 약한 곳으로 들여왔다. 마법 북은 문해하면 그 효과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분해하는 순간 발동되지 않는다면 보통 불량품이 될 수도 있다. 그걸 데일 남작 부부는 분해해서 마법 스크롤로 팔고 다시 조립해서 마법 북으로 팔았다. 뿐만 아니라 직접 마법 아이템을 제조하기도 했다. 조악한 마법아이템이라니. 알라나데일에서 그런 행위가 몇 년이나 이어질 수 있었던 게 놀라운 수준이다. “그 수사관이 그녀들이 판매한 향유를 발견했던 모양이에요.” 그 수사관? 에녹은 고개를 들었다. 수사관들이 아니라 수사관이라고 했다. 그는 알라나데일 사건을 수사한 게 이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안이 특수수사관이라는 것도. “그 수사관이 혹시, 로엔 경이더냐?” 밀레디는 고개를 갸웃했다. 로엔 경? 그녀는 마녀들에게 들은 수사관의 외모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로엔 경과 비슷하네요. 크고 검은 남자라 했거든요.” 크고 검다. 이것만큼 이안을 서술할 말이 또 있을까. 에녹은 혀를 찼다. 그가 도와주려던 마녀들이 피하려 한 존재가 이안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안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마녀들을 도와줄 수가 없다. 에녹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방법을 구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임시변통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안이 세 마녀를 만난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면 세 마녀는 현재 안전하다. 그 안전은 에녹이 이안을 붙잡고 있는 동안은 유지될 수 있다. “보내버리고 싶었건만.” 쯧하고 혀를 차며 에녹이 투덜거렸다. 이안을 눈 밖으로 내보낼 수 없는 이유가 또 생겼다. ============================ 작품 후기 ============================ 우하하하하하하 금요일입니다. 00208 2. 과한 대가 =========================================================================                            이안과 케이트는 온실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원래는 응접실에서 마실 예정이었으나 집사가 곧 에녹의 손님이 찾아올 예정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케이트는 온실에 다과를 준비했다. 이안은 이제는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찻잔을 들었다. 왼 어깨의 상처는 거의 나아가고 있었다. 에녹은 의사를 부르지 않고 본인이 직접 이안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피를 싫어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의사를 불렀다간 케이트가 곤란해진다. 다행인 건 에녹이 의술을 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식으로라면 조만간 큐바인 하우스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안은 생각했다. “이안, 케이크 먹을래요?” 케이트는 케이크를 잘라내며 물었다. 괴물에서 돌아온 후로 이안은 그다지 음식을 잘 먹지 않았다. 딱히 음식을 가리는 건 아니지만 케이트와 함께 지낼 때와 비교하면 먹는 양이 줄었다. “아니.” 이안은 케이트 손에 들린 케이크를 힐끔 보고 대답했다. 이런 겨울에 어디서 딸기를 구한 걸까. 케이트가 한 조각 잘라내는 케이크의 단면에는 딸기가 듬뿍 들어 있었다. 주인님이 아끼는 대녀를 위해 주방장은 재료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요리를 준비했다 “입맛이 없어요?” 케이트는 먹지 않겠다 했음에도 케이크 한 조각을 그의 앞에 놓으며 물었다. 폭신한 스펀지케이크 사이사이에 편으로 썬 딸기를 시럽으로 졸여 듬뿍 집어넣고 표면을 부드럽고 달콤한 생크림을 발랐다. 한 조각 먹으면 입안이 달아서 씁쓸한 홍차와 먹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래서 케이트는 그와 자신의 홍차에 아무것도 넣지 않았다. 이안은 그런 씁쓸한 홍차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아니.” “먹어봐요. 딸기가 들어가서 상큼 달콤해요.” 케이트는 어딘지 모르게 신이 나 있었다. 지나가는 말로 주방장에게 딸기 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했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만들어 줬던 것이다. 그녀는 에녹을 위한 한 조각을 남기고 나머지는 고생하는 사용인들에게 먹으라고 나눠주었다. 하녀로 일하면서 이런 귀한 디저트를 먹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라는 걸 그녀는 잘 알았다. 이안은 씁쓸한 홍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조만간 이 집을 나가야 한다. 그리고 다시 업무에 복귀해야 할 것이다. 그는 그때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알라나데일에서 팔려나간 마법아이템을 수거해야 하고 향유를 만든 마녀도 찾아야 한다. 케이트를 노린 마녀도 찾아야 한다. “이안?” 어느새 케이트는 케이크 위에 장식된 딸기를 포크로 집어 그에게 내밀고 있었다. “딸기라도 먹어요.” 이안은 물끄러미 케이트가 내민 딸기를 쳐다봤다. 아차, 입으로 받아먹으면 어쩌지? 케이트는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떠올리고 속으로 혀를 찼다. 이안이라면 포크에 꽂힌 그대로 입으로 받아먹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포크를 뺄 수도 없고.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이안이 달칵하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이안의 손이 케이트의 손에서 포크를 받아들었다. 어라. 케이트는 묘한 기분이 들어 딸기를 우물우물 먹는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왜 그러지?” 이상한 기분이 든다. 받아먹을 거라 생각했다. 그걸 노린 건 아니지만 문득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아, 주변에 보기 민망한데.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이안이 평범하게 포크를 받아들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섭섭함? 뭔가 이안이 그녀를 밀어내는 그런 허전함.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케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최근 이런 일이 잦아졌다. 이안의 행동에서 거리감을 느끼는 일이. “실례합니다.” 집사가 문 앞에 서서 말을 걸었다. 딸기를 우물우물 먹고 있던 이안과 케이트가 고개를 들었다. “주인님의 손님이 오셨는데 아직 주인님께서는 오지 않으셔서요. 어떻게 할까요?” 에녹이 없을경우 에녹과 약속한 손님이 오면 케이트가 나서서 손님을 접대하곤 했다. 에녹이 올 때까지. 케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접실에 계신 거죠?” “네. 아가씨도 아시는 분입니다.” 응접실로 가려던 케이트의 발걸음이 멈췄다. “어서 오세요.” 응접실에 앉아 초조하게 에녹을 기다리던 제이드는 케이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케이트와 그 뒤로 어깨에 붕대를 감은 이안이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아, 스미스 양.”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조세핀을 떠올렸다. 조세핀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이런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레인포레스트 경은 좀 늦으시나 보죠?” 제이드는 자연스럽게 이안과 케이트에게 다가가 두 사람의 등에 손을 대고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조세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녹이 도와줄 수 있다는 말에 제이드와 함께 이 저택에 들어왔지만 조세핀은 아직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그녀는 에녹이 자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케이트가 고생을 한 건 조세핀 탓도 있다. 전부 그녀의 잘못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조세핀은 이안과 케이트를 위험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그리고 그 이유로 에녹이 그녀를 꺼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에녹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도 껄끄러운데 케이트를 만날 위험을 무릅써야 하다니. 조세핀에게는 레인포레스트의 저택에 오는 것 자체가 상당한 고난이었다. “무슨 일이냐.” 복도로 나온 이안이 날카롭게 물었다. 제이드는 그의 등에 댔던 손을 슬금슬금 떼어냈다. 그리고 이안의 시선을 따라 케이트의 등에 닿은 손도 떼어냈다. “으음, 사실 우리는 레인포레스트 경을 만나러 온 거거든?” “그건 알고 있다.” 이안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 하긴. 제이드는 슬쩍 응접실을 뒤돌아 보고 다리를 꼬았다. 조세핀은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알리고싶어 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그렇겠지. 제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레인포레스트 경께 부탁드릴게 있어서 왔거든. 그런데 스미스 양과 네가 나온 걸 보니 경은 아직 돌아오지 않으신 모양이네.” “아저씨라면 곧 돌아오실 거예요.” 케이트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제이드를 자연스럽게 응접실로 안내하려 했다. 하지만 제이드가 움직이질 않았다. “킬리언 씨?” “아, 으음, 그게, 뭐랄까….” 제이드의 이마에서 삐질삐질 땀이 나기 시작했다. 저택 안이 훈훈하기는 하지만 땀이 날 정도로 더운 건 아니다. 이안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어디 아픈 거냐?” “어? 아니, 안 아픈데?” “그런데 왜 땀을 흘리는 거지?” “땀? 아, 그게. 더, 더우니까!” 그러더니 제이드는 으헙 하고 재킷을 벗었다. 어쩐 일로 오늘은 옷차림이 얌전하다 싶었는데 재킷 안에 받쳐 입은 조끼가 푸른색 공단이었다. “창문을 열라고 할게요.” “아, 아니, 그럴 필요는!” “저흰 괜찮아요. 겉옷을 하나씩 더 입으면 되니까요.” 상냥한 케이트의 말에 제이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에녹이 돌아왔을 때 집 안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응접실 복도가 창문을 연 탓에 찬바람이 들어왔으므로 사용인들은 다들 지하에서 나오려 하질 않았다. 추위를 그다지 타지 않는 탓에 에녹은 처음엔 집사가 겉옷을 입고 있는 걸 보고 이상하게 여기다가 그가 가볍게 기침을 하자 물었다. “지금 창문을 연 건가?” “네. 손님께서 덥다고 하셔서.” “손님?” “킬리언 씨께서 오셨습니다.” 아, 그 녀석. 에녹의 머릿속에 제이드의 경박한 얼굴이 떠올랐다. 조세핀이라는 여자가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덥다고 창문을 열다니, 이것도 저주의 일종인 걸까. 그는 겉옷도 벗지 않고 부랴부랴 응접실로 향했다. 이 날씨에 더워서 창문을 열 정도면 심각한 상황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응접실 문 앞에 코트를 입은 이안과 케이트, 그리고 조끼만 걸친 채 벌벌 떠는 제이드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다녀오셨어요?” 케이트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에녹의 목을 끌어안았다. 창문을 연 탓에 코트를 입었어도 케이트의 얼굴과 손이 차가웠다. “무슨 일이냐?” “아, 킬리언 씨가 아저씨와 약속을 했다면서요?” “왜 응접실에 안 앉아 있고?” 에녹은 차가운 케이트의 손을 감싸 쥐었지만 에녹의 손이 그다지 따듯하지 않아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여기서 가장 따듯한 건 이안이었지만 이안은 케이트에게서 약간 떨어져 있었다. “그게, 킬리언 씨가 앉아있기 싫다고 해서요.” “그래?” 에녹의 시선이 제이드와 그 뒤에 있는 응접실을 훑었다. 응접실은 그래도 훈훈한 편에 속했다. 제일 키가 큰 이안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들어가서 이야기 하지.” “엇.” 에녹이 움직이려 하자 제이드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에녹의 얼굴에 이게 무슨 짓이지?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 그게.” 제이드는 곤란한 표정을 짓고 이안과 케이트를 쳐다봤다. 여기까지 조세핀을 데리고 오는 건 힘들었다. 그 과정 중에는 케이트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조세핀을 설득하는 것도 들어 있었다. ============================ 작품 후기 ============================ 케이크가 케이트를 먹고 포크를 입고 제이크를 만나러 갑니다. ...이런 오타가 엄청 많이 나오는 이유가 뭘까요...? 00209 3. 인정 =========================================================================                            “케이크 드릴까요?” “네, 잘 먹겠습니다.” 이안은 넉살 좋게 케이크를 받아드는 제이드를 떨떠름하게 쳐다보았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덥다는 둥 서 있는 게 좋다는 둥 온갖 헛소리를 하면서 추운 복도에 서 있으려 하더니 에녹이 오자마자 이안과 케이트를 끌고 다른 응접실을 점거하고 앉았다. “뭐냐.” 퉁명스런 이안의 말에 제이드가 응?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손에든 포크로 케이크를 찍으려던 차였다. “우릴 여기로 끌고 온 이유가 뭐냐고.” 잔에 차를 다 따른 하인이 차 주전자에 덮개를 씌우고 나갔다. 케이트는 따듯한 찻잔을 감싸 쥐고 그 온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제이드 때문에 추운 복도에 서 있느라 얼어 죽는 줄 알았다. 꽁꽁 얼어붙은 손안에 따듯한 잔을 쥐니 손가락 끝이 슬금슬금 간지러웠다. “아, 음.” 제이드는 어쩔 줄 몰라 뜨거운 차를 홀랑 마셨다가 크악하고 벌떡 일어났다. 입천장이 홀랑 까진 것 같다. “괜찮아요?” 케이트가 깜짝 놀라서 제이드에게 우유를 내밀었다. 하지만 우유도 미지근하게 데운 터라 그리 도움이 되진 않았다. 그는 입을 벌리고 하아 하아하고 크게 숨을 쉬다가 간신히 자세를 바로 했다. “어, 음. 괜찮습니다.” 그 사이에 이미 케이트가 가져오라고 한 얼음이 도착했다. 제이드는 얼음을 한 개 입에 넣고 굴리다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 편의 꽁트를 이안이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뭐냐.” “뭐, 뭐가?” “우릴 여기로 격리한 이유가 뭐냐고.” “격리라니, 난 그저 두 사람과 오붓하게,” 흥. 제이드의 말을 자르고 이안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안.” 무례한 태도다. 케이트는 이안에게 부드럽게 지적하고 제이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리를 같이 온 손님과 떼어놓은 이유가 뭐예요?” 둘 다 눈치가 빠르다. 사실 이건 빠르다고 할 수가 없다. 에녹이 올 때까지 제이드는 두 사람을 조세핀에게서 떼어놓으려 온갖 한심한 행동을 다했으니까. 그는 자랑한답시고 꺼내놓았던 스카프를 목에 매면서 입을 열었다. “아, 사실은 이안에게 할 말이 있어서.” 이안은 찻잔을 입에 댄 상태로 그를 쳐다봤다. 그의 취향대로 설탕이나 우유를 넣지 않은 차는 씁쓸한 맛이 났다. “내가 제대로 본 건지 모르겠는데.” 제이드는 능숙하게 스카프를 묶으며 말을 이었다. “고골리를 본 것 같아.” “고골리?” “고골리요?” 케이트와 이안이 누구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야 두 사람은 잊어버렸을 만도 하다. 아니, 케이트는 이름을 듣지 못했으니 이름만으로는 모르는 게 당연했다. “지난 검투장 사건 때 도망친 범인 말입니다.” 범인? 이안의 눈이 빛났고 케이트는 어깨를 움츠렸다. 회색 머리의 남자. 그 남자에 대한 공포감이 떠올랐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검을 휘두르는 남자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다. “어디서?” 이안이 물었다. 고골리에게 가장 감정이랄 것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일 것이다. 고골리가 사라지지 않았다 해도 호 건가의 범죄를 증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가장 손해를 입은 건 이안이었다. “고층거리 쪽에서 멀지 않은 골목이었는데.” 제이드는 턱을 쓰다듬으며 어떤 골목인지 설명했다. 좀 외지고 음침한 골목이다. “수사 중인 사건 때문에 향수를 찾고 있었거든.” 그렇게 말하다가 그는 이안이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세히 설명했다. “지난번에 내가 알려준 향 말야. 여자애들 시체에서 난다던,” 거기까지 말한 제이드는 케이트를 슬쩍 살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꼿꼿하게 앉아있었다. “전 신경 쓰지 말고 이야기하세요.” “괜찮아요?” “네.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버서커 마법에 걸린 고골리와 죽은 여자아이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제이드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골목 쪽에도 약초상이 있다고 해서 들렀는데 나오는 길에 회색 머리가 쑥 지나가더라고.”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다. 나이가 들면 머리색이 회색이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머리의 높이가 묘하게 높았고 기색이 달랐다. 그는 지나가는 남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익숙한 얼굴이 거기 있었다. 어딘가 감금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로 말라있었다. 버서커 마법 때문에 그를 더 크게 봤는지도 모른다. 제이드는 잠시 익숙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가 숨을 들이켰다. 그 남자다. 불법 검투장 사건의 범인. 이름은 남자가 그의 눈앞에서 사라진 다음에야 천천히 떠올랐다. 고골리. “어딘가 갇혀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갇혀있었다고?” “응. 좀 말랐고, 더 늙었다는 느낌이었어.” 발걸음에 힘이 없었다. 얼굴을 보지 못해서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지만 뒷모습만으로도, 그렇게 수척해졌음에도 고골리에 대한 인상은 강했다. “어디로 가고 있었지?” “글쎄, 골목이라.” 얼기설기 얽힌 골목이었다. 거기서 고골리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제이드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고층거리? 아니면 외곽 쪽으로 가는 것 같은데.” “그런가.” 이안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케이트는 어쩐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안, 아직 움직이면 안 되는 거 알죠?”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케이트의 태도가 더 단호해졌다. “이안, 대답해요. 아직 움직이면 안 되는 거 알죠?” 파직파직 하고 전기가 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제이드는 침을 삼키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이안.” “뭐냐.” “아직 움직이면 안 돼요. 알았죠?” “거의 다 나았어.” “그래도, 혼자 돌아다닐 수준은 아니잖아요.” 호박색 눈동자에 불만이 어렸다. “내가 어린애로 보이나?” “어린애는 아니지만 병자죠.” “다리는 멀쩡해.” “다리가 멀쩡하면 뭘 해요. 팔 하나를 못 쓰는데.” “쓸 수 있다.” “무리하면 말이죠.” 투닥투닥 이안과 케이트의 다툼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제이드는 찻잔을 들더니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대고 홀짝이기 시작했다. === “멍청한 짓을 했군.” 에녹은 조세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냉정한 말에 조세핀이 고개를 숙였지만 그는 허락하지 않았다. 에녹의 갸름한 손이 조세핀의 턱을 단단히 잡았다. “쯧.” 혀 차는 소리가 조세핀의 가슴을 때렸다. 에녹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으로 조세핀의 얼굴을 요리조리 돌려보더니 다시 놓고 물러났다. “법칙을 무시했군.” “법칙이요?” “그래, 등가교환의 법,” 거기까지 말하던 에녹이 입을 다물었다. 이런 구구절절한 이야기까지 일반인에게 말할 필요는 없다. 조세핀은 마력을 느끼지 못하고 마법에 무지한 일반인이다. 원래대로라면 마녀는 아름다워진 대가로 조세핀에게 일정량의 생명력을 마력을 대신해서 받아갔어야 했다. 생명력을 주면 몸이 쇠약해지거나 수명이 줄거나 둘 중 하나다. 때로는 수명이 줄어 쇠약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조세핀의 경우는 명백하게 젊음과 수명을 가져갔다. 이건 누가 봐도 악독한 짓이다. 어차피 수명을 가져갈 거라면 수명만 가져가면 됐다. 굳이 젊음까지 가져갔다는 건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노인이 된 상태로 고생하다 죽으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킬리언 군이 부탁했으니 도와주마. 하지만 그리 쉽지는 않을 게다.” 조세핀이 못마땅한 한편 안쓰럽기도 했다. 에녹은 그녀에게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타인의 생명력을 나눠 받는 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 “타인의 생명력이요?” 조세핀은 엉거주춤 에녹에게 찻잔을 받으며 반문했다. 타인에게 생명력을 받는다고? 누구에게? 그런 그녀의 의문을 잠재우듯 에녹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이대로라면 길어봐야 내년까지 살겠지. 그 전에 누군가에게 생명력을 받아야 할 게다. 그래도 괜찮은 인생을 살았더구나. 나눠주겠다는 사람이 있는 걸 보니.” “생명력을 나눠 받으면 모든 게 해결되나요?”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아. 상대방이 나눠주는 생명력만큼만 네 수명과 젊음을 돌려받을 수 있을 뿐이야.” 그 말은 제이드가 나눠주는 만큼 젊어진다는 뜻이다. 그녀의 남은 수명이 오십 년이고 제이드가 나눠줄 생명력이 이십 년 분이라면 조세핀은 삼십 년 정도 늙은 수준에서 살 수 있다. 조세핀의 마음속에 희망과 함께 불길함이 스멀스멀 녹아들었다.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당장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에게 생명력을 나눠준 상대 역시 나눠준 만큼 늙게 되는 게 아닐까. “그건 아니야.” 에녹은 조세핀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늙지는 않을 것이다. 생명력을 나눠주는 것뿐이니. 애초에 수명과 젊음을 강탈해 가는 것부터가 너무 악독한 짓이다. 그건, 분명 대가가 있을 것이다. 마녀는 조세핀에게 대가 이상의 생명력을 강탈했다. 등가교환의 법칙. 그 법칙을 위배한 자는 대가를 받게 된다. 예를 들면 본 모습이 스러진다거나 하는. “누가 나눠준다고 한 거죠?” 대답을 알 것 같으면서도 조세핀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 에녹은 그녀의 희망을 단번에 꺾는 대답을 해주었다. “제이드!” 케이트와 이안, 제이드가 다과를 하는 응접실에 웬 노파가 나타났다. 조세핀은 숨을 헐떡이며 제이드에게 다가와 그의 몸을 주먹으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누가, 너한테, 그런 걸 하랬어!” ============================ 작품 후기 ============================ 음, 표지를 원래는 오늘 바꿔야 하는데 오늘바꿔봤자 내일부터 삼일, 주말 포함 5일이 빨간날이라서 의미가 없을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다음주 월요일에 변경하도록 하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휴일이 5일이나 되는데 음...처음엔 후작때처럼 의견 받아서 써볼까 했는데 제가 요새 바빠서...휴일동안 뮈엘라 비축 쓰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마녀의 방쪽에 내렸던 19금버전 몇개 올리겠습니다. 즐거운 구정! 행복한 휴일! 와하하하하핫 00210 3. 인정 =========================================================================                            어라. 케이트는 노파를 말려야 하나 하고 생각하다가 제이드가 묵묵히 주먹을 받아내는 것을 보고 멈췄다. 이안 역시 일어났을 뿐 아무 제지도 하지 않았다. 조세핀은 제이드를 투닥투닥 때리다가 지쳐서 숨을 헐떡였다. 나쁜 놈. 나쁜 자식. 그녀는 끙하고 소파에 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어디라도 앉지 않고는 못 버티겠다. “괜찮아?” 제이드가 재빨리 조세핀에게 찻잔을 건넸다. 식어서 마시기 쉽다. 조세핀은 후루룩 마시고 제이드에게 내밀었다. 그걸 또 그가 받아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과정을 케이트와 이안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쁜 자식.” 조세핀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제이드를 쳐다보지 않았다. 부끄럽고 미안하고 비참하고. 여러 가지 안 좋은 감정들이 그녀의 마음속에 소용돌이쳤다. “왜? 안된대?” 제이드는 여전히 이안과 케이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조세핀은 그가 묻는 게 뭔지 바로 눈치 챘다. 에녹이 도와줄 수 없대? 아니, 차라리 도와줄 수 없다면 나았을 것이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응? 안된대?” “그런 건 상관없어.” “상관없다니? 그럼 된다는 거지?” 두 사람의 대화가 과열되자 케이트가 이안의 손을 잡고 뒤로 자리를 피했다. 저 할머니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케이트는 어쩐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자.” “가자니, 왜?” 조세핀이 벌떡 일어나려다 어구구 하고 신음을 흘렸다. 허리가 찌르르하고 아팠다. 이 몸은 벌떡 일어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억울하고 슬퍼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좀 예뻐지고 싶어 한 게 뭐 그리 큰 죄라고. 그런 생각이 하루에도 몇십 번씩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하지만 조세핀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그녀의 잘못이다. 그녀가 잘못된 소원을 빈 탓이다. “필요 없어. 그냥 이렇게 살 거야.” “이렇게 살다니, 조, 아니….” 저도 모르게 조세핀의 이름을 부른 제이드가 이안과 케이트의 눈치를 살폈다. 케이트는 놀람보다는 어쩐지 하는 탄식이 밀려왔다. 조세핀이구나. 조세핀이 저주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세핀을 대하는 제이드의 태도. 그리고 조세핀의 태도. 그래서 케이트는 그녀가 조세핀이 아닐까 생각했다. “가. 가서 얘기해.” 조세핀은 허리의 통증이 멎자 앞서 걷기 시작했다. 여기서 나가고 싶었다. 케이트 앞에서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게 싫었다. “잠깐, 잠깐만요.” 케이트는 두 사람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마차 준비할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그 말에 제이드가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이 타고 온 마차는 돌려보냈다. “타고 가자. 너 힘들잖아.” “안 힘,” 안 힘들 리가 없다. 이 몸으로는 이 저택의 건물에서 정문까지 나가는 것만으로도 헐떡거린다. 아니면 아주 천천히 걸어야 하거나. 한나절은 걸리겠지. 어깨를 늘어트린 조세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트는 이안을 끌고 응접실을 빠져나오며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내가 모르는 거 알고 있죠?” “모르는 거?” “코트 양을 구할 수 있을까요?”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케이트는 조세핀이 이안과 큐마인 하우스에서 함께 살았기 때문에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추궁했지만 아니다. 이안은 오히려 더 몰랐다. 그는 일주일 동안 의식이 없었다. “왜 내가 알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안은 삐뚜름하게 물었다. 내가 만능인줄 아나. “하지만,” “난 너보다 더 몰라.” 그는 케이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두 사람이 지나갈 공간에 이안이 허리를 숙이자 케이트는 벽과 이안의 몸 사이에 갇혀버렸다. “기억 안나나? 내가 일주일간 의식이 없었다는 걸.” “의식이 없었다기보다는,” 괴물이었다. 케이트의 말은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졌다. 그녀가 슬그머니 이안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그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호박색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묘한 분위기가 일렁였다. 이안의 얼굴이 좀 더 내려오는 순간, “에헴.” “에헴.” 에녹의 헛기침소리가 두 번 들렸다.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에 에녹이 서 있었다. “카티야.” “아저씨.” 케이트는 마치 고양이 턱밑을 빠져나가는 것처럼 이안에게서 벗어나 에녹에게 다가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이 이안의 눈에는 쪼르르 도망치는 것처럼 보였다. “코트양의 저주는 풀릴 수 있나요?” 에녹은 케이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이안을 힐끔 쳐다봤다. 웃기게도 그 표정이 이안의 눈에는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리가. 이안은 머리를 젓고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아가, 내가 전에 말한 이야기 기억하느냐? 마력을 과도하게 흡수당한 마녀는 늙어서 죽는다는 이야기 말이다.” “네.” “마력과 생명력은 비슷하단다. 그 마녀 역시 마력과 생명력을 빼앗겼기 때문이지. 괴물이 더 흡수할 마력이 없다면 생명력을 흡수하는 경우도 있단다.” 케이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에녹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것도 같았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뗐다. “생명력을 빼앗겼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럼 저주가 아니에요?” “그래. 저건 저주가 아니란다.” 에녹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는 마녀가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자신의 생명력을 주기로 한 모양이구나.” “소원이요?” 늙는 것이 소원일 리는 없을 것이다. 이안은 케이트가 그녀가 만난 마거릿이 조세핀이라는 것을 아직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트 양은 아름다워지고 싶어 한 모양이구나.” 케이트는 뭐라 말하려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건 어떤 여자라도 꿈꾸는 일이다. 조세핀의 소원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려 한 건 그게 아니다. 케이트는 마거릿을 떠올리고 있었다. 조세핀이 사라짐과 동시에 나타난 아름다운 여성. 마거릿. “혹시 마거릿이…?” 에녹은 케이트가 비틀거릴까 싶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케이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마거릿은 아름다웠다. 누구라도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미인. 그런 미인이 연고도 없이 조세핀의 방에서 머문다 했을 때 케이트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처음 에바니엘에 올라올 때 케이트 역시 그랬다. 사람을 믿지 못했고 아는 사람 없는 타운 하우스에서 일을 했다. 그녀가 그랬으니 마거릿도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법이란, 무서운 거군요.” 케이트의 말에 에녹은 그녀가 다른 이유로 충격받았음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아름다워진 대가로 조세핀이 저렇게 늙어버렸다고 생각했다. 마법은 대가를 필요로 한다. 몇 주의 아름다움에 대한 대가가 저렇게 늙는 것이라니. 잔인하다. “코트 양의 저 상태는 자연스러운 게 아니란다.” 에녹은 케이트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해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원래대로라면 조세핀은 몇 년 늙고 말았어야 했다. 마녀가 그녀에게 과도하게 생명력을 빼앗아가 버렸다. 등가교환을 위배했다. 마녀에게도 어떤 식이든 법칙을 위배한 대가가 있을 것이다. “저 상태는 우리가 도와줄 수 있단다. 문제는.” 에녹은 복도 끝 응접실로 시선을 던졌다. 제이드가 자신의 수명을 일정 부분 포기했다고 말하자 조세핀의 반응은 격했다. 그녀는 절대 싫다고 거부했다. “타인에게 생명력을 나눠 받아야 한다는 점이지.”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누구의 생명력을요?” “킬리언군이 나눠주고 싶다고 하더구나.” 이안도 복도 끝 응접실로 시선을 던졌다. 살짝 열린 문 사이로는 조세핀과 제이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오랜 구정이 지났습니다. 다들 구정 잘 보내셨나요? 구정 지나서 슬픈 우리 마음을 이해했는데 날씨도 그지...아니, 미세먼지가 많네요. 목아파요... 표지 변경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변경됩니다. impress님께서 선물해 주셨습니다^^ 00211 3. 인정 =========================================================================                            “피해자는 린젤이라는 여자로 고층거리에서 구빈원를 운영하는 여자입니다.” 치안관의 말에 리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층거리에서 구빈원를 운영하는 여자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제이드와 카이사를 한쪽으로 끌어당겨 말했다. “들어 본 적 있어.” “구빈원을?” “아니, 린젤에 대해서.” 린젤에 대해서? 카이사와 제이드는 딱딱한 시체가 된 여자를 돌아봤다. 붉은 머리에 살집이 토실토실하게 오른 체형이었다. 죽은 사람을 놓고 성격 운운하기는 어렵지만 이 여자 살아있었을 때 한 성격했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그런 외모였다. “무슨 소문인데?” “고층거리의 구빈원은 아무래도 다른 데보다 기부같은 게 적기 마련이거든.” “그렇지.” “그런데 고아의 수가 가장 많은 곳이고.” 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건물 안을 다시 한 번 훑어봤다. 문이 낡아서 떨어져 나간 방에 난로를 피우지 않아 건물 안이 밖만큼이나 추웠다. 들어오는 돈은 없는데 먹여 살려야 할 고아의 수는 많다. 꽤 힘들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구걸 비슷한 일을 시킨다는군.” 카이사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힘든 상황에 부닥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층거리에 대해서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빈원의 원장이 자기가 돌봐야 할 아이들에게 구걸을 시킨다니? “여자아이들은 꽃이나 성냥을 팔고 남자아이들은 신문을 팔거나 구두를 닦게 시켜서 번 돈을 전부 수금한다고 들었어.” 말이 꽃이나 성냥을 판다는 거지 그건 결국 구걸이나 다름이 없다. 불쌍한 아이들이 추위에 떨면서 성냥을 사라는데 대부분은 동정심으로 사는 것일 테니까. 제이드는 한쪽에 웬 남자와 서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코를 훌쩍이면서 소녀는 린젤의 시체를 보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저 아이는 린젤의 딸인가?” “누구? 아, 아냐.” 리코는 고개를 저었다. 린젤은 딸이 없다. 놀랍게도 린젤의 나이는 이제 스물다섯. 보이는 것보다 훨씬 어렸다. 저렇게 큰 딸은커녕 아직 자식도 없다. “저 애도 구빈원의 고아야. 시체를 제일 먼저 발견한 목격자야.” “그 옆에 남자는?” “린젤의 남편.” 리코의 말에 카이사는 묘한 표정을 지었고 제이드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죽은 린젤이 스물다섯이라 했는데 남편이라는 자는 적어도 쉰 살로 보였다. 자기 나이의 두 배쯤 되는 남자와 결혼했다는 말이다. “사랑이 모든 걸 뛰어넘기는 하지.” 제이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조세핀을 떠올리고 있었다. 할머니가 된 조세핀을 처음 봤을 때 놀라긴 했지만 그는 점점 조세핀의 외모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원래부터 제이드는 조세핀의 외모에 신경 쓰지 않기는 했다. 그는 포목점의 막내아들이고 노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예쁘고 외모에 관심이 많은 여자를 만났다. 그러다 보니 제이드는 조세핀의 생각과 달리 외모에 크게 구애받는 타입이 아니다. 그는 에이미와의 쓰디쓴 실수로 배우자의 외모보다 그녀가 자신과 얼마나 잘 맞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농담에 웃고 그녀의 농담에 마음 놓고 웃을 수 있는 관계.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보지 못하면 자꾸만 생각나는 그런 사람. 조세핀은 너무 가까워서 너무 자주 만났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그녀가 생각나거나 보고 싶을 만할 상황이 없었다. “남편이 범인이 아니라는 말인가?” 카이사의 말에 제이드는 응? 하고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카이사는 서늘한 눈을 하고 남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야 그렇지 않을까? 젊은 부인인데.” “남자라고 무조건 젊은 부인을 원하는 건 아니야.” 그의 말에 리코가 히쭉 웃으며 끼어들었다. “아, 뭐야. 혹시 여자 생겼어? 그 여자가 나이가 많아?” 카이사의 입이 벌어졌다. 그는 어떻게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느냐는 듯이 리코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잖아. 보편적인 이야기를 한 것뿐이야.” “무슨 소리야. 보편적으론 젊은 여자가 좋지.” 제이드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부인한테 지금 그 말 전해줘도 돼?” 순식간에 리코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어쩔 줄 몰라하더니 크흠하고 헛기침을 하고 주제를 바꿨다. “어쨌든 제이드는 남편이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지?” 리코가 엄청난 공처가에 애처가라는 것을 아는 두 사람은 그저 피식 웃으며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의 말대로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음.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직 좀 빠르지만 구빈원도 여자가 운영하고 여자가 더 나이가 적다면서. 남편이 굳이 부인을 죽일 필요가 뭐 있어?” “그건 또 모르는 일이지.” 카이사가 진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더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났는데 부인이 이혼을 안 해주니 할 수 있는 건 죽이는 방법밖에 없는 것일지도.” 그럴 수도 있겠군. 제이드는 생각을 다시 했다. 그는 늘 젊은 부인이 늙은 남편을 죽이는 상황은 생각했어도 늙은 남편이 젊은 부인을 죽일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그는 문득 자신이 이 부부의 이야기를 조세핀과 자신에게 대입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세핀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그 몸으론 계단을 내려오기도 힘들 텐데. 자신이 생명력을 나눠준다고 하니까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조세핀의 모습이 떠올랐다. 잠시나마 그는 그녀가 예전의 조세핀으로 돌아와서 기분이 좋았다. 조세핀은 늘 그렇게 기가 세고 그를 구박하는 모습이 좋다. 며칠 안에 큐바인 하우스에 가서 조세핀의 방을 일 층으로 바꿔줘야지. 그녀를 설득하는 동안에라도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느라 고생하지 않도록. “제이드, 제이드.” 제이드가 정신을 차려보니 리코가 이상하다는 얼굴을 하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 뭐, 뭐야?” “시체는 보냈어. 너도 같이 갈 거냐고 물었는데 답이 없길래.” “아, 다 끝났어?” “남편과 이야기는 끝났고 저 여자애와 이야기를 할까 하는데 카이사가 시체를 가지고 돌아간다길래 너도 갈 거냐고 물었지.” “그래? 그럼 나도 남을게.” 리코는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섰다. 최근 제이드의 상태가 이상하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느라 남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때로는 심각한 표정이었고 때로는 히쭉히쭉 웃기도 했다. 여자가 생겼나. 리코는 그렇게 생각하고 손뼉을 짝하고 쳤다. 그래.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다. “뭐야? 재수 없게.” 갑자기 리코가 자신을 보며 히쭉히쭉 웃기 시작하자 제이드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 왜 이래? “그냥, 얼른 마빅을 불렀어요.” 소녀는 예상대로 겁을 먹고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리코는 소녀의 뒤에 선 죽은 여자의 남편 마빅을 쳐다봤다. “이 애와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물어보는 것이지만 물어보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하라는 조용한 강요에 마빅은 조용히 물러났다. “처음부터 말해줄 수 있을까? 언제 왜 여기에 왔는지부터.” 소녀는 마빅의 눈치를 살피더니 리코와 제이드를 쳐다봤다. 무서워 보이던 남자는 떠나고 없었다. 남은 건 푸근해 보이는 리코와 잘생긴 제이드뿐이다. “성냥을 팔다가 도저히 더 못 팔 것 같아서 돌아왔어요.” 소녀의 이야기가 더듬더듬 끊어질 듯 천천히 이어졌다. ============================ 작품 후기 ============================ 어제 미세먼지때문에 몸이 안좋은줄 알았는데 몸살감기같아요. 얼마나 아프냐면 저녁때 가족이 치킨을 시켰는데 거부했어요... 내일 업뎃 안되면 병가처리 해주세요. 00212 3. 인정 =========================================================================                            “이제 그만 돌아가겠다.” 이안이 느닷없이 말했다. 진짜로 느닷없는 말이었다. 케이트가 그에게 온 편지를 읽어주고 있던 차였기 때문이었다. 로엔 백작부인이 쓴 편지를 읽던 케이트는 ‘몸은 건강하니? 요새 통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 보고 싶구나.’ 라는 부분을 읽다가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요?” “그만 돌아간다고 했다.” “어째서요?” 어째서라니. 이안은 케이트를 물끄러미 쳐다봤고 그녀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이미 한번 이야기한 사안이다. 여긴 이안의 집이 아니다. 그러니 돌아가겠다는 이안의 말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케이트는 이안과 떨어지는 게 아쉬웠다. 그가 돌아가면 이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에녹이 한풀 꺾이긴 했지만 그녀에게 마법까지 건 것을 보면 그와 만나는 것을 제한하려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안은 돌아가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과 떨어지는 것이 그리 아쉽지 않은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케이트는 조금 섭섭해졌다. “네 대부가 오면 이야기하지.”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는 분위기라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실라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 “케이트 스미스?” 에드워드는 보고를 받고 이맛살을 찡그렸다. 누구더라? 갑자기 들으니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다 그는 퍼뜩 케이트를 떠올렸다. 아, 내 사촌이 마음에 품고 있는 하녀 출신의 아가씨. “동의해야지.” 그는 씩 웃으며 보좌가 가져온 종이에 도장을 콱 찍었다. “얼마나 동의했지?” 보좌는 에드워드가 내민 종이를 살피며 말했다. “내가 알아본 바로는 반은 훌쩍 넘었더군.” 에드워드와 함께 자라 부하라기보다는 친구에 가까운 보좌는 도장 찍힌 종이를 접어 봉투에 넣고 봉했다. 봉한 봉투는 하인을 통해 왕궁으로 전달될 것이다. 지금 에드워드가 동의한 것은 케이트 스미스 양을 호건 가의 일원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의 동의였다. 몇주 전 수도에 나타난 붉은 머리의 아가씨 케이트 스미스. 그녀가 호건 가의 사라진 막내딸 엘리자베스 호건의 딸이라는 것은 쉬쉬하면서 알려지던 이야기다. 뮈엘라의 귀족들은 그 사실에 주목했다. 과연 케이트 스미스를 호건 가에서 받아들일 것인가. 비스마르크 호건이 두문불출한 지 이미 몇 년째. 딸과 절연을 선언한 그가 손녀에게는 어떻게 나올 것인지 다들 귀추를 주목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호건 가의 며느리인 에스메랄다와 그녀의 아들 제프리는 케이트를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며칠 전부터 레인포레스트가 행동을 개시했던 것이다. 고작 경 작위이지만 건국 공신이 이 엘프는 적극적으로 케이트 스미스가 호건 가의 또 다른 후계자이며 호건 가가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다른 귀족들이 호건 가가 케이트 스미스를 후계자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하길 요구했다. “도의적은 무슨.” 에드워드는 피식 웃었다. 보좌 역시 비뚜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호건 가의 영향력을 양분하고 싶은 것뿐이겠지.” “레인포레스트 경도 그럴 거라 예상하고 있을걸?” “그렇겠지. 그 노인네.” 남의 집안일에 관심 쏟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에바니엘 우물가 같은 가십지라면 또 모르지만. 반수가 넘는 귀족이 호건 가가 케이트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동의한 건 에드워드의 말대로 호건 가의 힘을 양분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현재 호건 가는 너무 강력하다. 무기제조부터 시작해서 유통까지. 호건 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그러니 호건 가의 하나뿐인 후계자인 제프리가 귀족과 결혼한다면 그 귀족은 호건 가와 손을 잡고 무소불위의 힘을 누리게 될 것이다. 문제는 호건 가가 귀족 집안이 아니라 상인이라는 점이다.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콧대 높은 귀족 중 백작 이하의 집안에서만 호건 가에 혼사를 들이밀고 있었고 후작이상의 집안과 백작 이하 중에서도 과년한 딸이 없는 집안은 호건 가의 힘이 약해지길 바랐다. “이쯤 되면 내 친애하는 사촌이 뭔가를 가져와 줬으면 하는데.” 에드워드는 의자 손잡이를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케이트가 호건 가의 새로운 후계자로 인정받는다면 그녀의 지참금과 호건 가의 영향력을 노린 귀족들이 물밀 듯 구혼을 할 것이다. 로엔 가는 백작인 아르고에게 약혼녀가 있으니 이안의 상대로 혼사를 내밀 것이다. 하지만 이안은 서자고, 세간에 인정받은 게 없으니 불리하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이안이 불리하지 않도록 케이트가 후계자로 인정되기 전에 이안의 자리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뭔가가 있기를 바랐다. 같은 시각 호건 가의 저택에서 에스메랄다는 도박에 돈을 날리고 들어오는 제프리를 닦달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운이 안 좋았다. 평소라면 그 돈으로 새벽까지 도박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 패가 안 좋더니 이른 저녁에 벌써 가져간 돈이 바닥나 버렸다. 이런 때는 운을 시험하면 안 된다. 일찍 들어가서 좀 쉬는 게 좋다. 제프리는 자신이 참 현명하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며 히죽이고 있었다. “너 이리 와서 앉아 봐.” 모든 남자와 자식들의 가장 무서운 말이 에스메랄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제프리는 흠칫하고 에스메랄다를 쳐다보고 주춤주춤 소파로 다가갔다. 또 뭐지?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그리 든 게 없어 덜그럭덜그럭 소리가 났지만 그로서는 꽤 빨리 도는 것이다. “왜요?” “귀족들이 그 빨간 머리 계집애를 후계자로 인정하라고 국왕에게 탄원한다더라!” “엥?” 제프리의 입에서 덜떨어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탄원이라고? 남의 집안일에 개입하라고 탄원할 수 있는 건가? “에이, 말도 안 돼. 그런 걸 왕이 받아줄 리가 없잖아요.” “받아준대!” 제프리의 입이 딱 벌어졌다. 두 사람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왕이 귀족들의 요청으로 집안일에 개입한 경우는 꽤 있었다. 귀족이 적자 없이 서자만 두고 유언도 없이 사망할 경우, 작위를 누구에게 물려주느냐는 문제도 있었고, 한 귀족 영애를 두고 더 높은 집안에서 서로 결혼하고 싶다고 싸울 경우에도 중재한 적이 있다. “말도 안 돼! 그런 걸 들어준다고요?” “그래! 국왕이 우리에게 그 계집애를 받아들이라고 하면 더 지체할 수도 없단 말이다!” 에스메랄다는 벌떡 일어나서 응접실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독한 늙은이와 독한 엘프. 그리고 독한 계집애. 셋 다 그냥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내가 그래서 빨리 처리하라고 했지!” 비스마르크는 처리할 수 없지만 케이트는 다르다. 에스메랄다는 그녀가 시켰을 때 제프리가 재빨리 그녀를 죽이지 않은 것을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문젯거리는 재빨리 잘라냈어야 했다. 그녀는 분에 못 이겨 발을 동동 굴렀다. 목과 귀, 팔에 주렁주렁 매단 보석이 절그럭절그럭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 알았어요. 재촉 좀 그만 해요.” “재초옥?” 에스메랄다는 제프리의 여유로운 태도에 속이 터져 눈을 부릅뜨고 아들에게 달려들었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게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얼마 전에도 웬 미망인과 놀아나는 바람에 미망인이 임신했다고 찾아와서 떼어내느라 혼났다. 돈을 듬뿍 쥐여주고 수도 밖으로 쫓아냈으니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겠지. 그녀는 제프리에게 괜찮은 귀족 영애를 며느리로 데려올 때까지 귀찮아질 계집은 건드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고 다행히 아직까지 제프리는 그걸 지키고 있었다. “지금!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계집에게! 우리 쌩 돈을 떼어주게 생겼는데! 그런 말이 나와? 너 엄마가 저 노인네 비위 맞추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잊었니?” 독한 늙은이, 재수 없는, 짜증 나는 늙은이. 그녀는 비스마르크를 떠올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스마르크의 죽음이 세간의 이목을 주목시킨다는 것만 아니었으면 비스마르크를 벌써 죽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질기기도 하지. 하루 한 끼 죽만으로 연명하면서도 비스마르크는 살아 있었다. “알았다니까요.” 제프리가 짜증스럽게 대답했을 때 에스메랄다는 케이트도 그렇게 해야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놓쳐서는 안 됐다. 평생 이 집에 가둬놓고 천천히 기력이 쇠해서 죽도록 해야 했다. “알았다니? 뭘 알아?” “아, 진짜. 내가 다~ 알아서 했다니까요?” “알아서 했다고?” 에스메랄다의 분노가 가라앉았다. 그녀는 혹하는 표정으로 제프리에게 다가갔다. 제프리는 으스대는 표정으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는 이미 케이트를 처리하기 위해 여러모로 손을 쓰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부활!은 아니고.... 병원 다녀왔습니다. 주사맞기 싫어서 이빈후과로 갔는데 의사선생님이 "주사 한대만 맞으시죠^^?" 하시더군요... 간호사분께 팔에 맞으면 안되냐고 사정했는데 "엉덩이 대세요^^" ....흑흑.... 00213 3. 인정 =========================================================================                            국왕은 귀족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케이트 스미스는 타당한 호건 가의 사람이고 호건 가가 케이트를 거부하는 것은 도의적으로 옳지 못하다 판단했다. 그 판단에 왕조차도 케이트의 존재가 호건 가의 영향력을 양분할 것이라는 기대가 들어 있었다. 호건 가의 변호사 막스는 신이 나서 케이트를 찾아와 그녀가 엄연히 호건 가의 사람으로 인정됐음을 알렸다. “그럼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요?” 케이트는 조금 초조하게 물었다.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다. 그녀는 그것 외에는 바라지 않았다. 호건 가의 재산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그녀에게 유일한 혈육은 비스마르크뿐이다. 제프리는 혈육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설득해보겠지만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에스메랄다가 극구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비스마르크의 용태가 좋지 않다며 모든 방문객을 거부했다. 대신 그녀와 제프리를 만나러 오는 것이라면 언제든지 환영하겠다 말했다. 그런 말을 믿을 케이트가 아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제가 호건 가의 재산을 포기한다 해도 말인가요?” 이런. 막스는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그는 자상하게 말했다. “호건 가에서 걱정하는 게 그겁니다. 혹시라도 스미스 양을 만난 가주가 죽기 전에 자기 재산을 양도해 버릴 위험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받지 않겠다고 하면,” “그건 의미가 없어요, 스미스 양.” 비스마르크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케이트가 받지 않겠다 하면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그녀에게 줄 것이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에스메랄다가 케이트라면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건 핑계고 비스마르크를 꼬여 호건 가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에스메랄다가 딱 그 짝이다. “어쨌든 호건 가의 사람으로 인정되었으니 매달 일정 용돈을 받게 되실 겁니다.” 막스는 책을 내밀었다. 수표책이다. 케이트는 그가 말해주는 최대 금액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매달 남은 금액으로 은행에 그대로 남습니다.” “잠깐만요. 너무 많은 것 아닌가요?” 케이트의 말대로 금액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막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정도면 적은 겁니다.” 호건 가의 재산을 생각하면 이건 너무 적다. 하지만 케이트에게는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막스는 수표책을 케이트에게 밀고 남은 서류를 갈무리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케이트는 사교계에 에녹의 대녀일 뿐 아니라 호건 가의 상속녀로 데뷔하게 될 것이다. 그는 케이트의 사교계 데뷔 또한 준비하고 있었다. “내년 봄에 사교계에 데뷔하자꾸나.” 막스가 인사를 하고 나가자 에녹은 조용히 말했다. 케이트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데뷔요?” “그래. 신랑감도 찾아봐야지.” 케이트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이안을 향했다. 이안도 거기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앉아있기만 했다. “너무 빠르지 않을까요?” 미약한 케이트의 거절에 에녹은 단호하게 대처했다. “아가, 나 역시 너를 시집보내고 싶지 않지만 괜찮은 남자가 있는지조차 찾아보지 않는 건 아깝지 않느냐?” 그렇다 해도 굳이 이안이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케이트는 다시 이안을 힐끔 쳐다봤다. 그는 미동도 없었다. 우습게도 에녹 역시 이안을 힐끔 쳐다봤다. 그는 아직도 고민 중이었다. 이안 로엔. 백작 가의 서자. 이것만으로 이안은 케이트의 상대로 약간 부족했다. 그는 케이트에게 재력이 있는 만큼 백작부인으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안은 서자고 심지어 괴물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케이트가 이안에게 마음이 있다는 점이었다. 에녹은 그게 가장 고민스러웠다. 니콜라스와 엘리자베스 역시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의 도피를 했지만 행복했다. 케이트가 그녀의 부모를 닮았다면 작위가 무슨 소용이냐고 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전과는 다른 눈으로 이안을 살피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를 위험한 존재로, 케이트에게서 떼어낼 벌레로 치부했다면 이제부터는 케이트의 곁에 있어도 될 자인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느닷없이 이안이 말했다. 에녹은 잠시 그가 투정을 부리는 것이라고 착각했다. 이안을 괴물 취급하고 케이트의 상대로 보지 않는 것에 대한 투정. 하지만 그는 그럴 인물이 아니다. 에녹은 흠하고 다 식은 차를 마셨고 케이트는 깜짝 놀라 이안에게 몸을 내밀었다. “이안!” “그동안 돌봐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이제 몸도 거의 나았으니 돌아가겠습니다.” 거의 라는 말에 에녹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안의 어깨에 난 흉터는 평생 남을 것이다. 그 상처는 기이할 정도로 회복이 늦었고 어떻게 해도 완전히 낫지 않았다. 그는 그 흉터가 자기 자신을 위험하다고 판단한 이안의 의지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케이트에게 자신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스스로를 해하려 했기 때문에 생긴 상처. 그것과 이안이 괴물이 되어서도 케이트는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하지만 그도 그렇게 추측만 할 뿐 정확하게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좀 더 있는 건 어떤가.” 에녹의 말에 케이트의 얼굴이 밝아졌다. 에녹은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알겠지만 나는 아침에 나가 저녁때 늦게 들어온다네. 카티야 혼자 저택에 있는 시간이 많아. 아직 이 아이를 노리는 마녀가 돌아다니니 자네가 잠시 같이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진심입니까?” “진심이라네.” 에녹의 말이 사실이기는 하다. 아직 케이트를 노리는 마녀가 저 밖에 돌아다니고 있다. 마녀를 잡을 때까지 케이트가 저택 안에서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마녀를 잡을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다. 마녀는 이안과 케이트를 납치했을 때 이안에게 닿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지금 마녀가 가진 모든 마력이 그녀의 마력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안의 괴물로서의 능력은 흡수하는 자의 마력이 흡수하는 자의 것이 아닐수록 더 강력하게 흡수한다. “제가 케이트와 돌아다니면 오해를 받을지도 모릅니다.” 케이트는 잠시 그가 말하는 오해가 무엇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얼굴을 붉혔다. 혼기가 꽉 찬 여자와 남자가 함께 돌아다니면 두 사람을 연인으로, 결혼할 사람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이안은 그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에녹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네.” 케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지어 이안마저도 놀라서 잠깐 입을 벌렸다. 에녹은 크흠하고 헛기침을 하고 말을 돌렸다. “그보다 내, 자네에게 긴히 물을 것이 있네.” “저는 나갈까요?” 케이트가 물었다. 에녹이 대답하기 전에 이안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기 있어.” 다시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케이트는 그의 손이 닿았던 자신을 손을 내려다봤다. “로엔 경이 괜찮다면 나도 괜찮다.” 그렇다면. 케이트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에녹은 상체를 내밀고 구두코를 바라봤다. 무슨 이야기일까? 심각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자네, 에반스 공작에게 임무를 받은 것이 있다지?” 이안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알라나데일의 마법 아이템을 수거하는 비밀수사관이고 에녹은 뮈엘라의 마법부에 영향을 미치는 엘프다. 심지어 두 사람은 마법부에서 만나지 않았던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라나데일에서 퍼진 마법아이템을 수거하는 일이고.” 이안이 비밀수사관이라는 것은 알아도 정확히 그런 업무라는 것은 몰랐던 케이트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이안을 쳐다봤다. 마치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요? 라는 듯이. “네.” 이안은 케이트를 쳐다보지 않고 대답했다. “얼마전에 자네가 향유를 발견했다던데.”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마법부에서 그런 이야기까지 합니까?” 어조는 평탄했지만, 내용은 비아냥이라 에녹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안의 비난이 맞다. 이 사실은 에녹이 알아도 아는 척을 해서는 안 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확인해야 하기도 했다. 에녹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향유를 판매한 자를 찾았나?” “아니요.” “추정되는 자도 없나?” 이안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는 잠시 에녹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침묵이 흘렀다. 케이트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에녹과 이안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두 사람 다 앉아있는데 마치 검이라도 뽑고 대치하는 것처럼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느껴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오랜 침묵을 깨고 에녹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만난 마녀 세명을, 에반스 공작에게 보고했나?” ============================ 작품 후기 ============================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완전 죽다 살아났어요. 주사맞고 약먹어서 나아지긴 했는데 아직도 물이 써요... 표지는 레몬맛토끼님께서 그려주신 팬아트입니다. 감사합니다^^ 00214 4. 독 =========================================================================                            사교계에 일대 파란이 일어났다. 호건 가의 상속녀가 나타났다. 이미 몇 주 전부터 케이트가 호건 가의 상속녀라는 소문이 돌던 터였다. 약삭빠른 자들은 케이트의 호감을 얻기 위해 큐바인 하우스를 찾아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케이트 스미스라는 여자가 호건 가의 상속녀라더라 라는 소문은 호건 가에서 인정했다로 바뀌어 있었다. 실제로 에스메랄다는 국왕과 귀족들이 똘똘 뭉쳐 압박하자 하는 수 없이 케이트를 호건 가의 사람으로 인정했다. “케이트 스미스?” 실라는 하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아는 그 스미스 양인가? 그녀는 실비아를 쳐다봤다. “맞아요, 마님.”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실라는 그대로 의자에 툭 몸을 기댔다. 실비아가 깜짝 놀라 그녀에게 다가왔다. 몸이 약한 마님이 충격을 받아 기절이라도 할까 걱정된 탓이다. 그녀는 실라의 목까지 채운 단추를 몇 개 풀고 손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난 괜찮아, 실비아.” 실라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스미스 양이 호건 가의 상속녀라니. 어째서 그녀의 작은 아들이 가는 길이 이렇게 고된 걸까.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안타까웠다. “이안에게 괜찮은 짝일 거라 생각했는데.” 영리하고 싹싹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젊은 여자애답지 않게 경거망동하지 않은 점도, 예의 바른 점도. 무엇보다 이안 곁에서 주눅들지 않았고 이안도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곤란하다. 실라는 두 사람이 이어지는 게 불가능하다 생각해서 슬퍼하는 게 아니다. 그녀는 호건 가의 복잡한 사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호건 가의 가주 비스마르크는 몇 년째 두문불출하고 있다. 실권을 잡고 있다시피 한 사람은 그의 며느리 에스메랄다와 손자 제프리인데 두 사람 다 사교계에서 그리 소문이 좋지 않았다. 둘 다 건방지고 무례했으며 멍청하다는 소문이다. 거기에 에스메랄다는 사치가 심하고 제프리는 손버릇이 나쁘다. 그가 이 여자 저 여자 집적거린다는 건 비밀도 아니었다. “아깝다.” 실라는 실비아가 가져온 차로 목을 축이며 중얼거렸다. 케이트 스미스. 정말 탐이 나는 아가씨인데. 그리고 케이트를 탐내는 건 실라 뿐이 아니었다. 케이트는 그녀에게 배달된 어마어마한 꽃다발과 선물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너무 하잖아. 일시적으로 선물을 받아두는 응접실은 꽃과 선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 아가씨가 얼마나 멋진 분인데, 고작 집안으로 이러는 건가요!” 마사가 분통을 터트렸다. 지금까지 아는 척도 안 하던 자들이 케이트가 호건 가의 상속녀가 되자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꿨다. 그깟 호건 가가 뭐라고! 그렇게 생각했으면서도 마사는 바로 생각을 바꿨다. 그깟 호건 가가 아니다. 사람들이 태도를 바꾼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마사가 가장 놀라운 건 호건 가의 상속녀로 인정된 다음에도 변한 게 없는 케이트의 태도였다. 마사가 보기에 케이트는 그 어마어마한 호건 가의 상속녀가 되었음에도 변한 게 없었다. 딱히 사치를 부리거나 으스대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지금까지처럼 온실에서 차를 마시고 그림을 그리거나 이안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와서 이러다니, 흥!” 마사의 말에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슬며시 웃어버렸다. 그녀 대신 마사가 분통을 터트려 준 탓에 그다지 기가 막히거나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녀는 꽃다발을 들어 살폈다. 이 계절에 어디서 이런 꽃을 구한 걸까. 귀한 게 분명한 형형색색의 꽃이 가득하다. “꽃은 반만 말리고 꽃병에 꽂아 둘게요.” 마사가 그렇게 말하며 말릴 것과 꽃병에 꽃아 둘 것을 선별하기 시작했다. 하녀들도 신이 나서 가담했다. 케이트는 그녀들에게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몇 개 가져가라고 말했다. 하녀일 때의 경험상 주인 가족에게 이런 꽃을 받는 게 꽤 쏠쏠한 재미였기 때문이다. 여자사용인들은 꽃을 말려 포푸리를 만들면 서랍에 넣어 옷에 냄새가 배게 할 수 있어 유용했다. “이 선물은 어떻게 할까요?” 선물은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케이트는 선뜻 선물을 만지지 못하고 쳐다봤다. 저주 마법이라도 걸려있을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다. 이 선물들은 전부 레인포레스트 저택에 들어올 때 결계를 통과한 물건이었다. “전부 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아.” “네에?” 하녀들은 케이트의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케이트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별로 받고 싶지도 않고.” 뭣보다 이런 선물은 부담스럽기만 하다. “뜯어보지도 않고요?” “뜯어보고 보내면 더 기분 나쁠 거야.” 케이트의 말에 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 대로다. 괜히 뜯어보고 돌려보내면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돌려보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이 선물들이 아까웠다. 마사는 아쉬운 눈빛으로 선물꾸러미를 쳐다보다가 케이트의 뒤를 따랐다. 선명한 호박색 눈동자가 복도 끝에서 케이트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마사는 이안을 보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또 있다. 태도가 변하지 않는 사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야.” 그녀는 나지막하게 투덜거렸다. 로엔 경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모든 사람에게 무덤덤하고 냉정한 그의 태도는 케이트 아가씨에게도 다르지 않다. 레인포레스트 저택의 사용인들은 대부분 그를 무서워했다. 하지만 마사는 그가 아가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다. 저렇게 쳐다볼 거면 말이라도 먼저 걸던가. 그것도 아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주장하다가 주인 나리가 조금만 더 머물러 달라고 요청하자 다시 주저앉았다. 아가씨가 로엔 경에게 마음이 있는 건 확실하다. 경 역시 아가씨에게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주인 나리를 통해 아가씨에게 청혼을 하지 않는 걸까. “이안, 오래 기다렸어요?” 오래 기다렸느냐고? 이안은 말없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렸다. 케이트가 단장하고 내려오다가 그녀에게 도착한 선물을 확인하는 바람에.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미안해요.” “알면 됐다.” 얄미워. 마사와 케이트가 동시에 투덜거렸다. 밖은 오랜만에 맑았다. 케이트는 신이 나서 코트를 채 여미지도 않고 밖으로 나갔다. 외출은 오랜만이다. 이안의 상처치료와 마녀의 존재 때문이다. “주인 나리께서 외출을 허락하셔서 다행이네요.” 마사의 말에 케이트는 빙그레 웃었다. 에녹은 마녀가 이안을 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케이트에게 이안과 동행할 경우에만 짧은 외출을 허락했다. “어딜 먼저 가실 거예요?” 기대에 찬 마사의 물음에 케이트는 곰곰이 생각했다. 오랜만의 외출에 케이트만큼이나 마사도 흥분해 있었다. 이안의 뒤로 뚱한 표정의 용병 둘이 붙었다. “리본 가게를 먼저 갈까요?” 케이트의 말에 마사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어지는 케이트의 말에 용병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다음은 모자가게를 갔다가 차를 마시러 가요.” 이안은 용병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나섰다. 그는 여성의 쇼핑에 따라가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과연.” 두 시간쯤 지나자 이안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용병들이 이안을 보고 히쭉히쭉 웃으며 말했다. “힘들죠?” “그렇군.” 저 작은 체구 어디에서 이런 힘이 솟아나는 걸까. 그는 케이트와 마사가 신이 나서 거리를 누비는 것을 반쯤 경탄 어린 시선으로 지켜봤다. 두 사람은 두 시간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심지어 두 시간 동안 케이트가 산 건 레이스 한 묶음 정도. 그는 찻집에 앉으면서 자신이 지쳤다는 것을 인정했다. 육체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로. “괜찮아요?” 지친 표정의 이안을 보고 케이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상처가 다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환자다. 피곤할 만도 하다. “괜찮다.” “피곤하죠? 케이크 먹어요.” 그렇게 말하며 케이크를 내미는 케이트의 행동에 이안은 입을 닫았다. 정신적으로 지쳤는데 거기에 단 걸로 공격하다니. 더 피곤해진다. 머리가 지끈지끈 울리는 것 같아서 이안은 찻잔을 들었다. “잠깐만요.” 갑자기 케이트가 손을 내밀었다. 찻잔을 입술에 대려던 그의 행동이 뚝 멈췄다. “뭔가?” “아저씨께서 꼭 확인하라고 하셨거든요.” 그러더니 스푼으로 차를 떠서 그 위에 하얀 가루를 솔솔 뿌렸다. 그녀의 행동에 마사와 이안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차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케이트는 이번에는 자시의 차를 떠서 에녹에게 받은 가루를 솔솔 뿌렸다. 그녀는 마찬가지로 마사와 용병들의 차까지 확인한 다음에야 찻잔을 입에 댔다. “뭘 한 거지?” “검사한 거예요.”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무엇을?” “아저씨 말로는 뭔가가 들어가면 확인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독약 검출인가.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찻잔을 입술에 댔다. 사랑해 마지않는 대녀의 일이다. 에녹이 케이트를 얼마나 지극히 생각하는지는 레인포레스트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이안은 오히려 그가 아무 안전장치 없이 이안 하나만을 믿고 케이트의 외출을 허락한다면 그게 더 놀라울 것이라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어제 밤에 아파서 잠을 제대로 못잤어요... 하... 00215 4. 독 =========================================================================                            케이트의 짧은 외출은 그 후로도 반복되었다. 그때마다 이안은 케이트와 동행했는데 늘 뭔가가 빨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그제야 여성들의 쇼핑에 대해 제이드가 떠들어 댔던 것을 기억해 냈다. 정확하게 뭐라고 떠들었는지는 흘려들은 탓에 기억나지 않지만 제이드가 여성들의 쇼핑 어쩌고 하면서 떠들었던 기억은 난다. “이런 거였군.” 그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케이트가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했어요, 이안?” “아무것도.” 저거 거짓말이야. 뒤따르던 용병 둘이 눈빛을 교환했다. 저 무뚝뚝한 양반이 드디어 아가씨의 외출에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이 아가씨는 덜한 편이지.” “음. 세 시간이면 귀가하니까 말야.” 다른 귀족 영애의 호위도 해본 적이 있는 두 사람에게 두 시간의 쇼핑과 한 시간의 티타임 후 귀가하는 케이트의 외출은 상당히 짧은 축에 속한다. 케이트의 외출은 늘 티타임으로 귀결되곤 했다. 상처가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안을 배려한 행동이지만 오늘은 다른 이유가 또 있었다. 다섯 사람은 앤이 일하는 식당으로 향했다. “케이트!” 마침 홀에 나와 있던 앤은 케이트를 보자마자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오랜만이다. 그녀는 케이트와 옆에 선 이안을 보고 히죽 웃고는 케이트를 끌고 안쪽 테이블로 향했다. “너 소문이 자자하더라!” “소문?” “네 친척 말야. 호건 가라며!” 아, 맞다. 케이트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앤에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에 앤이 씩 웃었다. “나한테도 말해주지!” “미안해. 정신이 없어서.” “응. 정신없을 것도 같더라.” 다행히 앤은 케이트가 자신의 친척이 호건 가라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케이트는 쓰게 웃었다. 굳이 이미 예전부터 알았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그녀는 그저 사과했다. “미안해. 돌아다니기가 어려워서 이제야 말하네.” “나도 미안하지. 내가 찾아갔어야 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앤도 바빴다. 그녀가 일하는 식당이 원래 손님이 많기도 했거니와 최근 그녀가 맡은 일이 많아지면서 더 바빠진 탓이다. “밥 먹고 갈 거지?” 앤의 물음에 케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식사를 해결하려고 왔다. 오늘 아침, 외출하려던 에녹이 저녁 늦게 돌아올 테니 저녁준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케이트도 사용인들에게 반나절의 휴가를 주고 자신도 식사를 밖에서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그런 면에서 케이트는 사용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주인가족의 식사를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사용인들에게는 큰일 하나가 사라지게 된다. “이안. 생선 먹을래요, 고기 먹을래요?” 이안은 케이트의 질문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 여자는 자신이 어린아이인 줄 아나. 그는 손을 뻗어 케이트의 턱을 움켜잡았다. “내가 먹을 건 내가 고를 수 있어.” “주문해주려는 것뿐이에요.” “필요 없다.” 케이트는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땍땍거리기는. 그녀는 다른 세 사람의 요리와 자신의 것을 주문한 다음에 이안을 쳐다봤다. “고기.” 저것 봐. 케이트는 다시 입술을 내밀었고 용병들과 마사는 얼굴을 마주하고 킥킥 웃었다. “코트 양과 킬리언 씨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아요?” 식사를 기다리면서 케이트가 물었다. 이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른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방문 이후로 본 적이 없군.” 조세핀과 제이드는 어떻게 지내는 걸까. 케이트는 그들에게 소홀했던 점에 미안함을 느꼈다. 조세핀과 제이드에게 큐바인 하우스를 편한 데로 사용하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녀가 해준 건 그것밖에 없다. 조세핀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고마웠지만 케이트의 마음은 달랐다. 좀 더 신경 써야겠어.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음식이 나왔다. 케이트는 별 생각 없이 손을 뻗었다. “잠깐.” 용병들과 이안이 동시에 그녀를 제지했다. “왜요?” 영문을 모르는 케이트 앞에서 용병이 그녀의 음식에 하얀 가루를 뿌렸다. 에녹에게 받은 가루다. 그 모습에 케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먼저 조심하긴 했지만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닐까? 여긴 그녀의 친구가 일하는 곳이다. 이 음식은 분명 앤이 만들었을 것이다. 앤이 자신에게 해를 끼칠 리 없다고 케이트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가루가 음식에 스며들더니 녹색 연기가 픽 하고 피어올랐다. “어?” 케이트와 마사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나왔다. 동시에 세 남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안은 재빨리 케이트를 끌어당겼다. “이안?” “물러서.” 녹색 연기가 천천히 흩어졌다. 그는 케이트가 혹시라도 그 연기를 들이마시지 않도록 손으로 그녀의 입과 코를 막았다. 용병 한 사람이 주방으로 달려갔다. 맙소사. 케이트는 이안에게 손을 치워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잊고 멍하니 식탁을 응시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앤이 일하는 식당에서 요리에 이상한 게 섞여 있을 줄이야. 앤이 그랬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앤이 요리한 음식이 아닌 걸까요?” 케이트의 질문에 이안은 그녀를 내려다보고 손을 치웠다. “글쎄.” 그도 모른다. 앤이 요리했을 수도 있고 안 했을 수도 있다. 그건 용병이 주방으로 달려갔으니 금세 알 수 있겠지. 그의 생각대로 누가 요리했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요리를 한 건 앤이 맞았다. 용병들과 이안은 잠시 앤을 의심했으나 음식을 서빙한 종업원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앤에 대한 의심을 지웠다. 앤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깜짝 놀라서 달려왔다. “케이트!” 케이트보다 키가 큰 그녀가 덤빈 탓에 케이트의 몸이 휘청했다. 그녀는 케이트를 끌어안고 고개를 숙였다. “앤?” 케이트는 한참 후에야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앤, 나 괜찮아.” 앤이 꽉 끌어안고 있어서 숨쉬기 힘들었지만 케이트는 참고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앤도 놀랐다. 자신의 요리에 독이 들어있다니. 그것도 케이트를 위해 요리한 음식에. “미안해, 미안해, 케이트.” “나 괜찮다니까. 먹지도 않았고.” 그렇게 말하는 케이트의 손끝도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독살하려 했다. 야비하고 지독한 짓이다. 하지만 그녀는 꾹 참았다. “아가씨, 일단 돌아가요.” 마사의 재촉에 다섯 사람은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다. 귀가하는 마차 안에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용병들과 마사는 케이트의 눈치를 살폈고 이안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과자라도 가져올까요?” 마사의 말에 케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눈앞에 녹색 연기가 어른거려 입맛이 없었다. 에녹의 가루가 아니었다면 그걸 먹었을 것이다. 다시 케이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아가씨….” “마사, 저 좀 일찍 잘게요.” 잠옷으로 갈아입은 케이트가 힘없이 침대 안으로 파고드는 것을 마사는 안타깝게 쳐다보고 방을 나섰다. 불쌍한 아가씨. 독이라니. “천벌 받은 놈.” 그녀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동시에 반대편 복도에서 이안이 걸어 나왔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00216 4. 독 =========================================================================                            “보고하지 않았다고요?” 밀레디의 말에 에녹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세 마녀를 만나지 않은 것을 에드워드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건 다행이군요. 하지만,” “왜 그랬느냐는 거겠지.” 에녹의 밀레디의 말을 가로채며 씩 웃었다. 보고하지 않은 건 다행이다. 하지만 이안이 무슨 의도로 그랬는지 밀레디는 걱정스러웠다. 그가 다른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그건 에녹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보고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안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아직 보고할 만큼 조사한 게 없습니다만.” 보고하지 않은 이유가 보고할 만큼 조사한 게 없었기 때문이라는 에녹의 말에 밀레디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한숨 돌렸다. 그녀는 한결 여유로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로엔 경이 내 집에 있는 동안은 안심해도 될 것 같네.” 에녹이 이안에게 케이트 옆에 머물라고 한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 이 이유만은 아니지만. 하지만 이안이 언제까지나 레인포레스트 저택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에녹이 그를 계속 지켜볼 수도 없다. 밀레디와 에녹은 이안에게 세 마녀를 눈감아 달라고 부탁하거나 이안이 세 마녀를 찾기 전에 에바니엘 밖으로 빼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에녹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안에게 세 마녀를 눈감아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이안이 그것을 받아줄 것인가 하는 게 문제다. “로엔 경은 스미스 양이 마녀인 것을 알고 있나요?” 밀레디의 질문에 에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케이트가 마녀인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자신이 괴물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생각해보면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안은 마력흡수자이고 과거 뮈엘라였다면 위험인물로 낙인찍혔을 테지만 현 뮈엘라에서는 다르다. 그는 불법 마법을 수거하고 있고 그의 마법흡수자로서의 능력은 그의 일에 상당한 도움을 줄 것이다. 에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그 녀석을 카티야 옆에 둘 이유가 또 생겨 버렸다. 이안이 케이트를 마음에 두고 있는 동안은 케이트가 안전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식는다면 어떻게 될까. 에녹은 사랑이 식었을 때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아주 잘 알았다. 굳이 사랑이 식지 않더라도 결혼하고 첩을 두는 남자들은 많다. 에녹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력흡수자의 존재는 뮈엘라에서 숨기고 있다. 에반스 혈통만 봐도 그렇다. 왕족은 한 세대마다 마력흡수자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과거 뮈엘라가 마법의 황금기일 때는 당연했지만 지금도 왕족의 피에 마법과 관련된 뭔가가 얽혀있다는 건 찝찝한 일이기 때문이다. 로엔 경 역시 그런 식으로 엮을 수 있지 않을까. 에녹은 대녀를 지키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케이트는 자신의 침대 속에 누워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머리가 아프다. 입맛도 없고 속이 울렁거렸다. 잠이 오지 않지만 억지로 잠을 청하는 건 그런 이유다. 이 불쾌한 기분에서 피하기위해. 그때 그녀의 귀에 달칵하고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마사?” 케이트는 상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저녁을 먹지 않은 그녀를 위해 마사가 간단한 과자를 가져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마사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워하고 있을 때 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사가 아니었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이안?”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그녀의 몸을 훑었다. 그제야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얇은 잠옷 차림에 숄조차 걸치지 않았다. 방이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거라는 게 유일한 안도였다. “무슨 일이에요?” 케이트는 이불로 몸을 돌돌 말고 물었다. 이안은 성큼성큼 다가와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이안의 시선에 케이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노크도 하지 않고 슬쩍 들어오다니, 이건 마치. “괜찮나.” 그녀의 생각을 자르는 것처럼 이안이 물었다. 그는 그녀가 자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깨우지 않으려고 노크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케이트는 그가 자신을 걱정해서 들어왔다는 것을 깨닫고 쓰게 웃었다. 이안답다. 속을 알 수 없는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 “나 걱정돼서 온 거예요?” 과감한 그녀의 말에 이안의 입이 굳게 닫혔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매트리스가 출렁하고 움직였다. “엇.” 케이트의 몸이 휘청하고 흔들렸다. 그녀가 쓰러지려는 것을 이안이 잡아 부축했다. “고마워요.” 이안은 케이트의 어깨를 잡은 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잡힌 곳이 뜨겁다. 얇은 잠옷 천 너머로 이안의 손이 느껴졌다. 뜨거운 그의 체온에 그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안?” 그는 처음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걸 위해서라면 결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그는 케이트가 호건 가라는 점은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집안이나 신분 고하 따위는 그에겐 애초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사생아고 운이 좋아 서자로 인정받았다. 그의 친모는 마녀일지도 모르고 그 자신 역시 마력을 흡수하는 괴물이다. 이 시점에서 그가 신분 따위를 생각한다면 그게 더 우스운 일일 것이다. 케이트는 마녀고 그는 괴물이다. 마녀에게 괴물은 위험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에녹이 이안을 기피하는 이유를 케이트보다 이안 그 자신이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케이트의 어깨를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뗐다. 케이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이안은 몇 분째 케이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왜 이러는 걸까? “이안, 어디 아파요?” “아니.” 이안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고 싶은 걸까. 그도 모르겠다. 갖고 싶다. 곁에 두고 싶다. 만지고 싶고 안고 싶다. 하지만 안 된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피를 원했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또 그런 상태가 될지 모른다. 케이트 옆에 있는 다면 그녀가 위험해질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녀에게서 손을 뗄 수가 없다. 놓으려고 생각했다. 최근 그의 냉정한 태도는 그것 때문이었다. “너는,” 이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물었다. “너는, 내가 무섭지 않아?” 케이트의 눈동자가 부풀어 올랐다.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가볍게 숨을 헐떡이며 그녀는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고민했다. “무섭지 않아요.” 한참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케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깔끔했다. 그녀는 그의 옆에 무릎 꿇고 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엇비슷해졌다. “당신이 무서울 리가 없잖아요.” “내가 너를 죽여도?” “그럴 리 없어요.” 이안의 손이 다시 케이트의 어깨에 닿았다. 그는 가냘픈 어깨 위로 쓸어 올리듯 천천히 손바닥을 움직여 그녀의 목을 감싸 쥐었다. 가늘고 약한 목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목을 꺾는 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날 것이다. 그 와중에도 케이트의 호흡은 평온했다. “이래도?” 시험하는 것처럼 이안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목을 조르려는 행위보다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 때문에 놀라고 있었다. “이안.” 케이트의 손이 이안의 손을 감쌌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괜찮아요?” 탁하고 맥이 풀렸다.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미쳤느냐는 의미냐면 제정신이다.” “그게 아니라요.” 그의 손을 감싼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목을 죌 때와는 반대로 이안의 손은 케이트의 힘에도 가볍게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마치 그가 도망칠 거라 걱정하는 것처럼 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당신이 날 상처 입힐 수 있을 리 없어요.” 케이트는 빙그레 웃었다. 그는 그녀를 상처 입힐 수 없다. 그녀에게 해가 되느니 자결을 택한 남자다. 몸을 제어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스스로의 목에 칼을 겨눴다. 그녀의 손이 그의 셔츠 사이를 헤집었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움찔했다. 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깔끔하게 가로지른 선이 피부와 피부 사이의 틈을 벌리고 있었다. “당신은 날 해치지 못해요.” 웃음기 섞인 케이트의 말에 이안은 눈을 감았다. 단정적인 말은 마법에 가까웠다. ============================ 작품 후기 ============================ 이젠 안아파요! 00217 4. 독 =========================================================================                            “나는 너를 원해.” 정적을 깨고 이안이 말했다. 평온한 어조와 행동에 비해 그 말의 의미는 격정적이었다. 케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원한다고 했다. 그게 이안다웠다. “너를 원해. 갖고 싶어.” 그렇게 말하고 이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케이트는 그에게 좀 더 다가갔다. 그녀의 무릎이 그의 허벅지에 닿았다. “그런데 그게 옳은지 모르겠다.” 놀라운 고백에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옳은지 모르겠다고? 이거 이안 맞나? 이번에는 반대로 너무나 이안답지 않은 발언에 케이트는 혼란스러워졌다. “옳다고 하면 가질 거예요?” 순수한 호기심에 내뱉은 말이 유혹의 말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이미 말이 입 밖으로 나간 다음의 일이었다.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안은 피식 웃었다. 그는 손을 들어 케이트의 뺨을 가볍게 쓸고 턱을 움켜잡았다. 그녀의 얼굴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글쎄.” 천천히 내려앉던 입술이 중간에 멈췄다. 이안은 에녹의 경계마법을 떠올렸다. “어?” 갑자기 그의 행동이 멈춘 탓에 영문을 모르는 케이트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이안은 그녀의 턱을 움켜잡은 채 고민하고 있었다. “빨간 머리.” 이안은 그녀의 턱을 놓고 팔을 그녀의 몸 뒤로 짚었다. 두 사람의 상체가 가까워졌다. “후회하지 않겠나?” 오늘 이안은 어딘가 달랐다. 케이트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후회요?” 이안의 턱이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여기까지는 문제없군. 그는 그의 접근이 어디까지 허락되는지 확인하면서 입을 열었다. “난 내 것은 놓지 않을 거야.” 그는 지금까지 그의 것이랄 게 없었다.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실라 덕분이다. 실라가 받아준 덕분에 로엔 가의 사생아가 아니라 서자가 되었고 검술을 배울 수 있었다. 실라에게는 큰 빚을 졌다. 그녀는 그의 은인이고 보답할 존재다. 하지만 그의 것은 아니다. 실라는 아르고의 어머니다. 실라가 아무리 이안을 사랑해도 그녀는 아르고와 이안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아르고를 선택할 것이다. 그는 그런 것을 원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지체 없이 그를 선택할 수 있는 존재. 그건 그의 인생에서 단 한 명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케이트가 그의 것이 된다면, 그녀는 그에게 처음이고 유일한 그의 것이 될 것이다. “네가 나를 거부해도 나는 너를 놓지 않을 거야. 그러니 잘 생각하는 게 좋아.” 케이트는 그가 자신을 협박하는 건지 경고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무슨 생각을 하라는 거지? 어째서 그는 자신이 그를 거부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녀의 눈동자에 혼란이 가득 담겼다. 이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녀에게 에녹과 자신 사이에서 자신을 택하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이 중요했다. 부유한 자들은 결혼하고 나면 다른 상대에게 눈을 돌리는 경우가 있다. 이안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것이 아니라면 부인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케이트가 그의 부인이 된다면 그는 그녀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길 원했다. 왜냐하면 그가 그녀의 것이 될 테니까. “이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안은 케이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나직하게 말했다. “너는 호건 가이고 레인포레스트의 대녀지. 강력한 마녀이기도 하고. 그러니 잘 생각하고 결정하라는 말이다. 네가 내 것이 되면 나는 너를 절대로 놓지 않을 거야. 나중에 네가 후회한다고 해도.” 후회. 케이트는 그가 말한 후회하지 않겠냐는 질문을 그제야 이해했다. 그는 그녀가 그를 선택한 다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케이트에게 이안보다 더 나은 남자가 나타날 수도 있다. 어쩌면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이건 이안이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케이트가 그를 선택한다면 그는 그녀를 절대로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울고 애원하고 어떤 말로 그를 매도하더라도 그는 그녀를 놓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그녀에게 먼저 확인해 두어야 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냐고. 아니, 후회해도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각오를 하라는 경고였다. 케이트의 입술이 벌어졌다. 입술 사이로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처음으로 이안의 약한 부분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가장 약한 어떤 부분. 아무에게도 보인 적 없고, 누구도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것. 사람은 아주 어린 아이 시절, 내 것과 네 것의 구분이 생기면서 세상과 자신을 구분한다. 자신의 것. 내 부모, 내 집. 내 옷, 내 침대. 그런 것들이 생기면서 단단하게 영글어 간다. 하지만 이안은 그런 것이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가지도 자신의 것이랄 게 없었다. 그는 희미한 기억 속에서 그를 낳아준 친모를 떠올렸다. 그녀는 이안을 아들로 보지 않았다. 이안의 가장 오래된 기억에서부터 그녀는 그를 보며 죽은 로엔 백작을 떠올렸다. 이안의 친모에게 그는 그녀가 사랑한 로엔 백작을 투영할 수 있는 존재, 그뿐이었다. 올려다본 그의 표정에 케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평소와 같은 표정변화가 별로 없는 얼굴이지만 케이트에게 이안의 얼굴은 손대면 파스스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이안.” 그녀의 가느다란 팔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안의 몸이 움찔했다. “내가 마녀가 아니고, 호건 가의 사람이 아니고, 아저씨의 대녀가 아니면, 날 놓지 않을 거예요?” 케이트의 얼굴이 그의 가슴에 닿아있어 그녀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이안은 몸을 숙여 그녀를 뒤로 밀어 넘어트렸다. 침대 시트 위로 부드러운 붉은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무슨 소리지?” “내가 마녀고, 호건가의 사람이고 아저씨의 대녀니까 생각해 보라고 한 거잖아요. 아니면, 생각할 기회도 없이 날 잡아챘을 거냐고요.” 잡아챘을 거냐고?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게 아니라,” “아니.” 그녀의 변명을 가르고 그의 단호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이안은 케이트에게 몸을 숙였다. 그의 그림자 아래 선명한 녹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케이트의 입술이 둥글게 휘었다. 하얀 얼굴 주변에 펼쳐진 붉은색 머리카락과 선명한 녹색 눈동자가 이안의 눈동자 안에 각인되었다. “아니, 그래도 물어봤을 거다.” 그는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천천히 입술이 닿았다. 부드럽고 달콤하게. 에헴하는 에녹의 목소리는 두 사람의 귀에 닿지도 못했다. “나 역시 네게 독일지도 몰라.” 이안은 팔꿈치만으로 상체를 지탱하고 말했다. 오늘 그녀가 먹을 뻔했던 독처럼, 그 역시 그녀에게 독이다. “내가 언제 네게 해를 끼칠지 몰라.” 케이트의 입술 위로 달싹이는 이안의 입술이 느껴졌다. 독이라는 말에 그녀는 저녁때 있었던 사건을 떠올렸다. 푸르스름한 연기가 공중에 피어올랐다. 어울리지 않아. 그녀는 피식 웃었다. 이안과 어울리지 않는다. 독연기라니. 그라면 검으로 그녀를 찌를 것이다. 하지만 그래. 그녀는 이해했다. 그가 이렇게 자신 없어 하는 것을. 사랑한다거나 로맨틱한 고백 없이 원한다는 말뿐이었지만 그의 자신 없는 태도가 그녀를 더욱 기쁘게 했다. “이안.” 그녀는 다시 이안을 끌어안았다. “나 잘 때까지 여기 있어줄 거죠?” 케이트는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릴 거라고 생각했다. 정확하게 그녀가 예측한대로 행동한 그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침대에 누웠다. 역시 당돌한 여자다. 그는 빙그레 웃었다. “이 마녀.” ============================ 작품 후기 ============================ BGM. 에헴, 에헴, 에헴, 에헴, 에헴 (feat. 에녹) 00218 5. 호랑이 굴 =========================================================================                            또다시 여자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리코는 일그러진 얼굴로 시체를 응시했다. 그 옆에 참담한 표정을 짓는 카이사도 있었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번에는 어린 소녀였다. 지난번과 같은 범인이라는 게 확실했다. 손톱이 깨끗했고 좋은 향이 났다. 무엇보다, “또 빨간 머리.” 리코가 신음처럼 말했다. 이번에 발견된 시체도 빨간 머리였다. 빨간 머리에만 반응하는 이상 성욕자라도 있는 걸까.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카이사가 말했다. “특정 머리카락을 좋아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외모의 취향일 뿐이다. 금발 미인만 좋아한다거나 흑발 미인을 좋아한다거나 하는 취향은 어느 남자나 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죽인다는 건 살인마가 이상성욕이라도 있다는 의미로 보인다. “지난 시체에는 그, 당한 흔적이 없었지?” 카이사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리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폭행을 당한 흔적은 없었다. “그쪽은 배제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이상 성욕자에 대한 범죄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두 사람은 고개를 젓고 몸을 돌렸다. 주변은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치안관들이 구경꾼을 몰아내고 있었다. 마차가 와서 시체를 수습했다. “아, 진짜 골치 아프네.” “음.” 리코의 투덜거림에 카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여자들은 구빈원의 린젤을 제외하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손톱이 깨끗하고 옷도 깔끔한 걸로 입고 있지만 그건 두 사람에게 어떤 힌트도 주지 못했다. 유일하게 증거랄 만한 것이 묘하게 좋은 향기뿐. 아는 사람이 없는 젊은 여성들. 깨끗한 몸과 깔끔한 옷. 그리고 좋은 향기. 이런 것들은 결국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가장 나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킬리언은 어디 간 거지?” 이 사건은 제이드도 함께 수사하고 있다. 그러니 이 자리에 그도 있어야 했다. 카이사의 물음에 리코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제이드는 잠깐 약속이 있어서.” “약속?” “이안을 만난다던데.” 제이드는 큐바인 하우스에 있었다. 이안과 케이트도 함께. 큐바인 하우스의 응접실을 조세핀의 침실로 바꾼 탓에 세 사람은 식당에 앉아있었다. “마음대로 응접실을 바꿔서 죄송합니다.” 제이드의 사과에 케이트는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잘하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이미 편한 데로 사용하라고 말해둔 터다. 그녀는 오히려 조세핀이 계단을 이동하는 게 힘들 거라는 걸 생각하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조세핀은 자신의 방으로 만든 응접실에서 쉬고 있었다. 누구라도 그럴 테지만, 늙어버린 다음부터 그녀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케이트는 더더욱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코트 양은 잘 지내고 있나요?” 케이트의 질문에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응접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조세핀은 괜찮다. 기력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제이드에게 들키고 나자 마음이 편해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죄책감 때문에 케이트와 이안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었는지 자기 방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제이드는 그저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에녹에게 자신의 생명을 나눠주겠다 자처한 것을 케이트와 이안도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세핀을 아끼고 가엽게 여겼지만 그녀가 케이트와 이안에게 준 피해를 감싸줄 생각은 없었다. 두 사람에게 조세핀을 봐 달라고 요청할 생각도 없었다. 일단 촉박한 조세핀의 생명을 구하고 나면 둘이서 이 두 사람에게 용서를 구할 생각이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이야기하세요. 수리할 곳이 있으면 수리하고 제게 비용 청구하시고요.” 상냥한 케이트의 말에 제이드는 말을 잃었다. 그는 한참 케이트를 쳐다보다가 대뜸 물었다. “조가 밉지 않아요?” 이안이 케이트를 쳐다봤다. 케이트 역시 그를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이 그의 어깨를 향했다. 옷 속에 가려진 그의 어깨는 아직도 상처가 남아있다. 그 상처가 생기게 된 원인에는 조세핀도 어느 정도 있다. “밉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요.” 케이트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입안이 텁텁하다. 밉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이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일주일간, 그녀는 조세핀을 원망했다.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왜 그녀가, 이안이 피해를 당하길 바란 걸까. 이안이 그녀를 인식하지 못하는 일주일 동안의 어느 날 밤, 케이트는 속상한 마음에 에녹에게 하소연했다. 코트 양이 왜 그랬을까요. 왜 저와 이안이 죽기를 바란 걸까요. 조세핀에 대한 배신감과 이안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힘들어하는 케이트에게 에녹은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아가, 사람이란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존재란다. 네가 잘못되길 바란 것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네가 다칠 거라 생각을 못 했을 수도 있지. 그녀의 행동은 용서하기 힘들고 나도 용서할 생각이 없지만, 그 감정이 널 좀 먹게 하지는 말거라.” 그 말은 케이트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용서하지는 말되 그 감정이 좀먹게 하지는 말라니. 그녀는 그렇게 감정을 간단히 자를 수 없다. 에녹 역시 그럴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고 케이트도 고민 끝에 자기 안에서 나름대로 결론을 도출해냈다. “반쯤은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도 있어요. 남은 반은 안됐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냥 그게 다예요. 이 마음을 부인하지 않으려고요.” 지금까지 케이트는 그렇게 살아왔다. 누군가가 미우면 마음속으로 마음껏 미워했다. 안됐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행동했다. 중요한 건 긍정적인 행동을 하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생각으로만 끝냈다. 긍정적인 생각은 행동으로 이었다. “그렇습니까.” 제이드는 찻잔을 입에 가져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게 더 나은 방법인지도 모른다. 자기 마음을 애써 다스리려 하지 않는 점이. “그래서, 나를 보자고 한 이유는 뭐야?” 이번에 그는 이안에게 물었다. 이안은 케이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 뭐야? 제이드는 문득 그가 지금까지와 달리 날 서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변에 세우고 있던 날 선 분위기가, 위험하고 어두운 느낌이 완화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그가 물어보려던 때에 이안이 입을 열었다. “부탁할 것이 있다.” 제이드의 눈이 반짝였다. 이안의 부탁이라면 최대한 들어줄 생각이지만 조세핀의 일 때문이라도 무조건 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살 용의자를 수배해줬으면 한다.” “암살 용의자?” 케이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식당에서 달아난 직원은 찾지 못했다. 이안은 제이드의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수사관이라는 그의 직책이나, 사람들에게 인기가 넓은 부분에 기대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괜찮습니까?” 이야기를 들은 제이드는 제일 먼저 케이트의 안전을 확인했다. “괜찮아요. 전 먹지 않았어요.” “다행이네요. 식당에 사람을 보내서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볼게요. “고맙습니다.” 그녀의 감사 표시에 제이드는 손을 내저었다. 굳이 조세핀의 일이 아니더라도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다. 그보다 그는 이안이 도움을 청했다는 사실에 꽤 놀라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이안은 한결 대하기 쉬워졌다. 분위기뿐 아니라 제이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점이 더 그러했다. “이만 일어나지. 가볼 데가 있어서.” “어딜 가는데?” “호건 가에 가기로 했다.” 제이드의 시선이 케이트를 향했다. 그녀는 호건 가에서 도망쳐 나온 뒤로 에스메랄다의 방문 거부가 아니더라도 저택에 들어가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괜찮겠느냐는 시선에 케이트가 이안을 쳐다봤다. “이안과 함께 가려고요.” 어라? 제이드의 눈이 커졌다.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씩 웃으며 이안을 툭 쳤다. “뭐냐?” “이 자식.” 기분 나쁘게 히죽대는 제이드의 태도에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아냐, 잘 가.” 이상한 짓을 하는군.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차에 올랐다. 제이드의 실없는 행동이 하루 이틀인 것도 아니고. 그는 금세 머릿속에서 털어버렸다. 하지만 제이드는 달랐다. 그는 여전히 히쭉히쭉 웃으며 떠나가는 마차를 지켜보고 있었다. 짜식, 잘됐다. 어쩐지 뿌듯한 기분이 들어 그는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케이트의 태도나 이안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눈치 빠른 제이드에겐 명확했다. 결혼선물로 뭘 주면 좋을까. 그는 벌써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으으..소제목...나중에 바꿀지도 모르겠어요. 오늘 엄청 춥네요.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표지는 리넬샤님께서 그려주신 팬아트입니다. 일주일 간격으로 바꿉니다. 00219 5. 호랑이 굴 =========================================================================                            “들어오십시오.” 케이트는 이안과 함께 호건 가의 저택에 들어섰다. 지금까지는 에스메랄다가 방문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귀족과 국왕이 압력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리 영향력이 큰 집안이라 해도 나라의 국왕과 모든 귀족이 단합하면 한 수 접는 수밖에 없다. 케이트는 호건 가의 사람이고 특별한 이유 없이 그녀의 방문을 거부하는 건 옳지 않았다. 하지만 에스메랄다가 그녀의 방문을 받아들인 것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마님께서는 조금 후에 나오실 겁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케이트의 인사에 집사는 고개를 꾸벅하고 나갔다. 그는 문을 살짝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케이트와 이안은 나란히 앉아서 에스메랄다를 기다렸다. 에스메랄다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다.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혼자라면 이 저택에 들어올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이안이 함께라면 겁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안을 보고 미소 지었다. “같이 와줘서 고마워요, 이안.” 이안의 손이 그녀의 부드러운 뺨을 가볍게 쓰다듬고 내려왔다. 그때 하인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이안의 손이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케이트조차도 그가 그녀를 만진 게 아니라 그냥 손을 올렸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인은 케이트의 잔에 차를 따른 다음 주전자를 바꿔서 이안의 잔에도 차를 따르고 나갔다. 케이트는 잔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제가 너무 예민한 걸까요?” 그녀의 말에 이안도 케이트의 잔을 쳐다봤다. 그는 그녀의 걱정을 이해했다. 한번 독에 당할 뻔했다. 밖에서 먹는 음식을 불안해하는 건 당연하다. “아니.” 이안은 케이트의 잔을 들어 자신의 것과 바꿨다. 케이트의 불안이 아니더라도 그 역시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어째서 하인은 케이트의 잔에 차를 따르고 그의 잔에 따를 때는 다른 주전자의 차를 따른 걸까. 단순히 주전자에 차가 없어서 바꾼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마시던 차를 가져온 것도 아니고 손님에게 내온 차가 부족해졌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오랜만이네. 사촌.” 제프리는 한참 후에 나타났다. 그때까지도 에스메랄다는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있었다. 케이트는 입을 굳게 닫았다. 별로 인사하고 싶지 않은 남자다. “친하게 지내자고, 사촌.” 거들먹거리면서 들어온 제프리는 케이트의 찻잔을 슬쩍 쳐다봤다. 마신 흔적은 없었다. 아쉽게 됐군. 입맛을 다시는 그의 행동을 이안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좀 늦으실 것 같은데. 내가 상대해도 되겠지?” “아뇨.” 케이트는 그가 맞은편에 앉으려 하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전 할아버지를 만나러 왔어요. 할아버지를 만나게 해주세요.” 당당한 그녀의 요구에 제프리가 멈칫했다. 그는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이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히죽 웃었다. “할아버지는 주무시고 계신 데. 언제 일어나실지 모른다고.” “이 시간에요?” 늦은 시각이다. 거의 저녁 식사 시간에 가까웠다. 케이트의 지적에 제프리는 어흠하고 헛기침했다. “그, 그거지. 나이 든 사람들은 잠이 많다고.” 생각나는 대로 지껄인 말이지만 그럴 듯했다. 케이트는 입을 다물었다.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다. 단순히 혈육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 슬슬 짜증이 나고 있었다. 제프리는 케이트가 입을 다물자 다시 슬슬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든 사람이 잠이 많다니. 천재적인 변명이다. 그는 자신이 꽤 영리하다고 생각했다. “언제든지 와보라고. 나이 든 사람은 잠이 많으니까.” 그 말에 케이트의 눈초리가 휙 올라갔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 말은 제가 올 때마다 할아버지께서 주무신다는 이야긴가요?” “그렇지.” “제가 언제 와도요?” “그, 그렇지.” “그럼, 할아버지께서 일어나 계신 시간을 알려주세요. 그때 올 테니까요.” 뭐야, 이 여자. 집요한 데다 건방지기까지 하다. 제프리는 케이트를 다시 봤다. 예쁘장한 여자라 생각했는데 이 여자가 귀찮아 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흠하고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했다. “그건 나도 모르지.” “어떻게 모를 수 있어요? 당신은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잖아요.” “이래서 가난한 사람이 싫다니까.” 제프리는 거들먹거리며 손을 벌렸다. “이렇게 큰 집에서 누가 언제 일어나고 언제 자는지 어떻게 알아?” “그 말은 할아버지가 정말 주무시는지 아닌지 모른다는 말이네요.” “아니, 그건 안다니까.” “아까와 말이 다르잖아요.” 제프리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그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구나 하면 될 일이지 왜 자꾸 꼬치꼬치 캐묻는단 말인가. 이전까지만 해도 그는 에스메랄다처럼 케이트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저 좀 곤란한 계집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확실히 케이트를 싫어하게 되었다. 어디 계집이 그의 말에 쨍알 쨍알 토를 다는지 듣기 싫었다.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건 어머니인 에스메랄다뿐이다. 그런 에스메랄다도 그는 무시하고 있다. 제프리는 테이블을 주먹으로 쿵 치며 소리쳤다. “시끄러워!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갑작스러운 말에 케이트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지? 안하무인에 재수 없기까지 하다. “지금 뭐라고 그랬어요?” “시끄럽다고 그랬다! 이래서 가난하고 천한 것들은 상대하기가 싫다니까. 조금만 뜯어먹을 건수가 생기면 우르르 달려와서!” 케이트는 화가 나서 주먹을 꼭 쥐었다. 이 멍청한 남자를 한 대 때려주고 싶다. 그런 생각이 그녀의 내부에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이안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안은 냉정한 눈으로 제프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케이트에게 조금이라도 손대려는 기미가 보인다면 후려갈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제프리는 불쾌하다. 이안 역시 제프리를 한 대 때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좀 닥치라고 했다. 어디 건방지게,” 그 순간 케이트 앞에 있던 잔이 팍 하고 깨졌다. 파편이 후두둑 떨어졌다. 이안이 재빨리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잡아당겼다. “헉?” 제프리 역시 깜짝 놀라 뒤로 펄쩍 뛰었다. 그러다가 그는 소파 등받이에 걸려 우당탕 넘어졌다. 마치 개구리처럼 소파에 걸려 카펫 위에 엎어진 모습이 꼴불견이다. 케이트는 눈을 크게 뜨고 찻잔을 쳐다봤다. 이게 내가 한 짓인가?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이안 역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안,” “쉿.” 이안이 케이트의 손을 잡아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폭발한 것처럼 찻잔의 밑부분과 차 받침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확인했다. “뭐, 뭐야?” 넘어졌던 제프리는 엉금엉금 소파 뒤로 기어가 고개만 내밀었다. 찻잔이 폭발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가 케이트와 이안을 수상쩍다는 듯 쳐다봤다. 케이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네,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큰일 났다. 케이트가 얼어붙었을 때 이안이 나섰다. 그는 자신의 잔을 집어 들어 테이블 위에 쪼르륵 부어버린 뒤 말했다. “차에 이상한 약을 탄 모양이군.” “무, 뭐?” “간혹 특정한 독약이 차 성분과 결합해 이런 현상을 보이곤 한다.” “그, 그런 말은 못들,” 아차. 제프리는 재빨리 입을 닫았다. 차에 독을 찼다는 걸 제 입으로 시인한 꼴이다. 이안은 그대로 케이트를 잡아당겨 일으켜 세웠다. “불쾌하군. 호건 가는 친척이 오면 독이든 차를 대접하나?” “그, 그게 아니라…!” 이안은 제프리의 변명을 무시하고 얼어붙은 케이트를 안다시피 하고 방을 나섰다. 큰 소리에 달려온 집사가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 일은 공식적으로 항의하겠네.” 이안의 말에 집사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몰랐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뭐라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문 그의 앞을 이안이 케이트를 데리고 지나갔다. “이안, 아까 그거….” 저택을 나와 마차 안에 들어가자 케이트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이안이 상체를 내밀자 두 사람의 무릎이 닿았다. 그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래. 독약 탓은 아니지.” 차와 결합하면 폭발하는 독약 따윈 들어본 적도 없다. 애초에 독약은 사람이 마셔야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마시기 전에 터지면 소용이 없다. 그의 말에 케이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랬던 걸까요?” 그녀의 힘이 갑자기 나타났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이안은 케이트가 고개를 숙이지 못하도록 그녀의 얼굴을 들었다. “글쎄.” 괴물은 마녀의 마력을 흡수한다. 하지만 이안은 케이트를 거부했다. 이안의 머릿속에 알라나데일의 계단에서 케이트가 떨어졌던 일이 떠올랐다. 낡은 계단이 부서졌을 때 케이트가 계단을 굴렀다. 아니, 구를 뻔 했다. 이안은 그녀가 죽을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작은 여자라면 목이 부러져 죽을지도 모른다.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케이트의 몸이 떠올랐다. ============================ 작품 후기 ============================ 킹스맨 보고왔습니다. 00220 5. 호랑이 굴 =========================================================================                            “잔이 깨졌다고?” 깨졌다고 하는 건 너무 얌전한 표현이다. 케이트는 그녀의 옷에 박힌 유리조각을 떠올렸다. 이안이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다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괜히 자세히 언급해서 에녹이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케이트가 걱정하는 건 그녀의 마력이 풀렸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폐허 속에서 이안과 함께 에녹에게 구해진 뒤 그녀는 다시 한 번 에녹에게 마력을 봉인 당했다. “네 힘이라는 말이냐?” 에녹은 케이트가 마법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폐허가 그녀의 소행이라는 사실에도 상당히 놀랐었다. 그 정도의 힘을 발휘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케이트가 에녹의 봉인을 깼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에녹의 봉인을 두 번이나 깼다는 말이다. 첫 번째 봉인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탐탁지 않은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이안의 존재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번엔 너무 빠르다. “그런 것 같아요.” 에녹은 재빨리 케이트의 손을 잡고 봉인을 확인했다. “풀린 건 아니야. 하지만 약간 흔들리긴 했구나.” 그는 혀를 찼다. “뭔가 다른 일이 있었느냐?” 케이트는 슬며시 이안을 쳐다봤다. 다른 일이라면 호건 가에 찾아가서 제프리를 만난 일이다. 하지만 그걸 다른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를 만나러 갔다가 호건을 만났어요.” “호건?” “제프리 호건이요.” 아, 그 녀석. 에녹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다. 제프리 호건을 좋아하는 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 사내가 무슨 짓을 했느냐?”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고요. 그냥, 좀 다퉜어요.” 케이트는 솔직하게 시인했다. 호건 가에서 내 놓은 차가 마음에 걸려 손대지 않았다는 부분부터, 제프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까지. “사실 한 대때리고 싶었어요.” 그녀의 수줍은 고백에 에녹이 껄껄대며 소리 높여 웃었다. 한 대 때리고 싶다니. 귀여운 말이다. 그때 이안이 입을 열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야, 그 사내를 만나면 누구라도 약간 격해질 걸세.”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유쾌하던 분위기가 이안의 말로 인해 가라앉았다. 에녹과 케이트는 무슨 말인가 하고 그를 쳐다봤다. “전에, 제가 케이트의 독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릿속에 그의 고백이 떠올랐다. 그가 그녀에게 독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 그건 에녹의 말이었다. 에녹은 케이트를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지.” “그건 무슨 의미였습니까? 제가 케이트를 잡아먹는다는 말 말고도 다른 무엇인가가 있는 것 아닙니까?” 에녹은 크흠하고 헛기침을 한 뒤 케이트를 쳐다봤다. 그녀가 겁을 먹을까 싶어 말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아저씨, 알려주세요.” “흠.” 그는 한참 케이트를 응시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로엔 경을 네게서 떼어놓으려 한 것인데.”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이래서 이안을 떨어트려 놓으려 했다는 게 무슨 말일까. 에녹은 다시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괴…. 아니, 마력흡수자는 마력보유자의 마력을 흡수하잖느냐.” ‘네에.“ “봉인된 마력을 흡수하기 위해 무슨 짓을 할 것 같으냐?” 이안이 입을 열었다. “봉인을 깨려 할 겁니다.” “맞네. 봉인된 마력을 흡수하기 위해 제일 먼저 봉인을 깨려 하겠지. 자네가 케이트 곁에 있으면 있을수록 케이트의 봉인이 약해질 가능성이 높다네.” 그래서 독이라는 말이다. 이안이 케이트의 마력을 흡수하지 않아도 그의 마력 흡수자로서의 힘은 마력보유자의 마력에 끌린다. 순수한 마력에 접근하기 위해 그의 힘이 끊임없이 봉인을 비틀어 열려고 한다. “물론 봉인을 깬다고 해서 마력을 바로 흡수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지난번에 겪지 않았느냐.” 에녹의 시선이 케이트를 향했다. 그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로엔 경의 마력흡수자로서의 힘이 강할수록 네 봉인을 강하게 부수려 할 것이야. 내 예상일뿐이지만, 지난번에 건물을 부순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닌가 싶구나.” 이성을 잃고 괴물이 된 이안이 케이트의 마력을 탐하기 위해 에녹의 봉인을 깼다는 말이다. 다행히 케이트의 봉인이 깨진 순간 괴물이 정신을 잃어 마력이 흡수당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정신을 잃지 않았다면 케이트는 여지없이 마력을 빼앗겼을 것이다. “그럼 아저씨 말씀은 이안이 제 봉인을 깨서 오늘 제가 마법을 사용했다는 말인가요?” 에녹은 입을 다물었다. 그것도 좀 애매하다. 만약 케이트가 마법을 사용했다면 그녀의 봉인이 깨어졌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케이트의 봉인은 남아있었다. 그때 이안이 다시 끼어들었다. 그 역시 곰곰이 생각하던 것이 있다. 그는 자신의 의혹을 정리하기 위해 물었다. “케이트의 봉인이 깨진 건 지난번 사건이 확실합니까?” “그래. 내가 카티야를 만나자마자 확인한 것이 그것이었으니 말일세.” “하지만 케이트가 마법을 사용한 건 그전에도 몇 번 있었습니다.” “큐바인 하우스에서의 일을 말하는 것 아닌가. 그건 카티야의 힘이 아니라 사악한 마녀의 흉계일 거라 본다네.” “그게 아닙니다.” 이안은 그가 알라나데일에서의 일을 모른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케이트를 한번 쳐다보고 말했다. “제가 케이트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녀는 이미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아, 아니에요!” 케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건 마치 그녀가 에녹 몰래 사실은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 같지 않은가. 그녀는 열심히 부인했다. “처음이었어요! 전 제가 한 줄도 몰랐단 말이에요!” 심지어 그거 때문에 이안에게 위협까지 당했다. 케이트는 문득 떠올라 원망스러운 눈으로 이안을 쳐다봤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그런 시선에도 이안은 무덤덤했다. “케이트의 말이 맞습니다. 그녀는 저와 만나자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에녹의 표정이 변했다. 이안과 만나자 마법을 사용했다는 말이 걸렸다. 그리고 그는 이안 역시 의도하고 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네의 말은 카티야의 힘이 자네 때문에 표출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깨닫지 못 했지만 제프리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는 케이트의 고백을 듣는 순간 이안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저 역시 제프리 호건을 한 대 때리고 싶었습니다.” 이안의 느닷없는 고백에 케이트와 에녹의 눈이 커졌다. 두 사람은 멍하니 그를 보다가 푸핫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토록 진지한 표정으로 하는 고백이 나도 걔 때리고 싶었어 라니. 케이트는 눈물이 글썽일 때까지 웃다가 이안의 팔을 잡고 숨을 헐떡였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웃느라 그녀의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러 올렸다. 그게 왜 웃을 일이지? 그는 두 사람이 왜 웃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녀석이 거기서 널 한마디만 더 모욕했다면 한 대 후려쳤을 거다.” 담담한 이안의 말에 웃음이 잦아들었다. 케이트는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이 남자가 뭐라는 거야.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달아올랐다. 케이트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그에게서 떨어졌다. “어, 어쨌든 이안도 호건을 때리고 싶었다는 말이죠.” 그래. 이안이 나지막하게 동의하는 것을 에녹이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그는 자신이 가장 우려하던 사태에 당도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는 어흠하고 헛기침을 하고 케이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이 붙어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덕분에 케이트와 이안의 사이가 좀 더 벌어졌다. “자네의 말은 케이트와 자네가 같은 생각을 했을 때 케이트가 마법을 사용한 것 같다는 말인가?” 어, 그래?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그러고 보니 그럴만한 상황이 꽤 많았다. 그녀는 자신이 마법을 사용했던 순간을 돌아봤다. 대부분이 두 사람이 동시에 위험한 순간에 빠졌을 때다. 에녹은 케이트의 손등을 토닥이며 생각에 잠겼다. 가능할 것도 같다. 상성이 맞는 두 마법사가 공명하는 것은 흔하지는 않지만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마력보유자와 마력흡수자의 공명이라? ============================ 작품 후기 ============================ 좀 늦지 않았나 싶은데 사실 제가 가입한 피어나 까페에서 검은소야곡 서평이벤트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까지인데 몇가지 조건이 있지만 세분께 검은 소야곡을 드립니다. 혹시 관심있는 분 중 가입한 분은 한 번 확인해 보세요. ..근데 오늘까지라는거... 00221 5. 호랑이 굴 =========================================================================                            “가능한 이야기인가요?” 케이트의 질문에 에녹은 고개를 들었다. “글쎄. 마력보유자 사이에서 서로의 마력이 공명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단다. 하지만 흡수자와의 사이에서도 그럴 수 있는지는 모르겠구나.” 에녹은 케이트의 손을 한 번 더 토닥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더 알아봐야 할 문제다. 그는 왕궁의 금서도서관을 살펴야겠다고 생각했다. 뮈엘라의 역사에서 그가 모르는 것은 없지만, 잊고 있는 것은 있을지도 모른다. “좀 더 알아보마. 시간 나는 대로 내, 왕궁의 도서관을 한 번 살펴보마.” “저도 도와드릴게요.” “아니다, 아가.” 금서 도서관이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다. 무엇보다 마력보유자의 접근을 차단하는 마법이 걸려있다. 허가된 몇 명을 제외하고. “너는 가지 않는 게 좋겠구나. 너는 마력을 숨기는 방법을 배우는 게 더 급한 것 같으니 말이다.” “그럼 제가 가겠습니다.”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에녹이 왕궁의 도서관을 간다고 했을 때부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마법에 대한 것이라면 금서 도서관일 것이다. 에녹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괴물과 그의 차이가 또 있다. 마녀를 구분할 수 있다는 것. 그는 그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찾아보고 싶었다. “자네가?” 에녹은 이안을 쳐다보고 생각에 잠겼다. 마력 보유자의 접근은 금지되어 있지만 마력흡수자라면 괜찮을 것이다. 그가 케이트를 데려갈 수 없는 이유는 케이트의 접근을 허가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출입 허가증이 있는가?” 없다. 하지만 그에겐 비장의 무기가 있다. 이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네.” “그럼 내, 날을 잡아보겠네.” 이안이 고개를 끄덕하고 일어났다. 케이트는 그의 뒤를 따라서 방을 나가려다 멈칫하고 돌아섰다. 그녀는 이안이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힌 것을 알았지만 이안은 무시하고 자신이 방으로 돌아갔다. 이른 시일 내에 큐바인 하우스에 한 번 들러야 할 것이다. 케이트는 문을 닫은 뒤 왜 그러느냐는 표정을 짓는 에녹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용기를 내기 위해 크게 숨을 한번 내쉬고 입을 열었다. “아저씨, 부탁이 있어요.” “부탁?” 케이트는 다시 한 번 숨을 내쉬었다. 용기가 필요하다.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그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제 사교계 데뷔 말인데요.” 그녀를 위한 사교계 데뷔는 착착 준비되고 있다. 변호사인 막스의 도움을 비롯해서 에녹은 자신의 영향력을 마음껏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거, 안 하고 넘어가면 안 될까요?” 긴장으로 케이트의 손이 그녀의 스커트를 꽉 쥐고 있었다. 땀 때문에 손바닥이 끈적였다. 케이트는 에녹의 실망하는 얼굴을 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말했다. “아저씨께선, 신랑감을 구해야 한다고 하셨지만요. 전 다른, 그러니까 다른 신랑감은 필요 없어요. 저는,” “아가.” 에녹의 그녀를 말리기 위해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는 그녀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부끄러움과 미안함에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이해한단다. 네가 사교계 데뷔를 하고 싶지 않은 건,” 숨을 한 번 들이켜고 에녹은 이안이 나간 문을 쳐다봤다. 저 괴물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괴물에게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대녀가 빠져들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안다. 하지만 아가, 사교계라는 건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란다.” 사교계에 데뷔한다는 건 신랑감을 찾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케이트는 누구와 결혼하더라고 사교계를 떠날 수 없다. 그녀의 부와 집안 때문이다. 그건 케이트가 사교계와 연관되고 싶지 않아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사교계가 그녀를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나는 네가 사교계에서 사람을 보는 눈을 길렀으면 한단다. 사교계에 있는 건 남성뿐만이 아니잖느냐. 여성과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거란다.” 그건 생각하지 못했다. 케이트는 자신의 친구가 조세핀을 제외하고 전부 하녀일 때 만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과연 아저씨야. 그녀는 에녹의 충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더 넓고 깊은 관점에서 이야기해준다. 그것이 케이트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네요. 엉뚱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해요, 아저씨.” “죄송할 것 하나도 없단다.” 에녹은 케이트의 손을 잡고 손등을 토닥였다. 긴장이 풀린 덕에 그녀의 손에 땀이 말라있었다. “뭐든지 물어보렴. 네가 대답해줄 수 있는 건 뭐든지 해 주마.” 다정한 말에 케이트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자연스럽게 조세핀이 떠올랐다. “아저씨, 한 가지만 더요.” “그래.” “코트 양은, 언제 도와주실 건가요?” 에녹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이 조세핀을 도와주겠다고는 이야기했지만 언제 도와줄 건지는 이야기 하지 않은 것을 떠올렸다. “그건 코트 양에게 달린 거란다.” “설마 코트 양이 도움을 거부했나요?” “그래.” 어째서? 사정을 모르는 케이트이 눈이 커졌다. 조세핀이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이유는 당연했다. 제이드의 생명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제이드가 열심히 설득하고 있었다. “조, 너 이러다 죽어.” “죽어도 내가 죽어. 네가 아니라.” 쌀쌀맞은 말에 제이드는 가벼운 좌절감을 맛봤다. 카이사와 탐문 수사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조세핀은 한 끼도 제대로 먹지 않고 있었다. 그가 큐바인 하우스로 퇴근하자 이제는 그가 익숙해진 제인이 쪼르르 달려와서 일러바친 덕에 알았다.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잖아. 먹기라도 하라고.” 제이드의 부탁에 조세핀은 눈동자만 굴려 그를 쳐다봤다. 필사적인 제이드 킬리안이라니, 이상하다. 그녀는 픽 웃었다. “웃기냐? 사람은 이렇게 애걸하게 만들고?” 이를 가는 말투에 조세핀은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우습다. 제이드의 태도가. “제이드, 난 됐으니까 너나 가서 먹어. 오늘 저녁도 안 먹고 왔잖아.” “네가 먹어야 먹지.” 조세핀은 가볍게 인상을 썼다. 입맛이 없다. 나이를 먹은 탓인지 그녀는 그다지 입맛이 없었다. 고기나 빵도 씹는 게 불편하다. 먹을 수 있는 건 수프 정도 인데 계속 그렇게 먹는 걸 줄이다 보니 점점 먹을 수 있는 양이 줄어버렸다. “진짜로 입맛이 없는데.” “그럼 나랑 같이 앉아있기라도 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이드는 조세핀 앞에 음식을 놓았다. 식당에서 사온 음식이었다. 예전에는 조세핀이 해줬는데. 그는 최근 식당에서 음식을 사면서 누군가를 위해 하나하나 챙긴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동안 그가 받았던 조세핀의 배려는 간단한 게 아니었다. 당연히 받기만 했던 것들이 주는 사람의 노력이 상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시락 먹는 것 같네.” 식당에서 가져온 음식을 보고 조세핀이 웃으며 말했다. 포장된 음식을 그대로 내놓은 탓에 정말로 소풍 가서 도시락을 먹는 기분이 들었다. 제이드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에밀리와 소풍을 간 적이 있거든? 그때 에밀리가 도시락을 싸와서 좀 놀랐었어.” “도시락?” 조세핀의 죽은 동생 에밀리와의 약혼 시절 이야기다. 제이드는 에밀리와 그래도 사이가 좋았던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에밀리는 미인이고 성격도 밝았다. 조금 이기적이긴 했지만 그때의 제이드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킬리언 가는 코트 가가 그리 부자가 아니라는 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예쁜 에밀리가 제이드의 신부가 된다는 것에 환영했을 뿐이다. 그 정도로 킬리언 가는 막내아들의 행복만을 기원했다. “음, 에밀리는 요리 못 하는 줄 알았거든.” “못해.” 제이드의 말에 조세핀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빵을 뜯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못한다고? 하지만 그때 도시락은 꽤 잘 만들었던데? 닭튀김도 있었고, 푸딩도 들어있었어. 그거 만들기 꽤 어려운 거 아냐?” “만들기 어렵다기보다는 손이 많이 가지. 에밀리는 계란후라이도 못하는 애야.” “어?” 조세핀은 고개를 들고 씩 웃었다. 마치 비밀을 알려주는 것처럼 그녀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거, 내가 만든 거야.” “네가?” “응. 너와 소풍 가는데 그냥 빵이랑 버터만 가져간다길래 내가 해줬어. 너 그때 푸딩 좋아했잖아.” 그리고 닭튀김도. 제이드는 그렇게 말하려다 꿀꺽 삼켰다. 가려졌던 시야가 환하게 밝아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때 그가 에밀리에게 어떻게 푸딩을 만들 생각을 했냐고 물어보자 에밀리는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에밀리 성격에 떠들어 대면서 자랑할 거라 생각했는데 겸손한 태도라 좀 이외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에밀리와 괜찮은 부부가 될지도 모른다고,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빵을 먹는 것도 잊고 느릿느릿 수프를 후후 부는 조세핀을 쳐다봤다. 그동안 그가 심각하게 몰랐던 사실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 작품 후기 ============================ 아...오늘 금요일이 아니었어요... 아, 맞다. 조용한 꽃님께서 몇가지 지적해주신 부분이 있어서 수정했습니다. 몇년에 걸쳐서 쓰다보니 저도 헷갈리는 부분이 있네요OT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00222 5. 호랑이 굴 =========================================================================                            도서관을 지키던 경비병에게 이안이 보여준 것은 에드워드에게 받은 검이었다. 검을 본 경비병은 말없이 이안을 들여보내 주었다. 에녹은 그가 에드워드 에반스 공작과 사촌 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검은 에반스 공작이 준 것인가?” “네.” 그럴 줄 알았지만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에녹은 검을 만져 봐도 되는지 물었고 이안은 검 집째로 내밀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검 집과 그 안에 꽂힌 검은 새파란 날을 자랑하고 있었다. 에녹은 가볍게 혀를 찼다. “귀한 것을 받았군.” 그는 검을 이안에게 돌려주며 말을 이었다. “이 검의 원주인이 누구인지 아는가?” “에반스 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라 하더군요.” “건국 왕인 에드워드가 성녀 뮈엘라에게 주었던 검일세.” 이안은 여성용 검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후대인 에드워드가 그것을 알고 준 걸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안은 새삼 검을 다시 봤다. “장식용 검이라 생각했습니다만.” “그건 사물을 베기 위한 검이 아닐세.” 에드워드가 사랑했던 여인 뮈엘라를 위해 드워프에게 부탁했던 검이다. 남성용 검과 여성용 검으로 한 쌍을. “성녀가 받은 것이라면 어째서 이것을 에반스 공작이 가지고 있는 겁니까?” 이안의 질문에 에녹이 씁쓸하게 웃었다. 뮈엘라는 건국 후 왕궁에서 편히 사는 것을 거부했다. 그녀가 성녀라 불리는 이유다. 에드워드를 도와 나라를 세운 뮈엘라는 에드워드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녀는 수도에 왕비로 남기보다 나라 곳곳을 다니며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돕기를 원했다. “뮈엘라가 수도를 떠나는 날, 에드워드에게 돌려줬다네.” 그것이 어째서 에반스 공작의 보물창고에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는지는 뻔하다. 청혼을 거절당한 에드워드가 아무렇게나 던져둔 것이겠지. 그는 건국 후 나라의 이름을 뮈엘라라 지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지만 뮈엘라는 끝까지 그의 사랑을 거절했다. “잘 가지고 있게. 언젠가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니.” 그럴까. 이안은 검을 다시 갈무리했다. 여성용에 심지어 베는 용도 아니라니 그가 쓰기는 불편할 것이다. 두 사람은 어둡고 퀴퀴한 도서관을 걸었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도서관은 거미줄과 먼지가 가득했다. 에녹이 지나가자 몇몇 서가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마력에 반응하는 것이다. 이안은 몰랐지만, 에녹은 굳이 알려주지 않았다. 그는 서가를 살피며 마력 흡수자에 대한 자료를 찾았다. 에녹의 손짓에 따라 이 서가 저 서가에서 책이 빠져나왔다. 이안은 책이 에녹 눈앞에서 파라락 펼쳐지는 것을 보고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마법의 황금기였던 뮈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지금은 뮈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마법사들이 있는 곳을 가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카티야를 이 나라 밖으로 빼낼 생각도 있다네.” 조용히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만 가득한 가운데 갑자기 에녹이 말했다. 이안은 책을 읽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책이 빠져나간 구멍을 통해 서가 반대쪽에 선 에녹이 보였다. “이 나라는 케이트에게 위험해. 그건 자네도 잘 알겠지.” 케이트를 노리는 마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녀인 그녀가 살기에 뮈엘라는 위험하다. 에녹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것도 알 테지.” 이안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말이 많은 자라 해도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자네와 카티야가 공명하거나 안 하거나, 자네는 카티야에게 위험해. 카티야는 자네에게 호감이 있는 모양이지만,” 에녹은 잠시 말을 멈췄다. 케이트가 이안에게 마음에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책을 뽑은 구멍을 통해 이안을 응시했다. 호박색 눈동자가 어슴푸레한 도서관 안에서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가 아무리 카티야의 마력을 가둔다 해도, 자네와 카티야가 흥분하면 계속 호건 가에서 일어난 일이 일어날 걸세.” 그러니 이쯤에서 멈춰. 더 이상 케이트와 가까워지지 마. 그런 경고였다. 에녹은 이안이 싫다고 말할 거라 생각했다. 알겠다고 떠날 녀석은 아니다. 그는 이안이 싫다고 한다면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달랐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무엇을 말인가?”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에녹은 훅하고 숨을 들이켰다. 서가 이곳저곳에서 피어오르던 빛이 한순간 팍하고 꺼졌다. “카티야에게서 떨어지라면 그럴 텐가?” “아니요.” 다시 서가에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놈 봐라? 에녹은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입을 열었을지만 이안이 먼저 말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떨어지는 것 말고 말인가?” “네.” “무슨 일이 있어도 카티야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생각인가?”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건 너무 가벼운 말이다. 그는 케이트를 휘감고 놓지 않을 생각이다. 그녀가 도망치면 끝까지 쫓아가서 잡을 생각이었다. “제가 케이트에게 위험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위험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만 알려주십시오.” “자네가 죽는 방법이라 해도?”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에녹은 숨을 탁 뱉고 말했다. “방법이 없다면 어찌할 텐가.”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럴 리 있네. 자네는 그 아이에게 불치병 같은 존재야. 조금 나아질 수는 있어도 낫지는 않아. 조심한다면 수명대로 살겠지. 하지만 조금의 실수에도 그 애의 목숨이 달렸단 말일세.” 이안의 턱이 단단해졌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테두리부터 조금씩 황금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도 알고 있다. 이안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이 손에 안겼던 몸이 얼마나 작고 연약한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괴물로 변했을 때의 기억은 조각조각이지만 그가 얼마나 케이트의 피와 살을 원했는지, 그녀가 얼마나 망가지기 쉬웠는지 몸이 기억하고 있다. “안 하겠습니다.” 에녹은 이안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 녹아버린 듯한 몸에 비해 이안의 눈동자는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괴물과는 다른 어떤 존재처럼 보여 에녹은 움찔했다. “조금의 실수도 하지 않을 겁니다.” 이안의 말을 들으며 에녹은 신기하게도 그게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자가 그런 말을 했다면 허세 넘치는 말이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말하는 것이라고 호통을 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안이 말하는 것은 진실처럼 들렸다. 다짐이 아니라, 어떤 단정. 그의 시선이 이안의 어깨를 향했다. 괴물이 된 상태에서 케이트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몸을 찌른 자다. 그는 문득 케이트에게 이안이 독일지, 이안에게 케이트가 독일지 의문이 들었다. 다음번에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이안이 케이트를 죽일 확률도 반, 케이트를 지키기 위해 자결할 확률도 반이다. “지난번에 자네가 죽을 뻔하지 않았나.” 생각해보면 케이트가 위험하긴 했지만 마찬가지로 이안도 위험했다. 마력흡수자는 생명에 위협을 느끼면 괴물이 된다. 위협을 느껴서 된 괴물이 쓰러진다는 건 이안이 생과 사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었다는 뜻이다. 에녹은 계속해서 이안을 괴물이라고, 케이트에게 독이라고 매도했다. 그런 험한 꼴을 당하고 매도당하면서까지 이안은 케이트 곁에 남아있다. “그게 사랑이라고 어떻게 믿나.” 에녹의 말에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에녹은 계속해서 말했다. “마녀는 이성에게 매력적이야. 카티야는, 그 애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나라의 모든 남성을 유혹할 수 있네. 어쩌면 여성도. 이런 생각, 해본 적 없나? 일반인에게 유혹적이라면 자네 같은 마력 흡수자에게 얼마나 매력적일지 말이야.”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술 한 잔 해쑴다... 00223 6. 허세 한 스푼 =========================================================================                            “아저씨와 무슨 이야길 했어요?” 호건 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케이트가 물었다. 이안은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날이 추운 탓에 케이트는 토끼털이 달린 케이프를 두르고 있었다. 하얀 케이프 위로 붉은 머리카락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별말 없었다.” 이안은 그렇게 말하며 손등으로 케이트의 뺨을 쓸었다. 차갑다. 그는 두 손으로 케이트의 두 뺨을 감쌌다. 그의 온기에 케이트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저씨랑 싸운 건 아니죠?” 그녀의 말에 이안이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너는 나를 어린아이로 생각하는 것 같아.” “가끔 어린애 같기도 해요.” 그래?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아차. 케이트가 물러나려 했지만 턱이 단단히 잡혀 있었다. “이안,” 케이트의 말은 더 이상 입술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안은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빨았다. 뜨거운 그의 입술과 달리 케이트의 입술은 서늘했다. 익숙하지 않은 행위에 케이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마차 안이라는 이유도 한몫했다. 이안은 각도를 바꿔 케이트의 입술을 삼키고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이안, 잠,” 거침없이 이어지는 키스에 케이트는 숨이 가빠 헐떡이며 그를 밀어냈다. 그녀의 입안에 혀가 쑥 들어왔다. 입안을 헤집는 혀에 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마차가 덜컹하고 흔들렸다. 이안은 천천히 뒤로 물려났다. 케이트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 미안해요.”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퍼졌다. 꽤 아프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케이트의 턱을 잡아 들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저씨께 부탁해서 치료해 달라고 할게요.” 순진한 케이트의 말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네가 왜 내 혀를 씹었는지는 어떻게 해명할 거지?” 케이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터질 것 같군. 이안은 남의 일처럼 생각했다. 나빴어. 케이트는 마차에서 내리며 이안을 흘겨봤다. 그냥 됐다고 하면 되지, 그걸 굳이 그렇게 창피하게 지적할 필요는 없잖아. 이게 다 그녀가 이안의 키스를 너무 쉽게 받아줘서 그렇다. 다음부터는 좀 더 열심히 거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섰다. “지난번에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집사는 다시 한 번 사과를 건넸다. 그렇지 않아도 레인포레스트 저택에 집사가 보낸 사죄의 선물이 마차 하나 가득 도착했었다. 그는 제프리의 명에 따라 잔에 독을 탄 하인을 찾아 해고했다. 하인은 억울하다고 했지만, 주인의 명을 따르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케이트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괜찮다고 하기엔 제프리가 괘씸했고 괜찮지 않다고 하기엔 그녀는 칼이 좋았다. 그녀는 이 늙은 집사를 당황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칼 역시 케이트의 대답을 원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사과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는 이번에는 하인을 시키지 않고 직접 케이트와 이안의 코트를 받았을 뿐 아니라 차까지 내왔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여전히 두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비스마르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말했다. 케이트아가씨는 주인 어르신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집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케이트가 매일 성과도 없이 호건 가에 와서 험한 꼴을 당하는 게 가여웠다. 지난번에는 감금당했고 이번에는 독살당할 뻔했다. 에스메랄다와 제프리는 그녀를 죽이거나 혹은 죽는 게 나은 삶을 주려 할 게 분명하다.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칼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완곡하게 돌아갈 것을 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케이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이대로는 아가씨께서 주인 어르신을 만나기 어려우실 겁니다.” 그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집사를 이채롭다는 듯 바라봤다. 적어도 이 집안에 케이트편이 한 명 있기는 하군. 이안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비스마르크 호건은 살아있나?” 이안의 질문에 놀란 것은 집사 칼이 아니라 케이트였다. 그녀는 깜짝 놀라 이안을 쳐다봤다. “이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전부터 궁금했다. 몇 년 전부터 비스마르크 호건을 만났다는 자가 없더군.” 케이트의 시선이 칼을 향했다. 늙은 집사는 이안만큼이나 표정변화가 없었다. 그는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 “식사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돌아가지 않으신다면 간단한 다과를 준비하겠습니다.” 말해주지 않을 생각이다. 케이트는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여기에 앉아있을 필요가 없다. 그녀는 이안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요, 이안.” “괜찮겠나.” “네. 괜찮아요.” 집사가 두 사람의 코트를 가지고 돌아왔다. 케이트는 집사의 도움으로 코트를 입으며 사과했다. “바쁠 텐데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칼.”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칼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역시 그는 이 젊은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다. 이 아가씨가 호건 가로 돌아온다면 좋을 텐데. 그는 표정변화 없이 나직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다음번에는 식사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주방장이 미트 파이를 아주 잘한답니다.” 응? 케이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칼과 시선이 부딪혔다. 혹시.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아버지도 미트 파이를 좋아하실까요?” 칼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요. 며칠 전에도 한 조각 드셨습니다.” 비스마르크 호건이 살아있다. 케이트와 이안의 시선이 부딪혔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면서 제프리가 들어왔다. “어, 뭐야.” 아슬아슬하게 케이트와 부딪칠 뻔했다. 이안은 재빨리 케이트를 끌어당겼고 칼은 제프리에게 다가가 케이트와 사이를 벌리며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셨습니까.” 평소보다 빠른 귀가다. 제프리는 케이트를 보고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어지간히도 오는군.” 발끈하는 케이트를 막은 건 이안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 꽉 쥐었다. 그 사이를 칼이 끼어들었다. “손님을 배웅하고 식사준비를 하라 이르겠습니다.” “아, 배웅까지 하나? 별것도 아닌 사람들인데.” 그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집사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살펴가십시오.” “다음에 봐요, 칼.” 문이 닫히고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케이트는 이안에게 기쁜 듯 말했다. “들었죠, 이안? 할아버지는 살아 계세요.” 어딘지 모르게 뽐내는 태도에 이안은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그는 제프리의 이른 귀가가 더 놀라웠다. 제프리 호건의 밤놀이는 꽤 유명하다. 이안이 알 정도로. 그는 창문을 살짝 열고 제프리가 다시 저택을 나와 마차를 타는 것을 확인했다. “이안?” “호건 가의 후계자가 또 나가는군.” 케이트는 이안 옆에 달라붙어 창문 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제프리를 태운 마차가 반대쪽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약혼녀를 만나고 온 게 아닐까요?” 느닷없는 케이트의 말에 이안이 그녀를 쳐다봤다. 케이트는 다시 자세를 고치고 새초롬하게 말했다. “저 사람과 부딪칠 뻔했을 때 향수 냄새를 맡았거든요. 여성스러운 향이었으니까 여자를 만나고 온 걸 거예요.” 그럴까. 제프리 호건이 약혼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만약 그가 약혼했다면 이안은 물론 케이트도 모를 리가 없다. 그래서 이안은 제프리가 만나는 사람이 약혼녀나 구혼 중인 여성이 아니라 정부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했다. 정부가 아니면 창부겠지.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케이트에게 제프리가 약혼녀가 아니라 정부나 창부를 만나러 가는 것일 거라고 알려줄 필요는 없다. ============================ 작품 후기 ============================ 집에오는데 임신한 고양이가 있길래 얼른 가지고 다니는 사료를 좀 뿌려줫는데 먹는둥 마는둥 하는 거예요. 그래서 뭐지, 입맛이 없나...? 하고 지켜보니까 근처 치킨집 주인분이 오시더니 "왜 친구랑 안놀고 왔어? 고기 먹을거야?" 이러시고 고기를 주시더란... 맞아요. 인간도 씨리얼보다 고기가 좋은데 육식인 고양이는 더하겠죠OTL 표지는 달리는mp3님께서 그려주신 팬아트입니다. 일주일간격으로 변경합니다. 감사합니다^^ 00224 6. 허세 한 스푼 =========================================================================                            그보다. 이안은 문득 제이드가 고골리를 봤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고골리는 호건 가가 연루된 검투장 사건의 용의자다. 그가 사라지는 바람에 호건 가와 검투장의 유착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 덕분에 이안이 수사관직을 사임하고 로엔 가에서도 나와야 했다. 그런 용의자가 갑자기 나타났다. 마치 갇혀있는 것 같았다는 제이드의 말과 함께 이안은 제프리의 마차가 사라진 쪽으로 다시 시선을 던졌다. 검투장 사건 때도 발견된 시체는 아이들의 시체가 많았다. 제이드가 지금 수사하고 있는 사건의 피해자 역시 소녀에 가까운 여자다. “마부.” 이안은 마차 천장을 두드리며 제프리가 사라진 쪽으로 가자고 말했다. “왜, 왜 그래요?” 케이트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레인포레스트 저택과는 반대방향이다. 이안은 창밖으로 시선을 슬쩍 던지며 말했다. “잠깐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 “뭐를 요?” 제프리의 마차가 사라진 쪽으로 서둘러 가봤지만 이미 마차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계속 갈까요?” 마부의 질문에 이안은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이상 계속 가봐야 제프리를 찾을 가능성은 낮았다. 무엇보다 지금 그는 케이트와 함께 있다. 케이트와 함께 간다면 그녀도 위험해질 수 있다. 결국 이안은 한숨을 내쉬며 큐바인 하우스로 가자고 말했다. “무슨 일인데요?” 케이트가 재촉했다. 이안은 그녀를 보고 덤덤하게 말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다.” “뭐를요?” 이안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뭐야, 왜 말을 안 해? 케이트의 얼굴이 물음표가 떠올랐다. 결국 그가 말을 한 것은 큐바인 하우스에 도착한 다음의 일이었다. “고골리?” 제이드가 차를 내오며 물었다. 그 옆에서 제인이 케이트가 가져온 과자를 펼쳐놓았다. “제인, 이건 가져가서 나중에 먹으렴.” 케이트는 제인이 펼친 과자의 반을 다시 싸며 말했다. 어차피 곧 식사하러 돌아갈 생각이다. 이 과자를 전부 다 먹을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말에 표정이 밝아지는 제인을 보며 케이트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예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예전. 제인 또래의 소녀가 떠올랐다. 자넷. 케이트는 자넷을 떠올렸다. 알라나데일에서 도망친 하녀.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났잖나.” 이안은 제이드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딘가 갇혀있는 거 같다고도 했고. 몇 가지 의심스러운 게 있어서 왔다,” 제이드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뭔데?” 이안의 시선이 제인을 향했다. 소년은 케이트가 싸준 과자를 들고 식당을 나가고 있었다. 제인이 완전히 나가자 이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네가 말한 사건, 그 사건 이후로 고골리가 나타났지. 고골리는 호건 가가 개입된 검투장 사건의 용의자이고. 지금 네가 맡고 있는 사건도 호건 가가 개입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높낮이 없는 어조로 말하는 이안과 달리 케이트와 제이드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져 갔다. 또 호건 가? 케이트는 눈을 크게 떴다. “잠깐만요, 이안. 그 말은, 지금 또 배후에 호건 가가 있다는 말인가요?” “추측일 뿐이야.” “아, 하지만,” 제이드가 끼어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용의자인 고골리가 사라진 게 수상하긴 했지.” 그는 케이트를 슬쩍 보고 말을 이었다. “호송 중에 사라졌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니까.” 치안관들이 호송 중에 사라졌다. 책임자는 문책을 당했고 한동안 난리가 났다. 이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그 당시 수상하다고 여긴 점이다. “젊은 여자들이 죽고 고골리가 다시 나타났다. 지난번엔 도박이었지.” 이안의 말에 제이드는 용병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세 가지를 떠올렸다. 도박, 매춘, 술. 그중 앞에 두 가지는 판매하는 게 금지다. 죽은 여자들의 상태를 떠올린 제이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라에서 금지했다고 해도 암암리에 성행하기 마련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안, 설마 호건 가가 매춘에 손을 댔다는 거야?” 덜컹하고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에 제이드와 이안의 시선이 케이트에게 향했다. 깜짝 놀란 케이트의 모습에 제이드는 혀를 찼다. “아니, 스미스 양. 제 말은 그게 아니고.” “케이트.” 이안이 손을 내밀었다. 새파란 얼굴의 케이트가 그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다가갔다. 제이드는 눈을 크게 뜨고 이안이 케이트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는 것을 쳐다봤다. 이안이 케이트를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제이드를 향했다. “계속해.” 이 상황에서 계속할 수 있을 리가! 제이드는 멍하니 이안의 가슴에 기댄 케이트의 등을 쳐다봤다. “제이드.” 이안이 재촉했다. 아아. 그래. 제이드는 부랴부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는 눈동자를 굴리다가 가까스로 말을 시작했다. “죽은 여자들의 상태를 보고 우리도 그쪽을 의심하고 있었어. 누군가 젊은 여자들을 데려와서 그, 그런 짓을 시켰다고.” 제이드의 시선이 다시 케이트에게로 향했다. 이안의 손이 그녀의 등을 툭툭 리드미컬하게 다독이고 있었다. “리코와 탐문을 해봤는데 수상한 곳이 있기는 해.” 리코와 죽은 여자애 대해 묻던 중에 두 사람은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집에 며칠 동안 고급스러운 마차가 몇 번이나 멈췄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내린 남자들은 마차만큼이나 좋은 차림을 하고 있었고 집에 들어갔다가 몇 시간 후면 나왔다고 했다. “문제는 그 집이 지금은 비어있다는 거야.” 제이드의 말에 이안은 생각에 잠겼다. 며칠 동안만 마차가 멈추고 사람이 들락날락 거린 집은 곧 빈집으로 돌아갔다. 제이드와 리코, 카이사는 사람들의 정보에 따라 그 밖에도 다른 집을 두 채 더 찾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위치는 어때?” 이안의 말에 제이드는 일어나서 지도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가 돌아왔을 때 케이트는 다시 자신의 자리에 돌아가 앉아 있었다. 그는 부끄러움에 발그레한 그녀의 얼굴을 모른척하고 지도를 펼쳤다. “이게 뭐예요?” “수도의 지도입니다.”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태어나서 처음 봤다. 지도라는 건 함부로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아무나 가질 수도 가져서도 안 되는 것이다. 적군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지도를 가질 수 있는 건 군대의 지휘계통에 있는 귀족과 왕족 정도다. 여기서 제이드가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가 수사관이기 때문이다. 제이드는 자신의 잔과 이안의 잔을 들어 지도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두 번째, 이게 세 번째.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어느 한 곳을 짚었다. “이게 제일 처음 집이야.” 케이트는 고개를 숙여 제이드가 가리킨 지점을 쳐다봤다. 이렇게 봐서는 어딘지 모른다. 그녀는 지도를 태어나서 처음 봤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안에게 시선을 던졌다. 당신은 어딘지 알아요? 그런 시선에 이안이 허리를 굽혀 지도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 놀랄 일은 아니군.” “여기가 어딘데요?” 호박색 눈동자가 지도 위에서 춤추다가 케이트를 향했다. “큐바인 거리.” ============================ 작품 후기 ============================ 밤은 춥네요. 00225 6. 허세 한 스푼 =========================================================================                            제이드는 케이트의 표정이 굳은 것을 보고 재빨리 나섰다. “아, 지금은 아닙니다. 사람을 시켜 확인해 봤는데 빈집이에요.” 그는 케이트가 다시 이안에게 기대려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고 다시 지도를 쳐다봤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지도에 대한 호기심이 충격보다 컸다. “호건 가에서 오는 길인데, 나오다가 제프리 호건을 봤다.” 이안의 말에 제이드가 호기심을 보였다. “호건이 어디로 가는지도 봤어?” “아니, 놓쳤어. 다음에는 확인해 볼 생각이다.” 그렇군.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박장의 배후에 호건 가가 있다면 범인은 제프리이거나 에스메랄다일 것이다. 두 사람의 합작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 도박장이나 매춘부들을 만나고 다니는 건 제프리다. 제이드는 제프리를 살핀다는 의견에는 동의했다. “조심해.”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이안은 그렇지 않아도 호건 가의 눈엣가시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갑자기 방해해서 미안하군.” “그럴 리가.” 제이드는 쓰게 웃었다. 그는 이안이 자신을 찾아와서 기뻤다. 늘 자신이 찾아가던 입장이었는데 최근 들어 이안이 그에게 자주 찾아오고 있다. “아, 그런데.” 케이트가 마차에 타는 것을 도운 이안을 제이드가 붙잡으며 슬쩍 물었다. “스미스 양과 잘 되어가?”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잘 되어가느냐니, 무슨 의미지? 그게 되묻기 전에 창문으로 케이트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이안?” “이안, 어서 타.” 케이트가 나타나자 제이드는 재빨리 이안을 마차에 밀어 넣었다. 결국 이안은 그게 무슨 소린지 묻지 못하고 케이트의 맞은편에 앉았다. “킬리언씨와 무슨 이야기 했어요?” 이안은 말없이 케이트의 얼굴을 쳐다봤다. 잘 되어가느냐고? 그의 머릿속에 에녹과 갔던 금서 도서관의 일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마력 흡수자에 대한 정보를 몇 가지 더 찾기는 했다. 예를 들면 마력 흡수자의 대부분이 마력보유자에게서 태어났다는 것. 놀라운 이야기지만 마력 흡수자가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은 뮈엘라 특성상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문득 자신의 어머니가 마녀일지 궁금해졌다. 마녀일까. 마녀일 가능성도 있다. 그의 기억 속에 그의 생모는 마녀로서 어떤 모습을 보여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워낙 그가 어릴 때 죽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이안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생모가 마력보유자라면, 그가 생모의 마력과 생명력을 흡수해 그녀를 죽였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는 자신의 생모가 어떻게 죽었는지 떠올렸다. 전염병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어린 그에게는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그의 생모는 병에 걸리자마자 며칠 만에 급격하게 병세가 악화돼 죽어버렸다. 콜록콜록하고 그녀가 내뱉던 기침 소리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듯 했다. “조!” 제이드는 숨 쉬지 못하고 기침하는 조세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콜록콜록하고 내뱉는 기침 소리에 제인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랐다. “조, 괜찮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조세핀의 입가에 제이드가 찬물을 몇 방울 흘려 넣었다. “조.” “괘, 괜찮아.” 조세핀은 제이드를 밀어내며 말했다. 머리가 띵하고 밭은기침 탓에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한참을 숨을 헐떡였다. “조, 가자.” “어딜, 가?” 느릿한 태도로 조세핀은 소파에 기댔다. 기침 탓에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제이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레인포레스트 경에게. 가자.” 제이드의 단호한 태도에도 조세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한 채 말했다. “싫다고 했지.” “일단 살고 봐야 할 거 아냐. 가자고.” “살아도 내가 살고 죽어도 내가 죽어.” 조세핀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이 이상 제이드에게 창피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다. 제이드에게 이것 이상으로 도움을 받는다면 죽고 싶을 것이다. 그녀는 제이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대로 살다가 죽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괜한 고생하지 마.” “조.” 제이드가 다시 말했지만 조세핀은 듣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은 단호했다. 제이드의 생명을 받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런 그녀를 보며 제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조세핀을 구할 수 있을까. === 제이드가 에녹을 찾아온 것은 이안과 케이트가 그를 찾아갔던 그 다음 날이었다. 급하게 찾아온 제이드의 표정에 에녹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했다. 서재에 단둘이 앉아 하인이 차를 가져올 때까지도 제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에녹이 조세핀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케이트 때문이다. 케이트를 위험하게 만들었던 조세핀을 돕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도울 수 있는 건 에녹뿐이었다. 제이드가 알고 있는 사람 중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에녹뿐이다. 다른 마법사를 찾는다 해도 그 마법사가 조세핀을 도와주리라는 보장이 없다. 뮈엘라는 마법을 사용하는 자뿐 아니라 저주에 걸린 자 역시 배척한다. 저주를 받아 원치 않는 남자들의 애정을 받은 로웨나가 그 증거다. “들게.” 에녹의 말에 제이드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를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다. 머릿속에 복잡해서 반사적으로 에녹의 말을 따랐을 뿐이었다. “전에 조를 도와주실 수 있다 하신 것, 아직 유효하시죠?” 정신을 차린 제이드가 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에녹은 차를 마시다 말고 흠하고 제이드의 얼굴을 살폈다. “그래. 도와줄 수 있네. 단, 자네의 희생이 필요하지.” 희생이 아니다. 제이드는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럼 도와주세요.” “자네 혼자 왔잖은가. 내 보기에 그 아가씨는 마음을 굳히지 않은 모양이네만.” 제이드는 빈 옆자리로 시선을 던졌다. 그 혼자 왔으니 당연하다. “조세핀에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조가 받지 않겠다고 해도 제가 줄 거니까요.” 에녹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주와 축복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사람들은 저주가 나쁜 것, 축복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지만 마법의 세계에서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독도 잘 쓰면 사람을 살리는 약이 될 수 있다. 마법 역시 그러하다. 아무리 좋은 마법도 받는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건 저주나 마찬가지다. 로웨나가 걸렸던 남자를 유혹하는 마법이 가장 대표적이다. 받는 사람이 원치 않는다면 저주, 원한다면 축복.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름다운 외모도 원하지 않는다면 저주가 될 것이고, 추한 외모도 받는 사람이 원한다면 축복이 될 테니까. 문제는 상대가 받지 않는다면 그만큼 포기해야 하는 것이 많다는 점이다. “자네가 무엇을 감당해야 할지 아는가?” 모른다. 하지만 제이드는 무엇이라도 감당한 각오를 하고 있었다. “뭐든 하겠습니다.” “자네가 생각한 것보다 더 늙을 수도 있어.” 제이드가 입을 다물었다. 에녹은 그것 보라는 듯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자네는 멀쩡할 줄 알았는가? 코트 양에게 자네의 생명을 주면 자네도 그만큼 늙는다는 걸세. 이십 년을 주면 이십 년 늙을 걸세. 거기서 코트 양이 원하지 않는데 주겠다? 그러면 그만큼 더 힘이 필요하단 말일세.” 그래서 조세핀이 엄청나게 늙어버린 것이다. 사악한 마녀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까지 조세핀에게 지워버렸다. ============================ 작품 후기 ============================ 어제 아파서 못 올렸어요. 죄송합니다아... 정신이 없어서 몇가지 공지를 잊어버렸는데 작가 아홉명이 모여만든 "공방 피어나"의 회원가입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회원가입 신청은 이번 달 말까지고 성인만 가능합니다. http://cafe.naver.com/bloomingnest 첫 종이책 "왕자비 프로젝트"가 출간됐습니다. 전에 "왕자님의 약혼녀"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소설인데 가필했습니다. 오늘 넘겼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예판올라가면 다시 한번 후기나 공지로 올리겠습니다. 수정하느라 죽는 줄 알았어요. OTL 00226 6. 허세 한 스푼 =========================================================================                            “각오했습니다.” 이 녀석 봐라. 에녹의 얼굴에 웃음기가 어렸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물었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제이드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네.” 죽을 수도 있다는 건 거짓말이다. 몇 년분 정도의 생명력을 더 사용해야겠지만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에녹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 정도의 각오를 보고 싶었다. 제이드가 조세핀을 돕는 데 필요한 것. 남을 저주하려면 내가 죽을 각오 정도는 해야 한다. “코트 양이 자넬 용서하지 않는다 해도?” “네.” 이번에는 대답이 쉽게 나왔다. 제이드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조세핀이 다시는 그를 보지 않겠다 해도. 미워한다 해도. 상관없다.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 조세핀이 죽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을 미워하더라도 더 살기를 바랐다. 아무도 사랑해 주지 않아. 나는 덤이야. 안타까운 조세핀의 말이 그의 귓가에 달라붙어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렇지 않다고 몇 번을 말해도 지금의 조세핀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제이드는 그녀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으로 표현하기로 결심했다. 적어도 마지막 죽는 순간 나는 너를 사랑했노라고, 그걸로 충분하지 않으냐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 스푼의 허세와 한 컵의 애정. 에녹은 찻잔 안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좋아.” 에녹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조세핀은 여전히 꼴 보기 싫지만, 그는 제이드가 마음에 들었다. 늘 그를 인간사회에 남게 하는 존재들. 인간은 조세핀처럼 허탈할 정도로 짧은 생각과 이기심, 열등감으로 남을 망가트리는 한편, 제이드처럼 놀랄만한 애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도와주겠네. 자네가 생명을 포기하지 않아도 될 방법도 하나 알려주지.” 제이드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는 상체를 내밀며 물었다. “뭐죠?” “코트 양에게 생명력을 빼앗은 마녀를 찾아오게.” 에녹의 말에 제이드는 웃음을 터트리려다가 멈췄다. 에녹은 진심이었다. “마녀를 어디서 찾아야 하죠?”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해야지. 마녀를 찾아오면 코트 양을 도울 수 있네. 자네의 도움 없이 말이야. 마녀를 찾기 힘들다면 자네의 생명력을 나눠주면 되고.” 에녹이 손을 벌리며 미소 지었다. “선택의 자네의 몫일세.” 조세핀을 위해서라면 그가 희생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마녀를 찾아서 조세핀에게 생명력을 돌려준다면 조세핀은 원래대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제이드가 나눠준 몇 년 정도의 젊음이 아니라 그녀가 원래 가지고 있던 젊음으로. 문제는 마녀를 찾는 것을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제이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마녀는 케이트에게 집착한다. 그녀는 케이트를 죽이기 위해 조세핀을 이용했고 이안을 위험하게 만들었다. 에녹이 케이트를 절대 혼자 이 저택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언제 마녀가 그녀를 공격할지 모르므로. 그렇다면, 케이트 주변을 살피면 어떨까. 마녀는 케이트를 지켜보고 있을 테니 케이트 주변을 맴돌면 마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삼 일만, 삼 일만 주십시오.” 그래도 안 되면 자신의 생명력을 포기할 것이다. 제이드의 맹세에 에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인간의 맹세 따위는 믿지 않는다. 인간은 맹세를 하기엔 너무 짧은 존재다. “여기 킬리언 씨가 그만 떠나신다고 하시는군.” 에녹의 말에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제이드에게 다가왔다. 그는 집사의 안내를 따라 저택을 떠나는 제이드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녀는 이안 때문에 케이트 곁에 접근하지 못한다. 마녀가 접근하지 못하는 건 에녹 역시 마찬가지다. 두 존재는 마녀의 접근을 차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마녀 역시 두 존재의 접근을 알아차릴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제이드는 어떨까. 그는 마력이 없는 보통 인간이다. 또한 훈련받은 수사관이다. 마녀는 제이드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제이드를 이용해 마녀를 잡는다면 조세핀뿐 아니라 케이트의 안전 역시 확보할 수 있다. “괜찮은 방법이군.” 그는 식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 “돌아오셨습니까.” 호건 가의 집사 칼은 제프리의 두 번째 귀가에 고개를 숙였다. 평소라면 새벽에나 들어올 남자가 이른 저녁에 들어왔다 나가더니 자정이 되기 전에 완전히 귀가했다. 이례적인 일임에도 칼의 얼굴은 아무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식사하셨습니까?” “아니, 됐어! 내 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마!” 제프리는 어딘지 모르게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그는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자기 방으로 올라가더니 쾅하고 문을 닫았다. 아래층에서 사용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위층을 바라봤다. “뭣들 하는 건가. 얼른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게.” 칼의 말에 사용인들이 허둥지둥 흩어졌다. 이번엔 대체 무슨 일일까. 칼 역시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위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부디 아가씨께 피해가 없으면 좋을 텐데.” 자신의 방에 돌아온 제프리는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자기 방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아, 씨. 어쩌지?” 골치 아파졌다. 고골리가 돌아오지 않았다. 항상 낮에는 돌아왔는데 오늘은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낮에 고골리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그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걱정하기 시작한 건 그의 귀에 붉은 머리 여자만 죽이고 다니는 연쇄살인마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아니, 붉은 머리 여자만 죽이는 건 문제가 없다. 그가 노린 게 바로 그거니까. 붉은 머리만 죽이도록 고골리를 세뇌한 건 성공했다. 하지만 린젤은 아니다. 제프리는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피해자 중에 젊은 여성뿐 아니라 구빈원의 원장도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깜짝 놀라 의자에서 뛰어오를 뻔했다. “그 병신이!” 제프리가 원한 건 젊고 예쁘장한 붉은 머리 여자다. 린젤처럼 나이 들고 못생긴 여자가 아니란 말이다. “아니, 아니지.” 어쩌면 이게 더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정신없이 방안을 걸어 다니던 제프리의 발이 멈췄다. 젊고 예쁜 여자만 죽이는 것보다 붉은 머리 여자라면 아무나 다 죽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건 괜찮아.” 제프리는 한 가지 걱정을 덜어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구빈원의 원장을 죽인 건 괜찮다. 어차피 벌레 같은 인간 한둘 쯤 더 죽는다고 곤란할 것 없다. 이제 남은 문제는 고골리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부디 고골리가 어딘가 그가 모르는 곳에서 그의 목표를 이루기 전에 죽지 않기를 바랐다. === “붉은 머리야?” 리코의 질문에 카이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또 붉은 머리다. 지난번엔 젊은 여자였는데 이번에는 노인에 가까웠다. “젊은 여자가 아니군.” 리코는 그렇게 말하며 린젤을 떠올렸다. 나이만으로 치면 린젤도 젊은 여자긴 하지만 외모는 중년이었다. 이번 피해자는 노인이다. 그래도 젊은 여자로 한정되던 지금까지와 달리 범인의 타겟에 변화가 생겼다. “붉은 머리 외엔 아무 접점이 없어.” 카이사의 말에 리코는 시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농부였던 모양인지 시체의 손에는 흙이 묻어있었다. 다듬어진 손과 깨끗한 옷차림이었던 지금까지의 피해자와 또 다르다. “냄새도 안 나는군.” 그 달콤한 향도 나지 않는다. 리코와 카이사는 너무 맡아서 이제는 익숙해진 그 향을 떠올렸다. “목격자가 있습니다.” 치안관이 남자를 한 명 데리고 다가왔다. 리코는 부들부들 떠는 남자의 모습에 혀를 찼다. 목격자인데 이렇게 겁을 먹어서야. 남자는 죽은 노파를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자자.” 리코가 남자를 데리고 조금 먼 곳으로 떨어졌다. 카이사는 시체를 다시 살피고 치안관에게 물었다. “들은 거라도 있나?” “남자를 봤다더군요.” “남자?” 리코와 함께 시체에서 떨어진 목격자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자꾸만 시체로 흘러가는 시선을 간신히 붙잡은 채 더듬더듬 말했다. “키, 키가 커, 컸습니다요.” “얼마나 컸지?” “치, 치안관 님보다 머리 하나 정도요.” 남자의 말에 리코는 카이사와 이야기 중인 치안관을 돌아봤다. 치안관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크다면 카이사와 비슷할 것이다. “체격은 어떤가?” “조, 좀 말랐던 것 같기도….” 이게 문제다. 이렇게 겁먹은 목격자는 대부분 잘못 기억하곤 한다. 리코가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남자가 퍼뜩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아! 하, 한가지! 머리카락이 으, 은색이었습니다요!” “은발? 회색이란 말인가?” “아? 어, 아, 그게, 그…. 네, 회색인 것 같기도….” 하아. 결국 리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 작품 후기 ============================ 왕자비 프로젝트 예판이 떴네요. 알라딘에서 예판중이라고 합니다. 알라딘 굿즈 노리시는 분들! 사실 저도 아직 책을 못봐서 아무 생각이 없어요. 음... 불금입니다. 00227 6. 허세 한 스푼 =========================================================================                            살인사건이 또 일어났다. 이번에는 노인이라는 말에 제프리는 벌떡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느닷없는 행동에 클럽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며 수군거렸다. “요즘 호건의 행동이 좀 이상하지 않아?” “아아, 어딘지 모르게 안절부절못하고.” “어디에 정신 팔렸는지 도박으로 엄청 날렸다던데. 그래서 그런가?” “예끼, 이 사람아. 호건 가가 어느 집인데 도박으로 좀 날렸다고 안절부절못하나?” 하긴. 클럽에 있던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프리가 도박으로 돈을 날린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전부터 어딘지 모르게 정신이 팔려있기는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돈의 힘으로 해결이 되기 때문에 제프리는 여유 있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그가 대담하다고 착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이 그렇듯, 제프리는 대담한 게 아니라 믿는 구석이 있는 것뿐이었다. “미치겠네.” 제프리는 마차 안에서 짜증을 내며 생각했다. 고골리를 그냥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무리 무서울 게 없는 그라지만 고골리가 뒤처리 힘든 사람들을 이렇게 많이 죽이다가 잡히면 곤란해진다. 지금까지 고골리가 죽이도록 했던 건 기댈 곳이 없는 고아 계집애들 뿐이었다.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여자들. 수도 밖에서 데려온 아이들도 많아서 시체를 내다 던져도 증거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고골리가 죽인 여자 둘은 다르다. 가족이 있고 보는 눈이 있으니 범인이 고골리라는 것을 들킬지도 모른다. 치안관이 고골리를 잡기 전에 그가 먼저 고골리를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제프리가 집에 들어서자 집사가 말했다. 코트를 받아들려는 집사에게 됐다고 말하려던 제프리의 움직임이 멈췄다. 손님? 의아해 하는 제프리의 태도에 칼에 나직하게 다시 말했다. “케이트 스미스 양과 이안 로엔 경입니다.” “뭐?” 제프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머리 같은 년! 왜 이렇게 쫓아다니고 지랄이야? 그는 쿵쿵 소리를 내며 응접실로 걸어가 문을 열어젖혔다. 응접실에 케이트와 이안이 앉아있었다. 두 사람은 내온 차에 손도 안 대고 있다가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리는 문에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할아버지 잔다고! 노인네 잔다고 몇 번을 말해? 집사! 내가 아무나 들이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나가 아니라 호건 가의 사람이니 들이지 않을 수가 없지만 지금 그걸 제프리에게 언급하는 건 집사로서 마땅한 행동이 아니다. 제프리는 신경질적으로 소매를 여미며 소리쳤다. “나가!” “잠깐, 할아버지는,” “노인네 죽은 다음에나 찾아오시지!” 케이트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올랐다. 이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야? 그녀가 화를 내려는 순간 이안이 그녀를 막았다. “가자.” 그는 제프리가 코트와 모자를 벗지 않은 것을 다시 확인했다. 뒤에 선 칼이 받아들려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프리가 다시 나가려는 게 분명해 보였다. 게다가 그는 에녹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케이트와 이안, 둘 다 흥분하면 안 된다. 그는 제프리를 때려눕히고 싶은 욕구를 찾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뭐라고요? 이안, 지금,” “나가서 이야기하지.” 이안은 케이트를 질질 끌고 저택 밖으로 나섰다. 그는 바동거리는 그녀를 들어 그대로 마차 안에 집어넣었다. “이안!” “잠깐 기다려 봐라.” “뭘 기다려요?” 이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을 살폈다. 과연, 제프리의 마차가 정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이안, 뭐하는 거예요?” 그가 일어나자 케이트가 놀라서 외쳤다. 이안은 문을 열고 빠르게 말했다. “너는 돌아가.” “돌아가라니, 왜요?” “저 녀석이 검투장 사건의 배후라는 증거를 잡아야 한다.” “그럼 저도 갈래요.” 계속해서 케이트가 매달리자 그는 초조하게 멀어지는 제프리를 쳐다봤다. 케이트를 걸어가게 할 수 없으니 그가 뛰어서 저 마차를 따라잡아야 한다. 그는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럼 가서 제이드나 레인포레스트 경을 불러와.” “잠깐, 이안!” 케이트가 말리기도 전에 이안이 마차의 문을 닫고 마부에게 명령했다. 출발해! 이안의 명령에 마부가 마차를 움직였다. 마차 창문이 벌컥 열리더니 케이트의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이안, 조심해야 해요!” 그는 그대로 뛰어 제프리의 마차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차는 계속해서 달려가는데 이안이 뛰어서 따라잡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때 그의 뒤쪽에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안.” 느닷없이 나타난 제이드의 모습에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제이드가 손을 내밀었다. “타.” 이안은 그대로 제이드의 손을 잡고 말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제이드는 휘청하다가 가까스로 말고삐를 잡고 어색하게 웃었다. 괴물이 따로 없다. 두 사람이 탄 말이 마차를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저거 제프리 호건이야?” “음.” 제이드가 물었지만 이안은 부연 설명 따위는 하지 않았다. 제이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예상했기 때문에 더 묻지 않고 물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안 궁금하다.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익숙한 제이드는 주절주절 떠들었다. “마녀를 잡아야 해서 말야. 스미스 양 뒤를 쫓고 있었지.” “케이트의 뒤를 쫓고 있다고?” 제이드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이 가해졌다. 제이드는 재빨리 말했다. “으아, 마녀를 찾으려고! 그러려고 쫓은 것뿐이야!” 그제야 이안의 손이 약해졌다. 제이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지독한 자식. 같은 시각 리코와 카이사는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또 시체가 발견됐다. 좀 일찍 퇴궐한 제이드와 달리 서류정리를 하느라 늦게까지 남은 리코와 카이사에게 전령이 온 것이다. 이래서 일은 오래 할 필요가 없다고 리코가 투덜거렸다. “또 붉은 머리야?” 리코의 질문에 카이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시체 옆에 무릎 꿇고 앉아 시체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치안관!” 벌떡 일어난 카이사가 주변에 있는 치안관을 불러모았다. 리코는 무슨 일인가 하고 카이사를 쳐다봤다. “아직 따듯해. 범인은 멀리 가지 못했을 거다.” “뭐?” 리코의 시선이 시체를 향했다. 이번에는 붉은 머리 소년이었다. 아예 성별까지 달라졌다. 소년이라 지금까지의 피해자보다 반항이 거셌던 게 아닐까. 그래서 더 빨리 발각됐을 것이다. 카이사는 목격담을 확인하고 모인 치안관에게 외쳤다. “용의자는 남자. 키는 나만 하고 마른 체격이라고 한다. 회색 혹은 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를 찾아라.” 치안관들이 골목골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카이사와 리코 역시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월요일입니다. 베란다를 정리하려고 다이소에서 간단하게 바구나 두어개 사서 싹 넣어둘까? 하고 인터넷 다이소를 들어갔는데 정신차려보니 이만오천원어치를 결제하고 있었습니다. 다이소가 이렇게 무서운 뎁니다, 여러분~ 아참, 표지는 달리는mp3님께서 그려주신 팬아트입니다. 감사합니다^^ 00228 7. 위험한 남자 =========================================================================                            이안과 제이드가 제프리의 뒤를 쫓아 따라간 곳은 큐바인 거리였다. 익숙한 거리의 모습에 두 사람은 혀를 찼다. 이상 징후를 감지한 첫 번째 장소도 이곳이었다. 제프리가 손대고 있는 게 정말 매춘이라면 이 거리만큼 괜찮은 장소는 또 없다. 케이트는 진저리를 치겠지만 큐바인 거리는 과거 정부들이 살던 거리다. 그렇기 때문에 거리 자체가 정부를 만나러 오는 남자들이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개발되어 왔다. 뒷마당의 높은 관목도 그렇고, 거리가 달팽이 모양으로 구성되어 거리 바깥쪽에서 안쪽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점도 그렇다. 고급 마차가 집 앞에 서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정부의 거리일 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예술가, 지식인이 살고 있으니 그들의 능력을 빌리기 위한 방문자가 줄을 잇기 때문이다. 독신자들이 살다 보니 개인 마차가 아니라 전세마차를 사용한다는 점도 거리에 낯선 마차가 돌아다니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만들었다. “놓쳤어.” 제이드는 주위를 살피며 나직하게 말했다. 작은 집이 쪼르륵 세워져 있으니 마차에서 내린 사람이 어느 집으로 들어갔는지 알기가 어렵다. 그것도 역시 정부를 찾는, 혹은 매춘을 찾는 남자들에게 이득일 것이다. “첫 번째 장소로 가지.” 이안은 구두 뒤축으로 말을 차며 말했다. 예상치 못한 말의 움직임에 제이드의 몸이 휘청했다. “첫 집? 거길 또 쓸까?” 뒤에 앉은 이안 덕에 나가떨어지지 않은 제이드가 물었다. 이안은 손을 뻗어 제이드의 손에서 고삐를 빼앗아 말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제이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건 모양새가 나쁘다. 남자 품에 안겨서 말을 타는 감각은 지금이 중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기겁을 하고 떨어져 나갔을 상황이다. “거길 말하는 게 아니야.” 지도에서 확인한 집 앞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말발굽 소리를 숨기기 위해 말에서 내렸다. 이안이 주변의 다른 집을 살피기 시작하자 제이드는 금세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 “과연, 근처 다른 집을 이용할 수도 있군.” 치안관들은 한번 들킨 집이니 이 근방으로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했다. 실제로 혹시 몰라 첫 집은 살펴보지만 그 주변은 살피지 않는다. 그런 생각의 허점을 노렸을 거라는 게 이안의 생각이었다. 물론 제프리가 그 정도로 영리한 건 아니다. 그는 케이트가 호건 가의 상속녀로 인정받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안일했고 그런 그녀를 자기 집 안에서 독살하려 할 정도로 멍청했다. 그런 안일함과 멍청함의 조화가 오히려 이안의 판단과 어긋나게 맞아 떨어졌다. 제이드와 이안은 원래 집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집에 귀족이 들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이안이 아니라 제이드가. “저기 봐.” “아는 사람인가?” “무슨 귀족인데. 어린 여자애들을 좋아한다더군.” 제이드는 그 말과 함께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고 이안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안도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남자다. 하지만 그는 기억하지 못했고 제이드는 몇 번 유흥가에 얼굴을 비쳤던 그를 기억했다. 귀족이 주위를 살피더니 문을 두드렸다. “그럼 저기라는 말이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에서 귀족을 맞이하는 사람의 얼굴이 드러났다. 제프리다. 제이드는 나직하게 욕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자식. 제프리는 손님을 들여보내고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바깥으로 나왔다. 손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 맞이한 게 아니다. 그가 그럴 리가 없다. 그는 고용한 용병에게 문을 잘 살피라고 말한 뒤 거리로 나왔다. 고골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지하로 들어간 것일지도 모르지. 그는 부디 그러기를 기대하며 몸을 꺾었다. 품에 저택에서 가져온 스크롤이 부스럭 소리를 냈다. “따라가자.” 제프리가 다시 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 모습을 살피던 이안과 제이드가 살그머니 그 뒤를 쫓았다. 그는 집을 빙 돌아 지하로 통하는 문 쪽으로 향했다. “주방을 통해서 가려나 본데.” 제이드의 말에 이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집이나 식료품 창고에 식료품을 운반하기 위해 지하로 통하는 문이 있다. 보통 때는 하인들이나 이용하는 문이지만 이 집은 다르다. 제프리는 조심스럽게 문을 잡아당겼다. 문이 열려있다. 고골리가 돌아왔구나. 그의 얼굴에 안도한 표정이 스쳤다. 그는 품속에 손을 넣고 스크롤을 확인했다. 아직 거기 그대로 있다. 찢어지지도 않았다. 워낙 강력한 마법이라 지금까지 아껴왔던 스크롤이다. 기회는 한 번뿐. 그는 불을 켜려고 램프를 찾다가 포기하고 발을 내디뎠다. “지키는 사람은 없는 것 같지?” 제이드는 제프리가 들어간 문을 응시하며 물었다. 지키는 사람도 없고 문을 잠그지도 않았다. 고골리가 돌아오길 기다렸으니 제프리가 문을 열어뒀던 것이다. 위험하기 그지없는 행동이다. 또한 제프리답게 멍청하기도 했다. 그는 그만큼 자신이 아직 걸리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여유 있었다. 검투장 사건 때도 걸리지 않았다. 이쯤 되면 자신이 운을 타고난 남자인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참이다. 잠시 제프리가 다시 나오길 기다린 이안은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잡아당겼다. 뒤에서 제이드가 깜짝 놀라 컥 하는 소리는 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갈 거면 말 좀 하고 가라고.” “위험하다면 한 명만 위험한 게 낫잖아.” 혼자 움직인 걸 말하는 게 아니라고. 제이드는 투덜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희미한 불빛이 멀리 있어 어둡긴 했지만 앞이 안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좋은 냄새.” 제이드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좋은 냄새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제이드의 기분이 좋아졌다. 앞서 걷던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 역시 제이드가 좋은 냄새라고 한 냄새를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전혀 좋은 냄새가 아니었다. 이걸 왜 좋은 냄새라고 하는 거지? 이안은 의문이 들었지만 무시했다. 그는 자신의 기준이 남들과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다르다면 왜 그런지 물어보는 경우도 있지만 개인적인 취향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 좋으냐고 물어보면 그냥 좋다는 대답이 날아오기 때문이다. 제프리는 지하까지 내려갔다가 고골리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짜증을 내며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귀찮은 자식.”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스크롤을 가지고 이 집으로 오는 사이 생각이 바뀌었다. 고골리를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그는 아직까지 사람을 죽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전부 남을 시켰던 것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법 스크롤의 도움을 받을지언정 그가 직접 손을 대야 한다. 그는 그 사실이 불편했다. “그래. 잘됀 거야.” 그는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며 억지로 미소 지어 보였다. 고골리가 여러 종류의 여자를 죽인 게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는 조만간 고골리로 하여금 케이트를 죽이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그가 붉은 머리 여자만 보면 살의가 끓도록 세뇌해 왔다. 수사관이 발견한 어린 여자들은 전부 그의 시험용이었다. 최대한 케이트와 비슷한 붉은 머리 계집애들. 케이트가 죽는다 해도 수사관은 범인이 붉은 머리 여자만 죽이는 연쇄살인마라고 생각할 뿐 처음부터 노린 게 케이트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제프리답지 않게 머리를 꽤 굴렸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영리한지 자화자찬하며 계단을 올랐다. 그가 마지막 계단을 밟으려는 순간 바로 옆에서 남자들이 지나갔다. 엇.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로엔이라는 녀석이다. 그는 어슴푸레한 조명 속에서도 이안을 금세 알아차렸다. 잊기 어려운 남자긴 하다. 크고, 검으니까. 심지어 로엔은 혼자가 아니었다. 제프리는 몸을 계단에 찰싹 붙이고 지나가는 이안을 응시했다. 함께 가는 것은 안타깝게도 남자였다. 그 빨간 머리 계집애라면 좋을 텐데. 여기서 케이트와 이안을 죽이고 고골리도 죽여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귀찮은 문제들이 한 번에 해결된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우선 고골리를 찾아야 한다. 그는 이안과 제이드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살금살금 계단 위로 올라왔다. 문이 열려있었으니 고골리가 한 번 돌아왔던 게 분명했다. ============================ 작품 후기 ============================ 다이소에서 주문한거 언제 올까요? 두근두근 00229 7. 위험한 남자 =========================================================================                            “아저씨!” 케이트는 마차 밖으로 몸을 내밀며 소리쳤다. 왕궁 안까지 들어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에녹이 사람들과 왕궁 밖으로 막 나오고 있었다. “카티야?” 에녹은 함께 있는 여자들을 돌아봤다. 세 마녀가 아차 하고 고개를 돌리려다가 카티야라는 이름에 케이트를 쳐다봤다. “아저씨, 만나서 다행이에요!” 케이트는 마차가 채 멈추기도 전에 문을 열고 뛰어 나오며 외쳤다. “이안을 도와주세요!” “이안? 로엔 경 말이냐?” 에녹이 재빨리 마차에서 뛰어 나오는 케이트를 받아들었다.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몸이 그의 품에 안착했다. 케이트는 에녹의 팔을 꼭 잡으며 부탁했다. “이안이 제프리 호건을 따라갔어요. 킬리언씨가 그러는데 제프리가 매춘하고 있는지도 모른대요! 지, 지도에서 살펴봤었는데, 큐바인 거리에서 첫 번째 집이 발견됐고요!” “카티야, 카티야.” 에녹은 급한 마음에 횡설수설하는 케이트를 다독였다. 이안이 지금 제프리를 따라 어디까지 갔는지 모른다. 이안을 놓치면 그를 도울 수 없다. 그런 조바심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가, 숨을 쉬렴.” “아저씨, 빨리 따라가야 해요.” 안 되겠다. 그는 결국 마차 문을 열고 말했다. “자네들도 타게.” 영문을 모르는 세 마녀도 케이트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사인승인 마차에 다섯 명이나 타게 되니 마차 안이 북적북적했다. “우린 왜 탄 거야?” “잠자코 있어보자고.” 수잔의 투덜거리자 귀네비어가 진정시켰다. 그 사이 케이트는 마부에게 호건 가의 저택 쪽으로 가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에녹이 그녀의 무릎을 다독이며 물었다. “어떻게 된 게냐?” “저, 그런데 이분들은?” 그제야 케이트의 눈에 세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들은 민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에 만나지 않았느냐. 네가 꿈에서 만났다는 그 마녀들 말이다.” “아.” 모르겠다. 케이트는 가볍게 인사를 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얼굴은 본 적이 없다. 목소리만 들었을 뿐. 그때 만난 마녀는 후드를 눌러쓰고 있었다. 그녀는 세 여자를 보고 에녹을 다시 쳐다봤다. 로라는 그런 케이트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손가락이 까딱였다. “내가 꿈에서 너와 만난 마녀란다.” 목소리가 들었던 것도 같다. 케이트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로라고, 이쪽은 귀네비어.” 나이 든 여자가 빙그레 웃었다. “여기는 수잔.” 마른 여자가 흥하고 입술을 삐죽였다. 탐탁지 않아 하는 태도에 케이트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말했다. “저는 케이트, 스미스예요.” “알고 있고말고.” 귀네비어는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호건 가의 상속녀잖니.” 케이트 스미스의 이름만은 사교계에서 모르는 자가 없다. 케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그런 식으로 유명해지는 건 바라지 않았다. 상속녀라니, 너무 부담스러운 이름이다. “그보다,” 에녹이 이어지는 소개를 끊었다. 그는 케이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로엔 경이 무슨 일이라고?” === 위로 올라갈수록 밝아졌다. 그리고 사람의 기척이 늘어났다. 이안과 제이드는 어떻게 해야 할 지 걱정했지만 놀랍게도 아무도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집 안에는 이미 여자를 사러 온 남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사 차림의 이안과 제이드 역시 손님이라 여겼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서 제이드는 콧방귀를 뀌며 열린 문틈을 살폈다. 아직 손님이 들어가지 않은 방은 문이 열려있었다. 깨끗하게 차려입은 소녀들이 두려움에 떨며 어둠 속에 앉아있었다. 그 눈에 떠오른 공포와 경멸에 제이드는 구역질이 났다. 당장 구해주고 싶다. 그는 이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할까?” “뭘?” “이 애들을 내보내도 괜찮을까?” 이안의 턱이 단단해졌다. 그 역시 불쾌하던 차다. 하지만 이 여자들을 내보내도 괜찮은 걸까. 지난번 검투사 사건 때도 증인이 많지 않아 결국 묻히고 말았다. 그는 제프리를 반드시 잡아넣고 싶었다. 그는 위험하다. 케이트에게. 케이트를 위해서라도 제프리 호건은 감옥에 가두는 게 좋았다. 그러려면 그가 배후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이 여자들은 여기 있어야 한다. 케이트를 위해서.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이안은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케이트뿐이고 나머지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단호한 이안의 태도에 제이드는 방 안쪽으로 내밀었던 몸을 뺐다. 그가 나가면서 문이 조금 더 열렸다. 그때 안에 있던 여자가 외쳤다. “이안?” 이안보다 제이드의 몸이 움찔하고 멈췄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이안을 보고 다시 문을 열었다. 방 안쪽에서 웅크리고 앉아있던 여자 중에 한 명이 비틀비틀 일어났다. “이, 이안? 이안 맞아요?” 이름을 잘못 부른 게 아니다. 확실히 이안이라고 부른 게 맞다. 제이드가 물러나자 이안이 방 안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느새 무리 사이에서 앞으로 나온 여자가 금세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이안, 도, 도와줘요.” 어디서 본 얼굴이긴 하다. 제이드는 어린 여자의 얼굴을 보고 엇 하고 소리를 냈다. 그도 아는 얼굴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이름은 몰랐다. 이안은 물끄러미 여자의 얼굴을 보다가 말했다. “알라나데일?” 자넷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목이 막혀서 숨을 쉬는 게 어려웠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그런 생각이 가득 찼다. 그녀는 이안에게 매달려서 울음을 터트렸다. “케, 케이트는요?” 훌쩍이면서 묻는 자넷의 말에 이안은 그녀가 알라나데일의 하녀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때보다 약간 더 자라고 더 보기 좋아지긴 했지만 알라나데일의 하녀 자넷이 맞았다. 알라나데일의 저택이 무너질 때 마을로 도망쳤던 하녀. 케이트가 때때로 자넷은 어떻게 됐을까요? 하고 물었던 게 떠올랐다. 이안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골치 아프게 됐군. “잠깐, 알라나데일의 하녀 맞죠?” “네, 네에. 맞아요.” 자넷은 다정한 제이드의 손을 잡고 눈물을 떨궜다. 다행이다. 지옥에 구원 줄이 내려온 기분이다. 그녀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애원했다. “나가고 싶어요, 나가게 해주세요, 제발.” 이안은 자넷을 다시 방에 넣으려 했다. 그녀를 빼주면 다른 여자들도 나가게 해 달라 매달릴 것이다. 그러다 보면 소란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니 자넷도 나가지 못하는 게 낫다. 하지만 제이드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자넷의 손을 잡았다. “이리 나와요.” 어둠 속에 앉아있던 여자들이 주춤주춤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안은 제이드를 노려봤고 제이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할 수 없잖아.” 여자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할 수 없다. 이안은 여자들을 빼내기 위해 뒷문으로 그녀들을 안내했다. 뒷문은 열려있다. 복도를 어슬렁거리던 남자들이 여자들이 나가자 이게 무슨 일 인가하고 따라 나왔다. “아니, 당신은 안 되지.” 제이드가 빙그레 웃으며 도망치는 귀족을 낚아챘다. 모자도 챙기지 못하고 달아나던 귀족은 목덜미를 잡히자 바르작대며 소리 질렀다. “이, 이놈! 내가 누군지 아느냐!” 어째서 찔리는 짓을 하다가 걸리는 사람들은 똑같은 말을 하는 걸까.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귀족을 나무에 묶었다. 흩어지려는 여자들을 모아서 한쪽에서 기다리라고 한 건 제이드였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아~ 다이소에서 무사히 물건이 와서 룰루랄라 뜯다가 그만... 방 정리용으로 산거지만 택배라는건 참 좋네요. 후후후 그런 의미로 내일은 업뎃이 없습니다. 방청소를 해야해서...는 아니고 제가 어딜 가야해서... 그러니, 금요일날 만나요! 00230 7. 위험한 남자 =========================================================================                            “이안.” 여자들을 한쪽에 모아둔 제이드가 다가왔다. 그는 이안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그 향이다.”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 향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려다가 그는 문득 떠올렸다. 죽은 여자의 몸에서 나던 그 향을 말하는 거다. 어딘지 모르게 달콤하던 향. 그에게 제이드가 계속해서 말했다. “저 저택말야. 들어갈 때부터 그 향이 엄청 강하게 났거든? 집에 향수를 들이 부은 줄 알았는데 여자들에게 바른 거였어.” “들어갈 때부터?” 이안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들어갈 때부터 그런 향이 났다니, 무슨 소리지? 그의 이상한 표정에 제이드가 어라? 하고 물었다. “들어갈 때 그 향 못 맡았어? 엄청 진했다고.” “진한 향을 맡긴 했지.” 하지만 좋은 향은 아니었다. 그에겐 그리 좋지 않은 향이었다. 약간 역겨운 것 같기도 했다. 이안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가 맡았던 건 좋지 않은 향이었다고. 이번에는 제이드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너한테는 그 향이 별로 안 좋은 향이었단 말야?” 두 사람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어떻게 한 향이 두 사람에게 다르게 느껴질 수가 있는 거지? 그때 뒷문으로 누군가가 도망쳐 나왔다. 숱 없는 금발 머리. 제프리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고민하던 것도 잊고 달려들었다. “제프리 호건!” “뭐, 뭐야?” 제프리는 자신을 뒤쫓는 남자들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택에서 보고 피했던 남자 둘이 어느새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저 멍청한 놈들이? 그는 몸을 틀어 골목으로 냅다 뛰어들었다. ===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치안관의 말에 세 마녀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에녹은 창문을 열고 물었다. “무슨 일인가?” “연쇄 살인범이 도주 중이라는 의심이 있어서 확인 중입니다.” “연쇄 살인범?” “네. 마차 안에 타고 계신 분들을 확인하겠습니다.” 할 수 없다. 에녹은 마녀들과 케이트를 쳐다보고 문을 열었다. 치안관은 마차 안에 에녹을 제외하고 여자가 네 명이나 탄 것을 보고 잠시 당황했다. “늦은 시각이라 내가 태워주기로 했다네.” “그러시군요.” 그는 에녹의 얼굴을 보고 그가 엘프라는 것을 알자 다시 당황했다. 엘프? “설마, 레인포레스트 경이십니까?” 어머. 케이트의 입에서 가벼운 감탄이 흘러나왔다. 치안관이 알 정도로 유명한 분이었다는 뉘앙스의 감탄에 에녹은 저도 모르게 슬쩍 웃었다. “그래. 내가 에녹 레인포레스트라네.” “아, 만나서 영광입니다.” 그야 영광일 것이다. 건국영웅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는 다섯 사람의 신분을 확인하려 하지도 않았다. 건국영웅이 함께 타고 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에녹의 얼굴을 뇌리에 박으려는 듯 뚫어지라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사인 승인데 다섯 분이 타셨군요. 다음부터는 적정인원만 승차 부탁드립니다.” “알았네.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말이야. 미안하게 됐군.” 에녹의 말에 치안관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는 이상 없다는 말과 함께 마차 문을 닫으려 했다. 그때 케이트가 몸을 내밀었다. “자, 잠깐만요!” “네, 무슨 일이십니까?” 연쇄 살인마가 돌아다녀서 검문 중이라 했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치안관은 잠시 망설였다. 사실 그는 연쇄살인마라는 말도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차 안에 여성이 이렇게 많이 타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흉악범의 범죄를 발견했는데 현장이 오래되지 않아서 범인이 이 근방에 있을 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시체가 아직 따듯하다는 말이죠?” 어머. 마녀들이 입을 딱 벌렸고 치안관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가 최대한 완곡하게 표현한 것을 케이트가 바로 꿰뚫어 볼 줄은 몰랐다. “아, 죄송해요.” “아니, 아닙니다. 실례지만 아가씨는 누구십니까?” “케이트 스미스예요.” “내 대녀라네.” 에녹의 말에 치안관의 눈이 다시 커졌다. 에녹의 대녀가 호건 가의 상속녀라는 소문은 이미 무성하다. 그는 다시 한 번 케이트를 보고 다른 여자들도 살폈다. 건국 용사, 호건 가의 상속녀와 함께 타고 있으니 그녀들도 뭔가 대단한 사람이 아닐까 한 것이다. 그 시선을 눈치챈 에녹이 재빨리 그에게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무슨 일이냐?”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요.” 마녀들과 에녹의 시선이 케이트를 향했다. 문을 닫고 멈춰서 있을 수 없어 에녹은 마부에게 출발하라고 부탁했다. “이안이 제프리 호건을 따라간 지금, 치안관들이 연쇄 살인마를 쫓는 다는게 우연이 아닌 것 같아요.” “아가, 호건 가와 연쇄 살인마가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이냐?” 잘 모르겠다. 케이트는 고개를 숙였다. 너무 앞서간 게 아닐까. 하지만 어쩐지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든다. 이건 그녀의 마녀로서의 감인 걸까.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죠?” 불안한 듯 창밖을 내다보던 수잔이 물었다. 그녀는 마차가 가는 길에 드문드문 보이는 치안관의 모습에 불안했다. 에녹이 그녀들을 위험하게 하지는 않을 테지만 마차가 마치 치안관을 따라가는 것 같았다. “호건 가의 저택으로, 어?” 케이트는 수잔을 따라 창밖을 보다가 치안관들이 그녀와 같은 길을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한 번 연쇄 살인마사건과 제프리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앞으로 쭉 따라가 주세요.” 호건 가에 도착하자 케이트는 마부에게 말했다. 도망친 회색 머리의 남자를 본 적 있느냐며 사람들에게 묻는 치안관들은 어느새 큐바인 거리로 모여들고 있었다. 창밖으로 리코와 카이사의 모습이 지나갔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는 사람들이다. 이안과 함께 일하던 수사관들. 리코와 카이사 역시 케이트를 알아봤다. 두 사람은 마차가 멈추자 그쪽으로 달려갔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마차 문이 열리자 그 안에 앉은 다섯 명의 모습이 드러났다. 카이사가 조용히 경고했다. “이 마차는 사 인승입니다.” 그런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에녹은 입을 다물었다. 세 마녀는 이게 누군가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저씨. 이분들은 이안과 함께 일한, 아니, 일했던 수사관분들이세요.” 수사관이라는 말에 마녀들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다시 가벼운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리코와 카이사는 에녹의 이름을 듣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호건 가의 상속녀인 케이트 스미스가 건국영웅 에녹 레인포레스트의 대녀라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케이트에게 한층 더 예를 갖춰 물었다. “어디를 가십니까?” “이안을 찾아가고 있어요.” 리코와 카이사가 시선을 교환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도 제이드를 떠올리고 있었다. 연쇄 살인마의 행적이 제이드가 사는 큐바인 거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로엔 경에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이안은,” 케이트는 잠시 망설였다. 이안이 제프리의 뒤를 쫓았다는 걸 해도 될지 판단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잠깐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안은 제프리 호건의 뒤를 따라갔어요.” “제프리 호건 말입니까?” 놀랍다는 말과 함께 리코와 카이사는 다시 시선을 교환했다. 연쇄 살인마와 제프리 호건은 연관되어 있는 게 분명하다. 케이트는 자신의 감으로 연쇄살인마를 쫓는 치안관을 따라가는 것이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두 사람은 이안을 찾아간다는 케이트의 마차가 연쇄살이마를 따라가는 행적과 같은 것을 보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6부는 다음주 쯤에 끝날것 같아요. 그 후에 가능하면 (저도 정리할겸) 질문 받고 외전이 올라갈것 같습니다. 00231 7. 위험한 남자 =========================================================================                            “거기서!” 제프리는 뒤에서 쫓아오는 남자들의 말에 부아가 치밀었다. 너 같으면 서라고 한다고 서겠냐, 이 멍청이들아? 이 동네는 어떻게 된 게 집 앞에 흔한 마차나 말도 없다. 말을 탈 줄 몰랐지만 지금 심정으로는 말 그까짓 거 휙 타고 도망치면 될 것도 같다. 그동안 제프리와 이안의 거리가 쉽게 좁혀지고 있었다. 제프리보다 이안의 다리가 훨씬 길다 보니 당연한 일이다. 이안 바로 뒤에서 제이드도 따라오고 있었다. 제프리는 이를 갈았다. 저 멍청한 놈들은 밥 먹고 운동만 했나. 운 좋게도 눈앞에 말이 나타났다. 제프리는 멈춰 섰다. 이제 이걸 타고 도망치면! “저 멍청이, 뭐하는 거야?” 제이드는 말등자에 발을 걸지 않고 자꾸만 말 위로 뛰어오르려는 제프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가 숨을 헐떡이며 멈춰 섰을 때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고 제프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잇!” 마음 같아서는 훌쩍 뛰어서 말 위에 올라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가 본 용병들이 때때로 그런 묘기를 보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실력이 출중한 용병들이나 가능한 짓이다. 승마를 배운 적 없는 제프리가 할 수 있을 리 없다. 결국 그가 포기하고 다시 달아나려 했을 때는 이미 이안이 손을 뻗으면 그의 목덜미를 낚아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진 다음이었다. “저, 저리 가지 못해?” 제프리는 이안의 위압감에 눌려 주춤거리며 말했다. 이안을 수식하는 말이지만 검고 크다. 언제나 그렇다. 그의 위압감은 이런 어두운 골목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제프리 호건, 매춘은 불법이다.” 이안의 말에 제프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난 매춘 안 했어. 잡아가려면 매춘 한 사람들을 잡아가라고. 난 여자들을 대줬을 뿐이야.” 그 당당한 대답에 제이드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렸다. 저 멍청이가 뭐라는 거지?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매춘보다 알선이 더 죄질이 나쁘다. 그건 제대로 된 집안의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호건 가의 후계자씩이나 되는 놈이 당당하게 말한다는 게 이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는 그게 자랑스러운 모양이군.” “자랑스러운 건 아니지만, 나쁠 게 뭐 있어? 어차피 그냥 뒀으면 시골에 처박혀 있었을 계집애들 데려다가 입히고 먹여서 남자 좀 받게 한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내가 집안만 이어받으면 그런 멍청한 법 따윈 싹 갈아엎을 거야.” 멍청하다 못해 뇌가 청순하기까지 한 발언에 제이드가 중얼거렸다. 미친놈. 제프리는 그 말을 귀신같이 알아듣고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뭐가 나빠? 어차피 걔들도 나한테 감사할걸? 제 주제에 어디서 귀족들 씨를 배느냔 말이다!” 그런가? 이안이 제이드를 돌아봤다. “맞아?” “절대 아니야!” 이안은 다시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고 제이드는 씩씩거렸다. 저 미친놈이 어디서 약을 팔아? 그는 이안의 이해를 돕고 그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말을 이었다. “저 미친놈이 말하는 여자들에 스미스양도 속할 수 있다고!” 스미스양? 제프리는 그게 누군지 몰랐지만 이안의 표정을 보고 케이트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형형한 빛을 띠고 있었다. “제프리 호건, 반항하지 마라.” 이안을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프리가 반항할 거라 생각했다. 수사관으로 일했던 경험상 마지막이라는 걸 알아도 반항하지 않는 범인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제프리가 검을 뽑았을 때 놀랍지 않았다. “저 녀석, 검 소지허가서는 있는 건가.” 제이드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수사관이나 치안관, 기사와 같은 사람들 외에 검을 소지하고 다니는 건 불법이다. 용병들은 검 소지허가서를 지니고 다녀야 한다. 허가서라고 해봐야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패 정도지만 없으면 치안관에게 끌려간다. 당연하게도 제프리는 허가서가 없었다. 호건 가라는 이름과 돈을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안은 제프리가 검을 쥔 폼을 보고 천천히 자신의 검을 뽑았다. 저 검을 휘두를 수나 있으면 다행이다. 제프리는 검을 휘둘러 본 적이 별로 없는 게 분명했다. 그의 생각대로 제프리는 자신의 곁에 고용한 용병이 없는 것에 화를 내고 있었다. 그 멍청이들은 꼭 필요할 때 도움이 안 된다. “이얏!” 제프리가 웬 기합소리와 함께 검을 뻗었을 때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누가 검을 뻗으며 소리를 지른단 말인가. 그는 아예 좀 물러나서 이안이 제프리를 가지고 노는 걸 구경하기 시작했다. “헙! 이엽!” 소리만 들어서는 제프리가 엄청난 검사 같다. 헐떡이는 그와 달리 이안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행동하는 것부터가 다르다. 과장되게 검을 휘두르는 제프리와 달리 이안은 가볍게 그의 검을 피하거나 쳐 내고 있었다. 제이드는 쪼그리고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슬슬 지루해 지고 있으니 곧 끝날 것이다. 아카데미 시절에도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이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들이 그에게 결투를 신청하거나 뒤에서 습격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그때마다 이안은 진지하게 그들을 받아냈다. 제이드도 처음엔 잘도 받아준다고 생각했지만, 곧 이안이 새로운 상대와 검을 겨루는 것을 진지하게 여긴다는 것을 깨닫고 멀리서 구경하곤 했다. 챙하고 제프리의 손에 있던 검이 날아갔다.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에 자기 손을 붙잡은 그가 이안을 노려봤다.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는 평온했다. 그는 제프리가 포기하고 손을 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 사이를 뛰어들었다. 제이드는 뛰어든 남자의 회색 머리를 보고 놀라서 소리쳤다. “이안!” 고골리였다. 치안관들의 수색을 피하느라 이곳저곳을 헤맨 탓에 그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제이드는 고골리의 몸에 튄 피를 보고 검을 뽑아들었다. 이안은 시야에 고골리가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자세를 바로 했다. 더 이상 제프리는 그들의 안중에 없었다. 세 사람 사이에 긴장이 흘렀다. 고골리는 이안과 제이드를 보고 그다음에 제프리를 알아봤다. 세 명이 아니다. 그가 상대할 사람은 두 명뿐이다.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역시 자세를 고쳤다. 제프리는 살금살금 도망치려다 멈췄다. 젠장. 고골리 때문이다. 그가 여기서 수사관에게 잡히기라도 하면 골치 아프다. 그는 품속의 스크롤을 확인했다. 여전히 거기 있었다. 여차하면 사용할 생각으로 제프리는 품에 손을 넣은 채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다. 고골리가 검을 휘둘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검이 이안의 검과 부딪쳤다. 제이드는 자신은 막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챙하고 부딪친 검날이 그그극하고 긁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검과 검 사이에 차가운 열기가 흘렀다. 이안은 고골리의 검 날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보고 그가 사람을 찌르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건 제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엇. 그는 벌떡 일어나 저도 모르게 말했다. “잠깐, 최근 붉은 머리 여자만 죽이고 다니는 게 네 녀석 짓이었어?” 뭐? 고골리의 시선이 제이드를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늦었다. 찰나의 빈틈을 그냥 넘길 이안이 아니다. 그는 검을 떼어내고 앞으로 길게 찔러 넣었다. “큭.” 아슬아슬하게 이안의 검은 고골리의 배를 찌르고 빠져나갔다. 푹 하고 찔리는 감각에 고골리는 잠시 인상을 썼으나 아무렇지 않은 듯 검을 털었다. “붉은 머리 여자?” 이안은 검을 휙 털어 묻은 피를 털어낸 뒤 물었다. “연쇄 살인 말야. 이상한 향이 묻어있던 시체.” 제이드의 말에 이안은 고골리와 제프리를 쳐다봤다. 제프리가 눈에 띄게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네 녀석 짓인가.” 대답 없이 고골리는 검을 길게 휘둘렀다. 이안이 뒤로 물러나는 순간 그가 있던 자리에 검이 궤적을 그리며 스쳐 지나갔다. 제프리는 품에 넣은 스크롤을 살짝 꺼냈다. 이걸 사용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최대한 스크롤을 찢을 수 있는 타이밍을 엿보고 있었다. 이안이 물러나면서 동시에 주저앉아 발을 뻗었다. 그의 발이 고골리의 발목을 세게 걷어찼다. 고골리가 휘청하는 것을 보지도 않고 이안은 벌떡 일어나 검을 휘둘렀다. 퍽하고 검이 지면에 꽂혔다. 그 자리에 자리 잡고 있던 고골리의 목은 어느새 옆으로 비켜 나가 있었다. 고골리가 검을 휘두르기 전에 이안은 검에서 손을 떼고 뒤로 훌쩍 뛰어 피했다. 예상보다는 본능이었다. 그가 있던 자리에 고골리의 검이 지면과 수평선을 그리고 지나갔다. “이안!” 그때 케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고 제이드가 소리쳤다. “이안, 앞!” 이안은 반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그가 있던 자리에 고골리의 검이 박혔다. 이번에는 이안이 그대로 몸을 튕겨 다리를 뻗었다. 고골리 역시 박힌 검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났다. 고골리가 물러나면서 이안의 검을 뽑아들었다. 이안 역시 고골리의 검을 뽑아들었다. 두 사람 다 자신의 검이 아니니 공평했다. 이안에게 고골리의 검은 좀 짧았고 고골리에게 이안의 검은 좀 무거웠다. “이안, 어딨어요?” 케이트가 이안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찾고 있었다. 제이드는 제프리가 도망치지 않도록 그를 주시하며 고민에 빠졌다. 케이트를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부르지 않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제프리나 고골 리가 도망칠 경우 케이트가 위험할 수 있다. 제프리는 그녀를 노리고 있고 고골리는 붉은 머리 여자만 죽이고 있으니까. 그 사이에도 이안과 고골리의 검은 서로를 아슬아슬하게 비켜 나가고 있었다. 이안은 고골리를 향해 정확하게 검을 찔렀지만 한 뼘 정도 부족했고, 고골리는 검을 휘두르는 게 조금 느려졌다. 하지만 곧 이안은 고골리의 검에 적응했다. 그는 단숨에 사정거리를 좁혔다. 검의 길이를 늘일 수 없다면 그가 평소 움직이는 것보다 한 뼘 정도 더 가까운 곳에서 움직이면 된다. 이안의 검은 고골리의 옆구리를 길게 베고 빠져나갔다. “큭.” 이번에는 고골리도 비틀거렸다. 그때 케이트가 그곳에 도착했다. 그녀의 뒤로 에녹과 세 마녀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리코와 카이사도. “젠장.” 할 수 없다. 제프리는 제이드가 막을 틈도 없이 품에 있던 스크롤을 잡아 뜯었다.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번쩍하고 섬광이 빛났다. 그리고, 모든 것이 멈췄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월요일인가요? 아니요. 표지는 초록요플레님께서 그려주신 팬아트입니다. 00232 7. 위험한 남자 =========================================================================                            “하.” 제프리는 숨을 토해냈다.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는 여전히 들려왔다. 이 부근만 멈췄다는 뜻이다. “이거 괜찮은데?” 그는 찢어진 스크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시적으로 스크롤 주변 일정 부근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여차하면 고골리를 죽여야 할 때를 위해서 남겨 놨다. 난 역시 똑똑해.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히죽 웃었다. 그는 날아간 자신의 검을 들고 고골리에게 다가갔다. 빨리 그를 찌르고 도망쳐야 한다. 이 마법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정작 고골리 앞에 가서 망설였다. 사람을 찔러 본 적이 없다. 그는 개나 고양이를 괴롭혀본 적은 있어도 사람을 죽여 본 적은 없었다. 그의 망설임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안 되겠다. 제프리는 결국 포기했다. 멈춰있는 사람의 몸에 대고 검을 찔러 넣는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어려웠다. 인간의 피부는 탄성이 있어서 검을 찔러 넣는다고 쑥 들어가지 않는다. 제프리는 검은 떨어트리고 몸을 돌렸다. 마법 지속이 끝나기 전에 이 자리를 피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그때 그의 뒤에 누군가가 날아 내려왔다. “멍청하긴.” 제프리가 상대방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앙상한 손이 그의 등에서 파고들어 와 가슴으로 빠져나왔다. “이게,” 펄떡이는 심장이 앙상한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제프리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목을 움직이는 것도 어려웠다. 말을 하기는커녕 숨 쉬는 것도 힘겨웠다. 그의 입에서 그륵그륵 하는 거친 소리만 새어 나왔다. “키워서 잡아먹을 게 아니라면 기회가 있을 때 죽여야 하는 거란다, 멍청아.” 마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쑥 빼냈다. 그 반동으로 제프리의 몸이 앞으로 휘청이더니 철퍽 넘어졌다. 그의 눈동자에 빛이 사그라졌다. 마녀는 손에 쥔 제프리의 심장을 인상을 쓰며 집어 던졌다. 술과 마약, 도박에 찌든 남자의 심장 따윈 필요 없다. 마녀는 펄떡이는 심장을 신발로 꾹 눌러 밟으며 지나갔다. 그 발길 끝에 케이트가 있었다. 케이트는 이안을 발견해서 반가운 표정 그대로 멈춰있었다. 하얀 피부 위에 발그레한 홍조가 사랑스러웠다. 반짝이는 초록색 눈동자도, 얼굴 주변에 흘러내린 붉은색 머리카락도. 마녀는 케이트의 목에 코를 대고 그녀의 체취를 마셨다. 희미하지만 달콤한 향이 났다. 마력의 향. 전부 개방되지 않은 게 아쉽지만 지금 이게 어디인가. 그 뒤를 따르는 에녹의 표정은 지금 상황에 어울리게도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는 케이트가 휘말려 다칠까 봐 걱정하는 것이지만 마녀가 보기엔 우스꽝스러웠다. “거기서 두 눈 똑바로 뜨고 사랑하는 대녀가 죽는 꼴을 보라고, 더러운 엘프.” 마녀는 그렇게 말하며 케이트의 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손이 부드러운 가슴을 가볍게 찔렀다. 그 순간 마녀의 눈이 커졌다. “컥!” 마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마녀의 가슴에서 검 끝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제프리에게 했던 짓을, 그동안 다른 여자들에게 했던 짓이 되풀이되었다. 끝부분이 빠져나왔던 검이 다시 천천히 마녀의 몸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녀는 끝을 잡으려는 듯 손을 허우적대다가 비틀비틀 뒤를 돌았다. 거기에 이안이 서 있었다. “너……!” 이안은 검을 뽑아내 버릇처럼 가볍게 휘둘러 거기 묻은 피를 털어내려 했다. 하지만 털어지지 않는다. 그는 검 날에 묻은 거무스름한 피를 보고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피가 검고 끈적했다. “너 이놈!” 마녀는 비틀비틀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너무 느려서 이안이 한 걸음 만에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어?” 그때 마법이 풀렸다. 뛰어오던 케이트가 비틀하고 멈춰 섰다. 장면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어 있었다. 마법으로 자신이 멈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상황은 눈 한번 깜빡했을 뿐인데 바뀐 것처럼 느껴졌다. 마법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에녹뿐이었다. 그는 공기 중에 남은 마력으로 마법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상황으로 봤을 때 일정 공간의 모든 것을 멈추게 하는 마법일 것이다. “카티야!” 에녹이 케이트를 잡아당김과 동시에 이안이 마녀에게 검을 꽂았다. “키에에에에엑! 귀를 찢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인간의 비명이 아니다. 몬스터의 울부짖음 같았다. 케이트는 입을 딱 벌렸다. 이안이 찌른 구멍으로 마녀의 몸이 빨려 들어가면서 쪼그라들었다. “이안!” 거센 바람에 케이트의 몸이 휘청거렸다. 에녹이 잡고 있지 않았다면 넘어졌을 것이다. 이안은 지면에 검을 꽂아 넣고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버텼다. 마녀의 몸에 난 검 상에 마녀의 몸이 빨려 들어가는 기괴한 형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마치 돌풍이 분 것처럼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빨려 들어간 몸은 펑하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그와 함께 무수히 많은 작은 빛 덩어리가 나타났다. “어!” 리코는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공중에 잠시 멈춰있는가 싶었던 빛 덩어리들이 하늘 위로 올라가더니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휙휙 날아가는 빛 덩어리들의 속도가 빨라서 어디로 날아가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아저씨.” 에녹은 케이트를 내려다보고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을 풀었다. 케이트는 풀려나자마자 이안에게 달려갔다. “이안!” 이안이 몸을 돌리자마자 그녀가 달려들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이안, 괜찮아요?” 그는 그녀의 따듯한 체온을 느꼈다. 제프리와 마녀가 죽었다. 케이트는 이제 안전하다. 그녀를 위험에서 지켜냈다. 이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천천히 그녀의 얼굴 위로 이안의 얼굴이 내려앉았다. “에헴.” “에헴.” 에녹의 헛기침 소리가 두 번 들렸다. 이안과 케이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두리번거렸다. 에녹은 손을 뻗어 케이트를 이안에게서 빼내며 말했다.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줬으면 좋겠네.”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이안과 키스하려고 했다니, 자신의 대담함에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다. 하지만 이안이 반응은 달랐다. 그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말했다. “최소한의 예의만 지키면 됩니까?” 이놈이? 에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아직도 이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마녀를 죽인 이안의 공로는 인정했다. 침묵이 이어졌다. 다들 에녹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만세!” 에녹의 대답이 나오자마자 제이드가 환호성을 질렀다. 그는 리코와 카이사에게 달려가 두 사람의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는 카이사는 불편한 표정으로 팔이 흔들렸다. “어머, 어머.”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세 마녀는 어리둥절해서 서 있었다. 분명 저 남자는 괴물인데 에녹이 자신의 대녀가 그와 교제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실이 세 마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한편 더 남았어요~ 내일 만나요~ 00233 [만우절 기념] 랄다공주 =========================================================================                            에스메랄다는 제프리의 사망 소식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럴 리가 없다. 그녀는 전령이 가져온 소식을 믿지 않았다. 멀쩡하게 나갔던 아들이다. 난데없이 죽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들은, 제프리는 어디에 있지?” “시신을 왕궁에 운반했다고 합니다.” “시신이라니!” 그녀는 흥분해서 전령의 뺨을 내리쳤다. 짜악하고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느닷없이 맞은 전령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곧 시선을 떨궜다. 부고소식을 들은 유족들의 반응은 격앙되기 마련이다. “내, 내 아들은 죽지 않았어!” 그녀는 새된 소리로 외치고 하녀를 불렀다. “왕궁으로 가봐야겠어! 준비해!” 마차가 뒤집어질 듯 빠르게 도로를 달렸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에스메랄다는 부디 자신이 들은 소식이 거짓이기를 빌었다. 그리고 그녀의 희망은 산산이 무너졌다. 제프리는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누워 있었다. 심장을 빠져나간 구멍에 절망의 심연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안 돼!” 에스메랄다는 아들의 시체 앞에서 비명처럼 오열했다. 아들이 죽을 리가 없다. 그녀는 제프리의 시신 위로 눈물을 떨어트리다가 벌떡 일어났다. 아들을 살려야 한다. 제프리는 살아나야 한다. 이대로라면 호건 가의 재산은 저 얄미운 엘리자베스의 딸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치마를 잡고 누군가를 찾아 정신없이 뛰었다. 제프리의 시신에서 멀어진 그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에녹과 이안 사이에 선 케이트를 발견했다. “너!” 에녹이 막았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에스메랄다는 그를 뿌리치고 케이트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작은 몸이 에스메랄다와 부딪치자 휘청했다. 이안이 재빨리 케이트를 부축했다. “네가 죽였지! 내 아들! 제프리를!” “아, 아니에요.” “거짓말 마! 네가, 네가 재산을 탐내서 내 아들을 죽인 거잖아!”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에스메랄다는 오늘 아들을 잃었다. 다들 그녀의 분노를 이해했다. 누구에게라도 분노를 표출하고 싶은 것 뿐이다. 하지만 에스메랄다의 분노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케이트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그녀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네가 다시 살려줘. 제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케이트는 당황한 눈으로 에녹을 쳐다봤다. 이럴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에스메랄다는 케이트의 스커트 자락을 잡고 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제발, 뭐든 할게. 그러니 제프리를, 제발 내 아들을 돌려줘.” 아무리 얄미운 에스메랄다와 제프리지만 이렇게 애원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약해진다.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에녹을 쳐다봤다. 그는 케이트의 시선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아가.” “하지만 아저씨.” 케이트의 치맛자락을 잡은 에스메랄다가 에녹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재빨리 에녹의 한쪽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내 아이를 돌려주세요. 제발, 뭐든 할테니…,” “뭐든?” 에녹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뭐든이라 했다. 케이트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에스메랄다는 깨닫지 못했다. 그녀는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필사적으로 끄덕였다. “네, 네에. 뭐든, 뭐든 할게요.” “그렇다면.” 에녹은 에스메랄다의 손을 잡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벌써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저 멀리 떠오르는 해를 가리킨 에녹이 입을 열었다. “해가 뜨는 곳을 향해 걸어가게. 열흘 밤, 열흘 낮을 걸어가면 문지기를 만날게야. 문지기가 어디를 가느냐고 물어보면 잊어버린 것을 찾으러 간다고 하게.” 에스메랄다는 에녹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그가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문지기가 열어준 문 안으로 들어가면 강이 하나 나올 걸세. 그 강을 따라 열흘 밤 열흘 낮을 걷다보면 빨래를 하는 사람을 만날게야. 검은 빨래를 희게 만들라는 거지. 시키는 대로 하게.” “그, 그러면 제프리가 돌아올까요?” “시키는 대로 하다보면 언젠가 아들을 살릴 수 있을 걸세.” 에스메랄다는 고개를 끄덕이고 해가 뜨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무 준비도 되지 않았지만 아들을 되살려야 겠다는 목표만은 뚜렷했다. 아들을 살리고 호건가의 재산을 손에 넣기 위한 그녀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 작품 후기 ============================ 다음 화부터 아들을 구하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 에스메랄다의 이야기. 랄다공주가 시작됩니다. 는 만우절... 얼마나 속으셨으려나 ㅎㅎㅎ 진짜 내용은 내일 가져올게요~ 00234 7. 위험한 남자 =========================================================================                            에스메랄다는 제프리의 사망 소식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럴 리가 없다. 그녀는 전령이 가져온 소식을 믿지 않았다. 멀쩡하게 나갔던 아들이다. 난데없이 죽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들은, 제프리는 어디에 있지?” “시신을 왕궁에 운반했다고 합니다.” “시신이라니!” 그녀는 흥분해서 전령의 뺨을 내리쳤다. 짜악 하고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느닷없이 맞은 전령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곧 시선을 떨궜다. 부고 소식을 들은 유족들의 반응은 격앙되기 마련이다. “내, 내 아들은 죽지 않았어!” 그녀는 새된 소리로 외치고 하녀를 불렀다. “왕궁으로 가봐야겠어! 준비해!” 케이트는 불안한 표정으로 마차 안에 앉아있었다. 시간이 늦어지자 추워졌다. 그녀는 오들오들 떠는 자넷을 끌어안았다. 이안과 제이드가 일러준 대로 여자들은 거기 모여 있었다. 한두 명 사라지긴 했지만, 누군가에게 끌려간 건 아니었다. 여자들은 불안해하더니 슬그머니 일어나서 어디론가 가버렸다고 말했다. 믿을 수 없어서겠지. 제이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들은 치안관도 믿을 수가 없었던것이다. 실제로 손님이 자기 말 한마디면 치안관 따위는 쉽게 물러서게 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고 증언하는 여자도 있었다. 여자들. 케이트는 비슷한 옷을 입고 겁먹은 눈을 한 여자들을 떠올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굉장히, 더러웠다. 모멸감. 분노. 자괴감 같은 것들이 그녀의 내부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는 자넷을 내려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자넷을 비롯해 거기 있는 여자들은 대부분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이었다. 손님으로 찾아온 남자 중 일부는 그 나이 대의 딸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역겨워. 케이트는 눈을 꾹 감았다. 전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갈기갈기 찢어졌으면 좋겠다. 그녀는 여자들을 떠올렸고 제인을 떠올렸다. 제인은 처음 그녀를 찾아왔을 때 성인 남자를 보면 겁을 집어먹었다. 그건 지금 자넷도 마찬가지다. 남자들은 전부 죽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생각했을 때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마차 안에 있던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꺅!” 힉하고 케이트의 목 안으로 억눌린 신음이 스며들었다. 어둠 속에서 호박색 눈동자만 떠오른 것처럼 보였다. 이안은 겁먹은 자넷과 그녀를 꽉 끌어안은 케이트를 보고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에요?” 케이트의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이안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잡아당겼다. 자넷은 케이트를 붙잡는 것도 잊고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안?” 그녀의 작은 몸을 끌어안자 이안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몇 번이나 그녀의 냄새를 맡은 다음에야 끌어안은 팔에 힘을 풀었다. “이안, 무슨 일이에요?” “냄새가 역해서.” “냄새요? 제 냄새요?” 나 그렇게 냄새가 났어? 케이트가 고개를 돌리자 자넷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그 말을 뒷받침하듯 이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여자들한테서 지독한 냄새가 나.” “여, 여자들이요?” 여자들한테서 지독한 냄새가 나나? 케이트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독한 냄새라고?” 마차안에 있던 세 마녀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들은 이안이 고개를 들자 움찔하고 물러났다가 대표로 로라가 입을 열었다. “여자들에게서 나는 냄새가 지독하다는 말이죠?” 이 여자는 누구지? 이안은 로라를 비롯한 마녀들을 쳐다봤다. 익숙한 얼굴이다. 그는 그들이 찻잎 가게에서 본 손님과 직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향유를 물어봤던 여자들이군.” 그의 말에 로라가 어깨를 움츠렸다. 남은 두 여자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처럼이 아니다. 실제로 죄를 지은 게 맞다. 뮈엘라에서 그런 마법 약품을 만드는 건 불법이니까. “어, 그러니까, 우린…….” 로라는 어쩔 줄 몰라 더듬거렸다. 그러고 보니 수사관이었다. 불법 마법 아이템을 수사하던 수사관. 큰일 났네. 세 여자가 시선을 교환했다. 그때 케이트가 나섰다. “이안, 저분들 괴롭히지 마세요.” “괴롭힌다고?”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누가 누굴 괴롭힌단 말인가. 그는 그저 물어본 적밖에 없다. 지난번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다.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케이트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바동거리기 시작했고 이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넷이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 그러니까 저 냄새가 역하다는 거잖아요?” 로라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케이트는 이안을 올려다봤고 이안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역하던가요?” 어떻게 역하냐니. 이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냥 역했다. 불편하고 기분이 나빴다. 그 냄새가 진한 저택 안쪽으로 갈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그런 역한 냄새였다. 그래서 케이트를 찾았다. 그녀의 냄새를 맡으면 조금 나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생각이 적중했는지 지금 그의 상태는 꽤 괜찮아졌다. “그냥 역해.” “기분이 좋아지고 더 맡고 싶은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이안은 다시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좋은 냄새라면 저택 안을 수사하다 말고 여기로 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의 표정을 본 로라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 아니. 그냥 궁금해서요. 그러니까, 그 향은 일반인한테는 상당히 좋은 냄새거든요. 그런데 음, 그러니까.” 그녀는 자넷의 눈치를 보며 작게 말했다. “괴물에게는 어떨, 아니, 괴물이 아니라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드도 향을 맡고는 좋은 냄새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이 향이 기분 나쁜 건 이안 뿐인 모양이었다. 즉, 저 여자들과 집안에서 나는 향은 이안같은 마력흡수자들에게는 상당히 역한 냄새인 모양이었다. “이안, 기분이 안 좋아요?‘ 케이트의 손이 그의 이마에 닿았다. 약간 서늘한 손이 닿자 기분이 좋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입술을 눌렀다. “아니, 이제 괜찮아.” 어머. 세 여자는 가볍게 탄식을 흘렸다. 괴물과 마녀의 조합이라니, 기묘하지만 어울린다. 저 무서운 남자가 한순간에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낭만적이네.” 귀네비어의 말에 수잔이 투덜거렸다. “낭만적이긴 당연한 거지. 괴물이 마녀에게 반하는 건 당연한 거 아냐?” 응? 케이트는 그게 무슨 소린가 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안이 무서운 표정으로 쏘아보자 수잔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케이트가 들은 다음이었다. 그녀가 그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에녹이 다가왔다. “아가, 오래걸릴 것 같구나.” 그는 자연스럽게 이안의 품에서 그녀를 빼내며 말을 이었다. “먼저 가서 돌아가는 게 어떻겠느냐?” “하지만 아저씨만 두고 돌아갈 수는,” “걱정 마렴, 카티야.” 에녹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여기 로엔 경도 함께 있으니 말이다. 내 손님들도 너무 오래 머물게 해서 미안하니 함께 내 집에 가서 쉬었으면 좋겠구나.” 케이트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이안과 에녹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살폈다. 두 사람, 사이 안 좋을 텐데. 하지만 에녹의 말이 맞았다. 이안은 수사관으로서 남아서 일해야 하고 그건 에녹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이안에게 말했다. “아저씨께 친절해야 해요?” 당부의 말에 이안은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왜 나한테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그야, 아저씨는 신사니까요.”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차. 케이트가 재빨리 덧붙였다. “물론, 이안도 신사긴 하지만요.”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완전히 엎드려 절 받기다. 불만스럽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참았다. 이안은 케이트의 손을 잡고 나직하게 말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어머니께 너와의 혼인을 말씀드리러 갈 거다.”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씩 웃으며 그녀의 볼을 가볍게 쓸고 에녹에게 도전적인 시선을 던진 뒤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저놈이? 에녹은 이안을 향해 눈을 부라리다가 케이트의 표정을 보고 멈칫했다. 그녀는 발그레하게 뺨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역시 위험한 놈이야.” ============================ 작품 후기 ============================ 뮈엘라의 수사관 6부 끝났습니다! 그동안 함께 달리신 분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후로 외전이 한편정도 더 올라갈 예정인데 바로는 아니고...음 며칠 있다가 올라갈 예정입니다. 사실 아직 쓰지도 않았... 그 전에 질답을 할게요. 7부에서 회수할걸 제외하고 떡밥은 대충 다 회수한 것 같긴 한데 매의 눈인 분들이 있으셔서 어떨까...싶네요. 캐릭터에게 물어보시면 캐릭터가 답해드립니다. 떡밥 뿐 아니라 궁금한걸 물어보셔도 되고, 마음대로 예요. 시간은 좀 여유있게 잡겠습니다. 최소 다음주 월요일까지. 00235 QnA =========================================================================                            Q. 몇 부까지 예상하고 계시나요 칼같아님 신이지기님 A. 초기에도 언급했지만, 7부까지입니다. 앞으로 1부 남았어요. Q. 7부 연재 시까지 쉬다가 오시나요?? 칼같아님 Ol크리트님 마루누나님 루뇌님 A. 넹. 외전 올리고 일이주 쉬고 다른거 쓸거 같습니다. Q. 자신이 마녀라서 이안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어카나요ㅜㅜ 소피블랑님 A. 그러게요. 이안,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안 : 잡으러 간다. Q. 수리공으로 가시나요?? aaa12345님 주댕주댕님 루뇌님 A. 넹. 일단 수리공 비축도 조금씩 쓰고 있는데 다른 것도 조금씩...진짜 조금씩 쓰고있습니다. Q. 작가님은 어디사시죠 밍샤님 A. 여러분 마, 크흠. 지구에 삽니다. Q. 근데 이게 프로포즈 끝인가요? 담백하네요 ♂라파엘로♀님 A. 원래 프로포즈라는게 그리 거창한 게 아니라서...애초에 이안에게 프로포즈는 결혼 허락의 개념입니다. 문제는 결혼 허락은 당사자인 여자가 아니라 여자의 아버지에게 받는게 일반적이긴 합니다. Q. 작가님의 나이가 궁금합니다! 해초해초님 A. 먹을 만큼 먹어써~ 갈때까지 가써~ 뭔가가 좀 틀렸다는 느낌이 드는데, 먹을만큼 먹었습니다. Q. 이안에게 묻고싶습ㄴ다 결혼하면 어디서 살건가여! 종오소호님 A. 이안, 어디서 살건가요! 이안 : 내 집에서. A. 이안 집 없잖아요. ...어, 그러고보니 이 남자 직업도(표면적으로)없고 집도 없네요. Q. 이안이 케이트한테 스킨쉽하려고 할 때(혹은 할 때) '에헴' 소리가 날 때도 있고 안날 때도 있었던것 같은데 이안이 편법(?) 같은걸 찾은건가요?_? 김끄앙님 A. 헉 이걸 모르시다니! 그마법 은근 별거 아닌 마법인데 에헴하는 소리가 키스할 때, 하려고 할 때만 나요. Q. 저 세마녀들이 나쁜 마녀랑 연관이 있었던거 같은데...그왜저번에 일부러 케이트를 에녹에게서 떼어놓으려고 떠나는것을 도와달라고 한다고 했던거 아니었어요 ? sysy님 A. 네. 아니었습니다. Q. 그래서 결혼은 언제??? 끼끼씨님 A. 7부 안에 하지 않을까요? 안하려나...? Q. 이안 케이트에게 스킨쉽할 때마다 에헴소리 신경쓰이죠? 뚜버기여행님 A. 이안, 신경쓰이나요? 이안 : 아니. A. 그럴리가! 이안 : (노려본다.) Q. 에녹에게 사랑이란? 뚜버기여행님 A. 에녹, 에녹에게 사랑이란 어떤건가요? 에녹 : 엘프는 인간보다 훨씬 긴 세상을 태양과 달을 마주한단다.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건 가장 강력한 감정의 하나란다. A. 랍니다. Q. 에녹이 괴물에 대해 일반화한 말로 미뤄보면 에드워드도 사람피 마시는거 아닌가요? 에드워드가 평소에 어떻게 괴물임을 숨기고 다니는지 궁금해요 로즈마리랑 관계도 그렇구요 워터메론님 A. 음, 5부에서 한번 나왔는데 에드워드와 이안은 다른 종류의 괴물입니다. 괴물도 괴물마다 아주 조금씩 다르고, 마력 보유자가 많은 뮈엘라에서 마력보유자의 존재로 일그러진 마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생겨난 존재인 만큼 어떤 마녀를 만나느냐, 그 마녀에게 얼마나 받아들여 지느냐에 따라 성향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에드워드는 사람의 피를 주기적으로 마셔주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공작이기도 하고, 이안과 달리 자신이 괴물이라는 것을 어릴 때부터 알았던 케이스다라서 숨기고 관리하는데 체계가 잡혀 있습니다. 로즈마리와의 관계는 아래 같이 답하겠습니다. 얘네도 나중에 한번 썼으면 좋겠네요. 일단은 이정도만. Q. 로즈마리가 당분을 섭취하는게 에드워드에게 어떤식으로도움이되는건가요?? 소피블랑님 A. 로즈마리가 피를 제공합니다. 많이 제공하는 건 아니고 사람이 이주에 한번 헌혈하는 정도의 양으로요. 당분은 로즈마리가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그게 마력에 영향을 끼치고~ 그렇습니다. Q. 케이트의 할아버님이 살아계신지, 어디 아프신건 아닌지, 손녀의 존재는 알고 계신지가 궁금해요. 대체 왜 방에서 두문불출 하시는건지 ㅠㅠ 신이지기님 A. 7부에 나왔어요. 살아있다고. 왜 방에서 두문불출하는 지도 나왔어요. 제프리와 에스메랄다가 감금하고 스프만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집사가 가끔 음식 빼돌려서 주고 그럽니다. (찡긋) ============================ 작품 후기 ============================ 어제 까지 질문을 받았는데 별로 없는걸 보니 제가 떡밥회수를 거의 한 모양이네요. 혹시 잊어버리고 회수 못한 떡밥 있을까봐 질답편 하겠다고 한거였는데 다행입니다. ㅎㅎㅎ 외전은...몇가지 생각중인데 아직 안썼어요. 뮈엘라 마법학교이야기도 괜찮을것 같고, 두 사람이 적자로 사교계에서 만났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고. 이런저런 IF버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외전은 이번주 주말 아니면 다음주 쯤에 가져올게요~ 00236 [외전] 뮈엘라의 괴도 =========================================================================                            - 보름달이 뜨는 밤에 가장 소중한 루비를 받아가겠다 호건 가에 이런 예고장이 날아온 것은 이틀 전의 일이었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비스마르크 호건은 코웃음을 치며 예고장을 무시했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주인어른의 자신감에 집사 칼은 걱정스러워 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 저택의 경비를 두배로 강화했을 뿐이다. 그래서 호건 가의 커다란 저택은 평소보다 더 소란스러웠다. 케이트는 집 안팎을 경계하는 용병들의 발걸음 소리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났다. 목마르다. 질과 자넷이 우유와 쿠키를 담은 접시를 침대 옆에 놓아뒀지만 차가운 물이 마시고 싶었다. 줄을 잡아당기려던 케이트의 손이 멈췄다. 몇 시인지 모르지만 사위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이런 시간에 물 한잔 갖다 달라고 질이나 자넷을 깨우는 건 미안하다. 그녀는 침대 밑에 가지런히 놓인 슬리퍼에 맨 발을 꿰어 신고 일어 났다. 침대 옆 소파에 그녀가 벗어둔 가운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케이트는 가운을 걸치고 그 위에 숄까지 덮어 체형을 완전히 감춘 다음에야 문을 열었다. 이미 케이트를 알고 있던 용병들은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뮈엘라의 군수사업으로 거상이 된 비스마르크 호건의 하나뿐인 손녀다. 왕실 국고의 반이 호건가에서 납부한 세금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다. 아무리 부잣집 아가씨를 잡아서 인생 좀 펴볼까 하는 생각을 하는 녀석이라 해도 이쯤 되면 멈칫하게 된다. 잘하면 호건 가의 하나뿐인 손녀사위고, 잘못하면 사랑하는 손녀를 건드린 죄로 자신뿐 아니라 일가친척까지 생계가 끊길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몇 년 전 사교계에 데뷔한 케이트에게 감히 키스하려한 죄로 평민도 아니고 귀족자제가 원치 않는 해외 유학을 떠난 사례도 있었다. “무티.” 케이트는 불 꺼진 주방 안에 들어서며 조심스럽게 요리사를 불렀다. 불이 꺼져있으니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주방은 요리사인 무티의 공간이다. 금지옥엽인 아가씨가 뜨거운 물에 데이기라도 할까봐 요리사를 비롯한 사용인들은 비스마르크의 명령이 없어도 그녀가 주방에 들어가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주의하고 있었다. 그 탓에 케이트는 주방에 들어가기 전에 늘 머뭇거리곤 했다. “아무도 없나?” 당연하다. 이 시각이라면 주방 하녀들도 전부 잠을 자고 있을 시간이다. 가장 늦게 잠들고 가장 일찍 일어나는 견습 하녀역시 자신의 방에서 새근새근 잠에 들어 있을 테지. 케이트는 주방 옆에 놓인 램프를 들어 안을 비췄다. 램프가 있어서 다행이다. 불을 켤 줄 모르는 그녀는 램프가 없었다면 주방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주방 안에서 램프의 불빛을 받아 뭔가가 반짝 빛이 나는게 보였다. “누, 누가 있어요?” 남자는 큰 체격과 달리 놀랍도록 아무 기척도 없이 어두운 주방 안에 서서 케이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호박색의 눈동자. 그의 얼굴을 알아본 케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 년 전에 들어온 하인이었다. 이안, 뭐라고 했는데. 성은 기억나지 않는다. 케이트는 램프를 조리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미소 지었다. “이안도 목이 말라서 내려왔나요?” 속을 알 수 없는 호박색 눈동자가 케이트의 얼굴 위에 떨어졌다. 이안은 케이트가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나라를 쥐락펴락 할정도로 부유한 집안의 하나뿐인 후계자가 이렇게 격의 없는 건 이상한 거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 이안은 케이트가 어딘가 모자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새로 온 하인이라는 말에 경계심을 너무 쉽게 풀었고 예의상 미소가 아닌 진짜 반갑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이안의 대답에 케이트는 다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린 야식 파트너네요.” 그녀의 얼굴 주변에 꽃이 활짝 피어났다. 하마터면 이안은 그녀에게 손을 뻗을 뻔 했다. 다행히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케이트가 몸을 돌리더니 조리대와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목만 말랐는데 배도 고픈 거 있죠. 이안도 배고프죠? 무티가 분명 어딘가에 과자를 숨겨놨을 거예요.” 적은 양의 빛을 받아 가운과 숄을 걸친 조그마한 몸이 더욱 작아보였다. 이안은 멀뚱멀뚱 케이트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케이트는 조리대를 뒤졌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고개를 갸웃했다. 무티라면 분명 어딘가에 디저트를 남겨놨을 것이다. 다들 못 들어오게 했지만 과자를 노린 그녀는 새벽에 몰래 주방을 침입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무티는 케이트를 위해서인지 견습 하녀들을 위해서인지 몰라도 과자를 낮은 찬장에 숨겨두곤 했다. “이안, 여기 좀 열어봐요. 여기 분명 있을 것 같아요.” 높은 찬장에 손이 닿지 않아 낑낑대는 케이트 뒤로 이안이 성큼 다가갔다. 그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찬장을 열었다. 안에 애플 파이가 들어 있었다. 순식간에 케이트의 코에도 시나몬향과 함께 달콤한 사과 냄새와 버터냄새가 풍겨왔다. “그거예요!” 보물이라도 찾은 것 같다. 케이트는 반색하면서 몸을 돌렸다. 동시에 그녀의 코가 이안의 가슴에 부딪쳤다. “아야.” 코가 뭉개진 것 같아 케이트는 코를 움켜쥐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는 당연히 이안이 괜찮냐고 물어볼 줄 알았다. 하지만 이안은 그저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선명해서 케이트는 잠시 말을 잃었다. 부잣집 아가씨로 자란이상 그녀는 누구에게나 대우받고 돌봄 받는 입장이다. 샤프롱이 없으면 파티도 가지 않고 집 안에서도 늘 몸종인 질과 자넷이 따라다닌다. 남자와 이렇게 가깝게 있어 본 게 처음이었다. “저기, 이안?” “네.” “조금, 물러나 줄래요?” 이안은 민망하다는 기색도 없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틈이 생기자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터 조금 이상한 남자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말이 없고 일을 잘하기 때문에 집사 뿐 아니라 그녀의 가정교사인 에녹마저도 칭찬을 하는 하인이지만, 때때로 케이트는 그와 시선을 부딪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눈이 마주치면 아주 잠깐이지만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남자. 케이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안을 그렇게 정의내리고 있었다. “실례.” 갑자기 이안의 손이 다가왔다. 움찔하고 놀라는 케이트의 손을 치운 그가 그녀의 코를 살폈다. 계속 코를 만지는 그녀의 태도가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이안은 작은 코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누르고 케이트의 표정을 살폈다. “아픕니까?” “아, 아뇨.” “부러지진 않았습니다.” 역시 이상한 남자다. 케이트는 허리를 펴는 이안을 묘한 기분으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무엇을 말입니까?” “부러지지 않은 거요.” 이안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권투를 배웠습니다.” “권투요?” 케이트의 눈이 반짝였다. 최근 신사들이 많이 배운다고 들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조리대 위에 애플파이를 내려놓는 이안을 종종따라가서 물었다. “어디서요?” “여기저기에서 배웠습니다.” “정식으로 배운 건가요?” 이안은 칼이 어디 있는지 아는 것처럼 헤매지 않고 칼을 꺼내더니 파이 위에 칼을 대고 케이트를 쳐다봤다. “조금 더요.” 많이 먹으면 잠을 못 잘 텐데.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파이를 잘랐다. 어디선가 포크를 찾아온 케이트가 스툴위에 올라가 앉더니 눈을 빛내며 파이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찾은 포크가 사용인용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이안은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권투는 어떻게 배우게 됐어요?” 케이트는 집요했다. 이안은 머릿속에 케이트에 대해 의외로 집요한 여자라고 적었고 입을 열었다. “어쩌다 보니까 배우게 됐습니다.” “클럽에서 배운거예요?” “제 출신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이안의 질문에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클럽은 신사들만 출입 가능한 곳이다. 그러니 그런 곳에서 하인인 이안이 권투를 배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방금 케이트는 이안에게 사실은 귀족가의 사생아가 아니냐고 둘러 물어본 것이다. “미안해요. 그럴 뜻이 아니었어요.” 이번에도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어려운 남자야. 케이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반년이나 이 집에서 하인으로 일했지만 그의 과거에 대해서 아는 자가 별로 없다. 그녀는 맞은 편에 앉아 파이를 먹는 이안을 힐끔 쳐다봤다. 곧게 편 허리와 어깨. 소리 없이 파이를 먹는 모습이 그녀가 만났던 어떤 신사보다 낫거나 비슷한 수준이었다. 대체 어디서 뭘 하던 남자일까. 궁금하다. 그녀는 다른 하녀들도 그의 출신성분에 대해 수군거린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몸종인 질과 자넷만 해도 질은 멋있다며 좋아했고 자넷은 무섭다고 피하고 있었다. 궁금한데. 고양이를 죽이는 호기심이 케이트의 뇌리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만 들어가십시오.” 파이를 다 먹고 나자 케이트를 방까지 데려다 준 이안이 말했다. 에스코트 해주는 모습이 정말 신사같아 감탄하고 있던 케이트는 그의 손에 살며시 자신의 손을 얹고 말했다. “재미있었어요.” 이안의 시선이 자기 손위에 겹쳐진 케이트의 손으로 향했다. 친밀한 행동이었다. 그는 다른 쪽 손으로 케이트의 손을 잡아 떼어내며 딱딱하게 말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십시오.” 케이트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무엇을 조심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밤늦게 혼자 용병들이 가득한 집안을 돌아다닌 것? 자다 말고 파이를 먹은 것? 주방에서 이안과 단 둘이 앉아있던 것? 걸리는 게 너무 많다. 그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말했다. “어차피 아무도 모를 텐데요, 뭐.”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럴리 없다. 용병들이 봤으니 적어도 케이트가 자다말고 일어나 방을 나갔다는 것만은 알것이다. 다만, 주방에서 그와 단 둘이 앉아 파이를 나눠먹었다는 것만은 모르겠지. 그는 약간의 심술을 담아 말했다. “제가 알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안은 비밀로 해줄 거잖아요.” 순진하기도 하지. 그는 둥글게 미소 짓는 케이트를 내려다보다가 가만히 허리를 숙였다. 어. 하고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제 이름을 부르시는 군요.” 그의 입술이 가볍게 그녀의 입술을 훔치고 멀어졌다. 이안은 놀라서 얼어붙은 케이트를 향해 말을 이었다. “남자를 오해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 작품 후기 ============================ 번외편인 IF버전입니다. 본문과 아무 상관없으니 본문이 아니면 싫다! 하시는 분은 안보셔도 무방합니다. 괴도물을 써보고 싶어서 구상중인데 어떨까 싶어서 분위기만 이쪽에 차용해 봤습니다. 외전은 몇편이나 될지 잘 모르겠네요. 늘 그렇듯 5편 이하로 될거 같아요. 제가 요새 정신이 좀 없어서... 이번주 안에 한편 더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00237 [외전] 뮈엘라의 괴도 =========================================================================                            다른 사내였다면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실제로 케이트는 몇 달전 파티에서 날씨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입술을 대는 남자의 행동에 놀라 소리를 지른 적이 있었다. 그 일은 사교계에서 길게 회자되지 않았다. 그저 어느 무례한 남자가 호건 양에게 치근덕대다가 혼이 나고 물러났다는 정도로만 이야기 되었다. 일부는 케이트를 동정했고 케이트를 질투하는 일부는 고소하다고 생각했다. 또 일부는 케이트에게 치근덕거린 남자를 안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상대 남자가 혼이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케이트는 더 이상 그 사내에 대해 듣지 못했지만 그가 어디론가 멀리 보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녀의 자만심이나 복수심과는 상관이 없다. 그저, 자신의 할아버지인 비스마르크가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와 놀다가 실수로 그녀를 다치게 했던 정원사의 아들은 아직도 이 저택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그녀가 처음으로 다과회에 참석했던 날, 그녀를 앞에 두고 그래봤자 졸부의 손녀 아니냐고 비웃던 귀족영애는 혼담이 파기되었고 지금까지 아무런 혼담도 받지 못하고 있다. 살면서 체득한 할아버지의 성격상 감히 금지옥엽 손녀에게 손을 댄 사내라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케이트는 처음에 너무 놀라서 소리 지르지 못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에 만나면 무례했다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말해야지. 소리 지르지 않고 방으로 돌아온 자신을 기특하다고까지 생각하면서 그녀는 이안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주의를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성격이 할아버지인 비스마르크가 가장 걱정하는 그녀의 순진하고 여린 부분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할아버지.” 다음날 아침, 밝은 목소리로 할아버지에게 인사한 케이트는 자신의 앞에 아침식사를 내려놓는 이안을 힐끔 쳐다봤다. 감히 지난 새벽에 주인집 딸의 입술을 훔친 자의 태도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이안은 평소와 똑같이 무표정했고 무뚝뚝했다. “좋은 아침이라기엔 얼굴이 안 좋구나, 아가.” 주변에 주어야할 다정함과 관심을 손녀에게 몰빵해버린 비스마르크는 예리했다. 그는 지난 새벽에 일어나 파이 한 조각을 해치우고 다시 침대에 기어들어간 손녀딸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다. 당연하게도 비스마르크는 케이트가 새벽에 자다 일어나서 이안과 함께 주방을 뒤졌다는 걸 몰랐지만 그걸 숨기기엔 케이트의 얼굴이 부었던 것이다. 평소보다 빵빵해진 볼이며 제대로 자지 못해 거친 피부까지. 반사적으로 이안도 케이트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어, 자다가 깨서 그래요, 할아버지.” “저런, 용병들 때문에 시끄러웠구나. 칼, 당장 용병을,” “할아버지이이이이!” 그냥 뒀다간 이 집안의 용병이 당장 쫓겨나게 생겼다. 케이트는 재빨리 할아버지의 손을 부여잡으며 매달렸다. “그냥, 그냥 깬거예요. 그런 날 있잖아요. 그냥 자다가 눈이 떠지는 날.” 슬프게도 비스마르크는 그런 일이 없는 사람이다. “그럴 리가. 아가, 어디 아픈 것 아니냐? 에녹, 자네가 봐도 아가 얼굴이 안좋지 않나?” 케이트를 아끼는 거라면 비스마르크와 쌍벽을 이루는 에녹까지 나타났다. 그는 아침 조깅을 하고 왔는지 상쾌한 표정으로 들어오다가 비스마르크의 말에 케이트의 턱을 들어올렸다. “그렇군. 얼굴이 부었어. 카티야, 자기 전에 차를 마셨느냐?” 차뿐인가. 파이도 먹었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가 없어서 케이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네. 차를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래요.” “아가, 어제 저녁이 짰니?” “아니, 아니, 아니에요.” 이번에는 불똥이 주방장에게 가게 생겼다. 케이트는 또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다가 지쳐서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녀의 하루는 늘 이런 식이다. 과보호하는 할아버지와 가정교사인 에녹. 괴도가 나타나면 할아버지와 에녹의 관심도 조금은 멀어질 줄 알았는데. 헛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억지로 스크램블 에그를 끼적였다. “여어.” 친구가 왔다는 말에 하인들이 지나다니는 후문으로 나간 이안은 제이드의 모습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런 모습으로 잘도 왔다싶을 정도로 제이드의 모습은 화려했다. 깃 달린 모자에 초록색과 녹색의 보색이 화려한 재킷. 거기에 하얀 바지까지. 이안은 무심하게 말했다. “폐하를 알현하러 가나?” “응? 폐하? 왜?” “아, 폐하께서 어릿광대라도 찾으시나 했다.” 비꼬는 말에 제이드의 눈이 커졌다. 그는 이안에게 달려들더니 외쳤다. “너, 이 자식! 유머가 늘었다?” 보통 때의 이안이라면 그의 옷차림에 일언반구도 없었을 것이다. 타인의 옷차림, 말투, 생활까지. 타인이 무엇을 하건 내게 피해만 없다면 상관없다는 게 이안의 신조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제이드의 옷차림을 비꼰 것이다. 친구의 변화라면 뭐든 쌍수를 들고 환형하는 제이드는 신이나서 이안을 꽉 끌어 안았다. “그래! 그렇게 가는 거야!” “덥다. 떨어져.” 두 사람이 온도차가 느껴지는 대화를 하는 그 시각, 케이트는 이안과 대화할 때라고 생각했다. 비스마르크는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상점가를 확인한다며 나갔고 에녹은 잠시 친구를 만난다면 자리를 비웠다. 할아버지와 선생님이 안 계실 때 이야기를 해야겠어. 케이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안을 찾았다. “이안이요? 아까 친구가 찾아왔다고 해서 뒷문으로 잠깐 나갔는데요.” “아, 그래요?” 케이트는 질과 자넷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뒷문으로 나갔다. 매캐한 담배냄새가 풍겨왔다. 다른 하인들이 피우는 것과 다르게 지독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냄새였다. 할아버지가 피우시는 것과 비슷하네. 케이트는 이안을 찾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설마 할아버지께서 벌써 돌아오신 건 아니겠지. 잠시 움츠렸던 그녀는 비스마르크가 뒷문으로 들어올 리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 어깨를 폈다. 마구간 뒤로 그림자 두 개가 보였다. 월등하게 큰 그림자는 누가 봐도 이안이다. 그림자도 위압적이네. 케이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가갔다. “그래서, 루비는 찾았어?” 엇 하고 멈춘 것은 남자의 목소리 다음에 들린 이안의 말 때문이었다. “몇 개 있어. 이집 주인 손녀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더군.”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루비? 그야 그녀에게 루비가 몇 개 있기는 하다. 뒤 이어 이안이 말을 이었다. “사파이어나 에메랄드가 더 많지만.” 그것도 사실이다. 그녀의 눈동자와 닮았다며 여기저기에서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할아버지의 선물이었고 때때로 비스마르크에게 잘 보이기 위한 선물도 있었다. “언제 할까?” 다른 남자가 말했다. 케이트의 머릿속에 팟하고 도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루비를 훔치러 온다던 괴도다. 이안이 괴도였다.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안타깝게도 그 기척을 이안이 느꼈다. 그는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고 기둥 뒤를 살피다가 덤벼들었다. “앗!” 이안은 케이트를 덮친 다음에야 그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기척을 느끼지 못한 이유를 알았다. 이렇게 작은 여자의 기척은 생각보다 느끼기가 어렵다. 작고 가볍기 때문이다. 그는 케이트 위에 올라탄 채 한참을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안, 내려오는 게 좋,” “도둑이야!” 제이드의 말과 함께 정신을 차린 케이트가 소리를 질렀다. 이안은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덮다시피 입을 막았다. 하아. 이안이 숨 쉬는 게 밑에 깔린 케이트에게 느껴졌다. 이 남자가 지금 뭘 잘했다고 한숨이야? 케이트는 눈을 부라렸지만 밑에 깔린 채 코와 입이 막힌 채로 부라려봤자 위협적이지 못하다는 걸 그녀는 몰랐다. “어떻게 할까?” 이안은 바둥거리는 케이트의 몸을 꽉 잡고 물었다. 아이고, 머리야. 제이드가 머리에 손을 댄 채 투덜거렸다. “일단 내려와. 이 아가씨, 질식해 죽겠다.” 그렇지 않아도 숨이 막히던 차다. 케이트보다 두 배쯤 되는 덩치인 이안이 그녀를 깔고 누른 채 코와 입을 막고 있으니 그녀는 질식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소리 지를 겁니까?” 당연하다. 케이트는 왁왁대며 소리 지르려 애썼다. 이안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고 케이트는 몸부림을 쳤다. “잠깐, 아가씨. 우리 말좀 들어봐요.” 제이드가 말을 걸었지만 케이트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있는 힘껏 몸을 흔들고 있었지만 이안 때문에 꿈쩍도 하지 못한다는 게 분했다. 급기야 눈물까지 글썽이는 그녀를 보고 이안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더니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읍! 읍!” 해석하자면 더러운 손수건 빼! 정도겠지만 안타깝게도 이안의 손수건은 깨끗했다. 게다가 좋은 냄새까지 났다. 이안은 그대로 케이트의 몸을 달랑 들어 안았다. “읍! 읍!”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손수건을 빼라고! 케이트가 다시 읍! 읍!하고 소리쳤지만 이안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그녀를 안고 성큼성큼 호건 저택을 빠져나갔다. ============================ 작품 후기 ============================ 이번주 안에 한편 올린다고 했는데 잊어버... 아직 이번주 안지났으니까 괜찮죠? 다음편은 다음주 안에 올리겠습니다. 00238 [외전] 뮈엘라의 괴도 =========================================================================                            “이 미친 자식아.” 제이드는 한숨을 내쉬며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이걸 어떻게 할 건데? 건드릴 사람을 건드려야지! 이 아가씨를 납치하면 어떻게 해!” 하지만 패닉 상태에 빠진 제이드와 달리 이안은 무덤덤했다. 그는 의자에 묶어둔 케이트를 힐끔 쳐다보고 말했다. “다시 돌려주면 돼.” “이 아가씨가 물건이야? 돌려주면 되게?” “웁웁! 웁웁웁!” 케이트 역시 맞다는 듯 소리쳤다. 해석하자면 난 물건이 아니라고, 이 바보자식아! 쯤 되겠다. 그녀는 묶인 채로 몸부림치다가 지쳐서 몸을 늘어트렸다. 숨이 가빴다. 입에 손수건이 들어온 탓에 축축해서 기분이 나빴다. 이런 기분 나쁜 일을 당하는 건 처음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납치당할 뻔한 적은 많지만 한 번도 그 시도가 성공한 적은 없었다. 뒤로 묶인 줄 때문에 팔이 뻐근했다. 손목에 파고드는 건 또 어떤가. 덕분에 케이트를 억지로 움직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온몸이 다 아팠다. “웁! 웁! 웁웁웁!” 약간 쉬고 나서 그녀는 다시 소리쳤다. 제이드는 차마 그녀를 쳐다보지 못하고 이안에게 다가가 말했다. “입 정도는 풀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 “소리 지르면 곤란해.” “하아.” 그는 과도하게 한숨을 내쉬더니 케이트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아가씨, 우선 이것만 알아둬요.” 뭘? 케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제이드고 이안이고 가만둘 생각이 없었다. 풀려나기만 하면 아주 작살을 내버릴 생각이었다. “난 아가씨를 납치한 일에는 저놈이랑 아~무 상관없어요. 알겠죠?” 퍽이나 훌륭한 동지애다. 케이트는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고 이안은 한쪽눈썹을 들어올렸다. 제이드는 어색한 헛기침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손수건을 빼줄게요. 대신 소리만 지르지 말아줄래요?” 그의 부탁에 이안이 덧붙였다. “저 아가씨의 지능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은데.” 맞는 말이다. 입이 자유로워지는 순간 케이트는 있는 힘껏 비명을 지를 생각이었다. 그녀는 눈동자를 데굴 굴렸고 제이드는 다시 말했다. “비명 지르면 이번엔 저 녀석 양말을 아가씨 입 안에 넣을지도 몰라요.” 웩. 케이트가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입에 손수건이 들어간 상태로는 짓기 어려운 표정이지만 어쨌든 그녀는 해냈다. 이안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왜 내 양말이야? 네 양말이 아니라.” 그의 말에 제이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 양말은 물 빠지거든. 새 거라.” 웩. 다시 한 번 케이트는 입 안에 손수건이 든 상태로 역겹다는 표정을 짓는 데 성공했다. 그 사이에 제이드는 조심조심 케이트의 입안에 든 손수건을 빼내고 있었다. “어때요? 저 녀석한테 양말을 달라고 할까요?” “아니, 됐어요.” 너무 바보 같지만 효과적인 협박에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바보 같은 도둑들이라니. “이왕 풀어준 김에 손도 풀어줘요.” “풀어주기 전에 말할 게 있다.” “듣기 싫어요. 빨리 손이나 풀어줘요.” 케이트의 당돌한 요구에 이안의 눈썹이 다시 올라갔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케이트의 턱을 쥐고 들어 올리며 말했다.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대담한 거죠.” 케이트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입 안에서 헝겊 맛이 났다. 그리고 향수냄새도. 웩하고 다시 한 번 입맛을 다신 그녀가 요구했다. “그리고 차 한 잔도 부탁해요. 입안에 이상한 맛이 남아서.” “헤?” 제이드의 얼빠진 소리와 함께 이안의 눈썹이 다시 올라갔다. 그는 다시 말했다.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한번 친 대사잖아요? 그러니 차나 한 잔 갔다 줘요.” 이번에는 이안이 한방 맞았다. 제이드는 배를 잡고 뒹굴었고 이안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트는 느긋하게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차가~ 마시고 싶어~. 차~! 홍차도 좋고~ 녹차도 놓고~ 커피는 안 돼~.” 그녀의 노랫소리와 함께 제이드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이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는 그대로 허리를 굽혔다. “왜냐면~ 화장, 읍?” 케이트의 입술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깜짝 놀라서 움찔하는 그녀가 도망칠 수 없도록 그녀의 뒤통수를 단단히 잡은 이안이 케이트의 입안에 혀를 집어넣었다. “흐, 읍? 읍! 으읍!” 입안을 헤집던 혀가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케이트는 놀란 나머지 멍하니 이안을 쳐다봤다. 그는 손등으로 젖은 자신의 입술을 문지르고 냉정하게 말했다. “이제 이상한 맛은 없겠지.” 케이트의 얼굴이 펑하고 터질 정도로 붉어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어서 입을 딱 벌렸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지? 그녀를 더 기분 나쁘게 만든 건 그가 자신의 입술을 닦았다는 점이었다. 입술을 닦고 싶은 건 그가 아니라 그녀다. 케이트는 몸을 흔들며 외쳤다. “풀어줘요! 풀어달라고!” “으, 이안.” 제이드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노려봤지만 정작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다시 의자에 앉아 지도를 살피고 있었다. “당신들, 할아버지가 아시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케이트의 말에 제이드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 당신들이 아니라 당신입니다. 전 빼주세요.” 그게 더 얄밉다. 케이트는 제이드를 찌릿하고 노려봤다. 잠시 방 안에 조용해 졌다. 그 사이에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안과 제이드가 그녀를 납치해 온 곳은 여관방이었다. 여관이라는 곳 자체를 처음 와보는 케이트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낡아서 부분 부분 누렇게 변색된 벽지하며 움직일 때마다 끼익끼익 소리 나는 바닥. 그녀는 호건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들의 방과 크기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구조도 거의 비슷했다. 침대 하나와 세면대 하나, 책상과 의자 하나. 적어도 그녀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들의 방이 이 방보다는 훨씬 아늑할 것이다. “저건 뭐예요?” 케이트는 벽에 핀으로 고정시켜둔 신문을 보며 물었다. 아주 작은 기사부터 신문 일면을 차지할 만큼 큰 기사도 있었다. 그녀는 그 기사들이 모두 괴도에 대해서 조사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 저건.” 제이드는 입을 열다말고 이안을 쳐다봤다. 이거 함부로 말해도 되나? 하지만 그가 대답하기 전에 케이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설마. 당신들 범죄를 기념이랍시고 모아둔건 아니겠죠?” “뭐?” 이안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이 여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렇잖아요. 뮈엘라를 시끄럽게 한 괴도가 두 명인 거, 치안관도 알아요?” “괴도가 두 명인가?” 이안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케이트는 머리를 갸웃하며 물었다. “당신들 말고 또 있어요?” “우리?” 이안과 제이드의 눈이 커졌다. 두 사람 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고 제이드는 케이트에게 다가왔다. “잠깐, 아가씨. 설마 우리가 괴도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아니에요?” “절대 아닙니다!” 제이드가 펄쩍 뛰며 외쳤다. 어쩌다 그런 오해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당신들 우리 집에서 루비를 찾고 있었잖아요. 날 납치했고. 이런 여관에 처박혀 있고.” 아, 그런 오해를 할 만한 상황이 많았군. 제이드는 눈동자를 굴렸다. 이안은 허탈하다는 듯 의자에 기대있더니 하하하 하고 웃기 시작했다. “우, 웃어?” 깜짝 놀란 건 케이트 뿐이 아니었다. 제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이안이 저렇게 웃는 건 처음 봤다. 이안은 한참을 소리 내서 웃더니 다시 케이트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우린 괴도가 아니야, 순진한 아가씨.” “순진하다는 말은 아까 했,” “수사관 이안 로엔과 제이드 킬리언이다.”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수사관이라고? 수사관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국왕폐하의 직속으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잠입수사를 한다고 했다. 그들이 맡는 임무는 횡령, 탈세, 뇌물등과 같은 범죄다. “자, 잠깐.” 케이트는 고개를 흔들어 이안의 손을 떨쳐내며 물었다. “그럼 왜 우리 집에 있었던 거죠?” 이안이 다시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케이트의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냐, 거짓말.” “진실일수도 있지.” “그럴 리 없어.” “그건 알아봐야 하는 거다.” 케이트는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거짓말이다. 할아버지가 그런 짓을 저질렀을 리 없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턱을 움켜쥐려는 이안의 손을 물어 뜯으려했다. 격렬하게 반항하는 그녀의 태도에 이안마저 물러났다. “그러니 너는 잠시 여기 있어야 해.” “싫어요. 절대 싫어.” 뒤로 묶인 손목에 줄이 파고들었지만 케이트는 개의치 않고 몸부림쳤다. 결국 손목이 파랗게 변해버린 것을 눈치 챈 이안이 그녀의 손목을 묶은 줄을 끊어냈다. “이거 놔! 이 나쁜 자식아!” “나쁜 건 내가 아니라 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케이트의 손이 그의 뺨을 후려쳤다. 찰싹하고 가벼운 소리와 함께 여관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제이드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고 케이트는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얼어붙었다.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변해있었다. “하, 할아버지를 모욕하지 마!” 겁에 질린 주제에 말도 잘한다.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이면 그때 엿듣는 바람에. 케이트는 괜찮은 여자다. 작고 부드러운 몸에 사람을 쉽게 믿는 것하며. 상황이 이렇지 않았다면 한번쯤은 안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집안이 집안이니만큼 불가능 했겠지만. 그는 부드러운 천으로 상처 난 케이트의 손목을 감쌌다. 그 위에 다시 줄을 감은 그는 반대쪽 줄을 자신의 손목에 묶었다. “얌전히 있어. 일이 끝나면 돌려보내 줄 테니.” “악당.” 상관없다. 이안은 케이트에게서 손을 떼고 다시 지도와 조사한 수첩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안의 손에 묶였기 때문에 케이트는 앉을 곳이 없었다. 그녀는 그가 앉은 의자 옆에 서서 중얼거렸다. “나쁜 놈.” 제이드가 슬쩍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의자를 갖다줘야하나? 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이안이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자신의 무릎위에 앉혔다. “이거 놔, 이 나쁜 자식아!” “말 조심 해.” 이안의 위압적인 말에도 케이트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두 사람의 손이 묶여있어서 자세가 불편했다. 젠장. 이안은 한숨을 내쉬고 그녀의 목뒤로 자신의 팔을 둘렀다. “성추행범.” 이안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가 욕을 못해서 안하는 게 아니다. 어린아이와 여자 앞에서는 말조심을 하는 것뿐이다. 그때 들키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시 한 번 후회하며 그는 고개를 숙여 케이트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진짜 성추행당하기 전에 말조심하시죠. 아가씨.” 이번 협박은 유효했는지 케이트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 작품 후기 ============================ 제가 지난주까지 오기로 했는지 이번주까지 오기로 했는지 기억이 안나네요. 어허, 거기 확인 안해도 돼요. 우리 서로 바쁜 벌꿀들이잖아요. 사소한거에 신경쓰지 맙시다. 사소한거라니까 생각났는데 얼마전에 음, 이것도 얼마전이 언제인지 기억이 안나네요. 왕자비프로젝트(구 왕자님의 약혼녀)가 종이책으로 나왔습니다. 아직 안읽은 분들, 읽은분들 전부 대상으로 블로그에서 이벤트 하고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은 blog.naver.com/kiarne 로 와주세요. 같은 이벤트를 피어나 카페에서도 합니당. 카페 가입회원분들은 이쪽 참여도 가능합니다 http://cafe.naver.com/bloomingnest/8557 전연령이고 개인블로그에서 하는 거기때문에 성인만이라거나 카페가입자들만 이라는 조건이 없다는게 메리트죠. 이 모든것을 39,900원에. 가 아니라. 다음편은 저 이벤트 끝나기 전에 올리겠습니다. 헿 00239 [외전] 뮈엘라의 괴도 =========================================================================                            “나 자러간다.” 제이드가 그렇게 말하며 일어날 때까지 이안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자료를 보고 있었다. 식사조차도 이 방 안에서 해결했다. 이안은 고개를 들고 케이트를 확인했다. “허.” 케이트는 이안의 가슴에 기대고 잘도 자고 있었다. 식사를 할 때도 투덜투덜거리더니 배가 부르자 잠이 온 모양이었다. 부잣집 아가씨인 주제에 이런 여관의 음식을 별 무리 없이 먹는 것도 그렇고, 남자의 무릎 위에서 졸리다고 잠드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호건가의 아가씨는 성격이 참 좋은 모양이라고 이안은 생각했다. “일어나.” 이안은 케이트를 깨우기 위해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케이트는 싫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더니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으응, 나 오 분만.” 이안은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잃었다. 자신이 납치당했다는 경계심이 없는 걸까? 심지어 그녀는 이안에게 매달리기까지 했다. 그는 미간을 찡그리고 케이트를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손에 묶은 줄을 풀었다. 손이 자유로워지자 케이트는 잠결에 자기 얼굴을 문질렀다. 그는 그녀를 한참 내려다 본 다음에 그녀가 가볍게 코까지 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군. 그런 생각은 케이트를 벽 쪽에 밀어 넣고 그 옆에 누운 다음에도 이어졌다. 그녀가 한쪽 팔을 척하고 올려놓았던 것이다. “젠장.” 어두운 방 안에 이안이 나직하게 욕지거리를 내뱉는 소리와 규칙적인 케이트의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응?” 다음날 아침 눈을 뜬 케이트는 눈앞에 보이는 남자의 얼굴를 멍하니 쳐다봤다. 아, 나 아직도 자나 봐. 꿈꾸는 게 아니고서야 그녀의 옆에 남자가 누워있을 리 없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이불에 몸을 맡겼다. 약간 까끌까끌하고 버석버석한 감촉이 그리 기분 좋지 않은 이불이었다. 매트리스는 너무 딱딱했고 침대는 남자 때문에 좁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케이트는 약간 졸았다. 그녀의 이런 느긋한 성격은 할아버지인 비스마르크와 가정교사인 에녹덕분에 형성된 부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옆에서 그녀대신 동동거려주는 누군가가 있으면 정작 본인은 조금 느긋하고 낙천적인 성격이 되기 마련이다. 게다가 케이트는 살면서 위험하다 싶을 정도의 고비를 겪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약간 속상하긴 하지만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겪은 적도 없다. 부모님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셔서 기억조차 나지 않았고, 경제적으로 과하다 싶을 정도로 부유하게 자랐다. 비스마르크 때문에라도 케이트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더 그랬다. 그래서 케이트는 이안과 제이드에게 납치된 다음에도 상당히 느긋한 성격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니, 심지어 그녀는 이안과 제이드를 걱정하기까지 했다. 할아버지께서 두 사람을 가만두지 않을 텐데. 그녀는 어떻게 하면 할아버지의 분노로부터 두 사람을 약간이나마 도와줄 수 있을지 허황된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잠깐!” 느긋하게 졸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가물가물한 눈을 뜨던 케이트는 그대로 벌떡 일어났다. 정신이 들고 나서 보니 그녀의 옆에 누워있는 마자는 이안이었다. 수사관 이안이라고 했다. “미쳤나봐.” 케이트는 어이가 없어서 신음을 흘렸다. 이 남자 지금 나랑 같이 자고 있어? 그녀는 재빨리 자기 몸을 확인했다. 옷은 그대로 였다. 무엇보다, 손목에 줄이 없었다. 그렇다면 도망칠 좋은 찬스라는 말이다. 할아버지께 말씀드려야 해. 그녀는 슬금슬금 엉덩이를 움직였다. 바깥쪽에 이안이 자고 있어서 그의 몸을 넘어가는 수 밖에 없었다. 이안은 그녀가 그의 몸을 넘을 때까지 자고 있었다. 좋아. 이대로 문을 열면!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꺅!” “거기까지.” 이안은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며 케이트를 침대 위에 집어던졌다. 싸구려 매트가 그녀가 덜어지자 삐걱삐걱하고 요란한 소리를 냈다. “보, 보내줘요!” 그녀는 침대 위에서 다리를 끌어당기며 외쳤다. 스커트가 뒤집어진 탓에 무릎 위가 고스란히 보여버렸다. 부끄러움에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안된다고 했을 텐데.” “할아버지께서 걱정하실 거라고요!” 그건 사실이다. 이안은 잠시 케이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지금쯤 호건가는 뒤집어졌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탓에 괴도가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역시 들키지 말았어야 했다고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몇 번째 하는 후회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늦은 일이다. 그는 펜과 종이를 내밀었다. “써.” “뭐를?” 케이트는 펜과 종이를 받아들지 않은 채 되물었다. 이안은 다시 말했다. “호건에게 편지를 쓰라고.” “할아버지한테 편지를 쓰라고요?” “귀가 잘 안 들리나?” 우씨. 케이트는 이안을 노려봤고 이안은 무심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완전 실망이다. 그녀는 펜과 종이를 낚아채며 앙칼지게 말했다. “당신한테 납치당했다고 쓰면 되나요?” “그럴 리가.” 이안은 여유 있는 말투로 편지 내용을 불러주기 시작했다. “잠깐 시내 구경을 나왔다가 남자한테 반해서 쫓아왔다고 써.” “그 남자가 당신이고요?”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케이트는 펜을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미쳤어요?” 요란한 소리에 제이드는 피식 웃었다. 이른 아침부터 기운 넘치기도 하지. 그는 옆방에서 나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가 그게 케이트의 투덜거리는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침대 위에 벌렁 누웠다. 괴도의 소행 늘어남에 따라 제이드와 이안은 한 가지 의혹을 제기했다. 아무리 신출귀몰한 괴도라고는 하나 이정도로 까지 잡히지 않고 루비만 족족 훔쳐 가는 건 기적에 가깝다. 그렇다면 그 뒤에 힘 있는 자가 도사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힘 있는 자가 괴도의 뒤를 봐줄 이유가 없다. 거기서 이안은 또 한 가지 의혹을 제기했다. “괴도의 소행으로 이익을 얻는 게 아닐까?” 두 사람은 괴도의 소행으로 뮈엘라 내에 루비의 가격이 치솟기 시작한 것을 깨달았다. 루비뿐 아니다. 다른 보석의 가격도 따라서 같이 급등하고 있었다. 그들은 괴도가 나타나기 전부터 루비를 모으기 시작한 사람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선물을 받거나, 구매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보석을 모으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조사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많은 보석을 모은 것은 당연하게도 비스마르크 호건이었다. 이쯤 되면 더 이상 괴도는 수사관들과 무관하지 않다. 비스마르크 호건은 범죄를 이용해서 경제적 이익을 취한 게 된다. 두 사람은 호건가 저택에 잠입을 시도했고 이안만이 하인으로 들어갔다. 로엔 백작가의 귀한 둘째아들이 호건가의 하인이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제이드는 킬킬대며 생각하다가 꿈지럭꿈지럭 일어났다. 슬슬 배가 고파진다. “할아버지한테 거짓말 하란거야?” “그래.” 당당하다. 이안이 그게 무슨 문제냐는 표정을 지었을 때 제이드가 문을 두드렸다. 그는 들어오라는 말을 듣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두 사람, 배고프지 않아?” 그러고보니 배고프다. 일어나자마자 소리 지르고 이안과 기 싸움을 한 탓에 케이트는 허기가 졌다. 배고파. 하지만 이안이 줄을 들어 올리자 그녀는 깜짝 놀라서 물러났다. “잠깐, 싫어.” “잠깐, 이안. 나갈 건데 아가씨를 줄로 묶어두면 이상하지 않을까?” “그런가?” 그렇다. 누가 봐도 이상하다고. 하지만 이안은 잠시 생각하더니 알았다는 듯 줄을 내려놓았다. 덕분에 줄에서 묶이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케이트는 천으로 감싼 팔을 문질렀다. “도망치면 줄로 묶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거다.” “사람을 줄로 묶다니, 인권침해라고.” “범죄자의 인권도 지켜줘야하나?” 이안의 말에 케이트가 울컥해서 외쳣다. “나 아직 범죄자 아니라고!” 제이드는 두 사람이 툭닥거리는 것을 재미있다는 듯 쳐다봤다. 호건가의 아가씨는 얌전하고 소극적이라는 평이었는데 이안에게 겁먹지 않고 덤비고 있다. 그녀가 얌전하고 소극적으로 보이는 건 그녀가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이 대신 나서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대신해서 나서줄 사람이 없으니 본 성격을 드러내기 쉬웠다. 어쨌거나 세 사람은 여관 일층으로 내려왔다. 아침식사를 하는 사람들도 여관 식당은 북적이고 있었다. “자리 없는데. 기다릴까?” “나가지” 그 말과 함께 이안은 케이트의 어깨를 잡고 잡아당겼다. 그의 품에 쏙 안기게 된 케이트가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아가씨, 뭐 먹고 싶어요?” 붙임성 좋은 제이드의 질문에 케이트가 중얼거렸다. “집 밥. 무티가 해주는 오믈렛 먹고 싶어.” 비꼬는 그녀의 말을 제이드가 능숙하게 받아 넘겼다. “집 밥 좋죠~. 나도 집 밥 먹고 싶다아.” “그럼 가면 되잖아요.” “안되지, 안 돼. 아가씨만 남겨두고 가면 큰일 날 것 같거든요.”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 여자를 죽이지 않을 정도의 참을성은 있다.” “뭐라고?” 케이트가 발끈해서 말했다. “난 뭐 당신이 좋아서 참고 있는 줄 알아?” “넌 날 죽일 능력도 없잖아.” 사실이다. 케이트는 팔꿈치로 그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백 번 찌르면 죽겠지!” 하아. 제이드는 이마에 손을 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좀 싸워라. 그는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싸우다 정든다던데.” 케이트가 발칵 화를 냈다. “누가!” ============================ 작품 후기 ============================ 외전은 앞으로 한편 아니면 두편이면 끝날것 같아요. 지난번에 말씀드린 "왕자비 프로젝트"이벤트를 피어나 카페에서도 하고있습니다. 둘 다 각각 별도로 진행되니까 당첨확률이 두배! 아니, 이게 아니라. 조건이 있긴한데 두분 뽑아서 책을 보내드려요. 이미 책을 사서 봤다! 하시는 분들께는 마찬가지로 두분 뽑아서 소정의 상품을 드립니다. 전자는 이번주 일요일까지. 후자는 10일까지. 자세한 사항은 카페(http://cafe.naver.com/bloomingnest/8557)를 확인해주세요. 가입하신 분만 확인이 가능합니다. 00240 [외전] 뮈엘라의 괴도 =========================================================================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여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식당이었다. 이안은 여전히 케이트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에 식당 주인은 두 사람을 부부라고 생각했다. “부부라면 세트메뉴도 괜찮죠.” 누가 부부냐고 케이트가 투덜거리기 전에 이안이 먼저 말했다. “그럼 그걸로.” 우씨. 케이트가 투덜거렸다. “누가 부부야, 누가.” “범죄자와 수사관이라고 말 할 수는 없잖나.” “누가 범죄자,” “쉿. 아가씨, 목소리가 너무 크다고요.” 이미 주변 사람들이 기묘한 세 사람의 구성을 확인한 후였다. 남자 둘과 여자 하나. 여자는 작고 예쁘장한데다 누가 봐도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남자 하나는 크고 검었다. 언뜻 보기엔 부잣집 아가씨와 호위 같다. “그렇군.”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트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케이트를 알아보는 건 무리가 없지만 그녀가 두 사람과 있다는 사실이 비스마르크의 귀에 들어가면 곤란해진다. “식사, 포기할까?” 제이드의 질문에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녀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고 나직하게 말했다. “빨리 먹고 돌아가야겠군.” 흥. 케이트는 콧방귀를 뀌었다. 누구마음대로 빨리 먹고 돌아가? 그녀에게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누군가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다면, 할아버지에게 그녀가 이 사람들과 있다고 알려줄 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이안이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우리 두 사람 속도에 맞춰. 우리가 다 먹으면 네가 못 먹었어도 일어날 테니까.” “무뢰한.” 레이디의 식사 속도에 맞춰 주는 건 예의다. 딱히 레이디에 국한되는 예의는 아니다. 상대와 식사 속도를 맞춰주는 게 예의인 것 뿐이다. 이안은 다시 속삭였다. “말조심 해. 혼나기 싫으면.” 흥. 어떻게 혼낼 건데? 케이트는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중얼거렸다. “협잡꾼.”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는 케이트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을 내렸다. “힉!” 케이트의 몸이 그의 품 안에서 펄쩍 뛰어 올랐다. 제이드가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들었지만 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미쳤나봐. 그녀는 너무 놀라서 숨을 몰아쉬었다. 허벅지가 얼얼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한번 꽉 잡고 놓은 탓이다. “서, 성희롱,” “진짜 성희롱해준다고 했을 텐데.” 우씨. 이 남자는 그러고도 남을 남자다. 케이트는 어깨를 움츠렸다.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그러고보니 아가씨는 왜 아직 약혼하지 않았나요?” 빵을 뜯으며 제이드가 물었다. 빨리 먹으라니까. 이안이 눈짓했지만 케이트는 무시하고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허락을 안 하셨어요.” “아, 결혼허락을요?” 남자가 있었다는 말인가? 이안은 자신이 빨리 먹으라고 했다는 것도 잊고 케이트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입 안의 빵을 재빨리 삼키고 말했다. “아뇨. 남자와 만나는 걸요.” 묘한 시선이 두 남자 사이에 교환됐다. 제이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할아버지는 아가씨를 결혼시킬 생각이 없나보죠?” “그건 아닐걸요.” 그녀는 이번에는 구운 돼지고기를 씹어 삼키고 말했다. “제가 결혼하는 걸 보는게 소원이라고 하시니까요.” “아하. 예컨대, 아가씨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눈이 높은거군요.”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비스마르크 호건의 눈에 차는 남자가 있기는 할까. “그럼 청혼은 많이 받았겠네요?” “음.” 케이트는 냅킨에 손가락을 닦으며 생각했다.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한 청혼은 단 하나도 없었다. 전부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래서 청혼을 얼마나 받았는지 모른다. “몇 번 있었을 건데, 다들 호건가라는 이름을 보고 한 거니까요.” 뜻밖에도 냉정한 말에 제이드와 이안은 약간 놀랐다. 그들은 그녀가 머릿속도 샤방샤방 레이스와 리본덩어리인 공주님일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에 대해 그렇게까지 냉정한 판단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건 너무 냉정한 파단 아닐까요?” 케이트는 다시 구운 돼지고기를 우물우물 먹고 말했다. “전혀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녀는 냅킨을 들어 입을 닦고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제이드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남자들은 내가 좋아서 청혼할 정도로 나를 잘 알지 못하니까요.” “그, 그렇습니까?” “그렇잖아요. 당신들도 어제까지만 해도 내 성격이 어떤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도 몰랐잖아요.” 사실이다. 이안은 먹는 것도 잊고 케이트를 쳐다봤다. 그 역시 케이트가 좀 이상한 아가씨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고 너무 쉽게 다가갔다. 어딘가 모자란 여자라고 생각한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케이트로서는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거다. 이미 그녀 주변의 사람들은 비스마르크와 에녹으로 두 차례 걸러진 사람들뿐이다. 거기서 케이트가 경계심을 보인다면 그녀가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저런. 제이드는 문득 눈앞의 아가씨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부유하다고는 하나 그녀의 인생은 돈과 명예로 좌지우지될 것이 눈에 보였다. 케이트에게 구혼하는 남자들은 케이트가 아니라 그녀가 상속받을 유산과 호건가의 힘을 보고 구혼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고, 비스마르크 역시 최대한 케이트가 지위 높고 부유하게 살 수 있는 남자와 결혼시키려 할 것이다.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인생이 최선인 사람도 있다. 하지만 케이트는 아니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갑자기 정적을 깨고 이안이 말했다. 그는 빵을 우물우물 먹으며 말을 이었다. “사람은 어차피 상대를 완벽하게 알기 어려워. 자신이 알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것뿐이지. 서로를 완벽하게 안다면 과연 호감이 생길까?” 그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케이트를 내려다 봤다. 경멸에 가까운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누군가를 완벽하게 이해하다면 도망치기 바쁠걸?” “완벽하게 이해하는 걸 바라지도 않아. 적어도 좀 더 알아줬으면 하고 생각하는 거지.” “알면 뭐가 달라져?” 이안의 말은 냉정했다. “너를 알아준 사람이 너를 좋아해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네 약점을 꿰고 널 이용할 수도 있다.” “나한테 호감이 없다면 날 알려 하지도 않을 거잖아.” “그 호감이 너에 대한 호감이라고 어떻게 보장하나.” “자. 자.” 분위기가 과열되자 제이드가 끼어들었다. 그는 케이트와 이안 사이에 팔을 뻗어 케이트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빨리 먹으라고 한건 너잖아, 이안. 일단 먹고 대화해.” 그의 말에 다행히 케이트와 이안의 싸움은 종식되었다. 하지만 케이트의 기분까지 풀린 건 아니다. 그녀는 씩씩대며 전투적으로 빵을 뜯었다. “아, 왜 건드리고 그래.” “뭘?” 케이트가 식사를 하는 사이 제이드가 이안을 타박했다. 적당히 잘 구슬러서 데리고 있다가 놓아주면 될 걸 왜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지 모르겠다. “왜 저 아가씨 말에 하나하나 반응하느냔 말야.” 하지만 이안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하나하나 반응한다고?” “그래.” 그의 시선이 케이트를 향했다. 그 모습을 본 제이드는 이안도 그가 하나하나 반응한다는 걸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그는 맥주를 홀짝이며 혀를 찼다. 이안이 여성은 둘째 치고 사람에게 저렇게 시비를 거는 건 처음 본다. 그것만으로 케이트는 이안에게 특별하다는 걸 두 사람 다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갈까.” 이안은 진짜로 자신의 식사가 다 끝나자 일어났다. 케이트는 다 먹지 못했지만 말없이 일어났다. 그녀는 아직도 이안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녀를 이해한다면 도망치려하다니, 기분이 나빴다. 모욕 받은 기분에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본다는 것을 바로 눈치 채지 못했다. “어?” 남자를 깨달은 것은 이안이 아니라 제이드 옆에 붙어 여관으로 돌아갈 때였다. “호건양?” 제이드는 케이트의 발걸음이 느려지자 그녀를 뒤돌아봤다. 그녀가 도망치려 한다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케이트는 제이드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낯익은 남자다. 그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케이트는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그가 누군지 깨달았다. 예전에 그녀에게 키스하려다 비스마르크에게 걸려 호되게 혼난 남자였다. 유학 갔다고 했는데? 의문이 떠올랐지만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다. 그녀가 도와달라는 신호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이안이 다가와 그녀를 끌어당겼다. “아!” 다시 케이트는 이안의 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빠져나가려 바둥쳐서 소용없었다. “뭐하는 거야?” “도망칠 것 같아서.” 부랴부랴 그녀가 다시 남자가 있던 쪽을 쳐다봤지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아...정신을 놓고 있었네요 외전은 앞으로 한편 남았습니다. 이번주 안에 올게요. 00241 [외전] 뮈엘라의 괴도 =========================================================================                            밤이 되자 케이트는 눈을 슬그머니 떴다. 그녀의 옆에 잠든 이안의 얼굴이 보였다. 이마 위로 아무렇게나 내려온 그의 검은 머리카락과 단정한 눈썹이 또렷하게 보였다. 얄밉게 올라가던 눈썹이 이 눈썹이렸다. 그녀는 이안의 눈썹을 손가락으로 누르려다 멈칫했다. 그러고보니 손이 묶여있지 않다. 그녀가 잠들자 이안이 풀어준 모양이었다. 그녀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달이 떠 있었다. 창 밖으로 휘엉청 뜬 달 때문에 방 안이 밝았다. 그래서 얼굴이 잘 보였던 거구나. 케이트는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오늘이 보름달이 뜬 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할아버지!” 보름달이 뜬 밤에 괴도가 루비를 훔치겠다고 했다. 그게 오늘이었다. 그녀는 살그머니 이안을 피해 침대 밑으로 내려갔다. 그녀의 체구가 작은 덕에 매트리스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걱정이다. 방을 나가려던 그녀는 멈칫하고 멈췄다. 그런데, 이 남자는 왜 여기 있지? 괴도를 잡으려고 한 거 아니었나? 그렇다면 호건 저택에 가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안은 여전히 여관에, 그녀의 옆에 누워 자고 있었다. 생각이 바뀐걸까. 그녀는 식사를 하고 돌아와서 그녀만 남겨둔 채 나간 이안이 제이드와 오래 이야기하고 돌아왔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 의견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모르겠다.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다. 괴도가 보석을 훔치러 오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가 위험할 수도 있다. 그녀는 살그머니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자정이 넘은 시각이다. 이 시간에 마차가 다닐 리도 없고 그녀 혼자 걸어서 집까지 돌아갈 수 있을 리도 없다. 위험한 것도 있지만 너무 오래 걸린다. 케이트는 삐걱이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밟고 여관 일층으로 내려왔다. 여관 일층은 그리 깨끗하지 않았다. 원래 여행자들이 와서 간단히 요기를 해결하는 곳이다. 음식 맛이라면 식당이 더 훌륭할 것이다. 그녀는 정문이 아니라 후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여관 마구간이라면 말이 있을 테니 그걸 훔쳐 타고 집으로 가겠다는 계산이었다. “훔치는 게 아니라 빌리는 거야.” 케이트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진짜로 빌리는 거다. 집에 도착한다음 아침이 되기 전에 사람을 시켜서 말과 돈을 보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계산은 마구간에 도착하기도 전에 어긋났다. 그녀가 달빛 아래 몸을 드러내자마자 남자가 뛰어 들었다. 앗하고 케이트가 몸을 피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그에게 끌어 안겼을 것이다. “호건 양!” 남자는 케이트의 거부에도 굴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는 복면을 벗고 얼굴을 드러내더니 케이트의 손을 잡았다. “당신도 날 기다렸던 거군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케이트는 놀라서 손을 뿌리치려다 멈칫했다. 익숙한 얼굴이다. 낮에 만났었다. 그리고 몇 달 전 그녀에게 키스하려다 혼난 남자다. “어, 그러니까.” 이름이 뭐더라? 안타깝게도 케이트는 남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빌? 윌리엄? 뭐였지? 그녀의 눈 앞에서 남자는 잡은 케이트의 손등에 입을 맞춘 뒤 느끼하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루비를 받으러 왔습니다.” “네?” 두 번째로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소중한 루비? 그녀는 루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케이트는 남자에게 잡힌 손을 빼려고 애쓰며 말했다. “지금은 루비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요.” 아니, 그보다. 말을 하고 나서야 케이트는 남자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그녀는 손을 뿌리치려 애쓰며 물었다. “당신이 괴도였어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사랑의 괴도. 호건양. 저와 함께 가시죠.” 가긴 어딜 가?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전에도 그녀에게 달콤한 입술을 맞보게 해달라는 둥 꽃잎 같은 입술이라는 둥 이해 안 될 소리를 늘어놓으며 키스하려 했다. “잠깐, 이걸 좀 놔주면,” “아니, 두 번 다시 당신을 놓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 가시죠.” 남자에게 꽉 잡힌 손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케이트는 이로써 할아버지의 누명을 벗겨졌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러려면 이 남자에게서 벗어나야 겠지. 아무리 손을 뿌리쳐도 뿌리쳐지지 않는다. 케이트는 눈을 딱 감고 말했다. “미안해요.” “네? 뭐가,” 퍽하고 케이트의 발이 남자의 무릎을 걷어찼다. 꽤 센 힘이었다. 남자는 커흑하고 신음을 하더니 주저앉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다시 여관 안쪽으로 뛰어 들었다가 뭔가에 부딪쳤다. “아,” 이안이었다. 어둠속에서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선명했다. 그는 자신의 가슴팍에 부딪쳐 튕겨나가려는 케이트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와 동시에 들고 온 검을 가볍게 흔들어 검집을 벗겨냈다. “당신, 어떻게, 아니. 그보다,” “저 놈이 괴도라는 말이겠지.” “그래요!” 이안은 자연스럽게 케이트를 자신의 등 뒤로 보냈다. 가혹하게 걷어차인 무릎을 문지르던 남자도 이안을 발견하고 검을 뽑았다. 달빛 아래에서 두 남자의 검이 반짝였다. 어떻게 하지! 케이트는 치맛자락을 잡고 다시 뒤로 돌았다. 저러다가 이안이 다치면! 그녀의 머릿속에 든 걱정은 더 이상 할아버지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케이트는 이안을 돕기 위해 안쪽으로 종종종 달려가다가 또 다른 남자와 부딪칠뻔 하고 멈춰섰다. “제, 제이드! 도와줘요! 이안이!” “아, 알아요. 압니다아.” 제이드는 졸린 눈을 비비며 느긋하게 이안과 남자가 대치중인 뒷 마당 쪽으로 걸어갔다. 몸이 단 케이트만 그의 곁에서 재촉하기 시작했다. “빨리가요! 저러다 이안이 다치면,” “이안이요?” 제이드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픽 웃었다. 이안이 다칠 리가 없다. 그의 예상대로 두 사람이 뒷마당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이안은 남자의 가슴을 밟고 서 있었다. “어, 어떻게?”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이안에게 달려갔다. 그 뒤를 천천히 걸어온 제이드가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혀를 쯧쯧 차면서 말했다. “그냥 거기서 살 것이지.” 그도 알고 있는 남자였다. 몇 달 전 호건가의 아가씨에게 반해 쫓아다니다 결국 키스까지 하려 했던 남자. 분노한 비스마르크에 의해 국외로 쫓겨났었다. 이안은 검을 집어넣은 뒤 케이트의 턱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처음으로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겁에 질려있었다. “괜찮아?” 그건 이쪽이 할 말이다. 걱정하는 듯한 이안의 말에 케이트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녀는 이안의 손을 잡고 물었다. “당신은, 괜찮아?” “나?” 이안은 놀랍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괜찮냐고? 걱정할 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두 사람의 뒤에서 남자의 손을 묶은 제이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가씨, 그 녀석 검술실력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혀요.” “손 꼽힌다고요?” “가끔 기사단에 시범 보이러 갈 정도예요. 최소한 이 나라에서 그 녀석에게 검술로 이길 범죄자는 없답니다.” “어, 지, 진짜예요?” 케이트의 질문에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이드가 느긋했던 거구나. 케이트는 그제야 제이드의 태도가 이해가 됐다. 그러다가 그녀는 문득 두 사람이 어떻게 알고 나왔는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내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그녀의 질문에 이안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저 남자를 본 게 너뿐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모습에 제이드가 한숨을 내쉬며 끼어들었다. “좀 친절하게 대하라고. 호건양은 아무 죄가 없다는 것도 알았잖아.” “저, 제가 아무 죄가 없다는 걸 알았다고요?” 그 순간 이안이 눈동자를 굴리는 게 케이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이안의 손을 잡으며 독촉했다. “방금 그거! 뭐야?” “뭐가?” 이안은 얄밉게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를 가는 케이트를 떼어내며 제이드가 입을 열었다. “아, 그러니까 말이죠. 아가씨가 이 남자를 봤을 때 우리도 봤거든요. 그리고 이상하다 하고 생각했던 겁니다.” 남자의 이름은 빌 로운. 로운 남작가의 막내아들이다. 몇 달 전 반해서 쫓아다니던 케이트에게 키스하려다 비스마르크에게 들켜서 국외로 유학이라는 명목하게 쫓겨났다. 그런 남자가 오늘 케이트 주변에서 발견되었다. 이안과 제이드는 재빨리 빌이 국내에 들어온 것은 아는 자가 있는지 확인했고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심지어 로운 남작 가에서도 빌이 들어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두 사람은 ‘가장 소중한 루비’라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가장 아름답다거나 가장 비싼 루비라면 모르지만 가장 소중한 루비라고? 두 사람이 괴도와 호건가의 유착을 의심한 것은 바로 이 예고장 때문이었다. 보석의 가격이 치솟도록 괴도를 고용해서 보석을 훔친다. 그렇기 때문에 괴도는 이미 호건가를 잘 알고 있는 자일 것이다. 라는 예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비스마르크가 탈세를 한다는 의심은 괴도와 유착되었을지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괴도와 유착된 것이 아니라면 그 의심은 힘을 잃게 된다. 케이트는 허리에 손을 얹고 이언을 쳐다봤다. 의기양양한 표정에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나한테 할 말 없어?” “할말?” “날 의심했잖아! 범죄자라고 몰아세웠고!” 그랬다. 하지만 이안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조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지.” 으극. 이안의 얄미운 대답에 케이트는 이를 갈았다. 이 남자는 절대지지 않는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럼 조사해! 이번엔 정당하게! 사람 납치 같은 거 하지 말고!” 이안의 입술이 둥글게 휘었다. 그는 케이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건, 나를 네 집에 초대하는 건가?” 초대하는 게 아니다. 와서 조사하라는 것 뿐이다. 하지만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할아버지께 정정당당하게 가서 말씀드리란 말야.” “할아버지와 말이지.” 이안은 케이트의 손을 잡고 빌이 입술이 댄 곳을 세게 문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인상을 쓰는 케이트와 달리 이안은 느긋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케이트의 손등에 자신의 입술을 댔다. “내 무례를 사과하지.” 어?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손등에 닿은 이안의 입술이 달싹여서 간지러웠다. 어깨를 움츠리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이안은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인사 하지. 나는 이안 로엔. 로엔 백작가의 차남이다.” 어어? 케이트는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이안의 표정에 저도 모르게 말했다. “케이트. 케이트 호건이야.” ============================ 작품 후기 ============================ 외전 끝났습니다. 괴도물도 한번 써보고 싶어서 도전했는데 덕분에 중간에 구멍이 뻥뻥...났지만 외전이니까 이런 분위기도 있구나~ 혹은 케이트가 호건가에서 자랐으면 이랬겠구나~ 정도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다음에 쓸건 원래대로라면 후작과 수리공인데 이게 음... 이북 계약이 되면서 카카오페이지 기다무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이야기 나온지는 좀 됐는데 정확하게 확정된게 아니라서 (원래 식장 들어가기 전까지 배우자가 누가될지 모르는거니까요) 말씀을 안드리고 있었는데 어제 확정이 돼서 바로 말씀을 드리게 됐네요. 다음주 (5월 25일) 부터 카카오페이지 기다무에 들어갑니다. 제목변경없고, 자세한건 후작과 수리공 쪽에 공지로 올릴게요. 조아라쪽은 뮈엘라를 계속 쓰거나 다른걸 쓸 예정입니다. 문제는 뭐를 써도 기다무쪽에 업뎃되는게 있다보니 지금까지처럼 1일 1연재는 안될것 같고 아마 일주일에 2, 3회 연재쯤 될것 같네요. 이것도 다음주 안에 다시 한번 공지로 올리겠습니다. 00242 [공지] 7부 마녀 =========================================================================                            [호건가 상속녀 등장.] 불의의 사고로 하나뿐인 상속자를 잃고 안주인은 정신을 놓아버린 불행한 사건이 연이어 벌어진 호건가에 샛별같은 행복이 찾아왔다. 호건가의 사라진 막내 엘리자베스의 딸, 케이트 스미스가 유일한 호건가의 상속자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빨간머리에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이 아가씨는 사랑스러운 성격으로 사교계의 수 많은 남자들을 사로잡았을 뿐 아니라 한동안 두문불출한 호건가의 수장 비스마르크를 병상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러니 사교계의 미혼남성들은 귀를 씻고 기다리시라! 곧 호건가에서 하나뿐인 상속녀의 남편감을 찾아 파티를 열것이니. -에바니엘 우물가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키아르네 입니다. 후작과 수리공이 카카오 페이지에 간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잠적했다가 돌아왔습니다. 흑흑, 때리지 마세요! 후작과 수리공은 무사히 2부가 시작됐습니다. 오늘 (월요일) 기준으로 2부 3화가 올라왔습니다. 월, 수, 금 이렇게 일주일에 세번 올라간다고 합니다. 아니, 이게 아니라. 뮈엘라의 수사관은 이제 7부 딱 한부 남았는데 후작과 수리공 비축을 쓰느라 제가 이쪽 비축은 못쌓아서요. 오늘이 1일이니 8일부터 7부 시작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처럼 주 5회 평일 한편 연재를 하면 참 좋겠는데 연재가 두개가 되니까 버거워서, 매일은 못하고. 일주일에 두, 세번 올리겠습니다. 00243 1. 호건 가의 아가씨 =========================================================================                            에스메랄다 호건이 정신을 놓았다. 제프리의 죽음만으로도 격변이 일어나기에 충분했던 호건 가는 결국 완전히 뒤집어졌다. 그때까지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던 아니, 나오지 못한 비스마르크는 집사의 도움으로 문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몇 년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비스마르크의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마비로 쓰러진 그는 팔다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고 말도 어눌했다. 몇 년의 시간 동안 팔은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 있었지만 자유롭지 못한 몸과 의사소통은 여전했다. 케이트가 호건 가로 들어간 것은 비스마르크가 아프지 않은 상태였더라도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호건 가는 그녀가 매우 많이 필요했다. 그녀는 부랴부랴 에녹의 집에서 호건 가로 거처를 옮겼다. 이번에는 혼자였다. “음식은 준비됐어?” 호건 가의 주방은 세 가지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했다. 입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비스마르크를 위해 부드러운 음식과 케이트가 먹을 평범한 음식. 그리고 음식을 손으로 집어 먹는 에스메랄다 때문에 손으로 집어 먹어도 될 만한 음식까지. 음식이란 양이 많을 때보다 종류가 많을 때가 더 바쁜 법이다. 정신없이 수프를 젓던 요리사가 소리쳤다. “거의 끝나가! 앞에 있는 거부터 내가!” “아가씨 접시는 어느 거야?” 세 종류의 음식을 내가야 하다 보니 정신이 없었다. 대니얼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접시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제일 먼저 나가야 할 음식은 수프라 두 접시 다 호박수프였다. “아가씨는 무슨.” 루신다는 간이 좀 더 진한 접시를 들어 올리며 빈정거렸다. “그 여자도 하녀였다던데, 무슨 아가씨야?” “루!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빵이나 잘라!” “쓸데없는 말 아니에요!” 요리사는 루신다가 손을 닦고 빵을 집어 드는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솥 앞에 섰다. 대니얼이 쓰게 웃으며 접시를 들고 올라가 버리자 루신다는 입술을 삐죽였다. 새로 호건 가의 후계자가 된 케이트라는 여자는 루신다보다 호건 가에 대해 몰랐다. 에스메랄다 마님은 일주일에 한 번씩 옷을 맞추셨는데! 루신다는 케이트가 호건 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에스메랄다와 비교하면 옷도 소박했고 보석도 그리 많이 걸지 않았다. 기껏 해봐야 목걸이 정도. 늘 점심때쯤에나 눈을 뜨는 에스메랄다 마님과 달리 케이트라는 여자는 이른 아침에 눈을 떠서 창문을 열고 방 안 공기를 환기하곤 했다. 루신다는 그게 싫었다. 호건 가쯤 되는 부잣집 후계자라면 사치를 부리고 게으름을 피우며 최대한 우아하게 살아야 하는 거다. 그녀는 빵을 자르며 들으란 듯 투덜거렸다. “로엔 백작 가에 내가 아는 애가 있어서 들었다고요. 그 여자, 거기서 하녀로 일했다고 했어요. 하녀라니!” “루.” 누군가 그녀에게 주의를 주기 시키기 위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루신다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여자를 어떻게 아가씨라고 부르냐고요!” 거기까지 말한 루신다는 주방 안이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상하다? 설거지하는 물소리도, 요리사의 재촉하는 고함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목을 돌려 주방 안을 확인 했다. 다들 행동을 멈추고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게 보였다. 어라? 뭔가 이상하다. 루신다는 주방 출입구를 보고 사람들이 눈치를 보는 게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집사 칼이 거기 서 있었다. 맙소사. 깜짝 놀란 루신다가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떨어졌다. 아주 천천히 사람들의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그녀의 손을 떠난 칼은 쨍강하고 주방 바닥에 튕겼다가 떨어졌다. “올라가서 짐 싸게.” 칼은 마치 식사는 다 됐냐고 묻는 것처럼 말했다. 그는 와들와들 떨고 있는 루신다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치 급료까지는 계산해 주지.” “지, 집사님. 잘못,” “필요 없네.” 그는 매달리려는 루신다를 냉정하게 쳐내며 말했다. “과거에 귀족 영애였더래도 이 집에서 하녀면 하녈세. 반대로 하녀였더래도 아가씨라면 아가씨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질세. 이 여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나가도 좋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칼은 다시 한 번 주방 안을 둘러본 뒤 루신다를 힐끔 쳐다보며 몸을 돌렸다. 얼어붙은 루신다를 제외하고 주방은 다시 원래대로 소란스럽고 바빠졌다. “수프입니다.” 케이트는 비스마르크와 그녀의 앞에 차례로 놓이는 수프를 보고 다시 비스마르크를 쳐다봤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늙었고 왜소했다. 그건 몇 년을 방안에서 갇혀 지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식사는 식당이 아니라 비스마르크의 방에서 이뤄졌다. 하루에 한 끼는 할아버지와 함께 식사하고 싶다는 케이트의 요청에 따라 비스마르크는 침대에 몸을 기댄 채, 케이트는 그 옆에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식사를 했다. “고마워요.” 케이트는 접시를 내려놓고 물러나는 대니얼에게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건넸다. 식당이 아닌 방에서 식사하기 위해 여기까지 하루에 한 번 테이블과 의자를 옮긴다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지, 그리고 일 층인 식당이 아니라 이 층인 비스마르크의 방까지 식사를 날라야 한다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음식을 앞에 두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케이트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싶어 비스마르크의 방안을 살폈다. 에스메랄다가 제프리의 죽음으로 정신을 놓자 방에서 나올 수 있었던 비스마르크는 제일 먼저 자신이 머물던 방을 바꿨다. 원래 그가 머물던 가장 큰 방에서 손님방으로 옮기면서 자신이 썼던 모든 가구를 불태우라고 명했다. 아무 관심도, 힘도 없이 커다란 방에서 혼자 누워있어야 했던 세월에 대한 반발 같은 거였다. 케이트는 그런 비스마르크의 기분은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사실 그녀가 이해하고 말고 와 상관없이 비스마르크는 방을 옮길 수 있다. 이 저택은 그의 것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알라나데일에서의 경험으로 큰 사건을 겪은 사람의 기분을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자기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못 견뎌 했고 조용한 것을 싫어하게 되었다. 비록 그런 부분들은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케이트는 이해했고 할아버지를 동정했다. 그래서 가능한 비스마르크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 케이트의 말에 비스마르크가 창밖으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요 며칠 눈이 내리거나 흐린 하늘이었던 것에 비하면 그녀의 말대로 창밖은 오랜만에 날이 맑았다. “흥.” 그는 그저 못마땅하다는 듯한 소리를 내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그런 의미다. 그는 혼자 힘으로 움직일 수 없다. 마비된 다리는 몇 년 동안이나 요지부동이다. 하지만 케이트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온실에 꽃이 피었을지도 몰라요. 몇 송이 꺾어서 보여드릴까요?” 비스마르크의 입술이 우물댔다. 그는 뭔가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포기하고 짧게 내뱉었다. “됐다.” 길게 이야기하면 그의 어눌한 말이 드러난다. 자신의 약점을 보이는 게 끔찍하게 싫은 그는 말을 짧게 하곤 했다. 케이트는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이야기를 해봤자 할아버지가 짜증을 낸다는 걸 안다. 두 사람은 침묵으로 비스마르크의 종자를 기다렸다. 마비로 손힘이 없는 비스마르크는 식사도 종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종자는 오지 않았다. 그제야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종자가 오늘 휴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아프시다고 했던가. “고얀 놈.” 그는 애꿎은 종자를 향해 나직하게 욕을 내뱉으며 수저를 집어 들었다. 그의 손이 덜덜 떨리며 수프를 떠올리는 것을 케이트가 불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도와드리고 싶은데. 그러면 화를 내시겠지? 케이트는 이미 한번 도와드린다고 다가갔다가 혼난 적이 있다.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아니나다를까 비스마르크의 손에서 수저가 떨어져 내렸다. 툭 떨어진 수저는 그가 앉은 침대 시트에 노란 수프를 튀기고 침대 밖으로 튕겨 나갔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할아버지!” 비스마르크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케이트가 다가가자 허우적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저리 가.” “어디 다치신 덴 없고요?” “저리 가래도!” 소리가 커졌다. 복도를 걷고 있던 칼에게도 비스마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주인어른이 아가씨에게 소리높이는 게 분명하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케이트는 칼의 등장에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는 시트의 노란 얼룩을 걱정하던 터였다. “칼, 할아버지 시트를 걷어야 할 것 같아요.” 칼은 케이트와 비스마르크의 얼굴을 살폈다. 진심으로 더러워진 시트를 걱정하는 케이트와 달리 비스마르크는 곤혹스러워 보였다. 그는 그의 손녀가 불편했다. “아가씨, 제가 하겠습니다.” 그는 비스마르크와 케이트 사이에 끼어들었다. 비스마르크가 눈에 띄게 안도하는 것이 보였다. 이런이런. 칼은 속으로 웃었다. 이렇게 무뚝뚝하게 구는 노인네도 할아버지라고 싹싹하게 구는 아가씨가 흐뭇했다. “식사 중이시니 시트는 식사 후에 갈겠습니다.” 칼은 비스마르크의 옷매무시와 침대를 정돈한 뒤 물러났다. 그의 도움을 받아 식사는 무사히 이어졌다. 케이트는 약간 우울한 기분으로 비스마르크의 방을 나왔다.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할아버지에게 사랑받았으면 하는 기대는 이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적어도 할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 케이트가 한숨을 내쉬었을 때 하녀가 어느 방에서 후다닥 뛰어 나오다가 케이트를 보고 재빨리 자세를 바로 했다. “저기는,” 열린 문틈으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재빨리 누군가가 문을 닫아버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더이상 알 수가 없었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어요.” 하녀가 말을 걸었을 때에야 케이트는 정신을 차렸다. 이 층 가장 깊숙한 방은 이제 에스메랄다가 쓰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은 그녀가 정신을 놓기 전에 가장 싫어하던 방이었다. “손님이요?” “네. 로엔 백작 가에서 오셨어요.” 어라. 케이트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안이 왔다. 그녀는 재빨리 자기 방으로 돌아가 거울을 살폈다. 머리가 헝클어지지는 않았을까. 식사를 하면서 옷이 더러워지지는 않았을까. 그녀가 옷을 새로 갈아입고 일 층으로 내려오기까지 꽤 시간이 필요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키아르네 입니다~ 7부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장이예요!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만 제가 지금 카카오 기다리면 무료에 연재하는게 있어서 매일은 못오고 일주일에 2, 3번정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맞다. 이번 표지는 앤앤님께서 선물해주신 그림입니다. 표지는 일주일정도 유지됩니다. 00244 1. 호건 가의 아가씨 =========================================================================                            이안은 화려한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과연 호건 가라고 불릴만하다. 가장 좋은 응접실은 궁전과도 비교될 정도였다. 섬세하게 조각된 기둥과 레이스로 짜인 벽지. 몇십 명이 들어와 있어도 충분할 법한 큰 응접실은 그만큼 소파와 테이블이 크고 많았다. 이안은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한가운데에 묵묵히 앉아있었다. 누가 보면 조각상으로 오인할지도 모른다. 케이트가 내려온 건 그가 도착하고 약간의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그녀는 일 층까지 빠르게 내려와서 응접실 앞에 멈춰 섰다. 머리랑 옷, 괜찮나? 그녀가 옷 매무시를 가다듬고 있을 때 이안이 응접실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뭐하는 거야?” “이안!” 케이트는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가 그를 보고 배시시 웃어 보였다. “오래 기다렸어요?” 오래 기다렸다. 이안은 물끄러미 케이트를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손을 잡고 휙 잡아 당겼다. 동시에 응접실 문이 닫혔다. “앗, 닫으면 안,” 미혼 남녀가 단 둘이 방 안에 있을 때는 그 방문을 열어둬야 한다. 케이트는 그 사실을 지적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이안은 케이트를 단단히 끌어안고 그녀의 입술을 빨았다. 품 안에서 작은 몸이 깜짝 놀라서 굳었다가 부드럽게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응, 이안,”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다가 입안으로 혀를 집어넣자 케이트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는 그녀가 숨을 헐떡일 때까지 입술을 빨다가 천천히 놓아주었다. 아쉽다. 오랜만에 만난 케이트다. 두 사람은 한동안 바빠서 만나지 못했다. 케이트는 얼굴을 붉히고 입술을 문지르더니 후다닥 응접실 문을 열었다. 그녀는 문틈 사이로 누가 지나가는지 확인하고는 이안을 향해 서서 허리에 손을 얹었다. “문 닫으면 안 되죠!” 그녀의 타박에도 이안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케이트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말했다. “문 열었으니 계속 해도 돼?” 이 남자가? 케이트의 손이 야무지게 그의 팔을 때렸다. “안돼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안은 케이트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대고 물었다. “그럼 언제 하면 되지?” 이런 행동도 하면 안 된다. 케이트는 불안해서 문밖을 살피며 대답했다. “나중에요.” “나중에 언제?” “겨, 결혼한 다음에?”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는 불만스럽다는 듯 케이트를 보다가 말했다. “결혼이라면 지금이라도 할 수 있잖아.” 안다. 케이트는 반쯤은 미안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어머니께 혼인이야기를 하겠다는 이안을 말린 건 그녀였다. 에스메랄다가 정신을 놓고 비스마르크가 방을 나왔지만 ,거동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자, 케이트는 결혼을 미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 역시 이안과 함께 있고 싶다. 하지만 지금 이런 상태의 호건 가를 두고 이안과 결혼하는 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케이트는 이안의 가슴에 뺨을 대면서 말했다. “미안해요.” 그녀의 행동과 목소리에 이안은 문득 리코를 떠올렸다. 미인 부인을 둔 리코는 꽤 자주 퇴근을 서두르곤 했다. 제이드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면 늘 싱글벙글 웃으며 부인이 보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군. 그는 케이트의 등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때때로 정부나 부인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남자들을 볼 때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비싼 보석이 갖고 싶다거나, 공연이 보고 싶다는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걸 보면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 이안은 케이트의 부탁이라면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았어.” 일단은 참아보자. 케이트가 이렇게 부탁하니까. “아, 이안. 할아버지 뵙고 갈 거예요?” 두 사람이 사이좋게 온실을 구경하고 난 뒤 케이트가 물었다. 호건 가의 온실은 겨울임에도 많은 꽃이 피어 있었다. 그녀는 식사시간에 비스마르크에게 이야기했던 대로 할아버지에게 보여드리기 위해 꽃도 몇 송이 꺾었다. “글쎄.” 이안은 꽃을 품에 안은 케이트를 내려다보고 손을 뻗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꽃잎이 묻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꽃잎을 떼어내자 케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배시시 웃었다. “할아버지, 안 보고 갈 거예요?” 졌다. 이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인사 하지.” 비스마르크는 여전히 자신의 방에 누워 있었다. 그의 침대 시트는 새로 갈아서 깨끗했다. 집사가 이안 로엔 경이 케이트 아가씨를 만나러 왔다가 잠시 인사를 한다고 하자 비스마르크는 불만인지 칭찬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로엔 경이라고? 제 어미보다는 낫군.” 들어오시랍니다. 칼은 이안과 케이트를 방 안으로 안내하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에스메랄다와 제프리로 망해가던 집안이 케이트의 존재로 다시 일어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케이트를 찾아오는 이안 로엔 경은 로엔 백작의 둘째 아들. 비스마르크가 딸 엘리자베스를 그리 시집보내고 싶었던 귀족 가다. 이안이 서자라는 것은 칼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비스마르크에게도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비스마르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보고 속으로 가볍게 감탄했다. 크고, 검다. 이안 옆에 선 케이트는 그의 반도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점이 비스마르크의 마음에 들었다. 딸을 닮아 작은 손녀다. 그런 손녀의 배우자라면 이안정도로 큰 남자가 좋다. “내, 자네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지.” 비스마르크의 말에 이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케이트는 슬쩍 이안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그녀의 어머니와 이안의 아버지를 결혼시키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안도. “신기하군.” 딸로 이어주려 했던 집안이 손녀로 이어지게 된다니. 비스마르크는 역시 로엔 가와 그의 집안은 무언가가 있었던 거라고 속으로 감탄했다. 장사를 하다 보면 때때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 서로 간의 입장이 맞지 않아 판매할 수 없었던 물건이 빙 돌아서 결국은 처음 구매자에게 팔려가는 경우. 엘리자베스와 케이트도 그런 식인지도 모른다. 비스마르크는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이 애와 언제 만났나?” 언제 만났지? 이안과 케이트의 시선이 부딪쳤다. 작년 봄에 만났다. 고작 일 년.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일 년 동안 엄청난 일을 겪었다. 그녀가 평생 겪었던 모든 일을 합친 것보다 더 크고 강렬한 사건들이 그 일 년 동안 터졌다. “일 년 정도 됐습니다.” 이안의 대답에 비스마르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 년이라. 그는 대충 이안에 대해 알고 있었다. 로엔 백작 가의 둘째 아들이라는 것. 서자라는 건 칼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수사관이었고 지금은 수사관 자리를 박탈당했다고는 하나 백작 가라면 굳이 일할 필요도 없었다. 보통 귀족의 둘째 아들은 작위를 이어받은 형을 도와 집안일을 하기 마련이다. 수사관이 된 이안의 행보가 이례적일 정도다. 다들 그가 능력을 인정받지 않은 상태에서 로엔 가의 서자가 되는 바람에 능력을 보이기 위해서 수사관이 되었다고 생각해서 모른 척하는 것 뿐. 비스마르크가 원한 건 귀족 가라는 이름이었다. 케이트가 이안과 결혼하면 적어도 귀족 가의 일원이 된다. 나쁘지 않았다. “아 참, 할아버지. 꽃을 좀 꺾어 왔어요.” 케이트는 꽃을 꽃병에 꽂으며 말했다. “분위기가 좀 환해질까 해서요.” 그녀의 말은 지금 이 상황에 꽤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반신불구인 노인과 무표정한 얼굴의 커다란 남자. 그 사이에서 꽃을 장식하는 케이트. 그녀 덕분에 분위기가 환해지긴 했다. 비스마르크는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지금 뭘 하고 있나?” 비스마르크가 기대한 건 형을 도와 영지를 관리한다는 그런 판에 박힌 말이었다. 하지만 이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달랐다. 그는 케이트를 한번 쳐다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수사관장 직을 맡고 있습니다.” 그게 뭐지? 비스마르크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 케이트가 먼저 깜짝 놀라서 외쳤다. “정말요? 언제부터요?” 케이트도 몰랐다. 이안은 그녀의 손을 슬쩍 잡았다. 며칠 되었다. 하지만 케이트도 바쁘고 그도 바빠서 이야기할 틈이 없었다. 같이 산다면 어떻게든 이야기를 했을 테지만 두 사람은 꽤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더 그랬다. “얼마 전에.” “세상에. 축하할 일이네요!” 그녀의 반응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마녀를 물리치고 최근 가장 시끄러운 연쇄살인범을 잡았다. 뿐만 아니라 제프리의 죽음으로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대규모 매춘에 제프리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제프리가 죽고 케이트가 호건 가에 들어가는 것으로 호건 가의 입김이 이안에게 호의적이 되었다고 판단한 에드워드는 재빨리 이안을 치하하고 그를 수사관장 직에 봉했다. 어쩌면 작위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안은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어쩌면의 일이니까. “수사관장이라.” 비스마르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것도 괜찮지.” 나쁘지 않다. 기사단에 들어가서 강함을 겨루는 것도 괜찮지만 호건 가를 물려받을 케이트와 결혼할 남자라면 사람들을 다스릴 줄도 알아야 한다. 괜찮아. 생각보다 훨씬 괜찮아. 비스마르크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께서 이안을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요.” 비스마르크에게 인사를 남기고 나가면서 케이트가 속삭였다. 이안은 그녀의 등허리에 손을 얹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런가?” “네. 기분 나쁘실 땐 반응이 다르시거든요.” 좀 더 표정이나 말투가 달라진다. 케이트는 기분 나쁠 때 비스마르크가 얼마나 뾰족하게 투덜대는지를 떠올렸다. 음식이 너무 짜! 이건 너무 달아! 날 절여서 통조림을 만들 생각인 게야? 케이트가 먹어봤는데 전혀 달지도 짜지도 않았다. 이안은 그런 케이트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현관 앞에 서자 허리를 숙였다. 어? 케이트가 깜짝 놀라 물러났다. 다행히 그의 입술은 그녀의 뺨에 닿았다. 이 정도는 허용범위 내다. 케이트가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빰에 손을 대자 이안이 덤덤하게 말했다. “어머니께서 조만간 보고 싶다고 하시는군.” “저를요?” “그래.” “어, 저 혼자요?” 응?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할아버지도 함께 가고 싶어?” “아니, 그게 아니라.” 이안도 함께냐는 의미였다. 케이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요?” 그의 손이 그녀의 뺨을 쓸었다. 이안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 작품 후기 ============================ 아이고 잊고 있었네요~ 다음주에 만나요~ 00245 1. 호건 가의 아가씨 =========================================================================                            케이트를 찾아오는 손님은 이안뿐이 아니다. 그녀는 비스마르크를 대신해서 호건 가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덕분에 에녹의 집에 머물 때보다 훨씬 바빠졌다.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업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건 케이트가 듣기에도 조악하고 말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세상에. 케이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찾아온 남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유리로 구두를 만들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대체 무슨 생각에서 나온 말일까. 다행히 그녀가 말을 끊어야 하나하고 고민하던 때에 집사가 나타났다. 응접실 문 앞에 서서 헛기침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그는 케이트에게 다가가 나지막하지만, 남자에게도 들릴만한 소리로 말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요?” 살았다. 이 남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 좋을 정도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남자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먼저 일어날게요. 어디 사신다고 하셨죠? 주소를 알려주시면 검토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아마도 남자에게 연락이 갈 일은 없을 것이다. 케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자신에 대해 약간의 환멸을 느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건 싫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녀는 집사의 뒤를 따라 또 다른 응접실로 향했다. “주인님의 손녀이신 케이트 스미스 양이십니다. 아가씨, 이쪽은 의사 로알님이십니다.” 아, 의사. 케이트는 재빨리 로알에게 다가갔다. 케이트보다 한 뼘 정도 큰 남자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의 손을 잡더니 말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영광인 건 이쪽이다. 케이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도 영광이에요, 선생님. 신체마비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는데요.” “부, 부끄럽네요.” 낯을 가리는 남자다. 그는 케이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케이트는 손을 놓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재빨리 집사가 하녀를 시켜 차를 날라 왔다. “할아버지께서 몇 년 전에 쓰러지신 뒤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셔서요. 손힘도 많이 약하시고요.” 로알은 환자 이야기가 나오자 놀라울 정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 케이트의 얼굴도 보지 못했던 남자가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말은 할 수 있습니까?” “약간 어눌하세요.” “환자분을 볼 수 있을까요?” 케이트의 시선이 문밖에 서 있던 집사를 향했다. 그는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비스마르크가 의사를 보고 싶지 않다면 끝날 일이다. 그는 지금까지 케이트가 알아본 의사들을 대부분 거절했다. 치료할 필요 없다. 이런 태도였다. 하지만 케이트는 이번 의사는 꼭 만나봤으면 했다. 로알은 뮈엘라 내에서 마비된 신체를 치료하는 것으로 소문난 의사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치료를 하는 탓에 그와 연락이 닿아 여기까지 모셔 오는 게 매우 힘들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후 돌아온 칼은 실망스러운 대답을 내놓았다. 케이트는 실망해서 어깨를 늘어트렸다. 이번에는 꼭 만나셨으면 했는데. 로알 역시 저런 하고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다 로알이 말했다. “그러면 제가 수도에 온 김에 며칠 머물 생각이니 그 사이에라도 연락을 주시면 찾아오겠습니다.” “며칠 머무실 생각이시라고요?” “네. 오랜만에 올라온 수도라서요. 지인도 만나고 도움이 필요한 환자도 볼 생각입니다.” 그래? 케이트의 머리가 재빨리 돌았다. 그녀는 일어나려는 로알에게 물었다. “혹시 머무실 곳이 정해졌나요?” “지금은 중앙 광장 쪽에 있는 여관에 머물고 있습니다. 혹시 거처를 바꾸게 되면 연락을 드릴,” “그렇다면! 여기 머무시는 건 어떠세요?” 다른 사람의 말을 끊는 건 무례한 짓이지만 케이트는 흥분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나서버렸다. 어차피 여관에서 머문다면 이 저택에서 머물러도 되지 않을까. 이 집은 방이 아주 많다. 로알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호건 가의 저택에서 머문다는 건 꽤 구미가 당기는 일이긴 했다. 수도에서 왕궁 다음으로 화려하다는 저택. 그리고 쓰러진 가주와 하나뿐인 후계자는 젊고 예쁘장한 아가씨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네. 짐은 제가 가져오라고 할게요. 칼, 이분께 방을 안내해 주시겠어요?”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칼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어느 방으로 할까요?” 케이트의 머리가 다시 바쁘게 돌아갔다. 이 저택은 방이 정말 많다. 안 쓰는 방을 포함해서 마흔 개나 된다. 그녀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칼이 다시 말했다. “이 층 나무 방은 어떨까요? 뒤쪽에 있어서 정원이 보이니까요.” “네. 부탁드려요.” 이 층 나무 방이 어디더라? 케이트는 잠시 생각했지만 포기했다. 이 집에 대해서는 그녀보다 집사인 칼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집안일에 대해서라면 칼과 비스마르크의 의견을 중시하고 있었다. 그다음 그녀가 만난 것은 파티 플래너였다. 제프리가 죽고 케이트가 호건 가의 유일무이한 후계자가 되었으니 그녀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알리는 파티를 여는 게 어떠냐는 집사의 의견이 있었던 것이다. 비스마르크 역시 투덜거리긴 했지만 동의했기 때문에 케이트는 결국 자신을 알리는 파티를 열게 되었다. 보통은 본인이 아니라 본인의 윗사람이 열어주기 마련이다. 케이트라면 에스메랄다가 열어줘야 한다. 케이트는 에스메랄다를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게 뭔가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설령 에스메랄다가 제정신이라고 해도 그녀가 케이트의 귀환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어줄 리 없다는 생각만이 위안이었다. “집이 크니까 따로 장소를 빌리기보다 이 집에서 하는 게 어떨까 싶어요.” 플래너의 말에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할아버지께 여쭤볼게요.” 이집은 어디까지나 비스마르크의 집이다. 할아버지의 허락 없이 이 집을 쓸 수 없다는 케이트의 의지에 플래너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음식과 초대할 손님 목록. 그리고 케이트의 의상과 악단까지. 손님이 많다면 음식은 호건 가의 주방에서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다. 플래너가 추천한 믿을 수 있는 요리사 중에 앤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케이트가 빙그레 웃었다. 친구가 능력 있고 믿을만한 요리사로 인정받았다는 게 기뻤다. 칼은 문밖에 서서 상의하는 케이트와 플래너를 지켜보다가 서재로 향했다. 의자에 앉은 비스마르크가 막스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멍청한 것.”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비스마르크의 욕이 흘러나왔다. 막스는 어쩔 줄 몰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비스마르크가 방에 감금된 동안 호건 가의 사업은 엉망이었다. 에스메랄다와 제프리가 사치를 하고 말도 안 되는 사업에 투자했기 때문이다. 가능성 없는 사업도 그럴듯해 보이면 투자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온갖 사기꾼과 허풍쟁이들이 밀려들었다. 아침에 케이트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도 당연하다. 그럼에도 호건 가의 부는 어마어마했다. 제프리가 살아있었더라도 에스메랄다와 둘이 죽을 때까지 사치를 해도 다 쓰지 못했으리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칼은 막스가 보고를 멈춘 틈을 타서 끼어들었다. 그는 식은 비스마르크와 막스의 찻잔을 교체하고 차를 따른 뒤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는 파티를 논의 중이십니다. 오늘 찾아온 손님은 전부 돌아가시라고 했습니다.” “손님은 무슨.” 비스마르크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멍청한 하이에나들이지. 손님이라고 할 것도 없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칼은 꿋꿋하게 말했다. “오늘 만난 손님 중 아가씨께서 투자하기로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투자를 안 했다는 건가, 혹했지만 참았다는 건가.”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흠. 비스마르크는 의자 등받이에 목을 대며 묘한 신음을 흘렸다. 적어도 에스메랄다보다는 낫군. 하긴, 에스메랄다나 제프리보다 못한 사람은 에바니엘 전역을 뒤져도 몇 명 없을 것이다. 상당히 박한 평가였지만 꽤 정확한 평가였다. 비스마르크는 집안과 가업을 에스메랄다와 제프리에게 넘겨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비스마르크가 경영하고 있었을 것이다. 갑자기 쓰러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에스메랄다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비스마르크를 쉬게 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감금했다. 무력하게 침대에 누워 감금되었던 기억이 떠오르자 비스마르크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그는 고개를 들고 변호사를 향해 말했다. “저 애가 베스의 딸인 건 확실한 거겠지?” 벌써 몇 번째 받는 질문이라 막스는 재빨리 대답했다. 네. 확실합니다. 막스의 대답이 아니었어도 비스마르크는 케이트가 엘리자베스의 딸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있었다. 케이트는 엘리자베스를 닮았다. 예쁘장한 외모와 작은 체구가 누가 봐도 엘리자베스의 딸이다. 이안의 어머니인 실라가 이십여 년 전에 마지막으로 본 엘리자베스를 떠올릴 정도로. “그 애에게 다른 남자는 없나?” 비스마르크의 질문에 막스와 칼의 시선이 부딪쳤다. 칼이 아는 한은 없다. 막스 역시 마찬가지다. “이안 로엔 경뿐입니다. 주인님.” 칼의 대답에 비스마르크는 다시 흠하고 생각에 잠겼다. 로엔 백작 가의 둘째 아들. 귀족이고 수사관장이라고 했다. 나쁘지 않다. 아쉬운 건 이안이 작위가 없다는 것뿐이다. “칼,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무엇을 말입니까?” “로엔 경 말일세. 그 아이의 배우자로 괜찮은 것 같나?” 집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머릿속에 에스메랄다에게 감금되었던 케이트를 구하러 왔던 이안이 떠올랐다. 여차하면 쫓겨날 각오를 하고 도와주려고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케이트는 뛰어내리라는 이안의 말에 주저 없이 그의 품으로 뛰어내렸다. 보통 사이가 아니다. 그 이후로 칼은 자기 나름대로 이안과 케이트의 관계에 대해 조사했다. 이안이 수사를 위해 찾아갔던 시골에서 하녀로 일하던 케이트를 데리고 올라와 자기 어머니의 하녀로 일자리를 줬다고 한다. 그때까지 이안이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도와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데일 남작의 피해자이자 남작 가의 범죄에 동참했을 지도 모를 여자를 데리고 와서 뒤를 봐줬다는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수사관 직을 박탈당하자 케이트만 데리고 큐바인 거리의 작은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일설에 의하면 로엔 백작 부인도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더이상 하녀가 아니게 된 스미스 양의 하숙집에 로엔 경이 눌러 앉아있을 이유가 없다. 그녀가 레인포레스트 경의 대녀라는 것을 알려져 레인포레스트 경의 집으로 들어갔을 때도 로엔 경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갔다고 한다. 레인포레스트 경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제 좁은 식견으로는 괜찮은 분 같습니다.” 칼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가씨께서 가진 게 없을 때부터 돌봐주셨던 분입니다. 괜찮은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가.” 비스마르크의 미간에 다시 주름이 생겼다. 작위가 아쉬운데. 그때 칼이 덧붙였다. “아, 그리고 에반스 공작님과 친하다고 하더군요.” 비스마르크의 시선이 집사를 향했다. “그래?” ============================ 작품 후기 ============================ 즐거운 수요일 입니다~ 표지변경했습니다. LAZ님께서 그려주신 팬아트입니다 00246 1. 호건 가의 아가씨 =========================================================================                            “이안, 보고서,” 수사관장실을 노크도 없이 벌컥 열었던 제이드가 자리에서 일어서 있는 이안을 발견하고 말을 멈췄다. 어라? 그는 무슨 일인가 하고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뭐가?” “일어서 있길래. 무슨 일 있나 해서.” 제이드의 지적을 받고서야 이안은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사관장이 된 지 일주일째. 그는 책상 위에 올라간 서류를 힐끔 쳐다보고 말했다. “아무 일도 없다.” 그럴 리가. 하지만 이안의 표정으로는 뭔가 딱 꼬집어 물을 수가 없다. 눈썹 하나만 까딱해봐라, 바로 몰아세워 줄 테다. 제이드는 이안의 이상한 행동을 한쪽으로 밀어 놓고 수사관장실로 한 발짝 들어왔다. “경매장 사건 말인데, 보고서 제출 기한을 좀 미뤄주면 안 돼?” “안돼.” 젠장.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칼에 잘렸다. 제이드는 어깨를 움츠렸다가 다시 물었다. “에이, 그러지 말고.” “네 보고서는 원래 어제까지 주기로 한 거 아니었나? 그걸 하루 미뤘으면 많이 미룬 거 같은데.” 에이. 제이드는 다시 어깨를 늘어트리며 수사관장실을 떠났다. 한 번 미뤄줘서 두 번도 미뤄줄 줄 알았다. 얄미운 생각이 아닐 수 없지만 원래 한번 틈을 주면 두 번 틈도 노리는 게 인간이다. 제이드가 실망한 표정으로 자기 자리에 돌아오자 리코가 낄낄대고 웃었다. 카이사는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미뤄줘?” “엉.” 제이드는 책상에 반쯤 작성하다 만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종이 위에 웬 지렁이가 꿈틀꿈틀 기어가고 있다. 카이사는 제이드의 보고서를 내려다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킬리언, 자네 글자는 대단히,” 뭐라고 말해야 덜 무례할까. 카이사가 고민하는 사이 리코가 끼어들었다. “만화경을 보는 기분이지.” 그래. 그거. 아무리 뮈엘라가 문맹률이 높다고는 하나 수사관은 글을 쓰고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불법 마법을 잡으려면 어쩔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카이사의 글씨는 단정하고 우아했다. 리코의 글씨 역시 좀 지저분 하긴 했지만 보는 데 무리는 없었다. 하지만 제이드는 너무 심했다. 리코는 제이드의 보고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보고서 작성이 문제가 아닌 거 같은데. 너 그동안 보고서 작성을 어떻게 한 거야?” “그동안은 이안이 했지.” “허.” 제이드를 사이에 둔 두 남자의 입에서 한탄이 터져 나왔다. 어쩐지 보고서 작성하는 꼴을 못 봤다. 두 사람은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이번 기회에 보고서 작성 좀 제대로 해 보라고.” “그래. 그래.” 젠장. 제이드는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좌절했다. 그는 이런 거 못쓴단 말이다! 뮈엘라에서 글을 이만큼 쓰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쓸모없는 능력인데! “일찍 퇴근하겠습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기 전에 수사관장실에서 이안이 나왔다. 그는 코트에 팔을 꿰며 말했다. 누가 봐도 서두르는 모습이 완연하다. “무슨 일이지?” 리코와 카이사의 시선이 부딪혔다. 이안이 서두르는 건 처음 본다. 두 사람이 골머리를 썩고 있는 제이드에게 물었다. “뭐 아는 거 있어?” “몰라.” 심통 난 목소리로 제이드가 투덜거렸다. 내 코가 석 자거든? 이안이 탄 마차가 타운하우스 앞에 멈췄다. 그는 집사가 열어주는 대로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며 물었다. “케이트는?” 케이트? 호칭 없는 이름에 집사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마님과 이야기 중이십니다.” 이안의 몸이 바로 위층으로 향했다. 어머어머. 계단 뒤에서 하녀들이 소근 거렸다. “진짠가 봐.” “그러게.” 케이트 스미스가 호건 가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그 이야기는 이미 몇 주 전부터 알고 있긴 했다. 소문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놀란 건 케이트가 호건 가의 후계자라는 사실이 아니라 이안이 케이트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었다. “못할 건 없지만.” “음, 솔직히 집안도 비슷하고.” “비슷하긴 뭐가 비슷해? 저쪽은 일개 부자고, 이쪽은 귀족이거든?” 마리의 말에 아비게일이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입이 삐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하랬다고, 마리. 넌 이 집이 호건 가보다 낫다는 거야?” “그러니까 이쪽은 귀족,” “그 귀족 자제가 사표 내게 한 게 호건 가거든?” 순식간에 계단 뒤가 조용해졌다. 하녀들은 아차 하고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도련님은 호건가를 잘못 건드려서 수사관을 그만두고 로엔 가와 표면적인 절연을 한 적이 있다. 불안해져서 애니는 두 손을 꼭 쥐었다. 그녀도 케이트가 좋았던 건 아니다. 같은 빨간 머리인데 더 예쁘장하고 남자들에게 인기 있는 케이트에게 질투가 난적이 많았다. 하지만 이쯤 되면 질투하기도 어려워진다. 같은 하녀일 때라면 케이트는 질투의 대상이지만 호건 가의 아가씨라면 선망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그녀는 케이트가 이안과 잘 되기를 바랐다. 마리는 케이트가 싫은 모양이지만 그녀는 하녀 중에서 자신이 가장 똑똑하고 예쁘다고 생각하는 여자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케이트가 잘된 게 질투심이 나는 거다. 잘 됐으면 좋겠는데. “어서 차 내가지 않고 뭐해?” 애니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집사가 다가와서 호통쳤다. 엄마야! 계단 뒤에 모여 있던 하녀들이 파사삭 흩어졌다. “역시.” 실라는 맞은편에 앉은 케이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부터 엘리자베스가 생각나는 외모였다. 예쁘장하고 자그마한 체구. 그녀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네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지.” “아버지와 만나기 전에요?” “그래.” 케이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녀가 비스마르크에게 듣고 싶었던 건 이런 이야기다. 아버지를 만나기 전의 어머니. 그녀가 아는 어머니 엘리자베스의 세상은 아버지인 니콜라스의 존재가 전부였다. 그녀는 니콜라스만을 보고 그 커다란 집을 뛰쳐나왔고 고운 손으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행복해했다. 오로지 니콜라스가 곁에 있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매우 사랑하셨어요. 그래서 어머니의 처녀 적 이야기보다 아버지와 만난 다음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하셨거든요.” 그게 케이트가 자신이 호건 가의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던 이유였다. 엘리자베스는 니콜라스를 만나기 전의 인생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대했다. 아버지와 절연하고 집을 뛰쳐나온 것도 한몫했겠지만 지금 떠올려보면 이상한 일이다. 케이트는 호건 저택에 들어가서 이상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 커다란 집과 수많은 사용인. 어마어마한 부와 힘을 가지고 부족한 것 없이 살던 아가씨가 한순간 뛰쳐나와 시골의 아낙으로 살면서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음, 모든 아가씨가 다 그렇지만 호건 양은 예쁜 걸 좋아하는 아가씨였지.” 아니, 이젠 스미스 부인인가? 실라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사교계에서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고 하면 알까?” 케이트는 대충 알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실라는 그녀가 이게 무슨 의미인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교계에서 유행을 선도한다는 건 센스가 있다는 것뿐 만이 아니다. 누구보다 먼저 실험적인 의상과 액세서리를 한다는 건, 그게 실패했을 경우 재빨리 다른 것으로 교체할 수 있는 부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엘리자베스는 센스도 있었지만 호건 가라는 집안의 부를 마음껏 이용하는 그린 것 같은 부잣집 아가씨였다. “재미있는 아가씨였어요. 곁에서 보면 나도 즐거워지는 그런 사람이었지.” 비록 접점은 없었지만 실라는 한걸음 떨어져서 엘리자베스를 보며 감탄했다. 어마어마한 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귀족이 아니라는 것은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장점을 잘 활용하는 아가씨였다. 실라는 케이트에게 엘리자베스에 대한 이야기를 천천히 해주었다. 안 좋은 이야기는 적당히 걸러서. 재미있고 좋은 이야기만. 이안이 들어선 것은 그쯤이었다. 그는 집사가 문을 두드리고 도련님이 돌아왔다고 이야기하자마자 문을 열었다. “어서 오렴.” 케이트와 실라는 즐거워 보였다. 아니, 사실 즐겁기도 했다. 이안은 자신이 묘하게 긴장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다녀왔습니다.” 이안은 습관적으로 실라의 뺨에 키스하고 물러났다. 그 모습을 케이트가 빤히 쳐다보는 게 그의 시선에 걸렸다. “여기 앉으렴.” 실라가 자기 옆자리를 토닥이며 말했다. 이안의 몸이 움직였다. 그가 실라의 옆자리에 앉기 전에 그의 손이 케이트의 뺨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어라. 케이트는 닿은 곳에 손바닥을 대고 고개를 숙였다. 백작 부인이 보고 계신데. 하지만 부끄러우면서도 좋았다. “내가 스미스 양에게 잠시 와달라고 한건 두 사람의 관계 때문이에요.” 이안이 자리에 앉아 자세를 고치자 실라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이안과 케이트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두 사람, 결혼할 생각인가요?” 말했어요? 케이트의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이안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테이블 위로 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직 정식으로 청혼한 건 아닙니다.” “그건 알아.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실라의 시선이 케이트를 향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호건 가가 너무 부자라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럴 수도 있나? 귀족은 신부가 많은 지참금을 가져오는 걸 반긴다. 지참금이 없고 너무 예쁜 여자보다 평범하고 지참금이 있는 여자가 더 인기 있을 정도다. 너무 부자라서 걱정될 수도 있을까. 케이트는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그녀도 호건 가가 부담스러웠으니까. 처음 그녀가 호건 가의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때 에스메랄다가 바로 그녀를 받아줬다면 지금처럼 호건 가에 선뜻 들어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케이트가 호건 가에 선뜻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에스메랄다와 제프리의 거부와 패악으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밖에 호건 가의 후계자가 남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케이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별도로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처음으로 그의 어머니와 반목했다. “너무 부자라는 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호건 가가 뮈엘라의 국고를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다는 건 고층거리 사람들도 알고 있는 이야기잖니. 그 정도로 부자라면 이안, 너는 로엔 경이 아니라 호건 가의 사위로 더 알려질 텐데 괜찮겠니?” 실라가 걱정하는 건 그거였다. 이안이 로엔 경이 아니라 호건 가의 사위가 되는 것. 그렇지 않아도 이안은 지금까지 능력을 보이지 않고 로엔 가의 서자가 되는 바람에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랐다. 사교계에서도 이안에 대한 반응은 차가웠다. 이제야 마녀를 죽이고 연쇄살인범을 잡아서 능력을 인정받아 수사관장이 되었는데 여기서 케이트와 결혼하게 된다면 또다시 운 좋게 저 자리를 거머쥐었다는 구설수에 오를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안은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재빨리 대답했다.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얘야.” 실라는 케이트와 이안을 번갈아 쳐다보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프리 호건의 범죄를 네가 밝혔잖니.” 제프리는 죽지 않았더라도 몰락했을 것이다. 도박장에 이어 매춘, 약물까지 사용했으니까. 물론 호건이라는 이름이 있으니 완전히 몰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사교계에서 매장되는 정도였겠지. 하지만 실라가 보기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안이 호건가를 공격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안이 호건 가의 사위로 들어간다는 건 그리 좋은 모양새가 아니다. 속물 같고 세속적인 생각이지만 실라는 이안이 사교계에서 더이상 구설수에 오르지 않기를 바랐다. 케이트가 호건 가의 사람이 아니라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케이트가 그냥 적당한 하녀라면, 이안과 함께 본가로 내려가서 조용히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이안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케이트를 가질 수 있다면 무슨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었다. 그의 인생은 단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었다. 원해서는 안 되는 것. 그리고 주어지는 것. 케이트는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그 두 가지에 속하지 않는 것이었다. 원해도 되고 그가 욕망해서 손에 넣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는 인생에 그런 건 단 하나만 있으면 된다. ============================ 작품 후기 ============================ 아무도 모르게 슬쩍 올려놓고 가야지~ 아참, 후작과 수리공은 간혹 몇편예상이냐고 물어보시는데 성인편만 50편이 좀 넘을 예정입니다~ 한권 정도면 끝날 줄 알았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약간 길어졌네요. 00247 1. 호건 가의 아가씨 =========================================================================                            이안의 태도가 완고하자 실라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아들이 원하는 건 웬만하면 다 허락해주는 편이었다. 수사관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때도 말없이 응원해주었다. 이번에 케이트를 부른 것도 딱히 반대하기 위해 부른 게 아니라 케이트의 입장을 들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녀는 케이트를 괜찮은 아가씨라고 생각했지만, 사람이 처지가 바뀌면 성향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얌전한 하급귀족 아가씨가 상급귀족과 결혼하자 그전까지 친하게 지내던 하급귀족 부인들을 무시하는 것을 몇 번이나 봤다. “그래요.” 실라는 결국 한풀 꺾여서 말했다. “미안해요. 노파심에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고 생각해 줘요.” 이안은 어머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케이트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케이트는 일어나지 않으려 버티며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부인. 걱정하실만했어요.” 실라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케이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공평하지 않아요.” 이안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동시에 실라의 눈동자가 커졌다. 두 사람은 얌전하게만 있던 케이트의 말에 놀라서 당황하고 있었다. “부인께서는 제 조건이 너무 좋아서 이안이 아니, 로엔 경이 손해를 볼까 봐 걱정하셨지만, 제가 호건 가가 아니었다면 우리 입장은 반대였을 거예요.” 그 말이 맞다. 실라는 계속해서 케이트가 차라리 하녀이길 바랐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시골로 내려가 조용히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생활금은 로엔 백작이 지원해 주면 된다. 지금도 실라의 생활비는 로엔 백작이 내주고 있고 그건 귀족 사회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로서 아들 걱정을 하시는 건 당연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당연히 생각하시고 지금 상황은 불편해하시는 건 불공평한 것 같아서요.” 실라의 입이 벌어졌다. 그녀는 멍하니 케이트의 얼굴과 이안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케이트는 그런 그녀에게 재빨리 사과했다. “무례한 말씀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무례하긴 하다. 실라는 잠시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무례하지만 그녀의 말이 맞았다. 실라는 이안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이안을 위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먼저 무례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아들을 걱정해서 남의 집 귀한 아가씨를 데려다가 자신의 불만을 토로하는 건 어른스럽지 않았다. “스미스 양은, 내 생각보다 훨씬 당돌한 거 같군요.” 칭찬일까 불만일까. 케이트는 고개를 숙였고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실라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저었다. “아니, 칭찬이에요. 호건 가의 후계자라면 그 정도 당참은 있어야지.” 그렇습니까.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케이트는 여전히 얌전히 앉아있었다. 실라는 케이트의 어머니가 아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걱정하는 건 당연하다. 그녀는 지금 정면에서 네 아들만 걱정하는 건 불공평한 거라고 받아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케이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스미스 양의 말이 맞아요.” 실라 역시 후회하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굳이 하려 했다면 케이트가 아니라 그녀의 보호자와 이야기 했야 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케이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안을 잘 부탁해요.” 어라.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이안과 실라의 얼굴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흐뭇한 미소를 짓는 실라와 달리 이안은 불편한 표정이었다. “어머니, 아직 결혼이야기는 이르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하지만 너는 스미스 양과 결혼할 생각이잖니.” 정곡이다. 이안은 입을 다물었고 케이트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녀 역시 이안과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이라기보다는 다짐이지만. 두 사람의 결혼이 미뤄진 건 어디까지나 케이트의 상황 때문이었지 두 사람의 마음이 변하거나 해서는 아니다. 케이트는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제 상황 때문에.” “아니에요, 스미스양.” 실라는 느긋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케이트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배경은 둘째치고 케이트가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태도 같은 부분은 실라가 보기에 이안의 배우자로 충분했다. “미안하다.” 실라와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나오자마자 이안은 케이트에게 사과했다. 처음 받는 사과에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어, 나한테 사과하는 거예요?” “그래.” “진짜로?” “그래.” “어디 아픈 거 아니죠?”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는 케이트의 턱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사과하는 것도 불만인가.” “그, 그건 아니지만.” 익숙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서 오히려 당황스럽다. 그녀는 이안의 손에서 얼굴을 떨어트리며 물었다. “당신이 미안할 게 뭐 있어요?” “어머니께서 너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셨을 때 이런 이야기일 줄 몰랐으니까. 네 말대로야. 이건 공평하지 않았어.” 그건 그렇지만. 케이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건 공평하지 않다. 실라는 비스마르크와 이야기를 했야 했다. 그녀는 이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 할아버지와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안의 표정이 불만스럽다는 듯 일그러졌다. 그는 케이트의 허리를 손으로 감싸며 투덜거렸다. “그 집안에서 일하는 건 너뿐인 건가.” “그럴 리가요.” 케이트의 밝은 웃음소리가 복도 안에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흩어졌다. === 케이트는 어두운 복도를 끝도 없이 걷고 있었다. 이상하다. 그녀는 창밖을 쳐다보려 애쓰며 생각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로 가려 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다시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움직였지만, 뒤돌아본 복도는 반대쪽 복도와 똑같았다. 심지어 자신이 어느 방에서 나왔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자 케이트는 혀를 차버렸다. 이건 전부 호건 저택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녀는 집을 나가기 전 그녀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가 사용하던 방을 쓰고 있었다. 그건 케이트가 원한 것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소녀 시절을 보낸 방에서 지내면서 때때로 여기에 이렇게 엄마도 앉아서 창밖을 봤겠지 하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 그 방으로 돌아갈 길이 요원하다. 대체 어느 복도로 나가야 하는 걸까. 케이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자신이 여전히 발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하다. 케이트는 자기 발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걷고 싶지 않은데 발은 계속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그때 그녀의 내부에서 누군가가 희미하게 속삭였다. - 도망쳐야 해. 무엇에게서? 그렇게 되묻자마자 목덜미가 선뜻해졌다. 서늘한 악의가,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증오가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그것은 케이트의 뒤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서 흐느적흐느적 거리며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달려서 도망치면 저것도 똑같이 달려서 쫓아올 게 분명했다. 지금 이 거리를 둔 채 멀어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케이트는 덜덜 떨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발에 자기 몸을 맡겼다. 도망쳐야 해. 도망쳐야 해. 그녀 안의 누군가가 계속해서 희미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누군가의 부름에 케이트의 정신이 확하고 따듯한 곳으로 끌어 당겨졌다. 그녀는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꿈이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음습한 꿈이었다. 서늘한 날씨임에도 케이트의 몸은 땀에 젖어있었다. 하녀가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깜짝 놀라서 다가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평소라면 먼저 일어나서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어놓고 있던 아가씨가 웬일로 늦잠을 잔다 싶었다. 케이트의 얼굴은 아픈 사람처럼 창백했다. 게다가 땀에 젖어 목덜미에 달라붙은 머리카락까지. “아가씨께서 몸이 안 좋으시다고?” 칼은 주방에서 케이트와 비스마르크의 식사를 확인하다가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오믈렛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케이트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아, 괜찮아요. 아까 로알 선생님께서 봐주셨어요.” 원래는 비스마르크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머물고 있지만, 여전히 비스마르크는 로알의 진단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니 대신 무료로 숙식을 해결해 주는 케이트의 상태를 봐주는 서비스 정도야 할 수 있겠지. 로알은 케이트의 상태를 살피고 단순히 스트레스 때문에 예민해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혹시 모르니 다른 의사에게도 찾아가 보라고 조언했다. “별문제 없다고 하셨어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거기 서 있는 집사를 향해 케이트가 사근사근하게 말했다. 로알이 그녀에게 다른 의사도 찾아가보 라고 조언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저 스트레스로 악몽을 꾼 거겠지. 케이트는 아무에게도 꿈 내용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레인포레스트님께 말씀드리는 건 어떨까요?” “아저씨께요? 뭐 하러요.” “걱정하실 테니까요.” “아이참, 별거 아니라니까요.” 그래도 칼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케이트는 그의 걱정을 덜어내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또 그러면 그때는 꼭 말씀드릴게요.” 그녀의 말에 칼도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것만은 어쩔 수가 없다. ============================ 작품 후기 ============================ 어? 지난주에 안올렸네요? 헐;;;; 죄송합니다. 이번주에 네번 올릴게요~ 아, 맞다. 카카오페이지 기다무에서 연재하는 후작과 수리공이 주 5회 연재로 변경되었습니다. 뮈엘라는 주 2,3회정도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00248 1. 호건 가의 아가씨 =========================================================================                            “안녕하세요.” 케이트가 바쁜 이유는 또 있다. 그녀는 사무실 안에 들어서며 인사했다. 아담한 사무실 안에 여자들이 책상을 마주 하고 앉아 있다가 케이트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앗, 스미스양!” “어서 와요.,” 그녀의 방문이 환기라도 된 것처럼 여자들이 일어났다. 저마다 차를 내온다 과자를 가져온다 분주하자 케이트는 귀네비어에게 물었다. “제가 방해한건 아니죠?” “방해는 무슨.” 귀네비어는 코웃음 치며 케이트에게 의자를 건넸다. 그렇지 않아도 나른하던 차에 잘 왔다. “학생들은 어때요?” 다과가 펼쳐지자 케이트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제난 몇 주동안 케이트는 제프리가 벌인 사건을 수습하고 다녔다. 이곳도 그녀가 수습한 것 중 하나다. 제프리에게 속아 갇혀서 매춘하게 된 여자들은 스무 명이 넘었다. 케이트는 그중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은 전부 돌려보내 주었다. 그리고 남은 사람이 열 대 여섯 명 정도. 의탁할 가족이 없는 여자들은 구빈원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이안이 그렇게 말했을 때 케이트는 한 겨울에 성냥을 팔던 소녀가 떠올랐다. 그리고 알라나데일에서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자신도. 그때 이안과 제이드가 없었다면 케이트는 할아버지를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뭔가를 하고 싶다. 그전까지 그녀의 마음 밑바닥에 깔려있던 생각이 빠르게 수면위로 떠올랐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뭔가를 하고 싶어 했다. 작년의 그녀라면 모르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많은 것이 있었다. 주체 못할 만큼의 돈, 할아버지. 그리고 많은 지인들. 케이트는 어머니의 유산을 털어 커다란 건물을 샀다. 여자들의 거취가 가장 급했다. 늦봄이지만 밤은 쌀쌀하다. 그녀는 피해자들이 머물 수 있도록 건물을 꾸미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참,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가장먼저 응답한 건 세 마녀였다. 에바니엘을 떠나려다 발이 묶인 귀네비어, 로라, 수잔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차에 케이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케이트의 감사인사에 로라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우리도 수사관 눈을 피할 수 있어서 좋지, 뭐.” “그 수사관이 이 아가씨 애인인거 잊었어?” 수잔의 투덜거림에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안이 애인이라니. 부끄럽다.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사이 세 마녀의 시선이 부딪쳤다. 물어봐. 귀네비어가 눈짓했지만 로라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입을 연 건 참지 못한 수잔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랑 결혼할거야?” “네? 이안이요?” “그래. 그 남자.” 하, 하겠지? 케이트는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이안과 결혼이라니 생각만 해도 부끄럽다. 하지만 하고 싶다. 케이트가 대답을 못하는 것을 착각한 귀네비어가 재빨리 물었다. “에녹은 뭐라고 하던가요?” “네? 아저씨요?” 여기서 아저씨가 왜 나오지? 혼란스럽던 케이트의 머릿속에 한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어라, 혹시? “알고 계세요? 이안이,” “괴물이라는 거?” “수잔!” 수잔의 말과 동시에 로라가 타박했다. 괴물이 아니라 마력 흡수자! 케이트는 쓰게 웃었다. 알고 있구나. 그게 놀라우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귀네비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섭지 않아?” “네? 이안이요? 아니요.” 그녀는 단호하게 다시 말했다. “무섭지 않아요.” 그렇게 대답하는 한편으로는 케이트도 처음 이안을 만났을 때 자신이 그를 무서워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알라나데일에서 그녀는 이안을 볼 때마다 기묘한 공포감을 느끼곤 했다. 포식자 앞에 선 피식자의 느낌. 몬스터나 흉포한 짐승을 맞닥트린다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 공포의 이유를 이제는 안다. 그건 마력 흡수자를 맞닥트린 마력 보유자로서의 공포였다. “본인이 그렇다면야.” 귀네비어는 그렇게 말하며 말을 아꼈다. 더 말하고 싶은 게 있지만 참았다. 두 사람이 행복하다면 됐다. 과거 마법의 나라인 뮈엘라였다면 모르지만 지금은 마력의 기본 지식조차 없는 힘의 나라인 뮈엘라다. 굳이 그녀가 알고 있는 걸 케이트도 알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세 마녀에게 마법 지식을 가르친 에녹이 케이트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말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귀네비어만의 생각이었다. “진짜로 괜찮은 거야?” 수잔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귀네비어와 로라가 말릴 틈도 없이 말했다. “괴물이 사랑하는 건 아가씨가 아니라 아가씨의 마력인데?” “네?” “수잔!” 귀네비어가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로라가 일어났다. 그녀는 케이트의 어깨를 감싸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학생들 공부하는 거 보러갈까요?” “에, 네?” 로라와 함께 교실로 이동하는 도중에 케이트는 뒤를 돌아봤다. 귀네비어가 수잔에게 뭐라고 화를 내는 게 보였다. 무슨 말일까.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짚이는 부분이 있다. 케이트는 교실과 학생들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이안은 마력 흡수자이고 마녀의 마력을 노린다고 했다. 그건 그녀가 겪어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안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그녀가 마녀이기 때문인걸까. 가슴 철렁한 생각이 떠올라서 케이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대로 이안과 계속 함께 해도 되는 걸까. 그녀는 이안과 함께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안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그의 감정이 케이트를 향한 게 아니라 케이트의 마력을 향한 것이라면 이건 옳지 못한 게 아닐까. “어쩌지.” 생각은 점점 멀리 나아갔다. 이안이 사랑하는 것이 케이트가 아니라 케이트의 마력이라면 그녀가 이안을 자신의 마력을 미끼로 해서 묶어 두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주먹 쥔 손이 떨려서 케이트는 두 손을 맞잡았다. 그녀는 이안이 좋다. 평생 함께 하고 싶고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이안도 그런 걸까. 그는 그렇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마력에 속고 있는 거라면 어쩌지.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울고 싶어졌다. “다녀오셨습니까, 아가씨.” 칼은 심각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케이트에게 모자를 받아 들었다. 무슨 일일까. 케이트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침에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과 이어져서 칼은 걱정이 되었다. 그는 하녀에게 케이트의 모자를 넘기고 그녀의 기분을 돋궈줄만한 달콤한 것을 가져오라 일렀다. “아가씨.” 케이트가 자기 방 거실에 몸을 늘어트리고 앉아있었다. 집사는 그의 등장에 당황해서 몸을 일으키는 케이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 안 좋은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아니에요.” 그렇게 말해도 케이트의 심각한 표정은 여전했다. 칼은 다시 물었다. “레인포레스트님께 연락할까요.” “네. 부탁드려요.” “그러셔도 연락, 네?” 반대할거라 생각했다. 칼은 케이트가 부르지 말라고 해도 부를 생각이었다. 케이트의 대답을 놓친 그는 놀라서 그녀를 다시 봤다. “아저씨께 잠시 뵙자고 전해 주시겠어요?”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건 어떨까요?” “그럼 감사하고요.” 집사는 잠시 주춤하다가 입을 열었다. “감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원하는 걸 이뤄드리는 게 제 일이니까요.” 에녹은 호건가에서 보낸 전령에게 연락을 받고 무슨 일인가 싶어 일찍 찾아왔다. 그는 아직 식사 준비 중이라는 말에 손을 젓고 케이트를 찾았다. “아가, 무슨 일이냐.” “아저씨.” 케이트는 에녹을 자기 방 거실로 안내했다. 이런 이야기는 단 둘이 조용히 하고 싶었다. 그녀는 하녀가 차를 내려놓고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알고 계셨어요?” “무엇을 말이냐?” “이안, 로엔경이요. 그 사람이 제 마력에 반응한다는 거, 알고 계셨어요?” 마력이라는 단어에서 케이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에녹은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너도 알고 있지 않았느냐.” “그게 아니라.”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사람이 절, 그, 사랑한다는 게 제가 아니라 제 마력일지도 모른다는 걸요.” 아. 에녹은 낭패스러운 표정을 감추기 위해 찻잔을 들었다. 케이트에게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던 사실이다. 하지만 언젠가 그녀가 알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마력 흡수자는 마력 보유자를 알아본다. 그들에게 가장 맛있는 것은 마력이기 때문이다. 이안의 눈에 케이트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만찬이나 다름이 없다. 그는 케이트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케이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에녹은 그녀가 정신을 잃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가 일어나 그녀 곁에 가려고 했을 때 케이트가 입을 열었다. “이안도 이걸 알고 있나요?” 글쎄. 에녹은 멈칫했다. 이안이 알까. 솔직히 그는 그가 어디까지 알고 어디까지 모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안은 모를 것 같은 정보를 알고 있기도 했고 알 것 같은 정보를 모르고 있기도 했다. 에드워드 에반스의 도움도 있겠지. 하지만 에반스 공작이 어디까지 이안에게 이야기 해줬는지 에녹은 모른다. 그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모를 것 같구나.” 케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케이트는 이안을 만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안이 찾아오는 것도 바쁘다거나 집에 없다는 이유로 돌려보냈다. 이안을 피하려고 한건 아니었다. 다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안은 처음엔 비스마르크가 막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한번 당한 적이 있으니까. 에녹이 케이트를 데려가서 이안과 만나지 못하게 했었으니 비스마르크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는 문제는 비스마르크가 아니라 케이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죄송합니다.” 칼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엔 무표정한 얼굴로 거절했지만 이제는 미안할 때도 됐다. 이안은 이미 열 번도 넘게 방문을 거절당했다. 이쯤 되면 이안도 어이가 없을 텐데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그저 그런가 라고 말한 뒤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일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했다. 가장 걸리는 일이라면 얼마 전 로엔 백작부인이 케이트를 불러 이야기한 것이겠지. 하지만 케이트가 그 일로 그를 피한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케이트라면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따질지언정 말없이 그를 피하거나 할 리가 없다고, 이안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인데. “본인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케이트는 앤과 대화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두 사람은 케이트의 파티 요리에 대해 의논했고 약간의 절충안으로 결정했다. 원래는 파티플래너가 할 일이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앤과 대화하는 일이니 케이트가 직접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는 식당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이안과 맞닥트렸다. “어.” 당황하는 케이트와 무표정한 이안.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케이트의 마부. 세 사람은 식당 앞에서 무슨 일인가 하고 잠시 서 있었다. 먼저 입을 연건 케이트였다. “오,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인건 아나.”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안다. 며칠째 이안을 피했으니 그가 화가 났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케이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화, 났어요?”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화났을 것 같아?” 화났구나. 케이트는 미간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사과하고 싶지만 그건 그녀가 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을 때나 할 행동이다. 그와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안은 그 태도에서 케이트가 여전히 자신을 피할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 그는 케이트에게 몸을 숙였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 어. 케이트가 뒤로 물러나려 하기 전에 이안의 손이 그녀의 팔을 꽉 잡고 있었다. “안 놔준다고 했을 텐데.”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부가 무슨 일인가 하고 다가오자 이안은 재빨리 그녀의 팔을 놓고 한걸음 물러났다. 어머. 케이트는 멍하니 이안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게 아니다. 케이트는 이안의 눈을 보고 숨을 삼켰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안.” 이번에는 케이트가 다가갔다. 그는 이안의 소매를 잡고 물었다. “조금만 생각 좀 하고요.”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생각하고 말고는 상관없었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해도,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감정을 가져도 상관없었다. 케이트 스미스는 그의 것이다. 그에겐 그것만이 중요했다. ============================ 작품 후기 ============================ 아마 오타가 좀 있을 건데~ 수정할 시간이 없어서....흑흑... 나중에 수정하겠습니다. 아마도... 00249 2. 검은 복도 =========================================================================                            또 그 곳이라고, 케이트는 생각했다. 이번에도 그녀는 어둡고 긴 복도에 있었다. 호건 저택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복도다. 끝을 알 수 없는. 케이트의 발은 여전히 그녀의 의지와 별도로 걷고 있었다. 끊임없이 걷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피곤해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다. 지금은 끊임없이 걸을 수 있지만, 언제까지 걸을 수 있는 걸까. 이렇게 계속해서 걸을 수 있을 리 없다. 언젠가는 발이 아플 거고, 다리에 힘이 풀릴 거다. 그리고 그때 그것이 쫓아오면, 그렇게 생각한 순간 뒤통수가 선뜻해졌다. 그것이 왔다. 케이트는 눈을 꼭 감았다. 무섭다. 차갑고 검은 그것은 허우적허우적 대며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발은 끊임없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검은 것도. 여기서 나가야한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이 복도를 벗어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부지런히 양 옆을 살피며 빠져나갈 수 있는 문을 찾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문은커녕 창문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전부 벽뿐. 석조 벽에 대리석으로 조각한 레이스가 장식되어 있는 똑같은 벽이 몇 미터나 이어졌다. 벗어나야 해. 등 뒤에서 검고 질척한 것이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알라나데일의 톰처럼 변했다가 죽은 데이지의 모습으로 변하기도 했다. 전부 죽은 사람이었지만 케이트는 깨닫지 못했다. “아아악!” 새벽이 파르스름하게 단장할 때쯤, 케이트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식은땀을 흘리는 그녀의 몸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아가씨!” 제일먼저 뛰어온 건 자넷이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소녀는 비명을 듣자마자 그것이 케이트라는 것을 알았다. 재빨리 달려 들어온 자넷을 붙잡고 케이트는 흐느껴 울었다. 무서운 꿈이었다. 어둡고 긴 복도를 그녀에게 저주를 퍼붓는 죽은 자들을 매달고 걸어 다녀야 하는 꿈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칼은 자넷 다음으로 케이트의 방에 도착했다. 그와 동시에 로알도 가운을 입고 부랴부랴 달려왔다. 집사는 하녀에게 따듯한 차에 브랜디를 넣어 가져오라고 시키고 케이트에게 다가갔다. 창백한 얼굴은 한 그녀는 와들와들 떨면서 울고 있었다. 눈물에 젖은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가 겁에 질려있다. “아가씨, 잠시 맥을 보겠습니다.” “괘, 괜찮,”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케이트는 숨을 헐떡였고 자넷이 깜짝 놀라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상태가 좋지 않다. 무슨 병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하고 걱정하는 두 사람에게 진맥을 살핀 로알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냥 좀 놀라신 것 같습니다.” “말도 안돼요!” 자넷의 고함에 케이트의 눈꺼풀이 움찔했다. 집사는 그녀에게 목소리를 낮추라고 눈짓한 뒤 입을 열었다. “놀라신 것 치고는 상태가 너무 안 좋은 것 아닙니까?” “그게.” 로알은 어쩔줄 몰라하며 말을 이었다. “젊은 아가씨들은 신경이 예민해서 간혹 이런 경우가 있어요. 스미스양이 이상한 게 아니예요.” 그의 말에 따르면 금지옥엽 귀하게 자란 아가씨일수록 예민해서 악몽에 크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칼과 자넷은 반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반쯤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케이트는 처음부터 이렇게 귀하게 자란 게 아니다. 그녀는 하녀로 일했고 이안의 수사를 도왔다. 칼은 케이트가 보기보다 엄청난 경험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굳이 비스마르크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알라나데일에서 사람이 몇 명이나 죽었고 케이트는 살인이 벌어지는 동안 그 저택에서 살았다. 살인을 목격하거나 시체를 봤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그때의 기억 때문에 이러는 지도 모르지.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넷을 내려다 봤다. 아가씨와 알라나데일에서 함께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사건이 커지면서 케이트가 자넷을 탈출 시켰고, 이리저리 떠돌던 자넷은 수도에서 일을 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제프리의 매춘사업에 팔려왔다. 이안과 제프리가 큐바인 거리를 습격한 것은 자넷이 팔려온 다음날의 일이었다. 다른 여자들에 비해 자넷은 베프리의 사업에 이용되기 전이었다. “자넷.” “네.” 칼은 아가씨와 함께 있고 싶다며 매달려 온 소녀를 내려다 봤다. 나이에 비해 왜소한 체구와 주눅 든 태도였지만 바지런하고 성실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한동안은 아가씨와 함께 있거라.” “네?” “잠은 옆방에서 자고.” 옆방이라면 몸종의 방이다. 수습하녀에서 일시적이긴 하지만 자넷은 일순간에 케이트의 몸종이 되었다. 당황하는 그녀에게 칼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처럼 혹여라도 아가씨께서 밤에 안 좋아 보이시거든, 깨워드려라. 알겠지?” “네.” 엄청난 임무를 맡은 것처럼 자넷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칼은 자넷의 가녀린 어깨를 가볍게 손으로 감싸쥐었다가 놓고 케이트에게 다가갔다. 케이트는 기진한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지쳤다. 피곤하고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너무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가씨, 차 드세요.” 칼의 부축을 받아 상체를 일으킨 케이트는 자넷에게 찻잔을 받아 한 모금 넘겼다. 따듯한 차 덕분에 얼어붙은 몸이 녹아드는 것 같아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기운을 차린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사죄의 말이었다. 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이 새벽에 여러분을 깨워서요. 할아버지도 일어나신 건 아니죠?” “괜찮습니다. 주인님께선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렇군요. 집사님도 그만 쉬세요. 저 때문에 고생하셨어요.” 또 이런다. 칼은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상냥하고 다정하게 자란 케이트를 볼 때마다 뿌듯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호건가의 후계자라면 언제 어디서 누가 그녀의 약점을 잡으려 할지 모른다. 좀 더 강해져야 한다. 칼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아가씨를 돌보는 건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걸로 미안해하지 마세요.” 다정한 꾸짖음에 케이트의 눈이 다시 젖어들었다.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이안이 보고 싶었다. 그가 결혼하자고 했을 때 미루지말고 했으면 좋았을걸 하는 이기심이 솟았다. 그랬다면 이미 결혼한 거 어쩌냐고, 지금처럼 고민 없이 포기하고 그와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녀석 상태가 안 좋다고?” 간밤에 케이트의 상태를 들은 비스마르크는 차를 마시다 말고 에잉하고 혀를 찼다. 새벽에 잠을 설친 탓에 케이트는 늦잠을 자고 있었다. 집사는 비스마르크의 잔을 채우며 대답했다. “네. 의사 말로는 조금 예민해서 그런거라고 합니다만.” 엘리자베스도 간혹 그랬다. 비스마르크의 머릿속이 휙하고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하나뿐인 막내딸 엘리자베스는 그애를 낳고 곧바로 죽은 어미를 닮아 약하고 사랑스러웠다. 간혹 그가 뭔가를 사주지 않으면 하루종일 졸라대다 결국 지쳐서 앓기도 했다. 그런 어린 딸이 웬 남자와 도망쳐서 타지에서 죽었다. 그것보라고, 자기 말 듣지 않아서 그 꼴 된 거 아니냐고 혀를 차는 한편 비스마르크는 어린 엘리자베스를 떠올리며 가슴이 아팠다. 절연하긴 했지만 애지중지 키웠던 것만은 사실이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네?” 집사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자 비스마르크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고 녀석이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냐. 내가 뭘 해주면 돼?” 투덜거리긴 해도 케이트를 생각하는 할아버지다. 집사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글쎄요. 하고 말을 이었다. “아가씨께 여쭤보겠습니다.” “됐어. 뭘 물어봐? 그냥 해줘.” 엘리자베스가 도망친 날 딸을 너무 오냐오냐 키웠다고 자책했는데, 결국 비스마르크는 딸을 닮은 손녀에게도 약했다. 비스마르크가 케이트가 원하는 건 다 해주라고 말했기 때문에 케이트의 파티준비는 쉽게 진행됐다. 파티 장소를 호건 저택으로 정해도 될지 몰라 망설였던 파티 플래너는 할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졌다는 말에 가장 신나했다. 신이 난건 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 유명한 호건 저택에 들어갈 수 있는 거냐고 놀라워했고 케이트를 부러워 했다. “네 할아버지가 널 정말 사랑하시나 보다.” 앤의 칭찬에 케이트는 멋쩍게 웃었다. 그런가? 잘 모르겠다. 비스마르크는 케이트와 단 둘이 있을 때 그녀에게 말을 건 적이 없다. 늘 누군가에게 투덜거리는 모습만 볼 뿐. 그래서 그녀도 호건 저택을 파티장으로 쓰는 것을 허락해 줬다는 사실에 약간 놀라워하고 있었다. “이안은 어때?” 문득 앤이 물었다. 케이트는 화이트 초콜릿과 체리를 넣어 만든 화이트 포레스트 케이크에 포크를 꽃아 넣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 “이안과 너 말야. 어떠냐고. 두 사람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떠돌던데.” “어, 어디서?” “어디긴 어디야.” 앤의 시선이 텅 빈 식당을 휘저었다. 브레이크 타임이라 정리하는 직원만 있을 뿐, 식당에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이 가장 이야기를 많이 하는 곳 중 하나잖아, 여기.” 그러네. 케이트는 케이크를 조각내며 쓰게 웃었다. 이안과 결혼. 할 수 있을까. 그녀의 심상치 않은 태도에 앤이 몸을 내밀며 물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응?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니긴. 네 표정이 이미 말 하고 있거든?” 그렇게 말해도 앤에게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고 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했다. 내가 마녀라고? 그래서 마력을 흡수하는 이안이 내 마력을 보고 나를 좋아하는 거라고? 말도 안 된다. 이런 이야기는 절대 말할 수 없다. 그녀의 손 아래에서 케이트가 흩어지고 있었다. 앤은 접시를 내려다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얘가? “먹을 거 가지고 장난치면 벌받아.” “아, 미안.” 그제야 케이트는 조각조각난 케이크를 한입 먹었다. 달콤한 케이크가 입안에 들어가자 약간이나마 우울한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걱정돼서.” “뭐가?” 케이크를 반쯤 비우자 이야기할 기운과 거짓말이 떠올랐다. 케이트는 우울하게 말했다. “결혼했는데, 이안이 날 사랑하는게 아니면 어떻게 해?” 완벽한 거짓말은 아니다. 그녀의 걱정은 이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니까. 앤은 느닷없는 케이트의 말에 눈을 크게 뜨더니 으하하하 하고 폭소를 터트렸다. 정리하고 있던 직원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보는 통에 케이트의 얼굴만 달아올랐다.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테이블을 몇 번 때리더니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럴리 없어.” “아니, 그러니까 만약에.” “만약에라도 그럴리 없다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앤의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창문을 가린 커튼을 젖히더니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보여?” “응?” “이안말야.” ============================ 작품 후기 ============================ 쨔잔~ 00250 2. 검은 복도 =========================================================================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진짜다. 진짜로 이안이 거기 서 있었다. “어, 언제?” 당황하는 그녀에게 앤이 조각 조각난 케이크를 먹으며 말했다. “아까. 너 가고 나서 이야기 좀 하자 길래 난 또 둘이 싸운 줄 알았지. 나한테 편들어 달라고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다고.” 그런 것 치고는 평온하다. 안절부절 못하는 케이트에 비해 앤은 남의 일처럼 덤덤했다. 남의 일이긴 하지.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해. 너까지 얽히게 해서.” “아니, 난 재미있는데?” 뭐?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앤은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남의 사랑 싸움만큼 재미있는 건 없잖아.” “강 건너 불구경이라는 거지.” “그렇지.”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케이트는 다시 의자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야할지 모르겠다. 이안에게 못할 짓이라는 것도 안다. 무엇보다 그녀가 이안을 사랑한다는 게 가장 가슴 아팠다. 이안이 그녀의 마력에 홀려있는 상태라면, 그러면 어쩌지. 그의 의지에 반해서 그녀가 그를 묶어두는 거라면 어쩌지. “이야기 해봐.” 앤이 말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의 접시를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왜 그런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럴 때는 차라리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네 걱정이 뭔지.” 맞는 말이다. 케이트는 어쩐지 신기한 기분이 들어 앤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는 약간 쑥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앤도 남자를 소개받았다고 했지. 기억이 떠올라서 케이트는 불쑥 물었다. “앤, 그 남자는 누구야?” “그 남자?” “너와 사귀는, 운 좋은 남자.” 앤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녀는 카나리아를 잡아먹은 배부른 고양이처럼 웃더니 손을 저으며 말했다. “내 연애보다, 네 연애먼저 걱정해. 내 걱정 해주려면 넌 아직도 멀었으니까.” 그럴지도 모른다. 케이트는 그녀가 늘 자신의 상담상대가 되어주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앤에 비하면 그녀는 아직도 부족할 것이다. “고마워.” 앤은 인사와 함께 돌아서는 케이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쩌냐니, 귀여운 걱정을 한다. “이안.” 이안은 식당을 빠져나와 자신에게 다가오는 케이트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친구를 만나러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어쩌면 케이트가 앤에게는 무언가 이야기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붉은색 머리카락이 봄바람에 가볍게 흩날렸다. 바람을 따라 케이트의 냄새가 흘러넘쳤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케이트의 손을 잡고 자신의 품으로 당겼다. “이야기할 마음에 드나?”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잠깐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게 며칠 전의 일이다. “약간은요.” 약간?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는 케이트를 내려다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두 사람이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오자 앤은 이야기 할 수 있도록 자리를 한 쪽에 마련해 주었다. 차를 내준 직원이 떠나자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은 아직도 이안의 손 안에 있었다. 커다란 손이 마치 그녀가 도망이라도 간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녀의 손을 쥐고 있었다. “케이트.” 이안은 나직하게 그녀를 재촉했다. 그녀가 자신을 피하는 이유가 뭘까. 피할 이유가 없다. 그가 지난 며칠간 열심히 생각해낸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내 어머니 때문인가.” “네?” “내 어머니께서 내게 지난번에 그런 이야기를 해서, 그래서 피하는 건가?” 지난번에 그런 이야기가 뭐지? 케이트의 머릿속에 천천히 실라의 말이 떠올랐다. 케이트가 호건 가라서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건 생각도 안 해봤다. 다른 너무 놀라운 걱정거리 때문에. “그, 그것 때문 아니에요.” 이안의 한쪽 눈썹이 다시 올라갔다. 그럼 대체 뭐란 말인가. 그는 당최 케이트가 그를 피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저기, 이안.” 케이트의 얼굴이 다시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무슨 일이지? 이안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터질 것처럼 붉은 뺨을 감쌌다. “질문이 있는데요.” “해.” “그게,” 아무리 그녀라 해도 이런 질문은 부끄럽다. 케이트는 주변을 살피고 침을 한번 삼킨 뒤 이안을 향해 몸을 내밀었다. 무슨 일인가 하던 이안은 케이트가 자신에게 몸을 내밀고도 망설이자 귀를 기울였다. “저기, 나, 나를 사랑해요?” “그래.”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다. 이안은 덤덤하게 대답하고 감싸 쥔 그녀의 손을 들어 자신의 입가에 가져갔다. 손마디에 이안의 입술이 닿았다. 케이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안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래. 너를 사랑해.” “진짜로요?” 이안의 머리가 기울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무슨 의미지?” “그러니까, 진짜 나를 사랑하는 거예요?”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 케이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그녀는 이안의 손에 잡힌 자신의 손을 빼려다 포기하고 다시 말했다. “나는 마녀잖아요?” “그래.” “당신은 마녀의 마력을 흡수하는 사람이고요.” “그래.” “그러니까, 당신이 날 좋아하는 게,” 무슨 소린지 알겠다. 이안은 케이트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아니.” “나 아직 말 안 끝났어요.” “들을 가치도 없다.” 이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를 피하나 했더니 고작 그런 이유로 케이트가 그에게서 도망치려는 게 불쾌했다. “하지만 이안,” 케이트도 그를 따라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당신이 그랬잖아요. 저한테 더 좋은 남자가 생기면 어쩌냐고.” 그래.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안은 어이가 없어서 케이트를 쳐다봤다. 그녀는 이안에게 가까이 붙어서 속삭였다. “만약, 만약에 당신에게 더 좋은 여자가 생기면요? 진짜 사랑하는 여자가 나타나면요?” 이안이 진짜 사랑하는 여자. 그런 여자가 나타나면 어떻게 하지. 아니, 어쩌면. 이안이 진짜 사랑하는 여자가 나타나도 그녀의 마력에 홀려 눈치 채지 못하면, 그러면 어떻게 하지? 케이트의 두려움이 드러났다. “나한테 더 좋은 여자는 없어.” 이안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는 다시 케이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너뿐이야. 너만 있으면 돼.” “하지만,” “케이트.” 무슨 일인가 했더니 쓸모없는 걱정이었잖아. 케이트의 걱정을 단번에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며 이안은 그녀의 몸을 들어 올렸다. “아!” 예고도 없이 발이 땅바닥에서 떨어지자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이안의 어깨를 짚었다. 눈 높이가 비슷해졌다. 호박색 눈동자가 그녀를 강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네가 마녀기 때문에 너를 사랑하게 된지도 모르지.”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계기일 뿐이야. 나는 너를 사랑하고 내 인생에 여자는 너 하나로 충분하다. 네가 뭐라고 해도 상관없어. 너는 내 것이고, 나는 네 것이다.” 슬픔과 안타까움이 케이트의 마음속에 몰려왔다. 뒤 이어 행복함과 기쁨도. 어찌해야할 바를 모를 감각에 케이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눈앞의 그녀보다 훨씬 큰 이 남자가 안쓰러우면서 동시에 사랑스러웠다.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안.” 케이트의 가는 팔이 이안의 목을 감았다. 그녀는 이안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당신은 내거예요. 그래서 겁이 나는 거예요. 내가 당신의 진짜가 아닐까 봐.” ============================ 작품 후기 ============================ 늘 올려야지~ 하고 딴일 하다가 잊어버리네요 아놔;;; 요일을 정해서 올려야 할까봐요. 00251 2. 검은 복도 =========================================================================                            그녀가 그의 진짜가 아닐까봐 겁이 난다고 했다. 그의 품안에서, 그의 케이트가. 이안은 식탁에 앉아 빈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케이트를 이 손에 안았을 때의 감각이 생생하다. 그것보다 더 진짜일 수가 있을까. “이안, 괜찮니?” 실라는 요즘 들어 조금 달라진 아들의 모습에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가장 아픈 손가락인 둘째아들은 케이트를 만나고부터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케이트가 곁에 있을 때 뿐이었다. 그녀는 살면서 이안이 한 여자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을 처음 봤다. 몇 번이나 뚫어져라 쳐다본다거나, 지나가면서 슬쩍 손이나 뺨을 만진다거나. 이 아이가 사랑에 빠졌구나. 무표정한 얼굴임에도 실라는 이안의 행동에서 그것을 알았다. 하지만 얼마 전 케이트를 불러 이야기 한 후로 이안의 태도는 그보다 조금 더 이상해졌다. 지금처럼 인상을 쓴 채 빈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일이 생겼다. 심지어 어제는 자기 방에서 거울을 골똘히 쳐다보고 있었다고 했다. 물론, 이안이 말한 건 아니다. 실라의 몸종인 실비아가 해준 말이다. 그리고 실비아는 이안의 셔츠를 다림질하고 가져다 놓던 하인에게 들었다고 했다. 재미있는 점은 하인은 물론 실비아와 실라까지 아무도 이안이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머니,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안의 질문에 실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물어본다면 바로 질문을 꺼낼 아이다. 이렇게 물어봐도 되느냐고 물어본 적은 그다지 많지 않다. 실라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케이트와의 일인 걸까. “무슨 일이니?”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셨습니까?” 식당 안이 얼어붙었다. 시중을 들던 하인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트릴 뻔 했다. 문 앞에 서있던 집사가 재빨리 하인들에게 물을 가져오라며 내보낸 덕에 실라는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실라와 전 로엔 백작이 그리 다정한 사이가 아니었다는 것은 로엔 백작 가의 사람이라면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배우자로 존경했을 뿐, 거기에 사랑은 없었다. 하지만 귀족 부부는 대부분 그렇지 않던가. 사랑해서 결혼하기 보다는 결혼해서 사는 동안 정이 드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아니, 사랑하지는 않았지.” 실라는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 남편이자 이 집안의 주인으로서 존중했단다.” 이안도 부부란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부부는 귀족 가에서는 그리 흔치 않다. 그는 케이트를 만나기 전까지 적당히 괜찮은 귀족 영애를 만나 결혼할 것이라 생각했다. 사랑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적당히, 어머니인 실라가 소개해주는 여자와 결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케이트를 만났다. 그것만으로 이안의 세계는 완전히 달라졌다. 아무것도 없던 중심에 케이트가 올라갔다. 그의 세계는 케이트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스미스 양과 무슨 일이라도 있니?” 이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실라는 다시 물었다. 그녀가 불러서 이야기 한 것 때문에 스미스 양이 화가 난 걸까. 그럴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실라가 불렀을 때, 케이트는 이안이 아니라 실라에게 직접 말했다. 그녀의 걱정은 공평하지 않다고. “한 가지만 더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처음 저를 낳은 친모가 나타났을 때, 걱정하셨습니까?” 다시 식당 안이 얼어붙었다. 실라는 잠시 얼어붙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네 친어머니에 대해 잘 모른단다.”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 얼굴에 실라는 쓰게 웃었다. 어린 이안이 로엔 백작 가의 저택 앞에 나타난 이후로 실라는 이안의 친모에 대해 떠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로엔 백작은 부인을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배우자를 존중했고 그 이유로 자신이 만나는 여자를 실라가 알지 못하도록 숨기는 정도의 배려는 했다. 같은 이유로 로엔 백작은 이안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에 물어볼 수가 없었다. 실라도 굳이 어떤 여자였냐고 묻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 당시에 아르고가 네 살쯤 됐을 텐데, 그때 나는 정신이 없어서 걱정할 틈이 없기도 했지.” 아르고와 이안의 나이는 네 살 차이난다. 실라는 이안이 태어났을 때쯤에 그녀가 두 번째 유산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이안의 나이로 보건데 그 시기쯤일 것이다. 전 로엔 백작이 이안의 모친과 바람을 피운 것이. “스미스양이, 네가 부정을 저지를까봐 걱정하니?” 그런 건 아니다. 이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실라에게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애매하다. 이안은 케이트가 마녀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그런 마녀의 마력을 흡수하는 괴물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평생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굳이 그런 이야기를 실라에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실라가 알아봤자 걱정하거나 케이트와의 관계를 반대할 것이다. 이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실라는 그것이 긍정이라고 생각하고 약간 흥분해서 말했다. “네가 그럴 리 없잖니.” 다 큰 아들을 어린아이 취급 하는 실라의 행동에 이안은 잠시 말을 잃었다. 실라는 손을 뻗어 이안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고 말했다. “내가 아는 너는 그럴 리 없어. 걱정하지 마렴.” 묘하게도 실라는 이안이 죽은 로엔 백작과 상황이 꽤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 로엔 백작 역시 자신보다 훨씬 부유한 집안에서 아내를 맞이했다. 그리고 로엔 가에 재정적 위험이 닥쳤을 때 실라가 가져온 지참금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전 로엔 백작이 실라를 한부로 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다. 하지만 이안과 케이트는 다르다. 그녀는 이안의 손을 다독이며 말했다. “너는 스미스 양을 사랑하잖니?”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식사가 끝나고 난 뒤의 일이었다. 식사를 마친 실라가 피곤하다며 자기 방으로 돌아가자 혼자 남은 이안은 저택 밖으로 나와 담배를 꺼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을 찾는 그에게 집사가 불 붙인 성냥을 내밀었다. 집사도 담배를 피우던가. 잘 모른다. 못 본 것 같지만 이안은 관심 없는 것을 금세 잃어버리곤 하니 봤지만 기억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집사는 성냥에 불을 끄며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말대로 쓸데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살면서 이안이 이정도로 고민하는 것을 처음봤다. 이안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집사를 쳐다봤다. 불쾌해 하는 기색은 없다. 하지만 이 도련님은 늘 감정표현이 없었다. 그러니 불쾌해 하는건지 아닌지 모른다. 집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련님의 어머니를 알고 있습니다.”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알고 있다고? 그 표정을 본 집사가 재빨리 말을 고쳤다. “정확히 말하면 안다기보다는 이 저택의 하녀로 일하셨던 거지만요.” “그런가.” 그건 이안도 알고 있다. 집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마님께서 말씀하신 데로 마님은 돌아가신 백작님과 도련님의 어머님의 관계를 모르셨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나.” “도련님의 어머니를 쫓아낸 게 저니까요.” 휙하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집사는 의연한 표정으로 이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이안이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이 저택에서 쫓아낸 게 그라고 고백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래서? 라는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약간 김이 빠진 집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화 내지 않으실 겁니까?” “왜 쫓아냈는지 말해보게.” 이렇게 무심할 수도 있나. 집사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안이 무섭다고는 생각했지만 이정도 일 줄은 몰랐다. “돌아가신 백작님의 처소에서 나오는 것을 봤습니다.” 이번에도 이안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사는 이어서 말했다. “그때 백작부인께서 유산을 하셨을 때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도련님께는 죄송하지만, 백작부인을 위해 제가 쫓아냈습니다.” 그런가. 이안은 담배연기를 토해냈다. 집사의 걱정과 달리 이안은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 그에게 어머니는 실라 한 분 뿐이고, 그를 낳아준 여자는 친모일 뿐이었다. 이안은 병에 걸려 죽어가던 핼쑥한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가 이안에게서 본 것은 사랑하는 남자, 로엔 백작이었다. 케이트는 그녀가 이안의 진짜가 아닐까봐 겁이 난다고 했다. 그는 그녀의 자그마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다시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의 진짜. 재미있게도 그는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진짜가 되었던 적이 없다. 실라에게는 그녀가 잃은 아이들을 대신하는 존재였고 전 로엔 백작에게는 부정의 증거였다. 그를 낳아준 여자에게는 사랑하는 남자 대신이었다. 케이트가 그의 진짜가 아니면 어떤가. 그가 그녀의 진짜면 된다. 이안은 집사에게 알겠다고 말한 뒤 담배꽁초를 버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점이 떠올라 다시 돌아왔다. “한가지 물어볼 게 있네.” “네.” “내 친모를 쫓아냈을 때 어머니께서 유산했을 때라고 했는데.” “네. 그랬습니다.” “그게 몇 번째 유산이었지?” 집사의 눈이 커졌다. 그는 이안의 질문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게 중요한가? 하지만 이안의 표정은 늘 그렇듯 진지했다. “두 번째였을 겁니다. 지금 주인님이 태어나신 후니까요.” 실라는 세 번 유산했다. 아르고가 태어나기 전에 한 번, 아르고가 태어나고 나서 두 번. 그 두 번은 각각 아르고가 세 살 때와 열 살 때였다. 이안이 찾아온 것은 아르고가 열 살 때였으니 집사가 이안의 친모를 쫓아낸 것은 아르고가 세 살 때가 맞을 것이다. “그렇군.” 시간이 맞지 않는다. 이안과 아르고는 네 살 차이가 난다. 일 년 정도의 오차라 집사와 실라는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안에게는 충분히 걸리는 일이었다. 그는 집사의 어깨를 한번 툭 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고맙네.” ============================ 작품 후기 ============================ 으어어어 안녕하세요 자기 전에 어느분이 블로그에 왜 뮈엘라 안올려, 이 게으름뱅이야! 빵야빵야! 하셔서 깜짝 놀라 달려왔습니다. 아니, 실제로 상당히 온건하게 말씀해 주셨어요. 정신이 없어서 이야기를 들어야 아차! 하게 되네요. 죄송합니다. 00252 2. 검은 복도 =========================================================================                            “구빈원이시라고요?” 케이트는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보며 물었다. 여기저기 기워 누덕한 옷과 앞코가 닳아 반질반질한 구두. 누가 봐도 여자의 옷차림은 그리 좋지 않았다. “네. 저는 구빈원 원장인데 모두 좋으신 분들의 도움으로 꾸려나가고 있답니다.” 여자가 손수건을 들어 눈물을 찍어냈다. 그녀의 옆에 앉은 바싹 마른 여자아이가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호건 가에서 지원만 해주신다면, 이 아이 같은 아이들이 무사히 지낼 수 있을 거예요.” 안타깝다. 케이트는 몸을 내밀어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네 이름은 뭐니?” 여자아이는 아무 말 없이 원장을 쳐다봤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던 원장은 아이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대답해야지.” 그녀의 말에 여자아이가 더욱 겁을 집어먹은 표정을 지었다. 원장이 부드럽게 말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두려웠다. 케이트는 다시 물었다. “이름을 알려줄래?” “아, 아이샤요.” “그래, 아이샤. 몇 살이니?” 이번에도 아이샤는 원장을 쳐다봤다. 묻는 대로 대답하라는 말에 소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열 두 살이요.” 저런. 케이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물러났다. 아홉 살인 줄 알았다. 그만큼 나이보다 작고 말랐다. 그녀는 원장에게 물었다. “구빈원에 모두 몇 명이 있나요?” “스물 아니, 마흔 명이랍니다.” 과연? 케이트의 시선이 한 쪽에 떨어져 앉은 자넷을 향했다. 그녀는 아이샤를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일단은 알겠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알겠습니다. 어디를 후원할지 고르고 있는 중이라서요. 아이샤를 보니 그곳을 후보에 넣어도 좋을 것 같네요.” “그, 그럼 저희를 후원해 주신다는 건가요?” “정확한 건 조만간 구빈원을 살펴본 뒤에 결정할 예정이에요.” “살펴본다는 건…?” “마흔 명이라고 하셨죠? 조만간 찾아가서 상태가 어떤지 어느정도 후원해야 할지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빈원 원장이 케이트의 말에 크게 당황하는 게 보였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 바쁘신데 굳이 찾아오실 필요까지는,” “아니에요.” 케이트는 아이샤에게 미소를 보낸 뒤 원장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얼마나 후원이 필요한지, 정확한건 제 눈으로 보고 결정하는 편이라서요. 일단 후보에 넣어두고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넷이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라는 두 사람의 태도에 원장은 아이샤를 끌고 터덜터덜 호건 가를 빠져나갔다. “어때?” 케이트는 재빨리 테이블을 정리하는 자넷에게 물었다. 그녀는 다른 자신의 잔에 차를 따른 뒤 두 손으로 잔을 움켜잡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자넷은 테이블을 정리하러 들어온 하녀에게 정리한 다과를 건넨 뒤 돌아보았다. 과자가 좀 남았다. 아이샤가 과자를 먹고 싶어 계속 시선을 보내던 것이 기억에 남아 좀 가슴 아팠다. “그 여자가 거짓말 하고 있었어요.” 그랬다. 자넷의 말에 케이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구빈원에 모두 몇 명이 있느냐고 묻자 분명 스무 명정도 있다고 말하려가 말을 바꿨다. 그리고 그녀가 조만간 찾아가 살펴보겠다고 하자 당황했다. 뭔가를 속인다는 증거다. “후원금을 구빈원에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음, 그렇겠지.” 뭔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제프리에게서 여자들을 구해낸 뒤 케이트는 그 전부터 가볍게 생각했던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이안이 구해낸 여자들을 위해 거취가 될만한 건물을 사고 그녀들이 사회생활을 할수 있을 만한 교육을 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그녀가 알게 된 것은 뮈엘라에서 여자가 할 만한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힘의 나라인 뮈엘라에서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여자들은 할 만 한 일이 없었다. 대부분이 요리, 세탁, 재봉과 같은 일이다. 그러다 보니 가장 인기 있는 일이 어느 지체 높은 집안의 하녀가 되는 일이라니 말 다했다. 글을 가르쳐보면 어떨까. 케이트가 그 생각을 한 것은 공원에서 신문을 놓고 뭉쳐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을 봤을 때였다.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남자가 한자리에 앉아 뭔가를 끼적끼적 쓴다는 걸 우습게 여기기 때문에 뮈엘라의 문맹률은 낮았지만 생각해보면 전문직들은 대부분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수사관이 그렇고 변호사도 그렇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쳐서 변호사 보조나 대독자로 일할 수 있게 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케이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 것은 그녀의 경험덕분에 떠오를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부모님 덕분에 글을 배울 수 있었는데 상당히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타운 하우스에서 실라를 위해 대필을 했고 큐바인 하우스에서 시나몬을 위해 신문을 읽어주었다. 하다못해 알라나데일에서도 데일남작부인을 위해 우체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녀가 주문한 책을 받아오기 위해서. “어라?”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보니 데일남작 부인을 그녀에게 책을 받아오라고 몇 번이나 심부름을 시켰다. 그 말은 그녀가 책을 읽을 수 있다는 뜻이다. 분명 알라나데일의 마지막 밤에 마법 북을 이용해 마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데일남작부부의 자식들은 어떨까. 케이트는 사건이 벌어지기 전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지않은 네일 남작의 아들 마이크과 이미 시집간 딸 둘을 떠올렸다. 분명 케이트가 이안과 함께 수도로 올라왔을 때 딸 둘은 부모님과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만난 지 몇 년이나 지났고 연락하지 않은지도 꽤 되었다고 했다. 거기에 딸 부부의 집을 수색했을 때 마법 관련한 물건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이안은 딸들은 관련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했다. “괜찮으세요?” 자넷의 말에 케이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무 오래 생각에 잠겨있었던 모양이다. 크게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부모님이 불법 마법을 사용하다 잡혔다는 소문이 퍼지자 데일 남작의 딸들은 사교계의 소문을 피해 지방으로 가버렸다. 설령 그녀들이 데일 남작부인에게 글을 배웠다 해도 그것을 마법을 사용하는데 썼다는 증거는 없다. 데일남작 부부는 아직도 감옥에 투옥중이고 마법사용뿐 아니라 몇 건의 살인을 사주했기 때문에 평생 감옥에서 나올 수 없다. 사주를 받아 살인을 저지른 빌은 이미 몇 달전에 사형에 처해졌다. 이안은 굳이 케이트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들리는 소문으로 살인을 저질러 사형당한 남자가 빌이라는 것을 알았다. “응. 괜찮아. 나갈 준비를 해줄래?” “어딜 가시게요?” “학교에 가보려고.” ‘학교’란 케이트가 여자들을 먹이고 재우고 가르치는 곳을 말한다. 자넷이 케이트가 나갈 준비를 하는 사이 그녀는 잠시 비스마르크에게 나갔다 오겠다고 말하기 위해 이 층으로 올라갔다. “우으으.” 낮은, 웅얼거리는 듯한 신음소리가 이층 복도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케이트는 계단을 올라다가 복도에서 흐느적흐느적 배회하는 사람을 발견하고 움찔 멈췄다. 부스스한 머리에 잠옷차림새의 에스메랄다가 복도를 힘없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으, 우으, 으….”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신음에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등줄기가 오싹했다. 제프리의 시신을 보는 순간 혼절한 에스메랄다는 깨어나서 아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했다. 소리 지르고 몸부림치던 그녀는 빠른 속도로 미쳐갔다. 고작 며칠 사이에 에스메랄다는 본래의 화려하게 꾸민 외모를 잃고 부스스한 머리와 푸석한 피부로 넋을 잃고 침대에 누워있게 되었다. 때때로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물건을 부수기도 했기 때문에 늘 그녀의 곁에 사람이 붙어있어야 했다. 비스마르크는 썩 내쫓으라고 했지만 그래도 호건 가의 사람이다. 케이트는 그럴 수 없어 저택의 안쪽에 그녀의 방을 꾸미고 하루 종일 그녀를 지켜볼 사람을 고용했다. 어떻게 하지. 에스메랄다에게 다가가도 되는 걸까. 케이트가 고민할 때였다. 그녀의 뒤에서 에스메랄다를 돌보는 하녀가 하녀용 계단을 올라오다가 케이트의 모습을 보고 다가왔다. “아가씨?” “아, 멜. 어디 다녀왔어요?” “네. 호건부인께서 구토를 하셔서.” 과연. 옷을 갈아입고 온 모양이다. 케이트는 자리를 비운 일로 혼날까 싶어 불안해하는 하녀에게 빙그레 미소지어보였다. “부인이 복도에 나와 계셔서 무슨 일인가 했어요.” “어머나!” 그제야 복도 저쪽을 배회하는 에스메랄다를 알아차린 멜이 후다닥 그녀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에스메랄다는 거칠게 굴지 않고 하녀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돌아갔다. 별 일 아니었구나. 괜스레 긴장한 게 부끄러워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 작품 후기 ============================ 히이익...죄송합니다.... 때리지 마세요! 돌 던지지 마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아. 잊었던거 아닙니다아. 놓은거 아닙니다아. 지난주에 가족들과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 후로 바로 후리공 마감이 닥쳐서 + 더위에 허덕이다 왔습니다. 더워서 밤에 잠을 못자고 잠을 못자니 글을 못쓰고의 크리라 이번 여름은 진짜 힘들것 같네요... 차라리 후리공이 끝날때까지 뮈엘라를 중단해볼까...했는데 중단하나 띄엄띄엄이라도 나가나 마찬가지일것 같아서 + 마지막 부라서 이대로 가겠습니다. 00253 2. 검은 복도 =========================================================================                            “어머, 어서 와요.” 느긋하게 앉아 차를 마시던 두 여자가 케이트를 보고 미소 지었다. 수잔은 수업을 하러 간 모양이다. 케이트는 귀네비어가 챙겨주는 의자에 앉아 로라에게 찻잔을 건네받았다. “그러고 보니 다른 분들은 안 드려도 될까?” 귀네비어의 말에 로라가 찻주전자를 다시 집어 들었다. 세 사람은 창문 너머로 복도에 서 있는 남자들을 쳐다봤다. 전부 호건가의 상속녀인 케이트를 지키기 위한 남자들이다. “네. 괜찮아요. 저분들은 아무것도 안 드세요.” “어머, 목마르지 않을까?” 로라의 말에 케이트는 쓰게 웃었다. 마녀에게 한 번 크게 당한 뒤로 에녹은 케이트의 경호를 맡은 사람들에게 저택 외부에서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에녹의 지시는 그대로 호건 가의 집사인 칼이 이어받았다. 레인포레스트 저택에서는 미안해서 외출을 삼갔던 케이트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다.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남자들을 쳐다보고 찻잔을 입에 댔다. 호건가의 상속녀로 할 일이 많았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비스마르크는 케이트에게 자신의 사업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무기를 만들고 어떻게 유통하는지. 사업체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그녀는 아직 몰랐지만 언젠가 비스마르크는 케이트에게 돈을 이용해서 귀족들을 어떻게 굴복시키는지도 알려줄 예정이었다.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비스마르크를 대신해서 움직이다 보면 케이트의 행동 범위는 넓어지기 마련이라, 남자들에게는 미안해도 어쩔 수가 없다. “수업하는 거 보러왔어요?” 케이트가 목을 축이자 귀네비어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이 학원은 케이트가 오갈 데 없는 여자들을 위해 차린 곳이고 그녀의 돈을 써서 여자들의 의식주뿐 아니라 세 마녀의 임금까지 지급하고 있다. 그러니 언제라도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확인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오늘은 그것을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케이트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 억지에 여기 남아주셔서 감사해요. 수도를 떠나려고 하셨는데.” “됐어요, 됐어.” 귀네비어는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케이트의 감사를 거부했다. 세 마녀가 수도를 떠나려 한 것은 수사관인 이안에게서 도망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제프리 호건의 죽음과 함께 비밀 수사관 이안이 사악한 마녀를 물리치면서 수도는 마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수사관은 물론이고 치안관들까지 어딘가 숨어있을지 모를 마녀를 찾아내 물리치겠다는 가소롭고도 희망찬 꿈에 부풀어 있었다. 거기에는 에드워드 에반스 공작이 마녀를 물리친 공을 치하하여 이안 로엔 경을 수사관장으로 특진시키고 귀족 작위를 내리려 한다는 소문도 한몫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이 시점에 수도를 떠나려는 것은 위험할 수 있었다. 나뭇잎은 숲에 숨기랬다고, 케이트는 오갈 데 없는 여자들을 돌봐주고 가르쳐줄 겸 세 마녀를 학원의 강사로 고용했다. “덕분에 우리도 의심 안 받고 좋지, 뭐.” “그래요. 그 수사관이 우리를 잡으려고만 안 한다면야.” 로라의 말에 케이트는 쓰게 웃었다. 이안은 세 마녀에 대해 잠시 잊고 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기억해 낼 것이다. 그때 그녀가 이안에게서 이 여자들을 지켜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 수사관 때문에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 건데요.” “응?” 케이트는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제가 왔을 때 그러셨잖아요. 이안이 사랑하는 건 제가 아니라 제 마력이라고요.” 이런. 로라와 귀네비어는 재빨리 시선을 교환했다. 수잔의 입방정은 그렇지 않아도 문제다. 그녀가 말실수하고 재빨리 케이트를 내보낸 뒤 귀네비어는 수잔에게 신신당부했다. 케이트 앞에서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엄밀히 따지면 그렇긴 한데.” “아닌 경우도 있다는 건가요?” 케이트의 질문에 귀네비어는 입을 다물었다. 수잔의 말에 틀린 것은 없다. 괴물이 원하는 건 마력, 그 자체다. 그들은 게걸스럽게 마력을 흡수했고, 마력을 모두 빼앗긴 마녀가 죽거나 쇠약해지는 건 당연한 순서이다. 하지만 귀네비어와 로라가 선뜻 말할 수 없는 건 괴물과 마녀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마법의 나라였던 뮈엘라는 어느 순간 무인들의 반란이 일어나 힘의 나라로 뒤집어졌다. 천하게 여겨진 무인들은 마법사와 지식인들의 경멸을 받으며 상당히 치욕스럽게 살았다. 수습 기사들은 마법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실험대상이 되기까지 했다. 그런 것들이 차곡차곡 모여 무인들에게 마법에 대한 공포와 분노가 자라났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장군의 아들이 마법사들의 빈정거림에 분을 참지 못하고 때렸다가 마법으로 공격당해 죽으면서 폭발했다. 장군을 비롯한 무인들은 왕궁으로 몰려갔고 닥치는 대로 마법사를 죽이기 시작했다. 마법사의 파괴력이 높다 해도 이미 수많은 무인은 분노로 눈앞에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그들에게 왕궁 내의 기사들이 협조하자 뮈엘라의 판도는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잠들어 있다가 그대로 죽거나 잡힌 마법사들이 어마어마했고, 아들을 처참하게 잃은 장군은 왕의 목숨을 위협했다. 마법사를 몰아내거나, 여기서 왕궁이 무너지거나. 왕궁이 무너지는 것보다 목에 겨눠진 날카로운 칼날에 겁을 집어먹은 왕은 장군의 요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인의 해방 시대가 도래하면서 나라 안의 마법사들은 나라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도망친 마법사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마법의 나라로 번성했던 만큼 뮈엘라는 마법으로 이뤄진 건물이 많았고 그것을 지탱할 마법사가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뮈엘라의 발전한 마법 지식이 적국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무인들은 마법사들의 이동을 차단했다. 꼼짝없이 뮈엘라에 갇히게 된 마법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숨죽여 살기 시작했다. 몇몇 마법사만이 왕궁에 협조해 마법 건물을 유지했을 뿐이다. 이 시기에 마법서 적이 파괴되었다. 왕궁과 상아탑에 있던 수많은 마법 서적은 무인들의 손에 의해 책장에서 떨어져 나와 광장에서 불에 탔다. 그 불이 어찌나 오랫동안 거세게 타올랐던지 스무 밤이 지나도록 광장 주변은 뜨겁고 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보유자와 흡수자의 연구는 그 시기에 전부 소실되었답니다.” 귀네비어는 뮈엘라의 역사를 이야기한 뒤 그렇게 덧붙였다. 어쩌면 왕궁에 숨겨뒀을지도 모르지만,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럼 흡수자가 보유자의 마력을 사랑한다는 건 알 수 없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로라가 케이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마력 흡수자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마녀들 사이에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어요. 진짜 마녀들 말이에요.” 귀네비어가 목소리를 낮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둠의 사랑을 받는 자여, 라고 시작하는 노래였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둠은 빛을 원했기 때문에 빛을 가진 여자에게 접근했다. 여자는 어둠을 사랑했지만, 어둠이 사랑한 건 여자가 아니었다. 어둠은 여자의 빛을 먹어치우고, 또 먹어치웠다. 결국 빛을 전부 빼앗긴 여자는 죽음이 되었다. 허무가 되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런 가사에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괴물이 마녀를 죽게 하는 건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안이 그녀를 죽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어둠이 사랑한 건 여자가 아니라는 부분은 신경 쓰인다. “노래 가사처럼 그는 제 마력 때문에 저를 사랑하는 걸까요.” 케이트의 중얼거림에 귀네비어와 로라는 다시 서로를 쳐다봤다. 그제야 두 사람은 케이트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떠올랐다. 마녀는 이성에게 인기 있기 마련이다. 그건 설령 괴물이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다. 귀네비어가 입을 열었다. “스미스 양, 마녀가 이성에게 인기가 좋다는 건 알고 있죠?” “네? 네에.” “사실 나는 이 나이까지 결혼을 한 적이 없어요. 남자와 교제를 하려고 하면 부끄럽지만 두려웠거든요.” 뭐가요? 라고 물어보려다가 케이트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귀네비어는 케이트의 손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 마녀들은 이성을 끌게 돼요. 때때로 그런 마녀도 있더라고요. 어린 나이에 부유한 남자를 유혹해서 본처 자리를 차지하는.” 케이트는 그녀 주위에 있었던 남자들을 떠올렸다. 이안을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그냥 평범한 하녀였다. 그러다가 이안을 만나 에녹의 봉인이 망가지면서 곤란한 남자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빌이나 데일 남작의 막내아들 마이크. 지금은 죽은 제프리. 아직도 때때로 그녀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이 있다. 하지만 다행히 케이트는 호건 가의 상속녀이고 그 점을 잘 이용하고 있었다. “그런걸 보다 보면 무서운 거예요.” 귀네비어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이 남자는 정말로 날 사랑하는 걸까. 하고 말이죠.” 그녀와 똑같다. 케이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른 점은 귀네비어가 모든 남자에게 그런 생각을 했다는 점이겠지.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생각도 해요. 이 남자가 내 마력 때문에 날 사랑하면 어때? 내가 사랑하면 되잖아. 하고요.” “하지만 그래 버리면 이안에게 진짜 좋은 사람이 나타났을 땐 어떻게 해요?” “저런.” 딱하다는 듯 귀네비어와 로라가 혀를 찼다. 로라가 불쑥 물었다. “만약 그게 당신이면요?” “네?” “로엔 경에게 가장 좋은 사람이 당신이면 어떻게 할 거냐고요.” 그럴 리없다 라고 대답하려던 케이트는 멈칫했다. 두 사람의 말이 맞다. 그녀보다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고 그녀가 가장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 “스미스 양, 그건 로엔 경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에게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당신은 로엔 경이 당신을 떠나길 바라요?” 그렇지 않았다. 케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얼마나 바보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한결 얼굴이 밝아진 그녀를 보며 두 여자는 빙그레 웃었다. “감사합니다.” 케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건넸다. 이곳을 나가서 다른 곳도 들러봐야 한다. 그녀는 로라와 귀네비어의 인사를 받으며 건물을 나가다 문득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 노래는 누구에게 배우신 건가요?” “나는 내 어머니에게 배웠어요.” 귀네비어가 말했다. “내 어머니는 나와 같은 마녀였으니까요. 로라는,” “저는 당신의 대부에게 배웠답니다.” 아저씨께? 놀란 케이트의 표정에 귀네비어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노래를 만든 것도 아마 그분일 거예요.” 더더욱 놀라운 사실이다. 하지만 케이트는 곧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에녹은 뮈엘라에 존재하는 마녀를 돌봐주었고 지켜주었다. 세 마녀도 수도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도와주려 했고 케이트의 마력을 봉인하기도 했다. 그녀의 주변에서 이안의 위험성을 제일 먼저 깨달은 자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묻기 전에 그분께 먼저 찾아가는 게 더 좋았을 텐데.” 로라와 귀네비어의 말에 케이트는 얼굴을 붉혔다. 잘못 찾아왔다. 이런 것은 에녹이 더 잘 알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아저씨께 묻기 전에 여러분께 먼저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아저씨는 조금,” 이안을 좋아하지 않으시니까요. 케이트가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귀네비어는 그녀의 손등을 다독이며 위로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후후후....여러분 손에 들린 돌이 잘 보이네요. 자 절 치세요! 전 돌에 맞아도 할말이 없으니까요! 이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일단 후작과 수리공 연재분을 마지막까지 넘기고 왔습니다. 중간중간 뮈엘라도 병행하려고 했는데,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흑흑...죄송합니다. 그래도 후작과 수리공 끝났으니 이제 뮈엘라로 귀환합니다! 마지막 7부니까요!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원래대로 빨간 날 제외하고 평일 하루 한편씩 올라옵니다. 가능한 11시 ~ 12시 사이에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끝난 후작과 수리공은 이북과 개인지로 나올 예정입니다. 개인지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해서 이런저런 제 욕심대로 만들어 볼 생각이예요. 당연히 19금이 될거고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지만 19금 씬이나 외전 부분을 추가하기 위해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표지는 리쥬아님께서 주셨습니다. 00254 2. 검은 복도 =========================================================================                            케이트가 건물을 나왔다. 경호원들은 재빨리 주변을 살피며 케이트 주변에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금 떨어져서 주변을 살피던 남자들이 돌아왔다. “어때?” 리더인 유진의 말에 돌아온 남자 중 한 명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별다른 일은 없어. 쓸모없는 녀석 둘, 멍청한 녀석 둘. 뒤에 둘은 정리했고.” 그의 말에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쓸모없는 녀석은 케이트 아가씨에게 구혼하려 쫓아다니는 녀석들이다. 호건 가에 정식으로 구혼할 수 있는 녀석이라면 이렇게 거리를 돌아다니며 케이트가 나타나기를 기다릴 리가 없다. 어떻게 부잣집 아가씨를 잡아서 인생 한 번 펴보려는 어중이떠중이거나 정말 케이트에게 반했으나 집안이 상대가 되지 않는 경우다. 이런 자들을 경호원들은 쓸모없는 녀석이라고 암호처럼 불렀다. 말 그대로 쓸모없는 녀석들이니까. 사람을 살 정도의 능력이 없어 직접 움직이기 때문에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멍청한 녀석은 돈을 노리거나 케이트와의 혼사를 노려 그녀를 납치하려는 자들을 칭하는 말이다. 보통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사람을 쓰기 때문에 경호원들의 눈에 익거나 척 보기에도 위험해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케이트가 호건 가의 상속녀라는 것이 확실해진 다음부터 이런 자들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차라리 집에 찾아오거나 집 주변에 서 있는 건 양반이다. 어떻게든 케이트와 한 번 이야기를 할까, 그녀를 납치할 수 있을까 싶어서 그녀의 뒤를 쫓아다니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케이트가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기 전에 경호원들이 먼저 처리한다는 사실이다. “어딜 가실 겁니까?” 대충 케이트의 목적지를 알고 있지만, 유진은 확인을 위해 물었다. 케이트는 약간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잠깐 구빈원을 들리고 싶은데요.” “구빈원이요?” 남자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구빈원이라니, 호건 가의 아가씨가 가기엔 좋지 않은 곳이다. 조심스럽게 누군가가 말했다.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아뇨, 확인 한번 해보고 싶어서요. 안될까요?” 케이트의 초록색 눈동자가 향하자 남자들은 할 수 없지 하고 생각했다. 억지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안 될까요? 하고 물어보면 이쪽 마음이 약해진다. 결국 케이트를 비롯한 남자들은 그녀와 함께 고층거리의 구빈원까지 돌아보고 나서야 호건 저택에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오셨습니까.” 칼이 돌아온 케이트를 맞이했을 때 그녀는 약간 기운 빠진 모습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집사가 눈빛만으로 묻자 남자들은 우물우물 말을 하지 못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집사의 질문에 케이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전혀 괜찮지 않다. 그는 비스마르크가 그녀를 찾았다는 것을 조금 후에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방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차가운 홍차를 마시며 케이트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짓눌린 마음을 한숨을 내뱉어 풀어내려 애썼다. 구빈원의 상태는 어마어마했다. 그녀는 생각보다 참혹한 현실에 가슴이 아팠다.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 아이들은 무기력했고 삶의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추운 날씨에 성냥을 팔던 아이가 떠올라 케이트는 눈을 감았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내 표정이 좋지 않은가 보지. 두 번째 듣는 질문에 케이트는 쓰게 웃었다. 오자마자 집사가 묻더니 이번엔 자넷이 묻는다. 그녀는 자넷을 향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리 와, 자넷. 네게 줄 게 있어.” 줄 것? 자넷은 고개를 갸웃하며 케이트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돌아오기 전에 잠깐 들린 리본 가게에서 자넷에게 어울릴 것 같아 고른 파란색 레이스 리본을 내밀었다. “네 생각이 나서.” 케이트의 말에 자넷은 가볍게 감동했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는 모습에 그녀는 다시 구빈원의 아이들을 떠올렸다. 자넷 역시 구빈원에 있었다고 했다. 이러다 굶어 죽겠다 싶어서 도망쳐 나오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 케이트가 본 아이들처럼 그런 무기력한 눈동자를 하고 더러운 침대에 누워있었을지도 모른다. 후원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지만, 그 모든 아이를 하녀로 고용할 수도 없다. 그녀는 자넷과 제인을 떠올렸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없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구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심지어 제인은 그녀가 구한 것도 아니었다. 문득 그때의 일이 떠올라 케이트는 얼굴을 붉혔다. 검투장 안에서 이안에게 아이들을 도와달라고 매달렸던 건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기억이다. 그때 케이트가 혼란 상태에 빠졌던 이유를 에녹에게 묻는다면, 에녹은 마녀인 그녀가 오남용되는 마법과 아이들의 공포에 동화되어 그랬던 것이라고 대답해 줄 테지만 그녀가 물어볼 리 없고 에녹이 알 리 없으니 여전히 그 사건은 케이트의 흑역사로 남아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케이트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때처럼 이안에게 매달리지 않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 후원을 하는 건 어렵지 않다. 호건가는 부유하고 도와달라며 찾아오는 사람은 많으니까. “많이 있죠.” 옆에 앉아있던 자넷은 자신에게 묻는 말인 줄 알고 대답했다. 뭐? 케이트가 놀란 표정을 짓자 자넷 역시 잠시 놀랐다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호건 가의 후계자시잖아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을까요?” “음, 그렇긴 한데. 후원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해서 말야. 내 능력이 뭔지 생각해 보고 있었어.” 마녀라는 건 빼고 말이지. 차마 자넷에게 말하지 못하는 걸 생각하며 케이트가 쓰게 웃었을 때 이쯤이면 쉬었겠지 하고 생각한 집사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할아버지께서? 벌떡 일어난 케이트는 그녀가 비스마르크에게 아직 돌아왔다고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쳐서 흐느적흐느적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느라 잊어버렸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케이트는 비스마르크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렇게 말하다가 우뚝 멈췄다. 비스마르크 옆에 막스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뭐가 죄송해? 이리 가까이 와. 안 보여.” 비스마르크는 툴툴거리며 케이트에게 손짓했다. 무슨 일이에요? 케이트가 변호사에게 눈짓으로 물었지만 그는 그저 시선을 피했다. 어라? 막스가 케이트의 시선을 피하는 건 처음이라 케이트는 약간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자 비스마르크는 손에 든 종이를 정리하며 물었다. “계약서 보는 법은 익혔겠지.” 다시 한 번 케이트의 시선이 막스를 향했다. 무슨 일이지? 계약서 보는 법은 막스가 알려줬다. 그러니 이 질문은 그녀가 아니라 막스에게 했어도 된다. 할아버지께서 무슨 일을 맡기시려는 거구나. 케이트는 재빨리 대답했다. “네.” “그럼, 이거 좀 검토해 봐.” 비스마르크의 책상에 우르르 쏟아진 건 각양각색의 계약서였다. 종이로 적은 계약서도 있었고, 나무에 적당히 그림을 판 계약서도 있었다. “검토요?” “그래. 검토 몰라? 확인해 보라고.” 계약서를 확인해 보라니, 왜? 케이트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막스에게 향했지만 그는 이번에도 시선을 피했다. 보긴 뭘 봐? 비스카르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정리해서 네 생각을 말해봐. 기한은,” 어디 보자. 얼마나 줘야 하나. 생각하는 비스마르크에게 그때까지 꼼짝없이 서 있던 막스가 재빨리 말했다. “다음 주 까지요.” “다음 주는 너무 길지 않아?” “안 깁니다. 양이 많으니까요.” 그렇다면. 비스마르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영문을 모르는 케이트는 물러가라는 신호라는 것을 깨닫고 계약서를 끌어안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굳이 확인하지 않고 그냥 가르쳐 주셔도 될 텐데요.” “하나하나 언제 가르쳐주고 앉아있어? 내가 저 녀석 교사야?” “교사는 아니지만 하나뿐인 손녀잖습니까.” “하나뿐인 손녀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게지.” 흥. 하고 비스마르크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케이트도 지금까지 존재하는 줄 모르고 살았다. 그러니 어딘가 그가 모르는 손주가 또 있을 수 있다는 뜻이지만 막스는 케이트가 진짜 손녀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로 이해하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아닙니다. 스미스양은 진짜 어르신의 손녀가,” “아, 알아. 안다고.” 몇 번이나 확인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를 닮은 저 외모. 케이트가 그의 진짜 손녀라는 걸 믿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 제프리보다 낫다는 것도.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그보다 더 큰 확신이 필요했다. 제프리보다 나은 사람은 수도 에바니엘에 차고 넘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제프리를 후계자로 삼았다. 하지만 그 하나뿐인 후계자가 자신이 쓰러진 틈을 타 감금하고 사업을 제멋대로 휘두르지 않았던가. 비스마르크는 케이트를 손녀로 생각하는 한편 제프리에게도 뒤통수를 맞았는데 이십몇 년 동안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손녀를 믿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럼, 스미스 양을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으실 겁니까? 스미스 양이 하나뿐인 후계자라고 소문이 났는데요.” “내가 인정 안 했는데 소문은 무슨 소문이야?” 막스의 말이 가당치 않다는 듯 비스마르크는 콧방귀를 뀌었다. 호건 가의 가주로 호건 가를 이끄는 것과 호건 가의 아가씨로 사는 것은 다른 문제다. 비스마르크는 케이트가 호건 가의 아가씨로 사는 건 괜찮다고 생각했다. 절연하긴 했지만, 타지에서 죽은 막내딸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도 더해서. 하지만 호건가의 가주라는 건 다르다. 방에서 나온 뒤 제프리와 에스메랄다가 망쳐둔 사업을 보면서 그는 능력이 없는 자에게 자리를 물려주려 한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달았다. “차라리 더 능력 있는 자에게 물려주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그게 케이트의 인생을 위해서라도 좋을지 모른다. 로엔 경이 능력이 있다면 다행이겠지. 비스마르크는 그렇게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어제는 좀 춥더니 오늘은 또 살짝 덥네요. 이즈음 날씨가 제일 가능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00255 2. 검은 복도 =========================================================================                            “이안, 있나?” 카이사는 그렇게 물으며 수사관장실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기척이 가라앉더니 누군가 문을 열었다. “들어가게. 난 이만 갈 테니.” 에드워드 에반스 공작이다. 익숙한 얼굴에 리코는 반사적으로 한발짝 물러나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입니다. 에드워드도 그렇게 말하며 이안을 한번 돌아본 뒤 수사관실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저 사람 언제 왔던 거지? 리코는 복도 저편으로 사라진 에반스 공작을 쳐다보다가 사무실로 발을 내디디며 물었다. “왜 온 거지?”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카이사는 에드워드와 이안 둘 다 연루된 소문을 떠올리며 손님용으로 놓인 의자에 앉았다. 분명 에반스 공작이 이안에게 작위를 주려고 한다는 소문이었는데. 소문이니 그저 소문으로 그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사관들은 이안이 작위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호건가의 후계자인 케이트 스미스 때문이다. 수사관들이 보고 들은 바로는 이안은 스미스 양과 친밀한 관계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안이 집착하는 여자가 알고 보니 호건 가의 후계자였더라 지만. 스미스 양이 호건 가의 후계자로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난 뒤 두 사람이 결혼할 것이라는 것도 수사관들의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에반스 공작은 호건 가를 혈연으로 묶고 싶어 할 것이다. 이안과 에드워드는 이종사촌. 에드워드가 이안에게 작위를 줌으로써 자신과의 친분을 과시할 것이라는 게 사람들의 예측이다. 하지만 정작 이안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사람들의 예측이나 수군거림에 관심을 끊고 살아왔고 지금 당장 그에게 중요한건 그런 게 아니었다. 이안은 에드워드가 왜 찾아왔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카이사를 부른 이유를 말했다. “알라나데일 사건에 대해 알고 있나?” 알라나데일? 알고 있다. 카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드와 이안이 맡았던 사건이다. 꽤 큰 사건이라 그 건으로 이안이 이급 수사관이 되었다. 나라 경계에 사는 귀족 부부가 마법 경계가 약한 틈을 찾아서 타국에서 마법 아이템을 밀입국했다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안은 그가 안다는 시늉을 하자 말을 이었다. “그때 사라졌던 데일 경에 대한 항의가 들어왔다.” “항의? 무슨 항의?” 이안은 책상 위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데일 경에 대해 떠올리려 했지만 이제는 얼굴은커녕 목소리도 희미했다. “도망친 후로 친분 있는 귀족들에게 의탁해 살았던 모양이더군. 그러던 와중에 몇 가지 좋지 않은 일을 저질렀고.” “좋지 않은 일이 뭔지 자세히 알려줘야겠는데.” 카이사의 요구에 이안은 책상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가 다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돌봐줬던 사람의 여형제를 강제로 추행하려 한 게 두 번, 부인을 유혹하려 한 게 한 번, 하녀를 손 댄 게 다섯 번, 도망치면서 잡다한 물건을 훔친 게 일곱 번.” 무덤덤한 어조로 데일 경의 피해를 내뱉는 이안의 모습에 카이사는 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깜빡였다. 뭘 어쨌다고? “그럼 지금 그 남자가 일곱 집이나 전전했다는 건가?” “아니, 전전한 거 다섯 집이다. 두 집에서 두 번 훔쳤더군.” “이게 무슨.” 믿을 수가 없다. 카이사는 입을 딱 벌렸다. 뭐 이런 멍청한 녀석이 다 있지? “숨겨주고 돌봐준 집 주인에게 은혜를 그따위로 갚았다고?” “은혜가 아니라 피해라고 보는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 와중에도 언어유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안의 모습에 카이사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이제 와서야 항의를 했다는 건가? 일 년이 지나서? 그 사람들도 대단하군.” “에반스 공작의 말에 의하면 자기만 당한 줄 알고 부끄러워서 잠자코 있었다더군.” “하아.” 그러게 왜 숨겨줬단 말인가. 카이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귀족 다섯 집이나 손해를 입었다면 국왕이 나서서 중재를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데일 남작 가는 사라졌기 때문에 국왕이 나서서 중재할 수가 없다. 원래 가난한 집안이 마법 아이템 밀반입으로 부를 쌓았기 때문에 이안과 제이드의 수사로 전부 압수당했고 데일 남작 부부는 살인을 주사한 죄가 더해져 사형이 선고 되었다. 다행히 다른 집안으로 시집간 두 딸은 관계가 없음을 적극적으로 알려 벌금으로 끝났지만 아들인 데일 경은 다르다. 그 역시 잡히면 살인에 연루되었는지 확인해 강하게는 사형을 받을 것이다. 그런 남자를 숨겨주고 돌봐주다니, 역시 귀족들이란. 하고 카이사는 쓰게 웃었다. “이동 경로를 봤을 때 수도에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우선 수도를 거점으로 찾아보는 게 어떨까 싶다.” 이안의 말에 카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안처럼 두 손을 깍지 끼며 물었다. “파트너는?” “필리스와 함께하게.” 리코라면 괜찮지. 몇 번이나 파트너로 일했다. 카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이사가 떠나자 이안은 의자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수사관장이라는 자리는 생각보다 피곤하다. 정치와 상관없이 살아온 그에게 너무 정치적인 자리였다. 며칠 전만 해도 에반스 공작의 반대파가 찾아와서 슬쩍 떠보고 갔다. 그런 것들은 그와 상관없을 거라 여겼는데. 하지만 이제 그와 상관있어질 것이다. 이미 상관있었다. 누구보다 변화를 느끼는 건 이안이었다. 그가 호건 가의 후계자인 스미스 양과 가까운 사이라는 소문이 돌자 그전까지 그를 신경조차 쓰지 않던 자들이 차례로 찾아와 안부를 묻고 갔을 때는 멍하기까지 했다. 이안은 현재 사교계에서 그의 형인 아르고보다 더 유명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달갑지 않다. 달갑지 않지만, 괜찮다. 그는 케이트를 떠올리고 눈을 떴다. 호박색 눈동자 테두리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라?” 비스마르크에게 받은 계약서를 살펴보던 케이트는 움찔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자넷을 차를 가져오겠다면 나간 탓에 지금 그녀의 방에는 케이트 혼자 있었다. “이상하다.” 케이트는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계약서를 살피기 시작했다. 글이 적힌 종이 계약서도 있지만, 문맹률이 높은 탓에 나무판자에 대충 그림을 새겨 넣은 계약서도 있었다. 심지어 냅킨에 알 수 없는 그림을 휘갈긴 것도 있다. 전부 에스메랄다와 제프리가 체결한 계약이다. 그녀는 보자마자 그것이 두 사람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것도 할아버지의 교육인가 보다. 케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지렁이를 몇 개 던져둔 것 같은 계약서를 해석하려 애썼다. 그때 깜짝 놀랄 정도로 선뜻한 기분이 들었다. 악몽을 꾸고 일어났을 때처럼 몸을 감싸는 한기에 케이트는 어쩔 줄 몰라 주변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데 기분이 이상했다. 케이트가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 살짝 열린 문을 앙상한 손이 들어와 틈을 벌렸다. “헉! 앙상한 손은 마녀를 연상케 했다. 이안이 죽였건만 케이트는 일순, 마녀가 그녀를 죽이기 위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녀가 아니었다. 문이 열리고 부스스한 모습의 에스메랄다가 모습을 보였을 때,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에스메랄다의 모습은 또렷한 의식이 없어 보였다. 케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 어딘가에 있을 사람을 불렀다. “거기 누구 없어요?” 에스메랄다를 돌보던 하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이지? 놀랍게도 때때로 하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에스메랄다가 복도를 배회하는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깜짝 놀라고 어쩔 줄 몰랐던 케이트지만 이제는 침착하게 사람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자리를 옮겨 사람을 부르는 줄을 잡아당겼다. 아래층에서 누군가가 듣고 곧바로 와줄 것이다. “괘, 괜찮아요?” 에스메랄다가 문 손잡이를 잡은 채 멍하니 서 있자 케이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가 갑자기 달려들어 케이트의 목을 물어뜯지는 않을 것 같다. 케이트는 윤기 잃은 에스메랄다의 머리카락과 푸석푸석한 피부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가엽다. 그녀는 에스메랄다가 미웠지만 미운 한편으로는 동정심도 들었다. 남편을 잃고 아들마저 죽었다. 아들만 바라보고 산 여자가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케이트가 그녀를 동정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에스메랄다?” 케이트의 발걸음이 그녀에게 향했다. 빛을 잃은 눈동자는 케이트의 방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케이트는 약간 안도했다. 정신을 잃은 여자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본다면 그것만으로도 무서울 것 같았다. “에스메랄다, 괜찮아요?” 케이트가 손을 내민 순간, 에스메랄다의 고개가 케이트를 향해 휙 움직였다. 헉! 깜짝 놀란 그녀가 뒤로 한 발짝 물러났지만 에스메랄다의 시선을 바뀌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자 케이트는 비명을 질러야 하나 하고 잠시 고민했다. “무슨 일, 어머나!” 케이트의 호출을 듣고 달려온 하녀가 깜짝 놀라 에스메랄다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당황한 케이트를 향해 연신 사과하며 말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지? 죄송해요, 아가씨.” 아직도 심장이 쿵쿵 뛰는 것 같지만, 케이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내저었다. “아니, 괜찮아요.” “부인, 방으로 돌아가요.” 에스메랄다는 순순히 하녀의 안내를 따라 케이트의 방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이 구구데이라는거 아셨나요? 지인들이 구구데이래! 치킨 먹어야 해! 해서 치킨먹고 오느라... 00256 어떤 도피 =========================================================================                            비스마르크가 시킨 일을 전부 확인하는 데 일주일도 필요 없었다. 케이트는 삼 일 만에 계약서를 들고 비스마르크의 방을 찾았다. “뭐야?” “다 봤어요.” 벌써? 비스마르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케이트가 끌어안고 있는 계약서무더기를 쳐다봤다. 그는 에헴하 고 헛기침하며 손을 내밀었다. “어때?” “네?” “봤으니 생각한 게 있을 거 아냐? 어떠냐고.” 아. 케이트는 허둥지둥 품에 안고 있던 계약서를 정리해서 겹쳐둔 순서대로 비스마르크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전부 안 좋아요.” 솔직히 말하면 엉망이다. 어째서 이런 계약을 했는지 경험이 없는 케이트조차 이상할 정도였다. 그녀는 가장 많은 첫 번째 무더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바로 계약 파기가 가능해요. 상대방도 계약 이행을 안 했거나 제대로 된 계약이 아니라서요.” “흠.” “그리고 이쪽은 파기는 어렵지만 기간이 얼마 안 남은 거고요.” 그리고. 케이트는 마지막 가장 작은 무더기를 가리켰다. 이게 제일 문제다. 말도 안도는 계약인데 계약의 기본 조건은 갖춰져 있는 데다가 상대방의 흠도 없다. 심지어 계약기간도 아직 한참이나 남아있다. “이쪽이 가장 문제예요.” “그래?” “네. 이쪽 계약서들은 전부 이행해야 해요.” 흠. 비스마르크는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래, 파기할 방법이 없다?” “그건 아니지만,” 케이트는 어물어물 입을 다물었다. 방법이야 있다. 상대방과 이야기해서 적당히 계약 파기하자고 설득하는 거다. 데일 남작 가와 타운하우스, 큐바인 하우스에서 일하면서 케이트는 소소하게 업자들과 계약을 했었다. 주기적으로 세탁물을 맡기기도 했고 매일 아침마다 갓 구운 빵과 우유를 받기도 했다. 웬만하면 계속 거래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서로 적당히 좋은 합의점을 찾아 계약을 파기했었다. 빵과 우유보다 규모가 크긴 하지만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아니지만?” 비스마르크의 재촉에 케이트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잘못하면 우리가 협박하는 게 되어버려서요.” “협박?” “예전에 배달오던 우유를 끊은 적이 있거든요. 원래는 일 년 정도 계약이었는데 그걸 중간에 끊어야 하니까, 우리 사정이 안 좋다거나 이런저런 핑계를 댔는데 지금은 그런 핑계를 사용할 수가 없잖아요? 그럼 결국 사용할 수단이 이런 불리한 계약을 유지할 생각이 없으니 적당히 좋게 파기하자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그 말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호건 가가 할 경우 협박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실제로 협박에 가깝기도 하다. 쉽게 말해서 이런 일방적인 계약을 유지해서 호건 가의 미움을 받아봤자 너희 가게에 안 좋을 거다라는 말이니까. “그래서, 너는 그게 싫다는 거냐?” 비스마르크는 차가운 눈으로 케이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싫다 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케이트는 망설였다. 그녀는 자신이 뭐라고 말해도 할아버지가 실망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네. 싫다기보다는, 불편해요.” “힘을 사용하는 게?”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다른 가게를 협박하는 게 힘을 사용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케이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강한 힘을 가졌다면, 그만큼 제대로 써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다가 그 힘을 잃더라도 말이냐?” 그 말은 케이트를 후계자로 삼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한번 혈연에 얽매여 제프리를 후계자로 삼았다가 뒤통수 맞은 적이 있었다. 부족한 혈연은 의미가 없다. 그는 오랜 시간 침대에 누워 생활하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케이트가 호건 가를 이끌 능력이 없다면, 그는 다른 사람에게 호건 사업을 넘겨줄 생각이었다. “큰 힘을 잘못된 곳에 쓰느니 없는 게 낫겠죠.” 손녀의 대답에 비스마르크는 웃음을 터트렸다. 반쯤은 어이가 없어서 터져 나온 웃음이었다. 그는 그녀가 이 정도로 쉽게 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케이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너는, 이 집안을 포기할 수 있다는 거냐?” 처음으로 할아버지와 반목하는 상황에 케이트는 침을 삼켰다. 물러나고 싶지만 물러나선 안 된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게 호건 가는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뿐이에요. 그걸 포기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시면 아니요, 저는 할아버지 곁에 있을 거예요.” 날카로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누군가 눈치 없는 하인이 들어온다면 펑하고 터질 것 같은 기운이 방안에 감돌았다. 케이트는 크게 숨을 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호건가의 돈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네.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어요.” 비스마르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케이트의 얼굴에서 아주 오랜 옛날 도망친 딸의 얼굴을 겹쳐보고 있었다. 그는 허탈해서 계약서로 시선을 떨어트리며 말했다. “네 어미와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엘리자베스도 그랬다. 케이트의 아버지, 니콜라스와 도망치기 전에 이 집안을 포기할 거냐는 질문에 비슷하게 대답했다. 언제나 아버지를 사랑할 거지만, 돈을 사랑한 건 아니니까 포기한다는 건 맞지 않아요. “할아버지.” 케이트는 재빨리 비스마르크 곁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약해지긴 했어도 정정했던 노인이 그녀의 대답을 듣자 한순간에 늙은 것처럼 보였다. “전 할아버지 곁에 있을 거예요. 제게 이 집안의 사업을 물려주시지 않으셔도요.” 비스마르크의 손이 가볍게 케이트의 손을 다독이다가 멈칫했다. 그는 손녀에게 너무 친밀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에헴하고 다시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설탕발린 말을 한다고 내 마음이 넘어갈 것 같아?” 다시 비스마르크가 꼬장꼬장한 모습을 보이자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안도해서 미소를 지었다.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본 할아버지의 약한 모습은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 “설탕 발린 말 아니에요. 할아버지를 만나려고 지금까지 수도에 남아있었는걸요.” 에스메랄다가 아무리 막고 방해를 해도 그녀는 비스마르크를 만나기 위해 수도에 남아있었다. 할아버지만 만나면 떠날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남아 있다가 정착하게 돼버린 것이지만 비스마르크를 만나기 위해 남아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비스마르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은 집사에게 들어 알고 있다. 그는 늘 케이트와 이야기를 하고 나면 묘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사르륵하고 녹는 느낌. 그건 엘리자베스가 아직 어릴 때를 떠올릴 때와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 역시 에스메랄다나 제프리와 같을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이 떠오르곤 했다. 또 한편으로는 엘리자베스처럼 그녀 역시 그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랑스러운 손녀였지만 그 마음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 그는 케이트가 다가오면 부담스러웠다가 떠나면 섭섭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할아버지가 생각에 잠기자 케이트는 살그머니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그녀를 발견한 집사가 이야기를 중단하고 케이트에게 다가갔다. “찻물을 가져오려고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신 것 같아요.” “저런.” 그렇게 말했지만, 칼은 비스마르크의 기분이 늘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말했다. “돌아가시면 곧 올려보내겠습니다.” 호건 저택의 방에는 사용인을 호출할 수 있는 줄이 달려 있지만 케이트는 그걸 그다지 사용하지 않았다. 하녀로 살아온 기간 탓에 타인을 종을 울려 부른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네. 고마워요.” 케이트가 마음을 놓은 듯 돌아가자 칼은 계단 아래로 고개를 내밀어 하녀를 불렀다. 그가 어르신 방으로 찻물을 가져가라는 지시를 하고 다시 용병에서 몸을 돌리는 사이 남자는 케이트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분은 어르신을 좋아하시는 것 같군요.” “손녀가 할아버지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칼의 말에 남자는 쓰게 웃었다. 제프리는 비스마르크를 좋아하지 않았다. 꼬장꼬장하고 자기 좋을 대로 휘두르려 하는 노인네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갔다. “아가씨를 노리는 사람은 귀족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확한 배후는 좀 더 캐봐야겠지만, 몸값만 원하는 건 아니겠죠.” “흠.” 칼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제프리도 어린 시절 몸값을 노리고 납치하는 자들이 있었다. 두어 번 성공한 적도 있지만 전부 무사히 구출해 냈다. 하지만 케이트는 몸값만을 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케이트가 납치당한다면 더 심한 꼴을 당하리라는 것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경호원을 늘리면 이목을 모으게 되겠지.” “그렇죠.” 남자의 대답에 칼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누군가를 보호하거나 공격하는 일은 그보다 용병이 더 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아가씨께 약혼자가 있지 않습니까? 있다고 들었는데.” “정식 약혼자는 아니지만 마음을 둔 분은 계시네.” “이런 경우에는 결혼을 빨리해버리는 게 낫습니다. 대부분 상대방이 이미 결혼을 해버리면 포기하니까.” 반말과 존댓말을 교묘하게 섞는 남자의 말에도 집사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건 어렵네.” 케이트는 분명 좀 더 기다리고 싶다고 말했고 칼 역시 동의했다. 그는 비스마르크와 케이트가 좀 더 친해진 다음에 케이트가 결혼하기를 바랐다. “그럼 할 수 없지. 인원을 두어 명 더 투입해서 기존보다 좀 더 떨어진 범위 내에서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게 완벽한 대응은 되지 않습니다. 차선책은 움직이지 않는 거죠” 그게 그렇게 쉽다면 다행이겠지. 칼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케이트는 쉽게 말해서 부지런한 사람이다. 그건 그녀가 원래 부지런한 성격이기도 하지만 하녀로 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얼마 전에 해고한 하녀를 떠올렸다. 정확하게는 그녀의 불만을. 호건 가의 아가씨가 너무 부지런하다고 했다. 하녀처럼 일어나서 침구를 정리하고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어둔다. 지금처럼 사람을 부를 일이 있어도 자신이 움직인다. 안타깝게도 그건 장점이라기보다는 단점에 가까웠다. 최대한 자기 손을 쓰지 않는다는 게 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오늘이 벌써 목요일이군요. 와...시간이 참 빠르네요. 내일 하루만 더 버티면 토요일입니다! 다들 화이팅이예요. 00257 어떤 도피 =========================================================================                            “다녀오너라.” 그다지 일 층까지 내려오지 않는 비스마르크가 케이트를 배웅하기 위해 일 층에 내려와 있었다. 당연히 호건 저택의 사용인들도 한 줄로 서서 케이트를 배웅하고 있었다. “아가씨,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며칠 안 걸리는 데요, 뭐.” 집사의 걱정에 케이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며 자기 가방을 하나 집어 들었다. 왕복 일주일 정도면 다녀올 거리다. 심지어 그녀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자넷과 호위로 용병 다섯 명이 따라간다. 케이트로서는 용병이 다섯 명이나 따라와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집사가 강력하게 우긴 결과였다. “다녀오세요, 아가씨.” 사용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케이트가 탄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아. 케이트는 창밖으로 잠시 손을 흔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에게 말하지 않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이 됐다. 일주일간 수도를 떠난다고 이야기를 해야 하나? 하지만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자니 그녀는 지금 이안을 멀리하는 중이고, 괜히 이야기했다가 이안이 그녀에게 다가오는 게 겁이 났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어두운 케이트의 얼굴을 보고 자넷이 물었다. 그녀는 멀리 나간다는 기대감에 케이트가 준비해준 새 옷을 입고 케이트가 준 리본으로 머리를 묶고 있었다. 케이트가 구한 여자 중에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자넷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 며칠만 겁에 질렸을 뿐 곧 케이트가 준비해준 일상생활에 잘 적응했다. 케이트는 자넷을 보고 애써 미소 지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당장 할아버지께서 시킨 일만 생각해도 벅찬데 거기에 그녀가 구해준 여자들의 일과 이안의 일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응. 그냥 머리가 복잡해서.” 자넷은 케이트의 말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가 보기에도 케이트는 바빴다. 다른 사람들은 호건 가의 후계자가 된다면 이 정도는 당연한 거라고 말했지만 거기에는 케이트가 갑자기 나타난 후계자라는 이유도 한몫했다. 뮈엘라는 힘의 나라다. 능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무시당할 수밖에 없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안이 그렇다. 그의 검술 실력은 대단했고 수사관으로서도 괜찮은 인물이었지만 어릴 때 로엔 백작 부인의 동정심 하나로 집안에 받아들여졌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무시를 당하고 있다. 저택 밖의 사람들도 그렇지만 저택 안의 사람들도 은연중에 케이트가 얼마나 능력을 보여줄지 주시하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이미 케이트가 몇 가지 능력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이안을 도와 제프리를 잡았고 갇혀있던 비스마르크를 구했다. 이안을 도와서 몇 가지 사건을 해결했다. 전부 이안과 관련된 사건이라 그들은 케이트가 이안과 결혼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로엔 경때문에요?” 자넷이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녀는 케이트처럼 하인일 때의 이안을 알았기 때문에 그가 귀족이고 백작 가의 서자라는 것을 알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도련님이었던 마이크보다 훨씬 기품이나 카리스마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안은 일을 잘하는 것 같으면서도 못하는 하인이었다. 하인이라면 누구나 할 줄 아는 옷 손질이나 정리하는 것을 전혀 몰랐고 하인의 생활 방식이나 저택 운영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그랬던 것이 귀족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이해가 되었다. “그 사람 문제도 있지.” 케이트의 대답에 자넷이 몸을 내밀며 물었다. “로엔 경은 어떤 분이에요?” “너도 알지 않아?” “제가 아는 건 정체를 숨기느라 말도 없었고 태도도 무뚝뚝한 하인일 때잖아요. 지금은 다르겠죠?” 잘못된 기대를 하고 있다. 케이트는 자넷을 보며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전혀 다르지 않다. 하인일 때와 마찬가지로 무뚝뚝하고 말이 없다. 약간 고압적이고 제멋대로이기까지 하다. “똑같은데.” “어, 그럼 어떻게 반한 거예요?” 반했다고?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떻게 반했느냐니. 딱 잘라서 언제라고 말하기 어렵다. “글쎄. 어느새 정신 차려 보니 좋아하고 있었다는 거에 가까울 거 같은데.” 자넷의 표정이 급속도로 실망감에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그녀는 뭔가 그럴듯한 로맨스라도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케이트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왜 좋아하게 된 걸까.”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중얼거렸다. 자넷이 무슨 말인가 하고 고개를 들었다. “무뚝뚝하고, 자기멋대로에 이기적이고. 억지로 키스나 하는 그런 남자인데 말야.” 어, 억지로? 자넷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하얗게 질렸다. 억지로 애정을 강요당해서 세뇌된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케이트도 그런 걸까.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로 좋아하는 게 맞나요?” “어?” 정곡을 찔려서 케이트는 눈을 크게 떴다. 자넷은 케이트가 이안을 정말로 좋아하는 게 맞느냐고 물어본 거지만 케이트는 이안이 그녀를 정말로 좋아하는 게 맞느냐고 물어본 것으로 이해했다. “나도 모르겠어.” 오해에 오해가 더해졌다. 자넷 역시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역시, 아가씨는 로엔 경의 괴팍한 애정공세에 당황해서 혼란스러워 하는 것뿐이구나. 그녀는 조금 더 대담하게 말했다. “아가씨, 로엔 경은 좋은 분이시겠지만요. 저는 걱정이 돼요.” “뭐가?” “아가씨는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른 로엔 경의 태도에 혼란스러운 걸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닐까요?” 뭐? 케이트는 입을 딱 벌리고 자넷을 쳐다봤다. 그런 이야기, 처음 들어봤다. 자넷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안과 케이트가 함께 겪은 것을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시각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보고 있었다. “전에 있었던 곳에서 그, 아가씨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요. 조금 거칠게 구는 남자인데도 거친 행동으로 느끼는 혼란을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제야 케이트는 자넷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했다. “혹시, 좋아한다고 착각한다는 게 이안이 아니라 나를 말하는 거니?” “앗.” 실수를 깨달은 자넷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워하는 태도에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죄, 죄송해요.” “아냐. 그럴 수도 있겠네.” 처음엔 분명 싫었다. 자기 멋대로 키스하거나 고압적으로 구는 태도가. 이런 점은 지금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단점을 상쇄할 만큼의 매력이 있는 남자다. “좋은 사람이야. 사교적인 부분이 부족해서 그렇지 날 많이 생각해 줘.” 생각해보면 이안은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렇지 케이트를 위로해 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알라나데일에서 손수건을 건네주기도 했고 타운하우스에 처음 와서 힘들어하는 그녀를 찾아와 안아주고 가기도 했다. 그리고. “나 때문에 목숨을 걸었지.” 마녀에게 잡혔을 때 그녀를 해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려 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케이트에게는. 그는 그녀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도 사랑해주었다. 하녀일 때와 호건 가의 상속자가 된 지금 이안의 태도는 변함이 없다. 주변의 태도는 바뀌었는데 이안만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케이트는 평화롭게 변화된 환경에 익숙해 질 수 있었다. “목숨을 걸어요?” 자넷의 물음에 케이트는 생각에서 벗어나 미소 지었다. “그 마녀말야. 이안이 죽였다는. 마녀가 나를 죽이려 했거든. 그때 나를 살리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그냥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자넷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더니 흥분해서 외쳤다. “세상에! 운명적인 사랑이네요!” 운명은 운명이지. 케이트는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마녀와 괴물이라니 운명이다. 그에게 그녀의 마력이 정신을 잃고 달려들 정도로 매력적이니 운명이라기보다는 필연일 것이다. 다그닥 다그닥 하고 말발굽 소리만 길게 이어졌다. “이안.”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나직하게 한숨 쉬는 듯한 목소리. 케이트의 목소리와 닮았다. 하지만 이곳은 수사관실이고 케이트가 있을 리가 없다. 잘못 들은 걸까. 그는 주변을 살펴 그를 부를 만한 사람을 찾았지만, 이곳에 있는 여성들은 그를 로엔 경이라고 부르지 이안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 그래?” 이야기하던 리코는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두리번거리는 이안을 발견하고 물었다. “벌레라도 있어?” 이 계절에 벌레가 있을 리가 없다. 가볍게 던진 농담이었는데 이안은 진지하게 받았다. “이 날씨에 살아남은 벌레가 있을 리가 없잖나.” “그럼 갑자기 왜 그런 건데?” 케이트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케이트의 목소리일 리가 없다. 이안은 고개를 젓고 리코에게 계속하라고 말했다. 카이사까지 세 사람은 지금 마이크를 찾는 일을 의논하던 중이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이상한 소리?” 이상한 소리가 뭐지? 카이사와 리코가 두리번거렸지만 이안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업무시간이 끝나자 이안은 칼같이 왕궁을 빠져나왔다. 기분이 이상하다. 호건 가에 들러 케이트가 괜찮은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런 그의 뒤를 제이드가 뒤쫓아오며 물었다. “이안, 바로 집에 가?” “아니, 호건 가에 들릴 생각이다.” “그래? 술이나 한잔 할까 했더니.”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이드는 이안의 뒤를 따라왔다.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뜻이다. 하소연일지도 모른다고 이안은 생각했다. 조세핀은 마녀가 죽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완벽하게 원래대로 돌아온 건 아니고 원래보다 다섯 살 정도 더 나이 들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조세핀은 당장 늙어 죽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했고 욕심부린 대가라고 받아들였다. 에녹 역시 그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마녀가 소모해 버린 수명이다. 마녀 안에 남아있던 거라면 돌려받을 수 있지만 사라진 것을 받을 수는 없다. “죄송합니다. 아가씨께서는 출타 중이십니다.” 이안의 느닷없는 방문에도 당황하지 않은 집사는 침착하게 케이트의 부재를 알렸다. 그는 케이트가 어딜 갔느냐는 이안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어제 출발하셨습니다. 주인님의 심부름으로 며칠간 비우실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라면 어디로 갔는지 절대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이안인 만큼 칼은 예외를 적용했다. “일주일이면 돌아오겠네.” 호건 저택을 돌아서면서 제이드가 말했다. 집사가 말해준 주소는 마차로도 왕복 일주일이면 볼일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는 거리였다. 말을 타고 달린다면 편도로 하루이틀사이에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안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늘 무표정이었기 때문에 굳어있다는 걸 구분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제이드는 알아차리고 물었다. “왜? 뭐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어?” 글쎄. 이안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호위로 용병이 다섯 명이나 따라갔다고 했다. 게다가 일 자체도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아니라고 했으니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안은 수사관실에서 들었던 소리가 신경 쓰였다. 그건 분명 케이트의 목소리였다. “이안.” 다시 한 번 케이트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이안은 흠칫하고 고개를 들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당연하게도 케이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제이드에게 물었다. “들었나?” “뭘?” 제이드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 목소리는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그는 그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어? 이안, 어디가?” 그대로 타고 온 말 위로 올라탄 이안이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제이드는 깜짝 놀라 그의 뒤를 따랐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금요일입니다아~ 와아~ 와아~ 여러분 다음주에 만나요!!!! 00258 어떤 도피 =========================================================================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저택에서 출발한 지 이틀째 저녁이 되자 맨 앞에 말을 타고 가고 있던 유진이 돌아와서 케이트에게 말했다. “알겠어요.” 케이트는 창문을 열어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창문을 닫았다. 피곤하다. 처음 수도로 올라왔을 때 이용한 마차보다 더 편하고 좋은 마차였는데도 마차여행은 여전히 피곤했다. 그녀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자넷이 그녀의 무릎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조금 서두른 덕에 빨리 왔네요.” “그러게.” 원래대로라면 오늘 저녁은 근처 마을에서 묵고 내일 점심때쯤에나 도착했을 것이다. 그런데 케이트가 조금 서두르자고 부탁했다. 약간 늦어도 목적지에 도착해서 묵고 싶다고. 멀리서 마을이 보였다. 여기저기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에 사람들의 긴장이 누그러졌다. 케이트는 그녀가 해야 할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에스메랄다와 제프리가 엉망으로 체결한 거래를 최대한 회유해서 끊어야 한다. 부담스럽다. 케이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회유해야 할지는 생각해 놨다. 좀 더 제대로 된 계약으로 원래 계약한 기간보다 더 길게 계약한다고 하면 어떨까. 하지만 싫다고 하면 어쩌지? 호건 가의 부를 무기 삼아 휘두르고 싶지 않은데. 그녀가 그런 고민을 할 때였다. “공격!” “으아아아아아!” 근처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여러 명이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게 뭐지? 케이트는 깜짝 놀라 창문을 열었다. “아가씨, 닫으십쇼!” 마차 바로 옆에 있던 유진이 그녀가 연 창문을 탁 쳐서 닫아버렸다. 하마터면 손가락이 끼일 뻔해서 케이트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소리가 들려왔다. 챙하고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칼 소리에 자넷의 몸이 흠칫하고 굳었다. 케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숫자가 꽤 많다. 용병들은 반사적으로 검을 빼 들었다. 몸에 밴 습관 덕분에 강도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지만 잠시나마 긴장이 풀린 대가를 혹독했다. 빈틈이 생기자 강도가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꺄악!” 비명을 지른 건 자넷이었다. 케이트는 손을 뻗어 자넷을 끌어 안았다. 강도의 손이 마차 안으로 쑥 들어오는 동안 그를 저지하는 자는 없었다. 맙소사. 케이트는 자넷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이대로 있다간 끌려 나가버린다. 마법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게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마법은 일어나지 않았다. 에녹이 다시 한 번 봉인했는데 그렇게 쉽게 깨질 리가 없다. “아아아악!” 강도가 자넷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케이트는 자넷이 마차가 떠나가라 지르는 소리에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거 놔!” 누구에게 도와달라고 외치기 전에 케이트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자넷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남자의 손을 마구 때리고 꼬집었다. 남자가 어쩔 수 없이 손을 떼고 물러나자 이번에는 다행히도 용병 중 한 사람이 남자의 목덜미를 잡고 끌어당겼다. “자넷, 괜찮니?” 여전히 마차 밖은 전투로 시끄러웠다. 간간이 마차 벽에 뭔가가 부딪칠 때마다 마차와 함께 케이트와 자넷의 몸도 흔들렸다. “엄마, 질….” 자넷은 케이트의 품에 안긴 채 엄마와 죽은 자매의 이름을 불렀다. 케이트는 착잡한 기분으로 자넷을 끌어안고 있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면 마차 안에 검이라도 하나 둘 것을 그랬다. 그녀는 채 닫히지 않은 문을 조심조심 닫으며 바깥 상황을 살폈다. 강도의 수가 용병보다 훨씬 많다. 그냥 보기에도 세배는 돼 보인다. 큰일 났다. 케이트는 다시 자넷을 꼭 끌어안았다. 자넷과 달리 그녀는 지금 당장 보고 싶은 사람이 가족이 아니었다. “이안.” 그녀가 그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한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디선가 남자 둘이 말을 타고 달려와 강도와 싸우는 용병을 돕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남자 중 한 명이 낯익은 남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 사람은?” “로엔 경 아냐?” 그 사이에 이안과 제이드는 강도를 몇 명이나 쓰러트렸다. 덕분에 정신을 차린 용병들도 제대로 응전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긴장을 풀고 있을 때 기습당해서 밀렸던 것뿐이라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어 케이트가 무슨 일인가 하고 창문을 열었을 때 강도 대부분은 도망가고 상처를 입은 강도는 잡아 묶어둔 상태였다. “괜찮, 이안?” 괜찮냐고 물어보려던 케이트는 창문으로 불쑥 내미는 이안의 얼굴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하루 종일 말을 달리고 바로 전투에 가담하느라 이안의 모습은 땀과 먼지, 피로 엉망이었다. 하지만 케이트를 확인하는 눈동자만은 생생했다. “괜찮나.” “괜찮아요. 아니, 그보다 어째서 여기에?” 수도에서 이틀은 걸리는 거리다. 케이트는 그렇게 묻고 나서 바로 이안이 쉬지도 않고 말을 달려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문 너머에서 이안이 손을 뻗었다. “이안?” 이안의 손이 케이트의 뺨을 감쌌다. 다행이다. 다치거나 아파 보이지는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케이트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에요?” 잠시 침묵이 지나갔다. 이안은 툭 내뱉듯이 말했다. “네가 불렀잖아.” “네?” 그게 무슨 소리야? 케이트가 묻기 전에 제이드가 소리쳤다. “이안, 잠깐 이리 와봐.” 쑥 하고 이안의 팔이 빠져나갔다. 케이트는 무슨 일인가 하고 마차 밖으로 따라 나갔다. 용병들은 자기 상처를 살펴 본 뒤 잡힌 강도들의 상처를 살펴보고 있었다. 검에 베인 상처가 대부분이라 케이트는 마차 밖으로 나오자마자 피 냄새를 맡았다. “어, 오랜만이네요.” 케이트를 알아본 제이드가 인사하자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인 것보다 제이드와 이안이 왜 여기 있는지가 더 궁금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심은 묶인 강도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냥 강도가 아닌 모양인데.” 제이드의 말에 이안을 비롯한 용병들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소리야?” 유진은 제이드 앞에 무릎 꿇고 앉은 강도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며 물었다. 그는 존댓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금세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만 같은 모습에 케이트는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설령 그가 강도를 때린다 해도 당연하다. 강도단 때문에 용병들도 피해를 입었다. 크지는 않지만 상처도 있었고 말이 도망가 버린 사람도 있다. “제대로 말하지 못해?” 유진이 강도의 배를 가볍게 걷어차며 윽박질렀다. 아무도 강도에게 동정의 눈빛을 보내지 않았다. 다들 자기 짐과 상처를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이 녀석이 뭐라고 했어? 아니, 했습니까?” 강도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제이드에게 물었다. 제이드는 픽 쓰러진 강도를 부축해줄 생각도 하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도착하기로 한 인원수를 알더군요.” “인원수요?” 유진의 시선이 다시 강도에게 향했다. 케이트는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생각하다가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지나가던 여행자를 덮치는 강도라면 이 여행의 총인원이 몇 명인지 알 리가 없다. 하지만 이 근방에서 다섯 명의 용병과 두 명의 여성이 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호건 가와 계약한 가게다. 케이트는 며칠 전 계약 상대방에게 언제 몇 명이 갈 것인지를 전달하는 전령을 보냈던 것을 떠올렸다. 숙박할 장소를 대신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간에 전령이 강도단에 당해 정보를 누출했다 하더라도 케이트와 자넷은 마차 안에 있었다. 마찬 안에 있는 사람이 여성 두 명이라는 걸 강도단이 확실하게 알 리가 없다. 그 말은 결국 이 강도단은 케이트가 만나기로 한 상대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네 배후에 누가 있지?” 유진의 말에 강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카악 퉤 하고 오히려 유진의 얼굴에 침을 탁 뱉어 놓았다. 헉하고 놀란 케이트의 신음만 침묵 속에 떠돌았다. “그러시겠다면.” 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강도의 배를 퍽 차서 그를 다시 넘어트렸다. 눈치 빠른 제이드가 이안에게 눈짓했다. 이안은 케이트를 번쩍 안아 들고 다시 마차 안으로 향했다. “잠깐, 뭐하는 거예요?” “네가 볼 필요 없는 거다.” “하지만,” 하지만. 케이트는 마차 안에 들어가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넌 나중에 전달만 받으면 돼.” 이안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으아아악 하는 엄청난 비명이 마차 밖에서 울려 퍼졌다. 자넷은 흠칫 놀라며 귀를 막았고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게 분명하다. 이안은 손을 뻗어 케이트의 귀를 막아주려 했다. 하지만 케이트가 그의 손을 잡고 저지했다. “그냥 두세요.” 앞으로도 이런 일은 일어날 거다. 그렇다면 차라리 익숙해지는 게 낫다. 케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슬픈 월요일입니다. 흑흑흑...흑흑흑...흑흑흑흑.... 그래도 오늘은 집에오는 길에 고양이를 여섯마리나! 봤어요! 육고양이! 00259 어떤 도피 =========================================================================                            “크, 큰일 났습니다!‘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고 있던 이고르에게 직원이 새파란 얼굴로 달려왔다. 웬 소란이야? 그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사슴고기를 그대로 직원에게 던졌다. “큰일은 무슨 큰일!” 퍽 하고 커다란 고기가 붙은 뼈가 직원의 머리에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직원은 어지러운 듯 머리를 감싸고 잠시 비틀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호, 호건 가에서 오고 있단 말입니다!” 오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직원의 태도는 그것과는 좀 달랐다. 이고르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어머, 뭐야? 그의 옆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던 여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창가로 달려간 이고르의 눈에 저 멀리 마차 한 대가 보였다. 마차는 특이할 게 없지만, 그 주변의 남자들은 특이하다. 말을 탄 일곱 명의 남자와 그 뒤를 줄에 묶여 따라오는 남자들. 기묘한 행렬에 늦은 시간에도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쳐다보기 시작했다. “실패했단 말야?” 이고르의 외침에 직원은 고개를 푹 숙였다. 호건 가에서 사람이 온다고 하길래 도착하기 전에 쫓아낼 요량으로 용병을 고용해 강도 인척 꾸몄는데 실패했다. 이고르는 실패를 믿을 수 없어 멍하니 창밖을 쳐다봤다. 다섯 명의 용병과 함께 온다기에 스무 명을 고용했다. 사대 일이란 말이다. 그런데 지다니, 말도 안 된다. 당연하게도 호건 가에서 케이트의 호위를 위해 고용한 용병은 뮈엘라에서도 실력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이고르는 그렇다 해도 세배 정도의 인원이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잠깐, 왜 일곱 명이지?” 점점 가까워지는 일행 중 말에 탄 남자는 모두 일곱 명이었다. 다섯 명이라고 했는데? 이안과 제이드가 갑자기 쫓아와서 도와줬다는 것을 모르는 이고르는 호건 가에 속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는 두 명의 직업을 알게 된 순간 그의 얼굴은 더욱더 일그러졌다. “이런, 이런.” 제이드는 땀과 먼지에 절은 모자를 탕탕 치며 빈정거렸다. 전력을 다해 말을 달렸으니 용병들보다 훨씬 피곤할 게 분명한데도 그는 이런 순간에서 한 번쯤 비아냥거려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였다. “이야기하러 온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사람을 고용하다니, 볼 것도 없군.” 용병들은 잡아온 강도들과 함께 한쪽에 꿇어앉은 이고르와 그의 직원들에게 침을 탁 뱉었다. 용병은 용병이다. 그들이 케이트 앞에서 이렇게 거친 행동을 하는 건 처음이라 케이트는 잠깐 놀랐다가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쩌나, 이분들은 수사관이란 말이지.” 유진이 이죽이며 식탁에 털썩 앉더니 이고르가 먹던 음식을 쭉 훑었다. 맛있는 걸 먹고 있군. 사슴고기에 꿩고기, 토끼고기까지. 순 고기뿐인 식탁이다. “수사관?” 이고르는 유진의 말에 이안과 제이드를 쳐다봤다. 척 봐도 이안과 제이드가 수사관처럼 보이긴 한다. 이안은 아무 말 없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고 제이드는 가슴 위로 팔을 교차하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용병들과 수사관들이 한통속이 되어 이고르를 겁주는 모습이 우스워서 자넷은 저도 모르게 푸흡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분위기가 약간 누그러지자 이고르가 외쳤다. “수사관이 여기까지 올 리가 없지! 거짓말 마!” 자넷의 웃음으로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거다. 유진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꿩고기를 들어 뜯었다. “아니, 진짠데.” 제이드가 이고르에게 자신이 수사관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동안 이안은 케이트에게 다가갔다. 그는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 케이트의 표정이 좋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얼마 전 그에게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보다 더 나빴다. “케이트.” 케이트가 고개를 들었을 대 이안은 이미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네, 네?” “무슨 일 있나?” “무슨 일이라니.” 있다. 아주 큰 문제가. 이안은 분명 아까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가 그를 불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부른 적이 없다. 이것도 마력 때문인 걸까. 케이트의 기분이 우울해졌다. 그가 그녀의 마력에 끌린다는 걸 이런 식으로 확인한다는 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며 케이트는 이안을 피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상대는 이안. 케이트를 만나 그녀의 표정이 전보다 더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단계까지 갔지만 아직 그녀가 움직인게 자신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눈치채지 못하는 남자다. 그는 그대로 그녀를 따라갔다. 케이트는 그녀가 몇 걸음 걸어간 곳을 이안은 한 걸음 만에 성큼 다가오는 것을 보고 읏 하고 놀랐다. 이 남자에게서 도망치기란 쉽지 않구나. “뭐하는 거예요?” “뭐가?” “왜 날 따라오는 거예요?” “따라가면 안 되는 거였나?” 케이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이제 자넷은 케이트와 이안의 사랑싸움을 구경해야 할지, 이고르를 겁주는 제이드를 구경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전부 다 놓치기 아까운 구경이다. “수사관이 하는 일이 뭔지 알아? 가장 대표적인 게 귀족 살해사건인데, 저기 저 남자 보여? 수사관이긴 한데 귀족이거든. 넌 지금 귀족을 살해하려 한 거야.” “자, 잠깐, 전 그냥 호건 가에서 나오는 사람을,” “아, 그래. 호건 가. 호건 가에서 나온 저 아가씨 말인데. 저 아가씨가 호건 가의 후계자인 건 알 거고, 귀족인 저 남자의 약혼녀거든?” 몰랐다. 이고르가 케이트를 공격하게 한 데는 그녀를 잡아 호건 가의 사위가 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멍청한 녀석이잖아. 제이드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된 이고르를 보며 혀를 찼다. “아가씨, 짐을 풀까요?” 자넷이 물었다. 맞다. 케이트는 이안과 유진을 쳐다봤다. 그녀는 어차피 이곳에서 하루이틀정도 묵어가려고 계획했기 때문에 상관없다. 하지만 이안은 어쩐다. “이안, 어떻게 할 거예요?” 케이트의 물음에 이안은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너와 함께 간다.” “어? 우리 여기서 자고 가?” 제이드의 당황한 질문을 뒤로하고 결국 케이트와 이안은 이고르의 집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케이트로서는 그대로 다시 에바니엘로 돌아가고 싶지만 이미 시간은 한밤중이고 이고르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해도 아직 호건 가와의 계약이 남아 있다. 용병들은 이고르와 그의 부하들은 묶어 한방에 집어넣고 식탁에 차려진 만찬을 즐겼다. “하아.” 위층에 짐을 푼 케이트는 슬리퍼로 갈아 신고 방 밖으로 나왔다. 아래층에 용병들이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에 간간이 제이드의 목소리도 끼어 있어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문제를 일으킬 만한 사람들은 가둬두긴 했지만 여자라고는 자넷과 케이트 외에 전부 마을 창부들뿐이다. 유진과 이안은 케이트에게 자넷과 한방을 쓰는 게 좋겠다고 말했고 케이트는 순순히 그 말을 따랐다. 여독과 긴장으로 피곤했는지 자넷은 금세 곯아떨어졌다. 하지만 생각이 많은 케이트는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계약문제는 그녀의 예상과 다르게 아주 쉽게 해결이 될 모양이다. 설마 그녀를 공격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이안과 제이드가 오지 않았더라도 유진과 그의 부하들이 알아서 잘 처리했을 테지만 이안과 제이드가 합류한 덕에 일이 더 쉬워졌다. 계약 당사자가 범죄행위를 저질러 사업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됐으니 계약은 자동으로 파기된다. 그럼 이제 이고르와 그의 부하들은 이 지방 상급 치안관에게 넘기고 계약서만 가지고 돌아가면 된다. 문제는 이안과의 관계였다. 아직도 그녀는 그녀가 자신을 불렀다는 이안의 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의 마력이 이안을 매혹하고 있다. 그녀가 마녀가 아니었다면, 아니.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 케이트는 머리를 저으며 복도를 따라 걸었다. 따듯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싶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은 따듯한 차가 아니라 이안이었다. “왜 나왔지?” 복도 한쪽에 벽에 기대고 서 있던 이안은 터덜터덜 걸어오는 케이트에게 물었다. 너무 조용히 있던 터라 누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케이트는 펄쩍 뛰어오른 다음에야 상대가 이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안, 뭐하는 거예요?” “흡연 중이다.” 그렇군. 이안의 손끝에 담배가 들려있었다. 그러고 보니 담배냄새가 났다. 몇 번 맡아본 냄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방금 자넷이 묶은 머리를 풀고 정성스럽게 빗질해 준 덕에 붉은 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왜 그러지?” 이안은 케이트의 머리카락 안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조용하게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 케이트는 그의 눈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처음 알라나데일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녀는 잡아먹힐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치 거대한 맹수를 만난다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 그녀가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에도 그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정확하게 그려냈다. 그래서 케이트는 이안이 무서웠다. 하지만 지금 그는 무섭지 않다. 그는 여전히 포식자이고 그녀는 피식자지만 그녀는 이안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이안, 날 어떻게 생각해요?” 느닷없는 케이트의 질문에 이안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는 그게 무슨 의미일지 잠시 생각했다. “여자겠지.” 이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건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케이트는 그럴 줄 알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안이 바로 말을 이었다. “내 인생에 하나뿐인.” ============================ 작품 후기 ============================ 영화보고 오는 길에 버스를 잘못 타서 중간에 내려서 갈아타고 왔더니 한시간이나 걸렸어요. 원래는 이십분정도 거린데OTL 오늘의 바보짓입니다. 후작과 수리공 개인지 가수요 조사 합니다. 여기 말고 조금 있다가 올라올 후작과 수리공 쪽을 확인해 주세요. 00260 어떤 도피 =========================================================================                            엇 하고 케이트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녀는 잠시 자신이 들은 소리가 뭔가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지금 내가 들은 게 진짜로 들은 말이 맞나? 하지만 정작 이안은 멀쩡했다. 그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아닌가?” “어, 아니. 좀, 놀랐어요.” “뭐가?”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거든요.” “내 인생에 하나뿐인 여자라는 게?” 케이트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웅얼거렸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요.” “바람둥이 같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 그녀가 반박하기 전에 이안이 케이트의 손을 잡고 그녀의 얼굴에서 떼어냈다. 잘 익은 토마토처럼 보인다. 이안은 케이트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생물학적인 여성이라면 어머니도 있지만, 이성적인 여성이라면 너뿐이다.” 으으.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부끄러우면서 기뻤다. 하지만 동시에 죄책감이 생겼다. “만약, 내가 당신에게 저주를 걸었다면요?”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는 덤덤하게 물었다. “걸었나?” “걸었을지도 몰라요.” 걸었으면 건 거지 걸었을지도 모른다는 건 무슨 소리일까. 이안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케이트는 재빨리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 마력에 매력을 느끼는 거잖아요.” 이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케이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말했다. “그게 진짜가 아니면 어떻게 해요?” “진짜가 아니라니, 뭐가?” “그러니까, 날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 마력을 사랑하는,” “그럴 리 없다.” 이안은 단칼에 거부했다. 하지만 케이트는 계속해서 말했다. “전에 그 여자도 그랬잖아요. 마녀의 저주에 걸려서 보는 남자마다 사랑에 빠졌었잖아요.” 이안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누굴 말하는 거지? 그는 곧 케이트가 말하는 게 로웨나 벨링스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마녀가 죽고 저주가 풀렸지만 수도원에서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의 애정이라는 것을 두렵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여자의 저주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면 풀렸잖아.” “그러니까요, 만약 당신이 그런 거라면요? 나중에 진짜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케이트.”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창틀에 아무렇게나 비벼 끄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앗, 그러면 창틀이 망가지는데! 오랜 하녀의 습관으로 케이트는 뭐라고 말리려 입술을 열었지만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내가 너와 결혼 후 정부를 둘까 봐 걱정하는 건가?” “당신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이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네가 말하는 게 그거잖아.” “그러니까, 내 말은.” 답답하다.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말하려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 사랑이 식는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당신의 유일한 여자가 아니면요? 진짜 유일한 여자가 따로 있는데 내가 당신을 속이고 있다면요?”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속이고 있나?” “그게 아니고요!” 답답해서 케이트는 발을 한 번 굴렀다. 그게 아니다. 왜 이해를 못 하는 거야! 그녀는 주먹을 꼭 쥐고 가까스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마법으로 당신을 유혹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요? 당신이 날 사랑하는 게, 진짜 당신의 마음이 아니라 내 마력 때문이면, 어떻게 하냐고요.”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이안은 새빨개진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는 케이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상관없다.” 이번에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었다. 케이트는 믿을 수 없어서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네 마력이라면, 저주라면 상관없어.” “하지만,” “나는 진짜 저주 같은 사랑에 빠진 사람을 알아. 아니,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여자를 안다.” 그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에 담배냄새가 섞여 있었다. 여자라고 했다. 케이트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뭔가 그녀가 알면서도 모르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저주 안에서 행복했다. 그러니, 저주의 당사자가 나라면 나 역시 그러할 테지.” “그건, 혹시.” “그래.” 이안은 씩 웃었다. 전혀 기쁘지 않은 미소였다. 눈동자가 천천히 황금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의 손이 케이트의 두 뺨을 감쌌다. “나를 낳은 여자다.” 천천히 그의 입술이 케이트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케이트는 처음 듣는 이야기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멍하니 그의 키스를 받았다. 이미 살짝 열린 입술을 천천히 비비고 그 사이로 혀가 들어왔다. 케이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그녀의 입안을 그의 혀가 헤집고 있었다. “으, 응.” 케이트는 이안의 셔츠를 꽉 쥐고 매달렸다. 순식간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몇 번이나 그녀의 입술을 맛봤다. 이게 저주라면, 그것도 괜찮다고 이안은 생각했다. 저주가 아니었다면 그는 평생 누군가를 사랑하기는커녕 신경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초록색 눈동자가 화가 나면 어떤 색이 되고 기쁘면 어떻게 반짝거리는지, 붉은색 머리카락이 자다 일어나면 어떻게 흐트러지는지. 문득문득 떠올랐다. 그가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다면 사랑은 저주인 거겠지. “이안,” 케이트가 이안을 밀어냈다. 그녀는 괴롭다는 듯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담배 피우고 나서 키스하지 마요.” 그게 싫었던 모양이다. 이안은 씩 웃으며 물었다. “안 피우면 해도 된다는 거지?” 뜻밖에도 당황할 줄 알았던 케이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라. 이안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라 잠시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 그동안 그를 피하고 도망치던 케이트의 태도가 변했다. “지금까지 그래서 도망쳤던 건가?” “네?” “내가 저주에 걸려있다고 생각해서 날 피한 거냐고.” 저주에 걸렸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 케이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안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케이트의 태도가 이상했던 이유가 그거였다. “다시 말하지만 난 저주라 해도 상관없어.” “내가 상관있어요.” “내가 상관없는데 어째서?” “하지만,” 케이트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안은 오물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내려다봤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부끄러운 모양이다. 그가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케이트가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천천히 모든 것이 소멸했다. 이안은 그대로 굳어서 그를 둘러싼 건물과 땅과 소리가 사라진다고 느꼈다. 색채마저 사라져 눈앞에 있는 건 오직 케이트 하나뿐이었다. 초록색의 눈동자가 담긴 새하얀 얼굴 주변에 붉은 머리카락이 구불거리고 있었다.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빛났다. “여기가 내 집이 아니라는 게 안타깝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쪽 다리를 굽혔다. 당장 안고 싶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럴 수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게 처음으로 그를 조바심 나게 했다. “방금 그 말로 너는 내 저주를 풀었어.” 높던 눈동자가 낮아졌다. 케이트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와 시선을 맞춘 이안에게 당황해서 입을 벌렸다. 그래서 그가 한 말이 바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네? 뭐라고요?” “내가 널 사랑하는 게 저주 때문이라면, 네가 날 사랑하는 것으로 저주는 풀린 거다.” 그게 무슨 소리야? 케이트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이안을 사랑하는 게 왜 저주를 푸는 게 되는 거지? 이안은 케이트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그 손등에 입을 맞췄다. 처음으로 보는 이안의 다정한 태도에 케이트는 계속해서 당황했다. “사랑이 저주인 건 보답 받지 못하기 때문이지. 보답 받는다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네가 날 사랑한다면 나는 그걸로 됐어.” 하지만. 케이트는 새어나오는 항변을 꿀꺽 삼켰다. 뭔가 부족하다. 그녀는 여전히 불안했고 죄책감이 남아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이안이 미소 지었다. “그러니 도망가지 마. 네가 도망간다면 그게 내게 저주니까.” 케이트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손이 그의 뺨을 감쌌다. 천천히 내려앉는 입술의 감촉에 이안은 눈을 감았다. 다음날 다시 에바니엘로 가면서 케이트는 이안을 피하던 자신의 도피가 끝났음을 깨달았다. 더이상 이안을 봐도 불편하거나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으어어어 수요일입니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00261 4. 기드온 =========================================================================                            케이트가 돌아오자 집사는 자신의 주장대로 용병을 데려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은 케이트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제프리도 호건 가의 후계자이기는 하지만 실력 있는 용병을 다섯 명이나 데리고 다니지는 않았다. 남자인 제프리는 여자인 케이트보다 공격당할 일이 적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케이트는 납치당해 몸값을 요구받을 뿐 아니라 강제로 원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할지도 모를 위협도 있었다. 그리고 에바니엘로 돌아온 뒤 케이트가 그녀가 자신의 입장이 제프리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사건이 다시 일어났다. 구빈원을 살피던 그녀를 납치하려는 사건이었다. 지금까지는 케이트가 눈치채기 전에 용병들이 처리하곤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케이트.” 이안은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왔다. 자기 방에 앉아서 로알의 진찰을 받고 있던 케이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안, 어떻게?” 어떻게 알고 왔느냐는 질문이다. 호건가의 아가씨가 고층거리에서 납치당할 뻔했다는 소문은 치안관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다. 고층거리 담당 치안관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괜찮아?” 이안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케이트의 뺨을 감쌌다. 희미하게 달콤한 피 냄새가 났다. “다쳤나?” 이안의 눈이 커졌다. 그는 시선을 내려 붕대가 감긴 케이트의 손목을 발견했다. “그냥 긁힌 거예요.” 조금 민망해서 케이트는 붕대가 감긴 손을 다른 손으로 덮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안이 오기 전에 집안사람들의 호들갑에 시달린 후다. “상대는?” 상대는. 케이트는 대답하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놀랐다. 그리고 무서웠다. 상대는 어린 소년이었다. 제인과 비슷한 또래일 것이다. 잠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말에 마음을 놓았다. 어른 남자가 아니라 아직 소년이었으니까. 사람들과 약간 떨어진 순간 구빈원의 소년은 케이트의 손목을 잡고 잡아당겼다. 헉하고 놀라자마자 이상하다고 생각한 유진이 달려와 주었다. 덕분에 손목에 긁힌 자국만 남고 무사할 수 있었지만 소년은 아니다. “감옥에요.” 케이트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제인 또래의 소년이 벌써 감옥에 갔다는 게 불편했다. 그녀를 끌고 가려 했다는 두려움과 별도로 어린 소년이 벌써 범죄자가 됐다는 사실이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다행이군.” 이안은 그렇게 말하고 케이트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제프리는 이런 일이 없었다. 그는 남자이고 구빈원 근처에는 다가가지도 않았으니까. 나쁜 자들은 케이트가 여자고 약하고 남을 도우려 한다는 것을 이용했다. 소년의 단독범행일 리 없다는 것을 그녀도 깨닫고 있었다.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아요.” 사람들이 물러나고 이안과 단둘이 남자 케이트가 말했다. 물론 조금 떨어진 곳에 자넷은 남았다. 이안은 케이트가 기대 누운 침대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뭘 할 건데?” 이안은 다정하게 물었다. “뮈엘라는 힘의 나라잖아요? 약한 아이들과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어요.” 가진 게 없는 여자들은 몸을 팔고 고아들은 이런 식으로 범죄에 가담하게 된다. 아니면 제인처럼 희생자가 되거나. “힘이 필요하지 않은 일을 만들어야겠어요.”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힘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 뭔데? 그는 그게 뭔지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그런 게 있나?” “있어요. 많지 않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요.” 큐바인 하우스에서 살 때 만난 시나몬이 가수라는 걸 알고 케이트가 궁금했던 게 있다. 가수는 어떻게 새로운 노래를 배우는 걸까? 간단하다. 누군가가 부르는 것을 보고 듣고 따라 부르는 것이다. 결국 뮈엘라에서 가수는 얼마나 잘 부르느냐도 있지만 얼마나 많은 노래를 알고 있느냐고 능력의 척도였다. 하지만 뮈엘라의 공연은 타국에 비해 몇십 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다. 마법이 사용되는 공연은 전부 사장되고 새로운 음악이나 극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타국에서 인기 있다고 해도 그걸 즐길 수 있는 건 일부 귀족과 부자뿐. 음악과 연극은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다 보니 수도인 에바니엘에서나 볼 수 있는 게 되었다. 공연자들이 지방으로 내려가는 일이 적기도 했지만 지방의 공연자들이 그것을 배울 가능성도 적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실라와 친해지는 계기를 만들어준 바람의 바다도 원래대로라면 케이트는 몰랐을 것이다. 인기 있었던 이유는 그게 연극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이트는 글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책으로 읽었고, 그 책이 써진 건 몇십 년 전의 일이다. “뭔데?” 이안의 질문에 케이트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생각한 것이 몇 개 있긴 하다. 이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큐바인 하우스에서 시나몬이 가져온 신문을 읽어줄 때가 생각났다. 그리고 비스마르크의 명령으로 계약서를 살폈을 때도. 케이트는 해석하느라 고생했다.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나무판이나 냅킨에 그림을 그려놨으니 당연하다. 다르지만 비슷한 경우다. “이안, 귀족 중에도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적잖아요?” 이안은 무슨 일인가 하고 눈을 크게 뜨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그럼 신문은 어떻게 해요? 에바니엘 일보를 못 읽는 사람도 있을 텐데요.” “대독자가 있지. 아니면 종자가 읽어주거나.” 대독자. 케이트가 타운하우스에서 실라에게 했던 것도 비슷한 일이었다. 그녀를 대신해서 편지를 읽고 답장을 썼다.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대독자를 고용할 수 있는 건 부유한 사람들뿐이다.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케이트같은 사람에게 쫓아와 부탁하는 수밖에 없다. “여러 명이 모여서 일하는 곳이 있죠. 세탁소라거나 직물조합 같은 곳이요. 그런 곳에서 대독자가 있으면 어떨까 해요.” 이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 사람들이 에바니엘 일보를 읽으려 할까?” 물론 읽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에바니엘 일보는 다분히 귀족들 대상의 신문이다. 어느 귀족의 아들이 기사가 됐다거나 변경에 몬스터가 나와서 토벌했다거나 하는 기사를 싣는다. 기사직이나 귀족과 관계없는 사람들은 관심이 없을 것이다. 케이트는 음 하고 약간 망설이면서 말했다. “에바니엘 우물가가 있잖아요.” 다시 한 번 이안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 가십지? 에바니엘 일보가 몇몇 귀족들의 기부로 이어지고 있다면 에바니엘 우물가는 시나몬 같은 가십에 관심이 많은 여성들의 구매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뭘 도와줄까?” “아직 도와달라는 말 안 했는데요.” “내게 말한 이유가 있겠지.” 도움을 요청하려고 말한 건 아니었는데. 케이트는 쓰게 웃었다. “당신은 귀족이잖아요. 내가 이런 일을 하면 사람들이 당신에게 뭐라고 할지도 몰라요.” “내게?” 이안은 과연 그럴까? 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참, 이 남자는 원래 사교계에서 그리 인기 있는 편이 아니지. 케이트가 입을 다물자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상관없어.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내 인기가 더 나빠질 수는 없을 거다.” “그거 전혀 위로가 안 되는 걸요.” “위로하려고 한 말 아니다.” 이안은 케이트의 붕대를 감은 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입술을 맞췄다. “네가 뭘 하더라도 지지한다는 말이야. 뭘 도우면 되지?” 케이트는 웃음을 터트렸다. 한결같은 이안의 태도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대독자가 필요한 장소를 알기가 어렵거든요.” 그런데? 이안은 참을성 있게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치안관들은 에바니엘 이곳저곳을 담당하잖아요? 그분들께 대독자가 필요한 장소를 물어볼 수 있을까요?” 그 정도쯤이야.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일을 시키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장소를 알려달라고 하는 거다. “내일 아침에 물어보도록 하지.” “고마워요. 이안.” 시간이 꽤 지났다. 이안이 일어서며 케이트의 뺨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이안이 나갈 수 있도록 방문을 연 자넷이 유진에게 그가 돌아가는 것을 알렸다. “대단하시네요, 아가씨.” 자넷이 문을 닫고 돌아오며 말했다. 케이트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뭐가?” “그 소년에게 납치당할 뻔하셨잖아요. 저라면 혼쭐을 내주고 싶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 녀석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바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일을 생각하셨잖아요.” “그래?” 케이트는 쓰게 웃었다. 대단한 게 아니다. 그녀는 그저 그녀를 잡아끌던 소년의 눈에서 필사적인 감정을 읽었다. “제인이 생각나서.” 제인? 자넷은 제인을 모른다. 그녀가 어리둥절해하자 케이트는 다시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소개해 줄게. 좋은 아이야. 그 애도 범죄에 휘말렸었거든.”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 쪽이었지만. 도박장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아이들과 그중에서도 살아난 제인이 떠올라서 밉지만, 그냥 미워할 수만은 없었다. ============================ 작품 후기 ============================ 친구와 저녁을 먹고 오는 길에 버스를 탔는데 또! 잘못 탔어요. 이번에는 심지어 조느라 종점에서 내리는 바람에 돌아오느라 힘들었어요. 무사히 귀환한 저를 환영해 주세요. 흑흑. 00262 4. 기드온 =========================================================================                            며칠 후 이안은 케이트에게 에바니엘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 일하면서도 거칠지 않은 장소를 몇 군데 알려주었다. 당연하게도 전부 공방이었다. 세탁하는 곳, 버터나 쨈을 만다는 곳, 천을 짜는 곳. 케이트는 그곳이 전부 여자들이 일하는 곳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이쪽이 낫다. 그녀가 돌봐주는 여자들은 심하게는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했고 대부분은 남자를 무서워했다. “더 필요한 건 없나?” 이안의 질문에 케이트는 고개를 젓다가 생각난 듯 말했다. “필요한 건 아니지만, 말해야 할 게 있어요.” 무슨 일이냐는 듯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케이트는 할아버지가 두 번째로 시킨 일을 이야기했다. “지난번처럼 며칠 정도 수도를 떠나야 할 것 같아요.” “이번엔 또 뭐지?” “이번엔 괜찮을 거예요.” “지난번에도 괜찮을 것 같아서 널 보낸 거잖아.” 그건 그렇지. 케이트는 더이상 할아버지 변명을 그만두었다. 이고르를 지역 치안관에게 넘기고 돌아온 뒤 비스마르크에게 전후 상황을 설명했지만 그는 그저 알겠다고 했을 뿐이다. 미안하다거나, 잘했다거나, 하다못해 수고했다는 말조차 없었다. 그러더니 어제 또다시 그녀를 불러 다른 일을 맡겼다. 섭섭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용병이 다섯 명이나 함께 가준 덕분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그녀는 지금쯤 이 자리에서 한가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언제 출발하지?” 한숨을 내쉬는 케이트의 턱을 움켜잡으며 이안이 물었다. 곧이요. 그녀의 대답을 듣자 그의 표정이 변했다. 곧? 말 그대로 곧이다. 다음 날 아침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모든 사용인들이 심지어 칼조차도 케이트가 좀 더 쉬어야 한다고 했지만 비스마르크는 바로 출발하라고 말했다. “그렇군.” 그렇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다음 날 아침, 호건 저택 앞에 나타났다. “이안, 여기서 뭐 해요?” “나도 간다.” 그래도 되나? 된다. 케이트는 어쩔 거냐고 묻는 유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가 움직였다. 비스마르크는 케이트 혼자 갔다 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지난번 사건으로 이안이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 이렇게 해도 된다. “놀랐어요.” 마차가 출발하자 자넷이 말했다. 이안은 자신의 말을 타고 마차 옆을 따라오고 있었다. 케이트는 마차 시트에 몸을 늘어트리고 창문 밖을 쳐다보다가 자넷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뭐가?” “로엔 경과 함께 가기로 하신 거요. 거절하실 줄 알았거든요.” “아, 그거.” 케이트의 시선이 다시 창밖을 향했다. 이안이 유진과 뭔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둘이 대화가 되나? 사소한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녀는 자넷에게 말했다. “좀 대담하게 가기로 했어.” “대담하게요?” 케이트는 늘 이안과의 관계를 고민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이유도 모른 채 두려워했고 에바니엘에 와서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뿐인 사람이 되었지만, 주인집 도련님과 하녀였을 뿐이다. 두 사람의 입장이 동등하게 된 뒤에는 마녀와 괴물이라는 관계로 가로막혔다. 이안이 그녀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선 다음에는 그녀가 이안을 본의 아니게 이용하는 게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일었다. 그런 고민들이 차례차례 일어났고 케이트와 이안은 서로를 거부하거나 피하는 형태로 관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지난번 사건에서 케이트는 이안의 마음을 확인했다. 그녀가 그를 이용하는 것이라 해도 상관없다. 저주라 해도 상관없다고 했다. 그게 케이트에게 답이 아니기도 했고 어떤 의미로는 답이기도 했다.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자신의 마음과 이안의 마음에. 어차피 이안의 인생에 하나뿐인 여자가 그녀고, 그녀도 이안 외의 남자를 생각할 수 없다면 괜한 고민을 하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주어진 것을 누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게 케이트가 내린 결론이었다. “응. 생각해보니 이안이 옳더라고.” “로엔 경이요? 어디가요?” 자넷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로엔 경의 어디가 옳다는 걸까? 그녀의 표정을 보고 케이트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원하는 걸 얻으면서 사는 것 말야. 난 이렇게 길게 고민했는데 결론은 그거였어.” 어딘지 모르게 시원한 표정을 짓는 케이트를 보고 자넷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잘 이해가 안 돼요. 아가씨라면 원하는 걸 얻으면서 사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그렇지.”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건 가의 아가씨라면 원하는 것을 얻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호건 가의 아가씨가 아니라 하녀 케이트 스미스로 살았기 때문에 그걸 몰랐다. “이안 덕분에 깨달았다고나 할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이안을 쳐다봤다. 이안과 유진은 한참 검에 대해 대화를 하고 있었다. 재정적인 부분뿐 아니라 감정적인 부분에서 좀 더 원하는 것을 대담하게 드러내도 된다. 그녀는 그것을 깨달았다. 말을 달려 케이트와 이안, 자넷. 그리고 유진을 비롯한 다섯 명의 용병이 향한 곳은 뮈엘라 수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광산이었다. 마차로 가는 데만 꼬박 이틀이 걸리는 그곳은 드워프가 관리하고 있다. 뮈엘라가 마법의 나라에서 힘의 나라로 변화하면서 다른 이 종족들이 많이 떠났지만 유일하게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바로 드워프였다. “드워프는 무기를 만드니까요. 오히려 지금의 뮈엘라가 드워프에게 더 좋은 나라일 겁니다.” 유진의 말에 케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넷이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짓자 그는 쓰게 웃으며 설명했다. “뮈엘라는 힘의 나라잖아요? 드워프는 훌륭한 무기를 만드는 걸 좋아하거든요. 서로 원하는 게 맞아 떨어 진 거죠.” 그렇구나. 자넷은 입을 딱 벌리고 유진의 설명을 들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금색과 붉은색이 섞인 광산이 보였다. “네 할아버지가 시킨 일은 뭐지?” 광산 앞에 드워프들이 나와 기다리는 게 보였다. 이안이 마차 옆으로 다가와 묻자 케이트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끊어진 거래를 다시 체결해 오라세요.” “왜 끊어졌는데?” 케이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말해 무엇할까. 제프리와 에스메랄다 때문이다. 드워프의 기분을 상하게 해 버렸다. 어떤 식으로 드워프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는 케이트도 몰랐다. 그저 칼이 이야기 해준 것만 알 뿐이다. “자세한 건 저도 몰라요. 다만 할아버지께선 중요한 사람이니까 꼭 거래를 다시 체결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걸 네게 맡겼다는 건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려던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안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그녀도 안다. 케이트의 능력이 못 미친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중요한 거라면 비스마르크가 직접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물론 비스마르크가 움직일 수 없으니 대리인으로 케이트가 가는 것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케이트에게 아무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그저 광산에 가서 드워프와 다시 계약을 체결해 오라고 했을 뿐이다. 그리 유쾌하지 않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그녀에게 이런 일을 시켰는지 알 것 같아서 우울해졌다. “필요하지 않다고 했는데.” 그녀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마차가 느려지더니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자넷은 벌떡 일어나 케이트의 옷차림을 정돈하더니 가방을 들고 문을 열었다. 마차 밖에서 케이트를 맞이하는 건 케이트와 키가 비슷한 드워프 세 명이었다. 진짜로 키가 작네. 드워프를 처음 보는 자넷은 그녀보다 약간 큰 그들의 키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앞에 이안과 유진이 서니 두 사람이 거인처럼 보일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호건 가에서 왔습니다.” 케이트의 인사에도 드워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차가운 눈으로 케이트와 함께 온 사람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아무래도 제프리와 에스메랄다가 엄청난 실례를 저지른 모양이다. 케이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서려는 이안을 막으며 그녀가 다시 말했다. “호건 가에서 나온 케이트 스미스입니다. 이야기하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돌아갈게요.” 비스마르스의 계획이 뭔지 알 것 같아서 케이트는 좀 강하게 나갔다. 그녀가 이런 일을 처리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거다. 처리할 수 있다면 호건 가를 물려주고, 처리하지 못한다면 물려주지 않겠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케이트는 호건 가를 물려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당장 호건가의 후계자가 그녀밖에 없으니 그녀가 해야 한다면 하겠지만, 필사적인 건 아니다. 그녀가 아쉬울 게 없다는 듯이 나오자 드워프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운데에 있던 드워프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내가 기드온이오. 나와 이야기하지.” ============================ 작품 후기 ============================ 다음주에 만나요!!!!! 00263 4. 기드온 =========================================================================                            옮긴 곳은 광산 옆에 있는 집이었다. 굴이 아니네. 케이트는 약간 실망했다. 드워프라면 광산에 굴을 파고 사는 줄 알았는데. 집이 낮았기 때문에 인간 남자들은 대단히 어정쩡하게 움직여야 했다. 문을 지날 때는 당연하고 중간중간 낮은 곳을 지날 때는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했다. 특히 이안은 허리를 반쯤 숙이고 들어오느라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앉게.” 테이블에 용병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앉았다. 유진은 여기서 공격이 일어날 경우 케이트를 보호할 수 있는지 생각하며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유로 이안도 케이트의 옆에 앉았다. 재미있는 모양새군. 기드온은 케이트의 양쪽에 자리 잡고 앉은 남자들을 보며 생각했다. 저 조그마한 인간 여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려는 게 눈에 보인다. 제프리 때는 없었던 일이다. 이건 케이트 스미스라는 여자를 저 두 남자가 좋아하는 걸까? 한 명은 용병으로 보인다. 그는 유진을 보고 쉽게 판단했다. 옷차림은 호건 가에서 일하는 만큼 좋은 것을 입었지만 태도가 그러했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보호하려는 모양이군. 그의 시선이 반대쪽에 앉은 이안을 향했다. 그는 이안이 용병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전에 뭔가 다른 것을 깨달았다. 뭐지? 이안은 뭔가 달랐다. 아주 희미한 차이였지만 그는 눈치챘다. “케이트 스미스입니다. 호건 가에서 나왔습니다.” 기드온이 이안에게 말을 걸려는 순간 케이트가 다시 한 번 인사했다. 그는 이안에게 말을 걸 타이밍을 놓치고 에잉하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드워프, 기드온일세. 이 광산을 책임지고 있지.” 주방에서 여자가 나와 커다란 컵을 내려놓더니 들어갔다. 차? 케이트는 그녀의 얼굴만 한 컵의 크기에 놀라 내용물을 확인한 다음 더욱 놀랐다. “드워프의 맥주로군.” 용병이 기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마시고 싶다는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봤다. 하지만 유진이 허락할 리가 없다. 결국 맥주를 마시는 건 드워프들뿐이다. “케이트 스미스라면 호건 가와 무슨 관계요?” “엘리자베스 호건이 제 어머니세요.” 손녀라는 말이군. 기드온은 맥주를 마신 뒤 턱에 묻은 거품을 닦아내며 말했다. “제프리가 사망했다는 말은 내 들었지.” 그래? 케이트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고 제프리의 사망이 상당한 사건이기는 하나 드워프에게까지 소문이 퍼졌을 줄은 몰랐다. “네.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그동안 제 사촌인 제프리가 가주인 할아버지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진행한 부분이 많아서요.” “할아버지? 비스마르크의 의견을 무시했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아, 할아버지께서 한 번 쓰러지셔서요. 아니, 지금은 멀쩡하세요.” 비스마르크가 쓰러졌다는 소문은 괜히 잘못 퍼지면 좋지 않다.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변명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제프리에게 맡겼던 부분을 다시 살피고 있어요. 그중에 이 광산과 거래가 끊어진 것을 확인해서 찾아온 거고요.” “그렇군.” 기드온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비스마르크에게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제프리의 말에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에게 항의가 닿지 않아 제프리의 말을 믿었던 거다. 비스마르크가 쓰러졌었다는 케이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해가 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프리의 무례를 없었던 일로 덮어두고 넘어가기엔 기드온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가씨가 다음 호건 가의 가주가 되는 건가?” “그건 확실하지 않아요.”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왔으면 아가씨가 후계자라는 거 아니야?” 기드온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케이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보기에도 지금 이 모양새는 비스마르크가 케이트에게 호건 가를 물려주기 위해 교육하고 일을 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케이트는 지난번에 비스마르크에게 이야기한 게 진심이었다. 이곳에 남은 건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지 호건 가의 부를 노린 게 아니다. 그녀가 해야 한다면 하겠지만 그녀가 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달라고 할 생각은 없다. 이런 이야기를 처음 만난 기드온에게 할 수는 없어서 케이트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저보다 더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확실히 제프리와는 다르군. 기드온은 케이트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제프리의 과도한 자신감은 보기 흉할 정도였다. 하지만 케이트는 완전히 반대였다. 문제는 그 반대가 지금 그녀의 자리에는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호건가의 대리인이 너무 겸손한 것도 좋지 않은데.” 기드온의 말에 엇 하고 입을 벌렸다. “그런가요?” “그렇지. 믿을 수 있어야 할 거 아닌가.” “그렇군요.” 케이트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자신감. 그것도 필요하구나. 생각해보면 그녀는 수도에 오면서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것 같기도 하다. 알라나데일에서는 달랐다. 그곳은 시골이고 지금처럼 남의 눈치를 보거나 그녀의 처지를 생각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의 자신감은 무지로 비롯한 자신감이었다. 케이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이 크다는 것을, 그녀가 모르는 더 엄청난 일들이 많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나는 커다란 세계에 그녀가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자 움츠러들었던 거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케이트는 진지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그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기드온이 처음이다. 다들 그저 힘내라거나 너는 잘할 수 있다는 말만 했다. 오히려 그녀를 처음 본 기드온에게 잘해야 한다는 말을 듣자 정신이 들었다. “좋아.” 그녀를 지켜보던 기드온이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더니 컵을 탕하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가씨, 계약하러 온 거지?” “네? 네.” 급작스러운 태도변화에 케이트는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다. 뭘까? 무슨 소린가 하던 그녀는 그다음에 나오는 기드온의 말에 더욱더 놀랐다. “내 눈으로 호건 가를 봐야겠네.” “네?” “같이 가자구. 수도로.” “하지만, 광산을 떠나셔도 되나요?” “이 몸이 광산으로 보이나? 나는 광산이 아니라 광산을 관리하는 거야. 그러니 움직일 수 있지.” 그런 말이 아닌데. 케이트는 이안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가 어떤 답을 줄 리가 없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기드온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가자고! 자자, 뭣들 해? 안 마시고?” 그러고 보니 드워프를 제외하고 인간들은 모두 맥주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케이트 그녀의 얼굴만 한 잔을 내려다봤다. “우리 맥주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뭐야?” 그게 아니다. 하지만 용병들이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유진은 크흠하고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저희는 스미스 양을 보호해야 해서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맥주 한 잔 마신다고 검을 못 잡나?” “그게 아니라.” 이건 그녀 때문이다. 케이트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얼마 전에 마녀에게 속아서 위험했었거든요. 그 이후로 특히 음료는 조심하고 있어서요.” “뭐? 우리 맥주가 마녀가 만들었다는 거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케이트가 좀 더 변명하려 했을 때였다. 갑자기 기드온이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태도를 바꿔 물었다. “그런데, 마녀에게 속았다고?”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제프리를 죽인 마녀가 저도 죽이려 했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수도에서 마녀를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소문도 퍼졌구나.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을 가리켰다. “네. 여기 로엔 경이 마녀에게서 저를 구해줬어요.” “로엔 경이?” 기드온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또 화를 내려는 건가? 케이트는 긴장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이안을 묘한 표정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괜찮아?” 결국, 다음 날 아침 수도로 기드온과 함께 돌아가기로 해서 케이트는 기드온이 준비해준 방에서 자넷과 묵기로 했다. 이번에도 이안은 복도에서 케이트를 기다리고 있다가 물었다. “이안, 누구와 방을 써요?” 괜찮으냐는 질문을 교묘하게 비켜간 질문에 이안의 표정이 변했다. 용병은 다섯 명. 이안까지 합치면 여섯 명인데 기드온의 집은 방이 세 개밖에 없다. 방 하나는 자넷과 케이트가 쓰니 남은 방을 이안과 다른 남자가 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른 남자는 높은 확률로 유진일 거라고 케이트는 예상하고 있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 “전 중요한데요.”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던 이안은 빙글빙글 웃는 케이트의 얼굴을 보고 그녀가 재미있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여자가. 그는 케이트의 뺨을 감싸 쥐고 쓰게 웃었다. “네 몸종과 방을 바꿔볼까?” “자넷이요?” “그래. 저 드워프는 너와 내가 한방을 써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데.” “안 되죠! 자넷이 유진 씨와 같이 쓰게 되잖아요!”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 말은 나와 한방을 쓰는 건 괜찮다는 건가?” 엇 하고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천천히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걸 보면서 이안은 피식 웃었다. 이런 점을 귀엽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가볍게 케이트의 입술을 훔치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들어가. 이런 여행은 이게 마지막이었으면 좋겠군.”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케이트는 후다닥 자넷과 함께 묵기로 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안은 그녀의 뒷모습이 방문이 닫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피식 웃으며 뒤로 돌았다. 그가 복도 창문 옆에 서서 담배를 꺼냈을 때 기드온이 나타났다. 이안은 담배를 꺼내던 자세 그대로 기드온을 쳐다봤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하지만 기드온은 품에서 부싯돌을 꺼내 이안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감사,” “자네.” 기드온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드래곤인가?” ============================ 작품 후기 ============================ 흑흑흑...월요일입니다 흑흑.... 00264 4. 기드온 =========================================================================                            이안의 담배가 떨어지지 않은 건 기적에 가까웠다. 그는 상상 이상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멍하니 기드온을 쳐다봤다. 이 드워프가 지금 뭐라는 거지? 그러다가 그는 뒤늦게 불이 붙은 담배가 자기 손에 들려있다는 것을 깨닫고 한 모금 빨았다. “제가 드래곤이면 드래곤이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그건 아니지.” 그럼 대체 왜 물어 본 거야? 이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럼 뭡니까?” “인간은 아니잖아.” 엇 하고 이안의 입이 벌어졌다. 그러고 보니 에녹도 바로 그가 괴물이라는 것을 눈치채기는 했다. 인간은 모르지만 이 종족은 아는 뭔가가 있는 걸까. “그게 보입니까?” 이안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게 이 종족의 눈에는 보이는 걸까. 기드온은 품에서 파이프를 꺼내더니 불을 붙이며 말했다. “보이는 게 아니라 느껴지네.” 그건 무슨 느낌일까. 기드온은 이안이 말없이 담배를 입에 물자 자기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가 떼며 말했다. “산 아래로 아래로 파고 내려 가다 보면 공기가 희박해지거든. 자네를 보면 그런 느낌이 들어.” 더더욱 모르겠다. 이안은 조금 고민하다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마력 흡수자에 대해 아십니까?” “마력 흡수자? 잠깐.” 기드온의 눈이 커졌다. 그는 이안을 올려다보더니 곧 수염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마력흡수자면 드래곤은 아니라는 말인데.” 대체 무슨 차이인 걸까. 이안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제가 마력 흡수자일뿐 아니라 인간이 아니라는 겁니까?” “몰랐나?” 몰랐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드온은 끄응하고 신음을 흘렸다. 이거 괜한 소리를 한 모양인데. 모른다면 차라리 모르고 사는 게 나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알아버린 이안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인간이 아니라면 위험한 건 없습니까?” “자네가 살면서 문제가 없었다면 없는 거 아닐까?” 에녹과 반대로 기드온은 느긋했다. 이안은 다시 물었다. “제게는 문제가 없지만 제 주변은 문제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아, 그렇군.” 별로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는 태도에 이안은 맥이 탁 풀렸다. 하지만 곧 기드온의 질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네 주변에 이유 없이 죽은 사람이라도 있나?” “이유 없이?” “갑자기 약해지더니 죽었다거나, 말도 안 되는 사건에 휘말린다거나 하는 경우 말야.” 없다고 말하려던 이안은 멈칫했다. 살면서 죽은 사람은 많이 봤다. 알라나데일의 사건이 처음이 아닌 데다가 힘의 나라인 뮈엘라에서 수사관으로, 검사로 산다는 것은 죽음을 많이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상한 죽음은 있다. 그것도 그의 주변에. “있군.” 기드온의 목소리가 어두운 복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안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칼, 이분은 기드온씨예요. 광산을 관리하는 드워프시죠.” 다시 호건 저택으로 돌아온 케이트는 집사에게 기드온을 소개했다. 칼은 기드온이 묵을 방을 정리해 달라는 부탁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드온씨, 할아버지를 소개해드릴게요.” 케이트는 기드온을 이 층으로 안내했다. 그 뒤를 이안이 묵묵히 따랐다. 하지만 기드온을 비스마르크에게 소개해준다는 건 케이트의 착각이었다. 이미 두 사람은 알고 있는 사이였던 것이다. “흥, 꼴 좋다.” 기드온은 방에 들어가 비스마르크를 보자마자 소리쳤고 케이트는 새파랗게 질렸다. 쓰러져서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된 사람에게 꼴좋다니, 비스마르크가 당장 기드온을 쫓아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반응은 케이트가 각오한 것과 달랐다. 그는 의자에 앉아서 기드온을 쳐다보더니 흥하고 비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래야 자네와 시선이 맞을 거 아닌가.” 어라?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기드온이 껄껄대고 웃으며 비스마르크에게 다가가는 것을 멍하니 쳐다봤다. 아무래도 두 사람은 친구인 모양이다. 기드온은 비스마르크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더니 맞은편에 앉았다. 하녀가 차를 들고 들어왔다. “움직이지도 못한다길래 죽어가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군.” 케이트는 재빨리 하녀를 붙잡았다. 그녀는 하녀에게 쟁반을 받아들며 속삭였다. 맥주 한잔 가져와요. 기드온의 말에도 비스마르크는 화내지 않았다. 그가 젊은 시절 사귀었던 친구 중 하나다. 비스마르크의 친구라 할 수 있는 사람은 대부분 죽거나 연락이 되지 않았고 기드온도 그중 하나였다. “광산에 고꾸라져 죽은 줄 알았더니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나?” 지지 않는 비스마르크의 대답에 케이트는 약간 안도했다. 알고 보니 기드온은 그녀가 모르는 비스마르크의 친구였던 모양이다. 두 분이 이야기하실 수 있도록 물러가야 하는 걸까. 케이트가 이안을 붙잡고 방을 빠져나가려 했을 때였다. “저 아가씨가 엘리자베스의 딸이라던데.” “아, 그래. 케이트, 이리 오너라.” 윽. 못 빠져나갔다. 케이트는 이안의 팔을 잡은 채 비스마르크에게 향했다. 이안은 나가고 싶어서 버텼지만 케이트가 그를 한번 쳐다보자 할 수 없이 그녀와 함께 비스마르크와 기드온 사이에 앉아야 했다. “그렇군. 엘리자베스와 닮았어.” “웃기는 소리 하네. 자네는 그 애가 요만할 때 봤잖아.” 그렇게 말하며 비스마르크가 손을 펼쳐 엘리자베스의 키를 표현했다. 다섯 살 때쯤인가. 케이트는 비스마르크의 손 높이를 보고 가늠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다섯 살 때라면 꽤 오래전 일이다. 역시 두 사람은 젊은 시절의 친구였던 거다. “아, 그 애가 자네 부인을 닮았다면 똑같겠지.” 기드온의 대꾸에 비스마르크가 멈칫했다. 그는 천천히 케이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엘리자베스를 낳고 죽은 그의 부인. 엘리자베스는 지어미와 똑같이 생겼다. 그리고 그런 엘리자베스를 케이트가 닮았다. “그렇군.” 무거운 한숨과도 같은 말이 비스마르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기드온조차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 다행히도 하녀가 맥주를 가지고 들어왔다. “드세요. 드워프의 맥주보다 맛은 덜하겠지만요.” 케이트의 말에 기드온이 껄껄 웃으며 그녀의 등을 철썩 내리쳤다. “눈치가 빠른 아가씨로군.” 으악. 휘청이는 케이트의 몸을 이안이 재빨리 잡아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바닥으로 굴러떨어졌을 것이다. “제프리보다 나아.” 기드온의 말에 비스마르크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건 인정한다. 하지만 케이트 앞에서 순순하게 인정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밖에 나가서 돌을 던져도 그 녀석보다 나은 녀석이 맞을 걸세.” 그건 그렇지.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졌다. 이안은 슬쩍 케이트에게 속삭였다. “그만 가봐야겠다.” “아, 그렇죠. 미안해요. 붙잡아둬서. 할아버지, 이안을 배웅해 주고 올게요.” 비스마르크가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이안과 케이트는 재빨리 방 밖으로 나왔다. “또 심부름 갈 일이 있을까?” 복도를 걸으며 이안이 물었다. 글쎄요. 케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할아버지는 좀,” 변덕이 있는 편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건 그녀가 할아버지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네가 이 사업을 물려줄지 말지 고민하는 모양이군.” “이안은 내가 호건 가를 물려받길 원해요?” “아니.” 엇. 케이트는 순식간에 나온 이안의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호건 가를 물려받으면 지금보다 더 바빠질 거잖아. 네가 지금보다 더 바빠지는 건 싫다.” 그녀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가끔 놀랄 정도로 귀여운 말을 한다. 케이트는 까치발을 하고 이안의 목을 끌어안았다. 잠시 놀랐던 그는 허리를 숙여 그녀를 마주 안았다.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해.” “고마워요.” 두 사람은 사이좋게 일 층으로 내려갔다. 이안을 위해 현관문을 열어주면서 케이트는 기분이 좋아서 미소 짓고 있었다. 문밖으로 나가던 이안은 문고리를 잡은 채 문득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케이트.” “네?” 광산에서 기드온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신경 쓰인다. 하지만 그는 곧 제대로 아는 이야기가 아니라 당장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일 보자.” 케이트가 다시 배시시 웃었다. “네.” ============================ 작품 후기 ============================ 엌ㅋㅋ 드래곤 아닙니다아 케이트가 다서쨜 이안도 만났잖아요? 00265 5. 케이트의 사업 =========================================================================                            드워프가 온 것이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비스마르크의 웃음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어머, 이게 무슨 소리야? 비스마르크가 쓰러진 뒤에 저택에 들어온 하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스마르크의 방을 쳐다봤다. “쓰러지기 전에는 유쾌한 분이었나 봐요?” “그럴 리가.” 그녀의 말에 조금 더 오래된 하녀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여기서 일한 지 십 년째인데 한 번도 저렇게 크게 웃으시는 걸 본 적이 없어.” “굉장히 친한 친구인가 보죠?” “글쎄.” 오래 일한 하녀가 어깨를 으쓱하고 지나갔다. 십 년 동안 이 저택에서 지내면서 그녀도 비스마르크에게 드워프 친구가 있는 줄은 몰랐다. 드워프 거래자는 있었지. “좋은 일이군요.” “그런가요?” 응접실에서 로알과 차를 마시고 있던 케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알의 귀에도 비스마르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를 초대해 티타임을 즐기는 이 상냥한 호건 가의 새로운 후계자에게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찌푸린 얼굴보다는 웃는 얼굴이 낫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기분이 좋으면 치료할 가능성도 높아지니까요.” 그것도 그렇다. 케이트는 차를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드온이 온 덕에 비스마르크는 꽤 자주 방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오늘 아침은 아침을 식당에서 먹기도 했다. 이건 좋은 일이겠지. “아, 선생님. 오늘 저녁때 시간 있으세요?” 케이크를 콕 찌르던 케이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기드온이 방문한 것을 기념으로 다 함께 모여서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 덕분에 주방은 지금 불타오르고 있었다. 지금이 추워서 다행이라고 케이트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열기로 다들 쓰러졌을 테니까. “몇몇 분을 모셔서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꼭 같이 드셨으면 좋겠어요.” “몇몇 분이라면 누가 오나요?” “저와 할아버지, 이안 아니, 로엔 경이 오고요. 기드온 씨와 제 대부도 오실 거예요.” 제이드도 초대했지만 약속이 있다고 했다. 로엔 백작 부인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거절했고, 변호사 막스는 일이 많아서 안 되겠다고 했다. 그러니 로알까지 온다면 여섯 명이다. “아직 제 대부는 못 만나셨죠? 그분도 의학 쪽으로 지식이 있으셔서 좋은 대화 상대일 거예요.” 그렇군요. 로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초대를 감사히 응했다. 의학 쪽으로 지식이 있는 호건 가 후계자의 대부라니,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의학 쪽으로 지식은 있지만 할아버지의 치료를 그 사람에게 부탁하지 않은 걸 보니 얇은 지식일 뿐인 모양이라고 로알은 생각했다. 어쩌면 그가 아는 것을 알려줄 수도 있겠지. “여기 왜 쭉정이가 있어?” “이런, 광산에서 돌만 파먹고 사는 드워프가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오?” 그리고 그날 저녁, 예견된 혼돈과 파괴가 벌어졌다. 이안은 새파랗게 질린 케이트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엘프와 드워프가 사이가 안 좋다는 걸 몰랐나?” “모, 몰랐어요.” “저런.” 이안은 안됐다는 듯 케이트의 팔을 가볍게 다독이더니 물렀다. 물러나지 마! 당신은 날 도와줘야지! 케이트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로알을 돌아보자 그 역시 굳은 얼굴로 에녹을 쳐다보고 있었다. 얕은 지식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더니 전혀 아니다. 상대는 몇백, 몇천 년이나 살아오는 종족인 엘프다. 그는 삐걱거리는 목으로 돌려 케이트를 쳐다봤다. 엘프를 대부로 두고 드워프가 할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인 아가씨라니. 대체 이 아가씨는 뭐지? “하, 할아버지.” “왜?” “두 분을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쾅! 하고 화를 참지 못한 기드온이 테이블을 내려치는 바람에 테이블 위에 있던 꽃병과 그릇들이 덜그럭하는 소리를 냈다. 비스마르크는 바보 같은 소리를 한다는 표정으로 케이트를 쳐다봤다. “뭐하러?” “하지만, 저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누가 다쳐?”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다치면 어떻게 해요?” “드워프와 엘프가 싸워서 둘 중 하나가 다치면 전쟁 나겠지.” “네에?” 깜짝 놀라는 케이트에게 비스마르크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걱정마라. 전쟁이 날까 봐서라도 둘은 안 싸울테 니.” 싸우다 둘 중 하나가 다친다면 전쟁이 난다는 말은 반대로 그걸 조심하느라 싸우지 않을 거라는 말도 된다. 정말 그럴까?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케이트의 앞에서 거짓말처럼 파직 파직 불꽃 튀게 싸우던 두 사람이 흥 하고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소개해야 하는 걸까. 케이트는 로알을 쳐다보며 고민했다. 서로 소개해주고 화기애애한 식사가 될 줄 알았는데 예상이 벗어났다. 그녀는 에녹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여기 있는 분들을 소개해 드릴게요. 할아버지는 아시죠?” 에녹은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건넸고 비스마르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니콜라스의 친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기드온 차례가 되자 기드온이 흥 하고 말했다. “소개할 필요 없네. 저 쭉정이는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 카티야. 저 쓸모없는 먼지 덩어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 소개할 필요 없단다.” 어째서 또 이렇게 되는 거야. 케이트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라서 입술을 깨물었다. 이안이 다시 케이트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저런.” 도움이 안 된다. 결국 기드온과 에녹의 투닥거림 속에서 식사가 이어졌다. 이안과 로알의 소개는 하는 둥 마는 둥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둘이 투닥거리던지 케이트는 식사가 끝날쯤에는 아예 흥미진진한 기분으로 두 사람을 구경하게 될 정도였다. “엘프면 엘프답게 이슬이나 처먹을 것이지 뭐가 좋다고 인간들이랑 살고 있어?” “그러는 그쪽은 드워프라면 가서 돌을 캐 먹어야 할 텐데? 아, 늙어서 소화가 어렵나?” “내가 늙은 거면 자네는 산송장이지, 산송장.” “송장은 흙을 파면서 사는 게 송장이지.” 유치해. 대체 왜 싸우는 건지 모르겠다. 심지어 에녹은 어마어마하게 오래 살았는데 이렇게 유치하게 싸운다는 게 케이트는 신기했다. “드워프와 엘프는 개와 고양이 같다고 하더군.” “개와 고양이요? 어디 가요?” 식사를 마치고 응접실로 자리를 옮기자 이안이 말했다. 누가 개인 거지? 케이트가 궁금해서 물었다. 그는 자리를 옮기고도 투닥거리는 기드온과 에녹의 모습을 지켜보며 말을 이었다. “행동이나 환경이 달라서 안 맞는다는 말이다.” 그런 말이었군.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비스마르크가 집사를 부르며 말했다. “난 이만 올라가야겠네. 다들 더 놀다 가게.” 피곤했다. 아침도 식당에서 식사하느라 움직여야 했고 저녁도 식당으로 움직였다. 오랜만에 만난 기드온에게 자신이 멀쩡하다는 것을 보여주느라 그렇다. “그럼 잠깐 확인 좀 하겠습니다.” 비스마르크가 일어나자 로알도 따라 일어섰다. “아, 뭘 확인해? 필요 없어.” 일부러 강한척했지만 소용없다. 로알도 이젠 비스마르크의 성격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문제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확인만 하겠습니다. 명색이 의사가 머무는 집에서 어르신 상태 체크도 못 해서야 문제잖습니까.” 와, 능숙해지셨네.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저도 도와드릴게요. 세분, 잠시 이야기 나누고 계세요. 금방 돌아올게요.” 결국 응접실에 이안과 기드온, 에녹만 남았다. 에녹과 기드온은 사이가 좋지 않고 이안은 억지로 분위기를 풀려고 노력하지 않는 남자다. 잠시 응접실 안에 잔과 컵을 내려놓는 소리만 이따금 이어졌다. “인간들은 물러나고 인간이 아닌 자들만 남아있다니, 재미있는 모양새로군.” 기드온이 맥주를 홀짝이며 말했다. 이안은 아무 말도 없이 손에 들린 호박색 술을 한 모금 마셨지만 에녹은 달랐다. 그는 빈정거리며 말했다. “허, 난쟁이가 마력 흡수자에 대해 뭘 안다고?” 아무래도 두 이 종족이 그를 가지고 다툴 모양이다. 이안은 잔을 내려다보며 케이트가 언제쯤 돌아올지 생각했다. 사이가 나쁜 개와 고양이 사이에 그를 남겨두고 떠나다니, 나중에 이 복수는 확실히 해줘야겠다. “마력 흡수자는 모르지만 인간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지.” “인간이 아니라고?” 놀란 나머지 에녹이 실수했다. 기드온은 에녹의 표정을 보고 그가 이안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 봐라? 큰 약점 하나 잡았다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에녹이 아차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기드온은 품에서 파이프를 꺼내며 낄낄대고 웃었다. “잘난 척은 있는 대로 하더니, 결국 쭉정이는 어쩔 수 없군. 허허허.” 쭉정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화나기는 처음이다. 하지만 그럴 때가 아니다. 에녹은 이안에게 다가가 그의 옆에 앉았다. 인간이라기엔 뭔가가 달랐다. 에녹은 찬찬히 이안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오히려 인간 속에 섞여 있다 보니 놓쳤다. 기드온은 반대로 인간과 어울린 게 오래되어서 눈치챈 모양이다. “그렇군.” “제가 인간이 아닙니까?” 이안은 담담하게 물었다. 놀라거나 겁을 먹지 않은 태도에 에녹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그의 이 성격도 그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인 걸까. “자네, 낳아준 여자가 있다고 했나?” “네.” “그녀가 자네를 낳은 게 확실한가?” ============================ 작품 후기 ============================ 후작과 수리공 개인지는 작업중에 있습니다. 택배쪽만 알아보면 바로 신청받기 시작할게요. 신청받기 시작하면 여기저기 공지할테니 걱정마세요! 00266 5. 케이트의 사업 =========================================================================                            에녹의 무례한 질문에도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제가 태어날 때 저를 받은 집시가 있습니다.” “그래?” 에녹은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이유가 뭐지? 그때 기드온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아, 뭐가 문제야?” 이해할 수가 없다. 인간이 낳았다면 인간이라는 뜻이다. 드워프가 낳았다면 드워프가 되는 거고. 하지만 에녹의 생각은 달랐다. “두 가지 예상이 있네.” 그는 진지한 얼굴로 빠르게 말했다. 당장에라도 케이트가 돌아올 수 있다. 그녀와 로알이 돌아오기 전에 이야기를 해두는 게 좋겠지. “호문클루스라고 아나?” 처음 듣는 단어다.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기드온은 알았다. 그건 뮈엘라가 마법의 나라일 때 존재했던 단어다. 마법을 깊이 연구하는 다른 나라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뮈엘라에서 그 단어를 아는 자는 극히 드물다. “연금술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거지. 사장되었지만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나라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구를 했네.” “다른 나라도 연구하고 있습니까?” “아니, 다른 나라에서도 금지되었네.” 마법을 핍박하면서 마법과 연금술의 경계에 서 있던 연금술사 역시 사라져 버렸다. 호문클루스는 가장 그 경계에 서 있던 기술중 하나다. 에녹은 혹시나 하고 이안을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자네의 생모가 연금술사였나?” “아니요.” 연금술사일 리가 없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차라리 마녀에 가까울 겁니다.” 마녀다운 행동을 한 적은 없지만. 엄마라서가 아니라 기억에 남은 그의 생모는 예쁘장한 외모였다. 남자에게 인기가 있었지만 그녀는 죽을 때까지 그것을 거부했다. 오직 이안만 보고 살았다. “그렇다면 두 번째 예상인데.” 그때 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케이트가 돌아온 것이다. 기드온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고 에녹은 약간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물러났다. “자리를 비워서 죄송해요.” 다시 이야기는 이안이나 호문클루스와는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기드온은 비스마르크와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시작했고 케이트는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하지만 이안은 아니었다. 그는 문득 에녹을 쳐다보고 그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을 깨달았다. 에녹이 하려고 했던 건 무슨 이야기였을까. === “괜찮은 생각이네요.” 케이트의 이야기를 들은 세 마녀 중 긍정적으로 반응한 건 뜻밖에도 수잔이었다. 그리고 가장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한 로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귀네비어만이 부정적으로 말했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냥 신문을 읽을 뿐인 걸요.”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 틈에서 뭔가를 읽는다는 행위를 한다는 건 부담이 될 수 있어요.” “알아요. 부담스러울 거예요.” 케이트는 귀네비어의 말에 동의하며 말을 이었다. “저도 그런 게 부담스러우니까요. 하지만 잘하면 그게 일자리가 될 거예요. 뮈엘라는 신문을 대신 읽어줄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그렇긴 하지만.” 마뜩잖다는 귀네비어의 태도에 수잔이 끼어들었다. “언제까지 우리와 스미스 양이 보호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저 여자들도 언젠가 다른 사람들과 살아야 해. 궂은일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고작 신문을 읽는 정도라면 재활로 딱 좋지 않아?” “그렇긴 하지만요.” 로라가 끼어들어 말했다.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이 건물 밖으로 나간다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럼 이렇게 해요. 싫어하는 사람은 제외하고, 나갈 때 호위로 용병을 붙일게요.” “용병이라니 남자라면,” “여자 용병으로요. 어때요?” 그렇다면 할 말이 없다. 로라는 수잔을 쳐다보고 귀네비어를 쳐다봤다. 귀네비어의 걱정도 이해는 하지만 수잔의 말도 맞다. 언제까지 저 여자들을 이곳에서 품고 있을 수는 없다. 그녀들은 언젠가 독립해야 한다. “그래요. 괜찮겠네요.” 로라까지 동의하자 귀네비어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마녀는 곧바로 여자들이 모여 있는 방으로 가서 글을 능숙하게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케이트가 알려준 장소에서 신문을 읽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때 제일 앞에 서 있던 여자가 손을 들었다. “네. 무슨 일이죠?” “잠깐, 스미스 양. 그 아이는,” 귀네비어가 끼어들려 했지만 손을 든 여자가 입을 열었다. “저, 저어, 마, 말이 능숙하지 모, 못하면 어, 어쩌, 죠?” 이런. 케이트는 왜 귀네비어가 끼어들려 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질문한 여자의 걱정도. 이런 사람을 안다. 반사적으로 머릿속에 타운 하우스에 만난 폴이 떠올랐다. 그러고 밉살맞던 메리도. 그때는 그렇게 얄미웠는데 이제는 신기할 정도로 아무 느낌도 들지 않는다. 다시 한 번 그녀가 얼마나 변했는지 떠올라 케이트는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는데 주변이, 환경이 변해버렸다. 메리가 얄미웠던 건 그녀와 자신이 같은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메리는 얄미워할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지금 케이트는 말 한마디로 메리가 직장을 잃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을 테지만. 나, 엄청 강한 힘을 가지고 있구나. 케이트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여자에게 물었다. “글은 다 아나요?” “네, 네, 네에.” 불안감에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기서도 쓸모없는 것이라고 혼나는 걸까. 지금까지 좋았는데. 불안감에 그녀의 손이 떨렸다. 쓸모없는 사람은 나가라고 하면 어쩌지? 여길 나가면 갈 곳이 없다. 이번에야말로 고층거리로 가서 몸을 팔아야 할지 모른다. 여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직 글을 다 못 배운 사람은 몇 명이죠?” 반 정도가 손을 들었다. 그렇군. 케이트는 글을 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라, 귀네비어, 수잔. 고작 세 명이 스무 명에 가까운 여자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당연히 느릴 수밖에 없다. 그녀는 말을 더듬는 여자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에, 에, 에밀리, 리예요.” 에밀리. 케이트의 눈에 울 것 같은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조금 겁을 먹었다. 하지만 반대로 용기가 있기도 했다. 먼저 나서서 물어보는 건 용기가 필요한 법이니까. 용기 있는 여자다. 케이트는 에밀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건 어때요? 여기 세 분만으로는 힘들 테니까요.” 그건, 하고 나서려던 수잔은 귀네비어의 눈치에 멈췄다. 귀네비어의 마뜩잖은 표정이 어느새 풀려있었다. 에밀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케이트의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지, 지, 진짜요?” “네. 사람은 누구나 장점 하나씩은 가지고 있어요. 그걸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지. 여러분께 이번 일을 시키려는 것도 그 일환이에요. 이번 일을 못 한다고 해서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일을 찾아보면 되니까요.” 상냥한 말에 방 안의 분위기가 밝아졌다. 어째서 그런 일을 시키는 건지 두려워하던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보고 세 마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먼저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생겼다. 괜찮은 변화다.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던 여자들이 적극적으로 뭔가를 하려고 한다는 건. 케이트는 세 마녀가 여자들에게 신문을 읽을 장소를 골라주는 것을 보며 이 일을 좀 더 넓혀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에밀리처럼 읽는 것은 못해도 가르치는 일을 돕는 것은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골라서 고아들도 가르쳐 보면 어떨까. 여자아이들이 고아원을 나가 꽃이나 성냥을, 나쁘게는 몸을 팔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문제는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건데. 할아버지께 이번 사업을 이야기할 것을 떠올리자 절로 한숨이 나온다. 한쪽에 비켜서 작게 한숨을 내쉬는 케이트에게 귀네비어가 다가왔다. “고마워요.” 예상치 못한 인사에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귀네비어에게 감사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다. 그런 케이트의 태도에 귀네비어가 빙그레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에밀리에게 다른 일을 줘서요. 여기 있는 아이들은 자신이 어딘가에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게 중요하거든요.”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 나를 필요로 한다는 건 그녀 역시 중요했다. 큐바인 하우스에서 이안의 하녀로 일했던 건 그에게 감사한 것도 있지만 그곳에 그녀가 중요하다는 감각이 아주 좋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케이트의 겸손한 말에 귀네비어는 조금 부끄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내가 결혼 한 적 없다고, 전에 말했죠?” 그런 말을 했었던 것도 같다.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결혼을 했더라면 아마 스미스 양이나 저 아이들 또래의 아이가 있을 거예요. 여기서 저 아이들을 돌보다 보면 가끔 저 아이들이 내 딸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그렇구나. 케이트는 감동해서 귀네비어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이 정도로 저들을 아끼는 줄 몰랐다. “결혼을 안 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으세요?” “없어요.” 귀네비어의 단언에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뮈엘라에서 결혼하지 않는 여자는 흔치 않다. 훌륭한 실력의 검사나 부자와 결혼하는 것도 여자의 능력으로 보여지는 나라다. “아이를 낳지 않은 건 조금 후회되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걸 후회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결혼하지 않고 사는 여자는 마녀로 몰리기 십상이다. 케이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녀의 표정을 읽은 귀네비어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일하기 전까지는 남편과 사별했다고 거짓말해야 했어요.” 그렇구나. 어쩌면 케이트가 어린 시절 만났던 남편과 사별했다는 여자들도 사실은 결혼 한 적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귀네비어는 케이트의 손을 놓고 흥분해서 떠드는 여자들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나는 마녀잖아요? 혼자서도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 작품 후기 ============================ 제 방....더러워요.... 00267 5. 케이트의 사업 =========================================================================                            “혼자서 아이를 낳아요?”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녀는 혼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건가? 귀네비어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깔깔대고 웃었다. 그렇게 놀랄 줄 알았다. “상상임신이라고 알아요?” 모른다. 케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상상임신이 뭐지? 귀네비어는 상냥하게 설명했다. “임신하지 않았는데 임신했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인간은 물론이고 동물도 간혹 그런 일이 일어나요.” “그거 큰일 아닌가요?” “그만큼 상상임신을 하는 여자는 필사적이라는 거예요.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자신이 진짜 임신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면 놀랍게도 진짜로 배가 불러온다고 해요.” 임신했다고 생각한다고?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배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모습에 귀네비어가 다시 배를 잡고 웃었다.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요. 굉장히 드문 일이고, 그만큼 자신이 진짜로 임신했다고 착각해야 하거든요.” “그건, 마녀에게만 일어나는 일인가요?” “아니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동물도 가끔 상상임신을 한다고요. 보통은 배가 불러올 뿐이지 실제로 아이를 갖은 게 아니니까요. 아이가 없다는 걸 깨달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대요. 하지만 마녀는 다르죠.” 귀네비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녀는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케이트를 향해 몸을 내밀고 속삭였다. “보통 인간이라면 그냥 빈 배가 불러오는 것뿐이지만, 마녀잖아요? 있을 리 없는 것을 현실로 만든다더군요.”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아이가, 생기는 건가요?” “저도 아주 옛날에 문헌으로만 읽어서 정확하게는 몰라요. 그냥 그런 일이 있다고 해요.” “그, 문헌은?” “도망치면서 불태울 수밖에 없었죠.” 그렇구나. 케이트는 조금 묘한 기분으로 여자들과 귀네비어를 쳐다봤다.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마녀의 대단함이 확실하게 다가왔다. 필사적임 하나로 없는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아무리 마법에 무지한 뮈엘라에서 자란 케이트라 해도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는 알았다. “좋은 거 알려줄까요?” 귀네비어의 목소리가 다시 은밀해졌다. 이번에는 약간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와 표정에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뭔데요?” “마녀는 원치 않으면 임신도 되지 않아요.” “네?” “그래서 마녀들은 그런 쪽으로 상당히 즐길 수 있답니다.” 케이트가 그 말을 이해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녀는 멍하니 귀네비어를 쳐다보다가 마치 폭발하는 것처럼 화르륵 하고 얼굴을 붉혔다. 지금 이 얼굴로는 절대로 이안을 볼 수가 없을 것 같다. “아,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집으로 돌아오자 그녀를 기다린 것은 비스마르크의 호통소리였다. 이어서 기드온이 화가 나서 바닥을 쾅하고 차는 소리도 들렸다. “내가 내 광석 안 판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그냥 팔라고 하잖아!” “아, 싫다고!” 무슨 일이지? 놀라서 굳은 채 이 층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케이트에게 집사가 다가와 코트를 받아들며 말했다. “다녀오셨습니까.” “할아버지께서 지금 싸우시는 거예요?” “조금 언성이 과해지신 것뿐입니다.” 아니, 저건 누가 봐도 싸우는 건데. 그녀는 다시 물었다. “무슨 일로 싸우, 아니, 언성이 과해지신 건데요?” “그게.” 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재빨리 말했다. “기드온님께서 주인님께 거래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어째서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기드온이 말을 안 한 모양이다. 케이트는 서둘러 이 층으로 올라가며 물었다. “얼마나 다투 아니, 언성을 높이셨어요?” “한 시간 쯤 됐습니다.” “의사선생님은 어디 계시죠?” 할아버지 상태에 저렇게 다투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녀는 제일 먼저 로알을 불러달라고 요청하고 비스마르크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노크도 없이 쾅하고 들이닥친 손녀의 모습에 비스마르크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방안에 감도는 팽팽한 분위기가 느껴져 케이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기드온은 무기만 들고 있지 않을 뿐 여차하면 비스마르크를 한 대 후려칠 기색이었다. 이크, 비스마르크의 분노가 그녀를 향해 쏟아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케이트는 재빨리 말했다. “싸우시는 거 아니죠?” “싸우다니!” “우리가 왜 싸워?” 기드온까지 정색해서 말했다. 거짓말. 조금 전까지 그의 팔뚝에서 힘줄이 불끈불끈 튀어나와 있었다. 케이트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아니면 왜 그렇게 언성을 높이신 건데요?”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비스마르크의 화살은 케이트를 향했다. 어라? 당황하는 케이트에게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왜 이 녀석을 데려온 거야? 내가 분명 거기서 계약을 하라고 말 했을 텐데?” “데려온 게 아니라 내가 찾아 온 거다!” “너는 조용히 해! 일 처리를 이따위로 해서 어디 이 집안을 물려받겠어?” 거기까지였다. 케이트의 참을성은. 이 집안을 물려받을 수 있겠냐는 비스마르크의 말을 들은 순간 케이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 할아버지가? 쩍 하고 뭔가가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기드온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돌린 순간 케이트가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이 집안에 관심 없어요. 할아버지가 시키신 일을 한 것도 이 집을 물려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시키신 거니까 한 것뿐이에요.” 엇. 예상하지 못한 진행에 기드온의 몸이 굳었다. 비스마르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케이트는 여전히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다른 누군가에게 물려주세요. 절 할아버지의 애정으로 휘두르시는 건 좋아요. 하지만 제가 원하지도 않는 돈으로 휘두르려 하지 마세요.” 이런. 이런. 로알을 불러온 칼이 나직하게 내뱉었다. 진정시키러 간 아가씨가 오히려 주인님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로알은 새빨개진 비스마르크의 얼굴과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는 기드온을 보고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분명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져 비스마르크의 상태가 걱정된다고 들었는데? “이것 봐. 자네가 안 키우니 드디어 제대로 된 사람이 하나 나왔군.” 기드온의 말이 정적을 깨트렸다. 비스마르크는 형형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내뱉었다. “그 입 닥치게.” 기드온은 재미있다는 듯 히쭉히쭉 웃었지만 비스마르크의 말대로 입을 다물었다. 비스마르크는 케이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기어코 너도 이 집을 나가겠다고?” “나간다고 한 적 없어요.” 칼은 케이트가 자신의 손을 맞잡고 비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닌 척해도 긴장한 모양이군. 그는 말없이 로알과 함께 뒤에서 기다렸다. “전에도 이야기했잖아요. 전 이 집의 돈 때문에 남은 게 아니에요. 할아버지 때문이지. 왜 그걸 몰라주세요?” 끄응하고 비스마르크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에게 돈은 애정이다. 애정이 없으면 돈도 없다. 케이트는 왜 할아버지는 돈보다 할아버지의 애정을 원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냐고 물었지만 그는 그 두 개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케이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가씨, 그만 방으로 돌아가시죠.” 이어지던 침묵을 뚫고 칼이 말했다. 케이트는 비스마르크를 쳐다보다가 힘없이 돌아섰다. 기드온 역시 쯧쯧하고 혀를 차더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떠나지 마세요.” 케이트가 방으로 돌아오자 칼이 말했다. 그의 말에 케이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떠나요? 어디로요?” “죄송합니다.” 실언했다. 칼은 재빨리 물러났지만 케이트가 더 빨랐다. 그녀는 칼의 옷을 잡으며 물었다. “저, 안 떠나요. 할아버지가 나가라고 하기 전까지는요.” 이 말을 할까 말까. 칼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방금 주인님 방에서 하신 말씀은 떠나실 것처럼 들렸습니다. 적어도 제게는요. 그래서 실수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떠날 것처럼 들렸어요?” 그건 아니었는데. 케이트는 조금 기운이 빠져서 의자에 걸터앉았다. “할아버지도 그렇게 들으셨을 수 있겠네요.” 칼은 이번에도 망설이다가 말했다. “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구나.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중에 가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려야겠어요.” “아니요, 아닙니다. 사과하지 마세요.” “네?” 놀란 케이트에게 칼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주제넘은 소린지 모르지만, 지금 아가씨께서는 주인님께 그 정도는 하셔도 된다고 봅니다.” “정말요?” 칼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네.” ============================ 작품 후기 ============================ 이번추석은 아무곳도 안갑니다. 부럽죠? 00268 5. 케이트의 사업 =========================================================================                            케이트가 새로운 일을 시도하자고 말한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그녀가 며칠 정도 대독자가 와서 원하는 신문이나 잡지를 읽어줄 거라고 말했을 때 공방에서는 쓸데없는 일이지만 공짜로 와서 읽어준다면 말리지는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안제, 오늘까지라고 했지?” 돌아가기 위해 신문을 정리하던 안제에게 공방의 주인이 말을 걸었다. 안제가 신문을 읽는 곳은 방직 공방이다. 여기저기에서 절그럭절그럭하고 물레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루종일 신문이나 잡지를 읽어야 하는 그녀를 위해 안제의 자리에는 찻주전자와 찻잔이 놓여 있었다. “네, 크흠. 네에. 오늘까지예요.” 방직 공방에서 직공들이 들을 수 있도록 글을 읽으려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그래서 일이 끝날 때쯤이면 안제를 비롯한 케이트의 여자들은 목이 꽤 아팠다. 하지만 모두 즐거워했다. 첫날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색하게 신문을 읽어야 했지만 이틀, 사흘이 지날수록 공방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안제는 그녀가 읽는 신문기사 내용에 따라 직공들이 웃음을 터트리거나 한숨을 내쉬는 것이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뿌듯하고 보람 있었다. 때로는 지난번에 읽은 기사를 다시 읽어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고 어떤 직공은 간신히 빌려왔다며 책을 읽어달라고 하기도 했다. 책 따위, 신문이나 잡지 따위 느긋하게 읽을 시간에 한 줄이라도 천을 짜는 게 이득이라고 말하던 직공들이 이제는 그녀가 오기를 기다린다는 게, 안제는 행복했다. “그럼 내일부터는 다른 공방을 가는 거야?” “아마 이삼일 정도 쉬고 갈 거 같아요.” 케이트는 한 공방에서 일주일 이상 신문을 읽지 않도록 계획했다. 뭐든 너무 쉽게 주어지면 가치를 잃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주일 내내 목을 혹사한 여자들에게 이삼일 정도의 휴식이 필요할 거라고 말했다. “음, 그러면 혹시 어느 공방으로 가는지 정해졌어?” 사장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안제는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다시 정해준다고 했거든요.” “다시 정해준다면 그때 우리 공방으로 올 가능성도 있을까?” “그건 아닐 거예요. 스미스 양 말이 갈 곳이 많다고 했어요.” 안제의 말에 사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럼 할 수 없지. 그녀는 안제에게 말했다. “혹시 그러면, 우리와 계약을 하는 게 어때?” “계약이요?” 혹시나 했던 게 역시나다. 안제는 너무 기뻐하지 않으려 애썼다. 이런 이야기를 이미 다른 여자들에게도 들었다. 공방에서 신문을 읽은 지 삼, 사일쯤 되자 공방 측에서 자신들과 계약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들은 여자들이 생겨났다. 일주일 동안 다른 공방에 가서 공짜로 신문을 읽지 말고 자신들과 계약해서 돈을 받으면 자신들에게만 읽어달라는 것이다. 사장에게 같은 제안을 들은 안제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스미스 양에게 물어볼게요. 저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라서요.” “그것도 그렇지? 그래. 결정하고 알려줘.” 돌아온 안제에게 이야기를 들은 케이트는 활짝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제 그녀까지 공방에 나갔던 여자들 전원 제안을 받았다. 축하해요. 그렇게 말하고 안제를 방으로 돌려보낸 케이트는 세 마녀와 함께 테이블에 앉았다. “이 정도로 반응이 좋을 줄 몰랐어요.” 수잔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그녀는 이게 돈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했다. 처음 케이트의 의견에 동의했던 건 이걸로 여자들이 밖으로 나가는 것의 두려움을 없애고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효과는 엄청났다. 공방에서는 여자들뿐 아니라 세 마녀와 케이트에게까지 부탁을 해왔고 여자들은 당연히 자신감이 생겼다. 자신이 쓸모없지 않고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넘어서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행복해했다. 그리고 아직 공부가 부족해 나가지 못하는 여자들에게도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럼 공방과 계약할 건가요?” 로라의 질문에 케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당장은 계약할 생각 없어요.” “어째서요? 돈도 준다는데,” “너무 적어요.” 로라의 마을 자르며 케이트는 단호하게 말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적다. 글을 읽는다는 게 천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자들이 제안받은 돈 액수를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이 정도로는 찻집에서 차 한 잔밖에 못 사요. 저 사람들이 자립하려면 적어도 월세 정도는 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신문을 읽는 일로 그만한 돈을 낼까요?” 귀네비어의 비관적인 질문에 케이트는 씩 웃었다. 지금 이 순간 할아버지께 감사했다. 사업에 대해서 가르쳐주신 덕분이다. “우리를 원하는 곳은 더 많아질 거예요. 벌써부터 싸게 일할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그러려면 지금 요청 들어온 곳을 거절해야 할 텐데.” 로라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수잔이 그게 뭐 대수냐고 말하기 전에 케이트가 먼저 말했다. “그러니 제가 나서야죠. 저분들은 제 책임하에 있고 저는 그렇게 싼 가격에 저분들의 노동력을 제공할 생각이 없다고 전해주세요.” “공방에서 우리를 떠나 자신들에게 오라고 하면 어쩌려고요?” “그것도 괜찮죠.” 케이트는 가볍게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의식주를 제공해 주고 있어요. 우리를 떠나 자신들에게 오라는 건 그걸 제공해 주겠다는 의미겠죠? 그때는 저분들이 선택하면 돼요. 우리의 의식주를 받을 건지, 공방의 의식주를 받을 건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간단한 논리다. 하지만 세 마녀는 그 논리보다 케이트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했다. 지금 그녀의 말은 나쁜 말은 그녀가 듣겠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공방의 요구에 거절하기 위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 책임자인 스미스 양이 허락하지 않았다고만 하면 된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로라의 말에 케이트는 쓰게 웃었다. 그렇지 않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아요. 당장 의식주가 해결될 돈을 준다고 해도 저분들이 혼자서 생활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저도 무상으로 도와주는 게 아니니까요.” “어떻게 하려는 거예요?” “학원을 차릴 거예요.” 케이트는 방 안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하녀 학원이 있다고 들었어요. 하녀 일을 배우는 대신 학원비를 내는 거죠.” “하지만 저 사람들은 낼 돈이 없잖아요.” “학원비 대신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그걸 받을 거예요.” 케이트는 자신이 생각한 것을 이야기했다. 고아나 가난한 집 아이들을 대상으로 학생을 받아서 가르치는 대신 앞으로 몇 년 정도 학원 소속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게 기회가 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기한이 끝나면 학원을 나갈 수 있는 건가요?” “그렇죠. 그때쯤엔 개인 대독자가 활발해지도록 해야겠지만요.” 괜찮은 생각이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비관적인 생각을 하는 수잔과 달리 로라는 긍정적이었다. 그녀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뮈엘라의 귀족들이 개인 대독자를 두는 게 당연해지겠군요?” “네. 그리고 좀 더 신문이나 잡지가 많이 생겨날 거고요.” 에바니엘에서 나오는 신문은 매일 나오는 게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나온다. 이 일주일 동안 여자들이 읽은 건 케이트가 모아둔 신문이었다. 읽는 사람이 늘어나면 신문이나 잡지도 좀 더 늘어날 것이다. 그러면 종래에는 뮈엘라에 글을 읽고 쓰는 게 천한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케이트는 이 생각은 말하지 않았다. 이건 그녀의 희망에 가까웠으니까. “이안.” 수사관장실 문에 똑똑똑하고 노크한 제이드는 이안이 대답하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며 그를 불렀다. 책상 앞에 앉아있던 이안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기는 했지만 그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얼마 전에 고층거리에서 스미스 양을 데려가려던 소년 말야.” 고층거리의 소년이라는 말에 이안의 표정이 굳었다. 케이트가 그런 일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그는 고층거리를 담당하는 치안관에게 범인인 소년에게 일을 시킨 배후를 밝혀내라고 말했다. 그 배후를 제이드가 전달받은 모양이다. “돈을 받았다는군. 금발 머리 남자에게.” “금발 머리 남자?” 누구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자 제이드도 두 손을 벌렸다. “너도 몰라? 그럼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데.” “케이트에게 금발 머리 남자를 아냐고 물어보지.” “그래. 스미스 양의 구혼자일 수도 있으니까.” 장난스러운 그의 말에 이안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제이드는 낄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스미스 양도 너무 하지. 이 녀석을 빨리 구제해줘야 할 텐데.” “남 말 하는군.” 이안은 서류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너야말로 구제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뭐? 내가 왜? 이 몸이 여자를 구제하면 구제하지,” “난 결혼 허락을 받았지만 넌 아직도 멀었잖나.” 엇 하고 제이드의 입이 벌어졌다. 그는 멍하니 이안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뭐를? 이안은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쳐다봤다. 알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는 그냥 한번 던진 말이었을 뿐이다. 결혼 허락은 조세핀을 지칭한 게 아니다. 그저 결혼 자체가 멀었지 않으냐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제이드는 좌절한 표정으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제이드의 질문에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그냥 되는 대로 던졌을 뿐이다. 거기에 제이드가 걸릴 줄은 몰랐다. 그는 이안이 대충 던진 말에 자신이 걸렸다는 것도 모르고 말했다. “조세핀이 나보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래.” “그럼 돌아가.” “그녀 혼자 두고 어떻게 돌아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이안은 서류를 다시 넘기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네가 없는 게 그녀에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콰광. 제이드는 이안의 말에 충격받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로 충격받긴 했다. 이안은 잘난척하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했다. “네가 있으면 네 몫의 음식도 그녀가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잖아. 네가 요리를 할 리는 없고.” 큐바인 하우스에서 일하던 케이트가 들었다면 콧방귀를 뀌며 댁이나 잘하시라고 할 말이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엔 제이드와 이안뿐이다. 제이드는 넋을 잃은 표정으로 그럴 수가. 하고 중얼거렸다. 이안이 서류를 넘기는 팔랑하는 소리만 이어졌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추석 보내셨나요? 전 추석 내내 미드와 낮잠으로 점철된 하루를 보냈습니다. 후후후 자다 깨서 미드보도 미드보다 자고 자다 깨서 미드보고!!!!! 심지어 오늘 내일 내일 모르 삼일만 일하면 또 쉬죠! 아참, 후작과 수리공 개인지는 이것저것 알아보느라 좀 늦어지고 있는데요, 가능하면 이번주 내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는 지난주에 신청 받으려고 했는데 ㅠㅠㅠ 죄송합니다. 좀만 기다려 주세요! 00269 5. 케이트의 사업 =========================================================================                            “마님, 초대장이 왔어요.” “그래?” 실라는 실비아가 내민 초대장을 받아들었다. 그녀가 읽기 쉽도록 실비아는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꺼내 펼친 상태였다. “호건 저택에서 파티를 한다네.” 초대장에는 날짜와 시간, 그리고 장소가 적혀 있었다. 보통 뮈엘라에서 통용되는 초대장이다. 숫자만으로 이뤄진 날짜와 시간. 장소는 적지 않는 경우도 많다. 적히지 않는 경우 주최자의 집에서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장소에서 열릴 경우 배달원은 받는 사람에게 장소를 반드시 말해주곤 했다. 이럴 경우 우편배달부에게 맡기지 않는다.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직접 배달한다. 실라는 초대장에 적힌 장소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호건 저택이라 적혀있다. 잘 적지 않지만 적을 수도 있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줄에 적힌 문구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어머.” “왜 그러세요, 마님?” “호건 가에서 재미있는 이벤트를 하네.” “이벤트요?” 실라는 빙그레 웃으며 초대장을 실비아에게 건넸다. 재미있는 이벤트다. 스미스 양이 제안한 걸까? 그렇다면 무슨 생각일지 그녀는 궁금해졌다. 왜 이런 일을 벌인 걸까? 한편 케이트는 다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파티를 준비하는 것 외에도 할 일이 많았다.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호건 사업을 살펴봐야 했고 그만큼 배워야 했으며 그녀가 시작하고자 하는 대독자 사업도 계속해서 알아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비스마르크와 기드온 사이도 틈틈이 확인해 봐야 했다. 그 날 이후 비스마르크는 기드온에게 다시 계약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급속도로 서먹해졌기 때문이다. “좋지 않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비스마르크의 방으로 향했다. 오늘이야말로 대독자를 육성하는 사업에 대해 비스마르크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기드온과 그녀에게 꽁해 있는 할아버지에게 사업을 위해 투자해 달라는 말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할아버지, 들어갈게요.” 노크를 한 뒤 그녀는 대답이 들리지 않아도 문을 열고 들어갔다. 비스마르크는 의자에 앉아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쳐다보지 않는다. 한숨을 내쉬려던 케이트는 문득 비스마르크가 외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뮈엘라는 힘의 나라인 만큼 유흥이 운동에 치우쳐 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혼자 힘으로 움직일 수 없으니 운동을 하는 건 물론이고 구경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으으. 이런 것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의 일만 해도 산처럼 쌓여있는데 할아버지가 가여워졌다. 이안이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이안의 그런 성격이 부럽다고 생각하며 비스마르크에게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공연 보러 가시래요?” “뭐? 공연은 무슨.” “악단을 부를까요? 가까운 몇 분만 모아서 음악회를 여는 거예요.” “가까운 몇 분 중에 땅딸보도 들어가는 거냐?” 기드온을 말하는 거다. 역시 기드온씨 때문이었군. 어린애도 아니고 할아버지가 이러시면 그냥 모른 척 넘어가 버리고 싶다. 하지만 케이트 성격상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분이라면 음악회보다는 마상시합을 더 좋아하시겠죠.” 비스마르크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그는 드디어 손녀를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보다 그 녀석 취향이 낫다는 게냐?” 이 대화의 어디에 기드온 씨가 더 낫다는 말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케이트는 결국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잊어주세요. 제가 실언했어요.” “그런 쓸데없는 소릴 하려고 온 거야?” 내 다시는 할아버지를 걱정하지 않으리라. 케이트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하지만 다음번에도 그의 외로워 보이는 뒷모습을 보면 또다시 쓸데없는 말을 할 거라는 걸 그녀도 잘 알았다. “그건 아니고요.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투자해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케이트는 비스마르크 옆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투자? 비스마르크의 표정에 놀라움이 앉았다. 그녀는 자신이 시작하려는 학원을 설명했다. “고아나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서 학원을 세울까 해요.” “자선사업을 하자는 게냐?” “자선사업, 까지는 아니고요.” 케이트의 자신감이 조금 사라졌다. 자선사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이 사업은 이익을 내야 한다. 그녀를 위해서, 그리고 여자들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쳐서 공방 같은, 사람들이 일하는 장소에 가서 신문이나 책을 읽게 할 거예요. 수업료를 받지 않는 대신 학업을 마치고 몇 년 정도 학원 소속으로 일하는 거죠.” 그녀의 설명을 들은 비스마르크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공방에 가서 신문을 읽는다고? 그가 보기에도 돈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자선사업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차라리 개인 대독자를 키우는 게 낫지 않겠냐?” “개인 대독자는 비싸서 수요가 적어요. 하지만 공방은 공방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고용할 수 있으니 부담이 적죠.” 과연. 무슨 말인지 알겠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그게 돈이 될 것 같지가 않아서 물었다. “자선사업이 아니라고?” “아니에요. 사업 계획을 세워봤는데요.” 케이트는 재빨리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일 년 안에 학원을 세워서 더 많은 학생을 가르치는 동안 케이트가 보호하는 여자들이 대독자의 몸값을 높이는 거다. “몸값은 오르고?” 비스마르크의 말에 케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료로 일주일간 시험을 해봤는데 모든 공방에서 돈을 지급하겠다고 했어요. 당장 대독자가 적으니 경쟁이 붙을 거고요.” 흠. 비스마르크는 턱을 쓰다듬으며 손녀를 쳐다봤다. 순진한 생각이다. 경쟁이 그렇게 쉽게 붙을 리가 없다. 하지만 무료로 시험을 하고 경쟁을 붙이려 한다는 게 영리하기도 했다. 안타까워서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제프리가 아니라 케이트가 그의 곁에 있었어야 했다. 그는 처음으로 손녀의 어린 시절부터 지켜보지 못했던 게 안타까웠다. 그가 지켜봤다면, 그리고 키웠다면 지금쯤 이 집안의 가주는 그가 아니라 케이트였을 것이다. “내가 투자를 한다면, 이 집안을 물려받을 게냐?” 뜻밖의 질문에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투자를 요청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말씀하세요?” “아니지, 넌 내 손녀잖아.” “제가 손녀라서 마음에 들지 않지만 투자하시겠다는 말씀이세요?” 끄응. 비스마르크는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케이트는 상처받아 고개를 숙였다. 사업으로 잔뼈가 굵은 할아버지가 보기에 손녀가 아니면 투자할 필요성을 못 느낄 사업이라면 희망이 없는 게 아닐까.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계획이 순식간에 위태롭게 느껴졌다. 괜히 말씀드렸나 봐.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고 일어났다. “실례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케이트를 쳐다봤다. 완전히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다. 케이트의 계획이 낙관적이긴 하지만 손해 볼 가능성도 반, 이득 볼 가능성도 반이다. “왜 거절하셨습니까?” 문밖에 서 있던 칼이 안타깝다는 듯 물었다. 조건 없이 투자해줬다면 케이트와 비스마르크가 친해질 계기였다. 설령 케이트의 사업이 망한다 해도 비스마르크 정도의 부자라면 손녀와 가까워지기 위한 대가로 지불하기엔 값싸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원금 회수에 너무 오래 걸려. 어느 시간에 이익을 내느냔 말이야.” “하지만 주인님.” “시끄러워!” 그는 손을 내저어 칼의 말을 중단했다. “나는 사업가고, 저 녀석은 내 뒤를 이을 녀석이야. 자기 사업이 가망성이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알아야지!” 비스마르크는 혼자서 움직일 수 없다. 하루라도 빨리 케이트가 호건 가를 물려받아야 한다. 호건 사업은 뮈엘라를 움직이는 큰 손이다. 케이트가 실수를 할수록, 멈춰있을수록 뮈엘라 전역에 피해가 커진다. 그는 케이트가 좀 더 야망을 품길 바랐다. 하지만 가져온 게 고작 자선사업이라니. 영리하지만 아직도 그의 손녀는 순진했고 소극적이었다. 좀 더 공격적으로 사업을 하란 말이다. 쓸모없는 고아나 창녀를 돕는 그런 일 말고. 칼은 더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주인의 태도에 한숨을 내쉬며 방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이래서야 케이트 아가씨를 위한 파티가 제대로 열릴지 걱정된다. 그는 케이트에게로 향했다가 그녀가 기드온과 대화하는 걸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허, 그 쫌생이 녀석이 네 사업에 투자하는 걸 거부했다고?” “할아버지가 보시기엔 별로였나 봐요. 그리고 할아버지가 더 잘 아시잖아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철썩하고 기드온의 손이 케이트의 등을 내리쳤다. 악 하고 휘청이는 케이트의 모습에 칼은 저도 모르게 나서려다가 멈췄다. “그 녀석이 더 잘 안다고 해도 결국은 뒷방 늙은이야. 판단력이 흐려졌을 거라고!” 네에? 놀라는 케이트의 모습에 기드온이 하하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다시 그녀의 등을 툭툭 쳤다. 이번에는 살살. “비스마르크는 조심할 수밖에 없어. 늙었으니까. 실패하면 다시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잖아. 하지만 아가씨는 다르잖아? 실패 좀 하면 어때? 다시 일어나면 되지.” “하지만 제가 실패하면 학원의 여자분들이,” “떽. 아가씨가 실패하면 그 사람들이 죽어? 어차피 그 사람들은 이대로 거기서 숨어 살거나 자기 살길 찾아가 거 나잖아. 내가 보기엔 괜찮아 보여. 저 쫌생이랑 한 번 더 부딪쳐 보라고. 그렇게까지 멍청한 녀석은 아니니까.” 비스마르크의 욕을 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케이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멍청, 아니 부족한 분이 아니라면 왜 할아버지와 계약을 하지 않으시려는 건데요?” 기드온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그는 바닥을 쿵 하고 한 번 구르며 말했다. “아, 사과도 안 하는 녀석과 무슨 계약이야!” 결국 그거였나. 케이트는 이런. 하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 성격에 사과할 리가 없다. 하지만 기드온은 계약을 제프리가 강제로 끊어버린 것에 대해서 분노할 자격이 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케이트의 말에 기드온은 다시 그녀의 등을 내려치며 말했다. “아가씨는 그때 여기 있지도 않았다며? 왜 아가씨가 사과해?” ============================ 작품 후기 ============================ 으어 오늘 춥네요.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아, 지난화 제이드와 이안의 대화가 이어지지 않아서 수정했습니다. 00270 5. 케이트의 사업 =========================================================================                            기드온의 말이 맞다. 케이트가 대신 사과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가족의 일이니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와 기드온 문제로 걱정할 때가 아니다. 이제 학원은 어떻게 하지? 할아버지에게 부탁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그가 거절하는 바람에 자신감이 깎여버렸다. “이안 생각에는 어때요?” 이안은 케이트와 마주앉아 그녀의 사업계획을 듣고 있었다. 이안이 듣기에도 허무맹랑하고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인 걸까. 그런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거의 음식을 먹다가 포크를 내려놓고 말했다. “잘 모른다.” “잘 안될 것 같아요?” “그게 아니라.”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사업에 대해 전혀 몰라. 로엔 가의 사업은 형님이 하시니까.” 그건 알지만. 케이트는 속상해서 입술을 내밀었다. “당신의 생각을 물은 거잖아요. 어떠냐고.” “난 전혀 모르는데 내 생각이 필요한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감정적인 동조가 필요한 거잖아, 이 사람아! 화를 내려던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감정적인 동조라니, 그녀는 이안이 그녀의 의견에 동조해주길 바랐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이안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이안은 대답만 하면 되는 거였다.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이람. 자신의 부족함에 기운이 빠진 케이트를 보고 이안이 물었다. “네가 원한다면 주변에 물어봐 줄까?” “누구요?” “형님도 있고. 에반스 공작은 어때?” 로엔 백작은 그렇다 쳐도 에반스 공작? 케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공작님께 여쭤보기에 너무 별거 아니잖아요.” “네겐 별것 아닌가?” “그건 아니지만요.” “네가 별것이 아니면 된 거 잖아.” 가끔 케이트는 이안의 저 자신감의 근원이 궁금했다. 자신감일지 무신경일지 모르지만. 에라 모르겠다.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분의 의견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죠.” 이안은 빙그레 웃으며 케이트의 손을 잡았다. 여기 식당인데. 케이트는 그 손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안, 여기 식당이에요.” “그런데?” 그는 손가락으로 케이트의 손바닥을 문지르며 시치미를 뗐다. 케이트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미워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쳐다본다는 걸 알았지만 그녀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두 사람은 약혼만 안했을 뿐이지 이미 서로 집안에 인사도 다 했다. 공공장소에서의 이런 친밀한 행동에 익숙해져야겠지. 그녀는 이안의 손을 마주 잡으며 생각했다. 그녀도 이안과 손을 잡는 게 좋았으니까. 그동안 서로 피하느라 만나지도 못했던 때를 생각하면 아쉬웠다. “그러고 보니 초대장이 왔더군.” “아, 받았어요?” “그래. 어머니도 받으셨다.” “백작 부인은 어때요? 오실 수 있으실까요?” 실라가 몸이 약하기 때문에 케이트는 초대장을 보내면서도 걱정했다. 뮈엘라에서는 몸이 약한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다. 실라가 그녀의 재산으로 전 로엔 백작의 사업실패로 로엔 가가 경제적으로 휘청거릴 때 살려낸 적이 있기 때문에 그녀가 집안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존경받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초대된 중요한 자리는 참석하기 때문이다. 늘 무리를 해서라도 실라는 초대받은 연회나 파티에 참석하곤 했다. 돌아와서 그녀가 힘들어하는 것을 지켜본 만큼 케이트는 백작 부인이 걱정스러웠다. “그래. 참석하실 거다.” “너무 힘드시면 안 오셔도 되는데.” “안 왔으면 좋겠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 몸이 안 좋으신데 억지로 오셨다가 더 아프실까봐 걱정돼서 그렇죠.” 그렇군. 그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전하지.” 두 사람 다 바빴기 때문에 케이트와 이안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안은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 봐야 했고 케이트는 여자들을 보러 갈 생각이었다. 정 안되면 은행을 찾아가면 어떨까. 케이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이안이 코트를 가져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번에 학원을 세우는 일로 막스와 상담했을 때 그가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방법도 있다고 말했다. “케이트!” 주방에서 앤이 나오더니 홀을 가로질러 그녀에게 종종종 다가왔다. 케이트는 어라 하고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바쁠 것 같아서 인사 안 했는데. 괜찮아?” “귀한 손님이 왔는데 당연히 나와 봐야지.” 장난스러운 대답에 케이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앤이 이어서 그녀에게 물었다. “아참, 초대장 왔더라.” 그렇지 않아도 이안과 그 이야기 했다. 앤이 조금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내가 가도 돼?” “무슨 소리야?” “아니, 호건 가의 파티라며. 갈 수 있는 건 좋은데, 내가 가도 되나 해서 말야.”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속삭였다. “그 막 왕도 오고 그러는 거 아냐?” 그럴 리가. 케이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왕대신 공작은 초대했는데, 어때?” 윽 하고 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런 귀족들이 오는 자리면 더더욱 가기 힘들다. 하지만 케이트가 먼저 말했다. “당연히 와야지. 널 초대하지 않으면 누굴 초대해?” “하지만 귀족들도 많고.” “호건 가는 귀족 아니야.” 무슨 소리. 귀족에 버금가는 집안이면서. 앤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이안과 결혼하면 귀족이나 마찬가지지 뭐.” 이안이 귀족이긴 하지만 작위는 없다. 케이트가 그걸 말하려 하자 앤이 먼저 선수 쳐서 말했다. “게다가 조만간 이안도 작위를 받는다는 소문도 들었어. 그럼 넌 귀족 부인이 되는 거고, 네 자식은 귀족인 거지.” 그 소문이 소문대로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케이트는 앤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도 넌 내 친구야. 당연히 올 의무가 있어.” 자격이 아니라 의무다. 친구는 친구의 파티에 참석해야 한다. 앤은 못 말리겠다는 듯 미소를 터트렸다. 불안했던 마음이 케이트의 말로 조금 가라앉았다. 그녀는 케이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그래. 의무라면 가야지.” “응. 꼭 와야 해.” 곧이어 이안이 케이트의 코트를 가지고 돌아왔다. 앤 역시 주방으로 돌아가 봐야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재빨리 인사하고 헤어졌다. 이안이 케이트가 코트를 입는 걸 도와주며 물었다. “뭐가 의무라는 거지?” “앤이 제 파티에 오는 거요.” 이안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웃음을 터트리며 그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유진만 마차 안으로 들어오고 다른 용병들은 말을 타고 마차 뒤를 따랐다. 케이트는 이안의 이해를 위해 설명을 덧붙였다. “당신이 작위를 받을 거라는 소문을 들었나 봐요.” 그래? 이안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케이트 역시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유진은 흥미 있다는 표정으로 이안을 쳐다봤다. “그러면 저는 귀족이 아니어도 제 아이는 귀족일 게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그렇군.” 이번에도 이안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케이트는 조금 조바심이 들어서 물었다. “이안, 아이를 싫어해요?” 싫어하느냐고? 이안은 자신이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생각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조금 귀찮고 성가시긴 하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아이들을 무시하는데 도가 튼 남자다. “글쎄. 아무 생각도 없는데.”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것도 모르겠다. 이안은 솔직하게 말했다. “글쎄.” 결국 유진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자신을 닮은 아이를 보고 싶지 않습니까?” 자신을 닮은 아이? 이안의 머릿속에 그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죽은 로엔 백작은 그와 닮은 이안을 끔찍해했다. 신기할 정도로 그는 가장 똑같다고 할 정도인 이안을 싫어했다. 그야 부정의 증거니 싫어해도 할 말은 없지만. 그래서 그는 자신을 닮은 아이를 원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오히려 자신과 닮은 아이라면 이상한 기분이 들것 같았다. “케이트를 닮은 아이라면 보고 싶다.” 그 말에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고 유진은 크흠 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렇군. 이안은 죽은 그의 생모를 떠올렸다. 그의 생모도 그랬던 거다. 자신과 닮은 아이가 아니라 사랑하는 남자를 닮은 아이를 원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생모의 기분이 조금 이해가 돼서 이안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트를 닮은 붉은 머리카락에 초록색 눈동자를 한 작은 여자아이가 떠올랐다. 그는 손을 뻗어 케이트의 손을 잡고 다시 말했다. “그래. 너를 닮은 아이라면 갖고 싶어.” ============================ 작품 후기 ============================ 후작과 수리공 개인지 판매합니다. 총 네권으로 10월 2일(오늘)부터 10월 11일(일요일)까지 입금 + 주문받고 12일부터 입금된 수량 + 파본대비본 만큼 제작합니다. 제작하는데 넉넉하게 일주일정도 잡고 배송은 19일부터 23일 사이에 이뤄집니다. 자세한 사항은 블로그 http://kiarne.blog.me/220497080647 를 확인해 주세요. 00271 6. 마이크 =========================================================================                            “그거 좋은 생각이긴 한데.” 에드워드는 턱을 쓰다듬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의 서재는 벽난로 가득 잘 마른 나무가 들어서 훈훈했다. 따듯한 방에서 차가운 브랜디를 홀짝이며 그는 이안을 바라봤다. 작위 건으로 잠시 이야기를 나누려고 불렀다. 슬슬 돌려보내려던 차에 그가 에드워드에게 스미스 양의 학원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이건 투자를 해달라는 거겠지? 눈치 빠른 사람의 단점이다. 에드워드는 지레짐작해서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괜찮은 사업이군. 이익도 느리지만 꾸준히 기대할 수 있고, 사회사업이라고 생각하면 이미지 관리로도 나쁘지 않아. 하지만,” 하지만? 이안의 호박색 눈동자가 에드워드를 응시했다. 에드워드는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투자는 해줄 수가 없네.” “어째서입니까?”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건 인사치레에 불과했던 걸까? 이안의 궁금증을 답하기 위해 에드워드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알잖아. 글을 천하게 여기는 것을. 스미스 양이라면 괜찮아. 해도. 호건 가는 사업하는 집안이고 그 후계자가 사회사업으로 첫발을 내딛는다는 건 나쁘지 않지. 하지만 나는 얽힐 수 없네. 내가 얽히면 그렇지 않아도 정치적인 일이 더욱 정치적이 되어버려.” 에드워드가 말하지 않은 것을 이안은 바로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에드워드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잘 알았다. 에드워드 개인적으로는 괜찮은 사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공작이고 차기 왕위 후보자다. 이런 일에 얽힐 수 없다. “그래서, 투자는 어렵지만, 사업만은 전망 있다고 하더군.” 다음날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안이 전해준 말에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투자는 어렵다고? 그녀는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안! 난 투자자를 부탁한 게 아니에요!” “나도 투자를 권한 게 아니다. 그냥 전망이 있는지 물어봤을 뿐인데 투자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 거지.” 으으. 민망해서 케이트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공작에게 사업 투자라니, 부끄럽다. 이안이나 에드워드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는 당연히 에드워드의 투자가 불가능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안의 투자도. 지식을, 글을 천하게 여기는 뮈엘라의 사상 기반에는 마법에 대한 공포가 담겨있다. 평민들은 어차피 윗사람들만 바뀌는 거니 크게 관심 없지만 귀족과 왕족들은 백 년 전 마법사에게 지배당하던 시대가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을, 글을 천하여 여기는 지금 상황을 고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에드워드는 케이트가 하는 건 괜찮다고 말했다. 호건 가는 귀족이 아니고 케이트는 힘이 약한 여자기 때문에 핑계가 있다. 오히려 장사치가 사회사업으로 이미지를 바꾸려 하는 걸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이안이나 에드워드가 끼어들면 안 된다. 주류 사회에 속하는 귀족 남자가 귀족과 왕족이 가장 두려워하는 지식과 글을 키우는 사업에 참여한다? 절대 안 될 말이다. 그래서 케이트도 사업을 시작하려 구상하면서 이안에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괜찮겠냐고. 물론 이안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하지만 좋은 이야기도 있다.” 이안은 케이트가 당황하는 바람에 꺼내지 못했던 좋은 이야기를 슬그머니 꺼냈다. 그녀가 얼굴에 손을 떼자 그는 어딘지 모르게 자랑하는 듯한 투로 말했다. “에반스 공작으로는 투자할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이름을 밝히지 않는 투자가로는 투자할 수 있다고 하더군.” 놀라움으로 케이트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뻐끔 거리다가 간신히 물었다. “진짜요?” “그래. 네가 필요한 금액 전부는 안 되고, 일정 부분은 개인 돈으로 투자해 주겠다더군.” “세상에.” 엄청난 돈이 해결되었다. 할아버지께 또 어떻게 말해야 하지? 하고 골머리를 썩이던 그녀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기뻐하는 케이트의 얼굴을 보고 이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부족한 금액은 내가,” “절대로 안 돼요.” 단호한 거절에 이안의 눈이 커졌다. 그는 놀라서 케이트를 쳐다보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절대로 안 된다고?” “안돼요. 로엔 백작 가는 이 사업을 모르는 거예요. 특히나 당신은 절대 연루 되어서는 안 돼요. 알겠어요?” “하지만 너와 결혼하는 순간 이미 한 배에 탄 게 아닌가?” “그럼,” 케이트는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 “부인이 괴짜라 당신이 고생하는 걸로 해요.” 이런. 이안은 반사적으로 케이트의 턱을 움켜잡았다. 키스하고 싶다. 하지만 그는 이곳이 고급 찻집이라는 것을 깨닫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네가 괴짜라 다행이군.” 케이트 역시 빙그레 웃었다. 다음 일정이 빡빡했기 때문에 케이트는 이안과 헤어지고 의상 가게로 향했다. 케이트의 파티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다. 그 계획중엔 케이트의 의상 준비도 들어 있었다. 거의 끝났지만, 마지막으로 확인할 게 있다. 의상에 달 보석이나 리본이 과하지 않는지, 케이트에게 어울리는지. 에드워드에게 전망 있다는 칭찬도 듣고 개인적인 투자로 받을 수 있어서 케이트의 기분은 상당히 좋았다. 그녀는 유진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리며 자넷에게 말했다. “하얀색은 금세 더러워질 것 같아서 아까워.” “하지만 사교계에 데뷔하는 아가씨들은 전부 하얀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는 걸요.” “차라리 아이보리 색으로 하지. 하얀색 드레스는 입을 일도 별로 없는데.” “그러게요. 장례식은 검은색을 입죠? 왜 하얀색 드레스인 걸까요?” “아, 그건 말야.” 직원들이 기다리는 의상 가게로 다가가며 케이트는 자넷을 위해 사교계에 데뷔하는 아가씨들에게 하얀 드레스를 입히는 이유를 설명했다. “하얀색처럼 아무것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아가씨라는 뜻이라는데 내가 보기엔 그냥 누가 신입인지 쉽게 가려내려고 하는 거 같아.” “아가씨도 참.” 자넷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와 함께 용병들도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케이트만은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텃세 부리기 쉽게 하려는 거 같지 않아? 하얀 옷이니까 실수인 척 음료 같은 걸 엎질러 버리면 큰일이잖아.” “그럴 리가요.” 텃세를 부리느라 하얀 옷에 음료를 엎지른다고? 자넷은 그 얼룩을 지울 생각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케이트는 입을 다물었다. 하녀들도 이런 텃세가 있다. 대신 그녀들은 어두운색의 유니폼이라 티가 잘 나지 않는다. 가게를 확인한 용병들이 아무 문제 없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 능숙하게 케이트를 가게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와 동시에 웬 남자가 가게 밖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확인해.” 케이트가 눈치채지 않도록 유진이 부하에게 조용히 명령했다. 보통 때라면 드레스를 확인하는 것도 호건 저택으로 불러 확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트가 여기저기 다니느라 바빴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느니 가는 길에 들리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의상 가게로 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먼저 가게 안을 살펴본 부하를 불러 나직하게 물었다. “위험요소는 없나?” “네. 혹시 몰라서 일시적으로 문을 닫았습니다. 아가씨께서 가기 전까지는 손님을 받지 않겠다고 했고요.” “안에 무기는?” “가위와 칼은 치워놨고 바늘과 핀에 독 확인을 끝냈습니다.” 알겠다는 말과 함께 유진은 부하를 자기 자리로 보냈다. 그가 손짓하자 케이트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지켜볼 수 있도록 데려온 여자 용병이 앞으로 나섰다. 그 일련의 행동이 일어나는 동안 케이트는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유진은 그녀가 완성된 옷을 보고 감탄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의 일은 케이트를 보호할 뿐 아니라 그녀가 어떤 위험에 처했는지 조차 모르게 하는 거다. 괜찮은 일자리다. 보수가 세고 호건 가라는 이유로 기대했던 그 어떤 억지나 짜증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진은 케이트가 무사히 오래 살기를 기도했다. 그래야 이런 편한 일자리가 오래 유지될 테니까. “입어보실 게요.” 적나라한 영업용 말투에 케이트는 쓰게 웃으며 직원들의 손에 몸을 맡겼다. 그녀들이 케이트의 옷을 벗겨내는 동안 용병인 마리아가 매의 눈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그때 가게 안으로 남자가 들어왔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에 직원이 후다닥 나와 말했다. “죄송해요. 오늘은 문 닫았어요.” 남자는 지저분했다. 머리는 안 감은 듯 뭉쳐 있었고 옷차림은 낡고 더러웠다. 직원은 상냥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남자를 쫓아내려고 다가갔다가 그가 꽤 호감 가는 외모를 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 괜찮잖아? 하지만 그뿐이다. 저런 외모라면 어느 저택의 하인으로 들어가도 되지만 뮈엘라의 남자들은 그리 선호하는 직업이 아니다. 하인은 약하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검을 다룰 줄 아는 하인을 고용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가 주세요.” 다시 한 번 직원이 좀 더 단호하게 말했을 때 남자는 씩 웃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사람에게 거지취급을 한다. 한때 부유한 귀족이었는데. 그는 품에 손을 넣어 너덜너덜한 책을 꺼냈다. 직원이 무슨 일인가 하고 눈을 크게 떴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남자가 책장을 찢자 그의 찢어진 단면에서 검은 잉크가 흘러나와 남자의 주변에 떠올랐다. “마법?” 경악에 찬 직원에게 남자 주변에 떠올랐던 잉크가 빛나더니 쏘아졌다.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직원의 몸이 뒤로 밀렸다가 털썩 쓰러졌다. 그녀의 몸과 벽에 수십 개의 화살 자국이 생겼다. 직원이 쓰러지는 쿠당탕하는 소리에 용병이 나왔다. 그는 남자를 보고 피 흘리며 죽어있는 직원을 확인하자 검을 뽑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남자도 다음 장을 찢었다. 찌익하고 종이가 찢어지는 것과 동시에 그 단면에서 잉크가 흘러나왔다. “마법이다!” 용병의 외침에 안쪽에서 용병들이 뛰어 나왔다. 우당탕하는 소리에 옷을 갈아입던 케이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하지만 그녀가 망설일 새도 없이 마리아가 나섰다. 그녀는 케이트의 손을 잡고 미리 확보해 둔 뒷문으로 달려갔다. “꺅!” “이게 무슨 일이야? 직원들이 가게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으나 문은 남자가 막고 있었다. 유진을 비롯한 용병들이 무기를 들고 남자 앞에 대치했다. 유진은 케이트와 그녀를 지키던 부하가 뒷문으로 달려가는 것을 확인하고 외쳤다. “마법을 쓴다! 조심해라!” ============================ 작품 후기 ============================ 오늘의 바보짓입니다. 개인지를 신청받기 시작했잖아요? 입금, 신청 확인을 하는데 가입 안된 아이디가 있는 거예요. 주소가 경찰서.... 혼자 뭐지? 어째서? 왜? 하고 두려움에 떨다가 연락드렸는데 제가 멍청하게 아이디를 잘못 검색한거였어요. 그분이 지금 보고계시다면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아 맞다. 이김에 한번 더... 후작과 수리공 개인지 신청받고 있습니다. 입금 신청받은 수만큼만 인쇄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블로그 (http://kiarne.blog.me/220497080647)를 확인해 주세요 00272 6. 마이크 =========================================================================                            마리아에게 끌려가며 케이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넷이 오다가 의자에 걸려 넘어지는 게 보였다. “잠깐만요! 자넷이!” “우선 피해야 합니다.” “자넷이 위험하잖아요.” 여기서 가장 위험한 건 케이트다. 하지만 케이트는 싸움에 자넷이 휘말릴까 걱정됐다. 자넷을 살피려고 케이트가 멈춘 틈을 타서 의상 가게의 직원이 먼저 뒷문을 열었다. 벌컥 문을 여는 순간 파지직 하고 푸른 섬광이 번쩍였다. “아아아악!” 먼저 뛰쳐나간 여자의 몸에 섬광이 내리꽂혔다. 케이트와 마리아, 둘 다 놀라서 멈춰 섰다. 나갈 수 없는 건가? 털썩 쓰러진 여자의 몸을 아무도 손대지 못했다. 그 사이 케이트는 자넷에게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남자와 용병들의 싸움은 용병이 우세한 것으로 보였다. 당연하다. 마법을 쓴다고 해도 용병은 여러 명이고 남자는 한 명이다. 남자가 종이를 찢는 사이 다른 각도로 용병이 덤벼들면 된다. 케이트는 펑하고 마법에 맞아 부서진 벽 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마리아의 손에 고개를 숙였다. “위험합니다!” “미안해요.” 곧이어 벽으로 마법을 맞은 용병이 탕하고 부딪쳤다. 후두둑 돌가루가 떨어져 케이트는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저, 저 사람 알아요.” “아는 사람입니까?”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마리아는 역시 구혼자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간혹 구혼자들이 자신의 청혼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상대 여자를 죽이려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남자는 옷차림이 도저히 호건 가에 구혼하는 구혼자로 보이지 않았다. “마이크 데일이라고, 데일 남작의 아들이에요.” “귀족입니까?” 상대가 귀족이면 일이 골치 아파진다. 그렇다 해도 케이트를 보호해야 하니 싸울 수밖에 없지만. 이걸 유진에게 전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는 그녀에게 케이트가 다시 말했다. “이젠 아닐 거예요. 데일 남작은 몇 달 전에 사형당했거든요.” “사형당했다고요? 무슨 죄로, 설마?” 마리아는 깜짝 놀라서 케이트를 돌아봤다. 귀족이 사형을 받았다니 보통 일이 아니다. 그녀는 다시 책장을 찢는 마이크를 보고 다시 물었다. “혹시 마법과 관련된 겁니까?” “네. 데일 남작 부부가 마법아이템을 몰래 반입했어요.” 그리고 사람도 죽였다. 어쩌면 마이크도 자신의 부모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케이트의 머릿속에 스쳤다. 아니,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연루됐을 가능성도 있다. “자세히 아시는군요.” “그 사건의 증인이 저예요.” 이런. 마리아는 마이크가 만들어낸 마법 화살을 검으로 튕겨내는 유진을 보고 혀를 찼다. 저 남자가 기를 쓰고 저러는 이유를 알겠다. 저건 살 생각이 없는 거다. 케이트를 죽이고 자기도 죽겠다는 거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런 의상 가게에서 마법을 쓸 때부터 범상치 않은 녀석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믿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죽을 각오를 한 거다. “그렇다면 곤란해지겠군요.” 마리아의 말에 케이트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여길 나가야겠습니다.” 여길 나가야 한다는 건 동의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라니, 무슨 의미일까? 궁금해하는 케이트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한 뒤 마리아는 주변을 살폈다. 뒷문은 함부로 나갈 수가 없고 앞문은 마이크가 막고 있으니 나갈만한 곳은 창문뿐이다. 그녀는 용병들과 마이크가 싸우는 방향의 큰 창문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저쪽으로 가는 건 위험하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재봉틀이 놓인 방이 있었다. “아가씨.” 마리아는 재빨리 돌아와 케이트를 데리고 안쪽으로 기어갔다. 뒤이어 자넷이 따라왔다. 세 여자의 머리 위로 마이크가 사용한 마법이 휙 지나가 벽에 부딪혔다. “힉.” 움츠러드는 자넷을 끌어안으며 케이트는 억지로 기어 안쪽 방으로 향했다. 덕분에 그녀가 입은 새로 만든 옷은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렸다. “이 창문으로 나가세요.” 마리아가 가리킨 창문은 아이가 나갈 만한 크기의 창문이었다. 자넷과 케이트는 가능하다. 자넷은 어리고 케이트는 체구가 작으니까. 케이트는 자넷이 먼저 나갈 수 있도록 창문을 들어 올렸다. “당신은 어쩌고요?” 이 창문은 마리아가 나가기엔 작다. 그녀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먼저 나가서 도움을 요청하세요.” “하지만,” “아가씨.” 마리아는 케이트는 창문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아가씨가 안전하셔야 저희도 마음을 놓을 수 있어요.” 그녀의 말에 케이트도 더는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먼저 나간 자넷의 도움으로 케이트는 창문을 빠져나갔다. 엉덩이가 좀 걸리긴 했지만 안에서 마리아가 밀어준 덕에 빠져나갈 수 있었다. “도움을 요청할게요.” 건물 밖에서 케이트가 창틀을 붙잡고 말했다. 도움보다는 그녀가 한시라도 빨리 다른 보호를 받아야 한다. 마리아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지만 케이트를 혼자 거리로 내보낸 것이 걱정스러웠다. “그럼 로엔 경을 불러주세요. 그분, 수사관이죠?” 수사관이라면 마법범죄를 처리하니 마이크의 마법 공격으로부터 케이트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케이트가 왕궁 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확인하고 마리아는 심호흡한 뒤 바깥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머리 바로 위로 불덩어리가 꽂혔다. 윽 하고 재빨리 물러났던 그녀는 일부러 마이크에게 들리도록 소리쳤다. “아가씨, 엎드리세요!” 케이트가 안전하면 마이크가 이곳에 그녀가 없다는 것을 눈치채서는 안 된다. 적어도 그녀가 왕궁에 도착할 때까지는. “자넷, 어서 타!” 케이트는 지나가던 승합마차에 올라타며 소리쳤다. 안에 손님이 두 명 타고 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왕궁까지 전속력으로 가주세요. 요금은 열 배로 낼게요!” 당신 뭐야? 이미 타고 있던 다른 손님이 항의했지만 케이트는 손을 들어 그들의 항의를 멈춘 뒤 단호하게 말했다. “죄송해요. 사람의 목숨이 달려있어요.” 사람의 목숨? 무슨 일인가 하고 손님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사이 마차는 전력으로 달려 왕궁 앞에 도착했다. 마차가 멈추자마자 안에서 자넷을 비롯한 손님들이 뛰쳐나왔다. 우엑 하고 멀미로 구토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케이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경비병에게 달려가 이안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케이트? 무슨 일 있나?” “이안!” 이안은 업무를 보던 차림 그대로 뛰쳐나와서 케이트의 어깨를 잡았다. “마이크가, 의상 가게에, 마리아 씨가!” 급해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안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다행히 뒤 따라 나온 제이드가 케이트의 말을 번역했다. “마이크? 혹시 마이크 데일 말입니까?” “네! 네, 맞아요! 마이크 데일이요! 그 사람이 의상 가게에서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어요.” 케이트의 말에 제이드와 이안의 표정이 변했다. 두 사람은 무슨 일인가 싶어 뛰쳐나오며 들고 온 검을 확인하고 케이트에게 물었다. “어딥니까?” “시내에 있는 의상 가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마차를 타려다 아차하고 뒤를 돌아봤다.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안 했다. “마이크 데일이 마법을 써요.” “마법?” 느닷없는 이야기에 제이드는 입을 딱 벌렸다. 이안은 재빨리 경비병에서 여분의 병력을 요청하라고 명령한 뒤 케이트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엇, 잠깐만.” 내렸던 손님들을 태우지도 않고 마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타지 못한 자넷도 멍하니 떠나는 마차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넷은 여기 있는 게 낫다. 케이트와 이안은 마이크가 마법을 펑펑 날려대는 곳으로 가야 하는 거다. 자넷을 데려갔다가 그녀가 다칠 수도 있다. 그녀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자넷에게 외쳤다. “자넷, 위험하니까 집으로 돌아가!” “아가씨는 요!” 자넷이 외쳤지만 그 소리는 케이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마차가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호건 저택으로 가지 위해 몸을 움직였다. 케이트가 사라진 뒤 의상 가게 주변은 텅 비어 있었다. 마법 소리와 검 소리에 놀란 주민들은 재빨리 중요한 것만 챙겨 도망쳤다. 그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거리에 멈춰 서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쪽에서 펑하고 마리아의 머리 위로 뭔가가 터졌다. 불 아니면 번개일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내밀었다. 마이크에게 검을 휘두르는 남자의 등이 보였다. 들어갔다! 라고 생각한 순간 마이크가 뒤로 펄쩍 물러났다. 샥 하고 그의 가슴에 가로로 긴 줄이 생기면서 핏방울이 송글 송글 맺혔다. “젠장.” 유진은 혀를 차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마이크가 또 종이를 찢고 있었다. 이번엔 무슨 마법일지 모르니 피해야 한다. 불이나 물이라면 검으로 막을 수 있지만 번개는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쫙하는 소리와 함께 마이크의 손에서 책의 페이지가 찢겨 나갔다. 검은 잉크가 종이에서 흘러나오더니 페이지는 빈 것이 되고 빠져나온 잉크가 제이드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화살이다. 유진은 뒤로 펄쩍 물러나며 외쳤다. “화살이다!” 투두두둑하고 뭔가가 쏟아지는 소리가 나더니 유진이 피한 장소에 손가락만 한 굵기의 구명이 몇십 개나 나 있었다. 허. 그는 파스스 무너지는 벽을 보며 입을 딱 벌렸다. 막으려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지만 다행인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벽이 무너지면서 마리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숨을 곳이 없다. 마이크는 케이트의 모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차. 케이트를 찾는 마이크의 표정을 보고 마리아가 신음을 흘렸지만 이미 늦었다. 케이트가 이미 도망쳤다는 것을 깨달은 마이크가 책을 쥔 채 뭐라고 중얼거리자 책장이 파라락 넘어갔다. 이번엔 뭐지? 누군가 마이크에게 검을 휘둘렀다. 마이크는 뒤로 물러나며 펼쳐진 페이지를 아무렇게나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유진이 달려가 그를 걷어찼다. 퍽 하고 마이크가 건물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데구루루 구르는 그의 손에는 여전히 마법 책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반대쪽 손에는 찢긴 종이가 한 움큼. 마법이 실패한 건가? 유진은 마이크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의 주변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쿠르릉 하고 지축이 흔들렸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으으...개인지 신청 받으면서 입금이랑 신청을 확인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모니터에 블루스크린이 똻! 안돼! 하고 외쳐봤지만 블루스크린이 또다시 똻! 부품은 문제가 없다는 말에 결국 윈도우를 다시 깔았습니다.... 으으, 윈도우 포맷하고 다시 까는거 너무 귀찮아요 ㅠㅠㅠㅠ 00273 6. 마이크 =========================================================================                            케이트는 불안한 마음에 마차가 달리는 동안 창문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만 도망쳐 나와서 걱정됐다. 용병들이 그녀가 도망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제발 무사하기를. 불안해하는 그녀의 손을 이안이 잡았다. “괜찮을 거다.” 그랬으면 좋겠다. 불안해하던 케이트는 익숙한 거리에 들어서자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도망친 사람들과 무슨 일인가 하고 나온 주변의 상인들 때문에 마차가 접근하기 어려웠다. 결국 비키라고 몇 번이나 소리 지른 끝에 마부는 마차 안을 향해 외쳤다. “마차로 진입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내릴게요!” 케이트는 그렇게 말하며 이안이나 제이드가 문을 열기 전에 벌떡 일어나 마차 밖으로 뛰쳐나왔다. 제이드는 마부가 부른 삯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뭐가 이렇게 비싸? 하지만 그는 군말 없이 돈을 내고 이안과 케이트의 뒤를 따랐다 “마리아!” 이안은 케이트가 지나갈 수 있도록 사람들을 헤치고 길을 터 주었다. 덕분에 케이트는 생각보다 빨리 건물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가 빠져나갈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건물이 거기 있었다. 여기저기 벽에 구멍이 뚫리고 무너져서 창문은 전부 내려앉아 있었다. “유진! 괜찮아요?” 케이트의 외침에 무너진 틈 사이로 용병들의 얼굴이 슬쩍 보였다 사라졌다. 동시에 안쪽에서 마이크가 튕겨 나왔다. 그의 상태가 그리 멀쩡하지 않은 것을 보고 케이트는 잠시 안심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피범벅이다. 실력 있는 용병 다섯 명이나 상대하면서 그나마 이 정도인 건 그가 사용하는 마법의 힘 덕분이었다. 이어서 유진이 검을 쥔 채 뛰어나왔다. 유진도 멀쩡하다. 오히려 마이크보다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옷이 약간 그을린 정도다. 끝난 건가? 마이크와 유진의 상반된 모습에 케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끝일 리가 없다. 쿠르릉 하고 지축이 울렸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케이트를 잡아당겼다. 무슨 일이지? 깜짝 놀란 유진이 뒤를 돌았고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의상 가게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리아!” 깜짝 놀란 케이트가 건물을 향해 뛰어들었고 그녀를 놓친 이안이 당황한 표정으로 케이트를 따랐다. 무너지는 건물 사이로 다시 마리아의 얼굴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유진은 마이크의 멱살을 잡고 외쳤다. “멈춰!” 멈출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멈출 수 있다고 해도 멈출 생각이 없다. 마이크는 씩 웃었다. 그 표정에 어린 광기에 산전수전 다 겪은 유진조차도 움찔하고 놀랐다. “케이트!” 이안은 몇 걸음 가지 않아 케이트를 붙잡았다. 그가 뒤에서 케이트를 끌어안은 순간 건물의 붕괴가 멈췄다. 가장 먼저 그 사실을 깨달은 건 히죽히죽 웃던 마이크였다. 그의 눈이 커지자 유진도 뒤를 돌아보았다. 무너지던 건물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무너지던 벽이 휘어진 그대로 멈춰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안쪽에서 들리는 부하들의 목소리에 유진은 마이크의 수족을 결박하며 건물 안쪽을 향해 외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안에 있는 부하들을 구할 기회였다. “다들 빨리 나와!” 내려앉은 문으로 용병들이 허둥지둥 허리를 굽히고 하나, 둘 기어 나왔다. 케이트는 눈을 부릅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인 마리아까지 나오자 유진이 외쳤다. “다 나왔나? 못 나온 사람은 없어?” 없다. 용병들은 저마다 주변을 둘러보며 인원수를 확인했다. 전원 나왔다. 누군가 전원 나왔다고 말하는 것과 동시에 쿠르릉 하고 다시 지축이 흔들렸다. “케이트.” 이안은 케이트를 품에 안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와 먼지에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용병들은 무너지는 건물의 잔해에 맞을까 싶어 뒤로 물러났고 유진은 발광하는 마이크를 질질 끌고 물러났다. “너 이년! 내가 네년을 가만 둘 줄 알아? 목을 분질러 버리겠어! 이 나쁜 년!” 마이크의 외침에 케이트는 움찔했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를 향한 분노가 어마어마해서 기가 질릴 정도였지만 케이트는 억지로 가슴을 내밀고 마이크를 쳐다봤다. “더러운 년! 은혜도 모르고, 감히! 내가 널,” 마이크가 더 떠들기 전에 유진이 그의 배를 걷어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마이크의 몸이 펄떡였다. “컥, 컥!”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괜찮아요 라고 중얼거리며 케이트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마이크에게서 돌렸다. 그가 왜 그녀에게 저렇게까지 적의를 품고 있는지 몰랐다. 그래서 더 두려웠지만 케이트는 애써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무너진 건물 잔해에서 먼지가 풀썩 피어올랐다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마리아가 그녀에게 다가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건물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신기한 일이네요. 무너지던 건물이 멈추다니. 마법의 부작용일까요?” 이안의 손을 잡은 케이트의 손에 힘이 들었다. 그녀의 귀에 구경꾼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봤어? 그거 뭐였지? 마법인가? 제이드는 이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목격자가 너무 많다. 이번 사건은 그냥 넘어가기 어려울 것이다. 당장은 마이크 데일이라는 미친놈이 마법을 사용해서 건물을 무너트리려 했다는 이야기뿐이지만 마이크가 노린 것이 호건 가의 후계자인 케이트 스미스라는 소문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무너지는 건물을 멈춘 것이 누구냐 하는 의문이 떠오를게 당연했다. === 케이트는 흠뻑 젖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또 악몽을 꿨다. 긴 복도를 얼굴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쫓겨 도망치는 꿈을. 마치 온종일 복도를 뛰어다닌 것처럼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케이트의 비명에 그녀를 깨운 자넷이 다시 물었다. 걱정스러운 자넷의 표정을 보고 케이트가 힘없이 웃었다. “괜찮아. 어제 조금 놀랐었나 봐.” 그렇지 않아도 하얀 케이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자넷은 손수건에 따듯한 물을 적셔 케이트의 땀을 닦아 주었다. “수사관의 방문을 취소할까요?” 자넷의 질문에 케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어제 마이크를 지원 나온 수사관에게 맡긴 뒤 케이트는 이안과 제이드의 보호를 받으며 저택으로 돌아왔다. 원래대로라면 수사관들과 함께 왕궁으로 가거나 수사관들이 저택으로 따라와서 사건 경위를 이야기해야 한다. 하지만 수사관장인 이안과 호건 가의 이름 덕분에 피곤한 일은 다음 날로 넘길 수 있었다. 그러니 약속을 취소해서는 안 된다. “일어나셨습니까.” 케이트가 옷을 갈아입고 내려가자 칼이 인사를 건넸다. 어제 엄청난 일을 당했다고 들었다. 케이트가 자신의 방으로 올라간 뒤 그녀를 내보낸 마리아는 칭찬과 호통을 동시에 들었다. 기지를 발휘해서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케이트를 내보낸 것은 잘했지만 마이크가 눈치채고 쫓아온다면 건물 안쪽에 있는 용병들이 그녀를 보호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보호해야 한 상대의 안위를 도박에 맡긴 거다. “할아버지는요?” “먼저 식사하셨습니다.” 오늘은 케이트가 좀 늦었던 거다. 케이트는 얼굴을 붉혔지만 다른 귀족 아가씨들은 이 시간도 이르다. 곧 그녀를 위해 준비한 음식이 나왔다. 부드럽게 익힌 오믈렛과 팬케이크. 별거 아닌 음식이지만 팬케이크 위에 가득 얹어진 과일이 호건 가의 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계절에 아침으로 과일이 올라간 팬케이크를 먹을 수 있다는 건 지난밤 새도록 과일을 사서 말을 달린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돈이 꽤 많이 든다. 그녀가 좋아하는 아침 식사다. 케이트는 빙그레 웃고 과일을 입안에 넣었다. 이런 부에 익숙해지는 것보다 칼의 배려가 고마웠다. “고마워요, 칼.” 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어제 저녁때 나온 스튜를 입맛이 없다며 물리는 걸 보고 사람을 구해 신선한 과일을 공수해 왔다. 케이트가 맛있게 먹는 걸 보니 그의 기분이 뿌듯했다. 수사관들이 호건 저택을 찾은 것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이른 오후였다. 어제의 사건을 이유로 칼이 오늘 예정을 전부 취소했기 때문에 케이트는 오랜만에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온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손님이 도착했다는 말에 붓을 놓고 돌아섰다. 그림을 그리는 건 꽤 즐겁다. 아무 생각 없이 붓을 휘두르다 보면 잠시나마 고민을 잊게 된다. 살롱을 운영해 볼까. 케이트는 잠시 생각했다. 화가나 음악가를 후원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뮈엘라의 예술은 어디까지나 취미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리 발전한 상태가 아니다. 특히 음악은 악보의 존재가 적어 널리 알려지기 어려웠다. 지금 하는 사업과 결합하면 괜찮지 않을까.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녀의 다리는 부지런히 움직여 손님이 기다리는 응접실에 도착해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케이트가 나타나자 문을 두드린 뒤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안녕하세요.” 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이트는 카이사와 리코, 제이드를 보고 마지막으로 이안을 쳐다본 뒤 미소 지었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곧 가족이 될 텐데 이 정도야 당연하죠.” 제이드의 여유 있는 인사에 리코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제이드는 이안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이 녀석과 결혼하면 우리 가족이지, 뭐.” “결혼? 로엔 경과?” 리코는 어어? 하고 이안과 케이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아직 결혼을 하기로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케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카이사가 말을 이었다. “어제 사건에 대해 여쭤볼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 거리를 가신 목적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곧 파티를 열어서요. 제 옷이 완성됐다길래 확인하러 갔어요. 그 옷은 새로 만들어야겠지만요.” 그날 케이트가 입은 옷은 원상 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망가졌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 식사를 하자마자 새로 드레스를 만들기 위해 의상 가게에서 직원이 찾아왔다가 갔다. “파티요?” 리코의 질문에 케이트는 어라? 하고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제가 초대장을 드렸는데요. 혹시 못 받으셨나요? 분명 이안에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이안에게 향했다. 그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제이드에게 나눠주라고 말했는데?” 시선은 그대로 제이드를 향했다. 제이드는 어라? 하고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아하하 하고 웃으며 말했다. “내 책상에 잘 있어. 가서 나눠줄게.” 그럼 그렇지. 다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카이사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 작품 후기 ============================ 윈도우를 포맷했더니 업데이트가 맘대로 시작해서~ 늦어서 죄송합니다~ 00274 6. 마이크 =========================================================================                            중간에 하녀가 두어 번 더 들어와 차를 교체하는 동안에도 질문은 이어졌다. 마이크를 알고 있는지, 그가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까지 질문하고 나서 카이사는 흠 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데일의 마지막 마법이 발동되던 중간에 잠시 멈췄다던데, 혹시 아십니까?” 아주 잠깐 케이트의 심장이 멈췄다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이안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알아요. 저도 봐, 봤으니까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지만 카이사는 그게 다른 이유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수첩을 내려다보며 미간에 주름을 만든 채 물었다. “어떻게 멈췄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네에. 그냥, 건물이 무너지려던 그대로 멈춰버렸어요. 그, 뭐라고 할까, 그림처럼요?” “그림이요?” “네. 무너지는 그림을 보는 것처럼 원래대로라면 떨어져야 할 돌이 이렇게 멈춰있는, 그런 느낌이에요.” 그렇군. 카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격자의 증언이 똑같다. 그는 수첩을 덮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끝인가요?” “네. 피곤할 텐데 붙잡아서 죄송합니다.” 그녀의 짓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케이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에요. 저보다 고생이 더 많으시죠. 다과를 좀 더 내올 테니 드시고 가세요.” “괘찮,” “그럼 감사하죠.” 괜찮다고 말하려는 카이사를 막고 제이드가 끼어들었다. 그 사이 이안은 케이트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카이사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말하려다가 케이트를 쳐다보는 이안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 이안은 케이트와 응접실에서 나와 조용히 말했다. 케이트가 수사관들을 잘 대접하라고 말했기 때문에 비스킷을 굽는다, 샌드위치를 만든다, 주방이 소란스러워졌다. 케이트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이안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안에서 카이사가 그녀에게 질문할 때도 이안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누가 그랬는지 잡기 어려워. 마이크의 마법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럴까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때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케이트는 흠칫하고 놀랐다가 제이드의 얼굴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놀랐다가 안심하자 제이드는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미안, 하나만 물어보고 얼른 자리를 비켜줄게.” 아무래도 이안과 케이트가 뭔가 비밀스러운 일을 하려던 중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비밀스러운 이야기인 건 맞지만, 일은 아니다. 케이트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여기서 그런 말을 해봤자 제이드는 더욱더 오해할 것이라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스미스 양, 큐바인 하우스를 제게 팔 생각 없습니까?” 제이드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의 이야기였다. 큐바인 하우스를 팔라는 말에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네?” “물론 돈은 제대로 지급할 겁니다. 아는 사이라고 깎지 않을 테니 걱정마세요.” 그녀의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가 다시 제이드를 향했다. 제이드가 큐바인 하우스를 팔라고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는 조금 초조한 표정으로 케이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사려고 하시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킬리언씨는 이미 집이 있잖아요?” “아, 그게, 그러니까.” 이번에는 제이드가 이안과 케이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의 소매에 달린 번쩍이는 커프스단추가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냈다. “조세핀이 저보고 나가라고 해서요.”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고개를 기울이는 케이트 옆에서 이안이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사려는 건가. 영리하군.” “뭐가요?” “제이드가 그 집을 사면 나갈 필요가 없어지잖아.” 여전히 이해를 못 하겠다. 조세핀이 나가라고 하는 것과 집을 사는 것에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케이트는 눈을 깜빡이며 이안의 부연설명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제이드가 그 집을 사면 조세핀도 더 이상 나가라는 말을 못할 거잖아. 안 그래?”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케이트는 입을 뻐금거리다가 제이드를 돌아봤다. 그녀는 제이드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머리를 짚었다. “우선, 킬리언씨. 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건데요?” “조세핀에겐 내가 필요하니까요.” “어째서요?” 엇 하고 제이드가 멈칫했다. 왜냐고 물어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조세핀은 여자니까?” 케이트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허리에 손을 얹고 물었다. “다시 말해보시죠.” 제이드의 시선이 황망하게 이안을 향했고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 그러니까, 조세핀은 여자고 보호가 필요하고, 나는 남자니까요.” “그럼 제가 큐바인 하우스로 우리 집 사람을 한 명 보낼게요. 나가실 건가요?” “아뇨.” 케이트는 허리에 얹었던 손을 들어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미소 지었다. “그럼 이제 안 나가려는 이유를 이야기해 보세요.” 어.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는 어쩐지 이안이 그녀에게 잡힌 이유를 알 것 같아 이안을 쳐다봤다. 겉보기엔 얌전하고 조용해 보이는데 이런 구석이 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조세핀과 함께 있고 싶으니까요.” “코트 양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했을, 걸요?” 아마. 했을 거다. 아마도. “했을 걸요? 한 거예요, 안 한 거예요?” 제이드는 이마에 손을 얹고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슷하게는 했죠.” “비슷하게 뭐라고요?” 너 혼자 여기서 어떻게 살아? 내가 필요할 거야. 라고 했다. 다행히도 제이드는 그걸 입 밖으로 내기 전에 비슷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거봐.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그 집, 코트양도 사겠다고 했어요. 며칠 전에.” 뭐? 제이드의 눈이 커졌다. 안 돼! 그건 안 된다. 그 집이 조세핀의 집이 되면 조세핀은 당당하게 그를 내쫓을 거다. 케이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제인은 그 집에 계속 있고 싶다고 했고, 코트양도 제인을 계속 고용하고 싶어 하니까 코트 양에게 파는 것도 괜찮을 거 같긴 하거든요. 제가 거길 관리하는 것도 어렵고. 킬리언 씨는 집이 있지 않아요? 어차피 팔 거면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 파는,” “저, 저도 필요해요!” 제이드가 덤벼들면서 외쳤기 때문에 케이트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로 이안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케이트를 감쌌다. “조세핀이 부른 가격보다 더 드리죠.” 이런. 케이트는 이안의 손을 잡은 채 속으로 혀를 찼다. 지금 그 집을 누가 사느냐가 문제가 아닐 텐데. 어떻게 이안과 다니는 걸까 하고 궁금해했는데 이제 보니 제이드는 이안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킬리언 씨가 그 집을 사면, 코트 양이 다른 집을 구하지 않을까요?” 엇 하고 제이드의 입이 벌어졌다. 조세핀이 그 정도로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케이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전 솔직히 그 집을 잘 관리하면서 사는 분께 팔고 싶거든요. 킬리언 씨는 그 집이 필요한 게 아니라 코트 양을 잡기 위해 필요한 거잖아요. 그럼 집을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코트 양을 설득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어서 제이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어깨가 축 처지는 게 보여 케이트는 저런 하고 속으로 혀를 찼다. === 케이트의 걱정과 달리 그녀의 가장 큰 두 가지 문제는 그럭저럭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안의 말대로 수사관들은 붕괴하는 건물을 멈춘 것이 마이크의 마법 실패라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 사이에서는 근처에 다른 마녀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오갔지만 그렇다면 그 마녀가 왜 용병들을 구해줬느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케이트의 사업은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보이고 있었다. 처음 시험했던 공방과 현재 신문을 읽는 공방뿐 아니라 소문을 들은 공방에서도 케이트와 세 마녀에게 연락을 해왔다. “진짜로 제시하는 돈이 올라가는군요.” 세 마녀는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그녀들 앞에서 제시하고 간 금액이지만 믿을 수가 없다. 처음 찻집의 차 한 잔을 시작한 돈은 며칠 사이에 휙휙 뛰어 작은 방 반달 치 월세까지 올라갔다. 뭐야, 되잖아. 케이트는 안심해서 미소 지었다. 생각해보면 공방 직원들이 돈을 모아서 지급하는 경우 이 정도로 올라가도 직원들 개인에게 가는 부담은 적기 때문에 가능하다. 게다가 거리에 소문이 나서 약간의 거품도 섞여 있을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모른 척할까요?” 로라의 말에 케이트는 귀네비어를 쳐다봤다. 응? 왜? 귀네비어가 눈을 크게 뜨자 케이트는 다른 여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부터 연락하는 사람이 있으면 솔직하게 이야기하죠.” 공방에서 신문을 읽는 여자들은 케이트가 돌봐주고 있다. 그녀들이 케이트 밑을 떠나 공방에서 일을 하려면 공방에서 주는 돈으로 생활할 수 있어야 한다. 한 달 치 월세, 그리고 생활비. 그녀는 세 마녀와 최소한 필요한 금액이 얼마일지 의논했다. 여자 혼자 살만한 동네의 월세가 얼마인지, 생활비가 어느 정도 드는지 세 마녀의 의견은 꽤 도움이 되었다. 케이트는 계속 하녀로 일했기 때문에 괜찮은 동네의 월세가 얼마인지 몰랐고, 생활비 역시 몇 달 전부터 에녹의 집에서 다시 호건 저택으로 거처를 옮기며 최근 물가를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과연 호건 가네.” 케이트와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수잔이 중얼거렸다. 보통은 케이트가 세 마녀를 만나러 가지만 지난번 사건 이후로 케이트는 며칠 외출을 삼가고 있었다. 덕분에 들어오게 된 호건 저택이다. 세 마녀는 화려한 호건 저택의 내부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구경했다. 조각상과 그림은 아주 예전에 사라졌다고 알려진 작품도 있었다. 귀네비어는 마법 아이템이 장식품으로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스미스 양, 이게 뭔지 알아요?” 커다란 유리구슬 안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들어 있다. 케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냥 예쁜 유리조각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귀네비어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건 마법 도구예요.” “이게요?” “쉿.”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할 때 쓰는 도구다. 귀네비어는 멀리있는 것을 볼 때 쓴다고 말했다. 때로는 과거나 미래도 본다고. “하지만 뮈엘라의 마법사들은 사라졌으니까요. 이걸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죠. 그래서 남아 있을 거예요.” “얼마 전에 이 집에 수사관들이 왔었거든요. 그런데 아무도 이게 뭔지 알아본 사람이 없었어요.” “마법 도구는 두 가지가 있어요.” 귀네비어는 주변을 살피고 재빨리 속삭였다. “마력을 품고 있어서 늘 마력이 느껴지는 것과 텅 비어 있어서 마력을 불어넣어야 반응하는 것이죠. 전자가 많고 그렇기 때문에 감별하기가 쉬워요. 수사관들은 마력이 반응하는 반지를 끼고 다니거든요.” 그러고 보니 알라나데일에서 이안이 숨겨둔 반지를 본 적이 있다. 그도 그걸 늘 끼고 다니는 걸까? 호기심을 뒤로 미루며 케이트가 물었다. “후자는요?” “이 수정구슬 같은 거예요. 마력을 불어넣어야 반응하기 때문에 그냥 두면 지식이 없는 사람은 마법 도구라는 걸 몰라요.” 아, 그렇구나. 그럼 이건 이대로 둬도 되는 걸까? 케이트가 물어보려 했을 때였다. 귀네비어는 다시 주변을 살피더니 속삭였다. “로엔 경 같은 마력 흡수자도 마찬가지예요. 스미스 양 같이 마력을 뿜는 마력 보유자와 달리 아무것도 안 하면 사람들이 모르죠.” 그렇구나.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녀는 잡히고 괴물은 살아남은 이유가 그거였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술 한잔 해쑴다 00275 6. 마이크 =========================================================================                            “왜 내게 말하지 않은 게냐.” 에녹은 케이트를 보자마자 대뜸 말했다. 다시 집 밖으로 나가는 걸 자제하면서 케이트는 주변 사람들과 여유 있게 차를 마실 시간이 생겼다. 그녀의 대부는 케이트가 마이크에게 공격당할 뻔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다. “별일 아니었는 걸요.” 케이트는 찻잔을 내려놓으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경우라면 모르지만, 이번은 확실히 그녀가 위기의식을 느끼기 어려웠다. 마이크는 용병들의 공격으로 상당한 상처를 입었고 감옥보다는 병원으로 가야 할 수준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그가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전에 마리아 덕분에 건물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별일이 아니긴!” 에녹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꾸짖었다. 하지만 케이트보다 몇 살 많아 보이지 않는 외모에 할아버지 말투로 꾸짖다 보니 케이트는 조금 재미있었다. 그녀는 웃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게다가 괜히 아저씨께 걱정을 끼쳐드리기도 싫었고요.” 상냥한 말에 에녹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케이트의 손을 잡아 다독이더니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혹시 몰라서 만들어 놨단다. 가지고 다니거라.” “이게 뭔데요?” “듣기로는 어제 건물이 무너지다 잠시 멈췄다더구나.” 아차. 케이트가 들켰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녹은 다시 엄한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널 혼낼 생각은 없다. 네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한 건 어쩔 수 없잖으냐.” 하지만 그가 봉인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그 봉인이 약해졌다니 놀라웠다. 그 괴물 때문이겠지. 그는 이안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케이트는 서로 공명한다. 두 사람이 원하는 게 일치하면 이안의 마력 흡수자로서의 능력과 케이트의 마력 보유자로서의 능력이 시너지를 일으키는 것이다. “역시 허락하지 말았어야 했어.” 에녹의 중얼거림에 케이트가 눈을 크게 떴다 “뭐가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서둘러 말을 얼버무리며 품에서 꺼낸 목걸이를 케이트의 목에 걸어주었다. 가느다란 줄 끝에 섬세하게 세공된 자개가 걸려 있었다. “마법발동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하는 마법이 걸려있단다. 혹시라도 누군가 너를 의심하면,” 케이트는 메달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누군가 그녀를 의심하면 에녹이 준 이 목걸이 덕분이었다고 핑계를 대라는 말이다. 그녀는 감격해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러면 아저씨가 위험할 수도 있잖아요.” “괜찮아. 그 정도까지는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있다.” 그는 케이트의 대부다. 니콜라스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 아내와 케이트를 에녹에게 부탁했다. 에녹은 케이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생각이었다. 위험하지만 아주 위험한 건 아니다. 그는 그렇게 케이트를 위로했다. “그보다, 귀네비어에게 들으니 재미있는 일을 한다면서?”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케이트를 위해 재빨리 주제를 바꿨다. 얼마 전, 귀네비어와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케이트가 괜찮은 사업을 시작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에녹은 그렇게 판단했다. 에드워드처럼 그 역시 멀리 내다봤을 때 괜찮은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오래 걸리고 눈에 띄는 이익은 없을 것이다. 적자가 나지 않는 것만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사업이었다. 하지만 지금 뮈엘라에게, 그리고 케이트나 세 마녀와 같은 마녀들을 위해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그는 과연 케이트가 어디까지 내다보고 그 일을 시작했는지 궁금했다. “그래, 어디까지 계획하고 있느냐?”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요.” 케이트는 얼굴을 붉히며 자신이 생각한 것을 이야기했다. 벌써 대독자를 고용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있다. 급여는 아직 모자라지만 이대로 대독자에 대한 소문이 퍼진다면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뮈엘라에 글의 중요성도 알릴 수 있고요.” 에녹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장기적으로 보면 뮈엘라에 마법의 부활을 꾀할 수도 있겠지.” 깜짝 놀란 케이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긴 했지만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건, 아직은 위험하니까요.” 작아지는 케이트의 목소리에 에녹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그녀의 말대로 마법의 부활을 꾀하려는 건 위험하다. 뮈엘라는 마법사에 대한 공포심이 대단해서 어린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는 이야기 속의 사악한 악당 대부분이 마법사일 정도다. “그래,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듯 구는 게 중요하겠구나.” “네.” 고개를 끄덕이는 대녀를 보며 에녹은 잠시 흠 하고 생각하다가 물었다. “네 어머니가 호건 가라 다행이구나. 꽤 오랜 기간 투자가 필요한 사업이니 말이다.” “아, 그거 말인데요.” 케이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약간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할아버지와는 상관없이 진행할 거예요.” “어째서?” “그냥, 제가 혼자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요.” 에녹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사회사업은 호건 가 같은 부유한 집안이 길게 잡고 시작하는 것이 사회적으로도 좋다. 그리고 호건 가의 사람인 케이트가 시작했다는 게 호건 가로서도 이미지 구축에 괜찮을 것이다. 오히려 호건 가가 귀족이었다면 다른 무인들에게 빈축을 샀을 테지만 호건 가가 귀족이 아니기 때문에 딱 좋았다. 심지어 호건 가가 그동안 무기와 군수품 사업으로 재력을 키웠다는 것을 생각하면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는 핑계도 댈 수 있다. “설마, 네 조부가 투자를 거절한 게냐?” 케이트의 얼굴이 당황으로 달아올랐다. 에녹은 믿을 수가 없어서 입을 딱 벌렸다. 죽은 제프리 때는 별 쓸데없는 사업에 돈을 퍼부어도 가만히 있더니 케이트는 거절한다고? “멍청한 노인네가.” “아저씨!” 케이트의 비난에도 에녹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사실이잖느냐.” “하지만 제 할아버지이신걸요.” “흥. 멍청한 조부 밑에서 네가 고생이 많구나.” 그렇지 않다.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할아버지 변호를 시작했다. “조금 고집 세긴 하지만 괜찮은 분이세요.” “그리고 머리도 굳었지.” “아저씨!” “그래, 그래. 알겠다. 결국 에녹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비스마르크는 호건 사업이 군수품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그 외에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케이트의 사업 쪽이 훨씬 괜찮은 방안일 텐데. 그는 혀를 차며 케이트를 쳐다보다가 불쑥 물었다. “그래, 돈은 어떻게 마련할 생각이냐?” “반 정도는 이름을 알리지 않는 투자자가 투자해 준다고 했어요.” “이름을 알리지 않는?” “네에. 믿을 만한 분이에요.” “마법사?” “마법사는 아니고요.” 그럼 누구지? 에녹은 케이트의 사업에 투자할 만한 사람을 더이상 떠올릴 수가 없어서 다시 턱을 쓰다듬었다. 그는 꿈에도 이름을 알리지 않는 투자자가 에드워드라는 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머지 반은, 좀 더 알아봐야죠. 대출도 생각해 봐야 하고.” “대출?” “아니면 큐바인 하우스를 파는 방법도 있고요.” 그래서 케이트는 조세핀과 제이드의 제의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집을 팔면 해결되고?” “음, 조금 부족하지만 부족한 건 어떻게든,” 해야 한다. 말을 잊지 못하는 그녀에게 에녹이 대뜸 말했다. “부족한 금액, 내가 투자하마.” “네? 아저씨께서요?” “그래. 내 돈은 못 받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만, 죄송해서.” “죄송할 것 없어.” 에녹은 씩 웃었다. 젊은 청년의 얼굴에 연륜이 가득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법사로서, 그리고 뮈엘라의 건국자로서 투자하려는 게야. 나쁘지 않아. 힘에만 몰려있는 뮈엘라에 필요한 거란다.” 케이트의 얼굴에 부끄러우면서도 뿌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비스마르크에게 거절당해 깎였던 자존심이 바르게 차올랐다. 케이트는 에녹을 끌어안았다. “감사해요, 아저씨.” 뭐가? 에녹은 케이트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가 대녀라서가 아니라 그녀의 사업이 나라에 필요해서 투자하겠다고 했으니 케이트가 고마워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케이트는 그래서 고마웠다. 그녀가 하려는 일을 뮈엘라에 필요한 일이라고 말해준 것이. “그래, 그 사업 좀 자세히 이야기해 보려무나.” 이제는 대부로서가 아니라 투자자로서 하는 말이다. 케이트는 웃음을 터트리며 그에게서 떨어져 앉았다. 그녀의 초록색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에녹은 미소를 지으며 케이트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편 케이트를 지키는 용병들은 한동안 그녀가 외출을 자제한 덕분에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유진은 느긋한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부하들의 나태를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최소 인원만 남기고 모두 끌고 호건 저택 뒷마당으로 나왔다. 이안이나 에녹이 봤다면 눈을 빛냈을 광경이 시작됐다. 보호구를 걸치지 않은 용병들이 훈련이다. 두 사람은 보는 것은 물론이고 참여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구령 붙여!” 유진의 외침에 소리 없이 움직이던 용병들이 하나! 둘! 하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마리아 옆에 있던 남자가 슬쩍 물었다. “이상하지 않냐?” “뭐가?” “건물 무너질 때 멈춘 거. 그거 결국 이유가 뭐였는지 아무도 모르잖아.” “범인 마법이 잘못된 거라던데?” 하나둘 하나둘 하는 구령이 백 번째를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숨을 헐떡이는 사람조차 없었다. “마법이 잘못되면 무너지던 게 멈추기도 하나?” “그거야 우린 모르지. 수사관들이 뭐래?” “그 양반들이 우리한테 알려줄 사람들이냐?”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마리아는 투덜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무사히 건물에서 살아나와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 그런 문제는 관심이 없었다. “그때 마녀가 있었던 거 아니냐는 거지.” “마녀? 무슨 마녀?” “그건 모르지. 근데 무너지던 건물을 멈추게 할 정도면 강력한 마녀 아닐까?” “야 이, 멍청아. 강력한 마녀가 있었으면 수사관이 알아차렸겠지!” 그건 그렇지만. 남자가 입술을 삐죽일 때였다. 유진의 눈이 빛났다. “거기 두 사람! 떠들 기운이 있지? 너흰 한 시간 더 해!” 그의 명령에 마리아의 고개가 남자 쪽으로 휙 돌아갔다. 너 때문에! 그런 표정에 남자는 윽 하고 고개를 돌렸다. 할 수 없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목검을 집어 들 때까지도 하나둘 하고 구령을 외쳐야 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즐겁...기는 개뿔 월요일이죠. 아니, 화요일이구나...OTL 내일은 업뎃을 못할것 같아요. 후작과 수리공 개인지 건으로 인쇄소를 가봐야 하는데 집에 늦게 돌아올것 같거든요. 잘하면 수요일도 못올릴수도 있는데...수요일은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00276 7. 거절 =========================================================================                            마이크의 누이 중 누구도 마이크를 살려 달라고 국왕에게 요청하지 않았다. 마이크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누이들은 이미 남작 부부가 이안과 제이드에게 잡혀 수도로 끌려왔을 때 제 살길을 찾아 데일 가를 거부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난 지 몇 년이 지났고 연락도 하지 않아 그들이 마법을 쓰는 줄 몰랐다고 주장했다. 그녀들이 가져간 지참금이 마법아이템을 팔아 나온 돈이라는 걸 알면서. 마이크는 차갑고 더러운 감옥 바닥에 앉아 누이들을 저주했다. 그도 누이들처럼 도망칠 구석이 있었다면 이미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저주하는 것이다. 마이크 데일. 그는 데일 남작 부부의 작위와 가업을 이을 하나뿐인 아들이었고 남작 부부가 수사관에게 잡히기 바로 며칠 전까지 함께 살았다. 그러게 다른 사람들처럼 수도로 보내달라니까. 마이크는 재작년, 어머니에게 수도에 타운하우스를 얻어 살게 해달라고 졸랐다가 거절당한 것을 떠올렸다. 이미 죽고 없는 어미가 원망스러웠다. 그랬다면 그가 지금 이런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 년을 죽였어야했는데.” 자연히 그의 분노는 케이트를 향했다. 귀하게 자란 귀족인 그가 이런 꼴이 되어 있는데 고작 하녀였던 계집이 운 좋게 부자 할아버지를 만나 팔자 펴서 살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남작 부부가 저지른 범행에 증인이 된 것도 그녀라고 들었다. 며칠간의 사냥에서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다 무너진 집과 그 주변을 살피는 치안관들이었다. 치안관이 그를 발견하기 전에 마이크는 무너진 저택 앞에 쌓아둔 마법 아이템을 알아차렸다. 마법아이템을 보는 순간 마이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집이 무너져있고 꽁꽁 숨겨둔 마법아이템이 밖에 나와 있다는 건 심상치 않다. 그는 근처에 있는 친구라 부를만한 작자에게 찾아가 잠시 몸을 의탁했다. 다행히 한동안 데일남작 부부가 무슨 죄로 잡혀갔는지 소문이 나지 않아 마이크는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비싼 술을 마시고, 카드 게임을 하고, 창녀를 샀다. 그러면서도 그는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알아봤다. 누군가의 신고였는지 수사관이 찾아와서 남작부부를 잡아가려 했다고 했다. 남작부부는 잡혀가지 않기 위해 반격했고 그 탓에 집이 무너졌다. 마이크는 소문의 신고자가 케이트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년이다. 그 자그마한 빨간 머리 계집애. 그 계집애가 아니라면 누가 신고한단 말인가. “젠장.” 키티였던가, 캣이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가증스러운 얼굴은 또렷이 떠올랐다. 마이크는 이를 갈다가 그가 떠올린 얼굴이 상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뭐, 뭐야?” 공중에 케이트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라 있었다. 어깨 아래로는 보이지 않는다. 유령? 마이크는 깜짝 놀라 뒤로 물렀다. 불투명하고 매끄러운 것이 케이트의 얼굴모양이었다가 파스스 흩어지더니 다시 케이트의 얼굴이 되길 반복했다. “뭐?” 뭔가 희미하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마이크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공중에 떠오른 케이트의 얼굴을 쳐다봤다. “…하고 싶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복수 하고 싶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이크는 케이트의 얼굴을 쳐다봤다. 파스스 흩어진 케이트의 얼굴이 힘겨운 듯 다시 모이더니 다시 물었다. “이 여자에게 복수하고 싶어?” “그래. 복수하고 싶어.” 케이트의 입술이 벌어졌다. 깔깔깔 웃는 것처럼. 눈이 가늘어지고 입 꼬리가 귀까지 찢어졌다. 마이크가 흠칫 놀라 물러났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케이트의 얼굴이 아닌 그것을 보며 마이크는 그가 무엇과 이야기 했는지 알아차렸다. === 이안이 케이트를 만나기 위해 호건저택에 찾아갔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건 기드온이었다. 그는 응접실 창문을 열어 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두면 춥기 때문에 이안은 보통 나가서 피우곤 했다. 사용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인 실라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기드온이 먼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안도 자연스럽게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응? 그건 뭔가?” 이안의 담배를 본 기드온의 반응에 그는 말없이 한 개피 내밀었다. 기드온도 품에서 다른 파이프를 꺼내 내밀었다. 한 사람과 한 드워프는 서로의 담배를 교환해서 불을 붙이고 입에 물었다. “자네가 마녀를 잡았다던데.” 잠시의 정적을 즐긴 기드온이 대뜸 물었다. 이안은 생각보다 독한 담배에 인상을 쓰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이름은 아니, 어떻게 생겼던가?” 이안은 마녀의 생김새를 떠올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꿈에 나올까 무서운 생김새긴 했다. 비쩍 말라서 뼈에 가죽을 씌운 듯 한 외모에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되지 않는 목소리. “죽은 자처럼 보였습니다.” 기드온의 눈이 커졌다. “해골?” “네.” 그는 잠시 이안의 얼굴을 쳐다봤다. 마녀가 죽었다. 믿어지지가 않는다. 기드온은 다시 물었다. “확실히 죽었나? 그러니까, 어떻게 죽였지?” “검으로 찔렀습니다.” “어떤 검이었지?” 어떤 검이냐니? 이안이 무슨 소리냐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자 기드온은 담배를 물고 깊게 빨아들였다. 천천히 연기를 내뿜은 뒤 드워프는 다시 말했다. “자네가 죽인 마녀가 내가 아는 그 마녀라면, 쉽게 죽었을 리 없어.” 이안은 쉽게 죽지 않았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그때의 상황을 기드온은 모른다. “마녀도 인간이잖습니까. 죽는데 조건이 있습니까?” “내가 아는 마녀라면 몇 백 년은 산 마녀라네. 그렇게 오래 산 괴물이 쉽게 죽었을 리 없잖은가.” “제가 검으로 찔렀을 때 죽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시체는 안 남았겠지?”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는 남지 않았다. 거센 바람이 불었다. 케이트가 날아갈 정도의 바람이었다. 기드온은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그런 존재들은 그리 쉽게 죽지 않는데. 자네가 죽인 마녀가 내가 아는 마녀가 아닌 모양이군.” 그런 모양이다. 이안은 복잡한 기분에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마녀는 죽었다. 그가 찔렀다. 그는 마녀를 찌를 때 느꼈던 감각을 떠올렸다. 속이 빈 가죽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검이 들어간 순간 펑 하고 작은 파열음이 들린 듯한 착각도 들었다. “죽지 않았다면, 어디 있는 걸까요?” “글쎄.” 마녀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안이 마녀를 죽인이자 조세핀이 젊음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마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케이트. 그의 생각이 케이트로 흘러갔다. 그는 괜찮다. 마녀가 다시 나타나도. 그 마녀는 그를 두려워한다. 그가 마력흡수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이트는 아니다. 오히려 그녀를 노리겠지. “이안.” 가벼운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케이트가 빙그레 웃으며 들어오다가 가볍게 몸을 떠는 것을 보고 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춥나?” “괜찮아요.”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기드온과 이안을 쳐다봤다. 창문을 열어놔도 응접실은 담배냄새가 가득했다. 이안은 파이프를 기드온에게 내밀고 케이트를 품에 안은 채 응접실을 나갔다. 두 사람 뒤에서 기드온이 손을 흔들었다. 천천히 온실로 걸어가면서 이안은 케이트의 머리에 붙은 실을 발견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떼어내며 물었다. “드레스는 아직 완성이 안됐나 보군.” 이안이 떼어낸 실을 본 케이트는 얼굴을 붉혔다. 안 그래도 자넷이 아직 다 못했다고 했는데 이안이 기다릴까봐 급하게 내려온 탓이다. 그녀는 재빨리 그의 손에서 실을 뺏으며 말했다. “네. 그래도 거의 다 됐어요.” 지난번 사건으로 케이트의 드레스는 완전히 망가졌다. 호건 가에서 여는 파티에 입어야 하기 때문에 그녀는 급하게 의상가게를 찾았다. 물론 건물이 무너진 의상 가게에 대신 보상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죽은 가게 직원을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죽었다. 그것에 대한 보상은 어떤 것으로도 할 수 없다. 케이트는 이안에게 물었다. “그런데 마이크 아니, 데일은 어떻게 됐어요?” 도련님이라고 불렀던 마이크를 이름이나 성으로 부르는 데는 그다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죽이려 했다는 것과 데일 남작 가가 몰락했다는 것도 한몫했다.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 몇 달 안에 사형이겠지.” 마법을 사용한 것은 둘째치더라도 마이크는 사람을 죽였다. 마법을 배척하는 뮈엘라인만큼 마법으로 인한 살인은 그 죄가 더 크다. 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사람을 죽이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케이트는 묘한 기분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죽이려한 자지만 데일가에서 몇 년 간 일 하는 동안의 정도 무시할 수 없다. 왜 그녀를 죽이려 한 걸까. 케이트에게 마이크는 철없고 가끔 짜증나는 도련님이었지만 마이크가 그녀를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했다는 건 놀라웠다. “왜 절 죽이려 한 걸까요?” 케이트의 질문에 이안은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그는 그녀가 상처받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사람이 누군가를 죽이는데 생각만큼 큰 이유는 없어.” 이안은 위로랍시고 이야기 했다. “고층거리에서는 담배 한 개피 때문에 살인도 일어난다더군. 그러니 신경 쓰지 마라.” 담배 한 개피 때문에?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응접실에서 본 기드온과 이안을 떠올리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응접실에서 기드온씨가 당신을 죽이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나는 담배 한 개피 때문에 살인할 사람은 아니라는 건가?” “그런 의미도 되나요?” 케이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본의 아니게 이안을 믿는 게 되어버렸다. 잠시 온실을 걷던 두 사람은 곧 다른 응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개인지 작업 때문에 본의 아니게 자꾸 소설 연재가 걸리네요. 죄송합니다. 며칠전에 데스크탑이 문제를 일으켜서 포맺하고 별짓을 다했더니 다시 작동되길래 오, 다행이야. 이번달만 버텨줘. 다음달에 쉬게 해줄게(다른거 살게) 했는데 어제 드디어 사망하셨습니다. 젠장. 다행히 지난번에 문제일으켰을 때 혹시 몰라서 HDD 도킹 스테이션을 사놔서 하드의 내용은 노트북에 연결해서 살렸습니다만, 노트북으로 작업하려니 죽겠네요. 다들 백업미리미리 해둡시다! 아, 그리고 다음주도 이틀정도 업뎃이 안될거 같아요. 목, 금 이요. 개인지 배송해야 해서 ㅠㅠ 이번달 내내 이럴거 같은데 이번달은 일주일에 세번정도만 올라온다고 생각해 주세요. 아. 오타 있어요. 오늘은 오타 검색기 못돌렸거든요. 00277 7. 거절 =========================================================================                            응접실은 아무도 없었다. 기드온이 있는 응접실과는 다른 응접실이니 당연하다. 문을 닫자마자 이안은 허리를 숙였고 케이트는 머리 위가 어두워지자 고개를 들었다가 주춤 물러났다. 그녀의 허리를 이안의 팔이 감싸고 있었다. “잠깐,” 케이트가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입술이 닿았다. 이안은 케이트의 입술을 덥석 집어 삼켰다. 품 안에서 잠시 파드득 하던 작은 몸이 금세 얌전해져서 그에게 매달려 왔다. 오랜만이다. 끌어안거나 손은 몇 번 잡았지만 키스를 한 것은. 이안은 케이트의 몸을 안아 올렸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자 케이트는 이안의 목에 팔을 감았다. 가슴이 닿는 것이 부끄럽다. 입술이 떨어졌을 때 케이트의 얼굴이 붉어진 건 키스가 길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딨어요?” 여전히 그녀의 몸은 그의 품 안에 있었다. 발이 땅에서 떨어져 데롱데롱 흔들리면서도 케이트는 위엄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이안은 아니었다. 그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한 거다.” “그래도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분위기? 이안은 가만히 케이트의 얼굴을 쳐다봤다. “케이트.” “네?” “키스해도 되는 분위기인가?”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 남자가 정말? 그녀는 그의 가슴을 때리며 외쳤다. “절대 아니에요! 내려줘요!” 이안은 빙그레 웃으며 케이트를 내려놓았다. 장난이었구나. 그가 웃는 것을 본 그녀는 입술을 삐쭉였지만 곧 피식 웃어버렸다. 처음 만났을 때와 생각하면 상상도 못할 변화다. 두 사람은 응접실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마주 앉는 것보다 좀 더 친밀한 자세에 케이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케이트, 검을 다룰줄 아나?” “검이요? 아뇨. 몰라요.” 하지만 검을 어떻게 만드는지, 어떤 종류가 있는지는 안다. 비스마르크의 교육 때문이다. 케이트가 그렇게 말하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줘 봐.” 이안의 손 위에 케이트의 손이 올라갔다. 커다란 남자의, 검사의 손에 작은 손이 마치 아기 손 같다. 이안은 빙그레 웃으며 케이트의 손을 쓸었다. 그리 고운 손은 아니지만 그래서 좋았다. “다음에 올 때, 괜찮은 검을 가져다주지.” 필요 없다고 말하려던 케이트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호신용으로 단도를 품에 지니고 다녀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던 차다. 지난번 여행 때 검을 가지고 있을 걸 하고 후회했다. “검을 좀 배울까요?” 케이트의 질문에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배우고 싶어?” “조금이라도 다룰 줄 아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 그럼 다음에 올 때 잡는 법부터 알려줄게.” 기사나 용병 중에 여자도 많다. 케이트를 보호하는 용병 다섯 명중 한 명이 여자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안은 케이트의 작은 손을 단단히 잡았다. “그 아이를 노린 게 확실한가?” 비스마르크는 방에서 칼과 이야기 하고 있었다. 소파에 앉은 비스마르크와 그 옆에 선 칼 사이에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가 오갔다. “네. 용병들이 아가씨를 따라다니는 걸 봤다고 합니다. 아가씨의 목숨을, 아가씨를 해치기 위해 기회를 엿본 것 같습니다.” 칼은 아가씨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다고 말하려다 재빨리 말을 고쳤다. 너무 과격한 단어를 사용하면 비스마르크가 충격을 받을까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비스마르크는 그 이유로 충격받지는 않았다. “제프리도 이런 일은 별로 없었는데.” 비스마르크가 한탄하듯 말했다. 제프리를 죽이겠다고 덤빈 사람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대부분이 취하거나 욱해서 저지른 짓이었다. 마법을 사용해도 결혼이나 사업을 위해 제프리의 호감을 얻으려는 목적이 전부였다. 마법을 사용해서 건물을 무너트리면서까지 호건 가의 사람을 죽이려 한자는 없었다. “아가씨께서 예전, 알라나데일에 계실 때 알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원한이라도 졌나?”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알라나데일의 영주 데일 남작의 아들이랍니다. 아가씨께서 일하시던,” “알아, 알아.” 비스마르크는 손을 저어 칼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몰락한 남작 가 말이잖아. 그 집안사람들은 다 사형받았다고 하지 않았어?” “다른 가문으로 시집간 딸들과 도망친 아들이 남았습니다. 이번에 아가씨를 공격한 사람은 도망쳤던 아들이고요.” “도망쳤던 놈이 왜 케이트를 공격 한거야?” 그게. 칼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런지 대충 안다. 다들 수군수군 하는 소리도 있고. 하지만 그는 그걸 비스마르크에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뭐야? 걔가 죽을 짓을 저질렀어?” “그건 절대 아닙니다!” 칼은 반사적으로 정색해서 말했다. 케이트가 죽을 짓을 저질렀다니 절대 그렇지 않다. 설령 그렇다 해도 마이크의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이지만 그 이전에 케이트는 누군가에게 살해 위협을 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한 숨을 내쉬고 이야기 했다. “질투가 났던 것 같습니다. 순식간에 아가씨와 살인범의 입장이 뒤바뀐 거니까요.” 귀족이었던 마이크는 한순간 몰락가문의 도망자가 되었고 하녀였던 케이트는 호건자의 사람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흠 하고 턱을 쓰다듬다가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케이트를 후계자로 삼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나?” “그건 제가 결정할 것이,” “아, 알아. 안다고. 그냥 묻는 거잖아.” 칼 역시 흠 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대로 이건 그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호건가의 앞날은 비스마르크가 결정하는 거니까. 하지만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케이트 아가씨가 후계자로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성실하고 배우려고 하십니다. 영리하기도 하고요. 다만,” “다만?” “마음이 약한 게 흠이죠.” 아, 그렇지. 비스마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트는 마음이 약하다. 정확히 말하면 정에 약하다. 아는 사람, 친구, 가족. 그런 것들에 끌려 다닌다. 비스마르크를 만나겠다며 수도에 남아있는 것만 해도 그렇다. 그리고 호건가의 재산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비스마르크 때문에 호건가에 남아있다. 그녀가 구한 여자들을 재활시키기 위해 사회사업을 시작한 것도 그렇다. “사람을 너무 믿어.” 비스마르크는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 영리하고 성실하면 뭐하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데. 그는 꽤 객관적으로 손녀를 판단하고 있었다. 역시 케이트를 후계자로 삼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그녀에게 후계자로 삼지 않겠노라 말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그가 후계자로 삼지 않겠다고 하면 케이트가 떠나는 게 아닐까. 케이트는 아니라고 했지만 믿을 수 없다. 죽은 제프리와 미쳐버린 에스메랄다도 호건 가의 부를 원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물론 후계자가 제프리 하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그렇게 말해도 비스마르크가 그를 후계자로 삼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한 말이다. 그렇다면 케이트역시 그런 게 아닐까? 케이트를 곁에 두고 싶은 것 이상으로 비스마르크는 그가 후계자로 삼지 않으면 그녀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혼자 남는 게 두려웠다. 작은 방에 움직이지 못하고 갇혀 지냈던 기억이, 이대로 그가 죽어도 아무도 모를 거라는 두려움이 그를 지배하고 있다. 뮈엘라와 케이트를 위해서라도 호건 사업은 다른 사람이 맡는게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두려움 때문에 그는 케이트를 후계자라는 이름으로 묶어 놓고 있었다. “로엔 경은 어떤가?” 비스마르크의 말에 칼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분은 오히려 사람을 믿지 않죠.” “그거 말고 그, 그거. 그 뭐냐.” 단어가 기억나지 않는지 비스마르크가 손짓하자 칼이 대신 말을 이었다. “작위라면 아직 이야기 중이라고 합니다.” “에이, 거참.” 빨리빨리 줄 것이지. 그렇게 투덜거리던 비스마르크는 차라리 자신이 로비를 할까 하고 생각했다. 호건 사업을 물려주지 않는 대신 귀족 부인을 만들어주면 어떨까. 사람을 너무 믿는 손녀와 사람을 믿지 않는 할아버지. 칼은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디 케이트가 비스마르크의 마음을 녹일 수 있길 바랐다. ============================ 작품 후기 ============================ 집에 온 동생에 갑자기 슈크림 빵을 만들겠다며 나가서 밀가루 종류별로, 버터, 우유를 사왔습니다. 미쳤나...? 하다가 불금이라 그래 어디 해봐라! 하고 제가 아는 것만 알려주고 (빵 반죽할때 이스트와 설탕과 소금이 닿지 않게 넣으라거나) 지켜보는데 슈크림부터 만들더니 빵 반죽도 시작. 오븐 꺼내야할건데? 하니까 후라이팬에 굽는 슈크림빵이라길래 ??? 하고 쳐다봤는데 ...맛있어요. 세상에... 아, 오타 있어요. 오타 검사를 못해서. 00278 7. 거절 =========================================================================                            “이봐.” 누군가 졸고 있던 간수의 발을 툭 차서 그를 깨웠다. 상사가 내려온 건가 싶어 화들짝 놀라 일어난 간수는 눈앞에 선 남자가 상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어리둥절했다. 익숙한 얼굴이다. 하지만 누군지 기억나지 않았다. 적어도 관련자일 테지. 그는 허리를 숙이며 생각했다. 지하 감옥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다. 여길 들어왔다는 건 관련자라는 말이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죄수들은 잘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 건 됐어. 그보다.”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간수는 남자의 내려다보는 태도에 자연스럽게 그가 새로 온 상사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걸 호건 저택으로 보내.” “네? 호건 저택이요?” 커프스단추였다. 낡고 더러워졌지만 꽤 비싸게 샀을 것이다. “이걸 왜,” “유품이다. 호건 저택으로 보내 줘.” 유품이라니, 누구?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간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자신이 의자에 앉아있다는 것을 깨닫고 벌떡 일어났다. “어?” 내가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지? 꿈이라도 꿨나? 하지만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했다. 주변을 돌아본 그는 곧 테이블 위에 반짝이는 한 쌍의 커프스단추를 발견했다. 꿈이 아니었다. “뭐지?” 받아놓고 졸기라도 한 건가? 간수는 고개를 갸웃하며 나가는 문을 살폈지만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다.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마법사범을 가두는 지하 감옥이라 마법으로 들어올 수는 있어도 나갈 수는 없다. 그가 마법에 걸려 문을 열었다고도 생각할 수 없다. 그가 멀쩡하지 않은 상태로 문을 열면 경고음이 울리게 되어 있다. 정말로 그가 잘 모르는 상사가 살펴보러 왔다가 그가 조는 걸 보고 뭐라고 한마디 하고 간 모양이다. 간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 없는 신음을 흘렸다. 그러다 그는 곧 테이블 위에 남은 커프스단추를 떠올렸다. “유품이라고?” 호건 저택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유품이라는 말은 누군가 죽었다는 말이 렸다. 간수는 후다닥 감옥 안쪽으로 향했다. 감옥에 갇힌 자는 몇 명 되지 않는다. 그는 한 명 한 명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고 가장 최근에 들어온 죄수의 감옥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젠장.” 가장 최근에 들어온 죄수가 쓰러져 있었다. 굳이 들어가서 확인하지 않아도 텅 빈 눈동자가 그가 죽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시체 옆에는 식사가 손도 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잠시 후 간수는 죄수가 대체 어떻게 죽은 건지 이상하게 생각했다. 아무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목을 맸다거나, 몸을 찌를만한 무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파서 죽었다면 끙끙거리는 소리라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가장 가까운 감옥 앞으로 달려가 물었다. “너! 저 남자가 어제 무슨 소리 안 냈어?” “신입? 뭐라더라. 복수한다고 했던가?” 그런 건 잡혀 들어온 죄수라면 대부분 하는 말이다. 간수는 그의 말을 두 번 생각도 안 하고 무시했다. 가끔 마법을 많이 사용한 부작용으로 급사하는 죄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 그걸 거야! 간수는 그대로 감옥 밖으로 달려나갔다. “데일이 죽었다고요?” 케이트의 물음에 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커프스단추를 들고 호건 저택으로 온 것은 마이크 데일의 시체를 발견하고 이틀 후의 일이었다. “벌써 형이 집행된 건가요?” 이안에게 사형일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형이 결정되고 집행될 줄은 몰랐다. 간수는 머리를 조아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아니요. 사형이 아니라 급사했습니다.” “급사요? 설마 상처 때문에?” 용병들의 공격을 받아 생긴 상처가 악화하어 죽은 걸까? 케이트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하지만 간수는 고개를 저었다. “말 그대로 그냥 픽 죽었습니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어요. 겁도 없이 마법을 사용한 죄수가 다음날 감옥 안에서 죽어 있기도 합니다.” 마법을 쓴 부작용이라고, 간수가 덧붙였다. 그렇군요.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위에 간수가 올려둔 커프스단추를 쳐다봤다. “그런데, 이건 왜 제게 주시는 거죠?” “유품입니다. 죄수가 죽으면 남은 물건은 가족에게 보내주거든요. 데일이 호건 저택에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이 집으로?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는 데일과 가족이 아닙니다.” “험, 그게. 가족이 없는 죄수들이 지인에게 자신이 남은 것을 남기는 경우도 있고, 그렇습니다.” 간수의 말대로 드문 일이 아니다. 가족이 없는 죄수라면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에게 자신이 가진 가장 귀한 것을 남긴다. 하지만 케이트는 사랑하는 사람도, 친구도 아니다. 오히려 원망하고 미워하는 사람이다. 죄책감인 걸까? 케이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일겠어요. 가져와 줘서 고맙습니다.” 쭈뼛쭈뼛 거리며 나가지 않으려는 간수를 보고 케이트는 쓰게 웃었다. 여기까지 가져왔으니 심부름 값을 달라는 거겠지. 사실 이런 걸 노리고 유품을 전달해 주기도 한다. 그녀에게는 그다지 쓸모없는 것이지만 케이트는 칼에게 약간의 돈을 쥐여주라고 말했다. “이건 어떻게 할까요?” 간수가 떠나고 칼이 물었다. 케이트의 시선이 다시 테이블 위의 커프스단추를 향했다. 과거에 꽤 비싸게 산 것이 닳고 더러워져 있었다. 그녀는 대체 이걸 왜 자신에게 보냈는지 알아내기 위해 그녀의 기억 속에 커프스단추를 떠올리려 했다.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알라나데일에서 케이트는 마이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시골 남작의 아들이라는 점과 부유하고 외모가 호감형이라는 이유로 여자들의 인기를 얻었던 그는 거들먹거리는 성격이었고 가벼웠다. 늘 주변을 돌아다니며 사람을 모아 도박을 하거나 술을 마시고 근처 영지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했다가 새벽 늦게 돌아와 오후에나 일어나곤 했다. 그런 생활이 케이트의 눈에 좋게 보일 리가 없다. 도련님과 하녀라는 입장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마이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심지어 데일 남작 부인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때에도 저런 아들을 둬서 안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마이크와의 사이에서 커프스단추는 물론이고 그럴싸한 추억이 남았을 리가 없다. “별로 좋은 기억이 없는 자의 유품이라면 그냥 버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칼의 제안에 케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녀에게 줬는지는 모르지만 가지고 있기도 누굴 주기도 찝찝하다 그녀는 커프스단추를 한 번도 만지지 않고 일어나며 말했다. “태우는 게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칼은 커프스단추를 집어 난로 안으로 던져 넣었다. 화륵 하고 잠시 거세졌던 불길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다. “오늘 일정은 어떻게 할까요?” 칼의 질문에 케이트는 오늘 일정을 떠올렸다. 오전에는 에바니엘 서쪽 상점가 대표와 만나기로 했다. 무역으로 가져온 무기나 향신료 같은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점심식사는, “에반스 공작님이 오신다고 하셨죠?” “네. 주인님께서 초대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공작님을 왜 초대했는지 아세요?” 케이트의 질문에 칼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비스마르크가 에반스 공작을 식사에 초대한 이유를 알고 있다. 사실 저녁 식사에 초대했지만 에반스 공작은 영리하게도 저녁 식사는 바쁘다고 거절하고 대신 점심식사는 어떻겠냐며 제의했다. 점심 식사를 한다면 오후에 일정이 있다는 말로 빠져나갈 수 있다. 비스마르크가 곤란한 부탁을 하려 한다면 도망치려는 것이다. 칼은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주인님께서는 아가씨와 로엔 경을 부탁하실 것 같습니다.” “저와 이안을요? 에반스 공작께요?” “왕궁에서 로엔 경께 작위를 준다는 말이 있는 건, 아가씨도 알고 계시지요?” 알고 있다.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마녀를 죽이고 제프리의 불법 매춘과 도박사건을 잡았기 때문이다. “제 생각이지만, 주인님께서는 자신은 괜찮으니 로엔 경께 작위를 주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케이트는 이해할 수 없어서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물었다. “칼, 그럼 왕궁에서 이 집의 눈치를 보느라 이안에게 작위를 주지 않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칼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나? 케이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안이 마녀를 잡고 제프리의 불법 행위를 찾아낸 것은 확실히 상을 받을 일이지만 제프리는 하필 호건 가의 후계자였다. 처음 도박장 사건도 오히려 이안이 잘못 건드려서 수사관 자리를 박탈당했을 정도다. 그러니 그 후계자의 잘못을 깊게 캐 들어간 이안에게 상을 주는 걸 왕궁에서 호건 가의 눈치를 보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저와 이안의 관계를 왕궁에서는 모르나요?” “알 겁니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아가씨는 후계자가 아니시니까요. 왕궁에서는 아가씨와 주인님 중 어느 쪽 편을 설지 고민하는 겁니다.” 아. 케이트의 입에서 가벼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보일 수 있구나. 아직 후계자로 결정되지 않은 여자와 겉보기엔 건재한 가주. 호건 가의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 편에 서야 할지 고민하는 게 당연하다. 단순히 생각하면 호건 가의 뒤를 이을 사람은 케이트밖에 없으니 케이트 편에 서려 할 수도 있지만 비스마르크는 케이트를 손녀로 인정한 다음에도 후계자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계속 그녀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대리를 시키고 있지만 왕궁에서 보기에 그럴 거라면 후계자로 결정한 다음에 일을 시켜도 늦지 않다. 어째서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고 일을 시키기만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드는 수밖에 없다. ============================ 작품 후기 ============================ 이쪽에 공지를 안한거 같아서. 후작과 수리공 개인지 발송 일자가 좀 미뤄졌습니다. 예상은 23일 안에 하는 거였는데 23일에 포장해서 택배사에 넘기기로 했어요. 25일 이후에 배송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 주소가 바뀌는 분들은 카페에 가셔서 주소 변경 신청 해주세요. 00279 7. 거절 =========================================================================                            “어서 오십시오.” 천하의 비스마르크도 에반스 공작에게는 예의를 갖췄다. 그도 그럴 것이 왕위 계승 1위인 자다. 현 국왕이 사망하면 다음 왕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리고 현 국왕은 몸이 약하고 후사가 없었다. 에드워드는 비스마르크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하고 케이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앉아있는 비스마르크를 대신해서 케이트가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입니다.” 에드워드는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케이트를 향해 넌지시 말했다. “이 집에서 만나니 더더욱 반갑군요.” 이게 무슨 소리야?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의 표정으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에드워드는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레인포레스트 경이 스미스 양을 호건가의 사람으로 인정해 달라는 요청을 할 때 실시간으로 봤거든요. 잘 되길 바랐는데 잘돼서 다행입니다.” 케이트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감사합니다 라고 늦은 인사를 했다. 에녹이 그녀를 호건 가의 사람으로 인정하도록 에스메랄다를 압박했다는 걸 알고 있다. 많은 귀족들의 동의서를 받아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에드워드는 자신도 동의했다는 걸 완곡하게 말한 것이다. “싫어하는 음식은 없다고 해서 우리 집 요리사가 가장 잘 하는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비스마르크가 어흠하고 헛기침하며 끼어들었다. 그의 생각과 달리 케이트와 에드워드는 아는 사이였고 심지어 친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뭐야. 비스마르크는 식사가 나오기 시작하자 의례적으로 감탄하는 에드워드와 케이트를 번갈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에드워드도 케이트에게 호감이 있는 모양이고, 케이트도 에드워드가 싫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로엔 경보다는 에반스 공작 쪽이 더 낫지 않을까? 아니. 아니다. 비스마르크는 고개를 저었다. 에반스 공작이 탐이 나긴 하지만 공작 부인자리는 케이트에게 어려울 것이다.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 그의 손녀는 그런 정치적인 자리에 견디기 어려워 할 게 뻔하다. 적어도 에드워드가 케이트를 사랑한다면 사랑으로 버티겠지만 그가 보기에 에드워드가 보이는 감정은 예쁘장한 여자에 대한 약간의 호감정도였고 그나마도 사촌의 부인이 될 여자를 향한 예의일 가능성이 높았다. “식사는 괜찮습니까?” 재빨리 계산을 끝낸 비스마르크는 케이트에게 이안에 대해 이야기 하는 에드워드에게 물었다. 로엔 경이 백작만 돼도 좋겠다. “네. 아주 맛있습니다. 훌륭한 요리사를 두셨습니다.” “허허. 자주 놀러 오십시오. 곧 저 아이도 결혼을 하면 저 혼자나 마찬가지니까요.” “저런, 스미스양은 로엔 가로 갈 예정입니까?” 다시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재빨리 원래표정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에드워드는 그녀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걸 깨달았다. “그게 좋지 않겠습니까. 저 애에게도.” 이게 무슨 소리야? 케이트는 버럭 소리 지르려는 걸 참기 위해 재빨리 빵을 찢어 입 안에 넣었다. 후계자가 되라고 성화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시집가서 이 집을 떠나는 게 좋다는 거야? 따지고 싶은 것은 많지만 그녀는 일단 참았다. 에드워드의 앞에서 할아버지에게 그게 무슨 소리냐고 말해봤자 좋을게 없었다. 대신 에드워드가 물었다. “그렇습니까? 스미스 양이 대리 경영을 한다는 소문을 들어서 저는 다르게 생각했지 뭡니까.” 에드워드의 시선이 케이트를 향했다. 그는 말을 참기 위해 천천히 우물우물 음식을 씹고 있는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저와 비슷하게 생각했을 테고요.” 이대로라면 케이트가 능력이 되지 않아 비스마르크가 그녀를 버리고 다른 후계자를 찾았다는 소문이 돌 거라는 걸 완곡하게 말하는 거다. 비스마르크는 안색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케이트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공작께서는 저 아이가 호건 가를 이끄는 게 괜찮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글쎄요.” 손대면 쩌적하고 갈라질 듯한 긴장이 흘렀다. 케이트는 체할 것 같아 식기를 내려놓았다. 에반스 공작과 할아버지의 점심식사라니 괜찮을까 하고 걱정하긴 했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 말려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뭘 말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에드워드는 물을 한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스미스 양이 못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영리하고 성실한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아직 어리고 순진한 면이 있죠.” 비스마르크와 에드워드는 마치 이 자리에 케이트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케이트가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두 분. 전 아직 여기서 숨 쉬고 있답니다.” 곧 질식할 예정이지만요. 차마 크게 소리 내지 못한 말을 중얼거리며 그녀는 바짝바짝 타는 목을 축이기 위해 물 잔을 들었다. “이거 큰 실례를 했군요. 물론 스미스 양이 거기 있는 걸 알고 있습니다.” ============================ 작품 후기 ============================ 아파서 어제 업뎃 못했습니다. 오늘도 안올리고 쉬어버리면 무슨일인가 하실까봐 남은 비축만 올려요. 한화분만큼 못쓰고 앓아누워서 짧을 거예요. 장염은 아닌데 계속 토해서 좀 쉬어야 할거 같아요. 이번주는 쉬겠습니다. 다음주 비축 하루필요할거 같아서 화요일에 다시 올게요. 00280 7. 거절 =========================================================================                            에드워드는 빙긋 웃으며 넉살좋게 주제를 바꿨다. “괜찮으시면 언제 로즈마리를 만나러 와주세요. 그녀는 스미스양이 바빠서 요즘 매우 심심해하고 있거든요.” “아, 그럼요. 물론이죠.” 정신없이 바빠서 로즈마리를 잊고 있었다. 케이트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마리에게도 도움 받은 게 있다. 조금 특이하긴 하지만 좋은 친구다. 그때 비스마르크가 끼어 들었다. “로즈마리라니 공작의 동생입니까?” “아, 아뇨. 로즈마리양은 공작님의, 케이트가 약혼녀라고 말하기 전에 에드워드가 대뜸 말했다. “먼 사촌입니다.” 응?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에드워드를 쳐다봤다. 사촌이라고? 약혼녀라고 했는데? 먼 사촌이자 약혼녀라는 말일까? 어쩌면 아직 약혼을 알리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그녀와 이안의 관계처럼. 케이트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먼 친척인데도 이렇게 신경써 주는걸 보니 아끼는 사촌인 모양입니다.” 비스마르크의 말에 에드워드가 씩 웃었다. “그렇죠. 아주 아끼는 아이랍니다.” “그 아가씨가 부럽군요. 분명 결혼도 괜찮은 집안과 시키실 테죠?” 으으. 케이트는 자꾸만 에드워드를 향해 돌아가는 눈동자를 잡기 위해 눈앞의 샐러드가 굉장히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로즈마리는 아주 괜찮은 집안과 결혼 할 거다. 에반스 공작이라는. “네. 저는 부디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에드워드의 말에 비스마르크그 흠 하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마음써주는 아가씨가 부럽군요. 우리 케이트도 좋은 집안과 결혼 해야 할텐데 말입니다.” 우리 케이트? 케이트는 비스마르크가 그녀를 지칭하는 호칭에 놀라 눈을 크게 떴고 에드워드는 좋은 집안과 결혼이라는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스미스양은 로엔 경과 결혼이 약속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아니었습니까?” “아, 물론 로엔 경과 결혼할 예정입니다만. 로엔 경은 로엔 백작가의 서자에 아무 작위도 없지 않습니까? 하나뿐인 손녀가 걱정돼서 말이죠.” 거짓말. 케이트는 울컥 화를 내려다 말았다. 어쩌면 비스마르크도 진심인지도 모르다. 진짜 그녀가 걱정되어 저런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침에 칼과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안이 작위를 받는 일로 에반스 공작과 이야기 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 단순히 백작 이상의 집안과 사돈 관계가 되고 싶은 것 뿐 아니라 진심으로 케이트를 걱정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안에 대한 비스마르크의 표현은 가혹하지만 사실이다. 케이트는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렇군요. 그 걱정도 이해합니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 잔을 들어 올렸다. 그의 예상대로 비스마르크가 그를 식사에 초대한 건 뭔가 부탁할 게 있었던 거다. 그 부탁은 이안의 작위에 관한 것이었고. 그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조금 욕심 부리는 게 보이긴 하지만 괜찮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로엔 경은 곧 작위를 받게 될겁니다. 폐하께서도 결정하셨으니까요.” “그래요?” 비스마르크가 반응하기 전에 케이트가 먼저 물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에드워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이안에게 줄 작위와 영지는 결정되어 있어요. 물론, 스미스양이 호건가에 남는다면 저와도 연이 생기는 거니 제 개인적으로 좀 더 밀어붙여 보겠지만요.” 에드워드의 말에 비스마르크는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가 재빨리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에드워드의 말은 케이트에게 호건가를 물려준다면 이안이 좀 더 좋은 작위를 받을 수 있도록 추진해 보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그는 이야기 초반에 케이트에게 집안을 물려주지 않을수도 있다는 말을 흘렸다. 이제와서 말을 바꾸면 비스마르크의 꼴만 우스워 진다. 끄응하고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보며 에드워드는 속으로 웃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지금 준비된 작위도 바로 수여되지는 않을 겁니다. 조금 곤란한 일이 생겨서 말이죠.” “곤란한 일이라뇨?” “아, 이안이나 호건 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아니,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는 목을 축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성녀가 나타났거든요.” 성녀? 식당 안에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성녀라니, 너무 뜻밖의 사건이라 비스마르크와 케이트 둘 다 말을 잃었다. “성녀라니, 확인된 성녀입니까?” 비스마르크가 정적을 깨고 물었다. 그럴 리가 없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제 확인해야죠.” 그럼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군. 아니, 아닐 가능성이 높다. 케이트는 놀라서 입을 벌렸고 에드워드는 씩 웃었다. 힘의 나라 뮈엘라는 한 편으로는 성녀의 나라이기도 하다. 개국 용사인 성녀 뮈엘라의 이름을 딴 나라인 만큼 타국에 비해 성녀의 등장 빈도가 높다. 하지만 그만큼 성녀를 자칭하는 가짜의 등장도 많아 조건이 까다롭다. 성녀를 검증하는 위원회가 따로 있을 정도다. “가짜 성녀라고 판단되면 어떻게 되나요?” 케이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녀가 나타났지만, 가짜로 판단됐다는 이야기는 몇 번 들었다. 개중에는 성녀가 아니라 마녀인 경우도 있었다. 에드워드는 입에 든 음식을 삼키고 비스마르크를 한번 본 뒤 입을 열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도 말을 고르는 게 분명하다. “가짜 성녀라고만 판단되면 수도에서 추방당합니다.” 그것뿐?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생각보다 가혹하지 않다. 수도에서 추방당하는 정도라면 조용히 자기가 살던 동네로 돌아가 살아도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때 비스마르크가 덧붙였다. “낙인을 지닌 채 추방된다.” “낙인이요? 어떤 낙인이요?” 비스마르크는 음식을 자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마에 가짜라는 낙인이 찍힌다고 하더구나.” 하마터면 사례 들릴 뻔했다. 케이트는 마시고 있던 물 잔을 재빨리 내려놓으며 비스마르크를 쳐다봤다. 이마에 가짜라는 낙인이 찍힌다고? 맙소사. 그녀의 시선이 에드워드를 향했다. 그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네. 가짜 성녀로 확인되면 이마에 낙인이 찍힙니다. 그녀를 성녀로 추대한 집안 역시 불이익을 받고요.” 어떤 불이익인지 묻고 싶지도 않아서 케이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돌렸다. “불이익이 있는데도 성녀로 추대됐다는 건 진짜 성녀라는 말이겠네요.” “그럴 리가.” “그러면 좋겠지만요.” 케이트의 질문에 비스마르크와 에드워드가 동시에 쓰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점이 순진하다는 거다. 비스마르크는 혀를 차며 말했다. “범죄도 안 걸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사람이야. 가짜인지 진짜인지 누가 알겠어?” 그럴까. 케이트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걸 노리고 성녀로 꾸미기엔 돌아오는 게 너무 가혹하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에드워드가 웃으며 말했다. “성녀로 확인된다면 그 성녀는 왕족과 결혼해야 합니다. 당연히 성녀로 추대한 집안도 꽤 힘을 얻게 되겠죠.” 내 기준으로는 장점이라기보다는 단점이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장점만을 보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몇 년 주기로 꾸준히 나타나거든요.” 몇 년 주기로? 케이트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그녀는 수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몰랐지만 몇 년 전에도 가짜 성녀가 나타난 적이 있다. 그녀는 낙인이 찍히기 전에 먼저 성녀가 아니라고 고해서 낙인이 찍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낙인이 찍히지 않았다고 해서 모든 일이 마무리되는 건 아니다. 성녀가 아니었다고 해도 성녀로 불릴만한 일을 한 것에 대해서 조사를 하게 되어 있다. 이때 수사를 하는 것도 수사관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폐하는 어떻게 지내십니까? 몸이 이래서 뵈러 가지도 못했습니다.” 비스마르크가 말을 돌린 덕분에 이야기는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에드워드는 국왕인 그의 사촌이 어떻게 지내는지 가볍게 이야기했다. “며칠 전에 만나서 점심 식사를 했는데 늘 그렇듯이 바쁜 모양이더군요.” 성녀에 대한 것은 이안도 알고 있을 테지만 케이트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은 모양이다. 에드워드는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야기를 굳이 케이트에게 해서 그녀에게 겁을 줄 필요는 없다. 그 역시 필요하지 않았다면 케이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식사를 마치고 일어선 에드워드가 케이트에게 나직하게 물었다. 그녀는 무슨 일인가 하고 에드워드를 보다가 비스마르크에게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 에반스 공작님을 배웅해 드리고 올게요.” 고개를 끄덕이는 비스마르크를 뒤로하고 케이트는 에드워드와 함께 식당을 나섰다. 집사에게는 할아버지를 부탁했다. 복도에 두 사람만 남자 에드워드는 케이트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나직하게 물었다. “성녀가 아니라는 걸 들킬 경우 어떤 벌을 받는지는 들으셨죠?” 네에. 케이트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는 주변을 살펴 아무도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더욱 낮춰 말했다. “하지만 반대로 성녀라고 인정받게 되면 상당한 이익을 얻게 될 겁니다. 성녀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니 왕궁에서 발언권도 무시할 수가 없죠. 성녀를 추대한 집안의 힘 역시 더욱 강해질 겁니다.” 그런데? 케이트는 이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는 이유를 더욱 더 알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 에드워드가 허리를 굽혀 그녀와 시야를 맞추며 물었다. “스미스 양, 한 번만 묻겠습니다.” “네에.” “성녀가 될 생각, 없습니까?” 정적이 흘렀다. 케이트는 에드워드의 말을 기다리던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내가 무슨 소릴 들은 거지? 곧이어 그녀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네? 뭘, 무슨 생각이요?” 성녀가 될 생각이라고 했다. 그게 생각으로 되는 건가? 케이트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지금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에드워드는 놀라는 케이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확실히 비스마르크의 말대로 그녀는 순진하다. 혹시 몰라서 물어본 거긴 하지만 이런 일에 동원되기엔 너무 순진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로즈마리보다는 나을 거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성녀로 확인된 여자는 왕족과 결혼한다는 거, 이야기했잖습니까?” “네.” “그건 그다지 장점이나 대우 같은 게 아닙니다. 단순히 성녀를 왕족과 묶어두기 위한 핑계일 뿐이에요.” 마법의 나라에서 그리고, 힘의 나라에서 왕이 국민의 지지를 대 마법사나 소드 마스터에게 빼앗기지 않은 이유는 성녀가 왕의 편이기 때문이었다. 성녀 뮈엘라를 사랑한 건국 왕 에드워드는 뮈엘라를 놓아줬지만, 후대 왕들은 그렇지 않았다. 국민의 지지가 성녀와 왕으로 양분될 것을 걱정한 그들은 결국 성녀를 왕족과 결혼시키겠다는, 보상처럼 보이는 족쇄를 내놓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결혼한 성녀는 어떻게 될까요?”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생각도 해본 적 없다. 결혼한 성녀가 지금까지 존재했던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성녀는 모두,” “네. 미혼이었죠.” 설령 결혼했다 해도 미혼이 되었다. 그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결혼한 여자를 성녀로 추대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말이죠.” 그 말은 지금 성녀라고 소문난 여자가 유부녀라는 말이다. 케이트는 여전히 에드워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국왕 폐하의 반대파에서 성녀를 추대하고 있습니다. 세력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기 위해서요. 현 왕의 건강이 좋지 못하고 후사가 없다는 것도 한몫하겠죠.” 국민들은 성녀를 사랑한다. 그녀가 가짜라고 밝혀지기 전까지는. 반대파는 그것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짜라는 게 밝혀지면 꼬리를 잘라버린다. 에드워드는 그것을 자신도 이용해 보기로 결심했다. “물론 스미스 양을 진짜 성녀로 추대하려는 건 아닙니다. 저쪽의 성녀가 성녀라면 스미스 양도 성녀라고 반박하려는 거죠. 그러니 성녀 감별을 받지도 않을 거고 가짜라고 해서 낙인이 찍히고 쫓겨나는 일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네. 하지만 정치적으로 움직여야 할 겁니다.” 케이트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에드워드의 듯은 알겠다. 자신을 도와달라는 거겠지. 그녀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런데 왜 하필 제게 그런 중책을 부탁하시는 거죠?” “스미스 양의 뒤에는 호건 가가 있으니까요. 게다가 로엔 경과 곧 결혼할 테고요.” 부가 있고 에드워드와 가까운 로엔 가와 결혼할 여자기 때문이다. 케이트는 그가 자신에게 부탁한 이유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되면 도와주신 대가는 톡톡히 하겠습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이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정치적으로 움직여야 하고 위험할 수 있어요. 최악의 경우 낙인이 찍히고 수도에서 추방될 가능성도 아예 없다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케이트는 진짜 성녀가 된다. 그런 의미에 그녀는 잠시 에드워드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거절할게요.” “거절입니까?” “네. 저는 할 수 없어요.” “이안이나 호건 가를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스미스 양 자신을 위해서입니까?” “둘 다요.” 실패할 경우 로엔 가는 물론 호건 가에 끼칠 피해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마녀라는 것까지 들통 난다면. 케이트는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거절하는 걸로 이 집이나 로엔 가에 피해가 오나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 사실 로즈마리를 성녀로 내세우려고 했습니다.” 에드워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로즈마리를? 케이트는 괜찮냐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하고 말고는 로즈마리의 뜻이다. 그녀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하지만 로즈마리는 기반이 없어서요. 좀 더 확고한 스미스 양이 낫지 않을까 했던 거죠.” 생각보다 별거 아니지만 꽤 중요한 이유키도 했다. 케이트는 에드워드가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에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에드워드는 쓰게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 작품 후기 ============================ 오랜만입니다아. 죄송하게도 며칠 또 쉬어야 할것 같아요. 지난번 장염비슷하게 아팠던게 전조였는지 몸살에 심하게 걸려서 헤롱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감기 조심하세요. 콧물에 기침에 목은 아프고 목소리도 안나오고 열이 올라서 어지럽고 난리네요. 조금만 더 쉬고 올게요. + 죄송합니다. 중간에 한 장면이 잘렸네요 00281 8. 케이트 =========================================================================                            “여어, 손님은 갔나?” 에드워드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복도에서 케이트는 기드온과 부딪쳤다. 그녀와 시야가 맞는 남자는 그리 많지 않다. 케이트는 고개를 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네. 같이 식사하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아, 됐어, 됐어. 왕족이라며? 그런 귀찮은 존재들과 식사하다가 체하기만 하지.” 그럴 리가. 케이트는 오늘 아침 엄청난 양의 스크램블에그와 베이컨을 먹어치우던 기드온을 떠올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맥주도. 끼니마다 맥주를 마시는 기드온 덕분에 호건 저택은 꽤 많은 양의 맥주를 구입했다. 집사 말로는 기드온 혼자 일주일에 맥주 두 통을 마신다고 하니 엄청난 양이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에드워드와 케이트, 비스마르크가 점심식사를 하는 동안 기드온도 같은 메뉴로 식사했다. 배가 고파서 돌아다니는 건 아닌 모양이고. 케이트는 무슨 일인가 하고 물었다. “비스마르크에게 할 말이 있어서.” 손님이 가기를 기다렸다는 말이다.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비스마르크의 방으로 앞서 걸었다. “할아버지는 지금 방에 계실 거예요. 차를 내오라고 할게요.” 비스마르크의 방문 앞에서 케이트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기드온은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별건 아니고. 슬슬 돌아가 볼까 하고.” “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케이트의 고개가 휙 하고 돌아갔다. 돌아간다고? 그녀는 비스마르크에게 기드온이 잠깐 할 말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잊고 외쳤다. “가시다뇨?” 그 소리에 비스마르크도 무슨 소린가 하고 고개를 내밀었다. 기드온은 케이트의 반응에 당황해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오랜만에 저 녀석도 봤고, 아가씨도 만났으니 이제 그만 가봐야지.” “뭐? 그냥 가겠단 말야?” 놀라기는 케이트보다 비스마르크가 더 놀랐다. 그가 불편한 몸으로 일어나려다가 넘어질 뻔하자 케이트는 허둥지둥 비스마르크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할아버지?” “아, 치워.” 누가 보는 앞에서 불편한 몸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웠던 비스마르크는 애꿎은 케이트에게 버럭 화를 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부축하려는 케이트의 손을 탁 치며 그녀를 무시했다. 케이트의 얼굴이 민망함에 가볍게 달아올랐다. 그것을 본 기드온은 쯧 하고 혀를 차며 다가왔다. “더 있어봐야 네가 손녀 구박하는 꼴밖에 더 봐?” 뭐? 비스마르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드온은 케이트의 손을 잡아 자기 뒤로 확 당기며 말했다. “자네 늙었군.” “내 나이가,” 기드온은 두툼한 손을 내밀어 내 나이가 몇인데! 그럼 늙었지! 라고 외치려는 비스마르크의 말을 막았다. 그가 몇 살인지 안다. 그리고 기드온 자신이 몇 살인지도. 하지만 그는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 “여기 오면서 쭉 봤는데 말야. 자네 하는 일이 대체 뭐야? 노망들었나?” “뭐?” 느닷없는 기드온의 호통에 비스마르크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이 드워프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하나밖에 없는 손녀 괴롭히면서 뭘 얻겠다고 이러느냐는 거야. 이딴 집, 줄 거면 후딱 주고 일을 시키던가. 주지도 않으면서 일은 일대로 시키잖아. 자네가 이 아가씨를 휘두를 수 있는 그 할애비라는 권리만큼 해주는 게 있기는 해?” “무슨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이 집에서 먹고 자잖아! 그리고 내 손녀 내가 휘두르겠다는데 자네가 무슨 권리로,” “아, 그러니까!” 탕 하고 기드온이 후려친 탁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으아. 케이트가 허둥지둥 나서 탁자가 비스마르크 쪽으로 굴러가지 않도록 붙잡는 동안 아래층에서 하인들이 뛰어 올라왔다. “그래. 어디 뚫린 입으로 말 한번 해보자. 자네 손녀가 입고 먹을 길이 없어서 찾아왔나? 이 아가씨는 자네 없어도 아니, 자네 없으면 더 잘 먹고 잘살걸?” 사실이라 반박할 말이 없다. 비스마르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케이트는 들어오려는 하인들을 막고 방 밖으로 나갔다. 지금 이 방에 비스마르크와 기드온 외에는 없는 게 낫다. 두 사람의 싸움은 케이트가 불씨가 됐지만 점점 더 커지고 개인적인 일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할애비랍시고 부려 먹어 놓고 부탁 하나 안 들어줘?” “무슨 부탁? 잠깐, 저 녀석이 자네한테 말했어?” “말하긴 뭘 말해! 이 집 사람들이 다 알아! 자네 왜 그렇게 쪼잔해졌어?” “쪼잔해지다니?” “할애비라는 걸 핑계로 부려 먹을 거 다 부려 먹었으면 그깟 돈 좀 주면 어때? 돈도 많은 양반이 하나밖에 없는 손녀한테 그것도 못 해주나?” “하나밖에 없는지 더 있는지는 두고 봐야지.” “허, 그래. 더 있는지 몰라서 못 해줬다 이거야? 그래서, 친구도 여러 명이니 필요 없을 때 버렸다가 이제와서 연락한 건가?” 이것 봐, 이것 봐. 문에 귀를 대고 안쪽 상황을 살피던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이야기는 케이트와 비스마르크의 관계에서 기드온과 비스마르크의 관계로 넘어갔다. 두 사람은 좀 더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무슨 일이냐고 묻는 하인들과 용병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두 분의 의견 다툼이 좀 있어서요. 두 분만 이야기하실 수 있도록 시간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저희는 내려가겠습니다. 여차하면 부르세요.” 하인들이 내려가자 용병들이 어찌하느냐는 듯 유진을 쳐다봤다. 별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유진은 케이트를 보고 부하들을 쳐다본 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희는 내려가. 여긴 내가 있을 테니.” “괜찮아요. 저 혼자 있다가 여차하면 사람을 부르면,” “누군가 달려올 때까지 시간이 걸리잖습니까.” 케이트는 잠시 유진이 남으려는 게 기드온과 비스마르크의 싸움을 엿듣기 위해서인가 하고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하지만 아닌 모양이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은 복도 벽에, 케이트는 문에 기대고 마주 섰다. “이런 걸 여쭤봐도 될지 모르겠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기드온과 비스마르크의 고함을 배경음악으로 깔며 유진이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호건 가를 스미스 양이 물려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에드워드가 떠난 건 고작 한 시간 전의 일이다. 케이트는 대체 어떻게 알았느냐는 표정을 지었다가 하인들을 떠올렸다. 많은 주인이 식사 시중을 드는 하인들의 존재를 잊고 대화를 한다. 하지만 그들도 귀가 있고 입이 있다. 문제는 그게 사용인들 사이에서만 수군거리는 걸로 끝나지 않고 용병인 유진에게까지 흘러갔다는 점이다. 하녀 중에 누군가 유진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라고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너무 빨리 퍼졌네요.” “아직은 저만 압니다.” 케이트의 걱정에 유진이 재빨리 덧붙였다. 용병 중에 아는 사람은 그밖에 없다. 이 저택의 사용인 중에서도 아는 사람은 일부일 것이다. 케이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네. 그럴 수도 있죠.” “아쉽군요.” “그런가요?” “네. 물론 스미스 양이 경호하기 쉬운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요.” 그의 말에 케이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마녀에, 마법아이템을 쓰는 남자에, 뮈엘라에서 이 정도로 자주 마법 공격을 막을 일은 없을 것이다. “놀라셨겠네요.” 케이트의 말에 유진은 무슨 소린가 하다가 그게 마법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전 뮈엘라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요?” 그건 몰랐다. 아니, 알 방법이 없을 것이다. 뮈엘라는 공용어를 사용하고 이 대륙에서 공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나라와 종족이 없으니까. 그녀의 표정에 유진은 씩 웃으며 말했다. “용병은 국경이동이 쉬운 편이니까요.” 그것도 몰랐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긴 하다. 뮈엘라의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용병과 무인들의 출입국은 다른 나라와 비슷한 편이다. 마녀들의 이동이 강제된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던 그녀는 출입국이 자유롭다는 사실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용병 중에 뮈엘라 사람이 아는 자들이 꽤 될 겁니다. 전 십 년 전에 뮈엘라로 왔고요. 마법 공격을 받는 건 십 년 만이었죠.” 그래서 좀 고전했다고 유진은 변명 아닌 변명을 중얼거렸다. 케이트는 유진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스마르크의 둘째 아들, 그녀에게는 작은삼촌 되는 남자를 떠올렸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그 역시 떠났다고 했다. 남자와 사랑의 도피를 하고 아버지에게 절연 당한 엘리자베스와 달리 그는 먼저 호건 가와 절연하겠다고 선언 후 나가버렸다. 어쩌면 뮈엘라 밖으로 나간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작은아들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아들 혹은 손자에게 호건 가를 물려주고 그녀는 로엔 가로 보내려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에요. 잘 막아주셨어요.” 케이트는 재빨리 생각에서 벗어나 인사했다. 마리아가 아니었다면 그녀도 무너지는 건물 속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마력은 여전히 봉인되어 있었을 거고, 이안을 만나지 못해 막지 못했을 거다. “덕분에 제가 무사히 여기 있는 걸요.” 그녀의 인사에 유진은 볼을 긁적였다.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요행으로 칭찬받는 건 민망하고 쑥스럽다. 그는 쑥스러워 하다가 물어보려던 것을 떠올렸다. “호건 가를 나가시면 역시 로엔 가로 가시는 겁니까?” “그건 아닐 거예요.” 케이트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는 절 로엔 가로 보내고 싶어 하시지만, 거긴 이미 이안의 형님인 로엔 백작이 있으니까요. 저와 이안은 따로 나와 살겠죠.” “만약 호건 가를 물려받는다면 로엔 경과 이 집에서 사실 생각이셨나요?” 그건 생각 못 했다. 케이트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그녀가 로엔 가로 가지 않으려 한 건 아직 로엔 백작인 아르고가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약혼녀가 아직 열아홉 살이기 때문에 결혼을 조금 미루고 있다고 들었다. 스무 살이 되는 해에 결혼한다고 했으니 내년에 결혼할 터다. 그런데 케이트가 이안과 결혼해 로엔 가로 들어가면 같은 해에 신부가 둘이나 한 집에 들어가게 된다. 복잡해지는 것도 싫고, 이안은 서자이니 그녀가 물러나는 게 좋다고 생각했던 거다. “생각 안 해봤어요. 하지만 이제와서 무슨 상관이겠어요? 어차피 할아버지는 제게 물려주지 않으실 텐데요.”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감기는 거의 나았고 후작과 수리공 개인지판매도 끝났으니 이제 진짜로 뮈엘라 연재를 재개해야겠네요. 여전히 빨간날 제외하고 평일 하루 한편씩 올라갑니다. 11시전까지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00282 8. 케이트 =========================================================================                            “굉장히 시원하게 이야기하시는 군요.” 유진은 그다지 섭섭하지 않다는 투로 이야기하는 케이트에게 감탄했다. 호건 가의 후계자는 케이트뿐이다. 그런데 굳이 케이트에게 물려주지 않겠다고 하는 거다. 그가 케이트라면 할아버지에게 섭섭함을 넘어서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시원한가? 케이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번 돈이고 세운 사업인걸요. 제게 물려주셔야 할 당연한 이유는 없죠.” 케이트의 말에 유진은 입을 딱 벌렸다. 이런 호구 아니, 순진한 사람을 봤나. 그는 어이가 없어서 잠시 케이트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스미스 양이 뭐가 부족해서요? 호건 씨는 제프리 호건도 후계자로 삼았잖습니까?” “제프리는 할아버지와 같이 살았잖아요. 전 이제 막 이 집에 들어왔을 뿐이고요.” “그건 스미스 양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다른 사람들도 일부러 호건이 아닌 집에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유진은 멍하니 케이트를 쳐다보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까지 호건 씨가 시킨 일은 왜 다 한 거죠?” “할아버지니까요.” “도움이 조금도 안 되는 할아버지인데도 해달라는 일은 다 해준다는 건가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케이트는 다시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도움이 되고 안 되고만 보자면 할아버지보다는 제가 할아버지께 도움이 안 될 텐데요.” 틀린 말은 아니다. 유진은 다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도움이 되고 안 되고만 보자면 비스마르크보다 케이트 쪽이 더 도움이 안 되는 게 맞다. 더 좋은 집과 좋은 음식, 좋은 옷을 입고 천애 고아인 케이트 스미스에서 비스마르크의 하나뿐인 손녀인 케이트 스미스가 되었다. 여기서 뭔가를 더 원하는 건 욕심이라고 케이트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처럼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녀는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여기 오기 전에 살던 곳에서 전 의지할 곳이 하나도 없었어요.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저택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들어온 지 몇 년 안 된 사람들이었죠. 생각해보면 전부 저처럼 고아였기 때문에 제가 다르다는 걸 몰랐던 것 같아요.” 그곳에서 벗어나며 앤과는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알라나데일에서 케이트는 기본적으로 혼자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그녀가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없다. 모든 사람이 그녀와 같았던 알라나데일에서는 괜찮았다. 하지만 케이트는 수도로 와서 타운하우스에서 일하며 자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깨달았다. “전 저도 모르는 새에 늘 주변을 살피고 약삭빠르게 살려고 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그게 평범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자 완전히 지쳐 버린 거죠.” 그 시기에 유일하게 케이트가 믿을 수 있었던 건 이안이었다. 이 무뚝뚝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남자는 기묘하게도 그녀를 불편하게 함과 동시에 감정 한편으로 의지할 수 있었다. “유진 씨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요. 좀 더 내 것을 챙기라는 거죠?” 유진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트가 말하는 것을 그는 반쯤은 이해하고 반쯤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나 말투, 지금 분위기에서 그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처음 수도로 왔을 때와 달리 지금 전 내 것이라는 게 생겼어요. 무뚝뚝하지만 할아버지도 있고, 좋은 친구들도 있죠. 여차하면 뛰어들어가서 숨을 수 있는 내 방도 있어요. 올해가 지나면 쫓겨나는 게 아닐까, 이 접시를 깨면 급여를 하나도 못 받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돼요.”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케이트가 하는 말은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 역시 이번 의뢰인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한동안 의뢰도 들어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고민을 했기 때문에 케이트의 고민도 이해할 수 있었다. 케이트는 그런 고민에서 벗어났다. 그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철 들 때부터 내 집이, 내 가족이 없이 살던 사람이 평생 일할 필요도, 집세를 걱정할 필요도 없는 삶으로 바뀐 것이다. “여전히 전 스미스 양이 좀 더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나니 스미스 양의 상황은 부럽습니다.” 케이트는 뻐기거나 수줍어하는 기색 없이 미소 지었다. 그녀는 생사의 기로에서 벗어나 이안과 결혼해 평범한 가정을 꾸린다는 꿈 꾸던 평온한 삶을 눈앞에 두고 있다. 유진은 그녀가 욕심이 없다고 에둘러 말했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제게도 당연히 욕심이 있어요. 사람마다 원하는 삶이 다른 것처럼 욕심의 방향도 다른 것뿐이에요.” 유진이 말하는, 그리고 할아버지인 비스마르크가 말하는 욕심이란 에드워드의 제안을 받아들여 가짜 성녀가 되는 그런 종류겠지. 많은 부와 권력을 갖는. 케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게는 죽을 때까지 그녀가 마녀라는 걸 들키지 않겠다는 엄청난 욕심이 있다. 하지만 이걸 유진에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케이트가 더 이상 말하지 않자 유진은 맥이 빠져 다시 벽에 몸을 기댔다. 좀 특이한 아가씨라고 생각하긴 했다. 가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거나 어려운 단어를 쓰는 것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여자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고 일자리를 알아봐 주는 긴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용병들은 그녀가 성녀 뮈엘라를 본받는 거냐고 농담을 던졌다. 심지어 비스마르크의 구박과 변덕에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움직이는 것을 보고 진짜 성녀 뮈엘라의 현신 아니냐고 진지하게 농담하는 자도 있었다. “스미스 양은 좀, 독특한 분이군요.” “그런가요?” 케이트는 평온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독특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성격의 독특함을 생각하기엔 마녀로서의 자신과 마력흡수자로서의 이안을 대할 때를 생각하느라 버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비스마르크나 에드워드, 그리고 유진의 반응을 생각하면 확실히 그녀의 욕심은 다른 사람과 그 방향이 다른 모양이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잦아들었을 때 방 안쪽에서 들리던 고함도 잦아 들었다. 케이트는 더 이상 비스마르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깨닫고 다시 벽에 귀를 댔다. 들어가도 되나? “아, 그래. 사과하면 되잖아, 사과하면.” 비스마르크는 투덜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놈의 드워프 끈질기기도 하다. “자네 손녀한테도 사과해!” 이쯤에서 멈춰야겠다. 케이트가 재빨리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기드온이 다시 외쳤다. “나이를 더 먹었으면 더 여유로워 져야지, 이깟 집 물려준다고 애를 그렇게 부려 먹는 게 말이 돼?” 엇 하고 케이트와 비스마르크 둘 다 멈췄다. 케이트는 재빨리 기드온에게 다가가 말했다. “전 괜찮으니 그만하세요.”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기드온은 귀신같이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비스마르크가 에헴 하고 시선을 돌리는 것과 케이트가 주제를 바꾸려는 걸 보고 무슨 일인가 하다가 물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냐? 자네, 말 좀 해봐.” 공기가 답답해졌다. 상황을 아는 유진은 눈치 빠르게도 방 밖으로 슬그머니 나가버렸다. 케이트는 뭐라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가까스로 말했다. “집과 상관없이 할아버지이신걸요. 제가 일을 도와드리는 건 당연한 거예요.” “그래!” 비스마르크는 케이트의 말에 옳다구나 하고 외쳤다. 얜 내 손녀잖아! 난 할아버지고! 그러니까 짐 좀 안 물려줘도 일 시켜도 돼! 그런 자기 합리화가 시작됐다. “가족끼리 일 좀 시키는 게 뭐가 어때서? 어? 집 물려주면 하고 안 물려주면 안 하면 그게 남이지 가족인가?” 이것 봐라? 기드온은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어이가 없어서 자기 친구에게 소리쳤다. “이 늙은이가 아주 노망이 들었구만!” 쾅하고 기드온이 테이블을 내려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쩍하고 테이블이 반으로 갈라졌다. 헉. 케이트가 움찔하고 뒤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유진은 무슨 일인가 하고 들여다봤다가 테이블이 반으로 쪼개진 것을 보고 들어왔다. “제정신이야?” 버럭 소리 지르는 통에 유진이 케이트에게 괜찮냐고 묻는 소리가 묻혔다. 기드온은 비스마르크에게 한풀이라도 하듯 소리쳤다. “가족이니까 그 정도는 해줘도 된다고? 그래서, 손녀가 도와달라는 사업도 거절했나? 이 노인네야, 늙을 거면 곱게 늙고, 노망날 거면 빨리 뒤져!” 헉.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가 유진의 팔에 부딪혔다. 비스마르크는 친구의 폭언에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소리쳤다. “뒤지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더 심한 걸 알려줄까? 태어나서 한번 도움도 안 준 할애비라는 인간이 가족이랍시고 애먼 여자애 노예 생활시키는 게 더 심한 거야, 이 노인네야!” 와, 이건 그가 나설 일이 아니다. 유진은 비스마르크와 기드온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케이트에게 속삭였다. “도망칠까요?” 안 된다. 케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까까지는 비스마르크와 기드온의 싸움이라 끼어들지 않았지만 이번은 문제가 그녀다. 케이트는 조심스럽게 기드온과 비스마르크 사이로 끼어들었다. 누구 편을 들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기드온의 편을 들자니 할아버지가 서운해할 테고, 할아버지의 편을 들자니 기드온의 말이 맞다. 게다가 기껏 남의 편을 들어줬더니 그렇지 않다고 하면 기드온이 곤란할 것이다. “잠시만요. 두 분, 멈추세요.” 케이트가 손을 벌리자 버럭버럭 소리 지르던 비스마르크와 기드온의 싸움이 멈췄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유산 받으려고 할아버지 일을 도운 건 아니니까요. 전 괜찮아요.” 거봐. 비스마르크의 표정이 밝아졌다. 반대로 기드온의 표정이 다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케이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기드온 씨 말대로 제가 평생 여기서 할아버지 일을 하는 건 옳지 않죠. 할아버지께서 제게 호건 가를 물려주길 포기하셨다면 더더욱 저 말고 진짜 후계자가 해야 할 테니까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비스마르크와 기드온의 표정에 의문이 떠올랐다. 케이트는 천천히 숨을 내쉬고 말했다. “이번 주까지만 호건 사업 일을 하고, 손 뗄게요.” “뭐?” 케이트의 선언에 곤란해 진 건 비스마르크였다. 지금까지 케이트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일을 가르치고 있었다. 최근에 와서야 케이트보다 다른 사람이 더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던 탓에 당장 케이트가 손을 떼면 일을 할 사람이 없다. 하지만 비스마르크가 그런 이야기를 하기 전에 케이트가 먼저 말했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전 호건 가 사람이 아니라 로엔 가 사람이 될 테니까요. 다른 후계자에게 갈 자리를 제가 붙잡고 있는 것도 좋지 않고, 저도 시작한 일이 있으니 그 일에 매진하고 싶어요.” 억 하고 비스마르크가 뒤통수에 손을 갖다 댔다. 재빨리 케이트가 비스마르크의 몸을 부축했지만 너무 무거운 탓에 유진이 달려들지 않았다면 둘 다 쓰러졌을 것이다. “너무 급한 거 아닙니까?” “급해요? 뭐가요?” 유진을 돌아본 케이트의 얼굴은 무표정이었다. 그녀는 비스마르크가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유진을 도와 의자에 앉힌 뒤 사람을 불렀다. 누군가 오길 기다리면서 유진은 케이트에게 말했다. “이번 주까지만 한다니, 너무 급하잖습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케이트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 돈이고 할아버지 사업인걸요. 제가 책임져야 할 이유가 없어요.” ============================ 작품 후기 ============================ 억 늦어서 죄송합니다. 11시까지 올리려고 했는데 집에 이제 와서. 얼마전부터 오른손목이 아프길래 버티컬 마우스라는 걸 주문했습니다. 오, 신기해. 오른손목 통증은 줄어들겠다~ 하고 있는데 어머니 컴퓨터가 고장나서 봐드린다고 컴퓨터 본체를 들어올리다가 왼손목이.... 00283 8. 케이트 =========================================================================                            그날 이후 케이트는 정말로 호건 사업에서 하나둘 손 떼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갑자기 손을 떼려 한 건 아니다. 할 수 있는 한 도우려 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가 기드온과 싸우는 걸 보면서 그녀는 자신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쪽은 바빠서 이안과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그녀가 진짜 하고 싶은 일도 늦춰가며 하고 돕고 있는데 할아버지는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케이트가 이 집의 돈보다 할아버지의 애정을 더 원한다고 말해도 그는 믿지 않고 있다. 그녀가 그렇게 말을 해도 돈의 맛을 보게 되면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언젠가 그럴지 모르지. 케이트는 칼에게 찻잔을 받아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스메랄다와 제프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 역시 언젠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딸이 부를 버리고 도망쳐 사랑을 택했음에도 비스마르크는 돈의 힘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케이트를 별것 아니게 생각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칼은 케이트를 위해 케이크를 자르며 물었다. 건조한 과일을 럼에 불려 콤포트를 만든 다음 스펀지케이크 위에 얹은 간단한 케이크였다. “네. 전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지만. 칼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케이크를 케이트에게 내밀었다. 한 번쯤은 주인님도 그의 부에 끌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하필 하나뿐인 혈육이라는 게 비스마르크에게 불행이라면 불행이지만. 든 사람 자리는 몰라도 난사람 자리는 안다고. 스미스 양이 손을 놔 버리면 지금까지처럼 손녀를 쉽게 부려 먹을 생각을 못 하겠지.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입장이지만 그는 케이트의 결정을 지지했다. “그런데, 사업에 손을 떼시면 이 집을 떠나실 겁니까?” “할아버지께서 원하시면요.” 케이트는 폭신폭신한 케이크를 잘라 졸인 과일을 얹어 먹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후계자가 온다면 불편할 테니까요. 다행히 아직 큐바인 하우스가 있으니 급한 대로 거기로 옮길 생각이에요.” “남아계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할아버지도 제가 로엔 가로 가길 원하시는데, 불편하게 남아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큐바인 하우스를 팔지 않아서 다행이다. 케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제이드와 조세핀은 어떻게 됐을까. “이젠 나가겠다고?” 케이트와 이야기를 한 칼은 오후 시간이 되자 비스마르크에게 차를 내가며 슬쩍 지나가는 말로 케이트가 나갈 것 같다고 말했다. 당연히 비스마르크는 펄쩍 뛰며 물었다. “나간다니? 어디로? 내가 이 집 안 물려준다고 유세하는 거야?”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칼은 재빨리 비스마르크의 앞에 놓인 찻잔이 넘어지지 않도록 잡으며 말을 이었다. “이 집은 다른 후계자가 이어받아야 할 테니까요. 아가씨께서 남아 계시면 새로 올 후계자나 주인님께서 불편해하실 거라고 합니다.” “아, 불편하긴 누가 불편해? 이 큰집에 여자 하나 있다고 뭐가 그리 불편하겠어?” “주인님은 불편하지 않으시겠지만, 아가씨는 분명 불편할 겁니다.” “뭬야? 그 녀석이 불편할 게 뭐 있어?” “생각해 보십시오.” 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가 들수록,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사람은 이기적이기 마련이다. 그는 오랜 주인을 위해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혈육인데 후계자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고, 그게 주인님께서 원해서 이뤄진 일이라면 아가씨는 이 집에서 거부당했다는 인상을 받게 될 겁니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요.” 그의 말에 비스마르크는 에드워드의 말을 떠올렸다. 사교계에서는 이미 케이트를 호건 가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 그녀를 두고 다른 후계자를 세운다면 이미지가 이상해 질 거라고 말했지. 비스마르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서, 자네는 그 아이를 후계자로 두라는 말인가?” “제가 어찌 주인님께 이래라저래라 하겠습니까.” 너구리같은 녀석이. 비스마르크는 칼을 가볍게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한 말이 그거잖아.” “아닙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이런 의견도 있다는 걸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못마땅한 헛기침소리가 비스마르크의 입으로 터져 나왔다. 칼이 엘리자베스를 예뻐했다는 걸 안다. 그보다 더. 하지만 에스메랄다나 제프리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자가 케이트 때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케이트를 옹호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네는 그 아이가 후계자로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비스마르크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물음이다. 칼은 약간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그건 제가 말씀드릴 만한 사항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잘도 떠들어 놓고.” 칼은 저도 모르게 씩 웃었다. 그걸 보고 비스마르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고르자면 칼뿐이다. 그의 집사. 그가 호건 가를 세울 때 그와 함께 있었던 남자. 쓰러져 에스메랄다와 제프리에게 감금당한 후에도 칼만이 온전한 그의 편이었다. “자네는 엘리자베스를 좋아했지.” 칼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좋아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딸처럼 예뻐했다. 그는 결혼하지 않는 그에게 딸 대신이 되어준 작은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 애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거 아닌가?” 케이트의 얼굴에서 엘리자베스를 보는 게 아니냐는 말이다. 칼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주인님께서는 아가씨, 케이트 아가씨를 보면 엘리자베스 아가씨가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아이가 예쁘다고 무조건 물려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제프리 도련님 때와는 다른 말씀을 하시는군요.” 끙하고 비스마르크가 신음을 내뱉었다. 제프리가 예뻐서 후계자로 삼은 게 아니다. 그 녀석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칼은 같은 조건에서 케이트는 배제하는 그의 태도를 꼬집고 있었다. “케이트는 이 집에서 자라지 않았어.” “이 집에서 자란 게 후계자에 조건이라면 주인님, 외람되지만 그 조건에 맞는 후계자는 아무도 없다는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론이라 반박할 말이 없다. 비스마르크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리고 마음이 너무 약해.”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마음이라는 건 어느 방향이냐에 따라 강해 보일 수도, 약해 보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칼의 말에 비스마르크가 고개를 들었다. 칼은 잠시 그가 숨 쉴 시간을 준 뒤 말을 이었다. “이 나라에서 호건 가는 정점을 찍었습니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고 봅니다. 다른 곳은 제프리 도련님이 하셨던 불법 정도겠죠. 주인님께서 그쪽으로 손을 대길 원하신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누구를 데려와도 케이트 아가씨와 비슷할 거라고 봅니다.” “어차피 비슷할 거, 그 애에게 줘라 이건가?” “그럴 리가요. 제가 감히 주인님께 누구에게 물려주라고 할 입장이 아니지 않습니까.” 또 이런다. 비스마르크가 흥 하고 콧방귀를 끼자 칼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저, 제가 보기에 지금 호건 가에 필요한 건 케이트 아가씨 같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마음 약하고 정에 이끌리는 여자?” “아니요. 힘이 아닌 다른 쪽 길을 제시하는 후계자 말입니다.” 다른 쪽 길? 비스마르크는 잠시 생각하다 그게 케이트가 얼마 전 투자를 요청한 사업이라는 걸 떠올렸다. 그는 거절했다. 여자들을 모아서 뭘 어쩐다고 했던 것 같은데. 오래 걸리고 아무도 관심 없는 그런 일이었다. 그가 호건 가를 세울 때 뛰어든 일은 누구나 노리고 단시간에 돈을 벌 수 있는 무기상이었다. 전사가 많은 뮈엘라에서 좋은 재료를 확보해 무기를 만들면 큰돈을 벌 수 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당연히 라이벌도 많았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그 라이벌을 모두 뿌리치고 단 하나뿐인 호건 사업으로 솟았다. 그가 케이트에게 바란 건 그런 거였다. 수많은 라이벌과 어떻게든 공적을 가로채려는 음해 자들 사이에서 용감하게 뿌리치고 나아갈 수 있는. 그래서 그는 케이트가 사업이랍시고 가져왔을 때 실망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사창가와 구빈원에서 쓰레기를 모아다가 글을 가르친다고 누가 알아준단 말인가. “다른 쪽 길이라고?” 비스마르크는 늘어진 눈꺼풀을 올려 칼을 쳐다봤다. 칼은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네는 그게 제대로 된 길이라고 보나?” “주인님께서 걸으신 길도 제대로 된 길은 아니었습니다.” “그건 그렇지.” 그는 크흠하고 자세를 고쳤다. 칼의 말대로 그저 방향이 다른 길일 뿐일까? 오랜만에 비스마르크의 머릿속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수요일 입니다. 어머니 컴퓨터를 형제와 함꼐 사드렸는데 오늘 도착해서 이것저것 설정 해드렸더니 어머니께서 신난 표정으로 생선을 구워주셨습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저와 형제 모두 생선구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다는 점이지만요. 누구를 위해서 생선을 굽나... 00284 8. 케이트 =========================================================================                            공방에서 대독자에게 혼자 생활하기에 충분한 돈을 주기에는 아직 무리였다. 제시하는 돈이 일정 금액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않자 케이트는 다른 방안을 제시했다. 일주일을 반으로 나눠 두 곳에서 일하는 것이다. 공방 사람들은 비용이 낮아지는 만큼 동의했고 다양한 대독자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받아들였다. 케이트의 사업에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비용이 낮아졌지만, 일주일에 두 곳에서 일하는 만큼 한 곳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받을 수 있었고, 여자들도 다양한 곳에서 일할 수 있었다. 이런 방법은 케이트가 예상했던 결과를 불러왔다. 여러 명이 번갈아가며 기사를 읽으니 공방마다 선호하는 방식과 대독자 개개인의 실력 차가 드러난 것이다. 공방마다 더 선호하는 대독자를 고용하기 위해 좀 더 많은 돈을 지급하려 했고 그것은 결국 다시 한 번 가격 경쟁을 불러왔다. “생각보다 훨씬 괜찮네요.” 수잔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트의 사업이 망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약간의 수익마저 올리고 있었다. “저도 놀랐어요.” 케이트는 부끄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녀 역시 본전치기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에반스 공작이나 레인포레스트의 지원금을 돌려주지는 못해도 더 이상의 도움 없이 사업을 꾸려나갈 수 있는 수준이다. 게다가 호건 사업에도 손을 뗀 덕에 시간에 여유가 생겼다. 케이트는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오랜만에 이안과 차를 마시기로 했다. 늘 호건 저택에서 마셨는데 오늘은 특별히 디저트로 유명한 찻집을 가기로 해서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내일 봐요.” 일주일에 두어 번 오면 자주 오던 것이 이제는 매일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빙그레 웃으며 떠나는 케이트를 창밖으로 쳐다보며 여자들이 조잘조잘 이야기했다. “호건 가의 아가씨라며?” “호건 가가 뭐야? 귀족?” “호건 가를 몰라? 세상에, 너 어디서 왔니?” 호건 가가 귀족이냐고 물었던 검은 머리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고향을 말했다. 거기가 어디야? 유일하게 어딘지 아는 여자가 호들갑 떨며 말했다. “엄청 시골에서도 왔네. 호건 가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어째 모르나 했다. 부자야. 엄청난.” “귀족보다 더?” “얘 좀 봐. 귀족이 다 부자인 줄 아니? 망한 귀족은 서민보다 못해.” 순식간에 방 안에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쪽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던 에밀리도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뮈엘라에서 팔리는 무기는 전부 호건 가를 통해 나온다는 말이 있어.” “웬만한 귀족보다 힘이 세다더라.” “무슨 힘?” “귀족이 이래라! 하면 우리 같은 사람은 죽는시늉이라도 내야 하잖아? 호건 가는 싫다고 할 수 있다는 거지.” “싫다고 할 수 있다 뿐이야? 반대로 귀족한테 일을 시킬 수도 있을 걸?” “어머 어머.” “그러니 그 남자가 우리한테 그랬지.” 누군가의 말에 방안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늘해졌다. 다들 딱딱하게 굳은 채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떠올렸다. 케이트와 제프리가 같은 집 사람이라는 걸. “그럼 뭐야? 자기 집 치부 감추려고 저러는 거잖아.” 날카로운 지적이 나왔다. 그럴 리 없다는 생각과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여자들의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다. “그, 그건 아닐걸?” 여자들의 시선이 한쪽에 꽂혔다. 에밀리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래서 그녀는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더듬지 않으려 해도 소용없다. “스, 스미스양이 호, 호, 호건 가에 들어간 건, 오, 오, 올해, 올해거든. 일 년도 아, 안 됐어.” “호건 가에 들어간 게 올해라니, 무슨 소리야?” 에밀리는 읽고 있던 신문을 내밀었다. 에바니엘 우물가. 케이트가 여자들이 공방에서 읽을 수 있도록 공수해 둔 신문이다. 에밀리는 더듬는 걸 고치기 위해 자유 시간에도 신문을 읽는 연습을 하곤 했다. “호건 가에 새로운 후계자가 나타났다. 케이트 스미스라는 여성은,” 에밀리가 내민 신문을 읽던 여자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방 안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케이트 스미스라는 여성이 호건 가의 사라진 딸, 엘리자베스의 딸이라는 게 밝혀졌다는 기사였다. 어떻게 알아낸 건지 기자는 케이트가 에바니엘의 하녀로 일했으며 마법 사건에서 살아남아 수도로 도망쳐 왔다는 것까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세상에.” 여자들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흘렸다. 하녀였다가 호건 가의 아가씨가 되다니, 완전히 누구나 꿈꾸는 신분 상승이다. “하지만 스미스 양이 호건 저택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호건 저택에 있는 에스메랄다 호건과 제, 제프리 호건이 그녀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다는 제보다.” 제프리의 이름을 읽을 때 여자의 목소리가 흔들리기는 했지만 마지막까지 전부 읽기는 했다. 여자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굴렸다. “그럼 호건 가에서 스미스 양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는 소린가?” “그렇겠지. 재산을 나눠 가질 사람이 하나 더 생기는 거니까.” “이, 이런 것도 있어.” 에밀리는 다른 신문도 하나 내밀었다. “바로 지난밤, 잠깐, 바로 이거 언제 신문이야?” 기사를 읽던 여자가 신문을 뒤집어 날짜를 확인했다. 벌써 몇 달 전의 신문이다. 그녀는 가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바로 지난밤, 고급 주거지역에 소란이 일었다. 새벽에 일어난 사건이라 모르는 사람이 많겠지만, 필자의 귀에는 들려온 소식이다. 호건 저택에서 웬 여자가 도망쳐 나왔다는 소문이다. 최근 확인되지 않은 정보에 의하면 호건 가에 새로운 후계자가 등장했다고 한다. 그러니 도망친 여자는 그 후계자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녀의 명예를 위해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기로 한다.” 전형적인 카더라 소식이지만 에바니엘 우물가인 만큼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당시 기사를 읽은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며 궁금해했지만 도망친 여자가 케이트라는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만큼 에바니엘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기도 했다. “뭐야, 그럼. 이 여자가 스미스 양이라는 거야?” “그, 그럴 것 가, 같지 않아?” 다들 말을 하진 않았지만, 에밀리의 말에 수긍했다. 제프리 호건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새로운 후계자가 나타났으니 소문나기 전에 그녀를 감금하려 했을 것이다. “저, 적어도, 스, 스미스 양이 다, 다, 단순, 히 호건 가의 치, 치부를 감추기 위해 이, 이, 이런 일을 한다고 보, 볼 수만은 없다는 거지.” 그것도 그러네. 다시 방 안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때, 케이트는 여자들이 그런 대화를 한다는 걸 꿈에도 모르고 이안과 만나고 있었다. “왔나.” 마차 문이 열리자 이안은 몸을 내미는 케이트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케이트의 발이 계단을 밟기 전에 그의 품에 안겼다가 조심스럽게 땅바닥에 닿았다. “기다렸어요?” “아니, 나도 방금 왔다.” 오랜만이다. 케이트는 빙글빙글 웃었다. 호건 사업에 손을 뗐고, 할아버지도 다른 후계자를 찾겠노라고 했으니 그녀는 호건 가를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여유를 찾았다. 덕분에 그녀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에 매진할 수 있어 좋았고 이안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어 좋았다. 무엇보다 좋은 건 그에게 이 사실을 알려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따로 준비된 작은 방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 나자 이안이 말했다. 외부에서 음식물 섭취가 금지된 용병들은 유진만 남고 전부 방 바깥쪽에서 두 사람을 지키고 있었다. “할 말이 있거든요.” “좋은 소식인가 보군.” “저한테는요.” 따듯한 차와 달콤한 케이크가 나왔다. 이안은 삼단 트레이를 보고 잠시 멈칫했지만 능숙하게 가장 아래 있는 케이크를 집어 케이트에게 내밀었다. “할아버지께서 호건 가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시겠대요.” “그래?” “얼마 전에 에반스 공작님이 오셔서 점심식사를 하고 가셨거든요. 아, 혹시 알고 있어요?”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에드워드와 이안, 둘 다 바빠서 만나지 못했다. 에반스 공작이 비스마르크와 점심식사를 했다고? 무슨 일인가 싶어 그는 찻잔을 든 채 유진을 쳐다봤다가 케이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상황을 아는 유진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에반스 공작이 너와 점심식사를 하고 갔다고?” “할아버지와요. 저는 덤이었어요.” 이안이 손을 뻗어 케이트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녀가 덤이라니, 그럴 리가. 그런 태도였지만 케이트는 가볍게 얼굴을 붉힌 채 꿋꿋하게 말했다. “그때 할아버지 말씀이, 호건 가는 다른 사람에게 물려준다고 하시더라고요.” “네게 이야기 한 게 아니라 에반스 공작 앞에서 말을 했다고?” “뭐, 그렇죠.” 아무리 할아버지라 해도 무례한 행동이다. 그런 이야기는 케이트에게 먼저 말을 한 뒤 남에게 알려야 한다. 그 사실에 놀라는 이안의 표정에 케이트 역시 쓰게 웃었다. 그런 점이 비스마르크의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점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은 그녀의 할아버지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호건 사업에는 완전히 손 뗐어요. 이제 저한테 남은 건, 대독자 사업과 당신뿐이에요.” ============================ 작품 후기 ============================ 내일은 업뎃이 없습니다아. 어딜 가서 토요일날 내려오거든요. 즐거운 주말 보내시고, 다음주에 만나요! 00285 8. 케이트 =========================================================================                            당신뿐이라는 말에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말이 묘하게 기분 좋았다. 그는 대뜸 물었다. “그럼 결혼 준비를 해도 되겠군.”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네.” 비스마르크는 케이트가 로엔 가로 갈 거라고 했다. 재미있는 말이지. 케이트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호건 가에 있겠다고 했는데 할아버지는 에반스 공작에게 그녀가 로엔 가로 갈 거라고 말했다. 그런 점을 참을 수 없다. 마치 케이트를 자신이 두는 체스의 말처럼 여기는 태도. 에드워드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녀는 체스의 말이 아니다. 이안 역시 마찬가지다. 비스마르크가 가란다고 케이트가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간다고 로엔 가에서 그녀를 받아줘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호건 가 역시 마찬가지. 케이트가 남겠다고 남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정도로 만족하자. 케이트는 간단하게 생각했다. 호건 가의 사람이라는, 그녀가 천애 고아가 아니고 할아버지와 대부가 있다는 것을 안 것으로 충분하다. 어차피 바라지 않던 재력이기에 주지 않겠다면 오히려 더 간단하게 물러설 수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아무 준비도 없이 한 말이었지만 케이트는 그가 뭔가 생각하고 에드워드에게 이야기 한 것이라 생각했다. 케이트를 후계자로 삼지 않고 다른 후계자를 내세우겠다면 호건 가의 하나뿐인 혈육인 그녀는 빨리 비켜주는 게 좋다. 할아버지의 사업을 돕고 할아버지가 사업에 다시 손댈 수 있을 때까지 결혼을 미루겠다는 케이트의 계획은 에드워드와의 점심식사로 가볍게 바뀌었다. “집은 어떻게 할까?” 이안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결혼 준비라면 제일 먼저 준비해야 할 게 집일 터다. 그는 타운하우스에 살고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다른 집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 아무 곳이나 괜찮아요.” 케이트 역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큐바인 하우스는 조세핀이나 제이드에게 판매할 거다. 그렇다면 새집이 필요하겠지. “타운 하우스에 들어가는 것도 괜찮겠지만, 그건 좀 아닌 것 같고요.” “음.”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작위를 물려받지 않는 자식이 결혼 후에도 부모와 함께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큐바인 하우스는 킬리언 씨가 산다고 해요.” “그래?” “아니면 코트 양이나요.” 이안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두 사람이 결혼해?” 케이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글쎄요.” 제이드는 조세핀이 좋은 모양이던데, 조세핀은 어떨까. 그녀는 그녀가 알고 있는 조세핀을 떠올렸다. 제이드에게 아주 마음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던데. 조세핀이 제이드에게 마음이 있거나 말거나, 그리고 유진이 이안과 케이트의 알콩달콩한 대화에 몸을 비틀거나 말거나 시간은 흘렀다. 그 사이에 괴로워 한 건 유진 뿐만이 아니었다. 비스마르크는 정말로 케이트가 너무 쉽게 호건 사업에 손을 떼자 말을 하진 않았지만 당황했다. “그리고 이쪽은 정기 계약입니다. 란데이아 계약서까지 두 개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뭐? 란데이아?” 처음 보는 계약서에 비스마르크는 미간을 찡그리고 막스를 쳐다봤다. 변호사는 약간 곤란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스미스 양이 계약한 겁니다. 란데이아 상인들과 계약하기로 했고 마지막으로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뭘 팔기로 한 건데?” “검 서른 정입니다.” “서른 정? 고작 그걸 팔아서 뭐에 써?” “그게.” 막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방 안에는 그와 비스마르크 단둘 뿐이다. “란데이아에서 마법 석을 구해주기로 했습니다.” “뭐?” 비스마르크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의 고함에 하인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나갔다. 막스는 깜짝 놀라 손을 내밀며 속삭였다. “아, 물론 구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호건 가에서 만든 검을 사고싶다는 요청에 스미스 양이 제시한 조건일 뿐이니까요..” “대체, 그 애가 그걸 뭐에 쓰려고 사려 한 건지 알고 있나?” “저도 그렇지 않아서 걱정되어 물어봤는데 스미스 양 말로는 아는 귀족에게 줄 것이라 하더군요.” 정확히 말하면 높은 분께 드릴 거라고 했다. 비스마르크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스쳐 지나간 아는 귀족은 에드워드 에반스 공작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찾아왔을 때 성녀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했었지. 에드워드는 그 성녀가 진짜인지 확인해 본다고 했었다. 그걸 위해 마법 석이 필요하다고 했던 걸까. 날카로웠던 비스마르크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에드워드 에반스 공작과 손을 잡고 있었던 거다, 그의 손녀는. 생각보다 순진하지만은 않았군. 그는 만족감에 으흠. 하고 소리를 내며 사인했다. “그리고 이쪽은 붉은 광산 관리 문제입니다.” “이건 지금까지 어떻게 했지?” “스미스 양이 처리했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비스마르크는 심드렁하게 막스가 내놓은 서류를 확인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변호사가 서류를 내려놓자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이걸 전부 그 애가 처리했다고?” “네. 몇 개 새로 계약한 것도 있습니다.” 새로 계약한 데에는 왕궁 기사단과 기존 계약을 해지하고 새 계약을 체결한 것도 있었다. 용병과 계약한 것에는 무기와 방어구 뿐 아니라 식료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허.” 나쁘지 않잖아. 비스마르크는 가볍게 감탄하며 변호사가 내려놓는 계약서를 살폈다. “그리고 이쪽은, 고아원과 구빈원에 후원하는 목록입니다.” “후원?” 비스마르크의 눈썹이 치솟았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그가 뭐라고 투덜거리기 전에 막스가 먼저 말했다. “새로 계약했다기보다는 제프리 호건 군이 계약한 것 중 파기할 수 없는 계약을 약간 수정한 것뿐입니다만.” “수정했다고?” “그쪽에서 얻는 수익 일부분을 호건 가 이름으로 고아원과 구빈원에 후원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허.” 어차피 손해 볼 거라면 이런 식으로라도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비스마르크는 문득 케이트가 가져왔던 자선사업이나 다름없는 그녀의 사업이 떠올랐다. “그 애가 한다던 그 자선사업은 어떻게 됐나?” “자선 사업이요? 아, 대독자말씀이십니까?” “뭔진 모르지만, 걔가 하는 거 있잖아. 그건 어때? 망했나?” “아뇨. 오히려 이익을 얻고 있습니다.” “그게 이익을 얻었다고? 어떻게?” 비스마르크의 반응에 막스는 쓰게 웃었다. 그런 반응도 이해는 간다. 무기상으로 큰 부자가 된 남자니 더더욱 그랬다. “일종의 유흥거리 제공이죠. 이런저런 이야기나 소문들을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다들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흥. 계집애들이나 좋아할 만한 일이군.” “아, 아닙니다. 최근엔 목공소나 대장간에서도 요청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뭐? 대장간이나 목공소에서 그런 걸 왜 듣고 싶어 해?” “소식이잖습니까. 변경에서 이런저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알려주는 거니까요. 일하면서 들을 수도 있고. 반응이 좋다더군요.” 그래? 비스마르크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별거 아니라고, 나약한 계집애의 자선사업이라고 생각해서 물리쳤는데 그게 아니었나?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막스가 서류를 챙겨 떠나자마자 칼을 불렀다. “자네, 들었나?” “무엇을 말입니까?” “아, 그 녀석 사업 말야! 생각보다 잘 된다면서?” “아가씨 사업 말입니까? 네. 잘 된다고 하더군요.” 잘 된다기엔 아직 약간의 이익을 얻는 수준이지만 칼은 일부러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자세하게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비스마르크의 입가가 씰룩쌜룩 움직였다. 뭔가를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말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드디어 물었다. “대장간이나 목공소에서도 부른다던데?” “네. 꽤 호평이랍니다.” “말세군, 말세야. 계집애들도 아니고 대장간에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사람을 쓴다고?” “이야기가 그냥 이야기가 아니죠.” 칼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더 유용할지도 모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떤 검을 선호하는지, 새로운 검술에는 어떤 검이 필요한지, 금속 가격이 올라갔는지 내렸는지를 알 수 있으니까요. 대장간이라면 가장 필요할 이야기지요.” 칼의 말 대로다.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우습다는 듯 말했다. “그래 봤자 에바니엘에서만 도는 소문이잖아. 그게 그리 도움이 되겠어?” “지금은 아니지만 점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케이트 아가씨 사업 덕분에 신문과 잡지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군요. 판매도 두 배 이상 올랐고요. 신문사는 기자를 변방까지 내보내 소식을 알아오라고 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소식은 에바니엘 안의 이야기뿐 아니라 변방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얼떨떨해서 잠시 칼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래서? 그게 뭘 어쨌다는 거야?” “케이트 아가씨 말씀으론, 그렇다면 소식을 알고 싶어 할 사람이 더 늘어날 거고, 그만큼 대독자를 필요로 할 사람도 늘어날 거라고 하더군요.” “그러다 사람들이 글을 배우면? 다 필요 없는 거 아닌가?” “아가씨 생각은 그렇지는 않답니다. 뮈엘라에서 글은 그리 인기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귀족들은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배우지 않으려 할거고, 저희 같은 사람들은 일하느라 따로 글을 배울 시간을 내기가 어려울 거라더군요.” “그 애가 거기까지 생각했다고?” 칼은 빙그레 웃었다. ============================ 작품 후기 ============================ 에..즐거운...월요일...입.....니...... 00286 9. 소문 =========================================================================                            “고생했어.” 자리를 정리하는 안제에게 공방 주인이 말을 걸었다. 이 공방과는 한 달을 계약했다. 공방 사람들도 안제를 마음에 들어 하고 안제도 여기가 좋았다. 그러니 장기적으로 계약할 수 있다면 좋을 거다. 안제는 가방을 챙기다 말고 미소 지었다. “고생은요.” “내일은 쉬지?” 일주일에 세 번 계약했다. 빈 날짜에 다른 대독자를 고용하는 곳도 있지만, 이곳은 안제뿐이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공방 주인이 뺨에 손을 대며 아쉽다는 듯 말했다. “안제가 없으면 조용하다니까. 없을 땐 어떻게 일했나 싶어. 내일 일하는 곳은 어디랬지?” 공방이 비는 날짜에 다른 대독자를 고용한다는 건 대독자도 비는 날짜에 다른 공방에서 일을 한다는 말이다. 안제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치즈 공방이요.” “어휴, 거기 냄새 때문에 힘들 텐데.” “아니에요. 이젠 익숙해 져서 괜찮아요.” “그래도 우리 공방이 제일 좋지?” 주인의 말에 안제는 공방을 둘러보며 웃었다. 차가운 날씨에도 공방 안쪽은 훈훈했다. 여기저기에서 커다란 솥에 부글부글 쨈을 끓이고 있었다. 달콤한 냄새에 배가 고파왔다. 그녀는 가방 안에 공방 사람들이 챙겨준 작은 잼 병을 떠올렸다. “네. 여기가 제일 좋아요.” “안 되겠어. 안제를 여기로 빼 와야지. 거기 사장이 아가씨랬지?” “네. 스미스 양이요.” “그래. 젊은 사람이더라. 어떤 사람이야?” 그러고 보니 공방 주인은 케이트와 만난 적이 없다. 모든 계약에 케이트가 나설 수 없으니 세 마녀와 분담해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잼 공방 주인과 이야기 한 건 세 마녀 중 로라였다. “좋은 사람이에요.” “소문에는 호건 가 사람이라던데.” “맞아요. 비스마르크 호건의 손녀딸이라고 하더라고요.” “어머, 그럼 대독자 사업은 호건 가에서 자본을 대준 거야?” “그건 아니라고 하던데요.” “그래?” 통통한 뺨을 가진 공방 주인의 눈이 반짝였다. 안제는 여자들과 수다 중에 나온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 사업은 케이트 스미스 양이 자기 돈으로 차린 거라고 들었다. 익명의 후원자가 도와줬다고도. “호건 가에서 도와준 건 없다고 들었어요. 전부 스미스 양의 힘으로 시작한 거래요.” “원, 세상에. 젊은 아가씨가 어디서 그런 돈이 났대? 안제가 지금 사는 곳도 그 아가씨 건물이라며?” “네. 익명의 후원자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익명의 후원자라니, 누구?” “그건 저도 잘 몰라요. 스미스 양의 대부라는 말도 있고요.” 스미스 양의 대부가 누구지? 공방 주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케이트 스미스의 대부는 에녹 레인포레스트지만 귀족이 아닌 자들은 두 사람을 따로 알고 있다. “뭐, 이상한 일로 돈 번 건 아니겠지?” “스미스 양이요?” 안제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지막 말은 혹사한 목 탓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기까지 했다. 그녀의 태도에 공방 주인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이, 이상하잖아. 젊은 아가씨가 그런 돈이 있다니.” “그런 거 아니에요!” 이미 여자들 사이에서 케이트가 그녀들을 돕는 것과 이런 사업을 하는 이유가 좋은 이유라는 편과 호건 가의 사람으로서 죄책감으로 이런 일을 하는 거라는 편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공방 주인이 수상하다고 말하는 순간 스미스양이 죄책감 때문에 그녀들을 돕는 게 아니냐고 생각하던 안제의 생각이 휙 돌아섰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케이트를 옹호했다.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요. 자기 전 재산으로 사업을 시작한 사람이에요. 그 아가씨 대부가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 줄 아세요?” “어, 어어? 그래?” 늘 소극적이던 안제가 이 정도로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건 처음이라 공방 주인은 조금 당황해서 생각했다. 스미스 양이 정말 좋은 사람인 모양이구나. “네! 스미스 양 대부가 에녹 레인포레스트 경이래요. 아시죠? 뮈엘라 건국 용사요.” “뭐야? 누가 누구라고?” 안제의 목소리에 퇴근하던 여자들이 이끌려 돌아왔다. 그녀들은 케이트가 건국용사인 에녹의 대녀라는 사실에 호들갑을 떨며 입을 모았다. 건국용사의 대녀가 자선 사업을 하고 있노라고. 소문을 들은 비스마르크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호건 가의 아가씨가 아니라 건국용사의 대녀가 자선 사업을 하고 있다니.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흘려보낸 것이 아쉬워졌다. “네가 하는 자선 사업 이야기 좀 해봐라.” 케이트는 난데없는 할아버지의 부름에 올라왔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선 사업이요?” “그래. 네가 한다고 한 거 말야. 그, 뭐냐. 여자들 모아서 뭘 한다며.” “대독자 사업이요?” “그래. 그거. 이야기 좀 해봐.” “관심 없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할 말이 없다. 비스마르크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뒤 다시 말했다. “관심이야 생길 수도 있는 거지.” “그렇죠.” 케이트는 순순히 그녀의 사업에 대해 이야기 했다. 부를 명칭이 마땅하지 않아 사업이라고 했지만 비스마르크가 보기에 사업이라기엔 별것 아닌 수준이었다. “수익은 어떻게 하고 있냐?” “대단하진 않아요.” 일하는 여자들의 생활비로 지출하면 약간의 돈이 남는다. 하지만 그녀들이 공동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생활비가 절약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비스마르크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투자금은 반환했고?” “아니요. 아직이요.” 기껏 해봐야 몇 주 전에 받은 투자금이다. 벌써 반환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는 잘됐다는 듯 말했다. “그럼 그거 돌려줘라.” “그 정도 돈은 모으지 못했는데요.” “반환해야 할 돈만큼은 내가 주마.” “왜요?” 싫다거나 할아버지가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냐고 말할 줄 알았다. 케이트가 그렇게 따질 거라고 생각해서 반박을 준비했던 비스마르크는 멈칫했다. 왜냐고? 그는 손녀의 얼굴을 쳐다보고 그녀가 진심으로 궁금해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순진한 아가씨가 운 좋게 사업이 약간 성공하고 그걸로 이미지가 좋아졌을 뿐이다. 비스마르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손녀딸을 가르치는 기분으로 친절하게 말했다. “그 돈은 어차피 언젠가 갚아야 할 빚 아니냐. 내가 주면 갚을 필요 없으니 좀 더 여유 있게 사업할 수 있을 거다.” “할아버지는 제게 그냥 돈을 주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손녀가 사업을 하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잖으냐.” 케이트는 피식 웃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절대로 없다. 그녀는 그것을 살면서 깨달은 것보다 알라나데일에서, 그리고 수도에 와서 더욱더 많이 깨달았다. “어째서요? 전 호건 가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인걸요.” “아무 상관 없다니. 네가 내 손녀라는 걸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잖으냐.” “하지만 전 로엔 가로 갈 거잖아요.” 케이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렇다고 혈육이 끊어지는 건 아니잖으냐.” “어머.”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케이트가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엄마는 끊으셨잖아요?” 비스마르크의 표정이 볼만해졌다. 붉으락푸르락해진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케이트는 이쯤에서 그만하자고 생각했다. 그녀는 순진한 거지 멍청한 게 아니다. “돈이 가장 무섭다지만, 갚아야 할게 돈뿐이라면 차라리 나아요. 형태가 없는 빚은 갚아도 갚아도 끝이 없거든요. 예를 들면 혈육이라는 마음의 빚 같은 거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줄 때 받지 그러셨어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저, 저…!” 비스마르크는 자기 할 말만 하고 나가버리는 케이트를 붙잡지 못하고 혀를 찼다. 건방진 소리를 하는 손녀가 얄미웠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픽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보고 집사는 비스마르크가 걱정되어 살짝 문을 열고 안을 살폈다. 다행히도 그의 주인은 허탈하게 웃고 있었다. “차를 내올까요?” “그래. 펄펄 끓는 걸로 부탁하네.” 펄펄 끓는 거? 칼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았다. 비스마르크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난쟁이 말대로 내가 늙은 모양이군.” “대화가 잘 안 풀리신 모양입니다.” “안 풀린 게 아니라, 내가 눈이 어두웠지.” 저녀석을 순진하다고, 약하다고 생각했다니. 비스마르크는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찼다. 이건 또 무슨 일이지? 칼은 오랜만에 보는 비스마르크의 기운 빠진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사람 보는 눈은 나보다 자네가 낫군.” 비스마르크는 칼을 올려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새오 키아르네애오 서버점검이 24시간 이었으면 좋았을텐데 아쉬어오 00287 9. 소문 =========================================================================                            그 소문을 들은 것은 비스마르크뿐만이 아니었다. 공방거리와 상점가로 퍼지던 소문은 사교계까지 흘러갔다. 에드워드와 실라의 귀에도 들어간 건 당연했다. 실라는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안은 사교계 가십으로 시달렸다. 이안 본인은 아무 관심이 없었지만 실라는 다르다. 그녀에게 이안은 가장 아픈 손가락이고, 그만큼 타인의 입에 오르는 것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소문은 좋은 걸요.” 실비아의 말에 실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스미스 양의 행동이 좋은 일이긴 하지.” 실비아의 말대로 걱정부터 하기엔 시기상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곳이나 꼬투리 잡으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아르고보다 이안이 더 걱정스럽지 않아?” 실라의 질문에 실비아는 쓰게 웃었다. 원래 친자식보다 입양한 자식이 더 조심스럽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보다 아르고에게는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많았지만 이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게 실라는 더 미안하고 신경 쓰였다. “스미스 양과 결혼하면 도련님 뒤에 호건 가도 있게 되니까요. 게다가, 도련님께서 작위를 받을지도 모른다면서요.”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실라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으면 좋겠다. 이안이 그녀의 배로 낳은 자식이 아니라 줄 수 없었던 것들을 지금이라도 아들이 얻었으면 좋겠다. 소문을 들은 에드워드는 케이트를 식사에 초대했다. 에반스 공작의 저택이 아니다. 케이트는 최근 사슴고기 요리로 유명한 식당이라는 이야기에 눈을 깜빡이며 에드워드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당연하게도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은 안쪽 방이었고 이번에는 유진도 들어 올 수 없었다. 방 안에는 에드워드와 케이트뿐이다. “사슴 고기 드셔 보셨나요?” “네. 예전에 조금.” 알라나데일에서 손님이 왔을 때 요리해서 먹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녀가 먹은 것보다 식당에서 나온 요리가 훨씬 화려하고 맛있었다. 그때는 좀 냄새나고 별로였는데 괜찮았다. 오물오물 먹는 케이트를 에드워드는 어쩐지 아련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뭔가 잘못하고 있나요?” “아뇨. 마리가 생각나서요.” “로즈마리 양이요?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얼마 전에 마리도 여길 데려왔었거든요. 맛있게 먹더니 나오는 길에 사슴고기라는 걸 알고 울더군요.” “…사슴이라서요?” “그런 모양입니다.” 눈이 예쁜 아이를 어쩌고 하면서 훌쩍이던 게 생각나서 에드워드는 다시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소고기는 어떻게 먹는단 말인가. 역시 로즈마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여자다. “그보다, 이안이 집을 구한다던데요.” 에드워드의 말에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난번에 이안과 만나서 결혼해서 살 집을 이야기 하기는 했다. 에드워드와 이야기하다가 집을 구한다는 말을 꺼낸 모양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할아버지도 제가 호건 가를 나가길 원하시니까요. 예전에 살던 집은 사고 싶다는 사람이 나와서 다른 집을 구할까 해요.”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집 때문에 만나자고 한 게 아닌 모양이다. 당연하지만. 케이트는 무슨 일인가 하고 에드워드를 쳐다봤다. “결혼은 언제 하실 계획입니까?” 이안은 에드워드에게 마치 내일 당장에라도 할 것처럼 이야기했다.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저희 결혼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문제는 문제인데. 에드워드는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는 자신이 케이트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녀를 이용할 생각이다. 정치에서 중요한 건 그를 뒷받침 해줄 힘 있는 자들이다. 호건 가는 모든 정치인이 원하는 부자고, 지금 사교계에 호건 가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안과 케이트가 결혼하면 판도가 달라진다. 로엔 백작 가가 사교계에서 주목을 받을 테지만 현 로엔 백작은 정치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는 평이다. 그건 실라 로엔 백작부인과 이안 로엔 경 역시 마찬가지. 그렇다면 그 힘을 이용할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쪽으로 사교계의 시선이 모일 것이다. 에드워드는 그걸 자신 쪽으로 가져올 생각이었다. 혈통만으로 봤을 때 에드워드는 현 왕이 이대로 후사 없이 사망하면 다음 왕위 계승자다. 하지만 왕위라는 건 혈통만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다. 지지와 재력은 당연히 필요하다. 에반스 공작 가는 귀족의 지지와 재력은 충분하지만 그렇다고 버리기엔 호건 가라는 힘이 아쉬웠다. 호건 가라는 연을 이어두면 무인들의 지지뿐 아니라 상인들의 지지까지 얻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케이트와 호건 가를 놓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케이트를 편할 대로 이용해 먹을 만큼 에드워드가 양심이 없는 건 아니다. 그는 반짝거리는 외모와 달리 이기적이고 타인을 경멸하는 어두운 속내를 가지고 있지만 가까운 몇 명에게만은 호의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케이트는 그 가까운 몇 명에 속해 있다. “결혼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닙니다.” 결국 에드워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스미스 양의 사업이 잘 돼가고 있더군요.” “네. 후원, 감사드려요.” “아, 아뇨. 후원 감사를 받으려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닙니다. 저 역시 스미스 양이 하는 사업이 뮈엘라에 꼭 필요한 사업이라고 생각해서 후원한 거니까요.” 꼭 필요한 사업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후원한 그 이유가 더욱 크게 대두하였기 때문이다. “왕궁에서 말이, 그러니까 조금 가볍게 말이 나왔습니다.” “말이요?”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에드워드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다시 생각했다. 케이트와 만나자고 한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왜곡하지 않고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스미스 양의 사업과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서요.” “왕궁에서는 원치 않는다는 말인가요?” “원치 않는다는 건 좀 극단적인 표현이고요.” 에드워드는 뒤로 몸을 빼며 좀 더 완곡하게 다시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 고위 귀족들은 전사들이니까요. 백 년 전 마법의 나라일 때에 대한 과한 공포감도 있다 보니, 케이트 양의 사업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조금 나오고 있어요.” 케이트가 호건 가의 사람이기만 하다면 괜찮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레인 포레스트 경의 대녀가 대독자를 키우고 있다는 소문은 이쪽은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곧 이안 로엔 경과 결혼한다는 말까지 나와서,” 나와서? 케이트는 눈을 크게 뜬 채 불안한 심정으로 에드워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는 케이트의 시선을 피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이대로 이안에게 작위를 줘도 괜찮겠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말은, 이안의 작위 수여가 무산된다는 말인가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제게 이야기하신다는 건 그럴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에드워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맞구나. 케이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바싹 마른 입술로 다시 물었다. “공작님은 제게, 이안과 결혼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려는 거군요?” 그는 그저 쓰게 웃었다.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을 눈치 빠르게 깨달은 케이트에게 미안하면서 고마웠다. “포기하라는 게 아닙니다.” 달그락하고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케이트와 에드워드 둘 다 식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소리는 두 곳에서 번갈아가며 나고 있었다. “조금 기다려 보라는 거죠. 여론이 조용해지면, 그때 해도 늦지 않으니까요.” “조용해지지 않으면요?” “그땐 스미스 양이 결정하는 거죠.” 어떤 걸 결정하라는 걸까. 케이트는 멍하니 앉아있었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서 제대로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사업을 포기하거나, 이안의 작위 수여를 포기하거나, 이안을 포기하거나. 이안을 포기한다고? 욱하고 목 안쪽에서 뭔가가 올라오다 콱 막혔다. 케이트가 고개를 숙인 순간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유리잔이 쩍하고 갈라졌다. “!” 이안은 깜짝 놀라서 입술에 대고 있던 찻잔을 떼어냈다. 따끔하고 입술이 아팠다. 찻잔 안의 홍차에 붉은색 잉크 같은 것이 천천히 흩어지는 게 보였다. 이게 뭐지? 엄지로 자신의 입술을 쓸자 피가 묻어 나왔다. 그는 찻잔을 들어 올려 쩍 갈라진 금을 찾아냈다. “케이트?”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이안은 벌떡 일어나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가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그의 의자가 쿠당탕하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어, 뭐야? 벌써 퇴근해?” “아니, 다시 돌아온다.” 보고서를 제출하려던 제이드는 코트를 꿰입으며 사무실 밖으로 나오는 이안을 보고 멈칫했다. 그가 더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이안은 휙하고 떠나버렸다. 다시 돌아온댔으니까 보고서는 그때 제출하면 되겠지 뭐. 자리로 돌아오면서 제이드는 어라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안 입술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건조해서 찢어졌나?” ============================ 작품 후기 ============================ 으어...아직도 수요일이라니...으어으어... 00288 9. 소문 =========================================================================                            에드워드와 헤어진 케이트는 곧바로 큐바인 하우스로 향했다. 이미 호건 저택에는 나오기로 이야기해둔 상태다. 이안과 결혼을 미룬다면 그녀가 머물 집을 확보해야 한다. 그녀가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안에서 제인이 문을 벌컥 열며 뛰어 나왔다. “케이트!” 제인이 그녀에게 덤비는 것처럼 보이자 유진이 재빨리 그녀 앞에 나섰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제인은 아직도 성인 남자가, 특히 용병처럼 보이는 사람이 무섭다. 소년이 멈칫하자 케이트가 제인의 손을 잡았다. “잘 지냈어?” 오랜만이다. 제인은 호건 저택에 갈 수가 없기때문에 두 사람이 만나려면 케이트가 큐바인 하우스로 와야 한다. 하지만 최근 바빠서 그녀는 큐바인 하우스를 찾아올 수가 없었다. 조금 눈을 글썽거린 소년은 덥섭 케이트를 끌어안았다. 못 본 사이에 키가 많이 자랐네. 그녀는 제인의 어깨를 토닥였다. “제인, 무슨 일, 어머.” 그다음에 모습을 드러낸 건 조세핀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제인이 밖으로 뛰쳐나가자 무슨 일인가 하고 나왔다가 제인이 끌어안고 있는 케이트와 그 주변을 둘러싼 용병들을 보고 멈칫했다. “안녕하세요, 코트양.” “드, 들어와요.” 무슨 일이지? 조세핀이 당황하며 문에서 몸을 비키자 용병들이 케이트와 제인을 둘러싸고 우르르 안으로 들어갔다. 케이트는 그녀가 무슨 일이냐고 눈빛으로 묻는 것을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인, 어제 사온 케이크 남았지? 가져와. 아, 거기 분들도 케이크 드시겠어요?” 조세핀은 완전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케이트는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테이블에 앉아 부지런히 움직이는 조세핀과 제인을 지켜봤다. 용병들은 예의 바르게 조세핀의 제안을 거절했다. 마녀는 죽었지만 조세핀은 한번 마녀에게 속아 넘어간 여자다. 에녹이 이유를 말해주진 않았지만 조세핀을 조금 더 경계하라고 일렀기 때문에 유진은 굳은 표정을 지었다. “어쩐 일이에요?” 제인이 차와 케이크를 가져오자 조세핀이 능숙하게 차를 우리며 물었다. 뭘 어떻게 말해야 할까. 케이트는 유진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눈빛을 알아차린 그는 다른 용병들에게 집 바깥쪽을 살피라고 명령해 내보냈다. “이 집 말이에요. 누가 살지 결정했어요?” “제가 살 거예요.” “그 말은 킬리언 씨도 했는 걸요.” 그 녀석이. 조세핀은 이를 갈았다. 귀찮게 시리 쫓아와서 결혼하자고 졸라대고 있다. 대체 무슨 생각이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먼저 사겠다고 했잖아요.” “코트 양, 먼저 사겠다고 했다고 모든 거래가 성사되는 건 아니잖아요. 전 두 사람 다 알고 있으니 어느 쪽과도 불편해지고 싶지 않아요.” 제이드에게 팔면 조세핀이 불편해할 거고, 조세핀에게 팔면 제이드가 삐칠 것이다. 케이트의 말에 조세핀은 에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그럼 아직 안정했어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저도 여기 와서 잠시 살아도 될까요?” 케이트의 질문에 조세핀의 표정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일그러졌다.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여긴 당신 집이잖아요? 왜 그걸 물어보는, 잠깐. 혹시 저 방 빼야 해요?” “아니, 그건 아니고요.” 그렇지 않다는 케이트의 태도에 조세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하면 곤란하다. 본가가 있는 제이드와 달리 조세핀은 돌아갈 집이 없다. 가출이나 다름없이 집을 나왔고 부모님이 정해주신 결혼상대자는 치안관에게 넘겨버렸으니 그녀가 있을 곳은 이곳 뿐이다. “슬슬 여기로 돌아와야 할 거 같아서요.” “하지만 스미스 양, 호건 가의 사람이잖아요?” “호건 가의 사람이라고 거기서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어라. 조세핀의 머릿속에 얼마 전에 들은 소문이 떠올랐다. 비스마르크 호건이 유일한 혈육인 케이트 스미스를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호건 사업을 물려주려고 한다던가. 그때는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라고 비웃으며 넘겨버렸지만 지금 케이트를 보니 꽤 신빙성 있는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곧 로엔 경과 결혼한다고,” 지난밤에 돌아온 제이드가 떠들어댔다. 이안과 스미스 양이 결혼한대! 난 그 녀석 결혼 못 할 줄 알았는데! 조세핀은 제이드의 말을 떠올리다가 케이트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뭔가가 잘못됐다. 케이트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뇨. 그냥 좀.” 생각 좀 하느라. 케이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수단으로 큐바인 하우스가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역시 조세핀이 팔라고 했을 때 바로 팔지 않아서 잘됐다. 제인은 케이트 옆에 앉아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에 제인은 한쪽 눈으로 열심히 케이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제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못 본 사이에 키가 많이 컸네.” 그녀가 없었어도 잘 먹은 모양이다. 아까 보니 조세핀이 잘 챙겨준 것 같아 케이트는 조세핀에게 감사했다. “제인을 돌봐 주셔서 감사해요.” “돌봐주긴요. 그 애가 절 도와줬죠.” “코트 양이 글도 계속 알려줬어요!” 응? 케이트는 난데없는 제인의 자랑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못 본 사이에 큰 건 키뿐만이 아니었다. 제인은 말버릇도 확실히 좋아져 있었다. 그리고 글도 알려줬다고? 그녀의 시선이 다시 조세핀을 향했다. 조세핀은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대단한 건 아니에요. 그냥 단어만 좀.” “글을 사용할 줄 알아요?” 그러고 보니 몇 달 전 큐바인 하우스에서 함께 살 때 그녀에게 온 신문을 본 적이 있다. 에바니엘 우물가였지. 케이트의 생각대로 조세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좀.” 호건 저택에 케이트는 없었다. 잠시 약속이 있어서 외출 중이라는 칼의 말에 이안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외출했다가 무슨 일이라도 난 게 아닐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려던 그는 곧 단념했다. 그의 찻잔에 금이 간에 심상치 않아서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안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칼은 현관문에서 비켜서며 물었다. 호건 저택의 정원을 지나 건물까지 들어왔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무실로 다시 돌아가 봐야 한다. 괜찮다고 말하려던 이안의 시선이 문 저쪽에 어슬렁거리던 기드온을 향했다. 드워프는 담배를 꺼내 막 이쪽으로 걸어오다가 이안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여. 잘 지냈나.” “네. 잘 지내셨습니까.” 기드온은 문을 잡고 선 칼에게 수고라고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왔다. 커다란 저택은 조용했다. 제프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파티도 열고 손님도 찾아와서 시끄러웠지만, 지금은 조용했다. 지금까지 찾아온 손님 대부분이 사기꾼이었기 때문이다. 케이트가 호건 사업을 맡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손 쓴 것은 그런 사기꾼들을 거부하는 일이었다. 늘 대기실을 가득 메우던 사람들을 거부하고 나자 케이트는 투자 요청을 위한 기본적인 것을 요구했다. 미리 시간을 정해 약속을 하고 찾아올 것. 필요한 투자 규모와 사용 계획을 설명할 것. 그전까지 제프리는 그런 것도 없이 사기꾼의 입바른 말이면 돈을 턱턱 내놓곤 했다. 오죽하면 호사가들은 제프리 호건의 돈을 눈먼 돈이라고 불렀다. “이 집 노인네 손녀랑 결혼한다며?” 이 집 노인네? 이안은 그게 비스마르크를 지칭한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건 어떻게 됐나?” 기드온이 자기 담배를 내밀었다. 줄까? 아니요. 됐습니다. 이안은 손을 저으며 물었다. “그거요?” “자네 친부모 말야.” 주변을 살핀 기드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엘프와 이야기 해봤느냐고.” 이번에는 에녹을 말하는 거다. 주변인을 죄다 별명으로 부르고 있다. 이안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잊고 있었다. “안 해봤군.” 기드온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파이프를 손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뭐, 자네가 멀쩡히 살아있으니 별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네만.” 살아 숨 쉬고 있고 나이를 먹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고 지금까지 살면서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면 상관없다는 게 기드온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안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는 에녹을 찾아가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호건 저택의 정문이 열리면서 마차가 들어왔다. 다그닥 다그닥하는 말발굽 소리와 매끄러운 마차 바퀴 소리에 이안은 몸을 돌렸다. “이안?” 문을 열리면서 케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이미 들어오면서 마차 창문으로 이안을 확인한 상태였다.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으면서 가장 보고 싶었던 남자의 모습에 케이트는 눈을 크게 떴다. 무사하군. 이안은 재빨리 케이트의 상태를 확인했다. 팔다리 멀쩡하고 얼굴도 멀쩡하다. 그를 부르는 것을 보니 말도 할 수 있는 모양이다. 이안은 케이트가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그녀의 허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가 바닥에 그녀를 내려놓으려 했을 때 케이트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 작품 후기 ============================ 이번엔 제가 늦은게 아니에요! 조아라 접속이 안됐다고요! 전 무죄예요!!!! 00289 9. 소문 =========================================================================                            움찔하고 이안의 몸이 굳었다. 그리고 기드온은 더 놀랐다. 그는 입에 물고 있던 파이프를 떨어트릴 정도로 놀랐다가 재빨리 파이프를 주워들고 도망쳤다. “허허. 요즘 젊은이들은.”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케이트를 이안의 목을 끌어안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이안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케이트?” “네?” “무슨 일 있나?” 있다. 아주 큰 일이 있다. 하지만 그걸 당장 이안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이안에게 말한다면 그는 작위를 포기하겠다고 말할 것이다. 케이트 역시 작위에 큰 관심은 없다. 그건 이안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안이 원치 않아서 포기하는 것과 케이트 때문에 포기하는 것은 다르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이안이 뭔가를 포기하게 되는 게 싫었다. “그냥요.” 보고 싶었다. 아주 많이. 하지만 케이트의 속을 모르는 이안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키스해도 되는 분위기인가?” 내가 미쳐. 케이트는 내려달라고 바동거리며 투덜거렸다. “방금까진 그랬는데 당신이 다 깼어요.” “내가 뭘 어쨌기에?” 분위기라는 게 있지 않으냐고 따지길래 그럴 분위기냐고 물어봤더니 그가 다 깼다고 한다. 이안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에요?” 이안과 약속이 있었다면 케이트가 큐바인 하우스를 들렸을 리가 없다. 그녀의 질문에 이안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나?” “없는데요?” “아픈 곳은?” “멀쩡해요.” 단순한 우연이었나? 이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앞에서 케이트도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찻잔에 금이 가서, 네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 찻잔? 케이트는 잠시 그게 무슨 소린가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아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에드워드와 대화 중에 유리잔에 금이 갔다. 그거, 내가 한 거였구나. 케이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번에는 이안과 공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무의식중에 마법을 사용해 버렸다. “우연이겠죠.” 그녀는 서둘러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이안은 잠시 케이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스럽지만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한편 케이트는 빠른 시일 내에 에녹을 만나 그녀의 마력을 다시 봉인해 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안, 저녁 먹고 갈래요?” 케이트가 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하마터면 그러겠다고 대답할 뻔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한번 꼭 쥐었다 놓으며 말했다. “아니, 들어가 봐야 한다. 다음에 다시 오지.” “그렇군요.” 아쉽다. 하지만 일하러 가야 한다는데 잡을 수도 없었다. 케이트는 조금 망설이다가 까치발을 하고 다시 이안의 목을 끌어안았다. 오늘따라 이상한 행동을 하는군. 이안은 느닷없는 케이트의 행동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안겨 주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호박색 눈동자가 어리둥절해하는 게 보여 초록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에드워드는 시간이 지나도 사교계의 소문이 가라앉지 않으면 그녀가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이안은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를 선택할 것이다. 케이트는 그것을 알았다. “이안, 나와 작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안이 대답했다. 알면서도 확인하고 싶었다. 케이트는 쓰게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걸 당신 가족들이 싫어하면요?” “상관없어.” “당신, 어머니와 형을 사랑하잖아요.” 사랑?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케이트는 그녀가 말한 단어가 얼마나 낯간지러운 단어인지 모르는 것처럼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상관없다.” “하지만,” “너를 더 사랑하니까. 상관없어.” 허를 찔린 것처럼 케이트는 숨을 들이켰다. 이안이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그럴 수 없다. 이안처럼 더 사랑하는 순으로 잘라낼 수 없다. 그녀는 할아버지와 이안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선택할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을 고르라면 주저 없이 이안을 고를 것이다. 그녀는 할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 쪽에 더 가깝다. 하지만 혈육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사랑을 위해 가족을 버렸지만 그녀는 자신이 그럴 수 있을지 확실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이안이 그럴 수 있다 해도 그렇게 두는 게 옳지 않게 느껴졌다. “당신이 부러운 건지, 무서운 건지 모르겠어요.” 무섭다고? 이안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 했을 때 케이트가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자신이 입술을 댔다가 떨어졌다. 가벼운 충격에 이안은 자신이 물어보려 한 것을 잊었다. 그의 눈이 커진 것을 보고 케이트는 빙그레 웃었다. “가요. 들어가 봐야 한다면서요.” 제 할 말만 하고 쏙 빠져나가는 케이트를 보고 이안은 헛웃음 지었다. 진짜 마녀 그 자체로군. 평생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섭다는 건 무슨 소리지? 이안이 고개를 돌렸을 때 케이트는 이미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다음에 물어봐야겠군. 그는 타고 온 말에 올라탔다. === 호건 가에서 열리는 파티가 다음날로 다가왔다. 아이러니하게도 호건 가의 사람으로 첫 인사를 하는 파티였건만 파티가 끝나면 케이트는 큐바인 하우스로 짐을 옮길 생각이었다. “아가씨, 주문하신 물건이 도착했습니다.” 칼의 말에 케이트가 고개를 돌렸다. 급하게 가봉하는 탓에 매달려 있던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가씨, 움직이지 마세요!” “잠깐, 잠깐만요, 아가씨!” 거의 끝났다. 이대로 내일까지 케이트의 체중변화가 없으면 된다.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은 그녀는 재빨리 일 층으로 내려왔다. “이거예요?” 케이트의 질문에 칼은 말없이 궤짝을 열었다. 하얀 가면이 가득 차 있는 궤짝은 기괴하면서도 흥미로운 장면이었다. “주문 수량만큼 왔나요?” “네. 확인해 봤습니다.” 불량품은 없겠지. 케이트는 가면을 하나 들어 확인했다. 가장 무난한 디자인을 주문했다. 뮈엘라는 가면파티나 특별한 의상을 입고 참여하는 파티가 많아서 이런 가면이 대량으로 판매되곤 한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가면을 써보는 케이트에게 뜬금없이 칼이 물었다.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던 그녀는 칼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가면 파티가 위험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이다. 거기에 케이트가 준비한 게임까지. 그녀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할아버지께는 허락받았고, 장소는 일 층으로만 한정해 놨으니까요. 괜찮아요.” “하지만 가면을 쓰고 있잖습니까. 가면을 쓰고 있으니 자신이 누군지 모를 거라는 생각에 아가씨께 해코지하려는 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켜주시는 분들도 계시고, 집사님과 일하시는 분들도 주변에 계실 거잖아요. 괜찮아요. 한 시간만 하고 끝낼 거니까.” 하지만. 칼은 찝찝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런 이벤트가 드물지 않다. 젊은 사람들이 있는 저택에서는 케이트처럼 약간의 게임을 준비한다. 케이트가 알라나데일에 있을 때도 데일 남작 부부 역시 게임을 준비했다. 몇 시간 동안 먹고 이야기만 하면 지겨우니 다 함께 할 수 있는 게임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칼은 그 모든 것이 케이트라는 이유만으로 걱정됐다. 정작 친할아버지보다 더 케이트를 아끼는 이 노 집사는 그녀가 이 저택을 떠나 큐바인 하우스로 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큐바인 하우스로 거처를 옮기는 것도, 그녀가 준비한 게임도 전부 못하게 말리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호건 저택에 있는 동안만은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주자 하는 마음에 물러났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아 접속이 안됐어요! 접속이 안됐다고! 글구 친구랑 술도 마시고 왔어요. 술을 잘 못마셔서 술집은 일년에 한번 갈까 말까인데 호롱낙지가 진짜 맛있더라고요. 와, 진짜 맛있었어요. 근데 양이 적어서 슬펐어요. 00290 9. 소문 =========================================================================                            호건 저택의 파티는 호화로웠다. 저택 내, 외부를 밝히는 불빛에 저녁 시간부터 시작된 파티임에도 대낮처럼 밝았다. 방문하는 손님들은 저 멀리에서 마치 떠오르는 태양처럼 밝은 건물을 보고 저게 뭔가 하고 놀라다가 호건 저택이라는 것을 알고 납득 할 정도였다. 케이트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옆에 비스마르크도 앉아 있었다. 사교계에 처음 데뷔하는 아가씨들은 하얀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 이번 파티는 케이트에게 호건 가의 사람으로 인사하는 것과 동시에 사교계 데뷔이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제이드는 조세핀과 함께 들어와 인사를 건넸다. 케이트는 반가워서 제이드와 조세핀의 손을 하나씩 잡고 미소 지었다가 할아버지께 소개했다. “할아버지, 이분은 조세핀 코트 양이에요. 큐바인 하우스에 살고있는 제 친구예요.” 케이트의 소개에 조세핀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자신을 친구라고 불러줄 줄은 몰랐다. 파티에 초대하긴 했지만 그건 제이드를 봐서 함께 초대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어서 케이트는 제이드도 소개했다. 조세핀에게는 관심 없었던 비스마르크는 이안의 동료이자 수사관이라는 제이드를 보고 물었다. “제이드 킬리언이면 킬리언 포목점인가?” “네. 킬리언 포목점의 셋째 아들입니다.” 그렇군. 비스마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킬리언 포목점이라면 수도에서 가장 큰 포목점이다. 그의 손녀는 그런 곳의 막내아들과 꽤 친해보였다. 호건 가에 들어오기 전에 알게 된 인연이라는 말이다. 새삼 기드온의 말이 떠올라 그는 케이트의 얼굴을 쳐다봤다. 호건 가에 오지 않았어도 잘 살 수 있었을 거라 했던가. “참, 초대장에 이걸 가져오라고 쓰여 있던데요.” 조세핀이 품에서 가면을 꺼내며 물었다. 초대장에 케이트를 도와 게임을 진행할 사람은 사용할 가면을 지참하라고 적혀 있었다. 원치 않는다면 호건 가에서 준비하겠다는 말도. 가면 파티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가면을 쓴 사람은 없었다. 제이드는 들어오는 입구에서 가면을 가져오지 않은 사람에게 준비한 가면을 나눠주는 것을 보고 가져온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네. 게임을 하려고요.” “가면을 가져온 사람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걸 노린 거니까.” 그걸 노려? 어리둥절한 조세핀의 얼굴에 케이트는 빙그레 웃었다. 이런 특색 있는 파티를 열 경우 하인을 시켜 손님에게 이야기해주는 게 보통이다. 간혹 글을 읽을 줄 아는 손님에게는 하인을 보내지 않아도 되지만 그런 경우는 적다. 케이트가 알라나데일에서 일할 때는 그녀가 읽어줄 수 있었기 때문에 하인이 오지 않았다. 큐바인 하우스나 타운 하우스도 마찬가지. 오히려 케이트가 일한 저택은 이런 부분에서 특이한 환경이었던 거다. 초대장에 가면을 가져오라는 문구가 있었다는 걸 저택에 도착해서 알게 된 손님들은 당황해서 술렁거렸다. 입구에서 미리 준비한 가면을 나눠주긴 했지만, 파티란 무릇 유행하는 의상과 재력을 과시하는 장소다. 과시할 기회를 잃었으니 일부 사람들은 케이트가 일부러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이라 투덜거렸다. “자기만 돋보이길 원하는 거죠, 뭐.” “얼마나 좋은 가면을 쓰려고 이러는 걸까요?” “드레스 봤어요?” 다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사교계에 데뷔하면서 하얀 드레스를 입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얀 드레스가 얼마나 쓸모가 없는지 잘 알고 있다. 평소에 입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여자 형제가 많다면 돌려 입기도 하고 어머니의 드레스를 물려 입는 경우도 있다. 때때로 화려하게 만들어서 결혼식 때 입는 여자도 있다. 하지만 케이트의 드레스는 평범했다. 급하게 만드느라 그런 것도 있지만 레이스나 리본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건 별로 화려하지 않았죠?” “그러게요.” 그럼 대체 왜 가면을 가져오라는 말을 하지 않은 걸까? 초대장에 ㅛㅡ여 있긴 했지만 그들에게 말로 해주지 않은 건 알려주지 않은 거나 다름없다. “제가 재미있는 소문을 들었는데요.” 젊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무슨 소문인가 하고 쳐다보자 남자는 우쭐한 표정으로 나직하게 말했다. “호건 가에서 다른 후계자를 찾는 다더군요. 스미스 양을 후계자로 삼지 않을 모양입니다.” “어머,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지 않아요?” “비스마르크 호건이 물려주지 않을 거라고 했답니다.” “세상에.”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었던 걸까요?” 저 제프리 호건도 후계자로 삼았던 비스마르크 호건이다. 케이트 스미스에게 뭔가 큰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 이야기하는 사람들 머릿속에 갖가지 상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로엔 백작 가와 결혼하는 게 문제인가?”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긴 젊은 남자가 재빨리 물었다. “로엔 백작 가와 결혼이 결정됐습니까?” “스미스 양이 로엔 백작 가의 이안 로엔 경과 친밀한 사이라고 들었어요. 집안끼리 이야기가 얼마나 진행됐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아, 저도 그 이야기 들었어요.” “비스마르크 호건이 꺼릴만하네요.” “무슨 소리예요?” “스미스 양의 어머니 말이에요. 비스마르크 호건의 딸, 엘리자베스 호건 양이 전 로엔 백작과 혼담이 오갔거든요.”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 놀라는 사람 반,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반이다. 그랬구나. 바깥쪽에서 모른 척 귀 기울이고 있던 조세핀은 속으로 생각했다. 호건 가와 로엔 가의 인연은 선대부터 이어졌던 거다. 어떻게 보면 선대에 이어지지 못한 가문의 결합이 케이트와 이안에 와서 이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비스마르크가 보기엔 이안의 어머니인 실라 로엔은 그의 딸이 갔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여자다. 사람들은 비스마르크가 그런 여자의 아들과 손녀의 결혼을 반기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한때 탐냈던 집안이잖아요? 조금 돌아왔다고 생각하면,” “그건 백작 직을 계승할 남자일 때의 일이죠. 이안 로엔 경은 작위가 없잖아요.” 엘리자베스 때도 비스마르크는 작위 때문에 혼담을 넣었다. 당시 그리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던 로엔 백작 가의 재정을 책임지겠다는 조건이었다. “이번에 이안 로엔 경에게 작위를 내린다는 소문이 파다한 걸요.” “어머, 그거 무산될지도 모른다는 소문 못 들었어요?” 이번에는 이안의 작위로 주제가 바뀌었다. 별생각 없이 이야기를 던졌던 여자는 사람들의 시선에 당황해 얼굴을 붉히며 다시 말했다. “그, 그런 소문이 있어요.” “왜 무산된대요?” “이건 비밀인데요.” 비밀이라고 말하며 목소리 낮추는 부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미 열 명이 넘은 시점에서 더 이상 비밀이 아닐 텐데. 조세핀은 그렇게 생각하며 귀를 기울였다. “왕궁에서 일하는 제 사촌이 그러는데 스미스 양이 하는 그 자선 사업을 왕궁에서 그리 반기지 않는다더군요.” “스미스 양이 하는 자선 사업이 뭡니까?” “사람들이 신문이나 잡지를 읽어주는 일이라던데요.” “아, 대독자요?” “대독자는 대독자인데 개인적으로 고용하는 게 아니라 공방 같은 곳에서 신문이나 잡지를 읽어준다고 하더라고요.” 사람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런 일을 스미스 양이 한다고요?” “당연히 직접 하는 건 아니죠. 고아원이나 구빈원 사람들을 가르쳐서 일을 시킨다더군요.” 아, 하긴. 다들 그럴 줄 알았다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일을 누가 하겠는가. 가만히 앉아서 글이나 읽는 조잡스럽고 쓸모없는 일을. 비천한 사람들이나 할 일이다. “그래서 스미스 양의 자선사업 때문에 로엔 경의 작위가 무산될 수도 있다고요?” “두 사람이 결혼하면 스미스 양은 로엔 백작 가의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로엔 경은 마녀를 잡은 영웅인데요.” 하긴.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이란 그런 법이다. 진실과 한 끗 차이로 어긋난다. “조, 어디 있나 한참 찾았잖아.” 사람들과 인사하던 제이드는 한참 후에나 조세핀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를 찾으러 왔다. 조세핀은 재빨리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제이드와 함께 걸었다. 어쩌다보니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 케이트 스미스 양이 이안 로엔 경과의 결혼을 할아버지인 비스마르크 호건의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니. 그녀가 도울 방법이 있을 것이다. 조세핀은 미소 지었다. “고마워, 제이드.” “어?” 오랜만에 보는 조세핀의 미소에 제이드는 당황하면서도 느슨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이상한 표정에 그녀는 픽 웃어버렸다. “네 덕분에 이런 곳도 와보고. 데려와 줘서 고마워.” “무슨 소리야. 스미스 양이 너도 초대했잖아.” “하지만 나 혼자였으면 안 왔을 거야.”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겨울밤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환한 조명과 고가의 가구. 잘 차려입은 하인들이 음료를 나르고, 한껏 꾸민 신사 숙녀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난 이런 화려한 집에서 좋은 드레스를 입은 미인이 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응?” 지나가는 하인의 쟁반에서 능숙하게 음료를 집어 조세핀에게 건네던 제이드가 무슨 소린가 하고 고개를 돌렸다. 조세핀은 저 멀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케이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얀 드레스가 조명아래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붉은 머리카락에 초록색 눈동자. 그리고 흰 피부. 예쁘장한 외모의 하녀는 부잣집 아가씨가 되어 한껏 피어났다. “하지만 어디나 괴로움은 있는 거구나.” “무슨 소리야?” “스미스 양도 힘들겠다고.” “아, 그렇겠지. 일도 많다던 걸.” “무슨 일?” 조세핀의 눈이 반짝였다. 제이드는 그녀가 완전히 예전대로 돌아왔다고 느꼈다. “지금까지 호건 사업을 대신 경영했다더라고. 이안 말이 얼마 전에 손을 뗐다던데.” “비스마르크 호건이 다른 사람에게 물려준다고 했다던데?” “아, 맞아.” “스미스양이 일을 잘 못 했어?” “그건 아니고. 내가 듣기론 사업을 경영하는 부분에서 비스마르크 호건과 스미스 양의 견해가 달랐다더라고.” 그래? 조세핀은 제이드가 건넨 음료를 한 번에 쭉 마시고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그 이야기, 자세히 해줘.” ============================ 작품 후기 ============================ 헉...뜰에 들어가 보니 선물받은 팬아트가 다 날아갔네요. USB두개랑 하드랑 클라우드 서버 두개에 저장해 놨는데 이럴줄 알았으면 CD로도 구워둘걸 그랬네요. 이럴수가 ㅠㅠㅠㅠㅠ 조아라가 복구해 줄까요? 00291 9. 소문 =========================================================================                            호건 가의 유일한 상속녀를 보기 위해 초대받은 사람 대부분이 방문했다. 초대의 반 정도 오는 게 보통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수다. 평소 사용하지 않는 호건 저택의 홀은 손님으로 북적거렸다. 홀 앞뒤에 위치한 응접실과 현관에도 손님이 가득해서 사용인들은 정신없이 음료를 날랐다. 케이트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비스마르크 옆에 서서 사람들에게 정식으로 호건 가 사람으로서 인사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녀의 인사가 얼마나 들렸겠느냐마는 중요한 건 케이트가 호건 가의 사람으로 소개받았다는 거지 그녀의 인사가 아니다. 인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앞다퉈 케이트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이 로엔 백작 가가 도착했다. 실라 로엔과 이안 로엔. 아쉽게도 아르고 로엔은 영지에 문제가 생겨 참석할 수 없다는 의견을 표해왔다. 이안과 실라의 도착을 발견한 사람들이 길을 터주기 시작했다.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호건 저택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어떻게든 케이트와 비스마르크 곁으로 가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데 이안의 얼굴을 보자마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쫙 갈라진 것이다. 어머어머. 실라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안과 함께 다니면 사람들이 길을 터주기는 한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모든 사람이 한마음이 되어 비켜주는 건 처음이다. 그녀는 아들을 올려다보고 빙그레 웃었다. 이안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내려다보고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그러시냐는 표정이었지만 실라는 말하지 않았다. “로엔 백작 가의 실라 로엔 백작부인과 이안 로엔 경입니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한순간 뚝 끊겼다. 이미 다들 그 소문을 들은 뒤였다. 비스마르크 호건이 이안 로엔과 케이트 스미스의 결혼을 반기지 않는다는. 소문은 그래서 케이트 스미스를 후계자로 삼지 않았다는 데까지 번져있었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백작 부인.” 케이트는 실라의 손을 잡으며 인사했다. 그 옆에 있던 이안의 시선이 케이트에서 비스마르크에게로 이동하자 누군가 헉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실라는 내색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안의 태도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정작 이안은 아무 생각 없었지만, 엄마의 마음은 또 그렇지 않다. “와줘서 고마워요.” 케이트가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자 이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이안의 팔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조금 있다가 게임할 건데. 그때까지 있을 거죠?” 이안의 시선이 실라를 향했다. 그녀는 오래 있지 못한다. 쉽게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걷거나 서 있는 것도 힘들고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 있는 것도 힘들었다. 초대를 받으면 늘 예의상 삼십 분 정도 있다가 돌아가곤 했다. 이미 안색이 좋지 않은 어머니를 보고 이안은 케이트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게임이 끝나기 전에 돌아오지.” 이안과 실라가 별문제 없이 물러나자 사람들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서 비스마르크와 케이트에게 말 걸려는 사람도 있었고, 물러나는 실라와 이안에게 말 거는 사람도 있었다. 다시 홀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이대로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해도 괜찮지만 준비한 순서가 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케이트를 본 비스마르크는 능숙하게 나서서 사람들을 정리했다. “제 손녀가 뭘 가져오시라고 했다고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주의가 다시 비스마르크와 케이트에게 집중됐다. 가져오라고 했다고? 몇몇 사람은 품에서 가면을 꺼냈지만 대부분 무슨 소린가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트는 물러나는 할아버지에게 감사하다는 표정을 짓고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초대장에 가면을 가져오시라고 적었는데요. 따로 대독자를 고용하시거나 읽으실 줄 아는 분이 아니면 모르셨을 거예요. 그래서 가져오지 않으신 분들께는 입구에서 가면을 나눠드렸답니다.” 아, 그거? 사람들은 입구에서 받은 가면을 쳐다봤다. 하얀색의 밋밋한 가면이다. “스미스 양을 도울 사람은 가져오라고 적어놨던데요. 뭘 도와달라는 거죠?”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케이트는 그쪽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술래잡기요.” 다시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술래잡기라니, 숨은 여러 명을 술래 한사람이 찾는 그거? 케이트는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설명했다. 손님들이 술래가 되고 케이트를 찾는 것이다. 잡는 사람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노라고 이야기하자 와아아 하는 함성이 일어났다. “가면을 가져오신 분은 저를 도와주시면 돼요. 제가 중간중간 가면을 바꿀 건데, 이분들의 가면과 바꿀 거랍니다.” 기한은 한 시간. 한 시간 안에 케이트를 잡아야 한다. “도와준 사람은 무슨 이득이 있나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질문을 한 남자는 호건 가에서 나눠준 하얀 가면을 들고 있었다. 케이트는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고 말했다. “절 잡으신 분과 같은 선물을 드릴 거예요.” 가벼운 탄성과 함께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케이트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이 층으로 올라가며 이안의 행적을 좇았다. 그녀를 지켜보는 아들에게 실라가 말했다. “나는 돌아가야겠다.” 이안은 돌아서는 실라의 몸을 부축했다. 시간을 보니 호건 저택에 온 지 삼십 분쯤 지났다. 확실히 많은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이 인사를 나눠야 하는 게 실라에게 부담이 됐던 모양이다. 그는 다시 한 번 케이트를 돌아보고 실라를 부축해 호건 저택을 나섰다. 여긴 호건 저택이고 한낮처럼 밝으니 별일은 없을 것이다. 케이트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이 층으로 올라갔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술래잡기를 하는 건 빨리 잡아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려올 때는 사용인들의 계단을 이용해 내려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내려오면 집사가 종을 울려 게임의 시작을 알리기로 했다. 복도 저편에서 하녀가 몸을 내밀어 계단 아래를 살피고 있는 게 보였다. 에스메랄다를 돌보는 하녀다. 케이트는 안타까운 마음에 말을 걸었다. “심심하죠?” “어, 어머, 아가씨! 죄송해요.” “아니에요.” 죄송할 게 뭐 있어요. 케이트는 손을 저으며 하녀를 안심시켰다. 다른 사용인들은 이런저런 일을 하느라 파티를 구경할 기회가 많지만, 그녀는 다르다. 이 층에서 온종일 에스메랄다를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자를 돌봐야 한다니 지루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할 것이다. 대낮처럼 환한 파티가 궁금하기도 할 것이고. 케이트가 하녀였다면 바꿔주겠다고 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하녀와 아가씨라는 입장 차뿐 아니라 이 파티는 그녀가 주인공이다. 케이트는 하녀의 팔을 몇 번 다독이고 자기 방으로 향했다. 이미 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걸 도와주기 위해 자넷이 기다리고 있었다. 칼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라고 해야겠다고 케이트는 생각했다. 당장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다. “혼나는 줄 알았네.” 하녀는 한숨을 내쉬며 에스메랄다의 방으로 돌아왔다. 들킨 것이 케이트 아가씨라 다행이지 집사였다면 불벼락을 받았을 것이다. 좋은 아가씨다. 저렇게 좋은 아가씨가 이 집을 나가신다니, 아쉽다. 저 꼬장꼬장한 집사도 안타까워했다. “부인은 아가씨 발끝에도 못 쫓아가지.” 그녀는 나직하게 에스메랄다를 욕하며 방문을 열었다. 호건 부인은 차라리 정신을 놓은 지금이 낫다 싶을 정도로 패악을 부렸다. 차가 뜨겁다고 뺨을 때리기도 했고 손님 앞에서 내온 찻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녀를 자르기도 했다. “어휴, 내 팔자야.” 하필이면 정신 놓은 부인의 뒤치다꺼리나 하게 되다니. 하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 중 가장 체격이 좋은 게 그녀기 때문이다. 에스메랄다는 정신을 놓았기 때문에 용변도 가리지 못했다. 앉으면 앉은 채로, 누우면 누운 채로 쌌다. 식사도 식기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마구 움켜쥐고 먹었다. 그래서 하루에도 옷을 몇 번이나 갈아입혀야 하고 목욕도 몇 번이나 시켜야 했다. 그런 일을 남자에게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신을 놓았다고는 하지만 이 집의 부인이고 가주인 비스마르크의 며느리다. 침대 커버나 커튼 같은 걸 치울 때는 하인에게 부탁할 수 있지만 에스메랄다의 옷을 벗길 때는 하인을 부를 수 없다. 내가 없는 새에 또 싼 건 아니겠지? 하녀는 정신이 번쩍 들어 에스메랄다를 불렀다. “부인, 부인?” 에스메랄다의 방 안은 그녀가 정신을 놓은 이후 늘 그랬듯 기묘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하녀를 위해 불을 켜놨는데 그 불도 반쯤 꺼졌는지 어둑했다. 이상하다. 기름이 떨어졌나? 하녀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에스메랄다를 찾아 방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에스메랄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간 거야?” 방 밖으로 나왔다면 복도에 있던 그녀가 못 봤을 리 없다. 하녀는 혹시나 하고 침실 문을 열었다가 화장대 앞에 서 있는 에스메랄다를 보고 깜짝 놀라 움찔했다. 에스메랄다는 멀쩡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분명 하녀가 나가기 전까지는 약간 헝클어진 머리와 저녁으로 먹은 스튜가 묻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거울 앞에 선 그녀는 새 드레스를 꺼내 입고 머리도 다시 빗어 묶었다. “부, 부인?” 하녀는 에스메랄다가 자신을 돌아봤을 때 그녀가 화장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녀는 꽤 오래전에 메스메랄다의 화장을 포기했다. 해봤자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화장대에 놓인 화장품을 우걱우걱 먹는 걸 봤을 때. 하녀는 에스메랄다의 화장을 모두 숨겨 버렸다. “내 립스틱이 어디 갔지?” 에스메랄다는 멀쩡한 목소리로 말했다. 중얼거리거나 더듬거나, 끝을 흐리는 말투가 아니었다. 예전처럼 까칠하고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똑똑히 들렸다. “네, 네?” 에스메랄다가 멀쩡하게 말한다는 사실에 놀라 하녀는 그녀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하녀에게 천천히 다가온 에스메랄다가 다시 물었다. “내 립스틱 말야. 다른 건 다 있는데. 그게 없어.” 립스틱? 하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에스메랄다의 화장품을 숨겼을 때 그녀는 립스틱을 슬쩍 했다. 새로 나온 고급제품이었다. 그녀가 일 년 내내 돈을 모아도 살 수 없는, 그런 고급품이었다. 정신을 놓은 여자를 돌보는데 이 정도쯤은 가져도 되지 않아? 아무도 모를 거라고. 그런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났던 탓이다. 에스메랄다는 하얗게 질린 채 와들와들 떠는 하녀를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내 립스틱. 어디 있냐고.” “주, 죽을죄를 졌습니다.” 하녀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으며 소리쳤다. 찻잔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고한 여자다. 도둑질을 들켰으니 어떤 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하녀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에스메랄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죽을죄를 지었으면, 죽어야지.” ============================ 작품 후기 ============================ 으으, 집에 오는 버스안에서 잠들었어요. 눈을 떠보니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결국 택시를 탔는데 세상에, 택시에 카드리더기가 없는 거예요. 전 카드뿐인데! 흑흑...뜻밖의 고생이었어요. 00292 10. 게임 =========================================================================                            딸랑딸랑딸랑 하고 종소리가 울렸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종을 들고 선 집사가 어흠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가면을 써주십시오.” 부스럭부스럭하고 사람들이 가면을 꺼내는 소리가 이어졌다. 호건 가에서 나눠준 하얀 가면을 쓴 사람들 가운데 드문드문 화려한 가면을 쓴 사람들이 보였다. 이래서야 쉽게 잡겠는데? 사람들은 생각했다. 가면을 직접 가져온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케이트가 이 사람들과 가면을 교환한다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작은 체구에 붉은 머리. 그리고 초록색 눈동자. 사람들은 저마다 케이트의 특징을 중얼거리며 사람들 사이를 헤매고 다니기 시작했다. “가면을 가져올 걸 그랬어.” “안 알려줬는데 어떻게 가져와?” “그러니까 대독자를 고용할 걸 그랬다고.” “필요할 줄 알았나.” 한 무리의 여자들이 투덜거리며 지나갔다. 다들 하얀 가면을 쓰고 있다. “요새 에바니엘 우물가던가? 그것도 재미있다던데. 진짜 대독자를 고용할까 봐.” “어머, 괜찮은 사람 있으면 소개 좀 해줘.” “이거 설마 스미스 양이 자기 사업 홍보하려고 하는 게임은 아니겠지?” “그 설마지 뭐.” 조세핀은 입 다문 채 여자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옆에 앉은 케이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붉은 머리카락을 말아 올리고 최근 유행하는 드레스로 갈아입은 케이트의 모습은 하얀 가면까지 쓰고 있어 파티 시작할 때의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괜찮은 홍보네요.” “홍보는 홍보인데 반쪽짜리 홍보예요.” 조세핀의 말에 케이트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홍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사실 홍보는 아니다. 대독자를 고정적으로 고용하려면 고정적으로 읽을 만한 뭔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뮈엘라는 고정적으로 읽을 만한 뭔가가 없다. 도서관은커녕 부자라고 해도 책이 있는 집은 많지 않다. 다른 나라와 뮈엘라의 서재라는 개념은 꽤 다르다. 뮈엘라의 서재는 은밀한 손님을 맞이하는 곳에 가깝다. 가끔 편지를 쓰는 사람도 있다. 실라나 케이트처럼. 다른 나라라면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해도 서재를 만들지만 뮈엘라는 책을 읽는 공간, 서재가 품위 유지나 남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층에 만드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호건 저택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사람들이 이런 방식을 재미있다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케이트는 솔직하게 말했다. 초대장에 아무도 읽지 않는 문구를 넣고 읽은 사람에게만 선물을 주는 거. 힘과는 상관없는 방식이다. 뮈엘라는 모든 잣대가 힘으로 나누어진다. 검술대회, 창술시합, 활쏘기. 알라나데일에서는 축제가 되면 거대한 망치를 들어 말뚝을 한 번에 박는 사람을 축제의 왕으로 뽑기도 했다. 그런 것들은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사람들이 제외되기 마련이다. 케이트가 그랬고, 그녀의 엄마 엘리자베스가 그랬고, 아빠인 니콜라스가 그랬다. 케이트는 축제에서 단 한 번도 축제의 왕이 된 적이 없다. 그녀 성격상 축제의 왕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왜소한 소년이 축제의 왕이 되고 싶어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제인. 그녀는 큐바인 하우스에 있는 제인을 떠올렸다. 한쪽 눈밖에 남지 않은 소년이 검술이나 창술, 궁술로 인정받으려면 피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가 그걸 원한다면 괜찮다. 나쁘지 않다. 하지만 지금 뮈엘라는 원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초대장에 글을 쓰는, 그런 방식이 유행했으면 좋겠어요.” 조세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케이트를 쳐다보고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깨달았다. 대독자 사업, 초대장 이벤트. 이런 것들은 전부 뮈엘라에서 무시당하던 글을 끌어 올리려는 노력이다. 문득 사람들이 떠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왕궁에서 스미스 양의 자선사업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한다는. 그래서 이안 로엔 경의 작위 수여가 무산 될 수 있다는 소문이었다. 이야기를 들을 때는 그녀도 사람들처럼 아무리 그래도 로엔 경은 마녀를 잡은 영웅인데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케이트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이야기가 근거 없는 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 왕궁에서는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조세핀의 질문에 케이트가 깜짝 놀라 그녀를 돌아왔다. 역시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조세핀은 케이트가 놀랐다는 것을 알았다. “네, 뭐. 그리 좋아하진 않겠죠.” 케이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다. “호건 가에서도 나간다고 들었는데요.” “소문 빠르네요.” “집안의 도움도 받을 수 없고, 왕궁도 좋아하지 않는 일인데 할 거예요?” 조세핀의 말에 케이트는 힘없이 웃었다. 그녀도 안다. 모른 척, 관심 없는 척 사는 게 낫다는 것을. 그녀가 노력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호건 사업을 비스마르크 대신 경영했을 때 그가 알지 못했던 것처럼. “나는 힘도 없고, 무기도 다를 줄 몰라요.” 게다가 마녀라는 엄청난 비밀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읽고 쓸 수 있죠. 엄마가 남겨준 돈도 좀 있고요. 좋은 사람도 많이 알아요.” 에반스 공작도 있고 레인포레스트라는 건국 용사가 대부다. 그리고 킬리언 씨와 코트 양도 있잖아요. 케이트의 말에 조세핀은 얼굴을 붉혔다. “그러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제인이나 대독자 사업의 여자들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서 뮈엘라에 힘만 중시하는 지금의 풍토가 완화됐으면 좋겠다. 케이트는 불법도박경기를 떠올리고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건 힘만 중시하는 뮈엘라의 비정상적인 분위기의 극단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었다. “뭘 도와주면 돼요?” 느닷없이 조세핀이 물었다.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다시 물었다. “도와주고 싶어요. 뭐든. 당신에게 진 빚은 둘째치고서라도.” 글쎄요. 케이트는 뭘 부탁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조세핀이 할 수 있는 게 뭐지? 그녀가 망설이는 사이 음료를 가지러 갔던 제이드가 잔을 들고 다가왔다. “으으, 지금 음료대 완전 난리야.” “무슨 일 있어?” “거기서 누가 스미스 양을 봤다고 해서.” 역시 소문은 믿을게 못 된다. 조세핀과 케이트는 피식 웃었다. 케이트는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자마자 조세핀과 합류해 지금까지 쭉 그녀와 있었다. “슬슬 이동할까요?” 케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녀는 얼굴을 덮은 하얀 가면이 제대로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지 확인했다. “스미스 양?” 남자는 붉은 머리 여자를 발견하고 물었다. 여자는 움찔하더니 뒤를 돌았다. 찾았다! 남자의 머릿속에 환호성이 터졌다.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기쁨보다는 게임에서 이겼다는 즐거움이 더 컸다. “땡. 틀렸어요.” 여자가 가면을 벗으며 말했다. 생긋 웃는 표정은 재미있다는 의미가 가득해서 남자는 약간의 부끄러움을 안고 물러나야 했다. 붉은 머리로 보였던 여자의 머리카락은 다시 보니 금발이었다. 이상하다. 내가 잘못 봤나? 그는 머리를 갸웃하고 다시 케이트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방금 그 여자는 스미스 양과 전혀 닮지 않았다. 키도 스미스 양보다 훨씬 컸고, 나이도 스미스 양의 어머니뻘이었다. 그가 착각한 건 여자가 혼자다니는 데다가 그녀의 머리카락이 붉은색이었기 때문이다. 금발의 어디를 보고 붉은색으로 착각한 거지? 남자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뒤를 돌았을 때 여자는 이미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고 없었다. “스미스 양?” 이번에는 여자가 물었다. 불린 여자는 다시 가면을 벗으며 말했다. “땡. 틀렸어요.” “어머, 미안해요. 머리카락이 붉은색이라.” “내 머리카락은 금발인걸요?” “하지만 여기가,” 여자가 가리키는 곳은 애교 머리로 몇 가닥 어깨 위로 흘러내린 부분이었다. 움직임에 흔들린 통에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고 거기에 붉은 것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머. 아까 뭘 먹었더니.” 여자가 그렇게 말하며 머리카락을 문지르자 말라붙은 검붉은 것이 떨어져 내렸다. “소스가 묻었나 봐요.” 성격 좋게도 여자가 민망할까 봐 건넨 말에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네. 소스가 좀 묻었네요.” ============================ 작품 후기 ============================ 이번에 집에서 김장을 해서 겉절이에는 칼국수지! 하고 (원래 칼국수 안좋아함) 어제 칼국수면을 사갔는데 오늘 집에 오니 가족들이 다 먹은 다음이었습니다. ...그거 사인분이었는데. 둘이서! 사인분을! 00293 10. 게임 =========================================================================                            케이트는 여유 있게 홀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지금 쓰고 있는 건 어느 부자의 가면이었다. 아버지뻘의 퉁퉁한 남자는 가면을 바꿔 달라는 그녀의 부탁에 매우 재미있어하며 바꿔줬다. “재미있는 이벤트군요. 저도 다음에 이런 게임을 해봐야겠습니다.” 케이트의 아이디어를 빌려도 되겠느냐는 요청에 가까운 말이다. “하실 때 꼭 저도 초대해 주세요.” 부자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케이트는 그렇게 말하고 물러났다. 그녀가 바라는 바다. 재미있는 일은 널리 퍼지는 게 이롭다. 그녀가 사용한 방법까지 퍼진다면 더더욱 좋다. 놀랄 정도로 케이트를 찾아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이토록 뻔뻔하게 홀 안을 돌아다닐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실제로 스미스 양을 찾겠다는 집단은 홀 밖으로 나가 베란다나 화장실을 뒤지고 있었다. 홀 안의 사람들은 케이트를 찾을 생각이 없는 데다가 그녀가 가면을 몇 번 바꾼 덕에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도 잘 알고 있다. 붉은 머리카락에 아담한 체구는 특정되기 좋다. 거기에 가면까지 같은 것을 오래 착용하고 있으면 주변에서 혹시? 하고 반응한다. 그래서 그녀는 사람들이 알아볼 것 같다 싶으면 가면을 교환하고 있었다. 워낙 사람이 많아서 그녀의 갈아입은 옷이 뭔지 아는 사람이 적은 게 다행이다. 이제 좀 앉을까. 케이트는 대화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사교계의 뒷소문을 듣고 있었다. 스미스 양을 찾으면 상품을 준다니, 대체 무슨 상품일까요? 그녀를 찾기는 귀찮지만, 상품은 궁금한 모양이었다. "스미스 양과 식사를 한다거나?" 누군가가 던진 말에 사람들이 그럴듯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까지 보고 케이트는 몸을 돌렸다. 계속 걸어 다녔더니 발이 아팠다. 평소 잘 신지 않는 뾰족한 앞 코와 가느다란 힐 구두를 신었기 때문이다. 케이트는 슬쩍 홀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그녀가 나가는 걸 눈여겨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손님용 응접실에 잠깐 앉아 있을까. 오래는 말고 딱 오 분만. 거기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케이트가 복도를 걸을 때였다. 발을 내디뎠을 때 발목에 뭔가가 걸렸다. 엇 하고 케이트가 깨닫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몸이 앞으로 휙 하고 휘청였다. 발이 아파서 천천히 걷고 있던 게 다행이었다. 넘어지기 직전에 케이트는 가까스로 벽을 붙잡고 몸을 지탱했다. 복도 끝, 약간 단차가 있는 곳이라 넘어졌다면 어디 한군데는 부러졌을 것이다. “이게 무슨,” 스타킹 너머로 뭔가가 걸리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실, 아니면 가는 줄 같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케이트는 그대로 주르륵 주저앉았다. 그녀는 엉금엉금 기어 복도 끝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가느다란 실을 발견했다. 끝은 장식기둥에 감겨 있었다. 누가 이런 짓을? 제일 먼저 케이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누군가가 그녀를 해하려 실을 묶어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케이트는 그럴 리 없다고 머리를 저었다. 오늘 아침도 이 복도를 지나갔다. 그때는 이런 실 같은 건 없었다. 그렇다면 방문한 손님 중 누군가가 이런 걸까? 위험하지 않겠느냐던 집사의 말이 떠올라 케이트이 손이 떨렸다. 초대한 손님을 떠올려봤지만, 너무 많았다. 가족뿐 아니라 친구나 지인을 데려온 사람도 있다. 그중에 그녀를 해하려는 사람이 없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게 정말 그녀를 노린 걸까. 케이트는 애써 생각을 돌렸다. 그녀가 이 복도를 지나갈 거라는 보장이 없다. 게임 도중에 손님용 응접실에 가서 앉아 있으려 한 건도 즉석에서 떠오른 생각이다. 그녀가 마음을 바꿔 온실로 갔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케이트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천천히 온실 쪽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만난 건 음료를 나르는 하인뿐이었다. “없네.” 복도를 샅샅이 뒤졌지만 실 같은 건 없었다. 손님용 응접실로 향하는 복도에만 있었다. 우연인가. 케이트는 맥이 탁 놓여 멍하니 서 있었다. 어쩌다 보니 실이 기둥에 감겨 있을 수 있나? 알라나 데일에서 목조 벽의 거스러미에 실이 걸린 적이 있다. 비슷한 경우일까. 케이트는 지나가는 하인을 불렀다. “복도에 위험한 게 없는지 확인 좀 해줄래요?” 복도 끝, 단차가 있는 곳, 계단. 케이트는 그런 곳에 실이 묶여 있지 않은지, 다칠만한 곳이 없는지 확인해 달라고 말했다. 생각할수록 그녀를 노린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만 노린다면 아무나 지나다닐 수 있는 복도 끝이 아니라 그녀의 방 앞에 설치하는 게 맞다. 특히나 손님용 응접실은 케이트보다 손님이 오갈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파티를 망치려는 자의 소행인지도 모른다. 호건 가의 파티에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면 호건 가의 이미지가 나빠질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케이트는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다른 쪽으로 불편해 졌다. 누군가 호건 가를 시기해서 손님들에게 해를 끼치려 한다는 거다. “없습니다.” 흩어졌던 하인들이 그녀에게 돌아와 이야기했다. 빠르게 확인하기 위해서 여러 명의 하인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무슨 일 있느냐고 물어보는 손님도 있었지만, 그들은 케이트의 명대로 어느 부인이 떨어트린 핀을 찾고 있다고 둘러댔다. “계속 확인 좀 해주세요. 손님이 다치면 큰일이니까요.” 알겠습니다. 하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흩어졌다. 칼이 이야기를 듣고 뒤늦게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아가씨?” “복도 끝에 실이 붙어 있었어요. 우연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 걸려서 넘어지면 크게 다칠 상황이었거든요.” “아가씨께서 걸리신 겁니까?” 칼이 제일 먼저 걱정한 건 케이트의 안위였다.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전 괜찮아요. 우연히 제가 발견했을 뿐이에요.” 그가 보기에도 케이트는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다행이다. 저도 모르게 그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아가씨가 계시는데 이런 위험한 일이 벌어지다니. 칼은 용병을 불러 케이트가 이야기한 것을 다시 전달했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만에 하나라도 누군가 다치면 큰일이다. 유진이 다시 복도를 살폈다. 그 사이 케이트는 가면을 바꾸고 다시 홀 안으로 들어갔다. 하인들과 이야기한 탓에 그녀가 케이트 스미스라는 걸 손님들도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컸다. 홀 안으로 들어가면서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이안을 찾았다. 실라를 부축하며 나가던 것을 봤다. 게임 하기 전까지는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그녀를 노린 게 아니라 해도 이 저택에 해를 끼치려는 사람이 있다. 이런 때에 실라가 먼저 돌아간 것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안도. “아가씨.” 누군가 그녀의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들켰나! 케이트는 잔뜩 긴장해서 몸을 돌렸다. 잘 차려입은 남자가 하얀 가면을 쓰고 서 있었다. “뒷모습만 봐도 그 아름다움에 눈이 부시군요. 가면을 쓰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 가면을 벗었다면 이 방안에 사람들은 모두 눈을 뜨지 못했을 테니까요.” “네?” 케이트를 찾은 게 아니었다. 그녀는 당황해서 멍하니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가 유려하게 낭만적인 말을 토해냈다. 신선한 느낌이다. 케이트는 잠시 남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목덜미가 어쩌고, 뒷모습이 어쩌고 떠드는 게 무뚝뚝한 이안에게서는 듣기 어려운 찬사였다. “혹시 생각 있으면 제게 아가씨와 산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아, 죄송해요.”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과 같이 산책하는 건 다르다. 게임 중이 아니라 해도 모르는 남자와 단둘이 산책할 생각은 없었다. “혹시 배우자분과 함께 오신 겁니까? 그렇다면 그분은 대단히 불쌍한 분이 아닐 수 없군요. 이토록 아름다운 부인을 혼자 둘 정도로 어리석다니요.” “아니,”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상대가 워낙 주절주절 떠들어대서 뭐라 말할 수가 없다. 케이트는 당황해서 고민에 빠졌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저기, 그게,” “그런 눈이 어두운 자는 잊어버리시고 저와 좋은 시간을 보내시는 게 어떨까요? 이래 봬도 제가,” 남자의 자기 자랑이 시작됐다. 검술이 어쨌다느니, 어느 시합에서 몇 위를 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케이트는 이 상황에서 그녀가 남자를 무시하고 자리를 피하면 안 되는 이유를 떠올렸다. “없네.” 가면을 쓰고 있어서 누군지 모를 거다. 나중에 그녀라는 걸 알고 뭐라 한다면 게임 중이라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 자리를 피했다고 말하면 된다. 그럼 되잖아? 케이트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가볍게 들어 올렸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저는 그 어떤 고난이라도,” 눈을 반쯤 감은 채 자기 자랑에 취해 떠들던 남자는 휙 하는 바람이 느껴져 눈을 떴다. 눈앞에 있던 그의 취향 정곡에 맞는 여자가 몸을 돌려 저 멀리 멀어지고 있었다. “잠깐, 아가씨?” 뒤에서 남자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익. 따라오지 마. 케이트는 좀 더 빠르게 걸었지만, 키가 작은 그녀가 남자보다 빨리 걸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남자를 피해 홀을 빙글빙글 돌던 케이트는 결국 반대쪽 복도로 빠져나왔다. 안 되겠다. 역시 제대로 거절해야지. 복층 구조인 이쪽 복도는 조금 서늘했다. 케이트는 멈춰 서서 남자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그녀가 멈추자 남자는 안심하고 발걸음을 늦췄다. 아이 참. 케이트는 남자가 가까운 곳까지 다가오길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때 남자의 등 뒤로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하얀 가면을 쓰고 있지만 케이트가 못 알아볼 리가 없는 남자였다. 이안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뭐지? 케이트는 그가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건지, 아니면 그냥 볼일이 있어서 오는 건지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그가 아는 척한다면 사람들 앞에서 그녀가 케이트 스미스라는 게 밝혀진다. 아직 게임 중인데. 케이트는 홀 안쪽에서 그녀를 찾아 나오는 사람들을 힐끔 쳐다봤다. 그 사이 이안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 앞에 와 있었다. 케이트는 당황해서 입을 열었지만 이안이 그보다 더 빨랐다. “이안?” 휙하고 이안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케이트의 비명에 가까운 신음은 그의 가슴에 묻혀 사라졌다. 그에게 추월당한 남자가 깜짝 놀라서 얼어붙었지만, 케이트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이 남자가 왜 이래? 그녀 역시 얼어붙었다.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끌어안다니? 하지만 거의 동시에 퍽 하고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안은 완전히 케이트를 둥글게 보호하고 있었다. 그녀를 쫓아오던 남자는 얼어붙은 채 이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복층 복도에서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그게 이안의 바로 뒤에 떨어져 산산 조각나는 걸 본 다음에야 남자는 떨어진 게 사람 머리만 한 조각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괜찮나?” 더 이상 떨어지는 게 없다는 걸 확 한 다음에야 이안은 케이트를 품에서 놓아주며 물었다. 그녀는 무슨 소린가 하다가 그의 등 뒤에 박살 난 조각상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 작품 후기 ============================ 어 죄송합니다아~ 저녁먹고 졸았어요. 오늘이 금요일이죠? 다음주에 만나요! 00294 10. 게임 =========================================================================                            “언제, 아니, 어떻게, 아니,” 뭘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다. 더듬거리는 케이트를 보고 뒤를 확인한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네가 저 남자를 피해 도망치는 것 같길래.” 도와주려고 따라다가 보니 복층 복도 난간에서 뭔가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케이트는 당연히 눈치채지 못했고 그런 케이트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남자 역시 눈치채지 못했다. 남자는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케이트가 위험하다. 이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빨리 다가가 케이트를 끌어안았다. 그다음은 케이트도 알고 있는 일이다. 조각상이 떨어졌고 그 파편이 이안의 등에 튀었다. “유진! 칼!” 이미 조각상이 떨어지는 소리에 달려오던 칼과 유진은 케이트의 목소리에 안도했다. 적어도 케이트가 다치지는 않았다는 뜻이니까.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전 괜찮아요. 위층 확인 좀 해줄래요?” 칼과 유진의 시선이 계단 위를 향했다. 호건 저택은 복도에 조각상이나 그림을 장식해 두긴 한다. 칼은 박살 난 조각상을 살폈고 유진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괜찮아?” 이안이 다시 물었다. 그의 손이 뺨에 닿은 다음에야 케이트는 자신의 가면이 벗겨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안이 끌어안으면서 벗겨진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다. 케이트는 바닥에 떨어진 가면을 쳐다보고 이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옷도 갈아입었고 머리도 다르게 묶었다. 가면도 쓰고 있었는데 그는 어떻게 멀리서 그녀를 알아봤던 걸까. “스, 스미스 양?” 멍하니 서 있던 남자가 다가와서 물었다. 그녀가 케이트라는 것을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케이트는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케이트 스미스입니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케이트의 손을 잡다가 이안을 보고 흠칫해서 물러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남자가 하얀 가면을 쓰고 케이트 옆에 서 있는 장면은 위압감을 주기 충분하다. 이안은 가면을 벗으며 말했다. “이안 로엔이다.” 남편보다 더 나쁘다. 남자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네! 두 분, 축하드립니다!” 뭐가?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남자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말했다. “그, 저, 결혼, 그러니까 두 분이 결혼한다는 말을 들어서요. 결혼 축하드립니다.” “아, 그거요.” 케이트는 다시 빙그레 웃으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 결혼이 성사될지는 알 수 없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다행히 그녀는 인사만 하고 마치는 데 성공했다. “이 층 복도에 수상한 사람은 없습니다.” 때마침 용병들이 달려와 말했다. 조각상을 떨어트린 자는 이미 도망갔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직 저택 안에 있을 수 있다. 케이트는 조각상 파편을 들어 올리는 칼에게 물었다. “그 조각은 원래 이쪽에 있는 건가요?” “네. 바로 위 복도에 장식해두는 거긴 합니다. 벽 쪽으로요.” 일 층이 보이는 난간 쪽으로는 아무것도 장식해 두지 않는다. 누군가 걷다가 툭 치는 바람에 떨어지면 아래 있는 사람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케이트처럼. 칼의 말을 들을 케이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실수라고 애써 생각하려 했다. 호기심에 이 층을 구경하던 손님이 실수로 치는 바람에 놀라서 도망친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칼의 말대로 벽 쪽에 있던 조각상이라면 누군가 일부러 케이트의 머리 위로 떨어트렸다는 말이 된다. 그녀의 머릿속에 복도에 걸려있던 실이 떠올랐다. “케이트.” 이안이 재빨리 케이트의 어깨를 감쌌다. 누군가 그녀를 해하려 한다. 두 번 다 그녀가 목표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케이트의 몸이 떨려왔다. “파티를 중단할까요?” 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케이트가 얼마나 기대하고 열심히 준비했는지 알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케이트를 해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빨리 끝내고 그녀를 보호하는 게 좋다. “하지만 목표가 제가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렇다면 더더욱 끝내야지.” 케이트의 반박에 이안이 말했다. 목표가 케이트라 해도 중단해야 하고 케이트가 아니라 해도 중단해야 한다. 호건 저택에서 누군가가 다친다면 그것도 큰 문제다. 이안의 말에 케이트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준비한 게 많은데. 가면뿐 아니라 글을 읽을 줄 알면 유리한 게임도 있다. 이게 고작 한 가지 했는데 멈춰야 한다니, 속상했다. “네 소개를 했으니 목표는 이룬 거잖아.” 케이트가 호건 가의 사람이라는 것을 소개하기 위해 준비한 자리니 당초의 목표는 이룬 게 맞다. 케이트는 이안을 한번 흘겨보고 칼에게 말했다. “하지만 갑자기 중단하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녀의 말이 맞다. 이안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고 칼은 음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케이트는 이 파티가 끝나면 큐바인 하우스로 거처를 옮길 예정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안 좋은 소문이 퍼질 수 있다. 그런데 파티를 갑자기 중단하면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질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칼은 조용히 케이트의 의중을 물었다. 그로서는 최대한 빨리 중단했으면 좋겠다. 케이트를 위해서. 그녀가 위험하길 바라지 않는다. 케이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이 게임은 끝내죠. 홀 안에서 다른 게임을 조금 하다가 적당한 때에 끝내는 게 좋겠어요.” “아가씨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케이트를 해하려는 자가 저 무리 중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홀 안에 사람을 모은다고 위험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칼이 걱정하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첫 파티고 어쩌면 호건 가의 사람으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파티다. 가능하면 좋게 끝내고 싶었다. “할아버지께는 말씀드리지 마세요. 제가 잘 끝낼게요.” 그녀가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데 집사가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안마저 입을 다물자 칼은 끙하고 물러났다. 케이트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축하해요.” “네?” 남자는 멍하니 케이트를 쳐다봤다. 갑자기 조각상이 떨어지고 로엔 경이 스미스 양을 구하는가 싶더니 용병들이 우르르 달려와 그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추궁이 끝나니까 이번엔 스미스 양이 다가와서 축하한단다. 그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입을 딱 벌리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게임에 이기셨잖아요.” 케이트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미소 지었다. 남자는 그제야 그녀를 발견한 사람에게 상품을 준다는 말을 떠올렸다. 그 게임? 그는 게임에 아무 관심 없었다. 그가 노린 건 외로운 여자를 낚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 한 것뿐이다. 멍청하게 서 있는 남자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칼은 재빨리 다가가 남자를 별 실로 안내했다. 그가 홀로 돌아가 방금 있었던 일을 떠들어 버리면 이 사건을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려는 케이트의 노력이 수포가 되어 버린다. 케이트는 남자와 함께 별실ㄹ 향하는 칼을 지켜보다가 이안의 손을 잡았다. “우리도 돌아갈까요?” “널 먼저 찾은 건 나잖아.” 이안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 남자는 그녀가 케이트 스미스 양이라는 걸 눈치채지도 못했다. 그녀를 알아차린 건 이안이 먼저였다. 불만스러운 어조에 케이트는 눈을 크게 떴다. “게임에 이기고 싶었어요?” “그건 아니지만,” 그럼 뭐가 문제인데? 케이트는 멀뚱멀뚱 이안을 쳐다보다가 혹시 하고 물었다. “상품이 갖고 싶었어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태도에서 케이트는 그녀가 정곡을 찔렀다는 걸 깨달았다. 말도 안 돼. 그녀는 믿을 수 없어서 다시 물었다. “상품이 갖고 싶었어요?” “갖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럼 뭔데요?” “그 상품이 뭔지 내게 말하지 않았잖아.” “당신은 별로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요.” “사람들 말이, 상품이 너와의 식사권이라고 하던데.” 응?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무슨 소리냐고 되물어보려다 그녀도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홀 안에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주제 중에 이 게임의 상품이 뭔지도 있었던 것 같다. “저와 식사는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이안의 표정이 더욱더 구겨졌다. 그는 뭐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녀와의 식사가 이 게임의 상품이라면, 저 남자가 케이트와 식사를 한다는 거 아닌가. 그것도 단둘이! “이안? 왜 그래요?” 케이트는 갑자기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는 이안에 놀라 그의 뒤를 따랐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일이 좀 있어서... 내일과 내일 모레는 못올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어딜 갈 일이 생겨서요. 거의 끝나가는데 자꾸 일이 생기네요. 화, 수 쉬고 목요일에 올게요~ 00295 10. 게임 =========================================================================                            사용인들이 게임이 끝났음을 알린 덕에 홀 안은 다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입구마다 용병이 지키고 서 있다. 케이트는 사람들이 조용해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가면이 벗겨진 덕에 사람들은 금세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이미 스미스 양을 찾았다는 말에 헐레벌떡 달려온 손님들이 한숨 쉬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이안은 케이트가 다른 게임을 제안하는 동안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사람들의 저 사람은 왜 저기 서 있나 하는 시선에도 그는 꿋꿋했다. “들어오실 때 나눠드린 가면이 있죠? 그 가면에 제가 글자를 써놨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가면을 확인하려 했다. 케이트는 재빨리 그들을 제지했다. “잠시만요. 글자는 두 가지예요. 하나는 당첨이고 하나는 꽝이랍니다. 당첨이라고 적힌 가면을 가지신 분께도 마찬가지로 상품을 드릴 거예요.” 여기서 다시 이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대체 몇 명과 식사를 하는 거냐고 그가 속으로 투덜거리는 사이 케이트는 게임을 설명했다. 앞으로 삼십 분 동안 서로 가면을 교환한다. 힘을 사용하는 건 금지. 상대방의 가면이 탐나면 오로지 말로 상대방을 설득해야 한다. 삼십 분 후 종이 울리면 자기 가면을 확인하고 글자가 있다면 그녀에게 와서 당첨인지 꽝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이번에도 당첨과 꽝을 읽을 줄 아는 사람에게 좀 더 유리한 게임이었다. “물론 집에서 가면을 가져오신 분도 참여하실 수 있어요. 제가 아까 바꾸면서 안쪽에 표시를 해놨거든요.” 하인이 칼에게 건네받은 종을 흔들었다. 딸랑딸랑딸랑. 종소리가 나자마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서로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홀 안에서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 건 케이트와 하인들뿐이다. 이안은 자신의 가면을 벗어 안에 뭔가가 적혀있는지 확인했지만, 그의 가면은 아무것도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 사이 케이트는 하인들에게 홀 밖에서 돌아다니는 손님이 있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유진 역시 그와 마리아만 케이트 곁에 남고 다른 부하는 저택 안을 살피도록 내보냈다. 가면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사람은 타인의 가면과 바꾸려 했고, 가면에 뭔가가 쓰여 있는 사람은 바꾸지 않으려 했다. 홀 안에 대규모 토론이 일어났다. “눈치 게임이군.” 누군가 중얼거렸다. 상대방의 가면이 가지고 싶으면 상대방이 원하는 뭔가를 제공하고 교환해야 한다. 내가 교환하고 싶어 한다는 것 자체가 내 가면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호건 가에서 제공하는 상품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모른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교환한 가면이 당첨이 아니라 꽝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을 수도 있다. 머리 좋은 사람은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가면을 마치 뭔가가 있는 것처럼 꾸며댔다. 뮈엘라의 사람들은 힘의 나라로 살아오면서 백 년 전 사람보다 단순해진 경향이 있다. 강한 자는 강하기 때문에 눈치가 빠를 필요가 없다. 단순한 그대로 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게임은 강한 사람보다 약한 사람에게 유리한 게임이었다. 그리고 약할수록 강한 자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눈치가 빨라질 필요가 있다. “이 많은 사람과 한 번씩 식사하려면 바쁠 텐데.” 그리고 처음으로 이안도 눈치라는 걸 봤다. 그는 인생 처음으로 완곡하게 ‘그러니 식사권이라는 상품은 포기하라’고 케이트에게 말하고 있었다. “네? 제가 왜 이 사람들과 식사를 해요?”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파티는 가벼운 음식을 제공하지만 식사시간 후에 열렸다. 케이트가 손님들과 식사할 이유가 없다. 그녀의 태도에 이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상품이 식사권 아닌가?” “식사권이요? 그것도 있지만요.” 두 사람의 대화가 뭔가 맞지 않았다. 케이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준비한 상품은 지정된 식당의 식사권과 신문 구독권이에요.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거예요?” “나는 상품이 너와의 식사라고 들었는데.” “저와 식사하는 게 무슨 상품이 되는 데요?” 비스마르크와 식사라면 모르지만 그녀와 식사하는 게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인가. 케이트는 이해되지 않아서 이안을 쳐다봤다. 이안은 신문 구독권보다 케이트와의 식사권이 훨씬 인기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뱉지 않는 현명함을 보였다. 그가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용병이 유진에게 다가가 속삭이는 게 보였다. 두 사람은 유진의 얼굴에 경악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무슨 일이지? 곧이어 유진이 재빨리 자가와 나직하게 말했다. “호건 부인의 방에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문제? 다시 서로를 쳐다본 이안과 케이트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에스메랄다의 방으로 향했다. 방 앞은 용병이 막고 있었고 하인들이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보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아가씨.” 칼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케이트를 제지하며 말했다. 에스메랄다를 살피는 하녀가 죽었다. 시신이 참혹하다고 칼이 말했다. 이안은 들어가려는 케이트를 말리고 대신 들어갔다. 이런 날에 그녀가 안 좋은 것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녀는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었다. 온 사방에 피가 낭자했다. 마치 짐승이 뜯어 먹은 것 같은 형국에 이안은 역시 케이트가 들어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들어왔다가 드레스에 피라도 묻는다면 기분이 나쁠 것 같다. “에스메랄다, 호건 부인은요?” “없습니다.” 없다니 무슨 소리야? 케이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칼이 재빨리 덧붙였다. “방 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자가 어딜 갔단 말인가. 케이트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누군가 그녀를 납치했을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나간 사람 중에 호건 부인과 같이 나간 사람이 있나요?” “그것도 확인했습니다. 없습니다.” 그럼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다들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 비스마르크가 나타났다. 그의 휠체어를 미는 하인이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다 여기 모여 있어? 무슨 일이야?” 에스메랄다 방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얼어붙었다. 그는 칼과 케이트를 차례로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왜 다 여기 있느냐고 묻잖아. 왜? 그 계집이 또 무슨 짓을 했어?” “그게 아니라,” 칼이 머뭇거리며 나섰다. 이 안은 시체가 있다. 비스마르크가 봤다가 놀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움직였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호건 부인이 사라졌습니다.” 용병이 말했다. 비스마르크는 휙 하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소리쳤다. “누가 호건 부인이야?” 고함에 다시 사람들이 얼어붙었다. 에스메랄다를 호건 부인이라고 안 하면 뭐라고 한단 말인가? 유진이 말했다. “제프리 호건 씨의 어머니가 사라졌습니다.” 그래. 그 계집에게는 제프리의 어미 정도로 충분하다. 비스마르크는 유진을 쳐다보며 물었다. “잘됐군. 문 닫고 못 들어 오게 해.” “할아버지!” “어르신!” 케이트와 칼이 동시에 외쳤다. 나 귀 안 먹었어. 비스마르크는 인상을 쓰며 덧붙였다. “아예 그년이 이 집을 못 찾아오면 더 좋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이 비스마르크의 말에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 이안만 빼고. “아직 이 집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비스마르크는 이안을 보고 흠하고 턱을 쓰다듬었다. “그럼 다시 잡아다 가둬. 칼, 지하에 감옥 하나 만들게.” “어르신.” 말 조심 좀 하십시오. 칼의 경고에도 비스마르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안은 용병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가서 제프리의 모친을 찾게. 위험인물일 수 있네.” “위험인물이요?” 유진이 물었다. 이안은 그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케이트를 공격한 게 그 여자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뭐?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복도에 줄을 달고 위층에서 조각상을 떨어트린 게 에스메랄다 일 수 있다고? 이안의 발언은 파급력이 대단했다. 하인들은 수군거렸고 용병들은 재빨리 흩어졌다. “진심이에요?” 케이트의 물음에 이안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여자고, 널 미워하잖아. 이 이상 가는 용의자는 없는 것 같은데.” ============================ 작품 후기 ============================ 즐거운 금요일입니다~ 어제 왔어야 했는데 집에 오자마자 완전 기절해서... 즐거운 주말 보내시고 다음주에 만나요~ 00296 10. 게임 =========================================================================                            주변이 얼어붙었다. 하인들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고 케이트는 멍하니 이안을 쳐다봤다. 생각해보면 에스메랄다는 케이트를 어떻게든 없애고 싶어 한 사람이었다. 죽이지 않으려 했을 뿐이지 그녀의 존재를 감추려 했다. 호건 가의 재산 때문에. 제프리와 결혼시키려 한 것도 그런 시도 중 하나였을 뿐이다. 하지만 케이트는 그 이유로 에스메랄다가 자신을 죽이려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 이안은 같은 이유로 죽이려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호건 부인이 하녀를 죽이고 절 죽이려 한다는 건가요?” 케이트의 질문에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반응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죽였다고?” 아차. 케이트는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비스마르크가 있다는 걸 잠시 잊었다. 그는 경악한 얼굴로 케이트를 쳐다보다가 방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어르신, 안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네가 뭔데 내게 명령이냐고 일갈하려던 비스마르크는 칼이 표정을 보고 주춤 물러났다. 집사는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 안의 참혹한 모습을 주인에게 보여주지 않겠다는. “사고가 아닌 게 확실해?” 비스마르크의 질문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사고라면 그는 이 집에 케이트를 한순간도 둘 생각이 없다. “그 여자가 죽였단 말이지?” “확실한 건 아닙니다.” 집사가 나서서 말했다. 하녀가 죽었고 에스메랄다가 사라졌다. 에스메랄다가 죽이고 도망쳤거나 누군가 하녀를 죽이고 에스메랄다를 납치했거나, 누군가 하녀를 죽이는 사이 에스메랄다가 도망쳤거나. 셋 중 하나다. 그는 비스마르크에게 세 가지 가설을 이야기했다. 지금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에스메랄다가 하녀를 죽이고 도망쳤을 거라는 점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정신도 온전치 못한 여자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친다고? 그 여자가 사람을 죽이는 건 둘째치고 이 많은 사들 가운데 돌아다니는데 아무도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비스마르크의 말도 맞다. 케이트는 이안을 쳐다봤다. 에스메랄다가 살인자인 것과 외부에서 들어온 살인자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차라리 외부에서 들어온 살인자 쪽을 믿고 싶다. 하지만 이안의 생각은 굳건했다. 그는 비스마르크의 말대로 누군가 에스메랄다를 납치했다는 게 그의 주장과 같은 이유로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자를 데리고 이 저택에 있는 수많은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이 저택에 이십몇 년을 살았다. 저택 곳곳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에스메랄다가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것도 그녀의 계획이 아닐까. 사람들이 안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스마르크와 케이트를 죽이고 이 집안을 손에 넣으려는 흉계일 수도 있다. 지금 케이트와 비스마르크가 해를 입는다고 해도 사람들의 의심은 에스메랄다를 피해갈 것이다. 방문한 손님 중 누군가 나쁜 마음을 가진 자의 소행이라 생각하겠지. “어쨌든 내 집에 살인마가 돌아다닌다는 말이잖아.” 비스마르크가 외쳤다. 케이트는 누군가 그 소리를 들었을까 싶어 주위를 돌아봤다. 이 층이긴 하지만 혹시라도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손님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 낯선 얼굴은 없었다. 이안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의 곁에 서 있었고 칼이 나섰다. “그만 종료할까요?” “종료해? 뭘?” “손님을 보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흠 하고 비스마르크는 생각에 잠겼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그만두고 싶지만, 고작 그런 녀석에게 겁먹어서 피한다는 생각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천히 그의 머릿속에 파티를 그만두면 안 되는 이유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수군거릴 것이다. 이 파티는 케이트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지만 그에게도 자신이 멀쩡하며 에스메랄다와 제프리 따윈 그의 안위에 손끝 하나 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계속해.” “네?” 칼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비스마르크가 말을 잘못했거나. “계속 하라고. 유진, 범인은 찾고 있나?” “네. 지금 수색하고 있습니다.” 아까 흩어지던 용병들을 떠올리며 비스마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휠체어를 돌리며 말했다. “계속 해.” “하지만, 어르신.” 칼이 쫓아가는 비스마르크를 지켜보며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네 할아버지는 네 안전에는 관심이 없는 건가.” 직설적인 말에 케이트는 쓰게 웃었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아닌 척 말했다. “할아버지도 지금 파티를 종료하며 이상한 소문이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신 거죠.” “그런가.” 이안은 떨떠름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라면 절대 그렇게 안 할 것이다. 남의 수군거림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만약 그런 오기를 부려서 케이트가 다친다면. 이안은 고개를 젓고 품에서 검을 꺼냈다. “혹시 모르니 가지고 있어.” 케이트의 눈이 커졌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긴 했지만 검이었다. 그녀는 비스마르크의 교육 덕분에 그게 여성용 검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설마 백작 부인 걸 가져온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실라는 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는 혐오에 가깝다. 그런 그녀가 무기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고 이안은 생각했다. “에반스 공작에 내게 준, 빌려 준거다.” 케이트는 이안의 말에 무슨 소린지 몰라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에드워드가 이안에게 빌려준 걸 이안이 그녀에게 빌려준다는 건가? 그래도 되나? “가지고 있어.” “하지만,” “아니면 다른 무기를 가지고 있나?” 없다. 무기를 가지고 다녀볼까 생각해 본 적이 있지만 괜히 제 칼에 제가 다친다는 말을 들어 포기하고 잊어버렸다. 뮈엘라의 여자는 두 부류로 나뉜다. 적극적으로 힘의 세계에 뛰어들어 용병이나 기사가 되는 여자와 애초에 탈락해서 최대한 안전한 세상에 사는 여자. 케이트는 후자였다. “이렇게 쥐고.” 이안은 검집을 빼지 않은 채 손잡이에 케이트의 손을 갖다 대며 나직하게 말했다. “앞으로 찔러. 손만 움직이면 안 돼. 온몸으로.” “하지만,” 이안의 움직임에 따라 케이트의 몸이 휘청였다. 그녀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는 거부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이걸 사용할 일이 있겠어요?” 기본적으로 뮈엘라는 안전하다. 케이트가 겪은 수많은 사건을 뒤돌아보면 믿을 수 없겠지만 힘을 숭배하는 만큼 기사나 치안관의 보수는 좋은 편이다. 그만큼 거리를 지키는 사람들의 실력은 올라가고 범죄자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뮈엘라에서 일어나는 불운한 사건은 전부 늦은 밤에 돌아다니거나 위험한 곳을 기웃거리지만 않으면 일어나지 않을 사건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밝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회의를 보이는 케이트의 태도도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방패는 몇 개가 있어도 부족하지 않아.” “이건 방패가 아니라 검이잖아요.” 이안이 다시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며 검을 받아 들었다. 이걸 어디에 둔단 말인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어서 그녀는 검을 지니고 있는 것도 어색했다. 투덜거리는 그녀에게 이안이 말했다. “벨트에 검을 다는 고리가 없나?” “이안, 이건 드레스예요.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치안관이나 용병에도 여자는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검을 지니는 게 당연한 직업이니 케이트처럼 어디에 둘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안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케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라고 가져온 거야? 그녀를 걱정해준 건 고맙지만 사람들 사이에 이런 검을 들고 다니면 마찬가지로 시선을 받을 것이다. 다행히 케이트의 고민은 마리아가 풀어주었다. 마리아는 능숙하게 케이트의 가터벨트를 이용해 검을 숨겨주었다. 여차하면 주저앉아 검을 뽑는 법도. 두 사람은 사이 좋게 다시 일 층 홀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가면을 교환하느라 정신이 없어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할 말이 있다.” 이안은 제이드를 찾아내 말을 걸었다. 제이드의 가면이 워낙 화려해서 찾기 쉬웠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탕파를 끌어 안고 앉아있다가 잠들었어요. 후...따뜻한거 최고야. 00297 10. 게임 =========================================================================                            제이드의 기가 막힌 언변에 홀려 그에게 가면을 내밀던 남자가 케이트를 보고 정신을 차렸는지 허둥지둥 다시 가면을 썼다. 제이드는 에이. 하고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왜?” 이안의 뒤에 케이트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제이드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건 조세핀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 있어요?” 조세핀의 질문에 케이트는 이안을 쳐다봤다. 이안이 고개를 숙여 나직하게 속삭였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제이드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입을 벌렸으나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주위를 한번 둘러본 그는 이안과 똑같이 속삭였다. “설명해 봐.” “피해자는 이 집 하녀다. 호건 부인의 방에서 발견됐고, 방주인은 사라졌다.” 호건 부인이 범인이거나, 범인이 하녀를 죽이고 호건 부인을 납치했거나, 범인이 하녀를 죽이는 사이 호건 부인이 도망쳤거나 셋 중 하나로군. 제이드의 머릿속에 이안과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호건 부인이 납치됐다고 생각해?” 제이드 역시 다른 사람과 똑같이 생각했다. 이안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녀가 범인일 수도 있지.” “그럴 리가.” 말도 안 된다. 제이드는 호건 부인이 정신을 잃은 후 만난 적은 없지만 소식은 간간이 전해 들었다. 혼자 식사는커녕 대소변도 제대로 가리지 못한다고 들었다. 그런 여자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쳤다고? 백 보 양보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까지는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도망쳤다는 건 그녀가 조금이라도 정신이 돌아왔다는 말이다. “그녀가 범인이라면 목적이 뭔데?” 제이드의 질문에 이안의 시선이 케이트를 향했다. 엥? 그는 깜짝 놀라서 그녀와 이안을 번갈아 쳐다봤다. “호건 부인이 스미스 양을 노릴 이유가 있어?” “케이트뿐 아니다. 그녀의 할아버지까지 둘 다 노릴 수 있지.” 재산 때문이라면 가능성 있다. 후계자였던 제프리가 죽었으니 호건 부인이 호건 가의 재산에 손댈 수 있는 기회는 사라졌다. 정신이 돌아온다 해도 평생 그녀는 용돈을 받으며 살아야 할 것이다. 운 나쁘면 그 용돈을 주는 사람이 케이트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비스마르크와 케이트가 죽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비스마르크에게 남은 후계자는 케이트뿐이다. 둘 다 죽는다면 호건 가의 재산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에스메랄다가 차지할 수 있다. 적어도 용돈을 받는 생활보다는 낫겠지. “그녀가 정신이 돌아왔다는 말야?” “모른다. 하지만 납치범 쪽보다는 가능성이 높잖나.” 납치범이 에스메랄다를 납치했다면 몸값을 노린 것이다. 하지만 파티가 열리는 호건 저택에 침입해 하녀를 죽이면서까지 납치할 정도의 가치가 에스메랄다에게 있느냐고 묻는다면 제이드는 절대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심지어 그녀는 비스마르크의 미움을 산 상태다. 납치범들이 요구하는 몸값을 비스마르크가 들어줄 거라는 보장도 없다. “흠.” 이안의 주장이 더 가능성 높다. 에스메랄다가 정신을 차리고 케이트와 비스마르크를 죽이려 한다? 그 여자가 그럴 수 있는 여자인가? “좋아. 찾아보자고.” 제이드는 가면을 고쳐 쓰며 말했다. 결국 호건 부인을 찾으면 해결되는 문제다. 하지만 이안이 머뭇거렸다. 그는 케이트의 곁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가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제이드가 물었다. “왜?” “케이트를 혼자 둘 생각은 없어.” 와. 조세핀은 저도 모르게 손뼉을 쳤고 케이트는 얼굴이 붉어졌다. 제이드는 입을 헤 벌리고 이안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너 이안 맞아?” “무슨 의미야?” “아냐, 아무것도. 그럼 우리가 스미스 양을 지키면 되나?” 이안은 못마땅하다는 듯 제이드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어머. 조세핀이 케이트에게 속삭였다. “로엔 경이 스미스 양을 많이 좋아하나 봐요.” 남의 연애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지. 케이트가 한숨 쉬는 사이 하인이 다가와서 물었다. “시간이 다 됐는데, 어떻게 할까요?” 홀 안은 격렬한 토론으로 시끄러웠다. 케이트는 주변을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딸랑딸랑딸랑 하고 종이 울리면서 장내가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케이트의 지시에 따라 글자가 있는 가면을 가진 사람들이 가면을 들어 올리고 하인들이 그녀에게 가면을 가져오는 것을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제이드와 이안은 그 사이에 호건 부인이 없는지 찾았다. 사람이 너무 많다. 케이트 곁에 서서 시선만으로 찾는 것은 한계가 있다. 유진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 찾기는 했지만 그가 찾는 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부인과 그런 부인을 부축하는 남자였기에 자연스럽게 단장한 에스메랄다를 지나쳤다. “이건 꽝이에요.” 케이트가 꽝이라고 써진 가면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에이. 가면의 주인이 실망하는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나직하게 깔렸다. 반대로 그녀가 당첨이라고 알려주는 건 박수와 함께 환호성이 따랐다. “그리고 이건,” 당첨이라고 적힌 가면을 들어 올리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어느 분 가면이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여자가 손을 들었다. 표정에 긴장이 섞여 있었다. 케이트는 여자의 표정이 기대가 아닌 것을 알았다. “잘 쓰시네요. 당첨이에요.” 누가 봐도 케이트가 쓴 게 아닌 글자였다. 필기체가 다를 뿐 아니라 펜으로 쓴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웅성거리다 물었다 “하지만 그건 스미스 양이 쓴 게 아니잖아요?” “전 제가 쓴 것만 된다고 한 적 없는 데요.” “그럼 아무나 당첨이라고 쓰면 상품을 주는 겁니까?” “그럼요. 글자를 쓸 줄 안다면요” 그런 거였어? 조세핀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도 가면에 쓸 걸 그랬다. 할까 하다가 말았지만. 가면에 직접 당첨이라고 쓴 사람은 몇 명 더 있었다. 재미있게도 전부 여자였다. 케이트는 그녀들에게도 모두 상품을 준다고 했다. 식사권과 신문 구독권. 식사권은 괜찮지만 신문 구독권은 그다지 인기 있는 상품이 아니라서인지 크게 소란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어차피 신문 구독권을 받고 좋아할 정도라면 글을 읽는 게 기본 능력이 되는 사람일 테니 당첨되지 않은 사람 중에 상품을 탐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녀가 상품 받을 사람들은 하인에게 이름과 사는 곳을 알려달라고 하자 홀 안에 약간의 소란이 일어났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한곳으로 가려다 보니 생기는 소란이다. 이안은 그 틈을 타고 호건 부인이 케이트에게 접근하지 않을까 하고 전방을 주시했다. 그때 약간 떨어진 곳에서 비명이 들렸다. “꺅!” 사람들의 고개가 소리가 난 쪽으로 휙 돌아갔다. 이안은 케이트를 한 번 보고 조세핀을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 있어. 코트 양, 케이트와 함께 있어 주시죠.” 엇 하고 제이드가 뭔가를 말하려다 멈췄다. 케이트는 그녀도 함께 가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이미 이안이 떠난 뒤였다. 제이드는 뭔가 걸리는 게 있는 것처럼 이안과 함께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면서 조세핀을 힐끔힐끔 돌아봤다. “스미스 양.” 조세핀이 재빨리 케이트에게 다가갔다. 용병들은 집 안을 수색하느라 홀 안에 있는 건 유진 밖에 없었다. 하인들 몇 명이 케이트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그냥 가벼운 소란일 거예요.” 케이트보다는 자신을 달래기 위해 조세핀이 말했다. 누군가 넘어질 뻔했다거나, 그 정도의. 금세 이안과 제이드가 돌아와서 투덜거릴 것이다. 케이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킬리언 씨는 당신을 정말 좋아해요.” 조세핀이 무슨 소린가 하고 눈을 크게 떴다. “아까 이안이 당신에게 저와 함께 있으라고 하니까 뭔가 말하려 했잖아요.” 그녀도 봤다. 조세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킬리언 씨는 코트 양이 저와 함께 있다가 휘말려서 다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 조세핀은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제이드가 그런 걱정을 했다고? 그녀는 그가 사라진 쪽을 쳐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제 걱정이나 할 것이지. 바보.”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매일 늦지만 일부러 늦는게 아니에요! 이게 전부 추워서 라고요! ... 00298 10. 게임 =========================================================================                            조세핀의 말대로 별다른 일은 아니었다. 여자가 비명을 지른 이유가 드레스에 음료수를 엎질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 제이드는 한숨을 내쉬었고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미 저택을 빠져나갔을 가능성은 없어?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지만 숨을 정도의 정신이 있다면 이 사람 많은 곳에서 누굴 죽이려고 하진 않을 거 같은데.” 제이드의 말도 맞다. 이안은 어쩌면 호건 부인이 집 밖으로 나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사람들이 그녀가 미쳤기 때문에 누군가를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해도 실제로 그녀가 죽이는 걸 본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반대로 소란스러운 틈을 타서 케이트를 해치려 할 수도 있다. “적어도 최대한 빨리 케이트를 해치려 하겠지.” 이안의 말에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메랄다가 호건 가의 재산을 원해서 케이트를 해치려는 거라면 그녀가 이안과 결혼하기 전에 움직여야 할 것이다. 케이트가 이안과 결혼한 뒤 죽으면 케이트의 재산은 이안에게 갈 테니까. 이안에게 뒤집어씌운다면 모를까. 불길한 생각을 한 제이드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에스메랄다는 그리 영리하지 않다는 평이 있다. 반대로 이안은 그렇기 때문에 에스메랄다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영리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녀를 저평가하고 있다. 비스마르크도 그렇고 용병들도 그렇다. 하지만 정말 에스메랄다가 영리하지 않고 제정신이 아니라면 하녀를 죽이고 이렇게까지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다. 사실은 상당히 영리한 게 아닐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뭐야, 어디 갔어?” 그리고 두 사람이 다시 돌아갔을 때 케이트와 조세핀은 거기 없었다. 이안과 제이드는 주변을 돌아보며 두 여자를 찾았다. 화장실을 간 게 아닐까. 화장을 고치러 갔다거나. 이안은 대뜸 지나가는 하인을 붙잡고 물었다. “케이트, 스미스 양은 어디 갔지?” “네?” 하인도 모르는 눈치였다. 이안은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찼다. 별일이 아닐 수도 있다. 케이트 혼자 사라진 게 아니라 조세핀도 함께 사라졌으니까. 처음 생각대로 화장실에 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제이드는 달랐다. 호건 부인이 케이트를 노린다면 그 옆에 있는 조세핀이 거슬린다는 이유로 그녀도 해치려 할 수 있다. 그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케이트와 조세핀의 행방을 물었다. “아가씨라면 몇 분 전에 홀을 나가셨는데요.” “누구와?” 이안과 제이드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하인 역시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녀 한 명이 홀 안으로 들어와 케이트를 부르는 걸 봤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은 하인이 하기 때문에 손님이 모인 홀까지 하녀가 들어오는 건 대단한 실례다. “그래서 뭔가 급한 일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어디로 갔지?” 비스마르크가 부른다고 했다. 비스마르크의 방은 이 층에 있으니 비스마르크에게 간 거라면 이 층으로 갔을 것이다. 이 층입니다. 라는 말에 이안과 제이드는 동시에 뛰어 나갔다. “시체를 제일 먼저 발견한 게 당신인가요?” 케이트는 하녀를 따라가며 물었다. 앞서 걷던 하녀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시체요?” “호건 부인의 방에서 발견된 시체요. 당신이 호건 부인을 돌보는 일을 하는 걸로 기억하는데, 아닌가요?” “아, 맞아요.” 호건 부인을 돌보던 하녀다. 파티가 시작할 때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던 케이트가 발견하고 말을 걸기까지 했으니 확실했다. 하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보자마자 바로 뛰쳐나와서 제대로 본 건 없지만요.” 그녀의 말에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그랬다. 처음 시체를 봤을 때 비명을 질렀고 밤에 잠도 자지 못했다. 눈을 감으며 그 참혹한 모습이 눈꺼풀 안쪽으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일부터는 좀 쉬어요.” 케이트는 하녀의 어깨에 손을 갖다 대며 위로했다. 그런 엄청난 일을 겪은 사람을 일하게 하다니, 하필이면 파티가 열리고 있어서 일손이 많이 부족한 모양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어디로 가는 거예요?” 케이트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오고 있던 조세핀이 물었다. 비스마르크가 케이트를 부른다는 말에 걱정되어 따라오긴 했다. 하지만 하녀는 이 층으로 올라가지 않고 있었다. “아, 어르신께서는 온실에 계세요.” 무슨 일인 걸까. 케이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비스마르크가 그녀를 부른 이유가 뭔지 알아차리려 애썼다. 설마 집을 나가지 말라고 하시려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이트가 사업에 손을 떼고 나자 비스마르크는 그녀가 생각보다 훨씬 일을 잘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원래 눈을 부라리고 지켜보지 않으면 더 잘하는 법이다. 그녀의 생각대로 집을 나가지 말라고 말하려는 건지도 모른다. 할아버지 성격상 미안하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나름대로 관계를 회복하려 할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케이트는 생각했다. 이대로 이 집을 나가버리면 할아버지와의 관계가 멀어질 것 같아 조금 걱정스럽기도 했다. 얄밉고 고집쟁이인 것과 별개로 비스마르크는 하나밖에 없는 그녀의 가족이고 할아버지다. 그녀는 비스마르크와 오래오래 가깝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아가씨.” 저택 안의 모든 장소와 마찬가지로 온실은 환했다. 케이트가 들어오기 전 이 집 사람들은 온실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지만 정원사가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관리되고 있었다. “할아버지?” 케이트는 온실 안쪽으로 들어가며 비스마르크를 불렀다. 넓어서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들이 걱정하지 않을까요?” 조세핀이 케이트의 곁에 꼭 붙어서 물었다. 이안과 제이드가 돌아와서 두 사람이 사라진 것을 보고 놀라지않겠냐는 질문이었다. “할아버지께서 부르셔서 잠깐 다녀오겠다고 했으니까요.” 케이트는 말을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한 하인을 떠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조세핀은 고개를 저었다. “우린 온실에 있잖아요.” “아, 그러네요.” 비스마르크의 방이 있는 이 층에 가도 그녀와 조세핀은 없다. 케이트는 하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서 로엔 경과 킬리언 씨에게 우리가 온실에 있다고 전해 주겠어요?” “그럼요.” 하녀는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동시에 쾅하고 온실 문이 닫혔다. 움찔하고 놀란 조세핀이 케이트에게 매달렸다. “제가 전하지 않아도 다들 알게 될 거예요.” 하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찢어지라 웃는 입과 달리 눈과 코가 비틀렸다. 힉하고 조세핀이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케이트는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하녀의 얼굴이 변해가는 것을 지켜봤다. 눈코가 비틀리더니 천천히 다른 사람의 얼굴로 변해갔다. “당신!” 하녀의 얼굴이 완전히 다른 사람의 얼굴이 되자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에스메랄다가 거기 서 있었다. “당신, 당신도 마녀였어요?” 케이트의 물음에 에스메랄다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녀는 허리를 잡고 깔깔대며 웃음을 터트렸다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런, 아가야. 당연히 이 여자는 마녀가 아니란다.” 이 여자? 자신을 지칭하는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단어에 케이트와 조세핀은 입을 딱 벌렸다. 에스메랄다는 양팔을 벌리더니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이런 멍청한 여자가 마녀일 리가 없잖니?” 에스메랄다는 그렇게 말하며 낄낄대며 웃었다. 에스메랄다 호건이 마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런 여자가 마녀라면 마녀 망신이 따로 없다. “하지만 마녀가 아니라서 조금 더 편했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괜찮은 몸이다. 나이에 비해 관리를 잘해놔서 체력도 근력도 나쁘지 않았다. “당신, 누구야?” 드디어 케이트가 그녀가 에스메랄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물었다. 에스메랄다는 씨익 웃었다. “이 여자가 정신을 놓아서 내겐 퍽 다행이었단다.” 에스메랄다가 한 발짝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케이트와 조세핀이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더욱 깊게 찢어졌다. “당신! 스미스 양을 해치려 하면 로엔 경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조세핀의 외침에 에스메랄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평범하고 아무 힘도 없는 계집에게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이런, 다시 못생겨져서 못 알아봤지 뭐야. 다시 못생겨진 기분이 어때?” 그녀의 말에 조세핀과 케이트는 그녀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두 여자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래. 나란다, 아가.” 마녀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흘러나왔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던 조세핀은 등에 닿는 화분에 헉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함정이었다.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하지? 그녀가 망설이는 사이 조세핀이 화분의 흙을 한 움큼 집어 마녀에게 뿌리며 소리쳤다. “도망쳐요!” 예상치 못한 공격에 마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 케이트와 조세핀은 양옆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커다란 화분 덕분에 두 사람의 몸을 숨길 수가 있었다. 마녀는 고개를 돌려 사라진 케이트와 조세핀을 확인하고 다시 씨익 웃었다. 독 안에 든 쥐는 바로 이런 걸 보고 말하는 거지. “어디, 게임을 시작해 보자꾸나.” ============================ 작품 후기 ============================ 인생 처음 해본 고등어 조림이 성공했습니다. 심지어 맛있어요. 오늘부터 백주부님을 존경합니다. 00299 11. 저주 =========================================================================                            퍽 하고 커다란 화분이 느닷없이 박살 났다. 조세핀은 반사적으로 머리를 끌어안았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아서 다행이다. 소리를 냈다면 그녀가 어디에 숨었는지 마녀가 발견했을 것이다. 그녀가 있는 쪽에서는 케이트의 모습이 보였다. 케이트는 테이블 아래 몸을 끌어안고 굳어있었다. 괜찮아요? 조세핀이 입 모양만으로 물었지만,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어디어디 숨었나~.” 에스메랄다의 모습을 한 마녀가 흥겨운 듯 노래를 부르며 다가왔다. 마녀가 걸을 때마다 가까운 곳에 있는 화분이 퍽 소리를 내며 깨졌다. 마녀가 살아 있었다. 케이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앉아있었다. 믿을 수가 없다. 마녀는 죽었다. 이안이 죽였다. 죽이는 걸 봤다. 마녀가 이안의 검에 찔려 쪼그라드는 것까지 확실하게 봤다. 마녀가 흡수한 마력들이 펑하고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까지 케이트는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런데 그 마녀가 여기에, 에스메랄다의 얼굴을 하고 서 있다. 거짓말. 케이트는 믿을 수가 없어 마녀를 힐끔 쳐다봤다. 에스메랄다의 얼굴이다. 아니, 에스메랄다의 몸을 차지했다. 그전에는 하녀의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호건 부인의 방에 죽어있었다는 하녀는 그 하녀였겠구나. 케이트는 탁하고 맥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녀를 죽이려는 마녀는 죽었고 그녀는 살아남았다. 해피엔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직도 마녀는 살아남았고 그녀를 노리고 있다. 히스테리가 발작처럼 일어나 케이트는 입을 꽉 막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곧 가라앉았다. 멍하니 히스테리를 일으킬 때가 아니다. 마녀는 죽지 않았다. 누군가의 모습으로 분해 그녀를 속였다. 앞으로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케이트는 고개를 털었다. 이런 생각은 아직 하지 말자. 일단은 도망쳐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안과 제이드가 곧 두 사람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찾으러 올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와 조세핀이 온실에 있다는 건 모를 테고, 이 넓은 집에서 두 사람을 찾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알아서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하인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없다. 상대가 평범한 살인마라면 하인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지만 마녀라면 오히려 하인들이 위험하다. 평범한 살인마라니. 케이트는 자신의 생각에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됐나. 평범한 살인마라니.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조세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입술이 물었다.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창문. 케이트는 조세핀이 보일 정도로 과장되게 창문이라고 입을 벙긋대며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향하는 곳을 따라간 조세핀의 시선이 커다란 창문에 닿았다. 창문이 열리면 창문을 통해 빠져나가면 된다. 열린다면 말이지만. 두 사람은 마녀를 피해 조심스럽게 온실 가장자리로 기어갔다. 다시 한 번 퍽 하고 화분이 터졌다. 케이트는 머리를 끌어안고 엎드렸다가 뒤를 돌아봤다. 곧이어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화분이 터지는 게 보였다. 마녀는 불그스름한 것이 보이는 데로 공격하고 있었다. 에스메랄다의 입이 양옆으로 찢어진 게 보여 케이트는 다시 한 번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 사이 조세핀이 먼저 온실 벽에 닿았다. 온실은 창문은 많았지만 전부 닫혀 있었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창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아당기다가 포기하고 다음 창문으로 향했다. 정원사가 어찌나 꽉 닫아놨는지 조세핀의 힘으로는 열리지 않았다. “그만 포기하렴, 아가.” 마녀가 에스메랄다의 목소리로 깔깔대고 웃으며 말했다. 널 구해줄 기사님은 없어. 그 소리에 케이트는 울컥 화가 났다. 그녀는 기사 따위를 기다리는 게 아니다. 누군가 도와주면 좋지만 마냥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린 적은 없다. 이게 마녀가 죽었다고 생각한 안일함의 대가라면 너무 가혹하다. 마녀는 그녀의 눈앞에서 분명히 죽었단 말이다! 다시 한 번 히스테리가 일어날 것 같아 케이트는 몸을 끌어안았다. 그 순간 퍽 하고 마녀의 옆에 있던 화분이 깨졌다. “어머, 화났니?” 마녀는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며 말했다. 방금 공격은 마녀의 소행이 아니다. 달콤한 계집애가 나름대로 공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역시 무르다. 이렇게 노출된 목표물을 맞히지 못하고 고작 주변에 터졌을 뿐이다. 케이트는 마녀 주변에 화분이 터지는 것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이번 건 그녀가 했다. 그녀도 확실히 느꼈다. 자신이 했다는 걸.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다. 케이트는 재빨리 조세핀에게로 기어갔다. “안 열려요?” “네.” 약간 낙담한듯한 목소리가 조세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녀는 마녀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케이트에게 물었다. “우리, 둘 다 죽이려는 걸까요?” 당신은 괜찮을 거라고 말하려던 케이트는 입을 다물었다. 마녀가 노리는 건 아마도 그녀, 케이트일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으니까. 하지만 조세핀은 무사할 거라고 생각할 수 없다. 마녀는 케이트를 공격하기 위해 이안을 죽이려 했다. 케이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조세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도 자신만은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녀는 잔인하다. 약간의 아름다움을 누린 대가로 조세핀의 젊음을 가져갔다. 마녀가 얼마나 잔혹한 존재인지 조세핀은 그때 확실히 깨달았다. 다시 그녀의 젊음을 가져가려는 건 아닐까. 퍼뜩 떠오른 생각에 조세핀은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마녀는 죽었다고 했는데. 하지만 그녀의 충격은 케이트보다는 덜했다. 적어도 그녀는 눈앞에서 마녀가 죽는 걸 본 게 아니다. 낙담하는 조세핀의 얼굴에 케이트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녀는 케이트만 아니었다면 마녀와 엮일 일이 없었다. 마녀가 조세핀을 노린 건 그녀가 케이트와 아는 사이이고 큐바인 하우스에 살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꼭 여기서 내보내 줄게요.” 케이트의 다짐에 조세핀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케이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 몰랐다. 이번에는 조세핀이 죄책감이 들었다. 케이트가 모르는 게 하나 있다. 마녀가 조세핀을 노린 건 그녀가 케이트와 가까웠고 큐바인 하우스에 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케이트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 예쁘장하고 부자에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케이트를 질투했다. 그리고 지금도 질투하고 있다. “아뇨.” 조세핀은 케이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같이 도망칠 거예요.” 케이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옆에 있던 화분이 퍽 하고 터졌다. 마녀가 물었다. “이제 끝났어?” 비스마르크의 방은 비어있었다. 노크해도 아무 대답이 없자 이안은 예의를 저 멀리 던져버리고 문을 열었다. 조바심에 제이드가 외쳤다. “조!” 아무도 없다. 조세핀과 케이트는커녕 비스마르크도 없었다. 설마 비스마르크도 납치당했나? 하는 생각이 이안의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집사가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내밀었다가 예상하지 못한 인물에 놀라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여기, 조세핀과 스미스 양은 안 왔습니까?” “조세핀, 코트 양 말씀이십니까?” 여기서 조세핀과 케이트를 왜 찾는단 말인가. 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여긴 주인님의 방입니다만.” “방주인은 어디 갔습니까?” 이번에는 이안이 물었다. 방주인? 예의 없는 호칭에 가볍게 인상을 찡그렸다가 펴며 칼이 말했다. “어르신께서는 로알 씨와 대화 중이십니다.” 말이 대화지 진료나 마찬가지다. 로알은 파티의 소란스러움을 틈타 대화를 명목으로 비스마르크의 상태를 살펴보려 하고 있었다. “거기 혹시 조세핀과 스미스 양도 있나요?” 제이드의 질문에 칼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비스마르크가 로알에게 자신의 상태를 순순히 말하는 건 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케이트와 조세핀이 곁에 있다면 로알과 비스마르크의 담소는 순식간에 깨졌을 것이다. “아니요. 설마, 두 분도 사라지신 겁니까?” 이안과 제이드가 대답하기 전에 칼이 하인을 불렀다. 아가씨를 찾아! 그의 외침에 하인이 달려나갔다. 차라리 이게 낫다. 제이드는 허탈한 표정으로 이안을 쳐다봤다. 그와 이안 둘만으로는 케이트를 찾을 수가 없다. 찾아서 별일 없다면 다행이지만 두 여자에게 문제가 생긴 거라면 빨리 찾아야 한다. “언제 어디서 사라지셨습니까?” 칼의 질문에 이안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어떤 하녀가 두 사람을 데려가는 걸 봤다고. 칼은 바로 하녀들을 소집했다. 아무도 케이트를 부르러 간 사람은 없었다. “홀에 들어가는 건 금지인걸요. 이렇게 손님이 많은데 갔을 리가요.” “아가씨께 꼭 전달할 말이 있다면 남자들에게 부탁했을 거예요.” 자연스럽게 칼은 마지막으로 케이트를 봤다는 하인을 불러왔다. 대니얼은 바짝 긴장해서 불려 왔다. 뭔지 몰라도 그가 잘못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가씨를 모시러 간 하녀가 누구였는지 기억나나?” “하녀요?” 대니얼은 어리둥절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사람들의 형형한 눈빛에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그 하녀, 이름을 아나?” 이안이 다가오며 물었다. 힉. 대니얼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어, 아마, 매들린이었나?” 칼의 눈이 커졌다. “거짓말 말게!” “네? 제가 왜 거짓말을,” 갑자기 달려든 집사의 모습에 대니얼은 다시 뒤로 물러나다가 넘어질 뻔했다. 늘 침착하던 집사와 다른 모습에 제이드가 물었다. “매들린이 누굽니까?” “호건 부인을 돌보는 하녀입니다.” 호건 부인을 돌보는 하녀? 이해가 늦은 제이드와 달리 이안은 바로 뛰쳐나갔다. 그는 바로 이 층의 모든 방문을 쾅쾅 열기 시작했다. “그 하녀가 누군데요?” 어리둥절한 제이드에게 칼이 새하얀 얼굴로 말했다. “부인의 방에서 발견된 죽은 하녀 말입니다. 그녀가 매들린입니다.” 다음 순간 제이드 역시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그는 이안과 반대쪽 복도를 뛰어 다니며 문을 열어 살피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술 한 잔 해쑴다... 그냥 자려다가 내일 일이 있어서 업뎃을 못한다는 게 생각나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다음주에 만나요 00300 11. 저주 =========================================================================                                      “젠장, 말이 돼? 죽은 여자가 어떻게 나타나냐고!” 쾅! 하고 열린 문은 힘을 이기지 못해 반대편 벽에 부딪혔다가 튀어 돌아왔다. 마지막 방까지 전부 확인한 이안은 계단으로 향했다. 그는 난간을 잡고 위일지 아래일지 생각하며 말했다. “마녀겠지.” “마녀는 죽었잖아!” 네가. 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안은 알아들었다. 그가 마녀를 죽였다. 케이트를 노리던 마녀를. “다른 마녀일 수도 있다.” 또 다른 마녀가 나타나서 케이트를 노리려는 걸 수도 있다. 케이트는 강력한 능력을 가진 마력 보유자이고 그 능력을 탐내는 마녀가 또 나타날 수도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제이드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기겁해서 외쳤다. “마녀가 또 있다고?” 백 년 전, 힘의 반란 이후로 뮈엘라의 마법사는 모두 숨어 들어갔다. 마법은 극소수의 사람만 배울 수 있게 되었고 마녀로 태어난 사람은 자신이 마녀인지도 모르고 살다 죽었다. 자신이 마녀라는 것을, 마녀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들은 은밀하고 단단하게 뭉쳐 서로의 존재를 감췄다. 당연히 뮈엘라에서 마법사와 마녀는 드물어졌다. 아니, 드물어 보였다. 케이트를 노리던 그런 강력한 마녀의 존재는 재앙에 가깝다. 그런 강력한 마녀가 둘이나 존재한다는 말을 제이드가 공포로 받아들인 건 당연했다. 이안은 말도 안 된다고 외치는 제이드를 무시하고 생각했다. 케이트를 노리던 마녀는 그가 죽였다. 확실한가? 그는 검을 찔러 넣던 감촉을, 검으로 만든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가던 마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마녀가 아니라면 새로운 마녀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마녀가 어떻게 케이트의 존재를 알고 어떻게 이 집에 들어온 걸까. “레인포레스트 경을 모셔오게.” 이안은 일 층으로 내려가며 집사에게 외쳤다. 안타깝게도 에녹은 오늘 오지 않았다. 케이트가 초대했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케이트가 파티가 끝나면 큐바인 하우스로 나간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집사는 직접 에녹을 데려오기 위해 뛰어 나갔고 제이드는 이안과 함께 일 층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에요?” 홀 안쪽에서 손님 몇 명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질문을 받은 하인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자 그건 바로 손님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가 되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있나 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파티에는 손님들이 즐길 수 있는 것들을 몇 가지 준비하기 마련이다. 곡을 연주하거나, 간단한 연극을 하기도 하고 화가를 초대해 즉석에서 간단한 초상화를 그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하지 않는 손님들은 빠르게 반응했다. “스미스 양은 어딜 간 거죠?” “호건 씨가 보이지 않는데?” 하인은 재빨리 비스마르크를 찾으러 뛰어갔다. 홀 안에서 사람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퍽 하고 또다시 화분이 터졌다. 케이트와 조세핀은 어깨를 움츠렸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흙이 우수수 쏟아졌지만 둘 다 입을 꼭 다물었다. 케이트와 조세핀이 어디 있는지 마녀에게 들키면 안 된다. 마녀가 깔깔대고 웃는 소리가 온실 안에 울려 퍼졌다. 화분이 터진 탓에 휑해진 공간에 마녀의 웃음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도망칠 수 있을 거 같아?” 마녀는 즐거움인지 분노인지 모를 새된 소리로 외쳤다. 이 계집 때문에 소멸될 뻔 했다. 아슬아슬하게 죽은 제프리의 시체에 숨어들어 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운 좋게도 시체가 옮겨진 곳은 호건 저택이었고 아들의 죽음을 본 에스메랄다는 정신을 잃었다. 맨정신보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의 몸을 차지하기가 훨씬 쉽다. 어디로 도망가도 어차피 온실 안이다. 이번에야말로 그 작은 심장을 먹어 치워주지. “널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공주님.” 다시 퍽하고 화분이 터졌다. 공주님이라는 호칭에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공주님이라니, 그런 호칭을 듣기는 처음이다. 그렇게 불릴만한 삶을 살지도 않았다. “너도 마찬가지야, 호밀 빵.” 호밀 빵? 케이트와 조세핀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호밀 빵이라니, 무슨 소리야? 하지만 마녀는 자신의 호칭이 마음에 드는지 한참을 깔깔대고 웃었다. 엄청난 마력을 가진 케이트는 보기도 좋고 맛있는 케이크다. 하지만 아무 능력도 없고 예쁘지도 않은 조세핀은 호밀 빵이었다. 매일 먹기는 하지만 딱히 맛있어서 먹는 건 아닌. 마녀는 보이지 않는 조세핀을 향해 조롱을 날렸다. “미모를 경험해 보니 어때? 호밀 빵은 평생 겪어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삶이잖아? 네 옆에 있는 케이크는 바로 그 삶을 살고 있단다.” 케이크? 케이트와 조세핀은 마녀가 케이트의 이름을 잘못 발음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두 사람이 잘 못 들었거나. 하지만 다음 순간 마녀가 다시 말했다. “넌 호밀 빵이고, 저 애는 케이크야. 모든 사람이 먹고 싶어 하고 사랑하는 건 바로 케이크란다. 너는 평생 받을 수 없는 그런 대접을 받겠지.” 죽지 않는다면 말야. 마녀는 그렇게 덧붙이며 다시 깔깔대고 웃었다. 그 광기에 조세핀의 입이 굳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마녀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겠다. 케이트는 조세핀을 쳐다봤다. 마녀는 두 사람을 이간질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조세핀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도 널 좋아하지 않아. 넌 예쁘지 않고 착하지도 않으니까. 착한 척했지만 아무 소용없었지.” 상처를 후벼 파는 말이 마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만두라고,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은 조세핀의 손을 케이트가 꼭 잡았다. “네가 좋아하는 남자도 널 좋아하지 않아. 너도 알잖아? 너처럼 못생기고 아무것도 없는 여자를 어떤 남자가 좋아하겠어.” 킬리언 씨는 당신을 좋아해요. 케이트가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조세핀은 새빨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워서 죽고 싶다. 이대로 마녀에게 덤벼들면 마녀가 죽거나 그녀가 죽겠지. 어느 쪽이어도 저 괴로운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니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보렴. 너도 그 남자가 잘생기고 성격이 좋아서 좋아하는 거잖아. 안 그래? 그럼 못생기고 성격도 안 좋은 너를 그 남자가 좋아하겠어?” 그건 아니다. 조세핀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제이드가 잘생겨서 좋아하는 게 아니다. 성격이 좋은 건 모르겠지만. 그녀는 오랜 시간 제이드를 봐왔고 그 시간은 더 이상 제이드가 잘생기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충분했다. 어쩜 저렇게 못된 소리를 골라서 할 수 있지? 케이트는 울컥 화가 나서 조세핀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못됐다, 진짜. 나쁜 여자 같으니. 마음 같아서는 한 대 때리고 싶었다. 그 순간 화분이 마녀를 향해 날아갔다. 마녀가 반사적으로 팔을 휘두르자 화분은 마녀의 팔에 맞아 부서졌다. 조세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케이트를 쳐다봤다가 다시 마녀를 쳐다봤다. 분명 저쪽에 있던 화분이 마녀를 향해 날아갔다. “당신이 한 거예요?” 케이트의 몸이 얼어붙었다. 조세핀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는 머뭇머뭇 조세핀을 쳐다봤다. “다른 것도 던질 수 있어요?” “네?” “더 큰 화분을 던져요! 마녀가 쓰러지며 도망칠 수 있잖아요.” “어, 그게.” 케이트가 망설이는 사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화분이 퍽 하고 터졌다. 조세핀이 재빨리 말했다. “빨리요! 저년이 다 부수기 전에.” 온실에 있던 화분은 반 이상 부서졌다. 전부 마녀의 소행이다. 더 이상 부술 게 없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케이트가 결과를 떠올리기도 전에 다른 화분이 마녀에게 휙 날아갔다. 퍽 하고 마녀의 머리 위에서 떨어진 화분은 그녀의 몸에 닿지 못하고 부서졌다. 흙과 뿌리가 쏟아져 내렸지만 역시 마녀의 몸에 닿지 않았다. “제법 귀엽게 노는구나.” 마녀가 우습다는 듯 말하는 순간 조세핀이 속삭였다. “하나 더!” 퍽 하고 작은 화분이 마녀의 머리에 부딪혔다. 마녀가 휘청하자 조세핀과 케이트는 환호성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마녀가 자세를 바로 했다. “예쁘게 먹어주려 했더니.” 마녀가 손을 들자 화분 몇 개가 공중으로 올라갔다. 예전 같았으면 여기 있는 화분 전부를 띄울 수 있었을 텐데. 이게 전부 그 더러운 괴물 때문이다. 에스메랄다의 몸에서 숨어있는 동안 회복하긴 했지만 마녀의 힘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어서 빨리 케이트의 심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마녀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펑! 퍽! 하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빠르게 터지는 화분을 피하기 위해 케이트와 조세핀은 그 자리에 엎드렸다. 케이트가 화분을 몇 번 날려 보냈지만 전부 마녀가 띄운 화분에 부딪혀 마녀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박살 났다. “저쪽이다.” 희미하게 뭔가 터지는 소리에 이안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는 그 한마디만 남긴 채 제이드를 기다리지 않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어? 어디?” 제이드가 물어보며 따라왔지만 이안도 어디에서 소리가 나는지 몰랐다. 그는 그저 연달아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가는 것뿐이다. 마녀가 온실 안의 화분을 빠르게 부수기 시작한 게 이안에게는 다행이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리에 이안이 위치를 찾기가 쉬웠다. 하지만 케이트에게는 불행이었다. 점점 그녀와 조세핀이 숨을 화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지막 화분이 공중에 떠올랐다. 윽 하고 신음을 억누르는 케이트와 하얗게 질린 조세핀의 얼굴이 마녀의 눈에 보였다. 마녀는 새빨갛게 칠한 입술을 양옆으로 찢으며 웃었다. “거기구나.”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갑자기 가족들이 집에 있는 모과가 썪기 전에 모과차를 만들어야 한다며 썰기 시작해서... 전 모과차 안마시는데...OTL 00301 11. 저주 =========================================================================                                      힉 하고 억눌린 신음이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순간 쾅하고 엄청난 소리가 났다. “꺅!” 조세핀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케이트가 소리난 쪽을 쳐다보는 사이 마녀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다시 한 번 쾅! 하고 문이 들썩였다. 문이 들썩이고 있다. 그것을 봤을 때 케이트는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하지만 문밖에 있는 게 하인들이라면 오히려 그들이 위험하다. 소리를 질러야 하나? 아니면 차라리 하인들이 모르고 떠날 수 있도록 조용히 해야 할까? 케이트가 망설이는 사이 문밖에서 이안이 외쳤다. “케이트!” 이안이다!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구해주길 기다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안심이 됐다. 반대로 마녀는 칫 하고 혀를 찼다. 더러운 괴물, 역겨운 괴물 같으니. 마녀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훅하고 불이 꺼졌다. 힉 하고 조세핀이 신음을 삼켰다. 케이트는 그녀를 끌어안고 외쳤다. “이안! 여기에요!” 아주 잠깐 조용해졌던 바깥이 요란해졌다. 남자들이 외치는 소리와 이안이 쾅쾅하고 문에 몸을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젠장, 이리와!” 마녀가 손을 뻗었다. 케이트가 조세핀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끌어안았을 때 조세핀 역시 같은 행동을 했다. 그녀는 케이트를 보호하기 위해 마녀와 반대편으로 밀어냈다. “코트 양!” 에스메랄다의 손이 조세핀의 머리카락을 잡고 끌어당겼다. 머리카락이 뜯기는 고통에 조세핀은 눈물을 찔끔 흘렸다. 마녀는 손안에 들어온 것이 케이크가 아니라 호밀빵이라는 것을 깨닫고 혀를 찼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왜 그런 짓을? 케이트는 자신이 아니라 조세핀이 마녀에게 잡혀있는 것을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닫자 조세핀은 덜덜 떨었다. 에스메랄다의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꽉 잡고 있어서 떨어질 수가 없었다. 마녀에게 잡아먹힐 거야. 조세핀은 눈을 꼭 감았다. 에스메랄다의 숨결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왜? 대신 죽어주려고?” 마녀는 깔깔대며 웃었다. 조세핀의 젊음을 가져간 건 꿩 대신 닭이었다. 마력이 있는 여자를 찾을 수 있을 때도 있고 찾을 수 없을 때도 있다. 찾을 수 없을 때도 마녀는 마력을 흡수해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래서 마녀는 마력 대신 타인의 생명력을 가져갔다. 가성 비는 낮지만, 한 동안은 그럭저럭 버틸 수 있으니까. 케이트가 질 좋고 오래가는 양초라면 조세핀은 냄새와 연기가 많이 나는 저급 양초다. “코트 양을 놔줘!” 나무뿌리가 마녀의 몸에 날아와 부딪쳤다. 이어서 케이트가 흙을 집어던졌다. 마녀는 어이가 없어서 픽 웃었다. “너희들은 이게 문제야. 엄청난 마력을 가지고 있으면 뭐해? 쓰지도 못하는데. 그럴 거면 내가 가져가는 게 더 낫잖아.” 마녀가 손가락 하나를 까딱하자 케이트 주변에 있던 부서진 화분이 공중에 떠올랐다. 마녀라면 손으로 들어 올리는 게 아니라 마법으로 떠올려야 할 거 아닌가. 뮈엘라의 마력보유자들은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건 커녕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 케이트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안 쓸 거라면 마녀가 쓰겠다는 게 뭐가 나쁜가. 그때 쾅!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나며 온실 벽 흔들렸다. 문이 휘어져 약간의 틈이 생겼다. “케이트! 괜찮아?” 이안이 소리쳤다. 바깥에서 하인들이 하나, 둘 하고 구령을 맞추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한 번 쾅!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하인들은 커다란 통나무를 가져와 문을 부수려 하고 있었다. “빨리빨리 하자꾸나, 아가.” 마녀는 히쭉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대편 손에는 여전히 조세핀의 머리카락이 잡혀 있었다. “이 호밀빵과 네 마력을 교환하자.” “교환?” 주먹을 꽉 쥐고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앞뒤 재지 말고 마녀에게 돌진해서 조세핀을 구해야 할지, 일단 달아나서 조세핀을 구할 방법을 생각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였다. 마녀는 새빨간 입술로 둥글게 호를 그리며 말했다. “그래. 네 마력을 내게 주면 이 못생긴 계집은 놓아주마.” 조세핀의 귀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못생긴 계집이라는 말이었다. 못생겼다니! 하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화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녀의 외모 품평이 아니다. “거짓말! 마력을 주면 스미스 양도 늙을 거잖아!” 조세핀의 외침에 마녀의 고개가 그녀에게 돌아갔다. 늙는다고? 마녀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멍청한 소리! 너와 저 아이가 같은 줄 아니?” 어라?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그녀가 마력을 줘도 그녀에게는 아무 피해가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케이트로서는 그냥 주는 게 좋다. 뮈엘라에서 마력보유자라는 것을 전혀 좋지 않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다른 존재의 마력을 흡수하는 방법이 심장을 먹는 것이라던 로즈마리의 말을 떠올렸다. “늙지 않고 죽겠지.” 냉정한 케이트의 말에 마녀는 코웃음 쳤다. 그걸 알고 있다니, 할 수 없네. “선택하렴. 네가 죽을지, 이 애가 죽을지.” 다시 한 번 쾅! 하고 문이 흔들렸다. 조금만 더 버티면 문이 열리지 않을까? 케이트는 초조하게 문 쪽을 쳐다봤다. 그때 조세핀이 꺅하고 비명을 질렀다. “내가 기다려 줄 것 같아?” 마녀의 손이 조세핀의 가슴 위에 올라가 있었다. 손끝이 가슴을 찌르고 들어와 조세핀은 저도 모르게 몸부림쳤다. “네 심장과 이 계집애의 심장이란다.” 천천히 마녀의 손이 자신의 가슴으로 파고들어 오자 조세핀이 소리쳤다. “스미스 양을 죽이고 나도 죽일 거잖아!” “그야 그렇지.” 마녀는 히쭉 웃었다. 케이트의 심장을 먹고 부족하면 조세핀의 심장도 먹을 수 있다. 다시 쾅! 하고 문이 흔들렸다. 마녀는 문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하지만 케이크를 먹는 사이 문이 열리면 호밀 빵은 버리고 갈 수도 있잖니?” 그 말을 듣자 조세핀의 마음이 흔들렸다. 운이 좋다면 그녀가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케이트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는 마음을 굳혔다. “반대로 날 죽이는 동안 문이 열리면 스미스 양은 도망칠 수 있다는 거지?” 뭐?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조세핀을 쳐다봤다. 지금 그녀의 말은 그녀가 죽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조세핀은 마녀의 손을 꽉 잡고 외쳤다. “도망쳐요!” 그렇게 말한다고 도망칠 수 있을 리 없다. 조세핀의 의도를 알아차린 마녀가 조세핀을 떼어내려 했지만 오히려 그녀는 마녀를 붙잡고 늘어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케이트는 망연해서 조세핀과 마녀의 몸싸움을 쳐다봤다. 조세핀을 두고 도망칠 수 없다. 그렇다고 그녀가 여기서 마녀와 싸울 수도 없다. 없다고? 이안이 마녀를 죽였다. 하지만 마녀는 살아났다. 케이트는 지금까지 살인을 한 적이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한 건 아니었다. 그녀가 의도한 게 아니었고 마법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죽였다는 자각도 적었다. 누군가를 다치게 한다는 게, 그리고 그걸로 누군가가 죽을 수 있다는 게 케이트에게는 공포스러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마녀를 죽이거나 그녀와 조세핀이 죽거나. 케이트는 처음으로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그녀의 손이 치마 속에 감춰둔 검을 더듬었다. “케이트!” 틈 사이로 이안의 외침이 흘러들어왔다. 아가씨! 하고 하인들이 부르는 소리도. 하지만 케이트는 치마 속으로 손을 넣으며 마녀와 조세핀에게로 접근했다. 어딜, 어떻게 찔러야 하지? “코트 양, 숙여요!” 케이트가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조세핀이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숙였지만 마녀가 더 빨랐다. 마녀가 손을 뻗자 케이트의 손에 있던 검이 뭔가에 부딪혀 날아갔다. 앗. 케이트는 재빨리 검을 찾으러 달려갔다. 그 사이 조세핀도 마녀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이 년들이. 마녀는 숨을 헐떡이며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겼다. “내, 반드시 네년의 심장은 먹고 말 테다.” 케이트 때문에 소멸될 뻔 했고 시체에 숨어 간신히 다음 육체를 찾았다. 그리고 육체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을 모으느라 이 정신 나간 여자 몸에서 버텨야 했다. 마녀는 이를 갈며 케이트를 노려봤다.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면 달아나서 다른 마력보유자의 심장을 뜯어 먹는 게 훨씬 현명한 판단이다. 하지만 케이트의 심장을 반드시 먹고 말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이 계집의 마력이 얼마나 대단한가와 달리 자신을 이토록 고생시킨 년놈을 죽여서 그 시체를 씹어 먹어야 분이 풀릴 것 같다. “도와주세요!” 조세핀이 문으로 달려가 문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제이드가 그녀의 손을 알아봤다. “조! 조!” 사람들이 문틈으로 손을 넣고 문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삐걱삐걱하고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면서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체 왜 안 열리는 거지? 마녀는 끙 하고 신음하며 손가락을 까딱했다. 뭔가가 조세핀의 목덜미를 잡고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꺄아악!” 조세핀의 비명에 제이드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문을 닫아주는 것도, 그녀를 잡아당기는 것도 모두 마녀의 힘이다. 검을 발견한 케이트가 손을 뻗는 것을 본 마녀는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검이 주르륵 반대쪽으로 미끄러져 갔다. “이익!” 그와 동시에 조세핀을 잡아당기던 힘이 약해졌다. 문을 잡고 있던 힘도 약해져 사람들이 영차! 하고 잡아당기는 순간 문이 휘청했다. ============================ 작품 후기 ============================ 와, 잘하면 다음주에 완결 되겠네요. 신난다~ 어제 한 모과청은 복선이었습니다. 오늘 엄청난 사건이 터졌거든요. 산소를 차단한다고 병을 뒤집어 놨는데 병 하나가 틈이 좀 벌어져 있었나 봐요. 오늘 설탕물이 다 흘러나와서...네...복선이었습니다. 00302 11. 저주 =========================================================================                                      “젠장.” 마녀는 숨을 헐떡이며 다시 집중했다. 이 정도는 눈 감고도 했는데. 이게 전부 케이트 때문이다. 그리고 더러운 괴물 때문이다. 내 반드시 저년의 심장을 먹고 말테다. 마녀는 이를 박박 긁었다. 에스메랄다의 손가락 끝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 몸의 생명력까지 짜내고 있는 탓이다. 케이트는 허둥지둥 검을 찾았다. 테이블 아래로 들어간 검은 손이 닿지 않았다. 간신히 그녀의 손끝이 닿았을 때 마녀의 마법이 그녀의 몸을 들어 올렸다. 호밀빵보다는 수월하군. 마녀는 혀를 차며 생각했다. 조세핀보다 케이트가 가볍기 때문에 마력 사용이 덜했다. 그렇다고 에스메랄다의 몸이 부서지지 않는 건 아니다. 피부가 바짝 마르기 시작한 게 보였다. 왼쪽 팔이 손끝에서 어깨까지 누군가 툭 치면 바스라질 것처럼 바짝바짝 말랐다. “이익!” 케이트는 손을 힘껏 휘둘렀다. 손끝에 닿은 검이 테이블 바깥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그녀는 곧이어 마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녀의 몸을 잡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마법은 육체적인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케이트의 눈에 똑같이 몸부림치는 조세핀이 들어왔다. 아무리 몸부림쳐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케이트는 마녀를 노려봤다. 뭐든 좋으니 그녀를 공격했으면 좋겠다. 조금씩 케이트 주변에 있던 부서진 화분 조각이나 나무뿌리 같은 것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물이 끓는 것처럼 임계치에 도달한 케이트의 마력은 그녀의 주변에 있는 자잘한 것들을 공중에 띄웠다. 그리고 파도처럼 케이트와 마녀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 공중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젠장.” 마녀는 조세핀을 잡고 있던 힘을 풀었다. 아슬아슬하게 에스메랄다의 몸 주변에 실드를 친 순간 마녀와 케이트 사이에 떠올라 있던 것들이 화살처럼 마녀에게 쏘아져 나갔다. 케이트가 아직 자신의 힘을 완전히 컨트롤할 수 없는 게 마녀에겐 다행이었다. 대부분 마녀의 몸을 맞추지 못하고 비켜 지나갔다. 하지만 워낙 많은 것이 날아간 탓에 실드를 뚫고 마녀를 맞추는 것도 있었다. 날카로운 화분 조각에 에스메랄다의 어깨와 뺨에 상처가 생겼다. 마녀는 피 냄새를 맡고 입술을 비틀었다. 어차피 버릴 몸이다. “조!” 쾅! 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온실의 문이 부서졌다. 제일 먼저 제이드가 뛰어 들어왔다. 마녀가 그쪽을 쳐다보는 사이 케이트는 검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가씨!” “부인!” 하인들이 케이트와 에스메랄다를 보고 외쳤다. 그들 뒤로 손님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밀려들었다. “여러분, 물러나세요!” 제이드가 외쳤다. 하필 집사가 자리를 비운 탓에 하인을 총괄할 사람이 없다. 이안은 온실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자꾸만 그의 앞을 막는 사람들에게 짜증 나서 외쳤다. “비켜.” 그 사이 케이트는 검을 움켜잡았다. 여성용 단검인 게 그녀에게 다행이었다. 이안이 쓰는 검이었다면 그녀는 들어 올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케이트는 마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마녀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 두고 볼 마녀가 아니다. 마녀는 손을 뻗었다가 왼손까지 갈라지기 시작하는 걸 깨달았다. 점점 마력이 떨어지고 있다. 어서, 빨리. 마음이 급해졌다. 마녀가 손을 휘두르자 케이트의 몸이 휘청였다. 동시에 온실 문이 다시 닫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 이안은 자신의 앞에 있던 여자를 달랑 들어 뒤로 던지고 있었다. 나가떨어진 여자들은 이안에게 항의하려다 쾅 소리와 함께 온실로 들어가던 사람들이 문에 부딪혀 크게 다치는 것을 보고 이안이 자신을 구해줬다고 착각했다. “다 꺼져! 심장을 뽑아먹기 전에!” 마녀의 새된 소리에 사람들이 으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하인들은 다친 사람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케이트는 다시 마녀의 마법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역시 소용없었다. 그녀가 움직인 화분 조각이 에스메랄다의 얼굴에 부딪혔지만 마녀는 케이트를 놓아주지 않았다. 제이드는 조세핀을 끌어안고 잡아당겼다. 두 사람의 몸이 달아나는 사람들에게 휩쓸려 비틀대다 넘어졌다. 이안은 사람들을 해치고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마녀와 케이트는 서로에게 보이는 거라면 뭐든 날리고 있었다. 화분 조각, 나무뿌리, 작은 의자와 테이블까지. 어느 순간 마녀는 케이트를 공격하기를 멈추고 그녀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케이트의 몸이 공중으로 둥실 떠올랐다. “헉!” 케이트의 신음에 이안은 그녀에게 달려가다 멈췄다. 그가 케이트에게 달려간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는 그대로 에스메랄다에게 향했다. 그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아차. 검이 없다. 호건 가의 파티는 무기 소지가 금지였기 때문에 입구에서 그의 검을 맡기고 들어왔다. 이안은 아쉬운 대로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마녀는 그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고작 나뭇가지로 공격하려 하다니. 마녀가 손을 들자 이안이 든 나뭇가지가 뱀으로 변했다. 순식간에 거대한 뱀이 되어 흘러내리는 나뭇가지를 이안은 인상을 쓰며 집어 던졌다. 마녀는 거기서 더 나아가 이안을 공격하려 했다. 이안이 던진 뱀이 샤악 하고 소리를 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안 돼!” 케이트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뻗자 뱀이 그대로 돌이 되어 버렸다. 이런. 이안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려 누가 보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다들 도망치느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제이드는 조세핀을 끌어안고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마법 싸움은 위험하다.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케이트가 위험하다. 이안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돌이 된 뱀을 마녀를 향해 걷어찼다. 돌은 마녀의 팔에 맞아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마녀의 팔도 후두둑 피부가 떨어져 나갔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흐르는, 그런 게 아니었다. 케이트는 마치 그림의 물감이 말라 떨어지는 것처럼 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마녀의 몸은 말 그대로 부서지고 있었다. 케이트가 놀란 사이 마녀는 이안에게 화분을 집어 던졌다. 이안이 팔을 들어 막느라 시야가 가려지자 마녀는 케이트에게 돌진했다. 아슬아슬하게 케이트가 옆으로 피한 덕에 마녀의 손이 그녀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케이트의 팔뚝에 에스메랄다의 손톱자국이 남았다. 단단한 손톱이 그녀의 팔뚝을 가볍게 찢었다. 가늘게 스며 나오는 피에 마녀는 히죽 웃었다. “저 괴물은 언젠가 널 잡아먹고 말 거야.” 마녀는 손톱에 묻은 케이트의 피를 할짝이며 나직하게 말했다. 케이트와 이안은 마녀가 말하는 괴물이 이안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그가 흡수자라서요? 상관없어요. 난 이안을 믿어요.” 케이트의 말에 에스메랄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웃는 것도 같고 화내는 것도 같다. 기묘한 표정을 한 채 마녀는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인간이 아니라 해도?” 이안은 얼어붙었고 케이트는 무슨 소린지 몰라 눈을 깜빡였다. 굳은 이안의 얼굴을 본 마녀가 깔깔대고 웃었다. “모르는 줄 알았는데.” 더 잘됐다. 마녀는 배를 잡고 웃었다. 모를 줄 알았다. 자신이 자연적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는 걸. 하지만 괴물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더 좋은 일은 마녀의 케이크가 그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다. “아가야, 네 남자는 인간이 아니란다. 적어도 남자의 씨로 만들어지지 않았어.” 케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동시에 알 것도 같았다. 그녀는 다시 이안을 쳐다봤다. 그 사이 마녀는 천천히 케이트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이안, 무슨 소리예요?” 이안은 인상을 쓴 채 케이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도 무슨 일인지 모르는데 그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네 남자는 네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이래도 그를 믿어?” 마녀의 말에 이안이 외쳤다. “난 케이트에게 손대지 않아.” “이 달콤한 아가는 네가 인간이 아니라고는 생각도 못 했잖아?” 마녀의 도발에 이안이 분노했다. 그가 달려들자 마녀는 식겁해서 물러났다. 하지만 곧 씩 웃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의심을 심었다. 이게 시작이다. “너도 나와 똑같아. 우린 둘 다 저 애의 마력을 탐내고 있어.” 이안의 동물적인 감각은 마녀가 지금 덫을 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케이트에게 시선을 던졌다. 마녀와 그녀 사이의 거리는 아직 떨어져 있다. 하지만 아까보다 확실히 가까워졌다. 그는 천천히 케이트에게 다가갔다. “헛소리.” 케이트가 움찔해서 이안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녀가 할퀴고 지나간 케이트의 새하얀 팔뚝에 거무스름한 피딱지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과연 헛소리일까?” 마녀는 이죽거리며 말했다. “네가 저 아이를 정말로 사랑한다고 생각해?” 케이트와 이안의 시선이 부딪쳤다. 마녀는 두 팔을 펼치며 말했다. “저 아이에게 마력이 사라져도 여전히 사랑한다고 착각할 수 있을까?” 이미 케이트와 이안이 한 이야기다. 이안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마녀에게 마력이 사라진다는 건 죽는다는 말일 텐데. 죽을 때까지 사랑하면, 충분한 거 아닌가?” ============================ 작품 후기 ============================ 제가 올리려고 했는데요~ 조아라가~ 접속이 안돼서요~ 00303 11. 저주 =========================================================================                                      뜻밖의 대답에 마녀는 움찔했다. 괴물이 그렇게 나올 줄 몰랐다. 영원한 사랑, 사랑의 본질. 이따위 쓸모없는 이야기를 좀 더 할 줄 알았다. 그때 이안이 한 발짝 내밀었다. 그는 마녀가 움찔해서 뒤로 물러나는 걸 보고 몇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에스메랄다의 몸을 차지했어도 여전히 마녀에게 이안의 마력흡수자로서의 능력은 위험한 모양이다. 그리고 마녀에게 남은 힘이 없다는 것. 이안은 케이트에게 속삭였다. “검을 줘.” 검? 이안이 케이트에게 빌려준 검을 말하는 거다. 케이트는 살그머니 쥐고 있던 검을 이안에게 내밀었다. 여성용 검이라 이안에게는 너무 짧고 가벼웠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이걸 사용할 줄은 몰랐는데. 빌려준 에드워드도 몰랐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이 검은 그가 에드워드 에반스 공작의 밑에서 일한다는 표식에 불과했으니까. “그 검으로 이 몸을 찌르려고?” 이안이 검을 받아드는 것을 본 마녀가 낄낄대며 물었다. 속에 있는 것은 마녀라 해도 겉모습은 에스메랄다다. 아무리 마녀를 죽인 거라고 주장해도 이안이 에스메랄다를 찌른다면 그는 케이트의 가족을 죽인게 된다. 그 사실에 이안은 잠시 멈칫했다. 그는 괜찮다. 하지만 케이트도 괜찮을까? 그가 케이트를 돌아보는 순간 마녀가 손을 뻗었다. “큭.” 순간적으로 거센 바람이 불었다. 퍽 하고 이안의 몸이 뒤로 나가떨어지면서 그가 쥐고 있던 검이 쨍그랑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이안!” 케이트는 깜짝 놀라서 이안을 불렀다. 마녀는 연달아 케이트를 향해서도 바람을 휘둘렀다. 이안과 달리 아주 가벼운 바람이었지만 케이트의 몸이 휘청였다. “마녀와 괴물이라.” 마녀는 히죽이며 케이트에게 다가왔다. 파멸의 조합이다. 괴물은 끊임없이 마력을 갈구하지만 마녀의 마력은 한정되어 있다. 에스메랄다의 손이 케이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아악!” 붉은색 머리카락이 에스메랄다의 손아귀에 한 움큼 잡혀 올라왔다. 고통에 찔끔 눈물 흘리면서 케이트는 마녀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너희는 서로를 파멸시킬 거야.” 마녀가 혀를 차며 말했다. 괴물을 사랑한 마녀는 자신의 생명력을 짜내면서까지 마력을 주고, 그 마력에 중독된 괴물은 마녀가 죽은 후에도 마력을 찾아 도시를 나라를 헤맨다. 마녀 한 명의 마력을 전부 흡수한 괴물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그 손 놔.” 이안이 으르렁대듯 말했다. 에스메랄다의 입술이 좌우로 길게 찢어졌다. 마녀는 킬킬대며 케이트의 목에 손을 댔다. “괴물 앞에서 마녀를 죽이는 것도 재미있겠어.” 케이크가 흘린 피에 미쳐가는 괴물을 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다. 마녀는 케이트의 목덜미에 얼굴을 바싹 갖다 댔다. 달콤한 냄새가 난다. 가느다란 목은 보드랍고 따듯했다. 그 안에 흐르는 피에 섞인 마력의 냄새는 괴물뿐 아니라 마녀도 군침 흐르게 할 만 하다. 케이트는 목덜미에 닿는 축축한 마녀의 숨결에 몸서리쳤다. 싫다. 그녀는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가 움직인 물건들은 마녀를 맞추지 못하고 떨어졌다. “소용없어.” 마녀는 깔깔대고 웃었다. 평소 연습을 했어야지. 보지도 않고 등 뒤에 있는 사람을 공격하는 건 마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게 뮈엘라에 있는 마력보유자들의 문제점이다. 마력이 아무리 많아도 그걸 사용할 줄 모르면 아무 소용 없다. 그때 케이트의 눈에 이안이 떨어트린 검이 들어왔다. 이리와. 케이트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보석으로 치장된 손잡이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허튼짓하지 마.” 마녀가 케이트의 목을 압박하며 외쳤다. 자신에게 하는 소린 줄 알고 케이트가 움찔하는 바람에 들썩이던 검이 다시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툭 떨어졌다. 하지만 마녀는 케이트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이안이 마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어느새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케이트는 자신의 목이 에스메랄다의 손톱에 찔려 피가 나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놀란 나머지 숨 쉬는 것도 있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다시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리와. 문득 바깥쪽이 시끄러워졌다.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세 사람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케이트는 마녀가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제길.” 마녀가 케이트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순간 이안이 덤벼들었다. 그를 피하기 위해 마녀가 케이트를 끌어안고 몸을 빙글 한 바퀴 도는 순간 온실 문이 벌컥 열렸다. “카티야!” 에녹이 왔다. 마녀는 이를 갈았고 케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만이 그 순간을 노려 마녀에게 덤벼들었다. “이안!” 마녀와 이안이 더러워진 온실 바닥을 함께 굴렀다. 케이트는 휘청거리다 주저앉았다. 이안이 위험하다. 그녀의 손에 어느새 검이 들어와 있었다. 온몸으로.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검을 쥔 채 온몸으로 마녀에게 돌진했다. 검이 뭔가에 막혔다가 뚫는 느낌이 손잡이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카티야!” “케이트!” 이안과 에녹이 동시에 케이트에게 달려들었다. 에녹보다 이안이 조금 더 빨랐다. 그는 재빨리 케이트를 끌어안고 잡아당겼다. “힉.” 핏기없는 얼굴로 눈을 크게 뜬 케이트가 멍하니 에스메랄다를 쳐다보다가 몸서리쳤다. 그녀가 에스메랄다의 몸을 찔렀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평생 이 감각을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케이트는 생각했다. 어떻게 전사들은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걸까. “아가.” 에녹은 케이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검을 놓았어도 여전히 검을 쥔 모양 그대로 굳어 있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에스메랄다에게 향했다. “피가,” 케이트는 신음처럼 내뱉었다. 검으로 찔렀는데 에스메랄다의 몸에는 피가 보이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에스메랄다가 손을 뻗었다. “너는 불행해 질 거야. 괴물과 이어진 마녀의 이야기에 해피엔딩은 없어.”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에스메랄다의 몸이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케이트는 반사적으로 이안을 끌어안았다. “어디서 감히.” 에녹은 분노해서 케이트 앞을 가로막았다. 빠르게 미라화된 에스메랄다의 몸이 뒤로 풀썩 쓰러졌다. 놀랄 정도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케이트는 눈을 크게 뜨고 에스메랄다의 시체를 쳐다보고 있었다. “죽은 건가?” 이안이 입을 열었다. 죽은 거야? 정말? 케이트가 반문하려 했을 때 에스메랄다의 시체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빛 구슬이 빠져나왔다. 빛 구슬은 비실비실 날아올랐다. 본 적 있다. 이안이 골목에서 마녀를 찔러 죽였을 때. 그때도 이런 무수한 빛이 하늘에 떠올랐다 흩어졌다. 그중에 마녀도 섞여 있었던 거구나. 에녹이 손을 내밀었지만 이안이 더 빨랐다. 그는 손을 뻗어 빛을 잡았다. 그의 손 안에 갇힌 빛이 요동치는가 싶더니 기묘한 비명이 들렸다. “끼에에에에엑.” 기묘한 비명에 케이트는 다시 어깨를 움츠렸다. 이안이 손을 펴자 그 안에 새까만 재만 남아 있었다. “죽은 겁니까?” 이안이 물었다. 에녹은 이안의 손을 들여다봤다. 세상에. 그건 마녀의 생명력이었다. 마력의 근원. 마녀의 마지막 보루. 그게 이안의 몸에 닿자 그대로 이안에게 흡수되어 버렸다. 그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런 것 같군.” “이렇게 쉽게요?” 케이트는 얼떨떨해서 물었다. 이안이 찔렀을 때도 살아남은 마녀다. 그녀가 찌른다고 죽을 것 같지가 않다. “그렇게 끈질긴 여자였는데.” “남자란다, 아가.” 이안과 케이트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에녹은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에헴 하고 기침하고 말했다. “여자가 아니야. 남자였어. 몰랐느냐?” “모, 몰랐어요.” 그녀는 더듬거리며 대답했지만 머리 한구석으로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마녀 중에는 극히 드물지만 남자도 있다. 케이트의 아버지처럼.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집사가 소리쳤다. 부서진 문밖에 하인들이 몰려와 있었다. 손님들이 안쪽을 볼 수 없도록 온실 문을 막고 선 하인과 가장 선두에 있는 칼을 보고 케이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칼에 찔려 죽은 에스메랄다와 모여 있는 세 사람. 엄청난 추문이다. 이안과 에녹은 빠르게 움직였다. 이안은 케이트를 끌어안고 에스메랄다의 시체를 사람들의 시야에서 가렸고 에녹은 두 팔을 벌리고 문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접근하지 마시오! 방금 마녀를 처리했소.” 마녀라는 말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믿을 수 없다는 반응과 그것 보라는 반응이 뒤섞였다. “저거 호건 부인 아냐?” 누군가 소리쳤다. 다른 사람보다 키가 좀 더 큰 남자는 쓰러진 에스메랄다와 복부에 꽂힌 검을 한눈에 알아봤다. “호건 부인이 죽었어?” “호건 부인이 죽었대!” “마녀가 호건 부인을 죽였어?” “아니, 검에 찔려 죽었다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안을 향했다. 검에 찔린 시체가 있으니 당연히 이안이 죽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범인은 이안이 아니라 케이트다. 케이트는 자신이 그녀를 죽였다고 말하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니, 나서려 했다. “호건 부인은 마녀에게 홀린 상태였습니다.” 이안은 케이트의 팔을 잡아 자기 뒤로 빼며 말했다. 누군가 헉 하고 소리를 냈다. 이안은 덤덤하게 이어 말했다. “그래서 제가 찔렀습니다.” “이안!” 케이트의 만류에도 이안은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다. 에녹은 이안을 한번 뒤돌아보고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수사관이 마녀를 처리했소.” 수사관이 마녀를 처리했다. 그 말은 힘을 가진 것처럼 사람들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하인들의 안내를 받아 손님들은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홀 안으로 돌아갔다.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었지만 이런 분위기로 파티가 지속될 수 있을 리가 없다. 비스마르크는 이 층 복도에서 떠나는 손님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불안한 표정의 케이트를 향했다. 에스메랄다가 케이트를 죽이고 싶어 했다. 그녀는 마녀와 결탁했고 두 사람은 케이트를 죽이기 위해 소동을 일으켰다. 에녹과 이안에게 그렇게 설명을 들은 비스마르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케이트가 죽었을 수도 있다. 그의 하나 남은 혈육이. 케이트는 이안의 팔을 끌어안고 그에게 기대 서 있었다. 완전히 지쳤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저 쉬고 싶었다. 파티가 끝났다. 그리고 저주가 남았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엄청 추웠네요. 으으으...따듯한 물에 샤워하고 느긋하게 누워있다가 깨달았습니다. 아참, 도서관에서 대여한 책 반납해야 하는데. 내일은 업뎃이 없습니다. 연말이라 가족모임이 있어서... 다음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