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프롤로그> 군대를 막 제대하고 복학생으로 나름 착실히 학교를 다니던 나. 이제 갓 23살이 된 남성으로, 지금까지 여자친구를 사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생활에 커다란 불편함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연애 세포가 점점 굳어가고 있다는 것 정도만 빼고. 어쨋든. 평범하게 대학교를 다니고, 평범하게 자취를 하고, 평범하게 20대 청년처럼 생활을 하던 나에게. 평범함이라는 단어가 부끄러움을 타고 쏙 모습을 감출 정도로 놀란 특이한 일이 발생해버리고 말았다. 사건의 발단은 대략 이렇다. 내가 다니고 있는 법학과 학생회장은, 다른 학과에 비해 조금은 특이한 성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제안한 것은 바로. 이번 MT를 외국으로 가보자는 것. 돈이 많이 드는 어학연수 따위보다, 여행을 가장한 외국행 MT가 서양의 신진문물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아주 사탕발림식의 이야기로 포장하며 이런 계획이 통과된 것이다. 상당히 돈이 많이 드는 여행 계획임에도 불구하고, 어찌저찌 성사된 이번 모임에 나는 개인적으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더불어서 귀찮다는 의미의 한숨도 첨가해보자. 결국 이러쿵 저러쿵 해서 해외 MT가 성사되었고. 다른 학과는 부럽다는 듯이 우리 과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부담스러울 따름이었다. 뭐. 좋다. 여기까지는 그러 그렇다고 치자. 한번도 외국에 나간 적이 없던 나이기에 별로 커다란 불만사항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래. 하지만. "... 이건 아니잖아." 무한하게 펼쳐진 백사장의 바다. 파란 하늘. 그리고. ...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외딴 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면, 대략 이렇다. 어느정도일까. 음... 1시간 정도 전으로 돌려보면. "유에! 정신이 들었니?" 라는 고음의 목소리와 함께 눈을 뜨게 된 나. 그러고보니 뒷통수에 느껴지는 것은 배게의 감촉이 아니라 부드러운 살결같은 느낌이다.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분명 강의실에서 칠판에 형법을 가르치면서 우리에게 수업을 하고 있어야 할 교수님이 두 눈에 약간의 촉촉한 눈물을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내가 정신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결국 눈물을 보이기 시작한다. 상황을 보아하니 나는 아무래도 교수님의 무릎배게를 당하고 있었던 상태인거 같다. 왜 내가 여기서 교수님과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욱신거리는 머리를 감싸쥐며 상반신을 일으킨다. 그러자 하늘에 머물고 있던 나의 시선은 말도 안되는 광경을 목격하고 만다. 파손된 배의 갑판으로 보이는 철조물과 끝없이 펼쳐진 해안가. 마치 하와이의 해변가를 보는듯한 푸르른 바닷물이 하늘을 대신해서 파랑색이라는 아름다운 색깔을 나의 시선에 강조시키고 있었다. "교수님. 여기는 어디죠?" 일단 아주 기초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그러자 잠시 눈물을 그친 뒤 교수님은 침착하게 말하기 시작한다. "유에. 기억 안나니? 우리 학교 MT 중에..." 교수님이 우물쭈물하며 말을 더듬는다. 생각해보자. MT라... 확실히 나는 지금 여행복 차림으로 옷을 입고 있고, 교수님도 평소에 있는 타이트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다. 다만 약간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군데군데 옷이 찢겨진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봤자 못입고 다닐 정도의 파손상태는 아니여서 그다지 신경쓸 요소는 아닌데, 문제는 왜 우리가 여기에 있고 저 이상한 철조물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일시적인 정신상태의 착란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교수님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한다. "무리도 아닐거야. 도중에 배가 난파가 되서 지금 우린..." 교수님의 붉은 입술이 살짝 떨리기 시작한다. 차마 말하기가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도 대충 교수님의 상황설명에 얼추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MT 여행중에 타고 있던 배는 난파되었다. 그리고 현재 교수님과 나는 이름모를 섬에 이렇게 둘이 있다. 그렇다. 그 말은 즉... "... 조난되었어." ============================ 작품 후기 ============================ 주인공이 어느 새 대학생이 되어버린 '무인도 표류일지'입니다. 이것도 데드라인과 마찬가지로, 가급적이면 빠르게 완결까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도중에 새로운 이야기도 넣거나, 아니면 캐릭터를 추가하는 방향을 잡던가 해서 기존 편과 달라진 이야기를 선사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할 예정이니, 애정과 관심을 가져주시고 봐주시기 바랍니다. ^_^; 다시한번, 갑자기 글이 사라져서 놀라셨던 분들께 정말 사죄의 말을 올려봅니다. 제가 죽일놈입니다. ㅜ_ㅜ 2화 EP 1. 무인도 탐방기 대략 상황은 이렇다. 배가 파손당하고, 조난 도중에 나는 일시적인 기억장애를 띄게 된 모양이다. 배가 난파되는 과정이 어렴풋히 기억에 남아 있는걸로 봐선 말이다. 그나마 기억이 다 날아가지 않은 것 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결과적으로 말해서, 학교를 다니거나 성장해온 기억은 확실히 각인되어 있는데, 배가 난파되는 과정에서의 기억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교수님은 일시적인 기억상실증이라고 하는데, 의학에 도통 관심이 없는지라 그러려니 하고 넘긴다. 법대 교수님이 무엇을 알겠는가. 전공 말고는 그다지 깊은 소양을 보이긴 힘들 것이리라 생각한다. 어차피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지금 우리는 조난되었다는 결과다. "교수님은 언제 정신을 차리셨나요?" "나도 얼마 안됐어. 눈을 뜨니 근처에 쓰러진 널 발견하고서 바로 달려왔지. 그 후에는 네가 정신을 차릴때까지 몇시간도 안된거 같아."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한 교수님의 말에 나는 일단 안심했다. 교수님이 정신을 빨리 차린 편이라면 우리는 무인도(일단 사람이 보이지 않는 관계이므로 임시적으로 이렇게 말하겠다.)에 조난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조난된지 2일이 채 흘러가지 않았다는 소리군요." "어떻게 알 수 있니...?" "인간은 음식없이는 버틸 수 있어도 물 없이는 버틸 수 없어요. 수분의 보충을 하지 않았던 며칠간은 즉,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로 길어봐야 2일 이전이라는 소리죠. 게다가 물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교수님이나 저도 일단은 멀쩡한 상태라는 소리는 고작해야 조난 후 하루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의 뒷받침이 되요. 일단은... 배가 고프시죠?" "으, 응." 자신의 날씬한 배를 양 손으로 마치 숨기듯이 감싸쥐는 교수님. 우리 학교에서 시간 강사로 형법을 가르치고 있는 젊은 여교수님인지라 외모가 상당하다. 더불어 몸매 또한 마찬가지. 한창 연하인 남학생에게 배고픔을 호소하는 모습이 부끄러운지 약간은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애써 못본척 하면서 말을 이어본다. 이것도 나름 매너 플레이라고 하겠지. "움직일 힘이 남아있고 배가 적당히 고픈 시점이라는 소리는 일단 하루가 지났다고 봐도 되겠네요." "그렇구나." "그럼 먹을것을 먼저 찾아보도록 해요. 아, 그것보다 식수가 먼저겠네요. 교수님. 이 근처를 혹시 수색하시진... 않았겠죠. 정신을 차리고 그 직후에 저를 발견했다고 했으니까." "응. 시간적 여유가 없었어." "그럼 식수부터 찾도록 하죠. 먹을것은 그 다음으로 하구요." 영차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랫동안 누워있었던 모양인지 무릎에서는 우두둑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벌써부터 이른 나이에 삭신이 쑤시다니. 그래도 생각보다 움직임이 둔하지는 않은게 다행이다. 어딘가 다친 흔적이나 통증이 있다면 이 섬에서 살아남기 곤란한것 같기 때문이다.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교수님이 다리에 묻어있던 모래알을 털어내면서 감탄한다. "대단하구나, 유에." "무슨 소린가요? 교수님. 갑자기 뜬금없이." "아니... 일단은 내가 교육자의 입장인데 아무것도 못하고 너한테만 의지하고 있는거 같아서..." "신경쓰지 마세요. 미성년자도 아니고. 저도 엄연히 군대를 갔다 온 성년이니까요." "그, 그러니?" 사제지간이라고는 하나, 나이로 따지자면 동일한 성인이다. 여자는 나이에 굉장히 민감하다고 하지만, 어쨌든 객관적인 시선으로 놓고 보자면,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 요소니까. 교수님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린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우리 교수님은 생각보다 미인이다. 나이도 28세에 아직 미혼인 처녀. 학교에서도 남자들에게는 인기절정을 달리는 범접할 수 없는 어른의 여자같은 표본형인 셈이다. 그런 교수님이 오늘따라 상당히 귀엽게 보였다. 나보다도 연상이면서, 이런 귀여운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랍기도 했다. "신경쓰지 마세요. 식수부터 먼저 찾고 일단 생존자가 있는지 찾아보도록 하죠." "응." 해안가를 벗어나서 섬의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제법 울창한 숲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지라 나는 근처에 있던 제법 튼튼해보이는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들어 혹시 있을지 모르는 뱀이나 위험동물에게 위협을 가하기 위해 이리저리 휘두르면서 풀잎소리를 증대시킨다. 별다른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면 뱀같은 녀석들은 먼저 도망치기 때문에 보호차원으로 선택한 행동이다. 교수님은 우선 내 뒤로 위치시킨 뒤에 점점 숲의 안쪽으로 들어가본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렇게 쉽게 물은 발견되지 않는다. 라이터나 장작, 냄비같은게 있다면 바닷물을 끓여서 식수를 조달하는 방법도 있지만, 언제까지나 그런 방법으로 이 섬에서 버틸 생각은 없다. 조난구조가 언제 올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 전에 라이터의 가스가 먼저 닳아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뭐, 그 전에 라이터 자체가 없지만 말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군대에 있을때 여러번의 유혹이 있었지만, 결국 돈이 아깝다는 이유로 흡연자의 길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만큼, 내가 흡연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럴때 후회요소가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먹을 물을 발견하는 미션에 실패하고 말았다. 모든게 자신의 생각대로 된다면 나는 인간이 아니라 신일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이라는게 정설인 것이다. 그 전에 이미 조난당한 시점부터 세상이고 뭐고 일단은 저 멀리 던져두어야 할 판국이지만 말이다. 교수님의 말로는 대략 1시간 정도 섬을 돌아다닌것 같다고 한다. 더이상 해안가에서 멀어지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되어 일단은 다시 해안가로 돌아오기로 잠정적으로 결정. 숲속에서 밤을 지샌다는 것 만큼 위험한 행동은 없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이 섬에 대해서 안 사실은 아무것도 없고, 짐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대한 동물도 존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일단은 본래 장소로 복귀. 식수도 발견하지 못했고, 먹을것도 못구했으며 더불어 생존자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섬은 꽤나 크다는 사실 하나였다. "작은 섬일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크군요. 여기." "응. 그런데 이렇게 큰 섬이면 보통 지도상에 표시가 되어 있어야 정상인데, 지도에는 이런 섬이 없는거 같았어." "교수님. 지도 같은거 가지고 계시나요?" "아니. 출발하기 전에 항로 코스를 한번 살펴봤거든. 그런데 우리가 가는 루트에 이런 커다란 섬은 없었어." 오랫동안 걸어서 발이 아픈지 신고있던 하이힐을 벗는다. 중간에 미니스커트가 잠시 올라가면서 교수님의 새하얀 속살이 잠시 내 시야에 수줍게 모습을 들어낸다. 나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교수님이 황급히 자신의 스커트를 내린다. 평소에는 이런 과민반응을 본 적이 없어서 나는 머쓱해하며 헛기침을 몇번 한다. 군대에 있다가 막 제대해서 그런 것일까. 젊은 여자만 보면 기분이 참 오묘해진다. 그래도 할 이야기는 해야겠지. "교수님. 그 하이힐은 신고 다니지 않는게 좋을거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는게 좋겠네. 사실 발이 많이 아프거든." 수줍게 웃어보이는 교수님이 하이힐을 저 멀리 던져버린다. 마치 오랫동안 차고 다녔던 족쇄를 벗는 죄수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진작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미리 해두는게 좋다고 판단했다. "교수님. 사실 할 말이 있어요." "응? 뭐니." "이건 앞으로 교수님이나 저에게 있어서 중요한 이야기에요. 교수님. 지금 저희의 현실을 아시죠?" "응..." 내 진지한 말에 교수님은 잠시 주눅이 들었는지 말 끝을 흐린다. 하지만 지금은 교수님을 배려하는 것 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어서 그것부터 언급하는게 좋을듯한 나의 결단으로 계속 이어간다. "제가 하고싶은 말은 교수님은 '교수'이라는 체면을 잠시 버려뒀으면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여기는 이름모를 섬. 인간관계로 형성된 사회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교육자라는 직위도 잠시 버려두세요. 여기서 일일히 학생 앞에 교육자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은 애초에 필요없으니까요." "......" "그리고 저도 그렇게 크게... 신경쓰지 않을테니까요. 그러니까... 아셨죠? 제가 하고싶은 말이 무엇인지." 얼렁뚱땅하게 넘어간다. 역시나 나는 말주변이 그다지 없는 모양이다. 만약, 나에게 타인의 의견을 마음대로 설득시킬 수 있는 그런 재주가 있었다면, 변호사나 말을 잘 하는 판매원의 길을 걸었겠지. 그러나 나의 말 뜻은 제대로 전해졌는지 교수님은 고개를 살며시 끄덕인다. "네가 하고싶은 말... 잘 알았어." 역시나 진심은 통한다고들 했던가. 인간사회라는 안전이 보장된 곳에서 동떨어진 외딴 세계. 이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교수님이나 나는 선생과 학생관계가 아니라 서로 살아남기 위한 '생존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은 인간사회에서 있던 각자의 신분을 먼저 버리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한다. 그것을 교수님은 고맙게도 이해해준 것이다. "무례한 말 해서 죄송해요.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면 그때 충분히 반성문을 쓰던가 사과를 하던가 몇번이나 할테니까요." "반성문으로 끝날 거 같니?" "... 하다못해 F학점은 주지 마세요. 재수강은 좀..." 진심어린 표정으로 호소하는 나에게, 쿡쿡 웃으면서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나를 바라보는 교수님. "농담이야, 농담. 난 오히려 네가 이렇게 나랑 같이 있어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걸." 나보다 약간 키가 작은 교수님이 나를 수줍게 올려본다. 노을진 태양의 빛 탓에 오늘따라 교수님의 모습은 상당히 눈부셔보였다. 교수와 학생이라는 신분을 버려서일까? 교수님은 싱긋 웃어보이면서 진실된 미소로 화답한다. "그런데 너, 내 이름 아니?" "아니... 글쎄요. 하하." "너무해. 교양 과목도 아니고, 어떻게 전공 과목 교수님의 이름도 모를수가 있니." "그야 보통은 모르고 지내지 않을까요. 하하하..." "웃음이 나오니? 정말!" 교수님이 뾰로퉁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이런 모습의 교수님도 처음보는 탓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신선했다. 또래 여자아이들 놀리는 맛도 있지만, 이렇게 연상의 여자도 놀리는 맛이 있을줄은 처음 알았다. 팔짱을 낀 채 그래도 연상이니 무시하지 말라는 포즈를 취해보이는 교수님이 또박도박 말한다. "한노아. 똑똑히 기억해야되." "명심할게요, 교수님." "응. 착하네." 교수님이 나의 머리를 기특하다는 듯이 쓰다듬어준다. 평소의 학교라면 볼 수 없는 교수님의 흐트러진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잠시 웃음이 나온다. 내 반응에 교수님도 스스로 웃긴지 자신도 이내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의식이 돌아온지 첫째 날. 그리고 그 밤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한다. ============================ 작품 후기 ============================ 아, 안돼... 리플 보기가 너무 무서워... 어떤 질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3화 해안가 근처에 커다란 나뭇잎을 구해 대충 움막 형태를 만든다. 움막이라고 보다는 그저 뼈대만 앙상한 텐트라고 해야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밤에는 기온이 떨어져서 제법 추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해는 이미 저물었고,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뭇가지에 열대수같은 커다란 나뭇잎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물 곳의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불'이 없다는 것이다. 입고있던 겉옷을 이불삼아 누워있는 노아 교수가 나를 올려다보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묻는다. "정말 안자도 되겠어?" "저희는 지금 식수도 없지만 그 다음으로 중요한 '불'이 없어요. 밤에는 야생동물들로부터 보호해줄 보호수단이 없는 셈이죠. 그러니까 제가 망을 볼게요. 교수님은 잠을 자두세요." "그래도..." "불침번 역할은 남자의 일이니까요." 걱정할것 없다는 듯이 한번 씨익 웃어보인다. 내 모습에 교수님은 여전히 뭐라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자신은 도움이 안될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연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잠을 청한다. 그래도 과연 진짜 야생동물이라든지 그런 생물이 있을까. 솔직히 나도 반신반의 하지만, 그래도 대비는 철저히 해두는 편이 좋다. 유비무환이란 말도 있으니까. 야생동물 문제는 둘째치고. 상반신은 겉옷으로 해결되지만, 미니스커트 차림의 하반신은 덮을 수 없는 상태인지라 일단 교수님이 잠이 든 것을 확인한 후에 내 겉옷을 교수님의 얇은 다리에 덮어준다. 그다지 추운 날씨는 아니지만, 교수님이 행여나 감기가 들까봐 걱정되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끄러운 말이긴 하지만 성인 여성이 이렇게 무방비로 잠이 든 상태라면 젊은 혈기를 자랑하는 청년이 버틸수나 있을지도 스스로가 불신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비책도 살짝 들어가 있다. 교수님 옆에 나도 나란히 누워본다. 천장 대신에 펼쳐진 풍경은 낯선 밤하늘. 그리고 평소에 들려오던 시계침이 돌아가는 째깍째깍 소리 대신에 들려오는 것은 반복적인 파도의 소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실에서는 절대 있을리가 없지만, 교수님은 규칙적인 숨소리로 잠이 든 상태. 그 모든것이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결국 우리는 일상생활과는 동떨어진 하나의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유에!" 학교 옥상에서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의 이름을 기쁘게 부르는 한 소녀. 알고 있는 여성이다. 나와 같은 교복으로 보아서는 서로 같은 학교에 재학중이고, 같은 반인 데다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난 이 아이에게 고백받았다는 사실이다. ... 그런데 내가 왜 고등학생이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거야." "아니. 그냥 좀." 머쓱해하며 머리를 긁적이는 나에게 소녀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온다. 옥상에서 남자에게 당당히 고백한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직접 나에게 한발자국 천천히 다가오기까지 하는 것이다.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적극적이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잘 안서는 상황에서, 소녀는 어느새 자신의 숨결이 내 얼굴에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좁혀온다. "아까 내 고백에 대한 대답... 들을 수 있어?" 수줍게 묻는 소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사랑스럽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평소에는 성격이 남자애답다며 소문이 자자한 녀석이 이렇게 여성적인 모습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선 이 녀석도 역시 여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갑자기 고백이라니...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한데." "그래? 그럼..." 소녀가 까치발을 들며 내 목을 양 팔로 감싸안은 채 그대로 자신의 입술을 내 입술위에 포갠다. 처음해보는 키스. 물론 나의 입장으로서는 소녀의 너무나도 적극적인 태도에 상당히 당황스러워했지만, 소녀는 능숙하게 자신의 혀를 내 입 안으로 밀어넣는다. 이 자식. 스킬이 너무 좋잖아. 라고 태클을 걸 시기는 이미 지난듯 하다. 소녀의 혀가 나의 혀를 적극적으로 유혹하기 시작한다. 이미 입술 주변은 나와 그녀의 타액으로 서로 범벅이 된 상태. 그러나 소녀는 그런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내 입술을 계속해서 탐한다. 키스도 키스 나름이지만, 가슴 부근에는 소녀의 풍만한 가슴이 옷 위를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가슴이 큰 타입이구나 라는 냉정한 생각은 이미 버린지 오래. 누가 봐도 훌륭한 몸매의 소유자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남자를 유혹하면 넘어가지 않을 남자가 어디있겠는가. 나도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내 손은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긴다. 그러자 그녀는 약간의 야한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기쁘다는 듯이 나에게 더욱더 안겨온다. 아. 18년동안 살아오면서 이런 짜릿한 경험도 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듬과 동시에 이것이 꿈은 아니겠지 하는 의심까지 든다. 하지만 나의 의심은 현실로 이루어지는 신기한 힘을 지니고 있는 모양이다. "......" 눈을 떠보니, 상당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노아 교수가 제일 먼저 들어왔다. 문제는 왜 노아 교수의 입술과 내 입술이 서로 포개진 상태냐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의 사고회로가 파업상태에 들어갔는지 작동을 하지 않는 경우에 이르른다. 그러나 재빨리 두뇌의 모든 뇌세포를 풀가동시켜 지금의 상황을 판단해보도록 한다. 설마 내가 잠꼬대로 교수님과 억지로 키스한 것인가? 이리 생각해도, 저리 생각해도 이것이 정답일 확률이 99.9%인 모양이다. "우왓!" 황급히 교수님에게서 떨어진다. 자는동안 내가 무슨짓을 한건지는 몰라도, 교수님의 옷가지도 제법 많이 풀어져있었다. 스커트는 이미 속옷이 다 보일 정도로 올라간 상태고, 와이셔츠는 가슴골이 그대로 보일만큼 풀어져있었다. 무엇보다도 교수님의 입 주변에는 아직도 나의 타액으로 젖어있는 상황이었다. 이 말인 즉슨. 학생이 교수를 덮치고 있었다. 이런 헤드라인 기사가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난다면 나는 아마도 평생 범죄자로 살 것이다. 물론, 내가 노아 교수에게 교수라는 직함은 당분간 버리라는 말은 했어도, 언젠가는 구조대가 온다면 다시 사회로 복귀한다는 결과까지 잊으면 곤란하다. 비록 지금은 남녀관계라고 해도 항상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교수님!" 머리를 조아리며 무조건 사과한다. 남자와 여자간에 과도한 스킨십이 발생할 경우, 남자 입장이 불리하게 작용할 확률이 매우 크다. 실제 판례도 그렇고, 아무래도 법을 전공하는 나이기 때문에, 이런 방면으로는 무조건 조심을 하고 볼 일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일단 내 쪽에서 100퍼센트 과실이 있으니 사과만이 답이라는 생각에 무조건 엎드리고 보는 것이다. 잘못한 쪽은 어찌되었든 전반적인 상황을 보아선 나이지 않은가. 반면, 노아 교수는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지 한동안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다가, 자신의 옷차림을 눈치채고 황급히 정리하기 시작한다. 외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설마 교수와 낯선 섬에서 키스를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물론, 노아 교수님도 나와 같은 입장일 것이다. 평소에는 그냥 '예쁜 교수님이구나'라는 생각 정도로 끝나던 사이였는데, 본의 아니게 키스라니. 머릿속이 상당히 혼잡스럽다. "... 이제 그만해도 돼."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다 용서는 안되겠지만... 그래도 갓 군대에서 제대한 남성인걸. 어쩔 수 없잖아." "그렇다고 모든 군인들이 다 성욕에 굶주려있단 의미는 아니에요." "할머니가 여자로 보일 정도라며!" "그거야... 과장된 표현이라니까요." 저 멀리 GOP 지역에서 근무중인 군인의 신분이라면, 혹시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약간은 불만을 노출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내 행동이 이해가 된다는 말투다. '갓 제대한 남성'이라는 사실로 이해한다는 것도 어느정도 내가 불신당하고 있나 라는 사실을 유추하기 충분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교수님의 용서를 구했다는 점에 대해서 큰 의의를 두도록 한다. "여자친구 꿈이라도 꾼거니?" 노아 교수님의 질문에 나는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대답한다. "여자친구는 없어요." "그래? 꿈속에서 여자친구 어찌구 저찌구 그러던데..." "아, 그건 고등학생 때, 어떤 여자애한테 고백받은 일이 있어서요. 그것때문에 그런거예요." "고백받았는데 사귀진 않았니?" "뭐... 그냥 흐지부지 되었다고 해야하나. 제가 이런저런 이유로 대답을 미루다가 취소당했거든요." "취소?" "유효기간이 지났으므로 고백의 효과는 사라졌데요." "그 아이가 그랬니?" "그런 셈이죠." 생각해보니 그 녀석도 약간은 아스트랄한것 같다. 멋대로 고백하더니 이제와서 취소라니. 솔직히 말하면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한 나의 탓이 더 크겠지만, 그래도 고백에 유효기간이라는 것이 어디있는가. 무슨 음식상품도 아니고. 이렇게 말해봤자 직접 고백해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4화 아침부터 벌어진 키스 사건 이후로, 교수님과 약간 서먹해진 감도 없지않아 있지만. 그래도 스킨십은 서로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하지 않은가. 물론, 내가 지어낸 근거없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믿고 싶다. "말은 그렇다 쳐도, 방금의 키스는 좀 위험했어." 숲 안 쪽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릴 정도였다. 오죽하면 소변을 보는 데 불편함을 겪을 정도의 생리 현상이 일어났겠는가. 정말로 내가 여자에 고파있는 녀석인가. 이게 다 군대 때문이다. 적어도 맥X이라든지 스X크 같은 유익한 서적을 금서목록에 포함시키지 말라고. 이래서 위쪽에 근무하는 늙은이들은 젊은이들의 불타는 심정을 이해 못한다니까. "읏차." 마지막 소변 한 방울까지 말끔히 털어내고 바지의 자크를 올린다. 오랫동안 입었던 탓일까. 바지 뿐만 아니라 옷 등에서 각종 냄새들이 풍겨 나온다. 적어도 갈아입을 옷 같은 거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남자인 나도 찝찝함의 극에 달한 정도인데. 하물며 교수님은 어떨까. 여자들은 이런 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나야 뭐 훈련을 할 때에도 같은 옷을 1주일 내내 입은 적도 있었는데. "... 관두자." 생각을 그만둔다. 여기서 고민해봤자, 하늘에서 옷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오늘도 여지없이 물을 찾아 떠난다. 섬에 대한 탐색도 할 겸, 오늘은 상당히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자는 노아 교수님의 의견이 있어서 아침부터 작전을 짜고 있는 것이다. "해가 저무는 시간이 대충 몇시쯤인지 혹시 기억하시나요?" "어제는... 7시쯤으로 기억해." "그럼 지금이 11시니까 12시에 출발한다고 생각하면 3시 반까지 숲의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그 시간에 맞춰 다시 이곳으로 오는게 좋겠어요." "해가 저물기 전에 딱 맞춰서 오게끔 하는구나." "네. 물도 중요하지만 밤에는 불 없이는 숲에서 지내는 것은 위험하니까요. 그보다도 교수님. 아직까지는 버틸만 하세요?" 걱정스럽기도 하고 해서 일단 교수님의 안위를 묻는다. 내 말에 교수님은 약간은 힘든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대답한다. "솔직히 목도 좀 마르고 정신적으로 피곤하기도 해." "사실대로 말씀해주시니 제 입장으로서는 다행이에요." "괜히 걱정거리만 떠넘기는거 같아서 교수의 입장으로서는 오히려 미안한데..." "어제도 말했잖아요. 지금은 교수와 학생이 아니라 서로 이 섬에서 생존해야 하는 목적을 가진 동료라구요. 그러니까 제 입장까지는 생각하시지 마시고 솔직히 어디가 아프면 아프다고 말씀하셔도 돼요. 아니, 꼭 말씀하셔야 해요." "응. 고마워. 믿음직스럽네." "천만에요." 노아 교수님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혹시 감기라도 걸렸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왜 교수님이 저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지 모르겠다. 성인 여자란, 아직은 내게 있어선 미지의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시간이 지났지만, 점심은 커녕 물 한잔 마실 수 없다.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사람과 자연의 대결을 다룬 모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도 아니고, 굳이 우리가 이런 고생을 왜 하는지도 모를만큼 정신적인 피로는 쌓일만큼 쌓여있었다. 뒤에 따라오는 교수님도 슬슬 한계인듯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애초에 여성의 체력으로 신발도 없이 무리한 숲 탐험을 강행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라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나마 나는 군대에서 체력 단련을 했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나마 나은 편이지만, 교수님은 우선 여성에다가 평소에 운동신경이 좋은 편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눈에 봐도 곱게 자란 아가씨 타입의 여성. 그런 교수님에게 이런 강행군은 약간 체력적인 문제를 선사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물이지만, 그것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바로 건강상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자칫 잘못하다가 여기서 열병이나 감기같은 병이 걸렸다가는 손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더이상 숲의 안쪽으로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오늘 안으로 식수는 반드시 구해야 한다. "...생각해라. 유에. 생각하는 거다." 가던길을 멈추고 나 자신에게 암시를 걸어본다. 식수를 조달할 방법. 비가 내린다면 그만큼 좋은 일이 없겠지만, 하늘은 공교롭게도 밝은 태양이 자신의 모습을 오늘따라 계속해서 자랑하고 싶은지 구름한점 없이 햇볕만 쨍쨍한 맑은 날씨다. 평소에 비가 내리지 말라고 하면 내리고, 이럴때는 왜 안 내리냐 라고 하늘을 원망해보기도 한다. 예전에 소꿉친구 중 하나인 여자애가 있었다. 그 애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잘 알텐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무지하게 좋아하는 녀석이니까 아마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도 어떻게 해야할지 잘 알 것이다. 결국 내 머릿속에서 떠오른 긴급수단은 한가지밖에 없었다. "저기, 교수님." "... 왜 그러니?" 이제 대답할 기운도 없는 모양인듯 하다. 그도 그럴것이, 수분보충은 없고 땀은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하는 상황에서 교수님도 슬슬 한계가 다가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사람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게 어디있겠는가. 나는 결국 내가 생각해낸 긴급조치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오늘 안으로 식수를 찾기에는 무리인것 같아요. 그래서 한가지 방법이 떠올랐는데요." "정말? 어서 말해보렴." "... 오해하지 말고 잘 들으세요." 약간 생기가 돌아온 교수님에게 나는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일단 지르고 보자는 듯이 거침없이 말한다. "소변... 을 마시죠." 내 말에 역시나 교수님은 내가 예상한 듯이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얼굴이 화악 붉어지기 시작한다.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다. 자신의 소변을 제자였던 남학생과 마신다는 변태행위를 해야할 판국인데 정상적인 반응을 보일리가 있나. "교수님. 이건 제가 변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에요. 오늘 안으로 식수를 조달할 방법은 이 방법밖에 없어요. 왜 티비 프로그램에서도 나오잖아요. 식수가 없으면 당분간 소변으로 버티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이에요." "그거... 진짜로 티비 내용 맞니?" "아마도...요." 사실은 나도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할 정도로 식수가 급했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방법에 교수님은 수치심으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다가 나에게 다시 묻는다. "어떻게... 마시는데." 생각해보니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입고있는 옷밖에 없다. 오늘 하루분량을 버틸 수 있는 식수가 필요한데, 그렇다는 소리는 적어도 소변을 보관할 물통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통이라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생각난 것이 있었다. "교수님, 하이힐 있잖아요." "그걸로 마시려고?" "내일까지 식수를 보관할 물건은 그거밖에 없어요. 제 신발은 숲속을 걸어다녀서 더럽고, 교수님 하이힐은 저희 천막에 두고 왔잖아요. 그리고 아무래도 교수님 입장에서도 제 신발보다는 교수님 하이힐로 마시는게 정신적으로나마 더 나은 쪽이 아닐까 해서요." "......" "서로 성기를 입에 대고 마시는 것 보다는 좋은 편이라고 생각해요." 내 말에 노아 교수님의 표정이 갑자기 화악 붉어지더니 이내 충고어린 말투로 말한다. "... 너, 그거 성희롱이야." 한쪽 하이힐에는 내 소변을 담고 잠자코 교수님을 기다리는 중이다. 움막으로 돌아온 우리는 바로 소변작업(?)을 실시하고 있고, 교수님은 창피하다며 약간 숲의 안쪽으로 들어가 소변을 보시는 중이다. 문제는 해안가가 너무 조용해서 교수님의 움직임에 들려오는 소리 하나하나가 다 들린다는 것이다. 여성의 소변을 이런 식으로 마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에게도 변태 기질이 있기나 하는 것일까. 물론, 소변을 마신다는 행위 자체가 거부감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살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 무지하게 부끄러운 얼굴로 자신의 소변을 담아온 교수님이 나에게 하이힐을 건낸다. "... 자." 하이힐을 통해 아직도 교수님의 온기가 느껴진다. 살다보니 이런일도 다 있나. 신이시여. 부디 이 불쌍한 교수와 제자 관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교수님. 뭔가 떠있는데요?" "뭐?" "무슨 털 같은게... 으왓!"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교수님이 제빨리 자신의 소변이 담긴 하이힐을 빼앗아서 정체불명의 털같은 것을 빼낸다. 설마 하지만 역시나겠지. 그것밖에 안떠오른다. 저 털의 정체는... "저기, 교수님. 혹시 그거..." "더, 더이상 말하지 마! 창피해 죽겠단 말이야!" 아마 오늘 내가 한 말들은 성희롱의 절정을 보여주는 말들일지도 모른다. 이것도 다 살기 위해서이니 참고 버티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무튼, 내일은 제발 식수가 발견되기를 바랄 뿐이다. 5화 "... 마시는거지? 이거." "네." "꼭 마셔야 돼?" "살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잖아요." 내 소변을 담은 쪽은 내일 아침을 위해 보류하고, 우선 교수님의 소변이 담긴 하이힐을 서로 번갈아가며 마시기로 했다. 교수님은 자신의 소변을 마시는 것에 대해서 약간은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던 와중인지라 먼저 내가 마시기로 하고 하이힐의 발복쪽에 입가를 댄다. 교수님의 소변에서 약간의 시큼한 냄새가 난다. 평소에 교수님의 소변을 마실 일이 있을까 라는 생각은 죽어도 한 적이 없는데,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니 참 기구한 운명이 아닐수가 없다. 한모금 한모금 천천히 마시기 시작한다. 여성의 몸 안에서 머물던 물 웅덩이가 내 목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그렇게 맛없지는 않은 탓에 교수님에 비해 그다지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교수님은 자신의 소변을 제자가 먹는 그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지 이보다도 더 빨갛게 달아오를 수 없다는 얼굴로 차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교수님의 입장이라고 해도 엄청나게 창피할 것이다. 그 심정, 100퍼센트 이해는 불가능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대충 예상할 수 있다. 반절을 남기고 입을 뗀다. 아직도 입 안에서는 교수님의 소변의 맛이 느껴진다. "어, 어때?" 왜 맛을 묻는건지 잘 모르겠지만, 당황해하는 교수님이 귀엽게도 보여서 나는 한번 웃어보이고는 질문에 대답해준다. "괜찮아요. 맛있네요." "... 그럴리가 없잖니." "교수님같은 미인의 소변이 맛없을리가 없잖아요." "저기, 혹시나해서 묻는건데. 너 변태기질이 있거나 그러지는 않지?" "사실 이번에 약간 그쪽으로 눈이 떠진것 같아요." "정말?!" "농담이에요, 농담. 자, 이제 교수님 차례에요." 소변이 담긴 하이힐을 내민다. 그러나 교수님은 여전히 거부감이 있는지 그저 하이힐만 들고 있다가 차마 못마시겠다는 듯이 울먹이기 시작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살아야 한다는 생존성이 양립하면서, 아직도 교수님 내면속에서는 갈등을 일으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안해. 난 차마..." 교수님의 아름다운 얼굴에 천천히 한 두방울씩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여지껏 힘든 상황에서도 억지로라도 웃음을 보여줬던 교수님이 결국 눈물을 보이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여성의 눈물이라 했던가. 비록 나보다도 연장자라고 해도 교수님도 하나의 여성이다. 겉으로는 강한 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연약한 여성의 내면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인격체인 셈이다. 사실 나도 불안하기는 하다.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을 살면서, 생전 처음 겪어보는 무인도에서 조난당해 지금까지 부모님의 보호아래 받아온 환경조차 없는 상황에서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노아 교수님이라는 여자까지 데리고 말이다. 정신적으로도 많이 지쳐있었지만, 여기서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교수님은 의지할 존재가 없을 것이다. 학생이기 이전에 남자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섬에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생존자들도 찾아내서 언젠가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울고 있던 교수님의 옆에 놓여진 하이힐을 들고서 교수님을 대신해 소변을 입에 머금는다. 그 뒤 바로 교수님의 양 어깨애 손을 올려놓아 억지로 모래사장에 눕힌다. 나의 이런 강제적인 태도에 교수님은 놀란 눈을 하고서 이내 나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친다. 그러나 여성의 힘으로 건장한 청년의 힘을 압도할 수는 없는 법. 나는 그대로 교수님의 입술과 내 입술을 마주하고 억지로 교수님의 입 안에 소변을 밀어넣는다. 읍읍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저항하는 교수님은 억지로 자신의 소변을 마시고 난 뒤에야 약간은 그 저항이 줄어들었다. 이것으로 교수님과는 두번째 키스. 두번이나 되는데 키스라는 단어가 가진 로맨스의 분위기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들만 있다는 것이 조금은 안타깝기도 하다. 상대는 그래도 연상의 미인 여성인데. 입술을 떼자, 교수님의 타액과 나의 타액이 한동안 길게 연결되어 늘어진다. 아직도 교수님을 위에서 누르고 있던 형태를 취한 나는 눈가가 촉촉한 교수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외친다. "무례한 짓이라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지만, 마시지 않으면 제가 곤란한 게 아니라 교수님이 곤란해진다고요." "그, 그치만..." "교수님. 냉정해지세요. 지금은 사회에서 당연시되던 식사 매너나 위생을 챙길 때가 아니에요! 살아야 하잖아요? 여기서 그냥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죽을 건가요?" "유에..." "살아남기 위해선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합니다. 여긴 대학교가 아니에요. 사회도 아니고요. 야생의 세계입니다." "......"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으로 닭살스런 대사가 아닐수 없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지금 이 상황을 통해 순간적으로 감정을 격하게 먹은 탓에 내가 무슨 짓을 한건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싫어하는 교수님을 억지로 쓰러뜨려 강제로 소변을 마시게 하고, 게다가 화까지 낸 셈이다. 상황파악이 뒤늦게 되자 이제서야 나는 교수님을 자유롭게 해주고 교수님의 옆에 앉은 채 조용히 사과한다. "죄송합니다. 순간적으로 감정적이 되었네요." 하지만 노아 교수님은 내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인다. "고마워." "......" 단 한마디. 오로지 단 한마디로 교수님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오는 것이 느껴진다. 이것으로 교수님도 약간은 기운을 차렸다면 더 바랄것이 없을 것이다. 한숨을 쉰 채 잠시 불어왔던 폭풍의 분위기가 슬슬 저물어가는 노을과 함께 잠잠해지려던 찰나, 교수님이 내 품 안으로 점점 파고들기 시작한다. 필요 이상으로 다가오는 탓에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선 몸을 살짝 뒤로 뺀다. 그러나 교수님은 오히려 내 허리를 감싸면서 적극적으로 안겨온다. 교수님의 풍만한 가슴, 야릇하게 빛나는 붉은 입술이 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올려보는 교수님. 나도 남자인지라 대충 이게 무슨 상황인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노아 교수님. 저기..." 일단 말을 걸어보지만, 교수님은 대답대신 살며시 눈을 감으며 내 쪽으로 얼굴을 향한다. 이것은 무언의 허락인가. 오늘만 벌써 담임 교수님과 세번째 키스를 하는 것인가. 나도 모르게 분위기를 타면서 교수님의 얼굴쪽으로 점점 다가간다. 그녀의 섹시한 신음소리와 규칙적인 숨쉬기로 인해 움직이는 부드러운 가슴이 나를 자극시킨다. 앞의 두번의 키스와는 다르다. 지금은 교수님이 여자로서 남성의 키스를 바라는 것이다. 무인도에 표류되기 전에 그저 평범한 교수와 제자의 관계였던 나와 노아 교수님. 그런 우리들은 지금 사제지간을 떠나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몸을 섞을수도 있다는 상황 바로 직전까지 오게 된 것이다. ... 라고 생각을 했지만. "여, 역시 안 돼!" 대뜸 양 손으로 내 가슴을 밀쳐내는 교수님의 돌발행동.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면서 말을 더듬기 시작한다. "아, 아무리 무인도가 사람의 마음을 개방적으로 한다 해도... 아직 우린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 어이가 없을 정도로 순진한 교수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내뱉는다. 내 반응을 응시하던 교수님이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빨개진 얼굴을 하며 퉁명스레 말한다. "뭐, 뭐야. 나 무시하는 거야?" "아니요. 그냥 우리가 처한 상황이 웃겨서요." "어떤게...?"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표류되고, 동경하던 교수님과 키스까지 했으니까요." "... 동경?" "학생들 사이에선 젊은 나이에 교수 자리를 역임하고 있는 교수님을 부럽다고 해서요." "시간 강사일 뿐인데..." "그래도 대단한거죠." 나도 모르게 진심으로 교수님에게 칭찬을 던져본다. 그래도 이게 교수님에게 위안이 된다면, 더할나위없이 좋겠다만. 6화 어제 소변을 마신다는 획기적인 사건을 겪고 나서 또 무인도의 하룻밤이 지나게 되었다. 아직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날짜 횟수를 기억하는 데에 귀차니즘이 생겨버린 나는, 중천에 떠오른 해를 백사장 위에 누워서 바라보는 중이다. 노아 교수님은 볼 일이 있다고 사라진 지 오래. 미묘하게 떨리는 말투나, 양 다리를 베베 꼬는 모습으로 보아선, 분명 대변쪽이 아닐까 예상해본다. 본인 앞에서 '똥 싸러가는 건가요?'라는 말 따위를 해봤자 날아오는 건 뺨 밖에 없을 거 같아서 잠자코 있었다만. 그래도 야생동물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먼 곳에 가서 볼 일을 해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동안 백사장 위에 누워있던 내게, 큰 일을 치루고 온 노아 교수님이 다가온다. "유에~!" 뭔가 굉장히 설레는 목소리로 내 옆에 털썩 앉으며 하는 말. "먹을 것을 찾았어." "... 네?" 노아 선생님의 손에 들려있는 건 정체불명의 풀 잎사귀. 우리나라에서는 꽤나 보기 힘든 모양새를 하고 있는데... "먹어도 되나요?" "응!"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입니까. 그거." "야, 약초 도감에서 본 적이 있어. 먹으면 배부르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하던데..." 식용이라면 나야 대 환영인데. 괜히 이상한 것을 먹고 배탈이나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교수님이 가져오신 거니까. 여기서 이대로 '의심스러운 건 먹지 마세요.'하고 매정히 말할 수도 없기에 상반신을 일으키며 교수님이 구해온 풀 잎 하나를 집어들고. 입 안에 그대로 투하한다. 우물우물... "어떠니?" "뭔가... 미묘하게 쓴 맛이네요." 솔직히 말하자면. 맛 없다. 고작 풀 잎 따위가 감히 나의 고귀한 입맛을 만족시키려 하다니. 무엄하도다! "그걸 고기라고 상상하며 먹는 거야. 그럼 맛있지 않을까?" "교수님. 고기 좋아하시나요?" "조, 좋아하긴 하지만... 예시가 그렇다는 거야! 예시가!" 은근슬쩍 자신의 양 손으로 배를 가리며 나에게 대뜸 화를 낸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괜히 이상한 오해를 산 것 같다. 이래서 여자들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고 하나. 아니지. 여기에 적용될 속담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교수님이 구해온 풀 잎으로 오늘의 식사를 대신하기로 결정. 점심을 보내고, 저녁이 다가오며 슬슬 공기가 차가워지는 시점이 몰려오고 있었다. 추위 탓에 자연스레 가까운 자리를 잡아 앉은 나와 교수님. 그 순간. 움막의 뒷편에서 순간적으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와 동시에 교수님과 나는 하는 행동을 멈추고선 서로 창피한 듯이 떨어진다. 하지만 지금 창피함이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가 있는 것이다. 근처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해는 이미 저문지 오래. 손전등은 커녕 불조차 없는 이들에게 저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확인할 방법은 오로지 직접 숲으로 다시 들어가는 일 뿐이다. 난 그 일이 여간 내키지가 않는다. 저 생명체의 정체에 대해서 아는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들짐승일 가능성도 있다. 맷돼지나 이런 큰 덩치의 짐승이 아니고서는 숲 안쪽에서 해안가까지 풀과 나뭇잎을 건드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크게 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생존자일 가능성도 있다. 해가 저물었기 때문에 해안가의 우리를 보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존자라는 이유가 있다면 반드시 가야 하지만, 들짐승이라면 반드시 피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누가 있는걸까?" "쉿. 조용히 하세요. 교수님." 두려움에 약간은 떨기 시작하는 교수님을 우선 진정시킨다. 괜한 소음으로 인해 우선은 이쪽의 위치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짐승인지 사람인지 아직 그 정체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첫째도 조심, 둘째도 조심이었기 때문이다. 근저에 목검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나뭇가지를 집어든다. 커터칼이 있다면 나뭇가지를 깎아서 목검 비슷하게 만들 수 있는데, 지금 가진 것이라고는 옷과 그리고 살아남겠다는 강한 정신력 뿐이다. "교수님은 움막으로 들어가 계세요. 제가 가볼게요. "나, 나도 갈게." "둘이서 움직이면 이쪽 위치가 금방 들통나요. 들짐승이라면 문제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안심하시고 움막으로 들어가세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는 교수님. 선뜻 제자만 내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내 자신이 가봤자 도움이 되지 않을거란 사실을 알고서 어쩔 수 없이 입을 연다. "... 다치면 안 돼." 교수님이 내 팔 한쪽을 꼭 끌어안으며 말한다. 마치 전쟁터에 남편을 보내는 아내의 모습이라고 해야 어울릴지... 재수 없으니까 관두자. 그보다 그런 상황을 본 적도 없어서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다. 교수님에게 한번 싱긋 웃어보인 뒤 바로 숲으로 진입한다. 최대한 나뭇잎과 풀은 밟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점점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이동한다. 숲의 안쪽은 예상보다도 훨씬 어두워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어둠에 익숙해지고 난 뒤에는 진행속도가 수월하였다. 상대방은 어디론가 이동중인 모양이다. 점점 그 소리가 해안가로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교수님이 있는 방향과는 약간은 떨어진 방향이지만, 해안가로 나온다면 우리의 위치는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소리를 내는 정체불명의 생명체와는 체 2m도 되지 않는 거리까지 접근한다. 먼저 인간인지 동물인지 말을 걸어보고 싶지만, 동물이라면 대답도 없이 바로 돌진할 것이다. 그런고로 나는 우선 위협을 가하자는 심정으로 바로 달려들었다. 양 손에 나뭇가지를 쥐고 가로방향으로 그대로 있는 힘껏 휘둘러본다. 충분히 위협은 될 수 있을만한, 그렇지만 피해는 주지 않을 목적으로 휘두른 공격. 방금과 같은 공격으로 인해 인간이라면 갑자기 튀어나온 누군가의 공격을 받는다면 비명을 지를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전혀 반대로 이야기는 진행되기 시작한다. 상대방(동물인지도 모르지만)은 순간적으로 뒤로 몇발자국 물러서면서 바로 나에게 돌진한다. 게다가 그 돌진속도 또한 인간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났다. 갑작스런 공격을 받고도 비명조차 지르지 않은 체 반격을 가해온다. 순간적으로 난 이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동물이라고 잠정적인 판단을 내렸다. 보통 인간이라면 의문의 습격을 당하면 보통 비명을 지르는게 정상 아닌가, 하다못해 비명 정도는 아니더라도 반격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공격한 상대는 이미 내 예상을 초월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기랄!" 돌진해오는 녀석을 피해 아슬아슬하게 바닥을 구르며 피한다. 그러자 내 머리가 위치하던 곳에 섬뜩한 칼날같은 날카로운 물건이 베고 지나간다. 동물중에 저런 날카로운 뿔을 가진 존재가 있을까도 생각해봤지만, 이름도 모르는 섬에서 어떤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살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도 생각해봤다. 내가 구른 방향으로 그 녀석은 다시 방향을 바꾸어 그 날카로운 뿔을 휘두른다. 달빛을 통해 반사되는 시퍼런 날이 내 눈 앞에 아슬아슬하게 지나간다. 도망만 치면 이길 수 없다는 판단에 나는 최후의 결단으로 녀석에게 도리어 달려든다. 이대로 피하기만 하다가는 당할 우려가 크기 때문에 '최고의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문구를 믿어보기로 한다. 그대로 녀석을 잡아 바닥에 눕힌다. 움직이지 못하게 그 녀석을 왼손으로 누르려 손을 데는 순간, 생각보다 말캉한 부드러운 촉감이 내 손을 타고 흐른다. 그와 동시에, 내가 타고 올라가 누르고 있던 녀석이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하읏..." 여성, 분명히 여성의 신음소리다. 약간 에로틱하긴 했지만...이 아니라. 설마 하는 눈으로 내가 공격한 상대방을 내려다본다. 그러자 숲속의 달빛이 이 녀석의 정체를 비추려는 듯이 환하게 비추기 시작한다. 흙 위를 아름답게 수놓은 듯한 금발의 머리카락들. 그리고 달빛에 비치는 푸른 눈동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조각같은 외모. "여, 여자?" "... 알았으면 빨리 내려오시지? 변태 호색남." "으악! 죄송합니다!" 일단 상대방의 기세에 눌려 펄쩍 뛴 채 물러선다. '나 참...'이라고 불만을 늘어놓으며 상반신을 일으키는 그녀. 생각보다 아름다운 외모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것보다도 아까의 움직임은 분명 동물적 감각과 버금갈 정도의 뛰어난 움직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 보통 내기가 아니다. "누구신지...?" "너, 정말로 날 모르는거야?" 소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가슴에 오른손을 가져간다. "네 동아리 부장인 이유아잖아. 너보다 선배라고!" "...네?" "네? 가 아니라고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그것보다도 후배가 선배를 덮치려고 감히 습격을 해? 아무리 사람이 없는 섬이라고 해도 여자를 겁탈하려고 하다니. 믿겨지지가 않아. 정말." "아, 그게 아니라 선배님. 이건 여러가지 사정이..." "시끄러. 이 일은 한동안 잊지 않을테니까." 엄청난 오해를 산 모양이다. 그것보다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 학교 검도부 동아리 부장은 분명 여자라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내가 직접 본 적은 몇번 없기에 사실 부장이 누구였는지 잘 기억이 안난 듯 하다. 아무튼 부장이라 소개한 유아 선배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노아 교수님도 그렇고 아무래도 나는 여자를 화내게 하는 무슨 특별한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 작품 후기 ============================ 잠시 글 연재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자면, 데드라인 완결 이후 연재되고 있는 무인도 표류일지가 완결까지 찍고 나서야 난파선 표류일지가 연재될 예정입니다. 하나하나씩 완결까지 올리기로 계획을 잡고 있어서 이런 일정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ㅡ_ㅡ;; 그리고 엔딩의 경우에는 저번같은 경우에는 조금 허무하게 끝난 감이 없지않아 있어서, 이번에는 엔딩을 다르게 꾸며볼까 생각중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인상깊은 엔딩이 될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을 하고 있으니, 계속해서 무인도 표류일지 관심있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7화 유아 선배를 움막쪽으로 안내하던 도중. "그런데 선배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나요." 문득 들은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질문을 던져본다. "나? 외국에 있는 친구 얼굴이나 보러 and 여행 겸 가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었지." "우리들과 같은 배에 타고 계셨나 보네요." "법학과 해외 MT 여행?" "알고 계셨나요?" "MT를 해외로 간다는 사실 때문에 학교 전역에 소문이 쫙 깔렸거든. 다들 법학과가 부럽다느니 어쨌느니 하면서." "뭐... 결과는 좋지 않게 되었지만요." 의도는 참신했으나. 무인도에 표류된 결과를 놓고 보자면, 최악의 여행길이 되지 않았나 평가하고 싶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엣헴. 이라고 말하며 작은 헛기침으로 잠시 화두를 돌리는 유아 선배. "그럼 노아 교수님이랑 둘이서 있던거야?" 유아 선배의 물음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네. 저기 보이는 움막 보이시죠? 저기에 계실 거예요." "혹시 교수님에게 이상한 짓을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겠지?" "선배. 아까는 그저 들짐승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뿐이라서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라니까요. 강간하거나 겁탈이나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과연 어떠려나. 사람도 없는 왜딴 곳에 미인 여교사랑 단 둘이 있으면 이상한 생각을 할 수도 있지. 특히나 너같은 녀석이라면 더더욱." "... 전 확실히 선배한테 변태로 낙인찍혔군요." "흥." 대략 교수님과 지내온 일에 대해서 미리 설명을 했지만, 유아 선배는 여전히 나를 변태취급 하는 듯 하다. 미리 교수님과 키스한 사건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으로 여겨졌다. 만약 교수님과 억지로 키스한 내용까지 이야기했다면 나는 변태가 아니라 강간범으로 레벨이 상승했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움막으로 도착하자, 인기척을 느낀 노아 교수님이 우리를 향해 달려온다. 누군가와 함께 걸어온 탓에 약간은 놀란 교수님이 이내 유아 선배를 알아보고는 기쁜 표정을 지어보인다. "너... 유아 아니니?" "네. 안녕하세요. 교수님." 둘이 서로 아는 사이인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내 속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유아 선배가 나에게 설명투로 말을 해주기 시작한다. "법과 사회라는 교양 과목을 듣고 있는데, 담당 교수님이 바로 노아 교수님이시거든." "아. 그래서 타 학과인 선배가 교수님을 알고 계시는 군요." 참고로 유아 선배는 경제학부. 그다지 우리들과 접점이 없을 줄 알았는데, 내가 소속되어 있는 동아리의 부장인 데다가 교수님의 제자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까. 유아 선배도 교수님의 모습을 확인하자 마자 반갑다는 듯이 서로 감싸안는다. 두 여인은 서로 촉촉한 눈가를 감출 생각도 없이 안부를 물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뭔가 소외감이 느껴지는 것이 약간은 불만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흐뭇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그동안 혼자서 돌아다녔니?" "네. 정신을 차려보니 혼자만 있어서... 교수님은요? 유에랑 같이 있던 거예요?" "응.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던 유에를 내가 발견했거든. 어제부터 같이 다니고 있단다. 그나저나 장하구나. 여자애 혼자서 생활하고 있었다니..." "전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인것 같아요. 이렇게 교수님이랑 만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까 나와 있었을땐 저렇게 활짝 웃어보이는 모습은 보여주지도 않았으면서 교수님 앞에서 보여주는 미소는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였다. 생각해보니 우리 검도부 동아리 부장은 학교에서도 알아주는 미인이라는 소문을 친구에게 들었던 것 같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이제와서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다. 미인에다가 아까의 실력으로 봤을때 운동신경도 발군. 이런 인물을 '엄친딸(엄마친구아들의 딸 버전)'이라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매번 재수강을 피하느라 고군분투하는 나와는 다른 인생을 걷고 계시는 분이군. "그런데 교수님. 이상한 짓 같은거 당하지 않았죠?" "이상한 짓이라니?" "유에한테 말이에요. 방금 절 겁탈하려고 했다니까요. 정말." "... 사실이니? 유에." 이제는 교수님 마저도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런 식으로 바라보면 내가 진짜 범죄자 같이 느껴질 정도의 착각마저 든다. 제발 사람 말좀 들어주세요. 다들. "그럴리가 없잖아요. 교수님." "그, 그렇겠지? 나도 참." 교수님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의심했던 자신의 태도를 버린다. 음. 왠지 새삼스레 느낀거지만, 갑자기 교수님이 내 말을 잘 따르게 된 것은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때에 비해서 너무나 순종적으로 따르기 시작했다고 해야할까. 교수님의 반응에 유아 선배는 우리 둘을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그러더니 이내 의심의 눈초리로 바꾸면서 작게 속삭인다. "역시 뭔가 있었어. 둘이서." 교수님과 단 둘이 무인도에서 생활했을 때의 일을 그대로 유아 선배에게 들려준다. 도중에, 유독 선배의 신경을 자극하는 내용이 존재하고 있어서 그런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유아 선배가 말도 안된다는 듯이 외친다. "서로 소변을 마셨다고?" "글쎄 물이 없어서 그랬다니까요. 이상한 짓 때문에 그런게 아니라요." "못 믿겠어. 정말..." 유아 선배도 스스로가 생각해도 창피한지 수치심으로 인해 얼굴이 잔뜩 상기되었다. 이 선배도 화만 내는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보니까 나름 신선한 것 같다. 한참을 그렇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유아 선배가 한숨을 쉰 채 말한다. "물 있는 곳은 내가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담아뒀던 소변은 버려도 돼요." "정말입니까?!" "정말이니?!" 우리의 외침에 유아 선배가 잔뜩 주늑들면서 일단 진정하라는 듯이 양 손을 펴보이며 우리를 말리기 시작한다. 물이 있다는 말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 물이 근처에 있다는 걸 전혀 모른체 괜히 소변을 마셨다는 수치심이 가중되어 자신도 모르게 외친 모양이다. "여기서 한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어요. 아마도 다들 길을 잘못 갔었나 보네요." "아아. 헛수고만 했네." 몰려오는 자괴감에 바닥에 누운 채 한숨만 푹푹 내쉰다. 나름 있는 지식, 없는 지식을 동원해 물을 찾아봤지만, 결국 찾지도 못하고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결말이 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내 모습을 보던 교수님이 힘내라는 듯이 웃어보인다. "물이 있는 장소는 내일 같이 가보도록 해요." "그것보다 선배. 아까 저랑 싸울때 커터칼을 가지고 있던 거 같은데 어디서 나셨나요?" "이거? 아, 난 깨어나보니 옆에 가방같은게 있었거든. 거기서 쓸만한 물건이 없나 찾아봤는데 필통에 들어있던 커터칼하고 라이터정도? 이 정도밖에 없었어." "라, 라이터요?" "응." "물에다가 불까지 구비하고 나타나시다니... 유아 선배. 혹시 여신님 아닌가요? 아니면 구세주?" "이 변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래." 이렇게 식수와 불에 대한 문제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한 짓은 모두 헛수고라는 것만 빼고 너무나도 쉽게 해결되었으니 일단 내일부터는 오늘처럼 물을 찾아 삼만리 영화를 찍지 않아도 될듯 하다. ============================ 작품 후기 ============================ 마영전을 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오늘 무제한 이너아머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비한테 줬는데, 가슴 크기를 중간으로 설정해둔 이비의 바스트가 이너아머 하나로 순식간에 업 되더군요. 역시 마법사 이비... 아니, 연금술사였던가; 8화 근처에 있는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아서 불을 피운다. 교수님의 손목시계를 통해 확인한 결과, 현재는 저녁 10시를 넘어가는 시각이라는 정보까지 들었다. 세삼 궁금했던 것이 있었는데, 여기는 한국도 아니면서 어째서 교수님의 시계는 낮과 밤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시각으로 맞춰진 것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들려온 대답으로는 수학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미리 우리가 목표했던 외국의 시차에 맞춰놓은 것이라고 했다. 저번에 지도로 배의 루트를 확인한 것과 이번 시계에 관련된 교수님의 대처방안을 보아 역시 교수님은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인것 같다. 이런 면에서는 연장자다운 모습이 느껴진다. "힘들지 않니?" "아니요. 오늘은 불침번을 2교대로 돌아가면서 하니까 별로 부담은 안되네요." "그렇구나." 유아 선배의 합류로 불침번은 내가 1조, 그리고 유아 선배와 교수님이 2조로 번갈아가며 보기로 했다. 체력적인 부담을 줄이고자 유아 선배가 제시한 방법이기도 하다. 섬에서 오랫동안(이라고 해봤자 하루 남짓) 혼자서 생활한 유아 선배는 미리 잠이 들었다. 천막 안에서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잠을 자는 선배의 모습은 아까 나와 싸움을 벌였던 강인한 모습과는 반대로 여성의 성숙함이 묻어나오는 무방비한 모습이었다. 그저 활동적이고 쾌활함으로 똘똘 뭉친 여자인 줄 알았는데, 자는 모습은 연약한 분위기도 자아낼 줄 안다. 여자란 변신의 귀재라고 하니까. 한편, 교수님은 잠이 잘 안오는지 내 곁에 앉아 활활 타오르는 불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많이 초췌해진 담임 교수님의 모습에 약간은 안쓰러운 감정마저도 느껴질 정도였다. "내일 유아 선배가 물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면, 우선 교수님은 목욕부터 먼저 하시는게 좋을거 같아요." "응. 며칠동안 씻지도 못했으니까. 너무 찝찝하기도 하네." "저는 유아 선배하고 교수님이 끝나고 나서 할테니까 천천히들 하세요." 아까 주웠던 긴 나무 막대기로 불씨를 이리저리 찌르면서 장작이 더 잘 타게끔 만든다. 그러던 와중에, 교수님이 내 곁으로 바짝 몸을 붙이면서 자신의 몸을 밀착시키기 시작한다. "같이... 할래?" "네?!" "목욕... 혼욕해도 좋은데." 점점 더 자신의 몸을 밀착시켜온다. 여성의 몸이 이렇게나 부드러운 것이었나. 아니면 교수님이기에 이렇게나 남성을 흥분시키는 자극제같은 역할을 하는 것일까. 불의 희미한 빛 덕분에 교수님의 표정은 한층 더 섹시하게 보인다. 풀어진 긴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아찔한 여체의 곡선을 타고 흘러내린다. 나를 올려다보며 또다시 살짝 눈을 감는 교수님. 아까와 같은 상황의 모습이었다. 다만 다른점이 있다면, 천막에서 유아 선배라는 다른 여자라 잠든 환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남성을 유혹하고 있다. 교수님같이 단아한 분에게 이런 색기있는 모습이 존재할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것도 다 무인도의 힘일까? 아니면 수컷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암컷의 본능인 것일까. 역시 여자는 변신의 귀재다. 생각지도 못한 180도 분위기 전환을 자아낼 줄이야.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교수님의 입술위를 포갠다. 교수님의 부드러운 향기가 후각을 자극한다. 며칠 씻지도 않은 통인지라 유난히 여성의 유혹하는 진한 페로몬이 가득 풍겨오는 착각마저 들었다. 교수님의 혀와 내 혀가 서로를 탐하려는 듯이 움직인다. 때로는 교수님의 혀를 빨기도 하고, 교수님의 입술이 내 입술을 핥기도 했다. 몇분동안 그렇게 서로 키스만을 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이미 서로간의 타액이 목을 타고 흘러내린다. 한동안 키스만을 탐하는 남녀의 음란한 소리가 해안가에 퍼져나갔다. 교수님이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쉬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미약한 추측으로 따져본다면, 아까의 무드잡힌 키스에 비하면 지금은 오로지 성욕을 풀기 위해서 키스를 하려는 모습인것 같다. 아마도 교수님의 이런 태도가 나온 것은 유아 선배의 등장 이후라고 생각해본다면,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남성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길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렇게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이건 내 단순한 생각일 뿐이고, 사실 단아하고 청초하기로 소문난 노아 교수님이 그럴리가 없을 거라는 사실은 잘 알고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도 솔직히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키스만으로 만족한다면 그것 나름대로 섭한 일일지도 모른다. 내 손은 점점 교수님의 허리를 끌어안은 위치에서 대담하게 교수님의 탐스러운 가슴쪽으로 옮겨간다. 예상대로 큰 가슴이 한쪽 손에 가득 찬다. 본의 아니게 유아 선배의 가슴도 만져본 경험이 있지만, 유아 선배에 비해 약간 크다고 해야할까. 부드러운 촉감과 큰 사이즈까지 모든게 남성을 유혹하는 여체의 완벽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하아..." 교수님의 입술 사이로 야한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옷가지 위에서 만졌을 뿐인데, 교수님은 극도로 흥분했는지 자신의 양 손을 내 목에 걸치면서 적극적으로 또 한번 키스를 감행한다. 옷 사이로 느껴지는 부드러움보다도 더 욕심을 내서 손을 옷 안으로 넣어본다. 차가운 남자의 손길이 순결한 처녀의 피부에 닿자, 교수님은 약간 몸을 움찔하면서도 그 짜릿함에 점점 신음소리의 크기는 커져갔다. 이것이 여성의 가슴. 어렸을 때(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예전에) 어머니의 가슴을 만지고 난 이후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낯선 여자의 가슴을, 그것도 맨 피부로 직접 만져본 일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상대가 바로 연상의 교수님이라는 점도 참으로 잊지못할 요소였다. 부드럽게 교수님의 가슴을 어루만져본다. 세상에 이렇게나 탐스러운 물건이 과연 존재할까 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도 해본다. 교수님은 남자의 손길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내게 밀착해온다. 것으로는 단아한척 해도 막상 들어가보면 적극적인 타입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일부러 짐짓 얌전한 척 해온 것일까. "저기요." 한동안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육체를 탐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천막쪽에서 유아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놀란 우리들은 허겁지겁 서로 거리를 두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선을 회피한다. 교수님은 빠르게 헝크러진 머리와 옷차림을 정리하고 있었고, 나는 잔뜩 발기된 성기를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부스스한 눈으로 천막에서 나온 유아 선배가 교수님을 향해 별다른 의심없이 묻는다. "아직도 안자고 계셨어요?" "으, 응. 잠이 안와서." "빨리 주무시는게 좋을 거예요. 조금 있다가 불침번 저랑 같이 서야 하잖아요. 그리고 저 변태랑 단 둘이 있으면 무슨짓을 당할지도 모르니까요." 하품을 하며 천막을 나오는 유아 선배. 변태라고 무시당했지만 일단은 차마 선배의 말에 대꾸할 양심적인 행동은 하지 못한 관계로 태클거는 대사는 하지 못한다. "어디가세요? 선배." "... 숙녀에게 화장실 가는 길을 묻다니. 정말 최악이야." 아무래도 나와 유아 선배 사이는 좀처럼 가까워질래야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인듯 하다. 전생에 원수라도 진 것일까? 이거, 내일부터는 상당히 고된 하루가 될듯 하다. 교수님과 유아 선배가 모두 잠이 든 새벽. 어제에 이어 밤하늘을 바라본다. 무인도에 조난당한지 이걸로 이틀 째. 구조대가 오긴 오는걸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이런 희망도 없는 생각 따위는 진작에 버리자고 마음먹었다. 우리는 곧 구조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지금까지 버틴 것이다. 교수님도 자신의 소변을 마셔야 하는 굴욕을 참아가면서 까지, 그리고 유아 선배는 여자 혼자서 이런 위험한 장소를 돌아다니는 것 까지 그 모두가 희망이 있기에 행한 행동들이다. 나 역시도 희망이라는 녀석을 생각하고 있기에 이렇게 불을 지피며 혼자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부모님은 잘 계실까? 약간 귀찮기는 하지만 그래도 오빠라고 부르며 잘 따르는 여동생도 잘 자내고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같은 학과 친구들과 교수님들은 무사하실까. 배가 난파될 당시의 기억이 너무나도 흐릿하기 때문에, 그 때 당시의 정황을 제대로 떠올리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생사의 여부도 알지 못하다니.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지금 내 입장에선 적어도 통용되지 않는 문장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다못해 핸드폰이나 연락이 되는 통신 수단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 아니지. 전기나 수도 공급도 없는 무인도에서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는 건가. 점점 고민만 해서는 안된다. 이런식으로 가다가는 무인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 언젠가는 반드시 살아 돌아가야지." 오늘도 나는 이렇게 혼잣말로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별들이 수놓은 아름다운 천장을 바라본다. 절실한 기독교 신자였다면, 기도라도 했겠지만. 공교롭게도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냥 드러 눕고 밤하늘을 바라볼 뿐이다. ============================ 작품 후기 ============================ 마영전 하느라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된지도 몰랐습니다 ㅡ_ㅡ;; 그냥 자기도 뭐해서 소심하게 한 편 올리고 가겠습니다. 다들 안녕히 주무세요! 9화 EP 2. 편지 보내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우선 잠시 교수님과 나의 보금자리였던 천막에서 나온다. 따스한 아침햇살이 여지없이 해안가를 비추고, 말 그대로 1급수의 푸른 물로 이루어진 듯한 착각마저 들게하는 맑은 바다가 내 시야를 정화시켜준다. 현대 사회의 생활에 찌든 자들이 가끔씩 휴양지로 놀러오기에는 정말 좋을만한 장소인듯 하다. 문제는 돌아갈 방법도 없고 음식과 식량도 존재하지 않는 환경은 사양이라는 것이다. 배가 난파되어 무인도에 표류되었다는 상황 설정만 아니었다면, 정말 금상첨화였을텐데. "일어났어?" 불침번을 도맡고 있던 유아 선배가 부스스 일어난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무인도이긴 하지만, 미녀의 얼굴을 보며 아침잠에서 깨어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선 그래도 만족이라고 할까. "네. 그동안 별일 없었죠?" "있기야 하겠나. 무인도에서." 어제의 일 때문일까. 유아 선배의 차가운 말투는 정말 적응이 안된다. 사실은 자는 척 하고 교수님과 내가 한 행동을 다 듣고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만약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자는 척을 할게 아니라 들고있는 커터칼의 날을 세우며 나에게 달려들었을 확률이 더 크기 때문에 그런 우려는 하지 않아도 될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나에게도 좋겠지. 긍정적인 마인드를 잊지 말자. "경치 하나는 정말 좋네~" 기지개를 펴며 힘있는 말로 외치는 유아 선배. 이 선배 또한 나와 같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나보다. 그런 긍정적인 선배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 건네주도록 하자. "유아 선배." "왜?" "이거 먹을래요?" "... 이게 뭔데?" "먹을 거요." 초록색의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는 풀 잎사귀를 건네준다. 부연 설명을 붙이자면, 어제 노아 교수님이 약초도감에서 봤다며 자랑을 하고서 따온 식품이지만. 아무리 봐도 그다지 몸에 좋아보이진 않아 보인다. 유아 선배 역시도 나와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심어린 눈초리로 묻는다. "대마초야?" "실제로 본 적 있나요?" "아니. 전혀." "그런데 왜 뜬금없이 마약의 한 종류가 튀어 나오는데요?" "왠지 먹으면 이상한 생리 현상이 벌어질 것 같이 생겼잖아." 그 의견에 대해서는 나도 심히 공감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노아 교수님이 '나도 드디어 도움이 되었어!'라는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따온 먹거리인데. 그 자리에서 위험할 거 같으니까 안 먹겠다는 말을 했다간, 교수님이 얼마나 풀이 죽을지 감도 안 잡힌다. 모른 척 하고 먹긴 했는데. 오늘 무사히 눈을 떴으니까 생명에 큰 지장을 주는 그런 생물체는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임상실험을 거치며 결론이 났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불만이긴 하지만, 그러려니 해야지. "미안. 난 안 먹을래." 정중히 거절하는 유아 선배의 말. 이것도 예상대로다. 덧붙여 말하자면. "난 소중하니까." 뒤에 첨가된 유아 선배의 두번째 의견 역시도 예상대로였다. 홀로 앉아있던 유아 선배의 곁에 교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잠시 화장실이라도 간 것 같다. 어제처럼 또 여성에게 화장실 가는 길을 물었다간 유아 선배에게 정강이를 걷어 차일거 같아서 생략하도록 한다. "교수님이 오시면 바로 물이 있다는 곳으로 가죠." "그러는게 좋겠어." "그 장소는 혹시 호수인가요?" "음... 그런 셈이지. 생각보다 꽤 커. 물이 고여있는 장소라서 ㅤㅆㅓㄲ었을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맑더라. 마실만 한 물인거 같아. 엊그제부터 내가 마시면서 생활했는데도 배탈이나 이런게 없는걸 보면 마셔도 된다는 소리겠지?" 복통이나 설사를 동반한 병적 증세는 없는 모양이다.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사실 나에게는 의학적 지식은 전무한지라 유아 선배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미안, 기다렸니?" 볼일을 보고 온 모양인지 교수님이 내 모습을 발견하고서 약간 상기된 얼굴로 인사한다. 나도 덩달아 창피해져서 머쓱해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제 일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수와 제자의 관계보다 남녀관계라는 점을 강조했던 사건인지라 본인들도 모르게 부끄러워진 모양이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우리의 이런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유아 선배는 갈 길을 재촉한다. 숲으로 들어선 우리는 유아 선배가 선두, 가운데에 노아 교수님, 그리고 내가 맨 마지막 순번으로 물이 있는 곳을 향한다. 길안내 역할을 맡은 유아 선배가 이끌어주는 길은 역시나 우리가 물을 찾기 위해 갔었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쪽이었다. 이러니까 물을 못 찾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아 선배의 말 그대로 정말 규모가 꽤 큰 호수가 보인다. 작은 동물들도 이 호수에서 목을 축이는지 몇마리가 보인다. 물 상태를 보니 바닷물과는 다르게 투명한 색으로 겉으로만 보기에는 청정 1급수라는 팻말을 붙여도 될 만큼 깨끗해보인다. 아마도 수도공사에 종사하는 분이 이 호수를 접했다면, 꽤나 놀랄만한 얼굴을 하겠지. 일단 어제부터 물을 마신적이 없는 나와 교수님은 손으로 바가지 모양을 만들어 물을 마신다. 그 순간, 인간이란 생물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필수요소는 음식도 뭐도 아닌 바로 물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되었다. 물. 이것은 자연의 축복인 것이다. "이제 살만 해?" "천국을 체험한 느낌이네요." "그 정도야?" "소변보다는 수십배나 맛있으니까요." "... 더러워." 유아 선배가 오버한다며 어이없다는 듯이 웃어보인다. 교수님도 순간적으로 내 말에 동의한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한동안 그렇게 목을 축인 우리는 그동안의 피로를 풀 겸 깨끗한 물에서 몸을 씻기로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내 성별이 문제였던 것이다. "설마 너, 혼욕할 생각은 아니겠지?" 어제 교수님은 분명 허락했지만, 당연한 결과로 유아 선배는 절대로 안된다는 듯이 엄포를 선언한다. 자신의 알몸을 낯선 남자한테 보인다는 것에 엄청난 거부감이 일어난 듯 하다. 물론, 나도 그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에 노아 교수님과 유아 선배가 먼저 물에 들어가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가기 전에, 유아 선배가 나에게 이쪽으로 와보라며 손짓한다. "설마 벗고 계신건 아니겠죠?" "내가 무슨 변태녀인줄 아니? 근처에 기다란 나뭇가지하고 손바닥만한 크기의 나뭇잎 8장 정도만 구해다줘. 우리가 목욕할동안 네 일거리야." "무슨 용도로 쓰시게요?"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옷도 빨아서 말리려고. 일단 구조대가 올때까지 이 옷을 입고 생활해야 하는데 옷이 쉽게 찢겨지거나 그러면 곤란하잖아. 그리고 바닷물에 잔뜩 찌들어서 옷에 소금기도 가득하고. 찝찝하기도 하니까 한번쯤은 빨아서 말리려고." "그렇군요. 그래서 세탁과 선배가 지시한 재료의 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 변태야. 그러니까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을 말리는 동안은 입을게 없잖아. 그래서 나뭇가지의 줄기를 끈처럼 잘라서 만들고, 나뭇잎으로 가리개 역할을 하는거지. 한마디로 자연버전 수영복. 어때?" "... 선배나 교수님은 3장, 그리고 나머지 2장은 제꺼인가요?" "그래. 손수 네 옷까지 만들어주니까 고맙게 생각하라고." "우와.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오려고 하네요." 별 감흥없는 목소리 톤으로 친절히 대답을 해줬다. 그런고로 여성분들이 목욕씬을 찍는 동안, 나는 재료 구하기 탐험에 나선 것이다. 호수 근처도 한번씩 둘어볼 생각도 있으므로 유아 선배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아, 참고로 엿보거나 그러면 죽여버릴거야." 라는 마지막 경고문까지 잊지 않고 말해주시는 친절한 선배님이시다. 재료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돌아다니면서 느낀 거지만, 아마 이 섬은 열대지방에 위치한게 아닐까 싶다. 나뭇잎의 크기나 생김새, 그리고 나무종류와 날씨의 따스함을 봐서는 적어도 추운 쪽 지역은 아니라는 것이 내 잠정적인 결론이었다. 열대 지방에는 야생 짐승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위험한 동물이나 이런 것은 현재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기껏 해봐야 다람쥐 크기의 생물정도밖에 보이지 않는다. 간혹가다가 뱀같은 녀석들도 보이기는 하는데,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환경인지라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다. 내가 정말로 위험하게 생각했던 멧돼지나 덩치 큰 산짐승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일단은 안심이다. 하긴, 산간지역도 아니고 섬인데 그런 동물이 과연 살 수나 있을까 하고 의심부터 해봐야 정상이지만 말이다. 호수의 근처에 있던지라 유아 선배의 목소리는 금방 들을 수 있었다. 선배의 부름에 따라 가보니, 어느새 완성된 자연버전 수영복을 입고 있는 두 여성은 그야말로 미의 여신들이라 할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 교수님이야 진작에 몸매가 좋은 걸 알고 있었지만, 비키니 형식의 수영복을 입고 있으니 역시나 어른의 색기가 숨김없이 드러난다. 부끄러워하는 표정과는 다르게 농염한 몸매가 정말로 아찔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반면 유아 선배 또한 교수님에 비해 뒤쳐지지 않을 정도의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가슴도 적당히 크고, 무엇보다도 운동을 해서 그런지 살짝 선만 보이는 복근, 그리고 잘록한 허리와 눈부신 머리카락의 윤기가 자연스레 탄성이 나올 정도였다. "뭐야.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지 말라고. 변태야." "슬픈 남자의 본능이라 생각해주세요, 선배님." "흥이다. 너도 빨리 옷 벗고 물에 들어가. 네 수영복은 저쪽에 뒀으니까." 보아하니 커다란 나뭇잎 두장을 엮어 하반신만 가린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난 또 원시부족에 나오는 민망한 수영복 차림인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평소의 사각팬티와는 다를바 없는 모양새라서 안심했다. "벗은 옷은 나한테 주렴. 대신 빨아줄게." "괜찮나요? 교수님." "응. 신경쓰지 않아도 돼." 일단 구석으로 가서 나뭇잎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뒤에 교수님에게 옷을 건내준다. 그러자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뒤에 있던 유아 선배가 날 지긋이 쳐다본다. "생각보다 몸은 좋네. 근육도 적당히 있고." "선배. 후배의 몸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보지 마세요." "너도 아까 내 모습 뚫어지게 봤잖아. 그러니까 복수야. 오고가는 정이 있어야지. 한국인이잖아?" "그런 의미로 쓰이는 말인가요?"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적용시키라고. 꽉 막힌 녀석아" 은근히 유치한 구석이 있는 유아 선배다. 그것보다 우리 동아리 부장이 이렇게나 재미있는 사람이었을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동아리에 자주 얼굴 좀 비출걸 그랬다. 10화 오랜만에 마친 목욕을 뒤로 하고, 구석에서 커터칼을 이용해 나뭇가지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유아 선배에게 다가간다. 길이도 제법 길고 튼튼한 나뭇가지의 껍질을 하나하나씩 벗겨내는 과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한 나머지 참지 못하고 묻는다. "선배. 이번엔 무엇을 만드시나요?" "목검." "목검요?" "응. 혹시 모르니까 무기 정도는 자급자족으로 조달해야지." 무기라. 굳이 무기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아마 유아 선배도 무인도라는 미지의 섬에 있는 동안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어도 외부의 적에 의한 공격을 방어할 수단은 필요할 것이라 판단한 셈이다. 외부의 적. 산짐승같은 것들도 있지만, 혹시나 하는 가설도 있다. 만약에 이 섬이 무인도가 아니라면? 이 섬에 우리가 오기 전에 먼저 살고 있던 원시부족같은 토착민이 존재한다면? 비록 섬이기는 해도 그 규모가 생각 이상으로 큰 섬이다. 토착민이 살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차라리 토착민이라면 오히려 더 좋을지도 몰라." "무슨 뜻인가요? 선배." "우리 외에 생존자가 더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리라 너도 생각하지?" "네." "그 '생존자'들이 만약에 우리를 습격한다면?" "......" 산짐승과 원시부족의 존재 여부는 둘째치고, 제일 문제인 것은 어찌보면 우리 이외의 생존자라는 말을 유아 선배는 하고싶은 것이다. 서로 살기위해 협력하는 것이 보통. 그러나 만약에 그와는 반대로 무법지대의 이 상황을 오히려 극단적으로 생각하며 오로지 독단적인 행동을 하는 무리들이 있다면? 인간은 극한의 상황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존재다. 더욱이 지금 우리에게는 식량이라는 것이 없다. 다른 생존자들은 그 이전에 식수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지가 가장 큰 걱정이지만, 만약에 이대로 식량부족의 악순환이 이어진다면 결국 하나의 집단을 형성한 무리가 다른 집단을 습격할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다. 법과 사회라는 규칙과 룰이 없는 야생에서, 젊은 혈기의 충동으로 순간적인 판단미스에 의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 존재들인 것이다. "한가지 중요한 문제가 더 있어." "... 범죄형 생존자 말입니까?" "그래. 지금 여기에는 인간사회를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법과 질서가 없는 무법지대야. 그렇기에 인간의 욕망, 간단하게 말해서 인간의 3대 욕망이라 불리는 것들이 극대화 되겠지. 수면욕은 문제가 되지 않아. 남는게 시간이니 잠은 충분히 잘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식욕은? 이것은 당분간이라면 나무에 있는 열매를 따거나 생선을 잡거나 하는 형식으로 버틸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한계가 있어. 그러나 지금 당장 다가올 문제는 아니야. 가장 큰 문제가 있다면..." "성욕이군요." "그래. 남자인 너는 잘 모르겠지만, 여자인 나나 노아 교수님에게 있어서 지금 가장 큰 적은 추위도, 배고픔도 아닌 바로 '남자'라는 존재들이야. 인간이 극한 상황에 몰리게 되면 남자들은 '성욕'을 찾게 되는거지. 성행위를 통해 무인도라는 섬에 갇히면서 쌓인 스트레스도 풀 수 있고, 그리고 여자를 지배할 수 있다는 소유욕까지 채워주는 역할을 하는 거니까. 게다가 지금 생존자들은 혈기왕성한 대학생 남자들이야. 여자라는 존재는 이미 그들의 섹스 대상일 뿐이지." "조금은 안타깝군요. 이러한 현실이." "사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 입장으로서는 널 많이 견제하고 있는게 사실이야. 그런데 아까 교수님하고 목욕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눠보니, 너는 어느정도 신용해도 될거 같다는 판단하에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거야." 열심히 커터칼을 이용해 목검을 만드는 유아 선배. 그러나 여자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는지 자주 쉬는 타임의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보다못한 내가 옆에 털썩 앉으면서 선배를 대신해 커터칼을 빼앗은 후 나무를 깎기 시작한다. "이런건 남자가 할 일이잖아요. 저한테 맡기세요." 한동안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던 유아 선배가 이내 보기드물게 어린아이같은 웃음을 지어보인다. "이래서 널 신용한다는 거지." "원래 전 매너가 철철 넘치는 남자에요." "거짓말." 혀를 빼꼼 내밀며 메롱 하는 유아 선배. 약간 까칠한 성격도 있지만, 가끔씩 보여주는 이런 귀여운 모습이 유아 선배의 매력인것 같다. "아무튼, 이래봬도 여성을 배려할 줄 아는 매너남입니다. 유에라는 남자는." "글쎄. 그건 어떨까. 검도부 부장님 이름도 모르고 있었으면서." 단번에 핵심을 찌른다. 원래 사람 이름 외우는 것 만큼은 쥐약인지라 유아 선배가 그 방면에 태클을 걸어오면 반격할 수단이 없다. 그런데 유아 선배는 어째서 내 이름을 알고 있던 것일까? 엄밀히 말하자면 유아 선배와 나는 오늘 처음 대면식을 가지고 말을 섞은 사이다. 그런데 어째서 유아 선배는 단번에 내 이름과 모습을 알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저기 선배." "응?" "어째서 제 이름을 알고 있었던거죠?" "......" 질문을 잘못 던졌나 싶을 정도로 유아 선배의 얼굴이 급속도로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내 예상이라면, 유아 선배는 결국 여행을 오기 전에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어째서 유아 선배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냐 하는 것인데... "그, 그런거 묻지 마! 이 변태야." "여기서 왜 갑자기 절 변태취급 하시는 건가요. 전 그저 궁금해서..." "그러니까! 그냥 사소한건 넘어가라고!" 유아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 정강이를 걷어찬다. 뼈를 통해 엄청난 아픔이 뇌를 자극하며 다리를 부여잡은 채 바닥을 뒹굴거려도 유아 선배는 여전히 빨간 얼굴을 감추면서 '흥!'이라는 코웃음과 함께 사라진다. "... 도대체 뭐냐." 여자의 마음은 정말로 모르겠다. 먹을 물을 확보한 우리들에게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할까. 예상 외의 물건이 백사장에서 발견되었다. 이름하여. "... 유리병?" 손 안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유리병을 집어든 유아 선배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건을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한다. 근처에서 유아 선배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노아 교수님이 혹시나 하는 얼굴로 말을 한다. "배 안에 있던 물건들이 이 섬으로 떠내려 온 것일까?" "그럼 하다못해 생존에 필요한 물건이 떠내려오지, 왜 이런 유리병이 왔는지 모르겠어요." 하늘이 내려준 선물을 저평가하는 유아 선배. 저러다가 날벼락을 맞을라. 그래도 선배의 말은 명백히 사실이다. 라이터라든지 아니면 칼, 물을 담을 수 있는 냄비나 물통 등 여러모로 활용도가 높은 물건들이 분명 배 안에 즐비해있을 터인데, 그 많고 많은 물건들 중에 발견된 게 고작 유리병 하나라니. 김이 다 빠진다. 적어도 쓸만한 선물을 내려달라고요. 하늘이시여. "유에! 저기봐!" 교수님이 종종걸음으로 어디론가 뛰어간다. 파도와 모래 바닥이 만나는 경계선상으로 가더니, 뭔가를 또 발견했는지 주운 물건을 들고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볼펜?" 물건의 이름을 내뱉은 유아 선배의 말이었다. 볼펜이라. "이번에도 또 실용도 없는 물건을..." "그러게요." 하늘이 참 원망스럽다. 글씨라도 써서 어쩌라는 것인지. 구조 신호를 보낼 수 있는 폭죽이나 그런 건 없냐고요. 부정적인 생각에 빠진 나와 유아 선배와는 다르게, 노아 교수님은 뭔가 아이디어라도 있는지 눈을 반짝이며 우리 둘에게 말한다. "이걸로 편지를 써서 유리병 안에 넣고 바다에 흘려보내는 거야! 어떠니?" "......" 할 말을 잃었다. 물론 유리병과 볼펜으로 가능한 일이 뭐가 있을까 해봤자 교수님이 말한 구조신호가 전부인 게 뻔하지만. "교수님. 그건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장면이라구요. 실제로 그 유리병이 외부 사람들의 손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핵심을 아주 콕 찍어서 말한 유아 선배의 말에 격한 공감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여주자.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반드시 등장하는 장면이긴 하지만, 그걸로 인해 주인공들이 구조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지만 교수님은 그래도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을 생각인지 우리들에게 강력히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 그렇다고 하지면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고 여기에 계속 있을 순 없잖니!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야!" "음..." 이번에는 교수님의 말에 일리가 있다. 아무런 시도 없이 얌전히 구조를 기다리는 건, 너무 수동적이잖아. ============================ 작품 후기 ============================ 예전에 비해 확연하게 달라진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건 등장인물이 점점 많아지고 나서 드러나는 사항이니, 훗날의 재미로 남겨두시면 됩니다. 아마도요...? 11화 "다 좋은데." 나와 교수님을 번갈아 바라보던 유아 선배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나지막히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쓸 종이가 없잖아요?" "아..." 생각해보니. 글자를 쓸 수 있는 볼펜도 있고, 외부로 전달해줄 유리병도 있는데, 가장 중요한 종이가 없다. "잎사귀에다 쓰면 어떨까요. 선배." "바보야. 쓰이겠니?" "하기사..." 행여나 쓸 수 있다고 한들, 제대로 글씨를 알아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매우 미지수다. 기왕 떠내려 올거면, 세트로 좀 오지. 왜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법이잖아. 볼펜 가는 데 종이가 왜 안 가냐고. "어쩔 수 없지." 라고 말하며 갑자기 내 티셔츠의 끝자락을 잡는 유아 선배. "옷 좀 찢어봐." "뭐라고요?" "너, 흰색 티잖아. 쓰면 글씨도 잘 보일테고. 가능성은 없지만, 행여나 기적이 발생되어서 구조를 받게 되는 경우가 생길수도 있잖아?" "선배가 제일 반대하지 않았나요." "막상 볼펜이 생기니까 해보고 싶어졌어." "......" 인간의 호기심이란, 정말 무서운 녀석이다. 해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나의 소중한 옷을 희생해야 하다니. 갑자기 암울해지는 이 기분은 무엇일까. 사춘기 소년도 아닌데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듯한 그런 느낌마저 다가올 정도다. 하는 수 없이 티셔츠의 끝자락을 약간 찢어서 노아 교수님에게 건네준다. 여자들에게 옷을 찢으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여기서는 남자인 내가 희생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자코 유아 선배의 말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천 조각을 받아든 교수님이 볼펜의 뚜껑을 열고, 제대로 나오는지 테스트를 해본다. "잘 나오네." 결과는 대 만족. 이제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거, 구조 신호를 영어로 써야되겠죠?" 유아 선배가 교수님에게 한 말이다. 아무래도 한국이나 아시아 권이 아니니까. 그리고 가장 전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언어가 영어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그런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영어로 구조의 문장을 완성하라니. 아는 영어 단어라고 해봤자 I'm find thank you. and you? 밖에 없는데. 생각지도 못한 난관해 봉착한 것 같다. "저... 영어를 어떻게..." 허둥대며 말하는 나와 달리. 쓱삭쓱삭이란 효과음으로 평평한 나무기둥을 찾아 아무렇지도 않게 천 위로 문장을 나열하는 교수님. 한글도 아니고 영어다! 영어라고! "왜 그러니? 유에?" "아, 아니요." 이게 바로 고학력자의 위력인가. 아무렇지도 않게 영어 문장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다니. 역시 교육 분야에 종사하는 분 다운 모습이다. 교수님 앞에서 이런 말을 하면 미안하지만, 무인도에 와서 처음으로 커다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병 안에 천 조각을 넣고 최대한 바다 멀리 유리병을 던지는 역할에는 내가 당첨되었다. "으랴아아압!!!" 있는 힘껏 유리병을 멀리 던지는 나. 예전에 폭포나 호숫가에 놀러가서 돌 멀리 던지기 게임 같은 걸 할 땐 언제나 내가 친구들 사이에서 1등을 차지해왔기 때문에 이런 거는 자신감이 충만하다. 물론 영어 문장 서술하기는 매우 약하지만. 편지 보내기는 일단락 되었고. "이제는 먹을게 문제지." 자연산 비키니 차림의 유아 선배가 허리에 손을 올려놓은 채 당당하게 말한다. 아무리 봐도 정말 아찔한 몸매...라고 생각했다가는 선배에게 또 정강이를 걷어 차일거 같아서 재빨리 지워버린다. "근처에 과일같은 열매는 없니?" "몇개 있긴 하지만, 언제까지고 과일로 버틸수는 없어요, 교수님. 영양쪽도 문제가 되니까요." 결국 유아 선배가 하고싶은 말은 '육류'를 사냥해보자는 의도인듯 하다. 육류라로 해봤자 소고기나 돼지고기는 어림도 없고, 아마도 생선을 의미하는 듯 하다. "참고로 이 호수에는 물고기도 제법 있으니까 낚시를 하는게 어때요?" "낚시 말입니까?" "그래. 호수 한 가운데는 수심이 꽤나 깊어서 물고기들이 많이 서식하는거 같아. 한번 헤엄쳐서 들어가보긴 했는데, 셋이서 먹고 살 정도의 양은 있는거 같더라고." 호수 한 가운데로 들어가볼 생각을 다 하다니. 유아 선배는 역시 겁이 별로 없는 여성인듯 하다. 나도 그다지 수영은 잘 못하는 편도 아니지만, 혼자서 호수 안으로 들어갔다가 쥐라도 나면 그대로 물귀신행이 될텐데 그런건 전혀 생각을 안한건지, 아니면 수영에 자신이 있는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선배. 낚시라면 아무래도 낚시대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것도 자급자족으로 하면 되지." "낚시대는 구할 수 있다고 해도 줄은요? 물고기를 건져 올릴만큼 튼튼한 실도 없잖아요" 나무줄기를 잘라 만드는 것은 한계가 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자연산 수영복이라면 여러 가닥을 엮어서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만, 가늘고 튼튼한 낚시줄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유아 선배는 내 물음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리킨다. 설마 하지만 혹시나 해서 확인 차원으로 묻는다. "머리카락... 인가요?" "그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그리고 낚시줄이 없으면 머리카락으로 하면 되지." "아니, 잠깐만요. 인간의 머리카락이 그렇게 내구성이 좋은게 아니잖아요. 금방 끊어질텐데." "그러니까 한번에 여러가닥을 꼬아서 만드는거지. 적어도 5~7가닥 정도 엮어서 만든다면 웬만해서는 잘 끊어지지 않을거야. 게다가 교수님이나 나나 머리카락 길이도 기니까 금방 만들 수 있을테고." 유아 선배의 말이 교수님은 약간 뜨끔하는 반응을 보인다. 자신도 지목당할줄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교수님이나 유아 선배나 머리카락 길이는 배꼽까지 내려오는 롱 헤어 스타일인지라 유아 선배의 말도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것 같다. "넌 튼튼해보이는 나뭇가지를 구해오도록 해. 교수님하고 나는 그동안 낚시줄을 만들고 있을테니까." 유아 선배의 지시로 또다시 숲 탐험에 나선다. 이번에는 조금 난이도가 있는 미션으로 가느다란 형태를 하고 있으면서 잘 휘어지고 내구도가 높은 나뭇가지를 적어도 2개는 구해와야 한다. 그런데 유아 선배도 참으로 아이디어가 좋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 시작한다. 판타지 소설에서 보면 엘프들은 자신의 활에 쓸 줄을 자신들의 머리카락으로 사용한다는 말이 가끔씩 나오기는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판타지 소설이니까 가능한 소재일 것이지, 실제로 머리카락을 이용한다면 화살이 날아가기는 커녕 활대를 휘게 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래서 몇가닥을 엮어서 만들자는 유아 선배의 창의성이 돋보인 것이다. 이정도면 거의 수아 급으로 자연 다큐멘터리의 마스터 수준이 아닐까 하고 생각도 해봤지만, 수아랑 유아 선배를 비교한다면 수아가 너무 압도적으로 이길거 같아서 포기한다. 그만큼 수아라는 녀석은 어떤 의미로 정말 굉장한 여자아이다. 나뭇가지를 구하면서 먹을만한 열매도 몇개 구해간다. 곧 있으면 해가 저물 기세니 야간에 식량을 조달하는 것 보다 미리 식량을 비축해두는 것이 좋을것이란 판단 하에서였다. 숲이 어두워지기 전에 유아 선배와 교수님이 있는 장소로 돌아가니, 아직도 한창 낚시줄 제작에 연연하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이 제일먼저 보인다. "아직 다 완성 안됐나요?" "으응. 생각보다 어렵네... 이거." 한쪽 눈을 감은 채 마치 바늘 구멍에 실을 꿰는 것 처럼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는 두 여성에게 이제 슬슬 천막으로 돌아가자고 권유한다. 호수가 숲 안에 위치하기 때문에 여기서 계속 머물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해안가에 위치한 천막으로 다시 돌아간다. 호수와 천막의 거리는 한시간 내외의 거리인지라 돌아가는 길은 수월했다. 천막으로 도착한 뒤 불을 피우기 시작한다. 아직까지는 라이터의 가스 잔존량이 꽤나 남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제 슬슬 불을 피우는 연습을 해야할 듯 하다. 불을 중심으로 모인 우리들. 일단 옷은 고이 접어서 천막 안에다 두고, 자연산 수영복을 입은 채 불 주변에 둘러앉는다. 따스한 불빛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나도 모르게 예전 추억이 기억난다. "마치 캠프 파이어 같네요." "조난당했다는 어이없는 상황만 빼면 정말 좋을텐데." 자신의 무릎을 껴안은 채 한숨을 쉬는 유아 선배. 겉으로는 씩씩한 척 해도 속으로는 역시나 집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한 여대생이었다. 유아 선배의 한숨을 위로하듯이 노아 교수님이 유아 선배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걱정하지 마렴. 구조대는 반드시 올거야. 이렇게나 큰 사건인데 가만히 있을리가 있겠니."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역시나 연장자다운 태도라고 해야할까. 비록 우리 중에서도 신체적인 요건은 가장 뒤쳐지는 교수님이지만, 그래도 우리보다 연상인 성인이다. 유아 선배에게는 교수님이 정신적 지주 역할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한 듯 하다. 개인적으로 아주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생물은 자신에게 힘든 시련이 닥치게 되면 의존하는 경향이 있는 약한 생물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탄생한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내일은 낚시대를 만들어서 물고기를 잡아보도록 하죠. 그리고 천막도 보수하고, 호수와 천막을 왔다갔다 하는 길도 새로 다듬을 필요가 있을거 같아요." "... 행동력 있네." "언제까지 무기력하게 있을수는 없으니까요. 일단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봐야죠." "그래도 역시 남자 한명이 있으니까 도움이 되는구나." 유아 선배가 약간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본다. 평소의 선배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가끔씩 보는 저런 약한 모습은 잘 적응이 안되는게 사실이다. 나의 입장으로서는 선배가 계속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는데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는 부탁일지도 모르겠다. "잠시 실례." 자리에서 일어난 선배가 숲 안쪽으로 들어간다. 이제는 묻지 않아도 자연스레 화장실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 유아 선배도 그렇고 교수님도 그렇고 자주 화장실을 가는 요인은 아마도 음식은 거의 먹지 않고 오로지 수분만 보충하는 형식으로 물만 마시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일만으로는 버티기 어렵다는 것이 여기서도 증명되는 셈이다. 유아 선배가 자리를 비운 사이, 오랜만에 교수님과 단 둘이 된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한동안 어색하게 우리는 타오르는 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유아 선배가 오기 전에 서로 몸을 밀착하며 성인물에 나올법한 키스를 한 사이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12화 의외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노아 교수님이었다. "오랜만이네. 둘이서 이렇게 있는거." "그, 그렇네요." 그러고선 잠시 침묵. 이토록 나에게 말재주가 없다는 사실을 저주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한동안 또다시 이어진 침묵의 바다가 또 한번 교수님에 의해 물결치기 시작한다. "저번에... 있잖니." "키스 말인가요?" "응. 그거..." 내가 너무 노골적으로 말했나. 교수님은 불보다도 빨갛게 달아오른 표정으로 말을 이어간다. "내가 너무 억지로 분위기를 잡았나 해서... 혹시 너에게 부담된건 아닌지 모르겠어." "아, 아니에요. 오히려 좋았는걸요." "좋았다니... 그것도 나름대로 곤란한데." 한참을 그렇게 우물쭈물 거리던 교수님. 정장 차림에서 비키니 차림으로 바뀌니 교수님의 커다란 가슴의 형태가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허벅지의 안쪽과 목 부근의 쇄골이 여체의 매력을 더욱더 극대화 시킨다. 이 차림으로 그대로 버틸 수 있는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만약, 유아 선배가 없었다면 나는 당장에라도 교수님에게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유아 선배도 있고, 그리고 교수님을 무리하게 덮치는 것은 유아 선배가 말했던 것 그대로 '강간'이기 때문에 참도록 하자. 좀 더 교수님과 친해지고 싶다. 단순한 육체적 의미가 아닌, 심리적인 의미로. 로맨틱하다고 할까. 아니면 바보일까. 둘 중에 어느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평소에 동경하던 교수님이라면, 분명 언젠가는 지금의 내 심정을 알아줄 날이 올 거라 분명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라고 생각을 했지만. 뻐억!! "이, 이 변태 자식아! 교수님한테 무슨 흑심을 품고 있는 거야!" 자초지종을 설명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선배는 잔뜩 빨개진 얼굴을 애써 감추면서 교수님에게 '저 변태는 위험해요, 천막으로 들어가요, 교수님.'이라고 말하며 유에를 버린 채 천막 안으로 들어간다. 한동안 아픔의 고통과 함께 시간을 보내던 유에는 슬픈 남성의 본능을 저주하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모래바닥을 뒹굴었다. 교수님은 둘째치고. 아무래도 유아 선배에게 내 마음은 전해지지 않는 모양인가 보다. 아침은 정말로 상쾌하다. 무인도의 유일한 장점이라고 부른다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은 이 생활. 언제쯤 탈출할 수 있을까. 그리고 유아 선배에게 낙인찍힌 변태의 이미지는 언제쯤 탈출할 수 있을까. 노아 교수님과 유아 선배의 합작으로 완성된 낚시대. 이름하여 '노아' 낚시대와 '유아' 낚시대라고 부르도록 하자. 참고로 '노아'낚시대는 낚시줄이 검은색이고 '유아'낚시대는 금색이라서 어느 낚시대가 누구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었는지 쉽게 구별이 된다. 여담이지만 '유에'낚시대는 본인의 머리카락이 여자처럼 긴 편이 아니므로 없다. "생각보다 튼튼하네요." "누가 만들었는데." 장인정신을 드러내는 유아 선배의 말 그대로 낚시줄은 생각보다 튼튼했다. 이거라면 꽤나 큰 물고기가 잡혀도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는 이상 낚시줄이 끊어질 일은 없을것 같다. "그래서 이제 낚시를 하러 가는건가요?" "그렇지. 참고로 낚시는 나와 교수님이 할테니까 너는 '집'이나 보수해." "말 안해도 그러려고 했어요. 그럼 전 새로 보수작업을 할테니까 물고기 많이 잡아오세요." 잠시의 작별인사를 마친 뒤 재료를 구하러 숲속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유아 선배가 내 손목을 다급하게 잡는다. "자, 잠깐만. 그 전에 네가 꼭 해야 할 일이 더 있어." "또요?" "뭐야. 선배의 말을 무시하겠다는 거야? 지금?"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무슨 일이시죠? 아름다우신 선배님." 유아 선배는 잠시 우물쭈물 뜸을 들인다. 차마 말하기 창피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대화인 모양이다. 내가 할 일중에 유아 선배에게 창피스러움을 주는 일이 있는가? 설마 혼욕을 하자는 건 아닐테고. 그러나 내 생각과는 반대로 유아 선배의 입에서는 약간은 어이없는 요구사항이 튀어나온다. "지렁이를 구해서 낚시대 끝에다 달아줘." "그런건 선배가 하셔도 되잖아요. 사소한 일인데." "트, 특별히 너에게도 낚시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거니까 빨리 지렁이 구해와서 낚시줄에 달아줘!" 여기서 한가지 눈치챈 사실이 있다. 설마 하고 생각해보지만, 아무래도 선배는... "... 선배. 혹시 지렁이 무서워하세요?" 선배가 지나치게 동요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백발백중에 버금갈 정도로 정확하게 핵심을 찌른 모양이다. 무서울게 없을 줄 알았던 천하의 유아 선배가 지렁이를 무서워하다니. 어떻게 본다면 여자애 답다고 말해야 하나. 은근히 귀여운 면이 있는 선배같다. "그런거 아니거든!" "알았어요, 알았어. 구해오면 되죠?" "... 작은 걸로 구해와야 돼." "큰거는 무서우니까요?" "이게 정말!!" 유아 낚시대와 노아 낚시대의 그늘에 가려져서 빛을 보지 못했지만, 유아 선배가 낚시대를 만드느라 습작품을 몇개 양산해낸 물건들을 발견했다. 여성의 긴 머리카락들을 뭉쳐서 낚시줄을 만든 다음에 나도 나름의 '유에' 낚시대를 완성. 여자인 유아 선배도 만들었는데, 나라고 못 만들겠는가. 이름을 '유에' 낚시대로 붙이고 싶었지만, 공교롭게도 내 머리카락으로 만든 게 아니라서 그건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지렁이는 이미 두 여자들에게 모두 몰아줬고. 시간도 남으니까 바다 낚시라도 해볼까 해서 일단 근처의 큰 바위가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찢어진 티셔츠 안으로 시원한 바다의 바람이 몸 안쪽으로 몰려옴을 느끼며 자리를 잡고 앉는다. "신선이 된 기분이구만." 여기에 밀집모자까지 있으면, 말 그대로 바다 사나이 아닌가. 교수님에게서 받은 옷핀 하나를 살짝 구부리고 머리카락 낚시줄 끝에 매달아둔다. 미끼는 없지만, 혹시 또 모르잖아. 어떤 바보같은 물고기가 옷핀을 보고 '지렁이인가?' 하며 덥썩 물지도. "읏차!" 최대한 멀리 옷핀을 던지고 자리에 앉아 입질이 오기를 기다린다. 낚시의 'ㄴ'자도 모르는 나이기 때문에 특별한 낚시 스킬이나 그런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혼자서 집 지키는 강아지 마냥 멀뚱멀뚱 서 있는 것 보다 무언가라도 하는 편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 "후아암~..." 세상은 정말 호락호락하지 않은 녀석인가 보다. 분 단위도 아닌 시간 단위가 흘러간 것 같은데, 아무런 입질도 없다니. 하긴. 물고기라고 한들, 생각 정도는 하겠지. "쓸모없는 짓을 했나." 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 입질이 왔다! 생각지도 못한 무게감이 낚시대를 통해서 양 손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바로 이 손 맛이구나! 강태공들만이 느낄 수 있는 바로 그것! "왔구나!" 있는 힘껏 낚시대를 잡아 당긴다. 낚시대 끝에 끌려오기 시작하는 무언가! 자, 어서 탐스러운 너의 몸을 보여주렴! 오늘 저녁에 배불리 일용할 양식을 선사해주란 말이다! "... 뭐냐." 낚시대 끝에 걸려있는 무언가를 보자마자 방금 전까지 타올랐던 낚시꾼의 혼이 순식간에 꺼져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유리병?" 그렇다. 어제 우리가 구조 신호를 보내기 위해, 천조각에 메시지를 적어서 바닷가에 흘려 보냈던 바로 그 녀석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유리병 리턴즈. "......" 역시 현실과 영화는 다르구나. ============================ 작품 후기 ============================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싫어하는 영어 문장이 '아임 파인 땡큐 엔드 유?'라고 하더군요. 주입식 교육의 부작용입니다. ㅡ_ㅡ;; 그리고 질문 식의 코멘트를 달아주시면, 제가 달아주신 코멘트 편수에 닉네임을 앞에 적어서 질문에 답변을 하는 코멘트를 다는 형식으로 하겠습니다.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사양말고 코멘트로 언제든지 물어봐주세요. 13화 노아 교수님과 유아 선배는 낚시를 하러 호수가로 발걸음을 옮긴 상황에서 짬을 내고 나도 낚시를 해봤지만. 결과는 유리병과의 재회 뿐이었다. 역시 나는 낚시에 취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유리병을 바다 위로 던져버린 뒤에. 그 후, 움막으로 돌아온 뒤에 묵묵히 작업이나 하기로 결정해버린다. 천막의 보수를 담당하고 있기에 근처에 있는 커다란 잎과 튼튼해보이는 나뭇가지들을 모아본다. 유아 선배가 맡긴 커터칼을 이용해 나무줄기를 잘라 끈 대신 사용하고, 거대한 나뭇잎은 지붕을 보수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천막은 셋 이상은 들어가서 자는 일이 없기 때문에 딱히 크기를 늘리거나 할 필요는 없을것 같다. 그럼 나머지는 간단한 보수작업만 하고 호수로 가는 길도 낼 겸 여성분들과 합류하면 되겠다는게 내 생각이다. 모래바닥에 닿는 느낌도 이제는 익숙해진지 오래다. 찢어진 티셔츠는 내가 입고 있던 옷과 나란히 다시 빨랫줄(이라 쓰고 나무줄기라 읽는다.)에 걸려있고. 오늘 저녁부터는 다시 빨았던 옷을 입을 수 있으니까 하루만 이렇게 윈시복장으로 지내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춥게 느껴지거나 창피한 감정도 이제는 슬슬 적응이 되는 모양이다. 유나 선배나 노아 교수님도 나와 비슷한지 이제는 자연스럽게 비키니 복장으로 돌아다니는 일에 그다지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듯 하다. 인간의 적응력이란 정말 대단하다. 무인도에 표류된 지 아직 5일이 채 지나지 않은 거 같은데, 벌써부터 이 상황에 익숙해지다니. "나도 참. 태평하게 무슨 생각을..." 기지개를 펴며 좌, 우로 고개를 돌리는 목 운동을 시전하다가. 예상 외의 사건과 마주치게 되었다. 무인도에서 보기 극히 드물다는 사건과. "벼, 변태..." 외딴 섬에서, 처음 보는 여자한테 졸지에 변태로 오인받고 말았다. 사태를 냉정하게 파악해보자. 지금 내 눈앞에는 낯선 여성 2명이 날 변태로 취급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많고 많은 종류중에 변태냐고 태클을 걸기 전에, 일단은 지금 이 상황부터 생각해보자. 분명 나는 천막을 보수하기 위해 재료를 모아서 열심히 성실하게 개미만큼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갑자기 여성 2명이 나타나서 지금 내 눈앞에 서있다. 자세히 바라보니 한쪽은 긴 머리, 그리고 다른 한쪽은 세미롱 길이의 머리 스타일을 자랑하고 있다. 굳이 내가 왜 머리카락을 언급하냐 하면, 여성 두명의 모습이 머리카락 말고는 체형이나 외모나 너무나도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더욱에 머리카락 색깔은 노골적으로 한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은발. 잠시 여성들을 멍하게 바라보던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일단 말을 걸어본다. 동물도 아니고, 인간이니 말은 통할거 아닌가. "저기..." "다가오지 마! 변태야!" 외국인처럼 생긴 주제에 한국말은 잘 하는구만! 아니, 지금 걸고 넘어질 문제점은 이게 아니잖아. 역시나 예상했던 대답이 들려온다. 유아 선배에게 하루종일 변태라는 단어를 수도없이 들어서 이제는 내성이 생긴 듯 하다. 처음보는 여성한테 변태라는 치욕적인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하게 버틸 수 있는 내 정신력이 순간적으로 존경스럽기도 하고 다르게 생각해보면 어쩌다가 내 신세가 이렇게 되었는지 불쌍하기도 할 정도였다. 역시 인간의 적응력은 무섭다니까. "다가오지 마!" 머리가 긴 쪽의 여성이 버럭버럭 소리친다. 오지 말라느니 저리 가라느니 왜 알몸이냐니 하는 소리들이었다. 참고로 진짜 알몸이 아니라 그냥 수영복 비슷한 차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약간 짧은 사각팬티 차림이라고 설명하면 적당할듯 하다. 물론, 그 소재가 자연산이라는 점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만. "멀쩡이 옷 입고있는데 알몸이라니." "꺄악! 저리가, 변태! 치한! 저질!" 긴 머리쪽이 거침없이 속사포 욕설을 날리기 시작한다. 생긴건 참하게 생겼는데 입은 정말 험하다. 나중에 욕쟁이 할머니가 될 자질을 충만하게 갖춘 여자아이가 아닐수가 없다. 그에 비해 세미롱 여성은 긴 머리 여성의 뒤에 숨어서 오들오들 떨고 있다. 저쪽은 긴 머리 여성과는 다르게 성격이 상당히 내성적인 모양이다. 하지만 대놓고 욕하는 긴머리 쪽보다, 저렇게 구석에 숨어서 오들오들 떨고있는 모습이 나에게 있어서는 정신적으로 더 충격인 셈이다. 제발 날 좀 변태취급하지 말란 말이다. "알았어, 알았어. 옷 입고오면 되잖아." "있으면서도 벗고있던 거야? 저리 가! 오지 마!" "... 입어도 뭐라 그러고 안 입어도 뭐라고 그러고." 투덜투덜 대면서 천막으로 들어가 벗어두었던 옷을 입고 나온다. 하지만 아직도 안심할 수 없는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는 긴 머리 여성이 어디서 구했는지 커다란 나무막대기를 겨누면서 위협자세를 취한다. 이래봬도 검도부 소속인 내게 있어서 상대방은 초보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챈다. 하반신 다리의 위치도 안정적이지도 않고, 나뭇가지를 너무 힘주면서 잡는 자세를 하면 나중에 팔에 무리가 간다. 척 봐도 근육이 붙어있는 체형도 아니고. 내가 바로 달려들면 제압할 수는 있겠지만, 상대는 겁에 질려있는 여자들이다. 그런짓을 했다가는 변태에서 초 변태로 진화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진작에 포기한다. "자. 항복. 이제 됐지?" 나는 양 손을 머리위에 들어올리며 아무런 위협을 가하지 않겠다는 제스쳐를 취한다. 긴 머리 여성은 잠시 나를 노려보면서 천천히 나에게 접근한다. 자세히 보니 긴 머리 여성은 작은 백 가방을 등에 메고 있었다. 조난당하기 직전에 챙긴 것인가? 아니면 이 섬에서 정신을 차린 직후에 얻은 물건일까. 가방의 형태를 보아하니 여행 가방이다. 유아 선배도 가방을 구했었지만, 필요한 물건은 커터칼과 라이터 뿐이라서 가방은 버리고 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저 여성은 굳이 가방을 메고 다닌다는 사실을 유추해 보자면, 유아 선배가 주웠던 가방의 내용물보다도 훨씬 유용한 내용물들이 들어 있을거라 짐작한다. 여성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굶주리거나 갈증을 호소하는 표정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인도에 표류되고 난 동안 알아서 식수와 음식을 자급자족했다는 소리. 보기보다 생활력이 있는 여자들인것 같다. 긴 머리 여성이 들고있던 가방에서 나온 물건은 노끈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지만, 단순한 노끈이 아니라 노끈 뭉치와 커터칼이 나온다. 긴 머리 여성이 고개로 한번 나를 가리키자, 세미롱 여성은 여전히 겁먹은 얼굴을 하면서도 침착하게 노끈을 칼로 끊어 내 손과 발을 묶는다. 여성들이 다가온 시점에서 바로 여성들에게 반격을 가하면 될 일이지만, 저들이 딱히 위협을 가하는게 아니라 오로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취하는 방법이므로 난 얌전히 협력한다. 지금 현 상황에서 여성들의 최대의 적은 바로 성욕에 굶주린 '남성'이다. 유아 선배가 말했던 것이 실제로 적용되고 있음을 뜻하기도 했다. 보통 무인도에서 생존자를 만나면 기쁜 마음으로 다가오는게 먼저이다. 그러나 이들의 태도는 그렇지 않다. 우선 남자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철저하게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생각보다 냉철하고 옳바른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이름은." 긴 머리 여성이 나에게 커터칼을 겨누며 묻는다. 실제로 찌를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통성명은 해야 하는 관계로 천천히 말한다. "유에. 당신들은?" "네 질문에 대답할 용의는 없어." "상대방의 이름을 먼저 물어봤으면, 적어도 대답 정도는 해줘야 예의 아니야?" "너희 나라에서는 그런 말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상관 없는 일이야."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소리는... 어느 대학의 교환학생이라도 되는 거냐." "ㅤㅋㅡㅅ..." 자신의 상세 프로필 정보를 추측해나가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커터칼의 날을 내 목 근처로 들이밀며 협박한다. "입 다물어." "......" 고압적인 말투와는 달리, 손은 상당히 떨리고 있다. 아마도 낯선 사람에게 흉기를 들이대는 일 자체가 처음이겠지. 한 눈에 봐도 온실속의 화초 마냥 자란 것 처럼 보이는 연약한 여성들이다. 안 봐도 눈에 선하지. "생존자들끼리 이래봤자 아무런 이득이 없잖아. 물론 너희들이 보기에는 내가 위협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너희들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어." "......" "그리고 나 뿐만 아니라 이 섬에 표류된 2명의 일행이 더 있어. 너희와 같은 여자라고. 못 믿겠으면 기다려 봐." "......" 침묵으로 일관하던 긴 머리 여성쪽이. 마지못해 천천히 입술을 열기 시작한다. "...아리아. 22살 그리고 저쪽은 내 언니인 세리아. 24살이야." "외국인?" "혼혈. 아버지는 미국인이고 어머니는 한국인." "그래서 머리카락 색이 은발이었군." 그런데 미국인들은 보통 은발이 아닌가 생각해봤지만, 은발이니 금발이니는 중요하지 않는 듯 하다. 중요한 것은 긴 머리 여성쪽은 나보다 연하이며, 그리고 저쪽 여성과 자매 관계라는 정보였다. "혼자? 아니면..." 긴 머리 여성이 천막의 안을 바라보더니 중얼거린다. "진짜로 일행이 있나보네. 그것도 여성들." " 참고로 한명은 우리 학과 교수님이신 노아 교수님하고, 나머지 한명은 동아리 부장인 유아 선배지. 나랑 같이 생활하고 있어." "그래서. 어디있지? 그 두분은?" "낚시하러 잠시 바캉스 길에 올랐지." "... 근처에 물이 있나? 아니면 바다 낚시?" "엄밀히 말하면 전자에 속하지. 바다 낚시는 효율이 없다고 방금 내가 증명했거든." 천막 뒤에서 풀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의 크기로 봐선 인간 크기의 형태. 긴 머리 여성과 세미롱 여성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기도 전에, 긴 머리 여성에게 누군가가 엄청난 속도로 돌격해온다. 해안가의 햇빛을 통해 물결치는 머리카락.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목검이 한 눈에 봐도 '유아 선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웅! 유아 선배가 순식간에 긴 머리 여성과 거리를 좁히면서 목검을 휘두른다. 순간적으로 뒷걸음질 치면서 유아 선배의 공격을 피하며 엉덩방아를 찧는 긴 머리 여성. 여성이 유아 선배의 공격을 피했다기 보다는 유아 선배가 일부러 위협만 가하기 위해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며 휘두른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바닥에 넘어진 채 커터칼을 들고 바로 일어나 반격을 가하려는 긴 머리 여성. 그러나 그 반격은 성사되지 못한다. "움직이지 마." 유아 선배의 목검 끝이 세미롱 여성의 목에 겨눠진 상태다. 긴 머리 여성을 떼어놓음과 동시에 그녀의 저항을 무의미하게 만들기 위해 인질을 잡은 것이다. 검도부 부장다운 빠른 판단력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 언니에게 손대지 마." "네가 얌전히 있는다면 손댈 일은 없어." 숨어있던 노아 교수님도 모습을 드러낸다. 노아 교수님은 이 여성들을 아는지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외친다. "아리아하고 세리아 아니니?" "교수님. 아는 사이에요?" "우리 학교 교환학생이잖니. 철학과의 두 자매." "......" 교수님의 모습을 확인한 아리아가 들고 있던 커터칼을 내려놓는다. 교수님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함으로 인해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서야 믿은 것이다. 나이가 나보다 연하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철저한 여자다. 아리아라는 녀석은. 아리아의 반응을 바라보던 유아 선배도 겨누던 목검을 내려놓는다. 잔뜩 겁먹었는지 눈가가 촉촉해진 세리아가 훌쩍이기 시작하자, 노아 교수님이 세리아를 자신의 품에 안아준다. ============================ 작품 후기 ============================ 쉔을 살지, 리신을 살지 고민됩니다. 쉔은 피시방에서 몇번 해봤는데, 리신은 한번도 한 적 없고, 멋있어 보여서 사고 싶단 생각이 들지만... 고민되는군요. 14화 "그 동안 겪었던 회포를 늘어놓는 것도 좋겠지만, 지금은 움막 안으로 들어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하늘을 가리키며 실내로 자리를 옮길 것을 제안하는 유아 선배. 점점 짙어지는 먹구름과 함께, 정수리 위로 차가운 감촉을 가진 무언가가 툭 떨어진다. 너무나도 익숙한 바로 그 느낌. "비...?" "기후변화가 엄청 심한 곳인가봐." 유아 선배가 단편적으로 무인도의 날씨를 평가한다. 점점 굵어지기 시작한 빗방울 탓에 자리를 옮기게 되고. 천막 안에 모인 우리들. 원래 교수님과 내가 자는 공간용으로 만들어서 2인용인지라 5명이 모여 앉는 것 만으로도 자리가 꽉 찬다. 왜 하필 좁은 천막 안에 모여서 이렇게 있느냐 하면, 결국 밖에 엄청난 비가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 두방울 씩 내린다 싶더니 결국은 쏟아지기 시작하는 비. 폭우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비에 젖어 감기에 걸리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라 판단해서 모두 이렇게 천막으로 대피한 것이다. 참고로 오늘 내가 움막을 보수하면서 바닥에 나뭇잎들로 미리 바닥을 깔아두었고 바다쪽으로 물이 흐르도록 배수로를 파놨기 때문에 움막 안으로 물이 대량으로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이것이 바로 군인의 힘. 삽과 함께 2년을 보내온 나이기에, 배수로 작업 정도는 눈 감고 할 수 있다. "제법 잘 보수 되어있네? 칭찬해주마." 라고 말하며, 유아 선배의 가녀린 팔이 내 머리위를 쓰다듬어주기 시작한다. "행정보급관님에게 얼마나 시달렸는데요. 말년까지 배수로 작업에 투입되었다니까요." "군대 이야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아. 그보다 알고 있어?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군대 이야기라는 거." "가장 싫어하는 건 군대에서 축구 하는 이야기라면서요?" "잘 알고 있네. 그러면 침묵을 지킬것. 이상." "알겠습니다. 명심할게요." 쳇. 군대 이야기도 나름 재미있는데. 물론, 전역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여유겠지만. 어쨌든, 움막 안에서 불을 피우는 것은 힘든 상황인지라 5명은 동그랗게 앉은 채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모인것도 인연인지라, 서로 통성명을 하기로 하고서 제일 먼저 고학년인 유아 선배가 자신의 소개를 먼저한다. 유아 선배와 노아 교수님, 그리고 나는 서로 통성명을 마친 사이인지라 금방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리아, 세리아의 차례가 돌아온다. "아까 저기있는 유에 선배에게 말했지만, 1학년인 아리아입니다. 선배들처럼 딱히 부활동은 하지 않았으나 할아버지한테서 의학공부를 약간 배웠습니다." "정말?! 철학과라며!" "언니가 철학과고, 저는 의대입니다. 교수님이 잘못 알고 계셨나 보군요." 저절로 유아 선배와 내 시선이 교수님에게로 향한다. 잘못된 정보를 전달해버린 교수님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푹 숙이며 핑계 아닌 핑계를 둘러대는데. "시, 실수 할 수도 있잖니... 나라고 대학교 전 학생들을 다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젠장. 귀엽잖아. 연상의 누님 맞아? 왜 이리 귀여운 말투를 가지고 있냐고. 반해버릴 정도잖아. 한창 노아 선생님의 매력에 푹 빠져있는 나에게, 아리아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렇다고 아직까지 전문적인 지식을 배운건 아니지만, 예전부터 할아버지의 병원을 물려받으려고 의대쪽을 생각해두고 있기 때문에 간단한 병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행이다. 사실 제일 불안한게 '병'이었거든. 이 중에서 감기라도 걸리면 손 쓸 방법이 없었는데 마침 의학도가 있다니." 유아 선배의 안도에 아리아는 표정변화 없이 살짝 고개만 끄덕인다. 몇번 이야기해본 결과, 아리아라는 녀석은 약간 무뚝뚝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아까는 날 보고 그렇게나 비명을 질러대더니, 원래 이런 성격인 듯 하다. 다음 차례는 세리아. 그러나 세리아는 그저 난감하다는 듯이 웃음을 지을 뿐, 양 손을 교차하며 엑스자를 만들어보인다. 자기소개를 하기 싫다는 표시일까? 그러고보니 아까부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세리아는 지금까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이다. "언니는... 말을 못해요." 아리아의 표정에 변화가 보인다. 안타까운 감정인 듯 하면서도 자신의 언니에 대해서 동정의 표정이기도 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세리아. 그래서 아까부터 말을 하지 않은것이 아니라 말을 '못한' 것이다. "혹시 이유를 알 수 있니?" 노아 교수님의 질문에 아리아는 세리아를 한번 쳐다본다. 말을 해줘도 될지 묻는 표시인듯 하다. 세리아는 아리아의 시선에 부드럽게 웃어보이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같이 지내온 자매인지라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듯 하다. "언니는 사실 말을 못하는게 아니라 하지 않는 거예요." "그럼 장애가 아니라는 소리니?" "네. 어렸을때 한 남성에게 강간을 당할뻔한 일이 있었거든요. 그 이후로 언니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 그래서 유에에게 과민반응을 보였던 거구나." "네. 유에 선배에게는 죄송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괜히 물어봤다는 듯이 후회하는 노아 교수님. 교사라는 직위에 있긴 하지만, 모든 학생들의 사생활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학교란 장소가 워낙 많은 학생들이 다니고 있는 교육의 장이기도 하고. 고등학교와는 다르니까. 물론, 혼혈아인 아리아나 세리아는 교수진들 사이에서도 유명하기에 노아 교수님도 한번에 이 자매들을 알아볼 수 있었지만, 세리아의 말을 못하는 이유에 그런 사연이 있을줄은 몰랐던 것이다.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언니는 말을 잊었어요. 그 일이 있은 후, 언니가 말을 한 모습은 저도 보지 못했어요." "미안하구나. 괜히 물어본거 같아." "아니에요, 교수님 잘못으로 돌리지 마세요. 어차피 언니에 대한 사정은 여기 계신 선배들에게도 미리 말해두는게 좋을것 같기도 해요. 세리아 언니도 그래서 허락했구요." 잠시동안 움막에는 암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가뜩이나 비가 내리는 눅눅한 분위기에서 더이상 분위기가 다운되는 것은 사양하고 싶은지 유아 선배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기 시작한다. "왜요, 선배."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꺼내봐. 암울하잖아." "군대 이야기라도 꺼내볼까요?" "... 죽인다." "그럼 군대에서 축구했던 이야기를..." "너,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나한테 맞아볼래?" 이 사람. 눈빛이 진심이다! "그렇다면 선배가 해보세요. 왜 저한테 웃겨보라는 책임을... 컥!" 선배의 팔꿈치가 내 복부를 강타한다. 아픔의 신음소리에 다른 여성들이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라고 이제는 사람까지 때리는 이 난폭한 선배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해봤지만, 그랬다간 선배의 로우킥이 너무나도 무서워서 애써 웃어보이며 분위기 반전을 꾀하도록 한다. "그러고보니 선배하고 교수님. 낚시의 성과는 어떠셨나요?" "... 그게 재미있는 이야기냐. 둔탱아." "이게 제 한계라구요. 그러고보니 물고기의 '물'자도 안보이는데, 낚시는 꽝이었나 보네요." "시끄러. 생각해보니까 낚시줄과 낚시대만 있지, 사실은 낚시바늘이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데." "옷핀은요?" "옷... 핀?" "네. 교수님이 가지고 계시던 옷핀요. 그거, 낚시바늘 대용으로 사용하려고 가져가신 거 아니었나요?" 순간 흐르는 정적. 교수님과 선배의 시선이 서로 교차한다. 설마. "... 아무도 옷핀을 활용할 생각을 안 했던 건가요." 바본가. 이 두 사람. 낚시대와 줄이 있으면, 바늘은 상식이잖아. 아니, 그것보다 옷핀은 뭐하러 가져간 거야. 그러고보니 내가 선배의 낚시대에 지렁이를 매단 것은 그저 머리카락의 끝부분을 이용해 지렁이를 묶은 것 뿐이다. 처음에 입질이 왔다며 좋아하던 선배가 낚시대를 들어보니 지렁이만 온데간데 없고, 낚시줄만 자신의 모습을 들어냈다는 후일담이었다. 옷핀을 사용하지 않은 자의 최후라고 할까. 베드엔딩이다. 하기사. 유리병 리턴즈보다는 나은 편인가. "만들어줄거면 제대로 해야할거 아니야." "낚시대는 선배가 만들었잖아요. 그것보다도 옷핀이란 수단이 있으면 활용을 하라고요." 선배와 내가 한동안 옥신각신 하는 동안이었다. 아리아가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가방을 열어보이자, 그 속에서 나온 것은 낚시바늘에서 '낚시'라는 글자를 제외한 단어인 바늘이었다. "이걸 휘어서 만들면 될 거예요." "아니, 그것보다 왜 가방에 바늘이...?" "'실과 바늘은 여자의 기본 아이템이니까요.' 라고 언니가 말하고 있어요." "그거, 네 것이 아니었구나." "언니는 준비성이 좋으니까요." 가방의 정체는 세리아의 소유품을 담은 가방이었다. 생각해보니 노끈에다가 커터칼도 나오던데, 그것도 여자의 기본 소양 아이템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다시 분위기를 침체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서 그냥 우연으로 들었었겠지 하고 넘긴다. 모르는 게 약이다. 진실을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말자. 괜히 내 신상에 위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 한편 유아 선배는 바늘을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빙그레 웃어보인다. "이걸로 내일은 대어를 낚을 수 있겠어." "옷핀 활용법도 몰랐으면서." "시끄러워! 단지 까먹었을 뿐이라고!" "그보다 낚시나 할 줄 아시나요?" "... 이것이 슬슬 기어오르네." 유아 선배의 바디블로가 시전되기 전에 재빨리 엎드려 사과를 구한다. 자연에서 살아남는 방식보다 유아 선배에게서 살아남는 방식이 더 비참하게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 아닐것이리라 생각해본다. 야생에서 살아남는 법. 여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라. ============================ 작품 후기 ============================ 제가 주 포지션이 정글러라서 지금 문도, 말파이트, 아무무를 사용하고 있는데, 매번 이 3 챔프만 하다보니까 너무 질립니다 ㅡ_ㅡ;; 예전에는 알리 정글도 간혹 했었는데, 박치기가 너프먹고 난 뒤로 안 하고요... 클템 선수의 쉔을 따라하기엔 아직 제 실력이 많이 부족한 것 같고... 어렵군요. 15화 저녁이 깊어질 때까지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문제가 하나 더 생기고 만 것이다. 잠을 자긴 해야하는데, 비를 맞으면서까지 불침번을 무리하게 밖에서 세울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이 움막에서 5명이 하룻밤을 지새야 한다는 상황이 온 것인데, 이 상황에서의 최대의 걸림돌이 바로 남자인 내가 된 것이다. "너, 그냥 비 맞으면서 밖에서 자면 안되니?" "... 선배. 아무리 절 변태취급 하신다고 해도 이 날씨에서 절 그냥 버릴 셈인가요." "농담이야, 농담. 남자가 째째하게 그런건 시원스럽게 농담으로 받아들이라구." "선배가 말하면 진담처럼 들려요." 움막의 입구에서 제일 안쪽인 위치에는 이제 막 합류해서 심신이 지친 자매들을 배치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입구쪽에는 내가 배치되었다. 문제는 내 옆에서 누가 잠을 자느냐가 화두였다. "그냥 내가 자도 되니?" "교수님이요?" "응. 유아 네가 유에를 꺼린다면 내가 잘 수도 있는데..." 노아 교수님이 옆에서 잔다는 것도 나름 문제가 있다. 지금은 5명이서 최대한 밀착해서 자야하는 상황인데, 노아 교수님의 다이나마이트 몸매와 부비적거리며 잔다면 아마 나는 밤을 샐지도 모른다. 그것보다도 교수님과는 얼마 전에 차마 말로 표현하기도 부끄러운 이런 짓이나 저런 짓을 한 전과가 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내가 과연 이성이라는 단어를 지킬 수 있을지가 더 문제일지도 모른다. "안돼요. 교수님. 차라리 제가 잘게요. 언제 저 짐승이 교수님을 덮칠지 모른다구요." "그래도..." "제게 맡겨주세요." 워낙 단호하게 말하는 탓에 노아 교수님도 차마 더 이상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수 없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아리아나 세리아의 곁에 아까 검을 겨누던 유아 선배가 있는 것 보다 교수님인 노아 교수님이 있는 것이 자매들에게도 훨씬 위안이 되리라 생각도 들기 때문에 오히려 유아 선배의 판단이 더 옳을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유에. 넌 어때?" "저요?" "그래. 내가 네 옆에 자는데에 불만 없지?" "저야 뭐..." 어차피 따져봐도 내겐 거부권이 없잖아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기 전의 로우킥은 사양하고 싶은 관계로 묵비권을 행사하도록 하자. 이렇게 해서 유아 선배와 나는 본의 아니게 옆에서 자게 되었다. 각자 정해진 위치에 눕고나니, 정말로 움막 안은 좁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유아 선배의 머리카락에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가 코 끝을 자극할 정도였다. "... 옆에서 만지거나 그러면 바로 사망일줄 알아." "저도 오래 살고 싶습니다. 선배." "...흥." 선배는 입구의 반대편으로 등을 돌리며 누워버린다. 나도 선배와 반대로 등을 돌리며 눕고 싶었지만, 입구에서는 비바람이 몰아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천장을 바라보며 나란히 눕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들려오는 것은 여성들의 규칙적인 숨소리와 비가 내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오랜만에 다같이 잠을 자는게 처음인지라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사실 이 상황에서 쉽게 잠이 오는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차라리 자위라도 몇번 한다면 피곤해서 잠이라도 금방 들텐데, 문제는 하지도 못하고 이성의 한계를 자극하는 여성들과 잠을 자야 한다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 "잠시 바람이나 쐬고 올까." 커다란 나무 아래에 들어가면, 그래도 바깥이라 할 지라도 비는 어느정도 피할 수 있다. 움막을 보수하면서, 의자 대용으로 마련해뒀던 썩은 나무 기둥이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질척이는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을 생각은 없기에, 눕혀진 기둥 위로 자리를 잡고 앉는다. 차가운 바다 바람과 더불어 매섭게 몰아치는 빗방울들이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그래도 잠이 오질 않기에 무인도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날씨 관찰에 온 힘을 기울이는 중. 그러던 와중에. "뭐하고 있어?" 유아 선배가 움막 안쪽에서 고개를 내밀고 나에게 묻는다. "잠이 안 와서요." "기절이라도 시켜줄까?" "... 가급적이면 평화로운 수단을 잠을 재워줄 생각 같은 건 없으신가요." "아리랑 치기 정도는 가능한데." "기절이란 수단을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으시군요." 목덜미 뒤로 손날 치기를 통해 사람을 기절시키는 기술. 일명, '아리랑 치기'라고 한다. 그런 위험한 기술을 나에게 선보이겠다니. 어떤 의미로 정말 무서운 선배가 아닐 수가 없다. 나는 잘도 이런 선배 밑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구나. 자주 얼굴을 비추지 않은 게 어찌보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움막에서 나와 내 곁에 자리를 잡은 유아 선배. 한동안 나무기둥을 바라보더니. "... 너. 잠깐 팔을 뒤쪽으로 해봐." "네?" "잔말말고 빨리. 선배의 말을 거역할 셈이야? 대통령의 명령보다도 무서운 이 선배의 말을?" "참으로 특이한 위계질서네요." 어쩔 수 없이 선배가 하는 말 그대로 따라주도록 한다. 그러자 대뜸, 내 무릎 위에 앉는 선배. 무슨 행동인지 의미를 알 수가 없어서 질문을 던져보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예상 외였다. "벌레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래봤자 애벌레나 개미같은 거 밖에 없어요." "개미도 싫다고!" "선배. 곤충 자체가 싫으세요?" "당연하잖아! 나는 다리가 5개 이상 달린 건 무조건 싫어!" 선배에게 단단히 미움을 사게 된 곤충들에게 심심치 않은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을 정도다. 나름 귀여운 녀석들인데. 물론, 바퀴벌레 제외하고. 상당히 외설적인 자세가 되었음에도, 선배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작은 엉덩이를 좀 더 내 사타구니 쪽으로 밀착해온다. "이상한 생각하면 죽여버린다." "이런 포즈에서 이상한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게 더 웃긴거 아닌가요." "노력 정도는 할 수 있잖아." "하하..." 천재는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노력으로 이뤄진다. 성욕은 1퍼센트의 노력과 99퍼센트의 야성으로 이뤄진다. 비율 자체가 상대가 안 되는데. "그나저나. 이 섬에서 언제쯤이면 나갈 수 있을까." 기나긴 한숨을 쉬며 지금 우리들에게 처한 최대의 난제를 언급한다. 나도 이 섬에서 하루라도 빨리 나가고 싶긴 하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보이는 편도 아니고. 오늘 낮에 시도했던 소심한 구조 신호 수단, 일명 '유리병 편지'도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 날씨라면, 분명 유리병 녀석도 우리와 같이 어딘가에 표류되었을 테지만. "선배는 강하시네요." "뭐가?" "이러한 상황에서도 침울해지지 않은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서요." "바보. 우울해져봤자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고. 위기에 처하면 그 위기가 찾아오게끔 만든 과거의 자신을 탓하기 보단, 미래의 나를 위해서 최대한 극복할 생각을 해야지." "극복이라..." "후퇴보다는 전진을, 그리고 후회보다는 대책을." "좋은 말이네요." "내 삶의 격언이라고 할까." 굳은 결의의 표정을 보이며 나에게 단호히 말한다. 강한 정신력. 교수님을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유아 선배는 정말 대단한 여자다. 교수님에 비해서 용기있고, 행동력 또한 높으니까. 남자인 나조차도 선배의 이런 의지에 미치지 못할 정도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니까 이 섬을 나가기 전까지 서로 힘내보자고." 선배가 팔꿈치로 내 복부를 살짝 터치한다. 미묘하게 얼굴을 붉히면서. 이것도 선배가 나에게 보여준 일종의 애정 표현일까. 이런 면모는 또 강인한 선배의 모습과는 달리, 매우 귀여워 보인다. ============================ 작품 후기 ============================ 문도! 글 올린다! 16화 EP 3. 뒤를 조심하세요. 다행스럽게도 아침햇살은 비구름 뒤에서 자신의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오늘도 해안가를 비춘다. 비가 그친 덕분에 오랜만에 반가운 해안가를 직접 바라보니 이것도 나름 말로 표현하기 힘든 반가움이 느껴진다. 움막에서 조심스럽게 나오자, 밖에서 바람을 쐬고 있던 아리아가 나를 바라본 채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아침인사를 한다. 다들 움막에서 잠이 든지라 꽤나 빨리 일어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보다도 더 부지런한 녀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자는데 불편하지 않았어?" "아니요. 나름 괜찮았습니다." 해안가의 바닷바람이 그녀의 긴 은발을 감싼다, 유아 선배와는 다른 약간 신비한 매력이 있는 녀석이다. 표정변화도 드물고, 말투도 왠지 얼음마녀같은 딱딱함을 자랑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언니만을 생각하는 따뜻한 녀석이다. "선배는 평안히 주무셨는지요." "뭐... 덕분에 잘 잤지." 참고로 유아 선배와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거의 날밤을 샐 지경이었지만,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아리아에게 '유아 선배와 진솔한 밤을 보내느라 잠을 잘 못잤단다. 하하하!'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마치 나의 이런 머릿속이라도 미리 바라보는 초능력이라도 있는지, 아리아는 나를 지긋이 바라본 채 말한다. "... 하긴. 어제 잠도 안 자고 그런 짓을 했으니까 잘 주무셨겠죠." "누가 들으면 오해할라!! 그냥 단순한 담화였다고!!" 나도 모르게 반론을 제기해버린다. 이 녀석. 혹시 깨어 있었나? 그것보다도 자면서 유아 선배와 내가 밤 바람을 쐬고 있다는 모습을 다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까.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서 어색하게 웃어보인다. 딱히 유아 선배를 덮친것도 아니고 그냥 서로 기분 좋은 일(?)을 했을 뿐이니까 여기서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도록 하자. "... 변태군요." "아니. 그러니까 난 아무런 짓도 안 했다니까?" "알고 있어요. 하지만 생리적으로 선배를 고운 시선으로 볼 수가 없네요." 아리아가 나를 노려보기 시작한다. 남성 혐오증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이 녀석. 어제부터 나를 고운 시선으로 바라본 적이 없다. "선배가 유아 선배랑 친하게 지내건 저야 상관 없는 일이지만, 세리아 언니에게까지 손을 뻗히면 이 세상과 강제적으로 작별인사를 시켜버릴 거예요." "말 안해도 알고 있다니까. 가뜩이나 남자에 대한 안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는 아이한테 내가 무슨 짓을 한다고." "부디 그러셨으면 좋겠네요." 모닥불 피우는 장소 근처에 두 다리를 모은 채 조숙한 자태로 앉는 아리아.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녀석, 입이 험한 것 빼고는 가만히만 있으면 꽤나 미인인데 조금은 자신의 매력을 죽이고 있는 그런 행동을 해서 약간은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아리아. 넌 남자친구 없어?" "이제는 저한테까지 작업을 거시는 건가요?" "그러니까 난 그렇게 바람둥이가 아니래도. 여자한테 대쉬해본 적도 없고, 사귀어 본 적도 없으니까. 순수한 청년이라고." "사귀지도 않는데 교수님이랑 키스도 하나요? 정말 최악이군요." "알고 있었냐?! 어떻게 안 거야! 설마 교수님이?!" "그냥 한 번 떠본 사실인데, 순순히 자백하시는군요." "속인거냐!" "쉽게 속아 넘어간 쪽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남을 당당하게 속이고 어찌 그런 허풍이 나오냐." "언니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불안 요소를 제거해버리는 편이 좋으니까요." "그러면서 은근슬쩍 손에 커터칼을 쥐는 거, 그만둬라. 진심으로 무섭다고." "쳇." "혀도 차지 마!" "농담이었습니다. 진담과 농담도 구별하지 못하시는군요." "... 알았다. 내가 잘못했어." 더 이상 말을 섞었다간 아리아에게 왠지 미움만 잔뜩 받을 기세여서 잠자코 준비운동을 한다. 좁은 움막에서 비집고 잔 터라 온 몸이 쑤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도부 활동을 그렇게나 적극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운동을 해두는 것이 개인적으로도 상큼한 아침을 시작할 수 있는 기분을 느낄수 있기 때문이다. 한참 이리저리 몸을 푸는 사이에, 유아 선배도 눈이 떠졌는지 눈을 비비적거리며 밖으로 나온다. 부스스한 선배의 눈동자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든 선배가 경직된 모습으로 나에게 인사한다. "아, 안녕? 유에." "서, 선배도 안녕하세요? 하하." 둘이서 서로 말을 더듬는 채 어색한 모습을 주고 받는다. 그 모습을 보던 아리아가 자신의 무릎을 감싸쥐며 조용히 말한다. "... 애인 사이는 그렇게 어색한 관계인가요?" 아리아의 발언에 유아 선배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여본다. "무슨 소리야?" "유에 선배가 유아 선배의 사타구니 냄새를 맡고 싶다고 저한테 고백했어요." "!!!" 그리고 이어지는 선배의 로우킥이 정강이를 정확하게 강타. 이종격투기 선수들이 느낄법한 고통을 최근에 느끼는 와중에 선배가 내 목을 자신의 팔로 조이면서 다급하게 속삭인다. "어째서 아리아가 저런 말을 하는거야! 너, 무슨 생각인데?!" "저거 새빨간 거짓말이라니까요! 제가 무슨 냄새 패티시즘도 아니고!" "그런데 왜 갑자기 아리아가 나와 너 사이를 엮냐고! 교수님과 네가 아니라?" "그, 그게 어제 저희가 하는 행동을 아리아가 봤었나봐요." "... 이야기 한 거?" 유아 선배와 내가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보고있던 아리아가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입을 연다. "신경쓰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을게요." "정말? ... 이 아니라. 아리아. 사실 우린 애인 사이니 뭐니 하는 관계가 아니란다. 오호호. 그냥 단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나 한 거야. 밤에 잠이 안 와서 그런 거지. 심심풀이라고 해야 하나?" "괜찮습니다. 처음에는 다 그런 이유로 시작하는 거니까요." "......" 도대체 무슨 관계를 상상하며 저런 말을 하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워낙 표정변화도 없는 녀석이다 보니까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당황한 유아 선배를 바라보며 어차피 아리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의도는 없다는 듯이 말한다. "농담이에요. 저도 그렇게까지 입이 가벼운 여자는 아니니까요." 라고 말하고선 발걸음을 옮기는 아리아. 그 모습을 듣던 선배가 내 옆구리를 쿡쿡 지르면서 책망하기 시작한다. "... 이게 다 네가 큰 소리로 떠들어서 그렇잖아." "죄송합니다." 결국, 언제나 사과해야 하는 일은 내 몫이다. 분명 유아 선배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7화 "하아..." 의미모를 한숨을 내쉬는 교수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왜 한숨을 쉴까 궁금해서 교수님에게 다가가 질문을 던져본다. 혹시나 나와 유아 선배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하는 마음도 조금은 있기도 하고. "교수님.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나요?" "그게 아니라..." 움막 한 구석에 놓여있는 다수의 나뭇잎들을 가리킨다. "이거 때문에." "이건..." 우리가 평소에 대변을 보고 화장지 대용으로 사용하는 나뭇잎들이다. 최대한 넓고 얇은 평면을 자랑하는 잎사귀들로 모아서 사용하고 있는 것들인데.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는지 궁금해진다. "다름이 아니고..." 뭔가를 말하기 어렵다는 듯이 우물쭈물거리던 교수님이 살짝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에게 묻는다. "그... 닦을 때... 불편하지 않니...?" "그거야 화장지에 비하면 많이 불편하죠." "그, 그렇지? 하다못해 생리현상은 깨끗하게 해결하는 편이 좋은데..." 깔끔하기로 소문난 노아 교수님이기에 충분히 이런 고민이 가능하다고 보여진다. "단순히 어떤 면이 불편하신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뭐랄까... 잎사귀 면이 좀 까칠해서 닦을 때 아프다고 해야 할까... 그, 그것보다!" 자신이 낯선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제야 깨달았나 보다. 양 손으로 작은 얼굴을 가린 채 내 시선을 회피하며 부끄러움의 최상급 표현을 온 몸으로 표출하기 시작한다. 교수님을 놀리는 재미가 은근히 쏠쏠한걸. "엉덩이도 좀 아픈 것 같고..." "다치신 건가요?" "모르겠어. 살짝 피가 묻어 나오긴 했는데. 직접 볼 수가 없으니까." 현재 아리아, 세리아 자매는 호수에 목욕을 하러 갔고, 유아 선배는 부족한 잠을 매꾸기 위해 커다란 바위 위에서 낮잠을 청하고 있는 중이다. 그럼 결론적으로, 교수님의 건강을 살필 수 있는 건 나 뿐. "좋아요. 그럼 제가 봐드릴게요." "무엇을?" "교수님 항문이요. 괜찮은지 어떤지 제가 한번 볼게요. 괜찮나요?" "나, 나보고 엉덩이를 까보라고?!" 하기야. 성인 여성에게 무리한 부탁을 한 것이라곤 나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건강의 문제였으니. "교수님. 냉정하게 생각해보세요. 행여나 나뭇잎에 있던 세균이 교수님의 체내에 들어가서 이상한 병이라도 감염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 그건..." "아무리 의학에 소질이 있는 아리아가 있다고 하지만, 녀석은 고작해야 학부생이에요. 대학원생도 아니고, 전문 분야도 다르잖아요. 물론 저도 아마추어이긴 하지만, 교수님의 몸 상태에 이상징후가 있나 없나 외견상으로 파악하는 것 정도는 가능해요. 그리고 항문같은 경우에는 본인이 직접 보기 힘든 곳이잖아요?" "으..." "부끄러움보다, 건강이 우선시입니다. 교수님." "......" 고민에 고민을 이어가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교수님의 모습이 애처로워보이긴 하지만. 사실 무진장 귀엽기도 하다.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니 초등학생 때 여자애를 괴롭히는 기분이라고 할까. 성인이 되어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 실로 오랜만임과 동시에 사회적으로 여러가지 문제점을 야기할 수 있는 감정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나도 깊은 공감을 표하고 싶다. 명백히 성희롱이니까. "... 알았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을 표시하는 교수님의 모습에 마음속으로 작게나마 환호성을 지른다. 항문은 그렇다 쳐도. 모든 남성들이 동경하고 있는 비밀스러운 장소까지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자신의 손을 치마에 가져가려던 순간. "아. 졸려 죽겠네..." "히익?!" 놀란 교수님이 어깨를 움찔거리며 황급히 손을 뗀다. 부스스 눈을 비비며 움막 안으로 온 유아 선배의 등장. 우리들을 보면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말을 한다. "역시 잠은 실내에서 자야돼." 라고 말하며 그대로 누워버린다. ... 이런 젠장! 해안가의 바다가 자랑하는 모습이 영화에서 볼 수 있을법한 투명함을 자랑한다는 사실에 상당히 감사해야 해아겠다. 굳이 잠수를 해서 해산물을 따올 필요도 없이, 수면 위에서 목표물을 포착한 뒤에 바로 건져올리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기 때문이다. 속옷만을 입은 체 한동안 바다속 탐험을 한 결과, 전복 비스무리한 먹을거리를 많이 따올 수 있었다. 수영 실력이 남다른 유아 선배와 함께 작업을 하니, 오늘 만큼은 과일로 채운 배를 해산물로 채울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가지기에는 충분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속옷 차림으로 나와 같이 바닷물에서 나오는 유아 선배. 우리 둘이서 왜 속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느냐 묻는다면, 오히려 옷을 다 입은 채 수영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지 않는가 라고 반론하고 싶다. 유아 선배가 만든 특제 자연산 수영복은 물로 인해 찢어질 가능성이 있어서 이렇게 속옷을 착용하고 들어간 것이다. 덕분에 아리아는 나를 완전히 변태취급 하듯이 바라보고, 세리아는 차마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이와는 반대로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유아 선배와 노아 교수님은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평소대로 나를 대해준다. 인간의 적응력이란 정말 무섭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다. "수고했어." 노아 교수님이 나와 유아 선배에게 물통을 건낸다. 참고로 이 물통들은 세리아의 가방에서 나온 것으로, 이제 귀찮게 물통을 과일열매로 따로 만들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정말 궁금한게, 과연 세리아의 가방에는 도대체 어떤 물건들이 들어 있는지 한번쯤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긴 하다. 하지만 만약에 그랬다가는 아리아의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 참도록 한다. 점심식사 준비 팀의 각 역할 분담으로 인해 아리아는 모닥불 담당, 그리고 세리아는 구해온 해산물을 끼울 긴 막대기를 커터칼을 이용해 깎고 있었다. "수고하셨어요." 아리아의 말과 세리아의 웃음이 우리를 맞이한다. 먹을걸 들고오면 변태를 바라보는 눈에서 어느정도 중화된 눈빛으로 바뀌는 신기한 현상을 느낄 수 있었다. 나란 녀석은 오로지 식량조달 역할만 할 뿐인가 보다. 약간은 서글퍼진다. "그런데 이거, 무슨 생물체인지 알 수 있어?" 유아 선배가 우리들이 잡아온 전복 비스무리한 것을 내민다. 한동안 이것을 바라보던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소중한 단백질 공급원이죠. 이건 먹을 수 있어요." "... 잠깐. 방금 그 대사, 어디서 많이 들은거 같은데." "착각일 거예요, 유에 선배." 분명 모 다큐멘터리에서 말하는 베X씨의 대사가 아닐까 추측하지만, 아리아는 눈 하나 꿈뻑하지 않으면서 태연하게 세리아가 깎은 막대기에 해산물을 하나 둘 씩 꼬치구이 형식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음식이 다 되는 동안, 나와 유아 선배는 옷을 갈아입기 전에 호수가로 가서 몸을 씻고 오기로 한다. 바닷물 속에 있었던지라 소금기가 아직 피부에 남아있는 것이 여간 찝찝한 기분이 들어서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속옷 차림으로 한동안 걸어가던 유아 선배가 뒤를 바라보다가 이내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다. 뭐 찔리는 것이라도 있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유아 선배가 갑자기 내 오른쪽 팔을 껴안으며 팔짱을 낀다. "서, 선배!" "뭐야. 팔짱 정도는 상관 없잖아." 유아 선배가 싱글벙글 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나와 걸음을 맞춘다. 길거리에서 커플들이 흔히 하는 팔짱을 유아 선배와 속옷 차림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저녁 이후로 묘하게 유아 선배의 적극적인 태도에 나도 모르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저기 말이야." 대략 10분정도 지났을까. 유아 선배가 말을 걸어오길래 무심코 대답한다. "네." "노아 교수님이랑... 무슨 일 있었지." 이것이 바로 웬만한 점쟁이 뺨친다는 그 유명한 여자의 감이란 녀석인가. 유아 선배의 물음에 어찌 대답할지 생각하다가, 언젠간 들킬 것이라면 미리 말해두는게 좋을 것이라 생각한 나는 사실대로 말하기로 한다. "있긴... 있었죠." "무슨 일. 키스라도 했어?" "......" "했구나. 했지?" "3번 정도밖에 안했어요." "3번이나 했어?!" 유아 선배가 옆구리를 꼬집기 시작한다.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부위중에 제일 취약한 옆구리를 꼬집은지라 나도 모르게 비명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유아 선배는 오히려 내 모습을 보며 잘됐다며 이내 토라진 표정을 지어보인다. "역시 그랬어. 하긴. 신체 건장한 남녀가 둘이서 무인도에 하룻밤을 같이 지샜는데 아무런 일도 없다는게 말이 안되지." 무지하게 양심에 찔리는 말들을 서슴없이 하는 유아 선배. 불만을 이리저리 늘어놓으면서 특이하게도 팔짱은 여전히 유지한다. "죄송합니다." "... 됐어. 3번이나 했다는 소리는 교수님도 어느정도 허락한 거라는 소리잖아." "그런가요?" "너와는 다르게 교수님은 성인이야. 가벼운 마음으로 남자에게 입술을 허락할 리가 없는게 당연한데." 질투하는 건가. 이런 선배의 모습도 귀엽게 보인다. 원래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접점이 없는 요소가 있다고 한다면 '여성'이라는 미지의 존재였는데, 조난당한 이후로 여복이 터졌나보다. 평생 쓸 여복을 여기서 다 쓰면 곤란한데 말이다. 잠자코 걷던 유아 선배가 한숨을 쉬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기 시작한다. "둘 중에 한명을 선택해라. 라고 말하기에는 힘들겠지? 너나 나나." "아무래도 그렇겠죠." "얼굴에 제대로 철판을 깔았구나?" "남자의 슬픈 본능이라고 할까요." "... 좋아. 나도 그렇게까지 째째한 여자는 아니니까. 여기는 무인도라는 특수한 상황이니까 너와 교수님과의 관계는 어느정도 허락해줄게. 대신." 팔짱을 끼던 팔을 풀고 유아 선배가 내 앞에 마주선다. 약간 상기된 얼굴. 조금은 촉촉한 눈망울. 말 그대로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과도 같았다. "우리 둘이만 있을때는 이제부터 '연인'관계야. 알았지?" "그거, 고백하시는 건가요?" 너무나도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을까. 선배의 얼굴이 급속도로 달아오르며 창피함을 감추기 위한 로우킥이 장렬한다. 또다시 숲에 울려퍼지는 나의 비명소리. 이러다가 득도하는 건 아닐런지 모르겠다. "그래! 고백이다! 그러니까 너에게 거부권은 없어!" "그런 말도 안되는..." "아무튼. 교수님과의 관계도 허락해줄테니 이제부터 너와 난 연인이야. 알았어?" "그럼 교수님과 이렇고 저렇고 그렇고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짓들도 가능한가요?" "안되는게 당연하잖아!" 이번에는 크리티컬 데미지까지 들어간다. 만약에 지금 이 모습이 온라인 게임이었다면, 유에라는 몬스터는 유아라는 플레이어에게 원샷 원킬 당했어야 할 장면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허락 했다고 하시면서 안된다고 말하시면 저보고 도대체 어떤 행동을 하라는 건지..." "... 적당히 수위 조절하면서 하라고. 멍청아." 유아 선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흥!'을 외치면서 혼자서 호수가로 걸어간다. 이 세상에서 풀 수 없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여자의 마음'이라는 문제일 것이다. 분명히 답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알고보면 오답이기도 한 것이... 정말 여자의 마음은 모르겠다. 모르겠어. ============================ 작품 후기 ============================ 글을 쓰다보면서 문득 든 생각인데, 쓰는 사람의 패티시즘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엉덩이 패티쉬라든지 그런 건 절대로, 진짜, 결코 아니고요. 믿어주세요. 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ㅜ_ㅜ 18화 호수가에 도착했을 무렵, 아무래도 유아 선배가 먼저 목욕을 하도록 권하는게 예의라고 생각해서 나는 조용히 자리를 피하려고 걸어가려던 찰나였다. "어디가." 유아 선배가 내 손목을 잡고서 걸음을 억지로 멈추게 한다.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에 너무나도 당연한 대답을 하도록 하자. "전 나중에 할게요. 선배 먼저 하세요." "바보야. 방금 말했잖아. 둘이 있을때는 연인 사이라고." 말이 끝나자 마자, 선배가 자신의 속옷을 벗기 시작한다. 브래지어와 팬티를 순식간에 벗어버린 선배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우왓!'하면서 뒷걸음질 친다. 내 반응이 못마땅한지 선배는 자신의 양 팔로 가슴을 가리면서 뾰로퉁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뭐야. 나랑 같이 목욕하는게 싫은거야?" "절대로, 단연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황송할 뿐이죠." "그럼 그 반응은 뭐야. 오히려 이쪽이 더 무안하잖아. 그것보다도 창피하다고! 빨리 너도 벗고 들어와!" 유아 선배가 먼저 물가로 들어간다. 아까도 말했지만, 여성의 마음을 도저히 모르는 처지인 나는 그저 선배가 말하는 데로 속옷을 벗은 채 선배의 옆에 앉는다. 내가 들어온 것을 확인한 선배가 만족한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자신의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댄다. 선배의 머리카락이 수면위를 아름답게 수놓고, 투명한 물 안쪽으로 선배의 가슴과 비밀스러운 곳이 그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한동안 웃고있던 선배가 작게 탄성지으며 나를 올려다본다. "너, 야한생각 하고있지?" "그, 글쎄요." "부정할 생각은 하지도 마. 커진게 물 속에서 훤히 보이는걸." "그야 여자랑 알몸으로 같이 있는데 멀쩡하게 지낼 남자가 어디있나요." "흐음. 나를 여자로 인식한다는 거구나." 선배가 나를 바라본 채 살짝 눈을 감는다. 노아 교수님과의 경험을 통해 이것이 여성이 보내는 '키스'요구 행동이라는 것을 안 나는 유아 선배의 요구에 응한다. 유아 선배도 이제는 약간 키스에 적응이 되었는지 적극적으로 혀를 밀어넣기까지 한다. 간간히 선배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가 나를 더욱 자극한다. 슬쩍 손을 뻗어 선배의 가슴을 만져보려 했으나. "안 돼." 냉정하게 내 손목을 잡은 선배가 딱 잘라 말한다. "거기까지 허락하진 않았어." "그래도 모처럼의 혼욕인데..."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가급적이면 안전한 수단을 택하고 싶어. 괜히 무인도에서 둘이 같은 이부자리를 가졌다가 아기라도 생겨봐. 임신을 하게 된다면, 무인도에서 어떻게 할 건데?" "......" "너도 한창 성욕이 끓는 20대 남성이라는 건 나도 이해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안 돼." "그렇군요." 나도 잠시 정신을 놓았나 보다. 혼욕이라는 수단의 매혹에 넘어가서,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다니. 무인도이기에, 교수님과 함부로 선을 넘지 않았던 거 아니었나. 그런데 이제와서 유아 선배와 관계를 가지려 하다니. 이것이야말로 모순이다. "고마워요. 선배. 덕분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먼저 물가에 나와서 가볍게 옷을 입는다. 물기를 닦을 수단이 없어서 조금은 찝찝함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래도 바닷물에 젖어있는 상황보다는 나으니까 말이다. 여전히 호수 안에 머물던 유아 선배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한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늦었네. 둘 다." 노아 교수님이 우리를 맞이하는 말에 나와 선배는 어색하게 웃어보인다. 우리 둘의 사이를 알 리가 없는 교수님은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우리를 모닥불로 안내한다. "......" 그 와중에 아리아가 우리를 지긋이 바라본다. 마치 '나는 너희들이 지난 시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라는 듯이 말하는 눈빛이었다. 아리아에게 헛기침을 하며 암묵적으로 '모른척 하고 넘어가렴. 귀엽고 사랑스럽고 깨물어주고 싶은 후배야.'라는 의미를 담은 눈빛을 보내자, 아리아는 이내 '기분 나쁘네요. 선배. 토 나올거 같아요.'라는 의미를 담은 눈빛을 또 쏘아보낸다. 한동안 그렇게 눈싸움을 하던 와중에, 유아 선배가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몰래, 그러나 살의를 담은 일격을 가한다. 덕분에 꼬치구이를 먹던 내 입에서는 음식맛 대신 비명이 감돌았지만, 세리아나 노아 교수님에게 들키지 않게 어색하게 웃어보이면서 선배에게 귓속말로 억울함을 호소한다. "왜 때리시는 거예요." "... 네가 맞을 짓을 하니까 그렇지. 왜 아리아랑 둘이서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러니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니까요." "시끄러. 노아 교수님과의 관계만 인정했을 뿐이지, 아리아에게 손대는 일은 허락한 기억이 없으니까 음흉한 눈으로 아리아를 쳐다보지 마. 이 늑대 자식아." 할 말을 다 한듯 다시 꼬치시식에 들어가는 유아 선배. 그 모습에 나는 작게 한숨쉬면서 다시 꼬치구이를 입에 물려던 순간, 아리아가 마치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작게 말한다. "... 공처가." 요새 후배라는 녀석들은 선배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스킬을 고루고루 갖추고 있는 모양이다. 차마 모두가 모여있는 상태에서 화를 낼 수는 없기 때문에 애써 못들은 척 식사에 집중한다. 아리아에게는 무시당하지, 유아 선배에게는 맞고 다니지. 노아 교수님에게는 유아 선배와의 관계를 들킬까봐 조마조마하지. 전에 무인도에 와서 여복이 터졌다고 자랑하던 내 모습이 갑자기 처량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유에." 잠시 나를 호출하는 노아 교수님의 말. 가까이 와보라며 귓속말로 중대한 사실을 전달해주기 시작한다. "또... 피가 나왔어." "정말인가요?" "으, 응. 어떻게 하지?" 아무래도 아까 이야기 나누던 그 항문 관련 문제인가 보다. 진짜로 어디 이상징후가 있는 건 아닌가. 잠시 교수님을 데리고 숲 안쪽으로 온 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말을 한다. "치마 벗어보세요." "여, 여기서?" "아무도 없으니까요." "으으..." 미약하게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타이트한 정장 치마를 벗기 시작한다. 핑크색의 팬티가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고. 뒤를 돌아 팬티마저 내리자, 뽀얀 엉덩이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 상태로 누워서 엉덩이를 치켜 올려보세요." "창피하게..." "교수님.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 알았어." 결국 고집을 굽힌 교수님이 엉덩이를 내 쪽으로 치켜 올린다. 하얀 두 살덩이 가운데에 위치한 작은 구멍. 이것이 바로 여성의 항문이구나. 작고 탄력적인 엉덩이를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묘한 감정이 들 것 같다. 성욕의 절정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노아 교수님의 이상상태를 확인하는 게 최우선 사항이므로 잠시 양해를 구하도록 하자. "잠시만 참아주세요." 라고 말을 하면서, 양 손으로 교수님의 엉덩이를 쥐어본다. "흣?!" 상당히 에로틱한 신음소리를 내며 그대로 얼굴을 지면 바닥의 방향으로 향해 묻는 교수님. 촉감도 훌륭하도다. 이것이 바로 여성의 엉덩이구나. 가슴 이후로 이 세상에서 이렇게나 부드럽고 아름다운 촉감을 선사해줄 수 있는 신체 부위가 존재하고 있다니. 인류의 발견이자 인류의 보물이자 인류의 지켜야 할 유산이다. ... 감탄은 이 정도 선에서 그치고. 살짝 힘을 주며 엉덩이 골을 벌려본다. 그러자 미묘하게 풍겨오는 구린 향. 여기서 고개를 돌렸다간, 교수님에게 엄청난 마음의 상처를 줄 수 있으므로 잠시 숨을 참는다. "살짝 긁혀서 상처가 난 모양이네요." "저, 정말?" "네. 그래도 혹시나 모르니까 나중에 물로 씻어두는 편이 좋겠어요. 세균 감염은 아무래도 좋지 않으니까요." "으응... 알았어." 종기가 생겼거나, 아니면 특이한 사항은 보이지 않는다. 항문의 피부 자체가 워낙 연약하다 보니까, 부드러운 화장지가 아닌 까칠까칠한 나뭇잎으로 뒷처리를 해서 피부에 상처가 간 것으로 보인다. 최대한 빠른 행동으로 치마를 다시 올린 교수님이 사과보다도 빨간 얼굴을 긴 머리카락으로 가리면서 황급히 종종걸음으로 움막을 향해 뛰어간다. 무인도에 표류된 것도 신기하지만. 동경하던 교수님의 항문을 맨 정신으로 보는 날이 다 올 줄이야. 세상은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 작품 후기 ============================ 아 이 더러운 트롤때문에 멘붕을 겪고 왔습니다. lol을 하려면 역시 멘탈이 강해야 하는군요. 정신수련하는 기분입니다. 손오공이 시간과 정신의 방에서 수련할 때의 느낌이 바로 이런거겟죠? 19화 점심을 먹은 뒤, 움막을 보수하기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수가 아니라 확장공사라고 불러야 옳을 듯 싶다. 어제처럼 비가 올 경우를 대비해서 4~5명이 잘 수 있도록 내부 크기를 늘리자는 의견이 나와서였다. 그래서 점심을 먹은 뒤, 어제에 이어 낚시팀과 움막 보수팀으로 나뉘게 되었고, 낚시팀은 유아 선배와 아리아, 세리아가 뽑히게 되었다. 그리고 말 안해도 알 수 있듯이 움막 보수팀은 나와 노아 교수님. 움막 보수팀에는 남자의 역할이 전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내가 필수적으로 뽑히게 되었고, 낚시팀은 동물이나 아니면 다른 생존자들을 발견했을 때 충분히 대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유아 선배가 뽑히게 되었다. 아리아는 세리아와 같이 다니고 싶어하는 눈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팀이 형성된 것이다. 노아 교수님은 커터칼로 나뭇가지를 잘라 끈을 만드는 일을 담당하고, 나는 집을 보수하는 역할을 맡았다. 유아 선배와 그렇고 그런 일들을 겪고 난 이후에 노아 교수님과 단 둘이 남은 상황이라 왠지 좀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유아 선배도 노아 교수님과의 관계를 허락했으니 그렇게 심하게 죄책감을 가지지 말자고 스스로 말하면서 작업에 열중한다. "다 됐니?" 나무 줄기로 만든 끈들을 가져온 노아 교수님. 이제는 이런 작업도 익숙해졌는지 교수님도 제법 능숙하게 일처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평생 이런 낯선 환경을 접할 기회도 없이 그저 온실속의 화초로 자란 교수님을 생각한다면 정말 엄청난 발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잘 하셨어요." "정말?" "네. 역시나 교수님. 학습 속도가 정말 빠르시네요." 진심어린 칭찬에 교수님이 어린 아이처럼 기뻐한다. 나이와 맞지 않게 귀여운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점이 노아 교수님의 매력이라고 할까. 유아 선배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아..." 하던 일을 멈춘 교수님이, 갑자기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며 당황한 기색을 선보인다. 그러더니 이내, 한 손으로 배를 가리고 나에게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말한다. "자, 잠시 휴식해도 되겠니?" "네. 뭐... 상관 없지만." "그, 그럼!"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숲 안 쪽을 향해 간다. 저 방향은 아마도... 우리가 임시로 대변이나 소변을 볼 때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둔 화장실 방향 아닌가. 아무래도 배가 아프신가 보다. 소변이라기 보다는 대변쪽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뭘 잘못 드셨나? 아니지. 잘못 먹었다면, 교수님 뿐만 아니라 나나 유아 선배, 은발 자매도 배가 아파야 하는데. 하긴. 지금 우리들이랑 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한 자리에 모였을 때, 혹시나 배가 아픈 적이 있었는지 물어봐야겠다. 우리가 먹었던 음식 중에서 신체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날 것이나 썩은 음식을 먹었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설사 하나만으로 끝나면 참 좋겠다만. 혼자서 움막 보수 작업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 "유, 유에~..." 숲 안 쪽에서 미세하게 교수님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교수님을 불러보지만. "무슨 일인가요? 교수님." "그, 그게..." "문제라도 생겼어요?" "푸, 풀 잎..." "네?" "잎사귀를 안 가져왔어~!!" 어쩐지. 움막에도 안 들리고 무작정 가더라 싶었다. 우리가 화장지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잎사귀들은 현재 움막 안쪽에 보관중이다. 크게 비가 온 적도 있었기에 모래밭도 다 젖은 상태고, 바닷가의 바람이 많이 불어오는 편이기에 잎사귀가 날아가지 않도록 움막 안에 보관중이다. "알았어요. 가져다 드릴게요." "부, 부탁할게."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인가 보다. 뒷처리를 할 물품을 챙겨가지 않다니. 하여간 교수님도 은근히 덜렁거리는 모습이 있다니까. 그것도 나름 귀여운 면모이긴 하지만... ...... "... 어?!" 일 났다. 움막 안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보여야 할 '그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참고로 그것이란, 방금 교수님이 나에게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던 바로 그 잎사귀 형제, 자매 녀석들이다. 설마 벌써 다 썼나? 아니면 아까 유아 선배와 은발 자매들이 혹시나 큰 용무를 볼 수도 있을까봐 미리 챙겨간 건가? 그렇다면 하다못해 우리들이 사용할 분량 정도는 남겨줄 수 있는 센스를 발휘했어야지. 왜 다 가져갔냐. "어쩔 수 없나." 한숨을 내리쉬며 움막에서 나온 뒤, 교수님에게 현재 상황을 보고한다. "다 떨어진 거 같아요." "그, 그럼 어떻게 해?!" "제가 한 번 구해볼게요. 교수님도 근처에 비슷하게 생긴 잎사귀가 보인다면, 일단 그걸로 사용해보세요." "으, 응. 알았어. 노력해볼게." 최대한 교수님이 볼 일을 보고 계신 쪽은 피해서 잎사귀들을 모아본다. 여성이 생리현상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자 일부러 그쪽 방향으로 가는 건 매너 위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교수님이 얼마나 창피해할까. 자신의 제자에게 대변을 싸는 모습을 보이다니. 수치심의 극치를 달리는 상황극 같은 건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다. 적당히 쓸 만한 잎사귀들을 모은 뒤에 문득 든 생각. "가만 있어보자. 이걸 전해주려면 어차피 교수님한테 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다. 내가 매너 플레이라고 생각을 한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론 교수님에게 다가갈 수 밖에 없다. 이미 정해진 결과라니. 이것도 운명인가. "교수님. 죄송한데, 잎사귀 전해드리러 가도 될까요?" "자, 잠깐만!" 허둥대는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뭔가 허둥대는 움직임을 하고 있는지, 숲 안 쪽에서 바스락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온다. 그와 동시에. 말끔한 옷차림을 갖추고 다시 내 앞에 등장한 교수님. "다행이도 근처에 쓸 만한 풀 잎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네요." "... 혹시 '못 봐서 아쉬워요.'같은 생각 같은 건 안 하지?" "서, 설마요. 하하하!" "으..." 노아 교수님의 얼굴이 급격히 빨개진다. ... 어떻게 내 속마음을 아셨을까. 잠시 벌어졌던 사건을 뒤로 하고. "으랴압!" 1M 크기의 나무를 기둥으로 세우기 시작한다. 꽤나 두꺼운 덕분에 세로로 일으키기에는 엄청난 근력을 소모하는 작업이었다. 어제와 같은 경우에는 비가 그리 많이 내리지 않았지만, 폭우에 대비해서 움막을 조금 더 튼튼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거라는 판단 하에서 이렇게 기둥을 세우기 시작한다. 건축에 관련된 지식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점점 형태를 갖춰나가기 시작하는 움막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뿌듯함이 느꺼진다. 이 기회에 장래를 건축가로 바꿀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고작 이런 일로 건축가를 꿈꾼다면 전국의 모든 건축가를 모욕하는 행동이라는 생각에 빠르게 포기한다. "좀 쉬었다 하렴." 노아 교수님이 물통에 담아 둔 물을 건내면서 제안한다. 그러고보니 점심식사 이후 내내 작업만 한 탓에 꽤나 피곤함을 느끼고 있던 와중에 교수님의 제안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달콤했다. "그럼 잠시만 쉬죠."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래도 여기서 게으름을 피웠다가는 미완성된 움막을 뒤로하고 모두가 바깥에서 자야하는 불상사를 겪어야 하기 때문에 오늘 하루만 얌전히 참도록 한다. 노아 교수님이 자신의 손으로 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직접 닦아주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교수님에게서 풍겨오는 성인 여성의 페로몬이 나의 신경세포 하나하나를 자극하기 시작한다. 진짜 날이 갈수록 노아 교수님의 색기는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다. 내가 야한 생각만 하고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교수님의 이런 자태에 나도 모르게 강제적으로 교수님을 끌어안는다. "어머!" 교수님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한동안 나에게 안긴 채 쑥쓰러운듯 그저 고개만 떨구고 가만히 있는다. 이게 다 유아 선배가 나를 잔뜩 흥분시키고 만 결과라고 생각해버리며 점점 교수님의 눈부신 허벅지를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유, 유에. 안돼. 이럴때..." 교수님이 내 손을 잡으며 말린다. 하지만 이미 이성과는 작별인사를 한 내 정신상태로는 교수님의 그런 저항도 무의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노아 교수님의 희고 고운 목에 키스를 한다. 마치 드라큘라가 피를 빨기 위한 자세마냥 교수님의 목에 깊은 키스자국을 남긴다. 교수님은 깊고도 농염한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내 키스를 즐기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상태로는 안된다고 판단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언제올지 불안한 모양인지 교수님은 나를 과감하게 밀어낸다. ============================ 작품 후기 ============================ 점심에 밥 먹기 귀찮아서 유우에 콘프레이크를 말아 먹었더니, 배가 아픕니다 ㅡ_ㅡ;; 20화 "이러면 안돼, 유에. 다른 사람들이 올지 모른다고." "... 죄송해요. 교수님." 강제로 노아 교수님을 희롱한 죄가 있기에 순순히 사과한다. 교수님이 재빨리 내 행동을 제지한 탓에 나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요새 너무 성욕에 굶주린 것인가? 아니면 유아 선배를 통해서 여체를 많이 접하고 있었기에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나도 모르게 본능에 몸을 맡길뻔 했다. 노아 교수님은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면서 말한다. "무슨 일 있니? 평소에 이렇게 적극적이 아니었잖니." "그러니까 말이죠. 그게..." 이러다가 유아 선배와의 일이 들통날까봐 나는 나름 이미지 전환용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한다. "욕구불만 이라고 할까요. 하하하!" "......" 노아 교수님의 눈빛이 마치 변태 짐승을 보는 듯한 눈으로 달라졌다. 아무래도 이 대답은 틀린 모양이다. 제기랄. 왜 신은 나에게 언어능력이라는 스킬을 부여하지 않은 것일까.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유아만으로는 부족한거니?" "부족이라니요. 오히려 평소보다 더욱 훌륭한 자극이 돼서... 으악!!" 나도 모르게 입을 막는다. 설마 했는데 노아 교수님 마저도 우리의 관계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유아 선배와 내 관계를 알고 있기에 노아 교수님은 자신의 몸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일까? 순간적으로 교수님이 날 과감하게 밀쳐낸 이유에 대해서 해명이 되는 순간이었다. 유아 선배와의 관계가 교수님에게 들킨 것이다. 나름 국가 기밀 프로젝트 뺨칠 정도로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는데, 노아 교수님 앞에서는 그러한 것은 오히려 무용지물인 모양인가 보다. 한숨을 쉰 채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넘기는 노아 교수님이 힘없게 웃으면서 입을 열기 시작한다. "평소에 너희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은 새삼 눈치채고 있었는데... 사실인 모양이구나." "그렇게 티가 많이 났나요?" "널 바라보는 유아의 눈빛이 마치 사랑을 하고 있는 소녀의 눈빛과 많이 비슷했거든." 결국 나의 이런 반응으로 인해 교수님의 추측은 확실로 들어난 것이다. 여기선 남자답게 유아 선배와의 관계를 인정해야 하는 입장이 되어버린 나는 일단 교수님에게 무릎을 꿇고서 사과한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교수님!" "됐어. 딱히 너희 관계에 대해서 태클을 걸 생각도 없고, 적당한 선에서만 유지해준다면 참견할 일은 없으니까." 그래도 약간은 서글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노아 교수님.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저절로 죄책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교수님과 서로 애정행각도 많이 해온 사이인데 유아 선배라는 여자와 바람을 피우다니. 교수님이 날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일단은 찔리는 양심이 나에게 빨리 노아 교수님에게 빌라고 재촉한다. "저기, 교수님..." "유아는 알고 있니?" "무엇을요?" "유아가 합류하기 전에... 있었던 일들." 노아 교수님이 상당히 조심스럽게 묻는다. 역시나 노아 교수님도 유아 선배를 신경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것이, 유아 선배가 합류하기 전에 교수님과 단 둘이 키스를 하는 둥 애정행각을 벌였는데 유아 선배가 그걸 알면 노발대발할 것이라는 예상은 교수님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네. 알고 있어요." "뭐라고 했었니?" "교수님과의 관계는 신경쓰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쿨하구나. 요즘 아이들은." 자신의 남자가 다른 여자와 애정행각을 벌여도 어느정도까지 허락해 주겠다는 말에 노아 교수님은 나름 충격인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교수님도 내심 유아 선배의 말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었다. 그것보다 교수님과 유아 선배는 그리 큰 나이차이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기껏해봐야 4살 차이? 물론 교수와 학생이라는 신분 자체가 확 다르긴 하지만. "유아는 생각이 깊구나." "화끈한게 아니라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아리아와 세리아가 우리에게 합류한 이후로 너도 어렴풋이 느꼈겠지만 우리는 하나의 작은 '사회'를 형성하고 있잖니. 물론, 그 중심에는 남성인 네가 있고, 그 주변에는 우리들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구나. 야생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이렇게 문명을 접한 사람과 사람이 모이면 사회라는 울타리를 만들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단다. 유아는 자신이 너를 독점하는 것으로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사회라는 것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 나와의 교제도 허락했다고 생각해." "... 그렇군요." 유아 선배가 결코 성적인 개념이 개방적이어서 노아 교수님과의 교제를 허락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 나름의 지켜야 할 룰과 규칙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작은 '사회 집단'은 이미 나와 노아 교수님이 만난 순간부터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 작은 울타리 안으로 유아 선배와 아리아, 세리아 자매가 합류함으로 인해 그 규모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즉, 유아 선배는 이 사회라는 집단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가 결단하며 나와 노아 교수님의 기존에 있던 관계를 허락했던 것이다. 노아 교수님의 말과 유아 선배의 언행. 이 모든것이 하나로 설명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유아 선배가 의도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말한 것일수도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그래도 유아 선배의 깊은 생각에 세삼 놀랍기도 하다. 교수님은 그 일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긴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는 듯이 묻기 시작한다. "유아랑은 어디까지 했니?" "하다니요?" "저기, 그... 섹스는 했니?" 교수님의 고운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올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것도 이거 나름대로 흥분되는 장면인 모양이다. 노아 교수님의 참한 이미지에서 그런 음란한 단어를 들을 수 있다니. 점점 내가 변태가 되어가는 것인가, 아니면 노아 교수님이 그만큼 매력적인 것인가 햇깔리기 시작한다. "아직은 안했어요." "그래? 다행이다... 어머!"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이제서야 깨닫게 된 교수님이 스스로 입을 막는다. 그 모습 또한 여간 귀여운게 아니다. 교수님 역시도 약간의 질투심을 가지고 말한 것일까? 그런 의도였는지는 자세히는 알지 못하겠지만, 이런 이유에서 노아 교수님이나 유아 선배나 둘 다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다. 유아 선배와 노아 교수님, 그리고 내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이 쯤에서 마무리하고. "그나저나 교수님." "왜 그러니?" "그쪽은 이제 괜찮나요?" "그쪽이라니?" "아래쪽이요." 라고 말하면서 교수님의 엉덩이 부분을 가리킨다. 또 다시 화악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희미하게 상, 하 방향으로 끄덕이는 교수님. "이, 이따금씩 아프긴 하지만 괜찮은 거 같아. 그... 최대한 조심해서 닦고 있으니까." "다행이네요. 너무 심해지면, 나중에 아리아한테도 상담을 받아보세요." "응. 기억할게." 아까 볼 일을 볼 때도 별 무리없이 뒷처리를 한 것으로 유추해 보자면, 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커다란 건강상의 문제가 되진 않았나보다. 음식을 잘못 먹어서 탈이 났는지에 대한 여부는 나중에 다른 인원들도 교수님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느냐 아니냐에 따라 판단될테고. 시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교수님과 움막 작업 마무리를 하고 있을 무렵. "짜잔~" 낚시줄 끝에 파닥파닥 거리는 정체불명의 생명체는 세간에 '물고기'라고 불리는 존재였다. 그 '물고기'를 유아 선배는 자랑스럽게 내 눈 앞에 보여주면서 말한다. "어때. 이게 '유아'낚시대의 위력이라고." "그것보다 제가 달아준 미끼가 크게 한 몫을 했나보네요." "시끄러워. 다 내 실력인데 감히 어디서 태클이야." "옷핀 사용법도 몰랐잖아요." "그, 그건 깜빡했을 뿐이라고!" "깜빡 수준이 아니잖아요. 낚시 바늘은 기초 상식입니다." "시끄러워! 모처럼 먹을 것을 구해왔는데 도리어 핀잔을 늘어놓다니!"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그러니까 빨리 불 위에 올려놓으세요. 배고프니까요." 유아 선배에 이어 아리아도 한마리 잡아온 결과, 오늘은 보기 드물게 물고기 구이와 고정메뉴인 과일이 저녁식사 메뉴로 등장했다. 낚시대를 만든지 근 이틀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건저올린 쾌거였다. 이제는 익숙하게 나무꼬치로 물고기를 끼워넣는 아리아와 세리아. 처음에는 징그럽다면서 그런 행동도 약간은 꺼려하는 눈치였지만, 역시나 인간의 적응력은 남다른지 이제는 능숙하게 일처리를 하는 자매의 모습이 참으로 대견스럽기도 했다. 완성된 움막을 이리저리 바라보던 유아 선배가 그저 그렇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뭐, 너 치고는 잘 만들었네." "진심어린 축하에 눈물나게 고맙군요. 선배." ============================ 작품 후기 ============================ 제가 다른 노블레스 작가분들에 비해 필력도 안 좋은 편이고, 실력도 별로인 사람인지라 글에 허술한 점이 많이 보입니다 ㅡ_ㅡ;; 부족한 면을 지적해주신다면, 최대한 고칠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이니, 거리낌없이 저를 마구 까주시기 바랍니다. 헤헤헤. 21화 "그나저나 노아 교수님이랑은 별다른 일 없었지?" 역시나 물어볼 줄 알았다. 유아 선배의 입장에서 노아 교수님과 나만 단 둘이 남게 된 상황이 신경이 안 쓰였을리가 없었을 것이다. 호수로 갈때도 불만어린 눈으로 한동안 나를 노려보더니 내가 예상한대로 유아 선배는 돌아오자마자 그 질문부터 날린 것이다. 실제로 노아 교수님과는 아무런 일이 없었으므로(물론 실질적으로는 내 입장은 미수범이긴 하지만) 당당하게 말한다. "선배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어요." "... 거짓말." "정말입니다. 그리고 노아 교수님도 저희의 관계를 알고 있었어요." " 역시... 그렇구나." 유아 선배의 반응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의외성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놀라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봤지만, 유아 선배는 대충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한 대답을 오히려 나에게 들려주는 셈이었다. 의문이 든 나는 유아 선배에게 조용히 묻는다. "놀라지 않으세요?" "아니, 사실은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어. 노아 교수님이 우리 관계를 눈치챌 것이라는 사실." "어째서요." "저번에 내가 너한테 말한 적이 있다고 했었지? 노아 교수님과 너와의 관계를 어떻게 눈치챘냐 했을때." "...네." "비슷한 원리야. 여자는 한 남자를 좋아하게 되면 의도적이지는 않아도 확실히 그 시선은 달라지게 되어 있거든. 나름 신경쓴다고 했는데, 여자의 본능까지는 숨길 수 없었나봐." 작게 한숨을 쉬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그럼 노아 교수님에게 들킬걸 알았기에 일부러 둘이 있던 시간을 마련해준 것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어차피 노아 교수님에게 들킬 사실이라면, 차라리 내가 스스로 노아 교수님에게 모든걸 털어놓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을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아 선배가 일부러 우리 둘을 남겨둔 것일지도 모른다. 의도적이었든, 의도치 않은 결과이든 간에 사실대로 털어놓은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노아 교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는데?" "일단 유아 선배에 대해서 칭찬해주셨어요." "나?" "네. 이제 막 형성된 작은 사회모임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남자를 공유하고자 하는 결단까지 내리는 걸 보면 어리긴 하지만 존경스럽다고 하시던데요." "역시 교수님은 교수님이구나. 한방 먹은 느낌이네." "한방 먹었다니요?" "사실 너와 나 이전의 관계보다는 너와 노아 교수님과의 관계가 더 먼저였잖아. 그런데 교수님은 내가 너에 대한 권리를 허가하는 듯한 말에도 너그럽게 이해하고 오히려 내 제안에 승낙까지 하셨어. 만약에 다른 여자였다면 '네가 뭔데 이제와서 애인 행세냐!'라고 화냈을텐데, 교수님에게 약간 미안한 감정도 드네." "......" 뭐라고 해야할까.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여성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말로는 직접 하지 않아도, 이 척박한 무인도라는 환경에서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을 보면 아직 우리는 이성을 잃지 않은 하나의 '인격체'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선배가 내 웃는 모습이 약간 불쾌한지 괜히 창피해하며 화내기 시작한다. "뭐야. 음흉하게 웃기나 하고." "아니요. 이런게 바로 '사회'라는 조직이 아닐까 생각해봤어요."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래." 등을 홱 돌리면서 모닥불로 향하는 유아 선배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상당히 대견스러워 보인다. 말은 차갑게 해도 속으로는 다른 사람들까지 배려하는 모습에 역시나 부장이라는 존경심이 들기 시작했다. 움막을 보수하고, 물고기를 잡고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오늘도 무인도의 저녁은 여지없이 찾아온다. 모닥불 근처에 앉아 허기를 달랜 우리들은 마땅히 할 것도 없고 해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일을 상의하도록 한다. "우선은... 식량과 식수에 대한 문제인데." 노아 교수님이 사회자 역할을 하면서 이야기의 화두를 던져주신다. 아무래도 여기서는 연장자의 지위가 어느정도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노아 교수님 본인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나이 많은게 그다지 좋다고만 생각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정기적인 식수와 식량을 구하는 것도 좋지만, 어느정도의 식량을 미리 비축해두는게 좋을거 같아요." "비상식량을 말하는거니?" 유아 선배의 의견이었다. 노아 교수님의 되물음에 유아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시작한다. "현재 우리는 식수 문제와 식량 문제에 대해서는 당분간 걱정이 없어요. 바닷가에서 해산물도 따올 수 있고, 숲에는 과일열매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여차하면 오늘처럼 호수에서 낚시를 할 수도 있구요.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지금 저희에게는 그날그날 식량을 조달하는데에 치중이 맞춰져 있다는 거예요. 이 섬에 만약 사계절이 있다는 가정을 해본다면, 겨울에는 어떻게 하죠? 그리고 굳이 계절문제가 아니더라도 폭우가 계속 퍼부으면 열매를 따러가는 것도, 바닷가로 들어가는 것도 못해요. 그러니까 그 일들을 대비해 비상식량을 미리 쌓아두는게 좋을거 같아요." "저도 선배의 의견에 찬성이에요." 아리아의 지지에 이어 세리아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언의 찬성을 표시한다. 나도 개인적으로는 비상식량의 필요성을 느끼고는 있었기 때문에 유아 선배의 말에 찬성한다. "그럼 주로 과일이나 풀종류가 좋겠구나. 어패류는 썩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노아 교수님의 부연설명에 아리아가 뒤이어 말한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썩는 식량보다는 그래도 유효기간이 긴 과일이나 풀종류를 비축해두는게 좋을거 같아요." "그럼 결정이구나. 내일부터 시간이 남을 때마다 조금씩 쌓아두도록 하자." 그리고 덧붙여 비상식량을 보관할 장소를 만드는 일도 내게 넘겨졌다. 움막 형태의 창고를 만들 필요는 없고, 땅을 파서 지면에 보관하는 형식으로 해두면 된다고들 말하는데, 사실 삽도 없는데 땅파는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성진은 잘 모르는 모양이다. "그럼 다음은..." 다음 화두로 넘어가기 직전에. "저기. 끼어들 타이밍을 찾지 못해서 입 다물고 있었는데요." 아리아의 말이 커다란 분위기의 반전을 예고한다. "여기 오기 전에... 생존자를 봤었어요." "생존자가 있었다고?!" 아리아의 말에 나와 선배, 그리고 노아 교수님이 소리를 지르고 만다. 우리들 이외에 생존자 이야기는 아직까지 접해본 적이 없는지라 아리아의 말은 우리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아리아가 자신의 말을 계속해서 이어간다. "네. 여기에 오기 전에, 그러니까 며칠 전에 생존자로 보이는 사람을 봤어요." "잠깐. 그런데 왜 같이 오지 않은거야." 듣고보니 조금 이상하다. 생존자를 발견한 아리아와 세리아였을텐데, 왜 동행하지 않았던 것일까. 생존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여성의 입장인 그녀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도움이 될텐데 말이다. 그러나 아리아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내심 고민의 흔적이 담긴 말을 내뱉는다. "무서웠으니까요." "무섭다니..." "그 사람들, 남자였어요.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선배." 아리아의 말은 어떤 의미로 굉장히 함축적인 의미를 선사하고 있었다. 말을 못하는 자신의 언니까지 책임지고 데리고 다니는 아리아에게 있어서는 무인도라는 개방적인 장소에서 낯선 남자 무리와 어울려 다니는 것을 그리 선호하지 않을거란 생각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무인도라는 장소는 법과 사회라는 보이지 않는 안전한 울타리가 없는 상황. 그 속에서 인간의 감정과 욕망은 극한을 향해 내달린다. 법이 없으면 범죄율이 증가하듯이, 인간이라는 이름의 본디 사악한 존재를 가두는 암묵적인 규칙과 규율이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외딴 곳에 만난 남자들. 고작 2명이라고 하지만, 아리아와 세리아에게 있어서는 '남자'라는 생물이 무인도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강간'당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머리를 긁적이며 아리아의 말을 해석하는데 성공한 것인지 유아 선배가 말을 이어간다. "아리아. 네 생각은 잘 알겠어.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해." "감사합니다." "하지만 순수하게 칭찬하는 의미는 아니야. 왜 생존자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서야 꺼내는지에 대한 추궁은 해야겠는걸." 유아 선배의 말에 잠깐 우물쭈물 거리던 아리아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금 입을 열기 시작한다. "정황이 없었어요." "단지 그 뿐?" "네." "뭐... 어느정도 이해는 가지만." 연약하디 연약한 여성에 불과한 아리아에게 그 정도의 통찰력과 냉정함을 기대하기란 조금은 어렵다는 생각 정도는 여기에 있는 모두가 다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언니까지 떠맡고 있는 아리아에게는 심적 부담이 그만큼 컸다는 소리와도 같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생존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혹시 그거 아니니? 생존자 수색을 하고 싶다 라는 말." "... 잘 아시네요. 유아 선배. 평소의 선배답지 않아요." "난 원래부터 깊은 사고방식을 가진 여자였거든?" 놀리지 말라는 듯이 반 위협적인 협박을 가하는 유아 선배. 그러고선 갑자기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리기 시작한다. 왜 나를 보는걸까 하는 생각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묻는 수밖에. "갑자기 왜 다들..." "네 의견은 어떠니? 유에." "제 의견요?" 노아 교수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응. 아리아의 의견대로 생존자를 수색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자 한다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 "그런 이유였군요." 생각에 잠긴다. 갑작스레 나에게 이런 무거운 질문을 던지다니. 노아 교수님이 직접적으로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아무래도 내 의견에 따라 앞으로의 갈피를 잡겠다는 뜻으로 보여진다. 우리들 중에서 리더의 위치에 있어야 할 만한 인물은 본디 노아 교수님이지만, 공교롭게도 여기는 무인도. 남자인 내가 리더의 역할을 맡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고민하는 내가 조금은 답답한지 편하게 생각하라는 뜻으로 내 어깨를 주물러주는 유아 선배가 말한다. "너무 오래 생각하지 마. 네 의견에 대해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을테고, 그리고 우리 모두 공감하지만 지금 실질적으로 우리를 이끄는 리더는 바로 너야.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남자잖아? 그러니까 여기서 너의 의견은 절대적으로 존중해줄거야. 나 뿐만 아니라 모두가." 유아 선배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노아 교수님의 말 그대로 정말 나를 중심으로 하나의 무리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세삼 느낄 수 있었다. 내 판단으로 인해 모두가 고생할수도 있고, 모두가 편해질수도 있다. "난..." 날이 밝은 뒤, 아리아와 나는 일찍 길을 떠날 채비를 갖춘다. 세리아의 가방에서 나온 손가방(도대체 저 가방 안에는 얼마나 더 많은 물건이 들어있는 것일까)을 이용해 물통과 약간의 식량을 담는다. 라이터는 가져갈 수 없다. 그런고로 적어도 이틀 안으로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내가 내린 결정은 탐색이었지만, 모두가 자리를 이동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길을 알고 있는 아리아와 나만 탐색길에 나서고, 나머지는 우리의 보금자리를 지키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유아 선배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었지만, 난 아리아의 의지를 높게 샀다. 실질적인 목적이 아니라고 해도, 아직 우리가 하나의 이성을 가진 '인격체'임을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거 가져가." 유아 선배가 직접 깎은 목검과 커터칼이었다. 이거 만드는데 꽤나 힘들었는데 유아 선배가 순순히 목검을 넘겼다는 것이 약간은 짠한 마음을 들게 한다. "잘 쓸게요." "무사히 돌려주러 와야 해. 반드시." "걱정하지 마세요." 아리아도 자신의 언니와 잠깐의 작별인사를 나눈다. 어디 멀리 가는것도 아닌데 마치 먼길 떠나는 것 처럼 대해주니 약간은 민망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아리아와 난 잠시간의 탐색길에 오르게 된다. 앞으로 무슨 일이 다가올지도 모른 채 말이다. 22화 EP 4. 정당방위의 범위 아리아의 말로는 왔다갔다 하는데 사실상 하루가 채 걸리지 않을거라 설명한다. 자신들이 그때는 워낙 정상적인 판단을 할 때가 아니여서 우리쪽 베이스 캠프와 자신들이 있던 장소를 다이렉트로 온 것도 아니고, 이리저리 해매면서 온 탓에 시간이 걸렸을 뿐이지 사실상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라고 설명해준다. 아리아와 같이 길을 걸은지도 대략 3시간 정도가 흐른다. 노아 교수님의 손목시계를 받아온 아리아가 주기적으로 시간을 체크한다. 거리를 측정하자는 면도 있지만, 숲 안쪽에서는 언제 해가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서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다. 슬슬 점심때가 다가오자, 근처의 커다란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손가방에서 조그만한 과일 열매를 꺼내어 먹는다. 며칠동안 과일은 빼놓지 않고 섭취하다보니 비타민 쪽으로는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오늘따라 물고기 구이가 그리워지는 이유는 착각이 아닐 것이다. "선배." 갑자기 아리아가 말을 건다. 사실 출발한지 처음으로 말을 거는 아리아였기에 나도 모르게 약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나에게 무슨 할말이라도 있는지 아리아는 잠시 우물쭈물 갈등하는 듯 하다가 이내 결심한 듯 속내를 말하기 시작한다. "고마... 워요." "뭐가 고맙다는 거야?" "제 의견에 손을 들어주셔서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별거 아닌거 가지고 고민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후배 양은 말이다. "됐어. 네 의견에 손을 들었다기 보다는 나도 우연히 너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고,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절충안이잖아? 지금 이렇게 우리 둘만 탐색하러 나선 것 자체가. 그러니까 유아 선배나 노아 교수님의 의견도 수렴한 결과니까 그렇게 부담가질 필요는 없어." 융통성 없는 후배는 그래도 뭔가 말할듯 말듯 하다가 결국 내 말을 수용하기로 했는지 잠자코 식사를 하기 시작한다. 이 녀석도 알고보면 귀여운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평소에 보면 말없고 무뚝뚝한 성격인줄 알았는데, 어제 저녁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말하기도 하고, 그리고 감사하다는 말도 할줄 아는걸 보니까 말이다. 식사를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길에 오른다. 아리아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이 오늘따라 더욱 눈부시게 보인다. 숲의 안쪽이라 그런지 나무들을 통해 간간히 들어오는 햇살이 아리아의 은발을 빛나게 하는 효과를 선사하는 듯 하다. 아리아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숲 안쪽에 위치한 작은 공터. 그 곳에서 그동안 아리아 일행이 머물렀던 흔적들이 보인다. 타다 남은 장작과 과일 껍질들, 그리고 움막으로 만들었던 구조물까지 말이다. "아무도 없네." "잠깐만요."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는 아리아가 이리저리 수색을 개시한다. 단서라도 하나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나도 아리아의 수색에 동참해 한동안 우리는 그렇게 이 장소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인적이란 전혀 보이지 않고,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어디 잠시 자리를 비운건 아닐까요?" "그건 아닐거야. 과일껍질을 보니까 방금 깎은 흔적은 보이지 않아. 적어도 이틀 전. 그리고 너하고 너희 언니가 처음 우리와 합류한 날에는 비가 왔었어. 그렇다면 이틀전에 비가 왔다는 소리는 적어도 이 사람들이 여기에 계속해서 머물고 있었다면 물에 젖은 장작 말고 마른 장작들이 보여야 하는데 그런 흔적도 없고. 내 생각으로는 너희가 생존자를 목격하고 난 이후에 그들도 역시 이 자리를 벗어난것 같아." "... 그렇군요." 무릎을 모으고 얌전히 쭈그려앉은 아리아가 타버린 장작들을 바라본다. 이 곳에서 그녀들은 도대체 어떤 일을 겪었던 것일까. 그리고 이 곳에 있던 생존자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모든게 의문 투성이었다. 밤도 늦었으니, 이들이 사용했던 베이스 캠프에서 하룻밤 자고 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밤도 되었고 어두울때 움직이는 것은 좋지 않을거란 판단 하에서 우리는 하룻밤 여기서 머물고 가자고 합의를 봤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움막 안에서는 라이터와 먹다 남은 물통이 남아있었다. 둘 다 생존에 꼭 필요한 필수품인데 이것들을 놓고 갈 정도였다면 어지간히 급박한 이유가 있었나보다. 급한 위기 상황이라고 생겼던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또 약간 애매하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라고 해도 들짐승을 만난것도 아니고. 굳이 구호 물품까지 내팽개치고 어디로 갈 이유가 있었나 할 정도의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다 되셨나요?" "아, 잠깐만." 라이터를 이용해 불을 피운다. 근처에 잘 탈만한 나뭇가지들을 구해와 모닥불을 만들고, 완성된 움막도 있어서 하룻밤 머물 정도의 환경은 충분히 갖춰진 상태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2개였던 움막 중 하나가 저번에 내렸던 비에 의해 부숴진 탓에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도 설마 아리아와 같은 움막에서 잘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서로 2교대로 불침번도 서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리아가 나와 같이 자는 것을 허락할 일은 절대 없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충 움막 안을 정리하고 나온 아리아가 모닥불 근처로 와서 나와 마주앉는다. 활활 잘도 타오르는 불길 마저도 오늘따라 이 어색한 분위기를 어찌 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유아 선배는 성격이 좋아서 주저리주저리 떠들기라도 할테고, 노아 교수님은 조용하지만 그래도 세리아처럼 대화를 못할 정도의 상대는 아니다. 그런데 아리아와 나는 단 둘이서만 있어본 적이 처음인지라 서로 어색한 분위기를 어찌할 수 없었다. 아리아라는 인물 자체가 일단 말이 많은 편도 아니고, 그리고 나도 상대적으로 수다쟁이 타입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래서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요소중에 하나가 '화술'이라는 것이다. "... 저기 말이야." 결국 남자인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본다. 아리아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어 나와 시선을 마주하는 형식으로 반응을 보인다. "저번에 유아 선배가 나를 중심으로 뭉친 집단이라는 말을 했잖아. 유아 선배나 노아 교수님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어. 그런데 사실 너희 자매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약간 궁금하기도 했는데." 분명 유아 선배는 아리아 자매도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거라 공식석상에서 말한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또 어떨까? 본인들에게 직접 그 속마음을 들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 내 물음에 아리아는 표정변화 없이 대답한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정할게요." "... 이봐. 그렇게 말하는게 더 상처라고." "솔직히 선배에 대해서 안좋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도 사과드릴게요. 언니에 대한 지나친 걱정으로 선배에게 폐를 끼친 점도, 그리고 공처가라고 놀렸던 것도, 유아 선배의 일로 비꼰 것도 전부 사과드릴게요." 갑자기 속사포로 쏟아지는 아리아의 말에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힌다. 갑자기 이 녀석이 왜 이러는 것일까? 머릿속에 아리아의 지금 상태에 대한 해석을 요구하려던 찰나, 아리아의 핑크빛 입술이 모닥불에 의해 빛나면서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한다. "우리... 진실게임 할래요?" "진실게임?" 이건 또 왠 급전개냐고 묻고 싶지만, 아리아는 자신의 할말만을 계속할 뿐이다. "제가 먼저 말하면 선배 차례에요. 아시겠죠?" "잠깐만. 아리아, 너 갑자기 왜그..." 하지만 내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나온 아리아의 말은 가히 만화에서 나올법한 5톤짜리 망치로 뒷통수를 때리는 장면이 연출될 정도로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저, 선배를 좋아하는거 같아요." ============================ 작품 후기 ============================ 21, 22편을 수정 한다 했는데, 저도 올리자마자 한번 다시 훑어보겠습니다. 왠지 요새들어서 부족한 부분이 많이 보이고, 읽으시는 분들도 코멘트로 지적을 해주셔서, 올리고도 안심이 안 되는군요; 이게 다 부족한 저의 탓입니다 ㅜ_ㅜ 23화 "저, 선배를 좋아하는거 같아요." ... 방금 환청을 들은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얼음마녀 같았던 아리아가 날 좋아한다고 대놓고 말하고 있다. 귀신한테 홀린 것일까? 손등을 꼬집어보니 일단 고통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환각도, 환청도 아니라는 사실은 일단 확실하다. 그렇다면 저 아리아는 사실 다른 인물일까? 그건 말도 안되는 경우이므로 넘기도록 하자. 혼돈의 카오스로 가득찬 내 머릿속을 진정시킨 채 나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대답한다. "유머 실력이 제법인데? 생각보다 타격이 컸어. 하하." "농담으로 들리시나요? 엄연한 사실인데요." "그럴리가 없잖아.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네가 날 싫어한다고 말하면 이해가 되겠는데, 좋아한다는 건 이상하잖아. 안 그래?" "... 아무래도 제 진심을 보여줘야 하겠네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아리아. 묘하게 아리아가 무섭게 느껴진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천천히 나에게 걸어오는 아리아를 바라보며 속으로 이걸 피할까 말까 하다가 왠지 아리아가 날 놀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아서 일단 가만히 있는다. 아리아가 내 무릎에 자신의 엉덩이를 통해 걸터앉는다. 이 녀석, 이렇게 가벼웠나 할 정도로 무겁다는 느낌이 생각보다 많이 들지 않았다. 아리아의 시선과 내 시선은 채 10cm도 되지 않는다. "떨고 계시나요? 선배." "잠깐만. 아리아. 이건 심장에 무리가 가는 장난인거 같은데." 설마 진짜로 이 녀석. 나를 좋아하고 있는 건가? 아무리 무인도라 할 지라도, 개방적인 마인드를 조장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곳이라고 한들, 너무 개방적이잖아. "네, 네 고백은 미안하지만..." "거짓말이에요. 선배." "... 뭐?" "거짓말이라고요. 한국말 모르시나요?" "아니. 너무 잘 알아서 탈인데. 그것보다 거짓말이라니?" "제가 선배를 좋아할 이유가 전혀 없잖아요. 설마 이런 시덥지 않은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건가요?" "너..." 그럼 그렇지. 천하의 아리아가 나에게 이런 고백을 할 일 같은 건 전혀 없겠지. 다시 나에게서 멀어진 아리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말한다. "설래였나요?" "너 같으면 안 그러겠냐." "걱정하지 마세요. 선배.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기초적인 지식을 적용시켜봐도 제가 선배에게 진심으로 반할 일 같은 건 전혀 없겠지만, 그래도 호기심은 있으니까요." "호기심이라니?" "이성에 대한 호기심은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잖아요. 선배에게 말했듯이, 저 역시도 남자친구란 존재를 만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남자란 생물이 어떤 존재인지 잘 몰라요. 물론 의학적인 시선이나 생물학적인 주관으로는 충분히 잘 알고 있지만요." "잘 알고 있는데 문제되는 점이라도 있는 거냐." "발기 현상이나 고환의 구조, 정액의 구성 요소 같은 걸 알아봤자 실생활에 도움이 안 되잖아요?" "... 상당히 엄한 단어들을 발설하는구나. 후배." "제가 알고 싶은 건, 무인도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극한의 상황에 몰리게 된 남자와 여자의 심리 탐구에요." "그것도 나름 흥미가 가는 분야구나. 그런데 의학 전공인 네가 심리학에 관심이 있었냐?" "재미있잖아요." "하하..." 역시 아리아. 무표정으로 잘도 제 3자와 같은 시선을 유지하며 저런 말을 한다. "무인도에서 남녀가 섹스라는 관계를 가지게 되는 동안의 과정을 보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선배가 고자라든지 그런 일부의 신체 불구가 되는 경우가 생길 때에는, 저의 재미가 줄어드니까 조심하세요." "남자의 생명에 굉장히 지장이 많이 갈 법한 고자란 말을 하다니." "선배란 존재 자체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주세요." "칭찬이냐, 욕이냐." "굳이 말하자면 칭찬이 45.9퍼센트, 나머지가 욕이 차지하는 비중이라고 말할 수 있겠군요." "욕이 더 많이 있잖아!!" 나 참. 이 녀석은 선배 놀리는 재미로 살아가는 악독한 성격의 소유자인가 보다. "피곤하니 전 자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을 자르며 대뜸 누워버린다. "그리고 자는 도중에 이상한 짓 하면 유아 선배나 교수님에게 그대로 일러바칠 예정이니 그리 아세요." "안 해. 이 녀석아." 마지막까지 정말 치밀한 녀석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리아의 말에 따라 진짜로 성추행을 한다느니 그런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의심을 받는다는게 조금은 서글픈 현실로 다가온다. 한동안 모닥불을 바라보며 따스한 감촉을 느끼고 있을 때. 오랫동안 불을 바라봐서 그럴까. 갑자기 소변이 마려와서 잠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리아가 깨지 않게끔 조금 떨어진 곳에 가서 볼 일을 보려는 생각에 자리에서 벗어나는 나. "읏차." 바지의 지퍼를 내리고 성기를 꺼내여 안에 있는 내용물들을 액체 형태로 쏟아내는데. "....." 미묘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아까부터 뒷통수가 따끔따끔하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동물인가? 야생짐승이 전혀 없다는 보장 또한 없으니까 그런 우려도 어느정도 생각하고 있지만. 움직임이 짐승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얌전하다. 마치 내 주변을 경계하며 대기를 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 그렇다면 동물이 아니라 사람일 수도 있다. 지퍼를 다시 올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을 걸어본다. "거기 누구 있나요." 아리아가 봤다는 생존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해봤지만. 아무런 말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대신에.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황급히 내게서 멀어지는 무언가가 행동을 개시한다. "잠깐만!" 나도 모르게 뒤쫓겠다는 선택지를 고르고 말았다. 짐승이라면 뒤쫓지 않는 게 훨씬 더 현명한 선택일지 모르지만, 인간의 호기심이란 때로는 성욕보다도 더 억제하기 힘든 그런 감정과도 같기에 지금의 내 행동을 스스로 막을 방법이 없었다. 내 몸 정도는 스스로 보호할 수 있으니까. 미리 받아왔던 커터칼을 주머니 속에 꺼내며 혹시나 모를 위협에 대비한다. 그렇게 몇 분 간 추격전을 펼친 끝에. "응...?" 오른쪽 발 아래 굉장히 낯선 느낌을 주는 무언가가 걸렸다. 돌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가볍고. 그렇다고 나뭇가지라 부르기에는 또 무겁다. 뭐지. 살짝 시선을 내리며, 눈이 어두운 숲속의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끔 시간적 여유를 두고 있는 사이에. 내가 발로 찼던 그 물건의 정체가 점점 내 시야에 들어온다. 기다랗고 큰 무언가. 마치. '사람의 팔'과도 같은 것이. 아니. 틀림 없다. 저건... "우욱!"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나오기 시작한다. 잔혹하게 뜯겨져나간 사람의 팔. 성인 남성의 팔로 보이는 신체의 일부가, 어둡고 습한 숲 속의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던 것이다. 어째서? 왜?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상황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던 내게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사람의 시체는 처음 보나?" 울창한 숲의 나뭇잎들 사이로 내려오는 달빛을 받으며 등장한 의문의 여성. 흑발의 긴 머리카락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너풀거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마치 굶주린 하이애나와 같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어둡고, 깊고,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의 눈동자가 뜯겨져 나간 사람의 팔을 보고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진 나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다. 마치 나를 관찰하기 위해 일부러 이 곳까지 유인해 온 것 같다는 그런 느낌까지 주는 상황이었다. 평범한 일이 아니다. 무인도에 표류된 순간부터 이미 평범한 인생과는 꽤나 거리감이 생겨버린 그런 기분을 받긴 했지만. 이 여자는 다르다. 오싹한 분위기. 사람의 팔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그리고 이 상황을 오히려 직관적인 시선으로 분석하려는 듯한 냉철한 눈. ...위험하다. 이 여자. ============================ 작품 후기 ============================ 전 편에는 없던 등장인물이지요. 그나저나 배고파서 샌드위치 하나 사왔는데, 그거 먹으니까 또 배가 아픕니다 ㅡ_ㅡ; 24화 "누구냐. 넌." 얼음장같은 눈동자를 지닌 여성이 나에게 먼저 정체를 묻는다. 목소리가 여성 치고는 꽤나 저음에 속하는 그런 톤. 물론 남성에 비해서는 높은 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생각보다 낮은 저음에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분위기도 사악해보이는 데다가, 목소리까지 저러니까 위축이 된다고 할까. 그것보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팔과 저 여자의 관계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혹시... "... 당신이 한 거야?" 아랫쪽의 팔을 가리키며 물어본다. 옷 소매와 함께 뜯겨져 나간 사람의 팔. 자세히 보니, 짐승의 날카로운 이빨에 물려 뜯겨 나갔다기 보다는, 날카로운 물건으로 베어 나간듯한 절단면이 보인다. 그리고 여성이 지니고 있는 나이프. 커터칼도 아니고, 나이프다. "질문은 내가 먼저 했어." 여성이 나이프의 끝을 나에게 겨누며 딱딱한 말투로 일관한다. 확실히 먼저 질문을 받은 쪽은 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저런 식으로 협박을 하면 이쪽도 곤란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거라고는 커터칼 뿐인다. 나이프를 상대할 리가 없다. 더욱이 뜯겨져 나간 팔의 모양새는 성인 남성으로 추정되는 그것. 만약, 여자가 성인 남성과의 말다툼으로 저런 짓을 했다면, 분명 성별의 완력차를 극복할 수 있는 실력의 소유자라는 말이 되는 셈이다. 하기사. 생각해보면 평범한 여자라고 한다면, 나이프를 들고 다닐 이유도 전혀 없겠지. "유에라고 한다." "국적은?" "지금 말하고 있는 언어 그대로." "한국인인가." 의사소통의 문제를 전혀 느끼지 않을 정도로 익숙한 우리나라말 담화로 봐선, 아무래도 저 여자 또한 한국인이 아닐까 싶다. 얼핏 외모로 봐서는 일본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건 예상 외다. "내 소개도 했으니까 당신 소개도 해주시지." "네 녀석에게 이름을 말해줄 가치가 있나?" "상호간의 예의라는 것도 모르냐. 넌." 여전히 칼 끝을 나에게 겨눈 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수수께끼의 여성. "... 그 녀석들의 동료는 아닌가 보군." "그 녀석들?" "네가 발로 차버린 그 팔의 주인과 동료들." "역시 이거, 네가 한 일이냐?" "머리가 사람 수준으로 돌아간다면, 충분히 알 수 있겠지." "... 사람이라도 죽인 거냐." "멍청한 녀석이군. 이건 '정당방위'다." "... 뭐?" "정당방위. 녀석들은 나를 강간하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 또한 그에 맞는 응수를 둔 것이다." "응수라니... 정당방위의 범위가 살인까지 이어지는 건 아니잖아!!" "뭘 모르는군." 나이프를 다시 거두며, 나에게서 점점 멀어지려 하는 수수께끼의 여자. "너도 이 섬에 표류되서 알겠지. 배가 난파된 이후, 제대로 된 식량을 구할 수 없었다는 것 정도는." "... 그래." "녀석들은 나 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 여자를 강간했다. 그리고 어떻게 했는지 아나?" 차갑고 냉정한 눈빛이 날카로운 얼음가시가 되어 나에게 쏘아지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여자를 죽이고 인육으로 먹었다." "뭐라고...?" "이 섬에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던 녀석들은, 몸통만을 남긴 채 여자의 팔과 다리를 뜯어내고, 먹거리로 사용하고 있었다. 여자의 몸은 단순히 그 녀석들의 성적 노리개 역할을 하기 위해 일부러 사지를 절단하고 남겨두었지." "그,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다시 생각하는 게 좋을거다. 여기는 사회도, 법도 없다. 경찰도 없지. 말 그대로 무법의 세계. 인간을 구속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제재할 수단조차 없지. 인간의 추악함은 바로 이런 장소에서 드러나는 거다." 믿을 수가 없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고? 게다가 여자는 성적 노리개로 활용한다고? "녀석들을 죽이고. 그 여자 또한 죽음을 바라고 있었기에 직접 내가 죽였다. 이것이 네가 궁금해하는 사건의 전부." "......" "인간답게 이 섬에서 살아가고 싶다면, 제대로 된 생존 방법을 갈구하는 게 좋을거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 나에게 이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지도 모르니까." 점점 숲 안 쪽으로 모습을 감추는 수수께끼의 여자. 우리가 처한 사실이 단순한 표류가 아닌, 최악의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채. 말도 없이 내 앞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다음날 아침.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채 우리들은 다시 일행이 기다리는 베이스 캠프로 발걸음을 옮기기로 한다. 어제와 같은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아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가죠.'라는 말만 할 뿐이다. 하긴. 큰 일을 겪었던 사람은 아리아가 아니라 나 뿐이겠지만. 아리아와 같이 행동했던 일행들도, 그리고 자신들을 도와줬다던 세이라는 여자의 행방에 대한 단서도 알아내지 못한 채 귀환한다는 점은 아무래도 조금 꺼림칙하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가장 궁금하지만, 여기서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은 없는지라 미련없이 귀환길에 오른다. 아니면 설마. 어제 그 여자의 이름이 세이라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름을 물어보진 못했지만,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오는 길은 처음에는 낯선 길이라 쉽지 않았으나, 돌아가는 길은 쉬웠다. 나도 이제 길을 외울 정도였기 때문에 굳이 아리아가 안내하지 않아도 쉽게 알아서 찾아갈 수준까지 올라온 셈이다. 어제 불침번을 하면서 주변을 대충 눈요기로 봤는데, 식수를 조달할만한 거대한 호수는 보이지 않았다. 아리아의 말을 들어보자면, 배가 난파당한 뒤 바다에 떠내려온 식수 몇통으로 버틸 수 있었다고 하던데, 그 이후의 일은 잘 모르겠다고 한다. 세이라라는 여자의 생존 여부. 그리고 어제 나타난 의문의 여자. 모든게 의문 투성이다. 나중에 유아 선배와 노아 교수님에게 의논해볼 가치가 있을듯 하다. 해가 떨어지기 직전, 우리는 베이스 캠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침 저녁준비를 하던 노아 교수님이 우리를 향해 환하게 웃어보이며 맞이한다. "어서오렴. 별 일 없었니?" "네. 사람 그림자도 못만났지만요." 여기서는 살짝 거짓말. "그렇구나. 아, 배고프지? 어서 와서 식사하렴." 아리아의 모습을 발견한 세리아가 달려오며 아리아를 와락 껴안는다. 아리아도 세리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다녀왔다는 인사를 한다. 아름다운 자매의 정을 옅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발견 못한거야?" "... 뭐, 그렇죠." "소득도 없는데 뭐하러 고생한거래. 칫." "유아 선배도 세리아처럼 와락 껴안아주며 기쁜 마음으로 반겨주실 순 없나요?" "나에게 도대체 뭘 바라는거야. 변태야." 유아 선배의 로우킥이 또다시 정강이를 정확하게 가격한다. 역시나 돌아오는건 폭력밖에 없는 것인가. 괜히 말을 걸었다며 폭풍 후회를 하면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생선꼬치 앞에 앉는다. 사실 어패류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무인도에 조난당하고 난 이후에는 어패류가 급속도로 좋아지기 시작했다. 편식하던 날 개선하게 만들 정도의 위력을 가진 야생 꼬치구이, 만세. 살이 많은 부위를 한입 베어문다. 역시나 사람은 육류를 먹어야 한다. 비록, 물고기지만 말이다. 아리아도 나와 마주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리아의 뒤를 이어 나머지 일행들도 모닥불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제각기 식사를 하기 시작한다. 역시 밥은 사람이 많아야 먹는 맛도 있는 것 같다. 한동안 식사를 먹던 중, 그동안의 일을 들려주자 노아 교수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한다. "큰일이구나. 그 사람들은 어찌 되었는지 걱정이야." "살아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모르는 생존자에게 그다지 신경쓰지 마세요. 교수님." 유아 선배의 말에 노아 교수님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일관한다. 교수님 입장에서는 쉽사리 신경을 끊을 수가 없나 보다. 그러나 강경파인 유아 선배는 그런 노아 교수님의 의견에는 동조하지 않는 눈치인듯 하다. 차마 교수님에게 직접 말은 하지 않지만, 표정으로 모든게 드러난다. 유아 선배가 원래 성격상 지르고 보는 화끈한 성격인지라 한편으로는 무슨 말을 터뜨릴지 조마조마했는데, 아직 사리분별력이 낮아지지는 않았나보다. 노아 교수님도 유아 선배의 표정을 못본건 아니다. 하지만 내심 모른척 하고 넘어갈 뿐이다. 여기서 괜히 갈등사항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진의 실질적인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유아 선배와 교수님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는 노아 교수님. 이 둘의 분쟁만큼은 서로가 피하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렇게 속으로 쌓아두기만 하면 언젠가는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생길거라는 불안한 예상도 해본다. 인간이란 이기적인 동물이라고 하지들 않는가. 아무리 우리가 하나의 집단으로 뭉치고 서로 협력하는 관계라고 해도 결국 자신만큼 소중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타인에게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동물인 것이다. 분위기를 파악한 아리아와 세리아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괜히 나서봤자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묵묵히 저녁식사를 끝낸 우리. 노아 교수님과 유아 선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움막으로 들어가거나 모닥불 자리 근처에 앉는다. 언젠가는 우리들간의 갈등이 올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이렇게 다가오니 마땅히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보다도 어제 있었던 의문의 여자가 나에게 들려준 사실. ... 현실은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너무나도 잔혹했다. 아니지. 사람이란 존재가 너무나도 무서운 것일지도. ============================ 작품 후기 ============================ 저녁식사 맛있게 하시길! 25화 낯선 여자에게서 들은 사건. 이 사건은 우리들에게 아주 중대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이렇게 무인도에 조난당해서 먹을것을 힘겹게 구하면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사실은 기적이다. 아마 배가 난파된 사건 이후로 대부분은 배가 난파당했을 시점에 아마 바닷속에서 물고기 밥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우리는 그 중에서도 우연치않게 파도에 떠밀려와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매일매일 죽음과 싸우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죽음과의 생존경쟁에서 패한 자들을 본 적이 없다. 굶어죽은 사람. 예전 빈곤시대에서나 나올 수 있을법한 단어가 무인도에서는 예외적은 경우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이 사람을 잡아 먹는다. 예전에 비디오 게임 중 좀비 게임이 있었는데, 시나리오에서 먹을 것이 떨어져서 사람을 잡아먹는 등장인물을 본 적이 있었다. 무인도 표류도 마찬가지. 과일이나 물고기, 그리고 풀 등 먹을 것이 있다면 조달할 수 있지만, 낯선 상황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힘들고, 또 결코 풍족한 먹거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게다가 생존자들끼리 굶주린 채 있다면. ... 상상조차 하기 싫다. 여자를 강간하는 것도 모자라서, 사지를 절단해 인육으로 먹다니. 인간이 할 짓인가. 생존자들 중에서 물도, 식량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들처럼 지혜와 협동심을 발휘해 살아남기를 원하는 집단이 있는 반면, 희망도 없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죽음이라는 녀석과 싸워서 패한 자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시체는 죽음이 언제나 우리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종의 신호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 여자가 나에게 경고했던 것과 마찬가지. 오랫동안 장거리 일정을 소화하느라 피곤한지, 아리아는 먼저 자러 가겠다고 움막으로 향했다. 세리아도 아리아를 뒤따라 같이 움막으로 향하는 모습까지 확인한 나는, 잠시 유아 선배와 교수님을 부른다. "우리 둘만?" "네. 아직 저 두 자매에게는 들려주고 싶지 않으니까요." 한숨을 쉬며, 머릿속을 정리한다. 아무래도, 서로가 서로를 믿어야 하는 우리들인데 이렇게 나 혼자 비밀을 간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이야기를 들은 후 두 여성들의 말문은 막히고 만다. 유아 선배는 상당히 동요하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하고, 노아 교수님은 이내 참았던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자신이 알던 세계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일까. 잔혹한 현실과 부딛친 교수님의 눈동자에, 끈임없이 투명한 눈물이 모래바닥 아래로 떨어진다. "교수님..."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노아 교수님을 바라본다. 너무나도 연약한 그녀. 이름도 모를 사람들의 죽음을 그녀는 눈물로써 애도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성스러운 눈물. 바로 지금의 교수님의 투명한 눈동자에서 흘러내리는 성수와도 같은 것을 가리키는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정말... 이니?" "네. 직접 눈으로 봤습니다. 그리고 들었습니다." "아리아는. 아리아는 봤어?" "그때는 제가 불침번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아리아에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리아가 어떠한 충격을 받을까봐 걱정되서 한 조치였다. 하지만 유아 선배는 나의 이런 행동에 대해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보이기 시작한다. 유아 선배의 칭찬을 예상했던 내게 있어서는 약간의 반전이라면 반전이었다. 그리고 유아 선배는 그 반전의 이유를 스스로 털어놓기 시작한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한거야. 아리아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니." "선배야말로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거죠? 아리아가 얼마나 상처받을지 알고나 하시는 말씀인가요?" "여기는 학교도, 가정도 아니야!" 유아 선배가 벌떡 일어서며 외친다. 희미하게 떨리는 다리와 손이 유아 선배 역시도 노아 교수님과 마찬가지로 막상 다가온 죽음에 대한 공포로 억압되어 있는 듯 하다. 유아 선배는 특유의 드센 분위기로 애써 자신을 독려하기 시작하지만, 제 3자인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아리아도 알고 있었다면, 그 여자를 붙잡아서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었을 거 아니야! 그것보다, 그렇게나 위험한 여자를 왜 함부로 놓아준 거야! 왜!" "유아 선배. 진정하세요. 일단 앉으시고..." "난 진정하고 있어!" 버럭 소리치는 유아 선배의 목소리가 해안가를 가득 체우기 시작한다. 행여나 아리아와 세리아가 지금 우리의 이런 소리를 들었을까봐 순간 노심초사 했지만, 곤히 잠든 그녀들의 모습을 멀리서 확인한 후 안심하며 유아 선배에게 다가간다. 살며시 유아 선배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자, 유아 선배가 내 손목을 치면서 나를 노려보듯이 쳐다본다. "건들지 마." "선배. 진정하세요. 동요하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선배가 흔들리면 아리아나 세리아는 어떻게 하라구요. 일단 앉으세요. 그리고 교수님도 그만 우셔야 합니다. 언제까지 저희가 노아 교수님을 보호하며 지낼수는 없어요." 한동안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던 유아 선배가 여전히 불평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다. 노아 교수님도 내 말에 일단 진정이 되었는지 작게 흐끅 하는 딸꾹질만을 조심스럽게 한다. 사실 선배나 교수님들의 심정은 이해가 간다. 무엇보다도 유아 선배가 하고싶은 말은 나로서는 이미 그 의도를 알고 있기에 일부러 아리아에게까지 보이지 않은 것이다. "선배, 선배가 하고싶은 말은 무엇인지 알고 있어요. 그래서 왜 아리아에게 그 시체와, 생존자인 낯선 여자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를 내었다는 이유도 말이죠." "... 알면 됐어." 약간은 화가 풀린 모양이다. 그러나 여전히 내 안이한 태도에 약간은 불만을 가진 눈동자는 여전하다. "그럼 대답해봐.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 여자에게서 들은 사건, 그리고 여자와 처음 만났던 상황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털어놓은 나에게, 유아 선배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생존자... 그러니까 여자의 사지를 절단하고, 인육으로 먹었다는 남자들도 위험하단 생각이 들지만."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모닥불을 지긋이 바라보던 유아 선배가 동요하는 눈동자로 중얼거린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너에게 그 사건을 털어놓았다는 여자가 더 무서워." "어째서요?" "생각해봐.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였어. 물론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하지만, 남자'들'이었다며? 아무리 굶주려있다 한들, 상대는 다수야. 게다가 여자의 근력으로 다수의 남자들을 상대할 순 없잖아." "잘 때 몰래 습격했을수도 있죠." "일반인이라면 아무리 잘 때 공격했다 하지만, 인기척이 없을리가 없어. 필히 그 여자는 비정상이야. 이상하다고." "생각해보면..." 그 때 느꼈던 살기. 얼음장 같았던 시선. 그리고, 무인도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의 생존력. 평범한 여자가 할 수 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감당못할 일들로만 이뤄진 것들이었다. 유아 선배의 말에 교수님도 격하게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다. "그 여자의 정체가 무엇일까?" "글쎄요..." 알 수가 없다. 직접 대면한 사람은 나밖에 없지만, 이름도, 그 외에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안 것이라고는 성별, 그리고 외형 뿐. 그 이상의 고급 정보는 아직까지 접하질 못한 게 어제 탐사의 결과물이다. "네가 만났다던 그 여자도 무섭지만, 나는 가장 무서운 게..." 유아 선배의 목소리에는 이제 '두려움'이라는 감정까지 전해질 정도다. "그 사람이 우리까지 습격할 수 있다는 게... 너무 무서워." "......"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 여자는 사람을 죽였다. 물론 무인도에서 저지른 살인이 처음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사람을 죽여놓고도 너무나도 태평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모습이 뇌리에서 잊혀지질 않는다. 평범한 녀석이 아니다. 그렇다면 필히, 우리에게 위해를 가할 상황도 올 수 있다는 말. "먹을 거, 식수, 구조, 그 다음은 미치광이 생존자까지 걱정해야 될 상황이네." 한숨을 쉬는 유아 선배. 가녀린 어깨 위에 한 손을 올려놓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나름 위로를 해보인다. 해결해야 할 것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차라리 굶주림과 싸우는 게 더 마음 편하겠어." 자신의 배를 양 손으로 감싸면서 말하는 유아 선배의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는다. 그러자 유아 선배가 뾰로퉁한 표정을 지으며 예외없이 나에게 따지기 시작한다. "뭐야. 이 심각한 상황에서." "그냥... 선배의 모습이 귀여워 보여서요." "넌 이란 상황에서도 사탕발림이야?" "심각해져봐야 소용 없어요. 우리들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이 섬에서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는 일이니까요." 알고보면 정말 간단하다. 우리가 할 일은 오로지 생존. 그것 뿐이니까. "참 속 편한 결정이네."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엉덩이에 묻은 모래들을 털어낸다. "하지만, 마음에 들어." "다행이네요." "단순하기 때문에, 간편해지는 거야. 하나만 생각하면, 고민해야 할 것도 하나로 줄어들게 되는 법이니까." 양 손을 머리 위로 쭉 펴며 가볍게 몸을 풀어보이던 선배가 움막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나도 졸리니까 이만 잘래. 불침번, 수고해~" "좋은 꿈 꾸세요." "노력해볼게." 노력한다고 좋은 꿈을 꾸게 된다면, 참 편할텐데 말이다. 유아 선배의 퇴장에, 교수님도 옅은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유아의 말이 정답인 거 같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단순하게 생각하자.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이 섬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도만 찾아내면 되니까.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면, 불쌍한 나의 뇌세포들만 죽어나가게 할 뿐이다. "내일 아리아하고 세리아 선배에게 말을 해줘야겠어요." "응.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뭐라하지 않을게." ============================ 작품 후기 ============================ 요새 자정만 되면 배가 고픕니다. 별로 피곤한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닌데도, 왜이리 배고픈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편의점에 뭘 사러 갈까 고민중인데, 이러니까 점점 살이 찌나봅니다 ㅡ_ㅡ;; 간만에 맥주를 마시고 싶은 그런 충동이... 26화 다음 날 아침. 결국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로 한 우리는 아리아와 세리아에게 어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체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래도 계속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세리아는 한동안 충격이 심했는지 노아 교수님이 곁에 붙어서 쓰러지지 않게 돌봐줘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까. 아리아는 무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묵묵히 끄덕일 뿐이다. "무인도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아요. 오히려 당연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긍정적인 대답이네."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계적인 사고방식의 컴퓨터입니다. 말도 안되는 상황이라고 해도 어떻게 해서든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해석하려고 하죠. 비현실따윈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회의 하나의 방식. 그러니까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고, 그리고 오히려 선배가 시체를 발견했기 때문에 우리들의 결속력은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용감하구나. 아리아." 솔직한 칭찬에 아리아가 나를 슬쩍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홱 돌린다. 내가 무슨 잘못된 말이라도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 전에 아리아가 작게 중얼거린다. "... 더 대단한건 선배에요." "나?" 전혀 의외의 말을 하는 아리아 덕분에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만다. 그러자 아리아는 한숨을 푹 쉰채 여전히 혼잣말을 하듯이 계속해서 말한다. "아무튼 정말 둔하다니까." 여전히 의미심장한 녀석이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이상한 말만 하다니. 아니면 내가 정말로 이해 못하는 것일까? 가뜩이나 복잡한 머리가 더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아침부터 상쾌한 바람을 느낄만한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도 무인도 생활에 이제 어느정도 적응이 되었기 때문인가 라는 이유이리라 생각하며 기지개를 쭉 펴본다. 넓게 펼쳐진 해변. 투명한 바닷물이 마치 하와이에 놀러 온 듯한 착각을 선사해준다. 물론 하와이에 실제로 가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내 옆에서 같이 해변가의 바람을 맞이하는 세리아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내게 인사한다. 말을 못하는 그녀였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의 사소한 제스쳐로 최대한의 의사를 표시한다. 어찌보면 약간 불쌍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동정의 시선으로 세리아를 바라보면 또 당사자에게 실례를 범하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왜냐하면 말을 못하는 장애에 대해서는 세리아 본인은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아리아가 말해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적한 해변가는 오늘도 평화롭다. 휴양을 온 기분이지만, 문제는 실제로 휴양을 온 것이 아니라 조난되어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것이라는 사실이지만. "유에. 이것좀 도와주겠니?" "아, 네!" 노아 교수님의 말에 대답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여자가 들기에는 조금 무거워보이는 거대한 돌. 이것을 가리키며 어색하게 웃는 노아 교수님이 나에게 부탁한다. "미안하지만 이걸 모닥불 근처로 옮겨주겠니?" "상관 없지만... 어디에 쓰실 건가요?" "그냥 작은 탁자같은 거라도 만들어볼까 해서."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두 팔을 걷어붙이고 돌을 있는 힘껏 들어올린다. 보기보다 제법 무거운 녀석. 나도 나름 동아리 활동이나 태권도 등으로 단련했다고 생각했지만, 이 녀석은 보기보다 무겁다. 차라리 노아 교수님이 더 가볍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영차 영차 속으로 구호를 지르면서 간신히 모닥불 근처로 돌을 옮겨놓는다. 한숨을 쉬면서 땀을 닦으려고 하자, 어느새 다가온 세리아가 자신의 옷 소매로 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기 시작한다. "아, 미안한데." 고개를 수평으로 흔들면서 부정의 의미를 나타내는 세리아. 아마도 괜찮아요 라는 의미를 뜻하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아니지. 선배니까 반말 아닐까? 그러고보니 나는 왜 세리아에게 '선배'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는 걸까. 선배라는 위엄보다는 왠지 지켜줘야 할 연약한 후배의 느낌이 강해서? ... 관두자. 어차피 독백인데. 뭐라 태클 걸진 않겠지. 그냥 하던데로 하자. 거대한 돌 위로 또 하나의 돌을 올려놓는다. 이번에는 수평으로 깎인 넓지막한 돌. 하나, 둘 씩 기초를 다지고 그 위에 평판의 돌을 올려놓으니 제법 모양새가 갖춰진 탁자가 만들어졌다. 자연으로 만든 간이 책상이라. 몸이 좀 고생했을 뿐이지 완성시켜놓고 보니까 나름 그럴싸하다. 근처를 지나가고 있던 유아 선배가 우리들을 발견하고선 다가오며 감탄어린 시선으로 말한다. "오! 만들었네요. 이거." "제법 쓸만하니?" "네. 이 정도면 괜찮을거 같아요." 괜찮다니. 무엇을 말하는 건지 잘 이해가 안가서 유아 선배에게 물어본다.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겁니까? 이거." "응. 그거잖아. 물고기 손질같은 거 사용할때 도마가 없었으니까. 칼은 있는데 도마가 없으니까 제대로 손질할 수 없더라고. 그래서 부족하게나마 이런 식으로 만들자고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거야." "그런 거라면 진작에 저에게 말해줬으면 좋았을텐데요." "요리는 여자 담당이라고. 변태 씨." 허리에 손을 올려놓으며 귀엽게 윙크하는 유아 선배. 하긴. 실제로 여기서 요리를 가장 못하는, 아니 전혀 모르는 인물은 나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뭐라 반박을 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저 식량 확보에 전념할 뿐이다. 나머지는 아리아와 세리아가 한 팀, 그리고 노아 교수님과 유아 선배가 한 팀 이런 식으로 2교대로 식사를 준비하는 방식으로 순환이 되고 있다. 덕분에 요리를 잘 못하는 교수님도 점점 실력이 늘어가는 중. 여러가지 의미로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데 아리아는?" "잠깐 볼 일을 보고 있어요." "그렇구나." 노아 교수님의 말에 유아 선배가 친절하게 대답한다. 볼일이라면 그거겠지. 음... 뭐랄까... 그런거 있지 않는가. '소'로 시작해서 '변'으로 끝나는 것이라든지. 아니면 '대'로 시작해서 '변'으로 끝나는 그런거 말이다. 참으로 설명하기 조금 부끄럽다. 본인도 아니고 내가 왜 이런 기분이 드는걸까. 나야 뭐 대변을 볼때만 사용하면 되지만, 여성진들은 그게 또 아닌지라 여러가지 의미로 휴지 대용으로 쓸만한 나뭇잎들을 많이 필요로 하고 있었다. 특히나 선배나 교수님같이 생리주기에 접어든 여성에게 있어서는 평소의 2배가 넘는 나뭇잎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아나 세리아는 아직까지 생리주기에 접어든 편은 아닌지라 그다지 불편한 점은 없어보이는데, 가끔씩 터지는 유아 선배의 히스테리나 노아 교수님의 불편한 태도 기타 등등은 조심해야 한다. 생리에 접어든 여성의 짜증이 얼마나 극한을 달리는지에 대한 현상은 내 누나를 통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담으로 말하자면, 내 누나이기도 한 유린이라는 여자는 평소에도 엄청난 장난끼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도 좋고, 운동신경도 뛰어나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슈퍼우먼. 나와 한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면서도 정말 대단한 여자라고 생각될 정도로 뛰어난 업적들을 많이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배가 난파된 이후로 누나의 생사는 여전히 불명. 같은 대학에 같은 학과를 재학중인 우리 누나도, 나를 따라 이번 해외MT 여행에 참가했었다. 가족이기도 한 내 입장에서는 누나의 안전 여부가 상당히 궁금하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다.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남매인데. 배가 난파되고 이 곳으로 흘러들어와서 어디선가 우리들과 같이 무인도에서 무사히 생활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소식이라도 들려오면 정말 좋을텐데 말이다. 나도 모르게 절로 한숨이 내쉬어진다. 다들 잘 살아 있을려나. 누나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렇고. 다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으면 하고 작게 생각해본다. "뭐야.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분위기를 잡는건데?" "이래봬도 분위기 있는 남자거든요." "보나마나 아리아의 볼 일보는 일 같은거 상상했겠지. 그렇지?" "... 제가 변태입니까. 선배. 여자의 볼 일을 보는 상상을 하다니." "너라면 충분히 가능할거 같아서." "물론 충분히 가능하지만... 이 아니라. 저도 그렇게까지 변태는 아니라고요." "과연 그럴까?" "네." "하늘에 맹새할 수 있어?" "... 아마도요." "거 봐." 오늘따라 선배의 태클은 상당히 무겁다. 역시나 '그 날'이라 그런 것일까. 유난히 내게 간섭이 심하다는 느낌도 들고.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는 그런 기분도 들고. 아무튼 조심해야한다. 생리기간의 여자 말이다. ============================ 작품 후기 ============================ 확산성 밀리어아서라는 게임을 해봤습니다. 카드 게임은 역시 어려워요 ㅡ_ㅡ 27화 EP 5. 두통, 치통, XX통엔... 낯선 여자의 등장. 그리고 무인도에서 펼쳐지고 있는 극악무도한 현실. 그 모든걸 접한 우리들이지만, 시간은 이런 우리들에게 여유란 것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무심하게 흘러간다. 오늘도 평화로운 아침이 찾아온 무인도. ... 라고 생각을 했지만. "으으..." 움막 안에서 배를 움켜쥔 채, 바둥거리고 있는 유아 선배의 모습 때문에 그 평화로운 아침의 일상조차 깨지고 말았다. "괜찮나요? 선배." "... 죽을 맛이야." 안색까지 시퍼렇게 될 정도로 아픈가 보다. 설마 노아 교수님에 이어 유아 선배까지? 그렇다면 진짜 우리가 먹고 있는 음식이 건강상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려나. 생각에 잠긴 나는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우리들이 먹었던 음식들의 목록을 떠올려본다. 구운 물고기. 야자수 같은 열매. 그리고... ... 교수님이 구해왔던 그 풀 잎! "혹시?!" 약초 도감에서 보고 가져왔다고 본인은 말했지만,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유력한 범인 중 하나다. 이래서 정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거나 주워먹지 말라고 옛 어른들이 말씀하신 거구나. 지금이라도 당장 교수님께 가서 말을 해야겠다. "잠시만요. 선배. 제가 교수님께 가서..." "뭐, 뭘 하려고?!" "어느 곳에서 그 풀 잎을 가져 오셨는지 물어보려고요." "갑자기 그 대마초는 왜?" 참고로 말하자면, 대마초가 아니다. 유아 선배가 멋대로 그렇게 부를 뿐. 이상한 오해를 하지 말도록 하자. 그러는 편이 피차 좋을테니까. "배 아프시다면서요? 교수님도 얼마전에 속이 안 좋으셨는데. 아마도 그게 원인이 되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내가 배 아픈 건..." 뭔가를 말하려다 이내 고개를 좌, 우 방향으로 거세게 흔든 유아 선배가 이내 말을 끊는다. "... 아무것도 아니야."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으신가요?" "있지! 당연히 있고 말고!" 도리어 화를 낸다. 이상하다. 남의 건강상 문제를 지적하는 게, 혼날 일인가? 의구심만 무럭무럭 솟구치고 있기 때문에 유아 선배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할 순 없지만. 그래도 할 건 해야지. "교수님에게 다녀올게요." "야, 야! 그러지 말라고~!!" "왜 말리나요?" "아... 진짜!!" 이제는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면서 바닥에 뒹군다. 오늘따라 유아 선배의 반응이 매우 이상하군. 그 풀잎에 복통 증상뿐만 아니라 정신적 공황상태 효과까지 옵션으로 붙어 있었나? 교수님은 그러시지 않았는데. 아니면 혹시 개인차? 어떠한 방향으로 의심해도, 다급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교수님! 이쪽입니다!" 황급히 노아 교수님을 데려온 나. 여전히 움막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유아 선배의 모습이 더더욱 초췌해진 듯한 느낌을 전해준다.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다급하게 나와 함께 뛰어 온 교수님. 유아 선배의 모습을 보더니, 혹시나 하는 말투로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유아. 너, 설마..." 뒤에 이어질 말을 내뱉으려 하다가, 내 모습을 힐끗 바라본 교수님이 유아 선배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묻는다. 그제서야 유아 선배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또 다시 교수님에게 무언가를 알려주자,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교수님이 내 쪽으로 다가오며 말씀하신다. "별 일 아니니까 신경쓰지 마렴." "네?! 이게 별 일 아니라고요??" "응. 유아는 쉬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자리를 비켜주는게 좋아. 자, 빨리." "그, 그치만..." 움막 바깥으로 향해 내 등을 양 손으로 떠미는 교수님. 도대체 뭐냐. 여자들만의 비밀? 나에게는 말할 수 없는 그런 병적 증세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어떤 희귀병이길래 그러는 것인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질 않는다. 무인도에 조난된 우리에게 있어서 식량을 조달하는 일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아니었다. 이제부터 알 수 없는 적, 그러니까 바이러스나 병과 같은 일종의 보이지 않는 적과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들짐승 같은것도 조심해야 할 판국이다. 물론 사람을 위협할 정도의 들짐승이 이 무인도에 서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아직까지 검토할 필요성이 있지만, 대비해서 나쁠건 없지 않는가. 여러가지로 복잡한 상황에 놓인 우리들은 그래도 계속해서 무인도 생활을 영위할 뿐이다. 점심식사를 하는 와중에, 유아 선배가 모두를 부른다. 소집의 이유는 다름이 아닌 소지품 확인. 항상 모닥불을 피우는 장소에 앉은 우리들은 일단 가지고 있는 소지품을 확인하기로 한다. 그 전에. "선배. 이제 괜찮나요?" "... 그렇게까지 나아진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버틸만 해." "병 같은 건 아니죠?" "여자라면 당연히 걸려야 할 병이니까." "...?" 여전히 알 수 없는 말 만을 내뱉는 유아 선배. 참으로 독특한 희귀병 녀석이다.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유아 선배가 가지고 있던 것과 아리아, 세리아가 가티고 있던 것, 그리고 내가 아리아와 같이 탐색길에 오른 과정에서 얻은 것 포함해서 커터칼은 총 3개. 그리고 물통 2병과 임시로 만든 낚시대, 마지막으로 유아 선배가 만든 목검이 전부였다. 참고로 세리아의 가방도 있지만, 그 안의 내용물은 도대체가 뭐가 들어있는지를 공개를 안하니 일단은 미확인 물체(?)로 인식하기로 한다. 아무튼 호신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칼은 총 3개. 목검까지 포함하면 4개가 된다. 한동안 이 물건들을 바라보던 나는 내 생각을 말하기 시작한다. "우선 목검은 유아 선배가 사용하실거죠?" "너나 나 말고 목검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럼 유아 선배는 목검을 사용하는 쪽으로 하고, 나머지 교수님이나 아리아, 그리고 세리아에게 각자 커터칼을 맡기도록 하죠." 나의 제안에 아리아가 슬며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호신용 커터칼입니까?" "그래. 나도 커터칼이 도구를 만들때나 여러가지로 우리 상황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도구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반대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몸을 지킬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기도 해. 이것만 있다면 여성인 너희들에게도 들짐승이나 이런것에는 대처할 수단을 갖출 수 있게 되는거지. 물론, 싸우라는 뜻은 아니지만. 도망칠 수 있으면 충분히 도망치고. 효율성은 떨어질지는 몰라도 위협을 가하기에는 충분하니까." "들짐승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거의 확실시 하고 말씀하시는거 같은데요." "대비해서 나쁠건 없잖아. 그리고 이 섬에는 내가 만났던 그 정체모를 여자도 있으니까. 그렇지?" "... 뭐. 사실이군요." 무엇이든지 항상 처음이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 문제의 '처음'을 극복하게 된다면, 사람은 그 일에 대해서는 처음보다는 덜 어색한 자세로 임할 수 있다. 지금은 비록 무기를 들고 낯선 무인도라는 환경에 적응하는게 영 믿기지 않을 테지만, 일단 현실을 직시한다면 대비할 수 있을만한 모든 가능성은 최대한 고려하는게 좋은 것이다. "조심해도 나쁠 건 없지. 무엇보다도 안전이 제일이니까." 유아 선배가 이리저리 자신의 목검을 휘두르며 말한다. 아직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지, 평소와 같은 날카로움은 없어 보이지만. 여성들이 커터칼을 가지고 다닌다는 제안은 반대가 없었다. 내가 굳이 커터칼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아무나 빌리면 되는 것이고, 나 혼자서 단독으로 떨어지 지낼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 너는 어떻게 할거니?" 노아 교수님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는다. 한마디로 커터칼도, 목검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내가 들짐승이나 기타 위험이 될만한 동물과 마주쳤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지 묻고싶은 모양이다.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유아 선배가 먼저 피식 웃어보이며 노아 교수님에게 대신 대답하기 시작한다. "교수님. 이 녀석에게는 무기따위는 필요 없어요." "어째서. 그보다도 위험하잖니. 적어도 날카로운 돌 같은 거라도 가지고 있는 편이..." "교수님. 제가 검도부 부장인건 잘 아시죠?" 갑작스런 질문에 노아 교수님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유아 선배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면서 말을 이어간다.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검도부 부장 자리에 오른 것은 검도부 내에서 적어도 저에게 대적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심지어 남자들도 함부로 상대하지 못하죠. 아니, 오히려 저랑 대련하면 제가 이기니까 체면상 덤비지를 못하는 거예요." "정말이니?" "네. 아버지가 도장을 하시거든요. 그래서 어렸을때부터 검도에만 매진한 탓에 검도 대련이라면 누구한테도 지지 않아요." "하지만 그 이야기는..." "그런데, 제가 부장을 역임할때 딱 한 사람한테 패한적이 있어요. 그게 누군지 아세요?" 검도부 부장 이야기를 언급할때부터 알아봤다, 유아 선배는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옛 이야기를 회상하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노아 교수님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잠자코 유아 선배의 말을 말리지 않는다. "바로 저 녀석이에요. 게다가 저 녀석은 맨손이었다구요. 검도부인 주제에 어떻게 목검도 없는 상태에서 절 압도하냐구요. 그래도 나름 목검만 있으면 상대가 누구든지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쇼크였어요." "둘이 싸우기라도 했었니?" "설마요. 신입생 검도부원들의 실력을 테스트하려고 하다가 우연치않게 유에를 본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목했죠. 그랬더니 유에가 하는 말이 뭔지 아세요? '전 아직 신입부원이니까 맨손으로 해도 될까요?' 라는 거예요. 어차피 검도도 배우지도 않았으니 목검을 쥐어줘봤자 사용방법도 모르니 그냥 맨손으로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알았다고 했죠. 그런데 결과는 참패했어요." 아직도 그 억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사실 선배를 속인감도 없지않아 있는 탓에 나는 다시금 사과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그때는 죄송하다고 했잖아요." "그럼 왜 태권도 유단자 주제에 어째서 검도부에 들어온거냐고!" 역시나 또다시 분노가 폭발했다. 사실, 굳이 검도부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는데 태권도 이외의 무술을 배워보는것도 나쁘지 않을거라는 친구들의 회유에 나도 그냥 따라간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치않게 유아 선배의 눈에 띄게되어 대련을 하게 되었고, 도망칠 분위기도 안되서 그냥 맨손으로 한 것이다. 결과는 아까도 말했듯이 유아 선배의 참패. "그리고 이 무인도에 와서도 저와 유에는 숲 안에서 한바탕 싸운적이 있어요. 제가 처음 합류했을때 기억하시죠?" "아, 그때구나." "네.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는데 저 녀석은 제 공격을 다 피하고도 남아서 저를 넘어뜨렸다니까요. 분해요! 정말 분해!" 분노의 최상급 표현을 남발하는 유아 선배의 질책에 아리아와 세리아도 덩달아 나를 원망하는 듯한 눈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왜 이리 여자들한테 미움을 받나 억울함을 표출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유아 선배의 바가지가 더 심해질거 같아서 얌전히 있기로 한다. "그래서 유에에게는 칼따윈 필요 없어요. 주지 마세요. 절대로." "으, 응. 최대한 노력해볼게." ============================ 작품 후기 ============================ 확산성 밀리언 아서라는 게임이 엄청 뜨고 있다고 해서 한번 해봤습니다. 그런데 어렵군요. 카드 일러스트가 저의 덕심을 자극하긴 하지만, 처음이다보니 아직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28화 이렇게 해서 유아 선배를 제외한 여성들에게 커터칼이 지급되었다. 사용방식같은 것들은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일단 유아 선배가 시간이 나는대로 여성진에게 대충 호신용으로 알려주기로 한다. 나도 만약에 칼을 놓친 뒤에 맨손일 경우 호신용으로 몇가지 알려주기로 약조를 받아낸 뒤에 다음 안건을 제시하기로 한다. "식량과 식수문제는 어느정도 안정화가 된 것 같습니다. 이제 치안 문제도 정해졌고 나머지가 문제인데..." "나머지라니요? 이밖에 더 문제가 있나요?" 아리아의 물음이었다. 정말로 모르는 듯한 눈치가 보여서 나는 친절하게 설명해주기로 태도를 바꾼다. "예전에도 언급했던 적이 있잖아. 생존자 수색에 관한 거." 우리 말고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아리아와 세리아의 이야기를 통해 확인되었다. 여기저기 생존자가 아직도 식수와 식량문제로 매일매일 죽음과 싸우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어느정도 생활의 안정을 찾은 우리들이 생존자 수색에 나서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먼저 제안해본 것이다. "생존자 수색이라..." 유아 선배도 저번과 같은 거부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엊그제 벌어진 사소한 논쟁에서 우리들의 생존 여부를 가장 우선시하자는 유아 선배가 별다른 반대를 표명하지 않고 있다는 말은 즉, 우리의 생활이 예전에 비해 나아지고 있다는 소리와도 같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안정감이라는 것 말고 하나가 더 있었다. "엊그제와 같이 장기간 인원을 분산시키는 일은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한거 같아요." 아리아의 태클이었다.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생존자 수색에 찬성하던 아리아가 이번에는 오히려 반대를 표명하는 입장을 보였기 때문에 속으로 적지않게 당황했다. 생존자 수색에 찬성하던 아리아가 반대의 의사를 표시한 덕분에 잠시 고민하던 유아 선배도 아리아의 편에 선다. "그래. 지금 중요한건 외부, 내부의 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일이야.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일단은 우리의 목숨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자." 이번에도 이런 식으로 기각되었다. 대충 예상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른 생존자들에게는 약간은 미안한 감정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의 임시 회의는 종료되었다. 점심식사를 준비하기로 하고 각자 역할분담에 나선 우리들. 식수 담당은 유아 선배와 세리아가 맡기로 하고 숲 안의 호수로 발걸음을 옮긴다. 나는 바닷가에 들어가서 해산물을 건져오고, 나머지 인원들은 불을 지피는 둥 식사준비를 하는데 일손을 투자한다. 바다속에 잠수해서 해산물을 건져올리는 일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사실 난 그다지 수영을 잘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점점 수영실력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인간이란 정말 무서운 적응력을 가지고 있는 생물인 모양이다. 낚시대가 없는 이상 해삼같은 것들만 건져올린게 다지만, 그래도 이것또한 어디랴. 점심과 저녁 두끼를 해결할 수 있을만큼의 먹을거리를 건져올린 후에 모닥불에서 불을 쬐기 시작한다. 날씨가 포근한 지역이라고는 해도, 장시간 물에 있으면 체온이 내려가기 때문에 항상 체온을 따뜻하게 유지하라는 아리아의 충고 덕분이었다. "아으... 죽겠네..." 아직도 배가 아픈지, 연신 앓는 소리를 내며 움막 바깥으로 나온 유아 선배. "또 심해지셨나요?" "뭐... 그렇지." "도대체 어디가 아프시길래 그러나요. 교수님한테는 말해도, 저한테는 비밀인 그런 병명이?" "넌 진짜 눈치도 없구나. 친누나를 가지고 있다는 남자가 그렇게 둔해서야 어떻게 이런 잔혹한 사회에서 살아남을래?" "관계 있는 태클인가요? 그거." "학교 선배이자 인생 선배로서 해주는 말이야. 새겨듣도록 해... 으으..." 유아 선배의 이상현상을 지긋이 바라보던 또 다른 인물, 아리아가 과일 손질을 준비하며 우리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더니 이내. 뭔가 나에게 해줄 말이 있다는 식으로 툭 던진 한 마디. "생리통이잖아요." "으아아아앗?!" 아리아의 한 마디가 유아 선배의 비명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그렇군. 생리통. 이제서야 모든 정황이 납득되기 시작했다. 하긴. 그렇지. 한달 주기로 마법에 걸리는 날이 오게 되면, 자연스레 유아 선배처럼 복통을 호소하면서 신경도 날카로워지니까. 내 친누나의 생리통 때문에 내가 피해를 입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에 여성의 생리기간에 대한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증상을 눈치채는 건 힘들었지만. "애써 숨기고 있었는데! 왜 말한 거야!" 유아 선배가 아리아에게 원망하듯 말해보지만. 냉정하게 대답하는 아리아. "이제와서 숨길 이유가 뭐가 있나요. 어차피 다 성인인데." "그래도..." 여자의 수치심이라고 할까. 시원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인 유아 선배도, 전혀 의외의 면이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저번에는 다리가 5개 이상인 생물은 무조건 싫다면서 내 무릎 위에 앉질 않나. 이번에는 생리통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연기를 하지 않나. 소녀틱하구나. 유아 선배. 물론, 본인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면, 정강이를 까일지도 모르니까 조심해야지. 과일열매를 따온 아리아가 자신의 커터칼로 먹기좋게 자르기 시작한다. 저번에 식사준비를 할때 잠깐 보긴 했지만, 아리아는 요리 실력이 어느정도 있는 녀석인듯 하다. 과일을 깎는 솜씨나 간을 맞추는 능력을 보자면 요리에 전무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요리를 전혀 못할거 같은 캐릭터가 오히려 요리를 잘하다니. 역시 사람은 겉모습으로 평가하면 안됨을 다시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에비해 의외로 노아 교수님은 요리에 대해 상당히 취약한 면을 많이 보여주는 상황이다. 혼자서 자취를 하는것도 아니고, 집안에서 통학을 하는 교수님인지라 혼자서 요리를 하는 적은 별로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도 28살이면 보통 어머니에게 요리를 많이 배우고도 남을만한 나이가 아닌가 태클을 걸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교수님이 울먹울먹 하는 눈으로 노려볼거 같기 때문에 차마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유아 선배와 세리아는 식수 당번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 본래는 생리통 때문에 가급적이면 내가 유아 선배 대신에 세리아와 같이 호수로 왔다갔다 할 생각이었지만. "내 일이니까... 읏?!" 라고 말을 하며 끝까지 자신이 가겠다고 고집을 피운 탓에 어쩔 수 없이 보내주기로 했다. 말 끝마다 고통을 호소하는 신음소리를 첨가하면서, 고집 하나는 정말 황소급이다. "알았어요. 조심해서 갔다 오세요." "세리아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는 표정을 하면서 말하는 유아 선배. 도저히 선배의 고집을 꺾을 방도가 없어서, 마지못해 승낙은 했지만. 그래도 막상 보내놓고 나니, 안심이 안 된다. 이게 바로 예쁘고 귀여운 딸을 가진 아버지의 심정이 아닐까. 이제 막 대학생이 된 딸이 자정이 넘도록 늦은 시간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서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딸의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는 평범한 가정집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 참고로 우리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해봤다. 우리 누나도 노는 문화에 익숙한 여자다보니, 아버지의 속을 애태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덕분에 누나를 데리러 매일 밤 보디가드를 자처하며 나가야 할 내 신세를 생각해보라. 적어도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라고. 날라리 누나야. 여하튼 세리아와 유아 선배를 보내고 난 뒤. 식사준비가 완료. 이제 유아 선배와 세리아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식수를 조달하러 갔으니 물통에 물을 채우기만 하면 될 일. 금방 돌아올거라 생각한 우리들은 기다란 막대기에 먹을거리를 꽂은 다음에 불에 익히기 시작한다. 하지만 도중에 문제가 생겼다. 유아 선배와 세리아의 귀가가 늦어지고 있던 것이다. "늦는거 같지 않니?" 노아 교수님도 그녀들의 귀가가 늦음을 알아챈 모양이다. 하긴, 교수님은 시계를 가지고 있으니 감이 아닌 정확한 수치로 그녀들의 귀가가 늦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한다. 고작 물을 뜨는데 이정도로 시간이 오래 걸린단 말인가? 게다가 유아 선배 혼자도 아니고 세리아도 같이 갔다. 두명이 갔는데 물통 두개를 들고오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갑자기 아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숲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한다. 순간적으로 나도 일어나서 아리아의 손목을 잡는다. "잠깐만. 어디 가는거야." "... 보면 모르세요? 언니한테 가보려는 거잖아요." "그건 나도 아는데 혼자서는 위험해. 여기서 교수님이랑 같이 있어." "하지만 언니가 늦는다고요. 이렇게까지 늦을리가 없잖아요!" 보기 드물게 아리아가 감정을 격하게 표현한다. 자신의 언니에만 관련된 일이라면 아리아의 성격은 불같이 변한다. 언니에 대한 여동생의 과보호일수도 있지만, 지금은 과보호가 아니라 순수하게 걱정을 해도 화를 낼 만한 상황은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리아를 보내는 것도 위험하다. 결국, 지금 상황에서 올바른 판단은 아리아와 교수님을 여기에 두는 일이다. "내가 갔다올게. 그러니까 교수님이랑 여기서 있어." "그치만..." "반드시 찾아올테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 작품 후기 ============================ 혹시나 스마트 폰으로 '확산성 밀리언아서'게임을 하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에로트리체'로 친구 추가를 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초보라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ㅜ_ㅜ 레벨 11이에요; 29화 숨이 턱까지 막힌다. 그러나 달릴 수 밖에 없었다. 나뭇가지들이 잔상처를 선사하는 것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내 정신은 온통 유아 선배와 세리아의 안전에 쏠려있었다. 주머니속에 노아 교수님이 넘겨주신 커터칼이 느껴진다. 본래 칼을 휘두르거나 하는 방식은 그다지 좋게 생각하는 편은 아니지만, 비상시를 대비해서 가지고 가는게 좋을거 같다는 노아 교수님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받아두었다. 노아 교수님과 아리아만을 남겨두고 가는 것도 신경쓰이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평소라면 1시간 걸리는 거리를 달려온 결과 채 30분도 안되서 도착한다. 호수에는 세리아와 유아 선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뜨다 만 물통만이 보일 뿐이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설마 정말로 들짐승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무인도에 머물고 있는 원주민 같은 거?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나는 일단 소리를 질러본다. 과연 내 외침에 대답을 할까. 하지만 다행히도 이런 의문이 들기도 전에 호수의 반대편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건 대답이 아닌, 유아 선배의 비명소리였다. "선배!!"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재빠르게 달려간다. 그리고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목검에 의해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서있는 선배와 뒤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세리아의 모습이었다. 유아 선배의 모습을 발견하고 다가가려는 순간, 유아 선배가 무언가를 두려워하듯이 외친다. "가까이 오지 마!" "선배, 왜 그러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 순간,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 때문에 지면에 몸을 굴린다. 내가 서있던 자리를 스치듯이 지나가는 날카로운 섬광.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로 상반신을 일으켜 다음 공격에 대비한 내 앞에는 생각지도 못한 존재가 서 있었다. 마치 울긋불긋한 단풍과도 같은 천을 뒤집어 쓴 채 가면을 쓰고 나를 바라보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나를 향해 나이프를 겨누고 있었다. 절대로 평범한 녀석은 아니다. 천을 뒤집어 쓴 녀석의 모습은 마치 만화에서 나올법한 유령의 모습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새하얀 가면은 마치 웃는 것 같은 표정이기도 하고, 아니면 무표정이기도 하다. 알록달록한 천과는 대조적으로 오로지 하얀 바탕위에 눈과 입만 그려져있는 가면이 약간은 소름돋을 정도의 공포심을 자아내고 있었다. 뒤에서 힘겹게 서있는 선배와 세리아도 걱정된다. 무인도에 이런 녀석이 있었다니. 들짐승이려니 하고 예상했지만, 요새 들짐승은 도구를 사용하기에는 높은 지능을 보유하고 있는 수준까지 진화하진 않았으리라 절로 생각이 든다. 물론 침팬지 이런 동물이면 가능하겠지만, 그건 털이 복슬복슬한 녀석을 가리킬때 쓰는 말이고.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녀석은 침팬지라고 보기에는 약간, 아니 심하게 무리가 있을만한 체형과 생김새를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명백한 인간인 것이다. 그것도 나이가 꽤나 어려보이는. 유아 선배와 세리아를 노리고 습격한 모양이지만, 유아 선배의 검도실력에 아마도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내가 올때까지 살인을 저지르지 못한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일까. 유아 선배가 세삼 대단하다고 느꼈지만, 선배와는 다르게 상처하나, 아니 심지어 거친 숨조차 내지 않는 녀석의 모습을 보아하니 적어도 유아 선배보다는 실력자인 셈. 유아 선배도 약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유아 선배를 가지고 놀 정도면 나도 초반부터 전력으로 나가야 상대가 될 듯 하다. "세리아! 선배를 데리고 여기서 도망쳐!" "...!" 말을 못하는 세리아가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오히려 여기에 있다가는 인질이 될 가능성이 크기에 나는 계속해서 도망치라고 외친다. 저 녀석 말고 동료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저 녀석은 미끼일지도 모르고, 다른 정체불명의 녀석이 나타난다면 유아 선배와 세리아까지 보호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미리 도망치라고 한 것이다. 내 의도를 안 것인지 유아 선배가 세리아를 설득해서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기 시작한다. 이미 잔상처가 많은 유아 선배의 걸음은 세리아에게 대부분 맡긴 상태이기 때문에 그녀들의 이동속도는 상당히 늦었지만, 내가 정체불명의 존재에게서 도망칠 여유를 주기에는 충분했다. 아무말도 하지 않지만, 유아 선배가 나에게 조심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낸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면서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이곤, 대치중이던 존재를 노려본다. 커터칼과는 다른 엄연한 흉기의 위엄을 자랑하는 나이프가 나를 향해 겨눠진다. 천 사이로 나온 것은 약간은 그을린 피부의 손목. 아까의 빠른 움직임으로 보아 혹시 짐승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해봤지만, 사람의 팔을 보고선 확실하게 저 녀석은 인간이라는 사실이 들었다. 녀석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돌진해온다. 그것도 신발을 신지 않은 상태의 맨발로 말이다. 발이 아프지도 않나 하는 생각을 하지도 못하게 할 만큼의 빠른 돌진능력에 일단 옆으로 살짝 비켜나면서 녀석의 하반신을 공격한다. 유아 선배가 나에게 자주 사용하던 로우킥과 비슷한 모션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도중에 공중으로 박차오르며 순간적으로 내 안면쪽을 향해 발길질을 한다. 도저히 인간의 유연성으로 보기 힘든 몸놀림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팔을 교차시키며 방어를 한다. 빠악! 엄청나게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팔에서 전율이 흐르기 시작한다. 부들부들 떨릴 정도의 강한 타격이 팔의 세포 하나하나를 통해 뇌속까지 뼈저리게 전해진다. 그다지 체격도 커보이지 않는 주제에 공격의 모션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있다. 뒤이어 녀석이 내 복부를 향해 팔꿈치를 날린다. 이대로 방어만 하면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재빨리 뒤로 물러서면서 그대로 돌려차기를 날린다. 허나 내 공격이 느린건지 아니면 녀석이 엄청나게 빠른건지 나의 발길질은 허공만을 가를 뿐이었다. 순간 슬로우 모션처럼 녀석이 내 발길질을 살짝 옆으로 피하며 동시에 녀석의 무릎이 시야에 점점 커짐을 느꼈다. 그대로 안면으로 니킥을 날린 것이다. 이건 피할 수 없을거라 생각하면서 맞을 각오를 하면서까지 몸을 있는 그대로 회전시킨다. 살짝 오른쪽 볼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그대로 바닥으로 넘어진 내 위로 녀석의 발이 내려찍기를 시도한다. 쉴 틈도 없는 공격이다. 최대한 날렵하게 옆으로 몸을 굴리면서 내려찍기를 피한 뒤 반동을 이용해 빠르게 일어나 반격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녀석은 이미 내 시야에서 벗어나 사각지대에서 나이프를 꺼내든 참이었다. 부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인간으로서 과연 이런 소리가 들리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은 '생각'보다는 오로지 모든 움직임의 소리와 살기 하나만 믿고 반응을 보일 뿐이다. 나이프의 번뜩임이 아슬아슬하게 내 앞으로 스쳐 지나간다. 이번이 몇번째일까. 저 나이프의 공격을 있는 그대로 다 맞았다가는 난도질 수준에서 그칠것 같지 않다는 아찔한 생각마저 들었다. 일단 녀석과 거리를 벌린다. 녀석도 잠시간의 대치상황을 깰 생각은 없는지 아니면 공격에 대한 방법을 궁리중인지 나와 같이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나이프로 나를 겨눈 모습을 유지한채 말이다. 속도로는 녀석을 이길 수 없다. 분명 인간이지만, 인간을 초월하는 유연함과 움직임으로 도저히 녀석의 공격 패턴을 예상할 수 없다. 내가 지금까지 저 녀석의 공격을 피한 이유는 오로지 지난 세월동안 도장에서 단련한 '반사신경'만으로 피한 것이지, 저 녀석의 공격을 눈으로 보고 이해하고 패턴을 익힌 뒤에 피한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어디서나 볼 수 없는 움직임에 동물적인 감각. 말 그대로 실전무술이었다. 난파된 여객선 승객 중에서 저 정도로 특이한 옷차림에 움직임도 뛰어난 사람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재빨리 해본다. 결과는 'No!'다. 내가 아는 한, 저 정도의 실력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정식 무술도 아니고 실전용이란. 특수부대도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오류는 저 정도의 아담한 체구가 대학생일리가 없지 않는가. 기껏해야 초등학생 수준으로 보이는데. 숨을 고르게 내쉰다. 이로써 알아낸 것은 저 녀석이 난파선에서 표류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뿐이다. 그렇다면 혹시나 저번에 생각했던 '원시부족'의 존재 여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까? 정말 이 섬은 무인도인가? 아니면 원시부족이 살고 있는 장소이기도 한 것일까. 하지만 섣불리 예상할 수는 없다. 그 당시 배에는 우리 학교 학생들이 대부분 타고 있었지만, 선원이나 선장 등 일부 예외적인 인물들도 있다고 고려해보면, 그 예외적인 인물 중 하나일 확률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 녀석이 들고있는 나이프는 일반적으로 과일용 칼이 아닌 군용 나이프다. 명백히 살인을 목적으로 만든 흉기인 것이다. 원시부족이라면 저런 나이프를 들고 있을리가 없지 않는가. 예전에 티비에서 탐험 프로그램 같은 걸 보면 현대식 나이프를 들고 다니는 원시부족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돌칼이라면 인정하겠지만. 아무튼, 그렇다면 적어도 학생은 아닐 터. 아마도 난파된 생조자라 생각하면 선원쪽이 아닐까 한다. 녀석이 다시한번 달려들때를 기다린다. 어차피 스피드에서는 내가 앞설 수 없고, 반격을 노릴 뿐이다. 녀석도 내가 자신의 공격을 모조리 피한것이 약간은 당황스러운 것인지 나를 경계하는 태도가 더욱 삼엄해졌다. 한동안 우리의 대치상황은 오래가기 시작한다. 내가 시간을 벌면 벌수록, 세리아와 유아 선배가 안전하게 베이스 캠프까지 도달할 확률이 높다. 일단 이 녀석의 발을 잡아두는 것이 컸다. 하지만 의외의 상황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 아니, 휘파람인지 고동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중요한건 소리가 아니라 소리로 인한 녀석의 '반응'이었다. 갑자기 경계태새를 푼 녀석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본 채 나지막하게 말한다. "Sister..." 영어. 분명히 영어다. 게다가 목소리는 여성. 이로써 녀석은 원시부족이라는 미지의 존재가 아님이 밝혀졌다. 하지만 어째서 미국인이 여기에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전에, 녀석은 가면을 통해 나를 한번 노려보는 듯 하더니 이내 빠르게 모습을 감춘다. 원시부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정확한 영어발음. 게다가 목소리는 분명 여성이었다. 적어도 12세 이상. 성인 여성의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그리고 체구가 나보다 작다는 것으로 친다면 적어도 노아 교수님 만큼의 성숙한 여성은 아닐거라 생각한다. 물론, 노아 교수님도 나보다 작기는 하지만, 미국인들은 대부분 키가 크다고 하지 않는가. 녀석의 체구는 아리아와도 비슷하다고 봤을때, 대충 연령만을 예상할 뿐이다. 하지만 그녀가 말한 '시스터'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혹시 휘파람을 분 사람의 정체를 말하는 것일까? 개인이 아닌 집단? 역시 원시부족의 가능성? 모든게 의문 투성이었다. ============================ 작품 후기 ============================ 표류일지의 아이돌이 등장했습니다. 귀요미하군요. ㅤㅎㅏㅋㅤㅎㅏㅋㅤㅎㅏㅋ. 그리고 오늘 친구 생일이라고 개인당 29800원짜리 뷔페를 얻어먹고 왔습니다. 가격이 ㅎㄷㄷ합니다;; 3만원 어치 뽕을 뽑아야 하는 중대한 임무를 받고서 먹엇지만, 배가 너무 불렀습니다 ㅡ_ㅡ;; 3접시가 한계라고요! 30화 베이스 캠프로 돌아왔을때, 유아 선배는 아리아에게서 상처를 치료받고 있었다. 끓는 물에 상처를 소독하고, 깨끗한 나뭇잎으로 상처를 감싸는 둥 응급처치를 확실하게 하는 모양이다. "유에! 무사했구나." 노아 교수님이 나를 발견하더니 와락 끌어안는다. 갑작스래 창피해진 내가 어색하게 웃어보이면서 노아 교수님에게 조용히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한다. 유아 선배도 오늘만큼은 나를 걱정하고 있었는지 내 모습을 확인하더니 편하게 미소짓는다. 세리아 역시도 약간은 후유증이 남아있긴 하지만 괜찮은 모양이다. 어찌저찌 해서 난 그 녀석으로부터 모두를 지켜낼 수 있었다는 상황에 감사할 뿐이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그녀의 정체가 궁금할 뿐이다. 실전무술을 익힌 낯선 여성. 그리고 휘파람 소리. 그 모든것이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로 가득할 뿐이다. 아리아의 응급처치를 받은 유아 선배는 당분간 움막에서 쉬기로 결정을 내린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가벼운 상처라면서 그 제안을 거절했지만, 그 원시부족으로 보이는 소녀의 단검에 독이 묻혀져 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당분간 상황을 봐야 한다는 것이 아리아의 결론이었다. 그래서 지금 유아 선배는 움막 안에서 세리아의 간병과 함께 낮잠을 취하고 있는 중이다. 노아 교수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는 아리아에게 다가가서 묻는다. "저기, 유아 선배는 어떤거 같아." "선배도 아시잖아요. 아직까지는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 없어요. 독이 묻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있지만, 당장 붓기가 부어오르거나 하는 증상이 보이지 않는것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독'에 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거 같아요." "그럼 그 '독'에 관한 소재는 유아 선배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과장되게 표현한 것이겠구나." "... 그럴지도 모르죠."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관하며 고개를 돌리는 아리아. 솔직하지 못한 녀석이다. "하지만 생존자의 존재보다도 그 여자의 정체가 더 궁금하긴 하네요. 평범한 생존자... 로는 보이지 않으셨죠?" "그래.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디서 구했을지 모르는 흰 가면과 울긋불긋한 천을 뒤짚어 쓰고 나이프를 든 채 사람을 습격하지는 않았겠지." "그럼 그 여자의 정체는 뭐죠?" "나도 모르겠어. 일단은 혹시나 우리가 무인도라고 생각했던 이 섬에 사실은 토착민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도 해봤지만, 분명 여성은 '영어'를 사용했어. 그것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발음으로." "사소한 요소인데 주의깊게 잘 관찰하셨네요." "그때는 세포 하나하나의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였거든. 자칫 잘못하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사의 갈림길에서는 어찌보면 당연한 상태야." "좋아요. 그건 넘어가도록 하죠. 그럼 또다른 문제는..." 아리아가 타다 남은 장작을 이리저리 뒤적이면서 말을 잇는다. "그 시스터라고 불린 정체불명의 인물에 대해서 말인데요." 사실 우리를 습격했던 여성보다도 휘파람 비스무리한 소리로 그 여성을 부른 정체불명의 인물이 더 문제일지도 모른다. 여성의 행동으로 보아서는 그 인물을 무척 따르는 것 같은데. 그리고 '시스터'라는 것은 일단 그 정체불명의 인물의 성별은 '여성'이라는 소리이다. 그럼 그 여성은 말 그대로 우리를 습격한 여자와 자매관계인 것일까? 시스터라는 단어의 용례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는 한참을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노아 교수님이 오시면 물어봐야 하나. "적어도 이번 일에 있어서 알아낸 확실한 사실들은 생존자들을 위협하는 '인물', 즉 정체불명의 적이 있다는 것과 그 적의 '동료'가 있다는 사실이야." "이 무인도라는 장소, 점점 위험한 곳이 되어가는군요." "아마도 그 여성은 왠지 모르지만 우리들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는거 같아. 그렇지 않다면 아무런 이유없이 우리에게 칼을 들이내밀리 없잖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경써야 할 점은 그 여성이 선보인 몸놀림이야. 그건 보통 인물이 소화하기에는 힘든 실력이었어. 나름 나도 무술면에 있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녀석과 대전할 당시에는 나조차도 승패를 예상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여자이면서도 선배를 몰아붙일 정도라면 굉장한 실력이군요." "상대방은 나이프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어찌보면 내가 소극적으로 한 감도 있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리아와 유아 선배가 도망칠 시간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상대방을 무리하게 제압할 생각보다는 오래 버틸 생각부터 했으니까." 처음부터 여자를 쓰러뜨릴 생각으로 덤볐다면 또 어찌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 당시 나에게는 세리아와 유아 선배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싸움을 하지 못한 것이다. 변명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난 그렇게 말하고 싶다. "좋아요. 일단 미지의 적에 대해서는 넘어가죠. 중요한건 유아 선배의 '회복'이에요." "회복이라니. 방금 네가 경상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거야 신체상으로는 경상이죠. 하지만 미지의 적에게 습격당한 유아 선배의 '심적 상태'는 과연 경상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요?" "......" "게다가 유아 선배는 생리 기간이에요.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만한 사건과 조우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많이 피로해지겠죠. 무인도에서 살아야 한다는 상황 하나만으로도 피곤한데, 미지의 적까지 나타나면 더더욱 불안해하는 게 일반인의 생각 아닌가요." "... 네 말이 맞아." 아리아의 눈이 나를 지긋이 바라보기 시작한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지만, 나에게 마치 유아 선배의 문제를 맡기려는 듯한 그런 부탁의 의미가 내포된 눈빛이었다. 자리를 털며 일어선 아리아가 노아 교수님에게 다가가려는 듯이 발걸음을 옮기기 직전에, 나를 향해 뒤돌아보며 말한다. "이럴때는 선배가 먼저 위로해주는 것도 좋을거 같아요." "위로란 말이지..." "선배가 유아 선배의 버팀목이 되어주셔야, 나중에 또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에 안심할 수 있을 거예요."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선배는 우리들의 기둥이자, 기둥이자, 기둥이자, 고기 기둥이라고요." "잠깐만. 그 '고기 기둥'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도대체 뭐냐?!" "글쎄요. 숫처녀인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거짓말 하지 마!!!" 저 녀석. 일부러다. 일부러 저런 외설적인 단어를 모른 척 하면서 내뱉었다고. "아무튼." 말을 자른 아리아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한다. "선배가 잘 위로해보세요." "최대한 노력해볼게." "원래 겉으론 강해보이는 타입이, 오히려 속은 연약한 법이니까요. 그 점을 미리 알아둔다면, 나중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후배 주제에 인생 선배같은 말을 하는구나." "누가 오래 살았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누가 많은 경험을 했느냐가 더 중요하죠." "알았어, 알았어. 경험이 풍부한 후배님." "그리고 선배가 유아 선배에게 괜한 말실수를 해서 오히려 피해를 입히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유아 선배는 그저 선배가 곁에 있어주는 것 하나만으로도 크나큰 위로가 될 테니까요." "무슨 근거로?" "여자의 감이에요." "참으로 과학적인 근거구나." "과학을 뛰어넘은 초월적 근거라고 하죠." 그러고선 종종걸음으로 나에게서 멀어진다. 역시 아리아는 솔직하지 못한 녀석이다. ============================ 작품 후기 ============================ 원고료 쿠폰을 주신 분들의 닉네임이 옆에 표기되는 그런 기능이 추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익명으로 되어있다보니, 감사를 표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습니다. 조아라 측에서 이런 건 안 해줄지 모르겠습니다. 쿠폰을 주셨음에도 일일히 감사의 표시를 하지 못하는 저를 원망해주시기 바랍니다 ㅜ_ㅜ 그리고 전편에 올려주셨던 코멘트 중에서 신 캐릭터 등장인물에 대해 올려주신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해당 편수에도 답변을 달아드렸지만, 일단 대충 2~3명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글이 다 쓰여지지 않아서 '예상'만 하고 있습니다. ^_^; 31화 아리아와 노아 교수님, 그리고 세리아는 식수를 떠오기 위해 호수로 향했다.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했던 유아 선배의 부재로 식수를 뜨러 가는 간단한 일에도 3명이 몰려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아리아가 나에게 했던 말을 유추해보면, 아마도 일부러 자리를 비켜준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선배를 위로해주라는 뜻은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겠지만, 대략적으로 아리아가 내게 부탁한 의미에 대해서는 나도 얼추 알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이렇게 유아 선배에게 발걸음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움막 안으로 들어가자, 누워있던 유아 선배가 상반신을 일으키며 나를 반긴다. 약간은 힘이 없는 미소. 언제나 무인도에서도 활기참과 발랄함을 잃지 않았던 선배의 시무룩한 표정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무슨 일이니? 유에." "잠시 옆에 앉아도 되나요?" "응. 상관 없는데..." 유아 선배의 옆에 털썩 하고 주저앉는다. 선배의 갸냘픈 어깨가 내 시야를 통해 비춰진다. 선배가 이렇게 연약한 사람이었나. 가느다란 팔로 모두를 지켜야 한다는 무게감을 담은 목검을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른 인물이다. 유아 선배라는 존재는. "꼴 사납네. 내가 제대로 세리아를 지켜줬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텐데." "상대가 나빴을 뿐이에요. 선배는 충분히 잘 싸워주셨어요." "하지만 결국 이 모양 이 꼴이야. 정말 창피해." 무릎을 감싸안은 채 선배가 얼굴을 묻는다. 프라이드가 높은 선배로서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그렇게 비참하게 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마 타격이 컸을 것이다. 육체적인 상처가 아니라 바로 심적인 상태가 문제인 것이다. 아리아는 그렇게 나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천천히 선배의 어깨를 한 팔로 감싸안아본다. 잠깐 움찔했던 선배가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피식 웃어보인다. "위로해주는거야?" "아니요." "그럼 이건 무슨 의도지?" 가급적이면 선배가 동정심을 받는다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나는 싱긋 웃어보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선배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의지할 수 있는 존재에요. 그렇게 쉽게 무너질리가 없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라고. 그거." "저도 아리아에게 그런 말을 들었어요. 아무것도 아닌데, 너무 평가를 후하게 주는 거 아니냐고." 생각을 달리 잡아봤다. 어찌보면 사탕발림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부 덩어리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실제로 대단한 일을 해내고 있는 거예요. 선배." "... 어떤 면이?" "난파선에서 살아남아 무인도에 표류되어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일 자체가 기적이잖아요." "그야 그렇긴 하지만..." "그러니까 우리들은 충분히 과대평가 받아도 돼요.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까." "... 그러게." 유아 선배가 피식 웃는다. 조금은 기운을 차렸으려나. "생리는 좀 어때요?" "괜찮긴 한데..." 약간 뾰로퉁한 얼굴로 나를 째려보며 말한다. "여성에게 수치심이 가득 담긴 단어를 발설하다니." "......" 이것도 매너 위반인가. 모처럼 좋은 분위기를 다 망쳐버린 듯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뭐, 오늘따라 듣기 좋은 말을 마구 해주는 카사노바에게 좋은 선물을 해주고 싶지만." "저요?" "그래. 너. 나와 동침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는데." 엄청난 상품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다! 유아 선배와 몸을 섞을 수 있는 기회라니?! ... 하지만. "그림의 떡이잖아요. 그거." "눈치 챘어?" 유아 선배가 가녀린 손으로 '브이(v)'자를 만들어 보이며 귀엽게 윙크한다. 가뜩이나 몸도 좋지 않은 선배에게, 내가 성적인 행위를 강요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아마 유아 선배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아 선배가 내 곁에 오더니. 쪽. 그대로 내 볼 위에 부드러운 입술을 대면서 뽀뽀라는 행위를 선사해준다. "구해줘서 고마워. 백마 탄 왕자님." "하하..." 본의아니게, 동화속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마치 일부러 맞춰 온 듯한 환상적인 타이밍으로 노아 교수님 일행이 도착한다.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생활하는 우리를 보면서 노아 교수님와 아리아는 뭔가 의심쩍은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지만, 유아 선배는 다시 잠을 청할 뿐이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식수를 정리할 뿐이다. 유아 선배답지 않은 부끄러운 대사를 잘도 읊은 뒤에 편안히 휴식을 취하다니. 은근히 유아 선배도 뻔뻔스러움이 존재하는 여자다. 노아 교수님이라는 여자를 놔두고 유아 선배와 연인같은 스킨십을 했다는 것 때문에 본의 아니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와중에, 확인사살 전문가인 아리아가 나에게 조용히 귓속말로 말을 건다. "조만간 아이를 볼 수 있나요?" "참으로 무지하게 위험한 발언을 해주는구나. 후배 양. 그것보다도 네가 생각하고 있는 음란한 행동같은 건 안 했다고." "거짓말도 참으로 서투르시네요." "너의 두뇌 구조는 내가 하는 말이 자동으로 모두 거짓말이라는 항목에 포함되게끔 설정되어 있는 거 아니냐." "그럼 저에게 있어서 유아 선배와 선배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어떤 관계가 되는거죠?"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 하지 말라니까." 이 녀석은 묘하게 날 놀려먹는 재미를 느끼는 듯한 행동을 보여준다. 나의 짜증내는 모습을 여유롭게 웃음으로 무마시키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열이 뻗히지만, 유아 선배의 앞에서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모른채 한다. 할 말을 마친 아리아와 세리아가 움막 안에 위치하며 자리를 잡은 채 떠온 물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노아 교수님도 하려는 말이 있듯이 아리아가 빠진 틈을 타서 나에게 다가온다. "임신은 절대로 안되는거 알지?" "교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충분히 조심... 이 아니라. 어째서 교수님도 음란마귀, 아리아와 똑같은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아무런 일도 없었다니까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리아와 어쩜 이리도 같은 생각을 하며 우려섞인 말을 하는 것일까. 설마 이것도 여자의 감? 무슨 국방부 레이더 수준으로 탐색 능력이 이리도 좋단 말인가. 물론 실제로 레이더 탐지기가 가지고 있는 탐색 능력의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치지만. 내 반응을 보고 안심했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보이는 노아 교수님이 살짝 윙크하며 말한다. "아무튼 다행이야." "어떤 점이요?" "여러가지 의미로." "여러가지 의미...?" 의미모를 말을 하는 교수님. 그러자 살짝 얼굴을 붉히며, 아리아나 유아 선배, 그리고 세리아에게 들리지 않게끔 교태 섞인 목소리로 살짝 내 팔을 친다. "질투하고 있다고... 나 지금..." "그럼 당장 저와 같이 불타는 밤을..." "바보야. 그런 뜻이 아니잖니." "지금이라도 교수님같은 여성분이라면 전 얼마든지 상대해드릴 수 있죠." "...그거 성희롱이야. 그리고 난 유아에게 혼나고 싶지 않거든." 노아 교수님이 오른손을 살랑살랑 흔들어보이며 자리를 뜬다. 보아하니 아리아와 노아 교수님은 이미 눈치를 챈 모양. 반대로 세상물정 모르는 세리아만이 큰 눈을 깜빡이며 무슨 이야기를 하는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역시나 순수의 대명사. 아리아와는 다르게 세리아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치다. 이렇게 또다시 저녁이 찾아온다. 유아 선배의 부상으로 한동안 불침번은 2명이서 2개조로 돌아가기로 한다. 습격자까지 나타난 상황이고, 현재 우리들의 지위가 꽤나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무리하게 유아 선배에게 불침번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유아 선배의 회복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점에서, 생존자 구조같은 외부적인 활동은 극히 자제하고 정체불명의 인물에 대한 공격에 대비해 지금은 방어를 최우선으로 하자는 잠정적인 결론이 내려진다. 아무튼 시간이 또다시 멈추지 않는 강물처럼 흐르고 나서 내와 아리아가 불침번을 서게 되는 시간이 다가온 이 시점. 나와 한 조를 이루게 된 아리아는 타오로는 모닥불을 이리저리 나뭇가지로 쑤시면서 곤히 잠이 든 여성진들을 바라본다. 자신의 언니뿐만 아니라 노아 교수님, 그리고 유아 선배까지 티격태격 하는 사이에 그만큼 정이 든 모양이다. "걱정되나 보네." "걱정은 안들지만요." "그럼 왜 자꾸 움막쪽을 바라보는데." "불침번의 역할이에요, 선배." 역시나 깐깐하고 솔직하지 못한 녀석이다. 한동안 아리아의 은발이 타오르는 모닥불의 불빛에 반짝인다.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던 탓인지는 몰라도 아리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원래 그다지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닌 그녀지만, 오늘따라 더욱 말이 없는 듯 하다. 아니지. 말이 없었던게 아니라 오늘따라 유난히 말이 많았고 장난끼도 많이 발동되었지. 평소의 이미지와 자주 오버랩 되다보니 나도 모르게 착각하고 말았다. 혼자서 쓸모없는 생각을 하는 나의 태도를 눈치챈 것인지, 아리아의 입이 드디어 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뭐가?" "선배와 유아 선배의 첫 섹스 말이에요." "안 했다니까?!" 순간적으로 마시던 물을 뿜을 뻔 했다. 이 녀석,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멋대로 남의 관계까지 날조하다니. "그렇게도 할 말이 없었냐?" "아니요. 이거 제 솔직한 심정이에요." "솔직한 심정?" "유아 선배는 유에 선배에게 관심이 있어요. 본인도 아시죠?" "......"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다. 한 쪽에는 노아 교수님. 그리고 다른 쪽에는 유아 선배. 무인도라는 한정적인 장소만 아니더라도, 사회에서 충분히 인기 있을법한 여자를 한 명도 아닌 2명이나 독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도 어느정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더불어 말하자면, 부담감도. "만약에 이 무인도에 남자라고는 선배밖에 없다면, 저도 조금은 생각을 달리 해볼까 고민중이에요." "내가 불안해 할 만한 생각이냐? 그거." "아니요." "다행이네." "유에 선배와 제가 직접 육체적인 관계를 맺어보는 것도 어떨까 하는 아주 가벼운 생각이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너!! 지금 나보고 걱정 한 번 해보라는 심산으로 그러는 거지?!" "전 진심인데요." "말도 좀 가려서 하라고. 심장에 무리가 갈 정도는 좀 자제해." "선배는 진짜 제 말을 믿지 못하는군요." "이봐, 진정하라고. 나보다는 차라리 무인도를 탈출해서 마음이 통하는 다른 남자랑 하는게 좋잖아. 그렇지?" "정말 우리가 탈출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나요?" 갑작스런 아리아의 정색. 그녀의 물음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는다. "선배는 이 무인도에서 우리들이 모두, 무사히 구조될 확률이 몇 퍼센트라고 생각하시나요?" "... 글쎄." 정말 우리는 이 섬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아리아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스스로 의심이 가기 시작한다. 확신하진 못한다. 탈출할 수 있다는 점도, 그리고 우리들이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점도.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지금을 기준으로 지나온 과거들을 기억 할 순 있지만,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알 수 없다. 미래란 단어는 인간에게 있어서 영원히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기도 하니까. ============================ 작품 후기 ============================ 정말 좋은 문구가 떠올랐는데, 이번 편수에 집어넣을 수 없었습니다 ㅡ_ㅜ아까워라... PS. 질문해주신 코멘트에 대한 답변은 해당 편수에 달아드렸습니다. 32화 "무인도에서 탈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상황에서 미지의 적까지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과연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 "그래요. 어느정도 희망은 가지고 있죠.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전에, 적어도 죽기전에 해보고 싶은 것은 하고 싶은게 인간의 욕망이잖아요." "... 그래서 지금 이게 너의 대답이구나." "선배에게 반하게 된 건 사실이에요. 이렇게 낯선 환경에서 우리들을 지켜줄 수 있는 우두머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카리스마도 가지고 있죠. 믿음직한 남성의 모습에 여성은 반하게 되어 있어요. 생물학적인 유전이죠. 강한 수컷을 따르는 암컷들. 그것이야말로 자연의 섭리이자 법칙." "......" "그리고 저 역시도, 생물학적으로는 여성이니까요." 아리아의 손이 점점 상의의 와이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한다. 아리아의 부드러운 허벅지를 내 사타구니 안으로 넣으면서 자극적인 촉감이 성욕을 자아내고 있었다. "어때요, 선배. 지금이라면 저, 선배에게 모든걸 줄 수 있는 기분인데요." 말수도 그다지 없고 무뚝뚝한 녀석인지라 솔직히 무인도에 표류된 일에 대해 이렇게까지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아리아가 우리와 같이 살고자 하는 방도를 찾기 위해 보여줬던 행동들은 다 꾸며낸 것들이란 말인가. 사실 이 소녀는 어렴풋이 자신들이 구조되지 못할 것을 짐작이라도 하고서 애초에 마음속으로는 구조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지 오래인 것일까. 그리고 자신만 희망을 포기하고 있을 뿐이지 자신의 주변 사람들은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도 모르게 아리아라는 녀석에 대한 고지식함에 약간의 화가 느껴지고 있었다. 어째서 벌써부터 희망의 끈을 놓아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는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만 아리아는 낯선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여리디 여린 여대생일 뿐이다. 그런 이유 하나만으로도 아리아가 가지고 있는 마인드에 대해서 공감이 전혀 안되는 바도 아니다. 하지만. "아리아. 내가 널 과대평가했던 모양이야." 라고 말하면서, 그녀의 얼굴에 뺨을 때린다. 오른쪽 손바닥에 느껴지는 따스한 감촉. 그리고, 아리아가 자신이 나에게 뺨을 맞았다는 인지조차 하지 못했는지, 맞고 나서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화 조차도 내지 않으면서. "마음 여린 교수님도, 심적이나 육체적인 면으로도 아파하고 있는 유아 선배도, 그리고 네가 그토록 보호하고 싶어 하는 세리아도, 모두가 무인도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서 살아가고 있어.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어 보이던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 "실망했다. 아리아.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여자였냐?" "... 그래서 어쩌라고요." 아리아가 두 손을 꽉 쥔다. 지긋이 다문 입.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하는 그녀의 몸동작에 따라, 긴 은발 또한 살며시 공중에 너풀거린다. "불확실한 미래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건 모든 인간들의 공통적인 반응이잖아요! 언제 구출될지 모르고, 심지어 구출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냉정하게 이성을 차리고 있으란 말인가요?!" "적어도 너처럼 절망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보다, 희미하게 보이는 희망을 올려다보며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값어치가 있잖아!" "선배는 정말 바보군요! 그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거의 없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0 퍼센트라는 불가능은 아니야!" 나도 아리아와 맞대응하며 소리친다. 움막 안에 잠들어있을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기에는, 내 감정을 억누를 수 있는 자제력이 거의 바닥에 가깝기 때문에 힘든 일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섬에서 나갈 거야. 그러니까 아리아. 너는 닥치고 내가 하는 말에 따르면 돼." "......" "절망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다. 살아만 있어도 좋으니까." "......" "그거 하나만으로도, 내게 있어선 충분해." 살아만 있으면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떠한 일들이 벌어져도. 죽지 않고 내 눈 앞에서 무사한 모습을 보일 수만 있다면. 나는 아리아 뿐만 아니라 지금 움막에서 자고 있는 다른 일행들에게도 어떠한 욕심을 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분위기가 슬슬 진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아리아의 뺨을 때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내가 무심코 사과를 한다. "미안." "사과하지 않으셔도 되요. 이번에는 명백히 제가 잘못했으니까요."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않아도 돼." "아니요. 정신을 차려야 할 제가 약한 말을 한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었어요. 그러니까 용서해주세요. 유에 선배." "용서라고 할 것 까지는 없지만." 순순히 사과를 하는 아리아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렇지. 이게 바로 아리아다운 모습이다. "선배에게 어떤 식으로 은혜를 갚아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은혜라니. 그런 거창한 건 아니잖아." "어쩔 수 없죠. 여자로서 남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 '몸'을 바칠게요." "바치지 마!! 바치지 말라고?!" "제가 싫으신가요, 유에 선배? 실망이군요." "도대체 네가 왜 실망을 하는 거냐!" "선배는 저 같은 미인의 용기를 무심하게 걷어 차버리는 카사노바 같은 녀석이군요. 바람둥이. 희대의 발정남." "은근슬쩍 내 욕으로 몰아가려 하지 마라." "아니면 더 이상 성욕을 느낄 수 없는 불구가 된 것인가요? 이름하여 고자?" "난 육체적으로도 멀쩡한 남자라니까!" "그럼 제 몸을 통해서 직접 확인해보셔도 좋아요." "전혀 좋지 않아. 전혀!" 평상시의 아리아로 돌아온 모양인가 보다. 이래야 내가 알던 건방진 후배, 아리아답지. 놀림 당하는 내 입장에서 보자면 조금 괴로운 상황이 아닐까 싶지만, 그래도 무인도에서 살 의욕을 잃고 지내는 것 보다는 백배, 아니 수천배는 훨씬 나은 편이라 말하고 싶다. 불침번 교대 직전에. 잠시 화장실을 들리기 위해 숲으로 향하던 내게, 의외의 손님이 찾아오게 되었다. "좋은 말이었어." "너는...?" 낯선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자, 얼마 전에 만났던 그 수수께끼의 여성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번뜩이는 나이프의 모습도 여전. "여기가 너희들의 베이스 캠프였나. 찾기 쉽군." "그야 뭐..." 이 여자를 만났던 장소는 우리가 머물고 있는 베이스 캠프에서 정확히 최소 반나절 이상은 걸어가야 도착할 수 있는 장소였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아무리 우리쪽이 공개된 해안가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쉽게 찾긴 쉽지 않을 터인데. 거리상의 문제도 있고. 설마 나와 아리아가 이 쪽으로 돌아올 때 미행을 했다는 의미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녀석에게 다른 생존자와 접해봤자, 전혀 득이 될 것으로 보이진 않는데.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해하는 표정이군. 남자."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당연하잖아." 긴장된 표정으로 녀석의 말에 대답을 한다. 나는 흉기를 지니고 있지 않다. 반면, 녀석은 나이프라는 총 다음으로 위험한 수단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여성이라고 하지만,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저지른 녀석에게 성별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터. 여성의 근력이 남성에 비해 부족하다고 하지만, 흉기를 지니게 되면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차별적 요소다. "너무 그렇게 겁 먹지 않아도 돼. 남자. 나는 너희들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온 게 아니니까." 냉정하고 차가운 얼음장 같은 특유의 시선이 나에게 쏘아진다. 말은 이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완화시켜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표정과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다. 조금이라도 내가 이상징후를 보이는 순간, 녀석은 아마도 나에게 칼을 들고 곧장 달려들 것이다. 내 직감이 그렇게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녀석은 무인도에 서식하고 있을 야생 동물들 보다도 훨씬 무서운 존재. 위험대상 넘버 원이 우리들의 베이스 캠프를 알아냈다는 의미는, 나름 심각한 쪽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일단, 찾아온 목적부터 듣는 게 최우선. 만약 정말로 위해를 가하려 온 게 아니라면,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녀석도 약간 싸이코 기질이 있어 보이는 미친 여자라곤 하지만, 무인도에서 표류된 생존자 중 한 명. 사회에서 생활할 때와 다르게, 어려움을 겪고 있을 부분이 한 두 개가 아닐 것이다. 생존자와 생존자의 교류를 노리는 건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교섭이 시작되려고 한다. ============================ 작품 후기 ============================ 아... 확밀아 친구가 꽉 찼습니다 ㅡ_ㅡ;; 트위터와 인터넷 소설 후기란에 나름 적극적인 홍보(?) 덕분인지 몰라도. 꽉 차버린 친구창을 바라보니 제 마음도 두근두근세근네근, 늘어난 능력치 때문에 두근두근세근네근 거리는군요. 하지만 좋은 카드가 없어요 ㅡ_ㅜ 그리고 코멘트를 쭉 보면, 제가 미필자라고 거의 확신시되는 댓글이 많이 보입니다만... ... 죄송합니다. 155mm 견인 곡사포 포병 출신입니다. ㅜ_ㅜ 실망시켜드려서 다시 한 번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현역 만기 제대한 제가 죽일 놈입니다 ㅜ_ㅜ 독자 여러분들에게 미필자 코스프레이어처럼 보이게 한 제 부족한 글 탓입니다 ㅜ_ㅜ 33화 "이봐." 양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녀석에게 적대적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외부적으로 표출해본다.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성의라는 게 있잖아. 속으로 혼자 생각하는 것 보다, 이렇게 외형으로 표시를 해주는 편이 더 효과가 있을 것 같아서 시도해본 수단이다.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나이프를 손에서 놓지 않고 여전히 나를 경계하는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타인과의 교류를 절대로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 ... 무서운 여자다. "묻고 싶은 말이 몇 개 있는데." "내가 대답해줄거라 생각하나?" "정보 공유 정도는 별로 크게 신경쓸 게 아니잖아." "좋아. 들어보도록 하지." 여자가 고압적인 태도로 코웃음을 치며 질문 발의권을 허락해준다. 태도가 조금 짜증나긴 하지만, 그래도 현재 내가 알고 싶은 사실이 있기 때문에 일단 녀석에게 저자세로 나가는 수 밖에 없다. 자존심보다 중요한 건 바로 목숨이니까. "오늘, 우리들을 습격했던 괴인이 있었어." "괴인? 사람이란 뜻인가?" "그래. 12세 정도로 추정되는 여자아이." "여자아이가 너희들을 습격했다고?" "믿기지 않겠지만, 그 녀석의 몸놀림은 엄청났어. 인간 사회에서 볼 수 없는... 뭐라고 할까 야생적인 그런 느낌이 강했으니까." 하지만 방금 저 여자의 반응으로 인해 깨달은 사실이 있다. 처음 듣는다는 듯한 말투로 반응을 보였다는 말은. 즉, 녀석은 우리들을 습격한 녀석과 만난 적이 없다는 뜻이다. 아니,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고 해석하는 편이 가장 정확하리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이런 내 예상이 너무나도 잘 맞아 떨어지는 대사가 녀석의 입을 통해 들려온다. "네가 나에게 묻고 싶은 건 그게 전부? 미안하게도 나는 너희들을 습격했단 괴인의 정보도, 그리고 사실 유무 조차도 알지 못해." "나도 알아. 방금 네 반응으로 충분히 알았으니까." "성인 남자인 네가 당해내질 못할 정도라면 꽤나 버거운 녀석임에는 틀림 없는 사실이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오히려 여자는 나이프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며, 덤빌테면 덤벼보라는 식으로의 오기를 발동시킨다. 저 여자는 배가 난파되었을 당시에, 인간으로서 중요한 감정 한 가지를 같이 버리고 이 섬에 표류된 것 같이 느껴진다. 두려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외부적인 요소에 의해 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식수 부족의 두려움 등 인간이라면 분명 가져야 할 공포라는 것을 전혀 표출하지 않는다. ... 그렇기에 나는 개인적으로 저 녀석이 가장 두려운 것이다. 무서움이 없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잔혹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습격자가 나에게 덤벼든다면." 여자가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딱 잘라 말한다. "죽이면 되니까." "......" "좋은 정보 고맙군. 그 보답으로, 네가 알고 싶어하는 거 하나 정도는 말해주도록 하지." 긴 머리카락이 숲 안 쪽까지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휘날린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외모.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것들 보다도 더 잔혹하고, 차갑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예신" "... 이름이냐." "네가 알고 싶어하는 나의 이름. 기억해두길." 이라고 말을 하면서 숲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이예신이라. "... 이름은 참 예쁜 녀석인데." 성격은 참 더럽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시 생각에 잠긴 나. 해안가에 큰 바위 위에 걸터 앉은 채, 백사장의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머릿속을 정리해본다. 원시부족들이 사용할 법한 가면을 쓰고 등장한 소녀. 그리고 미치광이 이예신. 소녀의 정체는 둘째치고, 예신이라는 여자도 문제다. 과연 정말로 혼자 무인도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 표류된 이후로 다른 생존자들과 집단을 형성하며 살고 있는 것인지 조차도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 집단으로 들어오라고 제안하기엔 너무 위험한 녀석이다. 물론 본인이 들어오겠다는 말도 안 하겠지만. 골치 아프구만. 무인도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도 잘 안 잡힌다. 가뜩이나 먹을 것이라든지 기초적인 생존 문제 해결하기에도 버거워 죽겠는데, 골치거리가 2명이나 늘어났다. "어쩐다..." 결국 고민으로 하루를 꼴딱 보내게 되어버린 나는 뒤늦게 해가 저물고, 불침번을 서야 하는 시간까지 다가오게 되었음을 눈치채고 말았다. "고민 상담은 교수님한테 가서 하세요. 유에 선배." 어제와 같이 나와 불침번 조가 되어버린 아리아가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으며 태클을 건다. "이래봬도 우리들을 위해 고민하고 있는 거라고. 후배." "곁에서 보면 짜증나요." "... 직설적인 의견, 정말 고맙다." "뭐, 고민을 할 정도로 중대한 문제가 있다는 건 저도 알지만요." 마른 장작들을 번갈아 넣은 뒤에, 내 근처로 자리를 잡은 아리아가 긴 머리를 정돈하며 말한다.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건,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래요." "그래?" "선배도 무언가를 선택하기 위해 고민한다면, 그 전에 무언가를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상황까지 고려하시면서 고민해보세요. 그렇다면, 훨씬 더 침착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좋은 말 들려줘서 고맙다." "천만에요." 서로 훈훈한 말을 주고 받으며 평화로운 무인도의 저녁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고민 뒤에 찾아오는 새로운 위기가 직관적으로 온 몸의 신경들을 타고 전해진다. "... 아리아." "갑자기 왜 그렇게 진지한 표정을 짓는거죠? 선배."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움막 안으로 들어가서 모두를 깨워. 그리고 절대로 움막 근처를 떠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알겠어?" "... 무슨 소리에요?" 아리아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것이 아리아가 주변의 인기척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녀석'은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도 사실은 방금 눈치챈 것이었기 때문에 확신은 못하지만, 분명 누군가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한 번 찾아왔던 손님이 다시 찾아온 모양이야." 신경을 집중시키고 최대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원시 소녀와 미치광이 살인자란 존재들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다시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돌아오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생존본능이라는 사실이 정말 무서운가보다. 내 말대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아리아. 모두를 깨우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는 와중에, 우리들의 움직임을 눈치챈 것인지 수풀속에 숨어있던 녀석이 재빠르게 우리들에게 튀어나온다. 첫번째 타겟은 바로 아리아. 약해보이는 녀석을 먼저 공략한다는 판단은 나쁘지 않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여성을 공격하는 버르장머리없는 녀석은 혼을 내줘야지!" 나 역시도 순간적인 움직임으로 아리아와 녀석의 사이를 막아선다. 작은 체구의 녀석이 꽤나 빠른 속도로 달려오며 발차기를 날린다. 오른손을 들어 그대로 안면에 날아드는 발을 막아서는 나. 여전히 무지막지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팔이 후들거릴 정도로 말이다. 도대체 저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이 정도의 근력이 나오는지 정말 이해가 안갈 정도다. '그것이 알고싶다'에 제보하고 싶을 정도라고 해야 할까. 인체의 신비 이런 느낌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쪽도 물러설 생각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지키고 싶은 소중한 사람들이 바로 내 등 뒤에 있으니까 말이다. 정말로 쓰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커터칼을 꺼내든다. 녀석의 나이프에 상대도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거라도 들어야 안심이 될거 같아서 한번 손에 쥐어본 것이다. 이번에는 내 쪽에서도 무기를 들으니 녀석도 약간 당황한 모습을 보일거... 라 생각했지만, 그런건 크나큰 오산이었다. 아니, 착각인 것이다. 녀석은 내가 칼을 들어도 전혀 쫄지 않고서 또다시 나에게 덤벼든다. 밤이라서 모닥불 빛에 의존하는 한정적인 시각의 범위 내에서 녀석의 움직임을 쫓아야 하는 내게 있어서는 약간 불리한 상황. 게다가 스피드도 월등히 앞서는 녀석에게 다른 일행들이 피해가지 않는 범위까지 이끌면서 싸워야 할 자신은 솔직히 말해서 별로 없다. 확률상으로 따지면 '0'이라는 숫자가 수도 없이 배열되어 있고 마지막에 소수점 하나와 숫자 '1'이 나열되어 있는 그런 수치라고 보면 될까. 아무튼 그 정도로 희박하다는 뜻이다. "선배! 교수님! 세리아 언니! 일어나봐요." 아리아가 다른 여성진들을 깨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번개같이 움막으로 뛰어가는 정체불명의 녀석. 순간 앗차 하며 나 역시도 다급하게 뛰어가지만, 녀석의 주위를 끌어들이느라 너무 멀리 이동했다. 순간의 방심이 큰 사고를 부르게 생긴 것이다. ============================ 작품 후기 ============================ 원고료 쿠폰 24개를 주신 분이 계실 줄이야... 정말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인데도, 이리 과분한 사랑을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ㅜ_ㅜ 그 밖에 쿠폰 주신 분들도 감사합니다! 더더욱 열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확밀아도 어느덧 4일차에 접어들었습니다. 하면 할수록 은근히 재미있는 듯 하기도 하고, 왠지 현질을 해야 할 거 같은 기분도 듭니다...;; 34화 속으로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만약에 저 녀석이 제일 처음 아리아를 살해하고 나머지 여성들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그렇게 된다면 난 저 녀석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보복할 생각이니까. 선택의 기로. 누군가에게 칼을 들이내미는 순간, 나는 일행들 중에 누구를 방치할지, 누구를 살릴지 선택해야 할 지도 모른다. 어느 누가 중요한가.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아리아의 말이 순간 뇌리에 스치기 시작한다.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건,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말. 나는 정말 포기해야 하는 건가?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고?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누군가의 목숨을 버린다는 그런 결단을 하라고? ...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어느 누가 소중하지 않겠는가. 전부 다 내 소중한 동료이고, 지키고 싶은 존재다. 한 명을 포기하고 다른 한 명을 살릴 바에야, 모두를 살리고 나 혼자 죽는 게 더 마음 편하다고! "젠자앙!!!!!" 최대한 지면을 박차고 움막으로 뛰어간다. 오늘따라 익숙했던 백사장의 모랫바닥이 이리도 힘들게 느껴진 적이 있었을까.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너무나도 무겁다. "크윽..." 턱 밑까지 차오르는 호흡을 몰아쉬며, 안 좋은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찬다. 최악의 상황.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상황. 하지만. "...?!" 그런 일은 다행스럽게도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바로 한 여성의 목소리에 의해. "엘리! Stop!!" "......" 단지 그 한마디. 고작 그 한마디에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살기를 가득 내뿜던 녀석의 움직임이 마치 얼음 땡 놀이를 할 때 '얼음!'이라고 외친듯한 모습과 흡사할 정도로 모든 움직임이 멈춰버린 것이다. 만화에서 자주 볼 수 있지 않는가. 시간 조절 능력 어찌구 저찌구. 그 능력이 저 녀석에게만 해당된 그런 장면으로 비유해도 좋을듯 싶다. 아니지. 방금 그 목소리. 분명 어디서 들은적이 있는데... 어벙하게 서 있던 나에게,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여성이 백사장에 모습을 드러내며 반갑게 말을 걸어온다. "뭐야. 벌써 이 누님 목소리도 까먹은거야?" "누, 누나?!" 짧은 핫팬츠에 타이트한 분홍 티, 그리고 포니테일로 묶은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등장한 내 친누나. 이름하여 유린. 설마 귀신은 아니겠지. 어째서 누나가 여기에 있는걸까. 아니, 그것보다도. "살아 있었어?!" "보시다시피." "혹시 처녀 귀신이 되어 나타났다든가 하는 퇴마록 비스무리한 스토리는 아니겠지." "오랜만에 만나니까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남동생아. 퇴마록에는 그런 스토리가 없다고. 그리고 처녀는 맞지만 공교롭게도 살아있고." "......" "뭐야. 그 못믿는다는 눈은." "아니. 그냥." "그렇게 의심된다면 만져보든가. 자." "어딜?" "당연하잖아. 가슴이지." "... 누나 맞구나." 친동생으로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멘트가 귓가에 들려온다. 이런 말장난 할 사람은 누나밖에 없다. 남동생에게 당당하게 가슴을 만져보라고 하다니. 그것도 정말로 만지라는 듯이 내 앞에서 자랑스럽게 어깨를 펴보이며 말하는게 아닌가. 가뜩이나 쫄쫄이 타입의 티인지라 누나의 가슴 윤곽이 심하게 드러나는데 말이다. 어느정도라고 한다면 유두까지 보일 정도로... "잠깐! 누나! 설마 노브라야?" "당연하지. 무인도에서 뭘 바라니." "그래도 좀 가리든가 해봐!" "어머? 설마 이 누나의 가슴이 부끄러운거야?" "......" "너도 남자구나. 정말. 아무리 무인도라고 해도 너무 지나치게 사고가 개방적으로 되어버리면 안된다고. 근친상간이라는 말도 있잖아. 뭐, 개인적으로 근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은 하지만." "누나. 무인도에 와서까지 그 장난끼는 여전하구나." "나는 장난이 아니라 진심인데?" "......" 이걸로 확실해졌다. 지금 내 눈앞에서 빙그레 웃으며 여유롭게 말하는 여자는 확실히 내가 아는 유린이라는 내 친누나가 맞다. 농담과 진담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수위의 아메리칸 조크를 즐길 정도의 담력을 지닌 여자는 지구상에 우리 누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렇게 살아서 만나는 남매상봉도 좋긴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금 뭐라고 해야 할까. 감동이 없다고 해야 좋을까. 아무튼 그런거 있지 않은가. 누나와 남동생이 서로 껴안으며 '살아있었구나!'라고 펑펑 우는 그런 장면 말이다. 그러나 그런 감동적인 장면과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와 지구 사이의 거리 정도로 먼 우리 남매인지라 그런 시츄에이션 적용 대상 범위에는 애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듯 하다. 마치 평소와 똑같이 '왔어?'라고 인사하는 것처럼 마냥 아무렇지도 않다. "저기." 어색하게 우리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유아 선배. 그러고보니 잊고 있었다. 지금 우리들의 상황을 말이다. "유에. 그 분은 누구...?" "아, 제 누나에요. 이름은..." "안녕하세요~ 유린이라고 해요. 유에의 어여쁜 누나에요. 간략하게 '린'이라고 불러주시면 좋겠어요~!" "... 라고 합니다." 누나의 생기 발랄한 인사에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만다. 하긴. 누나의 이런 행동은 너무 기운차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오히려 피곤하게 만드는 특수능력이 있다고 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피곤한 존재다. 우리 누나 말이다. "그런데 선배." "왜? 아리아." "이 사람 좀 어떻게 해주시는게 좋지 않나요." 아리아가 가리킨 곳은 바로 아까부터 얼음장처럼 가만히 서있는 가면의 녀석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누나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어색하게 웃어보이고는 말한다. "엘리. 됐어. 움직여도 좋아." "... thank you." 별로 고마울것 까지는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다. 아무튼 누나의 말에 쫄래쫄래 누나의 곁으로 가서 허리에 매달리는 애교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가면의 녀석. 피식 웃어보이고는 이내 누나가 녀석의 가면을 직접 벗겨주자, 눈부실 정도의 풍성한 금발이 밤하늘의 달빛에 반사되어 노출된다. 드디어 정체를 드러낸 가면의 녀석. 아주 놀랍게도 여성. 아니, 소녀였다. 나이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리디 여린 소녀. 게다가 눈동자도 푸르스름한 것을 보아서는 분명... "외국인인가요?" 아리아의 말에 누나가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 쓰다듬 해주면서 대신 대답한다. "응. 맞아. 나이는 우리보다 어리지만 무인도 조난이라는 경험에 있어서는 대 선배에 속하는 대단한 녀석이지." "무슨 말이니? 그거." 노아 교수님이 뒤이어 묻자, 대답은 잠시 뒤로 미룬 채 눈을 반짝이며 교수님에게 손을 흔드는 누나가 반갑다는 듯이 인사한다. "아! 교수님도 계셨네요. 다행이에요. 무사하셔서." "고, 고마워. 그것보다 대답을..." "아. 그렇네요. 일단 잠시 앉아서 이야기 해도 될까요? 조금 길어질거 같은데." 누나가 나에게 시선을 돌려 말한다. 실질적으로 이 집단을 이끄는 사람이 누군지 파악하고서 보여주는 반응이라고 볼 수 있겠다. 예나 지금이나 눈치 하나는 정말 빠르다. 내 누나지만 이 점에 있어서는 존경스러운 마음을 담아도 좋다고 본다. "그럼 일단 모닥불로 이동하죠." 내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본의 아니게 이뤄진 제 3자들간의 만남. 이 사건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무인도 생활에 커다란 전환점이 될 가능성을 선사해주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 작품 후기 ============================ 가챠를 했는데 왜 4성 이후로 나오질 않는거니 ㅡ_ㅜ이래서 도박은 안 됩니다. 슈레 하나 얻어보겠다고 있는 티켓을 다 투자했건만. 나오는 거라고는 레플밖에 없다니... 나쁜 확밀아! 확 밀어버려! ... 죄송합니다. 35화 EP 6. 마우스 투 마우스 한밤중에. 그것도 꼭두새벽(아까 시간을 물어보니 대략 새벽 2시라고 노아 교수님이 답을 해주셨다.)에 다같이 모닥불에 모여 앉은 우리들. 자리가 모자른지라 엘리라고 불린 꼬마 아이는 누나의 무릎 위에 앉게 되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누나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이 계속 누나의 허리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별로 상관없어하는 눈치였기에 괜찮겠지 하며 이대로 자리에 앉기로 한다. 장작을 몇개씩 집어넣는 이라아와 세리아. 날씨도 제법 쌀쌀해지고 있었기 때문인지라 모닥불에 손을 갔다 대며 추위를 녹이는 누나에게 나는 우선 제일 묻고 싶은 말을 꺼내본다. "누나." "왜?" "일단 먼저 설명해줘야 할 것이 있는데." "아, 그렇지. 설명해줘야지." 누나도 알고 있다는 듯이 허리춤에 엣헴 하고 기침을 몇번 하면서 우리들을 바라보고선 말한다. "일단..." 꿀꺽. 잔뜩 긴장한 분위기 속에서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간다. 저 소녀에 대한 정체. 아까 누나가 했던 '무인도 대 선배'라는 말의 의미. 그리고 배가 난파된 이후로 어떻게 무인도에서 지내왔는지 등등. 기타 여러가지 설명이 필요한 복합적인 문제의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는 첫 마디가 누나의 입에서 튀어 나오기 시작한다. "일단 저는 생리중이에요." "그게 아니잖아!!" "어머, 왜 그래. 남동생. 여자에게 있어선 생리주기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아니. 그건 나도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어. 유아 선배를 통해서... 가 아니지. 남자인 내가 알 리가 없잖아. 중요도의 순위를 따진다면 누나의 생리 주기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게 있을거 아니야." "더 중요한 거라면... 아! 그거구나." "그래, 그래. 바로 그거." "내가 '양'이 꽤 많은 편이니까 그쪽은..." "그러니까 아까부터 생리 이야기좀 그만 하라니까!!" "칫. 재미 없어. 남동생." "누나가 더 재미 없다고." 아직까지도 장난끼 다분한 말투를 이어가다니. 역시나 누나 답다고 해야 할까. 무인도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잘도 이런 컨셉을 끌고가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누나의 농담을 듣고 있던 유아 선배가 나를 힐긋 쳐다본다. 마치 '원래부터 이런 성격이었어?'라고 묻는듯한 그런 느낌이다. 나를 알고 있다가 누나와 처음 만난 사람들은 대게 이런 눈치를 보낸다. 성격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남매 사이라고 다 같이 똑같은 성격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그런 불변의 진리와 세상의 이치 같은 이론은 없지만, 그래도 너무나도 판이하게 성격이 다르다보면 의심이 되는 게 정상이다. "농담이야, 농담. 이제부터 제대로 이야기를 할께요." 누나도 분위기 파악은 전혀 못하는 인물이 아니기에 농담은 그쯤에서 해두고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모양인가 보다. "우선 이 아이에 대해 설명할게요. 이름도 방금 들었다시피 '엘리'라고 부르면 되요. 본명은 잘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엘리?" 아리아의 되물음에 누나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한다. "응. 엘리. 그렇게 부르면 되더라고." "잠깐만. 누나. 그러고보니 엘리는 다른 생존자와는 약간 달라보이던데. 아까 '무인도 경험 면에 있어서는 우리보다 선배'라는 말을 했었지? 그 말 뜻은..." "역시나 내 남동생. 맞아. 엘리는 우리보다도 먼저 조난된 생존자야." "뭐라고?!" 누나의 말에 화들짝 놀라는 우리들. 유일하게 놀라지 않는 인물은 누나를 포함해서 엘리 본인 뿐이었다. 한국말루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우리들의 말에는 일체 흥미가 없는지 작게 하품을 하며 고양이처럼 누나의 무릎 위에 앉아있는 엘리. 정말 작은 체구다. 이런 작은 체구의 소녀에게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온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누나의 말. "믿기지는 않겠지만 정말이에요. 대충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엘리가 11살때. 그러니까 3년 전에 부모님과 같이 개인 소유의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우연치 않게 비행기가 이 섬에 추락하면서부터 무인도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하네요." 누나의 말에 손을 번쩍 든 유아 선배가 묻기 시작한다. "그럼 엘리의 부모님은 어떻게 된건가요?" "아, 우선 미안한데 말 놓아도 돼? 너도 나한테 편하게 말 놓아도 되니까." "으, 응. 상관 없긴 한데." 유아 선배에게 나이도 물어보지 않고, 무턱대고 말부터 놓자는 제안을 하는 누나가 세삼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기 시작한다. 뻔뻔하기에 짝이 없는 행동이라 생각하지만, 다른 쪽에 정신이 팔려 있는 우리들이었기 때문에 누나의 제안을 그리 깊게 새겨 듣지 않는다. "아무튼 말을 이어가자면. 엘리의 부모님은 돌아가셨어. 우리들이 이 섬에 오기 전, 그러니까 4일 전 쯤에." "......" 순간 말문이 막힌 노아 교수님이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세리아 역시도 그 말을 듣고 약간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본 아리아가 자신의 언니에게 손을 살며시 잡아주지만, 아리아 본인도 동요의 눈빛을 하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사람의 죽음. 엊그제만 하더라도 그 죽음이라는 것을 접했던 우리였지만, 그것보다도 더 충격적인 사실은 따로 있었다. 바로 '3년'동안 무인도에서 표류되었다는 말 그 자체.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은 금방 구조가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길어봤자 한달 안쪽으로. 하지만 3년이라는 수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기하학적인 숫자로 인식될 수준의 년단위로 다가오고 있었다. 1년도 못버틸거 같은 무인도 생활인데 여기서 3년을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부모님이 돌아가신 엘리와 제일 처음 만난건 바로 나였어. 다른 생존자들에 대해서도 여기저기 찾아봤지만, 보이는 것은 싸늘한 시체 뿐이었지." "......" 누나 역시도 생존자 수색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3년동안 이 무인도에서 생활한 엘리라는 존재를 만난 순간부터 누나에게는 의식주 문제가 해결된 셈. 우리보다도 어느정도의 여유가 있던 누나는 그 여유를 생존자 수색에 집중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예상대로 다수의 생존자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 배가 난파되고 살아서 무인도로 흘러들어온 우리들 조차도 스스로를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기적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 모양이다. 기적은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기적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우리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도 일종의 기적인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기적'을 어디까지 이어가느냐 하는게 포인트인 것이다. 그래도 엘리가 3년동안 이 무인도에서 생활했다는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렇게까지 절망적인 내용만을 담은 소식을 전하는 것은 또 아니다. 생각을 해보자. 비록 3년동안 구조되지 못했다는 점은 비관의 대상이 될만한 점이다. 하지만 그것을 뒤집어서 생각해 본다면 3년동안 살 수 있을만한 방도가 분명 존재하고 있다는 뜻과도 같은거 아닌가. 비록 엘리 혼자서 3년을 다 보낸 것은 아니지만, 분명 살아남을 수단은 존재하고 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어떤 의미로 우리들에게 '희망'이라는 단어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더 질문해도 돼?" 연이어 질문을 던지는 유아 선배의 말에 누나가 발언권을 허락한다. "언제든지." "그 옷은... 어떻게 된거야." "아, 이거?" 생각보다 깨끗한 옷차림이라서, 나도 모르게 질문을 던져봤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허름한 옷차림인 우리와는 다르게, 누나는 굉장히 깔끔한 옷을 입고 있어서,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자신의 티셔츠를 가리키며 말하는 누나가 싱긋 웃어보인다. "보급품이지." "보급품?" "그래. 엘리가 머물고 있는 곳은 작은 통나무 집이야. 그 곳에 의류나 침구류 같은것도 있다고 식기재료도 있고." "어째서 그런게?!" "당연하지. 말했잖아? '여행중'인 엘리의 가족을 태운 이 비행기가 섬에 추락했다고 말이야." 여행중이었다는 말은 적어도 의식주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수단이 될만한 도구들을 가지고 다녔다는 말과도 같은 소리다. 결과적으로 누나가 현재 입고 있는 옷을 포함해서 의식주의 도구들이 엘리가 살고 있는 곳에 마련되어 있다는 뜻이다. 어느새 잠이 든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누나가 본인도 하품을 약간 하면서 말을 이어간다. "중요한 이야기는 대충 끝난거 같으니까 내일 다시 이야기할까? 오늘은 피곤해서 자고 싶은데." "그렇구나. 일단은 잠을 자고 내일 다시 이야기하는게 좋을거 같아." 노아 교수님도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벌써 새벽 3시가 다 되어가는 상황.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나기 때문에 우선 잠을 먼저 청하기로 한 우리들은 일단 불침번 세우는 일을 제외시키고 모두가 취침에 임하기로 한다. ============================ 작품 후기 ============================ 후기란에 어떤 말로 채워볼까 하다가, 저의 뛰어난 유머감각을 발휘해보기로 했습니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는 현상을 줄여서 뭐라고 하는지 아시나요? 정답은... 동해입니다. 아이고 배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 배꼽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36화 제대로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을 억지로 보내고 난 뒤에 맞이한 아침은 그다지 상쾌한 기분을 선사해주지 않는다. 영화중에서 무인도를 배경으로 남자와 여자가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해변가에서 하하호호 떠드는 장면이 있었는데, 지금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낭만적인 장면과 상당히 거리가 먼 분위기만이 감돌 뿐이다.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난 여성진들. 평소에 미용이나 이런 면을 유난히 신경쓰는 노아 교수님 마저도 오늘은 상당히 초췌한 얼굴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도 그럴것이, 어제 벌어진 소란 덕분에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체불명의 원시부족이 있었다느니 뭐니 하는 쓸모없는 가설도 엘리와 누나의 등장으로 인해 한꺼번에 날아간 상황. 약간 맥이 빠지기도 하는 그런 기분을 선사해주는 아침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튼 피곤에 쩔어서 기상한 우리들. 근처에 놓여있는 식수통으로 대충 입 안을 행구는 우리들을 보며 누나가 감탄했다는 듯이 말한다. "적은 도구로 여기까지 잘도 생활했구나." "기특하지?" "칭찬 아닌데." 내 말에 누나가 눈을 흘기며 말한다. 어떤 풍족한 생활(물론 무인도라는 각박한 환경 내에서 한정된 이야기)을 누렸기에 식수통을 보고 나서 적은 도구라는 표현을 쓰다니. 약간 경외심마저 들기 시작한다. 베시시 일어난 엘리는 본능적으로 누나의 허리에 또다시 매달리기 시작한다. 코알라도 아니고. 누나와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매달려있는 엘리를 보면서 누나가 어색하게 웃음과 동시에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누나를 잘 따르네." "귀엽지? 애완동물 같다니까." "아니. 사람을 애완동물 취급하면 안되잖아." "그래도 귀여운걸 어떻게 하니. 고양이 같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귀여워. 그렇게 보이지?" "뭐..." 가면을 쓰고 있었을땐 몰랐는데, 이 녀석, 누나의 말대로 조금 귀여워 보이기는 하다. 아. 이러면 안되지. 나는 로리콘이 아닌데 무슨 말을 하는건지 모르겠다. 아침부터 정신차려라. 유에. 무인도에 와서 이상한 취향에 빠지면 안된다고. "로리콘이네요. 선배." "시끄럽다. 아리아." 나의 명경지수(明鏡止水) 상태를 원상복귀 시켜버리는 아리아의 말에 태클을 건다. 녀석. 어떻게 내 속마음을 알았지. 대단하군. 하지만 로리콘은 아니란 말이다. 세수를 하고 나서 이제야 정신이 드는지 노아 교수님이 세리아를 데리고 오더니 말한다. "아침 준비 할테니까 기다리렴." "저도 도와드릴까요?" 누나의 말에 노아 교수님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한다. "아니. 유린은 엘리를 보살펴주렴. 피곤해 보이는거 같은데." "그럴게요. 그리고 교수님. 편하게 대해주셔도 되요. 어차피 학교에서도 딱딱한 사이가 아니었잖아요?" 누나와 교수님은 처음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이로 추정된다. 나야 뭐 군대를 갔다 왔으니까 복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기 때문에 인맥 초기화 스킬을 당해버려서 그다지 학교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신세이긴 하지만. 마당발이라 불릴 정도로 낯선 사람과 친해지길 좋아하는 누나로서는 사전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단어 조차도 실려있지 않은 듯하다. 나쁜 말로 표현하자면, 푼수끼가 다분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노력할게." 살짝 눈웃음을 치면서 세리아를 데리고 음식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로 향하는 교수님. 역시나 저 웃음, 정말 좋다. 어른의 매력이 물씬 느껴지는 눈웃음이라고 해야 할까. 청초한 교수님 답기 않게 약간은 색기있는 분위기마저 풍기는 매력적인 요소라고 부르고 싶다. "선배. 로리콘에서 금새 연상 취향으로 전직하셨나요." "아리아. 아까부터 자꾸 내 속마음을 훔쳐보고 있는데. 그거, 프라이버시 침해라고. 알고 있는거냐." "선배 한정으로는 침해해도 괜찮아요." "말 그대로 인권을 유린하는 네 말에 할 말을 잃고 마는구나." 나와 아리아의 쓸모없는 대화를 듣고 있던 누나가 나와 아리아를 한번씩 쳐다보며 갑자기 의미시장한 미소를 띄우기 시작한다.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무슨 꿍꿍이가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그만 두는게 좋을거야. 누나." "나는 아직 아무런 말도 안했는데?" "시선이 이상하잖아. 말투도." "그것보다도 너희 둘. 사귀고 있는거니?" 역시나 저런 말을 던질줄 알았다. 상당히 친숙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둘을 보고서 혹시 사귀는건 아닌지 묻는 누나도 그렇고, 그리고 그런 말을 듣고도 그다지 상반된 표정변화를 보여주지 않는 아리아도 대단하다. 역시나 포커 페이스. 대단한 녀석이다. 아리아라는 여자 후배 말이다. "아니요. 저는 애인이에요." 이 녀석도 이상한 답변으로 응수한다. 사귀긴 개뿔. "어머, 사귀고 있다는 뜻 아니니? 그거." "사귀고 있는 쪽은 유아 선배와 노아 교수님이에요." "양다리구나. 내 남동생. 대단한걸?" 어느순간 나라는 인물을 놀리는데 단합을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잘도 주고받는 누나와 아리아의 대화였다. 그것보다 아리아 녀석. 그렇게 함부로 말을 내뱉어도 되는 것이냐. 거짓말이 나중에는 진실이 되는 경우가 있다고. "어디보자. 어디보자..." 이상하게 내 주변을 둘러보던 누나가 방긋 웃으면서 아주 핵심을 꿰뚫어버리는 대사를 날리기 시작한다. "노아 교수님하고 유아하고 그렇고 그런 관계라면, 벌써 섹스는 했단 말이네." "... 아니." "진짜? 세상에. 무슨 초등학생끼리 연애하는 것도 아니고. 플라토닉 사랑이라도 하는 거야?" "그럴리가 없잖아." 나도 정신상태가 멀쩡한 남성이라고. 이런 짓이나, 저런 짓이나 하고 싶어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유아 선배와 교수님과 이렇고 그런 짓을 하기에는 뭐라고 할까... 여자 경험이 없는 나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여자를 대할지 잘 모르겠다. 무턱대고 밀어붙이는 건 매너 위반일테고. "연애 상담이라면 언제든지 해줄테니까 부담없이 찾아오라고." 누나가 내 어깨 위로 손을 올리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해준다. "상담비라도 받는 건 아니겠지?" "무료야." "어떠한 변덕이 들어서?" "뭐, 친남매니까 이 정도는 기본이지. 네 심리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남매면 뭐든지 알 수 있다는 그런 전제가 어디있어." "우리 남매 한정으로는 해당되는 이야기야." "거짓말." "현실에 눈을 돌리면 안돼. 남동생. 그것보다도 모두한테 할 말이 있으니까 식사때 모두 모여줬으면 좋겠는데." "할 말?" "어제의 이야기 말이야. 계속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거든." 애매모호한 얼굴로 되묻는 내게 누나는 오히려 상큼한 미소를 날려준 채 자리를 뜨기 시작한다. 우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라. 그것이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해지긴 하지만, 설마 공개적으로 '내 남동생은 동아리 선배와 담임교수와 섹스하고 싶다고 말하더라!'라는 쓸모없는 말을 하지는 않겠지. 아니. 혹시 또 모른다. 내 누나니까. 무슨 말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만한 인물이니까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 베이스 캠프?" 우리 모두의 입에서 튀어나온 공통적인 단어였다. 오늘도 말리 비틀어진 생선을 쥐어 뜯고 있을 무렵 누나가 아주 놀라운 소재를 던져준 것이다. "네. 저와 엘리가 묶고 있는 장소요." "장소라면... 어제 말했던 통나무 집 말이니?" 노아 교수님의 물음. 그러자 누나가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상 하로 끄덕이기 시작한다. 엘리의 부모님. 그러니까 돌아가신 두 분이 만드셨다는 통나무 집으로 옮겨가지는 말을 누나가 직접 한 것이다. 사실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다. 엉성한 움막에서 계속 지내는 것보다 안전이 보장된 통나무 집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 더 이득이니까 말이다. 아직까지 들짐승에 대한 존재 확인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리고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을만한 장소로는 움막은 그다지 적합한 집이 아니니까 통나무 쪽이 훨씬 더 끌리는 것은 사실이다. 생선을 먹다 만 누나가 입에서 가시를 뱉어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집 근처에 호수도 있고, 공터에 자리잡고 있어서 시야도 넓어요. 산속 깊은 것도 아니고 적당히 바다와 가까운 편이니까 언제든지 해변으로 나갈 수 있고요. 한마디로 말해서 풍수지리설로 따지면 괜찮은 입지라고 볼 수 있죠." 부동산 중개업자마냥 자랑스럽게 주변 환경과 위치, 그리고 기타 여건에 대해서 장화하게 설명을 늘어놓는 누나. 확실히 누나의 말을 그대로 믿기로 한다면 나쁜 조건은 아니다. 게다가 어차피 우리들이 여기에서 계속 머무는 것도 좋은 편은 아니고. 오히려 누나가 머물고 있는 거처로 이동하면 의식주에 관련된 도구들을 많이 확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건데. 리더." "나?" 누나의 말에 오히려 멍청하게 되묻는 나였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얼빵한 모습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내 말을 들은 누나가 오묘한 표정으로 답한다. "당연히 널 말하는거지. 누굴 가리키겠니." "어째서 난데." "네가 리더니까." "그렇다고 내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것도 아닌데." 한숨을 쉬면서 말하는 내게 의외의 응원군이 투입된다. "뭐 어때. 사실인걸." "선배?" "저번에도 말했지. 남자로서, 그리고 리더로서 모두들 너의 생각을 존중해줄거라고. 나도 그렇고 교수님도, 그리고 아리아나 세리아도 마찬가지야." 선배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 정도로 나를 신뢰하고 있는 것인가. 조금은 부끄럽기까지 할 정도였다. 선배의 응원 아닌 응원을 받았으니, 고민할 필요도 없다. 분명 누나가 머물고 있는 베이스 캠프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우리들에게 이득이 될만한 장소임은 틀림없다. 물론 통나무 집에 이 인원이 전원 들어가서 산다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생존에 필요한 최저한의 도구가 있다는 소리는 그에 합당한 공구도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과도 같다. 그렇다면 그 공구를 이용해 통나무 집을 확장시키든가 하면 될 거 아닌가. 뭐든지 부딛쳐보고 일을 진행해야 한다.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부딛쳐 보기도 전에 벌써부터 기가 질리면 안된다. 어차피 우리들이 있는 곳은 무인도. 가만히 있는다고 경찰이 와주거나 법이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도 아니다. 야생에서 우리들은 집단을 이루고 살아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캠프를 옮기도록 하죠." 그리고 내 말의 한마디가 우리들의 무인도 생활에 있어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탄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 작품 후기 ============================ 음... 이상하군요. 분명 재미있는 개그를 올렸는데, 반응이 제가 생각햇던 것 이하입니다. 어쩔 수 없죠. 오늘 밤에는 좀 더 재미있는 개그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배꼽 빠질 준비를 해두시기 바랍니다! PS. 이번에도 24개의 원고료 쿠폰을 주신 익명의 독자분께 정말 감사의 말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그 밖에, 쿠폰을 주신 분들도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최대한 재미를 줄 수 있는 작품이 될 수 있도록 달리겠습니다!! 37화 누나도 합류를 하게 되었고. 먹을 입이 늘어난 상황에서 오늘 당장 해결해야 할 식사거리를 구하기 위해 물고기를 사냥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가볍게 준비운동을 하고, 발 끝부터 가볍게 물을 적신 후에 마지막으로 심리적인 안정을 취하고. "그럼 가볼까." 커터칼로 만든 작살을 이용해서 바다로 들어가려던 순간, 나를 제재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디 가려고? 남동생." "보면 몰라? 먹을 거 구하려고 하잖아." "나도 아는데. 그러다가 바다에 빠지면 어쩌려고?" "내가 수영에 그리 많은 소질을 보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빠져 죽을 정도는 아니야." "음... 그래?" 한동안 유심히 나를 바라보던 누나. 그러더니 갑자기 나머지 일행들이 있는 장소로 향하면서 무언가를 묻기 시작한다. 혹시 이상한 질문 같은 걸 하진 않겠지? 아무리 누나가 어렸을 때부터 마이페이스 성격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타인이 상당히 꺼려할 정도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사람은 아니다. 이성적으로 그렇게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불안한 게 사실. "괜찮겠지. 뭐." 의미심장한 누나의 행동이 매우 신경쓰이지만, 그렇다고 아침부터 쫄쫄 굶을 생각도 없기에 먹을 것을 구하러 바닷속으로 입성하기 시작한다. 먹을 것을 구해 온 내 시선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허리춤에 손을 올려놓고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누나의 모습이었다. "남동생. 이쪽으로 와." "나? 그것보다 무슨 일로?" "어허! 누나가 부르는데 감히 토를 달아?" "달아도 전혀 문제되질 않는데?"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사춘기 소년 마냥 반항끼를 마구 드러내지 말고, 일단 이쪽으로 와보라니까." "알았어, 알았어. 잠깐만." 호숫가에서 간단하게 샤워라도 하고 싶었지만, 다들 모여있는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우게 된다. 아무래도 누나가 소집한 모양인가 본데. 아까 다른 사람들에게 질문하던 모습과 어느정도 연관이 있는 건가? 의문 투성이지만, 그래도 모른 척 할 수 없기에 모닥불 근처로 발걸음을 옮긴다. 다들 앉아있는 모습을 확인한 누나가 아주 당차게 말을 한다. "지금부터 인공호흡 교육을 실시하겠습니다." "어째서?" 나도 모르게 직관적으로 되레 질문을 던져본다. 뜬금없이 인공호흡이라니? 너무나도 황당한 이야기 전개 때문에 우선 질문부터 마구 던져보지만, 누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오히려 나에게 으름장을 늘어 놓는다. "이 바보야. 아무도 인공호흡을 할 줄 모른다고 하는데, 바다에 계속 들어가는 건 말이 안 되잖아. 행여나 너나 유아가 바다로 물고기를 잡으러 들어갔다가 다리에 쥐라도 나봐. 누가 구해주는데? 그리고 그 응급처치는?" "......" "적어도 물에 들어가려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간단한 구조 조치는 알고 있어야 하잖아. 그런데 유아도 그렇고, 교수님도 그렇고, 아리아나 세리아도 모른다고 하는데. 위험 천만한 상황이 납득될 리가 없잖아. 너도 그렇지? 남동생." "뭐어..."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어느 누가 제대로 된 응급조치도 모르는 상황에서 바다를 수시로 들어간다는 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위험 수치가 다분한 상황이다. 게다가 여기는 무인도. 119 구조 신호도 보낼 수 없고, 주변에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다. 오로지 우리들의 힘으로, 우리들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하는 극박한 스테이지. "그럼 지금부터 물에 빠졌을 때 초보자도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간단한 응급조치법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짝짝짝. 졸지에 학생에게 강의를 받게 된 모순된 상황을 접하고 있는 교수님도, 운동신경은 좋지만 응급처치에 관해서는 잼병이었던 유아 선배도, 의학 분야에 종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공호흡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아니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알고 있긴 한데 귀찮아서 일부러 모른 척 할 수도 있다. 아리아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테니까) 아리아와 언니쪽인 세리아. 마지막으로 한국말은 못 알아듯는지 나무 기둥 의자에 앉아서 작은 몸만 좌, 우 방향으로 흔들흔들 거리기만 하는 엘리까지. 상당히 개성적인 학생들을 데리고 인공호흡 강의를 시작하는 누나. 개인적으로 나는 군대에서 이미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다지 크게 새겨듣진 않는다. 간단한 강의를 마치고 난 후에. "좋아요. 그럼 직접 실전 겸 체험의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유아." "?" "이쪽으로 와서 누워봐." 지목당한 유아 선배가 모닥불 근처에 자리를 잡고 얌전히 눕는다. "아까 설명드린 그대로, 우선 환자가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면 되요." 아주 약하게 환자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거리거나, 가볍게 말을 걸며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본다. 응급 상황에 맞게 일단 의식이 없는 쪽의 루트를 택해서 환자로서의 연기를 시작하는 유아 선배이기 때문에 곧바로 다음 설명에 임하는 누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환자의 입 안에 이물질이 있으면 집게 손가락으로 긁어내서 기도를 확보하면 되요. 그리고..." 계속해서 모범적인 설명을 이어가던 누나가 그 이후의 절차들에 대해 설명하며 드디어 인공호흡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한 '그 부분'에 도달하게 된다. "이제 남은 것은." "자, 잠깐?!" 누나가 누워있는 유아 선배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개려고 하자, 황급히 누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제지하기 시작하는 환자. "뭐야. 치료를 거부하는 환자라니. 들어본 적이 없어." "환자는 무슨! 그냥 하는 척만 하는 거 아니었어?!" "그러면 재미가 없... 아니지. 본보기가 안 되잖아." "방금 재미 없다고 말하려고 그랬지?!" "설마. 네가 잘못들은 거야. 분명히. 왜냐하면 너는 의식이 없는 환자니까." "의식 있다니까!" 의식이 없다면 저렇게 말을 잘 할 리가 없잖아. 그것보다 본인의 의사 없이 멋대로 과도한 스킨십을 시도하지 말라고. 푼수 누나야. 하지만 저런 막무가내 누나라 해도, 시늉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직접 본보기로 보여주겠다는 말을 하는 건 개인적으로 높게 평가를 하고 싶다. 교육자로서의 자세가 제대로 된 그런 학생이 아닐까 싶다. 물론 피실험자가 되어버린 유아 선배로서는 굉장히 꺼려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뭐야. 왜 그래. 유아. 설마 너, 이게 첫 키스야?" "처, 첫 키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24살이나 먹고 아직까지 키스를 해본 적이 없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정말로?" "다, 당연하지!" 한 눈에 봐도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온 몸에서 풍겨나온다. 그러나 일부러 모른 척 하는 누나. 저게 누나의 스타일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타인을 골탕 먹이기 위해 태어난 여자. 한동안 갈등어린 시선으로 누나와 다른 사람들을 한번씩 훑어보던 유아 선배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하면 되잖아! 하면!" "좋아. 그럼 다시 의식을 잃어주세요. 환자님?" "으으..." 마음속의 자신과 싸우며 다시 자리에 눕는다. 그리고 살며시 눈을 감고. "기도를 확보한 다음에." 누나의 설명에 맞춰 살짝 몸에 힘이 들어가는 유아 선배의 모습이 멀찌감치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키스... 가 아니라. 인공호흡. 누나와 유아 선배의 부드러운 입술이 서로 맞대면서 안에 공기를 불어 넣기 시작한다. 상반신을 일으키는 누나의 움직임에 따라, 입술에 여성들끼리의 긴 타액이 섞이며 늘어진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어제에 비해 훨~씬 더 재미있는 개그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인천 앞바다의 반대말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정답은... 인천 엄마다. 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이고 배아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38화 "하아..." 미세하게 야릇한 신음소리를 내뱉는 유아 선배. 첫 키스는 아니지만, 그래도 동성과는 아마도 첫 키스가 아닐까 예상을 해본다. 살아생전, 동성과 진한 입맞춤을 할 기회 자체가 있겠는가. 지금과 같이 인공호흡을 할 경우를 제외하고, 동성애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이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남자의 입자에서 여성들의 키스를 본 소감은 베리 굿. 아름다운 두 여성이 서로 입술을 맞대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왠지 묘한 기분이 든다. 특히나 보기 좋게 뭉개지는 유아 선배와 누나의 가슴. 둘 다 한국인 여성의 평균 가슴 크기 치고는 꽤나 큰 부류에 속하기 때문에,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들이 서로 맞닿는 장면이 연출된다. 은근히 야한 장면이 연출되는 인공호흡 강의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여기서 환자가 정신을 차리면 만사 오케이." 손으로 동그라미 표시를 만들며 가볍게 윙크하는 누나였다. "이것으로 오늘의 강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짝짝짝. 학생들의 열렬한 박수 세례가 이어진다. 그 중에서도 엘리는 남들이 박수를 치니까 졸지에 따라서 치는 듯한 그런 모습처럼 보인다만. "그럼 이제." 상큼하고 시원스럽고 상냥하고 부드럽고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누나가, 우리들을 쭉 훑어보며 말한다. "실습을 해볼까요? 인공호흡 실습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결국 각자 한번씩 입맞춤 하기에 성공한 누나의 계략에 실로 감탄어린 박수를 보내고 싶다. 교수님, 아리아, 세리아의 입술까지 다 훔친 누나. 정말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참고로 나는 그냥 패스. 이유인 즉슨, 남자는 싫다고 한다. "우락부락한 남자보다, 귀엽고 청순한 여자쪽이 더 좋잖아." "내가 언제 우락부락 형태가 되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것보다 누나, 레즈비언이었어?" "아니. 이래봬도 남자의 사랑을 듬뿍 차지하고 싶은 색기 가득한 여자야." "본인의 입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그럼 도대체 무엇때문에 한 명씩 돌아가며 인공호흡을 한 건지 모르겠다. "내 의도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네. 남동생." "정상적인 상식인이라면 당연하지." "멍청이. 너는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눈요기가 아닌, 직접적인 실습을 해봐야 어떤 식으로 인공호흡을 해야 할 지 명확하게 알 수 있어. 여기는 학교도, 사회도 아닌 무인도잖아? 겉보기식 교육 방식은 필요 없어. 뭐든지 실전." "실전이라..." "장난식으로 보일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이 인공호흡에 대해 명확히 알아야 나중에 다른 동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으니까." 겉으로는 장난처럼 보일지 몰라도, 속으로는 그런 깊은 뜻이 있을 줄은 몰랐다. 여기서는 누나의 말이 거의 정답에 가깝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는 의사표시를 전달한다. 사람은 겉보기엔 모르는구나. 오랫동안 한 지붕 아래에 살던 누나지만, 무인도에서 누나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된 듯한 그런 느낌이다. 인공호흡에 관련된 이야기는 이것으로 종료하고. 베이스 캠프 이전의 방식을 택한 우리는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게 좋다는 의견을 따라 일단 짐을 정리하기로 한다. 그래봤자 애초에 우리가 들고 있던 짐이라고 해봤자 커터칼 몇자루와 식수통, 그리고 유아 표 낚시대와 세리아의 가방 등이 전부지만 말이다. 움막은 혹시 다른 생존자들이 있을까봐 철거하지 않고 남겨두기로 했다. 부실한 움막이다보니 지속적인 보수가 없다면 비와 바람에 무너질 가능성이 크지만, 그래도 철거하는 것보다 나은 편이지 않을까 해서 남겨두기로 결정한 것이다. 대충 짐정리가 다 끝나자, 머리를 푼 누나가 긴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내리며 우리들에게 말한다. "앞으로 저희들이 갈 곳은 대략 반나절 정도 걸리는 거리에요. 행군 속도를 조금 빨리 하면 2~3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으로 도달할 수 있어요." "그렇게 가까웠어?" "응. 생각보다 많이." 누나의 말에 내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말해본다. 그래서 엘리가 빠른 속도로 우리가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나 하는 의문점이 이제야 풀린듯 하다. "뭐, 일단 사소한건 재껴두고. 천천히 갈 예정이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 마세요. 산속을 통과하는 거니까 길도 험난하고요. 그러니까 시간 이런거 상관하지 않고 안전에 유의해서 가도록 해요. 알았죠?" "네." 마치 유치원 교수님인 듯이 친절하게 설명하는 누나. 산속을 통과한다면 역시나 행군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질 것이다. 유아 선배와 나는 그렇다고 해도, 여기에는 노아 교수님과 세리아, 그리고 아리아가 있지 않은가. 평범한 여대생들에 평범한 여교수에게 이런 강행군을 계속해서 시키는 것도 무리가 있으리라 판단한 누나는 아무리 늦어도 반나절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말을 먼저 꺼내두고 앞으로의 행군 계획을 설명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럼 출발하죠." 내 말을 시작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긴 인물은 바로 엘리. 길 안내자이기도 한 아 꼬마 아가씨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숲속을 잘도 걸어나간다. 아스팔트가 평지처럼 깔린것도 아닌 비포장도로임에도 불구하고 맨발로 흙 위를 잘도 걸어다니는 발랄한 꼬마 숙녀의 모습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만다. 자연 친화적인 모습이라는 느낌이 확 와닿는다. 엘리를 필두로 누나, 그리고 나와 세리아, 노아 교수님, 아리아, 마지막으로 유아 선배 이런 순서로 행군을 하게 되었다. 가장 체력이 약한 둘을 가운데에 배치시키고, 언제 어디서든지 위협적인 무언가가 튀어나왔을 경우 대처하기 좋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제일 앞장섰다. 유아 선배는 행여나 있을지 모르는 후방을 책임지기 위해 맨 뒤에 배치. 처음에 이 배치 구도를 듣고 제일 많은 불만을 표시한 인물은 유아 선배였지만, 그래도 행군에 괜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공통적인지라 얌전히 따르기로 결론이 내려졌다. 한참을 그렇게 길을 가던 도중. 문득 궁금한 것이 떠오른다. "누나." "응. 왜~?" "처음에 엘리가 우리를 습격한 이유에 대해 들을 수 있을까 해서." 생각해보니 궁금했다. 설마 누나가 엘리보고 우리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린것은 아닐테고 말이다. 내 질문을 들은 누나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내 별거 아니라는 듯한 해답을 내놓기 시작한다. "나 말고 낯선 이를 만나서 그런거 아닐까." "일종의 경계 태새였다는 뜻이야?" "뭐, 그럴수도 있지. 엘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렇게 많은 생존자와 접하는 것은 3년만이잖아. 물론 3년 전엔 또래 여자 아이들과 노닥거리면서 생활했을수도 있지만, 성장폭이 큰 10대 기간에 3년동안의 무인도 생활은 잠시동안 사회라는 울타리를 잊어버리기엔 충분한 시간이니까. 그래서 엘리 스스로도 모르게 사람이 두려워졌을 가능성도 크지." "그런데 누나는 잘 따르잖아." "이게 다 평소의 행실이 좋아서 그런거라고." 그 말인 즉슨. 누나는 평소의 행실이 좋아서 엘리에게 사랑받고 있고, 나는 평소의 행실이 좋지 않아서 엘리와 피튀기는 혈투를 벌였다는 뜻인가. 이 무슨 막말인가. 뭐, 아무래도 좋다. 우선 우리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은 사실에 만족하니까. 대략 1시간 정도를 걸었을까. 잠시 앉아서 쉬기로 한 사이에 유난히 체력이 부족한 세리아와 노아 교수님은 거의 녹초가 다 되어가는 모습으로 자리에 앉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쉰다, 각자 유아 선배와 아리아가 붙어서 괜찮냐는 듯이 컨디션 조절에 신경써주는 모습을 보고선 나 역시도 누나의 안전을 묻기 위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그 순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빙그레 웃고 있는 누나가 나에게 무언가를 내민다. "자, 이거 먹어봐." "... 뭔데. 이거." "영양제." "이게?" "자연산이야." 누나의 손바닥에 굴러다니는 작은 초록색 은단 크기의 약. 약초 같은걸로 만든 것일까. 한눈에 보기에도 시중의 약국에서 파는 평범한 약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누나가 자연산이라는 말까지 한 것으로 보아 분명 이건 누나가 만들었거나 아니면 엘리가 만들었거나 둘 중에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면서 나에게 계쏙해서 먹어보라고 권유하는 누나. 마지못해 자연산 알약을 한 입 삼키고 물을 마신다. 맛은 그다지 없는 편이고. "별로 달라진 느낌이 안 드는데." "효과는 나중에 나타나니까 괜찮아." 하긴. 먹자마자 바로 효과가 나타나는 약은 드물지 않은가. 게다가 자연산이니까. 누나의 말이 약긴 미심쩍긴 하지만, 그래도 시험삼아 잠깐 누나의 장난감이 되어줬다고 생각하자. 그게 마음이 편하니까. ============================ 작품 후기 ============================ 게임 시나리오 일 쪽을 구하고 있는데, 메일이 한 통 왔습니다.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고, 일본쪽 시장 겨냥을 하고 있는 분들이라서 아싸! 하고 내용물을 봤지만. 음... 만들고자 하는 게임이 BL이더군요. 간단하게 말해서 보이즈 러브, 여성향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이럴수가. BL은 절대로 못 쓴단 말입니다. ㅡ_ㅡ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못 써요! 여자들과 하앍하앍 하는 게 좋지, 남자랑 하는 걸 맨정신으로 쓸 수는 없습니다. ... 일 구하기 참 어렵군요 ㅡ_ㅡ 39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행군을 시작한다. 강행군은 아니지만, 계속적으로 숲속을 걷는 일이다보니 너도나도 모르게 은근히 체력의 한계가 빠른 타이밍으로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대낮의 숲속이 이렇게 힘든데, 야밤의 숲속은 얼마나 더 위험할까 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갑자기 몸에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뭐랄까. 온 몸이 뜨거워진다고 표현하면 좋을까. 힘이 넘친다고 해야 할까. 누나가 준 영양제인지 뭐시긴지가 이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지만,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효과가 생기고 있었다. 가뜩이나 숲속이라 걷기도 불편한 상황에, 아랫도리까지 커져버리는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무턱대고 커져가는 남근 때문에 걷기가 더욱 불편해진 상황. 자랑은 아니지만 내 것의 크기가 그리 작은편도 아닌지라 바깥에서 보면 텐트를 치고 있다는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날 정도다. 뒤에 있는 여자들에게 들키지 않고 있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 되지만, 중요한건 바로 누나다. 성욕이라는 감정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상황에서, 앞서 걸어가는 누나의 뒷모습 조차도 자극의 요인이 되고 있었다. 원래부터 몸매가 좋은 누나였기에 타이트한 티에 핫팬츠 위로 작은 엉덩이가 마치 남자를 유혹하는 듯이 흔들리고 있다. 게다가 맨살의 허벅지라니. 아무래도 다른 곳을 보는게 좋을듯 하다. 어디 시선을 둘 곳이... "생각보다 반응이 빠르네. 남동생." "... 누나. 혹시 일부러..." "어머, 그래도 내 말이 틀린건 아니잖아. 기운을 차리게 해주는 약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그 '기운'이라는 단어가 다른 쪽이잖아!" "뭐 어때." 라고 말하면서 어느새 나와의 거리를 좁힌 누나가 살짝 뒤를 돌아보며 내 아랫쪽을 바라보기 시작하더니 이내 묘한 미소를 날린다. "생각보다 크네. 교수님이 고생좀 했겠는걸?" "아직 교수님이랑은 안했다니까." "어차피 손만 뻗으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관계잖아. 그렇지?" "부정은 안하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쓸모없는 약을 주는건 아니잖아!" "쓸모 없지는 않아. 다른 의미로 이건 '임상실험'이니까." "실험?" "그래. 남자에게도 과연 내가 만든 약이 통하는지에 대한 실험이지." "도대체 뭘 보고 만든거야. 이 약." "엘리의 집에 약초 도감이 있었어. 아마도 엘리의 부모님이 그동안 무인도에서 발견한 약초들의 효능을 적은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막상 실험할 대상이 없으니까 곤란해했거든." "남동생을 실험 재료로 쓰다니." "미안미안. 그래도 나도 악녀는 아니니까 보답 정도는 해줄게." 이상한 말을 내뱉은 누나가 갑자기 살짝 손을 뒤로 빼면서 내 성기 윗부분을 툭툭 건드리기 시작한다. 느닷없는 누나의 행동에 무심코 말리려 하지만, 누나가 다시 팔을 앞쪽으로 빼돌리며 말한다. "어때. 이 누나가 자위정도는 도와줄 수 있는데." "전력을 다해 거부할게." "내가 싫은거야?" "어." "너무 매정하게 대답하네. 실망이야." "실망은 개뿔. 무슨 병 주고 약 주고도 아니고. 효능을 실험해보고 싶다면, 나중에 하던가. 아니면 약의 강도를 좀 낮추던가 했어야지!" "미안. 나도 초보이다 보니까 배율 조정을 잘 못했어. 본래 처음은 어쩔 수 없잖아. 실패는 성공의 외삼촌이니까." "어머니겠지." "그랬나?" "......"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으로 보아선, 분명 일부러 그랬다. 누나와 20년 넘게 산 내가 보증하는데, 이 말투와 행동. 그리고 미묘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거의 확실하게 일부러 계획적으로 나에게 이런 강도 높은 자연산 비아그라를 먹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확실한 근거가 된다고 단언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의 비율이 1대 다수로 있는 우리 일행인데. 이런 위험한 약을 먹이다니. 누나도 진짜 답이 없는 여자다. 잠시 쉬는 시간. 결국 참다 참다 못한 나는 잠시 화장실을 갔다 오겠다고 말을 한 뒤에 어디 적당한 장소가 없나 찾기 시작한다. 무엇을 하기 위한 장소인가. 그거야 당연한거 아닌가. 성이 나버린 요 놈을 진정시키기에는 한가지 수단밖에 없지 않은가. 커다란 나무기둥 아래에 앉아서 벨트와 지퍼를 내린다. 그러자 마치 세상 바깥의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는 듯이 튀어나오는 녀석. 지금까지 수많은 발기 상태를 보았지만 아마도 이번에 제일 큰 축에 속하지 않을까 할 정도로 엄청나게 커져버린 상태였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남근을 손으로 쥐고서 천천히 위 아래로 흔드려는 순간, 누군가가 내 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으면서 말을 걸어온다. "오호라. 너, 그런 식으로 자위하는구나." "누나?!" 언제부터 대기하고 있었는지 눈을 흘기면서 등장한 누나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정돈하면서 아주 상큼하고 화사한 미소로 나에게 인사한다. "이 누나의 감시망을 피할수는 없지." "감시망이고 나발이고 누가 먼저 약을 먹였는데."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이것도 다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이라고 생각해줘." "무엇 때문에." "실은 필요한게 있거든." 내 정면에 나와 같이 시선을 맞추려는 듯이 쭈그리고 앉은 누나가 한번 내 성기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남자의 정액." "정액이 왜 필요한데." "아까 너한테 말했었지? 엘리의 부모님이 작성하신 약초 도감 말이야. 그걸 보다가 좋은 약재가 있었거든." "어떤거?" "해열제." "확실히 좋은 약이긴 하네..." 필수적인 약품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고열로 인한 건강의 악화는 감기를 부를 수도 있고, 각종 병명의 원인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어째서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재료중에 남자의 정액이 재료로 들어가는건가. 내가 품고 있는 생각을 눈치챘는지 누나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한다. 여전히 시선은 내 성기에 꽂힌 채. "무인도에서 나는 각종 약초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없어. 그런 관계로 자세한 설명은 불가능. 하지만 도감에는 분명 써있어. 남자의 정액과 약초를 섞어서 해열제를 만들 수 있다고." "민간요법 아니야?" "도감에 적었을 정도면 실제로 효능이 있다고 생각해. 무엇보다도 학식의 기초는 바로 경험이니까." "......" 누나의 말이 맞다고 생각된다. 굳이 효능도 없는 약초 제조 방법을 도감에 쓸 이유는 전혀 없지 않은가. 누나가 장난끼가 많다고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약초에 대한 재료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는 진지한 표정을 보여주면 분명 누나의 말이 정답일 가능성이 크다. 원래부터 장난끼가 많은 사람이지만, 한번 진지해지면 제대로 분위기를 타는 사람이 바로 우리 누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에게 억지로 그 약을 먹인거야." "다 좋은데. 왜 나한테 미리 말을 안한거야." "그야 재미 없으니까." "역시나." "뭐, 아무튼 이유를 알게 되었다면 괜찮지? 네가 먹은 정력제의 효능으로 따져보자면 족히 3~4번의 사정 정도는 거뜬하다고 보여지니까." "아니. 이봐. 누님. 그런 약은 행군을 끝내고 먹이던가. 쉬었다가 또 다시 산길을 걸어가야 할 판국에 나에게 그만큼의 횟수를 사정하라고?" "안되는거야?" "그야 당연하지!" "하지만 너, 집에 있을땐 하루에 그 정도 자위하고 그랬잖아." "누나가 내 자위 횟수를 어떻게 알고 있는거야!!" "말했잖니. 친누나니까 모르는게 없다고." 귀엽게 한쪽 눈을 감으면서 윙크하며 말하는 누나였지만, 속은 시커먼 구렁이가 자리잡은 것이 분명하다. 약의 효능을 알아볼 겸, 그리고 재료도 확보할 겸, 덤으로 남동생도 놀려볼 겸 이렇게 쓰리 쿠션의 이득을 달성할 수 있는 이 좋은 계획을 누나가 놓칠리가 없었던 것이다. 누나와 이야기하는 사이에, 남에게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로도 이미 흥분의 극에 달한 성기가 갑자기 느닷없이 누나에게 정액을 내뿜기 시작한다. "어멋!" 쭈그려 앉고 있던 누나의 얼굴과 가슴, 그리고 다리에 흰색의 끈적한 정액들이 뿌려진다. 살짝 놀란 누나였지만, 이내 당황하지 않고서 자신의 몸에 묻어 있는 정액 중 가슴에 묻은 것을 손으로 훔치면서 작은 유리병에 흰고 끈적한 애액들을 담는다. 저 유리병을 보니 우리가 바다로 흘려보낸 유리병이 떠오르는군. "맛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먹지 마." "안 그런다니까." 굉장히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남자의 정액을 바라보고 있던 누나이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충고를 던져줬다. "하지만 이런 양으로는 부족한데." "...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 유리병이나 넘겨." "지금?" "나보고 행군 도중에 쓰러지라고 하는 소리야? 그거?" "뭐야. 네 정력이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였어? 실망이야." "이상한 쪽으로 실망하지 말라고. 그리고 실망이라면, 남동생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그런 위험천만한 약을 먹인 누나에게 더 실망했다고." "그러니까 대를 위해 소를 희생..." "도대체 어딜 봐서 대라는 거야." 나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인다. 옛날부터 마음먹은 그대로 실천하는 황소고집 성격의 누나지만, 하다못해 무언가 일처리를 하면 관계자나 주변인에게 한 마디 정도 통보해주는 습관을 길들여두는 편이 좋아 보인다. 매번 이런 식으로 말을 하지만, 정작 누나가 지킨 적은 단 한번도 없다는 게 문제가 될까. "어쨌든 미안. 누나." "뭐가?" "아무런 말도 없이 누나의 옷을 더럽혀서." "어머나. 그런 사소한 걸 신경쓰고 있었어?" 그래도 누나에게 말도 없이 정액을 뿌린 것에 대한 일은 내가 사과할 것이 마땅했으므로 순수하게 미안함을 표시한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쿨하게 넘기는 누나의 반응 덕분에 그래도 미안함이 덜해지지만. 누나가 다가오는 인기척 조차도 눈치채지 못한 나의 둔함을 탓하는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친누나에게 이런 추태를 보이고 싶진 않았는데. ============================ 작품 후기 ============================ 설날에 군산에 내려가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할 일이 없어서 벌써부터 걱정됩니다;; 피시방에서 밤을 지새야 하나... 아니면 친척형 만나러 갈지 고민됩니다. 고향에 가도 할 게 없다는 게 참 서글픈 현실로 다가오는군요. 어찌되었든, 다가오는 설날 명절을 생각하며 써본 39편이었습니다. Ps. 원고료 쿠폰 주신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안 보는 것 같으면서도, 매일매일 출석 체크하듯이 확인하며 여러분들의 과분한 사랑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흐규흐규 ㅜ_ㅜ Ps 2. 개그는 재미가 없어서 유머 코너는 폐지했습니다; 40화 누나의 어시스트(?) 덕분에 겨우 약을 먹은 만큼의 사정을 하게 된 나. 대략 4번정도 한 기분이다. 덕분에 정신은 혼미하고, 체력적으로는 금방 쓰러질듯한 기분이 물씬 퐁기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는 반대로 누나는 연신 싱글벙글 거리면서 작은 유리병에 담긴 정액들을 이리저리 흔들어보이며 말한다. "수고했어. 남동생. 다음번에도 잘 부탁해." "그 이상은 무리라니까." "그래도 모두를 위해서 힘내보렴." "도대체 그 정도의 양이면 얼마나 많은 해열제를 만들 수 있는건지나 좀 알려줘." 내 질문을 받은 누나가 잠깐 고심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이내 해맑게 웃으면서 말한다. "글쎄." "설마 모른다는 말은 안하겠지." "아, 정답이야." 뭐랄까. 예상할 수 있는 답변이었지만 허무하다고 보는게 좋겠다. 이것도 다 누나복이 없는 내 탓이지 뭐. 잔뜩 기운이 빠진 얼굴로 다시 행군을 제개한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느껴지지만, 그래도 여기서 퍼질 수는 없는 노릇. 뒤에서 다가온 노아 교수님이 걱정이 된 듯이 계속해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유에. 표정이 왜 그러니?" "... 잠깐 마녀에게 홀렸거든요." "마녀?" "네. 지독한 마녀요."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요녀에게 영혼까지 털린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몇시간동안의 강행군 끝에 드디어 도착한 새로운 베이스 캠프. 탁 트인 공터 한 가운데에 푸른 호수와 통나무 집이 자리잡고 있는 그림같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해변가도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시야가 좋은 장소. 꽤나 괜찮은 지역에 집을 골랐구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기 시작한다. "자, 도착이에요." 누나의 말에 모두가 통나무 집으로 향한다. 역시나 예상했던 것과 같이 크기는 우리 모두가 자기엔 약간 부족한 상황. 대충 집을 둘러보니, 침실방 하나와 부엌, 그리고 거실이 전부다. 말이 침실이지 사실은 그냥 넓지막한 공간일 뿐이고, 침구류가 모셔져 있는 장소일 뿐이다. 대충 4~5명 정도는 잘 수 있을만한 공간. 그렇다면 나머지는 거실에서 자면 되는건가. 거실 역시도 그다지 큰 편은 아니다. 식사를 하는 장소로도 겸용하고 있다보니 침실에 비해서 그리 큰 편은 아닌 장소. 그래도 거실까지 침실용으로 활용한다면 아마 3~4명 정도는 잘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거실쪽은 약간 개조가 많이 필요해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주변을 둘러본 다른 사람들도 침실과 거실을 둘러보더니 한마디씩 던진다. "제법 괜찮은 장소네." 유아 선배의 말에 누나가 선배를 뒤에서 팔짱을 끼며 말한다. "어때. 마음에 들었어?" "응. 그것보다도 놀라게 하지 마." "미안, 미안~" 선배는 개인적으로 이 장소가 마음에 든 모양인가 보다. 뭐, 우리들이 지금까지 살고 있었던 움막에 비하자면 훨씬 좋은 장소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웬만해선 통나무 집에 대한 만족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 증거로, 노아 교수님과 세리아, 그리고 무뚝뚝과 시크함의 상징인 아리아의 눈망울도 초롱초롱해진 상태에서 통나무 집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지 않은가. 잠깐 바깥으로 나온 뒤에 주변을 둘러본다. 화장실로 추정되는 작은 건축물이 있어 문을 열어보니... 정말로 화징실이다. 그래봤자 통나무 몇개 세워둔 것이 전부지만 말이다. 나머지 부속으로 딸려있는 시설들은 빨래널이가 될 만한 기둥과 식수, 식량 보관함 정도가 있다. 땅을 파서 최대한 상하는 것을 방지하게 위해 만든 식량 보관함은 우리나라의 옛 선조님께서 김치를 보관하기 위해 항아리를 땅에 묻은 방식과 흡사해보인다. 역시나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조상님들의 지혜는 현대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침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만세! 만세! 만만세! 아무튼, 식수도 바로 앞에 있고 근처에 엘리의 부모님께서 심어놓은듯한 과일 나무들(간이 과수원이라고 부드도록 하자)도 보이고. 어떤 의미로 상당히 풍족한 생활이 아닐수가 없다. 이런 식으로 휴양지 분위기를 만들어 놓으면 무인도에 정이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물론 휴양이라는 목적만을 놓고 보자면 굉장히 매력적인 생활일지도 모르지만, 배가 난파되고 낯선 섬에 표류되어 언제 구조될지 모르는 기약 없는 약속을 지니고 있는 상황이라면 별로 땡기지 않는 상황임에는 변함없는 사실이겠지만 말이다. 시설이 좋아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해서 이 섬에 머무를 생각은 없다. 최대한 빠르게 구조신호를 보내고, 그리고 구출된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전까지 우리들은 여기에서 계속 살아남아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더불어 식수와 식량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되고 자리를 잡게 된다면, 부가적으로 복지 문제도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 좀 더 편안한 생활과 안정된 먹거리 등, 좀 더 고심을 해봐야 할 여러가지가 존재한다. 각자 대충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집 내부를 구경하고 있는 와중에. "유에 선배." 어두컴컴해지는 하늘 아래 집 안에서 아리아가 나를 부르기 시작한다. "선배. 식사 준비 할테니까 들어오세요." "알았어. 곧 갈게." 오자마자 저녁식사에 여념이 없는 노아 교수님과 아리아. 교수님도 이제 제법 요리실력이 많이 상승했고(그래봤자 물고기 굽는 것과 과일 써는 것 뿐이지만), 세리아는 평범한 실력이었으니 그다지 불편한 것은 없었다. 게다가 요리에 필요한 부엌칼과 기타 식기 재료까지 다 있는 상황. 하지만 안타깝게도 미국인이었던 엘리의 가족분들이었기 때문에 젓가락은 없다. 한국 사람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식기재료이기도 하지만, 없는걸 어찌하랴.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미국 사람들에게 앞으로 젓가락을 휴대하고 다니도록 전국적으로 교육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냥 참도록 하자. 군대에서도 젓가락 없이 먹었는데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하지만 나와는 달리, 오랫동안 젓가락이라는 식기 도구와 친숙함을 다져왔던 다른 사람들은 어느정도 불편함을 느끼는 듯하다. "불편하네..." "그러게요." 이제와서 세삼 식기도구에 대한 불편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조금 모순된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그만큼 좀 더 복지적인 문제에 시선을 돌릴 정도로 우리들의 무인도 생활이 나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다. 긍정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좋겠지. 노아 교수님이 잘라놓은 메론 비슷한 과일을 먹는 선배가 젓가락이 없음을 불평하자, 아리아 역시도 공감한다는 듯이 받아친다. 하지만 엘리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포크락(포크와 숟가락의 합성물)으로 잘라놓은 과일을 야무지게 잘도 먹는다. 마치 햄스터가 양 볼을 빵빵하게 불린 채로 사료를 먹는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나름 귀여운 모습이다. 그렇다고 나는 로리콘이 아니다. 다시한번 못 박아두지만, 새겨두도록 하자. "어머, 잘 먹네. 엘리."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끄덕 흔드는 엘리. 그 모습을 보던 노아 교수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이제 우리들과 완벽하게 친해진 것일까. 처음 만났을때와 같은 살기를 뿜어내는 일은 이제 없었다. 뭐, 애초에 누나의 도움이 많이 컸지만. "자, 다 되었습니다!" 노아 교수님이 거실의 나무로 만들어진 탁자에 하나하나 먹을거리를 차려놓기 시작한다. 세리아는 포크와 나이프를 올려놓는 잔심부름을 도맡는다. 역시나 미국인들은 젓가락과 숟가락 대신에 나이프와 포크겠지. 이해한다. 다같이 잘 먹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간단하게 차려진 저녁식사를 시작한다. 의자 갯수도 부족한 탓에 몇몇만 의자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나머자는 거실에 앉아서 식사를 한다. 내일은 의자라도 만들어두던가 해야겠다. ============================ 작품 후기 ============================ 오늘따라 건강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일단 잠을 자고 오겠습니다;; 잠이 보약이라고 하니까요. 자정 이전에 일어나면, 평소와 같은 시간대에 다음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일어나지 못하면, 다음 편이 안 올라갈수도 있습니다. 우선 잠 좀 푹 자다 오겠습니다 ㅡ_ㅡ; 41화 EP 7. 등짝을 보자. 평온한 아침. 그리고 잔잔한 일상의 시작. 조용하게 시작된 무인도의 하루는 오늘도 활기차고, 그리고 눈부시다. 마치 여성의 아름다운 머릿결을 보는 것처럼. 마치 비단의 다양한 무늬를 보는 것처럼. 마치... 음... 이하 생략. 오늘따라 왜 이리 표현력이 하늘 무서운줄 모르고 다양해졌냐 하고 물으신다면 대답해드리는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포켓몬스터에 나온 명대사다 기억해두도록 하자. 다시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오늘따라 내가 왜 이렇게 하이텐션인지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움막의 음습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통나무라는 보다 체계적이고 안전한 거처로 옮겼다는 사실 하나를 꼽을 수 있겠다. 정말 사소한 일이지만, 나나 다른 여자들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일단 비나 바람 같은 자연환경에서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 마련된 셈 아닌가. 이런 점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안전하다'라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래서 자주 CF에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을 넣나보다. 참고로 엄밀하게 따져보자면 우리들의 집은 아니다. 잠깐 임대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물론 임대료는 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돈이 없는 가난한 학생이니까. 그리고 현금이 통용되지 않는 장소이기도 하잖아. 아침에 일어나서 햇살을 맞이하며 아침식사를 한다. 오늘의 당번은 누나와 유아 선배. 어머니를 따라 자주 요리를 하곤 하는 누나였기 때문에 초기의 노아 교수님처럼 요리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는다. 나도 자주 누나의 요리를 먹곤 했으니까 말이다. 간략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일단 모인 우리들. 유난히 잠이 많은 타입으로 보이는 엘리는 이른 아침에 일어난 것이 불만인 모양인지 누나의 허리에 딱 달라붙어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원래부터 무인도에서는 규칙적인 생활 이런 규율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굳이 엘리를 깨울 필요는 없다. 자세한 설명은 누나한테 들으면 되니까 상관없겠지. "일단 새로운 숙소로 오게 되었으니까 가장 중요한게 뭔지 다들 알죠?"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아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먼저 이 집에 대한 증축이겠죠?" "음. 맞는 말이긴 하지만, 집에 대한 것은 머무는데 지장은 아직까지 없으니까 놔두기로 하자.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음식하고 생활도구 이런거니까. 그렇지?" 말을 마치고 손으로 의자를 가리킨다. 여기에 놓인 의자의 갯수는 총 3개. 하지만 우리들은 7명이다. 원래 생활하고 있던 누나와 엘리, 그리고 어제부로 합류하게 된 나와 노아 교수님. 유아 선배, 아리아, 세리아. 이렇게 7명이 생활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최소 물품은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중요한건 식량. 본래 3명 안팎으로의 식량을 비축하고 있는 엘리네였기 때문에 그 숫자의 2배가량 불어난 7명이 먹고 버티기에는 비축분의 식량이 턱없이 부족한게 사실이다. 그래서 가구 제조 말고도 식량의 확보, 그리고 식수 조달. 이 3가지가 오늘의 할 일이 되는 것이다. 대략적으로 내 생각을 듣고 있던 노아 교수님이 손을 들며 말한다. "그럼 역할 분담을 하면 되는거니?" "네." "그 점에 대해서 내가 생각해본 엔트리가 있는데. 말해도 될까?" 누나의 말이었다. 의외로 세심하고 꼼꼼한 누나였기 때문에 벌써부터 역할 분담에 대한 인원 배정을 끝낸듯 하다. 나도 누나의 성격을 조금 닮았으면 좋으련만. 그렇다고 장난끼 넘치는 성격까지 닮고싶은 마음은 없다. 누나는 누나고, 나는 나니까. "말해봐." "우선 가구 제조는 유에하고 노아 교수님이 맡고, 식량 조달은 유아와 나, 엘리. 마지막으로 아리아와 세리아는 점심 준비를 하는거야. 어때?" "식수 조달은?" "먹을 물은 어차피 바로 앞이 호수니까 금방 떠오면 상관 없겠지." "식량 조달은 어디서 할 예정인데?" "어제 잠깐 봤지? 근처에 있는 간이 과수원. 거기서 과일을 몇개 따고, 그리고 이 공터에는 없지만 밭이 하나 있어. 거기서 고구마나 감자같은 것을 캐오면 돼." 이건 조금 의외의 말이었다. 설마 고구마나 감자가 있을줄이야. 누나의 말대로 그런 식량이 있다면 상당한 희소식이다. 충분히 배를 불릴 수 있기도 하고, 오랫동안 ㅤㅆㅓㄲ지도 않으니까 지금 우리들의 상황에선 최적의 식량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과일이나 물고기 보다는 훨씬 나은 편 아닌가. "고구마나 감자가 자라는구나. 여기." 유아 선배가 세삼 놀랐다는 듯이 말한다. 과일 열매나 물고기 사냥밖에 식량 조달의 수단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우리들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로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선배의 말에 누나가 윙크를 하며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한다. "그럼. 정성스럽게 키운 밭인걸. 당연하지." "마치 누나가 키웠다는 듯이 말하는데." "일단 명목상으론 상속자니까." "엘리잖아. 그거." "그렇다면 법정 대리인. 엘리는 미성년자니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지 원." 누나의 언어유희를 뒤로하고, 우리들은 각자의 위치로 자신들이 할 일을 찾아 움직이기로 했다. 식량 담당을 맡은 유아 선배 팀은 우선 간이 과수원으로 향했고, 나와 노아 교수님은 일단 나무 재료를 구하기로 하고 숲속으로 향하기로 한다. 누나에게 받은 톱을 들고 숲속으로 향하는 우리.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숲속 안쪽은 약간 어두컴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나무의 우거짐이 햇살을 가리고 있는 탓일까. 노아 교수님이 어느새 내 곁으로 바짝 붙어서 걷기 시작한건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혹시 교수님. 무서우세요?" "그, 그럴리가 없잖니."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답하는걸 보아하니 내가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연하에게, 게다가 자신과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제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듯이 애써 강한척 하는 교수님이 묘하게 귀여워보인다. 워낙 얼굴도 예쁜 교수님이다보니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애교있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콩깍지가 씌워진 것도 아니고, 교수님 팬도 아니었지만, 무인도에 오고 나서 교수님에 대한 솔직 담백한 모습을 하나 둘 씩 발견할수록 교수님의 매력도가 매우 상승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은근슬쩍 교수님의 손을 잡아준다. 약간 무서워하던 교수님이 화들짝 놀라면서 이내 얼굴을 붉히며 말한다. "유, 유에. 이거..." "무서우시면 제 손을 잡아도 되요." "무서운거 아니라니까..." 잔뜩 주늑이 든 교수님이 약하게 부정해본다. 그러나 이미 다 들통난 사실. 교수님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마음편히 웃어보인다. "미안해. 무인도에 오고 나서부터 계속 너에게 의존하는거 같아서." "괜찮아요. 교수님. 여자잖아요. 여자를 지키는건 남자의 의무니까요."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은 듬직하게 느껴져." 화사한 미소와 함께 교수님이 나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역시 귀엽다. 연상이라 그런가. 평소에 교수님이 이렇게 귀여운 여자였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조금은 강의 시간 때 말을 잘 들을걸 그랬다. 레포트 제출이나 발표 수업도 적극적으로 임할걸. 일단 적당한 나무를 골라서 그 자리에 멈춰선 우리. 톱을 꺼낸 뒤에 나무 위로 올라가서 큰 가지를 하나 배기 시작한다. 아래에 교수님이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괜찮니? 유에." "걱정하지 마세요. 그것보다도 교수님. 가지 아래에 있으면 위험하니까 멀리 떨어저 계세요." "응. 알았어." 내 말을 곧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교수님이 종종걸음으로 뒷걸음을 친다. 그와 동시에 우수수 한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가지. 나무에서 폴짝 뛰어내린 나는 그 자리에서 잔가지를 다시 잘라내고 적당한 크기로 나무를 자르기 시작한다. 흥부와 놀부가 톱으로 박을 썰 때의 기분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니지. 절대로 같은 기분이 아니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흥부와 놀부는 박을 배면 보물이 나오지만, 나는 나무를 배어봤자 아무것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보물은 아니지만 의지는 만들 수 있지 않은가. 다시 기운차게 톱을 썰고, 썰고, 또 썬다. 평소에 주입식 교육 탓에 체육이라는 과목을 기피하게 된 현대 대학생의 저질 체력이 갑작스럽게 원망하고 싶어지는 기분이 든다. 이미 땀으로 흠뻑 범벅이 되어버린 탓에 어쩔 수 없이 상의를 탈의한다. 가뜩이나 옷도 부족한데, 괜히 땀에 적셔서 갈아입을 옷도 없이 맨 몸으로 잠에 들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저, 저기." 교수님이 약간 당황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설마 탈의했다는 사실 덕분에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일단 자연스럽게 나름 영업용 미소를 지으면서 교수님의 말에 답을 하도록 하자. "네. 교수님." "갑자기 옷은 왜 벗니...?" 약간 상기된 얼굴로 묻는 교수님이었다. ============================ 작품 후기 ============================ 잠을 자고 나니까 좀 나아졌습니다. 푹 자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눈이 떠져버렸습니다; 그나마 좀 살만 하군요. 여러분들도 모두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ㅡ_ㅡ; PS. 오늘이 확밀아 합요일입니다! 42화 "옷이 땀에 젖을까봐요." "그, 그러니?" 간략한 설명이었지만, 교수님의 시선은 차마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그렇게나 부끄러운 일인가. 성기를 노출한 것도 아닌데, 유난히 교수님의 반응이 과다표현 된다고 생각이 든다. 수영장에 가도 남자는 팬티 하나만 걸치지 않는가. 뭐, 정도를 넘어선 노출이라고 생각이 되진 않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다시 톱을 들고 나무를 열심히 썰어내는 작업을 재개한다. 교수님은 주변에 장작으로 쓸만한 마른 나뭇가지들을 수집중. 참고로 이 무인도에 흘러들어올때 입고 있던 타이트한 정장은 잠시 벗어두고, 교수님은 통나무 집에서 공수해온 평상복을 입고 있는 상황이다. 누나가 입고 있는 핫팬츠 수준의 노출도를 자랑하는건 아니지만, 여성의 아찔한 각선미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스키니 진의 타입인지라 교수님의 풍만한 둔부가 허리를 숙여 나뭇가지를 주울때마다 눈에 확 들어온다. 톱으로 작업을 하는 척 하면서 교수님의 뒷태를 감상하는 일.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일석이조 아닌가. 아, 저 커다란 엉덩이에 하루라도 빨리 내 아랫도리에 있는 녀석을 넣을 날이 왔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대놓고 했다간 제아무리 성격이 좋고 온화한 교수님이라도 화내겠지. 무인도에 있다고 해도 교수님인데, 제자가 가서 '교수님. 저랑 섹스 한번만 해주세요!'라고 말할수도 없지 않는가. 뭐... 솔직히 말하자면 키스까지는 했지만. 안 된다. 다시 재정신으로 돌아오자. 작업에 열중해야지, 괜히 여체에 홀려서 반(反) 인륜적인 생각만 하면 그것이 어디 제자로서의 도리인가. 교수님과 제자의 선을 지켜야 하는 것이 도리이거늘... 이라고 해봤자 역시나 저 아찔한 몸매는 버틸수가 없다. 나도 남자라고. 제길. 톱이 제대로 나무를 썰고 있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재정신은 거의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상태로 진행된 작업. 무의식중에 그나마 제대로 썬 나무 판자들을 몇개 확보해놓은 나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교수님을 부르기로 한다. "노아 교수님. 잠시 쉬었다가 하시는게 어때요?" "응. 알았어. 이것만 줍고 갈게." 먼발치에서 교수님의 아리따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근처에 그늘이 될만한 장소를 찾아 앉은 나. 내 옆으로 교수님도 나란히 와서 무릎을 꿇고 앉으며 손수건으로 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기 시작한다. "수고했어. 유에." "아니에요. 교수님도 고생하셨는걸요 뭘." "그러니?" "하지만 이제 겨우 아침에 할 일이 끝났을 뿐이잖아요? 계속 힘내야죠. 점심에도 계속해야 하니까." "해가 저물기 전까지는 최대한 작업을 많이 해두는 편이 좋겠구나." "그런 셈이죠." 라고 말하면서 은근슬쩍 교수님을 쳐다본다. 무릎을 꿇고 앉은 탓에 허벅지와 종아리가 겹쳐진 자태. 스키니 진이 터질듯이 타이트하게 교수님의 다리를 조여오는 저 곡선미는 정말 성욕에 따따블 성욕을 얹을 만큼의 강력한 파괴력을 자랑한다. 게다가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탓에 시원스런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난다. 한 손에 다 움켜쥐어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가슴. 그리고 연상으로서의 색기 넘치는 분위기까지. 누나가 나에게 먹였던 약의 효능이 아직까지 지속되는 것인가. 오늘따라 왜 이리 교수님이 섹시하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유에. 괜찮니?" "네?! 아... 저요?" 계속 교수님을 쳐다보고 있던 것이 들키기라도 했나.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묻는 교수님이 걱정된다는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오며 말한다. "안색이 안좋아보여. 어디 다치기라도 한거 아니니?" "아, 아니에요." 교수님. 그 이상 다가오면 정말 위험하다고요. 가뜩이나 지금 교수님을 강제로 덮쳐버리고 싶은 충동이 마구마구 솟구치는데 오히려 교수님 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에게 다가오면 참을수가 없을 정도로 버티기가 힘들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 긴 대사를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느새 나에게 바짝 다가온 교수님이 자신의 이마와 내 이마를 맞대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열이 있나 측정해보는 것인가. 눈을 감은 교수님의 숨결이 바로 코 앞까지 닿을 지경이다. 땀을 흘린 여성의 페로몬 향수가 물씬 풍기는 상황. 아까부터 아랫도리의 녀석은 잔뜩 팽창된지 오래다. 교수님이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지, 텐트를 치고 있는 녀석은 '빨리 노아 교수님을 덮쳐!'라고 나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좀 절제하라고. 아랫도리 녀석아. 나는 너를 그런 식으로 키운 적이 없단 말이다. 이런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오히려 매력적인 미소로 화답하면서 나에게 말한다. "열은 없는거 같은데. 다행이야." "... 교수님." "왜 그러니? 유에. 역시 열이 있는거니?" "아니요. 열은 없는데 다른 쪽에 문제가..." "다른 쪽이라니... 어머!!" 잔뜩 성을 내고 있는 성기의 윤곽을 확인한 교수님이 놀라셨는지 잠시 뒤로 물러선다. 아까보다 배로 빨개지는 얼굴. 물론 나 역시도 창피한지라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바지 아래에서 커져버린 남근은 하루라도 빨리 바깥으로 노출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제는 교수님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이다. 한동안 내 아랫도리에 시선이 꽂혀있던 교수님이 힐끗 나를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흥분... 된거니?" "아마도요..." 나도 모르게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사실 좀 민망하지 않은가. 여성에게 당당하게 '나, 너 때문에 흥분해버렸어. 에헷.'이라고 대놓고 말할수 없는 노릇이니까. 교수님의 시선이 유난히도 따갑다. 질책하는 시선인 것일까. 하긴. 교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자신을 욕정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발기된 남자아이를 좋아할리가 없다. 나라고 해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교수님은 오죽하겠나. 하지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교수님의 답변은 상당히 어긋나는 부분이 많았다. "내가... 도와주면 되니?" "네?!" "그, 그러니까... 남자는 흥분하면 사정하고 나서는 괜찮아지다고 하잖니. 그러니까 내가 도와주면 될거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무인도 파워인가. 그렇게나 얌전한 교수님이 스스로 이런 말을 꺼낼줄이야. 사실 베이스 캠프를 이전하기 전까지 교수님과의 애정행각을 많이 벌여왔던 것은 사실이다. 교수님과 키스를 하거나, 키스를 하거나, 키스를 하거나... 생각해보니까 키스 이상으로 진도가 나간 적은 없구나. 여하튼. 거의 대부분 내가 교수님의 몸을 원해서 저지른 일이기도 하고, 교수님이 스스로 나에게 자신의 몸을 바치거나 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바는 드물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예전의 것들보다도 다르다. 오히려 교수님이 리드를 하는듯한 기분마저 드는 것이다. 얌전하고 청순한 교수님이 자신이 도와주겠다는 말을 할 줄이야. "교수님. 그 말 뜻. 설마..." "부, 부끄러우니까 자세히 말하지는 말아주렴. 부탁이니까." "... 그럼." 서서히 벨트를 풀고 발기된 상태의 남근을 꺼낸다. 약의 효능을 빌린 때보다는 아니지만 엄청나게 커진 상태. 족히 20cm는 될 정도라고 예상되어지는 크기다. 재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까지 될 거라고 착각이 들 정도로 커다랗게 된 것이다. 대낮에 자신이 데리고 있는 남자 제자의 성기를 바라보는 교수님의 눈은 여성의 본능을 띄우고 있는 그런 눈과도 비슷하게 바뀌어가고 있다. 이거 잘하면... 혹시 교수님과 잘하면 지금 이 순간. 제자와 교수라는 사회적인 관계를 벗어나서 섹스라는 남자와 여자의 본능적인 관계에 돌입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저절로 들기 시작한다. ============================ 작품 후기 ============================ 원고료 쿠폰 22개 주신 분과 8개 주신 분, 4개 주신 분, 그리고 한개씩 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쿠폰 주신 분들의 아이디가 옆에 뜨는 기능이라도 있다면, 무슨 무슨 에피소드를 써달라고 저에게 말씀해주시는 분에 한해서 소재를 활용해 별도로 에피소드를 쓸 수 있는 이벤트 같은 것을 하고 싶지만... 조아라에서 그런 기능을 제공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ㅜ_ㅜ 여하튼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할 대사이긴 하지만, 설날 연휴 건강히 보내시기 바랍니다! 만수무강하세요! 복 받으실겁니다! 알라뷰! 43화 내 앞에 있는 노아 교수님의 어깨를 살포시 잡는다. 순간 약간 움찔거리는 노아 교수님. 하지만 이내 다시 표정을 잡고서 내 손길을 따라 서서히 안겨오기 시작한다. 자리에서 일어선 채 안겨오는 교수님. 잔뜩 발기된 성기는 교수님의 사타구니 안쪽으로 파고들고, 교수님의 커다란 유방은 내 가슴 위에 보기좋게 뭉개진다. "......" 서로 말없이 바라보는 우리. 나를 올려다보는 교수님이 살며시 눈을 감는다. 이 표시가 키스를 허락하는 뜻임을 이제 알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선 나는 거침없이 교수님의 핑크빛 입술을 덮쳐가기 시작한다. "으음..." 낮게 신음을 내뱉으며 남자의 혀를 받아들이는 교수님. 부드러운 입술의 촉감은 세상에서 존재하는 어느 달콤한 초콜렛 보다도 더 끈적하고 맛있는 맛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혀와 혀의 얽힘이 교수님의 입 안에서 벌어진다. 타액과 타액의 교환. 내 혀가 교수님의 혀를 능욕하기도 하고, 교수님은 수(受)의 입장에서 남자의 거친 혀의 놀림을 받아내고 있다. 유아 선배 때와 마찬가지지만, 같은 연상의 여자라고 해도 선배와의 경우와는 차원이 다르다. 선배와 나의 나이 차이는 기껏해야 1살 차이. 그러나 20대 후반이기도 한 노아 교수님은 나와 5살 가까이 차이가 난다. 나이 차이에 대해선 개인적으로 기준이 다르게 설 수 있기 때문에 사회의 신분을 통해서 비교해보자면. 나는 학생이고, 교수님은 직장에 다니고 있는 성인 여성이다. 성숙미로 따지자면 교수님 쪽이 훨씬 더 사회 경험도 풍부하고, 지식이나 그런 면이 사회 초년생인 나보다도 더 많을거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여성이 내 품에 안겨오며 여리디 여린 모습을 보여주니 이것도 나름 보호본능을 자극한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괜찮은 느낌이다. 싫지만은 않다고 본다. 왼손을 아래로 이동시켜 교수님의 허리를 슬며시 쓸어내리고 이내 아래쪽의 탄력적인 엉덩이를 어루만진다. 한쪽의 엉덩이 살이 왼손바닥 안에 다 들어올 정도로 작은 엉덩이. 그러나 몸의 전체적인 비율에 의하자면 그리 작은 엉덩이도 아니다. 남자를 유혹하는 여성의 완벽한 신체조건이라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아짤한 둔부의 촉감은 점점 내 성욕을 더욱더 자극시켜나가고 있었다. 스키니진 위로 동그란 엉덩이를 거칠게 쓰다듬기 시작한다. 그러자 교수님이 점점 내게 더 안겨오며 신음소리의 강도를 높여간다.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내 품 안에서 빨개진 얼굴로 신음소리를 내뱉는 교수님. 평소에는 그저 좀 예쁜 여성이라고 생각했던 노아 교수님인데, 지금은 그저 내 성욕을 달래주기 위한 여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교수님의 바지를 살짝 내린다. 엉덩이만 노출되는 수준까지 바지를 내린 뒤에 깊은 계곡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순간, 교수님의 짧고 강한 신음소리와 함께 완벽하게 내게 기대어오기 시작한다. "흐읏!" 짧고 강한 여성의 교태 어린 신음. "교수님. 꽤나 많이 젖으셨네요." "... 말하지 마... 창피해."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교수님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품에 쏙 들어오는 교수님. 원래부터 노아 교수님이 이리도 연약해보였던 것일까. 다시 한번 교수님의 입에 키스를 퍼붓기 시작한다. 그리고 연이어 다른 한 손으로 교수님의 티를 위로 올려 거대한 유방을 바깥으로 노출시킨다. 속옷은 브래지어, 그리고 팬티 둘 다 입지 않은 상황. 무인도에 오고 나서 속옷의 갯수가 심히 부족하기 때문에 이렇게 땀을 많이 흘리는 작업에는 속옷을 착용하지 않는다. 핑크빛 유두가 고개를 든 채 서있다. 오른손으로 유두를 만지작거리자, 교수님의 몸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설마 여기가 성감대인가. 얼굴을 내려 교수님의 다른쪽 가슴을 입으로 베어 물자, 교수님의 허리가 활처럼 휘면서 크게 신음을 내뱉는다. "으흥!!" 내 머리를 감싸면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몸을 밀어 붙이는 교수님. 그녀의 땀냄새가 여성의 페로몬 향수로 변하며 수컷의 성욕을 자극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교수님의 질 입구에 아까부터 발기된 채 부드러운 여체의 허벅자 사이에 둘러쌓여있던 내 성기는 지금이라도 당장 교수님의 몸 안으로 들어가서 난리를 피우고 싶다는 듯이 껄떡인다. 금방이라도 사정을 할 기세여서 교수님의 몸을 만지는 것은 잠시 미뤄두고, 나무기둥 반대편으로 교수님에게 손을 댄 채 허리를 숙이게 만든다. "유, 유에. 이거..." "후배위에요.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 부끄러워..." 나를 향해 엉덩이를 뺀 채 서있는 교수님. 제대로 벗지 않은 바지 위에 드러난 사타구니는 흥분의 상징인 번들거리는 애액으로 젖어있었고, 남자의 성기를 지금 당장이라도 받아들이고 싶다는 듯이 씰룩거리고 있었다. 내 성기를 질 입구에 갔다놓으며 교수님의 가느다란 양 허리를 손으로 잡고서 자세를 잡는다. 그리고 있는 힘껏 성기를 교수님 몸 안쪽으로 찔러넣는다. "... 아악...!!!"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비명소리를 내지르는 교수님. 비록 내가 많은 여자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유 경험자라고 해도 남자의 성기를 받아들이는 일은 여성의 입장에서는 만만치 않은 일인가보다. 내가 여자가 아닌지라 그 기분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지금의 교수님의 반응을 보아서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그런 기분이다. 허리를 다시 뒤로 뺐다가 질 입구까지 그대로 또 박아넣는다. 내 움직임에 따라 교수님의 허리가 크게 휘면서 나무 기둥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한 채 울부짖기 시작한다. 한창 그렇게 성욕에 지배당한 채 허리를 움직이는 나와 달리, 교수님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히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교수님이 약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허리의 움직임을 멈출수가 없다. 본능대로 움직이는 수컷의 성교 행위. 노아 교수님의 비명섞인 신음소리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녀의 허리를 잡고서 피스톤 운동을 시작한다. 점점 더 그럴수록, 교수님의 여성기는 내 남근을 조여오고 있음이 확연하게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질퍽질퍽한 살과 살의 마찰음이 숲속에서 울려 퍼진다. 야외 플레이도 아니고. 어차피 지나가는 사람이라곤 없으니까 그다지 신경쓰지 않지만, 전방으로 노출된 이 대자연에서 교수님과 섹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더 흥분도를 올리기에 충분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후배위 상태에서 교수님의 가슴을 움켜쥔다. 아까보다 배로 커진 유두는 남자의 손길을 받자마자 더더욱 딱딱해지고 있었다. 계속되는 성교. 교수님의 입구에 내 성기가 들락날락한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희고 고운 엉덩이 살이 내 움직임에 맞춰서 음란하게 흔들리고 있다. 교수님의 긴 흑발은 아래로 흘러내린 채 가슴과 함께 출렁이며 더더울 야한 몸짓을 연출하고 있다. 내가 교수님을 정복했다 라는 지배욕이 강하게 몰려온다. 나보다 연상인 성인 여성을, 그것도 교수님을 내가 정복한 것이다. 교수님은 이제 겨우 내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흔들면서 암캐로서의 본능을 깨우며 비음섞인 신음소리만을 낼 뿐이다. 점점 더 대담해지는 교수님의 허리놀림. 커다란 엉덩이가 남자를 유혹하듯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교수님의 조임이 상당히 강해진다. 마치 남근을 잘라버릴듯한 기세로 조여오는 교수님의 몸 안. 예상치 못한 조임에 나도 모르게 사정의 타이밍이 옴을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교수님! 슬슬 나올 거 같아요." "아, 안에다 싸면.. 안 돼...!" 아직도 그 날인 것일까. 제아무리 나라고 해도 교수님을 임신시키고 싶지는 않다. 가뜩이나 무인도라는 각박한 상황에서 임신을 해버린다면 다른 사람들을 무슨 얼굴로 봐야하는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사자인 교수님을 쳐다볼 도리가 없다. 거의 사정 직전에 교수님의 몸 안에서 성기를 뺀 나는 그대로 노아 교수님의 엉덩이에 정액을 뿌린다. "윽!" 성기의 뿌리 끝까지 쥐고서 흔들자, 벌컥벌컥 쏟아지는 끈적한 정액들이 교수님의 몸 이곳 저곳에 뿌려진다. 성기를 몸 안에서 빼내자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교수님이 엉덩이를 위로 치켜올린 채 그대로 쓰러지고 만다. 아직까지 씰룩거리는 질 입구. 허벅지는 이미 교수님과 나의 애액으로 범벅이 되어 바지까지 흠뻑 젖어버리고 말았다. 흰색의 스키니진이 얼룩이 새겨질 정도로 많은 양의 애액을 내뿜어낸 교수님. 그녀와의 섹스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교수님이 꽤나 양이 많은 편이구나 라는 사실은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교수님을 내 품으로 끌어들인다. 얌전히 안겨오는 교수님의 입술위에 다시금 내 입술을 포개며 섹스의 마무리로 키스를 한다. 교수님 역시도 힘겨워 보이긴 하지만, 내 키스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정말 노아 교수님은 최고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이런 예쁜 교수님을 지금까지 몰라보았다니. 여자를 보는 안목도 참 없나보다. 나란 녀석은 말이다. 무인도에서 나가게 된다면, 교수님 과목은 꼭 수강해야지. ============================ 작품 후기 ============================ 즐거운 메리 설날입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이 뒤섞여버린 안타까운 3일 연휴 콤보지만, 그래도 몸도 마음도 푹 쉬길 바랍니다! Ps. 쿠폰 감사합니다! 전편에도 감개무량을 표현했는데, 보시자마자 원고료를 대량으로 투여하신 분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 부디 설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ㅜ_ㅜ 44화 격렬한 섹스의 여파였을까. 교수님의 바지가 젖어버린 관계로 본의아니게 노아 교수님은 하체를 탈의한 채 잠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격렬하게 나와 몸을 섞었던지라 애초에 움직일 힘조차 없었는지 내 옷으로 사타구니 부군의 비밀스러운 곳만을 가린 교수님이 쭈그려앉은 채 내가 작업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계신다. 열정적인 섹스를 마친 뒤에 대략 30분 정도가 흐른 지금. 그래도 계속해서 교수님과 누워있을수는 없는 관계로 하던 작업을 다시 재개하기 시작한다. 교수님의 바지는 나뭇가지 위에 올려둔 상황. 다른 색도 아니고 흰색이었기 때문에 유난히도 애액의 얼룩이 티가 확연하게 난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는 말은 이럴때 쓰는 것일까. 몸을 섞을 당시에는 쾌락으로 인해 앞뒤 생각 안할 정도로 좋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감이 밀려온다. 차라리 교수님의 바지를 다 벗기고 나서 섹스를 할걸 그랬나보다. 아직까지도 숨을 몰아쉬는 교수님이 열심히 톱질중인 내 모습을 보더니 존경스럽다는 듯이 말한다. "대단하구나. 유에." "저요?" "응."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할까. 의아한 표정으로 교수님에게 다시 되묻는 나. "왜 뜬금없이 그런 말을 하세요?" "아니. 그, 그러니까..." 약간 우물쭈물해하며 말을 더듬던 노아 교수님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기어코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 세, 섹스... 하고 나서도 일을 잘 하는구나 해서..." "아. 그거군요." "피곤하지 않니?" "피곤하기야 하지만, 그렇다고 일을 그르칠 수는 없잖아요." "역시 20대 남자 답구나. 이 교수님은 도저히 체력적으로 못버티겠어." "교수님도 젊으신걸요. 방금 전 섹스는 좋았어요.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들에 비해서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로요." "어머머. 창피하게 그런 말을..."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을 양 손으로 가리면서 부끄러워하는 노아 교수님. 캬~ 역시 귀엽다. 연상이지만 정말 귀엽다. 지금 당장 가서 또다시 교수님을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물론 안아준다는 의미가 단순한 포옹만을 의미하는건 아니라는 사실은 당연지사이지 않은가. 그래도 부끄러워하는 한편, 유아 선배와의 섹스에 대한 것이 궁금한지 교수님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묻기 시작한다. "다른 여자랑 한 적이 있었니? ... 어떤 식으로 했니?" "궁금하세요?" "따, 딱히 궁금한건 아니고... 그냥... 하는것도 없고 심심해서..."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말을 더듬는 교수님이 부정 아닌 부정을 해본다. 은근히 노아 교수님을 놀리는 것도 재미있는걸. 잘못하다가 'S'기질이 발동될수도 있겠다. "글쎄요. 사실 여자 경험은 없다시피 해요. 그냥 해본 친구들에게 이것저것 조언 비스무리하게 들은 적이 있어서요. 여자들은 처음 할 땐 아프다는 말 같은 거 정도?" "그렇구나. 처음은 아프지. 그 고통, 나도 이해해." "교수님은 어떤 사람에게 처녀를 줬나요?" "나?" "연애 경험이 있었다고 하니까 궁금해서요." 내 말에 교수님이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프라이버시를 너무 많이 침해한 것인가. 아무리 내가 교수님과 관계를 가졌다고 해도 과거의 일에 대해서 일일히 캐묻는 것은 엄연한 실례의 행동이 되지 않을까 라는 후회감이 뒤늦게 밀려온다. 그러나 교수님이 들려준 대답은 예상 외였다. "난... 남자한테 처녀를 준 게 아니야." "설마 동물하고?" "그, 그럴리가 없잖니!!" 빨개진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치는 교수님. 설마 했는데 역시나 아닌가보다. 하긴, 동물이랑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면 말을 들은 이쪽은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좋을지 난처하니까 말이다. "그럼 어떤 식으로 처녀를 빼앗기게 되었나요." 빼앗기다니. 말이 조금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생략하도록 하자. 질문을 받은 교수님이 아주 딱딱한 미소로 말한다. "사실 자위하다가... 그랬어." "자위요?" "응..." 교수님이 자위라니. 청순한 이미지에 세상물정 하나 모를듯한 온실속의 화초, 노아 교수님이 자위행위라니. 아무래도 상상이 안간다. 머릿속의 비디오 테이프를 아무리 재생시켜봐도 모자이크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한마디로 내 두뇌의 한계 범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장면이라는 뜻이다. 여러모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노아라는 교수님 말이다. 아니지. 이건 어떤 의미로 편견 아닌가. 교수님도 성인이니까. 다 할건 하는 나이니까.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하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청순해보여도, 사실 할 건 다 하는 사람이었다니. 이거, 교수님을 놀릴만한 재료가 또 늘어난 기분이다. 일단 간단하게 의자를 만들 수 있을만한 나무 판자를 몇개 잘라온 뒤에 캠프로 돌아온 나와 노아 교수님. 아직까지도 바지에 얼룩이 지워지지 않은 상황인지라 교수님은 티셔츠를 최대한 아래로 끌어내리며 얼룩 부분을 가리기에 바쁜 상황이었다. 최대한 남들에게 들키지 않게 집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으려 했지만, 공교롭게도 딱 걸린 인물이 있었다. "...?" 과일 한 조각을 아작아작 먹고 있던 엘리와 마주친 것이다. "... where you going?" 뭔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무표정의 시선으로 나를 지긋이 올려다보는 작은 체구의 소녀. "아, 그러니까..." 당황한 교수님이 최대한 엘리를 피해 집 안으로 들어갈까 했지만, 엘리의 손가락이 느닷없이 교수님의 엉덩이를 쿡쿡 찌른다. 화들짝 놀란 교수님. 일부러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엘리가 가리킨 곳은 바로 교수님의 애액과 내 정액이 만들어낸 얼룩부분이었다. 오른쪽 엉덩이살 부근에 있는 얼룩을 발견한 엘리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보고 있었다. 영어로 ㅤㅆㅘㄹ라ㅤㅆㅘㄹ라. 내가 들을 수 있는 영어 단어는 한계가 금방 드러난다. 외국어 영역에서도 4~5등급 정도의 수준을 왔다갔다 거리는 나였기 때문에 이 정도가 한계다. 엘리의 말을 한마디로 풀어보자면, '왜. 얼룩이. 이 곳에. 무슨. 이유로. why?'라고 해석할 수 있다. 나름 굉장한 해석능력이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수학능력평가시험 외국어 영역 5등급의 위엄이다. 오늘의 결론. 한국말을 사랑하자. 세종대왕 님. 사랑합니다. 나와는 다르게 엘리의 말을 전부 다 알아들었는지 교수님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영어로 대답을 한다. 역시나 대학에서 일하는 고 학력자의 대표 선두주자 교수님. 영어까지 잘한다. 아무튼 엘리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선 집 안으로 들어가는 교수님. 그런데 엘리가 있다는 소리는 유아 선배와 누나도 와 있다는 말 아닌가. 어딘가에 있겠지 하면서 나는 바깥에 숲에서 가져온 나무판자들을 늘어놓는다. 약간 크기가 작을지도 모르지만, 이걸로 7명 분의 의자를 만들 수 있다. 여유분의 판자까지 가져왔으니까, 내일 작업하면 그만이다. 이런 노가다는 고등학생이란 신분을 유지했을 무렵, 기술 가정 시간의 실습 때와 군대에서 공병 작업으로 불려나가고 한번 하고서 거의 안해봤는데, 그래도 나름 군대 생활의 노하우를 발휘하며 천천히 가구 제조의 경험을 키워나간다. 온라인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레벨이 오를수록 스킬 레벨도 오른다는 그런 느낌? 대략 그렇다고 보면 된다. 기지개를 펴면서 뻐근한 몸을 풀고 있을 무렵, 아리아와 세리아가 나를 발견하더니 다가오기 시작한다. "다녀 오셨어요? 선배." "어. 너희도 나름 열심히 했나보네." "저녁 식사 준비하고 있었으니까요." 아리아의 말에 세리아도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한다. 어딘지 모르게 노아 교수님과 약간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신비로운 소녀같은 느낌의 세리아. 말을 하진 못하지만, 그녀의 표정 하나로도 그녀가 나에게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충분히 전달되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뜻일것이다. '유에 오빠! 너무 멋있어요! 사랑해요! 꺄악!' 이라는 느낌. 영어 해석은 못해도 세리아 언어(?) 해석은 가능하다. 분명히 이런 뜻이리라 생각하는 나는 나머지 톱과 망치들을 정리하며 근처에 있는 호수로 다가가 세수를 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자 아리아의 질문이 곧바로 ㅤㅅㅗㄷ아지는것은 당연한 일. "선배. 어디 가세요?" "잠깐 손도 씻고, 세수좀 하고 올게." "빨리 오세요. 곧 해가 지니까요." "알았어." 간단하게 아리아에게 대답을 하고 나서 호수를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누나하고 유아 선배는 집 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화장실이라도 간 건가. 궁금하긴 하지만, 일단 호수에 가서 땀부터 씻는게 좋다고 판단한 나는 빠르게 이동을 한다. ============================ 작품 후기 ============================ 이 글은 예약 시스템으로 올린 글입니다. 이 시간이면 저는 지금쯤 고향에 가서 심심함의 극치를 맛보고 있겠지요; 오타나 이상한 부분이 보일시에, 코멘트로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향에 있어도 피방을 가서 글을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_^; 45화 드디어 호수에 도착. 집 바로 바깥에 위치한 곳인지라 금방 도착한다.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인지라 금방 도착한 나는 또다시 상의를 탈의하며 호수의 물을 적시려고 허리를 숙인다. 그러나 그 곳에. 차마 보아서는 안될... 아니지. 정말 보고싶을 정도로 눈부신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호수 안에서 샤워중이었던지 알몸으로 멀뚱멀뚱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유아 선배. 그리고 뒤에는 누나까지 있다. 설마. 이것은... "뭐, 뭘 하는거야!! 이 변태야!!" "자, 잠깐만요, 선배! 진정하세요!" "진정은 개뿔! 감히 숙녀의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봐? 진작에 따끔하게 혼을 내줬어야 했는데! 너, 거기 서!" "선배! 그러니까 알몸이라고요!" 풀어서 해석하자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면 알몸이 그대로 다 보이니까 제발 가만히 앉아 있어주세요!'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뒤늦게 내가 하고자 하는 진의를 파악했는지, 양 손으로 풍만한 가슴을 가린 채 비명을 지르며 다시 황급히 물 속으로 앉는 유아 선배의 목소리. "꺄~악!!" 유아 선배가 재차 자신의 손으로 사타구니와 가슴을 가린다. 중간에 목검을 들고 나를 쫓아오려던 무서운 기세는 비명 한방에 날아가버린듯 하다. 그나저나 이런 사건이 벌어질 줄이야. 나는 단순히 세수를 하러 온 것 뿐인데. 이런 횡재가... 그게 아니잖아. "뭐야. 남동생. 보고 싶었다면 진작에 말하지. 언제라도 보여줄 수 있었는데." "누나는 좀 가리고 다녀!!" "어머. 어차피 어렸을땐 다 보고 지낸 사이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어렸을때와 지금은 차이가 확 난다고!!" "구체적으로 어디가?" "......" 여러가지로 차이가 난다. 몸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그렇고. 하지만 그런 걸 어떻게 말하냐. 바보 누나야. 친누나의 알몸 차림을 상세하게 묘사할 정도로 나는 그렇게까지 변태가 아니라고. 그것보다 남동생에게 그런 행동지시를 내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괜히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쪽으로 오해할라. 누나는 유아 선배와는 다르게 가릴 생각은 전혀 없는지 오히려 자랑스럽게 자신의 몸매를 드러내며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선 말한다. "역시 너도 남자구나. 혈기왕성한 그 혈기를 주체할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이런 식의 야외 플레이는 삼가해야 하지 않겠니?" "알았으니까 누나는 좀 가리라니까!!" 핑크색의 유두와 시커먼 음모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에도 누나는 여전히 가릴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아니 오히려 자신의 몸매를 과시하는 단계에 접어든다. "그나저나 내 몸 어때. 괜찮지?" "알았어, 괜찮으니까 옷 좀 입어!!" "인정하는 거야?" "인정 안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여자들에게 맞아 죽을 일이 발생해버리잖아." 내 누나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지만, 정말 몸매 하나는 끝내준다. 대학교 1학년 때, 홈쇼핑 모델도 했을 정도니까. 물론 그 때 당시에는 누나가 실제 쇼핑몰 사장을 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모델 아르바이트로 했을 뿐이다. 반응도 좋았고, 인기도 많았고. 특히나 옷맵시를 제대로 살릴 수 있는 몸매의 소유자이다 보니까, 예전에는 연예인 기획사에서도 연락을 올 정도였다고 한다는 말을 아버지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한 마디로 잘 나가는 여성. 그것이 바로 우리 누나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성격이 너무 괴팍해서, 쉽사리 쓸만한 인재가 되질 못한단 사실은 주변인이라면 충분히 알고 있다. 그것이 현실이니까. 신은 이래서 공평한가 보다. 누나에게 환상적인 바디 라인을 선사해줬지만, 이상한 성격을 내려줬으니까 말이다. 입으라고 해도 꼭 청개구리처럼 입지 않는 누나. 그리고 여전히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면서 내게 주변에 있던 돌들을 마구 던져대기 시작하는 유아 선배까지. 생명에 위협이 느껴지는 공격을 피하고 나서야 나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말도 안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난 결과. 내 머리에는 장렬하게 혹이 3개 정도 생긴 상황이다. 의료담당인 아리아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내 머리위에 생긴 혹을 바라보며 묻는다. "선배. 넘어지기라도 하셨나요." "넘어졌으면 오히려 다행이지." "그럼 어쩌다가 이런 멋진 상처를 만들었나요." "멋지냐? 이게?" "마치 만화같이 부풀어오른 혹이 신기해보여서요." "... 그러냐." 이런 내 말을 들으며 식사를 하고 있던 유아 선배는 고개를 홱 돌리면서 '흥!'하고 코웃음을 친다. 쌤통이라는 말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유아 선배의 모습을 보던 세리아가 대충 상황이 이해 갔다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잘 모르겠지만, 왠지 유에 선배의 과실이 100퍼센트 인 것 같군요." "함부로 추측하지 마라. 이래봬도 나는 피해자 쪽이라고." "혹시 '샤워를 하러 갔는데 유아 선배와 유린 선배가 우연치 않게 호수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유아 선배에게 진탕 맞았다.'라는 상황을 겪은 것은 아니겠죠?" "너, 어디서 보고 있었냐? 왜 이렇게 정확하게 알아 맞추는 거야." "추측입니다." "잠깐만. 그건 이미 추측의 범주를 한참 벗어났어." "그럼 예지 능력이라 해두죠." "그게 더 이상하잖아." 가뜩이나 머리의 혹도 욱신거리는데, 아리아의 말도 안 되는 말장난에 상대를 하다 보니까 더 머리가 아파옴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녀석은 나를 괴롭히는 맛에 살아가는 녀석인가 보다. "아무튼 조심하세요. 유에 선배." "그래도 후배라고 걱정은 해주는구나." "가뜩이나 머리 나쁜 유에 선배의 뇌세포가 더 죽어나가면, 이쪽이 다 곤란하니까요." "너는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란 직업을 가질 녀석이 환자의 마음을 후벼 파는 그런 말이나 툭툭 내뱉는 거냐?!" "이 정도 상처가 무슨 환자인가요." 상처의 유무로 환자를 구별짓는 못된 의사가 내 주변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중에 유아 선배나 유린 선배에게 사과라도 해두시는 편이 어떤가요?" "... 아무래도 그러는 편이 좋겠지." 일부러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성의 알몸을 봤다는 것은 명백히 잘못한 일이다. 사회적인 인식도 그렇고, 무엇보다 눈이 호강한 쪽은 나니까. ============================ 작품 후기 ============================ 이 글 역시도 예약시스템으로 올린 글입니다. 지금 이 시간이면... 자고 있진 않을테고, 뭐든 하고 있겠지요 ㅡ_ㅡ;; 모두들 즐거운 설날 명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46화 "그래서 대략 만들 수 있겠어?" 식사를 마친 뒤에 설거지를 하고 있는 다른 일행들을 뒤로하고 직접적으로 나에게 묻는 누나. 공구나 이런 일은 결국 내가 거의 전담하기로 암묵적인 합의가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누나가 나에게 물어보는 것은 당연하다. 엘리에게서 받은 못과 손망치를 살펴보는 나는 누나의 말에 나름 친절하게 대답해준다. "일단 재료는 충분하고. 못이 약간 녹슬긴 했지만 전혀 사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까." "그래?" "내일 정도는 완성될 수 있을거야." "믿음직하네." 진실을 담은 누나의 칭찬에 괜시리 쑥스러워진다. 칭찬을 받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게 아니라 누나에게 이렇게 솔직한 칭찬을 들은게 상당히 오랜만이기 때문이다. 근처에서 엘리가 자주 먹는듯한 과일로 보이는 것을 아그작 아그작 섭취(?)하는 작은 꼬마 숙녀. 뒤에 위치한 세리아가 빙그레 웃으면서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별다른 거부감이 없이 엘리는 세리아의 손길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뭐랄까. 사나운 아기 고양이를 길들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풍성한 금발에 작은 체구의 엘리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정체불명의 과일을 먹을 뿐이다. "이제 다른 사람들한테도 많이 익숙해진 모양이네." "그런 셈이지. 엘리도 혼자서 야생에서 계속 살아온 것도 아니고, 우리가 오기 전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으니까."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그리 낯설게 느끼지는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은 누나의 뜻이기도 하다. 처음엔 우리들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품기도 했지만, 그것도 다 낯선 사람이라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싫어한다기 보다는 경계의 의미를 담은 뜻의 표현이라고 본다면 지금 엘리의 모습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한창 또래 아이들과 티비에 나오는 연예인 이야기를 하고, 학업에 대한 숙제를 할 나이에 무인도에 표류되어 3년이라는 적지 않은 기간을 소비하게 된 엘리. 이 작은 소녀의 현재 상황을 생각한다면 약간 안쓰럽다는 동정심이 드는게 사실이다. 그래도 언젠간 이 섬에서 나갈 수 있겠지. 아직까지도 나는 이런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런데 누나. 엘리랑 말이 통하는 편이야?" 생각해보니 궁금한 사실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아리아나 유아 선배도 엘리와는 그다지 원활한 의사소통을 잘 못하는 편이고, 세리아는 말할 필요도 없이 서로 대화를 못한다. 노아 교수님은 유창한 영어 발음과 함께 엘리와 같이 ㅤㅆㅘㄹ라ㅤㅆㅘㄹ라 거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누나는 어학연수도 갔다오지 않은 상황에서 외국인이기도 한 엘리와 서로 막힘없이 대화를 할 수 있다는게 신기하게 느껴진 것이다. 내 질문을 들은 누나가 윙크하면서 간단하다는 듯이 대답한다. "내 능력을 얕보지 말라고. 남동생. 이래봬도 고등학생 때 외국어 영역 1등급, 그리고 토익 점수 평균 900점 이상의 소유자니까." "5등급과 1등급의 차이가 이리도 심한거였어?" "그러니까 평소에 공부좀 하라고 했잖니. 뭣하면 무인도에 온 김에 내가 영어라도 알려줄까?" "아니. 그건 사양할래." "왜?" "육체적으로도 피곤한데 정신적으로도 피곤하기는 싫으니까." "육체적으로 피곤하단 말이지. 노아 교수님이랑 섹스해서?" "그야 당연하... 누나가 어째서 그 일을 알고 있는거야!!!" 화들짝 놀라며 소리치는 나. 이런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 웃어보이는 누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교수님 바지에 얼룩이 묻어 있었으니까." "고작 그걸로?" "거기에 정액 냄새가 났거든." "남의 세탁물을 뭐하러 냄새 맡는거야. 당신." "궁금하잖아." "뭐가?" "생각해봐. 한창 여자에 굶주린 20대 청년이 아리따운 미모의 여교수님과 같이 인적이 드문 숲속으로 향했는데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비정상적인 일이니까." "마치 내가 노아 교수니을 덮칠 줄 알았다는 듯이 말하지 마. 난 강간범이 아니라고." "그래도 결과적으론 사실이잖아. 그렇지?" "... 누나의 말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제일 짜증난다니까." 이걸로 최근에 내가 노아 교수님과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누나에게 전부 들키고 말았다. 그러나 누나는 공연히 떠들고 다닐 생각은 없는지 그저 싱글벙글 거리면서 누운 채 나를 바라볼 뿐이다. "그나저나 정말로 많이 컸네. 남동생." "원래 남자는 성장기가 빠르다고." "신체적인 성장은 정말 빨라보이더라. 특히나 아랫쪽." "그러니까 그 일은 잊으라고." "잊혀지지 않는걸. 그로테스크한 남성기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제발 좀 떠나보네." "나중에 우리, 서로 자위하는 모습 보여주기로 할까?"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런 행동을 해." "흥분되잖아." "흥분이라..." "무인도에 있으면 따분하다고. 자극적인 일이 있어야 재미있지. 원래 사람이라는 종족은 원초적인 생존 조건이기도 한 의식주가 해결되면 희노애락(喜怒愛樂)을 추구하잖아. 한마디로 심심하지 않을만한 오락거리를 추구하는 종족이라는 뜻이지."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지? 이 무인도가 얼마나 큰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정적인 범위에 지극히 제한되어 있는 지역에서 마땅한 오락수단을 찾는건 어렵잖아." "그래서 결론이..." "그래. 성욕이라는 것이지." 누나의 말을 전면으로 부정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욕만큼 자극적이고 즐길 수 있는 수단이 없지 않는가. 인간의 3대 욕망이라고 하는 요소중에 식욕, 수면욕,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자리를 성욕이 차지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성욕이야말로 일종의 생존을 보장하는 원초적인 욕망. 성욕이 없으면 그 종족의 번식력도 기하급수적으로 하락할테고, 그 말은 곳 그 종족의 멸망을 뜻하기도 한다. 물론 사회적인 인식으로 성욕이라는 것은 변태나 아니면 범죄 이런 쪽으로 연상시키는게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굳어지게 되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성욕이라는 감정을 그렇게 나쁘게 보지 않는다. 그렇기에 교수님과 관계를 가질때도 망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녀의 반응에 응수해준 것이다. 사실 나 역시도 여체를 탐하는 남자로서의 욕망이 발동된 적도 있지만, 나 뿐만 아니라 여성의 입장에서도 성욕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섹스라는 수단만큼 자극적인 오락거리는 없다고 본다. 오락이라는 단어와 비유하는 것은 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르게 생각한다면 따분하고 지루하기 때문에 섹스를 하는 경우의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본다면 굳이 오락이라는 하나의 단어에 비유해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그래도 근친은 안돼." "뭐, 그렇겠지." 쿨하게 인정해버리는 누나. 역시 나를 한번 떠보기 위한 장난섞인 농담이었나 보다. "노아 교수님이든, 아니면 유아든. 네가 어느 쪽을 선택하는지에 대해서는 뭐라고 크게 관여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여자 관계에는 언제나 유의했으면 좋겠어." "때 늦은 누나 노릇이야?" "상황이 상황일수록 최대한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이라고 할까." 누나의 말이 맞다. 실제로 얼마 전에 교수님과 섹스를 한 적도 있고, 한정된 공간 안에서 남녀가 같이 생활을 하게 된다면,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가까워질 수 있는 상황이 많이 연출된다. 교수님 뿐만 아니라, 유아 선배와 관계를 가질수도 있고. 무인도에 표류되었다는 상황 자체가 평범한 상황극도 아니고, 어디에서나 쉽사리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에피소드도 아니다. 결국은 내가 하기 나름인가. 남자인 내가 최대한 자제를 하는 쪽으로 다가서야 한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란, 언제나 남자의 본능이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누나도 그 점을 알기 때문에, 굳이 나에게 다가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힘내라고. 남동생." "노력해볼게." 응원 아닌 응원을 받으면서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여자관계. 남자의 입장에선 굉장히 행복한 고민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평범한 사회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펼쳐지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여기는 무인도. 통상적인 사고방식이 통용되지 않는 그런 장소. "어렵네..." 교수님과의 관계가 우발적인 충동이라 해도, 어차피 무인도에서 오랫동안 지내게 된다면 교수님과의 관계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차피 관계를 가졌으니, 앞으로는 주기적인 육체 관계를 가질지도 모른다. 유의하도록 하자. 이럴수록, 내가 이성을 차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 작품 후기 ============================ 고향에서 1박 2일을 머물고, 오늘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피곤하군요 ㅡ_ㅡ;; 민족 대 이동이 시작된 탓에 오늘 오전 10시부터 정체가 시작되었다고 하던데. 지금쯤이면 차 안에 계신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아무쪼록, 사고 없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_^PS. 난파선 표류일지는 무인도 표류일지가 완결까지 올라간 뒤에 연재될 예정입니다. 47화 EP 8. 누드 하우스 "어째서 이런 일이..." 한탄 섞인 목소리의 유아 선배가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사타구니와 가슴을 팔로 가리면서 말한다. 믿기지 않지만 선배의 현재 모습은 알몸.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황이라는 뜻이다. 더욱더 웃긴건 바로 유아 선배만이 아니라는 뜻이다. 청순미인 세리아도, 눈치 빠른 후배 아리아도, 친누나이자 어떤 의미론 악당(?)이기도 한 내 누나 유린도, 최연소를 자랑하는 꼬마 숙녀 엘리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연장자이기도 한 노아 교수님 마저도 알몸인 채 집 안에 모여 앉아있는 것이다. 물론 두말할 필요도 없이 나도 말이다. 유아 선배의 한탄섞인 말을 듣던 누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한다. "뭐, 이것도 다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분명 오늘의 날씨를 계획한 존재는 이 상황을 노렸다고 밖에 볼 수 없을걸요." 아리아의 태클이 무자비하게 들어온다. 어쩌다가 우리들이 알몸인 채 집 안에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게 되었느냐 하면 꽤나 긴 회상씬이 필요하다. 우선 어제 노동을 마치고 집안으로 복귀한 우리들. 그런데 문제가 여기서부터 생겼다. 여벌의 옷이 동이 나버린 상황에서 입을 옷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각자 작업을 하기 전에 아리아와 세리아가 전에 입고 있던 평상복들을 말려놓은 참인지라 다행으로 여기고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뭐, 뭐야 이게!" 유아 선배의 말에 모두가 눈 앞에 벌어진 참극으로 말을 잃고 만다. 허술허술하던 빨랫대가 무너지면서 진흙텅이에 빠진 것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물이 고여있던 장소가 생긴 것일까 하고 생각할 무렵, 하늘에서 한 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이 곧바로 해답을 선사해주듯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거세게 내리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다급하게 집으로 들어간 우리. 하지만 문제는 이 다음부터였다. 입을 옷은 현재 세탁물로 분류된 채 격리된 생활을 하고 있고, 입을 수 있었던 여벌의 평상복은 현재 진흙이 덕지덕지 묻은 상태여서 입을 옷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속옷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결국 리더인 내가 내린 결단은 이거였다. "날씨가 맑아질때까지 일단 세탁물을 말리는 건 잠시 뒤로 미루도록 하죠." "그러면 입을 옷이 없어지잖아요." "걱정하지 마. 아리아. 우리에게는 비와 바람으로부터 지켜줄 이 집이 있잖아." "그거하고 옷이 무슨 상관인데요." "한마디로 말해서. 벗고 있으면 된다는 소리를... 유, 유아 선배! 왜 갑자기 목검을 휘두르는 겁니까!!" "이 변태 자식! 아, 알몸으로 있으라고? 하루종일??" 옆에 있던 수재 목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하는 유아 선배 덕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집 안. 결국 간신히 선배를 진정시키고 나서야 합의를 볼 수 있었다. "난 괜찮은데. 어차피 알몸으로 있다고 해도, 세삼 부끄러운 일도 아니잖아. 남들한테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들끼리인데." "그치만..." 누나가 정말 의외로 내 편을 들어준다. 평생에 손에 꼽을 정도로 기이한 현상이었지만, 그래도 누나라는 원군을 필두로 아리아도 참전 선언을 하기 시작한다. "저도 유린 선배의 말에 찬성이에요." "아리아, 너까지?!" "유린 선배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여기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남자는 어차피 유에 선배 한명밖에 없고, 그리고 다른 의미로 선배나 노아 교수님은 부담이 전혀 없으시잖아요. 그렇죠?" "!!!" 아리아의 폭로 아닌 폭로에 유아 선배와 노아 교수님의 얼굴이 급격하게 빨개지기 시작한다. 아리아가 원래부터 하고 싶은 말은 '어차피 육체 관계도 가졌고, 서로 볼 거 다 본 사이인데 상관 없잖아.'라는 뜻일 것이다. 물론 유아 선배와 육체 관계를 가진 적은 없고, 서로 알몸으로 혼욕을 한 적은 있지만... 이런저런 식으로 합의를 보다가 마지막에는 민주주의의 대표 결정 수단이기도 한 다수결 제도에 의해 의견이 갈라지게 되었다. 참고로 반대는 2표. 노아 교수님과 유아 선배 단 두명만이 반대를 했고, 나머지는 찬성에 손을 들었다. 세리아는 아리아의 의견을 따라가는 편이었고, 엘리는 누나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같이 가는 타입인지라 어렵지 않게 나까지 포함해서 찬성 5표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어제의 역경을 딛고 난 후. 지금 이 모습이 바로 그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간간히 천둥번개도 내리는 상황. 어제 밤에 비해서는 그래도 낮인지라 분간이 서로 될 정도의 밝기 조명은 확보할 수 있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서로의 알몸을 그대로 볼 수 있다는 뜻. 아직도 창피한지 가릴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로 가리도록 노력하는 유아 선배였지만, 반대를 표명했던 노아 교수님은 진작에 포기했는지 앙 손을 무릎 위에 얹고서 다소곳하게 앉아있을 뿐이다. 교수님의 경우에는 한 팔로 가슴 전부가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크기였기 때문에 포기한듯 하다. 가슴이 커서 노출을 선택하다니. 약간 모순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 다수의 여성들이 발가벗은 몸을 보고 있는지라 성기가 발기되는 현상은 지극히 당연하다. 덕분에 유아 선배나 아리아는 나를 노골적으로 변태라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고, 세리아는 나를 차마 쳐다보지도 못한다. 노아 교수님도 얼굴을 붉힌 채 말없이 바닥만 보고 있는 상태. 유일하게 누나와 엘리만이 당당하게 집 안을 활보할 뿐이다. "자, 어제 막 따온 과일 드세요." 누나가 나뭇잎에 담아온 과일이 동그랗게 앉은 우리들 한 가운데에 놓여진다. 알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누나의 허리에 딱 달라붙어 있는 엘리. 나체든 뭐든 상관없이 그냥 누나가 좋은가보다. 그나저나 엘리도... 음... 뭐랄까. 아직 덜 성숙한 꼬마 여자아이의 몸을 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가슴이 있는지 없는지 잘 분간이 되지 않지만, 핑크빛의 작고 귀여운 유우는 눈에 확연하게 들어온다. 엘리도 분명 크면 미인이 되겠지. 어렸을 때의 풋풋함은 사라지고, 점점 사회를 알아가는 성인 여성으로 자라나는 엘리의 모습을 상상하니, 귀여운 딸내미를 둔 부모의 심정이 어느정도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아니지. 이해가면 안되잖아. "유린 선배. 유에 선배가 엘리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어요." "아리아!! 이상한 말 하지 마!" 벌떡 일어나며 외치는 나. 그러나 유아 선배가 비명을 지르면서 소프라노 뺨치는 비명을 질러대고선 말한다. "이 바보야!! 자리에 빨리 앉아!!" "유에 선배. 그 흉물스러운 물건, 우리 세리아 언니에게 보여주지 마세요." "......" 아까부터 건드리기라도 하면 금방 정액 폭발을 해버릴거 같이 부풀어오른 성기. 이미 핏줄까지 불끈불끈 나 있는 상태의 남근을 힐끗 바라보던 세리아가 결국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무래도 남자 성기는 처음보는 듯한 그런 반응이다. 그나저나 내가 바바리맨도 아니고. 여자들에 비해선 그래도 강도가 적지만, 나도 내 자존심을 그대로 드러내고서 알몸으로 생활하는건 영 익숙하지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침부터 계속 발기상태. 도대체 몇시간동안 이런 상태를 유지하는건지 정말 돌아버릴 정도다. 그렇다고 이 성난 녀석을 진정시킬수도 없는 노릇.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누나의 가슴이 보이고,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면 노아 교수님의 사타구니가 보이고,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면 아리아와 세리아 쌍둥이 자매의 탐스러운 엉덩이가 보인다. 말 그대로 절정상태. 저번에 누나가 준 그 약의 효능급으로 정말 피곤한 상황이 아닐까 한다. 아침부터 이런 식으로 가만히 앉아만 있는 상황에서 따분하고 심심한 우리들. 어제도 잠깐 언급했다시피, 인간이라는 종족은 오락을 추구하는 특성을 가진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이런 따분함과 심심함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나. 더불어 바깥은 비가 내리고, 통나무의 좁은 집에 7명이 나란히 모여있는 상태에서 아무런 대화도 없이 이러고 있는 것은 시간낭비지 않는가. "저기요." 분위기 메이커이기도 한 누나가 먼저 말을 꺼낸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누나에게 쏠리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던 누나가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하기 시작한다. "심심하지? 다들." "......" 말은 안하지만, 모두들 고개를 상 하로 끄덕이며 누나의 말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투표 참가율 100 퍼센트. 그리고 지지율 100 퍼센트. 아주 놀라운 지지력을 선보이는 누나의 한마디였다. 공산당 국가에서도 달성하기 힘든 지지율을 이뤄내다니. 대단하다. "심심하니까 게임이나 할까요?" "게임?" 내 말에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응. 모처럼 사람도 많은데. 간단한 게임이라도 하는게 좋잖아. 그리고 덜 심심할테고." ============================ 작품 후기 ============================ 본래는 이 전 부분에서 H씬 비스무리한 장면이 나왔습니다만, 일단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올리지 않았습니다. 계속 3류 쓰레기 소설이라든지, 작가가 미연시에 미친 오타쿠 새끼라느니 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소심함이 발휘된 모양입니다. ^_^;; 그렇다고 크게 신경은 쓰고 있지 않습니다. 어차피 조아라 노블레스에서 연재한다는 건, 그런 소리들을 다 감당해야 한다는 말과도 같은 거니까요. 이제 적응되었습니다; 어쨌든 그래도 저는 무인도 표류일지를 재미있게 봐주고 계시는 분들만 바라보고 위안을 삼으며 연재하고 있습니다. ^_^; 남은 설날 연휴 마지막 날도 건강히 보내시기 바랍니다~! 48화 누나의 말을 필두로 게임을 하는게 좋을거라는 의견이 속속 나오기 시작한다. 이렇게 비오는 날에 집 안에 가만히 있는것도 나름 고역이라는 사실을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느끼고 있었다는 근거가 된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바로 '무슨 게임'을 하느냐 아닌가. "그런데 유린 선배. 생각해두신 게임 같은거 있나요?" "음. 글쎄." 아리아의 말에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누나. 한마디로 저 반응은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 뜻이다. 일단 내뱉고 나서 생각하자는 태도. 일명 '선 발언, 후 생각'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역시나 나의 친누나다운 모습. 제안을 하려면 좀 더 획기적인 게임을 생각하고 제안을 하든가 했으면 좋았을것을. 뭐, 게임이라는 오락의 수단 조차도 생각해내지 못한 내가 할 불평불만은 아니지만 말이다. 누나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옆에 있던 유아 선배가 노아 교수님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교수님. 좋은 게임 같은거 없나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내가 예전 대학에 다닐 때 하던 놀이들밖에 없는데." "오! 교수님이 예전에 대학생 때 하던 놀이요? 뭔가요, 그거." 유아 선배의 눈이 초롱초롱해지고 있다. 왜 저런 관심을 표시하고 있는 지 상당히 궁금하지만, 어쨌든 싫어하는 편은 아니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유아 선배의 과다한 반응에 노아 교수님이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대답한다. "그냥 술 마시는 게임이었어. 369라든지 베스킨라벤스라든지 이런 간단한 게임 있잖니." "... 정말 간단하네요." "응. 걸리면 술 마시는 벌칙 위주로 흘러갔으니까. 흑기사도 요청할 수 있고." 과거도 지금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게임을 했었다는 사실에 급 실망의 기운이 밀물 밀려오듯 몰려오기 시작한다. "아무리 그래도 너희들을 대리고 그런 놀이를 할 수는 없겠지? 유치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술도 없는데."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군요." 작게 한숨을 쉬며 순식간에 사라진 기대감을 애써 위로하는 유아 선배였다. 본래 저런 놀이들은 술자리와 함께 해야 더더욱 흥이 나는 법. 맨정신에 그냥 하면 별로 재미가 없다. 술이 문제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술이 있기에 재미있는 상황도 있는 법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일지도. 결국 노아 교수님에게는 마땅한 아이디어가 없다는 소리.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후배이기도 한 아리아에게 말을 거는 근성을 보여주는 유아 선배. "아리아는 재미있는거 없니?" "저도 마땅히 떠오르는건 없는데요."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한눈에 봐도 아리아의 성격상 '놀이'라는 문화와 조금은 동떨어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 않는가. 공부라면 또 모르겠지만, 노는데에 취미를 들일 만큼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여성 타입이 아니기 때문에 아리아도 간단하게 패스. 옆에 있던 세리아도 어색한 웃음으로 고개를 한번 밑으로 숙이면서 죄송하다는 표시를 유아 선배에게 한다. 그러자 유아 선배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한다. "아, 아니아. 세리아. 그렇게까지 미안해할 필요는 없는데..." 예의 바른 세리아를 뒤로하고 드디어 내 차례까지 온다. 시선을 나에게로 돌린 유아 선배가 이윽고 아래쪽을 한번 살짝 쳐다본 뒤에 고개를 좌우로 격렬하게 흔든다. 남성의 성기를 보는 것이 아직까지 익숙해지지 않는 모습으로 보인다. "... 유에는 뭐 없어?" "묘하게 말투가 차가워진거 같은데요. 거기에다가 유독 저한테만요." "기분 탓이야." "그랬으면 좋겠지만요." 발가벗은 채 성기를 발기시키고 있는 남자 대학생이 여자들에게 그다지 고운 말을 듣지 못할거라는 사실은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저도 명확한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네요." "그런것도 하나 생각 못하다니. 멍청이. 바보." "......" 기분 탓이 아니다. 명백하게 선배는 나를 혐오하고 있다. 고작 성기노출 하나 가지고. 아니지. 성기노출이라는 것은 여자에게 있어선 혐오감을 선사해주는 일종의 변태성 플레이니까 유아 선배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건가. 그러고보니 어느새 유아 선배도 자신의 가슴과 음모 가리는 것을 포기하고 얌전히 앉아있는다. 계속해서 가슴을 가리는 것은 팔이 아프다는 희생 플레이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한 모양이다. 참으로 현명한 판단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무도 마땅한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는 순간. 누나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말한다. "괜찮은 게임 내용이 떠올랐는데." "누나가 생각해내면 왠지 불안하단 말이야." "어머, 그럼 너야말로 마땅한 아이디어라도 있니?" "......" 억울하지만, 누나의 말에 반론을 펼칠수가 없다. 내가 접한 놀이문화는 고작 컴퓨터 게임이 전부다보니 이런 식으로 모두가 모여서 할만한 게임은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휴대용 게임기로 배틀을 하거나 하는 이런 류의 오락은 알고 있지만, 무인도에서 게임기를 찾아보기라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도 아닌 바늘 조각 찾기보다도 더 어렵지 않은가. 그런고로 잠자코 있는다. 내 반응을 본 누나가 싱긋 웃으면서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왕(王) 게임이라고 아세요?" "아, 그거 알고 있어." 노아 교수님이 반가운 기색을 보이면서 말한다. 아마도 교수님이 알고 계시는 게임으로 추정된다. 순진하게 보여도, 교수님도 은근히 많은 놀이 문화를 접해봤구나. 새삼 노아라는 여자에 대한 재평가가 내 머릿속에서 순차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교수님이 아는 척을 해오자, 누나가 반갑다는 듯이 자신의 손뼉을 마주치며 말한다. "역시나 교수님. 그럼 노아 교수님 말고 룰을 아는 사람은 없는거야?" 모두가 고개를 끄덕끄덕. 공교롭게도 나는 전혀 모른다. 오히려 누나가 그런 류의 게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 한숨을 쉬면서 '문화생활'이라는 것과 접점이 없는 인물들이라며 간접적인 의미를 담은 한숨을 내뿜은 누나가 설명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간단해. 게임을 통해서 '왕'을 뽑는거야. 그리고 벌칙 수행자를 뽑는거지. 왕은 벌칙 수행자한테 명령을 내릴 수 있어. 어떠한 것이라도." "어떠한 것?" 유아 선배의 물음이었다. 의미심장한 단어가 들려오자 반사적으로 되물은 유아 선배의 말에 누나는 여전히 싱글벙글 모드를 유지하면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그래. 무엇이든지. 한마디로 말해서 무제한이야." "예를 들자면?" "이런거지. 내가 만약에 왕이 걸렸어. 그 순간 내가 내리고 싶은 명령을 내리는거야. 벌칙 수행자를 뽑기 전에. 그리고 벌칙 수행자는 유아, 바로 너. 그럼 네가 앞서 왕이 된 내가 내린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거지." "뭐야. 간단한거네." "그렇지? 간단하고 재미있는 게임이라니까." 누나의 미소가 점점 옅어진다. 그와 동시에 피어오르는 이 불안감은 도대체 뭘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혀 건전한 게임이 아닐 거 같은데. 시키는 명령을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면, 누가 악의적으로 못된 명령을 하는 순간, 게임의 건전도가 증발하는 거 아닌가. ... 아니면 내가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알고보면 순수하고 착한 '왕 게임'이라는 녀석을 나도 모르게 문란하다고 몰아가며 저평가를 내린 것은 아닐지. 그렇다면 미안하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 '건전함'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단 말이야. ============================ 작품 후기 ============================ 때구니™ 님께서 질문하신 내용 답변입니다. 주인공이 초반에 누나 걱정을 안한 것은 무인도 표류일지 여담 격인 이야기입니다만, 본래 제가 처음 이 글을 쓸 때 유린은 등장인물에 넣고자 할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글을 쓰다보니,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주인공에게 누나가 있었으면 하는 계기가 들었고, 그로 인해서 갑작스레 유린을 투입하게 되었습니다. 1년도 더 된 일이라서 제가 상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어쨌든 그런 연유로 원래는 없던 유린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밖에 많은 여담이 존재하지만, 이건 차차 질문이 들어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_^PS. 설날이라고 쿠폰으로 세뱃돈을 주신 분들께 큰 절을!!! ... 마음속으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세뱃돈 받을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되었든 감사합니다! 49화 누나의 말대로 일단 게임을 진행하기로 한다. 왕을 선출하는 방식과 벌칙 수행자를 선출하는 방식은 간단하게 '가위바위보'라는 대 국민 게임이 선정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게이머를 보유하고 있다는 가위바위보를 통해서 우선 왕을 선출하기로 한다. 7명이서 나란히 화로를 주변으로 모인 뒤에 가위바위보를 시작. 대략 3판 정도 갔을까. 첫번째 왕이 된 인물은 바로 아리아였다. "제가 왕이 된 건가요?" "응. 자, 이제 명령을 내려봐." 참고로 벌칙 수행자가 결정되기 이전에 미리 명령을 내리는 방식. 만약에 벌칙 수행자를 선출한 뒤에 명령을 내리는 순번으로 한다면 특정 인물만 공격당할 가능성도 있고, 재미도 반감될 우려가 있다는 뜻으로 사전에 명령을 내리고 후에 벌칙 수행자를 뽑는 형식을 채택하기로 한다. 원래 왕게임은 이것과는 다른 방식이라고 하던데. 대략 누나의 설명을 들어보니, 막대기 끝에 왕이라는 글자가 적힌 것과 함께 숫자 번호를 적어놓고 왕을 뽑은 뒤에 왕이 '1번과 2번이 서로 딱밤 때리기!'라고 말하면 그대로 수행하는 게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무인도에서는 종이를 구하는 일도 흔치 않고, 필기도구도 없기 때문에 가위바위보를 택해서 하는 것이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들 하지 않는가. 약간의 진행방식에 착오가 있는 점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원래의 게임이 추구하는 목적 달성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가볍게 넘기도록 하자. 아무튼 기념비적인 첫번째 왕에 당선된 아리아가 잠시 고민하더니 명령을 내리기 시작한다. "초반에는 약하게 시작할게요. 일단 벌칙 수행자 두명을 뽑아서 서로 이마에 딱밤을 먹이는 걸로 하죠." "괜찮은데? 그거." 누나의 칭찬이 들려온다. 대략적으로 룰을 잘 이해했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된다고 본다. 어찌되었든 왕의 명령이 내려졌고, 아리아를 제외하고 나머지 인물들이 꼴찌 2명을 뽑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시작한다. 결과는 나와 유아 선배 당첨. ... 그런데 걸려도 왜 이런 벌칙에 걸리는거냐. 나란 녀석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유아 선배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말한다. "먼저 때려도 좋아." "......" "뭐해? 빨리 해." 유아 선배의 가슴이 나에게 다가올때 살짝 덜렁거림을 포착할 수 있었다. 역시나 알몸 파워. 대단하다. 하지만 이런것에 눈이 팔려 있을수는 없지. 일단 검지에 중지를 걸어 유아 선배의 이마에 살짝, 정말 아주 살짝 딱밤을 때린다. 유아 선배가 아무리 건강미 넘친다고 해도 그래도 여자는 여자이지 않는가. 여성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는 우를 범하고 싶은 마음은 없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선택을 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절대로 강하게 때릴 수 없는 벌칙에 걸리고 만 것이다. "여자라고 봐주는 거야?" "봐주는 게 아니라, 여성의 얼굴에 상처라도 내봐요. 얼마나 큰 치명상인데요." "딱밤 하나 가지고 별 걱정을 다하는 구나." "만약이라는 경우의 수도 생각하면 되요."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인지, 아니면 바보같은 선택지를 고른 것인지 나로서는 짐작을 할 수 없지만, 여하튼 지금의 심정은 대략 이렇다. 어쨌든 나도 살살 때렸으니까 유아 선배도 살살 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자리를 잡고 이마를 드러낸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과는 다르게, 유아 선배는 씨익 웃으면서 자신의 손가락을 풀기 시작한다. 한 눈에 봐도 풀 파워로 때릴 거라는 의지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저기. 선배." "왜?" "저는 살살 때렸는데 선배는 엄청나게 강하게 때릴거 같은 기세로 보여지는데요." "응. 맞아." "역시나." "그야 너, 방금 내 가슴 훔쳐봤잖아." 그걸 또 눈치챈건가. 유아 선배는 정말 감이 좋다. 천성적인이 아니면 후천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훔쳐본게 걸린 것이다. "훔쳐본게 아니라 보이는걸 어떻게 합니까." "시끄러워! 잔말말고 정의의 심판을 받아." 라고 말하면서 풀 스윙으로 '따악!!'하는 소리와 함께 내 이마에 선배의 손가락이 명중한다. 엄청난 통증. 유아 선배 본인도 자신의 손가락을 쥐면서 살짝 아파하는 표정을 지어보일 정도로 쎄게 때린 것이다. 때린 사람이 아파하는데 맞은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말없이 바닥에 누워 이마를 감싸쥐자, 천장으로 남성기가 우뚝 솟아오른 형국을 만들어낸다. 그러자 노아 교수님이 재빨리 나를 다시 앉히면서 말한다. "누, 누우면 좀 그런데..." "......" 누울수도 없다니. 이런게 바로 남녀평등 아닌가. 아무튼 게임은 2차전으로 넘어가게 된다. 가위바위보가 또다시 시작되고, 2번째 왕은 정말 걸려서는 안될 인물이 당선되고 말았다. "이번에는 내가 왕이네?" 엄청나게 기뻐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내 누나가 전혀 고민도 없이 명령을 내리기 시작한다. "꼴찌 한명을 골라서 엉덩이로 이름쓰기." "뭐어?!" "왜들 그래요? 벌칙으로는 단골 손님이잖아요." 확실히 누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 엉덩이로 이름쓰기. 벌칙게임에 그걸 빼면 섭하지. 초등학교 시절부터 소풍을 갈 때마다 전통적으로 내려져 오는 벌칙 중 하나이다. 나도 여러번 걸렸던 기억도 있고, 걸렸을 때마다 창피함과 수치심이 극대화 되어서 울었던 적도 있다는 일화를 누나에게 전해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들의 상황을 고려해보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은 나체 상황에서 다들 보는 앞에 엉덩이를 치켜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쓰라니. 남자인 내가 얼굴이 다 빨개질 정도인데 다른 여자들은 거의 기절초풍할 수준까지 도달할 정도였다. 유일하게 멀쩡한 인물은 엘리 뿐. 아마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그런 것일수도 있고, 굳이 본인이 걸려봤자 엘리의 성격상으론 창피함이라는 감정과 매우 거리가 먼 표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본인으로서는 별로 감흥을 느끼지 못하나 보다. 역시 모르는 게 약인가. "왜 그런 명령을 내리는거야!" "어머머. 벌칙은 자고로 강해야 재미있는거지. 전초전은 끝났잖아. 그렇지?" 유아 선배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누나는 신념을 지키면서 명령 수행을 밀고 나간다. 왕의 명령은 절대적. 유아 선배가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수행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왕 게임. 일명 데스매치. 이번 판에는 절대로 걸리기 싫다는 의지를 마구마구 뿜어내는 우리들은 비장한 마음으로 가위바위보에 임하기 시작한다. 특히나 절대로 이 벌칙에 걸리고 싶지 않다는 의견을 강하게 내뿜는 인물은 바로 노아 교수님. 가장 연장자이기도 한데, 알몸으로 자신의 제자들 앞에서 민망한 추태를 보일 수는 없다는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가위바위보. 그리고 꼴찌는... "말도 안돼...!!" 누나의 명령에 토를 달았던 죄였을까. 유아 선배가 당첨된 것이다.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려놓으며 안도하는 노아 교수님. 엘리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우물우물 과일을 씹고 있으며 아리아와 세리아도 남몰래 한숨을 내쉬어본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 거의 울음 직전까지의 안쓰러운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던 유아 선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러더니 뒤를 돌아보기 시작. 여성의 굴곡이 한눈에 들어오는 뒷태였지만, 안쓰럽게도 저 아리따운 뒷태는 곧 민망함의 사건으로 발달하게 될 것이다. "크윽...!" 수치심이 느껴지는지 작게 소리를 내지른 선배가 허리를 숙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위로 치켜올리기 시작하는 둔부. 한눈에 엉덩이가 다 들어올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가자, 유아 선배의 조개살이 그대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정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음란한 모습. 마치 남성에게 후배위로 자신의 몸 안에 그 거친 성기를 넣어달라는 듯한 유혹의 포즈와도 흡사하다. 여성의 수치심을 강조함과 동시에 벌칙까지 수행이라니. 누나가 내린 명령이지만 정말 대단하다. 1타 2피. 친누나인게 가끔은 존경스러워질때가 있다. 기가막힌 벌칙 내용을 생각해냄과 동시에 벌칙자에게 정신적으로 엄청난 타격까지 줄 수 있다니. 천천히 유아 선배의 엉덩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유아 라는 이름 세글자를 쓰기 시작. 다들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지만, 분명 속으로는 '귀엽다'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는 귀엽다 라는 감정과 더불어 묘하게 섹시해보이는 유아 선배의 허벅지와 엉덩이 라인 덕분에 성기의 끝에 투명한 액채가 매달릴 정도로 흥분되기 시작한다. 엉덩이가 움직일때마다, 숙이고 있는 상체에 늘어진 가슴도 덜렁이며 움직이는 모습이 조금씩 보인다. 정말로 대단하다. 이 벌칙. 엉덩이로 이름쓰기라는 벌칙이 이리도 음란한 벌칙이었던 것인가.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로 놀라운 발견이라고 칭하고 싶을 정도의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 작품 후기 ============================ 오늘 갑작스레 술자리가 생긴 탓에 좀 늦어졌습니다 ㅡ_ㅡ;; 어울리지도 않게 연애 상담도 해주고... 여하튼 술자리가 웬수입니다; 50화 겨우 자신의 이름을 다 쓴 유아 선배가 잽싸게 자리에 주저 앉은 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벌칙을 수행한 유아 선배.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다. 더불어 내가 저 벌칙에 걸리지 않은게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누나는 이런거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듯이 유아 선배에게 자신이 느낀 소감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유아, 너무 귀여워~" "시끄러워!!" 명령을 내린 본인이 칭찬을 해줌에도 불구하고 유아 선배는 잔인하게 단 칼에 베어버리듯이 거절한다. 음. 정말로 악당이다. 내 누나지만, 유린이라는 여자는 정말로 악당이다. 하지만 동시에 누나가 내린 명령의 파급효과는 굉장했다. 왜냐하면 앞으로 벌어질 벌칙은 이것보다도 더 심하게 나갈 것이라는 일종의 계획표를 선사해주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가위바위보. 신의 장난인지, 아니면 유아 선배의 기합인지는 모르겠지만, 왕으로 당선된 인물은 바로 '유아 선배'였다. "드디어... 때가 왔구나. 후후후..." 기분나쁜 웃음을 흘리는 유아 선배. 아까의 벌칙이 그렇게나 창피했던 것일까. 뭐... 분명 창피할거란 예상은 하지만, 유아 선배의 성격이 확 뒤바뀔 정도로 민망한 벌칙이었음은 쉽게 예상하지 못했다. "벌칙 수행자는 2명. 그리고 그 2명은 서로..." 유아 선배의 명령을 기다리는 우리들은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가는 사운드를 내고 있었다. 과연 어떤 벌칙이 우리들 앞을 가로막고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유아 선배의 강한 한마디. "서로 키스해." "뭐?!"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야! 직접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뽀뽀같은 허접하고 유치한 게 아니라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딥(Deep)키스! 알았어?" "......" 횡포다. 왕이라는 존재가 이번에는 폭군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것보다도 키스라니. 게다가 딥 키스. 혀까지 넣고서 키스하라는 말인가. 알몸으로? 그것은 마치 성행위를 하기 전에 애무 형식의 일종으로 하는 키스지 않는가. 남자와 여자 한정으로 말이다. 나야 어차피 남자니까 상관없다. 나 말고 남자는 없고, 다들 여자니까. 그런데 문제는 나와 유아 선배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이 여자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벌칙 수행자가 내가 걸리지 않는 이상 동성끼리의 끈적한 키스를 해야 한다는 소리. 유아 선배, 제대로 열받았나보다. 아무튼 이리저리 왈가왈가 떠들어봤자 소용 없는 일. 결국 또다시 시작된 가위바위보. 그런데 이게 왠 일.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한숨과 함께 혼자서 중얼거리는 나. 벌칙 수행자 중 한명에 내가 걸리고 만 것이다. 설마 내가 걸릴거라 예상하지는 못했는지 유아 선배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에게 말한다. "바보! 왜 진거야!" "가위바위보에 진 것이 제 책임은 아니잖아요." "그, 그래도..." 뭐라고 말하려던 유아 선배의 말을 누나가 가로막는다. "유아. 한번 내린 명령은 철회 불가능이야. 알고 있지?" "윽..." "그리고 이번 기회에 공식적으로 남동생과 키스할 수 있는 찬스가 오게 되다니. 놓칠 수 없지." 귀엽게 윙크하면서 말하는 누나. 그러자 유아 선배의 표정은 더욱 울상으로 변한다. 그러게 왜 하필이면 키스라는 명령을 내려서 이 고생인지 모르겠다. 아니, 그 이전에 남동생을 상대로 키스를 해야 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저리도 의지를 불태우는 누나도 조금 이상한 거 아닌가. 정신적인 상태를 의심해 볼만하다. 나머지 한명의 벌칙 수행자를 뽑기 위해서 다시 가위바위보. 그런데 이번에도 또다시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바로 누나가 걸린게 아니라 '세리아'가 걸렸기 때문이다. 자신이 벌칙 수행자로 당첨된 것을 뒤늦게 안 세리아의 얼굴이 급격하게 빨개지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도 설마 세리아가 당첨될줄은 몰랐는지 한동안 정적에 휩싸이게 된다. ... 그래도 엘리와 키스하는 것보단 다행인가. 범죄자를 면하게 된 것은 어찌보면 내겐 행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누나를 상대하게 되는 일도 피하게 되어서 천만다행. 나중에 후폭풍을 감당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유에 선배." "왜?" 아리아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게 깔면서 나에게 거의 협박투로 말하기 시작한다. "세리아 언니는 머리털 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키스니까 부드럽게 대해주세요. 알겠나요?" "유난히 그 '처음으로'라는 글자를 강조하지 않냐?" "... 사실 유에 선배에게 언니의 첫번째 키스를 바치고 싶게 할 마음 따위는 전혀 없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죠. 벌칙은 벌칙이니까. 그리고 제가 말린다고 해도 언니가 스스로 정했으니까요." "정했다니. 세리아. 너 정말 나랑 키스... 할 생각이야?" 단도직입적으로 세리아에게 묻는다. 그러자 마치 신혼밤 수줍은 새색시처럼 홍조를 띄운 세리아가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청순계의 대표 선두주자. 그런데 이거와는 전혀 별개잖아. 아무리 나라고 해도 여성의 첫키스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 그런데 고작 이런 벌칙따위로 첫키스를 바쳐야 하다니. 하지만 세리아도 허락 했으니까 뭐... 나는 무죄겠지? 아마도. 천천히 세리아에게 다가간다. 엄청 커져버린 성기를 덜렁이면서 다가가는 내 포즈는 영락없이 알몸의 세리아에 현혹되어 그녀를 덮치러 가는 변태의 모습을 하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주변의 여성들의 눈이 그렇게 나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떳떳하다. 왜냐하면 이건 벌칙이니까. 벌칙이다. 벌칙이라고. 상대방 또한 동의의 의사표시를 보여준 공식적인 키스다. 정당방위. 그리고 무죄. 세리아의 양 어깨를 잡자, 움찔거리던 세리아가 이내 눈을 감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키스. 부드러운 세리아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자, 그 틈을 노려 혀를 집어넣는다. 추릅 하는 효과음과 함께 세리아의 혀가 내 혀를 피해 도망치는 듯한 움직임을 펼치다가 이내 결국 구석에 몰린 세리아의 혀는 내 혀에게 전적으로 움직임을 맡긴다. 순백한 여성의 혀를 점점 능욕해간다. 비록 키스일 뿐이지만, 서로 알몸 상태에서 나누는 키스는 새로운 흥분감을 전해준다. 우리들의 침이 섞인 타액은 세리아의 가슴 위로 떨어지며 그녀의 유두쪽으로 흘러간다. 곱게 무릎을 꿇은 채 얌전히 내 키스를 받고 있는 세리아. 여전히 눈을 질끈 감은 채 내 움직임에 맞춰 혀를 움직인다. 정말 첫키스가 맞나보다. 물론 나도 그리 많은 키스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무후무한 세리아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교수님과 섹스라는 강도 높은 스킨십도 한 적이 있으니까. 그렇게 대략 몇분이 지났을까. 스톱이라는 누나의 말과 함께 세리아에게서 멀어지자, 잠시 우리 사이를 잇고 있었던 타액이 길게 늘어지며 약간 야한 장면을 연출한다. "... 키스 잘하는데? 남동생. 내가 상상했던 기존의 어리버리한 남동생의 이미지가 아니야." "그런가?" "보는 나도 조금 흥분될 정도였어." "흥분하지 말라고. 변태 누나." 나도 모르게 딴죽을 걸어버렸다. 흥분할 장면이 따로 있지. 제 3자의 시선으로 우리 둘의 키스 장면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땠는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미묘한 기분이 든 것은 사실이다. ============================ 작품 후기 ============================ 어제는 제가 글을 연재하면서 실로 오랜만에 추천이 200이 넘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추천 감사합니다~! 51화 세리아와의 키스 이후로. 아무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자,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은 붉어진 표정의 유아 선배가 말을 이어간다. "자, 잘 봤어..." 도대체 무엇을 잘 봤다는 것인가. 여전히 아그작 아그작 과일을 먹는 엘리를 제외하곤 모두가 다 침묵 상태에 들어간다. 그렇게나 충격적이었던 것인가. 나와 세리아의 키스가. 내가 말하기에도 좀 그렇지만, 사실 그리 충격적이었던 것은 아니라고 보는데. 당사자가 세리아와 나라는 사실 빼고는 그냥 평범한 키스 아니었나... 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타락한 것인가. 무인도에 오고 나서 진짜 사회에서 겪어볼 수도 없는 여러가지 행각들을 많이 체험하고 나니까, 솔직히 말해서 무인도에 표류된 것도 나쁜 일의 연속만이 있는 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조금 하고 말았다. 현실에 안주하면 안되겠지만. 어느정도 진행된 게임을 슬슬 끝내고자, 교수님이 우리들에게 말을한다. "일단 점심이라도 먼저 먹을까?" 노아 교수님의 제안이었다. 유일하게 손목시계를 가지고 있는 노아 교수님인지라 지금이 12시가 다 되어간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어쩐지 배가 고파 오더라. 현대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했다고 해도, 인간의 생체시간이 때로는 더 정확할때가 있다고 깨닫게 되는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바깥에 태풍 수준의 비가 내리기 때문에 오늘은 어제 아리아와 세리아가 캐온 고구마와 감자를 구워먹기로 했다. 거실 구석에 놓인 화로 근처에 감자와 고구마를 꿰어놓은 막대기를 세워놓고 기다리는 중. 생으로 먹어도 맛있지만,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따스한 고구마를 먹는것도 좋다고 생각이 든다. 다들 화로에 모여서 불을 쬐고 추위를 녹이는 중. 이 무인도 지방이 그리 추운 장소는 아니라고 해도, 알몸 상태에서 버티는 건 체감온도가 낮게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공기의 감촉을 선사해주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몸을 녹인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거 같지 않아?" 화로 속에서 고구마를 꺼낸 유아 선배가 자신의 팔을 비비적거리며 말한다. 아침이 지나고 점심시간에 들어서자 쌀쌀해지는 날씨. 사실 아까부터 나도 어느정도 주변 기온이 춥다는 사실은 감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고환이 오그라들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남성기라는 것은 이런 면에서 정말 좋다고 본다. 더울때는 고환이 축 늘어지고, 추울때는 오그라드는 생체 온도계. 그런데 원래 용도는 이게 아니잖아. 세리아의 고구마 껍질을 벗겨주던 아리아가 유아 선배의 말에 대답한다. "이불이라도 꺼내서 두르는게 어때요?" "좋은 생각이긴 한데..." 현재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이불은 고작 3개가 전부. 7명이니까 2명, 2명, 그리고 3명. 이렇게 짝을 지어 이불을 두르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 되는거다. 결국 누군가와는 나와 같이 이불을 두르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 3명 그룹은 체구가 작은 엘리가 들어가면 문제가 없지만, 다른 한명은 남자인 나와 직접적으로 알몸을 서로 부대끼며 좁은 이불을 두르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결국 누가 유에 선배와 이불을 같이 두르는지가 문제네요." "이것도 가위바위보로 정할래?" "유린 선배. 그렇게 쉽게 정할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가?" 엘리를 제외하고는 남은 여자들이 골똘히 고민중. 그 중에 누나가 손을 번쩍 들며 말한다. "내가 할까?" "자진해서 나서는 이유가 뭔데?" "그야 난 유에의 가족이잖아. 괜찮겠지?" 가족이니까 오히려 더 문제있는거 아닌가. 어느 평범한 집에서 다 큰 남매가 서로 나체로 같은 이불속에 들어가냐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나가 저렇게 직접 나서는걸 보면 분명 또 무슨 꿍꿍이가 있을 터. 하지만 여기서는 다른 여성들보다 누나가 같이 이불을 사용하는게 좋겠다고 판단했는지 결국 나와 누나가 한 그룹, 노아 교수님과 엘리, 유아 선배가 한 그룹, 마지막으로 쌍둥이 자매인 아리아와 세리아가 한 그룹으로 지정되었다. 버팀목(?)을 읽은 엘리는 처음에는 당황스러운 모습으로 우왕자왕 했지만, 이내 제 2의 타겟을 발견하고 그 여성의 허리에 매달린다. 제 2의 타겟이 된 인물은 바로 노아 교수님. 느닷없이 자신의 허리에 안겨오는 엘리의 모습에 교수님이 당황하며 작게 비명을 지르지만, 엘리는 그런거는 전혀 상관 없다는 듯이 교수님의 큰 가슴에 얼굴을 묻고 부비부비 거리기 시작한다. 뭐랄까. 엄마와 딸 같은 느낌? 이렇게 말하면 노아 교수님이 엄청나게 화내겠지. "교수님이 좋은가 본데요?" "그, 그래?" 누나도 인정하는 것을 보아하니 확실히 노아 교수님이 마음에 든 모양인가보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노아 교수님을 골랐을까 하고 고민해본 결과. 아마도 가슴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지금 여기에 있는 여성들중에 가장 가슴이 큰 인물은 바로 노아 교수님. 그 다음 후순위로 누나와 유아 선배가 있는데, 엘리는 그 큰 가슴에 매력(?)을 느끼고 노아 교수님에게 달라붙은 것이라고 해석되는 것이다. 잠시간의 점심식사. 있는 것이라고는 물과 고구마, 감자 뿐이기 때문에 그다지 활기찬 점심시간은 되지 못한다. 간략하게 식사를 마치고 잠시 게임을 중단시킨 채 이불에 들어가서 몸을 녹이는 중. "실례할게." 윙크하며 같이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누나가 내 옆에 앉는다. 순간 움찔한 느낌이 들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괜한 오해를 사기 싫어서였다. 게임을 재개하기 전에, 잠깐 담화를 나누는 소각상태. 누나도 깔깔 웃으면서 대화에 동참한다. 여자 3명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말은 괜히 있는게 아닌가보다. 어디서 그렇게 수다 소재가 마구마구 샘솟는지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대화하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선 내 말수는 점점 줄어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누나가 내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놓는다. 순간적으로 누나를 바라보지만, 누나는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노아 교수님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눈다. 우연인가? 이불 속은 좁으니까 단순한 사고일수도... 하지만 나는 누나의 행동이 사고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누나의 손이 점점 내 사타구니 안쪽으로 향하더니 발기된 성기를 잡는게 아닌가. 갑자기 왜 이런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말리는게 좋다는 생각으로 누나의 손목을 잡는다. 하지만 내 성기를 움켜쥔 손을 전혀 땔 생각이 없는지 누나의 악력은 점점 더 강해진다. "... 윽...." 나도 모르게 표정이 점점 변해간다. 눈치라도 챈 것일까. 나와 누나 그룹의 옆에 있던 아리아가 이상한 표정으로 묻는다. "선배.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 아니야. 아무것도." "... 수상한데요." "아니라니까. 하하하!" 거의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인다. 다른 여자도 아니고 친누나가 내 중요부위를 잡고 있다는 모습을 들키는 순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갈 가능성이 너무 커서 일단 아무런 일 없다는 듯이 무마시킨다. "누나." "응? 왜?"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내 말에 응답하는 누나의 뻔뻔함에 할 말을 잃었다. 어쩔 수 없지. 나도 손을 뻗는다. 누나의 얇은 허리에. 그리고. "아야얏?!" 누나가 짧은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진다. 쓰고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대 누나 필살기를 발동시킨 나. 일명, '옆구리 꼬집기' 스킬을 사용하고 말았다. 유독 옆구리 촉감이 민감한 누나가 왼쪽 옆구리를 부여잡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동자로 나를 째려보며 말한다. "너, 너! 그거 반칙이야!" "누나가 한 짓은 반칙이 아니고?" "으..." 생각지도 못한 일격을 당했는지, 억울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누나의 표정. 남동생에게 한 방 먹었다는 게 그렇게나 자존심 상하는 일인가. 먼저 뻔뻔한 행동을 한 쪽은 누나면서. 티격태격하는 우리 둘 사이를 바라보던 노아 교수님이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연다. "둘이 사이가 좋구나." ""전혀요." " 나와 누나가 합창하듯 똑같은 단어로 대답하자, 교수님은 어색하게 웃는 미소만을 보여준다. 뭐. 다른 집안과는 달리, 유독 남매지간 치고는 꽤나 서로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우리 가문이자 우리 남매의 관계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친누나가 남동생의 성기를 잡고 장난을 친다는 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누나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려준 것. 말로 안 되면 행동으로. 누나에게 따끔히 교육을 시켜줬을 뿐이다. "... 매정한 남동생." "누나가 더 심했다고." "쳇. 재미없어." 다시 이불 안으로 들어온 누나가 투덜투덜거린다. 금방 삐지고 금방 풀리는 게 누나니까. ============================ 작품 후기 ============================ 확밀아는 뽑기에서도 안 주던 슈레를 각요 잡아서 주는 걸 봐서, 현질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마음을 마구마구 심어주는 그런 게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뽑기 티켓을 30개를 투자했건만... 슈레 이상을 받은 적이 없다니 ㅡ_ㅡ; PS. 가급적이면 전에 있던 등장인물들은 다 나오는 걸로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52화 잠시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는 말을 했던 누나가 돌아오고 대략 오후 2시 경. 여전히 이불을 두르고 몸을 녹이고 있는 우리들 중에서 노아 교수님이 천장에 걸어놓은 세탁물들을 보며 말한다. "적어도 빨래정도는 해두고 걸어둘걸 그랬네." "그러게요. 조금 후회되네요." 유아 선배도 동조한다는 듯이 노아 교수님 옆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엘리를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이불을 두르고 있는 선배와 교수님. 다른 여성들에 비해 노아 교수님이 성인이라고 해도, 여성의 체격 차이는 남자처럼 크게 나지 않는다. 다들 고만고만한 키와 체구를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 없이 여성 3인조 그룹은 다른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적당히 이불을 두르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바깥에는 아직도 비가 우수수 쏟아지는 상황. 아까부터 미세하게 천둥 소리도 들리는 것으로 보아서는 정말로 태풍이라도 지나가는 듯 하다. 이 날씨 속에서 빨래를 하러 가는 것은 무리. 세탁도 안한 옷들을 말려봤자 입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리고 어차피 우리들에게는 이불이 있기 때문에 그리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체온을 유지시켜주는 화로라는 존재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거실에 설치되어 있는 이 화로는 통나무 집 내부에 설치하기엔 상당히 위험한 시설. 그러나 엘리의 부모님들은 이 화로 주변에 철판(엘리 가족들이 타고 왔다가 추락한 비행기의 합판이라고 보여진다)으로 둘러서 주변에 발열물질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고,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위에 연통까지 설치해뒀다. 그래서 이렇게 실내에 화로를 쬘 수 있는 것이다. 얻어 사는 입장이지만, 엘리의 부모님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감사의 인사를 마음 속으로 드리도록 하자. 아무튼 한동안 그칠거 같지 않는 날씨 속에서 우리들은 또다시 침묵으로 일관하며 시간을 떼우고 있었다. 엘리는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노아 교수님의 허벅지 위에 기댄 채 새근새근 졸고 있고, 세리아도 피곤한지 아리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 노아 교수님과 유아 선배도 완벽하게 자고 있는건 아니지만, 점점 눈커풀이 무거워지는 듯이 깜빡 조는 모습을 간혹 보여주고 있는 상황이다. 그나마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있는 것은 나와 아리아, 그리고 친누나인 유린이란 여자, 이 3명이 끝. "심심하네요." 현재의 심경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아리아의 말에 전적으로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와 누나였다. "심심하니까 진실게임이라도 할까요?" "넌 그 진실게임, 참 좋아하는구나." "진실게임 프로게이머거든요." "그거 참 부럽다." 사실은 전혀 안 부럽지만. 약간 비꼬는 말투에 조금 심술이 났는지, 아리아가 뾰로퉁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말한다. "선배가 저에게 그런 아니꼬운 말을 할 만한 입장은 아닐텐데요." "뭐가 어때서." "교수님과 유아 선배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으면서..." "......"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우리 둘... 아니지. 3명의 관계가 거의 공식 설정화 되다시피 한 모양인가 보다. "좋겠네요. 유에 선배. 양다리라서." "본의 아니게 이렇게 된 거라니까." "그래도 남자의 입장에선 싫진 않은 상황이죠? 양 손에 꽃이니까." "그야... 솔직히 말하면 그렇긴 하지." 둘 다 연상이라는 점도 그렇고, 성격은 다르긴 하지만, 공통점이 있는 반면 차이점도 분명 존재한다. 공통점이라면... 가슴이 둘 다 큰 편이라는 점? 교수님이 유아 선배에 비해 조금 큰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자는 가슴 크기가 전부가 아니다. 따스한 마음씨. 성격. 간략하게 말하자면 내면적인 아름다움. 이 얼마나 좋은 울림을 가진 단어란 말인가. "성인군자 납시셨네요." "넌 내 머릿속에 있는 독백도 알아듣냐?" "대충 선배의 표정으로 봐서 지금 어떤 생각을 머릿속에 품고 있는지 다 알 수 있어요." "능력도 좋다. 너." "유에 선배는 금방 얼굴에 티가 나는 편이니까요. 좀 더 개인 감정을 숨기는 게 좋아요. 포커페이스라는 단어가 있잖아요?" "레이디 가가의 노래지." "팝송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나도 알아. 그냥 웃자고 한 소리라고." "별로 웃기지도 않았어요." "......" 난 가끔 이 녀석이 정말 내 후배인가. 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적어도 선배에 대한 존경심 정도는 품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다. "나, 그러고보니까 너한테 듣고 싶은 게 있었는데." 내 바로 옆에서 팔짱을 낀 채 기대고 있던 누나가 얼굴에 화색이 돌며 대화에 끼어든다. 언행으로 보아선, 방금 나한테 삐쳤던 에피소드는 금새 말씀히 세탁된 것 같아 보인다. 정말 감정에 충실한 여자다. 우리 누나란 사람은. "뭔데." "아무거나 물어봐도 돼?" "신상정보는 금지." "진실게임인데?" "난 진실게임을 하겠다고 말한 적도 없고, 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어." "그럼 누나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볼게. 보편적인 질문이야." "...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해지는데." 누나가 정상적인 질문을 하겠다니. 나름 오랫동안 누나와 같이 지내왔지만, 이런 말은 또 처음 들어본다. 곰곰히 생각에 잠기던 누나가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묻기를. "우리 가문의 며느리로 들어올 사람은 누군데?" "......"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강력한 마구가 들어왔다. 게다가 흠 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스트라이크. 이게 온라인 상에서 유행하고 있는 단어로 표현하자면 '돌직구'라는 건가. 전혀 거리낌없이, 하나의 겉치레 없이, 빙글빙글 돌려 말하는 간접적 요소도 전혀 포함하지 않고 그대로 스트레이트성 질문을 던진다. 이래야 내가 알고 있는 누나답지. "생각해본 적 없는데." "에이. 그게 뭐야. 재미 없게." "누나는 재미로 내 미래의 아내를 고른단 말이야?" "현재 유아나 교수님 둘 중에서 누가 너랑 제일 가까운지 알고 싶어서 그렇잖아. 아리아도 궁금하지 않아?" 대기하고 있던 제 3자, 건방진 후배 아리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진실게임이니까요." "그러니까 난 하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대도." 이상한 여자들이다. 본래 여자들은 이런 연애 이야기 떡밥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그렇다고 본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지금은 비록 졸고 있다곤 하지만, 행여나 잠에 든 척 하면서 몰래 듣고 있을 가능성도 베재할 순 없으니까. "둘 중에 한 명을 선택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하지만." 그래도 기왕 질문을 받았으니, 솔직한 감정을 표시해본다. "육체적으로 가까운 순위를 따지면 아무래도 교수님 쪽이 더 끌리는 게 사실이지." "응큼하군요. 선배." "니가 그런 말을 나한테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가만히 생각해보면, 유아 선배와는 아직 몸을 섞은 적이 없다. 교수님과는 얼마전에 실제로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기도 했고.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 곳, 통나무 집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관계를 가졌으니까 최근 중에 최근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몸을 섞었다고, 크게 관계가 진전된 것 또한 아니다. 사귀고 있다고 하기엔 뭐하고... 애매한데. 이것도. "잘 생각하며 하라고. 남동생." "충고 정말 고마워. 새겨들을게." 연애에 대해서는 솔직히 진지하게 생각을 해봤던 적이 없었는데, 무인도라는 한정적인 장소에 있다보니 이런 것도 고려를 해봐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그냥 무턱대고 서로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은 짐승이나 하는 것이고. 서로간의 감정을 느끼며 차근차근 접근해 나가야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닐까. 그리고 그게 사랑이라는 연애 감정이기도 하고. "발정난 수컷마냥 이 여자, 저 여자 건들이고 다니지 말고." "나도 안다니까." "뭣하면, 저번에 너에게 선물해줬던 그 전설의 '비약'을 빌려줄 수도 있어." "그게 뭐 대단하다고 '전설의'라는 접두어까지 붙이는 거야." "어머. 현대 약학계를 뒤흔들만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킬지도 모르는데?" "그거야 누나의 말이 너무 과장된 것이고." 감정 없이 무조건 본능에 충실하는 것은 동물들이나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누나에게 비약을 받고, 그저 서로간의 육체를 탐하는 것은 성인 AV를 찍는 배우들 선에서 끝나면 될 일. 서로간의 취향에 따라 빈번한 육체 관계를 가지는 건 상관 없겠지만, 아직까지는 섣불리 접근하면 안 된다. 비록 무인도라는 각박한 상황이긴 하지만, 최대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평정심을 유지하며 지내면 되는 것이다. 살기 위해 여자를 강간하고, 인육을 먹었던 사람들과 다르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고 다니던 여자, 이예신 같이 이상한 정신상태를 가진 여자와는 다르게. ============================ 작품 후기 ============================ 대학 신입생때는 매번 마시는 게 술이었는데, 이제는 술을 거의 안 먹다보니 주량도 많이 약해졌나 봅니다. 맥주 500cc에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라니... 좋은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주량의 퇴보에 걱정을 해야 좋을지 잠시 고민이 되던 순간이었습니다. 53화 EP 9. 넌 이미 입고 있다. 단지 깨닫지 못했을 뿐. 어제 하루종일 빨래도 못 말리고, 덕분에 습기 찬 집 안에서 그다지 명랑 쾌활하지 못한 기분으로 하룻밤을 지샌 우리들. 하지만 밤이 되고 나서야 날이 밝아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오늘에서야 쨍쨍한 태양의 밝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시작된 일과는 바로 빨래. 노아 교수님과 아리아, 그리고 세리아 이렇게 3명이서 옷을 세척하는 동안, 유아 선배는 예전에 본인이 만들었던 '유아 표 자연산 수영복'을 다시 만들려고 재료를 구하러 잠시 이 주변을 배회하기로 했다. 패션계의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잘 만들었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문제는 나뭇잎이 주 재료인지라 너무 쉽게 찢어진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내구도가 약한 옷은 기능성을 상실하게 되는 법이니까. 유아 선배가 새로운 자연산 수영복을 만드는 동안, 그럼 나머지 우리들은 뭘 할까 고민하던 중. 누나가 나에게 엘리를 떠넘기며 말한다. "남동생. 엘리를 데리고 유아랑 같이 심부름 좀 갔다올래?" "심부름?" "응. 길 안내는 엘리가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갔다 왔으면 좋겠는데." "나는 상관 없는데. 유아 선배는 수영복 만든다고 바쁘잖아." 나름 유아 선배는 정당한 일을 하고 있다고 말을 하지만, 누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정론으로 즉답한다. "솔직히 말해서 만들어봤자 쓸모가 없잖아." "하긴." 어차피 우리들에게는 여벌의 속옷,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여성진들에게는 각각 여벌의 속옷 1개를 포함해서 총 2개의 속옷을 가지고 있고, 나는 2~3벌 정도의 속옷을 가지고 있다. 이 섬에 있던 엘리의 부모님 속옷인데, 문제는 여벌의 속옷이 있다고 해도 엘리의 부모님 중 어머니께서는 미국인답게 가슴 사이즈가 꽤나 큰 편이어서 그나마 맞는 편이 노아 교수님이나 누나 정도밖에 없었다. 나머지 일행들은 그럭저럭 수치를 손수 개조해서 간신히 여벌의 속옷을 확보한게 전부다. 그리고 어차피 이 섬에 있던 남자라고는 나밖에 없으니까 남성용 속옷은 어느정도 여벌이 많이 있는 편이다. 약간 찢어진 곳도 있지만, 이것이 어디인가. 없는것 보다는 나은 편이겠지. 결국 한마디로 말해서, 어제와 같이 갑작스런 폭풍이 오지 않는 이상은 속옷 걱정은 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유아 선배가 만든 수영복은 말이 수영복이지, 사실 물에 들어가도 그다지 수영복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로지 하는 역할이라고는 '가리개' 기능 밖에 없으니까 만드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가리개 역할이라면 굳이 속옷이 아니더라도 옷을 걸치면 되니까. 나름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누나가 싱긋 웃으면서 말한다. "그러니까 쓸모없는 곳에 노동력을 낭비하지 말고, 유아랑 같이 엘리를 데리고 사이좋게 갔다 와." "장소가 어딘데?" "그리 멀지 않아. 여기서 5분 거리 정도?" "아니. 거리를 물어본게 아니라 '장소' 말이야." 제일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누나에게 우리가 가야할 장소가 어디인지 물어본다. 앗차 하며 말해주지 않아서 미안 이라는 의미를 담은 윙크를 하는 누나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답한다. "엘리의 가족분들이 타고 왔던 비행기가 있는 장소야." "비행기?" "그래. 그 곳에 아직 보관중인 물품들이 몇개 있으니까, 가져왔으면 해서." "통나무 집으로 다 가져온거 아니었어?" "엘리의 가족은 소규모잖아. 그리 많은 물품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비행기의 잔해 안에 보관해놓은 물품들이 몇개 있어. 특히나 의류 같은거." "옷이 더 있단 말이야?" "어제같은 경우에는 폭풍이 너무 거세게 몰아친 바람에 가지 못했지만, 여벌의 옷이 더 있어. 대부분 여성용이겠지만." "남자옷은 별로 없나보네." "안타깝게도 말이야. 엘리의 어머님이 의상쪽에 종사하셨던 분인가봐. 거의 여성용 의류가 많이 있더라고. 세계여행을 하면서 사온 옷들도 많이 있고." "남자옷은?" "있긴 한데. 여성용에 비해서는 별로 없는 편이야." "4~5벌 정도만 있으면 만족해." 엘리의 부모님에 대한 사실은 사실 그다지 많이 듣지 못했다. 내가 직접 엘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의사소통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있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고.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엘리에게 슬픈 기억을 되살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암묵적으로 엘리의 부모님에 대한 사실을 듣는 것을 꺼려온 것일지도 모른다. "누나." "응?" "그런데 엘리를 그 곳에 데려가도 돼?" 부모님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인지라 정말 엘리를 그 곳에 함께 데려가도 좋은지에 대한 판단을 다시한번 누나에게 묻는다. 그러자 누나는 별로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의 뜻을 담은 미소를 넌지시 건낼 뿐이다. "엘리는 그렇게 약한 아이가 아니야. 그러니까 신경쓰지 마." "......" 과연 정말로 그럴까. 우리들 중에서도 엘리와 가장 많이 지내왔던 누나가 하는 말이기에 일단 따르기로 하지만, 과연 엘리의 속마음은 어떤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아직 여리디 여린 꼬마 숙녀. 하지만 엘리라는 아이는 3년동안 야생에서 살아온 경력을 가진 강한 아이다. 그런 아이에게도 부모라는 존재는 든든한 기둥이자 휴식처가 되어주는 것. 그런 존재를 잃었으니 엘리의 마음속 한 켠에 상실감이라는 커다란 공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모처럼 획기적인 수영복을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정말." "진정하세요. 선배." 약간 불평불만을 내뱉으며 결국 우리와 합류한 유아 선배. 그녀를 사이에 두고 엘리가 앞장서고, 그리고 내가 약간 뒤에서 따라가는 포메이션을 유지하며 엘리의 지도를 받아 비행기가 있는 장소로 이동중이다. 사전에 미리 누나에게 몇몇의 지시를 받았는지 엘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물론 말해봤자 우리들이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엘리 본인도 알고 있기에 말을 안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묵묵히 우리들을 데리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현재 우리가 걷고 있는 곳은 숲속 안으로 향하는 길. 비행기가 섬의 가운데 부근에 떨어진 것일까. 점점 으스스해지는 숲속의 길을 따라 우리는 속도를 재촉한다. 가뜩이나 옷 전부를 세탁하는 중이라서 알몸인 상태. 신발은 신고 왔지만, 엘리는 맨발이다. 결과적으로 알몸인 상태로 신발만 신은 우리들의 이 모습이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알몸이 싫어서 일부러 수영복이라도 만들려고 했었는데." "그러게요." 일반적인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지금 당장 경찰서에 신고할 법한 그런 차림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차림을 하고 있다. 덜렁거리는 성기도 신경쓰이고, 걸어나가는 유아 선배의 탄력적인 엉덩이도 절로 시선이 간다. 여기서 괜히 남자의 자존심이 우뚝 서게 된다면, 엄청나게 쪽팔린 일이 벌어지게 될 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옷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순간이네요. 진짜로." "그러게 말이야." 나와 유아 선배는 서로 퉁명스럽게 불만을 내뱉으며 가지만, 엘리는 묵묵부답으로 잘도 다닌다. 게다가 맨발로. 역시 야생소녀. 알몸이든 뭐든 숲속이라면 거리낌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에 솔직히 말해서 감탄이 절로 나온다. 불편하지 않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영어를 못하는 관계로 생략. 설마 무인도에 와서까지 언어의 장벽을 느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작품 후기 ============================ 오늘이 확밀아 석탈해하고 색동 등장이 끝나는 날인가요? 석탈해 기껏 4장 모았건만... ㅡ_ㅡ;; 풀돌도 못시키겠군요;; 54화 나체 상태의 선배가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내리며 땀을 닦는다. 알몸이라 그런지 선배의 탄력적인 엉덩이 살이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섹시함을 자랑하며 요리조리 흔들린다. 간혹 보이는 비밀스러운 둔덕. 아. 요새 묘하게 노아 교수님과 있을때도 그렇고, 지금 유아 선배의 뒷 모습을 보면서도 그렇고. 유난히 여성의 엉덩이 쪽 속성에 취미를 들인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샘솟는다. 이런걸 패티쉬라고 하는건가. 이런 내 속내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일까. "... 유에." "네. 선배." "너, 지금 흥분했지." "그, 글쎄요..." 유아 선배가 살짝 뒤를 돌아보며 눈을 흘긴다. 특히나 커져버린 아랫도리를 말이다. "거짓말. 몸은 정직하게 반응하고 있잖아." "알잖아요. 선배. 여자의 알몸을 보면서 걷고 있는 제 사정도 생각해주시면..." "흥. 혹시 또 몰라. 갑자기 등 뒤에서 날 덮칠지도 모르잖아." "부정할 순 없지만..." "그런건 부정하라고! 이 바보!" 목검은 아니지만, 근처에 있던 나뭇가지를 던저 검도 자세를 취하려고 하는 유아 선배를 간신히 또 말린다. 이래저래 남자의 입장에서 여자에게 많이 양보해야 하는게 약간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이 상태에서 마음만 먹으면 유아 선배를 강간할수도 있지만, 선배의 의사를 어기면서까지 육체 관계를 가지는 것은 양심에도 찔리니까 이럴때는 절제하자. 게다가 흥분을 해버리면 발기된 페니스가 걸을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려서 불편하니까 말이다. 아무튼 중간에 약간의 트러블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누나의 말 그대로 대략 5분 정도가 지나서야 소문의 비행기가 추락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눈 앞에 드러난 녹슨 비행기의 모습. 상상했던 것 보다 큰 편은 아니지만, 개인 소유용 비행기니까 그 크기의 문제는 가볍게 넘어가도록 하자. "come on." 우리에게 손짓하며 이쪽으로 오라고 말하는 엘리. 우리를 배려해서 일부러 짧고 간단한 영어 단어만을 말해주는 엘리가 조금은 대견스럽기도 하다. 동시에 영어를 못하는 내 고등학교 성적이었던 외국어 영역 5등급과 토익 성적이 조금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럴줄 알았으면 공부라도 좀 해둘걸. 설마 무인도에 표류해서 미국인과 만날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세삼 느껴지는 우리나라의 주입식 교육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함이 뒤늦은 후회를 부르고 있었다. 낡은 비행기의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서는 엘리를 따라 나와 유아 선배도 뒤를 따른다. 내부는 햇빛이 들어오긴 하지만, 상당히 어두컴컴한 상태. 그래도 어느정도 어둠에 점점 익숙해지다 보니까 실루엣은 구분이 가능할 정도의 시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손을 비행기의 벽체에 대보자, 구석구석에 먼지가 묻어 나온다. 한동안 사람의 손길을 받지 않은 곳인가. 누나의 부연설명을 다시 상기시키자면, 엘리의 가족들은 대부분의 생필품 용 물건들은 통나무 집으로 옮겨왔고, 비행기는 창고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통나무 집이 위치한 곳과 비행기가 떨어진 곳이 가까운 것도 바로 그러한 점에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한때는 비행기였지만, 지금은 날지 못하는 창고 신세로 전락해버린 비행기와 자주 오갈 정도의 가까운 거리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집의 위치 하나하나까지 신경써서 만든 엘리의 부모님에 대한 세심함이 조금은 감사하고, 그리고 존경심도 든다. 뭐... 엘리의 부모님 께서도 설마 우리들이 이런 식으로 무인도에 표류되어서 생활하게 될 줄은 모르셨겠지만. "우와... 못보던 물건들이 많이 있네." 유아 선배가 비행기의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탄성을 자아낸다. 몇몇 짐상자로 보이는 것들과 공구 도구들, 그리고 기타 여러가지 값비싼 식기도구들도 보인다. 이 짐상자가 누나가 말했던 옷들인가. 상자에 손을 대며 일단 하나를 뜯어본다. 가벼운 느낌이 나는걸 보아서는 아무래도 옷이 맞는듯 하다. 천천히 상자를 열고, 그 내용물을 확인해본다. 결과는 빙고.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알록달록한 의류들이 시야에 먼저 들어온다. 왜 이런 옷들을 비행기 내부에 보관하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옷을 일단 꺼내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왜 엘리의 부모님이 이 옷들을 비행기 창고에 넣어뒀는지에 대한 이해가 충만하게 들기 시작한다. "뭐, 뭐야. 이 옷들..." "......" 유아 선배가 약간 당황해하며 말하지만, 엘리는 대답하지 않는다. 마치 익숙하다는 듯이 별다른 표정변화를 보이지 않고 유아 선배가 들어올린 옷을 바라본 뒤에 하나하나씩 상자에서 꺼내기 시작. 어차피 엘리는 이 상자에 들어있는 내용물에 대한 정체를 진작에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놀라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내 손에 들린 채 모습을 보인 옷. 그렇다. 분명 옷이다. 하지만 옷에서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지 않은가. 예를 들자면 이런거. 중세시대의 상위 귀족 부인들이 입었을 법한 프릴이 가득 달린 옷들이라든지, 아니면 바니걸 의상이라든지, 아니면 화사한 드레스라든지. 상자 내부를 이리저리 뒤져보던 유아 선배가 이해가 잘 안간다는 듯이 나에게 묻는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옷들이 왜 여기 있는거야?" "아까 누나에게 들은건데, 이 옷들은 엘리의 어머님께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시며 수집한 귀한 옷이라고 하던데요." "저, 정말?!"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해가 안된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유아 선배가 '비싸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재빨리 시선을 바꾼다. 이래서 여자들의 허영심이란. 마치 처음에는 상표만 가린 손가방을 보여주면 '싸구려 티가 너무 나요. 어멋!'이라는 반응을 보이다가 중간에 '샤X'이라는 브랜드 명을 보여주면 '너무 멋져요, 이 가방! 알라뷰 쏘 마치!'라고 급변하는 태도와 비슷하다고 본다. 유아 선배도 여자라서 이런 류의 상품을 보면 눈을 반짝반짝 모드로 체인지 시키는건 어찌보면 생리학적으로도, 그리고 사회학적으로도 당연할지도 모른다. 여성은 남성들을 유혹하기 위해 자신을 계속해서 꾸미고, 또 꾸민다고 하지 않는가. 남성이 '힘'으로 말하는 존재라면, 여성은 그 힘있는 남성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종족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여자의 본능. 그리고 유아 선배도 여자. 나름의 공식이 성립되는 순간이다. 예쁘게 치장하는 것이 여자의 본능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수컷을 유혹하기 위한 암컷의 행동은 정당범위 내에서 인정이 가능하니까. 물론 뭐든지 도가 지나치면 보기 힘든 게 마찬가지. 지나치게 비싼 명품 백이나 명품 옷을 요구하는 것도 일종의 '도가 지나친' 행동 범위에 들어가지 않을까 추측한다. 교수님도 어느 정도 허영심이 있는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지만, 무인도에 있는 터라서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 싫어하시진 않겠지만, 만약에 내가 교수님과 사귀게 된다면 경제적인 면에서 조금 손해를 감수해야 할 지도 모른다. ...... ... 이건 너무 섣부른 판단이었나. 교수님이 나랑 사귄다는 생각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을 섞은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마음까지 허락해준 것인지에 대해서는 나조차도 알 수 없으니까. "유아 선배. 너무 욕심 부리지 말라고요. 적어도 '입을 수 있을만한' 옷을 고르고 가져가야 하니까요." "나, 나도 알고 있다고! 사람을 무슨 욕심 꾸러기 취급을 하는거야?" "혹시나 몰라서 미리 한 말이에요." "흥. 실례되는 말을 하다니.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 엉덩이를 보고 발기된 주제에." "그건 남자의 생리현상이에요." "나도 이건 '여자의 생리현상'이야." 뭔가 의미가 다른 말싸움을 하는 느낌이다. 아무튼 옷을 보는 취향이 없는 나인지라 일단 쓸만한 옷을 고르는 것은 유아 선배에게 맡기도록 했다. 더불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체구가 작은 엘리의 옷 역시도 유아 선배가 직접 골라주기로 한다. 여성들이 옷을 고르는 동안, 나는 주변에 잠깐 산책이라도 갔다 올까 하는 마음으로 비행기 밖을 나서려고 했지만, 생각이 달라졌다. 아까 봤던 공구들이라든지, 기타 통나무 집을 증축시킬만한 도움이 되는 도구들이 몇개 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비행기 내부를 돌아다니며 몇몇 아이템(Item)들을 찾아볼까 하고 발상을 전환시킨 것이다. 비행기 내부는 그리 넓지 않지만, 쌓여있는 물건은 많은 편. 대부분 엘리의 어머님께서 수집한 옷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중에 뭔가 쓸만한 아이템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잠시 유아 선배와 엘리를 뒤로 하고 비행기 내부의 반대편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예상치 못한 보물급 도구들을 발견할 수 있을거란 희망을 가지면서 말이다. ============================ 작품 후기 ============================ 조아라 접속이 원활하지 않네요. 점검하고 난 이후에 오히려 퇴보한 느낌이... 저만 그런가요? 55화 근처에 놓여있는 공구들을 몇개 집어본다. 드라이버나 전동 드릴. 그리고 녹슨 망치 등등등. 사실 가져가도 그다지 도움이 될만한 물건들은 아니다. 드라이버는 나사가 있어야 쓸 수 있는 물건이고, 전동 드릴은 베터리가 이미 방전된지 오래. 녹슨 망치는 뭐... 굳이 말 안해도 알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그다지 큰 소득을 거두지 못한 나. 대충 옷을 다 골랐는지 유아 선배가 나를 부르기 시작한다. "유에~ 빨리 와서 짐 날라." "알았습니다. 기다려보세요." 싱글벙글한 미소를 지으며 내가 커다란 상자 하나를 건내는 유아 선배. 원래부터 짐꾼 역할이었던 것은 나니까 그다지 유아 선배의 이런 떠밀기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정작 신경이 쓰이는 것은... "저기. 유아 선배." "응응. 왜?" "엘리 말인데요. 아까 왔을때랑 많이 바뀐거 같은 느낌 아닌가요." 같은 느낌이 아니다. 확실히 바뀌었다. 청색의 세라복 느낌이 물씬 풍기는 짧은 치마. 검은색 바탕의 핑크색 줄무늬가 새겨져있는 오버 니삭스에 커다란 빨간 리본이 달려있는 귀여운 티셔츠를 입고 있는 엘리. 게다가 머리에는 가슴 부근에 있는 리본과는 다른 작은 크기의 리본 두개로 트윈테일의 머리 스타일로 바뀐 아이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표정은 여전히 뚱한 모습이다. 평소에 엘리가 먹는 과일이 없어서 그런가. 약간 맹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엘리의 변화를 눈치챈 나에게 유아 선배가 잘했다는 듯이 말한다. "눈치가 빠른걸? 유에." "아니. 눈치가 느리고 빠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원래부터 옷 하나 걸치지 않고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 옷을 입고 있는걸 보면 당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으흥~ 어때, 어때. 귀엽지? 그치?" "확실히..." 유아 선배의 말 그대로 귀엽다. 내가 로리콘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금발의 트윈테일은 어떤 의미로는 정석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표정이 약간 뚱한 표정이라는 것만 빼면 좋을텐데, 오히려 그 표정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졸지에 인형놀이의 '인형'을 담당하게 된 엘리. 평소에 노출(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그렇지만, 다른 말로 해석하자면 평범한 옷을 입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은 모습이라고 표현하고 싶다.)을 자주 하던 엘리였기에 이런 옷은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눈치이다. 꽉 끼는 오버 니삭스도 그렇고, 치렁치렁 달려있는 리본들도 그렇고. 게다가 무엇보다도 엘리가 가장 신경쓰고 있는 포인트로 보아서는 양갈래로 땋여진 자신의 머리, 즉 트윈테일 스타일의 머리를 가장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유아 선배는 그런 엘리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엘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궈여워, 귀여워.' 빔을 마구마구 발산하고 있다. 그래도 역시나 미국인이랄까. 금발이라는 점도 있지만, 일단 전체적으로 몸의 밸런스가 굉장히 좋아서 옷맵시가 잘 살아나는 느낌이다. 아직 유아 체형이라서 좀 그렇지만, 장차 나이를 조금 먹기 시작하면 노아 교수님 부러지 않을만한 글래머러스의 미인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여진다. 서양 여자들은 가슴이 크지 않은가. 바로 그런 것이다. 결코 야동으로 인한 잘못된 성지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동양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옆집 재수생.avi'라든지, 아니면 '하숙생 누나가 어느날 우리집에...avi'라든지 이런거 있지 않은가. 다들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하겠다. "......" 엘리가 유아 선배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기 시작한다. 뭐라고 영어로 ㅤㅆㅘㄹ라ㅤㅆㅘㄹ라 말은 하는데, 당연한 말이겠지만 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유일하게 들린 단어라고는 'cloth'하나 뿐. 물론 유아 선배도 번역은 불가능하다. 구글 검색엔진같은 첨단 IT 기능을 소유하고 있지 않는 이상, 우리들의 외국어 실력으로 실시간 영어 번역 완벽 해석은 힘든 것이다. 만약에 실제로 그런 능력이 있다면 내 고등학교 외국어 영역은 5등급이 아니라 1등급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5등급이다. 현실은 시궁창이다. 줄여서 말하면 '현시창'. 대학 버전으로 표현하자면 신발 사이즈와 동일한 점수가 나와버린 점수 정도라고 할까. 취업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유아 선배는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착하지? 라고 말한다. "그래? 옷이 마음에 든다고?" 엘리의 고개가 격하게 수평으로 좌, 우 방향을 번갈아가며 흔든다. 노골적으로 싫다는 제스쳐. 영어는 잘 알아듣지 못하지만, 엘리가 현재 유아 선배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무슨 뜻인지 나 역시도 알 수 있다. 만국의 공통어, 바디랭귀지라고 하지 않는가. 저 뜻을 간략하게 해석해보자면 '나, 이 옷 싫어. 빨리 벗겨줘.'라는 뜻이 되겠다. 그러나 유아 선배는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엘리의 진의(眞意)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인지 연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엘리가 너무 귀여워 못살겠다는 표정으로 일관한다. "그래그래. 이 언니도 우리 엘리, 너무 귀여워보여. 엘리도 마음에 들지?" 또다시 격하게 고개가 수평으로 흔들린다. 아무리 봐도 싫다는 뜻이잖아요. 선배. 아니면 정말로 일부러 모른척 하는건가. 어찌되었든 유아 선배의 꽉 막힌 외국어 실력 덕분에 엘리는 졸지에 불편한 옷차림으로 베이스 캠프까지 향하게 되었다. 내가 벗겨주고 싶지만, 그 순간 미성년자를 강간하려고 하는 범죄자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차마 그런 식으로 도와주지도 못한다. 아직 제대로 성숙하지도 않은 엘리의 몸을 건드렸다간, 진짜 범죄자 취급을 당할 가능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다수의 옷상자를 들고 캠프로 복귀한 우리들 앞에. "어머! 엘리 너무 귀엽다~" "정말이네요." "설마 이런 옷이 있을줄이야." 순차적으로 노아 교수님, 아리아, 그리고 누나가 연신 감탄하며 엘리의 새로운 복장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한다. 갑작스레 열린 대화의 장. 여성들의 옷에 대한 열망이 너무 강하게 느껴진 탓에 나는 쉽사리 대화에 끼어들지 못한 채 통나무 집 근처의 구석으로 가져온 상자를 내려놓는다. 고생은 내가 다 했는데, 관심은 온통 엘리로 집중. 약간 불공평한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뭐 어쩔 수 없겠지 하는 생각으로 일단 대충 말린 옷을 집어서 입는다. 이게 얼마만에 입는 옷일까. 처음에 내가 입고 있던 평상복이 아닌 엘리의 아버님께서 입으셨던 사복이지만, 그래도 옷을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리도 반갑게 느껴질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직 덜 마르긴 했지만, 그래도 옷이라는 존재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의식주라는 단어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 세삼스레 깨닫고 말았다고 할까. 옷은 중요하다. "아, 수고했어. 유에." "이제서야 날 본거야? 누나." "그야 엘리가 너무 귀여우니까 신경을 못썼지. 이게 다 엘리의 저 살인적인 귀여움 때문이라고." "남의 탓을 하는건 예전부터 누나의 특기이자 장기였지." 그래도 엘리가 세삼 귀엽게 보인다는 것은 인정하겠다. 원래부터 일단 외모면이나 여러가지 관점에서 태가 좋은 아이였기 때문에 옷빨도 잘 받는다. 덕분에 유아 선배를 포함해서 다른 여성들이 내가 가져온 옷 상자를 풀며 엘리의 옷들을 따로 모아 수집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엘리에게 이것저것 다 입혀볼 생각이겠지. 대충 엘리도 그녀들의 의도를 짐작했는지 도망갈까 하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누나에게 잡혀서 어디로 몸을 피할수도 없는 노릇. 울상을 짓는 엘리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도움의 시선을 요청한다. 웬만해서는 이런 식으로 엘리가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을 하지 않는데, 그만큼 엄청나게 싫은 모양인가보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신경쓸 범위가 아니란다. 엘리. 미안하지만, 얌전히 여자들의 인형이 되어주렴. "이 옷도 엄청 귀엽지 않니?" "오! 교수님, 센스 좋으신데요? 빨리 엘리한테 입혀봐요!" "전 이 옷이 더 마음에 드는데요. 유아 선배." "......" 순차적으로 노아 교수님, 유아 선배, 아리아, 마지막으로 세리아까지. 엘리에게 어떤 옷을 입혀볼까? 라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는 여성 4인방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절로 한숨이 세어 나온다.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렇다 해도, 얌전하고 눈에 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세리아까지 적극적으로 나설 줄이야. 엘리의 귀여움이 만들어 낸 하나의 사회적 현상인가. 아니면 어렸을 때부터 인형 옷 갈아입히기 놀이 문화에 적응해버린 우리나라 여성들 한정의 특이한 문화인가. 혼자서 나름 곰곰히 생각을 해보며 애써 엘리의 SOS 눈빛 신호를 무시한다. 나를 원망하지 마렴.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 작품 후기 ============================ 요즘 짱짱맨! 이라는 말이 유행이더군요. 그래서 저도 한번 써보기로 했습니다. 확밀아 짱짱맨! 후기 짱짱맨! 56화 엘리의 옷에 대한 토론도 좋지만, 다들 한가지 잊고 있는 사실이 있지 않은가. "저기요. 다들 일단 옷부터 입는게 좋지 않을까." 내 말에 모두가 순간 움직임을 정지하고 나에게 모든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런 식으로 한꺼번에 바라보면 좀 그런데 말이다. "생각해보니 그렇네." "엘리에 대해 너무 정신이 팔려 있어서 나도 모르게..." "모두 옷부터 입도록 해요. 가져온게 있으니까요." 유아 선배가 상자를 가리키며 말한다. 이제서야 본인들이 아직까지도 나체를 유지하고 있음을 깨달았는지 서로 옷을 골라주기 시작한다. 여자들이 옷을 골라 갈아입는 사이에 잠시 바깥으로 나온 나. 왜냐하면 누나가 내 무릎을 발로 툭툭 건드리면서 '레이디가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태평하게 앉아서 볼 생각이야? 당장 나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알몸이었으면서 세삼 옷 갈아입는 것에 무엇이 신경쓰이는지 모르겠지만, 누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도 잠시 내가 자리를 비워줬으면 하는 눈치였는지라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잠시 나와있다. 아침에 잠깐 시험삼아 만들어둔 의자에 앉아있는 내 옆에 쫄래쫄래 뒤를 따라나온 엘리가 나를 멀뚱히 쳐다본다. 엘리는 이미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인가보다. "나한테 무슨 볼일 있어?" "......"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흔든다. 생각해보면 굳이 내게 볼 일이 있어서 바깥으로 나온게 아니라 여성진들의 옷 갈이입히기 놀이에 또 당할까봐 일시적으로 도망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가 있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제대로 옷을 입혀놓으니 엘리도 정말 봐줄만 하다. 매일 원시부족 느낌이 나는 옷만 입고 있던 엘리인지라 이렇게 평상복을 입혀놓으니 약간 달라보인다고 해야 할까. 틴 모델급 정도는 봐줄 수 있는 그런 수준이라고 봐도 좋다. 원래부터 백인인지라 피부는 일행들중에 가장 뽀얀하기도 하고, 체구도 작은지라 간혹 누나가 말하는 '애완동물 같이 느껴진다'라는 대사를 인용해서 아기 고양이 같이 애교도 있다. 본인이 실제로 애교를 떨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외형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나도 잠정적으로 엘리에 대한 복장 평가를 남몰래 하고 있을 무렵. 태풍의 여파인지 모르겠지만, 제법 쌀쌀한 바람이 날카롭게 불어오기 시작한다. 모래와 살짝 뒤섞여서 그다지 쾌창한 느낌을 선사해주기에는 목적 달성에 실패한 바람이 우리들을 향해 다가온다. 살며시 눈을 옅게 뜨면서 모래가 눈에 들어가는 것을 방지한다. 그러나. 모래와 먼지가 우리를 덮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엘리의 짧은 청치마가 바람에 휘날리며 발랑 위쪽으로 까지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아랫쪽은 전혀 신경써주지 않은거냐. 저 여편네들. 한편, 바람이 잠잠해지자. 엘리가 본인의 긴 머리카락을 정돈하기 시작한다. 무인도에서 생활하는 동안 제대로 머리카락을 자른 적이 별로 없는거 같은지 엘리의 머리카락 길이는 꽤나 길다. 거의 엘리의 무릎까지 내려올 정도의 길이를 자랑하니까 말이다. 보통 여성의 반응이라면 머리카락보다 우선 올려진 치마를 신경쓰는게 도리 아닌가. 약간 올라간 치마 덕분에 여전히 엘리의 사타구니가 발랑 까진 상태를 유지한다. ... 아무래도 이거. 내려줘야겠지? 내려줘야 한다. 그래. 나는 정당한 행동을 하려는 것이다. 양심에 찔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나는 로리콘이 아니라고. 아무리 상대가 덜 성숙한 꼬마 여자아이라고 해도, 성적으로 흥분하거나 하는 그런 일은 없을거란 말이다. "엘리. 잠깐만." "......" 가만히 손짓하자, 나에게 다가오는 엘리. 정말 애완동물 같다. 작은 고양이를 키우는 것 같다는 듯이 말했던 누나의 말에 조금은 공감이 가기 시작한다. 엘리의 허리 위로 올라간 치마를 내려주기 위해 청치마 자락을 손으로 잡는다. 가만히 서 있으면서 내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던 엘리.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엘리의 입에서 아주 놀랄만한 단어가 튀어나온다. "...Sex?" "왓(What)?!" 왠 뜬금없는 섹스냐.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튀어나온지라 나도 모르게 영어로 외치고 말았다. 보았느냐. 나의 영어 실력. 참으로 눈물나는 반응이지 않는가. "저기. 엘리. 왜 갑자기 그런 단어를 말하는거야." "......" "... 라고 내 말을 알아들을리가 없나." 노아 교수님이나 누나에게 물어볼까... 라는 생각을 해봤지만, 내가 엘리의 치마를 잡고서 내리려고 하니까 엘리가 Sex라고 외쳤다는 말을 했다면 아마도 누나와 노아 교수님의 경멸 어린 시선을 받을거 같아서 참도록 한다. 상황을 아무리 지지고 볶고 뒤집고 튀겨봐도 내가 엘리를 강간하려는 그런 연출로밖에 생각되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래서 남자의 지위는 참으로 불편하다고 생각된다. 여자를 함부로 건드리면 성추행이니 성희롱이니 성폭행이니 하는 것들 말이다. 어린 아이를 상대로 성욕을 품으면 범죄라고. "알았어. 알았으니. 가만히 있어. 엘리." "...o.k." 오. 내 말을 알아들었다. 아무래도 계속 우리들의 말을 듣다보니 엘리도 어느정도 적응이 된 것인가. 일단 내 의도가 통했음을 알았으니까 상관 없겠지. 엘리의 얇디 얇은 허리를 잡아 치마 자락을 내려준다. 정말 가느다란 허리다. 내 허벅지 정도의 두께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정말 여린 소녀다. 아직 나이도 어리니까 이런건 당연하겠지만, 이런 몸으로 잘도 무인도라는 야생에서 살아남았구나 하는 경외심이 자연스레 들기 시작한다. 치마를 내려서 엘리의 사타구니가 보이지 않게 다시 정리해준다. 그러자 엘리가 감사의 표지로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Thank you." "천만에."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다시 의자에 앉는다. 내가 의자에 앉는 모습을 잠자코 보던 엘리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작은 기합소리와 함께 내 허벅지 위에 앉는다. 그러고선 나에게 기대며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엘리. 평소에 나에게 이런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기에 조금은 놀랐지만, 그래도 상관 없겠지 하며 의자에 등을 기대어 최대한 엘리도 편안한 자세가 될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 예전에 자신의 아버지와 이런 식으로 자주 앉아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엘리는 그 추억을 느끼면서 내게 이렇게 적극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이다. 아리아보다도 더 감정표현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엘리답다. 정말 귀여운 녀석이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무인도에서 3년간이나 생활을 해왔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 아무런 말 없이 엘리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그러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대로 내 손길에 몸을 맡기는 작은 소녀. 엘리가 너무 대견스럽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리고 지금까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무인도에 표류된 일도 그렇고, 낯선 땅에서 어린 나이에 양친을 모두 잃었다. 불쌍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심적인 고난을 견뎌온 이 작은 소녀가 너무나도 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빨리 무인도에서 나갔으면 좋겠네." "...?"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엘리. 아무래도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인가 보다. 한국말을 많이 공부해야할 필요성이 있겠구나. 우리 엘리야. 아니지. 내가 영어를 공부하는 게 더 빠르려나? ============================ 작품 후기 ============================ 오늘따라 왜 이리 졸린지 모르겠군 ㅡ_ㅡ;; 잠 좀 자고 오겠습니다~ 57화 한참 엘리와 같이 바깥에서 대기중일 무렵에. "남동생~" 기교섞인 목소리와 함께 등장한 누나가 엘리와 나 앞에 폴짝 등장하더니 한바퀴 돌아보이며 나름 모델 포즈를 선보인다. "어때?" "뭐가?" "지금 네가 보고 있는 나의 모습을 평가해보란 의미잖니." "오늘도 변함없이 이상한 누나였어." "성격적인 면이 아니라 외형적인 면." 확실히 이제서야 누나의 달라진 옷차림을 눈치챈게 신기할 정도의 복장이 지금 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평소에 입고 다니던 핫팬츠와 타이트한 티는 잠시 벗어두고, 엄청나게 짧은 초미니스커트에 짝 달라붙는 정장 차림. 그리고 어디서 구했는지 빨간색의 안경에 귀걸이까지 착용한 누나의 모습. 마치 노아 교수님 풍의 옷을 입은듯한 그런 컨셉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이힐까지 신은 누나가 한바퀴를 돌아보면서 나에게 윙크하며 말한다. "OL(Office Lady) 복장이야. 어때? 섹시하니?" "엄청나게... 가 아니지. 좀 편한 옷을 고르지. 왜 하필이면 그런 옷을 고른거야?" "그야 어른 분위기가 나니까." "......" 남몰래 노아 교수님과 같은 직장 성인 여성의 생활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이라도 되는걸까. 전체적으로 빨간색 컨셉의 정장과 하이힐이 누나의 색다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왜 그런거 있지 않은가. 야동이나 망가같은 것을 보면 자주 등장하는 가정교사 누나 이런 컨셉 말이다. 스커트 밑으로 뻗은 커피색 스타킹에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 그리고 엄청나게 잘빠진 몸매. 글래머러스한 오피스 레이디 풍의 복장에는 역시 누나와 같은 S라인 타입 몸매의 소유자가 입는게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가슴도 크고, 그리고 엉덩이도 크다. 한마디로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곳은 나온 환상몸매를 자랑하는 누나가 내 시선을 받으면서 요염하게 웃어보인다. "남동생의 시선이 너무 뜨거운데?" "너무 티가 났었나." "응. 뭐, 내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잘 알지만, 그래도 그렇게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면 '흥분'해버릴지도 모른다고." "... 벌써 한거 아니야? 누나." "어머. 들켰니?" "어."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입으로 잠깐 해줄까?" "... 아니. 정중히 사양할게." 내가 누나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아리아와 세리아가 우리들을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시선 덕분에 아리아, 세리아 자매가 바깥으로 나왔음을 알게 된 누나가 뒤를 돌아보며 그녀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잘 어울리네. 미인 자매 양." "유린 선배. 방금 유에 선배와 무엇을 하려고 했었나요?" "별거 아니야. 가볍게 입으로 유에의 물건을 애무하는 정도?" "별거 아닌게 아니잖아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아리아. 덩달아 세리아 역시도 종종걸음으로 아리아의 뒤를 따른다. 은발의 미소녀 자매가 입은 옷은 누나가 착용한 복장과는 상당히 다르다. 엄청나게 다르다. 아니, 무지하게 다르다. 내가 이 정도까지 복장의 차이를 언급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 이유는 바로 아리아, 세리아가 입고 있는 옷이 '메이드 복'이었기 때문이다. 짧은 프릴 스커트 밑으로 얼핏 보이는 가터벨트. 화이트와 블랙의 조합으로 심플하면서도 단정해보이는 컨셉에 허리에 두른 검은색의 커다란 리본. 그리고 가슴이 절로 강조되는 상의에 머리에는 마무리로 흰색으로 치장된 리본이 달린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리아, 세리아 자매 세트로. 저것이 그 유명한 자매 덮밥이란 말인가. 쌍으로 똑같은 메이드 옷이라니. 그나저나 정말 괜찮은, 바람직한 복장이다. 메이드 옷. 설마 이런 곳에서, 그것도 일반 현실 세계에서 찾기 힘든 메이드 옷을 여기서 볼 줄이야. ... 그런데 점점 엘리 어머님의 취향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오피스 레이디 복장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메이드 옷이라니. 음... 괜찮은 취미라는 사실은 인정하겠지만, 설마 직접 입으실 생각이셨던건 아니겠지. 누나에게 약간의 불만을 토로하는 아리아. 옆에 있던 세리아가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아리아를 말리자, 이제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왔는지 자신의 긴 은발을 한번 쓸어내리며 태도를 가다듬기 시작한다. "자자. 그러지 말고 남동생에게 빨리 옷 자랑해야지. 세리아도 나란히 서봐." 누나가 아리아와 세리아를 데리고 내 앞에 세운다. 얼떨결에 나란히 서게 된 자매. 똑같은 옷 복장에 둘 다 메이드 옷이라는 점이 정말... 최고다. 지금 당장이라도 '주인님께 봉사하겠습니다.'라고 외치면서 말 못할 이런저런 서비스들을 해줄거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아... 이러면 안되지. 나도 정신차리자. "... 선배." "왜? 아리아." "뭐라고 한마디라도 좀 해주세요. 눈치 없게." "음..." 팔짱을 낀 채 아리아가 선호할만한 말을 뇌속에 저장되어 있는 사전을 열람하며 찾아본다. 여자가 좋아할만한 단어. 새로운 옷(메이드 복)을 입고 있는 여자에게 들려주면 좋은 말이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멋있어." "좀 더 다른 말을 생각해주세요." "이게 아니었어?" "당연하죠." 1차전은 실패했다. 그렇다면 남은 사전 속의 단어가 뭐가 있을까. 이거는 어떠냐? "나름 괜찮은데?" "다시 생각하세요." "이것도 아니야?" "좀 더 표현력을 발산시켜 보세요. 혼잣말은 잘 하면서." 어떻게 알았지. 양심에 찔리잖아. 아리아. 그것보다도 두번재 퇴짜를 맞으니까 이제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내가 그렇게까지 눈치가 빠른 녀석도 아니고. 여자친구를 사귀어본 경험도 전무하니까 무슨 말을 해줘야 좋을지 모르겠다. 단순하게 예쁘다는 선택을 할까? 무슨 미연시(미소녀 연예 시뮬레이션)도 아니고. 선택지가 뜨냐. 1번, 예쁘다. 2번, 엄청 예쁘다. 3번, 정말 예쁘다. 그런데 왜 다 예쁘다라는 선택지밖에 없냐. 내 언어 표현력이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영어활용능력에 이어서 우리나라 언어 실력도 형편이 없을 줄이야. 세종대왕님께서 많은 한글을 창제하셨지만, 정작 활용할 줄 모르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절망한다. 역시 우리나라 말은 어렵다. 엘리의 심정이 조금은 공감될지도. "예쁘네." 결국 고심한 끝에 무난한 선택지를 골랐다. 자, 호감도 업(Up)이냐. 아니면 다운(Down)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 선배. 센스가 정말 최악이네요." 호감도가 다운되었다. 아리아 루트는 공략 불가능인가. 이대로 베드 엔딩이 뜨는건 아니겠지.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세리아는 알게 모르게 작게 '쿡쿡' 소리를 내며 웃는다. 왜 그런 반응을 보일까 하다가 자세히 바라보니, 아까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얼굴이 상기된 아리아를 목격한 것 때문에 그리 웃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정말 부끄럼쟁이네. 우리 후배." "그런거 아니라니까요." 저것이 소위 말하는 '츤데레'라는 것일까. 겉으로는 싫다 싫다 하지만 속으로는 좋아 좋아 하는 이 시대의 진정한 이중인격자... 가 아니라 그런 컨셉의 미소녀. 뭐, 아무튼 좋아하니까 그걸로 됐다고 생각한다. 아리아와 세리아의 우아한 자태를 구경하던 도중에, 순번상으로는 다음 타자에 해당되는 인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메이드 자매. 예쁘네." 유아 선배의 등장. 이쯤되면 도대체 누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솟아나기 마련이다. 자연스럽게 유아 선배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 곳에 정말로 눈이 뒤집어질만한 복장을 한 미소녀가 서 있는게 아닌가. 길게 튀어나온 토끼귀.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검은 망사 스타킹에 바니걸 복장 되시겠다. 유아 선배의 큰 가슴을 모아 올려주며 가슴절벽이라는 자연도 만들지 못할만한 뇌세ㅤㅈㅕㄱ인 풍경을 연출하는 산물을 보여주고 있었다. 쭉 뻗은 긴 각선미. 그리고 약간 애교성이 더해진 토끼꼬리까지. 처음에 내가 비행기에서 봤던 바니걸 복장을 유아 선배가 하고 나온 것이다. 워낙 잘 빠진 몸매이다보니 시원스러레 바디라인을 드러내는 바니걸 복장이 정말 잘 어울린다. 가슴도 크고, 허리도 날씬하고. 입이 닳고 마르도록 칭찬을 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을만큼 바니걸 복장을 잘 소화해낸다. "오, 괜찮은데? 유아." "칭찬 고마워~"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면서 귀엽게 윙크를 날려주는 유아 선배. 그녀답지 않은 애교성 가득한 말투의 인사까지. 매력 덩어리라고 불러도 될만큼 환상이다. 허리춤에 손을 올려놓은 유아 선배가 어깨를 펴면서 당당하게 나를 바라본다. "유에. 네가 원하는 바니걸 복장 입어봤는데 어울려?" "제가 그 복장을 원했었나요?" "비행기 안에서 네가 가리킨 옷 중에 하나잖아." 분명 선배의 말이 맞긴 하다. 그런데 그건 약간 독특한 복장이라서 가리켰을 뿐이고, 딱히 내가 바니걸 복장이 취향이라는 의미를 담은 뜻은 아니었단 말이다. 하지만 뭐... 이렇게 보니까 나쁘진 않다. 일단 노출도가 높다는 의상이라는 점에서 강력한 찬성의 한 표를 던지고 싶고, 여성의 매력적인 몸매를 유감없이 드러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또 한 번의 따따블 표를 던진다. 탄력적인 허벅지와 함께 육감적인 몸매도. 아무래도 교수님과 누나, 그리고 아리아와 세리아 자매와는 달리 운동을 하는 여자이다 보니까 피부나 다른 외형적인 면에서는 상당히 매력적인 페로몬을 발산한다. 운동하는 여자가 섹시하다고 하지 않는가. 보면 볼수록 정말 매력적인 선배다. 교수님과는 다르게 몸을 섞을 때 또 다른 매력이 있을 것 같은데... ... 옷차림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야한 상상을 할 줄도 알게 된 내 정신상태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다. 그 정도로 유아 선배의 옷차림이 성욕을 마구마구 자극시킬 정도의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저런 선배와 언제쯤 육체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을지. ============================ 작품 후기 ============================ 네. 엘리의 간식이 포함되면 안됩니다 ㅡ_ㅜ 그런데 그걸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셨군요;; 좀 놀랐습니다. Ps. 원고료 쿠폰 24개, 12개, 기타 쿠폰을 주신 익명의 분들 감사합니다. 어젠가 엊그제인가 언급하려 했었는데, 계속 까먹고 있었습니다. ㅜ_ㅜ 58화 하지만 뭐... 이 정도면 합격이다. 바니걸 속성이 전혀 없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노출도라는 점에서는 10점 만점에 100점을 주고 싶을 정도니까 말이다. 다른 사람들도 아닌 유아 선배니가 저런 요염하고 섹시미가 물씬 풍기는 복장을 잘 소화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물론 유아 선배만이 아니라 노아 교수님이나 누나같이 가슴이 큰 여자들이 소화할 수 있을만한 옷이라고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한 최종 보스. 살며시 문을 열며 모습을 보인 것은 바로 노아 교수님이다. 과연 어떤 복장으로 내 눈을 즐겁게 해줄까. 아니지... 과연 어떤 복장으로 우리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실까. "기대돼? 남동생." "이거, 은근히 기대되는데." "노아 교수님은 정말 예쁘다고 한번 잘 봐봐." 누나의 말을 들으며 시선을 입구쪽으로 돌린다. 그리고 누나의 말이 진실임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을 소요하지 않았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알록달록한 치마. 그리고 색동 저고리. 단아하게 땋아올린 머리카락에 배꼽이 수줍게 드러나있는 복장은 바로 한복. 그것도 전통 한복이 아닌 개량한복이다. 약간... 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더 업그레이드 시켜서 노출도를 과감하게 어필하는 개량한복을 입고 등장한 노아 교수님. 청순함과 요염함을 동시에 자랑하는 한복의 미(美)를 제대로 살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동양 미인의 선녀 등장. 이목구비에 잡티하나 없는 피부까지. 정말 완벽하다. 미스 퍼펙트(Miss Perfect)! "어, 어울리니...?" 수줍게 자신의 가슴 위로 손을 올려놓으며 말하는 노아 교수님.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정말 최고다. 마치 온실속의 화초마냥 곱게 자란 아가씨가 세상 구경을 처음 나온듯한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었다. "노아 교수님. 너무 예뻐요!" "기대 이상인데요?" 유아 선배와 아리아가 순차적으로 노아 교수님에게 칭찬을 날려준다. 세리아도 말은 못하지만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동경의 눈빛으로 교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서 대기중이던 누나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말한다. "남동생. 이번에는 제대로 여자를 기쁘게 하는 말을 교수님께 들려주라고." "내가?" "여기서 남자의 감상이 빠지면 섭하잖아. 그렇지?" "뭐..." 누나의 말을 들었는지 교수님의 시선이 나를 향해 쏠리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순간 나와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교수님이 부끄러워 하면서 다시 고개를 아래로 떨군다. 귀엽다. 20대 후반이라는 여자 치고는 적지 않은 나이지만, 이렇게 귀여운 교수님의 모습은 처음본다. "정말 예뻐요. 교수님." "그, 그러니?" "남동생. 넌 정말 표현력이 덜 떨어지는구나." "시끄러워. 바보 누나." 그래도 정말 순수한 감상을 표현한 것이다. 다른 말 하나도 보태지 않고서 연신 '예쁘다'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아리아나 세리아, 유아 선배, 그리고 누나와 엘리도 하나같이 다 천사같고 예쁘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노아 교수님의 모습은 더욱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본의 아니게 펼쳐진 코스프레 대회는 노아 교수님의 압승으로 보여진다. 잠시동안의 패션쇼가 끝나고 저녁 준비를 시작하는 아리아와 세리아 자매. 세탁물이 다 마르기 전까지 당분간 자신들이 입고 있는 옷을 그대로 착용하기로 결정하고 이렇게 집 안에 다들 식사를 기다리며 모여있는 상황이다. 엘리 사이즈의 옷은 다른 옷 크기들에 비해 많이 보관되어 있어서 엘리의 여벌에 대한 문제는 별로 걱정이 없어 보인다. 아무래도 엘리의 어머님 역시도 엘리에게 이것저것 옷을 입혀보는 취미가 있으셨던 모양인가 보다. 그래도 오버 니삭스에 핫팬츠도 나름 괜찮은듯 하다. 매일 울긋불긋한 천만 뒤집어 쓰고 다니는 엘리였던지라 저런 현대식의 복장도 정말 잘 어울려보인다. 무인도라는 장소만 아니면, 학교에서 또래 남자 아이들에게 제법 많은 인기를 끌었을 법한 그런 아이인데. 3년이라는 시간을 무인도에 허비한 사실이 너무나도 통탄스러운 그런 순간이다. 엘리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제 3자가 보기에는 어린 나이에 무인도에 표류된 사건이 인생에 있어서 아주 커다란 전환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이 보이는 그런 전환점. 가급적이면 다른 아이들과 같이 평범하고 비슷하게 성장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식사 준비 다 되었어요." "수고했어." 오늘의 식사 당번 중 한 명인 아리아가 우리들을 호출하기 시작한다. 아리아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며 자리에 제일 먼저 앉은 교수님을 따라서 우리들도 나란히 식사 장소로 이동. 내가 만든 의자들과 탁자에서 처음 맛보는 점심식사. 폭풍이 그치고 새벽에 일어나서 비행기에 옷을 가지러 가는 그 시간동안 틈틈히 만든 의자와 탁자의 내구력을 시험해볼 절호의 찬스인 것이다. 판자와 재료들은 이미 셋팅을 다 해둔 상태였기 때문에 못과 망치고 조립만 하면 되는 마무리 단계를 끝내고 나서야 드디어 실용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된 가구들. 나름 뿌듯한 감정이 느껴지고 있었다. "예상외로 잘 만들었네. 이거." 누나가 탁자를 이리저리 흔들어봐도, 제법 튼튼한 구조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부서지지 않는다. 누나의 칭찬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 왜냐하면 고등학생 때 기술 가정 시간에는 수행평가고 필기 시험이고 전부 100점 만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가구 만들기에 커다란 조예가 있다는 건 아니고. 군대에서도 어느 정도 작업같은 걸 많이 해봤으니까 이런 것도 금방 적응이 된다. 그리고 특히나 이런 실력을 선사해준 영향력을 가장 크게 부여한 인물이 바로 아버지. 예전부터 무엇을 만들거나 고치는 것에 솜씨가 좋았던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서 나 역시도 만들기 이런 분야에 어느정도 센스와 기질이 있었던 것이다. 내 입으로 스스로 말하는 것은 자랑같이 들리지만, 사실인걸 어찌 하겠는가. "이것이 다 나의 재능이지." "무인도에 와서 너의 그 재능이 도움이 될 줄은 정말 몰랐어. 굼뱅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누나. 그건 칭찬이 아니라 비꼬는 거라고." "어머, 들켰네." "......" 여전히 장난을 일삼는 말을 좋아하는 골치아픈 누나다. 그래도 무인도에서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걸 어찌하나. 이해심 많고 정신연령이 높은 내가 참아야지. 메이드 옷을 입은 자매들 답게 요리 서빙까지 덤으로 서비스를 해준다. 옷이 들어있던 상자에 앞치마도 있었는지 메이드 복 위에 앞치마를 두른 세리아와 아리아가 우리들 주변을 배회하면서 각자 앞에 식기도구와 음식을 담은 접시를 내민다. "메이드의 접대를 받는 기분이 어떤가요. 선배." 아리아가 나에게 직접적으로 묻기 시작한다. 하필이면 단 둘이 있을때도 아닌 다른 사람들도 있는 장소에서 이런 도발적인 질문을 하다니. 하지만 나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아리아의 말에 대응한다. "맛있게 드세요. 주인님. 이라고 말해주면 더 고마울텐데." "... 유에 선배의 식사분만 바깥에 버려도 되나요?" "농담이야. 농담이라고." 아메리칸 조크도 안 통하는 녀석이다. 그래도 주인님이라는 호칭을 써주면 더 고마울지도 모른다는 말은 사실이다. 모처럼 메이드 복장을 갖춘 은발의 미소녀인데, 그런 서비스 정도는 해주면 좋잖아. 그래도 밤은 길다. 어차피 지금 당장 구조대가 온다는 확신도 없고, 언젠가는 계속 이런 식으로 친밀도를 쌓아가다 보면 아리아가 메이드 옷을 입고 '주인님'이라고 불러줄 때가 올 수 있으리라는 쓸모없는 기대감을 가져본다. 그 날이 오기는 할까 라는 의구심은 버리는게 좋다. 믿는게 좋다고 하지 않는가. 믿음으로 만들어가는 미래. 정말 좋은 문구라고 생각한다. ============================ 작품 후기 ============================ 점점 후기에 무슨 말을 써야 좋을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처럼 간단한 유머라도 올릴까요? 59화 EP 10. 말할 수 없어. 말하고 싶은데, 속마음만 들키는 걸.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작업을 재개하는 나. 아직 몇몇 의자들은 보수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이렇게 작업을 서두르는 것이다. "식후에 소화 시키기에는 딱 좋은 작업량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따사로운 햇살이 그늘 없이 바로 내 머리 위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따뜻하기 보다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덥다. 게다가 이 더운 날씨에 작업까지 하고 있으니까 더더욱 더울 수 밖에 없다. 비가 온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고, 습도도 높은 상황에서 계속 이런 작업을 해야 하다니. 나도 참 운이 없다고 해야 좋을지, 아니면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더 마음 편할지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런 불운한 테크트리를 밟고 있는 중이냐 하면, 이렇게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름 튼튼하다고 생각했던 의자가 와장창 하고 부서진 것이다. 그게 어떻게 벌어진 일이냐 하면... 점심식사를 하던 도중. 모두의 의자를 만든 나는 나름 뿌듯함을 느끼면서 저녁식사에 임할 수 있었다. 노동 뒤에 먹는 식사는 배로 맛있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평소와 다르게 색다른 복장을 하고 있는 아리따운 여자들과 식사를 할 수 있으니 맛도 좋고, 눈도 호강하고. 여러가지로 괜찮은 점심식사가 되었다. 물론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조용하게 식사를 하던 도중에 노아 교수님이 약간 몸을 뒤척이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나 뿐만이 아니라 유아 선배 역시도 교수님의 이상한 태도를 눈치챘는지 내가 먼저 묻기 전에 교수님께 말을 건낸다. "노아 교수님.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세요?" "아니... 의자에 뭔가 날카로운 가시같은게 있는거 같아서." "그래요?" 라고 말하면서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린다. 도대체 뭐냐. 그 시선들. 그렇게 한꺼번에 바라보면 내가 잘못한 것처럼 느껴지잖아. "유에 선배. 의자를 만드실때는 하나하나에 정성을 가미해서 만들어주세요 장인정신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이봐. 후배. 내가 전문적으로 가구를 만드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사소한 실수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렇지?" "선배에 한정해서는 사소한 실수라도 용납할 수 없어요." "너, 아까 내가 '주인님'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던 것 때문에 삐진거 아니지?" "글쎄요." 아무래도 내가 핵심을 제대로 짚은거 같다. 요새 아리아의 감정표현이 은근히 활발해진 느낌이란 말이야. 자주 웃거나 미소 짓거나 왁지지껄 함박 웃음을 짓거나 하는 좋은 방향으로 감정표현이 원활하게 되었으면 좋겠지만, 문제가 있다면 오히려 화내는 쪽으로 더욱더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니까 문제다. 약간 주춤이던 노아 교수님이 괜찮다고 말하면서 다시 의자에 앉는다. "이제 없어진거 같아." "조심하세요. 교수님. 엉덩이에 가시라도 박히면 안되니까요." "응. 알았어." 개량한복 차림의 교수님이 우아하게 웃으면서 영차 하며 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노아 교수님의 그런 방심이 오히려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끼이익. 수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의자. 내가 만든 의자에는 입이 달린 것도 아니고, 이런 사운드를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능한 경우라면 의자에 문제가 있어서 삐그덕 거리는 정도일텐데... "꺄ㅡ악!" "교수님?!" 느닷없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면서 노아 교수님이 순식간에 탁자 아래로 사라진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파악도 하지 못한 채 놀란 우리들. 벌떡 일어나서 교수님에게로 다가가자, 그 곳에는 부숴진 의자 위에 자신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찡그린 표정으로 주저앉은 교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아야야..." "괜찮으세요? 교수님." "으, 응. 괜찮아." 넘어진 교수님을 일으켜주는 아리아와 세리아. 의자가 난데없이 와장창 사라지는 마술아닌 마술을 본 유아 선배가 나를 노려보며 말한다. "유에. 너, 노아 교수님 의자 너무 허술하게 만든거 아니야?" "무슨 소리에요. 유아 선배. 이 중에서 가장 튼튼하게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것이 바로 노아 교수님이 앉으신 의자인데요." "그런데 멀쩡한 의자가 부숴질리가 없잖아." "하지만 분명 제대로 설계 했다니까요. 아까 제가 강도 테스트를 했는데도 멀쩡했고요. 오히려 제가 더 신기할 정도에요." "그럼 의자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거야?" "그거야 저도 잘 모르죠." 미스테리다. 어째서 멀쩡한 의자가 왜 무너진 것일까. 아까도 내가 직접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이지만, 노아 교수님 의자가 가장 튼튼하게 만들어진 완전한 제공품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만약에 노아 교수님 것의 의자가 무너질 정도라면, 자연스럽게 우리들이 앉고 있는 의자도 부실공사로 인해 부숴지는게 정상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음식이라는 다수의 물건을 지탱하고 있는 탁자도 예외 대상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노아 교수님의 의자가 먼저 무너진 것일까. "혹시..." 모두의 시선이 노아 교수님에게로 쏠린다. 설마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여기에 있는 모두가 하고 있는건 아니겠지. 하지만 시선의 방향으로 보아서 아마도 이런 내 생각이 맞는거 같다갑자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 시작하는 노아 교수님이 처음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다가 이내 뭔가 눈치를 챘는지 화악 붉어지는 얼굴을 애써 가리면서 다급하게 말하기 시작한다. "나, 난 아니야! 그렇게까지 내가 무거운 건 아니라고!" "교수님. 혹시 무인도에 오게 되서 오히려 살 찌신거 아닌가요?" "아, 아니라니까!" 양 손을 절래절래 지으면서 극구 부정하는 교수님. 그러나 누나의 눈은 교수님의 허리와 배를 관찰하는 모드로 들어선지 오래다. "그러고보니 무인도에서 묘하게 교수님의 식탐이 많이 늘은거 같은 기분이..." "아니야! 아니라고!" 노출된 자신의 배를 양 손으로 가리면서 또다시 부정한다. 내가 보기에는 날씬해 보이는데. 엘리 정도의 극단적으로 가느다란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살이 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뱃살이 나온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글래머러스한 편. 그러나 남자가 보는 시선과 여자가 보는 시선은 또 다르지 않은가. 내가 노아 교수님의 몸매가 괜찮다고 생각해도, 여자들은 다르게 보는듯 하다. "아, 여기 살이 조금 찐 듯한 증거가..." "무, 무슨 짓이니! 유린!"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누나의 손길에 노아 교수님이 화들짝 놀라며 기겁한다. 그러나 누나를 피해도 대기중인 인물은 얼마든지 있었다. "유린 선배. 허벅지도 조금 수상해요. 약간 통통해진 듯한 느낌이..." "아,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엉덩이 쪽이 더 수상한데?" "정말! 아리아하고 유아까지!" 거의 울먹이는 수준까지 온 노아 교수님. 살이 쪘다는 말이 그렇게나 듣기 싫은 것일까. 역시 남자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약간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무리가 있는듯 싶다. 날씬해 보이시는데. 음... 이상타. 내 시각이 잘못된 것일까. 노아 교수님의 진심을 담은 부탁이 통한 것일까 유아 선배가 깔깔 웃으면서 자신들이 했던 말을 철회한다. "농담이에요. 교수님. 그냥 한번 떠본 거예요. 교수님이 얼마나 날씬하신데요." "......" 하지만 말이라는 것은 함부로 흘렸다고 해도 다시 주워담을 수 없는 것 아닌가. 노아 교수님의 시선은 이미 '나 삐졌어!'라는 의미를 가득 내포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만날수 없어 만나고 싶은데 그런슬픈 기분인걸 말할수 없어 말하고 싶은데 속마음만 들키는걸 내 사랑의 마법의 열쇠가 있다면 그건 바로 이세상이 아름다운 이유 catch you catch you catch me catch me 이젠 숨박꼭질은 그만 그만 우울한건 모두 파란하늘에 묻어버려 오늘도 너에게 달려가는 이마음 나는 정말정말 너를 좋아해 ... 이상 카드캡터 체리 노래 1절 가사였습니다. ㅡ_ㅡa 60화 이런 연유로 지금 나는 다시 내가 만든 가구를 점검하게 되었다 이 말이다. 노아 교수님을 원망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덕분에 이런 잔업을 하게 된 것에 대해 조금은 유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노아 교수님이 살이 쪘다 이런 말은 아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교수님은 날씬하니까. 망치를 한번씩 두드리며 다시금 내구력 테스트를 시작한다. 우리들 중에서 가장 체중이 많이 나가는 내가 앉아보기도 하고. 남자인 내가 앉아서 버틸 수 있을 정도면 여자들이 앉는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겠지. 그렇다고 실제로 내가 다른 사람들의 몸무게를 아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래도 나보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있으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겠지. 그렇다고 몸무게를 물어볼수도 없고. 아무리 눈치없는 나라고 해도 여자들에게 함부로 몸무게를 묻는 행위는 매너 위반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이건 문제 없고..." 기존에 만들어져있던 의자 3개를 제외하고 4개의 의자와 1개의 탁자를 점검중이던 나에게 누군가가 쫄래쫄래 발걸음을 옮겨온다. 살짝 고개를 돌려 확인한 결과. 여전히 메이드 복을 입고 있는 은발의 미소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굳이 어느 쪽이냐 하면 드센 성격의 동생쪽이 아니라 얌전하고 참한 성격의 언니쪽으로 보인다. "세리아. 무슨 일이야?" "......" 내 말에 그저 살포시 웃어만 보이는 세리아. 세삼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세리아는 직접 '말'을 하지 못한다. 아니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말을 못하는게 아니라 '하지 않고' 있다. 예전에 아리아에게서 들은 말에 의하면,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을 극히 꺼려하게 된 세리아는 결국 말을 하지 않는 정신적인 장애를 안게 되었다고 한다. 치료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치료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요소, 즉 '본인의 의지'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아직까지 세리아의 이런 증상에 대해 치료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세리아가 말을 못하는 증상은 신체적인 장애 요소가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라는 뜻이다. 그런데 세리아가 왠일로 나에게 온 것일까. 문득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사실 세리아는 매번 아리아와 붙어 다니는 모습이 거의 암묵적으로 생성된 법칙이다시피 할 정도로 자매끼리 항상 페어를 짜는 일상이 관습화 되었는데 단독으로 세리아가 나에게 온 것은 보기 드문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나한테만 할 말이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런 궁금증은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해결되었다. 뒤에 숨기고 있던 물컵을 내미는 세리아. 양 손에 곱게 잔을 잡아 나에게 내미는 모습이 얌전한 성격의 세리아다웠다. "심부름이야?" "......" 말은 못하지만, 제스쳐로 고개를 위, 아래로 흔든다. 노아 교수님이나 유아 선배가 보낸 것일까. 보통은 이런 잔심부름은 아리아가 오기 마련인데. 자신의 언니를 너무 과보호하는 습성이 있는지라 세리아에게 할당된 일의 범위 중에 자신이 할 수 있을만한 곳에 손이 미친다면 본인이 직접 하고야 마는 것이 바로 아리아다. 잠시 화장실이라도 간 것일까. 아무렴 어떠랴. 누가 가져오든간에, 물을 갔다 준 사실 하나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는가. "고마워. 세리아." "......" 또다시 고개를 상하로 끄덕이는 세리아. 그런데 표정이 약간 이상하다. 뭐랄까. 감기기운이 있는 환자처럼 붉으스름한 얼굴색을 띄고 있다고 해야 할까. 평소의 조용하고 참한 세리아에 비해 지금은 어딘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걱정된 나머지 세리아에게 말을 걸어본다. 비록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듣는 일은 가능한 세리아인지라 내 물음을 듣고 즉각적으로 부정의 표시를 내보인다. "그럼 어디 아픈데라도?" 이번에도 역시 아니라는 듯이 오른손을 작게 흔든다. 그럼 무슨 일일까. 심부름도 끝났는데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내 주변에 서서 멀뚱멀둥 있는 세리아의 모습이 오늘따라 조금 수상하게 느껴진다.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분명 무언가 나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라도 있나. "괜찮다면 내가 이야기를 들어줘도 될까?" "...!" 아니라는 듯이 또 한번 손을 흔들어보인다. 이번에는 고개까지.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하지 않는가. 어차피 세리아와 이런 식으로 단 둘이 대화를 나눠본 일도 없겠다 해서 모처럼의 휴식시간을 세리아에게 투자하기로 한다. "어차피 잠깐 휴식을 가지려고 했으니까 앉았다 가." (끄덕끄덕) 이번에는 승낙의 표시를 보여준다. 약간 망설인 공백이 있었지만, 결과만 좋으면 오케이 아닌가. 일단 안전검사를 마친 의자 하나를 세리아에게 선사해주고 나는 집 근처에 있는 난간에 걸터 앉는다. 처음에는 나보고 의자에 앉으라고 권유한 세리아였지만, 그래도 여자를 차가운 곳에 앉히게 할 수는 없는지라 세리아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리아를 앞에 두고 나만 의자에 앉은 모습을 아리아에게 보였다간 훗날이 감당이 안될거 같아서 미리 사고 예방 차원에서 한 배려였다. 두 다리를 모으고 양 손으로 치마 안쪽이 보이지 않게 허벅지 위에 곱게 올려놓은 세리아가 나를 힐끗힐끗 바라본다. 고개를 살짝 떨구고서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세리아. 정말 어디 아픈거 아니지?" 이번에도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인다. 말을 할 수 없으니 계속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수밖에 없다. 저번에 보니 수화도 할 줄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화를 아는 사람은 우리들 중에서 아리아가 유일한 사람이니 세리아가 평소에 아리아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때는 이렇게 이지선다 형으로 yes or no의 바디랭귀지를 보여주는게 전부다. 간단한 대사는 그 정도로 그치고, 정작 필요한 장문의 말이 있을때는 나무 막대기로 흙 위에 글자를 적는다. 무인도에는 종이도, 펜도 없으니까 말이다. 근처에 놓인 작은 나뭇가지를 발견한 세리아가 잠시 자리에서 일어선 뒤에 종종걸음으로 주워오고 나서 다시 의자에 앉아 바닥에 글자를 쓰기 시작한다. -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세리아의 글씨는 무인도에 와서 처음보는거 아닌가. 역시 생긴것도 예쁘니까 글씨체도 예쁘다. 말도 안되는 연관성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세리아의 글씨체는 보기 쉽고, 여자아이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본인이 스스로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하니까 일단 감기나 이런 병에 관련된 증상 문제는 아닌듯 싶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매번 세리아의 옆에 붙어 다니며 거의 살다시피 하는 친절한 여동생, 아리아가 세리아의 이상상태를 눈치채지 못할리도 없을테니까 말이다. 그럼 세리아의 이런 태도에 대한 변화는 도대체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한가지 떠오르긴 한다. 마법의 날. 누나가 마녀에서 악녀로 변하는 마법의 날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본다. 그렇다고 세리아에게 '혹시 그날이니?'라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리고 정말 생리 기간이라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 보다는 약간 짜증섞인 표정을 보여줘야 하는게 정상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마법의 날이라는 소재는 일단 후보에서 배제시킨다. 고민하는 내 모습을 보던 세리아가 마지못해 다시한번 바닥에 글자를 새겨넣기 시작한다. - 그냥 선배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에요. "내가 일하는 모습을?"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세리아. 누나나 아리아와는 다르게 세리아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할 위인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이건 사실이리라 판단 되어진다. 그런데 내가 일하는 모습을 봐서 이득이 되는것도 없을텐데. "별로 볼 것도 없어. 그냥 의자나 탁자에 어디 이상이 있나 하고 검사만 하는 작업인데." - 힘들지 않으세요? "그다지. 정작 힘든건 가구를 제조하는 일인데, 그 작업은 이미 끝냈으니까. 뭐... 교수님의 의자는 다시 만들어야 하겠지만." 한숨을 쉬는 내 모습을 보던 세리아가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며 조숙하게 웃는다. 현모양처 스타일이라고 해야 할까. 웬만해선 절대로 화를 낼 것 같지도 않고, 삐지지도 않을것 같고, 그리고 토라지지도 않을것 같은 랭킹 부동의 0순위, 세리아의 위엄있는 웃음이었다. 누나나 유아 선배는 워낙 감정표현에 충실하다보니 얼굴 표정에서 금방 속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데, 세리아는 그저 부드럽게 미소만 지을 뿐이다. 이런걸 여신의 미소라고 하는건가. 마음까지 정화되는 느낌이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 아무런 말도 없이 어색하게 앉아있는 상황에서. 세리아가 아주 소극적으로 바닥에 뭔가를 또다시 끄적끄적 거린다. 살짝 고개를 들어 세리아가 적은 글자를 확인해보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서프라이즈!'라는 단어가 튀어나올뻔 했다. - 주인님... ♡ 귀... 귀... 귀... 귀엽다!! 가까이서 봐야 겨우 글자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조그만한 단어로 '주인님'이라고 쓴 세리아. 게다가 뒤에 앙증맞게 하트까지 넣었다. 직접 말로 들을 수 없다는게 안타깝지만, 언어의 힘이라는 것은 듣기 뿐만이 아니라 쓰기도 있지 않은가. 창피한지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세리아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잔뜩 웅크리기 시작한다. "주, 주인님이라니... 세리아. 혹시 다른 사람들이랑 게임에서 져가지고 '쪽팔려 게임'이런거 수행하는건 아니겠지?" 강한 부정의 의미로 고개를 숙인 채 좌우로 흔들어댄다. 은발의 눈부신 머릿결이 세리아의 고개에 따라 일렁인다. 세리아는 거짓말을 못한다고. 이렇게 착한 아이가 누나같이 거짓말을 일삼는 일을 할 리가 없지 않는가. 그나저나 이것이 바로 연하의 위력인가. 노아 교수님이나 유아 선배, 그리고 누나같은 경우에는 자신들이 나보다 연상이라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자각하고 있는지 이런 애교있는 모습을 별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같은 연하인 아리아와 엘리는? ...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다들 알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얌전하던 세리아가 이런 앙증맞은 애교를 보여주다니. 눈에서 감동의 눈물이 다 나올 정도로 기쁨이 넘처 흐른다. "... 저기. 세리아. 일단 주인님이라고 말해줘서... 가 아니지. 말은 안했으니까. 아무튼 고마워. 솔직히 말해서 기뻐." "......" 더욱더 세리아의 얼굴이 빨개진다. 머리에 연기라도 나올 정도로 달아오른 세리아가 또다시 나무 막대기를 쥐고서 이번에는 더더욱 작은 글씨체로 또다시 무언가를 쓰기 시작한다. 너무 작아서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이상 확인이 불가능한 문장. 아까 주인님이라는 단어보다는 조금 길어보이는데. 확인 차원으로 허리를 숙여서 세리아의 발 밑에 쓰여있는 글자를 확인해본다. 그리고 그 곳에.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진 문장의 힘을 내포한 단어가 쓰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 선배... 좋아해요. ============================ 작품 후기 ============================ 세리아의 나이를 수정합니다. 제가 전에는 아리아와 세리아의 나이가 동일하다는 점을 까먹었는지, 설문에도 그렇고 이 훨~씬 전 편에도 그렇고 세리아의 나이를 24살로 알고 쓴 흔적이 보이더군요 ㅡ_ㅡ;; 가만히 생각해보니, 세리아는 아리아와 동갑인 22살이었습니다. 둘이 쌍둥이고, 동갑이라는 설정이었지요. 그걸 60편 연재하면서 깨달은 제 자신이 부끄럽사옵니다. 사죄의 뜻으로 카드캡터 체리 노래를 불러드리고 싶지만, 오히려 욕만 먹을 거 같아서 여기서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61화 "좋아한다고?"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세리아. 내 시력이 급격히 하락해서 바닥에 쓰여져있는 작은 글씨를 잘못본게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돌 다리도 두드렸다가 한번 더 밟아보고 안되면 바주카포로 몇번 때려서 안전한지 확인해야 건널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확인차원으로 한번 더 물어보도록 하자. "나를 좋아한다고?" 다시 고개를 끄덕끄덕. "Me?" "......" 말도 안되는 영어까지 써본 결과.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라는 사실로 판명이 되었다. 하지만 믿기지가 않는다. 왜 세리아가 나를 좋아하는건가? 세리아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스스로 말하면 조금 비참하게 느껴지지만, 잘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리 잘 생긴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침 드라마에 나올법한 제벌 2세도 아니고. 노래나 춤을 잘하는 아이돌 그룹의 남자 가수도 아니고. 아. 그런데 정말로 나열해보니 점점 스스로가 비참해지기 시작한다. 자책하는 말 따위는 여기서 관두도록 하자. 아무튼 이런 이유로 세리아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내 자신이 오히려 납득할 수가 없다. 뭔가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곁들여서 왜 세리아가 나를 좋아하는가 라는 논문 주제로 누군가 프리젠테이션 형식으로 알려줬으면 좋겠다. 잠자코 고개를 푹 숙이던 세리아가 발 밑에 있던 글자를 신고 있는 하이힐로 지우고선 다시 몇글자를 끄적끄적 쓰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아까에 비해서 조금 큰 글씨.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한글 2002의 글자 포인트 15에 해당하는 그런 크기가 아닐까 추산해본다. 참고로 글씨체는 궁서체다. - 대답을 들려주셨으면 좋겠어요. 오늘따라 세리아의 태도가 상당히 적극적이다. 아니지. 태도가 적극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뭔가 결심을 했다는 듯이 약간 색다른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부끄러워 하는 모습이야 수도 없이 봤는데, 직접 고백을 하고 나서 그 대답을 들려줬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마무리를 확실하게 지어주는 세리아 여신님. 소인은 꽤나 감동을 받았소이다. "꼭 여기서 대답을 해줘야 돼?" 내 말에 느닷없이 세리아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순간 앗차 하면서 허둥지둥대며 일단 세리아를 진정시키기로 한다. "아, 알았어. 미안해. 세리아. 이 선배가 잘못했어. 울지 말고. 알았지?" "......" 겨우 진정이 되었는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는 세리아였다. 그렇다고 울릴만한 소리는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곤란하다. 잠시 기다려달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도 고백한 상대방에게 있어서는 마음의 불안감을 초래하는듯 하다. 그렇게 따지면 아무래도 마음이 여리디 여린 세리아에게 내가 못할 말을 한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인정해야겠지. 머리를 긁적이면서 고민을 해본다. 세리아라는 미소녀와 사귄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괜찮다. 나에게 손해가 가해질 일은 전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는 더욱더 이득이다. 이런 미소녀를 어디서 여자친구로 만들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알다시피, 이미 나는 유아 선배와도 그렇고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고, 그리고 교수님과는 실제로 몸을 섞었던 전과도 있다. 누나와 아리아가 나에게 추긍한 적도 있다시피, 엄밀히 말하자면 양다리.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란 녀석, 은근히 대단한거 아닌가. 이거. 어느새 다수의 여자들을 섭렵하다니. 무슨 양산형 판타지 소설에 나올법한 먼치킨 주인공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나도 마음을 굳게 다지기로 한다. 어차피 무인도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계속 지내다보면 들킬지도 모르는 관계. 그렇다면 적어도 나에게 직접적으로 용기를 내어 고백해온 세리아에게는 최소한의 진실을 말해주도록 하는게 도리 아닌가. "세리아. 사실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멋진 사람이 아니야." "......" "솔직히 말하지만, 나는 노아 교수님하고 관계를 가졌어. 그러니까... 섹스라는 단어 알지?" "......" "다들 알고 있던 눈치라서 말하는 건데, 교수님과 그렇고 그런 행위를 한 적도 있고, 유아 선배와도 사귀기로 한 사이이기도 해. 물론 선배와는 아직 별다른 진전을 보인 적은 없지만." "......" "그러니까 세리아. 네 고백은 받아주기 조금 힘들거 같아. 미안." 이것이 내가 세리아에게 건네줄 수 있는 최대한의 답변이다. 마음은 아프지만, 그래도 나보다도 더 가슴이 아플 여자에게는 그래도 이런 진실성 담은 답변은 들려줘야 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긴 머리카락 때문에 고개를 숙인 세리아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설마 울고 있는건 아니겠지. 사실 운다고 해도 별로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여기서 세리아를 울려버리면 곤란하다.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특히 아리아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런 내 우려는 단순한 착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인 즉슨, 나무 막대기를 든 세리아의 메시지가 업데이트 되면서 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그 문장을 뇌리에 입력하며 괜한 걱정을 했다는 결과물로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 알고 있었어요. "다행이다... 가 아니잖아! 알고 있었다고?!" 다시 바닥을 문질러 글자를 지운 뒤에 새로운 글자를 쓰는 세리아. - 네. "언제부터?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나도 모르게 육하 원칙을 남발하며 세리아의 답변을 재촉한다. 잠시 뜸을 들이는 세리아. 그러고 나서 이내 다시 막대기를 들고 쓱삭쓱삭 새로운 문장을 써내려간다. - 저번에 유린 씨하고 아리아하고 이야기를 할 때... 사실 깨어 있었어요. "비 오는 날 때였나." 나와 아리아, 그리고 누나가 서로 이야기를 할 때라면... 분명 태풍이 와서 알몸으로 왕 게임을 하고, 그 뒤에 아리아와 누나와 한 이불 속에서 진실게임 아닌 진실게임을 가졌던 그 일을 가리키는게 분명하다. 역시나 그때 깨어 있었던건가. 사실 생각해보면 누나와 아리아, 그리고 내가 서로 이야기를 하는 상황속에서 계속 폭풍 슬리핑을 했다는 사실이 더 이상할 것이다.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일부러 알면서 모른척 해왔다는 소리인가. 이것으로 내가 유아 선배와 교수님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진도까지 나갔는지에 대해서 내 주변에 있는 여자들은 다 알게 된 셈이다. 아니지. 엘리는 아직 모르는 눈치인 걸로 보이니까 예외로 치자. "세리아. 내 여자관계에 대해서 네가 알고 있다는 거, 아리아도 알고 있어?"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세리아. 그렇다면 아리아는 모른다는 뜻인가. 일부러 자신의 언니에게는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세리아가 나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진작에 눈치채고, 괜히 세리아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비밀 엄수를 하고 있었을지도. 만약 아리아가 내 생각대로 그런 이유를 들고 세리아에게 나와 유아 선배, 교수님과의 관계를 일부러 털어놓지 않은 거라면, 그 녀석은 괜한 헛수고를 하게 된 셈이다. 뭐... 비밀이란 것은 3명 이상이 알게 된 순간부터 이미 비밀이라 불릴 자격을 잃어버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속도라면, 조만간 엘리도 우리들의 관계를 알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엘리는 나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까. 짐승을 보는 듯한 그런 눈빛을 하겠지. 순진무구한 소녀에게 짐승 취급을 받게 되다니. 생각만 해도 절망감이 절로 노크를 하고 찾아오는 듯한 그런 기분을 맛볼 것 같다. ============================ 작품 후기 ============================ 확밀아 서버 관리 좀 진짜 제대로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일 안하니, 엑토즈야 ㅡ_ㅡ PS. 노래방 데려가주시면 카드캡터 체리 주제곡 불러드리겠습니다. 뀨잉뀨잉 62화 그래도 기껏 아리아가 세리아에게 숨기려고 했던 사실인데. 굳이 아리아에게 이런 사실을 알릴 이유는 없다고 본다. 일단 여기서는 세리아에게 선처를 구해볼까. "아리아에게는 말하지 않는게 좋겠어. 그거." - 저도 알고 있어요. "그, 그래?" 하긴. 알고 있었으니까 일부러 말을 안했겠거니 생각해본다. 아무리 서로 친밀한 쌍둥이 자매라고 해도 프라이버시가 있으니까. 잠깐. 아리아와 세리아의 상황을 이해하느라 잊고 있었는데, 나와 유아 선배, 그리고 나와 교수님과의 관계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리아는 나에게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다. 세리아라는 인물을 놓고 보자면, 우리 누나와 아리아 같이 거짓말을 하루 3끼 식사마냥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언제나 진솔하고 수줍음 많은 모습을 보이는 세리아가 나를 일부러 골탕을 먹이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보여지진 않는다. "세리아, 너..."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리아가 빠른 속도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써내려간다. - 선배를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에요. "내가 다른 여자랑 관계를 가졌다고 해도?" - 상관 없어요. "진짜로 하는 말이야? 그거?" - ... 상관 없어요. 이건 조금 예상 외의 답변이었다. 은근히 고집이 쎈 타입이었나. 세리아. 누가 같은 자매 아니랄까봐 이런 면은 자매의 취향이 높은 수치로 일치하고 있었다. "세리아. 네 기분, 잘 알았어." "......."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뭐라고 반대할 생각은 없겠지.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그 좋아하는 감정을 억누르고 표현하지 말라고 억압하는 것은 같은 사람으로서 권한 밖의 일이라는 사실은 나도 잘 아니까." 좋아하는 기분은 그 누구에게도 간섭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사람이기에, 그리고 이성을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인간은 이런 표현의 자유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을 정도로 인격의 존엄성을 존중하겠다는 취지. 나 역시도 세리아의 마음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살짝 자리에서 일어서서 세리아에게 다가간다. 의자에 앉아있던 세리아가 촉촉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며 두 눈을 질끈 감는 것이 보인다. 고개를 살짝 들면서 나를 바라보는 그 모습.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키스'를 바라는 여자아이의 모습이다. 세리아의 어깨를 살포시 잡는다. 순간 움찔하는 세리아의 몸. 조금이라도 건들면 깨질듯한 아름다운 여신의 조각상처럼 세리아를 부드럽게 다루도록 하자. 여자아이에게는 언제나 상냥하게 대해주라고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를 좋아하고 있는 이 귀여운 여성에게는 더더욱 선심을 많이 써야 한다. 좋아해주는 만큼, 나도 그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세리아의 핑크빛 입술이 윤기가 나는 것처럼 보인다. 부드럽고, 달콤해보이는 여자아이의 입술.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과 함께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 성녀처럼 느껴질 정도로 순백하고, 그리고 아름답게 보인다. 고개를 내리자, 이제 거의 코 앞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우리 둘 사이. 조금만. 조금만 더 입술을 뻗으면 세리아와의 키스가 시작된다. 왕 게임에서 벌칙으로 형식적인 키스를 한 것과는 달리, 지금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을 나누기 위한 성스러운 애정행위인 것이다. 과거의 지금과 현재의 지금이 다른 것처럼. 시간은 계속 끊임없이 흘러가기 때문에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현재의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래.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눈 앞에 있는 세리아를 생각하자. 그렇게 마음을 먹고 드디어 서로의 입술이 맞닿으려던 순간... "세리아~ 심부름 무사히 끝났니?" "노, 노아 교수님?!" "어머. 유에. 작업 다 끝난거니?" 아까의 개량한복과는 다른 평상복을 입고 등장한 노아 교수님이 우리 둘을 바라보며 말한다. 설마 교수님이 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어정쩡한 자세로 세리아의 뒤로 돌아가 의자를 점검하는 척 한다. 세리아 역시도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없이(애초에 말을 못하지만) 의자에만 앉아있는다. 우리들의 모습을 조금 이상하게 바라보던 노아 교수님이 세리아에게 다가오며 그녀의 오른 손을 잡는다. "미안, 유에. 세리아 좀 빌려갈게." "어, 언제든지요." "그럼 수고하렴." 오늘 저녁 당번은 노아 교수님과 세리아였나. 잘못했다간 노아 교수님에게 예상치 못한 광경을 들킬뻔 했다는 사실이 조금은 섬뜩하게 느껴진다. 가뜩이나 미묘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여자들도 많으니까 몸가짐에 조금 신경쓰는게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얌전하던 세리아가 나를 좋아한단 말이지... ... 이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조금 혼란스럽다. 설마 그 순진한 세리아가 나를... 오랫동안 인생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진짜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있다. 겨우 잔업을 끝내고 돌아온 나. 다행스럽게도 저녁이 되기 전에 완성되었는지라 이제 다시 마음편히 모두 자리에 앉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태풍의 여파로 인해서 오늘은 고기반찬을 기대하기 힘든 식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조금은 유감스럽게 느껴진다. "이번 의자는 괜찮은거겠지?" 감자를 한입 베어 물며 나에게 묻는 유아 선배. 그녀의 말에 나는 어깨를 펴며 자랑스럽게 말한다. "이번에는 완벽합니다." "정말로?" "네. 국제의자협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의자 안전성 테스트 검사까지 통과한 당당한 완성품이죠." "그런게 있어?"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에요." "......" 유아 선배는 그게 말이 되니 라는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그 정도로 안전성에 대한 것은 보장한다는 뜻이다. 아직까지도 의자가 망가진 원인은 밝혀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설마 정말로 노아 교수님의 몸무게 때문에 무너진건 아니겠지. 저번에 얼핏 노아 교수님의 몸무게를 들은 적이 있던거 같은데, 의외로 엄청 가벼운 몸무게 수치를 들은 기억이 아직까지도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정확한 몸무게 수치는 기억나지 않지만, 의자가 망가질 정도의 수치는 아니었음을 다시금 확신한다. "왜 그러니? 유에. 갑자기 날 쳐다보고." "아니에요. 교수님." 이런. 잘못하다간 교수님에게 또 다시 무례한 말을 꺼낼뻔 했다. 조심해야지. 아까는 그래도 1시간 정도 아무하고도 말 안하는 것으로 삐지는 것을 풀었지만, 이번에는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니까 말조심 해야 한다. 노아 교수님이 은근히 잘 삐지는 성격이라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걸 노처녀 히스테리... 라고 말했다가는 영영 돌이킬 수 없는 현상이 벌어지겠지. 아마도 노아 교수님은 평생 나랑 대화도 안할 기세로 생활할 것이다. "그보다도 교수님. 의자는 마음에 드세요?" 일단 본인에게 착용감에 대해 물어보도록 하자. 질문을 받은 노아 교수님이 부드럽게 웃어보이며 말한다. "응. 마음에 들어. 유에. 수고했어." "아니요. 이런 일이라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참고로 또다시 의자가 망가지는 수모는 겪지 말아주세요. 교수님. "...!" 식사를 하다 나와 잠시 눈이 마주친 세리아가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급격하게 빨개지는 세리아의 얼굴. 옆에 있던 아리아가 걱정된다는 듯이 세리아에게 말을 건다. "언니. 몸이라도 아파?" "......" 부정의 의사표시로 고개를 저어보이는 세리아. 아픈 것 때문에 얼굴이 빨개진게 아니라 나와 눈이 마주쳐서 창피함이라는 감정이 샘솟은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오로지 나와 세리아만이 눈치채고 있었다. 세리아의 반응도 전혀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사이가 껄끄럽게 되는 것은 사양인데. 조만간 세리아와 단 둘이서 다시한번 말을 나눠봐야 하는 것인가. 잡생각이 든 탓에 제대로 식사조차 되질 않는다. ============================ 작품 후기 ============================ 아직 나오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나온 여성 등장인물 중에서는 개인적으로 노아와 유린이 제 취향이 많이 반영된 캐릭터입니다. 세리아 같은 현모양처도 좋지만요. ㅤㅎㅓㅋㅤㅎㅓㅋㅤㅎㅓㅋ. PS. 확밀아는 '확산성 밀리언아서'라고 해서, 스마트폰 용 카드 게임입니다. 요새 한창 재미가 들려서 하고 있는 게임이지요. 63화 깊은 새벽 시간. 괜시리 잠이 오지 않는 상황에서 모닥불 지킴이 담당으로 선정된 나와 누나는 아무런 대화 없이 서로 앉은 채 그저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만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 누나." "왜? 남동생." "여자는 남자의 무엇을 보고 반하는거야?" "갑자기 분위기 있는 질문을 하는구나." "그냥 그런 일이 좀 있어서." 낮에 세리아에게 고백받은 일이 신경쓰여서 결국 누나에게 상담 아닌 상담을 요청하려고 말을 꺼내본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지긋이 응시하던 누나가 아직도 궁금증이 가시지 않았는지, 연이은 질문을 나에게 던진다. "그런 일이라니. 무인도에서 있을만한 일이라고 해봤자 우리들밖에 없는데?" "......" "솔직하게 말해봐. 무슨 일 있지?" "있긴 하지만..." 말을 아끼는 내 모습을 보던 누나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말한다. "늦은 나이에 사춘기라도 온 거야?" "질풍노도의 시기가 찾아오긴, 내가 너무 나이가 많이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야 모르지. 사람의 감정은 컴퓨터 프로그램 마냥 정교하게 짜여져 있는 게 아니니까." "하기사..." 누나의 말에 공감을 표시하며 고개를 끄덕여준다. 컴퓨터처럼 세밀하고 정교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기계겠지. 인간의 감정은 어렸을 때 자주 가지고 놀았던 어디로 튈 지 모르는 탱탱볼 같은 녀석이기 때문에 늘 재미있고, 늘 고민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사랑 고민도 예정이 없던 일. "그렇게 느껴진다면 빨리 말을 해주시지. 궁금하잖아." "어쩔 수 없네." 한숨을 쉬며 본의 아니게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세리아가 나에게 고백한 일부터 우리들이 산장 안에서 이야기를 가질 때 세리아가 깨어 있었다는 둥 여러가지 새로운 정보들을 누나에게 그대로 언급하기 시작. 제아무리 장난끼가 많은 누나라고 해도, 가끔은 이런 식으로 누나답게 내 고민을 들어주기도 한다. 물론 제대로 된 해결책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손에 꼽을 정도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같은 여자이기도 한 누나에게 의견을 듣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결국 털어놓게 되었다. 내 이야기를 듣던 누나가 조금은 의외라는 듯이 말한다. "세리아가 너를 좋아한다고?" "어." "남동생. 혹시 꿈속에서 고백받았다 라는 말은 아니겠지?" "누나. 이건 현실이라고. 아무리 내가 눈치 없다고 해도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할만한 정도의 수준은 아니잖아." "음... 왜 세리아가 널 좋아할까." "내가 오히려 묻고 싶다고. 그거." "그야 남동생은 별로 그리 잘 생긴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침 드라마에 나올법한 제벌 2세도 아니고. 노래나 춤을 잘하는 아이돌 그룹의 남자 가수도 아니고. 이상한데." "... 그거, 아까 내가 세리아한테 써먹으려고 했던 대사라고." "재활용이라는 의미를 담아보자고. 남동생." "시끄러워." 뭐, 이럴줄 알았다. 누나가 진지하게 내 고민 상담을 들어줄리가 없지. 한숨을 쉬면서 천장을 바라보는 나에게 누나가 빙그레 웃으면서 작게 속삭이기 시작한다. "여자의 마음을 알고 싶어?" "물론 그것도 궁금하지만,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왜 세리아가 나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가 더 궁금해." "그럼 오히려 이런 질문은 어떨까. 너는 왜 굳이 세리아가 자신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아내려고 하는건지에 대해서." "그야 궁금하잖아." "어째서?" "... 글쎄." 말이 막힌 나를 보더니 누나가 작게 웃어보이고선 다시 입을 열어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한다. "남동생.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 대해서는 굳이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는거야." "무슨 소리야?" "연애라는 감정은 말이야. 아직까지 인간이 알아내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라고. 그 어떠한 과학자도, 심리학자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는 소리야. 결국, 인간 본연이 가지고 있는 '좋아해'라는 감정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자, 그리고 미스테리로 둘러쌓여 있는 소중한 공간이라는 뜻이야." "......" "아무도 알지 못하는 마음을 과연 누가 명확하게 해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그런건 존재하지 않아. 하지만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미지의 감정에 몸을 맡기고, 본능을 맡기는거야. 그리고 서로 사랑을 나누고, 평생의 반려자로 살아가게 되는거지." "철학적인 말이네." "낯선 타인에 대해서는 누구나 어색한 생각은 가지게 되어 있어. 하지만 점점 그 사람에 대해 알아갈수록, 그 사람에 대한 매력에 빠져가는 것이지. 그리고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 현상을 바로 '사랑'이라고 부르고 있어." 누나답지 않은 진지한 말이었다. 사랑이라 불리는 감정이란 녀석. 솔직히 그런 단어는 약간 여성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해야 할까. 남자인 내가 사랑에 대해 왈가불가 할 필요성도 없었고, 애초에 사랑이라는 연애 감정을 품을만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누나의 이런 말은 조금은 신기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세리아가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특이한 현상이 아니야. 어찌보면 여자아이로써 당연한 현상이야." "그럴까?" "아마도." "애매한 대답인데." "그런가? 그리고 굳이 세리아가 너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아내려고 하지 않는게 더 좋을거야. 왜냐하면 사람은 본인의 마음조차도 잘 모르는 생물이거든." 결국 세리아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냥 잠자코 캐묻지 말라는 것이 누나가 내린 결론이었다. 이번 만큼은 누나의 말을 듣는 편이 좋겠지. "어때. 제대로 된 상담이 되었어? 남동생." "나름 괜찮았어." "그럼 이제 내 부탁을 들어줘야지." "부탁?" "그래. 부탁." 누워있던 누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지막히 속삭인다. "너 때문에 다시 샤워해야 하니까 같이 목욕하러 가자." "이 꼭두 새벽에? 그것보다 뭘 했다고 땀을 흘린 거야." "모닥불에 너무 가까이 있었나봐. 등에 식은 땀이 주르륵, 주르륵." "어설픈 효과음 같은 건 내지 말라고." 귀여운 척을 하는 것인지, 윙크를 해보이며 내 손을 잡아 끌기 시작한다. "여자 혼자서 밤길에 목욕하러 가는 건 무섭다고." "... 알았어. 같이 갈게. 그러니까 보채지좀 마." ============================ 작품 후기 ============================ 요새 들어서 부쩍 코멘트 수가 많아졌음을 깨달았습니다. 음... 왜일까요?! 많은 건 좋지만, 왠지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코멘트를 다시던 분들이 아니었을텐데 ㅡ_ㅡ;; 가난한 저에게 설마 무엇을 바라시는지 ㅜ_ㅜ 드릴 것도 없어요. 64화 누나와 같이 근처에 있는 호수로 향하는 나. 새벽의 차가운 공기는 기관지를 통해 폐 속까지 그 서늘함을 온 몸에 전해주기 시작한다. 춥긴 하지만, 그래도 몸을 청결하게 한다는 행위에 대해서는 게을리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인내심을 발휘해 참도록 하자. 옷을 벗고서 호수 안으로 들어간 우리. 본래는 누나와 같이 들어갈 생각이 없었지만, 어차피 무인도에 오고 나서 서로 못볼 꼴 다 본 사이이기 때문에 그냥 아무런 항의 없이 혼욕을 즐긴다. 어차피 친누나이기도 하고. 별로 문제될 건 없겠... "우리 남동생. 또 다시 커져서 어쩌려나." "......" ... 없을 리가 있나. 이 상황에서 가만히 넘어가면, 우리 누나가 아닐 것이다. "이상한 말 하지 말고 목욕이나 해. 누나." "뭐야. 그냥 농담 한 것 뿐인데." "친동생한테 성희롱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것이 농담이야?" "블랙 코미디에서 자주 나오는 조크니까." "장르에 대한 정의 좀 명확하게 인식해 봐." 말은 그렇다 쳐도, 누나는 다시봐도 정말 명품 몸매라고 칭하고 싶다. 누나가 만약에 조금만 더 나이가 먹으면, 그러니까 20대 후반정도 되는 나이가 된다면 미스코리아 뺨 칠 정도의 수준을 자랑하는 여성이 되리라고는 의심치 않는다. 아니지. 이미 20대니까 여기서 더 성장할 일은 없을지도. 한동안 차가운 새벽 공기와 함께 그것보다 더 차가운 호숫가의 물 안에 머물던 나와 누나는 결국 너무 추운 나머지 그냥 간단하게 물만 적시고 나오기로 합의를 본다. 중간에 투명한 이슬같은 물방울들이 누나의 가녀린 몸을 타고 바닥을 향해 흘러 내리는 모습을 슬쩍 훔쳐보며. 새벽이 무섭다고 앙탈을 부리는 누나의 손을 잡고 다시 캠프로 돌아오는 우리. 그러나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고요한 산장의 모습이 아니라 바깥에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은발의 미소녀였다. 순간 말문이 막혀버린다. 분위기로 보아서는 분명 아리아는 아니다. 약간 드센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아리아보다는 선함의 포근함을 가진 세리아라고 판단하는 것이 더 옳다고 본다. "......" 왜 새벽에 세리아가 잠도 안 자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머릿속에 채 가시지 않는 의문부호를 띄우며 누나에게 물어보려고 하는 순간. "'우리'가 아니라 '너'를 기다리고 있던 거겠지." "나?" "그래. 너. 영어로 말해줄까?" "아니. 됐어. 충분히 알아 들었으니까." 물론 세리아가 나를 기다린 이유에 대해서도 좀처럼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세리아에게 해줘야 할 대답이라면 있긴 하지만. 약간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덜 마른 머리카락을 만지던 누나가 내 어깨를 살며시 밀며 말한다. "남동생. 잠깐 세리아랑 이야기좀 하고 올래?" "이 밤중에?" "야심한 시간에 보내는 데이트도 나름 매력적이라고. 그렇지?" "그치만..."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시며 계속해서 바깥에 머무르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하고 반론을 펼치려 했지만, 그 전에 누나가 먼저 작게 속삭인다. "세리아는 일부러 너를 기다린거야." "그러니까 왜."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야?" "무슨 근거로 나도 모르는 속마음을 누나가 알 수 있는데." "여자의 감이니까." "......" 예전에 유아 선배가 한번 써먹은 '여자의 감' 드립은 태클을 걸고 싶어도 걸 수 없는게 현실이다. 내가 여자도 아니니까 이런 식으로 말을 꺼내면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하는것일까. 그래도 누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잠을 안자고 바깥에서 우리들이 돌아올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소리는, 아직까지 잠을 자지 않고 우리들이 나가기를 보고 있다가 타이밍에 맞춰서 이렇게 세리아가 직접 모습을 보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세리아를 지나치며 얌전히 집 안으로 들어가는 누나. 세리아가 살짝 누나를 바라보는 미세한 반응이 있었지만, 정작 누나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듯 하다. 겉옷을 두르고 있는 세리아에게 다가가는 나. 약간 딱딱한 표정을 지어보이지만, 그래도 평소의 세리아다운 모습이다. 얌전하고 참한 모습. 기다리고 있었던 모습은 마치 일하러 바깥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현모양처의 아내를 떠올릴 수 있을만한 이미지를 선보이고 있었다. "잠시 걸을까?"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세리아.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 수 있을까봐 신경을 쓰고서 장소를 옮기는 선택을 한 것이다. 우리들이 이동한 곳은 캠프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가로 통하는 길. 숲속을 거쳐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미리 해안가와의 길을 개통해뒀기 때문에 어두운 숲 안쪽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바닷바람을 맞이하며 휘날리는 세리아의 긴 은발. 달빛에 반사된 그 모습이 정말 예뻐보인다. 이 넓은 해안가에 나와 세리아 단 둘만에 있다. 누나가 만들어준 이 기회를 날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세리아를 부른다. "세리아. 잠깐 할 말이 있는데." "......" "아까 네가 나에게 고백했던거 말이야." 세리아의 시선이 나와 마주친다. 낮에는 세리아의 마음을 암묵적으로 허락했다. 하지만 세리아는 불안해하는 것이다. 정말로 내가 세리아를 받아주었는지에 대한 그 의구심이 오늘 세리아를 이 자리까지 오게 한 것이다. 여자로서 좋아하는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할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세리아를 억압하고 있었던 것일까. 점점 누나와 다른 여자들을 거치면서 나도 어느정도 여자라는 생물에 대해 이해도가 많이 늘어난 상황이다. 더욱이 말을 못하는 세리아였기 때문에 몸짓, 그리고 눈빛 하나하나 세세한 행동이 세리아 본인의 감정표현을 대신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 온순한 이 여자를 상처주고 싶지 않다. 이 마음이 지금 내게 있어서 솔직한 감정이었다.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생각, 그리고 마음에 충실하라. 누나가 나에게 들려준 그 말이 다시금 떠오르기 시작한다. 천천히 세리아의 어깨를 잡은 뒤에 그녀를 안아준다. 얌전히 나에게 안겨오는 세리아. 낮에 비해서 그나마 어느정도 긴장감이 완화된 모습을 보이지만, 아직까지도 떨고 있다. 누나에게 처음 받았던 그 약의 효능은 이제 거의 남아있진 않은 상황이지만, 여체에 대한 수컷 본연의 갈망은 사그러들지 않는다. 이것이 남자의 본능이니까. 발기된 성기가 세리아의 배를 쿡쿡 찌르기 시작한다. 낯선 남자의 성기를 느낀 세리아가 순간 훔칫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자신의 몸을 내게 접촉시켜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리아와의 키스. 유난히 키스에 욕심이 많은 것일까. 대놓고 조르지는 않지만, 키스를 해달라는 요구를 하듯이 자연스럽게 눈을 감으며 고개를 드는 세리아의 입술에 혀를 밀어 넣는다. 왕 게임을 했을때와는 달리 적극적인 혀의 놀림. 세리아도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고 자신의 혀로 내 혀를 맞이한다. 여전히 키스에 대해서는 서투르지만, 세리아니까 괜찮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다. 서로의 타액이 교차하는 순간에도 내 손은 세리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가 그녀의 작은 둔부로 향한다. 남자의 차가운 손길을 받은 세리아가 강하게 몸을 떨며 두 손을 곱게 모으고 나를 올려다보며 옅은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흐읏..." 말은 하지 못하지만, 소리는 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서로간의 강도 높은 스킨십을 통해서 세리아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얌전하고 청초한 세리아의 신음소리라니. 얼마전에 엘리의 신음소리 이후로 나름 신선한 사운드가 아닐까 한다. 게다가 평소에는 들을 수 없는 세리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메리트까지 있으니까 그 가치는 더더욱 상승함을 느낄 수 있다. 느긋하게 세리아의 겉옷을 벗긴다. 차가운 밤공기가 그녀의 피부에 직접적으로 와닿음과 동시에 세리아의 억압되어 있던 신음소리가 조금 더 커진 느낌이 든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오로지 세리아와 나, 단 둘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우리들은 서로의 몸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고개를 아래로 내려 세리아의 목에 키스자국을 남긴다. 약간 당황한 모습의 세리아가 나를 조금 떠밀려는 모습을 취했지만, 연약한 세리아의 팔힘으로 남자인 나를 밀쳐낼수는 없었다. 손을 아래로 뻗어 세리아의 가슴 한쪽을 강하게 움켜쥔다. 그러자 세리아의 고개가 하늘로 향하면서 긴 은발이 더욱더 찰랑인다. "!!!" 신음소리의 강도가 낮긴 하지만, 그래도 세리아는 소리보다는 몸의 반응으로 신음을 대신한다. 타인에게 자신의 가슴을 만지게 하는 일은 처음인 것일까. 유난히도 반응이 민감한 세리아였다. 그래도 일을 멈출수는 없는 것. 세리아를 모래 사장에 눕히고선 그녀의 가슴을 한입 베어문다. 아리아와 같은 자매임에도 불구하고 미세하게 가슴의 모양도 다르고, 그리고 유두의 크기도 다를 것이다. 아리아의 가슴을 직접 본 적은... 없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여하튼 내 추측으론 그러하다. 누가 좀 더 크냐하면 세리아에게 손을 들어주고 싶다. 역시나 언니인 것일까. 조금이라도 연상인 쪽이 가슴이 크다는 불변의 법칙... 같은 건 없지만, 그래도 성숙함이라는 요소가 있으니까. "아... 하아..." 크게 벌어진 입에서 간간히 신음이 흘러나온다. 고개를 아래로 내리면서 세리아의 치마를 벗기자, 그녀의 분홍색 팬티가 눈에 들어온다. 물방울 무늬의 귀여운 팬티를 입고 있는 세리아. 그녀의 입구를 막아주는 유일한 천쪼가리를 과감하게 벗긴다. 거의 무릎까지 내린 세리아의 팬티위로 음란한 애액을 내뿜고 있는 여성기의 모습이 보인다. ============================ 작품 후기 ============================ 의자 구입한지 4개월도 안 지난거 같은데, 고장이 나버렸습니다 ㅡ_ㅡ;; 이래서 인터넷 싸구려 물품은 구입하면 안되는군요. 65화 세리아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묻는다. 약간 시큼한 냄새가 코끝에서 전해지기 시작한다. 자신의 사타구니에 내가 얼굴을 들이 내밀거라 생각은 못했는지 세리아가 위에서 양 손으로 내 머리를 잡고 밀치려 한다. 잔뜩 빨개진 얼굴로 거의 기어나오는 소리를 내면서 힘을 쓰는 세리아. 하지만 세리아가 그렇게나 힘이 ㅤㅆㅔㅆ다면, 아까 내가 세리아를 안았을때 진작에 나를 밀쳐냈을 것이다. 워낙에 힘이 약한 그녀였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그녀의 사타구니를 유린해간다. 혀를 내밀고, 작은 콩알같이 서있는 클리토리스를 살짝 건드려본다. "!!!" 세리아의 허리가 격정적으로 휜다. 뇌쇄적인 그녀의 굴곡이 달빛에 아름다운 실루엣을 만들어내는 상황. 새끼 손톱보다도 작은 클리토리스를 혀 끝으로 살짝살짝 건들면서 한 손으로 세리아의 엉덩이 계곡 깊숙한 곳에 위치한 항문 구멍을 찾는다. 나를 떼어내리는 세리아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래봤자 여성의 근력일 뿐. 게다가 유아 선배같이 운동을 조금 한 사람도 아니고, 몸을 쓰는 일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자라온 공주같은 세리아였기 때문에 이런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가운데 손가락으로 세리아의 항문 입구를 쓰다듬기 시작한다. 여성기의 시큼한 냄새와 함께 항문에서 풍겨오는 약간의 미세한 냄새. 내가 변태는 아니지만, 이 냄새 또한 나를 흥분을 몰아넣기에 충분한 자극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혀를 아래쪽으로 내리며 세리아의 조갯살을 핥는다. 땀이 약간 베어있는지 조금은 짠 맛도 느껴지는 상황. 세리아의 눈에는 어느새 남자에게 자신의 비밀스러운 곳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수치심과 창피함으로 물든 눈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세리아의 양쪽 조갯살을 벌려 질 입구를 확인한다. 이것아 바로 여성의 성기. 그리고 남자를 받아들이는 암캐의 본능이 살아 숨쉬는 장소다. 더 이상 참을수가 없는 나는 다급하게 바지 지퍼를 내려 지금 당장이라도 저 연약한 질 입구로 들어가고 싶다고 아우성을 내지르는 성기를 해방시킨다. 스프링처럼 툭 하고 튀어나오는 남성기의 모습에 세리아가 기겁을 하며 점점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한다. 모래 사장에 눕혀있는 세리아의 발목을 잡아 다시 내게로 끌어온다. 짧은 시간이지만 세리아의 비명 아닌 비명이 약하게 세어나온다. 하지만 해안가에서 그녀를 도와줄만한 사람은 없다. "조금만 참아. 세리아." "...!!!" 그대로 있는 힘껏 성기를 세리아의 몸 안에 밀어 넣는다. 중간에 처녀막의 감촉이 남근의 끝에서 느껴졌지만, 그런건 개이치 않고 곧바로 뚫어버린다. 어차피 시간만 오래 끌어봤자 세리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가급적이면 고통을 빨리 끝내주려는 내 나름의 배려. 그러나 처녀막에 대한 개인의 차이가 있는지 세리아의 표정은 나와 관계를 가지던 교수님에 비해서 상당히 아파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지 못할 뿐이지, 거의 눈이 뒤집어질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진 세리아. 처녀의 뜨거운 피가 모래 사장 아래에 뚝뚝 떨어지고, 그녀의 엉덩이를 타고 허리까지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다시 몸을 뒤로 빼서 이번에는 천천히 피스톤 운동을 시작한다. 고통에 일그러진 세리아가 이를 악 물며 내 목에 매달린다. 그대로 세리아를 들어서 그녀를 안아올린다. "아... 아아..." 실성 직전의 표정을 보여주는 세리아. 팔에도 아까와 같은 근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첫 경험인데 너무 무리하는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 나는 최대한 피스톤 운동을 빠르게 하며 사정 타이밍을 앞당긴다. 어마어마한 조임력. 남성기를 꽉꽉 물어대는 질 안쪽의 돌기들이 부드러운 촉감을 느끼게 해준다. 굉장한 조임력이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다른 여성과 관계를 가졌다는 경험이 없었다면, 금방이라도 세리아의 자궁 안으로 사정을 해버렸을 정도로 그 위력과 강도가 상당히 쎄다. 그러나 하반신에 비해 세리아의 상반신은 거의 힘없이 흐물거리고 있었다. 자신이 남성기를 받아들였다는 사실 조차도 잊어버렸는지 세리아의 입에서는 한방울의 침이 흘러나온다. 자제력을 잃어가는 상황. 처음에는 기절한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통해서 아직 세리아가 정신을 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큭..." 서서히 사정 타이밍이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이대로 안에다 사정할까? 툭 까놓고 말하자면 세리아의 자궁에 내 정액을 선사해주고 싶었다. 만약에 그 날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질내사정을 하고 싶은 이 기분. 그 정도로 세리아라는 여자에 대해서 나 역시도 푹 빠져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건 무리겠지. 처음 관계를 가지는 세리아에게 무리를 해서 질내사정을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나는 몸 안에서 성기를 빼내어 세리아의 가슴과 얼굴에 뿌리기 시작한다. 하얗고 비린 냄새를 풍기는 정액들을 온 몸으로 맞이하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는 세리아. 힘없이 널부러진 그녀의 심장만이 호흡을 공급시켜주기 위해서 상당한 펌프력을 자랑하며 뛰고 있었다. 세리아까지 관계를 가지고 말았다. 노아 교수님에 이어서 이번에는 세리아라니. 유아 선배가 알면 거품을 물겠지. 지금의 나이에 이 정도 전적이라면 내 친구들이 절대로 믿지 않을 것이다. 교수님과는 몸을 섞었고, 유아 선배와는 사귀는 사이고, 세리아에게는 처녀를 받아갔다. 거짓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무인도라는 각박한 환경이 나에게 준 선물이 아닐까. 하지만 동시에 내가 그녀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부담감이라는 이름의 짐으로도 작용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서야 정신이 든 세리아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다가 이내 내 옆으로 쓰러진다. 교수님에 비해 유난히 회복 속도가 느린 세리아. 격렬한 섹스를 가지고 난 뒤에 대략 30분 정도가 흘러서야 세리아는 이제야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하반신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잠시 세리아가 완벽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될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한다. 내 옆에 앉아서 어깨에 머리를 기댄 세리아가 작은 막대기로 해변가의 모래 위에 글씨를 쓰기 시작한다. - 많이 아팠어요. 선배. 역시나 그랬던 것일까. 대게 처음 관계를 가진 여자들에게 물어보면 일단 성욕이고 쾌락이고 뭐고 떠오르지 않고 그저 아픈 감정만이 몰려 왔다고들 한다. 하지만 교수님과 관계를 가진 것처럼 처음만 극복하면 다음부터는 오르가즘까지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숙련도를 보여줄 수 있을만한 단계에 오른다. 물론 교수님은 처녀가 아니었지만. 이것도 역시 개인차가 있겠지만, 여하튼 개인적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경험이 많을수록 섹스에 대한 아픔도 덜 하다고 말이다. 정확한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비과학적인 근거를 적용시켜 본다면, 세리아는 적응력이 약간 느릴거라 추측한다. 그 정도의 아픔을 호소할 정도면... 아마도 그렇겠지. "미안. 세리아." "......" 일단 세리아를 아프게 했다는 사실은 명백한 진실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사과한다. 하지만 세리아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내게 이런 말을 들으려고 했던게 아니라는 듯이 다시 글씨를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 그래도... 좋았어요. "좋았다고?" 수줍게 빨개진 얼굴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이는 세리아. 겉으로 보기에는 섹스를 상당히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의외의 대답이 들려와서 조금 놀랐다. 아니면 나를 배려해서 일부러 괜찮은 척 하는건 아닐까. 잠시 나를 올려다보던 세리아가 써진 글자를 지우고선 다시금 새로운 글자를 쓴다. - 앞으로도... 저를 좀 더 많이 사랑해주세요. ...... 역시. 세리아는 정말 귀엽다. 이런 앙증맞은 말도 할 줄 알고. 실제로 입을 통해서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글자라는 것도 언어에 속하고, 말이라는 것도 언어에 속하지 않는다. 다 같은 의사소통수단이라는 것에 대해 공통점이 있으므로 사소한 태클은 넘어갈 수 있다고 보여진다. 살포시 세리아의 반대편 어깨에 손을 올려 놓자, 자연스럽게 세리아가 자신의 몸을 내쪽으로 붙이며 안겨온다. 오랜만에 밤 하늘의 바다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좋았고, 그리고 옆에 아름다운 은발의 미소녀가 있어서 더더욱 기분이 좋다. 이렇게 따져본다면, 꼭 무인도의 생활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세삼 들기 시작한다. 풍경도 좋지, 매일 학교에 가서 학점이라는 시험 성적에 억압받지 않고 살아도 되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미인들과 같이 생활할 수 있어서 좋지. 소위 말하는 '아일랜드 오브 하렘'이라는 것일까. 이래나 저래나 아무튼 좋은 것이다. 긍정적인 마인드는 살아갈 희망을 주는 빛줄기니까. ============================ 작품 후기 ============================ 결국 의자가 박살났습니다 ㅡ_ㅡ;; 새 의자가 올때까지 한 쪽으로 기울어진 삐딱선을 탄 의자와 동거동락해야 하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한쪽이 기울어지니까 기분이 참 오묘하군요. 허리에 안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다분합니다. 66화 EP 11. 몬스터 헌터 어제 새벽에 세리아라는 예상치 못한 여자를 상대하느라 몸이 녹초가 되어버렸다. 겨우 집으로 돌아와서 세리아를 먼저 재우고 뒤늦게 거실로 복귀한 나는 쿨쿨 잘도 자고 있는 누나의 옆에 누워서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시간은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아침해가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모습을 확인했을 정도니까 아마도 거의 5~6시 정도 되어서야 잠에 들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본다.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난 나. 무인도의 또다른 좋은 점은 늦게 잘 수도 있고, 그리고 늦게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힘겹게 상반신을 일으켜본다. 일단 집 안 내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식량을 조달하러 갔거나, 아니면 빨래를 하러 갔거나 둘 중에 하나려니 생각하고 나 역시도 몸을 일으키려고 한다. 그런데 어째 이상할 정도로 몸이 무겁게 느껴진다. 아직까지도 피로가 덜 풀린걸까 하며 이불을 걷자, 내가 몸이 무겁다는 것을 느낀 것이 피로라는 녀석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되었다. "... 엘리. 거기서 뭐하는거야?" "......" 내 배 위에 앉은 채 뚱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소악마, 엘리가 긴 금발을 찰랑이며 도리어 나에게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낸다. "...??" "아니. 그러니까 왜 내 배 위에 올라 타 있냐고." "......" "알았어. 내 말, 못 알아듣는 표정이구나. 오케이." 언어의 장벽을 아침부터 느끼고 말았다. 어쨌든 양 손으로 엘리의 겨드랑이에 넣은 채 그대로 다른 곳에 엘리를 안착시킨 뒤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나마 오늘 할 일은 거의 없는지라 덜 피곤한 일정이 펼쳐져 있어서 다행이지만 말이다. 어제 의자와 탁자를 마무리하는 작업을 일찌감치 끝내둔 것이 이럴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무인도 생활이 다 좋은데, 이런 식으로 여자들과 상대를 하려면 체력적으로도 상당한 부담감이 엄습해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나마 아직까지는 교수님과 세리아, 2명이라 다행이지, 만약에 무인도에 다른 여자들까지 있다면, 그리고 그 여자들과도 관계를 가지게 된다면 아마도 나는 해골만 남을 정도의 연약한 모습으로 변할 가능성이 너무 클 것이다. 그럴때는 약이라도 빌려야지 원. 아무튼 엘리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온 나. 아침 햇살이 강하게 나를 반겨주기 시작한다. 녀석의 위치로 보아서는 이미 점심 가까이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떴다는 말은 배꼽시계도 슬슬 울릴 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뜻하니까 말이다.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있던 아리아가 나를 바라보며 약간 차가운 말투로 말한다. "일찍 일어나시네요. 선배." "내가 조금 아침형 인간 타입이라서." "그렇군요. 요즘 아침형 인간은 점심이 다 되어서야 일어나는 게으름뱅이가 되었군요.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농담이라니까." 여전히 장난이 통하지 않는 후배다. 아리아의 맞은편에서 같이 빨래를 널고 있던 세리아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화악 하고 붉어지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나도 왠지 모르게 쑥스러워지는 상황.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가지고 아침이 되고 나서 얼굴을 마주하면 왠지 모르게 이렇게 창피한 기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세리아처럼 저렇게 부끄러움이 많은 상대방과 관계를 가지면 왠지 나도 모르게 죄책감이랄까. 아무튼 그런 마음이 생긴다. 우리 둘을 수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아리아가 다시 한번 입을 열기 시작한다. "선배. 이제는 언니까지 노릴 생각이신가요." "그런거 아니라니까." 사실, 노리고 있다 라는 말보다는 이미 관계를 치뤘다고. 미안하다. 아리아. 나는 네 언니까지 범해버렸어. 그치만 어쩔 수 없지 않니. 남자란 존재는 원래 변태인 것을. "... 뭐, 상관은 없습니다만." "그것보다도 다른 사람들은?" "노아 교수님하고 유아 선배는 과일을 따러 가셨고, 유린 선배는 잠시 비행기에 가셨어요." "비행기?" "네." "무슨 일로?" "그건 저도 잘 모르겠군요." 비행기에 뭔가 볼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필요 물품이 남아 있다고 보기에는 조금 힘들다고 생각한다. 나도 나름 구석구석 빈틈 없이 찾아봤지만, 나오는 것이라고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점 퇴화되어버린 도구들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여성 의류들은 아직까지 많이 남아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고보니 어제의 코스프레 복장은 버려두고, 오늘은 여성진들의 복장이 평상복으로 돌아와있는 상태다. 어차피 코스프레 옷은 빨래가 마를때까지 입기로 한 것이니까 갈아입은 것은 당연지사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유일하게 엘리의 복장만이 달라졌다. 평소에 울긋불긋한 천만을 즐겨입던 엘리. 그러나 이제부터는 평상복을 입히기로 한 것인지, 어제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나름 캐쥬얼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무릎까지의 다리가 보이는 청바지. 그리고 리본 넥타이가 있는 흰색의 티셔츠를 입고 있는 금발의 엘리가 여전히 내 옆에 머물면서 어디서 구해왔는지 평소에 그녀가 먹는 과일조각을 얌냠쩝쩝 먹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남동생~ 일어났어?" 저 멀리서 우리들을 향해 크게 소리치는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비행기에서 뭘 그리 또 많이 가져온 것인지 한 아름 상자를 들고 등장한 누나. 폼새를 보아하니 분명 옷이 담겨있는 상자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누나. 비행기에 다녀왔다며." "응. 아리아한테서 들었어?" "방금. 거긴 어쩐일로 다시 간거야?" "별거 없었어. 이걸 가지러 갔었지." 영차 하고 작은 기합을 내지르는 누나가 들고 온 상자를 내려놓는다. 내가 예상했듯이 상자의 내용물은 다수의 의류 품목들. 별로 특이해보일만한 것도 보이지 않는 옷들이다. 참고로 캐쥬얼 복은 아니고 파티 드레스같은 옷들만 즐비한 내용물이라는 사실은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이 옷들은 또 왜?" 사실 누나가 가져온 옷들은 별로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차피 여분의 옷들은 이미 가져온 상황이고, 그리고 아직까지 옷이 모자를 타이밍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리아와 세리아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미 마른 세탁물도 거둬들인 상황. 그런데 굳이 여벌의 옷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 작게 웃어보이는 누나가 나를 향해 어리석다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아직 많이 부족하구나. 남동생." "모욕하는건 좋은데. 악당같은 대사는 잠시 미뤄두고 일단 간략하게 이유나 설명해줘. 궁금하잖아." 여전히 남을 놀리는 데에는 이상하게 힘을 쏟는 누나였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급성위장염 환자, 에바트리체라고 합니다. ㅜ_ㅜ 67화 "의류의 사용법은 굳이 '입는 것'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아. 그렇지?" "뭐 그야..." 누나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얼핏 알 수 있었다. 옷이라는 물건은 원래부터 천으로 만들어진 완제품. 반대로 말하자면 옷을 찢거나 아니면 보기 좋게 자른다면 우리는 '천'이라는 재료를 얻을 수 있게 된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묻고 싶은건. 굳이 그 '천'을 쓸 용도가 있냐 이 말이지." "그야 여러곳에 있지. 예를 들자면 네가 이번에 만든 의자와 탁자에 방석이나 깔개 대신으로 사용할수도 있고." "그건 좋은 아이디어네." "그렇지? 아~ 빨리 작업을 시작해야지."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면서 다시 상자를 들고 산장으로 향하는 누나. 원래부터 저렇게 의류를 건드리는 일에 관심을 보였던 것일까. 내 기억으로는 그런 취미는 없는 것으로 아는데 말이다. 나와 누나가 대화를 나누던 사이에, 아리아가 나를 부르기 시작한다. "선배." "무슨 일인데?" "좋은 거 보여드릴게요." 라고 말하면서 어느새 아리아에게 안겨있는 엘리가 나를 올려다본다. 설마 아리아가 보여주겠다는 것이 엘리는 아니겠지. "보여줄게 뭔데?" "사실 방금 엘리에게 '한국말'을 가르쳤습니다." "오. 정말?" "네. 간단한 의사소통이지만요." 워낙 습득력이 빠른 엘리인지라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아는 총명함을 발휘하는때가 많다. 언어능력 면에서도 마찬가지. 우리들을 만난지 대략 5일(누나를 만난 기간을 통틀어보면 그것보다 더 길다고 생각된다.) 정도가 막 지날 무렵인데도 불구하고 말은 못하더라도 알아듣는 것은 어느 정도 충분히 가능할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와있다. 기대하시라고 말하는 아리아가 엘리의 어깨를 살짝 터치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엘리가 유창한 한국말로 자신이 배운 한국말을 들려준다. "... 한쿡말 넘후 어려워효." "......" "......" 뭐시다냐. 이 말. "... 이게 끝이야?" 내 말에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긍정의 표시로 화답한다. "네." "도대체 뭘 가르친거냐. 넌." "엘리에게 알려준 방금의 말은 자신이 알아듣지 못할 경우나 아니면 대답하기 곤란한 때 한국 사람들에게 사용하면 좋은 핑계거리 중 하나로써..." "아니. 부연설명은 안해줘도 돼. 그런거 빼고 유용한 말을 가르치란 말이야." "유용한 말이 뭔가요?" "음... 예를 들자면 말이지." "예를 들면?" "......" "......" "... 한쿡말 넘후 어려워효도 괜찮은 말 같네. 생각해보니까." "바보군요. 선배." "시끄러워." 언어의 장벽은 너무 높다고 깨달았다. 산장 안에서 여전히 의류작업에 열을 올리는 누나. 도중에 세탁물 작업도 끝난 세리아와 아리아까지 합류해서 현재 3명이서 작업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엘리는 중간중간에 한국말을 배우기 위해서 일을 도와주는 것은 아니지만 같이 누나 일행에게 합류한 상태. 나는 혼자서 주변을 배회하며 마른 장작이나 찾아볼까 하고 발걸음을 이리저리 옮겨다니고 있던 찰나였다. "유에~!!" 이번에는 저 멀리서 유아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것도 왠지 모르게 약간 다급한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할까. 유아 선배와 노아 교수님이 빠른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오더니 거칠게 호흡을 몰아쉬기 시작한다. "왜들 그러세요." "아니... 그러니까..." 여전히 호흡을 몰아쉬며 말을 더듬기 시작하는 유아 선배. 그녀를 대신해서 이제서야 호흡이 진정된 노아 교수님이 대신 설명해주기 시작한다. "숲에 들짐승 같은게 있는거 같아." "들짐승이요?" "응. 그... 뭐였지. 사슴같은 것이었나. 노루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거..." 무인도에 들짐승이 살고 있다 라는 말은 처음 듣는 정보였다. 우리가 이 섬에 와서 아직까지 들짐승이라고 부를만한 동물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유아 선배와 노아 교수님이 놀라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동물원도 아니고, 야생의 동물인데 사슴이나 고라니 같은 얌전한 동물이라고 해도 언제 어디서 우리들을 적으로 인식하고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빠르게 산장쪽으로 도망쳐온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마디로 말해서 선배와 교수님의 판단은 꽤나 괜찮다고 보여진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세요. 혹시 들짐승이 쫓아왔을지도 모르니까요." "너는 어떻게 하려고?" "전 잠깐 산장 주변을 둘러볼게요." "위험하다고. 그거." 유아 선배가 약간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지만,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안심시키고선 선배의 목검을 잠깐 빌리기로 한다. "어차피 공터 안이라면 산장과의 거리도 가깝고, 여차하면 저도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순간 바로 산장 안으로 들어올 생각이니까 그렇게 염려하지 마세요. 알았죠?" "으, 응..." "선배는 교수님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세요." 일단 그녀들을 먼저 산장 안으로 들여보낸 뒤에 목검을 들고 주변을 배회해본다. 공터의 경계선을 주변으로 수풀이 우거진 탓에 숲 안쪽으로의 시야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내부에 들짐승에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지에 대한 것도 알 수가 없다. 상대는 사람도 아니고 동물이니까. 이건 동아리 활동에서 서로 목검을 겨누고 진검승부를 하는 페어 플레이 정신의 스포츠가 아니다. 야생에서의 동물들이 정한 생존의 규칙따위는 없는 것이다. 위험해지면 도망가고, 싸울만 하면 싸울 뿐. 그게 전부다. 호흡을 고르고 천천히 정신을 집중시킨다. 동물들은 불을 무서워한다고 하던데, 대낮에 불은 소용이 없어보인다. 목검을 받아 들고는 왔지만, 사실 이게 도움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스스로 위안을 삼을만한 아이템의 용도로밖에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냥용 총이나 이런것이 있으면 좋았을것을. 있다고 해도 사용법은 모르겠지만. 한동안 주변을 배회해본다. 대략 10분정도가 지났을 무렵, 선배와 교수님의 뒤를 쫓아온 들짐승의 행방은 느껴지지 않았다. 도망간 것일까. 아니면 기회를 엿보고 숨을 죽이며 우리들을 감시하는 것일까.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사슴과의 동물이 그렇게까지 난폭한 생물은 아니지 않는가. 게다가 육식 동물도 아니고 초식 동물인데 굳이 유아 선배와 노아 교수님을 쫓아올 이유는 없어보인다. 자신들의 영토를 위협했다 해도 그건 단순한 자기 방어의 행동에 그칠 뿐이지, 적을 섬멸하기 위해서 직접 추격을 개시하는 행동까지 취하는 동물로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위험해보이는 상황은 우려되지 않은 관계로 나 역시도 산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 작품 후기 ============================ 하루에 화장실을 몇번 갔다왔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였던 나날이였습니다 ㅡ_ㅡ;; 그래도 조금 살만 해졌다 싶었는데... 이제는 머리가 어지럽군요. 마가 끼었나 봅니다. 68화 "남동생! 살아 있었구나." "... 멋대로 죽이지 말라고. 누나. 멀쩡한 사람한테 무슨 짓이야." 오자마자 듣는 소리가 그다지 달가운 소리는 아니다. 마치 내가 들짐승에게 당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하지 말라고. 바보 누나. 내가 오자, 자연스럽게 우리들은 탁자를 주변으로 각자의 의자에 앉게 된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아 교수님과 유아 선배가 마주했다던 들짐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다. "확실히 들짐승이었나요?" "응. 분명해." 아리아의 물음에 유아 선배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확답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 말을 들은 노아 교수님이 잠시 생각에 잠기면서 자신의 생각을 토로한다. "아직 우리가 모르는 무인도에 대한 정보가 있지 않을까." "방금 교수님이 봤다던 들짐승 같은거요?" "응. 사실 들짐승이 무인도에 서식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현상은 아니지만, 이걸 다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잖니." 노아 교수님의 한마디로 시작된 일. 어찌보면 우리들에게는 혁명적인 계기가 될 수 있었던 말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확실하게 혁명적으로 진화되었다. 교수님이 제안한 사실은 바로 이것. 들짐승이 있다. 그렇다면 이 들짐승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애완동물로 기른다? 그건 말도 안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고양이나 강아지라면 모를까. 야생의 동물을 길러서 어디에 써먹겠는가. 그렇다면 포켓몬스터 마냥 교육을 시켜서 오락거리로 싸움을 시킨다? 만화를 너무 많이 봤다. 게다가 몬스터 볼도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 먹는단 말입니까." 내 말을 듣던 노아 교수님이 살짝 빨개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그렇게 생각하는게 좋을거 같아." "분명 노아 교수님 말대로 괜찮을듯 한데요. 그거." 교수님의 의견에 아리아가 감탄을 표시한다. 노아 교수님이 우리들에게 한 말은 들짐승을 잡아먹자 라는 뜻이다. 약간 말투가 조금 요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이렇다고 볼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의 식단은 빈약하다고 볼 수 있다. 과일이나 고구마, 감자는 그렇다고 쳐도, 가장 중요한 고기가 올라오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내가 고기를 좋아하는 타입이긴 하지만, 굳이 취향에 따라 해석할 것이 아니라 고기라는 것도 섭취를 해줘야 어느정도 영양의 밸런스가 맞지 않는가. 뭐, 사실 물고기도 '고기'가 맞긴 하다. 일단 글자가 붙어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물고기와 그냥 고기는 글자 하나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맛은 어마어마한 차이를 부여하고 있다. 결국, 돼지고기나 소고기는 무리라고 하더라도 '고기'를 먹고 싶다는 것은 나, 아니지 우리 모두의 소망이다. 잘근잘근 씹는 육질의 맛을 느끼고 싶다고 이 연사, 힘차게 외칩니다! 라고 소리치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니까 말이다. "그런데 말이죠." 중간에 태클을 거는 누나가 손을 살짝 들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어떻게' 잡느냐가 큰 걸림돌이잖아요." "그렇네. 생각해보니까..." 노아 교수님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다시 고민에 휩쌓인다. 먹는건 좋다. 그러나 그 과정이 문제인 것이다. 들짐승을 잡는 것이 가장 큰 일. 우리들 중에서 사냥을 해본 자가 있는가? 기껏 해봐야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대학교 테크트리를 타면서 양산형 사회인으로 도약하기 위해 그냥 무작정 공부만 하던 우리들. 학교에서는 왜 '동물 사냥법'같은 헌팅의 기술은 알려주지 않은 거냐고. 이래서 우리나라의 주입식 교육 시스템이 문제다 이 말이다. 그렇다고 진짜로 사냥을 잘하는 방법 이런걸 교과목에 넣으라는 소리는 아니다. 하다못해 체육과목 시간을 늘려주던가 하면 자연스럽게 체력도 늘어날태고 할 것인데. ... 가만. 여기서 사냥을 해본 적이 있을거 같은 사람이 갑자기 뇌리를 스친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그 '인물'에게 시선을 보내기 시작한다. 느닷없이 모두의 시선을 받는 인물의 정체는 바로 무표정으로 과일을 아그작 아그작 먹고 있는 엘리. 금발의 작은 레이디는 의아하다는 듯이 우리를 한번씩 바라보면서 과일을 먹던 손을 멈추고서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 한쿡말 넘후 어려워효." "......" 괜찮은 사용법이었다. 엘리. 역시나 습득력 하나는 정말 빠른 아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발뺌하면 안되잖아. 엘리와의 친화력이 가장 높기도 하고, 의사소통도 별 무리 없이 가능한 누나가 엘리에게 다가가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말한다. 영어로 뭐라고 쏼라쏼라. 오로지 알아들을 수 있는 인물은 노아 교수님밖에 없다. 교수님은 대충 어떤 식으로 누나가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있다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서 벌어지는 학력의 차이. 이제야 기껏 중간고사, 기말고사라는 지옥에서 잠시나마 벗어났나 싶더니 여기서 또 언어의 장벽에게 막혀버렸다. 다시 한번 국제화 시대를 원망하도록 하자. 한글이 최고라고. 누나와 잠시 몇마디를 나누던 엘리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그 제스쳐를 보자마자 누나가 환하게 웃으면서 우리들에게 말한다. "들었지?!" "... 어. 듣긴 들었는데." "해석을 해줘야지 알아듣잖아." 내 말에 이어 유아 선배가 누나에게 태클을 건다. 적절한 태클은 허용 가능. 아주 좋았다. 유아 선배, 나이스. 누나를 대신해서 노아 교수님이 우리들에게 대략적인 대화의 내용을 풀어서 들려주기 시작한다. "엘리도 몇번 사냥을 해본 경험이 있다고 해. 물론 혼자서 해본건 아니고 부모님과 같이." "그렇다면 아버님 쪽이 되시겠군요." "맞아. 유에. 그런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혼자였던 기간 동안에는 혼자서 사냥을 해본 적은 없고, 공터 주변에 있는 과일이나 채소 이런걸로 끼니를 때웠다고 하는구나." 약간 엘리가 불쌍해지기 시작한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무인도에서 잠시나마 홀로 살았던 기간. 우리들은 무인도에 표류되어서 어찌해야 좋을지 정신적인 공황상태까지 일어났을 지경이었는데 엘리는 묵묵히 누나와 만나기 전까지 혼자서 무인도의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나이가 어리지만, 그래도 이런 면에서 보자면 엘리가 대견스럽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굉장한 녀석임에는 틀림없다. 손을 번쩍 든 유아 선배. 노아 교수님이 발언건을 허가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혼자서 사냥을 할 수 없었다는 말은, 다같이 사냥을 하지 않으면 힘들다는 말과도 같다는 뜻이네요." "그럴수도." "그리고 그 말을 뒤집어 본다면, 엘리는 사냥법을 '알고 있다'라는 뜻 아닌가요?" "그건 조금 달라." "다르다니요?" "고정된 사냥법은 없다고 말하더라고. 애초에 사냥이라는 것이 워낙 확률적으로도 성공하기 힘들고, 정공법이라는 것을 정해둬도 들짐승들의 행동은 인간이 예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항상 움직여주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지는 않다고 해." "과연..." 동물에 대한 생태학적 분석이라든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대체로 야생동물의 행동을 예측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우리도 이제 고정된 식단과 단순한 반찬에 질린 상황. 고기를 섭취할 수 있다면 사냥 정도는 해볼 가치가 있지 않은가 하는 결심이 선다. "아무튼 한번 해보도록 하죠. 사냥이란거." "정말 할거야?" "당연하지. 누나. 고구마와 감자는 이제 질렸다고!" "그건 나도 그렇지만..." "이대로 고구마와 감자의 노예가 될 생각인가?! 이제 우리가 들고 일어서야 할 때가 되었다고! 모두들! 나를 따르라!" "... 남동생. 점점 말이 이상해지는거 같은데." "아. 그러고보니." 이게 다 고기를 섭취하지 못한 이상증세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아무튼 우리들의 목표는 사냥. 그리고 오늘 저녁을 고기 반찬으로 대체하는 것. ============================ 작품 후기 ============================ 이제 거의 98.343% 치유가 되었으므로 멀쩡하게 연재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휴우... 대변이 고체에서 액체로 바뀌는 현상은 불쾌하기에 짝이 없던 현상이었습니다 ㅡ_ㅡ; 참고로 '몬스터 헌터' 에피소드는 제가 무인도 표류일지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입니다. 헤헤헤. 69화 이런 이유로 사냥 파티가 구성되게 되었다. 첫번째는 탐색 겸 될 수 있으면 사냥까지 겸할 수 있도록 구성이 된 인원들. 나를 포함해서 길안내 and 유일한 사냥 경험이 있는 엘리와 여성들 중에서(엘리를 제외하고) 가장 신체능력이 뛰어난 유아 선배, 그리고 마지막으로 엘리의 통역가로 뒤를 따라오게 된 누나. 이렇게 총 4명이 사냥을 위한 파티를 결성하게 되었다. 아리아와 세리아, 그리고 운동신경이 거의 없다고 보는 노아 교수님은 산장에서 대기. 처음에는 다같이 가는게 좋지 않냐는 의견이 나왔지만, 괜히 들짐승의 성질을 건드려서 도망쳐야 할 위급한 상황이 오게 된다면 운동신경이 좋지 않은 인원들은 오히려 짐이 될 수 있다는 잔인한 말이 있었기 때문에 3명은 이번 파티에서 빠지게 되었다. 참고로 그런 잔인한 말을 한 사람은 엘리였다. 은근히 냉정한 말도 할 줄 아는 꼬마 숙녀 아가씨. 오늘따라 엘리를 여러모로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상당히 많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육식동물 같은 것이 나올까?" 아직까지 의심이 많은 누나의 말에 발끈하며 반론을 펼치는 유아 선배. "직접 이 눈으로 봤다니까." "딱히 너와 노아 교수님이 신기루를 보았을수도 있다고 말하거나 그런 뜻은 아니야. 그냥 섬이라는 장소에서 몸집이 큰 육식동물이 서식이 가능한지에 대한 사실이 궁금한 것이지." "그러고보니..." 유아 선배도 도중에 궁금해졌나보다. 짐승들이 육지에서 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왔을리는 없을테고. "아마도 이 섬은 꽤나 예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겠지." 자신이 질문을 던지고 자신이 해답을 내놓는 누나의 말이었다. "오랫동안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해봐. 남동생. 만약에 이 섬이 바다에 자주 침수되거나 하는 그런 환경을 가지고 있다면, 아마도 몸집이 큰 육식동물이 서식하기에는 힘들잖아. 그런데 이 섬에는 그런 동물들이 있어. 그 말 뜻은 적어도 바다에 침수되거나 하는 그런 자연현상은 없다는 뜻이 되겠지." "그런거야?" "여기까지는 내 추측일 뿐이야." 누나의 말에는 전문 지식이 들어가있거나 하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섬에 육식동물이 존재한다는 현상을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방법으로 설명한 말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섬의 침수니 어쩌니 하는 일은 잠시 접어두고. 사냥감 포착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우리들은 엘리를 앞세우고서 계속해서 장소를 옮겨나간다. 꽤나 섬의 중앙까지 들어온 느낌. 나 뿐만 아니라 누나와 유아 선배 역시도 이렇게 멀리까지 베이스 캠프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약간은 심리적으로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유일하게 여유를 부리는 것은 엘리 혼자. 아까 배운 '한쿡말 넘후 어려워효.'를 중얼거리면서 당당하게 걸어나간다. 설마 엘리는 그 말이 '주문'이라고 생각하는건 아니겠지. 이리저리 숲속을 배회하던 우리들 중. 감이 좋은 유아 선배가 갑자기 작은 소리로 우리들을 부르기 시작한다. "잠깐만." "왜? 유아." 누나의 물음. 그러나 유아 선배는 자세를 낮추라는 제스쳐만 보내고선 대답을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포착한 것일까. 엘리도 자연스럽게 자세를 낮추면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하지만 여자의 감이라는 무기를 소유하고 있는 유아 선배와 야생의 감이라는 또다른 천연 무기를 소유하고 있는 엘리 이렇게 두명이 반응을 보이니까 신빙성은 있다고 보여진다. 나 역시도 숨을 죽이면서 수풀 사이로 들짐승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우스스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풀들. 숫자로 보아서는 대략 2마리 정도 될듯 싶다. "설마 맷돼지 이런 종류가 있는건 아니겠지." "그럴리는 없을걸." 이라고 믿고 싶다. 누나의 물음에 일단 긍정적인 대답을 해줬지만, 그래도 없다는 보장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모습을 보인 것은 사슴과 비슷한 생물 두마리였다. 대략 내 가슴부근까지 오는 덩치를 자랑하는 노루. 좋은 먹잇감이 되겠군. 맛있어보인다. 으흐흐... 가 아니라. 왜 이러지. 내가 정말 고기에 미쳐버린건가. "어떻게 할까? 유에." 유아 선배가 나에게 의견을 묻는다. 아직까지 우리들을 경계만 하고, 달아나지는 않는 노루. 그렇다는 말은 근처에 녀석들의 둥지가 있다는 소리와도 같을 것이다. 사전에 미리 포메이션을 짜거나 하는 작전 같은것을 미리 상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약간 아쉽긴 하지만 돌을 집어서 내쫓는게 좋겠지. 하지만 그런 행동을 말린 것은 누나였다. "잠깐만. 남동생." "왜 그래?" "좋은 기회잖아. 이 기회에 한번 연습해보는게 어때?" "사냥 연습?" "그래. 실패해도 경험이 될 수 있으니까 시도해보는게 좋을거 같은데." "그런가..." 누나의 말에도 어느정도 일리가 있다. 사전에 미리 작전을 짜둔 것은 없지만, 그래도 사냥을 한번 해보고 안 해보고의 경험차이는 명백하게 크다.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즉석으로 각자의 위치를 정하는 수밖에 없다. "유아 선배는 녀석들이 도망갈 수 있는 진로를 차단해주세요." "내, 내가??" "돌을 던지거나 아니면 목검으로 위협만 하면 되요. 분명 우리들이 저 녀석들을 덮치려고 하면 도망갈게 뻔하니까요." 초식동물의 습성이다. 누군가 습격을 하면 싸우기 보다는 도망치는게 본능인 녀석들을 대비해서 미리 도망갈 루트를 차단하는게 가장 좋은 것이다. 물론 미리 함정을 설치해뒀거나 하는게 더 효율적이겠지만, 지금은 인력으로 트랩의 빈자리를 매꾸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누나는 유아 선배와 같이 행동하다가 다른쪽으로 도망칠거 같으면 미리 방향을 알려줘." "오케이." "그리고 엘리한테도 이렇게 전해줘. 우리가 사냥할 노루는 덩치가 큰 놈 한마리만 노린다고." "두마리 다 노리는게 아니야?" "어차피 연습이니까 한마리로 족해."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봐." 누나가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엘리에게 작전 지시를 내리는 동안, 나는 허리춤에 착용하고 있던 나이프를 꺼내든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현재 엘리와 내가 들고 있는 나이프 2자루와 유아 선배가 들고 있는 목검 한자루가 전부. 나중에 산장으로 돌아가면 활과 화살같은 원거리 공격수단이라도 제조해둬야겠다. 이거, 작업만 늘어나는 꼴이네. 결국. 누나의 설명을 다 들은 엘리가 나를 보면서 나이프를 손에 쥔다. 내가 달려들면 따라서 움직이겠다는 신호. 우리들이 수행할 계획은 결국 이런 것이다. "그럼 시작!!" 스타트 신호를 외친 내가 노루들에게 달려나간다. 그러자 예상대로 각자 도망가기 시작. 내가 먼저 녀석들에게 덤벼들어 도망갈 방향을 미리 알게끔 다른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이에 스피드가 빠른 엘리가 노루에게 돌진한다. 야생에서 생활하던 엘리인지라 숲속에서도 그 움직임은 여전하다.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순간적인 가속도를 내며 나를 피해 도망친 노루와 마주할 정도의 거리에 미리 도착한 엘리가 나이프를 휘두른다. 하지만 엄연히 노루와 사람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엘리의 엄청나게 빠른 공격에도 불구하고 노루는 뛰어가던 방향을 틀면서 재빨리 옆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의외로 반사신경이 뛰어난 노루 녀석이었다. 아니면 우리가 사냥이라는 행동에 둔한 것일까. "유아 선배!" "알고 있어!!" 미리 대기중이던 유아 선배가 노루의 루트를 차단한다. 그리고 제 3자의 시선이 되어 먹잇감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누나가 나에게 외친다. "남동생. 그대로 좌측 90도 방향!" "알았어." 유아 선배를 피해 달아날 수 있을법한 노루의 행동방향을 미리 예측하고 그 자리에서 대기한다. 누나의 말에 따라 노루가 정말로 나에게 오는 것은 어찌보면 약간의 운도 따라준 상황.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포위망을 좁혀가면 언젠가는 노루를 잡을 수 있다. 내가 시간을 끄는 사이에 점점 노루 근처로 모여드는 유아 선배와 엘리. 하지만 마지막에 아주 커다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내 앞으로 돌진해오던 노루가 긴 다리를 이용해서 나를 뛰어넘은 것이다. "점프라고?!" "노루 주제에 건방지게!!" 왠지 인간의 존엄성에 상처를 입었다고 해야 할까. 이 녀석. 감히 나를 뛰어넘다니. 인간을 얕보지 말란 말이다!! ============================ 작품 후기 ============================ 아... 확밀아의 신이시여. 전지전능함을 발휘하사, 불쌍한 백성에게 제발 카나리아 1장만 더 선물해 주시옵소서. ㅜ_ㅜ 아니면 알카로이드 4장만 더... 굽신굽신. 70화 설마 노루 저 녀석이 이 정도의 점프실력을 가지고 있을줄은 몰랐다. 슬램덩크의 강백호나 채치수 보다도 더 높은 점프력을 선사하다니. 순식간에 나를 루저로 만들어버리는 저 솜씨. 제법이다. 다시 봐야겠는걸. 노루 녀석. 아무튼 이렇게 해서 사냥은 실패로 돌아갔다. 나를 뛰어넘은 노루는 찰지게 생긴 엉덩이를 씰룩씰룩 거리면서 민첩하게 도망간다. 저 녀석, 스탯은 덱스(Dex)만 풀로 찍었음이 분명하다. 사기 캐릭터라고. 그거. 나에게 다가오던 유아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괜찮아?" "네. 딱히 다친곳도 없고. 멀쩡해요." "그나저나 정말 빠르네. 노루... 맞나?" "일단 임시로 그렇게 부르죠." "응. 아무튼 생각 이상으로 빨랐어." 유아 선배와 나, 그리고 누나는 세삼 처음 마주해보는 노루 녀석의 행동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과는 다르게 엘리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는 듯이 평소의 뚱한 표정으로 나이프를 집어 넣으면서 우리들에게 다가오더니 누나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엘리의 애교성 있는 행동을 보던 누나가 피식 웃으면서 말한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캠프로 돌아갈까?" "그러는게 좋겠어. 날도 어두워지면 곤란하니까." 오늘은 간단하게 맛보기로 사냥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비록 사냥은 실패했지만, 들짐승에 대한 패턴과 움직임,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험'이라는 소중한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호랑이나 치타도 사냥에 성공할 확률이 30% 미만이라고 하지 않는다. 육식동물의 제왕도 그 정도 수준인데 그런 동물과도 같은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 그리고 속도도 없는 우리 인간들이 사냥에 성공할 수 있을 확률은 더 낮다고 보여진다. 역시 작전이 필요하다. 오늘 습득한 정보량을 가지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냥을 할 수 있는 작전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루저로 만들어버린 노루 녀석에게 복수해야 하지 않는가. 가뜩이나 한국 여자들은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고 놀려대는데, 나를 그 루저로 만들어버린 노루녀석 만큼은 반드시 잡아서 잘근잘근 씹어 먹어주겠다는 일념으로 타오르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키가 작다는 뜻은 아니다. 절대로. 집으로 돌아온 우리. 당연한 말이지만 사냥에 실패를 했기 때문에 오늘도 과일과 고구마, 감자, 그리고 매일매일 질릴 정도로 보는 풀잎들이 탁자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노아 교수님이나 은발 미소녀 쌍둥이 자매도 우리가 첫날부터 사냥에 성공하고 돌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사냥 인원들이 딱 맞춰 복귀할 시점에 미리 저녁식사를 차려두었다. 오늘 겪언 경험담을 유아 선배와 누나가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잠자코 우리들의 말을 듣고 있던 노아 교수님이 자신의 긴 흑발을 매만지며 말한다. "역시 보기보다 쉬운 일은 아니구나." "티비에서 보면 원시부족 사람들은 쉽게 사냥에 성공하던데, 역시나 숙련도의 차이가 있다보니 쉽게 성공하진 않나 보네요." 정곡을 찌르는 아리아의 말. 부정할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사실만을 골라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어보여." "가능성이요?" "그래. 사냥에 성공할 가능성." 누나의 말에 모두가 시선을 모은다. 뭔가 좋은 비책이라도 떠오른 것일까. 그러고보니 우리들 중에서 유일하게 노루와 상대하지 않고 녀석의 움직임을 줄곧 관찰할 수 있었던 인물은 누나가 유일했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 눈을 통해 얻은 정보량은 우리들보다 많을 터. 이런 이유로 누나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지기 시작한다. "일단 초식 동물이 멋대로 적에게 덤벼들 생각은 없다는 가정 하에서 말할게. 노루가 도망칠 루트를 미리 차단하기에는 솔직히 말해서 거의 불가능이라고 보는게 좋을거 같아." "대안을 내놓을줄 알았는데 절망적인 말을 하면 어떻게 하자는거야. 누나." "계속해서 들어봐. 아직 우리가 사냥에 숙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야생에서 살아온 노루라 그런지 움직임이 상당히 빨라. 그래서 처음부터 동물의 움직임을 눈으로 보고 쫓아가기에는 우리들의 신체능력이 너무 부족하단 말이지. 우리들 중에서도 엘리가 가장 빠르지? 그런데 그 엘리 조차도 노루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말 다한거라고 봐야겠지." "그렇긴 하지만..." "처음부터 무리하게 잡을 생각을 하는 것 보다도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게 좋아. 남동생. 안되는걸 알고 빠르게 포기하고 다른 대책을 모색하는 것도 일종의 '선택지'니까." "그럼 어떤 방법이 있는데." "그걸 이제부터 찾는거야." "찾는다고?" "응. 노루를 쉽게 사냥할 수 있을만한 수단을 하나하나씩 실험하는거지." 모두가 누나의 말에 어느정도 공감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한 아리아와 세리아, 그리고 노아 교수님은 모르겠지만, 나와 유아 선배, 그리고 누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노루 뒷 꽁무니만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라고. 그렇다면 이쪽에서는 두뇌 플레이를 하는 수밖에 없다. 신은 인간에게 동물과 같은 발톱이라는 무기와 스피드를 주지 않았지만, 대신에 '생각'이라는 창의성을 부여했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살리는 것이 바로 사냥 성공을 위한 지름길이 아닌가. "그러니까 모두 시간이 날 때 하나씩 아이디어를 생각하는게 좋을거 같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끝." 마무리를 지은 누나였다. 덕분에 저녁 식사는 평소에 비해 꽤나 길어진 상황. 다들 밥은 먹고 있지만, 노루를 사냥할 수 있을만한 독창적인 생각을 골똘히 하느라 제대로 음식을 먹지도 못하고 시간만 축내고 있는 상황이 연이어 이어질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내일은 확밀아 피버 데이입니다! 71화 시간은 흘러흘러 저녁 8시. 누나의 말대로 각자 방에서 노루를 잡을 수 있을만한 대책을 생각하는 중이다. '야생에서 사냥을 성공시키는 방법 101가지' 라는 책이 있었다면 조금은 쉽게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지만, 그런 이론적인 것 보다는 그냥 베어 그릴스 형님에게 가서 직접 배우는 것이 더 빠르리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전자도, 후자도 불가능한 상황. 적어도 다큐멘터리 중에서 이런 비슷한 상황을 극복하는 프로그램 같은걸 많이 봐두지 않았을까 라는 후회감만이 문득 든다. 잠시 머리라도 조금 식힐까 하고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자, 유아 선배가 나를 발견하고서 같이 따라 나온다. "어디 가려고?" "호수에서 샤워좀 하려고요." "밤중에 왠 샤워?" "머리를 식히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까 해서요." "음... 그렇단 말이지." 팔짱을 끼며 고민에 휩쌓인 유아 선배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나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 나도 갈까?" "그 말 뜻.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아시나요. 선배." "다, 당연히 알고 있다고! 이 바보야!" 정강이를 후려 차려는 모션을 하는 선배. 반사적으로 선배에게서 멀어지자,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말한다. "남자답게 와서 맞는게 어때?" "선배가 때리는 것은 장난 아니게 아프단 말이에요." "... 흥."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먼저 포기한 선배가 내 옆에 와서 나란히 걷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선배의 손을 잡자, 유아 선배 역시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내 손을 마주 잡는다. "저, 저기 말이야." 잠시 뜸을 들이던 유아 선배의 표정. 한 눈에 봐도, 무언가 초조함이 느껴진다는 그런 감정이 전해진다. "아직도 낮에 있었던 노루 사냥에 대해 고민중인가요?" "내가 사냥밖에 모르는 여자로 보여?" "그럼 무슨 고민이라도?" "... 아, 진짜." 거칠게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던 유아 선배가 뾰로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너, 교수님하고 그거... 했었잖아." "알고 계셨나요?!" "이제와서 놀랄 것도 아니면서." 옆구리를 과감하게 꼬집기 시작한 유아 선배가 이윽고 사과처럼 빨개진 얼굴로 말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은 이 쪽이서 더 못 기다리겠으니까... 마음대로 해도 좋아." "뭘 기다린다는 거예요." "이 멍청아! 네가 먼저 적극적으로 리드해주길 기다렸다가, 여태 관계도 못 가졌잖아!! 교수님한테 첫 경험도 빼앗긴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아... 그거인가요." 이제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그동안 선배는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관계를 가지기를 요구하는 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여성의 심리는 도통 알 수가 없단 말이다. "그렇다면 선배가 바라는 거, 해드릴까요?" "... 묻지 말고 행동으로 해. 바보." 오늘따라 선배의 애교가 더더욱 귀엽게 보인은 건 착각이 아니리라 생각된다. "아아아... 하아으읏..." 선배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거칠게 가슴을 애무하면서 그녀의 육체를 탐한다. 이미 성기는 발기의 절정 상태를 이루고 있었고, 유아 선배 역시도 사타구니에서 번져나오는 애액으로 이미 허벅지가 번들거릴 정도로 많이 젖은 상태였다. 물에 들어가기 전에 선배의 몸을 갈구하는 내 성적인 본능에 몸을 맡긴다. 선배 역시도 처음 나와의 섹스를 경험하는지라 그다지 냉담한 반응을 보여주기 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내게 키스를 해오거나 성기를 어루만지거나 하는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선배." "으흠..." 유아 선배의 엉덩이를 양 손으로 만지면서 그녀를 내 몸에 최대한 밀착시킨다. 뜨거운 성기의 기둥이 유아 선배의 배를 찌르자, 선배가 약간 엉덩이를 뒤로 빼면서 말한다. "너무 크잖아..." "선배 때문이에요." "... 바보." 말은 그렇게 해도 선배의 표정은 오히려 이런 것을 바라고 있었다는 듯이 나를 올려다본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키스. 달빛 아래에 빛나는 호수의 수면을 눈앞에 두고 나는 선배를 뒤로 돌린 채 후배위 자세로 남근을 선배의 몸 안에 찔러 넣는다. 선배의 신음소리가 더욱 깊어져간다. 후배위 자세에서 나를 향해 엉덩이를 치켜 올린 선배의 허리를 잡고서 계속해서 전진, 후퇴 운동을 반복한다. 조용한 새벽의 공터에는 남자의 거친 호흡소리와 여자의 앙탈진 신음소리가 뒤섞여 야릇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진짜 암캐처럼 4발로 선 유아 선배의 사타구니를 계속해서 겁탈하는 나. 선배의 목소리에도 점점 비음이 섞여들며 슬슬 오르가즘을 맞이하고 있다는 신호를 나에게 보내주고 있는 듯 하다. 차가운 새벽의 공기 속에서 땀을 흘리는 것은 그다지 좋지 않은 일. 하지만 섹스라는 것은 자신의 주변환경에 대한 우려감을 잊게 할 정도의 방대한 양의 쾌락을 선사해준다. 괜히 성욕이라는 것이 인간의 3대 욕망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다. 감정이자 본능. 그것이 바로 성욕이고, 그 성욕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바로 섹스(Sex)다. "아아... 으으으읏..." 선배의 눈가에 약간의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 양 손으로 자신의 허리를 잡고 있는 내 손목을 잡은 유아 선배가 나를 향해 뒤돌아보며 뭔가를 바라고 있다는 듯이 애처로운 시선을 보내기 시작한다. 선배의 지금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대충 감을 잡은 나는 이윽고 기나긴 섹스의 여운을 선배의 몸 안에 정액이라는 이름의 물질로 형상화 시켜서 토해내기에 이르게 된다. "하아아으윽!!" 마지막에는 허리를 휘면서 내게 매달리는 선배의 음탕한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공중에서 수를 놓으며 나에게 기댄다. 평소에 약간 성격이 드센 유아 선배지만, 섹스를 하는 만큼은 내가 선배를 마음대로 지배하고 유린할 수 있다는 정복감에 대한 쾌락도 더불어 선사해준다. 도도한 유아 선배의 엉덩이를 내 마음대로 만지고, 가슴을 탐하고, 그리고 선배의 자궁 안에 내 정액을 싼다. 이것이 얼마나 야릇하고, 그리고 흥분되는 일인가. 가파르게 호흡을 정리하며 나에게 안겨오는 선배. 그녀의 얼굴에 묻은 머리카락을 차근차근 떼어주면서 선배의 질 입구에서 흘러나오는 내 정액들을 바라본다. 상당히 음탕한 모습. 이렇게까지 선배가 섹시해보인 적은 상당히 드물 것이다. 역시나 육체관계라는 것은 평소에 보던 여자의 순진무구한 이미지를 한순간에 성욕에 미친 암캐의 모습으로 바꿔버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수단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 유에." "왜 그러세요. 선배." "너무 익숙한 거 아니야?." "뭐가요?" "... 섹스." "그, 그런 가요?" "설마 너. 다른 여자랑도 관계를 가지고 있다거나 하는건 아니겠지?" "......" 역시나 유아 선배의 감은 정말로 좋다. 아니지. 지금은 선배의 말을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부정할까. 그것이 문제로다.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선배에게 모든 것을 토로하도록 하자. 어차피 가만히 있다가 들킬지도 모르는데, 그냥 속 시원스레 털어놓는 것이 나도 그렇고, 선배 입장에서도 좋지 아니한가. 물론 들려주는 말은 선배 입장에선 그다지 유쾌한 말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사실은 선배의 말이 맞을수도..." "이 바람둥이 자식!! 나가 죽어!!" "자, 잠깐만요, 선배! 도대체 목검은 어디서 튀어나온 겁니까?!" "사소한건 신경쓰지 말고 얌전히 내 단매에 목을 내놓으시지?" 뜬금없이 사극 풍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선배의 말. 여자들 중에서도 가장 질투심이 심한 부류가 바로 유아 선배였기 때문에 대충 이런 반응은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각오 하나만으로 온 몸에서 전해지는 통증을 참기란 조금은 무리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목검의 끝을 겨누고서 나에게 차가운 말투로 묻는 유아 선배. "도대체 누구랑 관계를 가진거야!" "그게..." "빨리 말 안해?!" "... 세리아하고..." "세리아까지???" 자신의 이마를 감싸쥐며 골치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어보이는 유아 선배. 본인의 입장에선 아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으니까. 참하디 참한 세리아와의 관계를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하지만 지금이 절호의 찬스. 몰래 선배의 뒤를 돌아가서 그녀의 허리를 확 안아버린다. "자, 잠깐! 유에! 아직 나, 화 안풀렸거든?!" "화를 풀때는 서로 스킨십을 하는게 좋잖아요. 그렇죠?" "무, 무슨 말이야! 그... 거... 꺄악!" 전위행위도 없이 곧바로 커져버린 성기를 유아 선배의 질 안으로 삽입시킨다. 설마 내가 삽입을 시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선배가 내 팔을 당기면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그렇게 쉽게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운동을 한 여자라고 해도 남자의 근력을 쉽게 당해낼 수 없는 일. 툭 까놓고 말하자면 세리아보다는 약간 버거운 유아 선배였지만, 그래도 이미 뒤를 잡히고서, 게다가 남성기까지 박혀있으니 선배의 저항이 점점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대로 허리를 뒤로 빼서 다시 풀 삽입. "흐읏!!" 선배의 짧은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방금 첫번째 섹스를 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두번째 섹스를 하게 되다니. 아직까지 선배의 몸 안에 남아있던 내 정액들이 그대로 흘러나오며 재차 들어오는 2차 성기의 삽입을 맞이하고 있었다. "너... 빨리... 하아앗.... 빼... 으흥..." 애타게 부탁하는 선배였지만, 이미 스위치가 들어가버린 상황. 본능에 맞겨버린 나는 암캐를 강간하기 위해 달려든 수컷처럼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유아 선배의 몸이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내려올 정도로 강하게 피스톤 운동을 하기 시작하자, 선배의 비명소리도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한다. 저항하는 선배를 억지로 삽입하고, 그리고 섹스한다. 마치 여자를 강간하는 듯한 그런 기분까지 들고 있었다. 그리고 선배 역시도 말로는 싫다, 싫다 하면서도 남근을 꽉꽉 조여대는 여성기의 돌기들은 아까 첫번째 섹스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조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선배. 이번에도 안에다 쌀게요!" "더... 싸면... 임신... 한다고..!" 내 아기를 임신한 선배의 모습이라. 그것도 나름 흥분되는... 이 아니지 않는가. 어차피 선배의 말은 거짓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왜냐하면 생리도 끝났고, 아까 첫번째 섹스를 할 때도 질내사정을 허락했기 때문에 임신할 수 있는 주기는 현재 아니라고 보여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혀 임신할 수 없다는 보장이 있는건 아니지만, 지금의 나는 이성보다는 본능이 유에라는 남자를 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격렬하게 선배의 자궁 입구에 또 한발 갈겨댄다. 아까보다도 많은 양의 정액들이 선배를 정말로 임신시켜버릴 기세로 자궁 안쪽을 습격하기 시작한다. "저, 정말로... 싸... 하아앗!!"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유아 선배였지만, 이어서 다가오는 오르가즘의 쾌감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기에 여념이 없다. 이것으로 두번째 섹스 완료. 가끔은 이런 컨셉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위험한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스러운 섹스였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시작된 확밀아 피버! 벌써부터 요정 알림이 불붙고 있습니다. 72화 선배와의 격렬한 섹스를 두번이나 한 뒤에 몸을 씻고 돌아오는 길. 아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만, 그래도 내가 처음에 다른 여자들과 관계를 가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는 많이 완화된 편이었다. "너, 그럼 이번에 첫 경험이 아니겠네?" "엄밀히 따지면 그렇죠." 유아 선배가 살짝 눈을 흘기더니 옆구리를 꼬집기 시작한다. 순간적으로 터져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틀어막자, 유아 선배가 쌤통이라는 듯이 혀를 빼꼼히 내밀며 '메~롱' 포즈를 취한다. "천벌이라고. 변태남." "... 귀여운 천벌이네요." "흥!" 그나마 이 정도로 넘어간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유아 선배가 머리 끝까지 화가 나면 인격 자체가 바뀌기 때문에 적당한 수준에서 끝난 편인 것이다. 지금 이 상황 말이다. 그런데 머리를 식히고서 좋은 아이디어가 없나 고려해보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유아 선배와 주구장창 섹스만 하고 돌아올 뿐이라니. 원래의 목적을 나도 모르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사이좋게 돌아온 우리. 아직도 거실에서는 여전히 노루를 잡을만한 아이디어 대 공모전이 실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명확하게좋은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은 상황으로 보인다. 한 눈에 봐도 그 분위기를 알 수 있을법한 장면이었기 때문에 굳이 입 바깥으로 꺼내어 물어볼 필요도 없다고 보여진다. "아, 이제 왔어?" 우리들의 복귀를 환영하던 누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로 바라보며 말한다. "열정적인 섹스, 기분 좋았어?" "어, 어떻게 안거야!" 당황스럽게 대답하는 유아 선배. 그런 식으로 솔직하게 반응을 보인다면 우리들이 진짜로 섹스를 하고 왔다는 사실을 일파만파 알리는 꼴이 되는 것이라고요. 유아 선배. 게다가 유도심문일 가능성도 있는데. 이 반응을 놓칠리 없는 누나가 우리 둘을 번갈아가며 웃는다. "정력도 좋네. 남동생." "... 시끄러워. 작전은 생각해 뒀어?" "보시다시피 감감 무소식." 노아 교수님과 아리아, 그리고 세리아는 여전히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유일하게 가만히 앉아서 평상시와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이 딱 한명 있었다. 이름하여 엘리. 간식용 과일을 작은 입으로 얌냠쩝쩝 하면서 고뇌에 빠진 중생들을 바라보는 인자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럴리가 없겠지만. "그럼 일단 간략하게 상황을 정리해볼게요." 시선을 모은 누나가 지금까지 나온 아이디어를 총집합해서 설명해주기 시작한다. "일단 숲속에 있는 풀들을 엮어서 트랩을 만든다는 아이디어인데..." 아, 저 아이디어. 어디서 들은 기억이 있다. 무슨 고사 같은것에서 들은 것 같은데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뭐였더라. 음... ... 그냥 넘기자. 귀찮으니까. 누나의 말을 들은 노아 교수님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수풀 묶기 대작전에 대한 태클을 건다. "그건 넓적한 발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통용되는 작전이고, 노루에게는 그다지 통하지 않을거 같아." "역시나 그렇겠죠? 그럼 이건 각하." 노루가 신발을 신고 뛰어다니는 것도 아니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디어가 각하된 점에 대해서는 심심한 유감을 표시하는 바이다. "그럼 다음 아이디어는 땅굴을 파서 함정을 만든다는 이야기인데. 반론 있는 사람?" "저요." 곧바로 태클이 들어온다. 손을 든 사람은 바로 아리아. 굳이 아리아가 아니더라도 이번에는 나도 대답할 수 있을 정도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후배에게 양보하는 대인배같은 마음을 발동시켜보자. "아리아. 당첨. 말해보렴." "유에 선배의 키를 뛰어넘을만한 점프력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라면 적어도 2M 깊이의 함정을 파야 한다는 소리인데, 어느새 다 팔 생각인가요?" "7명이 다 투입되면 그래도 빠른 시일 내에 팔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있는 삽의 갯수도 한정되어 있고,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이 있어요." "예를 들자면?" "그 함정으로 노루가 오지 않는 이상은 함정이라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바로 그 점이 가장 큰 문제점이 아닐까 싶다. 우리들이 노루를 유도한다고 해도 성공 확률은 지극히 낮다. 게다가 노루가 언제 어디서 출몰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단순한 감으로 아무 곳이나 장소를 잡아 함정을 판다는 것은 그냥 순수하게 인력낭비에 불과하다. 그 이후로도 여러가지 제안들이 올라왔지만, 제각각 단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세상에 완벽한 것이라는 존재는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나가 나오면 그 하나에 대한 단점을 언급하는데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도 비효율적이리라 판단한 내가 나서기로 한다. "그럼 그나마 가장 쓸만한 대안들을 몇개 골라서 시험해보는게 좋겠어." "아무래도 그러는게 좋겠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이는 누나. 이대로 끝없는 논쟁을 하는 것보다 뭐라도 하나 시도해보는게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누나 역시도 판단한 모양이다. 그리고 오늘도 무인도의 아침은 밝아왔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우리들이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바로 '창'을 만드는 일. 어제 내가 생각한대로 원거리성 무기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시도해보는 것이다. 가급적이면 활을 만들고 싶지만, 나뭇가지로 만드는 활은 내구성이 약한데다가 날아가는 속도, 그리고 날카로움도 뒤떨어진다. 자연스럽게 활은 탈락. 그렇다면 그나마 투척용으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창 아닌가. 그래서 아침부터 이렇게 돌을 갈고, 긴 막대기를 제작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이런게 통할까?" 개인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노동같은 것을 상당히 싫어하는 누나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운동신경은 좋으면서 희안하게 귀차니즘 또한 수치가 매우 높다. 극과 극을 달리는 성격 탓에 동생인 내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집에서뿐만 아니라 무인도에서도 마찬가지. "시도해볼 수 있다는 것은 하기로 했잖아. 불만만 토로하지 말고 빨리 손을 움직여." "아아~ 귀찮아~" 내 말을 반찬 집어먹듯이 삼켜버린 누나는 더더욱 크게 귀차니즘을 숭배하는 말을 내뱉는다. 옆에서 같이 나무 막대기 껍질을 벗겨내던 노아 교수님이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말한다. "너무 그렇게 투정부리지 말으렴. 이걸 극복하면 고기를 먹을수도 있잖니." "... 교수님." "왜 그러니? 유린." "그러다 더 살쪄요." "무, 무슨 소리니!?" 화들짝 놀란 교수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래고래 말을 더듬으며 소리치기 시작한다. "나, 나는 그렇게 살찌지 않았다고 말했잖니!" "정말요?" "정말이라니까!" "혹시 또 모르죠. 불균형한 식사 탓에 어느새 교수님의 몸무게가 늘어있을지도." "그럴리가... 없어!" "하지만 체중계도 없잖아요. 확신할 수 있나요?" "그건..." 교수님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들기 시작한다. 마음이 여린 교수님을 놀리면 쓰나. 진짜 남을 놀리는 일 하나는 타고났다니까. "누나. 교수님 그만 놀리고 빨리 작업이나 하시지." "알았어, 알았어. 하면 되잖아." ============================ 작품 후기 ============================ 분명 오늘이 확밀아 피버데이일텐데, 왜 보상 카드는 피버가 아닐까요. 73화 누나의 불평불만을 들으면서 만들어낸 창의 갯수는 대략 4~5개. 목표량인 10개를 채우고 싶지만, 점심부터는 이제 따로 해야 할 일을 수행할 시간이다. 바로 노루가 머물고 있는 서식지를 찾아내는 일. 어제와 같이 동일한 파티 구성원으로 원정길에 오르는 우리들. 나를 포함해서 4명이 노루의 서식지를 찾아내는 동안에 나머지 3명은 남은 창을 만들기로 한다. 더불어 식사준비까지 말이다. 이제서야 지겨운 일에서 해방되었다는 듯이 기지개를 펴보이는 누나. 옷 가지고 수선하는 작업은 좋아하면서, 돌과 나무를 가지고 작업하는 일은 상당히 싫어하는 눈치를 보여준다. 역시나 친누나지만 성격을 좀처럼 종잡을수 없다. 엘리의 안내를 따라 또 다시 숲속으로 향하는 우리. 어제 우리들이 노루를 마주친 장소까지는 순조롭게 갈 수 있었다. 사람의 발걸음을 접한 숲길인지라 어느정도 갓길이 만들어진 상황이다. 덕분에 해매이지 않고 곧바로 어제 우리들이 초식동물들과 마주친 장소에 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긴가?" "아마도 맞을걸." 유아 선배가 건성으로 내 말에 대답을 한다. 이제부터 수색 시작. 주변에 노루의 발자국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선 분명 어제의 장소가 맞긴 하다. 하지만 노루의 'ㄴ'자도 보이지 않는 상황. 우리가 적임을 감지하고 서식지를 옮긴 것일까. 초식동물의 행동 패턴을 모르기 때문에 이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오늘따라 베어 그릴스 형님이 그립게 느껴지는군. "누나. 그쪽은 어때?" "전혀." "역시나 허탕인가."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 앉는다. 노루로 추정되는 발자국은 있는데 정작 발자국의 주인이 없다니. 분실물이 있으면 찾아가란 말이다. 노루 녀석아. 네 녀석의 발자국을 두고가면 어떻게 하냐고. 무인도는 분실물 센터도 없단 말이다... 라는 말을 해봤자 올리가 없지. 내 앞에서 킁킁 거리면서 노루의 냄새를 찾는듯한 모션을 보여주는 엘리. 인간의 후각이 그 정도로 발달되어 있지는 않을 터인데. "......"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기 시작하는 엘리. 냄새로 노루를 찾는 행위는 관둔 것일까.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는 것에 불과했다. 수풀의 한 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엘리의 모습. 설마 하면서 몸을 숙이면서 엘리에게 다가가 그녀가 가리키고 있는 수풀의 너머쪽을 살펴본다. ... 있다! 어제 우리들과 마주친, 그리고 나에게 루저라는 굴욕을 선사해준 파렴치한 녀석이 보이는 것이다. "누나, 유아 선배." 작은 목소리로 다른 여자들을 부른다. 내 목소리를 듣고 곧바로 분위기를 파악하고선 발걸음 소리를 최대한 죽이면서 다가온 유아 선배와 누나가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던진다. 여유롭게 호수에서 목을 축이고 있는 노루 녀석을 발견. 우리가 머물고 있는 산장 근처의 호수보다 약간 커보이는 면적을 자랑하는 호수가 따로 보인다. 하긴. 호수가 몇개 더 있다는 사실은 세삼 놀랍지는 않은 일이지만, 설마 이 곳이 들짐승들의 서식지가 아닐까 하는 괜한 기대감을 가지게 하는데는 충분한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다시한번 사냥 시도?" 유아 선배의 제안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번에는 노루 한마리만 대기중인 상황. 게다가 호수에서 목을 축이고 있으면 방심하고 있다는 뜻과도 같다. 이럴때 창을 들고올걸. 들고 온다고 해도 제대로 던질수나 있는지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투척 연습이라도 할 수 있지 않는가.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지금 그 상황이 속담의 상황과 맞을지도 모르겠다. "한번 더 시도해보죠." "알았어." 어제의 복수도 하고 싶고. 그리고 이런 식으로 경험을 쌓아가다보면 언젠가는 사냥에 성공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헌팅이라는 방향으로 갈래를 잡았다. 다시금 나이프를 꺼내들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기 위해 산개를 하기 직전. 눈 앞에 새로운 사냥감이 등장했다. 그 사냥감은 마치 우리들을 눈치채고 있다는 듯이, 아니. 명확하게 눈치채고 우리들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순간 나는 노루가 물을 마시고 몸집이 풍선처럼 빵빵해진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 지금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는 짐승은. 소위 말하는 '멧돼지'라고 부르기에 아주 충분한 동물이 서 있었다. "......" 말문을 잃은 우리들. 무슨 반응을 보여야 좋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바로 멧돼지 녀석이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우리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하는 녀석. 내가 어렸을 적, 예전에 군대에서 갓 제대한 친척형에게 이런 말을 들은적이 있다. 자신이 GOP에 근무할때 티코 차량의 크기만한 멧돼지를 잡은 적이 있다고 말이다. 그때 나는 친척형에게 무슨 멧돼지 크기가 차량정도 크기냐고 웃으면서 놀려댔지만, 친척형은 진짜라고 오히려 나를 비난했다. ... 미안. 형. 나중에 무인도에서 살아 나간다면 형한데 무릎을 꿇고 싹싹 빌면서 그때 내가 놀렸던거 사과할게. 그리고 이렇게 말할게. 멧돼지는 진짜로, 엄청나게 크다고. "모두들, 나무 위로 올라가!!" 누나들에게 그렇게 외친 나는 근처에 있는 돌을 멧돼지에게 던진다. 녀석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되는 것을 확인하고 내가 의도하는 것이 먹혀들어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동생, 너는 어떻게 하려고?!" "난 알아서 피할테니까. 내가 시간을 버는 동안 높은 곳으로 올라가. 알았어?" "으, 응. 알았어." 어차피 자신들이 있어봤자 방해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얌전히 내 말에 따른다. 오히려 누나와 유아 선배의 이런 빠른 판단이 내게 있어서는 득이 된다. 왜냐하면 최대한 여자들의 신변을 보장시키고 나서 내 안전을 생각하는게 덜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멧돼지 녀석아. 내가 상대해줄테니까 따라와봐!" "......" 저 녀석. 정말로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까의 차분한 분위기에 비해서 씩씩대며 나를 노려보더니 이내 전속력으로 달려오는게 아닌가. 주변에 잔가지들 조차도 멧돼지의 돌진에 나가 떨어지는 어미어미한 장면을 초래하고 있었다. 예전에 탐험 영화를 보면 그런게 나오지 않는가. 고대 유적에서 주인공의 동료 중에 얼빵하게 생긴 조연이 '아, 힘들다'라고 말하면서 벽에 있던 함정 스위치를 건들여서 뒤에서 거대한 돌이 굴러 떨어지는 장면 말이다. 지금 내가 딱 그 상황이다. 정말로 어떠한 비유적인 표현을 써봐도, 방금 내가 말한 표현만큼 잘 포장해서 말할 자신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언어 구사력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몸집도 큰 데다가 속도까지 빠르다. 정말로 차량이라도 되는건가. 저 돼지 녀석 말이다. 최대한 가파른 길을 피해서 나 역시도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주변에 잔가지들이 보이지만, 그것까지 피하면서 달릴 여유따윈 없다. 아마도 내가 일생일대에서 이렇게까지 빨리 달린 경험을 찾아보라고 과제를 내린다면, 지금 이 순간만큼 빠르게 뛰어본 적이 없을 정도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뛰는 질주. 그러나 이것도 곧 따라잡힐 기세다. 근처에 있는 나무기둥을 잡아서 90도 코너를 돈다. 몸이 잠깐 공중에서 붕 뜨며 반 강제적으로 달리는 방향의 위치를 튼다. 하지만 멧돼지는 자신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몇미터 정도 앞으로 돌진해서야 겨우 방향을 틀 수 있었다. 어느정도 다시 차이를 벌린 상태. 대략 기교있는 플레이로 넘어갔지만, 이것도 한번이지, 두번까지 시도하기는 싫다. ============================ 작품 후기 ============================ 피버 데이인데... 피버 데이인데... 카나리아 한장만 먹으면 풀돌인데... ㅜ_ㅜ 74화 숲속이라는 것이 이리도 뛰기 힘든 길이었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와서 문득 이런 약한 소리를 하는게 더 웃기는거 같다. 저 멀리서 또 다시 뛰어오기 시작하는 멧돼지. 정말 육중한 몸으로 잘도 뛰어온다. 말 그대로 몬스터 아닌가. 온라인 게임에서 누가 초보 1레벨부터 기초적인 몬스터로 멧돼지를 넣어놨는지 정말 면상이 궁금해질 정도다. 실제로 현실 세계의 멧돼지는 이리도 강한데 말이다. 잡생각은 이 쯤 접어두고, 허리춤에 있던 나이프를 다시 한번 꺼내든다. 이걸로 멧돼지를 상대하려고 할까 라는 바보같은 생각 때문에 꺼내든 것이 아니다. 나도 나름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나이프를 박아 넣는다고 해도 저 육중한 살집에 흠집이나 날까 하는 생각도 들 판국인데 목숨을 걸고 멧돼지에게 칼을 꽂아넣는 미친 짓은 하기 싫다. 근처에 기둥이 제법 두꺼운 나무를 고른다. 그리고 몇발자국 올라가서 있는 힘껏 나이프를 나무 기둥에 푹 하고 찌른다. 암벽등반하는 기분이 절로 드는 순간이 아닐까 한다. 멧돼지가 나에게 다가오기 전에 최대한 나무 위로 올라가야 한다. 녀석이 와서 나를 떨어뜨리려고 거대한 몸집으로 몸통 박치기를 하는 순간, 게임은 끝이기 때문이다. 나도 최대한 오래 살고 싶다고. 돼지 녀석아. 이제 겨우 다른 여자들과 공적으로 섹스를 할 수 있을만한 지위를 얻기 시작했는데 그런 파라다이스를 쉽게 포기할쏘냐. 있는 힘껏 발에 힘을 주면서 공중으로 도약한다. 손을 쭉 뻗어 가장 두꺼워보이는 나뭇가지를 그대로 캐치. 어렸을적에 나무 늘보라 불릴 정도로 나무를 잘 타던 내 실력도 녹슬지 않았다. 겨우 멧돼지가 도착하기 전에 나무에 매달린 나. 주변에서 유아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유에! 괜찮아?" "전 괜찮아요!" "다행이다. 살아 있었구나." "그러니까 자꾸 멀쩡한 사람 죽이지 말라니까요. 누나도 아니잖아요." "아... 미안." 말이라는 것은 때로는 함부로 내뱉으면 그게 현실로 벌어지는 경우가 있다. 언령인지 뭐시긴지 하는 미신의 존재 말이다. 개인적으로 믿는 종교는 없기 때문에 뭐라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이래봬도 현실주의자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뭘 해야 좋은지 나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나이는 되었다 이 말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야기가 무신론자까지 나오게 된 것일까. 나를 올려보는 멧돼지. 말 그대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된 멧돼지 녀석이 예상대로 나무에 자신의 몸을 쿵쿵 거리면서 박아대기 시작한다. 포켓몬스터도 아니고. 누가 알려줬냐. 몸통박치기라는 기술 말이다. 적어도 피카츄처럼 100만볼트 정도는 익히고 오시지. 한동안 그렇게 나무에 충격을 가하면서 나를 떨어뜨리려고 하지만, 녀석의 의도대로 절대로 그렇게 되진 않는다. 나도 팔힘은 나름 쎄단 말이다. 영차 하는 기합과 함께 나무 위로 올라간다. 튼튼해보이는 나뭇가지를 골라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한동안 이어지는 대치 상황. 계속해서 대기를 타며 나를 기다리고 있던 멧돼지가 등을 돌리면서 자신이 갈 장소로 간다. 아무래도 그 호수겠지. "휴..." 이제 겨우 한숨을 돌린 나. 다른 사람들도 무사히 대피했다는 사실도 확인했으니 이제 저 녀석이 완벽하게 모습을 감출때까지 버티다가 산장으로 가면 된다. 아직까지 긴장을 늦출수는 없지만, 그래도 위험한 순간은 넘겼으니 다행이라는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온다. 멧돼지 녀석이 돌아가고 난 이후. 나무에서 내려온 우리들은 일단 산장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우리들의 이른 복귀에 꽤나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이 일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을 마치자, 노아 교수님와 세리아가 도리어 자신들이 큰 일을 겪은 마냥 더 놀라기 시작한다. "그런 일이..." "그나마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네요. 선배." "불행 중 다행이지." 아리아의 말 그대로 무사히 돌아온 것이 정말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시무시한 멧돼지에게서 살아남은 것이 용할 정도.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이제부터다. 동물들이 모이는 호수가 들짐승들의 본거지라고 친다면, 그 곳에서 함정을 설치하면 쉽게 노루같은 것들을 잡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오늘 나타났던 멧돼지의 존재 여부. 노루는 그나마 양반축에 속했다. 왜냐하면 적어도 적극적인 공세를 우리들이게 퍼부은 일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녀석은 다르다. 우리를 적대적인 인물로 인식해버리고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한마디로 성격 한번 드러운 녀석이란 소리. 녀석을 해치우지 않으면 우리들에게 '고기'라는 식량은 없는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제일 간단하고 좋으리라고 본다. 결국 다시 마련된 긴급 회의. 아리아 외 다른 사람들이 만든 창을 일렬로 방 안에 진열시켜놓은 뒤에 우리는 다시 모여 회의를 하기 시작한다. 특명.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해주세요. 헠헠헠.' 이라는 사명감으로 모인 우리들. 마지막에 약간 이상한 의성어가 들어갔다는 사실은 가볍게 잊고 넘어가도록 하자. 그 정도로 고기가 먹고 싶다는 뜻이다. 배고프다고. 좀 육질맛이 나는 것을 입 안에 넣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러분. 우리는 아주 중요한 상황에 국면하고 말았습니다." 내 말에 아리아가 손을 든다. 아직 대사도 시작 안했는데 벌써부터 태클이라니. "선배. 어디 전쟁 나가시나요." "생존이라는 이름의 전쟁터로 나가는 길이지." "... 아. 그렇군요." "잘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 지금 저희들은 눈 앞에 고기를 두고 있습니다. 그 호수가 육식동물들의 서식지라는 사실을 안 이상, 함정을 파든 다른걸 하든 지지고 볶고 삶고 튀기든 간에 적어도 고기라는 식량을 확보할 수 있을만한 루트는 이미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 열정적인 웅변을 토해내는 나를 보며 공감한다는 듯이 노아 교수님만이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나머지 사람들은 '도대체 너, 뭐하냐.'라는 마음에 들지 않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의욕이 없는 사람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지금 우리들에게 커다란 시련이 오고 말았습니다. 이름하여 멧돼지!" "시련 치고는 참 저렴한 단어네." "시끄러워. 누나. 분위기 좀 망치지 마." "알았어, 알았어. 이 누나가 잘못했어. 남동생." 모처럼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의 마음을 느끼며 눈물나는 감동의 연설을 시작하려 했건만. 그 전에 초를 치면 안되지 않는가. "지금 우리들의 상황을 설명해주게. 아리아 소위." "제가 왜 소위인가요." "그냥 분위기에 따라서." "어쩔 수 없죠. 이번만큼은 바보 선배를 둔 제 신세를 잠시 한탄하는걸로 그칠게요." 자리에서 일어선 아이리가 자신의 은발을 한번 쓸어내리며 나를 대신해서 우리들이 국면한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일단 선배들의 말을 들어보자면, 그 멧돼지는 아마도 이 서식시 근처에서 실세를 쥐고 있는 놈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영역에 함부로 침입하지 말라는 그런 느낌일까요. 새로운 존재, 그러니까 오늘 멧돼지와 마주한 유에 선배 일행들을 보고 아마도 적으로 인식하고 곧바로 공격에 임하는 태도를 보였겠죠." 아리아가 하고자 하는 말을 간추려 본다면, 결국 우리들은 녀석을 쓰러뜨리지 않는 이상, 먹이권 확보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이것이 바로 먹이사슬 관계. 먹고 먹히는 싸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 작품 후기 ============================ 카나리아 한장, 알카로이드 한장, 프롤 한장 남았습니다! 제발 한장씩 주셔서 저에게 풀돌을 선사해주시옵소서 ㅜ_ㅜ 확밀아의 신이시여!! ... 쿠루밍은 그만 주시고요. 75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희들이 그 멧돼지를 쓰러뜨리지 않는 이상, 고기를 확보하는 루트는 확보할 수 없게 된다는 뜻과도 같은 것입니다." 깔급하게 결론을 내린 아이리의 말. 내가 하고싶은 말도 사실 그것이다. 사전에 협의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제대로 표현해줬으니 약간은 기특하게 보인다. 나중에 칭찬이라도 해줘야겠군. "그런데 질문 있는데." 유아 선배가 손을 번쩍 들며 말한다. 고개를 끄덕이고선 그녀의 발언권을 허가하자, 선배가 나에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멧돼지를 잡을만한 방법이라도 있어?" "그거야..." "있는거야?" "... 이제부터 생각해야죠." "뭐야. 없잖아." 사실 이번 사건은 노루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노루는 그냥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저 잡아보세요.'라는 듯이 방정맞게 뛰어다니는게 전부였지만, 멧돼지는 그게 아니다. 몸집도 큰 데다가 공격까지 한다. 집채만한 그 덩치에 치이게 된다면 적어도 경상으로 끝날 수준은 아니리라 확신하기 때문에 더더욱 어려운 것이다. 예전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게임중에 '몬스터 헌터'라는 게임이 있다. 거대한 몬스터를 플레이어들이 협동심을 발휘해서 잡는 게임이다. 마치 내가 그 게임의 플레이어 캐릭터가 된 듯이 멧돼지를 앞에 두고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죽는다고 마을에서 부활시켜주는 이런것도 없다. 인생은 고작 한번. 현실이라는 이름의 온라인 게임은 로그아웃도 없으니 피할 방법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할 수밖에 없어." "... 정말로 사냥할거야?" "그래도 고기가 먹고 싶다고!" "......" 날 이상한 놈 바라보듯이 쳐다보는 유아 선배. 하지만 상관 없다. 잘근잘근 씹히는 그 육질맛을 다시금 맛볼 수 있다면 멧돼지는 붉은 돼지든 사냥해 보이겠다는 것이 나의 강력한 의지였기 때문이다. 재료는 충분하다. 잘 하면 잡을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생각이라는 것은 언제나 단순한 일상을 바꿔버릴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생각이다. 아이디어. 멧돼지 따위는 인간의 아이디어로 사냥하면 되는 것이다. 약초도감을 펼치고서 여기저기 페이지를 훑어보는 아리아. 그리고 옆에서 영문 번역을 맡은 노아 교수님을 사이에 두고 나까지 이렇게 3명은 오늘 하루 거실에서 취침을 같이 하기로 정해졌다.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쿨쿨 꿈나라로 가는 기찻길에 올랐지만, 아직도 우리 셋은 야식을 먹으면서 화로의 불빛을 쬐며 책 읽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약초에 가장 능통한 아리아가 우리들이 원하는 약을 찾고, 그리고 그 중간 과정으로 노아 교수님이 번역을 해준다. 나는 그냥 떨거지. 왜 내가 깨어있나 하고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지만, 멧돼지 사냥 이론을 주장한 사람이 나였기 때문에 그 제안자인 내가 마음 놓고 발 뻗고 잘 수는 없지 않은가. 덕분에 새벽 1시가 되어가는 이 상황에도 우리 3명은 여전히 두꺼운 약초 도감을 뒤지기 시작한다. 우리들이 찾고 있는 약. 그것은 바로 마비의 효과를 가지고 있는 약이다. 사람에게도 들을 수 있다면 동물에게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 우리는 일시적으로 신경을 마비시키는 약이 있는지에 대해 찾아보고자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이다. 잠깐, 아주 잠깐만이라도 멧돼지의 움직임을 멈출 수 있다면, 그 틈을 파고 들어서 멧돼지의 정수리 부분에 나이프를 박아 넣으면 된다. 제아무리 힘쎄고 몸집이 큰 동물이라고 해도 머리를 공략당하면 쓰러지기 마련. 정면으로 승부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잔머리를 쓰자는 것이다. 하지만 마비에 관련된 약은 쉽싸리 보이지 않는듯이 책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아리아가 기지개를 펴며 말한다. "아직도 100페이지나 남았네요." "무지하게 많이 남았네." "엘리의 아버님은 약사라도 되셨던 것일까요. 일반인이 알고 있다는 지식 치고는 상당히 많은 종류의 약초들이 기재되어 있어요." "그 많고 많은 약초중에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녀석은 보이지 않는다 이거로군." "아직까지는요." "그럼 잠시 휴식이나 해볼까." 내 말을 시작으로 아리아와 노아 교수님이 겨우 한숨을 돌리며 편하게 다리를 뻗는다. 가벼워보이는 큰 티셔츠에 팬티만 입고 있는 노아 교수님의 탄력적인 허벅지가 눈부시게 드러난다. 나도 모르게 자연스러운 시선으로 노아 교수님의 허벅지를 바라보자, 앞에 있던 아리아의 일침이 내 시선을 놓칠리가 없다는 듯이 말한다. "교수님. 유에 선배가 교수님 다리 훔쳐보고 있어요." "어머!" "아리아. 쓸모없는 말을 하는구나." "그치만 사실인걸요." 뚱한 표정으로 말하는 아리아. 그와는 반대로 다시 다리를 곱게 모은 노아 교수님은 조금 빨개진 얼굴로 나를 힐끗 바라본다. 좋은 구경거리를 놓치긴 했지만, 그래도 저 포즈도 나름 괜찮다. 어차피 브래지어는 착용하고 있지 않는 교수님인지라 티셔츠 위로 유두의 형태가 확연하게 보일 정도. 워낙 가슴이 크다보니 교수님의 S라인 굴곡은 옷으로도 감출 수가 없을 정도의 요염한 포스를 뽐낸다. "선배." "왜?" "교수님 가슴 만지면 어떤 기분이세요." "느닷없이 이상한 질문을 하는구나. 후배." "그래도 궁금해서요." 아리아의 쌩뚱맞은 질문에 당황한 것은 나 뿐만이 아니였다. "그, 그런 질문은 못써요. 아리아." "그치만 궁금한걸요." 상기된 얼굴로 아리아에게 약간의 훈계를 놓는 노아 교수님이었지만, 그녀의 훈계는 민망할 정도로 아리아에게는 씨알도 안 먹힌다. 교수님의 위엄이니 뭐니 하는 것은 무인도에 오고 나서 지금까지 그 위력이 많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아리아의 이런 태도에도 교수님은 마땅히 화를 내거나 하지 않는다. 현재 우리들은 교사와 제자라는 사이보단 유대감으로 묶인 동료라는 관계로서 더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가슴 큰 여자가 좋다고 하던데요. 사실인가요? 유에 선배." "뭐... 거짓이라고는 말 못하겠지." "그럼 제 가슴은 어떤데요." 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티셔츠를 살짝 올리는 아리아. 핑크빛 유두가 보일 정도의 위치까지 올려버린 아리아의 도발적인 태도에 순간 나도, 그리고 노아 교수님도 놀라고 만다. "뭐, 뭐하는 짓이야. 아리아." "그치만 질투나는걸요. 선배." "질... 투?" 아리아의 표정이 조금 화난 듯한 기운을 내포하기 시작한다. 이 녀석, 방금 정말 질투라고 말했나. "네. 질투에요." "뭐 때문에." "그야 선배는 노아 교수님밖에 쳐다보지 않고 있잖아요." "......" 일부러 교수님을 놀리려고 하는 짓인지, 아니면 진짜 질투인지 잘 모르겠다. 그것보다 아리아의 성격으로 따지자면, 장난일 가능성이 농후할테지. 뭐... 아리아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노아 교수님이 워낙 글래머러스하고, 그리고 나같은 20대 청년에게 있어서는 젊은 여교사는 동경의 대상 아닌가. 게다가 얼굴도 예쁘고 완전 쭉쭉빵빵한 미인 여교사라니.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청년들에게도 이런 성인 여성은 어떤 의미로는 여신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관심이 표출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리아가 어디 부족한 여자라는 뜻은 아니다. 감정표현이 원활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귀엽고 가끔 솔직한 면도 보여준다. 게다가 요즘 보기 힘든 은발의 미소녀 아닌가. 가슴도 작은 편도 아니고. 애인으로 선택하고자 하는 여자라면 노아 교수님 보다는 아리아가 더 좋다고 본다. 노아 교수님은 뭐랄까. 범접할 수 없는 성인 여성의 야릇한 존재 정도 된다고 해야 할까. 다만, 아리아는 저 성격만 어떻게 좀 고친다면 정말 괜찮을텐데. 자연스럽게 시선을 회피한 나. 아무리 나라고 해도 노아 교수님이 보는 앞에서 아리아의 가슴을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아는 이런 나를 괴롭히려는 것인지 짖궂은 말을 이어간다. "선배. 흥분하셨나요." "... 글쎄." "아랫도리. 커졌어요." "너, 요새 우리 누나랑 자주 어울려 다닌다 싶더나 그런 짖궂은 농담 따먹기나 배운 거였냐." 그것보다 눈치없는 자식 같으니라고. 이럴때 발기하면 어쩌자는 것이냐. 정말 욕망에 솔직한 녀석이다. 자신의 가슴을 보여주고 있던 아리아가 이제는 교수님에게 그 타겟을 변경한다. "노아 교수님도 가슴 보여주세요." "왜, 왜 그런 말을 하는거니?" "그야 저만 보여주면 불공평하잖아요." "시... 싫어. 창피하단 말이야." "정 보여주기 싫으시다면 제가 교수님, 덮쳐버릴 수도 있어요." "뭐...?" "어때요. 자신의 제자한테, 그것도 남 제자도 아니고 여 제자한테 능욕당하는 모습, 유에 선배에게 보여주기 싫으시죠?" "......" 오늘의 아리아는 상당히 적극적이다. 노아 교수님에게 덮쳐버릴지도 모르니 가슴 보여달라고 말하다니. 이 녀석, 술이라도 취한 것일까. 아니면 이게 바로 여자가 가지고 있는 질투의 힘? 무섭다. 참말로. ============================ 작품 후기 ============================ 노아는 괴롭히는 재미가 있는 캐릭터로 설정되었습니다. 헤헤헤. 76화 한편 아리아에게 협박(?)을 받은 노아 교수님은 당황한 표정으로 아리아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한다. "그, 그게 무슨 소리니. 아리아. 교수님... 한테 그런 말을 하면 못써요." "노아 교수님. 아까도 말씀 드렸죠? 여기서는 제자, 교수님 관계따위는 없다고요." "그래도 지킬건 지키는게..." "전 경고 했어요. 분명." 아리아의 손놀림이 약간 수상해진다. 지금이라도 당장 노아 교수님을 덮쳐서 저 커다란 가슴을 마구마구 만져줄테다 라는 기세등등한 모습. 노아 교수님이 순간 움찔하며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듯이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런 교수님의 마지막 희망마저 미리 차단하는 아리아의 치밀한 말이 들려온다. "선배는 가만히 계세요." "... 내가 가민히 있으면 무슨 득이 되는데." "만약에 제 말을 들어주신다면 선배와 내일 하루종일 섹스해드릴게요." "듣기만 해도 즐거워질 농담, 정말 고맙다. 하지만 거절할게." "왜요." "굳이 네가 안해줘도, 다른 상대가 있으니까." 내가 말하고도 좀 그렇지만, 확실히 그렇다. 굳이 아리아 뿐만 아니라 섹스할 상대는 노아 교수님이라든지, 그리고 유아 선배, 세리아까지 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와도 섹스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선 나에게 그런 제안을 하다니. 좀 더 다른 제안을 하라고. 자신의 예상 범위 내에서 원하는 답변을 얻지 못했는지 아리아가 약간 당황한 표정을 보이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이 방법은 정말 쓰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죠." "뭔데?" "선배가 정말로 좋아할만한 제안이에요." "들어보고 결정할까?" "메이드 복 입고 '주인님'이라고 말해주기." "뒤에 하트는?" "... 꼭 그렇게 닭살돋는 대사를 해야 하나요?" "물론이지." "... 어쩔 수 없죠. 승낙하겠습니다." "오케이. 계약 성립." 나와 아리아의 말에 노아 교수님이 기겁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친다. "계약은 무슨 계약이니! 유에! 아리아 좀 말려... 꺄ㅡ악!" "교수님. 정말 재잘재잘 시끄러워요!" 결국 아리아에게 메이드 복 입고 주인님 더하기 하트 권한을 손에 얻은 나. 뭐... 노아 교수님에게 별다른 위해를 가하는 것도 아니고(물론 노아 교수님 본인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위해겠지만), 그냥 아리아가 하는 그대로 놔둬볼까. 여차하면 좀 심하다 싶을때 말리면 그만 아닌가. 아리아를 피해서 구석으로 뒷걸음질을 치던 노아 교수님. 결국 모서리에 몰리고 만 교수님이 양 손으로 아리아에게 다가오지 말라면서 붕붕 휘두른다. 정말 성인 여성답지 않은 귀여운 모습을 자주 보여준단 말이다. 우리 교수님은. 왜 여지껏 결혼을 안했을까 하는게 오히려 더 미스테리로 다가온다. 노아 교수님만큼 매력적인 여자도 어디 있다고. 아니면 교수님의 외모가 너무 출중해서 다른 남자들이 오히려 건드리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건 분명 용기없는 녀석들일 것이다. 모름지기 한번 정도는 대쉬를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로 나는 용자. 왜냐하면 노아 교수님과 관계를 가졌으니까. 무인도라는 약간의 버프를 받긴 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결과만 좋으면 만사 오케이라는 뜻. 노아 교수님의 몸 위로 덮쳐든 아리아가 반 강제적으로 교수님을 포박하기 시작한다.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아리아보다 힘이 약한 것인지 은발의 미소녀가 자신의 타이트한 티를 벗겨감에도 우왕좌왕하며 '꺄ㅡ꺄ㅡ'비명만을 내지를 뿐이다. 침실 안쪽에 있는 일행들이 깨지 않는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라고 할까. "가만히 계세요. 교수님." "시, 싫어!~" "얌전히 계시면 좋은거 해드린다니까요!" "그, 그런거 안해줘도 좋으니까 떨어져! 싫단 말이얏!" 노아 교수님의 풍만한 가슴이 세상의 공기를 마시고 싶다며 뛰쳐나온다. 다시봐도 정말 큰 가슴. 아리아와 거의 1.5배 정도 차이가 날 정도의 거대한 가슴이다. 거유 만세. 만만세. 자신의 상의를 벗은 아리아의 가슴과 교수님의 가슴이 서로 보기 좋은 모양새를 갖추면서 가슴끼리의 마찰을 일으킨다. 포르노 영화를 보면 가끔 저런 장면이 나오질 않는가. 3P를 할 때 여자배우 두명이 자신의 가슴을 서로 비비적 거리는 그 장면. 그것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말캉말캉한 가슴들의 향연속에 아리아의 손이 이번에는 노아 교수님의 아랫쪽으로 향한다. 비밀스러운 둔덕을 유일하게 지키고 있는 팬티 한장을 벗기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노아 교수님도 아리아의 손길이 향하는 의도를 직감한듯이 자신의 손으로 방어하려고 아리아의 손을 잡아보지만, 그건 훼이크였다는 사실을 교수님은 이제서야 깨달았다. 아리아의 입술이 노아 교수님의 입술을 덮친 것이다. 동성간의 키스는 은근히 자극적이구나. "읍, 읍!" 아리아의 혀가 노아 교수님의 입 안으로 들어가서 교수님의 혀를 능욕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내가 그 사실을 알 수 있느냐 하면 굳게 입술을 닫고 있던 교수님의 입이 호흡 곤란으로 벌어진 틈을 타 아리아가 자신의 혀를 밀어 넣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서로 입을 벌린 채 맞이하는 키스라면 분명 안의 내용물에는 여성끼리의 혀가 엉키고 있을거라고 충분히 추측할 수 있지 않은가. 굳이 예상해볼 필요도 없겠지만, 노아 교수님의 혀가 도망다니는 입장일테고, 아리아의 혀가 추적자의 입장일 것이다. 하지만 입 속에서 도망다녀봤자 서로 마주치는건 당연지사. 아리아의 적극적인 키스로 인해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교수님의 얼굴은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이미 입가 절반이 아리아와 본인의 타액으로 번들거리기 시작한다. 키스 공격으로 약해진 틈을 타 아리아가 재빨리 교수님의 팬티를 쑥 내려버린다. 방심하고 있던 교수님에게 기습이 통한 것이다. 무릎에 걸친 팬티 덕분에 다리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교수님을 그대로 위에서 바라보는 아리아. 체위로 따지면 저번에 아리아와 잠깐 했던 여성 상위 체위라고 볼 수 있다. 여자 입장은 바로 아리아. 아래에 깔려 있는 입장은 노아 교수님이다. 입술을 뗀 아리아가 교수님을 바라보며 말한다. "노아 교수님. 그거 아세요?" "뭐, 뭘...?" "저, 은근히 'S'끼가 있어요." 은근히가 아니라 대놓고 잖아. "교수님은 괴롭혀주고 싶을 정도로 너무 귀여우세요." 세삼 이제 와서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아리아는 평소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척을 하는건지, 아니면 본 모습을 숨기고 있는건지 판단이 잘 서질 않을 정도로 자신의 'S'끼를 철저히 감추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육체관계가 발동되면 유감없이 발휘대는 'S'끼. 그리고 그 S 모드가 지금도 발동된 것이다. "평소에 이렇게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교수님. 아니지... 노아라고 해야 하나?" "서, 교수님한테 무슨 말버릇이니?!" "시끄러워. 노아. 적어도 '암캐'라고 불리기는 싫지?" "아, 암캐...?" "그럼 입 다물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알았어?" 우와. 진짜 장난 아니다. 지금까지 아리아와 몇번의 애정행위를 펼치면서 자주 저런 모습을 봐온 경험이 있지만, 오늘은 유난히 심하다. 평소에 노아 교수님한테 악감정이라도 있던 거냐. 저 녀석. 아니면 자신이 평소에 절대로 넘을 수 없는 교사와 제자의 입장에서 이번에는 오히려 자신이 상위의 지위에서 연상의 여자를 능욕할 수 있다는 쾌감 때문에 오히려 분위기를 타는 것인가. 이유야 어찌 되었든 정말 굉장한 녀석이다. 아리아라는 후배 녀석 말이다. 평소에 잘 해줘야지 라는 느낌이 오늘따라 마구마구 들기 시작한다. 아리아에게 깔린 채 이름까지 대놓고 불리는 노아 교수님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아무리 교수님이 착하다고 해도 아리아의 이런 태도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까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나보다. "교수님한테 그러면 못써! 아리아!" "... 무슨 말을 하는거야. 이 암캐가." 라고 말하면서 노아 교수님의 오른쪽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는 아리아. 그러자 교수님의 동공이 커져가며 허리가 자연스럽게 휘어진다. 설마 노아 교수님. 느끼고 계시는건 아니겠지. "여긴 학교가 아니라고.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세계야. 알았어?" "그, 그치만 난 교수이고..." "교수? 교수면서 지금 제자한테 암캐라는 소리를 듣고 밑의 사타구니가 흠뻑 젖어 들어가는 여자가 교수이야?" "그렇지 않아!" "거짓말은 안하는게 좋다고." 아리아의 왼손이 뒤로 돌아가더니 교수님의 조갯살을 한번 훑기 시작한다. 그러자 교수님의 신음소리가 더욱더 깊어진다. 자신의 손을 노아 교수님 바로 눈 앞에 내미는 아리아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이게 네가 암캐라는 증거야. 알겠어?" "아, 아니야..." "아직까지 더 반항할 생각이 있나보네." 투명한 액채로 젖어버린 아리아의 손을 노아 교수님의 가슴 위로 매만지며 애액을 닦아낸다. 노아 교수님의 가슴이 마치 수건인 마냥 사용하는 아리아가 나에게 시선을 던지면서 말한다. "선배." "왜?" "이 암캐의 아랫쪽 입을 선배의 물건으로 박아버리세요." "......" 이번 만큼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나. 사실 나도 노아 교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는게 나름 묘한 흥분감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아까부터 발기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오자 발버둥치는 교수님이었지만, 그런 모습도 귀여워보인다. "미안해요. 교수님. 잠깐만 실례할게요." "유, 유에! 시, 싫... 어... 어어엇!!" 허리를 뒤로 크게 뺀 다음에 그대로 교수님의 입구에 성기를 박아 넣는다. 짧은 비명과 함께 그대로 남근을 맞이하는 교수님. 그러나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게 아리아가 자신의 사타구니로 교수님의 입을 막아버린다. "어때요? 노아 교수님. 제자의 사타구니를 핥으니까. 기분 좋아?" "으... 우웁..." "정말로 기분 좋은가보네. 교수님. 혹시 'M' 아니야?" "읍읍..."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교수님. 그러나 아리아가 깔고 앉았기 때문에 말은 하지 못한다. 밑에서는 내 성기가 교수님의 아랫쪽을 공략하는 중. 위에서는 아리아와의 진한 키스를 나눈다. 나도 이미 스위치가 들어간 상황. 세리아와 관계를 가지고 난 이후부터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성관계를 가질때 나도 약간 여자들을 억압하고 강압하는 그런 모습이 자주 보이게 된다. 이것도 무슨 패티쉬같은 것일까. 여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취미가 없는데. 그렇다고 때리고 싶다 라는 파렴치한 생각은 절대로 들지 않는다. 단지 성욕에 울부짖는 여성 본연의 모습이 보이면 나도 모르게 흥분한다고 해야 할까. 그런 느낌 있지 않는가. ... 내가 나름 변론을 하고는 있지만, 어째 점점 '나는 변태가 다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건 착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이 샘솟기 시작한다. ============================ 작품 후기 ============================ 어제 후기에 올렸던 한 마디가 이번 편수 스토리를 압축하고 있을 줄이야... 쓴 본인이 할 말은 아니지만, 저도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 ^_^;;; 77화 계속해서 무한 피스톤 운동. 교수님의 양쪽 다리를 내 어깨 위에 올려놓고 풍만한 엉덩이를 만지면서 교수님의 몸 안에 성기를 찔러 넣는다. 신음소리는 아리아의 사타구니를 통해 이미 들리지 않는 상황. 교수님의 얼굴은 아리아의 질 입구에서 흘러나오는 애액으로 이미 세수를 한 듯이 젖어있었다. 음란한 두 여자들의 모습에 나도 이제 흥분에 달할 지경. 교수님의 생리 기간이 저번에 끝났음을 알고 있기에 오늘은 교수님의 자궁 안쪽에 정액을 쏘아보낸다. "노아 교수님. 쌀게요!" "으읍... 읍읍!!" 뭐라고 말하느지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분명 '바깥에 싸줘!'라는 말이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사정, 방대한 양의 정액들은 교수님의 자궁을 가득 채워가고 있었다. 천천히 교수님의 몸 안에서 성기를 빼낸다. 그러자 마치 무너진 댐에서 흘러나오는 물처럼 정액들이 왈칵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던 아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교수님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묻고 정액들을 핥기 시작. 이미 노아 교수님은 기운이 다 빠져버렸는지 그대로 대(大)자로 누워 내가 안에다 싼 정액들을 토해낼 뿐이다. 이제서야 겨우 상황이 정리된 것인지, 교수님이 상반신을 일으키며 우리들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훌쩍이기 시작한다. "나... 교수인데... 흐윽..." "......" 뚝뚝 흘러 내리는 교수님의 눈물. 방금 전까지는 불타는 성욕 때문에 재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지만, 사실 교수님에게 무례한 짓을 한 것은 사실이다. 나도 모르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교수님에게 사과하려 하자, 옆으로 다가온 아리아가 교수님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사실 다 연기였어요. 교수님." "연... 기?" "네. 그냥 교수님하고 같이 유에 선배와 3P 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예요. 제가 교수님을 얼마나 존경하는데요." "정말...?" "네. 물론이죠." 아니. 절대로 연기가 아니다. 굳이 연기라고 한다면 지금의 아리아의 모습이 바로 연기라는 것이다. 아까 노아 교수님에게 멋대로 '암캐'라고 부른 것이 바로 아리아 본연의 모습. 극한의 'S'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아 바로 아리아다. 그런데 잘도 태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정말, 정말이지?" "네. 정말정말정말이에요." "정말정말정말정말?" "그럼요. 정말정말정말정말정말이에요."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겠다는 듯이 말 끝을 흐리는 노아 교수님이 울음을 그치기 시작한다. 아아. 얼마나 순진무구한 여자란 말인가. 노아 교수님. 아리아의 말이 거짓임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하고 '역시 내 제자가 나한테 그럴리가 없지. 암. 그럴거야.'라는 순수하고 퓨어(Pure)한 생각을 하시고 계실 줄이야. 저것도 노아 교수님 답다면 다운 반응이지만, 그래도 실상을 알고 있는 제 3자가 보면 양심이라는 이름의 샌드백에 원 펀치 쓰리 강냉이, 가젤 펀치, 바디 블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뎀프시 롤까지 선사해주는 그런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이래저래 해서 끝난 이벤트. 뒷처리를 하고 나서 다시 약초 도감을 찾으려고 했지만, 너무 피곤한지 결국 3명은 나란히 거실에서 잠이 들었다. "... 라는 이유로 못 찾았습니다." "이 바보 멍청이!!" 유아 선배의 로우킥이 장렬한다. 아프다. 그것도 매우. 목검으로 맞는 것보다도 배로 아프다. 영어로 말하자면 시크. 도도하다는 뜻이 아니다. 아프다는 뜻이다. 말없이 정강이를 부여잡고 있는 나.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세리아는 마치 나를 성욕에 굶주린 짐승 보듯이 경멸의 시선을 하고 있었다. 미안. 세리아. 순수한 너의 마음에 나는 신사로 보여지지 않는가 보구나. 그래도 날 미워하지 말아주렴. 반대로 엘리는 고통을 호소하며 뒹굴고 있는 나에게 쫄래쫄래 다가오더니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 한쿡말 넘후 어려워효." "그 유행어. 아직까지 쓰고 있구나." "yes." 이제 다른 패턴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니. 엘리. 한번 써먹은 개그 코드는 두번 먹히기 힘들단다. 다시 이야기를 원상복구 시키자면, 아침해가 밝아온 지금 이 상황에서 결국 어제 주구장창 3P만 하다가 끝이 났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유아 선배는 나를 구타 아닌 구타라는 이름의 사랑의 매를 선사해주었고, 노아 교수님과 아리아도 나름 반성하고 있다는 듯이 얌전하게 무릎을 꿇고서 어색하게 웃어만 보인다. 한숨을 쉬면서 등장한 누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뭐, 그렇게까지 시간의 촉박함을 요하는 일은 아니니까 이 쯤에서 넘어가자. 어때? 유아." "... 그렇긴 하지만." "남동생이 인기있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여긴 무인도이기도 하고. 성욕에 굶주린 것은 남자 뿐만이 아니라 여자인 우리들도 간혹 그런 때가 있으니까." "......" 역시나 해결사 누나다운 말이었다. 말을 듣고 있던 유아 선배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밝은 표정으로 돌아오는 아리아와 노아 교수님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오전 내내 아리아와 노아 교수님, 그리고 누나와 엘리 4명이 번갈아가며 전문 용어로 이뤄진 영어 문장들을 해석한 끝에 드디어 사냥에 조금은 써먹을 수 있을법한 마비탄을 찾을 수 있었다. 제조 방법을 찾은건 그나마 다행. 하지만 고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문제는 제료란 말이지." 또다시 회의를 하기 위해 모인 우리들. 아침 겸 점심으로 또다시 투입된 감자와 고구마를 먹으면서 말이다. "계속 이런것만 먹으면 방귀 같은것도 엄청 독해지겠는데?" 누나의 눈치없는 말에 얼굴이 빨개진 여성진들. 더욱이 세리아가 가장 많이 빨개지기 시작한다. "누나. 분위기를 봐서 이야기를 해." "그치만 사실이잖아. 인간의 생리현상을 모독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남동생." "그렇군... 이 아니지." 납득을 하면 어쩌겠단 말이냐. 아무튼 이런 식으로 식단이 일원화 되면 언젠가는 질리기 마련. 구조대가 오기 전에 지겨운 식단 때문에 먼저 돌아가실 지경이다. "그럼 재료를 모으기로 하는게 좋겠네. 다들. 찬성하지?" 모두가 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멧돼지 정도 급의 동물을 마비시킬 정도의 강력한 약을 제조하려면 그만큼 많은 양의 재료들이 필요하다. 한꺼번에 이 정도의 수량을 달성하려면 우리 모두가 약초를 캐내는데 투입해야 할 지경. 하지만 숲속에는 아직까지 멧돼지라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도 팀이 자연스럽게 나눠지게 되었다. 7명 중 나를 포함해서 세리아, 그리고 누나. 이렇게 3명이 A팀으로 결성되었고, 나머지 유아 선배, 엘리, 노아 교수님, 아리아가 B팀으로 결정이 되었다. 선정 근거는 일단 멧돼지와 같은 위협적인 들짐승에 대비할 수 있을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분배시키고, 나머지 운동신경이 부족한 사람들을 채워넣는 식으로 짰다. B팀같은 경우에는 유아 선배와 엘리가 있으니까 괜찮을테고. 나는 세리아와 누나를 챙기면 된다. "그럼 해가 지기 전에 목표량을 달성하든 못하든 복귀하는 걸로 합니다. 알았죠?" "응."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수긍하는 유아 선배. B팀 리더가 된 선배가 이끄는 팀은 우리와 다른 방향으로 숲 안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A팀 리더인 나는 세리아와 누나를 데리고 B팀이 사라진 반대편으로 향하는 중. 우리들의 루트는 어제 동물들이 머물고 있던 그 호수를 피해서 돌아가는 식으로의 루트를 계획했다. 괜히 전력이 분산된 상황에서 멧돼지를 마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아. 숲속에는 벌레들이 많아서 싫었는데." 또다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하는 누나. 예상은 했지만, 걸은지 5분만에 싫은 소리를 할 줄은 몰랐다. 점점 귀차니즘의 신봉자로서 능력을 갖춰가는 누나에게 따끔하게 충고를 던져보도록 하자. "그런 안이한 생각으로 가면 안된다고. 누나. 언제 어디서 녀석이 우리들을 습격할지 모르는 상황이니가 주의해야지." "그야 나도 알지만... 벌레들은 싫은걸. 그치? 세리아." 질문을 받은 세리아가 내 눈치를 살짝 보면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고 세리아가 벌레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행들 중에서도 노아 교수님과 더불어 벌레를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냐면, 밤중에 산장에서 모기가 한마리 들어왔는데, 그 모기 조차도 잡는게 무서워서 아리아의 등 뒤로 숨어버린 일화가 있었다. 물론 그 모기는 아리아의 손에 의해 장렬하게 전사했음은 굳이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다. "그나저나 이런 약초가 있을까?" 엘리의 부모님을 의심하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행여나 한 내 말에 누나가 심심치 않게 대답한다. "그 약초 도감은 시중에 파는 약초들로 제조할 수 있는 방법을 기재한게 아니라 순수하게 이 무인도에서 얻을 수 있는 약초들로 만들 수 있는 도감이야. 그러니까 그 말을 뒤짚어 생각한다면, 약초 도감에 나와있는 약초들은 적어도 이 무인도에서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겠지."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하지만." 누나의 말이 맞다고 보여진다. 무인도에서 얻을 수 있는 약초들로 여러가지 실험을 한 끝에 제조된 약초 도감. 3년이라는 제작기간을 괜히 헛수고로 만들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 약초도감에 우리들이 앞으로 고기를 먹을 수 있을만한 수단이 되어줄 효과적인 방법도 충분히 나와 있으리라고 믿고 싶다. 그만큼 고기가 먹고 싶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리고 우리 일행들을 대표해서라도 말이다. 한참을 걸어가던 우리. 그때 누나가 잠시 우리들의 발걸음을 멈추는 소리를 한다. "아, 이거 같은데." "어디... 정말이네." 도감에서 나온 그대로의 약초다. 사진이 아니라 그림으로 그려져 있어서 확신은 못하겠지만, 생긴것은 비슷하게 보인다. "그럼 이걸 따가도록 할까?" "바로 시작하자." 등에 두르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난 이후에 나란히 앉아서 약초들을 최대한 캘 수 있을 만큼 캐는 우리들. 예전에 이런 식으로 재료를 모아서 연금술을 만드는 게임이 있었는데. 고전 롤플레잉 게임이라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마법 하나 쓰려고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약초를 모으는 그런 게임으로 기억한다. 왜 느닷없이 내가 이런 말을 꺼내느냐. 바로 우리들의 지금 그 모습이 게임속의 캐릭터와도 똑같지 않을까 해서 꺼내본 말이다. 참고로 나는 도중에 인내심의 부족으로 그 게임을 클리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 취향은 격투게임이었기 때문이다. 요새 유행하는 '철곤'이라든지 '킹오브 화이트'라든지 이런거 있지 않은가. 남자라고 하면 역시 격투 게임. 서로가 서로의 자웅을 겨루는 일에는 격투게임만한 수단이 없다고 본다. 그렇다고 내가 격투게임을 프로게이머 수준으로 잘하는 정도까지 올랐다는 뜻은 아니다. 그냥 오락실에서 가볍게 20연승 정도? 뭐, 이 정도야 기본이지 않는가. 20승 이하면 연승도 아니지. "남동생. 잡생각 하지 말고 약초부터 빨리 캐." "설마 누나. 독심술 같은거 쓴 것은 아니지?" "내가 초능력자니? 어떻게 네가 속으로 격투 게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겠어." "하긴... 어라?!" "자, 빨리 일하자. 일." "어? 어... 알았어." ... 정말로 초능력자라도 되는거냐. 이 여자. ============================ 작품 후기 ============================ 하루종일 확밀아 인벤에서 살고 있습니다. 카드 검색만 하루에 몇번을 하는건지...;; 78화 열심히 재료를 채취, 그리고 채취한다. 손에 흙이 묻는게 조금은 기분이 나쁜지 누나가 풀의 줄기만을 쥔 채 뜯어내고 있었지만, 그런다고 손이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다. 세리아처럼 묵묵히 자기가 할 일을 하는게 더 좋을텐데. "그런데 말이야." 또다시 말을 걸어오는 누나. 조금의 수다라도 없으면 일이 힘들다는 것을 느끼는 것인지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소재를 꺼낸다. "또 왜. 누나." "아니. 너무 심심하니까 재미 없다고 해야 할까." "노동이라는 것이 재미있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뭔가 좀 흥이 돋는게 더 재미있다고." 또다시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누나였다. 도대체 나보고 어떤걸 원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MP3가 있는것도 아니고. 별다른 첨단기계도 없는데 누나가 바라고 있는 그 '재미'라는 것을 들어주기에는 그 수단이 너무 한정적이다. 누나의 투덜거림 속에서도 묵묵히 목표량을 달성한 우리. 이제 겨우 한 종류의 약초를 캐내었을 뿐이다. "다른건... 산호초?" "응. 산호초 맞네." 누나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한다. 산호초라. 그렇다면 바다로 가야 하는 것인가. "아무래도 이건 해안가로 가야겠지." "산호초가 산에서 나는 것은 아니잖아. 그렇지?" "뭐... 당연한 말이겠지."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해안가로 향하게 되었다. 산 속 공터에서 머물고 있다가 해안가로 가는 것은 실로 오랜만... 이 아니다. 엊그제 세리아와 같이 몸을 섞었던 적이 있지 않은가. 그 기억이 났는지 세리아의 얼굴이 붉어진다. 우리 둘의 사소한 반응조차 눈치챈 누나가 아주 음흉한 미소를 띄면서 말한다. "오호라. 너희 둘이 섹스했던 장소가 바로 여기구나." "잘도 눈치챘네." "알기 쉽거든. 너희들의 표정을 보면 금방 눈치채는건 당연하지." 참고로 나와 세리아 단 둘의 시간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누나가 일부러 자리를 피해준 경력이 있다. 그 이후로 우리 둘이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은 누나도 알고 있었지만, 어디서 관계를 가졌는지 까지는 알지 못했다. 의도적이진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들킬줄이야. 해안가의 탁 트인 공간이 우리들 앞에 드러난다. 그와 동시에 누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세리아에게 다가가서 속삭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어머, 세리아. 이런 탁 트인 공간에서 관계를 가지다니. 의외로 적극적인걸?" "......" 양 손을 가슴 위로 모은 세리아가 부끄러워하기 시작한다. 유난히 창피함을 많이 타는 세리아를 일부러 놀리는 누나. 남을 이런 식으로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누나의 취미이자 특기다. "세리아 그만 놀리고 산호초나 캐러 가자." "나도?" "둘이 가는게 더 빠르잖아." 술술 옷을 벗는다. 내가 노출증 환자라서 옷을 벗는게 아니라 산호초를 캐기 위해서는 바다로 들어가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괜히 옷을 젖게 할 필요가 없어서 이렇게 벗는 것이다. 속옷은 남겨둘까 하다가 옆에 누나가 브래지어와 팬티까지 다 벗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나도 입을 필요는 없겠군 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대로 팬티를 벗는다. 아마도 어차피 서로 알몸 다 본 사이끼리 굳이 격식차릴 필요는 없을거라는 생각 때문인 것이리라고 본다. "세리아는 거기서 기다려. 금방 갔다올게." 고개를 상, 하로 끄덕끄덕 흔드는 세리아가 조심하라는 듯이 우리들을 바라본다. 참고로 내 아래쪽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세리아. 비록 서로 섹스를 한 사이라고는 해도 아직까지 남성의 성기를 제대로 바라보는 행동은 못하나보다. 나도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말이다. 가방은 내가 들기로 하고, 누나와 같이 점점 바다속으로 향한다. 풍덩이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잠수. 바다 안이 워낙 투명한지라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산호초의 모습은 훤히 보이고 있었다. 탁 트인 시야 덕분에 금새 목표물을 찾을 수 있었던 우리들. 들고 온 나이프로 산호초를 따는 내가 누나에게 넘겨주고, 누나가 내 등에 매달린 가방 안에 산호초를 챙기는 형식으로 번갈아가며 역할 분담을 한다. 그런데 서로 벗은 몸으로 같이 바다에서 산호초를 따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조금은 묘한 기분이 든다. 누나의 알몸이 그대로 보이지만, 수압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요소 때문인지 발기 상태까지는 되지 않는다. 그나마 이게 다행. 바닷속에서 누나의 나체를 보고 발기 상태가 되면 오히려 쪽팔리지 않는가. 바다에 잠수해서 산호초를 따다가 호흡이 모자르면 다시 수면 위로 와서 숨을 고르고 다시 잠수. 이런 식으로 계속 반복적인 패턴을 하다보니 금방 우리들이 원하는 목표량을 채울 수 있었다. "푸앗!!"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민 나와 누나. 거칠게 호흡을 몰아쉬며 다시 해안가로 나온다. 묵직한 가방의 느낌이 꽤나 많은 양을 따왔다는 것을 직감시켜 주고 있었다. "꽤나 많이 땄네." "그러게.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라고 서로 바라보는 우리. 그런데 우리들에게 다가온 세리아가 내 손을 잡고서 어느 한 쪽을 가리키기 시작한다. "응? 왜 그래. 세리아." "......" 고개를 살며시 흔들면서 가리킨 쪽을 바라보라는 신호를 남기는 세리아. 그녀가 나에게 보라고 제시한 장소로 시선을 돌리자,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거... 혹시?"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나가 놀란 눈동자를 하면서 외친다. "난파된 배의 일부분 아니야?!" "정말이네." 난파되고 난 이후에 여기까지 떠내려온 것일까. 갑판의 파편으로 보이는 몇몇 철 조각들이 미세하게 떠다니고 있었고, 그 주변에 우리들이 머물고 있는 산장의 크기에 5~6배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는 배의 일부분이 해안가 근처에 놓여있었다. 물기를 털어내고 옷을 입은 누나가 배의 일부분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우리들에게 제안한다. "한번 가볼까?" "그러는게 좋겠지." 혹시나 저기서 뭔가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자면 생활 필수품 같은 것들이나. 아니면... 생존자. 혹시 우리들 말고 저 배의 일부분으로 추정되는 구조물에 거처를 마련하고 무인도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나도 누나를 따라 옷을 입고 가방을 맨 뒤에 앞장서서 발걸음을 옮긴다. 그다지 먼 곳에 위치하지 않은 상황이라서 금새 도착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가는 길 도중에 난파된 배의 내부에서 흘러들어온 물품이 몇몇 보인다. 구명보트의 찢어진 천 쪼가리라든지 깃발이라든지 하는 쓰레기로 분류될만한 것들 말이다. 가지고 가봤자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을거 같고. 저런걸 들고 가도 멧돼지에게 던질수도 없으니까 말이다. 점점 구조물에 다가선 우리들. 멀리서 봤을때보다도 훨씬 더 큰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우와. 생각보다 무지하게 크네." 손으로 작게 햇빛 가리개를 만든 누나가 탄성을 자아낸다. 세리아 역시도 양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상황. 이정도 크기라면 생존자들이 머무를 수 있을만한 거처로서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보여진다. 과연. 정말로 생존자가 있을까. 끔찍했던 사고 속에서 우리들과 같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운 좋은 생존자들이 과연 존재할까. 의심해봤자 소용 없다. 만약에 생존자가 없다면 별로 달라질건 없고, 그리고 있다면 도와줘야 한다. 우리들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일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들어가보자." "응." 내 말을 신호로 우리들은 점점 배의 내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 작품 후기 ============================ 아마 오늘 올라가는 편수부터 나머지 등장인물들이 다 나올거라 예상됩니다. 79화 어두운 실내 안쪽. 부서진 잔해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우리들은 최대한 벽에 손을 댄 채 이동한다. 너무 어두워서 앞사람 모습 조차도 보이지 않을 정도. 손전증이라도 있으면 좋았을텐데, 불 조차도 귀한 이 무인도에서 그런 물건을 바라는 것은 사치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런 곳에 사람이 살까?" "혹시 모르니까 확인해보는 것도 좋겠지." 누나가 약간 이해가 안간다는 말투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그래도 사람이 산 흔적이라도 보인다면 어느정도 믿겠는데,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그 말은 어느정도 공감이 가지만." 워낙 어두운 곳이라서 사람이 살 만한 장소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이 내부를 지나 위쪽으로 올라가면, 배의 갑판이었던 일부분이 남아있기 때문에 혹시나 그 쪽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을까 하고 예상해본다. 삐그덕 삐그덕 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온다. 예전에 공포영화 같은 곳에서 보면 유령선이 떠다니지 않는가. 그 유령선의 내부로 들어선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다지 유쾌한 감정은 들지 않는다. 정말 사람이 살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괜한 발걸음을 했나. 하지만 그때, 갑자기 세리아가 내 손을 잡더니 유난히 크게 확장된 동공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 아으..." "왜 그래? 세리아." "어... 흐으으..." 말을 못하는 세리아가 쥐어 짜는 목소리로 말할 정도면 분명 무슨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볼 일이라도 봐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남동생!" "누나는 또 왜?" "누, 누누누가 있어!" "뭐?!" 누나의 더듬거리는 말을 듣자마자 순식간에 나에게 달려드는 정체불명의 존재. 동물인지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일단 맞대응 겸 내가 가지고 있던 가방으로 날아오는 공격을 방어한다. 푸욱! 움푹하게 내 쪽의 품 안으로 밀어오는 무언가. 찌르기 공격인가. 하지만 가방을 뚫지 못한 의미 불명의 무기를 거둬들인 녀석이 느닷없이 나에게 날라차기를 시도한다. "크윽!" 좁은 곳에서 이런 과한 몸동작이라니. 허리를 숙여 재빨리 뒤로 몇걸음 물러난 뒤에 녀석과의 거리를 다시 벌린다. 빠른 움직임. 엘리보다 높은 스피드를 자랑하는건 아니지만, 적어도 유아 선배 급 정도의 운동신경을 자랑하는 녀석이다. 그런데 왜 생존자가 나를 공격하는 것인가. 어두워서 정확히 우리들과 같은 입장인 생존자라는 것이 확인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무인도에서 사람이 존재할 일은 없지 않은가. 엘리와 같이 몇년 전부터 이 섬에 머물거나, 아니면 배가 난파된 사건 때문에 여기까지 흘러들어 왔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칫." 짧게 혀를 친 녀석이 이제는 무작정 도망치기 시작한다. 여지껏 마음데로 공격을 퍼붓더니 이제는 꽁무니를 빼는거냐. "누나! 세리아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있어!" "너는 어떻게 하려고?" "나는 녀석을 쫓을게." "위험하다고! 그거!" "괜찮아. 당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누나에게 들고 있던 가방을 넘겨주며 먼저 바깥으로 대피하라고 말한 뒤에 도망친 녀석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계단을 통해 계속해서 올라가는 녀석. 밤 시야가 밝은 편인지, 아니면 여기에서 거처를 마련하고 오랫동안 살아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익숙한 몸동작으로 계단을 오르내린다. 나도 어느정도 시야가 어둠에 적응한 상황인지라 어렴풋이 사물의 실루엣 정도는 구별이 가능한 상황. 녀석의 뒤를 쫓기 위해 계단을 탄 나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위쪽으로 옮긴다. 나를 갑판 위까지 유도하는 것인가. 도대체 무슨 의도로? 설마 좁은 복도에서 싸우기 힘들거라는 판단 때문에? 여러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들기 시작했지만, 그건 잠시 보류해두기로 하고 추격에 온 힘을 다한다. 몇층을 올라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계단을 올라온 나. 문을 열자, 넓게 펼쳐진 갑판의 공간이 눈에 확 들어오기 시작한다. 계속 어둠속에 있다가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오니까 시야가 적응하지 못한다. 눈부심에 눈을 가리고 있는 내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습격을 가하는 정체불명의 녀석. 이정도 기습은 나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일부러 갑판 위로 나를 유인한 것은 분명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차 한잔 하면서 담화를 나눌 생각으로 저지른 행동은 아닐테고, 분명 이런 기회를 엿볼 것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곧바로 갑판 위로 몸을 날리며 몸을 몇번 구르기 시작한다. 비포장 도로의 무인도보다는 그나마 훨씬 더 충격과 아픔이 덜한 상황. 검도와 태권도를 둘 다 배워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줄은 몰랐다. 상반신을 일으켜 경계 자세를 취하며 녀석의 모습을 확인한다. 검은색의 천을 두르고 긴 나무 막대기를 든 녀석. 마치 판타지 소설의 마법사가 두르고 있는 후드마냥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있는 녀석의 모습을 눈으로 포착한다. 보아하니 배의 잔해물 중에서 구한 것으로 보이는데. 너덜너덜한 검은색의 천을 두른 녀석이 무기를 들고 빠르게 나에게 돌진한다. "이봐! 당신, 생존자 맞지?" 말을 걸어보지만, 감감 무소식. 오히려 그 말을 듣고 적극적으로 내개 공격을 가한다. 얇고 긴 막대기로 가하는 찌르기 공격. 아까도 분명 찌르기 형태의 공격을 시도했었던 기분이 든다. 그때는 내가 가방으로 막았으니까 방어가 가능했지만 말이다. 날카롭게 들어오르는 찌르기 공격에 다시금 몸을 뒤로 빼며 거리를 벌린다. 마치 공격하는 타입이 '펜싱'과도 같다. 저 무기(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민망할지 모르겠지만)도 펜싱에서 사용하는 칼과 비슷하지 않는가. 근데 칼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쪽 분야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일단 임시적으로 칼이라고 부르자. "생존자인데 왜 나를 공격하는거지?" "......" 다시금 말을 걸어보지만, 역시나 대답은 들려주지 않는다. 설마 세리아처럼 말을 못하는 장애를 가진 것은 아닐테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하는 것을 보아서는 협상따윈 없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출하고 있는듯 하다. 그래도 적어도 말 정도는 받아주면 좋을텐데. 일단 다시금 거리를 벌려 녀석의 모습을 살펴본다. 얼핏 망토에서 드러나는 손의 생김새로 보아서는 남자의 손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체형도 전체적으로 나보다 작은 체구. 그리고 간간히 보이는 긴 머리카락으로 보아 녀석의 성별은 '여성'임에 틀림없다. 아니, 확신한다. 그래도 여자라고 무시해서는 안된다. 유아 선배 수준의 운동신경과 반사신경을 자랑하고 있는 녀석이었기 때문에 방심을 하다가는 바로 저 무시무시한 찌르기에 당할 수 있다. 하나같이 급소만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저 공격은 날카롭게 그지 없는 것이다. 실제 펜싱 칼만 아닐 뿐이지, 기세는 실제 모델 못지 않을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 나이프를 꺼내들어야 하나. 하지만 여자를 상대로 괜히 나이프를 꺼내들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도 저 여자는 나같이 실제 살생용 흉기를 들고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튼튼해보이는 긴 나무 막대기 하나 뿐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역시 무력으로 여자를 제압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포박하는 방법밖에 없다. "아가씨." "...?" 내 말에 살짝 고개를 들며 나를 바라보는 여자.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나를 응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온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갈 예정이니까 조심하는게 좋을거야." ============================ 작품 후기 ============================ 이 편수는 예약으로 올라간 편수입니다. 지금쯤 저는 이 시간이면 아마 술을 마시고 있겠지요. 벌컥벌컥. 드링킹. 80화 호흡을 가다듬어보자. 간만에 전투 의지가 끌어오르는 이 기분. 최근까지 맛보질 못했다. 멧돼지의 경우와는 다르니까 말이다. 그 녀석은 싸울 의지고 나발이고 도망가기에 바빴고, 이렇게 오랜만에 사람과의 대전을 벌이는 것은 나같은 입장에서는 오히려 반갑다고 할 수 있다. 치고 받고 하는 그런 육탄전을 정말로 선호한다 라는 말은 못하겠지만, 싫어하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자세를 잡는 것이다. 검도부이기도 하지만, 태권도라는 무술 유단자이기도 하니까 굳이 검은 필요 없겠지. "... 진심으로 덤비겠다고?" 녀석의 목소리를 이제서야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 의외로 조금 하이톤의 목소리. 약간 날카로운 느낌을 선사해주는 여성의 음성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에 이어질 여성의 대사였다. "... 남자 주제에. 남자 주제에 감히 이 몸한테 손을 댈 생각을 하겠다고?!" "뭐...?" "도대체 남자가 왜 이 섬에 있는거야!! 남자라는 것은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자, 잠깐만. 그래도 나름 그 끔찍한 사고에서 살아남은 나인데, 그런 식으로 두번 죽일 필요는 없잖아." "시끄러워ㅡ!!" 말이 통하지 않는 녀석이다. 뜬금없이 혼자서 화를 내지를 않나. 그러더니 이제는 '남자는 전부 악(惡)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남성 혐오증이라도 있는건가. 저 녀석. 아무튼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은 없다. 세리아와 누나의 일도 걱정되고. 가급적이면 빠른 시간 내에 일을 마무리 짓고 내려가는게 좋다고 생각한 나는 다시 자세를 잡으며 말한다. "좀 거칠게 다뤄도 원망하지 말아라." "흥! 그건 내가 할 소리야." 역시나 펜싱 자세를 잡는 여자. 검(나뭇가지지만)의 뾰족한 끝 부분을 나에게 겨눈 뒤에 무게중심을 언제라도 뛰쳐나갈 수 있도록 앞에 둔다. 한 손은 머리 위로 올린 채 대기중. 올림픽 경기에서 펜싱 대회를 볼 때의 그 자세와 똑같다. 그렇다는 소리는 적어도 저 여자는 펜싱이라는 스포츠 종목을 배운 적이 있다는 말이 된다. "하압!" 짧막한 기합소리를 내지르며 먼저 여자가 돌진해온다. 찌르기 중심의 공격이다보니 그 돌진력 또한 엄청나게 빠르다. 멧돼지 녀석에 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다만 여자가 이렇게 속도를 빠르게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서있는 거리 까지의 단거리에만 속하는 경우일 뿐. 장거리로 저렇게나 빠른 속도를 유지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뒤로 약간 물러서서 거리를 벌릴까? 하지만 그런 구차한 짓은 벌이기 싫은 관계로 나 역시도 그대로 돌진을 택한다. 내 행동에 약간 의아하다는 말투로 나에게 외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바보네! 이 나한테 돌진을 해올 생각을 하다니!" "원래 여자는 적극적인 남자를 좋아한다며." "나, 남자따위는 다 죽어버려야 해!!"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이 녀석, 분명 남자 혐오증이라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정도로 극심하게 남자를 싫어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그래서 생존자든 아니든 무턱대고 우리를 공격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얼토당토 않는 추측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잠시 뒤로 밀어두고. 여자의 찌르기 공격이 정확하게 내 심장을 노린다. 진심으로 나를 죽일 셈이냐. 아무리 진검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진짜로 맞으면 위험하다. 치명상 정도는 아니겠지만, 꽤나 아플 것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그런 뻔한 공격에 내가 당할 위인이 아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 정도의 공격은 가볍게 피할 수 있다. 본래 찌르기라는 공격은 한 곳을 집중적으로 노려 치명상을 가하는 공격 타입. 베기와 같은 넓은 범위의 공격 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피하는 것도 검도보다 손쉽다. 살짝 허리를 더 낮추면서 가볍게 여자의 공격을 피했... 다고 생각했다. "역시 남자는 단순해!" "?!" 여자의 검이 궤도를 틀어 베기 공격으로 전환이 되지 않는가. 아슬아슬하게 허리를 최대한 비틀어서 옆으로 몸을 날려 공중에 붕 하고 바람을 가르는 베기 공격을 피해낸다. 재빨리 옆으로 굴러 여자의 뒷편으로 돌아간다. 충분히 때릴 수 있는 범위. 하지만 그렇다고 여자를 때릴 수도 없고. 가급적이면 잡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포박 전법을 쓰려고 손을 뻗지만, 여자는 쉽게 뒤로 스탭을 밟으며 나와의 거리를 벌린다. 역시나 그 순간 타격 공격을 택했어야 했다. 그것이 정답. 하지만 내가 괜히 오답을 고른게 아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여자를 때렸다간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지 않는가. 가뜩이나 남자 혐오증을 가지고 있는 여자에게 때리기까지 하면 그 미움은 2배의 상승효과를 불러올게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내 배려는 오히려 오해를 낳고 말았다. "때, 때릴 생각을 안하고 잡으려고 하다니! 분명 날 덮치려고 한 것이겠지?! 이 변태!! 죽어버려!!" "... 오해라니까." "오해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남자는 역시 최악의 생물이야. 왜 살아있는거야!" "글쎄... 운이 좋다고 해야하나." 정말 말이 많은 여자다. 게다가 까탈스럽다. 유아 선배가 가끔 토라진 모습이나 화내는 모습을 많이 보이긴 했어도, 감당이 안될 정도는 아니었다. 가끔 가다가 그게 오히려 귀여워보일 정도로 애교있는 모습으로도 생각되었으니까 유아 선배의 경우는 상당히 양호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여자는 다르다. 뭐랄까. 감당이 안된다. 절대로 감당할 수 없다. 아직까지도 작은 목소리로 '남자 따위는...'이라고 중얼거리고 있다. 그 정도로 남자가 싫은건가. 과거의 트라우마라도 있는거냐. 저 여자. 그래도 아까의 변칙 공격은 꽤나 괜찮았다. 단순한 찌르기 공격 형태가 아니라 도중에 유연함을 가지고 베기 공격을 택한 것은 괜찮은 선택이라고 보여진다. 비록 들고있는 검(다시한번 말하지만 나무 막대기다.)이 펜싱의 검과도 비슷해서 굉장히 얇아 그 위력이 많이 반감되는게 사실이지만, 기습 공격이라는 것은 위력이 크든 적든 통하기만 하면 육체적인 데미지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데미지까지 줄 수 있는 효율적인 수단이다. 그래서 예전에 삼국지나 이런 책을 보면 적은 인원으로 매복이라든지 하는 수단을 통해서 대군을 물리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는가. 순간의 방심을 역이용한 효율적인 공격이라고 생각된다. 결론으로 압축하자면 저 여자, 말은 시끄럽게 해도 굉장한 실력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이봐." "누구한테 말을 거는거야! 저질! 변태!" "그러니까 아직 무슨 행동을 취하거나 한 게 아니라니까." "남자라면 존재 그 자체가 죄악이야!" "그럼 그쪽 아버지 분은?" 순간 말문이 막힌 여자. 녀석이 여기에 있다는 소리는 자신을 낳게 해준 어머님과 아버님이 있다는 소리 아닌가. 잠시 망설이던 여자가 더듬더듬 말을 내뱉기 시작한다. "아, 아빠는 특별해!" "아빠란 말이지..." "뭐야!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는게 이상해?!" "아니. 전혀." 다만 조금 귀여워 보인다고 해야할까. 딱딱하게 '아버지'라고 부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친근성 있게 '아빠'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나름 귀엽군. 음... 하지만 재잘거리지만 않으면 더 귀여울텐데. "아무튼 나는 댁이 싫어할 정도로 이상한 짓은 하지 않았다고. 그러니까 그 나무 막대기를 내려놔." "싫어." "어째서?" "그런 식으로 나를 방심하게 해서 덮칠 생각이잖아!" 속고만 살았나. 왜 이리 의심이 많은 것일까. ============================ 작품 후기 ============================ 어제 새벽 5시까지 마시고, 오늘 아침 7시쯤에 잤습니다. 덕분에 아직까지도 졸리군요. 잠이 역시 최고입니다. PS. 오늘 2월 요정이 끝나다니... 아직 카나리아하고 알카로이드도 풀돌 못시켰는데 ㅜ_ㅜ 81화 그래도 저 여자의 말에 어느정도 공감은 간다. 그렇다고 내가 여자의 입장에서 공감이 간다는게 아니라. 어느정도 이해가 된다는 뜻이다. 생각을 해보자. 낯선 무인도, 그러니까 자신을 보호해줄 경찰이나 사회, 그리고 법이라는 보이지 않는 보호막이 없는 이 무법지대,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남자와 여자가 있다. 그런데 과연 그 여자가 남자를 믿을 수 있을까? 남자라는 존재는 성욕이라는 감정에 상당히 충실한 존재. 내가 말하기도 그렇지만, 그래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여자를 방치하기에는 위험하다. 혼자서 여기서 살아온거 같은데, 우리들이 있는 장소로 대리고 가서 좀 더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은가. 결코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 아니다. 이건 순수한 배려심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거다. 아무튼 그 이상은 시간끌기 싫다. 이제 행동으로 옮기자. 빠르게 다시한번 돌진한다. 여자도 갑자기 내가 이런 식으로 다가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시 놀란 눈치. 하지만 그렇다고 멈출 생각은 전혀 없다. 부우웅! 찌르기 공격이 들어온다. 이번에도 가볍게 회피. 그리고 이어지는 두번째 연타가 시작된다. 내가 피한 방향으로 베기 공격이 들어온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공격이었지만, 실제로 상당히 피하기 어려운 공격. 그러나 나도 바보는 아니다. 여기서는 이런 방향으로 하는 것이다. 빠아악!! 왼손의 팔목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얇은 막대기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정면으로 맞는 것은 꽤나 아프다. 설마 내가 팔로 막대기를 막을 것은 생각해지 못했나보다.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여자의 손을 그대로 잡아 뒤로 꺾는다. "아야!!" "조금만 참아." 그리고 그대로 여자의 나머지 손에 들린 막대기를 반 강제적으로 놓게 한 뒤에 몰래 챙겨온 밧줄로 여자의 손을 묶는다. 손을 허리 뒤로 위치시킨 뒤에 똘똘 줄을 묶어 포박에 성공한다. 억지로 무릎을 꿇게 하자, 여자가 나를 사납게 올려다본다. "비겁한 녀석!" "그래도 나름 아픔이라는 고통을 감수하고 성공시켰잖아. 이 정도면 비겁하진 않지." "흥!!" 토라진 여자의 두건을 벗겨낸다. 검은색의 천 아래에 꽤나 아름다운 용모가 내 시야에 들어온다. 금발의 여성. 눈동자도 파랗다. 이 여자도 외국인인가? 하지만 분명 우리나라 말을 썼다. 그것도 엘리처럼 어색한 말이 아니라 유창한 말로. "이름이 뭐지?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사람인가?" "... 질문에 대답할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 "뭐, 강제적으로 대답하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그래도 상호 협력관계를 유지하는게 보기 좋잖아. 그렇지?" "... 흥." 여전히 세침데는 녀석. 여객선이 이런 미인이 타고 있었나. 배 안에서 나름 많은 여성들을 봤다고 자부하지만, 금발의 파란 눈동자를 가진 이국적인 미인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워낙 여자에 관심이 없다보니... 는 거짓말이고. 관심이 없으면 배 안에 있던 여자들을 유심히 봤을 이유가 없겠지. 사실 대인관계가 그렇게까지 좋지 않은 관계로 누가 누구와 사귄다 이런 것은 많이 취약하다. "... 이세린." "뭐?" "이세린이라고!" "그게 네 이름이야?" "그래! 그것보다도 함부로 부르지 마! 그 더러운 입으로!" "나름 깨끗하다고 생각하는데." "낯선 남자한테 내 이름을 불리고 싶지 않다 그 말이야!"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하는 녀석... 이 아니라 세린. 모처럼 이름까지 들려줬는데 성명을 말해줘야지 혼잣말이라고 이 녀석 저 녀석 말해주면 조금은 섭하리라는 생각에 이제부터 이름을 불러주도록 하지. 이국적인 외모와 다르게 한국형 이름이란 말이지. "이세린. 그럼 넌 여기서 혼자 살고 있었어?" "왜 그런 질문을 하는거지?" "그냥 동료가 있는지에 대한 가벼운 질문이야." "흥. 분명 내게 동료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다른 여자들도 강간하려고 다가서겠지." "나는 그렇게까지 변태가 아니라고. 그것보다 동료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게 좋겠지? 그거." "무, 무슨 소리야. 없다고 했잖아!" "아니. 너는 분명 이렇게 말했어. '다른 여자들'이라고 말이야. 나는 아직까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별조차 모르는데 스스로 '여자들'이라고 말을 했다는 소리는 분명 같이 있는 동료들이 있고, 그 동료들이 '여성'이라는 뜻이잖아. 그렇지?" "......" "어때? 내 추리력이." "바보 그 자체네." 여전히 나를 적대시하는 여자.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도 데리고 나가는 게 좋다고 생각한 나는 세린의 팔을 잡으려고 손을 뻗는다. 그러자 세린이 기겁을 하면서 비명을 지르는게 아닌가. "꺄ㅡ악! 건드리지 마!" "... 알았어. 알았으니까 내가 건드리는 것이 싫다면 스스로 일어나서 걸어."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는 세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알아서 걷기 시작한다. 그토록 반항하다가 순순히 말을 들을 정도로 남자의 손을 받아들이는게 싫단 말인가. 정말 극한의 남성혐오증을 보여주고 있었다. 세린을 앞세우고 아래로 내려가는 우리. 덜컹덜컹 거리는 배의 구조물 내부를 벗어나 바깥으로 나오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누나와 세리아가 나에게 다가오며 말한다. "남동생. 그 아이는?" "우리와 같은 배에 타고 있던 여자. 이름은..." "이세린." 나에게 대할 때와의 태도와 그다지 변함이 없는 말투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완화는 되어 있었다. 같은 여자를 봐서 안심이 되는 것일까. 누나가 나에게 다가와 조용히 속삭인다. "풀어주는게 어때?" "... 아무래도 그러는게 좋겠지." 더이상 나를 공격할 이유도 없을테고, 무기도 진작에 빼앗았으니 위협을 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맨손 격투라면 내가 한수 위다. 척 봐도 세린은 검이 없으면 싸우지 못하는 체질로 보이기 때문에 누나의 말대로 포박을 풀어준다. 자신의 팔을 매만지며 나를 노려보는 세린. 옆에 있던 세리아가 걱정이 되는지 세린의 팔목을 이곳저곳 만져준다. 포박줄로 인해 약간 자국이 생긴 상황. 세리아의 관심에 세린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고마워... 대학년이니?" 고개를 끄덕이는 세리아. 말을 못하는 세리아를 대신해서 누나가 대신 말을 꺼내준다. "세리아는 말을 못해." "그런가요." "너, 아마추어 펜싱대회에 나왔던 그 여자애 맞지?" "... 절 아는 사람이 있다는게 조금 의외인데요." "그래? 스포츠 채널에서 널 한 번 본 적이 있던 거 같은데." 팔짱을 낀 채 싱긋 웃어보이는 누나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프랑스 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미소녀 혼혈아. 부잣집 아가씨에 펜싱 실력도 수준급. 작년에 대회에서 우승했다고들 하지?" "개인적으로 조사라도 하셨나요?" "이 정도의 정보량을 내가 알고 있을 정도로 이세린이라는 여자는 꽤나 유명하단 말 뜻이겠지. 그렇지?" "근데 저 남자는 제 이름을 모르던데요." "아, 저 녀석은 내 남동생이야. 워낙 둔감한 녀석이니까 그냥 그러려니 했으면 좋겠어." "누나. 그런 말을 하면 안되지." 그래도 누나 덕분에 어느정도 분위기가 완화되었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성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2명이나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세린의 표정은 조금 긴장이 풀어진 모습이었다. 화내는 표정보다 저렇게 평소의 표정을 보니까 조금은 예뻐보인다. 누나의 말대로 미소녀이긴 하지만, 그래도 대놓고 처음 보는 사람(남자 한정)에게 무턱대고 '죽어버렷!'이라 외치며 검을 휘두르는 것은 그래도 좀 감당하기 힘들지. "그런데 여기 머무르고 있는거니?" "네." 일단 누나가 선배인지라 존댓말을 사용하는 세린이었다. 나름 격식은 갖추는 것으로 보인다. 무례한 녀석은 아니라서 다행이군. 아리아와는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니까 정말 다행이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확밀아 하느라 글 올리는 걸 깜빡하고 있었습니다. ^_^;; 82화 세린의 말을 듣고 있던 누나가 나름 화사하게 웃으면서 다시 질문한다. "그럼 몇가지 물어볼까?" "동료의 존재를 물어보시려는 거죠?" "잘 아네. 남동생에게 아까 조금 들었는데, 아마도 동료가 있을거라 하던데." "... 있어요." 내 예상이 맞았다. 아니지. 내 추리력이 맞았다. 이럴때는 평소에 명탐정 코난이나 소년탐정 김전일 같은 추리만화도 도움이 되는구나 라는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다. "몇명정도?" "2명이요." "다 같은 학생?" "아니요. 다른 한 분은 학생이 아니에요. 선배." "딱딱하게 선배라고 부를 필요 없어. 그냥 언니라고 불러줘도 돼." "... 그럼 언니." 약간 빨개진 표정으로 언니라는 호칭을 부른다. 그러자 누나가 싱긋 웃으면서 세린의 말에 대답한다. "그래그래. 이 언니, 여기 있어." "같이 있는 동료중에 한명은 저보다 후배, 그러니까 세리아와 같은 1학년이고 다른 한명은 언니도 잘 아시는 분이에요." "나도?" "양호 선생님이에요." "선생님이라고?" "고등학교에서 근무하고 계신 분이라고 들었어요." 세린의 설명에 의하면, 30대 초반으로 노아 교수님 보다는 나이가 많은 성인 여성이라고 한다. 양호 선생님 이름은 안지아. 얼마전에 결혼을 하셨지만, 남학생 한정으로 그 인기는 하늘을 찌를만한 절정 상태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양호 선생님 특유의 약간은 망가틱한 지위에 초 미니 스커트, 그리고 흰색의 스타킹과 가운. 마지막으로 거유(巨乳). 노아 교수님보다도 큰 엄청난 가슴을 가지고 있는 섹시한 양호 선생님이라고 한다. 일본 야동에서나 볼 법한 설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런 콘셉트 설정을 가진 양호 선생님이 존재하고 있을 줄이야. 이건 좀 의외였다. "남동생. 어째 눈빛이 점점 수상해지는데." "그, 그럴리가!" 설마 양호 선생님을 상상하던 내 모습이 그대로 바깥으로 표출된 것인가. 이럴수가. 나름 포커 페이스라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역시 남자는 저질이야! 음란한 생각밖에 안하고." "......" 곧바로 세린의 경멸어린 말과 세리아의 실망의 눈초리가 쏟아진다. 순식간에 여자들의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나. 이래서 남자는 절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남자가 변태인가 뭐가 나빠서. 남자가 변태이기 때문에 인류가 이렇게 번영하게 된 거 아닌가. 세린의 말대로라면 곧 이 곳에 과일을 따러 간 지아 선생님과 유체리라는 1학년 여학생이 돌아온다고 한다. 거의 해가 저물어갈 무렵까지 기다리던 우리들. 도중에 세린에게 지금까지 자신들이 여기서 머물고 있었던 일들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세린 본인도 정신을 잃고 해안가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쓰러진 자신을 발견한 지아 선생님이 체리와 함께 이 곳으로 당도하고 나서 거처로 삼고 그동안 근근히 풀과 과일들로 연명을 해왔다고 한다. 물같은 경우에는 배의 난파된 구조물 내부에 몇개씩 굴러다니고 있어서 호수가 없어도 어느정도의 식수는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세린의 말을 듣던 누나가 한숨을 쉬면서 말한다. "너도 나름 고생했구나." "......" 살짝 눈시울이 붉어지는 세린. 자신보다 연상인 누나의 말을 듣자 약간 울컥했는지 이내 곧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 흑..."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만 세린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누나. 그녀의 풍성한 금발을 따스한 손길로 쓰다듬어 주면서 진정하라는 듯이 세린을 위로하기 시작한다. 옆에서 걱정이 된 것인지 세리아도 세린의 옆에 앉으며 손을 잡아준다. "... 고마워..."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억지로 웃는 이세린. 아까의 기가 드센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린 표정에 나도 약간은 그녀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던 것일까. 부잣집 아가씨로 자라나 이런 고생은 하지도 않았을 터인데. 생판 모르는 무인도에 와서 낯선 과일과 풀들로 목숨을 이어가며 언제 올지도 모르는 구조대를 기다리는 것은 육체적으로도, 그리고 심적으로도 상당히 고된 일이라는 사실은 경험한 우리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 나 역시도 처음에는 노아 교수님과 같이 이 무인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나조차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교수님에게 용기를 복돋아 줄 수 없을거 같아서 억지로라도 기운을 내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 것이 아리아와 세리아를 만나게 해주었고, 그리고 누나와 엘리를 만나 지금은 어느정도 자급자족의 수준까지 우리들을 이끌어준 것이다. 살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반드시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 사람의 내면적인 힘은 그 어떠한 무기보다도 강력하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들은 이 각박한 환경 속에서 다른 어떠한 무기들 보다도 살고자 하는 목표 하나만으로 충분히 무인도에서 살아갈 희망을 품을 수 있다고 그렇게 믿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이 난파된 배의 구조물에서 부족한 생활을 해온 이세린과 양호 선생님, 유체리라는 여자아이도 마찬가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을 만났다. 이것도 다 인간의 힘. 대 자연에 맞선 사람의 의지인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두명의 낯선 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흰색 가운을 걸치고 있는 양호 선생님. 그리고 세린이 말했던 유체리라는 여학생으로 보이는 아이. "너희들...!" "안녕하세요, 선생님?" 평소에 친분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유난히 양호 선생님과 친해보이는 누나였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오지랖이 넓은 누나의 성격으로 보아선, 초면이라 할 지라도 일부러 친근감 넘치는 인상과 말을 주고 받으며 친분을 쌓으려는 시도라고 생각된다. 반면에 양호 선생님의 뒤로 숨으면서 우리들을 경계하는 표정을 보여주는 유체리. 특히나 나를 많이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아이도 설마 남자 혐오증이라는 것은 아니겠지. 누나와 함께 나에게 다가온 양호 선생님이 나에게 손을 내민다. 나 역시도 손을 내밀어 양호 선생님의 부드러운 손을 잡으며 악수한다. "생존자? 반가워. 이름이..." "유에라고 합니다. 그쪽에 있는 누나의 친동생이죠." "아, 그렇구나..." 말 끝을 흐린 양호 선생님이 세리아에게 시선을 돌리자, 옆에 있던 누나가 자연스럽게 세리아를 소개해준다. "이 아이는 우리와 같은 학교에 재학중인 세리아라고 해요." 서로 부담감 없이 자기소개를 나누던 우리들 중에서. "서, 선생님..." 뒤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체리가 양호 선생님의 팔에 매달리며 말하자, 지아 선생님이 풋 하고 웃으면서 우리들에게 말한다. "아 아이는 유체리. 너희들과 같은 대학교 1학년이야. 세린에게 들어서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바, 반가워요..." 여전히 무서워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특히나 나를 말이다. 내가 그렇게까지 여자들에게 무서움을 선사해주는 인상인가?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진 않았는데. 조금은 상처받았다. 쳇. ============================ 작품 후기 ============================ 이번 확밀아 이벤트 때, 다른 분들은 명찰 어떻게 모으시나요? 저는 아무리 해도 명찰이 잘 안 모이던데... 83화 EP 12. 대뇌의 전두엽까지 복통이 전해지는군! "다른 생존자가 더 있다고?" 지아 선생님의 놀라움 섞인 말이었다. 내 뒤를 따르는 동안에 누나가 그동안의 상황 설명을 이미 마친 상황. 지금까지 우리가 엘리라는 동반자를 만나서 그 곳의 산장에서 신세를 지고 있다는 등 하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언니쪽도 고생이 많았네요." "그래도 나름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까." 세린이 세삼 감탄했다며 말하자, 누나가 윙크하며 대답한다. 사실 평소의 생활을 따지자면 오히려 풍족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도 민망하리라 생각이 들지만, 사실이 그랬다. 무인도에서 그래도 그 정도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사치이자 운이 좋다는 뜻 아닌가. 이것도 다 엘리라는 조력자를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엘리가 무인도에 표류된 지 지금까지 남아있는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엘리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불행이니까 말이다.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지아 선생님이 다시금 생존자들의 이름을 되내이기 시작한다. "은발 미소녀 자매 중 동생쪽도 있고, 그리고 검도부 부장이라면... 이유아라고 했었니?" "네. 선생님." "생각보다 남녀 성비가 엉망이네." "그러게요. 저 혼자만 남자니까요." 생존자들의 명단을 듣던 지아 선생님이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더니. "그러고보니 노아와는 예전 선후배 사이였지. 너와 유아라는 여자와 같이." "같은 학교에 다녔었나요?" "뭐, 예전 일이지만. 노아는 건강히 잘 지내고 있나 모르겠네." 나이로 치자면 지아 선생님이 더 연상이기 때문에 노아 교수님을 가리켜 그냥 편하게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평소에도 교직 생활에서 알고 지내는 선후배 사이라며 그 두터운 친분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노아가 너희한테 폐를 많이 끼쳤을거 같은데." "... 뭐..." 부정을 할 수는 없다. 노아 교수님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교수님 치고는 그다지 명확한 역할을 하지 못한게 조금 흠이라고 해야 할까. 교수님의 성격을 고려해보자면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이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노아 교수님도 나름 파란만장한 생활을 거치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아리아에게 암캐라는 말도 들어보고, 그리고 소변도 마셔보고. 노아 교수님에게 조금은 미안한 감정이 들기 시작한다. 아무리 생존을 위해서 선택한 극단적인 상황이라고 해도, 교수님에게 못할 짓을 한 것은 맞는 일. 나중에 구조대를 통해 무사히 이 섬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된다면 무릎을 꿇고 서라도 사과를 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내 마음이 더 불편할거 같기 때문이다. 거의 해가 저물기 전에 도착한 산장. 그곳에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B팀이 우리들 말고도 3명의 생존자를 보더니 놀란 눈으로 다가오며 말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여러가지 일이 있었죠." 유아 선배의 물음을 듣자마자 제일 먼저 튀어나온 대답이 바로 이거였다. 엄청 두루뭉술한 대답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너무 긴 이야기인지라 마땅히 해야 할 첫마디가 떠오르지 않아서 이런 형편없는 대답을 들려준 것이다.' 뒤에서는 노아 교수님이 지아 선생님을 보더니 눈시울이 붉어지며 달려간다. "선배님ㅡ!" "... 잘 있었어? 노아." 양호 선생님의 품에 안겨 훌쩍이는 노아 교수님. 그동안 유일한 성인이자 연장자로서 마음 고생이 심했을 노아 교수님의 기분이 눈물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었다. 교수님이 여러모로 이만저만 고생이었다는 것은 우리들도 다 아는 사실. 교수면서 오히려 우리들의 짐만 되는 그 기분은 지금까지 말로 하진 않았지만, 내심 신경쓰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다른 만남은 끝이 나질 않았다. 왜냐하면 유아 선배의 말이 곧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 이세린이지? 너." "유아 언니?" "살아 있었구나." "운이 좋았어요." 도도한 모습으로 자신의 금발을 쓸어넘기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세린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누나의 품에 안겨서 울고 있었으면서도 애써 강한 척 하는 이국적인 외모의 소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유아 선배가 속해있는 검도부와 세린이 속해있는 펜싱부는 서로 라이벌 관계라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서로간의 이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뭐, 펜싱부의 에이스가 그렇게 쉽게 죽을리는 없죠." "여전하구나. 그 태도." 질렸다는 듯이 대답하는 유아 선배. 원래부터 이런 컨셉이었나. 이세린이라는 녀석 말이다. 자라온 환경 자체가 우리들같은 서민에게는 상상이 전혀 안되는 부잣집이라고 해도, 그래도 쉽게 이런 태도를 컨셉으로 잡기는 어려울텐데 말이다. 어떤 의미로 정말 대단한 녀석이 아닐까 한다. "선배." 나에게 다가온 세리아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뒤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체리를 가리키며 말한다. "누구인가요." "너와 동갑 여자. 이름은 유체리라고 해." "... 오다가 선배가 겁이라도 줬나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거냐." "아니. 왠지 모르게 겁을 먹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모든 악의 근원은 다 나냐?" "그 경우의 수가 제일 가능성이 크잖아요." "......" 역시나 이 녀석에게는 못당하겠다. 후배 주제에 말은 정말 잘한단 말이다. 어디 웅변 학원이라도 다닌거냐. 대략적으로 자기소개를 들은 아리아가 당당하게 걸어가며 체리에게 손을 내민다. "반가워. 나와 동갑이라며? 이름은 아리아. 잘 부탁해." "자, 잘... 부탁합니다." 동급생이면서도 존댓말을 하는 체리의 말에 아리아가 약간 한숨을 쉰다. 대략적으로 봐도 엄청나게 소극적인 태도를 지닌 여학생이라는 사실을 단박에 알 수가 있기 때문에 그다지 태클을 걸지 않는 아리아였다. 역시 이런 면에 있어서는 눈썰미가 정말 좋은 녀석이다. 다른건 몰라도 이런건 본받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절대로 안들지만 말이다. 아무튼 간략한 인사를 나눈 우리는 일단 양호 선생님 일행을 산장 안으로 들여보내기로 한다. 어차피 밤도 늦었고 해서 저녁식사도 준비할 겸 모두 모인 이 산장. 총 10명이라는 두자리 숫자로 불어난 인원수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보인다. 내가 만든 의자 갯수도 3개가 부족한 상황. 내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의자부터 만들라는 유아 선배와 세린의 지시가 떨어진다. 선배는 그렇다고 쳐도 세린은 도대체 뭐시다냐. "오자마자 주문이냐." "남자 주제에 말이 많아. 정말." 흥! 이라고 코웃음을 치면서 내게서 멀리 떨어지는 이세린. 체리한테 들어보니 저 녀석, 정말로 남성 혐오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유를 물어봤지만, 그건 체리도 알 수 없다고 한다. ... 라고 아리아가 중개 역할을 해주면서 체리의 말을 전달해주었다. "왠지 체리든 세린 선배든 다 유에 선배를 싫어하는거 같은데요." "시끄럽다." 굳이 현실을 언급하지 말란 말이다. 괜히 비참해지잖아. 내가 그리도 여자들한테 호감도를 살 수 없는 인상이라도 되는 것인가. 나름 잘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절대로 왕자병이 있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봐도 잘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아니한가. 의자와 탁자를 치워두고 거실에 동그라미 형태로 앉은 우리. 그 사이로 누나와 세리아가 귀여워보이는 식기도구 찻잔에 음료수를 따라가지고 온다. "짜잔. 유린 특제 코코넛 음료수 나왔습니다." "코코넛이라고?!" "그냥 열매 이름을 모르니까 그렇게 붙여봤어." 그러고보니 나는 코코넛 열매를 먹어본 적이 없다. 가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나 지구탐험대 이런 것을 보면 배우나 연기자, 텔런트가 나와서 코코넛 열매를 시원스레 마시는 모습이 자주 보이던데. 그런데 실제로 먹어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다지 맛이 없다고 한다. 누나의 말대로 코코넛(이라고 부르기로 한 열매의 음료) 열매 음료를 한잔씩 마시는 우리들. 약간 달짝찌근 하면서도 시큼하다고 할까. 매일 물만 마시다가 이런 자극적인 음료를 마시니 나름 괜찮다고 본다. "생각보다 맛있는데?" "그렇지? 나도 처음 먹어보고 나서 괜찮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유아 선배가 긍정적인 의견을 표시하자 만연의 웃음을 띄우며 좋아하는 누나였다. 유아 선배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꽤나 호평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심심치 않게 마셔도 괜찮을거 같은데." 나도 그 호평에 동참한다. 이것으로 무인도에서 즐길 수 있는 사소한 즐거움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인가. 나도 참 시야가 많이 좁아졌다. 예전에는 편의점에서 초코우유나 사이다, 콜라같은 것은 돈만 주면 언제든지 사먹을 수 있었는데, 무인도에서는 그런 탄산음료 구경 조차도 못하고 정체불명의 나무 열매 야자수에나 만족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럴줄 알았다면 평소에 과자나 음료수를 많이 먹어둘걸 그랬다. 당분간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질리도록 말이다. 하지만 그 전에 용돈이 먼저 바닥나겠지. ============================ 작품 후기 ============================ 이 에피소드 올리기 전에, 뜬금없이 배가 아파서 잠시 화장실에서 큰 일을 보고 왔습니다. 아닌 새벽에 급 대변이라니... 84화 나름 기분을 내면서 음료수도 한잔 했겠다. 그동안 서로 무인도에서 겪었던 갖은 고생을 토로하면서 담화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노아 교수님은 양호 선생님에게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하면서 연신 웃는 표정을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마치 자매같다고 해야 할까. 노아 교수님의 표정이 저렇게 밝게 보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연상의 여자가 있다는 것은 나름 든든한 버팀목이 되나보다. 교수님과 선생님들끼리의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나. 두명의 거유...가 아니라 두명의 어른이 이야기하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흐뭇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보기 좋다. 게다가 둘 다 한창 물오른 요염한 육체의 소유자들 아닌가. 양호 선생님은 결혼까지 했으니 유부녀라는 독특한 지위 덕분에 약간 새롭게 보인다. 설마 벌써부터 양호 선생님을 여자로 보는건 아니겠지. 현재의 나야. 선생님은 결혼 하셨다고. 무슨 큰일날 생각을 하는거냐. 속으로 이성과 본능이 서로 줄다리기를 하면서 간이 운동회를 하고 있을 무렵, 유아 선배가 세린에게 다가가서 비아냥 거리는 말투로 말한다. "이세린. 너, 유에한테 졌다며?" "지, 진 거 아닙니다만." "그래? 내가 들은 바로는 갑판 위에서 유에와 싸우다가 포박당했다고 하던데." "그, 그건..." 새빨개진 얼굴로 계속 부정하는 세린. 하지만 결과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의 패배였기 때문에 아니라고 말해봤자 그건 떼를 쓰는 일에 불과할 뿐이다.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세린 본인도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승기를 잡았는지 살짝 미소를 머금은 유아 선배가 쐐기를 박듯이 말한다. "여지껏 무패를 달성하던 너의 전적에 자랑스런 1패가 새겨지는 순간이구나." "이건 정식 대전도 아니었으니까 무효에요!" "그래도 승부는 승부잖아." "큭..."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세린의 프라이드가 엄청 높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 유아 선배와 비교해도 전혀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이세린이라는 녀석은 자존심이 드세다. 그렇다고 둘의 '자존심'이라는 단어의 용법이 완벽하게 똑같이 적용된다는 뜻이 아니다. 유아 선배는 승부욕과 관련된 자존심이라고 치자면 세린은 '콧대'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존재는 우월하다는 그런 느낌을 많이 받을 수 있다. 우리 누나가 공주병을 가지고 있다면, 세린은 '여왕병'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옳을 정도로 말이다. 여기서는 일단 내가 양보를 해야 하나. 가뜩이나 남자 혐오증까지 가지고 있는 녀석한테 더이상 미움이라는 이름의 낙인 도장을 찍히기도 좀 그렇고 해서 태평양 같은 넓고 마리아나 해구같은 깊은 아량으로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그건 엄밀히 따져보면 제가 진 거예요." "어째서?" 예상대로 되묻는 유아 선배. 자신의 말에 반론을 달을 줄은 몰랐다는 듯이 약간 딱딱한 말투로 말한다. 나중에 유아 선배에게 진탕 갈굼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든다. "만약에 세린이 들고 있던 검이 '진검'이었다면, 제가 졌을테니까요." "네가 나무 막대기를 팔로 막은거?" "네. 만약에 그렇지 않았다면 치명상은 아니더라도 중상 정도는 입힐 수 있었을걸요." "그건 이야기가 다르지. 애초에 너는 세린을 때릴 생각조차 없었잖아. 만약에 네가 진짜로 마음먹고 이 녀석을 공격할 생각이 있었다면 그런 번거로운 수단을 택할리는 없었을거 아니야. 그렇지?" "유아 선배. 대련이라는 것에는 엄연히 제 주관적인 판단이 승부의 갈림처가 될 수 있어요. 여자라는 어드벤티지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세린을 때리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한 건 엄밀히 말해서 제 판단이니까 결과는 매한가지 였을걸요." "... 뭐야. 너, 갑자기 세린 편을 들어주는거 같은데." "그냥 승부에 대해서는 그렇게 마무리를 짓고 싶다는 의도일 뿐이에요. 별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노골적으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하는 유아 선배. 왜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거야 라는 항의성 짙은 의도가 느껴진다. 미안합니다. 선배. 나중에 화를 풀어줄테니 지금은 세린의 비위에 맞춰주는게 좋아요. 한편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린이 나와 시선을 마주친다. 그러자 놀란 세린이 입을 뻐끔뻐끔 거리더니 다시 화를 내면서 나에게 말한다. "벼, 별로 감싸달라거나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고맙다고 말할 생각은 전ㅡ혀 없으니까!" "알고 있어. 감싼것도 아니고, 나도 그럴 의도는 없었으니까." "... 흥." 여전히 까탈스럽다. 이런것도 나름 적응되면 귀여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전에 세린이 가지고 있는 남자 혐오증을 좀 어떻게 극복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세리아 처럼 정신적인 트라우마라는 걸림돌이라도 있는 것일까. 알다가도 모르겠다. 자정이 다 될 무렵. 각자 배정받은 공간에서 잠을 청하기로 한 우리들. 그러나 대거 인원수가 늘어났기 때문에 방 배정의 문제도 심각하게 고려되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다름아닌 나. 왜냐하면 10명으로 늘어난 인원수이기 때문에 이제는 명확하게 리더라는 존재를 정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결국 내가 리더의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진작에 리더 비스무리한 자리에 있긴 했지만, 이제는 어림잡은 리더보다는 확실한 권한을 부여받은 셈인 것이다. 그래서 자리배정 역시도 결국 내가 정하기로 했다. "일단 침실이 좁긴 해도 취침을 취할 수 있을만한 장소니까 가급적이면 많은 인원수로 채워 넣었습니다. 침실 공간에 6명, 그리고 거실에 4명. 화로같은 경우에는 2명씩 조를 짜서 불이 꺼지지 않게 마른 장작을 계속 넣어주면 되고요. 조는 아까 말씀드렸죠?" 내 질문에 모두가 사이좋게 입을 모아 '네~'라고 대답한다. 무슨 유치원 선생이 된 기분이다. "그런고로 각자 배정받은 공간에서 잠을 취하도록 합시다. 부족한 이불의 갯수는 누나가 만들어둔 담요로 채우고요." 참고로 저번에 누나가 가져 온 옷으로 임시적인 담요를 몇개 만들었다. 이불이라고 부르기는 좀 민망하고, 그래도 나름 가리개 역할은 할 수 있으니까 담요라는 호칭을 부여해줬다. 이불은 총 3개. 그리고 임시적으로 만든 담요 역시도 3개. 그 중에 하나는 내가 덮기로 하고, 나머지는 성인인 노아 교수님과 지아 선생님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럼 불침번 초번을 제외하고 모두 취침에 들어가죠. 피곤하실테니 푹 주무시고요." 내 말을 끝으로 각자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간다. 거실쪽에 배치된 인물은 나를 포함해서 양호 선생님, 유아 선배, 그리고 이세린. 침실쪽 팀 구성원은 노아 교수님과 아리아, 세리아 자매, 엘리, 누나, 마지막으로 체리가 되었다. 처음에는 이런 배치에 남자와 한 공간에서 자야 한다는 억울함을 토로하던 세린이었지만, 리더의 권한이 막강해진 탓인지라 그다지 격렬하게 항의하진 않았다. 그냥 불평불만만 살짝 내비치는 정도. 어차피 단 둘만 자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있으니까 세린의 불만은 어느정도 억누를 수 있었다. 참고로 불침번 초번은 나와 지아 선생님. 가급적이면 양호 선생님과 이세린, 그리고 체리를 원래 우리쪽 멤버와 팀을 짜게 구성했다. 서로간의 어색함을 없애고자 일부러 그런 조 편성을 짠 것. 부연설명으로 꺼내보자면 세린은 그나마 친분이 있는 유아 선배와, 그리고 체리는 세리아와 팀을 짜게 해뒀다. 1학년 끼리 묶어두면 나름 편하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 작품 후기 ============================ 확밀아 2월 중순~말 요정 결산을 내봤습니다. 카나리아 4돌 알카로이드 (키라) 3돌 코플 (키라) 풀돌 쿠루밍 풀돌 리바이어선 3돌 이상입니다. 리바이어선은 굉장히 애매한 수준이라서 합성 재료로 사용할지 아니면 관상용이라도 놔둘지 고민중입니다. 리바이어선 짱짱걸!! ㅜ_ㅜ 85화 노아 교수님 뿐만 아니라 양호 선생님이기도 한 지아 선생님도 손목시계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들이 현재 불침번을 서고 있는 시간이 12시임을 알 수 있었다. 추운 새벽공기를 내쫓아주는 역할을 하는 화로에 마른 장작을 넣는 나. 의자에 앉은 채 약초도감을 보는 지아 선생님은 다리를 꼰 채 천천히 도감을 넘기며 내용물을 살펴보고 있었다. 영어로 서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힘없이 읽어 내려가는 지아 선생님. 학교의 선생이라는 지위에 있는 분들은 다들 저렇게 영어를 잘하시나. 조금은 존경스러워질 정도다. "......" 안경을 쓴 채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넘기는 지아 선생님의 모습. 노아 교수님도 물론 성인 여성이기는 하지만, 지아 선생님은 뭐라고 해야 할까. 진짜로 어른이라는 느낌이 확 와닿는다. 실제로 결혼도 했고, 그리고 나와 나이가 대략 10살 정도 차이가 난다. 대충 띠동갑 수준이라고 할까. 30대 초반인데도 불구하고 저렇게 볼륨있는 몸매를 유지하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도감 한 페이지 한 페이지씩 넘기며 꼼꼼히 내용을 살피던 지아 선생님이 장작을 넣고 있던 내게 말한다. "마취약을 찾아낸 것이 아리아라고 했었지?" "네. 그 도감에 있는 내용물을 살펴보니 나와있다고 하더라고요." "제법 약초에 대해 볼 줄 아는 아이구나. 아리아라는 여자애 말이야. 할아버지가 의사라고 하셨나?" "아마도요." "의사와 약사는 분야가 엄밀히 다르긴 한데, 전문 지식도 아니고 어깨 넘어로 본 지식만으로도 잘도 찾아냈네. 조금은 신기할 정도야." 물컵에 담긴 몰을 한잔 마시면서 말하는 지아 선생님의 솔직 담백한 칭찬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리아의 의학 지식이 단순한 상식 정도를 뛰어 넘고 있다는 사실이 양호 선생님에게 있어서는 조금 신기한 모양인가보다. 하긴. 전문 약사도 아니고 일반 대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그것도 한글로 되어있는 책도 아니고 영어로 되어있는 전문용어를 보고서 마취제를 찾은 것이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 보아도 조금은 신기하게 느껴진다. 붉은 입술로 물을 한모금 음미하던 지아 선생님이 다시금 말을 이어간다. "아리아의 눈썰미도 놀랍기도 하지만, 이 도감을 작성하신 엘리의 부모님도 대단해." "아버님이 약사였을까요?" "글쎄. 그것까진 알기 힘들지만, 그래도 어느정도의 약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게 좋겠지. 나도 그렇게까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이 정도의 지식 수준이라면 일반인 치고는 상당한 수준을 자랑하고 있거든." 그래도 실제로 저 약초도감 덕분에 우리가 무인도에서 별다른 병에 걸리지 않고 생활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자연환경에 따른 외적인 요소보다 병이라는 보이지 않는 내적인 위험요소가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어찌보면 가장 위험한 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취제를 만들어서 네가 말했던 그 거대한 멧돼지를 잡겠다 이 말이니?" "일단 계획상으론 그래요." "멧돼지 같은 들짐승을 마취시킬 정도면 직접 주사라는 수단을 통해서 체내에 주입을 시키거나 하지 않으면 힘들텐데." "역시 그런가요." "그래도 전혀 방법이 없는건 아니야. 마취제를 태워서 그 냄새를 멧돼지에게 맡게 하면 되니까. 후각적인 경로를 이용하면 가장 안전하니까. 하지만 그건 너무 수단이 오래 걸려. 직접 투여하는 방법보다 훨씬 축적되는 약의 양이 적기도 하고." "결국 체내에 마취제를 넣는 방법밖에 없다는 뜻이 되네요." "그럴지도 모르지." 몬스터 헌팅에 약간의 문제가 생긴 것이다. 마취제를 개발하면 손쉽게 멧돼지를 사냥할 수 있을줄 알았던 우리였는데, 직접 투여하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약의 효능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하다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리들에게는 '주사기'라는 도구가 없다. 오히려 있는게 이상할 정도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결국 냄새라는 수단을 통해서 멧돼지를 마비시켜야 한다는 뜻인데. 그것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면 사냥할 방법이 없다고 하는것과 마찬가지다. ... 아니지. 한가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호 선생님." "그냥 편하게 지아 선생님이라고 부르렴." "그럼... 지아 선생님. 혹시 '독'의 형태로 체내에 주입시키는 방법도 가능한가요." "독?" 약간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지아 선생님. 흐트러진 안경을 고쳐쓰고선 생각에 잠긴다. 원시시대 부족들을 보면 활이나 창의 끝에 독성을 가진 동물들에게서 채취한 독을 발라 그 독으로 서로 부족간의 전쟁을 하거나 그렇지 않은가. 그 장면을 통해서 혹시나 그런 방식으로 마취제를 투입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을 해본 것이다.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몸을 묻고 고민하던 지아 선생님이 희미하게 눈웃음을 지으면서 말한다. "가능할지도 모르겠네." "정말입니까?!" "순수한 마취제의 형태로는 아니지만, 네가 말한대로 일종의 '독'의 형태로 조금 손을 보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나이프와 창 10자루. 투척용 창이기 때문에 그 끝에 마취제를 발라 멧돼지에게 꽂아 넣으면 된다. 희망이 보인다는 소리인 것이다. 게다가 현재 우리들 중에서는 사냥을 나설만한 인물중에 유아 선배와 엘리, 그리고 나를 제외하고 이세린이라는 전투요원까지 손에 넣었다. 순수하게 운동신경이 좋은 누나도 있지만, 누나는 정말 '운동신경'만 좋을 뿐이다. 실제로 싸우는 방법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어느정도 펜싱이라는 종목을 통해서 외부의 위협적인 공격이 날아오는 것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물이 유아 선배와 이세린, 이렇게 2명이나 있으면 우리쪽에도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원거리로 멧돼지에게 창을 맞추고, 그리고 유아 선배와 이세린이 멧돼지의 시선을 끈 다음에 나와 엘리가 전방으로 나아가서 녀석을 쓰러뜨린다. 어느정도 마취제에 취한 멧돼지라면 저번에 나에게 무식하게 달려들던 그런 위력을 자랑하진 못할테고. 잘하면 녀석에게 한방 먹일 수 있는 수단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도 모르게 혼자만의 생각에 잠기고 만다. 그 모습을 보던 지아 선생님이 작게 웃어보이며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대단하구나. 유에." "저 말입니까?" "그래. 노아뿐만 아니라 아리아, 세리아 자매, 그리고 유아하고 엘리라는 꼬마 아이가 여기까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너'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 그건 과찬이에요. 선생님."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니?" "저 역시도 그냥 평범한 대학생에 불과하니까요." 약간 한숨을 쉬어본다. 방금 언급했듯이, 나는 그저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다. 이런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방법따윈 전혀 모른다. 만약에 이 무인도에서 나 혼자만 살아남게 되었다면, 아마도 나는 3일도 못가고 죽었을 것이다. "우리들이 여기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모두가'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죠." "명답이구나." "그런가요?" "자신이 옳다고 믿고있는 한, 그 답은 적어도 본인 스스로가 믿어주고 있으니 '오답'은 아니라는 뜻이잖니. 정답과 오답의 차이가 뭔지 아니?" "... 정답을 찍으면 맞지만, 오답을 찍으면 틀리다는 차이점 아닌가요." "맞아. 그래서 사람들은 정답보다는 오답을 택하는게 익숙해졌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라는 일종의 시험이나 테스트 뿐만 아니라 인생이라는 이름의 길에서도 마찬가지야. 정답, 그리고 정답만을 택해오는거야. 사람들이라는 존재는 말이야. 다르게 말하면 '정석'이라는 말이 될까. 수학의 정석이라는 책에서 사용되는 그 '정석'이라는 단어." "정석... 입니까." "남들이 '옳다'라고 믿기 때문에 자신도 그 길이 '옳다'고 믿고 있는거야. 하지만 그것이 오답일수도 있어. 다르게 말하면 그 선택안이 정답이라고 '현혹'되었다고 말할수도 있지. 하지만 결국 사회라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어. 신의 입장에서는 오답이지만, 인간이 정답이라고 믿고 있다면 적어도 인간 사회에서는 그게 정답이라는 뜻이야." 잠깐 물을 마신 지아 선생님이 다시 말을 이어간다. "한마디로 말해서 누군가가 어느 하나를 정답이라고 믿고 있다면, 그건 적어도 오답이 아니라는 뜻이지. 누군가가 정답이라고 주장한다면, 소수의 의견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오답이 아닐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일종의 의심. 그리고 군중심리. 그것이 바로 인간사회라는 것이야." "그렇네요." "이 무인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방법은 간단해. 바로 너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좀 더 효율적으로 무인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대안을 '정답'이라고 믿고, 그 정답을 향해서 목숨을 걸고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했기에 지금까지 무인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말이 되는거야. 그리고 이들을 정답으로 이끄는 것이 바로 '리더'의 역할. 한마디로 말해서 유에, 바로 너를 가리키는거야." "......" 솔직히 말해서 지아 선생님의 말은 어느정도 공감이 되긴 했다. 내가 대단하다는 뜻이 아니라, 비록 실패한다고 해도 그것을 '오답'이라고 치부하는게 아니라 '또 다른 정답'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포기하지 않고 덤벼들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무인도라는 환경에서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그 말 자체가 와닿은 것이다. "남자라는 성별의 지위 때문이라는 요소도 어느정도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을게. 이런 방치된 환경속에서 남성, 그러니까 '수컷'의 힘은 암컷보다도 훨씬 더 필요로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너는 남자라는 지위뿐만 아니라 결단력, 그리고 통찰력이 있어. 그렇다고 '유에'라는 인물은 혼자서 무리하게 떠맡겠다는 생각을 하는부류의 사람도 아니야. 자신이 부족한 점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솔직히 말해서 자문을 구하고, 모두의 의견을 존중해서 받아들이는 것이지. 그것이 바로 '너'였기 때문에 가능한거야." 지아 선생님의 말이 다시금 내 가슴속에 새겨진다. 오로지 '나'라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평소에 그저 무의식적으로 그냥 남들과 똑같이 학교에 나가고, 별다른 목표 없이 공부를 하며 취업 전선에 뛰어든다. 오로지 좋은 대학. 서울권에 있는 대학. 그리고 대기업에 취업. 우리 나라는 좋은 기업에만 들어가면 된다는 세뇌교육의 달인 아닌가. 나 역시도 그런 세뇌를 받으면서 학교를 다녀왔다. 나라는 인물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하지만 무인도는 지금의 나를 완전히 바꿔버린 것이다. 그저 책상에 앉아서 노트필기만을 받아 적는 나. 학원과 집을 오가는 나. 그리고 취업이라는 시험만을 생각하는 대학생인 나. 그러나 이제는 그때 그 시절의 나로 되돌아갈 수 없다. 아니,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 그리고 포부. 열망. 욕심. 마지막으로 희망. 이 모든것을 포기하고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다. 현재 나는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속의 작은 톱니바퀴였지만, 지금은 모두를 이끄는 수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당해질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말이다. ============================ 작품 후기 ============================ 좋겠다. 주인공... 86화 피식 웃던 지아 선생님이 반대편 다리를 꼬면서 말한다. "설교가 길었네. 미안해. 나이가 들어가니까 말이 많아지고 있나봐." "아니요. 덕분에 제 자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어머, 그렇다면 긴 시간동안 말을 한 보람이 있네." 눈웃음을 치면서 옅은 미소를 보여주는 지아 선생님. 유부녀라는 지위 때문에 그런지 묘하게 색기 있는 분위기마저 물씬 풍겨온다. "그런데 유에." "네?" "혹시 여기에 있는 여자들하고 '섹스'해본 건 아니겠지?" "......" 역시나 연륜이 묻어나오는 포스. 그 눈길은 피할수가 없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양호 선생님이기 때문에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격리되어 있는 세상에서 남자와 여자가 있다는 말. 그것은 굳이 말할 표현도 없이 육체관계를 가질 수 있을만한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지아 선생님 역시도 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나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여주며 말하는 것이다. 눈 밑에 위치한 점. 그리고 유난히도 붉은 입술. 커다란 가슴에 쭉 뻗은 각선미까지. 무엇하나 부족하지 않은 지아 선생님이 팔짱을 끼면서 나를 바라보고 말한다. "그다지 양심에 찔릴것도 없잖니.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데." "... 지아 선생님. 혹시 노아 교수님한테 들으셨나요." "어머, 금방 눈치채는구나." "역시나." 어쩐지 노아 교수님과 뭘 그리 쑥덕쑥덕 이야기를 나누나 했더니 나와 육체관계를 가진 이야기까지 서스럼없이 해준 모양인가보다. 노아 교수님다운 태도라고 볼 수 있지만, 그래도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지 않은가. 나중에 교수님한테 항의라도 해야겠다. 나름의 프라이버시 침해라고 말이다.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어. 유에. 성욕이라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이니까." "그런가요?" "실제로 나도 무인도에 오고 나서 자위같은 것도 했는걸." "자... 뭐요?!" "자위 말이야." 서스럼없이 말하는 지아 선생님이었다. 이것도 성인 여성의 포스인가. 얼굴에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말하는 것이 마치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입 밖으로 내뱉는 지아 선생님의 태도에 오히려 지려버릴듯 하다. "교수님도 자위를 하세요?" "내가 무슨 성인군자니? 나도 엄연한 여자야. 게다가 결혼까지 한 유부녀. 한창 남편과 섹스를 하며 신혼생활을 즐길 시간에 무인도에 있으니 나로서는 조금 갑갑한 상황일지도 모르지." "그, 그런가요." "그 얼굴을 보니 역시나 20대 청년이구나." "네...?" "실제로 집에 가면 야동같은 것도 많이 보지만, 이렇게 직접 여자가 음란한 말을 꺼내면 괜시리 쑥쓰러워하는 그 모습 말이야." "......" 어딘지 모르게 공감이 간다. 아니, 공감 정도가 아니라 정답이다. 작게 후후 웃으면서 마지막 남은 물을 마시는 지아 선생님이 나를 응시하고선 계속해서 입을 열기 시작한다. "이래봬도 양호 선생님이라고. 한창 성욕이 왕성할 시기인 고등학생 때의 너와 같은 또래 남자들의 고민 상담같은 것은 많이 했으니까." "다른 녀석들은 양호실에 가서 그런걸 상담했나요?" "그럼. 예를 들자면 자위를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발기되질 않아요 라든지, 아니면 자위를 하다가 성기에서 피가 나왔다든지 이런거 말이야." 부러운 자식들. 지아 선생님이 그런 애로틱한 상담을 해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진작 나도 지아 선생님이 근무하고 계신 학교로 전학을 갔을텐데. "뭐, 발기 부전이라고 주장하던 애는 내가 한번 만져주니까 곧바로 스더라." "마, 만져주셨습니까?!" "어머, 어디까지나 진찰의 일환이었을 뿐이야. 그렇다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10대 청소년을 데리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어디까지나 양호 선생으로서의 직업 정신이지." "어떤 식으로 만져줬는데요." "궁금하니?" 도리어 나에게 물어오는 지아 선생님. 역공으로 질문을 받을 것이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기 시작한다. "그, 글쎄요..." "직접 알려줄 수도 있는데." "직접요?!" "... 이리 와서 앉아보렴." 매혹적인 미소로 나를 손직하는 지아 선생님. 남자를 유혹하는 농염한 유부녀의 손길이 내 성욕을 끓어오르게 하기 시작한다.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양 자리에 일어나서 교수님의 바로 옆자링에 위치한 의자에 앉는다. 그러자 교수님이 가느다란 손으로 부풀어오른 성기를 옷 위에서 어루만져주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살짝 터치 정도만 해줬지." "처음이라는 말은... 그 이후도 있다는 뜻인가요?" "그럼. 이대로 끝내면 그 아이한테도, 그리고 나한테도 미안하잖아." "교수님 자신한테는 왜 미안한데요?" "그거야. 젊은 혈기의 정액을 맛볼 수 없으니까." "지아 선생님이 뉴스의 헤드라인에 등장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군요." "뭐든지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너도 잘 알잖니?" "군대에서 많이 깨달았지만요." 교수님의 손길이 점점 더 대담해진다. 화로 근처에 쿨쿨 잠들어있는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을 정도로 세심하게 손을 움직여 내 바지의 지퍼를 내린다. 고무 막대기처럼 부웅 하고 튀어나오는 내 아랫도리 녀석. 남근의 모습을 보자 교수님의 눈이 조금 커지더니 이내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혀를 내민다. "어머, 제법 큰 편에 속하는구나." "... 유일한 장점이죠." "글쎄.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은거 같은데." 귀두 부분을 어루만지기 시작하는 지아 선생님의 손길. 상당히 익숙한 여성의 손놀림에 이미 투명한 액채가 정액을 사정하는 듯이 마구 분출되기 시작한다. "내가 보기엔 넌 잘생겼고, 그리고 듬직해. 목소리도 어느정도 굵직해서 멋잇고. 혹시 고백같은 거 받아본 적 없니?" "있을지도..." "봐봐. 너는 자기 자신을 비하할 이유가 전혀 없어. 이 정도의 멋진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당당해질 필요도 있고." "......" "그리고. 만약에 내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이 거대한 물건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크고 딱딱한걸. 정말 멋져." 교수님의 손길이 더욱 바빠진다. 전체적으로 성기의 기둥을 쥐면서 위, 아래로 훑어 내리는 여성의 손놀림. 유아 선배나 노아 교수님 외 다수의 여자들이 내 성기를 어루만지거나 했지만, 지아 선생님처럼 이런 뛰어난 테크닉을 보여주진 못했다. 역시나 유부녀다운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선생님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 서로 시선을 마주치자, 교수님의 입술이 점차 다가오더니 내 입술 위로 포개어진다. 지아 선생님의 혀가 적극적으로 내 입 안으로 들어오며 남자의 젊음을 갈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도 젊은이의 패기로 교수님의 혀를 거칠게 애무한다. 위에서는 계속되는 키스가 이어지고, 아랫쪽에서는 교수님의 애무가 끊임없이 시전된다. 손을 뻗어 교수님의 큰 가슴을 만지자, 교수님의 입술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세어나온다. "하아..." "선생님. 너무 섹시하세요." "... 이제 30대야. 이런 아줌마한테 섹시하다고 말해봤자 무슨 득이 되는거니?" "그래도 사실대로 말한걸요." "사탕발림도 못 들어줄 정도는 아니구나. 으흠..." 다시 서로의 혀를 탐한다. 유부녀라는 존재가 이리도 매력적으로 다가올 줄이야. 계속되는 교수님과의 딥 키스. 원래 이 정도면 나름 오랫동안 사정의 타이밍을 끌 수 있을줄 알았는데, 고등학생 때 동경하던 양호 선생님과의 수위 높은 애무 행위가 이어지는 중인지라 나도 모르게 벌써부터 사정 직전까지 다가온다. "서, 교수님. 곧 쌀거 같아요." "잠시만. 기다리렴..." 이윽고 키스를 하던 입으로 내 성기를 머금은 교수님이 나를 올려다보며 사정을 허락한다. 벌컥 양호 선생님의 입 안에 쏟아지는 농도 진한 정액들. 교수님의 목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그대로 정액을 삼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동안 이어지는 사정. 오랜 시간동안 성기를 머금고 있어서 그런지 입을 떼자마자 거칠게 기침을 하던 지아 선생님이 양 쪽의 눈가에 살짝 눈물로 보이는 이슬을 맺으면서 말한다. "역시나 젊은 아이 답구나. 이 정도의 많은 양을 쏟아낼 줄이야." "양호 선생님이 상대라서 그래요." "어머, 기쁜데? 그 말." 다시 물을 떠온 교수님이 입 안을 행구면서 바깥으로 뱉어낸다. 구강 세척인가. "아무래도 아침에 일어났을때 입 안에서 밤꽃 냄새가 나면 안되잖니. 그렇지?" "그런가요?" "다른 여자들과 한번씩 관계를 가졌다면, 이미 정액 냄새도 다 알고 있을테고. 그러니까 이건 너와 나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행위라고 봐줬으면 좋겠어." "... 그렇군요." "남편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그래도 유부녀의 성욕은 굉장하다고. 유에. 알고 있니?" "야설이나 야동에서 보면 얼핏 알 수 있을 정도로의 지식만 가지고 있어요." "사실 그런 화류계 작품들에서 나오는 표현이 전부 거짓은 아니야. 실제로 남자의 맛을 본 여자, 그러니까 유부녀의 성욕치는 얼핏 보면 극에 달하거든. 왜 이런 수치도 있잖니. 남자가 가장 성욕이 높을때가 10~20대고, 여자들은 30~40대라고 말이야." "그런 통계가 있나요?" "과학적으로도 나와있는 신빙성 있는 통계야." 여자가 아니라서 그쪽 수치는 잘 모르겠지만, 남자쪽은 정확하다고 보여진다. 사실 10대 청소년 하면 아침 발기는 기본이고 길 가다가 성기가 고개를 절로 들어서 난감한 상황에 봉착할 정도로 성욕이 왕성한 때니까 말이다. 남은 물을 마신 교수님이 자신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를 바라본다. "그러니까 지금 너와 나는 성욕이 극에 달한 사람들이란 소리야." "나름 궁합이 맞는 말이네요. 그거." "그러니까 나중에 무인도에서 탈출하면 내 남편에게는 비밀로 해야 한다. 알겠니?" "교수님이 상대라면 무덤까지 가지고 갈게요." "착하네. 비밀 엄수만 제대로 지켜준다면 나중에 더한것도 해줄게." "더, 더한 거요?" "어머, 더한 거라면 너도 충분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자신의 미니스커트를 살짝 들어올리는 지아 선생님. 커다란 엉덩이가 마치 달덩이처럼 내 눈앞에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탐스러운 여성의 둔부가 시야에 확 들어온다. 노아 교수님보다도 풍만하고, 그리고 부드러워보이는 엉덩이.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저 엉덩이에 얼굴을 묻고 싶을 정도다. "잘하면 나한테 박게 해줄수도 있어." "정말입니까!?" "물론 기분 내키면." "... 기분입니까." "일단 오늘은 친해지자는 뜻으로 가볍게 한 것이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좀 더 이것저것 해보는 것도 좋겠지." "지금 당장 하면 안되나요." "그건 안돼." "왜요?" "애간장을 태우는 것도 일종의 '즐거움'이잖니." "... 태우다 못해 산화할거 같은 기분인데요." "그 정도로 나와 섹스하고 싶니?"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죠." "정말 욕망에 솔직한 아이구나." 또다시 요염하게 웃음을 들려주는 지아 선생님.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실망감 어린 답변이 다시한번 들려온다. "하지만 오늘은 안돼." "...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인내심이 깊어서 마음에 드는구나. 점점 유에라는 남자에게 빠져드는걸?" "이래봬도 매너남이거든요." "어머, 자화자찬도 할 줄 알고. 귀여운 모습도 있네." ============================ 작품 후기 ============================ 사이트가 폭주중이라고 해서 글을 올리러 왔다가 여러번 시행착오를 거치고 이제서야 올리게 됩니다. 조아라야 아프지 마 ㅜ_ㅜ 87화 장작불을 집어 넣으며 뒷정리를 하는 우리. 이제 슬슬 두번째 불침번 조를 깨우기 위해서 세린과 유아 선배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그 때. 아직 깨우지도 않았는데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는 세린. 그녀뿐만 아니라 유아 선배도 같이 벌떡 일어난다. 마치 사전에 미리 합의라도 본 듯한 완벽한 팀플레이 동작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만 것이다. "... 화장실." "뭐?" "화장실 어디 있냐고!" 갑자기 깨우지도 않았는데 일어나더니 이제는 화장실을 묻는다. 잠꼬대인가. 하지만 잠꼬대가 아니라는 사실은 금방 들어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유아 선배가 벌떡 일어나서 바깥으로 향해 거의 달리다시피 나가기 때문이다. 순간 눈치를 챈 세린도 같이 따라서 뛰기 시작.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상황 파악이 안되는 나로써는 뭐라고 설명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나 뿐만이 아니라 지아 선생님도 마찬가지인 듯.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바깥에 뛰쳐나간 둘을 바라보던 교수님이 나에게 묻는다. "방금 세린이 너한테 뭐라고 하지 않았니?" 지아 선생님은 방금 세린이 했던 대사를 못들은 모양인가보다. 아무래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으니 교수님이 있는 곳까진 들리지 않았겠지. "화장실이라고 했어요." "배라도 아픈건가." "그런것 치고는 약간 상태가 이상하던데요." 보통 소변이나 대변이 마려우면 그냥 조용히 나가는게 정석 아닌가. 그런데 마치 구급환자라도 된 마냥 뛰쳐나가는 모습은 뭐라고 해야 할까... ... 대변중에 그런게 있지 않은가. 혹시 밥먹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묽은 대변 말이다. 전문용어로 설사. 금방이라도 막 튀어나올듯한 대변은 아마도 그것밖에 없으리라고 본다. 소변이야 바로 앞 화장실까지 가는데 금방 참을 수 있을테고, 대변도 웬만해서는 저 정도로 급하게 뛰어나갈 정도로 바쁜 볼일은 아니지 않는가. "아니면 생리라도 하는건가?" "그건 아닐걸요. 교수님." "왜?" "세린은 모르겠지만, 유아 선배는 저번에 끝났거든요." "오호라. 유아의 생리 주기까지 알고있다 이 말이지?" 이런. 본의 아니게 불편한 진실을 밝히고 만 꼴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아 선생님은 요염한 미소를 유지한 채 다리를 꼬고선 말한다. "사실 노아밖에 관계를 가지지 않았을거라 예상한건 전혀 아니야. 분명 다른 여자들과도 관계를 가졌으리라 생각했지." "알고 계셨나요." "원래 남자의 성욕은 여자에 비해서 30배가 높다는 수치 결과가 있거든." "묘하게 공감가는 연구 결과네요. 그거." "나도 결혼한 이후에 남자의 성욕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있더라고. 결혼하고 나서 어찌나 박아대는지. 아래가 다 얼얼할 정도였다니까." 언젠간 나도 교수님의 몸 안에 내 아랫도리 녀석을 넣을 수 있는 날이 오려는지 모르겠다. 기분에 따라서라고 했으니까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 대략 15분 정도 지나자, 먼저 볼일을 마친 유아 선배가 돌아오며 말한다. "으... 죽겠네. 정말로..." 헬쭉한 표정으로 돌아온 유아 선배가 자신의 배를 감싸면서 힘없이 걸어오며 의자에 앉는다. 아닌 밤중에 큰 일을 치룬 유아 선배. 목소리를 들어봐도 꽤나 급했던 일임을 진작할 수 있었다. "배탈이라도 난 건가요. 선배." "글쎄. 이상하게 배가 아프단 말이야..." 자신의 날씬한 배를 손으로 쓰다듬기 시작한다. 가만히 지켜보던 지아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유아 선배에게 다가가 말한다. "잠깐 배 좀 걷어볼래?" "아... 네." 유아 선배가 상의를 살짝 들어올리자, 지아 선생님이 유아 선배의 배에 귀를 갖다대기 시작한다. 청진기가 없어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것인가. 바깥에서 꾸르륵 소리가 들릴 정도로 유아 선배의 상태가 조금 이상해보인다. 약간 민망한지 조금 얼굴을 붉힌 유아 선배. 몇초동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지아 선생님이 머리를 다시 들며 유아 선배의 배를 쓰다듬기 시작한다. "뭐 잘못 먹은건 없지?" "네. 평소랑 똑같아요." "혹시 알레르기나 그런거 없니? 아니면 예전에 장염이 걸렸던 경험이 있다든가 이런거." "아니요. 전혀 없어요." 건강미인의 대표 선두주자 유아 선배에게 질병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내 생각과도 상당히 부합되는 답변을 들려주는 유아 선배. 고개를 갸우뚱하던 지아 선생님이 팔짱을 끼면서 다시 의자에 앉는다. "정확하게 진단을 할 수는 없지만, 소리를 들어봐서는 급성 위장염인거 같은데." "자, 장염이요?!" "그래. 하지만 확인은 못하겠어. 배탈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심하다는 것밖에 알아내지 못했으니까." "말도 안되요, 그거..." 실망한 표정이 역력한 유아 선배. 마치 '이보시오, 의사양반. 내가, 내가 장염이라니!'라는 반응을 보일 기세였다. 유아 선배의 진단이 끝나자마자 산장으로 돌아온 세린. 아무래도 유아 선배가 볼일을 보는 동안 차례를 기다렸다가 이제서야 마무리를 짓고 돌아온 모양인가 보다. "아... 정말..." 이세린 역시도 자신의 배를 감싸쥐며 초췌한 몰골로 돌아온다. 세린도 예외없이 지아 선생님의 진단을 받게 된 결과, 역시 유아 선배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병명을 얻게 되는 영광 아닌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세린. 너도 장염 같은거 걸린 적 없지?" "네." "이상하네..." 과거에 장염조차 걸린 경험이 없는 그녀들이 나란히 똑같은 증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는 소리는... "아무래도 지아 선생님 일행이 이 산장으로 오고 나서 다같이 먹은 음식중에 문제가 있는게 있었나보네요." "머리 좋네. 유에." "간단하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으니까요. 애초에 다른 곳에서 생활하던 유아 선배와 세린이 동시간에 동일한 증상을 보인다는 것은 적어도 두명이서 같은 음식을 섭취했다는 조건이 성립되어야 가능하잖아요.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오늘 먹은 저녁이나 아니면 그 이후에 먹은 것들 중에서 장염을 일으킬만한 원인요소가 있다는 말이 되는데..." ...... .......... .............. 아. 순간적으로 그 원인이 될만한 것이 생각나고 말았다. "지아 선생님. 혹시." "... 아무래도 유에, 네가 생각한 것이 정답일지도 모르겠어." 저녁식사는 평소에 우리들이 먹던 식단과 똑같았다. 만약에 식단에 문제가 있다면 진작에 우리들은 장염에 걸렸어야 한다. 결국 의심되는 것은 단 하나. 바로 누나가 만들었던 '유린 표 특제 코코넛 야자수 열매 음료'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묘하게 이름이 길다. 나중에 좀 줄이라고 말을 해야... 가 아니지 않는가. 잠깐만. 만약에 그 야자수 열매가 이 사태의 원인이 된다는 소리는 결국 지금 이 상황이 유아 선배와 세린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뜻 아닌가? 그렇다는 말은... "화, 화장실!" "유에 선배! 비켜요, 방해되요!" 역시나 똑같은 대사를 읊으면서 우르르 나오는 침실 팀 인원들이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 야자수 열매를 먹은 인원들 전원이 똑같은 증상을 보이게 되는 비운의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오늘따라 평소에 천대받던 천연 화장실의 인기가 급상승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건 착각이 아니리라 생각한다. 그것보다도 누나는 도대체 야자수 열매에 뭘 넣은건지 모르겠다. 어떻게 요리하면 동시에 급성 위장염이라는 병명까지 득템을 하게 해주는 특수효과를 선사해주는 것인가. ============================ 작품 후기 ============================ 친구 결혼식이라고 졸지에 이벤트 기획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나저나 저와 동갑인데 벌써부터 결혼이라니... 뭔가 심경이 복잡하군요;; PS. 등장인물 설문란에 캐릭터를 추가했습니다. 88화 새벽 1시 경. 결국 쿨쿨 꿈나라로 향했던 일행들이 다시 현실세계로 복귀하고 나서 거실에 또다시 둘러앉게 되었다. 잠을 자고 싶어도 꾸르륵 거리는 배 덕분에 쉽게 취침을 취하지 못하는 상황. 노아 교수님이나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음료수를 제공했던 누나와 세리아 역시도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선 마치 생리하는 여자인 듯이 배를 감싸고서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즉... 간단히 말해서 위장염이라는 말인가요?" 아리아의 물음에 곧바로 지아 선생님의 대답이 이어진다. "그래. 정확하게 확답까진 할 수 없지만, 이 증상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그럴거라 생각해." 얼추 예측이 들어간 병명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들 중에서 의학적 지식이 가장 많기도 하고, 실제로 양호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의 정확하리라고 본다. 노아 교수님이 작게 한숨을 쉬면서 누나에게 묻기 시작한다. "유린. 도대체 무슨 열매를 가져온거니." "글쎄요. 저도 잘..." 시음하기 전에 누나도 말한 적이 있지만, 누나 역시도 그 열매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른다. 정체불명의 야자수 열매에 담긴 음료를 마시고 나서 모두가 다 위장염이라. 하지만 예외인 경우도 있었다. "저, 저기 교수님." "왜 그러니? 체리." "왜 양호 선생님하고 유에 선배, 그리고 엘리는 멀쩡한 건가요...?" 체리가 정확하게 문제점을 지적해주었다. 만약에 야자수 열매가 원인이라면 모두가 다 같이 배를 감싸쥐고 잠 못드는 새벽을 보내야 정상인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나와 지아 선생님, 마지막으로 엘리. 이 세명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이 더 문제가 되고 있던 것이다. "......" 엘리는 오히려 누나가 구해온 음료를 맛있다고 쭉쭉 빨아먹고 있는 중. 다른 사람들이 먹고 나서 위장염이 걸린 정체불명의 야자수 열매액임에도 불구하고 엘리는 새로운 간식거리를 만났다는 듯이 자신의 머리보다도 더 큰 열매에 작은 구멍을 뚫어놓고 빨아서 마시는 중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엘리의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하는 중이지만 말이다. 약간 한숨을 쉬면서 다리를 꼬고 앉은 지아 선생님이 말을 이어간다. "확실히 그 점은 이상해. 엘리라는 아이는 지난 3년동안 무인도에서 지내왔으니 저런 야자나무 수액을 먹어도 이상이 없을 정도로 몸이 적응했다는 대답 정도는 내놓을 수 있지만, 나와 유에가 멀쩡한건 나도 잘 모르겠어." "그렇다면 혹시 '체질'에 따라 그 수액이 몸에 받고 안 받고가 달라지는거 아닐까요?" "그럴지도 몰라. 아리아. 하지만 그 이유가 꼭 '체질'의 차이라는 점은 단언할 수 없어. 무엇보다도 모르는 정보가 너무 많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만, 그래도 그나마 나나 양호 선생님이 멀쩡한건 다행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건강상태가 나쁘지 않은 일행이라도 있어야 음식을 만들던지 식량을 조달하던지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지아 선생님은 더더욱 간호에 힘을 쓸 수 있고 말이다. "... teacher." "응? 왜 그러니. 엘리." 한창 음료수를 쭉쭉 빨아서 마시던 엘리가 노아 교수님에게 말을 걸어온다. 영어로 쏼라쏼라 주구장창 긴 장문으로 노아 교수님에게 무언가를 알려주는 엘리. 이야기를 듣던 노아 교수님이 누나에게 질문한다. "유린. 혹시 야자수 열매에 뭐 첨가한거 없었니?" "어떻게 아셨어요? 교수님." "엘리가 아까 먹은 음료수와 지금 먹은 음료수의 맛이 다르다고 하실래..." "역시나 엘리. 사실 아까 조금 단 맛이 나는 가루를 섞어봤어요. 약초들을 둘러보던 중에 발견했죠." 그래서 아까 시큼한 맛과 단 맛이 살짝 섞여서 났던 것이었군. 설탕은 아닌 것으로 보이고 말이다. 누나의 말을 듣던 지아 선생님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누나에게 말한다. "유린. 혹시 그 가루로 썼다는 거, 아직 남아있니?" "네. 아직 남아 있어요." "잠시 볼 수 있을까?" "상관 없지만요..." 힘겹게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누나가 작은 종이꾸러미를 가지고 등장한다. 가루를 건내받은 지아 선생님이 그 가루를 보면서 살짝 맛을 본다. 드라마 같은 곳에서 보면 형사가 마약인지 아닌지 검사하는 그런 장면 있지 않은가. 그 모습이 오버렙 되서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이게 원인일지도 모르겠어." "정말요?!" "그래. 어디까지나 '아마도'이지만." 모두가 놀라서 소리친다. 나름 반전이지 않은가. 폭풍 설사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야자수 열매의 혐의가 벗겨지는 순간인 것이다. 사실 야자수 열매는 그저 우리들에게 시큼한 맛을 선사해주는 순수하고 결백한 음료수였고, 알고보니 진범은 따로 있었다는 스토리. 이것도 형사 드라마에서 쉽게 볼 수 있을만한 시나리오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내가 인턴 생활을 할 때, 얼핏 설사약의 주 재료로 들어가는 것이 이런 비슷한 맛을 가지고 있었어." "... 결국, 저희는 설사약의 원재료가 되는 것을 들이킨 셈이네요." 유아 선배가 말도 안된다는 듯이 체념하며 말한다. 자연스럽게 누나도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어색하게 웃을 뿐이다. 몰랐다고는 하나, 최초의 원인 제공자가 되는 셈이니까 말이다. 가루를 다시 종이로 두르고서 누나에게 넘겨주는 지아 선생님이 부연 설명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순수하게 이런 가루 만으로는 위장염을 일으키기 힘들어. 아마도 우리가 먹은 야자수 열매 수액과 섞이면서 독특한 화학반응을 일으켜 위와 장에 무리가 가는 물질로 재탄생하게 된 거 같아. 아무튼 이런 조합은 앞으로 만들지 않는게 좋겠지." 어찌되었든 원인은 밝혀지게 되었다. 선의든 악의든 누나가 구해온 정체불명의 야자수 열매와 가루에 의한 집단 위장염 사건. 덕분에 오늘 새벽에 편히 잠에 드는 것은 힘드리라고 본다. 아침에 일어나서 상쾌한 기분으로 햇빛을 쬐는 나. 반면에 나와 지아 선생님. 그리고 아침부터 어제 먹던 야자수 열매를 또다시 쭉쭉 빨며 등장한 엘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초죽음이 된 상태로 누워있었다. 어제만 하더라도 1인당 평균 화장실을 4~5번 정도 갔다 온 상황. 가장 많이 간 사람은 이세린이었다. 평소에 부잣집 아가씨로서 좋은 것만 섭취해오던 그녀가 이런 낯선 환경에서 독특한 음식을 먹으니 몸도 적응이 안되 유난히 거부반응이 심했던 모양인가 보다. "그런데 저 위장염은 언제까지 지속되나요." "보통은 2~3일이면 끝나. 그때까지는 가급적 차가운 음식을 먹지 않는게 좋을테고. 최소한 수분만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만 음식을 섭취하는게 좋겠지." "물고기 같은 것은 안되겠네요." "죽 같은걸 먹는걸 추천하겠지만 말이야. 근처에 고구마하고 감자가 있다고 했지?" "네." "그럼 그걸로 죽이라도 만들어야지. 미안한데 엘리하고 같이 재료를 좀 구해와주렴. 요리는 내가 할테니까." "그렇게 하죠." 개인적으로 나는 요리를 전혀 할 줄 모르기 때문에 7인분의 죽을 만들어야 하는 일을 담당하게 된 것은 자연스럽게 지아 선생님이 되었다. 여전히 열매 수액을 빨아먹는 엘리를 데리고 나는 고구마, 감자 밭으로 향한다. 아직까지 교수님과 나, 그리고 엘리만 위장염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답이 내려지지 않았지만, 일단 아리아가 추측한데로 '체질'이라는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원인이 어찌되었든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결과가 더 중요하니까 말이다. ============================ 작품 후기 ============================ 마감일을 빨리 끝내고, 미리 새로운 무인도 표류일지 에피소드를 하나 써둬야겠습니다. 아직 제대로 등장 안한 캐릭터도 본격적으로 등장을 시키고, 저번에 연재할 당시에 활용하지 못했던 무인도 소재들도 이번에는 한번 써먹어야지요. 89화 열심히 걸어서 고구마, 감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지역에 도착한 나와 엘리. 그다지 먼 거리도 아닌지라 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렇다고 해도, 문제가 하나 발생하고 말았다. 바로 땅에 심어져 있어야 할 고구마와 감자 녀석들이 발이 달렸는지 바깥에 멀쩡히 나와 있다는 것. 대부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사실을 통해서 한가지 확신할 수 있는게 있었다. 분명 밭을 이렇게 난장판으로 만들어준 범인이 있다는 뜻이고, 그리고 그 범인이 지금 우리들과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 "... 오랜만에 보네. 멧돼지 녀석." 아무런 말도 없이(동물이니까 말이 없는게 당연하겠지만) 우리들을 응시하는 멧돼지. 티비에서 가끔 시골 농장 같은데에 산돼지가 내려와서 밭을 엉망으로 만든다는 소식은 접했어도,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애초에 무인도라는 장소에 표류된 일 자체가 놀랍기도 하지만 말이다. 나이프를 가져오지 않은게 실수다. 하긴, 가지고 있다고 해도 멧돼지와 싸울 수 있는것도 아니고 말이다. 꾸웨에에엑!! 말 그대로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지르며 우리들에게 돌진해오는 녀석. 순간적으로 엘리에게 외친다. "녀석과 정면으로 부딛치면 끝장이야. 잘 피할 수 있지? 엘리!" "... Yes." 나보다도 움직임이 민첩하고 빠르기 때문에 멧돼지의 공격을 쉽게 피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엘리. 그럼 이제 나만 조심하면 되는 것이다. 녀석의 움직임 패턴은 저번에도 한번 봤듯이 직선적이다. 기교가 없는 단순한 패턴. 그저 목표물을 발견하고 달려드는 것이 고작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급커브는 돌기 힘들다는 뜻. 녀석과의 거리를 벌리면서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리면 쉽게 피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면이 쿵쿵 울릴 정도로 거대한 몸집으로 달려오는 멧돼지 녀석. 모습을 보아하니 분명 엊그제 우리를 습격했던 녀석과 동일한 놈임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이야!" 내 신호와 함께 각자 좌, 우로 몸을 날린다. 우리들이 있던 자리를 그대로 지나쳐 저 끝까지 달려나가던 멧돼지가 가속이 겨우 멈추고 나서야 뒤를 돌아본다. 녀석의 속도가 줄어들 때를 노려서 근처에 있는 수풀 사이로 들어간다. 공터에서 녀석의 시야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은 위험하다. 숲 속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완벽하게 몸을 감출 수 있다는 보장이 되어 있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시야를 가려줄 수도 있고, 그리고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나무'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뜻이다. 폴짝폴짝 뛰어서 어느새 나무 위까지 올라간 엘리. 그리고 나 역시도 아래쪽에 위치한 잔가지 하나하나를 신중히 밟으면서 나무 위를 오른다. 꽤나 많은 거리를 벌려 두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여유를 가지고 나무 위로 오를 수 있었다. 그나마 천만 다행이라는 것이다. 또다시 우리들을 올려다보며 몸을 몇번 부딛치는 멧돼지. 나무가 흔들리기는 하지만,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허약한 나무보다도 기둥이 제법 튼튼한 녀석을 골라서 올라왔으니까 당연한 말이겠지만. 결국 저번과 같이 숲 속으로 발걸음을 옮겨 모습을 감추는 녀석. 이제서야 녀석이 우리들의 시야에서 벗어났음을 확인하고 난 뒤에 나무 아래로 내려올 수 있었다. "그나저나 심하네. 이거." "......" 말 없이 근처에 놓여 있는 고구마를 한입 깨무는 엘리. 멧돼지가 다 뒤집어 놓은 농작물의 폐해를 보고 있자니 자연재해로 인해 한 해 농사를 망친 농부들의 마음을 어느정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농사를 지은건 아니지만. 그나마 먹을만한 수준의 고구마와 감자들을 골라서 산장으로 복귀한 우리들. 부엌에는 앞치마를 두른 지아 선생님이 흰 가운을 벗고서 음식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머지 인원들은 여전히 거실에서 눕거나 앉은 채 시름시름 앓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뭐랄까. 집 안에 있었을 때 누나의 생리하는 모습을 보는 그런 느낌이다. 단체로 생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 정도로 말이다. "유에 왔니?" "네. 그런데 약간 문제가 생겼어요." "문제?"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지아 선생님. 이건 양호 선생님에게만 말할 수 있는 문제거리가 아닌지라 일단 점심식사때 모두를 모아서 이야기 하기로 정한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그 멧돼지에 관련된 이야기에요." "무슨 일 있었나 보구나." "아주 큰 일이었죠." 정말 큰 일이었다. 그나마 밭에 있던 사람들이 나와 엘리였기에 무사히 상처 없이 멧돼지 녀석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지만, 만약에 노아 교수님이나 아리아, 그리고 세리아나 체리였다면 꼼짝없이 멧돼지에게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누나의 특제 야자나무 열매 음료 덕분에 예상치 못한 위기를 넘겼다고 해야 할까. 부정적인 일이 긍정적인 효과를 낳게 된 묘한 사건이 아닐까 싶다. 고구마와 감자를 다지면서 최대한 먹기 편하게 만드는 지아 선생님. 옆에서 엘리가 멀뚱멀뚱 교수님의 요리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또다시 멧돼지 녀석이 공터에 나타날 가능성이 있음을 배제하지 않고 경계를 서기로 한다. 이번에는 제대로 나이프도 들었고, 더불어 우리들이 만들어 둔 투척용 창도 옆에 끼고서 나름 철저한 준비를 한 상황. 덤빌테면 덤벼봐라! 멧돼지 녀석아! ... 라는건 사실 훼이크고 오지 말아라. 좀. 전생에 우리랑 무슨 원수관계라도 되는거냐. 자연에서 얌전히 지내라고. 바깥에서 의자를 가지고 앉은 채 대기하던 내게 쫄래쫄래 다가오는 엘리가 내 옷깃을 잡으면서 산장 내부를 가리킨다. 음식냄새가 점점 진해지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식사 준비가 끝났다는 소리가 아닐까 싶다. "알았어. 그럼 가볼까?"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같이 산장 내부로 들어서는 엘리. 안으로 들어서자, 마치 전쟁에서 패배한 패잔병들의 모습을 보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축 늘어진 분위기 속에서 죽을 먹고 있는 일행들의 모습이 보인다. "... 유에. 우리들에게 뭔가 할 이야기가 있다며." 그래도 아직까지는 정신이 멀쩡한 것인지 유아 선배가 먼저 나에게 말을 꺼내온다. 아까 지아 선생님과 했던 이야기가 들린 것일까. 그렇다면 굳이 숨길 필요도 없으리라고 본다. "일단 집중해주세요. 아까 밭에 갔을때, 멧돼지에게 습격을 당했습니다." "뭐라고?!" 모두가 놀라서 외친다. 위장염 사건 때보다도 더 놀란 외침. 그도 그럴것이, 우리들의 영역마저 침범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자체를 가볍게 흘러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용케도 살아왔네." "가시돋힌 말, 고맙다. 이세린." "칭찬 아니거든?!" "뭐, 이래봬도 우리도 나름 멧돼지 녀석과의 전적이 있었으니까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지만 말이야. 경험이라는 것은 정말 좋은거지. 그것이 실패든, 성공이든 일단 한번 겪어봤다는 것은 대처할 수 있을만한 수단을 마련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는 거니까." "... 흥." 여전히 츤츤력을 내뿜고 있는 이세린의 태도. 위장염이라는 병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컨셉을 버리지 않는 불굴의 의지는 본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제 3자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좋게 받아들일 수 없는 컨셉인게 사실이다. 특히나 남자 협오증까지 가지고 있다면, 완전히 나를 경멸하는 태도를 보이니까 오히려 이쪽에서 마음에 상처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 하니까 말이다. 나는 아무런 짓도 안했다고. 억울하다. 정말로. ============================ 작품 후기 ============================ 저 연예상담좀... ㅜ_ㅜ 90화 얌전히 숟가락으로 죽을 퍼서 입 안에 넣는 우리들 중에서 체리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세린에게 말하는 것이 들려온다. "메, 멧돼지가 나온다면 이 곳도 위험하지 않을까요오..." "글쎄. 위험하긴 하겠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지 않니." "그건 걱정 안해도 돼." 체리와 세린의 말을 나 뿐만이 아니라 누나도 들은 모양인가보다. 도중에 대화에 끼어든 누나가 친절하게 이 집 구조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얼핏 평범한 통나무 집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비행기 재료로 만들어져 있거든." "비행기... 뭐라고요?" "비행기 판때기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걸로 보강되어 있으니까 멧돼지가 마음먹고 달려들어도 집이 무너질 걱정은 안해도 돼. 이래봬도 튼튼한 집이거든." "그런가요." 그건 나도 처음 안 사실이다. 이 집에 대해서 낱낱히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통나무 집이려니 하고 어물쩡 어물쩡 넘어간 것이 전부인데 그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이 산장에 대해서 다시 보게 되었다. 나름 대단한 녀석이었구나. 너. 가만. 그렇다면 나중에 이 집을 증축할때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라는 소리지 않는가. 나무도 아니고 철판을 뜯어내서 증축해야 하는 노가다를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허리가 아파옴이 느껴진다. 노동 좀 그만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아무튼 중요한건 이게 아니다. "이렇게 해서 필수적으로 멧돼지를 잡아야 할 이유가 생겼네." "그러게 말이에요." 유아 선배의 말을 아리아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지금까지 단순하게 '고기'라는 식량확보 차원으로 멧돼지를 사냥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생존의 문제,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영역싸움'까지 번지게 된 것이다. 저번에 우리들이 녀석을 보고 꽁무니를 뺀 것이 부작용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인간들이 나를 무서워하니까 내가 왕이다. 움화화화화!'라는 생각으로 우리들의 밭을 망쳐놓은 것이겠지. 건방진 녀석. 감히 인간님의 위력을 물로 보다니. 복수할테다. 눈밑에 점 하나 찍고. 하지만 현재 우리들의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노아 교수님의 한마디가 들려온다. "그런데 지금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엘리하고 지아 선생님, 그리고 유에밖에 없잖니." "그러고보니..." "아직 사냥을 운운할 단계는 아니라고 보는데." 이쪽은 환자가 7명이다. 제대로 모여서 싸워도 이길까 말까 한 판국에 병까지 얻게 되었으니 승산은 주식 폭락하듯이 더더욱 낮아지게 되는 셈이다. 결국 멧돼지에 대한 일은 잠시 보류하기로 하고, 문제는 지금 눈앞에 닥친 일이다. 바로 화장실 문제. "화장실이 1개밖에 없으니까 불편하잖아!" 벌써부터 세린의 항의가 들어왔다. 사실 왜 안 들어오나 싶을 정도로 까탈스러운 녀석이었기 때문에 지금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조금은 세삼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근데 왜 다른 사람들 놔두고 하필이면 나냐. "원래 1개밖에 없었으니까 그렇지." "그렇다면 하나 더 만들어줘!" "......" 막무가내 형식으로 말하는 세린이었지만, 그녀의 말도 어느정도 일리가 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지아 선생님이 잠시 끓인 물을 마시면서 나를 대신해 본인의 생각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확실히 10명이서 지내고 있는 장소에 화장실이 1개라는 것은 조금 부족한 면도 없지않아 있다고 봐." "역시 1개를 더 만들어야 하는 걸까요." "아무래도 그렇지. 그리고 말이 '화장실'이지, 사실 칸막이 정도만 쳐둔 형식적인 공간만을 지칭하는 것이니까 만드는데 그리 오래 걸릴것 같지도 않은데. 어떠니?" "양호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대충 수풀 경계선 근처에 풀을 베고 나서 나무로 울타리 형식으로 막아두고 넓직한 나뭇잎으로 칸막이 대용으로 덮어두기만 하면 된다. 밑에 땅을 파두는 것도 잊지 말고 하도록 하자. "그런고로 화장실 하나 만드는 작업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 점점 제 일이 늘어나네요." "부탁할게. 유에." 양호 선생님의 부탁이라면 어쩔 수 없나. 게다가 이대로 화장실 1개만을 두고 번갈아 사용하면 정작 내가 사용해야 할 타이밍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도 있으니까 만들어두는 편이 좋으리라는 생각도 살짝 든다. 화장실 미션 퀘스트 의뢰를 받고 나서 작업에 임하는 나. 퀘스트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빗발치는 민원을 그대로 묵살시킬 수는 없지 않는가. 그나마 멀쩡한 내가 이런 작업을 하는게 도리이니까 말이다. 삽 한자루와 톱, 그리고 기타 공구들을 들고 나온 나와 엘리. 양호 선생님은 여전히 환자들을 돌보기로 했고, 결국 행동 가능한 유일한 일원이 된 우리 둘은 이렇게 공터와 숲의 경계선 부근까지 나와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낫으로 풀을 베고, 근처에 땅을 파서 잔디가 없게끔 만든 뒤에 볼일을 볼 수 있을 정도의 구덩이를 판다. 매번 이런 식으로 화장실을 만든다고 해도 구덩이 안에 대변을 계속 싸다보면 언젠가는 채워지기 마련. 그래서 화장실을 딱히 정해두고 계속 사용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여러군데 옮겨다니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아마 내 기억으로는 이것이 3번째 화장실 만들기 작업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슥슥. 익숙한 솜씨로 풀을 베어가는 엘리. 그리고 나는 엘리가 풀을 벤 자리에서 삽으로 땅을 한번 엎는다. 3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공구 손질이 잘 되어있던 탓에 그리 녹이 슬지는 않은 도구들. 덕분에 일처리도 시원스럽게 정리되고 있었다. "대충 정리가 다 되어가는 느낌이네." "......"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 나와 같이 동의의 의사를 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멧돼지가 출현할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멧돼지의 기척이 아니라 다른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 이세린?" "그, 그래! 왜!" 작업중에 세린이 바깥으로 나와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게 아닌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 빨개진 표정으로 말이다. 나한테 화내는 언행이야 뭐 이제는 익숙해졌으니 그렇다고 쳐도, 얼굴은 왜 빨개진 것인가. 뜬금없는 금발의 미소녀가 등장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작업도 잠시 중지가 되었다. 종종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세린.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또다시 버럭 화를 내기 시작한다. "왜 아직까지도 화장실을 만들지 못한거야!" "화장실이 무슨 도깨비 방망이에서 나오는 보물인줄 아냐. 금 나와라 뚝딱! 하면 완성되게." "그, 그 정도는 해야 당연하잖아! 남자면서!" "남자를 끔찍히도 싫어하는게 누군데." "으..." 아무래도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묘하게 급해보이는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를 참는듯한 그런 모습도 보인다. 유난히 자신의 배를 쓰다듬는 세린이 나와 엘리를 번갈아 보면서 약간 촉촉해진 눈시울을 보인다. "잠깐, 너. 왜 우는거야." "누가 운다고 그래1!" "아니, 지금 울려고 하는 거 아니야?" "나를 울보 취급하지 마ㅡ!" 라고 말하면서 끝까지 부정하는 세린. 하지만 또다시 '윽'하는 짧은 소리를 내면서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한다. 이쯤되면 대략 눈치없는 나라도 알 수 있는 상황이다. 분명 이건 틀림없이... "너, 설마 그거..." "보, 볼일 보러 왔다고! 이 바보야!" "뭐라고?!" ============================ 작품 후기 ============================ 사실 이번 확밀아 명찰 이벤트 때 루프 보상으로 주는 카드 4장만 먹어도 행복하겠거니 했는데, 하루에 명찰 5천개 이상을 매번 얻다보니 풀돌까지 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게 다 카톡 이벤트 보상으로 준 배수카드 덕분입니다. 하앍하앍. 91화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화장실 완공 작업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첫번째 손님을 맞이할 줄이야. 그렇다고 벌써부터 대 호황을 누렸다는 뜻으로 순수하게 기뻐할 마음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을 과연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지금 내 바로 뒤에서 세린이 대변을 보고 있는 것이다. "저, 절대로 보지 마! 보면 진짜 죽여버릴거야!!" 거의 울듯한 표정으로 고래고래 소리친 뒤에 자신의 치마를 내리는 세린. 그와 동시에 나도 전방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작업을 다시 시작한다. 엘리야 어차피 같은 여자니까 상관이 없겠지만. 아니지... 같은 여자라고 해도 대변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엄청난 수치심을 선사해주지 않는가. 특히나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는 것은... ..... ......... .............. 그... 왜. 그런거 있지 않은가. 대변을 보면 작게 '뿌웅~'하고 들려오는 귀여운 방귀소리 말이다. 아 진짜. 내가 말하고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미약하게 그런 소리가 들려온다는 뜻이다. 제 3자인 내가 이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본인은 얼마나 창피할까. 그리고 바꿔서 말하자면 이런 수치심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얼마나 볼 일이 급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세린." "... 왜." 말투가 묘하게 하이톤이 되어버린 세린의 목소리가 들린다. 직접 볼 수가 없으니 뒤를 돌아서 대화만 하는 형식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여자는 대변을 보고, 남자는 삽질을 하고. 참으로 묘한 장면이 아닐수가 없다. "기존에 있던 화장실은 벌써 사람이 있었나보지?" "유아 언니가 들어가 있었어." "거기서 같이 볼일을 보면 좋았을텐데."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거야! 사이좋게 둘이서 창피한 모습을 보면서 볼일을 보라고?!" "아니. 지금 이 상황도 충분히 창피한거 아니야?" "그, 그야 그렇지만..." 말은 굳이 꺼내지 않지만, 대변 특유의 약간의 구린내가 느껴지는 듯 하다. 지독하다는 생각보다는 이런 느낌 있지 않은가. 여신이라 불리는 김태희가 싸는 대변은 분명 초콜릿일거야 하는 그런 생각들. 그렇다고 내가 그런 마음을 가졌다거나 하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나도 엄연한 사람. 스캇물에 취미를 들이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일종의 패티쉬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그 정도까지 비위가 좋은 편도 아니니까 말이다. "진짜... 죽고싶어..." 작게 중얼거리며 한탄하는 세린의 말이 바람을 타고 전해진다. 역시나 엄청나게 창피한 모양인가 보다. 그렇다고 정말로 죽으면 안된다고. 부잣집 아가씨. 고작 이런 일로 죽을지 살지 결정할 수 있다면 배가 난파되고 난 이후에 기적적으로 무인도까지 살아서 흘러들어온 강운을 욕보이게 하는 꼴이 되니까. 대충 삽질을 다 마친 나. 엘리 역시도 풀을 베는 작업을 끝냈는지 돌아서서 쉬고 있었다. 이럴때는 여자가 정말 부럽다니까. 어쩔 수 없이 나는 시선을 그대로 숲 안쪽으로 향하게 놔두고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그러자 또다시 들려오는 세린의 말. "... 뭐야. 벌써 작업 끝난거야?" "네가 볼일을 보고 나가야 작업을 할 거 아니야." "......" 이제 테두리로 울타리면 치면 끝이다. 나뭇가지와 나뭇잎은 미리 공수를 해왔기 때문에 가느다란 풀들로 엮기만 하면 간이 화장실 완성. 그런데 그 마무리 작업을 세린 덕분에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래 걸려?" "숙녀한테 누가 그런거 물어보라고 했어?!" "미, 미안." 나도 모르게 사과한다. 상황이 상황이라고 해도, 그래도 레이디에게 이런 실례되는 질문을 하는 것은 아무리 고려해도 조금 심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유에." "왜?" 특이하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세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근처에... 휴지 대용으로 쓸 수 있을만한 나뭇잎 좀 뜯어줘." "이봐.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어쩔 수 없잖아! 모자른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결국 그런 문제였나. "그런건 엘리한테 부탁하면 되잖아. 같은 여자이기도 하니까." "... 나, 영어 못한단 말이야." "뭐???" "영어 못한다고ㅡ!!" 이보시오. 의사양반. 이 여자가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게요? 라고 묻고 싶은 말을 내뱉는 이세린. 금발의 미녀가 할 말은 아니라고 보는데. 영어를 못한다니. "외국인이잖아. 영어를 못해?" "누가?" "너." "난 한국인이라고." "외국인 아니야?"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거야. 바보." "그야... 금발이잖아. 게다가 눈도 파랗고." "이 멍청이. 혼혈아라고 했잖아. 그리고 나는 정식으로 대한민국 국적도 가지고 있다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영어를 잘하거나 그런거 없어?" "애초에 영어도 못할 뿐더러, 평범한 축에 속한다고." "아버지가 미국인 아니셔?" "프랑스 인이야!!" "... 그렇군." 외국인이라고 꼭 영어를 잘하는 법은 없나보다. 아니지. 외국인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했었지. 수정하도록 하겠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미인이라고 해도 꼭 영어를 잘하라는 법은 없다. 오늘 처음 알게 된 토막 상식. 알아두도록 하자. 사람은 이런 편견 덕분에 시야가 좁아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깨달음을 선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세린 교수님. 결국 주변에 있던 나뭇잎들을 따서 몇번 문질러준다. 항문 주변의 피부는 연약하기 때문에 그대로 나뭇잎을 휴지 대용으로 사용했다간 긁히는 상처라도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좋다. 따서 잎을 확보한 것까지는 좋다 이 말이다. 문제는 과연 어떤 식으로 세린에게 전달해주느냐. 그것이 골치거리인 셈이다. "엘리." "...?" "잠깐 일로 와봐." 이럴때는 손쉽게 엘리에게 부탁하도록 하자. 그런데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되는 것일까. 일단 엘리의 작은 손에 다수의 나뭇잎을 쥐어준다. 그리고 허접한 영어 실력으로 아는 단어들 총 출동. 그나마 정확한 단어가 pass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정말 영어를 못하는 놈이다. 그러니까 미국은 절대로 가지 말아야지. 대충 알아들었다는 듯이 엘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다행이다. 알아들은 모양이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 먹지 마!!" "why?" 내가 준 풀잎을 먹는 엘리의 행동을 간신히 말린다. 자신의 손아귀에서 잎들을 빼앗자 도리어 '왜?'라고 물어오는 엘리. 표정을 보아하니 '니가 먹으라고 해서 먹은건데 왜 말리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내가 엘리에게 전달한 내용이 '이 나뭇잎을 먹어봐.'라는 뜻인것 같다. "그러니까 엘리. 먹는게 아니라. 전해주라고. 저기 있는 여자한테. 금발한테. 골드." "Gold?" "오케이. 오케이." "......" 애매한 표정으로 나뭇잎을 바라보던 엘리가 나에게 나뭇잎을 다시 건내면서 고개를 수평으로 흔들기 시작한다. 거절의 의미인가. 도대체 왜 거절하냐고. 고작 전달해주는 것일 뿐인데! "뭐하고 있는거야, 바보 유에!" "... 알았어. 줄테니까 기다려봐." 어쩔 수 없이 내가 직접 나서기로 한다. 천천히 뒤를 돌아서 발걸음을 옮긴다. 천천히. 신중하게. 잘못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이고 마니까. "... 스톱." 세린의 정지 신호에 순간 몸을 멈춘다. 그리고 허리 뒤로 손을 내밀며 나뭇잎을 건내자, 세린이 거칠게 잎을 받아든다. 미션 컴플리트. 아. 정말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비디오 게임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툼 레이더 최신판이 나왔지요. 그것도 한글화로요. 92화 겨우 볼일을 다 마친 세린이 자신의 치마를 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서야 끝인가 하고 드디어 한숨을 놓을 무렵, 세린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아직. 절대로 뒤 돌아보거나 하지 마." "덜 끝났어?" "그런거 아니라고. 바보!" 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발로 쓱싹쓱싹 하는 사운드를 내며 모래를 끌어모으기 시작한다. 대충 어떤 행위를 하려는지 나도 눈치를 챘다. 아마도 자신이 싼 대변을 흙으로 스스로 덮으려고 하는 것이겠지. 어느정도 다 가렸다 싶었는지 이제서야 세린이 평소의 목소리로 돌아오며 말한다. "이제 봐도 돼." "참으로 수고했어." 기껏 파놓은 구덩이를 다시 덮어놓다니. 이렇게나 민폐를 끼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이걸 입밖에 내놓는 순간 세린이 또 삐질지도 모르니 그냥 얌전히 속으로만 생각하자. 다시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나. 엘리 역시도 따라서 일어나며 자신의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탁탁 털고서 미리 만들어놓은 울타리의 일부분을 가져온다. 정말 착한 아이다. 한국말만 잘 했다면 더 좋았을것을. "......" 그런데 작업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리에 머물고 있는 세린. 볼 일도 끝났는데 아직 남아있을 이유가 있나 싶어서 물어보도록 하자. "뭔가 또 할 말이라도?" "... 몇가지 질문할게." "언제든지." "너, 변태 아니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변태라고 물어본다면 대답해드리는게 인지상정. 이 세계의 파멸을 막기 위해,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사랑과 진실. 어둠을 뿌리고 다니는. 나는야 변태... 가 아니잖아. "그럴리가 없잖아." "정말이지?" "어. 변태 아니야." "혹시 여자가 싼 대변을 보고 헠헠 거리거나 하는 그런 초 변태 아니지?" "그러니까 그런 취미 없다니까 그러네." "... 못 믿겠어." "이보세요." 졸지에 여자가 싼 대변을 보고 헠헠 거리는 초 변태가 되어버린 내 입장을 조금은 생각해달라고. 그렇다고 내가 성인 군자라는 뜻은 아니고. 적당히 밝힐 것은 밝히는 신체 건장한 남자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대변을 가지고 흥분한다거나 하는 그런 류는 아니라는 뜻이다. "... 저번에 책에서 봤어." "무엇을?" "남자들 중에서는 여자가 대변을 보는 모습으로 쾌감을 느끼는 변태들이 있다고." "도대체 어떤 책에서 그런 소개를 한 거냐." "몰라. 예전 일이니까 잊어버렸어." "그렇다면 내가 변태가 아닐까 라는 의심도 좀 잊어버려라." "... 정말로 아니지?" "글쎄. 아니라니까." "아니. 못믿겠어. 네가 작업하는 모습, 지켜볼래." "마음대로 해." 한숨이 절로 나온다. 행여나 세린이 돌아가고 나서 묻었던 대변을 꺼낸다는 발칙한 경우의 수까지 생각한 것일까. 그건 비위상해서 못한다고. 아무튼 공교롭게도 작업에는 참가하지 않지만, 세린이 구경꾼으로 남게 되었다. 어차피 울타리만 두르면 끝이니까 금방 마무리를 짓고 들어갈 예정. 어차피 슬슬 해도 저물어가고 있으니까 가급적이면 일찍 작업을 마치고 들어갈 계획이다. 다른 사람들이 위장염으로 누워있는 상황에서 멧돼지의 습격을 받거나 하면 곤란하니까 말이다. 얼추 작업을 마무리 짓고 공구들을 챙긴 우리. 도중에 세린이 다가오더니 삽과 낫을 들기 시작한다. "안 들어줘도 되는데." "... 시끄러워. 이 정도 일은 할 수 있다고." "뭐, 적당히만 해줘. 나중에 또 쓰러지면 곤란하니까." "... 흥." 작업을 마치고 복귀한 우리들. 이제 조금은 움직일 정도까지 회복이 된 모양인지 노아 교수님과 세리아도 지아 선생님을 도와서 같이 죽을 만들고 있었다. 나올때는 오후 1시였는데, 복귀하고 나서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저녁 6시가 다 되었다. 대략 5시간동안 중노동을 하고 나서야 화장실 제 2호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수고했어. 유에." "엄청 수고했죠." 유아 선배가 나를 맞이하며 말한다. 가볍게 선배의 말에 대답을 해준 뒤에 밖에서 공구를 정리해두고 내부로 들어온다. "다들 이제 괜찮아진 모양이네요." "아직 움직일 수 있을 정도밖에 되지 않아요. 선배." "그래도 시름시름 신음소리만 내뱉는 상태보다는 나은 편이겠지." 한숨을 쉬며 약간 부정적인 의견을 표시하는 아리아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 아닌 위로를 해준다. 아까부터 다른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던 지아 선생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우리들의 대화에 참여한다. "내일 정도면 아마 80% 정도는 완치될 수 있을거야." "애매모호한 수치네요. 그거." "인간의 몸은 기계가 아니니까. 개인차가 있겠지만 평균적으로 통산해보면 그 정도 될 거라고 예상해보는거야."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내일 모래가 되면 다들 완치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멧돼지가 우리들의 영역을 넘보고 있는 와중에 하루라도 빨리 녀석을 사냥해야 하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까지 완쾌된다면 이제 남은건 말 그대로 몬스터 헌팅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아, 맞아. 유에." "왜 그러세요? 지아 선생님." 도중에 나를 호출한 양호 선생님의 부름에 잠시 자리를 옮긴다. 부엌에서 노아 교수님과 세리아에게 요리를 맡겨둔 지아 선생님이 나에게 작은 유리병을 내밀며 말한다. "저번에 말했던 그거야." "그거라면..." "마취제." "이게요?" "시간이 날 때 만들어봤어. 너희들이 미리 재료를 구해줬으니 쉽게 만들 수 있었지만." "엄청나게 빠르게 만드셨네요." "액체 상태로 만드느라 조금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이지, 금방 만들수도 있었어. 그런데 제대로 효능이 먹힐지는 솔직히 말해서 장담하지 못해." "그렇군요." "미리 시험이라도 해보는게 어때?" "시험이요?" "테스트 말이야. 제대로 먹힐지도 모르는 독을 가지고 멧돼지에게 덤벼드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하잖니. 그러니까 근처에 있는 다른 동물들에게 시험을 해보는게 좋을거 같은데. 아무래도 사람에게 실험하는 것은 조금 위험하니까." "일리가 있네요."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노루조차 잡지 못하는 우리들의 상황을 꼽을 수 있다. 노루가 유난히 빠른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녀석은 굉장하다. 그렇단 말이다. "무슨 말이야? 그거." 도중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우리에게 다가온 누나. 그녀들이 위장염에 걸리기 전에 취침을 취하고 있을 무렵 지아 선생님과 같이 나눴던 마취제에 대해서 누나에게도 들려준다. 그러자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잘했다는 듯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누나. "좋은 아이디어인데?" "그렇게 상큼하게 칭찬해주면 도리어 이쪽이 더 불편한데." "뭐야. 순수하게 칭찬해줘도 뭐라고 하다니. 성격이 많이 변했는걸. 남동생." "그것보다도 누나는 앞으로 정체불명의 열매 같은거 따오지좀 마." "반성하고 있다고. 그거." 혀를 삐죽 내밀면서 메롱 포즈를 취하는 누나. 이번 일은 아무리 누나라고 해도 나름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다지 거친 항의는 하지 않는다. 죄는 사람의 고개를 무겁게 만든다고 하지 않는가. 본래의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수그러진 분위기를 유지해야 할텐데, 누나는 오히려 더욱더 활발한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뭐, 풀이 죽은 모습보다는 훨씬 더 보기 좋으니까 넘어가자. ============================ 작품 후기 ============================ 술이 땡기는 하루... ㅜ_ㅜ 93화 식사를 마치고 다시 모인 우리들. 이제는 어느정도 화장실 가는 횟수도 많이 줄은 일행들을 데리고 다시 한번 몬스터 헌터 작전을 개시하기 위해 자리를 잡은 나는 헛기침을 하면서 시선을 모은다. "일단 현재 우리들의 상황을 여기있는 모두가 알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종교 집단이 아닌데요." "시끄럽다. 아리아." 아픈데도 불구하고 태클 하나는 기가막히게 잘 거는 녀석이다. 누나와는 또 다른 타입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하나. 너무 환상적으로 태클이 들어와서 순간 할 말을 잊었잖아. "아까 얼핏 들으셨겠지만, 지금 제 손에 들린 것은 일종의 '마취제'입니다. 엊그제 모았던 재료들을 통해서 지아 선생님이 만드신 '독'이지요." "그걸 멧돼지의 체내에 주입하는거야?" 유아 선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네." "어떤 방식으로?" "나이프에 독을 발라서 찔러 넣는 방식으로요." "위험하잖아. 그거. 다칠지도 모르는데." "이건 마무리 형식이에요. 실상으로는 미리 만들어놓은 투척용 창의 끝에 독을 발라서 멧돼지에게 던지는 거죠." 내가 생각해낸 작전은 이렇다. 원거리용 창 10개에 독을 바른다. 그리고 멧돼지를 발견하면 나무 위에 올라가있던 인원들이 멧돼지에게 일제히 창을 던진다. 다수의 창을 맞은 멧돼지의 시선을 움직임이 빠른 엘리와 내가 시선을 끈다. 그리고 헤롱헤롱한 틈을 타서 곧바로 머리에 나이프를 박아 넣는 것이다. 아무리 강한 생명체라고 해도 직접적으로 이런 식으로 공격을 가하면 치명상을 가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따지면 사냥 성공이라는 말이 된다. "작전을 먼저 실행하기 전에 우선 제안할게 한가지 있는데." 지아 선생님이 손을 들면서 말한다. 모두의 시선이 교수님에게로 쏠리자, 잠깐 말을 끊은 양호 선생님이 다시금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한다. "아까 유에에게도 말했지만, 마취제가 얼마만큼의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검증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어. 일단 약초 도감에 적혀있는 그대로 제조하긴 했지만, 그 효능의 지속효과, 유효 시간 등 모르는게 태반이라는 소리야." "그럼 아까 지아 선생님이 말씀하셨던데로 다른 동물들에게 실험을 하자는 뜻인가요?" "그래. 노아에게 들었는데, 너희는 멧돼지를 사냥하기 전에 먼저 노루를 사냐하려고 했었다며?" "네." "그래서 노루를 먼저 사냥해보는게 좋다고 생각해. 멧돼지 보다는 덜 위험하잖아." 지아 선생님의 말에 따라 곰곰히 생각해본다. 사실 우리가 노루를 잡는다는 일을 포기한 것도 아니고, 멧돼지 덕분에 흐지부지 되었지만 원래 우리들의 목적은 노루였다. 지금은 주 사냥감이 멧돼지가 되어 버렸지만, 녀석을 상대하기 전에 먼저 노루를 이용해서 연습을 해두는게 좋다는 의견이 나온 것이다. "선배." "말해봐. 아리아." "저도 양호 선생님의 의견에 동의해요." "노루 먼저 사냥하자는 이야기?" "멧돼지를 사냥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되는 건 바로 마취제의 효능이에요. 그런데 그런 효능의 위력도 모르고 멋대로 사냥을 감행했다가는 도리어 멧돼지에게 당할 가능성이 크니까요. 그나마 안전하고 덜 위협적인 노루로 먼저 마취제를 시험하는 것은 약의 효능도 알 수 있고, 더불어서 사냥 연습도 되고 일석이조라고 봐요." "맞는 말이군." 멧돼지를 사냥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들이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사냥도 아닌 바로 '안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안전을 최우선한다는 가정에서 따져본다면 아리아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이다. 노루를 먼저 사냥하고, 다음에 멧돼지를 노린다. 순차적으로 점점 사냥감의 난이도를 높여가는 형식. 무턱대고 고레벨의 몬스터를 잡기 보다는, 저렙용 몬스터를 사냥함으로 인해 스킬과 레벨을 올리고 파티사냥으로 보스몹을 쓰러뜨린다는 전략은 나름 괜찮다고 본다. "좋아. 그럼 노루에 대한 사냥 연구를 먼저 시작하죠."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찬성의 의사를 표명한다. 일단 사냥건에 대해서는 끝. 그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것은 바로 사냥 멤버에 대해서였다. "그리고 사냥에 나갈 인원 선발에 대해서인데." "다 같이 나가는 거 아니었니?" 노아 교수님의 질문. 아마도 교수님 본인은 우리들이 전부 나가서 사냥을 하는줄 아셨던 모양인듯 하다. "안타깝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왜? 인원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데..." "굳이 인원수가 많다고 효율적인 사냥을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실제로 엘리의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당시에도 전 가족을 포함해봤자 겨우 3명이었어요. 그런데 그 3명이서 멧돼지를 잡을 정도의 사냥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결과적으로 말해서 최소 3명의 인원수만 갖춘다고 하더라도 일단 사냥은 가능하다는 말과도 같게 되지요." "그렇구나." "더불어 말하자면, 많은 인원수를 투입하는 것보다 사냥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인원만을 투입하고 싶어요. 물론 상대가 노루라면 모든 인원이 우르르 몰려가서 사냥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멧돼지같이 위력적이고 강력한 동물을 상대로 하기에는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그리고 멧돼지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표적만 늘어나는 꼴이 되니 그다지 좋지 않은 방법이죠." 결국 최소한의 인원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이번 사냥의 목표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엔트리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선 저를 포함해서 엘리, 그리고 유아 선배와 이세린, 마지막으로 누나. 총 5명이죠." "... 나도?" 금발의 미소녀, 이세린이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되묻는다. 그 심정, 알긴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엘리와 유아 선배 다음으로 네가 운동신경이 가장 좋으니까." "사, 사냥같은 것은 해본적도 없다고!" "그러니까 노루를 통해서 연습한다고 했잖아." "... 꼭 해야 돼? 그거." "사실은 식량 확보가 목적이라서 사냥이라는 행위 자체가 원래부터 재량행위였는데, 밭에 피해를 입힐 정도면 이제는 의무 사항이야." "밭 주변에 멧돼지가 오지 못하도록 트랩을 설치한다면 되지 않아?" "그렇게 한다고 한들. 밭은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들의 행동범위가 줄어들게 돼. 애초부터 이 공터는 인간들 영역이라고 봐도 무방한 곳이었는데, 멧돼지가 겁도 없이 이 곳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소리는 이제 우리들의 영역을 넘보기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야. 이것도 우리들이 멧돼지와의 싸움을 피하고 여지껏 도망치다가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뜻이지." 권투 시합으로 치자면, 상대방의 맹렬한 원 투 펀치에 의해서 기세가 꺾이고 코너에 몰린 급박한 상황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분명 K.O를 당하게 될 판국.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이 코너에서 빠져나와 상대방에게 숨겨두었던 라이트 펀치를 날리면 된다. 그 라이트 펀치를 날릴 수 있는 초석, 즉 잽과도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취제. 엘리의 부모님이 어떤 형식으로 사냥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은 인원으로 멧돼지를 잡을 정도면 틀림없이 마취제와 같은 약초들을 잘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괜히 약초 도감이라고 해서 두꺼운 책을 따로 만들어둔 것이 아니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우리들이 이 무인도에 오게 된 이후로 맞이하는 최초의 위기일지도 몰라요. 지금까지는 자연환경, 배고픔, 그리고 추위와 싸워왔지만 그것도 어느정도 익숙해지고 많이 나아진 상태. 이제 새로운 적을 무찌를 시간이 된 것이죠." 그렇다. 이름하여 멧돼지 사냥. 말 그대로 이제 더 이상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잠시간의 회의를 마치고 서로 제각기 볼 일을 보는 상황. 위장염에 걸린 사람들 중에서 가장 회복 속도가 빠른 인물은 아리아와 세리아였다. 어느정도 회복이 되었냐면, 이제는 거의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돌아와서 움직이는데 별 지장이 없을 정도로 많이 쾌차한 것이다. 반면 회복 속도가 가장 느린 인물은 이세린. 아무래도 귀하게 자라온 아가씨이다보니 몸에서 받질 않는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엄청나게 높은 모양이다. "이것이 바로 금과 은의 차이점인가?" "무슨 재미없는 농담을 하는 건가요. 선배." "아니. 그냥." 날 또다시 이상한 녀석 취급하는 아리아. 이 반응을 보아서는 이제 정말로 다 나은 것처럼 보인다. 세리아도 어느새 일어나서 지아 선생님과 부엌에서 뒷정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무리없이 움직이고 있으니까 말이다. 근데 보통은 은보다 금이 더 좋지 않은가. 금발인 이세린이 은발인 아리아, 세리아 자매보다도 치유력이 낮다니. 역시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물에 비교해서는 안되는구나 하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나저나 밭에 울타리나 트랩 같은걸 설치하는 것은 변함이 없네. 결과적으로 따져봤을때 말이야." 엘리와 같이 창을 손질하던 누나가 말한다. 사냥이라는 수단을 택했어도 방어 수단을 버린 것은 전혀 아니다. 언제든지 지금의 멧돼지뿐만 아니라 다른 녀석들, 그러니까 멧돼지 급의 동물들이 우리들에게 피해를 가할 우려가 크기 때문에 나름의 준비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사냥에 나가지 않는 인원들은 그 작업을 하면 되겠지." "철저하네. 남동생." "이래봬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같은것은 특기거든. 굳이 찍어서 말하자면 스타크래프트에서 주 병력이 적진을 치기 위해 가고 있는데 빈집을 들어올 가능성이 있으니까 방어 건물들을 구축해 놓는다는 그런 설정이라고 보면 되지. 참고로 방어에 능통한 종족은 사기라고 불리는 테란이야." "미안. 그건 공감을 못하겠어. 게임을 전혀 모르니까." "사실 나도 내가 말하고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 아무튼 대충 그런 느낌이라는 것이다. 멧돼지가 반드시 한마리만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고, 다른 멧돼지들도 존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최소한의 방어 대책을 강구하고 나서 공격을 나가는 것이다. 방어는 곧 최선의 공격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아무리 멧돼지를 사냥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의 보금자리가 망가진다면 그건 사냥을 안한 꼴보다도 더 심한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것과 마찬가지다. ============================ 작품 후기 ============================ 생존물에 관련된 소재를 얻기 위해 최근에 '정글의 법칙'을 봤습니다. 예능 프로그램이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소재 몇개를 발견했습니다. 조만간 이번 에피소드가 끝나고, 새로 영감을 얻은 소재로 이뤄진 에피소드 하나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내일부터 비축분을 열심히 마련해둬야지요. PS. 사과박스 연재에 관련된 질문을 하신 분이 계셔서 올려봅니다. 아직까지는 연재할 예정이 없습니다. 만약 연재한다고 한들, 무인도 표류일지가 아니라 다른 글이 올라갈 가능성이 큽니다. 조아라에서 결제하시고 보는 분들도 계신데, 괜히 사과박스에 가서 똑같은 글을 그대로 올리는 건 모양새가 좀 보기 안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연재한다고 한들 새로 쓴 글을 올려야지요. PS 2. 제가 얻었던 확밀아 배수 카드는 학도형 페리도트입니다. 카톡 이벤트 보상으로 2장을 주었지요. 헤헤헤. 94화 앞으로의 사냥 계획을 대략적으로 머릿속에서 생성하고 있을 무렵. 언제 내가 다가왔는지, 지아 선생님이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연장자라는 지위는 생각보다 힘든거야." "나이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뜻인가요?" "그래. 그리고 굳이 나이뿐만 아니라 노아는 너희들보다도 한참 성인이야. 교수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지. 너희는 제자고, 노아는 교수이니까." 잠자코 지아 선생님의 말을 듣고 있던 체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 그런거 신경 안쓰셨으면 좋겠어요..."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어려워. 너희들과 같이 나이가 1살 차이 수준으로 나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7~8살 이상으로 나고 있으니까." "... 그런가요...?" "노아의 입장에서는 나름 괴로운 위치였겠지. 교수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해줄수가 없었으니까. 이번 사냥 역시도 마찬가지야. 우리들은 그저 먹고 마시고 하면서 왁자지껄 떠들고 좋은 분위기를 탔지만, 사실 노아 본인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을지도 몰라. 왜냐하면 교수인 본인이 직접 아이들을 이끌고 식량 확보라든지 이런 주도적인 역할을 했어야 했는데, 정작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노아 교수님의 역할을 내가 대신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신보다도 나이가 어린 남자에게 리더를 맡긴 채 그저 따라가는 수동적인 위치로 전락해버린 노아 교수님. 사회에 있을때는 내 교수님이기도 했던 여성이 결국 무인도에 와서는 암컷과 수컷의 힘의 차이로 인해서 그 지위를 상실하고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집단을 이끄는 우두머리 수컷을 따라가는 일종의 한마리의 암컷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유에, 너에게 그런 의도는 없다고 생각해.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도 인정해줄 수 있을 만큼 무인도라는 환경에서 리더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으니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세리아와 체리는 그렇다고 해도, 아리아 마저도 이렇게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니까 괜시리 쑥스러워진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노아에게 더 상처가 될 수 있어." "잘하니까 노아 교수님이 더 괴로워하신다는 말인가요." "그래." 마른 장작을 주워서 넣은 지아 선생님. 대충 선생님이 하고자 하는 말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아리아가 선생님을 대신해서 말하기 시작한다. "유에 선배가 잘하면 잘할수록, 노아 교수님 본인은 '저 역할을 내가 했어야 했는데.'라는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것이겠죠. 다른 나라는 몰라도, 우리나라 특성상 교수와 제자 사이의 지위는 엄격하니까요." "그런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노아 교수님은 우리들에게 언제나 늘상 미안한 표정을 짓고 계셨어요. 교수로서 학생들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다는 그 기분 때문에요." "노아 교수님이 굳이 그런 기분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잖아." "제가 교수님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저나 유에 선배, 그리고 체리나 세리아 언니 모두가 아마 노아 교수님과 같은 지위였다면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내가 연장자고, 교수이니까. 모두를 안전하게 지켜내고 무인도에서 탈출하는거야 라는 주도적인 생각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 "그렇기 때문에 점점 유에 선배에게 의지해가는 노아 교수님 본인의 모습이 점점 더 싫어졌을 거예요." "그럴까?" "사회적인 위치와 나이만큼, 그 사람에게 책임감을 부여하니까요."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안다고 하지 않는가. 누나에게 자주 그런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아리아의 말에 무슨 반론을 펼쳐야 좋을지 모르겠다. 설마 노아 교수님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물론 직접 본인 입으로 들은 것은 아니고 제 3자의 입장을 통해 들은 것이지만, 그래도 얼핏 노아 교수님에 대한 감정을 추측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지아 선생님이 기지개를 펴면서 신경쓰지 말라는 듯이 입을 열기 시작한다.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 내가 알고 있는 노아라는 여자는 그렇게까지 약한 여자가 아니니까." "그렇겠죠. 누가 뭐래도 제 담임 교수님이니까요." 나도 모르게 지아 선생님의 생각에 동조하는 의견을 들려준다. 그러자 지아 선생님이 빙그레 웃으시면서 나를 보더니 톤을 낮춘 목소리로 말한다. "좋겠네. 노아는." "... 네?" "훌륭한 제자를 둬서. 약간 부럽기도 해." 민망한 칭찬을 날리시는 양호 선생님. 사실 전 그렇게까지 우등생이 아닌데요. 산장으로 돌아오고 난 이후에 같이 침실방에서 잠이 든 노아 교수님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나머지 인원들은 거실에서 취침을 취하게 되었다. 원래 불침번을 세워뒀어야 했는데 오늘은 가볍게 생략. "으음..."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엄습해온다. 살며시 눈을 뜨니 아직까지 모두 취침중에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역시나 어제 밤에 저지른 파티의 여파가 꽤나 큰 모양. 모기가 웽웽 하는 소리가 들려온 탓에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어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공터 안에 있는 호수 덕분에 아침에는 보통 안개가 끼어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해가 뜨기 전까지는 이런 식으로 습기 찬 안개속에서 아침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 게다가 현재 시간을 확인해보니 새벽 6시를 가리키고 있어서 축축한 이 분위기 속에서 아침을 맞이해야 하는 나는 상쾌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없다는 사실에 조금은 유감을 표시한다. "......" 여기저기서 뿌득뿌득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역시 아침에 일어나서 이런 식으로 몸을 풀어줘야 한다니까. 매일 하기에는 조금 귀찮지만, 그래도 이렇게 일찍 일어났을때는 체조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몸을 풀어주는게 잠을 더 빨리 깰 수 있고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대략 몸을 푼 나는 하품을 하면서 어제 우리들이 만들어놓은 밭의 울타리들이 잘 있는지 확인하러 간다. 멧돼지가 새벽의 틈을 타고 밭의 고구마와 감자들을 노리고 오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 탓에 오게 된 것이다. 5분정도 걸어가서 확인한 결과, 일단 겉모습은 멀쩡한걸 보아하니 멧돼지가 오진 않은 것 같다. 근처에 발자국도 없고. 이렇게 눅눅한 새벽에 보통 땅이 젖어들기 때문에 발자국이 쉽게 남는 상황에서 멧돼지의 방문 기록을 쉽게 알 수 있는지라 굳이 밭의 울타리 파괴상황을 보지 않아도 녀석이 이번에는 공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 정도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앞으로는 이렇게 불침번 말번초에게 순찰을 시키도록 해야 하나. 그래도 아직 멧돼지를 잡지 못한 상황에서 함부로 바깥에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하다. 공터 안이라고 해도, 멧돼지가 출몰하는 지역이라면 예외없이 단독행동은 금지해야 할 판국. 나야 남자이기도 하고, 멧돼지에게서 피할 요령을 가지고 있으니 이렇게 혼자서 순찰을 돌 수 있다고 해도, 세리아나 체리가 온다면 어찌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황을 연출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2인 1조 정도로 뭉쳐서 다니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나저나 아침부터 이런 생각을 다 하다니. 이 정도로 멧돼지가 신경쓰인다는 소리인 것일까. 가급적이면 빨리 녀석을 잡는게 좋을것 같다. ============================ 작품 후기 ============================ 요즘 들어서 잠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이상하다... 왜 이러지;; 95화 EX EP. 생존 속에서 우리가 멧돼지라는 무인도 생활의 커다란 위기 상황에 봉착하기 전. 그러니까 지아 선생님과 세린, 그리고 체리와 만나기 전에 겪었던 일화가 있다. 때는 그러니까 엘리의 통나무 하우스에 오고 나서 얼마 안 된 이야기. "더워라..." 손 부채질을 하며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누나가 연신 나에게 너무 덥다고 투덜거리기 시작한지도 언 1시간 째. 손등으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땀방울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나로서는 찝찝함과 누나의 투덜거림이라는 짜증섞인 상황을 버텨내고 있는 중이었다. 유독 더운 날씨에 숲 속에서 어물쩡거리고 있는 우리 남매. 이유인 즉슨. "굳이 또 다른 호수를 찾을 필요가 있는 거야?" 누나가 우리 일행의 목적에 잠시 딴지를 걸기 시작한다. 그렇다. 누나의 말 그대로, 우리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호수가 아닌, 다른 호수를 찾으러 잠시 길을 떠나온 상태이다. 멤버는 나와 누나, 그리고 전혀 덥다는 티를 안 내고 있는 무인도 생활의 달인, 엘리. "누나도 들었잖아. 혹시 우리가 머물고 있는 호수가 사용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미리 다른 식수용 호수의 위치를 알아두는 게 좋을 거라고." "사용하지 못할 상태가 생겨? 이 주변에 원자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석유를 싣고 가던 배가 침몰할 일도 없잖아." "산사태가 일어나서 흙탕물이 될 수도 있고, 정체모를 산짐승들이 우리가 머물고 있는 호수를 아지트로 삼을수도 있으니까." "상상력 한번 풍부한 녀석이구만. 내 동생이지만, 정말 대단해." "칭찬으로 들을게."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긴 하지만, 전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 또한 없다. 물이 오염되는 경우란, 곧 우리들의 생명과 직결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라는 말과도 동일하기 때문에 시간적인 여유가 남을 때, 이렇게 누나와 무인도 지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엘리를 대동해서 새로운 호수를 확인해두려고 하는 것이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무인도에선 언제나 유비무환의 태도만이 살 길. 서바이벌의 기초 지식 중 하나이다. "누나." "또 왜에~!" "엘리한테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하는 지 물어볼 수 있어?" "... 잠깐만." 누나도 이 지긋지긋한 행군은 더 이상 하기 싫은지, 엘리에게 직설적으로 물어보기 시작한다. 노아 교수님과 같은 유창한 영어 실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나 고학점의 영어 실력을 보유하고 있는 누나이기에 간단한 회화 정도는 할 수 있는 모양인가 보다. 누나의 말을 얌전히 듣고 있던 엘리가 작은 머리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브이(V)자를 만들어 보인다. 무표정으로 나름 애교있는 손짓을 보여주는 엘리. 그러나 누나는 이런 엘리의 바디랭귀지에 희망고문을 품어본다. "저 숫자 단위가 2분이었으면 좋겠어." "보나마나 2시간이겠지."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누나의 추측을 가볍게 무산시켜버리는 나. 이렇게 오랫동안 왔는데, 고작 2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괜히 헛된 희망을 품는 것보다, 그냥 얌전히 포기하는 편이 더 좋은 법. 슬X덩크라는 농구 만화에 등장하는 안 선생님도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던가. 포기하면 편해. 맞는 말이다. 하지만. "... 2 minutes." "나이스~!! 거봐, 남동생! 내가 뭐라고 했어?" 누나가 두 손을 불끈 쥐며 환호성을 지른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대략적인 시간. 2분. 가끔 기적이란 녀석도 심심한 모양인지, 자주 우리들 앞에 모습을 비추곤 한다. 뭐... 움직이기를 귀찮아하는 누나에게 있어선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값어치 있는 기적이겠지만 말이다. 교수님에게 손목시계를 빌려오지 않아서 우리가 도착한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지만, 배가 고파지는 시점으로 보아서는 대략 점심 정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호수를 찾은 것까진 좋은데." 구운 고구마를 아그작 먹던 누나가 최대한 고도가 높은 자리를 잡으며 강을 내려다고선 말한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크지 않아?" "그러게." 이런 말을 보태면 좀 과장된 표현일 것 같지만, 우리가 머물고 있는 호수보다도 대략 10배 정도 큰 크기를 자랑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호수라기 보다는... 강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고 해야할까. "그래도 이 정도면 식수 걱정은 없겠네. 물도 맑고." 바닥이 다 보일 정도로 투명한 1급 청정수의 면모를 자랑하는 강의 면모를 보고 나름 만족했다는 웃음을 선보이는 누나였다. 누나 뿐만 아니라, 물에 대한 걱정을 가지고 있던 나 또한 마찬가지. 엘리는 처음부터 이 강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에 우리들과는 다르게 별로 식수에 대한 근심과 걱정을 하고 있지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기분이 남다르다. "우리. 그냥 베이스 캠프를 옮겨버릴까?" "너무 무리한 요구를 제안하는 거 아니야? 누나. 보기에는 그렇게 보여도, 통나무 집을 만드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라고. 게다가 그 집에는 비행기 갑판도 내벽으로 설치되어 있잖아? 포기하기엔 아까운 보금자리야." "그럼 그 집을 다시 재료 단위로 분해했다가 이 곳으로 옮겨서 조립하면 어때? 그대로 가져오면 되잖아." "1시간 하고도 2분 거리를 그냥 걸어오는 것도 힘든데 두꺼운 나무들까지 들고 온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남자는 나 혼자 뿐이라고. 인원수는 그렇다 쳐도, 노동력은 부족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 "쳇.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 누나는 이 강물의 풍경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실제로 자연의 외관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장관에 나도 입을 다물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경관을 보고자 집을 통째로 옮긴다는 발상까지 도달한다는 사실에는 별다른 공감을 취하지 못하겠다. 있는 그대로가 최고. 보수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현상유지는 노동력을 아낄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럼 식사도 마쳤으니까. 이제 슬슬 가볼까." "잠깐만!"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내 손목을 황급히 잡는 누나. 뭔가 큰 일이 벌어졌나 싶더니만. "기왕 강에 온 김에, 샤워라도 하고 가야지!" "... 또 그거야?" "당연하지! 땀도 흘려서 찝찝하다니까!" "나 참." 절로 나오는 한숨을 막을 길이 없을 정도로 누나의 발언은 너무나도 태평했다. 그래도 뭐... 땀을 흘려서 찝찝하다는 사실에는 나도 동감하는 바이고. 게다가 이 강이 생활용수로 사용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는 직접 마셔보며 체험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탓에 어쩔 수 없이 누나의 말에 찬성을 한다. "알았어. 씻고 가자." "그럼 나 먼저 들어간다!" 라고 말하면서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고 재빨리 강으로 풍덩. 커다란 가슴이 출렁이는 모습까지는 대략 본 거 같은데... 그것보다도 이제는 바깥에서 알몸이 되는 것도 부끄럽지 않게 된 모양인가 보다. 무인도에서 생겨버린 안 좋은 습관이 벌써부터 누나에게 깃들게 되다니. 한숨을 쉬며 나도 옷을 벗기 시작한다. 옆에 있던 엘리도 대략 우리들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무엇을 할지 깨닫게 된 모양인지, 주섬주섬 옷을 벗기 시작. 체구가 작은 엘리가 나보다 훨씬 더 탈의를 먼저 한 모양인지 쫄래쫄래 다가가 누나 근처로 다이빙을 한다. 사방으로 튀기는 물방울의 모습이 정말 시원하게 보이는구만. 바지를 벗고 알몸이 된 채 누나와 엘리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는 나에게. "오옷. 덜렁거린다. 덜렁거려." "시끄럽다니까." 좌, 우로 흔들거리는 남성기를 보며 킥킥 웃어대는 누나. 아무리 친누나라 해도, 다 큰 남자의 성기를 보고 덜렁거린다는 말을 함부로 하는 건 좀 아니잖아. 엘리야 뭐 평소와 똑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니 중간이라도 가지. 천천히 입수를 시작하지, 발 끝에서 전해지는 시원함이 등줄기의 모든 신경을 타고 대뇌의 전두엽까지 전해진다. 으으. 시원하다. "감상은 어때? 남동생." "나쁘진 않네." "그렇지? 이곳으로 집을 옮기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니까." "한 순간의 감정적인 행복 때문에 앞으로의 미래를 고생길로 떨어뜨리는 선택 같은 건 하지 마. 누나. 안 좋은 습관이라고." 내 말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긴 머리를 찰랑이며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남의 충고는 좀 새겨 들었으면 좋겠건만. ============================ 작품 후기 ============================ 오늘은 합요일! 합합합합합합요일! 96화 "엘리! 이쪽으로 와!" "... yes." 뚱한 표정으로 첨벙첨벙 수영을 하면서 누나의 거대한 가슴에 얼굴을 묻는 데에 성공한 엘리. 누나의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부비 거리기 시작하자,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엽다는 듯이 웃어보이는 누나의 모습이 들어온다. 참으로 행복한 모습이다. 무인도라는 장소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 근처 바위에 등을 기대고 잠시 위쪽을 바라보는 나. 푸른 하늘 아래에 시원한 간물에 몸을 담고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마치 신선의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실제로 신선을 만나본 적도, 무릉도원에 가서 직접 체험해본 적도 없지만, 아마도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다. "... 응?" 탁 트인 시야에. 뭔가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의 모습... 이라고 할까? 동물의 움직임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앞 뒤가 맞지 않는 형상이 잠시 내 시야를 스치고 지나간다. 체형으로 보아서는 여자 한 명... 으로 보이는데. 부상이라도 당한 것일까? 한쪽 팔의 움직임이 매우 불편해 보인다. "누나." 엘리와 정답게 놀고 있던 누나를 부르며 손가락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킨다. "저쪽 한 번 봐봐." "왜?" "사람이 보인 거 같아서." "생존자야?"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어디어디." 손그늘을 만들며 내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향해보는 누나. 물방울 덕분에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머리카락은 내가 직접 손수 떼어준다. "나는 안 보이는데?" "정말로?" "잘못 본 거 아니야? 남동생. 요새 기가 허하다 싶더니만 헛 것이 보이는 거 같은데? 뭐하면 정력제라도 만들어 줄까?" "농담 아니라니까. 진짜로 봤다고. 어떤 여자가 팔에 부상을 입은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니까." "그래도 여기서는 제법 먼 거리이기도 하고. 네가 착각을 했을수도 있잖아." "그렇긴 하지만..." 누나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지금 우리가 목욕을 하고 있는 장소로부터 내가 여자를 본 장소까지는 꽤나 거리가 있다. 매의 눈 급의 시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력이 나쁜 편도 아니지만, 울창한 나무 숲의 형상과 사람의 외형을 착각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만약 진짜로 생존자가 있다면. 게다가 여성이고, 그 여성이 동물의 습격에 의해 다쳤다면? "아무래도 갔다오는 편이 좋겠어." "이 강을 건널 생각이야? 무리일텐데." "땟목을 만들면 되잖아." "만들 수 있어?" "노력은 해봐야지."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성공의 발판도 없는 법이다. 원래 인생이란 그런 거니까. "읏차!" 한쪽 어깨가 부서질 정도의 통각을 느끼며 간신히 강가 근처까지 옮겨온 다수의 통나무들. 손도끼를 가져오지 않은 관계로 이미 부러져 있는 나무들을 단순히 주워온 것에 불과하지만, 역시 나무는 나무다. 어마어마한 두깨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까. "남동생. 이 정도면 됐어?" "어. 수고했어. 누나." 다수의 잔가지들을 들고 온 누나에게 칭찬의 한 마디를 던지자, 옆에 있던 엘리가 뚫어져라 나를 쳐다본다. "알았어. 엘리도 잘했어. 굿." "......"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이제서야 납득했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질투심인가. 아니면 자신도 칭찬을 받고 싶다는 그런 감정? 어린애의 속마음은 잘 모르겠다. 개구리도 올챙이적 시절 모른다고 하지 않은가. 나 또한 마찬가지 일지도. "그런데 이걸로 뭘 하려고?" 누나의 직설적인 질문이 들어온 김에, 나무 재료들을 모은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해주도록 하자. "뗏목을 만들거니까." "만들 수 있어?" "실제로 만들어본 적은 없지만, 티비에서 본 적은 있으니까." 뭐든 경험을 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해본 적이 없다고, 영원히 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 말이다. "어디보자..." 제일 아래쪽에 나무들을 가로로 눕혀놓고, 그 위에 2단으로 세로 방향을 유지한 채 다른 나무들을 쌓아 올린다. 중간 중간에 잔가지들을 넣어 최대한 부력을 상승시키는 역할을 하게끔 만들고, 이음새로는 나무 줄기를 이용해 엮는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직접 만들어보니까 굉장히 힘든 작업이 아닐수가 없다. 이걸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는 실제로 했다니. 연기자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그 때 당시에는 과장된 연기 아니냐 했지만, 막상 실제로 해보니까 배로는 힘들다. 대충 뗏목의 형태가 만들어졌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해버렸다. "이거, 1인용 아니야?" "... 그러게." 설계의 착오인가. 아니면 재료의 부족인가. 면적은 작아도, 물에는 잘 뜰 줄 알았던 뗏목이 3명이서 타기에는 엄청나게 무리가 있는 한계 용량을 보여주는 것이다. 누나와 엘리 둘이서 타면 딱 적당. 그리고 나 혼자 타면 딱 적당. "결국, 남동생 혼자 가느냐, 아니면 나와 엘리가 둘이서 가느냐 차이네." 누나의 말 그대로다. 본의아니게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우리가 구해온 것 이상의 재료는 찾을 수 없고, 설사 더 있다고 한들 뗏목 보수작업을 해봤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다간 해가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두워지기 전에 강을 건너는 게 가장 좋은 상황이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고르게 된다. "내가 갔다올게." "너 혼자서?" "여러모로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르니까." 여자의 부상으로 추측컨데, 분명 덩치가 큰 짐승에게 습격을 당했거나, 아니면 악의를 품은 다른 생존자에게 공격을 당했을 가능성도 크다. 저번에 만났던 그 여자의 경고처럼. "하루 정도 날을 잡고, 누나하고 엘리는 여기서 임시적으로 캠프를 마련하고 내일 아침까지 머물고 있어. 불 피울 수 있지?" "엘리가 있으니까 상관 없긴한데. 하루씩이나 잡는 거야?" "내가 뗏목으로 강 건너편에 건너갔을 때는 이미 해가 지는 시간일 테니까. 밤에 도로 건너오는 것 보다, 날이 밝을 때 제대로 시야가 확보된 틈을 타 건너오는 게 훨씬 안전하잖아. 괜히 서두르다가 어두운 밤에 급류라도 휘말려봐. 돌이킬 수 없겠지." "하긴. 안전이 최우선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설득을 당한 누나의 한 마디였다. ============================ 작품 후기 ============================ 내일은 친구 결혼식이 있어서 제대로 글을 올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평소와 같은 시간으로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97화 누나와 엘리가 오늘 하루동안 머물 임시 베이스 캠프를 만드는 일에 동참하고 나서. 슬슬 해가 질 시간에 맞춰,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뗏목을 물가 위로 띄워본다. "갈 수 있겠어?" "해봐야 알겠지." 균형을 유지하며 뗏목 위에 안착. 약간 비틀거리는 감이 없지않아 있지만, 이내 곧 무게중심을 잡고서 막대기를 들고 수면의 바닥 아래에 위치시킨다. 물가의 중간 부분에 막대기를 넣어본 결과. 수심은 대략 2~3미터 정도로 판명이 된다. 수영을 치고 갈 수는 있겠지만, 급류라는 변수도 있고 도중에 체력이 바닥났을 경우도 고려한다면 안전하게 뗏목을 만들어두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옳았다. "그럼 내일 보자고. 누나, 엘리." "조심해서 잘 다녀와." "... bye bye." 뚱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흔들며 나를 배웅해주는 엘리. 그리고 엘리의 작은 양 어깨위에 손을 올려놓고 잘 갔다 오라는 말을 전하는 누나를 뒤로하고, 천천히 뗏목을 이동시킨다. 졸졸졸 흐르는 강물의 소리가 귓가를 통해 전해지며, 점점 더 팔에 힘을 가해본다. 무인도에 와서 그런 것일까. 수많은 작업 덕분에 나도 모르게 팔의 근력이 붙었는지, 평소라면 금방이라도 헥헥거릴 체력이 요즘 들어서 부쩍 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혼자서 마음속으로 취임새라도 넣으면 조금은 더 힘이 나려나. 라는 쓸모없는 잡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해가 딱 저무는 타이밍에 도착한 건너편의 풍경은 내가 왔던 곳과 다를 바가 없다. 단지. 어두운 시간대라 그런지 조금은 음산한 기운이 감돈다고 해야 할까. "영차." 미리 받아온 라이터로 근처에 있는 마른 장작들을 모아 불을 붙인다. 최대한 시야가 탁 드인 공터에 불을 붙여놨으니, 근처에 생존자가 있다면 아마 이 불을 보고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시야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생존자를 찾으러 다닐수도 없으니까 말이다. 일단 무작정 기다려보기로 하고서 그대로 바닥에 드러눕는다. 그러자 검은 하늘에 무수히 박혀있는 별들의 향연이 이어지는데. "... 괜히 왔나." 사서 고생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내가 잘못본 것일수도 있지만. 그래도 행여나 진짜로 생존자가 있다고 한다면, 구조의 손길을 내밀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로서 당연한 거 아닌가. 틀린 선택은 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지만, 그래도 역시나 음산한 기운과 차가운 공기가 폐 속 가득히 들어가는 이 느낌은 후회감을 자아내기에 딱 좋은 환경 조건을 조성하고 있었다. 그 때. "!!" 얼핏 느껴진 인기척에 나도 모르게 상반신을 일으킨 순간. "움직이지마." 단아하면서도 고음의 목소리가 나에게 재빨리 경고를 가한다. 그것도 한순간. 퍽! 뒷통수에 느껴지는 강한 충격과 함께.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는 나. 천천히 감기는 눈커풀 사이로. "... 이예신..." 저번에 만났던 정체불명의 여자가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크윽..."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느껴진 건, 뒷덜미에서 전해져오는 강한 통각이었다. 나도 모르게 미약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눈을 뜨자. "이제 정신을 차린 모양이군." "... 덕분에." 생존자 수색을 나섰던 때에 만난 이상한 여자, 이예신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나무 기둥에 묶여 있는 자세라고 해야 하나. 졸지에 포로가 된 건가? 하지만 난 딱히 이 여자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 기억도 없고. 그래봤자 예전에 단 한 번 만나서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이런 모진 경험을 겪어야 하는 이유가 되질 않는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노력보다 결과가 중요한 법. 이러쿵 저러쿵 머리속에 서식중인 뇌세포들을 아무리 굴려봐도, 결과적으로 나는 이예신이라는 여자에게 습격을 당했고, 지금 포박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만을 인지할 수 밖에 없다.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음. 나이프로 뭔가를 손질하고 있던 모양인지,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걸어온다. "배고픈가." "네 얼굴을 보니, 유독 배가 고파오는데." "재미없는 농담이군." "나도 웃으라고 한 말 아니야."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며 말을 해보지만, 상황은 여전히 불명이다. 왜 나에게 이런 대접을 하는지 조차도 알 수 없기에 최대한 조심하게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이 놈의 비틀어진 성격 때문에 도발적인 말만 튀어나온다. 역시 나도 누나의 동생이라는 걸까. 이렇게 보면 피는 정말 못 속인다. 어이없다는 웃음을 짓고 있던 예신이 갑자기 내 앞에 뭔가를 내민다. "먹어라." "그건..." 우리가 무인도에서 먹던 고구마나 감자, 생선이나 과일 종류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육류. "어디서 난 거지?" "인육은 아니니까 닥치고 먹기나 해." "......" 솔직히 말해서 미세하게 의심은 하고 있었다. 이 여자와는 안 좋은 기억으로 연관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근처에 머물고 있던 노루를 잡은 거다." "노루라고?" "넌 군대도 다녀왔으면서 서바이벌에 대한 전반적인 기초 지식도 없는 모양이군." "... 무식해서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장난 어린 사과를 건네본다. 서바이벌의 기초 지식이라. 군대에서 알려주는 거라고 해봤자. 형식적인 군기 잡기가 전부인데. 거기서는 무인도에 떨어져도 살아남는 방법 같은 건 안 알려준다고. 기껏 해봤자 정훈교실이 전부니까. 양 손이 포박되어 있는 관계로 예신이 건넨 고기를 직접 입으로 받아 먹는다. 내가 피운 화로에 알맞게 구워진 모양인지, 오랜만에 맛보는 육질의 감촉은 실로 뛰어났다. 이것이 바로 고기의 맛. 집에서 먹던 삼겹살의 향이 그리워지는 순간이로구나. 한동안 예상치 못한 포식을 마치고 나서.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내가 거기에 답해줘야 할 의무가 있나?" "의무는 없어도 자비 정도는 배풀 수 있지 않냐?" "여자에게 자비를 바라다니." "팔이 묶여 있으면 여자보다 약한 게 남자라고." "명심하도록 하지." 말로만 알았다는 식으로 답변한다. 눈빛과 표정, 어느 하나 변한 곳이 없으면서. 화로에 자리를 잡은 예신에게 우선 지금 당장 궁금한 2가지를 묻기 시작한다. "나를 묶어놓은 이유는?" "질문은 그게 다인가?" "아니. 하나 더 있어." "그럼 방금 네가 한 질문은 맨 마지막에 답해주도록 하지." "......" 일단 질문에 답을 해줄 용의는 있다... 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나. 그래도 무턱대고 싫다는 말 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도록 하자. "좋아. 그럼 다음 질문. 내가 이 곳에 온 이유이기도 한데. 상처를 입은 여자가 보였던 것 같은데. 넌 본 적 없어?" "... 글쎄." "질문에 친절히 답해준다고 하지 않았냐." "답해준다고 확답을 준 적도 없고, '친절히'라는 단어는 사용하지도 않았을텐데." "쳇." 기억력도 좋은 녀석. 자신이 한 말은 필사적으로 기억해내는 녀석이 화술계에 있어선 제일 상대하기 힘든 타입이다. 고기를 만졌던 손을 씻기 위해서인지, 물통에 담긴 식수로 가녀린 손을 씻기 시작한 예신이 딱딱한 말투로 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내려주기 시작한다. "그 여자라면 다른 생존자 집단으로 호송됐다." "호송?" "들짐승에게 습격당한 상태였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요 근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구조되었다고 말해주면 되나." "너도 그 집단의 일원이야?" 혹시나 하는 생각에 던져본 질문. 그러자 천천히 예신의 입술이 움직이며 말을 내뱉는다. ============================ 작품 후기 ============================ 전주 잘 다녀오겠습니다 ㅇㅅㅇ/ 98화 괜히 불안하게 나이프를 만지작 만지작 거리던 예신이 특유의 차가운 눈빛을 나에게 향하며 말한다. "집단 행동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아. 오로지 혼자서만 행동하는 주의라서." "넌 역시 이상한 녀석이야." "내 시선으로 보았을 땐, 아무것도 모르고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너희같은 부류가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데." "... 그러냐." 첫 만남 때부터도 대략 예상했던 결과지만, 역시 저 녀석은 평범하지 않다. 나와 같이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며 살아왔다는 말을 하기에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인은 정체불명의 여성. 게다가 무인도에서 범한 살인 조차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조차 느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뭐랄까... ... 익숙하다고 해야 할까. "너, 정체가 뭐지?" "이제와서 그런 질문을 하다니. 너도 참 바보구나." 나이프를 들고 설렁설렁한 걸음으로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다. 왠지모를 불안감. "아까 네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지? 왜 너를 포박하고 있냐고." "그랬었긴... 했지." "이제 그 대답을 들려주겠어." 라고 말하면서. 느닷없이 내가 입고있던 티셔츠의 아랫부분에 나이프의 날을 집어넣는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배꼽 바로 아래까지 느껴지는 이 기분. 정말 섬뜩하다. 말할 수 없는 공포란 바로 이런 것일까. 그것보다 이 여자, 도대체 나를 어떻게 하려는 것이길래 이런 행동을 취하는 걸까. "가만히 있어." 위엄있는 말과 함께, 나이프의 날이 세로로 세워지며 그대로 내가 입고 있던 티셔츠를 찢어버린다. 본의아니게 상의 탈의를 하게 되자, 나를 내려다보던 예신의 눈빛이 더더욱 가늘어지며 입맛을 다시는 듯이 혀를 살짝 내민다. "보기와는 다르게 제법 괜찮은 몸을 하고 있군." "난 먹어봤자 맛 없다고. 아까 네가 사냥한 들짐승이 더 맛있으니까 그 녀석이나 잡으러 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여성에게 있어서 남자보다 더 맛있는 생물이 또 있을까?" 이상한 말을 지껄이며 예신의 손가락이 천천히 나의 바지 자크를 풀기 시작한다. 저항할까 생각을 해봤지만, 나이프를 들고 있는 녀석에게 어떠한 보복을 당할지 예상조차 안 되기 때문에 그대로 묵살시킨다. 짤그락, 짤그락 소리를 내며 벨트까지 풀어버리고 그대로 바지를 벗겨버리는 예신. 이제 남은 건 속옷 뿐이다. "이런 위기상황에서도 그 더러운 물건을 잔뜩 세우고 있다니. 남자란 생물은 역시 알다가도 모르겠어." "......" 정신상태가 이상한 녀석이긴 하지만, 예신은 다른 의미로 미인이다. 사이코 기질이 다분한 광적인 매력이 있다고 해야 할까. 몸매도 좋은 편이고, 알게 모르게 색기까지 느껴진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잘 듣도록." 말과 동시에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내 속옷까지 벗겨닌 예신이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성기를 붙잡는다. 크게 불끈거리기 시작하는 남성기를 그대로 움켜쥐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는 녀석. "독신주의자이긴 하지만, 성욕같은 건 혼자서 풀어내면 재미가 없잖아." "뭐...?" "남자는 여자를 원해. 생리학적으로 당연한 현상이지. 그리고 여자 또한 남자를 원해. 이것도 생리학적으로 당연한 현상이야. 오랫동안 무인도 생활에서 성욕에 굶주리게 되는 건 남자들 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아?" "......" "그러니까 나는 너를 '잡아먹기' 위해서 붙잡은 거야. 네가 나랑 하고자 하는 섹스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까봐 일부러 포박까지 하는 수고로움을 치루면서 까지." 예신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나도 모르게 짧은 신음소리를 내뱉는다. 이윽고 뿜어지는 하얀색의 정액. 낯선 여성이 만져주자마자 사정을 할 정도로 성욕에 굶주려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언제 이 여자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알몸으로 성기를 붙잡혀 있는 상황과 아이러니하게 맞물려 흥분으로 작용하고 있나보다. 오른 손등에 잔뜩 묻은 흰색의 정액을 바라보던 예신이 혀를 내밀며 그대로 하얀색의 애액을 핥는다. "맛 없는 건 여전하군." "먹어 본 적이 있는거냐?" "그 이상 말했다가, 입을 찢어버리겠어." "... 알았다. 미안. 내가 잘못했어." 이 여자는 왠지 진짜로 할 거 같아서 나도 모르게 기세에 눌려 사과를 해버렸다. 맛 없다, 맛 없다 하면서도 정액을 다 핥아먹은 예신이 자신이 입고 있던 스키니진 바지를 탈의하기 시작한다. 보라색의 섹시미가 물씬 풍기는 팬티가 세상 바깥으로 노출되는 순간. 상의는 벗지 않은 채로 팬티까지 벗어버린 예신이 한번의 사정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발기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내 성기 위에 자리를 잡는다. 천천히 하반신을 아래로 향하면서 성기의 끝이 질 입구 안으로 살짝 들어가기 시작. 점점 더 자궁의 입구로 향해 안으로 들어가지만, 예신은 아프다는 표정 하나 지어보이는 거 없이 그대로 내 성기의 뿌리 끝까지 자신의 몸 안에 품어버린다. 이윽고 녀석에게서 볼 수 없을거란 예사롭지 않은 허리놀림이 시작. 남자 경험이 많은 여자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움직임이 장난이 아니었다. "윽..." 녀석은 신음소리조차 내고 있지 않지만, 도리어 내가 다 신음이 튀어나올 정도. 조임도 엄청나고, 말 그대로 명기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의 테크닉을 선보인다. 내가 여자 경험이 별로 없다는 것도 있지만... 뭐랄까. 생긴것과 다르게 너무나도 잘 논다고 해야 할까. "기분 좋나보군." "그, 글쎄..." "남자란 다 그래. 여자와 어떻게 몸을 섞을까 라는 생각밖에 안 하지. 입장을 바꿔서 당해보는 느낌이 어때?" "... 죽을 맛이야." 쾌락에 빠져서 죽을 맛이다. 분명 아프거나 괴로운 쪽은 여자인 예신일텐데, 녀석은 찡그리거나 인상을 찌푸리는 낌새 조차도 없다. 무덤덤하게 허리를 움직일 뿐. 마치 의무적으로 섹스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게다가... 쾌락이라든지 그런 감정보다는 그냥 무인도에서 무료한 일상을 보내다가 오랜만에 재미있는 오락거리를 찾았다는 그런 느낌일까. 예신의 허리놀림이 본능적으로 성기의 끝에서 하얀색의 정액이 자궁을 향해 뿜어지기 시작한다. 불끈거리며 끝까지 정액을 토해내는 성기를 몸 안에서 빼내는 예신. 그녀의 사타구니를 시작으로 탐스러운 허벅지를 지나 가느다란 종아리, 그리고 발 끝까지 내 정액과 그녀의 애액이 섞인 내용물이 그대로 타고 바닥을 향해 흐르기 시작한다. 5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섹스. 하지만 그 섹스가 끝나자마자. "컥!!" 예신의 발이 내 복부를 강하게 차올린다. "누가 안에다 싸라고 했지?" 변명할 시간조차 주지 않으려는 듯이 연이어 녀석의 날씬한 발이 내 복부, 안면, 가슴, 심지어 방금 전까지 예신이 움켜쥐었던 성기에게까지 향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구타. 손이 포박되어 있는 상태라서 그저 맞고만 있을 수 밖에 없는 내 신세가 겨우 끝이 나는가 했더니만. "놀잇감 주제에 함부로 기어오르려 하다니." 어느새 녀석의 손에는 날카로운 도신을 번뜩이는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언제 사람을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여자. 아니, 이미 살인이란 경험을 겪은 여자. 시한폭탄과도 같은 예신이 다시 한번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나이프의 끝을 내 목에 겨누며 말한다. "임신이라도 한다면, 나는 네 목을 이대로 그어버려서 물고기 밥으로 줘버릴 거야. 아니면 성기를 떼어서 고자로 만들어버릴까?" "......" "살려달라는 구걸이라도 해보시지." "......" 아마도 무인도에 들어와서. 최대의 위기상황이지 않을까 싶다. ============================ 작품 후기 ============================ 결혼식은 정말 피곤하군요. 막 전주에서 끝나고 돌아왔습니다. 99화 꿀꺽... 침이 넘어가는 상황에서 압도적인 위압감을 뽐내고 있는 예신. 세상에 이렇게나 이상한 여자가 다 있을까.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여성들의 범주 내에선 이런 특이 케이스가 존재하지 않는다. 평범하게 자라온 사람과는 유독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여성. 어떻게 해야 녀석의 비위를 맞출 수 있을지 고민하던 사이에. "재미 없는 녀석이군." 단발적인 말을 내뱉으며 스스로 나이프를 거둬들인다. 설마 농담이었던 것일까? 절로 나오는 한숨소리가 바로 목 부근까지 올라왔지만, 괜히 또 예신의 신경을 건드릴 수 있을거란 우려심에 재빨리 다시 배 안으로 삼킨다. 덕분에 아까 먹었던 고기에 얹혀서 소화게 제대로 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모처럼 무인도에서 구한 장난감을 함부로 고장내서는 안 되니까." "... 장난감 취급이냐." "여기 무인도에서 표류된 남자 생존자들 중에서는 그나마 니 녀석이 내 취향이니까." "하하하..." 기뻐해야 좋을지, 슬퍼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분명 간접적인 고백을 받은 듯한 기분이 드는데, 당사자는 매우 뻔뻔하게 시리 무표정에다가 나이프의 날을 매만지고 있다. 적어도 평범한 여성에게 고백을 받고 싶은데. 다시 화로 앞으로 자리를 잡은 채 앉은 예신이 음모 털에 뒤엉켜 굳어버린 정액 덩어리를 물로 씻어내기 시작한다. 보기에 따라 매우 음란한 모습일지 모르지만, 시행하고 있는 본인이 이예신이라는 여자라고 친다면 그다지 야한 느낌도 들지 않는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로 향한 뒤에 세면세족을 하는 듯한 그런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아까도 말했지만, 이 시간 이후로 내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다면, 곧바로 너를 죽이러 갈 거다." "......" 임신시키면 죽여버린다는 경고는 농담이 아니었나 보다. 사타구니를 씻어낸 뒤. 다시 스키니진 바지를 입은 예신이 나뭇가지에 자신의 젖은 팬티를 넌다. 흰색의 스키니진이라 검은 음모가 대놓고 드러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크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다. 하기사. 섹스를 하는 도중에도, 표정변화나 심지어 짧은 신음소리 조차도 내지 않았던 녀석인데. 그런 일에 신경을 쓸까. "이봐." "뭐지? 장난감." "함부로 남의 인격을 모독하는 별명같은 건 붙이지 말라고. 제대로 된 이름도 있으니까 그걸로 불러." "이름이 뭐지?" "유에." "알겠다. 이제부터 내 장난감 이름은 '유에'라고 짓도록 하지." "장난감이라는 단어는 좀 빼라니까." 일부러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나를 놀리는 재미에 빠지기라도 한 것일까. 어느쪽이든 확신을 가질 순 없지만, 만약 그렇다면 저 녀석은 진짜 대단한 녀석이라고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대놓고 남 놀리기를 좋아하다니. 게다가 포박을 시켜놓고 남의 정력을 마음대로 빼앗아가질 않나, 그래놓고 임신을 시키면 죽인다고 하질 않나. 순전 자기 멋대로다.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고 하던가. 귓속이 간지러웠는지, 곧장 말을 잇는 녀석. "그래서 나에게 하려던 말이 뭐였지? 장난감." "설마 나를 이대로 묶어놓고 가려는 건 아니겠지?" "음... 그것도 좋은 방법이군." "제대로 안전 보장 정도는 해달라니까." 아까 녀석이 나에게 먹였던 고기. 그건 분명, 덩치가 큰 들짐승이 있다는 소리와도 같다. 무인도에 어슬렁거리는 들짐승에게 무방비로 노출된다면. 행여나 멧돼지나 사나운 맹수와 맞주치게 된다면, 생존 확률은 극악으로 떨어진다. 결국 이래나 저래나 내 목숨의 선택권은 예신에게 있다는 소리. "어차피 아침이 되면, 저절로 풀어줄 생각이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대신, 너는 나와 오늘 만났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겐 알려선 안 된다. 이게 전제 조건." "이유는?" "내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으니까." "그게 전부야?" "아까도 말했지만, 난 집단 생활을 무지하게 싫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 사회에서도 친구라든지 그런 사람은 한 명도 없었던 거 아니야?" "스스로 죽고 싶다면 그렇게 말하도록. 네 뜻을 존중해줄 테니까." "미안. 농담이야. 용서해줘." 집단생활에 대한 거부감. 대학 생활에서 아웃사이더라는 존재와 비슷한 것일까. 아니지. 그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발생하는 하나의 왕따 현상일 뿐이지, 지금처럼 녀석과 비슷한 입장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무인도에 표류된 것도 처음일 터인데, 너무나도 익숙하게 야생의 생활에 적응해가는 여성. 게다가 살인도 서슴치 않는다. 정체가 뭘까. 이예신이라는 여자. "......" 또 한번 익숙한 자세에서 희미하게 눈을 뜬다. 차가운 새벽의 공기가 안면과 온 몸의 피부 전체와 맞닿으며 시원스러움의 촉감을 전해줄 무렵. "...?!" 내 몸을 포박하고 있던 줄이 풀어져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내 몸을 묶고 있던 줄이 '사라져'있다. 아마도 그 녀석이 가져갔겠지. 오랜만에 팔을 움직이자, 우두둑 소리가 나며 뻐근함을 파도의 밀물 밀려오듯 느끼게 해준다. 희미하게 기억을 더듬으며 어제 녀석이 했던 말을 잠시나마 떠올려보기 시작하는 나. "무인도에 표류된 사건이 너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재난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행운이며 축복이다." 녀석은 분명 내가 잠들기 전에, 그런 식으로 말을 했다. 오히려 무인도에 표류된 일이 녀석에게 있어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라니.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내 입장으로 적용시켜 보자면 절대로 공감할 수 없는 말이지만, 사람마다 주관적인 시선이 있으니까. 그러려니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녀석은 무인도 표류라는 사건을 통해서, 환멸을 느끼던 사회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일탈이란 이름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예신이란 여자는. 집단생활을 끔찍히도 싫어하니까. "이제와서 생각해봐도 별로 도움이 안 되겠지." 어차피 녀석은 내가 눈을 뜨기 전에 모습을 감췄다. 이제와서 뒤를 쫓아가봤자 찾지도 못할 뿐더러, 발견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예신에게 당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게다가 지금 단계에서 예신과 만나도 더 이상 할 말은 없으니까. "다시 돌아가야지." 강가에 미리 주차를 시켜놨던 뗏목을 다시 물가 위로 띄운다. 물살도 어제에 비해서는 상당히 양호한 편. 이 정도면 별다른 힘 안 들이고 곧장 누나와 엘리가 기다리고 있는 건너편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긴 막대기를 이용해서 열심히 뗏목을 이동시키자, 임시적으로 만든 베이스 캠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누나와 엘리. 제일 먼저 동물적인 감각을 소유하고 있는 엘리가 내 기척을 눈치채고 먼저 물가로 달려나온다. "다녀왔어. 엘리." "......" 마치 집에서 기르고 있는 작은 아기 고양이가 나를 마중나온 듯한 그런 귀여움을 선사해주는 엘리의 모습이었다. 금발 미소녀의 작디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는 와중에, 팔짱을 끼고 등장한 누나가 나에게 안부를 건넨다. "잘 갔다왔어?" "그럭저럭." "네가 봤다던 생존자는 있었던 거야?" "뭐..." 말을 할까 말까 하다가. 잠시 고민을 해봤지만. "역시 내가 잘못 봤던 것 같아." "그럴 줄 알았어." 누나가 장난스럽게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한다. "자, 빨리 가자. 다들 걱정하겠어." "말 안해도 알고 있어." 어제 있었던 일은 모두 비밀. 그녀의 존재를 포함해서 전부. 그게 나와 예신이 맺은 약속이자, 일종의 계약이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내일 100편을 달성하겠군요. 미리 자축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PS. 확밀아에서 학도형 메리 키라가 떴는데... 풀돌하기에는 2장이 모자릅니다 OTL 그래도 키라가 떴으니 기쁘군요. 키랏~☆ 100화 EP 13. 돼지는 잡아도 돼지. "... 훈련이라고?" 오히려 나에게 되묻는 유아 선배. 다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나서 사냥 팀을 소집한 나는 제일 먼저 그녀들에게 이런 말을 건냈다. 멧돼지를 잡기 위한 특훈을 하죠. 그래서 이렇게 유아 선배가 나에게 도리어 질문을 하는 것이다. "갑자기 왠 훈련인데?" "그야 생존률을 높이기 위해서죠." "작전은 이미 짜여있는거 아니야?" "멧돼지는 노루와는 달라요. 녀석은 스피드와 더불어서 파워까지 겸비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훈련이라니... 도대체 뭘 할건데?" 훈련 그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는 모양처럼 보인다. 사실 내가 약간 두루뭉술하게 말한 것도 있지만, 제대로 감이 잡히지 않는지 세린과 누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만을 보여줄 뿐이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훈련 메뉴를 생각해봤죠." "기특한 생각을 다 했네. 남동생." "하하하. 좀 더 칭찬해도 돼. 누나.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하는 남동생을 만나기에는 참 드문 일이잖아. 그렇지?" "아니, 그 말을 들으니까 방금 들려준 칭찬마저 철회하고 싶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어." 내가 생각해낸 훈련 스케쥴 그 첫번째. 스피드를 올린다. 어차피 우리들에게 멧돼지를 감당할만한 위력을 가진 근력의 소유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힘이 가장 쎈 나조차도 멧돼지를 감당하지 못하는데 다른 여자들이라고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그렇다면 적어도 멧돼지의 공격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순발력을 기르도록 하자. "... 라는 취지에서 일단 달리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하필 달리기인데." 벌써부터 항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발언자는 다름아닌 금발의 미소녀, 이세린. 충분히 태클을 걸 수 있을만한 인물이라고 예상했기에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유지하며 침착하게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사실 나는 너 뿐만이 아니라 유아 선배, 누나가 얼마나 빠르게 달릴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모르고 있어. 그래서 가볍게 테스트 겸 달리기를 해보자는 것이지." "엘리는 왜 제외하는데?" "너도 어제 직접 봐서 알잖아. 엘리는 우리들 중에서도 가장 빨라. 특히나 숲속이라면 마치 자신의 집 안인듯 양 마음대로 활보할 정도의 고수의 단계에 들어선 수준이지. 그러니까 굳이 말 안해도 알겠지?" "......" 반론이 없는걸로 보아서는 엘리에 대한 능력은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작 당사자인 엘리는 내 옆에 앉아서 어제 먹다 만 고기조각을 우물우물 씹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고로 바닥에 그려진 스타트 선에 정렬하고 출발 준비를 해주세요." "네에~..." 기운 빠지는 대답으로 출발선에 선 누나 외 2명. 그리고 이어지는 출발 신호. "스타트!" "경기인 이상, 질 수는 없지ㅡ!!!" 역시나 승부욕 충만한 유아 선배다운 태도였다. 내가 시작이라는 말을 하자마자 순식간에 앞으로 튀어나가는 선배. 운동신경이 엄청나게 좋은 선배가 초반부터 치고 나가자, 뒤늦게나마 라이벌 의식을 받았는지 세린이 막판 스퍼트를 가하기 시작한다. "제가 가만히 있을줄 알았나요?!" "그럼 날 이겨보든가. 펜싱부는 절대로 검도부를 이길 수 없다고!" "그렇게 나왔다 이거죠??" 세린의 승부욕, 아니 개인적인 프라이드에도 불이 붙어버렸다. 이 둘은 왜 이리도 사이가 안좋은 것일까. 서로 라이벌 사이라고 해도, 무인도에서는 조금 정도는 친하게 지내주면 좋을텐데. 아무튼 뜬금없이 과열 경쟁 분위기로 달아오른 달리기 테스트. 앞서가는 유아 선배의 뒤를 맹렬하게 추격하는 세린이 긴 금발을 휘날리며 빠른 속도로 유아 선배의 바로 뒤까지 추격한다. 저렇게 보여도 세린 역시도 운동신경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말이 되는건가. 세삼 놀랐다. 그냥 얌전한 부잣집 아가씨고, 단순한 취미 생활로 펜싱을 하는건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제대로 모양세가 갖춰진 펜싱 자세를 봤을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던건데. 어찌저찌해서 막판에 이세린의 놀라운 추격전의 결과물로 유아 선배가 먼저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동시에 골인을 하게 되는 특이한 결정이 내려졌다. "동시 우승이네요." "말 도 안 돼!!" 아리아의 말에 세린과 유아 선배가 사이좋게 전면 부정한다. 저럴때만 죽이 잘 맞는구나. 묘한 쪽으로. "아리아!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 내가 이 건방진 후배에게 질 이유가 없잖아." "누가 건방진 후배라는 거예요!" "당연히 널 말하는거지 누구겠어?" "흥! 그러면 선배는 '건방진 선배'가 되겠네요." "후배 주제에 뭐라고?!" "무인도에서 선, 후배 사이가 어디 있어요?" "... 좋아. 예전부터 펜싱부가 상당히 거슬렸는데 오늘에서야 결판을 지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구나." "우연이네요. 마침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서로 기분나쁜 대사를 읊으면서 각자 자신의 무기를 꺼낸다. 유아 선배의 목검과, 세린의 펜싱 칼(이제는 부연설명 하기도 지겹지만, 다시한번 말한다. 나무 막대기다, 진짜 칼이 아니다.). 마치 개와 고양이, 톰과 제리, 한국과 일본이 맞부딛친 것처럼 서로 으르렁 대는 이 상황속에 이제서야 결승점을 통과한 누나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한다. "결승점 분위기는 상당히 거칠었구나." "... 누나는 뭘 그렇게 설렁설렁 뛰어오는거야." "그치만 귀찮은걸." "귀찮다는거 나도 알고 있는데, 그래도 이건 사냥을 위한 일종의 기초 체력 테스트라고. 그러니까 좀 더 열정적으로 참가해줬으면 좋겠는데." "열정적이라... 그럼 전력을 다 해서 뛰면 되는거지?" "처음부터 그렇게 의욕을 보였다면 좋았잖아." "에헷." "귀엽게 윙크해서 무마시키려 해도 소용없어." 결국 다시 시작된 레이스. 처음에는 귀찮으니 뭐니 하던 사람들이었지만, 갑자기 은근히 승부욕 싸움이 되어버려서 세린과 유아 선배는 출발 직전에 몸을 풀고 있었다. 아까는 몸 풀 생각은 전혀 안하더니, 이제서야 진심으로 나오는 건가. "어차피 또 뛰어봤자 내가 이길텐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기는 사람은 저인게 당연하잖아요." "여전히 콧대하난 높구나. 이세린." "선배가 너무 허세력이 높은 거예요." "뭐가 어째?" "정말 진심으로 한번 해볼래요?" 파지지지직. 둘 사이에 스파크가 튀기는 착각이 들 정도로 맹렬하게 눈싸움을 시작한다. 이 사람들은 언제쯤 사이가 좋아질런지 모르겠다. "유에." 언제부터 옆에 있었는지 양호 선생님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너는 어느쪽에 걸래?" "... 내기라도 되는 건가요?"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도 내기를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서. 참고로 나하고 노아, 엘리가 유아한테 걸었고 1학년 3명이 세린한테 걸었어." "......" 이 사람들이 정말. 재차 강조하기도 귀찮지만 이건 내기 경기가 아니라고. 기초 체력 테스트란 말이다. 신성한 기록 테스트 현장에서 내기를 하다니. 그런건 내가 절대로 용납 못한다고!! "... 전 누나한테 걸게요." "어머, 의외의 선택이네." "배팅이 적은 쪽이 딸 확률이 높으니까요." 정정하도록 하자. 나름의 오락거리도 되리라고 생각하니까. 절대로 내가 재미있어 보여서 배팅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군중심리의 효과로 인해서 모두가 내기를 하니까 나도 모르게 그 분위기에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다. 이런 나를 이해해주기 바란다. 정말로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런게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줬으면 좋겠다. "... ready." 어느새 스타트 신호 보내기 전문 자리를 차지하게 된 엘리가 자신의 오른손을 공중에 일직선으로 들어보이며 말한다. 자연스럽게 스타트 자세가 되는 3명의 여성들. 일단 누나한테 걸긴 했는데, 어찌될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이기는 것은 바라고 있지도 않고, 그냥 누나가 삐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누나한테 걸었는데. 약간의 후회감이 밀려오지만 친동생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게 그나마 위안이 되겠지. "start." "이야아아아아압!!" 엄청난 기합을 내지르며 뛰어가는 유아 선배와 세린. 역시나 빠르다. 육상부에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의 엄청난 스피드. 100M 단거리라서 그런지 초반부터 전력질주를 하는 두 여인네. 아까는 세린이 폭풍 추격전을 벌여서 막판에 거의 다 따라잡을 정도까지 다다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세린이 유아 선배보다 빠르지 않을까 생각을 했지만, 의외로 팽팽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스타트 면에서는 유아 선배가 확실히 앞서갔다. 그만큼 반사신경이 좋다는 뜻. 하지만 지구력으로 따져봤을때는 이세린이 조금 더 앞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주 미세하게 스타트가 늦었지만, 거의 유아 선배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다 따라잡은 것이다. 육상, 특히나 100미터 달리기 경주에서는 근소한 차이라고는 하나 스타트 지점에서 누가 더 빠르고 힘있게 먼저 치고 나가느냐에 따라 기록의 단락이 좌지우지 된다. 다시 말하자면 스타트가 조금 느린 세린에게는 매꿀 수 있는 속도의 차이점이 명확하게 났다는 증거. 하지만 그 간격을 금새 따라잡은 것으로 보아서는 역시나 젊음이 좋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살 차이이기는 하지만 세린이 더 어리지 않는가. 이런 경기를 보고 있는 지아 선생님과 노아 교수님은 어떤 기분이 들지 조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골인. 잠시나마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던 경주가 끝나는 순간까지 유아 선배와 세린은 거의 동시에 골인하는 각축을 벌였다. 심판이기도 한 아리아가 고민이 될 정도의 아주 애매모호한 순위 경쟁. 그러나 유아 선배와 세린이 경쟁하는 숫자 순위는 1위가 아니다. 바로 2,3등이다. "유린 선배... 1등." "얏ㅡ호!" 손으로 브이를 만들면서 승리를 자축하는 누나. 그렇다. 서로 경쟁하면서 땀을 낸 유아 선배와 세린보다도 누나가 먼저 들어온 것이다. "이, 이건..." "말도 안돼!!" 이어지는 유아 선배와 세린의 절규가 오늘따라 처절하게 들린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100편입니다. 그리 오랜 기간이 걸린 것은 아니지만, 두자리에서 세자리로 올라갔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ㅡ_ㅡ;; 101화 본의 아니게 우승을 한 누나. 아니, 그것보다도 사실 진작에 우승할 실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하게 '귀찮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느긋하게 뛰다가 뜬금없이 2번째 판에서 본실력을 발휘한게 약간은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정작 우승한 누나는 그다지 표정이 좋아보이지 않는다. "누나. 어디 아픈데라도 있어?" "아픈데라... 아프다기 보다는 뭐라고 해야 좋을지. 신경이 쓰인다고 해야 하나?" 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킨다. 설마 심장이 아프다는 말은 아니겠지. 누나의 손가락은 정확히 가슴, 그러니까 유두를 가리키고 있었다. 커다란 티에 유난히도 존재감을 표출하고 있는 유두. 그것을 가리키며 누나가 별거 없다는 듯이 말한다. "뛸때마다 유두가 옷에 긁혀서 아파." "......"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 누나의 말을 듣던 세린과 유아 선배도 서로 으르렁 거리면서 쳐다보는 행위를 멈추고 자신들의 가슴을 내려다본다. 누나와 마찬가지로 약간 툭 튀어나온 유두의 형상이 보인다. 그리고 그녀들 역시 마찬가지로 뒤늦게나마 쓰린 고통이 느껴지는지 스스로 가슴 위를 주무르기 시작한다. "밴드 같은거라도 없어?" 퉁명스럽게 묻는 이세린. "있을리가 없잖아." "왜 없는거야." "무인도에서 벤드가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라고. 약국 조차도 없는 곳에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거냐." 우리들이 무인도에서 머물고 있는 기간 동안 여성들은 대부분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있다. 속옷의 갯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도 있기도 하고,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기 때문에 상의 속옷은 대부분 착용하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라면 여유분의 브래지어 사이즈가 엘리의 어머님 사이즈이 맞춰진 상태인지라 비슷한 가슴 크기를 가지고 있는 노아 교수님이나 지아 선생님 정도가 브래지어를 사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노팬티 차림은 또 아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브래지어까지는 그렇다고 해도 노팬티로 다니는 것은 여자로서 수치심을 견디기 힘들다는 이유로 아랫도리 속옷은 전부 착용한 상태다. 여전히 자신의 유두를 옷 위로 매만지며 누나가 작게 중얼거린다. "하다못해 붕대 비슷한 거라도 있으면 좋을텐데." "누나. 아무리 아프다고 남동생 앞에서 그런 행동은 좀 자제하라고." "뭐야. 남동생. 설마 이 누나에게 욕정을 품거나 그런거야?" "전혀." 누나의 짖궂은 장난은 통각 속에서도 빛을 내고 있었다. 잠시동안 내 친누나라는 사람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을 무렵. "그러고보니 붕대 비슷한 것은 있지 않나요...?" "비슷한 것?" "네..." 들릴락 말락 한 작은 목소리의 소유자가 제안을 한다. 정말로 오랜만에 체리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을 꺼낸다. 모두의 시선이 모아지자, 평소에 붙어 다니던 세리아의 등 뒤로 숨은 체리가 고개만 빼꼼히 내민다. 그녀의 수줍어하는 모습이 이제 어느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체리의 전용 바리케이트가 된 세리아가 어색하게 웃어보일 뿐이다. "그... 유린 선배가 잘라놓은 옷가지들..." "아, 맞다." 뭔가 생각이 났는지 누나가 두 손뼉을 마주하며 외친다. 잘라놓은 옷가지들이라면 설마 저번에 누나가 비행기에서 가져온 여벌의 옷을 말하는 것일까. "그건 담요로 만드는데 사용한거 아니었어?" "아니. 조금 정도는 남아있어." "그래? 그것보다도 남은 옷가지들로 뭘 어떻게 하려고?" "기다려봐. 남동생. 곧 유아 표 전용 수영복을 뛰어넘는 기발한 아이템을 들고 나올테니까." 누나의 말을 얼핏 들었는지 유아 선배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이제는 흑역사가 되어버린 유아 표 수영복. 용도가 전혀 쓸모가 없음을 안 이후로 수영복 제작을 공식적으로 포기해버린 유아 선배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버린 발명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단한 것을 들고 나오겠다고 호언장담을 한 누나. 하지만 개인적으로 봤을땐, 그다지 기발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남은 옷가지들을 모아서 길게 엮은 뒤에 그 것을 가슴에 둘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게 끝이야?" "뭘 모르는구나. 남동생. 이렇게 가슴을 고정시키면 상의 대신 입을수도 있고, 행여나 위에 옷을 껴입는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브래지어가 없어도 유두가 옷에 긁히는 일은 없잖아." "심플해 보이는데 은근히 다기능을 가지고 있네." "최대한 간단한 기술로 최고의 효율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발명품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잖아." 고작 옷가지를 두른 것으로 '발명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고 보지만 말이다. 그래도 누나의 이런 대처에 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여성들은 꽤나 반기는 눈치였다. 마치 통신 판매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주문하고 택배로 이제 막 받은 그런 기쁜 표정을 하고 있다고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다. "나름 괜찮은데?" "후후. 이것이 다 이 유린 교수님의 작품이라고." 유아 선배의 솔직한 칭찬에도 불구하고 누나의 자랑은 연신 끊이지 않는다. 역시 내 친누나다운 언행이었다. 괜히 내 누나가 아니지. 반면에 누나의 발명품... 이 아니라 조치에도 불구하고 몇몇 불평의 목소리도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 옷. 너무 노출도가 심한거 같은데요." 태클의 여왕. 이세린이 강림하셨도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할수도 없었다. 이유인 즉슨, 실제로 그러니까. 다들 상의를 탈의한 채 누나가 가져온 천으로 가슴만 조인 상황. 한마디로 말해서 정확히 가슴 둘레 부근만 가리고 나머지 부위, 예를 들자면 배꼽이나 허리, 쇄골라인 부분은 전부 다 노출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노출도가 높은 옷을 싫어하는 세리아같은 경우에는 들고 있던 옷으로 자신의 상체를 가리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고서 고개를 떨군 상태. 체리 역시도 세리아와 딱 달라 붙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역시 부끄럼쟁이 2인방 다운 태도다. 세린의 태클에 대답을 펼친 것은 다름이 아닌 지아 선생님이었다. "뭐, 노출도가 높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어차피 무인도잖아. 별로 볼 사람도 없으니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그, 그래도 있잖아요. 남자가, 남자가 있는데 이런 상스러운 옷차림은 좀..." "어머, 이세린. 딱히 가슴을 노출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해수욕장의 비키니 차림과도 같은 복장인데 그렇게 생각해보면 창피할 일도 없잖아. 안 그러니?" "그야 그렇지만..." 양호 선생님의 말에 따라 장소가 무인도였기 때문에 조금은 바캉스 기분도 나는게 현실이다. 바로 눈 앞에 바다가 보이기도 하고, 근처의 호수에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 문명이라는 흔적을 느낄 수 있을만한 물건은 해안가 근처에 놓여진 배의 파손 잔해부분과 숲 안쪽에 불시착한 비행기가 전부. 그 이외는 사람의 손을 거쳤다고 인식될만한 물건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식기 도구나 옷 같은 필수품은 제외하고 말이다. "... 어쩔 수 없네요. 정말." 작게 혀를 차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내리는 이세린. 결국 양호 선생님의 설득에 넘어간 것일까. 이세린처럼 단독으로 반대의 의견을 필력할만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세리아와 체리는 작은 한숨과 함께 잠정적으로 반대 의사를 스스로 포기하고 만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술 약속이 있어서 빠르게 올리고 바깥에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렛츠 음주! 102화 아무튼 유두가 옷에 긁히는 현상도 해결했고, 이제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작하려고 다시금 팀원을 불러모은 나. "아까 달리기 측정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누나가 압도적이었네요." "내가 본 실력을 발휘하면 이정도지." "하지만 누나는 전투요원으로 쓸 수도 없으니까 별로." "......" 실제로도 그렇다. 차라리 누나의 달리기 실력을 유아 선배나 세린이 가지고 있었다면 더 좋았을것을. 옵저버 역할을 해주는 누나가 달리기가 빠르면 소용이 없지 않은가. "아무튼 그건 그렇다고 치고, 두번째 훈련 메뉴는 바로 이거입니다." 짜잔! 이라는 효과임이 들릴 기세로 소개해본다. 특히나 이번 메뉴는 세린과 유아 선배가 좋아할만한 훈련 메뉴로 골랐다. 바로 '대련'이다. "... 오호라." "좋은 메뉴네. 그거." 서로 한마디씩 말하는 유아 선배와 세린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마주친다. 또 다시 튀기기 시작하는 스파크. 왜 하필이면 많고 많은 훈련중에 대련을 골랐냐 하면, 순간적인 판단능력을 기르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그렇다고 멧돼지와 칼을 겨누면서 정면으로 싸운다는 말이 아니라, 언제 어디에서 멧돼지의 습격이 온다고 하더라도 즉각적으로 몸이 알아서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올리기 위해서이다. 머리가 먼저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몸이 자동적으로 피한다. 바로 이러한 수준의 반사능력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아 선배와 세린을 서로 대련시킨다는 뜻은 아니다. "두명이 상대해야 할 상대는 바로 '이 녀석'입니다." "... 엘리?" 내 옆에 있는 엘리를 가리키자, 유아 선배와 세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본다.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별다른 감정표현 없이 그녀들을 올려다보는 엘리. 유아 선배는 어느정도 납득이 된다는 얼굴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지만, 세린은 또다시 태클을 걸어오기에 여념이 없었다. "왜 하필이면 엘리와 붙으라는 거야. 스피드가 빠른건 인정하겠는데, 대련쪽으로 치자면 유아 선배가 더 적성 아니야?" 역시나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백태클. 실제로 축구 경기에서는 백태클은 반칙감이지만, 그래도 나름 훌륭한 공격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퇴장. "직접 엘리와 붙어보면 내가 왜 너한테 엘리를 상대해보라고 말했는지 알 수 있을거야." "말로 하는것 보다 몸으로 겪어보라 이 말이네?" "그럼." "좋아. 그 정도라면 충분히 상대해주지." 아직 엘리의 무서움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저 녀석. 엘리의 앞에서 약간 거리를 벌린 뒤에 자신의 주 무기를 잡아 펜싱 자세를 취하는 세린. 옆에서 구경을 하던 유아 선배와 내 뒤에서 다른 사람들은 또다시 내기를 하자는 분위기가 생성되고 있었다. 얼핏 들어본 바로는 엘리가 절대적으로 앞서는 상황. 승률이 적은 쪽으로 베팅을 하기 좋아하는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세린의 편을 들어줄수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선호하는 것은 '승률이 적은 쪽'이지, '승률이 없는 쪽'은 아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세린이 엘리를 이길 확률은 제로다. 세린이 그 말을 들으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까봐 일부러 말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그럼!" 검을 겨눈 채 날카롭게 찌르기 공격을 시전하는 세린. 역시나 빠르다. 순간적인 돌진 능력은 저 녀석을 능가할만한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처음에 세린과 마주했을때 나도 저 공격에는 조금 당황한 기억이 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겼지만 말이다. 특유의 맹한 표정으로 세린의 공격을 바라보고 있던 엘리가 순식간에 발걸음을 옮기면서 옆으로 빠진다. 세린의 거의 1.5배 되는 정도의 속도. 정말 빠르다. 이 말 밖에 튀어나오지 않을 정도로. "흥! 빠르기만 하다고 그게 이길 수 있다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것은 아니지!" 엘리의 빠른 몸놀림은 세린 역시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번이지만 같이 사냥이라는 팀 단위 행동을 한 적이 있었고, 그리고 체구가 작은 엘리인지라 자신의 공격을 쉽게 피할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모를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린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엘리는 빠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세린의 뒤를 잡은 엘리가 그대로 공중으로 치솟으며 안면쪽으로 돌려차기를 시전한다. 부웅ㅡ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매서운 발차기. 그러나 세린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녀석은 아닌 모양이다. 검을 거둬들인 뒤에 최대한 몸의 무게중심을 뒷꿈치로 이동시키며 자신이 낼 수 있는 속도의 최대치까지 끌어올리며 뒤로 빠진다. 리치가 짧은 엘리의 공격을 그런 식으로 피한 세린이 거둬들였던 검으로 찌르기 공격을 시작한다. "미안하지만, 내 승리의 제물이 되어줘야겠어." "......" 저번에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찌르기라는 타입의 공격은 그 범위가 상당히 좁다. 한 곳에 위력을 집중시킨 형태이기 때문에 그 공격을 상대방에게 적중시키면 치명타를 입힐 수 있지만 피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가장 체구가 작은 엘리인지라 찌르기 공격을 적중시키기에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살짝 허리를 비틀면서 가볍게 피하는 엘리. 그러나 분명 세린의 저 찌르기 공격은 후순위의 콤보를 가지고 있다. "걸렸구나! 엘리!" 바로 베기 공격. 찌르기에 이어지는 기습 패턴이다. 나도 처음에는 많이 당황했지. 펜싱이라는 무술 자체가 거의 찌르기 위주만을 이용하는 공격형태를 자랑하기 때문에 평소에 그런 고정관념으로 굳어져버린 정신상태를 이용한 기습 공격. 찌르기만을 고집하리라고 생각하는 역이용한 발상은 정말 참신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저것이 실제로 펜싱 경기에 사용되는 도구였다면 그 위력이 더 컸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여기는 야생.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도구는 펜싱 칼도 뭐도 아니다. 위력이 약한 막대기일 뿐. 그렇기에 나는 그 점을 이용해서 그대로 팔로 공격을 막아내고 세린을 쓰러뜨리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엘리는 나와 비교해서 엄밀히 다르다. 속도는 빠르지만 그만큼 힘은 약한 엘리. 어린 소녀에게 있어서 그정도의 근력을 내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렇다는 소리는 몸으로 직접 저 공격을 막아내면서까지 무리수를 둘 수는 없다는 뜻. 엘리 본인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최대한 몸을 숙여 지면에 몇번 구르는 형식으로 회피와 거리 벌리기를 동시에 성공시킨다. 다시 벌어진 간격. 아까와 똑같은 상황에 국면하게 되었다. "제법이네. 이세린." "그러게요." 유아 선배의 솔직한 칭찬에 나도 모르게 동의의 표시로 화답한다. 거짓 없는 심정으로 말하자면 세린이 엘리를 상대로 여기까지 버티는게 조금 신기할 정도였다. 유아 선배도 쩔쩔매게 만들었던 그 엘리를 이 정도까지 상대하리라고는 나조차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세린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 그건 절대로 아니다. 유일하게 유아 선배와 세린이라는 두명의 여자와 정면으로 붙어본 내 경험에 의하면, 세린의 실력은 유아 선배 급에 속하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유아 선배는 엘리를 이기지 못했다. 도리어 당한 전적이 있을 뿐. 그렇기 때문에 현재 세린이 오히려 주도권을 가져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조금 의외성을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기에 충분하다는 말이다. ============================ 작품 후기 ============================ 작품 예약 시스템으로 올라가는 글입니다. 지금쯤 저는 이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을지...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시면 안 될텐데 말이죠; 103화 하지만 그것도 잠시. "... lady." "나?" "......" 세린을 바라보는 엘리의 눈이 순식간에 달라진다. 평소에 무표정에 뚱한 모습만을 보이던 엘리의 눈이 먹이를 노리는 동물의 그것과도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섬뜩한 분위기로 바뀐 엘리의 모습에 순간 세린의 어깨가 약간 움츠러든다. 살기. 지금 엘리는 세린에게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대련을 할 때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하는 것은 경기를 승리로 이끄는 지름길이야." 옆에서 구경하던 유아 선배가 팔짱을 끼면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엘리는 대련이라는 일종의 경기 규칙은 모르고 있어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게 있어. 상대방을 이기려면 먼저 기선제압을 해야 한다는 점 말이야." "그렇군요." "너는 그때 없었지만, 처음에 내가 세리아와 같이 있던 상태에서 엘리와 마주했을때 녀석은 나에게 저런 눈을 하고 있었어. 낯선 인물에 대한 경계심.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에게 일종의 '경고'를 보내고 있었지." "경고 입니까?" "함부로 허튼 짓을 했다간 당신을 공격하겠습니다. 라는 형식으로 말이야. 물론 엘리 본인의 속마음에서는 실제로 어떤 말을 했는지 잘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저것이 엘리의 본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내가 엘리와 싸울때는 녀석은 가면을 쓰고 있어서 저런 눈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도 엘리가 살기를 발하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 그 때 당시에 유아 선배와 세리아가 습격을 당했을때는 정신이 없었고, 오로지 선배와 세리아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기 때문에 시야를 넓게 보는 여유로운 행동은 할 수 없었다. 이제서야 엘리의 본모습을 보게 된 꼴인가. 나라는 녀석 말이다. "흐, 흥. 그렇게 쳐다봐도 무섭지 않다고." 세린 역시도 기선제압을 당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허세를 부려본다. 펜싱 경기를 하면서 세린 본인도 알고 있을 터. 자신이 지금까지 엘리에게 퍼부은 공세는 오로지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공격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비록 빗나가도 상관이 없다. 자신은 '공격'을 했고, 상대방은 '방어' 혹은 '회피'라는 선택을 했다. 그 순간부터 기선제압 여부는 갈리게 된 것이다. 공격한 쪽이 더 선택권을 많이 부여받게 된다는 사실은 불변의 법칙. 하지만 엘리는 기세를 탄 세린에게 기습적으로 태도 변환을 보여주면서 반전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엘리 본인은 지금까지 세린을 적극적으로 상대하지 않은 꼴에 불과하다는 뜻과도 같은 말이다. 자세를 낮춘 엘리가 세린에게 돌격해오기 시작한다. 단거리를 좁히며 순식간에 찌르기 공격을 하는 세린과 맞먹을 정도의 스피드. 엘리가 오히려 돌진해올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세린이 자기도 모르게 몇번 뒷걸음질을 친다. 그러나 다시 자세를 잡고 달려오는 엘리에게 칼을 뻗는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쉽게 회피. 그러나 세린의 공격이 그게 다는 아니다. "어른을 얕보면 큰 코 다친다고!" 베기 공격 대신에 무릎을 들어 올리며 엘리의 복부 위치에 공격을 가하는 세린. 이것도 일종의 훼이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검을 위주로 사용하던 세린이 베기를 택하지 않고 육탄전을 골랐다. 세린의 기교있는 플레이... 라고 보기에는 좀 힘들다. 왜냐하면 세린의 무릎 공격을 마치 예상이라도 했듯이 자세를 낮춘 엘리가 잠시나마 한쪽 발로 균형을 잡고 있는 세린의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서 다리를 걸어버렸기 때문이다. 세린이 왜 베기 공격을 포기하고 육탄전의 방식을 택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검으로 공격하기에는 이미 그 사정범위에 비해 상당히 근접한 엘리의 위치였기에 세린은 어쩔 수 없이 육탄전을 선택한 것이다. 설마 일부로 세린에게 육탄전을 유도시킨 건가. 엘리 저 녀석. "꺄악!" 무게중심을 잃은 세린이 뒤로 엉덩방아를 찧기 전에, 엘리의 다음 공격이 이어진다.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오든 추진력과 자신의 체중을 싫은 힘을 이용해서 팔꿈치로 세린의 복부를 노린 것이다. 반사적으로 세린이 양 팔을 교차시키며 그런 엘리의 공격을 막아낸다. 그러나 무게중심도 잃은 탓에 제대로 방어하기도 힘든 세린은 엘리의 힘에 의해 그대로 뒤로 나자빠지고 만다. 털썩. 엉덩방아를 찧는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고꾸라진 세린. 하지만 엘리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그대로 세린을 찍어 누르려고 하는 몸동작을 취하는 순간이었다. "엘리! Stop!!" "......" 아슬아슬한 순간에 엘리에게 정지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누나 뿐만 아니라 묘하게 내 말도 잘 듣고 있는 녀석인지라 마치 '그대로 멈춰라' 놀이를 하듯이 정말로 멈춰버린 엘리. 아래에선 두 눈을 질끈 감고 엘리의 공격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세린의 모습이 보인다. "승부. 갈렸네." 유아 선배의 말에 눈을 희미하게 뜬 세린. 위에서 찍어 누르려고 하던 엘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허탈한 표정으로 상반신을 일으킨 세린에게 손을 내민 유아 선배가 그녀를 일으켜준다. "뭐, 뭔가요. 저 아이..." "저게 바로 3년동안 무인도에서 생활해온 엘리의 본 모습일지도." "... 정말인가요." 유아 선배와 세린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는 엘리. 평소의 뚱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어느새 손에 자신이 평소에 즐겨 먹던 간식거리를 쥔 채 우물우물 먹기 시작한다. 도대체 어느게 녀석의 본 모습일까. 가끔 나도 햇깔리는 경우가 있다. 이런 태평한 모습을 보면 말이다. 결국 엘리를 상대로 1대1은 무리라고 납득해버린 세린. 평소에 자존심 하나는 에베레스트 산 정상급으로 높던 그녀가 이렇게 승패를 인정하고 만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고 유아 선배의 부연설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무인도에 오고 나서 2연패. 그것도 한번은 자신이 무진장 싫어하는 '남자'에게 당한거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체구도 작은 꼬마 여자아이에게 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 세린. 그녀 역시도 페어 플레이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순순히 패배를 시인한다. 물론 중간에 절대로 인정하기 싫다는 자아의식과 고민한 흔적을 많이 보이긴 했지만. 그래서 다시 훈련 메뉴로 들어가보자면. 내가 원래 계획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다. "지금부터 유아 선배와 세린은 엘리를 상대로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2대 1이라고?" 유아 선배가 말도 안된다는 듯이 묻는다. 그도 그럴것이, 아무리 엘리가 대단한 체술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검도부 부장이기도 한 유아 선배와 펜싱부 에이스인 세린을 상대로 대련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핸디캡이 너무 크지 않느냐 하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때는 숫자상으로, 게다가 나이까지 고려하자면 압도적으로 엘리가 불리한 상황. 그러나 엘리는 그 정도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엘리의 실력이라면 2대 1도 충분히 커버가 가능할겁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거야." "실제로 경기를 해보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겠죠." "너무 무책임한 발언인데."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객관적인 내 시선으로 봤을땐, 오히려 2대 1의 핸디캡을 붙여야 겨우 엘리와 상대가 된다과 보여진다. 결국, 이건 핸디캡이 아니라 엘리라는 존재와 동등히 싸울 수 있을만큼의 조건을 갖추게 해준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작품 후기 ============================ 오늘이 군단의 심장 나오는 날인가요? PV영상 보고 왔는데... 대박이군요. 짐 레이너와 사라 캐리건의 러브스토리. 읗어헝허어허허엏엏어허어 ㅜ_ㅜ 104화 견원지간이라고 불리는 세린과 유아 선배가 서로 팀을 짜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진다. 본인들도 그런 점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에는 자신들의 무기만 손을 볼 뿐이었다. 엘리라는 인물을 상대로 굳이 2명이서 팀을 이루게 만든 것은 승리라는 목표도 있지만, '팀워크'를 키우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크다. 우리들 중에서 가장 사이가 안좋은(정말로 앙숙인지 아니면 단순히 서로 소속되어 있는 분야가 라이벌 관계라서 그런건지 잘 모르겠지만) 두명의 팀워크를 키우는게 급선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둘 다 검도와 펜싱이라는 무술을 익히고 있는 여자들이기 때문에 대련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서로간의 호흡을 인지하고, 그리고 거기에 맞춰서 행동한다. 이상적인 행동이지만, 아마도 그리 쉽게 달성되지 않으리라고 본다. "괜히 방해되는 짓은 하지 마. 이세린." "선배야말로 제 움직임에 거슬리는 행동은 하지 말아주세요." "뭐가 어째?!" "한번 해볼텐가요??" 저거봐라. 벌써부터 싸우기 시작하지 않는가. 진짜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진 것인가. 왜 이리 사이가 안좋지. 아무튼 엘리를 상대로 펼쳐진 대련은 곧 시작되었다. 시간은 우리들을 기다려주지 않는 법. 어느새 심판 전문이 되어버린 아리아의 말에 따라 엘리가 빠르게 이 두명에게 다가가기 시작한다. 아까와 같은 나태한 행동보다는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엘리. 아마도 전에 세린과의 결투를 통해서 어느정도 엘리 본연의 '본능'이 눈을 뜬 것처럼 보인다. 야생인으로서의 본능이라고 해야 할까. 3년의 내공이 쉽게 쌓이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엘리. 이번에는 봐주지 않을거야!" 유아 선배가 먼저 치고 나간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벌써부터 아웃이다. 단거리로 움직임이 빠른 세린이 전방에 위치하고, 세린의 후방을 유아 선배가 책임지는 포메이션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본다. 하지만 초반부터 자신들의 위치를 망각하고 이런 엉터리 조합으로 나가면 패배가 눈 앞에서 '이리오렴~'이라고 손짓하는게 다이렉트로 보이지 않는가. 아직 저 둘이 친숙해지는 사이가 되려면 한참 멀은 것인가. "하압!" 유아 선배의 첫번째 공격. 언제봐도 무시무시한 공격이다. 여자 치고는 상당히 묵직한 느낌을 선사해주는 유아 선배의 일격. 그러나 위력이 쎄다고 다 좋은게 아니다. 폴짝. 가볍게 유아 선배의 공격을 뛰어 넘은 엘리. 상대는 아마 이 무인도에서 손으로 꼽을 정도로 빠른 존재라고 칭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엘리임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눈에 빤히 보이는 공격을 하다니. "선배는 뒤로 물러나 있으세요!" 유아 선배와는 다르게 속공으로 공격을 퍼붓는 세린이 외친다. 확실히 유아 선배의 스타일보다는 빠르다. 공격 범위가 심하게 작다는 점 빼고는 말이다. 하지만 엘리가 그리 쉽게 당할 위인인가. 또다시 가볍게 폴짝폴짝 뛰어 다니면서 마치 세린을 농락하듯이 회피한다. 이번에는 적극적인 공격 보다는 회피 위주로 이들의 주변을 맴돌면서 일종의 '약올리기 플레이'를 시전하고 있다. 사실 엘리가 일부러 그녀들을 약올리기 위해서 저런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대련이 시작되기 전에 내가 엘리에게 미리 지시를 했기 때문에 저런 행동 패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공격은 하되, 가급적이면 도망치면서 해봐라. 이런 식으로 말이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내가 직접 엘리에게 이런 복잡한 문장의 대화를 선사해준 것이 아니라 누나의 통역을 통해서 전달했다는 사실 정도는 다들 충분히 예측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아무튼 요리조리 피하는 엘리를 무슨 수로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엘리를 동물에 비유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노루라고 생각해보면 대충 어떤 행동과 전략을 짜야 대응할 수 있을지 좋을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본인들은 여전히 서로를 불신하면서 자기가 엘리를 이길것이라는 생각으로 덤벼들고 있다는게 문제지만. "... 이세린. 잠깐." "뭔가요." 유아 선배의 말을 듣자 자연스럽게 거리를 벌린 엘리. 그녀들이 서로 회의를 할 수 있게끔 배려를 하고 있는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나름 눈치가 좋아졌군. 역시나 학습 능력이 빠른 엘리답다. "지금 이대로라면 엘리에게 이기기는 커녕 머리카락 조차도 건드릴 수 없어."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건가요?" "협동을 하자." "협동이라면 아까부터 하고 있잖아요." "그게 무슨 협동이야. 각자 자신의 파트를 정해서 엘리의 진로를 미리 예측한 다음에 공격을 하자 이 뜻이잖아." "... 그런 말인가요?" "엘리에게 이기고 싶지? 모처럼 2대 1의 찬스까지 얻었는데 여기서 지면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 "확실히..." "그러니까 이번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돼. 알았어?" 여기서는 역시 연장자인 유아 선배가 먼저 협력을 제안하는게 답이었다. 세린 만큼은 아니지만 유아 선배 본인도 자존심이 상당한 여자. 그런 선배에게 연하인 세린이 먼저 말을 꺼내서 이렇게, 저렇게 하자는 의견을 말하면 마치 세린이 리더인 마냥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유아 선배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힐 가능성도 크다. 이번만큼은 유아 선배의 빠른 판단력에 칭찬을 보내고 싶다. 그리고 유아 선배의 말에 어느정도 세린의 공감까지 확보한 상황. 고개를 끄덕이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세린이 유아 선배에게 다가가며 말한다. "작전은 있나요?" "그럼." "어떤거죠?" "네가 선공, 그리고 내가 2번째." "그게 무슨 뜻인가요?" "서로 번갈아가며 리듬을 타는 형식으로 공격을 하자는 뜻이야." "그게 끝인가요?" "소수를 상대로 하기에는 가장 좋은 방법이잖아!" 라고 말하며 그대로 엘리에게 돌진. 말한대로 세린의 선공이 이어진다. 빠른 찌르기 공격.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빠르게 움직이는 엘리. 악순환의 반복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조금 다른 느낌. 바로 뒤이어 유아 선배가 엘리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역시나 회피. 그리고 세린의 공격. 회피. 유아 선배의 공격. 회피. 정말로 유아 선배의 말 그대로 리듬을 타듯이 연속해서 공격이 이어진다. 쉴 틈 없는 공세가 퍼부어지는 상황. 무의미해 보이는 단순무식한 작전일지도 모르지만, 어떤 의미로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숫자로 밀어붙이는 체력전. 공격을 하는 쪽도, 그리고 피하는 쪽도 언젠가는 그 체력이 바닥나게 되어 있다. 사람인 이상, 언젠가는 힘이 다 떨어질 터. 그 점을 노리고 유아 선배는 세린과 같이 합동공격을 하면서 쉴 틈도 없이 공격을 연계하는 것이다. 뭐랄까. 일단은 괜찮은 작전이라고 칭하고 싶다. 하지만 아마도 저런 형식으로 멧돼지를 상대할 수는 없겠지. 체력적으로 돌아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쓰러질테니까. 예상대로 제아무리 엘리라 한들 체력전으로 이어지면 버티기 힘들어보인다. 점점 거칠어지는 호흡. 세린과 유아 선배도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하지만, 엘리도 여유로운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서서히 움직임이 둔해지고 있던 것이다. 엘리의 움직임을 눈치챈 세린이 유아 선배에게 외친다. "선배!!" "알고 있어!" 세린의 공격.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원래 세린이 한번 공격하고 유아 선배가 다음 공격을 하는 형태의 콤보였지만, 세린의 공격이 2번이나 이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변수를 둔 그녀들의 방식에 잠깐 주춤한 엘리. 그 틈을 타 유아 선배가 엘리의 목에 검을 겨누는데 성공한다. "......" 졌다는 듯이 양 손을 들어보이는 엘리. 그 순간 세린과 유아 선배가 서로 마주보면서 환호를 지른다. "이겼다~!!" ============================ 작품 후기 ============================ 오늘 자정쯤에 어제 겪었던 저의 술자리 실화를 후기란에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웃기지만 슬픈 이야기입니다. ㅜ_ㅜ 105화 오늘은 하루종일 훈련 스케쥴을 소화한지라 모두가 넉 다운 상태. 일단 대충 유아 선배와 세린의 팀워크도 어느정도 맞추게 되었으니 내일은 마취제를 시험할 겸 노루를 사냥하러 가기로 예약을 해두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시간은 강물처럼 흐른 결과, 다음날 아침이라는 산물의 결과를 보여준다. 오늘도 여김없이 텔레토비에 나오는 아기해의 모습과도 같은 찬란한 자태를 뽐내는 아침햇살을 맞이하며 바깥으로 나온 우리. 아침식사를 마치고 일찍 발걸음을 옮겨 노루를 사냥하기 위해 숲 안쪽으로 향한다. 엊그제와 마찬가지로 팀원은 나와 유아 선배, 세린, 엘리, 마지막으로 누나. 전방에 서는 전투요원은 나와 엘리가 맡고, 유아 선배와 세린은 서포트, 마지막으로 누나는 옵저버 역할을 담당하기로 한다. 어느정도 팀 플레이도 정착되었으니 오늘도 노루 고기를 먹기 위해 힘을 써볼까. "그런데 말이야." 길을 걷던 도중에 누나가 말을 꺼낸다. "우리, 지금 그 연못으로 가는거지?" "그런 셈이지." "길이라도 뚫어둘까?" "공터하고 그 연못하고?" "응. 매번 이런 식으로 사냥을 한다면 길을 뚫어두는게 좋지 않을까 해서." "그건 좀 힘들걸." "어째서?" "공터까지 길을 뚫어놓게 된다면 노루같은 경우는 문제가 없겠지. 하지만 멧돼지들이 그 길을 타고 공터까지 오게 되면 곤란해지잖아." "그런가?" 사람이 만든 길을 동물들도 이용한다는 소리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행여나 혹은 설마 하는 불신있는 행동은 굳이 우리들의 손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지금 우리들이 목격한 들짐승 중에서 그나마 가장 위협적인 녀석이 멧돼지. 하지만 멧돼지 이상가는 녀석이 존재한다면?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늑대나 호랑이같은 맹수류의 녀석들 말이다. 그런고로 동물들에게 최대한 공터로 오는 길은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은. 기존에 이 섬에 머무르던 엘리의 가족들이 만약에 사냥터로 삼았던 곳이 있었다면, 어째서 그런 장소까지 가는데 길을 만들어두지 않았던 것일까. 아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해서 그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 모르는 정보가 너무 많다. 그럴때는 가급적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보다는 기존의 보수적인 길을 택하면서 조금씩 전진해가는 형식의 방법을 취하는 것이 안전성이 훨씬 더 높은 것이다. "곧 있으면 도착하겠네." 유아 선배의 말이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시선을 호수쪽으로 돌리게 만든다. 아침햇살에 반사되는 호수의 모습. 그리고 평화로운 그 주변 환경에서 노루들이 목을 축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침부터 참으로 부지런한 녀석들이고만. 물론 우리들도 부지런하게 이 곳으로 오긴 했지만. "제일 먼저 어느 녀석으로 할거야?"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먼저 타겟을 물어보는 이세린. 이럴때 보면 인간의 적응력이라는 것은 굉장히 무서울 정도다. 자란 환경이 유난히 다른 이세린도 이제 우리들의 생활에 점점 적응되는 이 모습을 보니 역시 인간이라는 종족은 생존력이 강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작은 놈으로 할까. 아니면 큰 놈으로 할까. 정말 고민이 되는... "... 고민할 필요도 없는거 같은데." "갑자기 왜 그래. 누나." "옆을 봐봐." 또다시 단체로 해바라기가 된 듯이 자연스럽게 누나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는 우리들. 그곳에서 목을 축이고 있는 또 다른 동물. 노루들에 비해 엄청나게 듬직한 덩치를 자랑하고 있는 놈. 비유적으로도 표현하기 귀찮으니까 그냥 말하도록 하겠다. 멧돼지. 바로 그 녀석이다. "저 녀석도 아침부터 참으로 부지런하고만."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말이야." 내 말에 유아 선배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을 받아준다. 아직 수풀속에서 자세를 낮추고 지켜보고 있는 우리들의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물을 마신다. 정말 언제봐도 무시무시한 덩치다. 저렇게 큰 놈이 바다 한 가운데에 떠있는 무인도에 서식하고 있을 줄이야. 이러다가 공룡이라도 나오는거 아닐런지 모르겠다. 쥬라기 공원 같은거 말이다. 참고로 영화 '쥬라기 공원'의 배경이 되던 곳도 일종의 '섬'이었다. 구체적인 시리즈까지 따지자면 1이다. "오늘은 포기하는게 좋을까?" "그러게." 유아 선배와 세린이 아깝다는 듯이 말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는 것은 역시나 조금 아쉽다. ... 한번 해볼까. "다르게 생각하면 절호의 찬스일수도 있겠어." "싸울거야?!" "싸우는게 아니라 헌팅이라고. 한글말로 풀어서 말하자면 사냥." 그렇다. 사냥이다. 평소에는 멧돼지 녀석에게 꽁무니만 빼고 다니던 나였지만, 오늘은 다르다고. "누나. 미리 나무에 올라가있어. 유아 선배하고 세린은 나무 위에서 숨어있다가 기회를 엿봐서 창을 던질 준비를 하고." "오케이." "엘리는 저기 보이는 커다란 바위 뒷편에 숨어있어... 라고 누나가 좀 전해줘." "응. 알았어." 영어로 재잘재잘 쏼라쏼라 이야기를 전달하기 시작하는 누나. 엘리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누나와 유아 선배, 그리고 세린과 엘리가 제각기 위치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작전은 미리 전달했고. 이제 나머지는 내가 저 녀석을 유인하면 된다. 오늘의 복수는 반드시 성공할테니까 말이다. "이봐! 멧돼지 녀석!!" 커다란 내 외침이 숲속 전역에 울려 퍼진다. 산봉우리도 아니고 메아리처럼 줄기차게 울리는 소리. 덕분에 내가 내지른 외침임에도 불구하고 나도 좀 쫄고 말았다. 초반부터 참 멋없는 모습을 보이다니. 꼴이 말이 아니고만. "......" 씩씩 거리면서 나를 바라보는 멧돼지 녀석. 이번이 3차 대면인가. 무슨 국제 회의도 아니고 3번씩이나 이렇게 안면을 마주해야 하는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은 니 녀석이 우리들에게 먹히던가, 아니면 우리가 또 도망치던가 둘 중에 하나니까 각오하라고. 오른손으로 멧돼지 녀석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외친다. "덤벼보라고. 돼지 녀석아." '크릉'거리면서 순식간에 가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초반에는 느릿느릿 움직이다가 점차적으로 덤프트럭마냥 돌진해오기 시작하는 녀석. 덕분에 노루들은 꽁무니를 뺀 사태고 나 역시도 뒤로 돌아서 달아나는 스탭을 밟는다. 요새 들어서 저 녀석 덕분에 숲속을 배경으로 달리는 연습이 많이 되어있다 보니까 이 정도 장애물들은 쉽게 뛰어넘을 수 있게 되었다. 잔나무라든지 돌덩이라든지 하는것들 말이다. 이럴줄 알았으면 학교에 다닐때 육상부라도 지원해볼걸. 잘 따라오고 있나 살짝 뒤를 돌아본다. 그러자 내가 뛰어넘은 나뭇가지를 그대로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열심히 뒤를 쫓아오는 녀석. 의외로 모범생 녀석이고만. 충실한 태도, 눈물나게 고맙다. 달리기 시작한지 100미터 정도 되었을까. 평지에서 전속력으로 뛰는 것도 힘든데 장애물이 많은 숲 속에서 전력질주를 하려고 하니 해변가에서 달리는 것 만큼의 체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숨이 턱까지 차오른 상황. 또다시 앞에 있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허들 뛰어넘기 마냥 넘는다. 나는 뛰어넘는데, 저 녀석은 부숴뜨리고 온다. 그런건 반칙이라고. 이 자식아. "조금만 더...!" 내가 미리 점찍어 두었던 바위까지 달리면 된다. 산봉우리 정상에 올라가면 볼 수 있을거 같은 커다란 바위. 거기까지 가면 된다.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바위의 모습. 목적지가 보이자 또다시 전속력을 다해 뛴다. 막판 스퍼트!! "으랴아아아아아압!!!!!!" 그리고 바위까지의 거리를 대략 2미터 정도 남겨두고 슬라이딩. 옷 위로 작은 돌덩이들이 피부에 긁히는 느낌이 그대로 생생하게 전해진다. 촤아아악! 소리를 내며 야구에서 도루를 하는 포즈로 최대한 몸을 납작하게 깔며 겨우 정지한 나.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90도 방향으로 꺾으면서 구르기 시작한다. 있는 힘껏 뛰어오며 속도를 줄이고 그대로 코너를 도는 방법은 그나마 이게 가장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비록 상처투성이가 되지만, 저 멧돼지 녀석에게 그대로 들이받아 사망하는 것보다는 나은 편 아닌가. 순간적으로 코너를 튼 나와는 달리 멧돼지 녀석은 이번에도 자신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면서 그대로 바위와 정면충돌을 한다. 쿠우웅!!!! 바위가 크게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충돌. 저 정도면 뇌진탕을 일으켜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대형사고를 일으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상대로 멧돼지가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그 정도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뛰어오다가 예상치도 못하게 바위와 키스를 해버렸으니 잠시동안 정신을 잃는것도 당연지사. 그와 동시에 나는 타이밍을 알리듯이 크게 외친다. "유아 선배! 세린!!" "알고 있다고!!" 바위 근처의 나무 위에 숨어있던 유아 선배와 세린이 동시에 창을 던진다. 고정되어 있는 표적이기 때문에 초보자라도 쉽게 맞출 수 있는 상황. 저 창 끝에 있는 마취제가 멧돼지의 피부를 뚫고 체내에 주입되어 녀석의 몸을 마비시킬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멧돼지 녀석을 너무 얕본 것일까. 창을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창이 튕겨나오고 만다. "뭐, 뭐야?! 이거!" 놀란 유아 선배가 다시한번 있는 힘을 다해 창을 던진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 그녀들의 팔힘이 약해서 그런것이 아니다. 멧돼지의 가죽이 그만큼 질기고 단단하다는 뜻이 되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젠장. 계획이 조금 어긋나고 말았다. "선배, 세린! 다시 위로 올라가. 멧돼지가 정신차리기 전에." "하, 하지만..." "잔말말고 빨리!" 허리춤에 있는 나이프를 꺼내든다. 대충 어설픈 창으로 쉽게 멧돼지 녀석을 잠재울 수 있을거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중의 공격수단을 만들어봤지만 역시나 예외는 없었다. 그렇기에 두번째 공격 스타트. "엘리! 네 차례야!" "... yes!" 바위 뒷편에 대기중이던 엘리가 그대로 위에서 점프를 하며 멧돼지의 머리를 노린 채 뛰어든다. 나 역시도 멧돼지의 측면으로 파고들며 나이프를 겨눈다. 엘리와 내가 들고 있는 나이프 역시도 마취제를 묻혀놓은 흉기. 원거리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면, 직접 공격만이 있을 뿐이다. "머리를 노려!" 내 말에 엘리가 멧돼지의 머리를 노리기 위해 나이프를 크게 위로 든다. 그대로 내리 찍기만 하면 되는 상황. 하지만. 엘리가 먼저 멧돼지의 정수리에 나이프를 꽂아넣기 직전에 멧돼지 녀석이 정신을 차리고 말았다. "크르릉...!" 자신의 몸을 크게 흔들기 시작하는 멧돼지. 엘리가 위에 있음을 직감한 것일까. 머리를 향해 내리 꽂았어야 했던 나이프는 그대로 빛나가 엉뚱하게도 멧돼지의 등판에 꽂히고 말았다. 혀를 차면서 그대로 멧돼지에게서 뛰어내려 거리를 벌린 엘리. 본능적으로 멧돼지가 제정신을 차렸음을 안 것이다. "......" 멧돼지가 좌, 우에 위치한 우리들을 한번씩 번갈아보기 시작한다. 두번째 공격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소리. 지금 우리들의 상황은 꽤나 위험한 축에 속하지 않을까. ============================ 작품 후기 ============================ 사실 어제 술자리에서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여자에게 고백했다가 차였습니다. ㅜ_ㅜ오늘따라 하늘이 노란색인 이유는 뭘까요. 106화 무인도에는 '오늘의 운세'라는 프로그램을 보여줄 정도의 최첨단 문명의 산물이기도 한 TV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하고 있다고 해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기가 안 들어오니까. 그렇다. 전기가 없다. 하지만 그런건 관두고, 만약에 그 '오늘의 운세'라는 프로그램을 봤다면, 대략 내 운세는 이렇게 나타날 것이다. '오늘 당신의 하루는 길가다가 멧돼지를 만나서 최대한 저항을 해봤는데 공교롭게도 씨알도 안먹히고 그대로 게임 오버가 될 운명이네요.' 그렇게 상큼한 미소로 말해주지 말라고. 아나운서 아가씨. 안그래도 지금, 그 상큼한 미소를 지어줄만한 천사들이 주변에 보일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으니까. "......" 육중한 발걸음으로 천천히 나와 시선을 마주치는 멧돼지. 가까이서 보니까 티코 수준이 아니라 봉고차 수준이다. 동물이 이렇게 커도 되는거냐. 신은 불공평하잖아. 인간도 거인으로 좀 만들어달라고. 아니, 그게 아니지. "오늘은 재수가 진짜 없네." 온갖 인상을 찌푸리며 나이프를 들고 있는 손에 힘을 쥐어본다. 나이프를 잃은 엘리에게 멧돼지를 감당할 수단은 없다. 그렇다는 소리는 멧돼지 녀석에게 대항할 힘이 없다는 뜻과도 같다. 가급적이면 엘리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 나였기에 지금 멧돼지의 저 행동은 행운이 작용한 결과다. 아무래도 나라는 인물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는 것인가. 이 녀석. 금새 달려들 기새로 자세를 낮춘다. 피할까? 아니면 이대로 정면으로 받아버려? 그건 말도 안되잖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에. 녀석이 달려오기 시작한다. 내 짧은 인생도 이것으로 끝인가. 빌어먹을. "유에!" 순간적으로 세린의 외침이 들려온다. 그리고 옆으로 날아오는 창 한자루. 세린이 던진 창을 그대로 받은 난 반사적으로 투척 자세를 취한다. 정신을 집중하자. 어차피 이 창을 던져도 멧돼지에게 통하지는 않는다. 물리내성 버프라도 받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안 통한다. 오히려 우습다는 듯이 튕겨나올 뿐. 하지만 그건 멧돼지 녀석의 '몸통'을 노렸기 때문이다. 모든 생물에게는 예외없이 '약점'이라고 부를만한 부위가 존재하는 법. 멧돼지라고도 예외 없다. 저 녀석이 약점 없는 최강의 생물이라면, 아마도 백악기 시대에 지구를 점령하던 종족은 공룡이 아니라 멧돼지였을 것이다. 그렇다. 약점. 그 약점이 되기도 하는 '눈'에 창을 그대로 던진다. 제대로 날아드는 창. 마치 자석의 이끌림을 받고 있듯이 정확하게 멧돼지 녀석의 왼쪽 눈을 꿰뚫어버린다. 크워어어엉!!!!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지르는 녀석의 돌진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든다. 다시 한번 옆으로 몸을 날리면서 낙법을 시전. 순간적인 기습을 받은 멧돼지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옆의 공간으로 빠지면서 몸을 한번 뒤짚는다. 치명상을 입힌 탓일까.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몸을 이리저리 뒹굴면서 나름의 애교를 떠는 녀석을 바라본다. 설마 이대로 우리들의 승리? 권투 시합에서 다운을 빼앗은 채 코너에서 기다리고 있는 권투선수의 마음이 이 것과도 같은 것일까. 일어나지 말아라. 심판은 없지만, 카운터는 안 세줘도 된다. 그러니까 일어나지 말아라. "... 라고 말했더니 일어나네." 오늘은 정말 운이 안좋은 모양이다. 발버둥친 효과는 눈에서 창을 빼내는 효과를 발휘했는지 자리에서 일어선 멧돼지가 나를 노려본다. 한쪽 눈에 피가 철철 흐르는 멧돼지 녀석. 그리고 아까보다도 배로 흉폭해진 상황이다. "왜 마비가 안되는거야?!" 세린의 외침이 허공에서 들려온다. 당연하잖아. 마취제가 곧바로 효과를 발휘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혈관이 있는 부위도 아닌 눈에 꽂혀버렸으니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런지도 잘 모르겠다. 겨우 창을 꽂았다고 생각했더니 또다시 위기인가. 이게 무슨 국가 재정 위기도 아니고. 극복했다 싶더니 또다시 위기인가. 시동을 걸기 시작하는 멧돼지. 이번에는 내게 피할 여유가 있다. 방향이 어찌 되었든 창을 적중시키지 않았는가. 게다가 약간 엉뚱한 곳이기는 하지만 엘리의 나이프고 꽂혀있다. 이제는 녀석이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목숨을 끊으면 된다. 최대한 뒷걸음질을 치면서 나무쪽으로 달려간다. 나의 이런 행동을 눈치챈 녀석이 순식간에 또다시 뛰어오는게 아닌가. 눈치 하나는 끝내주게 좋은 녀석이다. 여자의 감을 뛰어넘을 멧돼지의 감이라도 가지고 있는건가. 어감 한번 참 어울리지 않다. "이제 좀 쓰러지라고. 돼지 녀석아!" 라고 말하며 멋지게 덤벼들고 싶지만, 그건 자살행위. 결국 근처에 있는 나무를 향해 뛰어간 나는 기동을 잡고 폴짝폴짝 뛰어올라 나뭇가지를 잡은 채 대롱대롱 매달린다. 이번에도 몸통 박치기를 할 기세로 뛰어오는 멧돼지. 그런다고 이 나무가 부러질것 같으... ... 부러지잖아?! "으앗!" "유에!!" 우지끈 하면서 나무 기둥이 순식간에 부러진다. 제법 두꺼운 기둥을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멧돼지 녀석의 공격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썩은 나무였나. 운도 진짜 지지리도 없다. 하지만 이대로 땅에 떨어졌다간 이번에는 멧돼지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녀석도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를 듣고 내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어쩔 수 없지. 모 아니면 도다. "이제 그만 끝을 내자. 이 돼지 녀석아!!" 땅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나뭇가지를 붙잡아 최대한 몸의 반동을 주면서 멧돼지 바로 위로 뛰어든다. 나이프의 날을 세워서 정확히 녀석의 정수리에 칼을 박아넣는데 성공. 푸욱! 그다지 유쾌한 감각을 선사해주지 못하는 촉감을 느끼며 멧돼지에게 내동댕이 쳐진다. 땅에 몇번 구르면서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대로 눈을 감아버리면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 말이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상반신을 든다. 전방에 시선을 고정시켜 멧돼지의 행방을 찾는 나. 하지만 멧돼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것이, 멧돼지 녀석은 그대로 거대한 몸덩이와 함께 쓰러지며 그대로 숨이 끊어져버렸기 때문이다. "... 죽은거야?" 쫄래쫄래 다가오는 엘리가 멧돼지의 생사 여부를 확인한다. 긴장된 상태로 바라보는 우리들. 그리고 잠시 뒤. 엘리가 멧돼지 몸통에 꽂혀있는 나이프와 정수리에 꽂혀있는 또다른 나이프를 빼어들며 긍정적인 제스쳐를 보여준다.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끄덕. "아~싸!!!" "이겼다~!!!" 멧돼지에게서 승리를 따낸 것이다. 이것이 몇일만의 쾌거인 것인가. "... 굉장하네요." 아리아의 솔직한 감상이 이어진다. 그도 그럴것이, 노루를 사냥하기로 떠났던 우리들이 들고 온 것은 다름아닌 집채만한 멧돼지였기 때문이다. 이 녀석을 들고 오는것도 어지간한 중노동이 아니었다. 체중계가 없어서 확신은 못하겠지만, 분명 이 녀석의 체중은 kg단위가 아니라 '톤' 단위라고 확신한다. 커다란 눈을 껌뻑이며 멧돼지를 구경하는 일행들. 지아 선생님과 노아 교수님도 살아생전 직접 자신들의 눈으로 멧돼지를 본 적은 처음이라고 말한다. "이렇게까지 큰 생물이라는 건 처음 알았는데." "그러게요... 놀랐어요." 그러고보니 동물원에서 본 멧돼지는 이렇게까지 크게 생기진 않았지. 이 녀석은 무인도에서 자양강장제나 아니면 영양제 이런거라도 먹으면서 큰 것일까. 아무튼 잡혔으니까 됐지만 말이다. 세리아의 팔짱을 끼고 있던 체리가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한다. "이것으로 농작물의 피해는 없어지겠네요." "아마도." "아마도... 라니요?" 내게 들려온 대답이 긍정적인 의사가 아닌게 놀랐는지 체리가 나에게 서스럼없이 말한다. 그리고 잠시 뒤 자신이 나에게 함부로 말을 했다는 것이라도 느꼈는지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세리아의 등 뒤로 다시 숨는다. 뭘까. 이 장면. 마치 내가 일방적으로 체리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오해성 짙은 이 상황. "멧돼지가 이 녀석 한마리가 아니라는 소리라는 뜻이야." "하, 한마리가 아닌가요?!" "그럴리가 없지. 멧돼지라는 생물 자체가 이 무인도에 있다는 소리는 이 녀석을 낳아준 부모 멧돼지도 있다는 소리잖아. 한마디로 말해서 멧돼지라는 생물이 한마리만 존재하는게 아니라 '다수'가 존재한다고 봐야겠지." "어, 어떻게 하죠? 한마리도 힘든데 다수면..." "그러니까 주기적으로 이런 식으로 사냥을 하는거지. 공터는 우리들의 영역이니까 함부로 오지 말아라 라는 경고를 보내는거야. 우리들이 농작물에 피해를 입은 것은 지금까지 녀석들에게 꽁무니를 빼는 모습만 보여줬기 때문이야. 그래서 멧돼지는 인간이라는 생물이 별로 위험한 존재가 아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들의 영역까지 침범한 것이지." 반대로 말하자면 엘리의 가족들이 주기적이로 사냥을 했기 때문에 3명의 소수 인원으로도 농작물을 지켜내왔다는 말도 된다. 결국 먹이사슬. 무인도에서 힘쎄기로 소문난 멧돼지를 주기적으로 사냥해줘야 먹이사슬 피라미드가 완성된다는 뜻이다. 어느 한쪽의 품종이 우세하게 번식하면 생태계는 파괴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고기파티를 해야 하나." "이제 겨우 멧돼지를 잡았으니까 오늘은 더 화려하게 가죠." "더 화려하게?" 누나의 말에 지아 선생님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표시한다. 나도 누나가 어떤 의도를 또 가지고 있기에 이런 말을 꺼내는지 궁금한 상황. 어제의 파티도 나름 화려했다고 생각하지만, 또 무언가 즐거움 가득한 이벤트라도 있는 것일까. "누나. 또 무슨 꿍꿍이야." "어머, 꿍꿍이라니. 나는 단순히 오늘의 기분을 만끽하고 싶다는 뜻이었다고." "그건 나도 공감하긴 하지만." "자자, 모두들. 일단 고기 손질은 엘리와 남동생에게 맡겨두고 나머지는 파티 준비를 하도록 해요. 슬슬 해가 저물잖아요." "내가 엘리와 같이?!" "그치만 다들 할 줄 모르잖아. 고기 만드는 방법." 엄밀히 말하자면 만드는 방법이 아니지만 말이다. 다른 사람들 역시도 아무리 엘리가 고기를 발라내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는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저 거대한 멧돼지를 데리고 작업하는게 엄청나게 오래 걸리고 힘들고 짜증나고 귀찮고 하기 싫은 것인지 자연스럽게 내가 엘리와 같이 하는 쪽으로 의견이 맞춰지고 있었다. ... 이래서 남자는 피곤하다니까. 엄청난 덩치를 소유하고 있는 멧돼지의 고기를 겨우 추출할 수 있었다. 몇시간이 걸린 것일까. 다른 사람들이야 파티 준비에 요리에 여러가지를 하고 있다고 해도, 방금 사냥을 마친 나, 게다가 나름 오늘 제일 고생했다고 생각하는 내가 이렇게 직접 고기를 마련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와는 다르게 엘리는 피곤한 기색도 없이 특유의 뚱한 표정으로 척척 작업을 해낸다. 그 결과, 대략 3일동안 먹고도 남을만한 고기가 완성이 되었다. 그나저나 정말 많다. 고기. ============================ 작품 후기 ============================ 사실 고백했던 상대 여자가 예전에 제가 군대에서 전역하고 처음으로 사귄 여자였습니다. 사귄지 얼마 안되었다가 헤어지고, 다시 몇년 지나고 고백을 했는데, 또 차인 셈이지요. 같은 여자에게 두번 차인 심정이 이리도 고통스러운지 몰랐습니다 ㅜ_ㅜ 미련을 버리고 다른 짝을 찾아봐야겠지요? 으헣ㅇ허어헝허얼허어렇엏ㅁ어ㅣ먼ㅇ러ㅗㅔ뱌ㅐㅈ도ㅔ램냐올ㅈㄷㄱ 107화 EP 14. 게임의 법칙 이틀 연속 고기 파티. 그동안 고기의 '고'자도 못보고 있던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하늘의 축복이 내린 이틀간이라고 보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어제 꺼냈던 철판들이 오늘 또 쓰이게 될줄이야. 이것도 다 멧돼지 사냥에 성공한 결과물이라고 보여진다. "자~ 오늘도 사냥 성공에 건배를 하지요." "그것도 노루가 아니라 멧돼지니까요." 그렇다. 노루가 아니라 돼지다. 엄연히 돼지 고기. 개인적으로 고기를 좋아하는 나이기 때문에 오늘의 고기 파티는 상당히 흥하다. 지글지글 타오르는 고기들. 어제 잠깐 만들어놓은 캠프파이어를 좀 더 보강해서 이번에는 야외의 공간에 분위기를 잡고 둘러 앉은 우리들은 고기를 얌냠쩝쩝 맛있게 섭취한다. 밤하늘 아래에 즐기는 고기 파티. 게다가 장소는 무인도. 조금 낭만적인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아. 맛있다. 정말 솔직한 감상으로 이렇게 말을 하고 싶다. "맛있어?" 누나가 묻는다. 그거야 당연히... "마시쪙!!" "... 뭐니. 그 말투." "아니. 그냥 해보고 싶어서." 잠시 비둘기가 된 기분이었다. 아무튼 그건 그렇다고 쳐도. 아까부터 궁금한게 있었다. "누나. 오늘 뭔 이벤트인지 뭐시긴지 준비했다며." "이벤트?" "어." "... 아. 그거구나." 아까 내가 엘리와 같이 고기 해체 작업을 하기 전에 분명 뭔가가 재미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미리 경고... 가 아니라 예고를 한 누나. 물론 고기를 먹는 일 역시도 재미있긴 하지만, 조금 더 다른 재미가 필요하다. 배부름이라는 느낌 말고 오락이라는 즐거움 말이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제 2회. 왕게임~" "또야?!" 왕게임에 대해서 유난히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유아 선배가 외친 말이었다. 왜 하필 그 게임을 하냐고 따지기 시작하는 유아 선배. 참고로 선배는 저번 왕게임에서 알몸으로 엉덩이로 이름쓰기라는 엄청나게 쪽팔린 벌칙을 수행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내게 있어서는 세리아와 첫키스의 추억을 선사해주기도 한 게임이다. "그게 뭔가요? 왕... 게임?" 반면 모르는 사람들도 몇몇 있다. 대표적으로 세린과 체리. 순수한 1학년 후배는 뭐 모를거라 대충 예상은 했고. 세린은 음... 부잣집 아가씨는 왕게임 같은걸 모르는게 당연한건가. 애초부터 '여왕'이니까. 규칙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기 시작하는 누나의 말이 들려온다. "왕게임이란 말이야..." 저번에 한번 설명했으므로 이하 생략하도록 하자. 재탕하면 지겹지 않은가. 누나에게서 룰에 대해 설명을 들은 체리가 세리아의 팔에 매달리며 후들들 떨고서 대답한다. "뭐, 뭐든지 말인가요...?!" "그래. 뭐든지." 누나의 상큼한 미소와 함께 들려오는 대답. 정말로 '뭐든지'다. 유아 선배가 알몸으로 엉덩이로 이름쓰기를 할 정도의 범위조차도 허용되는 '뭐든지'라는 단어는 참 좋다. 참고로 '여자와 남자가 섹스하기'라는 벌칙도 수행 가능한건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람이 꽤 많네. 가위바위보를 두 팀으로 나눠서 해야 하나." 지아 선생님이 약간 고민된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확실히 사람이 많긴 많다. 물론 저번에 비해서 고작 3명이 늘어났을 뿐이지만, 7명과 10명은 다가오는 체감상의 차이가 확연하게 다르다. 한자리수 숫자와 두자리수 숫자의 차이점 말이다. 아무래도 10명이 많아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이런 왕게임의 실행에 유난히도 반대하는 1인이 등장하게 되었다. "절ㅡ대로 안해!!" 그렇다. 굳이 말하는 것도 피곤하겠지만, 저렇게 비명을 지르면서 완고하게 반대하는 사람의 정체는 바로 유아 선배다. 왕게임의 페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유아 선배이기에 이렇게 왕게임을 하자는 식의 분위기로 끌고 가는 누나의 모습을 그대로 방관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 왜냐하면 유아 선배의 이런 반대 의견을 간단하게 무마시킬 수 있는 인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겁나시는 건가요? 선배." 유아 선배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이세린의 한마디. 다른 사람의 말도 아니고 바로 이세린의 태클에 유아 선배의 신경은 훨씬 날카로워지기 시작한다. "누, 누가 겁난다고 그래!" "제가 보기에는 겁이 나서 게임을 회피하는 그런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요." "그런건 네 착각이라고!" "그렇다면 게임을 하시는게 어떤가요?" "윽..." 걸려들었다. 딱히 세린이 수완이 좋아서 유아 선배게 왕게임에 참가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라이벌 의식. 서로 절대로 양보하지 않겠다는 자존심 싸움이 만들어 낸 결과물일 뿐이다. 그런데 정말로 괜찮을지 모르겠다. "자자. 그럼 의견도 합치되었으니. 시작하도록 할까요?" 누나의 말과 함께 드디어 게임 시작. 가위바위보 1차전의 결과, 왕은 지아 선생님이 당첨되었다. "처음부터 나야?" 왕이 되고도 오히려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지아 선생님. 젊은이들과 이런 소풍 분위기의 게임을 진행하는 것이 좀처럼 낯선 모양인지 약간 어색해하는 모습도 보인다. 지아 선생님이 꺼려하는게 있다니. 처음 안 사실이다. 그래도 게임을 진행시키지 않을수는 없지 않은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가벼운 벌칙을 제안한다. "꼴찌는 내가 딱밤을 때리도록 할게." "또 딱밤인가요." "어머. 저번에도 이런 벌칙을 했었니?" "네." 분명 내 기억으로는 첫번째 벌칙이 딱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연설명을 조금 보태보자면, 그때 딱밤 벌칙에 걸린 사람은 나와 유아 선배였다. 나는 살살 때렸는데, 유아 선배는 풀 파워로 때렸었지. 덕분에 무진장 아팠다. 아무튼 벌칙도 정해졌으니 가위바위보 시작. 이번 벌칙의 수행자는 하늘의 장난인지 모르겠지만, 체리가 당첨되었다. "저, 저저저저저기..."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체리. 두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가기 시작한다. 그 어떤 냉혈안이라도 체리의 이런 모습을 본다면 쉽게 때리지 못할 기분까지 드는 상황속에서 지아 선생님이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체리의 이마에 살짝 터치하는 수준으로 때린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오들오들 떨던 체리. 동정심을 불러오게끔 하는 이 태도 덕분에 첫번째 벌칙은 조금 시시하게 끝나버렸다. 뭐, 초반에는 이런 분위기도 나쁘진 않지. 원래 게임이라는 것은 점점 더 불타오르는 것이 재미있는 편 아닌가. 가위바위보 2차전. 어디보자. 이번 왕은... 아. 초반에는 조용히 나가나 싶더니, 제일 걸려서는 안될 위인이 걸리고 말았다. "오호라. 이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겠지?" 손으로 '브이'를 만들어보이는 누나가 아주 음흉한 미소를 띄우기 시작한다. 왜 하필 많고 많은 인물중에 누나를 고르셨습니까. 하늘이시여. 기왕이면 평소에 착하고 얌전하게 잘 지내는 세리아나 아니면 심한 벌칙은 고르지 않을거 같은 체리라든지 이런 인물들을 골라주셨으면 좋았을것을. 어찌하여. 하필이면. 왜 누나란 말인가. 이렇게 백날 불평해봐야 소용없다. 어차피 그런다고 누나가 왕의 지위를 스스로 반납할 위인도 아니고. 어떻게 잡은 찬스인데 쉽게 날리겠는가. "저는 조금 강하게 나갈 예정이라고요." "강하게?" 세린의 물음. 아직까지 이세린은 누나가 어떤 인물인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나야 뭐 친누나니까 당연히 잘 알고 있지만, 세린은 누나라는 영역에 처음 들어오는 문외한이기도 하다. "... 이봐." "내 이름은 '이봐'가 아니라 유에거든." "아무래도 좋잖아." "뭐가 아무래도 좋아. 멀쩡히 이름이 있는데 name으로 불러달라고." "... 유에." 약간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제대로 내 이름을 불러주는 세린. 정말 솔직하지 못한 녀석이다. 진작에 이렇게 부를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할 것이지. 그래도 나름 이것도 애교로 봐줄 수 있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너희 누나, 도대체 어떤 사람이야?" "직접적으로 나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다음 벌칙이 무엇인지 들어보면 충분히 알 수 있을걸." "그래?" 누나는 참고로 극과 극을 달린다. 얌전할땐 얌전하지만, 날뛸땐 정말 심하게 날뛴다. 그리고 이 게임에서, 왕 게임이라는 시간에 누나는 조용한 타입이 아니라 날뛰는 타입을 선호할 것이다. 그리도 드디어 내려지는 누나의 명령. "다음 게임에서 시행되는 가위바위보 꼴지는 '알몸'이 되어야 합니다." "거짓말!!!!!" 세린과 유아 선배가 동시에 소리치며 일어선다. 이럴때는 사이가 좋아보인다. 평소에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면 좋을텐데. ============================ 작품 후기 ============================ 그렇게 예쁜 여자도 아니고, 능력 있는 여자도 아닌데 자꾸 눈에 아른거립니다. 이게 다 제가 여자를 알고 지낸 횟수가 거의 없다시피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한번 사귀었던 사이라 그런 것일까요? 미련인지 아니면 이게 진짜 애정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차이는 건 괴롭군요 ㅜ_ㅜ 108화 누나의 한마디에 모두가 숙연... 아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두번째 벌칙부터 상당히 강하게 나가는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절로 들만한 위력을 가진 벌칙. 게다가 이번에는 과거의 누드 하우스 사건과 차원이 다르다. 모든 사람들이 옷을 입고 있는 상황에서 나홀로 알몸이 되는 그 기분, 생각만 해도 오묘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말이 오묘하다는 뜻이지,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쪽팔리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누나의 명령에 조목조목 따지기 시작하는 유아 선배. "초반부터 무슨 말도 안되는 명령이야!" 뒤이어 세린도 유아 선배의 말에 동참하기 시작한다. "맞아요. 나, 남자 앞에서 알몸이라니... 그렇게 파렴치한 행동 따위는 할 수 없어요!" "어머,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라고 말했을텐데." "......" 유아 선배와 세린이 아무리 발발 날뛰고 항의한다고 해도 누나에게는 '승자'라는 절대적인 방위권이 있다. 게임의 규칙.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유아 선배와 세린이 이 왕게임에 참가하고 있다는 말은 그 규칙에 임할 것을 동의했다는 뜻과도 같기 때문에 이들이 누나에게 항의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 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아리아가 나지막히 말한다. "선배들. 결과적으로 본인이 걸리지만 않으면 되잖아요." "... 그래도..." "게임은 게임이에요. 특별히 유아 선배나 세린 선배를 겨냥하고 내린 명령도 아니잖아요. 어디까지나 복불복. 그것이 게임의 묘미 아닌가요?" 역시나 1학년들 중에서 최강의 포스를 자랑하는 아리아다운 말이었다. 세린이 유아 선배에게 대드는 것은 애교에 불과하다. 아리아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본래 모습을 표출한다면, 노아 교수님 마저도 암캐로 만들어버리는 여왕님의 위엄을 보여주니까 말이다. 아리아의 말이 너무 합당해서 차마 반론조차 하지 못하는 라이벌 2인방. 결국 '나만 아니면 돼'라는 무한 이기주의를 발휘하며 가위바위보 게임에 임한다. 그렇다. 모든 게임이 그러하듯이 나만 아니면 된다. 결론적으로 꼴찌만 안 걸리면 나홀로 알몸이 된다는 무시무시한 벌칙 정도는 가볍게 피할 수 있지 않은가. 실력도 아니고 운이다. 확률은 9분의 1. 주사위를 던져서 특정 숫자가 나오게끔 하는 도박보다도 훨씬 더 높은 확률이니까 할만하다. "가위바위보!" 생과 사의 갈림길 속에서 펼쳐진 가위바위보 대전. 이토록 불꽃튀는 경쟁은 본 적이 없다. 그래도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기에 가위바위보 꼴찌 결정전에 당선되는 불운에 걸리지 않도록 나도 필사적으로 임한다. 그래봤자 가위, 바위, 아니면 보 셋중에 하나의 확률싸움이기 때문에 머리를 쓴다고 해도 별 수 없다. 운이 좋으면 그만. 그리고 그 운이 없는 사람 두명이 꼴찌 결정전에 임하기 직전이었다. "뭐야. 나도 꼴찌 후보인거야?"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별거 아니라는 감흥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지아 선생님. 반면에 상대방, 즉 꼴찌 후보 기호 2번에 당선된 불운의 여자, 세린의 눈은 오늘따라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착각마저 보여준다. "양호 선생님. 전 절대로 질 수 없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교수님이라면 오히려 노출을 즐길줄 알았는데, 저건 조금 의외다. 아무래도 최고 연장자인 위치에 있다보니 쪽팔리는 감정이 드는건 어쩔 수 없는건가. 그러나 양호 선생님의 다음 대사에는 이런 내 상상을 가볍게 뒤짚는 모범 답안이 나오고 말았다. "함부로 유부녀의 알몸을 보여줄 수는 없으니까." "......" 그런 겁니까.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저번에 저와 불침번을 설 때 보여주었던 애무 실력은 도대체 뭐라고 설명하면 좋단 말입니까. 선생님.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래도 가위바위보는 해야 할 판국.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양호 선생 VS 대학교 2학년 여학생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둘 다 가위. 그리고 이어진 무승부 속에서 또다시 시작된 2차전 역시도 둘 다 가위. "왜 자꾸 가위만 내는 거예요!" "3분의 1 확률에서 나한테 화내봤자 별 수 없는데." 의도적으로 무승부를 내는 것은 아닐테고. 그런다고 가위바위보의 결정 여부가 인위적인 결과가 나오게끔 하는건 힘들지 않은가. 아무튼 무승부 2연속에 당첨된 기괴한 인연은 잠시 접어두고, 또 다시 시작된 가위바위보. 혼신의 힘을 다 한 세린의 태도에 하늘이 반했는지, 이번 게임의 승자는 세린에게 양보한 듯하다. "이, 이겼어... 이겼다고...!!" 갑자기 기도하는 신도의 성숙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세린. 저렇게도 기뻐할줄은 솔직히 말해서 몰랐다. 막상 진 양호 선생님은 별로 크게 신경쓰이지 않는다는 담담한 표정을 지어보이는데 말이다. "어쩔 수 없네. 진건 진거니까." "양호 선생님, 벗으시는 건가요~?" 누나의 외침에 지아 선생님이 요염하게 웃음으로 화답한다. "그래. 섹시 다이너마이트 몸매를 잘 지켜보렴." 본인이 스스로 칭찬하는 것도 좀 보기 드문 일인데. 그래도 지아 선생님의 몸매가 끝장이라는 사실은 나도 인정한다.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자, 마치 봉인되어 있던 거대한 가슴이 빠방! 하는 효과음과 함께 튀어나온다. 그리고 짧은 미니 스커트를 아래로 벗고서 스타킹 마져도 탈의.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남은 팬티 한장조차도 과감하게 벗어버린 지아 선생님이 허리춤에 오른손을 올려놓고 모델이 뽐내는 포즈 비슷한 형태로 자세를 잡아보인다. "뭐, 알몸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네." "멋져요, 선생님!!" "역시 어른이에요!" 누나와 유아 선배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지아 선생님. 서양 야동에서 볼 수 있을거 같은 그런 몸매 있지 않은가. 가슴과 엉덩이가 무지하게 크고, 거기에 허리는 잘록하고. 길게 뻗은 허벅지까지 정말 예술이라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의 여체였다. 이것이 유부녀의 몸매란 말인가. 색기와 요염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형상화 시킨듯한 착각마저 든다. ... 안돼지. 벌써부터 커지면 안되잖아. 발기된 아랫도리를 꾹꾹 누르려고 하는 내 모습을 본 아리아가 지아 선생님에게 두 손으로 깔때기 모양을 만든 다음에 크게 외치기 시작한다. "양호 선생님. 유에 선배가 선생님보고 흥분했어요." "어머, 역시 피끍는 20대 청년에게 자극적인 모습이었나보네." 눈가 밑의 점 때문에 지아 선생님의 표정이 너무 야하게 보인다. 수북하게 보이는 음모. 전혀 가릴 생각도 없다는 듯이 자신의 몸매를 도리어 뽐내며 자리에 앉는 지아 선생님이었다. 정말 최고다. 양호 선생님의 몸매. 유부녀 최고! 아무튼 이렇게 해서 2차전이 끝이 났다. 지아 선생님의 누드 쇼 덕분에 분위기는 한창 절정으로 치닫는 상황. 가위바위보 제 3차전을 통해 선발된 세번째 왕은 바로... ... 나였다. 별일이 다 있네. 내가 왕을 다 잡아보고. 그렇게까지 운이 좋은 편이 아닌데 이번판은 꽤나 운수가 따라준 모양이다. "그럼 내가 명령을 내리면 되는거지?" "강한걸로 부탁해요. 선배." 아리아의 특별 지시. 사실 나도 약한 벌칙 따위로 이 무르익은 분위기를 다운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약간 선정적이라고 해도, 밀고 나가볼까. 이 에로에로 파워를 유감없이 선보여주마! "꼴찌는 2명을 뽑습니다." "왠지 강한 벌칙이 나올거 같은데..." 노아 교수님. 정답입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강한건 하지 않을 예정이다. 왜냐하면 3차전은 '초반'이지 않은가. 분위기의 최고조로 달하게끔 하는 일종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서 나는 이런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맨 마지막 꼴찌가 두번째 꼴찌의 엉덩이에 입맞춤을 하도록." "이 변태 자식!" "나가 죽어버려!" 갑작스레 쏟아지는 유아 선배와 세린의 언어 공격. 하지만 이제와서 철회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왜냐하면 한번쯤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성들끼리의 음란한 모습을. 본래 금기시 되는 행위엔, 그만한 쾌락이 따라오는 법이니까. 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나름 어기는 쾌감이 있다고 해야 할까. 반항아 기질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딱 적당할 것 같지만, 그거와 동성간의 애정행각은 약간 맞지 않는 구석이 있으니까 더 이상 파고 들어가진 않겠다. 여하튼. 이 게임의 법칙은 왕이 시키는 명령을 그대로 이행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까 어떠한 수단을 발휘한다 하더라도 내가 내린 명령은 그대로 수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하하. "명령은 절대적이잖아요." "무슨 그딴 음탕한 명령을 내리는 왕이 어디 있어!" "여기 있잖아요." 간단하게 유아 선배의 말을 끊어버린다. 오늘의 나는 막을 수 없다고. 이래봬도 유린이라는 여자의 남동생이니까 말이다. ============================ 작품 후기 ============================ 재미없는 제 고백 이야기는 이 쯤에서 잠시 중단하고, 오랜만에 확밀아 이야기입니다. 현재 레벨이 49이고, 여전히 무과금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모은 명찰은 페리도트 배수카드 덕분에 현재 72000개 정도 되고요. 덕분에 마리스를 풀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키라! 세력도 기교! 기교 짱짱걸!! 109화 왕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다. 현실세계의 왕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런건 이루어질리 없는 헛된 소망일 뿐이니까 가볍게 넘기고, 게임에서라도 왕이 된 이 기분을 만끽하자. 아무튼 벌칙 내용은 '엉덩이 키스'로 지정. 아직까지도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는 세린과 유아 선배였지만, 왕은 위대하다고. 그렇게 노려봤자 한번 내뱉은 명령은 철회도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 나중에 죽여버리겠어." "저도 꼭 끼게 해주세요. 유아 선배." ... 왜 나를 괴롭힐때만 서로 협력 플레이를 하는 건가. 두명 다. 가위바위보 3차전. 승자의 여유를 가지고 관람하는 것도 꽤나 기분이 좋은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유롭게 경기를 관람중인 나. 그런데 상당히 의외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아니, 어찌보면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키스를 당하는 쪽이 세리아. 그리고 더 황당한 것은 바로 키스를 하는 쪽이 아리아가 걸린 것이다. 느닷없이 자매 두명이 걸려버린 상황. 다른 사람들 역시도 약간 엉뚱한 결과가 도출되었기 때문에 순간 할 말을 잃고 이 둘을 바라본다. "...아... 으..." 띄엄띄엄 소리를 내는 세리아. 물론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정말로 '소리'만을 낼 뿐. 웬만해선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 세리아가 스스로 이렇게 소리를 낼 정도라면 본인의 입장이 얼마나 난처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얼굴이 사과처럼 빨개진 세리아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하고 있다. 하지만 중간에 이런 애매모호한 분위기를 끊은 것은 벌칙 수행자이자 세리아의 쌍둥이 동생이기도 한 아리아. "벌칙. 수행하면 되는거죠?" "어? 어... 그렇긴 한데." "정말로 하는거야?!" 누나가 대신 내가 하고싶은 말을 물어본다. 쌍둥이 까지는 아니더라도 누나와 나 역시도 남매사이. 나이스한 질문이었다고 칭찬해주고 싶지만, 정작 명령을 내린 사람은 나인지라 뭐라 위로의 말을 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벌칙 수행자 본인이기도 한 아리아는 오히려 담담하게 말한다. "뭐, 어때서요. 그다지 심한 벌칙도 아닌데요." "심하지 않다고?" 이번에는 노아 교수님이 놀라서 되묻는다. 강도가 그리 크지는 않은게 사실이다. 내가 여자 둘에게 서로 마우스 투 마우스를 하라고 시킨것도 아니고, 동성 섹스를 하라고 시킨것도 아니다. 하지만 강도의 차원을 떠나서 정신적인 데미지를 입을만한 벌칙을 내린 것은 사실이다. 의도적은 아니었지만, 그 벌칙 수행자 둘이 공교롭게도 은발의 미소녀 쌍둥이 자매가 걸릴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한 일. 이런 우려와는 달리, 아리아는 자신의 어깨를 당당하게 펴면서 목소리에 힘을 주고 다시금 선언한다. "언니의 힙이라면 언제든지 핥아줄 자신도 있어요." "뭐라고!?!?" 뭐냐.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냐. 돌발적인 레즈 발언에 순간 당황해하는 일원들. 하지만 오히려 우리들의 당황한 모습이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아리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왜 다들 그런 표정을 짓는 건가요?" "그치만 다른 부위도 아니고. 엉덩이라고. 항문 근처인데..." 더듬더듬 말하는 노아 교수님. 이럴땐 역시 교육자인 자신이 나서서 올바른 성적 지식을 부여하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의무감으로 말을 하는듯 하다. 그렇다고 아리아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것은 또 아니다. "세리아 언니에게서 냄새가 날 리가 없잖아요." "뭐...?" "우리 언니는 땀냄새도 향수처럼 느껴질 정도로 제가 많이 아끼는 사람이니까 이 정도 일은 벌칙 수준도 아니에요." 잠시 잊고 있었다. 아리아가 세리아에 대해 지나칠 정도의 과보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런데 저 말은 자매애라기 보다는 단순한 스토커잖아. 아니면 아리아, 너 설마 그런 취미였냐. 담담해하는 아리아와는 다르게, 세리아는 창피한지 그녀의 말을 막기 위해 손을 바둥바둥 허공에 저어보인다. 그런 세리아에게 아리아는 오히려 일침을 가하는 한마디를 날릴 뿐이다. "언니. 벌칙 수행해야지. 스커트 잠시 내려봐." "!!!" 싫다고 고개를 좌 우로 열정적으로 흔드는 세리아. 아무리 자매라도 언니의 엉덩이를 핥겠다는데 누가 좋아할까. 이번만큼은 성격좋고 얌전한 세리아라고 해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나보다. 하지만 그래서는 벌칙이 진행되지 않는다. 약간 냉정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게임은 게임 아닌가. 약간 한숨을 쉬는 아리아가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세리아에게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언니. 계속해서 언니가 이런 거부반응을 보인다면 게임에 차질이 생기잖아. 그렇지?" "......" "이대로 게임이 진행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입히는 꼴이 되는거고. 세리아 언니가 타인에게 폐를 끼친다는 일은 생각도 못해봤는데. 언니 본인도 그런 일은 싫지?" "......" "자, 그러니까 스커트를 내려줘." 잘 나가다가 마지막 말에 초를 치는구나. 확실히 이대로 진행이 안되면 난감하다. 벌칙 면제 이런 제도도 없고, 흑기사... 는 조금 고려해볼 가능성이 있는데. 왕인 내가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남자인 나는 당연히 안되는거고. 그렇다고 여자는 되느냐? 그렇게 물어온다면 그건 또 아니다. 왜냐하면 같은 동성이라고 해도 엉덩이 키스를 좋아하는 별난 취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한 여기에 있는 사람들 한정으로 생각해본다면 절대로 없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꼽아보라면 엘리 정도가 있지 않을까. 물론 아무런 의미도 모르고 하겠지만. 수치심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세리아가 아주 소심하게 스커트의 지퍼를 내리기 시작한다. 역시나 아리아. 자신의 언니를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 지지직. 지퍼가 내려가고, 허리를 숙인 세리아가 조신한 태도로 엉덩이 계곡이 드러날 정도로 살짝 스커트를 내린다. 세리아의 하반신을 앞에 두고 무릎을 꿇은 아리아. 본인은 별로 긴장한 표정을 지어보이지 않는데, 주변 사람들이 오히려 침이 넘어갈 정도로 부끄러워하고 있다. 이런 명령을 내린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조금 미안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실제로 엉덩이 키스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포르노 동영상에서 가끔 여배우들이 서로의 엉덩이와 사타구니를 핥아주는 장면은 있어도, 실제로 보는건 또 처음이다. 그리고 애초에 그건 포르노라는 장르고, 지금은 단순히 게임의 벌칙수행 아닌가. 내가 조금 과한 명령을 내렸나 싶은 양심의 가책마저 드는 순간이다. 아리아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면서 천천히 세리아의 둔부를 향해 얼굴을 갔다 대기 시작한다. 묘하게 야해보이는 이 장면. 그러고보니 다른 여자들의 레즈씬은 많이 봤어도 자매 덮밥용 레즈 씬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실제로 쌍둥이의 위치에 있는 저 둘이 이렇고 저렇고 그런 말 못할만한 음탕한 행위를 하면 어떻게 보일까. 생각만해도 벌써부터 흥분의 도가니 탕에 빠져들 기세다. 쪽. 살짝 아리아의 입술이 세리아의 왼쪽 엉덩이살에 닿는다. 허벅지와 엉덩이의 경계선을 만들어 주듯이 접힌 엉덩이 살이 정말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 장소에 아리아가 입맞춤을 한 것이다. 키스도 아니고 애무도 아니다. 그저 살짝의 입맞춤인데 엄청나게 강도 높은 에로틱을 선사해주었다. 두 자매에게 진심으로 박수 갈채를 보내고 싶다. 10초정도 세리아의 엉덩이와 키스를 한 아리아가 입술을 뗀다. 세리아의 둔부에 아리아의 입술자국이 희미하게 남은 모습을 보니 약간 묘한 기분도 든다. 황급히 자신의 스커트를 올리는 세리아. 자세히 보니 이미 수치심으로 물들은 눈 끝에 약간의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 정도로 창피했던 것일까. 뭐, 다른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엉덩이를 까는 것은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런데 정작 쪽팔려야 할 아리아는 표정변화 없이 무뚝뚝한 얼굴로 게임의 속행을 주장할 뿐이다. "다음 판으로 넘어가죠." "그, 그럴까?" 어색하게 웃으면서 게임 준비를 하는 누나. 은근히 아리아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 내 감이 잘못된 것이 아니리라 생각한다. ============================ 작품 후기 ============================ 아침부터 비가 오네요... 아니지. 어제 저녁부터인가요? 제 마음에도 비가 내려요 ㅜ_ㅜ 110화 잠깐동안 연출되었던 엉덩이 키스로 인해 게임은 서서히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 알몸의 지아 선생님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가위바위보 4차전에 임하기 시작한다. 가위바위보 게임을 할 때마다 흔들리는 거대한 유방. 아. 정말 볼때마다 탐스럽다. 저 유방을 한 입 베어물어 봤으면 좋겠는데. 어떤 맛이 날까. 유부녀는 특별한 맛이 나겠지? 아마도. "아싸! 또 나다!" 환호하며 좋아하는 누나. 아니꼽게 바라보던 유아 선배의 태클이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온다. "잠깐. 유린, 너 사기같은거 치는거 아니지?" "그럴리가. 가위바위보라고. 사기칠 여유따윈 없잖아." "... 정말이야?" "그럼. 이게 무슨 섯다 아니면 고스톱도 아니잖아. 밑장빼기 같은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누나의 말이 맞다. 가위바위보에서 사기를 칠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단순한 운, 그 자체다. 다만 누나가 두번이나 왕을 잡는다는 점은 하늘을 원망해야 하는 시나리오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누나라면 이 분위기를 다운시킬만한 벌칙을 말하지는 않을 터. 자, 또 어떤 시련이 내려지는 것이냐. 빨리 말해. "다음 꼴지 한명도 지아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알몸'이 됩니다." "두번째 누드쇼라고!?" "내 목표는 전원을 다 알몸으로 만드는 일이지." 싱긋 웃으면서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누나. 다 좋은데, 왠지 조금 어긋나지 않았나. 고작 누드가 목표인 불순한 동기에 포부라는 단어를 사용하다니. 이 단어도 싸구려가 다 되었다. 아무튼 좋다. 엉덩이 키스와 동급은 아니더라도 강한 벌칙이니까. 이미 누드차림이 된 지아 선생님은 별다른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다. 유아 선배와 세린은 이제 반론을 펼쳐봤자 자신들의 의견이 먹혀들 리가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잠자코 있는다. 아리아가 자신의 언니의 엉덩이에 키스까지 했는데 설마 반대할 용의가 있겠는가. 그렇게 해서 시작된 제 4차전 가위바위보. 누나를 제외하고 4명과 5명으로 그룹을 나누어 가위바위보를 시작한 끝에, 재수없게도 이번에는 라이벌 전이 되어버렸다. "... 설마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이세린." "우연이네요. 저도 이런 식으로 다시 선배와 결전을 벌이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운명의 장난인가. 아니, 장난으로 이렇게 엔트리를 짜도 힘들게 나올만한 대결구도가 너무나도 쉽게 나와버렸다. 이유아 VS 이세린. 무인도에 머물고 있는 멤버들 중 가장 안좋은 상극을 가지고 있는 둘이 최악의 벌칙 수행을 앞두고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고 만 것이다. "누누히 강조하지만, 이쪽은 알몸이 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선배."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렇다고 몸매가 자신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굳이 말하자면 나는 글래머러스한 편이라고." "저도 몸매가 자신이 없다는 뜻은 아니에요. 결단코!" 갑자기 왜 서로들 몸매가지고 싸우는 것인가. 여전히 알 수가 없다. 그래도 피해갈 수 없는 결전. 패자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알몸이 된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그리고 승자는 다음 경기까지 옷을 입고 다닐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평범 오브 라이프를 즐길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천국과 지옥. 누가 알몸이 되느냐가 지금 이 가위바위보 한판에 달려있는 것이다. "가위바위..." "보!" 첫번째 경기. 유아 선배가 가위, 그리고 이세린 역시도 가위. 결과는 무승부가 나왔다. "역시 제법이네요. 선배." "그쪽도." 겨우 가위바위보 무승부 한번 가지고 서로의 기질을 칭찬하는 이 훈훈한 상황. 평소에도 이렇게 서로 칭찬하고 잘 좀 지내보라고. 두 아가씨. 아무튼 승부가 안 난 관계로 두번째 경기에 임한다. 이번에는 신중하게 경기에 임할 생각인지 유아 선배가 팔을 배배 꼬고선 그 사이로 한쪽 눈을 감은 채 손바닥에 안에 보여지는 가위바위보 신의 신내림을 살펴본다. 그 모습을 본 이세린 역시도 똑같은 포즈를 취하면서 같은 신내림을 받는다. 저런 태도를 취한다고 한들 실제로 가위바위보 경기 승률이 100%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단순한 미신. 결국 자기 최면 = 마인드 컨트롤과 같은 효과만 낳게 되는 것이다. 그 정도로 심적으로 기댈 곳이 필요하다는 뜻이겠지만. 그렇게나 싫은건가. 알몸이 된다는 것이. 유아 선배는 어차피 누드 하우스 사건도 있었고 하니까 그다지 상관 없지 않을까 싶은데... 이세린은 조금 이해가 간다. 다른 여자들은 그렇다고 해도, 남자인 내가 있지 않은가. 절대로 남자에게 만큼은 자신의 고귀한 살결을 보여주기 싫다는 여왕 폐하의 의지가 여기까지 전해지는 듯 하다. 아무튼 힘내라고. 누가 지든 남자의 입장인 나는 호강하는 셈이니까. "가위바위..." "... 보!!" 두번째 경기 결과. 유아 선배가 주먹을, 이세린 역시도 주먹을 내면서 또다시 무승부가 되었다. 아까 지아 선생님과 세린이 나체 벌칙을 걸고 가위바위보를 할 때와 동일한 카운트. 굳이 차이점을 언급하자면 그때는 둘 다 가위로 무승부가 났었고, 지금은 주먹끼리의 무승부가 한번 났다는 정도밖에 없다. 아, 가장 중요한 차이점을 빼먹었다. 바로 상대가 라이벌인 유아 선배라는 거. "언재까지 무승부로 할 생각이야. 이세린." "선배야말로 왜 하필 주먹을 낸 거예요! 그때는 가위를 냈어야죠." "나보고 일부러 지란 말이야?" "선배는 나체가 더 어울려요. 자연인 같으니까요." "뭐라고ㅡ!?" 또다시 불이 붙고 말았다. 캠프파이어는 정작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둘의 뒤에 캠프파이어가 설치되어 있는 것 마냥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한다. 정말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까는데는 열정적인 두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평소에 사냥도 열심히 한다면 좋을텐데 말이다. 이래나 저래나 세번째 경기는 시작되었고. 그리고 서로의 패가 나왔다. 3번째 경기. 이번에는 무승부가 아니다. 한 사람은 주먹을,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가위를 내고 있는 것이다. 승부가 갈렸다. 승자는 바로... "아싸~!!! 이겼다!!" 유아 선배가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외친다. 승리를 자축하는 세리머니. 반면에 패자가 되어버린 세린은 무릎을 털썩 하고 꿇으면서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린다. "이럴수가. 어째서... 어째서 내가 진거야!" "평소에 행실을 곱게 했으면 이겼잖아. 건방진 후배." "흥!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가 선배보다도 백배, 아니 천배정도 더 착하게 생활했을걸요?" "안 들려~ 안 들리니까 빨리 옷이나 벗어. 아니면 내가 벗겨버린다?" "크윽..." 분하지만, 오늘은 세린이 패배했다. 기껏 지아 선생님과의 명승부를 연출해놓고 결국 나체 신세라니. 이 녀석도 신세가 참 딱하다. 결국 나체가 될 운명이었다는 소리 안인가. 그것이 조금 지연되었을 뿐. 입고 있던 상의를 천천히 벗는 이세린. 유난히도 나에게 시선을 꽂은 채 '뭘 봐. 이 짐승!!'이라고 외치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만, 힐끗힐끗 그녀의 몸매를 감상한다. 스커트를 내리고, 입고 있는 마지막 분홍색의 귀여운 팬티마저도 벗어버린다. 오버 니삭스조차도 벗어버린 세린. 정말로 알몸이 되었다. 사실 세린의 나체는 처음본다. 허리도 가늘고, 운동을 한 여자인지라 피부도 꽤나 탄력적이다. 프랑스 인의 피가 섞여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정말 뒷태가 곱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가슴. 의외로 빵빵하다. 유아 선배 급이라고 해야 할까. 유아 선배도 결코 작은 크기가 아닌데, 생각보다 큰 가슴은 나를 놀라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가슴 크기 랭킹에 변화가 있을것 같은 예감이 든다. 지아 선생님이 가장 크고, 그 다음으로 노아 교수님, 누나 순번. 이후로 유아 선배와 세린이 공동 순위가 되는건가. 다음으로 세리아와 아리아, 체리가 그저 그런 순위를 유지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절대적인 빈유를 자랑하는 엘리. 괜찮다. 엘리야. 너도 언젠가는 크게 되면 글래머러스한 가슴의 소유자가 될 테니까 슬퍼하지 말으렴. 그리고 은근히 빈유 취향의 속성을 가진 사람들도 이 세상에 많이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단다. 그저 그대로 곱게, 예쁘게 자라만 다오.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나체 상태가 된 세린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나를 노려본다. 자신의 손으로 두 풍만한 가슴을 가린 채로 말이다. 나체가 된 세린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누나가 제법이라는 듯이 말한다. "꽤나 가슴이 있는 편이었네. 옷을 입으면 말라보이는 타입이었어?" "그, 그런 셈이죠." "과연. 역시나 외국인... 이 아니라 혼혈아 다워." 근거가 있는 말인가. 저 대사. 뭐, 동양인이 서양인보다 가슴이 작은게 맞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 뜻으로 해석해보자면 가슴이 큰 서양인의 유전자를 다른 사람들에 비해 조금이라도 많이 가지고 있는 세린이니까 어찌보면 가슴이 큰 편에 속하는 것이 정답일지도. 그런데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걸까. 아까부터 가슴, 가슴 이야기만 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여자는 가슴이지. 암. 그렇고 말고. "안녕? 나체 동지?" "......" 지아 선생님이 세린의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면서 말한다. 세린에게 가위바위보 승부에서 졌기 때문에 나체가 된 양호 선생님이 세린에게 저런 식으로 말하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체의 두 미인이 저렇게 나란히 앉아있으니 나름 괜찮아보인다. 정말로. 이제 슬슬 4차전도 끝나고, 5차전이 시작되었다. 가위바위보. 결과는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엘리의 승리. 영어를 통해서 해석을 해야 하기 때문에 노아 교수님이 엘리가 내릴만한 명령을 직접 듣고 있다. 엘리 정도라면 무난한 편인가. 별다른 뜻깊은 명령은 내리지 않겠지. 그저 노래하기, 춤추기 이 정도? 아니면 뭐 다른게 있나. ... 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처럼 느껴질만한 대사기 튀어나오게 되었다. "자위를... 하라고?!" 노아 교수님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엘리에게 되묻는다. 설마. 아니지. 그럴리가 없다. 엘리가 내린 명령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위'를 하라는 뜻은 아니겠지? 교수님의 말에 엘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그녀의 반응을 본 사람들의 행동이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이 일제히 멈추고 만다. ... 강도가 너무 쎄잖아. 떨리는 입술로 본인이 직접 엘리의 명령을 전달하게 된 노아 교수님의 말이 확인사살처럼 들려온다. "에, 엘리가 내린 명령은... 꼴지 한명은 이 자리에서 자위를 하라는데..." "저, 정말이에요?!" "말도 안돼!" 주변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속속들 뛰쳐나오기 시작한다. 심지어 누나 조차도 엘리의 발언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패닉상태를 보여준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위라고? 이건 뭐... 사형 수준이잖아. ============================ 작품 후기 ============================ 내일 확밀아 화이트데이 이벤트를 한다고 합니다. 내용은 캔디 카드 5배수, 캔디 키라 카드 지급, 그리고 명찰 획득 2배(이건 맞나 모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기간은 목~금요일이며, 이틀동안 열심히 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111화 그렇게 해서 시작된 가위바위보 5차전. 분위기는 말 그대로 엄숙하다. 전쟁터를 연상시킬 정도의 기운이 감도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일제히 전장으로 향하기 시작... 이 아니라.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기 시작한다. 가위바위 보! 보! 그리고 또 보! 일단 A그룹에서는 재수없게도 내가 당첨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환호를 지르면서 나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내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건 약올리는 것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반면 B그룹에서는... "......" 아무런 말도 없이 침울한 표정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노아 교수님. 불쌍하다. 정말 불쌍하다. 아리아에게 암캐 소리를 들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번에는 남들 앞에서 자신의 성기를 보여주면서 자위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나나 다른 사람들은 괜찮다. 어차피 나이도 어리고 학생이니까. 하지만 지아 선생님이나 노아 교수님의 입장은 엄연히 다르다. 우리보다 연상이고, 그리고 교수님인데 학생들 앞에서 자위를 해야 한다니.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처신인가. "유에..." 나에게 '한번만 봐주면 안될까?'라는 동정심을 구하는 눈동자를 보여주기 시작하는 노아 교수님. 아... 넘어가주고 싶다. 정말 교수님이 불쌍해보인다. 학생인 내가 봐도 만약에 이 벌칙에 교수님이 당첨이 된다면 차마 눈을 뜨고 보지 못하... 는건 아니고. 두 눈을 부릅 뜨고서 뇌에 있는 모든 메모리 장치를 꺼내들고 저장을 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교수님의 자위라니. 섹스만 해봤지, 교수님이 스스로 다리를 벌리고 자위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인 여교사, 우리 교수님이라는 인물한테서. 절대로 질 수 없다. 이번에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내 딸감을 위해서!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굳이 노아 교수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변태 취급 하면서 죽이려고 달려들겠지. 그러니까 대충 이런 식으로 둘러대도록 하자. "죄송합니다. 교수님. 승부의 세계는 냉혹하잖아요." "그런..." "교수님. 전 학교에서 이런걸 배웠습니다. 필사적으로 노력하라. 그리고 승리하라. 도전하고 쟁취하라. 저희들이 대학을 거쳐 취업으로 가는 목적이자 모토가 되는 문구 아닙니까?" "......" "그래요. 친구들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다 취업이라는 거대한 관문을 앞두고 경쟁하는 경쟁자. 다르게 말하자면 친구이자 라이벌이라는 뜻이지요. 아시나요? 그 슬픔.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하하호호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절을 버리고 취업 경쟁을 위해서 친구를 밟고 올라가야 하는 그 슬픔을!" "가위바위보랑 취업 준비랑은 별로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요! 상관 있습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교수님. 가위바위보는 사회의 축소판이에요. 가위는 형사소송법을, 바위는 헌법을, 그리고 보는 민법을 뜻하는 심오한 게임입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데. 그 말..." "당연하죠. 방금 제가 정했으니까... 가 아니라. 어찌되었던 가위바위보에는 저같은 대학생이 절대로 물러서서는 안될 중간고사, 기말고사 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교수님. 그렇기 때문에 전 질 수 없어요. 왜냐? 시험을 잘 봐서 취업을 해야 하니까!!!" "고, 고작 가위바위보를 이겨서 취업을 한다는게 말이 안되잖니!" 역시나 나의 말빨은 정말 화려하다. 이 얼마나 신빙성 있는 거짓말인가. 내가 생각해도 정말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교수님의 사정은 봐드릴 수 없다. 노아 교수님의 자위하는 모습도 보고싶긴 하지만, 다르게 말하자면 내가 자위하는 모습도 보여주기 싫다. 사실 자위를 하는 모습을 다른 여자들이 보고 있다는 사실도 은근히 흥분되는 요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자위를 하긴 싫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가위바위보. 입술을 살짝 문 노아 교수님이 나를 응시하며 말한다. "그렇다면 이 교수님도 어쩔 수 없이 전력으로 갈거야." 상당히 보기 드문 교수님의 굳은 의지. 아무래도 교수님 역시도 절대로 질 수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교수님이라도 같은 마음이 들겠지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나 역시도 전력으로 가위바위보에 임하는 수밖에 없다. "그럼 준비해주세요." 요새 심판 전용 칭호를 획득하게 된 아리아가 중개를 하기 위해서 우리들 사이에 선다. 어느새 주변으로 구경꾼들이 몰려온 상황. 노아 교수님과 나는 자세를 잡고 가위바위보 패를 낼 준비를 한다. 사실 가위바위보가 순수하게 운에 의존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얼핏 보면 3분의 1 중에 하나를 내서 승부를 겨루는 일종의 확률 싸움이기도 한 가위바위보. 그러나 가위바위보의 승률을 높이는 방법은 따로 있다. 그 중에 하나. 바로 '가위바위보'라는 대사를 할 때 '보' 부분을 크게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무의식이라는 잠재분야가 있기 때문에 자신이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반응을 보일때가 있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백화점 안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인파 속에서 한 사람이 갑자기 '왁!!!'하고 소리를 친다고 가장해보자. 그렇게 되면 당연히 사람들이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겠는가. 이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위바위보를 할 때 '가위바위'파트를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동시에 '보!'라는 단어를 크게 외치면, 사람은 그 짧은 순간에 '보'라는 글자를 인식하게 되어서 스스로도 모르게 실제로 '보'를 낼 확률이 크다고 한다. 3분의 1 확률싸움에서 조금이라도 높은 확률을 이끌어내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큰 방법. 가위바위보를 이길 수 있는 전략 중 하나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이렇게 주변에 구경꾼들이 많고, 게다가 장소가 야외인 경우는 방금 내가 말한 트릭은 그다지 효율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노아 교수님." "왜 그러니?" "저는 남자니까 '주먹'을 낼게요." "뭐... 어?!" "그러니까 저는 주먹을 내도록 할게요." 심리전. 가급적이면 정말 쓰고싶지 않은 심리전을 교수님에게 걸어본다. 내 말을 들은 교수님의 표정이 급격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주변에서 들려오는 불만소리들. "치사하다. 남동생. 순수하게 가위바위보로 승부해." "너무하네요. 유에 선배. 그렇게 안 봤는데." "... 역시 남자는 최악이야!" "유에. 나는 너를 검도부에서 그런 부원으로 키운 기억이 없는데." 누나, 아리아, 세린, 마지막으로 유아 선배까지 차례차례로 말을 꺼낸다. 대략 이런 욕을 먹을줄은 이미 예상을 했다. 하지만 대놓고 자위를 할 바에야 욕을 먹는게 훨씬 좋은 편 아닌가. 내가 주먹을 낸다는 선언으로 인해 교수님의 선택의 폭은 크게 줄어든다. 첫번째. 내가 정말로 내뱉은 말을 순수하게 이행할 경우. 이런 경우의 수로 따져보면 내가 주먹을 낸다고 가정을 하는 사례다. 그렇다면 교수님은 '보'를 내면 된다. 한마디로 간단한 일. 그러나 교수님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로 '주먹'을 낼 것인가. 아니면 일부러 심리전을 걸어서 보를 유도한 뒤에 가위를 내는 수법이 아닌가. 엘리같이 단순한 타입이 아니라 노아 교수님같이 생각이 많은 부류에게 있어서는 제대로 먹혀드는 심리전이다. 보를 낼 것인가. 아니면... 두번째 경우의 수. 내가 주먹을 낸다고 하고 거짓으로 다른 것을 냈을때의 가능성을 충분히 염두해둬야 한다. 그 말인 즉슨, 보를 유도하고 가위를 내면 교수님 본인은 주먹을 내면 된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3분의 1 싸움을 2분의 1로 줄이는 격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3분의 1에서 2분의 1로 확률을 줄였다는 말이 꼭 내게 유리하게 상황이 흘러간다 라는 말과 같은 소리가 아니다. 내가 노린 것. 2분의 1의 확률로 줄인 뒤에 교수님의 '신용'을 역이용하는 것이다. 확률은 반반이라고 해도, 교수님은 분명 나를 신용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교수님에게 딱히 모난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노아 교수님은 머리는 좋으신데 은근히 순수한 면이 있는지라 남을 잘 믿는 습관이 있다. 더욱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집단의 리더이기도 한 내 말을 쉽게 믿을 수 있을거라는 예상은 가볍게 할 수 있다. 교수님에게 미안하지만. 이번 경기, 제가 잡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가위바위..." 드디어 시작된 가위바위보 경기. 아리아의 말과 함께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간다. 나름 심리전을 걸었지만, 제대로 통할지에 대한 것은 미지수. 나는 그저 노아 교수님이 나를 믿고 있다고 가정하고 가위를 내면 되는 것이다. "보!!" ============================ 작품 후기 ============================ 드디어 시작된 화이트데이 이벤트입니다. 고백하고 차인 저에게는 전혀 무관계한 날일 뿐이지만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112화 "......" 노아 교수님의 표정이 참으로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로 다가온다. 연신 계속해서 교수님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하지만, 노아 교수님은 들은 체도 하지 않는다. 가위바위보 결과. 승리는 내가 가져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약간의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마지막에 노아 교수님의 신용을 이용해서 가위를 내려고 했던 나. 하지만 막판에 도저히 착한 노아 교수님을 배신할 수가 없어서 그냥 주먹을 택했고, 실제로 나는 주먹을 냈다. 만약에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 시나리오가 진행되었다면 결과는 노아 교수님의 승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승자고 노아 교수님이 패자가 되었는가. 그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교수님이 '가위'를 냈다는 것이다. 결국 내가 이기게 되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는 점이 있다. 교수님은 왜 가위를 낸 것이지? 교수님이 낼 것은 가위를 제외한 주먹과 보. 둘 중에 하나여야 했을 터이다. 그런데 쌩뚱맞게도 가위가 튀어나와서 나도 조금 놀랐다. 그래서 교수님에게 물어본 결과. 들려온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그냥... 아무생각 안하고 낸 것인데." 저 말 듯은 나 혼자 머리를 굴리면서 쌩 쇼를 했다는 것과 같은 말이지 않는가. 교수님은 애초에 내가 주먹을 내겠다는 예고 발언은 생각지도 않고 순수하게 '가위바위보'를 한 것이다. 괜히 복잡하게 생각해봤자 오히려 자신의 머릿속만 복잡해지지 않는가. 그래서 교수님은 과감하게 포기를 한 것이다. 그것도 두 눈을 질끈 감고. 교수님에게 어느정도 동정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교수님의 자위를 볼 생각을 하니 묘하게 기대가 되는 이 기분은 무엇일까. 천천히 터벅터벅 걸어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 앞에 선 노아 교수님. 구경꾼들은 연신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노아 교수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는 것인가. 그럼 도대체 왜 나한테 심리전을 건다고 욕을 한 거야. "노아 교수님. 파이팅!" 유아 선배의 응원. 도대체 무엇을 파이팅 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거의 울상이 다 된 노아 교수님이 엘리쪽을 바라보며 말한다. "아, 아무리 그래도 엘리에게는 조금... 그렇지 않니?" "엘리요?" "으응. 엘리는 꼬마아이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좀..." 역시나 교육자다운 발언이다. 아까 지아 선생님도 '자신의 몸매는 18세 미만 관람불가'라는 말을 했었는데, 노아 교수님도 교수라는 지위에서 한창 커가는 다른 아이에게 괜히 트라우마를 심어주는게 아닐까 하고 걱정되는 모양인듯 하다. 그런데 교수님.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 명령을 내린 인물일 바로 엘리인데요. 그래도 차마 엘리에게 자위에 대한 행위는 보여줄 수 없었는지 노아 교수님이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주장한다. 이번만큼은 지아 선생님도 넘어갈 수 없다는 듯이 편을 들어주기 시작한다. "노아의 말이 맞아. 괜히 잘못된 성 지식을 심어주면 엘리에게 미안한 짓을 할 지도 모르니까." 그런고로 엘리는 일단 눈가리개를 하게 되었다. 자신의 눈을 왜 가리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엘리였지만, 딱히 반항하거나 그런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역시나 착한 아이다. 교수님의 손이 미니 스커트 안쪽으로 향한다. 묘하게 긴장되는 이 장면. 다른 사람들 역시도 숨을 죽이고서 교수님의 모습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아마 노아 교수님의 입장에서는 수치심이 극에 달해서 미칠 노릇일거라 예상되지만, 그래도 혼자서 벌칙을 받지 않겠다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우리들 역시도 엘리가 설마 이런 강도높은 벌칙을 내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해서 조금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흐윽..." 필사적으로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를 참으려고 노력하는 노아 교수님. 점점 오므러드는 다리 사이로 교수님의 오른손이 스커트 안쪽에서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제 3자인 우리들은 알지 못한다. '자위를 하라'라고만 했지, 그 전제조건에서 '옷을 벗고 해라'라는 말은 없었기 때문이다. 노아 교수님에게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수가 없다. 빨갛게 물든 교수님의 얼굴. 붉은 입술 사이로 조금씩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시작된건가. 많은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교수님의 자위를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희미하게 교수님의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설마. 아니, 설마가 아니라 진짜다. 여자가 흥분을 할 때 보여주는 투명한 애액의 한줄기가 길게 실을 늘어뜨리며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질퍽질퍽한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교수님의 손동작이 급격히 커지기 시작한다. 원래 '노출'이라고 함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눠진다. 단순히 더워서 벗은 것이거나 아니면 그 노출을 즐기거나. 후자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들이 봄으로 인해 일종의 흥분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노출증. 노출증이라는 것은 굳이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인에게도 충분히 그런 증상이 있다. 다만 노출증을 가진 사람들이 일반인들에 비해 유난히 자신의 노출을 통해 흥분을 느끼는 강도가 더 쎌 뿐이다. 노아 교수님 역시도 마찬가지. 교수님이 노출증 환자라는 소리가 아니다. 다만, 일반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자위 행위를 남들이 보고 있다는 사실이 수치심을 주는 한편, 그 수치심이 평소에 맛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쾌락'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는 뜻이다. 그리고 노아 교수님은 그 쾌락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아으읏!" 고개를 크개 뒤로 젖힌다. 교수님의 두 다리는 서 있기 조차도 힘든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아까에 비해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무수한 애액들이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중. 교수님은 애액의 양이 많은 편이다. 이 사실은 노아 교수님과의 섹스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원래 성인 여성이 되면 10대에 비해서 그렇게나 많은 양을 내뿜을 수 있는지에 대한 사실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교수님이 절정으로 치닫게 될 때는 손바닥이 흠뻑 적셔질 정도로 애액이 많이 분비된다. "아... 하아..." 이제는 아무렴 어떠냐는 식으로 마음을 먹은건지, 교수님이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다리를 스스로 벌린다. 평소에 남자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듯이 굳게 닫혀있던 조개가 스스로 흥분해서 자신의 입구를 연 것이다. 교수님의 스커트 안쪽이 그대로 보인다. 다만, 팬티 위라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삐죽 튀어나온 음모들. 그리고 팬티 속으로 파고 든 교수님의 고운 손가락이 남성기를 대신하듯이 자신의 질 입구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듯한 실루엣을 보여준다. "이, 이제... 더는... 안돼!" 교수님의 비음 섞인 비명소리와 함께 마치 오줌이 분비되듯이 전방에 애액이 분출되기 시작한다. 여자도 흥분을 하고 오르가즘에 달했을 경우에 남자들처럼 사정 비스무리한 형태로 절정을 맛볼 수 있다고들 한다. 이것도 그 현상인 것일까. 절정으로 치닫은 교수님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교수님의 주변에만 비가 온 듯이 흥건히 젖은 대지. 그 위로 노아 교수님이 힘없이 바닥에 누운 채 숨을 고른다. "하아... 하아..." 그렇게 청순하고 얌전한 모습을 보여주던 노아 교수님이 학생들 앞에서 스스로 자위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다니. 게다가 정말로 오르가즘을 느낀건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가파르게 호흡만을 내쉴 뿐이다. 어떤 의미로 정말 굉장한 벌칙이 되었다. 폭풍같은 벌칙이 끝나고. 계속해서 이어진 게임은 누나가 왕의 지위를 2연속이나 차지하는 말도 안되는 사기 스킬을 발휘하면서 현재 게임의 분위기는 중반으로 향하게 되었다. 누나가 왕이 되었다는 소린 결과적으로 말해서 누군가 적어도 2명은 알몸이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누나의 희생양으로 알몸이 되어버린 사람은 유아 선배와 노아 교수님이었다. "왜 또 나야..." 거의 울먹이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인은 노아 교수님. 정말 운도 없다. 아까는 학생들 앞에서 자위까지 하는 불순한 태도를 보여주시더니 이번에는 알몸 테러를 당했다. 아마 이번 게임에서 제일 정신적인 데미지가 크다고 보는 사람은 단연 노아 교수님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린과 나체 벌칙을 두고 엄청난 혈전을 벌였던 유아 선배 역시도 도대체 왜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겼는지 조차도 의심이 될 정도로 순식간에 나체가 되어버렸다. "이것도 다 정의의 심판이에요." "시끄러워." 세린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유아 선배가 입 다물라고 조용히 시킨다. 심기가 불편해보이는 것은 매 한가지. 정신적인 피해 더하기 육체적인 피해가 여기저기서 속출하는 가운데, 또다시 게임이 속행되었다. "자. 이번에 왕이 될 사람은 누구인가!" 누나의 기운찬 말과 함께 시작된 가위바위보. 알몸이었던 여자들이 4명으로 늘어나니까.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핑크빛 유두가 발딱 서 있는 풍성한 가슴 세례를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유아 선배와 노아 교수님의 가슴은 평소에도 자주 볼 수 있었지만, 나는 옷을 입고 있는데 상대방은 나체라는 점이 조금 독특한 설정이라고 보면 되겠다. 나름 괜찮군. 나도 누나의 계획에 동참하고 싶을 정도다. 아무튼 가위바위보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 왕은 누구냐. 체리나 세리아가 걸렸으면 좋겠다. 후반은 조금 얌전하게 가자고. ... 했더니 최악의 시나리오가 당첨되었다. "winer." "에, 엘리..."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다. 누나가 2연속으로 왕이 되었다는 것은 그렇다고 하자. 확률적으로 극히 드물 뿐이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니까. 하지만 왜 엘리냐. 어찌하여 엘리가 또 왕을 잡게 한 거냐고. 이제는 엘리의 명령이 어떤 식으로 내려질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아까는 자위까지 하라고 했으니. 설마 그것보다 더 강도가 높은 것이 나오지는 않겠지. 아니. 있을 수 없다. 엘리도 나름 순수파라고 믿고 있었는데. 영어로 명령을 전달받은 누나. 표정을 보아하니 별다른 특이한 명령을 내린것 같지는 않다. 다행이다... "꼴찌 2명을 뽑아서 서로 '섹스'하래." "다행이다가 아니잖아!!!" 결국 나오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서 암묵적으로 금지되다 시피 한 명령이 튀어나온 것이다. 알몸에, 자위쇼에, 엉덩이 키스까지 나왔는데 섹스라고 못 나오겠는가. 분명 누군가도 마음속으로 생각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왕이 된다면 꼴찌 2명을 뽑아서 섹스라도 시켜볼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존재는 알면서도 일부러 태연하게 다른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존재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거짓말이라는 것도 할 수 있는 종족이고. 그러나 엘리는 순수하다. 정말로 순수하다. 그리고 솔직하다. 그렇기 때문에 거리낌없이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 그것보다도 엘리 저 녀석, '섹스'라는 단어가 뭐지 알고서 하는 말일까." "절대로 모르고 한 말인거 같은데." 누나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내 질문에 대답해준다. 그럼 그렇지. 섹스라는 단어가 뭔지 모르니까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보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명령을 내린게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었다. 고작 엘리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공개적으로 섹스를 하라는 뜻인가. 이건 말도 안된다.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도 이 벌칙을 수행하는 것을 묵인해야 하는가 아니면 항의할까 고민하는 표정이 보인다. 유일하게 평소와 똑같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바로 명령을 내린 본인, 즉 엘리밖에 없다. "......" 자기가 어떠한 대단한 명령을 한 것인지도 모르는지 그저 과일을 아그작 아그작 먹는 엘리. 어린아이의 순수한 호기심은 정말로 무섭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를 통해서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 중이다. 나도 앞으론 나이어린 사촌 동생들에게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지 라며 작은 결심을 해볼 정도였다. ============================ 작품 후기 ============================ 노아는 역시 괴롭혀야 제맛이지요. 하앍하앍... 113화 엘리가 내린 명령은 절대적이다. 물론 본인은 불순한 의도에서 동기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섹스'라는 것이 무엇인지 보고 싶어서 내린 명령이라고 생각되지만, 벌칙을 받는 입장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속마음을 대변하자면 아마도 엘리를 죽도록 원망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상관이 없다. 어차피 여기에 있는 여자들 중에 대부분과 관계를 가진 것이 사실이고, 아직 체리나 지아 선생님과는 몸을 섞은 적이 없지만, 그래도 여자와 섹스를 할 수 있는데 싫어할만한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초 미인들로만 구성된 이 집단에서 말이다. 다만 한가지 문제가 될 점이 있다면 바로 이세린의 존재 여부다. 극도의 남자 혐오증을 가지고 있는 이세린과 내가 걸리게 된다면 어찌될까. 아마도 치를 떨면서 이 벌칙 수행을 거부할 것이리라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그게 정상이다. 왜냐하면 남자를 싫어하니까. 나 역시도 만약에 그런 상황이 오게 된다면 게임 분위기를 망치는 한이 있더라도 벌칙을 취하하고 싶다. 세린의 남자 혐오증이 얼마나 심한지 알고 있기도 하고, 그리고 잘못하다간 정말롸 세린에게 평생의 저주급과 비슷한 위력의 욕설을 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이다. 그런데 이세린과 내가 걸릴 가능성이 그리 높지도 않다. 오히려 낮은 편. 여기서 또 하나 살펴보고 넘어가야 하는 점은 바로 '여자들끼리' 걸렸을 경우에 어떤 형식으로 대처가 되는건지가 문제다. 남자와 여자가 걸렸다면 간단하게 '섹스'라는 단어를 압축해볼 수 있다. 바로 성기의 삽입 유무. 그러나 여자와 여자가 걸렸을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레즈행위가 나오는 것인가. 그것도 나름 기대가 되기도 하지만... 걱정이 가장 앞선다. "이거, 해야 되는거야?" 유아 선배의 물음. 나에게 묻는다고 해봤자 뭐 별다른 답안이 나오겠는가. 아무리 누나라도 섹스는 좀 심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있는듯 하다. 그러나 여기서 의외의 대답을 내놓은 사람이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내가 나서야겠네." "지아 선생님?!" 느닷없이 양호 선생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윙크하며 말한다. "엘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올바른 성 지식을 전달해주는 것 역시도 양호 선생님이 해야 하는 일환이니까." "그런건가요?" "교육과 더불어서 벌칙도 넘어갈 수 있고. 일석이조잖아. 그렇지? 유에." "저... 요?" 갑자기 나를 지명하는 지아 선생님. 설마. 아니, 그럴리가 없다. 혹시나 선생님이 나와 섹스를 하길 원한다는 뜻인가. "내 상대가 되어줘야지. 남학생." "네에?!?!" "어쩔 수 없잖니. 이 섬에 있는 남자라고는 너 하나밖에 없잖아. 그러니까 나와 남자와 여자 사이로 섹스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는 뜻이니까 네가 당연히 나와야지." "... 제가 말입니까." "올바른 성교육의 조교가 된다고 생각해줘." 과연 올바를까. 이 것이. 그래도 지아 선생님의 말에는 어느정도 합리적인 면이 있긴 하다. 왜냐하면 아까 내가 우려했던 '벌칙 대상자를 뽑는 과정에서 이세린과 내가 되었을 경우'라는 사례를 고려한다면 차라리 지아 선생님과 섹스를 하는게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니까 말이다.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남자의 입장에서 지아 선생님과 같은 섹시녀와 섹스를 할 수 있다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상대는 유부녀. "지아 선생님. 결혼 하셨잖아요..." 노아 교수님이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저 말을 그대로 풀어서 설명하자면 '결혼도 하신 분이 다른 남자랑, 그것도 우리학교 학생이랑 관계를 가지는 것은 조금 그렇지 않나요?'라는 해석으로 설명해볼 수 있겠다. 그러나 지아 선생님은 오히려 노아 교수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한다. "뭘 세삼스레 그런 말을 하고 있어? 결혼하기 전에 다른 남자와도 관계를 가져 봤는데, 결혼 후라고 못 가질까?" "그래도 좀..." "노아. 너도 그렇고, 그리고 나도 그렇고. 엄연한 '여자'야. 여자라고 성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잖아. 솔직히 말해서 여기에 있는 여자들 역시도 마찬가지잖아. 유에와 관계를 가질 수 있을만한 상황이 올지도 모르니까. 아, 이미 관계를 가졌다는 사람들도 있었지." 지아 선생님의 폭탄 발언. 잠자코 듣고 있던 체리와 세린이 화들짝 놀란다. 어차피 다들 아는 사실이기에 나는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다. "여, 여기에 있는 사람들과 과, 관계를 가졌다고???" 라고 외치면서 유아 선배를 바라본다. 세린의 시선을 받자 유아 선배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답을 한다. "그럴수도..." "서, 선배! 미쳤어요?! 서로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데 관계를 가지다니." "이세린. 난 진심으로 유에를 좋아하고 있어. 절대로 허튼 감정으로 유에와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야. 그러니까 그 말은 취소해줬으면 좋겠는데." 유아 선배의 목소리가 조금 싸늘해진다. 방금의 대사는 진실. 실제로도 유아 선배는 나와 이성관계를 전제로 사귀는 사이처럼 자주 그런 행동을 보여주기도 했다. 순간 말문이 막힌 이세린. 기세를 탄 유아 선배가 나지막히 말을 이어가기 시작한다. "약간 질투심이 나긴 하지만, 유아 교수님도, 그리고 유린도, 아리아도, 세리아도 마찬가지야." "......" "무인도라는 각박한 환경이 이런 관계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어느정도 동의를 할게. 전혀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게 어때서? 순수하게 자신이 좋아하면 되는거 아니야? 비록 내가 좋아하는 남자를 다른 여자도 역시 좋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은 기분이 상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전부잖아. 내가 조금만 양보하면 다같이 행복해질 수 있는 관계인데." "그래도..." 이세린이 하고 싶어하는 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남자와 여자가 한 쌍으로 커플을 이뤄서 평생의 반려자로 남은 일생을 보내는 것이 의무이자 권리이다. 그리고 그 '한 쌍'이라는 조건은 바로 인간사회가 만든 틀 안에서 생긴 고정관념. 야생의 세계, 그러니까 동물들의 세계에서는 힘있는 수컷들이 다수의 암컷을 지배한다. 하지만 인간사회에서는 그게 통용되지 않는다. 우라나라같은 경우에도 혼인이라는 제도가 있지 않은가. 혼인이라는 단어의 용법은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일종의 의식 행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혼인을 '제도'라는 수준까지 언급한다는 소리를 뒤짚어서 풀이하자면, 결국 일부일처제라는 기존의 관습을 법으로 형상화시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이지, 그 남자가 다른 여자. 즉 '처'라는 존재를 만들어서 또다른 가정을 꾸리게 된다면 그건 반사회질서에 불합리하다고 해서 엄연히 법에 걸리게 되어 있다. 실제로도 민법이라 불리는 사회의 울타리에서도 규졍되어 있는 점. 다시 말해서 일부 다처제 같은 하렘 파티는 꿈도 꿀 수 없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무인도. 인간사회에서 적용되었던 법과 규칙이 통하지 않는 야생의 사회이다. 그리고 그 야생의 사회에서 나는 다수의 여자들과 동거를 하며 살고 있다. 여자들을 지켜줄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바로 수컷. 그렇기에 여자들은 힘있는 수컷의 존재에 반하는 것이다. 물론 그 감정은 여러가지로 표현될 수 있지만, 좋아한다는 이름의 감정은 본연 그대로 암컷으로서 수컷을 좋아하는 그런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유아 선배와 다른 여자들이 품고 있는 '좋아한다'라는 감정 역시도 일종의 사랑의 형태이다. 우리들의 현재 관계가 인간 사회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그런 일이라고 해도, 본인들이 좋으면 그만 아닌가. 어째서 타인이, 어째서 다수가 만들어놓은 법에 굳이 자신의 가능성을 틀어 박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나 역시도 그건 반대한다. 좋아하는 마음은 아무리 법이라도 막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있는 여자들을 전부 좋아한다. "... 솔직히 말해서 전혀 이해를 못하겠어요." "유체리..." 세리아의 뒤에 숨어있던 체리가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선배들이 유에 선배를 좋아하는 감정은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져요. 거짓된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하고 싶어요." 체리는 어느정도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보기와는 다르게 사고방식이 약간 개방적인 모양이다. 세리아도 체리의 말을 듣고 안심했는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지아 선생님은 애초에 우리들의 관게를 알고 있었으니 그렇다고 하고. 문제는 바로 이세린이다. "나, 나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어!" 끝까지 우리들의 관계를 부정하는 이세린. 남자 혐오증을 가지고 있는 그녀였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어느정도 공감이 간다. 멀쩡한 사고방식을 가진 여자라면 당연히 우리들의 관계가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세린과 같은 남자를 극도로 싫어하는 여자가 바라본다면 그 효과는 더더욱 크겠지. 당황한 세린이 지아 선생님에게 묻기 시작한다. "양호 선생님도 이 관계를 허락하시는 건가요?" "어머, 나는 진작에 알고서도 묵인하고 있었는데?" "......." 물어볼 것을 물어봐야지. 양호 선생님은 우리들의 사이를 가장 먼저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한테도 말을 안했단 말이다. 순간 할 말을 잃은 세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양호 선생님이 작게 한숨을 쉬면서 말한다. "이세린. 너에게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해달라고 말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평가하려는 생각은 버려." "평가... 요?" "그래. 평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정답이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옳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바르다. 이런걸 한마디로 말해서 '고정관념'이라고 하잖아. 나쁜말로 하면 '고집'이지. 더 나쁜 말로 표현하자면 '황소고집' 정도가 될까." "......" "사람이 가장 해서는 안될 일이 바로 자기 자신은 정당화 시키면서 남을 비하하는 발언을 내뱉는 행동이야. 언제부터 본인이 신이 되었지? 본인의 기준으로 이 세상이 돌아가고 있어? 그건 아니야. 인간이라는 존재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생물. 하나의 사회라는 집단을 만들고, 그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생물이 바로 인간이야. 한마디로 말해서 지금의 세게는 한명의 인간이 아니라 전 세게의 모든 인간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세상'이기도 해. 그런 세상을 혼자만의 기준으로 억지로 맞추어 들어가지도 않는 틀 속에 끼워넣으려는 생각은 버리는게 좋아." "그치만..." "네가 말하려는 것은 잘 알고 있어. 물론 나름 충격이겠지. 남자 하나를 두고 다수의 여자들이 몸을 섞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야. 그렇지만 이것도 나름 괜찮지 않니? 본인들의 의사로 순수하게 사기, 강박도 없이 형성된 인간관계. 이것도 하나의 '사회'야. 무인도에서 결정된 작은 문화일수도 있지." "문화..." "너에게 굳이 강요는 안해. 그렇지만, 자신만의 기준으로 남을 평가하려 하지 마. 이건 선생으로서가 아닌 인생의 선배로서 말하는 충고야." ============================ 작품 후기 ============================ 오늘도 술자리를 갔다 오겠습니다. 여자는 아니고요 ㅡ_ㅡ;; 114화 한동안 어물쩡한 태도를 보이는 이세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는듯한 모습이다. 하긴, 그렇겠지. 일반적인 남녀관계가 아니니까. 세린의 저 태도에 대해서도 솔직히 말해서 부정하고픈 생각은 없다. 한숨을 쉬면서 머리를 긁적이던 지아 선생님이 세린을 보며 말한다. "이세린." "네?" "이제부터 좋은 장면을 보여줄게." 라고 말하면서 터벅터벅 나에게 걸어오는 지아 선생님. 혹시 이건. 설마 양호 선생님. 그렇고 그런... "읍!" 우려하던, 아니. 내심 바라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바로 양호 선생님과의 공개적인 키스. 알몸의 지아 선생님이 그 커다란 가슴을 출렁이면서 나에게 다가오더니 이내 자신의 입술을 내 입술 위로 포개는 것이 아닌가. 아, 이 기분. 연상의 키스는 역시 능숙하다. 다른 사람들이 보든 말든 나의 길을 가겠다! 라는 지조있는 플레이를 보여주는 양호 선생님. 유부녀의 농염한 자태가 달빛에 빛나면서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통해 들어오는 혀의 놀림이 나를 더욱 자극시킨다. 갑작스레 벌어진 기습 키스. 그러자 세린이 놀란 목소리로 외친다. "야, 양호 선생님! 나, 나나나나남자랑 키,키키키키스를?!" "어린 아이도 아니잖니." 나를 살짝 밀어서 앉힌 양호 선생님. 주변을 둘러보면서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노아. 내가 대표로 들어줄래?" "무, 무엇을요?" 놀라서 대답하는 노아 교수님. 그녀의 반응을 귀엽다는 듯이 지켜본 양호 선생님이 싱긋 웃으면서 가볍게 말을 이어간다. "미안하지만, 너희들의 유에를 잠시 빌린다고 말이야." 도발적인 말과 함께 그대로 내 상의의 셔츠에 달린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한다. 설마 정말로 공개 섹스를? 진심인가. 양호 선생님. "지아 선생님. 정말로 하실 생각인가요?" "벌칙도 있고, 그리고 세린에게 보여주고 싶으니까." "무엇을요?" "여자는 원래 남자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모습을." 선생님의 손이 내 상의를 벗기더니 이내 지퍼까지 손을 댄다. 솔직히 말해서 양호 선생님의 지금의 이런 행동은 내 힘으로도 충분히 말릴 수 있다. 하지만 남자의 가장 큰 단점이 있지 않은가.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이라는 이름의 족쇄. 참으로 골치아픈 녀석이다. 그리고 그 성욕에 진작에 K.O를 당해버린 내 아랫도리 녀석은 아까부터 지아 선생님의 허벅지를 거칠게 찌르고 있는게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점은 바로 이것이다. "선생님의 성교육. 정말 실감 넘치네." "그러게..." 누나가 침을 꼴딱 삼키면서 말하자, 유아 선배 역시도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마디로 말해서 말릴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는 뜻이고만. 노아 교수님과 세리아, 체리는 힐끗힐끗 눈치껏 구경을 해본다. 차마 옆에 있는 아리아처럼 대놓고 구경은 못하고 있고, 약간 빨개진 얼굴로 미세한 시선만을 던질 뿐이다. 이것도 달리 말해서 결국 말릴 뜻 전혀 없음 이라는 의미와도 같다고 해석된다. 그렇다면 엘리는? 아주 대놓고 보고 있다. 도대체 어떤 행위가 섹스인지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말이다. 이번에는 왜 눈가리개를 안할까 라는 생각을 해봤지만, 애초에 지아 선생님이 성교육이니 어쩌느니 하는 명목으로 보여주겠다고 하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정말로 이런 행동이 성교육에 좋은 영향을 줄지에 대한 것은 미지수지만 말이다. "엘리. 보면 안되요." "......" 노아 교수님이 엘리의 눈을 두 손으로 가린다. 아무리 엘리가 보고 싶다곤 했지만,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도 없는 장면이기에 응급조치를 시행한 것이다. 왜냐하며 19세 미만 관람 불가니까. 체중을 이용해 사타구니로 성기를 강하게 압박하는 지아 선생님. 그러면서 동시에 내 손을 잡고 자신의 오른쪽 가슴을 만지게 한다. "그렇게... 음... 천천히 유두를 만져보렴..." 지아 선생님이 내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한다. 요염한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지도를 하기 시작하는 양호 선생님. 역시나 유부녀 답게 리드하는 실력이 상당히 좋은 편이다. 지금까지의 성관계를 통틀어보자면, 대부분 내가 리드를 하는 타입으로 많이 갔다. 내가 여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일단 첫 경험은 무지하게 아프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 삽입을 하는 순간, 내가 섹스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 그 정도까지의 고통을 느끼고 있다고 해서 결국 초보인 내가 리드를 하는 방향으로 많이 섹스를 주도해갔다. 그렇다고 노아 교수님때는 그녀가 리드를 했는가? 그건 또 아니다. 노아 교수님도 경험이 있다고는 해도, 겨우 한 번이었을 뿐이고, 그리고 교수님의 성격 상 지아 선생님 처럼 지시를 내리면서 주도적으로 자신이 섹스를 리드하는 타입이 아닌지라 결국 또 내가 교수님을 이끌어가며 섹스를 주도했다. 그래서 수동적인 입장에서 하는 섹스의 기분을 잘 모르고 있던 나. 하지만 지아 선생님의 이런 태도도 나름 괜찮다. 어른이 이끌어주는 섹스. 게다가 유부녀다. 섹스 경험이 충분한 여자가 스스로 이끌어주니 나는 지아 선생님이 하라고 하는 그대로 따라하면 된다. 약간 편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시작한다. 선생님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점점 허리를 매만진다. 지아 선생님이 그런 내 손놀림을 보더니 색기 넘치는 미소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테크닉이 제법이구나. 유에." "나름 실전 경험을 많이 거쳐왔거든요." "동정의 서투른 손길을 기대했는데, 이러면 선생님이 실망이잖니." 하지만 표정으로 보아선 전혀 실망한 눈치가 아니다. 오히려 기대 이상이라는 듯이 잔뜩 흥분에 도취된 지아 선생님이 내 바지를 벗기더니 튀어나온 아랫도리 녀석을 사타구니 아래로 깔아 뭉개면서 말한다. "어른의 테크닉을 어디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 지켜볼까?" 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조갯살 아래로 성기를 비비적 거리기 시작한다. 삽입을 한 것도 아닌데 교수님의 몸에 눌려서 압박을 느끼는 성기가 엄청나게 커진 상태로 빨갛게 달아오른다. 지아 선생님의 몸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란한 애액이 성기를 적셔간다. 살과 살 끼리의 질퍽한 마찰음이 내 귀에 닿을 정도로 크게 들려온다. "음..." 허리를 앞, 뒤로 번갈아 가면서 흔드는 지아 선생님.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거대한 유방도 동시에 덩실덩실 흔들린다.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에로틱한 모습을 자랑하는 지아 선생님. 눈가 밑에 있는 점 하나까지도 남성을 유혹하기 위한 암컷의 자태로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지금 당장이라도 성기를 삽입해서 교수님을 괴롭혀주고 싶다. 저 거대한 유방에 얼굴을 묻고 거칠게 허리를 흔들고 싶다. 이런 충동이 들 정도로 지아 선생님의 몸놀림은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가볍게 한발... 흐응... 쏘아내게 해볼까...?" 양호 선생님의 허리놀림에 그대로 정액들이 분출되기 시작된다.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곧바로 사정. 그 정도로 양호 선생님의 애무 실력은 최상급이라고 불릴 정도로 최고를 자랑하고 있었다. 내 배 위로 뿌려진 정액들을 바라보던 지아 선생님이 허리를 숙여 직접 혀로 정액맛을 본다. 진하게 퍼지는 밤꽃 냄새. 그 원인이 되는 애액들을 혀로 핥아마시는 지아 선생님의 모습은 말 그대로 남자의 정기를 먹고 사는 서큐버스 그 자체였다. "역시 젊어서 좋네. 벌써부터 커지고 말이야." 지아 선생님의 오른 손이 내 성기의 기둥을 훑어 내리기 시작한다. 방금 사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까보다 더 커진 크기를 자랑하는 남근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교수님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유에. 혹시 여성 상위체로 해본 경험이 있니?" "있어요." "어머, 누가 그런 대담한 포즈로 기분좋게 해줬니?" "... 그건 사생활 비밀 보호 차원에서..." 다시 자세를 잡고 일어선 교수님이 이번에는 내 성기를 잡고 직접 질 입구에 갔다 댄다. 그리고 앉으면서 곧바로 삽입. "으흥...!" 지아 선생님의 음란한 신음소리가 공터를 가득 채운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얼굴도 사과와 구분이 안될 정도로 빨개진 상황. 자신이 직접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섹스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의외로 많은 흥분도를 선사해주는 체험이 아닐까 예상해본다. 선생님의 자궁 입구가 귀두 끝에 느껴질 정도로 깊이 삽입이 된 상황. 지아 선생님은 오랜만에 남자의 성기를 맛보았다는 듯이 여전히 요염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생각보다 꽤... 하앗... 크구나... 순간 찢어지는 줄 알았어." "그, 그런가요?" "그래도... 마음에 들었어. 유에... 아아아..." 깊고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는 선생님이 스스로 허리를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남자를 그대로 성욕이라는 구렁텅이에 빠뜨리게 할 정도의 위력을 가진 지아 선생님의 허리놀림. 익숙한 테크닉에 정말 뭐라고 감탄을 자아내야 좋을지 모를 지경이다. 그나마 아까 사정을 미리 해서 이 정도로 버티는 것이지, 만약에 사정 한번 없이 그대로 선생님의 몸 안에 삽입을 한 채로 저런 허리놀림 기술을 당했다면 금방 선생님의 자궁에 정액을 퍼부었을 것이다. 설마 지아 선생님은 이런 사태를 우려해서 미리 내가 정액을 한번 토해내도록 한 것인가?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지아 선생님의 연륜에 정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앞, 뒤, 그리고 좌, 우로 허리를 흔드는 선생님. 도중에 몸을 잠시 위로 들었다가 아래로 내리는 약간의 피스톤 운동도 겸한다. 역시나 유부녀다운 기술이라고 해야 할까. 약간 조임력 면에서는 처녀였던 다른 여자들보다 부족한게 사실이지만, 그 조임력의 차이를 선생님은 테크닉으로 극복하고 있었다. 물론 선생님의 테크닉도 한 몫 하지만 무엇보다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저 색기 넘치는 자태. 커다란 가슴이 선생님의 허리놀림에 맞춰 흔들리고 있다. 정말 사진기나 영상 촬영기 같은 것이 있다면 기록 매체로 저장을 하고 싶을 정도로 아찔한 모습이다. 웬만한 야동 여배우 저리 가라고 할 정도의 음란한 모습을 자아내는 선생님. "선생님. 곧 쌀거 같아요!" "안에다... 안에다 싸줘... 흐으읏... 오랜만에 정액... 맛보고 싶으니까... 아하앙...!" 교수님의 허락을 받자마자 그대로 사정. 오래 버티지도 못한 내 잘못도 있지만, 그만큼 교수님의 매력은 정말 핵폭탄 급이었다. 도대체 지아 선생님의 남편 되시는 분은 어떻게 선생님과의 밤을 지새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매일 섹스를 했다간 뼈밖에 남지 않을거 같은 기분마저 드는데 말이다. 있는 정력, 없는 정력을 다 선생님에게 바치는 셔틀 역할이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혹시 양호 선생님은 정말로 몽마라도 되는 것일까 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아찔한 섹스였다. 이것이 바로 소문의 유부녀 파워. 무섭도다. 정말로 무섭도다. ============================ 작품 후기 ============================ sdaas 님께서 올려주신 리플 답변입니다. 사실 저 말고도 노블레스 작품 택본이 너무 많이 돌아다닌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조아라에서도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알고 있고요. sdaas님과 같이, 택본을 배포하고 있는 카페 명이나 주소를 개별적으로 저에게 알려주시면, 제가 조아라 측에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소중한 제보 감사드립니다. 결제하시고 보시는 분들을 위해 열심히 단속(?)하겠습니다 115화 지아 선생님의 몸 안에서 저절로 빠지는 성기. 그 뒤를 따라 교수님의 애액과 내 정액이 뒤섞인 채 그녀의 사타구니 주변과 허벅지를 흠뻑 적시기 시작한다. 내 위에 쓰러진 지아 선생님이 거칠게 호흡을 몰아쉬면서 나를 올려다보곤 말한다. "역시 젋다는건 좋네..." "선생님도 정말 최고였어요." "후훗. 칭찬 고마워." 그리고 이어지는 마무리 키스까지. 정말 유부녀라는 존재의 색기는 어디가 끝인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의 위엄을 보여주는 교수님이었다. 격렬한 섹스의 현장을 마치고. 게임도 슬슬 마무리를 지은 뒤에 뒷정리를 시작한 우리. 아직까지 하반신이 얼얼한지 지아 선생님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남은 고기의 처분, 그리고 고기를 굽는데 사용한 철판을 치우는 둥 바쁜 행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캠프파이어의 불씨를 끄는 일을 도맡아 하는 중. 모래를 가져와서 불을 끄면서 행여나 남은 불씨가 없나 하고 마지막까지 확인한다. 괜히 공터에서 화제가 발생하면 집이 홀라당 타버리는 수준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무인도 전역이 화염에 휩싸이게 되는 불상사를 맞이할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매번 유의해야 하는 문구가 아닐까 생각한다. "선배. 도와드릴까요?" "나야 그래주면 고맙지." 아리아가 기특하게도 모래를 더 퍼오면서 말한다. 눈치 하나는 정말 좋은 녀석이다. 성격이 약간 대하기 어려워서 그렇지, 다른 1학년들에 비해서 싹싹한 모습을 보여주니 선배로서도 기쁘다. "아까 지아 선생님과의 섹스, 상당히 좋아 보였는데요." "... 그런 말을 하려고 일부러 온 거냐." "네." 정정. 아까 했던 말 취소하겠다. 역시나 아리아의 속마음은 종잡을수가 없다.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주러 온 것이 아닐까 했더니 그걸 물어보려고 접근했을 줄이야. "그래서. 뭐가 묻고 싶은데." "묻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좋아보였다.'라는 순수한 감정 표현이에요." "......" "... 선배는 유부녀가 좋으신가요?" "느닷없이 첫번째부터 강한 질문을 퍼붓다니."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선배는 은근히 연상 취향인거 같아서요." 아리아의 말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해준다. 사실 잘못한 일은 없지만, 왠지 모르게 말이다. 내가 연상 취향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그래도 굳이 연하, 연상을 택하라고 하면 나는 개인적으로 연상이 좋다. 왜냐하면 내가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20~30대의 그 '색기'는 정말 최고 아닌가. 노아 교수님도 그렇지만, 지아 선생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했다. 유부녀의 허리놀림. 그리고 엄청나게 큰 가슴. 아마 그런 여자와 섹스를 한다면 진짜 오래 버티지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연상은 뭐랄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성숙하다는 의미니까. "굳이 고르라면... 연상이겠지." "취향은 아니라는 소리인가요?" "취향이라고 보다는 '선호'한다는 편이야." "선배는 '오빠~'라고 불리는 걸 싫어하시나 보네요." "내가 그걸 좋아한다고 해도 네가 나보고 '오빠'라고 불러줄 일이 없잖아." 잠깐만. 그러고보니 오빠 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아리아는 나에게 한가지 약속을 한 것이 있었다. "너, 저번에 나한테 메이드 옷차림으로 '주인님'이라고 불러준다고 하지 않았어?" "... 글쎄요." 무표정으로 딱 잡아 떼는 아리아. 하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고 단박에 눈치를 챘다. 이 녀석,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것이다. 내가 말한 것은 저번에 노아 교수님을 아리아가 겁탈(?)할 때 잠자코 지켜만 보고 있다면 자신이 메이드 복을 입고 나에게 '주인님' 대접을 하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잠시동안 멧돼지에 관련된 일로 잊고 있었는데, 그게 이제서야 생각이 나다니. "모른척 해도 소용 없어. 아리아. 이미 나의 두뇌 기억 장치는 한글 프로그램으로 따로 만들어둬서 폴더에 저장해뒀으니까." "그 폴더, 한번 열어서 제가 직접 확인해보면 안될까요?" "그건 불가능해." "어째서죠?" "암호가 걸려있거든." "상당히 불편한 소프트웨어네요." "그러니까 약속을 지키라고." 아리아의 메이드 옷차림. 그 요소 하나만을 놓고 따져보면 내가 이렇게까지 아리아에게 약속을 이행하라고 강요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옷이야 뭐 언제든지 입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저번에도 세리아와 같이 자매가 세트로 메이드 복을 입는 장면을 실제로 보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마무리 포인트, 한마디로 말해서 챠밍 포인트는 바로 메이드 복을 입고 '주인님'이라고 불러주는거 아닌가. 게다가 아리아가 주인님이라고 불러주면 뭔가 조금은 기분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누나가 말하면 왠지 장난투가 많이 느껴져서 별로고. 노아 교수님이나 지아 선생님 같은 초 연상 그룹이 나에게 주인님이라고 부른다면... 우와. 이것도 나름 굉장하다. 상상을 해버리니까 또 성욕이 들끓는 느낌이... "... 선배." "왜?" "아랫도리. 티가 확 나는데요." "뭐야?!" 고개를 살짝 아래로 떨궈서 확인하니, 정말로 바지가 텐트를 친 것 마냥 불룩 솟아나온 상태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아 선생님과의 열정적인 섹스를 통해 2번이나 사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기운이 팔팔하다니. 굉장하다. 내 아랫도리 녀석. 이것도 다수의 여자들과 관계를 가지다보니 생긴 정력의 위력인가. 역시 경험을 통해서 능력을 키우는 방법이 최고라고 보여진다.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던 아리아가 작게 한숨을 쉰다. "메이드 옷을 입고 주인님이라고 말하는 제 모습이 그렇게 흥분되는 요소인가요." "성적 흥분은 그렇다고 치고, 일단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을거 같아." "변태군요. 정말로." "남자가 변태인가 뭐가 나빠서. 자고로 남자가 성욕을 밝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렇게까지 번성을 한 것이라고. 그런고로 나는 외치고 싶다. 남자가 변태인 것은 나쁘지 않다고!" 곰곰이 생각하던 아리아가 다시 나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표정변화 없이 말한다. "그렇네요. 정정하도록 할게요." "내 마음을 알아줘서 고맙구나. 아리아." "선배는 변태가 아니에요. 선배는 정말 구제 불능의 섹스 중독자에요." "... 미안. 그냥 변태라고 놀리는걸 다시 허락할게." "진작에 그렇게 하셨어야죠." 왠지 섹스 중독자라는 직설적인 말 보다 그냥 두루뭉술한 변태 소리를 듣는게 더 나을거라 판단되고 말았다. 순식간에 아리아에게 '변태라고 들어도 괜찮은 이유'에 관해서 설득을 당해버린 나. 아리아라는 여자는 정말 굉장한 화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니면 내가 바보인 것일까. 캠프파이어로 사용되었던 장소 주변의 마른 가지들을 줍는 아리아가 허리를 펴고 일어선다. 장시간동안 쭈구려 앉아있었던 모양인지 무릎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가볍게 체조 비스무리한 운동을 끝낸 아리아. 그러고 나서 다시금 말을 이어간다. "선배가 말한 거, 조만간 해드릴게요." "변태라고 부르는 거? 그거라면 방금도 했잖아." "바보군요. 선배. 자신이 했던 말 중에서 되감기 버튼을 눌러서 회상해보세요." 회상이라. 변태라고 부르지 마 이후에 했던 말이... "메이드 복을 입고 주인님이라 부르기 말이야?" "네." "이제서야 내 마음을 알아준 것 같아서 이 오빠는 기쁘단다." "멋대로 선배라는 칭호를 오빠라는 단어로 바꾸지 말아주세요. 기분 나쁘니까요." "......" "그럼 전 이만." 간단하게 말을 끝낸 아리아가 미련없이 자리를 벗어난다. 어찌보면 쿨한 모습이긴 하지만, 상대방이 되는 입장으로 감정을 표현하자면 조금은 대하기 어렵다. 게다가 무섭다. 후배이고 여자인데 왠지 모르게 무섭다. 다른 여자들이 저런 말을 하면(생각해보니 이세린은 제외하도록 하겠다.) 약간의 강도 높은 애교수준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법한 대사인데, 아리아가 말하면 진지하고 진담처럼 느껴지니 그게 문제다. 얼굴은 괜찮은데, 말을 하는 태도를 보면 은근히 독설가란 말이지. 그래도 대놓고 남자는 싫다고 말하는 이세린보다는 나은 편이겠지만. 뒷정리를 끝내고 모두가 돌아와서 잠을 청한다. 오늘은 멧돼지 사냥에 성공을 했기 때문에 불침번 없이 모두가 전원 취침. 포만감에 만족스러운 얼굴들을 하는 여자들의 모습을 보니 나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다. 그나저나 이제 사냥까지 하는 단계로 접어든 우리. 그 정도로 무인도에 적응했단 말인가. 설마 다큐멘터리나 영화에서나 보는 사냥을 내가 직접 해본 것은 처음이다. 아마도 무인도에서 나가게 된다면, 여기서 겪은 일들은 평생 잊지 못하겠지. 현재의 기억이 훗날의 추억이 되는 것처럼. 언젠가 이 순간의 시간도 뒤돌아보면 추억이 될 날이 오리라 믿고 나 역시도 잠을 청한다. ============================ 작품 후기 ============================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 저런 양호 선생님이 계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마 양호실 단골 손님이 되었을 겁니다. ㅡ_ㅡ; 116화 EP 15. 앞마당 멀티 확장! 산장에 머물게 된 인원은 이제 총 10명. 원래부터 3명이서 살던 집이었는지라 10명이 누워서 지내기에는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그나마 다들 여성이라서 남자들의 우락부락한 체격에 비해 왜소하니까 10명이라도 서로 침실방, 거실 이렇게 두 팀으로 나눠서 잘 수 있는것이지, 만약에 나를 제외하고 남자가 몇명 더 있었다면 이 집에서 야외취침을 해야 하는 불쌍한 사람이 나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무슨 1박 2일 복불복도 아니고 말이다. 이런 관계로 오늘은 그동안 미뤄두었던 통나무 집 증축 작업을 위해서 재료를 구하는 중이다. 일단 쓸만한 나무를 구하기 위해 숲으로 온 우리들. 나를 따라 온 아리아, 세리아 자매와 유아 선배, 마지막으로 재료로 써도 좋을 만큼의 품질을 가진 나무가 모여있는 장소로 안내하기 위해 합류한 엘리, 이렇게 5명이 길을 나섰다. 손으로 부채질을 하던 유아 선배가 약간 한탄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그나저나 멀리도 있네." "그러게요." "이 정도 거리일줄 알았다면 굳이 자원하지 않았을텐데." 유아 선배의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재료를 구하러 가기 위한 작업, 그러니까 나무 공수 작업에는 한마디로 말해서 나무를 자르고 옮겨야 하는 노동력이 필요하다. 거의 필수적으로 남자인 나는 이 작업의 일원으로 지정을 받은 셈이고, 길안내인 엘리 역시도 고정 멤버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나무를 옮기는 작업을 도와줘야 하는 도우미 3명을 뽑는 일만이 남은 상황. 3명을 뽑는데 어떤 형식으로 정할까 하다가 문득 누나가 이런 제안을 했다. "대 국민 게임인 가위바위보로 정하죠." 어제 저녁 우리들을 광란의 밤으로 몰아 넣었던 그 게임, 가위바위보를 또 다시 활용하게 된 것이다. 은근히 가위바위보 운이 없는 유아 선배가 걸렸고, 그 다음으로 세리아가 걸렸다. 원래 아리아는 걸리지 않았지만, 자신의 언니가 손을 더럽히는 노동을 해야 하는 꼴을 절대로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다고 해서 아리아는 결국 스스로 자원을 한 것이다. 역시나 무한 언니 사랑. 당해낼 재간이 없다. "......" 한참 그렇게 길을 앞서가던 엘리가 어딘가를 가리킨다. 빼곡히 자라난 나무들의 숲 속. 그 곳에서 산장의 원료로 쓰인 나무와 비슷한 것들이 몇개 보인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들이 목표로 하고 있던 장소에 도착했다는 소리다. "이제부터 노동의 시작인가." 질렸다는 듯이 말하는 유아 선배. 차라리 오래 걸리더라도 계속 가던 길만 갔으면 좋겠다는 의지마저 느껴진다. 그래도 거리가 멀면 멀수록 나중에 고생하는건 결국 우리들이지 않는가. 나무를 옮기는 일도 해야 하니까 말이다. "곧바로 시작하죠." "기운도 좋네요. 유에 선배." "빨리 끝내고 빨리 가서 쉬는게 좋잖아." "그야 그렇지만요." 막상 자신의 언니가 걱정되어 따라오긴 했지만, 아리아 역시도 이런 식의 단순노동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세리아도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성격이 워낙 착한 아이인지라 자신이 당첨되었으니 싫어도 묵묵히 따라오는 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엘리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자신의 전용 간식이 되어버린 정체불명의 과일을 아그작 씹어 먹기에 여념이 없다. 나무 기둥을 베어내는 데에는 웬만한 크기의 톱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래서 가져온 것이 바로 이것. 내가 의자를 만들기 위해 사용했던 톱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엄처난 크기를 자랑하고 있다. 마치 판타지 소설에서 나오는 바스타드 소드 급의 크기라고 해야 하나. 개인적으로 13강 무기였으면 좋았으리라 생각은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강화따윈 없는 것이다. "우선 이 나무가 좋겠네." 그나마 가장 적당한 크기의 나무를 고른 나. 혼자서 사용하는 톱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손을 잡은 맞은편에 유아 선배와 엘리가 동시에 잡는다. 나뭇가지도 아니고 나무를 통째로 베어내는 일인지라 두 사람의 호흡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서로 이렇게 반대편 손잡이를 잡고 쓱싹쓱싹 하는 것이다. 남자인 나는 괜찮지만, 여성들은 근력이 상당히 부족하기 때문에 각자 팀을 짜서 2명씩 붙기로 한다. 유아 선배와 엘리, 그리고 아리아와 세리아. 이런 식으로 여자측은 2팀이 교대를 하면서 돌아간다. 나는 오로지 나 혼자의 능력으로 썰어내야 한다.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단 말이지. "그럼 시작할게요." "오케이. 준비 완료." 유아 선배와 엘리가 먼저 자신들이 있는 쪽으로 톱을 끌어 당긴다. 그리고 뒤이어 이번에는 내 쪽으로 톱을 밀어낸다. 이런 식으로 영차 영차, 헛둘 헛둘, 원 투 쓰리 포 프라이데이 나잇~ 이라는 구호를 넣으면서 각자 나무를 써는데 집중을 한다. 전래동화 중에서 흥부와 놀부가 있지 않은가. 옛날에 그 동화를 보면서 흥부와 놀부가 박을 써는 모습을 보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이제와서 세삼 생각해보면 흥부와 놀부 형님들은 대단한 근력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거대한 톱을 들고 박을 자를 생각을 하셨습니까. 형님들. 나중에 뵙게 될 기회가 있다면 배우고 싶은 기분마저 들 뿐입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호흡을 맞춰가며 나무를 썬지 꽤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여자들 팀은 2번의 교체가 있었고, 나는 여전히 혼자서 반대편 파트를 담당하고 있었다. 집 안에 있을때 아버지를 도와서 이런 작업같은 것을 몇번 해보다 보니까 나는 그래도 어떤 식으로 작업을 하는게 효율적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톱이라는 것 자체를 처음 만져보는 여자들은 그런 감이 없다. 덕분에 벌써부터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유아 선배. 그리고 아리아와 세리아. 특히나 은발의 미소녀 자매들은 노동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여자들인지라 톱질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힘들어하는 표정이 눈에 훤히 보인다. 그나마 엘리, 유아 선배 조가 가장 오래 버틴다. 하지만 그래봤자 차이는 얼마 나지 않는다. 아무리 엘리라고 해도 어린 소녀의 근력으로 톱질까지 소화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나름 이해가 가지만. 거의 다 쓸어가는 상황에서 잠시 톱질을 멈춘 우리. 이제서야 한 시름을 놓은 유아 선배를 잠시 쉬게 해두고 나무를 둘러보던 나는 최대한 발에 힘을 주어 자르고 있는 부분의 윗쪽을 밀어본다. 우지끈! 경쾌한 소리와 함께 서서히 지면으로 내려가는 나무. 열심히 도끼질을 하고 나무를 넘기는 나무꾼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끝난거야?"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묻는 유아 선배. 하지만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이제 겨우 하나 끝났을 뿐인데요." "뭐라고...?!" "앞으로도 몇 그루가 더 남아 있어요. 한참 멀었다는 뜻이죠." "이거 하나 옮기는 것 만으로도 힘들것 같은데." "미리 잘라놓는 거예요. 옮기는 것은 그 이후에 다같이 할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커다란 나무를 하루만에 옮기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였지만. 하다못해 나무를 미리 잘라두기라도 하는 것이 오늘의 설정된 목표 중 최소치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도 유아 선배하고 아리아, 세리아였기에 이 정도로 별다른 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계속해서 작업할 수 있었던 것이지, 만약에 누나를 데리고 왔다고 생각을 해보라. 하루종일 재잘재잘 시끄럽게 불평불만을 늘어 놓았을 것이다. 육체적으로도 힘든데 정신적으로도 힘들 뻔 했다는 아슬아슬한 위기 상황을 넘긴 것이다. 우리들은. 두번째, 그리고 세번째 나무를 연달아 베어가는 상황에서 서서히 점심시간이 다가온다. 베이스 캠프까지 돌아갔다가 다시 이 곳으로 오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해서 미리 도시락을 싸온 우리들. 어제 먹다 남은 고기들을 미리 구워서 챙겨온 것이 오늘따라 왜 이리 맛있어 보이는 것인지 모르겠다. "잘 먹겠습니다." 서로 인사를 하듯이 말한 우리들은 도시락을 섭취하기 시작한다. 신선한 과일에 감자, 고구마, 게다가 '고기'까지.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유에. 한가지 물어봐도 돼?" 밥을 먹던 도중에 나에게 질문을 하려고 묻는 유아 선배.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나는 흔쾌히 승낙을 한다. "물어보세요." "어떤 식으로 공사를 할거야?" "음... 글쎄요." "설마 미리 설계 같은것도 짜두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겠지?"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유아 선배였다. 내가 원래 그리 신용도가 낮은 편은 아닌데, 오늘따라 선배의 의심의 눈초리는 상당히 매섭다. 마치 '여지껏 고생을 시켜놓고 이제와서 딴 소리를 했다가는 이 자리에서 숙청해버릴 것이니라!'라고 외치는 듯한 착각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의외로 철저하니까. "대략 어떤 형식으로 할 지는 생각해뒀어요." "대략?!" "... 자세하게 생각해뒀어요." "어떤 식으로?" "일단 침실쪽 공간을 넓히려고요. 대충 7~8명이서 넉넉하게 잘 수 있는 공간으로." 잠자코 말을 듣고 있던 아리아가 유아 선배를 대신해서 묻기 시작한다. "선배. 10명이 잘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게 아닌가요?" "불침번을 세운다는 가정에서 보자면 8명 정도가 딱 적당해. 그리고 10명이서 다 자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거실 역시도 충분하게 잘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두면 되니까." "간이 침대같은 거군요." "침대는 무리고. 아무튼 그거 비스무리한 것을 만들거야." 대충 납득 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아리아. 이번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다시 유아 선배의 질문 공세가 이어진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인데. 꼭 불침번이 있어야 해?" 의외로 핵심적인 질문을 던지는 유아 선배. 아니면 단순히 '불침번 서기 싫으니까 그냥 자게 해줘.'라는 뜻은 아니겠지. "불침번은 있는게 좋죠." "어째서?" "일단 크게 2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번째는 화로의 관리." "갑자기 왠 화로?" "불이 꺼지지 않게 감시하는 것이죠. 무인도가 그리 추운 곳은 아니라고 해도, 밤이 되면 기온이 급격하게 내려가요. 이럴때 감기라도 걸리면 안되니까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화로 관리를 잘못하게 되면 화재가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이 되죠. 아무리 산장 내부에 비행기 철판이 배치되어 있다고 해도, 목구조 자체는 원래부터 화재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으니까요." "그럼 불침번을 세워두는 이유 중 하나가 화로 관리라 이 말이지." "네. 그리고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마른 장작도 넣어주고요." "알았어. 그건 납득. 그럼 나머지 하나는?" "나머지 하나는 최근에 벌어진 것처럼 들짐승의 출현 여부에요." "멧돼지 말이야? 그 녀석은 사냥해서 이제 괜찮은거 아니야?" "저번에도 말한 바가 있지만, 이 섬에 멧돼지가 한마리밖에 없다는 가능성은 어디에도 없어요. 오히려 한마리만 있다 라는 전제보다 다수가 있다 라는 쪽의 가설이 더 확률상으로는 높죠. 그리고 멧돼지 뿐만이 아니라 늑대나 좀 더 포악한 짐승들도 있을 가능성이 커요. 그렇기 때문에 행여나 들짐승들이 이 산장을 공격하게 될 일에 대비해서 불침번이 감시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불침번을 일부러 세우는구나."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유아 선배였다. 가끔 드는 생각인데, 유아 선배는 단순해서 설득시키기 참 쉽다고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발언을 입 밖에 꺼낼 수는 없는 관계로 독백에서 그치도록 하자. ============================ 작품 후기 ============================ 제가 선천성 아토피 피부염이라서 겨울 내내 가려워 죽는줄 알았습니다. 지금도 날씨가 조금 풀리니까 얼굴이고 머리고 가려워 죽겠군요;; 우리나라 국민들중에 꽤나 많은 편이 아토피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게 다 시멘트 벽으로 된 집 환경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나무로 된 집이 좋다고 하던데,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 일행들은 아토피 걱정은 없겠군요. 117화 침실방을 확장시키려면 꽤나 많은 나무가 필요하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순수하게 통나무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점 뿐일까. 중간에 칸막이 역할을 해주는 철판이 있으니까 말이다. 계속해서 톱질, 그리고 또 톱질. 팔에 쥐가 날 정도로 톱질을 한 끝에 이제야 어느정도 오늘의 할당량을 달성했다는 생각이 든다. 해가 저물어오는 시간에 깊은 한숨을 몰아쉬는 다른 여성들. 나도 피곤한 기색을 하고 싶지만, 나 마저도 그런 모습을 보이면 본보기가 안되지 않는가. 그래서 그냥 참고 만다. "자, 이제 일어나서 다시 가죠." "... 갑자기 가는것도 귀찮아졌어." 유아 선배의 한마디.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안 갈수는 없잖아요." "업어줘." "요새 귀가 잘 안 들려서 그러는데 다시 한번 말씀해주실래요?" "... 됐다." 약간 뾰로퉁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이것도 나름 귀엽지만, 그래도 삐지는건 곤란하다. 사실 오늘 어느정도 몇개의 나무를 옮기려고 했으나, 다들 너무 피곤해하는 기색이 역력해서 옮기는 작업은 나중에 다같이 와서 한꺼번에 하기로 하고 일찍 산장으로 복귀한다. 평소에도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엘리조차도 오늘은 조금 피곤해보이는 표정을 할 정도면 말 다하지 않았는가. 해가 저물기 전에 돌아온 우리. 나머지 사람들은 음식과 식량 확보, 빨래 등등 가사를 담당하고 있었는지 우리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노아 교수님이 오른손을 붕붕 흔들면서 외친다. "잘 갔다왔니?" "잘은 아니지만요." 터벅터벅 산장 안으로 걸어가서 그대로 넉 다운. 나를 제외한 모든 일행들이 그대로 거실 바닥이 널부러진 채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버린다. 응원차 다가온 체리가 이들에게 부채질을 해준다. 자신의 친한 친구이기도 한 세리아가 고생하는 모습이 약간 마음에 걸렸는지 가장 먼저 세리아의 땀을 닦아주면서 안부를 묻는다. 후배들의 나름 귀여운 우정이 아닐까 한다. 아리아가 체리에게 자신의 언니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질투심만 안 가지면 좋을텐데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나는 바깥으로 나와서 증축을 하기 위한 계획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산장 전체를 둘러본다. 그리 크지 않은 아담한 집. 그러나 문제는 이 아담한 집에서 10명이나 살고 있다는 것이다. 확장 공사는 거의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상황. 재료는 구한다고 쳐도, 쓸만한 공구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비행기 안, 그리고 산장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공구 상자들을 확인해봤는데, 그리 마음에 드는 도구는 나오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못 같은 거. 산장에 남아있는 것들은 대부분 녹이 슬어버려서 사용한다고 해도 부실공사가 될 가능성이 너무 크다. 물론 이 산장을 그렇게까지 튼튼하게 지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는가. 저번처럼 폭풍 비스무리한 상황이 올지도 모르고. 언제나 조심, 그리고 또 조심하는게 좋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한번 더 밟아보고 망치로 살짝 두들기고 안되면 다이너마이트로 폭발도 시켜봐서 파괴가 안될 겨우에 가서야 이제서야 좀 안심하고 건널 수 있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약간 길게 느껴진다면 그건 기분탓일 것이리라고 본다. 아무튼 결론은 집을 만들 경우네느 튼튼하게 만들어두는 것이 좋을거라는 내 생각이다. 그렇다고 재료를 구할 장소가 또 있을까. 아무래도 없을거 같은데. 팔짱을 낀 채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가 다가오며 묻는다. "뭘 그리 고민하니." "아, 양호 선생님." 어느새 다가온 지아 선생님이 특유의 요염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고민하는 청년을 바라보는 일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너무 그렇게 심각한 고민에 휩싸이면 나중에 주름살이 는다고." "선생님 경험담인가요?" "내가 주름살이 있어보이니?" "... 글쎄요." "언제나 탄력적인 피부를 유지하는 것은 양호 선생님의 필수 사항이기도 하지." "필수 사항인가요?" "생각해봐. 병원에 갔는데 냄새나고 구리구리한 모습을 한 사람이 진찰을 하면 병을 고치러 갔다가 오히려 병에 걸릴거 같은 느낌이 들지 않니. 하지만 미인인 여성이 병을 진찰해주면 더 좋잖아. 그렇지?" "확실히..." "그러니까 양호 선생님으로서 미의 관리도 철저히 해야 한다는 사실이지." 어쩐지 애니메이션이나 소설을 보면 양호 선생님은 전부 다 아름다운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 따로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지나친 흥분감을 던져줄 정도로 섹시한 모습이라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출혈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은가. 굳이 언급은 안하겠지만, 아랫도리 녀석이 말이다. "그런 의미로 내가 어째서 고민하고 있는지에 대한 말을 해주면 이 양호 선생님이 친절하게 설명해줄 의향이 있는데." 지아 선생님의 목소리가 마치 달콤한 악마의 유혹같이 느껴진다. 역시나 섹시함을 자랑하는 유부녀 파워. 말을 거는 행동 하나만으로도 매료가 되어버릴것 같다. 굳이 진실을 감출것도 없이 사실을 말하기로 한 나는 거침없이 이야기를 꺼내본다. "사실 통나무 집 증축에 관한 건수인데요." "어머. 뭐가 문제되는 거라도?" "재료가 많이 후달려요." "상당히 저렴한 단어를 사용하는구나." "그 정도로 절실하다는 뜻이죠." 천연재료, 그러니까 통나무 같은 것들은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못과 망치, 기타 등등이다. 더불어서 질긴 밧줄도 있으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재료들이 모이는 것이다. 하지만 무인도라는 것은 극히 한정되어 있는 장소. 그런 재료가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어머, 있는데." "정말인가요?!" "그럼. 내가 실제로 봤는걸." 말도 안된다. 무인도에서 못이 나온다고? 여긴 도대체 뭐하는 장소인가. 설마 못을 전문으로 생산하던 외계인들의 집합소? 고대 문명? 그런것인가? ... 판타지 소설은 그만 쓰자. 이러다가 내가 이계까지 넘어가는 시나리오가 완성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어디서 보셨는데요?" 일단 궁금하니까 묻는건 당연지사. 그러자 선생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간단하다는 듯이 말해준다. "우리들과 처음 만난 장소. 기억하니?" "분명히... 난파된 배의 일부분이었죠?" "그래. 너도 들어가봐서 알겠지만, 생각보다 규모가 크잖아. 우리들도 아직 못가본 곳이 있을 정도니까." 다시금 기억을 되돌려본다. 그때 당시에는 실내가 어두웠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세린이 우리를 공격했던 탓이라서 제대로 내부를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손님들이 사용하던 방들이라든지 주방, 이런것도 보였어. 어두워서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식수를 찾아낼 때 그런곳을 얼핏 봤거든. 분명 공구같은 것도 있을거야." 확신까지는 아니더라도 확률은 높다. 하다못해 못과 망치가 아니더라도 우리들의 무인도 생활에 도움이 될만한 재료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 것은 꽤나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보여진다. "난파선의 내부에 대해 그나마 잘 아는 사람은 역시 이세린이겠죠?" "어머,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저를 피해서 갑판 위로 도망칠 때 이세린은 어두운 환경에서도 제 집인 양 마구 도망쳤거든요. 그래서 아마 배의 내부를 잘 알고 있을거라 생각해서요." "맞아. 그 아이, 의외로 모험심이 좋아서 이곳저곳 살펴봤지. 물론 체리는 겁이 많아서 내가 돌봐주느라 우리들은 그다지 많은 곳을 가보지 못했지만." 그렇다면 내일 난파선에 한번 가볼때 세린을 데리고 가야 한다는 뜻이 되는건가. 재료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감 덕분에 오늘은 편하게 잠을 청할 수 있게 되었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확밀아 다음 시즌이 시작되었습니다. 기교의 장을 선택한 보람이 이제야 생기는군요. 기교 짱짱걸!! 118화 그리고 저녁시간이 다가왔다. 지아 선생님을 통해 들은 난파선의 정보에 대해서, 그리고 내일 난파선으로 탐험을 떠날 거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자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바로 이세린이였다. "너, 설마 나보고 거기에 동행하라는 것은 아니겠지?" "잘 알고 있네." 예상대로 반대를 할 기세. 그런 점은 충분히 예상했다. 이세린이 내 의견에 순순히 승낙을 한 적이 있는가. 당연히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세린의 입에서는 전혀 의외의 답변이 들려온다. "... 좋아. 나도 갈게." "너, 이세린 맞지?" "왜." "아니. 왠일로 내 말에 순순히 따라 가겠다고 하나 싶어서." "누구를 성격 파탄자로 알고 있네. 이래봬도 사리분별은 제대로 한다고. 난파선의 내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잖아? 체리를 보내는건 너무 가엽고, 지아 선생님은 여기 남아있는게 좋고. 그렇지?" "뭐... 그런 셈이지." 내일 탐험을 떠날 인물은 극소수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호 선생님은 가급적 여기에 남아서 내 빈자리를 채워주길 바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노아 교수님도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것저것 지휘를 하는 타입은 조금 아닌지라 그나마 지아 선생님이 나을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사를 하던 노아 교수님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럼 내일 난파선은 단 둘만 가는거니?" "아니요. 아리아하고 저, 그리고 세린. 이렇게 세명이서 갈까 하는데요." "아리아는 왜?" "혹시나 거기에 의료품같은 것도 있을지 모르잖아요. 지아 선생님 다음으로 의학지식이 많은 아리아가 따라간다면 도움이 되겠죠." 내 말을 들은 노아 교수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는 듯이 의사표시를 한다. 그러나 정작 본인의 이름이 거론된 아리아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의심간다는 말투로 입을 연다. "그것보다도 세린 선배를 상대해줄만한 여성 멤버를 데리고 가는게 유에 선배 본인에게도 편할거라는 생각이 가장 크게 작용했겠죠." "아리아. 너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문제구나." "역시 그렇군요." 그렇다고 온전히 나만을 위해서 아리아라는 제 3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다. 남자와 단 둘이서 난파선에 가게 되는 세린의 입장도 어느정도 고려한 것이다. 내가 계획하고 있는 것 중 일부는 바로 난파선에서의 임시 캠프를 만들고 2박 3일동안 거기서 먹고 자고 하는 일이다. 그 넓은 난파선을 하루만에 다 돌아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 그래서 탐사팀이 난파선에 가 있는 동안, 나머지 일행들이 우리들이 오늘 잘라놓은 나무를 옮겨놓는 것이다. 대략적으로 우리들의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해준 나. 식사를 하면서 각자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나머지 일행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이 놓이는 한편 약간 불안한 감정이 들기 시작한다. 나 없이도 3일동안 잘 지낼 수 있을까 라는 걱정 말이다. 지아 선생님이 남아 있다고 해도, 지휘체계에서 리더가 함부로 자리를 비우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다고 난파선 탐험 인원에 내가 빠질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 곳에 다른 생존자들도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니면 혹은 이미 들짐승들이 거처를 마련하고 서식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희박할지도 모르지만, 만에 하나라는 말을 무시했다간 엄청난 사건과 사고를 부르기 때문이다. "그럼 저하고 아리아, 이세린은 오늘 일찍 자도록 할게요. 불침번은 탐험에 나가는 3명의 인원을 제외하고 짜뒀으니 그대로 서 주세요." 임시적으로 구성되어 진 난파선 탐험대. 요즘 유행하는 것 처럼 말을 줄여서 난탐... 그런데 조금 멋이 없게 느껴지는건 왜일까. 하룻동안 불침번 면제라는 달콤한 휴식을 취한 우리 셋은 아침 일찍부터 길을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난파선에서 3일동안 거처를 마련해서 머무를 예정이기 때문에 나름 철전한 준비를 하기 시작하는 우리. 작은 가방에 3일동안 먹을 식량과 식수를 챙긴 뒤에 길을 떠나게 되었다. 여기서 난파선까지의 거리는 대략 3~4시간 정도의 거리.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다시 캠프로 돌아오는 번거로움을 줄이고자 숙식이라는 수단을 택한 것이다. 숲속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제일 먼저 앞장을 선 나는 잔가지 제거 겸 길을 트는 역할로 나서게 되었다. 남자란 이래저래 고생인 것이다. "... 그런데 굳이 오늘 갈 필요가 있었어?" 뜬금없는 세린의 말. 마치 왜 하필 오늘을 골랐냐는 듯이 항의하는 느낌이 든다. 무슨 일이 있던 것인가? "오늘이라고 딱히 정한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가급적이면 산장 증축 공사를 하기 전에 미리 재료를 구하려고 오늘을 택한건데." "그래?" "오늘 무슨 볼 일이라도 있었어?" "... 무인도에서 볼 일 따위가 뭐가 있다고. 그냥 해본 말이야." 마무리는 역시나 쿨하게 '흥!'이라고 짧게 외친다. 아무리 봐도 분명 오늘 가는건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는 말투로 밖에 들리지 않는데. 그런데 나와는 달리 아리아는 대략 눈치를 챘다는 듯이 말한다. "유에 선배는 정말 눈치가 없네요." "내가 눈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적어도 이유 정도는 알려주라고." "그런 말을 하는걸 보니까 역시 선배는 눈치가 제로(Zero)에요." "......" 괜히 말을 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묘하게 또 내가 잘못했다는 느낌으로 흘러간다. 이세린이랑 같이 있으면 항상 내가 악역을 도맡게 된다. 왜일까. 정말로 내 잘못이란 말인가? 난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아가씨들. 도중에 약간 불편한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계속 걸음을 재촉한 끝에 난파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전히 그 커다란 몸집은 쉽게 감출 수 없다는 듯이 당당하게 우리들의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난파선. 배의 일부가 부서진 흔적은 난파되었을 당시의 사건의 잔혹함을 알려주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묘하게 숙연해진다고 해야 할까.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살아있는 우리들의 목숨을 감사하게 여길 뿐이다. "캠프는 어떻게 할래. 바깥에다 마련할거야?" 이세린의 질문. 아무래도 바깥에 마련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난파선 안은 햇빛이 들어오는 곳이 별로 없기 때문에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계속 생활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바깥이 약간 위험할 수도 있지만, 들짐승들이 해안가 주변까지 어슬렁거리지 않을거라 생각은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난파선의 내부를 고려해본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캠프 만큼은 안전이 확보된 곳이 좋다고 생각을 한 끝에 난파선 가까이에 마련하기로 했다. "그러는게 좋겠지." "그럼 당장 작업을 시작하자. 개인적으로 난파선에 오래 있는건 싫으니까." "싫다니? 너, 우리들과 만나기 전에 여기에 있었잖아." "깜깜한 실내 분위기 자체가 싫다는 뜻이야." "그렇다면 납득이 되긴 하지만." 사람은 빛이 있어야 살 수 있는 법이다. 난파선 내부는 말 그대로 암흑 천지. 그나마 양호 선생님 일행이 난파선 내부에서 캠프를 차리고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거처의 주변에 햇빛이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창문이 있다는 것과 난파선에서 구한 다량의 라이터들을 통해서 불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내 호주머니에도 지아 선생님에게 하나 받아 온 라이터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인공적인 불 보다는 자연산 빛이 더 기분 좋지 않은가. 낮에는 햇빛, 그리고 밤에는 달빛. 번갈아가며 마주할 수 있는 빛이 있다는 사실은 정말 좋은 것이다. 부지런히 주변에서 임시로 거처를 만들 수 있을만한 재료를 구해본다. 기둥 역할을 담당해줄 나뭇가지들을 해안가의 모래속에 깊숙히 박아 넣고, 그 위를 넓적한 나뭇잎으로 덮는다. 제법 모양새가 갖춰진 캠프의 모습이 완성되어갈 무렵. 어느정도 마무리를 지은 우리들은 짐을 정리하고 한숨을 놓는다. "꽤나 부실하게 생겼는데." 역시나 부잣집 아가씨 답게 고급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이세린의 한마디였다. 처음에 우리들과는 달리 움막집이라는 형태의 거처에서 생활을 해본적이 없는 이세린인지라 이런 형태의 간이 집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불평하지 말라고. 이세린. 그나마 이게 내가 만든 움막중에 가장 잘 만들어진 거니까." "세린 선배. 이번 만큼은 유에 선배의 말에 저도 공감할게요. 확실히 처음의 움막보다 잘 만들었어요." 왠일로 아리아가 내 편을 들어주는 것인가. 가끔 이렇게 순순히 아리아가 내 편을 들어줄 때마다 무슨 꿍꿍이가 숨어있지 않을까 하고 의심해본다. 워낙 겉과 속이 다른 녀석이니까 말이다. 난파선으로 향하기 전에 점심을 먹기로 한 우리. 아침 일찍 출발해서 장시간동안 빠르게 걸음을 재촉하고, 그리고 오자마자 움막을 만들었으니 피곤할 만도 하다. 상할만한 고기는 가져오지 않은 상황. 감자와 고구마, 그리고 물로 배를 채우는 우리들은 빈약한 식단을 보고서 절로 한숨이 세어 나온다. "갑자기 고기가 그리워지네." "저도 공감하는 바입니다. 선배." 이번에도 아리아가 내 말에 동의한다. 고기로 맺어진 인연이라도 되는 것인가. 근 이틀동안 노루 고기, 멧돼지 고기같은 호화로운 식단에 찌들어있던 우리들이다보니 감자와 고구마 만으로는 성이 안 찬다. "이세린." "또 왜." "혹시 난파선 안에 음식같은게 있지 않을까?" "음식?" "그래. 지아 선생님 말로는 주방도 보였다고 하던데." "... 글쎄. 확실히 식당 비스무리한 장소도 있긴 있었어. 그렇지만 직접 음식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확인해보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는걸." "확인을 안해봤다니. 거기에 있는 음식들로 지금까지 식사해온 거 아니야?" "양호 선생님 말로는 난파선 내부에 바닷물로 인해 침수된 흔적이 보인데. 그래서 가급적이면 저 안에 있는 음식들은 먹지 않는 편이 좋다고 하더라고. 뭐, 통조림이나 이런건 괜찮겠지만. 막상 찾으려고 했지만 그동안 제대로 이성적인 판단을 못해서 금새 잊어버렸겠지." 안에 있는 식량을 놔두고 바깥에서 식량을 공수해온 양호 선생님 일행.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통조림이나 인스턴트 식품, 그리고 바닷물에 한번 침수되었던 음식들을 먹을 바에는 차라리 무인도에서 구할 수 있는 먹을만한 과일류가 좋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감자를 한 입 베어 문 세린이 계속해서 대화를 주도해간다. "아무래도 양호 선생님이시니까. 우리들의 건강을 가장 중요시 생각한 것이겠지. 약간의 배고픔이 문제가 되더라도 건강에만 이상이 없으면 만사 오케이잖아. 하지만 잘못된 음식을 먹으면 잠시나마 포만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식중독이나 기타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크니까. 아마도 그런 점을 고려하신 거겠지." "어찌보면 정답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리아도 어느정도 지아 선생님의 처신에 대해서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무인도에서 배고픔이라는 것은 어찌보면 중요한 요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곳에는 사람이 먹을 수 있을만한 식량이 어느정도 많이 내포되어 있다. 과일 같은거 말이다. 아마도 지아 선생님은 행여나 구조대가 이 곳을 발견하는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를 것이라는 염두까지 해두고 미리 야생에서 음식을 구할 수 있을 정도의 습관을 체리나 세린에게 길들이게 하지 않았던 것일까 하는 추측이 절로 들기 시작한다. "어차피 우리들은 난파선에서 쓸모 있을만한 공구 재료같은 것들을 찾으러 온 것이잖아? 더불어서 먹을만한 음식들도 있으면 가져가면 되겠지." 별거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말하는 이세린이었다. 그녀의 말 그대로 우리들이 여기서 3일동안 체류하는 이유는 난파선에 도움이 될만한 물건이 있나 없나 수색해보기 위한 소기의 목적도 가지고 있다. 필요한게 있으면 최대한 가져다가 쓰는게 자급자족의 법칙 아닌가. 그리고 만약에 통신 기계같은 것이 나올수도 있으니까. 그것으로 도움도 청할 수 있지 않을까? ... 그럴리가 없겠지. 난파선에서 멀쩡한 전자기기가 나올 확률이 드물다는 사실은 문과인 나도 안다. 그러니까 그냥 원래의 목적인 공구 도구를 수색하는데 중점을 맞추도록 하자. ============================ 작품 후기 ============================ 확밀아가 새로운 시즌을 시작해서 그런지 각요나 광분 요정에 숟가락 올리는 것 조차도 힘들더군요 ㅡ_ㅡ;; 요정 알람이 울리면, 1분 이내에 순삭되어 있는 요정... 119화 점심식사를 간단하게 마친 뒤에 자리에서 일어선 우리들. 이 다음에 향할 목적지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바로 난파선의 내부가 될 것이다. 지아 선생님에게서 건네받은 라이터가 주머니 속에 제대로 들어 있는지 확인한다. 마음 같아선 횃불이라도 만들고 싶지만, 횃불이라는 것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무 막대기 끝에 불만 붙인다고 만들어지면 정말 속 편하겠지만, 신은 인간에게 그리 호락호락하게 불을 허락하지 않았다고들 말하지 않는가. 그만큼 무인도에서 식수, 음식 다음으로 중요한게 아마도 불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일단 불이 제대로 붙지도 않는 횃불은 버려두고 내부로 향한 우리. 최대한 햇빛이 들어오는 자리를 봐두면서 밝은 곳을 향해 이동한다. 숲 속에서는 내가 앞장섰지만, 배의 내부에서는 세린이 앞장서게 되었다. 길 안내도 할 겸 해서 말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앞장서는 것을 싫어하는 눈치다. 그러고보니 묘하게 아까 여기에 오면서부터 세린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한 모습을 자주 보인다. 상태라도 안 좋은 것일까. 아니면 감기? 그런 증상은 보이지 않았는데. 약간 앞서가는 세린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를 유지하며 뒤따라오는 아리아에게 말을 건다. "아리아. 세린의 태도가 묘하게 불편해보이지 않아?" "... 그걸 이제 눈치 채셨나요?" 분명 뭔가 아는 눈치다. 그렇다면 아까 숲 속에서 약간의 언쟁을 벌였던 그 소재와 관련이 있다는 뜻인가. "역시 건강상의 문제?" "선배. 잘 생각해보세요. 세린 선배가 왜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지 말이에요." "수수께끼는 영 취미가 아닌데." "이건 수수께끼가 아니라 단순하게 '눈치를 못 챈 유에 선배에게 내려지는 정의의 철퇴'라고 생각하세요." "전혀 단순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데." 정의의 철퇴라는 삭막한 단어까지 써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보다도 적어도 세린의 몸 상태에 안 좋은 쪽으로 이상이 있다는 뜻은 아닐 것이리라 확신한다. 왜냐하면 아리아가 세린의 병명(일단 추측이지만)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이런 탐색전을 하게끔 허락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도대체 어떤 문제인 것일까. "힌트 하나만 주면 안되겠니?" "... 좋아요. 우매한 선배를 둔 제 잘못도 있긴 하니까요." "묘하게 남을 비난하는 능력 하나만큼은 역시 최고구나. 아리아." "칭찬 고마워요." 그래도 세린의 몸 상태를 알 수 있다면 아리아에게 이런 쓴 소리를 듣는 것 정도는 약과겠지. "선배. 마법의 날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 잠깐. 거기까지. 이제 애써 외면하려고 해도 알 수밖에 없겠다." "그럼 됐어요. 선배는 이제부터 자신이 눈치가 그 정도로 없구나 하고 자책해주시면 되는 거예요." 어쩐지. 아까부터 상태가 묘하게 이상하다 싶더니 그 날이었단 말인가. 그래서 나에게 '왜 하필이면 오늘인가'라는 질문을 했었군. 이런 상황을 고려해보면 여자란 존재는 참으로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는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생리라는 기간 때문에 하루종일, 아니 며칠동안 불편한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남자로 태어난 것을 축복으로 생각해야 하나.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대한민국의 남자로 태어난 것은 조금 후회되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후회가 들지 않게끔 적어도 밥값 정도는 더치페이를 하자고. "뭐야. 둘 다 무슨 말을 그렇게 재미있게 하는건데." "아니야. 아무것도." 도중에 우리들의 말이 살짝 들렸는지 고개를 돌려 묻는 세린. 솔직하게 '사실 너의 생리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어!'라고 말할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적당히 둘러댄다. 이런걸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이겠지. 그러니까 나는 양심에 찔리지 않는다. 당당하다고. 약간 뚱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이세린이 다시 고개를 앞으로 향하면서 작게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 별로 상관 없겠지." 평소 같으면 바로 치고 들어왔을 세린인데, 역시나 그 날이 맞나보다. 미안하다. 이세린. 사실 나는 네가 지금 생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어. 뚜벅뚜벅 걸어가는 우리들. 한번 침수되었던 배 안이라 그런지 바닷물의 짠내가 그대로 느껴진다. 곳곳에 벽이 녹슨 흔적도 보이고. 이대로 방치했다간 난파선의 잔해조차도 다 무너질 가능성이 매우 커 보인다. 삐그덕 삐그덕. 기분나쁜 소리를 내면서 우리를 반기는 난파선의 환영인사. 그다지 별로 달가운 축하인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악플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무플이다 라는 말이다. 환영인사가 없는 것 보다는 나은 편이겠지. 대략 3층 정도의 높이만큼의 계단을 올라갔을까. 어느 특정 방 앞에 멈춘 세린이 우리들을 보며 말한다. "여기가 나와 체리, 그리고 지아 선생님이 머물고 있던 방이야." "여기는 꽤 밝은 편이네?" "햇빛이 많이 들어와서 택한 장소니까." 채광을 중심으로 했다 이 말이군. 침수되었던 난파선의 내부인지라 약간 습기찬 느낌도 없지않아 있다. 그래서 채광을 우선시 했구나. 이 곳이 그나마 배의 난파선에서 가장 채광이 좋은 장소라고 세린의 부연설명이 이어진다. 풍수지리설로 따져봐도 여기가 가장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이런 식으로 내가 말했다고 풍수지리설을 아느냐 라는 태클은 자제하도록 하자. 그냥 단순한 애드립일 뿐이다. 방 내부로 향한 우리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명의 여자가 머물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불을 들추면서 물어오는 아리아의 목소리. "그런데 이런 침구류 같은 것은 어떻게 구하셨나요?" "여기 방에 있었어." "그렇다는 말은 이 이불같은 경우도 말려서 사용했다는 뜻이군요." "그런 셈이지. 처음에는 눅눅한 느낌에다가 햇빛도 거의 안 들어오지, 아무튼 최악의 장소였거든. 그나마 이 주변은 교수님하과 체리, 그리고 내가 청소를 좀 해서 많이 나아진 편이야. 다른 방에 들어가서 비교해보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지." 자랑하는 것이 분명하다. 어깨를 당당히 펴면서 자신의 금발을 매만지는 저 태도. 이세린이 자주 보여주는 습관 중 하나다. 세린의 말 그대로 이 장소만 청소가 잘 되어있다. 아무래도 여자들이다 보니까 청결면에서는 깔끔한 모습을 보여주는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여자라는 존재는 밖에선 청결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제로 집 안에서는 남자들 급, 아니 그 이상으로 어지럽히고 살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 바가 있는데. 참고로 나는 유린이라는 누나까지 있으니 직접 목격도 가능하다. 대충 침실을 둘러본 우리. 딱히 필요한 물건은 보이지 않아서 그대로 나오기로 한다. 이불을 가져가도 별반 소용은 없을테고. 산장 안에는 기존에 사용하던 여분의 이불들도 있을 뿐더러 누나가 의류들을 통해 만들어둔 담요도 있기 때문에 그다지 이불의 여유분은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부피만 차지하니까 말이다. "다음은 어디로 갈거야?" 졸지에 길 안내 아가씨가 되어버린 세린이 이제는 스스럼없이 물어온다. 빠른 태도 전환은 보기 좋다. 자주 이런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지만, 이것도 생리 기간 한정이겠지. "일단 공구가 있을만한 장소로 갈까?" "거기가 어딘데." 도리어 물어오는 이세린. 생각해보니 공구가 어디쯤에 있을까. 음... ... 내가 선원도 아니고. 그런걸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일단 돌아다녀볼까?" "무책임하네. 정말로." "시끄러워." 어차피 난파선 내부는 한번 돌아볼 예정이었다. 계기가 약간 어설프다는 점 빼고는 계획대로라는 뜻이다. 물론 세린과 아리아는 아직까지 불신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신경쓰면 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자. "일단 갑판 위라도 올라가 볼까요?" 아리아의 제안이었다. 갑판 위라... "위에서부터 찾아보자는 뜻이지? 그거." "네. 맞아요." 세린의 말이 아리아의 마음속에 있던 진의를 맞춘 모양이다. 위에서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내려오는 형식으로 한번 돌아보자는 것이 아리아의 전체적인 의견 내용이었다. 어차피 해안가 바깥에 있는 움막으로 이동할거면 탐색 방향을 위에서 아래로 잡는 것도 나름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아래에서 위로 갔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조금 불필요하지 않은가. 어차피 3층까지 올라왔으니 갑판 위까지 올라가서 아리아의 말대로 수색 방향을 잡는 편이 좋다고 보여진다. "그럼 그렇게 해볼까?" "빨리 위로 올라가자. 여기는 너무 으스스해." 자신의 양 팔을 감싸면서 살짝 몸을 움추리는 세린의 말을 시작으로 우리는 또다시 위로 향하기 위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 작품 후기 ============================ 오늘밤엔 무슨 일을 할까 누구에게 기쁨을 줄까 나쁜 마음 끝이 없는 욕심 멀리멀리 사라지면 훨씬 아름다운 세상 될거야 뽀송뽀송 고슴도치 귀여운 루비 아빠 엄마께서 비밀을 아실까 ... 대략 여기까지 기억이 나는데, 하이라이트 부분은 뒤숭숭합니다. 미안해요. 천사소녀 네티. 120화 저번에 왔을때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둡다. 바깥이 흐린 것도 아니고 오히려 쨍쨍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두운 실내를 자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신비롭게 느껴질 정도니까 말이다. 갑판 위로 올라온 우리는 그토록 어두컴컴한 장소를 벗어나서 오랜만에 햇빛의 따스한 기운을 만끽할 수 있었다. 채광이란 역시 좋은 것이다. 괜히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일편단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의 계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기지개를 펴보이는 세린. 그 와중에 갑판 주변을 둘러보던 아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갑판 위는 휑 하네요." "그러게." 별다른 물품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외부에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는 장소이다 보니까 아마도 한번 침수되었을 때 파도에 다 떠밀려 간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볼 뿐이다. 갑판이라는 장소에서는 득템할 수 있는 아이템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 헛수고만은 아니였다. "선배들. 이쪽으로 와보세요." 아리아의 부름에 발걸음을 옮기는 우리들. 갑판의 외곽 쪽으로 이동한 우리들의 시야에 아주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무인도의 전체적인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는게 아닌가. 빽빽한 나무들로 구성되어진 무인도. 한 가운데에 약간 커다란 산 봉우리가 보이고, 곳곳에 넓직한 호수들도 몇개 보인다. 우리들이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무인도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던 것이다. "생각보다 크네요. 고작 작은 섬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클 줄이야." "들짐승이 살고 있을 정도면 어느정도 섬의 크기가 소규모는 아니라는 사실은 짐작할 수 있지. 그런데 이 정도로 클 줄은 몰랐는걸." 눈부신 햇살을 피하기 위해 잠시 이마 부근에 손으로 햇빛 가리개를 만들어 좀 더 무인도의 전체적인 모습을 관람한다. 사진이라도 있으면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지만, 공교롭게도 그런 최첨단 기술을 내포한 도구는 이 섬에 존재하지 않는다. 가급적이면 무인도 전역에 대한 지도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전부터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적어도 우리들이 어디 부근에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구조 신호같은 수단을 택하던가 하는게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곳이 무인도가 아닐 가능성도 있으니까 말이다. 시간이 나면 무인도를 한번쯤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은 채 우리들은 다시 갑판 한 가운데로 돌아온다. 무인도의 전체 모습이 보인다고 하나, 수풀로 우거진 탓에 내부 내용은 제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세린이 말한다. "이 섬. 도대체 어떤 곳일까." "글쎄.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들이 이 섬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방법은 극히 한정되어 있을걸." "지도 같은 거라도 있다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섬이 지도에 표기되어 있는 섬인지 조차도 모르는데 과연 그렇게 될지 모르겠어." "... 부정적인 대답만 하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라고 표현해줬으면 좋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이 섬이 도대체 뭐하는 섬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아직 풀리지 않은 상황. 일단 우리들이 직접적으로 체험한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요소가 몇가지 있다면, 저번에 누나가 말했듯이 들짐승이 살 정도라면 적어도 밀물로 인해 주기적으로 섬 전역이 침수되는 장소는 아니고, 갑작스레 화산폭발로 인해 형성된 섬도 아니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꽤나 오랜 세월동안 이 무인도는 존재해왔다는 소리. 이 자리에 엘리가 없어서 물어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원시부족이 살기는 힘들어보인다. 제주도나 울릉도 같이 커다란 섬도 아니고 말이다. 원시부족의 존재는 그렇다고 해도, 엘리같이 이 섬에 표류되어 목숨을 연명하는 사람들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만약에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 것이 가장 높은 확률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 생존자들은 아마도 우리같이 여행을 가던 도중에 배가 난파되어 이 섬까지 떠내려온 학생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갑판 위에서 한동안 무인도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우리들은 다시 아래로 향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갑판 위로 올라오는데 걸린 층수를 고려해봤을 경우에 한개 층 단위로 샅샅히 살펴본다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은근히 넓고 크기도 한 이 난파선을 고작 3명이서 다 확인해본다는 사실은 무리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갑판에서 한개층 내려온 우리들 중에서 아리아가 제일 먼저 입을 연다. "나눠져서 탐색하는 건가요?" "아니. 3명이서 1개조를 이뤄서 같이 행동할거야." "각 구역을 할당해서 찾는게 더 효율적이지 않나요?" "물론 능률적인 면을 고려하자면 그 편이 더 효율적이지. 하지만 이 곳에 어떤 위험적인 요소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잖아. 배가 갑자기 무너져 내릴수도 있고, 그리고 도중에 사고를 당했을 경우에 다른 사람을 부르기도 쉽지 않고. 그러니까 탐색이 조금 늦다고 하더라도 3명이서 다같이 다니는게 더 안전하지." "효율성 보다는 안전성이 우선이군요." "사람의 목숨만큼 값어치 있는 건 없잖아." "선배답지 않게 옳은 말씀을 하시네요." "... 내 마음속에 담긴 평소의 나라는 이미지를 좀 개선시켜 줬으면 좋겠다만." "시간이 날 때 고려해볼게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나보구나." 사소한건 넘기도록 하고. 어차피 이 난파선 내부는 다 돌아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손님 방으로 분류되어 있는 곳은 생략하고, 주방쪽이나 아니면 기게 관리실 같은 장소를 중점적으로 돌아보기로 한다. 어차피 손님 방에서 얻을 수 있는 생필품은 우리들도 웬만해선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바로 선장실. 아마도 이 곳에서 선장을 비롯한 선원 고위 간부진들이 회의같은 것을 하는 장소가 아닐까 예상해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바로 약간 혐오증이 들게 만들 수준의 악취. "... 지독하네. 정말로." 코를 막으면서 인상을 잔뜩 쓰는 세린이 우리들의 말을 대변해서 대표로 언급해준다. 정말 구리다. 그렇다고 이 배 선원들을 탓할수도 없는 노릇. 창문을 열어서 나름 환기라는 방식을 택해보지만, 효과는 상당히 미약하다. 차라리 배의 갑판 윗부분이 남아 있었다면 그나마 덜했을텐데, 하필이면 갑판 위쪽은 다 뜯겨져 나가고 아랫부분만 남아 있으니 제대로 환기도 안되고 채광도 안된다. 여러가지로 고충에 고충을 더한 탐색작업이 될 듯 하다. 넓은 선장실을 3명이서 각자 분담해 도움이 될만한 물건을 찾아본다. 나는 사무실의 한 켠에 놓여진 책상 주변을 담당. 서랍같은 걸 열자, 있는 것이라고는 볼펜이나 종이들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것도 다 침수되어 버려서 종이는 바닷물의 염분에 찌들어져 있었고, 볼펜은 나오지도 않는다. 필기도구라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해봤지만, 금세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나머지는 전자사전이나 핸드폰 등등. 이것도 다 베터리가 방전된 상태인지라 별로 쓸모가 없다. 하다못해 오랜만에 핸드폰의 액정 화면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이 기분은 마치 평소에 군 부대에 안에 틀어박혀 있는 병사가 바깥 사회의 네온사인 간판이라도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실제로 군대를 갔다 온 나이기 때문에 더더욱 공감가는 말이긴 하지만, 네온사인은 그냥 구실이고 거리에 돌아다니는 여자들이 더 보고싶다는 말이 진심이겠지. 나머지는 특이한 것이 없다. 깨진 거울이라든지. 제복도 있는데 어차피 내가 입기에는 사이즈도 맞지 않고.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런 제복류의 옷은 싫어한다. 딱딱한 기분이 들어서 말이다. 캐쥬얼한 복장을 선호하는 내겐 그다지 탐낼만한 옷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리아의 생각은 약간 다른듯 하다. "선배한테 어울릴만한 복장이네요." "나한테?" "네." "의외의 말을 하는구나. 난 이런 옷, 별로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그런가요? 제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조금은 부끄럽게 생각이 들지만, 선배는 나름 잘 생긴 편이니까요. 정장같이 단정한 옷을 입으면 약간 차도남 느낌이 나거든요." "차가운 도시 남자 말하는거지? 그 단어." "잘 아시네요." "이래봬도 신세대니까." 하지만 내가 이런 복장이 어울릴 것이라고 칭찬해주는 아리아의 말은 의외성이 조금 높았다. 제 3자가 보기에는 내게 이런 복장이 어울리는 것일까. 남자와 여자가 보는 시선의 차이점이 있다고들 하지만, 일단 나는 그다지 별로다. 이 옷. "세린 선배도 유에 선배가 이 옷을 입으면 어울릴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세린이 흰색의 제복과 나를 이리저리 비교하면서 오묘한 말투로 말한다. "너, 이런 옷이 취향이었어?" "아니라니까." "... 뭐. 벗고 다니는 것 보다는 괜찮아 보이긴 하네." "내가 무슨 벌거벗은 임금님이냐." 세린 언어를 해독해보자면 '잘 어울린다'라는 뜻일 것이다. 워낙 솔직하지 못한 녀석이니까 이런 식으로 간접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중에 가져가서 한번 입어볼까? ... 아니. 본인이 싫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굳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입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들고 가기도 힘드니까 그냥 포기하자. "옷은 그만 이야기하고. 뭔가 도움이 될만한 물건이 있었어?" "저는 없었어요." 고개를 좌 우로 흔들며 대답하는 아리아. 별다른 소득이 없었나보다. 그러나 세린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다. "난 하나 발견했지." "뭐? 정말?!" "바로 이거!" 라고 말하면서 내민 것은... 지도? 아니. 지도라고 불리기에는 조금 그렇고. 설계도라고 해야 하나. 분석도? "이게 뭔가요?" 나를 대신해서 아리아가 질문을 던진다. 그러자 세린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친절한 답변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이 배의 지도." "오호라. 이것이..." 세린의 말 그대로 이건 커다란 성과다. 배의 지도가 있다면 앞으로 우리들이 이 난파선을 수색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지 않겠는가. 무턱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은 괜한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 되는 것이고, 지도가 있다면 미리 언제 어디로 가야 할 지 정해둘 수 있어서 좋다. 세린에게서 지도를 건내받은 나. 대략 갑판부터 위치를 역추적해서 우리들이 있는 현재의 장소를 유추해본다. "배의 앞머리 갑판 부근 바로 아랫층... 오른쪽 코너였지?" "네. 아마도요." "그렇다면 이 곳이네." 지도가 영어로 되어 있어서 우리들이 있는 위치를 단박에 찾는 것이 조금 시간이 걸렸을 뿐이지, 그래도 지도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명백하다. 그런데 이 지도를 통해서 확인해본 결과, 우리들이 타고 있던 이 배는 생각보다 꽤나 많이 복잡한 구조를 자랑하고 있었다. 여행 당시에 우리들이 배정받은 곳은 갑판 위의 배 안쪽 숙박지역이었기 때문에 배의 갑판을 기준으로 아랫쪽 지역은 거의 와본 적이 없다. 시작 전부터 왠지 파란의 예감이 들기 시작하는건 기분 탓이려나. ============================ 작품 후기 ============================ 어떤 독자분께서 보내주신 쪽지를 받았습니다. 혹시나 몰라서 일단 익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용은 주인공의 친누나인 유린은 히로인 범주에 포함이 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쪽지에서도 답변을 드렸지만, 사실 굉장히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그대로 관계를 가지는 쪽으로 했지만, 아무래도 근친이라는 게 있다보니 아직까지도 제가 이 점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추가를 시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 우유부단한 저를 욕하십시요 ㅜ_ㅜPS. 엘리의 인지도를 걱정하시는 열혈팬(?)분이 계시더군요. 제가 특별편으로 하나 써둔게 있는데, 엘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니까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PS 2. 야밤에 부침개를 먹었더니 급 대변이... 121화 선장실을 나와서 지도를 든 나는 우리들이 갈 장소를 정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단 선장실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하면서 은근슬쩍 한번 정도는 들리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는 곳이 바로... "주방이군." "상당히 직설적으로 말씀하시네요. 유에 선배." "그야 3일동안 감자와 고구마와 함께 생활하기에는 너무 지겨우니까." 고기나 채소, 과일가지는 바라지 않는다고 해도 통조림이나 견과류, 아니면 인스턴트 식품같은 거라도 있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우리는 목표를 주방으로 잡게 되었다. 여전히 어두컴컴한 실내 내부. 주방이 복도까지 다이렉트로 이어져 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만약에 복잡한 코너를 지나쳐 가야 하는 루트였다면 아마 이곳저곳의 벽에 부딛치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생긴다. "여기쯤인거 같은데." 세린의 말에 내가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라이터를 켜본다. 입구 근처에 식당이라고 써져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마 선원들이 사용하는 직원용 식당이 아닐까 추측된다. 내 기억으로는 우리들이 밥을 먹었을 때 갑판 아랫부분이 아니라 윗 부분에서 먹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들어가볼까?" 기운차게 말하는 내가 먼저 당당하게 첫 걸음을 뗀다. 다른 여자들이 내 뒤를 따르는 포메이션으로 식당 내부로 진입. 여기저기 널려있는 의자들과 테이블이 사건의 참혹함을 알려주는 듯 하다. "지독하네." 근처의 부러진 의자 조각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말하는 이세린. 배가 난파될 당시의 상황은 워낙 급박해서 무슨 원인으로 이런 사고가 벌어졌는지 조차도 모른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마치 우리들을 집어 삼킬것만 같은 기세로 몰아붙이는 파도 속에서 간신히 배의 잔해를 잡고 바다 위를 표류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기 시작한다. 수영에는 자신이 있지만, 그런 상황에서 누가 수영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들겠는가. 그저 살기 바쁜 상황에서. 근처에 있던 물건을 집은 아리아가 나에게 다가오며 말한다. "선배." "왜? 아리아." "여기에 불을 붙여보세요." "그게 뭔데?" "양초에요." "양초... 라고?" 아리아의 말에 나와 세린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을 향해 쏠리게 된다. 분명 양초다. 그것도 한번 물에 젖었던 것도 아닌 새 양초. 비닐에 포장되어 있는 양초가 한 두개도 아니고 다량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이 식당에서 사용하던 것이겠죠. 테이블 위에 장식용으로 올려놓는 양초 같은거 말이에요." "그것이 배가 난파될 때 보관상자에서 한꺼번에 쏟아졌다 이 말이군." "저희들에게 있어서는 불행 중 다행이니까 별로 상관은 없겠죠." 아리아의 말 그대로다. 다수의 양초는 현재 우리들에게 있어서 꽤나 많은 도움을 주는 아이템. 횃불도 만들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약하지만 그래도 불을 통해서 밝기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는 사실은 이 어두운 공간에서 한줄기 빛이 내려지는 듯한 기적의 순간을 맛보게 해준다. 기적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그냥 표현이 그렇다는 뜻이다. 아리아와 세린, 그리고 나. 이렇게 세명은 양초에 불을 붙이고 각각 하나씩의 양초를 손에 든다. 여유분의 양초도 가방 안에 넣어 두었고. 그리고 촛농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비닐로 윗부분을 감싸두었으니 화상을 입을 염려는 없을 것이다. "오, 제법 괜찮은데?" 미약하지만 워낙 실내 내부가 어두워서 양초의 불빛 만으로도 금새 환해진다. 세린의 감탄섞인 말과 동시에 나 역시도 양초 하나가 있고 없고의 차이점을 세삼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양초에 불을 붙이고 나니까 식당의 모습은 더욱 가관으로 보여지고 있었다. 충격으로 인해 부서진 가구의 잔해들. 그리고 깨진 유리병과 식기도구에 여기저기 음식들이 상한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식당의 내부가 대충 온전하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깨진 식기 조각을 손에 든 세린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한다. "이 식기, 무늬가 내 타입인데. 아깝다..." "깨진건 어쩔 수 없지. 그것보다도 주방쪽을 한번 찾아보자. 그쪽에는 음식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따르는 아리아와 세린이었다. 식당 내부에는 유용하게 사용될만한 도구나 섭취 가능한 음식들의 모습은 일단 보이지 않는다. 주방으로 입성한 우리들. 식당과는 다르게 주방의 모습은 생각보다 양호한 편이었다. 식기나 음식 도구들이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의외로 냉장고나 냉동고, 재료 보관함 같은 것들은 멀쩡하게 제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로 바닥에 뭔가 장치라도 해둔 것인가. 배가 크게 흔들릴 것을 대비해서 고정장치 같은걸 마련한다든지 그런거 말이다. 뭐, 그런건 상관 없고 일단 식품들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절차로 잠시 양초를 아리아에게 건내고 문을 열어본다. 처음에는 잘 열리지 않다가 끼이익 소리를 내면서 드디어 내부의 모습을 공개하는 냉장고. 그러나 우리들이 기대하고 있던 모습과는 정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 상해버린 채소와 다수의 음식들. 썩어빠진 과일들의 모습도 여기저기서 심심치 않게 확인하게 된다. 자신의 금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하는 세린의 말. "냉장고가 있다고 하더라도. 전력장치가 고장난 순간부터 이미 냉장고는 그 기능을 잃었겠지." "하긴.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냉장고는 고작 음식을 보관하는 칸막이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냉장고의 기능이 무엇인가? 적정량의 온도를 유지하며 음식이 상하지 않게 보존해주는 그런 전자기기가 아닌가. 그러나 그 전자 기계들의 전제 조건이자 원동력이 되는 전기가 없다면 이건 그냥 단순히 부피만 잔뜩 차지하는 커다란 상자에 불과한 것이다. 냉장고 안에 손을 뻗는 이세린. 뭔가를 발견한 것인가? "이거, 먹을 수 있지 않을까?" "... 참치캔이네." 시중에 흔히 볼 수 있는 참치 통조림이다. 유효기간은 아직 지나지 않은 상황. 달력도 없으면서 어떻게 날짜를 알 수 있냐고 물어온다면 간단하게 대답해줄 수 있다. 왜냐하면 통조림에 적힌 유효기간이 내년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들이 난파를 당하고 오랜 시간동안 무인도에서 머물렀다고 해도, 6개월 이상 머문 기억은 없기 때문에 아직 유효기간의 '유효'라는 단어가 실제로 유효하다는 사실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통조림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세린이 말한다. "... 가지고 가서 먹어볼까?" "글쎄. 아리아는 어떻게 생각해?" 내게서 직접적으로 질문을 건네받은 아리아가 무표정을 유지하며 대화를 이어간다. "비록 냉장보관이 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통조림 내부는 진공상태로 되어 있으니까 적어도 상하지는 않았을거라... 고 추측하는데요." "그 말은 먹어도 된다는 뜻이야?" "어디까지고 '아마도'에요." "애매모호한 표현이네." 고민해보자. 먹을까? 아니면 말까. ...... "먹지 말자." "왜?!" 곧바로 세린의 반론이 치고 들어온다. 역시나 태클 전문. 하지만 이번 만큼은 나도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해도 될까?'라는 의심이 들 경우에는 하지 말라고 했거든." "도대체 어디서 그런 근거를 삼은 말이 튀어나온거야." "군대에서 선임에게 미움받지 않을 수 있는 101가지 방법이야." "... 도대체 뭐야. 그 진부한 책 이름 비스무리한 문장은." "아무튼 조금이라도 의심이 들만한 물건은 가급적 먹지 않는게 좋다는 뜻이야. 고구마와 감자가 지겹기는 해도, 적어도 식중독이나 독에 걸릴 정도로 위험한 것은 아니잖아. 그런데 괜히 이런 통조림을 먹었다간 어떻게 될지 모르고. 그리고 통조림 자체가 안전하다고 한 음식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확실한 안전'이 보장되어 있지 않으면 먹지 않는 편이 좋아. 음식에 대해서 만큼은 보수적인 입장으로 가는게 안전하니까." "그래도 아까운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서 포기하는게 좋겠어. 그렇지? 아리아." "이번 만큼은 선배의 말에 동의할게요." 설사 통조림이 먹어도 될 정도로 안전성을 보장한다고 해도, 현재 우리들이 그러한 확신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냥 깔끔하게 포기하도록 한다. 어차피 어제 저녁까지 지겹도록 고기도 먹었으니까 별로 미련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치도 '어류'이지 않은가. 무인도에 오고 나서 물고기는 거의 종류별로 먹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많이 섭취하고 있기 때문에 구미가 확 당기거나 그러지는 않고 있다는 속마음도 약간 반영된 셈이다. 그래도 참치와 일반 물고기는 다르지 않은가? 하지만 근 며칠동안 물고기만 먹어댔으니 물고기 비슷한 것만 봐도 질릴 정도다. 그래서 참치도 좀 별로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찌 느껴지는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쓸만한 물건이라고는 그다지 찾을 수 없는 장소. 나중에 지아 선생님한테 통조림을 먹어도 되는지 안되는지 확답을 받은 뒤에 다시 가지러 오던가 하는게 좋다고 판단되므로 일단 먹을 수 있을만한 거, 예를 들자면 아직 포장이 뜯기지 않은 류의 식품들은 따로 모아둔다. 그러는 순간. "꺄ㅡ악!!!!" "뭐, 뭐야?!" 갑자기 세린의 비명소리가 주방의 공간을 채워가기 시작한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왜 느닷없이 비명을? 아리아도 세린의 비명소리에 놀랐는지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린다. 워낙 큰 비명소리라 그런지 웬만한 공포영화에서 나올법한 히로인 뺨칠 정도의 연기 실력을 보여준 셈이다. 순간 8옥타브까지 올라갔다고 느껴질 정도의 엄청난 고음. 정말 대단하다. "뭐, 뭔가가 있어!" 겁에 질리 표정으로 내 뒤에 숨는 세린. 얼마나 무서워하면 평소에 나에게 다가오지도 않는 녀석이 알아서 스스로 내게 가까이 오는 것인가. "... 유에 선배. 정말로 뭔가가 있는거 같은데요." 아리아의 말을 시작으로 갑자기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식기들. 냄비고 뭐고 누군가의 손길을 받고 있듯이 와장창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린의 또다른 비명소리. 아리아도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어느새 내게 달라붙은 상황이다. "설마 유령이라도 되는건가?" "유유유유유유유령 따위가 있을리가 없잖아!!!" 말을 심하게 더듬으며 그 와중에도 내게 태클을 걸어오는 이세린. 이 녀석, 유령이나 귀신이나 이런 것들을 무서워하는 체질이었나. 그런 녀석이 용캐도 여기까지 잘도 따라왔다는 생각이 든다. 세린은 부정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 현상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현재 주방에 있는 사람은 나와 아리아, 그리고 세린 이 3명이 전부다. '사람'이라면 이렇게밖에 없지만, 정말로 유령이 있다면? ... 생각만해도 오싹하지만 그 가능성이 그나마 가장 큰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직까지도 식기도구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떨어지는 상황. 그 속에서 아리아가 작게 중얼거린다. "폴터 가이스트 현상일수도 있어요." ============================ 작품 후기 ============================ 제가 확밀아 친추창이 꽉 차있는 상태라서, 추가를 해주시는 분들께 죄송한 말이지만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확밀아를 시작하신 분도 계시다는 리플을 봤었는데... ㅜ_ㅜ 보답으로 재미있는 개그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제 글을 올리면서 떠오른 간단 유머입니다. 글을 '연재'하는 손'연재'~ ... 죄송합니다 ㅡ_ㅡ; 122화 "폴터... 뭐시기?" "폴터가이스트요. 설마 모르시는 건가요?" "그거지?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데 지진이 발생한 것처럼 막 사물이 움직이고 떠다닌다는 그거." 예전에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 아마도 그거와 비스무리 한 것이겠지. 정확한 발생 원인은 아직 과학적으로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 이 현상도 폴터가이스트 현상인 것일까. 그런데 영화에서 보던 것과는 다르게 물체가 공중에 뜨거나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싱크대 위에 있던 물건들이 떨어지는 정도가 고작이다. "내가 알고 있는 그 폴터 뭐시기인지와는 조금 이미지 상으로 다른데?"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해보자.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는 괴 현상과 마주하고 있다. 실제로 유령의 소행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과학 기술이 발달되어 있는 현대 사회에 살아가는 이 시대의 현대인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미신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좀 더 현명하게 과학적으로 머리를 굴릴 필요가 있다. 문과지만 말이다. 그래도 문과고 뭐고 상관 없잖아. 합리적으로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 선배! 저기에 뭔가가 있어요." "뭐?!" 아리아가 무언가를 목격한 모양이다. 눈에 보인다는 소리는 적어도 '실체'가 있다는 뜻과도 같지 않은가. 유령의 소행이 아니었단 말인가? "뭔데. 사람이야?" "아니요. 사람 정도의 크기로는 보이지 않고... 아무튼 모르겠어요." "알았어. 어디에 있는건데." "방금 우측 싱크대 쪽으로 돌아갔어요. 아니... 반대편이에요!" "오케이!" 잠시 세린을 아리아에게 맡겨두고 주변에 있는 부엌칼을 집어 든 채 싱크대 위로 올라가서 방해가 되는 물건들을 모조리 다 떨궈버린다. 그러자 아리아가 언급했던 '무언가'가 내 행동을 눈치채고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한거 아닌가. 분명 실체가 있다. 아리아가 정확하게 본 것이다. 크기 상으로는 확실히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고... 들짐승? 벌써 여기까지 들어온 것인가. "좀생이처럼 도망다니지 말고 모습을 보여!" 라고 말해봤자 알아들을 리가 없겠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녀석을 쫓는다. 워낙 잽싼 녀석이라서 눈으로 쫓는 것도 버거울 정도. "유에 선배! 왼쪽이에요." 아리아가 자신이 본 바를 그대로 들려주면서 정보통이 되어주지만, 생각보다 상당히 빠르다. 무슨 우사인 볼트도 아니고 뭘 이리 잘도 다니는 것이냐고. 내가 녀석을 쫓는다는 사실을 인지해서 그런 것일까. 갑자기 잠잠해진 실내 분위기가 되었다. 도망간 것일까? 아니, 그건 절대로 아니다. 왜냐하면 바깥으로 도망치기 위해서는 하나밖에 없는 입구를 거치고 나가야 한다는 소리인데, 주방 입구에 있는 아리아와 세린이 녀석의 존재를 보지 못한것으로 보아서는 여전히 이 주방에 기척을 숨기고 있다는 말과도 같다. "... 어떤거 같나요. 선배." "글쎄. 내가 봤을때는 몸집이 작은 들짐승 같이 보였는데." "그런 류가 있나요?" "많이 있지. 고양이나 개, 아니면 토끼나..." "그리고요?" "... 쥐 같은거." "!!!!!!!!!" 비명은 지르지 않았지만, 세린의 동공이 갑자기 확장되더니 내 목을 잡고 흔들기 시작한다. "쥐, 쥐라고?! 방금 쥐라고 했어???" "그, 그래! 근데 왜 내 목을 조르는거냐! 케, 켁..." "왜 하필 쥐가 여기에 있는거야! 빨리 잡아! 당장 잡으라고!!" "아, 알았으니까 목 좀..." 겨우 세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나. 목에 새빨간한 손톱 자국이 남아있을 정도로 강하게 목을 졸라댄 세린이었다. 이 녀석, 정말 날 죽이려고 작정했던거 아닐까. 괜히 쥐를 핑계삼아서 말이다. 이세린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더 무섭게 다가온다. "... 그나저나 너, 쥐 싫어하냐?" "당연하지! 도대체 왜 이 세상에는 쥐하고 벌레가 존재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이세린에게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쥐와 벌레들에게 약간의 미안한 감정도 느껴진다. 그래도 나름 살아있는 생명체인데, 이런 식으로 전면 부정당하면 아무리 이성이 없는 생물이라고 해도 삐질지도 모른다고. "세린 선배의 말이 맞아요. 빨리 잡아봐요. 유에 선배." "... 아리아. 너도 쥐 무서워하냐?" "아니요.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만." "그런데 언제부터 테이블 위로 올라가서 안 내려오는 모습을 하게 되었냐." "갑자기 테이블 위로 올라가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요." "......" 그나마 벌레에 대해서는 어느정도의 혐오감이 덜한 아리아였지만, 쥐 만큼은 엄청나게 싫은 것으로 보여진다. 아리아의 모습을 본 세린도 같이 올라가자는 듯이 오들오들 떨면서 테이블 위로 쭈그려 앉는다. 나 혼자만 덩그러니 주방에서 서 있는 상황. 뒤에서는 빨리 쥐를 잡아보라고 재촉하는 두명의 여인네들이 합창을 하듯이 나를 마구 쪼아댄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잡아서 없애주세요. 유에 선배." "그리고 잡은 순간 절대로 우리들한테 보여주자 말고 당장 바깥에다 버려! 식당 안에다 버리면 안돼. 다시 올지도 모르니까." "난파선 바깥에다가 던지세요. 절대로 보이지 않는 곳에다가요." "아리아의 말이 맞아. 빨리 안하고 뭐해!" 이 여자들이 정말. 그것보다도 아직 쥐라고 확정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쥐에 대한 불신론을 펼치기 시작하는 소리가 이어지기 시작한다. "... 쥐는 이 세상에서 박멸되어야 할 존재에요." "맞아맞아. 더불어 벌레도." 사실 녀석들은 별로 잘못한 것이 없는데, 괜히 이런 욕을 먹고 있다. 괜시리 내가 녀석들에게 미안해질 정도네. 그래도 언제까지고 이런 대치상황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 빨리 잡는게 이득이라고 본다. 문제는 어떠 식으로 잡느냐 이건데... "아리아. 혹시 쥐를 유도하는 방법 같은거 몰라?" "음식이 있으면 먹으러 오지 않을까요." "널리고 널린게 음식인데?" "그러니까 주방에 있었겠죠." 그렇다는 말은 한창 포식중에 있던 녀석인데 갑작스레 우리들이 등장하니까 이런 말도 안되는 사건 사고를 유발하는 것인가.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아리아와 대화를 하고 있던 사이에, 다시 식기들이 와장창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리인가. 마침 잘 됐다. "빠, 빨리 잡아봐!!" "알았으니까 재촉하지 말라고. 아리아, 내 등 뒤쪽은 시야가 안 보이니까 네가 살펴봐." "... 알았어요." 아리아도 빨리 쥐를 잡고 싶은 모양인지 필요한 말만 내뱉고 곧바로 내 지시에 따른다. 가뜩이나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는 관계로 식기가 순차적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따라서 녀석의 움직임을 쫓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녀석보다 늦게 움직임을 포착하는 꼴이 되므로 한발 앞서가서 미리 진로를 차단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측 공격밖에 없는가. 와장창창창. 또다시 다량의 식기들이 떨어진다. 얼마나 몸집이 큰 녀석이길래 식기들이 이런 식으로 떨어지는 것인가. 나도 쥐를 자세히 본 적은 없지만, 친척형이 군대에 있을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쥐보다도 엄청 큰 몸집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을 들은 기억이 있다. 집중. 그리고 또 집중하자.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볼 때 못하던 집중력이었지만, 시험은 아니니까 자기 암시를 걸 듯이 정신을 한 곳으로 모은다. 그리고 청각을 민감하게 만들자. 시각에 의존하려 하지 말고 청각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다. 녀석의 움직임을 머릿속에서 지도처럼 이미지 시켜본다. 오른쪽 선반. 왼쪽 코너. 마지막으로 가장 큰 싱크대로 향한다. ...... .......... .............. "선배! 위쪽이에요!" "거기냐!!" 바닥에 놓인 의자를 밟고서 그대로 싱크대 위쪽으로 점프를 뛴다. 선반에 보이는 작은 그림자. 분명 녀석이다. "놓칠줄 알고!" 이대로 너를 보냈다간 내 목숨이 간당간당 하단 말이다. 아리아는 그렇다고 해도, 이세린이 나를 또 얼마나 갈굴지 생각만 하면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니까. 그러니까 얌전히 내 손에 잡히라고. 쥐 녀석아. 미키 마우스는 그리도 착하게 생겼건만, 너는 왜 이리도 방정맞냐. 사사삭 소리를 내면서 모습을 감추기 직전. 몸을 날려서 손을 뻗는다. 그리고 손을 움켜쥔다. 오른손에 느껴지는 감촉. 분명 이건... 녀석의 꼬리다. 실제로 손으로 만져본 경험은 없지만, 길고 가느다란 이 것은 분명 꼬리가 아닌가. 그런데 생각보다 털이 복슬복슬한 감촉이 느껴진다. 본래 쥐가 이리도 털이 많은 존재였나? 라는 생각에 녀석의 꼬리를 잡고 그대로 선반에서 끌어내자. ... 생각했던 모습 이상으로 컸다. 아니, 클 수밖에. 왜냐하면 쥐라고 생각했던 녀석이 이런 울음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 야옹..." ============================ 작품 후기 ============================ 올라가는 에피소드 중에서 'EX'라는 말머리가 붙은 에피소드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에피소드라는 의미입니다. 일단 해충 편하고 바위섬 편을 써뒀는데, 지금 올라가고 있는 이 에피소드가 끝나야 올라갈 거 같습니다. 생각보다 길군요. 이번 에피소드 ㅡ_ㅡ;; 123화 "고양이...?"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내 손에 들린 들고양이를 바라보는 세린과 아리아. 사실 놀란건 나도 마찬가지다. 워낙 잽싸기 때문에 나는 또 쥐라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정작 잡힌건 작은 고양이라니. 그것보다도 이 무인도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짐승들이 살고 있길래 고양이까지 튀어 나오는 것인가. "소란의 정체는 바로 이 녀석이었군." "야옹~..." 나에게 꼬리를 붙잡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고양이가 발버둥을 치기 시작한다. 그러자 곧바로 들려오는 세린의 잔소리. "뭐하는거야. 동물 학대라고. 그거."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바깥에다 내다 버리라고 한 건 너잖아." "그, 그건 '쥐' 한정이라고. 설마 이렇게 귀여운 고양이였을 줄은 몰랐단 말이야." 오호라. 귀엽단 말이지. 확실히 세린의 말대로 귀엽게 생기긴 했다. 아직 어른 고양이도 아니고 아기 고양이인 듯이 작은 크기를 자랑하는 녀석이었다. 제대로 발톱도 안 나기도 하고. 아무튼 그다지 해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 안 버린다." "아기 고양이를 내다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생각보다 잔인한 사람이었네요. 유에 선배." "적어도 너희들에게 그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고양이를 바다에 내다 버리느니 어쨌느니 하던 게 누구였더라. 물론 그때는 이렇게 작은 아기 고양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하지만, 쥐와 고양이의 대우가 이렇게 달라지는걸 보면 내심 쥐 녀석도 은근히 불쌍한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톰과 제리라는 고전 만화에서 항상 당하는 역할은 고양이인 톰이었지만, 현실은 그런거 없다. 여자들에게 이쁨받고 사랑받는 존재는 막상 제리가 아니라 톰이니까. "이리오렴." 내가 들고 있던 고양이를 품에 안은 세린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귀여워 죽겠다는 시선을 띄우며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다. "어머... 귀여워라." 황홀한 표정까지 추가시키며 아기 고양이의 발바닥을 만지작 만지작 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전히 잔뜩 겁에 질린 고양이는 세린의 품에 안긴 상태에서 커다란 눈망울에 그렁그렁 눈물을 맺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다. 그 모습을 보던 아리아가 나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게 다 선배가 겁을 줘서 그런거예요." "뭐만 하면 다 나쁜놈은 내가 되는거냐." "네." "확답하지 마!" 고생이란 고생은 다 내가 하고, 정작 욕도 다 내가 얻어먹으니 이리도 불합리한 사회가 있단 말인가. 뭐... 고양이 녀석이 겁에 질린 것은 약간 미안한 감정이 들지만, 그래도 고생한 나에게 욕설은 아니잖아. ... 라고 말해봤자 들은채도 안하겠지. "이 고양이. 어디서 들어온 것일까요." "글쎄." 아리아가 나에게 물어오지만, 사실 나도 모른다. 알고 있는게 더 이상하겠지만, 거의 갑판 부근까지 이런 작은 몸으로 용캐도 올라온 것을 보면 조금은 신기한 느낌도 든다. 생각해보면, 방금 전에 보여줬던 빠른 몸놀림을 고려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이 녀석, 아무리 봐도 새끼 고양이인데 어미는 어디간 것일까. "주변에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그림자 같은건 없었지?" "한마리 뿐이에요." "그럼 아무래도 어미와 떨어진 것일까. 이 고양이." "그럴수도 있죠." 아리아도 고양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무서워하지 말라는 듯이 바라본다. 외딴 장소에 혼자 남은 그 기분. 모르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먹이를 주거나 하는 일 뿐이다. 이 넓은 무인도에서 녀석의 어미를 찾아주는 일 까지는 도맡아 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고양이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또다시 아리아가 나에게 자문을 구하려는 듯이 물어온다. 사실 이대로 여기에 놔두겠다고 말했다간 가뜩이나 고양이 학대 죄로 욕을 먹고 잇는 상황에서 더 쓴 소리를 들을것 같기도 해서 그냥 데려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여기에 놔두면 그것도 좀 그러니까 그냥 데려가는게 좋겠지." "역시나 선배. 말이 통하는군요." "뭐야. 너, 진작에 데려갈 생각이었냐?" "네." "그런데 왜 내 말을 물어본거야." "아무래도 선배의 의견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나름 리더 취급을 해주니까 그건 고맙긴 하다만." 나와 아리아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이세린은 고양이에게 '혼자서 어떻게 지냈니?'라는 말을 거는 둥 애정표현을 과시하고 있었다. 애완동물 같은걸 좋아하는 타입인가. 부잣집이니까 실제로 키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이 아이 이름 지어주는게 어때?" 이제는 이름까지 지어주자고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어필하는 이세린. 방금 전에 꺄악~꺄악~ 비명을 지르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이제는 거의 쳐음부터 이 고양이의 주인이었다는 마냥 애정을 쏟아붓고 있다. "저기저기. 이 고양이 이름. 뭐라고 지을까?" ... 벌써부터 고양이 이름을 지을 생각을 하다니. 이 고양이 녀석, 나한테도 이세린이라는 여자에게 사랑받는 방법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수강료인 물고기는 얼마든지 잡아줄테니 좀 알려달라고. "글쎄. 어울릴만한 이름이라..." 잠자코 생각을 해보자. 고양이에게 어울릴만한 이름이 뭐가 있을까. "아리아. 너는 마땅한 이름 같은거 없니?" 내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보던 세린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곧바로 아리아에게 묻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리아라고 마땅히 별다른 이름이 떠오르진 않는 모양이다. "고양이에게 붙일만한 이름은 평소에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요." "그렇겠지? 음... 뭐라고 붙일까." 고민하기 시작하는 두명의 여성. 오자마자 인기를 끌다니. 조금은 부럽기도 하다. 고양이 주제에 말이다. "그런데 이름은 잠깐 재껴두고 일단 바깥으로 나가는게 어때. 슬슬 날이 저물어 가는데." 고양이도 좋지만, 그래도 더 어두워지기 전에 나가는게 좋다고 판단한 나는 그녀들에게 말을 건내본다. 잠시 고양이에게 정신이 팔려있던 세린과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말에 찬성을 표시한다. 갑판과 선장실, 그리고 주방에서 고양이라는 새로운 동료(라고 불러야 하나.)를 얻고 나서 바깥으로 나온 우리들. 벌써부터 해가 저물어가기 시작하는 듯이 하늘은 붉은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더 늦기 전에 바깥으로 나온게 역시나 정답이었다. 일단 오늘 가져온 도구들을 풀어놓는 나. 그래봤자 가져온 것이라고는 밧줄 정도가 전부다. 내일은 본격적으로 기계실에 한번 들어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볼 무렵, 불을 피운 아리아가 우리들을 부른다. "슬슬 고구마하고 감자를 넣어도 될까요?" "잠깐만. 내가 준비해둘게." 불을 열심히 피운 후배를 대신해서 이번에는 세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리아에게 고양이를 건내준다. 엄청난 고양이 사랑이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다. 고양이를 건내받은 아리아 역시도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고양이에게 말을 걸어본다. "배고프니?" "......" 아무런 말... 이 아니라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바라보는 고양이. 대답을 해줄 거리는 기대는 애초에 아리아도 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고양이의 등을 매만지고서 나에게 말을 건다. "다른 사람들도 고양이를 기르는 것에 대해서 찬성해줄까요?" "이보세요. 언제 우리가 고양이를 기른다는 이야기로 나갔었어?" "방금 전에 그런 뉘앙스로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난파선에 놔두면 불쌍하다는 말만 했을 뿐이지, 직접적으로 우리가 기르자는 말은 안했어." "그럼 선배는 이대로 이 아이를 야생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나요?" "불쌍하긴 하지만, 그래도 스스로 어미를 찾아갈 수도 있잖아." "냉정하시군요." "이성적으로 판단을 한 결과라고 말해줬으면 좋겠지만 말이야." 고양이도 개처럼 후각을 이용해서 자신의 집으로 찾아가는 그런 습성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해서 해본 말이다. 약간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멋대로 고양이를 기르겠다는 것은 말하자면 다수의 의견을 묵살한 단순한 횡포일 뿐이다. 아무리 내가 리더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자는 의사는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3명이서 독단적으로 고양이를 애완동물로 기르겠다는 결정은 아직 이르다고 판단을 했기에 아리아에게 잘 타이르는 것이다. 혹시 고양이 털 알레르기 라든지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이런 이유로 괜한 분쟁은 일으키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다. ============================ 작품 후기 ============================ 코멘트가 드디어1000이 넘어갔습니다! 감사합니다! 리플 짱짱맨!! PS. 지금 확밀아 무한 커넥팅 때문에 짜증나 죽겠습니다. 혹시나 해서 게임 들어왔더니 알람도 없이 각요가 4마리가 떠 있는 진풍경이... 124화 "아무튼 고양이를 기르는 것은 일단 보류해둬." "세린 선배가 엄청나게 화낼텐데요." "...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좀 무섭긴 하네." 쉽게 예측해볼 수 있을 정도로 화내는 세린의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우리들 중에서 고양이의 매력에 푹 빠진 사람 탑 랭킹 단독 1위를 달리고 있는 세린인데, 이제와서 내가 '고양이는 기를 수 없다!'라고 말했다간 도대체 어떤 갈굼을 당할지 생각조차 못할 정도다. 그래도 나중에 잘 설득하면 알아주겠지.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다고 보여진다. ... 라고 믿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고작 한마디. "죽어." "......" 상당히 직설적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스트레이트로 꽂히는 독설. 여지껏 세린에게 들었던 욕설 중 그 어떤 것 보다도 짧고 강하다. 파괴력이 어마어마한 위력을 보여주는 이 독설의 위력은 아마도 155mm 견인 곡사포 탄종 HE탄 일제사의 위력과도 맞먹지 않을까. "예상대로네요. 선배." "내가 보기에는 예상을 초월했다고 보여지는데." 세린의 반응은 얼핏 부정적인 방향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정확했다. 다만 그 강도가 조금 쎌 뿐이지. 고구마 껍질을 까는 세린이 나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한다. "도대체 왜 기르면 안된다는 것인데!" "아직까지 기르지 말라고 한 적도 없어." "그럼 기르는거야?" "그것도 아니라니까."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거야! 남자가 줏대가 없어!"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뜻이야.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수도 있잖아."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거냐."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럽고 앙증맞고 깨물어주고 싶고 평생 애완동물로 기르고 싶은 마음이 마구 솟구치는 이 고양이를 싫어할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 세상의 진리이자 법칙이니까." 오늘 또 하나의 물리 법칙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름하여 이세린 학자의 '고양이는 절대적인 귀여움 곱하기 무한대'라는 공식 말이다. 피타고라스의 정의를 뛰어넘는 굉장한 법칙이 아닐까 평하고 싶다. 고양이에게 작게 감자를 잘라서 먹여주던 아리아가 우리들의 대화에 참가한다. "분명 귀엽긴 하지만, 이번만큼은 유에 선배의 말을 들어주는게 좋겠어요." "아리아. 너까지..." "세린 선배. 죄송하지만 유에 선배의 말이 맞아요. 우리들 멋대로 고양이를 기르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 어긋나는 행동이니까요." "......" 이것으로 표는 2대 1. 그렇다고 고양이를 기르자는 반대의 의사를 표시하는 의미를 나타내는 2표가 아니다. 보류라는 수단을 택한 의견. 그렇기에 이세린은 잠시 고민하는 척 하더니 한숨을 쉬면서 결국 민주주의 사회의 다수결이라는 방식에 굴복하고 만다. "... 알았어. 그럼 다들 찬성하면 기르는거다. 알았지?" "그때는 나도 반대할 이유도 없으니까." "두고봐. 반드시 기르게 만들도록 할 테니까." 도대체 어떤 식으로. 아무튼 해는 이미 저물었고, 간이 캠프파이어를 만든 우리들은 모닥불 앞에서 오늘의 식사를 하는 중이다. 여전히 식단은 변하지 않고 감자와 고구마. 그리고 후식으로 과일 몇개와 물이 전부다. 3일 내내 이것들을 먹고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현기증을 자아내게 하는 요소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안 먹을수는 없고. 식당에 있던 음식들을 먹기에는 너무 위험하고 그런 상황이다. 우리들과는 다르게 고양이는 잘도 먹는다. 주방에서 포식을 하며 지냈을 녀석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빈약한 식단을 오히려 맛있다는 듯이 얌냠쩝쩝 먹는다. 입맛 하난 참으로 싸구려 고양이고만. 이 녀석에게 나중에 멧돼지 고기를 먹여봐야겠다. "그런데 세린 선배. 혹시 이름, 생각나신거 있나요?" 아까 도중에 잠시 중단되었던 고양이 이름짓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아리아의 질문을 받은 세린이 고양이의 배를 간지럽히면서 말한다. "음... 이건 어떨까?" "생각하신게 있으신가 보네요." "아까 화로를 정리하면서 잠깐 생각해봤어." 라는 말을 던지면서 호흡을 고르더니 자신이 생각한 고양이 명칭을 내뱉는다. "루이 프랑소와즈 3세." "기각." "어째서?!" 몰라서 묻는건가. 고양이 이름 치고는 너무 고급스럽잖아. 무슨 절대왕정 시대의 귀족 이름도 아니고. 고작 들고양이에게 붙이기에는 너무 비싼 이름이란 말이다. 나도 그런 이름이 없는데 고양이에게 저 이름을 지어버리면, 왠지 배가 아플거 같아서 거부해버린다. 그러자 세린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면서 나에게 직설적으로 질문해온다. "그럼 너는? 생각해놓은 이름이라도 있어?" "몇가지 구상해본 것은 있지." "말해봐." 네이밍 센스 하나는 발군인 나에게 이런 질문을 가해오다니. 아직 멀었구나. 이세린. "빌리 어때?" "... 빌리는 사람이잖아." "그렇다면 반다크 홈은?" "도대체 어느나라 사람이야?" "엉덩국도 괜찮은데." "왠지 찰질거 같은 이름인데." "핑크씨도 괜찮을지도..." "너,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거 맞지?" 이상하다. 나름 멋진 이름들을 생각했다고 보여지는데 이세린의 마음에는 영 들지 않는 모양이다. 얼마나 멋지지 않은가. 특히나 빌리. 이름만 들어도 '오 마이 숄더'라든지 'ANG?'이라는 단어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올것 같은 그런 이름 말이다. 참고로 왠지 수컷이면서 수컷을 좋아할거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착각일 것이다. 순식간에 내가 생각해둔 이름 후보 4개가 거절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아리아가 자신의 은발을 길게 쓸어내리며 말한다. "선배들은 의외로 네이밍 센스가 별로네요." "그렇다면 너는 도대체 어떤 멋진 이름을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아리아에게 질문이 쏟아진다. 내 말을 들은 아리아가 작게 '훗'하고 웃으면서 마른 장작을 모닥불에 집어넣는다. "선배. 이름이라는 것은 자고로 그 생명의 '운명'을 담은 거예요." "갑자기 은근히 철학적인 서두를 꺼내는 이유가 뭐냐." "들어보세요. 남의 대사를 끊는 것은 주인공이 할 짓이 못되니까요." "... 알았다. 퍼뜩 이야기나 해봐." "잘 생각해보세요. 이름이라는 것은 생명체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니까 이런 말이 있잖아요. 이름을 잘 지으면 그 사람은 평생 만수무강 한다는 전설이요." "원래 전설이라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이잖아." "실화를 바탕으로 성립된 것이 전설이에요. 1%의 진실을 통해서 99%의 허구를 첨가시켜 만든 제품이죠." "... 그게 어딜 봐서 신빙성이 높다는 말이냐."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결국 이름이라는 것은 '길게 지으면 장땡'이라는 말과 같아요." "길게 지으면 된다고?" "예를 들자면, 김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세브리캉 무두셀라 구름이 허리케인에 담벼락 서생원에 고양이 고양이는 바둑이 바둑이는 돌돌이라는 이름. 어떤가요?" 어떤 의미로 굉장히 존경스러운 이름을 내뱉는 아리아. 그것보다도 이 녀석, 나는 김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밖에 못 외우고 있는데 그 이름을 다 읊는 엄청난 능력을 선보여준다. 내 주변에 저 이름을 다 기억하는 사람 조차도 없는데. 굉장한 녀석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이름 부르다가 숨 넘어가겠다." "그건 선배가 기억력이 약해서 그런 거예요. 분명 괜찮을 거예요. 이 이름." "아니. 절대로 괜찮을거 같지 않은데." 만약에 정말로 아리아의 말에 따라 저 이름으로 지었다간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말 것이다. 밥 먹으라고 고양이를 부를 때, '김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세브리캉 무두셀라 구름이 허리케인에 담벼락 서생원에 고양이 고양이는 바둑이 바둑이는 돌돌이야~ 밥 먹으렴.' 이라고 말하다가 어느새 저녁이 되어버리고, 그리고 목욕을 시킬 때. '물 뿌릴테니까 얌전히 있으렴. 김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세브리캉 무두셀라 구름이 허리케인에 담벼락 서생원에 고양이 고양이는 바둑이 바둑이는 돌돌이야.' 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고양이는 도망가고 없을 것이다. "세린 선배는 어때요. 제가 지은 이름, 마음에 들지 않나요?" 자기편 만들기 작전의 시작. 우리 누나가 잘 사용하는 전략이다. 나쁜 점이 전염된 것인가. 누나랑 놀다보면 어느샌가 이런 버릇이 하나 둘 씩 자기한테도 전염되니 그런것이 난감하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런 이름은 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 그런가요." 지극히 정상적인 대답이다. 이름이 길다고 무병장수 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고양이가 살아봤자 얼마나 살겠는가. 적어도 거북이 수명 정도까지는 살아야 '아~ 내가 인생을 좀 살아봤구나~'하는 말이 나오는 것이지. 결국 이렇게 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우리들. 이름 하나 짓는것도 이리 힘이 들 줄은 몰랐다. 고작 고양이 이름 하나가지고 이 정도로 고생하는데, 나에게 이름을 붙여주신 부모님들은 얼마나 고심을 하셨을까. 세삼 부모님에 대한 존경심이 샘솟기 시작한다. 무인도에 살아서 돌아가면 꼭 효도할게요. 흑흑. 얌전히 식사를 마치는 와중에, 아리아가 하나 더 생각났다는 듯이 말한다. "어울릴만한 이름을 찾아냈어요." "또 긴 시리즈 같은건 아니겠지?" "이번에는 자신작입니다." "들어나 볼까. 한번." "에바트리체 어때요?" "......" 이것도 조금 의외성이 가득한 네이밍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분명히 어디서 들은 기억이 있는데... 얼마전에 조아라 라는 사이트에서 '무인도 표류일지'라는 글을 연재하는 작가 닉네임 아닌가? 왠지 얼핏 한번 본 기억이 새록새록 들기 시작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세린 선배도요?" "응. 왠지 모르게... 찬양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할까. 잘생기고, 멋지고, 착하고, 매너남이고, 이 시대의 마지막 훈남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느껴지는데. 혹시 외국 사람이니?" "글쎄요. 저는 그냥 떠오르는 그대로 말씀드린 건데요." 공교롭게도 나도 세린과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도 모르게 신으로 모시고 싶을 정도의 신성함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렇다. "그냥 'EVA 1호기'라고 짓는게 어때?" "유에 선배. 그거, '에반케이온'이라는 작품에서 나오는 메카닉 이름 아닌가요?" "오, 알고 있냐?" "재미있게 봤으니까요. 뭐... 나쁘진 않은거 같은데요." "세린은?" "마땅히 붙일 이름이 없으니까. 그걸로 가는게 좋겠네." "그럼 에바 1호기로 짓자. 고양이. 이제부터 네 이름은 에바 1호기다. 알았지?" 격렬하게 고개를 수평으로 흔들면서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녀석. 하지만 너에게 거부권은 없다. 더 이상 생각나는 이름도 없을 뿐더러,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냥 이것이 니 운명이라고 하고 받아들여. 고양이 주제에 감히 인간의 의견을 거절하려 들다니. 요 녀석! 떼찌 해줄테다. ... 하지만 세린과 아리아에게 또다시 동물 학대죄로 오인받을거 같으니까 그만 두도록 하자. ============================ 작품 후기 ============================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아침잠이 많아서 큰일입니다; 125화 EP 16. 난파선 3인팟 3명이서 숙식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불침번의 여부는 묻지 않기로 한다. 3교대로 야간을 돌려봤자 다음날 탐색을 해야 하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그냥 얌전히 포기하고 동시에 잠을 청한다. "으음..." 천막 안에 누운 우리들 셋. 그 와중에 세린은 에바 초호기를 안고서 잠에 빠진다. 세린의 품에 안긴 에바 초호기는 작은 몸을 귀엽게 웅크리며 세린의 부드러워 보이는 가슴에 비비적거리며 작게 '야옹'하고 운다. 부러운 녀석. 나도 여자 품에 안겨서 가슴이 이리저리 부비부비 렛츠 파뤼 투나잇을 하고 싶다고. 하지만 세린에게 그런 짓을 했다가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하자. 다음 생에 귀여운 고양이로 태어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품을 하면서 천장을 올려다본다. 제대로 만든 움막도 아니고 한눈에 봐도 많이 허술해보이는 장소이기 때문에 밤 하늘의 별빛이 그대로 다 보인다. 도시지역이 아닌지라 상당히 많은 별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시골의 밤 하늘을 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것도 나름 나쁘지 않다. 세린에 뒤를 이어서 아리아의 숨소리도 고르게 들려온다. 벌써 잠이 든 것일까. 지아 선생님이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잠시 확인해보니 12시 자정. 그렇게까지 늦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피곤할만한 시간이긴 하다. 나 역시도 잠을 청해본다. 오늘 하루종일 난파선 내부를 탐험하느라 나도 피곤한 상황. 내일도 오늘처럼 일찍 일어나서 저 어두운 공간을 또 다시 들어가봐야 하기 때문에 역시나 마찬가지로 피로를 풀기 위해서 일찍 잠에 든다. 아침햇살과 함께 들려오는 파도의 소리. 자연산 자명종을 들으면서 우아하게 잠에서 깨어나... 지 못한 나였다. 왜냐하면 내 얼굴 위에 에바 초호기가 눌러 앉은 채 야옹 거리면서 작은 앞발로 내 이마를 툭툭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게 무슨 짓이냐. 에바 초호기." "냐옹~..." "설마 내가 어제 지어준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서 복수하는건 아니겠지?" 미묘하게 고개를 상, 하로 끄덕인 듯이 보인건 내 착각일까. 고양이 주제에 감히 인간에게 도전장을 내밀다니. 꽤나 담력이 좋은 녀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에바 초호기를 손으로 들어서 다른 곳에 내려놓은 나. 고양이 털이 얼굴에 덕지덕지 묻은 관계로 식수통을 이용해서 얼굴을 씻는다. 입 안에도 고양이 털이 몇개 씹히는 맛이 참... 그다지 상쾌한 기분은 들지 않는다. "일어나셨나요. 선배." "먼저 일어났었어? 아리아." "네. 우연치 않게도요." 아침을 준비하고 있던 아리아가 나를 바라보면서 말한다. "에바 초호기한테 선배를 깨워달라고 부탁했는데 잘 깨웠나보네요." "너냐? 내 얼굴 위에 이 녀석을 올려놓은 사람이." "들켰나요?" "굳이 그걸 말할 필요도 없잖아." "과연 유에 선배. 명탐정 셜록홈즈도 울고 갈 추리력이네요." 아침부터 왠지 후배에게 농락을 당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어쩐지. 에바 초호기가 나를 싫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토록 상냥하고 부드러운 형이 어디있냐고. 그런데 이 녀석... 자세히 보니까 수컷 맞네. 천막 안을 살펴보니, 세린은 아직까지 잠에 빠져 있었다. 누나와 마찬가지로 묘하게 아침잠이 많은 녀석인지라 항상 이렇게 늦게 일어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이번에도 역시나 마찬가지. 미인은 잠꾸러기라는 말이 있긴 한데, 그 말을 적용시키면 어울릴지 모르겠다. 예쁘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나 성격이 좀... 아침부터 답답하게 고구마와 감자를 먹는 나와 아리아. 도중에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얼굴로 움막에서 기어 나오는 세린이 우리들을 보면서 한마디 한다. "... 초호기는?" "여기 있어." 바로 옆에서 감자를 얌냠쩝쩝 섭취하고 있는 초호기. 반사적으로 녀석을 안아 든 세린이 자신의 품으로 가져가면서 초호기의 등을 쓰다듬 쓰다듬 해준다. 어지간히 정이 든 모양이다. "너, 집에서 고양이 같은거 기른 적 있어?" "고양이는 아니고 개는 기르긴 하는데." "그래?" 내 예상이 통했나보다. 고양이에서 개로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기른다고 하지 않는가. 나의 추리력은 아직 죽지 않았다. 이거, 이렇게 계속 가다간 나중에 추리소설의 주인공으로도 발탁될 수 있겠는걸. 아침 식사를 간단하게 마친 우리들. 몸을 이리저리 풀고 정신도 차릴 겸 간단한 세수를 한 다음에 다시 난파선 앞에 선다. 바다에 떠다니던 갈매기들이 난파선 주변을 맴돌면서 까마귀처럼 소리를 내지른다. 한눈에 봐도 유령선 잔해로 밖에 보이지 않는 으스스한 모습. 겉으로 봐도 이 정도의 위엄이 느껴지는데 안은 어떻겠는가. 그래도 난파선 안에는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이 많이 놓여져 있다. 확인은 해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많이 있을 것이다. 남자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자, 가보자." "... 또 가는거야?" 질색을 표하는 세린과 아리아. 물론 나도 가급적이면 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이것도 다 우리들이 편하자고 하는 짓이니까 말이다. 개인적으로 공구들과 재료들이 있다면 앞으로 편하게 남은 작업들을 할 수 있기도 하고, 그리고 행여나 더 만들어야 할 시설들 같은 경우에도 손쉽게 만들 수 있으니까 말이다. 두번째 탐험의 시작. 난파선 탐험 이틀째를 알리는 발걸음을 처음으로 떼기 시작한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내가 선두에 서고, 아리아와 세린이 뒤를 따라오는 형태로 난파선 내부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여전히 어두운 실내. 그러나 어제의 우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양초'라는 수단이 있기 때문이다. 횃불에 비해서 그 밝기가 미약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편 아닌가. 난파선에 들어간 뒤에 비닐을 뜯고 난 후. 양초의 심지에 불을 붙여서 점점 더 내부로 들어간다. 어제 지도를 보고서 되지도 않는 영어를 간신히 해석한 끝에. 이 근처에 배의 엔진을 관리하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난파선에 들어가고 나서 최하층에서 대략 2개층을 올라간 높이 부근에 있다고 나온다. 복잡한 설명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름 가장 간략하고도 깔끔하게 설명한 것이다. 결코 내 언어능력이 부족해서 그런것이 아니다. 외국어 능력은 많이 부족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여전히 으스스한 곳이네요." "그러게." 아리아와 세린이 제각각 말을 주고 받는다. 우리들이 이런 식으로 담화를 나누는 소리 조차도 실내에 반사되고, 반사되서 크게 울린다. 마치 동굴에 들어온 듯한 싸늘함. 천장에서 바닷물이 한 방울, 두 방울 씩 떨어지는 소리 역시도 약간의 음산함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또각또각. 우리들의 발걸음 소리에 맞처서 울리는 소음. 계단을 오르고 올라서 도착한 기계실 앞에 마주선 나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해서 나이프가 허리에 제대로 꽂혀 있는지 다시금 확인한다. 어제는 에바 초호기와 같은 아기 고양이었지만, 혹시 모르지 않은가. 맹수가 여기에 자리를 잡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아기 고양이인 에바 초호기가 이 난파선 내부에 들어왔다는 소리는 적어도 다른 동물들 역시도 이 곳에 들어올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다. 설마 집채만한 덩치의 멧돼지는 아니겠지. 이런 좁은 곳에서 그런 녀석과 마주했다간 정말로 큰일이다. "이세린. 일단 초호기는 아리아에게 넘겨두고. 너도 혹시 모르니까 무기를 드는게 좋겠어." "왜?" "만약을 대비해서야." "... 알았어." 만약에 들짐승이 안에 있다면, 녀석과 싸우면서 동시에 여자들을 지켜줄 여유까진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세린에게 아리아의 보호와 같이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알려준 것이다. "일단 내가 먼저 들어가서 안전한지 확인하고 올게." "오늘따라 이상하게 많이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여주네요. 유에 선배."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고 하잖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그런 관계로 일단 나 혼자서 입성. 무슨 던전에 들어온 것 마냥 음침한 기운이 사방에서 몰아친다. 에전에 본 판타지 소설에서 이런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여기서 본의 아니게 쭉쭉빵빵 미인 악마와 계약을 해서 드래곤으로 환생을 한 뒤에 양산형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인 듯이 먼치킨 히어로가 되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그런 시나리오가 생각난다. 현실 불가능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대략 분위기가 그렇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꽤나 넓은 기계실의 내부. 엔진은 폭파되었는지, 아니면 여기저기 부딛쳐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꽤나 많이 파손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주변에 널려다니고 있는 나사들과 드라이버. 그리고 기름. "위험이 될만한 동물은 없는건가..." 여기저기 양초를 들고 주변을 살펴본다. 실내가 꽤나 넓기 때문에 세밀하게 살펴볼 수는 없지만, 이 정도 돌아봤으면 됐겠지 싶은 마음으로 입구로 다시 돌아온다. "오케이. 안전한거 같아." "가정법으로 말한다는 뜻은 제대로 모른다는 말이랑 같은 것이잖아." "확률상으론 거의 80~90%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 "... 뭐, 믿어보도록 하지." 속고만 살았는가. 이세린. 가끔은 남의 말도 잘 믿어달라고. 아무튼 이렇게 해서 기계실 내부로 향하게 된 우리들. 엄청나게 높은 천장과 복잡한 미로 형태로 만들어진 내부의 인테리어에 세삼 이 곳을 디자인 한 건축 설계사에게 존경심이 들기 시작한다. 어떻게 이런 구조를 생각해냈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장인들이 많은 모양이다. 바닥을 살펴보던 아리아가 특유의 무표정으로 대답한다. "여기라면 선배가 찾고 있을법한 재료들이 많이 있을 가능성이 커 보이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라고 말하자마자 케이블 타이 한 뭉치를 득템했다. 그리고 와이어 뭉치까지. 꽤나 도움이 될만한 물건들이 속속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내미는 것을 보니 나도 흐뭇한 마음이 든다. 난파선까지 온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할까. "선배." 도중에 아리아가 부르는 탓에 잠시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근처에 세린과 같이 행동하도록 지시를 내린 탓에 아리아와 세린은 2인 1개조로 재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물론 아리아의 품에 안긴 초호기까지 합하면 셋이지만 말이다. "왜. 아리아." "이런것도 가져가면 되나요?" 아리아가 나에게 보여준 것은 나사와 드라이버였다. 못과 망치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건 더 찾아보면 나올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없는 것 보다는 나은 편이겠지. "망치같은 것도 있으면 가져와." "다른 것들은요?" "적당적당히 골라도 돼. 한번에 많이 가져갈 생각을 하는 것 보다, 우리들이 현재 산장을 증축시키는데 필요할만한 재료들만 모으면 되니까." 어차피 다 찾는다고 해도 많이 가져가지도 못한다. 이쪽은 겨우 3명이니까 말이다. 굳이 많이 들고 가서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은 그다지 선택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어느것을 골라야 좋을지 대충 예시를 들어주며 아리아와 세린에게 설명해준다. 아무리 여자들이다보니 이런 쪽으로는 전혀 지식이 없어서 말이다. 역시 남자가 고생하는 역할을 이미 정해진 것 같다. ============================ 작품 후기 ============================ 갈라져라 리얼! 터져라 시냅스! 퍼니시먼트 디스 월드!! ... 아시는 분들은 아실만한 대사였습니다. 126화 기계실 내부를 적당히 둘러본다. 우리가 타고 온 여객선을 움직이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주는 거대한 엔진. 그러고보니 이 녀석을 보니까 어째서 난파라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대략 알 수 있을것 같기도 한다. 근처의 벽이 약간 그을린 자국들이 몇개 보인다. 분명 화재로 인한 자국들. 그리고 바닥에도 몇개 탄 흔적들로 보이는 작은 기계 부속품들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다. 난파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화재였단 말인가? 설마 배의 엔진실에 불이 붙어서 그 여파로 인해 난파라는 사건이 초래되었다 이런 시나리오는 아니겠지. 그렇다고 함부로 화재라는 재해가 난파의 원인이라고 단정짓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에 우리들을 태우고 지나던 여객선은 예상치 못한 태풍과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순수한 자연재해로 인해서 난파되었다는 가설도 예외로 돌려서는 아니된다. 태풍으로 인해서 배가 손상을 입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다른 요소들이 2차적으로 발발하여 난파라는 사건에 가속화를 더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아마도 화재 역시도 자연재해로 인한 여파가 아닐까. ...... ......... ..............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된 원인은 찾기가 함들다. 애초에 내가 화재나 배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일반 대학생이 알 수 있을법한 상식 선에서 추측하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단 하나. 우리들은 MT 여행 도중에 타고 있었던 여객선이 커다란 사건으로 인해 난파되었고, 결국 이렇게 무인도에 표류되었다는 결과 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기계실에서 대충 얻은 재료들은 드라이버, 나사, 와이어, 케이블 타이, 못과 망치 기타 등등. 와이어와 밧줄만 있어도 어느정도 증축은 가능하니까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보여진다. 일단 다시 난파선에서 나와 우리들이 구한 재료들을 움막에 내려놓고 다시 2차 진입. 자연스럽게 세린의 불만이 튀어 나온다. "또 들어가는 거야?" "그런 셈이지." "구할 건 다 구했잖아. 이제 산장으로 돌아가면 안되는거야?" "기왕 난파선에 왔으니까 좀 더 둘러보는게 좋잖아. 뭔가 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인간의 욕망이란 정말 무섭구나." "욕망이 있었기에 인간이 지구상에서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 거라고." 사실 난 그렇게 욕심쟁이가 아닌데 말이다. 뭔가 또 아이템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난파선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고자 하는 의도가 가장 크다. 저렇게나 넓은 규모를 자랑하니까 분명 또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한숨을 쉬면서 다시 내 뒤를 따라 나서는 세린. 아리아 역시도 잠자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같이 발걸음을 돌린다. 지도를 확인한 결과. 어제 우리들이 선장실과 식당을 살펴봤던 갑판 바로 아랫층은 선원들이 숙박하는 장소로 판명되었고, 나머지는 기계실과 상황실 기타 등등이 위치하고 있다. 가만. 상황실이라면, 친척형에게 들은 적이 있다. '난 통신병이라서 상황근무병으로 일했지.' '상황실에서 무슨 일을 하는데?' '중요한 일이야.' '...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중요한 일인데?' '아무튼 중요한 것이지. 몰래 잡지를 읽거나, 잠을 자거나, 당직에게 뽀글이를 부탁해서 먹던가 등등.' '참 중요한 일을 해내셨구만.' 그리고 대화는 이게 끝이다. 도대체 어떤 면을 봐서 상황실에 대한 중요성을 알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부연설명을 해보자면, 친척형이 '통신병'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고 싶다. 매번 군무에 쩔어 살던 군생활을 펼치던 나였기 때문에, 통신병이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를 하는 지에 대해선 잘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통신병이 대략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일반인들도 쉽사리 알 수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통신'을 담당하는 보직 아닌가. 상황근무라는 말은 아마도 통신 대기를 뜻하는 것일테고.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상황실이라는 곳은 '통신장비'가 있다는 말과도 같이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외부와 연결할 수 있는 통신장비들이 있는 곳. 운이 좋다면, 아직까지 제대로 기능을 하는 장비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상황실로 가는 건가요?" 내 옆에서 어깨 너머로 지도를 보던 아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굳이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사실을 토로할 뿐이다. "아무래도 통신 시설이 있을만한 가능성이 가장 크니까." "상황실이라는 곳이 통신 장비가 모여있는 곳인가요?" "친척형에게 들은 적이 있거든. 나도 얼추 알곤 있지만, 자세히는 잘 몰라. 상황실이랑 친하게 지냈던 보직을 맡은 게 아니었으니까." "도움이 많이 되시는 친척형님이시네요." "나도 설마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어."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혹은 앞으로 군대에 갈 나이였을 때에는 사실 친척형에 대한 군대 일화는 그다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맨날 얼굴을 마주할때마다 말하는 것이 군대이야기 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여자는 아니지만, 왜 여자들이 예비역과 사귀면 군대 이야기를 싫어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을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군대를 갔다 오니까, 친척형의 기분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후배에게 군대에 대한 일화를 주구장창 늘어놓고 싶은 그 기분 말이다. 참고로 군대 이야기보다 더 싫어하는 것은 군대에서 축구하던 이야기라고 한다 새겨듣도록 하자. 아무튼 가볍게 잊어 버릴뻔 한 입 가벼운 친척형의 도움으로 인해 상황실로 향하게 된 우리. 내부의 복잡한 미로같은 구조도 이제는 익숙하게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친숙해졌다. 이러다가 난파선이 마치 내 집인 양 머물게 될 수도 있다는 기분마저 든다. 상황실의 위치는 그리 멀지 않다. 기계실 바로 윗층. 한계단 올라간 우리들은 곧바로 상황실을 찾은 다음에 내부로 들어간다. 여기저기 진열되어 있는 다수의 통신장비들. 생전 처음 보는 특이한 형태의 전화기도 있고, 영화에서 자주 보던 무전기도 몇개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같이 불이 꺼진 상황. "역시나 한번 침수되었던 난파선이라 그런지 전기나 베터리는 이미 나간 모양이네요." "조금 김이 빠지네." 아리아의 말에 세린이 한숨을 쉬면서 어느새 안고 있는 초호기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기분 좋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동시에 '야옹~'하는 앙증맞은 소리를 내는 초호기.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상황실의 장비를 전혀 쓰지 못한다는 것은 아리아의 말 그대로 약간 기운이 빠지는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혹시 여분의 베터리 같은 것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는 없을까?" "베터리요?" "그래. 양초같이 비닐이나 이런 걸로 보관되어 있을지도 모르지나. 베터리 같은 것이." 추측삼아 말해본 것인지만, 전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라고 본다. 언제나 바다 위에 떠다니는 여객선. 침수까지는 아니더라도 항시 방수에 대한 대비는 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걸 대비해서 베터리의 여유분을 미리 방수처리 해둔 것이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 것이다. 고민하던 아리아가 자신의 은발의 머리 끝을 검지 손가락과 엄지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비비면서 나의 질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내놓기 시작한다. "생각해보면 전혀 가능성이 없지 않을것 같기는 해요." "그렇지?" "하지만 문제는 그 방수처리 된 베터리가 괴연 어디에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인데요." "그런가..." "그리고 다른 문제점을 굳이 지적해 본다면, 방수 처리는 그렇다고 해도, 방전되었을 가능성도 크잖아요." 전기 제품이 물에만 약한 것은 아니다. 방전 역시도 마찬가지. 게다가 베터리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기계들이 물에 한번 잠겼던 상황인지라 제대로 작동이 될 지에 대한 확률 역시도 미지수다. 여러가지로 골치아픈 가설만 나올 뿐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찾아보는게 좋잖아." 의외로 세린이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언제나 부정적이고 남의 말에 태클 걸기를 좋아하는 녀석이 왠일로 희망에 넘치는 대사를 하는 것인가. 조금은 놀랍다. "뭐야. 사람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생각한 말을 그대로 입 밖에 꺼냈다간 또다시 세린에게 잔소리를 들을거 같아서 그대로 봉인하도록 하자. 아무튼 세린의 말 그대로 일단은 찾아보기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실천에 옮기는 우리들. 처음보는 통신장비들이 워낙 많은지라 어떤게 어떤건지 구분이 잘 안간다. 오죽하면 이것이 베터리인지 아니면 기계 장치인지 조차도 구분이 안될 정도니까 말이다. 친척형에게는 미안하지만, 무인도로 형을 소환하고 싶을 정도의 기분이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형. 군대 이야기 밤새도록 들어줄 테니까 이쪽으로 오면 안될까. ... 안되겠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하고, 그리고 온다고 해도 왠지 다른 여자들이 싫어할거 같은 기분이 든다. 특히나 이세린. 만약에 이 이상 남자가 더 늘어난다면 아마 녀석은 입에 거품을 물고 정말로 살기를 가득 띄운 채 나와 친척형을 제거하려고 난리를 피울게 분명하다. 이 섬에 남자가 나 혼자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시끄러운데, 두명이면 얼마나 더 골치아플까. ============================ 작품 후기 ============================ 슬슬 예비군 훈련 시즌이 다가오는군요. 얼마 안 되는 기간인데, 왜 이리 귀찮게 느껴지는지...;; 127화 찾고 또 찾아봐도. 보이는 건 검은 상자 뿐이요. 정체불명의 기계 덩어리가 전부이니라. 컴퓨터가 가끔 고장날 때 본체를 뜯거나 하는 그런 버릇이 있는 나였지만, 이 정도로 다량의 기계장치들을 보면 기가 눌릴 정도다. 더욱이 전부 다 처음 보는 것들 뿐이니. 이것이 통신 장비가 맞는지 아닌지도 햇깔린다. "... 그냥 포기할까." "나중에 다시 오는게 좋겠네요." 아리아도 지쳤는지 내 말에 공감한다는 뜻으로 말한다. 세린은 이미 포기한지 오래고 에바 초호기와 같이 장난을 치면서 딴짓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포기가 빠른 여자고만. "유에~ 빨리 나가자. 난파선에 도대체 얼마나 오래 있을 생각이야." "곧 나갈테니까 준비해." "나갈거면 진작에 나갔어야지." "그동안 우리들이 통신 장비를 찾았던 일을 헛수고로 만들지 마. 이세린." 농땡이를 피우고 있었으면서 불만은 가장 크게 말한다. 누나같은 심보가 벌써 세린에게도 전염이 된 것일까. 아리아에 이어서 이제는 세린까지라니. 무섭도다. 유린 바이러스. 세린의 볼멘소리를 BGM 삼으면서 결국 나오게 된 난파선. 그렇게까지 어두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아까에 비해서 햇빛의 양이 줄어들은 것은 명백하다. 벌써 저녁이라서? 그건 아니다. 하늘에 구름이 점점 모여드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소나기같은 것이 내릴 징후가 보인다고 판단된다. "야단났네." 내 말을 시작으로 한 방울씩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내가 무슨 기우제를 지낸 것도 아니고. 말이 끝나자마자 비가 내려오냐. 하늘도 참 원망스럽다. 그나저나 하늘을 원망하는 일은 잠시 미뤄두고, 정작 우리들의 현재 상황을 신경쓰는게 가장 좋지 않은가. "아무래도 움막에서 자는건 무리겠죠? 유에 선배." "그렇겠지. 대충 바람막이 수준으로 만든 움막이니까. 비를 막는데는 한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렇게까지 많은 비가 내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비조차도 움막은 제대로 막아주지 못한다.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서 바닷바람이나 피하고자 대충 만든 움막인데, 생각지도 못하게 비와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산장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적어도 여기서 산장까지의 거리는 3~4시간. 한마디로 말해서 지금 산장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그 시간동안 비를 맞고 가야 한다는 이야기와도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비를 맞으면서까지 산장으로 가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큰 행동. 감기에 걸릴수도 있고, 그리고 지금은 비가 적게 오지만 나중에 태풍같은 수준의 강풍과 소나기를 동반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일기예보를 듣지 못하는 이상, 항상 날씨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현재 이 방법밖에 없다. "오늘은 난파선에서 밤을 보내는게 좋겠지?" "역시 그 방법밖에 없겠네요." 세린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은 현재 이 난파선 내부밖에 없고, 그리고 세린 일행이 우리들과 만나기 전에 실제로 이 난파선에서 생활했던 경험이 있으니까 전혀 머무르지 못할 정도의 수준을 자랑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자고 간다고?" "어쩔 수 없잖아. 그렇다고 비를 맞으면서 바깥에서 잘 수도 없는 노릇이고." "... 불가항력이라면 어쩔 수 없지." 고귀하신 세린 여왕님께서도 납득하셨다. 다행이라고 봐야 하는건가. 그것보다도 우리들 중에서 그나마 이 난파선 안에 머무르는 경험을 수치로 표현한다면 가장 높은 사람이 바로 이세린 아닌가. 그런데 이 세명 중에서 가장 난파선에 머물기를 싫어하는 인물도 이세린이다. 조금 모순되는 말일지도. 움막에서 놓아두었던 재료들을 싸그리 가방에 담아 챙겨온다. 그리고 나서 예전에 세린과 지아 선생님, 체리가 머물렀던 그 방으로 향하는 우리들. 도중에 가는 길이 조금 복잡해서 그렇지, 한번 익숙해지면 이것도 나름 괜찮다고 보여진다. 난파선이 아랫부분이 아니라 갑판 윗부분이 남아 있었다면 그 곳에서 거처를 마련하고 살아도 될 정도의 쾌적함을 자랑할텐데. 약간 아쉽지만, 그래도 현재에 만족해야 하는게 가장 좋다고 본다. 방문을 닫고 내부로 들어온 우리들. 창문 바깥에 보이는 빗방울은 아까에 비해서 더욱 거세지기 시작한다. 공격력 업그레이드라도 했나. 꽤나 막강한 모습을 자랑한다. "생각보다 빗줄기가 쎄네요." "또 태풍이라도 온 것은 아니겠지?" 아리아와 세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창문 바깥을 바라본다. 확실히 저번에 내렸던 빗줄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크고 아름다운 빗방울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산장에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괜찮겠지. 무인도에서 3년을 넘게 버텨온 집인데 이런 비에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거라 예상된다. 어두워진 하늘 탓에 제대로 된 시간을 확인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나에게는 지아 선생님이 준 손목시계가 있기 때문에 아주 정확한 시간을 알아낼 정보통을 확보할 수 있었다. 현재 시각. 오후 4시. 어느새 점심 시간이 훌쩍 넘어버린 이 상황에서 저녁 겸 점심을 먹기로 한 우리들은 어제 저녁에 미리 구워둔 고구마를 꺼내서 각자 2개씩 배정받았다. 화로는 만들 수 없는 상황. 난파선에 괜히 불을 피웠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불을 피울 필요도 없이 양초들이 있으니까 어둠에 대한 내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작은 방에서 오손도손 모여 앉은 우리들. 오늘로 이틀째고, 내일 꼬박 3일을 채우게 되니까 산장으로 복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비가 그치지 않는다면 조금 문제가 될 수 있다. 거센 비바람을 뚫고 산장까지 가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상황. 문제는 이 비가 오늘까지만 주구장창 내리다가 그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결국 비바람이 그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장기 레이스가 될 것인가. 그렇게 되면 조금 난감하다. "선배. 이 비가 그치지 않으면 산장으로 못가는 것이죠?" "아마도 그러겠지." 아리아도 얼핏 우리들의 상황에 대해서 눈치챈 모양이다. 비를 피하고 멈출때까지 기다린다는 지구전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가장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것은 바로 식량 문제다. 3일치 식량밖에 가지고오지 않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결국 여유롭게 비를 피하며 난파선에서 대기를 해야 하는 시간적인 상황은 없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식량이 떨어지게 된다면 이 빗속을 뚫고 가야지." "가급적이면 오늘 안으로 비가 그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건 나도 공감이야." 굳이 아리아가 자신의 의견을 들려주지 않아도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바깥 창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세린이 아리아가 앉아있는 침대의 옆에 걸터 앉는다. 무릎에는 에바 초호기를 올려두고 고양이와 쎄쎄쎄 놀이를 하는 중. 초호기의 눈에는 졸음이 가득하지만, 세린은 상관 없다는 듯이 초호기와 노는데 열중한다. 그런것을 동물학대라고 하는 거라고. 이세린. "아 맞다. 한가지 물어볼게 있는데." "뭘?" "여기, 화장실은 어디있어?" 내 질문을 받은 세린이 손가락으로 방의 오른쪽 공간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기에 있어." "화장실에 방 안에 있는거야?" "애초에 여기는 선원들이 숙박시설로 사용하던 방이야. 간이 화장실이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셈이지." "그렇겠네." 화장실이 방 안에 있다는 사실 하나는 다행이라고 여겨진다. 괜히 바깥에 나가서 어두운 실내를 돌아다닐 필요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로 난 잠시 화장실에 갔다 올게." "굳이 화장실 가는 것까지 일일히 보고 안해도 되는데." "왠지 하고 싶어서." "......" 양초를 몇개 더 까서 화장실 문 근처에 놓아둔다. 어차피 가방 안에 양초들이 많이 있으니까 더 사용해도 무리는 없겠지. 산장에 들고 가서 사용해볼까 라는 생각도 해봤는데, 어차피 산장 내부에는 화로기 있기도 하니까 굳이 사용할 용도는 없어보인다. 화장실 문을 열고 입성. 고급스러운 화장실의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심플하고 나름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것도 에전에 지아 선생님 일행이 청소를 해둬서 그런 것인가. 약간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그래도 좌변기가 어디인가. 무인도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사용해보는 이 좌변기의 감촉. 역시 최고다. 게다가 물까지 내려간다. 아무래도 배수 시설은 아직 망가지지 않은 모양. 이 좌변기를 떼어가서 산장 근처에 있는 화장실에 이식을 시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수도관이나 배수관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애초에 만드는 방법도 모르지만 말이다. ============================ 작품 후기 ============================ 어제 올렸던 편수 후기란에 적혀있는 대사를 아는 분들이 계실줄은 몰랐습니다. 헤헤헤. 다음에는 드래곤 슬레이브 주문이라도 적어봐야 할까요. 흠... 128화 볼 일도 다 봤고. 이제 슬슬 잠을 청해볼까 하는 마당에,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신의 농간인지 모르겠지만 침대가 2개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인 1실이었나. 이 장소. 기왕이면 침대가 3개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세상일은 역시 내가 원하는데로 흘러가지 않는게 정석인듯 하다. "어떻게 할래? 2개밖에 없는데." 세린의 질문. 내 의사를 존중해준다는 뜻은 아니고, 단순히 의견만 물어본 듯하다. "지아 선생님하고 체리랑 여기에 머무를때는 어떤 식으로 잤는데?" 나하고 체리가 같은 침대를 썼어. 그리고 지아 선생님이 다른 침대를 썼고." "그렇다면 너하고 아리아가 침대를 같이 쓰고, 나머지 하나는 내가 사용하면 되겠네." "이럴때는 '내가 남자니까 바닥에서 잘게!'라고 말해주었으면 했는데." "... 시끄러워." 세린이 유도했던 말은 내 입을 통해서 발설되지 않았다. 차가운 바닥에서 자는건 사양이라고. 모처럼 침대도 있는데 오랜만에 매트릭스의 푹신함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잠에 들고 싶단 말이다. 결국 같은 침대를 사용하게 된 아리아와 세린. 그런데 문제는 이 다음부터였다. "이 침대, 상당히 좁네요." 아리아의 말. 애초에 1인용 침대인지라 그 넓이가 꽤나 좁았다. 그나마 여자들이라서 한 침대에 두명이 잘 수 있는 것이지, 만약에 남자 두명이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좀 더 이쪽으로 오세요. 세린 선배." "응. 잠깐만." 세린의 금발과 아리아의 은발이 서로 같은 침대 위에서 아름답게 수를 놓는다. 정말 환상적이다. 금과 은의 조화라니. 게다가 두 미소녀가 같은 침대에서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깝게 신체를 맞대고 있다. 이것도 은근히... 좋은데. 이것이야말로 절경 아닌가. "그런데 조금 부끄럽네." "같은 여자끼리니까 괜찮아요." 약간 쑥쓰러운 표정으로 말하는 세린에게 아리아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한다. 지금 두 여자의 형국은 최대한 나란히 누워서 거의 몸의 절반이 맞닿은 상황. 그 사이에 부럽게도 에바 초호기 녀석이 끼어있다. 젠장. 부럽다고. 여자들의 가슴계곡 사이에 몸을 묻은 저 녀석이 정말로 부럽다. "유에 선배. 이제 슬슬 자도록 해요." "어? 어... 그럴까." 내가 일어나서 곳곳에 놓여있는 양초들의 불을 끈다. 어두워진 상황 속에서 다시 침대로 돌아온 나는 자리에 누운 채 맞은편에 있는 여자들에게 잘 자라는 신호를 남긴 뒤에 몸을 눕힌다. 덜컹이며 흔들리는 창문. 아직 저녁 9시 밖에 되지 않았지만, 가급적이면 최대한 많은 취침을 해두는게 좋다고 판단해서 일찍 잠에 들었다. 새근새근 들려오는 아리아와 세린의 규칙적인 숨소리. 아름다운 은발과 금발의 여신들이 같은 침대에서 꼬옥 껴안고 잠에 든 모습은 정말로 심신이 정화될 기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최고다. 만약에 카메라가 있었다면 몰래 찍고 싶을 정도로 정말 아까운 장면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아리아의 가슴 계곡에 작게 웅크리고 있던 에바 초호기가 몸을 비비적 거리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답답해서 그런 것일지 모르겠지만, 중요한건 그게 아니다. 에바 초호기가 몸을 뒤척일때마다 점점 이불이 아래로 내려가는거 아닌가! "냐옹~..." 오오. 잘한다. 에바 초호기. 좀 더 힘내봐! 희미하게 보이는 아리아와 세린의 가슴. 서로 마주보고 잠에 들었기 때문에 그녀들의 가슴이 맞닿아 있는 상황. 그 사이에 에바 초호기가 이리저리 뒤척인다. 그래. 조금만 더 폭주해봐! 싱크로율 400%를 달성해보라고! 부스럭 부스럭. 에바 초호기가 작은 발로 바둥바둥 거리면서 그녀들의 얼굴 위쪽까지 올라오는데 성공한다. 이미 이불은 허리까지 내려가있는 상황. 금발과 은발의 긴 생머리 뭉치 속에서 에바 초호기는 이것이 무엇이지? 라는 생각과 함께 자신의 몸을 머리카락으로 돌돌 말기 시작한다. "으음..." 머리카락에 대한 위화감이 느껴진 탓일까. 세린이 약간 몸을 뒤척이기 시작한다. 얼핏, 아주 얼핏 세린의 유두가 보였던 거 같은데. 그것보다도 세린 녀석, 은근히 가슴이 크다. 저번에 가위바위보 게임을 통한 왕게임에서 누드 차림을 봤을때도 생각 이상으로 글래머러스한 모습을 보여서 약간 놀란 일이 있었는데, 누워 있는 상태에서도 그 가슴의 위용은 여전히 사그러들줄 모른다. 역시 여자는 가슴으로 말하는 것이군. 진짜로 부럽다. 에바 초호기. 살짝 손을 아랫도리로 향하게 만든다. 이미 발기되어 버린 성기를 왼손으로 잡고서 이불 속에서 바지의 지퍼를 내리고 약간 힘을 주면서 성기를 움켜쥔다. 도저히 지금 상황에선 편하게 잠이 들 일이 없을거라 판단한 나는 결국 세린의 가슴을 반찬삼아 자위를 하기 시작한다. 성기를 잡고 흔들면 티가 날 거 같으니까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위험한 행동을 한다. 고르게 숨을 내쉬며 잠이 든 여자들을 바라보고 자위를 한다는 것도 생각보다 좋은 일이지 않은가 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남을 엿보면서 자기 위로 행위를 하는 취향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다 에바 초호기 덕분이다. 너 이 녀석... 파이팅! 내 응원의 힘을 받았는지 에바 초호기가 더더욱 바둥거린다. 어지간히 답답한 모양인가 보다. 저리도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니 말이다. 그래봤자 내 눈에는 작은 솜뭉치가 비비적 비비적 몸부림 치는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초호기의 발버둥에 의해 잠깐 움찔하는 세린. 가려움을 느꼈는지 자신의 쇄골 부근을 손으로 긁기 시작한다. "으으음..." 희미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초호기를 옆으로 내팽개치는 세린. 평소에는 그리도 초호기를 아끼고 귀여워 했으면서 잠버릇은 초호기에게 악의를 가지고 어택에 어택을 감행하고 있다. 불쌍한 초호기. 도와주고 싶지만, 지금 네가 있는 곳은 남자들에게 있어서 어떻게 보자면 성역이란다. 일명 카오스 생츄어리라고 해야 할까. 디아블로 2 엑트 4에 나오는 지역 이름이 아니다. 절대로. "... 야옹." 힘겹게 울부짖으며 또다시 세린의 팔에 깔려 발버둥치는 초호기. 마침 딱 초호기의 배 위에 세린의 팔이 올려져 있어서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나보다. 숨을 못 쉬는 정도는 아니지만, 아기 고양이인 탓에 조그만한 불편함도 금새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지 또다시 네발로 몸부림을 치기 시작한다. 세린의 팔에서 겨우 빠져나온 초호기. 녀석, 새끼 고양이 주제에 은근히 모험심이 뛰어나다. 나중에 크면 좋은 고양이가 될 지도. 동화속에 나오는 '장화신은 고양이'나 아니면 슈렉에 나오는 고양이 정도는 모델로 삼는게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말로 장화를 신고서 펜싱칼을 휘두르지 말고.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곤란하니까 말이다. 세린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초호기가 힘이 다 빠졌는데 호흡을 고르기 시작한다. 초호기의 활약(?) 덕분에 세린의 한쪽 가슴이 옷 바깥으로 드러난 상황. 왼쪽 유방의 핑크빛 유두가 상당히 탐스러운 모습을 자랑한다. 한 손에 딱 들어올 정도로 말랑말랑해 보이는 가슴. 손으로 만지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들지만, 그러다가 세린한테 걸리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겠다. 아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욕이란 욕은 다 얻어 먹겠지. 점점 성기를 감싸쥔 왼손에 힘을 가해본다. 자위 감상용으로 사용하기엔 정말로 더없이 좋은 풍경. 여성의 가슴을 보고서 흥분한 채 그대로 성기 끝에서 끈적한 정액이 발사되기 직전까지 오게 되었다. 황급히 이불을 걷은 다음에 오른손으로 정액들을 받아낸다. 도중에 바닥으로 몇방울 튀는 것도 있지만, 그건 가볍게 발로 비벼주며 흔적을 없앤다. 방 안에 진한 밤꽃냄새가 풍기기 전에 재빨리 식수통 하나를 챙겨서 바깥으로 나온다. 그리고 근처에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왼손을 씻어 내린다. 이것이야말로 증거 인멸. 완벽한 범죄의 현장이다. 대충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고 다시 자리에 복귀한다. 여전히 자신의 가슴을 위풍당당(?)하게 드러낸 채 잠에 빠진 세린. 초호기도 덕분에 잘 빠져나와서 옆에서 새근새근 잠에 빠지고 있었다. 이대로 놔둘까? 아니면 옷을 다시 제대로 고쳐 입힐까. ... 아니. 괜히 건들였다간 세린이 도중에 깨기라도 하면 귀찮은 오해를 살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애초에 내가 세린의 옷을 벗긴 것도 아니고. 스스로 벗은 거니까 나에게 죄는 없겠지. 그래도 어느 정도 양심은 있으니까 이불 정도는 덮어준다. 감기가 걸리면 큰일이니까. 나 역시도 이제 침대에 돌와서 잠을 청한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바깥에 강하게 몰아치는 태풍과 소음 때문에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할거라 생각했는데, 한번 뿐이었지만 방금의 자위 덕분에 잠이 잘 올거 같은 기분이 든다. 이것도 다 초호기 덕분이다. 고맙다. 에바 초호기. 나중에 상으로 엔트리 플러그라도 줄게. ..... ......... ............. 잠이 든 나. 분명 확실히 잠이 들었다. 어째서 알 수 있냐 하면 왜 그런 기분 있지 않은가. 자신은 분명 자고 있고, 지금 이 상황은 꿈이라는 그 생각 말이다. 한마디로 몽상속의 자각. 지금 나는 그것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째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 하면. 바로 내가 누워있는 장소가 구질구질한 좁은 선원실용 방이 아닌 대 자연이 부르는 넓은 초원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좋다. 그런건 다 좋단 말이다. 배경이야 어차피 꿈이니까 상관 없겠지. 자연이든, 아니면 우주든 SF에서 볼 수 있을법한 기계화된 문명이라든지 아무튼 그런건 제한이 없으니까 순순히 인정을 하겠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안녕? 인간." "......" 내 발 밑에서 귀엽게 손을... 아니, 앞 발을 흔들어 보이는 작은 고양이. 분명 에바 초호기다. 그런데 말을 한다. 그것도 고양이 말이 아니라 인간 말을. 게다가 빨간 장화까지 신고 있다. 내가 아까 녀석에게 장화신은 고양이를 모티브로 삼으라고 했던 말이 반영된 것인가? 그것보다도 너무 빠르잖아! "상당히 얼빵한 인간이네. 고양이 처음 봐?" "아니. 상당히 많이 봤는데." 묘하게 성격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녀석, 원래 이런 까칠한 성격이었나. 게다가 목소리는 약간 소년틱한 음성이 들린다. 분명 이 녀석은 수컷. 하지만 아직 유아기라서 그런지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높은 톤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단 생김새는 확실히 에바 초호기다. 그러나 말투는 어딘지 모르게 건방진 어투가 많이 느껴져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한번 확인해 보도록 하자. "이봐. 고양이." "왜." "너, 에바 초호기냐?" "... 그래. 마음에도 들지 않는 이름이지만, 일단 그렇다고 하지." "나름 정성들여 지어준 이름인데." "뭐가 정성을 들였단 말이야!" 내 신발을 '얍! 얍!'하며 앞발로 원 투를 날리는 에바 초호기. 그러나 아기 고양이의 공격 따위는 그리 위협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약간 불쌍하게 보인다고 해야 할까. 나도 모르게 동정심이 든다. 한동안 자기 나름대로의 열정적인 공격을 퍼부운 에바 초호기가 큰 일 했다는 듯이 이마에 땀을 훔친다. 그나저나 정말 해괴한 꿈이 다 있다. ============================ 작품 후기 ============================ 요새 들어서 다시 날씨가 추워지는 기분이 듭니다. 이럴때 걸리는 감기가 진짜 독한 감기라고 하던데... 여러분들도 건강관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129화 산뜻한 초원의 바람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간다. 전에도 말했지만,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다. 어떻게 알 수 있냐고? 꿈이 아닌 이상 에바 초호기가 인간의 말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만약에 에바 초호기가 꿈에서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인간의 말을 했다면 그건 어마어마한 뉴스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런 수준의 지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바로 동물이다. 일단 한쪽 무릎을 꿇고서 에바 초호기를 내려보는 나는 녀석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이봐, 초호기." "그런 메카닉 느낌이 물씬 나는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그럼 뭐라고 부르는게 좋아?" 녀석에게 우선 개인의 의사를 물어보도록 하자. 도대체 왜 내가 지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아직 풀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물어보는게 예의겠지. 헛기침을 하던 초호기가 자신의 가슴을 앞발로 몇번 탕탕 두드리며 말한다. "황제." "에바 초호기에서 에바 양산형으로 강등시켜 버린다." "노, 농담이야! 인간이란 정말. 속이 너무 좁다니까..." 야옹 거리면서 내 말을 부정하는 초호기. 애완동물은 주인을 닮는다고들 하지 않는가. 점점 이세린의 말투를 닮아가는 녀석을 보니 나중에 산장으로 돌아가면 세리아에게 이 녀석을 돌보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한다. 뭐든지 조기 교육이 중요하니까. 괜히 세린이 데리고 있다가 나중에 물고기를 줘도 '싸구려 붕어는 먹지 않을거야!'라는 행동을 취하면 곤란하니까 말이다. 적어도 세리아의 얌전하고 고분고분한 태도를 본받으라고. 아무튼 그건 가볍게 넘기고. 눈앞에 있는 정체불명의 말하는 고양이, 에바 초호기와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자. "여긴 내 꿈속이지?" "보면 알잖아." "그래도 확인 차원으로 물어본 것이니까 성실하게 대답해줬으면 좋겠는데." "... 맞아. 여긴 네 꿈이야." 내 말에 약간 겁을 먹었는지 몸을 살짝 움추리며 대답하는 에바 초호기. 가뜩이나 몸집도 작은 녀석이 몸을 웅크리니까 더 작아보인다. 여자들이 왜 고양이에 그리도 열광하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거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아니, 그건 간단하게 생략하고. "그런데 왜 네가 내 꿈에 온거냐." "그거야 당연히 '길 안내'를 하기 위해서지." "길 안내라고?" "그래. 마왕을 쓰러뜨리기 위한 길 안내." "도대체 뭐냐. 어떤 B급 게임 시나리오 필이 충만하게 느껴지는 그 간단하디 간단한 설명은." "아무튼 너는 마왕을 죽이러 가야 해!" "어째서?" "그냥." "참으로 단순한 이유네." 그냥 곱게 지내게 해주면 안되냔 말이다. 꿈에서까지 이런 말도 안되는 괴생명체 고양이랑 만나서 이야기를 주고 받는 거 자체도 신기한데, 이제는 마왕을 쓰러뜨려야 한다니. 조금은 내 사정도 봐달라고. 그래도 왠지 에바 초호기가 가만히 놔둘것 같지는 않아서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이 곳이 어떤 설정으로 되어 있는지나 한번 물어보도록 하자. "튜토리얼 설명 좀 해줘." "튜... 뭐??" "튜토리얼 말이야. 처음에 시작할 때 간단하게 시작하는 설명 있잖아." "그게 뭐야?" "... 아니다." 고양이 지식에 대해 더이상 큰 기대를 가지지 말자. 오늘의 교훈이다. 기억해두도록. "유에, 너는 동료들을 모으고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에 있는 마왕의 집에 가서 녀석을 쓰러뜨려야 해." "잠깐만. 배경은 판타지인데 어째서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이 나오는거냐." "판타지라고 꼭 지역명이 영어나 간지나는 명칭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 그렇긴 하지만." 아니, 적어도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이라는 대한민국의 지역 명칭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장소라면 그에 합당한 도시의 모습을 해야 하지 않는건가? 그런데 왜 판타지 세계처럼 중세시대 건물로만 이뤄진 마을밖에 없냐고. 청주시는 어디갔냐. 대한민국의 교육의 도시라며. ... 괜히 내 꿈에게 태클을 걸지 말자. 이 꿈의 주인이 누구인가. 바로 나잖아. 결국 누워서 침뱉기 같은 꼴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 결국 내 상상력은 이게 한계라는 말이겠지. "자, 그럼 나를 따라와." 라고 말하면서 쫄래쫄래 네발로 움직이는 초호기. 어쩔 수 없이 머리를 긁적이며 그 뒤를 따르게 된다. 이것도 다 인과응보라고 하지 않는가. 귀찮지만 어울려주도록 하자. 마을로 도착한 우리들.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이라는 마을은 그저 이름만 복대동이고 단순한 판타지 세계의 마을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도시의 입구에 당당하게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이라고 써져있는 모습은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꾸는 꿈이지만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앞으로 조금 더 상상력을 키우던가 해야겠다. 아무튼 초호기와 마을로 입성한 나. 그러자 중간에 상당히 익숙한 인물의 모습이 보인다. "늦었잖아. 유에." "유아 선배. 그리고... 노아 교수님?" 말 그대로 상당히 익숙한 두 여자가 마을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복장이 좀... 유아 선배의 경우는 기사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갑옷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온 몸이 철로 무장된 그런 류의 갑옷이 아니라 어느정도 적당한 노출도가 있는 그런 복장 있지 않은가. 온라인 게임 보면 여기사가 입고 있는 그런 복장들. 배꼽과 허벅지가 훤히 드러난 상태의 유아 선배. 허리에는 작은 롱소드 비스무리한 검을 차고 있었다. "난 여기사, 유아라고 해." "... 캐릭터 설명인가요. 이거." "시끄러워. 잠자코 듣기나 해. 그리고 이쪽은 마법사인 노아 교수님." "마, 마법사야..." 자기 자신도 말하고서 약간 창피한지 얼굴을 붉히는 노아 교수님. 거의 30대가 다 되어가는 나이를 바라보고 있는 교수님인데 옷차림은 상당히 가관이다. 차이나 드레스라는 복장을 아는가? 옆트임이 상당한 옷으로 알려진 그런 종류같은 의류를 착용하고 있는 노아 교수님. 그 풍만한 가슴은 타이트한 상의 덕분에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바스트를 자랑하고 있었다. 역시나 노아 교수님의 글래머러스한 몸매는 어딜가도 숨길 수 없는 인류의 희망이자 보물인 것이다. "그런데 왜 두 사람이 여기에 있는건가요?" "글쎄. 마왕을 무찌르라는 임무를 가지고 왔는데." "... 오호라." 대충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지 알 수 있었다. 에바 초호기가 나에게 말했던 동료들은 바로 나와 같이 무인도에 머물고 있는 여자들이고, 그리고 그녀들을 데리고 같이 마왕을 쓰러뜨리고 이 세상의 평화를 가져온다는 그런 진부하디 진부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었다. 가만. 유아 선배와 노아 교수님이 직업이 있다는 말은 나 역시도 직업이 있다는 뜻과도 같은거 아닌가? "이봐. 에바 초호기." 옆에서 뒷발로 머리를 긁적이던 초호기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왜?" "나도 직업이 있는거야?" "그게 뭔데?" "유아 선배처럼 여기사 라든지. 아니면 노아 교수님 처럼 마법사라든지. 그런거 말이야." "그럼 넌 검사 하면 되잖아." "... 때린다." "때, 때리지 마..." 자신의 앞발로 머리를 감싸면서 또다시 몸을 웅크리는 초호기. 괜시리 미안해지게 이런 반응을 보여주다니. 약간 반칙이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는 초호기가 이제야 기억났다는 듯이 말한다. "맞아. 네 직업은... 그거였어?" "그거라니. 전사?" "아니." "그럼 검사?" "그것도 아니야." "도대체 뭐야." "대학생." "... 뭐라고?" "그러니까 네 직업은 '대학생'이라고."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판타지 세계의 직업들이 나열되고 있다가 왜 나한테는 지극히 현실적인 직업을 부여하는거냐. 그렇다고 내가 대학생이라는 직업을 부정하기도 참 뭐하다. 왜냐하면 실제로 대학생이 맞기도 하니까. 그런데 판타지 세계에서는 대학생이라는 직업이 없잖아! "이봐. 에바 초호기. 지금 당장 이 시나리오를 짜낸 사람한테 가서 나에게 제대로 된 직업을 선사해달라고 교섭해봐." "무슨 소리야. 이 꿈의 주인은 바로 너잖아." "......" 나는 꿈속에서까지 내가 대학생임을 자각하고 있다는 뜻인가. 조금은 서글프게 느껴진다. 꿈도 희망도 없는 대학생일 뿐이라니. "알았다. 그건 넘어가고. 나도 무슨 스킬명이라든지 그런게 있는거냐?" "있겠지?" "확인해볼 수 있어?" "스킬창을 띄워봐." "잠깐만. 이거, 게임 판타지였냐?" "그런 식으로 설정되어 있더라고." "......" 그러고보니 내 머리 위에 레벨과 '유에'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어느샌가 이 꿈의 세계가 게임 판타지라는 설정으로 뒤바뀌어 있다니. 역시나 꿈의 세계.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위엄을 자랑한다. 그래봤자 꿈이잖아. 아무튼 스킬창을 열어서 내가 보유하고 있는 스킬들을 확인해본다. 첫번째. 담벼락 넘기 스킬. ... 뭐냐. 이 스킬명은. "에바 초호기. 이 스킬에 대해서 설명 좀 해봐." "귀찮게 시리." "또 때린다." "... 지각을 면하기 위해서 순간적인 근력을 키워 점프력을 통해 담을 넘어가서 지각을 면하게 해줄 수 있는 스킬이라고 아주 친절하게 설명이 되어 있어." "한마디로 줄여서 말하자면 그냥 쓸모없는 스킬이라는 뜻이네." 뭐, 좋다. 어떤 의미로는 대학생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필수적인 스킬이 맞긴 하니까 말이다. 이런 개그 코드같은 스킬 정도는 있을 수 있지. 나도 이해한다. 그럼 두번째. 수업 도중에 교수님에게 들키지 않게 하면서 몰래 잠자기. 이건 굳이 초호기에게 스킬명 설명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보다도 도대체 왜 이딴 스킬밖에 없냐. 그래. 이것도 넘기자. 담벼락 넘어가기 스킬도 있는데 교수님한테 들키지 않고 몰래 잠자기 스킬이라고 없겠는가. 이것도 나름 대학생 스킬이 맞긴 하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기자. 세번째 스킬. 교수님에게 최면을 걸어서 휴강을 만들어내는 스킬. 오! 이런 유용한 스킬이... 가 아니라. 현실세계에선 절대적으로 필요할지도 모르겠지만, 판타지 세계에서는 전혀 아니잖아. 스킬창을 연이어 넘겨보니, 다른 스킬들의 모습이 보인다. 예를 들자면, 'MT에서 복학생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스킬'이라든지, 아니면 '소개팅에서 인기있게 만드는 스킬'이라든지, 또 '배 아픈 척 연기하기 스킬' 등등이 써져있다. "지금 장난하자는 거냐!!!" 결국 폭발. 참다참다 못해 이런 직업은 처음본다. 이런 스킬로 도대체 어떻게 마왕을 쓰러뜨리라는 말이냐. 마왕의 정체가 시험이라도 되냐?! "정말 도움이 안되는 스킬밖에 없네." 유아 선배도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한다. 이번만큼은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몬스터를 때려 잡을만한 스킬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들. 혹시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가 하는 생각으로 유아 선배에게 물어본다. "선배. 스킬창 좀 확인할 수 있을까요?" "언제든지." ============================ 작품 후기 ============================ 전설의 꿈 이야기 에피소드입니다. 한때 게임 판타지를 쓰고 싶었던 욕망을 가진 과거의 제가 쓴 에피소드입니다만... 타임머신이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서 말리고 싶은 기분이 살짝 들었습니다. 별로 재미없는 구간이므로 빨리빨리 올려서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130화 유아 선배의 바로 앞에 생긴 반투명의 창을 손으로 누르자, 앞에 스킬창이 뜨기 시작한다. ...... 스매쉬. 허리케인. 배쉬, 강타, 기타 등등등... 제대로 된 스킬명들이 나오고 있었다. 역시나 여기사. 근접전에 특화된 스킬명들이라고 느껴지는건 당연지사라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노아 교수님 것도 확인하고 넘어가야겠지. "교수님. 잠시만요." 마찬가지로 교수님의 캐릭터 창을 띄워본다. 파이어 볼, 아이스 볼트, 라이트닝 스피어 기타 등등등. "장난하자는거냐! 초호기!!" "그러니까 나한테 따져봐도 소용 없다니까." 이 세상의 어느 온라인 게임을 찾아봐도 나같이 쓸모없는 직업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이 것이 판타지 온라인이 아니라 현실세계 온라인이었다면 내가 최강일지도 모르지만, 여기는 몬스터를 때려 잡고, 최종적으로 마왕을 쓰러뜨려야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게임이지 않은가. 이런 생활의 달인같은 스킬은 필요 없다고. 그러나 내 기분따위는 아무렴 상관 없다는 듯이 말을 걸어오는 초호기. "자, 이제 몬스터를 잡으러 가자." "벌써?!" "마왕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레벨업을 해야지. 레벨업을 하기 위해서는 사냥을 해서 빨리 경험치를 올리는게 당연하잖아." 어찌보면 상당히 정석적인 답변이었다. 확실히 온라인 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을법한 패턴. 일단 NPC로부터 퀘스트를 받고 바깥으로 나가서 몬스터를 때려 잡으며 경험치를 올리면 레벨업이 되는 것이다. 이 말도 안되는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빨리 마왕을 쓰러뜨리는 것이 여러모로 좋겠지. 여기사인 유아 선배와 마법사인 노아 교수님, 그리고 대학생인 나(...)까지. 3명은 파티를 맺고 근처에 불쌍불쌍 열매를 먹은 듯한 여리디 여린 소녀에게서 '몬스터가 제 꽃밭을 엉망으로 만들었어요. 복수해주세요!'라는 간략한 퀘스트를 받고 마을 바깥으로 나간다. 초반 몬스터답게 상당히 약해보이는 슬라임들이 즐비해있다. 얼굴 모양이 'ㅅ' 과 깉이 생긴 녀석들이 토실토실 뛰어 다니면서 마을 바깥을 활보하고 다닌다. 초보 레벨 몬스터라고 한다면 역시 슬라임이겠지. "자, 이제 사냥을 해볼까?" 등에 매달려 있던 대검을 양 손에 쥐어보이는 유아 선배.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지고 있던 롱소드는 어딘가 상점에 팔아버리고, 대검을 구매해서 좀 더 강해보이는 이미지를 연출한다. 처음에 유아 선배에게 굳이 왜 그런 커다란 검을 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해보았지만, 대답은 이랬다. '기왕이면 평소에 들 수 없는 대검을 사용해서 폼 좀 잡아보고 싶었거든.' 어차피 여긴 게임... 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자면 내 꿈속인지라 물리적인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여성의 근력을 가지고 있는 유아 선배라고 해도 지금은 기사라는 직업때문에 힘이라는 스탯이 꽤나 높게 찍혀 있다는 뜻과도 같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성인 어른 크기 그브이 대검도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있다는 의미. 평소에 저런 모습을 동경해온 것인가. 아니지. 여긴 내 꿈이니까 이것도 상상의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평상시에 내가 유아 선배를 보고 '괴력의 소유자'라는 암묵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나보다. 내 자신의 무의식이 조금은 무섭게 느껴진다. "그럼 일단 내가 탱커 역할이네?" "아무래도 그렇겠죠." "오케이. 먼저 선방으로 돌진할게!" 대검을 들고 앞에 놓인 슬라임을 향해 달려가는 유아 선배. 상당히 빠른 속도다. 현실 세계에서 볼 수 없을것 같은 비정상적인 움직임이다. 이것도 나름 꿈의 세계가 가진 매력이겠지. 현실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된다는 요소 말이다. "으랴아아압!" 대검을 머리 위까지 치켜든 유아 선배가 슬라임을 향해 내려친다. 쿠우웅!! 엄청난 소음과 함께 대지가 움푹 파인다. 그러나 움직임이 너무 큰 탓에 슬라임은 요리조리 선배의 공격을 피하면서 약을 올리듯이 주변을 서성일 뿐이다. "에잇. 귀찮게 정말!" 열받는다는 표정으로 이리저리 검을 휘두르는 선배. 본래 저런 식으로 두손 무기를 든 전사는 정확도와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빠르게 치고 빠지는 도적이나 암살자와는 달리 한방 한방의 위력은 강하지만 명중률이 심히 떨어지는 전사이기 때문에 슬라임의 움직임을 쉽게 포착할 수 없는 것이다. "노아 교수님! 마법을 써주세요." "아, 알았어." 주문 영창에 들어가는 노아 교수님. 쓸 마법은 '파이어 볼'. 농구공 같은 비슷한 크기의 불구덩이가 교수님의 손에 생성되더니 이내 슬라임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한다. 화르르르륵. 불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슬라임 구이가 되어버린. 녀석 아까 까지만 하더라도 'ㅅ'와 같은 표정을 지어보이던 녀석이 x_x로 되어버렸다. 죽어도 끝까지 귀여운 표정을 유지하다니. 녀석, 프로정신이 제법이다. 몬스터 치고는 그 정신 하나는 본받아야 할 기세다. 계속해서 유아 선배와 노아 교수님의 연계로 사냥이 이어져간다. 유아 선배의 공격은 여전히 맞지 않고, 대신에 선배가 슬라임의 움직임을 단순화 시키는 사이에 노아 교수님이 미리 패턴을 예측해서 불구덩이를 날리는 형식으로 파티 사냥을 계속 해가고 있는 모습을 유지해간다. 그나저나. 내가 가지고 있는 스킬이라고는 고작 대학생으로서 정말로 실생활에 유용한 스킬밖에 없는지라 그다지 사냥에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MP가 무지하게 남아돈다. 참고로 체력 역시도 마찬가지. 일단 무기를 들 수는 있는거 같기는 한데. 무기 이름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수학의 정석. ... 진짜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 이 세계를 만든 녀석아. 라고 해봤자 나구나. 선배와 노아 교수님이 협동 플레이로 슬라임을 사냥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도 옆에 있는 슬라임을 사냥해보기 위해 시도한다. 무기 '민법강의(民法講義)'를 들고 나서 슬라임에게 돌진. 천천히 녀석에게 다가가서 수학의 정석을 내리 꽂는다. 그러나 유아 선배의 공격을 피하듯이 내 움직임을 간파한 작은 슬라임이 혀를 내두르며 요리조리 피하기 시작한다. 몬스터 주제에 감히 플레이어를 농락해?" "오냐. 네가 나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이거지." 스킬을 발동. 일명, 담벼락 뛰어넘기 스킬이다! "이얍!" 스킬을 이용해서 일시적으로 다리의 근력을 높힌 나는 점프를 뛰어서 슬라임의 머리 위로 그대로 민법강의(民法講義)를 던진다. 그러나 이번에도 얍삽하게 피한 슬라임. 하지만. "그건 훼이크였다!" "!!!" 내 말을 듣고 놀란 슬라임. 저것이 놀란 표정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지만, 그냥 분위기상 그렇다고 하자. 아무튼 지면에 그대로 착지한 나는 또 다른 스킬, '10분 안에 강의실까지 뛰어갈 수 있는 스킬'을 발동시킨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 100미터 경기에서는 우사인 볼트에게도 질 것 같지 않을 포스를 내뿜을 정도로 빠르다. 보았느냐. 이것이 바로 지각을 면하기 위해 달려가는 대학생의 모습이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존재의 위엄을 느껴보도록 하여라. 이 슬라임 녀석아!!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능한 내 모습에 놀란 슬라임이 도망치기에 바쁜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흔히 저런 모습을 보고서 이런 말을 하지. 헛수고라고. 아이템 창에서 또다른 무기를 꺼내든다. 이름하여 '신민사소송법(新民事訴訟法)'책을 꺼내든 나는 그대로 슬라임을 향해 투척한다. 우우웅! 바람을 가르는 성문 종합 영어 책은 슬라임의 뒷통수를 후려 갈기면서 그대로 명중. 꾸에엑 하는 소리를 내면서 그 상태로 옆으로 쓰러진 슬라임이 또 X_X 표정을 지으면서 뒤집어진다. "훗. 보았느냐. 이것이 바로 '대학생'이다!!"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치고 만다. 하울링! 영혼까지 울리는 내 목소리를 들어보아라. 이 슬라임 녀석들아! 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와중에, 상당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끄러우니까 그만 좀 소리질러요. 유에 선배." "선배라니. 설마 넌..." 갑작스레 등장한 의문의 여성들. 은발의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우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들의 이름은 바로 아리아와 세리아였다. 그런데 복장이 좀 이상하다. "... 어째서 또 메이드 옷이냐." "이게 다 선배의 꿈 속이라서 그렇잖아요."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내가 또 할 말은 없지만. 그나저나 너희들도 동료야?" "동료? 훗. 그럴리가요." 표정이 180도 변한... 이 아니라. 원래부터 저런 표정이었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악당같은 면모를 보여주는 미소를 연발하는 아리아가 자신의 메이드 옷 치맛자락을 살짝 휘날리며 외친다. "저와 세리아 언니는 바로 마왕님의 신뢰를 받는 사천왕 중 두 명입니다!" "그러고보니 정말 두명이네. 아니, 그것보다도 보통은 순차적으로 한명씩 등장하는게 정석 아니야?" "아무래도 연재 분량이 조금 부족해 보이는거 같아서 스토리를 빨리 진행하기로 했다네요." "무슨 이야기야!?" "아, 방금 그 말은 잊어주세요." "......" 메이드 복에 어울리지 않게 망토까지 걸치고 등장한 아리아, 세리아 자매. 한마디로 우리를 쓰러뜨리고 가지 않으면 마왕에게 절대로 도달할 수 없다는 듯한 포스를 마구마구 매뿜고 있다고 보는게 상책이라고 생각된다. "자, 어서 저를 쓰러뜨리세요!" "잠깐만 기다려봐." 메이드와 대학생의 대결. 뭔가 조금 이상한 대결 구도가 된 것 같지만, 아무렴 어떠랴. 어차피 여기는 내 꿈 속.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전혀 신기하지 않을거라 다짐한다. 그렇다. 다짐만 할 뿐이다. "유에!"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목소리. 아니, 나는 사실 이 목소리를 알고 있다. "지아 선생님! ...과 그 아이들." "그 아이들은 뭐야!" 양호 선생님 옆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세린. 그 옆에는 체리와 엘리가 나란히 서 있었다. 체리는 지아 선생님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엘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감도 안 잡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직하게 자신의 전용 과일 간식을 먹고 있다는 뜻. 꿈 속에서도 엘리는 이런 이미지로 밖에 그릴 수 없는 내 상상력의 한계를 다시금 맛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지아 선생님 일행은 아군인가요? 적군인가요?" "보면 모르겠니? 아군이잖아." "난 또. 세린이 껴 있어서 적군인 줄 알았... 뭐하는 짓이냐! 이세린!" "정말로 죽여버릴까?" 엄청나게 큰 펜싱칼을 내 앞에 던져버리는 세린. 꿈속에서나 여전히 저 까칠한 성격은 여전하다. 하다못해 상상의 세계에서니까 세린을 좀 더 얌전한 여성으로 묘사해줬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이미 내가 꾸고 있는 꿈이지 않는가. 아무래도 그런 일이 꿈속에서도 불가능하다는 뜻은 내가 세린의 얌전한 이미지를 전혀 상상할 수 없다는 뜻도 될 것이다. 세린은 저렇게 화를 내야 오히려 본인 답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렇다. 잠깐. 아군이 순식간에 4명으로 늘었다면... 아리아와 세리아 자매를 쉽게 격파하고 마왕에게 갈 수 있다는 뜻 아닌가? "후후후.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구나. 아리아."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바보 유에 선배." "그런 허세를 부려봤자 소용 없다고. 아리아. 우리팀의 전력은 이미 너를 압도하고 있다고." "하지만 선배. 중요한 착각을 하고 계세요." "중요한 착각?" "네. 그건 바로..." 아리아가 갑자기 내 발 밑에 있는 에바 초호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한다. "길안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던 존재가 사실 마왕이라는 시나리오죠!" "뭐라고?!" 라는 외침으로 녀석을 바라본다. 그러자 에바 초호기가 두 발로 벌떡 일어서더니 나를 올려보면서 하는 말. "하하하하하! 속았구나. 바보. 멍청이. 돌대가리. 네이밍 센스도 없는 대학생!... 아얏!" 나도 모르게 녀석의 이마에 딱밤을 먹인다. 그러자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서 나에게 항의하는 에바 초호기. "무슨 짓이야! 이 난폭한 인간!" "네가 마왕이라며." "그, 그야 그렇지만." "항복할래? 안할래." "마왕이 그렇게 쉽게 항복하는 거 봤어?" "아니." "거 봐. 그러니까 나도 최대한 저항을... 아, 아파! 때리지 마!" "빨리 항복 선언이나 하시지." "알았어! 항복! 항복이라니까!" "좋아. 잘했어." 자리에서 다시 일어선 나는 에바 초호기를 인질로 삼으며 아리아, 세리아 자매에게 말한다. "자, 마왕을 무찔렀으니까 됐지?" "제법이군요. 유에 선배." "별거 아닌 일 가지고 칭찬을 듣는 것도 무지하게 어색하네." "아무튼 선배는 세상을 구하셨어요. 축하합니다. 그럼 다시 만나길. 오호호호홋!" 이라고 말하면서 사라진다. 수고했다. 내 꿈아. 부족한 상상력이라도 잠시나마 상당히 독특한 체험을 하게 해주어서 고맙다. ============================ 작품 후기 ============================ 취업 준비생은 참 어렵습니다 ㅡ_ㅜ글만으로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나라에서 전문 작가로 살아간다는 게 생각보다 힘들다는 것을 요 근래에 들어 알게 되었습니다. 131화 "... 유에 선배." 내 어깨를 잡고 사정없이 흔드는 아리아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벌써 아침인가? 상반신을 일으킴 손목시계를 확인해보니, 이미 오전 9시. "일찍 일어났네. 아리아." "9시면 일찍 일어난 것도 아니죠. 그것보다도 악몽이라도 꾸셨나요. 아까부터 괴상한 소리를 내시던데." "괴상한 소리라니?" "예를 들자면 '민법강의 투척 공격을 받아랏!'이라든지, 아니면 에바 초호기 보고 '항복해!'라든지 하는 정신병자 같은 모습을 보여서 조금 놀랐어요. 잘못하다간 선배를 언덕 위의 하얀 집으로 데려갈까 라는 고려도 순간 해봤고요." "상당히 냉정한 처신, 눈물나게 고맙다." 침대에서 일어난 나. 그 옆에 에바 초호기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서 잠이 든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 뭐랄까. 독특한 꿈이었다고는 하나, 이 녀석이 말하는 것을 봤다는 사실이 그래도 나름 재미있는 요소로 작용한 꿈이었다. 비록 시나리오는 B급 게임 수준도 아니라 Z급 게임 시나리오라고 봐줄 수 있지만, 재미만 있으면 되겠지. 기지개를 펴면서 몸을 푸는 나. 하지만 이런 나와는 다르게 아리아는 약간 심기가 불편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선배. 창 밖을 바라봐주세요." 아리아의 말에 의해 그대로 시선을 돌려본다. 아직까지도 강풍을 동반한 엄청난 빗줄기가 사정없이 내리고 있는 상황. 오전 9시 임에도 불구하고 사정없이 몰아치는 폭풍과도 같은 빗줄기 때문에 오전이 마치 저녁인 양 어두웠던 것이다. "난감하게 됐네." 나도 모르게 절로 이런 말이 새어나온다. 정말 난감하게 되었다. 오늘이 딱 3일 째. 혹시나 몰라서 일단 한 끼 여유분의 식량을 가져오긴 했지만, 그래봤자 오늘 저녁까지 여유분 밖에 남아있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좋든 싫든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저 빗속을 뚫고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반대편 침대에 걸터 앉은 아리아가 팔짱을 끼면서 나에게 말한다. "비가 그칠때까지 여기서 더 머무를까요?" "식량은 어찌하고." "어제 식당에 남아 있는 것들이 있으니까 그걸 먹으면 될 거 같은데요." "급한대로 끼니는 때우자는 말이구나." "그런 뜻이죠." 생각을 해보자. 아리아의 말도 일리가 있다. 확실히 맨 몸으로 가기에는 너무나도 빗줄기가 거세다. 저걸로 사람이 죽을 확률은 없겠지만, 행여나 감기나 아니면 숲속을 가다가 재수가 없게 다른 자연재해에 휘말리게 된다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여기서 이대로 머물게 된다면 다른 일행들이 우리들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식당에 남아있는 식량으로 비가 그치기 전까지 버텨야 한다고 보자면, 음식이 상했거나 아니면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먹었을 경우의 여파까지도 고려해봐야 한다. 상황이 조금 난감학 돌아가기 시작한다. "괜히 왔나. 여기." "그래도 덕분에 필요한 재료들은 얻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기 때문에 우리들의 발걸음은 헛수고 까지의 수준을 자랑하는건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자면 진퇴양난에 빠진 격이 된 우리. 난파선 안에 갇힌 꼴이 되어버린 것은 조금 하늘을 원망하고 싶을 정도의 기분을 들게끔 해주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세린은?" 아침부터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에 아리아에게 묻는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면서 자신의 행방에 대해 스스로 답해주는 이세린. 그러고보니 희미하게 물이 내려가는 소리도 들려온다. 맞은편의 침대에 걸터앉은 아리아와 세린. 초호기는 세린의 무릎 위에서 새근새근 잠이 든 상황이다. 마음 편한 녀석. 개 팔자가 상 팔자라고 하던데, 이럴때 보면 마음 편한 동물의 입장이 약간 부럽게 느껴질때가 있다. 그렇다고 초호기가 개는 아니지만, 속 편하게 먹고 자고 하면 그만 아닌가. 인간인 우리들처럼 복잡한 생각 할 필요 없이 본능에 몸을 맡기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행동을 한다. 아무래도 인간이라는 종족은 이성이라는 불편한 수단을 습득하는 순간부터 스스로 엃매이는 족쇄를 차버리게 된 불쌍한 종족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이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겠지. 시간은 오전 10시를 향해 달려가는 상황. 슬슬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로 본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 "여기서 비가 그치기까지 기다려보자." "결국 그런 쪽으로 가는 것이군요." "어쩔 수 없지." 내가 생각해낸 최선의 수단이라고 판단되어지기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비오는 바깥을 쉬지 않고 3~4시간 걸어가는 것 보다, 여기서 비가 조금 약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때를 보고 이동하는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식량은 식당에 꽤나 많은 양이 내포되어 있다. 그 안전성의 문제는 아직 검토하지 않았지만, 최대한 상했을 것 같은 음식들은 피하고 진공포장이 되어있는 음식들 위주로 고르다보면 자연스레 먹을 것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본다. 내 결단을 들은 세린이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금발을 매만지며 말한다. "나 역시도 비를 맞아가면서까지 강행군을 펼치고 싶진 않으니까. 그게 옳다고 봐." "아리아는?" "여기에 남아 있는게 좋다고 주장한 사람은 원래부터 저였어요.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겠죠." "좋아. 그럼 아리아는 나와 같이 식당에 가서 식량을 확보해오고, 세린은 여기서 음식을 요리할 준비를 하는게 좋겠어." 각자 역할분담을 나눠준다. 소수의 인원이라도 제각기 다른 역할을 부여받고 빠르게 행동하는 것이 신속성도 있고, 그리고 체계적인 조직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다. 더불어 리더라는 위치까지도 세삼 느끼게 해주는 일종의 일시적인 행사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도중에 태클을 건 것은 역시나 세린이었다. "잠깐. 나하고 아리아, 서로 바꿔주면 안돼?" "갑자기 왜?" "... 나, 요리 못한단 말이야." "뭐라고?" "요리 같은건 전혀 못한다고. 해본적도 없어!" 약간 상기된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하는 세린. 그러고보니 이 녀석, 산장에 있을 때도 요리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하긴. 우리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가 요리를 할 줄 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신기하고 대견스럽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이 무인도에 와서 웬만한 여자들은 거의 다 요리를 하고 있어서 잠시 내가 착각한 셈이 되었다. 처음에 요리를 전혀 못하는 노아 교수님 마저도 지금은 자연스럽게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지 않은가. 어느새 이런 고정관념이 생겨버린 탓에 약간 잘못된 역할 분배를 하고 말았나보다. "알았어. 그럼 아리아가 요리를 준비하고, 세린은 나와 같이 가자. 불만 없지?" "딱히 없긴 하지만..." 그래도 약간 미안한지 세린이 말 끝을 흐린다. 요리를 못하는 것이 자랑은 아니니까 말이다. 게다가 후배에게 이런 짐을 떠넘기는 것이 조금은 불편한 마음을 비추는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둘 다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감자와 고구마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어느정도 요리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나 역시도 세린의 의견을 존중해주기로 한다. 감자와 고구마는 그냥 굽기만 하면 되지 않은가. 그건 요리를 모르는 세린 뿐만 아니라 그쪽 지식에 전무한 나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식당에서 구해올 물품은 어느정도의 요리, 그러니까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수작업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아리아가 미리 준비를 해두는 편이 좋겠다는 뜻이었다. 식당으로 향하기 전에 아리아가 촛불을 들고 방 안에 있는 간이 부엌으로 들어가서 몇가지 확인을 해보기 시작한다. 우선은 가스 밸브. 제대로 열려 있는지 확인을 한 아리아가 가스렌지의 스위치를 돌리자, 놀랍게도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리아 뿐만이 아니라 근처에 있던 우리들도 세삼 놀란 상황. 세린마저도 이런 모습을 처음 봤다는 듯이 말한다. "우리가 있었을땐 가스가 안 들어왔는데..." "일시적으로 작동하는 건가? 아니면 뭔가 다른 문제로 인해서 예전에 작동을 안하다가 이제서야 갑자기 그 문제 원인이 제거되서 가스가 들어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네." 나름 추측한 발언을 내뱉어본다. 세린 일행이 여기에 머물렀을때는 가스가 들어오지 않아서 바깥에서 불을 지피고 요리를 하거나 했다고 하는데, 어차피 들어오면 만사 오케이 아닌가. "그럼 저는 근처에 있는 도구들로 일단 간단한 준비를 하고 있을게요." "알았어. 따로 필요한 재료 같은건 없어?" 임시적으로 주방장의 지위를 임명맏은 아리아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하더니 아주 모범적인 대답을 내놓기 시작한다. "3분 카레나 아니면 라면같은게 있으면 좋겠죠." "그건 네가 요리하는 수준이 아니잖아." "적어도 물은 받아놓을 테니까 만약에 그런게 있으면 가져와 주세요." "알았다." 생각해보니 라면도 있었구나. 왜 그런 것을 인식하지 못했을까. 라면도 어차피 비밀봉지에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부패에 대한 걱정은 없다. 유효기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유와 같이 그렇게 짧은 기간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난파된 지 아직 한달도 지나지 않았다고 가정을 해보자면 분명 손님에게 여러가지 음식을 대접할 이 여객선은 적어도 한달 이상까지 될 정도의 유효기간을 자랑하는 식품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더욱이 라면이라면 불가능도 아니겠지. 촛불을 들고 갑판 바로 아랫층까지 올라가는 나와 세린. 에바 초호기는 방해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잠시 아리아에게 맡겨두고 우리 둘만 식당으로 향하게 되었다. 또각또각. 철판으로 이뤄진 계단을 올라가자, 끼이익 하는 음산한 사운드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여전히 기분나쁜 곳이야." 세린의 말에 공감을 표시하지 않을수가 없다. 녹이 슨 흔적뿐만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기분 나쁜 형상을 하고 있는 장소도 있다. 배 안에 아직까지 사람의 시체를 보지 못했지만, 없다고 볼 수도 없고. 우리가 운이 좋은건지 아니면 이 배가 한번 침수가 되었을 때 그 여파로 인해 안에 있던 시체들에 대부분 떠밀려 갔다든지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죽은 시체들까지 고려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산 자는 이대로 끝까지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의 한도를 찾아가며 연명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식당 내부로 들어온 우리들. 다수의 창문을 통해서 보이는 엄청난 바람의 여파가 마치 이 난파선을 집어 삼킬듯한 포스를 내뿜고 있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분노라도 한 것일까. 그리스 로마 신화를 그리 자주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이 정도 급이면 아마 신이 노했다 라고 표현해도 딱 좋을만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어제 에바 초호기와 만났던 장소이기도 한 부엌으로 입성. 안으로 들어가니, 여전히 식기도구들이 바닥에 내팽개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초호기와의 한판 씨름(?)을 하고 난 이후에 정리를 안했기 때문에 그렇다. 굳이 정리를 해야 하나 라는 필요성도 없었고. 아무튼 그렇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술자리가 있는 관계로 예약관리시스템 !! 132화 부엌의 냉장고 문은 저번에 우리가 열어두었던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 누가 다시 와서 닫을 일도 없겠지만. "라면, 라면이라..." 혼자서 중얼거리며 라면을 찾기에 열중하는 이세린. 정말로 라면을 가져갈 생각인가. 프랑스 인이기도 한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금발의 미소녀 여신님은 편식같은 것을 잘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의외로 식성이 좋은걸. 이세린. "유에." "왜?" "닭가슴 살이 있는데. 이것도 가져가도 돼?" "뭐, 아무래도 가져가는 것이 좋겠지?" 닭가슴 살은 다이어트 하기엔 정말로 좋은 음식이라고 한다. 콜레스테롤 어찌구 저찌구 하는 내용을 들은 기억이 있는데, 왜 그런 사람들 있지 않은가. 몸짱을 꿈꾸는 사람들이 닭가슴 살과 함께 보충제를 마구 먹어대는 그 장면. 참고로 내 친구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여기저기 찾아본 결과. 참치도 있고, 그리고 아리아의 축복이 실제로 작용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3분 카레가 있었다. 게다가 짜장까지. 그런데 밥은 없는건가. "뭐야. 정말로 카레가 있어?" "찾아보니 있던데." "그런데 밥이 없잖아." "...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이럴때는 묘하게 죽이 잘 맞는다. 카레나 짜장같은 것은 밥에 비벼먹어야 맛있는거 아닌가. 밥과 카레가 완성되어야 진정한 조합체라고 할 수 있다고. 고작 카레 하나만으로 배를 채울 순 없단 말이다. 그러나 이내 얌전히 생각에 잠긴 세린이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러고보니 인도인가? 네팔인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음식 중에서 그런게 있었어." "어떤거?" "빵을 카레 소스에 찍어먹는 거. 정확한 명칭은 기억 안나지만, 우리도 그렇게 비슷하게 먹으면 되지 않을까?" 색다른 제안이었다. 나름 괜찮다고 생각은 드는데,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지 않은가. "주식이 될만한 빵이 없는데." "바보. 빵을 대신할만한 것이 있잖아." "어떤거?" "감자." "과연." 생각해보니 있긴 있었다. 빵과 같은 입맛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감자를 카레에 찍어서 먹을 생각을 해보니 나름 그것도 군침이 도는게 아닌가. 이런. 갑자기 배가 고파지기 시작한다. 꼬르륵 소리가 세린의 귀까지 들렸는지 그녀가 아주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너, 어지간히 배가 고팠던 모양이네." "아무래도 성장기니까." "나도 성장기라고." 팔짱을 끼면서 작게 한숨을 쉬는 세린. 그녀의 가슴이 두 팔 위에 나란히 봉착하는 나이스한 장면이 연출된다. 잘 빠진 허리. 끝내주는 각선미. 게다가 금발 미인. 정말로 성장기구나. 이세린. 앞으로도 좋은 성장을 보여주면 정말 좋을텐데 말이다. 특히나 가슴. 남자는 등으로 말하지만, 여자는 가슴으로 말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지 않은가. 참고로 내가 내뱉은 말이니 정말로 인명사전을 통해 찾아보는 일은 하지 말자. 양심에 찔리니까. 카레에 짜장. 그리고 닭가슴 살에 어제 보았던 참치캔을 챙겨본다. 라면은... 보이지가 않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하고 있었던 음식인데 없다니. 흔하디 흔한 것이 바로 라면 아닌가. 그 흔한 라면조차 없다니. 조금은 실망감이 엄습해옴을 느낄 수 있었다. 컵라면은 바라지 않아도 적어도 봉지라면이나 이런 것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좋을텐데. 그래도 없는대로 먹어야 하는 것이 무인도의 생활. 우리들이 이 무인도에서 하루, 이틀 머무른 것도 아니고 엘리 수준까지의 달인의 반열에 들어선 것은 아니지만 나름 산전 수전 공중전 우주전 다 겪은 우리들이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까지 재료들을 구한 것도 상당히 만족한 미소를 연신 머금으며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때. 우리들이 재료를 풍족하게 구했다는 사실을 듣고 태풍이 시기라도 한 것일까. 느닷없이 난파선이 한번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우우우우웅!! 듣기 싫은 바람소리들이 난파선을 밀어 붙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세린의 비명소리. "뭐, 뭐야! 도대체!" "이세린. 근처에 잡을만한 것이 있다면 매달려 있어!" "아, 알았어." 나 역시도 근처에 있는 문고리에 매달린단. 난파선이 뒤집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로 흔들리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들이 있는 내부를 이리저리 뒤흔들기에는 충분한 영향력을 선사하고 있었다. "꺄악!!" 근처에 싱크대를 붙잡고 있던 세린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놓치고 만다. 바닥에 넘어져 반대편 구석까지 굴려는 세린의 허리를 간신히 끌어안고 내쪽으로 당겨온다. "괜찮아?" "으, 응..." 순간적으로 서로 몸을 맞댄 우리. 갑작스레 나에게 안기는 형국이 된 세린의 얼굴이 급격하게 빨개지기 시작한다. 평소의 반응대로라면 '이 변태! 어딜 만지는거야!'라고 소리치면서 달려들 세린이었지만, 그렇게까지 한가한 상황은 아니다. 세린 역시도 나에게 몸을 맡기면서 한동안 그렇게 임시적인 휴전 상태를 이어간다. 가느다란 금발 미소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안은 나. 이세린이라는 녀석이 이리도 연약한 몸을 하고 있었나. 은근히 체구도 작은 편인것 같다. 매번 화를 내고 소리치며 다니니까 그 기세 덕분인지는 몰라도 이렇게까지 작게 느껴진 적은 없었는데, 내게 기대있는 세린은 말 그대로 한명의 가녀린 여자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오들오들 떠는 세린. 거의 지진 급의 흔들림이 슬슬 멈춰갈 무렵, 이제 서서히 안전하다는 판단이 들기 시작한 나는 세린을 조금씩 놓아주며 괜찮다는 듯이 말해준다. "이제... 위험하진 않을거야." "......" 얼굴이 붉어진 세린이 황급히 내게서 멀어진다. 차라리 어색해진 분위기.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난파선이 흔들렸다는 엄청난 사건은 금새 잊어버릴듯한 이 기세. ... 난감하다. 차라리 세렌이 화라도 내주면 좋겠는데. 오히려 아무말도 하지 않은 체 나만 힐끗힐끗 바라볼 뿐이니까 오히려 상황이 더 묘하게 돌아간다. 두 손을 베베 꼬던 세린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고, 고마워..." "천만에." 그래도 솔직하게 고맙다는 표현도 할 줄 알고. 알고보면 세린도 나쁜 녀석만은 아니다. 단순히 남자 혐오증이 좀 심해서 그럴 뿐이지. ============================ 작품 후기 ============================ 어제 무진장 퍼마셨더니 속이 좀.. ;; 133화 배의 요동이 멈춘 시점에서 나와 세린은 최대한 몸을 낮추고선 다시한번 배가 또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해본다. 엘리의 가족들이 타고 불시착한 비행기와는 다르게 그렇게 오래 된 것도 아닌지라 부식도가 낮은 난파선이라고 생각되므로 고작 태풍에 우르르 무너지거나 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비바람의 여파로 인해서 배가 자칫 옆으로 눕혀질수도 있을거란 불안감이 우리들의 행동을 더욱 소극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 괜찮은거야?" 불안한 표정으로 내게 묻는 세린. "아마도." "... 뭐야. 그 불성실한 대답." "이것도 나름 추측에 추측을 더해서 발설한 대답이라고." "......" 말 그대로 나도 확신하지 못한다. 건축학과 출신의 대학생도 아니고, 난파선의 현재 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일개 대학생이 앞날을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을 지녔다고 보기는 힘들지 않은가. 그래도 일단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현재 상황을 토대로 그리 심하게 배가 이리저리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예상 정도는 해볼 수 있었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이세린. 아까 바닥에 넘어졌을때 묻은 먼지들이 신경쓰이는 모양이다. 자신의 치맛자락 끝부분을 툭툭 털어내던 이세린이 나를 힐끗 보더니 들릴락 말락 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 특별히 이번만큼은 감사하다고 생각해줄게." "특별하다고 말해주니 고마운걸."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약간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하는 모습도 조금은 귀엽다. 처음과는 다르게 그래도 어느정도 화를 내거나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그 강도 자체가 많이 낮아졌다고 보는 녀석의 반응이기에 나 역시도 그다지 불쾌하거나 그런 마음은 별로 들지 않는다. 재차 강조하지만 정말 인간의 적응력은 대단한 능력이라고 본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우리들. 잠시 떨어뜨렸던 음식들을 다시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힌다. 그러나 사건과 사고는 언제 어디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아주 흔한디 흔한 자연현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번에도 또 다시 세린의 비명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뭐, 뭐야! 어떡해!!"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야?!" 라고 물어보는데도 불구하고, 세린은 그저 비명만을 내지른 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하는 표정만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혹시 유령이라도 빙의된거야?" "그럴리가 없잖아! 바보!!"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 방방 뛰는건데." "아... 몰라!" 그러고 나서 느닷없이 상의를 탈의하기 시작하는 세린. 순간 놀란 나는 뒷걸음질 치면서 의아함을 잔뜩 담은 시선으로 세린을 바라본다. "갑자기 스트립 쇼라도 하고 싶은거야? 너?" "뭐, 뭔가가 옷 안으로 들어갔다고!" "뭐라니... 그게 도대체 뭔데." "벌레일게 뻔하잖아!!!" 아. 그랬군. 이제서야 왜 세린이 저리 날뛰는지 알 수 있을거 같다. 쥐와 벌레를 극히 싫어하는 세린인지라 등에 정체불명의 작은 생명체가 침입했음을 깨닫고 말도 안되는 사인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옷을 벗을 것은 또 없잖아.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은 세린이 그래도 남자 앞에서 자신의 가슴을 드러내는 것은 치부라고 생각하는지 양 손으로 가슴을 가린 채 나에게 등을 보여주며 다급하게 말한다. "빠, 빨리 떼어줘!" "떼어 달라고 해도 말이지..." 뭔가 보여야 떼어줄게 아닌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나보고 어떻게 해달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정말로 벌레가 옷 속으로 들어간거냐. 설마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옷 속으로 들어가서 그 차가운 느낌이 벌레라고 착각한거 아니야? 이렇게 물어보고 싶지만, 내 말은 아마 귀담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세린은 그저 울먹인 채 발을 동동 구르면서 '빨리! 빨리!'라고 말할 뿐이다. 약간 불쌍해 보이니까 여기서는 세린의 말을 우선시 하는게 좋겠다. 살짝 허리를 숙여 세린의 등을 바라본다. 여전히 봐도 고운 피부. 잡티 하나 없는 순결한 여성의 피부를 그대로 조각의 형태와 같이 만들어둔 것처럼 완벽한 뒷태를 자랑한다. 인터넷에 보면 흔히들 말하는 '숨막히는 뒷태'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말 그대로다. 양쪽으로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 라인이 여성의 아찔한 곡선미를 뽐내고 있었다. 게다가 세린의 상징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금발'이라는 요소가 더욱더 세린의 뒷태를 눈부시게 만든다. 비록 영어를 못하는 금발 미인이라는 점이 있지만, 그것도 다른 의미로 매력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 읏!" 갑자기 야릇한 신음소리를 내는 세린. 아직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단발적인 신음소리를 낸 그녀가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아직 말을 꺼내지도 않은 나에게 말한다. "네, 네가 너무 가까이 있으니까 숨결이 등에 닿잖아!" "미안." "... 정말. 빨리 찾아보라고." 세린의 소원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정말로 그녀의 등 뒤에 조그만한 벌레가 요리조리 움직이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거미. 새끼 손톱보다도 더 작은 거미가 요리조리 세린의 등 뒤를 활보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자식. 아직 나도 만져보지 못한 세린의 등을 만지고 있다니. 조금은 부러운... 이 아니라. 빨리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가만히 있어." "바, 발견한거야?" "그런 셈이지." "알았으니까 빨리 잡아줘!"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알아서 잡아줄텐데 말이다. 세린의 등 하부, 그러니까 바로 엉덩이 윗부분에 위치한 작은 거미. 그나저나 이 거미 녀석은 참으로 절묘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풍수지리설로 따지면 좌 청룡, 우 백호인가. 바로 엉덩이 위쪽이라니. 내가 짐작컨데 이 거미 녀석은 수컷일 확률이 매우 크다고 본다. 천천히 오른 손가락의 중지와 검지로 집게 형태를 만든 다음에 녀석을 향해 전진시킨다. 찰싹 때려서 잡으려고 하다가, 도중에 세린이 '때려서 잡으면 안돼!'라고 말해서 관뒀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잡아야 하는 형태를 하는 것이다. 주문이 참으로 까다로운 손님이 아닐수가 없다. "에잇." 빠르게 세린의 등 위에 있는 작은 거미를 캐치... 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빠른 거미 녀석. 요리조리 왔다갔다 하더니 결국, 세린의 치마 안쪽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꺄ㅡㅡㅡㅡㅡㅡ악!!!" 귀청이 찢어질듯한 비명을 내지르는 세린. 목소리는 가히 소프라노 급, 8옥타브를 간단히 넘어서는 경지를 자랑하는듯 하다. 나도 모르게 양쪽 귀를 막은 채 세린에게 고래고래 소리친다. "지, 진정해! 이세린!" "왜! 어째서 그 쪽으로 들어간거야!" "그 쪽이라니. 어디?" "모, 몰라! 묻지 마...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진정하고. 괜히 날뛰어봤자 오히려 녀석만 자극하는 꼴이니까. 천천히 심호흡을..." "이 바보 멍청이!! 아, 진짜. 나도 몰라!" 결국 자신의 치마 지퍼까지 내려버리는 이세린의 행동이 시작되었다. 지이익 하면서 순식간에 치마의 옆부분에 위치한 지퍼가 열리면서 그녀의 하얀 속살을 공기중에 노출시킨다. 차마 이런 세린을 보고 노출녀라고 욕할수도 없고. 어느정도 그 사정을 이해한다 보지만, 그렇다고 남정네 앞에서 홀딱 벗기에는 조금은 과한 세레머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것이 누드 하우스 2탄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나 세린은 자신의 체면 보다는 벌레가 옷 안에 들어간 것이 더 신경쓰이는지 연달아 치마마저 바닥에 흘려버린다. ============================ 작품 후기 ============================ 우와... 이거 스토리를 기억하고 계시는 분들이 계실 줄이야;; 하루하루 매 편수 보면서 올리는 저도 다음 스토리가 기억이 안 나는데,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표류일지를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아무튼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핰핰핰... 134화 순식간에 벗어버린 치마. 그 안에 분홍색의 귀여운 팬티가 얼굴을 빼꼼히 내밀기 시작하지만, 이내 다시 그 모습을 다 들어내기 시작한다. 도대체 이번에는 어디로 거미가 사라졌길래 이 호들갑인가. "어디로 갔는데." "허, 허벅지 근처에..." "그렇게 가리면 내가 볼 수 없잖아." "너! 일부러 거미를 핑계삼아 내 몸을 보려고 그러는거지?!" "먼저 거미를 내쫓아 달라고 한건 바로 너잖아." "그, 그렇긴 하지만..." "자, 손 치워봐. 그리고 살짝 다리도 벌려보고." "... 굴욕이야. 진짜로." 말은 그렇게 해도 치욕을 느끼는 것보다 거미가 자신의 몸 이곳 저곳을 해집고 다니는 것이 더 싫은 것인지 벽에 손을 대고 선 채 살짝 다리를 벌린다. 체위상으로 말하자면 후배위 자세의 그것. 그렇다고 실제로 세린과 섹스를 하는 판타지적인 상황은 아니다. 단순히 거미를 잡기 위한 행동. 불순한 마음은 조금도 없... 진 않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린이라는 여자가 스스로 다리를 벌리면서 나에게 엉덩이를 내미는데, 그 누가 흥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잠깐만 더 숙여봐." "......" 말은 직접적으로 하지 않고 있지만, 아마 속으로 피눈물을 뿌리고 있으리라고 본다. 이세린이라는 여자의 자존심에 외간 남자가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대놓고 드러난 사타구니를 보여주고 있는데 수치스럽지 않을수가 없잖아. 특히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세린이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이 거미 녀석, 어디로 숨었는지 도통 보이지 않는다. 팬티 위에도 없고, 종아리나 허벅지 위쪽에도 보이지 않는다. 크기 자체가 워낙 작아가지고 눈으로 자세히 관찰하지 않는 이상 확인하는 것도 조금은 힘들지만, 그래도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닌다. "이세린." "... 또 왜." "앞으로 돌아볼래?" "너, 나한테 죽고 싶어서 그러는거지?" "그게 아니라 혹시 앞에 있을지도 모르잖아." "앞은 없어." "직접 확인한거야?" "그, 그래."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정말로 없다고 보는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역시나 마지막 한 곳은... "이세린. 내 말, 오해하지 말고 잘 들어." "뭔데..." "지금 이 상태에서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어.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다른 곳으로 도망갔거나 아니면..." "자, 잠깐. 설마 팬티 안으로 들어갔단 말이야?" "그럴지도." "웃기지 마! 그럴리가 없잖...!!" 도중에 기세좋게 말하던 세린의 대사가 끊긴다. 그와 동시에 뭔가 섬뜩한 것을 느꼈다는 듯한 공포스러운 얼굴까지. 저 모습을 본 순간, 아무리 눈치가 없는 나라고 해도 세린의 모습을 충분히 분석할 수 있었다. 분명 있는 것이다. 그것도 세린의 팬티 속에. "있는거지? 그렇지?" "어어어어어어없다니까!!!" 이것으로 100% 확실해졌다. 우리를 농락하고 있는 그 작은 거미는 지금 세린의 팬티 속에 있고, 세린은 최후의 보루이자 마지막 자존심이기도 한 팬티 만큼은 절대로 벗기 싫다는 의사를 표시하고 있다. 상의와 하의는 수치심 VS 거미 사냥의 대결에서 거미 사냥이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면, 팬티는 수치심이 승리를 거둔 듯 하다. 그러나 과연 이 승리 상태가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쥐와 벌레를 죽도록 싫어하는 세린은 결국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면서 나에게 또다시 고래고래 소리를 치기 시작한다. "저, 정말로 없으면 진짜 두고 봐!" "그러면 말고." "뭐...?" "나도 목숨을 걸고서 거미를 잡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내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세린이 급격하게 당황해하기 시작한다. 그도 그럴것이, 그동안 얌전히 고분고분 세린의 말을 받아들여줬던 내가 이런 식의 강경책을 보여주니까 적지 않게 황당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사실 세린을 놀리려고 이러는 말을 하는게 아니라, 이번 기회에 어느정도 기선 제압을 하기 위한 하나의 방도라고 보는게 좋을 것이다. 그동안 남자 혐오증을 가지고 있다고 오냐오냐 하니까 점점 더 세린의 성격이 포악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내가 어느정도 컨트롤을 해줘야 한다는 나름의 책임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육. 나쁜 말로 말하면 조교. 세린이라는 흉폭한 암캐를 조교하는 역할을 맡은 나는야 사육사. 그런 것이다. 정말로 막 울것 같은 표정의 세린이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나를 죽일듯이 노려본다. 저 눈빛을 그대로 해석해보자면 '그냥 내 말에 따르면 좀 좋아!'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겠다. 남자의 자존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뼈저리게 느껴보라고. 금발 아가씨. ...... .......... .............. 한동안 이어지는 기싸움. 결국 거미의 징그러운 감촉을 또 한번 느낀 세린이 고개를 떨구면서 두 눈을 질끈 감고 패배를 시인하기 시작한다. "알았어! 인정할게. 정식으로 내가 너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고!" "진작에 그렇게 말할 것이지. 자, 빨리 벗어." "그래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벗으라고 말할 것까진 없잖아!!" 말은 저렇게 해도, 어지간히 거미가 싫은 모양인지 천천히 자신의 팬티를 내리기 시작하는 이세린이었다. 스트립 쇼도 아니고, 남자의 눈 앞에서 자진하며 옷을 벗는 여성의 모습은 정말 묘한 색기를 느끼게 한다. 약간 동그랗게 말린 팬티가 서서히 세린의 허벅지를 지나, 종아리를 거치고 발 끝에 걸친다. 결국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가 되어버린 이세린. 저번에 왕게임에서도 본 경험이 있지만, 이번에는 기분이 색다르다. 역시나 여체의 힘은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낀다. 똑같은 상황이라고 해도... 아니지. 똑같다고 볼 수는 없구나. 아무튼 비슷한 상황이라고 해도 알몸이 되어 버린 여자의 몸이 선사해주는 느낌은 엄청나게 다르니까 말이다. 이렇게 된다면 그 작은 거미 녀석에게 고마워해야 하겠는걸. 적어도 죽이지는 말고 몰래 살려보내도록 하자. 세린의 알몸을 구경시키게 해 준 보답으로. 양 팔로 가슴을 여전히 가린 세린이 내 앞에 선다. 사타구니도 오른 손으로 가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나는 그녀에게 딱 잘라서 말한다. "그렇게 가리면 거미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데." "... 다른 고셍 있을지도 모르잖아." "가장 의심되는 곳이 바로 '음모'인데." "......" 여성의 음모 속으로 작은 거미가 숨어버리게 된다면 찾는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아니, 실제로 겪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렇기 때문에 세린에게는 미안하지만, 손을 치우라고 말한 것이다. 이래봬도 깊은 뜻이 있다고. 절대로 에로에로한 기분 때문에 세린에게 여성의 중요 부위를 가리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전혀 에로한 기분이 없다는 것은 또 아니고. 아주 조금? 100%를 기준으로 대략... 99% 정도 될 것이다. 조금이 아니라고? 그렇게 느껴진다면 분명 기분 탓이리라. 이를 악 문 세린이 도끼눈으로 나를 바라보지만, 그래도 상황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수준의 세린은 아니기 때문에 얌전히 손을 치운다. 순간 든 생각. 머리카락 색깔에 따라서 음모 역시도 금발이다. 생각해보니 아리아는 은발이었나. 머리색깔에 따라 음모 색도 달라진다는 요소는 조금 신선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음모에 대한 토론은 이 쯤으로 해두고. 한쪽 무릎을 꿇고서 세린의 사타구니 바로 앞에 시선을 맞춘다. 음... 이것도 나름 좋군. ============================ 작품 후기 ============================ 자고 일어나니 목이 부어있는 희안한 상황. 135화 하지만 다리를 오므리고 있는 세린인지라 이번에도 또 한번의 지시를 내리도록 하자. "다리, 조금만 벌려줄래?" "너, 요구하는게 너무 많은거 같은데." "그렇다면 중단해도 상관 없고." "크윽..." 두 주먹을 불끈 쥐는 세린. 아마도 나를 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 그렇다고 정말로 때릴 위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약간 다리를 20~30도 각도로 벌린 세린의 조갯살이 드러난다. 예쁘다. 정말로 아름답다. 물론 여성기를 보고 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린의 전체적인 나체를 보고서 평하는 것이다. 여성기 만으로 아름답다고 말하면 그것은 변태겠지. 좀 더 얼굴을 가까이 세린의 사타구니를 향해 밀어 붙인다. 순간 몇번 뒷걸음질 치던 세린이었지만, 바로 뒤는 벽이라서 그런지 등에 차가운 벽의 감촉을 느낀 그녀가 약간의 짧은 신음소리를 내고 그대로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약간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보니 여성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묻고 애무를 하는 그런 플레이를 세리아 이외에는 거의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지라 나도 조금씩 두근두근 거리기 시작한다. "... 찾았어?" 세린의 질문. 그러나 음모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미를 찾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 "아무래도 직접 손으로 만지면서 찾아봐야... 우왓! 무슨 짓이야! 이세린!" "너, 정말로 날 욕보이려고 작정한거지? 그런거지?!" 평소에 세린이 들고 다니던 펜싱 칼... 이 아니라 비스무리하게 생긴 나무 막대기를 어느새 손에 쥐고 붕붕 휘두르기 시작한다. 펜싱 자세고 뭐고 그런것도 없이 그냥 무작정 휘두르는 막무가내 전법. 한마디로 말해서 쪽팔림을 그대로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라고 평할 수 있겠다. 목검 휘두르는 것을 멈춘 세린이 거칠게 바닥에 검을 내팽개치며 이제는 될대로 되라는 듯이 말한다. "마, 만져봐! 이 변태!!" "그럼 잠깐 실례." "만지라고 말하면 누가 못 만질줄 알았는가. 나는 언행이 일치하는 성실한 남자라고. 다시 아까의 위치 그대로 자리를 잡은 나는 오른손을 들어 세린의 음모를 쓰다듬어 보기 시작한다. 순간적으로 신음소리가 튀어나오는 세린이 나에게 엄청나게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외친다. "바, 바보! 이상한 곳 만지지... 마... !" "이상한 곳이라면..." 그 쪽인가. 클리토리스 부근 말이다. 음모에 가려진 탓이기도 하고, 그리고 실내도 그리 밝은 편이 아니라서 잘 확인은 못했지만, 내가 무심코 음모를 만지려고 옮기던 손동작에 세린의 클리토리스를 자극했나보다. 이건 조금 미안하게 느껴질지도. 이분에는 유의하며 확실히 음모 부근에만 손을 댄다. 약간 까칠까칠한 촉감이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기 시작. 남성의 성기 주변에 나있는 털과는 또다른 감촉이라고 해야 할까. 복슬복슬한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애매모호한 기분을 선사해준다. 푸석푸석한 소리를 내며 음모를 몇번 쓰다듬는 나. 딱히 움직이는 생물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눈에 보이는게 있다면 이세린의 조갯살이 약간 씰룩였다는 순간의 장면 정도? 묘하게 음란한 모습이라서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하는 소리를 내며 넘어가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설마... 젖은건 아니겠지. 이런 생각을 하는 나였지만, 약간 허벅지 사이가 조금 번들거리는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판단해서 정말로 젖은게 아닐까 라는 추측까지 할 수 있었다. 액체기 빛에 반사되는 효과같은거라고 해야 할까. 이 상황에서 흥분한 세린도 대단하지만, 그것을 직접 발견한 나도 조금은 대단하게 느껴진다. 사실 조금 더 세린의 사타구니를 감상하고 싶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이야 우스갯 소리로 말하는 것이지만, 혹시나 그 거미가 사람을 무는 독거미일수도 있고. 감상 시간은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고, 우선은 거미를 찾도록 하자. "아까 뒤돌아있던 그 자세로 바꿔봐." "진짜 주문 하나는 엄청 많네." "이게 다 너를 위한 선행 투자라고 생각해." "... 잊지 않을거야. 오늘의 치욕." 나 같아도 잊지 않을듯 하다. 내가 세린이 입장이라고 해도 말이다. 확실히 세린에게 있어서는 굴욕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제 3자의 입장에서는 이보다도 더할나위 없는 구경거리 아닌가. 혀를 짧게 찬 세린이 다시 벽에 손을 대고서 나에게 엉덩이를 내민다.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팬티마저 벗은 상황이라서 여성의 비밀스러운 장소에 위치한 조개가 입을 벌리고 남성기를 받아들이고 싶다는 듯이 씰룩거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훤하게 들어온다. 정말 절경이다. 금발 미소녀 만세. 이세린 만세. 엉덩이도 작고 탄력적이다. 유아 선배와 마찬가지로 운동하던 여자라서 그런지 피부의 탄력성과 건강미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중에 유아 선배와 세린과 같이 3P를 하는 날이라도 오면 정말 좋을텐데. 건강미인 두명과의 섹스라. 상상만 해도 금방 사정을 해버릴거 같은 흥분을 선사해준다. 하지만 다른 그 어떤 멤버보다도 제일 현실 불가능할거 같은 조합 역시도 유아 선배와 세린이다. 거의 라이벌이 되다시피 한 둘이 과연 같이 3P를 할 용의가 있는가 없는가는 질문할 가치가 없다고 본다. 엉덩이를 쭉 내밀고 있는 세린에게 염치 불구하고 말해본다. "잠깐 손 좀 댈게." "......" 침묵도 엄연히 동의한다는 뜻의 의사표시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허락'으로 인식하고 얌전히 세린의 탐스러운 복숭아에 손을 올려놓는다. 부드럽다. 스펀지 보다도 더 부드러운 감촉이다. 이래서 지하철에 자주 출몰하는 치한 아저씨들이 여성의 엉덩이를 만지는구나 하는 쓸모없는 공감대가 형성된다. 세린의 엉덩이 골을 살짝 손으로 잡아 벌려본다. 가운데에 보이는 핑크빛의 항문.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는 항문의 입구가 은근히 귀여워보인다. 그러고보니 나중에 다른 여자들과 섹스를 할 때 애널쪽도 한번 박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었는데.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기억해내고 말았다. 왜 하필 지금 그 기억이 떠오르는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렇다. ============================ 작품 후기 ============================ 목이 제대로 부운 터라 침을 삼킬때마다 불편합니다; 역시 건강이 최고군요. 136화 핑크빛 주름 진 작은 구멍이 눈 앞에 드러난다. ... 설마 항문 안으로 들어간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래도 언제나 '만약'이라는 말은 존재한다. 어차피 세린의 엉덩이를 잡고 있으니까 살짝 벌려도 뭐라고 하지 않겠지. 그대로 손에 힘을 주면서 세린의 양쪽 엉덩이 살을 잡고서 살짝 벌린다. 그러자 즉각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한세린. "너, 너 지금 뭐하는거야!" "아니. 혹시나 항문 안으로 들어간 것은 아닐까 하고..." "그럴리가 없잖아! 아니면 너, 지금 일부러 그러는거지? 그렇지?" "글쎄 그런 불순한 동기로 하는거 아니라니까." "아니. 분명해. 역시 넌 스캇물을 좋아하는 변태였어!" 은근히 또 그런 마니아틱한 용어를 다 구사하는 세린이었다. 참고로 스캇물이라고 하는 장르는 쉽게 말해서 '대변'을 가지고 성적 쾌감을 일으키는 것이다. 예전에 사람들이 한창 김태희를 찬양할 때 이런말을 자주 하지 않았는가. 김태희가 싸는 똥은 대변이 아니라 초콜렛일 거라는 반 농담삼은 인터넷 용어들 말이다. 그렇다고 실제로 김태희가 싸는 대변이 초콜렛이라는 말도 안되는 상상은 접어두기 바란다. 그 여배우도 인간이니까. 잠시 이야기가 옆길로 빠져버렸는데, 아무튼 스캇물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여성이 대변을 보는 모습을 보고 성욕을 불러 일으키는 사람들. 이것도 상당한 취향을 요하기 때문에 정상인이 본다면 오바이트가 나올만한 상황이리라는 인식이 들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마니아 층에서는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세린이 나보고 스캇물 마니아니 어째느니 하고 말하는 것이다. 이래저래 말해도 고분고분 얌전히 있는 세린. 살짝 얼굴을 들이 내밀자, 아까 풍기던 그 시큼한 냄새가 난다. 이것도 분명 마니아 층에서는 뭐라고 하던데. 냄새같은 것으로 흥분을 느끼는 뭐시기 저시기. "......"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없는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아무런 문제 없지 않은가. 그렇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냥 넘어가면 남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여자가 스스로(라고 말하기에는 약간 애매하지만) 다리를 벌리고 있는데 이 절호의 찬스를 날리면 왠지 엄청나게 손해를 보는듯한 그런 기분마저 느껴지기 시작한다. 저지를까? 아니면 관둘까? ... 양쪽에서 천사와 악마가 각각 내 귀에 속삭이는 듯한 착각마저 들려온다. 악마 曰. 뭐하는거야. 유에. 하늘이 내린 절호의 찬스를 놓칠 생각이냐? 네가 그러고도 남자냐? 여자가 스스로 다리를 벌리고 남자의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데 당당히 그 반응에 응해줘야 하잖아. 그게 진정한 사나이지! 그리고 반대편에 있던 천사 曰. 이런 천금같은 기회를 놓칠수는... 에헴. 아니죠. 유에. 이성을 차려야만 해요. 정신을 차리세요. 세린이 남자 공포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잖아요? 그럴수록 남자의 매력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당신의 사명이니까 지금은 우선 덮치는 것이... 아, 아니에요. 으흠. 잠시 말을 착각했나 보네요. 왠지 천사가 바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결로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둘 다 그냥 덮치라는 쪽으로 합의를 본 게 아닌가. 이성이라는 이름의 천사와 본능이라는 이름의 악마가 서로 씨익 웃으면서 평화 협정의 상징인 악수를 청한다. 참으로 보기 좋은 장면이 아닐수가 없다. 그런고로. 그대로 안면을 세린의 엉덩이 골에 묻어버리는 나였다. "자, 잠깐만! 지금 붜하는 거야!" "... 세린. 다 알고 있어. 너, 흥분한거지?" "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내가 남자 따위한테 흥분할 이유가 없잖아!" "말은 그렇게 해도 지금 네 사타구니는 젖은 수준이 아니라 이미 애액이 흘러 넘치고 있다고." "그, 그건..."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세린. 그녀의 엉덩이에 얼굴을 묻은 내게 미끈미끈한 여성의 애액이 턱에 잔뜩 묻혀진다. 정말로 성적인 의미로 흥분을 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남자의 손에 유린을 당하고 있다는 뜻으로 긴장해서 그런 것일지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내 성욕이 이성을 이기고 말았다. 남자의 성욕이란 정말 대단하다. 세린의 항문을 혀로 핥아본다. 순간 허리를 크게 휘면서 얉은 신음소리를 내는 세린. "흥으으응... 거, 거긴..." 설마 항문이 약점인 것인가? 여기가 성감대? 상당히 애매한 위치에 성감대가 있는 여자다. 물론 진짜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일단 현재의 반응을 살펴보자면 세린의 저 반응은 간지럽다는 감촉에서 나온 의미의 몸부림이 아니라 한 순간 성감대를 공략당한 여자의 쾌락에 떠는 몸짓이었다. 예전에 무인도에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자에게 완전히 쑥맥이었던 나지만, 그동안 다수의 여자들과 관계를 가지다보니 순간적인 안목이 늘어난 나였다. 좋은 현상인지 나쁜 현상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없는 것 보다는 좋지 아니한가. 혀를 살짝 밀어넣어 세린의 항문 안쪽으로 들어가본다. 그렇게까지 심하게 들어간 것도 아닌데, 갑자기 상체를 구부려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진 세린이 나를 향해 엉덩이만을 치켜든 채 몸을 베베 꼬고 있었다. "하, 하지마... 그 쪽은... 약하단 말이야!" "너, 정말 여기가 성감대냐?" "크윽..." 자신의 모습이 남자에게 정복당했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런지 세린이 약간 반항적인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조금 빨개진 눈동자는 아주 미세한 눈물까지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 수치심이 극에 달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자존심 하나로 먹고 하는 세린이라는 존재. 게다가 남 부럽지 않을 정도의 재력가의 딸. 그런 세린이 남들에게 절대로 털어놓지 않았던 자신의 감정을 조금씩 내비치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엄습해온다. 사실 내가 세린에게 이런 식으로 강도 높은 성추행을 가하면 평소에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을 정도의 분노를 나에게 쏟아낼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의외로 고분고분하다. 그렇다고 순순히 말을 잘 들으면서 이거 하라면 이거 하고, 저거 하라면 저거 하는 그런 고분고분하다 라는 뜻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평소의 이세린이라는 여자의 입장을 고려해보면 지금은 얌전한 편에 속하다는 뜻이다. 어째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지? 이 녀석, 남자를 극도로 싫어하는게 아니었나? "항문은... 더럽단 말이야." 고개를 억지로 내가 있는 쪽 반대편으로 돌리며 쥐어 짜내듯이 말하는 세린. 정말로 화를 안낸다. 왜? 어째서? 오히려 이런 반응을 보이니까 더 불안해지는건 내 쪽이다. 역시나 잘못된 선택이었나. "... 미안." "어...?!" "미안. 이세린. 그만 둘게. 내가 정도가 너무 지나쳤나봐." 세린에게서 약간 떨어지며 일어선 나. 여전히 엉덩이를 치켜들고 있는 세린이 오히려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갑자기 왜 그만두는거야?!" "왠지 너 답지 않아서." "나 답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인데." "아니. 나는 분명 네가 지금까지 본 적도 없을 정도의 화를 낼 줄 알고 그 각오를 굳힌 건데, 오히려 이렇게 나오니까 내가 더 미안해지..." "그, 그런건 단순한 고정관념일 뿐이잖아!" 느닷없이 소리치는 이세린. 아까와는 다른 상반된 태도를 보여주는 지금의 이 반응, 그리고 이 소리가 담은 의미는. 오히려 내가 녀석을 덮쳐주기를 바란다는 뜻인가? 아니. 그럴리가 없다. 내 착각이겠지. 그럼. ============================ 작품 후기 ============================ 아무래도 목이 부운 게 감기증상의 예고판 같습니다. 이 시기때 감기 걸리면 지독하다 하던데... 헐... PS. 확밀아 이야기입니다. 일요 렙은 80이 다 되어가는데 각요 렙은 5도 넘기지 못한 불편한 진실. ㅡ_ㅡ; 137화 왜인지 모르지만 오늘의 세린은 정말 이상하다. 물론 내가 이런 계기를 만들게 한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뭔가 좀 아닌듯 싶다. "그, 그런건 고정관념이라고. 단순한 착각일 뿐이니까..." "뭐?!" 갑자기 나에게 안겨오는 이세린. 남자를 극도로 싫어하는 세린이 오히려 내게 안겨오고 있는 것이다. 저번에는 손가락 하나라도 닿았다가 엄청나게 화를 내던 녀석이 회려 자진해서, 그것도 알몸으로 나에게 안겨오는게 아닌가. 그리고 살며시 나를 올려다보며 말하는 세린의 한마디. "그거... 해도 좋아." "너, 술 취했어?" "술 마신적도 없고, 그리고 안 취했어! 정상이라고!" "그런데 갑자기 왜 이래? 너 답지 않아. 이런거." "나 답지 않다고? 이게 내 본래 모습이라고 한다면?" "뭐라고?" "이게 내 본래 모습이라고. 남자를 탐하고, 그리고 섹스에 굶주려있는 본래의 내 모습. 그래. 사람들이 그런 여자를 보고 치녀라고 하잖아. 난 원래 그런 여자라고." 단어의 용법을 잘못 알고 있는거 아닌가? 갑자기 자신에게 치녀라는 칭호를 내려버린 세린이 점점 거칠어지는 호흡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사실 몇일동안 남들의 눈을 피해서 자위하느라 혼났어. 그거 알아? 나는 애널쪽을 공략당하는게 정말 좋아. 최고라고. 그 기분, 그리고 그 쾌락. 정말이지 잊을수가 없어." "너, 남자가 싫다며." "그래. 싫어. 죽도록 싫다고." "그럼 지금의 이 행동이랑 전혀 언행일치가 안되잖아." "싫어하니까 더 좋은거잖아!!" "......" 영문을 모르겠다. 싫어하니까 더 좋다니. 도대체 이 녀석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다른 여자들이 그냥 커피라면, 세린은 T.O.P가 아닐까 하는 쓸모없는 패러디도 생각해본다. 그것보다도 도대체 좋다는 것인지 싫다는 것인지 정확한 자신의 의사 정도는 표현해보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의 기분이 드는 순간, 무인도에서 겪은 일 중에 쇼킹한 사건 탑 10 안에 들어갈 정도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바로 나에게 안겨온 세린이 그대로 자신의 팔을 이용해 내 목을 감고서 키스를 한 것이다. 지금까지 기습키스는 여러번 당했지만, 설마 세린과 이런 식으로 키스를 당해보는 것은 또 처음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자를 싫어하는 이 부잣집 아가씨와의 키스라니. 짧은 키스 타임을 끝내자, 우리들의 입술을 잠시나마 이어주던 긴 타액이 늘어지면서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끊어지며 세린의 가슴 위로 놓여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 지금의 태도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데." "어떤 것이." "분명 너는 남자가 싫다고 했잖아. 그런데 어째서 스스로 이런 행동을 하는거야? 설마 남자 혐오증 그런건 거짓말이었어?" "아니, 명백한 사실이야." 담담하게 말하는 세린. 일단 남자 혐오증이 거짓이라는 가설은 무효화가 되어 버렸다. 본인이 직접, 그것도 한치 망설임도 없이 즉답을 꺼내는 것으로 봐서는 진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데 무의식적으로 어느정도의 망설임을 보이게 된다. 대표적인 예를 두가지 들자면, 순간적으로 잠시나마 말문이 막힌다든가, 아니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든가.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생각되지만, 제 3자가 보기에는 티가 확연하게 난다. 저것이 거짓인지, 아니면 진실인지 말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포커페이스를 항상 유지한다. 전형적인 인물들이 바로 사기꾼과 같은 부류겠지. 이세린 역시도 표정변화 없이 아주 스트레이트로 대답을 꺼낸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가 하는 말은 진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뜻을 내포하는 것이다. "남자 혐오증이라면서 이런 적극적인 어택은 너무 상반된 태도가 아닐까?" "... 끝까지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작게 한숨을 쉬면서 나에게서 멀어지는 세린. 순간 망설이는 듯한 눈빛을 보이면서 마지막까지도 내게 자신에 대한 비밀을 털어놓을까 말까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도대체 세린에게 어떠한 비밀이 숨겨져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사실 나, 마조히스트(masochist)야." "...?!" "괴롭힘 당하는걸 참을수가 없을 정도로 좋아하는 마조라고. 이 바보야!" "아니 잠깐만. 타임." 지금 이세린이 말한 것을 다시한번 정리해보도록 하자. 자신을 당당히 마조히스트라고 말하는 세린. 분명... M 기질이 조금 보이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렇지. 노아 교수님이 계셨구나. 하지만 노아 교수님은 M 기질이 다분히 보였을 뿐이지, 마조히스트까지 올라갈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마조라는 뜻 자체가 괴롭힘이나 이런 수단을 통해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게 아닌가. 처음의 노아 교수님은 아리아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에 대한 사실에 조금은, 아니 많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반 강제적으로 M 기질이 있다고 세뇌를 시키다시피 한 아리아의 전과가 눈부셨지만 말이다. 그래서 세린이 말하는 마조라는 단계가 어느정도인지 잘 모르겠다. 그것보다도 정말로 마조였냐. 오히려 마조보하 세티스트가 더 어울릴만한 사람이 도리어 마조라고 주장하다니. 세상 참 역시나 별 해괴망측한 일이 다 있다. 한동안 말문을 이어가지 못하던 침묵이 조금은 쑥스럽게 느껴진 모양인지 세린이 볼을 부풀리면서 따지듯이 말한다. "뭐야! 내가 마조라는데 불만 있어?" "그런건 아니고." 거 봐라. 이 태도로 보아서는 분명 S를 담당해야 할 여자가 오히려 M이라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그나저나 도대체 어딜 봐서 마조라는 것이냐. 이 여자. "아무리 봐도 마조가 아닌데." "무슨 말을 하는거야! 나는 이래봬도 진성 마조라고!" "그러니까 스스로 그런 말을 해봤자..." 자기 자신보고 알았으니까 빨리 나보고 괴롭혀 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이 말. "그럼 내가 널 괴롭혀주면 되는거야?" "......" 직설적으로 묻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세린. 진심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캐릭터에 어울리지가 않는데. 어찌되었든 결국 천사와 악마의 말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내 본능도 정말 대단하고만. 설마 세린이 진짜 마조라는 사실을 얼핏 눈치채고 '덮쳐버리자!'라는 생각을 반사적으로 한 것이었다면, 이건 나름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여자의 감와 같은 사기스킬에 이어서 드디어 남자의 감이라는 또다른 캐사기 스킬이 등장하게 되는 것인가. 놀랍도다. 천천히 세린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다시 뒤로 돌려 세운 뒤에 엉덩이 쪽에 손을 넣는다. "흐읍...!" 짧고 강한 신음소리를 내뱉은 세린에 다시금 벽에 손을 대면서 허리를 조금 숙인다. 손가락을 세워서 세린의 항문 입구를 간지럽힌다. 순간적으로 다리를 오므리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세린이 나에게 말한다. "괴, 괴롭히지 말고 빨리..." "너, 괴롭힘 당하는게 좋다며." "그, 그렇긴 하지만... 히읏!?" 가운데 손가락으로 세린의 항문 안쪽에 삽입을 시도한다. 말을 내뱉던 도중에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을 맞이하게 된 세린이 놀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귀여운 신음소리만 내뱉는 세린. 평소에 보단 기세 등등한 부잣집 아가씨의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만한 비밀을 알게 되니 나도 모르게 점점 더 세린을 괴롭히는 재미에 맛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S의 재미라고 해야 할까. 맛 들리면 큰일나는데... ============================ 작품 후기 ============================ 광분 리온이 한 장도 안 뜨다니... 저도 벅지 요정 가지고 싶습니다 ㅜ_ㅜ 138화 세린의 항문에 손가락을 집어넣은 채 그대로 속 안을 살짝 긁어본다. 남의 항문에 이런 식으로 삽입을 시도한 적은 없었지만, 세린의 표정은 이미 쾌락에 물든 표정을 하고 있으니 상관 없을지도 모르겠다. "엉덩이를 괴롭힘 당하니까 그렇게 기뻐?" "이, 이상한 말 하지 마..." 그러나 세린의 말과는 다르게 점점 내 가운데 손가락을 조여오는 항문의 힘이 더욱 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마조인 것인가.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점점 더 몹쓸 기분을 느껴버리는 치녀의 목소리에 나도 점점 그녀의 반응에 부응하고 싶어진다. 괴롭혀라. 그리고 좀 더 괴롭혀라. 이런 생각이 내 자아를 점점 지배하기 시작한다. ... 무슨 중2병이냐. 점점 흑화되게. 거칠게 세린의 가슴을 움켜쥐어본다. 말랑말랑한 이 감촉. 여자의 가슴이라는 것은 정말로 그 어떠한 것들보다 부드러운 감촉을 선사해주는 그런 느낌이다. 남자가 유난히 여자의 가슴에 집착한다는 말은 괜한 헛소문이 아닌 것이다. "누가... 가슴을 만지라고 했어... 흐읏...!" "나도 예전부터 은근히 남을 괴롭히는데 취미가 있거든." "진짜 넌... 변태야." "누가 할 소리를." 마조한테는 듣고 싶지 않다. 비록 컨셉이라고는 하나, 나 역시도 세린의 이런 약한 모습에 욕정을 느끼는 것은 사실. 자존심 드센 금발의 미인을 정복했다는 그런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나름 이것도 괜찮은거 같다. 세린의 금발을 살짝 잡아 당겨 내 쪽으로 더욱 몰아붙인다. 너무 강하게 당기면 아무리 괴롭히는 컨셉이라고 해도 미안하니까 말이다. 여자의 생명은 머리 아닌가. 물론 가슴도 좋지만, 여성의 전체적인 외부 이미지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린의 머리카락은 다른 흑발도 아니고 남자의 로망이기도 한 금발. 그렇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세린을 너무 심하게 괴롭히면 안되겠지 라는 걱정어린 마음이 든 것이다. 그래도 세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누군가가 이렇게 거칠게 당겨준다는 사실이 처음인 듯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면서 나를 노려보기 시작한다. "상당히 반항적인 눈빛인데? 세린." "크윽..." 두 팔을 부르르 떨기 시작하는 세린의 모습. 억울함의 호소일까. 아니면 자신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표출되고 있는 일종의 성욕일까. 여자의 입장이 아닌지라 나는 제대로 세린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세린의 항문을 유린하던 손가락을 빼어낸 뒤에 그녀의 입 앞으로 가져간다. 자신의 항문 안에 들어갔다 나온 손가락이 그녀의 안면 앞에 놓이자, 처음에는 격렬하게 거부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의 고개를 잡은 뒤에 반 강제적으로 세린의 입 안에 손가락을 넣어버린다. 어찌보면 대변이 약간 묻어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항문 속을 탐험하고 돌아온 남자의 손가락을 빨고 있는 것이다. "읍...! 흐읍!!" "시끄럽게 굴지 말고 빨아. 이세린." "흡.." 손가락의 끝에 세린의 타액이 묻어 나온다. 그녀의 혀가 최대한 내 손가락을 피하기 위해서 움직이지만, 혀보다도 더욱더 활동적인 움직임을 자랑하는 것이 바로 손가락 아닌가. 세린의 혀는 아마도 짠맛을 느끼고 있으리라 예상해본다. 아니면 자신의 대변? ... 이렇게 말하고 보니 은근히 스캇물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나도 점점 취향이 다양해지는군. 세린이 거칠게 몸부림을 치기 시작한다. 자신을 놓아달라는 뜻인지 아니면 입에서 손가락을 빼달라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세린의 저항하는 몸부림은 진의가 아니라는 뜻이다. 만약에 세린이 정말로 이런 플레이를 싫어했다면, 진작에 이빨로 내 손가락을 깨물어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공격성을 띈 행동은 보여주지 않은 채 오로지 형식적인 저항의 몸짓만을 보여줄 뿐이다. 이것도 S와 M의 플레이의 일종인가. 사실 나도 그렇게까지 컨셉을 짜고 플레이를 해본 경험이 없는지라 세린의 장단에 맞추기가 조금은 힘이 들다. 그렇다고 내가 눈치가 빠른 녀석도 아니고. 그냥 세린을 괴롭히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을 뿐이다. 세린이 약간 호흡곤란 증세를 보일때쯤 손가락을 빼준다. 켁켁 거리면서 거칠게 기침을 하는 세린. 도중에 세린의 목 안쪽까지 손가락을 찔러 넣은 적이 몇번 있어서 자칫 잘못하다간 구토까지 할 뻔한 최악의 상황에 도달한 적도 간혹 있었다. "... 너, 날 죽이려고 하는거야?"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이런 플레이를 싫어하지만은 않아 보이는데." "......" 솔직히 말해서 이정도 수준까지 오게 된다면 나도 정말 할 말을 잃고 만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이세린. 거짓말이 아닐까 하는 아주 작은 의구심 조차도 날려버리는 저 표정. 말은 싫다, 싫다 해도 눈은 오히려 나의 이런 강제적인 행동을 기다리고 있다는 더러운 암캐의 눈을 하고 있다. 평소에 알던 세린의 본심이 바로 이것인가.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 역시도 세린이라는 여자를 다시보게 되었다. 부잣집 아가씨이면서 남들의 동경을 한몸에 받는 완벽한 미인. 성격도 쿨하고, 남자들에게도 지지 않는 펜싱 실력의 소유자가 지금 내 앞에서 겨우 손가락 하나를 가지고 오히려 나에게 괴롭혀 달라고 매달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진짜 마조히스트란 말인가. 어떤 의미로 상당히 굉장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내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없는지라 처음에는 세린의 모습에 조금 당황했던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것도 이거 나름... ... 재미있다. "꺅!!" 세린를 매몰차게 밀치자, 그녀가 힘없이 바닥에 넘어진다. 알몸 상태로 바닥에 눕혀진 세린의 앞에 나는 당당하게 바지의 지퍼를 내리기 시작한다. 이제 한계다. 이런 미인이, 평소에 내가 싫다고 주저리주저리 떠들던 그 여자와 지금은 입장이 전혀 뒤바뀐 성행위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주인이고, 그리고 세린은 내 페니스만을 기다히며 더욱더 자신을 괴롭혀주기만을 기대하고 있는 더러운 암캐. 모두가 부러워하던 부잣집 아가씨는 오로지 성욕만을 추구하는 타락한 여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 작품 후기 ============================ 쓴 당사자가 말하는 것도 좀 웃길지 모르겠지만, 세린과 하는 H씬이 제 생각보다 무진장 긴 분량이 나오는군요. 세린에 대한 애정이 많았었나... 이상타;; 139화 바지의 지퍼를 열자, 지금이라도 당장 세린의 몸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듯이 아우성 치며 등장하는 내 아랫도리 녀석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미 핏줄까지 솟을 정도로 잔뜩 흥분한 상태. 남성기를 처음 봤다는 듯이 세린의 표정을 더욱더 빨갛게 달아오르며 이윽고 약간 두려워하는 시선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너, 페니스 처음 보는거냐?" "... 그래. 처음이면 안된다 라는 법이라고 있어?" "별로 상관은 없겠지만." 그렇다는 말 뜻은 곧 처녀라는 뜻과도 같은 의미가 되는 것인가. 하긴. 벌써부터 남자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게 더 말이 안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진성 마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남자 혐오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거짓이라는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자를 싫어하는 세린이 벌써부터 남자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말 자체가 모순되지 않은가. 아니지. 남자들에게 강간이나 아니면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도리어 남자 혐오증이 생긴 것인가? 생각해보니 그럴수도 있겠다. 결국 처녀가 아닐수도 있다는 말이 될지도... 하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 없다. 지금 내게는 그저 벌겋게 달아오른 남근을 쑤셔 박을 여자의 몸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거칠게 세린의 양 손을 바닥으로 누르고 양쪽 다리 사이로 허리를 넣고 비집고 들어간다. 지금 당장이라도 세린의 질구 안쪽으로 뚫고 들어갈 기세를 자랑하는 성기의 모습. 여성의 조갯살이 씰룩이며 바로 눈 앞에 있는 남근을 유혹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받기 시작한다. "이세린. 이거 봐. 이게 곧 네 몸 안으로 삽입될 녀석이라고." "그, 그런거... 징그러워..."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가급적 아래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세린. 그러나 그녀의 말과는 다르게, 몸은 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곧 자신이 섹스를 할 것이라는 기대감 혹은 쾌락과 충동. 그 모든 복합적인 요소들이 세린이라는 여자의 감정을 마구 뒤흔들기에 충분한 윤활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전위 행위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흠뻑 젖은 사타구니 안. 그 사이의 조그만한 틈에 성기를 갖다 대고 있는 힘껏 허리를 전진시킨다. "흐읍!!!" 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삽입의 고통을 참아낸 세린. 순간 귀두에서 느껴지는 답답한 감촉. 예상은 했지만, 이 녀석. 정말로 처녀였던 것이다. 처녀의 고통은 나 역시도 잘 안다. 그렇다고 내가 여자의 입장에서 처녀가 뚫릴때의 그 감촉과 기분을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간접적으로나마 첫경험을 하는 여성의 기분을 나도 어느정도 공감할 수 있다는 그런 의미다. 그래서 세린이 지금 어떤 기분이고 어떤 고통을 느끼고 있는지에 대한 지식 정도는 충분히 숙지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기왕 한방에 삽입을 해버렸으니, 그대로 밀어붙여 세린의 처녀를 가져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대로 전진, 그리고 전진. 붉은 액체가 처녀막의 상실을 알리듯이 바깥에 그 모습을 비춰주기 시작한다. 이로써 세린까지 관계를 가지게 된 나. 무슨 옛날 시대의 일부다처제도 아니고. 다수의 여자들과 이런 식으로 관계를 가지니까 기분이 조금 묘하다. "으... 흐으으..." 흐느끼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세린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이것 역시도 쾌락을 표출하는 일종의 수단이 되는 것인가? 자세히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현재 세린은 내게 처녀를 빼앗겨 버린 상태고, 그리고 두번째로는 아직 이 섹스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허리를 약간 뒤로 빼면서 다시 전진. 첫번째 피스톤 운동이 시작되자 세린의 몸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작은 편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교수님과 마찬가지의 거유도 아닌 세린의 가슴이 규칙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위로 갔다가 각각 좌, 우로 퍼지더니 아래쪽으로 향하며 다시 위로. 내 허리놀림에 맞추면서 반복적으로 가슴이 흔들리고 있는 모습은 언제 봐도 섹시하다. 촉감적으로도 남성기를 감싸고 있는 다수의 돌기들이 육체적인 쾌락을 선사해주고 있지만, 동시에 시각적으로도 만족을 시켜주고 있다. 내가 움직이는 몸동작에 맞추면서 신음소리를 헐떡이는 여성의 모습. 그 장면이 참을수가 없을 정도로 좋은 것이다. 평소에는 함부로 하지 못하는 여성을 섹스하는 일시적인 순간 만큼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내가 그녀들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복감이라고 해야 하나. 오로지 내 움직임에 맞추면서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암컷의 울부짖음을 들려주는 여성의 모습은 정신적인 쾌락 역시도 보장해주는 서비스 효과까지 더불어 선사해주고 있었다. "아아앙... 흐윽..." 숨이 막힐듯한 소리를 내지르며 내 허리를 껴안는 세린. 그녀의 손톱이 날카롭게 세워지며 내 등을 파고 들지만, 내가 현재 느끼는 이 고통보다도 세린이 느끼고 있을법한 고통이 더 크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긴 금발이 공중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듯 파도와 같은 물결무늬로 움직인다. 식당 안에서 펼쳐지는 섹스.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 단 두명의 신음소리와 질퍽이며 들려오는 음란한 소리가 이 공간을 매꿔가기 시작한다. 어느새 나에게 매달린 이세린. 손은 내 목을 감싸고 있고, 양 다리는 내 허리쪽을 두르고 있다. 그대로 세린을 들어올린 나는 그녀를 들어 올리고서 두 다리로 2명 분의 체중을 지탱하고 체위를 바꾸며 섹스를 하기에 집중한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세린의 유방. 가느다란 허리. 도저히 무겁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세린의 몸무게는 상당히 가볍게 느껴졌다. 원래 여자들이란 다 이렇게 가벼운 체중을 자랑하는 것인가. 아무튼 여자란 존재는 굉장하다. 남자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만큼의 신비로움을 가득 내포하고 있는 이 미지의 생명체. 연구 대상감이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특이한 존재가 아닐까 하고 본다. 아직까지 사정의 타이밍은 오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세린을 내려놓고 일찌감치 성기를 뺀다. 처음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던 세린이었지만, 곧 뒤이어 약간 강압적인 목소리를 담아 그녀에게 명령한다. "뒤 돌아봐." "뭐를... 하려고..." "잔말말고 빨리." 이유라도 알고 싶다는 세린의 의견을 가볍게 묵살해버리고 결국 내가 힘을 써서 그녀를 뒤로 돌린다. 노리는 곳은 바로 아까 내 손가락을 받아들였던 항문. 그 항문 입구에 성기를 갖다 대는 것이다. "너, 잠깐! 지금 뭘 하려고..." "보면 몰라? 항문에다 넣으려고 하는거지." "바,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그쪽은... 아니란 말이얏... 하앗!" 세린의 양 손을 붙잡은 채 엉덩이를 내쪽으로 빼게 만든다. 그리고 성기를 다시 세워서 그대로 삽입. 처음에는 삽입이 잘 안되었다. 왜냐하면 여성기와는 다르게 남근이 손쉽게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윤활유가 되어주는 애액을 내뿜는 곳이 아니니까. 그래서 성기를 약간 밑으로 내려 세린의 조갯살에 비비적 거리며 미끌거리는 애액을 성기에 잔뜩 묻히고 난 뒤에 과감하게 항문 안으로 밀어 넣어버린다. 차마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세린이 두 손을 바닥에 몇번 다급히 치기 시작한다. 그 정도로 아프다는 소리인가. 이미 눈시울도 빨개지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을 보여주는 세린. 그러나 이대로 멈출 생각은 전혀 없다. 다시 한번 뒤로 뺀 다음에 재 삽입. 성기를 끊어버릴 기세로 꽉꽉 물어대는 항문은 여성기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조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어때. 이세린. 기분 좋냐?" "아, 아파... 아프다고!!" "어차피 이것도 익숙해지면 괜찮을거야. 그렇지? 왜냐하면 넌 변태녀잖아." "아니야... 흐읏..."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네 스스로가 말했잖아. 나는 치녀랍니다. 제 몸을 사정없이 짓밟고 유린해주세요. 그렇지?"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이제와서 부정하는건 아니겠지? 치녀 양." "아아앗!!" 육체적으로도, 그리고 말로써 정신적으로도 세린을 지배해간다. 서서히,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정신이 점점 굴욕과 굴복감이라는 이름으로 물들어 가는 모습을 그저 나는 지켜볼 뿐이다. 거칠게 세린의 항문을 공략하는 나. 그 엄청난 조임력에 슬슬 사정의 시간이 온다는 것을 느끼고 그대로 세린에게 말한다. "안에다 쌀 테니까 제대로 받아라. 치녀." "으흐으으... 하으응..." 이제는 말 조차도 이어가지 못하는 세린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안에다 싸지 말라는 간접적인 행동. 그러나 어차피 질내사정도 아니고. 애널이니까 임신할 확률은 없다고 판단한 나는 그대로 세린의 의견을 깔끔하게 무시하게 안에다 싸버리게 된다. 서서히 넘쳐 흐르는 정액들. 차마 항문 내까지 도달하지 못한 성기들이 내가 남근을 빼냄과 동시에 분수처럼 흘러나온다. "하아... 하아... 하아..." 엉덩이를 공중으로 뺀 채 숨을 거칡 몰아쉬는 세린. 처녀를 바치게 되는 첫번째 섹스에 앞과 뒤, 즉 항문 쪽 처녀조차도 나에게 공략당해 버렸다. 세린에게는 약간 미안하지만, 이쪽은 첫 애널 섹스라는 점이 조금은 감회가 새롭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나름 기분은 좋았다는 말이다. ============================ 작품 후기 ============================ H씬이 끝나질 않아!!!!!!! 과거의 제가 이상할 정도로 세린을 많이 아꼈었나 봅니다. 분명 노아 취향일거라 생각했는데... 취향이 달라진건가;;; 140화 정신을 차린 세린이 천천히 옷을 입는다. 아직 항문에 몇몇 정액들이 흘러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치마를 입기 전에 식당 주변에 있는 수건 하나를 꺼내서 엉덩이에 묻어 있는 다수의 정액들을 말없이 닦아낸다. 나는 세린보다도 더 먼저 옷을 입고 있는 상황. 세린이 직접 자신을 강간해달라고 말은 했지만, 그래도 남자인 내가 먼저 세린에게 말을 꺼내는 것이 좋다고 판단해서 물어본다. "괜찮아?" "... 이제와서 걱정해주는 척 해봤자 소용 없어." "그렇겠지." 나도 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린에게 치녀니 뭐니 하면서 질구와 항문을 쑤셔버린 내가 할 말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미안하다는 감정도 들지만, 그래도 사과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세린이 바랬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것인지 확실하게 잘 알수는 없지만, 세린 역시도 사과는 바라지 않는 눈으로 나를 몇번 힐끗 쳐다보더니 정액이 묻은 수건을 내팽개치고 다시 치마를 입을 뿐이다. "... 오늘 일은 절대로 비밀이야." "뭐라고?" "오늘 일은 그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세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화 내기'가 시전된다. "굳이 그렇게까지 말 안해줘도 애초에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전혀 없었어." "흥. 또 모르지. 남자라는 존재는 여자의 몸만 밝혀대는 변태들 뿐이니까." "변태는 바로 너..." "아아아아악!!! 그러니까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갑자기 다급하게 소리 치면서 내 입을 틀어 막는 세린이었다. 자신이 마조히스트라는 사실이 남들에게 들켜지는 것을 그렇게나 싫어하는 것인가. 남자인 내게 직접 다가오면서 입을 틀어막을 정도로 말이다. 뭐... 생각해보면 자신이 변태라고 말하고 다니는 꼴과도 같으니까 오히려 이런 세린의 반응이 정상적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변태입니다 하고 광고하고 다니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않은가. 이제서야 제대로 원기 회복(?)을 한 것인지 제대로 옷가짐을 마무리 지은 세린이 근처에 놓여있던 우리들이 확보한 식량들을 들기 시작한다. "... 빨리 가지 않으면 아리아가 의심할지도 모른다고." "그렇겠지?" "태평한 소리나 하고 말이야. 얼른 너도 준비해." 평소의 세린으로 돌아왔다. 정말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즐기는 마조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여유로운 모습. 이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쉽게 세린의 본모습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뭐, 좋다. 어차피 세린의 비밀을 알아낸 사실 하나만으로도 커다란 수확이라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서로간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둘의 친밀도는 급격하게 늘어나는 법이다. 비밀이란 무엇인가. 나와 상대방 이외에 다수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은밀한 무언가를 가리키는 단어 아닌가. 다른 사람들도 아닌 유독 나를 싫어하던 세린이라는 여자와의 비밀을 공유하게 되어서 내 입장에서는 다행이라는 생각조차 들 정도로 안심이 되는 것이다. 계속해서 세린과의 사이가 서먹서먹해지면 어떻게 될까 라는 걱정까지 하던 나에게는 이번 일이 세린과 친해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발판이자 초석이 되어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세린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러면서 동시에 '어쩌다가 이런 녀석에게 들킨거람...'이라는 작은 중얼거림도 들려온다. 이 일의 계기가 되어 준 작은 거미 녀석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결국 도망쳤는지 마지막까지 녀석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작은 곤충이 만들어 준 인연의 끈, 앞으로 소중히 간직해야겠다. 음식을 들고 방 안으로 돌아온 우리들. 배가 그렇게나 흔들렸음에도 불구하고 평상시와 다름 없는 딱딱한 표정의 아리아가 가스렌지에 불을 붙이고 물을 끓이는 중이었다. 이 녀석도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그 상황에서도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다니. 여자이면서도 은근히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담력을 자랑하는 아리아의 모습을 가끔 이런 식으로 볼 때면, 정말 아리아라는 여자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굉장한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그보다도 같은 쌍둥이 자매인데 세리아와 성격이 왜 이리도 판이하게 다른거냐. 혹시 세리아에게 분배되었어야 할 담력을 전부 아리아가 빼앗아 간 것은 아니겠지? 그건 밸런스 붕괴라고. 하루빨리 업데이트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단 말이다. 안 그러면 아리아라는 캐릭터를 포기하고 세리아라는 캐릭터를 선택해서 플레이하는 온라인 게임 유저들에게 단체로 욕을 먹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렇게 게임 이야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요리 하는데 방해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인 것인지 자신의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아리아가 복귀한 우리들을 보더니 말한다. "늦으셨네요." "아까의 약한 지진 덕분에 조금 사건이 있었어." "사건이요?" "모았던 물건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사건." "그런 것 치고는 상당히 오래 걸린것 같은데요." "... 너, 무슨 점쟁이라도 되는거냐?" "요새 들어서 묘하게 신기가 올라오더군요." 재미없는 표정으로 말장난을 건내는 아리아. 이 녀석의 농담은 진담인지 아니면 그냥 해보는 말인지 영 알 수가 없다. 언니쪽인 세리아는 순수하고 좋은 표정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역시나 패치가 필요한 시점이군. "진행 상황은 어때?" 세린이 화제를 돌려보려는 듯이 말을 걸어온다. 한동안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의심된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던 아리아였지만, 아무렴 어떠냐는 식으로 가볍게 넘긴다. 세린도 이 분위기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는지 의외의 구원의 손길을 날려준 것은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자신과 내가 아리아 몰래 식당에서 육체관계를 가졌다는 것이 판명되면 나는 그렇다고 해도 세린의 입장은 매우 난처해진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남자 혐오증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세린 아닌가. 그런데 남자에게 몸을 허락했다는 것은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테고, 그리고 그 이유가 자신이 마조히스트였다는 사실로 접근하게 되는 증거를 마련하게 되는 것과 같은 곤란한 일이 벌어질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세린의 질문을 받은 아리아가 허리춤에 왼손을 올리며 대답한다. "아까의 사건 때문에 물 밖에 끌이지 못했어요. 조미료 같은 것은 넣지도 못했고요." "조미료가 있었어?" "선반에 있었어요. 많은 재료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충 간을 맞출 정도는 있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인위적인 식품, 그러니까 시중에 파는 식품과는 다르게 우리들은 천연 조미료를 사용하고 있다. 요리의 지식에 대해 전무한 나는 잘 모르지만, 누나가 나에게 들려준 말은 다음과 같다. 스프나 아니면 죽 같은 것을 그냥 날 것으로 만들어버리면 아무런 맛도 나지 않기 때문에 어느정도의 조미료를 첨가한다고 말이다. 어떤 식으로 얻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저번에 보았던 약초 도감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약초 도감에는 약초로 쓸 수 있을만한 식물의 종류나 효능만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쓴 맛과 짠 맛, 그리고 단 맛을 내는 여러가지 식물들에 대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어서 그걸 통해 정보를 얻었다고 답변을 들은 적이 있다. 예를 들자면, 사탕수수 같은거 말이다. 아마도 엘리의 부모님 중에서 어머님 쪽이 생각하신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볼 뿐이다. 아리아의 옆쪽으로 돌아서 부엌 안으로 들어간 세린이 아리아를 바라보며 말한다. "정말이네. 그냥 맹물이야." "그렇죠?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숟가락을 넣어서 직접 맛을 본 세린의 짧은 감상평이었다. 아무래도 맹물에 식사를 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은가. 먹을거면 차라리 차가운 물을 마시는게 좋지, 뜨거운 물은 별로다. 아니지. 생각을 달리 해보면 오히려 잘된거 아닌가. "마침 잘됐네. 우리가 가져온 것중에 뜨거운 물을 필요로 하는 것이 있었는데." "라면 같은 건가요?" 내 말에 호기심을 느낀 아리아가 의문부호를 머리 위에 띄우며 묻는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뜨거운 물을 필요로 하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은 라면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게 정상이겠지. 그러나 다른 의미로 라면보다 좋은 것을 가지고 왔다. "바로 카레와 짜장." "짜장을 듣는 순간 짜증이 나네요." "... 그거, 개그냐?" "네." "웃음이 나올락 말락 했는데, 네 표정을 보니까 개그가 아닌줄 알았어." "상당히 실례되는 말을 하시네요. 유에 선배. 그러니까 여자에게 인기가 없는 거예요." "시끄럽다." 여자에게 인기가 없어도 육체 관계는 많이 가지니까 상관 없잖아. 아무튼 아리아의 짧은 개그는 가볍에 넘기도록 하고, 우리가 가져온 카레와 짜장을 끓는 물에 넣는다. 그리고 더불어 어제 구웠던 감자와 고구마를 꺼내어 먹기 좋게 다듬기 시작한다. 아까 세린이 아이디어를 낸 그것, 그러니까 네팔 음식중에 빵에 카레를 찍어서 먹는다는 그런 형식의 먹는 스타일을 시도해보기 위해서 먹기 좋게 한 입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잘라내고 있는 것이다. 기왕이면 매운 카레가 좋았을테지만, 그래도 없는 것으로 만족해야겠지. 카레나 짜장을 가져온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판국이니까 말이다. ============================ 작품 후기 ============================ 오랜만에 lol을 하고 와서 느낀 점입니다. 역시 이 게임은 하면 안 된다는 것. 정신건강에 피해를 입힐 수단은 베재하는 편이 오래 사는 방법이겠지요. 141화 끓는 물에 담가두었던 카레와 짜장을 꺼내서 가위로 끝부분을 자른 뒤에 작은 접시에 쏟아내기 시작한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소스들의 모습에 저절로 군침이 꿀꺽. 게다가 폭풍우까지 몰아치는 추운 날씨에 이런 따스한 음식들을 영위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축복이 아닐까 라는 성대한 착각까지 해본다. 괜히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식사 앞에서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어 감사하다는 표시를 하는게 아니다. 비록 무교지만, 어느정도 그들의 행동에 대한 공감이 가기 시작한다. "잘 먹겠습니다!" 기운차게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건내면서 포크와 숟가락을 든다. 한 입에 들어가기 좋게 작은 사이즈로 자른 감자와 고구마를 포크로 찍은 뒤에, 카레와 짜장 소스에 찍어서 먹는다. 이것이 우리들의 원대하고 숭고한 계획의 일환이다. 그런데 고작 밥먹는 일 가지고 이런 거창한 단어를 써도 될런지 모르겠다. 뭐, 어찌되었든 맛만 좋으면 된거지. 포크로 먼저 감자 조각을 찍은 뒤에 카레소스에 담궜다가 입 안에 쏘옥 넣어본다. 음... 딜리셔스. 나도 모르게 저절로 되지도 않는 영어가 나올 정도로 맛있다. 사실 즉흥적인 애드립으로 이렇게나마 임시적인 식사를 하게 되었지만, 결과는 매우 만족스럽다. 실제로 감자와 고구마를 카레에 찍어서 먹는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신선한 아이디어도 가산점을 부르는데 한 몫 했다고 본다. 입 안에서 퍼지는 카레의 은은한 향. 그리고 감자의 씹는 촉감까지. 미식가 급으로 감평을 마구마구 내뱉는 내 표현력마저 상승하게 만드는 감자 앤드 고구마와 카레 앤드 짜장 소스의 결합. 잘 맛봤고요. 음. 제 점수는요... 10점 드릴게요. "맛은 어때. 괜찮아?" 아이디어 제공자이기도 한 세린이 나와 아리아에게 질문한다. 본인은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으로 보아서 일단 제안자이기도 한 세린은 맛있다고 평가하는 모양으로 보인다. 나 역시도 세린과 마찬가지의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높은 점수를 부여한다. "나름 괜찮네. 먹을 만도 하고." "... 네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거든." "그러십니까." 보기좋게 무시당했다. 이것이 평소의 남자 혐오증 모드의 이세린. 성행위를 가질 때에는 오히려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즐기는 마조이면서 겉으로는 아닌 척 한다. 그 차이가 일종의 매력 포인트라고 해도... 180도 달라지는 상반된 태도는 혹시 이 녀석이 이중인격이라도 가진게 아닐까 라는 의심마저 들게 만든다. 그래도 본질은 나쁜 녀석이 아니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직접적으로 세린의 질문을 받은 아리아가 싱긋 웃으면서 말한다. "맛있어요. 선배." "정말?" "네. 괜찮은 아이디어였다고 생각이 드네요." "다행이다..." 이보세요. 아리아. 왜 나와는 달리 세린에게는 그런 상큼한 미소를 지어주는 거냐고. 나한테도 그런 미소를 날려주면 어디가 덧나십니까. 라고 말해봤자 도움은 안되겠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나름 괜찮은 식사를 마치고 난 이후에 다시 찾아온 침묵의 시간. 아직 저녁시간이 된 것도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피곤함이 밀려온다. 이미 침대 위에서 잠이 든 세린. 아리아가 있어서 차마 말은 못했지만, 아까 격렬한 섹스를 나눈 뒤인지라 어지간히 피곤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인정한다. 게다가 처녀 상실에 이어서 애널 섹스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약간 엉덩이 쪽이 아픈지 제대로 앉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세린의 상황을 눈치챈 나로서는 조금 미안한 감정도 든다. 그래도 뭐... 남녀가 서로 몸을 섞는 것이라는 건 그런거 아니겠는가. 비록 후폭풍이 거세다고 해도 순간적인 쾌락은 그 모든 것을 보상해줄 정도로 기분이 좋은 것이니까 말이다. 침대 위에서 잠이 든 세린. 새근새근 숨을 고르는 그녀를 잠시 놔두고 설거지를 하기 시작하는 아리아였다. "굳이 설거지 할 필요가 있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는 나. 그도 그럴것이, 계속 여기에 머무르는 것도 아닌데 깔끔하게 뒷정리를 할 필요성이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물어본 것이다. 그러나 나와는 생각을 다르게 먹고 있는 것인지 아리아가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한다. "만약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선배." "재수가 없다면 우리들이 다시 이 곳에 머물게 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단 말이야?" "세상사 미리 대비해두면 나쁠것도 없죠. 오늘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면 선배는 아마 저에게 감사하게 생각할걸요." "확실히 오늘처럼 난파선에 왔는데 바깥에서 폭풍과 비바람이 몰아치게 된다면 이 곳에서 머무를 가능성이 크겠지." "그걸 대비해서 미리 뒷정리를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설거지를 게을리 하고 남은 음식을 치우지 않는다면, 파리나 구더기가 꼬일 수도 있으니까요." "... 그건 좀 비위생적인 상황인걸." 오늘은 아리아의 승리라고 인정해야 하는건가. 계속 듣고보니 아리아의 말도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 나였기에 계속해서 내 무릎에 올라 타려는 에바 초호기를 잠시 세린 옆에다 놔두고 일어서며 부엌에서 설거지를 열심히 하고 있는 아리아에게 다가간다. "나도 도와줄까?" "선배. 설거지 할 줄 아시나요?" 내가 그 정도까지 가정사에 관심이 없는 녀석으로 보여진 것이냐."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이겠죠." "그래그래. 어차피 나는 요리도 못하는 남자니까." "그런 직설적인 뜻이 아니었어요." "다른 뜻이었어?" "네." "어떤거?" "요리도 못하고 청소도 못하고 눈치도 없는 선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 아. 그러냐." 차라리 듣지 말걸 그랬다. 역시나 독설가 아리아다운 발언. 이 녀석에게 들은 독설만으로도 평균 수명이 총 20년중에 적어도 10년 정도 연장된 것이 아닐까 하고 느껴진다. 더불어 나머지 연수는 세린의 욕설이다. 두 여자에게 잔뜩 욕을 먹는 나는 오래 살 수 있겠지?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아리아와 세린에게 감사하게 여겨야겠다. 아직 과학기술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생명연장의 꿈을 실현시켜저서 고맙다고 말이다. 싱크대 위에서 옷 소매를 걷어 붙인 아리아가 소스를 담았던 작은 접시 다수를 나에게 내밀면서 말한다. "선배는 이 그릇들을 씻겨주세요." "어렵지 않지." 설거지를 전혀 해본적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정도는 가볍게 할 수 있다. 평소에 우리 유씨 집안에서는 어머니와 누나가 요리를 하고, 그리고 나는 어머니를 도와 설거지를 자주 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도 설거지를 가끔 하신다. 어머니의 구박에 못 이겨서 할 때가 많을 뿐이지만. 할당받은 그릇을 물에 적시고 세제를 몇방울 짜내어 수세미에 바른 뒤에 거품을 내고 쓱싹쓱싹 문지른다. 접시가 깨끗해지면서 동시에 어두웠던 내 마음도 깨끗해지는 그런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설거지를 하면서 난데없이 왠 시상을 떠올리냐. 내가 그렇게까지 감성적인 남자도 아닌데 말이다. 옷 소매를 걷고 설거지에 열중중인 우리들. 원래부터 설거지를 해야 하는 식기들의 양 자체가 별로 없어서 금방 끝낼 수 있었다. 아리아 혼자서 해도 3분이 채 걸리지 않았으리라고 보여질 정도로 적은 양을 깨끗하게 씻겨낸 뒤에 손을 닦고 제자리로 돌아온 우리들. 한쪽 침대는 세린이 누워서 잠을 청하느라 사용중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리아가 내 침대 위에, 그리고 나는 탁자에 놓인 나무 의자에 걸터 앉는다. 나도 푹신푹신한 침대의 감촉을 느껴보고 싶지만, 그래도 설거지와 요리 준비를 도맡아 한 아리아에게 양보하는 것이 좋겠지 라는 대인배 적인 생각을 해서 기분 좋게 양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리아는 이런 내 친절한 모습에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냐는 식으로 말할 뿐이다. "선배. 저한테 뭐 잘못한 것이라도 있나요." "남의 호의는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인지상정이야. 귀여운 후배씨."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선배가 이렇게 친절함을 보여주면 조금 의심이 되는데요." "마치 내가 평소에 범죄를 밥먹듯이 저지르는 사람 마냥 이야기하지 말아줄래? 이래봬도 상처받기 쉬운 타입이라고. 나란 남자 말이다." "그랬군요. 전혀 몰랐어요." 아리아라면 알고서도 일부러 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녀석은 그럴만한 충분한 위인이 되기 때문이다. ... 그러고보니 아리아는 세린과는 다르게 진성 세티스트. 한마디로 말해서 'S'다. 그런데 세린은 'M'. 서로 상극... 은 아니구나. S와 M이 서로 상호 보완관계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악어와 악어새의 사이라고 해야 할까. 서로 돕고 돕는 그런 관계... 그런데 S와 M을 보고 서로 돕고 돕는 관계라고 칭하니까 뭔가 조금은 어감이 이상하게 들린다. 아무튼 뭐 그런거 비슷한 것이다. 굳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자. 더 말했다가는 내 취향이 다 들통날수도 있을... 이 아니라. 여하튼 서로 S와 M의 기질을 알고 있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는 고민을 해보지만. 아무래도 그건 안되겠지. 세린은 끝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러나 내가 숨긴다는 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리아의 감이 무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아 선배나 누나와 더불어서 눈치가 상당히 빠른 아리아였기 때문에 금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런 고민의 흔적도 즉시 꼬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유에 선배." "갑자기 왜?" "뭔가 저한테 숨기는 것이 있는거 같은데요." 진짜 아리아는 뭐라고 해야 할까. 아까 본인이 말했던 것처럼 무슨 신기라도 내려온 듯한 착각마저 든다. 설마 농담이 아니라 진실 아닌가? 아니다. 더 이상 아리아의 페이스에 말려들면 안된다. 나도 포커 페이스를 유지해야지. "원래 인간이라는 존재는 비밀 한 두개 정도는 가지고 있는게 당연하잖아." "제가 말한 것은 선배가 몰래 남들이 이해할 수 없을만한 독특한 성적 취향을 가졌다든가, 야동을 볼 때 서양물만 본다든가, 아니면 번역기 없이 원판으로 일본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면서 H씬 장면만 주구장창 돌려 본다든가 하는 그런 류의 비밀이 아닌데요." "도대체 네 속에 있는 나란 녀석의 이미지는 어디까지 타락한거냐." "심연의 끝까지 타락했을지도 모르죠. 아, 참고로 부연 설명을 해보자면 독특한 성적 취향은 '스캇물'을 의미하는 거예요." "은근히 마니악한 단어를 알고 있구나." "그리고 두번째에서 언급했던 말 중에 서양물이라는 것은 빈유도 아니고 가슴만 엄청나게 큰 금발 미인이 망사 스타킹과 초 미니 스커트를 입고서 초반에 설렁설렁 스트립 쇼를 선보이다가 나중에 남자를 유혹하면서 'Fuck me!'라고 외치는 그런 류의 야동이에요." "무지하게 세밀한 설정이구나." "마지막으로 번역기 없이 미연시(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줄임말)를 한다는 뜻은..." "잠깐. 거기까지. 그 이상으로는 내가 인격적으로 용납하지 못할거 같아." "아무튼 제 마음속에 있는 선배의 이미지는 대략 이런 식이에요." "대략이 아니잖아. 그렇게까지 타락했다면 네가 구제 좀 해주면 안되겠니. 기왕이면 젠틀맨으로." "선배. 기적이라는 단어가 왜 '기적'인지 아세요?" "글쎄." "일어날 확률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기적이라고 불리는 거예요." "한마디로 축약해서 처음부터 구제할 생각도 없다는 뜻이잖아." "그럴지도 모르죠." "......" "어찌 되었든간에 선배가 숨기고 있는 비밀은 다른 종류의 것이잖아요."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굳이 제가 스스로 입 밖에 내뱉고 싶지는 않은데요." "협박이냐?"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스스로 말하기 전에 먼저 자백하라는 뜻인가. 정말 당돌한 녀석이다. 아리아라는 은발의 후배 말이다. 하지만 나도 아리아의 심리전에 손쉽게 걸려들만한 그런 바보는 아니다. 만약에 아리아가 나를 떠보려고 일부러 '나는 다 알고 있으니까 빨리 스스로 불어보세요!'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 말에 '오냐'하고 넘어갈 내가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로는 모르고 있으면서 아는 척 하는 전술. 간단하게 말해서 허장성세 (虛張聲勢) 전법이다. 삼국지에 보면 제갈공명이 썼던 그 전략 말이다. 아리아가 제갈공명의 환생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대충 그런 식의 심리전이라고 받아들이면 되겠지. 이번에는 안 속는다고. 아리아. ============================ 작품 후기 ============================ 요정 알람때문에 놓친 각요와 광분을 보면 제가 다 광분이 날 지경입니다. 확밀아가 망하는 날이 오게 된다면, 아마도 요정 알람 오류때문이지 않을까 라는 예상을 해봅니다. 오늘도 요정 알람이 하루종일 안 울리길래 기껏 다시 설치했건만... 또 안 울리기 시작합니다 ㅜ_ㅜ 142화 한동안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아리아. 그러나 내가 끝까지 부정을 하는 모습을 보고서 순순하게 입을 열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혀를 한번 차면서 아깝다는 듯이 살짝 입맛을 다신다. "뭐, 이 정도로 해두죠." "적당한 타이밍에 포기하는 방법도 나쁜 편은 아니겠지." "포기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고 보는데요. 왜냐하면 전 아직도 선배가 스스로 한 일을 자백하게끔 유도하는 일을 관두거나 하지 않았으니까요." "끈질긴 녀석이고만." "원래 여자란 그런 종족이에요. 자신이 관심있는 남자에게는 신경이 많이 가는 법이죠." "관심이라. 간접적인 고백이라고 봐도 좋으려나? 방금의 그 말." "선배가 좋을대로 받아들이시면 되요." 상당히 쿨한 답변을 들려준 아리아가 탁자위에 놓여있는 지아 선생님의 손목시계를 바라보고선 말한다. "그다지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내일을 위해서라도 잠을 자두는게 좋을것 같네요." "그럴까?" 아리아의 말에 나 역시도 동의를 표시한다. 내일은 비가 오든 안오든 더 이상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아침이나 점심 무렵에 날씨의 상황을 고려해서 만약에 비가 내린다고 한다면 최대한 빗줄기가 약해지는 시간을 노려서 그대로 산장까지 복귀를 감행할 예정.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의 체력 보존이 절대적으로 우선시 되는 것이다. 오늘 역시도 빠른 취침을 취하는 우리들. 군대에선 저녁 10시만 되도 잠을 자는 게 일상이었는데, 무인도에서는 그것보다도 더 이른 취침 시각을 체험할 수 있었다. 저녁 8시에 취침이라... 초등학생들도 8시에는 안 자는데 말이다. 어제 저녁까지만 하더라도 우중충한 하늘 아래에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던 상황이 마치 거짓말이라도 되는 마냥 금방 하늘이 맑은 모습을 드러낸다. 아침 일찍 일어난 우리들은 그동안 구해온 재료들을 가방에 넣고 베이스 캠프로 이동할 채비를 마무리 짓는다. 잠시동안 여기서의 생활을 마무리 짓고 산장으로 가서 증축 공사를 해야 하는 상황. 게다가 식량도 바닥을 보이고 있는지라 이제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도 없다. "오늘은 날씨가 참 좋네요." 푸르른 하늘 위에 뜬 태양을 바라보던 아리아의 말에 세린이 에바 초호기를 안고서 말한다. "그러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비가 내린 이후의 흔적까지는 완벽하게 지울 수 없었겠죠." 말 그대로다. 날씨가 맑게 개었다고 해도, 그동안 비바람이 몰아치던 후폭풍까지 원상복구 된 것은 아니다. 해안가의 모래알들은 어느새 질퍽질퍽한 진흙 비스무리한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고, 숲쪽으로 향하는 길 역시도 엉망으로 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날씨는 멀쩡하다고 해도 돌아가는 길은 여전히 고생길이라는 뜻이다. "뭐... 그래도 비를 맞아가면서까지 가야 하는 최악의 상황은 면한 셈이니까 그 점으로 위안을 삼자고." 위로 아닌 위로를 건내보는 나. 그런데 실재로 내 말이 맞다는 생각은 든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상황보다는 훨씬 나은 편 아닌가. 그러니까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고 만족할 줄 알아야 마음까지도 풍족해지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원래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고, 누워 있으면 자고 싶다고들 하지 않는가. 욕망 혹은 욕심이라는 감정은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근처에 보이는 기다란 나무 막대기를 하나 들어본다. 진흙텅이가 된 숲속의 길 중에서 늪과 마주칠 확률도 있기 때문에 의심 지역은 나무 막대기로 한번 찔러보기 위해서 임시적으로 구한 도구일 뿐이다. 나이프도 허리춤에 잘 위치해있고. 이건 행여나 들짐승들이 출몰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 대비한 행동이기도 하다. 그동안 폭풍우가 몰아치느라 제대로 먹이 사냥도 못했을 녀석들이 슬슬 활동할 시기가 아닐까 해서 말이다. 가방끈도 제대로 조이고. 다른 여자들도 갈 채비를 마쳤다는 신호를 확인한 나는 드디어 귀환길에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자, 그럼 가보자." "드디어 돌아가네요." "평소에 그렇게나 좁게 느껴지던 산장이 이토록 그립게 느껴질 줄이야." 내 말에 이어 아리아, 그리고 세린이 순차적으로 한마디씩 내뱉는다. 세린의 말에는 어느정도 공감이 가는 상황. 현재 무인도에 지은 산장은 평소에 우리들이 머물던 집, 그러니까 배가 난파되고 무인도에 표류되기 전에 살고 있던 그 집과 비교해보자면 턱없이 부족하고, 화장실도 따로 없고, 덥고 습하고 춥고 좁고 아무튼 온갖 불편한 단점은 다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무인도 내에서는 산장만큼 안전한 장소도 없다. 아까도 말했지만, 부족하면 부족한 만큼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며 살아갈 줄 알아야 하는 것이 바로 대인배 아닌가. 우리 모두 대인배가 되도록 하자. 어찌 되었든 대인배고 나발이고 지금은 산장으로 무사히 복귀하는게 최우선 상황. 그동안 우리들이 산장과 난파선 사이를 뚫어놓았던 일시적인 길은 이미 폭풍우의 영향으로 그 자취를 흔적도 없이 감춰버렸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허무함이 느껴진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위력이란 말인가. 몇걸음 몇걸음 걸어가던 도중에. "바닥이 진흙이라서 걷기가 힘들어." 세린의 불평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확실히 평소의 숲길에 비해서는 걷기 힘들다. 진흙 투성이라서 발이 간혹 빠지는 경우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짜증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 신고 있는 신발이 더럽혀진다는 것이다. 옷은 대충 만들거나 아니면 공수해온다고 하더라도, 신발 하나만큼은 구하기 힘들다. 물론 엘리와 같이 이미 무인도 생활에 익숙해져서 맨발로 다니는 타입도 있지만, 아직 우리들은 비포장 도로를 맨발로 활보하고 다닐 정도로 자연에 친숙한 사람의 반열에 들어선 것은 아니다. 비포장 도로 보다는 아스팔트 포장 도로가 친숙한 도시인이기 때문이다. 세린과 마찬가지로 아리아 역시도 걷기에 조금 불편함을 느끼는지 나에게 이런 말을 제안한다. "유에 선배." "왜?" 그냥 맨발로 가는게 좋지 않을까요?" "... 그건 다음으로 미루자." "어째서인가요?" "아직 맨발로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익숙해지지도 않은 우리들이잖아. 당연한 말이겠지만 맨발로 돌아다닐 정도로 발바닥에 굳은 살들이 생성된 것도 아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흙 상태일수록 날타로운 돌이나 아니면 나무의 가시에 찔릴 가능성도 있으니까 가급적이면 신발을 신고 돌아다니는 것이 좋을거야. 파상풍이라도 걸리면 큰일나니까." 인간의 살결은 엄청나게, 아니, 무지하게 연약하다. 비슷한 말이기는 하지만, 어감상 그 정도로 강조하고 싶을 정도로 피부의 연약함을 표현하고 싶다는 나의 의도를 이해해주면 고맙겠다. 굳은 살이 있다고 해도, 피부 자체가 판타지 소설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스톤 스킨(Stone Skin) 마법 수준으로 강화되지 않은 이상 사소한 것이라도 베이거나 찔릴 확률이 높기 때문에 최대한 신발을 신고 이동하는게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세린뿐만 아니라 신발을 벗고 가자고 주장한 아리아 역시도 내 말을 대충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평소대로라면 3~4시간 정도 소요될 거리가 오늘따라 상당히 멀게 느껴진다. 게다가 길도 험하고. 1시간 정도 강행군을 펼친 우리들은 우선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근처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앉는다. 바닥이 온통 젖은 흙들 투성이라서 함부로 앉을만한 장소를 찾기가 여간 쉬운게 아니었다. 그나마 좀 커보아는 고목나무의 아래에 위치한 뿌리에 걸터앉은 우리들은 잠시동안의 휴식을 통해 걷느라 무리한 다리를 쉬게 나둔다. 한숨일 쉬면서 자신이 안고 있던 에바 초호기의 등을 여러차례 쓰다듬어주는 세린이 작게 중얼거린다. "석기시대 사람들이 갑자기 존경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어." "그건 나도 공감하는 중이야." "이런 환경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 수 있었던 것일까? 신기하네." "인간도 최초에는 동물이었다고 하니까. 진화론에서 보면 그런거 있잖아. 원숭이였던 인간이 점차 도구 사용법을 알아가고, 집단 생활을 알아가고 하는 사이에 인간으로 진화한다는 그 이론." "단순한 가설일 뿐이잖아?" "그래도 제일 신빙성이 높은 거니까." 애초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이런 대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온 존재다. 그런데 인간은 자연을 배신하고 현대 문명이라는 일종의 인간만의 사회 국가를 만들고 과학 기술을 앞세워 무분별하게 자연을 파괴하고 자신만의 편익을 위해 만행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무인도 역시도 그렇다. 이미 현대 문명 사회에 적응해버린 우리들은 대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전혀 모른다. 그 정도로 평소에는 기계화된 문명에 너무 의존하며 살아온게 아닐까 하는 약간의 반성감 마저 들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때 이런 과목이 있었잖아요. 자연과 환경이라는 과목이요." "아, 그거? 나도 배운 적이 있어." 아리아가 도중에 우리들의 대화에 참가한다. 분명 내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4~5학년 때였나. 그 때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바른생활과 더불어서 내가 좋아하는 과목 중 하나였지. 은근히 이과 틱한 상식도 많이 있었고. 굳이 언급할 이유는 없지만, 그때 당시에는 화학기호나 옴의 법칙 이런 물리적인 것도 배우지는 않았다. 그저 자연을 사랑하자 라는 대주제를 가지고 수업을 들은 기억이 아주 희미하게 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보면 나도 은근히 기억력이 좋구나. 어쩌다보니 또 내 자랑이 되었지만, 사실인걸 어찌하리오. 내가 다 잘났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자연과 환경에서 배우는거 보면 그렇잖아요. 자연을 사랑하자, 자연을 오염시키면 안된다 이런거 말이에요."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런데 그게 왜?"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자고 주장하는 인간이 오히려 자연을 파괴하고 낭비하는 모습을 보면 조금은 넌센스가 아닐까 해서요." "그런걸 언행불일치라고 하는 것이겠지." 예전에 티비 프로그램에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자연을 무분별하게 파괴하는 인간의 습성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가 하는 주제로 말하는 강연 같은 것이였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욕망'이라는 것 때문에 인간은 자연을 짓밟고 자신의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이런 악역을 자처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걸 볼때마다 조금은 나도 모르게 위화감이 느껴지는게 사실이다. 바다에 버린 쓰레기들이 모여서 하나의 거대한 섬이 되었다는 인터넷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고 플라스틱 가루가 모이인줄 알고 먹은 새들의 부패된 시체도 있었고, 석유 유출 사건에서 기름을 뒤집어 쓴 물고기들의 모습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무인도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면, 사회에 있을때 내가 보았던 환경오염 관련 뉴스가 생각난다. 같은 자연 환경이라도 도심과 외부는 엄연히 다르구나 라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더불어 무인도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자연은 원래부터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구나 하고 말이다. ... 무인도에 돌아가면 오랜만에 자연과 환경이라는 교과서를 찾아서 한번 읽어봐야겠다. ============================ 작품 후기 ============================ 알고 지내는 이성친구가 있는데, 오늘 술자리에 눈치없게 제가 고백했다가 거절한 여자를 부른다고 합니다 ㅡ_ㅡ술자리를 취소해버릴까 했는데, 눈치가 보여서 걍 만나자고 했지만... 참 기분이 씁쓸하네요. 거절당한 여자한테까지 술 사주며 잘 보여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143화 "슬슬 다시 가볼까?"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고 일어서는 아리아. 그와는 반대로 세린은 '또 걸어야 해?'라는 약간의 불만을 토로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그녀 스스로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 잠자코 에바 초호기를 품에 안는다. 새끼 고양이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혼자서 걸을 수 있는 녀석이지만 어찌하여 세린이 안고 가는 것일까. 부엌에서 그 화려한 몸놀림을 보여주던 에바 초호기의 싱크로율 400% 폭주 모드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여성들의 귀여움을 한몸에 독차지하는 얌전한 새끼 고양이가 되었단 말이냐. 당연한 말이겠지만, 바닥이 질퍽질퍽한 상황인지라 새끼 고양이인 에바 초호기가 우리들의 걸음 속도를 따라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렇게 세린이 직접 에바 초호기를 품에 안고서 가는 것이다. 도중에 깊은 진흙탕에 빠지기리도 한다면 나중에 목욕을 시키는 것도 나름 곤욕이지 않는가. 내가 고양이를 애완동물로 키워본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서 고양이를 키워본 사람의 말에 의하면 동물들이라는 것은 원래 목욕 시킬때가 가장 힘들다고 자주 말하는 것을 들은 경험이 있다. 아무튼 다시 시작된 여정의 길. 숲 속인지라 나뭇잎에 매달려있던 빗방울이 이슬이 되어서 머리 위로 간혹 떨어지는 일을 제외하고는 순조로운 산책길이 되어가고 있었다. 위험이 될만한 들짐승도 보이지 않고 말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점은 하나 있었다. "... 가급적이면 바닥을 보지 않는 편이 좋으려나." "무슨 일인데? 세린." "지렁이 말이야. 징그러워!" 세린의 말 그대로 비가 온 뒤에 땅 위에 자주 목격되고 있는 지렁이의 모습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나도 개인적으로 상당히 궁금한데. 어째서 지렁이들은 비가 오거나 아니면 비가 오고 난 이후에 땅 속을 나와서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까. 평소에 정말 궁금한 사항이었다. 이럴때는 상식이 풍부한 아리아에게 물어보도록 할까. "아리아. 혹시 지렁이가..." "어째서 비가 오는 날이면 지면에 올라오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저에게 물어보시려는 것은 아니겠죠?" "오, 잘 아네. 이런걸 텔레파시라고 하는 건가?" "그런 텔레파시가 존재한다면 당장 유, 무선을 통째로 잘라버리고 싶은데요." ... 여전히 재미없는 후배 녀석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개그를 하기에는 조금은 무리가 있다고 보여지는데 말이다. 아니면 일부러 우리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 자기 희생을 감수하고 이런 농담을 한 의도라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일명 세크리파이스(sacrifice)라고들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아리아의 이미지와 너무 동떨어진 행동이니까. "쓸모없는 농담은 넘어가고. 알고 있다면 설명이나 해줘." "지렁이는 원래 '음성주광성 동물', 즉 햇빛을 싫어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땅속에서 생활을 하는 거예요. 또한 지렁이는 호흡기관이 없기 때문에 피부를 통해 산소를 흡수하여 호흡을 하지요. 그런데 비가 오게 된다면, 빗물이 땅위를 덮으니까 흙 속에 산소공급이 잘 안되어 지렁이가 피부로 호흡을 하기가 힘들어 지기 때문에 호흡을 하기 위해 땅위로 기어나오는 것입니다." "오호라. 생각보다 간단한 이유였네." "... 아마도요." "거짓이었냐?!" "진실이에요." "뭐야. 어쩐지..." "... 일 가능성이 80% 정도겠죠?" "도대체 뭐하는 인물이냐. 너." "평범한 후배입니다만." 이미 은발이라는 머리색을 가진 순간부터 평범 오브 평범이 아니잖아. "그것보다 진실이야, 거짓이야." "진실입니다. 참고로 출처는 네이버 지식인에서 퍼온 것이에요." "마지막까지 구체적인 설명, 눈물나게 고맙구나." 고작 지렁이가 비 오는 날에 왜 지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지에 대한 호기심 하나 알기 위해서 아리아와 말싸움 아닌 말싸움을 하고 말았다. 그것보다도 말싸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내가 아리아에게 농락당했다는 기분이 더 많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렁이도 나름 살겠다고 하고서 나오는 것인데, 불쌍하게도 여자들에게는 징그러움과 혐오감의 대상이 될 뿐이다. 같은 생물임에도 불구하고 에바 초호기 같은 아기 고양이는 이쁨을 받고자라나는데 말이다. 땅의 비옥도를 더욱 올려주는 이로운 존재인 지렁이에게도 조금은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자. 낚시 미끼로도 도움이 되니까 말이다. 한참을 또 그렇게 걷기 힘든 대지 위를 걸어가던 우리들. 아직 산장까지의 거리는 절반이 넘게 남아있는 상황이다. 본래 이렇게까지 먼 곳은 아니지만, 워낙 걷기 힘든 땅의 상태 위를 무리해서 발걸음을 재촉하다보니 몸에 피로도 쌓이고 있고, 덕분에 체감상으로도 어느정도의 피곤함도 축적되고 있는 안 좋은 상황에 놓이게 되고 있었다. 정말 재수가 없으면 도중에 야영을 해야 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서든 해가 저물기 전까지 산장에 도달하고 싶은데. 가뜩이나 식량도 없기 때문에 이제 슬슬 한계치에 다다를 때가 된 것이다.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다는 점은 아침 일찍 출발한 덕분에 이제 겨우 점심때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절반도 안 온 상황이지만, 우리가 출발한 지 겨우 2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해가 저물기 전까지는 그래도 시간이 많이 남은 상황. 어찌저찌하면 베이스 캠프까지 도달하는 것은 아슬아슬하게 달성할 수 있을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아니지. 기분만 들면 안된다. 확실하게 도착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먹자마자 곧바로 문제점이 생겨버리기 시작했다. "... 유에 선배." "괜찮아. 아리아. 니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어." "그럼 굳이 말은 안할게요." "......" 우리들의 바로 앞에 보이는 절경. 아니... 절경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기막힌 자연의 산물이 만들어 낸 시련의 일종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엄청나게 내린 비 덕분에 불어난 작은 강물이 몸을 잔뜩 불리고 흙탕물을 마구마구 뿜어내고 있는 모습이었다. 거리는 대략 5M. 그 작았던 강이 어느새 이렇게 불어난 것일까. 자연의 위대함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이 든다. 그것보다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어떻게 할거야? 이거." "글쎄." 세린의 물음에도 뭐라고 확답을 줄 수가 없다. 말 그대로 나도 지금 이 상황을 어찌 극복해야 좋을지 마땅한 생각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잠시 휴식할까?" "너, 대책 같은게 생각이 안나서 그렇지?" "사람이 가끔 너무 정직하게 대답하면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발언이 된다고." 세린의 말에 가볍게 대응한다. 사실 그녀의 말이 사실이기도 하고. 뭔가 좋은 방법이 떠오를 때까지 강제적으로 휴식을 취하게 되었으니까 최대한 그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밖에 없다. ... 생각해보자. 5M 거리의 폭을 갈 수 있는 방법. 게다가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분명 시간이 지나면 강물이 불어난 정도도 어느 수준까지는 가라앉을 가능성이 크지만, 방금 내가 언급했다시피 조금이라도 빨리 우리는 산장으로 복귀해야 한다. ... 어렵다. 상황이 조금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난감하네요. 이거." 나와 비슷하게 고민을 시작한 아리아도 고민을 해보기 시작한다. 로프가 있긴 하지만, 반대편으로 단단하게 묶을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강을 건너가기 시작하면 급물결에 휩싸일 가능성이 크다. 어디로 떠내려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위험한 행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건너갈 방도가 생각나지 않는다. 고민해보자. 조금 더 머리를 써보는 것이다. "유에 선배." "뭔데? 아리아. 좋은 아이디어라도 생각 난거야?" "돌 같은 것을 던져서 임시적으로 다리를 만드는 것이 어떨까요." "돌 다리를 만들자고?" "네. 발판이 될 수 있을법한 크기의 돌들을 여러게 던져두면 물에 휘말려 떠내려갈 확률도 없을테고.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 분명 아이디어는 좋다. 일시적으로 돌 다리를 만들어서 그 위로 건너간다는 방법 말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수단의 폭이 넓어졌다는 점은 좋긴 하지만, 커다란 단점이 있다. "그 많은 돌들을 어디서 구할건데?" 세린의 한마디. 그 말이 아리아의 정곡을 찌른 것이다. 돌 다리를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괜찮았다. 그러나 세린의 말 그대로 그 정도의 여유분이 적어도 내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이 돌이라고 하지만, 강을 지나는 데 발판으로 삼을만한 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옮기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소모된다. 가급적이면 빠르게 다리를 만들고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가뜩이나 이 강을 넘어가기에도 제한된 조건이 많은데, 시간까지 고려해야 하니까 더더욱 어렵다. 이런걸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해야 할까. 난감하다. 정말로. 시선을 돌려보며 주변을 다시한번 확인해본다. 현재 우리들이 있는 주변에는 제법 튼튼한 나무들이 포진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들 앞에 불어난 강물이 버티고 있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발판으로 삼을만한 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나무를 타고 반대편 나뭇가지를 통해 넘어갈까? 물론 나 혼자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여자들이 문제다. 운동을 좀 했다는 세린 조차도 약간은 무리수로 느껴지는 방법. 그렇다는 말 뜻은 아리아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여자 두명도 가능한 방법이라. "유에." 이번에는 세린이 나를 부른다. 아리아와 마찬가지로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일까. 약간 기대하는 눈치로 그녀를 바라보자, 세린이 자신이 생각한 나름의 아이디어를 나에게 들려주기 시작한다. "밧줄로 건너가는게 어때?" "이세린. 너도 알겠지만, 반대편 나무 기둥에 밧줄을 묶어줄만한 사람이 없잖아." "그건 걱정하지 마." 라고 말하면서 두 손을 모으고 무언가를 든 채 내 앞에 내미는 세린. 보아하니... 에바 초호기였다. "초호기는 왜?" "이 아이를 건너편까지 던져주는거야. 그리고 밧줄을 초호기한테 건내서 나무 기둥에 묶게 하는거지." "판타지 소설이냐. 이거. 그것보다도 너, 초호기를 너무 과대평가 하는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초호기라면 할 수 있어!" "그럴리가 없잖아." "너야말로 고양이를 너무 과소평가 하는거 아니야?" "아무리 내가 고양이를 과소평가 한다고 해도 적어도 자기 발만한 밧줄을 나무 기둥에 묶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이라고 보는데. 제대로 밧줄조차도 들지도 못하게 생겼고만. 그리고 만약에 그 일이 가능하다면 '세상에 이런 일이'에 출현하는 것은 따논 당상이겠다." 하지만 세린과는 다르게 초호기 녀석은 세린의 손 위에서 몸을 웅크린 채 절대로 하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좌 우로 격렬하게 흔든다. 더불어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까지 맺힌 상태다. 초호기가 불쌍하지도 않나. 이 여자 말이다. ============================ 작품 후기 ============================ 아... 여자란 생물은 진짜... ㅜ_ㅜ144화 "고양이는 애완동물 중에서 가장 영리한 존재라고!" 세린의 고양이 찬양은 끝을 모른 채 계속 전개되고 있다. 고양이가 귀엽다는 사실 정도는 나도 인정하겠지만, 그렇다고 고양이를 신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것은 아니다. "알았어. 고양이는 대단해. 인정할게." "그럼 내 작전대로 하는거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별개의 문제야." "뭐야. 방금 내 말에 동의한다며." "그건 고양이의 귀여움에 대한 너의 지나친 찬양을 인정하겠다는 말이고, 네 작전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은 아니야." "남자가 째째하게." 그런 말을 한다고 한들, 실현 불가능한 작전을 제안한 주제에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뜻인가. 게다가 초호기가 불쌍하지도 않는 것인가. 그리도 고양이가 좋다면서 고양이가 절대로 해내지 못할만한 일을 생각해내다니. 고도의 고양이 안티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까지 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무섭다. 이세린. 아무튼 상황은 다시 제자리. 지아 선생님의 손목시계를 확인해보자, 벌써 시간은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고민하는 사이에 여기서만 30분을 허비한 것이다. 위험하다. 이 상태로 가다가는 오늘 정말로 솦숙에서 야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비가 잔뜩 온 뒤라서 마른 장작도 없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불을 피우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라이터가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불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그 불을 어떻게 유지시키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불을 지핀다고 해도 그 불이 몇분을 못가고 금새 꺼져버리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 마른 장작도 보이지 않고. 태울만한 종이가 있긴 하지만, 이건 난파선 내부의 지도이다. 차후에 난파선을 다시 탐색할 때 엄청난 도움을 주는 아이템이기 때문에 함부로 소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작 불을 피우기 위해서 지도를 태운다고 본다면, 그것만큼 비효율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지도를 태운다고 해도 고작 종이 한장으로 모닥불이 얼마나 오래 버틸까. 기껏해야 한순간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숲속에서 밤을 지새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 게다가 멧돼지와 같은 들짐승이 언제든지 출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산장이나 난파선 근처에서 잠을 청해야 한다. 저번의 그 멧돼지 녀석과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야영은 정중히 사양하도록 하겠다. 그런 관계로 강물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은... "... 모르겠네." "선배. 좀 더 아이디어를 빨리 내보세요." "그렇게 재촉한다고 한 들. 아이디어가 쉽게 떠오를 일이 없잖아." 만약에 그런 반짝 아이디어를 재치있게 생각해내는 두뇌가 있다면, 나는 지금쯤 사업으로 때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빛나라 지식의 별의 소유자도 아니고 말이다. ...... 그래도 생각을 안하는 행동을 하면 안되겠지. 주변에 있는 나무들. 이용해야 할 방법은 이거밖에 없는데... ... 그러고보니 잠깐만. 내가 앞에서 언급했던 내용들 중에서 이 강물을 넘어갈 수 있는 수단이 분명... 윗쪽에 있는 고목나무들의 나뭇가지를 타고 넘어가는 방법이 있다고 말한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수단은 운동신경이 부족한 아리아 때문에 무리라고 했고. 하지만 나는 넘어갈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내가 나뭇가지를 타고 반대편으로 넘아가서 밧줄을 연결하면? "그래! 그거다!!" "뭐, 뭐야. 갑자기." 놀란 세린이 나를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세린의 그런 시선에 전혀 개이치 않는다. 왜냐하면 기가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위기상황에 몰리게 되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고들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고 방금 내가 생각한 아이디어가 초인적인 능력을 통해서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위기 상황에서 나름 쓸만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는 내 자신이 대견스러우니까 그것으로 된 것이다. "... 그러니까 네가 저 위쪽에 있는 나뭇가지들을 타고 반대편으로 넘어가면 우리들이 밧줄의 반대편을 너한테 던져주면 된다 이거지?" "그래." "가능해? 그런 일이." "여기에 있는 나무들은 웬만해서는 부러지지 않는 두꺼운 나뭇가지들을 가지고 있어. 세월의 흔적이라고 해야 할까. 겉보기에도 두꺼워 보이잖아. 그렇지?" "분명 그렇긴 하지만..." "위험하지 않을까요. 유에 선배." 아리아의 말대로 위험할지도 모른다. 도중에 내가 강물 위로 떨어지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뭇가지들이 튼튼해 보인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나무 기둥과 나뭇가지는 차원이 다르다. 그 강도하며 두께, 그리고 내구성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나뭇가지 쪽이 훨씬 더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은 일반 상식으로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주변에 있는 고목나무들이 다른 나무들에 비해서 나뭇가지가 두껍다고 해도, 부러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내 몸무게는 72kg. 나뭇가지가 이 무게를 견딜 수 있을지에 대한 확률은 단순히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이대로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나중에 더한 일도 생길지도 모르고. 그리고 제일 큰 문제점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아까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던 그 화사한 하늘의 모습이 어느새 구름이 자욱한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곧 비가 한바탕 다시 쏟아질지도 모른다는 확률이 커져가고 있는 상황이다. "밤을 숲 속에서 보내는 일 자체도 위험하지만, 거기에다가 비까지 오게 되면 난감해. 그러니까 다른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강은 반드시 건너야 하니까." 그렇다. 우리들은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허리에 밧줄을 맨 나. 그리고 그 밧줄은 최대한 여유 길이가 있을 정도로 늘인 뒤에 아리아와 세린이 붙잡아주기로 한다. 혹시나 강에 떨어질 우려도 있기 때문에 만약에 대비한 소소한 안전장치인 것이다. "떨어질 거 같으면 바로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수도 있어요. 유에 선배." "나도 알고 있어." 개인적으로 내 스스로도 강에 자처해서 빠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기 때문에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나무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고 있다. 안되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사람 목숨이 가장 중요하니까 말이다. 옷을 걷어 올리고 나무를 타기 시작한다. 어렸을때 누구나 한번쯤은 개구장이 시절이 있지 않은가. 나 역시도 어렸을땐 골목대장이라는 타이틀을 취할 정도로 장난끼가 다분한 유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이 정도 나무타기는 이미 마스터했다. 팔에 힘을 주고 재대로 발을 고정시켜서 위로 올라간다. 천천히. 신중하게. 정신을 집중시키고. 드디어 우리들이 위치한 나무 위쪽까지 올라가기에 성공한 나. 여기까지는 매우 순조롭다. 예상했던 것과 같게 일이 진행되는 상황.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나뭇가지들을 타고 건너편으로 넘어가야 하는 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점이다. "유에! 건널만 한거야?!" 세린의 목소리에 살짝 한 발을 내밀어 나뭇가지를 흔들어본다. 끼이익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어느정도 발판이 될 수 있을 정도의 강도를 보여주는 나뭇가지들. 이 정도면 충분히 건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괜찮아. 잘하면 될지도 모르겠는데." "선배. 생각보다 급류가 거세니까 조심하세요." "오케이. 나만 믿으라고." "냐옹~" "초호기도 응원 고맙다." 고양이 한테까지도 응원을 받으니까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초호기가 내뱉은 울음소리가 응원인지 아니면 세린의 품에 안긴 채 애교를 부리는 소리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뭐든지 마음 먹은대로 일이 이뤄진다고들 하지 않은가. 좋게 생각하면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리 하는게 좋을지도. 나무 아래에 있을때는 잘 몰랐는데, 윗쪽에 올라오니까 생각보다 바람의 세기가 강하다. 내 무게 때문에 흔들리는 면도 있는데, 바람이 불어옴에 따라서 주기적으로 나뭇가지들도 흔들리는거 아닌가. 그냥 조심해서 건너가면 되겠지 라는 안이한 생각을 한 내 자신이 조금은 부끄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바람이라는 변수를 생각하지 않았다니. 나도 아직 무인도 생활 적응에 한참 멀었나보다. 그건 대충 넘기고. 바람 덕분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의 유동적인 움직임을 대충 눈짐작으로 살펴보고 기억한다. 어떤 식으로 어느 방향으로 왔다갔다 흔들리는지에 대한 관찰을 하고서 그 패턴을 기억하도록 하자. 오락실에서 히든 캐릭터 고르는 키워드를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니까 이런 나뭇가지들의 움직임도 충분히 숙지할 수 있다. 그렇게 믿자. ============================ 작품 후기 ============================ 청하는 뒷끝이 덜해서 좋은 술 같습니다. 어제 처음 먹어본 술이지만, 소주보다는 괜찮다는 평을 내리고 싶습니다. 145화 서커스에서 보면 외줄타기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 기억이 다들 한번씩 있을 것이리라 생각된다. 물론 나 역시도 어렸을때 티비에서 곡예사들의 묘기를 본 적이 있다. 수십미터 상공에서 고작 줄 하나에 의지하고 반대편 기둥까지 건너가는 진기명기 말이다. 그냥 건너기는 것도 힘든데, 문제는 막대기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온갖 물건들을 올리고 건너가는 묘기는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신기한 묘기를 내가 스스로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비록 외줄은 아니지만, 스릴 하나 만큼은 서커스의 곡예사가 보여주는 아슬아슬한 기분 그 이상급은 된다. 밑에는 급류가 마치 떨어지면 나를 집어 삼킬 기세로 무지하게 빠르게 흘러간다. 고작 무인도 숲 안쪽에 있는 작은 강이었던 주제에 폭풍우의 버프를 받아서 그 몸둥이를 잔뜩 부풀린 이 녀석을 어떻게 건너가야 좋을지 고민하던 우리들은 결국 이런 수단을 택하게 된 것이다. 내가 건너가고, 줄을 기둥에 묶어서 그 줄을 잡고 세린과 아리아가 건너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가 건너편으로 건너가야 하는 전제조건이 성립되어야 가능한 승리조건.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수가 없다. 그래도 해보는 정도까지는 하는게 좋지 아니한가. 그나마 이 방법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해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좋아... 일단 첫 걸음은 양호하고..." 몸이 살짝 기우뚱 했지만, 제빨리 균형을 잡고서 몸을 낮춘다. 일어나 있으면 더 자세를 잡는데 불편하기 때문이다. 최대한 무게중심을 낮추면서 그대로 전진. 그리고 또 전진. 앞으로 계속해서 꾸준히 나아간 끝에 겨우 강의 절반 정도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유에 선배. 건널만 한가요?" "아직까지는 그런 기분이 드는데." "도중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너, 지금 나한테 일부러 겁 주려고 말하는거 아니냐?" "그럴리가요. 저는 순수하게 선배가 걱정되는 마음으로 말한 것이지, 만약의 상황이 벌어지게 되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상기시키기 위한 그런 불순한 의도로 말한 것은 아니에요." "... 그래. 잘 알았다." 눈물이 날 정도로 배려심 깊은 후배의 태도 덕분에 약간의 정신이 흐트러질 지경이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신 바짝 차리고 건너갈 일이 남아있는 내게 있어서는 조금도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내가 건너간다고 해도, 문제는 그 이후다. 줄을 연결한다고 해도 과연 아리아와 세린이 건너올 수 있을지 그 뜻으로 한 말이다. 하지만 그건 둘째치고, 우선 선행조건이기도 한 내가 먼저 일을 성공시켜야 하겠지. 집중하자. 정신 차리는거다. 유에. 다시금 한 발자국 씩 발걸음을 옮긴다. 다수의 나뭇가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두꺼운 나뭇가지만을 골라서 타고 가는 것이 약간의 곤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니지. 약간이 아니라 매우, 엄청나게. 베리 굿(very good)으로. 바람이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한다. 하늘에 구름이 끼어갈수록 날씨도 악조건이 되어 가고 있었다. 정말 운도 안 따라주는 우리들. 무슨 내가 비를 부르는 남자도 아니고 뭔 놈의 비가 이리도 많이 내리는지 모르겠다. 무인도가 위치한 지역이 열대지역이라도 되는 것인가. 나중에 구조를 받게 된다면 이 곳의 위치를 꼭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슬로우. 슬로우. 명경지수의 마음상태를 유지하며 반대편 나뭇가지에 발을 딛는데 성공한 나. 좋다. 여기까지는 기세 좋게 왔다만... ... 우우우우우우웅. "젠장...!"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 나온다. 갑작스레 기분이 더럽게 느껴진 것은 아니고, 난감한 상황에 봉착해버렸기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는 그래도 나뭇 가지를 살랑바람 정도로 흔들던 바람이 어느순간 강풍으로 변해서 한꺼번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선배!" "나도 알고 있어!!" 나뭇가지가 크게 휘청임에 따라 70kg가 넘는 무게를 지탱하고 있던 나뭇가지의 끝부분이 우지끈 하는 소리를 내면서 점점 갈라지는 모습을 보인다. 역시 바람이라는 변수가 크게 작용한 예상치 못한 결과물이다. 나도 모르겠다는 듯이 최대한 앞으로 몸을 날린다. 그와 동시에 경쾌한 소리를 내며 나의 무게를 받치고 있던 나뭇가지가 부러지며 강물에 유유히 흘러 내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몸을 날린 나는 최대한 손을 뻗어 다른 나뭇가지를 손에 잡는다. 그러나 갑작스레 많은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내구성은 가지지 않고 있는 모양인지 방금 잡은 나뭇가지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곧바로 부러지기 직전의 위태위태한 상황을 연출한다. "진짜 하나같이 왜 이리 허약하냐. 이 녀석들아!!" 나무한테 욕을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 정도는 나도 충분히 알고 있지만, 이 울분을 토해낼 곳이 없어서 그냥 허공에다가 한번 토로해본다. 이제 막 잡은 나뭇가지를 잡은 손 반대편, 즉 왼손으로 다른 나뭇가지를 잡는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잡아왔던 나뭇가지에 비해서 상당히 연약한 가지인지라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최대한 몸을 앞, 뒤로 흔들며 반동을 준다. 철봉에 매달린 채 다리를 흔드는 형국으로 모션을 취하는 나. 이제 건너편까지의 거리는 대략 1M. 이 정도면 충분히 할 수 있다. 무엇을 할 수 있냐고? 그거야... 뛰어 내리는 일 말이다. "이야아아아아압!!!!!!" 멋 없는 기합소리를 내지르며 그대로 몸의 반동을 이용해서 최대한 멀리 점프를 뛴다. 놀이터에서 각종 기구를 통해 나름 단련이 된 내 감각을 믿으면서 또 한번 몸을 날리는 나. 발 끝이 겨우 건너편의 지면에 닿자마자 최대한 몸을 낮추면서 전방으로 몸을 굴린다. 등에 따가운 돌들이 나를 마구마구 찌르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지만, 그런건 목숨을 잃을 정도의 위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진흙탕을 겨우 굴러서 간신히 강 건너편에 착지한 나. 그대로 대(大)자로 뻗어보이며 울창한 숲속의 천장을 바라본다. "유에! 살아 있는거야?" "... 걱정하지 마. 살아 있으니까."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잘 판단이 되지 않는다. 강이 불어나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터인데,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건지 정말 모르겠다. 그나저나 일이 어찌 되었든 일단 살아서 목표 달성을 했으니까 그것으로 된 것이겠지. ============================ 작품 후기 ============================ 무인도라는 소재 하나가지고 여기까지 연재할 수 있는 제 자신이 대견스러워졌습니다. 헤헤헤 146화 반대편으로 간신히 건너온 나는 우선 허리에 두르고 있던 밧줄을 고목나무 기둥에 묶는다. 부실하게 보여도 제법 튼튼한 연결줄을 마련한 우리들. 이제 남은 것은 아리아와 세린이 이 줄을 잡고 강을 건너오면 되는 것이다. "먼저 아리아가 건너오고, 그리고 뒤에 세린 차례로 건너오도록 해. 알았어?" "왜 하필 저 먼저인가요." 멀리서 들려오는 아리아의 질문. 은근히 아리아 녀석도 내게 태클을 많이 거는 축에 속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은근히 말이다. 세린은 뭐 대놓고 하는거고. "그냥 순번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일단 무슨 일이 있어도 줄은 절대로 놓지 마." "네. 알겠어요." 약간 긴장한 모습을 보이면서 밧줄을 잡은 아리아. 뒤이어 세린 역시도 아리아가 출발하면 그 즉시 줄을 잡고 강을 건널 준비를 한다. 아리아와 세린의 팔의 근력이 어느정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몸 정도는 지탱할 수준은 되리라 믿고 있으니까 마땅히 그녀들에게 해줄 지시는 없다. 그렇다고 내가 원격적으로 명령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급류 위를 걸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제대로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의 정신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을테고 말이다. 내 명령대로 아리아가 먼저 출발을 한다. 긴 은발이 강의 급류가 일으키는 바람에 너풀너풀 휘날리기 시작한다. 장마철이 되면 강 안쪽에 고립된 채 119 구조대원의 구조를 받는 사람들의 모습과 흡사해 보일 정도의 장면을 연출하는 이들. 나는 혹시나 몰라서 나무기둥에 묶어놓은 밧줄을 잡은 채 최대한 왔다갔다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준다. "... 건너갈게요." "힘내라고. 아리아." "최대한 노력해볼게요." 천하의 아리아도 이 순간 만큼은 긴장한다. 그녀도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겠지만 말이다. 로봇으로 만들어진 인조인간도 아니고. 첫 발을 내딛는 아리아. 순간 아주 미세하게나마 휘청였지만, 이내 급류의 빠르기 수준이 어느정도인지 간을 본 아리아가 조금씩 밧줄을 붙잡고 이동하기 시작한다. "세린! 곧바로 아리아의 뒤에 붙어서 이동해." "아, 알았어." 자신의 머리 위에 에바 초호기를 올려놓은 세린도 아리아의 뒤를 따라 이동한다. 에바 초호기 역시도 이번 만큼은 새끼 고양이의 연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애교를 떠는 것 보다는 상황을 인지한지라 작은 4발을 세린의 머리에 고정시킨 채 움직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고양이 주제에 은근히 눈치가 좋은 녀석이다. 덕분에 살았지만 말이다. - 쏴아아아아아! 무서운 기세로 불어난 강물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그나마 이것도 비오던 도중도 아니고 어느정도 비가 그쳤으니까 망정이지, 만약에 비를 맞으면서 무리하게 복귀 길을 감행했다고 한다면 시작하자마자 바로 이 강에 막혔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렇게 접근해보면 우리도 운이 좋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 긍정적인 시점으로 바라보자면 우리들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도 하다는 점이 조금은 놀랍기도 하다. 그렇지만 긍정적인 마인드, 소위 말해서 포지티브 마인드를 가지고 살기에는 아직 내게 있어서는 그 정도의 넓은 표용력이 없다. ... 긍정적인 마인드고 나발이고 제일 중요한 일은 아리아와 세린이 무사히 강을 건너는 점에 있지 않은가. 그래도 내가 우려하던 것과는 달리 침착하게 걸어오는 그녀들. 도중에 약간 걸음을 주춤할뻔한 일 빼고는 그다지 특이하게 위기상황이 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가장 먼저 출발한 아리아가 건너편에 거의 도달하자, 내가 손을 내밀어 아리아의 팔을 잡고서 내 쪽으로 이끌어준다. "수고했어. 아리아." "... 역시 몸 쓰는 일은 제 전문 분야가 아닌 듯 하네요." "그러니까 앞으로 유아 선배나 아니면 엘리와 같이 자주 사냥을 다니면서 몸을 단련하는게 어때." "정중히 거절할게요." 아리아와 세리아 자매의 공통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육체노동을 싫어한다는 사실.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이런 성향은 쌍둥이 자매 답게 닮은 모습을 보인다. 내 뒤쪽으로 위치한 아리아를 잠시 지나치고 이제 막 거의 다 건너온 세린의 손 역시도 잡아준다. 남성 혐오증이 있는 그녀지만, 지금은 혐오증이니 뭐니 하며 사소한 사실들 가지고 운운할 상황은 아니지 않는가. 사람 목숨보다 더 중요한게 어디 있다고. "이제 거의 다 왔어. 힘내." "질렸어. 정말로..." 여기까지 오는데 나름 심적 부담이 있었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세린. 그녀의 머리 위에 올라 타고 있던 에바 초호기가 세린을 대신해서 기쁨을 표시하듯이 작게 울어보인다. 이렇게 해서 강 건너기 성공. 비록 묶어놓은 밧줄은 버려두고 갈 수밖게 없지만, 나중에 강물이 원래의 수준을 회복하면 다시 그때 찾아오면 그만이다. 강을 건너고 대략 4시간동안의 강행군을 펼친 우리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산장을 발견한 우리들 중에서 세린이 가장 기쁜 표정을 지어보이며 빨래를 널고 있던 지아 선생님에게 달려간다. "선생님!!" "어머, 세린이잖아." 담담하게 우리들을 반기는 지아 선생님. 예상 외로 침착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한다. "제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닌데요. 그거." "너무 얌전하게 대응했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죠." "뭐, 어때. 난파선 탐험대 멤버에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네가 있잖아. 그러니까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으리라고 생각했지." "예상 외의 칭찬이신데요." "그래도 내 말대로 무사히 돌아왔잖아. 그렇지?" "......" 맞는 말이긴 하다. 복귀 예정일보다 하루 늦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던 지아 선생님은 그다지 평소와 별반 다를거 없는 표정으로 우리를 반겨준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동료들끼리 싹트는 유대감이라는 이름의 우정인 것일까. 내가 말하고도 창피하긴 하지만, 대략 그렇게 표현하고 싶다. "그럼 난파선 탐험대의 무사 복귀를 환영하며." "건배~!!" 누나의 말과 함께 시작된 작은 파티. 오랜만에 복귀한 우리들을 반기기 위해 그동안 보관하고 음식들을 꺼내어 성대하게 잔치를 벌여주는 나머지 일원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의사를 표시하고 싶을 정도다. 지아 선생님과는 다르게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꽤나 심각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예상 복귀일보다 하루가 늦어졌기 때문에. "정말. 다들 걱정했다니까. 비도 오고. 제대로 안전한 장소에 머물고 있는지 말이야." 누나의 말에 유아 선배를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 역시도 고개를 끄덕인다.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리지만, 폭풍우로 인해 혹시나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꽤나 많이 걱정을 했다고 하는 말을 아까 미리 지아 선생님에게 들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무사 오케이. 무사하면 된 것이다. "이렇게 다들 전원 사고 없이 복귀했으니까 용서해주세요." "의외로 아리아가 귀여운 말을 다 하네." "애교 아닙니다만." 살짝 누나에게 눈을 흘기는 아리아. 그 모습에 모두가 깔깔 웃는다. 오랜만에 다시 모인 무인도 멤버들. 그리고 이 외딴 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모임. 아직 다른 생존자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 무인도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서로의 모습을 지켜보고 안위를 걱정하는 등 상호간에 교류가 눈에 들어오는 이 장면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기쁘고, 그리고 보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집단의 리더를 맡고 있다는 그 느낌. 그리고 자부심. 처음에는 내게 리더라는 자리가 약간 부담스럽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적응이 되어버린 나에게 있어서는 지금의 지위가 전혀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화목한 모습. 무인도 속에서 들려오는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기쁘게 들려온다. ============================ 작품 후기 ============================ 다음 에피소드는 해충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147화 EX EP. 충(蟲) 이야기 들짐승에 관련된 이야기가 어느정도 해결되고. 이제 우리들에게 무인도에서 남은 문제점은 별로 없다고 속으로 단언했던 나였으나. 예상치 못한 문제점이 하나 툭 튀어나오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전에 죽을 고생을 다 하면서 잡았던 멧돼지와 같이 덩치가 중형차 급으로 큰 녀석도 아니고, 노루처럼 사방으로 왔다갔다하며 엄청난 스피드를 보여주는 녀석도 아니었다. 단지. 엄청나게 작고,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미세할 정도로 초 미니 사이즈의 그것들. "꺄아악!!!" 통나무 하우스에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고음의 비명소리와 함께, 다다다 소리를 내며 거실에 앉아있던 나에게 뛰어온 노아 교수님이 느닷없이 내 등 뒤로 몸을 감추면서 바들바들 떨기 시작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진 탓에 어벙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나에게. "유, 유에... 저, 저기..." "무슨 일이에요? 교수님." "버버버버벌레가...!" "벌레요?" "검고 둥그스럼하고 반짝반짝한 뭔가가 있었단 말이야!" 은근히 디테일한 묘사 실력을 보여주는 교수님의 설명이었다. 검고 둥그스럼하고 반짝반짝한 광택이 나는 녀석이라... 스무고개를 하는 심정으로 머릿속에서 각양각색의 추리 실력을 뽐내본 결과. "바퀴벌레인가요?" 격렬하게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이기 시작하는 교수님의 반응 덕분에 내 추리력의 정확도를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나저나 바퀴벌레라니. 지구가 멸망해도 살아남을 것 같은 우수한 종자를 가진 종족이 바로 바퀴벌레라고 하지 않은가. 인간이 사는 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외형은 방금 노아 교수님이 보여준 것과 같이 징그럽고 여자들에게 저절로 비호감을 사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불운의 벌레. 무인도에도 거주하고 있을 줄이야. 도대체 너희들은 안 사는 곳이 없구나. 그 생존본능은 진짜 인정을 해줘야 한다. "어디에 있었는데요?" "주, 주방에..." "구체적은 위치는 모르시죠?" 이번에는 고개를 수평 방향으로 살짝 흔든다.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 어쨌든 자신보다도 덩치가 수백배나 작은 벌레때문에 잔뜩 겁에 질려버린 교수님에게 근처에서 얌냠쩝쩝 과일 간식을 섭취하고 있던 무표정의 작은 여자아이, 엘리에게 붙어 있게끔 만들고 나는 주방으로 향하게 된다. 교수님이 유독 겁이 많다는 것도 어느정도 사실에 반영된 감이 있지만, 만약 그 상황에서 교수님이 아닌 그 이외의 여자들이 바퀴벌레를 봤다는 가정을 해보면, 아마도 지금의 교수님과 똑같은 반응이 나오지 않았을까 예측해본다. 여자들은 벌레를 죽도록 싫어하니까. 심지어 남자로 태어났으면 대장군 감이었을 거라고 칭송받는 우리 누나조차도 벌레를 싫어하는데. 교수님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 온실속의 화초처럼 자란 청순가련의 대명사께서 오히려 바퀴벌레와의 친화력을 보여준다면 그것도 나름 넌센스일 것이다. 어디보자. "잘 안 보이네..." 맨손으로 잡기에는 좀 무리가 있고, 면적이 평평하고 넓직한 기다란 나무판자를 가지고 온 내 시야에는 바퀴벌레의 존재감이 보이질 않는다. 크기도 작은 것이 쉽사리 보일리가 없다고는 예상했으나. 이래선 금방 잡을 수가 없는데. 끈끈이라든지 그런 건 없으려나. 하기사. 무인도에서 그런 물품을 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겠지. 한동안 주방을 이 잡듯이 수색을 해봤지만, 교수님이 봤다던 소동의 주범은 보이질 않는다. 혼자서 의미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에. "뭐하고 있어? 남동생." "아. 이제 온 거야?" 탱크탑과 핫팬츠라는 상당히 노출도 있는 패션으로 하우스 안에 들어선 누나가 손등으로 이마에 맺혀 있는 땀방울을 훔치며 묻는다. "잃어버린 야한 잡지라도 찾는 거야?" "그런 게 어디 있다고." "아니면 책장 밑으로 떨어진 100원짜리 동전?" "500원이라면 몰라도, 100원에 이런 노력을 공들일 가치가 과연 있을까 오히려 누나에게 되묻고 싶은데." 100원도 5개가 모이면 500원으로서의 가치를 발휘하니까 어찌보면 괜찮을지도... 가 아니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교수님이 여기서 목격하셨다고 했거든." "뭘?" "그거를." "그거?" "검고 둥그스럼하고 윤기가 나는 작은 거." "초코파이?" "나도 개인적으로 그런 단 음식이라면 정말 좋겠는데, 공교롭게도 녀석은 살아 움직이는 타입이야." "설마..." 갑자기 안색이 파랗게 질리면서 후다닥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멀어지는 누나. 요 근래 들어서 누나치고는 가장 순발력이 있는 모습이라고 평가하고 싶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버, 벌레는... 아니겠지?" "그것도 하필이면 악명높은 바퀴벌레야." "... 이 집. 불에 태워버리면 안 될까." "누나. 제발 멘탈 관리에 신경 좀 써. 아무리 벌레가 싫다 하더라도, 멀쩡한 집까지 태울수는 없잖아." "그치만 벌레라고!! 존재해서는 안될 녀석들이 왜 무인도에도 있는 거야?!" "들짐승도 있는데. 벌레라고 없을리가 없잖아." "으... 싫다. 정말." 문 넘어로 고개만 살짝 내민 누나가 진심으로 싫다는 표정을 지으며 작게 중얼거린다. "왜 우리가 벌레랑 같은 행성에서 살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지 모르겠어." "그거야 생물학자한테 가서 따져보고. 지금 중요한 건 주방에 잠복해있는 녀석을 빨리 찾아서 없애던지 해야 오늘 저녁 식사를 무사히 먹을 수 있다는 거야." 누나도 저 정도의 거부반응을 보여주는데. 주방에 바퀴벌레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면 이 집안 여자들은 전부 주방을 금지 구역으로 인식해버릴지도 모른다. 그 전에 빨리 잡는 편이 좋겠지. 나도 가급적이면 굶고 싶은 생각 같은 건 없으니까. 하지만 운명의 장난일까.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녀석 덕분에 괜히 집 안에서 시간만 축내고 있는 나였다. 거실에서는 누나와 교수님이 오로지 내 움직임만을 주시하며 '언제 잡을거야. 빨리 잡아줘!'라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고, 엘리는 그저 자리에 앉은 채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과일을 과다 섭취하고 있는 중이다. 엘리는 바퀴벌레를 무서워하지 않는 건가. 뭐... 생각해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3년이라는 기간동안 무인도에서 보내왔는데, 수많은 해충들을 만나봤을 엘리가 고작해야 바퀴벌레를 무서워할 이유는 전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바퀴벌레가 귀엽게 보일 정도라면 몰라도. 한참을 그렇게 찾고 있던 와중에. "나, 남동생! 저기에!" "바퀴벌레야?!" "오른쪽! 오른쪽 구석!!" 누나가 다급하게 나를 호출하며 손가락으로 어느 한 부분을 가리킨다. 정확히 누나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에 등장한 검고 둥그스럼하고 윤택이 나는 작은 녀석의 등장. 기다란 더듬이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내 살기를 눈치챈 듯, 다수의 다리들을 움직이며 발발 기어가기 시작한다. "어딜 도망가려고!" 생각보다 빠른 움직임이었으나. 그래봤자 인간 손바닥 안. 나무 판자를 내치려고 하는 찰나. "꺅!!!!!!" "아닛?!"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바퀴벌레 녀석이 느닷없이 'I can fly!'를 시전하고 만 것이었다. 설마 날아갈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한 나, 그리고 거실 안에서 또 다시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노아 교수님과 누나. 바퀴벌레 녀석도 수컷인 모양인지, 내가 아닌 비명을 지르고 있는 두 여자를 향해 방향을 틀기 시작한다. ============================ 작품 후기 ============================ 오랜만에 독수리 오형제 노래를 들으니까 옛 생각이 났습니다. 슈파 슈파 슈파 슈파~ 우렁찬 엔진소리~ 148화 바퀴벌레의 날개짓이 저리도 우직해 보였던가. 시각적으로도, 그리고 청각적으로도 엄청나게 불쾌한 장관을 연출하며 바들바들 떨고 있는 두 여성에게로 향하는 바퀴벌레 녀석의 모습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지나간다. 나무 판자를 들고 쫓아가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 이 곳은 통나무 하우스다. 함부로 뛰어다닐 수도 없고, 공간도 넓은 공터와는 달리 좁은 통로이기 때문에 쉽사리 움직이지 못한다. 무리해서 바퀴벌레를 쫓아갈 수도 없는 노릇. 점점 누나와 교수님을 향해 힘차게 날아오르는 바퀴벌레. 그와 동시에 여자들의 비명소리도 더더욱 높아진다. 하지만 그 때. "......" 뚱한 표정으로 작은 오른손을 살짝 들어올린 엘리가. ... 그대로 바퀴벌레를 잡아버린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누구보다도 빠르게 벌레를 낚아채며 오른손에 살짝 힘을 주기 시작하는 꼬마 여자아이. 푸직! 이라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사운드를 들려주며, 엘리의 손바닥에 압사를 당해버린 벌레였다. 종종걸음으로 내가 있는 부엌을 향해 다가온 엘리가 여전히 속마음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담겨져 있는 물을 살짝 퍼서 손을 씻기 시작한다. 무덤덤하게. 마치 이것이 일상생활이라는 듯이. "자, 잘했어. 엘리."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일단 칭찬부터 하고 본다. 그러자 엘리는 왜 자신이 칭찬을 받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는 모양인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나를 올려다본다. 엘리는 아마 모르겠지만. 오늘 너는 적어도 누나나 교수님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위인 대접을 받고 있을 거란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다 같이 모여서 저녁식사를 하던 도중. 오늘 벌어졌던 작은 소동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아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뭐, 나도 유부녀이긴 하지만. 벌레는 조금 꺼려지니까 이해해." 라고 말하며 옆에서 잔뜩 주눅이 든 노아 교수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 시작한다. 힘 없이 고개만 살짝 아래를 향해 끄덕이는 교수님. 무인도에서 제자들에게 의지하며 살고 있다는 것도 모자라, 고작해야 작은 벌레 하나에 호들갑을 떨었다는 사실에 미안함을 느낌과 동시에 창피함도 느끼고 있는 모양인가 보다. 정확한 교수님의 심리 상태는 알 수 없지만, 대략 그렇다는 느낌. 식사를 하고 있던 일원 중 한 명의 포지션을 담당하고 있는 은발 미소녀, 아리아가 식기 도구를 살짝 들어보이며 지아 선생님의 말을 건네 받는다. "무인도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문제가 해충이기도 하잖아요. 물리거나 하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감염에 대해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긴 하지. 가급적이면 모기나 벌, 그리고 개미한테 물리지 않으면서 생활하는 편이 가장 중요하긴 하지만, 필수불가결 적으로 물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면, 후속조치에도 힘을 쓰는 게 좋아.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의료 수단은 무인도에서 구할 수 있는 약초가 다니까." 우리들의 의료 담당인 양호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그러니까 엘리. 벌레를 맨 손으로 잡는 건 좋지만, 오늘처럼 항상 손을 씻고 다니렴. 오케이?" "... Yes." 한국말이지만, 어느 정도는 이제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작은 꼬마 숙녀를 바라보며, 지아 선생님이 연신 싱글벙글 미소를 짓는다. "빨리 이런 귀여운 딸을 가지고 싶은데." "그건 무인도에서 벗어난 뒤에 남편분과 열심히 생활하며 고민해보세요. 선생님." 지아 선생님의 소망을 비하할 생각은 없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남겨진 결혼생활이 아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딴지를 걸어봤다. 일개 바퀴벌레에 불과하지만, 바이러스나 세균을 묻히고 다닐 수 있으니까 언제나 조심하라는 말씀은 마음속 깊이 새겨듣도록 하자. 벌레를 조심하자. 이번 주 표어로 삼으려 했던 문장이었으나, 공교롭게도 불의의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때는 바퀴벌레 사건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 운도 지지리도 없구만." 공터 근처에 있는 나무를 올려다보며 나도 모르게 내뱉은 한 마디였다. 그렇다. 운 하나는 진짜 지지리도 없다. 아니지. 여객선이 난파당한 시점에서 무인도에 떠내려와 살아남은 순간, 내 인생의 모든 운을 다 써버려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할 거야? 저거." "글쎄." 옆에 있던 세린이 나에게 명쾌한 해답을 듣고 싶었던 모양인지 말을 걸어왔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 머릿속도 지금 혼돈, 파괴, 망각의 3단 콤보를 맞이하는 중이기 때문에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줄 순 없었다. 차라리 바퀴벌레 사건이 더 나았을까. 엥엥 거리는 녀석들의 모습이 오늘따라 상당히 보기 싫은 형태를 하고 있다.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장소에 왜 이 나무에 '벌집'이 생긴거야." 세린의 불만어린 한 마디에 나도 공감하는 바이다. 숲에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 수 많은 나무들을 버리고 왜 하필이면 이 공터의 나무에 자리를 잡았는지 모르겠다. 저 벌떼 녀석들. 게다가 하필이면 우리가 머물고 있는 하우스와 최단거리 나무. 집 안에 있으면 벌떼들의 엥엥거리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다. 더욱이 벌집의 크기도 매우 상당하다. 저 정도면 족히 꿀 한 병이 통째로... 가 아니고. 상당수의 벌들이 서식하고 있으리라 예상된다. "일단 제거는 해야겠지?" "무슨 수로." "그거야 이제부터 생각해봐야지." "대책이 없잖아. 그러면서 뭔가 떠올랐다는 식으로 의기양양하게 굴지 말라고." "내가 언제 그랬다고." "... 흥이다." 오늘도 세린의 컨디션은 최고조. 남자혐오증도 최고조다.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딛치게 되었다. 그나마 이제서야 벌집을 발견하게 된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긴, 이 정도로 큰 벌집이 위치해있고, 손가락만한 벌들이 날아다니는데 눈치채지 못할 이유도 없겠지만 말이다. 세린은 잠시 볼 일이 있다고 말하고선 자리를 뜨게 되고, 나무에서 멀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은 나는 벌집을 주시하며 작전을 생각해본다. 벌에 쏘이지 않고 효과적으로 벌집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 그런 게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공교롭게도 무인도에서 조달할 수 있는 도구는 매우 한정되어 있다. "고민이로다..." 재미삼아 만들어본 흔들의자에 몸을 기대고 생각을 해보지만,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대략 몇시간이 지났을까. 따스한 오후의 햇살을 온 몸으로 맞으며 누워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잠이 들은 모양인가 보다. "......" 누간가가 내 팔을 잡고 흔들며 잠을 깨우려는 듯한 움직임일 보여준다. 희미하게 눈을 뜨고 상반신을 일으키자, 아리아보다도 더 눈부신 은발을 뽐내고 있는 세리아가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내가 잠들었었어?" "......"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곧바로 내 추측이 맞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런. 너무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 금새 잠이 들 줄이야. 하품을 하며 일어나는 나에게. "... 젠장." 저절로 욕지거리가 입에서 튀어나올 정도의 경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까에 비해서 대략 1.5배 정도 몸집이 커진 벌집. 이제는 나뭇잎들 사이에서도 그 엄청난 덩치를 한 몸에 뽐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해진 형상이 내 시야에 그대로 들어온다. ============================ 작품 후기 ============================ 아는 동생이 같이 블소를 하자고 해서 고민중입니다. 게임 자체가 저의 덕력을 자극하긴 하지만...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음... 149화 일단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볍게 벌집이 생긴 나무 주변에 울타리를 마련해뒀다. 무엇보다도 안전이 최고니까 말이다. 행여나 아무것도 모르고 무심코 나무에 접근했다가 괜히 벌에게 쏘이기라도 하면 어쩔 것인가. 아무리 의료 담당인 지아 선생님이 계시다고 하지만, 후속 조치보다는 예방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란 사실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나저나 저거, 어떻게 처리할 거야?" 날도 저문 관계로 다 같이 모여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긴급 회의를 마련한 우리들. 누나가 먼저 말을 꺼냈지만, 그에 대한 합당한 답변은 아직 내 입장에선 제공할 수가 없다. "벌 크기도 어마어마하고. 한번 쏘이면 감당이 안 될텐데." 세린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유아 선배. "즉사 아닐까." "그 정도 까지는 아니지. 그렇다고 위험하지 않다는 의미도 아니니까." 지아 선생님의 객관적인 의견이었다. 결국,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벌집을 없애던가 해야 한다는 의미. "나무를 베어버릴까?" 정말 무식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정말 간단한 방법이기도 한 제안을 유아 선배가 한다. 고작 나무 하나를 베는 것으로 끝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세상은 공교롭게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쉽사리 돌아가지도 않는 편이다. 왜냐하면 세상이란 녀석은 늘상 변덕쟁이니까. "나무를 베려고 다가가는 순간에 벌들의 총공격을 받을걸." 누나의 말에 그대로 유아 선배의 의견은 묵살. 무표정으로 작은 입을 이용해 과일을 아그작 아그작 섭취하고 있는 엘리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은 죄다 심각한 표정으로 이번 회의에 임하고 있다. 벌과는 전혀 인연이 없던 사람들의 모임인지라 마땅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는 와중에. "어쩔 수 없죠."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꺼내본다. "일단 제가 한번 해볼게요." "혼자서?" "저 혼자 하기에는 좀 힘들고요. 자원봉사자 2명만 있으면 될 거 같은데요." "수많은 벌떼 대군과 맞서 싸울 희생자 3명이라..." "괜히 불길한 소리 하지 마. 누나. 효과적인 방법이 있으니까." 벌이 싫어하는 건 많은 게 있겠지만, 내가 알고있는 범주 내에서 가장 확실한 건 바로 '연기'다. 배우가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그런 연기가 아니라, 불을 피울 때 생성되는 바로 그 연기 말이다. 예전에 군대에서 근무할 때, 상황실 외벽쪽에 벌집이 생겨서 고생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행정보급관님이 지푸라기를 태우면서 벌들을 내쫓고, 벌집을 제거하라고 시켰던 일화가 기억난 것이다. 그걸 한번 응용해보기 위해 최대한 불에 잘 탈 수 있는 잔가지들과 지푸라기들을 모아 벌집이 위치한 나무 밑에 놓는다. 불길이 번지지 않게끔 주변에 탈 수 있는 물건은 치워두고, 행여나 또 한번 화재의 위험요소를 없애기 위해서 물까지 뿌려본다. "이 정도면 되려나." 나름 완벽한 방화대책에 자화자찬을 하고 있을 무렵, 자원 봉사자로 나선 세리아와 아리아 자매에게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라는 말을 한다. "어느정도 멀리 가 있으면 되는 건가요. 선배." "물가 근처에 있어. 행여나 벌이 너희들에게 몰려갈 경우에는, 물가 안으로 들어가면 되니까." "단순한 방법이네요." "단순해 보이기도 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니까." 벌이 쫓아오면 물가로 뛰어들면 된다. 일반적인 상식 아닌가. 그나저나 다른 건 다 둘째치고. "세리아하고 아리아, 너희들이 이런 위험한 일에 자원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저야 뭐 언니가 지원했으니까 같이 따라온 거니까요." "세트 개념이냐." "바늘이 가는 데 실이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바늘과 실이라." 이 두 자매는 정말 유독 다른 자매들보다 친분의 깊이가 훨씬 깊다고 느껴진다. 아마도 마리아나 해구보다도 더 깊을테지. 세리아는 좋은 쌍둥이 동생을 둬서 좋겠다. 제 3자에게만 친절하면 정말 좋은 녀석일텐데 말이다. 늘상 강조하지만, 이 녀석은 성격이 문제다. 정말. "아무튼 떨어져 있어봐. 불 지를테니까." "별로 안부를 묻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조심하세요. 선배." "빈말이라도 고맙다." "빈말 맞아요." "......" 제발 저 놈의 성격 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 아리아 이 녀석. 반면, 세리아는 초롱초롱한 눈빛을 빛내면서 연신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성녀님이라는 단어가 정말 잘 어울리는 그런 모습을 지닌 세리아의 팔을 잡고 질질 끌다시피 데려가는 아리아. 불을 피우려고 천천하 나무 밑으로 다가가기 시작한다. 머리 위에 엄청난 크기의 벌들이 엥엥 거리는 소리가 직접적으로 들려오지만, 최대한 무시하며 불을 붙인 나무를 들고 팔을 뻗는다. 의식하면 지는거다. 최대한 그런 마음가짐을 품고 장작을 던지려던 순간. "엇?!" 빗나갔다!! 임시로 만든 장작 덩어리가 아닌, 물에 젖어있는 지역에 불씨가 떨어진 것이다! 불도 안 붙고, 게다가 벌들이 내 존재감을 인식한 모양인지 점점 나에게로 몰려드는 느낌이 든다. "... 망할!!" 돌아볼 것도 없이 앞만 바라보며 뛴다. 멧돼지 사건 때보다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하지만 지금 내가 도망치려는 상대방 녀석은 어떤 의미로 멧돼지보다 훨씬 위험한 녀석이다. 아니, 녀석들이다. 복수형이라고. "따가워 죽겠네!!" 벌써 어느샌가 몇방 물렸는지, 다리나 팔에서 따끔따끔한 느낌이 전해진다. 최대한 물가에 숨어있는 아리아와 세리아에게 다가가지 않도록 호수 반대편을 향해 달려가는 중. 이 벌 녀석들은 뛰고 있는 인간보다도 속도가 빠른지, 연신 소름끼치는 소리를 들려주며 촉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엄청난 테러를 감행하고 있다. 세상에 이렇게 위험한 생물체가 또 있었나. 벌들에 비교해서 바퀴벌레는 그냥 애송이 수준이었다. "으랴압!!" 온 힘을 다해 호수 안으로 다이빙. 첨벙 소리를 내며, 시원한 물의 감촉이 벌써부터 부어버린 신체의 일부를 감싸기 시작한다. 잠수한 채 수면 위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는 중에. 한동안 놓친 사냥감을 아쉬워하듯 계속해서 내가 숨어있는 수면 위를 날아다니던 벌 녀석들이, 다시 본거지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렇게 한동안 물 속에서 녀석들의 눈치를 보고 있던 결과. "푸왁!"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드디어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잠시동안의 시간이었지만, 짧은 순간에 나의 잠수 능력이 이리도 탁월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리고 저 벌들의 위력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온 몸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 쓰라려 죽겠네." 영광의 상처란 건, 이리도 따가웠었나. "아얏?!" "조금만 참아. 남자잖아." "... 노력은 하고 있지만요." 몸에 박혀있는 벌침을 하나하나씩 제거중인 나. 그리고 벌침 제거 작업을 시행중인 지아 선생님. "용캐도 잘 살아 돌아왔네." "그 점에 대해서는 하늘에 감사하고 있지만요." 상반신에 박혀있던 침 갯수만 대략 5개였다. 오른쪽 팔에 2개, 왼쪽 팔에 1개, 그리고 등에 하나. "손 올려봐." "네." 오른쪽 손을 머리 위로 올리자, 겨드랑이 부분을 살피던 지아 선생님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내 등을 딱! 치면서 말한다. "자, 이제 바지 벗어봐." "... 그래야겠죠?" "뭐 어때. 서로 스킨십이란 스킨십은 다 했는데." "하하..." 공식적으로 섹스까지 한 사이인데, 이제와서 뭘 더 부끄러워하리. 잠자코 지아 선생님의 말에 따라 그대로 하의도 탈의한다. 알몸이 된 채로 지아 선생님 앞에 서는 것이 이렇게나 창피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무인도에 오고 나서 점점 더 몸이 좋아지는구나." "......" 지아 선생님의 손끝이 내 복부 부근에 잠시 머문다. 평소 같았으면 저 농염한 손길에 아랫도리 녀석이 잔뜩 커질법도 하겠지만. 지금은 부상중이라 아마 그러지도... ... 못할거라 생각했지만! "이쪽은 평소보다 더 커보이네." "?!" 의식조차 못했는데, 이미 성기가 발기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평소보다도 더 크다! 누나가 나에게 줬던 그 약의 효과보다도 더더욱! 뭐지? 도대체 내 몸에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인가. 머릿속이 혼돈의 카오스로 뒤덮힐 무렵, 지아 선생님이 나에게 나지막히 말한다. "진정하고 가만히 있어봐. 침 하나 더 뽑을테니까." "읏!" 말이 끝나자마자 뭔가 몸에서 뽑히는 듯한 시원한 감촉이 들면서, 동시에 따끔한 기분도 감돈다. 사타구니 부근에 뽑혀나온 벌침 하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지아 선생님이 비정상적인 발기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남근과 침을 번갈아보며 뭔가 눈치를 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과연. 그런 거로구나." ============================ 작품 후기 ============================ 날이 갈수록 후기란을 채울 게 없어지고 있습니다. 회심의 농담 코너도 조기 종료되었고... 오덕 관련 토크라도 해야 할까요. 그러지 않아도 오늘 걸즈 & 판처란 애니를 보고 왔는데 말이죠. 재미있었습니다. 헤헤헤헤헤. 150화 괜시리 불안하게 지아 선생님의 말이 유독 귓가를 강타한다. 보통 발기 현상이 벌어지만, 내가 모를 일이 전혀 없는데.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상태에서 발기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내 몸에 무언가 이상징후가 생겼다는 말과도 같은 것. 그래서 지아 선생님의 저런 반응이 괜히 무섭게 다가오는 것이다. 혹시. 벌침에 쏘인 영향인 걸까? "저기. 지아 선생님?" "유에. 아프지는 않니?" 라고 말하면서 손가락 끝으로 귀두 부분을 꾹꾹 누르기 시작하는 양호 선생님의 손길. 예상을 못한 선생님의 손동작에 순간적으로 하반신을 뒤로 빼려던 나였지만, 오히려 지아 선생님이 내 하반신을 잡고서 뒤로 빼는 행위를 저지시킨다. "... 아프거나 그러진 않은데요." "감촉도 제대로 느껴지고?" "네. 아마도요." "가정법 말고." "... 확실히 느껴집니다만." "좋아." 남성기를 쿡쿡 찌르던 지아 선생님이 다시 손을 거두고 나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어간다. "너도 대충 예상했겠지? 지금 이 발기 현상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그러게요. 전혀 커진다는 느낌도 없었고, 특별히 성욕이나 그런 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벌침의 영향이겠지." "설마. 제가 고자가 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아직 팔팔한 20대 청년인데!! 결혼도 못 했는데?!" 머릿속이 온통 패닉의 나락으로 빠져나갈 무렵, 지아 선생님이 손가락으로 엄청난 크기를 유지하는 내 성기를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쳐낸다. 촉감은 제대로 느껴지기 때문에 통각 또한 느껴지지 않을리가 없다. 두 손으로 성기를 움켜쥐고 몰려오는 통증을 참아내고 있을 무렵, 지아 선생님이 나지막히 말하기 시작한다. "진정해. 성욕에 지배당한 20대 청년. 아직 네가 남성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든지 그런 문제라고 단정짓지도 않았잖아." 한숨을 쉬던 지아 선생님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내 성기능에 대한 걱정이 앞서니까. 이럴수록 더더욱 냉정을 되찾고 현실을 파악해보도록 노력하자. "유에. 너, 건강상으로 벌침을 일부러 맞는 시술같은 거 들어본 적 있니?" "... 네?" "보아하니 들어본 적이 없는 모양인가 보구나. 간혹 벌침이 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일부러 벌들을 주문해서 침을 맞는 사람들도 더러 존재해.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시술같은 건 위험해보여서 별로 선호하지 않지만, 몸에 이로운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의미지." "그럼 지금 제 현상이 이로운 쪽에 속하는 건가요?" "유린에게 들어보니까. 예전에 너와 노아, 그리고 유아가 이 통나무 하우스에 오기 전에, 너한테 정력제 비슷한 걸 먹인 적이 있다면서?" "그랬던 일이 있었죠." "아마도 사타구니에 꽂혀있던 벌침이 공교롭게도 그런 역할을 한 게 아닐까 추측이 들어. 내가 벌 전문가가 아니라서 명확한 설명은 못해주겠지만, 벌침이 분명 네 성기에 영향을 주게 되었고, 그 덕분에 평소보다도 더 큰 발기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지." "벌침이 정력제로 작용했다는 뜻인가요?" "비슷하지 않을까? 나라고 모든 의학 지식을 섭렵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대충 가설만 세운 거야." "......" "뭐, 이래나 저래나 일단 상황을 보는 편이 가장 좋겠지. 일단 약을 발라줄게. 그리고." 미리 약초로 제조해둔 약을 손에 바르기 시작하던 지아 선생님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길. "당분간은 하의 실종 패션으로 지내렴." 남자의 성기가 지니고 있는 외형은 호불호가 갈린다. 남자들의 입장에서는 신체의 일부이기 때문에 별다른 혐오감이 없지만, 여성들 중에서는 남근을 매우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부류도 더러 존재한다. 현재 무인도에 표류된 우리 일행들 중에서 가장 그 혐오도가 높은 쪽은 바로 이세린. 그리고 성적인 생활과는 전혀 무관계로 살아온 순진무구한 세리아, 그리고 유체리. "......" 이 3명은 유독 나와 멀찌감치 떨어진 채 식사를 하고 있다. 반면, 나와 관계를 가졌던 노아 교수님이나 유아 선배, 지아 선생님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얌전히 저녁 식사에 열중하고 있는 중. 누나는 이제 남동생의 생식기를 보는 게 익숙해진 모양인지 크게 신경쓰고 있지 않는 모습이었으며, 성적인 감각이 무관하다 싶을 정도의 신경을 가지고 있는 엘리는 먹을거에만 많은 관심을 투자하고 있다. 하의를 입지 않고 생활한다는 게 이리도 많은 생활에 변화를 불러 일으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보다. "안 줄어드네. 그거." 누나가 손가락으로 여전히 발기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내 성기를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내가 묻고 싶다고." "계속 그런 식으로 발기되면, 힘들지 않아?" "안 그래도 머리가 어지러운 거 같기도 해." 피가 성기쪽으로 쏠리게 되니까 신체에 대한 변화도 미약하게나마 일어나고 있다. 발기 상태를 유지한 지 이제... 3시간 정도 되었으려나. 전혀 줄어들 기색을 보이지 않는 아랫도리 녀석.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도 더 커진 외형을 자랑하고 있는 성기 덕분에 곤란해 죽을 지경이다. 심지어 핏줄까지 불끈불끈 거리니까 이게 내가 평소에 알고 지내던 나의 또 다른 분신의 모습이 맞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 정도다. 흑인 남성의 그거에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의 엄청난 크기다. 대단한걸. 진짜로. 내가 봐도 탄성이 절로 나온다. 정말 이런 크기를 계속 유지한다면, 여자들이 좋아 죽지 않을까. 실제로 노아 교수님과 유아 선배는 아까부터 내 아랫쪽에 신경을 쓰이는지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는 중이니까 말이다. 크기가 커져서 좋긴 하지만, 가장 큰 문제점이 뭐냐 하면. ... 성욕이 안 느껴진다. 아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느껴지지 않고 있다기 보다는 그냥 평소랑 똑같다. 발기 상태라면 본래는 기본적인 성욕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어야 정상이지만, 성기의 크기만큼 성욕이 끓어 오른다는 게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유에. 다 먹었으면 일로 와서 앉아봐." 지아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의자에 앉은 채로 다리를 살짝 벌린다. 우람하게 커져있는 성기 주변에 정성스럽게 약을 발라주기 시작하는 선생님의 손길덕분에 어느정도 야한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성욕이 없어졌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성욕이 생겨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평소와 같이 자연스럽게 흥분이 된다. 신경에 이상이 생겼다던가 그건 아닐테고. "너무 걱정하지 마. 유에." "네...?" "그래봤자 일시적인 현상일테고. 이로 인해 병적인 뭔가가 생긴다던가 그런 건 아니니까 그렇게 인상 찡그리지 말라는 뜻이야." "얼굴에 티가 다 났나 보네요." "그런 셈이지." 약을 다 바른 뒤에, 노아 교수님이 내 쪽으로 다가오며 안부를 묻는다. "몸은 좀 어떠니?" "평상시와 다를 건 없어요. 다른 쪽은 아랫부분 밖에 없지만요." "그, 그래?" 어설프게 웃으며 또 한번 은근슬쩍 성기를 바라보신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거겠지. 당사자인 나도 엄청나게 신경 쓰이는데. 직접 보고 있는 제 3자는 어련할까. "자연산 비아그라를 섭취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니야?" "누나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잖아." 긴장감을 풀어주려고 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누나의 짖궂은 농담도 여유롭게 받아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하룻밤 자면 괜찮아지겠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제 슬슬 잘 준비 해야지. 유에는 오늘 고생했으니까 불침번은 안 서도 돼." "그래도 되나요?" "주치의로서의 명령이니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된단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지아 선생님의 배려 덕분에 오늘은 제대로 된 수면권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의미로 수면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취침을 준비하는 나. 여전히 약 때문에 하반신 노출 패션을 유지한 채로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불도 없이. "오늘따라 선배가 엄청나게 징그럽게 보이는군요." "시끄러워." 까칠한 은발 후배, 아리아가 내 옆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자신의 언니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내 옆을 자처했지만, 아리아의 독설을 감당할 재간이 없는 나로서는 불운의 포지션이 아닐까 생각된다. 불침번 초번초로 뽑히게 된 체리와 세린을 놔두고, 나머지 인원들은 취침을 위해 자리에 눕는다. 당연히 나와 아리아 역시도 마찬가지. 정면을 향해 눕자마자, 시야 아래에 여전히 발기된 채 우람한 형상을 뽐내고 있는 불기둥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녀석. 오늘따라 유독히 사납게 생겼구나. ============================ 작품 후기 ============================ 우와... 150편입니다;; 무인도라는 소재 하나만으로도 150편이라는 소재를 뽑아낼 수 있군요. 신기합니다. 151화 "... 아." 젠장.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 주변은 나에게 수면권을 보장하기 위해서인지 몰라도 지나칠 정도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데, 정작 나는 그 기회를 제대로 살리고 있지 못하는 중이다.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아직까지도 발기되어 있는 성기 때문. 오른쪽으로 등을 돌리면 벽에 닿고, 그렇다고 왼쪽으로 등을 돌리면 아리아 녀석의 허벅지에 닿게 된다. 정면으로만 자세를 유지하고 자야하는 것이 이리도 힘들 줄이야. 군대에서는 자세고 뭐고 피곤해서 잠만 잘 왔는데, 성기의 힘이 이리도 위대한 줄은 꿈에도 몰랐다. 뜬 눈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규칙적인 숨 고르는 소리가 들려 오는 것으로 보아서는 꽤나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모양으로 보인다. 이러다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겠고만. "... 아직도 안 주무시나요. 선배."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바로 옆에서 잠을 청하고 있을 줄로만 알았던 은발의 미소녀, 아리아가 푸른색의 눈동자를 뜬 채로 나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안 자고 있었냐?" "선배의 끙끙 앓는 소리 때문에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만." "... 진짜?" "증거라도 필요하신지?" "아니. 됐어. 괜히 더 미안해질 거 같으니까." "현명한 선택입니다." 그나저나 미안해 죽겠네. 말은 그렇다 쳐도, 결국 내 뒤척임 때문에 아리아도 졸지에 잠을 못 자고 있다는 뜻이지 않은가. "잠깐 자리 좀 비워줄까? 그 동안이라면 충분히 잘 수 있을 거 같은데." "선배는 이상한 쪽으로 남을 잘 배려하시는군요." "칭찬을 할 거면 칭찬을 하든지, 아니면 욕을 할 생각이라면 욕을 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확실히 해." "칭찬 요소 48퍼센트, 욕 요소 52퍼센트가 함유되어 있습니다만." "하다못해 칭찬 요소 함유량을 좀 더 늘려줄 순 없었냐." "저로서는 이게 최선이었어요." "... 그래. 최선을 다 하느라 수고했다." 이 녀석과 단 둘이 이야기를 하면 말 꺼내는 것 자체가 무섭다. 말빨도 워낙 쎈 녀석이다 보니까 뭐라 딱히 할 말도 없고. "그럼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냐." "어쩔 수 없죠. 특별히 마음씨 넓은 제가 선배를 위해 희생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을 하면서. 느닷없이 손을 아랫쪽으로 향하던 아리아가 갑자기 내 성기를 부여잡는다. 화들짝 놀라며 크게 움찔하는 나에게, 아리아가 다른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면서 나에게 경고하는데. "조용히 하세요. 선배. 다른 사람들을 깨울 생각인가요." "그건 아니지만... 그보다 어쩌려고 그러냐. 아리아." "이렇게 하면 되죠." 내 성기를 잡고 자신의 사타구니 쪽으로 이끈다. 그러더니, 성기의 주변에 푹신한 살의 감촉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설마 이건... "뭐하세요. 선배. 두 손은 놀고 있나요?" "나보고 뭘 어쩌라고." "뒤에서 절 안아주는 형태로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더불어 팔 배게도." "......" 왼쪽 손을 아리아의 머리 아랫쪽에 위치시키고, 오른손은 우선 내 골반 위에 올려놓는다. 참고로 나의 분신 녀석은 아리아의 부드러운 허벅지의 감촉을 느끼며 사타구니 안에 포근한 온기를 느끼고 있는 중. 바로 윗 부근에 아리아의 팬티로 느껴지는 촉감이 굉장히 야릇한 감정을 자아낸다. "선배의 거기, 엄청 불끈거리네요." "의도적으로 그러는 건 아니야." "이것도 다 벌침의 효과인가요?" "... 여자의 사타구니에 남성기가 있으면, 흥분되지 않겠냐." "결론은 선배가 변태라는 의미군요."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네 유혹도 한 몫 하고 있잖아." "그럼 선배는 제 유혹에 걸려든 셈이죠?" "절반정도." "그렇다면 오른 팔도 뻘쭘하게 뒤로 빼지말고, 제대로 위치해주세요." "......"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나는 결국 마음속으로 작은 결심을 하며 오른손을 아리아의 가슴 부근에 놓는다. 이로서 내가 아리아를 뒤에서 완벽히 안고 있는 자세를 취하게 되는데. "곧바로 가슴을 만지러 오다니. 선배는 역시 변태군요." "그럼 뭘 기대한 거냐." "다른 부위가 있잖아요." "어떤거?" "발가락 끝이라든지." "넌 내 팔 길이가 얼마나 길다고 생각하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원X스에 나오는 루X가 아닌 이상, 고무고무열매의 힘 없이는 이 자세에서 네 발 끝에 손을 위치시키기엔 불가능하다고." "무능한 선배군요. 실망했습니다." "너, 일부러 날 놀리려고 이런 자세를 취하게 만든 거 아니냐?" "그것도 어느정도 포함되어 있지만요." 역시 독설가 아리아.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래도 여기까지 스킨십이 진행된 이상. 나도 물러설 생각은 없기 때문에 짐짓 모른척 오른손으로 아리아의 가슴을 살짝 움켜쥐어본다.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아담한 사이즈의 가슴. "남자는 사정을 하면 피곤해진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날 일부러 사정시키게 하려고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거야?" "선배는 잠을 잘 수 있어서 좋고, 저는 잠을 방해받지 않을 수 있어서 좋고. 서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 아닌가요?" "맞긴 하지만..." 그래도 아리아와 이런 짓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섹스라는 관계를 가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도 다 있는 장소에서 둘이서 몰래 은밀한 행위를 펼친다는 거 자체가 불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아리아는 그런 신경을 크게 쓰고 있지 않은 모양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이런 대담한 성격인지 점점 더 내 성기를 조이기 시작한다. "윽..." 나도 모르게 미약한 신음소리를 내며 아리아의 유두를 살짝 꼬집어준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양 손을 이용해 입을 막는 아리아의 모습. 말은 독설만 툭툭 내뱉는 녀석이지만, 아리아도 여자인 모양인가 보다. "여기가 성감대야?" "선배. 은근슬쩍 성희롱 발언을 하시는군요." "이미 가슴도 만지게 하면서 성희롱 발언으로 문제삼을 수준이야?" 제대로 정곡을 찔렸는지, 아리아의 반응이 잠잠해진다. 아리아의 머리 아래에 눌린 팔을 제외하고, 나머지 팔로 주기적인 가슴 애무가 계속된다. 하반신도 슬쩍 뒤로 뺐다가 앞으로 전진시키는 둥 피스톤 운동에 버금가는 움직임을 선보이며 성기의 마찰을 극대화. 여성의 부드러운 허벅지의 살결이 성기를 압박하고 있는 것이 이리도 흥분되는 감정을 선사해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리아..." "... 왜요. 선배..." 애써 신음소리를 참아내려는 듯한 목소리로 나에게 답하는 아리아에게 굉장히 민폐스러운 발언을 내뱉어본다. "... 사정해도 되지?" "......" 잠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아리아의 손이 갑자기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여전히 한 손은 자신의 입을 막은 채로. 뭔가를 찾으려는 듯이 머리쪽 위에 허우적거리던 손이 무언가를 가지고 자신의 사타구니쪽에 위치시킨다. 익숙한 촉감이 귀두 끝에 닿는 순간, 아리아가 무엇을 준비했는지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기 시작. "잎사귀를 미리 준비해둔 거야?" "... 유비무환... 이에요." 겨우 한 글자씩 말을 하는 아리아가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해서 느릿느릿했던 하반신의 움직임을 좀 더 빠르게 해본다. 살과 살이 맞닿는 마찰 덕분에 점점 뜨거워지는 성기. 마지막에 최대한 아리아의 사타구니 안쪽으로 성기를 찔러 넣으며 쌓여있던 정액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벌컥벌컥 소리가 날 정도로 많은 정액들이 아리아의 손에 붙잡혀 있는 잎사귀 위를 전부 뒤덮는다. 교수님과 유아 선배와 섹스를 할 때도 저렇게 많은 양을 내뱉었던 적이 없을텐데. 재빠르게 양 손으로 잎사귀를 접으며 정액이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에 깔끔한 뒷처리를 선보인 아리아가 이윽고 긴 한숨을 토해내며 수위 높은 애정행각의 뒷풀이를 마무리시킨다. "이것도 정말 못할 짓이네요." "그래도 네 덕분에 잠은 편하게 잘 수 있을 거 같아." 벌써부터 모든 정력이 바깥에 빠져나간 듯이 축 쳐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성기는 여전히 발기상태. 다만, 아까와 다른 점은 빳빳하게 서 있던 녀석이 내 배 위로 늘어져있는 상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여자에게 유해한 물건이군요. 그거." "생식 관계에 있어선 가장 필요하기도 하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그런 걸 넣었다간 몸이 남아나질 않겠어요. 도대체 교수님이나 유아 선배는 어떻게 세... 그런 걸 했는지 알 수가 없네요." "나한테 물어봤자 뭐..." 여자가 아니라서 뭐라 대답을 해줘야 좋을지 모르겠다. ============================ 작품 후기 ============================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오덕 토크 2회입니다. 사실 제가 서브컬처 계열에 종사하다 보니까 애니메이션은 거의 필수로 챙겨보게 되는데요. 이번에는 본의 아니게 섬란 카구라와 러브라이브에 푹 빠져있습니다. 특히나 슴란 카구라는... 그거때문에 게임기가 살아났다는 소문도 들리고요. 러브라이브는 애들이 왜 이리 귀여운지... 핰핰핰. 여캐는 정말 좋군요. 보면 치유됩니다. ㅜ_ㅜ 152화 오랜만에 입는 바지의 감촉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의식주 트리오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준다는 그런 고마움을 물씬 풍기게끔 만들어주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제야 성기가 본래의 컨디션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옷부터 입는 선택지를 고른 뒤에, 어제에 비해 얼마나 더 벌집이 덩치를 키웠는지 확인하기 위해 잠시 바깥으로 나온다. 오늘도 우렁차게 울리는 벌들의 향연에 절로 찡그러지는 얼굴을 유지하며 고개를 올려보지만. "녀석들도 밤에는 잠을 자긴 하는구나." 그리 크게 커지진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마지막 불침번이었던 체리가 하품을 하며 나에게 '안녕히 주무세요.'라는 말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 뒤로 본의 아니게 잠의 은인이 된 아리아가 동시에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내 옆에 나란히 선다. "그쪽은 괜찮아 보이는군요." "네 덕분이지." "조금의 감사함이라도 표시하고 싶다면, 100만원을 요구할게요." "무인도에서 현찰이 어디 있다고. 나가면 줄게." "이자율은 200%입니다만." "넌 대부업에 관련된 운영 체계를 미리 배워둘 필요성이 있겠구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아리아였으나, 오랫동안 알고 지낸 탓에 이 녀석의 말이 농담이라는 것 정도는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런 그렇다치고. "오늘은 반드시 저걸 제거해야지." 더 자리를 잡기 전에 벌집을 제거해야 한다. 어제 나 같은 불상사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벌어지지 않을 거란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사고는 미연에 방지를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것. 벌집 제거 작전이라 부르고, 리벤지 매치라고 읽도록 하자. 어제와 마찬가지로 벌집 아래에 불을 피울 수 있도록 미리 셋팅을 해놓는다. 그리고 불이 붙은 나무가 빗나가게 하지 않게끔 일부러 장작을 긴 것으로 마련한 뒤에, 슬금슬금 다가가 불이 붙어있는 끄트머리를 장작 더미에 터치 다운! 점점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연기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흡족한 미소를 짓기 시작한다. "아리아, 세리아. 잘 숨어있지?" "선배가 말하지 않아도 제대로 숨어 있어요. 세리아 언니에게 위해가 발생하면 안 되니까요." 두 자매의 안전에도 이상 무(無). 이제 벌들이 빨리 벌집을 버리고 후퇴하기만을 기다리면 될 듯하다. 나도 멀찌감치 떨어져서 벌집의 상태를 관찰하는 중. 벌집에 있던 벌들이 연기 냄새를 맡았는지, 비정상적인 궤도로 막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벌집에 숨어있었던 벌들도 바깥에 나와서 광적인 비행을 보여주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섬뜩한지. 온 몸에 소름이 다 돋을 정도였다. 나는 저런 녀석들에게 물리고도 살아 남았구나. 어제의 후유증은 목숨을 잃을 뻔 했던 아찔한 경우의 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어쨌든. 벌들의 모습이 제법 뜸해졌을 무렵. "이제 슬슬 괜찮겠지." 무성하게 피어오르는 매연속을 뚫고, 긴 나뭇가지를 이용해 나무에 매달려있는 벌집의 끝을 툭툭 건드려본다. 아직 남아있는 잔여 벌들이 엥엥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벌집을 떨어뜨리는 나. 언제나 조심하고 볼 일이다. 행여나 기운이 팔팔한 벌이 남아있으면, 어제와 같은 사건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선배. 이제 괜찮나요?" 멀리 떨어져 있던 아리아의 한 마디. 해석하자면 '우리도 그쪽으로 가도 되나요?'라는 의미일테지. 아마도. "혹시 모르니까 거기에 있어봐. 벌집을 안전하게 치우고 나서 오는 편이 좋겠어." "혼자서 벌꿀을 독식하려고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겠죠?" "넌 도대체 나를 어떤 녀석으로 인식하길래 그런 쪼잔한 행동을 하는 녀석으로 묘사되고 있는 거냐." 아리아의 머릿속에 박혀있는 나란 존재의 이미지는 쉽사리 정화되지 않는 모양인가 보다. 어제 그런 과도한 스킨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건방진 후배의 발언은 잠시 후순위로 미뤄두고. 거의 농구공의 2~3배 급 크기를 자랑하는 벌집을 아래에 두고 어떤 식으로 처리를 할까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걸 쪼개보면 진짜로 꿀들이 들어 있을까? 실제로 양봉같은 걸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거대한 벌집이라면 아마도 충분한 량의 꿀이 나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기 시작한다. 저질러버려? 고기도 먹었는데, 꿀이라고 없겠는가. "좋아." 결심을 굳히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손도끼를 든다. 맨 손으로 쪼개기에는 내 담력이 부족한 관계로 도구를 이용해보도록 하자. 행여나 세균 감염이나 이런 것도 있을지 모르니까. 하지만 이것이 내가 판단했던 가장 큰 실수를 범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줄이야.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벌집 사이로. '그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제 나를 향해 달려들었던 벌들보다도 몸집이 족히 2배 가까이는 커 보이는 거대한 벌. 아니, 이건 꿀벌 수준이 아니라 포X몬스터에 나오는 독침봉이라는 포켓몬 수준의 크기를 자랑할 정도로 거대한 녀석이 위엄 넘치는 모습을 뽐내며 내 눈 앞에 등장했다. "!!" 지금 이게 어떤 기분이냐 하면. 최종 보스를 다 깼다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숨겨진 보스가 등장한 느낌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딱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나는 최종 보스를 쓰러뜨리기 위해 모든 HP와 MP를 다 소비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마주친 또 다른 최종 보스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 절로 침이 넘어가는 순간에, 덩치가 훨씬 큰 벌이 매섭게 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한다. 여왕벌 녀석인가?! 설마 벌집에 남아있을 줄이야. "제기랄!!" 꼴사납게 물에 젖은 바닥을 구르면서 날아드는 벌의 공격을 회피한다. 그러나 워낙 재빠른 녀석은 다시 궤도를 수정하며 나에게 날아들고. 회피 동작으로 자유로운 움직임을 선보일 수 없는 나에게는 또 다시 벌침 공격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새겨질 뿐이다. 이번에는 어디를 쏘일까. 다른 곳은 다 좋으니까, 제발 생식 작용을 담당하는 신체 부위에만 쏘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 때. "......" 여왕벌 크기 만큼은 아니지만, 체구가 작은 누군가가 나와 벌 사이를 가로막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 손으로 벌을 낚아챘다?! "......" 무표정한 얼굴로 잡은 벌을 땅바닥에 내리꽂더니, 그대로 발로 밟아 압사를 시켜버린다. 이후에,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간식용 과일을 꺼내어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거리기 시작하는 금발의 소녀, 엘리. "하, 하하..." 어이없는 웃음만이 새어 나오는 나를 향해서, 엘리가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덕분에 산 건가. 굉장하다. 이 소녀는. "결국 이번 일도 엘리가 끝낸 거구나." 노아 교수님이 허리에 착 달라붙은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한다. 엘리 덕분에 여왕벌로 추정되던 녀석도 완벽하게 제거. 벌집까지 없애고 나서야 우리 캠프는 다시 평화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엘리한테 맛있는 거라도 먹여줘야겠어요." "그러게." 내 말에 교수님도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지만, 정작 당사자인 엘리 본인은 자신이 어떠한 엄청난 일을 해냈는지 조차도 모르는 듯이 연신 뚱한 얼굴로 교수님의 허리를 감싸고 있을 뿐이다. ============================ 작품 후기 ============================ 엘리는 천하무적! 153화 EP 18. 카드 캡터 체리 ~봉인해제!~ "......" "......"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지지리도 운이 없는 날씨에 도저히 무슨 코멘트를 달아야 좋을지 모르겠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하면, 바로 또다시 폭풍우가 거세게 몰아치는 이 날씨를 가리키며 말하는 것이다. 요새 들어서 무인도 상공에 폭풍우들이 모여서 정모(정기 모임의 줄임말)라고 하는 것인가. 왜 이리 비가 많이 내리는 것일까. 게다가 우리들이 복귀하자마자 사냥도 못하게 비가 또 내리는 것은 무슨 횡포란 말인가. 날씨 조정 시스템이 고장이라도 난 거 아니야? 이거. "많이도 내리네." "그러게요." 거실에서 잠을 청하게 된 노아 교수님의 말에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감한다는 대답으로 교수님의 말을 받아준다. 현재 시각은 저녁 11시. 오늘 복귀를 마친 우리들은 작은 파티를 늦게까지 끝마치고 나서 잠을 청하기로 하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서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이미 침실방 팀은 전원 취침중. 거실에 할당된 오늘의 팀원 멤버는 방금 날씨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평을 서로 주고 받은 노아 교수님과 누나, 그리고 그녀들을 포함한 나머지 인원으로 나와 체리가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오늘 불침번 멤버는 나와 체리가 한 조, 그리고 노아 교수님과 누나가 한 조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유에. 오늘은 편하게 침실에서 자도 될텐데 굳이 거실에서 잘 필요가 있어?" "나름의 이유가 있으니까요." "이유?" 노아 교수님의 물음이었다. 내가 언급한 나름의 이유는 정말로 사소하고도 간단하고, 어찌보면 당연한 이유이다. "가뜩이나 6명이서 자는 침실방에 체격이 큰 남자인 제가 잘 수는 없잖아요. 그나마 거실이 넓고, 4명밖에 자지 않으니까 어찌보면 저에게 있어서는 거실이 더 편하죠." "음... 그러니?" 그래도 자신의 제자를 먼 원정길에 보내두고 이제서야 복귀한 나에게 불침번 근무까지 세워두는 것은 교수님의 입장에서 조금 미안한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누나는 그런 미안한 표정과는 상당히 상반된 얼굴로 오른손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말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노아 교수님. 제 남동생은 체력 하나 만큼은 좋으니까요." "그, 그러니?" 살짝 얼굴이 붉어진 노아 교수님이 차마 나를 바라보지 못하면서 대답을 한다. 대략 무슨 뜻인지 나도 알 수 있다. 체력이 좋다는 말은 남녀 관계에 성행위를 할 때 남성의 그 '체력'을 말하는거 아닌가. 자연스럽게 그런 쪽의 이미지가 연상된 노아 교수님이었기 때문에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바람직한 반응이라고 생각되지만 말이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체리가 힐끔힐끔 나를 바라보더니 누나에게 귓속말로 무언가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속닥속닥. 주저리주저리. 물론 나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내가 바깥 멀리에서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청각이 좋은 편도 아니고. 평범한 인간의 청력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에 X맨 수준의 놀라운 초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체리의 이야기를 듣던 누나가 갑자기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누나와는 다르게 체리의 얼굴은 급격하게 달아 오르기 시작하더니 누나에게 다급하게 말을 거는데 여념이 없다. "유, 유린 언니! 그렇게 웃으시면..." "아... 미안.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거의 눈물까지 맺힐 정도로 폭소를 남발하는 누나. 반응을 보아하니 체리가 나나 노아 교수님에게는 말해주지 말라는 듯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 같은데. 저런 식으로 상황이 전개되면 오히려 더 궁금증만 커져간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체험할 수 있지 않은가." 살짝 체리가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는 사이에 누나에게 물어보도록 해야겠다. 대놓고 추궁해서 물어보기에는 조금 매너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니까. 그리고 이런 것은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몰래 듣는 맛이 있으니까. 그런데 왜 이런 대사를 하는 내가 조금 사악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기분 탓일 것이다. 분명. "무슨 말을 주고 받은거니?" 그러나 나와는 다르게 노아 교수님은 직접적으로 묻는 방식을 택했다. 역시나 거짓이나 꾸밈이 없는 착한 마음을 가진 교수님다운 태도였다. 그렇게 표현하면 나는 결국 나쁜 놈이라는 소리가 되는 것인가... 말 그대로 '헐'이다. 교수님의 질문이 이어졌지만, 체리가 누나의 오른 손에 매달린 채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된다는 시선으로 울먹인 탓에 누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방금의 재미를 모두와 공유하고 싶지만, 다른 한 사람의 마음에 상처가 갈 수 있을거 같아서 비밀로 할게요. 노아 교수님." "그,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네." 어색하게 웃어보이는 노아 교수님이었다. 괜히 제자의 비밀을 파해치고 싶은 의도는 없었는지 깔끔하게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더 이상 파고들어 갔다가는 체리의 차마 말못할 추억거리가 하나 생길지도 모른다는 판단 하에서 이른 포기를 선택하신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나중에 물어봐야지. 기억해두도록 하자. 계속해서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아치는 상황. 화로속에 마른 장작을 넣은 나에게 누나가 이불을 덮으면서 말한다. "그럼 나는 먼저 잘테니까. 뒷일 잘 부탁해." "알았어. 교수님도 이제 주무세요." "응. 그럼 수고하렴." 의자에 앉은 채 화로 주변에 나란히 앉은 나와 체리를 제외하고는 노아 교수님과 누나는 잠을 청하기 시작한다. 본래 누나는 새벽잠은 별로 없는 편이기 때문에 밤 늦게까지 깨어있는 일이 다반사다. 다만 아침잠이 약할 뿐이지. 늦게 자니까 늦게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인가. 아무튼 일찍 잠에 든 누나와 노아 교수님. 그 상태로 10분 정도 흐른 상황에서 나와 체리는 서로 주고받는 대화 없이 그저 마른 장작을 화로속이 투척하면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후아암..." 반사적으로 하품이 나오는 나. 숙녀 앞에서 실례라는 기본상식 정도는 나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늘 하루종일 난파선에서 진흙탕 위를 걸으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무리한 행군을 몇시간동안 했고, 그리고 불어난 강물 위를 나뭇가지를 타고 건너는 아슬아슬한 묘기 아닌 묘기까지 연출하면서 여기에 도착했기 때문에 매우 피곤한 상황이다. 게다가 작지만 일시적으로 벌인 파티의 여운도 남아있고 말이다. 나와 같이 왔던 세린과 아리아는 거의 기절 상태에 가깝게 잠이 든 상황. 사실 나도 매우 피곤하지만, 그래도 내가 스스로 불침번을 자처했으니 이제와서 안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엄청나게 졸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다가온다. "피곤... 하세요?" "어? 어... 피곤하지." 의외로 체리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조금은 놀란 나. 수줍음이 극에 달하는 체리가 나에게 스스로의 의지로 먼저 말을 걸어온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에 놀란 것이다. 평소에 거리낌없이 말을 걸어오는 다른 여자들에 비해서 극도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체리였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인가보다. "피곤하시면 먼저 주무시는 것이..." "그럴수는 없지. 그래도 내가 먼저 하겠다고 손수 지원했는데. 남자가 한 입 가지고 두 말을 하면 혼난다고 누나에게 배웠거든." "유린 언니에게... 말인가요?" "뭐, 그렇게 된 셈이지." 부연설명을 하고 싶지만, 말이 길어질까봐 참기로 한다. 누나는 사실 장난식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고, 대부분 아버지가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신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성격상 상당히 남성다움을 선호하기 때문에 나름 거친(?) 인생을 살아온 나. 공구를 가지고 잡일을 하는 것 역시도 익숙한 이유가 아버지 덕분에 라는 요소가 강한 영향을 끼친 탓도 있다. 남자라면 적어도 삽과 고깽이 질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한적한 일요일 아침에 바깥으로 나가서 느닷없이 삽질과 고깽이질을 하게 된 안쓰러운 경험이 새록새록 기억의 메모리 장치에서 불러오기, 즉 로드가 되는 상황이다. 이것도 추억이라고 하면 추억인 것일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추억이 아닌데. 아무튼 그런 아버지의 밑에서 자란 나였기에, 그 영향도 꽤나 컸기 때문에 나도 어느정도 보수적인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남자는 여자를 지켜야 한다. 그리고 힘든 일이 있다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워야 한다. 이런거 말이다. 열혈 스포츠 물에서나 볼 수 있을거 같은 가훈틱한 마인드가 세뇌당한 듯이 나의 머릿속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셈인 것이다. 참으로 엄격한 가정사를 자랑하고 있는 유에라는 남자였다. 다시한먼 마른 장작을 넣고 있던 체리가 나를 힐끗 바라보며 말한다. "... 선배는 정말 대단한 사람 같아요." "내가?" 고개를 상하로 끄덕끄덕. 도대체 나의 어떤 면을 보고 대단하다고 하는 것일까. 사실 남들에게 존경받을만한 선행이나 일은 한 적이 없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 제게 있어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걸요." 수줍게 말하는 체리. 가뜩이나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그녀였기 때문에 어깨를 움추리는 모습을 보니까 마치 에바 초호기를 보는듯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작은 아기 고양이 있지 않은가. 체리에게 실례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초호기같이 아기 고양이와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서서 뭐든지 해결하시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존경받고 있어요... 그런 점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누나가 그러든?" "굳이 유린 언니 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그렇게 말씀해주셨어요... 지아 선생님이나, 노아 교수님도요." "학교에 다닐때는 그리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교수님이나 선생님, 그리고 다른 언니들이 그 정도로 칭찬해주실 정도라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없는 사이에 나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것일까. 남아있던 인원들 말이다. 호박씨를 깐 것처럼 악담을 나눈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쑥쓰럽긴 하다. 칭찬을 받아도 괜시리 부끄러워지는 이 현상. 아마도 내 일생 일대에 자주 느껴볼 수 없는 감정이리라 생각해본다. "하지만 체리. 네가 생각하는 나의 그런 모습들은 내가 혼자서 달성한게 아니야." "그럼... 어떤가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들 하잖아. 사회적 동물이라는 뜻이 무엇인지 알아?" "그, 글쎄요..." 도리어 질문을 당하자 체리가 조금 난감하다는 듯이 말한다. 체리에게 이런 식으로 직접적으로 질문하는 것은 조금 에로사항이었던 것일까. 그래도 기왕 이야기를 꺼냈으니 이대로 이어가도록 하자. "나도 대학교때 윤리 관련 선택과목 시간이었나... 과목 명칭은 자세히 기억이 안나지만, 거기서 들은 적이 있어. 사회적 동물이라 함은 인간이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를 가정으로 성립된 단어라고." "그게 무슨 뜻인가요?" "우리들은 현재 일종의 '사회'라는 거대한 체계적인 시스템에 의해 조직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잖아. 이 사회라는 구성 요소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인간' 그 자체야. 그리고 우리들 역시도 인간이지.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어. 야생에서 살아가는 인간 한명의 존재는 들짐승 수준의 가치로만 존재하는 것이니까." "......" "결국 인간은 인간 끼리의 사회를 구축하며 살아가야 비로소 인간이라는 본연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거야. 문명사회. 그리고 과학과 기술. 지금 그 요소들이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는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결국 인간은 그런 요소들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부정하고 싶어도 제거할 수 없는 것이지. 일종의 숙명이자 운명이라고 할까." "... 전문적인 이야기 같아요." "그렇지 않아. 이야기를 들어보면 공감대가 형성되는 부분도 있을거니까." "그럴까요?" "... 아마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확신은 못한다. 왜냐하면 내가 그리 말재주가 좋은 편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래도 대놓고 모른다고 말하는 것 보다는 나은 편이라고 생각해서 계속해서 하던 말을 마저 이어가도록 하자. "결국 인간들끼리의 사회를 갖추어 살아간다는 말은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야. 결론은 그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지." "네..." "그리고 이 전제조건을 무인도에 성립해보면 이야기가 빠를거야. 지금 우리들은 이 무인도에서 살고 있잖아. 그렇지?" "그렇죠..." "하지만 이 무인도에는 인간 사회처럼 발달된 기술과학의 흔적도, 그리고 자동차나 원동력으로 움직이는 물체도 존재하지 않아. 그 말 그대로 해석하면 원시세계 그 자체야. 하지만 문명은 없어도 '사회'라는 것은 존재해. 그것이 바로 이 곳. 그러니까 이 베이스 캠프에 모인 우리들은 일종의 작은 사회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거야." "사회요?" "그래. 보이지는 않지만 사회라는 이름의 울타리가 우리들을 맺어주고 있는 것이지.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영향을 미치고, 그리고 그 영향을 받아가고. 그게 바로 사회야." "그렇군요..." "그리고 나 역시도 나 혼자서 이 베이스 캠프에 있는 모두를 이끌어가는 것도 아니야. 나도 마찬가지로 이 사화의 구성원. 그렇기 때문에 노아 교수님 뿐만 아니라 누나, 유아 선배, 아리아와 세리아 자매, 마지막으로 지아 선생님와 세린, 너에게도 영향을 받으면서 이 무인도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지." "......" "인간이라는 존재는 신이 아니야.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지. 나라는 존재도 완벽하지 않아.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된 판단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모두에게 의지를 하는거야. 서로 상의해서 대답을 구하고,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찾아가는거지." 결국 나는 체리가 동경하고 있는 '완벽한 인간'은 아니라는 소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과도한 칭찬을 듣는 것은 조금은 과분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것이다.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체리가 곰곰이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내가 말해준 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칠까 생각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충분히 전달되었다고 보여지기 때문에 나름 만족한다고 본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오덕토크 3회가 아니라 확밀아 토크 1회입니다. 드디어 오늘 자정을 기점으로 3월 마지막 시즌이 끝났습니다! 개인적으로 제 수확은 대략 이카, 리온, 레아, 티아 (키라) 풀돌이고, 크림힐트와 스사노오는 노멀 -1돌이었습니다. 크림힐트는 마지막까지 발버둥쳐봤는데 결국 풀돌을 못했구요 ㅡ_ㅜ다음 강적 시즌을 노려봐야지요. 다른 독자 여러분들은 만족할만한 시즌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새로운 시즌도 오늘 새벽 1시부터 시작되니 다시금 힘내봅시다! 154화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비바람이 몰아치는 환경 덕분에 주변은 상당한 어두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게다가 폭풍우 특유의 사운드 효과까지. 우르르 쾅쾅 하는 천둥소리와 함까 번쩍이는 번개. 마지막으로 쏴아 하며 쏟아지는 빗줄기가 청각적인 효과의 공포를 우리들에게 맛보게끔 시전중에 있었다. 내 말을 들은 체리가 혼자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고, 나는 말 없이 다시 마른 장작을 넣을 뿐이다. 참으로 고요하다. 조용한 정적에 휩쌓이게 된 이 산장 내부. 거실에서는 노아 교수님과 누나가 자고 있고, 침실방에서는 그다지 눈에 띄일만한 특별한 사건은 벌어지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평화 그 자체라는 소리. 아니지.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으니까 평화로운 것은 아니구나. 정정하도록 하자. ... 그나저나 정말 조용하다. 바깥의 상황을 가리켜 표현한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들의 상황 말이다. 분명 불침번은 2명이서 서고 있는데, 오가는 말의 대화 횟수가 또 줄어들었다. 기본적으로 우리들은 불침번을 한개조 당 2시간 씩 서게 되어있다. 다만 오늘은 난파선에서 복귀한 아리아와 세린은 불침번 멤버에서 빠졌기 때문이 남은 인원들이 부족한 시간을 매꿔서 번갈아 서고 있는 중. 참고로 내가 속한 초번은 새벽 1시까지만 서고 취침에 들면 된다. 비록 잠은 부족할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여기는 무인도니까 부족한 잠은 낮에 채우면 되기 때문이다. 평소에 낮잠을 자는 것을 그다지 선호하는 편은 아닌데, 내일은 아마 나 역시도 실컷 잠을 청할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하루종일 잠이나 자야지. 내일 편안한 수면시간을 생각하며 다시 바깥을 바라보는 나. 평소에는 열어놓는 창문이었지만, 지금은 닫혀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잠깐 바깥의 상황을 살펴볼까 하고 열어본다. 역시나 무지막지하게 소나기가 내리는 상황. 차마 두 눈 뜨고 바라보기에는 조금 심할 정도로 많이 내린다. 아, 참고로 이 산장의 창문은 일반 창문의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윗쪽으로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는 문 같은 것을 만들어서 평소에는 받침대가 되어주는 나무 막대기 두개로 창문의 여닫이 나무 장판을 고정키셔 열여놓는다. 그러나 오늘같이 많은 양의 비가 퍼부어 질 때 비가 내부로 들어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닫아놓는 것이다. "여전히 많이 내리네." "그러게요오..." 체리의 버릇이기도 한 말 끝 흐리기가 시전된다. 엘리는 처음에 말을 할 때 약간 텀을 두고서 말하는 습관이 있는데, 체리는 엘리와 반대로 말 끝에 텀을 두고 말한다. 각자의 성향이 잘 반영된 말이라고 해야 할까. 역시나 부끄럼쟁이 1인자다운 체리의 말투라고 생각된다. "......" "......" 또 다시 조용하다. 아직 자정도 안됐는데 이렇게 서로 오고가는 대화가 없으면 나도 그렇고 체리도 그렇고 많이 답답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체리는 이런 조용한 분위기가 더 편할거라 생각이 되어서 체리가 이 침묵의 바다를 항해하듯이 조용한 분위기를 답답해할 일은 거의 없을거라 추측되지만, 내가 답답하게 느껴진다는 말은 사실이다. 게다가 가뜩이나 피곤한데 이런 식으로 말수가 없다면 더 졸리지 않은가. 그런고로 우선 뭔가 말이라도 꺼내보자. "심심하지 않니? 체리야." "선배는 심심하신가요...?" "굳이 물어본다면 역시나 심심하다는 쪽이겠지?" "미, 미안해요. 제가 워낙 재미없는 여자라서..." "아니.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라." 난감하게 되었다. 나는 고작 사소한 말 한번 걸어보고 그걸 계기로 해서 말수를 늘여보려고 시도했지만, 오히려 체리에게 있어서는 마치 내가 그녀에게 '너, 왜 이리 조용해! 뭔가 말이라도 해봐!'라는 듯한 책망을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인가 보다. "그냥 왠지 가만히 있으니까 조금 심심해서 그런거야. 조금 더 대화라도 나눠보자 라는 의도지. 너를 책망한다거나 하는 그런 뜻이 아니야." "네, 네..." 역시나 약간 겁먹은 표정이다. 세린같이 싫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약간 꺼려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면 솔직하게 말하자면 조금 마음에 상처를 받는다. 내가 무슨 못된 범죄자도 아니고, 왜 싫어하는지 이유조차 모르니까 말이다. 또다시 생각을 해보자. 오늘따라 정말 나의 두뇌에 위치한 뇌세포들을 풀가동 시키는 일이 많아지는데, 약간 미안하지만 계속해서 더 왕성환 활동을 보여주기 바란다. "저기, 체리야." "네...?" "끝말잇기라도 해볼래?" "끝말잇기... 말인가요?" "그래. 끝말잇기. 간단한 게임 같은건 졸리게 하지도 않고 좋잖아. 그렇지?" "네..." 굳이 머리를 쓰지 않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게임 중 가위바위보 다음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게임이 바로 끝말잇기 아닌가. 이제와서 말하지만, 사실 나는 끝말잇기의 숨겨진 고수라고 할 수 있다. 카드늄. 나트륨. 그리고 이산화나트륨. 결코 이을 수 없는 한방단어의 달인이기도 한 끝말잇기 초고수가 사실 바로 내 정체였단 말이다. 체리에게는 미안하지만, 끝말잇기를 시작하게 된 시점에서 이미 체리의 패배는 예고되어 있다. 하하하. "그럼 순서는 어떻게 정할까? 가위바위보?" "선배가 먼저 하세요오..." 순순히 나에게 차례를 양보하는 체리. 역시나 세리아와 마찬가지로 심성이 너무 착하고 고운 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끝말잇기 게임에서 봐줄 생각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작 게임 하나가지고 이런 말을 하는 나를 너무 욕하지 말라. 나에게 있어서는 이 끝말잇기 게임은 '공'에 속하니까. "그럼 먼저 시작할게. 음... 뭘로 할까." 근처에 보이는 사물 중 아무거나 보이는 것으로 정한 내 시야에 일단 우리들이 앉아있는 의자가 눈에 들어온다. 아마 이게 제일 무난하겠지. "의자로 시작할게." "자, 자..." 또다시 생각에 잠기는 체리. 모습을 보아하니 초보가 분명하다. 본래 초고수라 불리는 사람들은 자신이 고민하는 약한 모습을 함부로 보이지 않는 법. 호랑이는 함부로 발톱을 드러내지 않는다고들 하지 않는가... 근데 약간 어울리지 않는 사용법 같은데. 이거. 아무튼 고민하던 체리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자이언트 스윙(Giant swing)... 으로 할게요." "... 뭐???" "그, 그러니까 자이언트 스윙으로..." ... 이것이 뭣이다냐. 윙이라고? 윙? 윙으로 시작하는 단어가... 그러니까... 아니, 그것보다도 방금의 유체리. 전혀 끝말잇기 못할거 같은 초보티를 팍팍 내더니만 느닷없이 초강수의 공격을 선사하지 않았는가? 윙으로 시작하는 단어라고? 윙윙 죽게지 같은 단어는 안되냐?! 예상치 못하게 고민에 빠져든 나에게 체리가 내가 자이언트 스윙이라는 단어를 모르기 때문에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라고 착각했는지 갑자기 설명 모드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아, 자이언트 스윙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발을 겨드랑이에 끼운 채 빙글빙글 돌리는 기술이에요..." "그, 그러니?" "네..." 안타깝게도 그 기술명은 나도 알고 있다. 어렸을적에 누나한테 많이 당해봤으니까. 덕분에 벽까지 날아가서 머리를 부딛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지. 무슨 프로 레슬링 경기를 보고 나서 나에게 뛰쳐온 누나가 '게임하자!'라고 하더니 느닷없이 누워있는 내 발을 잡고 빙빙 돌리더니 그대로 '자이언트 스윙!'이라고 외치면서 던진 기억이 새록새록 나기 시작한다. 그러고보니 누나라는 존재는 내게 있어서 안좋은 추억만 선사해준 존재였고만. 그것보다도 솔직하게 말하자면 체리의 이벵서 그런 레슬링 기술이 튀어 나올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어떤 기술인지도 명확하게 숙지하고 있다. 의외성을 보여주는 모습이라 평하고 싶다. 하지만 의외성이든 뭐든간에 그게 승부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법이다. "졌어. 체리 너의 승리야." "가, 감사합니다." 고개를 한번 크게 푹 숙이면서 말하는 체리. 게임에서 이긴 자의 태도 치고는 상당히 지나치다 할 정도로 예의가 바르다. 그러나 그런 예의바른 행동과는 다르게 곧바로 한방에 경기를 정리해버리는 숨은 은둔고수, 유체리 교수님. 이거, 방심해서는 안되겠다. "제법인데. 유체리. 끝말잇기에 소질이 있는거 아니야? 아니면 평소에 자주 이런 게임을 해본 적이 있다든지?" "아니요. 오늘 처음 해봐요..." 예상이 빗나가고 말았다. 그럼 나는 오늘 처음 해보는 극 초보자에게 진 것인가? 끝말잇기의 달인인 내가? 그럴리가 없을 것이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우연히 알고 있는 자이언트 스윙이라는 단어가 마침 때에 좋게 사용된 것일 뿐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자. 그럼 2회전을 시작하자." "또 하는 건가요?" "원래 우리나라는 3판 2선승제 라는 제도가 있잖아. 그렇지?" "......" 법률로 정해져 있진 않지만, 내가 국회의원이라면 왠지 모르게 제정하고 싶은 개정안이기도 하다. 물론 실현 가능성은 전혀 없겠지만. 이렇게 해서 시작된 2회전(이라고 쓰고 복수전이라 읽는다.)의 선공을 맡게 된 것은 바로 유체리. 1회전에서는 내가 먼저 시작했으니까 형평성의 문제를 고려해서 2회전에는 체리에게 공격권을 양도한 나의 세심한 배려에 땡큐 라는 자화자찬을 보내고 싶어진다. "이쑤시개... 로 할게요..." "개, 개란 말이지... 그렇다면 개그. 어때?" "그... 인가요?" 또다시 고민하기 시작하는 유체리. '그'로 시작되는 단어는 그다지 높은 난이도를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쉽게 떠오를 정도의 쉬운 단어도 아니다. 그물이나 뭐 이런것도 있겠지만, '그'로 시작되는 단어는 별로 없지 않은가. 끝말잇기라는 것은 시간이 무제한으로 주어지는 게임도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순간적인 순발력을 요하는 이 게임에서는 나름 괜찮은 공격이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나의 커다란 실수였으니. "그... 그릇." "뭐라고?!?!?!" "그릇... 할게요." 아. 망했어요. 그릇이란 말인가. 릇으로 시작되는 단어? 그런게 있어? 두음법칙을 적용해도 '읏'이라는 글자로 시작되는 단어가 있긴 하는거냐고. 그것보다 유체리, 왜 이리 끝말잇기를 잘하는거냐. 초심자라며. "져, 졌다." OTL 자세를 취하면서 패배를 시인하는 나. 이건 빼도박도 못할 정도로 완패다. 3판 2선승제에서 5판 3선승제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느껴지긴 하지만, 이건 한번 한다고 해서 이길만한 수준을 자랑하는게 아니다. 남자의 자존심이니 뭐니 하는 그런 것도 없고, 그냥 이건 답이 없다. 어떻게 2턴을 이어가지 못하고 연속적으로 2연패냐고. 이건 말이 안된다. 끝말잇기의 신이라도 되는거냐. 유체리. ============================ 작품 후기 ============================ 오늘이 만우절이란 사실을 눈 뜨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만우절이라... 실은 제가 여자친구가 생겼습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ㅜ_ㅜ 155화 폭풍같은 끝말잇기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서 한동한 공황 상태까지 몰고 간 나는 일단 가볍게 소변이라도 보고자 비옷을 입고 바깥으로 나온 상황이다. 조금 설명을 가하자면, 내가 입고 있는 비옷은 산장에서 찾아내기도 한 소품중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여행을 좋아하시던 엘리의 부모님답게 비상시에 필요한 물품들은 거의 다 비행기 안에 있어서 그런지 무인도에서도 꽤나 도움이 되는 도구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소품 중에 하나로 바로 내가 입고 있는 이 비옷. 2개 한정으로 되어 있지만, 바깥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느라 이동하는데에는 상당한 효율성을 자랑하는 옷이라고 보여진다. "그나저나 무지하게 몰아 치는고만. 폭풍우 자식." 간단하게 불평불만을 늘어 놓으면서 도착한 화장실. 내가 도착한 이 화장실은 저번에 '폭풍 설사'가 벌어졌던 그 사건을 통해 만들어놓은 간이 화장실이 아니라 애초에 우리들이 이 무인도의 산장에 오기 전에 엘리의 부모님이 만들어 놓으셨던 그 화장실을 의미한다. 나와 엘리가 만들어놓은 간이 화장실은 천장... 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좀 그런가. 지붕이라고 말하는게 어울리겠지. 아무튼 비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붕을 만들어놓은 화장실의 구조가 아닌지라 이같이 비가 미친듯이 쏟아질 경우에는 임시로 만들어놓은 간이 화장실들은 사용하지 못한다. 비오는 날 한정으로 지붕이 있는 원조 화장실(?)을 사용하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비가 와도 여유롭게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영차..." 화장실 내부에 위치한 옷걸이에 비옷을 걸어두고 바지를 내린다. 대변을 보는 것은 아니고. 간단한 소변 정도이기 때문에 금방 끝날 일이지만, 그래도 비옷에 오줌을 묻히거나 하는 불상사가 벌어지면 안되지 않은가. 나중에 다른 여자들에게 무슨 잔소리를 들을지 모르기 때문에 화장실에 대한 매너 정도는 이렇게 지켜줘야 한다. 쉬이이이이... 졸졸졸 흐르는 소변의 물줄기를 바라보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굵은 빗줄기와 비교해본다. 훗. 내 소변의 물줄기 굵기가 더 굵다고. 왠지 모르게 째째한 말이기도 하지만, 잠시나마 기분이 좋아졌다. 사소한 점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게 된 이 습관도 아마 무인도의 영향이겠지. 잠시간의 기쁨 뒤에 몰려오는 왠지 모를 슬픔. 내가 비참해보이는 것도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감정이다. 다시 비옷을 입고 화장실 문을 열고서 바깥으로 나간 나. 어차피 나온 김에 주변의 상황이라도 잠깐 둘러보고 올까 하는 마음으로 공터와 숲의 경계면을 한번씩 둘러본다. 손전등이라도 있으면 정말 편할텐데. 보이지 않는 어둠속으로 들어가면서까지 순찰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기 때문에 그냥 시선만 가볍게 던지는 식으로 한바퀴 둘러보는게 전부다. 나 홀로 숲 안쪽으로 들어가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멧돼지 같은 위험한 산짐승은 보이지 않고. 뭐, 비가 이 정도로 쏟아지니까 어찌보면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시 발걸음을 산장으로 옮기는 나. 들어가기 전에 신발장 근처에 놓인 옷걸이에 우비를 걸어두고 어깨에 묻은 약간의 물줄기들을 털어낸다. 비옷이라고는 하나 100% 방수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마무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전 소중하니까요. 그렇다고 엘라스틴으로 머리를 감아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무인도에 샴푸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사치품은 이 곳에 없다고. 그러고보니 샴푸같은 것이라도 하나 만들어두면 좋을텐데. 약초도감에 그런건 안나와있나. 샴푸 제조법 이런 레시피. 화장실 겸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나. 여전히 비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다는 듯이 무자비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제 겨우 자정을 넘어가는 현재 시각. 불침번이 끝나려면 대략 새벽 1시 정도까지 있으면 되니까... 오래걸리겟다. 한 40분 정도 가량 남은 것인가. 자리에 돌아온 나는 의자에 앉아서 화로의 불을 쬐어본다. 따스한 감촉의 느낌이 내 손끝에 전해지는 포근함을 선사해준다. 불이라는 것은 인간이 생활하는데에 있어서 이렇게 여러가지 용도로 쓰이는 요긴한 요소이기도 한 것이다. 날것을 익혀 먹을때, 그리고 어두운 밤에 빛이라는 소중한 것을 선물해주는 불 말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정확하게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인간에게 불을 선사해주고 자신은 분노한 제우스에게 평생 독수리한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는 신이 있지 않은가. 신화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자. 불이라는 존재를 선사해준 업적을 칭송하며 말이다. 내가 자리에 온 것을 눈으로 확인한 체리가 의자에서 일어서며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저, 저도 화장실을..." "알았어. 갔다 와." "네..." 수줍게 말하는 체리. 내가 복귀한 다음에 화장실을 갔다 올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꽤나 오래 참았다는 듯이 꺼낸 말이었다. 체리 역시도 우비를 착용하기 위해 현관(임시 명칭이지만)으로 향한다. 단발의 머리카락을 목 뒷편으로 넘긴 체리가 우비를 쓰고 나서 바깥으로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차피 화장실은 1인용으로 제작되어 있었기 때문에 체리와 내가 동시에 화장실을 사용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2인용이라고 하더라도 같이 볼일을 보는 경우는 절대로 없겠지만, 그냥 그렇다는 뜻이다. 잠시 체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기지개를 펴면서 한껏 하품을 내질러본다. 괜히 체리 앞에서 하품을 했다가는 또 다시 내가 피곤함에 쩔어 있으면서 무리하게 불침번 근무를 서는게 아닐까 하고 걱정을 끼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이제서야 마음 놓고 다리와 팔을 쭉 뻗으면서 이런 식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다. 성격이 소심한 체리였기 때문에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많이 쓰는 타입이라는 사실 정도는 나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다. ...... 그나저나 체리와 불침번을 서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해야 할까.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자면 사실 은근히 불안하긴 했다. 그동안 체리와 이렇게 단 둘이 있어본 시간도 없고, 그리고 체리 본인도 은근히 나를 꺼려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세린 수준의 혐오증과 같은 증세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나를 많이 피하는 듯한 성향을 내비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서로 불침번을 서는 것도 내게 있어서는 어떤 의미로 놀라운 상황. 그리고 은근히 체리도 나의 말장난이나 대답에 대한 호응을 잘 해준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것일까. 잠깐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 파생된 그리움? 간혹가다 이런 말을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평소 보던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어딘지 모르게 조금은 섭섭하기도 하고 부족하고, 왠지 모르게 보고 싶다는 그런 느낌 말이다. 그런데 체리와 나 사이가 그렇게까지 유대감으로 맺어진 사이가 아닌걸로 알고 있는데. 스스로 말하기도 참으로 부끄럽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원인따윈 상관 없이 체리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개인적으로 상당히 만족할 뿐이다. 삐그덕 문이 열림과 닫히는 소리를 순차적으로 내며 우비를 건 체리. 자신의 머리카락에 묻은 몇개의 빗방울을 털어낸다. 역시나 여자는 머리카락에 신경을 많이 쓰는 존재이다보니 처음에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어깨를 비롯해서 몸에 묻은 물방울을 제일 먼저 털어낸 나와는 판이한 태도를 보여준다. "잘 갔다 왔어?" "네? 네..." 여자에게 화장실 잘 갔다 왔는지에 대한 질문은 조금 실례였나. 체리가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 질문에 대답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시 제자리에 앉은 체리. 그리고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또 다시 이어지는 침묵의 항해. 아까의 끝말잇기도 다시 하기에는 좀 그렇고, 다른 게임을 제안하기에는 밤이 너무 늦었다. 침실팀은 예외로 한다고 해도, 우리들과 같이 거실의 공간을 공유하면서 잠이 든 누나와 노아 교수님의 수면에 방해가 될까봐 요란한 게임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볼까 하다가 마침 아까 벌어졌던 사소한 에피소드... 라고 해야 할까. 조금 궁금증을 유발할만한 일이 있어서 그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도록 하자. "아까 누나한테 했던 말. 무엇인지 들을 수 있을까?" "유린 언니한테요?" "어. 둘이서 귓속말로 주고 받았었잖아." "그야 그렇지만..." 약간 말하기를 꺼려하는 체리. 아무래도 나한테 직접적으로 말해줄 생각은 없어 보이는 것 같다. 남의 입을 통해서 전해 듣는 것보다 아무래도 본인의 입으로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봤지만, 이런 태도를 보이면 그 확률은 극히 낮아지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 작품 후기 ============================ 아토피 덕분에 가려워 죽겠습니다. 애꿎은 피부만 고통받고, 여튼 아토피는 참 여러모로 불편하군요. 그나저나 내일부터 블소를 시작할까 하는데, 간만에 기공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기공사가 무빙샷 하는 맛이 좋지요. 여캐를 선택한다면 보는 맛도 추가! 참기름 피부 핰핰핰... PS. 만우절 기념 원고료 쿠폰 투척 감사합니다. 연참은 제가 4월 중반까지 개인적으로 바쁜 일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연참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156화 "미안. 말하기 껄끄러운 거라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돼." "아, 아니에요오..." 오히려 나에게 죄송하다는 듯이 사과하는 유체리. 이 녀석도 정말 성격이 너무 착하다. 사회에는 이런 착한 사람들을 이용해먹는 사기꾼들이 즐비한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라면 모두가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잠깐의 샛길로 빠져들어 딴 생각을 해본다. 내 눈치를 살피던 체리가 갑자기 자신의 두 손을 가슴 위로 곱게 모은 채 심호흡을 하기 시작한다. 긴장했다는 표정이 역력. 무엇을 하라고 저런 포즈를 취하는 것일까. "사, 사실대로 말하면... 비웃지 말아주시기에요." "어? 말 해줄거야?" "네..." 이거, 나름 의외성을 띈 전개가 펼쳐지고 있는거 같은데. 대답을 들을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고 있던 내게 오히려 자진납세 하면서 아까 자신이 꺼냈던 담화의 내용을 들려주겠다고 말하는데 내가 굳이 말릴 이유는 없지 않는가. 인간의 호기심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 "비밀로 할게." "정말이죠...?" "그럼. 내가 얼마나 입이 무거운 사람인데. 별명이 '다이아몬드 마우스(diamond mouth)'라고 불렸던 사나이라고." 물론 방금의 별명은 즉흥적으로 지어낸 것이다. 그런 별명을 가질리가 없잖아. 그래도 체리의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내가 누나도 아니고, 남의 부끄러운 비밀을 공연하게 대놓고 떠들고 다닐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사, 사실 아까..." "아까?" "유린 언니한테... 혹시 유에 선배가 난파선 탐험을 구실로 아리아랑 이렇고 저렇고 차마 말로 표현하기 부끄러운 행동을 하려는 일종의 핑계가 아닐까 해서..." "... 난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닌데." "죄, 죄송해요...!!" 연신 고개를 꾸벅이며 사과하는 체리. 이렇게까지 과도하게 사과할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마치 죽을 죄를 지었다는 듯이 사과의 사과를 시전한다. 저러다가 사과(Apple)라도 될 기세다. ... 방금의 유머는 재미가 없었나. "신경쓰지 마. 그런데 어째서 그런 생각을?" "그러니까..." 다른건 몰라도, 그런 의구심을 발현시킬만한 원인이 더 궁금하다고 생각한 나는 왜 그런 식으로 오해를 했는지 캐묻기 시작한다. 아니지. 캐묻는다고 하면 마치 내가 체리를 닥달하며 추긍하는 듯한 어감이 느껴지니까 단순하게 질문을 해본다고 표현하자. 더 이상 나의 신사 이미지 명예를 훼손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질문을 받게 된 체리가 약간 빨개진 얼굴로 말한다. "유에 선배는 다른 분들과도 유, 육체... 관... 계... 를 가지셨다고 들었어요." 유난히도 육체관계라는 단어를 띄엄띄엄 말하는 체리. 아마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에는 조금 쑥스러운 어감이 많이 있나보다. "그래서 한번 관계를 가졌던 경험도 있고... 난파선에서 다른 분들과 몸을 서, 서... 섞거나... 이러지 않았을까 해서요." "그렇구나." 충분히 오해의 소지를 낳을만한 이유였다. 저번에 캠프파이어 때 제 2차 왕게임에서 지아 선생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대놓고 우리들의 관계를 발설했기 때문에 현재 나의 여자관계를 모르는 이는 이 무인도에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생존자들이 있다는 가정하에선 성립되지 않는 조건이지만, 그 경우의 수를 제외하고 생각해본 결과다. 하지만 체리가 생각했던 그런 관계는 없었지만, 예상치도 못한 관계를 맺은 것은 사실이다. 의도치 않았지만, 세린이 M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 덕분에 설마 그녀와 섹스를 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을 난파선에서 벌이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체리에게 '사실 난 아리아가 아니라 세린과 섹스한 사이야!'라고 당당히 말할수도 없고. 아마도 이런 말을 했다가는 세린에게는 입이 가벼운 남자로 낙인찍힐테고, 체리에게는 발정난 수컷으로 욕을 먹을게 뻔하다. 그러니까 당연한 말로 세린과 나와의 관계는 숨기도록 하자. 그것이 현명한 방법이니까. "안타깝게도 그런 관계는 없었어. 그냥 난파선 이곳 저곳을 탐험하고 끝났을 뿐이지." "그렇겠죠...? 아무리 선배라도 공과 사는 구별하실 줄 아실거라 생각했거든요." 푸욱! 이것은 무슨 소리? 바로 양심에 찔리는 소리다. "유에 선배는 제가 동경하는 분인걸요. 그러니까 실망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을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푸우욱! 이건 좀 치명타다. 굳이 표현하자면 세린의 찌르기 공격에서 유아 선배의 베기 공격을 연달아 정통으로 맞은 느낌이라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저는 유에 선배를 신용하고 있거든요..." 푸우우우욱!!! 그만, 그만하라고! 더 이상 내 양심이 버틸 수가 없단 말이다! 날 그렇게 순수한 눈으로 쳐다보지 마! 으아아아아! ... 갑자기 엄청난 죄책감이 엄습해옴을 느낄 수 있었다. 괜시리 미안해지네. 이건 뭐 아리아와 관계를 가진 것 보다도 더 심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생각 덕분에 체리와의 시선을 맞추기가 껄끄러워질 정도다. 이래서 범죄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다른 사람의 눈을 직접 쳐다보지 못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게 아니구나 라는 간접 체험까지 더불어 경험할 수 있었다. 양심에 마구 공격을 퍼부은 체리가 또다시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말한다. "저, 저기 선배." "왜 그러니?" "한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질문이라. 나에게 궁금한 것이 뭐가 있는 것일까. 내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대스타도 아니기 때문에 사실 나에게 궁금한 사실은 별로 없을거라 생각하는데 말이다. 그러나 체리의 믿음을 배신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나름 착한 선배 이미지를 띄우고서 연기라도 하자는 식으로 간혹 이벤트 행사에서 종업원들이 영업용 미소를 보여주는 그것과 똑같은 스마일(Smile)을 유지하면서 체리에게 대답한다. "언제든지 물어봐." 우물쭈물한 태도를 보이는 체리. 대단한 질문이라도 되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질문일까 궁금해하던 찰나에, 드디어 체리의 입이 열리기 시작하며 자신의 생각을 언어화 시키며 풀어내는 작업을 시행한다. "서, 선배는... 자.... 위... 같은거 많이 하세요??" ....... .......... .............. 방금 내가 잘못 들은건 아니겠지. 자위라고? 스스로 위로한다는 그 자위 말하는거 맞겠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자위라는 단어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 것인가? 그런건가? 그럴리가 없잖아. "자위라고?" "네, 네..." 혹시나 몰라서 다시 확인하는 차원으로 되물어본다. 그러자 아까에 비해서 거의 배로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체리. 귀까지 빨갛게 물든 채로 나의 뜻이 적극 긍정의 의사를 제스쳐로 보여준다. 여자에게, 그것도 1학년 후배에게 자위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아본 나도 참으로 색다른 경험을 하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도 내가 체리랑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말이다. 살다살다 절대로 있을 수 없을듯한 일들을 이 무인도에 오고 나서 정말 많이 겪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도 질문은 받았으니까 나름 성실하게 대답해드리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 "자위... 하긴 하지. 무인도에 오기 전에는 하루에 1번 정도는 하지 않았나 하고 기억할 정도니까." "하루에 한번 씩이나요?!" "... 그렇다고 매일 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꼴릴때... 미안. 조금 언어를 순화시켜서 표현하고 싶은데, 이런 식으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네. 아무튼 그 뭐랄까... 남자의 성기가 커지는거 있잖아. 발기 한다고 하는거." "네, 넷!?" "그러니까... 커지면 하는 거지. 그런거야." "그, 그런가요..." 대답을 하는 나도 조금 창피하다는 생각이 든다. 절대로 내가 순진무구한 체리를 데리고 성추행 발언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순수하게 답변을 들려준 것이고, 그리고 그 질문은 체리 본인이 직접 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다. "저기, 그럼... 자... 위를 하면 그... 많이 나오나요...?" "정액 말이야?" "그, 그거요..." "글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요새 들어서 많이 나온다고 표현해야 하나. 개인적인 내 생각일 뿐이지만, 그렇다고 생각해." 자위에 이어서 이번에는 정액의 양까지 조사(?)하는 유체리. 도대체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보다도 순수하고 퓨어한 체리가 오히려 나에게 이런 성희롱 급으로 신고당할만한 질문을 먼저 꺼내올 줄은 몰랐다. 정말로 아무런 별다른 뜻 없이 남자에 대한 질문? 그런것 치고는 조금 외설적인 느낌이 강하게 난다. "혹시... 유에 선배의 거, 거기... 길이도 알 수 있을까요...?" "거기라면... 성기 말이야?" 고개를 끄덕이는 유체리. 그런데 내 성기의 길이는 알아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미안. 직접 실재로 측정해본 적은 없어서." ... 설마 유체리. 일부러 이런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나에게 이런 질문만 골라서 하는건 아니겠지? 약간의 외설적이고 19세 미만 관람불가 딱지를 화면 오른쪽 상단에 붙여야 할 기세를 자랑하는 이 음란 토크를 계속해서 이어가는 진의가 무엇일까. 남자의 입장인 내 쪽에서는 그다지 손해볼만한 일은 없다고 보여지는데 말이다. 오히려 이런 음란 토크를 주고 받으면 나야 좋지. 간접적인 성희롱 기분도 느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시점을 바꾸어 생각해봐도 도저히 지금의 질문들에 대한 의도는 이해할 수가 없다. 분명 일부러 이런 발언을 유도하는 거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의도로? ============================ 작품 후기 ============================ 제가 기억하고 있는 바로는... 이번 에피소드의 핵심은 여자와 주고 받는 '음담패설'이 아닐까 싶군요. 사실 쓴 저도 에피소드가 잘 기억 안나지만, 여하튼 어렴풋이 기억나는 바로는 아마 그럴겁니다. 요즘 유행하는 코드로 표현하자면 섹드립이겠지요. 157화 ...... 후배 여자아이를 데리고 도대체 내가 무슨말을 하는건지 모르겠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음담패설(淫談悖說)'이라는 것인가. 솔직히 나는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여자아이를 데리고 이런저런 야한 이야기를 하면 조금 기분이 이상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직접적으로 여자아이의 가슴을 만지거나 아니면 엉덩이를 주무르거나 하는 그런 스킨십은 없지만, 말이라는 것은 어느정도의 '힘', 즉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가. 게다가 상대가 여자라면 약간의 흥분감이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보다도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지만 말이다. "저기. 체리야. 나도 질문 하나 해도 될까?" "제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라면... 언제든지요." 아마도 이번에는 내가 체리 본인에게 야한 이야기를 할 차례라는 것을 얼핏 짐작했는지 조금 주눅든 표정으로 대답한다. 사실 내가 체리한테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이 있겠는가. 그냥 순수하게 질문할 의도로 말하려고 하는 것인데, 미리 겁을 먹으니까 좀 머쓱해진다. "다름이 아니고.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궁금해서." "죄, 죄송해요! 제가 선배한테 무례한 말을 한 것이군요오..." "아니, 그건 아니고. 사실 이런 음담패설은 오히려 좋다는...게 아니라. 방금 내가 했던 말은 못 들은걸로 하고. 그냥 왜 이런 질문을 꺼내는지 궁금해서." 중간에 나도 모르게 본심이 나와버렸다. 아찔한 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신사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언행을 신경쓸 필요가 있으니까 주의하도록 하자. 질문을 받게 된 체리가 우물쭈물한 태도를 보여주면서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한다. "서, 성적인 호기심... 이에요." "성적인 호기심이라." 나쁘진 않다. 체리 뿐만이 아니라 나 역시도 한창 그런 쪽에 관심을 많이 가질 나이. 당연히 이성에 대한 성적인 욕규와 그에 대한 갈망, 기타 궁금증 등 여러가지 열망이 봄비가 그친 뒤에 지면위로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 채 무럭무럭 성장해가는 새싹과도 같을 것이다. 이런 혈기왕성한 대학생들의 지식을 조금 더 전문적으로 알려주고자 구성애 선생님 같은 분이 계시지 않은가. 불순한 의도로 성적인 욕망을 표출하지 말고 옳바른 방향으로 풀어가도록 하자. 그렇다고 내가 옳바른 성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엘리와 지금 눈 앞에 있는 체리를 제외하고 다수의 여자와 관계를 가졌는데, 절대로 퓨어(Pure)하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하겠다. 나도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부족하게나마 내가 성교육을 도와주도록 할게." "감사합니다..." 뭔가 상황이 조금 묘하게 돌아가는 것 같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사소한 것에 신경쓰면 지는 거니까 말이다. 일단 가장 먼저 체리가 속으로 궁금한 것이 무엇인지 털어놔보도록 시켜보자. "그럼 이 오빠한테 물어볼것이 있어?" "오빠... 인가요?" "아리아 녀석은 오빠라는 단어로 절대 불러주지 않으니까. 세리아는 뭐... 말을 못하고. 엘리는... 예외로 치자." "선배는 오빠라고 불리시는 걸 좋아하시는 건가요?" "아무래도 위로 누나 하나만 있다보니 조금은 기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아는 친구 녀석중에 여동생이 2명 있는 친구가 있었다. 한명은 고등학교 3학년, 나머지는 1학년. 그래서 매번 그 친구 집에 놀러갈때마다 여동생 두명이 친구녀석 보고서 '오빠, 오빠'하는 모습이 그리도 부럽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나는 고작 누나 하나만 있을 뿐인데. 그리고 그 하나 있는 누나라는 사람이 엄창나게 장난끼가 심하다는 문제점도 가지고 있다. 뒷감당은 언제나 남동생이기도 한 내가 전부 담당하는 꼴이니까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쓰레기 버리는 사람은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다. 입 아프게 재차 강조해봤자 나만 비참해질 것이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굳이 누가 치우는 쪽이고 누가 버리는 쪽인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을 하지 않도록 하겠다. 약간 부끄러워 하면서 한 손을 가슴 위로 곱게 모은 체리가 무지하게 빨개진 얼굴로 수줍게 말한다. "유, 유에 오빠..." 오 마이 갓. 한글로 풀이하자면 신이시여. 오빠라는 단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아닐까 하고 찬양을 하고 싶은 기분이 히말라야 산 꼭대기 정상까지의 높이 수준까지 상승하고 만다. 이 얼마나 듣기 좋은 울림인가. 오빠라는 단어 말이다. 자음과 모음의 아름다운 조합. 그리고 '빠'이라는 억양이 강하기도 하고 약긴 애교 넘치는 글자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취향이 연하쪽으로 기울뻔 했던 아슬아슬한 순간을 모면하고 만다. 위험했다. 오빠 파워. 무섭도다. 여동생의 저력. 이래서 사람들이 오빠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구나 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말았다. 아무튼 오빠라는 단어에 대한 찬양론은 잠깐 접어두고.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이어가도록 하자. "그래. 궁금한게 무엇이지? 유체리 학생." "저, 저기. 그러니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체리가 두 눈을 꼬옥 감고선 말한다. "세, 섹... 스 할 때 기분 좋으신가요???" "......" 음. 예상보다 조금 강도가 쎈 질문이 튀어나왔군. 사실 나는 그저 남자도 여자와 같이 성적인 흥분을 느낀다든지, 아니면 남자의 성기가 언제 커진다는지 하는 그런 단순한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벌써부터 체리의 질문은 고속도로망을 바로 타고 가서 속도위반까지 저지르는 엄청나게 진도가 빠른 질문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그래도 질문해보라고 한 것은 내 쪽이니까 성실 정확하게 대답을 해줘야겠지. 나름의 책임간이라는 녀석의 무게도 있으니까. "기분 좋으니까 서로 관계를 가지는 것이겠지? 솔직히 말해서 기분이 좋지 않다면 남자고 여자고 섹스를 하는 이유는 없잖아. 단순히 종족번식만을 위해서 필수불가결 적으로 하게 된다면 그건 결혼한 뒤에 첫날밤, 혹은 아이를 가져야 할 경우에만 하면 되는거고, 사실 결혼도 하지 않은 커플들이 오히려 더 시도때도 없이 하는 사례가 많이 있잖아. 뉴스같은 것에 보면 말이야." "그럴지도..." "나에게 친척형이 한명 있는데, 그 형은 여자친구를 데리고 거의 1주일에 한번씩은 꼭 모텔로 가서 관계를 가진다고 하더라. 자세한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원래 성욕이라는 것은 인간의 3대 욕망이라고 불릴 정도로 원초적인 감정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자와 섹스하는 것이 기분이 나쁠리가 없지 않은가. 하루에 적어도 한번 이상으로 이 무인도에 있는 여자들과 관계를 가지고 싶다는 나의 생각은 아직도 변하지 않을 정도니까 말이다. 얼핏 알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던 체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저번에 들은 적이 있어요... 남성이 여성보다 야한 생각을 하는 것을 수치로 표시한다면 대략 30배 정도가 차이가 난다는 말을요." "사람의 감정이나 욕망을 정확하게 숫자로 표현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고 보지만, 부정할수도 없네. 그 연구결과 말이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정확하다고 본다. 물론 통상적으로 30배를 말하는 것이지, 그 이상이거나 이하인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참고로 나는 아마도 그 이상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렇겠지? 아무래도. 그러나 체리는 약간 더 알고 싶다는 표정으로 한번 더 물어오기 시작한다. "구체적으로는... 안되나요?" "구체적으로?" "네, 네..." 상세하게 설명해달라는 뜻인가. 이건 조금 난감하다. 내가 그렇게까지 뛰어난 언어 표현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언어 등급이 딸린다거나 하는 그런 문제는 아니지만, 섹스의 쾌락을 도대체 어떤 식으로 자세히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야설을 써본 경험도 없고 말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말을 해볼까. "그... 성기 있잖아." "네..." "여자 몸 속, 그러니까 질 안쪽으로 넣으면 뭔가 꽉 조여주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물컹물컹한 것이 성기를 바짝 조여대며 기분좋은 마찰을 일으키는... 그런거... 으음..." 아 젠장. 한글은 다수의 국가 언어들 조차도 표현이 가능한 만능 언어로 정평이 나 있는 위대한 존재인데, 그 언어 수단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겠다. 역시나 나의 언어 실력이 부족하다는 뜻인가. 아니, 그럴순 없다. 최대한 체리에게 실감나는 강의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표현을 써서라도 알려주고 싶다! 보여주고 싶다! ... 가만. 보여준다고? "체리야." "네...?" "지금부터 내 말 오해하지 말고 잘 들어. 알았지?" "무슨 말씀이시길래..." 그래. 지르도록 하자. 원래 남자라면 한번 정도는 질러주는 센스가 필요한 것이다, 힘내라 유에! "직접 몸으로... 할까?" 아. 말하고 말았다. 몸으로 할까 라는 말이 이렇게까지 외설적으로 들린 적은 없었다. 몸으로? 도대체 어떤것을? 무엇을? 보나마나 뻔한거 아닌가. 방금 전까지 여자와 남자의 섹스 관계에 대해서 토론(이라고 말해도 되는 건가)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그 '섹스'를 가리키는게 아닌가. 결국 내가 체리에게 말한 것은 '나와 섹스해볼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조금 무안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내가 명백한 변태가 되지 않는가. 나의 신사 이미지가. 훈남 이미지가. 한편, 내 제안을 듣게 된 귀여운 후배양은 이미 귀까지 빨개진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상태다. 시각적으로 머리 위에 김이 올라올 정도로 부끄러워하는 상황. 그렇다고 실제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것이 보인다는 뜻은 아니고, 그 정도로 지금의 현재 상황이 무안하게 느껴지고 있다는 점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대학 수학능력평가 성적표 발표일을 기다리는 수험생의 마음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긴장한 채 고민하는 후배, 유체리 양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나. '오빠는 변태에요!'라는 냉정한 말은 하지 말아달라고 속으로 기도하면서 그녀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린다. 대략 1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살짝 한숨을 내쉰 체리가 차마 내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아주 희미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 아주 약한 터치 정도라면..." 약한 터치는 어느정도의 수준을 가리키는 것일까. 약간 말이 두루뭉술한 점도 있고 해서 속으로 고민을 해본다. 터치라는 것, 그러니까 스킨십이라는 것은 '어느 부위'를 만지느냐에 따라서 그 스킨십의 기준과 난이도가 결정된다. 우선 손을 잡는 정도의 가벼운 스킨십 난이도는 하. 손 정도는 잡을 수 있지 않은가. 연인 사이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배나 허벅지까지는 중. 허벅지는 약간 마니악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여성의 비밀스러운 사타구니 근처라는 점을 고려해서 중이라는 난이도를 선사해주고 싶다. 그리고 꿀벅지라는 키워드가 한동안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적이 있지 않은가. 자주 티비 프로그렘에서 볼 수 있는 걸그룹 중 에XX스X의 멤버이기도 한 유X라는 가수가 한동안 꿀벅지로 아이돌 걸그룹계를 평정한 적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보니 유아 선배하고 세린도 은근히 꿀벅지라고 평하고 싶다. 아무래도 운동을 하던 여자들이라 그런지 허벅지쪽이 약간 육덕진 것이 촉감도 좋고 살결도... 라니. 변태냐. 나란 녀석 말이다. 마지막으로 상이라고 인정하고 싶은 부위는 바로 엉덩이와 가슴. 여기서부터는 사귀는 사이 아니고서는 만져서는 안될 곳이다. 그야 당연한거 아닌가. 여성의 상징이기도 한 가슴이다. '여자는 가슴이 전부라고!'라는 유명한 명언도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리고 왜 전철에서 여자의 엉덩이를 만지는 변태가 치한이라고 불리는가? 그거야 '엉덩이'를 만졌기 때문에 치한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어깨나 손 같은 것을 만져봐라. 성추행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는가... 아마도. "터치 정도라면... 어느 정도까지?" "저, 저기. 그러니까..." 명확하게 답변을 못 내리는 체리. 생각해보니까 내가 만지는 쪽인가, 아니면 만져지는(?) 쪽인가? 그런데 남자인 내가 만져지는 쪽이라고 표현하니까 조금 웃기기도 하다. 상대가 지아 선생님 같이 섹시미 철철 넘치는 연상의 유부녀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공교롭게도 지금의 상대는 쑥맥이기도 한 유체리 양 되시겠다. 안절부절 못하던 체리가 두 검지 손가락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말한다. "우, 우선 키스부터..." "키스라고?!" "그, 그러니까 키, 키스..." 엄청나게 당황한 포즈로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하는 체리. 툭 까놓고 말해서 키스라는 단어가 나올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망이... 가 아니라 의외로 순수한 요구조건이 나오게 되어서 역시나 실망이... 아 진짜. 왜 이러지. 아무튼 실망이... 포기하자. 그렇다. 실망했다. 나는 또 체리가 내 성기를 만져주거나 아니면 내가 체리의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져주거나, 혹은 그 이상의 진도를 나가게 된다면 비밀의 숲 속으로 손을 넣어서 요리조리 애무를 해줄 수 있는 상황까지 오게 되지 않을까 추측해봤는데, 처음에는 키스라니. 음... 순수하군. 유체리 양. "키스라. 키스란 말이지..." "시, 싫으신가요? 오빠...?" 그런 눈으로 바라보며 '오빠'라고 부탁하면 반칙이라고. 어쩔 수 없지. 이번에는 선배의 넓은 아량으로 넘어가주도록 할까. "엇흠. 좋아. 이 오빠가 넓은 아량으로 우리 귀여운 체리의 부탁을 들어주도록 할까." "가,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이며 나에게 인사한다. 이런 식으로 거의 반 강제적인 감사함을 받으니까 조금 양심에 찔리는 기분도... 아니. 나는 명백하게 체리에게 수준 높은 성교육을 선사해주는 것이다. 불순한 의도는 절대로 없... 을지도 모르지만. 이 순간만큼은 체리의 순수한 마음을 져버리지 말도록 하자. 그러니까 좀 가라앉으라고. 아랫도리 녀석아. 시도때도 없이 발기하면 어쩌겠다는 것이냐. "잠깐만. 체리야. 일단 이 오빠가 셋팅을 할게 좀 있어서." "셋팅이요?" "응. 잠깐이면 돼. 한 1분동안 뒤를 돌아보고 있어줄래?" "네... 그럴게요." 라고 말하면서 등을 돌리는 체리. 뒷모습도 정말 연약하고 가녀린 여성의 뒷태를 자랑하고 있다. 체리도 은근히 몸매가 좋은거 같기도 하고... 나쁘지는 않다. 그것보다도 다른걸 해야지. 체리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조심스럽게 살짝 바지의 지퍼를 연 다음에 엄청나게 성이 나버린 나의 분신으르 배꼽 위쪽까지 세운다. 그리고 나서 벨트 부근에 걸쳐놓은 뒤에 바지 위로 텐트를 치지 못하도록 임시조치(?)를 취한다. 이렇게 해놓으면 일어서도 발기했다는 티가 안나지. 생활의 지혜라고 볼 수 있다. ============================ 작품 후기 ============================ 여기서부터는 후반부에 돌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컴퓨터 사정을 직접 보여드릴 수 없어서 뭐라 말로 해명하는 데에 한계가 있지만, 비축분이 나눠져 있는 상황으로 보자면, 여기서부터가 후반부라고 표기하는 편이 좋을거 같습니다. 한마디로 이제 겨우 반 왔다는 소리입니다;; 158화 살며시 눈을 감는 체리. 보통 키스를 기다리는 여성들의 모습은 남자의 거친 입술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나름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나름 귀여운 모습을 연출한다. 직접 내가 실제로 여자를 사귀며서 느껴본 소감을 표출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여자와 사귀면서 한발 앞선 실전경험을 나에게 들려주었던 친척형에게서 전해들은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의 키스. 여자라는 존재는 그런 요소에서 로맨스를 느끼면서 자신의 입술을 허락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 체리의 모습은 핑크빛 물결이 가득한 로맨스와 거리가 조금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언제 서로의 몸을 구석구석 만지면서 음탕한 모습을 자아낼지 모르는 이 상황. 만약에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산장이 아니라 일반 모텔의 한 방이었다면, 지금쯤 벌써 육체 관계를 가졌지 않았을까 할 정도의 아슬아슬한 수위를 유지하고 있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겠다. "......"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언제쯤 내가 본인의 입술 위에 입을 맞추는지 잔뜩 긴장을 타면서 대기중인 모습이 역력하다. 체리의 이런 반응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적어도 뭐랄까. 조금 무드있는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초보중의 초보인 체리에게 감정표현을 컨트롤 하면서까지의 대단한 스킬을 바라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자리에서 일어서 천천히 체리의 핑크색 연한 입술위에 내 입술을 포개어본다. 드디어 성사되는 체리와의 첫키스. 나름 여자경험이 많은 나이기 때문에 사실 키스 하나가지고 별의별 생각을 다 할 정도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조금 에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전혀 두근거림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체리가 긴장하고 있는 만큼 내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된 대담한 행동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한동안 뻣뻣하게 그런 자세를 유지하는 나와 체리. 키스라기 보다는 그냥 뽀뽀와 비슷하다고 보는 형식적인 행위를 끝낸 나는 입술을 떼면서 그녀를 바라본다. 사실 체리의 입을 벌리게 한 뒤에 혀를 밀어넣어 좀 더 이것저것 딥 키스를 시도해보고 싶은 것이 나의 속마음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체리에게 있어서 이 모든 행위가 전부 '처음'에 해당되기 때문에 거칠게 다뤄서는 안된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이면 체리의 의사를 존중하며 지금의 행동을 이끌어가자고 마음먹은 것이다. "어때? 체리야." 내 질문을 받은 체리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면서 말한다. "끄, 끝인가요...?" "뭐, 다른 의미로는 끝이라고 볼 수 있지." "그렇군요오..." 두 손을 오므린 채 내가 하는 말의 진의를 파악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하는 체리. 아마 체리 본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진짜 키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실 정도 말이다. 체리가 성적 지식이 전혀 없는 유치원생 수준의 단계도 아니고, 나름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 체리였기 때문에 최소한의 성적 지식은 가지고 있을 터. 방금 본인이 한 것이 키스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민망하고 뽀뽀라고 부르면 딱 좋을만한 행동들이라는 사실 정도는 체리 본인도 스스로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나름의 배려라고 눈치를 챈 덕분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럼 다음은 어딜 만져볼까." "저기, 그러니까..." 그렇다. 사실 노리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날릴수는 없지 않겠는가. 여성의 몸을 마음대로, 합법적으로, 본인의 허락을 맡고 정정당당하게, 페어 플레이 정신으로 만질수가 있는 것이다. 절대로 몰래 만지거나, 체리에게 최면을 걸어서 자신과 상반된 의도로 '내 몸을 만지도록 하세요.'라는 말을 하게 만든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본인이 스스로 '터치'라는 스킨십을 주장한 것이다. 직설적인 내 질문을 받은 체리가 조금 당황한 시선을 던지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우, 우선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살며히 얹는다. 차마 본인의 입으로 가슴을 만지라는 말을 하기에는 조금 부끄러웠던 모양인지 손으로 제스쳐를 날리는 유체리. 역시 바디랭귀지라는 만국의 공통 언어는 참으로 위대하다. 심지어 입으로 표현하기에 난감하고 부끄러운 말을 이렇게 직접 상대방에게 표출할 수 있는 점이야 말로 바디랭귀지의 크나큰 장점이 아닐까 한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바디랭귀지 만세~!라고 외치고 싶은 이 기분, 참을수가 없다. 하지만 도중에 실제로 이런 소리를 내질렀다가 체리에게 하얀방이 필요한 환자로 인식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서 그건 자제하도록 하자. 모처럼의 기회를 마치 축구경기 중 골대 앞에서 독수리 슛을 날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벌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 만질게." 고개를 아주 희미하게 끄덕이며 무언의 허락을 보여주는 체리. 살짝 감은 두 눈과 달아오른 얼굴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귀여운 색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지아 선생님이 어른의 섹시함이라면, 체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섹시함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여자라는 생물은 정말 다양한 매력을 내뿜는 신비한 존재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꿀꺽 침을 삼키면서 오른손을 뻗어 체리의 아담한 가슴을 움켜쥔다. 말캉. 여성의 가슴이 선사해주는 부드러움에 대한 찬사는 저번에 내가 그동안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가지면서 누누히 강조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시금 가슴 찬양론을 꺼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데, 이 감촉은 역시 참을수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부드러움, 그리고 왠지모를 두근거리는 감촉. 이것이 바로 가슴의 위력이다. 괜히 '여자는 가슴이 전부라고!'라는 명언이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너무 거칠게 다루면 금방이라도 깨져버릴것 같은 아름다운 조각상과도 같은 체리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조금 힘주어 만져볼게. 그래도 괜찮지?" "네, 네...!" 신음 소리를 필사적으로 참는 모습이 다 보일 정도다. 아직 제대로 만지지도 않았는데, 체리의 입술 사이로 휘파람 비스무리한 소리가 들려온다. 돌고래가 초음파를 내보내는 것은 아니다. 체리가 자신의 입에서 금방이라도 쏟아질거 같은 흥분감의 신음소리를 내게 들려주기 싫어서 있는 힘껏 참고 있는 모습이다. 아무래도 가슴을 만지는데 자신이 신음소리를 내면 창피하다는 생각이 아직까지 강하게 드는 것이기 때문에 저런 행동을 보이는게 아닐까 추측을 해본다. 한 손에 들어오는 균형잡힌 가슴을 조물딱 조물딱 만져본다. 고무 찰흙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스펀지? 정확한 사물을 빗대어 표현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없지않아 있지만, 아무튼 그것과 같은 것을 만지는 정도의 부드러움. 옷 위로 만지고 있던 내 손가락 끝에 어느새 딱딱하게 서버린 유두의 감촉이 느껴진다. 불침번 근무가 끝나고 바로 잠들 예정이었기 때문에 브래지어를 벗고 있었던 체리의 옷차림에서 그대로 가슴의 형태를 손 안에서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솟아오른 유두를 살짝 꼬집자, 체리의 몸이 크게 비틀리면서 약간의 신음소리를 토해내기 시작한다. "흐읏....!!" 이대로 옷 안으로 손을 집어 넣어서 그대로 유방을 만져볼까. ... 아니지. 그건 너무 진도가 빠르다. 사실 옷 위와 안쪽에서 만지는 것이 얼마나 차이가 난다고 이런 말을 하는건지 이해가 안갈수도 있겠지만, 옷이라는 천쪼가리가 있고 없고의 차이점은 확연하게 난다. 적어도 '직접적으로' 스킨십을 하고 있지 않다는 대의명분이 있다는 차이점이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옷 위와 옷 안에서의 스킨십이 가지는 의미는 거리나 상황 상으로 별로 차이가 없다고 해도, 의미상으로는 하늘과 땅 수준으로 차이가 확연하게 나는 것이다. 희미하게 몸을 떨고 있는 체리의 반응을 확인한 나는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며 작게 속삭인다. "체리야. 아래쪽도... 만져도 되지?" "아, 아래쪽은... 하아앗..." 망설이는 말투로 약간 말끝을 흐리던 체리의 입에서 거절의 의사표현 대신에 묘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왜냐하면 그녀의 허락을 받기 전에 이미 내 손이 체리의 탐스러운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슴을 거치고 그녀의 날씬한 배를 한번 훑으며 내려간 뒤에 곧바로 부드러운 살결을 자랑하는 허벅지를 쓰다듬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배에서 엉덩이, 그리고 허벅지로 이어지는 이 완벽한 S라인의 라인을 좋아하는 내게 있어서는 이런 정도의 스킨십은 오히려 두 눈을 치켜뜨고 반기고 싶을 정도다. 여체라는 것은 그토록 신비하고, 그리고 남자에게 탐욕과 지배욕이라는 감정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요소인 것이다. 체리의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넣는다. 순간적으로 '흡!'하고 짧은 비명을 지른 체리가 자신의 다리를 오므리지만, 이미 그녀의 비밀스러운 사타구니 내부로 침입한 내 오른손을 뿌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 오빠... 거긴..." "괜찮아. 체리야. 힘을 빼고... 그래. 그렇게 천천히..."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넣어 체리의 팬티 위를 쓰다듬기 시작한다. 볼록 튀어나온 조갯살들이 아주 음탕한 감촉을 나에게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희미하게 젖어 들어가기 시작하는 체리의 안쪽. 무인도 내에서 팬티를 구하기 힘든지라 하나밖에 없는 속옷이 이런 식으로 젖어 들어가는 것은 체리에게 상당히 난감한 일이된다. 표정 그대로 그런 문제점을 반영하듯이 난처한 얼굴을 하는 체리를 바라보는 나는 이미 이 상황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귀여운 그녀에게 제안한다. "이대로 팬티가 젖으면 위험하잖아. 그렇지?" "......" "어때. 벗는게 좋지 않아?" "하지만..." "괜찮아. 아직 다음 교대까지는 시간이 많이 있고. 그리고 노아 선생님하고 누나도 잠이 많은 타입이니까 쉽게 깨진 않을테고." 반절은 거짓말이다. 누나가 잠이 많다는 사실 정도는 진실이지만, 노아 선생님은 아니다. 그렇다고 잠이 없는것도 아니기 때문에 명백하게 순도 100% 거짓말이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조삼모사(朝三募四) 격으로 체리에게 제안해본 것이다. 내 말을 들은 체리 본인도 역시 아무래도 이대로 팬티가 자신의 애액으로 더럽혀지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가는 다음날에 입을 속옷의 여유분도 없는 상황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여자들에게 의심을 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체리는 스스로 팬티를 벗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잠깐 체리에게서 떨어진 채 그녀가 스스로 팬티를 벗는 모습을 감상하기 위해서 나는 다시 의자에 앉는다. 치마 안쪽으로 양 손을 넣은 체리가 나를 바라보며 창피하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유에 오빠... 그런 식으로 바라보면 부끄러워요오..." "그치만 보고 싶은걸." "제가 속옷을 벗는 모습을요...?" "그럼. 남자는 원래 여자의 그런 모습에 흥분하는 것이거든." "그런가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되묻는 체리. 오늘따라 정말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말을 많이 하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건 사실이지 않는가. 솔직히 말해서 남자인 자신의 눈 앞에서 여자가 팬티를 벗는 행동을 한다면 흥분되지 않을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내가 직접 벗기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스스로 벗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다. 유혹의 난이도를 설정해본다면 최상급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것도 일종의 마니아틱한 패티쉬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부정할 수가 없다. 아무튼 이건 좋은 것이다.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양 손을 골반에 위치시킨 체리가 그대로 자신이 입고 있던 팬티를 아래로 끌어내린다. 도중에 흰색의 가느다란 애액의 줄기가 팬티에 살짝 묻어나오는 진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확밀아 초창기 시즌은 역시 요정 순삭때문에 짜증나는군요. 숟가락 얹을 시간이라도 좀 주면 좋으련만. 159화 팬티를 벗은 체리가 본인이 방금 전까지 입고 있던 따끈따끈한 여성의 속옷을 보이지 않게 테이블 밑에 내려놓는다. 방금 전까지 여대생이 입고 있던 속옷이라니. 이것도 정말 굉장한 흥분 아이템이 아닐까. 실제로 저런 속옷을 인터넷에 파는 사람이 있다고 하던데. 뭐였더라. 여대생이었는데, 자신이 생리중에 입고 있던 더럽혀진 속옷을 인터넷에 돈을 받고 파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여성의 팬티에 대한 갈망(?)은 숨은 팬들의 구매욕을 마구마구 자극하는 훌륭한 아이템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돈을 내고 사고 싶다는 생각까진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마음만 먹으면 다른 여자들과 육체관계를 가질 수 있으니까. 하하하. 자기자랑은 이쯤 관두고. 옷은 다 입고 있는데 속옷은 노팬티 착용이 되어버린 특이한 상황의 체리에게 다가가도록 하자. 여성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남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덕목중에 하나에 속하니까 말이다. "오빠 말대로... 벗었어요." 수줍어하며 말하는 체리. 정말 귀엽다. 미치도록 귀엽다. 쑥스러워하는 이 모습이란. 정말로 '진리'라고 표현하고 싶다. 세리아가 착한 모습에 은근히 애교있는 모습으로 남정내의 마음을 건들인다고 한다면, 체리는 정말 후배의, 연하의, 그리고 여동생으로써의...는 아니구나. 아무튼 실제로 피가 이어진 남매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마치 친남매처럼 귀여운 여동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체리의 이런 가냘픈 모습은 참을수가 없는 것이다. 천천히 다가가서 체리를 끌어안는다. 일어선 채 그녀의 작은 어깨를 한 팔로 감싸자, 체리가 빨개진 얼굴로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댄다. 아마도 남자에게 이런 식으로 안긴것은 처음일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사귀는 애인 사이도 아닌 그저 알고 지내는 학교 선배. 무인도에서 우연히 만났을뿐인 사람이라는 관계가 전부다. 그런 남자 선배에게 지금 자신의 소중한 것을 주려는 것이다. 얼핏 들어보면 약간 외설적인 말이 될수도 있지만, 남자와 여자가 서로 좋아하며 육체관계를 가지는 것인데 끝까지 그 사이를 부정하는 것도 매너 위반이지 않는가.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그리고 장소도 불문이다. 그런데 내가 막상 순수한 사랑이니 뭐니 하는 말을 지껄이니까 조금은 신빙성이 떨어지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음... 역시나 다수의 여자들과 관계를 가지는 생활을 일삼고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아무튼 체리를 감싸는 손을 다시 살며시 내리면서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기 시작한다. 이미 발기된 성기는 체리의 귀여운 배꼽 근처를 쿡쿡 찌르고 있었고, 체리 역시도 그 감촉을 확연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빨개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체리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처음이니까... 상냥하게 해주세요." "이 오빠만 믿어." 어찌보면 대 국민 거짓말에 속하는 말이기도 한 '오빠 믿지?'를 발설하는 나. 그렇다고 내가 진짜로 체리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또 아니다. 실제로 체리를 아프게 하거나 아니면 그녀가 싫어하는 성행위를 억지로 강요하면서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기 때문에 나는 당당하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체리의 작고 귀여운 엉덩이를 조금씩 쓰다듬어보자. 아마 엘리를 제외하고는 그 다음 순번으로 가장 작은 체구를 자랑하는 여자가 바로 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지. 실제로도 그렇다. 사실 세리아, 그리고 체리가 비등비등하다고 보여지지만, 개인만의 특유한 분위기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체리 역시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특유의 소극적인 그 이미지 덕분에 은발 미소녀들과 비슷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각 개인당 차지하는 비중이 작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어깨를 움츠리고 다니니까 말이다. 그런 체리를 꼭 껴안은 채 치마 안쪽으로 슬쩍 손을 넣어본다. "앗...!" 체리의 귀여운 탄성이 단발로 들려온다. 지금 그녀는 노팬티 상황. 한마디로 말해서 맨살의 여자 엉덩이에 낯선 남자의 거친 손길이 닿는 순간, 그 감촉으로 인해 체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이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무심고 되물어보는 나. 항상 여자들과 관계를 가질때는 너무 강압적으로 하지 않고 언제나 본인의 소견이나 아니면 느낌 정도를 물어보면서 하는게 좋다고 판단하는 나였기 때문에 이런게 거의 습관화 되다시피 되어있는게 현실이다. 뭐라고? 그렇다면 세리아나 세린의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 그거야 우선 세린의 경우에는 진성 마조니까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좋아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녀 본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세리아는... 음... ... 세리아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도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그때 당시에는 세리아와 오로지 관계를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어서 그런지 세리아는 조금 강압적으로 나간 감이 없지않아 있다. 이건 세린과 관계를 가질 때와는 상황과 조건이 달랐기 때문에 스스로 인정하는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뒤늦게 말해서 미안. 세리아.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좋았단다. 아무튼 체리의 표정을 매번 관찰하면서 그녀가 기분이 나빠지지는 않을까 조금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체리의 성감대가 어디일까 하는 물색 작업도 시작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테크닉. 아직 지아 선생님에 비해서는 한참 멀었지만, 나도 모르게 어느새 성감대를 찾아내고자 하는 생각을 가질 정도로 섹스에 대해서 여유가 생긴 것이다. 조금은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진 않는다. 나날이 변태성만 늘어가고 있고만. 조심해야지. "으음..." 희미하게 신음소리를 내는 체리. 그녀의 목에 깊은 키스자국을 남긴다. 뱀파이어가 괜히 처녀, 게다가 미인 여성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예쁘면 예쁠수록 그 맛과 향(?)이 좋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여성의 목덜미라는 것은 희고 곱고, 금방 상처입을 것 같은 기세로 연약함의 절정을 보여주는 외견중의 한 부위니까 이런 망상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흡혈귀는 아니지만, 그래도 최대한 그런 느낌을 살려서 체리의 목덜미를 애무한다. 그러자 그녀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간지럽히기 시작한다. "오빠, 나..." "벌써 흥분한거야? 체리. 음란한 아이네." "아, 아니에요..." "거짓말. 아랫쪽은 벌써 이렇게 젖었는데?" 체리의 치마속에서 엉덩이 골과 조갯살을 만지작 거리던 내 오른손을 보여주며 말한다. 이미 손에는 투명한 애액이 번들거리며 잔뜩 묻어있는 상황. 어느새 이렇게까지 많은 애액을 토해낸 것인지 본인도 이제야 알았다며 놀란 체리. 그러나 놀람이라는 감정 뒤에 곧바로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밀려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면서 내가 밉다는 듯이 내 가슴 위를 작은 두 주먹으로 여러차례 토탁토탁 치기 시작한다.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곤란하단 말이에요." "미안, 미안. 나도 모르게 분위기를 타서." 하지만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사과는 아니다. 물론 체리 역시도 나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수치심으로 인해 형식적으로 흘러나오는 책망어린 말일 뿐.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알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남자의 감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질퍽질퍽하는 음란한 소리를 자아내는 체리의 사타구니 부근. 애액의 끈적함은 이미 손 안에 잔뜩 느껴지고 있었다. "체리야." "... 오빠..." 나를 살짝 올려다보며 말하는 체리. 우리 둘은 그렇게 누가 먼저 말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키스를 이어간다. 이번에는 단순한 차원의 뽀뽀 수준이 아니라 서로의 입 안에 혀를 내밀고 실행되는 딥 키스. 일방적으로 내가 체리의 입 안에 혀를 밀어넣고 리드하는 격일 뿐이고, 체리는 그저 내 혀의 움직임에 그대로 맞장구를 쳐주는 수동적인 태도를 취할 뿐이다. 지아 선생님과의 키스에 비교하자면 상당히 많이 부족한 느낌이 들지만, 이것도 처녀의 풋풋함과 순수함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양호하다고 보여진다. 나쁘진 않다는 소리다. 쩝쩝 하며 야릇한 키스의 소리가 바깥에서 울려 퍼치는 빗줄기의 소리 속을 뚫고 산장 안으로 가득 울려퍼진다. 그나마 다행히도 밖에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바람이 내리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숙면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런 행위를 벌일 수 있는 것이지, 만약에 하늘이 상당히 맑았다면 이런 행동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잠에 민감한 세린이나 아니면 아리아, 세리아가 먼저 우리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깨어났을 가능성도 크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체리의 신음소리가 크다는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당히 얌전한 편. 뭐, 아무리 신음소리가 작다고 해도 세리아를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정상적으로 말을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체리는 엄청 조용한 편에 속한다고 당당하게 확신할 수 있다. 이래봬도 6명과 관계를 가진 사나이니까 말이다. 한참 나에게 목덜미, 그리고 아래쪽 사타구니를 공략당하고 있던 체리가 키스를 마치고 나서 약간 땀을 흘리면서 나에게 말한다. "신음소리가 크면...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겠죠...?" "아무래도 그렇겠지?" "저... 참을테니까... 좀 더 기분좋게 해주세요..." 이제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좀 더 기분좋게 해달라는 요구까지 할 정도다.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했구나 하는 말을 하고 싶지만, 다른 의미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관두도록 한다. 슬슬 때인가. 바지의 지퍼를 내리면서 잔뜩 성이 난 내 성기를 꺼내든다. 아랫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체리였지만,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어떤 행동을 한 것인지 그녀로서는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체리의 왼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을 내 아랫쪽으로 내린다. 붉고 검은 불기둥을 체리의 손에 쥐어주자, 체리가 짧게 탄성을 내지르며 말한다. "이, 이건..." "이게 바로 남자의 생식기라는거야. 체리야." "생각했던 것 보다 너무... 커요." 다들 그런 식으로 말했다. 심지어 남자 경험이 풍부한 지아 선생님 마저도 그런 말을 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약간 뒷담화지만, 지아 선생님이 나에게 이런 말까지 했을 정도다. 자신의 남편보다 훨씬 큰 것 같다고 말이다. 크기 면에서는 나도 나름 자신이 있기 때문에 당당하게 이런 식으로 여자들의 손에 내 성기를 쥐어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나름 자존심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여자가 가슴 크기로 자존심을 따진다면, 남자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크기'로 승부 보는게 아닌가.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는 체리가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침을 꿀꺽 삼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게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인가. 아니, 들어갈수나 있는 것일까 하는 걱정어린 시선으로 말이다. 그런 체리에게 작지만 위안을 담은 말을 건내본다. "너무 걱정하지마. 체리야. 아프지 않게 해줄테니까." "정말이요?" "그래. 그러니까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사실 이것도 확신하지 못할 어정쩡한 거짓말이다. 처음인데 아프지 않다는 것이 더 이상할테지. 그러나 혹시 모르지 않는가. 체리가 오히려 섹스라는 성행위에 특화된(?) 체질을 가지고 있을지도. 첫경인데도 불구하고 남자의 생식기를 받아들인 채 오히려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확률도 크니까 이런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해본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아플지 몰라도, 나중에 가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그때가서 다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의자에 먼저 앉은 나. 그리고 그 위에 체리가 다리를 벌리고서 내 성기 바로 밑에 깔고 앉는 자세를 취한다. 내가 완전히 누워 있는 모습이 아니라 상반신은 그대로 일으킨 상태에서 치뤄지는 약간 애매모호한 여성 상위자세. 그러나 여성 상위자세라고 해도 전적으로 체리는 내게 몸을 기댄 체 부르르 떨고 있는 연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겁먹지 말고.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서 힘을 빼봐." "네, 네... 으읏!!" 서서히 몸을 하강시키는 체리. 그와 더불어서 성기의 끝에 체리의 질 입구가 닿기 시작한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lol 토크 1회입니다. 간만에 피방 좀 가서 lol 한판 했는데, 카르마 리메이크 판 괜찮더군요. 한번 연습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탱키한 AP챔프가 좋아서 모르가나 같은 것도 하고 그러는데, 카르마도 탱키 + AP 챔프더군요. 실드 덕분인지 모르겠지만요. ...참고로 오늘 lol 게임은 다 지고 왔습니다 ㅜ_ㅜ 160화 점점 체리의 몸 안쪽으로 진입하는 남근. 몇번을 경험해봐도 역시나 처녀의 조임은 굉장하다. 솔직하게 툭 까놓고 말하자면 만약에 내가 여자 경험이 별로 없었다는 전제 하에서는 금방이라도 넣자마자 질내사정을 해버릴 기세로 굉장한 조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임력이라고 하면 내가 겪었던 것 중에 최고였던 것이 바로 세린과의 애널 섹스다. 항문이라는 것이 그 정도로 굉장한 조임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처음 알게 된 것이였기 때문에 아직도 항문으로 성교를 나눴던 그 일이 기억속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내 입장에서는 좋았지만, 세린의 입장에서는 한동안 걷거나 앉지도 못할 정도의 통증을 호소한 탓에 자주는 못할 것 같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처음 섹스를 하는 체리에게는 아무래도 애널섹스를 강요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겠지. 세린 역시도 처녀 섹스를 하면서 항문에 첫 삽입을 동시에 진행했지만, 그래도 체리와 세린은 다르지 않는가. 세린이 이 말을 들었다면 나를 엄청나게 책망했을 테지만, 그래도 사실은 사실이다. 고통이라는 감정을 잘 버틸 수 있을만한 인물은 아무래도 체리보다는 세린이기 때문이다. 성기의 뿌리 끝까지 삽입을 하자, 체리가 내 쇄골 부근을 이빨로 물면서 억지로 신음소리를 참아낸다. 처녀막이 뚫리고 있다는 감촉을 현재진행형으로 느끼면서 첫 섹스에 대한 고통을 호소하는 체리. 두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로 흠뻑 젖은 상태였고 나를 무는 체리의 턱에 힘이 실리고 있지만, 그래도 첫 섹스 치고는 상당히 잘 참아내고 있었다. 처녀막의 피가 마치 마개를 연 물통을 거꾸로 세워둔 것처럼 쏟아지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많은 다량의 피를 쏟아내는 체리. 뜨거운 붉은색의 액체를 음미하며 다시 성기를 질 안쪽까지 삽입한다. "흐읍!"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부르르 떨기 시작하는 체리. 이미 거의 눈동자는 풀려 있었고, 오로지 나에게 매달리는 팔과 다리에만 힘이 실릴 뿐이다. "조금만 참아. 체리야. 기분좋게 해줄테니까..." 하지만 내 말은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그저 거친 숨을 헐떡이며 피스톤 운동에 맞추며 허리를 흔들어댄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체리의 의지로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한번 시작한 것은 도중에 멈출 수 없다. 체리의 양쪽 허리를 붙잡은 내 손은 그녀를 한번 들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한다. 체리 스스로 몸을 가누기가 힘들거라고 판단한 나는 강제적으로 체리를 움직이게 하기에 이르른다. 자신의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체리가 눈물을 뿌리면서 내게 몸을 맡겨온다. 어떻게 해서든지 신음소리 만큼은 내뱉기 싫다는 의지가 강하게 보인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과 내가 육체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들키는게 싫다는 것 보다는 창피하다는 점이 강하게 작용하는 듯하다. 처음이니까 아무래도 질내사정은 무리라고 판단한 나. 게다가 체리가 혹시 생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니까 밀려오는 절정의 타이밍을 잠시 참으면서 체리를 그대로 들어올린다. "흐으으으읏!!!" 체리의 신음소리들이 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희미하게 세어나온다. 그리고 얼마 후, 곧바로 성기 위에 위치한 체리의 사타구니에 마구 뿌려지는 흰색의 정액들. 끈적끈적한 남녀의 타액들이 서로 얽히면서 진풍경을 만들어낸다. "후..." 깊게 숨을 내쉬면서 사정의 여운을 만끽하는 나. 이런 나와는 반대로 체리는 아직까지도 풀린 눈을 한 채 여전히 스스로의 입을 막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희미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실신한 것은 아니고. 아무튼 이렇게 해서 겨우 첫 섹스를 마치게 된 나와 체리. 두 남녀간의 섹스에 대한 뒷풀이라도 하듯이 우리들의 거친 호흡이 화로를 대신해서 실내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바지를 차려 입은 후에, 화로 근처에 누워있던 체리 역시도 겨우 상반신을 일으키면서 작게 한숨을 몰아쉰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 네..." 힘없이 대답하는 체리. 아마도 제대로 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던 자신이 나에게 민폐를 끼치고 말았다는 듯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으로 보인다. 그렇게까지 미안해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그래도 이런 태도가 체리 답다고 말하면 체리다운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나뭇잎으로 그녀의 사타구니 부근에 묻은 대다수의 정액들을 닦아낸 상황. 최소한의 뒷처리는 했기 때문에 따로 할 일은 없었다. 그저 체리가 다시 원기를 회복하기만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상황인 것이다. 시계를 바라보니 이제 앞으로 교대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10분. 곧 있으면 노아 교수님과 유아 선배 조와 교대를 하고 취침 모드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뜻하지 않게 체리와 섹스까지 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자신의 배를 매만지던 체리가 약간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임신은... 안하겠죠?" "일단 바깥에 사정했으니까. 아마 괜찮을거야." 확신은 하지 못하겠다. 왜냐하면 내가 의학적인 전문지식이 있는것도 아니고, 게다가 여자도 아닌지라 생리 주기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너, 생리기간은 아니었지?" "네. 저번에 끝났어요..." 다행히도 체리의 생리기간은 얼마전에 끝났다고 이제 막 대답을 들은 참이다. 그렇다면 임신까지는 안하겠지. ...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지아 선생님에게 부탁해볼까. 이 참에 다른 여자들도 다 같이 지아 선생님에게 진찰을 받아보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괜히 무인도에서 한명이라도 임신을 하게 되면 상당히 골치아프니까 말이다. 다른건 둘째치고, 구조가 된 이후로도 사회적인 파장도 클테고. 교대 시간도 다가오고, 체리도 슬슬 정신을 차렸기(?) 때문에 이제 남은 일은 다음 후번 근무자인 노아 교수님과 누나를 깨우면 되는 일만 남았다. 일단 체리와 서로 육체관계를 가지고 난 이후에 풍겨오는 정액냄새라든지 기타 다른 여러가지 페로몬 향수를 바깥으로 내보내기 위해서 창문을 열고서 때 아닌 환기를 시킨 우리들. 혹시나 몰라서 고구마와 감자를 구워 향을 피워 없앤다. 이건 내일 초호기한테 먹이로 줘야겠다. 아까우니까 말이다. 아무튼 대충 뒷처리를 한 나는 제일 먼저 노아 교수님에게 다가가서 가녀린 어깨를 잡고 살짝 흔들기 시작한다. "교수님." "... 음..." "교수님. 일어나세요. 불침번 근무 해야죠." "으응..." 두 눈을 비비적 거리면서 겨우 상반신을 일으키는 노아 교수님. 흐트러진 상의 옷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가슴이 출렁이면서 아찔한 장면을 연출한다. 이래서 거유 만세라니까. 괜히 남자들이 가슴 큰 여자를 좋아하는게 아니다. "일어나셨나요?" 고개를 끄덕이는 교수님. 얼핏 정신이 든 모양이다. 그리고 뒤이어 누나를 깨우기 위해 자리를 이동한다. 새근새근 잠에 빠진 누나의 어깨를 흔들며 말하는 나. "이보세요. 누나. 근무 설 시간이야." "... 앞으로 500분만 더..." "잠깐만. '0'이 2개 더 붙은거 같은 기분이 드는데? 보통 5분만 더라고 말하잖아." "... 5분 가지고 무슨 잠을 더 잔다고 그러니. 적어도 500분은 있어야 마음껏 잠을 자는거지." "그건 이미 '조금만' 잠을 잔다는 상식적인 의미에서 벗어났다고 보는데." 500분이면 도대체 몇시간이냐. 1시간에 60분이니까 8.333...(이하생략)라는 결과 나온다. 결국 지금 8시간을 자겠다는 뜻과도 같다는 말 아닌가. 어디가 조금만이냐고. 8시간이면 아침에 일어나서 온라인 게임으로 던전 앤 파이터를 한 2시간 정도 해주고, 마비노가 영웅전(참고로 캐릭터는 물론 이비다.)을 2시간 정도 레이드를 뛰어준 다음에, 점심으로 편의점 삼각김밥과 샌드위치를 사먹고 난 이후에 티비를 좀 봐주고, 무한도전 재방송을 충분히 감상하다가 요새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한 짬뽕을 사서 저녁으로 먹은 뒤에 다시 취침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닌가. 너무 설명이 구체적이라고 되묻는다면 원래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고 설명해주고 싶다. 거의 반 강제적으로 누나의 상반신을 일으킨 채 잠 깨라는 듯이 분노의 어깨 안마를 실시한다. 그러자 누나가 고개를 움추리며 꺄악!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한다. "무슨 짓이야! 바보 남동생!" "이제 제대로 잠 좀 깼어?" "... 아파. 불침번 못할거 같아. 그냥 잘래." "이제는 또 그쪽 핑계냐..." 역시나 핑계대기 류 甲인 나의 누나다운 말이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해서 누나와 노아 교수님 기상 완료. 창문을 닫은 체리와 같이 화로 근처에서 자리를 잡고 눕는다. 이불은 침실방 침에서 쓰고 있고, 거실에 있는 사람들은 개인용 이불, 그러니까 누나가 저번에 남은 의류들을 통해서 만든 담요를 덥는다. 침실쪽은 화로에서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에 솜이불을 사용하는 것이고, 어차피 거실에서 자는 사람들은 담요라고 해도 화로 근처에 있기 때문에 굳이 솜이불까지는 필요가 없는 것이다. 부엌에서 물을 떠온 노아 교수님이 한모금 물을 마신 뒤에 누워있는 우리들에게 상냥한 미소를 보여주며 말한다. "수고했어. 잘 자렴." "네. 교수님도 수고하세요." 드디어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오늘 하루는 정말 여러모로 고생 더하기 고생 곱하기 고생 나누기 1을 겪은 고단한 하루가 되었다. 불침번을 마치고 꿀맛같은 단잠을 취할 수 있다니. 나름 보람찬 하루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나는 눈을 감은 채 잠을 청한다.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 습기가 가득한 아침을 맞이하는 것은 그다지 상큼한 기분으로 기상할 수 없구나 라는 기분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푹풍우같은 저녁이 끝나고 난 후. 아직까지 흐린 날씨탓에 새가 지저귀는 맑고 쾌청한 환경을 맞이할 수 없었다. 무인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로맨스가 하나 사라진 아침은 약간 기운이 빠진 느낌이다. "자, 초호기. 이쪽으로 오렴." 아침식사를 하던 도중에 체리가 초호기에게 감자와 고구마를 잘게 으깨서 준다. 그러고보니 초호기는 우리측에서 기르기로 결정이 되었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이나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딱히 없었고, 무엇보다도 초호기의 아기 고양이라는 귀여움이 여성들에게 엄청난 어필을 한 찻에 만장일치로 초호기를 여기서 기르기로 결정이 난 것이다. 초호기에게 압도적인 애정을 쏟고 있는 3인방을 소개하자면 세린과 세리아, 그리고 체리 이 3명을 살펴볼 수 있다. 세린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고, 세리아는 그녀의 성격이나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애완동물 같은 것을 기를 경우에 모성본능이 가장 강할 거 같은 여자니까 예상대로라고 치자. 체리도... 의외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울리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초호기를 기르게 된 우리들. 제 11의 멤버가 된 초호기는 체리가 건내주는 아침밥을 얌냠 소리를 내며 작은 입으로 잘도 먹는다. 산장에 대려오고 나서 알게 되었는데 이 녀석, 의외로 식탐이 강하다. 원래 아기 고양이들은 한창 자랄 시기인지라 원래부터 이리도 식탐이 강한가 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먹는다. 그래서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혹시 초호기는 고양이가 아니라 치타나 호랑이 이런게 아닐까 하고. 물론 그럴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말이다. 잠시 초호기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사이에, 지아 선생님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유에. 오늘 작업 시작할거니?" "집 증축공사요?" "그래. 그거." "아니요.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르기 때문에 오늘은 생략할게요. 날이 맑을때 하고 싶으니까요." 날씨가 흐린 탓에 습기도 가득 찬 상황인지라 괜히 나무로 된 이 집을 건드리고 싶지 않다. 제대로 된 구조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오늘은 우선 이 통나무 집이 어떤 식으로 설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었다. ============================ 작품 후기 ============================ 언제 예비군 통지서가 날라올지 두려움에 떨며 살고 있습니다. 2박 3일 동원훈련이라니...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161화 "증축 공사는 못해도 일단 어떤 방향으로 증축을 할지 계획을 세울까 해요." "그러니?" "네. 설계도가 있으면 좋겠지만, 저번에 엘리한테 물어보니까 그런건 없다고 하더라고요." 잠시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입 안 가득히 감자를 먹고 있던 엘리가 나를 쳐다본다. 그러더니 이내 다시 식사에 열중. 초호기와 더불어서 엘리의 식탐도 알아주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2배 가량 먹어대는 엘리의 이런 식습관은 이제 거의 모두가 익숙해진 상황이다. 엘리 역시도 성장기라 그런가. 잔뜩 먹어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이 안찌는 것은 축복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식사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온 나. 다른 일행들은 각자의 할 일을 하기 위해 다른 장소로 이동한 상황이고, 내 곁에는 도우미 겸 보조원으로 유아 선배가 남게 되었다. 왜 하필이면 유아 선배가 남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냥 여자들 중에서 가장 거친 일(?)을 많이 할 수 있을법한 여자 멤버 투표로 유아 선배가 당첨되었기 때문이다. 기뻐해야 좋을지 슬퍼해야 좋을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유아 선배는 결국 나와 이렇게 집 주변을 둘러보게 된 것이다. "내가 그렇게 거친 일을 잘하게 생겼어?" 아직까지 뭔가 원한 비스무리한게 많이 남았는지 되묻는 유아 선배. 거친 일을 잘하게 생겼다기 보다는 그냥 아무래도 체육계 부활동의 부장을 맡았기 때문에 그런 점이 조금 유아 선배의 이미지를 거친 이미지로 만들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볼 뿐이다. 그래도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보다 조금 순화해서 표현하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한 나는 나름 나긋한 목소리를 흉내내며 선배에게 위로하는 말을 건내본다. "다들 그만큼 유아 선배를 믿고 의지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그럴까?" "... 아마도요." 확신은 못하겠다. 대중의 군중심리를 내가 쉽게 파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타인의 마음이 가장 알기 어렵다고 하지 않는가. 심리학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의 심리를 내가 무슨 주제로 알 수 있냔 말이다. 그래도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잠시동안은 유아 선배의 기분에 맞춰주도록 하자. 팔짱을 끼며 고민하던 유아 선배가 또다시 말을 걸어온다. "그런데 증축 공사도 안할거면서 살펴만 보면 뭐하게?" "선배. 이것도 나름 깊은 뜻이 있는 거예요." "깊은 뜻?"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잖아요." "산장은 적이 아니잖아." "적은 아니지만, 다뤄야 할 대상이 되기는 하죠."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런데 네가 살펴본다고 알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는거야? 이 집?"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겠지만, 대충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방향성 정도는 알 수 있어요." "음... 그래?" 여전히 미심쩍은 눈동자로 바라보는 유아 선배. 남을 의심하는 것은 좋지 않다. 신뢰의 관계를 가졌으면 좋겠지만, 뭐... 내가 건축학과를 나온 대학생도 아니고, 건축사도 아니니까 선배의 이런 의심가는 눈동자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주변을 다시 둘러보자. 본래 집이라는 것, 한마디로 말해서 건축이라는 것은 땅을 파서 기초와 기반을 다지고, 그 위에 집을 짓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통나무 산장은 일반적으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집의 형태로 되어있다. 사각형으로 기둥 4개가 기반이 되고, 그 주변으로 내력벽이 하중을 견디는 목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거실이라는 공간. 참고로 하중이라는 것은 위에서 아래로 짓누르는 집 자체의 무게를 의미하는데, 그 중에서 벽과 기동, 지붕과 같이 변하지 않는 무게를 유지하는 것이 고정하중이라고 한다. 그 고정하중의 힘을 주로 받는 것이 바로 내력벽과 기둥. 그런데 목구조 자체가 그리 많은 고정하중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별도의 기둥들이 위치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사각형의 각 모서리에 하중을 지탱하는 거대한 나무기둥 4개가 고작일 뿐이다. 그리고 거실을 중심으로 침실방, 부엌, 마지막으로 기타 공구들과 도구들을 보관하는 간이 창고가 마련되어 있다. 여러가지로 다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이 산장. 허술해보이지만, 실용성으로 따지자면 아마도 이보다도 더한 효율적인 구조가 없으리라고 본다. 잠시 고민하는 내게 유아 선배가 자신의 소견을 말하기 시작한다. "한쪽 벽을 허물고 그쪽에 제 2의 침실방을 만드는거야?" "그렇게 할까 라는 생각을 해봤는데, 약간 바꿔보려고요." "바꾼다고?" 유아 선배의 의견은 나도 전에 생각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게 가장 일반적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는 순간, 하중을 견디는 내력벽의 한쪽 무게를 각 3변이 나눠서 지탱하게 된다. 아마도 엘리의 부모님이 이 산장을 설계할 때 분명 무너지게 하지 않기 위해서 나름의 균형을 유지하며 만들었을 터. 건축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는 내가 이 집을 건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괜히 내력벽 한쪽을 허물고 다른 공간을 만들었다가는, 이 집에 무너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중으로 인한 충격이 아니라 풍력 말이다. 목구조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그에 따른 약점도 많이 있기 마련이다. 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내화성. 나무가 불에 약하다는 사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고 본다. 나무에서 만들어진 종이도 불에 약하지 않은가. 불에 대한 내성이 없는 물건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나무라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집은 통나무 집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한 불에 대한 문제점을 비행기 철판을 뜯어내어 재료로 사용하는 것으로 그 걱정을 차단한 것이다. 나무 사이에 널판지마냥 배치되어 있는 비행기의 철판들. 고도에서도 충분히 잘 견딜 수 있는 이 철판들은 당연하겠지만 불에도 잘 견디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불연재료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통나무 집에서 화로를 만드는 일도 가능한 것이다. 비행기 철판으로 인해서 해결한 것은 불에 대한 취약성뿐만 아니라 풍력에 대한 내구성도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보통 통나무를 쌓아올려 만든 집은 수직으로 내려오는 힘은 견딜 수 있지만 수평, 그러니까 측면으로 가해지는 힘에는 약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진이나 이런 자연현상이 오게 되면 나무 구조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런 이유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두가지 취약점을 철판으로 인해 완벽하게 차단한 아이디어는 정말 대단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철판이라는 재료가 오로지 장점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증축이 어렵다'라는 난제를 우리들에게 선사해준 것이다. "실제로 벽을 허무는 것은 상당히 어려워요. 나무 사이에 비행기 철판이 있기 때문에 그 철판을 뜯어내는 일 자체도 상당히 고역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한쪽 벽을 허물고 다른 공간을 확보한다는 것을 못한다는 말이야?" "그렇게 되는거죠. 가급적이면 이 집의 형태를 유지하되, 공간을 넓히는 방향으로 계획을 세우고 싶으니까요." "... 어렵네. 그거." 풀기 쉽지 않은 퍼즐을 만난듯한 반응을 보여주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저어보이는 유아 선배.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도 꽤나 골머리가 썩을 정도로 난감할 따름이다. 어떻게 이 집을 그대로 보존한 채 다른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까. 물론 이대로 계속 생활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다. 지금까지 10명이서 서로 잘 먹고 잘 살아왔으니까 말이다. 산장의 공간이 좁다고 해도, 인간의 적응력은 그에 따라 순응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아갈 수도 있다. 이것도 일종의 방법이니까. 하지만 동시에 불편함이라는 감정을 감수하고 생활해야 하는 일은 차마 버티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언제까지고 침실바엥서 6명이서 끼여서 잘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결국 증축 공사는 가히 필수적인 과정인 셈이다. 조금 더 머리를 굴려보자. 분명 좋은 수단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 그러고보니 저번에 강물 사건도 그렇고, 요 근래 들어서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진 듯한 이 느낌은 도대체 무엇일까. 학교에 다닐때도 이렇게까지 머리를 써본적이 없는데 말이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나에게 유아 선배가 또다시 입을 열며 말한다. "집을 한 채 더 만드는 것이 어때?" "... 그건 조금 힘들걸요. 아니, 취소할게요. 조금이 아니라 '많이' 힘들 거예요." "왜? 나름 좋은 아이디어 아니야? 현재의 집을 그대로 놔두고, 다른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노동력과 재료를 들이지 않고서 하는 웹게임 같은 사이버 공간에서라면 그게 더 효율적이겠죠. 하지면 여기는 현실 온라인이라고요. 마음데로 로그아웃 할 수 없는 현실 온라인 말이에요." "... 그런 온라인 게임이 있다면 좋은 아이템 같은것도 좀 구해봐." "아직 레벨이 23밖에 되지 않아서 그래요." 참고로 말은 레벨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내 나이다. 그렇게 따지면 제일 고렙은 지아 선생님인 것인가. 다음에 쩔이라도 받아야 할 기세다. 저렙 던전 좀 돌아주세요. 지아 선생님. 그리고 더불어서 남는 아이템 같은것도 좀 주시면 감사요. 절로 한숨이 세어나오는 유아 선배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베베 꼬면서 말한다. "명확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이상은 힘들겠네." "그 방법을 오늘 생각하는거죠." "그리고 내일 날씨가 맑아지면 공사를 시작한다 이거지?" "정답입니다." 미리 계획을 세워두고 공사를 시작한다. 아주 간단한 방법이지 않는가. 하지만 문제는 그 계획을 세우는 것이 문제란 말이지. 유아 선배의 말 그대로 집을 하나 더 만들어볼까? 비록 여자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하지만, 그래도 인력은 충분하다. 재료도 무인도 내부에서 천연 재료를 이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하고.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지 불가능한 일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가급적이면 10명이 모두가 한 공간에서 생활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많이 있으면 있을수록 '충돌'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무인도에서도 우리들밖에 없다고 하지만, 10명이나 되면 서로간의 감정이 충돌할 일도 빈번하게 벌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세린과 유아 선배의 관계는 특별하니까 예외로 치자. 이 둘의 악연은 무인도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라 무인도에 표류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관계니까 말이다. 우리들끼리 서로 싸운다는 생각은 현 단계에서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사람이라는 것은 또 모른다. 그러니까 최대한 같은 공간에 살면서 호흡을 맞추고, 서로간의 이념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단결력을 키우고 싶다는 것이 내 소견이기 때문이다. 공간을 확충하면서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 다시금 집을 살펴보도록 하자. 옆면을 허무는 것은 최후의 수단으로 보류하고, 다른 면이 없나. 지하실? 가뜩이나 나무가 습기에 대해 민감도가 심한 재료인데 지하실을 목구조로 만들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윗쪽? ... 윗쪽이라고? "오호라." "뭔가 떠오른거야?" 나의 짧은 감탄사에 유아 선배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오기 시작한다. 확실히 뭔가 떠올랐다. 산장의 모습은 일반 아파트처럼 사각형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들은 지금까지 산장 '윗부분'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2층을 만드는게 어때요." "2층이라고?" "네. 2층을 취침실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1층의 침실에서 5~7명, 그리고 2층의 침실에서 3~4명이 자면 되는거죠." "과연..." 그리고 윗층을 증축하게 된다면 굳이 한쪽의 벽을 허물 필요도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옥상 바로 위에 따로 집을 세우면 되는 거니까 말이다. 새로 산장을 짓기 위해서 땅을 파고 기초를 다질 필요도 없이 그 위에 집을 세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유아 선배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생각에 공감한다는 듯이 말한다. "괜찮은 아이디어야." "그렇죠?" "응. 그나저나 용케도 생각했네. 윗층을 활용하다니." 하지만 고생은 이제부터다. 2층 수준의 높이까지 나무를 옮겨야 하는 문제도 있고, 그리고 1층의 천장을 뜷어서 사다리를 만든 뒤에 2층과 1층 사이를 왔다갔다 할 정도의 수준까지의 왕복이 자유로운 구조로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전체적인 계획은 마련되었으니까 일단 가장 큰 장애물은 넘은 셈이 되는 것이다. ============================ 작품 후기 ============================ 아리아에 대한 설정이 자꾸 오류가 나는군요. 죄송합니다; 나름 살펴본다 했는데, 여기저기 수정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잡담으로 넘어가자면, 161편은 제가 주택관리사 공부를 했을 때 썼던 글입니다. 공부한 지식을 조금이라도 써보고 싶어서 아무래도 저런 소재가 나온 거 같은데... 이제와서 보니까 과거의 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162화 EP 19. 나무는 나무나무해! "2층을 만든다 란 말이지..." 물을 마시면서 다리를 꼰 채 내 설명을 들은 지아 선생님이 나를 응시하면서 말한다.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럼. 아무래도 집을 한 채 더 만들어서 따로 떨어져 있는 것보다 다 같이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 서로간의 유대감을 키울 수 있는 좋은 조건의 환경을 갖출 수 있으니까." 지아 선생님 역시도 집단생활에서 발발할 수 있는 충돌을 고려한 듯하다. 역시나 고렙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지아 선생님.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미 지아 선생님 역시도 고려하고 있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일단 전체적인 계획은 해결 완료. 이제 남은 문제는 저번에 하다가 중단했던 재료 확보하기란 말인가. "몇명 데려가서 나무 자르기 다시 하는거니?"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죠?" "고생이겠네." "뭐... 그런 셈이죠." 솔직히 말해서 고생의 90%를 담당하는 내가 할 말은 아니라고 본다. 여자들을 데려가기는 하지만, 거의 남자인 내가 대부분의 일을 마무리 하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안할수도 없는 노릇이고, 남자로 태어난 것을 불운으로 생각해야지 뭐. 그래도 섹스할땐 남자가 더 기분이 좋으니까 상관없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나무를 베기 위해 또다시 팀을 꾸려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되었다. 저번에 원정에 참가했던 세리아와 아리아는 자연스럽게 팀 멤버에서 빠지게 되었다. 이번에는 독특하게 유아 선배가 스스로 자원해서 나무 자르게 원정대에 참가하게 되었다는 특이사항 빼고는 또다시 2명을 더 뽑게 된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유아 선배가 다시 지원할줄은 몰랐는걸요." "... 거친 일을 잘 할거 같은 여자 1순위니까." "하하..." 아직도 삐진 것인가. 참고로 유아 선배와 더불어서 엘리 역시도 합류하게 되었다. 은근히 근력이 좋은 엘리였기 때문에 엘리도 포함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확정된 멤버는 엘리와 나, 그리고 유아 선배. 남은 두 사람을 뽑기 위해 또다시 모여든 일행중에서 또다시 뜻하지 않게 지원자가 나오게 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갈게." "교수님이요?" "응. 아리아와 세리아는 한번 갔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가야지." 약간의 자신감을 담아 말하는 노아 교수님이었다. 아무래도 연상의 책임감이라는 것이 작용했나보다. 노동으로 따지면 가장 연관이 없을거 같은 세리아도 갔다왔으니, 노아 교수님이 가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고 본다. 그럼 나머지 한명은 누가 될 것인가?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 세린에게로 쏠리기 시작한다. "왜, 왜 저에요?!" "아니. 나도 모르게 그냥." 모두를 대표해서 지아 선생님이 말을 꺼낸다. 정말 그렇다. 나도 모르게 그냥. 그 이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고 보여진다. 왠지 모르게 말이다. 우왕좌왕하던 모습을 보이던 세린이 작게 한숨을 쉬면서 말한다. "... 알았어요. 가면 되잖아요." "오케이. 그럼 출발준비를 하고 오후 1시까지 빨랫줄 앞으로 집합해주세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나무 자르기 원정대. 또다시 고난한 일상이 펼쳐질 것이리라 예상되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난파선 탐험대에 이은 나무 자르기 원정대라고 표현하고 싶지만, 왠지 그런 이명같은 것을 붙였다간 또다시 고생길이 열릴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냥 포기하기로 한다. 희안하게 나는 왠지 특별한 이름을 부여하면 그에 어울리게, 아니면 어울리지 않다고 표현하는게 옳을지도 모르지만, 고생만 진탕 하는 그런 징크스를 맞이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신의 장난? 아니면 작가의 농간? 만약에 우리들의 이런 고생길을 시나리오처럼 쓰는 절대자가 존재한다면, 주인공은 조금 편하게 시나리오를 진행시켜주면 안되겠냐고 뇌물을 쓰고 싶을 정도다. 산장 바로 앞에 모인 우리들. 저번과 같이 나무를 자를 수 있을만한 거대한 톱을 미리 챙겨둔 나는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막을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저번에 그 두꺼운 나무들을 한 그루씩 잘라내는데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충분히 몸이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2명이서 한 조를 이루고 톱질을 한다고 해도, 나는 혼자서 남은 파트를 담당해야 한다. 그게 얼마나 힘든지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아무튼 여자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나. 근처에 세리아가 체리를 대신해서 초호기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아까도 그 많던 감자와 고구마를 잘도 먹더니, 이번에도 또 먹는데. 정말 먹성 하나는 엘리 급으로 많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리아. 너무 그렇게 막 먹이면 나중에 뚱보 고양이가 된다고." 내 말을 들은 세리아가 빙그레 웃으면서 근처의 나무 막대기로 뭔가를 적기 시작한다. 자세히 바라보니, 아래와 같이 해독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판별이 된다. - 왠지 먹이를 주고 싶어서요. "... 그래?" 애완동물들이 야생환경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에 비해 어째서 살이 많이 찌는지에 대한 미스테리가 쉽게 풀린듯한 느낌이다. 귀엽다 귀엽다 하면서 더 많이 먹여주려고 하니까 이런 식으로 지방이 뒤룩뒤룩 찌는거 아닌가. 설마 나중에 많이 먹고 덩치라도 키워서 나홀로 멧돼지 사냥도 가능하게 되는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된다면 초호기에게 하루에 6끼라도 줄 수 있는 의향이 있다. 하지만 그런 능력조차도 없다면 괜히 식량만 축내지 말라고. 에바 초호기. 하지만 나와는 달리 세리아는 초호기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천천히 먹으라고 물까지 접시에 떠다준다. 이것이 바로 여성의 모성본능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더욱이 세리아니까. 음... 세리아는 나중에 어머니가 되면 정말 아이를 잘 키울거 같다. 말 그대로 현모양처라는 단어를 형태로 표현한 것이 바로 세리아가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니까 말이다. 어머니가 세리아라면 상관 없는데, 이모가 아리아라서 좀... 그렇겠지? 잡생각을 하고 있다보니, 드디어 등장한 여성진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 모습들이 참으로 가관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 어디 전쟁 나가나요." "뭐 어때. 이정도 복장은 갖춰 입어야 땀을 흘릴 수 있다고." 유아 선배가 허리춤에 손을 올려놓고 어깨를 당당히 펴면서 말한다. 그녀들의 복장은 한결같이 전부 통일한 상태. 배꼽을 시원스래 드러내고, 상의는 탱크탑을 갖춰 입었다. 가슴이 유난히 두드러지게 표현되는 복장 탓에 솔직히 말하자면 눈이 즐겁기는 하지만, 정말 저런 복장이 효율성이 있을까 하고 의구심만 가득 생길 뿐이다. "노출이 심하면 숲속을 통과할때 여기저기 긁히는 상처가 많이 늘텐데요." "이동할땐 겉옷을 입으면 되니까. 상관 없어." 나름 명쾌한 해답이었다. 유아 선배와 같은 의견을 공유하듯이 노아 교수님과 세린 역시도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 말한다. "아무래도 땀을 흘리는 것은 찝찝하니까." "마찬가지야." "......" 순서대로 교수님과 세린,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침묵으로 일관한 엘리가 말한다. 뭐... 땀을 많이 흘리면 그만큼 땀에 젖은 옷이 피부에 달라붙는 그 감촉이 그렇게까지 썩 좋은것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어느정도 나도 알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나중에 열사병이라도 걸려서 쓰러지는 것 보다는 나은 상황이겠지 하면서. "자, 이제 탐험을 시작해볼까?" 기운차게 외치는 유아 선배. 역시나 유 경험자답게 먼저 일행들의 기운을 복돋아주는 듯이 기합을 넣어 외친다. 여기서 실제로 나무 자르기를 경험해본 사람은 선배와 엘리, 그리고 나밖에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톱으로 나무를 자른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지 못할 것이다. 팔도 무지하게 땡기고, 근육들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힘들다. 평소에 내가 목공일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일개 대학생이었을 뿐인데 느닷없이 되지도 않는 노동을 하려니까 오히려 더 힘이 드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나도 이런 정도인데 여자이기도 한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힘이 들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원까지 하면서 기운찬 모습을 보여주는 유아 선배가 어떤 의미로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것도 유아 선배의 승부욕이 초래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을까. 지는것을 매우 싫어하는 유아 선배이다보니 어떤 일에서 난관에 부딛쳤을때 도망치는 것은 오히려 선배의 성격에 맞지 않을거라는 추측 정도는 가볍게 할 수 있을 정도다. 겨우겨우 시작된 제 2차 나무 자르기 원정대. 저번에는 우리들 중에서 유일하게 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이 엘리가 전부였기 때문에 엘리가 앞장서서 길안내를 담당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앞장서게 되었다. 비가 오고 난 직후에 한참 더 울창해진 나무와 풀들. 덕분에 기껏 임시적으로 만들어두었던 길이 또다시 엉망이 되었다. "작업할게 한가지 더 늘어난 느낌이네..." "그러게요. 정말로." 노아 교수님이 한숨섞인 말로 말하자, 유아 선배가 옆에 있던 잔가지들을 나이프로 쳐내면서 대답한다. 나무를 좀 더 편하게 옮겨두기 위해서라도 어느정도 길을 확보해둘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를 자를 수 있는 장소와 산장이 위치한 공터 사이에 왔다갔다 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해주는 길을 다듬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가뜩이나 무거운 나무들을 옮기는 일인데, 방해가 되는 잔가지들과 풀들이 있으면 난감하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교수님이 저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교수님의 말에는 전적으로 공감이 가지만, 본능적으로 작업에 대한 거부감이 일어나는 것은 생리현상 다음으로 지극히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도착한 작업장. 한쪽 구석에 1차 나무 원정대를 왔었던 성과물들, 즉 미리 잘라낸 나무들이 모여있다는 말이 된다. 비가 내릴지도 몰라서 혹시나 하는 조치로 빗물이 닿지 않게끔 임시조치를 취한 것이 정답이었다. 그래도 완벽한 방수는 불가능했는지 바닥쪽이 젖어있었다. 위에서 떨어지는 빗물에 맞지 않게끔 나뭇잎이 울창한 나무 아래에 모아두긴 했는데, 땅에서 올라오는 빗물들은 막을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건 후순위로 잠시 미뤄두고. 지금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나무를 자르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선순위로 돌리도록 하자. "그럼 전 엘리하고 자를만한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올테니까, 유아 선배가 대충 노아 교수님하고 세린에게 어떤 식으로 나무를 자르는지 간략하게 알려주세요." "응. 알았어." 귀엽게 윙크하며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표시를 보여주는 유아 선배. 나는 엘리와 같이 쓸만한 나무를 확보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기로 한다. ============================ 작품 후기 ============================ 제가 글을 쓰는 데에 있어서 커다란 약점이라 생각되는 부분이 2가지 있습니다. 등장인물 이름 짓는거하고, 그리고 에피소드 제목 짓기입니다 ㅡ_ㅡ;; 163화 나무를 고르는 점은 그렇게까지 깐깐한 편은 아니다. 친환경적인 1등급 나무만을 엄선하는 기업들과 같은 기준으로 고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런 기준을 세워둔다고 해도 1등급을 판별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애초에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들이 미리 잘라놓은 나무들과 비슷한 두께, 그리고 비슷한 크기와 지름만 충족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나무의 종류별은 불문. 가급적이면 재료는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좋다고 알고 있지만, 나무의 종류까지 통일해야 하는 세심한 배려는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그건 생략하도록 하자. 무인도에 머물고 있는 우리들 중에서도 가장 눈매가 좋은 사람이 바로 엘리였기 때문에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쓸만한 나무를 발견하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나무기둥에 'X'자 형태로 나이프를 이용해 표시하고 있었다. 엘리에 비해 부족하긴 하지만, 나 역시도 쓸만한 나무를 보면 엘리와 똑같은 표시를 기둥에 새겨두고 있었다. 얼추 원하던 물량을 확보했다는 생각이 든 나는 엘리를 부른 뒤에 다른 사람들이 모여있는 장소로 향한다. 그러자 그 곳에는 이미 유아 선배가 설명을 끝마쳤는지 숲길을 통과할때 임시적으로 입었던 겉옷을 벗어서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채 탱크탑 복장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복귀하는 우리 둘을 보면서 세린이 성을 내기 시작한다. "늦었잖아." "그래도 나름 빨리 온 거라고. 투정부리지 마." 세린의 입장에서는 변명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이니 어쩔 수 없다. 조건에 충족될만한 나무들이 길바닥에 놓여있는 돌덩이들 수준으로 널린 것도 아니고, 나무들이 많이 있다고 해도 그 중에서 쓸만한 나무들은 극히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일이 다 확인을 하면서 다녀야 한다는 고충을 겪고 나서야 이렇게 복귀한 것이다. 중간에 화제를 돌리려는 듯이 노아 교수님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뒤로 묶으면서 말한다. "자자. 그만 하고 슬슬 작업을 시작해야지. 할당된 시간은 얼마 없으니까 빨리 하자꾸나." "그래야지요.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할 수 있을 정도까지 해두고 싶으니까요." 저번 1차 작업 원정대의 경우에는 이른 아침에 출발해서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오늘은 다르다. 날씨가 흐린 탓도 있었고, 그리고 산장을 증축하는 계획을 세우는데 오전을 꼬박 소비해버렸기 때문에 우리들이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점심 이후부터 저녁 전까지밖에 없는 것이다. 적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이게 마지막이 아니고 재차 나무를 자르러 와야하기 때문에 조바심을 내면서 작업을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전제일이 가장 중요하니까 말이다. 괜히 시간이 없다고 투덜대면서 무리를 해서라도 빨리 작업을 끝내는 것보다 안전에 유의하며 천천히 끝내는 것이 더 좋다. "그럼 세린하고 노아 교수님이 한 조, 그리고 엘리와 유아 선배가 한 조를 해주세요." "오케이." 유아 선배와 엘리는 저번에도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예상대로 수월하게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충분히 밀고 당겨야 하는 타이밍을 이미 숙지하고 있는 둘인지라 나 역시도 덕분에 편하게 톱질을 하게 되었다. 본래 톱질이라는 것은 오로지 팔 힘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리드미컬한 움직임을 이용해서 작업하는 노동이기 때문에 솔직히 말하자면 여자라도 충분히 할 수 있을거라는 개인적인 소견이 있다. 그렇지 않다고 반박을 해온다면... 할 말이 없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라고. 그냥 그런 식으로 느껴진다 이런 생각 뿐이니까 말이다. 흥부와 놀부가 박을 톱질할 때의 기분을 다시한번 체험하면서 열심히 으쌰으쌰 톱질에 톱질을 시작한다. 주기적으로 교대를 번갈아하며 힘을 비축하면서 계속적인 작업을 진행하는 상황. 3개조로 나뉘다보니(물론 1개조는 나 혼자다.) 필수적으로 한개조당 두 텀은 연속해서 톱질을 해야 하는 구간이 생기게 된다. 지금은 어차피 인원수도 부족하고, 시간도 별로 없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데, 내일부터는 한개 조를 더 꾸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보완책도 고려해본다. 한동안 계속되는 톱질. 어느새 탱크탑을 입고 있는 여성들도 그 옷 조차도 땀으로 흠뻑 젖은지 오래다. 나 역시도 이미 상의를 탈의한 상태. 무인도에서 아무래도 목공 일이나 기타 힘쓰는 일을 많이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잔근육이 많이 생기고 말았다. 흔히 말해서 초콜릿 복근...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균형잡힌 몸매 정도 수준까지는 포함이 되지 않을까 라는 자화자찬도 해본다. 한동안 이어지는 톱질 타임을 마치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는 우리들. 물통을 벌컥벌컥 마시던 나를 힐끗힐끗 바라보는 유아 선배가 오묘한 시선으로 나에게 말한다. "너, 부활동 할때보다 오히려 더 몸이 잘 만들어진거 같은데." "... 선배. 언제 제 상체를 본 적이 있었나요?" "너, 기억 안나? 검도부 단체로 수영장에 갔던 일." "아... 그거군요." 이제야 생각이 났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유아 선배와 나는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이름만 아는 사이 정도라고 말하면 딱 좋을것 같다. 아무튼 유아 선배가 검도부 부장을 맡고 있을 때, 한창 매미가 울부짖는 여름의 어느 평일이었다. 무거운 보호구를 뒤집어 쓰고 검도를 하는 부원들을 배려한 것인지 어느 날 유아 선배가 부원들에게 단체로 수영장을 갈 수 있게끔 학교측의 지원을 받아낸 것이다. 덕분에 유아 선배의 인지도도 확 올라갔다. 원래부터 여성이라는 요소 때문에 유아 선배에게 그리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지만, 그때의 일을 통해서 유아 선배의 이미지도 어느정도 올라가게 된 것이다. 본래 체육계 부활동의 부장을 맡는 것은 대부분 여성보다는 남성이 주로 맡는 것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유아 선배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빛을 바랬다고 볼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어찌되었든 덕분에 유아 선배의 기교있는 깜짝 이벤트로 검도부 부원들 단체로 수영장 나들이를 떠나게 되었다. 나도 물론 거기에 속해 있었으니까 선배가 나를 본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 그런데 조금 이상한데. 검도부 부원들이 그리 적은 숫자도 아니고. 그 많은 인파에서 유독 나를 유난히 관찰했다는 소리도 되는거 아닌가? 그거. 그때는 내가 선배와 무인도에서와 같이 자주 말을 섞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나와 같은 궁금증이 들었는지 세린이 유아 선배를 바라보면서 질문한다. "선배는 설마 그때부터 유에를 신경쓰고 있다는 뜻이 되는건가요?" "무, 무슨 말이야! 너!?" 갑자기 세린의 기습 질문에 당황한 유아 선배의 얼굴이 급격하게 빨개지기 시작한다. 저 반응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세린이 핵심을 찌른거 같은데. 뭔가 눈치챘다는 듯이 세린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한다. "호오. 과연. 그랬군요." "너! 그 이상은 절대로 말하지 마! 알았어?!" "글쎄요. 기분 내키는 대로 할래요." "뭐라고???" "어머, 유아 선배. 그렇게 화내셔도 되는 건가요? 이 자리에서 유에에게 말해버릴수 있다고요. 선배는 사실 예전부터 유에를 조... 읍읍!" "크윽. 이 마녀!" 세린의 입을 막아버린 유아 선배가 조용히 하라는 듯이 세린을 째려보기 시작한다. 노아 교수님은 옆에서 그저 어색하게 웃어보일 뿐. 분위기를 보아하니 교수님하고 세린은 이미 뭔가 알고 있다는 눈치인데. 그나저나 '조...'는 도대체 뭐냔 말이다. 조기교육을 시키려고 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조미료를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다는 말? 아니지. 어떤 말이든 상황에 어울리지가 않고 있잖아. 그렇다면 '좋아했다.'라는 말인가? 설마 선배가 전부터 나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말? 단순한 부장과 부원이 아닌 이성으로서? 남자와 여자로서? ... 에이. 그럴일은 없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아 선배인데. 겨우 나같은 남자가 예전부터 눈에 들어왔을까. 무인도 이후라면 모르지만. 재게된 나무 자르기 대회... 가 아니라 작업. 연속되는 톱질에 톱질을 거듭한 끝에, 또다시 손이 저려오는 현상을 겪게 되었다. 그도 그럴듯이, 그동안 난파선 탐험대에서도 힘쓸 일이 많았고, 불어난 내천을 건너가고자 나뭇가지 위에서 곡예사 뺨치고 옆차기 두번 하도, 돌려차기에 마지막으로 발등으로 내려찍기까지 시도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나뭇가지 건너타기를 시전하고 나서 이런 중노동을 하려니까 자연스럽게 피로가 축적된 것이다. 게다가 시간도 슬슬 저녁을 달리고 있는 상황. 적당히 마무리하다가 오늘은 이 쯤에서 마무리를 짓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말을 한다. "오늘은 이 쯤에서 그만 두도록 하지요." "아싸!!" 유아 선배와 세린이 해냈다는 듯이 힘차기 외친다. 둘이 무슨 텔레파시라도 주고 받았는가. 이럴때는 기가막힌 환상의 파트너십을 보여주고 말이다. 평소에 좀 이렇게 친한 모습을 보여주면 어디가 덧나나. 그녀들 뿐만 아니라 노아 교수님도 이제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다는 듯이 얌전히 자리에 앉은 채 땀을 닦는다. 엘리는 평소와 같이 특유의 뚱한 표정으로 작업이 끝났다는 기쁨을 표출하는 둥 마는 둥 그저 주섬주섬 작업 도구를 챙기기에 바쁘다. 어찌되었든 작업을 마친 우리들은 이제 곧 떠날 채비를 하고자 그동안 잘라놓은 나무 기둥들을 따로 모아두기로 한다. 날씨도 흐리고, 또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르니까 말이다. 설마 혹은 만약에 라는 단어는 인간에게 대비심을 키워주는 좋은 습관을 길들이게 해준다. 그런 면에서는 정말 좋은 단어의 용법이라 생각한다. "준비 다 끝났니?" 노아 교수님은 이미 준비가 다 끝난 모양인가보다. 교수이라는 직업의 습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노아 교수님은 시야가 굉장히 넓다. 자신의 일을 끝내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봐줄 수 있는 여유로움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니면 관대함?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 역시 이런 면에서는 교육직에 종사하는 분 답구나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교수님의 말을 들은 우리들을 대표해서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얼추 다 된 거 같아요." "그럼 비가 오기 전에 산장으로 가는게 좋을거 같구나. 도중에 비바람이라도 만나면 난감할테니까." "아무래도 그러는게 좋겠죠." 자연재해라는 것은 참으로 무섭다. 게다가 무인도에서와 같은 수풀림에서 비로 인해 바뀌는 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 형태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이런 자연재해의 폐해로부터 조심, 그리고 또 조심해야 한다. 이건 뭐 무인도에서나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장소, 그러니까 문명화된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가 오면 수막이 생겨서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제대로 듣지 않는다든지 아니면 비를 홀딱 맞아 감기에 걸린다든지 하는 여러가지 부정적인 현상을 초래하기 때문에 비라는 것은 언제나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가끔 이럴때 느끼는 것이지만, 자연의 위대함이 가지는 스케일은 정말 대단한거 같다. 자연에 대한 경배는 이 쯤 관두고, 슬슬 발걸음을 재촉하는 우리들. 가장 무겁고 사이즈가 큰 톱 종류의 공구들은 언제나 내가 담당하고, 나머지 여성들은 잔 도구들을 들고 산장으로 항하게 된다. 그나마 우리들이 이 나무 자르는 장소까지 오는 동안 잔가지나 기다란 풀 같은 것을 미리 제거해뒀기 때문에 수월하게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비포장 도로가 아스팔트가 되는 정도의 수준까지 편리함을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인 의미에서 편해졌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좋겠다. ============================ 작품 후기 ============================ 4월 6일은 정말 좋은 날입니다. 식목일 다음 날이지만, 저에게는 매우 특별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헤헤헤그나저나 후기란에 뭘 쓸지 고민중입니다. 하루하루 일기를 써볼까 하다가 별로 재미있지도 않을거 같고, 오덕 토크 시리즈를 하려고 했지만, 아는 사람들만 아는 대화인지라 이것도 안 되고... 조만간 후기란을 재미있게 채울만한 소재를 만들어봐야겠습니다. 164화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힘들 내죠." 조금이나마 기운을 복돋아주기 위해서 일부러 기운차고 희망 가득한 말을 건내본다. 그러나 뒤에서 세린이 작은 목소리로 '아직 절반도 안 왔으면서.'라는 짧은 이야기를 한 덕분에 그 효력은 금방 사라지게 되었다. 눈치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본래 악의의 거짓말은 하면 안되지만,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은 밥 먹듯이 자주 해도 된다는 말이다. 또 내가 이런 말을 했다고 악의의 거짓말을 선의의 거짓말로 만들어버리면 그건 좀 난감할지도. 나무를 자르는 장소와 산장과의 거리는 산장에서 난파선까지의 거리에 비해서 훨씬 가깝기 때문에 금새 도착할 수 있었다. 때마침 저녁도 먹을 시간이고. 황금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들기 시작한다. 이제 겨우 한숨을 놓는 유아 선배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면서 걸쳤던 겉옷을 벗는다. "이곳 날씨는 밤은 춥고 낮은 덥단 말이야." "일교차가 심하다는 뜻일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지." 선배의 말을 세린이 받아주면서 기후에 대한 나름의 열띤 토록을 벌이고 있었다. 겉옷을 벗자, 유아 선배의 풍만한 두 가슴의 동선을 자랑하는 타이트한 탱크탑의 모습이 바깥에 그대로 드러난다. 노출의 계절 여름에서나 볼 수 있을것 같은 현상이 무인도에서도 펼쳐지고 있었다. 여름 만세. 그리고 더불어서 무인도 만세! 공구를 창고쪽에 정리해둔 우리들. 산장 안에서는 아리아, 세리아 자매가 요리를 하고 있었는지 좋은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오, 나름 괜찮은 냄새인데?" "유에 선배. 언제 오셨나요." "방금 왔지." 아리아가 괜히 참견하지 말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작게 한숨을 쉬면서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이곤 말한다. "지아 선생님이 괜찮은 조미료를 구해줬거든요." "무인도에 그런게 있어?" "근처 숲에서 하나 구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약간 후추 맛이 나는 계열의 조미료에요. 이름은 모르겠지만요." "쳔연재료란 말이지." 냄비 안에는 매콤한 향을 내뿜는 가루들과 작은 물고기들, 그리고 감자와 나물 비스무리한 것들이 담겨져 있었다. 매운탕 느낌이 물씬 풍기는 찌개라고 보면 좋겠다. 무인도에 와서 그 메뉴도 점점 다양해지는 이 모습을 보고 역시나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못하는 것이 없구나 라는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올만한 생각까지 이 찌개에 첨가시켰으면 좋겠다. 이런저런 잡담을 하던 사이에 어느새 산장 안으로 모인 우리들. 초호기는 오늘 하루종일 지아 선생님과 붙어 다녔는지 선생님의 무릎배게 위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옳지, 옳지. 귀여운 아이네." 지아 선생님의 감미로운 미소를 흠뻑 받는 초호기가 작은 입으로 '야옹~'이라고 울어본다. 나도 저 탐스러운 허벅지 위에서 선생님의 색기어린 저 미소를 독점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고양이와 동급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기 때문에 금새 고이 접어 주머니 속에 넣어두도록 하자. "자~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아리아가 냄비를 들고 테이블 한 가운데에 찌개를 내려놓자, 모두가 한번씩 탄성을 자아낸다. 고기 메뉴에 이어서 이번에는 찌개라니. 무인도라는 각박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피서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호화로운 식단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고보니. 요새 고기를 먹어본지도 꽤나 오래 되었지. 만약에 여유분의 고기가 있었다면 좀 더 메뉴가 다양해지지 않았을까. "내일 날씨도 좋은데 사냥이나 한번 더 갔다 올까요?" 게다가 고기도 먹고 싶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한번 제안해본 내 말이었다. 고기를 먹고 싶다는 생각은 슬슬 다른 사람들도 한 두번씩 들었는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 말로써 의견을 대신한다. 반대하는 의사를 표명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는 관계로 만장일치 통과. 게다가 초호기 조차도 찬성한다는 듯이 짧게 울어보인다. "고양이에게 너무 감자나 고구마만 먹이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지아 선생님이 다시한번 초호기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씀해주신다. 지나친 편식은 인간 뿐만이 아니라 동물에게도 좋지 않다는 교훈을 남겨주신 듯 하다. 사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누나가 손을 들면서 질문한다. "그럼 증축 공사는 언제 하고?" "당분간은 날씨가 흐리니까 계속적으로 작업을 감행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을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조금 불편하기만 할 뿐, 전혀 못살 정도는 아니잖아. 우선순위로 따지면 언제 걸릴지 모르는 증축공사보다 식량을 확보하는게 더 좋겠지." "하긴. 고기가 중요하지." 역시나 나의 누나. 이럴때는 마음이 잘 통한다. 몸에 좋고 맛도 좋은 고기고기고기. 고기 타령은 이 쯤으로 해두고, 슬슬 감자나 고구마나 풀들도 지겨우니까 육식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우리들이 무슨 채식주의자도 아니니까 말이다. "저기 말이죠." 잠자코 식사를 하던 아리아가 이번에는 누나에 이어서 손을 들어 할 말이 있다는 듯이 말한다. 뭔가 제안할 거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원에서 사냥 멤버에 넣어달라는 말은 아니겠지? "말해봐. 아리아." "예전부터 줄곧 생각해봤는데, '사육'을 하면 어때요." "우리가 직접 동물을 기르자고?" 모두의 시선이 아리아에게 쏠리기 시작한다. 색다르다고 표현하면 약간 독특한 제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직접 우리들이 동물을 길러서 육류를 조달하면 사냥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은가. "괜찮은 제안인거 같은데..." 누나가 감탄했다는 듯이 말한다. 식량확보 면으로 따져보자면 확실히 언제 성공할지도 모르는 사냥을 하는 것보다는 안전하게 사육을 통해서 식량확보를 하는 길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편리성 문제로 보자면 장기적으로 신경을 쓰고 관리를 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무인도에서는 차라리 조금 번거롭더라도 안전하게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아리아의 제안에도 어느정도 가치는 있다고 보여진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어때요?" 일단 전체적인 의견을 들어보자는 주의를 취하고 있는 나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에게 각자의 의견을 묻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노아 교수님. "사육이라는 것이 좋긴 하지만... 동반되는 여러가지 문제점도 있다고 봐." "어떤거요?" "예를 들자면, 우리들 중에서 누가 어떻게, 어느 방식으로 동물을 키우고 사육하는 방법을 아는지에 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전체적으로 봤을때 사육이라는 것은 사냥보다 편하지만, 사육이라는 수단 자체도 사냥과 마찬가지로 100% 성공을 한다는 보장은 없어. 기껏 암컷과 수컷을 구해도 둘이 새끼를 가지지 않게 된다면 괜히 노동력과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 되잖니." "확실히..." 사육을 하기 위해서는 동물끼리의 교미가 필수적이다. 애완동물조차도 직접적으로 키워본 적이 없는 내가 말하기에는 그렇지만, 동물들끼리의 교미도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사실 조차도 불분명하다. 교수님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듯이 세린이 말을 계속해서 이어가기 시작한다. "노아 교수님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고 봐요. 하지만 확률적으로 나가자면 우리들이 사육에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사냥에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비교하자면 사육쪽이 더 높은거 아닌가요?" "그건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육식동물이기도 한 치타 역시도 매번 사냥을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과반수도 넘기지 못하는게 사실이에요. 물론 인간은 단순무식하게 이빨과 발톱만을 주 무기로 삼는 육식동물들과는 다르다곤 하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상식선으로 생각해봐도 사육쪽이 더 식량확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명백하게 차이가 나요. 그렇죠? 다들." 노아 교수님의 의견에도 합당성은 있지만, 이번에는 세린의 말에 어느정도 공감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비록 우리들이 저번에 멧돼지 사냥으로 인해서 사냥에 대한 노하우와 경험, 센스까지 익히게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사냥이라는 수단은 제대로 된 식량확보 루트도 아니고, 그리고 사냥을 주기적으로 하면 행여나 발생할지 모르는 불의의 사고를 당할 우려도 있기 때문이다. 저번에 멧돼지 사냥을 통해서 얼추 다들 알고 있겠지만, 과거에는 계획했던 그대로 사냥의 시나리오가 흘러가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멧돼지에게 치이게 될 뻔한 아찔한 사건 사고를 당할뻔 한 적이 있었다. 그나마 그 사냥도 안전하게 끝난 축에 속하는 것이지, 행여나 마취제가 멧돼지에게 제대로 효능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나나 엘리는 큰 부상을 당했을 것이다. 안전성이라는 요소까지 전제를 잡아본다면 역시나 사육쪽이 더 힘이 실리게 된다. 그러나 한가지 불안요소가 있다. "궁금한게 있는데요오..." 소극적으로 오른손을 든 체리가 특유의 작은 목소리를 유지하면서 말한다. "할 말이 있다면 해보렴." "가, 감사합니다. 노아 교수님. 저기. 그러니까..." 말할까 말까 하는 우물쭈물한 태도를 보인 끝에, 나름 결심을 굳혔는지 체리가 자신이 생각했던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기 시작한다. "어째서 엘리의 부모님들은... 사육을 하지 않았던 걸까요?" "... 그렇네. 정말로..." 생각해보니 약간 이상하다. 어째서 엘리의 부모님은 사육이라는 편리한 수단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일까? 감자나 고구마 밭과 같은 주기적인 식량 확보 수단은 있었으면서 사육은 어째서 없었지? 물을 한 컵 마신 지아 선생님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꼬면서 말한다. "그 이유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넘긴다고 쳐도, 엘리의 부모님이 동물을 기르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겠어." "어째서요?" "우리는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엘리와 이 아이의 부모님이 남겨주신 무인도에 대한 정보, 그리고 기타 생활에 필요한 여러가지 경험담이 묻어 나오는 생활 방식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었어. 약초도감이나 고구마, 감자 밭, 그리고 근처에 있는 호수와 이 산장 등이 대표적이지. 오늘 우리들이 먹고 있는 이 찌개 역시도 약초도감의 일부에 적힌 것을 보고 구해온거야. 한마디로 말해서 무인도의 생활을 전혀 해보지 않은 우리들에게 과거의 전례는 크나큰 도움을 주는 것이지." "과연..." "하지만 사육이라는 면에서는 과거의 전례가 없어. 그 말을 적용시켜 본다면, 사육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 성공 가능성도 신만이 알고 있다는 뜻이 되는거야. 방법을 모른다고 해도 하다못해 엘리의 가족분들이 사육을 했었다는 증거가 있다면 적어도 이 섬에서 사육이 가능하다는 근거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텐데. 그런 근거 조차도 없어. 이건 사육을 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기울여보게 되는 입장에서는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지." 경험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뭐든지 항상 '처음'이 문제지, 차후부터는 처음에 비해서 별로 문제가 되는 법은 그다지 없기 때문이다. 평소에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번지점프를 하게 될 경우에 언제나 처음이 문제일 뿐이지, 한번 뛰어내리고 나면 그 경험을 통해 '별거 아니었어.'라는 마음가짐으로 다시 도전할 수 있게 되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지금 그런 '경험'이 없다. 그 점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망설임이라는 불안감을 생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 작품 후기 ============================ Happy birthday to Me~!! 165화 "뭐... 사육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도록 하는게 좋을듯 하네요." 먼저 사육에 대해 제안을 한 아리아를 포함해서 내가 모든 인원들에게 그렇게 화제 전환을 제안한다. 일단 고려를 해볼만한 수단임은 확실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사육을 할지 말지 정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내 말에 대해서 어느정도 공감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일원들. 지금은 우선 집의 증축에 대한 일부터 우선시하고, 나머지 일을 차근차근 진행시키는 편이 좋을것 같다는 쪽으로 의견이 합치되자, 다시 편안한 식사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설거지는 나무 작업을 하러 나가지 않았던 누나와 체리가 담당하게 되었다. 나머지 인원들은 노동력으로 인해 한층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서 서로 안마를 해주고 있는 상황. 나는 창고로 향해서 공구에 녹이 슬지 않도록 정성스레 닦는데 여념이 없었다. 엘리의 부모님들께서 필요한 최소한의 공구 정도는 녹이 슬지 않게 미연에 방지를 한 덕분에 톱이라든지 손망치라든지 하는 기본적인 공구들은 제법 쓸만한 상태를 갖추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구조대가 올 지 모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주기적인 관리를 해야 하는 것은 가히 필수적인 일과 중 하나. 기름칠을 할 수 있다면 더 좋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무인도가 무슨 중동 지역도 아니고, 땅만 파면 기름이 철철 흘러 나오는 장소와는 확연하게 다르기 때문에 무리한 기대는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가볍게 넘긴다. 벌써 어두컴컴한 밤하늘 덕분에 옆에서 엘리가 화롯불을 들고 불을 비춰준다. 멀뚱멀뚱 서있기만 하는 엘리였지만, 불을 들고 서 있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금의 내게는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빛을 선사해주는 중대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 공구들도 지금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정기적인 정비를 한다고 해도, 시간의 거스름을 이길 수는 없는 법. 언젠가는 녹이 슬고, 결국은 본래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날이 올 것은 확실한데, 과연 그 전까지 우리들이 무인도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더 문제가 되는 셈이다. 가급적이면, 아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전에는 나가고 싶은데 말이다. "톱하고 망치는 됐고... 오케이. 이제 끝났네." "...The end?" "예스, 예스." 내 말을 희미하게 알아들은 엘리가 끝났냐는 듯이 나에게 물어온다. 예전에 한번 언급했던 기억이 아직도 나지만, 엘리는 정말 학습능력이 뛰어나다. 한국어도 이제 어느정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올랐으니까 말이다. 엘리를 데리고 산장 안으로 들어온 우리들. 설거지를 마친 누나와 체리를 포함해서 사과를 시식중이던 일행 중 세리아가 우리들에게 포크에 하나씩 사과조각을 꽂아서 건내준다. 무인도에서 생성되는 과일이라면 전부 다 먹을 정도로 편식을 즐겨하지 않는 엘리는 잠자코 사과조각을 받은 뒤에 얌냠쩝쩝 먹기 시작한다. 흡사 먹는 모습이 초호기와 비슷하다. 아무래도 작은 몸짓으로 귀엽게 과일을 먹는 모습 때문에 그렇게 보이리라 생각해본다. 세리아의 옆에서 과일을 자르고 있던 아리아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성실하시네요. 선배."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모습에는 나도 놀라고 있는 중이다." "그 말을 다른 뜻으로 해석하자면, 평소에는 전혀 성실하지 않았다는 뜻이 되겠군요." "...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된 것이잖아. 그거." 도움을 요청하려는 듯이 누나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이제 막 사과를 한 입 베어 문 누나가 나와 아리아를 번갈아보더니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나에게 말한다. "도대체 내게 어떤 대답을 바라고 그러는거야? 남동생." "아리아가 방금 한 말을 부정해달라는 뜻이잖아." "왜 그래? 사실인데." "뭐가 사실이라는 거야. 오히려 불성실한 쪽은 누나잖아." "그거야 나는 누나고, 너는 남동생이니까 나는 다 용서가 되는거 아니야?" "얼토당토 않는 이상한 논리를 적용하지 말라고. 도대체 어느 법에 그런 규율이 나와있는건데." "'유에의 누나에 대한 관련 법' 제 12조 2항에 나와있어." "...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순식간에 국회의원이라도 되어서 법이라도 제정한 것인가. 이 바보 누나 말이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있냐고. 아무튼 본의 아니게 '불성실의 대가였지만 무인도에 환골탈태 해서 성실함의 대명사로 탈바꿈 한 청년'이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다. 나날이 갈수록 나의 이미지만 하락되는 기분이 들어서 조금은 침울해지고 말았다. 빌어먹을. 과일을 먹던 도중에 지아 선생님이 나를 향해 한가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유에. 혹시 나무 자르는 작업, 어느 정도면 끝날거 같은지 알 수 있을까?" "글쎄요. 사실 자르는 것은 어렵지 않을거 같은데, 문제는 옮기는 일이겠죠." "그렇다면 내일부터 전원 그 작업에 투입하면 안될까?" "모두요?" "그래. 가급적이면 급한 일부터 하나하나씩 끝내놓는 것이 좋잖아. 그리고 난 이후에 사육에 관한 이야기도 진지하게 고려해보고." "음..." 하긴.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급한 것은 바로 증축에 관련된 일이다. 다방면으로 일을 벌이는 것 보다 한가지에 집중해서 먼저 끝내놓고 하는 편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전 인원이라... 도박으로 따지면 거의 올 인(All in) 수준이라서 함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 10명(더하기 초호기)이 투입된다면 확실히 작업은 빨리 끝날터인데. "... 그러는 편이 좋겠네요." "그렇지?" "네. 지아 선생님 말씀이 옳아요." 가장 중요한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바로 기상조건. 비가 언제 내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 이상의 작업 시간을 계속 질질 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기상이라는 요소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 작업이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최대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빨리 작업을 마무리 짓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은 나름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자 한번씩 번갈아가며 그녀들을 쳐다본다. 아무래도 이건 내가 정말로 독단적으로 정하면 안될거 같은 기운이 마구마구 샘솟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간접적으로나마 그녀들에게 본인의 의견을 말해보라는 식으로 시선을 던진 것이다. 다른 작업도 아니고 순수 노가다 판인데. 게다가 남자도 아닌 여자들을 데리고 일을 하려니까 나도 조금은 미안한 감이 없지않아 있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이라면 하는게 좋은 것이다.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노아 교수님. "어차피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잖니. 오히려 우리들이 자원해서 나서는게 좋겠다고 봐." "나도 찬성." 교수님의 뒤를 이어서 누나도 기운차게 말한다. 뒤이어 아리아와 세리아, 체리와 세린 등등등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표정으로 흔쾌히 이 일의 임무를 맡는다는 식으로 대답하기에 이른다. 솔직히 말해서 약간 감동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 혼자서 개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안도감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모두가 서로 믿고 의지하고 도울 줄 아는 집단생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모습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에는 언제나 그 '충돌'이라는 녀석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서로간의 충돌이나 감정싸움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배려라는 보기 좋은 모습만이 보일 뿐이다. "그럼 내일은 다 같이 가보도록 하죠." ... 무인도에 와서 개인적으로 가장 감명깊은 장면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도 해본다. 취침 전에 잠시 바깥 공기를 마시기 위해 나온 나. 무인도의 밤 하늘은 평소에 학교라는 답답한 작은 공간 안에 틀어박혀있던 나의 가슴을 뻥 뚫어주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넓디 넓은 저 은하수같은 까만 천장. 그리고 전구마냥 빛나는 작은 별빛들. 이것 역시도 무인도의 낭만어린 모습이 아닐까. "뭔가 생각할게 있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노아 교수님. 곧 취침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노아 교수님 역시도 나와 바깥으로 나온 것은 역시나 이 밤하늘을 만끽하고 싶은 기분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라는 예상을 해본다. "잠시 바람 좀 쐬려고요." "밤바람은 차가우니까 조심하렴. 네가 감기에 걸리기라도 하면 위험하잖니." "그렇겠죠?" "가정법이 아니라 확신이란다."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가 되고 있는지에 대한 점은 나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대놓고 자랑할 생각은 없지만, 실제로 이 집단의 리더를 맡고 있기도 하고, 해결하기 난감한 일이 벌어지게 되면 우선 나를 먼저 찾는 것이 그녀들에게는 습관이 되어버린 셈이다. 솔직히 말해서 가끔 귀찮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한 두번 있었다. 전혀 없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 될 테니까 속마음으로나마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나무 자르기 작업에 모두가 동참할 수 있도록 의견을 모은 것이다. ============================ 작품 후기 ============================ 생일 축하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ㅜ_ㅜ 생일 기념으로 저도 연참을 하고 싶었지만, 오늘이 생일인지라 친구들과 술 한잔을 하러 가기 위해 지금 자리를 비운 상태입니다. 그 말인 즉슨, 이 편은 예약 시스템으로 올라간 편수란 뜻이지요. 여하튼,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이 글을 보고 계시는 시점부터 이미 생일은 지나가나 셈이겠지만, 더더욱 좋은 글로 보답드릴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166화 "무인도에 표류된 것도 꼭 나쁜 일 만은 아닌거 같네요." "어머. 그러니?" "뭐... 다른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들었다면 아마 저에게 로우킥과 더불어서 하이킥, 자이언트 스윙, 그리고 바디블로에 가젤펀치, 뎀프시 롤을 날릴지도 모르겠지만 오늘만큼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어째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니?" "...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모두가 이렇게 한 마음 한 뜻으로 위기상황을 극복해 나간다는 일은 멋지잖아요." "아. 그거구나." 빙그레 웃으면서 내 말을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노아 교수님. 작은 어깨에 가디건을 두르고 내 옆에 나란히 선 노아 교수님이 나와 같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한다. "사실은 모두 불안한거야." "불안... 인가요." "그래. 시간이 지날수록 구조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 그리고 어떻게 이 섬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면 좋을지 난감한 상황이 연속해서 벌어지고 있지. 현재 우리들의 상황이 상황인지라 겉으로는 표출하지 않고 있지만, 각자 불안감이 내포되어 있을것이 분명해. 너도 그렇고, 그리고 나 역시도." "......" "그런 면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재미있는거야. 속으로는 어찌될지 한 치 앞도 분간하지 못하는 불투명한 미래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 상황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인간이 다른 동물들, 혹은 다른 존재들을 재치고 지구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 이유가 뭔지 알고 있니?" "글쎄요..." "어떤 일이 있어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야. 물론 이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야. 절망한 끝에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쌍한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지. 하지만 그런 사람들 보다도 희미하지만 희망이라는 이름의 한줄기 빛에 의존하며 어떻게 해서든 난관을 극복하려는 불굴의 의지를 보이는 것이 바로 인간이야. 포기하고 싶지 않아. 쓰러지고 싶지 않아. 다시 일어나고 싶어. 이런 갈망은 어찌보면 인간 본연의 본능일지도 모르지."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희망이군요." 교수님의 말씀을 다시금 속으로 되새겨본다. 처음 배가 난파되고 나서 이 무인도로 흘러오게 된 일. 그리고 눈을 떠서 교수님과 조우했던 일. 도중에 유아 선배를 필두로 아리아와 세리아 자매의 합류와 누나, 엘리와의 만남. 마지막으로 난파선에서 우연치 않게 만날 수 있었던 지아 선생님과 세린, 체리. 그리고 에바 초호기까지. 모두가 무인도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우연치 않게 목숨을 건지고, 그 속에서 서로 끝까지 살고자 하는 의지의 불씨를 꺼지지 않게 지탱해주면서 활활 태워왔던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마른 장작이 되어주면서 희망의 불씨를 살려주는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 낸 것. "본래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너도 잘 알고 있지?" "네." "무인도에 표류되었던 로빈슨 크루소 역시도 그렇잖아. 나홀로 무인도에서 견디는 일을 참을수가 없어서 가상의 친구를 만든 뒤에 끊임없이 말을 거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한 것도 어찌보면 이해가 가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해. 인간은 본래 외로움을 많이 타는 존재니까." "...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다른 의미로 '왕따'라든지 '아웃사이더'라는 존재들은 오히려 우리들보다도 더 불쌍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본인들의 의사와는 다르게 그런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무인도에 표류된 우리들은 다수의 사람들과의 만남이라는 기회를 가질 수가 없을 뿐이지만, 그들은 주변에 충분히 이야기해줄 수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따라는 것은 어찌보면 집단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사회의 악이라고 분류할 정도로 아주 안좋은 현상이라고 본다. 의도적으로 한 사람을 따돌리면서 그 사람에게 정신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은 잘못된 일 아닌가. 만약에 본인이 그런 입장이 되어봐라. 절대로 그런 악의 넘치는 행동은 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인도에서의 가장 큰 고달픔은 자연재해나 배고픔, 그리고 불편함이 아니라 바로 '외로움'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들은 상호간에 믿을 수 있는 동료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같이 한 집에 살고 있다. 멧돼지와 같이 거대한 덩치가 없어도, 표범이나 호랑이와 같은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이 없어도, 노루와 사슴같은 빠른 스피드가 없어도 인간은 결속력이라는 그 어떠한 무기보다도 가장 강력한 무기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저녁에 내가 확인한 것은 바로 그 '결속력'. 이런 이유로 다른 그 어떤 때보다도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을 조금은 짠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잠시 말없이 서있는 나를 바라보던 노아 교수님이 상냥한 미소와 함께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면서 산장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너무 늦게까지 있지는 마렴." "노력해볼게요." 교수님의 배려 역시도 결속력이라는 것에서 나온 것일까. 나를 걱정해주는 그 마음은 교수님의 위치에서 제자의 몸을 걱정하는 것보다 무인도에서 같이 살아남은 생존자들끼리의 유대감이라고 인정하고 싶다. ...... ......... ........... "그만 들어갈까." 어차피 내일부터 다시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산장의 증축 작업 말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벌였던 일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작업이기 때문에 최대한 체력을 보충해두는 편이 좋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자인 내가 먼저 팔을 걷고서 선행하는 모습을 보여야 다른 사람들도 기운이 나지 않겠는가. 평소 같으면 부담감 때문에 자주 밤잠을 설칠만도 한데, 오늘은 왠지 잠이 잘 올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래서 사람은 마음먹은 그대로 오늘의 기분과 행동이 변한다는 말이 있나보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우리는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마친 뒤에 산장 바깥으로 모이게 되었다. 이제 곧 출발준비를 마친 우리들. 오늘 하루종일 나무 작업을 해야 하는 탓에 이리저리 몸을 풀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안쓰던 몸을 쓰려고 하니까 약간 어색하게 느껴질지 모르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미리 적응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특히나 운동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노아 교수님과 세리아, 아리아 자매, 그리고 체리. 이 4명을 중점적으로 스트레칭을 시키고 있는 내 모습을 본 누나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걸어온다. "어때. 준비 다 되었어?" "공구만 미리 준비해두면 완료지." "그럼 끝이겠네. 나하고 유아가 미리 챙겨뒀거든." "정말로??" "... 뭐야. 그 미심쩍은 눈빛은." "아니. 누나가 왠일로 스스로 나서서 귀찮은 작업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그랬어." "다시 창고 안에다 넣어버린다." "미안. 농담이야." 그냥 웃자고 한 아메리칸 조크였는데, 미묘하게 누나가 신경을 많이 쓰는 모양이다. 오늘부터 새나라의 어린이처럼 성실한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이라도 한 것일까. 뭐, 남동생의 입장인 나로서는 그런 면이 좋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준비 완료. 이제 나무 자르는 작업장으로 향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모두 모인 상황에서 나는 머리를 긁적이고선 우리들이 가야 할 숲 길을 바라본다. "아무래도 길을 먼저 터놓는 것이 좋겠는데요." "나무 자르는 작업을 하는게 아니라요?" 내 말에 자연스럽게 질문을 먼저 던지는 아리아. 이론적으로 따지기를 좋아하는 그녀다운 태도라고 보여진다. "어차피 나무를 자르고 난 이후에 그 나무 기둥들을 산장까지 옮겨와야 하니까 미리 길을 터놓으면 귀찮은 작업 일부를 끝낼 수 있고 좋잖아." "역시나 무인도에서 성실함으로 개과천선한 선배다운 말씀이시네요." "그 소재, 아직까지 써먹고 있냐?" "가끔 애드립을 칠 것이 없으면 써먹으려고요." "한번 지난 애드립을 재활용해봤자 재미 하나도 없다고." 요새 은근히 개그 캐릭터가 되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이는 아리아 때문에 난감하다. 본인의 캐릭터에도 어울리지 않는 옵션을 집어 넣으려고 하다니. 차라리 세린이나 누나가 그런 속성을 가지게 된다면 볼만 할 터인데. 어찌되었든 길을 터놓으며 나무 자르는 작업장으로 향하게 된 우리들. 낫을 든 사람 4명이 각자 앞서 나가면서 허리까지 길게 자란 풀들을 베고, 뒤에 사람들은 얼굴이나 기타 신체 부위에 굵히지 않을 정도로 잔가지를 쳐내면 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작업. 나무를 자르기 위해 몇시간동안 톱질을 하는 것보다는 배로 쉬운 작업이다. 낫질은 그냥 휘두르기만 하면 되는거고, 잔가지는 부러뜨리면 되지 않은가. 말로는 간단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것이 전부다. 최대한 성실하게 작업을 수행하며 도착한 작업장. 언제봐도 힘이 빠지는 장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주 적당한 예시로 이런게 있을 것이다. 이제 막 제대한 군인이 예비군 훈련을 받기 위해서 다시 전투복을 입는다면, 마치 전투복이 기력을 빼앗아가는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내가 직접 체험한 일이라는 뜻이 아니고, 요새 자주 언급되는 제대한 친척형의 일화를 담은 예시였다. 나는 아직 동원훈련 받을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받는다 해도 재학생 신분이라서 학생 예비군에 들어가 있겠지만 말이다. 군인의 전투복 수준은 아니지만, 그만큼 나무를 자르는 작업이 힘들다는 사실을 잘 표현했다고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다. 나날이 갈수록 나의 표현력도 늘어가는군. "... 생각보다 많네." "그러게요." 지아 선생님의 첫마디에 노아 교수님도 사뭇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을 한다. 잘라야 할 나무기둥 자체가 워낙 두껍기도 하고, 그 양도 장난 아니게 많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어제 술자리가 있었던 탓에 각요를 많이 놓쳤습니다 ㅜ_ㅜ 내 각요... 으헝헝헝헝 167화 도시락 담당을 배정받은 세리아와 체리는 근처 가까운 장소에 가지고 온 도시락을 내려놓는다. 아침 일찍 출발한 덕분에 아직 점심시간 전까지는 꽤나 여유가 있는 상황. 이래서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래를 먼저 잡아 먹는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선착순도 그렇지 않은가. 먼저 하는 사람이 임자, 장땡, 내가 먼저 침 뱉었음 퇘퇘퇘!인 것이다. 마지막은 유치해도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그런데 여기에 있는 나무들만 자르면 되는거야?" 누나의 물음이 이어진다. 그렇다고 누나 말 그대로 막무가내로 나무를 자르거나 하지는 않는다. 어제 엘리와 내가 괜히 X자로 나무기둥에 표시를 해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엘리하고 내가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쓸만한 나무기둥으로 보이는 것은 미리 표시를 해뒀어." "어떤거?" "이런 식으로." 우리들 근처에 있는 나무 중 표시가 되어있는 것으로 골라서 누나에게 직접 보여준다. 선명하게 'X'자로 표시가 되어있는 나무기둥. 멀리서 보면 제대로 분별이 가지 않지만, 2~3m 정도 거리를 유지해서 본다면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의 표시 능력은 자랑한다. 이래서 사전에 준비를 해두면 몸이 편하단 말이야. 그동안 내가 했던 일들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본다. "자. 그럼 모두 모여보세요." 일단 크게 2개조로 나눠서 나무를 자르는 작업을 진행해야 할 듯 하다. 우선은 노아 교수님과 지아 선생님은 갈라놓는 편이 좋겠지. 각자 교육자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한 명씩 속해 있으면 도움이 될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다음은... "저거, 혹시 원숭이 아니야?" "원숭이라고?!" 유아 선배의 단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가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으로 쏠리게 된다. 나무 위쪽을 바라보니, 희미하게 움직이는 무언가. 정말이네. 티비나 아니면 동물원에서 흔히 보는 동물 일순위, 원숭이가 나무 위에 우리들을 지긋이 바라보면서 우끼끼 거리고 있었다. "무인도에서 원숭이도 살고 있다니. 다시 보겠는걸." 누나가 허리춤에 손을 올려놓고 원숭이들을 조금 더 관찰하고자 두 손으로 햇빛 가리개를 임시적으로 만들면서 녀석들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확실히 원숭이를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다. 동물원에 가고 나서도 원숭이를 볼 일은 없었기 때문에 지금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원숭이를 보는 독특한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는 천연 온천 같은 곳에서 흔히 원숭이를 볼 수 있다고들 하던데. 한국에서는 야생에서 원숭이가 모습을 드러내며 왔다갔다 할 만한 조건은 아니기 때문에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본 적이 없고 말이다. 무인도에서가 아니라 사회에 있을 때 숲 길을 걸어가면 다람쥐나 청설모는 자주 볼 수 있어도 원숭이는 못보지 않는가. 나도 예전에 부지런한 아버지를 따라서 등산을 몇번 가본 경험이 있지만, 거기서 원숭이를 본 기억은 없다. 그런데 설마 무인도에서 원숭이를 보게 될 줄이야. 조금은 신기한 느낌이다. "예상은 했지만 체구가 엄청 작네." 누나의 솔직한 감탄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원숭이가 멧돼지 급으로 덩치가 큰 생물도 아니고, 인간 수준으로 거대한 덩치를 자랑했다면 그건 원숭이가 아니라 털이 많은 사람이라고 불러야 할 판국이다. 혹시 또 모르지 않는가. 키 작은 원숭이는 loser라는 말이 유행할지도. 나무에 매달린 원숭이 한마리가 땅에 내려오면서 우리들을 경계하듯이 으르렁 거리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저 집단의 우두머리, 즉 암컷들을 이끄는 대장인 수컷 원숭이로 보이는데. 아니지. 가정법이 아니라 실제로 남성기가 덜렁덜렁 흔들리는 모습을 보아서는 저 녀석, 분명히 수컷이다. 부정할 수 없는 물증이 보이니까 말이다. 원숭이의 변태 노출 행위(?) 덕분에 약간 얼굴이 빨개진 유아 선배가 어색한 시선으로 원숭이를 바라본다. 특히나 하체쪽은 가급적이면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선배의 모습이 가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반면에 누나는 원숭이의 성기와 내 아랫쪽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말한다. "역시나 인간과 제일 닮은 동물다워." "도대체 어딜 보면서 말하는거야. 변태 누나." "그래도 크기 쪽은 네가 승리니까 기뻐해도 돼." "동물이랑 비교당하는 일 자체가 불쾌한데." 나름 자존심 싸움(?)에서 승리했지만, 이긴 느낌이 안든다. 그야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의 성기가 원숭이의 성기보다 큰 것은 생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 아닌가. 개인차가 있다고 태클을 걸어 온다면 할 말은 없겠다. 아무튼 한동안 우리들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수컷 원숭이.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체리의 머리 위에 대기중이던 초호기가 폴짝 뛰어가서 수컷 원숭이를 상대로 야옹! 야옹! 하며 날카롭게 울부짖기 시작한다. 견원지간(犬猿之間)도 아니고 묘원지간(猫猿之間)인가. 이거. 그런데 고양이와 원숭이도 사이가 나쁜가?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뭐,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가든 대놓고 서로 적의를 보이는 초호기와 원숭이. 참고로 초호기도 수컷이다. 품종 자체는 다르지만, 이것도 나름 수컷끼리의 자존심 싸움이라는 뜻인가. 새끼 고양이인 초호기가 명백하게 밀리는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깡다구가 있는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초호기. 녀석, 갑자기 왠지 모르게 자랑스러운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나중에 크게 성장할 녀석임에 틀림이 없다. 한동안 초호기와 수컷의 기싸움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 그러던 순간에 갑자기 체리의 비명소리가 이어지며 다급하게 우리들을 찾는다. "유, 유에 오빠!" "무슨 일이야?!" 줄곧 에바 초호기 VS 정체모를 수컷 원숭이의 대결 구도 양상을 바라보던 모두의 시선이 이번에는 체리에게로 쏠린다. 그러자 잔뜩 겁을 먹은 체리가 말을 더듬으며 우리들의 점심식사가 위기라는 식으로 상황의 다급함을 전해주기 시작한다. "워... 원숭이가... 도시락을 가져갔어요!" "뭐라고?!" 위기다. 정말로 위기다. 감히 우리들의 도시락을? 인간이 먹을 도시락을 원숭이 주제에 훔쳐갔단 말인가! ... 가만. 잠깐만 머리를 굴려서 지금 우리들의 상황을 분석해보자. 저 수컷 원숭이의 등장으로 인해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게 되었다. 그 순간의 찰나를 마치 노렸다는 듯이 다른 원숭이들이 우리들이 모아놓았던 도시락을 가지고 도주를 한 것이다. 설마 유인 작전인가? 미인계도 아니고 이런 한심한 술책에 걸리다니. 그것보다도 원숭이들에게 속았다는 일 자체가 인격적인 모독감을 선사해주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 우리들의 도시락을 훔쳤단 말이지. "어떻게 하죠? 선배." 아리아가 나에게 앞으로의 대책을 물어보려는 듯이 질문을 던진다. 사실 점심 한 끼 분량의 식량이 없어졌다고 그리 큰 소란을 피울만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점심이야 하루 굶어도 안 죽지 않은가. 무인도에서 굶주림에 대한 훈련이 나름 잘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지금 벌어진 사건은 그리 큰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중노동을 해야 하는 빡센 스케줄을 가지고 있다. 노동력이 비례해서 자연스럽게 식사의 양과 중요성도 커지는 법. 한마디로 말해서 HP를 체워주는 힐링포션과도 같은 역할을 해주는 점심 도시락을 지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고작 '원숭이'들에게 강탈당한 것이다. 그것도 책략으로 말이다. 이것은 인류에 대한 도전이며, 만물의 영장이기도 한 인간에 대한 모욕감이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잖아." 두 주먹을 불끈 쥔 나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원숭이들이 도시락을 들고 도망치기 시작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단호하게 말한다. "되찾으면 되는거지!" "저렇게 빠른 녀석들을 상대로 어떻게 해서요." "근성으로!" "... 한마디로 말해서 대책따윈 없다는 말이군요." "인간의 의지를 무시하지 말라고. 아리아. 인간사 마음만 먹는다면 불가능한 일도 가능으로 만들 수 있단 말이다. 임파서블을 파서블로 만들 수 있는 근성을 얕보지 말라고!" 모처럼 끓어오르는 이 느낌. 간만에 열받았다 라고 외치고 싶을만한 이 주체할 수 없는 분노는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이다. "인간을 골탕먹인 죄, 백번 처벌당해 마땅할 것이다!" "... 선배. 혹시 술 같은거 마신 적 없으시죠?" 숨이 가파옴이 허파 끝에서 느껴져 오지만, 지금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쓸 시간이 아니다. "세린! 뭔가 좀 보여?" "보일리가 없잖아!" 저 멀리서 세린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온다. 사실 나 역시도 원숭이들의 꼬리 뿐만이 아니라 털 끝 조차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하겠다. "누나는?" "이쪽도 안 보여." 근처에 서있는 누나의 시야에 대한 정보도 얻어본다. 그러나 역시나 원숭이들은 긴 꼬리를 숨기고 감감 무소식. 이 녀석들, 어디서 숨밖꼭질 강사라도 초빙해서 수업이라도 들었나. 왜 이리 잘 숨냔 말이다. 무슨 전생에 닌자도 아니고 말이다. 도시락 쟁탈전... 이 아니라 빼앗긴 도시락을 다시 되찾아오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편성된 팀원의 구성은 나와 엘리, 누나, 세린, 그리고 유아 선배 이렇게 5명이 전부다. 가급적이면 모든 인원을 다 동원하고 싶었지만, 그나마 몸놀림이 가장 빠른 순서대로 뽑다보니 절로 이런 멤버가 나오게 되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사냥 멤버. 본래 멧돼지를 사냥할때도 이런 멤버로 사냥을 나섰던 경험이 있었는데, 그 데자뷰를 느끼듯이 똑같은 인원으로 때 아닌 숲 속 탐험을 하게 되었다. 나무 위를 중점적으로 바라보며 녀석들의 행방을 쫓고 있는 나에게 중요한 제보가 들려온다. "유에! 전방 5M!" 전방 수류탄도 아니고 전방 5M라는 어림짐작한 거리의 수치로 나에게 알려주는 유아 선배의 목소리가 숲 안쪽에서 메아리처럼 울린다. 그래도 유아 선배의 목소리 덕분에 금새 또다시 원숭이의 행방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들의 뜨거운 시선을 느꼈는지 원숭이들이 갑자기 냅다 도주를 시작. 눈치 하나는 정말 도가 튼 녀석들이다. 그 정도 수준급의 눈치라면 나도 좀 알려줘라. 이 원숭이 자식들아. 아무튼 또다시 시작된 추격전. 원래는 숲속의 길을 뛰어가는 일에는 엘리가 우리들 중에서 가장 압도적인 스피드를 자랑했지만, 지난 노루 사냥과 더불어서 멧돼지 사냥 등 나름의 경험을 통해서 숲 속에서도 빠르게 달리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각자의 스킬과 노하우를 터득한 우리들이었기 때문에 얼추 엘리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나는 이제 거의 엘리와 동급으로 달릴 수 있을 정도의 속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무리 엘리가 학습능력이 빠르다고 해도, 역시나 남자의 근력을 당해낼 수는 없는 노릇. 신체적인 차이는 명백하게 우리 둘의 수준을 갈라놓는다. 내가 제일 먼저 선두에 서고, 뒤이어 엘리와 세린, 유아 선배와 마지막으로 누나가 원숭이의 뒤를 따른다. 어차피 숲 안쪽으로 간다고 해도 무인도의 내부 구조를 자세히 알고 있는 엘리가 있고, 통역가이가도 한 누나까지 있으니까 이대로 추격을 계속 해도 별다른 무리가 없다고 판단한 나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작중 내용 토크 1회 and 오덕 토크 3회입니다. 코멘트에서 새로운 등장인물에 대한 질문을 남겨주신 분이 계셔서 우선 거기에 대한 답변을 먼저 올리고자 합니다. 아직까지는 등장인물 추가에 대한 계획이 없습니다. 이건 일단 글이 계속 연재되고 나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덕 토크 시간입니다. 오늘은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를 계속해서 유지중인(지금도 1위더군요.) 진격의 거인에 대해서입니다. 오늘을 통해서 저는 우라나라에 숨은 덕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는 당당한 덕후라서 괜찮습니다. 오예! -_-b 그리고 진격의 거인 재미있습니다. 연출력이 괜찮더군요. 세게관도 참신하고... 아무튼, 한번쯤은 보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168화 그나저나 정말 빠르다. 원숭이 녀석들 말이다. 가뜩이나 몸집도 작아서 제대로 눈에 띄지도 않는 판국인데, 마치 숲 속을 제 집 안방인 듯 양 자연스럽게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보니까 역시나 원숭이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기 시작한다. 괜하 나무 타기의 일인지라는 칭호가 붙는게 아니다. 저런 움직임은 아무리 체조의 달인이나 야마카시의 달인이 온다고 해도 저 정도 수준의 움직임을 그대로 똑같이 재현한다는 것은 아마도 기원전 이전의 문화재를 복원하는 일보다도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한마리도 아니고 다수다. 우거진 수풀 사이로 모습도 보이지 않으면서 셀 수 없을 정도의 원숭이들의 소리고 '우끼끼'하고 들려오는 것이다. 절대로 녹음해서 오디오로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실체가 있는 진짜라는 뜻이다. 잠시 발걸음을 멈춘 우리들. 원숭이들의 모습이 보이기는 하지만, 도시락을 가져간 원숭이는 보이지 않는다. 기껏 쫓아왔더니 소득도 없이 돌아갈 판국이다. 나와 엘리의 속도를 따라잡은 세린과 누나, 그리고 유아 선배가 나무 위에 열매마냥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원숭이들을 징그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다가온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는 세린이 말한다. "원숭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빠른 동물이었어?" "그건 나도 오늘 처음 알게 되었지만 말이야." 애초에 실제로 원숭이를 본 일도 처음인데, 원숭이에 대한 숨겨왔던 녀석의 수줍은 마음 모두를 알 수가 없지 않은가. 그건 그렇다고 치고, 숫자로 보아서는 아무래도 우리가 원숭이 소굴까지 뒤를 따라온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누나." 옆에 있는 누나를 부르자, 나무 위에 매달려있는 원숭이들을 관람하고 있던 누나가 대답한다. "응. 왜 그래?" "엘리한테 이 곳이 원숭이들의 소굴이 아닌지 물어봐줄 수 있어?"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봐." 우리들보다도 3년동안 무인도에서 살아온 엘리였기 때문에 이 장소에 대한 지식은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해박하다. 그래서 혹시나 한번 물어본 결과, 누나의 질문을 들은 엘리가 고개를 상하로 끄덕이는 모습을 머지 않아 확인할 수 있었다. "굳이 말로 설명 안해도 알 수 있지?" "물론." 누나가 엘리의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 대신 물어오자,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가 원숭이 소굴이든 아니면 호랑이 소굴이든 상관없다. 결론적으로 어디에 끌려가든지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있으니까 말이다. 이래서 우리 조상님들의 슬기와 지혜가 느껴지는 속담을 평소에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배움의 가르침을 상기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숭이들은 우리에게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아까 에바 초호기와 마주하며 서로 이빨을 드러낸 채 (초호기는 아직 제대로 이빨이 나지도 않은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으르렁 거리던 위협적인 태도 보다는 마치 우리들을 골탕먹이고 싶어하는 장난끼 넘지는 분위기가 아닐까 하는 추측성 있는 가설을 세워본다. 평소 장난끼 다분한 누나를 모시고 지난 몇십년동안 살아온 나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동물이라고 하더라도 그 분위기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감수성은 정말 위대하기 때문이다. 개그 콘서트에도 나오지 않는가. 감수성 말이다. 유아 선배가 한숨을 쉬면서 말한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예정인데?" "... 그러게요." "이보세요. 네가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하니." "잠시만요. 생각을 해볼게요." 원숭이 소굴을 발견했다는 것은 사실 우리들에게 득이 될 것이 별로 없다. 게다가 도시락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고. 그리고 기왕 이렇게 왔으니까 사냥이라도 할까 하지만 원숭이를 사냥한다고 해도 먹을만한 것이 나오는가. 차라리 살이 뒤룩뒤룩 찐 덩치 큰 멧돼지 한마리를 사냥해야 적어도 10인분 정도는 나오지 않는다. 고작해야 앙상한 원숭이를 사냥한다고 해도 먹을 고기도 안 나올거 같다. 그리고 저렇게 많은 원숭이들을 괜히 자극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숫자상으로도 부족하고, 지리적인 위치도 불리하다. 위에서 원숭이들이 돌이라도 던지게 된다면, 우리들은 방법이 없이 그냥 샌드백 마냥 당하는 꼴 사나운 장면을 연출하게 된다. 그냥 돌아가는게 좋을까. 도시락이 아깝기는 하지만, 역시나 지금은 일시적인 후퇴를 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 라고 마음을 먹자마자 유아 선배의 짧은 감탄사 섞인 말이 곧장 들려온다. "도시락은 저기 있는거 같은데." "......" 침착하게 손가락으로 도시락의 위치를 가리키는 유아 선배. 더불어 우리들의 시선도 유아 선배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향하고 있는 방향으로 틀어지게 된다. 도시락을 들고 있는 원숭이 두마리. 저 녀석들이 실제로 훔쳐간 범인(犯人)... 이 아니라 범수(犯獸)라고 해야 하나. 조목조목 따져보면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아무튼 사소한 한자 기초 상식따위는 가볍게 스킵 버튼을 눌러서 생략하도록 하고. 문제는 바로 저 도시락을 들고 있는 두 마리가 나무 위에 있다는 뜻이다. 대략 3미터 정도의 높이가 될 법한 나뭇가지 위에서 태평하게 서로의 등을 긁어주면서 우리들이 있든 없든 무시하는 무례한 태도를 보여주는 원숭이 커플. 그렇게 여유부리는 것도 지금 뿐이라고. 이 녀석들아. 감히 인간님들의 소중한 점심을 훔쳐가? 네놈들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 전차를 끌고 가서 네놈들의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겠어! 라는 성대모사도 조금씩 넣어주는 센스를 발휘해본다. "... 엘리." 조용히 엘리를 부른 나. 뒤이어 통역가인 누나에게도 작전 지시를 전달할 내용을 미리 말해주며 엘리에게 말해줄 것을 당부한다. 짧고도 간단한 작전 내용을 들은 엘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는 듯이 긍정적인 제스쳐를 보여준다. 역시나 배우는게 빠른 착한 아이. 어떤 의미로 엘리는 천재 타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엘리에게는 대충 설명을 해뒀고, 남은 사람들인 누나와 세린, 그리고 유아 선배를 불러모은다. "나하고 엘리가 도시락을 향해서 돌진할 동안, 시선을 좀 끌어줬으면 좋겠는데." "원숭이들의 시선을 끌라고?" "그래." "무슨 수로."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세린. 그녀와는 다르게 누나가 싱긋 웃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바깥으로 내뱉기 시작한다. "노래라도 부를까?" "누나의 노래 실력은 돌고래 초음파 수준으로 인간에게 맞지 않는 음역을 자랑하니까 안 부르는게 좋을걸." "뭐야. 내 노래 실력이 어디가 어때서."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볼을 부풀린 채 '나 화났음!'이라는 감정표현을 하는 누나.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대목이라고 보여지지만, 실제로 누나의 노래 실력은 바닥을 기고 기는 것도 부족해서 드릴로 지하를 뚫고 아래로 향할 정도로 심하다. 인간적으로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음처리는 물론이고 저게 노래인지 아니면 무슨 주술의 의식에 필요한 주문을 영창하는 것인지 제대로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노래실력이 영 꽝이다. 신은 누나에게 뛰어난 두뇌와 운동신경을 부여했지만, 동시에 최악의 노래실력을 선사해준 것이다. 과연. 노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아 선배가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한다. "그럼 춤이라도 출까?" "그건 참아주세요." 결론은 원숭이들의 시선을 끌 방법은 '없다'가 되었다. 아니, 사실은 있긴 하지만 효율적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로 마무리를 짓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작전을 수정하도록 하자. "유아 선배는 저와 팀을 짜고요. 엘리는 세린과 누나, 이렇게 3명이서 한 팀을 짜세요. 그 인원들로 각각 도시락을 한개 씩 탈환함을 목표로 행동하도록 하죠." "어떤 방식으로? 녀석들은 지금 나무 위에 있잖아." 세린의 질문 공세가 이어진다. 3M의 나뭇가지 위를 어떤 형식으로 원숭이들 수준으로 빨리 올라갈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을 물어본 것이리라고 요점만 간략하게 파악한 나는 이들에게 다시 상세한 설명을 해주기 시작한다. "나와 세린, 그리고 누나는 일종의 '발돋음대'가 되는거야." "무슨 뜻이야, 그거. 알기쉽게 설명을 좀 해봐." "유아 선배와 엘리는 각각 우리들이 발판이 되어서 나무 위로 올려주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면 된다 이거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재주껏." "... 뭐야. 그게." "아무튼 시간이 없어. 곧 있으면 점심시간이니까 빨리 도시락을 가지고 돌아가자고." 라고 말하면서 나는 유아 선배를 데리고 나무 아래로 향한다. 돌발적인 내 행동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같이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는 일행들. 다른 팀은 누나가 즉흥적으로 뭔가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어찌되었든 '알아서' 엘리를 나뭇가지 위로 올리면 되는 것이다. 나뭇가지 바로 아래에 자리를 잡은 내가 두 손을 깍지끼고서 유아 선배에게 말한다. "나머지는 선배에게 알아서 맡기도록 할게요." "너무 그런 식으로 부담주지 말라고ㅡ!" 하지만 유아 선배의 눈 역시도 '감히 우리들의 점심을 빼앗다니. 발칙한 것들!'이라는 의지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괜히 한국사람들이 '밥심'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밥의 위력은 굉장하단 말이다. 물론 실제로 우리들이 도시락으로 싸온 식사는 '밥'이라는 이름의 곡식이 아니지만 말이다. ============================ 작품 후기 ============================ 오랜만에 확밀아 토크 X회(기억이 안납니다;)입니다. 이번 시즌 현재 상황을 정리해보자면 우선 감사형 춘향 키라를 노리기 위해서 음표를 열심히 모으고 있습니다. 현재 순위가 대략 11500정도 되더군요. 그리고 카드는... 서브드랍 카드는 일단 노멀 풀돌을 완료한 상태입니다. 음표 보상 카드는 키라 풀돌이고요. 그런데 정작 중요한 요정 카드들은 아직 감감무소식이군요. 기교의 장으로서 이번 시즌 카드들은 나름 탐나는데 말입죠 ㅡ_ㅡ;; 어쨌든, 이번 시즌도 힘내봅시다! 169화 깍지 낀 내 손을 밟고서 그대로 나뭇가지 위로 점프를 뛰는 유아 선배. 단순무식한 방법이지만 이것이 그나마 나무 위로 가장 빨리 올라갈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에 감행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으랴아아아아압!!!!!!!!" 기운 찬 기합소리를 내지르며 그대로 공중으로 몸을 날리는 유아 선배가 나뭇가지를 잡고서 재빨리 올라간다. 꽤나 두꺼운 나뭇가지였기 때문에 유아 선배와 같은 여성의 몸무게는 충분히 지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른 팀인 누나쪽은 역시나 나와 마찬가지로 세린과 누나 둘이서 손을 마주잡은 채 작은 체구의 엘리를 그대로 위까지 점프시켜줄 수 있는 받침대를 일시적으로 만든다. 워낙 운동신경이 좋은 엘리 역시도 가뿐하게 그대로 나뭇가지 위로 안착하는데 성공. "거기 서ㅡ!!" 유아 선배가 도시락을 들고 있는 원숭이 한 마리를 향해 뛰쳐간다. 뒤이어 엘리 역시도 마찬가지. 유아 선배와는 다르게 크게 소리를 내지르거나 하는 행동은 보이지 않지만, 원래 조용한 사람이 더 무서운 법 아닌가. 소리소문 없이 엘리의 빠른 몸놀림이 원숭이의 뒤를 바짝 쫓기 시작한다. 나뭇가지 위에서 시작된 추격전. 아래에 있는 우리들도 도시락을 든 원숭이가 다른 나뭇가지로 옮겨 탈 때마다 매번 그쪽으로 이동하면서 원숭이들의 위치를 알려준다. "유아 선배! 바로 앞 나뭇가지로 넘어 갔어요." "이래서 원숭이는 정말 질색이라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도시락 탈환에 대한 열정은 나와 못지 않게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유아 선배. 그대로 또 한번 몸을 날리면서 반대편 나뭇가지 위에 안착한다. 저번에 내가 불어난 강물 위에서 서커스 쇼를 보여줬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 아무래도 남자와 여자의 체중이 그만큼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이유 분석까지 해본다. "이 녀석! 좀 얌전히 있어!" 유아 선배가 근처에 있는 잔가지를 꺾으면서 오른손에 든다. 아마도 유아 선배 본인의 입장에서는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왜 하필이면 이때 자신이 고생고생해서 만들어둔 목검을 가지고 오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가져온다고 해도 별로 효율성을 발휘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아무래도 검도부 부장으로서 뭔가 몸을 움직일 때 목검이 없으면 불안하거나 하는 그런 습관이 몸에 베어있는 것인가. 반면에 엘리는 원숭이와 거의 호각을 벌일 정도로 빠른 속도를 보여준다. 원숭이 급으로 작은 것은 아니지만, 엘리 역시도 나뭇가지 위에서 마음놓고 쉽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될 정도로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원숭이와 비교해도 전혀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따라잡는다. "그렇지, 엘리!" "조금만, 조금만 더!" 엘리쪽 팀원인 누나와 세린이 응원 겸 지시를 들려준다. 우리쪽은 아직 원숭이를 따라잡으려면 한참 남았는데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상징후가 발생하게 되었다. 쫓기던 원숭이를 다른 원숭이들이 보호하려는 듯이 몇마리가 유아 선배와 엘리의 앞을 가로막기 시작한 것이다. "뭐야. 원숭이 주제에 덤비겠다고?" 오히려 원하던 바라는 듯이 잔가지의 끝을 원숭이들에게 겨누는 유아 선배. 그것보다도 우리들은 지금 원숭이와 싸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도시락을 탈환하는게 주 목적인데요. 이런 식으로 말을 해보지만, 원숭이들이 진로를 주기적으로 반복을 하게 된다면 내가 말한 것도 소용이 없게 된다. 앞을 가로막는 원숭이들이 없어야 도시락을 든 원숭이의 뒤를 따라가든가 할 거 아닌가. 유아 선배가 마주한 상황과 마찬가지로 엘리의 앞에도 다수의 원숭이들이 포진하게 되었다. 엘리 역시도 움직임을 멈추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판단하다가 유아 선배의 모습을 보더니 자신의 허리춤에 있던 나이프를 꺼내든다. 아무래도 엘리도 싸우기를 선택했나보다. 덩치는 작지만 압도적으로 숫자가 많은 원숭이들을 상대로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사실은 나 역시도 충분히 알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유아 선배와 엘리 단 두명에게 도시락 탈환 임무를 맡기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기도 하고 말이다. 원숭이들이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가 엘리와 유아 선배가 부상을 당할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이쪽도 전면전쟁이다. "세린! 누나! 지원사격 부탁해." "지원 사격이라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야! 이 바보!" 뚱딴지 같은 말을 왜 하냐는 듯이 소리치는 세린. 그러나 서로 사소한 말 때문에 다툴 시간이 없다. "이런 식으로 말이야!" 근처에 있던 돌을 잡아서 그대로 도시락을 든 원숭이에게 던진다. 개인적으로 개울가 위에 돌 튀기기나 아니면 돌 멀리 던지기 등 '던지기' 류의 장난질 같은 것은 이미 도가 튼지라 명중률에는 꽤나 자신이 있다. 내가 돌맹이를 던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자신의 머리털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돌맹이의 위협적인 투척에 놀란 원숭이가 실수로 도시락을 떨어뜨린다. 그러자 지면을 향해 곤두박질 치던 도시락이 그대로 땅 위로 착지... 하려던 순간, 바로 아래에 있는 나뭇가지 위에 걸리고 만 것이다. 다른 원숭이들이 도시락을 줍기 위해서 아래로 향하는 모습이 보인다. 절호의 찬스를 놓칠수는 없지. 기껏 만든 기회를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이세린!!" "말 안해도 충분히 알고 있다고!" 두번째로 깍지를 낀 손을 낭심 부근에 위치시킨다. 대충 어떤 신호인지 눈치를 챘는지 세린이 나에게 빠른 속도로 다가오면서 깍지를 낀 손 위에 발을 올려놓고 그대로 체중을 싣고서 말한다. "준비 오케이!" "그럼 부탁한다!" 평소에는 사이가 극악으로 좋지 않은 나와 세린이었지만, 도시락 앞에서는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마주한 이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다. 이것도 다 원숭이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감히 인간 님의 도시락을 훔쳐가다니. 그 죄, 엄벌로 다스릴줄 알아라. 아무튼 세린을 그대로 들어올린 나는 그녀가 나뭇가지에 충분히 매달릴 수 있을 정도로 있는 힘을 다해서 나뭇가지 위로 올려 보내준다. 엄청난 기합소리를 내지르며 세린을 위로 들어 올려주자, 몸무게가 가벼운 여자인 탓인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위로 발돋음 할 수 있었다. 나뭇가지 위로 그대로 안착한 세린이 손을 뻗어 도시락을 향해 최대한 사력을 다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원숭이 역시도 마찬가지. 나의 돌팔매질에 도시락을 돟친 원숭이와는 다른 녀석들 2~3마리가 순식간에 세린과 도시락에게 다가가기 시작한다. 엄청난 속도.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빠른 몸놀림으로 우리들의 도시락을 탐내는 녀석들. 그러나 세린은 오히려 기세 좋게 외치면서 다가오는 원숭이를 노려본다. "원숭이면 원숭이답게 바나나 같은 거라도 먹어버렷ㅡ!" 그렇게 말하고선 거침없이 하이킥. 나뭇가지 위라는 불안정한 장소에서도 잘도 저렇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점이 조금은 부럽긴 하다. 건장한 체격의 청년인 나 같은 경우에는 나뭇가지가 부러질까봐 함부로 건들이지도 못할거 같은데. 여성의 몸무게로 저렇게까지 무리한 움직임을 보여도 나뭇가지는 그저 한번 철렁일 뿐 부러질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달리 표현하자면,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내가 위로 올라갈 수는 없다는 뜻이 된다. 결국 남은 몫은 유아 선배와 세린, 그리고 엘리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다. 누나와 엘리 쪽은 아직 도시락을 든 원숭이를 뒤쫓는 중. 우리들 쪽은 빠르게 세린이 가세해서 거의 도시락을 쟁탈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원숭이 3마리와 대치상황을 이루게 된 세린. 자신의 주 무기이기도 한 칼이 없는 상황에서 육탄전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세린 본인에게 있어서는 조금 부담이 되는 상황인 듯하다. "세린! 무리하지 말고 유아 선배의 지원을 기다려봐." 일단 침착하라는 듯이 그녀에게 지시를 내리는 나. 하지만 세린은 오히려 그런 내 지시를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따져온다. "유아 선배를 기다리다가는 다른 원숭이들이 더 몰려올지도 모른다고!" "그야 그렇지만..." "아무튼, 최대한 해보는 데까지 해볼거야." 라고 말하면서 도시락을 향해 또다시 접근하는 세린. 그러자 눈치 빠른 원숭이들이 세린에게 뛰어들기 시작한다. 그것도 3마리 동시에 말이다. 원숭이들이 고작 3마리만 있는 것도 아니다. 언제든지 덤벼들 수 있을 만큼의 다수의 숫자가 포진되어 있는 상황을 고려하자면 어쩌면 세린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안전하게 지원을 기다리는 일 보다는 빠르게 도시락을 쟁취하는게 급선무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어차피 유아 선배가 지원을 온다고 해도, 그만큼 원숭이들 역시도 다량으로 지원을 올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 하더라도 주변에 포진되어 있는 나무들 위에 원숭이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차서 우리들 끼리의 말이 안 들릴 지경이니까 말이다. 몇 십, 아니 몇 백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인해전술 상으로는 우리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 그렇기 때문에 치고 빠지는 것이 오히려 정답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세린의 소견이기도 하다. "이 놈들이!" 첫번째로 다가오는 원숭이의 몸동 박치기를 그대로 피한 세린. 뒤이어 두번째 원숭이가 마치 세린의 빈틈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바로 머리 위에서 뛰어내린다. "이세린! 위쪽이야!" "크읏...!" 무리하게 허리를 꺾으면서 나뭇가지 아래로 철봉을 하듯이 매달리는 세린. 자신의 머리 위로 습격을 가하던 원숭이가 목표를 잃고 뛰어내린 중력의 힘에 의해서 다른 나뭇가지에 착지하고 만다. 재빨리 다음 원숭이들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나뭇가지 위로 다시 한번에 올라간 세린. 역시나 운동하던 여자라 그런지 엄청난 반사신경을 자랑한다. 나 같으면 저 상황에서 원숭이들의 정신 사나운 공격을 피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는데, 세린은 내 우려와는 다르게 상당히 잘 해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벼운 체중과 여성 특유의 유연한 몸놀림 덕분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여유로운 분석도 해본다. 하지만 지면에 있는 나와 누나에게는 어느정도 여유가 있지만, 나뭇가지 위의 팀은 아마도 정신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세린을 향해 덤벼든 세번째 원숭이가 세린이 올라오자마자 숨어있다가 등 뒤에서 덤벼든다. 직감적으로 녀석의 기척을 느낀 것인지 그대로 허리를 숙이면서 자신의 머리 위로 날아드는 원숭이를 또 한마리 보내버린다. "나이스, 이세린!" "원래 나는 굉장한 여자라고!"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역시나 이세린.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여자다운 발언이었다. 세마리의 공격을 모두 흘려보낸 세린이 나뭇가지 위에서 한바퀴 몸을 굴리면서 그대로 도시락을 낚아채는 데에 성공한다. "아싸!" "좋았어!" 나와 세린이 동시에 감탄사를 자아낸다. 일단 첫번째 도시락 탈환 성공. 하지만 순간적으로 도시락을 다시 찾아왔다는 방심을 한 탓인지 세린이 나뭇가지 위의 빈 공간으로 발을 헛딛고 마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꺄ㅡ악!" "이세린!!" 최대한 낼 수 있는 모든 근력의 폭발적인 힘을 이용해서 그대로 세린이 떨어질만한 지점에 몸을 날린다. 도시락을 품에 안은 채 등부터 떨어지는 그녀를 간신히 양 팔로 공주님 안기라는 전법을 통해서 내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낙하 에너지 덕분에 팔에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지만, 세린이 무사하게 착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만약에 이대로 떨어졌다간 큰 사고가 발생할 수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기 때문에 그 위기를 잘 넘겼다는 사실이 커다란 위안이 된 셈이다. "... 괜찮아?" "으, 응." 내 품에 안긴 채 약간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세린. 의도치 않은 결과지만, 본의 아니게 강도 높은 스킨십을 하게 되어서 약간 민망한 순간이라고 생각이 된다. ============================ 작품 후기 ============================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원숭이와의 전투신(?)이 튀어 나와서 조금 놀랐습니다;; 도대체 과거의 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이 글을 썼던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170화 약간 놀랐는지 살짝 몸을 떠는 세린에게 안부를 물어본다. 혹시나 해서 몸에 이상징후가 발견된다면 곤란하니까 말이다. "일어설 수 있겠어?" "... 그 정도까지 다친건 아니니까." 하지만 말과 다르게 몸은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얼핏봐도 세린의 방금 그 말은 허세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들이는 일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약간 힘이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래도 스스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어디인가. 역시 세린은 대단한 여자다. "그쪽은 무사한거야?" 나무 위쪽에서 우리들의 안부를 묻는 유아 선배. 아무래도 선배 본인도 세린이 순간적으로 낙하하는 장면을 목격했나보다. "걱정하지 마세요. 세린은 무사하니까요. 더불어 도시락도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인데?" "그러니까 선배는 그대로 엘리를 지원하러 가주세요. 엘리가 거의 바짝 뒤를 쫓고 있으니까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거예요." "알았어. 밑에서 지시해줘." "네." 첫번째 도시락을 쟁취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아 선배가 기운차게 나뭇가지 위를 이동하기 시작한다. 소소하지만 원숭이들에게서 도시락을 따냈다는 일은 우리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낳고 있는 것이었다. 나무 위에서 올려다보며 약오르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원숭이 무리들. 하지만 원숭이들의 심정을 헤아릴 정도로 우리들은 그렇게까지 아량이 넓은 편이 아니다. "누나, 세린 좀 보살펴줘." "알았어." 잠시 세린을 누나에게 맡긴 나는 누나가 엘리를 지시하는 임무를 대신 이어 받는다. 나무 위의 현재 상황은 엘리가 원숭이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일방적인 상황이 연속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유아 선배. 바로 앞에 도시락 든 원숭이가 가고 있어요." "정확하게 말해서 어느정도 앞?" "3M 정도요." "오케이. 맡겨두라고!" 라고 말하자마자 유아 선배가 겁도 없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방금 세린이 발을 헛딛여서 땅으로 떨어질뻔한 아찔한 사건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아 선배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가기 시작한다. 담력이 쎈 것인지, 아니면 떨어질 자신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선배는 정말 대단하다. 괜히 세린과 더불어서 서로 으르렁 거리는 것이 아니구나 라는 쓸모없는 잡생각까지 해본다. 원숭이와 거의 마주한 유아 선배가 그대로 몸을 날리면서 손을 뻗는다. "얌전히 도시락을 내놓으라고! 몽키!!" 그러나 선배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우끼기 소리만을 내면서 가볍게 회피하는 원숭이. 이번 녀석은 꽤나 빠르다. 세린이 뒤쫓던 녀석과는 달리 엄청난 빠르기를 보여주는 녀석. 이래서 엘리가 고전을 면치 못했구나. 이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빠르다고 다가 아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예측 경로를 통해 미리 따라잡으면 그만인 것이다. "유아 선배. 왼쪽 나무로 돌아가세요." "비책이라도 있는거야?" "그 녀석은 아마 그쪽 나무로 돌아갈 거예요." "믿어도 되는거야?" "도박이에요." "... 알았어. 어떻게든 해볼게." 엘리가 뒤를 쫓는 동안에 유아 선배가 나무 반대편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먼 길이긴 하지만, 분명 저 경로를 통해 확인해 본다면 원숭이는 분명 유아 선배가 있는 곳을 지나칠 확률이 크다. FPS 게임을 할 때도 자주 볼 수 있는 예측사격이라는 종류의 하나라고 보면 될 것이다. 물론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도중에 유아 선배의 머리 위에서 몇마리의 원숭이들이 습격을 감행한다. 그 전에 바닥에 있던 돌맹이 몇개를 집어서 녀석들에게 투척을 시도하자, 원숭이들이 놀라서 유아 선배에게 멀리 떨어진다. "지원사격 고마워." "별말씀을요." 칭찬 아닌 칭찬을 들으면서 계속해서 주변 원숭이들이 유아 선배의 시야의 사각지대에서 습격을 감행하는지에 대한 감시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도시락이 중요하긴 하지만, 사람의 건강보다도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유아 선배게 원숭이들에게 상처라도 입게 된다면 아무리 도시락을 되찾는다고 해도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공교롭게도 내 예상은 그대로 적중. 인간에 비해 지능이 부족한 원숭이는 유아 선배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대로 함정이 있는 곳까지 얌전히 골인하게 된다. 기다리고 있었던 유아 선배가 원숭이의 꼬리를 그대로 낚아채는데 성공. 긴 꼬리인지라 잡는 것도 상당히 쉬워보인다. "잡았다, 요 녀석!" "우끼, 우끼끼!!" 꼬리를 잡히자 화들짝 놀란 원숭이가 그대로 도시락을 떨어뜨린다. 따라오던 엘리가 재빨리 땅에 떨어지기 전에 캐치. 외야수의 호수비를 보여주는 듯한 완벽한 플레이였다고 평가를 내리고 싶다. 그나저나 유아 선배, 원숭이를 잡는 것은 징그럽다고 못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하게 해낸다. 본래 여자들은 낯선 동물같은 것은 무섭다며 만지기 싫어하는 반응을 보이는게 정상 아닌가. 유아 선배의 또다른 취향을 맛본 느낌이 약간 든다. 나무에서 잠자코 내려오는 선배와 엘리. 원숭이들이 우리를 보면서 단체로 으르렁 거리기 시작하지만, 쉽싸리 덤비지는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자신들로부터 도시락을 탈취하는 모습을 보여준지라 우리들이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모양이다. 동물이 이래서 다루기 편리하지 않을까. 이성보다는 본능과 직감이 판단의 우선시가 되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그럼 잘 있으라고. 원숭이들아." 마무리로 상큼하게 인사를 날려준 뒤에 도시락을 되찾은 우리들은 원숭이 소굴로부터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올 수 있었다. "... 라는 이유로 이렇게 편안한 점심식사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 말이죠." "그렇구나. 수고했어." 지금까지 우리들의 활약상을 일일이 설명해준 내게 노아 교수님이 기특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우리들에게 격려의 한마디를 들려준다. 원숭이들로부터 도시락을 결국 불굴의 의지로 빼앗아온 우리들은 남아서 나무 자르기 작업을 실시하고 있던 일행들을 불러모은 뒤에 이렇게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원숭이들이 들고 다닌 탓인지라 반찬이나 이런 것이 섞여버린 도시락이었지만, 그래도 노동을 하고 난 이후에 먹는 도시락의 맛은 각별하다. 실컷 몸을 움직이고 나서 먹는 이 맛은 가히 꿀맛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나저나 원숭이들은 앞으로 조심할 필요성이 있겠네요." 얌전히 도시락을 먹던 아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한다. 원래부터 약간 조심성이 깊은 인물이 아리아지만, 굳이 원숭이들 때문에 몸을 사릴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멧돼지처럼 위협적인 녀석들은 아니잖아?" "뭘 모르시는군요. 선배. 멧돼지는 나홀로 거대한 덩치를 아무곳에나 쾅쾅 거리면서 부딛치는게 전부였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하기 쉬운 동물이었어요. 다만 처음에 우리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은 단순히 사냥에 대한 경험과 멧돼지에 대한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죠." "뭐... 그건 사실이지만." "반면에 원숭이들은 '꾀'라는 것이 있어요. 다른 동물들이 쉽게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편이라고요. 그렇다고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동물들에 비해서 '꼼수'같은 것을 부릴 수 있는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동물이 바로 원숭이에요. 다큐멘터리나 동물농장 같은 티비 프로그램에서 보면 원숭이의 아이큐가 높은 편이라는 정보를 알려주는 경우가 많이 있잖아요? 선배도 만약에 한번쯤은 그런 티비를 보신 적이 있다면 원숭이가 얼마나 머리가 좋은 녀석인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거예요." "그야 그렇긴 하지." 실제로도 원숭이는 우리들에게 도시락을 쟁취할 때 잔꾀를 쓴 경우가 있었다. 바로 수컷 원숭이가 나서서 우리들의 시선을 끈 뒤에 다른 일행 원숭이들이 도시락을 가져간 것. 그 일 하나만으로도 녀석들이 얼마나 잔머리를 잘 굴리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저희들도 이제부터 나름 원숭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는게 좋다고 봐요. 언제 또 그런 심술을 부릴지 모르니까요." 아리아의 제안에 이번에는 지아 선생님이 찬성의 표를 던저준다. "아리아 말이 맞아. 조심해서 나쁠것도 없잖아. 그리고 원숭이들에게 아무래도 우리의 존재는 철저하게 복수의 대상으로 낙인 찍혔을지도 모르니까." "과연..." 우리들이 계속해서 무인도에 머물고 있는 이상, 원숭이 무리 또한 우리들의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 작품 후기 ============================ 아마 내일이나 내일 모래쯤이면 다시 제대로 글을 쓸 시간이 날 듯 합니다. 이번 에피소드가 끝나고 새로 쓴 에피소드를 하나 올리고, 다음에 엘리를 중심으로 한 에피소드를 써봐야겠습니다. 대충 넘어간 사실인데, 사실 엘리는 정말 불쌍한 아이입니다. 엘리라는 등장인물을 통해서 감동 코드로 에피소드를 써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 일단 구상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오랜만에 엘리를 향한 애정을 듬뿍 담아봐야겠습니다. 엘리... ㅜ_ㅜ 171화 평화로운 점심식사를 진행중인 우리들. 사실 과정을 따져보자면 그리 평화로운 점심 식사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말이다. 도시락 하나 먹겠다고 원숭이들의 뒤를 쫓아서 나뭇가지 위에서 별 해괴망측한 생 쇼를 다 한 것을 생각한다면,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니까 말이다. 아무튼 편안하게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다시 나무 작업을 시작하기로 한다. 원숭이 덕분에 약간의 트러블이 있긴 했지만, 점심 이후부터는 정상적인 작업이 가능할 것으로 보여진다. "그럼 각자 할당량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보죠." "네에!" 라는 기합소리와 함께 제각기 흩어지기 시작한다. 점심 식사의 효과인가. 어쨌든 긍정적인 답변이 들려와서 다행이다. ... 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내 크나큰 오산에 불과했다. 작업을 마치고 한 자리에 모인 우리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누나와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조 역시도 오늘의 할당량을 달성하지 못한 듯 보인다. 역시나 원숭이들의 습격이 조금 컸나. 그래도 나름 많은 양을 가지고 돌아갈 줄 알았던 내 계산에는 약간의 착오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할당량을 달성하지 못한 내가 이런 말을 하니까 조금 우습게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대략 오늘 우리들이 한 최종적인 작업분량을 일일이 세고 있던 내게 지아 선생님이 작게 한숨을 쉬며 물어온다. "어때? 오늘의 작업 량." "예상량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 수확이라면 수확이겠네요." "수확?" "본래 오기로 예정되어 있던 멤버 5명이 할 분량을 기준으로 따지면 훨씬 더 초과해서 작업을 끝낸 셈이니까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네 말이 맞을수도 있겠네." "아무튼 그런 식으로 관점을 달리 생각해보면 그리 나쁜 결과는 아니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일을 치루면 결과도 긍정정으로 도출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얼핏 나는 것 같다. 약간 미신적인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믿으면 복이 온다는 말은 나쁘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고 오늘 작업량이 불만이라고 투덜투덜 댄다면 다른 사람들의 기분도 좋아지지 않을 뿐더러, 애써 작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감정만 상하는 꼴이 연출될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오늘 우리들이 들고 갈 나무량만 가지고 돌아가기로 한다. 2인 1조가 되어서 나무를 들고 산장으로 귀환. 5개조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옮길 수 있는 나무는 총 5개밖에 없다. 이걸 나중에 계속적으로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 덕분에 현기증이 약간 밀려오는 느낌마저 강하게 든다. 이렇게 해서 오늘 할당된 작업도 끝. 아직 저녁시간이 다가오려면 조금 이른 상황에서 단체로 목욕을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물론 여성들 9명만 이야기하는 것일 뿐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의 구세주, 우리들의 구세주, 무인도의 구세주인 지아 선생님이 다른 여자들에게 이런 말을 꺼내고 말았다. "유에도 같이 하는게 어때?" "선생님!!!" 다른 여자들이 느닷없이 성을 낸다. 특히나 세린의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육체관계까지 가졌기 때문에 뭘 저리도 쑥스러워하는 것일까 라고 물어온다면, 간단하게 대답해줄 것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체리나 세린과 관계를 가진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공식 설정상으로 나와 세린, 그리고 덤으로 체리는 서로 섹스를 한 사이가 아니라고 다들 알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본인들만 몸을 섞은 관계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는 상태. 그렇기 때문에 세린은 저런 반응을 필수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그런데 사실 앞서 언급했던 장황한 이유들을 제외하고 왠지 세린은 나와 육체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어도 반대를 할 거 같은 기분이 든다. 그냥 기분이 들 뿐이지만 묘하게 신빙성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구원투수인 지아 선생님이 살짝 눈을 흘기면서 세린에게 무언가를 말한다. 소근소근. 쏼라쏼라. ...... 이윽고 놀란 목소리로 말하는 세린. "서, 선생님이 어떻게 그걸?!" "이래봬도 인생 선배니까 그런거 정도는 가볍게 눈치챌 수 있지." "으..." 서로 무언가의 말을 주고받은 것은 확실한데, 세린과 지아 선생님의 저 대사만으로 도대체 어떤 대화를 주고 받았는지 알 수가 없다. 고작 말 몇마디 가지고 모든 내용을 추리하는 그런 명탐정의 기운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에게는 많이 힘든 추리 퀴즈가 아닐까. 어찌되었든 지아 선생님의 말을 들은 세린이 엄청나게 빨개진 얼굴로 다시금 지아 선생님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거죠??" "글쎄. 적어도 나는 발설하고 다닌 기억은 없으니까." "......" 역시나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은밀한 뒷거래가 있는건가. 그래봤자 무인도에서 할 게 뭐가 있다고. 지아 선생님의 몇마디에 결국 굴복한 세린의 말이 들려온다. "알았어요! 혼욕... 하면 되잖아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패배를 시인하는 세린. 덕분에 나도 다른 여자들과 혼욕이라는 아주 달콤 쌉사름한 상황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혼욕이라는 것은 본래 일본 온천에서 보면 남탕과 여탕, 그리고 제 3의 영역이라 불리는 '혼탕'이라는 것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래봤자 혼탕에 가면 여자의 알몸을 보기 위해 몰려든 남자들만 대부분 득실거린다고 하던데, 일본여행 한번 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신빙성 있는 말인지 아니면 그저 헛소문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모르는 말을 왜 언급하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해드리는 것이 인지상정. 일본에는 혼욕이라는 문화가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고 싶어서 서두를 이런 식으로 장식해봤다. 그렇다면 내 인생에 혼욕이라는 역사가 전혀 없었단 말인가? 그건 또 아니다. 다들, 특히나 남자들은 대부분 기억이 없겠지만, 어렸을때 어머니의 손을 이끌고 갔던 대중목욕탕의 기억을 떠올려보도록 하자. 물론 기억이 안 날 것이다. 아직 현역 대학생이기도 한 나조차도 기억이 잘 안나니까. 아무튼 여탕 입실이 인정되는 나이를 겪은 우리들은 인생의 최초이자 최후의 혼욕을 즐길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 최후라는 말은 취소하도록 하겠다. 내가 말하고도 왠지 모르게 스스로가 비참해지는 기분이 드니까 말이다. 말이 도중에 어떻게 진행되었든, 결과적으로 혼욕이라는 것은 남자의 로망이요, 남자의 꿈이요, 남자의 희망이다. 물론 나도 남자이기 때문에 혼욕이라는 존재에 대한 환상을 잔뜩 품고 자란 청년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인도에서 실제로 벌어졌다. 혼욕. 정말 좋다. 저번에도 유아 선배와 같이 목욕을 한 적도 있고, 다수가 있었지만 9명의 여자와 같이 혼욕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앞에서 지금까지 주구장창 설명하던 여탕의 기분을 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는 뜻. 당당하게 옷을 벗자, 물에 들어가기도 전에 빳빳하게 발기된 성기가 당당하게 고개를 내민다. 미리 들어가있던 여자들은 내 모습을 보더니 제각기 한마디씩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 변태." "저질." "성욕 대마왕." 유난히도 세린과 아리아, 그리고 유아 선배의 말이 선명하게 들려온다. 부끄러움 그룹 멤버인 세리아와 체리는 내가 물에 들어올때까지 고개를 살짝 숙여서 나를 차마 쳐다보지 못한다. 겨우 물 속으로 들어오자, 옆에 앉아있던 지아 선생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한다. "다같이 목욕하는 것은 처음이지?" "그렇네요." 참고로 오른쪽에는 지아 선생님, 그리고 왼쪽에는 노아 선생님이 앉아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양 손에 꽃. 양 손에 농염한 성인여성 둘이 알몸인 채로 내 옆에 있다는 뜻이다. 최고다. 환상이다.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한다. 아니지... 못 일어나면 안되니까 적어도 조금 오랫동안 꿈을 지속시켜주길 바랄 뿐이다. 강 중앙 부근에서 한창 수영중인 엘리. 목욕과는 사뭇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것도 엘리다운 모습이니까 보기 좋다. 반면에 초호기는 물에 들어오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고양이가 원래 물을 싫어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살짝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끝내 거부하길래 초호기는 그저 물 근처에서 세리아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받으면서 얌전히 누워있는다. 모두가 그렇게 제각기 목욕을 하고 있을 무렵, 지아 선생님이 살짝 나와의 거리를 좁히면서 말한다. "가끔은 이렇게 혼욕도 주최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 같아."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저야 좋습니다만..." "바보구나. 성적인 의미가 아니라 다른 의미가 있다는 말이야. 내가 방금 말한 그 뜻." "어떤거요?" "인간은 모름지기 타인과 친해지기 상당히 힘든 존재야. 알고 있니?" "... 글쎄요." 과연 친해지기 힘든 존재일까? 개인적으로 나는 그리 어렵다는 생각을 가져본 기억이 없는데 말이다. 학교 입학 첫날에 옆자리에 앉은 친구들과 말을 트고, 그때부터 주로 어울리는 친구들끼리 그룹을 형성하고. 그게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지아 선생님이 연신 말을 이어간다. "본래 사람은 '나 혼자'라는 인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싶지 않기 때무에 거의 억지로 친구를 만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 생각해봐. 내가 다른 사람에게 왕따라는 이미지로 낙인찍히게 된다면 과연 기쁘다고 생각하겠니? 아니면 밥을 혼자 먹거나 혼자서 조별활동을 하거나 하면?" "... 엄청나게 불쌍한 이미지인데요." "그렇지. 우리나라는 특이하게 '혼자서 하면 불쌍해보인다.'라는 고정관념이 박혀있는 나라야. 그 점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나는 악습이라고 보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도 있잖아. 어찌되었든 한국이라는 나라에 살면서 우리들은 세금 다음으로 필수적인 일이 되어버린 것이 바로 '친구 만들기'라는 과제를 얻게 된 셈이지." "그렇군요... 왠지 모르게 이해가 될 거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어요." "이해해줘서 고맙구나." "그런데 그 '친구 만들기'와 '혼욕'과의 상관관계는 어떻게 성립되는 건가요?" "사람을 사귈때는 서로 마음을 터놓고 사귄다고들 하잖아. 그 터놓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어. 진실게임같이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거나 하는 그런 방법 말이야.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지. 바로 서로 알몸이 된 상태에서 마주보는 방법이야." "신빙성 있는 말인가요? 그거." "내가 말하는게 조금 웃기게 들릴수도 있겠지만, 사실이야. 옷을 입은 채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같이 목욕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왠지 모르게 더 친밀감이 든다고 하더라고. 이건 내 친구가 논문으로 발표한 연구 결과 내용이야." 왠지 논문이라고 하니까 조금 신빙성이 느껴진다. "유대감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 무인도에서 살아가는데에 꼭 필요한 점이야. 네가 2층집을 고안한 것도 그 이유가 되었지? 가급적 모두가 한 공간에 머물면서 최대한 불화를 없애고 싶다는 의도 말이야." "그렇죠." "그것도 일종의 유대감을 키울 수 있는 작전이 되니까. 개인공간을 공유함으로 인해서 유대감을 키우는 효과는 같이 알몸 상태에서 목욕을 함으로 인해 유대감을 키워가는 방식과 같은 거야. 한마디로 혼욕이 단순히 음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야한 단어가 아니라 일종의 유대감을 키울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는 뜻이지." "그런 깊은 뜻이..." 사실 혼욕이라 하면 남녀가 서로 알몸으로 목욕을 하고, 그 이후에 이어지는 이렇고 저렇고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음란한 일을 하는 등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할 정도로 야한 일을 계속해서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나만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닐 것이다. 대부분 혼욕이라는 이미지가 조금은 야하게 들리는 것이 강하지 않은가. 특히나 성적인 면에 대해서는 유럽이나 이런 서양국가에 비해서 상당히 보수적인 면을 띄우고 있는 동양국가, 그 중에서도 한국이라는 나라는 상당히 성적인 면에 대해서는 꽉 막힌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혼욕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런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혼욕이 외설적인 의미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지아 선생님은 그 의미를 다르게 해석해서 혼욕이라는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왠지 남자도 아니고 여자, 게다가 성인 여성이기도 한 지아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조금은 신빙성이 느껴진다. 만약에 이 주장을 다른 남자가 했다고 가장해보자. 변태로 오해받기 딱 좋은 주장이 아닐까 싶다. ============================ 작품 후기 ============================ 유린은 참 아까운 캐릭터이긴 하지만, 주인공과 육체적인 관계로 발전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남매지만 피는 이어지지 않았다.' 설정을 만들어둘걸 그랬나 싶습니다; 172화 머리카락에 묻은 물방울을 만져보는 지아 선생님이 입을 열기 시작한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주기적으로 이렇게 다같이 모여서 목욕을 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이자는 말이야." "그거야 저야 황송하죠." "그럼 제대로 한번 계획해봐. 앞으로 세린이 반대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테니까." 그러고보니 갑자기 궁금해진 사항이 생겼다. "선생님." "왜?" "아까 세린한테 무슨 말을 한 건가요?" "아, 그거?" 작게 숨을 내쉬는 지아 선생님이 묘한 미소를 나에게 보여주고선 말을 이어간다. "듣고 싶니?" "궁금하니까요." "그렇다면 잠시 귀좀 빌려줄래?" 라고 말하면서 나에게 손직하는 지아 선생님. 역시나 그 자태 하난 정말 섹시하다. 아까부터 발기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내 성기는 지금 당장이라도 지아 선생님의 저 탐스러운 여체를 먹어버리라고 나에게 충동질하는 느낌이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서 느껴진다. 하지만 상황이 영 아닌지라 잠깐 그 성욕을 달래보도록 하자. 다들 보고 있는데 지아 선생님과 관계를 가지면 무엇이 되겠는가. 살짝 선생님에게 다가가자, 지아 선생님이 내 귀에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속삭이기 시작한다. "너와 세린이 섹스를 한 사실에 대해 말했었지."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겁니까?!" "아까도 말했지? 인생의 선배로서 티가 확 난다고." "......" 세린이 당황해할만 하다. 나 역시도 직접 이런 식으로 지아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들으니까 당황한 기색을 감출수가 없다. 이것도 유아 선배가 나에게 자주 주장하던 여자의 감인가? 이 정도 된다면 거의 사기급이잖아. 운영자는 뭐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건 너프 좀 먹여줘야지. 지아 선생님이 게속적으로 나와의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시금 말한다. "세린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가졌을까? 우리 유에." "... 글쎄요." "어머, 선생님에게 비밀을 감추는 것은 학생으로서 옳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보여지는데." "육체관계를 어떤 식으로 가졌는지 상세하게 말하는 것이 더 옳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괜찮아. 섹스 이야기 한정으로는 이 선생님에게 털어놓는 것을 허락해줄게." "그런 이야기에는 안 넘어가요." "특별히 보상을 해준다면 이야기해줄 생각이 있을까?" "보상... 입니까?" "그래. 예를 들자면 이런 식으로..." 지아 선생님의 손이 내 허벅지 위에 올려지더니 이내 아직도 엄청난 굵기를 선보이고 있는 남근을 살며시 손으로 쥐어 잡는다. 순간 움찔하면서 당황한 모습을 보이는 나. 그러자 노아 교수님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말한다. "무슨 일 있니? 유에." "아니요. 잠시... 날카로운 돌에 찔린거 같아서요." "어머머, 그럼 안되지. 어디 다쳤는데?" "아, 아니에요. 선생님. 굳이 살펴보실 필요는 없어요." "그래...?" ... 아슬아슬했다. 교수님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온다면, 물 밖에서도 지금 아랫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잠깐만요. 선생님." 남근을 잡은 채 위, 아래로 어루만지는 지아 선생님의 손놀림. 역시나 최고나. 이 테크닉. 과연 유부녀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정교하고 남자의 흥분을 그대로 꼬집어서 바깥으로 노출시킬 정도의 강력한 파괴력을 자랑한다. 물 위에 감출 것 없이 그대로 본 모습을 드러내는 지아 선생님의 양쪽 가슴. 그 위에 선생님이 음흉한 미소를 보이면서 말한다. "왜 그러니? 청년." "아무래도 여기서 하는 건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요." "난 아직 무언가를 한다고 아무런 말도 안 했는데?" "......" 내 망상이 너무 지나쳤나. 아니면 선생님이 일부러 나에게 장난을 거시는 것일까. 이것이 연상의 위엄? 포스? 과연 성인 여성다운 모습이다. 지아 선생님은 나보다 사회 경험이 풍부한 인생의 선배이기도 하다. 고등학생 시절은 당연히 겪었을테고 대학생활, 직장생활, 그리고 결혼까지. 인생의 거의 모든 난관을 직접 경험해온 지아 선생님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햇병아리 수준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아 선생님은 언제나 자신이 리드를 한다. 연상이니까. 그리고 나는 연하니까. 유아 선배와 누나와 같이 나와 한 두살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물론 노아 교수님은 논외로 치도록 하자. 노아 교수님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세리아나 체리같이 귀여운 면이 있으니까 말이다. 분명 연상인다 연상같지 않은 모습도 매력적인 요소라고 생각된다. 반면에 지아 선생님은 그런 구분이 확실하다. 자신은 선생, 그리고 나는 학생. 다만 구분은 확실히 하지만 성적인 면에 있어서는 상당히 개방적이다. 양호 선생님이라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유일하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섹스를 한 인물은 이 무인도에서 지아 선생님이 유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아 선생님은 다 같이 모여있는 이 장소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나에게 적극적인 애정 공세를 퍼붓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지아 선생님이 또 다시 나에게 다가오면서 뜨거운 숨결과 함께 적나라한 표현을 섞어 말한다. "사실 너 없는 동안 조금 외로웠거든." "... 제가 없는 동안이라면..." "난파선에 탐험을 떠나러 갔을 때 말이야." "그러고보니 그런 적이 있었지요." 겨우 얼마 전 일이지만, 마치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진다. 하루하루가 워낙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고, 그리고 TV나 컴퓨터와 같은 시간이 빨리 가게 만드는 마술과도 같은 효능을 발휘하는 전자기기가 없기 때문에 그런지 무인도의 하루는 굉장히 길게 느껴진다. 하루가 이틀같이, 그리고 일주일이 한달같이 느껴진다고 표현하고 싶은 기분이 마구마구 든다. 아무튼 지아 선생님이 나를 유혹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이 자리에서 섹스라도 해볼까?"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여기서는 좀 위험하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럼 이 단단하게 선 것은 무슨 뜻일까?" "그거야 선생님이..." 아직도 성기를 쥔 채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이 어루만지는 지아 선생님. 성기의 기둥을 만지다가 고환쪽을 만지다가 하며 번갈아서 만지는 스킬을 발동한다. 마치 어렸을때 가지고 놀던 구슬 2개를 만지는 듯한 그런 손놀림이었다. 유부녀가 이래서 색기 넘치는 포스를 뽐내는구나 하는 확인사살을 다시한번 당하는 순간이었다. "유에." "... 네." "선생님의 가슴, 만져보고 싶지 않니?" "......" 물 위에 둥둥 떠있는 거대한 유방. 그 모습을 보고 꿀꺽 침을 삼키던 내 모습을 포착했는지 지아 선생님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그거 알고 있니? 유에." "어떤거 말씁입니까?" "자연산 유방과 인공산 유방의 구별법." "... 인공산 유방이요?!" "가슴확대수술을 받은 유방 말이야. 한마디로 말해서 성형이라고 해야 하나. 가슴을 좀 더 크게 보이기 위해 실리콘을 집어 넣는다든지 하는 그런 시술을 받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지." 느닷없는 가짜 가슴과 진짜 가슴의 구별법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는 지아 선생님. "간단해. 물에 뜨면 자연산이고, 물에 가라앉으면 인공산이지." "그건 조금 신선한 말인데요." "인간의 몸은 원래 물보다 가볍기 때문에 물 위로 뜨게 되어있어. 물론 가슴 역시도 마찬가지지. 만약에 여성이 물에 들어가 있을 때, 유방이 물 위로 뜨면 그건 의학의 도움을 받지 않은 자연산이라는 증거야." "... 오호라." 참고로 지아 선생님 본인이 저런 말을 꺼내는 것이 이제서야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선생님의 거대한 두 가슴은 마치 그 위용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물 위에 둥둥 떠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자신의 가슴이 자연산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기분에서 한 말일지도 모른다. 살짝 시선을 돌려서 근처에 있는 노아 교수님을 바라본다. 선생님의 가슴 역시도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을 하는 모습을 몰래 확인. 그러나 노아 교수님은 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나한테 무슨 볼 일이라도 있니?" "아, 아니요. 그냥 수면 위를 바라봤어요." "그래?" 선생님 본인은 내가 자신의 가슴을 훔쳐봤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순식간에 변태로 오인당할뻔 했던 아슬아슬한 상황을 넘긴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쉰다. 그러나 나의 이 모습을 놓칠리 없는 인물이 가까이에 있었다. "저런. 내 말을 듣고 곧바로 그 지식을 활용하는구나." 지아 선생님이 작게 웃으면서 말한다. 그야 당연히 저런 말을 들으면 궁금하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지아 선생님이나 노아 교수님의 가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한번 확인해보고 싶은 아주 단순한 호기심에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야 뭐 아직 20대인데 벌써부터 가슴 확대 수술이니 뭐니 그 자체를 받을 필요성이 없겠지. 아직 한창 클 나이(?)니까 말이다. 물 안에서 슬쩍 내 손을 마주잡은 지아 선생님이 내 손을 이끌고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는다. "우리 유에는 자연산 가슴이 좋을까? 아니면 인공산 가슴이 좋을까?" "... 글쎄요." "솔직하게 말해도 된단다. 남자들이 자연산 가슴을 더 선호한다는 사실 정도는 양호 선생 일을 하면 금방 알 수 있거든." "미리 정답을 알고 계시면 소용이 없잖아요." 남자라면 당연히 인공산보다 자연산이 더 좋지 아니한가. A라는 여자와 B라는 여자가 있다고 치자. A는 천연이고 B는 시술을 받은 인공산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건드리지도 않고 가슴이 큰 A가 좋을 것이다. 하지만 크기에 차이가 있다면 이야기가 약간 달라진다. 시술을 받지 않았지만 가슴이 비교적 작은 A라는 여자가 있고, 시술을 받아서 가슴이 큰 B라는 여자가 있다면 그건 개인 취향을 약간 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여자는 그래도 가슴이 커야 한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B를 택할 가능성이 있고, 그래도 자연 미인이 더 좋다고 끝까지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A를 택할 것이라고 본다. 더불어 설명하자면 유난히 가슴이 작은 부류, 간단하게 말해서 빈유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문용어로 로리콘이라고 하지. 엘리같은 아이를 성적인 대상으로 삼고 흥분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면 로리콘이라는 부류에 속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나는 적어도 로리콘은 아니란 뜻일지도. ...... 여러모로 잡생각을 펼치고 있던 나에게 지아 선생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까?" "그냥 이것저것이요." "그래?" 라고 말하면서 이내 내 손을 이끌고 지아 선생님의 가슴 위에 올려놓는게 아닌가. 처음에는 남들이 볼까봐 흠칫 했지만, 제각기 다른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약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직 우리 둘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거나 하는 여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아 선생님이 이런 대담한 유혹을 펼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지아 선생님이라는 여성의 성격을 고려해본다면, 다른 사람들이 보든 안 보든 자신이 유혹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것 같다는 이 생각은 변함이 없다고 본다. 선생님의 왼쪽 가슴위에 올라가있는 나의 손바닥이 좋아 죽겠다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세포 하나하나의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은 바로 이런걸 말하는 것일까. 여자의 가슴은 매번 만질때마다 느끼는 사실이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것들 보다도 기분좋고 부드러운 감촉을 선사해준다. ============================ 작품 후기 ============================ 죄송스럽게도 이번 후기란 역시 확밀아 토크로 꾸미도록 하겠습니다 ㅡ_ㅡ;; 세력이 기교의 장이다 보니까 개인적으로 우산 요정 카드는 노멀이라도 풀돌을 하고 싶은데, 아직까지 2장밖에 못 먹었습니다 ㅜ_ㅜ 락샤하고 이어챠오는 노멀 풀돌인데... 힐 카드가 필요한데, 정말 안나오는군요. 이번 시즌은 그냥 감사형 춘향 키라만 바라보고 달려야겠습니다. (현재순위 만등!)PS. 코멘트는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_^;; 안 보는 거 아닙니다; 173화 내 얼굴이 빨개졌는지 선생님이 연신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한다. "그 반응, 나름 귀엽고 보기 좋네." "... 선생님. 저도 남자에요. 귀엽다는 말은 좀..." "어머, 그건 고정관념이야. 유에. 요새 귀여운 남자들, 여자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특히나 연상의 여자들이." 섹시한 미소로 말하는 지아 선생님. 아마도 저건 본인의 입장을 표현한 것인가. 연상인 자신은 귀여운 연하의 남자를 좋아한다는 말. 해당되는 사람은 노아 선생님과 지아 선생니밖에 없다고 보는데 말이다. "그러고보니 지아 선생님. 결혼하신 남성분도 설마 연하이신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니?" "지아 선생님은 왠지 연하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곰곰이 고민하던 지아 선생님이 작게 웃으면서 다시금 입을 연다. "어쩌면 너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네." "정말입니까?" "그래. 인정할게. 나랑 결혼한 남편도 나보다 2살 연하이기도 하고.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는 너와 같이 파릇파릇한 20대 청년을 좋아하거든." "... 그건 다른 의미로 범죄가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그렇다고 내가 발정난 여자라고 인식하면 곤란하지. 엄연히 '귀엽다'라는 호의적인 감정 때문에 좋아하는 것일 뿐, 성적인 대상으로 인식을 한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야." "과연..." 어느정도 납득이 되었다. 마치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자면 소녀시대나 카라같이 귀여운 여자 아이돌이 나오면 삼촌팬들이 많이 등장한다. 여성 아이돌을 성적인 의미로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겠지만, 단순히 귀여우니까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여성 아이돌을 보고서 자위를 하거나 섹스 충동을 느낀다든가 하는 것보다 귀엽고 보기 좋으니까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을거라는 말이다. 이건 지극해 나의 개인적인 소견이라서 확답을 하진 못하겠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가볍게 넘기도록 하자. 개인에 따라서 적당한 비유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일단 지아 선생님 본인도 아마도 그런 감정으로 연하를 좋아한다는 말이 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생님은 나를 바라보면서 한가지 의외의 말을 꺼낸다. "그러나 너는 조금 다르지." "저 말인가요?" "그래. 내가 하고싶은 말,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까?" "... 전혀요." "역시나." 약간 실망했다는 한숨을 내쉬는 지아 선생님. 왠지 선생님을 실망시켜드리는 발언을 했다는 내 자신이 조금 미워지기 시작한다. 나에게 진짜로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확신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본래 말하는 입장과 받아들이는 입장 차이는 분명히 있는 법이다. 나는 분명 호의적인 의도로 말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받아들이는 입장, 청자의 입장에서는 내가 적의를 가지고 이야기를 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오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오해'가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을 유발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아 선생님은 반 장난이라는 듯이 웃으면서 말한다. "여자가 직접적으로 이런 말을 하면 대게 눈치를 챘으면 하는데." "아직 사회경험이 별로 없는 대학생인지라..." "뭐, 그런 점이 귀엽긴 하지만." 요염한 자태와 함께 지아 선생님이 좀 더 나에게 가까이 다가 앉는다. 그녀의 탄력적인 허벅지가 내 몸에 그대로 닿을 정도까지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쓴다. 아직까지는 그리 우리들의 사이를 예의주시하는 사람들이 없어 보이긴 하지만, 한 눈에 봐도 뭔가 수상한 짓을 하려고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끔 나와 지아 선생님과의 거리는 상당히 가까웠다. 그러나 역시 신경쓰지 않고 그대로 자신의 할 말을 계속 이어가는 지아 선생님. "연하로서의 매력도 있지만, 더불어 말하자면 남성으로서의 매력도 느끼고 있다는 뜻이야." "그 발언은 아무리 그래도 좀 많이 위험하지 않을까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니?" "남편분이 그런 소리를 듣게 되시면 조금 실망하실텐데..." 조금이 아니라 많이겠지. 자신과 결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남성적인 매력을 느꼈다고 말을 하게 된다면 이건 거의 이혼감이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남의 가정을 파경으로 몰아 넣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기 때문에 선생님의 말에 약간의 반박을 펼쳐보인다. 그러나 지아 선생님은 여전히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내뱉을 뿐이다. "이래봬도 나는 상당히 개방적인 여자란다." "이래봬도가 아니라 그렇게 보여요." "감정표현에 솔직하자는 것이 나의 좌우명이거든." "가끔은 너무 솔직한 것이 화를 자초할 수 있지만요." 그래도 내심 궁금하기는 하다. 도대체 나에게 어떤 남성적인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뜻일까. 스스로 말하기엔 조금 비참한 기분이 들지만, 내가 그리도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역시나 남자와 여자가 보는 시각의 차이가 꽤나 큰 것일까.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아주 작은 목소리를 유지하는 지아 선생님. "여자는 말이지. 자기 자신을 지켜줄 강한 남자를 좋아하게 되어 있는 법이야." "제가 그렇게 뛰어난 인재였나요?" "의외로." "... 그렇군요." 일단 겉모습과는 달라보인다는 뜻인가. 여기서 조금 상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아 선생님은 점점 더 나에게 과도한 스킨십을 유도하면서 말을 이어간다. "무인도라는 환경이 내 감정의 변화에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거짓이겠지. 하지만, 인간은 원래 환경에 따라 변화하게 되어 있는 존재야. 그리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지아 선생님. 마치 연인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우리들의 사이에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나조차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나와 지아 선생님. 그러나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외설죄와 풍기문란죄로 잡혀가고 싶지 않아서 지아 선생님의 손을 살짝 뿌리치고 만다. "역시나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만..." "이성적이구나. 유에." "그것보다 양심에 찔린다고 해야 할까요." "뭐, 좋아. 여기서는 대놓고 할 수도 없을테니까. 그렇다면..." 살짝 몸을 일으킨 지아 선생님이 내 귓가에 작게 속삭인다. "오늘 밤 불침번 때. 알았지?" "... 진심이군요. 선생님." "그동안 많이 외로웠으니까." 눈웃음을 치면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지아 선생님이 바깥으로 향하고선 호수 근처에 널어놓은 옷을 입기 시작한다. 불침번 근무를 짤 때 본인과 나를 같은 조로 만들라는 식의 압박을 심어둔 지아 선생님의 행보를 멀뚱멀뚱 지켜보던 나는 아직까지 작아지지 않은 남근을 손에 쥔 채 자위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흰색의 정액이 호숫가 안에서 알게 모르게 퍼져가는 상황. 본래 이 정액이 지아 선생님의 몸 속에 들어갔어야 하는 정액들이었을텐데 말이다. 비리 아닌 비리를 미리 심어둔 지아 선생님의 말에 따라서 오늘의 불침번 근무는 나와 지아 선생님 조로 짜게 되었다.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 덕분에 저녁식사를 마친 뒤에 근무의 스케쥴을 들은 유아 선배가 조금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지아 선생님이랑 너랑 한다고?" "네." 뭔가 걸리는 것이라도 있는 것일까. 속으로 뜨끔 하면서 유아 선배의 말에 대답을 하자, 유아 선배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궁금증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내 '뭐, 아무렴 상관 없겠지.'라는 표정을 하면서 가볍게 넘긴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상황. 지아 선생님과 나의 관계가 들킨게 아닐까 하는 우려심에서 나온 한숨이었다. 그리고 당일날 불침번 근무 시간. 거실에서 취침을 취하고 있는 아리아와 세리아 자매. 그리고 나머지 거실 취침 팀이었던 나와 지아 선생님은 일찌감치 자리에서 일어나서 의자에 앉아있는 상황이었다. "역시 자다가 일어나는 것은 피로가 더 쌓이는구나." "그런가요?" "이럴때마다 내 나이를 체감하게 된단 말이야. 후후."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지아 선생님. 겉보기에는 2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젊은 외모였지만, 30대가 되고나니 나이에 대한 언급을 자주 하는 지아 선생님의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여자는 본래 20대가 외모의 절정이라고 하지 않는가. 일명 꽃같은 나이. 그 꽃 같은 나이의 시간대를 넘어서 이제 슬슬 수그러드는 자신의 나이를 보고 조금은 시간에 대한 원망섞인 말이라고 꺼내는 모양으로 보인다. "선생님도 충분히 젊어 보이시는데요. 뭘." "어머, 그거 위로니?" "진심을 담은 말이에요." "빈말이라도 고맙구나." 타이트한 티에 팬티 한장만 입고 있는 지아 선생님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무릎 위에 걸터앉는다. 풍만한 엉덩이가 내 허벅지 위에 앉는 순간, 여성의 엉덩이가 가지고 있는 부드러운 촉감이 피부를 통해 그대로 전해져온다. "그럼 좋은거 한번 시작해볼까?" 침이 절로 꿀꺽 넘어간다. 내 등에 몸을 기대는 지아 선생님의 가슴을 한껏 움켜쥐어본다. 순간 야릇한 신음소리로 화답하는 지아 선생님이 내 목에 팔을 걸면서 딥키스를 하기 시작한다. "음..." 이제 거의 키스도 익숙해질만도 한 나. 그러나 아직까지 지아 선생님에 비하면 햇병아리에 불과하다. 농염하게 움직이는 이 혀의 감촉.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태어난 여성과도 같은 이 육감적인 몸매는 어떠한 말로 표현해도 정확하게 묘사할 자신이 없다. 어떠한 남자라도 지아 선생님과 한번이라도 육체관계를 가지게 된다면, 절대로 그 맛을 잊지 못할 것이다. ============================ 작품 후기 ============================ 병무청에 전화해봤는데, 동원훈련 예정 날짜가 7월 초로 잡혀있다 하더군요. 저번에도 그렇고, 유독 한창 더울 때만 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174화 선생님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놓고 호수에서 만지지 못했던 지아 선생님의 사타구니에 손을 집어 넣는다. "... 적극적인데? 유에." "이게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이미 발기된 성기는 선생님의 엉덩이 골짜기에 박혀있는지 오래다. 한껏 부풀어오른 성기를 엉덩이 아래로 깔고 뭉갠 지아 선생님의 타액이 내 목을 타고 흐른다. 지아 선생님의 가느다란 허리를 매만지면서 날씬한 배 위에 손을 올려본다. 도저히 30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글래머러스한 몸매. 어느 사람이 지아 선생님을 유부녀라고 생각하겠는가. 노아 교수님과 나란히 세워두어도 젊은 여선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선생님이 나를 마주보는 형식으로 자세를 바꾼다. 내 위에 앉은 선생님의 질 입구에 성기가 천천히 삽입되면서 약간 허리를 튼 선생님이 뜨거운 신음소리와 함께 나에게 다시금 안겨오기 시작한다. 역시나 거실에서 취침을 취하고 있는 인원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크게 신음소리를 낼 수는 없다. 이건 저번에 불침번을 서면서 체리와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에 나 역시도 지아 선생님이 왜 이렇게 낮은 반응도를 보여주는지 그 기분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체리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손을 스스로의 입 위에 올려 놓으면서 강제적으로 터져나오는 신음소리를 죽이려고 노력한 반면에, 지아 선생님은 어른의 여유로움으로 신음소리를 충분히 조절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성인 여성의 위엄. 그리고 포스다. 다수의 남자들과의 관계를 가졌는지에 대한 사실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섹스 경험으로 따지면 노아 교수님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많은 여성이 바로 지아 선생님이다. 지아 선생님은 그런 노아 교수님과 비교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남성경험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섹스라는 애정행위의 정점에 서있는 것도 여유롭게 마음 먹은 그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이상으로 따진다면 사실 나도 그렇게까지 많은 여성을 경험하지 않았을 법한 나이에 속한다. 그러나 무인도라는 특수한 환경과 다수의 여자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내 스스로도 지아 선생님 못지 않은 관계 횟수를 자랑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순히 섹스 횟수가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지아 선생님은 오랫동안 기간을 두고서 천천히 다수의 섹스 경험을 한 것이고, 나는 단기간에 다수의 여자들과 섹스 경험을 한 것이다. 이 차이점은 명백하게 존재한다. 섹스라는 것은 저번에 누나가 말했듯이 연애경험을 모태로 해서 사랑의 결실을 맺는 하나의 과정이자 의식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연애라는 요소보다는 오로지 성욕이라는 본능적인 관계를 통해서 이룬 섹스경험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사실 마음속으로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생각하며 위하는 관계를 가져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본래 연애라는 것은 기간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300일을 사귄 커플과 30일을 사귄 커플은 색안경을 끼지 않고 바라봐도 애정도가 어느 커플이 높은 것인지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고 본다. 거의 대부분 300일 커플이 더 애정도가 높게 나올 것이라고는 굳이 설명하지 않도록 한다. 결국 남녀관계는 기간을 두고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는 일종의 인간관계 게임이다. 그러나 나같은 경우에는 그동안의 육체관계가 너무 단기간에 이뤄진 이유도 있고 해서 진실된 연애에서 태어난 섹스관계를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 본인의 입장인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어찌보면 약간 부끄럽기도 하지만, 사실을 직시하도록 하자. "읏...!" 선생님이 스스로 허리돌림을 시작한다. 역시나 테크닉 면에서는 선생님을 따라잡을 여자가 없다. 처녀의 풋풋함과 어설픔도 귀엽긴 하지만, 가끔은 이런 식으로 연상의 여자가 리드를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아 선생님의 리드미컬한 허리돌림에 맞추어 나도 선생님의 커다란 가슴을 입에 문다. 딱딱하게 선 유두를 지긋이 이빨로 깨물거나 하면서 육감적으로 상하로 흔들리는 유방을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그래... 좀 더 만져줘..." 색기어린 선생님의 부탁에 더욱더 적극적으로 가슴을 탐한다. 그럴수록 선생님의 질이 내 성기를 조여오는 느낌이 확실하게 전달된다. 적극적인 요구는 지아 선생님만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개성 포인트이기도 하다. 물론 다른 여자들도 이것저것 요구를 하긴 한다. 그러나 그런 요구는 단순히 자신의 성욕을 더욱더 자극하기 위한 일종의 부탁이나 명령일 뿐, 실제로 지아 선생님이 나에게 내리는 요구사항은 본인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성욕 역시도 자극을 시키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크다. 그렇기 때문에 지아 선생님이 다른 여자들에 비해서 테크닉이 좋다는 평을 듣는 것이다. 지아 선생님의 말에 따라 가슴을 공략. 게속해서 선생님의 허리놀림이 전개되고 있었고, 내 성기는 선생님의 몸 안에서 즐거운 비명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선생님. 이제 슬슬..." "안에다 싸도 좋으니까... 조금만 힘내렴." 응원까지 해주시는 센스. 정말 대단하다. 게다가 질내사정까지 하라고 말씀해주신다. 이래서 지아 선생님과의 관계가 색다르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질내사정. 별다른 신음소리를 내지 않은 지아 선생님이지만, 신음소리보다는 몸을 크게 움직이면서 흥분도에 대한 표현을 보여준다. 아무래도 자신의 신음소리를 무방비 상태로 내질렀다간 거실에 있는 여자들이 깰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체리의 경우에는 그나마 바깥에 비바람이라도 몰아치고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 지아 선생님과의 관계를 가지는 경우에는 조용하다. 고작 밤하늘 아래에 부엉이만 울어대는 조용한 환경에서 지아 선생님이 신음소리를 내면 배로 크게 들리지 않겠는가. 아무튼 선생님의 신음소리 조절(?) 덕분에 무사히 끝난 섹스. "잠시 목욕하고 올게." "그렇게 하세요." 마음 같아서는 선생님과 같이 호수에서 나란히 혼욕을 하고 싶었지만, 불침번을 보고 있는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누군가가 집 안에서는 정신이 말짱한 채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번갈아 가면서 목욕을 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육체관계가 좋다고 해도 본업(불침번 업무)을 소흘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아직도 성기에 묻어있는 애액들을 닦아낸 채 이제서야 겨우 옷을 추스러 입을 수 있었다. 그래봤자 트렁크 팬티 한장을 위로 올릴 뿐이지만 말이다. 선생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난 이후에 집 안에 진하게 풍기는 페로몬 향수를 제거하기 위해서 잠깐 창문을 열여 놓는다. 모기가 들어올 확률이 있지만, 그래도 섹스를 했다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는 이런 방법밖에 없다. 차가운 밤의 공기가 집 안 내부로 들어온다. 화로 덕분에 거실 팀에 누워 있는 아리아, 세리아 자매에게는 이런 찬공기가 다가갈 우려가 없지만, 밤공기에 오랫동안 노출되면 감기가 걸릴 정도로 추웠다. 2층을 만들게 되면 그쪽에도 화로를 하나 놓을까 하는 쓸모없는 고민까지 해보았다. 그러나 밤공기가 차다고 해도 한겨울에 맞이할 수 있을 정도의 추위까지는 아니고. 선선한 정도였기 때문에 굳이 화로까지 만들 필요는 없다고 보여진다. 괜히 침실방에 화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지아 선생님이 돌아오는 동안에 나는 기지개를 펴면서 하반신 운동을 잠깐 실시한다. 오늘 지아 선생님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총 2번의 섹스를 가진 나였기에 조금은 피로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력이 좋아졌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하루에 2~3번의 지속적인 육체 관계를 가지는 것은 아무래도 피곤하다. 내가 섹스를 전문적으로 하기 위해서 발명된 섹스 머신도 아니고 말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스테미너가 바닥을 기는 날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니까 오늘은 섹스 뿐만 아니라 원숭이들의 추격까지 하지 않았는가. 고생이란 고생은 잔뜩 한 느낌이고만. "나 왔어." "어서오세요." 지아 선생님이 젖은 머릿결을 말리면서 들어온다. 그러고선 의자에 앉아있는 나에게 빙그레 웃으면서 말한다. "너도 갔다 와." "전 괜찮아요." "괜찮지 않아. 청결 유지는 병을 제거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세라고. 괜히 병이라도 걸렸다간 양호 선생인 내가 용서하지 않을테니까." "... 알겠습니다." 본래 그냥 자려고 했던 나는 결국 지아 선생님에게 등을 떠밀리며 결국 호수에 오게 되었다. 내가 씻기 싫어하거나 하는 그런 불청결한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씻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라는 안이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뭐, 씻고 안 씻고를 떠나서 어차피 여기까지 오게 되었으니까 목욕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괜히 호수가에 와서 안 씻고 돌아가면 오히려 지아 선생님에게 더 욕을 먹을 거 같으니까 말이다. 근처에 옷을 걸어두고 알몸상태가 된 나는 차가운 밤공기를 허파 안쪽으로 밀어 넣으면서 호수에 다시한번 앉는다. 오늘로 2번째 목욕인가. 그러고보니 섹스도 2번 했는데. 오늘따라 2라는 숫자가 상당히 친숙하게 느껴진다. 인터넷에 보면 '외쳐! EE!'라든지, 하니면 '칠리콩까네~ 칠리콩까네~ 칠리콩까네~'라는 노래도 들을 수 있다. 참고로 둘 다 숫자 '2'라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아무래도 나 역시도 인터넷 세대이다보니 이런 것에 민감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콩의 기운이 느껴지는 2라는 숫자를 되새이며 다리를 쭉 펴보이는 나. 저절로 푸념 섞인 한숨소리가 새어 나온다. "... 경치 좋네." 은하수처럼 펼쳐진 별빛 천장을 배경으로 삼아서 즐기는 목욕. 이것도 일종의 풍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지금 내가 제일 처음으로 한 행동은 바로 이것이다. 이마에 손을 올려놓고 열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체크. 그리고 올려놓자마자 머릿속에서 강하게 든 생각은 다음과 같다. 감기다. 분명 감기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기 싫다는 생각 때문에 허위로 꾀병을 부리기 위한 임시방편의 가짜 감기도 아니고, 숙제하기 귀찮아서 집 안에서 부모님한테 거짓으로 감기에 걸렸다고 하고선 학교에 나가지 않으려고 애쓸때 쓰는 그 감기도 아니고, 친구들끼리 약속이 있는데 귀찮아서 나가기 싫어가지고 일부러 감기에 걸렸다고 사용할 때의 그 감기가 아니다. 정말로 감기에 걸린 것 같은 증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어쩐지 으슬으슬 춥다고 생각했더니만, 느닷없이 콧물이 나오지를 않나. 기침이 나오지를 않나. 여러모로 '나, 감기 걸렸소.'라고 광고를 하는 듯한 증상들만 툭툭 튀어나오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덕분에 내 앞에서 의자에 걸터 앉은 지아 선생님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나에게 최종적으로 이런 결론을 내린다. "감기는 아니야." "감기가 아니라고요?!" 믿을수가 없다. 설마 내가 꾀병이라고? 그럴리가 없다. 이건 명백한 감기 증상이다. 그동안 나름 살아오면서 감기에 대한 경험을 축적하고, 스킬을 쌓아왔기 때문에 감기라는 증상이 어떤 것인지 나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감기가 아니라는 황당한 진담 내용을 발설하면 지금까지 서두에서 장황하게 설명했던 나는 거짓말쟁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지 않는가. ============================ 작품 후기 ============================ 도X천XX 님으로부터 표류일지에 관련된 엄청난 분량의 내용이 담긴 쪽지를 받았습니다, 수신 여부만 막 확인한지라 아직 내용은 살펴보지 않았지만, 어쨌든 소중한 의견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편 올리고 천천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확밀아는 아직도 열심히 하는 중입니다. ^_^;; 노라이퍼 수준으로 열심히 플레이 중입니다; 우산 요정이 안 나와서 우울해하고 있는 중입니다 ㅜ_ㅜ 175화 EP 20. 저의 lol 주 챔프는 모르가나입니다. 지아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변에서 쏟아지기 시작하는 불신의 시선들. 그런 식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니까! "자, 잠깐만요. 지아 선생님. 열도 나고, 기침도 나오고, 콧물에 가래까지 끼는데 감기가 아니라고요?" "그래. 감기가 아니야." "그럼 이건 도대체 무슨 증상인가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감기 말고는 이런 증상과 어울릴만한 찰떡궁합의 병명이 잘 기억나지 않는데요." "아니, 있어. 그것도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병명이 있지." "......" 점점 더 심해지는 불신의 시선들. 등이 유난히 따갑다. 일하기 싫어서 일부러 꾀병을 털어놓고 있다는 듯이 세린의 말이 내 양심이라는 감정을 찔러오기 시작한다. "그럴줄 알았어. 보나마나 일하기 귀찮으니까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일거야. 분명해." "아니라니까! 나는 결백한다고!" "하지만 지아 선생님이 방금 감기가 아니라고 했잖아." "그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양호 선생님인 지아 선생님이 말씀하신 말이기 때문에 반박을 가할수가 없다. 왜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의사 선생님이 말하는 것이 일반인이 말하는 것보다 더 신빙성이 느껴진다는 사실 말이다. 의사 선생님의 한 마디가 환자를 암 환자로 만들수도 있고, 단순한 빈혈증세를 가진 환자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의사라는 직업에는 그만큼 의학적인 전문지식이 가미되어 없던 신빙성마저도 생겨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상황도 마찬가지. 우리들중에서 의학에 제일 도가 튼 인물이 바로 지아 선생님이기 때문에 의학적인 면에서는 지아 선생님의 말이 곧 법이요, 따라야 할 규칙과 규율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불신의 시선이 나에게 쏠리고 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일수도 있겠다. 내가 아무리 주구장창 이건 감기라고 주장을 해도, 지아 선생님이 아니라고 한다면 아닌 것이다. 내가 지아 선생님보다 더 의학적으로 지위가 높지 않는 이상,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현재의 여론을 뒤짚어 엎을만한 능력이 나에게 없다는 상황. 얌전히 '유에는 거짓말쟁이.'라는 좋지 않은 인식이 심어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불행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약간 한숨을 쉬며 다리를 꼬고 앉은 지아 선생님이 피식 웃으면서 말한다. "유에의 증상은 감기가 아니라 '몸살 감기'야." "그게 그거잖아요!!" "엄연히 다른 의미야." 결국 '몸살'이라는 단어 하나가 있고 없고의 차이점 아닌가. 그것보다도 나는 단순한 감기라고 생각했는데 몸살 감기로 업그레이드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슬프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모르겠다. "감기는 바이러스에 의해 코와 목 부분을 포함한 상부 호흡기계의 감염 증상으로, 사람에게 나타나는 가장 흔한 급성 질환 중 하나이기도 해. 재채기, 코막힘, 콧물, 인후통, 기침, 미열, 두통 및 근육통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지만 대개는 특별한 치료 없이도 저절로 치유되는 병이기도 하지." "몸살 감기는요?" "거기에 더해서 몹시 피로하여 생기는 감기야. 몸살이라는 단어 자체가 피로함이 절정에 다다르게 되어서 생기는 병이니까. 그렇지?" "그렇긴 하지요..." "아무튼, 절대적인 안정을 취하는게 좋을거야. 일단 산장 내부를 조금 찾아보니까, 감기 약이 있긴 한데... 시중에서 판매하는 알약보다는 확실히 효능이 떨어지기도 하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휴식이지. 모든 병이 다 그렇듯이, 심신을 안정시키는 일에서 치료가 비롯되는 것이야. 그러니까 유에, 너는 당분간 산장에서 풀 쉴 것." "그것으로 끝인가요?" "몸을 무리해서 혹사시키면 몸살 감기보다도 더 심한 병에 걸릴 수 있으니까 주의하라는 뜻이야." "선생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신다면야..." 덕분에 오늘은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다. 가뜩이나 머리가 어지러운 상황에서 감기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지식을 받아들이게 된 나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간신히 지탱하면서 흐느적 걸어가서 화로 근처에 자리를 잡고 누울 수 있게 되었다. 내 간병을 맡게 된 아리아와 세리아 자매가 이불을 밑에 깔아주고, 주기적으로 화로의 불을 켜놓게 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차갑게 적셔온 수건을 내 이마에 올려놓는 세리아. 옆에서는 아리아가 화로에 불을 유지시키면서 말한다. "그나저나 제일 건강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유에 선배가 제일 먼저 감기에 걸리다니. 예상 외네요." "...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무인도에 들어서 처음으로 걸리게 된 감기 환자는 바로 나로 당첨이 되었다. 이것도 나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다른 여자들도 아니고 남자인 내가 이까짓 감기로 가장 먼저 몸져 눕게 되다니. 괜시리 쪽팔림이 밀려온다. 알게 모르게 작게 한숨을 쉬던 나에게 아리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그 정도로 선배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고생을 많이 했다는 뜻일지도 몰라요." "몸살 감기 말이야?" "네. 지아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몸이 피로하게 되면 몸살 감기가 걸린다고. 솔직히 우리들 중에서 가장 고생하기로 유명한 사람은 바로 유에 선배니까요. 물론 식사나 그런 것은 여자들이 전담한다고 해도, 식사 준비에 비하면 톱질이나 기타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작업은 언제나 선배가 참가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어찌보면 지금까지 선배는 용케도 잘 버텨오신 것일지도 모르죠." "왠지 그거, 날 위로해주는 말 같은데." "... 그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위로하고 싶은 마음도 오히려 싹 달아나게 되어 있어요." 약간 부끄러운지 얼굴을 살짝 상기시킨 아리아가 고개를 다시 홱 돌리면서 마른 장작을 화로 안에 넣기 시작한다. 우리들의 모습을 보던 세리아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수건의 물을 한번 더 짜준 뒤에 다시 내 이마에 올려 놓는다. "고마워. 세리아." "......" 천만에요 라고 말하는 듯이 입모양을 만드는 세리아. 말은 못해도 가끔 이런 식으로 대화를 주고 받을수는 있다. 사실 간병에는 가급적이면 지아 선생님이 남아 있는 것이 정석처럼 되었지만, 그래도 아리아가 남아 있으니까 지아 선생님 본인도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은 채 나를 대신해서 다른 작업을 하러 간 상황이다. 지아 선생님이 합류하기 전에는 아리아가 의학 담당이었기 때문에 지아 선생님 본인으로서도 아리아가 내 곁에 간병인으로 남아 있다면 안심이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오늘의 상황은 내가 감기로 인해서 누워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무 작업은 당분간 중지되었다. 아리아의 말을 인용하자면, 본래 나무 작업을 하려고 했으니 어제 있었던 원숭이들의 습격도 있고 해서 내가 없는 이상은 가급적 최대한 조심하는 편이 아무쪼록 좋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와서 오늘은 간단하게 그동안 못했던 식량 채취나 밀린 빨래 세탁 등등을 하기로 스케쥴을 짰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잠시 아리아와 세리아가 자리를 비운 사이. 지아 선생님이 제조한 특제 약을 먹은 뒤에 세리아가 점심식사로 죽을 만들기 전까지 잠을 청해볼까 하며 자리에 다시 누운 나. 두꺼운 이불 안에다가 화로의 불까지 가까이 있어서 상당히 더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몸에 땀이 절로 새어 나온다. 그러나 본래 감기라는 것은 이렇게 땀을 충분히 흘려준 뒤에 잠을 푹 자둬야 쾌유할 수 있다는 사실 정도는 나도 알고 있기 때문에 별다른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않기로 한다. 병이라는 것은 심적으로도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는 증세이기 때문에 내가 긍정적인 생각을 유지한다면 쾌유 속도도 그만큼 빠르기 때문이다. 이래가지고 언제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라는 부정적인 생각만 하고 있다면 금세 다시 괜찮아질 것도 말짱 도루묵이 되기 때문이다. 의지라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산장의 익숙한 천장을 바라보면서 잠시 눈을 감아본다. 평소같은 경우라면 다른 여자들이 걱정이 되서 제대로 잠도 못 잘 판국이었는데, 지아 선생님이라는 든든한 아군과 유아 선배의 뒤를 이어서 운동신경이 좋은 세린의 합류로 어느정도 안정적인 집단이 되어가는 우리들이었기 때문에 나의 부재속에도 쉽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물론 체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래도 체리도 귀여우니까 봐주도록 하자. 이것저것 쓸모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어느새 찾아온 잠이라는 녀석. 주로 저녁에 자주 출장을 오는 녀석이지만, 오늘은 특별히 내가 몸살 감기라는 병명을 달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오전에 찾아오게 되는 수고스러움을 저지르게 된다.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모처럼 왔으니까 빨리 나를 꿈나라로 인도해주길 바란다. "... 선배." "......" "유에 선배." 아리아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면서 내 어깨를 잡고 천천히 흔든다. 비몽사몽한 정신상태로 일어나자, 아리아가 나를 바라보면서 말한다. "점심 드셔야죠." "...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어?" "이미 다들 식사 마치고 나간 상태라고요." "그렇구나." 영차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본다.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는 상태였고, 아리아의 옆에서 세리아가 따끈따끈한 죽을 들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내 앞에 죽을 대령한 세리아가 한 숟가락을 떠주자, 내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그렇게 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말투로 말한다. "직접 그렇게 해주지 않아도 돼. 수고스럽게." "언니의 노력을 헛되이 만들지 말아주세요. 유에 선배." 세리아 대신에 일침을 가해온 아리아가 나에게 말한다. 준비한 정성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마음에 어색하게 세리아에게 웃어주면서 살짝 입을 열자, 세리아가 방긋 웃어주며 내 입 안에 죽 한 숟가락을 넣어준다. ... 맛있다. 개인적으로 음식을 조금 짜게 먹는 타입인데, 딱 내 취향에 맞게 죽을 만든 세리아가 내 반응을 눈치챘는지 기뻐하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죽을 푼 다음에 입 안으로 넣어준다. 이제 세리아의 요리 실력도 정말 수준급으로 올라간 것인가. 고작 죽 하나 가지고 요리 실력을 평하는 사실이 조금 웃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무인도라는 장소에서 한정되어 있는 재료들로 이 정도의 수준까지 만들었다는 사실을 고려해본다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맛있는 죽이 완성되었다.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을 정도라면 몸살 감기에 한번씩 걸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상상도 해본다. "선배." "왜?" "방금 '감기 걸린것도 나름 좋은걸?'이라고 생각하셨죠." "...아리아. 예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너, 남의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초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는거냐?" "유에 선배 한정으로만 발휘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정말로?!" "농담인게 당연하잖아요." "환자에게 세상이 뒤집어질 정도의 농담을 건내는 것은 나쁘다고 본다만." "세리아 언니의 간병을 오랫동안 받고 싶다는 마음은 동생인 저도 부럽... 이 아니라 인정하지만, 빨리 쾌차하시는 편이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굳이 그렇게까지 강요 안해도 빨리 일어나려고 노력중이니까 걱정하지 마." "이건 걱정이 아니라 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유에 선배에 대한 질투입니다만." "... 이래서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이 필요하구나." 그래도 말상대라도 되어주는 아리아가 있으니까 한편으로는 조금 기쁘기도 하다. 세리아가 착하기는 해도, 말을 못하니까 의사소통에 있어서는 여러모로 갑갑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는데, 아리아와 대화하면 이렇게 서로 거침없이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속으로 응어리를 만들지 않고 곧바로 토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 있어서는 플러스로 작용한다고 보여진다. 이래서 일부러 아리아와 세리아가 같이 남아있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단순히 자신의 언니가 나홀로 간병을 하는 것이 걱정되서 아리아 본인이 자처해서 남아 있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 작품 후기 ============================ 질문 형식의 코멘트, 혹은 개인적으로 보내주신 문의 쪽지에 대한 답변은 이제부터 자정에 올라가는 글 편수 후기란에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제가 코멘트 확인을 자정에 올라가는 글 바로 전에 몰아서 확인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미리 말씀드리는 편이 좋을 거 같아서 올려봅니다 ^_^;;; 176화 오후의 무인도는 그리 선선한 날씨를 자랑하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더운 날씨. 열대기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돌아다닐 정도로 더운 날씨를 뽐낸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날씨에 불이 붙은 화로 더하기 두꺼운 이불 더하기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있다고 생각을 해보자. 자연스레 땀이 흘러 넘친다는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불 보듯 뻔한 결과물은 지금 나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아리아의 도움으로 상반신을 일으키자, 이불이 땀에 흠뻑 젖은 상태까지 오게 되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한다. "선배." "왜." "무슨 다한증 같은 증세라도 있나요." "고작 이거 가지고 다한증이니 뭐니 하는 트집을 잡는 말은 환자한테 삼가해. 괜히 더 기운만 빠지는 꼴이 될지도 모르니까." "선배가 평소와 같이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아메리칸 조크를 건내준 것 뿐인데요." "내가 언제부터 평소에 너의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되는 아메리칸 조크를 듣고 기운을 차렸다는 뜻이냐." "아니었나요?" "......" 뻔뻔함도 도가 지나친 말을 입에 담는 아리아였다. 그런 기억이 있다면 나에게 어디 증거물로 제출해보라고. 심장에 무리가 가는 농담만을 전문으로 일삼는 아리아의 유머감각이 어째서 편히 듣고 지낼 수 있는 가벼운 조크까지 발전했는지 정말 그것이 알고 싶다. 내 등에 손을 기대고 있는 아리아가 자연스럽게 나에게 말한다. "가만히 계세요. 지금부터 옷을 벗길 예정이니까요." "알았다... 뭐, 뭐라고?!" "그러니까 옷을 벗긴다니까요." "자, 잠깐만. 왜 갑자기 옷을? 세리아! 넌 또 왜 내 셔츠를 벗기려고 하는거야?!" "......" 세리아가 내 손바닥 위에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한 글자 한 글자씩 쓰기 시작한다.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으니까 갈아입혀 주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참고로 세리아의 얼굴은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상태다. 그렇게 부끄러워 하는 모습으로 말... 이 아니라 손바닥 글자를 해주면 참을 수가 없단 말이다. 도대체 무엇을 참을 수 없냐고 물어온다면, 대답하기 민망하니까 묵비권을 행사하겠다. "그런 관계로 이제부터 옷을 벗겨드릴 테니까 가만히 계세요." "...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무슨 빨간색 간판이 달린 안마 시술소에서 받는 성대접도 아니고, 두명의 은발 미소녀가 내 옷을 손수 갈아 입혀주겠다는 말을 하다니. 오히려 내가 다 황송해질 지경이다. 아리아가 내 셔츠를 벗기는 동안, 세리아는 옆에서 내 땀을 닦아줄 수건을 시원한 물에 적셔서 손수 짜는 중이다. 상반신을 벗기자, 아리아가 작게 한숨섞인 말로 말한다. "뭐... 예전에 비해서는 그래도 몸이 꽤나 좋아지셨네요." "뭘 그리 감상하고 있는거냐. 아리아." "남자의 신체를 칭찬해주고 있는 미녀에게 그렇게 띠겁게 대해도 되는 건가요. 선배." "말투가 왠지 모르게 이상하게 들려서 그래." "다음은 바지를 벗길테니까 힘을 좀 빼세요." "... 정말로 할 거냐?" "저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갈 생각은 하지 마세요. 입 바깥으로 꺼낸 말은 그대로 실천하니까요." 여아일언중천금(女兒一言重千金)이라고 하지 않는가. 앞글자가 미묘하게 바뀐 느낌이 들수도 있겠지만, 아리아의 성별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가볍게 넘기면 된다. 사소한 것에 딴지를 걸 생각을 하게 된다면 오래 살 것도 짧은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그냥 넘기는 것이 오히려 더 속이 편한 일일 것이다. 물론 근거없는 말이라는 사실 정도는 인정하도록 하겠다. 아무튼 아리아가 바지를 벗겨줄 수 있도록 최대한 힘을 빼는 나. 이불을 걷고서 손수 바지의 지퍼를 푸는 아리아의 눈 앞에, 남성이 속옷만을 입은 변태성 MAX의 모습을 보여주는 상태를 그대로 숨김없이 드러내게 된다. "... 속옷도 벗길 예정이니까 그렇게 아세요." "나를 알몸으로 만들 생각이냐!" "땀을 닦아주려면 어쩔 수 없잖아요. 아니면 선배. 이렇게나 많은 땀이 났는데 설마 속옷만 안 젖는 희안하디 희안한 상황이 벌어졌다고 주장하고 싶진 않겠죠." "그럴 일은 절대로 없겠지." "그러니까 얌전히 포기하세요." 라고 말하면서 과감하게 내 속옷까지 벗겨 내려가는 아리아. 그러자 감기 덕분에 기운이 빠진 상태인지라 축 늘어진 성기가 그대로 아리아와 세리아의 앞에 모습을 보이게 된다. 말 없이 얼굴을 붉인 채 애써 시선을 회피하는 세리아. 물론 아리아 역시도 약간 한숨을 내쉬면서(어째서 한숨을 쉬는거냐.) 말한다. "아무리 정력 왕이라고 하더라도 역시나 감기 앞에서는 장사가 없나보네요." "아리아. 도대체 나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잘 모르지만, 나도 인간이거든." "전 또 마당쇠 급의 정력을 자랑하고 있는 줄 알았어요." "마당쇠도 사람이잖아." "성욕 면에서는 사람이 아니죠." "그렇고만..." 공감하지 말아야 할 부분에서 공감을 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정력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한 마당쇠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아리아의 말에 현혹이 되었나보다. 어찌 되었든 축 늘어진 성기를 그대로 바깥에 드러낸 채 젖은 수건으로 내 가슴을 정성스레 닦아주는 세리아. 옆에서는 아리아가 내가 힘이 들지 않게 등에 손을 기댄 채 내 등을 받혀주고 있었다. "......" 두 손을 모아서 고운 자태로 수건으로 내 몸에 잔뜩 묻어있는 땀을 닦아주는 세리아. 워낙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여자아이라 그런지 유독 내 아래쪽에는 시선을 내리려고 노력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인다. 개인적으로 나도 이런 자존심 상하는(?)모습을 세리아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발기한 것인지 아닌지 뒤숭숭한 크기로 축 늘어진 성기. 내가 왜 이런 표현을 쓰냐면 분명 발기하기 전이라고 보기에는 크기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통 발기를 한 상태라면 성기가 꾿꾿하게 천장을 향해 서 있어야 하는 상태를 유지해야 정상이지만, 지금의 내 아랫도리 녀석은 내가 보기에도 참으로 안쓰러울 정도다. 크기는 발기된 크기지만, 서있지 못하고 축 늘어진 상황에서 아리아와 세리아 자매는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오묘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래도 미성년자도 아닌 성인인지라 아리아 뿐만 아니라 세리아 역시도 남자의 성기가 대체로 발기된 상태가 어떤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감기 덕분에 이런 식으로 힘빠진 모습을 보니까 이게 또 약간 다른 감정을 자극하나보다. 아랫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아리아가 피식 웃으면서 말한다. "저렇게 보니까 은근히 귀여워 보이네요." "너, 그거 남자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하는 말이냐." "당연하죠." "그렇다면 할 말이 없지만." 세리아도 싫지만은 않다는 눈치를 보인다. 핏줄까지 빳빳하게 선 채 모습을 보이는 성기보다는 해양생물의 개불같이 귀여워보이는(?) 모습도 볼만하다는 시선이 아닐까. 물론 이건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말이다. 세리아의 손이 내 가슴과 목, 복부를 닦더니 이내 손길이 멈춘다. 왜냐하면 바로 아래가 성기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난감해하는 세리아에게 아리아가 말을 건낸다. "언니. 내가 닦을까?" 라고 말하자, 세리아가 고개를 수평으로 흔든다. 그 행동은 아마도 본인이 닦겠다는 말과도 같을 것이리라. 기합을 넣으려는 듯이 짧게 호흡을 내쉰 세리아가 맨손으로 내 성기를 잡는다. 거의 성기의 기둥을 오른손으로 움켜잡은 채 위쪽으로 들어 올리자, 성기가 가리고 있던 사타구니의 아랫부분이 세리아의 눈 앞에 펼쳐진다. 땀 덕분에 페니스의 페로몬 냄새가 그대로 세리아한테 전해질 터. 그러나 세리아는 별다른 싫은 표정을 짓지 않고선 묵묵히 내 사타구니를 정성스레 닦아주기 시작한다. 세리아의 가느다란 오른손에 잡혀있는 성기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딱딱해지기 시작하는 성기가 본래의 기운을 찾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리아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한다. "선배. 언니가 잡아주니까 이상한 생각 하고 계시는 건가요." "남자이다 보니까 본능적으로 이렇게 된다고." "그런걸 변태라고 하는 거예요." "시끄러워." 그래도 싫지만은 않다. 감기 덕분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그 얌전한 세리아가 이렇게 직접 손으로 만져주니까 나도 모르게 흥분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세리아의 간접적인 애무 덕분에 다시 기운을 차리게 된 성기. 발기 상태의 그 모습을 다시 되찾은 옛 청춘(?)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남성기가 세리아의 바로 눈 앞에서 위풍당당한 모습을 뽐내기 시작한다. 내가 봐도 정말 자랑스러운 나의 분신 녀석이다. 감기라는 병에도 약해지지 않고 본능에 충실한 이 모습. 괜찮다. 살짝 호흡이 가파오르는 세리아. 아무래도 오랜만에 보는 남성기의 모습에 본인 역시도 조금 흥분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세리아의 성격 자체가 유아 선배나 누나처럼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치는 타입도 아니고 오히려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는 컨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차마 뭐라고 말을 하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언니의 심적인 변화를 가장 빠르게 눈치챌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한 아리아가 내 귀에 작게 속삭인다. "선배. 혹시 흥분하셨나요?" "왜 갑자기 그런 직접적인 질문을 가해오는 것이냐." "솔직하게 말씀해주시면 정말 고맙겠는데요." "솔직하게 질문에 답해서 나에게 득이 되는 것이 무엇인데." "만약에 선배가 흥분하셨다고 한다면, 적극적으로 저도 도와드릴게요." "무엇을?" "선배의 성욕을 바깥으로 분출하는 작업을요." "너, 그거 무슨 말을 뜻하는지 알고서 하는 말이야?" "직접적으로 말하고자 한다면 흔히들 '섹스'라고 하죠." "... 잘 알고 있네." 너무 잘 알고 있어도 문제다. 영특한 후배의 존재가 이럴때는 괜히 방해가 되는구나. ============================ 작품 후기 ============================ 코멘트 토크 첫회입니다. 오타 부분 지적해주신 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시간이 날 때 전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글을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엄청 오랜만에 뵙는 듯한 기분이 드는군요. 헤헤헤. 그리고 소제목은 아무런 의미 없습니다. ^_^; 177화 그래도 내가 감기가 걸린 와중에 섹스를 한다는 말은 조금은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스테미너가 부족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무인도에 표류되기 이전에 자주 이런 말을 들어봤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감기가 걸린 상태에서 연인과 키스를 하면, 그 연인에게 감기가 옮아간다는 소문 말이다. 물론 그것이 소문인지 진실인지, 아니면 의학적으로 정식적인 검증을 거친 현상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개인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감기가 걸린 상태에서는 가급적이면 육체관계를 가지지 않는 편이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내 '이성'이 주장하는 논리일 뿐이고, 본능이라는 이름의 유능한 변론가는 이렇게 주장한다. 감기니 뭐니 하는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인가. 남녀간에 육체관계를 가지는 숭고한 의식을 고작 감기 따위가 막을 쏘냐 하고 말이다. 섹스가 숭고한 의식이라는 것이 거짓은 아니다. 왜냐하면 생명창조의 가장 기초적인 행위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섹스행위를 장려하자는 뜻은 아니고,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게다가 본능이 주장하는 가장 커다란 주장은 바로 이것이다. 이 때 아니면 언제 이 은발의 미소녀 자매과 다 같이 관계를 가져 보겠는가. 솔직히 말해서 남자의 입장인 내 관점에서 보자면 거부할 일이 없다. 은발의 미소녀 자매와 잠자리를 가질 수 있다는 아주 부러움에 뒤집어질만한 상품이 눈 앞에 있는데 이걸 스스로 물리칠 용기가 있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나도 남자니까. 결과적으로 이성과 본능의 10초 토론에서 본능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아리아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본능의 승리 결과를 통보하기 시작한다. "딱 한번만이다." "역시 유에 선배. 성욕에 굶주린 수컷다운 말씀이시네요." "네가 먼저 꺼낸 말이잖아." "그렇다고 설마 감기가 걸린 상태에서 우리 둘을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을 꺼낼줄은 몰랐어요." "날 떠보기 위한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은 아니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선배의 희생을 헛되이 여길 생각은 없으니까요." 라고 말하면서 아리아가 적극적으로 세리아의 성기를 쥔 오른손에 자신의 손을 겹치기 시작한다. 화들짝 놀란 세리아가 아리아를 바라보는 상황. 그러자 아리아가 세리아의 입술을 덮치는 것이 아닌가. 나를 사이에 두고 펼쳐지는 자매들 끼리의 키스. 은발의 미소녀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머리카락들이 서로 엉키면서 나름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역시나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 공과 수에서 공 파트를 담당하는 것은 바로 아리아. 남자든 여자든 육체관계를 가질 때 절대로 적극적인 공세쪽에 위치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이기도 한 세리아는 그저 갑작스런 아리아의 키스에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하면서 얌전히 키스를 받아들인다.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는다는 소리는 세리아도 지금 우리들의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아리아와 세리아의 키스신을 바라보는 나는 생리학적으로 더더욱 성욕을 자극시키는 활성제를 느낄 수 있었다. 점점 하반신에 힘이 들어가고, 아까 축 늘어진 성기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오로지 여성들을 굴복시키고자 고개를 치켜든 자랑스러운 내 아랫도리 녀석의 모습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감기에 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 고생을 많이 한다. 내 분신아. 세리아의 오른손 안에서 껄떡이면서 흰색 끈적한 방울을 내뿜는 성기. 그 모습을 보던 세리아가 살짝 시선을 아래로 향하자, 아리아의 입술에 세리아의 입술에서 떨어진다. 여성들의 부드러운 입술끼리 연결해주던 증거로 남듯이 긴 타액이 늘어지면서 도중에 끊긴다. 그 모습조차도 야하게 느껴지는 이 상황속. 세리아와 아리아의 거칠어진 호흡이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다. "... 유에 선배. 저희 둘이 키스하는 장면, 처음 보시죠?" "당연하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아리아. 자매들끼리 키스하는 장면은 좀처럼 보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건 아마도 레즈 동영상에서도 보기 힘든 진귀한 장면이지 않을까. 만약에 인간의 두뇌가 컴퓨터화 되어 있다면 아마도 지금 내가 목격한 방금의 아리아, 세리아 두 자매의 키스신을 분명 메모리에 저장했었을 것이다. 이것이 현실로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 한일 뿐. 내 말을 들은 아리아가 세리아에게 작게 속삭인다. "처음 봤데. 세리아 언니." "......" 아리아가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속삭이자, 세리아가 약간 부끄러워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군다. 어지간히 언니를 많이 좋아하는 모양이다. 자매애가 좋은 것도 나름 보기 좋다고 생각을 하지만, 아리아는 그것이 조금 지나치다고 해야 할까. 세리아라는 여자를 단순히 언니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호해야 할 존재, 즉 금방이라도 깨질듯한 유리조각처럼 애지중지하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어머니라고 해도 저런 보호본능을 가지기 힘들텐데 말이다. 그러나 이건 내 착각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듯이 아리아의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정말로 충격적이었다. "유에 선배. 방금 저희들끼리 키스하는 모습을 처음 보셨다고 했죠?" "두번 말하기는 귀찮지만 분명 그랬지." "선배가 보지 못했을 뿐, 사실 저희는 이미 여러차례 키스한 경험이 있답니다." "그렇군... 뭐, 뭐라고?!" 갑자기 분위기가 묘해지기 시작한다. 분명 아리아는 나보고 자신과 세리아가 여러번 키스를 해왔다는 말을 들려줬다. 이건 내가 환청을 들은 것도 아니고, 눈 앞에서 생생하게 앉아있는 아리아 본인의 입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들은 말이기도 하다. 적어도 내 귀가 오작동을 하지 않는 이상, 방금 아리아의 말을 곱씹어 생각해 본다면 혹시 이 둘은... "너희들. 설마..." "그렇다고 레즈비언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유에 선배. 저나 세리아 언니도 확실하게 단정지어 말할 수 있지만, 이성애자니까요." "그런데 왜 자매들끼리 자주 키스를 했다는 말을 하는거냐. 이상하잖아." "안되는 건가요?" "... 어?" "자매들끼리 키스하면 안되는 건가요? 유에 선배." "그거야 뭐..." 갑자기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확실히 사랑에는 국경도, 그리고 성별도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아니지. 아리아는 분명 자기 입으로 본인과 세리아는 이성애자라고 했으니까 이 두명의 은발의 미소녀들은 적어도 본인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자각하고 있지 않다. 결과적으로 봤을때는 레즈비언은 아니니까 사랑이고 뭐고 이건 상관 없다는 소리인데... "그런데 왜 레즈비언도 아니면서 여자들끼리 키스를 한거야." 오히려 내가 질문을 감행해본다. 뭔가 조금은 상식선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던져본 질문이었다. 그러나 아리아는 내가 골똘히 고민하고 있던 것과는 상당히 상반된 태도로 쿨하게 답변해준다. "키스는 그냥 애정표현일 뿐이에요." "애정표현이라." "인사같은 거죠. 미국에서도 그렇잖아요." "개방적인 나라, 미국을 언급하면 할 말이 없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저와 언니는 인사를 한 것이죠." "... 이봐. 아리아. 이번만큼은 네 말도 안되는 화술에 쉽게 넘어갈 생각은 없다." "쳇." "거 봐라." 혀를 차면서 아깝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아리아. 아무래도 이 녀석, 나를 현혹시키려고 약간의 거짓말을 보탰던 모양이다. 거짓말은 그만 늘어놓고 사실대로 빨리 말하라고 재촉을 하자, 아리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결국 본인과 본인의 친언니에 대한 키스에 대해 해명을 하기 시작한다. "세리아 언니와 유에 선배, 저번 왕게임때 키스했던 경험이 있죠?" "... 분명 있었지." 아마 제 1차 왕게임 때였을 것이다. 그 때 나와 세리아가 꼴찌를 한 덕분에 서로 딥 키스를 하게 된 아주 행복한 벌칙... 이 아니라. 거의 피날레를 장식했던 벌칙을 받았던 당시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때는 나와 세리아가 첫번째 키스였고 해서 아마 나보다도 본인인 세리아가 더 기억에 남는 키스라고 보여지지만 말이다. 잠시 회상모드를 접어두자, 아리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사실 그때부터 세리아 언니는 유에 선배를 좋아했었다고 하네요." "... 이제서야 말하기도 좀 그렇지만, 약간 부끄러운 말이네. 그거." "감히 세리아 언니의 고백을 받고도 고작 그런 말이 나오는 건가요? 유에 선배." "그럼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줬으면 좋겠냐." "엎드려 빌면서 '저같이 미천한 자에게 감히 세리아 여신님의 자비를 내려주시다니. 황송하옵니다!'라고 말씀해야 정석 아닌가요?" "도대체 너의 머릿속에는 얼마만큼이나 세리아가 신격화 되어있는 것인지 정말 그것이 궁금할 지경이다." 그래도 방금의 말을 유추해서 살펴보자면, 세리아가 나에게 예전에 고백했던 일에 대해서 그때 당시 세리아의 심경이 어느정도로 두근거렸을지에 대한 상상을 조금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매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그녀가 그때 당시에 나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을때의 그 상황을 다시금 돌이켜보자. 다른 사람들처럼 말을 못하는 세리아가 수줍게 지면에 '좋아해요.'라는 글자를 나에게 보여줬을 때의 그 기분. 이렇게나 귀엽고 착한 세리아가 나를 좋아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돌이켜 생각해본다면, 정말 아리아의 말이 맞나 할 정도의 생각이 든다. 그 정도로 세리아라는 여자는 나에게 과분할지도 모르겠다. 천사같이 예쁜 이 후배가 여자친구로 있다면 얼마나 좋겠냔 말이다. ...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현재 나와 사귀고 있는 여자들이 너무 다수라는 점이다. 가장먼저 본처의 자리를 맹렬하게 노리고 있는 인물이 바로 유아 선배 되시겠다. 유아 선배는 무인도에 오고 난 이후에 가장 먼저 나에게 적극적인 연인행위를 주장하는 등 나와는 조금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자 노력한 모습이 다분히 보였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리고 노아 교수님도 있고, 지아 선생님도 있고, 세린이니 체리에다가... 아무튼 이런 식으로 번갈아 가면서 동시에 다수의 여자들과 관계를 가지느라 나의 성기는 약간 거짓을 보태어 말아자면 바깥에 있는 시간보다 여성의 몸 안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리라고 본다. 음... 약간의 거짓이 아니라 과장된 거짓인가. 아무튼 그 정도로 나는 현재 다수의 여자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 중에서도 세리아는 조금 특별하다. 순수한 연애를 펼치고 있다는 기분이 가장 많이 드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순정만화를 보는 남자는 아니지만, 아마 순정만화의 시나리오를 만들라고 한다면 세리아와 사귀는 시나리오가 순정만화의 분위기를 많이 연출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어쩌다가 순정만화 이야기까지 나오게 된 것일까. "......" 아리아가 너무 자신의 의견만 대변해서 말하다보니 세리아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상황이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자신과 자신의 여동생이 서로 키스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부터 이미 세리아에게는 창피함의 극치를 나에게 선보여준 셈이 되는 것인가. 본의 아니게 세리아의 치부를 건들인 느낌이 들어서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반면에 동생쪽은 여전히 적극적이었다. "그런고로 유에 선배는 세리아 언니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필요가 있어요." "도대체 어떤 식으로." "세리아 언니와 결혼하세요." "... 현실 불가능한 이야기는 제외하고." "유에 선배. 설마 세리아 언니가 싫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노아 교수님이나 유아 선배가 세리아 언니보다도 더 매력적이란 뜻인가요?" "너무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고가지 말라니까." "그럼 왜 거부하시는 건가요?" "네 머릿속에는 Yes나 No 말고 절충안은 없는거냐." "세리아 언니에 관해서는 없습니다." "철저하구만." 물론 아리아 본인도 약간은 무리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고집을 피우는 이유는 그만큼 자신의 언니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게 때문일 것이다. ============================ 작품 후기 ============================ 만약 현실에서, 세리아 같은 여자를 반려자로 맞이하게 되지만, 동시에 아리아를 처제로 삼게 됩니다. 천사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더니, 마녀가 붙어서 오는군요. PS. 그렇다고 주인공이 세리아랑 결혼한다는 의미가 아니고요 ㅡ_ㅡ;; 진짜인 줄 아시는 분이 더러 계시더군요; 178화 잠자코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리아가 갑자기 내 손바닥에 글귀를 적기 시작한다. 아리아에게는 들키지 않으려는 듯이 몰래 들려주는 자신의 대화. 한 글자 씩 적느라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대충 뜻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 아리아도 선배를 좋아하고 있어요. 라고 말이다. 역시나 쌍둥이라고 해야 할까.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덧붙여 설명하자면 좋아하는 남자가 하필이면 바로 나 하나로 통일되다니. 이것도 우연의 일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모 호기심 해결 프로그램에서 본 기억이 난다. 일란성 쌍둥이는 좋아하는 취향도, 그리고 선호하는 이상형도 비슷하다고 말이다. 이로써 그 티비 프로그램이 설명해줬던 말도 안되는 쌍둥이 논리가 실제로 가능한 일임을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중에 인터넷 시청자 게시판에 들어가서 나의 경험담을 적어주고 싶은 기분이 조금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실제로 적을 생각은 없고. 그냥 기분만 내자는 의도다. 아무튼 세리아가 나에게 아리아 몰래 이런 말을 하는 의도는 아마도 아리아의 기분도 알아달라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자기 자신도 나를 좋아하지만, 자신보다도 더 언니를 챙기는 기특한 동생의 마음씨를 언니로서 못본 채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리라. 그것이 바로 자매애다. 물론 나와 누나 사이에도 서로 티격태격하는 일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매간의 정이 있긴 하다. 타인도 아니고 혈육관계니까 말이다. 약간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리아를 오른손으로, 그리고 왼손은 세리아의 허리를 감싸주며 두 여자를 품에 안아본다.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이 이어지는 아리아의 딴지가 들려온다. "유, 유에 선배. 저 말고 세리아 언니를 더..." "네가 말하는 그 세리아 언니 본인이 이렇게 해달래." "하지만..." "언니를 사랑하는 동생의 착한 마음을 못본 채 할 수 없으니까." "......" 부쩍 말수가 줄은 아리아. 오로지 자신의 언니만 생각할 줄 알지, 정작 자신의 일은 뒤로 미루는 착한 여동생의 마음씨를 나 역시도 느낄 수 있었다. "... 사실은 그건 핑계고 유에 선배. 일부러 자매 덮밥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사탕발림을 하는 것이죠?" "남의 호의는 군말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제일 좋은거야." 방금 한 말 취소하겠다. 역시나 아리아는 아리아다. 세린과는 다르게 은근히 핵심을 찔러오는 무인도 계의 독설가, 아리아다운 태도였다. "으음..." 가장 처음으로 세리아와의 키스를 성사시키는 나. 사실 아리아와 처음으로 키스를 하려고 했지만. 아리아가 나를 노골적으로 째려보면서 '무조건 세리아 언니를 우선으로 생각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만. 변태 선배 님.'이라고 반 협박을 해서 어쩔 수 없이 세리아와 먼저 하게 되었다. 아직도 아리아의 타액이 입술 위에 묻어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3명이서 키스를 하는 느낌이 든다고 보면 좋겠다. 한명과 키스를 하지만, 서로 마음이 통하는 쌍둥이 자매의 입술을 동시에 덮치고 있다는 그런 느낌. 이건 아마도 평생을 살아가면서 느껴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오로지 쌍둥이이기에 가능한 자매덮밥 만세다. 세리아와의 키스를 끝낸 나는 이번에는 아리아에게 고개를 돌린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리도 자신의 언니와 키스를 하던 내 입술을 바라보는 아리아가 평소와는 다르게 적극적인 키스를 퍼붓는다. 이것도 나름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사실 아리아 본인은 부정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리아에게 약간의 레즈 성향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세리아를 위해서 자신이 세리아의 키스 연습상대가 되어줬다는 후일담도 얼핏 둘었지만, 사실 그건 핑계일 뿐이고 자신의 언니의 입술을 한번쯤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라는 추측성 어린 생각을 한번 담아본다. 그렇다고 이런 사실을 입 바깥에 내뱉었다간 또 아리아의 독설 한 바가지를 들을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얌전히 있는다. 욕을 먹으면 오래 산다고들 하지만, 불로장생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 손을 뻗어서 얌전히 있는 세리아의 가슴을 만져준다. 더불어 아리아의 가슴 위에도 손을 얹어놓는다. 일란성 쌍둥이라 그런지 가슴 크기도 둘 다 비슷한 느낌이 든다. 어느 한 쪽이 크다고 말을 잘 표현할 수 없고, 누워있는 상태라서 제대로 크기의 차이를 느낄 수 없는 탓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손 안의 촉감을 통해서 느껴본 결과는 판별 불가능. 그래도 한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유아 선배보다도 두 자매의 가슴은 조금 작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래도 엘리 정도의 빈유라는 뜻이 아니라 한 손에 들어오기 좋은 모양새와 아담한 크기라는 이야기일 뿐이다. 괜히 가슴 작다고 놀려댔다가는, 정말로 내 목숨에 지장을 끼칠만한 살기를 느낄거 같아서 실제로 그렇게까지 말은 하지 못하겠다. 아리아와의 키스를 마친 나. 이윽고 둘이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한 양 나에게 좀 더 밀착해오기 시작하면서 내 가슴 위로 아리아와 세리아의 두 손이 마주잡는 형국을 이루게 된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이 행동. 개인적으로 남매이기도 한 내가 보자면 조금 부러운 기분이 든다. 나와 누나는 이런 사이는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만약에 누나가 나에게 이런 행동을 해온다면... 닭살 돋아서 못하겠다. 그냥 누나는 누나 본래 모습이 제일 어울린다. 잠깐 가슴 이야기를 했었지만, 여자의 매력이 가슴으로 충분히 어필이 된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나도 남자이고, 그리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수의 남자들 역시도 여성의 가슴을 보면 저절로 눈이 돌아가는 것이 진리이자 어떤 의미로 생리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자연스럽게 두 자매의 가슴을 만지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본능. "... 유에 선배. 너무 가슴에 집착하는거 아닌가요?" 아리아가 이런 내 행동 패턴을 꿰뚫어 보듯이 태클을 걸어온다. 순간적으로 약간 당황했지만 호랑이 굴에 잡혀 들어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고들 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로 나 역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하며 말한다. "그럴리가. 나는 가슴이든 허리든 엉덩이든 골고루 만져주는 사람이야." "... 오히려 그게 더 기분 나쁜데요." "시끄럽다." 그래도 내 품안에 두 여자 자매들의 육체를 만질 수 있으니까 좋다. 오늘은 아리아의 태클도 여유롭게 흘려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매너를 연출해보자. "남자의 본능이란다. 후배야." "기분나쁜 본능이네요." 그래도 싫지는 않은 듯이 내 손길을 굳이 거부하지 않는다. 세리아 역시도 마찬가지. 이미 손가락에는 두 여성의 딱딱한 유두가 걸리적 거릴 정도다. "유에 선배." "이번에는 왜?" "언제 다른 사람들이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빨리 하도록 해요." "... 알았어." 아리아는 별다른 전위행위 없이도 충분히 삽입이 가능할 정도로 젖은 모양이다. 세리아보다는 우선 이미 준비를 마친(?) 아리아를 먼저 눕힌 뒤에 발기된 성기의 끝을 아리아의 질 입구에 그대로 삽입시킨다. "흐으..." 마치 식용유를 바른 듯이 쑥 들어가는 성기. 아직 경험이 없다는 의미를 가득 담고 있는 처녀막의 감촉이 성기의 끝에서 느껴진다. 반면 아직까지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세리아. 우물쭈물한 표정으로 아리아의 한 손을 꼬옥 잡아주면서 아프지 말라는 듯이 기도를 걸어주는 모습이 정말 귀여워보인다. 천천히 허리를 뒤로 뺐다가 다시 삽입. 피스톤 운동을 시작하자 아리아의 입술이 굳게 닫힌다. 세리아가 보는 앞에서 음란한 모습은 가급적 보이기 싫다는 무언의 항의인 것일까. "하아... 으으..." 그래도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를 막아설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희미하지만 아주 미세하게나마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 그러나 아리아 치고는 상당히 잘 참아내고 있다고 보여진다. 계속해서 아리아의 몸속에 정상위 자세에서 전진, 후퇴 운동을 펼치다가 사정 직전에 그녀의 몸 안에서 성기를 빼낸 뒤에 배 위로 정액을 뿌려댄다. 뜨거운 정액들이 아리아의 몸 위로 쏟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약간 몸을 떠는 세리아. 곧 있으면 바로 그녀의 차례라는 것을 직감한 듯이 꿀꺽 침을 삼키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거칠게 호흡을 몰아쉬는 아리아. 신음소리도 원하는 그대로 내뱉지도 못하고 애써 참느라 체력소모가 평소보다 배로 힘들었던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남자인 내가 신음소리를 낸다고 해도 얼마나 크게 나겠는가. 그저 거친 호흡소리가 전부일 뿐이기 때문에 사실 나는 육체관계에 신경을 쓰기만 하면 된다. 곧바로 발기가 시작되는 내 성기. 무인도에 오고 난 직후로 단련 아닌 단련이 되어서 사정 후에도 곧바로 발기가 되는 아주 놀라운 능력을 얻게 되었다. 보통은 한번 사정한 이후에 현자모드이니 뭐시기니 하는 인생무상의 시간을 가지게 되는데, 아직도 내 아랫도리 녀석은 여자의 몸을 갈구하고 있었다. "세리아. 아리아 옆에 누워." "......"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세리아 방금 전까지 자신의 동생의 몸 안에 있던 성기를 조금씩 받아들이는 표정은 한결 편안해보였다. 아마도 옆에 아리아가 있었기 때문일까. 세리아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신음소리를 거의 내지 않기 때문에 아리아보다는 그래도 신음을 참아내는 고충이 덜 할 것이다. "...!!" 이를 악 문채 동공이 크게 확장되는 세리아. 언니의 입장이지만, 아직까지 섹스에 면역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아리아보다 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언니..." 이번에는 아리아가 세리아의 손을 꼬옥 잡아준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없는 자매애. 솔직히 말해서 아리아와 세리아는 굳이 자매가 아니어도 왠지 모르게 정말 친한 친구사이까지 될 정도로 원래부터 이 둘은 이렇게 끈끈한 유대감으로 맺어진 사이가 아닐까 라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두번째 사정인만큼 정액의 양은 어느정도 줄은 상태. 아리아와 같은 많은 양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한 양의 정액들이 곧이어 세리아의 배 위에 떨궈진다. 두 자매가 나란히 한 남자의 정액을 배 위에 받아들인 모습. 보기 좋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뭐라고 해야 할까. 오묘한 기분이 든다. ============================ 작품 후기 ============================ 이 전 편수에서 제가 후기란에 세리아와 유에가 결혼하는 스토리로 마무리를 지을지 모른다는 뉘앙스를 가득 담은 멘트를 날려서 그런지, 행여나 오해하고 계시는 분들을 위해 다시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인공이 누구랑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된 내용이 없습니다. 이 전에 연재했던 분량에 대해서도, 그리고 현재 연재중인 무인도 표류일지에서도 누구와 이어진다고 정한 적은 아직까진 없습니다. 178편 후기에 올렸던 멘트는 그냥 현실에서 세리아 같은 여자랑 결혼하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상상식 멘트일 뿐입니다; 정식 엔딩까지 나오기에는 아직 편수가 한참 많이 남은 관계로 천천히 생각중입니다. ^_^; 179화 사람들이 오기 전에 간략하게 정리를 마친 우리들. 사실은 우리들이라는 단어보다는 나를 제외한 아리아, 세리아 자매가 했다고 표현하는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감기로 인해서 무리한(?) 섹스를 진행했던 나는 가뜩이나 정력도 흡수당한 기분이 들어서 그대로 넋 다운. 아리아는 잠시 볼 일이 있다고 하고선 바깥으로 나간 상황이고, 세리아는 옆에서 빨래감을 집 안에 널고 있었다. 그런데 왜 집 안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 것일까 문득 궁금해진 나는 그 궁금증을 그대로 삼키는 것이 아니라 한번 물어보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세리아." "...?" 말을 못하는 세리아가 고개를 갸우뚱 하며 나를 바라본다. 말은 못해도 말은 알아들으니까 어떤 의미로 편하긴 하다. 말도 할 수 있지만 정작 의사소통이 힘든 엘리에 비해서는 말이다. 이래서 언어라는 것이 중요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를 배우는 그 날이 왔으면 하는 작은 소망도 꿈꿔본다. 어느새 이야기가 또 바깥으로 새어버린 것일까. "빨래는 바깥에 너는 편이 좋지 않아?" "......" 무슨 말을 해줘야 좋을지 난감해하는 세리아. 역시나 참으로 착한 세리아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다른 인물을 갔다가 놓았다면... 음. 예를 들자면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세린을 꼽자면 분명 이런 답변이 들려왔을 것이다. 그럼 내 얼굴 위에다 널어줄까? ... 내가 생각해도 조금 심하다고 본다. 사람의 얼굴 위에 빨래를 널 생각을 하다니. 나쁜 여자, 이세린!... 이 아니라. 실제로 세린이 그렇게 말 한 것도 아닌데 나도 참. 무슨 생각을 하는거냐. 아무튼 내 질문을 받은 세리아가 이내 또 한번 내 손바닥 위에 간이 칠판 형식으로 검지 손가락을 이용해 한 글자씩 또박또박 나에게 자신이 해줄 말을 설명해주기 시작한다. 누워있는 상태에서 세리아의 언어를 해독중인 나. 그리고 그 판독 결과가 이제 막 나오게 되었다. '이왕 화로도 켰으니 말려보려고요.' 과연. 상당히 합리적인 답변이 나왔다. 물론 바깥의 쨍쨍한 햇볕에 말리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지만, 화로의 불에 말리는 것도 나름 낭만 아닌가... 낭만이랑 상관 없는 것인가. 어찌되었든 세리아가 그렇다는데 내가 굳이 태클을 걸어야 할 필요성은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바깥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 특히나 유아 선배와 세린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려온다. 또 한번 싸움이라도 벌어졌나. 저 둘은 무슨 일만 하면 의견충돌을 일으킨다. 좀처럼 화해할 생각도 없는 것인가. 그래도 나는 세린과 나름 화해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 아니라 육체로 말이다. 눈을 감은 채 다시한번 수면을 취하려 했지만, 유아 선배와 세린의 목소리는 마치 확성기를 달아 놓은듯한 큰 소음을 자랑하고 있었다. 공항 옆에 거주하는 주택 거주민들의 느낌이 아마도 나와도 같을까. 실제로 그런 지역에 살아본 경험은 없지만, 간접체험을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경험을 선사해준 유아 선배와 세린에게 너무나도 고마움을 느낀 나머지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대충 싸우는 내용을 들어보니, 빨랫대를 어디에다 옮길지에 대한 싸움을 하던 중이었던 모양이다. 유아 선배는 오른쪽에, 그리고 세린은 왼쪽에 놓자고 각자 맹렬한 토론을 하는 중. 그것보다도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상관 없는거 아닌가. "저 둘은 맨날 싸우네. 그렇지?" "......"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세리아. 조숙하게 앉은 세리아의 모습은 말 그대로 성녀라는 두 글자를 형상화시킨 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얌전하고 참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저 둘도 세리아의 성격을 조금 본받았으면 좋겠는데... 현실 불가능한 소원은 기대하지를 말아야지. 이건 램프의 요정, 지니가 와도 힘들어 보이니까 말이다. 문을 열고 산장 안으로 들어온 아리아의 말이 들려온다. "또 시작되었네요." "너도 나와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네." "선배나 저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니까요." 라고 말하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는 아리아였다. 내가 보기에는 아리아 녀석, 바깥에서 일을 하고 있다가 유아 선배와 세린이 또 한번 멈출 수 없는 폭주모드를 서로 일으키면서 말싸움을 시작하니까 피난도 할 겸 해서 환자인 나를 핑계삼아 도망쳐온 것처럼 보인다. 이런 면에서는 은근히 약삭빠른 녀석이라니까. 세리아도 어느새 그 많던 빨래를 다 걸었는지 자리에 앉은 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란히 사이좋게 옆에 앉은 아리아가 자신의 은발을 쓸어 내리면서 말한다. "선배. 원래 유아 선배, 학교에 있었을때도 저런 성격이었나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나마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유에 선배가 유아 선배와 제일 가까운 사이 아닐까 해서요." "... 그런가."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정말이었다. 이 중에서 유아 선배와 가족 관계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누나와 유아 선배가 서로 알고 지낸 사이였다고 하지만, 친구라고 부를 정도까지의 가까운 사이라기 보다는 그냥 안면만 익힌 사이라고 들은 기억이 있다. 그렇게 된다면 동아리 부장이었던 유아 선배와 그 동아리의 후배격인 내가 제일 가까운 사이가 된다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일리있는 말일수도 있겠다. "뭐... 검도부 부장인 유아 선배의 성격은 지금 이 곳에 비해서 별로 달라져 보이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그게 아니라 학교 내에 있었을때도 저렇게 세린 선배와 자주 다투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느냐 하고 묻는 거예요." "글쎄. 나도 동아리 부장인 유아 선배의 모습만 알 뿐이지, 그 이외의 모습은 나도 전혀 모르니까." "... 그렇군요." 생각해보니 우리들끼리도 서로 많이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새삼 들기 시작했다. 무인도에서 몇일, 아니지. 한달 이상이 되었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꽤나 여러 나날을 거치면서 서로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파고 들어보면 그리 많이 알고 있는것도 아니다. 유아 선배뿐만 아니라 선배와 말싸움을 하고 있는 세린에 대해서는 진성 M이라는 사실밖에 모르고... 그런데 이게 가장 치명적인 비밀 아닌가. 음.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 치자면 일단 개인 사생활에 대해서 제일 모르는 사람은 역시나 체리겠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 타인에게 이러쿵 저러쿵 발설하는 타입 자체가 아니다보니 체리에 대해서는 1살 아래인 연하 후배라는 사실 빼고는 전혀 알고 있는 것이 없다. 누나야 뭐... 너무 잘 알고 있어서 탈이고. 노아 교수님이나 지아 선생님도 체리와 마찬가지로 그리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문득 든 생각인데요." "뭔데?" "같이 지내오면서 저희들끼리도 나름 털어놓지 않은 비밀이나 사생활 같은게 많이 있었네요." "마침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유에 선배와 텔레파시가 통했다니.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네요." "이보시오. 아가씨. 환자한테 농담은 좋지 않아요." "제 말이 정말로 농담이라고 생각하시나요?" "... 미안. 내가 잘못했다." 나도 모르게 사과하고 말았다. 텔레파시를 보내서 죄송하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게 내 책임인가? 수신을 받은 아리아 잘못도 있잖아.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상호간에 태클을 걸고 넘어가봤자 유아 선배와 세린과 마찬가지일 거 같아가지고 잠자코 포기한다. 보아하니 아리아 역시도 그 이상은 별로 농담을 할 생각은 없어 보이니까 말이다. 이제 슬슬 잠잠해지는 유아 선배 VS 세린의 말싸움. 아마도 평소와 같이 중재 역할에 나선 지아 선생님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나중에 진실게임이라도 해볼까요?" "갑자기 왠 진실게임?" "그냥 심심해서 말해봤어요." "음..." 반 장난삼아 말해본 아리아였지만, 왠지 약간 끌리긴 한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 수 있는 계기는 속마음을 터놓는 일부터 시작되지 않는가. 아직까지도 우리들끼리 완전히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 못하는 이상, 혼욕이라는 수단을 동원해도 끈끈한 유대감이 완성되는 일은 조금 힘들다고 본다. 게다가 진실게임이라고 한다면, 무인도에서는 그다지 좋지 않은 추억으로만 가득 하니까 말이다. 맨정신으로 알몸이 되고,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모습들만 잔뜩 보여주고 남은 진실게임을 이제와서 무슨 수로 다시 하겠나 싶다. 그나저나. ... 저 둘의 말싸움은 도대체 언제 끝나려나. 안에서 쉬고 있는 환자 좀 배려해줬으면 한다만. ============================ 작품 후기 ============================ 전판에서는 엔딩이 흐지부지하게 끝났었습니다. 이번에는 확실히 엔딩을 짓도록 해야지요. 그리고 누구 한 명가 맺어지게 되는지, 혹은 맺어지지 않거나 제 3의 엔딩이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스포일러성이 강하기 때문에 말을 아끼도록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확밀아 4월 상반시즌도 이제 슬슬 마무리가 되가는군요. 우산 요정 한장만 나오면 노멀 풀돌인데!! 180화 EX EP. 표류속의 표류일지 "하아..." 노아 교수님의 한숨소리가 여기까지 전해진다. 비가 무성하게 내리고 있는 최악의 날씨덕분에 물살도 급류로 바뀐지 오래. 우리가 타고 온 뗏목을 이용해 건너간다는 생각 조차도 해보지 못할 정도로 물줄기가 너무나도 빠른 탓에, 교수님의 한숨소리가 더더욱 커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거의 확실하다. "언제쯤이면 나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니?" "... 글쎄요." 교수님보다 몇걸음 정도 뒤에 떨어진 위치에 앉아있던 나 역시도 힘없는 대답을 들려준다. 기왕이면 희망찬 말을 전해주고 싶었지만. 보이는 게 현실인지라 함부로 이상을 논할 수 없게 되었다. 교수님과 단 둘이 표류된 작은 섬. 우리가 난파선에서 기적적으로 표류된 뒤에 도착한 무인도보다도 몇십배, 아니 몇백배 정도 작은 바위섬에 교수님과 단 둘이 표류된 것이다. "하아..." 또 다시 들려오는 교수님의 한숨소리. 그러니까 이게 어찌 된 일이냐면. 때는 멧돼지 사건이 벌어지고 난 이후. 양호 선생님 일행이 우리들과 합류하기 전에, 미리 발견했던 큰 강에 도착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여기가 바로 거기였어? 엄청 크네." 유아 선배가 넓직한 강의 표면을 보며 탄성을 자아낸다. 식수를 대신하기 위해 엘리와 누나, 그리고 내가 3인 파티를 이루고서 찾아낸 강. 그리고 이예신과 기괴한 하룻밤을 지낸 장소이기도 하다. 아직 아무한테도 말하진 않았기 때문에 예신이 누구인지, 심지어 이 섬에 그런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여자는 모르고 있는 편이 신상에 좋을거라 스스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식수의 위치는 다른 사람들 역시도 미리 알고 있어야 하는 편이 좋다고 판단했기에, 누나와 엘리를 제외하고 모두가 이 강으로 총 출동한 것이다. 강가 주변에 도착을 했을때, 저번에 우리가 미리 만들었던 임시 움막도 아직 남아있고, 강 건너편으로 건너가게끔 도와줬던 뗏목도 아직 남아있다. "이게 네가 만든거야?" 세린이 신기하다는 듯이 내가 손수 제작한 뗏목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말로만 듣던 수제 뗏목이라 그런지 더더욱 신기하게 보이는건가. "당연하지. 만드느라 고생했다니까." "물에 뜨긴 떠?" "물론. 하지만 1인용이라는 단점이 있어. 여자들은 둘이서도 탑승 가능하지만." "뭐야. 있으나 마나 한 거네." "강을 건널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건지 너는 잘 모르는구나. 아까도 말했지만 나 혼자 몸무게로 2인용일 뿐이지, 여자라면 두 사람도 가능하다니까." 주구장창 이 뗏목의 장점을 나열하고 있는 와중에. 뭔가 재미있는 게 떠올랐다는 시선을 한 아리아가 슬쩍 노아 교수님을 바라보며 말한다. "그러고보니 교수님." "응? 왜 그러니?" 순진무구한 눈동자로 아리아를 바라보는 교수님에게. "교수님, 최근에 살 찌지 않으셨나요?" "!!!" 상당히 잔인한 말을 내뱉는 녀석이었다. 갑자기 자신의 배를 양 손으로 가리면서 붉어진 얼굴로 대뜸 화를 내기 시작하는 교수님의 반응.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아, 안 쪘다니까?!" "생각해보세요. 저번에 의자가 부서진 원인도 결국 밝혀내지 못했잖아요. 게다가 최근에는 고기라는 육류까지 식단에 올라오면서 점점 교수님의 몸무게가 의심스러워지고 있습니다만." "읏...!" 배꼽티에 다리 위에 딱 달라붙는 레깅스 차림의 교수님이 거의 울먹이는 표정을 하며 아니려고 끝까지 부정하기 시작한다. 아리아도 최근에 누나와 어울려다녀서 그런지 남을 괴롭히는 재미에 빠진 걸까. 누차 강조하지만... 아니지. 꽤나 오랜만에 강조하는 사실이지만, 노아 교수님은 결코 살이 찌거나 그런 타입이 아니다. 그렇다고 마른 타입도 아니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건강미가 있다는 말을 사용하는 편이 가장 정확한 표현법이라고 생각한다. 부드러워보이는 허벅지, 큰 가슴, 귀여운 엉덩이 같은 거. 특히나 저 허벅지가 정말 너무 탐스러워서 견디지 못할 지경이다. 노아 교수님 하면 역시 허벅지 아니겠는가. 특히나 저런 식으로 타이트한 레깅스를 착용하고 있으면 육감적인 허벅지의 라인이 그대로 드러난다. 여자는 역시 허벅지지. 암. 그렇고 말고. 아마도 아리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도 노아 교수님의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인정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아의 말에 발끈하는 교수님의 모습이 은근히 귀여워보였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리라. 그 덕분일까.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우리들의 반응에 오히려 더 화가 난 모양인지, 노아 교수님이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성큼성큼 뗏목으로 걸어간다. "좋아! 그러면 내가 유에랑 같이 뗏목을 타고 건너편까지 갔다 오면 되는거지?"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지 않나요. 교수님..." "유에는 조용히 하고 있어!" 진짜로 화난건가. 교수님의 눈빛이 장난이 아니다. 무인도에 표류되고 나서 이리도 강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던 교수님이었던지라 솔직히 나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주변 사람들도 만류를 하지만, 교수님의 고집은 사그러들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노아. 가뜩이나 물줄기도 급해보이는데. 그냥 가만히 있어." "말리지 마세요! 지아 선생님!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다고요!" 심지어 양호 선생님의 말도 깔끔하게 거절해버렸다. 지아 선생님 조차도 노아 교수님을 말리지 못했단 뜻은, 이 자리에 교수님의 행동을 저지할 용사는 없다는 말과 같다. 나이 서열순으로는 단연 2위니까. 어쩔 수 없이 뗏목 위에 교수님을 태우고 강가까지 갔다 오기로 결심한 나에게 아리아가 응원의 메세지를 보낸다. "힘내세요. 선배."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저도 교수님이 저 정도로 발끈할 줄은 몰랐어요." 여자들은 체중에 굉장히 민감하다. 특히나 교수님은 더더욱. 아마도 아리아 또한 그 사실을 간과하지 못했을 뿐이겠지. 이제와서 아리아를 추궁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일단 튼튼하고 기다란 막대기를 준비한다. 더불어 뗏목도 교수님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약간 보수 작업을 한 뒤에야 물가 위에 배를 띄운다. "교수님. 꽉 잡으세요." "... 말 안해도 알고 있어." 스스로 올라 타겠다고 호언장담을 늘어놨지만, 그래도 난생 처음 타는 뗏목이 무서운지, 자세를 최대한 낮춘 채 내 눈치를 보고 있다. 그렇게 무서우면 타지 말자고 하는 편이 더 좋겠는데. 하지만 이제와서 없던 이야기로 돌리기에는, 교수님의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은근히 불쌍해 보이기도 하니까.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 이렇게 해서 나와 노아 교수님 둘 만의 뗏목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계기가 좀 단순하면서도 말이 안 되긴 하지만, 인간의 고집이란 가끔 예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한 경우가 더러 발생하니까 말이다. 천천히 뗏목을 이끌고 강가를 향해 나아가는 나. 급류 덕분인지 몰라도 팔에 쥐가 다 날 지경이었지만, 체력 분배를 생각하며 간신히 반대편 강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으니. "... 아얏." 갑자기 자신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고 뭔가를 더듬거리기 시작하던 교수님이 순간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도 속으로 '뭐지?'라는 의구심을 품으며 똑같이 교수님과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향하는데. 차가운 액체 한 방울이 기가막힌 타이밍으로 내 이마 위에 떨어진다. 그와 동시에 나도 모르게 내뱉은 한 마디. "빗방울...?" ============================ 작품 후기 ============================ EX 에피소드입니다. 본 스토리와는 다르게 따로 추가된 별개의 에피소드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 이번 주인공은 오랜만에 메인을 차지하게 된 노아입니다. 181화 무인도의 날씨는 언제나 그렇듯, 예고없이 자주 바뀌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쾌창했던 날씨가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뒤덮힌 지 오래고, 심지어 한, 두 방울 씩 빗줄기가 떨어지는 게 아닌가. "교수님. 빨리 건너편으로 가죠. 괜히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나면, 오늘 내로 돌아갈 수 없어요." "으, 응. 알았어." 종종걸음으로 뗏목 한 가운데에 얌전히 앉는 교수님. 그리고 교수님의 머리 위에 나란히 선 뒤에 기다란 막대기로 뗏목을 띄운다. 아까에 비해서 훨씬 더 빨라진 물줄기를 가르며 열심히 배를 이동시켜보지만. "... 제기랄."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하고, 심지여 시야조차 희미해진다. 아까에 비해서 거의 2배 정도 굵어진 빗방울을 맞으면서 최대한 열심히 우리가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가려 노력하지만. 아무래도 한계에 봉착한 거 같다. "교수님! 일단 근처에 있는 저 섬에 정차할게요!" 간신히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짜며 뗏목을 작은 바위섬에 정착시킨다. 이제는 거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섭게 내리는 빗줄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조차 보이지 않는 적박한 환경속에서 최대한 머리를 굴려본다. 이대로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을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체온 유지가 안 될 테니까. 한참을 생각하고 있던 중에, 낯익은 목소리가 빗줄기를 뚫고 들려오기 시작한다. "유에~!! 괜찮은 거야?!" 건너편에 있던 나머지 일행들 중 유아 선배가 대표로 우리들의 모습을 확인했는지 안부를 묻는다. 비가 내리는 소리 때문에 제대로 잘 들을수는 없지만, 서로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확인한 것으로 만족하는 중. 무사하다는 것만 알면 되지 않은가. "어떻게든 살아 있어요!! 그것보다 유아 선배!! 다른 분들이랑 우선 숙소로 돌아가 있어요! 계속 비를 맞으면 안 되잖아요!" "너희는 어떻게 하려고?!" "비가 그치고 급류가 약해지면 다시 건너편으로 갈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우리가 비를 피해야 한다는 점도 있지만,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에게 우리들의 안부를 전하고 먼저 안전한 곳으로 피해있으란 의사를 전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에 우선적으로 유아 선배에게 캠프로 돌아가라는 말을 전한다. 그리고 남은 문제가 뭐냐하면. "어떻게 한다..." 최악의 상황이다. 면적도 좁고, 있는 거라고는 바위나 모래들 밖에 없는 이 작은 섬에서 비를 피하고, 당분간 먹을 것을 구하며 생활을 해야 한다. 노아 교수님도 벌써부터 추위 탓인지 몸을 웅크리고 바들바들 떨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인다. 비를 피해야 한다. "어쩔 수 없지." 결심을 굳히고서 뗏목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나서,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해 챙겨온 커터칼로 나무 줄기들을 자른다. 이음새가 끊어지자, 사방으로 흩어지는 나무 기둥과 잔가지들. "교수님! 저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자, 잠깐만."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내쪽으로 다가오는 노아 교수님에게 잔가지들을 바위섬 가운데에 옮겨달라는 지시를 내려준다. 나머지 나무 기둥들은 내가 직접 손수 옮기기로 하고. 쓸만한 나무기둥 4개를 가져와서 사각형의 형태로 수직 방향을 유지하며 바닥에 고정시키고, 나머지 나무 기둥들 가져와 평면으로 지붕 형태를 갖추게 만든다. 그 이후에, 입고 있던 티셔츠를 최대한 넓적한 면적을 뽐낼 수 있도록 찢어버리고, 지붕 위에 덮어보지만. "티 하나로는 부족한가..." 아래에서 열심히 잔가지들을 모으고 있는 교수님에게 다가가, 무례한 부탁을 해보기로 한다. "교수님. 죄송하지만... 입고 계신 티셔츠 좀 사용할 수 있을까요?" "버, 벗으라는 말이니?!" "어차피 물에 젖어서 쓸모 없어요. 그리고 비를 피하려면, 위에 입고 있던 옷가지들로 막을 수 밖에 없으니까요." "... 알았어. 잠깐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교수님이 순순히 티셔츠를 건네준다. 아무래도 여성용이다 보니까 내가 입고 있던 옷 보다도 훨씬 그 면적이 작지만, 그래도 재료가 없다시피 한 이 바위섬에서는 최고의 재료 중 하나라고 자부할 수 있다. 무인도에서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는 습관이 길들여진 탓인지, 티셔츠를 벗자 교수님의 탐스러운 가슴이 그대로 바깥에 노출된다. 핑크빛의 유두를 오른팔로 가리며 왼 손으로 잔가지를 모으는 작업을 시작하는 교수님. 아무래도 섹스라는 관계를 가진 남녀 사이라고 하지만, 부끄러워 하는 건 매한가지인가 보다. 어쨌든 부랴부랴 만든 2인용 움막.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1인용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정도로 좁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고시텔에 보면 좁디 좁은 방에 딱 사람이 누우면 꽉 차는 그런 크기 있지 않은가. 대략 그 정도 면적의 움막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교수님. 이 쪽으로 오세요." "응..." 게다가 화로도 있어야 하니 공간은 더더욱 좁아질 터. 본래 움막 안에 화로를 만들지 않지만, 비가 오고 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움막 안쪽에 화로를 만들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뜩이나 좁은 움막 공간이 더더욱 좁은 현상을 만들어내게 된 것. 처음에는 불이 잘 안 붙었지만, 그래도 무인도 생활 짬밥을 괜히 먹은 내가 아니다. 오기를 부려서라도 기어코 불을 피우는 업적을 달성한 나. 따스한 불길의 온도가 움막 안을 가득 채우고, 그와 동시에 아직도 내리기 시작하는 빗줄기의 소리와 함께 점점 날도 저물어간다. "......" "......" 여전히 팔로 가슴을 가리고 있는 교수님. 그 옆에 딱 달라붙은 나 역시도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서로 상의를 탈의한 채 좁은 공간에 있으니까, 왠지 모르게 기분이 묘해진다. "... 춥지 않니?" "네? 그야 뭐..." 교수님이 예상외로 먼저 입을 열었다. 소극적인 성격의 교수님이 서문을 열게 될 줄이야. "좀 더 내 쪽으로 붙으렴. 안 그래도 네가 있는 쪽이 더 좁아보이는데..." "괜찮아요. 교수님. 여성에 대한 배려는 기본이니까요." "그래도..." 아까부터 오른쪽 어깨가 축축하다고 생각했더니만.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자리가 내 자리였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워낙 정신이 없던 상황이었다 보니까 움막의 허술함을 뒤늦게 깨달은 셈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뗏목이 있어서 움막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과, 풀 한 포기조차 없는 작은 바위섬이지만 덕분에 수분을 적게 함유하고 있는 지면 때문에 그나마 불이 쉽게 붙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건 위안으로 삼아도 좋겠지. 하지만 언제까지나 재료가 무한정으로 공급되진 않는다. 움막을 짓는 데에 투입된 나무와 천 재료는 그렇다 쳐도, 장작으로 사용할 잔가지들은 한정적인 갯수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위섬에는 나무도 없는데, 불을 피울 장작조차 없어진다면 최악의 시나리오로 치닫게 될 것이다. 언제까지 이 바위섬에 머물러야 할지 모르고. 비가 그친다 해도 물줄기가 약해져야 강 건너편으로 건너갈 수 있다는 또 다른 조건이 클리어 되어야 한다는 점도 있다. 여러모로 난관 곱하기 난관. 더하기도 아니고 곱하기다. 배수로 작용한다는 점이 이리도 뼈 아프게 다가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절로 나오는 한숨소리. 그 소리가 교수님의 귓가에도 들렸던 것일까.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니?" "그건 아니고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아..." 내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뻘쭘한 감정이 들었는지, 긴 머리카락을 매만지기 시작하던 교수님이 얼굴을 살짝 붉히고서 말한다. "미안해." "갑자기 왠 사과에요?" "무인도에 표류된지도 꽤 오래 지났는데, 여전히 난 아무것도 할 게 없나 싶어서..." 노아 교수님의 말을 들음과 동시에, 예전에 지아 선생님이 나에게 해줬던 말이 떠오른다.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들에게 신세를 진다는 마인드로 무인도에 있었던 노아 교수님. 그게 아마도 본인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분담으로 작용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지아 선생님의 말이 아마도 정답이리라 생각된다. "방금도,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전혀 모르고...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서..." "괜찮아요. 교수님. 그게 뭐 어때서요. 교수님은 지금의 교수님 그대로 있어주면 되요." "......" 단어의 선택이 잘못 되었나. 사실 내가 누나와 같은 혈육이긴 하지만, 나는 누나에 비해 말빨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화술 능력은 평균치보다도 낮은 편. 그래서 지금과 같은 경우에 봉착하게 된다면, 어떤 식으로 여성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줘야 좋을지 잘 모르는 경우가 생긴다. 아니, 실제로 생겼다. ============================ 작품 후기 ============================ 아... 노아가 오랜만에 메인을 차지하니 쓰는 맛이 나는군요. 핰핰핰. 세리아 같이 천사형 여성도 좋지만, 사회적인 지위로나 몸매로나 외모로나 성격이나 여러가지 따진다면 노아같은 타입도 전혀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인 스타일의 여성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거지요 -_-b 그리고 짬을 내서 확밀아 토크를 해보자면, 오늘이 4월 상반시즌 마지막일입니다. 현재 저는 감사형 춘향 키라 풀돌을 노리기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지요. 현재 등수도 여전히 만등 유지상태입니다. 상황을 보아서 모아뒀던 홍차를 써야할지 모르겠군요. 무과금도 슈레플 키라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립시다!! 182화 "... 교수님." 어차피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본래 인간관계란, 직접 몸으로 부딛치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 편이 더 쉽게 전해지는 편이니까. 슬쩍 교수님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내 가슴쪽으로 교수님을 안아본다. 눈시울을 붉히던 교수님도 자연스럽게 내 팔에 의해 안기게 되는 모습을 하게 되는데. "......" "......"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나와 교수님. 이내 서로의 의도를 눈치채고 살며시 입술을 부딛친다. 차가운 밤의 공기가 피부에 맞닿고 있었지만, 나와 교수님의 체온은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어깨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살짝 밑으로 내리면서, 유두를 가리고 있던 교수님의 팔을 치운다. 자연스럽게 팔을 내리는 교수님의 아찔한 육체를 손으로 더듬기 시작하자, 교수님의 입술에서 야릇한 신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유에..." 뭔가를 강하게 요구하는 듯한 교수님의 시선. 남자인 나이기 때문에, 그리고 교수님과 몸을 섞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교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세를 살짝 바꾸면서, 교수님의 레깅스를 천천히 벗겨준다. 육감이 넘치는 허벅지가 비에 젖은 채 뽀얀 살결을 드러내며 등장하자, 절로 침이 꿀꺽 넘어가는 건 자연스러운 생리현상. 그와 동시에 아랫쪽 성기가 커지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이다. 나 또한 교수님과 같이 바지를 벗는다. 나머지 최후의 보루인 팬티마저도 제거하자, 완벽하게 서로가 알몸 상태가 되는데. "교수님. 이런 상황에서 말하긴 좀 뭐하지만..." 나에 비해서 작은 체구를 가진 교수님을 품 안에 안아주며, 귓속말로 속삭여준다. "교수님은 제 곁에 있어주는 것 만으로도 정말 큰 일을 해주고 계시는 거예요." "... 정말?" "그럼요. 교수님처럼 예쁜 미인이 옆에 있는데, 제가 힘을 내지 못할 리가 없잖아요." 결국 힘의 근원은 다 노아 교수님의 존재에 달려 있다. 다시 한번 교수님의 부드러운 입술에 키스를 선사해주며 천천히 성기를 교수님의 몸 안쪽에 고정시킨다. "앗...!"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는지, 자연스럽게 다리를 M자 형태로 벌리면서 남성기를 받아들이는 교수님의 모습. 청순 가련한 모습 뒷편에 숨겨져 있는 섹시한 이미지가 더더욱 내 성욕을 자극시킨다. 엉덩이를 살짝 뒤로 뺀 뒤에. 앞으로 전진. 살들의 마찰음이 오늘따라 야시시하게 들리는 건 내 착각이 아니리라 생각한다. "응... 흐읏..." 최대한 교수님이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서 교수님을 끌어 안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공중에서 나에게 매달린 자세가 된 교수님이 두 팔을 내 목 뒤로 걸고, 다리는 내 허리를 감싸는 자세로 남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이 또 어찌나 음란한지 벌써부터 사정 타이밍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교수님! 오늘 혹시..." "아, 안돼... 밖에다... 흣..." 약간 아쉬운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질내 사정을 추구하고 싶지만, 임신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교수님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에, 그대로 늘씬한 배 위에 정액을 벌컥벌컥 토해내는 내 분신. 새하얀 정액들이 교수님의 백옥같은 피부를 더럽히는 게 죄책감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쾌감마저 느껴진다. "후우..." 길게 한숨을 토해내며 자리에 앉자, 갑자기 교수님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뜬금없이 내 성기를 입에 물고 핥아주는 게 아닌가. "노, 노아 교수님..." "가만히 있어봐. 더러워지잖니." 귀두부터 고환, 그리고 사타구니 전 부분까지. 정액이 묻어있는 부분을 직접 혀로 핥아준 교수님이 정액들을 꿀꺽 삼키고 나서 애써 억지 웃음을 지어 보인다. 비린내 나는 정액을 삼키다니. 교수님도 진짜 대단하다. "이제 좀 깨끗해진 것 같네." "그렇게까지 안해주셔도 되는데..."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이것밖에 없잖니. 지금은 내가 너에게 봉사하는 시간이니까, 너무 그런 말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봉사라. 어떤 의미로 잘 어울리는 단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교수님의 펠라치오는 정말 받아볼 수 없는 진귀한 보상이기도 하니까. 물론, 아주 짧게 끝나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뒷마무리가 되어서 대 만족이다. 다음 날 아침. 화사한 햇살이 우리들을 반기... 어야 하지만, 불행하게도 단순한 희망사항에 그치고 말았다. 따스한 아침 햇살 대신에 눅눅한 습기와 더불어 아직도 보슬보슬 내리는 빗방울들. 최악의 컨디션을 가지고 있는 기상조건이 나와 교수님의 아침을 반기고 있었다. "아직 안 그쳤네." "그러게요." 참으로 굳은 날씨다. 하루만에 비가 그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나가는 비겠지 하고 희망을 가져본 내가 다 무색해질 지경이다. 화로에 붙였던 불로 말린 레깅스를 다시 입고, 여전히 한 팔로 가슴을 가린 채 움막 바깥으로 살짝 고개를 내민 교수님이 노골적으로 실망했다는 표정을 하면서 말한다. "오늘 나가기는 힘들겠구나." "그래도 혹시 모르죠. 갑자기 비가 그치고, 물줄기가 약해질수도 있잖아요?" "......" 하기사.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교수님인데. 날씨가 아무리 좋아진다고 한들, 강줄기가 쉽사리 우리들의 횡단을 허락해준다는 보장은 없다. 적어도 오늘 안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 노아 교수님도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희망적인 말을 내뱉지 않았던 것이다. 갈수록 곤란하구만. "일단 먹을거라도 구해볼까요?" "먹을 거라니... 여기서?" "아무것도 없는 바위섬이긴 하지만, 식량은 구할 수 있으니까요." 라고 말을 하면서 입고 있던 팬티를 벗고, 알몸이 되어버린다. 갑작스런 내 누드쇼에 당황한 것일까. 교수님이 손으로 눈을 가리며 짧막한 비명을 내지른다. "어머...!" 상당히 귀여운 반응이라고 생각하지만, 몇 차레 섹스를 해놓고 이런 반응을 보이면 나름 섭섭하기도 하다. 어차피 서로 못볼 꼴 다 본 사이인데. "기껏 말린 옷이 또 비에 젖으면 안 되잖아요." "그, 그랬었지. 나도 참..."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시선을 회피하는 노아 교수님.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일단 움막 바깥으로 나가야 하니까 말이다. 결코 노아 교수님에게 변태적인 플레이를 요구하고자 일부러 알몸 차림이 되려고 한 게 아니다. 어제에 비해서는 그래도 미약하게 줄어든 빗줄기를 맞으며 바깥으로 나간다. 바위섬의 규모 자체가 너무나도 작기 때문에, 금방 물가로 나갈 수 있는 관계로 굳이 먼 행군을 다녀올 필요는 없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으로 삼을 장점이라고 할까. "역시..." 강물이 워낙 깨끗하다보니 안의 내용물이 그대로 다 보이는 게 이토록 도움이 되는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비가 와서 저번에 우리가 왔을 때보다는 약간 더러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시야만 제대로 보이면 되는 거 아닌가. 수심이 옅은 곳에 발을 들이밀고 천천하 강가 안으로 들어간다. 그 자세에서 허리만 숙이고 고개를 밀어 물가 안으로 잠수. 작은 물고기들이 내 움직임에 반응한 것인지 짧은 지느러미를 팔락이며 요리조리 도망다니기 시작한다. 평소에 봤다면 정말 귀여운 녀석이라 칭찬하고 싶지만. 오늘은 아니다. "교수님. 아침 식사 드실래요?" "먹을 게 있는거니?!" "없으면 만들어야지요. 교수님의 식사를 거르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 그렇게까지 먹을 걸 밝히는 건 아니야!" "농담이에요. 농담. 자, 여기요." 두 손 가득히 작은 민물고기들을 내려놓는다. 그러자 감탄 더하기 놀라움의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교수님의 한 마디. "어떻게 잡은 거니?!" "엘리 덕분에 자주 훈련을 받았거든요. 나무 열매나 풀 같은 걸 구할 수 없을 때, 물가가 근처에 있다면 작은 물고기를 손쉽게 작는 훈련같은 거요." "그런 방법이 있었어?" "쉽진 않았지만, 그래도 배우고 나니까 도움이 될 줄은 몰랐어요." 움직임이 둔한 녀석을 고르고, 타이밍에 맞춰서 손으로 낚아채면 된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하기에는 엄청나게 어려운 기술. 그래서인지 엘리에게 처음으로 이 기술을 배울 때, 꽤나 애를 먹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서바이벌 기술은 생존의 기본 법칙이니까 그런 노력을 들여도 전혀 아깝지 않은 기술이라고 판단했기에, 엘리를 졸라서 기어코 알아낸 방식이기도 하니까. 실제로도 도움이 되었으니 보람도 느껴진다. 역시 사람은 많은 걸 알고 있어야 한다니까. 정보화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다. 명심하도록 하자. ============================ 작품 후기 ============================ MBC에서 방영한 '진짜 사나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연예인들이 군대에 실제로 들어가서 촬영하는 프로그램인데요. 군필자의 입장에서 보니까 공감대도 형성되고, 옛 생각도 나고 그러더군요. 앞으로 자주 챙겨봐야겠습니다. ㅋ 183화 다시 불을 피워서 물고기를 구워먹은 뒤. 저 강가 멀리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에 움막 바깥으로 나오는 내 시야에 익숙한 모습이 두 손을 붕붕 흔들며 나를 반긴다. "남동생. 살아있어?" "보시다시피." 누나 말고도, 엘리와 지아 선생님, 그리고 세린의 모습도 보인다. 아마도 저 4명이 온 이유는 우리들의 안부를 살피려고 온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 라는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선물을 주려고 왔어." "선물?" "그래. 잠깐만." 누나가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엘리에게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거리가 거리인지라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아니, 사실은 가까히 있어도 영어로 말하는 것이라서 내가 들어봤자 무슨 말을 하는지 분명 모를 것이다.), 그 다음 이어지는 엘리의 행동으로 인해 누나가 엘리에게 어떤 지시를 내린 것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멧돼지 사냥에 사용했던 창을 들고 선 엘리. 그 뒤에, 지아 선생님이 뭔가를 주섬주섬 묶는다. 다 됐다는 듯이 엘리의 작은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는 지아 선생님의 신호에 따라, 갑자기 투척 자세로 돌변하는 엘리의 모습에 순간 당황한 나는. "누나! 무슨 짓을 하려고?!" "위험하니까 좀 떨어져 있어." "이 좁은 곳에 어디로 피해있으란 거야!" "여차하면 네가 손으로 잡던가." "누나는 설마 나를 초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엘리, go~!" 예고도 없이 엘리에게 투척 명령을 내려버린다. 당황한 나는 일단 교수님에게 최대한 움막 안에 들어가있으란 말을 하고, 날아올 창을 대비한다. 누나의 말대로, 여차하면 잡아볼 심산으로 말이다. 최대한 뒤로 물러서던 엘리가 이내 매서운 속도로 엄청나게 빠른 돌진력을 선보인다. 이윽고 힘차게 창을 던지는데. 정확히 45도 각도. 투척 대상이 가장 멀리 날아갈 수 있다는 황금 각도로 던진 창이 공중을 가르며 정확히 바위섬 근처로 날아오기 시작한다. "조금만 더..." 바위섬 강가 근처에 떨어지기 직전이었던 창을 간신히 팔을 뻗어 잡는다. 자세히 보니까... 우리가 멧돼지 사냥에 사용했던 그 창이라고 부르기에는 끝이 뭔가 뭉툭하고 날카롭지 않다. 긴 막대기에 무게중심을 잡기 위해서 일부러 돌덩이를 붙였다는 듯한 느낌이 드는 그런 도구로 보인다. 그리고 끝을 보아하니. "밧줄?" 지아 선생님이 창 끝에 무언가를 묶었던 게 이거였나. 단순히 평범해보이는 밧줄인데. 창 끝에 밧줄을 매달고 여기까지 던져야 하는 이유가 뭐가 있을까 고민을 해본 결과. "설마." "그 설마가 맞아." 누나의 목소리가 내 추측에 신빙성을 더해주기 시작한다. "먹을거하고 옷가지를 보낼테니까 잘 받으라고." "어떻게 주려고?" "밧줄 끝에 매달아둘 테니까 끌어당겨. 그러면 되잖아?" "물에 다 젖을텐데?" "음식은 어차피 고구마나 감자, 열매 류니까 상관 없고. 옷가지는 말려서 사용해. 거기서 얼마나 더 지내야 할지 모르잖아." 누나의 말이 맞긴 하다. 먹을 것은 어차피 물에 젖으나 안 젖으나 문제가 되질 않고, 옷도 물에 젖는다 해도 불을 이용해서 말리면 그만이니까. 지금 당장 입을 순 없어도, 불 위에 말리면 금방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누나. 우리한테 필요한 건 장작이야. 나뭇가지 같은 거 좀 구해서 보내줄 수 있어?" "얼마나 필요한데?" "대략 3일치 분량 정도." "알았어. 현지조달 해볼게." 말이 끝나자마자 누나와 함께 다른 일행들이 주변에서 주섬주섬 잔가지를 구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으로 먹을 것도 해결, 옷도 해결. 그리고 화로 문제도 해결. 남은 것은 급류가 멈춰지기를 기대해야 할 뿐인가. 바위섬에 표류된지 대략 하루가 지났고, 그 하루라는 시간도 이미 해가 저물게 된 시각으로 바뀌는 중이다. 나뭇가지들을 구해서 아까와 같은 창 투척 방식으로 전달을 해주고 난 이후에, 누나 일행은 다시 베이스 캠프로 복귀. 불을 피운 뒤에 움막에서 또 하루를 보내게 된 나와 교수님은 오늘 얻은 고구마와 감자를 불에 익혀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비는 이미 그친 관계로 지붕 위에 올려뒀던 티셔츠는 햇빛 가리개 수준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옷도 없으니까 다시 재활용해서 입을까 생각해봤지만, 지붕을 만들기 위해 옷을 찢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포기해버렸다. 그리고 오늘 새로 받은 옷도 있으니까. 굳이 헌 옷을 입을 이유는 없잖아. "후우..." 식사를 마치고 난 이후에 대충 뒷정리를 하고 난 후. "잠깐 옷 갈아입기 전에 샤워 좀 하고 올게." "다녀오세요. 교수님."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교수님은 바위섬 근처에서 몸을 씻기로 하고, 나는 대충 세수만 하고 나서 옷을 갈아입는다. 차가운 강의 물기를 느끼며 그동안의 피로를 풀고 있는 나에게. "......" 맞은편에서 샤워를 즐기고 있는 교수님의 눈부신 자태가 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가슴. 잘록한 허리. 탐스러운 허벅지와 탄력적인 엉덩이. 정말 다시 봐도 끝내주는 몸매다. 얼굴부터 시작해서 가슴, 배, 골반, 그리고 다리까지 이어지는 환상적인 라인. TV에서 볼 수 있는 여자 연예인들의 몸매와 흡사한 교수님의 육체에 성욕을 느끼지 않을 남자따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란 생각마저 들 정도로 아찔한 여체를 가지고 있는 교수님. 평소에 강의를 들을때는 잘 몰랐는데, 무인도에 표류되고 난 이후부터 서로 프라이버시에 관련된 일화도 많이 겪다 보니까 교수님의 매력을 깨닫게 되었다. 겉으로는 강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매우 연약한 면모도, 그리고 자주 화를 내거나 삐치는 것도 귀엽다. 분명 나보다 연상이면서도, 지위 또한 학생과 교수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저런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수십가지 매력을 지닌 그런 여자 말이다. 육감진 몸매를 정결히 하는 교수님의 저 모습에 또 다시 아랫도리가 성을 내려고 하지만, 지금은 우선 해야 할 우선순위가 있기 때문에 잠시 성욕을 잠재운다. 오늘 얻은 나뭇가지들을 대충 분류를 해보자. 장작으로 사용할 것들과, 움막을 보수하는 재료로 사용할 것들. 단순히 장작으로 이용하기에는, 오늘 보급받은 나뭇가지들의 분량이 생각보다 많기 때문에, 움막 보수라는 부가적인 옵션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언제 또 비가 올지도 모르고, 단순히 비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강풍을 동반한 소나기라도 내린다면, 바위섬에 고정시킨 허술한 움막 하나만으로도 벅찰 것이다. 이런 걸 다다익선이라고 하는 건가. 뭐든지 많으면 좋다. 물론 많으면 많을수록 가장 가치있는 건 돈이겠지만. 돈이란 것도 인간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것이지, 무인도에서는 그냥 단순히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야생과 인간 사회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된 나로선, 돈도 필요 없으니까 하다못해 이 무인도 섬에서 나갈 수 있는 기회라도 줬으면 좋겠다. ... 휴지조각이라고 말하니까 생각난 건데. "이런..." 가장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물품 중 어떤 의미로 중요한 물건을 보급받지 못한 것. 장작도, 나뭇가지도, 옷가지도, 먹거리도 중요하지만,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유, 유에." "왜 그러세요. 교수님?"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노아 교수님이 살짝 불편한 심기를 나타내는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흰색의 스키니진 바지에 탱크탑. 교수님의 S라인을 그대로 드러내는 타이트한 옷차림이라 생각이 들지만, 정작 교수님은 노출도가 심한 옷보다 더 신경쓰이는 게 있는지 연신 한 손으로 자신의 배를 살살 쓰다듬는다. "저, 저기... 그러니까..." 말 못할 고민이라도 있는 것일까. 우물쭈물 거리던 교수님이 이윽고 뭔가를 결심한 듯이, 나에게 본심을 표현한다. "아까 물품을 보급 받을 때... 나뭇잎 같은 건 없었니?" 그렇다. 교수님이 찾는 그것. 넓직한 잎사귀. 단순한 풀잎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무인도에서 이러한 잎사귀들의 중요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휴지 대신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물품. 즉, 대변을 보고 뒷처리를 하게끔 만들어주는 그런 중요한 물건이란 뜻이다. 강 건너편에는 많이 구할 수 있겠지만.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들에게는. "... 없을걸요." 잎사귀 님께서 현재 부재중이시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확밀아 4월 상반시즌이 끝났습니다. 이번 수확으로는 우산 요정 노멀 풀돌, 고기 요정 노멀 풀돌, 락샤 키라 풀돌, 이어챠오 노멀 풀돌로 끝난 듯합니다. 음표는 180000개에서 딱 끝났는데, 과연 순위 내에 들어서 감사형 춘향이 저에게 올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홍차 꽤나 많이 썼는데, 못 얻으면 멘붕할지도 모릅니다 ㅜ_ㅜ여하튼 이번 확밀아 시즌도 수고하셨습니다! 184화 사건을 간추려 요약해보자면 대략 이렇다. 대변을 보고 나서, 뒷처리를 할 잎사귀가 없는 것이다. 바위섬의 규모가 아무리 작다 한들, 대변도 볼 수 없는 공간조차 없는 건 아니다.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위생적인 문제인 것이다. 잎사귀가 없다는 것은. "어떻게 하지..." 배를 움켜쥐고 쭈그려 앉은 채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교수님. 타이트한 스키니진 탓에 교수님의 엉덩이 라인이 그대로 바깥에 드러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교수님의 섹시한 힙 라인이 아니다. 잎사귀를 대신할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것인데. "밥 먹고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우선 교수님에게 들려줄 대안을 꺼내기 전에, 먼저 서두를 읊어보는 나. "손가락으로 먼저 닦고 나서 물에 씻으면 되지 않을까요? 휴지 대용으로 사용할 잎사귀는 없지만, 강물은 많으니까요." "시, 싫어! 씻는다 해도 손가락에 냄새라도 남는다면..." 하긴. 냄새가 남는 문제도 있지만, 그 과정도 꽤나 문제가 많다. 밥 먹고 세수하는 손으로 뒷처리를 한다는 게 좀... 다른 것도 아니도 대변을 처리해야 할 수단으로 손을 고른 게 큰 실수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물론 휴지도 없고 물도 없다면 그런 방법을 통해서라도 뒷처리를 해야 할 일들이 더러 발생할지 모르지만, 여기는 무인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사용해야 한다. "아니면 엉덩이를 물에 담갔다가 항문을 씻는 건 어떤가요? 자연 비대라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 그 물기는 뭘로 닦을거니?" "......" 그 문제도 있었네. 항문 근처에 남아있는 물기를 닦을 방법이 없다. 자연적으로 증발되게끔 엉덩이를 드러내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결국 뒷처리를 하기 위해선 잎사귀가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손가락으로 닦는다는 제안이 채택되지 않는 한. "으..." 슬슬 한계에 봉착했는지, 교수님이 앓는 소리를 내며 더더욱 배를 감싸쥐기 시작한다. 섹스 말고도 다른 의미로 신음소리가 나오게 될 줄이야. 참으면 병이 된다고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참을 수 밖에 없다. 바지에 대변을 쌀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생각을 해보자.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잎사귀가 없어도 깔끔하게 뒷처리를 할 수 있을만한 기가막힌 아이디어가 분명히 있을 거 같기도 하고... ...... ... 가만. "교수님. 아까 입고 계셨던 그 레깅스는 어디다 두셨나요?" "그거라면... 벽에 걸어뒀는데." 손가락으로 움막쪽을 가리키는 교수님. 오늘 아침까지 입고있던 레깅스를 활용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이 레깅스를 잎사귀 대신으로 이용해볼까요?" "이걸?" "네. 찢어서 사용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괜찮긴 하지만..." 엄청나게 망설이는 교수님의 눈동자. 천으로 하는 건 불편한 것일까? 물론 일반적인 휴지가 아니라서 여러모로 뒷끝이 찝찝할 수도 있다는 사실 정도는 나 또한 잘 안다. 하지만 무인도에 오고 나서 우리들의 뒷처리를 담당하던 물품이 무엇인가. 바로 나뭇잎이다. 잎사귀에 비교하자면, 천 쪼가리는 활씬 좋은 휴지 대리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그...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여전히 애매모호한 태도를 유지한다. 나에게 말을 하고 싶지만, 차마 말을 못하겠다는 그런 우유부단함이 여기까지 다 전해질 정도. 여자의 심리를 잘 알지 못하기에, 교수님의 마음속이 어떠한 말을 내포하고 있는지 잘 파악이 안 된다. 음... 뭐지. "혹시 레깅스로 뒷처리를 하면 미열이 생기는 병이라도 걸리신 건가요?" "세상에 그런 병이 어디에 있니?" "그렇겠죠? 역시." 그럼 뭘까. 아무리 추측을 해봐도 교수님이 반대의 말을 표시할만한 합당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교수님. 계속 숨기고 계시면 저도 답답해요. 이럴때는 오히려 속 편하게 말을 해주시는 편이 더 좋잖아요. 안 그런가요?" "으, 응. 알고 있지만..." 애매모호 대답 시즌 2가 시작되었다. 가끔 이런 교수님이 귀여울때도 있지만,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그게 위험한 사고로 번질 수 있을 가능성이 크다. 안 좋은 습관인데. "설마 이 레깅스가 교수님이 아끼는 옷이라서 버리고 싶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겠죠? 하하하." "......" ... 진짜냐. 농담으로 건넨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교수님의 정곡을 푹 하고 찌른 모양인가 보다. 그 증거로, 흔들리는 동공과 애써 나를 바라보려 하지 않는 시선, 그리고 아까부터 품 안에 꼬옥 품고 있는 레깅스를 근거로 주장할 수 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야 했는데. 아니, 레깅스를 껴안고 있는 모습을 봤을때부터 유추가 가능했던 시점 아닌가. 나란 녀석도 참 둔하다. "알았어요. 교수님이 아끼는 옷이라면 어쩔 수 없죠." "미안해..." "괜찮아요. 가뜩이나 무인도라는 장소에서 옷도 구할 수 없는데, 마음에 드는 옷을 희생해야 한다는 건 아까운 이야기니까요." 게다가 여분의 옷이라면 아직 한 벌 더 있다. 어제 내가 입고 있던 청바지 같은 거 말이다. "그렇다면 제 바지를 사용할게요. 교수님도 문제가 안 되겠죠?" "응. 난 괜찮아." "네. 그럼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만들게요." 이제와서 생각을 해보니까. 여성용 레깅스보다 남성용 바지가 더 면적도 넓고, 사용할 수 있는 공간도 많다. 진작 내 바지로 할 걸 그랬나. 커터칼로 바지를 찢어서 천 쪼가리를 만든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략 3~4일 정도는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이 나왔다. 그 안에 이 바위섬을 탈출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여기요. 교수님." "고, 고마워." 바지 조각을 받아든 교수님이 황급히 움막 뒷쪽으로 걸어간다. 어지간히 급하셨나 보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 때문에 교수님이 큰 일을 치루는 소리같은 건 들리지 않는다. 저번에 누나가 가져왔던 불량식품 덕분에 단체로 급성위장염이 걸렸을 때는 세린이 대변을 보는 소리를 들으면서 화장실 작업을 했던 것이 기억나는데. 교수님은 어떤 소리를 낼지... 같은 이상한 생각을 하다니. 언제부터 이런 변태가 되었냐. 나란 녀석은. 여자가 볼 일을 보는 거에 관심을 가지면 어쩌냐고. 교수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잔여 나뭇가지들로 움막을 보수한다. 특히나 유독 빈약하게 만들어진 벽쪽을 보수하자, 이제는 보온까지 제법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양 옆과 뒷편, 그리고 지붕까지 만들고 앞에는 뻥 뚫려있는 형식. 문은 없지만, 화로가 앞에 있으니까 추위 걱정은 없다. 그리고 연기가 움막 안에 가득 찰 일도 없을테고. 개방형 움막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어울리지 않을까 스스로 생각을 해본다. 무인도에 오고 나서 집 짓는 실력만 주구장창 늘어가는군. 이러다가 건축학과로 전과를 할 기세다. 만약 그런다면, 노아 교수님은 분명 반대하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여하튼 혼자서 각양각색의 망상 세계를 펼치고 있을 무렵, 교수님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다시 움막에 모습을 드러낸다. "잘 썼어." "별 말씀을요." 다시 움막 안으로 돌아와 내 곁에 앉는 교수님. 손에 남은 물기를 말리려듯, 양 손을 쭉 펴고 화로 앞에 쭈그려 앉은 채 불길을 쬐기 시작한다. 무릎이 교수님의 거대한 가슴을 짓누르는 형상이 되며 은근히 야한 장면을 연출하기에 이른다. 허벅지와 엉덩이의 타이트함도 수십배로 상승. 게다가 흰색 스키니진이라서 안에 입고 있는 팬티 색깔까지 다 보인다. 오늘은 검은색이군. 음... 야합니다. 교수님. "춥진 않으세요?" 새로 옷을 보급받았다고는 하나, 교수님의 옷차림은 노출도가 상당한 옷이다. 배꼽이 그대로 다 드러나는 탱크탑이니까 말이다. 자신의 옷차림을 한번 내려다보던 교수님이 머쓱하게 웃으며 내 질문에 대답한다. "괜찮아. 이 정도는 추운 편도 아닌걸. 그리고 비도 그쳤으니까... 어제보다는 확실히 덜 추워." "감기 증상이나 아니면 어딘가 불편한 점이라도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그럴게." 옅은 미소와 함께 승낙의 의사표시를 들려준다. 이렇게 보니 정말 여신이 따로 없구나. 교수님이 만약 유아 선배나 세린, 아니면 아리아 정도의 20대 초반 나이였다면 분명 연예인 기획사에서 스카웃이 들어올 정도였을 것이다. 엄청난 외모와 끝내주는 몸매의 소유자. 게다가 성격까지 얌전하고 참하다. 요즘 시대에 정말 보기 드문 여자가 아닐까 싶다. 이런 여자랑 무인도에 표류되다니. 어떤 의미로 행복일까. 아니면 불행 중 다행? ... 모르겠다. 일단 잠부터 자야지. ============================ 작품 후기 ============================ 오늘따라 바람이 무지하게 거세게 몰아치는군요. 폭풍이라도 왔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섭게 불고 있습니다. 그대 이름은 바람바람바람 185화 무인도에 표류된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무인도 안에 있는 거대한 강 한 가운데에 위치한 바위섬에도 표류되었다. 무인도보다 훨씬 더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지 이제 3일째. 계속해서 물품과 옷가지들을 보급받고 있긴 하지만, 수시적으로 비가 내리고 강물의 급류는 줄어들 생각이 없어서 이제는 슬슬 한계점에 봉착할 단계까지 오게 되었다. 그래. 생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해도, 심리적으로는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한정적인 공간에 사람을 가둬두면, 그 사람이 얼마나 재미있게 살 수 있나. ... 재미는 개뿔. "우리, 여기에 언제까지 있어야하니?" 노아 교수님도 얼굴에 잔뜩 어두운 분위기를 연출하며 나에게 저런 질문을 던진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 그래?" "참고로 교수님이 저에게 그 질문을 하신 것도 이번으로 23번째에요." "......" 할 게 없다. 무인도에는 사냥이라든지 보수 공사라든지 여러모로 할 일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바위섬에서는 진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있는거라고는 바위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낚시를 하고 싶어도 낚시대도 없고, 급류 때문에 낚시도 안 되고, 낚시대를 만들 정도로 나뭇가지가 여유롭게 마련되어 있는 상황도 아니고. 한숨을 쉬는 와중에, 오늘도 강가에 마중을 나온 일행들이 보인다. 이번에는 아리아, 세리아, 유아 선배, 그리고 창 던지기 전문 선수인 엘리까지 총 4명이다. 창을 던지는 데에 꼭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인물이기도 한 엘리는 매번 온다 치고, 나머지 멤버들은 그 날, 그 날 컨디션이나 식사 당번에 따라 달라지나 보다. ...... 엘리가 있고, 창을 던질 수 있고, 그 창을 내가 받을 수 있단 말이지. 어차피 뗏목을 만들 재료는 부족하다. 창을 이용한 밧줄 잇기로 뗏목 재료가 될 수 있는 잔가지들을 옮길 수는 있어도, 나무 기둥까지 옮기기에는 힘들다. 게다가 불어난 강물을 건너려면, 좀 더 뗏목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또 다른 전제조건이 마련되어 있다. 가뜩이나 성인 남자 기준으로 1인용인 뗏목인데, 노아 교수님까지 데리고 가야 하니까 적어도 성인 남성 기준 2인용으로 뗏목을 만들어야 한다. 애초에 처음부터 뗏목으로 다시 강 건너편까지 되돌아간다는 선택지 자체는 고를 수 없었을지도... 그렇다면. "유아 선배!" 일행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유아 선배를 부르자, 또 다시 보급품 던질 채비를 하던 유아 선배가 내 목소리를 듣고 반응했는지 답변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왜? 더 필요한 거라도 있어?" "아니요. 지금 막 바위섬을 탈출할 궁리를 세워봤는데요." "뗏목이라도 다시 만들게? 무리 아니야?" "괜찮아요. 뗏목이 아니니까요." "뭐?!" 차근차근 유아 선배에게 앞으로 우리들이 이 섬에서 탈출할 작전을 전달해준다. 노아 교수님도 옆에서 집중력 있게 듣고 있는 중이고, 내 말을 듣고 아리아가 직접적으로 엘리에게 통역을 해준다. 작전을 다 들은 유아 선배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보급품들을 풀어놓기 시작한다. "교수님. 괜찮겠죠?" "응. 계속 여기에 있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을거 같아." 어지간히 이 바위섬이 싫었던 모양인가 보다. 하긴. 교수님이야 여러가지 사정이 있을테지만 말이다. 내 기억으로는 대략... 이때쯤이면 슬슬 교수님의 생리 기간이 아닐까 싶지만. 가뜩이나 좁은 바위인데,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생리 기간까지 오게 된다면 교수님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할 것이다. 그래서 정신건강을 고려해 지금 이 시간에 바위섬을 빠져나가자는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작전 설명을 다 전달받은 엘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금 바위섬을 향해 창을 던질 준비를 한다. 창 끝에 기다란 밧줄을 연결한 건 똑같은 외형이지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밧줄의 끝에 보급품을 달지 않았다는 점이다. 엘리가 있는 힘껏 창을 던지고, 익숙한 솜씨로 그 창을 다시 받는 나. 고작 3일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그새 서로 익숙해진 실력을 몸소 체감한다. 역시 엘리의 천재성은 여러모로 편리하다니까. 건네받은 밧줄을 바위섬에서 가장 튼튼해보이고 무거운 바위에 둘러서 매듭을 짓고, 반대편 밧줄은 유아 선배의 주도하에 두꺼운 나무기둥에 묶는다. 어차피 뗏목으로 건너갈 수 없다면. 밧줄을 잡고 직접 건너가는 수 밖에. "교수님. 건너가실 수 있으시죠?" "노, 노력해볼게." 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힘껏 밧줄을 잡은 뒤에 천천히 강을 건너가기 시작한다. 가뜩이나 유독 근력이 약한 교수님이 잘 건널 수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천천히 교수님에게 지시를 내린다. 중간에 힘들 것 같아 보이면 멈추라 말하고, 휴식할 수 있는 구간에 휴식을 하고 가게끔 지시를 내리는 형식으로. "교수님! 조금만 더 힘내세요!" 유아 선배가 남은 밧줄을 자신의 허리에 묶고, 똑같이 교수님과 밧줄을 잡으면서 마중을 나와준다. 거의 3분의 1 정도까지 유아 선배가 교수님을 마중나와주고 나서야, 간신히 교수님이 강 건너편에 무사히 건너가는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건. "나 뿐인가."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물에 발을 담근다. "차가워 죽겠구만." 교수님은 잘도 이런 곳을 건넜구나 싶다. 심신이 매우 약한 연상 여성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심지가 매우 굳은 인물이 바로 노아 교수님이었다. 세상에 모든 여자들에게 지금과 같은 차가운 강가에, 그것도 급류를 뚫고 밧줄 하나만을 의지한 채 건너편까지 건너가라고 말을 하면 누가 그대로 할 수 있겠는가. 다시 한번 노아 교수님을 재평가해보며, 최대한 손에 힘을 주기 시작한다. 조금씩, 조금씩. 바닥에 발이 닿지 않을 깊이까지 왔을때가 제일 위험한 순간이다. "유에! 괜찮아?" "저는 신경쓰지 마시고 유아 선배도 물 바깥으로 나가 있으세요! 위험하니까요." 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밧줄의 내구력이 약해진 것일까. 느닷없이 바위섬에 묶어뒀던 밧줄이 끊어지는 사건이 발생해버리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몸의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급류에 몸을 맡기는 꼴이 되어버리자, 강 건너편에서 여성들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간신히 얼굴을 수면 바깥으로 꺼내어 호흡계를 확보. 안면에 쏟아지는 차가운 물방울들을 느끼며, 밧줄을 잡고 천천히 앞으로 전진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대각선 방향으로. "힘내!! 조금만 더!!"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누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다. 하지만 살겠다는 근성과 오기를 발동시키며 간신히 강가에 도착.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상황에서 그대로 대(大)자로 뻗어 가파른 호흡을 고르기 시작한다. "괜찮아?! 유에!" "... 어떻게든요." 먼저 건너갔던 노아 교수님이 눈가에 눈물방울을 맺으면서 내 안부를 살핀다. 유아 선배도 당황했는지 내 손을 잡으며 체온을 살피고, 세리아도 안색이 파랗게 질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일하게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두 인물. 돌돌돌 밧줄을 회수하는 엘리와, 그리고 은발의 냉혈안 후배, 아리아가 내 곁으로 다가오며 말한다. "선배는 언제나 모험을 즐기는 분이시군요." "... 넌 이게 즐기는 걸로 보이냐." 그래도 살았으니 다행이지 뭐. 악랄한 여후배의 농담도 다시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 작품 후기 ============================ 나름 음표 많이 모았다 생각했는데 저보다도 훨씬 더 굇수분들이 계셨군요 ㅎㄷㄷ; 그래도 감사형 춘향 키라를 먹어서 기쁩니다! 110레벨의 위엄이라니! ㅜ_ㅜ... 너무 확밀아 토크만 하면 재미가 없을 거 같아서 다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인도 표류일지를 완결짓고 연재할 차기작에 대해서인데요. 난파선 표류일지와 다른 신작 하나를 후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단 문제는 난파선을 곧바로 연재할지, 아니면 신작 하나를 연재하고 나서 연재할지 고민중입니다. 고민되는군요. 흐음... 186화 EP 21. 몬스터 헌터 ~프론티어~ 감기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던 나는 오랜만에 편안한 휴식을 마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꼬박 하루가 걸린 뒤에 일어날 수 있었던 뒤에 생각해보자면, 감기란 정말 무섭다. 괜히 인류의 적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뭐, 그건 간략하게 생략하고. "간만에 자리에서 일어나니까 기분이 어때? 유에." 지아 선생님이 내 이마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묻자, 나는 어색한 미소로 화답하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상쾌한데요." "그 말을 들으니, 일단 안심이네." "감사합니다." 덕분에 아침식사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사실 감기 덕분에 격리라는 극단의 수단을 취할까 고민하던 지아 선생님이었다고 하지만, 예상 외로 내가 감기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어서 그런 방법은 취하지 않았다는 뒷담화도 잠시 들을 수 있었다. 식사를 하기 위해 다같이 모인 이 자리에서 노아 교수님이 새삼스레 우리들에게 말한다. "유에. 감기에서 막 벗어나서 조금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한 가지 말해도 되니?" "어떤 건가요? 교수님." "실은 슬슬 사냥을 한번 더 하는게 좋을거 같아서..." 교수님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노아 교수님에게 쏠린다. 그러고선 은근히 한번씩 교수님의 전신을 훑어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묘한 시선의 방향에 노아 교수님이 잔뜩 빨개진 얼굴로 외친다. "왜, 왜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거니?!" 교수님의 항의에 대표로 대답하는 누나. "노아 교수님. 고기만 너무 밝히시다가는 살이 찐다는 전설이..." "난 고기를 밝히는 게 아니라 영향을 고려해서... 아무튼 그런거야!" 고래고래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노아 교수님. 하지만 과거에 고기에 대한 필요성을 언급했던 적이 있는 노아 교수님이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번에 내가 만들었던 의자가 갑자기 부서지는 등 아직까지도 교수님의 몸무게 덕분에 부서진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교수님이 저런 시선을 받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누히 강조하지만 교수님은 그렇게까지 살이 찐 편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날씬하다고 해야 할까. 허벅지도 적당하고. 엉덩이도 작고 예쁘다. 글래머러스하다고 보여지는데. 하지만 본인에게 있어서는 살이 쪘다는 말이 유난히 신경쓰이는 모양이다. 뭐... 여자라면 누구나 다 민감한 사항이겠지만. 노아 교수님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계속 이어진다. "그러니까.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고기가 필요하다는 뜻이군요." "아니라니까?!" "농담이에요. 교수님. 말씀해보세요." 짖궂은 누나의 장난에 교수님이 순간 또 울컥한다. 역시나 우리 누나다운 태도라니까. 한번 문 먹잇감은 절대로 놓이지 않고 끝까지 놀려야 직성이 풀린다. 남을 놀리는 심보는 세계 제일일거라 생각하며 노아 교수님의 다 하지 못한 말을 듣기 시작한다. "... 다른 사람들도 한번쯤은 사냥을 미리 경험해보는 것이 좋을거 같아서." "다른 사람들이라면. 엘리나 저, 그리고 누나하고 세린, 유아 선배를 제외한 나머지 5명 말인가요?" "응. 유에 말이 맞아." 노아 교수님의 의견은 어떤 의미로 조금 파격적이었다. 사실 나를 포함해서 엘리나 누나, 세린, 유아 선배가 거의 사냥을 전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왜냐하면 애초에 이런 멤버 구성원이 가장 운동신경이 좋고, 그리고 사냥 성공률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냥 멤버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운동이랑은 전혀 관계가 없을거 같은 세리아와 체리, 그리고 노아 교수님과 지아 선생님, 아리아 이렇게 5명으로 사냥 구성원을 짜보는 것이 어떻냐는 의견은... "... 어렵지 않을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순차적으로 세린과 유아 선배가 자신의 의견을 표시하기 시작한다.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나 역시도 마찬가지. 엘리는 우리가 아직까지도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이 계속해서 얌냠쩝쩝 식사만을 할 뿐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반론이 나오게 되었다. "저는 한번 쯤 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이런 주제로 토론을 열게 되면 가장 많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인물중에 한명이기도 한 아리아의 말이었다. 모두가 아리아의 말에 잘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을 하는 것은 당연지사. 나 역시도 아리아의 말에 쉽게 공감을 표시하지 못하겠다.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 나의 질문에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한다. "어제 유에 선배가 감기로 인해서 앓아 누운게 계기가 될 수 있겠어요." "거기서 왜 하필이면 내가 나오는 거냐."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사냥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서 사냥 멤버 5명이 모두 자리를 비우거나 아니면 감기에 걸려 정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상상을 해보세요. 그때는 나머지 5명으로 사냥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되는데, 과연 할 수 있을까요?" "... 그것도 그렇네." 무인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정석적인 방법은 '혹시나' or '행여나'라는 만약의 사태를 고려해서 철저하게 대비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이런 방식으로 수많은 난관을 극복해왔고, 그리고 아직도 극복하는 중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현재진행형. 아리아의 말에도 나름 일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녀의 의견을 듣고 있던 지아 선생님 역시도 동의에 한 표를 던진다. "아리아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 그런고로 나는 찬성." 지아 선생님의 뒤를 따라 체리와 세리아도 별다른 무리 없이 찬성에 한 표를 던진다. 다른 사람들도 사냥에 대한 의지가 이리도 확고할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할 건가요? 선배." 아리아가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려달라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는 것 같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럼 오늘부터 사냥에 대한 훈련을 시작하도록 하죠." 본인들이 하겠다는 것을 억지로 말릴 생각은 없다. 그리고 나 역시도 아리아의 의견에는 어느정도 찬성을 하는 바.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의 의견을 묵살하고자 할 의도는 없기 때문에 원년 사냥멤버 5명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의 사냥 능력을 키우는데 오늘 하루를 투자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럼 좀있다 봐~" 누나와 유아 선배, 그리고 세린은 가까운 곳에 식량 조달을 하기 위해서 장소를 옮기게 되었다. 토목공사는 잠시 휴식을 취한 상태. 오늘은 아리아의 말 그대로 사냥 기술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나와 엘리가 남았고, 나머자 5명은 간단한 체력 테스트 겸 사냥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서 이렇게 공터 앞으로 모이게 되었다. "가디렸지?" 라고 말하면서 등장하는 지아 선생님과 노아 교수님. 유아 선배가 고안했던 탱크탑 상의 패션을 그대로 착용하고 나온 두 선생님들의 모습은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하늘이시여. 두 선생님들의 저 철렁이는 가슴을 보게 해주셔서. "정말 많이 기다렸습니다." "어머, 그리 오래 걸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다른 의미로 기다렸다는 뜻이지요." "그렇구나." 지아 선생님도 대략 눈치챈듯이 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내 말에 대답해준다. 본래 내 고정관념 속에는 유부녀에 대한 어느정도의 기초 상식이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유부녀라 함은 약간 살이 오른 육덕인 모습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지아 선생님은 차원이 다를 정도였다. 유부녀의 색기를 한 몸에 가지고 있기도 하면서, 몸매 역시도 괜찮은 편이다. 노아 교수님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지아 선생님은 몸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간단하게 몸풀기 운동을 하고 있는 반면, 노아 교수님은 어색하게 지아 선생님을 따라한다. 노아 교수님이 운동이랑은 거리가 먼다는 점도 있지만, 아마도 현재 자신들이 하고 있는 복장이 남자 앞에서 보여주기에는 조금 창피한 느낌이 없지않아 있었기 때문에 저런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두 선생님들이 먼저 나온 상황에서 머지않아 다른 멤버들도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낸다. "꼭 이 차림을 해야 하는 건가요오..." 부끄러운지 세리아의 팔에 매달린 채 나오며 말하는 체리. 세리아 본인도 조금 창피한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등장한다. 퓨어 파들의 등장. 그런데 세리아나 체리나 은근히 노출도가 높은 복장도 잘 어울리는 듯 하다. 평소에 노출에 대한 것을 별로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의외성을 두는 복장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아리아. "제가 마지막이었나 보네요." "보시다시피." 아리아는 부끄러워하거나 하는 그런 모습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위풍당당. 그게 뭐 아리아의 컨셉에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이런 식으로 인원이 다 모인 상태. 대충 엘리에게는 노아 교수님이 '오늘부터 사냥 훈련을 할 거야.'라고 말을 해뒀기 때문에 내 옆에 서 있으면서 멀뚱멀뚱 그녀들을 바라본다. 참고로 현재 엘리의 머리 위에는 에바 초호기가 엘리를 따라하듯 작게 하품을 하며 누워있다. 고양이 팔자가 상팔자라 하더니. 조금 부러워질 지경이다. 그러고보니 요 근래 들어서 에바 초호기가 부럽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거 아닌가. 음... 고양이 팔자가 좋아보여도, 그래도 인간이 제일 좋다. 왜냐하면 이런 미인들을 두고 고양이로 돌아갈 생각은 없으니까. "그럼 먼저 뭐부터 할까요." "간단한 체력 테스트부터 해요." "그럴까." 아리아가 적극적으로 주장을 한다. 이 녀석, 설마 사냥을 해보고 싶었다든지 하는건 아니겠지. 오늘따라 왜 이리 기운이 넘치는 거야. 아리아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서 마련된 즉석 100M 달리기 대회. 체력도 테스트할 겸 얼마나 달리기 속도가 빠른지 각자의 운동신경을 바라보기 위한 하나의 비책이다. 단거리 달리기 테스트 하니까 예전에 세린과 유아 선배가 서로 라이벌 관계로 으르렁 거리면서 충돌을 일으킨 옛 사건이 생각나는데, 지금 이 멤버들은 그녀들에 비해서 충돌을 일으킬만한 멤버가 없다는 사실이 가장 좋다고 보여진다. 심적인 고생은 안해도 되겠군. 아무튼 이로 인해 시작된 달리기 시합. 나란히 출발선에 선 그녀들에게 내가 짧막하게 스타트 신호를 날려준다. "시작!" 이라고 외치자마자 제일 먼저 빠르게 치고 나가는 사람은 바로 아리아. 그리고 뒤이어 지아 선생님이었다. 아리아는 사실 이 중에서 가장 운동신경이 좋을 것이라고 예상은 충분히 하고 있었지만, 지아 선생님은 조금 의외다. 그리고 체리나 세리아, 마지막으로 노아 교수님. 이 3명은 거의 비등비등한 수준을 자랑한다. 음... 노아 교수님이야 뭐 나이에 맞지 않게 선전했다고 보여지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교수님에게 이런 말을 했다가는 미운털이 제대로 박힐 느낌이 들어서 실제로 이런 식으로 칭찬을 하지 않을 예정이다. 아니지... 본인의 입장에서 따져본다면 칭찬도 아닌가. 어찌되었든 노아 교수님 답지 않게 많이 선전하면 선전했다고 보여진다. 결과적으로 보면 칭찬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 작품 후기 ============================ 날씨가 또 더워졌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기장판을 틀고 잘 정도로 추웠는데, 이제는 갑자기 확 더워지는군요. 가끔 여기가 대한민국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물론 군대에 있었을 때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러시아에 사는 줄 알았지만요. 187화 무난한 단거리 테스트가 끝나고 대략적인 능력치를 종합해볼 시간. 일단 가장 확실한 것은 우등생 팀, 그리고 열등생 팀으로 나뉜다는 사실이다. 겨우 체력 하나로 우등이니 열등이니 하는 차별을 하는 것은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조금 미안하지만, 그래도 구별하기 쉽게 하려면 어쩔 수 없다. 우등생 팀. 사실 세린이나 유아 선배에 비해서는 우등생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리도 이 5명 한정으로 이야기를 털어놓자면 우선 아리아와 지아 선생님이 가장 뛰어난 운동신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리아는 충분히 예상했으니까 상관 없을테고. "지아 선생님." "왜 그러니?" 옆에서 수건을 땀을 닦는 지아 선생님에게 작은 질문을 하나 던져본다. "혹시 예전에 체육계 관련 동아리에서 활동했다든지 한 경력이 있나요?" "예전에 여자 농구부였거든." "오호라..." 궁금증이 풀리게 되었다. 농구라는 운동이 이리도 도움이 될 줄이야. 물론 나도 농구를 전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학창시절 때 가만히 앉아서 운동만 하는 습관보다는 꾸준하게 체육활동을 해온 지아 선생님에게는 지금에서야 꽤나 긍정적인 효과를 맛보게 할 수 있다고 본다. 아무튼 지아 선생님에 대한 운동신경의 미스테리는 이제 넘기도록 하고. 문제가 있다면 바로 열등생 팀이다. "... 고민되네." "어떤게 말이니?" 무심코 혼잣말로 중얼거린 내 목소리를 지아 선생님이 들으셨나보다. "아니요.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그래?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네." 지아 선생님의 걱정이 큰 힘이 되긴 하지만, 여전히 고민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열등생 팀. 굳이 팀 멤버를 밝히기에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어차피 내 속마음이니 언급하도록 하자. 노아 교수님. 세리아. 그리고 유체리. 솔직히 말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운동신경이 거의 제로(Zero)에 가까운 그녀들에게 내가 무리한 것을 바란것도 아니고 말이다. 세리아와 체리. 그리고 노아 교수님은 역시나 사냥에서 제외하고 싶은 마음이 매우 크다. 이걸 어찌해야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하는 나. 체력이나 운동신경을 기르는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아리아와 지아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어느정도 할 수 있을거 같지만, 다른 3명에게는 무리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이 멤버를 가지고 사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냥 성공 확률을 높여주는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는 뜻이 되는건데... ... 이것도 말로만 쉽지, 사실은 생각하기 꽤나 어려운 과제다. 주로 함정쪽으로 가야 하나. 여러모로 고민이 되기 시작한다. 이제 막 감기를 털고 일어났는데 머리를 써야 할 일이 생겨버리다니. 이 놈의 인기는 사그러들지 않아서 참으로 문제다. 하하하. 젠장. 왜 안구에 습기가 차는 걸까. "일단 모두 모이셨죠?" 모두가 고개를 끄덕끄덕. 내가 가리키고 있는 '모두'라는 말은 선생님 두 분과 은발의 미소녀 자매, 그리고 유체리를 가리키는 말과도 같은 뜻을 하고 있다. 작전 회의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제 2의 사냥 팀을 모은 나. 옆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서있는 엘리는 자신의 머리 위에 앉아있는 에바 초호기를 어떻게 하면 손을 이용하지 않고 초호기를 떨어뜨릴 수 있을까 하는 시험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음... 탐구생활 능력이 괜찮아보이는군. 잡생각은 이 쯤에서 관두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에게 들려줄 차례가 왔다. "사실 이 멤버로 현재 사냥 멤버이기도 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냥을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지아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군요."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네 말이 정답이니까." 지아 선생님의 말에는 거짓을 전혀 보태지 않은 진실만이 느끼잔다. 아마 체력 테스트를 하면서도 지아 선생님 뿐만 아니라 노아 교수님이라든지 아리아나 세리아, 그리고 유체리도 마찬가지로 스스로 현재 사냥 멤버와 똑같은 사냥 방식으로는 절대로 사냥에 성공하지 못할거란 생각은 다들 하고 있을 것이다. 자뭇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노아 교수님이 약간의 한숨을 쉬면서 말한다. "... 미안해. 내가 그렇게까지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아니요. 괜찮아요. 교수님. 그리고 사과하실 일도 아니잖아요." "그치만..."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면 좋은 방법이 나올거예요. 분명." 이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그리 좋은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몸을 쓰지 않고 잡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해봤자... 함정이 전부일텐데. 사실 함정도 은근히 몸을 쓰는 작업이다. 왜냐하면 함정을 '만드는 일'에 노동력이 들지 않는가. 물론 함정이라고 말한다면 덫이라든지 하는 여러가지 장치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이 무인도에서 덫과 같은 위력을 가질만한 함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쇠로 만들어진 강력한 덫이 이 무인도에 있을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함정을 만들려면 그런 일 역시도 상당히 제한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간단하게 함정 쪽으로 생각을 바꿔보죠." "어떤것이 있을까요오..." 수줍게 우리들에게 묻는 체리. 저 말을 들어 보아선, 적어도 체리에게는 마땅한 함정에 대한 생각이 없나보다. 만약에 본인에게 이 시대를 앞서나갈만한 뛰어난 함정 아이디어가 있었다면 우리들에게 저런 식으로 물을 것이 아니라 아리아처럼 손을 들고 당당하게 질문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로 무슨 일에 꽤나 높은 열정을 가지고 있는 아리아가 여전히 우리들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은 채 손을 번쩍 든다.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거야?" "그물을 만들어보는 것이 어떨까요." "그물?" "네. 물고기를 잡는 데에도 그물망을 사용하곤 하잖아요. 사냥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면 되죠."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자는 건지 설명해주면 고맙겠는데." 새로운 시도라고 볼 수 있었다. 아리아의 방금 의견 말이다. 함정이라고 한다면 가장 기본적인 것이 바로 땅을 파는 일. 그러나 삽을 들고 동물이 뛰어넘지 못할만한 깊이와 크기의 구덩이를 만드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사냥감이 우리들이 만든 함정에 '얼씨구나. 여기 함정이 있네? 한번 걸려 들어볼까?'라는 식으로 빠지지 않는 이상, 구덩이 작전은 힘들다고 본다. 그런 의견이 있었기 때문에 저번에 멧돼지를 사냥할때도 구덩이 함정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구덩이 함정에 대한 과거는 잊고, 아리아의 말에 집중하도록 하자. "우선 그물을 만들어서 양쪽 모서리 끝을 나뭇가지에 걸터서 각각 4사람이 잡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바닥에 깔아놓은 그물 한 가운데에 다른 사람이 먹이로 동물을 유인하는 거죠. 그래서 동물이 그물망 위로 올라왔다 싶으면 4명이서 동시에 밧줄을 당기는 거예요." "사냥감은 꽤나 무게가 나갈텐데. 여자 4명이서 들어올리는 것이 가능해?" "나뭇가지를 이용하니까 지랫대의 효과도 있고, 그리고 4명이서 모서리의 각 부분으로 나눠서 힘을 주기 때문에 사냥감의 무게에 대한 부담을 분할할 수 있어요." "과연..." 나름 합리적인 이유다. 아무렇게나 설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곳곳에 깨알같이 숨어 있는 과학적인 논리를 설명할때는 절로 탄성을 자아낼 정도다. 역시나 우리 멤버들 중에서 브레인 축에 속하는 일원다운 의견이다. 만약에 진작에 저런 의견을 내놓았다면 멧돼지 사냥에도 쓰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못하겠다. 아무리 4명이서 사냥감을 공중에 든다고 해도, 지렛대 효과를 이용해서 들어올린다고 해도 티코 차량 규모의 멧돼지를 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어차피 멧돼지 사냥에 있어서는 써먹지 못할만한 함정이라고 보는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외의 사냥감에는 좋다고 판단된다. 예를 들자면 새끼 노루라든지, 토끼라든지 하는 작고 가벼운 종류의 동물들한테는 효율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아의 의견에 반대를 내민 것은 나도 아닌 노아 교수님이었다. "한 가지 질문해도 되니?" "네. 언제든지요." 노아 교수님의 말을 들은 아리아가 교수님에게 직접 말씀해달라는 듯이 배려한다. 고개를 끄덕인 노아 교수님의 입에서 그물망 작전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물망은 어디서 구할거니?" "... 그러고보니." 그물망 함정 작전의 99.3842%를 담당하고 있는 그물망이 없다. 낚시를 할 때 사용하고자 만들어둔 그물망이 있긴 하지만, 내가 말하는 그물망은 어부들이 바다에 던져두고 다시 배를 이끌고 건져 올리는 그런 거대한 그물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개울가에서 한 사람이 작은 물고라든지 하는 그런 류의 물고기들을 잡을 때 사용하는 그물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도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무인도에서 나무 줄기들을 찢어서 만든 가내수공업의 결과물이다. 노아 선생님의 질문을 들은 아리아의 말문이 막힌다. 대화가 진행되던 사이에, 체리가 손을 들어 되묻기 시작한다. "저기... 그물망을 나무 줄기로 만들면 어떨까요..." "그건 힘들어." 체리의 말에 대답한 것은 지아 선생님. 딱 잘라 말한 탓에 체리가 약간 움츠러들며 이번에는 다시 한번 지아 선생님에게 질문한다. "불가능한 일인가요...?" "불가능하지는 않아. 그물망을 만드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만든다고 해도, 과연 그물망이 사냥감의 무게를 버틸 수 있느냐 그게 가장 큰 문제점이지." "그, 그렇네요. 생각해보니까..." 나무줄기로 만든 그물망의 내구도는 굳이 생각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사실 우리들이 지금 물고기 잡이 용으로 쓰는 나무줄기 그물망도 그다지 효율성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덩치가 큰 동물을 상대로 나무줄기 그물망을 사용할 것이라는 대담한 생각은 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이번 건 제안은 아웃. 조금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자. 다시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모두가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시간이 흐를수록 함정 작전은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만 더더욱 들 뿐이다. 함정 작전이 쓸모가 있다면 우리들이 굳이 함정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상태로 계속 침묵을 이어가던 우리들 중에 아주 의외의 인물이 또다른 제안을 한 것이다. 한 손을 들고서 뭐라고 쏼라쏼라 영어로 말하는 엘리. 그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우리들 중에서도 지아 선생님과 노아 교수님 단 두 분 뿐이다. 나도 어느정도 알아들을 수 있지만, 상당히 간단한 단어밖에 들리지 않는다. 엘리랑 같이 지내다보면 영어듣기 실력이 늘 줄 알았는데, 그건 단순한 나의 착각이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착각속에 그대'라는 노래 제목도 들어본 기억이 나는데... 어찌 되었든 엘리의 말을 듣던 지아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엘리가 말해준 대안에 대해 대신 설명하기 시작한다. "엘리가 아주 재미있는 제안을 했어." "어떤 제안인데요?" 대표로 지아 선생님에게 묻는 나. 엘리가 자기 자신의 의견을 표출한 것은 거의 처음이기 때문에 과연 어떤 제안을 내놓았을지 상당히 궁금하다. 그리고 들려온 대답은 정말 간단했다. "원거리 공격을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하던데." ============================ 작품 후기 ============================ 중간에 들어가는 EX 붙은 에피소드는 메인 스토리와 별개로 들어가는 외전격 이야기라고 보시면 될 듯 합니다. 그리고 이건 제 예상이지만, 표류일지가 아마도 다음달 즈음에 완결이 날 거라고 예상하기 때문에 슬슬 차기작에 대해 준비를 해둘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천천히 고민해보고, 나중에 무인도 표류일지가 완결 난 이후에 후기로 따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PS. 최근 확밀아에는 요정 순삭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숟가락 올릴 시간도 없어요 ㅜ_ㅜ 188화 엘리의 제안. 그것은 단 한 문장으로 결론을 지어보자면 '활을 사용해보자.'라는 뜻이다. 어차피 체력적인 소모나 운동신경을 많이 요구하는 근접전이나 추격전을 하기에는 이 멤버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고. 그래서 원거리형 사냥을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엘리의 나름 기특한 제안이었던 것이다. 원거리라. 사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아직도 가지고 있는 10개의 투척용 창이 그 증거다. 멧돼지 사냥 때 창 끝에 마취제를 발라서 멧돼지에게 던지기로 했는데, 아직까지도 마취제가 얼마나 사냥감에게 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을 해보지 못했다. 그동안 난파선 탐험이라든지 나무 자르기 작업이라든지 여러가지 거대한 프로젝트들이 있어서 여지껏 마취제 실험을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엘리가 주장한 내용은 창을 던지자는 뜻이 아니라 바로 다른 원거리 수단을 이용해보자는 뜻에 있었다. 이름하여 최종병기 '활'. 영어로 말하자면 보우(bow)가 되시겠다. 이렇게 보면 나도 참 영어 실력이 많이 늘었단 말이야. 음. 간단한 영어 단어라고 해도 생활에서 영어를 빈번하게 사용할 줄 안다는 이 습관 자체가 영어 실력이 늘었음을 뜻하는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대로 가면 토익 점수 900도 꿈은 아니겠다. 기다려라, 토익아. 내가 간다... 그 전에 무인도에서 좀 벗어나고. 엘리의 '활'에 대한 주장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꽤나 통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조금은 편해보이니까 말이다. 창과 같이 무식하게 던지는 것도 아니고, 세심하고 정교한 무기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사용하면 잘 할수도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여자 양궁도 세계 최강이니까 말이다. 같은 한국인이니까 잘 따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가설도 한 몫 했다. "활이라... 삽으로 구덩이를 파거나 언제 부러질지 모르는 나무줄기 그물망을 만드는 일보다는 훨씬 효율적인 방법으로 들리네. 그렇게 따지면 엘리가 주장한 방법도 나름 좋은 방법이지." "저도 좋다고 생각해요." 지아 선생님과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활 제작에 찬성의 표를 던진다. 세리아와 체리, 그리고 노아 교수님도 별다른 반대의 의사표시를 하지 않는다. "그럼 일단 활을 만들어보고, 그걸 가지고 훈련을 해보도록 하죠." "O.K." 활을 만들기 위해 간단한 재료를 구한 우리들. 우선 대량 양산 체제에 들어가기 전에, 셈플을 하나 구해서 만들기로 결정한 우리들은 그 샘플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재료들만 구성해서 나란히 정렬을 해뒀다. 휘는 정도가 좋은 나뭇가지 하나와 나무 줄기. ...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활 시위를 당기기에는 나무 줄기로 줄을 만들게 되면 탄력성이 심하게 좋지 않았다. 줄이 문제가 되는 것도 있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나무였다. 휨 모멘트가 좋아야 활의 위력이 그만큼 강해지기 마련인데, 우리들이 임시적으로 구해온 이 활대는 그다지 탄력성이 별로 없어보인다. 일반 나뭇가지를 구해와서 그런 것인가. 결국 일단 구해온 재료들은 영 꽝으로 보인다. "안되겠네. 이것들로는." "지아 선생님도 저랑 똑같은 생각을 하셨나보네요." "활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엉성해." "그 말씀에는 심히 공감합니다." 재료를 다시 구해와야 하는 것인가. 활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좋으련만. "노아 교수님은 활에 대해서 아시는 지식이라든지 하는 것이 있나요?" 지식 창고로 불리는 노아 교수님에게 묻자, 선생님이 어색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부정적인 의사를 우리들에게 보여주기 시작한다. "공교롭게도 이런건 교재에도 나와있지 않아서..." "그렇군요." 지극히 당연한 말이겠지만, 활을 만드는 방법 같은 건 전공 서적이나 심지어 교양 서적에도 나오지 않는다. 현대인과 원시생활은 그만큼 동떨어진 사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가 구해온 재료들을 빤히 보던 아리아가 말한다. "그래도 한번 만들어보는 것이 어떨까요." "만들어봤자 제대로 된 활이 나올 것이리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데." "결과가 뻔하긴 하지만, 어떤 식으로 활을 만드는지에 대한 연습 정도는 해두는 것이 좋을거 같아서요." 라며 오히려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는 아리아. 아니지. 사실 그다지 긍정적이라고 받아들이기에도 조금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무조건 해보자는 식의 막무가내 속성을 띄우고 있는 말이니까. 아리아의 제안에 '그래. 만들어보고 이야기해보자.'라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결국 제작에 돌입한 우리들. 구해온 나뭇가지를 나이프로 보기 좋가 깎아 내리고, 나무줄기들을 엮은 뒤에 활대의 각 끝에 묶어둔다. 겉보기에는 제법 활이라는 느낌이 물신 풍기는 무언가(?)가 완성. 그러나 우리들의 예상대로 제대로 활 시위도 당기기도 전에 활대가 부러지는 안타까운 참상을 보여주게 되었다. 한숨을 쉬면서 탄식하는 아리아 왈. "안되겠네요. 이거." "이봐. 네가 만들자고 그랬잖아." "빠른 포기는 어찌보면 긍정적일수도 있으니까요." "... 아. 그러셔." 역시 재료가 문제인가. 골똘히 고심해본다. 활대로 쓸 만한 나무막대와 가느다란 줄. 나무라는 물체 자체가 그다지 높은 탄성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나무줄기보다도 더 얇은 실을 구하기란 사막에서 바늘찾기, 아니지. 무인도에서 텔레비젼 찾기보다도 더 힘든 상황. 역시나 무인도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우리들이 자주 마주하는 문제는 바로 '재료 부족'이었다. 고민하던 우리들. 이대로 활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가질 무렵, 체리가 손을 들면서 특유의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저, 저기..." "왜 그러니? 체리야." 노아 교수님이 겁먹지 말라는 듯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주며 말하자, 체리가 창피한지 얼굴을 붉힌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기 시작한다. "그, 그러니까... 활 제작 방법이라면... 간단하게 알고 있어서요오..." "뭐라고?!" 이보시오. 의사양반. 이게 무슨 소리요. 체리가, 체리가 알고 있다니~!! ... 그런데 정말로 그런 제조법이 실존한단 말인가. 나와 같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는지 아리아가 내 생각을 대신해서 묻기 시작한다. "제조 방법 같은것이 있단 뜻이야?" "저, 정확한 제조 방법이라든지 그런건 잘 모르지만...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는거 같아..." "인터넷?" "'네이년 지식인'이라든지..." "거기구나. 나도 자주 애용하긴 하는데." 과연 지식인. 모르는 것이 없다. 문제는 허위 정보가 80%라는 문제점이 있지만. 참고로 나 역시도 무인도에 표류되기 전에 자주 애용한 적이 있다. 그 중에서 태양신 님의 답변은 위대하지. 지식인의 신이라고 불릴 정도니까 말이다. 질문을 하면 '내공 걸어요!'라는 말만 걸어도 답변이 잘 올라온다. 아주 좋은 사이트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고자 꺼낸 이야기가 아니잖아. "아는 대로 말해줄래?" "네, 네..." 우연치 않게 지식인에서 활 제조법을 본 체리 덕분에 활 제작소는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체리는 지식인에 활 제조 방법따위를 본 것일까. 음... 생각해보니 뭔가 조금 이상한데. 설마 본인이 활을 만들어서 실제로 써먹을 생각을 해본것은 아니겠지? 체리가 우리들에게 알려준 방법은 간단했다. 일단 활대로 쓸만한 나무는 대나무가 가장 좋다고 한다. 근처에 대나무가 있나 찾아보기 위해 엘리에게 되지도 않는 영어를 섞어가며 묻자, 엘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나무가 있는 장소로 나를 데리고 갔다. "정말 많네." 탄성이 절로 나와는 장면. 나와 엘리, 그리고 지아 선생님 이렇게 3명이서 일시적으로 대나무 구하기 팀으로 구성되어서 현재 우리 3명은 공터에서 대략 왕복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서 대나무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는 대나무 숲의 장관. 이런 곳에서 무협 영화를 보면 주인공과 적들이 공중에서 '절대신공!'이라든지 '천하지존!'이라든지 아니면 '간지폭풍!'이라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무협 기술을 내뱉으면서 내공이니 갑자니 하는 것을 이용해서 싸우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협영화 팬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반인의 상식으로 통해서 생각해 보자면 무협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대결신의 배경은 주로 숲 속. 그리고 그 숲 속에서도 대나무 숲은 아마 단골 손님중에서도 가장 매상을 많이 올려주는 단골 오브 베스트 손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와 같이 따라온 지아 선생님도 절로 입에서 탄성을 자아내며 말한다. "그러게... 이런 장소가 있는 줄 알았다면 자주 이용할걸." "어느것을요?" "대나무 말이야. 실제로 대나무는 아주 효용이 많은 나무거든." "그러고보니..." 대나무는 여러가지 용도로 많이 쓰이는 만능 나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죽염 치약이라든지 아니면 밥을 만들때라든지, 그릇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대나무 줄기 자체가 강도가 워낙 쌔서 이걸로 창을 만들면 더욱 효율적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절로 든다. "창을 만들지 못한다고 해도 대나무 숲이 있는 곳을 알아냈다는 것으로도 큰 수확이 되겠어." "유용하겠네요. 앞으로 요긴하게 쓸만한 대나무를 발견해서요." "그런 셈이지." 자연에서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재료는 모두 동원하고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가끔 이렇게 좋은 재료가 발견될때마다 무한한 기쁨의 영광을 누리는 기분이 재현되고 있었다. 특히나 대나무는 지아 선생님이 말씀하셨다시피 그 활용도가 매우 높은 나무였기 때문에 만약에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우리들과 똑같이 기쁨을 표출할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 전 대나무 좀 자르고 있을게요." "알았어. 난 주변을 좀 돌아보고 올게." "네." 가져온 톱을 이용해서 대나무 하나를 고른 뒤에 열심히 톱질을 한다. 일반 나무에 비해 대나무는 속이 비어있는 나무였기 때문에 굳이 2명이서 힘을 들여가며 자를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고목나무같이 나무 기둥이 엄청나게 두꺼운 것도 아니고 말이다. 쓱싹쓱싹. 슬근슬근 톱질하세 라는 어설픈 타령이 입에서 새어나올 지경이다. 여기까지 오는데 아직도 엘리의 머리 위에 자리매김을 한 초호기는 엘리의 금발이 마음에 들었는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엘리도 손을 사용하지 않고 초호기를 떨어뜨릴 수 있는 101가지 방법을 연구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그냥 모자인 것처럼 달고 다닌다. 귀여운 녀석들이 서로 뭉쳐다니니까 큐트함이 배가 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 큐트한 둘은 지아 선생님을 졸졸 따라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차피 작업하는데 제대로 엘리를 챙겨주지도 못하니까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대나무를 자르면서 체리가 우리에게 했던 간략한 제조법에 대해 떠올려본다. 우선 대나무를 반으로 쪼개서 2개를 만든다. 그리고 적당한 끝부분에 불로 열로만달궈서 구부린 뒤에 2개를 엇갈려 연결한 후 이 2개를 고정시킬 수 있게끔 나무줄기로 엮어서 서로 묶는다. 끝부분을 약간 휘게 만들어서 활대의 모양새를 갖추면 그것으로 끝. 그러면 탄성력도 높고 강도도 튼튼한 활대가 완성된다고 체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직접 해본적은 없지만, 다른 나뭇가지를 활용해서 만든 것보다는 훨씬 튼튼한 활대가 탄생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역시나 문제는... 줄인가. 고무줄도 없고. 이 문제는 돌아가서 체리에게 한번 상담해봐야겠다. ============================ 작품 후기 ============================ 심심풀이 땅콩으로 풀어보는 공식 설정 이야기입니다. 설정상으로 가장 가슴 크기가 큰 여성 캐릭터는 지아입니다. 그 다음으로 2위로는 노아가 있고요. 공식 설정상으로 가슴 크기가 작은 여성 캐릭터는 엘리(...)입니다. 엘리도 성인이 되면 커지겠지요. ㅜ_ㅜ 189화 대나무 숲 사이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지아 선생님이 나에게 다가오며 묻는다. "다 잘랐니?" "이제 조금 남았어요." "그래?" "주변에는 소득이 될만한 것이 있었나요?" 엘리를 옆에 세워둔 지아 선생님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한다. "글쎄. 알아낸 사실이라고는 이 대나무 숲의 규모가 생각보다 제법 크다는 사실밖에 없구나." "그 정도로 큰가요?" "사실 그리 넓은 크기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어. 이 무인도의 전체적인 모습을 내가 보질 못했으니까 무인도의 크기에 비해서 이 대나무 숲이 얼마만큼의 규모를 차지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니까." "그렇군요." 사실 무인도의 전체적인 모습이라고 하면 얼마전에 나와 세린, 그리고 아리아는 본 기억이 있다. 난파선 탐험 때 배 위의 갑판에서 무인도를 내려다본 경험이 새록새록 떠오를 정도니까. 우리들이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큰 사이즈를 자랑했던 이 곳 무인도. 높은 산 하나를 주변으로 울창하게 펼쳐진 산림으로 이뤄진 이 곳을 다 돌아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나게 큰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쓸 만할 정도의 양은 되니까. 그렇지?" 지아 선생님이 나에게 확인하듯 묻는다. 사실 우리들의 시야 안에서 보일 정도의 양 정도라도 대나무는 충분히 많아보인다. 그것보다도 사실 대나무가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크나큰 도움이 되고 있지만 말이다. "선생님 말씀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대나무 숲의 풍경은 정서에도 도움이 되니까." 한 손으로 햇빛 가리개를 만들어 대나무 끝을 올려다보는 지아 선생님. 그 옆에 서있던 엘리도 지아 선생님을 따라 작은 두 손으로 햇빛 가리개를 만들어 올려다본다. 순간 엘리가 고개를 드니까 초호기가 '야옹!'하면서 떨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하게 되었다. 깜짝 놀란 초호기가 낙법(?)을 이용하며 안전하게 착지하는 모습을 보고 엘리는 나에게 한 손에 브이 사인을 만들어보이며 특유의 무표정으로 멀뚱멀뚱 바라본다. 손을 이용하지 않고 에바 초호기를 머리 위에서 내려오게 하는 것이 성공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인가. ... 음... 아무튼 축하한다고 말해주자. 활대로 사용할만한 대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자른 나. 혹시 몰라서 몇개의 여유분을 더 챙기게 되었다. 어차피 대나무 하나를 자르면 그 줄기를 잘라서 여러개의 활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여러개의 여유분을 자를 필요는 없었지만, 대나무 숲에 왔는데 모처럼 많이 챙겨갈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된다면 많이 가져가고 싶은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이런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내가 자른 대나무 줄기의 합은 다 더해서 5개 정도. 양 손바닥으로 감싸쥘 정도의 두께만 잘라가지고 온 나는 지아 선생님에게 톱을 양도하고 대나무를 들기 시작한다. "영차!" 기합소리를 내면서 대나무들을 어깨에 짊어진다. 이게 속이 비어있는 나무 줄기라고 해도 보기와는 다르게 꽤나 많은 무게를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벌써부터 어깨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내 표정 변화를 본 지아 선생님이 순간적으로 나에게 물어온다. "나도 몇개 들까?" "아니요. 괜찮아요." "그래도 조금 무거워 보이는데." "그냥 처음 봤을때와 달리 약간 무거워서 그랬어요. 혼자서 전혀 못 들 정도는 아니니까요." 라고 말하자, 지아 선생님이 음흉한 미소로 화답하면서 나에게 작게 말한다. "남자는 자존심으로 먹고 사는 동물이라고 하더라. 유에." "그런가요? 하하하..." "특히나 여자 앞에서는 힘자랑을 하고 싶어지는 것이 남자의 본능일지도 모르겠네." "그럴수도 있겠네요." "뭐, 언제든지 힘들면 나한테 말해. 이래봬도 양호 선생을 하다보니 꽤나 노동력에는 자신이 있으니까." "양호 선생과 노동력과 연관성이 있는 겁니까? 전혀 관련이 없어보이는데요." "어머, 학교 내부의 양호실에 위치한 그 많은 의약품들은 누가 옮겼다고 생각하니." "... 그렇군요." 아무래도 담임 선생의 지위도 아닌 양호 선생 개개인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 지아 선생님이다보니 자신의 학생도 아닌데 함부로 다른 학생들을 데리고 힘쓰는 일을 시킬 수는 없었나보다. 연고나 아니면 밴드, 혹은 기타 물약 같은 것들은 그리 무겁게 보이진 않지만, 유리병에 담긴 의약품들도 종종 있지 않은가. 그런 것들을 고려해본다면, 지아 선생님의 말에도 어느 정도 신빙성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지아 선생님의 말은 고맙게 받아들이지만, 사실 선생님이 말씀하신 '여자 앞에서 힘 자랑하기'라는 자존심 모드가 발동되어서 나도 모르게 지아 선생님에게 괜찮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점도 있지만, 사실 내가 말한 그대로 전혀 못 들 정도의 무게도 아니니까 말이다. 더욱이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제일 중요하기도 한 양호 선생님인데 며칠 전에 감기 몸살이 걸린 나처럼 몸져 눕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다. 차라리 내가 쓰러지는 편이 훨씬 나은 편이겠지. 으쌰으쌰 속으로 기운이 나는 구호를 외치면서 이동하는 나. 왕복 1시간이 걸리는 거리니까 이제 숨만 쉬고 30분만 나무를 한쪽 어깨에 짊어진 채 이동하면 된다. 음... 상당히 고달픈 여정이 되겠군. 15분 정도 지날 무렵. 슬슬 어깨에 통증이 옴을 느낀 내가 시름시름 앓는 소리라도 무의식적으로 내뱉었는지 지아 선생님이 길을 가다가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조금 쉬도록 하자." "휴식인가요." "거부할 생각은 없지?" "... 당연하죠." 오히려 먼저 휴식을 제안해준 지아 선생님에게 고맙다고 말을 전하고픈 심정이다. 남자의 자존심을 앞세워서 무리하게 나무를 들고 있는 내가 오히려 먼저 휴식을 취하자고 주장하게 된다면 그것도 폼이 안나기 때문이다. 이래서 괜히 여자친구를 사귀면 있는 척 없는 척 괜히 기가 센 척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구나. 여자 앞에서 잘 보이고 싶은 남자들의 심리, 오늘 똑똑히 기억하도록 하겠다. 잠시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하는 우리들. 엘리는 아직까지도 기운이 남는지 내가 짊어지고 왔던 대나무 하나를 잡아서 봉 놀이(?)를 하기 시작한다. 성인 클럽에서 야시시한 복장을 입은 여자들이 추는 봉춤이 아니라 나무 막대기를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는 그런 장난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봉춤을 연마했다고 하면 뭔가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어린 아이면 어린 아이답게 퓨어하게 놀아야 하는 것이 진리이거늘. 나무 막대를 붕붕 휘두르는 엘리. 느닷없이 공격 타겟으로 지정받은 에바 초호기가 갑작스레 엘리의 막대기 공격을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을 선보인다. 맞으면 치명상... 까지는 아닌 공격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새끼 아기 고양이에게 있어서는 꽤나 위력적인 공격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야옹! 야옹!'하면서 도망치는 초호기. 그러나 엘리는 계속해서 초호기의 뒤를 쫓으며 공격을 펼친다. 엘리의 행동이 잘 이해가 안되는 난 옆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앉아있는 지아 선생님의 곁으로 다가오며 묻는다. "엘리는 왜 저런 행동을 하는 건가요?" "초호기를 운동시키려고 하던데." "운동... 이요?" "요새 너무 많이 먹고만 다녀서 살이 쪄 보인다고 초호기 운동 좀 시키고 싶다고 나한테 말한 적이 있어." "... 그래서 저런 행동을 하는군요." "나름 초호기에 대한 애정 표현이라고 생각해." "애정이라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고, 거의 동물 학대 수준으로 보이는데요." 조금 과격한(?) 운동을 펼치는 엘리. 뭐랄까. 우리 집 아버지와 교육 방침이 비슷한 방식을 선보이고 있어서 초호기에 대한 동정심이 조금 커지기 시작한다. 동물 중에서도 조류과에 속하는 새가 있는데, 독수리였나... 이름은 넘기도록 하고. 아무튼 자신의 새끼가 날개짓을 하기 위해서라면 공중에서 들어올린 채 그대로 지상으로 떨군다고 하던데. 새끼가 스스로 날개짓을 할 때까지 그 행동을 계속 반복한다고 한다. 참으로 냉정한 부모가 아닐수가 없다. 엘리도 나중에 커서 어머니가 된다면 왠지 모르게 자식에게 '이거 해!'라는 강경책을 사용할 어머니의 부류에 속하지 않을까 라는 추측을 해본다. 그런거라면 또 우리나라가 잘하지. 자식 교육을 위해서라면 오전 7시~오후 3시까지 학교, 오후 4시~저녁 6시까지 학원, 그리고 저녁 7시~저녁 12시까지 개인과외 혹은 학원, 도서관 기타 등등. 학구열이 뛰어나기로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있지 않은가. 아이들이 조금 안쓰러운 현상이라고 보여지지만, 이것도 어찌보면 사회 현상일수도 있으니 나 혼자 고쳐야지 라는 생각으로 쉽게 고쳐질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사회의 풍조급의 문제니까 말이다. 어쩌다가 우리나라 교육에 대한 이야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아무튼 엘리의 교육열... 이 아니라고 했지. 다이어트 방식은 상당히 열정적이고도 공격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초호기가 불쌍해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최근에 많이 먹은 것은 사실이니까 열심히 도망다니렴. 그리고 날씬한 고양이가 되렴. 뒤에서 응원해주마. "이제 슬슬 출발할까?" 10분 정도 휴식을 취한 우리들. 개인 손목시계 소유자인 지아 선생님이 자신의 손목에 차여져 있는 시계를 바라보며 말한다. 체감상으로는 아마 10분 남짓한 시간이리라 예상해본다. "저도 준비 할게요." "그래. 엘리~ 이쪽으로 오렴." "......" 지아 선생님이 부르자, 쪼르르 대나무를 들고 다시 온 엘리. 보기와는 달리 은근히 근력이 있는 엘리였기 때문에 대나무 한개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를 수 있나보다. 무인도에 대한 의문점 중 가장 미스테리한 것이 바로 엘리의 저 근력.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힘이 센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또래 여자아이들과 별로 다를바 없는데 말이다. 궁금하다. 정말로 궁금하다. 아무튼 이런 궁금증을 참고서 대나무를 다시 들도록 하자. 이번에는 반대편 어깨로 나무를 든다. 서로 번갈아가며 드는 것이 어느정도 몸에 부담이 가는 정도를 낮출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그런지는 나도 모른다. 나중에 지아 선생님한테 물어보는게 더 빠르겠지. 또 한번 영차 영차 대나무를 짊어지고 공터에 도착한 뒤.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다른 일행들이 대나무를 보자마자 놀랐다는 듯이 탄성을 자아낸다. 노아 교수님과 아리아, 그리고 나머지 여자들이 내가 짊어진 대나무를 하나씩 받아드는 과정에서 노아 교수님이 자연스레 감탄사를 내뱉는다. "정말로 대나무 숲이 있었구나." "그것도 아주 많이 있었어." 지아 선생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노아 교수님의 말에 대답을 대신 해준다. 이것으로 본의 아니게 대나무 숲이라는 아주 유용한 장소를 발견하게 된 우리들. 몇개는 잠시 땅에 내려두고, 활 제작을 먼저 하기로 마음먹은 우리들은 다시 한번 톱질과 나이프를 들게 된다. 이제 문제점은 바로 줄인가. "체리야." "네? 오빠..." 크~ 역시나 오빠라는 단어를 이렇게 직접 듣는 것은 기분이 좋다. 괜히 남성이 연하의 귀여운 여자들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애교 넘치는 울림, 정말 잊을 수가 없단 말이다. 그러나 옆에서 대기중이던 아리아가 나에게 눈을 흘기면서 말한다. "너무 그렇게 좋다는 티를 내진 마시죠. '선배'님." "... 딱딱한 녀석." 아리아도 나에게 오빠라고 말해주면 좋으련만. 세리아도... 부탁을 하면 들어줄거라 생각하지만, 문제는 세리아가 말을 못한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만약에 세리아가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생각만 해도 좋을텐데. ============================ 작품 후기 ============================ 엘리가 주인공이었던 표류일지 2부는 연재 계획이 없습니다. 그건 제가 볼땐 개인적으로 실패작이라는 느낌이 강해서 연재 계획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연재가 된다면, 엘리 이야기가 아니라 주인공 일행들이 무인도가 아닌 사회에서 펼치는 후일담 같은 이야기가 간혹 외전격으로 올라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늘상 그렇듯 계획만 잡고 있습니다. ^_^;; 190화 그건 그렇다고 치고. 본래 체리에게 용무가 있었으니 마저 하던 말을 이어가도록 하자. "혹시 활대에 걸 실은 어떻게 할 지 알아?" "그, 글쎄요. 잘..." 고민하는 소녀, 체리를 대신해서 노아 교수님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아무래도 무인도에서 구할 수 있는 강도높은 '줄'은 좀 힘들지 않을까." "활대는 구할 수 있을지 언정 줄은 힘들다는 말씀이군요." "응..." 본래 한 고개를 넘으면 또 한 고개가 등장하게 되는 법이다. 오오. 끝없는 방황길. 오오. 그것이 바로 인생. 그것은 외로움. 이런 뜻이다. "잠깐만요." 갑자기 아리아가 우리들의 대화를 중지시키더니 세리아의 앞에 써져있는 글자를 읽기 시작한다. "머리카락들을 엮어서 만들어보는게 어떠냐고 말하는데요?" "머리카락?" "네. '유아 표 낚시대'에서도 머리카락을 사용하잖아요." "생각해보니 그렇네." 물고기를 낚는 데에 사용되는 유아 표 낚시대의 낚시줄도 여성들의 머리카락을 엮어서 사용하고 있다. 그걸 활에 접목시켜보는 것이 어떠냐는 질문. "좋아. 한번 만들어보자." 결국 별다른 수단이 없음을 알게 된 우리들은 즉시 세리아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로 마음 먹는다. 어차피 나무 줄기로 할 수도 없으니까 말이다. 되든 안되는 시험이라도 해보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호기심 어린 탐구력이다. 이 탐구심이 현재 지구의 과학기술을 발달시킨 근원이기도 하기 때문에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절망하는 행동보다는 가능성이 별로라고 해도 일단 도전이라도 해보자는 식으로 하나하나씩 머리카락을 뽑기 시작하는 여성진들. 남자인 나는 어차피 머리카락을 뽑아봤자 길이도 짧기 때문에 별로 도움이 안된다는 결론을 내린 관계로 뽑지 않는다. 만약에 남자 머리카락이 활 제작에 투입되어야 한다면, 아마도 나는 대머리가 되어야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 일단 모아봤는데." "아프네요." 솔직하게 고통을 어필하는 아리아.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체리뿐만 아니라 세리아, 그리고 노아 교수님도 살짝 아프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개인당 얼마나 많은 머리카락을 뽑은 것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 워낙 가느다란 머리카락이기 때문에 누가 누구의 머리카락인지 분간도 잘 되지 않는다. 아, 그러나 명확하게 구분이 되는 부류는 있다. 바로 아리아와 세리아 자매의 은발. 검은 머리카락들 사이에서 유유히 자신의 존재를 독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은발의 머리카락들을 바라보며 노아 교수님이 부럽다는 듯이 말한다. "색깔있는 머리카락이라니... 조금은 부러울지도." "아니에요. 선생님. 오히려 은발이면 귀찮기만 한 걸요." "귀찮다니?" "남들과 다른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으면 오히려 더 눈에 확 띄일 뿐이에요. 대표적인 사례로는 마침 모르는 문제가 있는데 교수님의 시야에 확 들어서 난데없이 지목을 당하는 경우라든지, 아니면 모르는 영문 문장이 있는데 역시나 전자와 같은 이유로 교수님에게 지목당해서 번역을 해보라는 말을 듣는다든지. 이런 것들이요." "아, 아하하..." "도대체 겨우 은발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걸리도 않을만한 것들에 걸리는 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인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해요. 그렇지? 세리아 언니?" "......" 마치 지금까지 자신의 은발 때문에 겪었던 고충을 털어놓기라도 하듯 줄줄 거침없이 토해내는 아리아. 그녀의 질문을 받은 세리아가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아리아를 진정시킨다. 이런 면을 보면 확실히 세리아가 아리아의 언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그런데 이 머리카락... 이제 슬슬 엮어야지." "네. 시간도 얼마 없으니까 시작해야죠." 난감한 상황에 봉착한 노아 교수님의 말에 나도 동참을 해준다. 아무리 무인도에서 할 게 없고, 남아 도는 게 시간이라고 하지만, 계속 한가하게 말을 주고 받을 정도로 오늘의 일정이 여유로운 편도 아니다. 새로운 사냥 도구 테스트도 빨리 해보고 싶고. 그리고 개인적인 호기심으로도 활의 유용성을 시험해보고 싶기도 하니까. 여성들의 머리카락을 모아서 한 군데로 엮는 작업은 가장 세심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세리아에게 맡기기로 했다. 본인이 당첨되자 세리아가 자신이 이런 부담스럽고 중요한 작업을 맡아도 되냐는 식으로 우리들을 바라봤지만, 사실 우리들 중에서 머리카락을 엮는 작업 따위를 해본 유 경험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솔직히 말해서 세리아가 하든 다른 사람이 하든 별 차이가 없을거라는 생각에 세리아에게 부담없이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불로 조금씩 활대의 끝을 지진 나. 그리고 곧이어 세리아가 완성된 줄을 가지고 나에게 다가온다. "다 됐어?" "......" 고개를 끄덕이며 작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세리아. 이제 마무리 단계로 활대에 줄... 이 아니라 머리카락 엮은 것을 달기만 하면 된다. 뚝딱뚝딱. 작업 치고는 꽤나 어울리지 않는 사운드라고 보여지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 어찌되었든 완성된 무기. 이름하여 최종병기 활. 온라인 게임 아이템으로 치자면 숏보우 정도의 크기가 될 정도의 작은 활이 완성되었다. "음. 내가 봐도 잘 만들었어." 나 스스로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멋진 활이 탄생하게 되었다. 활 시위를 당겨본 결과, 약간 만족스럽진 못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들이 만들어본 가느다란 실줄 중에서도 가장 강도높은 위엄을 자랑하고 있었다. 내가 활을 만들 때 미리 화살을 만들고 있던 다른 일행들과 합류. 드디어 만들어진 활과 화살을 들고 다시 모이게 된 우리들에게 나는 먼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들이 직접 사냥감과 근접전을 벌이면서 사냥을 하기엔 상당히 무리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었어." "저도요." "나도."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오..." "......" 지아 선생님을 필두로 아리아, 노아 교수님, 체리, 마지막으로 세리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잠자코 지켜보던 엘리까지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나의 말이 참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본인들 먼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니. 도대체 이 사냥 훈련, 왜 한 것일까. 그래도 사냥 멤버 부사수를 미리 훈련시키는 방법의 필요성은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에 결국 훈련 방법을 원거리 형으로 변형시키자는 의견을 따르기로 한다. "혹시 이 중에서 활을 쏴본 적이 있는 분 계신가요?" 라고 말하면 아무도 없겠지. 나도 기껏해야 장난감 활 정도밖에 사용해본 적이 없는데. 우리 학교에도 양궁부라는 동아리도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괜한 질문을 했나 라는 생각이 들 무렵... "저, 저 해봤어요..." 아까부터 계속 의외성을 가진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가 있었다. 이름하여 유체리. 인터넷 지식인에서 활을 제작하는 방법을 봤다고 했을때부터 범상치 않은 아이라는 생각을 가지곤 있었지만, 실제로 활을 쏴 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물어보도록 하자. "어렸을 때 쏴 본 장난감 활이 아니라 진짜 활?" "네..." "양궁 대회에서 나오는 그 활?" "네..." 장난이 아니잖아. 진짜로 그런 전문적인 활을 쏴본 적이 있다고? 상식선으로 생각했을때 전혀 이해가 안 되는걸.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활도 아니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띄우고 있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어째서 체리가 진짜 활을 쏴본 경력이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표정으로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었다. 움츠러든 체리에게 아리아가 직접적으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투척하기 시작한다. "언제 쯤? 혹시 물어봐도 괜찮을까?" "그러니까... 중학생 때까지?" "혹시 양궁부였어?" "으, 응." 오호라. 이제서야 의문이 조금 풀린 느낌이다. 어째서 체리가 활을 만드는 방법 같은 걸 알고 있는지, 그런 것들에 관련된 궁금증 말이다. 가끔 이런 개인적인 과거의 일을 들어보면 저번에 아리아가 나에게 잠시 반 농담삼아 언급했던 '진실게임'의 필요성에 대한 여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정말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부분이 많은 듯하다. "그럼 활 쏘는 것을 부탁해봐도 될까?" "네, 네..." 나에게 활을 건내받은 체리. 비록 양궁에서 사용되는 경기용 활보다도 조금... 이 아니라 무지하게 많이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경험이 있고 없고의 차이점은 굉장하다고 보여진다. 처녀와 비처녀의 차이점이 확연한 것과 같은 논리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방금의 비유가 적정한 비유인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도록 하자. 처녀 드립 비처녀 드립은 논쟁을 많이 불러 일으킬 수 있을만한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는... 처녀든 비처녀든 상관하지 않는다. 마음만 통하면 되지 않는가. 게다가 여자가 부족한 우리 나라에서 처녀, 비처녀에 대한 전제조건까지 걸게 된다면 가뜩이나 '상상속의 동물, 여자친구'라는 호칭까지 붙은 애인을 사귀지 못하게 될 불상사가 발생할 우려가 클 것이다. 25세까지 동정을 지켜서 마법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 그런데 난 이미 동정이 아니잖아? 안될거야. 아마. 마법사의 길을 포기한 내가 이런 잡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자세를 잡은 체리가 활에 화살을 걸고 활 시위를 당기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자세가 나오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사실 양궁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던 나인지라 저게 모범적인 자세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토를 달 수 없다. 검도였다면 유아 선배가, 그리고 펜싱이었다면 세린이 태클을 걸었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 두 사람도 양궁은 전문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무슨 말을 잘 못하겠지. "그럼... 쏠게요." 마치 예전 복권 프로그램을 할 때 '자, 쏘세요!'라는 말과도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대사를 한 체리가 눈 앞에 임시적으로 만든 표적물에 화살을 날린다. 가까운 거리인지라 그대로 직사 각도를 택한 체리의 선택. 화살이 살짝 포물선을 그리면서 정확하게 표적물의 가운데에 꽂히는 장관을 연출한다. "... 우와." 절로 나오는 탄성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박수까지. 짝짝짝 소리를 들으면서 쑥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인 채 꾸벅 90도 인사를 펼치는 체리였다. 확실히 잘 쏜다. 가까운 거리라고 해도 손톱 크기만한 표적물의 중앙을 한방에 맞추기란 힘들다. 게다가 오늘 처음 사용해보는 임시적으로 만들어진 활인데도 불구하고 잘도 다루다니. 찬사를 받고 있는 체리가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되요오..." 마치 다음 대사가 '참 쉽죠잉?'이라는 말이 들려올 정도로 정말 간단 명료한 설명이었다. 겉보기에는 쉬워보이긴 하지만... 여기서 내가 빠질 수 없겠지. "체리야. 나도 한번 쏴봐도 될까?" "네..." 나에게 활을 건내는 체리. 본래 훈련의 목적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원거리 형 사냥 실력을 상승시키는 것이 주 목적이었지만, 이런 게 있다면 한번쯤 시도를 해보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호기심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 작품 후기 ============================ 봄이라 그런지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불편한 나날을 겪고 있는 중입니다. 기침과 콧물은 정말 안 좋은 녀석들이군요.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녀석들입니다. 191화 "흐음..." 활을 마치 하프 연주하는 마냥 줄을 몇번 튕겨보는 나. 대충 감은 잡았고. 화실을 건 뒤에 줄을 당기고 목표물을 조준한다. 그리고 그대로... 발사! '휘웅~'이라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날아드는 화살 그리고 표적물에 정확히 명중을... 하기는 커녕 계속해서 공중을 가르면서 나무 건너편까지 날아가는 스트레이트한 모습을 보여준다. ...... 녀석. 사람을 참 무안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고만. 고작 화살 주제에. "선배."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말을 꺼낼것 같은 아리아가 아주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에 머금고선 말한다. "집중력이 별로네요." "시끄럽다." 라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려는 듯이 말해본다. "2차전, 안 될까요?" 나의 간곡한 부탁이 통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일동(아리아는 제외하고 말이다. 잔인한 녀석)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다시 한번 활 시위를 당긴다. 이번에야말로. 하다못해 정 중앙은 아니라도 표적물에 맞추리가도 하자. 아니, 하다못해 나무라도 맞춰보자. 이런 심정을 담아 화살을 날려봤지만, 역시나 결과는 마찬가지. 3차전, 4차전, 5차전. 기타 등등등. 농구 용어로 치자면 에어 볼 꼴이 나고 있다고 보여지면 이해하기 빠르리라 예상해본다. 링에, 심지어 백코트에도 맞지 않은 채 공중을 가르는 농구공을 생각해보라. 멋지게 3점 슛을 쐈는데 그런 식으로 내가 쏜 공이 허무하게 에어 볼이 나오게 된다면... 민망의 극치를 달리는 것이다. 간략하게 말해서 쪽팔리다! "... 선배."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어깨에 손을 올려놓는 행위는 오히려 내 마음을 더 상처입힌다는 말을 모르는 것이냐. 아리아." "들켰나요?" "일부러 그런거냐?!" "아무래도 선배는 영 활과 궁합이 안 맞나봐요." "... 이번만큼은 인정하는 수밖에 없겠네." 나름 무인도에서 몸 쓰는 일이라면 주구장창 활약해왔지만. 남자의 자존심이라는 것도 있으나, 궁합이 맞지 않는건 어쩔 수 없다. 양궁은 정말로 내 체질이 아닌 모양이다. 하긴. 활을 잘 쏠 정도로 집중력이 높았다면 평소에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시험을 치룰때도 높은 집중력을 보여야 할 터. 물론 운동과 공부는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전혀 연관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만약에 나에게 그런 고도의 집중력이 있다면 평소에 다른 교수님들로부터 '정신 산만한 녀석!'이라는 소리를 들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나와 양궁은 절대로 이뤄질 수 없는 견우와 직녀 사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견우와 직녀도 1년에 한번은 만날 수 있잖아. 나도 1년에 하루 정도는 활을 잘 쏘는 날이라도 있다는 뜻인가. ... 이야기가 또 삼천포로 빠지게 되었다. 아무튼 내 뒤를 이어서 다음 주자를 맡게 된 노아 교수님.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양궁이었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노아 교수님은 양궁을 잘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자세는 이런 식으로... 네... 그렇게 하시면 되요오..." 체리가 옆에서 코치를 해준다. 아무래도 전문 경력자이다 보니까 정확한 자세에 대해서 코칭하는 것은 체리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런데 왜 내가 활을 쏠 때는 아무런 말을 안해줬던 것일까. 혹시 이것이 바로 차별? ... 아니지. 착한 체리를 원망하는 짓은 하지 말자. 괜히 내가 더 악역처럼 느껴질 수 있으니까. 여자를 괴롭히는 남자는 전형적인 악당 역할로 낙인찍힐 수 있기 때문에 그냥 약간 삐지는 정도로 참아주지. 흥. 체리의 조언을 받은 노아 교수님이 약간은 어설프지만 처음으로 활 시위를 당겨본다. 결과는 나와도 같은 에어 볼 형식의 화살이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2차전에서는 표적물 까진 아니지만 나무를 맞추게 되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다. "잘 하셨어요..." "익숙해지면 쉬울지도 모르겠구나. 이거." "교수님 말씀이 맞을지도..." 체리의 칭찬에 힘 입어 연이어 자신감을 얻은 노아 교수님. 이것이 바로 '버프'라는 것인가. 나에게도 버프 좀 걸어주지. 능력치 좀 상승되게. 노아 교수님에 뒤이어 다른 사람들도 한번씩 활을 쏴보는 중. 피융 피융 효과음을 내면서 그나마 가장 활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은... ...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체리다. 중학생 때 실제로 양궁 동아리에서 활동을 한 경력이 있고 말이다. 그리고 체리는 그렇다고 쳐도, 의외로 아리아가 소질이 있다는 평을 받았다. 체리가 아리아의 실력을 보고 평가한 바로는 다음과 같다. "초보같지 않은 실력이였어요..." "그 정도야?" 설마 하는 기분으로 되묻는 나. 그러자 옆에 있던 아리아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말한다. "선배. 자신의 후배를 무시하는 언행은 좋지 않다고 보여집니다만."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확인 차원으로 물어본 것 뿐이야." "정말인가요." "나를 너무 나쁜 놈으로 몰아 세우지 말라고. 이래봬도 나처럼 후배를 생각하는 선배가 또 어디 있다고." "이미 널리고 널렸을걸요." "......" 역시나 무인도 계의 독설가. 세린의 독설 역시도 뼈아프긴 하지만, 아리아와는 차원이 다르다. 세린이 살을 때리는 독설이라고 비유한다면, 아리아는 뼈를 깎는 독설이라고 평하고 싶다. 대놓고 욕이라든지 목소리의 음성을 높인다든지 하는 그런 행동은 보여주지 않지만, 조용한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라는 상식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나긋나긋하게 일목요연한 포인트 집기가 더 가슴을 쿡쿡 찌르는 말이라는 뜻이다. 어찌되었든 소질을 인정받은 아리아, 그리고 체리. 이 두명은 이로써 당분간 원거리 형 공격 무기인 활을 주로 연습하게 되었다. 나머지 일행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사냥 멤버가 7명으로 늘어났으면, 굳이 나머지 3명이 사냥에 동원되어야 하는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라는 나의 결론으로 인해서 세리아와 선생님 두 분은 사냥에 참가하지 않는 걸로 잠정 결론이 내려지게 되었다. 지아 선생님은 애초에 양호나 의료쪽에 종사하는 사람이기에 사냥에 참가한다는 말 자체가 조금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게다가 괜히 사냥을 나섰다가 지아 선생님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더욱 큰일인지라 자연스레 지아 선생님은 제외되었다. 그리고 노아 교수님과 세리아는 보급병이라고 해야 할까. 군대에서도 그런 거 있을 것이다. 행정분과 중에서도 보급계 말이다. 전투원이 있듯이 보급계 요원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노아 교수님과 세리아는 보급계원으로 임명받았다고 비유하면 좋을거라 생각된다. 어찌되었든 활이라는 중요한 무기 수단을 만든 우리들. 시간이 거의 저녁이 다 되어갈 무렵 모두가 모여서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담화를 주고 받으며 식사가 완성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참고로 오늘 식사 당번은 체력 훈련 겸 활 제작 작업에 참가하지 않은 나머지 인원들. 이제야 한 사실이지만, 요리를 전혀 못하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이름하여 이세린. 뭐... 어찌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인물이었기에 굳이 놀랍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부잣집 아가씨가 뭐하러 자신의 손에 물을 적셔가며 요리를 할 필요가 어디 있겠나. 아침 드라마에서도 보면 부잣집 아가씨 캐릭터들이 억척스럽거나 생활력이 강하다는 등의 컨셉으로 나온 적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오히려 가난한 집 안의 히로인이 그런 부지런한 모습을 보이면 이해가 가겠지만. 요리를 전혀 못하는 세린 덕분에 일시적으로 열리게 된 요리 수강. 학생인 세린은 유심히 일일 강사가 된 누나에게 요리 강좌를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부엌칼은 그렇게 쥐는 것이 아니라..." "이, 이렇게요?" "아니. 그게 아니지. 요렇게. 수평으로 드는거야. 도마와 칼의 면이 직각이 되도록." "... 어렵네요. 이거."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어렵지 않다. 요리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나도 가끔씩 집 안에서 누나를 도와 칼질을 몇번 한 적도 있는데, 세린은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칼을 어떻게 들었길래 누나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냐 하면... 무슨 펜싱하는 자세처럼 상대방의 비수를 노리고 칼날의 끝을 겨누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마치 과일이 자신의 적이라도 되는듯이 그대로 찌르기 공격을 시도하겠다는 강경한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만약에 요리되는 대상이 무생물이 아니라 생물이었다면 지레 겁을 먹고 부엌으로부터의 대 탈출을 시도했을 것이다. 쇼생크탈출 이후로 최고의 명작이 나왔을수도. 무슨 요리와는 원수지간을 가지고 있는지 지독할 정도로 요리에 소질을 보이지 않는 세린. 옆에서 구경하던 유아 선배의 놀리는 말이 안 들려올 이유가 없다. "흐흠. 펜싱계의 에이스도 제아무리 요리는 못하는 모양이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선배." "아니. 그냥. 솔직하게 요리 못한다고 털어놓으면 자연스럽게 유에와 같이 식사 당번에서 제외될텐데." "그건 여자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싫습니다만." "그래도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잖아. 그렇지?" "할 수 있어요!!" 세린에게 또다시 도발을 거는 유아 선배였다. 역시나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사이다운 모습이다. 무인도에 탈출하고 나서도 이 둘의 관계는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리라 예상해본다. 한동안 부엌에서 요리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라고 말하기도 아깝고 그냥 말싸움이다.)을 펼치는 유아 선배와 세린, 그리고 누나를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 벌써 저녁 7시가 다 되어가는데 아직까지 요리는 현재진행형이다. 이미 배가 고프다는 표현현은 과거형인데도 말이다. 부엌에서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는지 노아 교수님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자리에 일어선다. "나, 잠깐 부엌에 갔다 올게." "대신 요리해주려고요?" 아리아의 물음에 노아 교수님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한다. "응. 아무래도 이대로 있다간 오늘 저녁은 쫄쫄 굶을 거 같아서." "그 말에는 저도 찬성이에요." 라고 말하면서 아리아 역시도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마도 노아 교수님과 같이 부엌에서 작업을 하려는 것이리라 생각해본다. 어찌되었든 밥만 먹을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 그래도 요리를 전혀 못하는 내가 식사를 재촉하기에는 조금 염치없어 보이기 때문에 차마 그런 말을 입 바깥으로 꺼내진 못했다. 그러나 입을 대신해서 배가 꼬르륵 꼬르륵 소리를 내면서 적극적으로 '아임 헝그리!'를 외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간신히 저녁 식사를 먹게 된 우리들. 고작 감자 하나 자르는 데 무슨 시간을 그리 많이 소비했는지 세린 본인에게 묻고 싶었지만, 그래도 오늘 내에 저녁 식사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지덕지한 마음만 들 뿐이었다. 식사를 간편하게 마치고 난 이후. 몇몇 인원들이 설거지를 하는 중에 유아 선배가 오늘 우리가 만든 활을 구경하고 있었다. "확실히 잘 만들었는데." "그렇죠?" 나름 자랑을 하게 되는 나. 점점 못 만드는 것이 없어질 정도로 나의 만들기 실력은 나날이 스킬이 늘어나고 있었다. 오늘도 한 단계 레벨 업을 했다는 기분일까. 하지만 현실의 나는 레벨업 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제일 많이 든다. 손기술만 늘지 말고 지식을 조금 더 키우란 말이다. 대학생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다른 기술도 아닌 공부 실력! 그래야 대기업에 취엄을 할 수 있단다. ...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줄여서 현시창. 한 마디로 현실을 직시하자는 뜻이다. ============================ 작품 후기 ============================ 언제나 추천, 코멘트, 그리고 원고료 쿠폰 하앍하앍을 날려주시는 분들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매번 리플을 달아드리고 있진 않지만, 그래도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중이니, 저의 진심을 알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ㅜ_ㅜ 부끄부끄하군요. 그리고 여담으로, 다음주까지 시간이 잠시 남게 되어서 일주일 안으로 책 1권 분량 원고 쓰기에 도전해볼까 합니다. 아마도 조아라 편수로는 대략 50~60편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평소에 쓰고 싶었던 소재가 있어서 그걸로 원고를 써보려고 생각중입니다. 장르는 메이드의 저택과 같은 부류로 통일했습니다. 노블레스에 올릴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냥 연습 겸 필력 상승 겸 해서 써보기로 했습니다. 습작 개념이지요. 그럼 오늘 하루 즐거운 불금 되시기 바랍니다! ^_^ 192화 마치 하프의 줄을 튕겨내듯 여러번 활시위를 당기던 유아 선배가 포인트를 꼭 찍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머리카락으로 하면 언젠가는 끊어질텐데." "아무래도 그렇겠죠?" "피아노 줄이라든지 그런게 있으면 좋겠는데." "무인도에서 그런 것이 있을리가 없잖아요." 만약에 무인도에 피아노가 있다고 한다 해도, 그건 사람이 만든 인공산 피아노가 아니라 아마도 자연이 만들어 낸 피아노일 것이다. 결국 우리가 바라는 피아노 줄은 시중에서 구하지 않는 이상 여기서 만들어낼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피아노 줄 같이 가느다란 와이어가 있으면 정말 좋을텐데. 음. 피아노라... 피아노라... 피아노... ...... .......... ............. 가만. "유아 선배." "갑자기 왜 그래? 목소리 톤을 낮게 깔고서." "우리가 여객선 안에 있었을 때, 생각 나나요?" "어떤 거?" "그러니까 저희가 이 무인도에 표류되기 전에 배에서 보낸 시간 말이에요." "그야 생생하게 기억하지. 평생 누려보지 못할 초호화 여객선이었으니까." "맞아요. 바로 그거였어요." 젠장 왜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나도 정말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녀석인가보다. 하긴. 실제로 시험 점수가 낮게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머리가 나쁜 녀석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보니 왠지 내가 내 자신을 욕하는 기분이 드네. 관두자. 내가 나를 욕해봤자 이득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테니까. 아무튼 겨우 간신히 생각을 해냈다. 와이어 줄을 구할 수 있는 방법 말이다. "선배. 잘 생각해보세요. 여객선에서 저희들이 보았던 것이 무엇이었나요?" "선원들?" "더 깊게 들어가서요. 식사 할 때라든지." "밥 먹을 때?" "그래요. 밥 먹을 때 뭐가 있었죠?" "... 무슨 수수께끼 시간이니?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주면 안 돼?" "나름 긴장감을 살리기 위한 연출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만." "... 그런거 필요 없으니까 빨리 말 안해?!" 유아 선배가 나의 정강이를 있는 힘껏 걷어찬다. 오랜만에 맛보는 유아 선배의 로우킥에 나도 모르게 덩실덩실 황진이 춤을 추고 말았다. 얼씨구나. 나의 뇌세포들아. 아프구나. 그만 울부짖어라. 아직도 통증이 느껴지는 왼쪽 종아리를 쓰다듬으며 결국 수수께끼의 답을 내주고 만다. "밥 먹을 때 클래식을 연주하던 악단이 있었잖아요." "분명 그랬지." "그 곳에 피아노가 있었어요. 기억 나시나요?" "... 정말이네?!" 유아 선배가 이제서야 눈치챘다는 듯이 놀라움을 표시한다. 그렇다. 얌전히 생각해보면 답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배 안에는 '피아노'가 있다. 그렇다면 손 쉽게 그 '피아노 줄'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젠장. 그게 왜 이제서야 생각이 난 것일까. 나도 정말 기억력이 안 좋은 모양이다. "... 확실히 가능성이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의견에 찬성하는 세린. 우리들보다도 오랜 기간동안 난파선에서 머물렀던 경력이 있는 세린의 말인지라 그 신빙성이 더욱더 강해지게 되었다. 자리에 앉아서 진지하게 회상 모드로 옛 기억을 되감고 있던 지아 선생님 역시도 내 의견에 대한 강한 긍정을 표시한다. "그러고보니 피아노를 본 것 같기도 하고..." "있었나요?!" "... 아닌것 같기도 하고..." "있는 건가요, 없는 건가요." 애매모호한 답변 덕분에 괜시리 기운이 빠진다. 지아 선생님 본인도 이런 혼란을 나에게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지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이는 제스쳐를 취하고선 말한다. "너도 난파선 내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잖아.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다는 점." "물론 알고 있지요." "피아노 비슷한 실루엣을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해. 식당에서." "식당이라..." 그런데 우리가 난파선 탐험에 나섰을때도 식당에 가지 않았었나? 분명 그리 기억하는데... "그런데 저희가 식당에 갔었을 땐 피아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잖아요." 아리아가 도중에 말을 꺼낸다. 난파선 탐험대의 일원이기도 했던 아리아의 말 그대로 우리들은 그 자리에서 피아노를 보지 못했다. 분명 우리가 여객선 안에 있었을 때피아노를 본 장소는 바로 식당 내부. 밥을 먹으면서 우아하게 클래식 연주를 들려주던 사람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당시만 해도 친구들과 같이 '우리도 악기나 하나 배워보자.'라고 반 농담삼아 이야기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지옥같은 난파 사건 이후로 그 일도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아무튼 내 기억으로는 확실히 여객선의 식당 내부에 피아노가 있었다. 이것만은 확실하다. "어차피 식당을 다 둘러본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배가 뒤짚어질 정도로 흔들렸었으니까 식당 어느 구석에 박혀있지 않을까요." 내 말을 들은 지아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럴 가능성도 충분하지. 그리고 내가 본 것이 환상이 아니라면 정말로 피아노가 식당에 있다는 가정도 배제할 수 없고." "그럼 이번에도 난파선에 한번 더 갔다 오는거야?" 누나가 나에게 직접적으로 묻는다. 사실 난파선은 여러번 왕복할 기회가 있다면 충분히 그러고 싶은 마음이 크다. 왜냐하면 난파선 내부에 존재하는 것들 중 상당수가 우리들이 필요하는 물건들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양초. 아리아와 나, 그리고 세린이 난파선에서 가져온 소량의 양초들도 현재 산장 내부에서 상당히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단 3명만 갔다 와서 그렇지, 날 잡고 10명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간다면 많은 양의 양초를 공수해올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양초 뿐만 아니라 통조림이라든지, 기타 여러가지 공구나 이런 것들이 현재 난파선 내부에 가득 차있다는 소리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난파선이라는 이름의 보물창고. 비록 있는 물건들이 실제 금은보화 같은 값비싼 물품들은 아니지만, 생활 필수품이라도 무인도에서는 보물 취급을 받을 정도로 소중하다. "... 아무래도 다시 한번 갔다 와 볼 필요성이 있겠네요."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나. 기회가 되면 한번 더 난파선 탐험대를 구성해서 갔다 와야겠다. 불침번을 서는 와중에 난파선 탐험에 대한 일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책상 위에 켜둔 양초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곰곰이 생각을 해보지만. ...피아노 줄이라. 확실히 있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피아노 줄 뿐만 아니라 분명 다른 유용한 물건들도 있을 터.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까지 크게 필요성을 느끼는 물건들은 없지만... 아니지. 사실 분명 있을 터인데 우리가 너무 무인도 생활에 익숙해져버린 탓에 아직까지 눈치를 못채고 있을 뿐, 분명 많은 무언가들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같은 경우에도 팬과 볼펜이라도 있다면 충분히 나의 생각을 메모하면서 좋은 생각이 있다면 즉각적으로 필기를 할 수 있을 터인데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 더 욕심을 내본다면 PSP라든지, 플레이스테이션 3라든지 이런 것들도 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욕심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되면 적어도 MP3라도... 간만에 이어폰에서 나오는 특유의 전자기기 음성을 듣고 싶다. 사실 이어폰을 꽂고 다니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하지만, 지금은 건강에 나쁘다고 해도 이어폰 한번 꽂고 노래를 들어보는 것이 사소한 바램일지도 모르겠다. "난파선이라... 역시 한번 더 가야 할텐데..." 혼잣말로 중얼거려본다. 오늘 같이 나와 불침번 근무를 서게 된 엘리는 취침하고 있던 에바 초호기를 강제적으로 깨운 뒤에 초호기의 앞 발을 자신의 양 손으로 잡고서 쎄쎄쎄 놀이를 하고 있는 중이다. 본래 고양이는 잠이 많다고 하는데, 더욱이 어른 고양이도 아니고 아기 고양이인 에바 초호기가 이렇게 늦은 새벽에, 그것도 자고 있다가 도중에 깬 상황에서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기란 마치 로또가 3번 연속 당첨되는 것을 바라는 확률과 동일하다고 생각된다. "......" 하지만 엘리는 그런 초호기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체 여전히 털이 복슬복슬한 고양이의 앞 발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데에 여념이 없다. 음. 불쌍해 보이기는 하지만, 초호기가 엘리와 놀아주고 있는 동안 나 역시도 난파선이라든지 산장 2층 증축 공사라든지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가 꽤나 많이 때문에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상황. 그렇기 때문에 초호기의 희생으로 엘리의 관심사를 다른 곳에 돌릴 수 있다는 긍정적인 효과를 내 스스로 포기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초호기에게 미안하지만 방관하기로 한다. 미안하다. 초호기야. 그냥 오늘 하루, 잘못 걸렸다고 생각해라. ============================ 작품 후기 ============================ 노블레스에서 글을 연재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말이지만, 사실 저는 정통 판타지 물을 잘 못 씁니다 ㅡ_ㅡ;; 특정 주제나 테마 하나만을 두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굳이 정통 판타지를 쓸 생각이 들지 않아서 지금까지 판타지를 써본 적이 없습니다. 차라리 데드라인같은 좀비물이라든지 메이드의 저택 같은 로맨스물이나, 무인도 표류일지 같은 생존물을 쓰는게 더 재미있더군요. 그래도 정통 판타지 정도는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최근에 강하게 들기 시작했습니다. 설정 짜는 연습부터 해봐야지요;; 193화 ... 그래도 너무 고민만 하기에는 아직까지 내 두뇌의 기능성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부엌으로 잠시 자리를 옮기기 위해서 일어선다. 그러자 엘리가 누운 채로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 어디?" "아, 잠시 목이 좀 말라서. 물 좀 마시려고." "... ok." 방금의 한국말. 분명 엘리가 말한 것이다. 우리랑 같이 지내다보니 아주 기초적인 한국어 말 단어 정도는 이제 몇개정도 알아서 내뱉을 수 있을 정도의 아마추어 수준이 된 엘리. 외국인 특유의 한국어 말하기 표현과 같이 약간 어색한 발음으로 나에게 '어디 가느냐'라는 뜻을 담아 말한다. 그래서 친절하게 답변을 해준다. 엘리와 우리들의 의사소통 문제, 그러니까 지아 선생님과 노아 교수님, 마지막으로 누나를 제외하고는 현재 엘리와 정식으로 막힘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6명이 영어 회화를 배우는 것보다 학습능력이 빠른 엘리가 한국어를 익히는 속도가 월등히 빠른 상황. 자연스럽게 자신이 듣고 배우고 익혀두었던 한국어 솜씨를 종종 발휘하곤 한다. 이럴때마다 느끼는 사실이지만, 역시나 엘리는 정말로 대단한 녀석인 것 같다. 아무튼 부엌에서 물을 떠 온 나. 고작 물 한 잔 마신다고 아이큐가 상승하는 버프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 전환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가만히 앉아서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는 두뇌를 풀 가동 시켜봤자 명쾌한 해답은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가볍게 넘기기로 하자. 물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자리에 앉은 채 아까 저녁식사 이후로 제 2차 난파선 탐험대 구성에 대해서 대략적인 의견을 구해봤다. 별다른 반대 없이 다들 한번 더 난파선에 갔다 오는 것으로 조사되어 있는 상황. 여기서 내가 고민되는 것은 바로 증축공사에 앞서서 난파선에 갔다 오는 것이 과연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 하는 문제였다. 어차피 증축공사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전 인원을 모두 투입하고 있긴 하지만, 족히 1주일 이상은 걸리는 공사. 나무를 자르고 옮겨오는 일도 힘든 판국이기 때문에 절대로 빨리 끝나는 작업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증축공사가 끝나기 전까지 난파선 탐험을 미루는 것은 어찌보면 우리에게 손해되는 일. 그렇다고 저번처럼 소수 인원만을 구성해서 탐험을 가기에도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제대로 필요 물품들을 많이 가지고 오자는 쪽으로 여론이 기울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3명만 구성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기왕 갈 거면 7~8명 정도 대규모의 인원을 꾸려서 가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다. "... 여러가지로 고민 되네."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본래 자신의 생각이 막히면 무의식적으로 혼잣말을 하는 버릇은 나보다 우리 누나에게 있는 버릇인데. 아무래도 같은 혈육이다보니 어느새 그 버릇이 나에게도 옮겨온 모잉인가 보다. 무슨 바이러스도 아니고 말이다. "... 유." 바지자락 끝을 잡고 나를 부르는 엘리. 참고로 엘리가 방금 나에게 말한 '유'라는 것은 '너'라는 의미의 유(You)가 아니라, 유에의 '유'자를 지칭해서 부르는 말이었다. 미국인인 엘리에게 있어서는 한국 사람들의 이름을 풀 네임으로 부른른 것이 꽤나 어렵게 느껴진 탓인지 이처럼 성 앞의 글자만 따서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끔 성별이 겹치는 경우, 그러니까 '이유아'라는 이름을 가진 유아 선배라든지 아니면 '이세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세린이라든지 이렇게 둘이서 서로 '이'라는 같은 성일 때에는 별도로 '퍼스트'와 세컨드'라는 단어를 붙이고 부르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참고로 누가 퍼스트고 누가 세컨드냐 하면 연상이기도 한 유아 선배가 전자고 연하인 세린이 후자다. 엘리 본인의 입장에서는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단순히 구별하기 쉬우라고 그런 호칭을 붙인 거 같은데, 정작 유아 선배와 세린 본인들은 누가 누가 더 엘리의 호칭에서 앞서느냐 덕분에 또 한번 말싸움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당시의 세린 왈. '왜 내가 세컨드야!' 그러자 유아 선배 왈. '그야 당연히 내가 너보다 우월하니까.' 라는 식으로 말싸움이 이어졌다는 것은 이제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겠다. 워낙 뻔한 패턴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여러가지 소재거리들이 나왔지만, 일일이 다 기억하기에는 괜히 스트레스만 받는 경우가 허다하니 그냥 그 자리에서 듣고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이 둘의 싸움을 역사로 기록하는 식으로 책을 써 내려간다면, 기네스 북에 오를 정도로 최 장편을 달성하고도 남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엘리가 부른 탓에 대답을 해주도록 하자. "왜 그래?" "......" 뭔가 말로 우물쭈물 거리는 엘리. 자신이 아는 한국어를 표출하려고 노력하는 중으로 보인다. "... 쉬임칵 케... 포여." "음... 그러니까..." 또 한번 생각할 것이 늘어났다. 쉬임칵 케라는 말은 어느나라 용어인 것일까. 포여 라는 단어는 '보여'라는 단어일테고. 설마 영어의 그 쉬(She)는 아니겠지. "혹시 심각해 보인다고 말하고 싶은거야?" "... yes."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으로 말하는 엘리. 한국말은 잘 못해도, 무인도에서 우리들과 같이 지내오며 이미 한국어 청취 실력은 거의 한국사람 수준급으로 올라선 엘리였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의미는 제대로 알아 듣는다. 그나저나 심각해 보인다니. 난파선 때문에 고민하던 모습 덕분일까. 나도 모르게 어느새 심각한 인상을 쓰고 있었나보다. 그래서 엘리가 걱정이 된 나머지 나에게 이런 식으로 안부를 묻는 겸 물어보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리지만 그래도 사려심이 깊은 엘리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조금은 감동받은 기분이다. 역시 엘리는 나중에 크면 정말 끝내주는 미인이 될 것이다. 게다가 성격까지 착한 최고의 여성으로 성장할 것이리라는 기대를 해본다. 이래서 괜히 '엘리는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엘리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나지막히 말한다. "아니. 그냥 잠깐 생각할 것이 있어서 그랬어." "......" "걱정 끼치게 했구나? 미안. 아프다거나 두통이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니까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돼." "... o.k." 라고 말하면서 어느 순간 새우잠에 빠져든 초호기를 다시 안아드는 엘리였다. 그 순간 초호기는 커다란 눈망울로 '왜 좀 더 오랫동안 이야기하지 않는거야!! 고양이 잠 좀 자자!!'라고 말하는 기분이 느껴진다. 훗. 그렇게 쳐다봤자 엘리가 관심을 쏟고 있는 대상은 내가 아니라 너라고. 그러니까 순순히 오늘 잠 다 잤다고 생각하고 엘리랑 재미있게 놀아라. 아기 고양이야. 그동안 편하게 놀고 먹고 잤으면 받은 만큼 일해야지. 암. 그렇고 말고. 일하지도 않은 자, 먹지도 말라 라는 말도 있잖아. 물론 고양이인 초호기가 지금까지 내가 내뱉는 이 생각들을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률은 미지수지만, 그래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보다는 나은 편이라 생각해서 나의 뛰어난 언변 실력... 은 아니지만 대략 이런 의미를 담은 눈빛으로 초호기를 바라봐준다. '포기하면 편해'라는 모 농구 만화에서 나온 안 감독님께서 하신 유명한 대사도 있으니까 그냥 포기해라. 초호기야. 울먹이면서 엘리의 품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초호기. 하지만 은근히 악력이 좋은 엘리의 손아귀에서 쉽게 빠져나갈 수 없었던 초호기는 이내 몸을 축 늘이면서 '그래. 마음대로 해라!'라는 식으로 포기하기에 이른다. 현명한 선택으로 보여진다. 엘리 때문에 잠시 맥이 끊기게 되었지만, 어찌되었든 난파선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볼 무렵. 커피 한 잔의 여유도 아니고 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면서 있는 분위기, 없는 분위기를 내본다. 이것이야말로 차도남. 나무로 만들어진 허름한 산장을 카페같이, 그리고 물을 아메리카노 4900원짜리 같이 마시는 이 여유로움을 보라. 된장남 컨셉을 잡은 채 한껏 분위기를 연출해보는 나였지만, 괜히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관두기로 했다. 엘리도 밑에서 이런 말을 할 정도니까 말이다. "... crazy?" "노, 노!!!" "......" 그래도 미쳤다는 말은 너무하잖아. 내가 된장남 컨셉에 어울리지 않게 토종적으로 생겼다고 해도, 그래도 미쳤냐는 말은 마음에 상처를 받는다고. 엘리야. 뭐... 아무튼 잠깐동안 벌어졌던 된장남 코스프레는 잊어버리도록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생각을 해볼까... ============================ 작품 후기 ============================ 작품 예약 시스템으로 올라가는 글이기 때문에 후기란이 매우 짧습니다. 렛츠 드링킹!! 194화 아침의 맑은 공기를 마셔본다. 무인도가 유일하기 좋다고 느껴지는 상황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자연의 맑은 고기를 마실 수 있다는 이 점. 매우 좋지 아니한가. 개인적으로 상당히 좋다고 본다. 건강에도 좋고 말이다. 현대 문명 사회에서 전자파의 간접적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생활에서 이런 천연 기운이 만연하게 느껴지는 기분은 매우 상쾌하고 좋다. 자연환경 더하기 현대 과학 기술이라는 아주 혁명적인 진화는 없을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기지개를 펴면서 몸을 풀고 있는 나에게 유아 선배와 같이 불침번 말번초를 섰던 누나가 내 어깨를 몇번 두드리며 말한다. "아침부터 왜 그리 피곤한 모습이야? 남동생." "여러가지 일이 있어서." "뭐야. 불침번 설 때 자위라도 한 거야?" "그럴리가 없잖아." 아무리 남자가 자위에 목마른 성별이라 해도, 장소를 불문하고 무식하게 스스로 위로하는 행위를 남발하진 않는다. 물론 취향 차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누나를 바라보고 있을 무렵, 유아 선배가 우리들에게 다가오며 말한다. "유에. 오늘 사냥 나가기로 한 거. 알고 있지?" "물론이죠." "아침 먹고 1시간 뒤에 나간다고 하니까 알아둬." "네." 어제 임시적으로 만든 활도 시험해볼 겸 해서 오늘 사냥을 나가기로 미리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해뒀기 때문에 유아 선배가 오늘의 일정을 간략하게 전해주었다. 사실 머리카락으로 엮어 만든 실은 조금 불안한 감이 없지않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사냥에서 '활'이라는 원거리 수단이 동원된다면 매우 유용할 것이라고 판단한 나였기에 실전에서 실재로 한번 써먹어 보자는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간단하게 오늘의 사냥 멤버는 나를 포함해서 엘리, 그리고 유아 선배와 체리로 정해졌다. 5명 정도로 예상할까 하다가 멧돼지를 사냥하는 것도 아니니까 굳이 반수의 인원을 대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한 명을 제외한 4명으로 사냥에 임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엔트리 역시도 내가 계획했다. 아리아도 활을 잘 쏘긴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활을 쥐는 것은 역시나 양궁 선수로 실제로 활약했던 체리가 활을 잡는 것이 당연지사. 그래서 이번 사냥은 체리에게 있어서 생애 최초의 야생 사냥이 된 것이다. 아침식사를 마친 뒤에 집합한 우리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체리에게 용기를 선사하려는 듯이 유아 선배가 체리의 굳은 어깨를 마사지 해주면서 말한다. "너무 그렇게 겁먹을 거 없어. 넌 멀리서 활만 쏘면 되니까." "네, 네...!" 유아 선배의 응원이 체리에게 어느 정도의 용기을 샘솟게 해줬는지에 대해서는 미지수. 하지만 스스로 사냥에 나가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대답을 해 준 것만으로도 조금은 체리가 대견스럽게 보였다. 소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체리라서 사실 사냥에 선뜻 나서겠다는 대답을 해줄 것이라고 생각은 못했다. 평소와 같이 약간 우물쭈물 하는 기색을 보여주다가 이내 잔득 움츠러든 모습으로 '제, 제가 할 수 있을까요오...'라는 대답을 하면서 결국 부담감으로 인해 못 하겠다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줄 알았던 것을 예상했다. 그러나 나의 이런 고정관념을 말끔히 박살내고 사냥 참가의 의사를 표시한 체리는 어제 만든 활 시위를 몇번 당겨보면서 자신의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뭐랄까. 마치 기분이 '온라인 게임에서 탱커들만 있다가 서포트 형 캐릭터가 파티에 추가되었다.'라는 느낌일까. 어그로를 끄는 역할을 맡는 탱거로 나와 유아 선배가, 어쌔신 캐릭터로 엘리가, 마지막에 궁수 캐릭터로 체리가. 여기에 힐러까지 있으면 정말 완벽한 조합일텐데 말이다. 아, 힐러가 있긴 있다. 바로 지아 선생님. 그렇다면 이제 이 인원으로 길드를 만든 뒤에 곧 서버 최강의 길드로 자리매김을... 내가 무슨 온라인 게임 중독자도 아니고.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신 차리자. 유에. 아무튼 드디어 사냥길에 나서게 된 우리들. 오늘 우리가 사냥할 목표물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노루로 정하게 되었다. 솔직히 멧돼지를 잡기에는 너무 트라우마가 강렬하게 새겨져서 오늘은 포기했고, 어차피 활에 대한 효율성을 살펴보기 위해 나선 사냥길이기도 하니까 노루가 적당하다고 판단한 이유로 사냥 목표로 노루가 그 영광을 안게 되었다. 동물들이 잘 모이는 호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러던 도중에 화살의 끝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유아 선배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 정말 이 끝에 마취제가 발라져 있다는 말이야?" "네. 아리아의 말을 인용하자면 돌로 된 부분에 발라져 있다고 하던데요." "그런데 정말로 마취제가 정말로 동물들에게 통할까?" "지아 선생님한테 물어봤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하시던데요." 사실 아무리 지아 선생님이라고 해도 모든 약초의 효능을 마스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건 시중에서 판매하는 제조된 물건도 아니고. 야생에서 생으로 만든 마취제이기 때문에 그 효능이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저번에 멧돼지를 사냥할 때 마취제의 효능이 얼마나 가나 한번 알아보고자 시도를 하려 했지만, 마취제가 통하기도 전에 즉사를 시켜버려서 실험 결과를 도출해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계속 마취제가 얼마나 동물에게 통하나 실험하려고 멧돼지를 그대로 방치했다간 우리들의 목숨이 위험해질 뻔 했기 때문에 바로 즉사를 시켰지만 말이다. 평소 우리가 즐겨 사냥하기로 마음 먹은 그 호수에 드디어 도착. 정찰대로 나간 엘리가 우리들에게 보고한 바로는 노루 2마리가 물을 마시고 있다고 한다. 저 멀리서 보이는 실루엣으로 엘리의 말과 접목시켜 본다면 작은 녀석 한 마리와 큰 녀석 한 마리. 마취제를 단계적으로 실험하기 위해서는 일단 작은 녀석에게 먼저 실험을 해보고, 나중에 조금 덩치가 큰 녀석에게 실험을 해보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나는 호수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곳에서 모두를 불러모은 뒤에 작전 회의를 하기 시작한다. "일단 목표는 작은 녀석으로 잡고, 먼저 선공으로 체리가 마취제를 바른 화살을 쏴." "저, 정말로 쏘는 건가요?!" "그야 당연하지." "... 살아있는 생물에게 실제로 활을 써 본 적이 없어서..." 윤리적으로 갈등하기 시작하는 체리였다. 역시나 세리아와 더불어 마음이 여리기로 소문난 아이다운 갈등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차마 못하겠어요!'라는 말을 하면 오히려 난감해지는 것은 우리들이기 때문에 좋은 말로 체리를 설득하도록 하자. "어차피 사람도 아니고. 괜찮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냥을 하지 않으면 우리가 쫄딱 굶는 신세가 된다고. 그렇지?" "그렇긴 하지만..." "이것도 일종의 약육강식의 세계인거야. 체리야. 초식 동물이 풀을 먹고, 그리고 육식 동물이 다른 작은 동물들을 먹고 살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먹이사슬의 관계란 말이지. 살기위해 사냥을 해야 하는 우리들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 살짝 고민하는 표정이 엿보였지만, 이내 나의 말에 결심을 굳혔는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한다. "미안해요, 오빠. 제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었나봐요." 초롱초롱 눈동자를 빛내면서 나를 바라보는 체리.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차마 살아있는 생물에게는 위해랄 가할 수 없어요. 어멋!'이라는 순수하고 퓨어한 느낌을 자아냈었지만, 고기를 먹고 싶다는 일념인지 사냥에 대한 의지를 활활 불태우기 시작한다. 내 설득이 체리의 적극성을 이끌어 냈다는 효과는 보기 좋지만, 그렇다고 너무 하이 텐션으로 가면 그것도 나름 고역인데 말이다. "명령만 내려주세요! 오빠 대장님!" "오빠 대장?!" 유아 선배가 못말린다는 표정으로 체리를 바라본다. 체리에게 이런 면이 있었다니. 조금 신선하다. "오빠 대장이라... 괜찮지. 뭐." "도대체 뭐가 괜찮다는 거야." 라고 말하면서 옆구리를 꼬집는 유아 선배. 순간 '으아악!'이라는 짧은 비명을 내지르게 된 나였기에 체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에게 묻는다. "오빠. 어디 아픈가요..." "... 마음이 아프구나." "마음... 인가요?"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체리. 사실 유아 선배에게 꼬집힌 옆구리의 통증이 제일 아프게 느껴지지만, 정작 가해자인 유아 선배는 그저 흥 이라는 짧은 소리와 함께 '오빠 소리 듣기가 그리도 좋은가 보네.'라는 질투성이 100% 함유된 말을 꺼낸다. 솔직히 질투 난다고 한다면 그렇게 말해주면 좋을텐데. 하긴... 유아 선배가 누나도 아니고. 직접적으로 말을 꺼내는 사람은 아닌지라 이런 식으로 육체적인 고통(?)을 나에게 선사해 준 것일수도 있다. ============================ 작품 후기 ============================ 어제 거의 자정쯤에 바깥으로 나가서 새벽 4시에 집으로 기어들어왔습니다 ㅡ_ㅡ; 점점 나이를 먹어가니 노는 것도 힘들군요;; 30대가 된다면 제대로 놀 기운도 없는 게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아~ 젊음이여. 195화 우선 체리를 먼저 나무 위로 올려보내는 작업부터 먼저 시작했다. 궁수 역할을 담당할 체리가 지상에 있으면, 시야 범위도 상당히 좁아질테고. 무엇보다도 빠른 노루를 쫓아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과연 체리가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일은 미지수이기 때문에 나무 위에서 화살 쏘기 지원을 담당하게 된 체리였다. 처음에는 나무에 올라가는 일이 익숙치 않은 탓에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하며 나에게 애원한다. "오, 오빠. 저... 나무 타는 방법을 전혀 모르겠는데요오..." "... 역시나." 체리를 딱히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예상 범위 내였다는 나의 간략한 말에 체리가 조금 주눅 든 모습을 보여준다. 이 놈의 말 실수. 고쳐야 할텐데. 그래도 아래에서 활을 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 나는 그다지 높지 않은 나무를 발견하고선 말한다. "체리야. 저 정도라면 올라갈 수 있겠지?" 지상으로부터 대략 2~3m 되는 높이. 그러나 체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말한다. "혼자서 올라가는 일 자체를 못하겠어요..." "알았어. 그럼 내가 무등을 태워줄게." "정말인가요...?" "그럼. 이 오빠 믿지?" 대국민 거짓말이기도 한 '오빠 믿지?' 스킬을 다시 한번 시전한다. 왜 대국민 거짓말이라고 불리냐 하면. 여자들만의 언어가 있듯이 남자들만의 언어 중에서 '오빠 믿지?'라는 단어는 곧 '이제 넌 내꺼야. 으흐흐.'라는 말과도 같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용법으로 쓰인 의도가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겁이 많은 체리를 격려해주기 위해 사용된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다. 하지만 체리를 대신해서 유아 선배가 딱 잘라 말한다. "못 믿겠어." "왜 선배가 대신 말씀해 주시는 건가요." "모든 여자들을 대표해서 말한거야." "조건반사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남자는 다 늑대니까." 나 역시도 한 마리 늑대에 불과하단 말인가. 오늘도 먹이를 찾아서 어슬렁 어슬렁 거리는 굶주린 늑대. 참고로 굶주렸다는 말은 음식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 아니라 '여자'에 굶주린 늑대를 의미한다. 음... 부정할 수가 없다는 이 현실에 잠시 애도의 의사를 표시하자. 어찌되었든 결국 체리를 무등 태우게 되었다. 밑에서 발판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의견 또한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다수 존재하는 집단에선 언제나 남자가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게 대다수. 이런 사회적인 풍조도 빨리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희망어린 마음가짐과 함께 체리에게로 향한다. 한쪽 무릎을 꿇고 최대한 자세를 낮추자, 체리가 내 목에 올라 타기 시작한다. "으랴아아압!!" 최대한 짧고 강한 기합을 내지르며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 그러나 여성들이 듣기에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해석된 모양인가 보다. "오, 오빠. 혹시 제가... 무거운가요...??" "아니야, 아니야. 그냥 힘을 주기 위한 기합이라고나 할까. 별다른 의미는 없었어." 하지만 여기서 가만히 있을 유아 선배가 아니다. 곧바로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말에 날카로운 일침을 가해오는 유아 선배의 한 마디. "사람들은 그런 걸 간단하게 말해서 '핑계'라고 부르지." "... 유아 선배. 오늘따라 상당히 공격적이시네요." "기분 탓일거야." "정말입니까?" "... 아마도." 혹시 그 날인가. 여성들이 한달에 한 번 씩 걸린다는 마법의 날. 영어로 매직 데이... 문법 상 맞는지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자. 콩글리쉬든 어찌되었든 그냥 뜻만 통하면 되잖아. 내가 영어 못한다는 것은 이제 입이 마르고 닳도록 설명했으니까 올바른 용법을 설명해준다고 해도 내가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아니, 본능이 그걸 거부할거라 생각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자리에서 일어선다. 체리의 부드러운 두 허벅지가 내 오른 쪽, 그리고 왼 쪽 뺨에서 느껴진다. 바로 뒤통수 뒤로 체리의 은밀한 부분이 위치해 있을 터인디. 으... 참아야 하느니라. 여기서 괜히 발기해봤자 오히려 유아 선배의 독설에 버프 효과를 걸어주는 꼴이 되니까 여기서는 성인 군자라도 된 듯이 모든 것을 물아일체(物我一體 ) 상태로 만든다. 무념무상(無念無想). 명경지수(明鏡止水). 아는 한자 다 동원해가며 표현하는 깨끗하고 맑은 마음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자. "올라갈 수 있겠어?" 나를 대신해서 유아 선배가 걱정되는 표정으로 체리에게 묻는다. 그러자 체리가 아슬아슬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오, 올라갈 수 있을지도..." "조심해. 우선 머리 위에 있는 나뭇가지 있지?" "네..." "그래. 그 나뭇가지를 잡고... 옳지. 잘했어. 그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 서는거야. 유에의 어깨를 그대로 발로 밟고 일어서면 돼. 그냥 유에를 쓸모없는 발정난 수컷... 이 아니라. 말이 잠시 헛 나왔네. 아무튼 발판이라고 생각하고 일어서봐." 절대로 헛 나온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아 선배. 그토록 제 이미지는 선배의 마음 속 안에서 이미 퇴행 단계를 거치고 있는 것입니까. 무인도 표류 때 초창기의 그 달콤 상큼한 신혼의 분위기는 어디로 사라진 것입니까. 그래도 유아 선배의 마음이 어느정도 이해가 되는 것이, 내가 유아 선배 혼자와 육체 관계를 가지는 것도 아니고. 이미 다수의 여자들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유난히도 독점심이 강한 유아 선배에게 아마도 나는 미운 오리 새끼처럼 보일 것이다. 이래서 인기있는 남자는 괴로운 것이다. 훗. "이, 이렇게요?" ... 그리고 실제로도 괴롭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체리가 발로 내 양 어깨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앉은 상태였다면 여성의 말캉말캉한 둔부 덕분에 그다지 아픈 감촉을 느끼지 못하는데, 발꿈치로 어깨를 찍어 누르고 있다고 생각을 해보라. 아마도 미칠 노릇일 것이다. 그래도 이런저런 이유로 아픔을 호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속으로 눈물만 삼키며 언제 끝나나 하는 식으로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대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 그 상태로 발을 뻗어서... 잘했어." "오, 올라 왔어요. 오빠." 유아 선배의 지도 아래에 체리가 드디어 나무 위로 올라가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다. 그 속에는 발판이 되어준 나의 말 못한 고통이 뒤따랐지만, 그렇다고 잘해준 체리에게 아프다는 말은 차마 못하겠다. 이것도 얼핏 남자의 자존심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애써 괜찮은 척 쿨하게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턴다. 그 모습을 보던 유아 선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한다. "그냥 아프다면 아프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될 거 가지고." "... 아프지 않았어요." "과연 그럴까?" "... 아프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요." 믿어라. 그리하면 길이 열릴 것이다... 는 개뿔. 여전히 아프기만 하다.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나무 위로 체리를 올려보내는 작업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고작 나뭇가지 위로 올라가는 일 하나인데 벌써부터 사냥에 써버릴 기운을 다 낭비한 느낌이 든다. 체리에게 작은 목소리로 작전 지시를 내린다. "그 거리에서 노루가 보이니?" "네. 보여요." "그럼 우선 화살을 한번 쏴봐." "어느 부위에... 쏘면 되나요?" "......" 이것도 상당해 난제다. 가만히 있어보자. 동물농장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난폭한 동물을 마취시킬 때 분명 마취총으로 동물을 쏘는 장면이 있었는데. 어느 부위에 쐈더라. 기억이 잘 안 난다. 역시 모르면 물어보는게 진리다. 그런고로 옆에 있는 유아 선배에게 물어보도록 하자. "선배. 혹시 체리의 질문에 대신 대답해줄 수 있나요?" "너, 그것도 모르는거야?" "평소에 동물 프로그램 같은 것을 거의 안 봐서요." "동물에 대한 관심을 좀 가져봐." "... 노력해 볼게요." 졸지에 또 야단을 맞고 말았다. 그런데 티비 프로그램을 안 본 것이 그리도 죄가 되는 것인가. 이건 나름 내가 유아 선배에게 항의할 만한 이유를 갖추었다고 생각하지만, 왠지 그렇게 해봤자 본전도 못 뽑을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얌전히 내가 먼저 숙이고 들어간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선배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몸통을 노리면 돼." "만능 대답이네요. 그거." "어때. 간단하지?" "... 글쎄요." 몸통을 노리라고 말하다니. 그 정도는 나도 말할 수 있겠다. "유아 선배도 사실 잘 모르시는 거 아닌가요." "실례네. 정확하게 알고 있잖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줄 수 없는 건가요?" "어떤 식으로." "예를 들자면 목이라든지, 배라든지, 등이라든지, 엉덩이라든지. 이런 식으로요." "어차피 다 몸통이잖아." "... 체리야. 그냥 맞기 쉬운 곳을 골라서 쏴 봐." 조금 더 구체적인 대답을 기대하고 있던 내가 오히려 허무해지는 순간이었다. 사실 유아 선배도 잘 모르는 눈치인데, 본인은 극구 부인한다. 방금 내가 아프지 않다고 생색을 낸 것이 남자의 자존심이라면, 유아 선배는 여자의 자존심 때문에 일부러 아는척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역시나 어디서나 문제이다. 이 망할 놈의 자존심이라는 녀석 말이다. 어중간한 지시를 받은 체리가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래도 활 시위를 당기기 시작한다. "쏠게요...!" "알았어. 이쪽도 준비 완료야." 자세를 낮춘 우리들. 최대한 노루들이 있는 곳까지 접근을 한다. 발걸음 소리와 인기척을 죽이고. 동물들 중에서도 특히나 초식 동물은 감이 매우 좋기 때문에 이렇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도 금새 눈치를 채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초식동물은 육식동물의 사냥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항상 주위를 경계하는 태도를 게을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살기 위해서라면 언제 어디서든 도망갈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약자의 본능이기도 하니까. 피융!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는 화살. 우리들 머리에서 조금 공간을 두고 날아드는 화살 한 발이 작은 노루의 옆구리에 꽂힌다. "나이스 플레이!" 라고 짧막한 칭찬을 날려준 나. 곧바로 노루를 쫓기 위해서 또 다시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 작품 후기 ============================ 이틀치 밀린 코멘트를 한꺼번에 몰아서 방금 확인했습니다. ^_^;; 우선 밀아같은 경우에는... 저도 지금 드랍률이 상당히 안 좋기 때문에 절망중입니다; 유독 이번 시즌은 득이 힘들더군요. 그리고 다수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로 이뤄진 집단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사실 제 3자의 경우에는 남자의 입장이 부럽게 느껴질수도 있지만, 위에서 잠시 언급된 바와 같이 허드렛 일은 거의 다 도맡아시피 하다고 합니다. 제가 저런 입장에 처한 적이 없다보니 확신은 못하지만, 대게 그렇더군요. 특히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남자에 대한 의존도가 심하지요. 좋은 현상인지 나쁜 현상인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인 의견을 표현하자면,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독일같은 경우에도 여성의 자립심이 굉장하다고 하던데, 우리나라도 이런 인식이 점차 널리 펴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코멘트에서 생각보다 연령대가 높으신 분을 뵌 듯한 그런 기분이... 아, 아닙니다. ^_^;;; 196화 가장 움직임이 빠른 엘리가 먼저 노루에게 달려든다. 허루침에 꽂힌 나이프를 꺼내든 엘리가 노루에게 휘두르자, 우습다는 듯이 가볍게 옆으로 껑충 뛰며 회피한다. 뭐, 노루의 저런 재빠름은 한 두번 겪어보는 것도 아니고. 이쪽에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정도 일은 이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다만 우리들 중에서도 가장 빠른 몸놀림을 자랑하는 엘리의 공격이 저리도 쉽게 빗나갔다는 사실은 조금 의외다. 엘리가 느려진 것인지, 아니면 노루가 빨라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첫 일격은 그렇게 빗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곧바로 제 2타가 준비되어 있지!!" 라고 말하며 그 다음 공격을 날리는 유아 선배. 손에는 '유아 시리즈' 중에서 한 개인 유아 표 목검을 들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두른다. 어차피 사람에게 휘두르는 것도 아니고, 사냥감이가도 한 동물에게 휘두르는 일이기 때문에 유아 선배도 정말 가차없이 풀 스윙로 날린다. 하지만 선배의 공격 역시도 아슬아슬하게 빗나간다. 노루가 피할 곳을 에상하면서 공격을 가한 유아 선배였지만, 노루의 움직임은 선배의 예측 경로보다도 꽤나 많이 빗나간 모양이다. 그렇기에 마지막 대기자인 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히압!!" 나 역시도 허리춤에 위치시켜둔 나이프를 꺼내들며 즉각적으로 휘두른다. 유아 선배의 공격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무조건 공격을 감행하려고 계획했던 나였기 때문에 3번째 공격에서야 비로소 노루의 몸에 적중할 수 있었다. 다만, 즉사를 목적으로 노루의 목을 노리고 휘두른 것이 아닌 근육이 많아 보이는 허벅다리 쪽에 나이프를 스치는 정도로 만족해야 하는 작은 성공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내가 노린 공격이기도 하고. 애초에 우리들은 노루를 죽이기 위해서 이런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마취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효과를 지속할 수 있을지, 혹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야 노루에게 마취의 효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실험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노루를 즉사시켜야 할 필요성은 없었다. 내 공격으로 인해 한쪽 다리에 부상을 입게 된 노루. 그것도 앞 발이 아닌 추진력을 더해주는 뒷 발쪽을 노렸기 때문에 노루의 특기이기도 한 높은 점프는 이제 시전할 수 없다. "유아 선배, 엘리. 포위망을 좁혀가요." "알았어." "...o.k." 유아 선배와 엘리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성을 담은 말을 건낸다. 현재 노루는 내가 입힌 상처 덕분에 아까와 같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 지금은 우리들의 반응을 먼저 보고 도망갈 생각으로 경계를 잔뜩 세우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섣불리 우리가 괜한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노루는 빈틈을 찾아서 도망갈 것이다. 삼각 편대로 진영을 짜서 움직이고 있는 우리들이었기 때문에 빈틈은 상당히 많을 수밖에 없다. 다수의 사람들로 인해전술을 펼치면 좋겠지만, 그럴 상황도 아니고 말이다. 3명이서 최대한 노루가 도망갈 수 없도록 포위망을 좁히는 것이 그나마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체리! 한발 더 쏴버려!" "아, 알겠어요오...!" 노루가 잠시 움직임을 멈춘 사이에 재빨리 체리에게 지원사격 명령을 내린다. 곧바로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빠르게 날아들며 노루의 등에 다시 한 번 꽂히게 된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노루가 우리들을 피해 달아나려고 방향을 틀려는 의도가 다분히 보인다. 삼각형에 접목시키자면, 엘리의 꼭지점과 유아 선배의 꼭지점을 연결하는 삼격형의 한 변 방향으로 도망을 계획하는 노루의 움직임. 차라리 나와 엘리 사이의 거리에서 도주를 택할 것이지 왜 하필이면 그 쪽이냐 라고 속으로 원망 아닌 원망을 던져보지만, 나 혼자서 속으로 하는 생각을 노루가 알 방법도 없으며,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동물은 본래 감각이 상당히 뛰어난 존재다. 특히나 초식동물. 물론 인간 역시도 동물이기도 하지만, 현대 사회의 문명화라는 것이 야생의 감각을 없애기에 충분한 효과를 한 덕분인지 노루같이 미리 탈출 루트를 본능적으로 느끼고 몸부터 움직이는 날렵함을 보여주기 힘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 역시도 현대 사회의 기계화에 익숙해진 일개 학생. 사냥이라는 일 자체가 상당히 미숙할 수밖에 없다. "그쪽으로 갔어!" 유아 선배가 엘리에게 말하자, 그나마 우리들 중에서 가장 동물적인 본능을 많이 가지고 있는 엘리가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이면서 빠르게 노루에게 정면승부를 걸어온다. 만약에 노루가 초식이 아닌 육식동물이었다면 엘리의 정면승부를 받아들였을 터. 하지만 초식동물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살아남기 위해서 '도망'치는 것이 일종의 생존전략이다. 덕분에 노루는 가볍게 엘리를 회피하려는 동작을 선보이며 옆으로 빠진다. 하지만 엘리가 첫번째 일격을 가했을때와는 상황이 사뭇 다르다. 아까의 노루는 뒷다리에 상처를 입지 않은 상황. 하지만 지금 노루는 내가 입힌 상처가 슬슬 노루의 추진력에 브레이크를 걸 타이밍까지 오게 되었다. 살짝 방향을 트는 것 만으로도 노루에게 꽤나 부담이 되었는지 좀처럼 속력이 나오지 않는다. 이때가 찬스임을 직감적으로 느낀 엘리가 허리춤에 나이프를 꺼내들며 노루에게 달려든다. "... Fire!" 그건 총을 발포할때나 쓰는 말이라고. 엘리. 이런 사소한 태클을 걸 시간도 없이 엘리가 자기 자신에게 파이어라는 단어를 외치면서 칼을 휘두른다. 제 3자가 봐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날카로운 공격. 세린과 유아 선배가 이론에 나오는 교과서적인 공격이라고 친다면, 엘리는 철저하게 '실전'으로 단련된 공격이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저건 막지 못할 것이라는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노루의 반대편 다리에도 상처를 내는 데에 성공한 엘리. 아까 언급했다시피 우리들의 목적은 사냥이긴 하지만, 노루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도망치지 못하게 하면서 마취제의 효과가 어느정도까지 지속되는지 관찰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노루의 목숨이 붙어있는 상태에서 사로잡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깔려있는 셈이다. 양쪽 다리에 상처를 입은 노루. 엘리와 내가 휘두른 나이프에도 역시나 마취제가 발라져있기 때문에 곧 그 효과가 드러날 것이다. 가장 근육을 많이 쓰는 곳에 마취제를 투여하는 데에 성공했는지, 노루의 움직임이 멈추면서 이내 앞으로 고꾸라진다. "다 잡은거야?" "글쎄요..." 넘어진 채 우리들을 경계하는 노루. 간신히 잡았다 생각했는지 유아 선배가 길게 한숨을 토해내며 우리들에게 재차적으로 묻는다. "아무래도 다시 일어나서 달아날 기운은 없어 보이는데." "제가 보기에도 그렇게 보여요." "그럼 사냥 성공?" "아무래도..." 일단 성공이라고 보여진다. 그래도 혹시 모르기 때문에 준비해둔 밧줄을 푼 뒤 노루에게 다가가 앞발과 뒷발을 묶기로 한다. 우리들이 다가가 가느다란 형식이지만 매우 단단한 형상을 하고 있는 노루의 발이 격하게 움직인다. 누워있는 상태에서 마치 말의 뒷발차기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공격을 시도하는 노루. 초식동물이라고 해도 살기 위해서는 공격본능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유아 선배. 엘리와 같이 앞발쪽을 묶어주실래요?" "응. 알았어." 엘리와 유아 선배에게 앞쪽을 맡긴 나는 자연스럽게 노루의 뒷발쪽을 담당하게 된다. 가장 힘있고 위험한 뒷쪽을 남자인 내가 맡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 난폭하게 우리들에게 강렬한 저항을 보여주던 노루의 움직임이 서서히 사그러듬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서야 마취제의 효과가 발동되기 시작한 것일까. 노루의 발을 묶기 전에 노아 교수님에게 받은 손목시계를 확인해본다. 우리가 사냥에 임했던 시각은 오전 10시 현재 시각은 10시 50분. 체리가 마취제가 발라진 첫 화살을 노루에게 명중시켰을 때의 시간이 10시 45분이라는 것을 살펴본다면, 마취제가 효능을 발동할 때까지의 시간은 대략 5분이라는 소리가 된다. 5분이라... 하지만 아마도 이것이 정확한 수치는 아닐 것이다. 화살 2발에 나와 엘리가 직접적으로 노루의 활동 근원력이 되는 뒷발에 직접적인 상처를 냈다는 조건까지 감안해본다면... 5분에서 더 단축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노루를 생포하는 것이 중요하다. 뒷발을 하나씩 잡은 나는 어느새 나무에서 내려온 체리에게 말한다. "체리야. 거기에 보이는 밧줄로 노루 뒷발 좀 묶어줄래?" "네, 네...!" 다급하게 나에게 뛰어오면서 두꺼운 밧줄로 노루의 발을 묶기 시작하는 체리. 대부분 노루의 저항은 뒷발쪽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앞발을 담당한 유아 선배와 엘리 역시도 곧바로 손쉽게 노루를 포박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숨을 쉬면서 똘망똘망한 눈으로 우리들을 올려다보는 노루. 그렇게 바라보지 말라고. 오늘 노루 고기 한번 먹어봐야 하니까. ============================ 작품 후기 ============================ 무인도에서 나올 수 있는 액션 장면 중 가장 주된 장면이 바로 사냥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이 뒤에도 뭔가가 나올 예정이지만, 그건 스포일러라 언급하면 안 되겠군요;; 여하튼 오늘도 고생이 많은 주인공 일행들이었습니다. 197화 포박한 노루를 두고 유아 선배가 살짝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역시 동물을 죽이는 일은 잔인해서 직접 보질 못하겠어." "그건 저도 마찬가지에요오..." 유아 선배와 체리가 저런 말을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엘리가 저번과 마찬가지로 고기 해체 작업을 몸소 시범삼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을 잘라내고 가죽을 벗긴 뒤에 내장이나 기타 당당 먹지 못할 것들을 바깥으로 꺼낸다. 피의 비릿내가 공기중에 타고 우리들의 후각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강렬한 냄새가 풍겨온다. 유아 선배와 체리는 멀찌감치 떨어져있는 상태. 그렇다고 엘리보고 혼자 고생시키기에는 좀 미안한 감이 있어서 옆에서 나도 잠시나마 돕고 있었다. 엘리만큼 능숙한 솜씨는 아니고, 그냥 도구를 건내거나 버릴 건 버리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나저나 노루라 그런지 멧돼지보다 별로 먹을만한 부위가 잘 안 나오네." "......" 엘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이 제스쳐를 취한다. 저번에 사냥했던 멧돼지가 다른 녀석들에 비해서 유난히 덩치가 컸다는 점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확실히 멧돼지와 노루에서 나오는 고기의 양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아마도 이 양이면... 10명이서 한 끼 정도의 분량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사냥하기 힘든 멧돼지보단 노루를 사냥하는 쪽이 더 좋다고 판단한 나였다. 하지만 그 생각을 좀 바꿀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방금 든 것이다. 역시나 사냥감은 멧돼지로 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나는 나중에 멧돼지를 표적으로 삼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사냥을 한 의미가 고작 한 끼 분량의 식사로 보답되기에는 너무 적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생고생해서 얻은 고기가 고작 하루, 아니지 3끼 안으로 끝나는 이 비극적인 상황. 있을 수 없다. 아니, 있어서는 아니된다. 나는 오랫동안 고기가 먹고 싶다고! 고기 해체 작업을 마친 엘리가 준비해둔 천으로 고기를 감싼다. 여전히 비릿내가 강하게 풍겨오지만, 비닐 주머니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최대한 피를 제거하고 나서 고기만을 싸는 데에 집중한다. 대략 고기를 포장하는 일을 마무리지은 엘리. 역시나 고수의 손길을 거치니 노루 한 마리가 먹음직스러운 고기 메뉴로 금새 바뀌었다. "다 했어?" 저 멀리서 작업 진행 상황을 물어오는 유아 선배. 아마도 잔인한 장면을 직접 두 눈으로 보기 싫어서 저런 거리감을 두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예상이 든다. 유아 선배와 마찬가지로 다른 여성 멤버들 또한 마찬가지. 이럴때는 나도 그녀들과 동일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싶지만, 남자의 자존심이란 녀석이 발목을 잡는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선배의 질문에 친절히 대답해준다. "네. 다 끝났어요."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 옆에 있던 체리도 슬그머니 고개를 빼면서 정말로 작업이 끝났는지에 대한 여부를 직접 확인한다. 인간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직전까지 남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존재다. 그렇고 말고. 암. 아무튼 고기를 포장하고 다시 선배와 체리에게 돌아온 우리들. 곧 점심시간도 다 되어가는지라 슬슬 산장으로 돌아가기를 택한 우리들은 발걸음을 옮긴다. 사냥을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온 우리들의 눈 앞에.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에 잠깐 지아 선생님과 누나와 담화를 가지게 된 나는 오늘 사냥에서 보여준 마취제의 효능에 대해 솔직하게 보고를 하고 있었다. "... 라는 이유로 효능은 대략 5분으로 보입니다만." "그렇구나. 노루한테 5분이라면... 멧돼지같은 경우에는 6~7분 정도 걸리지 않을까?" "글쎄요. 아직 멧돼지에게는 시험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어차피 앞으로 사냥을 하는 방향은 멧돼지 쪽으로 잡을거지? 미리 한번 더 시험을 해보는 것이 좋다고 보는데." 지아 선생님의 의견에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멀리서 활을 쏴서 멧돼지를 마취시키면 사냥도 훨씬 쉬워지지 않을까요?" "맞는 말이긴 해.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바로 그 '활'이라는 병기가 얼마나 버텨주는지에 대한 것이겠지." "생각해보니..." 우리들이 만든 활은 말 그대로 '임시'로 만든 활이다. 여성들의 머리카락을 다수 모아서 꼬아 만든 활줄. 그렇기 때문에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나 피아노 줄이 필요하다. 보다 강한 활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사냥을 하기 전에 활 제작이 우선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난파선에 다시 한번 갈 필요가 있겠군요." 내 말에 지아 선생님이 팔짱을 끼면서 말을 이어간다. "이번에는 대규모로 갈 거지? 몇명정도 예상하고 있니." "가급적이면 전부 다요." "그렇게까지 많이 갈 필요가 있니?" "기왕이면 난파선에서 도움이 될 만한 물건들은 다 가지고 나오고 싶은게 저의 욕심이거든요." 물건이라는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쓰임새의 범위가 상당히 줄어들게 되어 있다. 피아노 줄 같은 것들도 포함되지만, 예를 들자면 삽이나 공구류의 물건들. 그리고 휴지나 통조림의 형태로 보관되어 있는 음식물들 말이다. 이런 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녹이 슬거나 썪어가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우리들이 쓸 수 있을 정도의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때 최대한 이용하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 쓸 만한 물건은 죄다 가져와서 쓴다. 이것이 바로 무인도의 생존 법칙 아닌가. 멀쩡히 쓸 만한 물건들이 난파선 내부에 진열되어 있는데 그걸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예전에도 한번 말했던 적이 있지만, 난파선은 지금 우리들에게 있어선 어떤 의미로 보물선과 같은 존재이다. 보물이 눈 앞에 있는데 가지 않을 이유는 없다. 전부 다 난파선에 간다는 내 말에 처음에 약간 미심쩍인 발언을 내뱉었던 지아 선생님이 잠시 고민에 빠진다. 그러나 누나는 오히려 시원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내뱉는다. "다 같이 가는 게 좋다고 나 역시도 생각해." "누나도 그렇게 생각해?" "가지고 나올 만한 물건들이 있다면 최대한 가지고 와야지. 지금 우리들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도 모자랄 판국이니까." 그렇다고 실제로 에바 초호기의 힘을 빌리겠다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누나가 한 말 말이다. 아기 고양이가 우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엘리가 불침번 설 때 심심하지 않도록 장난감이 되어 주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뭐... 사람들 사이에서는 애완동물의 귀여움을 보기 위해서 키우거나 아니면 심리 치료의 일환으로 동물을 사용하는 데도 있다고 하는데, 사실 무인도에서 길 가다가 볼 수 있는 것이 동물이지 않은가. 널리고 널린 것이 동물인데 굳이 애완용 고양이를 키우면서까지 동물과 가까이 지내고 싶은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물론 에바 초호기가 귀엽다는 사실은 인정하겠지만 말이다. 고민하던 지아 선생님도 점차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결국 우리들의 의견에 동조하기 시작한다. "반대할 의사는 딱히 없어." "그럼 내일 아침에 모두 난파선으로 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도록 하죠." "당일치기로 하는거니?" "아니요. 거기서 임시로 베이스 캠프를 만들어서 어느정도의 기간을 정하고 나서 지속적인 작업을 할 예정이에요." "예상 기간은?" "그것도 가 봐야 알겠죠." 우리들이 찾는 물건이 많으면 길어지는 것이고, 없으면 짧아질 것이다. 구체적인 기간을 정하고 움직이는 것도 물론 좋지만, 난파선에 얼마나 많은 필요 용품들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미지수이기 때문에 그때 가서 정하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걸 좋은 뜻으로 표현한다면 유연하게 대처한다 라고 표현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한다면 그냥 무계획으로 간다고 표현할 수 있다. 점심에 지아 선생님과 누나와 나눴던 의견을 모두에게 들려준 나. 내일 난파선에 한번 갔다 오자는 말에 대부분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줬다. 그 와중에 세린은 살짝 싫어하는 눈치였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두운 것을 정말 싫어하나보다. 사냥을 나갔던 멤버, 그러니까 엘리와 나, 유아 선배와 체리는 저녁 식사 전까지는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오전에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사냥이라는 수단을 수행하고 왔기 때문에 이렇게 일시적인 휴식이 부여되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흘러 저녁이 다가오게 되었다. 무인도에서 보내는 몇번 째 밤인지 이제는 새기 조차도 귀찮아진 상황. 얼핏 한달 정도 지나지 않았을까 추측해보지만, 어디까지나 정말 단순한 '추측'의 일환을 뿐이다. "그럼 오늘 불침번은..." 대충 오늘의 불침번 근무를 짠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각자의 파트너를 확인해 달라고 말하면서 명단을 발표한다. 종이와 펜이 있다면 적어두고 보여주기만 하면 될 터인데. 역시나 빨리 난파선에 갈 필요성이 있을 것 같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마찬가지로 저녁에 나갈 일이 있기 때문에 글만 바로 올리고 빠르게 퇴장하겠습니다. 모두들 즐거운 화요일 보내세요~ 198화 EP 22. 보물선 이른 출발을 서두른 우리들. 당분간 먹을만한 식량과 식수를 비축하고 가방에 넣은 채 난파선으로 향한지 언 반나절이 지나서야 난파선이 훤히 보이는 해안가에 안착할 수 있었다. "우리의 덩치 큰 친구는 아직도 잘 지내고 있나보네." "뭐... 일단 배니까." 누나가 손으로 햇빛 가리개를 만들면서 여전히 그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난파선의 위용을 한마디로 표현한다. 처음 봤을때와 달리 여기저기 녹이 슬거나 불가사리 같은 해산물들이 난파선과 진한 스킨십을 하고 있다는 점 빼고는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난파선이 트랜스 포머도 아니고 변신 기능이 없는 이상 똑같은 모습은 굳이 말 안해도 알 것이다. 짐을 내려놓은 뒤. 체력이 약한 세리아가 작게 한숨을 쉬면서 호흡을 몰아쉬자, 아리아가 세리아에게 다가가 등을 연신 쓸어내려주며 말한다. "괜찮아? 언니." "......"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세리아. 노아 교수님도 사실 체력이 매우 약한 축에 속했지만, 그래도 무인도에서 장시간동안 걷는 데에는 이제 익숙해졌는지 조금 여유있는 표정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럼 먼저 움막부터 만들어 볼까요." "찬성." 지아 선생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나지막히 말한다. 어차피 여기서 적어도 오늘 하루는 머물게 될 예정이니까 움막을 미리 만들어두는 편이 좋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번 움막을 만들어본 솜씨가 있는 나와 유아 선배, 그리고 노아 교수님이 작업의 진행을 재촉한다. 처음부터 우리들이 머물고 있던 산장에서 숙박을 하던 누나는 당연히 움막 짓는 방법을 알 리가 없고, 아리아와 세리아 자매도 우리가 움막을 만들고 난 이후에 합류했기 때문에 제대로 알지 못한다. 더불어 난파선에서 지내오던 세린, 지아 선생님, 그리고 체리 역시도 마찬가지다. 한번이라도 경험이 있다는 사실은 경험이 없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든 엄청난 차이점을 내포하고 있다. "일단... 저렇게 생긴 나뭇잎 같은 것들을 구해오면 돼요." 내가 지시를 내리자, 세린이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되묻는다. "몇 장 정도 필요한데?"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 너무 광범위해." 살짝 일그러지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세린. 그녀의 태클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제는 여유로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진 나는 어깨를 살짝 들썩인은 제스쳐를 취해보며 대답해준다. "그럼 10장 정도 가져오면 돼." "... 알았어."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살짝 째려본 세린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은 움막을 만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뭐라 나에게 태클을 걸 수도 없을 것이다. 음.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씀하시던 조상님들의 교훈. 무인도에 표류된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지에 대한 놀라운 효과를 창출하고 있었다. 나는 유아 선배와 더불어 움막의 뼈대를 만드는 작업을 실시한다. 우리들이 전에 머물렀던 움막은 텐트형과 마찬가지로 가운데에 기둥으로 쓸만한 나뭇가지를 세어두고, 양쪽으로 축 쳐지는 형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만들 것은 그때와는 사뭇 다른 구조의 움막. 이번에 만들 것은 뼈대로 사각형의 지붕이 될 만한 것을 만들어둔 뒤에 그 모서리에 나뭇가지들을 제각기 기둥삼아 세워둔다. 사각형의 움막을 만들려고 계획하고 있기 때문이다. 텐트형이 사실 만들기 간편하고 인력도 별로 안 드는 좋은 구조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들이 여기서 머물 인원은 총 10명이다. 텐트형의 움막에 모든 사람들이 발 뻗고 자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사실 난파선 내부에 들어가서 숙박을 하면 어떠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기각. 이유로는 참으로 간단했다. 난파선 내부가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저번 폭풍 때 배가 크게 흔들렸던 기억을 되살려 본다면, 여기저기 녹이 슬은 난파선이 쉽게 붕괴될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어서 안전하게 이렇게 바깥에 일시적으로 움막을 만들어 지내기로 결정된 것이다. 불편함이야 잠깐 참으면 되지만, 만약에 참사가 벌어질 경우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되면 수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최대한 불안 요소는 없앤다. 이것이 이번 난파선 탐험대 제 2기의 테마이기도 하다. "유아 선배. 그 쪽 좀 잡고 있어 주실래요?" "알았어. 이쪽이지?" "네. 노아 교수님. 나무 줄기 좀 가져다 주세요." "응. 여기 있어." 알아서 척척척. 동거라는 것이 단순히 '같이 머문다.'라는 그런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서로가 서로간의 호흡에 익숙 해졌다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 한다. 처음과는 달리 일의 작업 진행 속도가 상당히 빠르게 진행됨을 느끼게 된다. 아직까지 제대로 텔레파시가 통하지 않는 점도 있지만, 그래도 이런 노동 작업에 쥐약이던 노아 교수님도 어느 순간 내가 어떤 작업을 시킬 지 미리 알고 있다는 듯이 척척 움직이는 몸놀림을 선보이신다. 사실 개인적으로 교수님이 점차적으로 적응해가는 것은 보기 좋지만, 제자인 내가 이렇게 노아 교수님을 부려 먹어도 되는건가 라는 학생으로서의 양심이 조금 남아 있긴 하다. 미안합니다. 교수님. 거의 형태를 다 갖춰가는 움막의 뼈대. 나머지 일행들이 나뭇잎을 구해오기만 하면 된다. "잠깐 쉴까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나에게 말하는 유아 선배. 노아 교수님 역시도 적지 않은 한숨을 내쉬면서 우리들과 나란히 자리에 앉는다. "아, 정말. 너무 땀을 많이 흘려서 찝찝해." 유아 선배의 투정이 시작되었다. 최근에 누나랑 자주 어울려 다니다 보니 이런 투정부리기 스킬이 유아 선배에게도 전염이 된 모양이다. 유린 바이러스. 무섭도다. "... 가슴까지 다 젖어버렸어." "......" 무슨 반응을 보여야 좋을지 모르겠다. 타이트한 티셔츠를 살짝 앞으로 당겼다 놓았다를 반복하면서 셀프 부채질을 시작하는 유아 선배. 땀으로 흠뻑 젖은 상의 덕분에 유아 선배의 가슴이 살짝 비쳐 보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브래지어를 착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슴의 형태가 훤히 보인다. 살짝 커진 유두의 형태의 굴곡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고, 먹음직스러운(?) 가슴이 투명하게 비치는 모습은 정말 눈이 호강한다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음... 좋다! "너, 자꾸 내 가슴 힐끗힐끗 볼래?" "눈치 채고 있었나요? 선배." "그렇게 변태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면 누구든지 눈치챈다고. 그쵸? 교수님." "으, 응..." 노아 교수님 역시도 약간 옷이 젖은 상태. 그 커다란 가슴이 숨김없이 투명화 상태가 되어버린 티셔츠 바로 위에 훤히 드러나고 있었다. 더불어 교수님 역시도 브래지어는 착용하지 않은 상태. 무인도 표류 이후로 팬티는 입고 다니지만 브래지어는 거의 착용하지 않는 것이 여성들의 대세가 된지라 브래지어는 착용하지 않는 것이 이제 습관화가 되어 버린 듯 하다. 무엇보다도 빨아서 일일이 말리기도 힘들고, 게다가 브래지어 수량도 한정되어 있기도 하고, 사이즈도 제대로 맞는 것이 없는지라 이런 방식을 취한 것 같다. 남자로서 상당히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보여지지만 말이다. 나중에 가면 노팬티 현상도 발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옆에 앉은 노아 교수님이 한 팔로 가슴의 유두 부근의 위치에 팔로 가리면서 나에게 살짝 홍조를 띈 얼굴로 말한다. "남자는 좋겠어. 거리낌 없이 상의 탈의 같은 것도 할 수 있으니까." "이것도 나름 부끄럽다고요. 교수님." 노아 교수님의 말 그대로 나는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상의를 탈의한 채 작업을 시행했다. 그래서 옷이 땀에 젖을 일은 없었다. 찝찝한 기분은 내 좌, 우에 위치한 여성들에 비해 덜하긴 하지만, 그래도 더운건 더운거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노동량이 배로 많은 나였기에 사실상 체감 온도는 더더욱 덥게 느껴지고 있었다. 나를 응시하던 유아 선배가 내 옆구리를 쿡쿡 건들면서 말한다. "너, 은근히 몸매가 좋아졌는데. 근육같은 것도 생기고." "그런가요?" "조금은 네 몸의 변화에 눈치를 좀 채라고. 바보." 전신거울이 없다보니 사실 어떤 식으로 내가 몸짱이 되어가고 있는지 잘 모른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그냥 남들과 똑같은 평범한 체형이었는데, 무인도에 와서는 부쩍 힘을 쓸 일이 많아지도 보니까 나도 모르게 잔근육 같은 것들이 은근슬쩍 생기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근육이 생기면 좋은 현상인지 모르겠네요." "어머, 무슨 말이야. 그거." "요새는 뭐랄까... 호리호리한 남성이 대세라면서요?" "유행에 뒤쳐지고 있구나. 유에. 최근 트랜드는 당연히 짐승돌이지." "짐승돌... 이요?" "그래.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아이돌 남성 그룹들 같은 것을 지칭하는 뜻이야. 그런것도 모르는 거야?" "제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숙녀시대'라든지 '까라'라든지 아니면 '티나냐'밖에 없어요." "우와... 여기에 아저씨가 있었네." "아이돌 그룹을 많이 알고 있지 않다고 아저씨 소리를 듣는 것에 대해서는 왠지 반론을 토해내고 싶습니다만." 유아 선배가 질렸다는 듯이 나를 보고 탄성을 내뱉는다. 그러나 노아 교수님은 내 의견에 찬성한다는 듯이 내 편을 들어주기 시작한다. "아이돌 그룹을 많이 알고 적게 알고를 떠나서 유에는 확실히 또래 아이들 답지 않게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하니까." "... 그 말은 제가 늙어 보인다는 뜻인가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분위기가 그렇게 느껴진다는 뜻이란다." 당황해하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노아 교수님. 그 움직임에 맞추며 거대한 유방도 살짝 흔들린다. 오오오. 가슴 물결이라니. 세상에서 제일 요염한 물결이라 하면 역시나 가슴 물결이지. 나이스입니다. 노아 교수님. 교수님의 말을 듣고 있던 유아 선배가 뭔가 눈치챘다는 듯이 노아 교수님에게 묻는다. "노아 교수님. 혹시 무인도에 표류되기 전에 유에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나요?" "어떤 식...?" "네. 혹시 '남자'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라든지..." "나, 남자로!?" 화들짝 놀라는 노아 교수님. 솔직히 교수님의 반응이 전혀 이해못할 반응은 아니다. 왜냐하면 표류되기 전, 그러니까 우리들이 얌전히 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때라면 노아 선생님이 나를 남자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 문제가 있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과 선생과의 사랑. 금단의 사랑까지는 아니지만, 유난히도 성적인 관념이 그리 개방적이지 못한 우리나라에서는 윤리적으로 거의 암묵적인 금지로 인식되다시피 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사제지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교육 이외의 서로간의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사랑을 나눈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연애라는 포괄적인 범주로 받아 들여지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다고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물론 둘 다 성인이지만, 그래도 사회적 지위가 있지 않은가. 이 섬에 표류되기 전에 나를 좋아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유아 선배의 질문은 어찌보면 사회 전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제지간의 관계에 대해서 묻는 것일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 입장인 노아 교수님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 작품 후기 ============================ 이제 조만간 200편이 넘을 것 같습니다. 300편은 안 넘을 거 같은데... 이것도 가봐야 알것 같습니다 ㅡ_ㅡ; 199화 유아 선배의 질문을 받은 노아 교수님이 우물쭈물 대답을 보류하는 사이. 유아 선배는 더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말한다. "오호라..." "아, 아니야! 그런거 아니야!" 유아 선배의 말에 노아 교수님이 양 손을 붕붕 흔들면서 강하게 부정한다. 그 모습이 또 은근히 귀여워 보이는게 사실. 역시나 나이에 맞지 않게 귀여운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 노아 교수님 다운 반응이다. 그나저나 답변을 함부로 내뱉지 못한다는 뜻은... 설마 '좋아했다.'라는 쪽으로 의견을 기울여야 좋은 것일까. 아니지. 설마. 말도 안 된다. 교수님과 나는 그냥 그저 그런 사이. 뭐... 굳이 표현하자면 그냥 단순히 흔하디 흔하게 볼 수 있는 선생과 제자 사이일 뿐이다. 모범생처럼 교수님과 단 둘이 교육 지도를 받은 기억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학교에서 뛰어난 인재라든지 학과 수석을 매번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학업 능력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별다른 특징이 없는 내가 교수님의 관심을 끌 만한 요소는 전혀 없다. 이건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직접 이런 식으로 말하면 비참하긴 하지만, 그래도 사실인 것을 어찌하랴. 그래서 선생님이 설마 나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는 내 스스로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아 선배와 나의 입장 차이는 명확하게 다른 것인지 연신 싱글벙글 웃어 보이는 유아 선배가 피식 웃으면서 노아 교수님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어떤 면이 마음에 드셨어요?" "......" 그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봐도 되는 것인가. 노아 교수님 역시도 질문을 듣고도 쉽사리 대답을 내밀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 역시도 긍정한다는 표시의 일종인가. 조금은 교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번에 세린이 유아 선배에게 전부터 나를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도출한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의 제공 원인자가 아마 누나였었나... 아무튼 나도 알지 못했던 사실을 무인도에 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기 때문에 유아 선배에 대해 조금은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교수님은 조금 의외라고 할까. 아니지. 조금이 아니라 많이 의외다. 답변을 끝까지 보류하던 노아 교수님이 결국 단 한 마디를 입 밖으로 올리기 시작한다. "그... 냥..." "어머머. 이유 없는 '사랑'인가요?" "사, 사랑이 아니라 그냥 단순하 '호기심'이었을 뿐이야!" "노아 교수님. 그런걸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말하잖아요.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는 그 마음은 당연한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난 그저..." 또 다시 말 끝을 흐리는 노아 교수님. 뭔가 내가 모르는 비밀이라도 있는 것인가. 교수님이 나를 좋아하는 데에 필요한 비밀이라면...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온다.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고, 잘생긴 편도 아닌데 말이다. 혹시 누가 최면이라도 걸었나? 노아 교수님이 나를 좋아하게 되라는 식으로? 그런 녀석이 있다면 내가 반드시 찾아내서 잘했다! 라고 칭찬을... 이 아니라. 최면이라도 풀어달라고 해야지. "... 사실 유에는 내가 좋아하던 첫사랑이랑 닮았어." 엄청나게 빨개진 얼굴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유지한 채 말하는 노아 교수님. 내가 첫사랑과 닮았다고? 노아 교수님의 취향은 나 같은 학생이었단 말인가? 이건 조금 충격적인데... 유아 선배 역시도 나 같이 생긴 사람이 첫사랑이였다는 사실이 조금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이런 녀석이 첫사랑이라고요?" "이런 녀석이라니요. 선배. 듣는 사람 섭하게 시리." "그래도 사실이잖아. 잘생긴 것도 아니고. 특별히 뭔가 인기있는 비결이 없는 녀석이 첫사랑과 닮았다는 것은 내 상식으로 이해가 안 간다고." "... 그러는 선배도 저번에 세린하고 이야기 했던 그거..." "두번 다시 입 바깥으로 꺼내지 말라고 했지!!!" 유아 선배가 갑자기 내 목을 조이면서 다급하게 말을 끊는다. 남의 속마음을 털어놓게 만드는 일은 좋아하지만, 자신의 속마음을 남에게 털어놓는 일은 싫어하나 보다. "켁켁..." 호흡 곤란을 일으키며 선배의 허벅지를 탁탁 치고선 기권 의사를 표시하는 나. 이제서야 자신의 팔을 풀어주며 날 놓아준 선배. 의외로 힘도 좋단 말이지. 그래도 선배의 가슴이 등에 딱 달라붙은 그 감촉은 꽤나 좋았다.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도 있었기 때문에 제로 섬 게임(Zero sum game)이 되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나 참. 여자의 비밀을 그리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은 안 된다고." "... 그런가요." "더욱이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배로 나쁘다고!" 라고 말하면서 내 허벅지 살을 꼬집기 시작하는 유아 선배였다. 또 한번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 엄청난 통각이 밀물 밀려오듯 온몸의 감각을 마비시킬 기세로 퍼지기 시작한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의 나와는 달리 노아 교수님은 아주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는 딱히 외형적인 요소라든지 외모, 그리고 다른 여러가지 조건을 따지는 것은 아니잖니." "그야 그렇지만..." "유아. 너도 여자라서 잘 알 거야. 남자를 좋아하는 그 마음. 그리고 너 역시도 유에를 좋아하고 있잖니?" "......" "나도 너와 마찬가지로 그런 감정이란다."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유아 선배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노아 교수님에게 말한다. "교수님. 그런 발언은 반칙이라구요." "그러니?" "오히려 질문을 던진 제가 할 말이 없어질 정도니까요." "미안하구나." "...그렇다고 사과하실 정도까진 아니에요." 장난스런 웃음을 지어 보이는 유아 선배. 더불어 노아 교수님 마저도 유아 선배의 웃음에 맞추면서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두 여자들간의 비밀을 공유라도 한 듯이 말이다. 중간에 끼어 있는 남자인 나는 멀뚱멀뚱하게 둘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여자의 마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학문 분야가 아닐까 생각한다. 공부를 해도 해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처럼. 나뭇잎을 구해 온 지아 선생님 외 일동. 마무리 작업으로 나뭇잎들을 엮은 뒤에 움막을 보강시킨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 말한다. "이제 완성입니다." "오오!" 탄성을 자아내는 일행들. 마무리 작업을 도맡은 내가 작업의 끝을 알리듯 말하자, 너도 나도 기뻐하며 내부를 구경하기 시작한다. 바닥, 그리고 천장과 벽이 되는 부분에 넓직한 나뭇잎으로 바람과 비를 막아 줄 칸막이를 막아두었고, 바닥 역시도 나뭇잎들 다수를 이불 마냥 깔아두었다. 이 곳에 오기 전에 실제로 이불을 가져 올까 생각해봤지만, 어차피 밤의 추위는 비가 오지 않는 이상 옷만 두껍게 입으면 해결이 될 테고. 그리고 화로도 만들어 두었으니까 추위에 대한 걱정은 별로 들지 않는다. 정 비가 오게 된다면 난파선 내부로 대피하면 될 테고. 여러모로 경우의 수 같은 것들을 미리 다 고려하고 이 난파선 탐험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착실하게 방책을 다 생각해두고 있었다. 준비해도 나쁠 것은 없기 때문이니까.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삼국지의 유비가 무한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라는 짤막한 개그도 잠시 해 보았다. 하하하.... 너무 재미 있어서 배꼽이 다 빠지거나 하는 그런 불상사가 발생할지도 몰라서 이 개그는 혼자 마음속으로 묻어두기로 한다. 절대로 몰매를 맞을 거 같아서 그러는 게 아니다. ============================ 작품 후기 ============================ 매일 술 마시러 바깥에 나가는 건 아니고, 그냥 우연히 나갈 일이 겹쳐서 많아 보이는 것 뿐입니다. 사실 놀 장소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ㅜ_ㅜ그나저나 이제 200편에 거의 근접했습니다. 빨리 완결을 짓고 차기작 연재를 준비해야 할 시기인 것 같습니다. 완결까지는 대략... 60~70편 정도 남았군요. 외전격인 후일담 이야기도 들어간다면 제 욕심으로 300편을 채우고 싶지만,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 이것도 나중이 가봐야 알 거 같습니다. ^_^;; 200화 움막을 만드느라 시간도 꽤나 소모했고, 그리고 산장에서 이 곳으로 오는 데에 걸린 시간까지 고려해 본다면 지금쯤 하늘이 어두컴컴해지는 현상도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저녁 7시 이후 정도로는 완벽하게 해가 떨어지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오후 6시 이후로는 숲 속이라든지 외부 활동을 자주 통제하고 있는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현재 시각 5시 30분인 상황에서 난파선 탐험을 강요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오늘은 그냥 임시로 만든 움막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기로 한다. 어차피 숲 속도 아니고 해변가인지라 동물이 출현할 확률은 거의 없을거라 확신하는 나였지만, 그래도 만약에라는 경우의 수를 가장해서 타다 남은 재를 섞은 물을 여기저기 움막 주변에 뿌려둔다. 본래 담뱃재를 탄 물을 뿌려두면 뱀이라든지 하는 동물들이 접근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하던데, 담뱃재를 탄 물 대신에 타다 남은 재를 사용해도 효능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뿌려본 것이다. 효과가 있기만을 바라면서 말이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나머지 일행을 대신해서 나는 화롯불에 불을 붙이기 시작한다. 부싯돌이라든지 나뭇가지를 이용해 지푸라기에 불을 피우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라이터라는 도구에 의해서 쉽게 불을 붙일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에 굳이 도구의 힘을 빌리지는 않는다. 그래도 혹시나 라이터의 가스가 다 떨어질 수 있거나 혹은 불을 붙여야 하는데 라이터가 없을 경우를 고려해 본다면 불을 피우는 방법 정도는 배워두는 것이 어찌보면 필수 과목 중에 하나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오늘은 엘리 선생님을 모시고 불 피우기 강좌를 열게 되었다. 참고로 수강생은 바로 나. 통역에는 지아 선생님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 라고 설명하는데. 대충 알아 들었니?" 지금까지 엘리가 주구장창 설명하던 말들을 지아 선생님을 통해서 전달 받았다. 솔직히 말해서 방법은 쉽게 알 수 있지만, 문제는 들은 그대로 따라해도 불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속을 파낸 나무통 안에 지푸라기들을 밑에 깔고 그 위로 나뭇가지 하나를 직각으로 세워둔 채 양 손바닥으로 맞잡고 나서 마구 비비면 된다고 하지만, 그게 말이 쉽지 실제로는 불이 잘 붙여지지가 않는게 나에게 있어서는 가장 골치아픈 점이기도 하다. "마음은 따라주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고 있다고 엘리에게 전해주시면 안될까요?" "알았어. 잠깐만." 지아 선생님이 장문의 대화로 엘리에게 무언가를 전해준다. 그러자 엘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앞에 있는 '도구'들을 대신 잡는다. "혹시 엘리에게 직접 다시 한 번 보여달라고 부탁하셨나요? 지아 선생님." "응. 아무래도 말로 듣는 것보다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더 도움이 될 지도 모르니까." "과연.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지아 선생님의 말이 옳음을 느껴본다. 몸을 움직이는 것, 그러니까 농구나 축구 같이 스포츠라든지 하는 그런 류의 몸을 쓰는 것들은 이론으로 주구장창 듣는 것보다 직접 해보거나 눈으로 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그것이 효율적이기도 하고 말이다. 엘리 선생님께서 자리를 잡고 폼새 좋게 앉은 채 나뭇가지를 잡는다. 그러고선 그 작은 손으로 나뭇가지를 비비기 시작. 빠른 속도로 나뭇가지가 돌려지는가 싶더니, 대략 1분도 채 되지 않았을 까. 갑자기 엘리가 자세를 낮추면서 나무통 안의 작은 구멍에 입바람을 불어 넣기 시작한다. 여러번 '후~후~'하며 작게 입바람을 부는 엘리. 그 직후, 희미하게 연기가 커다란 나무통 구멍에서 세어 나오기 시작한다. "오..." "제법이네." 나와 지아 선생님이 각자 탄성을 토해내며 엘리의 빠른 성공에 대한 감탄을 자아낸다. 지푸라기에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모아놓은 마른 지푸라기 더미들과 장작 나뭇가지들에 살며시 놓은 엘리. 부채질 비슷하게 나뭇잎으로 서너번 흔들며 바람을 일으키자, 정말로 불씨가 살아나기 시작한다. 역시나 무인도의 달인. 엘리 선생님 다운 면모다. "일단 보기에는 쉬워보이는데..." 지아 선생님이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중얼거린다. 확실히 정말 보기에는 쉬워보인다. 그냥 지푸라기 더미들을 뻥 뚫린 나무통 안에 넣어서 조금 굵은 나뭇가지를 비비곤 마찰력으로 불씨를 일으키는 작업 말이다. 그러나 직접 시도해 본 내가 말하는 바는 사뭇 다르다. "저게 의외로 또 어려워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긴 머리카락 끝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다시금 말을 이어가는 지아 선생님 왈. "저번에... 유한 도전이라는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출연진들이 무인도에서 불을 피우는 장면을 본 적이 있어. 그게... 2시간 걸렸었나." "아, 저도 그거 봤어요." "어머, 너도?" "결국 2시간 동안 불을 피우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라이터로 불을 피웠었죠?" "음... 그랬었나." "제 기억으로는 아마 맞을걸요. 배가 난파되기 전에 재방송을 본 기억이 있거든요." 그 방송을 본 나 역시도 처음에는 '뭐 저게 어렵다고 그러나.'라는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시청자들을 웃기기 위해서 설정을 잡고 일부러 불을 못 피우는 척 하는 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던 나였지만, 지금은 사뭇 다르다. 그 출연진들이 진짜로 엄청나게 노력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우치게 된 것이다. 나중에 시청자 게시판에 사과 글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다. 설정이라고 생각하고 비난해서 미안해요 라고 말이다. 그리고 더불어서 국민 MC 메뚜기 님. 존경한다고 칭찬 글도 남기는 것 역시도 잊지 말자. 어찌 되었든 시범 조교로 불 피우는 요령을 다시금 몸소 보여주신 엘리 선생님의 뒤를 이어 나 역시도 자리를 잡고 다시 한 번 도전하게 되었다. 불은 인류의 구원이자 희망의 불빛. 무인도에 표류된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확실히 그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바로 불이기도 하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힘내렴." 지아 선생님의 짧은 응원을 받으며 호흡을 고른 나. 이미 저녁식사 조는 라이터로 미리 켜둔 불을 이용해서 식사 준비에 한창이다. 가급적이면 저녁식사가 완성되기 전에 불을 피우는 요령을 마스터하고 싶은 욕심으로 가득 차있는 나. 실용성의 문제도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왠지 모르게 오기를 자극하고 있어서 반드시 배우고 말겠다는 투지로 불타오르는 상황이다. 무인도에서 표류되어 있었다는 경력을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라이터나 다른 장치의 도움 없이 불을 피울 수 있을 정도의 능력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나름 무인도 경력 한 달(얼추 예상한 기간일 뿐이다.)인 나니까 불 정도는 쉽게 피울 수 있어야지. 암. 그렇고 말고. 일단 시도나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나뭇가지를 잡고 열심히 돌리기 시작한다. 스핀, 스핀, 그리고 스핀. 한국어로 표기하자면 돌리고 돌리고 돌리고. 지푸라기를 밑에 깔고 열심히 돌려보지만, 여전히 불은 붙지 않는다. 5분 정도 돌려봤을까? 팔이 땡길 정도로 돌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불의 'ㅂ'자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또 다시 힘만 낭비하고 실패. 절로 한숨이 나오는 나에게 지아 선생님이 내 어깨 위로 손을 올려 놓으며 말한다. "뭐,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잖아." 실패가 나쁜 것만이 아니다. 실패로 인해 성공으로 가는 하나의 경험과 수단, 그리고 방법을 터득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불 피우기 능력도 언젠가는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며 후일을 기약한다. 손목을 돌리면서 풀어주는 센스. 오랫동안 계속해서 단순노동 비슷한 작업만을 해왔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몸풀기 운동을 해주는 것은 굉장이 효과적이라고 본다. "나중에 엘리한테 또 특강이라도 받아야겠네요." "괜히 쓸데없이 힘 낭비하지 말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청년." "네." 지아 선생님의 뒤를 따라 나와 엘리도 같이 발걸음을 돌린다. 오늘 저녁은 어제 잡은 노루 고기를 넣은 찌개. 요새 다양한 천연 조미료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여성진들은 근래에 들어서 부적 찌개류의 음식에 손을 뻗기 시작했다. 나쁜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왠지 내가 실험 대상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조금은 달갑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래도 실험이라고는 하나 아직까지는 대체적으로 괜찮은 맛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불만은 없다. 요리의 달인... 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은 요리 실력을 가진 누나도 있고, 실제로 유부녀이기도 한 지아 선생님도 계시니까 말이다. ... 내가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불만을 토해내도, 어차피 요리 권한은 남자인 나에게는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불만조차도 표출하지 못하고 그저 '맛있다!'라는 말만 기계적으로 내뱉으며 먹을 수밖에. 식사조차도 복불복이라니. 기분이 참 묘하다. "짜잔.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누나와 아리아가 나란히 찌개를 들고 등장한다. 5인이서 2개 조로 찌개를 나눠먹기 위해 각자 둘러앉은 우리들. 아무래도 10명이서 동그랗게 앉아 먹는 것은 여러모로 불편하기 때문에 이렇게 2개 조로 나눠서 먹을 수밖에 없다. 숟가락으로 찌개의 국물을 맛보기 시작한다. 맛은... "오. 좋은데요?" "그렇지? 매콤한 맛이 이 찌개의 특징이거든." 내가 맛에 대한 평가를 내리자, 유아 선배가 허리춤에 손을 올려 놓으면서 싱긋 웃은 채 말한다. "일명, '유아 표 찌개'라고 표현해도 좋아." "이것도 '유아 표' 시리즈인가요." "그러엄~ 나중에 상표 등록까지 정식으로 신청을 할 예정이니까 기대하라고." 유아 표 낚시대에다가 유아 표 수영복, 그리고 이제는 유아 표 찌개인가. 도대체 어떤 류의 사업을 주로 하길래 낚시대에다가 수영복, 찌개까지 있는 것인가. 요식업인지, 아니면 의류인지. 낚시 물품인지. 무슨 대기업도 아니고 여러모로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고 있지 않을까 라는 우려 섞인 시선이 절로 표출되고 있었다. 아무튼 유아 선배 본인이 레시피를 만들어서 제작했다고 언급되는 '유아 표 찌개'. 확실히 맛있긴 하다. 매운 것을 좋아하는 내게 있어서는 부정할 수 없는 특유의 맛이 느껴진다. 우리 누나도 매운 찌개류 같은 음식을 잘하는 편인데. 누나와 비등비등할 정도의 맛을 자랑한다. 요식업 쪽으로 나가면 괜찮지 않을까. 유아 표 시리즈. 물론 내가 직접 투자자가 될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난 망하기 싫으니까. ============================ 작품 후기 ============================ 200편을 달성해서 기분이 좋긴 한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다음편에 이어질 텍본들을 살펴보니, 중간에 저장이 안 되고 파일이 없어져 있는 부분이 발견되었습니다 ㅡ_ㅡ;;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비어있는 공백 부분은 오늘 마저 채워야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과제가 생겨버렸군요; 사소한 문제는 대략 넘기고, 여하튼 200편입니다! 이대로 계속 쭈욱 달리도록 하겠습니다! 201화 시식을 마친 우리들. 가져온 식수로 설거지를 마치고 난 이후에 나는 다시 한 번 움막의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야생 동물들, 특히나 멧돼지 같은 위험한 녀석들 같은 놈들이 출몰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 횃불을 들고 근처에 동물들의 발자국이 보이는 지 수색을 하기 시작한다. 숲 안쪽까지 시야를 확대할 수 없지만, 해변가 근처에는 우선 동물들의 발자국이 보이지 않는다. 모랫바닥이라서 발자국 정도는 아주 쉽게 생길 터. 그런데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다는 뜻은 역시나 이 근처에 위협적인 동물같은 것이 없다는 뜻이 될지도 모르겠다. 간략하게 수색을 끝내고 돌아온 뒤. 저녁 8시가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이미 곤히 잠에 빠진 엘리는 데리고 온 초호기를 품에 끌어 안은 채 새근새근 꿈나라로 향한 상태였다. 고양이를 안고 자면 고양이 털이 입 안으로 들어와서 불편하지 않나. 그렇다고 엘리의 품 안에서 초호기를 빼내려고 하면, 유난히 경계가 심한 엘리가 금새 잠에서 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놔두기로 했다. 가위에 눌린 듯 무의식적으로 바둥거리는 초호기가 불쌍해 보이긴 하지만, 평소에 놀게 해주고 먹여주는 우리들의 은혜에 보답하려면 이 정도 고생은 해야지. 자고 있는 초호기와 엘리를 확인한 나는 모두가 모여 있는 모닥불 근처로 발걸음을 향한다. "이 주변은 어때?" 세린의 질문. 숨김없이 대답해주기로 결심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옆에 앉으며 말을 이어간다. "그다지. 특이할만한 점은 보이지 않고. 덩치가 큰 동물이 왔다 간 흔적도 없고. 그리고 더불어서 생존자의 흔적도 전혀." 사실 거의 실행하지 않고 있기도 한 생존자 수색 작전을 오랜만에 언급해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우리들조차도 무인도에서 지내기가 버거워서 생존자를 찾아다닐 여유는 없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지금은 조금 상황이 다르다. 외부의 날씨 변화, 혹은 위협적인 요소로부터 지켜줄 안락한 집이 있고 식수에 먹을 것까지 많이 가지고 있다. 그리고 더불어서 사냥까지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까지. 사실 생존자를 수색해도 될 정도의 환경은 된다. 그러나 모두가 이제 생존자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뜻은, 아마도 암묵적으로 이 무인도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우리들밖에 없지 않을가 하고 기정사실로 단정해버린 탓일지도 모르겠다. 잠시 생존자 이야기가 나오자, 체리가 살짝 어두운 표정으로 말한다. "... 모두 살아 있을까요오..." "글쎄. 이 무인도 어딘가에 살아 있는지에 대한 사실도 모르겠고, 구조대에 의해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는지도 모르겠고." "......" "알 수 있을만한 것은 전혀 없어. 우리들이 알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아직까지 살아있는 생존자의 모습을 본 적은 없다. 이예신을 제외하고는... 살아있거나, 아니면 죽었거나. 둘 중에 하나일 터인데, 만약 죽었다면 바다에 떠밀려 갔거나. 아니면 동물들이 뒷처리를 했을지도 모른다. 예신의 말에 의하면, 곳곳에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지 못한다. 그만큼 난 그 여자를 신용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눈 앞에 보이는 거대한 난파선 역시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어두워서 제대로 이곳 저곳 둘러보지 못한 탓에 사람들의 시체가 있는지에 대한 목격담은 아직까지 우리들 사이에선 들려오지 않았지만, 난파선 내부에 간혹 보이는 핏자국만이 어렴풋이 앞에 언급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자연스럽게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잠에 빠진 엘리를 제외하고 다들 모닥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는 상태에서. "잠도 안 오는데 뭔가 재미있는 거 없을까?" 누나가 연신 나뭇가지를 가지고 손장난을 치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진실게임은 안 할거야." "쳇." 진짜로 하려고 생각했냐. 혹시나 해서 미리 선수를 쳐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누나 바로 근처에 앉아있던 지아 선생님이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누나의 말에 딴지를 건다. "원정길에 오른 만큼, 많은 취침 시간을 확보해주기를 바라니까 일찍 자렴." "마치 고등학교 수학여행에서 학생들을 감시하는 선생님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지아 선생님." "너무 딱딱하게 받아들이진 마. 유린. 나는 단순히 주치의로서 이른 취침을 권고한 것 뿐이야." 누나의 독단어린 폭주를 지아 선생님이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해서 진정시켜준다. 역시 지아 선생님. 연륜이 묻어나오는 대처,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이 등장해버릴 줄이야. "무서운 이야기라도 하죠." "뭣?!" 은발의 미소녀 자매 중에서도 동생 포지션을 담당하고 있는 포커페이스 여성, 아리아가 의외의 제안을 내놓은 것이다. "어차피 잠도 안 오잖아요. 진실게임이 싫다면, 분위기에 어울리게끔 무서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해서 말해봤습니다만." "... 기가막힌 타이밍이구만." 바로 옆에는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난파선이 떡 하니 버티고 있고, 반대편에는 새까만 칠흑으로 치장되어 있는 숲이 포진되어 있다. 오로지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밤하늘에 떠있는 밝은 달과 별, 그리고 지상에는 모닥불이 전부. 물론 그렇다고 타이밍 좋은 아리아의 제안에 모두가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 그 이야기는 없던 걸로..." "의외네요. 유아 선배는 찬성할 줄 알았는데." 아리아가 일부러 유아 선배의 자존심을 살짝 건드리는 말투로 돌려 말한다. 순간 울컥하는 유아 선배의 눈동자. 그와 동시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세린이 작게 웃으면서 말한다. "고작 무서운 이야기 하나 가지고 떠는 건가요? 약하네요. 선배." "이세린...!!" 유아 선배의 약점을 잡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기 시작하는 세린의 마무리까지. 아리아의 도발에 이어진 2단 콤보는 유아 선배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까지거 하면 되잖아! 고작 무서운 이야기 가지고 누가 떤다고 그래?!" "흥! 보나마나 유아 선배잖아요." "뭐가 어째?!" 또 다시 시작된 유아 선배와 세린의 말싸움. 평상시 모습과 똑같아서 별다른 위화감이 느껴지진 않지만, 문제가 있다면 도발을 자처한 세린의 손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이다. 저 녀석. 자신도 무섭지만, 유아 선배와의 승부를 더 우위에 두면서까지 저런 무리수를 던져야 하나. 이세린이란 여자도 여러모로 손해보고 사는 피곤한 인생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유아 선배와 세린이 담력이 약하다는 건 완벽하게 파악되었고. "으..." 미세하게 한숨소리를 자아내는 또 한 명의 인물, 노아 교수님까지 포함해서 이걸로 3명째. 다른 사람들보다도 가장 교수님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나였기에 희미한 반응도 완벽하게 잡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단지, 자신이 나이순으로 넘버 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서운 티를 내지 못한 채 침묵을 지킬 뿐인 노아 교수님. 사회적인 지위까지 포함하면 그녀가 자발적으로 무서운 이야기 토크 같은 건 그만두자는 말을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 것이다. 세린도 그렇고, 유아 선배도 그렇고, 노아 교수님도 그렇고. 그 놈의 자존심이 무엇인지 참. 자신의 속내를 마음껏 표출하며 살지 못하게 만드는 구속구를 스스로 달고 살다니. 참 피곤한 운명이다. 난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그럼 제가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말을 꺼낸 장본인이기도 한 누나가 오른손을 번쩍 들고 기운차게 말하기 시작한다. 꿀꺽. 유아 선배와 세린, 그리고 노아 교수님의 침 삼키는 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릴 정도다. 다들, 잘 버틸 수 있으려나. 우리 누나의 무서운 이야기 시리즈는 진짜 가차 없는데. ============================ 작품 후기 ============================ ~사색소녀 1회~ "선택한다는 말인 즉슨,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말과 같은 거야." 라고 그녀는 말했다. 평상시와 똑같이 뜬금없는 화두 전환. 그리고 평상시와 똑같은 내 반응. "... 뭐?" "이해 못했어? 한 마디로,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말은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말과 같은 거라니까." "어. 그래서." "무언가를 포기할 각오가 되어있는 자만이, 선택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지." "그러냐." "...재미없는 반응." "......" 나에게 무슨 반응을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녀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반응은 '침묵'이 전부다. 절대로 상황대처능력이 미흡해서 그런 게 아니다. 그런고로 나는 침묵을 '선택'하고, '재미'를 포기하겠다. "이게 내 선택이야." 뾰로퉁한 표정으로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 재미없는 선택." ~여담~ 200편 축하 코멘트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다수의 코멘트 덕분에 잠시 눈물 좀 닦도록 하겠습니다 ㅜ_ㅜ계속해서 무인도라는 소재 하나만으로도 장편 글을 쓸 수 있다는 아주 놀라운 능력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02화 어쨌든 무서운 이야기 토크가 강행된 이후. 때 아닌 유령 이야기 덕분에 세린과 유아 선배는 한동안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게 되었다. 불침번 초번이기도 했던 나는 마른 장작을 모닥불에 집어 넣으면서 아직까지도 두 눈을 초롱초롱 뜨고 있는 유아 선배와 세린에게 작게 한숨을 쉬며 말한다. "이제 그만 슬슬 주무시죠. 둘 다." "... 싫어." 유아 선배가 투정을 부리려는 듯이 누운 채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세린 역시도 호의를 배푼 내 말에서 오히려 반감을 샀다는 듯이 거칠게 항의하기 시작한다. "내가 잠을 자든, 안 자든 상관 없잖아." "그거야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불침번에게 민폐라고. 취침 인원은 빨리 잠에 드는 것이 예의니까." "... 그런 예의 범절이 어디 있다고." "방금 내가 만들었어." 저녁 10시가 다 되어가는 상황에서 일찍 잠에 빠진다는 부탁도 사실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다들 새근새근 잠이 들었는데 이 둘만 멀쩡히 깨어 있다는 것은 불침번으로서 용서가 안 되는 상황이기에 이렇게 잠을 강요해본 것이다. 참고로 유아 선배와 세린과 더불어서 유령이라면 딱 질색을 표명하던 노아 교수님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공교롭게도 나와 같은 불침번 근무를 서게 되어서 지금 이렇게 모닥불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사실 교수님도 불침번 초번만 아니었다면 세린과 유아 선배와 마찬가지로 잠 못 이루는 저녁을 보냈을 확률이 매우 크다고 보여진다. 교수님 입장에서는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건지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봤을땐 좋은 편이라 생각이 든다. 텐트 바깥쪽에서 나에게 '취침을 강요하지 마!'라는 시선을 보내던 유아 선배가 남들이 깨지 않도록 배려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 나라는 숙면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고. 그러니까 강요하는 것은 정당치 않아." "강요가 아니라 권고에요." "그게 그거지." "최대한 잠을 많이 자두지 않으면 내일 피곤함을 느낄 테니까 미리 충분한 숙면을 취해두라는 저의 깊은 뜻을 담은 의미이기도 하죠." "그런 식으로 신경 써주지 않아도 충분히 잘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 본인이 좋다면 뭐, 어쩔 수 없겠지. 유아 선배의 말 그대로 잠을 강요한다 해도 본래 잠이라는 것이 쉽사리 오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만약에 내가 방금 말한 것처럼 '잠자야지.'라는 생각을 먹자마자 곧바로 잠에 빠지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면증 환자들에게는 상당한 희소식이 될 테니까. 그리고 수면제를 제조하는 제약회사는 파리만 날리는 꼴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계속해서 유아 선배와 세린의 말상대가 되어주면 괜히 잠만 더 안 잘것 같은 느낌이 든 나는 노아 교수님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이동한다. 내가 자리를 피하자, 유아 선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세린에게 말을 걸기 시작. 하지만 움막 안이라서 서로 그리 목소리의 톤을 높힌 채 말은 할 수 없는지라 소근소근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단하네요. 저 둘." 노아 교수님의 옆에 약간 거리를 유지하며 앉은 뒤에 말하는 나. 그러자 교수님이 부드럽게 웃어 보이면서 대답한다. "아무래도 많이 무서웠던 모양일지도." "유령이라든지 귀신같은 비과학적인 이야기를 저리 심각하게 받아 들이면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조금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여자 아이들이니까 이해해주렴." 여자는 귀신에 약하다란 말인가. 성차별 발언이 아니지만, 그래도 확실히 여성쪽이 남성에 비해서 겁을 많이 먹는 것은 사실이긴 하다. 겁이 없는 여자들도 있긴 하지만, 그 비율이 남성에 비한다면 압도적으로 적은 수일 뿐.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 누나같은 사람이나 아니면 엘리를 들 수 있겠다. 누나는 비과학의 산물인 귀신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나름 합리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서워하지 않고, 엘리는 귀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뭔지 모르겠다는 눈초리를 하고 있었던 것응로 보아서는 '모르기 때문에' 무서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지만,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 역시도 무인도에서 통하는 속담일 줄이야. 언어의 힘은 참으로 대단한 것 같다. 다시 한 번 더 마른 장작을 모닥불에 던져 넣은 내가 교수님에게 무심코 한 마디를 던져본다. "교수님도 그 여자 아이들에 속하는 건가요?" "나?" "노아 교수님도 유령이라든지 하는 그런 거에 조금 무서움을 타는 모습이 보인 거 같아서요." "그, 그랬니?" 살짝 말을 더듬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제대로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공포영화를 보며 화들짝 놀라는 여자들이 귀여워 보이기는 하지만, 노아 교수님은 그래도 연상이라는 자존심이 있는 것인지 살며시 고개를 흔들며 신빙성 없는 부정을 시작해보인다. "차... 착각일 거야. 그럼. 유에, 너의 착각..." "제가 오해한 건가요?" "... 아마도..." 말 끝을 흐린다. 캬... 정말 귀엽다. 노아 교수님. 누가 선생님보고 20대 후반이라는 여성의 고정관념을 가지겠는가. 얼핏 봐도 10대 후반, 20대 초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저 청초한 모습. 그리고 이기적인 몸매까지. 게다가 성격도 참하다. 만약에 내가 직장을 다니는 일반 청년(학생과 교수 관계가 아니라)이었다면, 노아 교수님에게 청혼을 하고 싶을 정도로 정말 사랑스럽다. 왠지 나름 강한 척 하는 교수님을 놀려주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 살짝 분위기를 떠보기로 결심한 나는 교수님에게 제안을 하나 해본다. "교수님." "왜... 그러니?" 본능적으로 내 모습이 평소와 다름을 느낀 것일까. 살짝 위축된 모습으로 대답하는 노아 교수님에게 내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한다. "그러게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교수님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도 아닌데요." "으, 응. 미안..." 반사적으로 사과하는 노아 교수님. 순수하게 사과하는 모습도 정말 귀엽다. 내 무릎 위에 앉혀놓고 교수님의 애교를 볼 수 있다면 정말 좋을텐데 말이다. 그런데 교수님이 또 누나와 같이 적극적인 성격도 아니고 약간 내성적인 성격인지라 애교같은 것을 잘 부리지 않는다. 아마 본인의 입장에서는 엄청 창피하고 쑥스러워하기 때문에 애교를 많이 부리거나 하지 않을거라고 예상해본다. 노아 교수님 같은 여자들이 애교를 부린다면 정말 남자들이 살살 녹을텐데. 참으로 아까운 인재다. 아무튼 애교에 대한 이야기는 이 쯤에서 접어두고, 교수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아까 마지 못해 끝냈던 괴담 이야기나 다시 할까요?" "...!!" 마치 엄청나게 충격적인 말을 들은 듯한 반응을 보여주는 교수님. 움직임이 그대로 멈춘 채 거의 돌아가지 않는 시선을 억지로 나에게 보내면서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로 말한다. "괴, 괴, 괴담 이야기...?!" "네. 어차피 불침번 근무 끝나기 전까지는 심심하잖아요. 그러니까 심심풀이 용으로요. 사실 저, 누나한테 괴담 이야기를 이것저것 들어서 꽤나 많이 알고 있거든요." "그, 그래도... 마, 맞아! 세린이라든지 유아라든지 아직까지 잠 못 이루고 있는 애들도 있잖니. 수면에 방해될지도 모르니까 안 하는 편이..." "두 사람이라면 아까부터 잠들었어요." "뭐...?" 못 믿겠다는 듯이 시선을 다시 움막 안쪽으로 돌리는 노아 교수님. 아까 우리들이 이야기하고 있던 사이에, 세린과 유아 선배는 이미 꿈나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맡긴 지 오래다. 역시 잠을 이기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다. ============================ 작품 후기 ============================ 병원도 갔다오고, 머리카락도 자르러 가야 하는데 왜 이리 바깥에 나가기 귀찮은지 모르겠습니다. 마침 비도 그쳤는데, 나가기 딱 좋은 상황인데... 이 놈의 귀차니즘 ㅡ_ㅡ; 203화 고민하기 시작하는 노아 교수님. 안 무서운 척 하는 것도 슬슬 한계가 온 모양이다. 교수님 괴롭히는 일은 그만 하고 다시 불침번 일이나 계속 해볼까... 하던 생각을 가진 와중에, 노아 교수님이 두 눈을 질끈 감고서 말한 한 마디. "그, 그래! 하면 되잖니!" "... 네?" "무, 무서운 이야기... 하면 되잖아..." 자신이 말하고도 후회하는 눈빛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그냥 노아 교수님을 약간 놀려주려는 마음으로 반 장난삼아 말한 것일 뿐인데, 노아 교수님이 순응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거,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노아 교수님. 무리하지 마시고 그냥 없던 이야기로..." "무리라니! 난 원래부터 괴담 이야기를 즐겨 듣는 걸!!" ...... ... 전혀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내뱉다니. 누가 봐도 무서운 이야기를 싫어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분이 저런 말을 해도 진정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여기서 얼렁뚱땅 괴담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계속 취하게 되면 내가 노아 교수님을 놀리려고 했다는 것이 들통날지도 모르고, 그리고 교수님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를 싫어하는지 한번 알아보고 싶어서 노아 교수님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한번 계속 해보기로 한다. "그럼 제가 먼저 할까요?"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이며 승낙의 의사를 표시하는 노아 교수님. 어차피 교수님이 알고 있는 괴담 이야기 자체도 거의 없을테고 말이다. 누나에게 들었던 무서운 이야기가 뭐가 있었나 하고 곰곰이 머릿속의 소프트 웨어에서 검색을 해본 결과. 간단한 무서운 이야기 하나를 꺼내보기로 한다. "옛날 옛적에..." 꿀꺽. 저절로 노아 교수님의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잔뜩 긴장했다는 소리.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리 옛날 옛적 이야기는 아닐 것 같으니까 수정하도록 하자. "... 예전에 어린 아이가 사고를 당했었습니다. 한쪽 눈이 실명될 위기에 놓일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당했죠." "어머머..." 도중이라고 해도, 아이가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노아 교수님의 모성 본능을 자극했나 보다. 양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안쓰러운 눈빛으로 변한 교수님. 이게 괴담이라는 이야기도 벌써 까먹은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계속 이야기를 진행시켜 보도록 하자. "아이는 대신 개의 눈을 받아서 이식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흔히 이런 말이 있잖아요. 개는 귀신을 볼 수 있다는 소문 말이에요." "그러고보니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되었든, 어느 날. 그 아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가는 길이었어요. 도중에 이웃집 아줌마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면서 '안녕?'이라고 말을 하더군요. 그래서 나름 예절바른 꼬마 아이는 '안녕하세요.'라고 꾸벅 인사했죠." "응..."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요. 알고 보니 이웃집 아줌마는 어제 돌아가셨던 거예요!!" "꺄ㅡ악!!!!"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비명을 지르는 노아 교수님. 순간 이야기를 풀어 놓던 나도 놀라가지고 교수님의 어깨를 잡은 채 흔들며 다급하게 말한다. "교, 교수님! 그냥 무서운 이야기일 뿐이라니까요! 실화가 아니에요!!" "실화... 아니야?" "... 네. 실화가 아니니까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주세요. 그리고 그렇게 크게 비명을 지르면 사람들이 깨잖아요." "미, 미안해..." 울먹이면서 나에게 사과하는 노아 교수님. 어지간히 무서운 이야기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 이야기가 끝난것도 아닌데 말이다. 고작 중간까지 밖에 오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비명을 지르면 이야기꾼인 내 입장에선 물론 무서운 이야기를 굳이 과대포장할 필요도 없이 상대방이 저절로 무서워 해주니까 고맙긴 한데... 그것도 정도가 있어야 기쁘지 이런 식으로 과도한 무서움은 오히려 내가 다 부담스러울 정도다. 이야기를 계속 진행시킬까 하다가 그래도 혹시나 도중에 중도포기 의사를 보일지도 모르는 노아 교수님의 의사를 존중하고자 먼저 진행 여부에 대해서 물어보도록 하자. "교수님. 계속 해도 되나요?" "......"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는 노아 교수님의 반응이었다. 내가 봐도 참으로 안쓰러울 정도로 무서워하고 있다. 아직 메인 하이라이트가 남아 있다고요. 그리고 막상 들어보면 그리 무서운 이야기도 아닐텐데. "... 그럼 다시 시작할게요." 헛기침으로 잠시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은 나. 아까 꼬마 아이가 이웃집 아줌마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다시 무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이는 놀라서 엄마에게 말했어요. '엄마! 나, 방금 그 아줌마랑 같이 엘리베이터 타고 왔단 말이야! 그 아줌마가 보였어!'라고 말이죠. 그러자 엄마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시나요?" "모, 몰라..." "... '너도 내가 보이니?'" ....... ............ ................ "꺄ㅡㅡㅡㅡㅡㅡㅡ악!!!!!!!!!" "교, 교수님?!" 이번에는 강제적으로 노아 교수님의 입을 내 손으로 틀어 막아버렸다. 순간적으로 '읍읍!'하는 소리를 내면서 내 팔을 연신 찰싹찰싹 때리는 노아 교수님. 잠시간의 버퍼링이 있어서 이번에는 안 놀라나 하고 방심했던 내 잘못이 조금 컸다. 설마 아까의 2배, 아니 3배로 비명소리가 크게 늘어날 줄이야.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음성이었다면 곧바로 음소거를 했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비명소리에 세삼 놀라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시간차 공격이라는 것인가. 지금까지 들어 본 노아 교수님의 비명소리 중 가장 큰 축에 속하지 않을까 라는 쓸모없는 생각을 해보면서 교수님의 입에서 손을 놓자, 오른쪽 손바닥에 교수님의 타액이 잔뜩 묻어 나온다. "켁켁..." 노아 교수님이 급하게 기침을 하면서 호흡을 천천히 몰아쉬기 시작. 나도 모르게 교수님을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형국을 취하고 있는 모습에서 사과하게 된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저도 모르게 그만..." "... 아니야. 나도 잘못했는걸." 큰 소리로 비명을 질러서 미안하다는 듯이 희미하게 웃어보이는 노아 교수님의 반응. 얌전한 교수님의 모습에서 그런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릴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강제적인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교수님. 정말 무서운 이야기 같은 건 딱 질색으로 보이는데요." "... 그렇게 보였니?" "네." 굳이 다시 한 번 확인할 필요도 없이 이것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노아 교수님은 정말로 무서운 것을 싫어한다는 사실 말이다. 아마도 공포영화 조차도 눈 뜨고 보지 못할 것이리라 예상해본다. 교수님을 뒤에서 안고 있는 자세를 유지한 채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 "어렸을 적부터... 무서운 거라면 딱 질색이었거든..." "역시나 그랬군요." "집안 내력일지도. 우리 엄마... 아, 아니. 어머니도 그렇고." 중간에 말을 급하게 더듬게 된 노아 교수님이 다급하게 엄마에서 어머니로 부르는 호칭을 바꿔 말한다. 그러나 이미 내 귀에는 다 들린 상황. "귀엽네요. 노아 교수님." "귀, 귀엽다니... 이제 곧 30대가 되는 여자한테 무슨 소리니." "그래도 귀여워 보이시는데요. 전혀 20대 후반이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 사탕발림도 정말... 그만 해도 돼." 부끄러워하며 살짝 나에게서 멀어진 노아 교수님의 얼굴. 보통때 같으면 여기서 섹스관계로 지속될지도 모르겠지만, 내일 난파선 탐험이라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함부로 노아 교수님이 몸을 허락해주는 것 같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움막에서 다른 사람도 자고 있으니. 우리들이 여기서 육체관계를 가지게 된다면 움막에서도 빤히 보이게 되는 부끄러운 장면이 연출될지도 몰라서 노아 교수님이 조금 꺼려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하면 내가 남자가 아니다. 멀쩡히 섹시 다이너마이트 급의 몸매를 가지고 있는 연상의 여교사가 눈 앞에, 아니지. 내 품 안에 안겨 있는데 가만히 놔둘리가 없지 않은가. 이미 성기는 발기될 만큼 커진 상황에서 서서히 노아 교수님의 가슴 위로 손의 위치를 옮겨본다. "여기서는... 안 된다니까..." 노아 교수님이 싫다 싫다 하면서 나의 스킨십을 거부한다. 그러나 말만 그럴 뿐, 직접적으로 내 손길을 치우기 위해 노력한다든지 하는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도 무언의 허락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인가. 교수님의 옷 안쪽으로 손을 밀어넣자, 여교사의 농염한 가슴이 손 안에 그대로 느껴진다. 과연 20대 후반 여성의 가슴. 호빵보다도 커다란 크기를 자랑하는 말캉한 가슴이 손바닥을 통해 부드러운 촉감을 전해준다. "흣..." 짧은 신음소리를 토해내는 노아 교수님. 어느 순간 교수님 본인의 오른손으로 스스로의 입을 막고서 최대한 신음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무래도 신음소리를 너무 크게 내다보면 움막 안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걱정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보여지고 있다. 남자의 손길을 무방비로 받고 있는 여체의 유방. 딱딱하게 선 유두를 검지와 엄지 손가락을 통해서 비비적 거리며 만지고 있는 내게 교수님이 살짝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 키스... 해줄래...?" "언제든지요." 노아 교수님의 키스 요구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당당하게 교수님의 입술 위로 내 입술을 포갠다. 오랜만에 느끼는 노아 교수님의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 나날이 그 색기가 물 오른 듯 높아지는 듯한 섹시함을 자랑하고 있었기에 자칫 지아 선생님의 원톱 자리를 노리고 있는게 아닐까 할 정도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상황이기도 하다는 개인적인 평가까지 해본다. 교수님의 입 안에 혀를 밀어넣으며 이리저리 움직여본다. 노아 교수님의 잇몸, 혀, 그리고 이까지. 하나하나 전부 다 혀의 감촉에 닿고 있었다. 쩝쩝 하는 소리를 내면서 타액과 타액이 서로의 얼굴에 잔뜩 묻어 나오는 상황. 노아 교수님은 키스를 상당히 좋아하는 타입인지 나에게 계속해서 딥 키스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래도 숨 막힐 정도로 키스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지라 입술을 뗀 나와 교수님. 긴 타액이 잠시동안 우리들을 이어주듯 길게 늘어지다가 이내 끊기면서 나와 교수님의 가슴 위로 떨어진다. 뒤에서 안고 있는 상황에서 약간 자세를 변형시켜 노아 교수님을 내 무릎 위에 앉힌다. 그러자 노아 교수님이 말씀하시길. "무거울텐데..." "괜찮아요. 교수님. 자, 여기 앉으세요." 내 다리 위로 손을 여러번 치면서 앉으라는 뜻을 보여주는 나. 노아 교수님이 마지막까지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얌전히 내 무릎 위에 앉는다. 나보다 연상이지만, 무인도에 오고 나서부터 왠지 모르게 나에게 만큼은 수동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교수님의 태도가 여성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귀여워 보이기도 하다. 매력이 넘치는 여자란 말은 바로 노아 교수님을 지칭하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말이다. 교수님의 풍만한 엉덩이가 살포시 허벅지 위로 눌러 앉자, 천상의 감촉이 뇌리에 스쳐 지나가듯 느껴진다. 역시나 한창 물오른 성인 여성의 여체는 최상급이다. 내가 취향이 연상인 것에 대해서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연상 만세, 노아 교수님 만세! 지아 선생님도 만만세! ============================ 작품 후기 ============================ 초단편 소설 ~사색소녀~ 2회 "사랑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야." 이번에는 그나마 보편적인 화두가 등장했다. 문제가 있다면, 편의점에서 얼굴을 마주 앉은 채 툭 튀어나온 이야기 소재가 '사랑'이라는 단어라는 점일 것이다. 이런 대화가 나왔다고 눈 앞에 있는 사색소녀와 내가 사귄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냥 친구 사이. 이상한 친구. "사랑이란 영역은 언제쯤 인간들에 의해 탐구되고 연구될까?" 사색소녀의 말에 잠시나마 딴지를 걸어주자. "네가 먼저 개척해보는 게 어때?" "그건 불가능해." "어째서?" "왜냐하면." 테이블 앞에 놓인 캔커피를 두 손에 감싸쥔 채 기나긴 한숨을 쉬는 사색소녀의 한 마디. "나는 사랑에 빠진 소녀가 아니라, 사색에 빠진 소녀거든." "... 그러냐." 사랑하는 소녀를 동경하는 사색소녀의 모습이었다. ~여담~ 자동예약시스템으로 올라가는 글입니다!! 오늘도 술자리입니다!! 드링킹!! 204화 한편, 내 무릎 위로 올라 탄 노아 교수님이 특유의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말한다. "무겁지... 않니?" "전혀요." "정말로?" "네. 오히려 보기와는 다르게 가벼워서 놀랐는걸요." "... 보기와는 다르게 라니. 그럼 평소에 내가 무겁게 보였다는 말과도 같은 거 아니니?" 라고 말하면서 뾰로통한 얼굴로 새침때기의 정수를 보여주는 노아 교수님의 목소리, 그리고 모습도 정말로 귀엽다. 약간 토라진 듯한 이 표정. 크... 정말 최고다. 귀엽다. 사랑스럽다.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큐트하다. 그래도 교수님의 이런 말이 거짓이 아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교수님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해보자. "그냥 농담이었어요. 교수님. 아시잖아요?" "... 거짓말." "정말이에요. 교수님을 안고서 움막 주변을 한바퀴 뛰어 다닐 정도인걸요." 유난히도 몸무게에 많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노아 교수님이었기 때문에 몸무게에 대해서 화가 났을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바로바로 풀어줘야 한다. 안 그러면 토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이제 오해가 다 풀렸겠지 하는 생각으로 노아 교수님에게 마무리 미소를 지어주는 나였지만, 노아 교수님의 마지막 말은 마치 이런 나의 웃는 얼굴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곧바로 튀어 나오게 되었다. "... 그럼 해 봐." "네...?" "방금 날 안고 뛰어다닐 정도라고 했잖니. 한번 해 봐." "... 정말로요?" "그럼 아까 그 말은 거짓말이었니?" "아, 아니요. 진짜인게 당연하잖아요. 하하하." ...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나보고 진짜로 노아 교수님을 안고 달밤에 런닝쇼를 하라니. 그것도 평지도 아닌 해변가에서. 아니지. 여기서 노아 교수님의 부탁을 거절했다간 교수님이 정말로 삐질지도 모른다. 지금 한창 섹스 바로 전 애무 행위에 돌입하고 있는 나로서는 여기서 선생님의 기분을 다운시켜봤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눈 앞에서 노아 선생님과 해변가 위의 공개 섹스를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고작 몸무게 농담 하나가지고 날릴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정도로 완벽한 여성이 자신과 섹스를 하고 싶다면 본인을 안고 해변가를 질주해보라는 조건을 내건 상황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답할 수 있다. 그래. 나도 할 수 있다 이거야. 양 팔로 선생님의 허리와 종아리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안아든다. 일명 공주님 안기. 자연스럽게 나에게 안겨오는 노아 교수님이 여전히 홍조를 띄운 얼굴로 재차 묻는다. "정말... 나, 무겁지 않은거지?" "가벼워요. 교수님." 다시 한 번 확인을 받은 노아 교수님이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댄다. 정말로 귀엽다. 하지만 이런 무리한 부탁은 조금 가려서 해주셨으면 합니다만. 그래도 이 원인을 제공한 최초 근원인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안다면, 이 정도의 벌칙은 웃으면서 받을 수 있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그래. 노아 교수님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라도 잠시만 내 몸을 고생시키자. ...... ........... ................ 정말 달 밤에 체조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해변가에서. 푹푹 무너지듯 발 아래로 내려가는 모래밭을 달리는 그 기분. 참으로 아리송한 느낌을 받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대략 5분 정도의 짧은 마라톤을 마친 뒤에 모닥불에 앉은 나.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와중에 노아 교수님이 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직접 닦아 주시면서 말한다. "괜찮니?" "... 그럼요." 여기서 또 괜찮지 않다고 말하면 교수생님이 '내가 무겁다는 뜻이니?!'라면서 또 삐질 거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에 일부러 아닌 척을 해본다. 여자의 마음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왜 그리 몸무게에 신경을 쓰는지 원. 아무튼 마라톤 아닌 마라톤을 마친 뒤에야 노아 교수님이 빙그레 웃으시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나름 농담이라고 생각해서 말한 건데 정말로 뛸 줄은 몰랐어." "진담이라면서요?!" "진담을 가장한 농담... 이랄까?" "......" 괜히 헛수고 했다는 뜻이 되겠다. 그래도 뭐... 교수님은 가벼우니까. 괜찮다고 보여진다. "교수님." "응?" "그럼 나름 고생한 이 제자에게도 포상이 있어야죠." "포상..." 살짝 얼굴이 빨개지는 노아 선생님.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게 안겨서 적극적인 키스 공세를 당하던 교수님이었기에 포상이라는 단어가 교수님에게 어떤 뜻으로 인식되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다 알 것이라 생각된다. 교수님의 몸을 원한다! 라는 직접적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노아 교수님도 어엿한 성인 여성. 내가 가리키는 뜻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으리라 생각한 나였다. 그리고 노아 교수님은 역시 나의 말을 배신하지 않았고 말이다. 주변의 눈치를 바라보던 노아 교수님이 티셔츠를 탈의하기 시작한다. 브래지어 없는 커다란 가슴이 내 눈에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이 광경. 정말 몇번을 봐도 명품 몸매다. 수줍게 얼굴을 물들인 노아 교수님이 살짝 고개를 옆으로 틀면서 말한다. "원하는 데로... 해도 좋단다..." 꿀꺽. 눈 앞에서 나보고 내가 원하는 어떤 행동도 해도 괜찮다는 말을 꺼내는 이 어른의 말. 정말이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섹시하다. 연상의 매력이 바로 여기서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다. 교수님의 오른쪽 가슴을 살짝 문 다음에 유두의 끝을 이로 깨물어본다. 그러자 교수님의 야릇한 신음소리가 해변가에 희미하게 울려퍼지기 시작. 그렇다고 너무 큰 소리로 신음소리를 내는 것은 다른 일행들에게 들킬 가능성을 상승시키는 효과가 있으므로 최대한 신음소리가 나지 않도록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손을 뻗어서 교수님의 풍만한 둔부를 어루 만진다. 타이트한 청바지를 입고 있어서 바지가 터질듯한 모습까지 보여줄 정도로 하체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난다. 청바지가 아니라 레깅스를 입고 있는 듯한 짝 달라붙는 모습마저 연출하는 노아 교수님의 몸매. 너무 깡마른 타입도 아니고 적당히 물오른 살결들이 바지의 건너편에 다가온 남자의 손길을 느끼면서 살짝 요동치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교수님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동시에 허벅지 위로 손을 올려 놓는다. "불편하면... 바지도... 벗을까...?" 내게 안긴 채 부끄러운 듯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노아 교수님. 그러나 나는 교수님의 그런 작은 배려를 잠시 물리치기로 결심한다. "아니요. 굳이 벗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도..." 바지의 까칠한 표면 속에 숨은 여체의 속살을 어루만지는 이 기분도 나름 좋아서 교수님의 제안을 뿌리친 것이었다. 그러나 노아 교수님은 나와는 달리 약간 우려되는 것이 있다는 것처럼 말한다. "바지도 젖으면... 안되니까..." "교수님. 벌써 젖으셨어요?" "시, 싫어.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지 마..." 예전에는 한창 애무를 하고 나서야 남성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여성기가 촉촉하게 젖는 현상을 자주 목격했는데, 이제는 키스와 잠시동안의 스킨십 하나만으로 벌써부터 아래가 촉촉하게 젖었다고 말하는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보니... "... 혹시 노아 교수님. 남자의 손길에 익숙해진 것은 아니겠죠?" "나, 나... 그렇게까지 음란하지 않아...!" 지금까지 본 표정 중에서 최고로 빨갛게 달아오른 노아 교수님이 내 가슴을 손으로 몇번 찰쌀찰싹 때리기 시작한다. 아프다는 생각보다는 뭐랄까. 노아 교수님이 내 품 안에서 애교를 부리는 듯한 그런 기분? 이것도 나름 좋을지도... 그렇다고 내가 매를 맞는다고 좋아한다는 점에서 마조라는 뜻이 아니다. 진성 마조는 따로 있으니까 말이다. 이세린이라고... 부잣집 아가씨가 진성 마조 파트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교수님의 애교 넘치는 행동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연상의 여인이 내 품 안에서 부끄러워하며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이 여성이 평소에 나를 가르치는 학교 교수님이라는 생각까지 하면 왠지 모르게 묘한 흥분감까지 느낄 수 있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아직까지도 외국에 비해서 성적인 고정관념이 명확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그 편견이 더욱 심하다. 아이들을 올바르게 지도하고 이끌어야 할 권위적인 지위를 가진 교수님이 제자와 바람이 나서 흉측한 육체관계를 가진다는 말은 우리 나라 전반적인 사람들 대다수가 인정하지 않을만한 사이일 것이다. 그런 인식 덕분에 처음에 노아 교수님은 나와 몸을 섞는 일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비록 무인도라고는 하나, 과연 제자였던 남학생과 몸을 섞어도 될 것인지에 대한 고민. 그러나 그 고민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한번의 선, 처음이라는 이름의 벽을 허물게 되면 그 이후로는 순환로와 마찬가지. 모든 일에도 항상 '처음'이라는 경계벽만 허물게 되면 그 이후부터는 처음에 비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항상 '처음'이라는 녀석이 사람의 심적 갈등을 일으키는 덫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처음을 넘은 우리들은 지금도 이렇게 몸을 섞고 있다. 노아 교수님의 입술이 내 입술을 탐하고 있고, 제자였던 내 품에 안겨 농염한 신음을 내뱉으며 자신의 육체가 내 손에 함락되어 가는 것을 즐기고 있다. 누가 봐도 평범한 연인 사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섹스 행위. 이것이 교수와 제자 사이를 넘어 처음으로 육체관계를 가진 이후에 벌일 수 있는 우리들의 현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으음..." 낮은 신음을 토해내는 교수님. 부드러운 엉덩이 살을 만지던 내 손길이 교수님의 비밀스러운 구역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한다. 바지를 입고 있어서 살짝 지퍼를 내리기 시작. 교수님이 아까 나에게 말씀해주셨던 그대로 끈적끈적한 액채 범벅이 되어 있는 팬티는 이미 교수님의 음란한 애액으로 인해 이미 다 젖은 상태였다. ============================ 작품 후기 ============================ 초 단편 소설 ~사색소녀~ 3회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가 아니라, 또 다른 성공이야." ...... 전화기를 통해서 전해오는 사색소녀의 목소리가 이리도 듣기 싫을 줄은 몰랐다. "... 그 말 하려고 일부러 새벽 5시에 나한테 전화를 건 거냐?" "응." "평일도 아니고, 늦잠이 공식적으로 허가된 일요일에?" "응." 대단한 양반이시구만. 우리의 사색소녀는. "네 덕분에 늦잠 자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잖아. 어떻게 책임질거냐. 사색소녀." "늦잠 자기에 실패한 게 아니라 일찍 일어나는 일에 성공한거지.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가 아니라 또 다른 성공이라니까." 아침부터... 아니지. 새벽부터 왜 내가 이 녀석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사색소녀. 너는 잠도 없냐. "알았으니까 난 다시 잔다. 이만 끊어." "기껏 일찍 깨워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녀석." "시끄러워." 라는 단호한 말을 내뱉은 뒤에. 뚝. ... 전화 끊기에 '성공'했다. ~여담~ 어제 술 마시고 집에 5시에 들어와서 오늘 오후 1시쯤에 일어났습니다 ㅡ_ㅡ;; 본래 오늘 올렸어야 할 표류일지 1회분량을 못 올렸더군요. 죄송합니다 ㅜ_ㅜ 못 올린 분량은 내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05화 "노아 교수님. 혹시 뒤로 하는 것은 싫어하시나요?" 직접적으로 노아 교수님에게 후배위의 선호도에 대한 질문을 던져본다. 나 혼자서 지레 짐작하는 것 보다 확실한 취향을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싫어하는 교수님을 무리해서 후배위 자세로 강요할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분위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후배위 자세가 된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노아 교수님이 연상이시고 하니까 나름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이렇게 묻게 되었다. 질문을 받은 노아 교수님이 어색하게 웃어 보이면서 말한다. "뒤로 하는건... 조금 부끄러워서..." "괜찮아요. 교수님. 나름 적응이 되면 괜찮을 거예요." "그, 그게 아니라... 뒤로 하면 다 보이잖니..." "다 보이다니요? 뭐가요?" 서로 알몸 상태(정확히 말하자면 노아 교수님은 벗다 말은 티 하나를 걸치고 있었고, 그리고 나는 바지만 탈의한 상태였다.)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 보여주지 말아야 할 곳이 어디 있는지 궁금해진다. 내가 아직도 교수님의 부끄러운 부분을 보지 못한 곳이... 겨드랑이? 하지만 후배위를 할 때는 내 쪽에서 겨드랑이가 보이지 않는거 아닌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묻는다. "겨드랑이 인가요?" "그, 그쪽도 나름 부끄러운 부위기는 하지만..." 더듬더듬 말을 아끼던 노아 교수님이 에라이 모르겠다 라는 표정으로 말한다. "... 항문이... 보여서..." "그랬군요." 갑자기 납득이 되고 말았다. 후배위의 장점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그렇고, 여자 입장에서는 후배위를 꺼려할만한 요소가 될 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후배위 자세의 주 요점이라고 볼 수 있는 '항문이 보인다'라는 점을 노아 교수님은 크게 신경을 쓰는 모양이다. 여성이니까 라는 말 보다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치부라고 할 수 있는 항문을 남들에게 보여준다고 하는 것은 상당한 수치심을 선사해주기 때문에 엉덩이를 들이 내밀고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여성 입장에서는 굉장히 창피한 일이 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뒤쪽은... 더럽잖니." 노아 교수님이 살짝 빨개진 얼굴로 대답한다. 확실히 인간의 신체 부위 중에서 가장 더럽다고 할 만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항문이다. 소변이야 액체(?)가 나오는 부분이니까 상관 없지만 일단 항문은 고체가 나오는 부분이지 않은가. 그리고 악취도 있고 말이다. 상당히 탁월한 노아 교수님의 말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나름 패티쉬라는 성벽일까. 왠지 모르게 노아 교수님이 이런 말을 하니까 교수님의 항문을 보면서 섹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교수님의 항문이라면 더럽지 않을 거예요." "그, 그게 무슨 말이니?!" 화들짝 놀라는 교수님. 저번에 난파선 내부에서 세린과 애널 섹스를 한 경험도 있고. 나름 한번은 해봤다는 자신감이 노아 교수님과의 애널 섹스를 이루게 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발전한 것이다. 갑자기 노아 교수님의 저 탐스러운 엉덩이 안 쪽으로 성기를 박아 넣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든다. 한편 내 말을 들은 노아 교수님이 엄청나게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말한다. "아무리 그래도 창피한 건 창피한거야..." "괜찮을 거예요. 교수님. 노아 교수님의 뒷쪽이라면 절대로 더럽지 않을 거예요." "그치만..." 유난히도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노아 교수님 달래기는 꽤나 힘들게 진행되고 있었다. 세린은 본인이 진성 마조였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애널 섹스를 할 수 있었지만, 노아 교수님은 다르다. 나름 순수한 감수성을 품고 있는 여성이기 때문에 여린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라고 생각하지만, 이 여린 마음에 상처를 낸 경력이 있던 아리아라는 인물이 있다는 이야기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수님. 뒷쪽으로 직접 넣어본 적은 한번도 없죠?" "으, 응... 한번도..." 그럼 항문쪽은 처녀라는 말인가. 좋다. 이 이야기를 응용해서 말을 꺼내보도록 하자. "노아 교수님. 저와 처음 관계를 가질 때. 생각 나시나요?" "생각... 나지." "그때 저는 사실 교수님이 처녀가 아니라서 조금 아깝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정말...?!" 놀랐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노아 교수님. 물론 방금 내가 내뱉은 말은 가짜다. 20대 후반에 오히려 처녀라는 것이 더 이상하게 들릴 정도로 이미 나이도 충분히 먹은 노아 교수님이었기 때문에 나는 성관계를 가질 당시에 그러려니 하고 쿨하게 넘였기 때문에 방금 내뱉은 발언은 순전히 연기에 불과하다. 그래도 노아 교수님이 처녀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이 기분은 사실이다. "네. 교수님. 좋아하는 여자의 처녀를 가지고 싶다는 남자의 마음은 다 똑같잖아요." "우우..." "하지만 방금 교수님의 말, 그러니까 뒷쪽은 처녀라는 말을 듣고 솔직히 전 안심했어요. 아, 지금이라도 내가 교수님에게서 '처음'이라는 것을 가져갈 수 있겠구나 하고 말이죠. 교수님에게 처음을 가져간 의미있는 남자로 기억되고 싶다는 이 기분, 아시나요?" "......" "노아 교수님을 좋아하는 만큼, 교수님의 처음을 원하고 있어요. 제 진심을 이해해주세요." 나름 연기가 일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 자화자찬을 해본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동정심이 일어날 정도로 훌륭한 연기 실력이었다. 유에. 나중에 배우 오디션을 봐도 될 정도로 말이다. 정말 완벽했다. 이런 나의 진심(을 가장한 거짓)이 통했는지 교수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첫사랑과 닮았던 나에게, 무인도에 표류되기 이전부터 이성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나에게 본인의 처음을 줄 수 있다는 이 순간을 노아 교수님 본인 역시도 갈등되는 요소로 인식되는 중인가 보다. 결국 무언가를 결심했다는 듯이 두 눈을 굳게 감은 노아 교수님의 한 마디. "... 한 마디만... 말해줄래?" "교수님한테요?" "응. 한 마디만 말해준다면... 내 처음을 줄게..." "말씀해보세요. 교수님." 무슨 부탁일지 궁금해서 교수님에게 직접 묻는 나. 잠시 뜸을 들인 교수님이 여지껏 보아왔던 모습 중 가장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선보여주며 말한다. "... 사랑한다고... 말해줘." "......" 뭐랄까. 순간 장난스러운 마음을 먹고 있던 내가 괜시리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노아 교수님은 진심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나에게 듣고 싶다는 말을 원하고 있는데, 나는 고작 교수님과 어떤 식으로 몸을 섞을지에 대한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괜시리 교수님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기 시작한다. "... 사랑해요. 노아 교수님." 내 말을 들은 노아 교수님의 두 눈이 순간 크게 떠지더니 이내 살짝 울먹이기 시작하며 말한다. "그 말... 정말로 듣고 싶었어..." "말씀하셨다면 언제든지 말해드릴 수 있었는데요..." "그래도 이렇게 직접 요구하는 것은 모양새가 안 나니까... 그래서 조금 망설였어." 기어코 교수님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한 방울. 노아 교수님이 이런 식으로 조용히 우는 장면 역시도 내게 있어서는 처음이었다. 물론 교수님이 우는 모습을 본 적은 많이 있다. 무인도에 표류되고 난 이후에 교수님과 나, 이렇게 단 둘이 있을 때도 말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교수님의 모습은 약간 의미가 다르다.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흘리는 눈물. 그 어떠한 미소보다도 아름다워 보이는 노아 교수님의 미소에 나도 모르게 교수님의 눈가에 살짝 키스한다. 교수님의 눈물이 살며시 입 안으로 들어옴을 느끼며 나는 교수님에게 작게 속삭인다. "울지 마세요. 교수님." "... 미안..." 말을 잇지 못하던 교수님이 스스로 손등을 이용해 눈물을 닦는다. 나 역시도 교수님의 눈물을 닦아주며 내 품안에 안겨 있는 여성의 사랑을 듬뿍 느끼고 있었다. 팔에 힘을 주며 교수님을 다시금 안아본다. 나보다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가녀린 체구를 가진 노아 교수님. 학교에서는 제자를 이끌어야 할 교수의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 이 무인도에서는 내가 보호해줘야 할 소중한 존재다. 그리고... 사랑하고 있는 여자이기도 하다. 눈물을 닦은 노아 교수님이 베시시 웃어 보이면서 말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기분이 조금 들어..." "몹쓸 짓이요?" "유에를 독점하고 싶다는 그런 욕심... 일까? 에헤헤..."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노아 교수님의 미소에 나도 모르게 피식 같이 웃어 보인다.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던 나와 교수님. 잠시동안 키스를 한 다음에 아랫쪽에서 아까부터 교수님과 연결되고 싶다는 듯이 아우성을 치는 성기의 끝을 노아 교수님의 항문 입구쪽으로 가져간다. 살짝 긴장한 노아 교수님. "저, 정말로 하는거니?" "아까도 말씀 드렸다시피 교수님의 처음을 받고 싶어서요." "그렇게 말하면... 반칙이야..." 최대한 아랫도리에 힘을 주면서 교수님의 애액을 성기에 미리 묻혀둔다. 세린과 한번 섹스를 할 때 애널섹스에 대한 나름의 스킬을 터득한 결과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 작품 후기 ============================ 좋은 주말 오후입니다. ^_^; 206화 항문은 여성기와는 다르게 성기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나오는 윤활유같은 애액이 없는 관계로 이렇게 잔뜩 교수님의 사타구니에 뿜어져 나오는 애액을 묻힌 뒤에 항문에 서서히 성기를 삽입하는 것이다. 귀두 부근이 들어가자, 교수님의 비명소리가 점점 커져간다. "흐으읏... 하아...!!" 아무래도 항문을 통해서 남성기를 받아들이는 경험이 전무한지라 교수님이 체감상 느끼고 있는 고통은 상당히 높을 것이라 짐작이 된다. 세린 역시도 처음에는 애널섹스를 할 때 엄청나게 아프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후유증으로 잠시동안 걷지도 못할 정도였고. 노아 교수님 역시도 마찬가지. 예외란 없었다. "아... 아팟...!" "교수님. 조금만 더... 참으시면 돼요." 나름 노아 교수님을 응원하면서 최대한 힘을 주며 성기를 노아 교수님의 몸 안까지 삽입시키는데 성공한다. 순간적으로 교수님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크게 튀어나올 뻔 했지만, 자신이 벗은 바지를 입에 물면서 산모의 고통을 발산하듯 속으로 비명소리를 삼킨다. 섹스를 하는 와중에도 다른 사람들의 숙면을 방해할 수 없다는 배려 깊은 노아 교수님의 행동이었다. 항문 끝까지 삽입된 남성기를 강하게 조여오는 노아 교수님의 몸 안. 여성기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조임력을 선보여준다. "교수님. 천천히 움직일게요." 대답 대신에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는 노아 교수님. 이미 두 눈에는 굵은 눈물 방울들이 흘러 넘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고통으로 인한 눈물. 오늘따라 참 다양한 용도로 눈물을 흘리는 노아 교수님의 모습. 그래도 역시나 아름다워 보인다. 우는 모습이 이리도 예뻐보이는 여자가 몇이나 될까. 아마 노아 교수님의 아름다움은 선천적으로 타고나지 않았을가 생각해본다. 허리를 뒤로 뺀 이후. 다시금 앞으로 전진시키며 최대한 교수님의 몸 안에 성기를 박아 넣는다. 그럴수록 노아 교수님의 몸이 크게 움찔거리기 시작한다. 처녀를 상실할 때와 비슷할 정도의 반응을 보여주는 노아 교수님. 내가 실제로 노아 교수님의 처녀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리라 예상해 볼 뿐이다. 교수님의 허리를 잡고 본능에 몸을 맡긴 채 연신 허리를 움직인다. 여전히 청바지를 입에 문 채 고통을 참아낸다. 커다란 가슴이 리드미컬하게 출렁이면서 여성의 요염한 자태를 한껏 뽐낸다. 색기로 치자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지아 교수님 못지 않을 정도의 섹시함을 뽐내는 노아 교수님. 다양한 매력이 있는 여성이라는 말은 노아 교수님을 향해 붙여질만한 칭호가 아닐까. 최대한 허리를 움직이던 나에게 슬슬 한계점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교수님. 이대로 안에다 쌀게요!" "... 으흡..." 제대로 교수님의 대답을 듣지 않은 채 그대로 안에다 사정을 한다. 어차피 자궁에다 사정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임신할 걱정은 없을거라 생각한 나는 그대로 교수님에게 질내사정... 이 아니라 체내사정을 한 것이다. 바깥에 사정하면 뒷처리도 어렵고, 그리고 몸을 씻을 수 있을만한 작은 호수도 없기 때문에 함부로 교수님의 몸 위로 정액을 뿌리지 못한다는 이유 덕분에 체내사정을 택한 것이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이유 보다는 애널로는 처음인 교수님에게 안에다 사정을 하는 기분을 맛보게 하고 싶었다는 작은 열망도 어느정도 영향을 끼치긴 했다. "하아아아악!!!" 마지막에 청바지를 입에서 뗀 노아 교수님이 길게 비명소리를 내뱉는다. 뜨거운 정액이 교수님의 항문 안으로 퍼지면서 마치 허리를 활처럼 휘는 광경을 연출하는 노아 교수님이 힘이 다 빠진 듯이 내게 기대오며 거칠게 호흡을 몰아쉬기 시작한다. 나 역시도 간만에 노아 교수님과의 섹스 덕분인지 몰라도 조금 기운이 빠진 상태. 노아 교수님을 내 몸 위에 올려놓은 채 항문에서 성기를 빼내자, 그대로 정액들이 우수수 쏟아지기 시작한다. 마치 배설을 보는 듯한 교수님의 모습에 본인도 약간 창피한지 여전히 힘겨운 표정을 유지하면서 나에게 작은 부탁을 남긴다. "보, 보면 미워할거야..." "... 하하..." 마지막까지도 정말 귀여운 말만 골라서 한다. 이래서 내가 교수님을 함부로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노골적인 애교는 없지만, 이렇게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여움이 묻어 나온다면 굳이 대놓고 노아 교수님에게 애교를 부탁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 그래도 이리 귀여운데, 거기에다가 애교까지 부리면... 정말로 교수님에게 반해버릴 거 같은 기분이 드니까 말이다. 역시나 마성의 여자다. 노아 교수님. 거친 호흡을 몰아쉬는 노아 교수님. 팬티는 벗어둔 채 식수로 빨고 난 후 모닥불 위에 나뭇가지를 통해서 올려 놓고 말리는 중이었다. 발가벗고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인지라 노팬티 상태로 옷은 착용한 노아 교수님의 모습. 애널 섹스의 여파 덕분에 제대로 바위 위에 앉을 수 없는 노아 교수님은 어쩔 수 없이 내 무릎 위에 앉은 채 모닥불의 따스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 이 광경, 기분이 조금 묘해." "그러게요. 저도 안 그래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노아 교수님의 분홍색 팬티가 모닥불 위에서 노릇노릇한 모습을 뽐내며 물기를 말리고 있다. 그 모습을 노아 교수님은 내 무릎 위에서 관전을 하고 있는 이 모습은 누가 봐도 이해가 안 되는 그런 장면이리라 생각해본다. "교수님. 아직도 엉덩이, 많이 아프세요?" "... 응. 종기가 났을 때의 아픔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파." "갑자기 죄송스러운 기분이 드는데요." "어머, 일부러 그런 기분을 느껴 보라고 말했는걸?" 교수님이 귀엽게 눈웃음을 지으면서 말한다. 아까 이후로 부쩍 애교성이 높은 발언을 많이 하는 노아 교수님의 목소리였다. 후배위가 효과를 본 것인가. 그렇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노아 교수님과의 애널 섹스를 했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좋은 효과를 창출했다고 보여지는데. 앞으로도 자주 후배위를 할 필요성이 있다는 뜻일까. 하지만 노아 교수님이 과연 또 다시 허락할지 미지수다. "교수님. 지금 몇시인가요?" "잠깐만... 11시 반 정도 된 거 같은데?" "곧 있으면 교대 시간이네요." "그러고보니..." 교대는 12시. 그런고로 30분 뒤면 후번 근무자와 교대를 하게 된다. 분명 내 기억으로는 우리 뒤의 근무자가... 체리와 유아 선배였나. 하도 조합을 많이 바꾸며 불침번 근무를 서다보니 나도 햇깔릴 정도다. 뭐... 불침번 근무자들이 누구든지간에 지금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교수님의 엉덩이의 아픔(?)이 빨리 나아야 한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도가 높은 요소임에는 변동이 없다. 자신이 엉덩이를 몇번 쓰다듬는 노아 교수님의 손길. 노팬티의 감촉 덕분에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도 항문쪽에서 통증이 느껴지는 탓에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교수님이 자신의 엉덩이를 매만지는 행동도 은근히 요염해보인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이는 노아 교수님이 몇번 다리와 허리, 그리고 엉덩이 살을 주무르며 운동을 하더니 조금씩 바위 위에 앉기 시작한다. 아주 조금씩 걸터앉은 노아 교수님이 살짝 일그러지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나도 모르게 노아 교수님에게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듯이 입을 연다. "천천히 하세요. 교수님. 어차피 곧 있으면 누워서 잘 수 있잖아요." "으, 응. 그냥 앉을 수 있는지 없는지 한번 시험해봤을 뿐이야." 라고 말하면서 살짝 다리를 옆으로 뺀 노아 교수님이 어색하게 웃어 보이면서 말한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똑바로 앉는 것은 무리일지도..." "여파가 크네요." "본래 항문으로 하는 것은 많이 아프니까." 더불어 치유 능력도 차이를 보인다. 세린같은 경우에는 그래도 꽤나 빠르게 자리에 앉을 수 있을 정도까지 회복이 되었는데. 노아 교수님은 그 시간이 세린에 비해서 오래 걸리는 듯하다. 아무래도 나이에 따라 다른건가. 그렇다고 이런 말을 노아 교수님에게는 할 수도 없을테고. 조금만 젊어질 수... 는 없지. 이대로가 좋다. 노아 교수님 자체로도 이쁘니까 이건 넘어가자. 시간은 흘러흘러 11시 55분. 이제 거의 다 마른 팬티를 손에 쥔 노아 교수님이 작게 한숨을 쉰다. "그래도 얼룩은 남아있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팬티를 보일 일도 없을 거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탈의를 할 때만 주의하면 될 테고. 나머지는 걱정 없으리라 예상해본다. 내 말을 듣고 있던 노아 교수님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손뼉을 '딱!'하고 치면서 다급하게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유에! 생각해보니까 옷은 난파선 안에 많이 있지 않을까?" "... 정말이네요?!" "그래,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옷이나 속옷 같은 것은 많이 남아있지 않겠니? 객실이 모여있는 지역도 있으니까..." 왜 이제와서 그걸 생각했을까. 난파선에서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음식이나 공구들 뿐만 아니라 의류들도 있었다. 특히나 여성 속옷들. 엘리의 부모님, 정확히 말하자면 어머님이 입고 있던 속옷들을 여벌로 사용하고 있는 여성진들에게 있어서는 희소식이 될 만한 사실이었다. 여유분의 속옷이 없기 때문에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고 다니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는 여성진들. 만약에 난파선에서 다수의 속옷들을 찾을 수 있게 된다면 당분간 속옷 걱정은 없을 것이다. 더불어 나뭇잎 속옷을 만들어 낸 유아 표 수영복 시리즈는 부도 위기에 처하게 될지도. "내일 난파선에서 한번 찾아보도록 하죠." "응!" 기운차게 대답하는 교수님이 팬티를 입고 나서 다시 바지를 입는다. 여성이 옷을 입을 때도 이렇게나 섹시한 모습을 연출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힐끗힐끗 교수님의 옷 갈아입는 장면을 몰래 본다. 만약에 여기서 카메라라든지 캠코더가 있었다면 바로 녹화를 했을텐데. 참으로 안타깝다. 어쩔 수 없이 나의 뇌세포들 하나하나의 기억력에 맡겨야 하나. 나중에 자위할 때 이 광경을 반드시 떠올리도록 하자. 제발.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근처에서 노아 교수님이 옷을 다 갈아 입었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교수님에게 '근무자 깨울게요.'라고 말을 하고선 움막으로 돌아온다. 쿨쿨 자고 있는 체리와 유아 선배. 은근히 신경이 예민한 체리가 내가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살짝 눈을 비비적 거리면서 상반신을 일으킨다. "... 벌써 근무 시간인가요오..." "그래. 천천히 나와도 되니까 잠 좀 깨고 나와." "네에..." 그리고 나머지 인물인 유아 선배는 어디 있나... "유아 선배. 일어나세요." "으음..." "근무 시간이에요. 슬슬 일어나셔야 노아 교수님하고 제가 잠을 자죠." "... 앞으로 5분만 더..." "이게 무슨 아침의 상황도 아니고. 일어나세요. 유아 선배." "......" 무서운 이야기 덕분에 늦게 잠을 잔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인가. 쉽사리 잠에서 깨지 못하는 유아 선배의 어깨를 연신 흔들면서 깨워보지만, 유아 선배는 계속해서 잠에 취한 상태를 유지한다. ... 간지럽혀볼까? 하지만 그건 유아 선배에게 조금 미안한 일이기도 하고. 아니면 큰 소리를 내질러볼까? 다른 사람들이 깰 가능성이 농후하니까 그것도 제외하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유아 선배." "......." "앗, 저기 처녀 귀신이..." "귀, 귀신?!" 화들짝 놀란 유아 선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연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린다. 그녀의 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잔뜩 겁먹은 눈을 하고 있었다. 효과 만점이네. 앞으로 유아 선배를 깨울 때 자주 써먹어야지. "귀, 귀신이 어디 있어?!" "있을리가 없잖아요. 선배." "... 너, 거짓말 한 거야?" "유아 선배를 깨우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선의의 거짓말같은 소리 하네!!" 유아 선배가 내 등을 찰쌀찰싹 때리면서 원망섞인 공격을 시작한다. 선배의 손이 은근히 매워서 이렇게 맞는 것도 꽤나 아프다. "알았으니까 이제 준비하고 나오세요. 유아 선배. 노아 교수님도 기다리신다고요." "... 확 늦게 나갈까 보다." "그렇게 되면 유아 선배를 강제적으로 끌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만." "흥!" 그래도 진짜로 나오지 않겠다는 말은 빈말이었는지 서서히 나갈 준비를 하는 유아 선배. 이미 체리는 정신을 다 차렸는지 바깥에 나와서 노아 교수님과 잠시간의 대화를 하고 있었다. "하아암..." 작은 하품을 하면서 나오는 유아 선배였다. 무서운 이야기의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귀신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약간 몸이 경직되는 뻣뻣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지간히 귀신을 무서워하네요. 유아 선배." "시끄러워. 빨리 잠이나 자." ============================ 작품 후기 ============================ 지금쯤이면 무한도전 보고 계시는 분들이 많으시겠지요? 무한~ 도전! 207화 불침번 교대를 마친 뒤 맞이한 달콤한 꿀잠. 그리고 시간은 흘러흘러 아침해가 밝아오는 때가 찾아오게 되었다. "잘 잤나요? 유에 선배." "뭐, 그럭저럭." 아리아가 나에게 건낸 아침인사를 가볍게 받아주며 움막 바깥으로 나오자, 다행스럽게도 오늘의 아침은 꽤나 밝은 하늘을 보여주고 있었다. 매일매일이 이렇게 맑았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난파선의 모습도 여전히 변함없다, 뭐... 변하는 것이 더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늘부터 난파선 탐험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미리 세린이 구해온 지도를 보면서 앞으로의 예정을 연구해본다. 1층으로 진입해서 갑판까지 올라가는 데에 걸리는 시간. 나눠야 할 멤버. 그리고 살펴볼 지역 등등등. 어제 노아 교수님의 제안이 있었던지라 약간 수정을 가미해서 나오게 된 최종 계획안은 다음과 같다. 나와 체리가 1조, 세린과 지아 선생님이 2조, 누나와 엘리가 3조, 유아 선배와 노아 교수님이 4조, 마지막으로 아리아와 세리아가 5조를 담당하게 되었다. 굳이 정할 필요는 없지만, 에바 초호기는 아리아와 세리아가 속한 5조로 투입되었다. 아무래도 5조가 가장 약한(?) 조이기도 하고 말이다. 최대한 수색 범위를 넓히고 싶고, 그렇다고 1인씩 10개조로 쪼개지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2명씩 5개조로 나눠서 수색을 하기로 결정했다. 에바 초호기와 같이 난파선 내부로 들어와서 생활을 하는 맹수들도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2인 1조 형식으로 조를 짰다. 각자 선별한 조의 기준은 운동신경, 혹은 위기상황 대처능력이 좋은 인물을 각각 한명씩 배치한 형국이고, 나머지 인물들을 짜맞추는 형식으로 넣었다. 내가 짠 명단을 보고 불만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여성진들. 이렇게 해서 난파선 수색 작전이 시작... ... 되기 전에. 밥은 먹고 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모두들, 식사하세요." 누나의 말에 모두가 모닥불에 모이기 시작한다. 불은 아침식사 준비 이후로 끈 상태. 계속 불을 피우고 있다가 행여나 산불이라도 발생하게 되면 난감하기 때문이다. 다 좋은데 문제가 있다면... "... 아침부터 찌개?" "어제 먹다 남은 것이니까." "너무 간단한 이유잖아." "무인도에서 먹는 것에 불만을 가지는 것은 사치라고." "......" 하긴. 사치가 맞긴 하다. 하루하루 끼니를 해결하는 것을 걱정해야 했던 무인도 생활의 초기를 생각해 본다면, 지금의 내 투정은 어떤 의미로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그래도 역시 아침부터 찌개는 너무했다. 나와 조를 짠 체리가 양초를 들고서 내 뒤를 따른다. 각각 배정된 양초와 라이터를 들고 수색 지역으로 흩어진 상황. 우리 조가 맡게 된 곳은 하층부 중에서도 최하층이었다. "물이 많이 고여있네요." "그러게. 바닷물이 난파선 내부로 들어온 것일지도." 치마를 살짝 걷어 올리며 내 뒤를 따르는 체리가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나도 바지를 걷어 올리고선 발걸음을 재촉한다. 바닥에는 매끄러운 철판의 감촉이 느껴지지만, 발목과 종아리에는 차가운 바닷물이 피부를 타고 전해진다. 난파선의 아랫부분 중 구멍이 난 곳을 통해서 바닷물이 밀려 들어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아니면 난파선이 한번 물에 잠겼을 때 미쳐 빠져나가지 못한 물들일지도. 사실 왜 최하층에 물이 고여 있는지에 대한 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까 넘어가고. 우리들이 정작 신경써야 할 것은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이 여기에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물건을 찾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판단한 우리는 물이 고여있는 지역은 대충 넘어가고, 물이 고여있지 않은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로 한다. 고요하게 흐르는 물소리. 우리들의 발걸음 소리가 최하층 난파선 내부에 울리면서 마치 동굴 탐험과도 비슷한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체리야. 보이는 거 없어?" "그, 글쎄요... 마땅히 제 눈에는..." 근처에 굴러다니는 것이라고는 이상한 기계들과 공구들, 그리고 볼펜이나 종이들 같은 것이 바닥에 놓여져 있었다. 어차피 다 물에 젖은 것들인지라 사용하기도 조금 애매한 물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게가 상당히 많이 나간다. 이런 식으로라면 아무리 내가 있다고 해도 다 들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체리가 있다고는 하지만, 체리가 무슨 천하장사도 아니고. 여자로서 들 수 있는 무게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근처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물밖에 없네." "혹시 물 속에 뭔가 값비싼 물건이라도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체리의 제안. 하지만 사실 그리 비싼 물건들이 있어 보일것 같지는 않다. 그것보다도 값나가는 물건을 찾아봤자 필요가 없잖아. 정작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이아몬드라든지 금이라든지 하는 부의 상징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쓸 수 있을만한 필수품들이니까. 다이아몬드나 금이 우리들 수중에 있다고 하더라도 이걸 돈으로 바꿔줄만한 사람도 없고, 그리고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쓸 곳이 없으니까 이건 그냥 가볍게 우스개소리로 넘기도록 하자. "괜히 기운만 빠지네." "... 그러게요." "잠깐 쉴까?" 휴식을 제안한 내게 체리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대답한다. "쉬어도 되나요?" "힘들면 쉬는게 좋지. 무엇보다도 건강이 제일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그럼 그렇게 할게요!" 난파선 내부로 진입한 이후로 가장 기운나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체리였다. 휴식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 공통으로 좋은 단어니까. 특히나 군복무를 하고 있는 군인들에게는 더더욱 기분 좋은 단어가 아닐수가 없을 것이다. 포상휴가라든지, 정기휴가라든지, 말년휴가라든지 하는 것들. 계속해서 물이 고여있는 장소로 나아가는 우리들. 물이 없는 쪽으로 가야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전진, 그리고 또 전진을 하고 있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바닷물의 투명한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마치 계속해서 바닷물로 이어져있는 미로를 걷는 느낌. 무슨 던전 탐험도 아니고,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난파선의 내부는 지금 당장이라도 바깥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 체리야." "네?!" "잠깐 여기서 기다려줄래?" "저, 저기..." "괜찮아. 금방 돌아올게." "네..." 약간 겁먹은 듯이 대답하는 체리. 에바 초호기를 우리가 데려올 걸 그랬나. 겁이 많은 체리에게 하다못해 초호기라도 건내주었다면 덜 겁을 먹었을텐데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앞쪽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무언가들. 형태를 명확하게 구별할 수는 없지만, 주변에 보이는 빨간색의 액체들이 지금 우리들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충분히 추측이 가능하게끔 하고 있었다. 우리가 타고 온 여객선이 갈라지고 그리고 바깥으로 미쳐 대피하지 못한 채 배의 잔해에 깔리게 된 사람들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 ...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다.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의 시체. 그리 많은 양은 아니지만, 부패가 시작되어 상당히 보기 역겨운 모습으로 건물의 잔해에 깔려 있는 시체들이 눈에 몇몇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체리를 이 쪽으로 오지 못하게 한 내 말은 옳았다고 보여진다. 만약에 체리가 지금 이 모습을 봤다면, 여린 가슴에 트라우마가 생겼을 테니까. "... 지독하구만." 내가 한 말 그대로다. 한달이 넘어가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시체의 부패는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다. 차마 맡기 힘들 정도의 지독한 악취. 근처에 꼬여 있는 정체불명의 벌레들. 아니, 구더기인가. 근처에는 시체들에게서 나왔는지 말라붙은 핏자국들이 선명하게 벽에 새겨져 있었다. 그때 당시의 참상을 연상시킬 수 있을 정도의 최악의 사건 현장. 솔직히 말해서 나 역시도 토가 나올것 같았다. 나라고 시체를 보는 것에 익숙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사람의 시체를 본 경우는 이번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 아리아를 따라서 학생들의 시체를 목격했던 것 이후에는 이렇게까지 심하게 부패한 시체를 목격한 경험이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 침착한 반응을 보여주는 것은... 어찌보면 뒤에 체리라는 여자가 있기 때문이었고, 그리고 나도 점점 죽음이라는 녀석을 이질적으로 대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죽음.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인간의 마지막 종착역. 아직 한창 자랄 나이인 20대이지만, 나는 이미 죽음이라는 녀석과 수없이 많은 만남을 가져왔다. 배가 난파되었을 당시, 그리고 무인도에 표류해서 굶주림과 싸울 당시, 이처럼 타인의 죽음을 목격했을 때의 순간. 무인도에 표류된 이후부터 죽음이라는 녀석은 항상 내 곁에 머무는 그런 느낌을 가지고 살아왔다. 거대한 낫을 든 사신이 언제라도 내 목을 칠 수 있다는 듯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그런 느낌. 속이 매스꺼워 질 정도로 역겨운 그런 느낌. 언제든지 나도 이들처럼 죽을 수 있다는 그런 느낌. ... 하지만 나는 그런 느낌을 잊고자 악착같이 무인도에서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 과거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내가 이 죽음의 사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인도에서 무사히 아무런 사건, 사고 없이 탈출하는 방법밖에 없다. "... 젠장."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나온다. 지금 이렇게 싸늘한 시체가 되어있는 사람들과 나의 입장은 솔직히 말해서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다 같이 난파되어버린 여객선에 타고 있었고, 그리고 사건을 당했다. 그러나 이들과 내가 명백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있다. 현실세계에서 숨을 쉬고 있고, 먹고, 그리고 잘 수 있다는 뜻이다. 어쩌며 내가 살아남은 일이 엄청난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하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나는 정말 운이 좋게도 무인도까지 떠내려 왔다. 싸늘한 시체로 전락되어버릴 수 있었던 아슬아슬한 순간을 피하고 말이다. ...... 무인도의 생활이 불편하다고 불만을 늘어놓을 이유는 없다는 뜻을지도 모르겠다. "오, 오빠..." "미안. 체리야. 기다렸지? 금방 갈게."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웃으면서 여행을 즐겼을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명복을 빌며 나는 그 자리를 떠난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 그 속에서 나는 당당하게 삶이라는 길을 택하고 싶은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오빠. 갔던 곳에는 필요한 물건같은 것이 있었나요...?" "아니. 전혀 없었어." 체리에게는 적당히 거짓말로 둘러대며 내가 본 것을 말하지 않는다. 만약에 체리가 시체를 봤다 하면 그 자리에서 기절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한동안 계속해서 이어지는 던전 탐험. 지긋지긋하다고 할 정도로 물 밖에 없다. 아무래도 이 지역을 수색 범위에 포함시킨 것은 잘못된 일이었나. 판단 미스였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바깥으로 나가보자." "네..." 어차피 여기에는 우리들이 찾는 물건도 없고, 그리고 또 시체들이 있는 장소가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체리의 심적인 정도를 고려해서 수색 장소를 다른 곳으로 정하기로 결정한 나는 우선 베이스 캠프로 돌아가서 새로 계획안을 짜기로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 작품 후기 ============================ 후기에 올라가는 사색소녀는 본편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예전부터 제가 하던 망상(?)을 초 단편 글로 표현한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럴싸할 것 같은 구절 하나만 딸랑 써놓으면 뭔가 재미가 없어 보여서 아주 간단하게나마 이야기 형식으로 써본 것이 사색소녀입니다. 가볍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 208화 바깥으로 나온 우리들. 점심은 각자 해결하기로 했기 때문에 굳이 베이스 캠프에 모일 이유는 없다. 어차피 각자 조끼리 먹을 2인분의 식사들을 한끼씩 챙겨 갔을테고 말이다. 그런데 베이스 캠프에 우리들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아리아와 세리아. "무슨 일이야? 은발 자매님들." "유에 선배. 일찍 돌아오셨네요." 아리아가 무언가를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무성의하게 대답한다. "뭐... 마땅히 발견해서 사용할만한 가치있는 물건들이 보이지 않았거든." "그런가요? 저희와는 반대되는 상황이었군요." "반대되는 상황?" "저희는 너무 물건이 많아서 잠시 이쪽으로 옮겨오고 한번 더 갈 예정이었거든요." "그래서 이른 시간에 베이스 캠프로 되돌아왔다 이 뜻이군." "실례네요. 선배. 혹시 저희가 농땡이라도 피울 줄 알았나요?" "아니, 그런 생각은 전혀." 가장 성실하기로 소문난 세리아가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을 뿐더러, 언니가 이 세상의 전부, 언니만 사랑, 언니의 인생이 곧 나의 인생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아가 세리아의 의견에 반대되게 농땡이를 피운다든지 할 일은 없을거라 생각되기 때문에 그녀들을 의심한 적은 한번도 없다. "그런데 가져올 물건이 너무 많다니... 무엇인데?" "유에 선배. 저희가 담당한 지역이 어딘지 아시나요?" "... 오호라." 대충 눈치를 챘다. 아리아와 세리아가 담당한 곳은 바로 의류실. 여성진들이 입을만한 속옷이라든지 옷들을 가져오는 임무를 부여받은 그녀들이었기 때문에 금방금방 일의 진행 속도를 빠르게 재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노아 교수님의 말씀대로 옷이 많이 있었던 것 같네." "더불어서 각 사이즈 별로 여성용 속옷들도 많이 있었죠." 라고 말하면서 내 앞에 브래지어를 당당하게 꺼내보이는 아리아. 옆에 있던 세리아는 그런 아리아의 당돌한 행동에 얼굴이 붉어지면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리아 녀석. 부끄러움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여자가 속옷을 남자에게 이렇게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보여줄 이유가 어디 있다고. "그래서 필요한 옷은 얼마나 가져왔는데?" "할당된 가방 안에 가득 들고 왔지요." "산장으로 다시 가져갈 때 불편하겠네." "괜찮아요. 유에 선배가 다 들면 되니까요." "... 나는 짐꾼이 아니라고. 아가씨." "보상도 해줄테니까 들어주세요." "어떤 보상?" "제 허벅지를 10초동안 만질 수 있게 하면 되나요?" "나름 괜찮은... 이 아니잖아." "선배. 지금까지 저의 가슴이라든지 엉덩이라든지 하고 만진 적이 있는 남자는 선배가 유일해요. 저의 몸에 대한 값어치를 알고서 그런 반대를 하시는 건가요?" "알았다, 알았어. 고귀하신 아리아 아가씨. 나중에 들어줄 테니까 짐 정리나 제대로 잘 하고 있어." 사실 기왕 만질거라면 세리아가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고귀함과 순결함의 대명사, 세리아의 살결이라면... 아. 생각만해도 다시 발기가 될 것 같은 기분이다. ...... "그런데 세리아의 복장... 조금 의외네." "이제야 눈치채셨나요. 유에 선배. 너무 둔감하시네요." "그래. 내가 둔감하다는 사실은 인정하마." 세리아가 입고 있는 옷. 내가 왜 이런 말을 했냐 하면... 사타구니 안쪽이 그대로 보일 정도로 엄청나게 짧은 길이를 자랑하는 미니스커트와 배꼽티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안 어울린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노출에 최적합된(?) 몸매를 가지고 있기도 한 세리아였기 때문에 정말로 잘 어울린다. 허벅지나 허리도 날씬하고. 가슴도 적당히 볼륨있고. 무엇보다도 워낙 미모가 뛰어나고 특히나 다른 여성진들과는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는 특유의 현모양처 분위기와는 다르게 섹시한 복장이 언밸런스하면서도 그 차이가 매력으로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리아 치고는 상당히 노출도가 높은 파격적인 의상. 세리아 본인도 부끄러운지 치맛자락의 끝을 잡고서 최대한 밑으로 끌어 내리려고 시도한다. "내가 알고 있는 세리아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과감한 복장인데." "세리아 언니는 어떤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리니까요." "그래. 그건 인정하는데... 왜 하필이면 저런 옷을?" "언니의 이미지 변화라고 보시면 되요." "이미지 변화라... 물론 그것도 좋을지도." 여자를 크게 바꾸는 요인은 흔히 3가지라고 한다. 첫번째가 머리 스타일, 두번째가 옷, 그리고 마지막이 화장. 긴 머리카락을 숏컷으로 자르면 왠지 모르게 성숙미가 느껴진다고들 하지 않는가. 그런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이미지 체인지. 나쁜 시도는 아니라고 보지만... 뭐랄까. 내 딸 같은 소녀가 나이가 들면서 노출도가 높은 옷을 입는 것을 반대하는 아빠의 마음이라고 할까. 그런 기분이 조금 드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체리도 입어볼래?" "나, 나?!" 아리아의 제안에 화들짝 놀라는 체리. 그러고보니 체리 역시도 노출도가 있는 옷을 입는 일은 별로였지. 우리 무인도 멤버 중 노출을 즐기지 않는 인원은 정확하게 말해서 3명으로 압축할 수 있다. 노아 교수님, 세리아, 그리고 유체리. 다들 공통점이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라는 점과 그리고 얌전하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공유하고 있다. 잠시 고민하기 시작하는 유체리. 본인의 입장에서는 조금 부끄러운 선택지일지도. 왜냐하면 혼자만 갈아 입는 개인 탈의실도 아니고, 아리아나 세리아, 더불어서 동성도 아닌 이성인 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체리는 세리아의 모습을 살짝 보더니 이내 아주 소극적인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 응." "좋아. 미리 옷을 골라뒀으니까 움막에 가서 갈아입고 올래?" "아, 알았어..." 어째서 옷을 미리 골라둔거냐. 아리아. 설마 미리 옷을 코디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입혀볼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난데없이 시작된 패션쇼. 남자인 나는 뭐... 할 것이 없어서 모닥불 근처의 자리에 앉아 옷을 정리중인 아리아를 바라본다. "... 아리아." "왜 그러신가요? 유에 선배." "너희 쪽 지역 말이야. 혹시 시체 같은 거라든지... 없었어?" "... 갑자기 분위기가 다운되는 소재를 꺼내시네요." "나도 알지만, 그냥 혹시나 해서." 난파선 내부에 시체가 있다는 소리는 다른 구역에도 시체가 있을수도 있다는 말과 같다. 전혀 가능성이 없는 말은 아니니까. 내 질문을 받은 아리아가 자신의 은발을 쓸어내리면서 말한다. "다행스럽게도 없었어요." "있었다면 큰일이었겠지." "... 세리아 언니가 있으니까요." 체리 뿐만 아니라 세리아 역시도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좋게 말한다면 착하다는 뜻이 되지만, 솔직히 말해서 무인도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조금 더 강해질 필요가 있다. 육체적으로 강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 그리고 굳은 결심.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마인드가 파괴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일수록 생존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 그렇다고 세리아나 체리에게 그런 마음가짐을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만약에 이 무인도에서 나홀로 남았다면, 스스로 굳은 결심을 할 필요성이 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세리아와 체리를 데리고 이끌어 줄만한 사람들이 다수 존재한다. 서로가 서로를 도와가며 살아가는 협력 플레이.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일지도. 내 눈치를 보던 아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 시체를 보셨나요. 유에 선배." "가끔 너의 그 통찰력 덕분에 놀라곤 한다니까." "체질이니까요." 농담삼아 대답하지만, 아리아의 말투는 꽤나 진지하게 들려온다. 시체의 목격. 무인도에서 머물고 있는 상태에서 꼬박 한달여만의 목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실제로 사람 시체를 본 적은 없을테지만, 나는 그 일을 경험한 사람이기도 하다. 사람의 죽음이라는 것을 바로 눈 앞에서 보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굳이 남자여서 라는 이유가 아니더라도 저절로 강인한 정신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정신줄을 놓아버릴지도 모르니까. ============================ 작품 후기 ============================ 아침부터 배가 살살 아픈 덕분에 본의 아니게 일찍 일어났습니다. 강제 기상이라니... 그것도 일요일 주말 아침에... ㅡ_ㅡ; 209화 체리가 잠시 옷을 갈아 입으러 간 사이에 아리아와 이것저것 담소를 나누는 나는 아까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까 시체에 대한 이야기를 아리아에게 털어놓자, 아리아는 그다지 충격받지 않은 모습으로 마른 장작을 모닥불에 넣는다. "어차피 사람이 죽는 것은 예정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냐?" "네. 다만 '언제' 죽었는지에 따라 개별적인 차이를 보이는 것 뿐이에요. 무인도에 표류되어 있는 저희들 역시도 마찬가지.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 관우, 장비처럼 한 날 한 시에 같이 죽기로 맹새한 도원결의(桃園結義)도 아니잖아요. 언젠가는 인간이라는 생물은, 아니 모든 살아있는 생물 자체는 반드시 죽게 되어있고, 그리고 인간은 그 죽음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 뿐이에요." "타인의 죽음을 받아들일 용기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문제란 말이지." "네. 어차피 죽음이라는 녀석에게 평생을 도망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저희들이 지금 이 무인도에 표류되어 있다고 해도 이것은 그저 죽음에서 잠시동안 멀어진 채 또 다른 삶이라는 이름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뿐이에요. 어차피 목적지는 모두가 다 같은 '죽음'이라는 곳에 도달하기 마련이죠." "......" "결과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에요. 언젠가 한번은 겪게 될 일. 그렇기 때문에 마음 편히 먹는 것이 어찌보면 부담도 덜 되겠죠." "대단하네. 아리아." "뭐가 대단하다는 건가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대단하다는 뜻이야."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되나요?" "그렇게 확인 차원으로 되묻지 않아도 칭찬이라는 사실 정도는 너도 알고 있잖아." "그냥 심심해서 한번 물어본 것 뿐이에요." 여전히 여유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아리아였다. 사실 죽음 앞에서는 아무리 나라고 해도 갈등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 시체를 보고도 멀쩡한 정신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은 의사나 경찰관, 형사 정도가 다일 뿐. 나같이 평소에 학교만 다니던 일반 대학생에게는 매스꺼운 장면이 아닐수가 없다. 하지만 시체를 봤다는 데에서 느껴지는 두려움의 근원지는 '징그럽다'라는 게 아니라 '죽었다'라는 원초적인 공포다. 사람이 귀신이나 유령을 무서워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죽을수도 있다는 공포 때문이다. 사람의 모든 두려움은 결국 '죽음'이라는 녀석으로부터 생성되는 아주 간단한 원리로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아직 멀었구나." 점심식사를 위해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 앉은 내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아리아가 피식 웃으면서 대답한다. "선배는 너무 자신을 과소평가 하는 버릇이 있어요." "그런가?" "네. 그리고 그게 안 좋은 버릇이기도 하죠." "안 좋은 버릇이라..."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 내리는 일 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을 거예요. 나 자신이 스스로를 믿어주지 않으면 누가 믿어주나요. 세상이 등을 진다고 해도 내 자신만큼은 스스로의 편이 되어줘야죠." "오늘따라 상당히 괜찮은 말을 많이 하는데? 철학자 아가씨." "잠시 사색의 시간을 가지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말들이에요." 나보다 연하라는 여학생답지 않게 꽤나 어른스러운 대답을 시원스레 내뱉는 아리아. 지아 선생님에게 들을 수 있을법한 대사들을 아리아에게서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신기하긴 하다. 물론 아리아를 낮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약간 애 늙은이 같다고 할까. 본인 앞에서 이런 말을 꺼내면 마치 아리아를 놀리는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해줄 가능성이 클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내 생각은 그렇다. 좋게 말하면 성숙해보이고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던 와중에. 드디어 옷을 다 갈아 입었는지 체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 "괜찮은데?" 나와 아리아가 순차적으로 체리의 옷차림을 보고서 내뱉은 작은 감상평이었다. 타이트한 칠부바지에 세리아 정도는 아니지만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티를 입은 체리. 얼핏 보면 체리의 가슴 안쪽이 보일 정도로 가슴 부근도 푹 파여잇는 과감한 노출형의 티를 착용한 채 등장하는 체리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면서 말한다. "어, 어울리나요오...?" "생각 이상으로 어울려." "감사합니다..." 내 칭찬을 듣자 체리의 얼굴이 더더욱 빨개진다. 칭찬은 곰도 춤추게 만들고, 예쁘다는 말은 여자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 직접적으로 예쁘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체리의 기분이 꽤나 상승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주려는 듯이 손을 베베 꼬면서 자신의 옷을 내려다본다. 세리아와 체리. 둘 다 섹시한 컨셉으로 이미지 변환을 노린 시도는 성공적이라고 평하고 싶다. "역시나 여자는 옷 하나만으로도 금새 이미지가 바뀌는구나." "놀랐나요? 유에 선배." "뭐... 사실 그리 놀랄만한 요소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집에 같이 머물고 있는 누나가 있다보니 그런 점은 많이 알고 있어." "그런데 왜 이제와서 처음 알았다는 듯이 감탄하시나요?" "내가 자세히 보아온 여자가 누나밖에 없었으니까. 다른 여자들도 변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지." "지금까지 여자친구 같은 것도 한번도 사귀어본 적이 없었나요?" "... 남의 연애사에 참견하려 하지 마. 비밀이다." "의외로 순진남이었네요. 유에 선배." "퓨어하고 순수한 남자였지." "하지만 알고 보니 변태였기도 하고요." "......" 항상 이런 식으로 마지막에 아리아에게 한방 먹는 듯한 패턴의 반복이다. 사실 남자가 변태인 것은 나쁘지 않다. 계속 주장해왔던 기분이 들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하고 넘어가자. "만약에 남자가 변태가 아니었다면, 인간이 과연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을까?" "아니요." "거 봐. 남자가 변태였기 때문에 많은 인간 종족 번식이 가능했고, 그 덕분에 현재 인류는 지구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 것이야. 그러니까 남자가 변태인 것은 나쁘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다." "상당히 형식적인 변론이네요." "맞는 말 아니냐?" "남자가 변태였기 때문에 인류가 이렇게 번성했다는 사실은 긍정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변태인 것은 전혀 나쁘지 않다 이 말이지." "아니요. 유에 선배 한정으로 선배가 변태인 것은 나쁩니다. 도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화학적으로도, 외국어 영역적으로도." "잘 나가다가 마지막에 산으로 간 느낌이 들었는데." "기분 탓일겁니다." ... 결국 결론은 '나니까' 나쁘다는 뜻이잖아. 이 건방진 후배 같으니라고. 한 순간 어른스러운 녀석이라고 칭찬했던 말, 취소 해버리겠다. 잠시동안 노출도가 높은 의상을 입었던 체리와 세리아. 다시 본래의 복장으로 돌아와서 다 같이 식사를 하는 데에 열중하고 있었다. 식사 담당은 공평하게 체리와 아리아가 맡은 상태. 각 조에서 한명씩 선발해서 요리를 담당하자는 의견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멤버가 정해지게 되었다. 참고로 우리 조, 그러니까 나와 체리 중에서 내가 요리를 전혀 못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리쪽에서는 체리가 나가게 되었고, 아리아는 자신의 언니이기도 한 세리아를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며 본인이 요리하는 일을 자처했다. 물론 세리아는 그런 아리아의 배려를 부담스러워 하면서 자신이 하겠다고 손을 들며 의견을 표출했지만, 간단하게 아리아에 의해 묵살당했다. 이럴때 보면 정말 언니와 동생에 뒤바뀐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그냥 넘어가는 상식 하나. 본래 일란성 쌍둥이는 먼저 태어나는 쪽이 형, 혹은 언니라고 불리고 나중에 태어나는 쪽이 동생이라고 그리 불린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먼저 태어나는 쪽이 동생이고, 나중에 태어나는 쪽이 맏이가 된다고 한다. 먼저 태어난 쪽이 나중에 태어난 쪽에 비해서 수정이 늦게 되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오는 순사는 동생쪽이 먼저 나온다고 한다. 이건 내가 인터넷 강의를 들을 때 강사가 재미삼아 이야기해준 작은 상식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나라가 아니라 외국으로 따진다면 아리아가 언니가 되는 것이고, 세리아가 동생이 된다는 뜻이다. 뭐, 하지만 둘 다 대한민국 영토에 살고 있었으니까 대한민국의 법을 적용해서 첫째가 세리아, 그리고 둘째가 아리아가 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리라고 본다. 잠시 쌍둥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던 사이에, 세리아가 내 옆으로 다가오며 물 한 컵을 건낸다. "고마워. 잘 마실게." "......" 입모양으로 '아니에요.'라고 살짝 보여주는 세리아. 말은 할 수 있지만, 자신의 의지로 말을 하지 않는 이 불운의 소녀. "세리아. 혹시 '말'을 다시 배워서 할 생각은 없어?" "......" 세리아가 희미하게 고개를 수평으로 흔든다. 본인부터 이미 말을 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인다. "불편하지 않아? 스스로 말을 할 수 있으면 최대한 재활훈련 같은 것을 해서라도 말을 하는게 좋을지도 모르는데..." "......" 세리아의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진다. 건들이지 말아야 할 지뢰를 건들이는 셈인가. 순간적으로 더 이상 이야기를 파고 들어가면 안될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어쩔 수 없이 이 이야기는 관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미안. 내가 너무 깊게 관여했나봐." "......" 근처에 있던 작은 나무 막대기로 모래바닥에 '괜찮아요. 익숙하니까요.'라고 쓰는 세리아. 재활치료에 대한 재촉이 익숙하다는 뜻일까? 하기사. 성대에 전혀 이상이 없으면 재활치료를 해서 말을 할 수 있게끔 조치를 받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아리아를 포함해서)도 아마 나처럼 세리아에게 이런 식으로 권유를 많이 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리아가 여전히 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아마 아직까지도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일지도. 서로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한 채 난파선을 바라보는 우리들. 세리아와는 그리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고 한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이런 시간은 우리 둘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아니, 확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점은 뭘까. 언어적인 장애? 세리아가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인정할 수 있다. 보고, 듣고, 말할 줄 아는 사람과 단지 글자로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서로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면 다른 일반적인 사람들과의 대화보다도 시간이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내 생각은 다르다. 단순한 언어의 장벽은 단지 핑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이야기가 통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모래바닥에 글자로 자신의 의사를 나에게 전달하는 세리아이지만, 직접적으로 말로 하는 것보다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릴 뿐 의사소통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 둘을 가로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장벽의 정체는 무엇일까. ... 아마도 내가 세리아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있지 않고 있다는 상황이라고 보여진다. 애초에 그녀는 어째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이 사실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 나와 세리아는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 계속해서 헛바퀴만 계속 도는 사이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근본적인 해결이 필요하다. 그 점을 이번 시간을 통해서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통찰력을 위해서라면 사파이어를... 정말, 정말이지... 너무 영롱하군요!! PS. 월~~~~~~~~요~~~~~~~~일~~~~~~입~~~~~~니~~~~~~다~~~~~~~~ 210화 "식사하세요." "드디어 밥이 왔구나~" 기뻐하는 내 앞에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음식들이 차려지기 시작한다. 유아 표 찌개는 이미 다 먹어버려서 없고, 천연 조미료를 섞어 약간 매콤한 죽을 만든 뒤에 감자를 찍어먹는 형식으로 만찬을 즐기게 되었다. 저번에 제 1차 난파선 탐험대에서 카레에 감자와 고구마를 찍어 먹었던 것이 의외로 맛있게 느껴졌던 나는 무인도에서 먹을 수 있는 식단 중에 지금 이 조합이 가장 선호하는 식단으로 TOP 1에 선정되었다. "유에 선배가 좋아하는 거지요? 이거." "어떻게 알았어?" 아리아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알고 있다니. 조금은 의외다. 말은 저렇게 딱딱하게 해도 사실은 나를 많이 신경쓰고 있는 착한 후배였구나. 아리아. 이 오빠는 감동 받았단다... 그러고보니 호칭을 선배에서 오빠로 바꿔준다면 더없이 좋을텐데. 그러나 나의 예상과는 달리 아리아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한다. "선배가 좋아하는 식단 같은 것은 전혀 모릅니다." "... 차가운 대답이네. 그럼 어떻게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알았는데?" "체리에게서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구만." 순식간에 납득해버렸다. 아까 최하층 탐험을 하고 있던 와중에 체리의 무서움을 조금은 덜어주고자 이것저것 사소한 대화를 하던 와중에 서로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그 일 때문에 체리가 내가 선호하고 있는 음식의 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체리가 말하길. '유에 오빠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여주고 싶어...'라고 말해서 어쩔 수 없이 마련했습니다." "아, 아리아...!" 나름 체리의 목소리를 성대모사 하면서 이 음식이 점심식사로 선정된 이유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는 아리아였다. 아리아의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황급히 그녀의 입을 막는 체리. 그래도 이 오빠를 생각해주는 그 곱디 고운 마음씨. 감동해서 눈물이 절로 흐를 지경이다. 세리아와 더불어 체리 역시도 착한 아이. 이런 귀엽고 심성 고운 아이들과 함께 무인도에서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 있어서는 어떤 의미로는 축복일지도 모르겠다. 아아. 감사합니다. 하늘이시여. 점심을 맛있게 얌냠쩝쩝하는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아리아가 난파선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나름 무인도 생활에 도가 튼 사람들이니까 잘 하고 있겠지." 그러려니 하고 별다른 의미 없이 답을 해본다. 방금 표현한 그대로 무인도 경력 한달여 기간을 가지고 있는 나름 베테랑(?)들인데. 끼니 정도는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특수부대를 상대로 서바이벌 게임이라도 한번 하게 된다면 이길지 어떨지는 몰라도 적어도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 정도로 이제 야생이라는 장소에 너무나도 익숙해져버린 우리들이었다. 왠지 조금 서글픈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아, 유아 선배하고 세린이다." "뭐?" 호랑이도 제 말하면 알아서 무대 위로 등장한 뒤에 '여러분 반갑습니다~'라고 외치면서 '내가 제일 잘나가~'라는 노래를 부른다는 속담도 있는데... 속담이 상당히 많이 변질되었다는 느낌이 들고 있다면 분명 그건 착각일 것이다. 아무튼 사색이 되어서 베이스 캠프 쪽으로 달려오는 두 여인. 뒤쪽을 보니까 그녀들과 파트너였던 다른 사람들, 그리고 나머지 한개 조 포함 총 6명이 베이스 캠프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서 베이스 캠프로 오는 것은 아닐테고. 점심은 난파선 내부에서 해결하기로 각자 합의를 봤을 터였다. 시간 절약이라는 측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중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뜻인가? "유에ㅡ!!!" 그동안 보고 싶었다는 듯이 크게 소리를 치며 나에게 뛰어오는 유아 선배. 더불어 세린도 평소에는 나에게 이름조차 부르지 않으며 '이 놈, 저 놈, 그냥 변태. 우주 최강 변태.'라고만 부르는게 일상사가 되었는데, 오늘은 왠지 조금 다르다. 유아 선배처럼 순수하게 내 이름을 부르기 때문이었다. "유에! 이 바보!! 뭐하고 있는 거야!" "뭐하긴. 보시다시피 오늘의 일용할 양식이기도 한 음식들을 먹고 있지." ... 역시나 뒤에 나를 욕하는 단어가 빠지지 않는 세린 표 언어였다. 유아 표 시리즈와 같이 사업하면 좋을텐데. 물론, 직접 세린 표 언어를 듣는 상대방의 기분이 좋다고는 보장하지 못하겠다. 부작용이 심하니까 함부로 사용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숨이 차오르도록 뛰어온 이유에 대해서 인터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에 기자가 사건 현장에 나와 있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 그러니까... 헥헥..." 유아 선배가 거칠게 호흡을 몰아 쉬면서 말 끝을 흐린다. 하긴. 힘들만도 하겠지. 평지도 아니고, 발이 푹푹 꺼지는 해변가를 전력질주 했으니까. 남자인 나도 해변가를 뛰는 일은 체력소모가 심하게 느껴져서 못하는데(어제 노아 교수님을 들고 뛰었다는 사실은 비밀리에 붙이도록 하자. 다른 여성들이 그 말을 듣는 순간 질투심이 폭발할 거 같기 때문이다.), 여성인 유아 선배가 그 지옥같은 달리기를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 정도로 뭔가 급한 일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여진다. 유아 선배와는 다르게 비교적 천천히 뛰어 온 세린. 그러나 표정은 둘 다 마치 못 볼걸 보고 왔다는 듯한 동일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설마 시체라도 본 것일까. 여성진들은 아마도 지금까지 단 한번도 시체를 직접 목격한 적이 없을 것이다. 내가 왜 '아마도'라는 말을 붙였냐 하면, 지아 선생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의과계열 출신들은 시체라든지 그런 것을 한번쯤 본다고들 하지 않는가. 약대 출신도 거기에 해당되는지에 대한 여부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걸 제외하고는 여성진들 중에서 나처럼 직접적으로 시체를 목격한 경험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일단 그리 추측을 해 보았다. 그러나 세린이 들려준 대답은 시체보다도 더 어이없는 존재를 거론하기 시작한다. "나, 나왔다고!" "나왔다니. 소변이?" "이 바보!!!" 퍽! 라고 말하면서 내 명치를 한 대 때린다. 그건 유아 선배의 전매 특허 공격이라고! 표절하지 말란 말이다! ... 그나저나 세린의 공격도 상당히 매섭다. 유아 선배 못지 않게 엄청난 통각이 파도의 물이 밀려오듯 사르르 느껴지니까 말이다. 젠장. 아파 죽겠네. "... 뭐가 나왔단 뜻이야?" 아픔을 뒤로 하고 일단 상황의 여부를 판단해보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침착을 유지한 체 세린에게 묻는다. 그러자 내 질문에 대답한 것은 이제 막 호흡이 안정된 유아 선배였다. "유유유유유유유..." "유(You)?" "너라는 뜻이 아니라!" 퍼억! 크으윽... 이것이 바로 원조 로우 킥. 역시 유아 선배다운 공격이다. 세린과는 다르게 공격에 무게감이 실려 있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엄청난 수준의 통각을 선사해준다. 이종 격투기 선수 부럽지 않을 정도의 이 공격. 역시 유아 선배는 검도부를 때려 치우고 이종 격투기의 세계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이런 여유로운 생각을 가질 틈도 없이. 유아 선배가 진짜로 나에게 하고 싶었던 단어가 무엇인지 곧바로 들려주기 시작한다. "유, 유령이 나왔다고!" ============================ 작품 후기 ============================ 월요일 오후입니다. 기운이 절로 빠지는 평일이군요 ㅜ_ㅜ 211화 ...... 베이스 캠프에서 벌어진 점심식사 시간에 공교롭게도 전원이 다시 모이게 되었다. 일단 계획상으로는 많이 틀어진 현재 이 상황. 모든 것은 유아 선배의 단 한마디 '유령'이라는 말 때문에 이렇게 긴급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회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언행을 보여주는 엘리. 아리아와 세리아 조에 합류해 있던 에바 초호기가 엘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었지만, 지금은 다시 엘리의 품 안으로 돌아간 채 앞발을 엘리의 오른 손과 왼 손에 잡히고선 두 발을 집고 일어선 채 불쌍하게 울먹이고 있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천사같은 세리아에게서 떨어져서 악마같은 엘리에게 다시 조교(?)당하는 불쌍한 아기 고양이, 에바 초호기. 이번에는 두 발로 걷는 연습을 시키고 있는 것인가. 엄청나게 대단한 조련사다. 엘리 녀석. "확실히 유령이었니?" "네! 분명했어요!" 지아 선생님의 물음에 선배가 확실하다는 듯이 강한 자신감을 보이며 외친다. 아니, 사실은 자신감 표출과는 약간 거리가 멀게 양 손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물론 세린도 마찬가지. 겉으로 표현하고 있진 않지만, 노아 교수님은 어느 새 지아 선생님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 유일하게 웃음을 짓고 있는 누나는 오히려 유령의 출현을 반가워하고 있다는 듯이 말한다. "유령이라. 평소에 궁금했던 건데. 유령 중에서도 과연 '서양 유령'과 '동양 유령', 어느 쪽이 더 무서울까?" "뭐... 무서운 것으로 따지면 아무래도 동양 유령이 무섭지." "서양 유령은?" "글쎄. 주관적인 입장에서는 그렇단 뜻이야. 그런데 누나. 이야기를 또 다른 곳으로 새게 만들지 말라고." 나도 모르게 누나의 엉뚱한 질문에 답변하고 말았다. 18년동안 몸에 베어 들어온 습관 탓이다. 괜히 2080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3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 처럼 20대의 잇몸 상태가 80대까지 간다는 말이... 잠깐. 이거, 치약 광고 문구잖아. ... 치약 광고가 되었든 어찌되었든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도록 하자. "현대 과학 문명에 유령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불확실한 존재를 보았다고 주장해도 쉽게 믿을 수가 없습니다만." 아리아의 말이 정곡을 찌른다. 확실히 비과학적인 초자연현상 같은 경우에는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이상 믿기는 힘들 것이다. 아무래도 과학이라는 것이 너무 많이 발전하다 보니까 과학 이외로 확실하지 않은 무언가를 인간이 쉽게 믿고 있다는 존재는 신 정도밖에 없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아니야! 정말로 있다고!" 아리아의 말에 반론을 펼치기 시작한 상대편 측 대표 유아 선배. 뒤이어 원군으로 세린이 합류하기 시작한다. "나, 나도 확실히 보... 지는 않았지만 들었어!" "들었다고?" 지아 선생님의 눈매가 살짝 달라진다. 어딘가 세린의 방금의 말에 포인트라도 잡아낸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들었다는 말은 일단 제대로 확인은 하지 못했다는 소리 아니니?" "그, 그건 그렇지만..." 지아 선생님의 말에 순간 할 말을 잃은 세린 선수. 이대로 K. O. 패를 당하게 되나요. 구원 펀치는 없습니까. "모습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분명 사람 울음 소리가 들렸어요!" 구원 펀치를 날려주는 유아 선배의 주장이었다. 선배의 말을 들은 누나가 '음~'이라고 작게 고민의 흔적을 표출하면서 입을 연다. "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사람의 울음 소리를 들었다는 증거는 놓치고 넘어갈 수 없는걸." "그, 그렇지? 유령이 맞는 거지?" 유아 선배는 이 세상에 정말로 유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파만파 퍼트리고 다니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무슨 신흥 종교도 아니고. 말로만 '유령은 존재합니다!'라고 말해봤자 사람들이 믿어주는 부류가 있고 믿어주지 않는 부류로 명확하게 나뉠텐데. 만약에 정말로 유령이 존재한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각인을 시키려고 한다면 정체불명의 존재를 과학적인 근거를 통해 밝혀내면 그만이다. 아주 간단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아주 힘든 방법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힘들다는 뜻이다. 하지만 누나의 말 그대로 그냥 넘겨 들을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나의 말에 나도 찬성." "유, 유에. 너도 유령이 있다고 믿어 주는거야?" "유아 선배. 그게 아니라요. 분명 유아 선배는 '사람의' 울음 소리를 들었다고 하셨잖아요. 그렇죠?" "응... 분명 그렇게 말했어." "유령이든 아니든 그 유무의 구별을 떠나서 일단 그 울음 소리를 낸 것이 생존자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는 말이에요. 제가 표현하고 싶은 뜻은요." "생... 존자?" 약간 어벙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내뱉는 유아 선배. 옆에 있던 세린도 마찬가지로 유아 선배와 똑같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저 표정을 있는 그대로 해석해 보자면, '그런 방식으로도 생각할 수 있겠구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유령 덕분에 제대로 된 사고방식을 할 수 없었던 유아 선배와 세린은 그때 당시에 생존자의 확인이고 나발이고 다 내팽개치고 유령이라는 두려움 때문이 무작정 이 베이스 캠프로 도망을 쳐 온 것이었다. 같은 파트너를 담당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 역시도 그녀들의 갑작스런 행동에 어쩔 수 없이 이 곳으로 동행하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내 말에 누나가 배를 잡고 깔깔 웃으면서 유아 선배와 세린에게 말한다. "아하하! 유령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니까 그러네." "아, 아니야! 분명 있어!" "그래요! 유아 선배! 모처럼 마음이 통했네요. 유령은 분명 있어요!" 간만에 견원지간이었던 두 사람이 연합 전선을 펼치기 시작한다. 철천지 원수이기도 한 유아 선배와 세린. 이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사이가 좋은건지 나쁜건지 분간이 안 갈때가 가끔 있다. 지금도 그 '가끔'이라는 단어의 범주에 포함되는 상황. 인간관계란 참으로 재미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원수가 될 수도 있고,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동료가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가급적이면 유아 선배와 세린은 원수로 지내는 나날들의 비율보다 동료로 지내는 나날들의 비율이 훨씬 높아졌으면 하고 기원해본다. 두 사람이 싸우면 당사자들 보다도 주변 사람들이 더 피곤해지니까 말이다. 단합 아닌 단합을 하며 유령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유아 선배와 세린. 하지만 이미 지아 선생님과 나는 생존자들의 가능성에 대해서 길을 열어두고 만약의 일에 대해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난파선에서 생존자가 남아있을 확률은 어느정도 되나요? 지아 선생님." "매우 크지. 난파선은 생존하는 데에 있어서 어찌보면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니까."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단 말씀이신가요?" "그래. 물론 처음부터 난파선에 남아 있다가 이 곳으로 표류된 경우가 있을테고, 아니면 세린이나 나, 그리고 체리처럼 이 곳 무인도로 떠내려 왔다가 우연히 난파선을 발견해서 저 곳에 베이스 캠프를 마련하고 사는 경우, 이렇게 둘로 나뉠 수 있어. 그만큼 난파선은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이 많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식당에서 다수 확보할 수 있는 식량과 식수들이 있으니까." "그럼 생존자가 있을 확률이 크단 말씀이시네요." "내 소견으로는 그렇게 보여. 난파선이 어둡기는 하지만, 우리들이 지금 가지고 온 양초처럼 빛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은 충분하니까. 그리고 갑판 위로 올라가면 채광도 확보할 수 있고. 아무튼 나름의 환경을 개선하다 보면 난파선에서 충분히 지낼 수 있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어." 한 마디로 제로가 아니라는 뜻이다. 누나도 더불어서 지아 선생님의 의견에 동조한다는 듯이 자신의 의견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나도 생존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 "누나는 어떤 논리적인 근거로 인해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 꼭 논리적인 근거가 필요해?" "수정할게. 굳이 논리적이지 않아도 돼. 근거를 말해줘 봐." "여자의 감." "그건 유아 선배 전매 특허라고." 오늘따라 유아 표 시리즈가 자꾸 저작권 침해를 받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고 있다는 생각은 분명 오해가 아니리라고 본다. 아까의 세린이 사용한 명치를 노린 로우킥의 경우도 그렇고, 여자의 감 시리지도 그렇고. 아니지. 여자의 감은 누나도 자주 사용했었나? 여자들이 많다보니 약간 햇깔리는 것이 사실이다. 여자면 누구나 다 '여자의 감'이라는 편리한 스킬을 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일하게 '남자의 감' 사용자는 나 하나 뿐. 하지만 여자의 감에 비해서 그 정확도가 매우 떨어진다. 나도 고레벨 스킬을 배우고 싶다고. 생존자가 난파선 내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전혀 부정할 수 없다. 그건 나 뿐만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모두가 마찬가지. 어찌해야 좋을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난파선 내부로 다시 들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낀 나는 유아 선배에게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장소를 묻는다. "유아 선배. 어느 곳에서 그 울음 소리가 났었나요?" "몰라... 어디서 들려 오는지 살펴볼 겨를도 없이... 도망쳤으니까." "그럼 층수라도 알려주세요." "너, 설마 난파선에 다시 가려고?" 유아 선배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진다. 유령이 사는 곳에 뭐하러 자처해서 가냐는 듯이 질책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사실 유령이든 뭐든 일단 무조건 다시 가봐야 한다. 진짜로 유령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생존자면 구해야 되고. 행여나 사람 울음 소리가 아니라 동물의 울음 소리라고 판명이 난다면 그 동물을 난파선 바깥으로 내쫓아 숲속으로 돌려 보내면 된다. 내가 가장 크게 걱정하는 것은 바로 불확실한 불안요소 덕분에 지금 난파선 탐험이 지체되고 있는 현상이다. 난파선 탐험을 다시 재게하기 위해서라도 울음 소리의 정체를 밝혀내야 하는 것은 어찌보면 필수적인 과정 중 하나. 고개를 끄덕이며 유아 선배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다. "그렇다고 이대로 난파선을 버리고 갈 수도 없으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난파선에는 우리들일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는 물건들이 매우 많이 존재한다. 제 2차 난파선 탐험대 원정길을 결성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준 재료이기도 한 피아노 줄이라든지 휴지나 양초, 그리고 식수를 넣고 다닐 작은 가방이라든지 여성용 의류, 속옷 등등. 그런데 이런 물건들을 고작 유령(물론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정체를 모르니까 일시적으로 유령이라고 부르겠다.)때문에 이런 메리트들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다. 한숨을 내쉬면서 결국 자신이 있던 층수를 알려주는 유아 선배. "... 최하층에서 3개층 올라가면 돼." 나와 체리가 조사를 하고 있던 맨 바닥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만약에 사람의 울음소리라든지 인기척이 느껴졌다면 우리들에게도 아주 희미하게나마 들렸어야 했는데. 역시나 유아 선배가 잘못 들은 것일까? 아니면 유아 선배와 세린에게만 들렸던 것일까? 흐음... 미스테리하다. 정말로 유령의 소행은 아닐테고. 어째서 특정 인원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일까. 차라리 유아 선배 혼자만 그 소리를 들었다면 '선배가 너무 겁을 많이 먹어서 환청을 들은 것일지도 몰라요. 하하하.'라며 웃어 넘길수도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유아 선배가 삐졌을지도 모른다는 부작용이 적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유아 선배 뿐만 아니라 세린, 그리고 노아 교수님 등등 나와 체리 조, 아리아와 세리아 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 소리를 들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기이한 현상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가 한 순간 동시에 체험한 비과학적인 현상. 이걸 말로 풀어서 설명하기에는 상당히 많이 부족하리라 본다. 역시나 이런건 직접 체험해야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겠지. ============================ 작품 후기 ============================ 사색소녀 4회를 쓸 차례였는데, 깜빡하고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요새 들어서 낮잠이 많아졌더군요. 왠지 낮잠은 자고 나서 일어나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낮잠 잘 시간에 무한도전이나 볼 걸 ... ㅜ_ㅜ 212화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계세요. 다들. 제가 우선 한번 갔다 올게요." "혼자 가는거야?" 누나의 질문이었다. 일단 유령이 믿고 있다는 절대 신봉자이기도 한 유아 선배와 세린은 데리고 가기에는 무리가 있고... 아. 노아 교수님도 마찬가지다. 세리아나 체리도 앞서 언급한 3명과 비슷비슷하기 때문에 차마 데리고 가기에도 조금 그렇고. "확인만 하고 돌아오는 거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거야." "그래도 혼자서 확인하는 것 보다 여러 사람이 같이 가서 확인하는게 좋잖아." "그렇긴 하지만..." "일처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이 누나가 지원할게." 손을 번쩍 들면서 명랑 상큼 쾌활하게 지원하는 누나의 말에 지아 선생님 역시도 손을 들면서 말한다. "3명이서 간다면 더 빠르겠지." 지아 선생님에다가 나, 그리고 누나라... 한명이서 최하층 3층을 전부 다 돌아볼 수는 없고. 3명이서 분담 업무를 하게 되면 괜찮을거라 생각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럼 한명만 더 지원을 받고 4명이서 2개 조로 쪼개어 수색해보죠. 엘리." "...?" "너도 같이 가자." "o.k." 역시나 무인도의 세계에서 어떤 의미로 절대 강자인 엘리.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한다. 이로써 나와 엘리, 그리고 지아 선생님과 누나. 총 4명이서 난파선에 거주하고 있는 유령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한 출발 준비를 하게 되었다. 급하게 결성된 고스트 버스터즈... 가 아니라. 생존자(일지도)를 찾기 위한 수색조가 결성되었다. 짐승의 울음 소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안전을 고려해서 누나와 엘리를 같은 조에 포함시켰고, 그리고 나와 지아 선생님이 같은 조가 되었다. 나와 엘리가 같은 조로 편성되면 누나와 지아 선생님 조가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일부러 엘리와 나를 가르게 되는 인원 편성을 짠 것이다. 지아 선생님과 누나가 준비되는데로 바로 출발하기 위해 나 역시도 확실한 준비를 하고 있다. 신발끈을 다시 한 번 조이고, 허리춤에 있는 나이프의 날이 제대로 살아 있는지 확인해보는 꼼꼼한 준비성을 발휘하고 있던 와중에. 유아 선배와 세린이 나에게 은근슬쩍 다가온다. "... 미안." 갑자기 사과하는 유아 선배의 말. 왜 뜬금없이 나에게 사과하는 것일까.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유아 선배를 바라보며 사과에 대한 진의를 묻는다. "왜 갑자기 사과하시는 건가요?" "... 원래 나하고 세린이 갔어야 했는데, 지아 선생님하고 유린이 가는 거 같아서." "그래서 사과를 하는거야..." 유아 선배와 세린이 각자 말을 한다. 사실 그녀들의 말 그대로 무슨 위험한 일이 있을 거 같으면 가급적 유아 선배와 세린, 엘리와 나 이렇게 베스트 멤버로 조를 편성하는 것이 거의 습관화가 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유아 선배와 세린이 빠지게 되었고, 조 편성에 꽤나 난항을 겪었던 내 모습을 보니까 양심에 찔린 것인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사과를 하러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난 그리 크게 신경쓰고 있지 않는데. "괜찮아요, 선배. 그리고 세린, 너도 마찬가지야." "그래도..."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잖아. 사람마다 약점이 있으니까. 그리고 죽는 것 보다도 더 싫어하는 일도 있기 마련이고.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심각한 표정으로 사과 안해도 돼." "......"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무사히 돌아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혹시나 우리들이 없는 사이에 베이스 캠프에 다른 사건들이 벌어질 가능성도 크니까 여기를 지켜주면 되는거지. 그걸로 합의 본 거다. 알았지?" "... 알았어." "유아 선배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으, 응." 사실 남을 위로하는 일은 그다지 체질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는 일이 더 많았지, 내가 남을 위로해야 하는 상황은 별로 없었으니까. 생각을 해보면... 무인도에 처음 표류되었을 때 내가 노아 교수님을 위로했던 적이 있었긴 하지만, 그건 위로라기 보다는 삶에 대한 목표를 심어주었을 뿐이고. 타인이 풀죽은 상태에서 기운을 복돋아주는 일은 나보다는 우리 누나가 더 전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고 난 이후에 집합장소인 모닥불로 모이기 시작. 엘리는 그다지 챙겨갈 것이 없다는 듯이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초호기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엘리." "...?" "굳이 말할 필요성은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초호기는 안 데려 갈거야." "why?" "그야 당연하지. 초호기까지 신경써줄 여유는 없다고. 초호기는 세리아하고 체리한테 맡겨두고. 자." "......"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푹 숙인다. 또 위로해야 하는 것이냐.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정말 남을 위로하는 데에는 천부적이라고 할 정도로 소질이 없다니까 그러네. 이제 그만 이런 시련 좀 내려주지 말아주세요. 하늘이시여. 우리들 근처에 있던 체리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엘리에게 초호기를 건내 받는다. 간신히 엘리의 악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초호기가 작은 입으로 '야옹~ 야옹~'하는 소리를 내면서 체리의 품 안에 안긴다. 그렇게나 좋은거냐. 에바 초호기. 뭐... 내가 초호기의 입장이라고 해도 귀찮게 하는 엘리보다는 초호기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체리가 더 좋을지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자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부럽다. 고양이 팔자가 상 팔자라고 하더니만. 부럽다. 정말로 부러워. "체리야. 초호기 잘 맞아두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 "네에..." "특히나 노아 교수님한테 좀 부탁해서 유아 선배하고 세린 좀 위로해달라고 말해줘. 알았지?" "무슨 일... 있었나요?" "그냥. 사소한 일이 조금 있었어." 나에게 있어서는 사소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본인들에게는 아닐것이다. 이런건 역시나 선생님에게 맡겨야지. 같은 학생의 입장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까. 그나저나 왜 이리 오래 걸릴까. 지아 선생님하고 누나. 도대체 무슨 준비를 하길래. 혹시 갑옷이라도 만들고 나오는 거 아닌가 할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우리들 왔어." "왜 이리 늦은거야." 누나가 빙그레 웃으면서 내 질책에 대한 해명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여자는 여러가지 준비할 것이 많으니까." "화장이라도 하고 온 것도 아니면서 그런 핑계를 내뱉다니." "뭐야. 나 혼자만 늦은 것도 아니잖아. 지아 선생님도 늦었는 걸. 왜 나한테만 뭐라고 그래?" "알았어. 늦은 건 그렇다고 치고. 이제 완벽하게 끝났지?" "그러엄~ 지아 선생님도 곧 오실거야." 어떤 의미로 '만능 핑계'이기도 한 '여자는 준비할 게 많아서.' 스킬을 누나가 발동시킨다. 광역 마법의 효과 덕분에 다리에 힘이 빠진다. 이럴줄 알았다면 나도 조금 여유를 부리며 모닥불로 올 걸. 앞으로 여자친구가 생겼을 때는 이런 지루한 기다림을 당하지 않도록 노력해야지. "미안. 오래 기다렸지?" "아니요. 지아 선생님. 방금 나왔어요." 마치 다 같이 이제 막 모닥불로 나왔다는 듯이 말하는 누나. 철판도 이런 철판을 깔고 핑계를 둘러데다니. 내 누나지만 정말 대단하다. 앞으로 누나와 결혼할 형님이 절로 걱정된다. 왠지 하루하루를 소주로 보내실 거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그래도 누나랑 같이 지내면 재미는 보장되니까 스트레스를 받진 않을 것이다. 다만 너무 장난끼가 많아서 귀찮다는 거 빼고는. 그러니까 미래의 형님. 넓은 아량으로 우리 누나와 잘 지내세요. 알고 보면 괜찮은 여자니까요. "그럼 출발해볼까요." "유령 사냥을 나가보자~!" "... 누나. 유령이 아니라 생존자 수색이라니까." 귀신이나 유령을 전혀 믿지 않는 누나가 자기 입으로 '유령 사냥'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이 조사대에 참가한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나 본능에 충실한 우리 누나답다. 난파선 내부로 진입하는 데에는 일단 별 문제가 없었다. 구멍이 뻥 뚫려버린 난파선의 바닥을 통해 최하층으로 진입. 나와 체리가 조사했을 때와 같이 바닷물이 바닥에 가득 차 있는 상황에서 각각 바지와 치마를 걷어 올리고 상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걸어간다. 양초를 들고 제일 먼저 앞서고 있는 내가 계단을 발견하자마자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저기에 계단이 보여요." "그럼 이대로 3층까지 올라가면 되는거니?" "네." 지아 선생님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마치 누군가에게 속삭이듯 말하기 시작한다. "정말로 유령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글쎄요. 그치만 적어도 지금 상황에선 유령보다는 생존자의 증거라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지만요." "그럼 왜 생존자는 난파선 내부에서 울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니?" "그야 뭐..." 지아 선생님의 말을 듣고보니 조금 이상하긴 하다. 왜 난파선에서 울고 있을까? 아직까지 유령의 정체가 생존자인지 아닌지는 확인하지 못한 상황이지만, 만약에 생존자라고 가정을 해보고 지아 선생님의 말을 곱씹어 적용시킨다면... ... 아무리 생각해도 울음의 의미를 모르겠다. "지아 선생님도 듣지 않으셨나요? 그 정체불명의 울음 소리." 누나가 확인 차원에서 지아 선생님에게 되묻는다.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과정에서 지아 선생님의 대답이 들려온다. "나도 그 자리에 같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사람의 목소리 쪽에 많이 가깝다고 보았거든." "그렇다면 역시나 생존자?"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그렇게 생각이 돼. 하지만 장담은 못하겠어." 지아 선생님의 의미심장한 말을 끝으로 드디어 계단에 도착하게 된 우리들. 엘리는 여전히 우리들이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래봤자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지만 말이다. 엘리는 유령이니 뭐니 하는 그런 것에 무서워할 녀석이 아니기 때문에 그 울음 소리를 들었다고 해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가서 정체를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그 울음 소리의 근원지가 동물이라면 사냥을 할테고. 가끔 엘리의 이런 담력이 부러워지는 경우도 종종 있긴 하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 사실 나라고 전혀 무섭지 않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인간인지라 정체를 알 수 없는 굉음을 들으면 우선 미약하게나마 겁을 먼저 먹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 혼자 남자니까 그렇게 할 수도 없고. 이 놈의 자존심이라는 녀석 때문에 '무서워!!'라고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다. 아... 남자로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힘들구나. ============================ 작품 후기 ============================ 사람에 따라서 무서운 걸 싫어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공포영화 같은 걸 잘 못 보거나 그런 거 말이죠. ... 참고로 저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_^;; 213화 터벅터벅. 철골 구조로 되어 있는 앙상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최하층에서 벗어나 2층, 그리고 뒤이어 도착한 3층. 저번에 나와 아리아, 그리고 세린이 제 1차 난파선 탐험대를 결성한 뒤에 왔을 때 마주했던 폭풍우 탓에 난파선이 조금 기운 상태인 탓에 약간의 경사가 있는 비탈길을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평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얼마나 오래 걸리나요?" "소리가 들린 장소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묻는거니?" "네." 5분 정도 걸어가던 와중에 내가 지아 선생님에게 묻자, 선생님이 별다른 고민조차 하지 않은 채 간단하게 말한다. "앞으로 걸어서 5분만 더 걸어가면 나올거야." "배 한 가운데였나요?" "아니. 조금은 구석진 곳이었어." "음..." 생각을 조금 더 해보자. 사실 난파선에서 생존자가 살아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 이 어두운 환경에서 한달의 기간동안 계속 머물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되고... 아니면 무인도에 떠내려 왔다가 우리들처럼 우연히 난파선을 발견해서 들어왔다는 말을 적용시켜 본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긴 하지만. 역시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왜 '울고 있다.'라는 소리가 들려온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무슨 슬픈 일이라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같이 지내오던 사람이 죽었거나? "... 모르겠어." "뭐가 모르겠다는 거야?" 옆에서 걷던 누나가 내 혼잣말을 엿들었는지 물어온다. "아니, 그냥... 만약에 생존자라는 것을 놓고 생각했을때 왜 그 자리에서 울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보고 있었거든." "그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을 알 수가 없어서." "사람이 운다는 행위는 그리 드문 현상이 아니잖아. 기쁠때나, 슬플때나, 아니면 하품을 할 때나 눈물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생리 현상이니까." "그렇긴 하지만..." 기뻐서 우는 것은 통곡 수준의 눈물을 흘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냥 살짝 눈가에 이슬 맺히듯 눈물이 나오는 것일 뿐. 하품을 할 때 흘리는 눈물 역시도 마찬가지다. 진짜로 통곡 수준으로 우는 것은 슬플 때밖에 없을 것이다. 소중한 사람이 목숨을 다 했다든지,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해서 안타까운 마음에 운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결과적으로 뭔가 엄청난 상심을 당했기 때문에 울고 있다는 행동이 외부로 표출된 것이고, 그 덕분에 우리 무인도 멤버 중 가장 겁쟁이이기도 한 유아 선배와 세린이 잔뜩 겁을 먹고 '유령이야!'라고 외치면서 순식간에 유령은 존재한다는 주장을 펼치게 된 셈이다. 사실 나도 누나와 마찬가지로 내 눈을 통해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현실 직시형 인긴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비과학적인 현상을 목격한 적도 없고 말이다. 물론 인간이라는 존재가 알고 있는 범주 내의 지식들은 넓디 넓은 우주를 생각해보면 발톱의 때만도 못한 수준일 것이다. 때로는 인간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알고보면 거짓으로 판명나는 경우도 한 두번이 아니니까. 그래도 아직까지 나는 과학적인 근거를 많이 신봉하고 있는 현대 사회의 문명인이기 때문에 이런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누나의 영향도 조금 컸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렇다. 복도를 걸어간 지 5분 정도가 흐른 시간. 지아 선생님의 말 그대로라면 지금 이 곳에 그 정체불명의 울음 소리가 들려와야 정상일 것이다. ... 하지만 들려오지 않는다. "이상하다. 여기가 아닌가?" 누나 역시도 정체불명의 울음 소리를 들었던 증언자 중에 한명이기 때문에 팔짱을 낀 채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엘리는 그저 멀뚱멀뚱 제자리에 서서 누나와 지아 선생님의 대답을 기다릴 뿐. 나 역시도 그녀들의 대답을 기다리는 방법밖에 별 다른 행동을 취할 수가 없었다. 수상한 현상을 직접 경험한 이 둘이 앞으로의 지시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무턱대고 이쪽으로 가자! 저쪽으로 가자! 라는 말을 함부로 할 수는 없다. 고민중이던 지아 선생님이 벽면에 손을 집어본 뒤에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 과연. 그런 것이었구나." "무슨 말씀이신가요? 지아 선생님." "유에. 내 말 뜻을 알고 싶다면 벽에 손을 대봐." 여전히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는 지아 선생님. 아무튼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손을 갔다 대본다. 그러자... "... 선생님의 감이 맞았네요." "그렇지?" 지아 선생님이 작게 웃어 보인다. 하지만 그 웃음의 이유는 기쁨이라는 것 보다 긴장감을 완화하기 위해 억지로 지어 보이는 미소일지도 모른다. 손을 대자마자 느껴지는 것은... ... 바로 진동감. 현재 우리들이 서 있는 난파선이 거친 바람에 휘날리며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는 상황을 의미하는 진동이 아니다. 실제로 날씨는 굉장히 맑고, 구름 한 점 없는 쾌지나 칭칭 나네 날씨를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날씨적인 외부 요소가 배를 흔들고 있고, 그 덕분에 지금 이렇게 손바닥에 진동이 느껴진다고 말하기에는 심하게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진동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진이 일어나서? 아니. 그것도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다. 벽면에 진동감이 느껴질 정도라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서 있는 장소에서도 지진이 일어났음을 진작에 느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달동안 무인도에서 지내온 내 경험에 의하면 이 곳에서 지진 활동이 일어난 적은 한번도 없다고 한다. 물론 확인 차원으로 누나에게 부탁해서 엘리에게 물어보는 것도 잊지 말도록 하자. "누나." "왜?" "엘리한테 지금까지 무인도에서 지내오며 지진이 일어난 적이 있었는지 물어봐줘." "알았어. 잠깐만..." 긴 장문의 영어를 내뱉으며 엘리에게 내 질문을 건내는 누난. 잠시 뒤. 엘리의 고개가 좌, 우의 방향으로 절래절래 저어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굳이 내가 말 안해도 알겠지?" "응. 충분해." 누나가 살짝 어깨를 으쓱 해보이며 말한다. 지난 3년간 지진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소리는 이 무인도가 위치한 장소가 지진 활동이 활발히 일어나는 지역은 아니라는 소리일테고. 만약에 일본처럼 지각변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면 커다란 지진은 무리라고 하더라도 작은 지진 정도는 많이 일어났어야 정상이다. 최종적으로 지진도 아니고, 날씨도 아니다. 외부적인 환경요소를 제외하고 이 벽면이 흔들리는 이유는... ... 소리의 영향이 클 터. "이 안 쪽에서 소리가 들린다는 뜻이겠죠?" 확인 차원으로 지아 선생님에게 다시 한 번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의견에 동종하는 지아 선생님. "그래. 분명 이 안이야." "하지만 사람의 목소리로 벽면이 흔들릴 정도의 소음을 유발시킬 수 있나요?" 이번에는 누나의 질문이었다. 확실히 누나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철문 벽을 진동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 그러나 이번에는 지아 선생님도 잘 알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어 보인다.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어. 그러나 내 생각은 대강 이렇게 돼. 우선 첫번째. 난파선이 여기저기 파손된 흔적이 많이 보이잖아. 그렇지?" "네." "전체적인 구조가 많이 허약해진 여객선의 벽면이 아주 미세한 진동 원인에 의해서도 흔들릴 정도로 약해졌다는 가설도 있을 수 있어. 실제로 군데군데 녹이 슨 곳도 있고, 금새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많이 파손된 바닥이나 벽면 같은 것도 보이잖니." 지아 선생님 말 그대로 이 난파선 내부는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위험한 구조물이라고 불려도 좋을 만큼 많이 불안정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난파선 탐험대 제 2차 원정길을 최대한 빨리 진행시키고자 발걸음을 재촉하며 온 것이었다. 만약에 난파선이 우르르 하고 무너진다면, 안에 있던 다수의 생활 필수품 같은 것들도 같이 파손되거냐 묻혀서 쓰레기가 되기 때문에 난파선이 무너지기 직전에 와서 필요한 물품들을 미리 다 외부로 실어 나르고자 하는 것이 이번 원정길의 가장 큰 목적이다. 여전히 벽면에 손을 대며 진동을 느끼던 누나가 지아 선생님의 말을 재촉한다. "첫번째 가설도 있다면 두번째, 세번째 가설도 있단 말씀이시죠?" "그래. 내가 생각한 두번째 가설은 이거야." 라고 말하면서 양초를 살짝 천장 부분까지 올려보이는 지아 선생님. 그녀가 양초불을 밝히자, 그 곳에 적혀있던 팻말의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기관실이라고 적혀 있는 3글자. "대충 무슨 뜻인지 알겠니?" "... 죄송합니다. 전혀 모르겠어요." 솔직하게 말하는 나. 기간실이라는 3글자로 지아 선생님이 내세운 두번째 가설을 추측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퀴즈 프로그램을 봐도 객관식 문제같은 것을 맞출 확률이 20%미만을 자랑하는 내게 있어서는 지아 선생님의 요구사항을 충족시켜드릴 수 없는 지적인 수준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건 조금 무리수였다고 보여진다. 참고로 주관식 문제는 전혀 맞춘 적이 없다. 내가 퀴즈 프로그램 같은 것을 자주 보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단 한 번도 맞춘 적이 없다는 사실은 남들에게 놀림감으로 치부당하기 딱 좋은 소재일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한번 맞춰봐야지. 내 말을 듣자마자 지아 선생님이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배려를 보여주신다. "기관실은 다른 장소에 비해서 그 공간의 규모가 굉장히 큰 곳이야. 그래서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작은 소음을 유발시키는 원인의 소리가 점점 확대되어서 기관실의 전체적인 공간에 영향을 미친다는 거 말이야." "저기... 선생님. 아직도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깔때기를 생각해보렴. 원뿔형의 끝부분, 그러니까 면적이 큰 부분 말고 작은 부분 말이야." "아, 그거요?" "깔때기의 면적이 작은 부분에 입을 대고 외치면, 큰 면적 부분으로 소리가 울려 퍼지지. 그거와 같은 효과야. 작은 소리라고 해도 그 소리를 크게 만들어주는 무언가를 통해서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지는 효과. 만약에 깔때기 원리와 같은 것을 적용시켜 본다면 사람의 목소리라고 해도 벽면을 울리게 만들 정도의 수준까지 커질 수 있어. 대표적으로 마이크와 스피커 같은 거. 가끔 행사 때 메인MC가 사회를 보는 경우가 있잖니. 그럴때 보면 다수의 스피커에 의해 멀리까지 MC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사실은 너희들도 잘 알고 있을거야." "그럼 기관실에 스피커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인가요?" "그건 모르지. 하지만 넓은 기관실에서 다수의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위해선는 방송 시스템이라든지 아니면 마이크와 스피커같이 작은 사람의 목소리를 크게 들려주는 무언가의 장치가 있을 거야. 그 물건이 있기 때문에 작은 울음 소리라고 해도 크게 들릴테고, 그 영향으로 인해 지금 우리가 손을 대고 있는 벽면이 울리는 현상을 초래할 수도 있지. 이게 두번째 가설이야." "굉장하네요. 지아 선생님." "여자의 감이라고 할까." 유아 선배의 목소리를 성대모사 하면서 말하는 지아 선생님이었다. 그러자 누나가 '오! 똑같에요, 선생님! 유아에게 꼭 들려주고 싶을 정도로!'라고 말하며 잠시동안 지아 선생님이 보여준 성대모사 능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초 단편 소설 사색소녀 4회~ "사람의 인생은 수많은 만남과 이별로 만들어졌어." 날씨가 더운지, 화창한 햇빛 아래에서 가슴골을 그대로 드러낸 노출도 높은 패션을 선보이며 손부채질을 하기 시작하는 사색소녀의 다음 한 마디. "그러니까 너와 나 역시도 언젠가는 이별의 아픔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그러겠지. 아마도." "슬프지 않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막 답답하지 않아?" "내가 왜." "그야 나처럼 재미있는 사람과 친구인 것도 드문 일이잖아." "재미야 있긴 하지만." 동시에 귀찮다.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도 이 녀석만큼 재미있는 친구도 찾기 매우 힘들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조금 더 나와의 만남을 소중히 가지도록." 허리춤에 손을 올려놓고 자신의 가치를 한없이 드높이는 녀석을 보니 간혹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언제쯤 우리 둘 사이에게 방문할까. 이별이란 이름의 손님은. 그리고 아마 그 손님은... ... 불청객일지도 모르겠다. ~여담~ 무한도전을 보고 만남과 이별이란 테마로 사색소녀를 써봤습니다. 만남이 있으면 언젠간 이별이 있기도 하지요. 지금 간직하고 있는 만남의 시간은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나저나 예능 프로그램이면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군요. 무한도전이란 역시! 214화 지아 선생님이 내세운 첫번째 가설과 두번째 가설. 확실히 이 두개 다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보기 힘들다 무엇보다도 우리 멤버 중 가장 기초 상식이 많기로 소문난 지아 선생님이기도 하니까 그 신빙성은 더더욱 두터워진다. "혹시 지아 선생님." "또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니? 우등생." "다른 가설들도 있나요?" "그럼. 있지." "어떤 건데요?" "앞서 말한 두 가설들은 생존자, 혹은 동물과 같이 작은 소음을 내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전제로 가정을 하고서 내새운 이론들이야. 그러나 세번째는 다르지." 라고 잠시 뜸을 들인 지아 선생님이 약간 목소리 톤을 낮추면서 말한다. "마지막은 '유령' 때문에 이 진동이 발생한다는 가설이야." "... 상당히 비과학적인 근거네요." "그래서 일부러 너희들에게 말하지 않은 점도 있지만." 마지막 가설은 일부러 우리들을 웃기기 위해 준비했던 것일까. 뭐, 그래도 앞서 언급했던 두 가설들 역시도 꽤나 높은 신빙성을 자랑하고 있었기에 마지막 가설은 지아 선생님의 애교로 봐줄 수 있었다. "그럼 슬슬 들어가 볼까요?" "렛츠 고, 고, 고!" 기운차게 대답하는 누나. 다 좋은데, 왠지 모르게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이 어린애 같은 태도는 조금 고쳐줬으면 좋겠다. "누나. 이럴때는 진지하게 임해줬으면 하는데." "괜찮아, 괜찮아. 인생은 포지티브 마인드로 살아가는 것이 제일 좋다고들 하잖아. 네거티브 마인드는 버리고 긍정적으로 생각을 고쳐 먹으면 슬픈 일도 기쁘게 느껴진다고." "아니. 슬픈 일이 기쁘게 느껴지면 안 되잖아." 누나의 포지티브 마인드를 초상집에 적용시키면 아주 큰일날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슬퍼해야 할 장소에서는 슬퍼해야 하는 것이 예의범절이잖아. 그런데 장소 구별하지 않고 시도때도 없이 '깔깔깔!'하고 웃으면 곤란하다. 모 티비 프로그램 중 1분 토론이라는 곳에서도 진지하게 서로 토론하고 있는데 깔깔깔 웃어대는 말도 안되는 행동을 보여준 사람이 있었긴 하다. 지금도 매우 욕을 먹고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어쨌든 잡담은 이 정도로 마치고 드디어 기관실 내부로 진입. 최하층과 마찬가지로 꽤나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거대한 규모의 공간이 어둠만을 가득 채운 모습으로 우리들 앞에 등장한다. "... 무지하게 어두워 보이는데." "그 말에는 나도 공감." 모처럼 누나의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정말로 어둡다. 매우. 어둡다. 정말로 어둡다. 넓은 공간에 펼쳐진 칠흑같은 공간 속에서 고작 양초의 불빛 하나의 의존한 채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둡다. 지금 이 기분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빛의 라이트, 어둠의 다크. 그것은 운명의 데스티니. 음. 정말 훌륭한 문구다. 누가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노벨 문학상을 타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문장 표현력 아닌가. 같은 의미의 반복을 통한 강조법. 그리고 함축적인 의미를 담은 뛰어난 묘사력. 마지막으로 한글과 영어의 조합. 이것은 곧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운명의 데스티니 같은 만남이다. 훌륭하도다. ... 라는 농담도 정도껏 하고. 지금은 이런 말도 안되는 농담을 스스로 할 여유는 없지 않은가. 우리들이 처한 상황을 고려해야지, 현실도피하지 말자. "지금 소리 같은거... 들리시는 분?" 신경을 곤두세우며 지아 선생님과 누나에게 물어본다. 그러자 들려오는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지아 선생님. "아니. 전혀. 나한테는 아직 아무것도 안 들려." 그리고 누나. "우리 발걸음 소리밖에 안 들리는데?" "나도 마찬가지야." 누나의 말에 이어 나도 딱히 특이한 소음이 들리거나 하지 않는다는 뜻을 내비친다. 우리가 이 기관실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일부러 소리를 죽인 것일까? 자기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 할 무슨 이유라도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것으로 정체불명의 존재는 더더욱 수상해지고 있었다. 생존자라면 우리들의 인기척을 느끼고 구조해달라고 말하든지 아니면 자신이 여기에 있다고 크게 외치거나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일절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들이 들어옴과 동시에 경계 태세를 높인 듯한 느낌이랄까. 그런 기분이 든다. 확신할 수 없지만, 일단 나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여자의 감 보다도 훨씬 더 부정확한 남자의 감. 그래도 내 스스로 어느정도의 신빙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의 감을 믿어보고 있다. 아니면 혹시 사람이 아니라 동물인 것인가. 동물은 본능적으로 누군가 자신의 영역에 침입하게 되면 우선 경계를 한다. 절대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을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생존자, 즉 사람일 가능성보다 동물일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지금까지 나의 개인적인 생각들을 종합해서 모아놓은 결과를 나열해봤을 뿐이므로 신빙성은 많이 떨어진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우리들의 출연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들 역시도 행동에 조심을 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부터는 가급적 떨어지지 마세요. 누나, 엘리한테 후방을 맡아달라고 해. 그리고 지아 선생님하고 누나는 저와 엘리 사이에 서고요. 제가 앞장설테니까 제 등만 보고 따라오세요." "응." "알았어." 누나가 엘리에게 내가 전하고자 하는 말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나는 천천히 허리춤에 위치한 나이프를 꺼내든다. 언제 누군가가 달려들어도 즉각적으로 방어와 공격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까지 대비를 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누나에게서 내 지시를 전해 들은 엘리 역시도 허리춤에 있는 나이프를 꺼내들며 시야의 방향을 뒤쪽으로 돌린다.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절대로 당황하지 말고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야 하는 상황. 최대한 빨리 반응할 수 있도록 누나와 지아 선생님의 경계 방향도 알려주며 전진에 전진을 거듭한다. 조심스럽게. 최대한 신중을 기해서... ... 라고 생각하던 찰나에. "에, 엘리?!" 갑자기 후방에 있던 엘리가 어디론가 뛰어가는 게 아닌가. 놀란 누나가 엘리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워낙 엘리의 움직임이 너무 빠른 탓에 누나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잠깐만! 엘리, 어디 가는거야!" 엘리가 향하는 방향으로 외치는 나. 그러나 내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무시하는 건지 들은 채도 하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우리가 왔던 반대 방향으로 뛰어간다. 기관실 바깥으로 나간 뒤에 코너를 돌아 모습을 감춰버린 엘리. 도대체 뭐지. 저 의미 모를 행동은. "어떻게 하지?" "...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왜 갑자기 엘리가 저런 행동을 하는 걸까." 평소에 침착하기로 유명한 지아 선생님도 엘리의 돌발 행동에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는지 나에게 묻기 시작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 역시도 패닉 상태다. 평상시의 엘리는 우리들의 말을 잘 듣는 아이인데, 왜 이제와서 저런 행동을 보이는 것일까.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라서 그런 것일까?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의 반항?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닐 것이다. 엘리와 같은 또래 아이들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상황도 상황인 만큼 굳이 내 말에 따르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엘리에게 사춘기라는 단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이 무인도에 머물고 있는 우리 전부가 다 알고 있는 기초 상식이기도 하다. 엘리 본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이니까. 빠르게 생각을 해야 한다. 엘리의 의미모를 행동은 둘째치고, 지금 우리들의 행동 방향을 잡는게 더 중요하다. 기관실 내부에 존재하는 정체불명의 무언가 혹은 누군가는 지금 우리들의 상황을 빤히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최대한 침착하게. 당황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을 골때리가 고민할 필요는 없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일을 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저희들도 바깥으로 나가죠. 기관실에 있는 것은 위험할지도 몰라요." "네 말이 맞아. 우선 이 곳을 나가서 생각해보자." 지아 선생님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와 같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누나도 별다른 반대 의사 없이 잠자코 우리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다.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기 보다는 우리의 동료이기도 한 엘리의 안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미련 없이 기관실을 벗어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패닉 상태에 접어든 지아 선생님과 누나를 데리고 일을 계속해서 진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녀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지금은 제정신이 아니다.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자처해서 위기상황을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가급적이면 안전지대로 가서 다시금 재정비를 하자. 그것이 현재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최선의 선택 사항인 것이다. ============================ 작품 후기 ============================ 평화로운 평일 오후입니다. =_= 215화 기관실에서 나오게 된 우리들.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엘리가 모습을 감췄다는 점이다. 4명에서 3명.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엘리가 이탈할 줄이야. 겁에 질린 유아 선배나 세린이 도망치는 일은 있을지 몰라도, 설마 그 엘리가 우리들의 포메이션에서 이탈할 줄은 정말 몰랐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 아무리 생각해도 추측을 할 수가 없다. "도대체 엘리는 어딜 간 것일까." "그러게요." 순차적으로 지아 선생님과 누나가 차례대로 말을 한다. 엘리의 의미모를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다는 말과도 같다. "누나. 엘리가 뭐라고 말하거나 하는 그런 거 없었어?" "이탈하기 전에 말이야?" "어. 아무런 말도 없이 뛰쳐 나갔을 그런 아이가 아니잖아." "만약에 내가 엘리의 말을 들었다면 이렇게 당황해 하고 있었겠니? 아무런 말도 없이 그런 돌발 행동을 하니까 나도 당황스러운 것이잖아." "... 하긴." 여전히 모르겠다. 어째서 엘리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 말이다. 고민하는 우리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엘리의 속마음을 알아본다는 것은 무인도에서 탈출하는 일 만큼으로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기관실 입구에서 자리를 잡고 가만히 대기하고 있던 우리들. "지아 선생님." "무슨 일이니? 유에." "혹시 지금이 몇시 정도인지 알 수 있을까요?" 무인도에서 유일하게 손목시계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단 2명. 지아 선생님과 노아 선생님. 그 중에서 우리들과 동반한 지아 선생님에게 현재 시각을 묻자, 선생님이 자신의 왼쪽 손목에 차여 있는 가느다란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신다. "오후 2시 3분." "그럼 13분까지 이 자리에서 기다렸다가 엘리가 안 오면 베이스 캠프로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이 곳으로 오도록 하죠." "그 이후로는?" "엘리를 찾아봐야죠.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는 편이 좋겠어." 10분 동안 엘리를 기다려보기로 한다. 혹시나 엘리가 다시 이 곳으로 올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일단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는 엘리가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고, 기관실에서 소리를 내는 의문의 근원지를 밝혀낸 뒤에 해가 저물기 전에 베이스 캠프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뜩이나 어두운 이 실내에 해가 저물게 되면 정말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찾아오기 때문에 지금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대에 베이스 캠프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충만하다. 잠시동안 엘리를 기다리는 사이에 머릿속을 정리해본다. 엘리의 돌발행동. 그 원인은 정말로... ... 귀신에게 홀려서 그랬던 것일까. 그렇다면 정말로 이 기관실 안에 있는 존재는 ... 귀신? 갑자기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진짜로 그런건 아니겠지? 아무리 나라고 해도 점점 이런 상황은 버티기 힘들다. 인터넷에 떠돌던 용어 중 흔히 말하는 '멘탈 붕괴'의 줄임말, '멘붕'이라고 하지 않는가. 나 뿐만이 아니라 그렇게나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던 누나도, 그리고 침착함의 대명사인 지아 선생님의 얼굴에도 서서히 '불안'이라는 두 글자가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위험하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로 위험하다. 마음 같아서는 베이스 캠프로 돌아가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수도 없는 상황. 엘리가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적어도 10분이라는 제한시간 범위 내 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 아. 진짜. 미쳐버리겠다. 일이 어쩌다가 이런 식으로 꼬이게 된 것일까. 속으로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인지 한탄하고 있을 무렵, 지아 선생님이 다급하게 나를 향해 목소리를 최대한 줄이면서 말한다. "누가 오고 있어." ...... "누가 오고 있다고요?" "그래. 발걸음 소리가... 들리잖아. 자세히 들어봐." 지아 선생님의 말에 따라 나와 누나도 온 신경을 청력 기능에 집중시켜본다. 또각... 또각... 희미하지만, 분명 사람이 걸어오는 소리가 명백하게 들려온다. 작은 통로같은 복도 내에 울리는 발걸음 소리. 동물도 아니고, 두 발로 걷는 사람의 인기척이 서서히 우리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들이 서 있는 장소 오른쪽 코너에서 들려오는 소리. 나는 다급하게 지아 선생님과 누나에게 코너를 도는 부분의 안쪽 벽에 붙어 있으라고 말한다. "가급적이면 움직이지 마시고. 그리고 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 소리를 내지 말아주세요. 숨도 조용히 쉬도록 노력하시고요." "너는 어떻게 하려고?" 누나의 질문이 들려온다. 방금 능력이 되는데로 소음을 없애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누나답게 내 말을 깔끔하게 어기면서 질문을 해온다. "나는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정체불명의 녀석을 환영해줘야지." "싸우겠다고?" "어쩔 수 없잖아." "귀신일지도 모른다고?!" "... 누나. 이제부터 다시 귀신을 믿기로 했어?"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고 하잖아. 오늘부터 유령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사실 나도 누나의 의견에는 어느정도 동조하는 바가 크다. 기관실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음. 그리고 마치 유령에게 홀린 듯한 엘리의 비상식적인 움직임. 그 모든 일을 이론적으로 해석할 수가 없는 현재의 이 상황에선 누나처럼 평소의 신념을 달리 먹는 수밖에 없을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조심해." "노력해볼게요." 지아 선생님의 응원 아닌 응원을 받으면서 다시금 나이프를 빼어든다. 옛날 영화 중에 고스트 버스터즈라는 영화가 있지 않은가.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워낙 유명한 영화라서 신세대인 나도 무슨 내용의 영화인지에 대해서 알고 있다. 진공청소기 비스무리한 것으로 유령을 빨아들이는 기계를 이용해 퇴마를 하는 주인공들의 활약을 담은 외국 영화.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나도 그 고스트 버스터즈의 주역이 된 듯한 그런 느낌이 든다. 사용하는 무기는 많이 다르지만 말이다. 또각. 또각. 또각. 발걸음 소리가 더더욱 선명해진다. 걸음걸이와 소리를 들어보자면 아마도 여자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나마 들짐승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하늘에 계신 높은 분께 감사드려야 하나. 그렇다 해도 여자라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여자들 중에서도 무서운 여자들이 한 두명이 아니니까. 예를 들자면 예신이라든지, 예신이라든지, 예신이라든지. 왠지 이예신만 언급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 그건 분명 착각일 것이다. 점점 크게 울려 퍼지는 발걸음 소리. 잠시동안 숨을 참고 있는지 지아 선생님과 누나가 긴장된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닫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최대한 그녀들만은 도망치게 만들어야 할텐데. 상대방이 인간인지 아니면 정말로 유령인지 조차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과연 내가 지아 선생님과 누나까지 전부 책임지며 보호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 집중하자. 유에. 무인도에서 그동안 수많은 위기를 극복해 왔는데, 겁먹을 필요 없잖냐. 배고픔과 추위와도 싸워 왔고, 거대 멧돼지와도 정면승부를 벌인 적도 있다. 불어난 내천 위를 나뭇가지 위로 아슬아슬하게 건넌 경험도 있다. 나도 나름 산전 수전 공중전 우주전까지 다 겪은 사람이라고. 이대로 쫄은 채 저항한번 해보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은 사양이다! 카운트 다운. 3. 2. 1. 제로! ============================ 작품 후기 ============================ 확밀아의 순삭 현상은 여전하더군요. 그리고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아토피 약에 들은 수면 성분 덕분에 오늘 하루종일 잠과 친밀도만 높이고 있었습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약이 엄청 졸리더군요. 감기약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눕자마자 꿈나라 여행을 떠나는 신기한 현상! PS. 새로운 캐릭터 추가에 대해서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말을 아끼도록 하겠습니다. 216화 카운트 다운. 3. 2. 1. 제로! "으랴아아압!!" 최대한 자세를 낮추면서 나이프의 날을 바짝 세우고 상대편의 목 부근에 칼을 휘두른다.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공격.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공격이라고 평하고 싶다. 하지만 그 때. "...!!" "......" 나이프를 쥔 내 손은 상대방의 목 바로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고작 2~3cm의 거리에서 바로 멈춰버린 나이프. 알 수 없는 초자연 현상에 의해서 막힌 것이 아니다. 내가 내 스스로 공격을 중단했기 때문에 회심의 일격이 중단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스스로 공격을 중단한 이유는... ... 상대방이 내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상당히 독특한 환영법이네요. 유에 선배." "아... 리아?" "네. 보시다시피 아리아입니다만." 은발의 긴 머리카락을 뽐내며 자리에 서 있는 아리아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칫 잘못했다간 아리아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뻔 했기에 식은땀이 절로 흐르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미, 미안. 너일줄은 생각도 못해서..." "알았으니까 칼 좀 치워주세요. 불쾌하니까요." "알겠습니다!" 빛보다도 빠른 속도로 칼을 다시 허리춤에 위치한 칼집에 꽂아 넣는다. 아리아라는 말을 들었는지 누나와 지아 선생님도 코너의 벽 안쪽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우리들이 있는 장소로 몸을 드러내며 말한다. "다행이다. 난 또 귀신인 줄 알고..." "유린 선배. 귀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그거야 나도 알고는 있는데, 지금까지 알 수 없는 현상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어서 말이야. 아하하..." "알 수 없는 현상?" "난데없이 엘리가 우리들에게서 이탈하고 말았거든. 어디로 갔는지 원... 도통 찾을 수가 없어. 어떻게 하지?" "아, 그러고보니 제가 이 자리에 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어요." "그것?" "엘리에 대해서요." 엘리에 대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는 아리아가 이제야 떠올랐다는 듯이 우리들에게 서슴없이 말한다. "엘리는 지금 베이스 캠프에 있어요." "뭣이라?!" 언제 또 베이스 캠프까지 간 거냐. 귀여운 꼬마 숙녀 녀석. 아니, 그것보다도 왜 베이스 캠프로 갔지? 우리들과 같이 난파선 탐험을 하기로 계획되어 있던 거 아니었나? 갑자기 엘리의 속마음이 너무나도 궁금해지기 시작했지만... 역시나 예상대로 우주의 비밀보다도 더 신비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엘리의 마음을 추측하기란 아직도 나의 실력이 많이 부족해보인다. 앞으로도 많이 수행을 통해 정진하는 수밖에 관심법이나 독심술이라도 배우고 싶은 심정이다. 정말로. "어째서 베이스 캠프로 돌아왔는지에 대해서는 물어봤니?" 지아 선생님의 물음이었다. 그러자 아리아가 고민하면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기 시작한다. "아니요. 그 말은 들을 수 없었어요. 엘리 혼자서 베이스 캠프로 왔길래 이상하다 싶어서 일단 난파선 안쪽으로 다 같이 선생님하고 선배들을 찾으러 온 거죠." "다 같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이 난파선 안에 있단 말이야?" "네." "그런데 왜 넌 혼자 왔니?" "저 뿐만이 아니라 다 각자 난파선 내부를 흩어져서 찾고 있어요. 혹시 선배들하고 선생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해서 최대한 빨리 발견하기 위해 그런 식으로 나눴죠." "음. 그렇구나." 베이스 캠프는 한참 난리가 났었겠군. 게다가 한명 씩 조를 짜서 수색중이라면, 노아 교수님이라든지 세린이나 유아 선배. 이 3인방은 지금 쯤 벌벌 떨면서 난파선을 수색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혼자서 다른 일행들에 대한 걱정이 들 무렵, 아리아가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말한다. "소리가 나는 장소는 저 혼자서 수색을 담당했으니까 나머지 사람들은 괜찮을 거예요. 현재 알려진 위험지역은 여기밖에 없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그런데 잘도 네가 이 곳으로 지원했구나." 솔직하게 말한 나. 내 말을 들은 아리아가 당연하다는 듯이 한번 어깨를 으쓱 해보이며 대답하기 시작한다. "그나마 제가 제일 겁이 없잖아요." "갑자기 납득이 가기 시작했어." "기왕 저도 왔으니까, 소리의 근원지를 파악하고 베이스 캠프로 빨리 돌아가도록 하죠. 어때요?" "뭐... 그것도 좋겠지." 마치 토크쇼의 메인 MC처럼 유창하게 말하는 아리아. 이 녀석도 은근히 겁나서 빨리 일을 처리하고 베이스 캠프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왜 이리 보채는 거지. 기관실로 진입한 우리들. 아까와 같이 칠흑같은 어둠 속을 뚫고 한 걸음 씩 도착한다. 미세하게 들려오던 소리도 점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커지고 있는 상황. "다들. 소리 들려요?" 선두에 선 내가 뒤에 있는 그녀들에게 묻자, 지아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뭔가 '웅... 웅...'하고 울리는 소리인데." "아무래도 울음 소리라고 보기에는 조금... 이상하지 않아?" 누나 역시도 자신의 소견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확실히 나 역시도 지금의 소리는 사람이나 짐승이 내는 울음 소리라고 보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살아있는 생물이 낸다는 소리 치고는 지나치게 많이 울린다고 표현하고 싶다. 결국 생존자라는 가설은 이대로 무너지고 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선배. 저기 보세요." "어디?" "저기 벽쪽에요." 아리아가 손 끝으로 가리키는 장소를 바라본다. 양초로 벽을 밝히자, 크게 뻥 뚫린 벽이 보이는 게 아닌가. "운석이라도 맞았나. 이 정도로 구멍이 뚫리다니." 솔직한 감상을 약간의 비유적인 표현을 써가며 말하자, 지아 선생님이 벽의 건너편에 시선을 주면서 말한다. "과연. 소리의 정체가 이거였구나." "이거라니요?" "이 거대한 구멍은 최하층까지 연결되어 있어. 저기 보면 최하층 바닥에 구멍이 뚫려서 바닷물이 들어오는 흔적이 보이지?" "그러고보니..." "저 구멍을 통해서 들어오는 바닷바람이 거대하게 뚫린 구멍을 통해서 3층인 여기까지 바닷바람이 들어오는 거야. 그래서 기관실에서 웅웅 울리는 소리가 크게 났던 것이지." "오..."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 결국 아까 지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깔때기 원리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하층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2층, 그리고 3층까지 연이어 뚫린 구멍을 통해서 들어오며 바람소리가 크게 확대된 것이었다. 지아 선생님의 말 그대로 커다란 구멍에서 느껴지는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이 느껴지자마자 또 한번 '웅, 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것이 유령의 정체였다니. 괜히 힘만 빠지네." "유령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던 누나 치고는 꽤나 이질적인 반응이잖아. 그거." "그래도 없다고는 믿고 있었지만, 있는 편이 더 재미있잖아." "단순한 재미만을 위해서 유령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비과학적인 현상을 과학적으로 만들지 말라고 전 세계에 존재하는 과학자들의 비난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그것보다도 유령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다지 재미있는 요소라고 보기 힘든데 말이다. 역시나 누나의 개그 코드는 쉽게 어울려주지 못하겠다. 아리아 역시도 약간 흥이 깨진다는 듯이 바람에 휘날리는 자신의 은발을 매만지며 말한다. "고생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결말이 이거니까 사실 조금 실망감이 큰 것은 사실이네요."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아리아. 이것도 나름 자연 현상이 만들어 낸 것이니까 말이야.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자연님을 찬양해야지." "언제부터 자연의 맹렬한 신봉자가 되었나요? 유에 선배." "오늘부터." "정말 단순한 분이네요." "시끄러워." 누나나 아리아는 실망스럽다느니 뭐니 하면서 말하지만, 아마도 이 괴상한 소리의 정체를 듣고 제일 기뻐할만한 사람은 바로 유아 선배와 세린, 그리고 노아 선생님일 것이다. 유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제일 안도할 3인방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자, 이제 상황도 종료 되었으니까 다시 캠프로 가자고." 내 말을 끝으로 기관실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 정말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기이한 체험들을 겪은 하루였다. 3층에서 2층으로, 그리고 1층으로 내려온 우리들. 바닷물이 가득 차 있는 바닥을 건너갈 때는 역시나 각자 입고 있는 바지 혹은 치마를 살짝 허벅지 높이까지 걷어 올린 뒤에 바깥으로 향한다. "그나저나 정말 공포 체험이 따로 없네. 그렇지?" "누나. 그렇게 해맑게 물어 오면 누가 공포 체험을 하고 왔다고 생각하겠어." "그래도 나름 흥미 진진한 이야기 전개 아니었니? 나는 만족하는데." "아까는 실망이라며?" "그건 그냥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어." "어떤 식으로?" "사실 그 정체 불명의 구멍은 유령들이 힘을 모아 만들었던 작품인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 the end." "참으로 부지런한 유령들이고만. 그런 작업 실력을 가지고 있을 정도라면 훌륭한 노동자로 대접받겠어." "그렇겠지?" "그리고 누가 봐도 배가 난파될 당시에 벌어진 틈새로 보이잖아. 누가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고." "그럼 저것도 초자연현상이야?" "누나. 방금 내가 한 말 다 흘려들었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제서야 누나의 입이 다시 트이기 시작했는지 나에게 장난삼아 이런저런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다시 귀찮아질 무렵, 지아 선생님의 말이 들려온다. "이제 거의 입구에 다 도착했어." "아아~ 빨리 베이스 캠프로 돌아가서 샤워해야지." "샤워할 물이 어디 있다고." 마지막까지 누나에게 태클을 거는 것을 잊지 않는 나도 참으로 대단한다. 어느새 무인도에서는 태클 전문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니까 말이다. 어쨌든 간신히 베이스 캠프의 모습이 보이고, 그 곳에서 모닥불 근처에 오손도손 앉은 일행들이 우리들의 모습을 확인하자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도 노아 교수님이 지아 선생님을 와락 껴안으며 말한다. "다행이다... 전부 무사하셨군요." "무슨 소리야? 노아. 그리고 다들... 왜 그래?" 울먹울먹이는 눈초리로 우리를 바라보는 여성진들. 그 중에서 엘리의 모습이 보인다. "엘리. 무사했구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엘리가 마치 고양이처럼 기분 좋다는 듯이 더 쓰다듬어 달라며 나에게 매달린다. 작은 체구의 소녀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도의 미소를 짓는 나에게 세린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면서 말한다. "... 로리콘이다." "아니라니까." "경찰은 뭐하나. 이런 사람은 안 잡아가고." "그러니까 아니라고." 그래도 오늘은 세린의 태클마저도 정겹게 느껴진다. 이래야 우리 멤버들 답지. 암 그렇고 말고. "그런데 엘리. 왜 갑자기 혼자서 뛰쳐 나간거니?" 누나가 여지껏 우리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궁금증을 털어놓듯 엘리에게 직접적으로 묻는다. 그러자 엘리가 멀뚱멀뚱 우리를 올려다보며 장문의 영어 듣기 실력을 시험하기 시작한다. 아. 제발 그만해. 영어 울렁증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괴로운 말이란 말이다. 그래도 엘리가 우리들에게서 이탈했던 이유는 듣고 싶기 때문에 누나가 대신 해석을 해줄 때까지 기다려 보도록 하자. 인내심 하나는 자신 있으니까. 엘리의 말을 듣고 있던 누나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 나와 지아 선생님에게 설명을 해준다. "이상한 여자의 모습이 보여서 쫓아갔다고 하네요." "이상한 여자의 모습?" 되묻는 나에게 누나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 말한다. "응." "생김새가 어땠는데?" "그게... 은발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던데." "은발이라고?!"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리아와 세리아에게 쏠린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세리아가 아리아의 등 뒤에 숨자, 아리아가 약간 화가 난 말투로 우리들에게 말한다. "저하고 세리아 언니는 선배 일행들이 난파선으로 들어간 이후에 난파선 내부로 간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만." ... 뭐라고? 잠깐. 방금 아리아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뭔가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누나가 당황한 표정으로 아리아에게 묻는다. "아리아. 아까 네가 베이스 캠프에 있는 일행들이 우리들을 찾기 위해서 난파선 내부로 들어와서 각자 수색하고 있었단 말을 해줬잖아?" "그런 기억은 전혀 없는데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를 포함해서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엘리가 베이스 캠프로 돌아오고 난 이후로 이 캠프를 떠난 적이 없어요. 전부 다 유에 선배 일행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죠. 섣불리 움직이면 위험하고 판단이 들어서요." 순간적으로 누나의 말문이 막힌다. 지아 선생님 역시도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상황. 다시 한 번 정신을 차린 내가 아리아에게 재차 확인 차원으로 묻듯 말해본다. "... 아리아. 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들이랑 같이 기관실 안까지 갔었잖아? 기억 안 나?" "이상한 말을 하는군요. 유에 선배. 아까도 말씀 드렸다시피, 저는 여기에 계속 머물고 있었습니다. 난파선 내부로 들어간 적은 그 이후로 없었어요." ...... ........... ............... 생각해보자. 아리아가 스스로 우리들과 같이 기관실 내부로 들어간 적도 없다고 말하고, 심지어 우리들이 난파선 내부로 들어간 그 이후로부터 계속 베이스 캠프에 있었다고 했다. 엘리가 본 정체불명의 여자의 환영은 은발이었고. 그리고 우리들이 베이스 캠프로 복귀했을 때. ... 아리아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모닥불 근처에 앉아 있었다'. 그렇다고 본다면 도대체... ... 우리들과 같이 있었던 은발의 여자는 누구였지? ============================ 작품 후기 ============================ 원래 이런 이야기는 여름에 해야 제맛인데 말입죠. 217화 EX EP. 소녀의 과거 "역시 넓구나. 이 무인도..." 오랜만에 도착한 난파선 갑판 위에서 무인도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보던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려본다. 경치는 참 좋은데, 문제는 이 곳이 바로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라는 점일 것이다. 아니지. 우리 말고도 몇몇 생존자들이 난파선에서 표류된 채로 이 곳에 떠내려 왔으니까 무인도는 아닌 셈인가. 산장에서 머물고 있는 일행들 말고도 이예신이라는 이상한 여자도 있으니까. "서, 선배." 갑판 위로 모습을 드러낸 체리가 수줍은 얼굴로 나에게 말한다. "지아 선생님이... 슬슬 가자고 하셔서..." "알았어. 곧 내려간다고 전해줘." "네..." 소심한 성격은 여전하구나. 하기사. 저런 것도 개성이라 말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잠시동안 무인도의 모습을 더 바라본다. 체리처럼 야생이라는 단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자마저도 오랜 기간동안 무인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원동력은 아마도 무인도에서 생성된 유대감 아닐까. 덩치가 산만한 멧돼지나, 먹을 음식의 부족이나, 매번 예측할 수 없는 기상학의 변동속에서, 우리들은 살아남고 계속 살아남았다. 물론, 다른 생존자들이 우리처럼 무난하게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수순을 밟진 않았을 것이다. 분명 무인도에 떠내려오지 못한 채 바다 저 깊은 곳에서 삶을 마감한 사람들도 있을테고, 무인도에 표류되어 왔어도 적응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을 생존자들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런걸로 치자면 우리들은 운수가 좋은 편인가. 의학에 정통한 지아 선생님도 계시고, 아리아도 있으니까. 그리고 행동대장이라 불리는 유아 선배도 있고, 분위기 메이커라 불리는 누나에다가 연장자로서 보호자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노아 교수님, 그리고 가정적인 취미로 많은 도움을 주는 세리아나 체리까지. 아, 가장 중요한 엘리도 있다. 비록 우리와는 다르게 난파선에서 표류된 케이스가 아니지만, 3년이라는 상상조차 못할 시간을 무인도에서 보내온 경험자이자 무인도 생활의 대 선배, 엘리가 아니었으면 아마 우리들도 무인도에서 크나큰 위기를 몇번이고 겪었을 것이다. 아니, 살아있는 것 조차도 힘들었을테지. 엘리와의 만남은 우리가 무인도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전제조건 중 하나였을거라 생각된다. 그만큼 엘리란 존재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와 다르게 엘리같은 도우미와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아직까지 무인도에서 다른 생존자를 만나본 적이 없는 나였기에 잘 상상이 되질 않는다. 이예신이라는 여자가 있긴 하지만. 그 녀석은 뭐랄까... 다른 세상 사람같은 느낌이 들어서 예외로 치자. 오히려 무인도에 표류된 것이 녀석에게 있어서는 축복이라는 말을 할 정도였으니까. 세삼 엘리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며 난파선 아래로 내려간다. 산장으로 돌아가면 오랜만에 엘리와 같이 놀아주도록 할까. 매번 간식과의 친화력만 높이는 모습을 보니까 한창 뛰어 놀아야 할 나이에 감정변화가 드문 모습을 보면 가슴이 조금 아프기도 하다. "늦었네?" "생각 좀 할 게 있어서요." 한쪽 어깨에 무언가를 걸고 있는 지아 선생님. 보아하니 오늘 난파선에 온 가장 큰 목적물로 보인다. "원하시는 건 찾았나요?" "보고 있다시피." 라고 말을 하며 빨간색 십자가 표시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의료가방. 예전에 아리아와 세린, 그리고 나까지 3명이 난파선에 왔을 때 얻었던 난파선 내부 지도를 이용해서 구급실의 위치를 알아내고, 지아 선생님이 의료 도구가 있는지 확인을 해보자는 제안때문에 지금 이렇게 체리와 선생님을 데리고 난파선에 와 있는 것이다. "대부분 약품들은 사고 때문에 박살이 나 있긴 했지만, 그래도 간단한 의료 물품들은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래도 온 보람은 있었군요." "다치지 않는 게 최선이긴 하지만, 유비무환이라고 하니까. 치료 방안 정도는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편이 좋겠지." 그래봤자 지아 선생님이 근무하고 있던 양호실 만큼의 약 수준까진 보장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라 생각을 하기에 천천히 의료 물품들을 옮긴다. 체리 역시도 지아 선생님에게 건네받은 물품을 양 손 가득히 들고 있는 상태였기에 나 또한 바닥에 있는 상자 몇개를 든다. 남자가 여자 가는 길에 동반된 주 요인은 바로 '짐꾼'이니까. "그럼 가죠." 상자때문에 시야가 잘 보이진 않지만, 전혀 안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와 같이 앞장서는 나. 그리고 내 뒤를 체리와 지아 선생님이 순서로 따라오기 시작한다. 짐도 많고, 산장까지 가는 데에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자주 쉬면서 가는 중. 게다가 얼마전에 비까지 온 탓에 물이 많이 불어난 상태다. 그래서 평소와는 다른 루트를 택하고 걸어가는 와중에, 예상치 못한 것과 마주치게 되는데. "서, 선배!" 나무 기둥 아래에서 쉬고 있던 체리가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이야?" "저기... 뭔가 보여요." "뭔가가 뭔데?" "동굴같은 거... 아닐까요?" 스스로의 말에 질문을 던지는 체리의 한 마디.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체리가 앉아있는 쪽으로 다가간다. 지아 선생님 역시도 궁금한 모양인지 나와 같이 일어나 체리쪽으로 다가가는데. "... 진짜네." 무인도에서 아직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던 존재. 바로 동굴. 하나도 없을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단지 지금까지 실제로 우리가 두 눈으로 본 적이 없을 뿐. 멀찌감치 떨어진 위치에서 동굴의 모습을 보고 있던 지아 선생님이 바람에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을 가다듬으며 말한다. "저 동굴의 주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겠지." "두 가지요?" "생존자이거나, 아니면 멧돼지보다도 덩치가 큰 동물이거나."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곰 같은거." "... 위험하네요." 멧돼지는 어느정도 커버가 가능하다 해도, 곰은 상당히 위험하다. 멧돼지는 일자무식으로 그저 앞을 향해 달려드는 녀석이지만, 곰은 생각보다 영특한 동물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힘도 멧돼지에 비해 훨씬 쎄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까지 가졌고, 덩치 또한 어마어마한 녀석을 상대로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그냥 지나갈까?" "아니요. 선생님. 곰의 동굴이라면 더더욱 확인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어째서? 위험할텐데." "여기는 난파선과 우리가 머물고 있는 베이스 캠프를 왔다갔다 할 수 있는 루트 구간이에요. 그 위에 곰이 서식하고 있는 동굴이 있다면, 위험하잖아요." "최소한 확인 정도는 해봐야 한다는 뜻이구나." "위험한건 매한가지겠지만요."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지아 선생님과 체리에게 따라오지 말라는 손짓을 해보인다. "저 혼자만 가볼게요." "괜찮겠어?" "괜찮지 않겠지만, 선생님이나 체리가 동반된다면 오히려 보호해줘야 할 대상이 늘어날 뿐이고,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질 수 있으니까요." 한 마디로 말해서 '혼자가 편해.'라는 의미다. 곰이 있다면, 자력으로 도망칠 수 있고(물론 실험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아 선생님과 체리와 함께 있을 때보다는 쉬울 것이다.). 위험한 상황이 펼쳐진다 하더라도 나 혼자로 끝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최선의 시나리오라면, 아무도 살지 않는 동굴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겠지만. 뭐든지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확실하지 않다. ============================ 작품 후기 ============================ 이번 이야기는 엘리가 주인공인 이야기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제가 워낙 제목 짓는 센스가 없는 관계로 대충 있는 그대로 에피소드 제목을 지어봤습니다. ㅡ_ㅡ;; 그리고 EX가 붙는 에피소드는 외전격입니다. 본편 스토리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별개의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점 유의해서 봐주시기 바랍니다. PS. 코멘트로 확밀아 리플을 다는 건 죄가 아닙니다;; 저는 매번 후기란에 확밀아 이야기를 할 때도 있는걸요;; 너무 크게 신경쓰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_^a 218화 "어디보자..." 일회용 횃불을 만들고 천천히 동굴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곰이 출몰할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도주로를 확보해두는 센스도 잊지 말도록 하자. 무엇보다도 안전이 최우선이니까. 동굴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점점 안쪽으로 향하기 시작하는데.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 뿐이었다. "엄청 큰 동굴이네." 이 정도면 곰 정도로 덩치가 큰 생물이 살아도 별다른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아 선생님의 예측이 맞을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다못해 곰이 아니라 생존자라면 더더욱 좋겠지만. 하지만 아직까진 생존자의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이 산다는 그런 모습보다는 뭐라고 해야 할까... 야생 그대로의 모습? 아니지. 사실 야생 그대로의 모습이라 표현하는 것도 조금 웃기다. 왜냐하면 분명히 무언가가 이 동굴을 사용한 흔적이 명백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구석에서 망가져있는 거미줄도 증거 중 하나. 인적이 드문 동굴일 경우에는, 규모가 꽤 큰 축에 속하는 거미줄도 크게 망가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거미줄이 파손되어 있는 형태 또한 덩치가 큰 무언가에 의해 망가져 있는 것으로 추정되니까 말이다. 뭐, 그건 그렇다 해도. "불안한데. 이거." 일단 덩치가 큰 생명체가 동굴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다. 물론 그 생명체의 존재를 다이렉트로 본 것은 아니지만, 그에 합당한 증거물을 찾았으니까 대략 그에 준하는 업적으로 치면 좋지 않을까 싶다. 나도 모르게 다시 한번 도주로를 바라본다. 그래봤자 동굴 바깥으로 열나게 뛰어가는 게 전부지만. "후우..." 동굴 안의 음산한 기운이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깊게 다가온다. 그냥 바깥으로 나갈까? 어차피 무언가가 이 동굴에 머물렀단 사실은 확보했으니까. 여기서 더 무언가의 업적을 내기 위해 노력하다간 괜히 화를 당할 우려가 크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정말 대단한 감정이라고 생각이 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앞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욕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동굴 깊숙히 발을 들이내미는 순간이었다. "엇?!" 동굴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을거라 생각했던 날카로운 나이프의 궤적. 시퍼런 날이 사선을 그으면서 내 목 부근까지 다가온다. 필사적으로 최대한 왼쪽 발을 뒤쪽으로 빼며 무게중심을 옮김과 동시에 회피 동작을 시작해보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목과 몸통이 분리되는 마술을 직접 체험하게 될지도 몰라." "... 또 너냐." 이미 나이프의 칼날은 내 목 언저리까지 도달한 지 오래다. 바로 앞에서 멈추긴 했지만, 자칫 잘못하다간 저 여자가 날린 경고가 실제로 벌어지게 되는 사건으로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나름 운동신경에 자신을 보이고 있는 나였지만, 무인도에서 유일하게 상대하기 버거운 인물이라고 한다면 딱 한 명 존재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바로 이예신. "익숙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더니. 역시나였군." "......" 다시 나이프를 거둬들이며 자연스럽게 허리춤에 위치시킨다. 너무나도 익숙한 동작.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바라볼 정도였다. 이 여자. 예전부터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도대체 정체가 뭘까. 나이프를 다루는 솜씨도 그렇고, 성인 남성인 나조차도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월등한 운동신경과 동시에 감정조차 매말랐다. 도저히 평범한 여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 가정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핑계 하나만으로 모든 게 설명 가능할 정도의 범주를 이미 넘어선 비정상적인 인물이 혀를 차며 다시금 나에게 묻는다. "여기엔 무슨 일이지? 장난감." "언제부터 내가 너의 장난감이 된 거냐." 잊고 있었지만, 이 녀석은 나를 물건 취급한다. 실제로도 자신의 성욕을 채우는 도구로 나를 인식할 뿐이니까. 물론 여자와 관계를 가지는 데에 있어서 그리 큰 불만을 제기할 생각은 없다만, 그래도 최소한 인격 정도는 존중해줄 수 있잖아. 하지만 이예신이란 여자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제외하고 타인에게 인격을 존중해줄 거라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무인도에서 가장 무서운 여자. 아마도 이 녀석을 말하는 거겠지. "혹시나 곰 같은 위험 생물이 살고 있을까 확인 차원으로 왔는데." "그래? 그렇다면 헛수고 했군. 여기는 그런 장소가 아니니까 다시 돌아가." "... 그러냐." 아니. 곰보다도 더 위험한 생물과 마주쳤다고 말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기는 네가 사는 장소야?" "이런 습한 곳에서 살고 싶어하는 인간이 어디 있는지 궁금하군." 긴 흑발을 쓸어내리며 불쾌하다는 듯이 말을 받아친다. 하기사. 나 역시도 이런 어두운 곳에선 살고 싶지 않다. 차라리 움막이라도 지어서 바깥에 일조권을 보장받으며 사는 편이 훨씬 좋겠지. "그런데 왜 이 곳에 있는 거야." "꼬치꼬치 캐묻는 이유가 뭐지?" "궁금하니까." "시덥지 않은 이유로군." 인간의 호기심이란 원초적인 감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는 녀석의 발언이었다. 말해줄 생각이 없나. 뭐, 순순히 말해주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지만 말이다.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시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에. "... 알려저도 상관 없겠지." "뭐?" "아니. 오히려 알려줘야 하는 편이 더 좋을지도." 예상 외의 전개에 들어서고 말았다. 녀석의 성격을 고려해볼 땐, 분명 이런 친절을 배풀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조건 같은 거라도 있는 거냐?" "남의 친절을 고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자로군." "......" 졸지에 내가 나쁜놈이 되고 말았다. "이 동굴 끝에 뭐가 있는지 알아?" "막드른 길?" "내가 말을 잘못했군. 이 '통로' 끝에 뭐가 있는지 아나?" "통로라고?" 방금 저 녀석이 한 말을 유추해보면, 이 동굴은 끝이 막혀있는 형태가 아니라 뚫려있는 형식으로 생성된 자연 공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터널이란 느낌일까. 어쩐지 미세하게 통풍이 된다는 느낌이 피부를 통해서 전해진다 싶었다. "넌 가본 적이 있어?" "어떤 의미로 이 무인도에서 필수요소라 할 수 있는 것들이 있기도 하니까." "뭐...?" "궁금하면 나중에 가보도록." 이라는 제법 쌀쌀맞은 말을 늘어놓은 예신이 내가 왔던 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아마도 동굴 바깥으로 나가려는 심산으로 보이는데. "입구에는 내 일행들이 있어." "... 쳇." 사람과 마주치기를 싫어하는 이예신의 성향을 배려해서 먼저 내뱉은 내 한 마디에 깔끔하게 혀를 차버리며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리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괜찮은 미모를 지닌 여성이라 생각하는데, 항상 저런 식으로 차갑고 사나운 표정만을 짓고 있다. 아마도 외부 사람들에게 겁을 주기 위한, 혹은 '나는 연약한 여자가 아니다.'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일종의 보호색이지 않을까 싶지만. 실제로도 연약한 여자가 아니니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으려나. 그냥 버릇이겠지. "좀 있다 나가는 편이 좋겠군." 결국 바깥으로 나가기를 포기한 예신이 허리춤에 찬 수통의 뚜껑을 열며 목을 축이기 시작한다. 내가 군대에서 봤던 그런 고물 수통이 아닌 현대식 수통. "무인도에서 구한거야?" "배가 난파되기 전에, 미리 챙겨둔 개인 물품이다." "보통은 그런 수통을 개인 물품으로 지니고 다니나?" "개인사에 참견을 많이 하는 녀석이군. 죽고 싶어?" "고작 그런 사소한 질문 하나 던졌다고 죽이느니 살리니 하는 위험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지 말라고." "사람의 목숨은 때론 하찮은 일에 의해 생과 사가 갈리게 되는 법이야."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하진 말라고. 넌 신도 아니잖아." 타인의 생명을 함부로 여기지 말라. 유명한 가르침이다. 잊지 말도록 하자. "어쨌든." 긴 흑발을 어깨 너머로 넘기며 이마에 살짝 맺혀있는 땀방울을 몰래 훔치는 예신이 평소와 다르지 않은 살기어린 무표정을 유지하며 말한다. "볼 일이 없다면 빨리 바깥으로 나가서 네 일행들과 사라져주시지." 말이라도 곱게 하면 정말 미인일텐데. 언행이나 마음씨 하나 독하게 내뱉는 녀석의 태도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다. 어차피 내가 동굴 안에 온 목적은 위험 생물이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소기의 목적은 달성되었다는 생각에 예신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도록 하자. 괜히 이 녀석과 일행들을 마주치게 하는 일은 나 역시도 찬성 아닌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싶다. "알았어. 그럼 내가 먼저 나가면 되지?" 고개를 끄덕이는 예신의 반응을 확인하며 나 역시도 동굴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 작품 후기 ============================ 연예계 토크 1회입니다. 모 커뮤니티 사이트를 보다가, 장윤정이 지금까지 벌어놓은 돈을 어머니와 남동생이 전부 날려먹어서 통장 잔고가 -10억이 되어 있다는 것을 두달 전에 알았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에도 올라와 있어서 한번 봤는데... 그 많은 돈을 다 날려먹는 재주를 가진 남동생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지;; 여하튼 장윤정 기사를 보고 씁쓸한 기분이 들더군요. 힘냈으면 좋겠습니다. ㅜ_ㅜ 219화 예신보다 먼저 나온 나는 곧장 지아 선생님과 체리를 데리고 다시 산장으로 돌아왔다. 곰이나 위험한 들짐승이 사는 동굴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예신이 동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줄 생각으로 황급히 자리를 뜬 것. 물론 그 녀석의 상황판단능력이나 비정상적인 무인도 생활 적응 능력 등을 고려해보면 별다른 무리 없이 동굴을 빠져 나갔으리라 생각하지만,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맴도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동굴의 끝에 무언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무인도에서 필수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 뭔지 잘 모르겠지만, 예신이 한 말의 의미는 일단 기억해둘 필요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나중에 엘리를 데리고 한번 더 가볼까. 그나마 무인도에 대한 지리를 알고 있는 건 엘리 뿐이니까. "다녀왔습니다." "어서와. 수고했어." 산장 안에있던 누나가 우리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난파선에 왔다갔다 하는 일도 이제는 거의 익숙해진 터라 산장 내부에는 꽤나 많은 필수품들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저번에 세린과 아리아, 3명이서 같이 가서 가져온 물건들을 포함해서 현대문명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여러가지 물품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역시나 인공품의 도움은 생활의 편리함을 보조해주는 필수 요소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보니까 진짜 휴양지에 온 기분이네요." 옆에서 묵묵히 약초 도감을 보고 있던 지아 선생님에게 한 말이었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좀 더 전문적인 재료들이 있으면 좋겠지만 말이야." "약인가요?" "건강상의 문제가 제일 중요하잖아. 저기 있는 노아의 경우도 그렇고." "아..." 화로 근처에 이불을 뒤짚어 쓰고 누워있는 노아 교수님을 가리키는 지아 선생님. 우리가 난파선에 갔다 온 이유 중 하나도 바로 노아 교수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행여나 난파선에서 의무실을 발견하면 좋은 약 재료 같은 것들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의료실이 있던 부분은 아무래도 바다 아래로 가라 앉은 모양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지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평범한 감기 증상은 아닌 거 같은데..." 노아 교수님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보는 지아 선생님의 말에 누나가 그릇 안에 담긴 죽을 가져온다. "큰 병인가요?" "아니. 내가 보기에는 그냥 피로가 쌓여서 일시적으로 현기증이 일어나는 것 뿐이라고 생각중이야. 벌레에 물린 흔적도 없고, 별다른 병명의 원인은 없어 보이니까." 힘겹게 상반신을 일으키며 누나가 주는 죽 한 숟가락을 얌전히 입 안에 넣는 노아 교수님의 모습에 왠지 모를 측은함이 느껴진다. "어때? 노아. 버틸만 해?" "네..."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지아 선생님의 말에 대답을 한다. 아무래도 제대로 의식은 있나보군. "얼마 전에는 남동생이 감기에 걸리더니만. 이번에는 교수님이라니." "마치 내가 원인인 듯이 말하지 마. 누나." 졸지에 악역을 자처할 뻔 했다. 단순한 감기라면 좋겠지만, 일단 지아 선생님의 말에 따라 일단 절대 안정이라는 조치를 받게 된 노아 교수님이기 때문에 오늘 아침부터 거실에 누운 채로 생활중이다. 나도 어느정도 교수님의 기분을 공감하고 있기에 별다른 터치를 하지 않는 상황. 환자는 최대한 안정을 취하게 배려해줘야 한다. 아리아 같이 멋대로 환자를 다루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엘리는 어디 갔나요?" 오늘 난파선에서 공수해온 물품들을 묵묵히 정리중이던 체리가 거실에 모습을 드러내며 묻는 말이었다. "엘리라면..." 곰곰히 생각에 잠기던 누나가 느닷없이 내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네가 데리고 올래?" "나?" "그래. 기왕이면 나보다는 네가 더 좋겠어." "뭔데 그래?" 고작 엘리를 데리러 가는 것일 뿐인데, 누나의 얼굴은 사뭇 진지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쪽에 있어. 어디인지 알고 있지?" "어... 알고 있긴 한데." "그럼 갔다오도록. 남동생." 계속 내 등을 떠미는 누나의 손길이 왠지 심상치가 않다.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것일까. 속으로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까지 엘리를 혼자 두기에는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어서 마지못해 누나의 제안을 수락하고 만다. 장소는 알고 있지만, 막상 직접 가본적은 없다. 산장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언덕이라서 몇번 눈요기로 본 적은 있어도... 설마 이렇게 직접 찾아가게 될 날이 올 줄이야. 바다가 한 눈에 보이고 전망이 좋다는 말은 누나에게서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내심 나중에 가봐야지. 라는 생각을 품은 적이 있지만, 이렇게 직접 가보게 되는 일이 발생할 줄은 몰랐다. 내가 왜 계속 이렇게 언덕에 대한 언급을 계속 하냐면. "... 헥... 헥..."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상황에서 오로지 드는 생각은 단 하나였기 때문이다. 나를 이 곳에 보낸 누나의 진의를 몸소 깨달은 것이다. 경사가 낮아보이는 언덕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매우 가파른 길로 연결되어 있는 언덕길 덕분에 예상치 못한 유산소 운동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 계단을 왜 이렇게 가파르게 만들어놨을까. 나중에 평탄하게 작업이라도 해둬야겠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저기 엉성한 티가 물씬 풍기는 계단 덕분에 올라가는 데에 꽤나 많은 고생을 해버리고 말았다. 겨우 가파른 계단을 부여잡고 올라온 내 시야에. "우와..." 탄성이 절로 나올만한 풍경이 펼쳐진다. 수평선 아래로 수줍은 얼굴을 감추기 시작하는 태양. 노을지는 수평선의 평면에 아름답게 수놓인 붉은색과 푸른색의 절묘한 조화. 그리고. "......" 말 없이 언덕의 끝에 서 있는 작은 체구의 소녀, 엘리. 평소의 엘리와 다르게, 순백의 원피스 차림을 하고 있다. 신발을 신기 싫어하는 녀석인데도, 제대로 작은 신발까지 차려 신은 모습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만다. 늘상 보던 엘리와는 미묘하게 거리감이 생성되는 느낌. 뭘까. 이 낯선 이질감은. "엘리." 작게 엘리의 이름을 부르자, 희미하게 고개를 돌려 내 존재를 확인한다. 분위기는 다른데. 얼굴 표정은 똑같다. 평상시와 같은 뚱하고 무표정한 얼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들을 손등을 훔치며 엘리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그 곳에는. 엘리가 왜 오늘따라 격식있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해답이 명쾌하게 제시되고 있었다. "... 묘비?" 어설픈 솜씨지만, 돌을 깎아 만든 두개의 묘비. 그리고 그 묘비 위에는 영어로 적혀있는 두 사람의 성명이 또렷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묘비를 바라보던 나는 순간 이 두 사람이 누구인지 쉽사리 깨닫게 된다. "그렇구나." 엘리의 옆에 나란히 서서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마 이게 전부겠지. "......" 무표정의 엘리가 내 손길을 느끼듯이, 얌전히 머리를 움직인다. 엘리의 부모님. 지난 세월동안 무인도에서 유일하게 엘리와 동거하던 사람들. 그리고 엘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 아니지. 가장 소중했던 사람들. 이 곳에서 엘리는 계속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일까. 낯선 땅에서 부모님을 잃고 혼자 살아오던 엘리는 도대체 무슨 감정으로 이 자연의 경관을 지켜보고 있던 것일까. 해답은 오로지 엘리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제 3자에 불과한 나 뿐만 아니라 엘리와 그나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누나 역시도, 그리고 산장에서 다 같이 생활하는 일행들 역시도. 엘리의 속마음을 100퍼센트 알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사람의 마음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지의 분야니까. "슬슬 돌아갈까?" "......" 미세하게 고개를 상하 방향으로 끄덕이는 엘리. 이제 어느정도 한국말은 잘 알아듣는 모양인가 보다. 엘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영어실력이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그녀와의 직접적인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머리가 좋은 엘리가 한국말을 익히는 속도와 내가 영어를 익히는 속도를 비교한다면, 아마도 전자가 훨씬 빠르겠지. 빛과 소리의 속도 차이라고 보면 되겠다. "오늘은 고기 요리라고 하더라. 가서 배불리 먹자고." "ok." 작은 체구의 소녀는 투명한 눈망울로 내 말에 대답한다. 그래. 지금은 그저 엘리를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하자. ============================ 작품 후기 ============================ 현실은 시궁창 토크 2회입니다. 저도 몰랐는데, 제 친구들 중에서 의외로 돈이 많은 집안인 녀석이 몇명 있더군요. 소위 말해서 부동산 부자 집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건물이나 땅을 가지고 있어서 나중에 월세나 받으며 살 정도의 수준이 되는 친구들이 한 두명 있었습니다. 물려받을 재산이 있다는 사실이 부럽긴 하지만, 그래도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게 제일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작 중요한 건 제 자신이 잘 살면 되는 일이니까 말이지요. 부러우면 지는겁니다. 네. ... 하지만 부러운 건 어쩔 수 없군요 ㅜ_ㅜ 220화 "다녀왔어." "오. 어서와. 두번째 인사네." "그러게." 산장 안에서 한창 요리중인 누나가 나와 엘리를 마중나온다. 다른 사람들 역시도 해가 저물어지기 시작한지라 이미 산장 내부로 다 모인 상황. 다만, 아직까지도 노아 교수님만이 거실에서 누운 채로 건강 악화와 투쟁중일 뿐이다. 걱정이 되는지, 간병에 나선 유아 선배가 물수건을 짜며 노아 교수님의 이마 위에 올려놓으며 말한다. "아직까지도 편찮으신거야?" "네. 쉽게 나을 것 같지는 않아보이지만요." "지아 선생님은 뭐라고 하셨는데?" "큰 일은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장담은 못하겠데요." "왜?" "정확한 진단을 할 수가 없으니까... 라는 이유라고 하셨어요." 우리가 난파선에 들린 가장 큰 이유였던 의료 도구를 찾는 일을 달성하지 못한 이상, 지아 선생님의 선전을 기대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청진기나 체온기, 심지어 간단한 약 조차도 없는 무인도에서 현대 의술의 정확한 진단을 발휘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 뿐만 아니라 지아 선생님 본인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 역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지금은 노아 교수님의 건강이 자연적으로 호전되기를 바랄 뿐이다. "뭔가 좋은 약초가 있으면 좋을텐데." 라고 말하면서 아까부터 계속해서 약초 도감을 열심히 정독중인 지아 선생님. 영어로 되어 있는 서적이지만, 별다른 무리 없이 독서를 소화해내는 것으로 보아선, 의류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역시 머리가 좋아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뭔가 좋은 거라도 발견하셨나요?" 금발의 세린이 지아 선생님 곁으로 다가오며 묻자, 고개를 수평 방향으로 젓는 선생님의 반응. "아침과 똑같에." "진전 없음... 인가요?" "그런 셈이지." 둘의 한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다. 일반적인 감기라면 좋겠다만. 나 또한 마찬가지로 노아 교수님의 건강 상태가 걱정되는 건 매한가지다. 무인도에서 가장 문제될 요소가 바로 질병이기 때문이다. 배고픔이나 추위, 수면부족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인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질병은 예외사항.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뿐더러, 있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치료 방안을 모색하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해결 방법이라... 미약하지만 그래도 머리를 굴리고 있는 내 시선 안에, 유독 특이한 움직임을 보이는 인물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 "어머..." 미세하게 눈을 뜨고 자신의 이불 안으로 들어오는 작은 생물... 아니지. 작은 소녀, 엘리를 바라보며 희미한 감탄사를 자아내는 노아 교수님의 한 마디. 작디 작은 소녀, 엘리가 이불 안으로 들어가며 노아 교수님의 곁에 딱 달라붙는다. "엘리도 교수님이 걱정되는 거야?" "......" 유아 선배의 질문에도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며 노아 교수님에게 최대한 밀착하기 시작하는 엘리. 그 모습이 또 귀여운지 노아 교수님이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 시작한다. "착하지? 우리 엘리." "......" 아까 내가 엘리를 마중나갔을 때, 자신을 길러줌과 동시에 무인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왔던 인물이기도 한 부모님의 묘비 앞에서 가만히 서 있던 엘리의 모습이 문득 오버랩이 되며 떠오른다. 부모님의 향수를 느끼고 싶은 것일까. 처음에는 우리 누나와 자주 붙어 있더니만, 최근에는 노아 교수님이나 지아 선생님과 같이 연상의 성인 여성에게 붙어있는 경우가 더러 목격되곤 한다. 유아 선배나 세린, 그리고 약간 성인 여성이라기 보다는 대학 새내기의 풋풋하고 싱그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여대생쪽인 1학년 트리오에게는 저런 식으로 과도하게 애정을 표현한 적이 없다시피 하다. 변함없는 표정을 유지하며 그대로 노아 교수님 곁에서 나란히 잠에 빠지기 시작한 듯, 천천히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교수님 역시도 알 수 없는 질병과 싸우고 있는 중이라서 피곤한지 엘리와 나란히 수면의 세계로 여행 준비를 하는 중. 두 (의)모녀를 지켜보던 누나가 허리춤에 손을 올려놓고 장난스러운 얼굴로 내게 말한다. "우리끼리 먼저 식사할까?" "아무래도 그러는 편이 좋을 거 같네." 나중에 깨면 그 때 먹어도 좋겠지. 우리끼리 먼저 식사를 마치고 난 이후에. 늦게 일어난 엘리와 노아 교수님도 서로 식사를 마치고 다시 잠에 빠지기 시작할 시간인 저녁 10시가 다가오자, 우리도 슬슬 잠에 들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첫번째 불침번 조이기도 한 아리아, 세리아 은발 자매를 놔두고 전원 침실방으로 향하게 되고. 노아 교수님의 간병이라는 특수한 임무까지 부여된 불침번 둘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건네주고 나 역시도 잠에 빠진다. 그러기를 대략 1시간이 지나고 나서일까. "......" 자고 있던 엘리가 상반신을 일으키며 창문 바깥에 펼쳐져 있는 밤하늘을 응시한다. 갑자기 왜 저럴까. 뜬금없는 엘리의 행동 덕분에 잠에서 살짝 깬 내가 행동의 진위를 물어보지만. "엘리. 무슨 일이야?" "......" 대답 없이 다시 자기의 자리 위에 눕는다. 도대체 뭘까. 엘리의 저런 행동은 이제 거의 익숙해져서 뭐라 토를 달 만한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럴때면 가끔 섬뜩하기도 하다. 설마 몽유병 같은 건 아니겠지. 그래도 무인도라 그런지 우리 말고는 피해를 볼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에 안도를 해야 하나... 아니지. 괜히 밤에 혼자 돌아다녔다가 들짐승들에게 습격을 당할 우려도 있으니까 주의깊게 엘리를 관찰할 필요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 라고 생각한지 30분이 지나서. "......" 다시 상반신을 일으킨 엘리. 아까의 행동과 똑같이 밤하늘을 응시한다. "엘리. 진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이번에도 동일한 질문을 던져보는 나. 하지만 엘리는 나를 살짝 쳐다보고 가볍게 혀를 차며 다시 누울 뿐이다. 가만. 왜 혀를 차는 거냐?! 마치 내가 엘리의 안부를 묻는 게 불만족스럽다는 그 반응은 뭐지? 어쨌든 엘리의 상태가 궁금해서 또 한 번 자는 척을 하며 대기중.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나 똑같은 반응으로 일어나며 밤하늘을 응시한다. 아무래도 뭔가 수상한데. 노골적으로 내가 엘리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은 싫어하고 있으니까. 이번에는 자는 척을 해보도록 하자. 눈만 살짝 뜨고 엘리의 행태를 감시하기로 결정한 나였지만. 휙. 시선을 갑자기 내 쪽으로 돌리는 엘리 탓에 황급히 눈동자를 감는다.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눈동자를 감는 행동 뿐이었으니까 엘리에게 들킬 일은 전혀 없을테... "......" ...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자리에 눕는 엘리의 모습에 순간 오한이 들 정도였다. 아무래도 내가 '쳐다본다.'라는 행동을 인식한 모양인가 보다. 엘리의 감을 무시했던 나의 불찰인가. 그렇다고 엘리의 야생으로부터 다져진 본능적인 감각이 저리도 뛰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쩔 수 없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냥 얌전히 자도록 하자. 어차피 내 주제에 엘리를 감시하겠다는 것은 저기 저 무인도의 밤하늘에 맺혀있는 수많은 별들을 따는 일 보다도 어려운 프로젝트라는 생각이 마구 들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특히나 방금의 내 시선을 눈치챈 것은 진짜 여러모로 대단하다.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올 정도였으니까. 그런고로. 그냥 잠이나 자야겠다. 뭐... 엘리의 기이한 행동은 아침에 일어나서 직접 물어보면 되겠지. ============================ 작품 후기 ============================ 무인도의 마스코트, 엘리의 이야기입니다. 겉으로는 귀여운 소녀지만, 무인도 멤버들 중에서 가장 아픈 과거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ㅜ_ㅜ 221화 "으음..." 머리를 긁적이며 또 한 번 눈이 떠진다. 엘리를 감시하느라 30분 간격으로 주기적인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평소보다도 더 피곤한 모양처럼 느껴지지만, 그래도 엘리의 상태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 모양인지 나도 모르게 눈이 떠졌나보다. 다시 잘까 하다가 습관적으로 또 엘리가 누워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보는데. "없잖아?!" 황급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나는 곧장 거실로 튀어 나간다. "뭐야. 느닷없이 튀어나오곤." "아니. 그게..." 불침번 차례였는지 세린과 체리가 나란히 화로 근처에 자리를 잡고 나를 지긋이 응시하기 시작한다. 노아 교수님은 숙명에 취하고 있는지 별다른 미동 없이 누워있는 상태. 그것보다도 신경써야 할 인물은 다른쪽에 있다. "혹시 엘리 못봤어?" "엘리?" "그래. 엘리. 모습이 안 보이는데." 질문을 받은 세린을 대신해서, 체리가 바깥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내 말에 대답해준다. "엘리라면 방금 화장실 가는 모양인지 나갔어요." "화장실이라고? 정말이야?" "네... 아마도요." 평상시와 다른 엘리의 상태를 보아서는 평범하게 화장실을 구실로 바깥에 나갈 일은 없다고 생각한 나이기에 다급하게 나갈 채비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러자 수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세린이 퉁명스러운 말투를 유지하며 묻는다. "여자아이가 볼 일을 보러 갔는데 그 뒤를 따라가려고? 도대체 어디 사는 변태 녀석이야. 너는." "따라가는 게 아니라... 아니. 생각해보면 따라가려고 하는 건 맞는데, 궁금해서 그래." "뭐가?" "엘리 녀석. 평소와 좀 다르지 않아?"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지." "......" 잠자리에서 눈치 싸움을 각축을 벌이던 사람은 엘리와 나 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엘리의 수상한 점을 등한시 여기고 있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인간의 습성이라고 하지 않는가. "어쨌든 가볼게." "잠깐만." 내 뒤를 이어 겉옷을 입은 세린이 대놓고 나를 노골적으로 노려보며 말한다. "변태짓을 하려고 하는 남자를 내가 그대로 놔둘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렇게 직설적으로 찔러 들어온다면 할 말은 없지만..." 오히려 세린이 나와 동행하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가 정말로 화장실에 생리적인 볼 일이 있어서 갔다면,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절차를 거치기에는 XY 염색체를 지닌 나로선 적합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같은 염색체를 가진 세린이라면, 화장실 안쪽으로 들어가서 직접 엘리의 모습을 확인할 수도 있겠지. "체리야. 미안한데, 혼자 노아 교수님 좀 돌봐줘. 금방 갔다올테니까." "네? 네... 알았어요." 일단 졸지에 혼자 남게 된 체리에게 양해를 구한 뒤. "가자." "자, 잠깐! 누가 멋대로 남의 손을 잡으라고 했어?!" "이제와서 새삼스레." 못볼 꼴 다 본 사이면서, 굳이 손 잡는 일에 트집을 일일히 잡는 세린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없다. 여자의 마음은 섬세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상황에 맞춰서 그런 세심함을 배려해줄 수 없는 시간도 더러 존재한다. 지금도 마찬가지. 부모님의 묘비 앞에서 멀뚱멀뚱 서 있던 엘리, 오늘따라 나름 애교를 많이 부리던 엘리, 그리고 잠자리에서 수상한 행동을 보인 엘리. 혹시. 안 좋은 쪽으로 이어지는 추측을 머릿속에서 애써 쫓아내며 황급히 화장실로 발걸음을 향한다. 안에 있을때는 잘 몰랐는데, 무인도의 밤하늘은 수 많은 별빛들의 모습을 대신해서 어두컴컴한 먹구름이 벌써부터 몰려오고 있었다. 비라도 오는 건가? 제법 쌀쌀한 자정 기온을 뚫고서 화장실에 도착한 나는 세린에게 곧장 부탁 아닌 부탁을 내린다. "엘리가 있는지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줘." "내가?" "그렇다고 내가 할 수는 없잖아." "그야 당연하지! ... 그런데 남이 볼 일을 보고 있는데 굳이 직접 들어가서 확인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럼 문만 잠깐 열어봐. 됐지?" "아, 알았어." 내 기세에 눌렸는지, 약간 주눅든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세린이 '엘리 있니?'라는 목소리를 내면서 살짝 화장실의 문을 열어본다. 혹시나 몰라서 약간 거리를 두고 기다리던 나는 엘리가 차라리 화장실 안에서 볼 일을 보고 있는 편이 좋을거란 생각이 든다. 정말로 그렇다면 엘리의 뒤를 쫓아온 나로서는 변태 로리콘이라는 욕을 세린의 입에서 한 바가지 들을 우려가 있을지 모르지만, 차라리 엘리가 없어지는 편 보다는 세린에게서 평생 들을 욕을 다 듣는 편이 더 좋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상황은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고 마는데. "엘리... 없는데?!" 당황한 모습이 역력한 세린이 믿기지가 않는다며 다시 한번 화장실 안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설마 설마 했는데. 안 좋은 쪽으로 예상이 맞아들어가는 상황에서 점점 엄습해오는 불안이라는 이름의 감정. 무슨 생각을 하는지 평소에도 도통 알 수 없는 엘리이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돌발적인 행동을 보일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나이인데. "어, 어떻게 하지?! 분명 나한테 화장실 간다고 말하고 갔는데..." "침착해봐. 엘리가 갈 만한 장소는 얼핏 알 거 같으니까." "알 수 있는거야??" "아마도." 확신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대충은 예상할 수 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엘리의 부모님이 묻혀진 장소.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비구름. 그리고 잠들기 전에 밤하늘을 응시하던 엘리의 행동까지. "세린. 너는 일단 체리랑 같이 이 근방을 수색해봐. 아, 그 전에 지아 선생님을 깨워서 노아 교수님 간병을 부탁드리고." "다른 사람들은 안 깨워도 돼?" "아직 엘리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괜한 일에 모두를 동요하게 만들고 싶진 않아. 그리고 꽤나 높은 확률로 엘리가 있을만한 장소는 알고 있으니까." "... 그럼 난 체리랑 같이 이 주변을 찾아보면 되는거지?" "그래. 들짐승들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반드시 2인 1조로 다니도록 하고. 지아 선생님에게 대신해서 불침번을 부탁드려봐." 라는 말을 남기고 최대한 빠른 발걸음으로 '그 장소'를 향해 간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을 향해서. 비와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면 엘리의 부모님이 묻혀있는 장소가 손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정도 수준으로 피해가 생길 만큼 무덤이 허술하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식 된 도리로서 걱정되는 것은 당연지사. 게다가 구름의 형태나 양으로 보아서는 꽤나 큰 형태를 갖춘 비바람이 내릴 것은 확실하다. 아마도 엘리는 미리 기상의 변화를 눈치채고 자신의 부모님이 묻혀 계시는 장소를 걱정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한밤중에 미리 그 장소를 보수하거나 아니면 안전한지 재차 확인하고 싶어서 자리를 비운 것일지도. 아까도 말했듯이 확실하진 않지만, 가장 높은 확률이기도 하기에 망설임 없이 오늘 엘리를 마중나갔던 그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나였으나. "또 우연의 일치로 만나게 되었네. 장난감." "... 이예신." 진짜 그녀의 말 그대로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의도된 만남인지는 모르겠지만. 현 상황에서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최악의 무인도 생존자이기도 한 존재와 만나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엘리를 찾아 나서던 와중에. 이건 뭐... 엘리를 만나기 위해 넘어야 하는 일종의 시련같은 건가. 만약 그렇다면, 너무 난이도가 높은 시련이 아닐까 싶다. ============================ 작품 후기 ============================ 이번 편에서는 이예신이라는 인물에 대해 좀 더 상세히 등장할 것이라 예상됩니다. 실제로 출연은 별로 안했지만, 표류일지 시나리오가 진행될수록 예신의 비중은 커지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지요. 222화 "이 시간엔 어쩐 일이야. 이예신." 아무리 생각해도 이 여자가 우리 구역 주변에 얼쩡거릴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우선 그 진의부터 묻기 시작해본다. 내 말투가 약간 불친절했던 것일까. 아니면 평상시 이예신의 인덕이 발휘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내뱉은 말을 듣자마자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로 기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예신. "내가 있으면 안 된다는 이유라도 있나?"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 내가 너와 이렇게 한가하게 대화할 이유가 없거든." "그 꼬맹이 여자아이를 찾으러 온 게 맞나보군." 순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지만. 망치로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번뜩 들었다. 예신이 무인도에 다른 생존자들의 존재를 알고 있고, 그리고 나와 같이 행동하고 있는 일행들의 정보 또한 알고 있다는 것 정도는 나 역시도 진작 알고 있었지만, 막상 엘리라는 특정 인물을 다른 사람도 아닌 예신의 입에서 언급되니 왠지모를 불안감이 문득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엘리에게 무슨 짓을 한거냐." "착각하지마. 장난감. 나는 이 무인도에서 사고를 일으킬 생각이 없어. 너한테도 말했지만, 여기는 나에게 있어서 사회라는 문명보다도 더 생활하기 좋은 파라다이스 같은 곳이니까." 관찰자. 이예신이란 여자는 무인도에서 자신의 역할을 그렇게 부르곤 한다. 지켜보기만 하는 역할. 하지만 무인도에서 상식 선의 인격을 벗어나는 행동을 할 경우, 그 즉시 징벌한다. 여자를 강간하고, 인육을 먹었던 생존자들에게 살인이라는 처벌을 내린 것처럼. 다른 생존자들 또한 잘 알고있나 모르겠지만. 우리는 무인도에서 알게 모르게 이예신이란 이름을 지닌 여자에게 암묵적인 룰을 강요받고 있다. 무인도에서 눈에 튀는 행동을 하지 마라.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지 마라. 그것만 지키면 저 여자는 아무에게도 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입으로 직접 그렇게 선언한 적은 있나 없나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충 그런 뉘앙스로 몇번이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설마 엘리가 저 녀석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던 것일까? 그럼 밤하늘을 응시하던 것이 아니라... ... 산장 주변에 어슬렁거리던 예신의 인기척을 눈치채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낯선 생존자의 낌새를 파악한 엘리는 독단의 결정으로 예신과 조우했고, 그 결과 종적을 감추게 되었다. 생각만 해도 최악의 스토리다. 설마 이런 변수가 있을 줄이야. "엘리는 어디있지?" 나도 모르게 허리춤에 미리 가져온 나이프를 꺼내며 녀석에게 위협을 가한다. 그러자 다시 한번 의미를 알 수 없는 조롱섞인 미소를 선보이며 마찬가지로 나이프를 꺼내기 시작하는 이예신. "모른다. 라고 대답한다면?" "거짓말이겠지." "어째서?" "너는 '엘리'를 특정적으로 지목해서 언급했어. 그렇다면 분명 엘리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다는 의미잖아. 안 그래?" "네 말대로 나는 그 꼬마 숙녀의 행방을 알고 있어. 하지만 나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과 그게 무슨 상관이지?" "네가 엘리에게 몹쓸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도 문득 들었거든." "훌륭한 판단이야. 하지만 가설이라는 것은 직접 눈으로 확인되지 않고 심증만 있기에 앞에 '가'라는 글자를 붙이는 거 아닌가?" "그래서 지금부터 그 가설을 기정 사실로 만들기 위해서 나이프를 손에 든 거지." 고민할 이유가 없다. 오른 발에 체중을 싣고서 빠르게 거리를 좁혀나가기 시작하는 나. 저 녀석과 직접적으로 마주 싸워본 적은 없지만, 비정상적인 몸놀림과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나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된다. 엘리의 행방을 알기 전에, 그리고 엘리가 무사한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유일한 힌트를 지니고 있는 이예신이란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 밖에 없을지도 모르니까. 본능이 나에게 그렇게 속삭인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주인에게 덤비는 장난감 따윈." 이 여자는 여전히 위험하다는 경고 신호를 꾸준히 보내고 있다. 언제부터 들고 있었는지, 왼손에 쥐고 있던 나이프를 수평 방향으로 휘두르기 시작하는 예신의 공격. 나이프를 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나는 재빠르게 속도를 줄이고 최대한 뒤쪽으로 몸을 뺀다. 그러나 마치 이런 나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반대로 이번에는 예신이 나와의 거리를 빠르게 좁혀오는데. "헛점 투성이야." "윽...!" 허리를 최대한 뒤로 빼면서 예신의 공격을 회피해보지만. 무인도에 오고 난 이후로 조금 길어진 머리카락들이 공중에서 그대로 나이프의 궤적이 따라 잘라지는 장면이 슬로우 모션으로 시야에 포착된다. 아주 미세하게 잘려나간 머리카락들의 잔해를 보면서 동시에 등에는 엄청난 식은땀이 흘러 내리기 시작한다. 만약 저 공격을 정면으로 맞이했다면? 아마 잘려나간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내 목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공포. 저 여자는 공포란 감정을 너무나도 잘 다룬다. 살기를 통해서, 그리고 알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를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여줌으로 인해 타인에게 공포를 심어준다. 그리고 그 심어버린 공포를 예신은 너무나도 잘 이용한다. 운동신경이나 반응속도와 같은 피지컬적인 능력 또한 뛰어나지만. 심리전 역시도 달인 수준. 일반인의 범주를 훨씬 뛰어 넘는다.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인 공포를 심어주는 작업을 저 여자는 너무나도 잘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일부러 내 목을 베어버릴 수 있었지만,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살짝 비켜나가는 공격을 함으로 인해서 나에게 공포라는 감정을 심어준 게 아닐까 예측해본다. 나이프를 거두고 다시 나와 거리를 벌린 예신이 나이프에 묻어있는 내 머리카락 몇 가닥을 털어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방금 그 회피동작은 괜찮았어. 역시 내가 인정한 장난감이야." "하다못해 너와 동등한 인간 취급 정도는 해달라고. 무생물 보다는 나을테니까." "아직도 그런 농담이 튀어 나오는 걸 보니까 나와 마주하는 것이 할 만 한가 보네?" "......" 솔직히 말해서 죽을 맛이다. 남자이면서도 여자인 예신을 압도하지 못한다. 힘으로도, 그리고 기교로도. 아마도 저 녀석은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생존자 집단에게도 역시나 나와 같은 공포심을 심어뒀을 것이다. 아니면 나처럼 장난감이라 불리는 남자들을 만들어서 자신의 성욕을 채우는 도구로 만들었거나 무력을 이용해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면서 이런 식으로 공포감을 심어줬겟지. 왜 저런 행동을 하는 거지? 무인도가 오히려 살기 편하다고 말했던 그녀. 그리고 생존자들끼리는 상식적인 선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금하게 만드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그녀. 자신만의 규칙을 어길 시 최악의 형벌을 내리는 그녀. 마치... "... 너는 무인도에서 '법'이라도 될 생각이냐." "법이라. 내가?" "그래. 너. 영어로 말하자면 유(you)." 호흡을 가다듬고 머릿속에서 든 추측을 정리해본다. 엘리의 행방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 중요한 엘리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우선 녀석을 이겨야 한다. 무력이라도 통하지 않으면 화술이라도. 그래. 만약 녀석이 생존자 집단에게 일부러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일부러 자신만의 규칙에 굴복하게 만들고, 일부러 자신의 룰에 따르게 만드는 거라면. 혹시. "법이란 말이지... 어감 좋네. 그거." 섬뜩한 미소를 짓는 예신의 모습을 통해 나는 한 가지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 녀석. 무인도를 자신만의 왕국으로 만들 셈인가. 그리고 그 왕국에서 이예신이란 여자는. 스스로 여왕의 자리에 군림하려고 한다. ============================ 작품 후기 ============================ 평온한 주말 낮입니다. 그래봤자 저는 집 안에 틀어박혀서 정글의 법칙을 보고 있지만요 ㅡ_ㅡ;; 나가기 좋은 날씨인데 집 안이라니 ㅜ_ㅜ 223화 독재정치란 단어는 역사책에서나 볼 법한 그런 현상이라 생각했는데, 설마 무인도에서 이런 상황과 조우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무인도에서 일명 '보이는 법'이 되기 위해 일부러 생존자들간의 정보를 감추고, 소수의 집단들이 각자 무인도에서 생활하게 방치를 하면서 그 집단에게 실질적으로 많은 간섭을 끼치고 있는 인물. 그리고 무인도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인물. ... 아니지. 녀석은 무인도에 표류된 지 3달이 채 되지 않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우리들은 여객선이 난파되고 난 이후에 이 섬으로 떠밀려 왔으니까 말이다. 실질적인 무인도의 정보통이자 토박이는 바로 엘리. 지금 내가 찾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혹시. "너, 엘리를 노리고 있는 거냐?"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이프의 끝을 내쪽으로 겨누기 시작하는 예신이 또다시 보기 싫은 미소를 선보이며 말한다. "내 입장에서 그 여자아이가 방해물이란 것 정도는 기정 사실이니까." "방해물?" "나보다도 더 이 무인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네가 말한 그대로 '보이는 법'이 될 수 없으니까. 알겠어?" 엘리는 예신이 모르고 있는 무인도의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예신 역시도 엘리가 모르고 있는 정보들을 잔뜩 가지고 있는 건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무인도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생존자 집단의 위치와 분포, 구성 멤버에 관련된 정보. 이것은 오로지 예신만이 알고 있다. 그것도 소수의 집단 정보가 아닌 이 무인도에 머물고 있는 생존자 전원에 대한 정보를. 그렇기 때문에 녀석은 혼자서 활동한다. 그리고 최대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드러내는 일이 있을 경우는, 그 집단의 대표자가 되는 사람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서일 뿐. 아마도 우리 집단중에서 내가 리더이기 때문에 예신은 내 앞에 밖에 나오질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점들이 전부 다 사실이란 것은 아니다. 그저 나 혼자만의 추측. 그러나 꽤나 신빙성이 있는 가설이라고 생각되기에 나도 지체없이 예신과 마주선다. "장난감. 네가 날 이길 수 있을거라 생각해?"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는 그 발언.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고." "후회는 네가 하는 거겠지." 단발적인 호흡을 내뱉은 뒤, 순식간에 나에게로 돌진해오기 시작한다. 숲 속임에도 불구하고,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그런 것 하나 개이치 않고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회피냐 방어냐. 사실 녀석의 빠른 공격을 막을 자신이 없기에 가급적이면 회피라는 동작을 선택하고 싶지만. 분명 녀석은 내가 이런 선택을 할 것이란 사실 정도는 이미 계산 하에 두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윽...!" 제 3의 선택지이기도 한 '반격'을 고른다. 오른손에 쥐어진 나이프를 들고 예신의 안면에 휘두른다. 예신의 나이프 역시도 내 목 부근을 정확히 노리며 날아오는 중. "...칫" 설마 내가 크로스 카운터란 위험한 선택지를 고를거란 생각은 차마 못했는지, 예신이 먼저 상반신을 숙이면서 자신의 공격을 취소시키고 회피 동작에 들어간다. 긴 흑발이 그녀의 잔상을 남기려는 듯이 공중에서 너풀거리고, 나 또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반사신경을 동원해서 날렸던 카운터 공격을 다시 회수한 뒤에 거리를 벌린다. 밤인데다가 숲인지라 달의 차가운 서리빛 조차도 들어오지 않는다. 이 최악의 조건에서 오로지 나이프의 궤적과 상대방의 움직임, 그리고 적이 어떠한 생각과 예상을 하고 덤벼드는지에 대한 심리전 만으로 이 대결이 성사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해가 쨍쨍한 대낮이었다면. 내가 저 여자에게 무참히 발렸겠지. "장난은 여기까지 하는 편이 좋겠지?" 저 미치광이 여자는 마치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듯이 재차적으로 나에게 공격을 시도한다. 공기조차 반으로 가르는 2~3 차례의 칼부림을 간신히 피하며 역습의 기회를 엿보고 있지만, 어두운 상황이란 조건은 예신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함과 동시에 나에게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서로 피차 안 보이는 건 같은 요소. 가뜩이나 야생이란 삶과 등한시하며 평범한 사회 생활을 즐겨오던 나에게 있어서는 지금의 상황이 마치 꿈과도 같다. 정체불명의 여자와, 그것도 무인도에서 칼부림을 주고 받고 있다니. 세상에 살다가 이런 일을 또 언제 겪어볼까. 멧돼지를 사냥할 때에도 이런 생명의 위협은 느껴본 적이 없는데. 낯선 여자에게서 익숙한 죽음의 향기를 느낀다. 2~3 차례의 공격을 피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 "이런?!" 어두운 바닥 탓인지 나무 뿌리가 있는 것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내가 뒤로 엉덩방아를 찧게 된다. 그 순간을 놓칠리가 없는 이예신. "그 동안 즐거웠어. 장난감." "... 난 하나도 안 즐거웠다고."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즐길 줄 아는구나. 꽤나 여유로운걸?" "지나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행위는 없으니까." "그 마인드, 마음에 들었어." 나이프를 수직으로 세운 예신이 그대로 내 머리를 향해 찍어 내리려는 포즈를 잡는다. 매섭게 다가오는 나이프의 끝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인다. 이런 건 잘도 보이는 구나. 진짜로. 나도 모르게 질끈 두 눈을 감을 때. 내가 불쌍하게 느껴졌는지, 하늘은 아직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뜻으로 예상치 못한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게 느껴진다. 바스락 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 무언가가 숲 속에서 튀어나와 예신의 허리를 발로 걷어 차버린다. 그와 동시에 터져나오는 예신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 "큭!" "......" 입을 꾹 다문 채 나와 예신의 사이를 가로막는 작은 체구의 소녀. 검은 숲 속에서도 유독 눈부신 빛을 뽐내는 금발의 소녀. 그리고 어딘가 여기저기 흙 투성이가 된 채로 굳은 눈빛을 띄우며 예신을 노려보는 소녀. "엘... 리?" 혹시나 하는 말에 살짝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엘리의 모습. 틀림없다. 여태 내가 찾던 소녀. 그리고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될 우리들의 소중한 동료이자 가족. 도대체 어디서 뭘 하다 이제야 왔는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런 사소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아니다. 당장 중요한 문제부터 해결하고 나서, 엘리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 순번상으로도 맞을 테니까 말이다. "요즘 꼬맹이들은... 다 하나같이 건방지구나." 내가 말한 '당장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라는 임시적인 호칭을 부여받은 예신이 생각보다 연약해보이는 허리 라인을 한 손으로 감싸쥐며 매서운 눈빛으로 나와 엘리를 번갈아 노려보기 시작한다. 진짜 살기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포스다. 남자도 아닌 여자가 저런 살기를 뽐내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일텐데. 여러모로 저 녀석은 상식이란 요소가 통하지 않는 여자라는 것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깨닫고 만다. "후..." 긴 호흡으로 잠시나마 예상하지 못했던 데미지를 미약하게나마 회복한 듯, 평정심을 찾은 예신의 목소리가 숲의 음산한 바람을 타고 전해진다. "아무리 나라 해도 이 밤중에 저 꼬맹이까지 상대할 수는 없으니까." "......" "전형적인 악당의 대사같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말 한 마디는 해두겠어." 도로 나이프를 집어 넣은 예신의 모습을 통해서 녀석이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흐트러진 긴 흑발을 단정하게 정리하더니. "오늘 나에게 저지른 무례, 나중에 후회할거야." 라는 말을 남기고 모습을 감춘다. ... 정말 전형적인 악당의 대사잖아. ============================ 작품 후기 ============================ 잠시 잊고 계실지 모르지만, 이 에피소드는 엘리가 주인공인 이야기입니다 ㅜ_ㅜ사실 저도 쓰다보면서 어느새 엘리가 중심이라는 걸 가끔 까먹긴 하지만요; 224화 다리에 힘이 풀린 탓에 한동안 앉아서 무성한 수풀 잎사귀들만 주구장창 관찰하던 나. 이윽고 조금이나마 기력이 돌아옴을 느끼며 바지에 묻은 흙과 먼지들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고맙다. 엘리." "......"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뚱한 표정으로 고개만 살짝 끄덕이는 작은 꼬마숙녀. 무인도에 오고 나서부터 엘리에게 도움만 받는 입장이 되니까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다. 어른으로서.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일을 당했길래 몰골이 엉망이야?" 라는 질문을 던져보지만, 엘리는 묵묵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아무래도 나에게 대답해줄 생각은 없는 건가. 보아하니 예신에게 해코지를 당한 것 같지는 않고. 엘리의 갑작스런 등장은 예신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눈초리였으니까. 아무래도 그 녀석과 엘리의 관계는 사실무근으로 판명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그것보다도 가장 큰 문제점은. 엘리가 예신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라는 건가. 낯선 생존자의 유무는 엘리 역시도 충분히 눈치채고 있었을 테지만, 그래도 예신이 어떠한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를거라고 생각된다. 예신과 대화를 나눈 적도 없을테고. 엘리가 무작정 적의를 들어내고 예신에게 달려든 것은 아마도 녀석이 나를 위협하고 있었던 모습을 포착했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공격을 했을 확률이 가장 높다. 우선 여기서는 엘리에게 한 가지 약속을 받아내는 편이 좋겠다. "엘리." "?"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는 엘리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말을 걸어본다. "아까 본 여자는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 마. 약속할 수 있지?" "......"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물론 무표정이지만, 오랫동안 동거동락을 해온 탓인지 대충 어떤 감정인지는 알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바디랭귀지 만세.) 소심한 이의를 제기하는 엘리였지만. 이내 알았다는 듯이 수긍의 의사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새끼 손가락을 들며 내 손가락과 마주 건다.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서 무인도에 또 다른 위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독단적인 결정이고, 이게 나중에 안 좋은 일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은 최대한 일행들의 심적 안정을 우선시하고 싶다. 그것이 내 판단이기도 하니까. 엘리를 데리고 돌아온 산장에는 불침번 근무였던 세린과 체리, 그리고 잠든 노아 교수님의 간병을 맡기 위해 임시적으로 불침번 근무에 합류한 지아 선생님이 우리들을 반겨준다. 그 중에서도 엘리의 엉망이 된 꼴을 보고 놀란 체리가 황급히 물수건을 가져와서 머리카락이며 팔, 다리, 얼굴 등 먼지가 묻은 곳은 전부 세심하게 닦아주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지아 선생님이 미약하게 한숨을 쉰다. "차라리 같이 연못이라도 가서 샤워를 시켜주는 편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 그런 방법이?!" "당황한 나머지 사고방식이 마비된 모양인가 보구나."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지아 선생님과는 달리, 패닉 상태에 빠져버린 체리가 허둥지둥 거리면서 엘리의 손을 잡고 호수로 향한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동행하고 싶지만, 오늘은 물러가겠다는 예신의 발언을 상기시켜 본다면 굳이 내가 같이 갈 필요까진 없을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잠자코 둘만 보내주기로 한다. 성격은 더러워도, 나름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니까. 게다가 그 녀석이 생각하고 있는 '룰'만 어기지 않는다면 녀석은 생존자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다. 예신이 나를 공격했던 이유도 따지고 본다면 내가 먼저 녀석에게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일테고. 게다가 엘리도 있으니까 안심이 된다. 한편. 엘리를 데리고 아닌 밤중에 샤워를 하러 간 체리를 제외하고. "이제 엘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번 이야기를 들어볼까?" 이미 경청모드 자세로 돌입한 지아 선생님이 먼저 말을 꺼낸다. 내심 쿨한 척을 하면서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세린 또한 귀를 쫑긋 세우며 '빨리 이야기해! 궁금해 죽겠다고!'라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기대하고 계신 청중 여러분들에게는 굉장히 미안한 이야기지만. "저도 잘 몰라요." "모른다고?" "엘리가 대답을 안 해줬거든요." 예신에 관련된 이야기는 비밀로 간직해야 한다. 그 녀석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녀석의 관심 대상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아마도 예신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생존자는 나와 우연의 일치로 알게 된 엘리를 포함해서 생존자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녀석은 일부러 생존자 집단의 리더들에게만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그런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조성한다. 가장 리더가 되는 사람만 제압을 한다면, 굳이 예신이 일부러 손을 들일 필요도 없이 자신이 주장하는 무인도의 '암묵적인 룰'과 균형은 유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신의 존재를 말하지 말라고 엘리에게 신신당부를 한 것이다. 조만간 무인도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늘어난 셈이지만, 가급적이면 진짜로 위험한 일에 다른 사람들을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도 궁금하니까 나중에 엘리가 돌아오면 묻도록 하죠." "모르는 척 하는 거 아니야?" 곧바로 세린의 트집이 들어왔지만, 절묘하게 방어하도록 하자. "진짜로 모른다니까. 거짓말 탐지기라도 있었으면 내 억울함을 증명해줬을걸?" "... 못 믿겠어." 신용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입장으로서, 아마도 나는 세린의 마음 속 한정으로 신용 불량자 신분이 되어있을 것이다. 여러모로 억울한 입장이긴 하지만, 그거야 뭐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까. 한동안 잠자코 침묵을 지키던 와중에. 드디어 우리들의 궁금증을 해결해줄 인물이 입성하게 되는데. "서, 선생님! 이것 좀 보세요!" 샤워하던 도중이었나. 아무리 급한 일이 있다고 한들, 발가벗은 채로 뛰어 들어오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다. 물론 체리의 몸매를 모자이크 없이 그대로 감상할 수 있다는 점으로 보아선, 남자의 입장에 서 있는 내 쪽은 전혀 피해가 없다. 아니, 오히려 눈이 호강한다고 할까.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채 그대로 물기를 머금고 달려온 체리가 지아 선생님에게 무언가를 내민다. 저돌적인 체리의 요청에 의해 무언가로 시선을 고정시킨 지아 선생님이 요리조리 훑어보기 시작하는데. "잠깐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갑자기 약초 도감을 샅샅히 뒤지기 시작하는 거 아닌가. 체리의 행동도 놀랐지만, 지아 선생님의 다급함도 왠지 모르게 당황스럽긴 하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세린이 나를 대신해서 체리가 가져온 무언가를 들고 묻기 시작. "이 꽃, 어디서 구해온 거야?" 세린이 들고 있는 꽃. 무인도에 와서 수 많은 식물들을 봐 왔지만, 상당히 독특한 칼라를 지니고 있는 꽃이다. 생김새는 장미처럼 생겼는데... 무지개 색깔이라는 게 특이하다고 할까. 내가 본 꽃 중에서 가장 많은 색깔을 가지고 있는 그런 꽃이라고 확신할 정도로 상당히 칼라풀한 꽃이다. "그게..." 우물쭈물하던 체리의 뒤를 이어서 입장하는 사건의 주인공, 엘리. 체리와는 다르게 제대로 머리를 말라고 왔는지, 옷차림도 말끔하다. "엘리가... 가져왔어요." 마침 엘리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체리가 손가락으로 엘리를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 작품 후기 ============================ 조아라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계신 작가분들을 보면, 약간 부럽기도 합니다... 만, 그만큼 필력도 좋으시고 실력도 출중하시니까 지원해주시는 것이겠지요. 나중에 언젠가는 저도 그 정도로 성정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도 열심히 달려야지요~~~~~~~~!!! 225화 생전 처음보는 꽃을 들고 온 엘리. 설마... "이 꽃을 가져오려고 바깥에 나갔던 거야?" 라는 내 질문과 함께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엘리의 부모님이 묻혀계신 장소가 걱정되서 한밤중에 나간 건 아니었구나. 하긴. 무인도에서 3년동안 지낸 엘리인데, 무인도의 기상 변화를 모를리가 없을 것이다. 악천우에 대비한 준비 정도는 만반을 기했을지도. "근데 이 꽃이 뭐길래 오밤중에 다른 사람들 몰래 따오러 갈 정도야? 귀중한 것도 아니잖아." 세린의 가벼운 태클. 꽃이라는 식물 자체가 인간 사회에서 다이아몬드나 석유, 혹은 금 덩어리와 마찬가지의 값어치를 자랑할 정도로 그리 존귀한 대접을 받는 것도 아니고. 굳이 이런 독특한 칼라의 꽃을 캐오기 위해 바깥으로 나갈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문득 든 호기심을 해결시켜준 것은 당사자인 엘리가 아니라 아까부터 급하게 약초 도감을 찾던 지아 선생님이었다. "아마도 엘리는 노아가 걱정되서 그랬던 것일수도 있어." "무슨 말씀이세요?" "이거 보렴." 나와 세린, 그리고 체리(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우리가 대화를 나누던 사이에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었다.)까지 옹기종기 모여서 지아 선생님이 펼쳐놓은 페이지를 바라본다. 그 곳에는. "... 이거, 꽃이 아니라 약초에요?" "아니. 꽃은 맞는 같아. 중요한 건 따로 있지."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무지개 꽃을 받아든 지아 선생님이 자초지종을 설명해주기 시작한다. "꽃이긴 하지만, 약초로서 효능을 지니고 있어. 기력이 약한 상태로 누워있는 요 근처의 누군가에게는 특효약이지. 정확한 명칭은 잘 모르겠지만, 그 약초 도감에 적혀있는 임시 명칭을 인용하자면 '레인보우 플라워' 정도일까." "설마..." 노아 교수님을 위해 일부러 꼭두새벽에 이 꽃을 따 온 것인가. 그래서 온통 흙과 먼지를 뒤짚어 쓴 엘리의 모습이 결과물로 도출된 것일지도 모른다. 엘리에게서 받아 든 꽃을 그릇 안에 넣고 약 제조에 들어가기 시작한 지아 선생님이 작업을 계속 진행하면서 말을 이어가기 시작한다. "약초 도감에 나온 증세와 해독초가 똑같이 일치해. 아마도 엘리는 자신의 부모님이 남겨놓은 그 약초 도감에서 레인보우 플라워... 무지개 꽃을 떠올리고 캐러 갔다온 게 아닐까 생각해." "그렇다면 우리와 상의햇 갔다와도 될텐데. 굳이 왜 혼자서..." 세린이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엘리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달리 붙어있을 상대가 없는지, 이제는 세린의 허리에 착 달라 무언의 애교를 보여주는 엘리의 모습. 이해가 안 된다는 세린의 질문에 또 한 번 해답을 던진 쪽은 다름아닌 지아 선생님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아프다면, 시기를 막론하고 그 사람의 건강 상태만 머릿속에 가득 차게 되는 법이니까." "... 그런 건가요?" "너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이세린." "조, 좋아하는 사람 따윈 없어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지아 선생님에게 따지는 세린의 모습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라. 그만큼 엘리가 노아 교수님을 좋아하고 있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을지도. "해답은 간단해." 이른 아침. 식사를 하던 중에 새벽에 벌어졌던 일들을 나머지 일행에게 전해주고 있던 나에게, 누나가 귀엽게 윙크하며 내 궁금증을 해결해준다. "노아 교수님과 엘리의 부모님 모습이 겹쳐 보였으니까 그랬을거야." "교수님하고 엘리의 부모님이 비슷하게 생기셨어?" "아니. 정확하게는 표현 못하겠지만... 네가 엘리를 데리러 갔던 장소에 대해서 다시 한번 떠올려봐. 어디였지?" "바다가 보이는 언덕이었잖아." "어제가 엘리 부모님의 기일이었고, 그 장소에서 오랜만에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렸을 시간이니까 노아 교수님에게 부모님의 모습이 투영되었을수도 있지. 게다가 아파하는 교수님을 보니 특히나 더." "병으로 돌아가신거야?" "나도 정확하게는 잘 몰라. 하지만 근 3년동안 별다른 무리없이 무인도에서 생활하시던 두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면, 외부적인 요인이 아니라 병적인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한 거 아닐까 싶어." 미지의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질병이다. 그건 무인도에서도 예외가 없다. 그렇기에 엘리의 부모님은 실제로 약초 도감이라는 것을 써서 기록할 만큼 질병에 대한 대비를 많이 하셨던 것이다. 자신들의 귀여운 아이가 병에 걸리지 않게끔 만들기 위해. "... 슬픈 이야기네요." 잠시 찾아온 정막 속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리아였다. 우리가 주고 받는 대화의 내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도 잠이 덜 깬 아기 고양이, 에바 초호기와 장난을 치며 놀고 있는 엘리의 모습이 세삼 여리디 여린 꼬마 여자아이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겉으로는 언제나 냉철하고 감정의 변화가 없는 소녀지만, 속내를 알고 보면 낯선 땅에서 3년동안 무인도 생활을 하면서 부모님까지 잃게 된 비운의 소녀이기도 하다. 절로 나오는 한숨. 왠지 모르게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누나가 두 손뼉을 마주치며 잠시 분위기를 반전시켜본다. "그런데 말이죠."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킨 누나가 의아한 표정을 과장시키며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엘리는 그 무지개 꽃을 어디서 가져왔을까요?" "그러고보니..." 우리도 나름 무인도에서 많은 생활을 했고, 나름 많은 지역을 탐방했으며, 나름 많은 사전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자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엘리가 가져온 무지개 꽃은 본 적도 없으며 심지어 그나마 우리들 중에서도 약초에 대한 지식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지아 선생님 조차도 무지개 꽃의 존재 여부는 엘리가 어제 새벽에 직접 우리들 눈 앞에 확인시켜주기 전까지 조차도 몰랐던 기정 사실. 그렇다면 엘리는 그 무지개 꽃을 어디서 가져온 것일까? 설마 엘리가 아직 우리에게 소개시켜주지 않은 장소가 있는 걸까? 혹은 엘리만 알고 있는 비밀의 장소라든지... 모두가 숨을 죽이며 누나의 질문에 대해 곱씹어 본다. 무지개 꽃과 같은 중요하고도 희귀한 약초가 있는 지역을 진작부터 일고 있었다면, 엘리가 지아 선생님에게 알려주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런데 실제로 엘리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장소에서 무지개 꽃을 캐왔다. 간밤에 엘리가 우리에게 보여준 행동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고민에 고민을 하던 와중에, 먼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인물이 수줍게 한쪽 손을 든다. "우리 세리아는 어떻게 생각해?" 졸지에 사회자 역할을 담당하게 된 누나의 말에 세리아가 아리의 어깨를 툭툭 건들이더니 수화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해준다. 그와 동시에 나와 유아 선배는 번갈아가며 세리아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를 유지하며. "세리아가 수화를 하는 건 처음 보는 거 같아." "저도 거의 본 적이 없어서..." 어차피 수화를 해봤자 알아듣는 사람이라고는 아리아밖에 없어서 우리들 앞에선 일부러 안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세리아의 의견을 전달받고 있는 아리아가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쌍둥이 자매는 역시 일심동체구나. 신기할 정도로 닮은 외관을 자랑하는 두 은발의 미소녀 자매지만, 성격은 판이하게 다른 탓에 가끔 진짜로 쌍둥이가 맞을까 라는 의문을 선사해주기도 하는 이중적인 효과를 창출하기도 한다. ============================ 작품 후기 ============================ 작품 예약으로 올라가는 편수입니다. 요즘 코멘트가 부쩍 줄어들어서 질문식 리플이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있다면 다다음 편 후기란에 답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렛츠 드링킹!!! 226화 세리아의 수화를 통해 의견을 전달받은 아리아가 대신해서 언어화를 시켜준다. "엘리가 우리에게 말하지 못할 복잡한 사정이 있는게 아닐까 싶다고 하네요." "그거야 우리들도 아는 사실이고."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를 데려갈 수 없는 위험한 장소라든가..." "위험한 장소?" "생각해보세요. 선배. 엘리가 우리를 데리고 갔던 장소 중에서 '대나무 숲'이 있었죠?" "있었지." "그 곳에 갔을 때, 저희들이 무슨 일을 겪었었죠?" "음..." 그리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얼마전에 일어난 일은 제대로 알 수 있다. 게다가 무인도 대부분에서 겪는 일들은 전부 다 생소한 에피소드들 뿐이기 때문에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원숭이 무리들이 우리 도시락을 훔쳐간 사건이 있었지?" "네. 아마도 엘리에게는 그게 어떤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 게 아닐까 생각되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봐." "대나무 숲에 재료를 구하러 갔지만, 원숭이 무리들이 우리들에게 그리 심한 장난을 칠 거란 생각은 엘리도 예상하지 못했던 거죠. 실제로 원숭이들 덕분에 도시락을 걸고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나지만, 엄밀히 생각해보면 그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기도 해요. 원숭이들이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악의를 들어냈다면, 단순히 도시락을 두고 술래잡기를 할 수준이 아니라 험한 상처도 입었을 가능성도 크니까요." 아리아의 말에 모두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엘리가 대나무 숲을 안내해주고, 원숭이 무리들에게 위협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 건 사실. 하지만 그게 전체적으로 엘리의 잘못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리아도 말했듯이, 원숭이 무리들이 우리에게 그렇게까지 심한 경계를 할 줄은 본인도 몰랐을테고, 그리고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만 본다 하더라도 그리 큰 피해는 없었다. 약간의 체력 소모만 전부였으니까 말이다. 생각을 정리해주려는 듯이, 아리아가 세리아의 전반적인 의견을 자신의 생각과 곁들여서 조율해주기 시작한다. "결국 엘리에게 있어서 우리들에게 희미하게나마 위험 요소가 있는 장소를 안내해준다는 일에 대해서 어느정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거부감이 든 게 아닐까 생각해요." "전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닌데." 그래도 무신경한 엘리가 알고보니 속내는 여리디 여린 소녀의 감성으로 그런 배려를 했다는 게 매치가 잘 안 된다. 내가 여자에 대해 잘 모르는 건가? 뭐... 남자의 입장이다 보니까 그럴수도 있긴 한데. "어쩔 수 없지." 고민에 휩쌓인 누나가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한다. "옛 선조님들의 말씀을 충실히 이행하는 수 밖에." "어떤거?" "모르면 물어봐야지." 라고 말하면서 성큼성큼 엘리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엘리.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 만류할 틈도 없이 곧장 엘리에게 왜 무지개 꽃이 있던 장소를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는지 묻는 누나. 본래 남자같은 성격이라는 건 친동생인 나도 잘 알긴 하지만, 저렇게나 무신경한 여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조차도 괜히 엘리에게 직접 묻는 것이 미안해서 못 물어보고 있었는데.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초호기와 놀아주는 것을 포기한 엘리가 영어로 누나에게 쏼라쏼라 대답을 해준다. 대충 알아들었다는 듯이 오케이 사인을 보낸 누나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세리아를 가리키며 말하길. "아깝다. 틀렸어." "......" 순식간에 퀴즈 프로그램으로 전락해버린 회의. 누나의 말에 어떠한 반응을 보여줘야 좋을지 진심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내 눈 앞에, 세린이 입을 연다. "엘리가 진짜 이유를 말해줬나요?" "응. 그런데 세리아의 말이 정답은 아니었지만." "정답이 뭔데요?" "맞춰보렴." "......" 진짜 퀴즈 프로그램이 되어버렸다. 상품도 없고, 아무런 맥락도 없는 예능 프로그램이 되어버린 회의속에서 엘리의 영어 대화를 알아들은 인물 중 한명인 지아 선생님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정답은 '알려주는 걸 깜빡해서'잖아." "지아 선생님! 컨닝은 안 되요!" "편법도 들키지만 않으면 노력의 수단 중 하나니까." 그렇다고 선생의 입장에서 컨닝을 적극 권장하는 듯한 말투로 저런 대사를 읊는 건 좀 아니라고 본다. 교육청에 근무중인 높으신 분이 지금 우리들의 대화를 청취하면 어떻게 하려고 저러는 지 모르겠다만. 무인도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 엘리에게 무지개 꽃이 있는 장소를 소개시켜달란 부탁을 건네자, 곧바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여준 엘리 덕분에 우리는 현재 어느 한 장소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름하여. "동굴... 이네요." 손바닥으로 임시 햇빛 가리개를 만들어 음산한 동굴의 전체적인 모습을 감상한 체리의 한 마디. 그렇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장소. 바로 얼마 전에, 지아 선생님과 체리와 함께 난파선에서 의료 도구를 찾으러 갔다가 복귀하는 길에 목격했던 바로 그 동굴이다. 더불어 예신과 마주쳤던 장소이기도 한 곳. 예신은 나에게 분명히 '무인도에 필요한 무언가'가 있는 장소라는 말을 했다. 동굴의 끝에 도대체 어떠한 것들이 숨겨져 있을까 생각을 했었는데. "어머나." "대단하네요. 이거." 순차적으로 누나와 아리아가 약간의 탄성 섞인 목소리로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장관에 넋을 놓고 한 말들이었다. "이게 그 꽃이니?" "네. 교수님." 건강 상태가 좋아진 노아 교수님도 엘리가 안내한 장소까지 도달한 상황. 한 마디로 말해서 무지개 꽃이 널리 펼쳐진 작은 화원 앞에서 우리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동굴 천장을 통해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 그리고 작은 개울가도 위치해있다. 뭐랄까. 마치... "누가 인공적으로 만든 화원 같은데?" 유아 선배의 말 그대로다. 의도적으로 만든 인공 화원. 무지개 꽃 하나만을 기르기 위해 인위적으로 개울가를 만들어두고, 햇빛이 비춰지는 동굴의 끝자락에 작은 화원을 만들어둔 것이다. 사람이 만든 화원의 정체. 그리고 엘리가 알고 있는 장소. "엘리의 부모님이 지어주긴 곳일까." 노아 교수님의 말에 모두가 숙연해지기 시작한다. 엘리를 위해서 만들어준 장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나 뿐만 아니라 일행 전원의 머릿속을 가득 채워가고 있나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내 머릿속에는 여기서 한 가지 요소가 더 추가되고 있었다. 이 화원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또 한 명 더 있다는 것. 예신은 분명 화원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말투로 나에게 언급했다. 어제 저녁에 숲 속에서 만났을 때가 아닌 이 동굴 안에서 우연히 녀석과 마주쳤을 때. 무인도에서 필요한 무언가가 동굴의 끝에 있다. 노아 교수님과 같은 의미불명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약초. ... 어렵다. 이 장소가 진짜로 엘리만이 알고 있던 비밀 장소였다면 정말 좋았을텐데. 예신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 화원의 위치를 알아냈는지에 대한 사실은 불명이지만, 녀석이 알고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히 불안 요소로 작용할 수 있었다. 무지개 꽃을 독점할 수도 있다. 예신이 엘리를 견제한 것은 다름이 아닌 무인도의 정보를 자신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 그런 예신이 엘리만이 알고 있던 비밀의 화원을 눈치챈 것이라면, 이 화원을 독점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인가. 그리고 엘리는 예신이 이 장소를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을까. ============================ 작품 후기 ============================ 아마 오늘도 술자리가 있을 거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술 마시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연달아 마시기에는 약간 부담스럽다고 해야 할까요... 마시면 마실수록 다이어트하는 불쌍한 지갑 ㅜ_ㅜPS. 코멘트에 대한 답변은 오늘 술자리가 없다면 이 다음편수 후기란에 한꺼번에 정리해서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술자리가 없다면요...;; 227화 희귀한 약초인 만큼, 예신이 동굴 끝에 있는 무지개 꽃을 독점하게 된다면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오늘처럼 노아 교수님과 같은 병적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약초이기 때문에 언제, 누가 와도 구할 수 있게끔 개방이 되어 있어야 하는 장소에 예신의 손길이 뻗히게 된다고 생각한다면... 꽤나 위험하지 않을까. 분명 엘리의 부모님 역시도 무지개 꽃을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일부러 이 동굴 끝자락에 화원을 만들어두고 꽃 종을 보관했을 터. 곰곰히 생각에 잠겨보고 결론을 내린 나는 모두에게 한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해본다. "잠시만 모여보세요." "무슨 일인데 그래?" 누나가 의문을 제시하며 내쪽으로 다가온다. 다른 일행들 역시도 마찬가지. 먼 발치에서 화원을 가꾸고 있는 엘리에게만 들리지 않게끔 최대한 작은 목소리를 유지하며 내 생각을 들려준다. "우리, 엘리에게 선물 하나 하지 않을래요?" "선물이라고?" "네. 지금까지 엘리가 우리에게 도움을 줬던 일들에 대한 보답으로요." 가급적이면 최대한 오늘 하루 내에 모든 작업을 마치고 싶었기 때문에 이제 어느정도 기력이 회복된 노아 교수님과 깜짝 선물의 주인공이 될 엘리만 산장에 남겨두고 이 작업에 전원이 다 투입되었다. 엘리에게는 노아 교수님의 간병을 부탁했더니, 맡겨만 달라는 듯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초호기를 데리고 산장에 틀어박혀 있으니까 우리가 하는 일을 눈치챌 리는 없을 것이다. 물론 감이 뛰어난 엘리이긴 하지만, 정확한 내용까진 잘 모르겠지. "그나저나 왜 이런 수고스러운 작업을 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어." 연신 투정을 부리면서 열심히 산장 앞에 땅을 갈기 시작하는 세린의 목소리였으나. 짐짓 모른 척 무시해버린다. 괜히 거기에 맞대응을 해봤자, 내 체력만 소비되기 때문이다. 따갑게 내리쬐는 햇빛 아래에서 호미와 삽을 들고 열심히 땅을 갈고, 평탄화 작업에 착수한 우리들에게 이제 막 산장에 도착한 지아 선생님이 큰 봉투를 나에게 내민다. "부탁한 거, 가져왔어." "최대한 훼손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가져오신거 맞죠?" "이런 쪽은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장담은 못하지만, 어쨌든 노력은 했으니까 걱정하진 마." 지아 선생님과 함께 갔던 유아 선배도 엄지 손가락을 내밀며 비밀 임무 수행의 성공을 알려준다. "좋아요. 그럼 이제 이걸 뿌리기만 하면..." 고르게 잘 갈은 작은 정사각형 밭 위에 지아 선생님과 유아 선배가 가져온 씨를 뿌린다. 그리고 나무를 몇개 잘라서 울타리를 만들고... 마무리로 펫말까지 만들어서 망치로 땅에 박아넣음으로 인해 오늘 갑작스레 짠 작업 스케쥴은 클리어. 이제 남은 건 하나밖에 없나. "체리야." "네. 오빠." "가서 엘리하고 교수님 좀 불러와줄래?" 체리에게 간단한 심부름을 시키고 난 이후에 탈의한 상반신 위로 흐르는 땀방울을 닦는다. 거의 모든 인원이 투입된 작업이라고는 했으나, 허드렛 일은 전부 다 내가 담당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솔직히 말해서 죽을 맛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차가운 호숫가로 달려가서 샤워라도 하고싶은 심정이지만, 엘리에게 이 선물을 보여주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제 막 쾌차한 교수님과, 교수님의 허리에 착 달라붙은 엘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어머. 이거 뭐니?" 노아 교수님의 질문에 내가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대답해준다. "우리 모두가 엘리에게 주는 선물이요." "...?"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엘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지아 선생님이 대신 통역을 해주기 시작한다. 엘리에게 선물한 것은 바로 '무지개 꽃 씨앗이 심어진 작은 화원'. 사실 화원을 통째로 이 곳에 옮겨올까 생각도 했지만, 괜히 엘리의 부모님께서 만드신 화원을 회수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우리 산장 근처의 공터 중에 한 장소를 잡아 작은 화원을 만들었다. 그리 큰 면적을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정성을 들여서 울타리에 펫말까지 완공을 시켰다. 지아 선생님으로부터 설명을 다 들은 엘리가 쫄래쫄래 다가가 화원 위를 걸으며 씨앗이 묻혀있는 곳들을 살펴본다. 선물을 검사하는 건가. "기뻐하는 거... 맞지?" 유아 선배가 떨떠름한 얼굴을 유지하며 나에게 묻는다. 사실 나도 기뻐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이걸로 위안을 삼으려고 하는 그 순간에. "... thank you." 화원 한 가운데에서. 수줍게 작은 목소리를 낸 소녀가. 웃는다. 희미하지만, 분명 웃었다. 무인도에 와서 처음으로 본 엘리의 미소. 있을지 없을지 확신하지 못할 정도로 미스테리한 존재였던 '엘리의 미소'가 실존했다는 결말을 직접 우리들 앞에서 증명되었다. 엘리의 미소를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채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다. 나 또한 마찬가지. 순진무구한 어린 소녀의 미소가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또 너무나도 눈부셔 보였기 때문이다.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 피곤한지 잠에 빠진 엘리의 얼굴을 잠시 보고 바깥으로 나와본다. 다시 평상시의 무표정으로 돌아간 엘리였지만, 아마도 그 미소는 평생 잊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품은 채로 바깥에 나오자, 우리가 만들었던 엘리의 화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만드는 데에 고생은 많이 했지만, 그래도 엘리가 기뻐하니까 그걸로 된 건가. 사실 엘리의 선물에는 숨겨진 또 다른 목적이 있기도 하다. 이예신이라는 존재 때문에 마련한 일종의 대비책. 그 녀석이 무지개 꽃을 독점할 수도 있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직접 우리들이 머물고 있는 공터 안에 무지개 꽃 화원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직 다 자란 꽃들도 아니기 때문에 화원이라 부를 수도 없지만, 조만간 엘리가 잘 키우겠지 라는 생각 덕분에 안심이 된다. 우리보다도 많은 무인도의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아픈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나 보구나." 가디건을 걸치고 내 옆에 나란히 앉은 노아 교수님. 밤바람에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돈하는 교수님에게 고개를 끄덕여준다.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엘리에게 화원을 만들어주자고 했던 거... 네 의견이었다며?" "그런 셈이죠." "너한테 그런 세심한 점이 있을줄은 몰랐어." "이래봬도 매너가 넘치는 남자거든요." "어머. 그러니?" 솔직히 말하자면 매너니 뭐니 왈가불가 할 문제도 아니다. 항상 우리 곁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언제나 우리들과 같이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의 소중함을 눈치채지 못한 것일 뿐이다. 무인도에 표류되고 나서, 나 뿐만 아니라 여기에 있는 모두가 엘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까. 낯선 섬에서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우리들에게 엘리는 자신의 정보와 지식, 경험을 토대로 아낌없는 조력자를 자처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사람이 그리워진 엘리이기 때문에 간혹 교수님과 우리 누나, 그리고 지아 선생님의 허리에 아기처럼 딱 달라붙어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긴 하지만. 그건 다 엘리가 어리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가 이 무인도에서 생활해 왔다는 점 자체가 대단하니까. 본의 아니게 엘리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은 시간이 되었다. "아마 오늘 엘리가 보여줬던 미소, 평생 잊지 못할 거 같아." 교수님의 혼잣말. 그리고 그 말의 의미는 아마 이런 뜻을 내포하고 있을거다. 엘리에게 좀 더 많이 미소짓게 만들어주고 싶은 일들을 해주고 싶다... 라고. ============================ 작품 후기 ============================ 오늘은 술자리에 안 갔습니다. 돈이 없어서요 ㅡ_ㅡ;; 그런 의미로 이번에는 '술자리 안 가고 그동안 밀린 코멘트 정리 토크 1회'입니다. 우선 지금까지 코멘트를 쭉 정리해서 나열해드리자면, 이예신이라는 등장인물에 대한 호불호가 상당히 갈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실 무인도 이야기만 주구장창 쓰다보면 분명 무난한 이야기 전개는 펼칠 수 있겠지만, 보시는 입장에서 질리기 마련입니다. 실제로도 별다른 자극 없이 무인도 생활 에피소드만 나오면서 예전에 비해 피드백이라 할 수 있는 코멘트 수도 현저히 줄어들었고요. 이야기는 언제나 자극이 있어야 되고, 그 자극이 되는 중심 소재가 바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예신이란 인물을 넣었고, 이 인물은 나중에 주인공에게 있어서 커다란 생각의 전환점을 선사하게 될 중요 인물이기도 합니다.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까지 일일히 다 설명드리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로 아직까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예신이란 인물이 왜 사회보다도 무인도가 더 천국이라 느끼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 그리고 그 이유를 깨는 주인공의 마음가짐이 이예신 중심의 에피소드에서 가장 큰 갈등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인도 생활 에피소드 노선을 포기한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이후에도 무인도 근처에 있는 작은 섬에 관련된 이야기라든지, 수영에 관련된 에피소드, 그리고 식량이 없어서 애벌레를 먹어야 하게 되는 초 궁핍 상황 에피소드 등 무인도 생활 관련 에피소드 역시도 꾸준히 나올 예정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코멘트에 대한 답변을 드리자면... 세리아 아리아 자매 갈등 에피소드는 삭제된 게 아니라 아직 순번상으로 나오지 않은 것 뿐입니다. 아마도 곧 나오리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생존자 집단의 등장은 물론 있을 예정이고요. 이예신에 관련된 이야기는 아직 상세히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주인공과 대립되는 대표적인 인물이 될 예정이고... 한 마디로 악역입니다. 이상 간단(?)했던 후기란이었습니다. 228화 EP 23. 자매 싸움 임시 베이스 캠프를 설치하고 난파선을 수색한 지 거의 1주일이 다 되어가는 상황. 도중에 약간의 문제(귀신 소동...)가 있었지만, 그 이후로도 끊임없는 작업으로 인해서 난파선 내부에 있는 물건들을 꽤나 많이 공수해올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들이라고 한다면 우선 의류가 있고. 그 중에서도 특히나 여성 속옷. 난파선을 찾아보다가 의류들만 모아놓은 작은 가게가 있어서 그 곳에서 다양한 옷들을 가져올 수 있었다. 물론 속옷도. 여성들은 특히나 속옷을 많이 반기는 눈치였다. 가뜩이나 브래지어 사이즈가 맞는 여분의 속옷이 없어서 불편했는데, 개인당 최소 4~5개의 속옷을 확보할 수 있었던 좋은 결과물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난파선 탐험대 제 2차 원정길의 최초 원인 제공이었기도 한 피아노 줄 역시도 확보 완료. 지아 선생님의 말씀 그대로 식당 내부에서 피아노가 바닥에 굴러 다니고 있었다. 주방과는 정 반대의 위치에 있는 한쪽 구석에 피아노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발견해지 못했던 것이었다. 어두운 실내에다가 구석에 제대로 박혀 있어서 그냥 일반 가구로 오인했던 것이 알고보니 피아노였다는 나름의 반전도 확인할 수 있었다. 피아노 줄 이외로 다수의 양초라든지 비누, 샴푸 등등등 여러가지 물품들을 확보한 우리들. 난파선 내부에서 옮길 수 있을만한 가방이라든지 쇼핑백도 가져온 뒤에 구해온 물품들을 차곡차곡 넣는다. "드디어 산장으로 돌아가는 건가... 감회가 새롭네." 유아 선배가 옷을 가방 안에 넣으면서 작게 말한다. 누나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적극적으로 공감하기 시작한다. "그러게. 빨리 가서 샤워하고 싶어." "샤워라... 1주일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했으니까. 정말 빨리 씻고 싶다." 누나와 유아 선배의 담화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로 우리들은 일주일동안 제대로 샤워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간단한 세수는 떠온 식수를 통해서 할 수 있었지만, 정작 필요한 샤워는 못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렇게나 많은 물을 가져온 것도 아니고. 그리고 주변에 호수라든지 식수 이외로 사용할 수 있는 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바닷물에 들어가서 샤워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히러 샤워를 안한 것 만도 못한 바닷물 샤워. 그래서 본의 아니게 서로 샤워를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옷 문제는 해결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샤워는 못한다고 해도, 난파선에서 가져온 다수의 옷들 덕분에 하루에 한번씩 새로운 옷으로 갈아 입으면서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옷에서 땀냄새가 난다든지 하는 안쓰러운 일은 없었다. 그러나 샤워를 안하고 지냈기 때문에 여전히 찜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 의미로 나 역시도 누나의 샤워하고 싶다는 투덜거림에 동감하는 바이다. "준비 다 되었니?" 노아 교수님이 우리들에게 묻기 시작한다. 아직까지는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노아 교수님에게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라는 의미를 담은 말을 전해준다. "아직 멀은거 같아요. 교수님 쪽은요?" "우리는 거의 다 끝나가고 있어. 그런데 유에. 이 움막은 어떻게 할 거니?" "아, 움막이요?" "응. 허물거나, 아니면 방치하거나 해야지. 지아 언니가 묻고 오라고 시켜서." "그렇네요. 움막이라..." 허물어 버릴까? 하지만 기껏 지은 집인데 말이다. 나름 애정도 쌓였는데. 고민하는 나에게 누나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한다. "놔두는 게 좋지 않아?" "방치 플레이를 하자고?" "어차피 움막을 이대로 놔두고 간다고 우리들에게 피해가는 일도 없을테고. 그리고 운이 좋다면 나중에 난파선에 다시 올 때 이 움막이 남아 있다면 좋잖아. 다시 지을 필요도 없고." "그때까지 이 움막이 과연 남아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예전에 겪었던 폭풍우 같은 게 오지 않는 이상 괜찮겠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움막을 '허무'면 '허무'하잖아." "... 우와. 재미없는 개그." "이게 바로 하이 개그라는 것이란다. 남동생." 이럴 때 가끔 느끼지만, 누나와 같은 혈육이라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워진다. 이런 썰렁개그는 제발 참아줘. 손발이 오그리 토그리 된단 말이야. 허무로 개그를 하는 누나의 말을 들어보니 예전에 '허무개그'라는 것이 떠오른다. 잠깐 반짝이다가 어느순간 잠잠해진 시대의 한 획을 그었던 허무개그.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다. 현재시각 오전 10시. 산장까지 가는 데에 소비되는 시간은 대략 반나절. 짐까지 들고 간다는 것까지 예상해보면 반나절 조금 넘게 걸린다고 봐야 좋을 듯 싶다. 짐을 다 싸고 난 이후에 먼저 식사를 하기로 한 우리들. 강행군이 될지도 모르는 행군 전에 배를 든든히 채우고 가는 것이 좋을거라는 우리들의 주치의, 지아 선생님의 의견이 있었기 때문에 점심 식사 준비가 한창이다. 어찌보면 난파선에서 먹는 마지막 식사가 될 지도 모르는 상황. 기분이 약간 뒤숭숭하기도 하다. "이제 마지막이네. 이 곳과도 드디어 작별이구나." 유아 선배가 허리춤에 손을 올려 놓으며 속 시원하다는 듯이 말하자, 세린도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유아 선배의 의견에 적극 동조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곳은 절대 두번 다시 오고싶지 않아요." "모처럼 의견이 맞았구나." "선배도 저처럼 단순히 무서워서 그런 것일 뿐이잖아요." "... 아하하." 며칠 전에 벌어진 은발의 유령 사건 덕분에 한동안 우리들 사이에선 거의 초토화된 분위기가 계속 되었었다. 누나는 그 이후로부터 유령이 있다고 실제로 믿게 되었고, 지아 선생님도 '이런 식으로 유령이랑 대화를 하게 될 줄이야...'라며 어찌보면 냉철한 소감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도 했다. 당연히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유아 선배와 세린은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 세리아와 체리도 난파선 쪽으로는 당분간 쳐다보지도 못하겠다며 바들바들 떨기도 했다. 노아 교수님은 겉으로는 멀쩡한 척 했지만, 밤만 되면 잠을 못자는 일시적인 불면증까지 겪기도 했다. 세상 참 미스테리한 일들도 많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아리아는 그 때 '왜 하필 저와 세리아 언니랑 비슷한 외형으로 나타났는지 모르겠군요. 특히나 왜 저로 둔갑했는지에 대해서는 따지고 싶을 정도에요.'라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유령에게 따져서 무슨 이득이 있을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봤지만, 사실 아리아의 입장에서는 어찌보면 '초상권 침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아리아의 불만을 어느정도 인정 해버린다. 유령이 고소당해서 법정에 서는 것도 조금 웃길지도 모르겠다. 판사나 변호사, 검사 양반들은 담력이 강한 분들이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경찰관 대신에 퇴마사를 배치하고. 일명 '유령 법정'이라고 할까. 오, 이거 소재 좋은데? ... 그런데 나는 왜 이런 잡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무튼 여러가지 이유로 한동안 패닉 상태에 빠졌던 우리들. 그러나 해야 할 일은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오기와 근성으로 난파선 수색 작업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점심 다 되었어." "네. 금방 갈게요~" 오랜만에 지아 선생님이 요리사가 되어서 점심을 담당하게 되었다. 여성진들 중에서도 가장 요리를 잘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안심하며 식사에 열중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물론 요리를 잘하긴 하지만, 그래도 실제로 유부녀이기도 한 지아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음식은 훨씬 잘 하는 편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런 지아 선생님 본인이 요리를 자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식사를 하는 와중에, 아리아는 연신 세리아의 곁에 붙어 있으면서 여러가지 질문을 한다. "언니. 신발은 사이즈에 맞는 걸로 신고 있는거지?" "......" "가방 끈은. 최대한 조여서 등에 붙게 해야돼. 그래야 어깨에 부담이 덜 가니까. 알았지?" "......" "그리고 물은 꼭 챙기고. 아, 물은 무거울 테니까 내가 들게. 마시고 싶을 때는 나한테 말해. 곧바로 줄테니까." "......" 역시나 지치지 않는 언니 사랑이다. 오죽하면 본인이기도 한 세리아가 다 부담스러워 할 정도일까. 누가 보면 진짜 레즈비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세리아를 애지중지하는 아리아의 태도. 다른 각도로 보자면 그 행동은 병적이기까지 할 정도가 아닐까. 아리아의 참견에 살짝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세리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쓰이는지 세리아가 입모양으로 아리아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목소리를 낼 수는 없기 때문에 단순하게 입모양만 뻐끔뻐끔 하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세리아. 아직까지 세리아의 입모양을 통해서 그녀가 뭐라고 하는지 나는 잘 알아들을 수 없다.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리아밖에 없고, 그나마 70~80% 정도 수준으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지아 선생님 정도밖에 없다. 아무래도 양호 선생님이다 보니까 의료 분야에서 전공한 분이기 때문에 세리아와 같은 증상의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가끔 수화도 사용하는 세리아였지만, 수화를 아는 사람은 역시나 아리아밖에 없다. 그래서 세리아는 아리아에게 뭔가 말하고 싶을 때만 수화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나뭇가지로 바닥에 글씨를 쓰거나 하는 게 전부일 뿐이다. 세리아의 말을 알아들은 아리아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말한다. "어니. 이건 과보호가 아니야. 동생으로서 순수하게 언니를 걱정하는 거라고." "......" 무인도에서 그동안 아리아와 세리아 자매와 알고 지낸 경력이 꽤 된다고 자부하는 나. 지난 한달동안 그녀들과 지내오면서 세리아가 '화'를 내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세리아가 살짝 얼굴이 굳어지는 모습 자체로도 신기한 것을 목격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이다.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어느새 아리아와 세리아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 순간적으로 아리아가 훔칫 주변의 상황 변화를 눈치채고 세리아에게 말한다. "... 알았어. 아무튼 무슨 문제 있으면 바로 나한테 말해줘. 알았지?" "......"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세리아. 한 순간 언성을 높이며 최초의 은발 자매의 싸움을 보게 되는건가 라는 생각을 했지만, 일단 그 일은 무산이 되었다. 불행 중 다행이로다. 정말로. ============================ 작품 후기 ============================ PS 1. EX 에피소드 이전 내용이었던 보물선 에피소드와 바로 이어지는 에피소드입니다. PS 2. 평소와 마찬가지로 코멘트 답변 정리는 자정에 올라가는 편수 후기란에 한꺼번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PS 3. 날씨가 너무 덥습니다. 벌써 여름같이 느껴집니다. 동원훈련을 7월에 가야하는데, 벌써부터 더우면 어떻게 훈련을 받을지... 머리가 아파옵니다 ㅜ_ㅜ 229화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드디어 시작된 행군. 반나절의 소요 시간이 예상되지만,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기 때문에 넉넉하게 행군 기간은 하루를 잡게 되었다. 무리하게 발걸음을 재촉하다간 부상을 당할 우려도 있고, 그리고 컨디션 조절도 해야 하기 때문에 여유롭게 길을 가는 것을 택하게 되었다. 밤에 이동을 하는 것도 무리가 있고 말이다. 선발대로 앞장서 가고 있는 나와 노아 교수님. 그리고 중간에 지아 선생님과 아리아, 세리아 자매, 엘리와 체리가 위치하고 있고 후발대로는 견원지간이기도 한 세린과 유아 선배가 뒤를 따르는 식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아리아 말이야..." 내 옆에서 걸음을 유지하고 있던 노아 교수님이 뒤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건다. "아리아요?" "응. 아까 세리아하고 싸울 뻔 한 거 아니니?"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그 둘이 싸운다는 것은 상상조차 안 되는걸요."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세리아는 아리아의 간섭을 많이 부담스러워 하는 거 같아." "하긴... 그건 맞는 말이긴 하죠." 실제로도 아리아의 세리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맹목적이라고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아리아가 나중에 딸이나 아들을 낳게 되어도 세리아를 돌보는 정도 수준까지 관심을 가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우리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이야기다. 너무 친해서 문제인 아리아, 세리아 자매 사이가 있는 반면에 너무 친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는 유아 선배와 세린도 있지만. 유아 선배와 세린도 아리아와 세리아 자매같은 관계의 반이라도 본받았으면 좋으련만. 그 점이 아쉽다. "예전부터 궁금해하던 건데... 혹시 세리아가 말을 못하는 이유에 대해 알고 있니?" 노아 교수님의 직접적인 질문. 이런 질문을 나에게 한다는 소리는 아마 본인 역시도 모른다는 말과도 같은 게 아닐까? 확인 차원으로 되묻기 시작한다. "노아 교수님도 모르시나요?" "응. 들은 적이 없어서."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 이건 의외다. 노아 교수님에게는 한번정도 상담할 수 있을 정도의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리아와 세리아, 두 자매의 개인사는 아무리 같이 무인도에 생활하고 있는 우리라 하더라도 쉽사리 침범할 수 없는 그런 철통방어를 자랑하고 있나보다. 걷고 걷다보니 거의 저녁이 다 되어가는 상황. 계속해서 행군을 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한 나는 우선 다른 사람들에게 짐을 풀고 노숙을 준비할 것을 알려준다. "여기서 더 이상 나아가는 것 보다 잠잘 준비를 하는 게 좋겠어요." "그러는 편이 좋겠어. 다른 사람들도 힘들어 보이니까."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아침부터 계속 걷기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온 거리는 이제 겨우 3분의 2. 아직까지는 끝나지 않은 여정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행군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보여지는 숲 속에서의 노숙. 사실 우리들은 그 동안 계속해서 이 숲 속보다는 공터라든자 해변가라는 탁 트인 공간에서 잠을 취해왔기 때문에 숲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맷돼지라든지 아니면 늑대 기타 등등 육식 동물이 우리들을 습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제일 중요한 불을 피우고, 그리고 식사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감자와 고구마로 대체한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감자 and 고구마네." 유아 선배가 불만섞인 목소리를 우회적으로 내본다. 참고로 감자와 고구마를 먹어본 일은 매우 흔한 일이지만, 이렇게 식사로 감자와 고구마 만으로 해결하는 일이 오랜만이라는 뜻이지, 감자와 고구마를 오랜만에 먹어본다 라는 의미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래서 한국말이 정말 어렵다. 함축적인 의미로 너무 많이 사용되니까. 음. 식사를 준비하는 여성진들을 대신해서 나와 유아 선배, 그리고 누나는 주변에 우리들이 잠을 청할 수 있는 공터를 만들어둔다. 풀이라든지 나뭇가지를 다른 곳으로 치우면서 바리케이트 같은 것을 만드는 등 하는 일을 도맡아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체리가 다급한 표정으로 나를 부른다. "저, 저기 오빠..." "왜 그러니, 체리야?" "그, 그러니까..." 뭔가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것일까. 대답을 할까 말까 심적인 갈등을 많이 표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체리에게 내가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한다. "괜찮아.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거리니까. 나한테만 조용히 말해봐." 타인의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느낀 나는 체리를 안심시키고자 그런 말을 한다. 그러자 체리의 얼굴이 급격하게 빨개지더니 이내 나에게 오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한다. "그, 급한 일이..." "급한 일이라면 혹시..." "대... 변..." "... 아하." 체리가 말 못할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아직 화장실도 만들어지지 않았고, 게다가 밤인지라 혼자서 볼 일을 보러 가기에도 체리의 입장에서는 무서울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하다. 저번에 유령 사건을 통해서 부쩍 여성진들의 겁 수치도가 매우 상승해서 화장실을 가거나 할 때는 거의 2인 1조로 다니게 된 것이 알게 모르게 관습화 된 상황. 그래서 체리 역시도 혼자서 화장실을 못가게 된 불운의 후배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나일까? 같은 여자들인 다른 사람들과 가면 될텐데. "근데 왜 선택한 사람이 남자인 나야?" "다른 사람들은... 바빠 보여서요..." "그렇구나." 갑자기 이것도 조금 서글퍼 지는데. 결국 하는 것이 없어 보여서 나를 택했다는 사실 아닌가. 그런데 나도 나름 노동을 하고 있다고. 겉으로 보이기에는 나뭇가지를 집어서 던지는 행동이라든지, 돌들을 집어서 멀리멀리 던지는 것이 노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것도 이것 나름 중요한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체리의 눈에는 그저 한가하게 노는 백수 오빠의 모습으로 보인 모양이다. 왜 이리 슬픈 기분이 느껴질까. 이 오빠, 원래는 잘 안 우는데 오늘따라 눈물이 나오네. ... 어찌 되었든 그건 그것으로 가볍게 넘기고. 체리의 볼 일이 우선이기 때문에 급한 일부터 해결하자. "알았어. 잠깐만 따라와." "네..." 임시적으로 마련한 베이스 캠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은 우리들. 화장실을 따로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나는 근처의 나무 기둥 하나를 골라서 그 곳 주변의 풀을 뜯어준 뒤에 체리에게 말한다. "여기서 볼 일을 보면 돼." "아... 감사합니다." "그럼 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다릴 테니까..." "그, 그건 안 돼요!" "안 된다고?!" 잠깐. 이게 무슨 소리냐. 여자가 볼 일을 본다는데. 그것도 작은 것도 아니고 큰 것을 본다는 데 당연히 자리를 비켜줘야지.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잰틀맨의 마음가짐 아닌가? 나는 성실하게 마더 파더 잰틀맨의 의지를 이어가기 위해서 나름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자리를 비켜준다고 말을 했는데 레이디 께서는 오히려 내 말을 거절한다. 알 수 없는 레이디의 말에 일단 질문부터 던지고 시작하자. "그게 무슨 뜻이야? 체리. 설마... 볼 일을 보는 모습을 직접 봐달라는 그런 소리는..." "그, 그게 아니라요... 제 시야 범위 내에... 머물러 주세요오..." "바로 앞에 서 있으라는 뜻이야?" "바로 앞은 너무 심하고... 약간 떨어져서요... 아니, 바로 앞에 머물러 주세요!" "......" 대충 체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 거 같다. 유령 후유증이라... 참으로 오래가는 증세다. 뭐... 그래도 체리니끼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 만약에 세린이라든지 유아 선배였다면 그냥 바로 옆에 머물라고 했을 것이다. 수치심을 포기하면서 까지 내가 곁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체리. 그 정도로 난파선에서 겪었던 체험은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스르륵. 치마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사실 그리 늦은 밤도 아니기 때문에 실루엣 정도는 다 보인다. 지금 체리가 치마를 벗으면서 동시에 팬티를 내리는 장면까지. 아무리 서로 육체관계를 가졌던 사이라고는 하나, 배설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또 다른 수치 플레이이기도 하다. 그... 예전에 언급했던 적이 있었는데. 스캇물이라는 거 있지 않은가. 여성이 배설을 하는 행위를 보고 성욕을 느끼는 성벽을 스캇물이라고 한다. 참고로 내가 말한 배설물이라는 것은 작은 것도 아니고 큰 것이다. 전문 용어로는 대변, 그리고 아주 간단하게 한 글자로 표현하면 똥이다. 살짝 힘을 주는 체리의 신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체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은 아무래도 상호간의 입장에 있어서 부끄러운 행위라고 생각이 든 관계로 나는 지금 뒤를 돌아보고 있다. 내 등 뒤에는 체리가 볼 일을 보고 있는 상황. "흐읏..." 최대한 소리가 안 나게 하려고 힘조절을 하는 것일까. 그러나 배설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들리게 되는 특유의 사운드 효과는 체리의 능력으로 조절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조금씩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 여자라고 역시나 별반 다를 것은 없나보다. 예전에 '우리들의 여신 김태희 님은 똥을 싸는 게 아니라 초콜렛을 쌀 것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인에 대한 나름의 환상을 갖추고 있는 남자들이 많았는데, 이런 식으로 본의 아니게 환상이 깨어지는 경우도 다분히 있다. 똥에서 향기가 나지 않을까 라는 말도 안되는 상상이라든지 그런거 말이다. 그러나 여자 역시도 멀쩡한 인간이고, 남자와 같은 생물이다. 비록 성이 다르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오빠... 드, 들리나요...?" "아니. 전혀. 바람소리 때문에 아무런 소리도 안들려. 하하하." "다행이다..." 사실 그럴 일은 전혀 없다. 2M 거리에 있는데 소리가 안 들릴리가 없다. 체리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이 오빠의 마음을 이해해주렴. 체리야. 그러고보니 저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세린이었나? 단체로 급성 위장염이 걸렸을 때 화장실 부족 문제로 나와 엘리가 작업하는 곳에서 대변을 봤던 사건 말이다. 그 일이 데자뷰처럼 느껴지는 와중에 체리의 말이 작게 들려온다. "다른 분들에게는 절대로 말해주지 마세요. 오빠. 부탁이에요!" "알았어. 나도 그렇게까지 눈치 없는 사람도 아니고. 너무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내가 이 말을 해봤자 손해를 보는건 오히려 내 쪽이다. '여자아이가 대변을 보는 데 왜 멀쩡히 보고 있는거야!'라면서 엄청난 질책을 받을 것이 뻔하니까 말이다. 안 봐도 비디오, DVD, 블루레이다. ============================ 작품 후기 ============================ '술의 유혹을 이겨내고 성실하게 코멘트 정리 후기를 올리자! 토크' 제 1회입니다. 이예신은 본편 스토리에서도 나온 적이 있습니다. 아리아와 주인공이 같이 생존자의 흔적을 찾으러 갔을 때 최초로 만난 적이 있지요. 이예신에 관련된 개인 에피소드는 EX 에피소드 뿐만 아니라 본편 스토리에서도 점차적으로 언급이 될 여정입니다. 등장 타이밍이 중요하기 때문에 지금은 간(?)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럼 더운 날씨에 모두들 건강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230화 시계도 없는 상황이서 이런 대치 기간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궁금증을 유발하던 찰나에, 할 이야기도 없는 거 같아서 체리에게 말을 걸어본다. "체리야." "네...?" "아리아와 세리아 있잖아." "아... 네." "세리아가 말을 못하는 이유, 혹시 들어본 적이 있어?" 아무래도 같은 또래 여자아이들이다 보니까 그런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 내게 직접적으로 체리에게 자문을 구해본다. 체리하고 세리아도 둘 다 성격이 비슷한지 워낙 친한 사이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여자 아이들 사이는 서로 비밀 같은것도 공유하고 친하게 지내는 아이들도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져본다. 그러나 체리의 답변은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니요오... 들은 적이 없어요." "그래?" "혹시 오빠는 아시나요?" "글쎄..." 알고는 있지만, 일부러 모른 척을 한다. 왜냐하면 본인들이 체리에게 직접 말하지 않은 사실을 내가 무슨 자격으로 말해주겠는가. "지아 선생님은...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양호 선생님이시니까 세리아의 진료 같은 것을 평소에 잘 봐주셨던 것으로 얼핏 기억하는데..." "지아 선생님이라." 그러고 보니까 지아 선생님고 가능성이 조금 있을지 모르겠다. 어떤 의미로는 세리아의 주치의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냥... 왜 아리아가 세리아에게 그렇게까지 신경을 많이 쓸까 해서." "아침에 있었던 그 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너도 알고 있었구나. 세리아 본인은 상당히 많이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지만 말이야. 저러다가 서로 싸우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서." "... 세리아와 아리아가 싸우는 장면은 상상조차 안 되는걸요..." "그러게 나도 이미지 상으로는 전혀 떠오르지 않아." 아무리 머릿속에서 상상을 해봐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타일로 가득 차 있는 모자이크 뿐이다. 한 마디로 상상조차 불가능. 다른 사람들에게는 까칠한 태도를 보이는 아리아지만, 언니인 세리아의 일이라면 죽고 못 살 정도로 신경을 엄청나게 많이 쓰는 아리아. 만약에 세리아와 아리아 둘 중에 한명이 죽어야 나머지 한 명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데스매치를 해도 아리아는 스스로가 목숨을 끊을 정도로 세리아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 그 정도 수준으로 말이다. 어찌보면 아리아가 세리아를 동성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 동성이 아니라 이성으로? 가능성이 있는 말일까. 하지만 전면 부정은 하지 못하겠다. 왜냐하면 이 무인도에서 아리아와 세리아랑 같이 3P를 할 때, 아리아는 분명 자신이 세리아와 키스했던 적도 있다고 했다. 아무리 자매애가 깊다고 해도 서로 키스를 하는 것은 무리수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키스라는 것은 이성끼리 서로 '사랑'하는 연애감정에 의해 비롯되는 애정행위 아닌가. 그런데 아리아와 세리아는 그런 이성관계도 아니고. 그저 같은 혈육이고, 게다가 동성이다. 그런데 키스를 했단 말이지... 아무리 아리아가 세리아를 배려해서 키스를 했다고 해도, 그건 어떤 의미로 받아 들여지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세리아는 정말로 순수하게 키스 예행 연습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아리아는 어떨까... "체리야." "네?" "혹시 너. 외동딸이니?" "아니요... 위로 언니가 한명 있어요." 체리가 외동딸이 아니라는 사실도 오늘 처음 알았다. 뭐 자매나 남매가 있다고 하더라도 장녀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막내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는 체리였다. 이 정도 예측 능력이라면 점집이라도 차려도 되겠는걸. 신내림이라도 받는건가. 요즘의 나 말이다. 그건 이야기 진행에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 일단 넘기도록 하자. "체리는 언니에게 '연애 감정'을 품어본 적이 있니?" "여, 연애 감정이요?" "그래. 동성으로서, 아니면 순수하게 자매로서 언니를 동경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 말이야." "... 전혀요." "그게 정상이겠지." 체리의 말 그대로 같은 자매라도 이성끼리의 연애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레즈비언이 아닌 이상 말이다. 그럼 아리아는 레즈비언인가? 아니, 그것도 전면으로 부정할 수 있다. 레즈비언이라면 남자인 나와 관계를 갖는 일 보다 세리아와의 관계를 갖는 일을 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세리아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었다면, 나와 세리아가 섹스를 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대를 했을 것이다. 플랜카드를 만들어서 1인 시위를 해도 부족한 점이 없을 정도로 반대 의사를 많이 표현했을 것이니까. 그러나 아리아는 달랐다. 심지어 세리아와 같이 나와 육체관계를 가졌다. 세리아의 몸 안에 나의 성기를 넣는 장면을 아리아 역시도 직접 보았다는 소리다. 정말로 아리아가 세리아를 동성의 우정이 아닌 이성의 애정으로 아끼고 사랑했다면, 그 당시에 아리아가 나와 세리아의 섹스를 반대했어야 정상일 테니까. 그럼 이 가설도 땡이란 말인가. 사랑이 아니라면 도대체 아리아가 세리아에 대한 맹목적인 봉사는 어디에서 나오게 된 것일까. 혹시 세리아가 말을 못하게 된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남자에게 강간을 당할 뻔 했던 일 때문에 충격으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하지만 이건 직접적으로 내가 사정을 알지 못하는 한, 쉽게 알 수 없는 가설이기도 하다. 그녀들의 과거 이야기를 상세히 모르는 한, 이 문제점은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을수도. ... 어렵다. 어려워. 역시나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퍼즐이 바로 인간관계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아리아와 세리아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체리의 부단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부스럭 부스럭 거리는 소리로 들어 봐서는 아마도 볼 일을 마치고 뒷처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예상해본다. 그리고 나의 예상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체리의 치마 지퍼가 올라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제 다 됐어요. 오빠..." "그러니까... 수고했어." "네, 네." 수고했다는 말을 건내는 나도 참 웃긴 녀석인 듯하다. 볼 일 본게 물론 수고한 일이긴 하지만, 어째 어감이 좀... 아무튼 이런 식으로 본의 아니게 체리가 볼 일을 보는 길에 어울려주게 된 나. 임시로 마련된 베이스 캠프로 돌아오자, 이미 식사 준비가 거의 다 마무리 되어가는 현장을 볼 수 있었다. 그래봤자 준비하는 것이라고는 감자와 고구마를 굽는 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모닥불에 미리 모여 있던 일행들 중 세린이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했는지 약간 차가운 말투로 말한다. "어디 갔었어." "그냥 여러가지 일로." "체리 데리고 이상한 짓 했지? 분명히 그랬을거야. 이 변태." "... 안 했다니까 그러네." 남자는 참으로 오해받기 쉬운 존재다. 여자 한 명과 남자 한 명이 으슥한 장소에 있다가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면 대부분 남자에게 질책이 쏟아지니까 말이다. 난감한 남자의 입장 중 하나의 사례로 보여진다. 체리와 같이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내게 할당된 감자와 고구마를 집어 들고선 얌냠쩝쩝 섭취를 하기 시작. 많이 먹어둬야 내일 있을 행군도 별 무리 없이 소화하기 때문에 맛이 없다고 해도 먹는 수밖에 없다.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먹기 때문이다. 뭐... 엄청나게 비싼 요리를 먹는다면, 방금 내가 언급했던 말 중에 전자와 후자가 바뀌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다. 저번에 인터넷 뉴스를 보니까 시가 2억원짜리 초콜렛도 있다고 하던데. 다이아몬드로 치장되어 있는 초콜렛이라고 들었다. 그런 경우에는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이 적용될 수도 있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물질만능주의 만세. 만세. 만만세! "언니." 아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리들 중에서 '언니'라는 호칭을 쓰는 경우의 수는 크게 2가지로 분류된다. 아리아가 세리아를 부를 때 사용하는 '세리아 언니'라는 호칭이 있고, 그리고 노아 교수님이 지아 선생님을 부를 때 쓰는 '지아 언니'라는 호칭이 있다. 여성진들 중에서 대부분 여성들 보다도 월등히 뛰어난 나이(?)를 소유하고 있는 지아 선생님. 왕언니라고 불릴만한 자격이 있지만, 그 이전에 학생과 선생이라는 관계가 있기 때문에 노아 교수님을 제외한 여성들은 지아 선생님을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른다. 아리아의 부름을 듣고 살짝 시선을 돌란 세리아. 그러자 아리아가 자신이 먹고 있던 감자를 세리아의 접시 위에 올려 놓으며 말한다. "언니, 감자 좋아하지? 이거 먹어." "......" 세리아는 당연히 거부한다. 남의 음식까지 먹을 정도로 세리아가 그리 식탐이 강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동생이 먹을 분량을 거리낌없이 먹을 만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 여자아이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리아 역시도 세리아의 거절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세리아에게 또 한번의 말을 걸기 시작한다. "그럼 내가 언니의 고구마를 먹을게. 그럼 됐지?" "......" 난감해하는 세리아. 옆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체리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그녀들의 대화에 참가한다. "그러고보니 세리아는 감자를 좋아하고 고구마를 싫어하지 않았어? 잘 됐네." "......" 과연. 그런 이유에서 아리아가 저런 말을 했구나. 세리아가 고구마를 싫어한다는 말도 처음 알게 되었지만, 그보다도 역시나 아리아라는 생각이 든다. 무한 언니 사랑. 그 끝을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를 정도다. 하지만 그녀들의 반대편에 앉아있던 세린이 나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부연 설명을 가해준다. "... 아리아도 고구마를 싫어하는데." "뭐라고?" "저번에 나랑 불침번을 서다가 그런 말이 나와서 알고 있어. 역시나 일란성 쌍둥이라고 해야 할까. 좋아하는 음식도, 싫어하는 음식도 많이 비슷하더라." "그럼 아리아는 고구마를 싫어하는데도 스스로 먹겠다고 말을 하는거야? 세리아거 까지?" "그러니까 무한 언니 사랑이라고 불리는 것이겠지. 나도 언니가 있긴 하지만, 저 정도로 언니를 배려하진 못하는데. 어떤 의미로 정말 대단한 자매야." "......" 세린은 반 농담삼아 이야기를 했지만, 정말로 대단하다. 아리아라는 녀석 말이다. 아까 체리와 같이 있을 때도 고민을 해봤지만, 도저히 세리아에 대한 아리아의 맹목적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역시도 마찬가지. 도대체 저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건 태생적으로가 아니라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난감해하는 세리아는 끝까지 자신이 먹겠다고 아리아에게 말을 한 듯하다. 세리아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아리아는 어쩔 수 없이 이대로 식사를 진행하게 되었지만, 역시나 석연치 않은 눈으로 이 자리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세금 신고를 해봤는데 무지하게 복잡하더군요. 예전에 자격증 공부를 할 때 세법을 조금 공부했었는데... 실제로 세금 신고를 해보니까 장난이 아닙니다;; 그래도 한번 해봤으니까 나중에는 익숙해지겠죠. 그나저나 상담원 연결 좀 해보려고 전화를 했는데, 거의 15분동안 바쁘다고 통화 못한다는 메시지 음성만 주구장창 듣고 왔습니다. 전화 연결하기가 하늘에 별따기 수준이군요;; 231화 노숙의 밤은 더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 10명이 모인 한 자리에서 최초로 하는 노숙이 아닐까 라는 기념비적인 생각도 해본다. 평소에는 산장이라는 안락한 보금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바깥에서 잘 이유가 없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산장까지 도달하려면 아직 멀었고, 움막을 만들기에는 이미 시간도 많이 늦었다. 가방 안에 들어있던 의류들을 꺼내어 최대한 두껍게 옷을 입은 뒤에 미리 돌들과 풀을 제거해둔 바닥에서 잠을 청하기로 한 우리들. 나머지 남는 여분의 의류들로 바닥에 깔아 이불 대용으로 삼고, 모닥불 근처에서 체온을 녹이는 식으로 잠을 청하기로 정한다. "숲 속의 노숙이라. 꽤나 위험한 일일지도 모르겠네." 지아 선생님이 허리춤에 손을 올려 놓으며 어두운 숲 속 안쪽을 바라본다. 선생님의 의견에 나도 적극 동조하는 바. 산 속에서 잠을 취하는 일 만큼 위험한 경우도 없기 때문이다. 동물들의 습격이 아무래도 가장 큰 위험요소일수도 있고, 그 다음 외부적인 위험 요소는 기후의 변화다. 지금이야 하늘이 맑았기 때문에 비가 올 확률은 없으니까 망정이지. 만약에 여기서 비까지 내렸다면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예전에는 불어난 내천 덕분에 고생을 많이 한 기억이 다시금 떠올려진다. 서커스 단원도 아니고, 흔들리는 나뭇가지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형식으로 재주를 부려야 했던 그 상황. 가급적이면 머릿속에서 삭제하고 싶은 메모리 데이터인데, 그래도 지금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나름의 경험담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또 한번 더 하라고 제안하면 하기 싫다. 마치 군대에 갓 전역한 예비역에게 '또 한번 재입대 해라!'라고 말하면 죽어도 싫다는 그런 말을 하는 것과 비슷한 부류라고 보면 될 듯 싶다. "불침번은 어떻게 할거니?" 지아 선생님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묻기 시작한다. 그러고보니 아직까지 제대로 된 불침번 근무 명단을 짜지 않았다. 여러가지 신경쓸 일도 있었고 해서 정신이 없었나보다. "아직 짜진 않았어요." "그럼 이렇게 짜는 건 어떨까." "미리 생각해둔 것이 있었나요?" "나하고 아리아가 한 조, 그리고 너와 세리아가 한 조. 어때?" "특정 인물들만 중점적으로 생각하셨군요." "그 2개 조만 짜준다면 나머지는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단다." 아무래도 지아 선생님 역시 저 둘 사이에 대한 일에 대해 알고 싶어하시는 것일까. 아니면 아리아와 세리아 사이에 무슨 불길한 기운이 감지되었기 때문에 일부러 나에게 불침번 명단을 지시한 것일까. 어느 쪽으로 생각을 하든, 확실한 것은 지아 선생님 역시도 나와 같이 아리아와 세리아 자매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 지아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짤게요." "잘 부탁할게."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근무 시간표야 한 두번 짜는 것도 아니니까요." "아니, 내가 말한 뜻은 그런게 아니라..." 긴 흑발의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리던 지아 선생님이 나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이면서 다시 입을 연다. "세리아를 잘 부탁한다는 뜻이었어." "아... 그런 거군요." "심성이 고운 아이지만, 그래도 소심하고 마음이 많이 약하니까 네가 최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줘. 말을 못하니까 세리아와 대화를 나누는 일이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는데, 그럴수록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것이 '애인'으로서의 역할이지." "애, 애인이요?!" "어머, 아니었니?" "유아 선배가 그런 말을 들었다간 저에게 10단 콤보 로우킥을 날릴지도 모를걸요." "후훗. 인기있는 남자는 힘들구나." "그러게요. 몸도 마음도 피곤하죠." 한숨이 절로 나오는 나에게 지아 선생님이 너무 상심하지 말라며 어깨를 몇번 두드려주기 시작한다. "그래도 그 만큼의 매력이 있으니까 여자가 꼬이는 것이지. 긍정적으로 생각해." "너무 꼬이면 문제인데요. 차라리 우리 나라가 일부 다처제였으면 하는 바람도 가지고 있어요." "어머,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나도 포함시켜 줄 수 있니?" "... 네?" "너의 아내 후보로 말이야." "선생님. 유부녀이시잖아요. 여자가 두 남편을 섬기는 것은 일부다처제가 아니니까 불가능할걸요." "농담이야, 농담. 그냥 웃자고 한 소리." 라는 식으로 말은 하지만, 정말로 웃자고 하는 소리로 말한 것인지 이해가 잘 안간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에 지아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는 '섹스 프렌드'라는게 있잖니." "... 선생님. 교육자로서 해서는 안될 발언을 하신 기분이 드는데요." "교육자이기 이전에 나 역시도 여자니까." "불륜이라고요. 그거." "불륜도 사랑의 형태 중 일종이란다. 귀여운 꼬마 신랑 님." "신랑이라..." 상당히 낯뜨거운 대사를 내뱉는 지아 선생님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멀어진다. 음... 진심인지 거짓인지 농담인지 정말 햇깔리는 대화가 아닐수가 없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극심한 이기주의가 낳은 사상관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남자 입장인 나로서는 지아 선생님과 같은 매력적인 여성과 몸을 섞을 수 있다는 시간을 가지는 것 만으로도 좋긴 한데. 복잡한 건 내일 생각할까. 괜히 자초해서 피곤해질 생각은 없으니까. 지아 선생님의 지시로 인해서 불침번은 그대로 선생님이 나에게 언급했던 명단 그대로 짠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각자의 명단을 발표했다. 다들 어느정도 수긍하는 분위기로 흘러갔기 때문에 이제 남은 일은 취침만 남은 상황. 저녁 10시에 취하는 이른 취침 덕분에 모두들 자리에 하나 둘 씩 눕기 시작한다. 초번이기도 한 지아 선생님과 아리아는 우리들이 자리에 누우기 전까지 모닥불을 지키면서 주변에 동물들이 나타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 신중함을 보인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가 아니라. 근무 수고하세요. 지아 선생님." "다들 잘 자렴." 지아 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취침에 임하는 우리들. 나 역시도 새벽에 다시 일어날 생각을 하면 충분한 숙면을 취해둬야 하기 때문에 꿈나라로 향하는 티켓 한 장을 구비한 끝에 열차를 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잠을 청하는 나. 밤하늘의 넓은 천장에 수많은 별들이 전등처럼 달려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감는다. 모닥불 안의 장작이 다닥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타들어가기 시작하고, 아리아와 지아 선생님의 작은 담소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그렇게까지 먼 거리에 있는 건 아니지만, 밤하늘의 운치를 느끼면서 잠에 빠져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란 생각을 한 나는 남의 대화를 엿듣기 보다는 숙면을 취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기로 한다. 때로는 야외에서 잠을 청하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야생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라고 알려진 '1박 2일'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출연진들끼리 잠자리 복불복을 해서 이긴 팀이 실내취침, 그리고 진 팀이 실외취침을 하는 식으로 프로그램을 꾸며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때 출연진들 중에서 실외취침에 당첨된 연예인이 했던 말이 야외취침도 한번씩 해보는 것도 좋을지도 라는 말을 했었는데, 그 말이 지금 이 순간에는 꽤나 많이 와닿고 있는 중이다. 매일 사회에서 익숙한 천장만을 올려다보며, 익숙한 공간에서, 익숙한 침대에 누워서 잠을 취하는 우리들. 안정적인 집과 따스한 보금자리가 있다는 사실은 좋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해본다. 너무 현실에 안주한 채 모험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라는 것이 아닐가 하고 말이다. 모험. 요즘 자라나는 시대의 아이들에게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아니 경험할 수 없는 그런 단어다. 낯선 섬을 찾아 배를 타고 여행을 하는 행동이라든지, 아니면 보물을 찾아 떠나는 두근두근 여행길이라든지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물론 요새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 자체가 별로 없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가슴이 뜨겁게 뛰거나 설레일 정도의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을만한 체험을 한번 정도는 해보는 것이 좋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무인도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 자체가 나에게는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이 처한 환경은 모험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고, 생존이라고 표현해야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인도에서 한달여 기간동안 표류하며 지내게 된 사실이 한 가지 있다면, 이런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위한 모험을 즐기는 것도 절대로 나쁜 악영향을 끼치지만은 않다는 말이다. ...... ............ ................ 잠시 밤하늘을 바라보며 잠에 들려고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조금은 감성적인 기분이 되었다. 이제 슬슬 정말로 자야지. 잠이 보약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단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되었는지 전번초이기도 한 유아 선배가 나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한다. "이보세요. 아저씨. 일어나시죠." "...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요?" "그럼. 정확히 새벽 3시에 깨웠으니까." "3시란 말이죠..." 참으로 암울한 시간이 아닐수가 없다. 저녁 10시부터 잤다고 치자면 대략 5시간은 잔 건가. 산장에 빨리 돌아가던가 해야지 원. 5개조로 불침번을 계속 돌리니까 피곤해 죽겠다. 산장은 그래도 피곤할 때라면 밤샘 근무 비슷하게 특정 조를 지정해서 그 한 조만 계속 불침번 근무를 새울 수 있는데 말이다. 당직같은 개념으로 새우면 밤새도록 근무를 섰던 2명은 낮에 편하게 자면 그만이고, 8명은 불침번을 안 서도 되니까 좋고. 일석이조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원이 불침번을 서게 된 상황. 산장에 돌아가면 랜덤으로 인원을 짜던가 해서 2명만 당직으로 세워두고 나머지는 푹 자게 해야겠다. ============================ 작품 후기 ============================ 날씨가 갑작스레 더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매번 느끼는 사실이지만, 이제는 봄하고 가을이 없어지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드는군요. 따뜻하다는 생각도 들 시간조차 없이 곧바로 여름 날씨에 돌입했습니다;; 아... 여름이라니. 더운 날씨를 또 어떻게 버텨야 좋을지 ㅜ_ㅜ 232화 유아 선배와 같이 근무를 섰던 세린도 나를 포함해서 세리아의 기상을 확인 하자마자 특이사항에 대해 알려주기 시작한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이상징후 없음." "... 그게 끝이야?" "그래. 끝." "결국 특이사항은 없다는 말이 되는구나." "평화로운 것이 제일 좋은 거니까. 아, 그리고 장작은 막 넣어뒀으니까 당분간은 안 넣어도 될거야." "알았어. 땡큐."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잠자리에서 나온 뒤에 모닥불 앞에 앉는다. 미리 앉아있던 세리아가 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힘내라는 듯이 작은 응원을 보내온다. 역시나 귀엽다. 세리아. 정말 이런 성격의 여자와 결혼하면 내조 같은 것이라든지 그런 걸 잘 할텐데. 세린이나 유아 선배처럼 기가 너무 센 여자랑 결혼하면 나름 고역일테고 말이다. "잘자요. 유아 선배. 세린도 잘 자고." "알았어. 그럼 이만." "수고해." 순차적으로 유아 선배와 세린이 나에게 말하며 잠자리에 든다. 피곤했는지 곧바로 잠에 곯아 떨어진 모습을 잠시 뒤에 확인할 수 있었다. 하긴. 많이 피곤했을 것이다. 난파선에서 유령이라는 심적 부담이 왕창 느껴지는 미스테리한 존재와도 조우했었고. 그리고 힘든 강행군까지 펼쳤으니까 말이다. 여성의 몸으로 여기까지 잘도 버텨주는게 내 입장에서는 도리어 고마울 따름이다. ...... ......... ............. 그런데 사실. 세리아와 별로 할 말이 없다. 내가 세리아와 그리 많은 말을 했던 사이도 아니고. 그리고 언어 수단이 글쓰기라는 방식에 한정되어 있는 세리아에게 무리하게 말을 시키는 것은 왠지 세리아를 귀찮게 하는 일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고. ... 아니지. 왜 이런 자리를 만들었겠는가. 세리아와 아리아의 사이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 약간의 비리(?)를 통해서 성사한 불침번 명단인데 이 소중한 기회를 날릴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뭔가 아무런 말이라도 일단 꺼내보고 생각하자. "저기, 세리아." "...?" "아리아 말이야...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아주 기본적인 질문을 던진 나. 어떻게 생각하진 뭘 어떻게 생각하겠냐. 그냥 좋은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겠지. 골라도 왜 이런 질문을 고른 것일까. 나도 참. 이런 모습을 보면 나도 진짜 말주변이 없는 녀석 같다. 친구들끼리는 그냥 농담도 막 주고 받고 그러는데, 이성이랑 이야기하면 왠지 숫기가 없는 그런 태도로 돌변하는 타입일까. 아직도 내 자신을 모르겠다. 마냥 화술 능력이 부족한 녀석이라고 가리키기에는 스스로가 조금 비참한 기분이 들어서 싫고 말이다. 어쨌든 질문을 받은 세리아. 어색하게 웃어 보이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내비치기 시작한다. - 좋은 동생이에요. 이번에도 역시나 마찬가지로 나뭇가지를 이용해 바닥에 글씨를 쓰는 방법으로 나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세리아. 내가 만약에 수화를 할 수 있었다면 조금 더 원활한 의사 소통이 되었을텐데. 그런 아쉬움도 들긴 하지만, 그래도 뭐... 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최대한 세리아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아니, 경청이 아니라 시청이라고 표현을 바꿔야겠다. "조금 민감한 질문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또 한번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나를 응시하는 세리아였다. 불침번 근무를 일부러 조정한 목표이기도 한 질문. 바로 세리아가 말을 못하게 된 사건에 대해 물어보려는 것이다. 입을 열기 바로 직전까지도 이 질문을 해도 괜찮을까 말까 고민을 하는 나. 심적인 갈등은 금새 결론을 지어 버리고, 직접적으로 세리아에게 질문을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네가 말 못하게 된 계기 말이야. 혹시 왜 그런지 물어볼 수 있을까 해서..." 자. 주사위는 던져졌다. 과연 질문을 받은 세리아는 어떤 답변을 나에게 들려줄 것인가. 나름의 기대를 안고 세리아를 바라본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아니면 남이 부탁하는 것을 전혀 거절하지 못하는 세리아가 고민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나에게 들려줄 수 있는지 없는지 한번 더 마음속으로 절차를 걸쳐야 하는 것일까. 그녀의 트라우마, 혹은 아픈 기억을 건들이는 질문이었기 때문에 세리아의 이런 망설임도 전혀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뭐, 말해주기 싫으면 대답해주지 않아도 돼." 한발자국 물러서는 나. 아직까지는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 말에 수긍이라도 하려는 듯이 세리아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지금은 꽝인가. 세리아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묻는 것은 당분간 보류해야 할 듯 하다. 다음 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난 나에게 지아 선생님이 몰래 다가오며 묻는다. "그 쪽 소득은 있었니?" "전혀요. 지아 선생님 쪽은요?" "마찬가지네. 이쪽도 전혀 없었어." "피차 일반이군요." 가드가 단단하다고 해야 할까. 자매 둘이서 마치 사전에 약속이라도 하듯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꺼내주지 않는다. 음. 궁금하긴 한데, 그렇다고 강제적으로 발설하게 할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수가 없다. 아무튼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다시 산장으로 떠날 채비를 하는 우리들. 이 이상의 시간을 지체할 생각도 없기 때문에 오늘은 최대한 빠른 걸음을 재촉하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슬슬 출발하자고." "알았어." 내 말에 누나가 기운차게 외치면서 대답해준다. 포메이션은 어제와 같다. 나와 노아 선생님이 앞장을 서고, 나머지는 뒤를 따르는 형식. 달라지지 않은 포메이션을 유지하면서 앞으로 계속해서 전진하는 우리들. 그러나 도중에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세리아. 괜찮니?" "......" 우리들 중에서도 유난히 체력이 약한 세리아가 상당히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주치의이기도 한 지아 선생님이 나에게 잠시 휴식을 취할 것을 요청한다. "모두들. 잠깐만 여기서 쉬고 갈게요." 일단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한 난 곧바로 세리아에게 달려간다. 아리아 역시도 마찬가지. 자리에 앉은 체 거칠게 호흡을 몰아쉬고 있는 세리아. 아무리 그녀가 체력적인 면이 조금 부족하다고는 해도, 어딘가 모르게 증상이 이상했다. 지아 선생님도 그 사실을 느꼈는지 갑자기 세리아의 옷 상단에 위치한 단추를 조금씩 풀어간다. 순간적으로 세리아의 가슴골이 보이게 되자 후다닥 놀란 나는 뒤를 돌아보며 지아 선생님에게 묻는다. "서, 선생님! 왜 갑자기 세리아의 옷을?!" "잠깐만 있어봐." 세리아의 옷 안에 손을 넣고 가슴과 겨드랑이 부분에 갔대 댄 지아 선생님이 한숨을 쉬면서 세리아에게 말한다. "왜 말 안했었니?" "......" 무슨 뜻이지? 지아 선생님의 질문에 상당히 난감해하는 세리아의 모습이 먼저 들어오지만, 아리아와 내가 가장 신경쓸 것은 바로 지아 선생님의 질문이었다. "지아 선생님. 방금 그 말 뜻은..." "감기야." "감... 기요?" "그래. 세리아는 지금 감기 환자라는 뜻이야. 언제부터 이런 증상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봤을때는 적어도 행군이 시작하기 전부터 감기에 걸렸던 거 같은데." ...... 난감하게 되었다. 행군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로 말이다. 솔직히 행군은 그다지 지장이 없다. 짐은 나눠서 들면 그만이고, 세리아는 내가 업고 가면 되니까. 어차피 남은 거리도 얼마 되지도 않는 관계로 충분히 업고 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은 이 것이 아니다. 바로 세리아가 본인의 감기 사실을 여지껏 숨기고 있었다는 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 왜 말 안했어..." 아리아의 목소리 톤이 낮아진다. 그러나 세리아는 아리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가방을 짊어지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만 할 뿐이다. 필사적으로 말리는 나와 지아 선생님. "잠깐만. 세리아, 일단 안정을 취해." "주치의로서 환자가 무리하는 모습을 보고 놔둘 수는 없지. 세리아. 지금은 휴식을 최우선시 하도록 해. 네가 쓰러지면 더 곤란해지니까." "......" 상황을 보아하니 세리아가 본인이 감기에 걸렸다는 사실은 아리아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아리아 본인도 방금 세리아에게 왜 말을 안했는지에 대한 추궁을 했으니까 말이다. 감기 탓인지, 아니면 그동안 무리한 강행군으로 인해 피로가 축적되었는지, 세리아에게는 전혀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정도로 무리를 하면서 버텨온 것일까. 작게 한숨을 쉬면서 우리들에게 어색하게 미소를 보여주는 세리아. 평소에 그녀가 보여주는 미소와는 상당히 기운이 없어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다. 보는 사람도 매한가지로 가슴이 아픈 장면. 그렇기 때문에 아리아는 얼마나 더 가슴이 찢어지고 있을까. "... 세리아 언니." 뭔가 음정이 불안한 목소리로 세리아를 부르는 아리아. 지아 선생님과 나는 아리아의 모습에 세리아의 감기 정도의 수준 이상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리아의 두 눈가에. 투명한 액채가 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펑펑 우는 그런 모습이 아니다. 감정을 절제하고 있는 듯한, 분함을 마음속으로 꾹 누르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세리아를 내려다보는 아리아가 질끈 입술을 깨물기 시작한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 본다. 아리아가 이렇게 '운다'라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말이다. '울고 있다'라고 표현하기에 딱 좋은 단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이후에. 아리아가 세리아의 어깨를 거칠게 잡으면서 외친다. "내가 그렇게 못 믿을만한 사람이야? 언니의 동생으로서 믿지 못할만한 여동생이었냐고!!" "진정해, 아리아!" "왜 나한테까지 숨긴거야! 적어도 나 한테 만큼은..." 도중에 말을 하려다가 무언가 남들 앞에서 해서는 안될 말이라도 있는것인지 스스로 대화를 단절시켜버리는 아리아. 도중에 달려온 유아 선배와 세린이 아리아를 한쪽 팔을 제각각 잡으며 말리자만 아리아는 세리아를 향해 다시 한 번 더 소리치기 시작한다. "언니가 날 싫어하고 있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어!! 하지만... 죄값을 치루게 위해서 나도 노력했단 말이야!" 죄값? 그리고 세리아가 아리아를 싫어한다고? 알 수 없는 말들이 연이어 들려오는 상황에서 세리아의 눈빛이 달라진다. 슬픔. 그리고 공허함. 평소에 찾아볼 수 없었던 세리아의 표정. 자리에서 힘없이 일어난 세리아가 아리아에게 다가간다. 무슨 '말'을 건내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울고 있는 아리아에 대한 사과? 그러나 이 예상은 너무나도 어이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도중에 우리들이 할 말이 없어질 정도로. - 짜악!! 손바닥과 오른쪽 뺨의 마찰음이 숲 속에서 가득 메아리치기 시작한다. 살짝 반대로 돌아간 아리아의 얼굴. 그리고 그녀의 뺨에 세리아의 손바닥이 '때렸다'라는 흔적이 남겨지듯 살짝 붉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언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세리아를 바라보는 아리아. 평소에 그렇게나 착하던 자신의 언니에게 남들 앞에서 '뺨'을 맞은 것이다. 끝없는 슬픔의 눈으로 아리아를 응시하는 세리아. 그러나 이내 감기 덕분에 힘이 바닥났는지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아니, 쓰러지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랄랄라라~ 라랄랄라라~ 이름이 뭐에요~ 전화번호 뭐에요~ 233화 "... 목숨이 위험하거나 할 정도의 수준까지는 아니야. 그냥 감기에 피로까지 겹쳐서 그 증세가 많이 악화된 것처럼 보일 뿐이지." "다행이네요. 정말로." 누워있는 세리아에게 수건으로 부채질을 해주고 있는 체리. 그리고 그 옆에서 지아 선생님의 설명을 들은 나는 십년 감수했다는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행이라는 말을 연발한다. 하지만 지아 선생님은 나에게 신신 당부를 하듯 말한다. "그래도 행군은 역시 무리야." "아무래도 그렇겠죠." "어떻게 할래? 들 것이라도 만들어서 세리아를 후송할까?" "들 것은 2명이서 들어야 하는 것이니까 가급적이면 쓰지 않는 편이 좋겠어요. 아무리 사람들이 많다고 해도 7명이서 3명의 짐을 분담하는 것 보다는 그냥 제가 세리아를 엎고 가는 편이 훨씬 효율적일테니까요. 7명이 2사람 분의 짐을 나눠드는 것이 다른 일행들에게도 덜 부담이 가겠죠?" "그건 맞는 말이긴 하지만... 뭐, 알아서 잘 판단해보렴." "네." 지아 선생님에게도 말씀 드렸다시피, 차라리 내가 세리아를 업고 가는 편이 다른 사람들에게 덜 부담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국 내가 세리아를 업게 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아리아가 세리아의 이것저것을 챙겼을텐데, 지금 아리아의 상태로는 본인의 갈 길도 챙기기 바빠 보인다. 그렇다고 아리아 역시 육체적인 한계에 달했다는 뜻이 아니라, 신체적인 문제보다 정신적인 문제가 더 심해 보인다는 의미다. 아리아를 대신해서 체리와 세린이 행군을 다시 시작하기 전에 잠시 짬을 내서 세리아를 돌봐주기 시작한다. 송골송골 맺혀있는 땀을 닦아주던 세린이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아무래도 땀을 닦아줘야겠어. 옷도 너무 많이 젖었고. 이대로 있다간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니까." "그 정도로 땀이 많이 났어?" "장난 아니야. 손에 잔뜩 묻어나올 정도니까." 세린이 조금 과하게 설명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만큼 세리아의 감기 상황이 심하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잠자코 넘어가기로 한다. 체리가 세린의 도우미 역할을 자처하며 세리아의 옷 갈아입히기 작업을 도와준다. 여자아이의 옷을 갈아 입히는 데에 나는 필요가 없는 관계로 일찌감치 떨어져서 있는다. 그래도 이렇게 멀뚱멀뚱 서 있는 시간이 아까운지라 자리에 앉은 채 푹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리아에게 향한다. 아리아의 옆에서 노아 교수님의 그녀의 등을 쓸어주며 위로를 하고 있었던 중인지 내 모습을 보자 교수님이 검지 손가락으로 '쉿!'이라는 제스쳐를 나에게 보여준다. "......" 겉보기에도 숨막히는 분위기. 노아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 역시도 아리아에게 무슨 말을 걸어야 좋을지 몰라하는 눈치가 보인다. 하긴. 나 같아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재치 넘치는 애드립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입 밖에 내뱉는 것이 두렵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 아리아는 당분간 노아 교수님에게 맡겨야 하나. 여자들끼리 할 이야기도 있을테고, 괜히 남자인 내가 끼어들어봤자 딱히 해줄 말도 없었기 때문에 지금은 우선 아리아의 상태보다는 세리아의 건강상태에 더 신경을 써주도록 하자. 아리아도 아마 내가 그러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비록 세리아에게 서운한 말을 했지만, 아리아의 세리아 사랑에 대한 것은 여전할 터.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걸 이해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동료라는 존재 아닌가. 옷을 다 갈아 입혔다는 세린의 말을 듣고 곧바로 다시 세리아에게 향한다. 옷을 두껍게 입힌 세리아는 누운 상태로 거칠게 호흡을 몰아쉬고 있었다. "정말로 괜찮은 걸까? 세리아 말이야." 세린이 조금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묻는다. "글쎄. 지아 선생님이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확답하셨으니까. 아마 괜찮을거야." "어쨌든 빨리 산장으로 가자. 거기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지." 세린의 재촉이 없어도 나 역시도 지금이라도 당장 산장으로 향하고 싶다. 어차피 이제 앞으로 대락 1시간 정도만 걸으면 도착할 거리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이유도 없다. 시험삼아 세리아를 업어보는 나. 체리와 세린이 세리아를 부축하며 일으켜 세운 사이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 이후에 그녀들의 도움을 받아 세리아가 내 등에 안착하자, 양 손을 뒤로 하고 세리아를 든 채 자리에서 일어선다. 워낙 가벼운 여자아이다 보니까 사실 그리 무겁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세리아.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세리아에게 고기라도 많이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절로 든다. 세리아를 업어본 나에게 체리가 묻기 시작한다. "업을만... 한가요? 오빠?" "응. 무리 없어. 이 정도면 충분한데?" 조금 힘들지 몰라도, 1시간 정도면 참을 수 있다. 너무나도 착한 우리 세리아가 아프다는 데, 내가 한시간도 못 버티겠는가. 오기로라도 버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 "이제 슬슬 출발할게요. 빨리 산장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준비를 마무리 해주세요." 그리고 시작된 마지막 복귀 행군. 사실 마지막이 될 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세리아를 업은 채 발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옮긴다. 괜히 걷다가 나무 뿌리에 발이 걸려서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차라리 나 혼자서 다친다면 괜찮지만, 나 뿐만이 아니라 세리아까지도 다칠 수 있기 때문에 조심 조심 하면서 신중한 행군을 해본다. 걸어가는 순서 역시도 바뀌게 되었다. 선발대로 엘리와 노아 교수님이 맡게 되었고, 나머지는 그대로 순번을 유지하게 된다. 환자를 업고 있는 내가 앞서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이런 변화를 주게 되었다. 계속해서 걷는 행군. 아리아가 내게 업혀있는 세리아를 힐끗힐끗 바라보는 시선을 얼핏 감지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짐짓 모른 척 하고 넘어간다. 지금 상황에서는 아리아와 세리아의 관계 조정보다는 산장으로 복귀하는 것이 최우선 사항이기 때문이다. 힘은 들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발걸음을 재촉한 보람이 드디어 시야에 들어서기 시작한다. "드디어 다 도착했다!" 세린이 기뻐하는 목소리로 한 말에 이어서 머지 않아 모두가 산장의 모습을 곧바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산장을 발견한 지아 선생님이 나에게 말한다. "일단 세리아부터 먼저 안으로 옮기자. 어서." "네!" 얼마 남지 않은 거리였기 때문에 발걸음을 빠르게 재촉하는 나. 세리아를 산장 안에다 눕혀놓고 그녀의 건강 상태를 관리하게 위해서 지아 선생님이 자리에 앉은 체 세리아를 진찰하기 시작한다. 주변 사람들도 세리아와 지아 선생님의 그런 모습을 구경하는 와중. 그러나 괜히 구경만 하고 있어봤자 세리아에게나, 우리들에게나 별로 도움이 안 될거라 생각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지시를 내린다. "우선 짐 정리부터 하죠. 세리아에 대한 간병은 지아 선생님에게 맡기고요." 내 말을 들은 누나도 공감한다는 듯이 말한다. "그러자. 다들. 유에의 말이 맞잖아. 자~ 빨리 짐 정리 하자. 할게 한 두가지가 아니야." 각자 짐을 정리하게 위해 흩어지는 상황. 나 역시도 지아 선생님의 진찰 행위에 방해가 될까봐 일부러 자리를 비켜준다. 어차피 내가 남아 있다고 한들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지켜보는 것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별다른 부담 없이 자리를 뜨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 중에서 유독 자리를 뜨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 아리아. 네가 여기 있다고 해도 세리아에게는 도움을 주지 못하니까 다른 사람들과 같이 짐 정리를 돕는게 좋겠어. 그렇지?" "......" 말을 걸어봤지만, 여전히 묵묵부답. 평소의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는 그녀 답지 않은 태도로 자신의 언니를 내려다보고 있는다. 뭔가 마음에 걸리적 거리는 것이 많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리아가 세리아에게 말했던 '죄'의 의미. 과거의 그녀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 때문에 '죄'라는 단어가 나왔는지 알 길이 없다. 그녀들 스스로가 말을 하지 않는 이상, 아마도 영원히 미스테리일 것이다. 한동안 멍하니 자신의 언니를 바라보던 아리아. 그러더니 이내 드디어 자리를 뜨게 된다. 본인이 여기에 있어봤자 괜히 세리아에게 심적인 부담감만 더 증폭시킬 것이라는 우려섞인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선택은 꽤나 현명하다고 보여진다. 화로에 불을 피운 엘리. 잘했다는 듯이 노아 교수님이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엘리가 교수님의 허리를 끌어 안으면서 볼을 부비부비 거린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엘리의 껴안기 버릇이었다. 처음 만났을때는 누나에게 자주 저런 버릇을 보여줬는데, 지금은 노아 교수님에게도 보여주고 있다 정말 광범위한 버릇이라고 표혀하고 싶다. 예전에는 종종 지아 선생님의 허리에도 매달렸던 전과를 가지고 있는 엘리였지만, 요새는 그런 버릇이 많이 줄어들은 상태다. 음... 점점 성장한다는 증거인가. 뭐, 어떤 의미로 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자세를 갖춰야 할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거실 안에서는 지아 선생님의 진찰이 계속 되고 있었고, 우리들은 짐 정리를 연이어 한다. 산장에 도착한 시각이 점심 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2시였기 때문에 각자 늦은 점심을 먹는다. 감기 환자인 세리아에게는 유아 표 시리즈의 확장판인 특별 죽이 완성되어 보급된다. "자, 세리아. 밥 먹어야지?" "......" 직접 요리를 한 유아 선배가 죽까지도 먹여줄 생각인지 세리아가 누워있는 자리의 옆에 앉으면서 말한다. 이번에도 도와주려는 듯 체리가 유아 선배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세리아의 상반신을 일으킨 뒤에 지탱해주는 데에 힘을 보태기 시작한다. 참으로 보기 좋은 장면. 그러나 본래 체리가 담당해야 할 저 포지션은 아리아의 역할이기도 하다. 계속 저 장면을 보면서 뭔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는데, 바로 아리아가 세리아를 챙기지 않고 있다는 점 덕분에 어색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주말입니다!' 토크 제 1회입니다. 주말이라고 해봤자 제 생활 패턴은 매번 똑같지만요 ㅡ_ㅡ;; 그래도 주말의 존재 가치는 평일에 비해서 많을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저도 평일보다 더 푹 쉴까 생각중입니다. 그런 의미로 오늘 써야 했을 EX 에피소드를 쓰지 못했지요. 헤헤헤헤헤헤헤헤헤. 다들 이렇게 귀차니즘에 전염되나 봅니다. ( ㅡ_ㅡ) 234화 "......." 아리아 본인도 세리아의 곁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상당히 망설이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게 심한 말을 해버렸고, 그리고 세리아에게 뺨도 맞았기 때문에 쉽사리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아의 심정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자주 누나랑 싸운 적은 있었기 때문에 동생의 입장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와 누나와의 남매 관계는 아리아와 세리아의 자매 관계와는 엄연히 다르다. 성별이 다르다는 점도, 그리고 나이도 다르다는 점도 다르긴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나와 누나는 아리아와 세리아 수준의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물론 혈육의 정은 있다. 없을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혈육의 정과 개인간의 특별한 애정은 다르다. 거의 연애 감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이라는 것과 많이 비슷한 아리아와 세리아 자매의 애정. 그것이 우리 누나와 나와의 관계에서 가장 많이 다른 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아리아가 세리아의 곁에 없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지구가 멸망해도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것만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기도 하다. "아리아. 세리아 옆에 안 가봐도 괜찮겠어?" 누나가 먼저 아리아에게 말을 걸어본다. 먼 발치서 자신의 언니에게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아리아. 지금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세리아의 옆을 지켜주고 싶다는 눈이다. 하지만 아리아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누나의 말에 긍정적인 답변을 들려주지 못한다. "... 지금은 그럴 수 없을걸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니?" "세리아 언니에게... 미움 받았으니까요." "미움이라..." 누나가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아리아 스스로는 세리아에게 정말로 미움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과연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말로 아리아가 세리아에게 미움을 받은 것일까 라고 의문을 표하고 싶다. 미움이라는 녀석은 증오와도 같은 단어이다. 증오. 듣기만 해도 복수혈전이 떠오르는 그런 무시무시한 단어다. 하지만 세리아와 아리아 사이에서는 그런 단어가 사용되는 일이 없을거라 생각되지 않는가?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나도 마찬가지다. 설마 저 둘이 진짜로 이런 식으로 싸울줄은 몰랐으니까. "저기. 아리아. 세리아는 정말로 너를 싫어한다든지 하는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과연 그럴까요?" "아마도 우리들 중에서 네가 제일 잘 알거 아니야? 세리아가 누구를 증오한다든지, 미워한다든지 할 만한 그런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말이야." "... 그렇긴 하죠. 언니는 그 누구보다도 천사같은 마음씨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 말에는 100% 공감한다. 솔직히 말해서 이 무인도에 표류된 이후에 세리아가 화를 낸 모습은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세리아가 아리아의 뺨을 때린 일은 어찌보면 엄청난 충격을 선사해 준 하나의 사건으로 치부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뺨이라는 것이 상대방이 싫기 때문에 취하는 행동 아닌가. 세리아가 얼마나 아리아를 싫어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어찌되었든 그때의 그 순간 만큼은 세리아가 아리아를 '때리고 싶다.'라는 명령을 온 세포 하나하나에 내렸기 때문에 그녀가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이다. 역시도 세리아의 그 태도에 대해서는 아리아와 세리아 두 자매의 비밀을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인가. 여러가지로 미스테리다. 이 두 자매에 대한 일 말이다. 감기에 걸린 지 반나절이 지나가는 상황에서. 점심시간도 지나고 저녁이 다 되어가는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본래 6시 정도면 저녁 식사를 하는 편이지만, 점심을 워낙 늦게 먹었기 때문에 저녁은 8시로 예정되어 있는 상황이다. 짐 정리도 다 끝났고, 가져온 옷들을 세탁한 뒤에 산장 앞에 있는 빨랫줄 위에 널어놓은 여성진들은 할일 없이 침실에 오손도손 모여서 각자의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거실에는 환자인 세리아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갈 수 없는 상황. 나와는 다르게 워낙 신체적으로 약한 세리아였기 때문에 절대 안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아 선생님이 못을 밖아두었다. 간접적으로 거실로는 출입 금지라고 말한 뜻. 그런 이유로 당분간은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 우리들이었다. ... 분위기가 무겁다. 왠지 모르게 말을 해서는 안될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거실에 있는 나 뿐만이 아니라 다들 점차적으로 그런 분위기를 느꼈는지 점점 대화가 적어지고 있었다. 엘리는 본래 말이 없고, 초호기는 동물이니까 애초에 말 자체를 못한다. 유아 선배와 세린, 그리고 가장 말이 많은 누나는 아리아의 눈치를 보느라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 노아 교수님도 어색하게 웃으면서 곱게 다리를 모은 채 앉아있을 뿐이다. 체리 역시도 선배들, 그리고 선생님이 말을 하지 못하니까 후배인 본인이 먼저 말을 꺼낼 수는 없다는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입을 쉽사리 열지 못하는 상황이다. ...... ......... ............ 참으로 무거운 공기다. 흠... 그래도 뭔가 말은 하고 싶은데, 그런 말을 사람 좋게 꺼낼만한 인물도 없고 말이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 바로 내 친누나였는데, 누나도 아리아의 눈치를 볼 정도로 심각한 분위기가 연이어 이어지고 있었다. 누나조차도 말을 못 꺼내는데 감히 누가 여기서 제일 처음 입을 열까. ... 제일 먼저 도전한 사람은 바로 노아 교수님. 이 거실에 앉아 있는 연장자이니까 아무래도 먼저 시범을 보여야지 라는 책임감이 노아 교수님의 등을 떠민 듯하다. 연장자라는 것이 이럴때 정말 부담스러운 지위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불쌍한 노아 선생님. 흑흑. "저, 저기. 그러니까..." "......." 모두가 교수님을 응원하려는 듯이 지긋이 선생님을 응시하기 시작한다. 마음 속으로는 모두가 한 마음 한 뜻. '교수님~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교수님~ 힘내세요~ 우리가~ 있어요~'라는 노래를 잠시 불러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부르기에는 영 분위기가 썰렁하고. 아무튼 사태는 점점 미궁속으로 빠져드는 추리 만화처럼 분위기가 침묵의 바다를 향해서 열심히 항해중이었다. 그러던 순간. 노아 교수님이 다시 용기를 내어 입을 연다. "세, 세리아는... 괜찮겠지?" "... 글쎄요." 아리아가 딱 잘라서 대답한다. 또 한번 막혀버린 노아 교수님의 공격. 거의 울먹울먹 거리면서 우리들을 바라보는 교수님. '너희들도 좀 도와줘! 제발! 부탁할게!'라며 우리들을 바라본다. 그러나 도와줄 이는 없을 뿐. 노아 교수님은 아마 속으로 우리들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화술 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에게 있어서는 이런 시련은 너무 가혹하다. 보통 사촌 형에게서 들은 바로는 이럴때야말로 남자가 흑기사 역할을 자처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그건 술자리에서나 나오는 말 아닌가. 예전에 대학교를 배경으로 한 시트콤에서 보면 여자와 남자가 같이 술자리를 할 때 게임을 해서 벌칙주를 여자가 마시게 되는 상황이 오게 되면 자연스럽게 흑기사를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 흑기사와 지금 이 흑기사는 엄연히 다르다. 흑기사도 능력이 있어야지. 술자리에서의 흑기사는 주량이 많기 때문에 흑기사를 자처하는 것이지만, 나같은 경우에는 화술도 부족한데 함부로 나섰다가 더 분위기를 악화시킬 수 있을 가능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나서기가 두렵다. 이 순간 만큼은 누나에게 조금 말빨 정도를 단련 시켜둘걸 이라는 후회감이 들기 시작한다. 그런데 내 스승(은 아니지만)이기도 한 누나도 침묵을 유지하고 있잖아. 우린 아마 안 될거야. 아마. 어쨌든 분위기 띄우기 1차전 도전자였던 노아 교수님은 실패했다. 첫번째 도전자가 아리아의 말을 트이게 하는 것이 실패한 영향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많은 본보기를 남겼다. 그 본보기를 해석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웬만한 화술 능력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은 도전하지 말아라. 정말 간단한 거 아닌가. 음... 너무 간단해도 문제가 있지만. 일단 대충 이렇다. 혼자서 잡생각을 하는 순간, 두번째 도전자가 강림하게 되었다. "마, 맞다. 생각난 게 있는데..." 도전자의 이름은 바로 유아 선배. 노아 교수님 이후로 연장자 라인이기도 한 유아 선배가 도전을 한 것이다. 나이 순으로 도전하는 것인가. 이거. 그렇다면 나와 세린이 경합을 하겠군. 체리는 맨 마지막인가. 운이 좋은 아이다. 어쨌든 유아 선배의 도전을 지켜보도록 하자. 성공하길 비는 마음과 함께 말이다. 그래서 이 거실에 평화를 가져다 주기를. "오, 오늘 날씨... 정말 좋지?" "... 평소와 똑같은데요." 아. 유아 선배. 그런 허무맹랑한 질문을 던지면 어찌합니까. 날씨가 어떠냐는 말은 이제 너무 흔하디 흔한 패턴이라고요. 조금 더 다양한 소재거리를 선택하는 것이 좋았다고 보지만, 아리아는 이미 벌써 퉁명스럽게 대답한 이후다. 아리아에게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지금 자신에게 있어서 날씨가 어떠느니 하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겠지. 본인의 기분이 '흐림'인데 바깥 날씨가 '맑음'이라고 떠도 기분이 좋아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결국 두번째 도전자인 유아 선배도 이대로 침몰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들은... 나와 체리, 그리고 누나와 엘리. 이렇게 4명인데. 사실 엘리는 거의 포기했다고 보면 되고, 체리도 그다지 성공활 확률이 높은 편은 아니다. 그러니까 생략. 본래의 차례대로라면 누나가 지원을 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여기서 한 가지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가 펼쳐지게 된다. 바로 세린의 난입. "아, 아리아." "...?" 하도 자신에게만 집중적으로 말을 걸어오다 보니까 이제 자연스럽게 아리아가 본인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저것도 약간 부담스러운 시선이다. 음.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약간 불리한 조건으로 시작하게 된 세린. 그러나 그녀가 가진 특유의 승부욕은 아직도 활활 타오르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혹시 배 고프지 않아?" "... 전혀." 갑자기 거기서 왜 배가 고프다는 질문이 나오는 것이냐. 저건 굳이 아리아 뿐만이 아니라 나 역시도 궁금한 생각이 든다. 오히려 질문자에게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질문하고 싶어지는 이 기분. 좀처럼 들기 힘든 기분인데 세린은 잘도 해낸다. 어떤 의미로는 성공이라고 할 지도. 물론 아리아 한정으로 보자면 여지없이 실패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유난히도 강하게 보여주는 세린이 재차 질문 공격을 날린다. "그, 그렇다면 목이 마르다던가..." "... 괜찮아." "아, 혹시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든지. 그런 건?" "......" 이제는 대답 보류. 아니, 대답하기를 거절한다. 나 같아도 아리아와 같은 대답을 하겠다. 왜냐하면 밥을 먹은지 4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밥을 먹었는지에 대한 여부를 묻는 사람은 내가 봐도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아무튼 가장 잔인하게 탈락하게 된 세린에게 약간의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본다. 그녀는 뭔가 절망했다는 듯이 다리를 모은 채 얼굴을 묻고 절망 모드로 돌입. 불쌍하긴 하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다. 그렇다면 이제 드디어 내가 나서야 할 차례가 다가오게 된 것인가. ============================ 작품 후기 ============================ '인터넷을 할 때마다 뜨는 더러운 팝업 사이트 때문에 짜증나 죽겠습니다!!!' 토크 제 1회입니다. 본래는 크롬을 쓰다가 오디오의 문제 때문에 크롬을 사용하고 있는 유저인데, 네이버나 다른 커뮤니티 사이트 게시판을 클릭할 때마다 뜨는 팝업 사이트 때문에 골머리가 아파옵니다. 익스플로러처럼 간단하게 사이트를 차단할 방법도 없고... 매번 프로세스 클린으로 초기화를 시키면서 버티고 있는데, 그래봤자 하루를 못 갑니다 ㅡ_ㅡ;; 그냥 익스플로러를 다시 써야할지... 235화 누구보다도 빠르게, 난 남들과는 다르게 먼저 아리아에게 딴 생각이 들지 않게끔 질문 공세를 펼친다. "아리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코가 무엇인지 알고 있어?" "... 큰 코요?" "그래. 큰 코." "......" 그렇다. 남들과 다른 질문이라고 자부한 데에는 그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질문한 것은 바로 간단한 퀴즈! 일단 아리아의 웃음을 먼저 이끌어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런 식의 넌센스 퀴즈를 먼저 낸 것이다. 웃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웃음이야말로 만병통치약. 웃음을 잃어버린 아리아에게 우선 미소를 먼저 찾게 해주고 나중에 질문을 해도 늦지 않는다는 나름 고도의 전략인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괜찮은 작전이라고 생각한다. 자. 맞춰봐라. 아리아. 물론 맞추기 힘들겠지만. "어서 정답을 말해보렴. 후배 양." "... 멕시코요." "어...?" "정답은 멕시코입니다. 틀린가요?" "아니... 정답이야." "......" 알고보니 세린보다도 잔인하게 넉다운을 당하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름하여 유에. 빌어먹을. 어떻게 답을 알고 있는거냐?! 아리아!! 나름 고안에 고안을 거듭한 개그였는데, 이런 식으로 무너질줄은 꿈에도 몰랐단 말이다!! ... 윽.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마치 '너도 제대로 말도 못 꺼내면서 왜 우리들을 원망하는 거야. 이 변태!'라고 바라보는 듯한 그런 시선들 말이다. 그만둬. 나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지 말란 말이다!! ... 라고 말해도 못 알아듣겠지. 넌센스 퀴즈도 안 통했다. 체리는 이미 포기했는지 깊은 한숨만을 내쉬면서 도전하기 두렵다는 듯이 아리아 모르게 고개를 흔든다. 엘리는 처음부터 도전 의사 조차도 없었고. 남은 인물은 누나밖에 없는 것인가. 뭔가 고민을 하기 시작하는 누나. 이걸 말할까 말까 처음부터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결국 결심을 했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기 시작한다. "아리아." "이번에는 유린 선배인가요. 마치 모두들 저에게만 말을 거는 것 같은 그런 착각이 드는데요." 착각이 아니라 정답이란다. 정말 감도 좋은 녀석이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원. 역시나 눈치가 정말 빠른 축에 속하는 아리아다운 판단이었다. 그러나 내 누나도 나름 대단한 사람이다. 여기서 물러설 누나가 아니라는 듯이 질문에 질문을 연속으로 던지기 시작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다들 네 걱정을 하고 있어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지." "과연. 그랬군요." "그래서 방금 나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해봐도 될까?"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이 아닌 이상은 답변 해드리겠습니다." "좋아. 그럼 질문할게. 너와 세리아의 일에 대해서 묻고 싶어." 너무 그렇게 직접적으로 묻는 건 실례가 아닐까 생각을 해보는 나. 다들 그런 식으로 질문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없이 날씨를 묻는다느니 배가 고프냐느니 아니면 재미없는 넌센스 퀴즈를 낸다든지 하는 선택지를 고르고 있었는데, 누나는 그런 겉치레 따위는 없다는 듯이 직설적으로 묻는다. 누나다운 태도라고 생각하지만, 너무 누나답다. 보통은 조금 누나다운 모습을 절제하고 질문할 필요성이 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여기서 아리아가 대답을 들려주면 의외의 행운이 따르게 된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은발 자매의 과거.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상세한 이력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아리아가 과연 우리들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하지만 누나의 질문에 대해서 아리아는 약간의 한숨과 함께 이런 말을 남긴다. "그 이야기에 대해서 궁금해 하시고 계시다면 그 생각을 지금 당징 지워주셨으면 합니다." "대답할 수 없다는 뜻이구나." "네."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안 되겠니?" "세리아 언니가 스스로 대답을 들려주게 된다면 전 신경쓰지 않겠습니다." 결국 본인은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다는 뜻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꼴이 되었다. 대답을 듣고 싶거든 세리아를 설득하라는 말인가. 저번에 나와 불침번을 섰을 때 세리아 역시도 그 질문에 대해서는 노 코멘트. 국가 일급 비밀이라도 되는 듯이 대답을 아꼈다. 결국 그녀들의 과거 이야기를 듣는 것은 포기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침실에 앉아있는 것이 불편한지 자리에서 일어선 아리아가 우리들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분위기를 흐려서 죄송합니다." "잠깐. 어디 가려고 그러니?" 노아 선생님이 아리아에게 묻자, 본인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한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오려고요." "그, 그래...?" "그럼 이만." 거실을 통해서 침실 바깥을 향해 나가는 아리아. 나가는 순간 까지도 누운 채로 잠이 든 세리아를 한번 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말은 저렇게 해도 세리아에 대한 걱정으로 머릿속이 가득 찬 모양이다. 저래야 아리아 답다고 보여지지만, 문제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직까지 아리아와 세리아의 관계는 예전에 세계대전 이후로 발발했던 냉전체제와도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아리아가 침실을 떠난 지 대략 5분 정도가 지났을까. 그래도 아리아를 혼자 놔두기에는 조금 그랬는지 긴급 요원으로 체리가 선택되었다. 같은 나이 또래이기도 하고, 그나마 말이 잘 통할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체리가 발탁되었다. 체리 본인도 아리아에게 가겠다는 의지도 돋보였고 말이다. 아리아와 체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누나였다. "그럼 아리아가 없는 사이에 잠시 할 말이..." "아리아와 세리아의 과거 이야기에 대해서지?" 노아 교수님이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한다. 그러자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색한 미소와 함께 노아 교수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려준다. "뭐, 그런 셈이죠." "하지만 여기서 그녀들의 과거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없잖아요." 도중에 태클을 걸어오는 세린. 너무 정확한 태클은 사양하고 싶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아니. 대충은 알고 있어." 세린의 말에 태클을 건 인물은 다름이 아닌 나. 하지만 그 다음에 해야 할 말도 꼭 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기에 모두에게 말을 꺼낸다. "물론 저도 상세하게 알고 있지는 않아요. 대략적이기는 하지만, 아리아가 말한 그대로 이건 본인들이 직접 여러분들에게 말을 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건 세리아가 말을 못하게 된 사건이지, 아리아가 세리아를 지극히 아끼게 된 계기와 연관이 되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함부로 추측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맞는 말이야. 남동생." 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누나는 자신이 여지껏 생각하던 것을 그대로 입 밖에 내뱉기 시작할 뿐이다. "그래서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지." "아리아, 세리아 본인들로부터 자매의 과거사를 알지 못하는 한 그 조치는 무의미하다고 봐요." "너무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세린아. 과거사를 '알면' 되잖아." "어떻게요?" "그야... 우리들끼리 추리를 해보는 거야." "추리요?" "그래. 지금까지 우리들이 보아왔던 아리아와 세리아의 모습을 통해서 과거의 일을 유추해보는 것이지. 어때요? 다들." 과거사의 추리라... 나름 괜찮은 방법이라고 보여지지만, 얼마나 정확도를 자랑하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누나가 제안한 방법 역시도 나쁘지는 않다. 본인들이 말을 해줄 의향이 전혀 없다면 우리들 끼리라도 추리를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뜻이다. 본인들을 강요해서 억지로 이야기를 꺼내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우리들으 순수하게 추리를 통해 획득한 과거의 이야기니까 아리아와 세리아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저작권 침해도 없을테고. 법은 잘 지켜야 한다. 준법정신이 투철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이런 습관을 길러두는 것이 좋다고 본다. 음.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바람직한 자세다. 어쨌든 누나의 말도 일리가 있기 때문에 딱히 반대하고자 하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괜찮을 거 같은데." "역시나 나의 남동생이야. 이 누나의 아이디어, 괜찮지?" "괜찮긴 한데. 문제는 역시나 잘못된 추리로 인해서 괜히 둘에게 오해를 사는 일이 없도록 해야지. 안 그래?" "후후후. 그 점도 이미 고려하고 있었지." 라고 말하면서 팔짱을 낀 누나가 우리들을 한번씩 번갈아가며 말한다. "지금까지 아리아와 세리아의 언행으로 보았을 땐, 분명 과거에 무슨 커다란 사건이 있었을거야." "그거야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잖아." 유아 선배가 조금 맥이 빠진다는 표정으로 누나의 말에 대답을 한다. 솔직히 커다란 사건이 없었다면 지금쯤 세리아가 정상적으로 우리들과 말을 할 수 있었을테고, 그리고 아리아의 세리아에 대한 지나친 관심병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다르다. 세리아는 말을 못하고, 그리고 아리아는 세리아에게 무언가 죄를 저질렀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다. 그로 인해서 세리아를 애지중지 하는 중. 누가 봐도 과거에 그녀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사실 정도는 굳이 예측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나는 유아 선배의 말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말한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말은 그런 단순한 뜻이 아니다 이 말이지." "그럼 어떤건데." "생각해봐. 혈육관계, 즉 남매라든지 자매라든지 아니면 형제라든지. 혈육 관계에서만 벌어질 수 있는 다툼을." "... 난 외동딸이라 잘 모르겠는데." 유아 선배는 스스로 기권을 표시한다. 선배가 외동딸이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된 나. 본래 외동딸이라면 집안에서 애지중지 키우게 되니까 성격이 참하게 된다거나 아니면 얌전한 태도가 몸에 베어 있는 것이 대부분일텐데. 이것도 어떤 의미로는 성차별적인 발언이 되는 것인가. 아무튼 대충 이미지는 그러하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유아 선배는 오히려 그런 아가씨같은 성격의 여성이라기 보다는 말괄량이의 느낌이 강하다고나 할까. 뭐, 대충 그런 느낌이다. 천천히 손을 드는 세린도 뒤이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저도 외동딸이라서 잘 모르겠어요." 외동딸이 두번째로 등장하게 되었다. 세린은 사실 어느정도 예상은 했다. 부잣집 딸래미에다가 외동딸이면 정말 집 안에서 보물단지 같이 키웠을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자존심도 드세고. 입맛이라든지 옷 센스 같은 것도 엄청 고급스럽다. 서민인 내 입장에서는 다른 차원에 사는 존재같이 느껴지는 세린. 하지만 무인도에 오게 되고 난 이후에, 특히나 난파선 제 1차 원정길에서 그녀가 진성 마조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난 이후부터 그녀도 나와 같은 인간이구나 라는 사실을 세삼 깨닫게 되었다. 그렇지만 난 아직도 세린을 상대하기엔 약간 부담스럽다. 이건 아마도 유아 선배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터. 세린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접어두고, 두명의 외동딸을 번갈아 바라보던 누나가 '과연...'이라고 작게 말하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에 말을 꺼낸다. "외동딸들끼리 사이가 안 좋구나." "......" "......" 생각해보니 유아 선배도 외동딸, 세린도 외동딸이다. 그런데 이 둘은 사이가 엄청 좋지 않다. 외동딸도 서로 통하는 것일까? 아니지. 싸운다는 소리는 의견의 격차가 있어서 자주 충돌한다는 의미니까 공통점이라기 보다는 차이점이라고 해야 좋을거라 생각된다.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외동딸에 대한 분석 방법 101가지를 연구하자는 주제가 아니니까 이건 그냥 생략하도록 하자. 괜히 내 머릿속만 더 복잡해지겠네. ============================ 작품 후기 ============================ 무인도 표류일지가 대략 300회 전후로 완결이 난다는 가장하에 생각해보면, 이제 슬슬 차기작에 대한 준비를 해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습작으로 2 작품이 있고, 현재 쓰고 있는 글이 하나 있습니다. 메이드의 저택이 생각보다 평이 좋아서 그런 식의 로맨스 작품을 하나 더 써보려고 현재 기획중입니다. 그리고 난파선 표류일지도 있고요. ... 생각해보니까 차기작에 대한 고민을 안해도 되겠군요;; 한다 해도 연재할 작품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 236화 "누나. 이야기를 다시 원래 궤도로 돌려서 설명해줘봐." "아, 그래. 그래. 잠깐 다른 곳으로 이야기가 샌 모양이네." 헛기침을 하면서 다시 시선을 모으는 누나. 형재자매 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솔직히 나도 일가견이 있긴 하다. 누나와 나도 원만하게 지내온 사이는 아니니까. 그렇다고 대놓고 싸웠다는 뜻이 아니고. 그냥 대부분 남자인 내가 많이 참고 넘어간 경우의 수가 많았다. 그렇다고 누나가 이런 나의 고충을 알아주느냐. 그것도 아닐테니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다. 아무튼 누나가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자매 사이에서 가장 다툼이 많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소유권 분쟁'이야." "소유권 분쟁?" 노아 선생님이 되묻자, 누나가 싱긋 웃으면서 게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그래. 소유권 분쟁. 원래 혈육관계, 특히나 형제자매 사이에서는 니꺼, 내꺼 같이 편가르기가 매우 심한 편이지. 동감하지? 남동생." "... 어. 무지하게 공감가는 내용이야." 그나마 나와 누나는 동성이 아니라 이성이기 때문에 그런 분쟁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형제, 자매 사이라면 특정 물건. 예를 들자면 컴퓨터를 사용한다든지 아니면 옷 같은 것들에 대해서 소유권을 놓고 자주 싸운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내 주변에서도 친구들 중 동생이라든지 형과 같이 지내는 친구 녀석들이 많이 있으니까 말이다. 뭐... 남자들은 솔직히 그런 것에 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은 아니지만, 여자들은 옷이라든지 화장품 같은 것들에 매우 심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어차피 알겠지만, 이것도 들은 말에 불과하기 때문에 장담은 하지 못하겠다. 누나의 말을 잠자코 듣던 세린이 도중에 참전한다. "그럼... 도대체 어떤 물건을 놔두고 싸우게 되었을까요?" "음. 어려운 질문인데." 말을 꺼내자마자 말문이 막혀버린 누나. 결국 누나 역시도 별다른 해결책이 없었다는 것을 뜻하게 되는 반응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실 별로 기대는 안했기 때문에 그다지 많은 실망감이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괜히 기운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누나의 고민에 이어 노아 선생님이 뭔가 중요한 관점을 빼먹었다는 듯이 누나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유린. 중요한 요소가 한 가지 빠진 거 같아." "중요한 거요?" "그래. 보통 자매들끼리 싸운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세리아가 말을 못하게 되었을 정도의 결과까지 고려를 해본다면 과연 단순하게 소유권 분쟁이라는 문제로 넘어갈 수 있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그렇네요." 누나도 스스로의 부족한 추리력을 인정하고 만다. 노아 교수님의 지적은 실로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평하고 싶을 정도로 누나가 내세운 가설의 부족했던 부분을 정확하게 찌른 셈이었다. 격투로 치자면 명치로 뻗은 라이트 훅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세리아가 말을 못하게 된 일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우리들이 모여서 추측을 해본다고 한들 그녀들이 과거에 겪었던 일을 알 수 없는 것이다. "힘드네..." 세린이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담아 말한다. 그녀의 말 그대로 힘든 게 사실이다. 우리가 셜록홈즈도 아니고. 명탐정 코난도 아닌데 이런 추측을 어떻게 완벽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사건은 또 다시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한숨을 쉬면서 각자의 생각에 잠겨있던 우리들. 도중에 무거운 침묵을 깨는 한 인물이 침실로 들어오게 된다. "다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고 있어?" "아, 지아 선생님." 유아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지아 선생님에게 다가가 묻는다. "세리아는 좀 어떤가요?" "이제 겨우 잠들었어. 어차피 그리 심각한 병도 아니었으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말이야. 안정을 조금 취하다 보면 나아질거야." "다행이네요..." "하지만 아직까지 안심을 할 수는 없는 상황이잖아. 그렇지?" "... 선생님의 말씀이 맞아요." 역시나 연륜으로 무장된 지아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우리들 중에서도 가장 인생을 오래 살았던 연장자이다 보니까 금세 우리들의 분위기가 숙연해진 원인을 간파하게 되었다. 팔짱을 낀 채 우리들을 바라보던 지아 선생님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다시금 입을 연다. "노아. 너도 아리아와 세리아에 대해 아는 사실이... 전혀 없지?" "네..." "뭐,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그리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었으니까." 지아 선생님 역시도 모른다는 사실은 저번에 숲에서 노숙을 할 때 들었다. 역시나 이 숲에서 그녀들의 과거를 유일하게 아는 인물은 본인들밖에 없는 것인가. ...... 잠시 호흡을 고른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분위기 전환을 삼으며 말을 바꿔보기 위해 시도해본다. "과거는 과거의 일이고. 지금 현재가 가장 중요하잖아요. 그렇죠?" "... 맞는 말이긴 한데." 세린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가 하고싶은 말이 무엇인지 말해보라는 식으로 응시하기 시작한다. 간접적으로 돌려서 말해봤자 어차피 시간만 낭비될 뿐. 이럴때는 직설적인 화법이 가장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결과적으로 아리아와 세리아는 싸우게 되었고. 지금은 서로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었어요." 상황을 정리해보며 말하는 나. 모두가 나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그 덕분에 아리아는 엄청나기 침울해져있는 상태고요. 세리아 역시도 아직까지 감기때문에 경황이 없지만, 아마 스스로도 자신이 왜 아리아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 본인도 본인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을 거에요." 아리아와 세리아의 유대감. 누구도 끊지 못할 강한 끈으로 이어져있는 그녀들의 유대감은 이런 일로 쉽사리 없어지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 결국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번 사태가 조용히 지나가기만을 기원하는 수 밖에요." "방관을 택하자는 이야기니?" 내 말을 듣고 있던 지아 선생님이 질문을 던진다. 사실 방관도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과거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자가 한 명도 없는 상황에서 괜히 우리들이 그녀들 사이에 끼어 들어가봤자 오히려 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리아와 세리아가 스스로 각자 해결해주기만을 바라는 것도 솔직히 말해서 내 스타일이 아니다. "저희는 '지켜보는 역할'이라고 말씀드리는게 더 정확하겠네요." "어머. 그 '지켜본다.'라는 말과 '방관'이라는 단어의 차이점이 어떤 것일지 조금 궁금해지기 시작했어." "방관은 말 그대로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태도를 말하는 거예요. 하지만 지켜본다는 의미는 방관과는 다르죠. 현재 상태에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가만히 상황을 보고, 그리고 해결책이 보이게 되면 격려를 해준다든지 아니면 중개를 하자는 뜻이에요." "한마디로 '신중해지자.'라는 뜻이구나." "그런 셈이죠." "역시나 너 다운 태도야." 지아 선생님이 빙그레 웃으시면서 나를 칭찬하기 시작한다. 학교에 다닐 때도 이런 식으로 선생님들에게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그러나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학생으로서 성실하게 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나도, 그리고 무인도에서 모두를 이끌고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나도 모두가 '유에'라는 이름의 내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럼 유에의 말대로 지금은 상황을 지켜보는게 좋겠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끼어들면 괜히 일만 커질 수 있으니까. 어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지아 선생님이 나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한다. 아무래도 가장 나이가 많은 지아 선생님이 이런 말을 꺼내니까 거의 모든 면에서 내 말에 반대를 표시하던 세린조차도 지금은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연륜의 힘인가. 지아 선생님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범접할 수 없는 30대의 위엄이 느껴지는 상황이었다고 보여진다. 늦은 저녁을 먹게 된 우리들. 바깥에서 체리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아리아가 돌아오고 난 뒤에 저녁식사를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직접 준비를 하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지만, 알다시피 내가 요리를 준비한 역사는 무인도 내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남자라서 매일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던 나지만,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보여진다. "... 저도 도와드릴게요." 아리아가 주방으로 향하면서 미리 식사를 준비중이던 노아 교수님에게 한 말이었다. 누나와 같이 식사를 준비하던 교수님이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고개를 몇번 흔들기 시작한다. "아니야. 신경쓰지 마렴." "그래도..." "할 일이 없다면 세리아의 곁을 지켜주는 게 어떠니?" "......" 은근슬쩍 아리아의 심적인 갈등을 떠보려는 것일까. 노아 교수님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세리아에 대한 일을 언급하자, 아리아의 표정이 점차적으로 굳어가면서 동시에 약간의 한숨을 동반한 채 말한다. "아직은 때가 아닌 거 같아요." "그, 그러니...?" 괜히 질문했다는 식으로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노아 교수님. 곁에 있던 누나도 교수님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아직은 너무 일러요!'라고 따끔한 충고를 해준 모양이다. 지아 선생님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그저 세리아의 간병에 온 신경을 집중시킨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너무 세리아와 아리아에게 시선을 보내면 오히려 그녀들이 부담스러워 할 것이라는 생각이 공통적으로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인지 간단한 말만을 던질 뿐, 그 이상의 심도있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 작품 후기 ============================ 일요일입니다. 요새 예능 프로그램에 심취되어 있어서 금요일부터 '정글의 법칙->무한도전->진짜사나이' 3콤보로 즐겁게 주말을 보내고 있습니다. 본래 티비를 잘 안 보는데, 근래 들어서 재미있더군요. 다른 예능 프로그램들도 찾아서 봐야겠습니다. 핰핰핰 237화 분명 식사를 하고 있긴 한데... ... 역시나 마찬가지로 매우 어색하다.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부부싸움을 한 어머니와 아버지가 같이 식사를 하는데, 그 사이에 끼어서 같이 식사를 하는 그런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만큼 이 자리가 매우 낯설다고 생각하면 이해되리라 본다. 개그 콘서트에서 '대화가 필요해.'라는 코너가 떠오른다. 거기서 나오는 개그맨들이 식사를 하는데, 진지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주는 그런 컨셉의 코너였다고 기억을 하고 있다. 재미도 있었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재미가 없다. 정말로 재미 없다. 아니, 오히려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이 자리가 거북하다. ... 정말로 도망갈까. 아니지. 만약에 그런 행위를 했다고 한다면 아리아와 세리아 두사람 다 한테 미움을 받을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지. 이럴때는 그냥 얌전히 식사를 하는 수밖에. 식사를 마친 우리들. 짐정리라든지 여러가지 남은 일들을 처리하느라 제대로 목욕도 못한 인원들이 대다수라서 자정이 넘기 전에 목욕을 하고 자는 편이 좋겠다는 의견이 속출했다. 특히나 유아 선배와 세린. 한동안 유령 공포 덕분에 식은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인지 유난히도 목욕을 하고 자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두명이었다. 사실 나도 땀에 쩔은 채 찝찝한 기분으로 자기는 싫었기 때문에 굳이 그 둘의 의견에 반박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아 선생님 역시도 몸을 깨끗하게 하고 자는 편이 감기에 걸리지 않을 확률을 높인다는 충고까지 해주셨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 없이 목욕 조를 짜게 된 것이다. 감기로 인해서 쉬고 있는 세리아를 제외하고는 9명이서 2개조로 나뉜 상황. 나와 누나, 그리고 체리와 아리아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사람들은 현재 바깥에서 목욕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현재 산장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환자 세리아를 포함해서 총 5명. "정말 숨 막히는 식사 시간이었어." 누나가 두 다리를 쭉 뻗으며 말한다. 방금 누나가 한 말에 대해서는 나 역시도 매우 공감하는 바가 크다. 그나마 세리아가 자리에 없었으니까 다행이지, 만약에 세리아가 감기에 걸리지 않은 상태로 식사에 같이 임했다면, 지금의 어색한 분위기에 배로 힘을 실어주는 그런 효과를 창출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리아가 들리지 않게끔 말했기 때문에 누나의 방금 그 말은 은발 자매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 아리아와 체리. 그리고 지아 선생님을 대신해서 간병을 맡게 된 나와 누나는 서로 주어진 역할에 충실히 하면서 언제 우리들의 목욕 차례가 돌아올지 손꼽아 기다리고 있게 된다. 누나가 차갑게 적신 손수건으로 세리아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주려던 순간. "......" 도중에 이마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 덕분인지 세리아가 눈을 뜨게 되었다. 가늘게 눈을 뜨며 우리들을 올려보는 세리아. 점심 때에 비해서는 혈색이 상당히 좋아진 느낌이다. "아, 일어났니? 세리아." "......"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누나의 말에 대답하는 누나. 그래도 아직은 요양을 해야 하는 시기인 듯, 그리 큰 동작은 보여주지 않는다. 땀을 닦아낸 누나가 세리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접촉시키기 시작한다. 열이라도 직접 재보려는 의도인 것일까. "음... 열은 많이 떨어진 거 같네." "누나. 그렇게 있으니까 세리아의 언니 같은데." "어머, 나도 이렇게 귀여운 여동생이 있다면 대 환영이야." "... 농담이라고. 농담." "기왕에 말 나온 김에, 세리아를 우리 동생으로 삼아버릴까?" "호적 정리라든지 그런 건 누나가 직접 해." "뭐야. 네가 해주는 거 아니었어?" "어째서 내가 와 누나가 벌려놓은 일의 뒤치닥거리를 자처해서 해야 하는데. 그 이유를 100가지만 말해보면 해줄게." "넌 나의 동생이니까." "좋아. 99가지 남았어." "나머지는 생략." "편법은 통하지 않아. 누나. 제대로 99가지의 이유를 말해보라고." "그냥 해주면 안 돼?"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있어. 그리고 공짜 좋아하다간 대머리가 될 지도 모른다고." "쳇. 째째한 녀석." 오늘따라 상당히 떼를 많이 쓰는 누나였다. 워낙 평소에 많이 보는 패턴인지라 이제는 익숙해지는 누나의 떼쓰기. 보통 나와는 다른 남자애들이 누나의 남동생이라는 보직을 맡고 있었다면, 금새 사퇴서를 내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우와! 미인 누나라니!'라며 순정만화에서 볼 수 있을법한 초롱초롱 눈망울 빔을 쏘아댈지도 모르겠지만, 유린이라는 여자의 남동생으로 대략 딱 잡고 1주일만 지내보면 자신이 헛된 꿈을 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내가 장담한다. 내기를 걸어도 좋다. "아무튼 점점 나아지고 있어서 다행이야. 세리아." 땀으로 인해서 얼굴에 달라 붙은 은발의 머리카락들을 손수 하나하나씩 직접 떼어주며 말하는 누나. 그래도 역시나 연상으로서의 보살핌이랄까. 아니면 모성본능? 세리아의 현재 모습이 누나의 모성본능을 자극하고 있는지 마치 귀여운 아기처럼 세리아에게 다정히 말을 걸기 시작한다. "힘들면 어려워하지 말고 그냥 아무한테나 말하고... 아, 말은 못하는구나." '미안'이라고 짧게 말하면서 어색하게 웃는 누나. 그러나 세리아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좌, 우로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어보인다. 정말 이렇게 보니까 세리아가 조금 귀여워보이긴 한다. 여자가 아픈 모습을 보이면 사실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 모습조차도 아름다워 보인다는 감정이 들고 있었다. 뭐였더라... 예전 중국의 고사성어 중에서 이런 사례가 있었는데. 예전에 추녀와 미녀가 한 마을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미녀는 가슴에 자주 통증이 오는 병을 가지고 있어서 평소에는 살짝 얼굴을 찡그린 표정으로 거리를 활보했다고 한다. 추녀도 미녀와 같은 병세를 가지고 있어서 마찬가지의 표정으로 거리를 활보했지만, 미녀는 아픈 표정 마저도 예뻐보이고, 추녀는 가뜩이나 못생겼는데 더 추하다는 식으로 가슴 아픈 말을 들었다고 한다. 외모 지상주의라는 단어에 딱 적용해도 될 만큼 훌륭한 사례라고 생각되지만, 예쁘다는 것의 긍정적인 효과가 타인들에게 얼마나 좋은 효과를 보여주는지에 대한 사례로도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 고사성어를 생각해내려 했지만, 역시나 떠오르지 않는다. 무식한 건 참 없어보이는 구나. 하하하. 세리아의 간병을 보살피고 있을 무렵, 때마침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로 돌아오는 아리아와 체리. 세리아가 도중에 깨어났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아리아가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는 행동에 대해서 약간 머뭇거리기 시작한다. 아직도 세리아에 대한 죄책감이 남아있는 것일까? 아니면 세리아의 미움을 받았다는 불안감이 커지게 되어서 아리아의 저런 행동을 나타나게끔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일까. 내가 아리아가 아닌 이상,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현저히 드물 것이다. 아리아의 애매모호한 태도를 바라보던 누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한다. "아리아. 여긴 네 지정석이지?" 누나가 가리킨 곳은 바로 세리아가 누워있는 바로 옆자리. 한 마디로 누나가 아리아에게 말하고자 하는 뜻은 '간병을 해!'라는 말과도 같을 것이다. 직접적으로 아리아에게 세리아에 대한 일을 언급해버리는 누나. 역시나 상대방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앞 뒤 생각없이 무조건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누나다운 태도라고 보여진다. 저래야 유린이라는 여자답지. 그리고 그동안 남동생을 못살게 괴롭히던 누나답다. 무인도에서는 조금 그 태도를 바꿔주기를 바랄 뿐이지만 말이다.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약간 과감한 행동을 취하는 누나. 아리아도 당황했는지 누나를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는다. 태도가 급변하는 것은 누나의 전매특허.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는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다. 뭐. 이래야 내 누나답지. "... 지금은 사양하겠습니다." 역시나. 예상했던 답변이 들려온다. 하지만 누나는 포기하기 싫은 듯이 아리아의 손을 억지로 잡으며 다시금 말한다. "네 언니가 이렇게 아픈데 가만히 놔두려고?" "... 선배가 신경쓸 일 아니잖아요." "그래. 네 말이 맞아. 어찌보면 내가 너무 주제넘게 남의 자매 일 사이에 간섭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아니, 확실하게 간섭하고 있어. 왜냐하면 우리가 타인은 아니니까." "......" "만약에 네가 여기서 나에게 '타인이잖아요.'라는 말을 했다면, 나도 세리아와 마찬가지로 너의 뺨을 때렸을거야." "... 알고 있어요." 무인도에 표류되기 전에는 확실히 타인일지도 모른다. 서로 얼굴도, 이름도 모르며 지내오던 타인 관계. 그러나 무인도에 표류되고 난 이후에 우리들은 가족과도 같은 유대감으로 뭉치게 되었다. 지금도 물론 마찬가지. 누나가 아리아와 세리아 자매에게도 이 정도로 간섭을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서로 무인도에서 살아서 나가겠다는 공통적인 목적을 가진 운명공동체. "......" 하지만 아리아는 누나의 이런 적극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말을 이어가지 못한다. 아직까지도 갈등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들이 겪었던 모종의 일 덕분에. 자신이 세리아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자격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아직까지도 품고 있는 것일까. 서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눈싸움을 시작하는 누나. 그리고 아리아. 사실 누나가 일방적으로 아리아를 노려볼 뿐이고, 아리아는 고개를 떨군 채 그저 누나의 손에 잡혀있는 모습일 뿐이다. 서로간에 벌어지고 있는 냉전체제. 꿀꺽 침이 넘어가는 상황을 마치 눈치라도 챈 듯이 문을 열고 등장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시원해라. 우리, 목욕 다 끝났... 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유아 선배의 말 끝이 의문 부호를 띄면서 점점 흐려진다. 아마도 지금 우리들의 상황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은 모양이다. 뒤따라오던 세린이 유아 선배를 지나치며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갑자기 왜 말 끝이 흐려지나요? 유아 선배. 또 귀신이라도 나타났..." 세린 역시도 유아 선배와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여준다. 둘 다 여자이다 보니까 남자인 나에 비해서는 감이 좋은 편일 것이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현재 산장 안의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중간에 기운차게 목욕에 대한 뒷담화를 늘어 놓으려고 하다가 말 문이 막히게 된 것이다. 노아 교수님과 지아 선생님. 그리고 초호기를 안고 들어오는 엘리도 산장 내의 어색한 분위기를 느끼면서 내부로 들어온다.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유아 선배와 세린을 뒤로한 채 지아 선생님이 상황을 정리하려고 하듯이 말한다. "자. 그만 싸우고 다들 목욕하러 가렴. 알았지?" "......" "... 네." 누나는 침묵으로, 그리고 아리아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각자 상반된 반응을 보여준다. 아무래도 누나의 입장에서는 절호의 찬스를 놓친 셈이고, 아리아의 입장에서는 지아 선생님이 구원의 손길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게임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이 때 당시에 깨닫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초 단편소설 ~사색소녀~ 5회 "사람이 내뱉은 말은 부메랑과 같아. 왜냐하면 어떤 형태로든 다시 본인에게 돌아오기 때문이지." 언제나 이상한 말만 발설하는 사색소녀가 과연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쓸모없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지만, 본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있지! 자격이 넘치고 넘쳤어! 라는 대답을 할 거 같아서 관두기로 했다. "그래서 너는 네가 한 말 중에 가장 후회되는 말이라도 있어?" 우회적으로 다른 질문을 던져보니. 잠시 망설이던 사색소녀가 고민에 휩싸인 얼굴을 하면서. "하나 있긴 있어." "뭔데?" "듣고 싶어?" "당연하지." "음..." 시간 끌기 스킬을 시전하는 것인가. 괜시리 안달이 나려고 할 무렵에 결국 스스로 입을 여는 사색소녀. "사실 나는 내가 정상인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렇구나." 지금까지 이 녀석한테 들은 말 중에서 가장 비정상적인 말이었다. ~여담~ 말은 한번 내뱉으면 주워담을 수 없지요. 정말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238화 EP 24. 과거 회상 1조가 목욕을 끝냈다는 소리는, 2조가 이제 목욕을 할 차례라는 말과 같다. 2조가 누구인가. 나와 체리, 그리고 문제의 장본인이기도 한 아리아와 아까 소동의 주범인 누나이지 않은가. 결국 산장에서의 일은 현재 연장전이 선언되어 작은 호수로 장소를 옮기게 된 것이다. 서로 알몸으로 호수에 들어가는 우리들. 차가운 물의 감촉이 우리들의 피부에 와닿고 있었지만, 워낙 땀을 많이 흘렸던지라 이 정도의 차가운 물은 추위라는 범주에 속하지도 않았다. 호수에 들어가 앉으면서 기분이 좋다는 듯이 말하는 누나. "시원하네~" "그, 그러네요오..." 어색한 말투로 누나의 말에 대답하는 체리. 본래 여자들인 이 3명과 나는 따로 목욕을 해야 했지만, 저번에 지아 선생님이 잠시 만들어 준 혼욕의 기회 덕분에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들과 알몸으로 목욕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오르게 되었다. 지아 선생님 덕분이라고 하지만, 정말 남자인 내 입장에서는 황송할 따름이다. 밤이라서 여체의 아찔한 몸매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어도, 지금의 이 상황 하나만으로도 나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흥분되는 요소가 된다. 하지만 그거야 평상시의 경우에서만 통용되는 일이고. 지금 상황에선 성욕이고 뭐고 그런 거 없이 집중해서 봐야 할 작은 싸움이 있다. 바로 누나와 아리아의 관계. 원래 이렇게까지 충돌이 잦은 사이가 아니었지만, 오늘의 누나는 조금 다르다. 더 이상 분위기를 흐리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유난히 아리아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리아. 아까 했던 말, 계속해도 될까?" "......" 누나의 이런 집착은 아리아에게 있어선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누나가 모를리가 없다. 그러나 누나는 그 사실을 알고서도 일부러 아리아에게 연이은 질문 공격이라든지 거친 말투로 말을 한다든지 하는 일을 서슴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누나가 하는 지금의 행동들이 아리아와 세리아의 관계에 어떤 진전을 보여줄 지에 대해서는 미지수다. 오히려 진전보다는 후퇴를 할 가능성도 농후하다. 하지만 누나의 도박이 성공한 것일까. 전혀 예상치 못한 아리아의 말이 이어진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서가 아니었다. "여러분들은 제게서 언니와 저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잘 알고 있구나." 누나가 윙크하며 말한다. 그러자, 아리아가 우리들을 한번씩 바라보며 체념한 듯 작게 한숨을 쉬어보인다. "... 좋습니다. 말씀드리도록 하죠."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다. 혼혈아인 나, 아리아는 그때 당시에 한국에서 은발을 가진 소녀라는 타이틀을 달고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어딜 가나 나에게 있어서는 시선을 받는다는 일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졌고, 그것이 일상이 되어갔다.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말은 아마도 이런 의미일 것이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의 다양한 시선을 받게 된다. 부러움, 질투, 시기, 그리고 호기심 기타 등등.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분야의 시선이 바로 '호기심'일 것이다. 나 자신과 다른 외형을 지닌 사람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질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한번쯤 관심이 쏠리게 된다. 하지만 유난히 한국이라는 나라는 그 정도의 차이가 매우 심하다고 볼 수 있다. 혈연주의라는 독특한 관습이 존재했던 것 때문일까. 좋게 말한다면 애국심, 그리고 집단력과 밀집력이 좋다는 말로 포장할 수 있지만, 그건 '다수'의 입장에서 볼 때의 긍정적인 말일 뿐이고, 사실 '소수'의 입장에서 보자면 혈연주의라는 단어가 그리 좋은 단어만은 아니라고 본다. 소수. 남들과 다른 특이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 그리고 나 역시도 '다수'가 아닌 '소수'에 속하는 여성이었다. "아리아." 칠판을 지우개로 닦고 있던 나에게 작은 소녀들이 말을 걸어온다. 나와 같은 초등학교 동급생들. 4학년에 재학중인 나에게 있어서 어찌보면 이런 다수의 관심사는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무슨 일인데?" "얼마 안 있으면 크리스마스잖아. 그때 혹시 예정같은거 있지 않을까... 라고 묻고 싶어서." "예정?" "응. 우리 집에서 파티를 하려고 하거든. 남자애들도 같이." "남자... 라." 대충 이 아이들이 나에게 어째서 이런 말을 걸어오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내가 은발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왕따를 당하거나 하는 그런 일은 없었다. 지금 보시다시피 말이다. 오히려 내가 은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인해서 학교 내에선 나름 유명인사 급으로 취급을 받고 있다. 특히나 남성들한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내가 스스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조금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게 되고 있었다. 초등학교 남자애들 주제에 벌써부터 여자 뒷꽁무니나 따라다니면 나중에 도대체 어떤 어른이 될 것인지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다. 뭐, 나랑은 상관이 없겠지만. 어쨌든 남자들에게 인기있는 내가 친구들의 파티에 참석하게 된다면 자연스레 남자들 다수도 이 파티에 오게 될 것이다. 얼마나 귀족적인 파티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친구들끼리 모여서 파티를 하는 일 자체가 나에게는 어떤 의미로 굉장히 귀찮은 일 중 하나이기도 했다. "미안. 약속이 있어서." "야, 약속...?" "응. 집 안에서 부모님과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로 했거든." "그, 그렇구나..." 3~4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아무래도 나이가 어리다 보니까 감정표현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는 것은 막을 수가 없나보다. "미안해." "어쩔 수 없지. 그럼 다음 기회에는 꼭 참석해줘." "응. 그럴게." 기약없는 약속을 잡아둔다. 이런 약속을 한다고 해도 내가 실제로 다수의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 가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내 스스로가 그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딱히 싫은 것은 아니다. 남들에게 주목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은 나에게 있어서 메리트로 작용할지 모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사람들의 시선을 즐긴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싫어하진 않지만, 즐기는 것도 아니다. 그냥 무심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한 단어 사용법이라고 생각된다. ...... 크리스마스까지 앞으로 일주일. 곧 있으면 이 초등학교도 방학을 할테고. 당분간 학교에 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유난히도 학교 다니기를 싫어하는 나에게 있어선 방학이라고 불리는 존재는 낙원이자 일종의 휴식처 역할을 하는 이로운 존재다. 우리나라는 왜 여름과 겨울, 그리고 봄 방학만 있는 것일까. 가을 방학이라는 것도 있으면 좋을텐데. 가을이 섭섭하게 여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아이들의 요구를 뿌리치고 교문을 나오는 나. 오늘은 내 쌍둥이 언니이기도 한 세리아 언니와 같이 하교를 하는 날이다. 그동안 세리아 언니가 일주일동안 당번 일을 하느라 혼자 하교를 했었는데, 오늘부터 언니가 담당하고 있던 당번이 끝나는 날이기 때문에 둘이서 하교를 할 수 있게 되었다. ... 하지만 사실 나에게 있어서는 이런 상황이 부담스럽다. "아리아~!!" "... 언니." 친구들과 대화를 하고 있던 세리아 언니가 나를 발견하자 교문으로 뛰어오기 시작한다. 나와 같은 은발이 공중에서 춤을 추듯 아름답게 수를 놓는다. 언제봐도 아름다운 은발. 나 역시도 은발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나의 은발과 언니의 은발은 조금 다르다. 그렇다고 다르다는 의미가 색깔의 차이라든지 명도의 차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분위기의 차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보시다시피 나는 그다지 말수가 없는 편이다. 전체적으로는 무뚝뚝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기도 한다. 하지만 언니는 나완 다르다. 원활한 인간관계. 그리고 모두와 서스럼없이 잘 어울리는 언니. 머리도 좋고, 성격도 좋다. 남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착한 심성마저 가지고 있었따. 내 언니이긴 하지만, 가끔 정말로 인간이 맞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완벽한 여성이다. 학교 내에서는 같은 은발의 소유자인 나보다도 언니가 압도적으로 인기가 많다. 남녀 불문하고 인기가 많이 있다는 뜻이다. 누나의 저런 성격이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마성을 발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나와는 사뭇 다른 언니. 같은 은발이면서도, 그 분위기는 엄연하게 다르다. 언니는 나와는 다르게 주변에서 사랑을 받고 자라고 있다. 누구라도 언니를 아껴줄테고, 그리고 누구라도 언니를 보호해줄 것이다. 그래서 나는... ... 세리아 언니가 싫다. ============================ 작품 후기 ============================ 세리아와 아리아가 처음부터 마냥 사이가 좋은 건 아니었나 봅니다. 쓴 제가 말하기도 좀 그렇지만, 신기하군요;; 239화 "오래 기다렸니? 아리아." "... 아니. 별로." 차갑게 언니의 말에 대답한다. 같은 쌍둥이면서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성격이 너무나도 차이가 나잖아. 혹시 내게 할당되었던 상냥한 마음씨가 전부 세리아 언니에게로 향하게 된 것일까? 그렇다며 나는 정말로 세리아 언니를 미워할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도 미워하고 있지만, 분노와 증오는 엄연히 다르다. '살기'의 농도가 다르니까. 딱딱한 말투로 언니의 물음에 대답하는 나였지만, 세리아 언니는 신경쓰지 않고 있다는 표정으로 여전히 상냥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있잖아. 아까 여자 아이들에게 파티에 참석하지 않겠냐고 권유받았어. 4학년 2반에 유지에라고 있잖아. 알고 있니?" "알고 있어." 아까 나한테 파티 참가를 권유했던 여자 아이의 이름이다. 교내에선 오지랖이 넓은 편으로 소문이 난 활발한 아이이기도 하다. 워낙 넓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도 기억하고 있는 여자아이다. "그래서 언니는 가겠다고 말했어?" "응. 당연하지. 모처럼 크리스마스인데 친구들과 보내면 좋다고 생각하지 않니?" "... 아니. 전혀." 언니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 아까 지에라는 여자아이에게 말했던 집 안의 약속이라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단지 내가 파티에 참가하기 싫어서 적당한 거짓말로 둘러댄 것일 뿐이다. 그러나 세리아 언니는 나완 다르게 사람이 너무 좋아서 이런 것은 당연히 참가해야 한다는 마인드로 학교생활에 임하고 있다. 그래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답변이 언니의 입에서 나오게 된다. "아리아. 너도 나와 같이 가자. 아까 지에한테 들어보니까, 집 안에서 부모님들이랑 보내기로 말했다며?" "그래서." "그때 엄마하고 아빠 둘 다 늦게 들어오실 예정이잖아. 내가 아빠한테 말해둘테니까 같이 가자. 우리 둘이 말하면 아빠도 분명 허락 해주실거야." "......" 남들은 좋게 말할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언니의 안 좋은 버릇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바로 참견이 너무 심한 것. 남을 배려하고 있다고 본인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즤만, 솔직히 말해서 내겐 민폐다. 그냥 나를 가만히 놔둘 수는 없을까. 집 안에서 내가 혼자서 무엇을 하든지 언니가 크게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난 신경쓰지 말고 혼자서 가." "하지만..." "시끄러워니까 혼자서 가라고!" 나도 모르게 언니에게 소리치고 만다. 순간 앗차 싶었지만, 다시 평상시의 무표정을 유지하면서 매섭게 세리아 언니를 노려본다. "더 이상 날 화나게 만들지 말고 혼자서 가." "......" 힘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세리아 언니. 내가 언니에게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어렸을 적부터 언니가 나에게 쓸모없는 참견을 할 때마다 이렇게 화를 낸다. 이것 역시도 일상에서 다반사로 벌어지는 상황 중에 하나다. 개인적으로 화를 내는 건 언니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는 이상 언니는 더욱더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나에게 집착하게 된다. 혈육이라는 점 때문일까? 주변의 친구들보다 유난히도 나를 챙기는 언니. 하지만 사실은... ...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언니가 정말 죽도록 싫다. 세리아라는 이름의 여성은 나에게 있어선 그저 약한 사람을 보듬어주며 자기 만족을 느끼는 일종의 '위선자'에 불과하다. 정말로 언니가 아니었다면, 절규까지 하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얼굴을 맞보며 생활해야 하는 자매 사이니까 그런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내가 자취나 하숙, 혹은 기숙사에서라도 생활하지 않는 이상, 언니와 얼굴을 마주 보면서 지내야 한다. 아직 초등학생에 불과한 나에게 부모님이 분가를 허락해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언니와 거리를 두면서 생활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언니의 방금과 같은 말은 나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뿐이다. "... 미안해. 내가 또 주제넘게..." "알면 됐어. 그리고 앞으로 나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솔직히 언니가 이러는 거, 내게는 부담으로 느껴질 뿐이니까." "그래도..." "만약에 언니가 더 이상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된다면, 나는 언니를 자매로 인식하지 않을거야." "아, 알았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두 번 다시 안 그럴테니까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마." 세리아 언니가 내 팔에 매달리며 말한다. 솔직히 말해서 언니의 이런 태도도 이해할 수 없다. 보통 이렇게 싸가지가 없는 여동생의 말이라면 도리어 강하게 나오거나 아니면 네가 하고싶은 그대로 하라고 화를 낼 만도 할텐데. 언니는 전혀 그런 것이 없다. 오로지 자신이 잘못했고, 자신이 용서를 빈다. ... 정말 구역질이 날 정도의 위선자다. 세리아라는 여자 말이다. 집으로 돌아온 뒤. 오자마자 하는 일은 방 문을 닫아버리는 일이다. 2층에 할당되어 있는 나와 세리아 언니의 방은 서로 마주보는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엄마와 아빠는 사업 때문에 항상 늦게 들어오신다. 덕분에 저녁은 매일 세리아 언니와 내가 번갈아 만들게 된다. 오늘은 세리아 언니가 요리 담당인 날. 서로 요리 실력이 그리 높진 않지만, 아침에 엄마가 미리 어느정도의 요리를 해두고 가시기 때문에 사실 우리들이 크게 요리라는 거창한 행위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모든 일에 항상 성실한 세리아 언니는 자신이 직접 요리책을 보거나 아니면 엄마가 집에서 쉴 때 요리를 배워두는 모범적인 태도를 하면서 요리 스킬을 나날이 상승시켜 가고 있었을 뿐이다. 나도 세리아 언니의 그런 행동에 어느정도 자극을 받아 독자적으로 요리 실력을 늘렸다. 보나마나 세리아 언니는 자신이 요리를 더 배워서 매일 자기가 식사를 준비하겠다는 사람 좋은 행동을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꼴이 보기 싫어서라도 나 역시도 요리를 배우게 되었다. 위선을 떠는 언니의 모습은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보기 싫은 모습이었으니까. 아마 유령이라든지 귀신보다도 더 보기 싫을 것이다. "후우..." 침대에 다이빙을 하는 나. 긴 은발이 침대 위에 넓게 퍼지면서 아주 익숙한 천장이 내 시야에 확연하게 들어온다. "... 크리스마스 파티라." 파티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꺼려하는 나. 그렇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파티를 싫어한다는 말과도 같이 사용될 수 있는 것일까? 뭐... 어찌되었든 파티는 가기 싫다. 갈까 말까 하는 반반의 마음이었다고 하더라도, 세리아 언니가 나에게 파티를 제안한 순간부터 파티에 더 가기 싫어졌다. 청개구리 심보가 있는 건 아니지만, 세리아 언니가 '이거 하자!'라고 하면 하기 싫다. 그냥 싫다. 세리아라는 여자가 나의 언니라는 것 자체도 싫다. 왜 내가 동생인 것일까. 적어도 언니라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덜 억울하진 않았을텐데. 혹시 산부인과 간호사가 우리 둘을 착각한 것은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세리아 언니에게 '언니'라고 불리는 상황이 오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텐데. "말이 안 되잖아." 스스로 바보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헛된 망상을 머릿속에서 지운다. 판타지 소설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침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패턴의 시나리오를 생각하고 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을 상상해보는 나도 정말 어리석다. ...... "잠들었었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상반신을 일으킨다. 현재 시간. 오후 6시. 자정무렵에 들어오는 엄마와 아빠를 제외하고는 역시나 단 둘이 집을 지키고 있는 우리들. 달콤한 음식의 냄새가 2층까지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선 지금쯤 세리아 언니의 요리가 다 완성되었으리라 생각해본다. 그리고 역시나 내 예상이 제대로 적중했다는 사실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세리아 언니의 말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리아. 일어났니?" "... 응." "그럼 옷 갈아입고 내려오렴. 저녁식사 준비 다 되었으니까."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봐." 그러고보니 학교에서 돌아오고 난 이후로 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도 참.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기억력이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안될텐데. 옷을 벗고 근처에 있는 평상복으로 갈아입는다. 요 근래 들어서 가슴도 약간 나왔기 때문에 얼마 전부터 브래지어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성장이 많이 느린 편인가 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작은 가슴이라는 것이 전혀 해로운 것만은 아니라고 배웠기 때문에 가슴 크기에 대해선 그리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빈유도 어느정도 수요가 있다고 했던가.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본 커뮤니티 사이트를 보아하니 오히려 빈유에 작고 귀여운 어린 여자 아이를 보고 하악대는 남성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비 범죄자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래도 작은 가슴이 천대받는 세상은 아니라는 사실 하나라도 깨달은 것이 어디인가. 옷을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가는 나. 이미 테이블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한 상 가득히 차려진 지 오래다. "어서오렴. 자, 식기 전에 빨리 먹어." "재촉하지 마. 안 그래도 먹을테니까." 언니의 말에 차갑게 대꾸하며 자리에 앉는다. 앞치마를 두른 세리아 언니가 나를 바라보며 행복하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언니." "왜 그러니?" "너무 그렇게 쳐다보면 오히려 소화가 안 되는데." "아, 미안해. 왠지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서..." 무슨 신혼부부도 아니고. 이제 막 결혼을 한 새색시와 같은 말을 하는 세리아 언니였다. 그렇다면 내가 남편이 되는 건가? ... 생각만 해도 끔찍한걸. ============================ 작품 후기 ============================ 오랜만에 lol을 했습니다. ... 역시 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더군요. 멘탈을 갉아먹는 게임으로 따지자면 단연 롤이 원탑일 겁니다. 남탓 of the 남탓! 240화 신혼부부든 뭐든 일단 공복 상태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든다. 살기 위해서라면 그래도 먹어야 하니까. 오늘의 저녁은 된장찌개. 그리고 기타 여러가지 반찬들이 나열되어 있다. 은발을 가진 외국인처럼 생긴 여성들이 된장찌개가 주식이라고 말을 한다면 대부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정말로 우리들이 좋아하는 주식이 바로 한식이다. 애초에 외국에서 그리 오랜 기간을 살았던 것도 아니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한국에 살았기 때문에 거의 한국사람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한 마디로 이름만 외국인일 뿐, 속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된다. 된장찌개를 숟가락으로 떠서 맛을 본다. 그러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세리아 언니의 질문이 연이어 시작되는 것은 이제 굳이 말로 언급하고 싶지 않다. "맛있니?" "... 맛있어." "다행이구나. 이번에 엄마한테 새로 배웠는데, 맛 없으면 어떻게 할까 고민했었어." 정말로 행복하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 세리아 언니. 자신에게 모질게 구는 여동생에게 이토록 한없이 자상하게 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세리아 언니는 인간이 아니라 사실 천사인걸까? 아니. 엄연히 나와는 똑같은 인간으로, 한 날에 같이 태어났으니까 분명 인간일 것이다. 그리고 천사는 등 뒤에 날개가 달려있어야 정상일텐데, 아무것도 안 달려있으니까 세리아라는 여자는 인간이다. 정말 단순한 이론이지? 어쨌든 다시 요리 이야기로 넘어가자면. 빈 말은 아니고 정말로 세리아 언니의 음식은 맛있다. 도저히 초등학생이 만들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맛있다. 이제 잘하면 정말로 엄마의 요리까지 넘볼 수준이 되었다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다른 반찬들은 어떠니?" 나에게 찌개 말고 다른 것들도 맛을 보기를 권유하는 세리아 언니의 말. 그런 식으로 부탁을 한다면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나는 얌전히 다른 반찬에 손을 뻗어본다. 우선 계란말이. 먹기 좋게 젓가락으로 계란말이를 2등분 해서 맛을 보는 순간. 입 안에 가득히 퍼지는 은은한 향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이것도 맛있어." "정말? 다행이다. 나름 자신작이었거든." 해맑게 웃어 보이는 세리아 언니. 그럴수록 솔직히 나는 불편한 심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언니는 정말 못 하는게 없다. 이제는 요리까지 거의 프로의 수준으로 넘보다니. 아무리 내가 노력한다고 해도, 분명 오늘과 같이 언니가 만든 맛있어 보이는 계란말이가 탄생될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보나마나 새카맣게 탄 미운 계란말이 새끼가 나오겠지. 이렇게 언니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나는 점점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만 더 커져간다. 내가 재능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언니가 너무 재능이 많은 것인지 모르겠다. 사람은 언제나 비교당하는 것이 가장 기분 나쁜 일이라고 하는데, 나도 그 심정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완벽하면 완벽해질수록 나와 세리아 언니의 격차는 벌어질 뿐이고, 그리고 주변에서 우리들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선도 달라진다. 결국 세리아 언니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나는 괴로워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뜻이 된다. ...... 고작 밥 먹는 일 하나가지고 이런 심적인 갈등을 해봤자 나에게 손해만 될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쯤에서 관둬야지. 밥그릇을 다 비운 뒤에 자리에서 일어난 나. 세리아 언니는 먹는 입에 굉장히 작기 때문에 식사 시간도 오래 걸리는 편이었다. "다 먹었니?" "응.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놔둬." "같이 하자. 나도 조금 있으면 밥 다 먹으니까..." "괜찮아. 어차피 요리 준비는 언니가 했잖아. 그러니까 설거지는 내가 할래." "... 알았어. 고마워, 아리아." 세삼스레 고맙다는 말을 하는 세리아 언니. 사실 누가 요리를 하면, 나머지 한 명은 거의 필수적으로 설거지를 하게 되어 있다. 결국 지금 내가 설거지를 담당하는 일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세삼스런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언니는 이런 일 하나하나를 가지고 나에게 일일이 고마움을 표시한다. 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런 언니의 반응을 보아오고 지낸 세월이 1,2년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무심코 넘긴다.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낀 채 설거지에 임하는 나. 그 동안 세리아 언니는 청소기를 들고 때늦은 청소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잠시 청소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멈춘 사이에, 틀어놓은 티비에서 여성 아나운서가 뉴스 속보로 전해주는 말이 내 귀까지 들리기 시작한다. "다음 소식입니다. 어제 저녁에 발생한 미성년자 살인 사건에 대해서 경찰은 수사의 범위를 확대하..." "어머머. 또 저런 일이..." 청소하다가 도중에 뉴스에 시선을 빼앗긴 세리아 언니가 자기도 모르게 약간의 탄식이 섞인 말을 내뱉기 시작한다. 얼마전에 뉴스에서 계속 특보로 알려주고 있는 살인마. 특징이 있다면 초등학생인 어린 아이들만 전문적으로 살인을 일삼는 악독한 녀석이라고 한다. 그냥 살인만 해도 악독한 녀석이라는 소리를 들을텐데, 이 범인 녀석은 어린 여자 아이를 잡아두고 그 여자 아이를 강간한 뒤에 살인을 저지르는 극악무도한 일을 벌이고 다니는 녀석이다. 덕분에 우리 학교에서도 공지사항으로 가급적 다른 곳에 들리지 말고 일찍 귀가하라는 특별 조치가 내려졌던 적이 있다. "빨리 안 잡히려나... 저 범인." 세리아 언니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말을 한다. 어찌보면 저 범인의 희생양에 우리들도 포함이 되는 일. 나이도 어리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여자아이라는 조건은 범행 대상이 되기에 딱 좋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물론 우리 자매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 아이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설거지를 마친 내가 거실에서 티비에 정신이 팔려 있는 세리아 언니를 바라보며 따끔한 충고를 던진다. "언니. 언제까지 청소기를 들고 멍하니 서 있을거야. 저녁에 진공청소기를 돌리면 이웃분들께 폐가 되잖아." "그, 그랬지. 미안해. 나도 참..." 허둥대며 재빨리 다시 청소를 재게하는 언니. 굉장히 신경 쓰일만한 뉴스라는 사실은 나도 인정하지만, 그래도 그 범인이 우리들을 습격할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세상에 널리고 널린게 초등학생 여자 아이들인데, 그 많은 아이들 중에 우리를 노리고 올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역도 다르고. 전국구로 수배까지 되었으니까 조만간 잡힐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 뿐이다. 식사와 함께 청소도 마친 우리들. 오늘은 엄마와 아빠가 저녁 11시에 들어오는 기분 좋은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잘 있었니? 우리 공주님들." "아빠~!!" 세리아 언니가 아빠의 팔에 매달리며 해맑게 웃어 보인다. 언니의 작은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쓰다듬어주는 아빠. 그 옆에서 엄마가 나에게 미소를 보여주시며 말한다. "언니랑 잘 지내고 있었니? 아리아." "... 응." 나는 세리아 언니처럼 애교가 많은 타입도 아니고 무뚝뚝한 여자아이기 때문에 이 반응이 최선이었다. 엄마도 그런 나의 태도를 알고 있는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면서 나를 부드럽게 안아주실 뿐이다. 부엌으로 들어선 아빠가 된장찌개를 맛보며 기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이야~ 세리아의 요리실력이 나날이 상승하고 있구나. 조만간 엄마도 따라 잡겠는걸?" "여보. 아직 딸래미에게 질 정도로 요리 실력이 줄어들진 않았다구요." 약간 토라진 표정으로 아빠에게 따지기 시작하는 엄마. 두 아이의 부모님이지만, 아직도 신혼부부와 같은 생활을 보내며 젊게 결혼생활을 보내는 우리 부모님 덕분에 집안은 연일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다만 그 와중에 솔직한 웃음을 보여줄 수 없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한다면 나 혼자 정도가 될 것이다. 엄마와 아빠에게 인사를 한 뒤에 잠을 자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 언니와 나. 아마도 엄마와 아빠는 술잔을 기울이며 뭔가 할 이야기가 있다는 듯이 아직까지도 거실에 남아있었다. 어른이 부럽게 느껴지는 점이 바로 저것. 늦게 자도 된다는 점이다. 나도 어른이 된다면 새벽 3시까지 잠을 안 자고 버티고 싶은데. 그런 일이 가능할까? 10시만 되도 졸린데 말이다.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자정이 되기 전에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해본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래를 먹는다고 하지 않는가. 내가 새는 아니지만, 그만큼 노력하면 남들에 비해 빠르게 앞서 나갈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일찍 잠에 드는 편이다. 목표는 언제나 세리아 언니를 뛰어넘는 일. 크리스마스 선물따윈 필요없고, 오로지 나의 목표는 그거 단 하나 뿐이다. ... 같은 혈육이기도 한 언니를 라이벌로 삼다니. 이러다가 정신질환이라도 걸리겠다. 언니 콤플렉스 같은 그런 질환같은 거 없나? 컴퓨터를 틀어서 검색을 하고 싶어도, 밤이 너무 늦은 탓에 못하겠다. 한숨을 쉬면서 잠옷으로 갈아입고나서. 침대위에 있는 이불속으로 들어간 채 오늘도 달콤한 꿈나라로 떠나게 된다. ... 후우... 나름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고 싶었는데, 아침부터 기분이 최악이다. 어제 저녁에 보았던 뉴스 덕분일까. 그 망할놈의 살인마가 우리 집에 들이닥치는 말도 안되는 꿈을 꿔버렸기 때문이다. 재수없는 꿈을 꾸다니. 이런 것을 나이트 메어라고 하는 것일까. 두 번 다시 꾸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아침해가 밝아옴과 동시에 부엌에서는 세리아 언니 대신 엄마가 앞치마를 두르고 열심히 요리에 임하고 있는 중이다. 아침만큼은 엄마가 직접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우리들과 아빠에게 상항 자신이 직접 만든 요리를 대접하는 엄마. 이런 엄마의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모습을 아마도 세리아 언니도 본따서 닮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아빠를 닮은건가? 음... 모르겠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머, 일어났구나. 아리아." 내 눈에 붙어있는 눈꼽을 직접 손으로 떼주며 상냥하게 아침 인사를 해주는 엄마. 이미 세리아 언니와 아빠는 일어난 지 오래인 것처럼 테이블 위에서 엄마의 요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름 일찍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기상시간으로도 세리아 언니를 이기긴 힘든가보다. 정말 기운이 빠지는 순간이다. 아침부터 기분이 상했다고 식사를 거를 순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얌전히 맞은 편에 자리를 잡은 후. 엄마가 준비한 식사를 맛있게 먹은 뒤에 학교 갈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기 시작한다.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해서 갔다오렴." 엄마의 배웅을 받으며 학교로 향하는 우리들. 언니와 같이 나란히 향하는 등교길은 이제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렇게나 싫어했지만,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어차피 하교도 같이 하기 때문에 이제와서 굳이 세리아 언니와 같이 등, 하교를 하기 싫다고 투정을 부려도 뜬금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특별한 불만같은 것을 외부로 표출하진 않는다. 그래봤자 내 이미지만 깎이게 되는 셈이니까. "아리아." 언니가 또 다시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어제는 잘 잤었니?" "... 그걸 왜 묻는데?" "아니... 악몽을 꾸는 거 같아서." "언니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데?" "자꾸 네가 신음소리를 내길래... 걱정되어서..." 언니 방까지 다 들렸던 것일까. 그것보다도 내가 그 정도로 민감하게 잠자리를 보냈다는 사실이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 작품 후기 ============================ 작품 예약으로 올라간 글입니다. ... 그럼 당연히 저는 지금 이 시간쯤에는 분명 렛츠 드링킹을 하고 있겠지요~!!!!!!!! 241화 재수없는 악몽을 꾸고 난 이후에 오게 된 학교. 내일부터 방학이라 그런지 오늘은 간단하게 방학식만을 마치고 교내의 모든 일정이 끝날 예졍이다. 뭐든지 빠른 것은 좋다. 특히나 한국에서는 어떤 일에서라도 빨라야 S급이라는 소리를 듣기 때문이다. 속도의 나라. 그 덕분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성장세가 이 정도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강당에 모인 전교생들은 방학식이 진행되는 와중에 뻘쭘하게 제자리에 서서 다음 식순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럼 지금부터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젊은 남자 선생님의 말과 함께 등장하는 대머리 아저씨... 가 아니라. 교장 선생님. 그래도 우리 학교 내에서는 최고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분이니까 함부로 대머리라고 놀리면 안되겠지. 예의에 어긋나니까 말이다. 한숨을 쉬면서 느릿느릿하게 교단으로 올라오는 교장 선생님의 모습을 바라본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라 그런지 올라오는 속도가 매우 느리다. 빠르기를 유난히 강조하는 대한민국의 컨셉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여진다. 그래도 교장 선생님에게 우사인 볼트 수준의 빠르기를 보여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젊은이인 우리들이 이해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일부터 겨울방학이군요..." 라는 진부한 대사로 시작된 교장 선생님의 말씀. 방학이라는 기대감 반, 설레임 반으로 두근두근 거리는 우리들은 교장 선생님의 말이 빨리 끝나고 어서 겨울 방학의 시대가 개막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대략 10분 정도 이야기가 이어졌을까.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나쁜 내용이 아니라 좋은 내용들 만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는 사실 정도는 나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야기가 너무 오래 지속되면 청중들이 질리기 마련이다. 이미 하품까지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일 정도로 교장 선생님의 말은 너무 늘어지고 있었다. 5분이 더 연장된 시점에서 교장 선생님의 마무리 지으려 하는 멘트가 귓가에 들려온다. "그럼 이 쯤에서 마치도..." 속으로 '아싸!'라고 환호성을 지르는 녀석들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물론 나도 그 중에 한명이긴 하지만, 너무 그 기분이 표정에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신경을 쓴다. 그러나 이런 나와는 다르게 얼굴에 '기쁘다!' 라는 감정을 한없이 표출하고 있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작게 한숨을 내쉬어본다. 어린애같이 왜 다들 그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들의 이런 기대감 속에서 한 가지 변수가 터지기 시작한다. "그러고보니 이런 말을 안했군요." 교장 선생님이 미리 이런 각본을 짜온 것이라면 정말 대단한 시나리오 작가라고 칭찬하고 싶을 정도의 말이 이어지는 게 아닌가. 아마 식스센스 이후로 최고의 반전이지 않을까 라는 높은 평점을 내리고 싶을 정도라고 생각된다. 또 한번 이어지게 된 지겨운 연설. 희망에 가득 차있던 아이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며 '이건 꿈일거야!'라는 얼굴을 하기 시작한다. 가뜩이나 새벽에 악뭉을 꾸고 와서 기분이 그런데, 또 한번의 악몽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리고 악몽을 자주 꾸면 키도 잘 안 큰다는 말도 본 기억이 나는데... 키는 상관 없으니까 가슴 크기 성장판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조금 더 크게 자랐으면 좋겠는데. 가슴 이야기는 이 쯤 해두고, 교장 선생님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여보도록 하자. "여러분도 뉴스를 봐서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최근 들어서 어린 아이를 전문으로 노리는 흉악범이 수배되었어요. 참 무서운 세상이죠." 아. 어제 세리아 언니와 내가 봤던 뉴스의 내용과 동일하다. 그 흉악범 덕분에 하루종일 악몽에 시달린 것을 생각한다면 내가 직접 잡아서 감옥에 넣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충동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경찰도 아니니까 무리겠지만. 호흡을 고른 교장선생님이 우리들을 바라보며 다시금 마이크를 잡은 채 말한다. "방학이라고 너무 놀러다니지 말고, 늦은 시간까지 돌아다니는 일은 없도록 하기 바랍니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착하니까 다들 알고 있으리라고 보지만... 알겠죠?" "네~!" 기운차게 대답하는 아이들. 교장 선생님의 말에 눈물을 쏟을 정도로 감동을 받아서 기운차게 대답하는 것이 아니다. 제발 연설은 이 쯤 해두고 빨리 끝내달라는 소리 없는 아우성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 여기서 마치도록 하죠." 교장 선생님의 말을 끝으로 사회를 맡은 남자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교가를 부르게 한다. 설렁설렁 교가 제창을 마치고 각자 반으로 돌아가게 된 우리들. 나와 세리아 언니는 애초에 반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같이 교실로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자, 가정 통신문 다 받았죠?" 여선생님이 우리들에게 묻자, 이상 없다는 듯이 아이들이 입을 모아 대답한다. 그러자 선생님이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말한다. "그럼 겨울방학, 알차게 보내도록 하고. 비상 연락망을 통해서 무슨 일이 있으면 선생님에게 꼭 전화 해주세요. 알겠죠?" "네!" "이만 마치도록 할게요. 다들, 방학 재미있게 보내세요." 라는 말을 끝으로 정말로 방학이 시작되었다. 오늘부터 카운트 다운에 돌입.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이 있어서 방학때 해봐야지 라는 마음가짐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 있어서는 방학이라는 이름의 값어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상관이 없다. 본래 방학은 쉬는 기간 아닌가. 따로 할 일이 없이 그냥 심신의 피로를 풀면 그만이다. 나쁘게 말하자면 방콕 생활이라고 할까. 가방을 들고 교실 바깥으로 나오는 나.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나에게 '개학때 봐~'라는 말을 하면서 각자 흩어지기 시작한다. 세상이 워낙 무섭다보니 오늘만큼은 다들 일찍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나 역시도 마찬가지. 교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세리아 언니가 환한 미소와 함께 나를 반기기 시작한다. "같이 가자. 아리아." "... 이제와서 세삼스레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언제나 마찬가지로 언니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나. 교문을 벗어난 이후에 우리집까지 곧장 직진으로 걸음을 옮긴다. 하늘을 멀뚱멀뚱 바라보던 세리아 언니가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확률이 높다고 하더라..." 은근히 그런걸 잘 따지는 언니의 말이었다. 사실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는 것이 뭐가 그리 기념비적인 일인지 잘 모르겠다. 그냥 12월 25일에 눈이 내리는 단순한 현상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런데 연인이니 아니면 다정한 남녀사이에선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어린 난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낭만적이라는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버릇이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는 나였다. 그래봤자 눈이 내리면 마냥 기뻐할 수도 없는 노릇일텐데. 길가에 눈이 쌓이면 바깥에 돌아다니기도 힘들지, 우산을 들고 다니면 그 위에 눈이 쌓여서 무겁기만 하지. 옷도 젖고. 특히나 군인 아저씨들은 내리는 눈을 보고 '마법의 똥가루'라고 부를 정도로 눈에 대한 증오심이 상당하다고 한다. "어차피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든 안 오든 나랑 상관없어." "어째서?" "어차피 집에 있을거니까." 솔직하게 언니에게 말을 한다. 파티에 참석한다는 약속도 하지 않았고, 부모님도 늦게 들어오실 것이 뻔하니까 크리스마스에는 얌전하게 집에서 보내기만 하면 된다. 괜히 춥게 바깥에 나가서 뭔가 기억에 남는 일을 억지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모습 자체도 귀찮고. 옆에서 나란히 걷던 세리아 언니가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그럼 집에서 파티할까?" "... 세리아 언니. 약속 있다며." "취소했어." "뭐..." "이제와서 생각해보니까... 집에서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해서." 어색하게 웃기 시작하는 세리아 언니.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세리아 언니가 스스로 파티 참석을 거절했을 이유는 없다. 아니... 한 가지 있을수도 있겠다. 바로 내가 집에서 혼자 쓸쓸하게 크리스마스를 보낼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분명 언니는 일부러 파티 참석을 포기하고 나와 같이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방식을 선택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세리아 언니와 같이 생활해온 내 입장에선 너무나도 알기 쉬운 언니의 습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언니의 행동은 오히려 내게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단 사실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날 배려하는 것이라면 그만 두는 게 좋을거야." "아니야. 정말로 나도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편하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어. 날씨도 춥고. 그리고 교장 선생님도 말씀해주셨잖아? 가급적이면 늦은 저녁에 집 바깥으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 분명 거짓말이다. 아니, 순도 100%의 거짓말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다른 아이들 같은 경우에는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교장 선생님의 말이지만, 세리아 언니 같은 경우에는 선생님의 말 하나하나를 절대로 소흘하게 여기지 않는 모범생적인 습관을 길들이고 있기 때문에 방금의 말에는 어느정도의 진실이 함유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래의 목적, 그러니까 언니가 크리스마스 때 친구들과의 파티를 포기하면서까지 집에 머물기로 한 주 목적은 분명 다르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내가 걱정되어서 일부러 자신도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야지 라는 쓸모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언니는 이미 약속까지 취소해버렸고, 그렇다고 집에 있는 언니를 바깥으로 내쫓을 권한은 내겐 없기 때문에 약간 짜증섞인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말한다. "... 알아서 해. 언니 마음대로 한다는데 내가 무슨 상관을 하겠어." "고마워. 아리아." "... 흥." 어지간히 귀찮게 하는 언니다. 정말로. ============================ 작품 후기 ============================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붓고, 머리가 아프고, 몸이 으슬으슬 춥습니다. 새벽에 술 마시러 돌아다녔더니만, 결과가 안 좋군요. 여러분도 환절기에 건강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ㅜ_ㅜ 242화 방학식이 끝나고 하루하루 나날이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벌써 크리스마스 이브의 아침이 밝아왔다. 어제 늦은 저녁에 간단하게 가족들끼리 파티를 한 우리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부모님께서 하시는 사업이 바쁘게 될 것 같아 집에 못 올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탓에 이른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게 된 것이다. 사실 엄마와 아빠랑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없다는 사실은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유치원에 다니는 애들도 아니고. 이제 나도 초등학생이니까 부모님의 사정 정도는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나도 역시 성장한 것일까. 조금은 뿌듯해진다. 현재시간 오전 8시. 이미 아침 뉴스는 크리스마스 특집이라는 문구가 커다랗게 새겨진 채 전 세계의 크리스마스 풍경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크리스마스 기분이라... 이런 것도 나쁘진 않을지도 모르겠네." 쇼파에 앉아있는 내 뒤에서 세리아 언니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말을 걸어온다. 그래봤자 내게는 별로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크리스마스가 뭐가 그리 특별한 날이라고. 내가 애인이 있다거나, 아니면 성인이 되었을 때 자유도 높은 파티를 주최하게 된다면 조금은 오늘과 내일이라는 녀석이 특별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당당하게 NO라고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크리스마스임에도 불구하고 집 안에서 세리아 언니와 단 둘이 집이나 보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아웃이다. 이건 내가 계획했던 크리스마스 계획이 아니었다고. 그러나 세리아 언니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을 읊을 뿐이다. "아리아. 저기, 케이크라도 사올까?" "... 케이크라면 어제 먹다 남은 것이 있잖아?" 참고로 먹다 남은 케이크는 어제 부모님이 사오신 초코 케이크를 가리키는 것이다. 엄마가 상당히 단 음식을 좋아하기 때문에 초코 케이크의 양 자체도 엄청나게 많았다. 그 엄마에 그 딸들인지 모르겠지만, 나와 세리아 언니도 단 음식을 매우 좋아한다. 특히나 초콜렛과 같은 군것질류 음식이 눈 앞에 있으면 우선 그것부터 먹고 볼 정도로 매우 좋아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것도 유전인가... 아무튼 갑자기 케이크를 사서 오겠다는 언니를 말린 나는 그냥 얌전히 티비나 보자는 식으로 말을 한다. "날씨도 추우니까 쇼파에 앉아있어. 그리고 바깥에 가급적이면 돌아다니지 않는 편이 좋다고 말한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리아 언니 본인이잖아." "그, 그랬었니?" "그랬었어. 그러니까 그냥 앉아 있어. 티비나 보다가 시간을 보내면 되니까." "그래도..." 내가 생각해도 정말 재미없는 말이다. 티비나 보다가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다니. 할 일 없는 백수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귀차니즘의 열렬한 신봉자도 아닌데, 왜 이런 생각이 절로 드는지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오늘 하루 한정으로 움직이는 일이 매우 귀찮다. 추워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마냥 귀찮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의 위력인가. 가만히 앉아 있기로 따지면 세리아 언니에게 있어서 그런 일은 좀이 쑤시는 일과와도 마찬가지기 때문에 세리아 언니에게는 방금의 내 말이 통하지 않는다. "아리아. 뭔가 해볼래? 재미있을거야." "... 어떤걸 하자는 말인데." "그, 그러니까..." 고민하기 시작하는 세리아 언니. 그러더니 이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손뼉을 치며 말한다. "케이크를 만들자, 케이크." "... 케이크란 말이지..." 사실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나였지만, 그렇다고 언니와 크리스마스 이브 날에 단 둘이 집에 남아있는 상황에서 무엇을 할 지도 생각이 들지 않아서 그냥 언니가 하고자 제안한 케이크 만들기 의뢰를 수락하고 만다. "상관 없겠지. 뭐." "그럼 재료 사갈까?" "... 재료?" "그래. 케이크 재료." "바깥으로 나가기 싫어서 케이크를 만들자고 한 거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재료 정도는 같이 사러 갈 수 있잖니. 그렇지?" "......" 그렇다면 도대체 왜 난 케이크 만들기를 같이 하자고 수락했던 것일까. 속으로 내 자신에게 '바보, 멍청이.'라는 자책감 어린 욕설을 날려주고 난 이후에 어쩔 수 없이 옷을 챙겨 입는다. 언니와 같이 외출을 나가는 일은 사실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한번 하겠다고 내 입으로 말하고 나서 나중에 딴소리를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내가 언니에게 한번 지고 넘어가기로 한다. 약속이라는 것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를 차지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나는 아무리 사소한 약속이라도 일단 지키고 나서 불만을 토로한다든지 아니면 좀 더 마땅한 의견이나 사전 계획 등을 제시한다. 약속을 한번 했으면 우선 그 약속을 지키고 난 이후에 할 말이 있으면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신념 덕분에 가끔 다른 사람들에게 '남자같은 여자'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한국에 이런 말이 있어서 내가 방금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남자는 한번 한 약속은 지킨다.'라고 말이다. 만약에 정말로 그런 말을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실천했다면, 우리나라 사기 사건에 많이 줄지 않았을까 라는 쓸모없는 생각을 하면서 코트를 입는다. 현관으로 나오자,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세리아 언니가 나를 보면서 활짝 웃는다. "자, 빨리 가자." "어차피 오전이니까 그리 서두를 일도 없잖아." "저녁이 되기 전에 케이크를 만들고 싶으니까 그래. 빨리빨리!" 핑크색의 코트를 입은 세리아 언니가 내 팔짱을 끼기 시작한다. 억지로 주머니에 넣은 손을 빼려고 했지만, 세리아 언니가 내 오른쪽 팔에 매달리며 말한다. "오늘만큼은 절대로 양보 안 할거야." "......" 언니를 끔찍히도 싫어하는 동생을 세리아 언니는 왜 이렇게 좋아하는 것일까. 아니, 정말로 좋아한다는 감정일까? 동정심일지도 모른다. 자신과는 달리 남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여동생에게 향하는 동정심. 만약에 정말로 그렇다면 나는 언니를 두 번 다시 언니라고 부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세리아라는 인물을 증오할 것이다. ... 하지만 너무나도 해맑게 웃는 세리아 언니의 표정을 보니까 그렇지는 않을 거 같기도 하고... "나도 몰라." 라는 소심한 저항을 하면서 집 바깥으로 나서는 우리들이었다. 다니는 마트마다 장내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송이 울려퍼진다. 익숙한 징글벨도 들려오고,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인지 산타 코스프레를 하고서 전단지와 선물을 들고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건내주기도 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캐롤송과 날지 못하는 가짜 산타클로스, 이 2가지와 버금갈 정도로 많이 보이는 장식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크리스마스 트리. "어머..." 시내 한 가운데에 장식되어 있는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보인다. 세리아 언니는 위엄 넘치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면서 저절로 탄식을 내뱉기 시작한다. "엄~청 크다. 그치?" "그러게..." 확실히 크다. 아파트 7층 이상의 높이는 될 거 같은데. 한 층을 2.5미터로 잡으면 대략... 17.5미터가 되는 건가. 정확한 수치는 잘 모르겠지만, 한참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높이가 상당하다. 저 트리의 꼭대기에 은색 별까지도 제대로 장식을 한 것으로 보아서는, 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계획한 회사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만든 모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재료값은 뭐... 추정 불가능하지만, 아무튼 많이 화려해보이는 트리였다. "밤에 봤으면 더 좋았을텐데." 세리아 언니가 살짝 아쉽다는 목소리로 말한다. 확실히 밤에 봤었다면 더 멋있을만한 트리다. 아직 낮이라서 그런지 작동은 하지 않지만, 전구도 색깔별로 다양하다. 다시 한 번 더 이 트리에 투자된 재료들이 얼마나 비싼 것들이지 알 수가... 없었다. 전구가 그리 비싼것도 아니고. 아무튼 거대한 트리도 봤고. 원래의 목표 장소이기도 한 마트에 도착한 우리들. 간단한 재료들을 구입한 이후에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점심이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점심 차려줄게." 세리아 언니가 본인이 식사 준비를 하겠다고 자청한다. "오늘은 내가 당번 아니었어?" "그래도 아침부터 나와 어울려줬으니까 그에 대한 보답이야." "......" 이런 점에선 역시나 자매라는 생각이 든다. 타인에게 빚을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고 해야 할까. 빚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좀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대략 이런 것이다. 타인이 나의 부탁이라든지 아니면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든지 해서 남아있는 약간의 고마움을 표출하고 싶다는 그런 기분 말이다. 표현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껴지지만, 대략 그런 느낌이라고 이해하면 좋을듯 싶다. 티비를 튼 나는 또 한번 뉴스 프로그램을 본다. 아직까지도 연이어 속보로 보도되고 있는 정체불명의 살인마 소식이 가득 찬 상황.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조금 더 희망찬 뉴스 같은 것을 전해주면 안될까 라는 생각으로 잠시나마 방송국에 텔레파시로 항의를 해본다. 전송 여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특별한 날 마저도 이런 흉악범의 소식을 알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른 프로그램으로 채널을 돌리자, 연예인들이 나와서 쇼 프로그램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크리스마스 이브 특집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오른쪽 상단 문구로 박아넣고 난 이후에 갖가지 미션을 하는 오락 프로그램이었다. 사람들을 웃기게 하기 위한 직업도 정말 어렵구나 라는 생각이 들 무렵, 언니의 목소리가 주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케이크는 점심 먹고 난 이후에 만들까?" "그래야지. 원래부터 그럴 생각으로 산 거잖아." "그럼 점심먹고 난 이후에 도구들을 찾아봐야지."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면서 흥에 겨운 목소리로 요리를 시작하는 세리아 언니. 작은 키 덕분에 밑에 우리들이 요리를 할 때 자주 사용하는 발판을 놓고 식사를 준비하는 중이다. 우리가 딱히 키가 작은 자매라는 뜻은 아니고. 본래 초등학생이 키가 커봤자 얼마나 크겠는가. 특히나 남자애들도 아닌 여자애들의 경우에는 키가 매우 작다. 그리고 더불어서 가슴도. 세간에 이런 어린 아이들을 좋아하는 마니아 층을 '로리콘'이라고 부르던데... 그럼 뉴스에 나왔던 그 살인마도 일종의 로리콘 범주에 드는 것일까? 어찌되었던 어린 여자 아이를 상대로 성폭력을 일삼는 불한당 같은 녀석들은 말살을 시켜버려야 한다. 전자발찌 이런 게 아니라 전자우비 정도는 걸쳐야 할텐데. "식사 다 됐어." "알았어. 잠깐만." 티비를 끄고 난 이후에 주방으로 자리를 옮기는 나. 아침부터 괜히 언니의 화술에 넘어가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배가 고프기 때문에 일단 밥을 먹고 난 이후에 생각하자는 식으로 자리를 뜨게 된다. ============================ 작품 후기 ============================ 몸상태가 매우 좋지 않은 관계로 글만 후딱 올리고 자러 가겠습니다. 건강이 최고입니다. ㅜ_ㅜ 243화 식사를 간단하게 마친 뒤에 케이크 도구를 열심히 찾아낸 세리아 언니. 사실 우리들이 스스로 케이크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선 '요리의 신동'이라고 오해할 소지가 다분하다는 점은 나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다. 그래서 반드시 이렇게 못을 박아두고 싶다. 우리들이 요리를 잘해서 케이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세리아 언니도 나에게 사전에 미리 말을 했듯이, 크리스마스 때 정말 할 일이 없어서 케이크를 만들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 정도면 되겠지?" 만족했다는 미소로 나에게 확답을 듣기 위해 묻는다. 이 정도가 아니라 정말 대단한 준비물들을 펼쳐놓고 있는 언니였다. 생크림 다발은 물론 계란, 그리고 기타 수도 없는 요리 도구들과 재료들을 어디서 찾아낸 것인지 궁금할 정도의 기분이 드는 언니의 준비성. 원래부터 준비성이 철저하기로 알려진 인물이긴 하지만, 도가 너무 지나치다고 보여진다. "언니." "왜 그러니? 아리아." "결혼식 때 사용되는 케이크라도 만들 생각이야?" "음... 그러면 더 분위기 있고 좋겠지?" "좋은 정도가 아니라. 고작 두명이서 먹는데 이렇게 많은 준비를 할 필요는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야." 언니에게 약간의 쓴 소리를 한다. 주눅든 모습을 보이던 언니였지만, 이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약간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말한다. "마치 아리아, 네가 언니 같다는 느낌이 들어." "그럼 내 언니답게 조금 언행에 신경을 쓰라고." "미안." 나도 마음같으면 세리아 언니가 아니라 세리아 여동생이라고 부르고 싶다. 사실 누가 언니고 누가 동생이고 하는 그런 문제가 남들이 보기엔 사소한 문제로 보일 수 있지만, 정작 당사자에게 있어선 엄청나게 민감한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나 우리나라에서는 '장남, 장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방금 내가 언급한 누가 언니고 누가 여동생일까요 문제는 굉장히 심도 있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 뭐, 세리아 언니 본인의 입장에선 그다지 '언니'라는 자리에 연연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내가 욕심이 많은 것일 뿐일까? 그래도 기왕이면 여동생보다는 언니 자리가 좋겠다. 그만큼 장녀 대우도 받을 수 있을테니까. 케이크를 한창 만들고 있던 와중에. 갑자기 우리집 초인종이 울리기 시작한다. "누구지?" 세리아 언니가 앞치마를 두른 채 인터폰을 누르며 바깥에서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의 신분을 확인하기 시작한다. "누구세요?" "세리아니? 옆집 아줌마야." "아... 잠시만요." 수화기를 내려놓은 언니가 나를 바라보며 '잠시 현관에 갔다올게.'라고 말한다. 굳이 자신의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나에게 보고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문을 열자, 언니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언니에게 작은 선물 상자를 내민다. "어머, 이건..." "아줌마가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란다. 마음에 들지 모르겠구나." "크리스마스 선물... 인가요?" "어제 너희 부모님한테 이야기를 들었어. 크리스마스때 부모님이 집에 잘 못들어 오신다고 말이야." "네." "그래서 우리 귀여운 세리아하고 아리아가 심심해할까봐 이 아주머니가 작은 선물을 준비했지. 나중에 집 안에 들어가서 풀어보렴. 선물이라는 것은 본래 몰래 혼자서 풀어봐야 더 기쁜 법 아니겠니?"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뭐, 사실 기쁘다든지 하는 유무를 놓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준 당사자 앞에서 선물 포장지를 갈기갈기 뜯으면서 선물의 내용물을 공개하는 행동은 약간 매너 위반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까지 못된 짓은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기분이 좀 그렇다고 할까. 여하튼 대충 말하자면 그런 셈이다.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메리 크리스마스." 아주머니의 인상 좋은 미소와 함께 현관문을 닫고 다시 주방으로 복귀한 세리아 언니. 선물은 잠시 거실에 위치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다시 케이크 제작에 들어간 세리아 언니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말한다. "과연 어떤 선물일까?" "글쎄. 뜯어보기 전까지는 잘 모르겠는걸." 일단 규모로 봐서는... 향수같은 것일까? 하지만 고작 초등학생인 우리들에게 주기에는 화장품같은 약간의 사치성 더하기 고가품 취급을 받고 있는 물건을 주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초등학생이다 보니까 그다지 과한 화장도 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사실 언니나 나나 가지고 있는 화장품 세트는 극히 기초적인 것 밖에 없다. 여자아이는 꾸미고 다녀야 예쁘다고 하지만, 글쎄... 아직 우리들에게는 조금 이른 말이 아닐까 라는 말이 더 체감상으로 와닿는게 현실이다. 향수... 도 조금 무리가 있다고 보고. 그렇다면 쿠키? 아마도 그게 가장 무난하다고 보여지는데. 저 선물 상자를 들어보면 무게감으로 인해서 먹을 것인지 아니면 화장품과 같은 물품인지 쉽게 구별이 가능하겠지만, 굳이 주방을 벗어나서 이런 시덥지 않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무분별한 발걸음을 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냥 하던 일이나 마저 하자. "아리아. 나중에 같이 뜯어보자." "알았어." 세리아 언니의 기분이 또 다시 업(UP) 되었다. 워낙 활기찬 성격을 가지고 있는 언니다 보니까 금세 이런 작은 에피소드로도 분위기를 타게 된다. 계속해서 요리를 하는 와중에. 또 한번의 초인종이 울리기 시작한다. "오늘은 방문객이 많네." "내가 나가볼게." 아까는 세리아 언니가 나가봤기 때문에 이번에는 내가 스스로 발걸음을 자처하며 인터폰을 든다. 화면에 비치는 것은 중년의 아저씨. 특유의 중저음으로 인터폰을 향해 입을 연다. "실례합니다. 택배인데요." "택배요?" "네." 이상하다. 택배라니. 누가 인터넷 물품이라도 시켰던 것일까? "세리아 언니. 혹시 인터넷에서 물건 산 적 있었어?" "아니. 없는데?" 그렇다면 엄마나 아빠가 시킨 것일까. 아빠는 그렇다고 해도, 엄마같은 경우에는 한번 마음에 든 쇼핑물이 있으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보통 택배가 올 일이 있으면 우리들에게 종종 그 사실을 말해주거나 했는데... 오늘은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그런지 정신이 없어서 말을 못해준 것일까? 그러나. 문을 열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나는 내 행동이 얼마나 큰 불행을 초래하게 될 줄은 그때 당시에 깨닫지 못했다. "잠시만요. 지금 열어드릴게요." 인터폰의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에 현관으로 향하는 나. 부모님이 주문하신 인터넷 택배 배달이라고 철썩같이 믿고서 문을 천천히 열어주기 시작한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드러나는 남성의 모습. 흰색의 캡 모자를 얼굴이 들어나지 않도록 잔뜩 눌러 쓴 모습을 하고 있는 남성이 나를 내려다보며 특유의 중저음으로 말을 이어간다. "택배 왔습니다만." "그래요...?" 사실 방금의 그 대사는 인터폰을 통해서 충분히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재차적으로 택배라는 단어를 강조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작은 소망사항이 있기도 하다. 굳이 쓸모없는 말을 통해서 길게 문장을 늘릴 필요는 없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일단 누가 택배를 주문했는지에 대해 물어볼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아저씨를 올려다보며 머릿속에 든 궁금한 사항에 대해서 입을 열어 천천히 묻도록 한다. "실례지만 누가..." "아, 누가 이 택배를 보냈느냐 하고 물어보려고 하시는 거지요?" "네, 네..." 조금 신기한 느낌이다. 본인보다 나이가 한참 아래인 나에게 왠지 모르게 존댓말을 사용한다는 일 자체가 내게 있어서는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존댓말의 사용 여부니 그런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 아니 우리들에게 있어선 그것보다도 더 관심사가 가는 문제가 있었으니까. - 퍽!! 둔탁한 소음과 함께 뒷통수에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두통인가? 아니면 단순한 나의 착각? 아니. 분명 그건 아니다. 외부적인 요소에 의해서 지금 나는 누군가에게 얻어 맞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누가? 어째서? 그리고 왜? 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알아내기 전에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바로 흰색의 캡 모자를 눌러 쓴 아저씨의 잔잔한 미소였다. 마지막의 그 모습을 끝으로, 나는 점점 알 수 없는 상황에 여전히 의구심을 품으며 서서히 정신을 잃어간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어느 평안한 오후. 그때 방문한 낯선 남자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평생 기억이 남을만한 트라우마를 선사하게 되었다. ============================ 작품 후기 ============================ 바람이 많이 부는군요. 비라도 오는건지... 여하튼 바람소리가 장난이 아닙니다; 244화 ...... "으윽..." 입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아까 맞은 뒷통수에 아직도 씻지 못할 통증이 남아있던 탓이었다.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정신을 잃을 정도로 강도가 쎈 타격을 맞아본 적도 처음이고, 그리고 어째서 내가 왜 맞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도 구하지 못한 상황에서 나는 천천히 눈을 뜬다. 불이 꺼져있는 집안 내부. 시계를 바라보니 분명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는 뜻은 적어도 실내가 어두워질 정도로 밤이 깊었다는 뜻은 아닐 터. 이 어둠에 대한 해명을 알아내고자 살짝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오래 걸리지 않아서 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스스로 알아낼 수 있었다. 거실에 뚫려있는 커다란 배란다. 그 배란다의 공간과 거실을 엄연하게 차단하려는 듯이 둘러 쳐있는 커텐이 집안 내부로 들어오는 빛의 행로를 방해하고 있던 것이다. 바깥에서 일부러 집 안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것일까. 여전히 상황이 잘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 서보는 나. 그러나 쉽사리 일어날 수가 없었다. "... 밧줄?" 손목과 발목에 각자 밧줄로 포박을 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보면 인질로 잡혀 있는 히로인들이 흔히 보여주는 그런 모습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화에 출연할 의사도 전혀 없고, 제의가 들어온다면 과감하게 발로 차버리고 싶을 정도로 연기에 대한 혼신을 불태울 생각도 없으므로 얌전하게 잡혀 있는 히로인의 역할을 하긴 싫다. "큭...!" 최대한 힘을 주면서 밧줄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써본다. 그러나 고작 초등학교에 다니는 여자아이가 팔뚝만한 두께를 자랑하는 밧줄을 쉽사리 풀 수는 없는 노릇. 아무리 발버둥을 치려고 노력을 해봤지만, 도저히 내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풀 수 없을 것으로 보여진다. 한숨을 쉬면서 몸을 돌려본다. 익숙한 천장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는 상황. 생각을 해보자. 어째서 나는 왜 거실에 누워 있는가? 아니지. 누워 있다기 보다는 어째서 포박을 당한 상태에서 쓰러져 있어야 하는 것인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사실 내가 앞으로 무슨 행동을 해야 좋을지 제대로 판단이 안 서는 상태라고 표현하고 싶다. ... 그래도 이 상태에서 얌전히 구조를 기다리기를 마냥 바라는 것은 내 성격에 맞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 내 상황이라도 파악을 해두기 위해서 다시금 두통이 느껴지는 머릿속의 생각들을 정리시키면서 기억을 더듬어보자. 분명 나는 택배 아저씨의 호출을 받고 문을 열었다. 거기까지는 전혀 이상이 없던 상황. 그러나 이상이 벌어진 사건은 그 이후에 발생하게 되었다. 문을 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가격한 아저씨. 도구를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손날을 이용해서 무림의 고수들이 흔히 보여주는 장면처럼 손날치기, 소위 말해서 '아리랑 치기'를 해서 나를 기절시켰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망할 놈의 택배 아저씨가 나를 때렸고, 그 덕분에 나는 지금 포박을 당한 상태에서 거실에서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해본 결과.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나를 이렇게 단단하게 묶은 사람이 누군지 너무나도 쉽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 그 아저씨..." 나도 모르게 이를 악 물면서 말하자, 마침 내 목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화장실에서 나온 아저씨가 작게 웃으면서 대답한다. "택배 아저씨 여기 있습니다만?" 또 다시 이어지는 존댓말. 처음에는 그냥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도 예의를 갖추는 착한 아저씨구나 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들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히려 존댓말을 통해서 현재 나의 상태를 비아냥 거리고 있다는 듯한 상상밖에 떠오르지 않고 있을 뿐이다. "당신. 이게 무슨 짓인가요?" "무슨 짓이긴. 보시다시피 남의 집에 와서 무례한 행동을 하려고 하는데?" "무례한 행동...?" "아무리 꼬마라고 해도 알 건 다 알고 있잖아? 요즘 초등학생들은 무섭다고 들었으니까. 그렇지?" "...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전혀 모르겠는데. 노망 든 아저씨." "모른 척 해도 내 계획에는 전혀 지장이 없어. 아니, 모르는 게 오히려 더 즐거울수도 있겠구만. 꼬마 아가씨." "......" 이걸로 확실히 알았다. 이 아저씨, 강도로 보였지만 만약에 강도였다면 나를 기절시키고 난 이후에 곧바로 집 안에 있는 고가품들을 들고 이미 도주의 길을 택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저씨는 그런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집 안에 어질러져 있는 물건도 별로 없어보이고. 그렇다면 적어도 강도는 아니란 뜻인가. 차라리 강도였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돈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다시 모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사람을 기준으로 놓고 봤을땐 전혀 그렇지 않다. 목숨이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뿐일테고. 그것보다도 어찌보면 우리들의 입장에선 꽤나 무게감이 실리는 것이 바로 '신체' 그 자체다. 아직 확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아저씨는 아마도 뉴스에서 언급하던 그 인간 말종 살인범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살인범이 어디로 도주를 했는지, 그리고 어느 지역에서 자주 출몰을 했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가지고 있지 않은 나지만, 왠지 감을 통해서 잠시나마 알 수 있을 거 같다. 이 아저씨는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반 다른 범죄자들과는 다르다. 아니, 사실은 범죄자 그 자체가 일반인들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직감적으로 나는 그렇게 느꼈다. 여자의 감이니 뭐니 하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생존 본능으로 느껴진 직감이기도 한 것이다. "... 아저씨. 뉴스에서 나왔던 그 살인범이네." "오호라. 나를 알고 있는건가?" "글쎄." "몽타쥬라도 본 모양이지?" "아저씨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사진이 전국에 있는 모든 경찰서에 뿌려져 있으니까 그럴수도 있겠지만." "어른을 가지고 말장난을 하면 안 된다고 배웠을텐데?" 포박당한 채 누워있는 나를 살인범이 내려다보며 나릇나릇하게 말한다. 내가 어떠한 도발이라든지 아니면 화제를 전환시키려고 하는 다른 말들을 꺼내려 해도, 이 아저씨는 그저 능글맞은 미소만을 보여준 채 절대로 내 말에 현혹되거나 하지 않는다. 나름 화술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던 나였는데, 이 살인범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꽤나 많은 내공을 쌓아둔 사람인 모양이다. 물론 범죄 분야에서의 내공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 잠깐. 지금까지 이 아저씨와 노닥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을 빼놓고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세리아 언니... 는 어디에 있는거야." "아, 너와 같은 그 은발 아가씨가 네 언니였구나. 나는 또 동생인줄 알았는데." "잔말말고 어디 있냐고 묻고 있잖아!!" 나도 모르게 무심코 성을 내버린다. 상대는 나보다도 한참 나이가 많은 사람. 게다가 힘으로도 절대 압도할 수 없는 신체 건장한 남성이다. 신체 조건 상으로도 매우 불리한 상황인데, 게다가 포박까지 당한 나. 누가 보면 겁도 없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거냐고 태클을 걸고 싶을 정도로 무모한 언행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본래 간혹 이성보단 본능이 앞서는 경우도 있는 법. 그렇기 때문에 딱히 내가 잘못을 했다든지 아니면 후회를 한다는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은 품고 있지 않다. 덮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를 내려다보는 살인범이 한쪽 입꼬리만을 올린 채 웃어보이며 말한다. "알고 싶나?" "......" 대답하지 않은 채 그저 녀석을 노려본다. 물론 알고 싶은 마음이 잔뜩 있다. 아무리 밉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피를 나눠가진 자매 사이 아닌가. 평소에는 꼴도 보기 싫지만, 그래도 언제나 차갑게 대하는 나에게 웃는 모습으로 반겨주는 그런 언니다. 그래서 적어도 안부 정도는 살펴보는 게 혈육된 자의 도리라고 말하고 싶다. 세리아 언니에 대한 행방을 계속해서 묻고 싶지만, 여기서는 괜히 약한 모습을 보여주면 안된다. 내가 절대로 기죽지 않는다 라는 모습을 각인시켜줘야, 나를 얕잡아보는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상황 자체가 이미 내게 많이 불리한 상황이기 때문에 뭐라 말은 하지 못하겠지만,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다 해볼 뿐이다. 계속 녀석을 노려본다. 살인범의 입장에서는 우습게보일지도 모르지만, 가능한 한 최대한의 반항을 해본 나였다. 그러자 녀석이 피식 하고 작게 웃으며 특유의 썩은 미소로 나를 바라보며 대답한다. "안심해라. 너와 같이 묶여있는 상태니까." "... 언니는 어디 있는거지?" "주방 바닥에서 취침을 하고 있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너와 같이 팔과 다리가 포박되어 있는 상태로." "......" 거실에서는 부엌의 안쪽 내부의 모습까지 완벽하게 확인할 수 없다. 녀석이 말이 정말로 사실인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수단은 없지만,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언니의 안전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잠시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본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미소로 바라보는 녀석. 만약에 내 손과 발이 자유로웠다면, 저 녀석의 면상에 의자를 집어 던졌을 것이다. 그리 긴 인생을 살아온 것도 아니지만,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본 미소 중에서 정말 구역질나고 더러운 미소 베스트 넘버 원으로 뽑고 싶을 정도의 충동이 느껴진다. "의외인걸. 언니 걱정도 다 하고." "의외... 라고?" "그래. 너희 둘은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거 아니었나?" 순간적으로 온 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언니와 내가 사이가 나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이 아니었다. 남들도 한눈에 봐도 내가 세리아 언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여동생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다들 알고 있으니까 이제와서 세삼스래 놀랄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정작 놀란 것은. 바로 이 녀석이 우리들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점이다. 평소에 나와 세리아 언니 사이의 모습을 보지 않은 사람이 아니고선 내가 언니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내가 세리아 언니를 좋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독심술 사용자나 아니면 예전에 태조 왕건이라는 사극 드라마에서 궁예라는 인물이 관심법이라는 것을 사용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 이런 판단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이 녀석은 오늘 순간적인 충동으로 우리 집을 골라서 습격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예전부터 우리 집을 습격하기 위해서 사전 준비를 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나와 세리아 언니 사이를 알고 있다는 원인은 그것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는 보여지지 않는 상황. 그럼 오늘의 범행이 미리 계획되어 있었다는 가능성이 매우 커지고 있는 것이다. "... 당신. 이미 예전부터 우리 집에서 범행을 저지르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지?" "꼬마아이 주제에 제법이군. 머리가 잘 돌아가. 조기 교육이라도 받은건가?" 계속 서 있기 그런지, 쇼파에 건방지게 다리를 올려 놓으며 앉은 중년의 남성이 여전히 단정치 못한 몰골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원래 범행이라는 것은 우발적으로 갑작스레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치밀한 계획을 통해서 저질러야 완벽한 범죄가 성립되거든. 알고 있을려나?" "마치 자신의 행위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한 말로 들리는데." "그런 느낌을 받았다면 내 설명에 제대로 전달이 되었다고 해석될 수 있겠지." ============================ 작품 후기 ============================ 요즘 자정만 되면 배가 고픕니다 토크 제 1회입니다. 배에 걸신이라도 들렸는지, 요새 들어서 자정만 되면 배가 고파옵니다. 저녁을 조금 먹어서 그런건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최대한 식욕을 자제하고 있습니다... 라면서 무언가를 먹겠지요. ㅜ_ㅜ 그리고 과거 회상편은 앞으로 2회 남았습니다. 245화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그리고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본능적으로도 지금 이 상황이 꽤나 위험함을 나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세리아 언니와 나를 왜 분류해서 이렇게 떨어뜨려 놓았을지도 의문이고, 그리고 왜 하필이면 널려있는 집 중에서 우리들이 머물고 있는 집을 택했는지도 의문이다. 그렇다고 범인이 이렇게 세밀한 사항을 자신의 입으로 발설하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저 입을 다문 채 녀석에게 말한다. "... 아저씨. 그 쪽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될까?" "내 목적이라." 뾰족뾰족 튀어나온 턱수염을 다시금 쓰다듬기 시작하는 녀석. 아무래도 저 행동이 이 범인의 버릇인 모양이다. "너도 뉴스를 봐서 알고 있겠지?" "... 글쎄." 짐짓 모른척 해본다. 사실 이 녀석이 미성년자를 강간하고 살인을 즐기는 미친 변태녀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나는 애써 녀석에 대한 정보를 하나도 모른다고 있다는 사실을 어필하기 위해서 모른 척을 시도한다. 상대방에게 최대한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한 일종의 대처라고 볼 수 있었다. 남이 모르는 일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상대방을 굉장히 초조하게 만드는 일 중 하나다. 개인적으로 사람에 대한 심리 분야 강의같은 것을 EBS에서 해준 적이 있어서 심심해서 한번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 강사가 강의했던 내용 중에 전자에서 언급한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어린 나이에 제대로 된 이해를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대략적으로 어떤 식으로 사람의 심리를 알고, 골탕을 먹이는지에 대한 것은 어느정도 숙지하고 있는 편이다. 덕분에 내 부모님이라든지 주변의 친구들은 나를 보고 애늙은이라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러나 이건 엄연히 '일반인'에 한정되어 있는 일이었을 뿐이다. 또 한번 한쪽 입꼬리만을 올리는 기분나쁜 웃음을 지어보인 녀석이 갑자기 주방으로 향하더니 이내 무언가를 어깨에 짊어지고 나오는 게 아닌가. 어두운 실내였지만, 점점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가는 상황. 그 덕분에 나는 남자가 들고 오는 무언가의 형태를 대략적으로나마 구별지을 수 있었다. 은색의 빛나는 긴 머리카락. 그 요소 하나만으로도 나는 지금 남자가 들고 오는 것이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 혈육이기도 한 언니, 세리아였다. "당장 언니를 내려놔! 이 변태 자식!!" "진정하라고. 꼬마 아가씨. 난 아직 너희들에게 '아무런 짓도'하지 않은 상태니까." "......" 녀석이 말하는 것은 단순한 현재 상황 보고가 아니었다. 아직 아무것도 안했다는 말은 곧, 앞으로 무슨 짓을 할 수도 있으니까 말 조심 하라는 경고성 어린 주의를 나에게 준 것이다. 나는 포박당한 상태고, 언니는 정신을 잃은 채 나와 마찬가지로 손과 발이 억압되어 있다. 언니 역시도 뒷통수를 맞은 것인지, 아니면 무슨 소단을 동원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지만, 나와 같이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은 분명 이 망할 녀석이 언니에게 무슨 짓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와 언니를 나란히 거실에 눕혀놓은 녀석이 쇼파에 앉은 채 우리들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좋구만. 은발의 초등학생이라..." 우리들을 기분나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품안에 있던 담배를 꺼내 입에 물기 시작한다. 지독한 담배연기가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상황. 간접흡연이 직접 담배를 피우는 흡연자보다 암 발생 확률이 높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녀석은 그런 상식선 마저도 가지고 있지 않는 모양이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날리고 싶지만, 방금 녀석이 경고의 의미를 가득 내포한 말을 나에게 했기 때문에 더 이상 말로 저항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보여진다. 속으로 분을 삭히고 있는 수밖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그저 남자가 무슨 행동을 할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채 녀석의 행동거지를 바라본다. 담배를 피우던 남자가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하는 것은 채 5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거 알고 있나? 꼬마 아가씨?" "... 무엇을 묻는거지?" "여자아이라는 존재 말이야." "여자아이...?" "너와 같이 아직도 중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미숙한 여자아이를 가리키는 말이지. 어때. 생각해본 적이 있나?" "......"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애초에 질문의 의도 자체에 숨겨진 의미가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말투도 평소와 같이 지나가던 사람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거는 투. 초등학교 여자아이 단 두명만 머물고 있는 집에 침입해서 범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람의 말투처럼 들려오지 않는다. 긴장하지 않은 채.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세간에는 여자아이를 좋아하는 부류를 '로리콘'이라고 하지. 이 정도는 알고 있겠지?" "... 알고 있어" "아마 뉴스를 봤다면 나도 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할거야. 덜 성숙한 여자아이를 강간한다는 행위는 그만큼의 쾌락을 주는 게 사실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내가 진짜 로리콘이라는 사실을 발설하는 것은 아니야.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 조금 차원이 다른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고 해야 할까." 여자아이를 강간하는 일에 대해서 쾌락을 느끼는 사람이 자신은 로리콘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사실 이 말에 딴지를 걸고 싶은 욕구가 매우 샘솟아 올랐지만, 그래도 여기서는 일단 녀석의 심기를 자극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나는 그저 대답은 회피하면서 녀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준다. 나름 나의 반응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녀석은 담뱃불을 재떨이 위에 비비적 거리며 말을 이어간다. "덜 성숙한 육체를 강간한다는 것은 최상의 쾌락을 전해주지. 빈약한 가슴. 그리고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육체. 무엇보다도 남성기를 처음 받아들이는 처녀의 몸부림. 비명소리. 울부짖음. '엄마, 엄마!'라고 울면서 아픔을 호소하는 그 모습. 아... 생각만 해도 정말 흥분되는 광경이군." "... 네 녀석은 최악이야." "후후... 이런 것으로 최악이라는 단어를 꺼내진 말라고. 더 즐거운 일은 그 이후에 있으니까." "더 즐거운 일...?" "꼬마 아가씨. 아까 나를 뭐라고 불렀었지?" "그거야...!" ... 생각나버렸다. 내가 녀석에게 전에 했던 말 중에 아주 치명적인 단어. 바로 '살인범'이었다. "그래. 표정을 보아하니 생각난 모양이군. 성적인 쾌락따위는 부수적인 즐거움일 뿐이야. 이건 남자로서의 유흥이라고 보는 편이 좋겠지. 나도 남자니까. 야동 한 번 안 본 남자들을 찾기 힘들 정도로 남자라는 동물은 성적인 쾌락을 갈구하는 존재이기도 하지. 그렇지 않아?" "절대로 공감 못하겠는데." "물론 여자 입장에서는 전혀 공감을 못하겠지. 그건 나도 이해해. 하지만 남자라면 내 말에 공감하고도 남을거야. 짧은 미니 스커트와 같은 노출도가 상당한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여자를 보면 소위 말해서 '꼴린다.'라는 표현을 쓰기 좋을 정도로 흥분하지. 아, 꼴린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 "... 알고 싶지도 않아." "남자의 성기가 커진다는 뜻이야. 꼬마 아가씨. 발기라고도 하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입에 딱 달라붙지 않다고 생각해서 간혹 '꼴린다.'라고 표현하고 있지.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그래. 지금 아가씨들이 그렇게 묶여 있는 채 저항할 수 없는 연약한 모습을 보고 있는 내 상태가 바로 그거야." ============================ 작품 후기 ============================ 오늘은 즐거운 불금입니다. 불타는 금요일이지요. 246화 솔직히 말해서 구역질이 나올 정도다. 인상착의도 더럽고, 인상도 최악이다. 목소리도 기분 나쁘고. 무엇보다도 저 웃음. 아니, '웃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도 아까울 정도로 징그러운 미소를 보고있자니 나도 이 자리에서 그냥 울어버리고 싶을 지경이다. 만약에 정신을 차리고 있는 쪽이 내가 아니라 언니였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강간을 즐기고 나서 내가 항상 하는 일이 있지. 여자들은 '처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하지만 나에게 강간을 당하면 그 소중하게 여겨왔던 '처녀'를 빼앗기는 일이잖아.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마음속으로 상처를 입은 채 살아갈까. 불쌍하기도 하지." "... 네 녀석이 진작에 강간따위를 하지 않았으면 될 일 아닌가?" "물론 그렇지. 하지만 말이야. 때로는 본능이 이성을 지배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 나는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주면 좋겠군." "......" "그래 그래.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빠져버렸군. 여자에게 소중한 것을 내가 가져갔으니까, 마지막으로 나는 여린 소녀들에게서 '인간으로서의 소중한 것'을 가져가는 거야. 약탈자라고도 불리고 싶을 정도로 말이지." "결국 마지막은 '살인'이라는 뜻이군." "정답이야. 똑똑한 꼬마 아가씨. 내가 저지른 일로 인해서 평생 괴로워하며 살아갈 바에야 차라리 내 손으로 그 여린 생명을 강탈하는 거지. 어때. 이게 바로 병주고 약주고 아닌가?" "웃기는 소리를 하는데? 아저씨. 그게 병주고 약주는 거라고?" "그런 셈이지. 아가씨, 제로 섬 게임(Zero Sum Game)이라고 알고 있나?" "......"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만나서 제로를 만든다는 뜻이야. 결국 내가 하는 일은 바로 이것이지. 강간이라는 이름의 마이너스를 선사해주고, 그리고 죽음이라는 이름의 플러스를 선사해준다. 그럼 나에게 강간을 당한 여자아이에게는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제로의 상태를 만들어주는 꼴이 되는거야. 어떤가? 아가씨.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주 적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 더 이상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 이 녀석은 미쳤다. 이성이니 본능이니 하는 말을 운운하면서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던 내가 오히려 바보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런 녀석들에게는 '상식'이라는 단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는 나였기에 지금 내가 하는 말들, 그리고 앞으로 이 녀석이 어떠한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예측 따위는 전혀 쓸모없는 가설로 돌아갈 뿐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될 뿐이었다. 녀석과의 대화를 주고받던 사이에, 세리아 언니의 입에서 옅은 신음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으음..." "오, 나머지 한 명의 어린 공주님께서 깨어나신 모양이군." 담뱃불을 끄면서 자리에 일어나는 녀석. 세리아 언니가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이 희소식이긴 하지만, 그래도 타이밍이 너무 안 좋다. 저 말을 듣고보니 녀석이 여지껏 우리의 몸에 손을 대고 있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우리들이 맨정신일 때 강간을 하기 위해서 저러고 있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세리아 언니가 제정신을 차리고 있다는 말은 곧 이 녀석은 우리들을 강간하기 위해서 행동을 할 것이라는 말과도 같게 된다. 그리고 나의 예상대로,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살짝 들어올린다. "아얏...!!" "꽤나 귀여운 비명을 지르는군. 아가씨. 지금까지의 대화 내용을 추스려보면 그래도 꽤나 냉정한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너 같이... 더러운 변태 녀석에게 이런 수모를 겪게 된다면... 그 누구라도 나와 같은 심정일걸." "변태라. 어떤 의미로 나에게 있어서는 칭찬같은 말이겠군." 역시나 틀려먹은 녀석이다. 변태를 칭찬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정신상태 자체가 궁금해질 무렵, 세리아 언니가 나의 현재 상황을 봤는지 상반신을 힘겹게 일으키면서 외친다. "무, 무슨 짓이에요!!" "완벽하게 정신이 든 모양이네. 네 언니 쪽 말이야." "크윽..." 상황이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에 대해서 나는 알고 있는 상태지만, 언니는 전혀 모르고 있다. 저 녀석이 어떤 타입의 인간인지, 그리고 무슨 목적을 가지고 우리 집에 들어왔는지에 대한 상세한 상황까지도 말이다. 물론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대충 알 수 있을 것이다. 도둑이라면 물건을 훔치고 달아나면 될 일. 그러나 그렇지 않고 집 안에 대기중이었다면 이 남자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라는 사실. 이 점을 세리아 언니가 눈치챌 수 있을까? ... 아니. 무리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세리아 언니가 그렇게까지 눈치가 좋은 여성이라는 느낌을 받은 적은 별로 없다. 그저 언니는 보이는 그대로 믿고, 그리고 의지하는 순수한 타입. 나와는 다르게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만 두라고 했잖아요!" 무리하게 일어서려고 시도하는 세리아 언니. 그러나 두 발 마저도 포박당한 상태에서 제대로 일어설 수 있을리가 없다. 그대로 콰당! 하면서 바닥으로 넘어지는 세리아 언니. "네 언니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저렇게 필사적인데 말이지. 정말 눈물이 나는 자매애 아닌가?" "......" 솔직히 표현하자면 지금 내가 어떤 행동들을 해야 좋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하지?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는 사실 정도는 나도 충분히 알고 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경찰에 신고할 수 있는 방법은 텔레파시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텔레파시를 보낼 수 있는 이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텔레파시를 보낸다고 경찰이 그 사실을 인지하고 출동한다는 말 자체가 일단 넌센스다. 현대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을 수 있을만한 근거가 별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 뿐만 아니라 세리아 언니까지도 위험하다. 속으로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고 있는 와중에, 세리아 언니가 갑자기 입을 열기 시작한다. "괴, 괴롭히려면... 저 부터 먼저 하세요!" "뭐라고?" "아리아에게... 손을 떼고 저부터 하라고요!!" 순간적으로 나는 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를 대신해서 자기를 희생하고자 하는 생각인가? 어째서? 왜? 아무리 혈육이라고 해도, 자신의 몸을 던져가면서까지 나를 지킬 의무는 솔직히 세리아 언니에겐 없다. 매번 언니에게 차갑게 대하던 나. 그러나 언니는 그런 나를 오히려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몸까지 던지고 있는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있다. 언니에게 말해야 한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더 이상 나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그러나 상황은 점점 언니가 말한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언니쪽이 먼저 자처한단 말이지." "... 네." 지금까지 세리아 언니의 여동생으로 지내오면서 언니가 진심으로 화를 내는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지금 세리아의 언니를 바라보고 있는 나는 순간 할 말이 막혀버린 것이다. 매섭게 녀석을 노려보는 세리아 언니. 언니에게도 '살의'를 담은 눈빛이 있었던 것이다. 그 살의를 담은 눈빛이 생성되게 된 원인이 나였다는 사실이 나를 더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다. "... 마음에 들어. 그 눈빛. 하지만 말이야." 남자의 주머니속에서 나이프가 나오기 시작한다. 순간적으로 흠칫한 나와 세리아 언니. 날카로운 나이프를 내 목에 들이대기 시작하는 녀석이 세리아 언니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한다. "이런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여동생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언니의 눈 앞에서 직접 여동생을 죽인다는 시나리오 말이야." "...!" 말 문이 막혀버린 세리아 언니. 물론 나 역시도 이 상황에서 뭐라고 말을 할 재간이 없었다. 날카로운 쇠붙이의 감촉이 목의 피부에 그대로 전해지는 상황. 남자가 마음을 먹고 조금만 힘을 주는 순간, 내 목은 이 날카로운 나이프에 의해서 잘려나갈 것이다. 생명의 위협이 느껴지는 상황. 아무리 나라고 해도, 현재 나는 나약한 초등학교 여자아이일 뿐이다. 무섭지 않을리가 없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아니, 다리 뿐만이 아니라 온 몸이 전부 사시나무 떨리듯 요동치기 시작한다. 신경, 그리고 세포 하나하나가 바람 앞에 촛불인 내 목숨을 두려워하듯 본능적으로 죽음이라는 녀석을 인지하고자 한다. 이대로 정말 죽는건가? 마지막 순간까지 세리아 언니를 원망하며 죽어야 하는건가? 세리아 언니는 왜 그런 말을 꺼내서 나를 이 지경까지 몰아 넣었던 것일까? ... 물론 언니는 순수하게 나를 구하기 위해서 분명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본능에 몸을 맡겨버린 미치광이 살인자. 이성적인 타협과 제안이 통하지 않는 상대다. ...... 질끈 눈을 감는다. 어린 나이에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될 줄은 몰랐지만, 더 이상 저항할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차피 이 녀석은 우리 둘을 강간하고 죽일 녀석이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히려 이러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이었다. "그만 두라고 했잖아요!!" 세리아 언니가 갑자기 와락 소리를 치면서 말한다. "당신! 내 동생에게 손 끝 하나 건들였다간 죽여버릴거야!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죽여버릴테니까!!" "오호라..." 두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세리아 언니. 남에게 이런 식으로 욕을 해본 적도 없을 것 같은 언니가 스스로 남을 죽이겠다고 하면서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막무가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 뭐. 이제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247화 한숨을 쉬면서 힘없는 눈빛으로 절규하고 있는 세리아 언니를 바라본다. 이제 모든게 끝났다는 식으로. 그러나 세리아 언니의 노력이 통했을까.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녀석이 느닷없이 세리아 언니를 향해서 발길질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컥!" "작은 녀석이 감히 나에게..." 연이은 폭력. 상대는 고작해야 자신의 허리 높이밖에 오지 않는 연약한 여자아이다. 그러나 이 살인범의 눈에는 지금 세리아라는 사람을 당장 패지 않고서는 성미가 풀리지 않는다는 식으로 무자비하게 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팔과 다리가 포박되어 있기 때문에 몸을 감싸는 일도 할 수 없다. 그저 저 무식하게 생긴 다리에 맞고서 신음소리를 토할 수밖에. "... 그만해..." "이 년이..." "그만 하라니까!!" 이번에는 내 쪽에서 먼저 소리를 친다. 발길질이 멈춘 녀석. 그러나 갑자기 나이프로 세리아 언니의 목을 겨누면서 말한다. "다시 한 번 아까 나에게 했던 말, 그대로 말해보시지." "콜록...!" 세리아 언니의 기침 사이로 살짝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얼마나 무자비하게 폭력을 가했으면 기침에 피가 섞여나올 정도의 모습까지 보여주겠는가. 어느순간 나 역시도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동안 언니에게 무심하게 대했던 내 자신이 한탄스럽게 느껴진다. 왜 언니는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나를 감싸주려고 하는 것일까? 고작 '자매'라는 관계 때문에? 사실 나에게 있어서 자매관계라는 것은 별거 없었다. 그냥 같은 부모님 아래에서 같이 태어났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자매관계'였다. 그러나 세리아 언니가 나에게 보여주는 것은 뭔가 다르다. 자매애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자비로움. 아니, 어찌보면 이것이 바로... 진정한 신뢰관계일지도 모른다. 얼굴이 잔뜩 부은 세리아 언니에게 녀석이 칼을 들이대며 혀를 차기 시작한다. "...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는군."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안 좋게 돌아가다니? 세리아 언니가 녀석에게 '죽어!'라고 협박해서? 고작 말 한마디로 상황이 바뀔 정도로 지금 이 상황이 그리도 가벼웠던 것일까? 그러나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는 듯이 녀석이 세리아 언니에게 말을하기 시작한다. "잘 들어라. 은발 꼬마 아가씨. 나에게 '죽어라.'라고 명령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알겠냐?" "......" "그런 의미로 내가 너에게 한가지 명령을 하겠다. 지금부터 잘 들어라." 거칠게 세리아 언니를 바닥에 내팽개친 녀석. 그리고 세리아 언니에게서 절대로 하지 말아야 했을 말을 기어코 읊게 된다. "지금부터 너는 말을 할 수 없는 장애를 가진 것이다. 만약에 네가 조금이라도 '말'을 하는 순간,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다시 너희들에게 찾아와서 네 여동생을 죽일 것이다. 알겠냐?" "......" "... 쳇. 쓸모없는 시간을 낭비했군." 이라는 말과 함께 배란다를 열고 집 바깥으로 스스로 발걸음을 옮기는 녀석. 그리고 방금의 모습이 내가 그 녀석을 직접 목격한 마지막이 되었다. "... 음..." "정신이 들었니?! 아리아!"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고서 거칠게 흔들기 시작한다. 희미하게 눈을 뜨자, 밝은 형광등의 불빛이 내 시야를 밝게 비추기 시작한다. "... 여긴...?" "병원이란다. 그나저나 다친 곳은 없고? 괜찮니?" "... 엄... 마...?" "그래...! 나야, 아리아..." 누워있는 나를 강하게 끌어안기 시작하는 엄마. 뒤에서 아빠가 의사를 불러달라며 급하게 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을 찾기 시작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힘겹게 엄마의 도움을 받아 상반신을 일으킨 나.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엄마에게 곧바로 물어봐야 하는 중요한 질문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언니... 세리아 언니는?!" "세리아라면..." 갑자기 말 끝을 흐리는 엄마. 왜 그런 반응을 보여주는 것일까? 엄마의 행동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연신 엄마의 손을 잡아 끌면서 대답을 보채는 나였다. "왜... 왜 말을 안 하는거야?" "저기... 그러니까..." "세리아 언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거야? 그런거야?" "아니... 그건 아니지만..." 점점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눈치로 말하는 엄마. 그런 반응을 보일수록 솔직하게 말해서 내 심장은 타들어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망설이던 엄마가 입을 열려던 순간, 병실의 문이 열리면서 아빠와 같이 들어온 인물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얼굴에 반창코를 붙이고 있는 언니의 모습. 미치광이 살인범 녀석에게 수많은 발길질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잃은 나보다도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던 것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무작정 언니에게 달려가 그대로 세리아 언니를 안는다. "무사했구나... 언니..." "......" 세리아 언니도 말없이 내 등을 감싸 안아준다. 아... 그동안 언니와 이렇게 포옹을 해본 적이 과연 얼마만에 일어난 일이었던 것일까.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지는 세리아 언니의 품 안. 그러나 우리들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엄마가 살짝 눈물을 흘리면서 세리아 언니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세리아. 아리아는 아직 안정을 더 취해야 하니까 이 쯤에서..." "......"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서 살짝 멀어진 세리아 언니. 그런데 그런 언니의 모습에서 약간의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팔과 다리에 보이는 다수의 상처들? 아니면 살짝 부은 얼굴때문에? 아니다. 전혀 아니다. 상처나 다친 곳은 언젠가는 치유가 된다. 언니의 몸에 흉터가 남을 정도로 심하게 상처를 입은 모습은 현재로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묘하게 침착한 모습을 보이는 언니. 그러나 도통 나는 그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째서 엄마는 세리아 언니에 대해 말하는 것을 살짝 꺼려했던 것일까? ...... ........... ................ "... 언니." "...?"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나를 바라보는 세리아 언니. 그러나 나는 다시금 언니의 이름을 불러본다. "세리아 언니?" "...?" 내가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가 얼핏 감이 잡히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부정하고 싶다. "언니... 왜 말을 안 하는거야...?" 현재 언니의 모습이... 들려오지 않는 대답을 들려주는 언니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 너무 충격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세리아 언니를 제외하고 의사의 진단 결과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는 나와 부모님. 나이가 지긋한 의사 선생님이 엑스레이 촬영 자료를 보여주면서 말을 이어간다. "보시다시피... 성대쪽이라든지 관련 기관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세리아는 말을 못하잖아요. 그럼 도대체 그건..." 엄마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재차 의사 선생님에게 묻는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뿐. 그다지 희망적인 답변을 들려주지 못했다. "세리아 양의 현재 문제는 아마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무슨 뜻인가요...?" "세리아 양은 아마도 어제 벌어졌던 범행 사건에 의해서 심한 충격을 받고, 스스로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정신적인 쇼크를 받아서 현재 언어쪽의 장애가 생기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뿐입니다. 그 이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결과적으로 세리아 언니는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말을 안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병적인 증세라고 보여질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확실한 것은, 분명 세리아 언니는 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 언제나 똑같은 등교길. 언니와 같이, 우리 둘은 서로 학교를 가고 있었다. 다만, 전과 달라진 점이 한가지 있었다. 내가 세리아 언니에 대해 마음을 열게 된 사실. 그리고... 세리아 언니가 말을 하지 못하게 된 사실. 세리아 언니가 말을 못하게 된 것은 어찌보면 나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범인의 심기를 건드리면서까지 보여주었던 언니의 용기. 전에도 몇번 세리아 언니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들을 습격했던 범인은 마침 우리 둘이 인질로 잡혀있던 상황에서 뭔가 낌새를 눈치챈 옆집 아주머니가 신고한 경찰에 곧바로 현장 검거가 되었다고 말이다. 물론 실제로도 그랬고, 뉴스에서도 속보로 전할 정도로 파장이 큰 뉴스거리였기도 했다. 그래서 녀석이 '시간이 없다.'라는 쓸모없는 말 따위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언니는 아직까지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아니, 정말로 트라우마가 생겨서 말을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이후로 작은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세리아 언니가 잃어버린 말을 대신해서, 그 빈 공간을 내가 채워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사이는 무인도에서도 계속 연장되고 있었다. "... 세리아 언니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다 제 탓이에요. 그 때, 만약에 언니가 범인 녀석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차라리 그 자리에 없었다면, 언니가 말을 하지 못하게 되는 일 따위는 없었을테죠." 여지껏 아리아의 말을 듣고 있던 우리들은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리아의 입에서 직접 듣는 당사자들간의 과거 이야기. 그리고 세리아가 어째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증의 해답을 담은 이야기. "세리아보다 더 괴로웠던 사람은... 바로 너였구나. 아리아." 누나가 작은 목소리로 아리아에게 나지막히 말을 한다. 체리도 아무런 말 없이 아리아의 옆에 다가가서 손을 꼬옥 잡아준다. 차가운 달빛이 내리쬐는 야심한 밤의 어느 호수. 이 작은 호수에서 우리들은 세리아와 아리아의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계기를 체험하게 되었다. ============================ 작품 후기 ============================ 이걸로 과거 이야기는 끝입니다. 생각보다 많이 길군요. 쓴 저도 놀랐습니다;; 248화 EP 25. 그녀가 들려준 한마디 어제 저녁에 잠시 호수에서 목욕을 했던 우리들은 바로 골아 떨어진 상태로 다음 날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어제 난파선에서 챙겨온 물품들을 나란히 둘러보고 있던 나. 옆에서 유아 선배가 내 보조 역할을 하면서 우리들이 챙겨온 물품들을 이리저리 확인해보기 시작한다. "피아노 줄이라... 정말로 있었구나." "지아 선생님의 말씀이 맞은 셈이죠. 뭐." "그럼 이걸로 체리에게 활을 만들라고 나중에 부탁하면 되겠네?" "아마도 그렇게 되겠죠." 원래부터 난파선으로 향하게 된 본래의 목적 중 하나가 바로 '피아노 줄'을 구하러 가는 것이었다. 활을 만들다가 자연스럽게 피아노 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그 덕분에 이렇게 대규모 원정대를 꾸려서 우리들과 같이 무인도에 표류되어 있는 거대한 손님이기도 한 난파선 내부로 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단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괜히 난파선에 무리하게 가서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오게 된다면 기운만 빠지는 꼴이 되지 않는가. 노력을 했으면 그 노력에 따른 결실이 따라오지 않는 일 만큼 스트레스가 쌓이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달콤한 결과라는 이름의 열매를 취득할 수 있다는 사실. 다행스럽게도 우리들의 원정길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노력의 결과로 보상받을 수 있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피아노 줄을 따로 분류해놓는 나. 그 다음으로는... "휴지... 네요." "그래. 휴지. 영어로는 티슈." "어째서 휴지를 가져온 건가요?" 유아 선배에게 직접적으로 묻는다. 아무래도 대략적으로 짐작은 가지만, 그래도 확인 차원으로 한번 묻도록 하자. 질문을 받은 유아 선배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나에게 말을 한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니야? 언제까지고 풀잎으로 엉덩... 아, 아무튼! 큰 일을 치루고 나서 닦는 그 기분은 사실 그렇게까지 기분 좋은 게 아니잖아." 도중에 엉덩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일에 잠깐 망설이는 유아 선배. 아무래도 쪽팔려서 그러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건 저도 동감하긴 하지만..." 그래도 사실 휴지를 가져온 것은 꽤나 비효율적인 일이라고 생각이 된다. 왜냐하면, 휴지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고, 그리고 가방 안에 겨우 들어갈 정도의 양 만큼을 가져온 휴지였기 때문에 금방 줄어들 것이 뻔하다. 물론 화장실에서 대변을 보고 난 뒤에 사용되는 용도로만 휴지를 사용한다고 하면 조금 더 오래 쓸 수 있겠지만, 그래봤자 기간 한정이다. 한, 두 명도 아니고 열명이나 되는 인원이 동시에 휴지를 사용한다면 화장실에서만 휴지를 사용하게 하는 제도를 마련해도 별로 효용성이 없다고 본다. "아무튼 이건 그다지 쓸모 없을만한 물건일 듯 하네요." "너무하잖아! 기껏 힘들게 구해왔는데!" "... 유아 선배가 들고 온 것이었군요." "그, 그래. 안 되는 일이야?" "뭐... 물건을 가져오는 것은 개인 취향이긴 하지만, 그래도 효율성을 조금 고려한다면 휴지는 영 꽝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 냉정한 녀석." "냉정한 것이 아니라 중립적인 입장에서 엄연하게 이 물건이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 분석을 했다고 표현해주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봅니다만." "마치 깐깐한 시어머니 같은 말을 하는구나. 쳇." "저같은 남자가 있기 때문에 백화점이라든지 티비에서 나오는 홈쇼핑에서 충동구매를 방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요." "잘났어. 정말." 살짝 코웃음을 치면서 약간 삐졌다는 듯이 입이 조금 삐져나오기 시작하는 유아 선배였다. 그래도 엄격하게 필요한 물건과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제대로 구별을 해야 좋은 것이다. 지금이야 뭐 어차피 휴지를 가져왔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것도 휴지에 대한 매너도 아니고. 그래서 일단 오늘부터 휴지를 보급하기로 그렇게 정하고 이거 역시도 따로 분류하기 시작한다. 얼마나 갈까. 길어봤자 2주? 아무튼 휴지는 정말 미스 초이스라고 보여진다. 의류들은 누나가 따로 가져간 상태. 어차피 의류들같은 경우에는 거의 90%가 여성복이기 때문에 내가 따로 손을 댈만한 분야가 아니다. 그래서 누나와 같이 파트너를 맺은 체리에게 맡겨둔 상황. 나는 그 이외의 물건들을 점검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계속해서 짐을 정리하고 있던 나와 유아 선배. 우리들을 향해 누군가가 걸어오면서 물컵을 건내기 시작한다. "......" 감기를 떨치고 일어난 세리아가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물을 선사해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부드럽고 수줍은 미소를 보여주는 세리아. 여전히 심성이 곱고 착한 세리아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 세리아." 유아 선배가 나의 몫까지 물컵을 세리아에게 받으면서 묻는다. "감기는 다 나았니?" "......" 고개를 살짝 끄덕이면서 긍정적인 답변을 들려주기 시작하는 세리아. 감기가 다 나았기 때문에 이렇게 바깥으로 나와서 우리들에게 물컵을 건내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만약에 여전히 감기몸살을 앓고 있었다면 지금쯤 세리아는 누워서 지아 선생님의 간병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감기가 제대로 다 나은 상태도 아니면서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일은 지아 선생님이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간호 선생님으로서의 지아 선생님이 세리아의 움직임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세리아의 감기몸살이 완치되었다는 말과도 같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세리아의 물컵 버프(?)를 받은 나와 유아 선배. 일하던 도중에 미녀의 이런 응원을 받으니까 왠지 모르게 기운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좋았어! 조금 더 힘을 내면서 일을 해볼까? 다수의 물건을 늘어놓은 채 다시 물건을 일일이 확인하는 나. 세리아도 구경을 하고 싶은 모양인지, 아니면 조금이나마 나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나를 대신해서 유아 선배가 그런 세리아의 모습을 눈치채고 묻기 시작한다. "세리아. 우리한테 무슨 볼 일이라도?" "......" 고개를 좌, 우로 흔들어보이며 아무런 볼 일도 없다는 듯이 대신 제스쳐로 말을 해주는 세리아. 평상시에 아리아와 세리아가 같이 다니는 모습이 일상이었다면, 지금 세리아 혼자서 방관하고 다니는 모습은 약간 어색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제 저녁에 아리아에게서 들은 세리아의 과거. 말을 하지 못하게 된 안타까운 사연을 알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는 나와 누나, 그리고 체리밖에 없었다. 유아 선배와 세린, 지아 선생님과 노아 교수님, 마지막으로 엘리에게는 아직 아무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껏 용기내어 우리들에게 비밀을 발설한 아리아였기 때문에 아리아 본인이 직접 자신들의 과거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주지 않는 이상, 우리들도 입을 다물기로 했기 때문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내 입장에서 보자면 적어도 선생님들에게는 우리들이 들었던 아리아, 세리아 자매의 과거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뒤에 상담을 받도록 아리아에게 권유하고 싶은 것이 욕심이다. 실제로도 이런 식으로도 권유를 해본 나였지만, 어제 저녁에 호수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을 때의 아리아는 고개를 흔들면서 내 말에 부정할 뿐이었다. - 선생님들에게는 도움 받고 싶지 않아요. 라는 짧막한 말. 선생님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거의 필수불가결로 선생님들이 아리아와 세리아 사이의 일에 간섭을 하게 될 것이다. 특히나 노아 교수님의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이런 일을 잠자코 넘어갈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노아 교수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아리아와 세리아 사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노아 교수님이기 때문이다. 지아 선생님은 노아 교수님과는 조금 다른 타입의 선생님이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그리고 포기할 건 포기한다 냉정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아 선생님은 노아 교수님과는 달리, 본인들이 선생님들의 간섭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 간섭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런 면에 있어선 지아 선생님의 센스가 조금 더 있다고 해야 할까. 융통성이 있다고 보는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노아 교수님이 융통성이 전혀 없는 꽉 막힌 여자란느 소리가 아니고. 너무 착해서 앞 뒤를 가리지 않고 타인을 생각하려고 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다는 뜻이다. 결코 나쁜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더불어 말하자면 세리아는 현재 내가 본인의 과거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분명 아리아는 세리아에게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본인들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냉전을 유지하고 있는 이 둘의 관계이기 때문이니까. 아리아가 정말로 세리아와 결별을 선언하려고 의도하고 있다면, 세리아에게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말을 직접 했을 것이다. 결국, 아리아는 우리들에게 '비밀로' 본인들의 과거 이야기를 해준 것이다. 눈치가 빠른 누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아침까지도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평소의 누나가 생활하는 패턴을 보여주었다. 체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망설이고 있다가 어제 저녁에 목욕을 마치고 산장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나에게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졌었다. '저,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당분간은 우리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지.' '비밀... 인가요?' '그래. 비밀. 본인들이 직접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주기 전까지 우리들은 오늘 아리아와 세리아의 과거 이야기를 듣지 않은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인식하면 편할테니까.' '네에...' 약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의 체리였지만, 이내 수긍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한다. 어째서 우리들에게만 말을 해줬는지, 그리고 전부 다는 아니지만, 산장에 머물고 있는 인원의 반수 가까운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해줬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이야기를 공유해도 되지 않을까 라는 체리의 생각이 있었나보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이 알고 있다고 해도, 그 사실이 비밀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은 입을 무겁게 해야 하는 책임감이 있는 것이다. 2명 이상이 알게 되는 순간부터 그 것은 비밀이 아니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이 '모르고 있다'라는 현재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비밀'이라는 조건이 성립되는 것이다. 비밀은 지켜야 하는 법.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침묵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시, 시원하네... 아하하." 물을 마시면서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유아 선배.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난 세리아였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줘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저런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세리아에게 있어서는 감기몸살이 다 나았다는 축하할만한 일이 있긴 하지만, 그녀에게 꼭 축하할만한 일만이 존재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아리아와의 싸움. 아마도 세리아에게 있어서는 아리아와 싸운일이 더 가슴아픈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하게 그 일이 더 그녀에게 있어서는 치명타를 남길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자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어떻게 해서든 이 둘의 화해를 이끌어가고 싶은 것이다. 같은 동료로서, 그리고 무인도에서 지내는 가족으로서. 물건을 정리하다 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결국 결단을 내린 채 세리아에게 말한다. "세리아." "...?" "잠시 할 말이 있는데." ============================ 작품 후기 ============================ 어제 저녁 시간동안 친구들과 롤을 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아마 제가 롤을 한 것 중에서 하루에 가장 많은 게임수를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많이 해봤자 하루에 3판이 한계인데, 어제는 대략 5~6판 했을까요... 저 같이 멘탈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위험한 게임이 바로 롤입니다 ㅡ_ㅡ; 249화 일하던 도중에 세리아를 데리고 해변가로 나가보는 중. 유아 선배는 도중에 나에게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거야?!'라고 물어왔지만, 나는 그냥 단순하게 '세리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라는 말로 일관했을 뿐이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쉰 유아 선배가 내 일을 대신 맡으면서 잘해보라는 식으로 응원 아닌 응원을 해준 일도 있었다. 유아 선배 특유의 '여자의 감' 스킬이 발동한 모양이다. 본능적으로 내가 세리아와 아리아 사이의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 해변가는 나와 세리아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장소이기도 하다. 바로 이 곳에서 처음으로 나와 세리아가 육체적으로도,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둘이 하나로 맺어진 장소였기 때문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 때는 밤이었고 지금은 대낮이라는 점일 뿐이다. "여기 앉아볼래?" "......" 내 옆자리를 권유해본다. 해변가의 모래 바닥에 다리를 얌전히 모으고 내 옆에 앉는 세리아. 아무래도 여기서 나와의 섹스를 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고 있는지 조금 수줍은 얼굴로 내 옆에 앉는다. ... 역시나 귀엽다. 무인도 일원 중에서 가장 참하고 가장 얌전한 세리아였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의 조신한 모습은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역시나 세리아 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런데 내가 세리아의 이런 모습을 감상하려고 그녀를 여기에 대려온 것도 아니고. 정신 바짝 차리고 내가 세리아를 따로 부른 본래의 목적을 다시 한 번 떠올리도록 하자. "저기, 세리아." "......" "내가 널 따로 부른 이유. 대략적이나마 알고 있겠지?" "......" 세리아도 그렇게 둔한 여자는 아니다. 엘리 수준으로 앞 뒤 상황에 전혀 관계 없이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그런 류의 타입이라기 보다는 주변 상황에 자신을 맞춰가면서 생활하는 그런 여자인 것이다. 타인에게 항상 양보하며 살아오는 행동을 취하던 세리아. 그녀에게도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오게 된 것이다. 잠시 호흡을 내쉬어본다. 사실 아직까지도 내가 아리아와 세리아의 관계 사이에 간섭을 해도 좋을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 덕분에 약간 망설여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엄연하게 이것은 그녀들만의 문제.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은 피를 공유하고 있는 혈육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사자들이 나서서 직접적으로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이 더 보기도 좋고, 그리고 뒤끝도 없을것이라 판단이 된다. 제 3자, 즉 아리아와 세리아의 어머니라든지 아버지가 나서서 '너희는 자매니까 무조건 잘 지내야 한다.'라는 식으로 타이르게 된다면 형식적으로는 그녀들이 서로 잘못을 했다면서 용서를 비는 일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치레에 불과한 단순한 행사의 일종. 진심으로 그녀들이 자신의 잘못, 혹은 타인에 대한 마음 등을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화해를 하게 된다면 그건 진정한 화해라고 볼 수 없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컴퓨터와는 다르다. 쓸모없는 잡생각이라는 이름의 파일을 휴지통에 넣어서 삭제하기를 클릭하는 것 처럼 영구적으로 서로에 대한 미움이라는 감정이 삭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녀들 사이에 간섭을 해서 화해를 이끌어야 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갈등과 미련이 아직까지도 남아있기 때문에 약간의 호흡을 내쉬어보는 것이다. "......" 내 생각을 눈치챈 것일까? 세리아가 나의 왼손을 꼬옥 잡아주기 시작한다. "세리아..." "......" 여전히 말을 하지 못하는 그녀. 그러나 백마디 말 보다 단순하게 손을 맞잡는 것으로도 세리아의 체온이, 그리고 세리아의 생각과 세리아의 근심, 그리고 우려가 내 마음속으로 전해져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텔레파시라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신비한 현상이지만, 모르는 현상이라고 해서 두렵다든지 무섭다든지 하는 기분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포근한... 마치 따스한 봄기운의 햇살을 맞으면서 초원을 걷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나에게 용기를 복돋아주기 위한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나에게 아리아와의 화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선해달라는 식으로 부탁을 하는 것일까.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리아가 현재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하다고 보여진다. "... 알았어. 너도 나름 힘내고 있었구나." "......" "그렇다면 나도 힘을 내야지." 자리에서 일어선 나. 아리아와 세리아를 전혀 화해시키지 못할 일도 없다. 사실 나에게는 그녀들의 사이를 다시 원상태로 회복시킬 수 있을 만큼의 전략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세리아. 내가 너희들의 사이에 끼어들기 전에, 나와 한가지 약속해줄 수 있는지 먼저 물어볼게." "...?"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나에게 말해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세리아. 어찌보면 내가 세리아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그녀에게 있어서 일종의 타부(Taboo)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씩.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천천히 세리아 본인이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또박또박하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한다. "세리아. 네 목소리로 직접 아리아에게 '말'을 해줘." 세리아와 같이 다시 산장으로 돌아온 우리들. 내 일을 인수인계 받은 유아 선배가 거의 작업을 다 끝냈는지 기지개를 펴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제야 돌아오는 거야?" "뭐... 그런 셈이죠." 약간 퉁명스럽게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유아 선배. 아무래도 내가 해야 할 일을 본인에게 떠 맡기고 간 것이 아직까지도 불만인 것일까. 나중에 제대로 사과라도 해야겠다. 유아 선배는 은근히 이런 거 가지고 오래 삐지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세리아가 살짝 나에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평소와 다름 없는 미소를 지어보인 채 산장 안으로 들어간다. 그 모습을 보던 유아 선배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질문하기 시작한다. "둘이서 해변가에서 뭐했어?"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어요." "거짓말. 야한 짓이라든지 그런 거 했지?" "... 유아 선배. 아직까지 제가 발정기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렇게까지 성욕에 굶주려있는 상태도 아니에요." "그래도 지아 선생님에게 들은 말로는, 남자는 항상 여자랑 같이 있으면 언제나 야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씀하시던걸." 음... 지아 선생님은 너무 남자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탈이다. 하긴. 사춘기 고교생을 다루는 양호 선생님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 상담이라든지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많이 해봤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느정도 청소년들이 생각하고 있는 섹스에 대한 환상, 그리고 욕구 등을 잘 알고 있을 터.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 오히려 이쪽이 곤란하게 될텐데. 어찌되었든 그건 잠시 뒤로 미루도록 하고. 유아 선배 특유의 여자의 감으로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세리아의 묘하게 달라진 반응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내 말을 듣고 난 이후의 세리아. 내가 지금까지 세리아와 같이 이 무인도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모습을 설마 해변가에서 보게 되었을 줄은 몰랐다. 저번에 난파선에서 유령사건 이후로도 그리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세리아였는데, '말'을 한다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 세리아는 본인 스스로 막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건 의학적으로도 검증이 된 사실이고, 지아 선생님 역시도 계속해서 학교에 근무할 때 꾸준히 세리아의 증상에 대해 진찰을 하면서 나에게 들려준 경험담을 이야기 해주셨다. 결과적으로 세리아는 과거의 그 범인의 경고에 의해서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 금기 사항 목록에 넣어버린 것이다. 자기 자신이 '말'을 하는 순간, 그 흉악범이 언제 어디에서 아리아를 해꼬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아마도 세리아는 그 걱정 때문에 지난 몇년동안 말을 해오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하다. 세리아가 가지고 있는 아리아에 대한 애정에 대해 고려를 해본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가설이기 때문이다. 해변가에서는 세리아에게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 못했다. 사실 대답을 들을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말을 해라'라는 대사를 나에게 직접적으로 들은 세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몸에서 약간의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말을 한다는 행위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하게 인식되어 있다는 사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 아무래도 세리아에게 말을 하게 한다는 기적을 바라는 것은 힘든 것일까.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고 있는 모습을 연출하자, 유아 선배가 의아하다는 듯이 묻기 시작한다. "뭐야. 세상 고민을 다 혼자 짊어지고 있다는 듯한 그 한숨은." "... 인생의 고뇌라고 할까요." "이보세요. 유에 씨. 우리는 아직 사회생활도 시작하지 않은 학생이라고요. 그런데 벌써부터 인생의 고뇌를 맛보게 된다면 안되잖아?" "그렇겠죠?" 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 인생의 고뇌 이전에 우리는 무인도에 표류되어 있다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거 아닌가. 이 정도면 그냥 나홀로 '더러운 이 세상!'이라고 욕을 하고 다닐 시간도 없이 당장의 끼니를 때울 수 있을만한 먹을것을 찾아 해메이는 편이 더 이득이 된다고 이미 내 머릿속은 그리 행동 패턴을 정해두고 있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무인도의 생활이라. 그렇다고 꼭 부정적인 효과만을 낳고 있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급적이면 다시 문명이 발달된 현대 사회로 진입하고 싶다. 게임도 하고 싶고. 그리고 통닭이라든지 탕수육도 먹고 싶은데. 잠시 사회에 대한 갈망을 하고 있을 무렵. 앞치마를 두른 세린이 우리들을 부르기 시작한다. "점심 다 되었으니까 노아 선생님께서 불러오라고 하시던데요." "... 세린. 설마 네가 요리한 것은 아니겠지?" 약간... 이 아니라. 대놓고 의심의 눈초리를 하면서 두 손을 허리춤에 올려놓은 포즈를 취한 채 묻기 시작하는 유아 선배의 말. 그러자 세린이 발끈하면서 들고있는 후라이팬을 들고서 외친다. "저도 이제 제대로 요리를 할 줄 안다니까요!" "네가? 못 믿겠어.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뜬 것도 아닌데 무슨 근거로 네 말을 믿을 수 있겠어?" "흥! 그렇게 의심이 많으니까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남자친구 하나 못 사귀고 있는 것이라고요." "너도 지금까지 남자친구 한번 사귄 적도 없잖아!" "저는 고백해오는 남자들이야 줄을 섰었답니다. 하지만 제가 사귀기 귀찮아서 다 찼을 뿐이죠." "으으..." 유아 선배의 반응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세린의 말이 맞는 듯하다. 뭐... 잠자코 생각을 해본다면, 몸매도 좋고 외모도 예쁘고 금발인 데다가 무엇보다도 집안이 엄청나게 부자다. 그러니까 고백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에게 이성을 사귄다는 점에 대해서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이제 거의 다들 아실거라 생각을 한다. 바로 남성혐오증. 남자친구를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 없을 정도의 지독한 남성혐오증을 가지고 있는 세린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남자들이 구애를 해와도 그녀 입장에서는 남자 보기를 돌 같이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 누가 세린을 마조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절대로 못하지. 나도 오히려 마조라기 보다는 S쪽이라고 생각을 할 정도였는데 말이다. ============================ 작품 후기 ============================ 250화쯤 되어가니 후기도 뭘로 채울지 고민이 듭니다 ㅡ_ㅡ; 뭔가 재미있는게 없을까요. 250화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이 된 유아 선배와 세린의 관계.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세린이었지만, 유아 선배는 아직 남은 비수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은지 계속해서 말을 한다. "그, 그래봤자 너는 어차피 평생 남자도 못 사귈 거잖아. 그렇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남성 혐오증이라며. 그런데 어떻게 남자와 사귈 수 있겠어? 안 그래?" "그, 그거야..." 이번에는 유아 선배의 공격이 정확하게 먹혀 들어갔나보다. 원래 처음에는 유아 선배와 세린의 말싸움이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는데, 요새는 약간 마음을 달리 먹었다. 일명 포지티브 마인드라고 해서,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도록 노력하자는 그런 류의 마인드를 최근에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은근히 제 3자의 입장에서 이 둘의 말싸움을 바라보면 뭐라고 해야 할까. 서로 말싸움을 하는 거 자체가 유치하기도 한데 그 모습들이 또 은근히 귀엽게 보인다. 평소에 서로의 개성이 워낙 강한 둘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말싸움이 붙게 되면 반나절이 지나도록 끝날 기미기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나중에는 제풀에 꺾여서 서로 헥헥거기로 휴전을 맞이하게 되는 에필로그로 마무리가 된다. 나름 훈훈한 결말로 끝나기 때문에 이제는 나도 이 둘의 말싸움을 '관람'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른 것이다.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아서 둘의 말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나. 지나가던 노아 교수님이 마침 우리들을 발견하고서 앉아있는 나에게 다가오며 작게 말한다. "... 또 시작된거니?" "일상 패턴이죠. 이제." "정말... 저 둘의 사이는 왜 이리도 좋지 않은걸까." 고심하기 시작하는 노아 교수님. 아무래도 나와는 달리 교수님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제까지고 아이들의 말다툼에 방관하는 태도를 취할수는 없나보다. 그러나 교수님이 구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세린이 후라이팬으로 유아 선배를 겨누면서 말한다. "나, 남성 혐오증 같은 것은 극복할 수 있어요!" "오호. 정말로?" "그럼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유에랑 팔짱을 껴봐." "뭐라고요?!" ... 점점 상황이 악화되어 가기 시작한다. 괜하 구경하고 있었떤 것일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진작에 자리를 뜨는건데. 뒤늦게 자리를 옮기기 위해서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유아 선배의 섬뜩한 한마디가 들려온다. "도망가면 평생 저주할거야." "그건 좀 봐주시죠..."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애초에 노아 교수님이 이 둘의 싸움을 말려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서 있을 수밖에 없는 나. 급 당황한 세린이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는지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 틈새를 재빠르게 파고들은 유아 선배의 일침이 가해진다. "거봐. 못하잖아." "할 수 있다니까요!!" 유아 선배는 당연히 모르겠지만, 세린과 나는 서로 육체관계까지 가진 사이다. 그때 당시에는 성욕이니 뭐니라는 분위기에 취해서 얼렁뚱땅 나와 관계를 가졌다고는 하나, 이렇게 다른 사람들도 다 보고 있는 공공장소(?)에서 남자와 팔짱을 끼는 일은 세린에게 있어서 하나의 거대한 시련이 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더불어 나에게도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남성 혐오증이냐. 아니면 승부욕이냐.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후로 최고의 난제를 만나게 된 세린. 결국 후자를 택했는지 눈을 질끈 감고서 외친다. "파, 팔짱만 끼면 되는 거잖아요!" "되긴 뭐가 된다는거니." 라고 말하면서 뒤에서 대기중이던 지아 선생님에게 딱밤을 맞는 세린이였다. '아얏!'이라는 귀여운 비명소리와 함께 자신의 머리를 감싸는 세린. 세린과 마찬가지로 앞치마를 두르고 있던 지아 선생님이 바깥에서 대기중이던 나와 유아 선배,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아 교수님 중 유독 유아 선배를 바라보며 말한다. "지겹지도 않니?" "그, 그거야. 자존심 싸움이라고 해야 할까요..." "자존심이 배를 부르게 해주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빨리 밥이나 먹으러 오도록." "그렇긴 하지만..." 이것으로 상황 종료. 역시나 지아 선생님. 대단하신 분이다. 지아 선생님의 중개 역할 덕분에 이번에도 별다른 무리 없이 점심식사를 하게 된 우리들. 오랜만에 실제로 주부 역할을 하고 있는 지아 선생님이 요리를 맡았기 때문에 그 맛은 상당히 각별했다. 다른 사람들이 요리를 할 때는 상당히 향이 강하다고 표현할 수 있지만, 지아 선생님은 야생에서 구할 수 있는 아주 다루기 힘든 향신료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게 맛을 낼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보여주고 계셨다. 이것이 바로 유부녀의 위엄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요리를 전혀 못한다는 사실은 아니다. 단지 각자의 개성에 맞춰 향이 너무 강하다는 이야기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야기다. 그리고 내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지아 선생님이 요리를 제일 잘 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아 선생님이 자주 요리를 안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일단 의료 분야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지아 선생님의 신경을 다른 곳에 분산시키지 말자는 모두의 의견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숨겨진 의미를 그대로 해석해보자면, 아마도 연장자 우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30대이기도 하고 말이다. 만약에 이런 말을 그대로 내뱉는 순간, 지아 선생님에게 무슨 보복을 당할지 상상할 수 조차도 없기 때문에 그냥 전자의 명목을 삼아서 다들 이런 식으로 지아 선생님이 자주 요리를 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채 요리 당번을 번갈아 하고 있는 것이다. 국물을 맛보던 노아 교수님이 지아 선생님에게 말한다. "맛있어요. 지아 언니." "그래? 많이 있으니까 천천히 먹어도 돼." 엄마 미소를 보여주는 지아 선생님. 사실 아리아와 비슷하게 약간 차갑고 사무적인 이미지도 조금 섞여있는 지아 선생님이었지만, 역시나 선생님은 선생님이시다. 저런 미소도 보여주실 줄 알고 말이다. 지아 선생님의 요리를 한번씩 맛을 본 일행들이라면 눈을 반짝반짝이며 역시나 지아 선생님 답다는 듯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만한 상황. 그러나 오늘의 식단은 평상시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 "......" 서로 말을 하지 않은 채 식사에 임하는 아리아와 세리아. 물론 세리아는 말을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말을 하지 않는 게 어찌보면 정상일지도 모르지만, 아리아는 입장이 조금 다르다. "아, 아하하. 이 요리 맛있네요. 지아 선생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리아?" "... 네." "......" ... 무겁다. 체중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분위기를 가리키며 표현한 말이다. 다시 바꿔서 설명하자면 공기가 무겁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평소에는 내가 말을 하면 태클을 걸어오는 순위 넘버 투에 속하는 아리아가 나의 말에 태클을 걸어오지 않다니. 2012년 지구 멸망설이 사실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리아의 분위기는 매우 저조해보였다. 참고로 태클을 걸어오는 순위 넘버 원은 압도적인 지지율로 세린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 영광을 우리들의 영원한 부잣집 금발 아가씨, 이세린에게 돌리도록 하자. 수상 소감은... 왠지 욕만 날아올 거 같으니까 생략하겠다. 옆에서 보는 것 만으로도 숨이 막히는지 유아 선배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우리 둘의 분위기를 관찰한다. 다른 사람들 역시도 마찬가지.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는 지아 선생님을 빼고는 모두가... 가 아니라. 분위기 파악을 전혀 못하는 사람이 한명 있긴 하다. 이름하여 엘리. "냐옹~" 품 안에 초호기를 안은 채 직접 밥을 먹여주고 있는 엘리의 모습이 보인다. 분위기 파악을 전혀 못하는 엘리였기 때문에 이렇게 평소와 다름 없는 식사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하더니만. 지금의 상황을 너무 적나라게 표현한 말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 나도 엘리가 되고 싶어." "동감이야." 옆에서 세린이 작게 중얼거리자, 나 역시도 마찬가지라는 듯이 말을 꺼낸다.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아리아와 세리아에게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크기로.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친 우리들. 제대로 소화가 다 될지에 대한 여부는 잠시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지아 선생님이 왠일로 곧바로 나를 호출하셨기 때문이다. "잠깐만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네. 상관은 없어요." 어차피 오전 작업도 유아 선배의 활약(?) 덕분에 마무리가 된 상황이고. 나머지는 내일부터 다시 나무 자르기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공구들만 미리 손질을 하면 된다. 요리를 담당한 사람들은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는 우리들만의 관습 덕분에 지아 선생님은 자연스럽게 설거지 당번에서 면제된 상황. 점심식사를 마치고 난 이후에 휴식을 취하는 일행들에게서 잠시 빠져나온 나와 지아 선생님은 근처에 있는 빨랫터로 자리를 옮긴다. 나뭇가지 기둥에 서로 연결되어 있는 밧줄위로 걸려있는 세탁물들이 공터 안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이는 장면을 연출한다. 그 앞에 자리를 잡은 우리들. 지아 선생님이 나를 호출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아리아와 세리아에 대해서 알아낸 건 없니?" "알아낸 거... 말인가요?" "그래. 저번에 산장으로 오기 전에 노숙을 했었잖아. 그 때 너와 내가 각자 아리아와 세리아의 파트너가 되어서 불침번 근무를 짜게 했던 거. 기억나?" "네... 그야 뭐..." 물론 재대로 기억이 난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그 때 당시에 세리아와 팀이었고, 지아 선생님은 아리아와 팀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불침번 근무를 설 때 나는 세리아에게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그녀들에 대해서 무언가의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은 엄연한 거짓말이다. 비록 의도에는 약간 어긋난 상황이었지만, 세리아가 아닌 아리아에게서 그녀들의 과거를 듣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나. 그 이후로 가급적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하지 않는 쪽으로 행동을 기울이던 나였지만,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모두가 둘의 과거 이야기를 몰라도 되는 것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왜 몰라야 하는 것일까? 사실 전혀 부끄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 범인에게 실제로 강간을 당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위협만 가한 채 실제로 아무런 피해 없이 둘은 무사히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거 아닌가. 본인들에게는 마음의 상처로 남아있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남에게 비밀로 하면서 지내는 일 까지는 아니라고 생각이 된다. ... 나 역시도 여기서는 결단을 내려야 할 타이밍인 것일까.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을 하지 못했지만, 그녀들의 화해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한다. 설령 그것이 아리아가 나에게 가지고 있는 신뢰를 배반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도. "... 지아 선생님. 잠시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는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지아 선생님에게만 들려주도록 한다. 이것도 나름 절충안이라고 보면 될 수도 있겠다. 아리아와 세리아의 이야기에 대한 사실을 그대로 털어놓자, 이야기를 얌전히 듣고 있던 지아 선생님이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한다. "왜 그 사실을 나나 노아에게 상담하지 않았니." "양심에 찔린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게 있어서요." "바보구나. 유에. 학교에서는 선생과 제자의 관계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우리들은 무인도에 있어. 여기는 학교도 아니야. 그렇다고 법과 규칙이 존재하는 사회도 아니지. 아무것도 없는 야생의 세계야. 결국 우리들은 사회적인 지위보다는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아끼는 동료애로 무장하고 있는 하나의 집단이라고 볼 수 있잖아. 그런건 연장자인 다른 사람들에게 상담을 했어야지." "...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사과를 받고자 너를 책망한 것은 아니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마렴." 작게 한숨을 쉰 지아 선생님이 평소와 같은 옅은 미소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을 이어간다. "용케도 혼자서 고민을 많이 했었겠구나. 역시나 남자아이야. 장해." "남자라는 성별이 관계가 있는 겁니까?" "글쎄. 그래도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말은 할 수 없지." 피식 웃으면서 작은 농담도 해보이는 지아 선생님이었다. 선생과 제자라는 관계는 아니지만, 지아 선생님은 우리들과는 다르게 사회라는 장소를 경험해본 어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와 같은 또래 녀석들의 상담을 전문적으로 해온 일종의 전문가.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지아 선생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요즘은 확밀아도 영 흥미가 떨어져서... 조만간 접게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고보니 다음달에 기사단이 나온다 하던데요. 흠... 251화 나와 지아 선생님만 너무 둘이서 오랜 시간을 보내면 다른 사람들(특히나 유아 선배)의 의심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우선은 산장으로 복귀한다. 다들 여전히 휴식을 만끽하고 있을 무렵, 볼 일이 있는지 산장에서 나오려고 하던 아리아와 제대로 마주친 우리들. 순간적으로 움찔한 아리아가 살짝 고개를 떨구면서 우리들을 지나친다. 옆에서 아리아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지아 선생님이 팔짱을 낀 채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 중증이구만. 이거." "그러게요." 평소와 같으면 '두 분이서 무엇을 하고 오신 건가요? 아, 괜찮습니다. 유에 선배.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요. 분명 새빨간 원으로 둘러 쌓인 숫자 19금이라는 표시가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 표시될법한 상황이라는 사실은 저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을테니까요. 오호홋!'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을 하지만. 역시나 마지막에 표현된 마녀 웃음은 제외하도록 하자. 이 웃음은 아리아에게 어울린다기 보다는 이세린에게 더 어울릴 거 같으니까. 산장으로 들어온 우리들. 체리와 같이 초호기의 애교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세리아의 모습을 거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세리아를 피해서 자리를 옮긴 것일까요." "그럴 확률도 매우 높다고 볼 수 있지." 내 질문을 받은 지아 선생님이 친절하게 답변을 내려 주신다. 아마도 한 지붕 아래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으면 현재 약간 삐긋한 자매 관계의 무거운 공기가 주변 사람들에게도 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아리아가 먼저 자리를 피한게 아닐까 라고 보여진다. 저렇게 보여도 은근히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기 때문에 아리아라면 충분히 그런 의도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른스럽다는 말이 아리아에게 괜히 붙은 게 아니다. 반면에 우리들보다도 나이가 많으면서도 어린애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취급받고 있는 누나가 나를 바라보자마자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말한다. "어디갔었어? 남동생! 심심했잖아." "누나가 심심한 일과 내가 볼 일을 보고 온 것이랑 무슨 상관인데." "깊은 상관이 있지. 대한민국에서 남동생의 역할은 심심해하는 누나의 장난감 상대가 되어줘야 한다고 나와 있거든." "도대체 어디에 나와 있는데." "'누나를 즐겁게 해야 하는 남동생에 관한 법률' 제 12조 2항에 나와있어." "... 함부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법률을 개정하지 마시지." 아리아와 누나의 나이가 서로 바뀐 것이 아닐까 라는 쓸모없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자, 주방에서 물컵을 내온 노아 교수님이 나에게 내민다. "마실래?" "고맙습니다." 노아 교수님에게 건내받은 내가 컵을 마시자, 평소와는 다른 물의 맛을 혀의 감각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교수님. 이거..." "아, 뭔지 알겠니?" "아니요. 전혀요." 이색적인 물의 맛을 한번에 알아차릴 만큼 그리 높은 식견을 자랑하지 않는 나의 혀. 뭐... 전문적으로 이런 분야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은 눈을 감고 어떤 종류의 음료인지 척척 알아 맞추는 사람들도 있던데 말이다. 특히나 가장 신기한 것이 바로 콜라와 펩시를 구별하는 사람이었다. 음...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아직까지도 정말 신기하게 느껴진다. 무슨 초능력자라도 되는 것인가. 그런 사람들 말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신기하네. 아니지. 지금은 콜라니 펩시니 하는 그런 것을 따질 일이 아니지 않은가. "퀴즈에는 워낙 소질이 없는 관계로 노아 교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답을 들려드릴 수 없을 거 같은데요." "어머, 빠른 포기니?" "기권이라고도 하죠." "아깝구나. 정답은 '녹차'였습니다." "녹차요?" "응. 엘리가 알려줬어." 라고 노아 선생님이 거실에서 멀뚱멀뚱하게 서 있는 엘리를 가리키자, 엘리가 손으로 'V'자를 그리면서 우리들의 앞에 나름의 제스쳐를 표시해보인다. 그러고서 작은 말로 중얼거리는 것도 있지 않는다. "... 내카 체일 찰나카." "......" 아무래도 누나가 또 엘리에게 이상한 한국말을 알려준 모양이다. 아니지. 유아 선배였나? 누구였었지? 저번에 '한국말 넘후 어려워효.'를 가르쳐 주었던 대 스승님의 정체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나저나 녹차라니. 저번에 야자수 열매같은 음료를 구해 온 누나 덕분에 나를 포함해서 여기에 있는 무인도 생존자 멤버 전원은 거의 음료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트라우마로 박혀서 이런 류의 시도를 별로 안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노아 선생님이 나에게 녹차를 권유한 것은 조금 의외였다. "설마 이것도 마시고 설사를 하는 건 아니겠죠?" "그럴리가 있겠니. 엄연히 녹차인데. 녹차의 효능 중에는 설사를 하게 해 준다는 사실이 없지 않니?" "그런가요?" "응. 아마도...?" "불안해지기 시작하는데요. 갑자기 무지하게 말이죠." "어머, 농담이란다. 이번에는 지아 언니에게 확실하게 확인을 맡았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신빙성이 보장된 안전제품이군요." 지아 선생님이 보장하셨다면야 뭐... 안전하겠지. 두 번 다시 폭풍 설사 에피소드는 겪고 싶지 않으니까. 녹차를 마시며 여유를 부리는 사이에. 잔업도 대략 끝났겠다. 마땅히 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내일 나무 자르기 작업에 곧바로 투입될 수 있게끔 공구 정리는 한번쯤 해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나였기에 부지런하게 자리에서 일어선다. 창고로 향하고 있던 도중에 마주친 누나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어디가? 남동생." "보시다시피 일하러." "무슨 일? '볼'일?" "생리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작업을 하러 간다는 뜻이야." "성실하네. 내 남동생이지만 정말 기특해." "그러니까 조금은 나를 본받으라고." 누나에게 남동생을 본받으라는 뼈저린 충고를 던지고 다시 창고로 향한다. 뒤에서 '쳇. 건방진 남동생이야.'라는 누나의 투덜거림이 들려왔지만, 애써 무시해버린다. 누나의 투정을 하나하나 다 들어줘봤자 나만 손해이기 때문이니까. 간만이 문을 열어보는 창고. 우리들이 난파선에 가 있는 동안, 나름 공구들끼리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었는지 제대로 열을 갖춘 채 서있는 모습이 정말 보기가 좋다. 그나저나 이런거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 안될텐데 말이다. 내가 무슨 공구 오타쿠도 아니고 왜 이런 생각을 하는건지 모르겠다. 난파선 탐험대를 구성해서 산장의 자리를 비운 사이에 비가 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공구가 젖었다든지 하는 그런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사실 비가 온다고 해도, 나름 우천에 대비한 조치를 다 해뒀기 때문에 공구가 물에 젖을 확률은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이 공구들의 수명이 앞으로 얼마나 더 연장될 수 있을런지나 모르겠다. 뭐, 여차 싶으면 새로 만들수는 있지만, 그래도 기계를 통해서 가공된 공구들이 훨씬 더 사용하기 편할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아깝지만, 최대한 아껴서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텐데. 나름의 근심어린 시선으로 공구들을 널리 펼쳐놓으며 햇빛에 말리기를 시전해본다. 비가 오지 않았다고는 하나, 지면에 물기가 있으면 그 물기를 타고 수분이 올라오기 때문에 공구가 눅눅해져버리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자주 일광욕을 시켜주는 것이 녹이 스는 일에 대한 나름의 최선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하는 추측성 어린 생각으로 일광욕을 시켜준다. 공구들이 햇빛을 쨍쨍 받는다고 해도 녹이 슨다거나 하지는 않을거라고 보여지니까. 공구들을 널리 펼쳐놓은 채 긴 한숨을 쉬며 이마에 약간 맺혀있는 땀을 닦는다. 다른 사람들은 간만에 고구마와 감자 밭, 그리고 빨래라든지 아니면 노아 교수님이 아까 발견한 녹차잎을 더 따러 가거나 하는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엘리. 빨리 오렴." 유아 선배의 말이 들려온다. 아마도 엘리 역시도 유아 선배와 같이 빨리 널기 팀에 속해있는게 아닐까 라는 추측을 해본다. 우리들 중에서도 키가 작은 엘리가 빨래를 넌다는 일 자체가 상상이 안 가지만, 그래도 귀여운 우리 엘리를 순식간에 루저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 재빨리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 남자가 키가 작다고 해서 '루저'라는 말을 내뱉은 개념없는 모 여성이 떠올랐지만, 어차피 우리들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니까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고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 뚱한 표정으로 유아 선배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엘리. 싫어하는 것인지 아니면 좋아하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는 특유의 표정을 지으면서 작업에 임한다. 저것이 진정한 포커페이스일지도. 엘리에게 개인 교습이라도 받고 싶을 정도로 무표정을 유지하는 모습. 그러나 그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역시나 아까 나에게 말해줬던 '내카 췌일 찰나카'였다. 저것도 재미들린 것인가. 점점 이상한 한국말을 배워가는 엘리의 앞날이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한다. 노아 교수님이라든지 지아 선생님에게 전문적인 한국어 교육을 배울 수 있도록 보장을 해줘야 하는 것일까. 이러다가 한국어가 아니라 짝퉁 한국어를 배우게 될지도 모르겠다. ============================ 작품 후기 ============================ '라이어 게임'이라는 일드를 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심리추리 드라마 같은 걸 좋아해서 엊그제부터 푹 빠져서 보고 있는데요. 진짜 시나리오나 연출같은 거 생각하는 부분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그런 의미로 라이어 게임 파이널을 보러 가보겠습니다. 그 전에 롤 한판 땡기고요; 252화 엘리에 대해서 신경을 쓰던 와중에, 지아 선생님이 나에게 다가오면서 말한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있어? 청년." "아, 지아 선생님." 쭉 뻗은 늘씬한 각선미의 곡선을 그대로 살려주는 스키니 진을 입고 등장한 지아 선생님. 결혼을 한 유부녀라고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의 색기 넘치는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노아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쌍벽을 이루는 저 거유. 젠장... 정말 부럽게 느껴진다. 지아 선생님과 결혼하신 분 말이다. 지아 선생님과 결혼했다면 분명 집 안에 들어갈 때마다 지아 선생님이 야시시한 차림으로 매일 유혹을 할텐데. 아니지. 이렇게 생각해보면 오히려 안 좋은게 아닌가? 서큐버스에게 정기를 빨리는 것이 굳이 좋은 효과라고는 단언할 수 없으니까 정정하도록 하겠다. 사람에 따라 상당히 피곤한 일이 될 수도 있다고. 내 옆에 앉은 지아 선생님이 긴 머리를 쓸어 내리고선 입을 연다. "너, 세리아에게 '말'을 하도록 지시했었지." "... 초능력이라도 사용하고 계신 겁니까? 선생님." "바보구나. 그럴리가 없잖니." 선생님 혼자서만 앉아있기도 조금 뻘쭘한 상황이라서 나 역시도 털썩 하고 제자리에 앉는다. 시선의 균형을 맞춰줬다는 사실에 지아 선생님이 빙그레 미소로 나의 센스있는 행동에 경의를 표하고선 다시금 화제를 이어가기 시작한다. "아까 세리아가 나에게 와서 묻더라고." "어떤 식으로요?" "자신이 말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 세리아도 본인 스스로 나름 노력을 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세리아의 행동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다. 바로 자신이 말을 못하는 이유는 기관지나 성대결절 등 신체적인 요소가 아니라 스스로가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정신적인 문제라는 사실. 세리아가 의지가 강하다면 자신의 의지 그대로 몸을 맡기면 말 역시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거라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세리아는 스스로의 힘으로 역경을 극복하기 보다는 지아 선생님에게 상담을 요청한 것이다. 타인에게서 도움을 청하는 것도 어찌보면 한가지의 선택 방안이 될 수 있다.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면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리아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내가 말하고 싶은 이유는 바로 스스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지아 선생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한다. "그 아이는 여전히 말을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 나도 너에게 그 아이들의 과거 이야기를 들어서 알게 되었지만, 세리아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는 보통이 아니야."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말씀인가요?" "정신질환에 대해서는 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 잘 대답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생각은 해. 차라리 신체적인 요소에 문제가 있다면 괜찮을지도 몰라. 현재 의료기술은 매우 발달되어 있는 상태니까 치료할 수 있는 확률이 매우 크다고 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정신적인 문제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문제는 곧 본인 스스로 말을 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절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뜻과도 같은거야." 공터 안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면서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을 정돈하던 지아 선생님. "결국 의료라는 치료 수단이 먹히지 않는 가장 위험한 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거지. 지금 세리아가 가지고 있는 병세는 그렇게 표현할 수 있어." "......" "어떠한 약도, 어떠한 치료 방법도 통하지 않는 무서운 질병이야. 본인 스스로에 대한 정신적인 문제는 그 정도로 심각하지. 괜히 정신과 의사가 있는 것이 아니야. 그만큼 인간이라는 존재의 두뇌는 매우 섬세하고, 정교한 일종의 기계장치와도 같은 것이니까. 다만 일반적으로 기계와 두뇌가 다른 점을 콕 찍어서 설명을 해보자면, 인간의 두뇌는 기계에 비해서 고장나면 수리하기가 정말 힘들다는 차이겠지." "그렇군요..." 약간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사실 나는 세리아가 스스로 말을 할 수 있게끔의 의지를 갖추게 용기를 복돋아주면 그것으로 세리아가 말을 할 수 있을거라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건 나의 엄연한 착각. 매우 커다란 오해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지아 선생님의 말을 통해서 깨달은 것이다. "어렵네요." "네가 고민하는 이유도 충분히 알 수 있어.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세리아가 스스로 '말을 하겠다,'라는 의지가 전제조건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야." "그럼 세리아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경우의 수는 전혀 없는 것인가요?" "글쎄. 아까도 말했다시피, 그쪽은 내 전공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뭐라고 제대로 설명해줄 수는 없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어." 자리에서 일어난 지아 선생님이 바지에 묻은 흙먼지를 손으로 털어내면서 말한다. "세리아가 말을 하겠다는 생각을 네가 품어주게 한다면,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 어느새 해가 저문 상황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우리들. 식사를 하기 전에 이미 모두가 다 같이 호수에서 목욕을 하고 왔기 때문에 어제처럼 달밤에 차가운 호숫가에서 목욕을 할 필요는 없었다. "아~ 시원하다." 난파선에서 가져온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말리는 유아 선배. 그러자 옆에 있던 세린이 유아 선배에게 따지듯 외친다. "잠깐만요! 왜 선배가 저보다 먼저 수건을 사용하는 건가요?!" "그야 당연하잖아. 내가 너보다 선배니까. 그렇지?" "선배일수록 후배에게 양보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연장자 우대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잖아." "나이 먹은게 자랑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이럴때는 자랑이지." "으으..." 또 다시 시작된 유아 선배 VS 이세린. 대낮이든 한밤중이든 둘의 말싸움은 언제 어디서라도 발동이 가능한 준비상태를 항상 유지하고 있다. 어떤 의미로 정말 대단한 둘의 관계라고 할 수 있겠다. 견원지간이라는 말이 이제는 저 둘을 위한 사자성어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일매일을 분쟁과 분투로 보내는 두 여성을 뒤로한 채. 아리따운 은발을 수건으로 말리면서 자리에 앉는 아리아의 모습이 보인다. "......" 여전히 무표정. 평소에도 사실 저런 표정을 짓는 녀석이긴 하지만, 오늘따라 그 표정이 상당히 매섭다. 게다가 말수도 별로 없다. 아리아가 무뚝뚝하다기 보다는 그래도 할 말은 하고 지내는 녀석이다 보니까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무뚝둑하다.'라는 느낌을 선사해주게 된 원인이 되었다. 무게감을 잡는 아리아도 꽤나 무섭구나 라는 생각도 부가적으로 들었다는 사실도 빼놓지 말도록 하자. 아리아와 약간 떨어진 장소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은 세리아.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면서 살짝 살짝 아리아의 눈치를 보는 모습이 보인다. 상당히 오묘한 둘의 관계. 가급적이면 빨리 해결해주고 싶지만, 이 둘의 관계 개선을 위해 꼭 필요한 전제조건이 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섯불리 조치를 취할 수가 없다. ... 어쩔 수 없지. 일단 다시 한 번 더 세리아와의 대화를 진지하게 나눠볼 필요가 있을듯 하다. 하지만 나와 세리아 단 둘이 남아봤자 사실 그리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줄 자신이 없다. 내가 같은 여자로서의 입장으로 세리아를 상담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그저 세리아보다 약간 연상일 뿐이고 나머지는 세리아에게 도움이 될만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다. 차라리 지아 선생님이 더 세리아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긴 하겠지만... "음..." 고민을 해본다. 손에 쥐고 있던 팬이 저절로 손가락들 사이로 휙휙 지나가기 시작한다. 학교에서도 자주 팬을 굴리는 버릇이 있던 나였기에 무의식적으로 이 버릇이 나오게 된 것이다. "잠시만 모여주실래요?" 식사를 다 마친 일행들을 불러 모으는 나.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리는 상황에서 나는 나름의 생각할 수 있는 조치 방안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오늘의 불침번 근무는 조금 특이하게 해볼까 해서요." "특이하게?" 내 말에 의구심을 품으며 머리 위로 물음표 의문부호를 띄우는 누나. 다른 사람들도 대놓고 누나처럼 되묻지만 않을 뿐이지, 다들 내 말에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네. 오늘은 불침번을 3인 1조로 세울까 하는데요." 3인 1조 불침번. 우리들의 인원수는 대략적으로 10명이다. 그래서 필수적으로 한명이 남게 되는 상황. 그래서 나이가 어리고 가장 잠을 많이 필요로 하는 엘리를 깍두기로 해서 다른 팀에 붙여두기로 한다. 3인 1조로 불침번을 서는 만큼, 각자 부담해야 하는 근무 시간도 그만큼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 그 불평불만을 억제하기 위해 내가 내세운 비장의 카드가 한가지 있었다. 바로 3명이서 근무를 설 때, 1명이라든지 많게는 2명까지 근무 도중에 취침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근무 도중에 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반기는 눈빛. 하지만 이건 자세히 생각을 해본다면 조삼모사에 불과하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전혀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내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는 바로 3인 1개조로 '처음' 불침번을 서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뭐든지 '처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호기심을 유발하기에 상당히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매번 2명이서만 불침번을 서게 되면 둘 다 할 말도 떨어지게 되고 해서 3명이 서게 되면 서로 자연스레 말도 많아지고, 그리고 근무시간에 더 집중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형식적인 말만을 늘어놓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받아낸 나. 그리고 나는 자연스럽게 나와 지아 선생님. 그리고 세리아를 한 조로 꾸리게 된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슬럼프입니다' 토크 제 1회입니다. 말 그대로 슬럼프가 왔습니다. 글도 잘 안 쓰이고, 개인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일도 잘 안 풀리는 거 같아서 요새 좀 우울합니다. 일단 계속 생각을 좀 해보고... 차후에 어떤 식으로 글을 연재할지 다시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을 거 같습니다. 253화 나름 괜찮은 화술로 3인 1조의 불침번 제도를 시행할 수 있게 된 나. 내가 생각해도 정말 괜찮은 화술실력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미안하다. 사실 화술 능력은 별로 상관 없고, 그냥 한번도 해보지 못한 조합이었기 때문에 호기심 삼아서 다른 사람들의 인지도를 끌어냈을 뿐이다. 호기심이라는 것은 정말 무섭다. 음. 그렇고 말고. 어찌되었든 초번초를 맡게 된 나와 세리아, 그리고 지아 선생님 조. 3인 1조이다 보니까 굳이 거실에서 잘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에 불침번을 담당하는 인원을 제외하고는 모든 인원들은 침실에서 취침을 취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거실에서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세리아에게 많은 신경을 쓰이게 할 거 같기 때문이다. 비록 자고 있다고는 하나, 행여나 깨어 있을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잠에 빠졌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거실로 다시 돌아온다. 난파선에서 구해온 양초를 테이블 위에 켜놓은 채 자리에 앉은 우리들. 화로의 불이 거실의 내부를 환하게 비춰주고 있긴 하지만, 양초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놓으니 서로간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럼... 우선 시작을 해볼까." 지아 선생님이 나에게 신호를 보낸다. 우리들이 굳이 이런 수고스러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고 오로지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바로 세리아가 '말'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 세리아 본인의 힘으로 말을 해도 좋을지에 대한 망설임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본인의 의지에만 기대기에는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판단한 우리들이었기 때문에 하다못해 지아 선생님이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 알아보고, 최대한 세리아의 힘이 되어주자는 의견에 힘을 모으고 있었다. 우선 지아 선생님이 세리아의 정면에 앉으면서 말을 하기 시작한다. "입을 벌려봐. 아~ 하고 말이야." "......" 작은 입을 한껏 벌려보는 세리아. 남자 앞에서 입을 활짝 벌리는 것이 조금 창피한지 약간 빨개진 얼굴로 나를 몇번씩 바라본다. 내가 스스로 말하면 자랑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세리아는 진심으로 나를 좋아하고 있다. 여자의 입장에서 이성을 좋아한다는 그런 의미로. ... 역시나 내가 말하고도 스스로가 쑥스러워진다. 연애라는 것이 이리도 창피한 것이었나. 그렇다고 실제로 내가 세리아와 교제를 하고 있다는 말 뜻은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그렇다는 의미다. 잠시 목 안의 상태를 확인하는 지아 선생님. 누누이 나에게 신체적인 문제는 없다고 강조를 하셨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금 진찰에 임한다. 돌 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듯이, 신중해도 나쁠 것은 없기 때문이다. 잠시동안 세리아의 목 상태를 확인하던 지아 선생님이 세리아의 어깨를 한번 두드려보이며 말한다. "됐어. 검사 완료." "......" 계속 오랫동안 입을 벌리고 있어서 그런지 턱에서 통증을 느끼기 시작하는 세리아. 그러나 심각한 수준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간단하게 양 턱의 끝을 잡은 지아 선생님이 간단한 안마를 해준다. "지아 선생님. 세리아의 상태는 어떤가요?" "너무 건강해서 탈이야." "... 그런겁니까." 이것도 나름 반전이라고 한다면 반전인걸까. 사실 세리아의 상태가 너무 건강하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상황이라는 점 정도는 나 뿐만이 아니라 지아 선생님도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아니, 지아 선생님이 오히려 더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뭐니뭐니해도 주치의니까. 어쨌든 잠시동안 세리아의 진찰을 맡은 지아 선생님이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시면서 별거 아니라는 듯이 다시금 말을 이어간다. "역시나 말을 못하는 이유는 정신적인 문제야." "정신적인 문제라..." "세리아. 잘 들어. 네가 말을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지 않는 이상, 이 이상증세는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알겠니?" "......" 지아 선생님으로부터 충고 아닌 충고를 듣는 세리아. 아무런 말 없이 지아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다가 근처에 있는 종이를 집어들고 펜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한다. 세리아가 쓴 글이 무엇일까 하며 바라보려던 찰나에, 익숙한 문구가 들어온다. - 말을 하고 싶어요! 뒤에 느낌표까지 새겨 넣으면서 진심으로 자신이 말을 하고 싶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보여주기 시작하는 세리아. 평소에 그녀에게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오기까지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던 지아 선생님이 피식 웃어보이며 세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 시작한다. "그 정도로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문제가 없겠는데." "그럼 어째서 세리아는 말을 하지 못하는 건가요?" 이번에는 말을 하지 못하는 세리아를 대신해서 내가 그 궁금증을 묻는다. 그러자 지아 선생님이 팔짱을 낀 채 나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하는 발성법을 까먹은 게 아닐까?" "... 글쎄요." 직접적으로 본인에게 대답을 듣기 위해서 지아 선생님과 내가 세리아를 바라본다. 그러자 세리아가 자신의 입으로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듯이 입을 살짝 벌린다. 설마. 정말로 말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지아 선생님의 말씀 그대로 개인적인 의지가 있기 때문에 세리아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 드디어 통할지도 모르겠다. ... 그러나 세리아의 목소리에 들려오는 것은 말이 아니라 일종의 단순한 '소리'에 불과했다. "아..... 아아..." 단순하게 '아' 발음만 내뱉는 세리아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지아 선생님이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말한다. "중증이구나." "갑자기 희망적인 상황에서 절망적인 상황으로 바뀐듯한 느낌이 드는데요." "세리아. 너, 발성법을 전혀 모르거나 하진 않지?" 고개를 끄덕이며 지아 선생님의 물음에 긍정하는 세리아. 역시나 이것으로 다시 한 번 세리아의 신체적인 문제점이 장애 요소가 된다는 가설은 다시 소멸되어버린 셈이다. 하지만 세리아는 여전히 말을 하지 못한다. 더욱에 자신이 말을 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까지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이다. 내게 있어서는 앞 뒤가 맞지 않는 미스테리한 상황에 잠자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는 나보단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지아 선생님이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리아. 다시 한 번 입을 좀 벌려볼래?" "......" 작은 입을 또 한번 벌리는 세리아. 이번에는 확실하게 진찰을 하려는 듯이 근처에 있는 숟가락을 가져와서 세리아의 혀를 누른 채 성대가 있는 곳까지 진찰을 한다. 저 장면은 병원에서 자주 보았던 그 장면이었는데. 나도 몸살감기에 걸렸을 때 저런 식으로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목이 원전히 쉰 상태에서 진찰을 받았었는데, 그때의 방식과 상당히 유사하다. 역시나 의료계에 종사하는 분 다운 위엄이 느껴진다. 조금 더 자세히 진찰을 하던 지아 선생님이 이윽고 숟가락을 꺼내면서 말한다. "됐어. 진찰 끝." "......" 아까와 같이 세리아의 양쪽 턱 끝을 잡고 스트레칭을 해주는 지아 선생님.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는 특별한 문제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어떤가요? 지아 선생님." "아까와 같은 답변을 주고 싶은데." "역시나 신체쪽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건가요." "정신쪽에도, 그리고 신체적으로도 문제가 없어. 그렇다면 이런 말이 나오는 수밖에 없는거지." 테이블에서 일어선 지아 선생님이 세리아를 유심히 지켜보면서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정신과 육체의 건강상태. 둘 중에 어느 한 곳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소리일지도." "거짓말...?" "난 잠시 바깥에서 바람 좀 쐬고 올게. 그동안 불침번 근무, 부탁한다." 라고 말하면서 문을 열고 산장 바깥으로 나가는 지아 선생님. 달빛의 은은한 분위기를 느껴보려는 듯이 그 이상으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과감하게 발걸음을 옮겨버린다. 졸지에 거실에서 단 둘이 남아있게 된 나와 세리아. 아까 지아 선생님의 말을 다시금 곱씹기 시작하는 나는 뭔가 한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정신과 육체. 둘 중에 어느 한 곳이 분명 문제가 있기 때문에 세리아가 말을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 역시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니까. 그럼 과연 어느쪽이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분명 지아 선생님은 나름의 진찰능력을 보여주면서 제대로 세리아의 목에 관한 검증을 한 상태다. 지아 선생님이 그쪽 분야의 전문가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지아 선생님의 성격으로 봤을 땐 모른다는 사실은 솔직하게 모른다고 쿨하게 인정하는 성격. 만약에 지아 선생님이 자신이 모르는 병에 의해서 세리아가 말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저런 말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렇다면 역시... ... 거짓말을 하고 있는 쪽은 바로 '정신'쪽인가. "세리아." "...?" 나지막히 세리아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러자 의자에 앉은 채 화로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던 세리아가 나에게 시선을 던지기 시작한다. 올바르고 순수한 눈빛. 세상물정 하나 모르는 듯한 청초한 이미지의 세리아. 그러나 그녀가 지아 선생님과 나에게 한 가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아니, 사실은 거짓말이 아니라 어떤 의미로 말을 못하겠다는 간접적인 표현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는 반어법이라는 문장 표현이 존재하니까. ============================ 작품 후기 ============================ 하루만 쉰건데, 왠지 모르게 굉장히 오랜만에 뵙는 느낌입니다. ^_^;; 요즘 날씨가 더워져서 선풍기를 다시 꺼낼까 말까 고민중인데... 아무래도 5월에 선풍기를 꺼내는 건 좀 이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음... 어떻게 해야 좋을지. 254화 근처에 있는 의자를 잡고 세리아의 옆에 자리를 잡는다. 활활 타오르는 화로 안으로 작은 나뭇가지를 던지며 말하는 나. "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도 남아 있는거야?" "......" 아까와 같이 나는 말을 할 수 있다는 당당한 태도를 보여주지 못한다. 역시나 거짓말을 한 쪽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쪽이었나. 우리들에게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기세 좋게 말은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세리아는 연약하디 연약한 여성. 자신이 당한 심적인 문제를 포함해서 타인을 걱정하는 마음, 그리고 연약한 마음씨를 통틀어서 전부 다 세리아라는 인물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세리아가 아까와 같이 기세좋게 우리들에게 '말을 할 수 있다!'라고 제대로 선언했을리가 만무하다. 필히 그것은 우리들은 안심시켜주기 위한 일종의 방책이었을 것이다. 자신보다 타인을 위하고 아끼는 심성이 매우 강한 세리아의 성향을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그 것이 정답이리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았는지, 잠시 말을 잊지 못하는 세리아가 나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지 화로에 시선을 응시한 채 그저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 만약에 정말로 세리아가 말을 하겠다는 의지가 남아 있었다면 내 말을 부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말이 허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이후에 나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질문을 받아버리면, 세리아의 입장에서는 도리어 할 말이 없었을테지. "세리아. 너의 입장에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네가 말을 해야 하는 이유는 존재하잖아. 다른 사람은 그렇다고 쳐도, 적어도 아리아를 위해서라도 네 목소리를 직접 들려줘야지. 안 그래?" "......"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 아리아라는 비장의 인물의 이름까지 꺼내며 세리아의 의지를 다시금 독촉시키려고 해봤지만, 이것도 조금은 난항을 겪고 있었다. 필히 아리아 역시도 세리아에게 말을 다시금 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 시도를 해봤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조금 그렇긴 하지만, 아리아에게 전적으로 세리아의 말을 못하게 된 상황에 대해서 전혀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리아를 지키기 위해서 세리아가 그 댓가로 '말'을 잃어버린 셈이니까. 만약에 그 자리에 아리아가 없었다면 세리아는 말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제까지고 '만약'이라는 가정이지만, 대략적으로 예상해본다면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는 벌어졌고, 그리고 그 이후로 세리아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리아 역시도 그렇게 보여도 세리아의 여동생이기 때문에 분명 자신의 언니가 다시 말을 되찾을 수 있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을텐데. 여전히 세리아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면 아리아의 그런 지극정성도 세리아에게 도달하지 못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아리아도 해내지 못한 일. 세리아를 끔찍히도 사랑하고 있는 아리아조차도, 그리고 아리아 뿐만이 아니라 세리아의 부모님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과연 우리들이 할 수 있을까. 나 역시도 세리아와 마찬가지로 망설임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내가 과연 세리아에게 '말'을 할 것을 강요할 자격이라도 있는 것인가? 나는 아리아와는 다르게 세리아와 혈육관계도, 가족도, 친구도 아닌 그저 무인도에서 같이 살아남은 뒤에 우연히 만난 남자에 불과하다. 실제로 우리가 이름과 얼굴을 알고 지낸지는 채 1년이 되지 않았기도 하고 말이다. 나 뿐만이 아니라 바깥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 지아 선생님도, 그리고 내 누나와 유아 선배, 세린, 체리, 마지막으로 엘리와 초호기까지. 여기에 있는 모두가 세리아와 처음 조우하게 된 일행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연 내가 세리아에게 이런 일을 강요할 수 있는 자격이나 될런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런 강요적인 태도가 세리아를 더 괴롭힐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말을 하라고 강요하면 그만한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니까. ......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유에. 내 스스로가 이런 약한 마음을 먹으면 어쩌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세리아에게 '말'을 찾아주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던거냐. 겉으로 우리들에게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있는 자신이 있다고 주장을 했지만, 아마 세리아의 속마음은 아직도 과연 내가 '말'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세리아의 망설임이 무의식적으로 말을 하는 행동에 방해가 되고 있는 것일지도.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인간의 무의식이라는 것은 매우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니까. 자기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지만, 잠재적으로 해서는 안될 일을 인식하는 순간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심리학에 대한 제대로 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확실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으로 그런 셈이 된다. "세리아." "......" "너무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 책망하지 마. 과거에 벌어졌던 일들은 네 잘못이 아니었으니까." "...!" 세리아의 눈동자가 커지기 시작한다. 어째서 내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알고 있는지에 대해 묻고 싶어하는 표정. 말은 못해도 오랫동안 세리아와 같이 지내다보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 역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잠시간의 혼란에 빠졌던 세리아였지만, 이내 내가 어떤 식으로 본인들의 과거 이야기를 알게 되었는지 알았다는 듯한 눈빛을 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세리아와 아리아 자매의 과거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본인들, 그러니까 아리아와 세리아 단 둘 뿐이었다. 그녀들의 과거에서 외지인이기도 한 내가 과거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소리는 즉, 아리아와 세리아 둘 중에 한명이 스스로의 과거 이야기를 발설했다는 패턴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세리아 본인은 말한 기억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아리아가 스스로 이야기를 꺼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챈 세리아가 약간은 허망한 듯한 눈으로 침실쪽을 바라본다. 고이 잠들어있을 자신의 여동생을 바라보는 시선. 놀라움과 동시에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이야기를 하는 일이 있더라도, 입이 무거운 아리아가 설마 과거 이야기를 타인에게 들려줄 것이라고는 세리아도 생각하지 못했나보다. 물론 세리아 뿐만이 아니라 나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 역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째서 아리아는 우리들에게 속 사정을 털어놓았을까? 아마도. 아리아는 우리들에게 과거 이야기를 대가로 바치면서 어찌보면 자신의 언니와 화해를 하게 해달라는 식으로 우리들에게 부탁을 한 것은 아닐까. 만약에 그렇다면, 나는 세리아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말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아리아로부터 암묵적으로 부여받은 임무이자, 그리고 최대한 아리아에게 표현할 수 있는 감사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세리아. 잘 들어. 범인은 경찰에게 잡혀갔어. 지금쯤이면 콩밥을 먹고 있을 거라고." "......" "너희들에게 접근할 일은 두 번 다시 없을거야. 출소를 한다고 해도 경찰이 전자발찌라든지 아니면 화학적 거세라든지 뭐든가 해서 너희들을 보호해줄 거라고. 그러니까 이제 네가 '말'을 하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그러니까 그 생각은 버렸으면 좋겠어." "......" "물론 지금 당장 말을 하라는 것은 아니야. 몇년동안 말을 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으니까 몸이 잘 익숙하지 않을테지. 하지만 적어도 네가 정말로 말을 하고 싶다 라는 의지를 보여줬으면 좋겠어. 가식이 아닌 진심으로." 세리아의 손을 살짝 잡아준다. 처음에는 약간 흠칫 하면서 놀란 세리아였지만, 어느새 그녀의 눈동자에는 자그만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눈물이라는 이름의 순수한 보석. 그 어떠한 보물보다도 값진 여성의 눈물이 내 손등 위로 한 방울, 그리고 또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차가운 온기를 가진 따스한 눈물의 감촉이 그대로 손등을 타고 나의 뇌리를 통해 전해진다. 너무나도 상냥한 기분.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부드러운 느낌. 세리아라는 여자가 나에게 보여주는 분위기는 너무나도 상냥하고, 그리고 따뜻했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ㅜ_ㅜ 오랜만에 lol좀 하다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255화 살짝 세리아를 내 쪽으로 잡아 당겨온다. 힘없이 나의 품에 안겨오는 세리아. 그 어떤 여성들 보다도 연약하고, 그리고 보살펴주고 싶다. 이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 품에 안긴 세리아가 나를 올려다보며 살짝 눈을 감는다. 그게 무엇을 요구하는 행동인지 충분히 알고 있는 나였기에 아무런 말 없이 세리아의 입술 위로 내 입술을 포개기 시작한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느낌. 사실 무인도에 와서 많이 경험해본 행위지만, 그래도 키스라는 것은 매번 새로운 느낌을 선사해준다. 특히나 세리아와의 키스는 나까지도 순수한 마음이 들게 되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경험이 많은 남자가 아닌 아직까지도 여자와 제대로 스킨십 조차도 해보지 못한 동정 남자의 기분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신비한 힘이 있다. 이제는 더이상 처녀가 아닌 세리아였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키스라는 행위 자체에도 많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내 가슴 위로 세리아의 가슴에서 전해지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매우 빠르게 느껴진다. 세리아가 긴장하고 있다는 의지가 서로간의 가슴을 통해 전해지는 상황. 살짝 침을 삼킨 나는 손을 올리면서 세리아의 가슴을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노아 교수님이나 지아 선생님과 같이 큰 가슴은 아니지만, 한 손에 들어오는 적당한 크기의 가슴이 내 손바닥 안에서 느껴진다. 부드럽고 좋은 느낌을 선사해주는 여성의 가슴. 정말 언제 만져도 최상의 감촉을 자랑한다. 점점 내가 변태가 되어가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여성의 여체 중 가슴과 엉덩이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하고 싶다. 그렇다고 정말로 이 느낌을 당당하게 주장한다면 나는 아마도 변태로 오인받기 쉽기 때문에 용기있게 그러진 못한다. 세리아를 내 무릎 위로 앉힌 다음에 그녀의 상의를 벗기기 시작한다. 세리아도 수줍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내게 몸을 맡긴 상태. 양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면서 내가 옷을 벗기기 편한 상태로 만들어주는 세리아. 희고 고운 피부와 눈부신 은발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마치 판타지 소설에서 볼 수 있을법한 하이엘프의 고귀하고 순결한 모습을 보는듯한 착각마저 들게 만든다. "아..." 약간은 쉰 목소리로 신음소리를 내는 세리아. 내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서서히 허벅지 안쪽으로 향하자, 세리아가 더욱더 적극적으로 내 품에 안겨오며 거친 호흡을 몰아쉬기 시작한다. 손을 뻗어 세리아의 비밀스러운 장소에 손을 데자, 이미 그 곳은 홍수가 난 듯이 질퍽하게 젖은 상태. 언제라도 남자의 성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어필하는 듯한 모습을 받을 수 있었다. 지아 선생님이 언제 들어오실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애무행위는 이 정도로 마치도록 하고, 빨리 관계를 치루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나. 거칠게 서버린 성기를 바지 지퍼를 내리면서 꺼내들자, 세리아가 내 성기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애써 시선을 돌린다. 아직까지도 남자의 성기에 대한 면역력은 그리 크지 않은 모양이다. 갑자기 문득 이런 세리아의 행동을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세리아의 한 손을 잡고 몰래 남근을 쥐게 한다. 화들짝 놀란 세리아. 본인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지 내 성기를 꽉 잡아버린다. 그러나 애초에 악력이든 뭐든 근력 자체가 약한 세리아였기 때문에 사실 그다지 아프지는 않다. 질 돌기가 조여오는 조임력보다도 못하다고 표현하면 적당하리라 생각한다. "...!" 세리아가 자신의 손을 빼고서 뭔가 무서운 물건(?)을 만졌다는 듯이 약간 떨기 시작한다. 남근을 보는 것도 처음은 아닐텐데 저 정도로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솔직히 말해서 나도 약간 미안해지기 시작한다. 마치 내가 해서는 안될 짓을 했다는 듯한 그런 죄책감을 들게 만든다고 해야 할까. 사실 그리 잘못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음... 아니면 내가 너무 성적인 면에서 개방적으로 변한 것일까? 고작 남자의 성기 가지고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내심 섭섭하긴 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보니까 이것도 은근히 귀엽다. 아. 세린과 관계를 가지는 순간부터 은근히 S끼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혹시나 하고 있었는데, 희미하게나마 나한테도 그런 끼가 있는게 아닐까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럼 안되는데. 연약한 세리아를 괴롭히는 행위는 내 스스로가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귀엽다! 귀여운데 어쩔수가 없다! "세리아. 너무 그렇게 겁먹지 말고. 천천히 만져보면 되니까. 자. 다시 한 번 더." "......" 세리아의 손을 다시금 잡아 끌면서 남성기로 가져간다. 불끈 거리는 성기가 세리아의 가녀린 손가락과 마주하자, 2배의 기운을 차린듯이 엄청나게 커지기 시작한다. 이번에도 화들짝 놀라는 세리아. 그러나 아까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손을 한꺼번에 확 빼거나 그런 모습은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대담하게 한번 더 만져보는 시도를 해본다. 그래. 그렇지. 잘하고 있어. 세리아. "조금 더... 세게 쥐어볼래?" "......" 표정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징그러운 생물을 만지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세리아.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손만 빼꼼히 내밀면서 남성기를 살짝 쥐어본다. 조임력은 확실히 질 돌기가 더 좋긴 하지만, 여성이 손으로 직접 남성기를 애무해준다는 상황 자체가 에로틱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나의 흥분도가 점점 올라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그러나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든 생각. 바깥에 있는 지아 선생님이 언제 산장 안으로 들어올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일단 호흡을 가다듬고 세리아를 살짝 앞으로 돌린다. 내가 하려는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리아 역시도 눈치를 챈 모양이다. 엉덩이를 내 쪽으로 보이게 하는 후배위 자세를 취한 세리아. 양 손을 테이블 위로 올린 세리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잡고서 성기를 세리아의 몸 안쪽으로 향하는 입구 끝에 위치시킨다. "세리아. 괜찮지?" "......" 의미심장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세리아. 그대로 있는 힘을 다해 그녀의 몸 안으로 성기를 찔러 넣는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짧은 신음소리를 내뱉는 세리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성 역시도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다. 달콤하고 색기 있는 신음이 아니라 목감기에 걸린 환자처럼 쉰소리를 내는 세리아. 마치 인어공주가 인간의 몸을 되찾은 대신에 목소리를 빼앗긴 듯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 세리아의 경우에는 목소리를 빼앗긴 대신에 아리아를 지켜냈다는 자부심을 얻은 셈이지만 말이다. "아... 아...!" 세리아의 은발이 움직임에 따라 리드미컬하게 공중에서 휘날리기 시작한다. 양초의 불빛과 화로의 불빛이 은발에 반사되면서 더욱더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후배위 자세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모습. 바로 여성의 뒷태를 감상하면서 섹스를 할 수 있다는 이점을 나는 충분히 만끽할 수 있었다. 다른 여성들에 비해서 오히려 말랐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가녀린 체구의 세리아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 작품 후기 ============================ '롤 좀 하려고 했는데 서버가 폭발한 탓에 못하고 하루종일 책만 읽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토크 제 1회입니다. 오랜만에 책을 읽으니까 뭔가 해냈다는 달성감이 드는군요. 사실 제가 극악의 독서량을 자랑하기 때문에 오늘로서 책을 잡게 된 게... 아마도 근 3달만이 아닐까 싶습니다. 소설책 좀 많이 읽어야 하는데 말이죠 ㅜ_ㅜ 256화 얇은 허리에 작고 귀여운 엉덩이 살이 내 사타구니에 부딛칠 때마다 조금씩 출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리아가 그리 살이 많은 체질이 아니기 때문에 출렁이는 정도가 상당히 미약하지만, 그래도 여성의 엉덩이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탄력성 덕분에 나름 만족하며 섹스를 할 수 있었다. 은발의 머리카락이 더더욱 세리아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와중에 서서히 정액을 방출할 기세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질내사정? 하지만 무인도에서 임신을 할 수 있다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질내사정 여부는 잠시 보류해두고 세리아의 엉덩이와 허벅지에 정액을 싸게 된다. "윽!" 짧은 신음소리를 내뱉는 나. 실로 오랜만의 섹스였기 때문에 정액의 양이 매우 많았다. 희고 끈적한 액채들이 세리아의 애액과 묻어 나오면서 그녀의 살을 더럽히기 시작한다. 세리아의 가녀린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주먹을 부들부들 쥔 채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고통이 성적인 쾌락으로 바뀌는 중이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의 반응이라고 보여진다. "후우..." 긴 한숨을 토해내는 나. 부들부들 다리를 떠는 세리아가 결국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고 만다. 세리아의 사타구니에서 아직까지도 흘러나오는 투명한 액체가 바닥을 적시기 시작한다. "세리아. 괜찮아?" "......" 한 손을 가슴 위에 올려 놓으면서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는 세리아. 표정은 아직까지도 한창 오르가즘에 올라 있는 여자처럼 붉게 색기로 물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청초함의 대명사이기도 한 세리아가 이런 섹시한 표정도 지을 줄 알고 있다니. 역시나 여자는 어떠한 이미지로도 변할 수 있는 수백가지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옷을 주섬주섬 입고 있는 와중에, 문을 열고 조용히 등장한 지아 선생님이 우리 둘을 바라보며 말한다. "오호라..." "의미심장한 말은 내뱉지 마시죠. 지아 선생님." "젊다는 건 좋구나. 그렇지?" "그렇다고 너무 젊은 혈기를 바깥으로 내뱉으면 곤란하겠지만요." 나와 지아 선생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세리아의 얼굴은 곤란하다는 듯이 급격하게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황급하게 옷을 차려입고 목욕을 하고 오겠다는 듯이 나간 상황. 한숨을 쉬면서 잠깐 어깨를 으쓱해보이는 지아 선생님이 말한다. "그렇게까지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세리아의 성격이라면 저게 정상이겠죠." "그나저나 세리아에게 무슨 위로가 되는 말이라도 해준거야? 아니면 몸으로만?" "일단 말은 해봤는데, 아직까지는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거 같아요." "망설이고 있다는 뜻이구나." "그런 셈이죠." 말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둘째치고, 애초에 의지 그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세리아였기 때문에 일단 그 의지의 불꽃을 다시 활활 태울 수 있게끔 촉매 역할을 하는 발화재료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하다가 곰곰이 생각을 해본 결과. "역시나 아리아의 도움을 받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 그건 별로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해."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아리아도 지난 몇년간 제대로 성곡하지 못한 일을 우리들이 성공할리가 없잖아. 지금에서야 아리아가 세리아의 말 하기 프로젝트에 합류한다고 해도 과연 승산이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는 절대로 장담할 수 없지." "과연..." 역시나 그 점이 걸리는 것인가. 아리아가 하지 못한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는 거 말이다. "정말 무거운 숙제네요." 내 말을 끝으로 나와 지아 선생님은 당분간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기나긴 새벽이 끝나고 다시 아침이 밝아온 상황. 불침번 말번초였던 아리아와 노아 교수님, 그리고 누나는 현재 잠을 자고 있는 상황이다. 아무래도 3인 1조로 불침번 근무를 서다보니 잠이 꽤나 부족한 하루였다. 다들 2명이서 근무를 하다가 3명이서 근무를 서니가 서로 할 말들이 2배에서 3배로 늘어난 상황을 접하게 된 탓에 1명은 잠을 자도 된다는 메리트를 얻고도 그 이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모양이다. 초췌한 얼굴로 아침을 맞이한 유아 선배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에게 한 말은 단 한마디였다. "3인 1조. 그다지 안 좋아보여." "저도 공감하는 바입니다만." "앞으로 하지 말자. 밤 새도록 수다만 떨고 다음 날을 맞이하니까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은 제도같아." 잠이 부족한 인원들 덕분에 본래 오늘 가려고 했던 나무 자르기 원정대 일정은 취소가 되었다. 뭐, 스케쥴이라는 것이 정했다가 취소가 되었다가 하는 것이니까 그냥 쿨하게 취소해버리면 되는거니까. 아직까지 우리들에게 산장의 개축에 대해 그다지 크게 필요성이 있다고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약간 불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불편한 상황 조차도 이미 적응해버린 단계였기 때문에 무리하게 작업을 주도할 생각은 없다. 현재 그나마 멀쩡한 정신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은 나, 세리아와 지아 선생님, 그리고 엘리와 세린, 유아 선배와 체리가 전부였다. 세리아도 본래 우리들과 같은 조였긴 했지만, 새벽에 불침번 근무를 서면서 오래간만에 섹스라는 격렬한 애정행각을 벌인 탓인지 유난히도 체력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기지개를 펴면서 바깥으로 나온 나. 사실 지금 당장 해야 할 작업은 어제 다 끝내뒀기 때문에 오늘 그다지 할 일은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오늘 할 작업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동시에 최소한 식사 당번만은 남겨두고 잠을 자도 좋다는 말을 전해둔 상태였다. 그래서 현제 세리아가 잠을 선택한 결과물도 내 말에 비롯되어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나마 멀쩡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 엘리가 나를 쫄래쫄래 따라오며 고구마와 감자가 있는 밭으로 이동한다. 머리 위에는 에바 초호기가 팔자좋게 하품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양이 하품도 사람이 하품하는 것과 같이 전염이라도 되는 것일가. 나를 따라오던 엘리도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엘리. 너도 졸리니?" "... no." "그래? 졸리면 언제든지 말하고 쉬어도 돼." "yes." '아니오, 예'를 번갈아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의 움직임에 따라 에바 초호기가 순간적으로 자신이 떨어지는 줄 알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세트로 귀요미들이 몰려 있어서 그런지 보는 사람 마저도 왠지 안구가 정화되는 느낌이다. 감자와 고구마를 캐기 시작하는 우리들. 가져온 바구니에 오늘 먹을 양을 담아두면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본다. "오늘은 꽤나 날씨가 덥네." 작은 한숨을 토해내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사실 그렇게까지 더운 날씨는 아니지만, 평소에 비해서는 그래도 체감상 온도가 약간 높게 느껴진다. 반팔을 입고 올걸 이라는 후회를 하면서 긴팔을 걷어보이는 나. 엘리는 원래부터 노출도가 조금 있는 원시적인 컨셉의 복장이었기 때문에 덥다 라는 인식이 그리 심하게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무인도에서 3년동안 오래 살아왔기 때문에 온도에 대한 변화는 이미 충분히 적응하고 있었을 것이다. 무인도의 자연환경 역시도 약간은 바뀌는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이 딱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점이라도 되나? 음... 여기가 어느 지역인지도 모르니까 날씨에 대한 개념을 잘 모르겠다. 우리나라는 아마 한창 여름때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면서 지금까지 캐낸 식량들을 들고 엘리에게 말한다. "이제 다 캔듯 하니까 돌아가자."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듯이 작게 '오케이'라고 대답하는 엘리. 말수는 별로 없지만, 대답같은 거는 착실하게 한다. 인사 하나만 잘해도 예의바르다는 소리를 듣는 대한민국 사회에선 엘리같은 케이스는 매우 훌륭한 케이스라고 생각된다. 이것도 다 나의 교육이 좋았기 때문일까. 내가 무슨 교육을 했냐고? 그야 여러가지 교육을 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인생 교육이라든지, 인생 교육이라든지, 인생 교육이라든지. 음. 내가 생각해도 정말 훌륭하다. 특히나 이성 교육도 해줬지. 나도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교사의 길을 걸어볼까? 갑자기 순식간에 나의 미래가 정해지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식량을 캐오고 난 이후에 도착한 산장. 오늘의 요리 당번은 유아 선배와 세린이 담당하게 되었는지 벌써부터 바깥에서 둘이 티격태격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고추가루를 많이 넣으면 안된다고 했잖아!" "정말 최악이네요. 유아 선배. 혹시 미각을 잃어버린 거 아닌가요? 여기서는 매운 맛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잖아요!" "그러는 너야말로 혀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왜 여기에 매운 맛이 필요하다는 거야! 오히려 필요한 건 단 맛이잖아! 사탕수수를 넣어야지!" "흥! 선배의 입맛은 너무 싸구려라서 저같이 고급스러운 여성의 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겠죠." "뭐가 어째?!" "한번 더 해보겠다는 뜻인가요?!" 저 두 사람은 정말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저 두 사람, 둘 다 같은 조였지 않았나? 어제 적었던 불침번 명단을 살펴보니 세린과 유아 선배, 그리고 체리와 엘리가 멤버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엘리는 그렇다고 해도, 체리가 정말 마음고생이 심했으리라 충분히 예상해본다. "오빠..."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마침 체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무렵, 그 장본인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게 아닌가. 얼굴은 이미 초췌해질대로 초췌해진 상태로 주방에서 끝나지 않는 언쟁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힘없이 바라본다. 나는 그저 체리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작게 말할 뿐이다. "고생했어." "정말 죽는줄 알았어요오..." 세린과 유아 선배를 같은 조로 묶은 나를 약간 원망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체리. 사실 체리에게 이런 원망을 들어도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때 당시에 내 머릿속에 가득했던 생각은 나와 지아 선생님, 그리고 세리아를 같은 조로 묶어야 한다는 목표 의식밖에 없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제 3자인 체리가 피해를 입고 말았던 것이다. 나중에 뭔가 선물이라든지 아니면 소원 이용권 한개라도 줘야할 듯 하다. 이대로 넘어가기에는 체리가 너무 가여우니까. 체리를 위로해주고 있는 사이에도 계속되는 말싸움. 마침 산장 내에 대기중이던 싸움 중개 종결자, 지아 선생님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체 둘의 머리 위로 꿀밤을 선사하며 말한다. "어린애들도 아니고 언제까지 싸울거니." "아얏..." 한숨을 푹푹 내쉬는 지아 선생님이 초호기를 머리 위로 들고 있는 엘리를 가리키며 말한다. "엘리를 좀 본받아. 둘 다. 알았지?" "... 네..." 반성의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 대답을 내뱉는 두 사람. 지아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다고 해도 말싸움이 끝날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이 두 사람의 기싸움은 아마도 계속될 것이다. 도대체 과거에 어떤 원수를 지었길래 매일 싸우는 모습밖에 보여주지 않는 것일까. 조금은 아리아와 세리아의 사이를 본받... 아니구나. 현재 아리아와 세리아 역시도 냉전중이기 때문에 본받으라는 말을 쉽게 꺼낼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하루라도 빨리 화해를 시키던가 해야지 원. 그리고 그 다음 타겟은 세린과 유아 선배로 정해야겠다. ============================ 작품 후기 ============================ 오늘 롤 올스타 대회에서 한국이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한국 경기는 다 챙겨보면서 주말을 보낸 보람이 있군요. 덕분에 롤챔스 시드 3장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공식전 경기 챙겨보니까 재미있군요. 257화 자고 있는 일원을들 제외하고 식사를 하게 된 우리들. 평소에는 아리아와 세리아가 같이 식사를 해서 분위기가 상당히 무거웠지만, 오늘은 아리아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잠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 딱딱한 식사 분위기는 되지 않았다. 나름 다행스러운 상황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래도 세리아와 아리아 두 자매가 같이 나란히 사이좋게 식사를 하는 모습이 조금은 그리워지는 마음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잠시동안 개인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도 개인 시간이라고 해봤자 마땅한 놀이감도 없고. 남는 시간을 좀 더 유용하게 써먹는 법이 없을까 하다가 문득 내가 다른 일행들 몰래 챙겨온 아이템이 생각나서 잠시 가방을 열어본다. "뭐 꺼낼 물건이라도 있는거야?" 뒤에서 유아 선배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몰래 챙겨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제와서 거리끼는 것은 없기 때문에 나는 당당한 심정으로 유아 선배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굉장한 아이템을 가져왔죠." "굉장한 거라니. 난파선에서 가져온 물건중에 그런 물건이 있었어?" "네. 무인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물건이죠." 라고 말하면서 내가 꺼내든 나름 '대단한' 물건은 바로... "... 축구공?" 그렇다. 유아 선배가 방금 꺼낸 단어 그대로 숨김없이 표현해서 '축구공'이다. 사실 난파선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찰나에 복도 끝까지 널려있는 잡동사니 물건들 중에서 축구공을 발견할 수 있었던 나는 재빨리 그 공을 챙겨오기 바빴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나는 축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운동을 싫어하는 편도 아니기 때문에 애들끼리 자주 축구를 하던 그 생각이 떠올라서 몰래 챙겨온다는 것이 잠시동안 내가 축구공을 가져왔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게끔 하는 방심을 낳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난파선에서 복귀하자마자 가져온 물건들을 나열해서 일일이 확인할 때 축구공의 존재를 잊어버렸던 것이다. 바람이 가득 차 있는 축구공을 머리로 몇번 짧게 헤딩해보이는 모습을 보여주자, 유아 선배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한다. "너도 어지간히 좋아하는구나. 운동 말이야."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다 같이 할 수 있는 구기 종목 운동을 좋아한다고 보는 편이 더 좋겠네요." "뭐, 남자들은 축구라든지 농구라든지 야구라든지 좋아한다고들 하니까. 전혀 이해는 못하는 편은 또 아니지만, 그래도 무인도에서 너와 축구를 할 수 있을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 몇명이나 될지 생각도 안 해봤어?" "유아 선배는 안 하실 겁니까?" "내가 왜." "무인도에서 딱히 할 것도 없으니까 오락거리로 축구라든지 하면 재미있을 거 같아서요." "오락거리가 없다는 사실은 어느정도 공감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땀을 흘리면서 축구를 할 생각은 들진 않아. 혹시 또 모르지. 나중에 정말로 할 것이 없다는 상황에 봉착하게 될 때는 이런 말을 한 나도 스스로 축구를 자처할 수 있을지도." "부디 그 때가 오길 기원해볼게요." "드문 확률이니까 너무 많은 기대감은 갖지 말라고." 유아 선배와 이런저런 말을 주고 받은 후에. 축구공을 들고 바깥으로 나온 나는 가볍게 공을 몇번 튀겨본다. 역시나 A급 축구공. 상표도 브랜드 명이라서 그런지 탄력이라든가 촉감이 아주 좋다. 학교에서 매번 축구할 때 불만사항이었던 것이 다 낡아 떨어지거나 바람이 약간 빠진 축구공들만 빼곡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불만이었는데 이 공은 딱 내가 원하던 바로 그 공이다. 땅에 공을 놓은 뒤에 리프팅을 해보이는 나. 공이 튀기는 소리가 귀에 들려옴과 동시에 이질적인 소리도 섞여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 아아..." 목감기에 걸린 듯한 쉰소리. 우리들 중에서 현재 감기 몸살에 걸린 사람은 없다. 물론 감기에 걸렸던 전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수 있지만, 현재 진행형으로 따져봤을 때에는 부정적인 표현을 쓰는게 올바르다. 소리의 근원지를 따라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이동을 한다. 들려오는 방향은 바로 산장 뒤쪽. 코너를 돌아서 고개를 살짝 내밀자, 그 곳에는 발성 연습을 하고 있던 세리아가 있었다. 한 손으로 자신의 목을 살짝 만지면서 천천히 입을 열고 소리를 내보는 세리아. 본인도 본인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것이다. 어제의 내 훈계가 세리아에게 통한 것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정말로 기쁠테지만, 한편으로는 아리아와의 결별 선언이라는 절박한 궁지에 몰란 세리아를 절벽으로 몰아세운 기분이 들어서 약간 찝찝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지. 여기서는 세리아에게 전면적으로 도움을 주겠다고 선언한 나니까, 지금의 이 상황을 그대로 넘기는 것은 말이 안 될지도. "세리아." "...!" 화들짝 놀란 세리아가 자신의 두 손을 가슴 부근으로 모은 채 잔뜩 주눅든 모습으로 나를 바라본다. 타인의 갑작스러운 등장 때문에 처음에는 놀랐던 세리아가 아직까지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이 한숨을 약하게 내쉬면서 나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발성 연습... 하고 있던 거야?" "......"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세리아. 마치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못할 부끄러운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들킨 듯한 수줍은 미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역시나 세리아의 매력은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라니까. 정말 귀엽다. 그래도 일단 귀여운 감정은 잠시 접어두고. 세리아의 말하기 수업을 도와주는 것이 우선적이니까 먼저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자. "그럼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일테니까 천천히 나를 따라해봐. 알았지?" "......" 고개를 끄덕이면서 긍정적인 답변을 보여주는 세리아. "우선 기초적인 글자부터 시작해볼까. 가나다 순이 괜찮겠지?" 질문을 던진 나. 그러나 세리아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다시 부정하기 시작한다. "그럼 다른 문장이라도 먼저 배우고 싶은 것이 있는거야?" "......" 이번에도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뭔가 먼저 배우고 싶은 단어가 있나보다. 예, 아니오 같은 기초적인 것일까? 뭐, 그런 것을 먼저 배워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여지지만. 하지만 세리아가 나에게 알려준 단어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기본 상식을 뛰어넘는 단어였다. "... 세리아." "......" 내 손바닥 위에 한 글자, 한 글자 씩 정성스레 자신이 처음으로 말하고 싶은 단어를 적는 세리아. 그녀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말을 잃은 나는 피식 웃으면서 세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 시작한다. 내 손길을 마치 기분 좋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작은 고양이처럼 세리아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인다. "하여튼. 정말로 너답구나." 취침 멤버가 기상한 시각.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겨우 눈을 뜬 나머지 멤버들까지 포함해서 모처럼 10명이서 대낮에 산장 거실에서 모일 수 있었다. 약간 더워진 날씨 탓에 화로의 가동은 이뤄지지 않은 상황. 그래도 밤에는 여전히 춥기 때문에 야간에는 화로를 가동시킨다. 본래 여름에는 새벽이 춥듯이, 이 무인도 역시도 새벽만 되면 많이 추워지기 때문이다. "일단 모이긴 했는데..." 우리를 한번씩 둘러보는 누나가 아직또 졸릴 눈으로 가라앉은 목소리를 이용해 말한다. "... 뭐하지?" "누나. 너무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해버리면 우리들이 오히려 민망해지잖아." "그래도 할 게 없는 건 사실 아니야?" "그럼 뭐할까. 또 진실게임?" "아니. 그건 이제 질렸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누나가 진실게임을 거부하고 있는 게 아닌가. 1회 진실게임 주최자이기도 한 누나가 저런 말을 하다니. 내일 지구가 멸망하기라도 하는 건가. 우리의 유일한 유흥거리 중 하나인 진실게임이었지만, 사실 게임이라는 것도 너무 한 종류만 계속 하면 질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오늘은 독특한 게임이 없나 라는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저는 빠지도록 하겠습니다." "아리아. 갑자기 왜?" "아니요. 그냥..." 평소와는 달리 기운이 없는 아리아가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보나마나 모두가 다 같이 하는 게임에 아리아가 참여하게 되면, 세리아는 필히 불편한 마음으로 게임에 임할 수 밖에 없을거라는 사실을 본인이 자각했는지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이 분명하다. 아직까지는 서로가 어색한 사이지만, 그래도 이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끔찍히도 아끼는 자매였다. 비록 세리아가 말을 못하게 된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아리아가 세리아를 싫어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다 바로 현재. 그리고 미래. 지나간 과거를 다시금 떠올리며 그 때 그 시절이 좋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움이 아니다. 바로 후회.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다는 말도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담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컵에 담긴 물은 이미 진작에 바닥에 쏟아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물을 컵에 채우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비어있는 상태가 현재라면, 물컵을 채워가는 과정이 바로 미래일 것이다. 바닥에 쏟아진 물을 보면서 안타까움과 자책감, 좌절을 느낄 필요가 없다. 후회라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발목을 잡는 일종의 덫일 뿐, 미래로 향하는 데 후회따위는 일찌감치 털어넘기면 된다. 과거의 경험을 미래로 가는 계단으로 바꿔야 한다. 그것이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방식이고, 그리고 이 무인도에서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가만히 앉아있던 세리아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며 아리아의 손목을 잡는다. 세리아의 적극적인 태도에 놀랐지만, 그것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바로 아리아의 반응이었다. "이거 놔!" 거칠게 세리아의 손을 뿌리치는 아리아. 세리아 본인도 아리아의 이런 반응은 차마 예상하지 못했는지 충격받은 얼굴로 아리아를 올려다본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은 세리아의 모습을 아리아가 순간적으로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이내 다시 냉정한 표정을 되찾으며 차갑게 말한다. "... 언니. 아까 산장 뒤에서 유에 선배와 말 연습을 했었지?" "...!" 아리아가 어떻게 저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설마... 그때 미리 깨어 있었기라도 한 것인가? 사실에 대한 진위 파악을 현재 단계에서는 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아리아가 세리아의 말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왜... 이제와서 갑자기 태도를 바꾼거야." "......" "무인도에 표류되기 이전에는. 내가 그렇게나 세리아 언니에게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리고 격려해줬는데. 언니는 내 그런 의도를 다 무시해버렸잖아. 말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잖아. 그런데 어째서? 왜 이제와서?" "......" "내가 한 번 말해볼까? 언니는 사실 나를 싫어하고 있던 거야. 자신에게서 말을 빼앗아간 장본인인 나를. 예전부터 언니를 싫어했던 철없는 나를. 그리고 무인도에 와서 죄책감으로 인해 위선적인 태도를 보여주며 언니를 챙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겉과 속이 다른 나를!" "......" "그렇기 때문에 언니는 이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서 스스로 말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겠지? 도와주는 사람이 '내'가 아니니까." ============================ 작품 후기 ============================ 이번달 안으로 완결이 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추가된 에피소드 양이 길어진 탓으로 아마 다음달로 완결을 미뤄야겠습니다 ㅜ_ㅜ약속을 어겨서 죄송합니다. 258화 ...... 한껏 어색해진 분위기. 놀란 눈으로 아리아를 올려보는 세리아. 분위기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는 상황에서 더 이상 이 상황을 방관해봤자 서로 득이 되지 않을거라 판단한 나는 우선 아리아의 정체모를 화를 가라 앉히기 위해서 자리를 일어선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서던 찰나에. 갑자기 지아 선생님이 내 손목을 잡고서 나의 행동을 저지한다. "여기서는 가만히 있는게 좋을거야. 유에." "왜 그런 말씀을..." 차마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아 선생님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며 단호하게 말을 하기 시작한다. "사실, 너희들의 사이에 제 3자인 우리들이 끼어들 생각은 전혀 없었어. 오히려 너희들의 문제를 방관할 생각이었지. 하지만 상황이 점점 길어지고, 아리아가 이런 식으로 아니꼬운 태도를 보여주면 내 의도도 조금 달라질 수밖에 없어." "......" "여기에 있는 모두가 너희 둘의 과거 이야기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어. 하지만 일부는 알고 있지. 그것도 아리아, 네가 직접 이야기를 해서." "... 지아 선생님도 알고 계시는 건가요." "그래. 물론 미안하게 생각은 하고 있어. 고의적으로 너희들의 아픈 상처를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거와는 별개로, 이대로 계속 상황이 흘러가게 된다면, 너희 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문제로까지 번질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방관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거야. 그렇지?" "......" 지아 선생님의 참전에 순간 말을 잃어버린 모두. 나 역시도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뭐라고 말을 해주지 못하겠다. 그러나 지아 선생님은 할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을 한 것인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그러니까 선생님으로서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겠어. 여기서 화해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명령인가요? 그 말."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야." "......" 우리들 중에서도 가장 연장자인 지아 선생님이 저런 말을 할 정도면 엄청나게 자존심을 낮추고서 한 말이 되는 것이다. 사실 지아 선생님에 저런 수준까지의 말을 입에 담을 줄은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은 당황스럽다. ... 그래도 이왕 벌어진 일. 여기서 수습하지 못하고 이대로 어영부영 흘리게 되면 계속해서 분위기만 안좋아질 것이 분명하다. 자리에서 일어선 나 역시도 아리아에게 말을 꺼낸다. "아리아. 네가 세리아에 대해서 자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 하지만 넌 그런 자책감 때문에 세리아에 대한 애정을 키워온 것이 아니잖아.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너는 네 입으로 분명 세리아를 싫어하고 있다고 했어. 하지만 과연 네가 정말로 세리아를 싫어했을까?" "무슨 뜻이죠? 선배." "정말로 네가 세리아를 이전부터 싫어했다면, 같이 등, 하교도 하지 않았을 뿐더라 말 조차도 섞지 않았을거야. 너는 단순히 세리아에 대한 동경 때문에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 결국은 그 화살을 세리아라는 인물로 돌린 탓이지. 네가 세리아를 미워하고 있는 그 마음은 세리아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사실은 솔직하게 자신의 언니를 좋아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아니었을까?" "......" "그렇기 때문에 네가 그 과거의 일을 겪고 난 이후에 보여주었던 세리아에 대한 애정은 절대로 거짓이 아닐거야." "... 전 선배의 말에 장담할 자신이 없어요..." "그렇다면 내가 장담해줄게!" 내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팡! 하고 쳐보인다. 자신감이 없는 아리아에 대한 일종의 선언같은 동작이었다. "네 스스로가 본인에 대한 마음에 자신이 없다면 내가 보장해줄게. 너는 분명 세리아를 좋아하고 있어. 그리고 지난 몇년동안, 네가 세리아에게 보여줬던 애정은 거짓이 아니야. 전부 네 마음속에서 나온 실제의 애정이지." "......" 잠시 멈칫하는 아리아. 하지만 역시나 내가 말을 해봤자, 어차피 나는 제 3자의 입장일 뿐이다. 나 뿐만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의 원인을 제공해준 지아 선생님도 마찬가지. 결국 당사자들이 해야 한다. 우리들이 도와줄 수 있는 한계선은 바로 여기까지. 그렇기 때문에. 세리아가 나에게 연습을 받아왔을지도. "... 세리아가 너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을 거야." "선배. 농담도 정도껏 하세요. 세리아 언니는 더 이상 말을 못해요." "아니. 할 수 있어." "못 한다니까요!!" "넌 왜 먼저 그리 속단을 하는거지? 세리아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건 바로 너 자신 아니야?" "지난 몇년동안 시도해왔어요. 세리아 언니에게. 제발 말을 해달라고... 예전에 들려주었던 그 목소리를 다시 한 번...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들려달라고... 하지만 언니가 왜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건 바로 아직까지 저를 용서하지 않았던 거예요. 자기 자신에게 목소리를 앗아간 존재니까!" 점점 감정이 격해지기 시작하는 아리아. 역시나 아직까지 본인이 가지고 있는 죄책감이 걸리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아리아와 세리아가 오해라는 이름의 장애물에 가로막혀 서로 위치한 지역을 마주할 수 없는 경우. 아리아는 자신이 세리아에게 미움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세리아는 아리아에 대한 마음이 아직까지도 변화가 없다. 여전히 자신의 동생을 사랑하고, 그리고 아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리아는 나에게 제일 처음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해주고 싶은 단어를 선정한 것이다. "아..." 순간적으로 놀란 눈을 한 채 내 옆에 서 있는 세리아를 바라보는 아리아. 방금의 그 말은 우리들 중 누군가가 한 말이 아니다. 게다가 아리아도 한 말이 아니다. 아직까지 단 한 글자였지만, 세리아가 천천히. 아주 힘겹게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 조금만 더 힘내. 세리아. 충분히 할 수 있어. 네가 그토록 부르고 싶었던. 여지껏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던 그 사람의 이름을. 마음껏 불러봐. "아... 리아..."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린 채 커진 눈동자로 할 말을 잊은 아리아.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지만, 분명 세리아의 입에서 선명하게 들려온 단어가 있었다. '아리아' 세리아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존재. 그리고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여동생. "세리아 언니...!" 한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싼 채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세리아. 이미 그녀의 두 눈가에는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 내리기 시작한다. 드디어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 때문일까. 지난 몇년동안 얼마나 불러보고 싶었던 이름일까. "세리아 언니... 세리아 언니...!!" 아리아가 자신의 언니의 이름을 부르면서 다급하게 다가가기 시작한다. 자신의 언니를 그대로 안아주는 아리아. 여지껏 보지 못했던 아리아의 펑펑 우는 모습이 우리들 눈 앞에 보이고 있었다. 그자 얌전히 아리아를 안아주는 세리아. 평소와 같은 세리아 특유의 온화한 미소가 얼굴에 그려진다. 말을 하기 위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생과 심적인 고통이 있었을지 아리아뿐만 아니라 우리들 역시도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세리아가 아리아를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아리아가 세리아를 사랑하는 마음은 절대로 거짓이 이나리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유에 선배. 그 반찬, 세리아 언니한테 주도록 하세요." "뭐라고?! 유일한 고기 반찬을 나에게서 빼앗아갈 셈이냐?" "시끄러워요. 세리아 언니는 좀 더 영양분을 섭취해야 한다구요. 선배는 넘치는 게 정력이니까 상관 없잖아요." "정력이랑 영양소 밸런스랑 전혀 관계 없잖아." "아무튼 무조건 세리아 언니 우선이라고요. 당장 이리 주세요!" "......" 라고 말하면서 결국 나에게서 유일한 고기 반찬을 빼앗아가는 아리아. 세리아의 자리 앞에 차곡차곡 놓여지는 고기반찬에 세리아도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다. 아리아와 세리아가 화해하고 난 이후에 어떻게 되었냐 하면. 보시다시피 아리아의 세리아를 향한 애정은 갑자기 파워 업을 하게 되었다. 가뜩이나 세리아를 끔찍하게 여기던 아리아 녀석이었는데, 세리아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갑자기 분위기를 타게 되었는지 연신 좋은 것이라고는 전부 세리아에게 몰아서 줘야 한다는 주장까지 할 정도로 '언니, 너무 좋아!' 병세가 더더욱 심각하게 깊어진 것이다. "...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긴 것 같구나." "그러게요." 지아 선생님의 말에 나도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뭐든지 도가 지나치면 안될 터인데. 과유불급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지 않은가. 그래도 뭐... 아리아와 세리아 자매 관계는 이렇게 해야 더 보기 좋을 것이다. ============================ 작품 후기 ============================ 이것으로 아리아와 세리아 자매 에피소드가 끝났습니다. 다음편은 EX 에피소드로, 무인도 근처에 있는 여러 섬 중에 하나를 탐험하는 내용입니다. 오랜만에 주연을 꿰차게 된 유아와 노아, 그리고 엘리와 유에가 4인으로 파티를 결성해서 다른 무인도 섬을 탐험한다는 내용이지요. 물론 EX 에피소드에서 핵심 인물로 손꼽히는 예신의 이야기도 한커풀 더 벗겨질 예정이며, 다른 생존자 집단과의 조우도 나올 예정입니다. ...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아직 글을 다 못 썼다는게...;; 259화 난파선에 오르면 무인도의 전체적인 모습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자주 갑판을 오르내리며 무인도의 절경을 바라본 결과, 무인도는 대략 커다란 섬 하나와 그 주변에 자잘하게 흩어져 있는 작은 섬들로 이뤄진 지역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 중에서 무인도의 메인 섬을 제외하고 두번째로 규모가 큰 또 다른 섬... 일명, 무인도 세컨드 섬의 존재를 확인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된다. "탐험을 나서죠." "...???" 저녁 식사를 하던 와중에, 뜬금없는 내 말 덕분에 모두가 일제히 식사를 멈추고(엘리를 제외하고) 나를 바라본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노아 교수님이 모두를 대표해서 나에게 묻는다. "갑자기 왜 탐험을...?" "이제는 슬슬 다른 생존자들을 찾아봐도 괜찮을 거 같아서요." 지난번... 그러니까 누나와 엘리를 만나기 전, 혹은 아리아와 세리아를 만난 직후. 우리들은 생존자 구조 활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때는 우리들도 무인도에 적응하지 못했고, 지금 당장 먹을 음식과 마실 물, 그리고 잘 보금자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던 탓에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구조의 손길을 내민다는 생각조차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리에게는 충분히 머무를 집이 있고, 마실 물도 제대로 확보되어 있으며 심지어 사냥을 통해서 고기 반찬을 얻을 정도로 음식을 습득하는 방법 또한 다방면으로 많은 경험을 쌓았다. 여유가 생긴만큼, 다른 쪽으로 에너지를 활용하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나 혼자서 단독으로 결정할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이렇게 직접 다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하는 시간에 일부러 이런 화두를 꺼내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싫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잠시 침묵으로 이 시간을 보내던 중에, 가장 먼저 이 침묵을 깬 인물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나는 찬성이야." 손을 번쩍 들고 말하는 누나에 뒤이어, 한 두명씩 찬성의 의사표시를 내비치기 되는데. 대체적인 의견을 종합해보자면, 가장 큰 이유는 나와 비슷했다. 우리가 먹고 살 만큼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점이 가장 큰 원인. 본래 여유가 생기면 베푸는 게 인지상정. 그래야 사람 살아가는 사회가 좀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 라는 과장된 표현은 이 쯤에서 관두고. 여하튼 어제 나온 의견들 덕분에 여러가지 떠날 채비를 마친 뒤에 시간이 흐르고 이틀 뒤. "준비 다 됐나요?" 유아 선배가 나뭇잎을 엮어서 만든 핸드백을 오른쪽 어깨에 걸치면서 묻는다. 노아 교수님과 나는 준비 다 되었다는 식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엘리는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만 살짝 끄덕일 뿐이다. 무인도 세컨드 섬을 탐험하기 위해 구성된 멤버는 나와 노아 교수님, 유아 선배, 그리고 지리 탐방을 위해 안내인 역할을 담당할 엘리까지 총 4명. 나름 엄선해서 고른 멤버이기 때문에 잘 해나갈 거란 자신이 든다. "조심해서 다녀와." 누나가 오른 손을 내밀면서 나에게 격려를 심어준다. 오랜만에 보는 누나의 진심어린 눈빛에 나 또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마주 잡아준다. "걱정하지 마. 누나야말로 우리가 없는 사이에 잘 부탁해." "당연하지. 너야말로 괜히 우리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을걸?" 분위기 메이커인 누나에다가 행동대장인 세린, 냉철한 판단의 아리아와 의학 담당인 지아 선생님, 그리고 집안일 담당으로 세리아와 체리까지 있으니까 우리가 없어도 어느정도 생활력이 될 것이리라 생각된다. ... 아 참. 초호기도 잊지 말아야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무인도 섬 탐방기. 가벼운 발걸음으로 해변가를 향해 자리를 옮기는 우리들의 앞길을 오늘따라 유독 밝은 하늘이 축복이라도 해주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해변가로 도착한 뒤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무인도와 무인도를 연결짓는 다리가 생성되었는지에 대한 확인 작업. 이 무인도 지형은 썰물이 되었을 때, 서로 섬 간에 도보로 이동이 가능할 정도로 바닥이 훤히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다. 난파선 갑판 위에서 지속적으로 오르내리며 섬을 관찰한 끝에 알아낸 특징 중 하나. 그렇기 때문에 별다른 뗏목 만들기 작업이 없이도 다른 섬으로 이동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밀물이 들어올 때의 시간대가 된다면 수심이 급속도로 깊어지기 때문에 뗏목이나 단순무식 수영법이 아닌 이상은 이동하기 불가능하다. "우와... 경치 봐봐." 유아 선배가 탄성을 자아내며 왼손에 들고 있는 수제 목검으로 바닥 아래에 놓인 조개 껍질을 툭툭 치기 시작한다. 노아 교수님 역시도 처음 겪는 자연현상에 넋을 놓으며 어느 새 예쁜 조개껍질 줍기 대회를 혼자서 개최 중. 오로지 엘리만이 짧은 하품을 하면서 아름다운 자연 현상을 무시한 채 걸어나갈 뿐이다. 역시 무인도 생활 경력자는 다른건가. 이런 것도 쿨하게 넘어갈 수 있다니. 무신경함의 대표 인물이기도 한 엘리였지만, 이를 가만 놔두지 않는 노아 교수님이 엘리를 부른다. "엘리! 이 쪽으로 와보렴." "......" 누나나 지아 선생님, 혹은 노아 교수님을 무척이나 잘 따르는 엘리이기 때문에 종종걸음으로 금새 교수님에게 다가간다. 작은 체구의 금발 소녀가 멀뚱멀뚱한 눈동자로 교수님에게 다가오자, 엘리의 작은 키에 시선을 맞추기 위해서 무릎을 굽힌 노아 교수님이 엘리의 목에 무언가를 걸어준다. "어때? 조개 목걸이란다." "......" "유에! 이거 봐봐. 엘리, 귀엽지 않니?" 노아 교수님이 호들갑을 떨면서 이번에는 나를 호출하기 시작. 솔직히 말해서 귀엽긴 한데... 정작 선물을 받은 본인은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지, 조개 목걸이를 매만질 뿐 별 다른 기쁜 표정을 지어 보이지 않는다. 엘리의 무반응을 보며 기운이 빠졌는지 미약하게 한숨을 내쉬는 교수님의 한탄섞인 혼잣말. "좀처럼 잘 안 웃는구나." "그야 그렇겠죠." 엘리의 미소를 이끌어내기엔 조개 목걸이로는 파워가 부족한 모양인가 보다. 무지개 꽃 화원에서 처음으로 보여줬던 엘리의 미소가 다시 보고 싶었던 것인지, 어떻게 하면 엘리를 기쁘게 해줄 수 있을까 연구중이던 교수님이 나름 필살기라고 생각하며 건넨 조개 목걸이었지만. 결과는 잔인하게도 K. O. 패배. "잘 웃지 않기 때문에 미소가 더 아름다운 법 아닐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노아 교수님. 아무리 위로의 말을 건네봤자 실망감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와 노아 교수님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엘리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양 손의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꼬리에 가져가며. ... 그대로 살짝 위로 올린다. 억지 웃음의 절정... 이라고 할까. 입은 웃고 있는 모양인데, 눈은 평상시와 똑같다. 이것도 엘리의 미소라 봐도 되려나. "고, 고마워. 엘리야." "......" 엘리의 반응이 웃긴 것인지,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선 노아 교수님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연신 쿡쿡 웃기 시작한다. 그러자 만족했다는 듯이 엘리가 엄지 손가락을 세우며 나에게 따봉 표시를 날리는데. ... 교수님 웃기기에 성공했으니까 만족했다는 의미인가. 아니, 어느 순간부터 엘리 웃기기에서 자신이 웃게 된 겁니까. 교수님. 본인이 웃으면 안 되잖아요. ============================ 작품 후기 ============================ 엘리를 제외하고 초창기 of the 초창기 멤버들이 모인 이야기입니다. 사실은 3명만 하려고 했지만... 귀여운 엘리를 빼놓을 순 없었기 때문에 가이드 겸 추가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엘리는 귀엽지요. 260화 질척이는 모래의 감촉을 느끼며 무인도의 두번째 섬... 정식 명칭같은 건 모르지만, 여하튼 장소에 도착했다. 우리가 있던 무인도의 면적에 비하면 심히 작은 규모. 뭐라고 해야 할까... 대략 5분의 1 크기 정도? 정확한 규모 측정을 할 순 없지만, 눈짐작으로 따지자면 아마 그 정도가 되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엘리에게서 무슨 말을 전해 들었는지 노아 교수님이 나에게 다가온다. "엘리도 이 곳에 온 적은 별로 없데." "그런가요?" "응. 별로 올 가치는 없다고 하던데." 무인도의 본 섬에만 있어도 사냥감이나 식수 확보 등 여러가지 문제점에 직면할 요소는 현저히 줄어든다. 산장에서 먼 거리이기도 하고, 바닷물이 빠져야만 입도(入島)가 가능한 장소이기에 굳이 엘리가 이 장소에 올 필요성을 느낀 적은 별로 없나보다.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 장소에 와야 할 이유는 있다. 왜냐하면 배가 난파되고 난 이후부터 생존자들이 다수가 이 섬에 표류되었고, 우리들의 목적은 그 생존자들을 찾아서 돌아다니는 일이기 때문이니까. "교수님. 엘리에게 이 섬에서 생존자가 있을 확률같은 거 물어보실 수 있나요?" 옆에서 무인도의 또 다른 섬을 올려다보던 유아 선배의 질문에 교수님이 알았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에게 회화를 시도한다. 간단한 영어 몇 마디가 오고 간 이후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근거는요?" "여자의 감이래." "......" 유아 선배가 유행어로 밀어붙이고 있는 문장이기도 한 '여자의 감' 스킬을 엘리가 사용하고 말았다. 순간 말문이 막힌 유아 선배가 엘리에게 쫄래쫄래 다가가더니, 살짝 머리에 꿀밤을 선사해준다. "언니 유행어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는 거 알지? 허락을 얻고 하라고." "...Sorry." 저작권을 주장하는 유아 선배도 그렇지만, 순수하게 사과하는 엘리도 차마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하겠다. 이래서 애들은 순수하다니까. "유아. 엘리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어린 아이잖니." "장난이에요. 교수님. 애정표현이라고 하죠." 노아 교수님이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기다렸다는 듯이 교수님의 허리에 딱 달라붙기를 시전하는 엘리. 그나저나 폭력을 애정표현의 일부로 말하는 유아 선배의 저 발언은 결코 넘어갈 수가 없다. 원래부터 말보다는 주먹이 먼저 나가는 불 같은 성격의 여성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훗날 유아 선배와 사귈 남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폭력을 견뎌야 하는 것인가... 아. 그러고보니 그 남자가 나잖아? 잠시 잊고 있었지만, 나와 유아 선배, 그리고 노아 교수님은 서로 사귀는 사이다. 이게 다른 여성 멤버들과 다른 점이 뭐가 있냐면, 무인도 공식(?)이라는 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유아 선배와 노아 교수님과 그리고 내가 서로 연인 관계(3각 관계라고도 말을 하지만)를 유지하고 있고, 호시탐탐 성욕풀이 파트너로 다른 여자들이 나를 노리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야 좋긴 한데. 아무래도 남자다 보니까 다수의 여자들을 직접 다 상대할 수는 없다. 정력이 무한으로 셈솟는 것도 아니니까. 천연자원도 무한이 아니라 유한이잖아. 대자연이 극복하지 못하는 걸 인간이 극복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어쨌든 나머지 일행들을 이끌고 도착한 백사장. 무인도 본 섬에 비해서 별다른 차이점이 느껴지진 않지만, 매번 보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기에 약간 낯설게 느껴지긴 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풍경이 바로. "유에! 저쪽 좀 봐봐!" 유아 선배가 다급히 어느 한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나에게 외친다. 모두의 시선이 유아 선배가 가리키는 쪽으로 향할 무렵. 그 곳에 있던 것은 다름아닌 '난파선의 일부'였다. 우리가 타고 왔던 여객선. 지금은 난파선이 되었지만, 그 배의 일부가 이 또 다른 무인도에 떠밀려 있던 것이다. 난파선을 바라보던 노아 교수님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우리들과 공통적인 의견을 대표로 발설한다. "저쪽에 있던 선박에 비해서 작은 편이네?" "그러게요." 여객선의 극히 일부가 난파되어 떠밀려 왔는지, 생각보다 굉장히 작은 규모를 선보인다. 대충 표현하자면... 4층짜리 원룸 건물 정도의 크기라고 할까. 물론 지하 주차장 형태의 그런 건물로. "그래도 난파선이 있고 없고는 많이 다르겠죠. 안 그래? 유에." "선배 말이 맞아요. 유무의 차이는 크니까요." 난파선에서는 무인도에서 구할 수 없는 물품들을 얻을 수 있다. 설사 떠밀려온 난파선의 조각이 작을지 모르더라도, 엄연히 여객선의 일부였던 존재다. 선원실이나 객원실이 붙어 있는 파트였다면, 실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물건들이 필히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의미. 만약 이 또 다른 무인도에 생존자가 있다면, 그들이 여태까지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더더욱 클 것이다. "아무래도 수색할 보람이 있겠는걸요?" 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듯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아 선배와 노아 교수님. 엘리는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영 관심이 없다는 표정으로 노아 교수님이 줬던 조개 목걸이를 만지작거릴 뿐이다. 무인도의 규모 자체도 그리 크지 않고. 섬을 대충 둘러보는 데에 그리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 같지 않을 그런 기분이 든다. 우리가 가져온 식량은 넉넉히 잡아서 1주일 분량. 하루 3끼 다 챙겨먹기엔 양도 부족하기에 현지조달을 해야 한다. 그래서 무인도 생활에 도가 튼 달인, 엘리 선생님을 모시고 온 게 야생에서의 생존을 목표로 둔 우리들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제대로 불을 피우는 요령조차 터득하지 못한 나를 대신해서, 엘리가 불을 피우기 시작한다. 유아 선배와 노아 교수님이 땔깜을 구하러 가고, 나는 임시 캠프로 활약할 움막을 짓는 작업에 착수. 보우드릴로 가볍게 불을 지핀 엘리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끝내고 나에게 와서 배고프다고 밥을 달라는 눈초리를 유지하며 조르는 중이다. 기둥과 나뭇잎으로 천장을 만든 나는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까지 잠시 기다리라는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네주고. 땀을 훔치며 어두워져가는 밤하늘을 관찰하고 있을 무렵, 장작을 구해온 여성 멤버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식사 준비에 들어가본다. 오늘의 요리는. "... 고구마와 감자라니. 지겨워 죽겠어. 정말." 실증이 다 난다는 얼굴로 나이에 맞지 않게 투정을 부려보는 유아 선배의 말. 노아 교수님도 말은 안 하지만, 내심 슬슬 다른 음식을 먹고 싶다는 눈초리를 하고 있다. 엘리는 적응이 다 되었는지 맛있게 얌냠쩝쩝. 군고구마와 구운 감자를 섭취하고 나서 물통에 남아온 물을 마신다. "그러고보니 식수를 찾는 게 최우선이겠네요." "생각하니까... 그렇네." 내 말에 잠시 깜빡 잊었다는 듯이 손뼉을 치는 유아 선배와 노아 교수님. 우리가 가져온 식수 역시도 일주일치지만, 이것 역시도 최대한 아껴 먹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 나온 결론이다. 일정이 늦춰지거나 불행한 사고 탓에 무인도 본 섬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될 경우를 고려한다면, 식수 역시도 현지조달할 수 있는 여력 정도는 충분히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불행한 사건이 뭐냐 하면... 갑자기 태풍이 상륙해서 물이 불어나 잠시동안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되는 일 같은 경우 말이다. 무인도는 상당히 불친절하게도 일기예보 같은 것도 없기 때문에 날씨는 말 그대로 운에 따라 달라진다. 미리 예측할 길이 없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대비만이 살 길이다. 타이트한 옷차림의 젊은 여성 캐스터가 나와서 일기예보 같은 걸 해주면 좋을텐데... 날씨 정보도 얻고, 눈도 좋아지고. 일석이조. "하암~..." "졸린가 보네요. 선배." "벌써부터 눈이 감겨..." 유아 선배가 피곤한지 하품을 하는 모습이 내 눈에 포착된다. 아마도 장시간 걸은 탓에 피곤한거겠지. 노아 교수님도, 그리고 평상시에도 일찍 잠에 빠지는 엘리도 슬슬 수면 모드로 발동할 기세를 보인다. 어쩔 수 없지. "이제 슬슬 잘까요?" "그래야겠어. 부족한 수면은 미용의 적이니까." "유아 선배. 언제부터 그렇게 미용에 신경을 쓰셨나요?" "...여자한테 굉장히 무례한 발언을 하는구나. 때려줄까?" "아니요. 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알면 됐어." 한창 신경이 예민할 때, 여자를 건들이는 발언은 가급적 삼가하는 편이 좋다. 무인도에서 얻은 또 다른 지식 중 하나. 어떤 의미로 보자면 생존에 필요한 지식 중 하나이기 때문에 미리 숙지해두도록 하자. 괜히 나중에 여자한테 맞을 일을 자초하지 말고. ============================ 작품 후기 ============================ '여름 날씨가 다가와서 그런지 몰라도 요새 들어서 저런 무인도에 여행이나 한번쯤 가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토크 제 1회입니다. 개인적으로 여행은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긴 한데, 그래도 날이 덥다보니 어디론가 떠나고 싶더군요. 바다 안이 그대로 보이는 투명한 해변가 같은 곳 말이지요. 죽기전에 한번쯤 가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여하튼 가고는 싶습니다 ㅜ_ㅜ 261화 뿌드득. 이른 아침부터 절로 눈이 떠지자마자 가볍게 목과 허리운동, 그리고 팔과 다리를 가볍게 움직이자 절로 이런 소리가 난다. 어제 저녁 늦게 도착한 해변가라서 급한데로 움막을 지었더니, 생각보다 공간이 좁은 물건이 튀어나온 탓에 다 같이 옹기종기 모여서 잤더니 뻐근해 죽겠다. 그나마 자야하는 4명 중 3명이 여성이었고, 그 3명 중 한 명은 어린 여자아이였기 때문에 잘 수 있었지만, 성인 남성 4명이었다면 한 명은 바깥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신세가 왔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긍정적인 마인드가 인생을 바꾸는 법이다. "먼저 할 일은..." 비몽사몽한 느낌으로 천천히 화덕을 향해 걸어간다. 일어나자마자 가장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것은 바로 불씨 살리기. 불침번을 정하지 않고 자다 보니까 어느새 불길도 많이 죽어있는 상태다. 4명으로 불침번을 돌리기에는 힘든 인원수이고, 해변가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들짐승이 오거나 그러진 않을거 같아서 일부러 불침번 제도를 없애고 다 같이 꿀잠을 취하기로 했다. 섬을 건너오는 데에 많은 체력을 낭비하기도 했고, 피로를 풀려면 충분한 수면 시간이 최고니까 말이다. 아직까지도 살짝 감겨있는 눈을 애써 치켜 세우면서 근처에 있는 장작들을 화덕 안에 넣는다. 그리고 공기가 통하게끔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어주자, 다시 살아나는 화덕. 엘리에게 화덕 관리법을 전수받은 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나도 이제 프로 생존가가 다 되지 않았을까. 국가 공인 자격증으로 야생 전문 생존가 자격증이 있다면, 나는 틀림없이 합격일 것이다. ... 그 전에 이 무인도에서 빠져 나가야겠지만. 불을 다시 살리고 있을 무렵, 두번째로 이른 기상을 한 것은 다름이 아닌 유아 선배. "잘 잤어요? 선배." "......"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마치 숫사자의 갈퀴를 연상캐 한다. 유독 뻗침머리 현상이 심한 유아 선배였기 때문에 아침에 막 일어난 모습은 솔직히 말해서 보기 흉하다. "... 지금 몇 시...?" "글쎄요. 아마 오전 7시 정도 되지 않았을까요?" 지금까지 무인도에 지내오면서 나름 해의 위치를 토대로 대략적인 시간 추정 방식을 익힌 내가 바다 위에 모습을 드러낸 태양의 자리를 보고 간단한 시간을 말해주자, 한숨을 토해내며 눈을 비비적거리는 유아 선배의 투정어린 목소리가 곧바로 들려온다. "그거밖에 안 됐어?" "그거밖에 라니요. 산장에 있을 때는 이것보다 더 일찍 일어났잖아요." "아... 피곤해." 죽을 맛이라는 얼굴을 하며 간신히 자리에 일어서는 선배의 모습이 오늘따라 안쓰럽게 느껴지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할당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어제 하루를 소비하고, 오늘 2일차에 접어든 무인도 탐사 기간이기 때문에, 돌아가는 날도 빼다보면 5일 안으로 생존자의 유무를 판별해야 한다. 아니면 그 5일 전에 생존자를 발견하거나. 어차피 둘 중에 하나. 앞면 아니면 뒷면. 참으로 간단한 선택지다. "세수라도 할래요?" "... 할래." 고개를 끄덕이며 터벅터벅 바닷가로 향한다. 가져온 물을 사용하게끔 배려하고 싶지만, 불행히도 우리들이 가져온 물은 극히 한정되어 있는 상황. 식수로 사용하기에도 간당간당하기 때문에 세면세족에 사용될 물은 바닷물로 해결하기로 미리 서로 의견을 모으고 왔다. 물론 엄청 찝찝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바닷물에 머리를 적시고 얼굴을 씻은 뒤에 다시 베이스 캠프로 돌아온 유아 선배. 얼굴과 머리에 소금끼가 느껴지는지 살짝 찡그러진 얼굴이 선배의 마음속을 대변하고 있다. "너무 짜." "원래 바다가 짜니까요." "짜도 너무 짜!" "나중에 민물이라도 구하면 그걸 이용하도록 하죠." "가급적이면 오늘 중으로 식수를 확보하고 싶은데." "안 그래도 팀을 나눌 생각이에요." "팀을 나눈다고?" "네. 식수 확보 팀과 생존자 수색 팀. 이렇게 두 팀으로요." "나눠도 돼?" "생존자를 찾으러 왔는데, 식수 때문에 고충을 겪을 수는 없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안전이 최우선. 이기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우선 저희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세요." 게다가 대략 한 달 정도의 기간이 흐른 상황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있다면,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법과 노하우를 나름 터득하고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생존자 수색이 급한 일은 아니라는 뜻. 화덕 근처로 온 유아 선배가 풀잎을 엮어 만든 핸드백에서 감자와 고구마를 꺼내며 묻는다. "팀은 어떻게 짜려고?" "저하고 노아 교수님이 수색 팀, 그리고 엘리와 유아 선배가 식수 팀으로 하려고요." "그렇게 짠 이유가 뭔데?" "일단 엘리와 저는 무조건 갈라지게 짰고요. 이 섬에 한 번이라도 와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엘리밖에 없으니까 식수 조달에 용이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식수 조달에 성공하면 물을 퍼서 옮기거나 해야 할 노동이 생기니까 자연스레 노아 교수님보다 유아 선배가 엘리와 같은 팀이 되는 거죠." "생존자 수색 팀은 별다른 노동력을 필요하지 않으니까?" "네." "나름 합리적인 근거네."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는 식으로 의사표시를 보여준다. 유아 선배의 저 반응을 보니까 어제 자면서 짬이 나는 시간을 토대로 미리 팀을 구성해놓은 게 그래도 효과를 거둔 거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 노력은 결코 배신을 하지 않는다. 참으로 기분좋은 말이다. "그런데 너..." 내 곁에 있던 유아 선배가 자신의 손으로 코를 막더니 상당히 가슴을 후벼파는 말을 한다. "안 씻었지?" "......" 방금 전까지는 칭찬을 들어서 기분이 참 좋았는데. 순식간에 역전이 되어버렸다. 청결은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요건인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내가 짰던 팀 그대로 오늘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합의를 본 뒤. 유아 선배와 엘리는 숲 안쪽으로 들어가기로 하고, 나와 교수님은 해안가를 따라서 일단 난파선 배의 일부를 살펴보기로 한다. 가장 먼저 생존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법한 장소이기도 하고, 우리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구할 수 있다는 또 다른 이점 때문에 먼저 수색장소로 난파선을 고른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꽝은 없는 장소란 뜻이죠." "그렇게 말하니까 설득력이 꽤 있구나." 감탄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노아 교수님의 모습이 오늘따라 많이 귀여워 보인다. 키도 나보다 작은 편이고, 어딘지 모르게 어수룩한 면이 또 보호본능을 자극한다고 할까... 연상인데도 불구하고 미덥지 못한 면 또한 언밸런스함이 감도는 미묘한 매력을 풍긴다. 여성의 챠밍 포인트는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으며 난파선에 도착. "생각보다 가깝네." "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대략 10분 정도 걸었을까. 곧장 모습을 드러낸 난파선을 바라보며 그나마 적게 걸었다는 체력 보존을 빌미로 위안을 삼아본다. "들어가볼까요?" "응." 노아 교수님을 뒤에 따라오게끔 만들고, 내가 앞장서는 형태로 난파선 안으로 들어간다. 규모는 작지만, 손상도가 무인도 본 섬에 있는 난파선에 비해서 꽤나 높은 편이라서 내부로 들어갈지 말지 고민이 된 것도 있다. 여차하면 우리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난파선이 붕괴되지 않을까 라는 그런 우려 때문에. 그래서 가급적이면 너무 깊게 들어가진 말고, 최대한 맴도는 형식으로 루트를 잡기로 한다. 어차피 내부 깊게 들어가고 싶어도, 배가 너무 많이 손상되어 들어가지 못하니까 말이다. "교수님. 조심하세요." 손을 내밀어 교수님의 손을 잡아준다. 바닥에 고인 물은 썩은 모양인지 냄새가 장난이 아니고, 습기가 가득 찬 배의 내부 덕분에 찝찝하기까지 하다. 후각적으로, 촉각적으로, 그리고 어두운 실내 내부 환경탓에 시각적으로도 잘 보이지 않는 최악의 조건. 손전등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그런 최첨단 과학 기기는 이 섬에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그래도 어두운 공간에 오랫동안 있다보니 눈이 어느새 어둠에 적응이 되어 움직일 정도의 시야는 확보가 된다. 교수님 역시도 나와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아까는 자주 발을 헛딛는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지금은 훨씬 나아진 발걸음을 선보인다. "이 곳에서 생존자들이 살고 있을까?" "산다기 보다는... 우리처럼 그냥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하러 자주 들락날락 거리는 정도의 수준밖에 안 될걸요?" "위험하니까?" "네.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곳에서 사는 건 바깥에서 머무는 것 보다도 훨씬 위험할 테니까요." 벌레나 들짐승들, 그리고 날씨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는 있어도, 이런 위험천만한 곳에 사는 것이 훨씬 더 안 좋다고 생각한다. 나 같아도 다른 곳에 움막을 짓고 사는 게 좋다고 보니까. ============================ 작품 후기 ============================ 이번 에피소드가 완결이 아닙니다. 완결 에피소드는 제가 아직 계산을 안 해봐서 몇번째가 완결 에피소드인지 알려드릴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이번 에피소드로 완결이 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나저나 3시간동안 롤 하다 오니까 눈이 좀 침침하군요. 나이가 들수록 피지컬이 떨어져서 큰일났습니다;; 262화 한동안 난파선 내부를 돌아다녀봤지만. "... 도저히 어두워서 볼 수가 없네요." 교수님과 해변가에서 빠져나온 뒤에 나란히 앉은 채로 난파선을 바라보며 약간 허망한 감정까지 들기도 한다. 시간상으로는 아마... 2시간 정도 살펴본 거 같은데. 아무런 소득도 없고, 오히려 체력만 낭비한 꼴이 되었다. 한 마디로 얻은 거 없음. 소득 없음. 참 힘 빠지는 일이로다. "배고프네." 교수님이 자신의 배를 만지면서 혼잣말로 내뱉은 말이 우연치않게 내 귓가로 들어온다. "이 쯤에서 점심 먹을까요?" "먹어도 되니?" "배가 고프면 먹어야죠. 좀 이르긴 하지만요." 저녁을 빨리 먹으면 될 일이고. 어차피 잠도 빨리 잠드는 상황인데, 굳이 시간 조절을 할 필요는 없을거 같다. 본능대로 행동하는 게 가장 살기 편하고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지는 수단이니까. 베이스 캠프에서 미리 구워온 감자와 고구마를 먹으며 식수로 목을 축인다. 어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 그리고 점심까지. 하루 3끼를 고구마와 감자로 해결하다니. 아무리 무인도 생활이 척박하다 하더라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다. 식수 겸 식량도 구해볼까. "교수님. 잠깐 바다에 좀 들어갔다 올게요." "왜?" "단백질 섭취가 하고 싶으시죠?" "그, 그렇긴 하지만... 괜히 미안해지게." 노아 교수님은 수영을 못한다. 무인도에서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나하고 유아 선배. 엘리 정도인가. 세린은 파도가 몰아치는 거친 물살로 가득한 바다 수영은 할 줄 모르고, 지아 선생님이나 체리는 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 내가 알고 있는 게 없다. 대부분 바다 사냥같은 경우에는 나와 유아 선배가 거의 전담을 하다시피 했으니까. 마침 괜찮은 생각이 들어서 은근슬쩍 노아 교수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해본다. "교수님. 혹시 수영 배우실 생각 없나요?" "수영?" "네. 물고기 사냥을 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더라도, 배워두면 무인도 생활을 하면서 유용하게 사용될 거 같아서요." "음..."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미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는 순간부터 거의 반절은 넘어왔다는 의미. 노아 교수님은 본래 그런 사람이다. 귀가 얇은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남의 제안이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착한 심성의 소유자이기에 매몰차게 하기 싫다는 말은 하지 못한다. 물론 그렇다고 노아 교수님의 성격을 이용해서 강제적으로 수영을 알려줄 의도는 전혀 없다. 어디까지나 실생활에 유용하니까. 혹은 나중에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때를 대비해서. 짧은 고민을 마친 교수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식으로 답변을 들려준다. "할래. 예전부터 배우고 싶었으니까." 무료 수영 강좌라서 그런지 노아 교수님의 표정이 한층 밝아진다. 본래 수영복은 별도로 없기 때문에 속옷 차림만 입은 채 나와 같이 바다로 들어오는 교수님. 무인도에 오면서 점점 글래머러스해지는 교수님의 여체에 순간적으로 시선이 향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교수님의 손을 잡고 바닷가 안으로 들어온다. "당황해하지 마시고요. 발을 위, 아래로 번갈아가며 움직여보세요." "이, 이렇게?" "네. 잘하고 있어요." 교수님의 손을 잡아주고 최대한 느린 속도로 교수님을 이끌어준다. 첨벙첨벙 거리는 물장구 소리와 함께 교수님에게 수영에 관한 노하우를 알려주는데. "유, 유에!" 황급히 고개를 치켜든 교수님이 갑자기 사색이 된 얼굴로 나에게 달려든다. 예상치 못한 풍만한 여체와의 스킨십 덕분에 잠시 이성이 바깥으로 가출할 뻔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도로 붙잡아 놓으며 교수님을 안정시킨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미, 밑에 뭔가 있어!" "밑에요?" 잠시 호흡을 들이마쉰 뒤에 잠수. 눈을 뜨고나서 교수님이 발견한 무언가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직접 두 눈을 통해 확인해보려 하는데. ... 이거구만. 교수님이 놀랄만도 했겠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처음 보자마자 교수님의 질겁하는 반응이 이해가 된다. 사건의 주범을 직접 손으로 들어서 물 바깥으로 꺼내어 올리자, 또 다시 기겁을 하면서 이번에는 황급히 나에게서 멀어지는 교수님. "그걸 들고 오면 어떡하니!!!" 난생 처음 들어보는 교수님의 화난 목소리에 사실 놀라기도 했지만, 자기 보호에 무심코 나온 반응이란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가볍게 흘려 넘긴다. "이거, 성게에요." "성... 게?" "네. 아주 맛있는 해산물이요." "마, 맛있어?! 그게?" "교수님은 먹어본 적이 없나요?" "...난 해산물 별로 안 좋아해서..." 생각해보니 물고기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교수님의 성향을 분석해보면, 성게를 좋아하지 않다는 이유 정도는 쉽게 납득된다. 나도 해산물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니까. 이해하지 못한단 말은 거짓말이고. "그거... 먹을 순 있는거니?" 고슴도치 마냥 사방으로 뾰족한 가시가 나 있는 성게를 가리키며 의심의 눈초리로 묻는 교수님에게 신용도를 높이기 위한 시원스런 미소를 선보이며 말한다. "물론이죠. 소중한 단백질 공급원이니까요." "...어디서 많이 듣던 대사인 거 같은데..." "신경쓰지 마세요. 잠시만요." 일단 해변가로 나와 근처에 있는 작은 돌을 찾는다. 그러고 나서 성게를 깨뜨리자, 안에 먹음직스러운 살결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중 하나를 집어 교수님의 입 위로 가져간다. "아~ 해보세요." "으..." 외관상 식욕을 자극하는 모습이 아니란 사실 정도는 나도 충분히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 법... 아니지. 살기 위해 먹는 건가? 여하튼. 다양한 해산물을 섭취해보는 것도 좋다는 의미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내가 준 성게를 삼키는 교수님. 2, 3번 턱이 움직인 것으로 보아선, 곧장 삼킨 모양인가 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겁이 굉장히 많은 교수님의 성향을 고려한다면, 부자연스러운 반응도 아니다. "맛있나요?" "글쎄..." 미묘한 대답. 뭐... 맛있다는 대답을 들을거란 생각은 나도 하지 않았다. 불고기도 아니고. 취향을 많이 타는 해산물이기도 하니까. 못먹을 정도의 수준은 아니란 말을 안했다는 것에서 만족해야 하나. 좋아. 오늘은 특별히 교수님을 위해 성게 요리를 준비해봐야지. "더 가져올까요?" "일단은... 배도 고프니까 먹어보는 게 좋겠구나." 식욕은 사소한 감정의 선을 극복할 수 있게끔 만든다. 긍정적인 효과로군. "그럼 가서 더 구해올게요." 라고 말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바스락. "...!!" 미세하지만 분명 내 귀에는 들렸다. 풀이 움직이는 소리를. 그리고 소리 뿐만 아니라, 운이 좋게도 막 일어서던 나에게만 보였다. 수풀이 보여준 미동까지. 무언가 있다. 들짐승인가? 움직이는 규모로 보아서는 적어도 엘리 정도의 크기, 아니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분명 들짐승일게 분명한데.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추고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나. 그 모습에 겁을 먹었는지 노아 교수님 역시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내가 바라보는 위치를 뚫어져라 본다. "무... 슨 일이니?" "교수님 일단 제 뒤에 있으세요." "동물이라도 나타난 거야?!"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이 상황. 묘하게 겪어본 적이 있다. 뭐랄까... 이 무인도에 처음으로 만난 동료이기도 한 노아 교수님과 단 둘이 있었을 때, 동물인 줄 알고 무심코 덤볐던 일화가 있었는데 알고보니 유아 선배였었지. 데자뷰처럼 느껴지는 현상이기에 이번에는 좀 더 침착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행여나 생존자일 가능성도 예외로 할 순 없으니까. 이번에는 무턱대고 덤비지 말자. 그렇다고 들짐승의 경우 역시도 제외할 순 없으니까 최대한 신중한 수단을 택해보자면. "일단 누군지 확인부터 해볼까." 아까 성게를 먹는 데에 사용했던 작은 돌을 다시 줍는다. 설마 이 돌이 재사용될 줄은 몰랐지만, 세상사 그 누구도 완벽하게 다 알고 있진 못하는 법이니까. "그 돌로 뭘 하려고?" 교수님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고 싶은 기분이지만. 최우선사항은 Q와 A가 아니라 위험요소가 다분한 저 수풀 넘어 누군가의 정체를 밝혀내야 한다. 돌을 든 상태에서. 그대로. ...투척!!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핑계를 발설하자면, 오늘 술자리가 있었는데 일찍 끝날 줄 알고 일부러 예약을 안 해뒀다가 생각보다 술자리가 길어져서 이제야 집에 돌아온 탓에 글이 올라가는 시간이 늦어졌습니다. 그나저나 꿀막걸리를 마셨는데, 생각보다 맛있군요. 도수가 높지 않고 달달한데, 괜찮은 맛입니다. 단점이 있다면, 배가 너무 부르다는 점일까요. 263화 수풀 안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돌맹이. 내가 던졌지만, 정말 잘 날아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한 곡선을 보여주며 날아간 돌맹이의 끝에 닿은 것은. "아얏?!" ...누군가의 머리였나 보다. 야생 동물의 반응이 들려올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꽤나 귀여운 음성이 들려와서 조금 놀라버렸다. 본래같은 경우에는 즉각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행동을 개시했어야 했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 이외의 사람이 내뱉는 음성에 약간 쇼크 반응을 일으켰다고 표현하는 편이 정확하지 않을까. 목소리의 주범이 벌떡 일어서더니 모습을 드러내며 무작정 화를 내기 시작한다. "사, 사람한테 돌을 던지다니! 당신, 양심도 없나요?" 돌맹이를 던진 것과 잔여 양심의 상관관계에 대해 약간 이해가 안 갔지만, 그래도 잘못을 한 쪽은 우선 나이기에 재빨리 사과부터 한다. "미안. 잘못했어." "국어책 읽는 목소리로 말하지 말고 진심을 담아 사과하라고요! 누가 봐도 전혀 진심이 느껴지지 않아요!" "나름 최대한의 진심 성분을 함유한 사과였는데..." 마치 꼬리를 밟힌 고양이 마냥 성난 모습을 연출하는 작은 체구의 여성. 엘리보다는 크지만, 세리아나 아리아, 그리고 체리같은 여자보다 약간 작은 키를 자랑하고 있는 단발의 여자아이가 눈을 번뜩이며 여전히 우리를 경계한다. 옷차림은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평상복. 피부는 햇빛에 많이 노출되어 그런지 약간 탄 듯한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언행으로 봐서는 굉장히 기운이 넘치는 여자애로 보이는데. "인. 그만 화내고 말을 들어보자." "우으으!!" 언제부터일까. 여자애를 '인'이라 지칭하며 부르고서 모습을 드러낸 또 한 명의 사람. 굉장히 넓은 어깨에 다부진 체격을 자랑하는 남성. 듬성듬성 자란 고슴도치 머리를 지니고 있는 남성에게 인이란 여자가 여전히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는지 따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대장님! 무례한 사람들이라고요! 실로 무인도에 딱 어울릴 정도로 야만적이고 현대문명의 손길을 전혀 받은 적이 없는 듯한 그런 희대의 비매너 녀석을 어떻게 용서하란 말인가요!" 실로 대단한 표현력이로다. 말이란 건 엄청난 힘을 지녔구나. 사람 하나 정도는 간단히 범죄자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니. 계속해서 폭주중인 여자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정하라는 말을 들려주는 남자. 대략 5분이 지났을까. 이제야 분이 풀린다는 듯이 모든 푸념을 털어놓은 인이 잠잠해질 무렵,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온다. "처음 뵙겠습니다. 생존자 여러분. 저는 이기한이라고 합니다." "유에입니다. 이쪽은 노아 교수님이고요." "바, 반가워요." 어색하게 꾸벅 인사하며 졸지에 나와 같이 인사를 주고 받게 된 노아 교수님. 어마어마한 덩치를 지닌 남자가 조금 무서워졌는지 악수를 나누고서 황급히 내 뒤로 숨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무인도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바로 '남자'다. 여자의 입장에서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할 대상 1호. 물론 나도 남자지만, 성적인 의미에서는 그다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기에 안전한 남자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하지만 다른 생존자의 경우는 어떨까. 특히나 자신을 이기한이라 소개한 남성은 과연.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여자는 남자를 경계해야 하는 것이 옳다. 특히나 사회나 법이라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없는 이곳, 무인도에서는 더더욱. 노아 교수님의 행동이 초면상으로는 매우 버릇이 없는 행동이란 것 정도는 나도, 노아 교수님 본인도, 그리고 졸지에 미수범이 된 이기한이란 남자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내가 노아 교수님을 대신해서 기한에게 사과를 하는 편이 좋겠지.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저희 일행쪽으로서는 낯선 남자를 보면 좀..." "하하.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쪽 여성분께서 하신 처사가 옳지요. 저는 오히려 인이 그쪽 여성분의 행동 처사를 본받았으면 할 정도입니다." "대장님!! 전 남자따윈 무섭지 않아요!" "그게 더 불안하다는 거야." 기한이 다시 큼지막한 손으로 인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주기 시작한다. 그나저나 대장님이라니. 나는 '오빠'라든지 '아빠'라는 칭호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지. 이건 좀 실례되는 말인가. 여하튼 독특한 칭호로 불리고 있는 기한이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을 선보이며 말한다. "두 분이서 계속 생존해오신 겁니까? 그런것 치고는 꽤나 복장이라든지 여러 면에서 고생한 흔적이 별로 보이질 않는군요." "아. 이건..." 노아 교수님이 그동안 우리들이 어떤 식으로 생존해왔는지 말해주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에. "다른 무인도 섬에도 난파선이 있거든요. 거기서 먹을거라든지 옷 같은 건 쉽게 조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어쩐지 저희들과는 달리 복장이 깔끔한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하." "운이 좋은 케이스지요." 엘리와 만난 이야기나 불시착한 비행기의 잔해, 기타 상세한 내역은 생략해버린다. 노아 교수님이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지만, 군말없이 모든 사실을 이 남자에게 털어놓진 않겠다는 암묵적인 내 결정을 따르겠다는 식으로 굳게 입을 다문다. 사람은 사람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그게 사회이든, 혹은 무인도에서든. 기한이란 남자가 과연 믿을만한 사람인지, 아니면 그다지 신용도가 높지 않은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판단하게 될테고, 그에 따라 우리들도 하나 둘 씩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물론 생존자란 존재는 반갑지만, 그렇다고 덥썩 그 생존자에게 모든 신뢰를 바칠 생각따윈 없다. 여성을 강간하려다 살해당한 다수의 남자들. 그리고 이예신. 아직까지 많은 생존자들을 만나보진 못했지만, 착한 사람들만 존재하란 법은 없다. 우선 이 남자와 저 인이라는 여성부터 파악해야 한다. 우리가 과연 믿을 만한 사람들인지에 대해서부터. 엘리와 유아 선배가 임시 베이스 캠프로 돌아오기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있기 때문에 나와 노아 교수님은 우선 기한을 따라 생존자들이 모여있는 장소로 향하게 되었다. 우리가 커다란 무인도 섬에서 왔다는 점과 더불어 그 섬에 있는 난파선에서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기한에게 들려주고, 혹시 몰라서 엘리와 유아 선배까지 포함해서 현재는 4명이 우리 생존자 멤버라는 점을 기한에게 알려주게 되었다. 별다른 의심 없이 내 말을 믿은 모양인지 기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을 데리고 우리들을 안내한다. 이곳 무인도는 그다지 규모가 큰 편이 아니기 때문에 별다른 수고를 들일 필요 없이 사람들의 흔적이 물씬 풍기는 장소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는. "이거 생각보다..." 그 이상이다. 내가 예상했던 건 고작해야 5~6명의 생존자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움막집 같은 걸 짓고 사는 광경을 예상했는데, 현실은 사뭇 달랐다. 제대로 지어진 나무 집이 다섯이나 있고, 그 곳에 머물고 있는 생존자들의 모습은 대략 눈짐작으로 봐도 15명이 넘어간다. 어린 아이들에다가 나이가 지긋하신 노인분, 여성과 남성 등등. 남녀노소가 모여있는 또다른 생존자 집단. 나이가 20대로 편중되고, 거의 90퍼센트가 여성으로 이뤄진 우리 집단과는 달리, 이 곳은 꽤나 각양각색의 생존자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여기가 현재 우리들의 베이스 캠프입니다." "캠프라기 보다는... 마을 수준인데요?" "하하하. 덕분에 고생 좀 많이 했죠." 라고 말하며 기한의 알통이 불끈거린다. 힘을 쓸 수 있을만한 장정의 존재는 무인도에서도 빛을 발한다란 말인가. 그 덕분에 나도 꽤나 고생 좀 했지. 우리들은 남자가 나 혼자밖에 없고, 여기는 성인 남자가 얼핏 봐도 5~6명이나 보이니까. ============================ 작품 후기 ============================ 오늘 롤을 하는 와중에 팀원들 중에서 미드 탈론이었는데 적만 보이면 그냥 무조건 들어가더니 혼자서 거의 두자리수 데스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고 문화충격을 받고 말았습니다. 노멀만 하는 유저인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았나... 싶군요. 게임을 못하는 거 가지고 까는 것도 좀 아니다 싶어서 걍 그러려니 하고 넘겼습니다. 모두가 다 게임을 잘하는 건 아니니까요. 다만, 못하는 게 죄는 아니지만, 비매너는 죄입니다. 아름다운 롤 문화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ㅜ_ㅜ 264화 "자. 이쪽으로." 기한의 안내를 받으며 도착한 곳은 어느 휴식터. 통나무 집 형태의 지붕과 벽이 있는 그런 건축물이 아니라, 통풍을 위한 구조인지 몰라도 벽은 없고 정사각형 포지션의 기둥과 거대 나뭇잎으로 뒤덮은 형태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건축물이기에 휴식터라는 명칭을 사용해봤다. 두께가 어마어마한 나무 기둥을 사용했는지, 제법 큰 규모를 자랑하는 나무 위에 먹을 것을 올려놓는 인. 그러면서 여전히 나에게 으르렁거리는 것을 잊지 않고 있지만, 이제는 그 모습도 귀여워 보이기까지 한다. 여성의 매력은 한 두 가지가 아니구나 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배고프실 테니까 이거라도 드시죠." 잎사귀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은 다름아닌 고기, 고기, 고기. 바닷물에 사는 지느러미가 달린 어패류의 그런 물고기가 아니라 육류다. 기름기가 좔좔 흐르면서 동시에 스테이크 마냥 먹기 좋기 통통한 살을 자랑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마 멧돼지가 아닐까 추정된다. 이 지역 사람들도 사냥법에 숙달된 것인가. 하기사. 우리보다는 남자들이 많으니까 쉽사리 사냥에 성공할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유, 유에." 눈 앞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바라보던 교수님이 내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올려다본다. 먹어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는 것인가. 무인도에 오고 나서 유독 식탐이 강해진 교수님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기에 고개를 살짝 끄덕여주자, 더더욱 눈가에 생기가 돌며 기한과 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잘 먹겠다는 의도를 표시한다. 몇 일동안 감자와 고구마로 배를 채웠으니. 교수님의 저런 반응도 눈감아 줄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여기에도 들짐승이 많이 있나 보군요." "건너오신 섬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을지 모르지만, 이 섬도 알고보면 꽤나 크답니다." 내 질문에 친절히 답변하는 기한. 겉으로 봤을때는 많이 작아보였는데, 그래도 식량 확보 면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인다. 뭐... 먹을 게 없다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결정했겠지, 굳이 여기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아까 점심 식사를 했지만, 그래도 나 또한 다시 배가 고파진 터라 고기를 잡고 배를 채워본다. 교수님에게 수영을 가르치느라 공복의 시간이 평소보다 좀 짧아진 듯한 그런 느낌이 들 무렵. "다른 두 분은 어디 계시는지." "물을 구하러 갔거든요. 저녁에 다시 베이스 캠프에서 보기로 했으니까 해가 저물기 전에는 돌아올 겁니다." "그럼 이 곳으로 데리고 오시겠습니까? 보시다시피 머물 곳은 이 장소로 해도 괜찮습니다만." "그래주신다면 저야 감사하죠." 시원스런 웃음으로 우리들을 초대하는 기한의 말에 나 또한 긍정적인 생각을 들려준다. 야생 짐승의 습격도 있고, 갑작스런 기온 저하라든지 여러가지 면에서 따져보자면, 해변가에 자리잡은 임시 베이스 캠프보다 사람들이 많이 머물고 있는 마을 쪽이 우리들 입장에서는 더 살기 좋은 환경 조건이니까 말이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난 이후에 교수님과 잠시 마을을 둘러보기로 결정을 하게 되고. 가이드 역할을 담당하게 된 인이 퉁명스러운 말투를 내뱉으며 말한다. "... 여기가 광장이야." "광장이라." 마을 한 가운데에 위치한 공터. 간단하게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형태로 나무 기둥이 눕혀져 있고, 그 한 가운데에는 강단처럼 생긴 나뭇기둥이 잘려져 있었다. 아마도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모여서 회의를 하는 공간이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알아본 바로는. 기한이란 남자가 리더로 보이니까 정 중앙에 있는 자리의 주인은 아마도 기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인이란 여자아이도 기한에게 대장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니까. 그래도 확인 차원에서 한번 물어보는 게 인지상정이란 생각이 들어서 질문을 던져보는데. "저기." "흥!" "......" 질문은 일절 받지 않겠다는 강경한 의지를 한 글자로 표현해버렸다. 정말 대단한 표현력이로구만. 언어의 마술사라는 칭호를 붙여주고 싶을 정도로 간결하고 완벽한 의사전달이 내 마음을 확 사로 잡았다. 어쩔 수 없지. 여기서는 교수님의 도움을 받아보도록 할까. "노아 교수님." "왜 그러니?" "저 대신에 이 마을의 리더가 기한이 맞는지 좀 물어봐줄 수 있나요." "직접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니니?" "아무래도 인은 저를 매우 싫어하는 거 같아서요." "그럼 못써. 유에. 여자한테 미움받을 짓이라도 한 거니?" "없다고는 말 못하겠지만요." 미확인 생물체를 확인한답시고 돌맹이를 던지고, 그 돌맹이가 보기좋게 인의 정수리에 맞은 것이 아직까지도 큰 화근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악의가 없다는 사실 정도는 인도, 기한도 알고 있을 테지만. 본래 여자란 존재는 감정적인 생물이다.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어도, 첫 대면부터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긴 건 꽤나 후유증이 크다. 첫 인상에서 상대방의 인식이 거의 90퍼센트 결정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 않는가. 그렇게 따지자면 나는 인에게 제대로 찍혔다는 것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하필이면 나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인이 우리들의 가이드를 맡게 되다니. 기한이 바쁘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이런 결과물이 도출되긴 했지만, 그래도 기나긴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의사소통의 부재는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있어서 치명적이라고. 아가씨. ============================ 작품 후기 ============================ 분량이 적어서 죄송합니다. 요새 취업도 안 되고 해서 멘붕중인지라... 진짜 일은 하고 싶은데, 직장 잡기는 너무 힘드네요. 별다른 장점도 없어서 그렇긴 하지만, 뭐라고 할까요. 이럴줄 알았으면 그냥 고등학교 졸업 하자마자 직장잡기에 올인할걸... 이라는 후회감만 밀려옵니다. 하아;; 누가 저 좀 데려가줬으면 하는 생각 뿐입니다. ㅜ_ㅜ 265화 광장을 중심으로 순수하게 잠만 자는 용도로 이용중인 집이 3이라고 치고, 음식 저장 공간소가 하나, 그리고 우리가 이 섬에 오기 전에 잠깐 찾았던 난파선의 잔해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보관하는 장소로 애용중인 창고가 하나. 마지막으로 밭이 하나. 대략 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이 마을에 비해 소규모로 살고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밭의 크기라든지 머물고 있는 통나무집의 공간 자체가 매우 크긴 하지만, 체계적이지는 않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집의 경우에는, 비행기의 철판을 뜯어왔기 때문에 보온성이나 강수의 침투 여부에서는 꽤나 높은 성능을 자랑한다. 그렇기에 품질면으로 따지자면 우리도 밀리진 않는다란 말을 하고 싶다. 여하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슬슬 일행들이 올 시간이라서. 잠깐 데리러 가도 될까?" 여전히 퉁명스러운 말투로 일관하며 일일 가이드로 맹활약중이던 인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나를 바라본다. "갔다 오든가." "최대한 빨리 올게. 기한 씨한테도 잘 말해주고." "대장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너에겐 대장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아니니까." "무례한 녀석!!" 이라고 말을 하며 또 다시 으르렁거리기 시작한다. 자칫 잘못하다간 물 기세. 무슨 동물도 아니고. 어쨌든 인에게 우리들의 행방을 알려주고 난 이후에 노아 교수님을 데리고 우리가 첫날 머물렀던 베이스 캠프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해안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에 대략 30분이라는 시간을 소비해서 도착. 그 곳에는 우리보다 먼저 복귀한 유아 선배와 엘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꽤 늦었네." "여러가지 일이 있어서요." 유아 선배의 말에 함축적인 의미를 담은 말을 전해준다.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 엄청나게 많은 일이 있어서 정신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뭐, 아무렴 어때. 그것보다 이거 봐봐. 짜잔~!" 자랑스럽게 물통을 꺼내며 식수를 보여준다. 유아 선배의 행동에 엘리도 졸지에 커다란 물병을 들고 유아 선배와 똑같이 작은 목소리로 '짜잔.'이라는 효과음을 내면서 물통을 들어보인다. 굳이 선배의 행동을 따라할 필요는 없었다고 보여지지만, 중요한 건 사소한 지적이 아니라 식수를 구했다는 점이니까 크게 신경쓰지 말도록 하자. "용케도 구하셨네요." "근처에 작은 호수가 있었어. 그것보다도 뭐라고 해야 할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고심의 흔적을 보이기 시작하는 선배. 뭔가 나에게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식수를 구하는 과정에서 무슨 문제라도 발생한 것인지 모르겠다. 모르면 물어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럴때는 직접 캐묻는게 정답이다. "문제라도 있었나요?" "그게 말이지..." 어느새 노아 교수님에게 다가가 자신이 구해온 식수를 자랑하고 있던 엘리를 향해 유아 선배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엘리가 아까 나한테 말한 거 같은데... 생존자의 흔적이 있었다고 했었나..." "가정법인가요." "어쩔 수 없잖아. 나, 영어 잘 못한다고. 사람이 어찌구 저찌구 한 거 같았는데... 생존자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 거 같아." 이럴때도 역시 모르면 물어보는 게 인지상정. 다행스럽게도 통역을 담당할 노아 교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직접 다가가서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는 교수님에게 임시 통역을 부탁해본다. 다정하게 엘리의 이름을 부르며 내 상식 수준으로 치자면 최상급 영어 단어들이 몇번 오고 간 끝에. "유아가 한 말이 맞은 거 같아." "제 영어 청취 능력도 좀 늘었나봐요~!" 라면서 심히 기뻐하기 시작한다. 생존자가 있다는 점에서 기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영어 능력이 상승했다는 점에서 기뻐하다니. 즐거움을 표출해야 할 핀 포인트가 상당히 어긋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해봐야 할 점이 또 하나 늘어서 생략해버린다. 유아 선배와 엘리가 발견한 생존자의 흔적. 그리고 나와 노아 교수님은 실제로 생존자들을 만나고 오는 길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요소의 실체는 동일인의 소행일까? 거리상으로도 가까웠다고 하니까 아마도 그렇지 않나 싶은데. 우리가 다른 생존자들을 만나고 왔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관련된 이야기까지 모두 끝난 상태에서 들려준 유아 선배의 한 마디. "그럼 여기 살고 있는 생존자들의 흔적이겠네." "과연 그럴까요." "의문을 제기할 이유라도 있는 거야?" "아니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유아 선배의 말대로 호수에 남아있는 인간의 흔적은 이 섬에 있는 생존자들의 흔적과 동일할지도 모른다. 다른 생존자 집단이 있다고는 보기 힘든 이유가, 분명 기한은 이 무인도에 있는 모든 생존자들을 찾아서 자신의 마을로 오게 했다고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무인도 섬의 규모보다 작은 탓에 기한의 집단이 다른 생존자들을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매우 드물다. 그렇다면 결론은 유아 선배가 말한 그대로가 될 지도 모르는데... "그것보다도."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던 내 망상을 끊은 것은 다름아닌 노아 교수님의 말.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아무리 거리가 가까워도 해가 저문 상태에서 숲을 들어가야 하는 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 싶은데..." "교수님 말이 맞아. 후딱 가자고." 유아 선배도 교수님의 말에 찬성의 표를 행사한다. 엘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빨리 자리를 이동할 것을 적극 권유 중. 나 또한 반대할 생각은 전혀 없기에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말한다. "제가 앞장설 테니까 따라오세요. 유아 선배가 맨 나중에 따라오시고요." "오케이." 임시적으로 걷는 순번을 정하고 생존자 마을로 향해 나아간다. 아직까지 해가 저물진 않았지만, 숲 속은 벌써부터 어둠의 흔적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고 있는 상황. 손전등이라는 첨단 과학의 산물도 없는 상태에서 계속 어두운 산길을 나아간다는 건 심적으로도, 그리고 체력적으로도 굉장히 부담되는 행군 일정이다. 그나마 거리가 가까운 점이 다행이라고 할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목소리가 왁자지껄 들려오는 장소에 도달하자.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유에." "천만에요."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맞이하는 기한의 목소리가 들린다. 마을 생존자 전부가 나왔는지, 우리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차례차례로 번갈아 선사해주는데. "...우리가 식수를 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유아 선배는 너무나도 쉽게 자신의 손에 건네진 또 다른 식수를 보고 그다지 기뻐할 생각이 없나보다. "언젠가는 좋은 날이 또 오겠죠.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선배." "그 좋은 날이 부디 꼭 왔으면 좋겠네." 낯선 곳에서 물을 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 역시도 잘 알고 있다. 이래봬도 나름 무인도 생활에 적응해왔으니까 말이다. 유아 선배와는 다르게, 엘리는 아무런 저항 없이 얌전히 물을 받아든다. 유독 작은 체구의 금발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오는지, 벌써부터 마을 사람들은 엘리를 중심으로 모여들며 귀엽다는 아우성을 내지르기 시작.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을 처음 접하게 된 엘리로서는 약간의 경계심이 생긴 모양인지 노아 교수님에게 다다다 뛰어가며 뒤로 숨어버리는 반응을 선보이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엄청나게 귀엽다는 예상치 못한 긍정적인 효과가 창출되어 버려서 오히려 엘리의 심기를 더 불편하게 만들어버린다. ============================ 작품 후기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구인 사이트를 보는 게 일상이 되어버릴 듯한 느낌이 매번 들고 있는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올해 안으로 취직을 하고 싶은데, 과연 뜻대로 될지 잘 모르겠군요. 모든 취업 준비생 여러분 힘내시기 바랍니다. ㅜ_ㅜ 266화 어딜가나 귀여움 하나만으로도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확연히 사버리는 엘리였으나, 본인은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쏟는 것이 귀찮게 여겨지는지 줄곧 노아 교수님 근처에 붙어 살며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저녁 식사를 할 때도 예외가 없다. "엘리. 먹기 불편하잖니." "......" 졸지에 또 다른 피해자가 되어버린 노아 교수님이 부드러운 말투로 엘리를 설득하려 하지만, 오늘은 꽤나 많은 고집을 부리고 있는 중이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기나긴 한숨을 내쉬는 교수님. 저 반응으로 보아서는 포기라는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이해하는 게 편하겠다. 반면. 요 며칠동안 감자와 고구마로 식사를 보내왔던 나와 유아 선배는 진수성찬에 넋을 놓은 채 식사에 몰두하는 중이다. 물론 나는 점심때 별도로 고기를 제공받은 적이 있지만, 그것과 이거는 별개. 본래 고기란 것은 먹어도 먹어도 맛있는 그런 음식의 한 종류니까 말이다. 식사를 마치고 난 이후에 노아 교수님과 유아 선배, 그리고 교수님에게 딱 달라붙어 있는 엘리까지 덤으로 3인은 현재 우리들이 머물 장소를 간단하게 청소하고 있다. 나 또한 도와줄 생각으로 자리를 옮기려고 하다가. "잠깐 할 말이 있습니다만." 기한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불러 세운다. 기한 역시도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광장으로 나를 안내한다. 태양을 대신해서 하늘의 정 가운데 스테이지를 꿰차게 된 달이 우리 머리 위로 밝은 빛을 내비치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부지런히 움직인다. 어른들은 내일 사냥 준비를, 여자들은 음식 관리를, 그리고 아이들은 잘 준비를. "체계적이네요." 마을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을 보고 내뱉은 한 마디에 기한이 웃음을 짓는다. "꽤나 오랫동안 무인도에 있었으니까요." "힘들거나 그러진 않았는지..." "물론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죠. 사냥이란 것도 여태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죠. 식수를 구하는 것도 어렵고, 머물 곳도 만들어야 하고... 뭐, 그것보다 더 힘든 건 따로 있었지만요." "더 힘든거요?" "물질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배고프거나 추운 건 참을 수 있지만,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건 꽤나 위험하거든요. 유에 씨도 잘 알 겁니다. 무인도에서 먹고 자고 마시고 하는 원초적인 일이 해결된다면, 다음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바로 정신적인 면이라는 거요." "......" 인간은 욕망 덩어리가 형상회된 존재이기도 하다. 일어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은게 인간의 본성이라 하지 않는가. 1차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바로 2차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반복되는 생존 라이프.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은 점점 초조하게 변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과연 무사히 무인도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라는 문장을 한 단어로 압축한 두려움. 이 두려움은 생존자들에게 있어서 꽤나 많은 스트레스를 암묵적으로 심어주게 된다. 본인은 인식하지 못할수도 있지만, 낯선 환경에서 점점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원래 지내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은 마치 파도의 밀물과 같은 형태로 밀려오기 시작한다. 다만, 파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썰물 현상이 없다는 게 문제일 테지만. "평화롭게 보여도,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끼리 자주 싸우는 모습이 목격되었습니다. 특히나 남자들이 말이죠." "힘들었겠네요." "그들을 중재하는 것도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한창 혈기왕성한 청년들이기 때문에 여자들을 안심시켜야 하는 임무도 있었죠." "그건 저도 이해해요." 나도 그거 덕분에 꽤나 고생했으니까. 특히나 아리아와 세리아의 첫 대면에서 그 고통을 물씬 느꼈다. 처음 보자마자 변태라니. 물론 내가 그때 당시에는 약간 노출도가 높은 복장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첫 만남부터 타인을 변태라고 단정짓는건 본인 입장에선 꽤나 가슴아픈 일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런저런 일도 겪고, 서로 마음을 터놓는 시간도 자주 가지다 보니까 이제는 가족이 다 된 느낌입니다만." 설마 진실게임 같은 건 아니겠지... 이 단어에는 아픈 추억이 많이 새겨져 있으니까 굳이 말로 언급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괜히 내가 자원해서 스스로 상처를 받을 일은 전혀 없으니까. "그래도 유에 씨는 그나마 덜 싸웠을거 같군요. 4명 밖에 없으니까요. 게다가 서로 친해보이기도 하고." "그, 그런 셈이죠. 소규모일수록 더 단결하는 법이니까요." 거짓말이긴 하지만. 일단 우리가 4명으로 이뤄진 소규모 생존자 집단이고,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던 중에 작은 무인도 섬을 보고 이 곳에 오게 되었다는 설정을 기한에게 들려줬으니 저런 말이 나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유아 선배나 엘리에게도 일단 이 설정을 전해두긴 했는데. 포커페이스의 달인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싶을 정도로 표정 변화가 없는 엘리는 별로 걱정이 안된다 하더라도, 감정표현이 다양한 유아 선배는 과연 어떨지 모르겠다. 노아 교수님도 사실 거짓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서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20대 후반 여성의 역량이라는 걸로 커버가 가능하겠지. 잠시 기한과 리더로서의 입장을 보내오며 겪었던 고충을 공감하던 사이에. "그러고 보니." 물어볼 게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기억하고 말았다. 잠시 말을 끊은 나에게 기한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는다. "문제라도 있는지..." "아니요. 오후에 유아 선배하고 엘리가 작은 호수에서 식수를 구했었는데..." "작은 호수라면... 혹시 나뭇잎들이 떠 있는 호수 아닙니까?!"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잠시만! 확인하고 와야겠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채 얼굴이 사색이 된 기한이 황급히 우리 일행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간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나도 뒤를 따르기로 하는데. 설마. 그 호수에 문제라도 있는 걸까? 분명 아까 기한은 '나뭇잎들이 떠 있는' 호수라고 말했다. 그럼 혹시 그 나뭇잎이 인체에 나쁜 영향을 주는 식물이라도 되는 건 아닌지. 혹은 독을 지니고 있는... "유아 선배! 엘리!" "우왓?! 깜짝이야!" 한창 잘 자리를 청소중이었던 유아 선배가 진심으로 놀랐다는 눈을 하며 나와 기한을 바라본다. 헉헉 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친 호흡을 내쉬는 우리들을 바라보던 유아 선배가 말하길. "무슨 일... 있어요?" "아까 그 호숫물! 설마 마신 겁니까?!" "네?! 네... 그야..." 기한의 기세에 눌렸는지,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유아 선배가 천천히 입을 연다. "마시긴 했는데..." "크윽... 결국은..." 머리를 감싸쥐며 굉장히 괴로워하기 시작하는 기한의 모습. 덩달아 나 역시도 당혹감을 감출수가 없었다. 뭐지. 저 반응은. 마치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는 금단의 과실을 아담과 이브가 먹어버렸다는 소식을 접한 것 마냥 괴로워하다니. 그 정도로 먹으면 안 되는 물이었나? 설마 먹으면 죽는 그런 거?! "뭐, 뭔데요... 불안하게 왜 그러..." "혹시 또 마신 사람이 있습니까?" "엘리도 같이 마시긴 했는데..." "이걸로 희생자가 2명인가." "희, 희생자요?!" 유아 선배도 기한의 말에 심각성을 느꼈는지 미세하게 입술을 떨기 시작한다. 곁에서 듣고 있던 노아 교수님과 나도 어찌해야 좋을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게 사실. 유일하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건 뚱한 표정으로 '오늘 나, 지쳤어. 사람들 많아. 힘들어. 귀찮게 해.'라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보이고 있는 엘리 뿐이었다. "잘 들으십시요! 그 물은...!" ============================ 작품 후기 ============================ 그 물은!! 그 물의 정체는!!! 도대체 뭐냔 말이오!!! 라는 생각으로 적절하게 끊어봤습니다. 267화 "그 물의 정체는...!" 마치 명탐정 꼬난이라든지 중년탐정 김전일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긴장감 넘치는 대사를 절묘하게 끊은 기한의 말. 불안감이 서서히 배수로 증폭되는 와중에, 유아 선배가 느닷없이 자신의 배를 감싸쥐며 살짝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뭐, 뭐야. 이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선배." "몰라. 갑자기 배가 아픈데..." 라고 말하면서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자, 잠깐 갔다올게!" "어디로요?!" "레이디가 화장실 가는 걸 직접적으로 묻지 마!!"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뜬금없이 내뱉으며 곧장 휴지 대용으로 사용할 나뭇잎 몇 장을 마을 주민에게 받아들고 재빨리 화장실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나간다. 한동안 유아 선배가 보인 기이한 현상에 관자놀이를 지긋이 누르던 기한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한다. "기어코 발생하고 말았군요." "도대체 뭡니까. 저거." "작은 호수. 그러니까 즉, 나뭇잎 호수는 이 마을에선 식수로 엄하게 금지하고 있는 물이기도 합니다. 이유인 즉슨, 호수에 떠 있는 나뭇잎들은 복통과 함께 지나치게 활발한 장 운동을 촉진시키는 효과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곧..." "그렇습니다. 그 물을 마시게 되면, 적어도 3일 동안은 고생 좀 하실 겁니다." "......" 뭐랄까. 데자뷰 현상은 바로 이럴 때 써 먹으라고 남아있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분명 이거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는데. 우리 누나가 가져온 정체불명의 가루 덕분에 모든 사람들이 (일부를 제외하고) 급성위장염에 시달렸던 그 사건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나와 지아 선생님은 괜찮았고, 엘리는 오히려 체질상 더 잘 맞는지 마구 마셔댔으니까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까 엘리는 이번에도 멀쩡한 거야?" "...ok." 자신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끄덕이는 작은 체구의 금발 미소녀. 유아 선배와 나란히 나뭇잎 물을 마셨을텐데, 이번에도 엘리는 살아남았다. 역시 무인도 베테랑. 다른 사람들의 일반 체질 상식을 월등히 뛰어넘는 신체 조건을 갖추고 있는 이 앙증맞고 귀여운 꼬마 아이의 눈동자에는, 유아 선배의 행동이 오히려 기이하게 느껴질 것이다. "으... 죽겠다..." 잠을 청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유아 선배는 여전히 자신의 날씬한 배를 움켜쥐고 하루종일 곡소리를 내는 중이다. 옆에서 노아 교수님이 간호를 해주지만, 기한의 말을 인용해보자면 저 설사 현상이 끝나려면 3일은 족히 걸린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러니까 확인도 안 하고 마시면 큰 일을 겪는 겁니다. 선배." "... 위로를 해주지 못할 망정, 나를 탓하는 거야?" "이번 일을 계기로 새로운 교훈을 깨달으셨다면, 그보다 값싼 경험은 없는 거죠." "... 진짜 시끄럽네. 위로 좀 해주면 어디가 덧나?!" 신경질적인 발언을 내뱉는 유아 선배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앓는 소리를 내며 눕게 된다. 방금 전까지도 화장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시간을 보냈던 유아 선배인데. 아직까지도 복통에 시달리는 거 보니까 그 나뭇잎 호수의 위력은 실로 굉장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싶다. "... 이제는 배가 아픈 게 아니라 엉덩이가 더 아퍼." "숙녀가 못하는 말이 없군요. 유아 선배." "시끄러워. 너도 한번 마셔봐. 장난 아니라고. 설사약이 필요 없을 정도야." "사양할게요. 건강이 최고니까요." 유아 선배의 친절하디 친절한 권유를 가볍게 밀쳐내고 자리에 누워본다. 새나라의 어린이라 불리는 엘리는 이미 진작부터 취침 모드에 빠진지 오래. 노아 교수님도 슬슬 잘 준비를 하기 위해 자리에 눕는다. "다들 잘자요." "잘자렴." "... 난 못자겠지만." 순차적으로 나, 노아 교수님, 그리고 유아 선배의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아본다. 낯선 지역에서 머무는 하룻밤. 낯서 하늘, 그리고 낯선 사람들. 그 곳에서 머무는 첫 밤에 취해 나도 모르게 서서히 눈이 감기고 있었다. 눈을 감은 지 대략 2시간 정도 흘렀을까. 아직까지도 곤충 합창대의 소리와 더불어 달빛 조명이 꺼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는, 깊은 밤이란 시간에 놓여져 있음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역시 낯선 곳에서 푹 자는 건 쉬운 일이 아니구나." 상반신을 일으키며 반사적으로 눈을 비비적거린다. 그나마 취침 모드에 들어가서 복통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는지 몰라도 평화로운 잠을 청하고 있는 유아 선배와, 어느 순간부터 노아 교수님의 옆에 자리를 차지해버린 꼬마 숙녀 엘리, 그리고 세상물정 모르게 잠에 빠져버린 노아 교수님까지. 모두의 모습을 확인하고 잠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본래는 쉼터로 이용하고 있던 장소지만,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인해 임시적으로 거대한 나뭇잎을 이용해서 일회용 벽을 만들고 집으로 사용중인 장소를 벗어난다. 광장 한 가운데에서는 거대한 화로를 지키고 있는 불침번 3명의 모습이 보인다. 어린 아이와 연세가 많으신 노인 분들은 제외하고 성인 남성과 여성으로 주축이 된 불침번 조의 이야기 담화 소재는 아무래도 낯선 곳에서 등장한 새로운 생존자인 우리들인가 보다. "오. 학생. 잠이 안오나 보구만." "그런 셈이죠. 뭐..." 머리를 긁적이며 수염이 듬성듬성 난 아저씨의 말을 받아준다. 얼핏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과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제법 젊은 남성, 그리고 유아 선배와 비슷한 연령대처럼 보이는 아가씨 한 명까지. 어떤 식으로 불침번이 짜여진 것일까 궁금하긴 하지만, 이 마을의 규칙이나 룰에 내가 굳이 참여할 생각은 없다.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쉽게 잠이 오는 건 이상하지. 암. 그렇고 말고." "이해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본의 아니게 30대 아저씨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말았다. 그다지 기분 나쁜 일도 아니니까 그러려니 하고. 나보다 어려보이는 남성에게 건네받은 물 한 잔을 받고 목을 축인다. 어차피 잠도 다 달아난 거 같으니까. 따스한 불을 쬐면서 잠시 생각을 정리해보도록 하자. 아까 유아 선배의 복통 때문에 기한에게 말을 건네지 못한 게 하나 있었는데. 분명 엘리는 그 작은 호수에서 생존자의 흔적을 목격했다고 했다. 하지만 분명 기한은 그 호수의 물을 마시지 않는 게 이 마을의 규칙이라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그 생존자의 흔적은 누구의 것이 되는 걸까. 이 마을 사람의 것 이외의 생존자가 저지른 거라고 하기에는 약간 논리에 맞지 않는 경우의 수가 있다. 왜냐하면, 분명히 기한은 이 무인도 섬에 남아있는 모든 생존자를 이 마을에 데리고 왔다고 했으니까. 마을 사람들이라면 작은 호수를 애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엘리는 사람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게 과연 어떠한 모순을 뜻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거다. "하다못해 기한 씨가 있었으면 물어보기라도 할텐데." "대장에게 물어볼거라도 있는 건가? 학생." "사소한 걸로 좀 의논할 게 있어서요." "하긴. 동료 아가씨가 그 물을 마셨으니까. 학생도 걱정이 많겠어." "그런 류의 걱정과는 조금 다른 쪽이라서요." "흠. 그렇군." 처음 만난 사람보다는 아무래도 면식이 있는 기한과 의논을 하는 게 좋을거란 판단이 내 머릿속에 문득 든 탓에 아저씨에게는 따로 말을 하지 않기로 한다. 괜히 마을 사람들의 불안감을 늘릴 필요는 없으니까. 그나저나. "......" 이 마을에서 바라보는 밤하늘 역시도 예상했던 그대로 아름답다. 이것도 무인도의 풍류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작품 후기 ============================ 보기와는 다르게 의외로 강철신체를 지니고 있는 엘리를 제외하고 불쌍한 유아만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장 청소는 잘 되겠군요. -ㅅ- 268화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광장에 모여서 불침번 사람들과 서로 자기소개를 주고 받게 되었다. 나는 대학생이라는 걸로 만사 오케이. 30대 아저씨는 기혼에다 아이가 둘이라고 한다. 20대 청년은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 참고로 미필. 그리고 여성같은 경우에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면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대학생이라고 들었다. "운도 나쁘지 원." 담배라도 있으면 피우고 싶다는 간절한 손짓을 보이던 아저씨가 한숨을 토해내며 한탄한다. "부장 녀석을 따라 출장가는 게 아니었어. 괜히 되도 않는 여객선을 타고 가자고 난리통을 피우더니만. 결국 이 지경 이 꼴이 났잖아." "하하..." "윗대가리가 똑똑해야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 편한데. 하아. 진짜. 세상 참 뭐 같고만." 아직 제대로 된 사회경험을 하지 못한 나로서는 아저씨의 말에 그리 깊은 공감을 표시할 순 없지만, 그래도 꽤나 억울하게 이 무인도 섬에 표류되었다는 사실 하나 정도는 알 수 있을 거 같다. 그래도 연명한 게 어딘가. 침몰하는 여객선에서 극히 드문확률로 우리들은 이 무인도에 표류된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의 생활을 따져보자면 여러가지 불만 사항이 나올 수는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생명이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도록 하죠." 젊은 여성의 말에 아저씨가 또 다시 깊은 한숨을 토해낸다. "나도 그러려고 노력중이야. 하지만 세상 일이 모두 노력으로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명한 말도 있잖아. 99퍼센트의 노력과 1퍼센트의 영감이라는 말. 순수 노력 성분 100퍼센트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란 뜻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지만요." 아저씨의 한탄을 지겹게 들어왔는지, 익숙하다는 뜻으로 가볍게 흘려넘기는 여성의 반응에 순간 뭐라고 말을 해줘야 좋을지 모르겠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자는 여성의 말에 동의하는 바이긴 하다만, 아저씨의 말도 어느정도 공감이 되는 것 역시 사실이니까. 추상적인 이야기는 잠시 넘기도록 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로 돌아오고 나서 내가 들은 정보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이 마을은 인원수가 많긴 하지만, 그 많은 인원수가 전부 불침번을 선다든지, 노동력을 앞세운 작업을 할 수는 없는 인원들이 아닌 쪽도 있어서 불침번을 교대 없이 하루 지정해서 근무한다고 한다. 즉, 불침번 형태가 아니라 당직 형태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남자 한 명은 반드시 포함되어 있고, 나머지는 융통적으로 돌아가면서 한다는 말을 들었다. 더불어 당직 순번 지정과 동시에 이 마을의 결정 권한은 대게 일부의 사람들이 발의를 하고, 기한이 의견을 수렴해서 최종적으로 정하는 형태를 취한다고 한다. "기한 씨의 존재감이 중요하군요." "우리 대장은 의외로 리더십이 있으니까. 젊은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이끌어가는 카리스마가 있어." "카리스마라..." 나와는 조금 다른 타입이라고 해야 할까. 하기사. 겉모습으로만 따져봐도 스타일이 다른데, 나와 기한이 같은 형태의 리더라고 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잠이 안 오시는 모양인가 보군요."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가볍게 어깨 운동을 하면서 등장한 이 마을의 대장, 기한이 광장에 놓여있는 나무기둥 의자에 털썩 앉는다. 나와는 다르게 잠이 오지 않아서 일부러 온 건 아닐테고. "기한 씨도 오늘 당직인가요?" "전 그냥 운동 좀 하러 나온 것 뿐입니다." "안 하셔도 충분할 거 같은데..." "운동은 꾸준히 하는 게 좋거든요." 라고 말을 하며 울퉁불퉁한 근육을 살짝 드러낸다. 헬스 트레이너라도 했던 양반인 걸까. 근육이 장난 아니다. "나중에 유에 씨도 저와 같이 운동 한번 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말씀은 고맙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더 이상 피곤해지기 싫거든요." "하하하. 일리있는 말이군요." 가뜩이나 산장에서 온갖 노동 업무를 다 도맡아 하는 나인데, 굳이 운동까지 하면서 몸을 키우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노동 작업을 하면 싫어도 근육이 붙으니까 말이다. 아. 맞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아까 내가 궁금히 여기던 거나 물어볼까. "잠깐 할 말이 있습니다만." "유아 씨에 관련된 이야기입니까?" "아니요. 아까 엘리가 의아한 말을 해서요." "일단 들어보도록 하죠." 나머지 당직 인원 3명에게는 들리지 않게끔 거리를 유지하며 자리를 잠시 옮긴 나와 기한. 아까도 말했다시피, 괜히 이 마을 사람들에게 괜한 불안감을 주고 싶지 않아서 기한에게만 이야기하기로 결정한 탓에 일허게 본의 아니게 밀담을 나누게 되었다. "그 호수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만." 나뭇잎 호수라 불리던 장소에 대해서 먼저 내가 말을 꺼낸다. 그 곳에서 생존자의 흔적을 보았다는 점. 그리고 기한이 나에게 들려줬던 이야기 중 이 무인도 섬에 있던 모든 생존자들을 모아서 마을로 옮겨왔다는 점과 더불어 작은 호수를 이용할만한 사람이 없다는 점. 이 두 가지 요소를 접목시켜 본다면, 작은 무인도 섬에 남아있는 생존자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라는 개인적인 의견을 첨가해서 들려줬지만. "그 말. 사실입니까?" "일단 제가 들은 바로는... 그렇습니다만." 엘리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다. 더욱이 엘리 혼자만 간 것도 아니고 유아 선배도 있다. 혼자서만 본 것도 아니고, 두명이 목격한 흔적인 데다가 엘리의 눈썰미를 의심할 여지는 없다. 난파선에서 표류된 생존자들을 통틀어봐도, 엘리만큼 무인도 생활에 적응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야생 소녀의 말에 의심을 할 여지가 없다는 건 다름아닌 나 또한 잘 알기에 확실한 사실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기한에게 각인시켜준다. 그러나 의아한 건 기한의 반응. "큰일이군요." 이번에도 나뭇잎 호수 사건마냥 대뜸 자리에서 일어서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한다. 또 뭐냐. 도대체. 나올 건 다 나왔다고 생각하던 큰일이 아직까지도 남아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말씀드렸다시피, 저하고 노아 교수님, 그리고 엘리는 아직 배가 아프거나 장 활동이 활발하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요." "차라리 그 정도의 사소한 문제라면 정말 좋을텐데 말이죠." "...네?" "저를 따라오십시요. 확인할 게 있습니다." ============================ 작품 후기 ============================ 이번에는 진짜 큰일이겠지요? 아마도요. 269화 "말씀드렸다시피, 그 물을 먹은 건 유아 선배하고 엘리 2명 뿐인데요. 또 무슨 큰 일이 남아있다는 겁니까?" "좌우지간 따라오시면 압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해볼 수 밖에 없으니까요."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며 나에게 따라오라는 말만 들려줄 뿐이다. 어두컴컴한 산속을, 그것도 남자와 단 둘이 걷게 된 게 상당히 묘한 기분이 들지만, 여하튼 큰일이 났다고 하니까 안 갈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일단 잠자코 기한의 뒤를 따른다. 달빛조차 들어오지 못하는 칠흑같은 숲속을 건너 도착한 곳은 어느 가파른 산등성이. 경사가 족히 30도는 될 법한 엄청난 가파름을 자랑하고 있다. "따라오십시요." "올라갈 생각입니까?!" "네. 당연하죠. 계단을 만들어뒀으니 불빛을 잘 비추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노력해보죠." 횃불을 이용해 최대한 발 밑을 비추는 데 모든 신경을 집중시킨다. 여기서 잘못하다가 넘어질 경우 가벼운 타박상 정도로 끝나진 않을테니까 말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께도 아니고 아닌 밤중에 등산이라니. 불씨가 나뭇잎이나 풀에 닿지 않게끔 최대한 유의하며 점점 산을 오른다. 계단을 만들어뒀다는 기한의 말 그대로 나무와 돌덩이로 이뤄진 자연산 계단이 튼튼한 내구성을 자랑하며 밤길 산행에 안전함을 도맡는다. 이런 훌륭한 건축 기술을 지니고 있다니. 제법 존경스러울 정도다. 나도 나름 작업 실력에 대해서는 꽤나 많은 테크닉을 지니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을 통해서 초심으로 돌아가야지. 여하튼 혼자만의 생각은 잠시 후순위로 미루도록 하자. 지금은 최대한 야간 산행에 집중을 해야 할 때니까. 여차저차해서 기한과 도착한 산꼭대기. 가파른 절벽 끝에 보이는 건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의 존재가 아닌, 2미터 정도 크기가 되는 거대 건축물이었다. "뭡니까? 이 탑 같이 생긴 건..." 절로 호기심이 들어 직설적인 질문을 내뱉은 나에게, 기한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답한다. "화로입니다." "이게 말인가요?!" "네. 이 근방을 돌아다닐수도 있는 구조 헬기나 민간 선박에게 보이게끔 24시간 불을 지피도록 만든 구조물이죠." "과연..." 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통해 낮에는 위, 아래에 구조 신호를 상시 요청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정도 크기의 거대 화로라면, 밤에는 굳이 연기가 아니라 순수한 화로의 불빛만으로도 충분히 구조 신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거라 예상된다. 밤에도, 낮에도 언제나 24시간 SOS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최적의 수단. 인원수만 많은 게 아니라 꾸준히 구조 신호까지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다시금 기한이란 인물에 대해서 내 마음속에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효과가 좀 있었나요?" "마을 주민 중에 할아버지 한 분이 근처에서 작은 헬기 소리를 들었다고는 합니다만..." 말 끝을 흐리던 기한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직접 눈으로 본 게 아닌 이상, 믿는 것도 좀 그래서요." 하긴. 이 넓고 광활한 지역에서 헬기 소리를 들었다는 말 자체가 약근 의심이 되기도 한다. 다수의 소음들이 머물고 있는 무인도 지역에서 정확히 헬기 소리만 들었다는 것, 그리고 하필이면 그 소리를 들은 게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라는 점이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감점 요소가 아닐까 싶다. 문제야 어찌 되었든, 논할 가치가 있는 사실은 이게 아니기에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그런데 왜 야밤에 이 곳을?" "아까 유에 씨가 말했던 제 3자의 흔적 때문입니다." "제 3자라니..." "유에 씨의 추측대로, 그 호수를 이용할 사람은 적어도 제가 소속되어 있는 마을 사람들 중에선 아무도 없습니다. 예전에 호숫물을 마시고 단체로 탈이 났던 적이 있었기에 절대로 다가가지 말라고 엄포를 해놨으니까요." 어쩜 우리들 이야기랑 이리도 비슷할까. "그래서 그 호수를 이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유에 씨의 말대로 외부인이 있다는 뜻이 되겠지요." "외부인이라면... 짐작가는 사람이라도 있는 겁니까?" "네. 너무나도 잘 알죠. 그리고 유에 씨. 당신도 아마 알 겁니다. 적어도 생존자 집단의 '리더'격에 놓여있는 사람이라면 말이죠." 점점 부풀어오르는 의심속에서. 기한의 다음 한 마디가 결국 내 의구심을 실현화시킨다. "이예신이라는 여자의 존재를." 무인도에 표류된 생존자들이 전부 우호적이고 선한 사람들만은 아니다. 여성을 강간하려 했던 자들도 있었고, 배고픔을 참지 못해 인육을 먹으려던 사람들도 있었다. 욕망과 이성의 싸움에서 승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욕망에 지배된 사람들. 그리고 우리들은 생존이라는 목표를 향해 욕망을 누르고 이성에게 지배되어 간신히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며 이 무인도의 생활에 적응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예신이란 존재는 뭐라고 할까. 적어도 무인도에 적응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예신이 무인도에서 가장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될 정도. 그녀는 사회를 증오하고,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구조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이 무인도에 남아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계획하고 있는 여자이다. 실제로 그 피해를 본 사례도 있고, 수단 또한 매우 악랄하다. 각기 흩어져 있는 생존자 집단의 정보를 단기간에 모으고, 그 집단의 리더격인 사람들에게 찾아가 '공포'를 심어준다. 어떠한 형태로든 간에. 물론 나도 충분히 예상은 하고 있었다. 기한에게는 예신이란 존재가 뇌리에 각인되어 있을거란 사실을. 하지만 쉽사리 언급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우선 타 생존자를 처음 만난 사실에 당황스럽기도 했을 뿐더러, 그런 정신머리도 솔직히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 마디로 축약하자면 그냥 묻는 걸 잊고 있었을 뿐. 그렇다고 이예신이란 여자의 존재까지 잊고 있던 건 아니다. "그 반응을 보아하니, 유에 씨도 알고 있었군요." "...대충은요." 대충이란 단어로 포장하기에는 좀 심도있는 관계라고 할까. 실제로 육체 관계까지 가진 적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서로 사랑이란 감정속에 관계를 가진 것도 아니고, 예신의 쌓여잇던 성욕을 풀어준 단순한 노리개 역할을 한 수준에 그쳤기에, 예신과 섹스를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그리 자랑거리로 여겨지진 않는다. ============================ 작품 후기 ============================ 오늘 조아라 공지사항을 보니까 노블레스에서 사과박스로 노블레스 작가 분들이 단체로 이동한 사건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 솔직히 말해서 공지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ㅡ_ㅡ;;; 그런 일이 있었군요. 흠...;; 저야 뭐 어차피 인기작가도 아니고, 보시는 분들도 얼마 안 계셔서 해당사항에는 없지만, 그래도 좀 많은 걸 느끼게 해주는군요.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이 글을 보고 계시는 분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완결까지는 무조건 연재한다고 초반부터 입을 많이 털었기 때문에 빼도박도 못합니다. 헤헤헤 ^_^;;; 270화 그건 그렇다 치고. 생존자의 흔적과 절벽 위에 건축된 거대 화로, 그리고 이예신. 이 3가지 요소의 공통점이 무엇이 있을까 나름 혼자서 끙끙 앓으면서 추측을 하던 사이에, 화로 안을 살펴보던 기한이 한숨을 토하며 말한다. "역시 예상대로 불씨가 꺼져있군요." "밤에도 항상 화로에 불을 붙여놓는 겁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화로는 24시간동안 풀 가동을 시키며 주기적으로 SOS 신호를 외부에 보낼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 크기의 거대 화로와 함께 탁 트인 시야라면 불빛 정도는 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럼 누가 의도적으로 불을 껐다는 의미가 아닌가요? 그거." "네. 이예신이란 여자가 했을 겁니다."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3가지 요소가 전부 퍼즐처럼 딱딱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 온 몸을 통해 전해진다. 마을 현지인이라면 절대로 이용하지 않을 나뭇잎 호수. 그리고 누군가 의도적으로 불씨를 없애버린 사고와 함께 떠오른 나머지 한 요소. 이예신. "그 녀석이 지금 이 섬에 와 있는 거군요." "네. 100퍼센트 장담은 못하지만, 꽤나 높은 확률입니다. 전과범이기도 하니까요." "이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군요." 기한의 말을 좀 더 인용해서 분석하자면, 이예신이 화로의 가동에 방해를 가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외부인의 존재. 그리고 그 외부인이 의도적으로 무인도에서 나가고 싶지 않은 인물이라는 가장하에 생각해본다면, 거의 100퍼센트에 육박할 정도의 높은 확률로 이예신이 범인이란 사실을 쉽사리 추측할 수 있다. "오늘 밤 잠 자기는 다 틀렸군요." 또 다시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화로에 다시 불을 지피기 시작한다. 들고 온 횃불의 불씨를 옮기며 화로의 불씨를 살리고, 입으로 공기를 불어 넣어 점점 더 화력에 박차를 가하도록 부채질을 시작한다. 한 두 번 불을 피워본 솜씨가 아니다. 나도 엘리에게 아직 완벽하게 불피우는 방법을 전수받지 못한 상태지만, 기한은 꽤나 익숙한 몸짓이다. 점점 더 이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나무라도 구해올까요?" "그래주신다면야 고맙겠습니다." 기한이 화로의 불을 지켜보고 있는 동안, 나는 근처를 둘러보며 장작을 구해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잠시 자리를 뜨기로 한다. 불을 피우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발화물질의 정기적 공급이기 때문이다. 횃불은 잠시 기한에게 남겨두고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한 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상황. 불이 아닌 달빛에 의존하며 나뭇가지를 구하려 하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고 있다. 그렇다고 횃불을 들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약간이나마 쌓여있던 시야의 이득에 대한 아쉬움을 재빨리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 횃불 하나를 얻음과 동시에 한 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는 제한사항을 등에 업기 보다는, 잘 안 보이긴 하지만 양 손을 자유로이 사용해서 보다 더 많은 장작과 마른 나뭇가지들을 구해오는 게 훨씬 이득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분 가량을 장작 구하기에 열을 올리며 시간을 보냈던 것일까. "누가 보면 치매라도 걸린 줄 알겠어? 야밤에 나뭇가지 수집이라니." "...너냐." 이 목소리의 정체를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얼핏 들으면 청아하고 맑은 고음의 목소리. 하지만 실체는 화로 사건의 범인이기도 하며, 무인도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고 싶어하는 욕심 많은 여자.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그렇게 허리를 숙이고 다니면 안 되지. 남자의 생명이 바로 허리잖아?" "누구 덕분에 젊은 나이에 허리를 혹사시키고 있는 건지 알고나 있는 거냐? 이예신." "글쎄. 전혀 모르겠는데." "못보던 사이에 시치미 떼는 능력도 수준급으로 늘었구나." "그러는 너야말로 그 재수 없는 말투는 여전하네." 달빛 사이로 유유히 모습을 드러낸 글래머러스한 몸매의 소유자, 이예신. 가슴 부근만 절묘하게 가린 탱크탑에 허벅지가 그대로 노출된 짧은 미니스커트가 그녀의 몸매가 얼마나 훌륭한 명품 몸매인지를 충분히 잘 나타내고 있는 중이다. 무인도에 오고 나서 꽤나 머리카락이 많이 길었는지, 이제는 거의 엉덩이 부근까지 내려오는 흑발을 거칠게 어깨 너머로 넘기며 나를 응시한다. 가만히만 있으면 진짜 남자들이 뒤를 졸졸 따라다닐 정도로 매력적인 여자인데. 문제는 성격이 너무 더럽다는 것이다. 아리아도 저 정도로 더럽진 않은데. "화로 안에 있던 불을 꺼버린 게 너지?" "굳이 나에게 안 물어봐도 충분히 알고 있잖아." "이실직고 해줘서 눈물나게 고맙다." "자신과 타인이란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신뢰라 이름붙은 계단 위에서 성립되는 게 정석이기도 하니까." "네 입에서 신뢰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예행연습이야." "예행연습?" "그래. 타인을 지배하기 위한 현혹." "예컨데, '나는 좋은 사람입니다.'라는 사실을 다른 생존자들에게 어필이라도 할 생각이냐. 마녀 양." "섭섭하네. 너에게 마녀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너에게 그럴 자격이 충분한지, 불충분한지." "충분하다 해도, 이쪽에서 거절하겠어." "환불은 불가능합니다. 고객님." "재밌는 농담을 하네. 장난감." "누차 말하지만, 나는 네 장난감이 아니야. 그리고 마녀의 장난감이 될 생각도 없으니까." "......" 이예신은 나와 이렇게 농담 따먹기나 즐겨 하는 여자가 아니다. 곧바로 성질을 드러내는 듯한 표정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그녀의 말투가 급격하게 가라앉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모습을 안 보였더니 버릇이 없어졌구나. 다시 교육 좀 시켜볼까?" "덤벼보라고." "못보던 사이에 깡다구도 생겼구나. 상대조차 되지 않는 주제에." "남자는 자존심 하나로 먹고 사는 생물이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여자에게 장난감이라 불리는데. 가만히 있을 남자가 또 어디 있겠냐?" "재미있네." 금세 예신의 눈빛이 바뀐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까지 뿜어져 나오는 살기. 저 분위기 하나만으로도 충분하게 살인미수 정도의 수준까지 처벌이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신이 내뿜는 분위기는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진짜 인간이 맞을까. 머릿속에 이런 의문이 제기될 정도니까 말이다. 멧돼지와 마주쳤을때도 심장이 이리도 쿵쾅거리지 않았는데. ============================ 작품 후기 ============================ 진짜사나이 보면서 한참을 웃어대며 일요일 하루를 보냈습니다. 뭔가 삶이 힘들때는 역시 웃는 게 제일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힘든일이 있으면 일단 무조건 웃어보는게 어떨까요. 271화 어두운 숲속 안에서도 예신 녀석은 신기하게 요리조리 잘도 움직이며 순삭간에 내 앞에 선다. 예전부터 궁금하게 여겼던 사실이지만, 이 녀석의 정체가 뭘까. 엘리도 아니면서 자기 마음데로 낯선 환경에서 엄청난 움직임을 선보이는 여자의 정체란 과연 뭔지 모르겠다. "일단 한 대 맞고 시작하렴." "큿..." 미약하게나마 신음을 토해내며 예신의 공격을 막기 위해 팔을 들어올린다. 늘씬한 각선미가 숲속에서도 빛을 발하듯, 여체의 곡선이 절묘하게 틀어지며 내 안면을 향해 날아온다. 예신의 발차기를 막기 위해 양 팔을 들어올려 가드를 한다. 아마도 팔에 엄청난 충격이 전해지겠지. 녀석과 직접적으로 싸운 적도 몇번 있어서, 내가 예신의 상대가 되지 않을거란 생각 정도는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잘 숙지하고 있다. ...라고 생각을 했는데. "...?!" 뭔가 평소와 느낌이 다르다. 분명 예신은 있는 힘껏 나에게 발차기를 날렸을텐데. 봐주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아무래도 시야를 가리는 어둠이란 환경이 예신에게도 제약으로 작용한 것일까. 생각보다. 안 아프다. 내가 예상하고 있던 통각의 수준보다 한참 떨어지는 예신의 타격에 순간 당황하기도 했지만, 이윽고 정신을 차리며 예신의 다음 행동을 예측해본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에 미묘한 변화의 물결이 일렁인다. 마치... 직접적으로 서로간의 공과 수를 마주한 다음에 무언가가 예전같지 않음을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나 뿐만 아니라 예신도 역시 눈치채고 있는 모양인가 보다. 그렇다면, 내가 세웠던 추측은 전부 무너진다. 예신은 나 따위를 봐주거나 할 그런 여자가 아니다. 더욱이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일부러 그녀의 화에 기름을 마구 들이부웠으니까. 성격상으로도, 그리고 인격상으로도 타인에게 자비를 배푼다는 점 따윈 예신의 사전에서 찾아볼 수 없다. "칫." 짧게 혀를 차면서 잠시 거리를 벌린 예신이 다음 공격을 하기 위해 이번에는 하단 공격을 시도한다. 여성의 가느다란 발이지만, 엘리와 마찬가지로 미스테리한 타격 수준을 갖추고 있다. 그렇기에 피할까 아니면 정면으로 응수를 할까 라는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이 전자를 선택해온 게 바로 나란 남자의 꼴사나운 모습. 하지만. 만약 예신이 방금 전에 모든 사력을 다해 나에게 가한 공격의 수준이 그 정도라면. 맞을 위치에 있는 왼쪽 발을 살짝 거둬들이며 동시에 최대한 힘을 준다. 미리 맞을 것을 예측하고, 그 강도를 보다 정확하게 알아내기 위해서 일부러 '피격'이라는 선택지를 고른 것이다. 일부러 피하지 않고 바보같은 정면승부를 한 결과. ...생각보다 덜 아프다. 아니, 예전에 저 여자가 선보인 불가사의한 공격에 비한다면, 아프다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될 만큼이다. "이예신." "...뭐야." "너,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냐?" "남 걱정할 시간에 자기 걱정이나 하시지." 라고 말을 하면서 다시 나에게 달려들지만. 이번에는 좀 더 다른 선택지를 고를까 한다. 지면을 박차고 살짝 공중으로 뛰어오른 예신이 자신의 체중을 싣고서 이번에는 정확하게 안면쪽을 향해 발을 휘두른다. 그와 동시에 허리를 살짝 뒤로 빼면서 가볍게 예신의 공격을 회피. 놀란 표정의 예신이 시야에 들어오지만, 이건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동작이 큰 모션을 취하면, 그만큼 피하기가 쉬우니까. 어두운 환경 조건이라는 게 악영향으로 작용하긴 하지만, 그건 나나 예신과 똑같은 조건일 뿐. 동일한 환경 조건이 일방적인 장애 요소라고 생각하진 않기에 회피라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위험요소가 큰 선택지는 바로. "이거나 먹고 정신차리시지!" 크로스 카운터. 있는 힘껏 주먹을 쥐고 예신의 복부를 향해 휘두른다. 여자를 때리는 건 매너 위반이라고 들었지만, 지금은 매너남이 되는 것 보다 생과 사의 기로에 선 내 위치를 고려해서 좀 더 합리적인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이 여자 앞에서는 진지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마주서야 하는 것이 바로 이예신이라는 여자의 정체니까. "으..."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배를 만지며 가까스로 일어나는 이예신. 후들거리기 시작하는 다리가 어둠속에서도 잘 보인다. 복부를 강타하면 하반신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모 권투 만화에서 본 적이 있다. 일단 예신의 움직임을 봉인하기 위해 발을 묶는다는 생각으로 복부를 있는 힘껏 때리긴 했지만... ...그래도 여자인지라 데미지가 꽤나 높았나보다. 미안한 감정이 들긴 하지만, 아직까지도 사그러들지 않은 예신의 살기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약과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채워진다. 그나저나. 예신에게 매번 당하기만 하던 내가 언제부턴가 예신과 이렇게 대등하게 싸우게 된 것일까. 내가 강해진 게 아니라 예신이 약해진 거 아닐까? 마땅히 무슨 특별한 운동이나 그런 걸 한 적도 없는데. "후우..." 내상을 입은 데미지를 조금이라도 회복하고자 호흡을 고르기 시작하는 예신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더 이상 그녀의 날카로운 공격이 나에게는 별다른 위협이 되질 않을거란 사실은 알게 되었고. 매정하게 그녀를 몰아세울 생각도 없기에 일단 대치 상황을 이루는 것에 만족하기로 한다. "이래서... 여자로서의 내가 싫다니까." 의미불명의 말을 내뱉으며 다시 두 다리로 마주선다.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이제와서 남자와 여자의 신체조건 차이에 대한 불평불만을 하늘에 계신 높은 분께 토로하려고 하는 것인가. "넌 성별의 차이에 대해 별로 크게 신경쓰지 않았잖아." "그거야 예전 이야기일 뿐이지." 내 말에 바닥 위로 침을 뱉는 예신의 행동. 그녀가 내뱉은 침에 살짝 피가 섞여 나오는 걸 의도치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멍청한 남자들은 잘 모르지." "???" "내 입으로 알려줄 생각따윈 없으니까 나중에 잘 생각해봐. 멍청이." 무인도에 와서 처음 보는 예신의 모습이라고 할까... 상당히 불쾌해하는 표정이다. 진심으로. 언제까지나 속내를 알 수 없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심리전과 더불어 말이 안 통할때는 육탄전도 마다하지 않던 그녀치고는 매우 비정상적인 반응. 기교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예신의 처세가 통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말인가. "그 떡대 녀석한테 전해." "떡대라면... 기한씨 말이냐?" "그래. 무식하게 생긴 덩치만 큰 남자한테 똑바로 전해. 나는 지속적으로 너희들의 구조 신호 활동을 방해할 거라고." "너, 조금은 마음씨를 착하게 사용할 생각 같은 건 없어?" "태생이 이러니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惡)한 존재다. 중국의 순자가 주장했던 성악설이라는 거 말이다. 나도 윤리 시간에 배워서 아주 잘 알고 있지. 어쨌든 자신이 할 말만 남기고 점점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다. 뒤를 쫓아갈까 하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기한의 목소리 덕분에 오늘은 여기까지 만족하기로 할 수 밖에. "유에 씨! 거기 누구 있습니까?" "......" 이미 흐트러진 나무 장작들을 다시 모으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웃는다. "야생 동물이었나 봅니다." "그렇군요. 저는 또 이예신이 나타난 줄 알고..." 거짓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른 척 하는 게 좋을거라는 생각때문에 잠자코 있기로 한다. "그나저나 야생 동물이면 멧돼지입니까? 그렇다면 아찔했던 순간이었군요." "글쎄요. 멧돼지는 아니고." 장작을 양 손으로 들어올리며 기한에게 화로쪽으로 가자는 식으로 눈치를 준다. "성질 나쁜 고양이었거든요." ============================ 작품 후기 ============================ 이력서를 넣은 곳 중에 한 곳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런데 복장에 대해서는 말을 안 해주더군요. 정장을 입고 가야할지, 아니면 평상복을 입고 가야할지 고민중입니다; 272화 화로를 다시 정상으로 되돌린 후. 마을로 다시 돌아와서 잠을 청한지 꽤나 시간이 지난 것처럼 보이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해는 이미 내 머리 위에 반짝이고 있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근처에서 엘리와 함께 마을 여성들과 식사 준비를 하고 있던 노아 교수님이 나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온다. "잘 잤니? 오늘따라 늦잠이 심하네." "낯선 곳에서 자려고 하니까 꽤나 잠이 안 와서요." 저 반응으로 보아하니, 아직까지 새벽에 벌어졌던 화로 사건에 대해서는 듣지 못한 모양인가 보다. 아니면 기한이 일부러 말을 안했을수도 있다. 이예신이라는 여자의 존재는 무인도에서 입으로 언급해서는 안될 기밀 사항이기도 하고, 괜히 마을에 불안감을 심어줄 필요는 없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리더로서는 괜찮은 선택이라고 인정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이 비밀이 지켜질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나와 기한 뿐만 아니라 예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인물은 엘리도 있으니까 말이다. 비밀이란 녀석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존재감을 만천하게 드러낼 확률이 높아지는 녀석이다. 사람의 입이란, 그만큼 가벼운 법이니까.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나는 거야. 늦잠꾸러기." "유아 선배. 몸상태는 좀 어떤가요?" "아직도 죽을 맛이야..." 표정으로 자신의 현재 상태를 아주 잘 어필하고 있는 유아 선배. 여전히 손은 배를 감싸쥐고 있는 모습이다. 노아 교수님에게 얼핏 들은 이야기를 잠시 풀어보면, 아침에만 대략 3~4번 화장실에 오며가며 했다고 한다. 굉장한 효과로군. 나뭇잎 호수. 가만 있어보자. 나뭇잎 호수에서 생존자의 흔적을 목격했다고 엘리가 나에게 말했었고. 그 생존자의 정체는 이예신으로 판명이 났다. 그렇다면 예신도 어제 나뭇잎 호수의 물을 마셔서 평소의 컨디션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한테 진 걸까?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건 아니다. 왜냐하면 유아 선배의 증세를 보고 이예신의 상태를 비교하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이예신은 적어도 유아 선배보다는 훨씬 괜찮은 상태를 보였다. 오히려 평소와 같은 모습이라고 말해두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럼 왜 어제 나는 예신을 이길 수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던 찰나에, 유아 선배의 말상대도 해줄겸 간접적으로 돌려서 질문을 던져보자. "유아 선배." "...또 왜." "A가 있고 B가 있는데, A는 평소 B에게 상대가 되지 못할 만큼 싸움을 잘 못해요." "뭐야. 퀴즈라도 낼 생각이야? 그럼 안 들을래. 가뜩이나 배도 아파 죽겠는데." "퀴즈가 아니라 그냥 사소한 질문이에요. 누워만 있으면 심심하잖아요. 가끔은 이런 가벼운 이야기도 들어주는 편이 덜 심심하고 좋지 않을까요." "...계속 해 봐." 일단 초석 깔아두기에는 성공. "그런데 어느 날. A가 B와 싸움을 했는데 A가 이겼어요. 그럼 원인이 뭘까요?" "그야 A가 B를 이기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했으니까 그랬겠지." "그 노력은 없고, 그냥 평상시처럼 지냈다면요?" "무기를 사용했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요?" "퀴즈 맞잖아! 넌센스야?!" "아니요. 그냥 제가 했던 말은 잊어주세요." 무도에 어느정도 소견을 갖추고 있는 유아 선배도 결국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 추측을 끝내고 만다. B를 이기기 위해 고된 훈련을 거쳤다든가, 아니면 총이라든지 사기성이 짙은 무기를 이용해서 승리를 쟁취했다든지 하는 그런 요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예신을 이기겠다는 신념으로 특별훈련 같은 건 한 적도 없을 뿐더러 무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무인도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는 나이프가 전부니까 말이다. 그럼 내가 예신을 이길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일까. 그녀의 공격이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자신감 있게 그녀와 정면으로 맞대응을 하면서 싸울 수 있었다. 자신감의 상승. 하지만 그 자신감을 상승시킬 수 있던 가장 강력한 요인은 역시 예신의 공격이 '아프지 않다.'라는 것이다. "유아 선배." "또 이상한 퀴즈 낼 생각이라면 때릴거야." "혹시 제 맷집이 강해졌다고 생각하세요?" "뜬금없이 무슨 말이야." "그냥... 뭐랄까. 유아 선배의 시선에서 보자면, 초창기 무인도에 표류되었을 때의 제 모습과 지금의 제 모습을 비교하자면 어떤지 궁금해서요." "그거야 본인이 가장 잘 알 거 아니야." "전 그런거에 무신경하니까요. 선배도 잘 알잖아요?" "......"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기관리에 대해서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신경을 안 쓰는 인물이기도 하다. 운동을 한 것도 특별히 단련이라는 목적보다는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한 것일 뿐. 뭔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유아 선배가 퉁명스럽게 말을 한다. "너, 상의 탈의해봐." "...네?" "못 들었어? 옷 벗어보라니까." "잠깐만요. 유아 선배. 아무리 성욕에 목이 말라있다 하더라도 마을 사람들이 보고있는 장소에서..." "누가 성욕에 굶주린 여자라는 거야! 이 바보야!" 화를 내면서 발로 쿡쿡 찌르기 시작하는 유아 선배의 분노 모드 발동. "잔말말고 상의만 벗어봐. 그러면 자연스럽게 해답을 알게 될 테니까." 시키는 데로 해볼까. 유아 선배의 말에 토를 다는 것보다, 우선 잠자코 따른 뒤에 태클을 걸도록 하자는 일명 '선행동, 후태클' 임시법칙을 따라 옷을 벗어본다. 난데없이 상의를 탈의하는 내 모습을 보던 꼬맹이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한번씩 나를 쳐다보며 지나간다. 창피하구만. "선배. 이제 뭘 하면 되나요." "뭔가를 하고 싶어?" "바지까지 벗으라고 말한다면 적극적으로 거절하겠습니다." "어떤 여자가 그런 말을 하겠어? 오히려 나야말로 거절이라고. 만약 정말로 그랬다간 소리라도 질러버릴 테니까." 남자와 여자. 언제나 사회적 약자는 여자다. 상의를 벗고 있는 남자와, 고통을 호소하는 표정으로 바닥에 누워있는 여자의 모습을 제 3자가 본다면, 분명 여자의 편을 들어줄 것이다. 가만. 굳이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의 차이가 아니더라도, 후자쪽이 더 약자처럼 보이려나. 음. 이건 비유를 잘못 든 셈이로군. ============================ 작품 후기 ============================ 정장이라... 겨울용 정장밖에 없는데, 큰일이군요 ㅡ_ㅡ;; 깔끔한 캐쥬얼 복장을 생각했었는데... 난감합니다;; 그런데 청바지도 깔끔한 캐쥬얼 복장 범위에 포함되나요? 273화 "아까 A가 B를 이기기 위해 특별한 훈련을 했다든지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 네가 말했잖아." "네. 그랬었죠." "그거, 니 이야기지?" "......" 유아 선배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기 스킬을 한 가지 보유하고 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현대 어떠한 과학과 발전을 지칭하는 발명품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감을 보여주는 유아 선배의 스킬 중 하나. "어떻게 알아맞췄나 라는 표정이네. 유에." "대충은요." "뻔하잖아? '여자의 감'이야." "그럴 줄 알았습니다." '남자의 감'도 만들어 달라고요. 운영자 님. 이번 패치를 통해서 남자 캐릭터도 좀 밸런스 패치 같은 걸 해주면 안 됩니까? 너무 여자들 기만 잔뜩 살려주는 거 같은데요? 여자의 감이라니! "최근에 싸운 상대라도 있는 거야?" 좀 더 집요하게 질문을 펼치는 유아 선배에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일단 부정의 의사표시를 보여준다. 이예신의 존재는 기밀사항. 그건 우리 집단에서나 기한이 이끌고 있는 이 마을에서나 동일한 사항이다. 예신의 정체를 발설하는 순간, 생존자 집단은 배고픔과 추위라는 외부적인 요인에 '이예신'이라는 존재의 위협까지 추가적으로 더하게 되는 상황에 봉착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예신이라는 여자 한 명 만을 놓고 본다면 별로 무섭지 않다. 예신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다른 생존자 집단의 리더들이 뭉친다면 간단하게 그녀를 제압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예신이 무서운 건 다름아닌 '누군가의 목숨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라는 점 때문이다. 무인도에 표류되고 난 이후에 실로 오랜 기간이 지난 상황에서, 생존자들은 각자 나름의 '유대감'이라는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말로 쉽게 풀이하자면 가족같은 관계라고 할까. 그 상황에서 예신이 자신의 가족같은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위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해보도록 하자. 그만큼 위험한 협박도 없을 것이다. 기한도, 그리고 나 역시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가급적이면 일행들에게 예신의 존재를 발설하지 않기로 노력한다. 물론 우리쪽에서는 엘리가 있지만, 엘리는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이기 때문에 쉽사리 비밀을 타인에게 털어놓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신의 존재를 유아 선배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그, 그냥 예시가 그렇다는 거죠. 뭐." "점점 의심되는데." "......" 다시 한번 여자의 감 스킬을 발동시킬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를 보여주는 유아 선배. 나에게 후딱 진실을 말하라고 강력히 요구하는 눈빛이었지만. "뭐, 더 이상 깊게 관여하는 것도 프라이버시 침해일지도 모르니까. 오늘은 넘어가줄게." "...여러모로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 "다만, 언젠가는 꼭 나한테 말해주도록. 알겠어?" "약속하겠습니다." 기약없는 약속일지도 모르지만. 위기는 혼자서 극복하는 것보다, 동료들과 같이 극복하는 편이 더 좋지 않은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튼 잠시 혼자만의 사색은 접어두도록 하고. 난데없이 상의를 탈의하라고 말했던 유아 선배의 이유부터 들어보도록 하자. "너 말이야. 지금까지 네 몸을 네 눈으로 직접 다 본 적은 없지?" "그야 뭐... 거울도 없으니까요." "잘 봐봐. 팔이라든지 배나 허벅지 부근." "???"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 유아 선배가 나에게 해주고자 하는 의도 말이다. 여자의 말을 해석하는 건 남자로서 꽤나 어려운 난제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노력이라도 해보자. 노력 없이는 결과도 없으니까. "미묘하게 예전과 달라진 거 같지 않아?" "글쎄요. 저는 잘..." "바보야. 생각해봐. 너는 무인도에 오고 나서 여러가지 노동일을 많이 했잖아. 그에 따른 보상이 뭐라고 생각해?" "통나무 집을 보수하고. 또 사냥에 성공한 적도 있었으니까 고기도 먹었고..." "자연스럽게 지속적으로 '운동'을 해왔다는 뜻이잖아. 멍청아!" 라고 말하면서 누어있는 상태로 발을 이용해 내 옆구리를 가볍게 툭 친다. 음... 무인도에 오고 나서 별의별 짓을 다 하긴 했지. 나무를 옮긴다든가, 죽어라 톱질을 했다든가, 식량을 구하느라 계속 물 속에 들어가서 수영을 1시간 넘게 한다든가. "체계적인 운동은 아니지만, 무인도에 오고 나서 사회에 있을 때보다 몸을 쓰는 일이 훨씬 더 많았잖아. 특히나 우리들은 남자가 너 하나밖에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힘든 일은 다 네가 포함된 적이 많고. 생각을 해봐. 그렇다면 저절로 몸에 근육에 붙게 되잖아." "그런 건가요?" "전신거울 같은 게 없으니까 스스로는 잘 모르겠지만, 제 3자가 네 몸을 보면 확연하게 티가 나. 초창기 때 무인도에 표류되었던 너와 지금의 네 모습을 비교하면 잔근육 같은 게 많이 붙어 있으니까." "과연..." 그러고 보니까 팔뚝이라든지 허벅지, 종아리나 복근 등 예전에는 물렁살이었는데 지금은 탄탄한 느낌이 강하게 난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무인도 생활 자체가 노동 of the 노동으로 되어 있다보니 나도 모르게 근력 운동을 하루에 10시간 가까이 해온 셈이었나 보다. 자연스럽게 신체가 강화되고, 그에 따라 일의 효율이 늘어나게 된다. 예신이 나에게 했던 말의 의미는 이것이었을까. 남자와 여자의 차이. 근력의 차이. 신체구조의 차이. 아무리 무인도에 오고 나서 같은 양의 노동력을 소화한다 해도, 남자가 여자에 비해서 월등히 근력이 많이 붙게 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도 근거있는 말이다. 게다가 집단생활로 인해 유독 작업량이 많았던 나와는 달리, 계속 혼자 무인도에서 생활하며 별다른 노동력을 요하지 않던 일상을 보내온 예신을 서로 비교해보자면 신체능력 성장으로선 비교가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예신의 공격이 별로 아프지 않았던 것인가. 이제야 내가 예신을 이길 수 있었던 미스테리가 풀린 느낌이다.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단 말이 맞군요."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볍게 몸을 풀어본다. 팔이 약간 욱신거리긴 하지만, 초창기 때 예신을 만나 직접 몸으로 상대해본 때와 비교해보자면 이 정도는 약과에 불과하다. 이것으로 이예신이란 존재에 대항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을 보유하게 된 나. 계속적인 열세에 몰려있던 내게 있어서 신체조건의 성장은 반격의 초석과도 마찬가지다. ============================ 작품 후기 ============================ 예약으로 올라가는 편수입니다. 아마도 지금쯤 저는 서울에서 밤을 지새고 내일 아침 면접을 위한 고민을 하고 있겠지요. 잘 보고 돌아오겠습니다. ㅜ_ㅜ 274화 유아 선배의 증세가 다시 호전되기까지 일단 마을에 머물기로 결정한 우리들. 아마도 내일 아침 정도면 다 나을거라는 기한의 말에 따라 일단 건강상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며 간신히 한숨을 돌리는데. "...으... 죽겠어..." 당사자는 여전히 파랗게 질린 안색을 표출하며 누워있는 상태다. 딱히 마을에서 할 일도 없기에 노아 교수님은 마을의 다른 여성들과 집안일을 도와주기 위해 투입되었고, 엘리는 또래 아이들과 같이 어울려 노는 중이다. 물론, 금발이라는 독특한 머리색을 지니고 있는 엘리에게 꼬마 아이들이 하나 둘 씩 신기하다는 듯이 만지작 만지작 거리는 탓에 엘리는 도망다니기 바쁜 모양처럼 보인다. 인기있구나. 우리 엘리.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접한 적이 없다보니 쑥스러워 하는 것 같다. "그럼 난 이제 뭘 할까." 다른 남자들과 같이 작업을 하려고 했으나, 기한은 괜히 몸 상하게 그럴 필요는 없다며 나에게 편히 쉴 것을 강조했다. 어차피 어제 새벽 내내 기한과 같이 화로의 불씨를 다시 되살리느라 거의 잠을 설치다시피 했기 때문에 낮잠이나 푹 자볼까 하다가. "이러면 안 되겠지." 자리에서 일어서며 옷의 소매를 팔꿈치 위쪽까지 걷어 올린다. 그 뒤에 간단한 푸쉬 업. 무인도에 오고 나서 팔굽혀 펴기를 하는 건 처음인데도 불구하고, 근육통이 느껴지거나 힘겹다는 생각이 그다지 들진 않다. 역시 유아 선배의 말대로 신체적인 능력이 상승한 것인가. 나도 모르게 하루하루를 운동을 보내왔으니, 그럴만도 하겠지. 하지만 고작 신체조건이 좋아진 거 하나만으로 예신을 이길순 없다. 녀석의 말도 안 되는 황소고집을 꺾어버리기 위해서는 예신과 나의 실력 차이가 현저히 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도출해야 한다. 무턱대고 운동만 해봤자 아무런 소득이 안 될테고. 어쩐다. ...... 가급적이면 아껴두려고 했던 최후의 수단이지만. 일단 사용해보도록 하자. "엘리. 이쪽으로 와 봐." "......" 아이들에게 쫓겨 다니며 난감해하던 엘리가 내 부름을 받은 즉시 쫄래쫄래 다가오기 시작한다. 꼬마 애들은 쉽사리 엘리의 금발을 만지작 거리는 걸 포기하려 하지 않는 눈치였으나,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포기를 하게 된다. 마을 꼬마 애들의 후퇴를 목격한 엘리가 멍 때리는 얼굴로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인다. 아마도 '해방이다!'라는 의사표시겠지. "널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잠시 나하고 좀 어울려줬으면 하는데." "...?" "간단히 말해서 훈련이야. 훈련. 엘리, 너 만큼 민첩한 사람은 무인도에 없잖아? 그래서 네가 나에게 공격을 하고, 내가 반격을 하거나 막거나 하는 형식으로 너의 움직임을 익히고 싶은데. 괜찮겠어?" 이예신의 무서운 무기 중 하나는 사회에서 지내온 성인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엘리와 같은 민첩한 몸놀림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무인도에서, 그것도 인간의 손을 전혀 타지 않은 자연 속에서도 엘리와 동급의 움직임을 선보인다는 의미는 곧, 엘리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하는 이상 예신의 움직임을 순간적으로 포착하고 반격하는 건 어림없는 일이란 뜻이다. 어제의 경우에는 밤이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예신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었지만, 대낮에 그녀를 만나게 되면 또 장담하지 못한다. 무인도의 환경은 불규칙과 규칙 중에 불규칙이라는 전자쪽에 좀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변수의 달인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왜 내가 엘리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지 그 의도를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지어 보이지만, 이내 깊게는 생각하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부탁을 수락해준다. 역시 엘리는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로구나. 인적이 드문 숲속으로 엘리와 같이 나들이... 가 아니라. 비밀 특별 훈련을 하기 위해 장소를 옮겨왔다. 괜히 엘리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을 노아 교수님이나 유아 선배가 알게 된다면, 더더욱 나를 수상한 눈빛으로 바라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좋아. 엘리. 우선 네가 움직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나를 무자비하게 공격해봐." "...?" "이 오빠는 괜찮으니까. 자!" "...ok." 오늘따라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오케이 사인을 보낸 엘리가 발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속도. 게다가 엘리의 공격은 맞으면 꽤나 아프다. 사냥으로 단련된 민첩함과 판단능력이 사회에서 온실속의 화초 마냥 자라온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차원이 다른 매서움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계속적으로 운동을 해온 유아 선배나 세린, 2명이서 연합을 해도 엘리를 이기지 못했다. 두 사람 다 펜싱과 검도 분야에서 나름 실력자로 인정받고 있는 여성들인데도 엘리에게 손을 쓰지 못했다는 말은 즉, 엘리의 실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사실을 의미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엘리를 나 혼자서 상대한다. 무인도 초창기 시절에는 엘리에게 꼼짝도 못하던 나였지만. "허업!" 짧은 기합을 내지르며 엘리의 발차기를 양 팔로 방어한다. 어린 아이지만 꽤나 묵직한 공격이 팔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 역시 엘리는 굉장한 녀석이다. 머리도 좋지, 운동신경도 뛰어나지. 게다가 귀엽기까지 하다. 나중에 성장하면 금발 미인이라 불릴 가능성도 높기에 차후 미소녀 인재라 불릴 정도로 아주 우수한 소녀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것과 이거는 별개. "엘리! 좀 더 빠르게!" "......" 제발 엘리가 속으로 부디 나를 향해서 '마조히스트인가.'라는 생각을 품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엘리가 그런 단어를 알 리가 없겠지만, 오빠로서는 굉장히 서글픈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재차 이어지는 엘리의 하단 공격. 아무리 엘리라 해도 성인 남성을 태클로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엘리가 노리는 것은 바로 발목을 가격해서 상대방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것. 그러나 이것도 역시 예상 가능 범위였기 때문에 살짝 발을 뒤로 빼며 엘리의 공격을 그대로 흘려버린다. 진짜... 예신과 엘리가 직접 단 둘이 일기토를 벌인다면 누가 이길지 상상이 안 갈 정도로 엘리의 공격은 점점 매서워지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밀려오는 이 후회감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작품 후기 ============================ 역시 첫번째 면접은 마음 편히 보는 게 제일이지요! 하하하하하! 그냥 좋은 경험 하고 왔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ㅜ_ㅜ 275화 사방으로 뻗는 엘리의 하단, 상단, 중단 공격. 신체적인 압박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압박 마저도 절묘하게 컨트롤 할 줄 아는 이 소녀에게 어떤 식으로 반격의 초석을 마련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다. 좀 살살하라고! ...라는 말을 하면, 오히려 사나이 자존심에 금이 갈 지도 모르니까 목구멍 안으로 꾸역꾸역 넣어두도록 하고. 여하튼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엘리의 공격이 빨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최대한 시선을 빠르게 돌리며 엘리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도록 노력해본다. 계속해서 엘리와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난 이후에. "오, 오케이. 이제 그만 스톱..." "......" 엘리의 움직임이 드디어 멈췄다.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빨랐던 움직임 탓에 겨우 한숨을 돌린 나. 정확한 시간은 잘 모르겠지만, 해의 위치 이동을 통해서 대략 1~2시간 정도 흘렀다는 사실만을 얼핏 알아차릴 뿐이었다. 본래 사회에 있을때 평범한 대학생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던 나였다면 해의 위치로 대략적인 시간을 알 수 있었다니 뭐니 하는 감각적인 행동은 꿈속에서도 흉내내지 못할 일이었겠지만, 무인도 생활을 오래 지속하다보니 이제는 어느정도 시간을 쉽사리 예측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한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다들 무인도에 적응하는 구나. 무인도 생활의 달인이라 불리는 엘리는 과연 얼마나 더 정확한 시간을 추측할 수 있을까. 나중에 한번 물어보고 싶은 기분이 들지만, 일단은 마을로 복귀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엘리를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마을로 돌아온 이후. "...어딜 갔다 온 거야." 아직도 죽을 맛을 하고 있는 표정을 유지하며 누워있는 유아 선배가 나와 엘리를 바라보며 묻는다. 노아 교수님은 어느순간 마을의 성인 여성들과 동화된 채 그동안 무인도에서 겪어왔던 고충을 털어놓는 데에 여념이 없고, 다른 여성들도 아이들을 돌보며 노아 교수님의 무용담에 귀를 경청하고 있는 중이다. "엘리랑 같이 산책 갔다 왔어요." "산책은 사람이 아니라 동물과 같이 갔다 오는 거라고." "그건 애완동물을 기르는 애호가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고요." 다른 의미로 정확한 말이긴 하지만, 엘리와 애완동물을 비교한다는 일 자체가 인격모독이라고 할까. 헌법 몇 조에 위반되는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여하튼 행복추구권을 멸시한 이유로 죄가 될 수 있는 발언이 아닐까 싶다. 아. 이런 식으로 점점 전공 지식을 까먹는구나. 아직도 본격적인 취업 활동을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머리가 비어가는 현상을 겪게 되어서 참으로 유감이다. 나중에 다시 사회로 복귀하면 정식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노력해야지. 라는 결심을 하게 되지만. 다시 본래대로 돌아가면 이 결심 또한 잊혀지리라. 다 그런거다. 천재가 아닌 이상, 노력하는 것 역시도 타고나야 하는 게 사람의 체질이니까.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랫동안 하는 거야." "공부도 타고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해보고 있었습니다만." "뜬금없긴 하지만, 옳다는 말이란 점에 대해서 부정하진 않겠어."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엘리와 단 둘이 밀회를 즐겼단 말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하겠어. 아청법으로 처벌되고 싶어?" "유아 선배가 의심할만한 그런 행동은 한 적도 없을 뿐더러, 엘리는 사회적으로 보호해야 할 귀여운 여자아이라고요." "네가 그런 마음가짐을 먹고 있으니까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구나." "하하하..."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다들 힘쓰도록 하자. 성범죄는 최악의 범죄라는 인식을 가지며 사회생활에 임하면, 우리나라도 아름다운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잡담은 이 정도로 마치고. 해가 저물기 시작하고, 마을 사람들이 슬슬 복귀할 시간을 넘어서면서부터, 광장 한 가운데에 모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저녁 식사를 해결한다. 식사가 마치고 난 이후에. "유아 선배도 내일 정도면 몸 상태가 괜찮아진다고 하니까 슬슬 저희도 내일 아침에는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기한에게 들려준 말. 내가 우리 팀 대표로 귀향 선언(?)을 발설하자, 기한은 못내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군요. 이 마을에 계속 머물러 계셔도 상관 없습니다만." "아니요. 생존자가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르니까 일단 돌아가서 저희도 수색 활동을 한번 해보려고요. 저 큰 무인도 섬의 지리를 잘 아는 건 누구보다도 저를 포함해서 노아 교수님, 엘리, 그리고 유아 선배니까요." "유에 씨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와드리고 싶지만, 저 또한 이 마을에서 계속적으로 구조신호를 보내는 일을 하는 것 역시도 중요하니까요." "제 생각도 같습니다." 모든 인력을 다 투입해서 생존자 수색에 박차를 가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기한이 이끌고 있는 이 마을에서처럼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외부에 우리들이 무인도에 남아있음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거대 화로의 불을 관리하는 것도 이 마을 사람들의 몫. 게다가 생존신호 방해자이기도 한 이예신의 존재를 기한이 계속 마크해야만, 우리들의 생존 소식을 외부 사람들이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약속한 복귀의 날 아침이 밝게 되고. "이제야 좀 살 거 같아!" "다행이네요. 유아 선배." 가볍게 몸을 풀면서 생기있는 표정으로 돌아온 유아 선배의 모습에 나도 절로 미소가 새겨진다. 유아 선배는 역시 활발해야 유아 선배 다우니까 말이다. 활발함의 상징이라 쓰고, 유아 선배라 읽을 정도로 유아 선배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활발함이다. "엘리. 준비 다 끝났니?" "......" 노아 교수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 오케이 신호를 보내는 엘리. 떠나가려는 엘리의 주변에 마을 꼬마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순수한 아이들의 표정에는 서운함이라는 감정이 피어오르고, 어떤 아이는 엘리에게 가지 말라며 울기까지 한다. 한동안 무표정으로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엘리였으나. "......" 우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게 아닌가.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지만, 그래도 엘리 또한 마을 꼬마 아이들에게 정이 들었던 모양인가 보다. 무엇보다도 자신과 비슷한 또래 아이들을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말이다. 대충 공감은 가지만. 좀 더 다양한 표정으로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했으면 좋겠다. 뭐, 그것도 점점 엘리가 다른 사람들을 다방면으로 접하게 되다보면, 언젠가는 이뤄질 목표라고 생각하기에 지금은 따스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노아 교수님도 그동안 정이 들었던 마을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인사를 하고, 나 또한 기한과 마주서며 작별인사를 건넨다. "다음에 또 다시 뵙게 될 날이 있으면 좋겠네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에 씨. 가는 길에 몸 조심하시고, 무엇보다도 이예신이라는 여자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네. 그 녀석은 제가 무인도에서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점이니까요." 이예신을 계속 무인도에 남겨두면 안 된다. 그녀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지금 그녀의 상태는 너무나도 위험. 이대로 가만히 놔둬서는 안 된다. 우리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그 녀석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이예신에게 반격을 가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럼 출발해볼까요." "오케이!" 내 말에 기운차게 대답하는 유아 선배의 뒤를 이어 노아 교수님도, 엘리도 다 같이 남은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는 베이스 캠프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낯선 생존자 집단과의 만남. 그리고 다시 한번 확인한 인간의 무서움.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아마도 인간이 규정지을 수 없는 가장 미스테리한 학문 분야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 작품 후기 ============================ 예약으로 올라가는 편수입니다. 이번 에피소드의 마지막 편이군요. 매번 예신에게 당하기만 하던 주인공이 이제 반격의 실마리를 찾았다는 내용의 에피소드였습니다. 이제 슬슬 완결을 향해 달려가는 느낌이 확 와닿는군요. 신작 고민부터 빨리 해봐야겠습니다; 276화 EP 26. 무인도에서 축구하는 이야기 근 일주일동안 나무 자르기 작업만을 주구장창 하다가, 겨우 잘랐던 나무들을 공터 안쪽으로 옮길 수 있었던 우리들. 그동안 너무나 많은 혹사(?)를 당한 탓에 모두가 진이 빠진 상태로 산장 바닥에 누워있기를 이틀. 결과적으로 통상 대략적으로 10일 가량의 시간이 소모된 상황이었다. "... 심심하다." 아침에 산장에 앉아있던 우리들을 대표해서 누나가 먼저 이런 말을 꺼내게 되었다. 역시나 심심한 상황은 절대로 참지 못하는 누나다운 반응이다. 누나의 말에 찬성한다는 듯이 유아 선배도 좀이 쑤신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동감. 무인도에는 딱히 재미가 있을만한 유흥거리가 없으니까." "그러게. 매일 이렇게 쉬고 있으면 살만 뒤룩뒤룩 찔 거야. 노아 교수님처럼." "나, 난 살 안 쪘다니까!" 교수님이 화들짝 놀라면서 자리에 일어남과 동시에 소리친다. 이제는 강조하는 일 조차도 귀찮지만, 노아 교수님의 몸매는 상당히 괜찮은 편이다. 그렇다면 왜 누나와 유아 선배가 저런 말을 하느냐. 단순히 노아 교수님 괴롭히기 장난을 일삼으려고 하는 것일 뿐이다. 착한 사람은 놀림감이 되기 쉽다고 하지 않는가. 나이상으로는 두번째로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오냐오냐 하니까 자주 이런 식으로 우리들에게 놀림받는 대상이 된다. 본인도 몸무게를 상당히 신경쓰고 있는 탓에 요 근래에 들어서 밤마다 공터 주변을 뛰면서 운동을 한다든지 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어찌보면 노아 교수님이 불쌍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그래도 저런 면모가 또 노아 교수님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반응이 귀여우니까. 의자에 앉은 채 따스한 녹차를 마시고 있던 지아 선생님도 대화에 참여하게 된다. "확실히 무인도에서 '따분하다.'라는 문제점은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문제점이라고 볼 수 있지." "그 정도로 심각한 문제인가요?" 이번 질문은 내가 던져봤다. 그러자 지아 선생님이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서 답변을 해준다. "물론. 인간은 매우 섬세한 존재야. 어떤 면이 섬세하냐 하면, 바로 정신적인 요소가 매우 섬세하다고 할 수 있지. 오락이라는 것도 스트레스 풀이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으니까. 특히나 우리들처럼 무인도에서 할 게 없는 백수, 백조 조합은 더더욱 유흥거리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거야." "오호라..." 일리가 있는 말이다. 재미라는 것이 부차적인 인간의 감성이라고들 하지만, 그래도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기도 하다. 따분하고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진실 게임이라도 한번 더 할까?" "아니요.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을 거 같아요." 지아 선생님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내가 단호하게 대답을 해준다. 진실게임의 '진'이라는 글자도 듣기 싫을 정도로 거부반응이 절로 생긴다. 진실게임이 우리들에게 선사해준 악몽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것이다. 나와 같은 반응으로 다른 사람들 역시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진실 게임은 하지 말자고 말한다. "그럼 무엇을 하는 게 좋을까. 좋은 의견이 있는 사람." 지아 선생님의 말에 모두가 잠시동안 생각에 잠기기 시작한다. 진실게임 말고 할 게 뭐가 있을까. 음... 음...... 음.......... ... 안 떠오르는데. "아무도 없니?" "그게..." 차마 뭐라고 말을 꺼낼 수가 없다. 대부분 나와 같은 20대 청년들은 컴퓨터에 의한 온라인 게임이라든지 그런 것에 익숙해진 상황이기 때문에 오프라인 놀이는 따로 생각할 수가 없다. 스타크래프트나 디아블로, 아니면 피파 온라인이나 위닝 일레븐 같은 게임만 할 줄 알지. 다른 건 생각나지 않는다. "아, 좋은 게 떠올랐어요." 라고 말하며 손을 번쩍 드는 누나. 지아 선생님으로부터 발언권을 허락받은 누나가 귀엽게 윙크하며 말한다. "숨박꼭질 어때요?" "이 나이 먹고 숨박꼭질을 하기에는 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니?" "아, 아하하..." 우리들은 그렇다고 해도, 노아 선생님이나 지아 선생님은 20대 후반을 훌쩍 넘기신 분들이다. 특히나 지아 선생님은 결혼까지 하신 유부녀. 이런 분들을 데리고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도 재미있는데요." 이번에는 아리아의 의견. 그러나 방금의 그 놀이 제안 역시도 숨박꼭질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거 같아서 그대로 묵살이 되어버린다. 그런고로 또 다시 의도치 않게 침묵의 도가니 탕으로 빠져버린 이 분위기. 뭔가 분위기의 반전을 요할 물건이 없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갑작스럽게 나의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동글동글하고 점박이 무늬가 있는 물건. 그 이름은 바로... 축. 구. 공. "... 그래서. 우리들이 축구를 하게 되었다 이 말이구나." 지아 선생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한다. 현재 우리들은 공터로 나온 상황. 점심도 먹었겠다, 어차피 소화할 운동도 해야 할 겸 해서 내가 제안한 '축구' 놀이가 운이 좋게도 받아들여진 것이다. 사실 여성들은 그다지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부류가 대부분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가볍게 내 의견 역시도 무시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많은 찬성을 받아낼 수 있었다. 축구가 놀이 수단으로 받아들여지는 데에 가장 큰 공로를 한 것은 바로 '그리 쉽게 해볼 수 없는 구기종목'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다들 한번 정도는 축구를 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왜 제가 빠져야 하는 건가요." "그야 남자가 끼게 된다면 밸런스가 붕괴되니까." 그렇다. 정작 축구를 좋아하는 나는 이번 축구 시합에서 빠지게 된 것이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에서 본의 아니게 심판을 맡게 된 나. 그리고 팀의 숫자를 맞추기 위해서 제일 연장자이기도 한 지아 선생님도 빠지게 되었다. 4대 4 팀전. 우선 팀을 정하기 전에, 공터의 상태를 파악해보자. 잔디 구장이라고 부르기에는 풀의 길이가 조금 긴 편. 그래도 전혀 없는 편 보다는 나은 상황이라고 생각한 나는 우선 가져온 밧줄과 철주를 이용해서 간이 구장을 만든다. "그런데 이런 철주가 어디서 나온 거야?" 유아 선배가 2개의 철주를 양 손으로 질질 끌면서 나를 도와주는 와중에 질문을 던진다. "저번에 비행기 창고에 갔을 때 보였거든요." "잘도 기억하고 있었네." "비행기에 무슨 물건들이 있는지 따로 메모를 해뒀으니까요." "언제 그런 수고스러운 작업을 해둔거야?" "난파선에서 종이와 펜을 가져오고 난 이후로요." 기억력의 천재가 아닌 이상, 비행기 창고 안에 있는 물건들이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일일이 다 기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잠시 짬을 낸 틈에 비행기 창고에 들려서 이것저것 최대한 많은 물건들을 메모해 두었던 것이 여기서 빛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역시나 메모라는 습관은 언제나 도움이 되는 좋은 습관이라고 보여진다. 해머를 이용해 철주를 직사각형의 모서리 부근에 박는다. 땅 밑에 그다지 많은 돌들이 박혀있지 않은 상황이라서 해머로 철주의 머리 부근을 한 번 내려 칠 때마다 쑥쑥 잘 들어간다. 그리고 최대한 굵은 밧줄을 이용해서 각 철주들을 묶는다. 이것으로 축구를 할 수 있는 구장의 경계선은 완성. 다음은 하프라인과 골라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 ... 그래도 정교하게 축구장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귀찮기도 하고, 인력적으로도 상당히 낭비성이 강하기 때문에 하프라인은 그냥 축구장 경계선의 반을 갈라서 직선으로 밧줄만 바닥에 놓는다. 덕분에 철주 2개를 중간에 더 박아야 하는 수고를 해야했다. "이제 남은 건..." 가장 문제가 되는 축구 골대다. 이걸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던 찰나에. 노아 교수님이 우리들에게 다가오며 말한다. "저번에 가져온 대나무를 이용해서 만드는 게 어떨까?" "오, 그거 괜찮은데요?" 유아 선배가 나이스 아이디어라며 노아 교수님을 칭찬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골대의 그물까지는 재현할 수 없지만, 최소한 골대의 골격만이라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대나무가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은 나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다. 골대의 골격을 만들만한 사이즈의 견적을 내본다. 실제 축구 경기에서 사용되는 골대의 규격 사이즈도 모르고, 어차피 여자들끼리 시합을 할 예정이기 때문에 그리 크게 만들 필요는 없을거라 생각한 나는 바로 톱을 이용해서 작업에 착수한다. 축구 시합에 나가지도 못하는 나는 정작 있는 고생, 없는 고생은 다 하고 있다니. 약간 모순되고 있다는 생각이 조금 들기 시작한다. ============================ 작품 후기 ============================ 남은 분량을 보니까 이제 정말 완결이 눈 앞에 보일 정도인 것 같습니다. 이후의 일정에 대해서는 아직 정한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열심히 고민중입니다. 외전격으로 무인도 이후의 일상 이야기에 대해 연재할 생각은 가지고 있지만, 설정을 짠 건 아무것도 없고요;; 뭐... 무작정 쓰다보면 언젠가는 되겠지요. 언제나 그런 마인드로 연재를 해왔으니까요. 하하하하하. 277화 곰은 재주가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는 옛날 말처럼, 말 그대로 작업이란 작업은 내가 다 하고, 실제 경기는 여성들이 뛰게 되었다. 사실 나도 축구를 하고 싶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지만, 역시나 내가 끼게 되면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는 여성진들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축구장 작업만 주구장창 하는 노가다 신세를 뛰는 중이다. 축구공을 챙겨온 것도 나고, 간이 축구장을 만드는 것도 나인데 정작 나는 축구공을 만지는 일 조차도 혀용되지 않으니까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눈이 떠지고 입에 거품을 물 지경이다. 그래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결을 이길 수 있는 트랩카드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얌전히 속으로만 분을 삭히는 수 밖에. 축구장을 완성시키고 그 다음 날 아침. 이른 식사를 한 우리들은 완성된 축구장으로 나온 뒤에 몸을 풀고 있었다. 스트래칭 강사는 전직 검도부 동아리 부장이었던 유아 선배가 담당하게 되었다.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마친 우리들. 우선 팀 구성을 짜는 데에서부터 난항을 겪게 되었다. "밸런스를 맞추려면 일단 유아 선배와 세린을 떨어뜨려야 하는 게 좋겠죠." "그렇긴 하지.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내 말을 듣고 있던 지아 선생님이 저 멀리서 초호기와 장난을 치고 있는 엘리를 가리키며 말한다. "엘리를 어느 팀에 넣느냐가 가장 문제가 될텐데." "엘리는 축구경기 룰 자체를 모르니까요." "아니. 룰은 문제가 되지 않아. 순수한 운동신경만 따지고 본다면 엘리가 2인분, 그리고 유아와 세린이 1인분씩 해서 서로 비등비등한 밸런스를 맞출 수 있게 될테니까. 그리고 룰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조용히 말하는 지아 선생님. "어차피 다른 사람들 역시도 축구에 대한 규칙을 숙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있잖아. 그렇지?" "... 그렇긴 하지만요." "그러니까 엘리를 블루 팀으로, 그리고 세린과 유아를 레드 팀으로 놓는 편이 그나마 밸런스가 맞을거야." "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팀 배치다. 어차피 서로 규칙도 모를 터. 물론 엘리에 비해서 유아 선배라든지 세린은 정말 아주 기초적인 지식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엘리는 축구 자체를 접해본 적이 없을테니까. 그렇다고 세린과 유아 선배가 그리 많은 축구 규칙을 알고 있다는 기대감은 가지고 있지 않는다. 고작해야 '축구는 발로만 사용해서 골대에 공을 넣어야 하는 게임.'이라는 수준만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내기를 걸어도 좋다. "그럼 남은 녀석들의 분배인데..." 지아 선생님이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다. 우선 유아 선배와 세린이 같은 팀, 그리고 엘리가 상대팀이기 때문에 남은 사람들 역시도 신중하게 서로간의 실력이 균형에 맞을 수 있도록 고려해야 한다. "그나마 나머지 사람들 중에서 운동신경이 좋은 사람은 아리아와 체리 정도가 되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죠?" "좋아. 그럼 아리아를 블루 팀에 넣고, 체리를 레드 팀에 넣도록 하자." "노아 교수님하고 세리아는요?" "아리아가 세리아와 다른 팀이 된다면 세리아가 어설픈 드리블을 하면서 골을 향해 달려가도 아리아는 절대로 막지 않을거야. 그러니까 아리아아 세리아를 같은 팀에 넣는 것이 블루팀에게 있어서 그나마 도움이 되겠지." "상당히 현실적인 이유네요." "요새 들어서 둘의 자매애가 더욱 끈끈해졌으니까. 누가 보면 레즈비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과대해졌어." 그렇다과 지아 선생님의 말이 진담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둘 다 엄연히 이성애자고, 아리아는 모르겠지만 세리아는 아직까지도 나에 대한 일편단심의 마음을 수줍게 고백했었다. 여자아이에게 고백을 받는 입장이 되어버린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좋을지 몰라했지만, 그래도 기분 하나만은 괜찮았다. 덕분에 아리아의 무한 질투심을 온 몸으로 받아야 했다는 사실은 여담으로 남겨두도록 하자. 어쨌든 나와 지아 선생님의 나름 공정한 편 가르기에 의해 팀이 정해지게 되었다. 엘리를 선두로 구성된 블루 팀 멤버. 에이스인 엘리와 아리아, 세리아 자매. 마지막으로 체리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 상대편인 레드 팀. 대 엘리전을 위해서 오늘 이 순간 만큼은 아군으로 다시 만나게 된 원수지간의 두 사람, 유아 선배와 세린. 그리고 노아 교수님과 누나로 구성된다. 명단을 붙여놓자, 너도나도 구경을 하러 오게 된 여성진들. 명단을 보자마자 너무나도 쉽게 예상된 시나리오 그대로 세린과 유아 선배의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어째서 이 녀석이랑 같은 팀이야!" "왜 내가 유아 선배와 팀인거야! 이 변태!!" "그러니까 왜 내가 변태가 되냐고." 단순히 팀 명단 하나만을 짰을 뿐인데, 순식간에 변태 성추행범으로 몰고 가는 세린의 말이었다. 듣는 사람 섭하게 시리. 나름 고생을 하면서 머리를 풀가동 시키는 노고를 격은 끝에 만든 명단인데 이런 식으로 맹 비난부터 날리면 괜히 기운이 빠지지 않는가. "팀 바꿀 수 있어?" "그건 불가능해." "어째서?!" 항의하는 세린이었지만, 나는 단호하게 대답해줄 뿐이다. "나름 배런스를 맞춰논 팀이기 때문에 여기서 더 욕심을 내게 되면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된다고." "도대체 팀 구성의 근거가 뭔데." "직접 경기를 해보면 알걸." "......" 사실 명단은 나 혼자만 짠 것이 아니고 지아 선생님의 의견도 들어가있기 때문에 더 이상 따지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세린이었다. 어찌보면 사람 차별하는 꼴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지아 선생님의 위엄은 나 역시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참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무인도에서 유아 선배와 세린의 말싸움을 말릴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자는 바로 지아 선생님이다. 역시나 고렙. 나도 레벨 좀 높여서 지아 선생님과 같은 랭커가 되어야지. 그 전에 쩔부터 먼저 받을까. 명단을 보던 사람들 중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는 부류가 있었다. "저는 세리아 언니와 같은 팀이라면 어찌되든 상관 없어요." "......"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세리아. 애정 넘치는 아리아의 고백에 순간 할 말을 잃었나 보다. 무슨 신혼부부도 아니고. 만약에 부부라고 치자면 남편은 아리아고 아내는 세리아가 되는 것인가. 바깥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앞치마 차림으로 조숙한 모습을 한 세리아가 활짝 미소를 지어 주면서 '수고했어요. 여보.'라는 말을 한다고 상상을 해보자... 그야말로 천국이 아니겠는가. 세리아 만세! 현모양처 만세! ... 아니지. 심판을 담당하게 되는 내가 벌써부터 한 쪽에 마음이 쏠려서는 안된다. 어디까지나 중립을 유지해야 하는 본모습을 보여주도록 하자. 경기 시작은 30분 뒤로 잡혀지게 되었다. 각자 팀끼리 우선 호흡을 맞춰볼 필요도 있고, 그리고 거기에 상응하는 작전도 짜야 할 시간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축구 규칙에 대한 설명이다. 모두를 불러모은 나는 우선 간략한 축구 규칙이라도 설명을 해주기 위해서 강의를 시작한다. "... 우선. 축구는 발로 하는 경기입니다." "그건 나도 알아." 누나가 '우우~'거리면서 너무 기초적인 강의라서 재미 없다고 야유를 퍼붓는다. 아주 기초적인 것도 모르는 학생이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닌가. 내 말을 그대로 번역해주는 지아 선생님이 영어로 엘리에게 차근차근 설명해주기 시작한다.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 알았다는 듯이 긍정적인 표정을 보여주는 엘리. 발로 하는 구기종목이라는 사실 하나만 알고 있어도 크게 성공했다고 보여진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가 보다. "그리고 골키퍼는 손을 써도 돼죠." "그것도 안 다니까." "시끄러워. 누나. 분명 모르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거라고." "설마. 그런 기초적인 룰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라고 누나는 말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강단에 위치한 나는 그 '기초적인 룰도 모르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몰래 살짝 얼굴을 붉힌 세리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아마도 '골키퍼'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조차도 처음 들은 게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가질 정도로 축구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라고 보여진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기초 룰이 아니라 상식 수준인데 그런 것을 모르다니. 세리아. 이 오빠는 약간 실망했단다. 하지만 귀여우니까 용서해주도록 하마. 어떠한 궁금한 질문이 있다면 이 오빠가 하나하나하나 차근차근히 알려줄 용의가 있으니까 언제든지 찾아오렴. 물론, 단 둘이 있을때 질문을 하러 오면 더 좋은 것(?)도 해줄 수 있단다. 으흐흐. ============================ 작품 후기 ============================ 오랜만에 롤 하다가 이렇게 빡친 적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정신병자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게임이 바로 롤이 아닐까 싶군요. 278화 정말 아주 기초적인 룰만 설명을 마친 나. 이제 각자 작전회의를 가질 수 있게끔 시간을 부여하고, 나와 지아 선생님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재료들을 준비한다. 그래봤자 나는 심판을 담당하고 있는지라 사실 몸만 있으면 되는 상황. 그래도 폼새는 갖추기 위해서 레드 카드와 옐로우 카드를 준비할까 라는 생각으로 근처에 있는 나뭇잎을 따온다. 일반적인 초록색 나뭇잎을 레드 카드로 대신 쓰고, 그리고 노란색 잎을 옐로우 카드로 사용하도록 하자... 라고 생각했는데. 근처에 장미가 보이길래 장미 잎을 따서 레드 카드로 쓰자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꽃잎 카드라. 뭐, 실제로 경기를 뛰는 사람들의 성별은 여성들이기도 하니까 꽃잎을 카드로 사용하면 경고를 받아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줄지도? 물론 말도 안되는 심판 결과를 선사해주면 몰매를 맞을 수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심판에 대해서는 언제나 공정하게 해야한다. 우리나라가 월드컵에 진출하고 난 이후에 포르투갈과 붙었을 때의 그 심판처럼. 카드(라고 쓰고 꽃잎이라 읽는다.)도 대략 다 구했고, 간단하게 경기장 정리나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커다란 돌 같은 것들을 저 멀리 던져놓는다. 아무리 잔디구장이라고 해도, 돌 위에 넘어지면 아프기 때문이다. 나름 세심한 배려를 실천하고 있는 나에게 지아 선생님이 다가와 묻는다. "그런데 골 넣으면 바로 스코어 계산만 하면 되는 역할이지?" "네. 지아 선생님의 역할은 그것으로 끝이에요." "간단하네." "심판은 대부분 제가 보니까요." 참고로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서 지아 선생님의 손목시계를 잠시 빌렸다. 어차피 여성들이 뛰는 경기이기 때문에 실제 축구 경기의 전반전과 후반전 시간을 적용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해서 각각 20분씩, 총 40분을 경기 시간으로 잡았다. 만약에 연장전을 간다 하면 5분으로 할지 10분으로 할지 아직 정하지 않았다. 그건 나중에 선수들의 체력을 고려해서 정하도록 하자. 아니면 패널티 킥을 하던지. 둘 중에 하나로 하면 되겠지. 시간은 흐르고 흘러 20여분이 지난 상황. 스트래칭도 끝났겠다, 축구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 수업에다가 각자 전략 전술도 다 짰는지 다시 모여든다. "작전은 다 짰어?" 누나의 도발이 시작되었다. 뭐, 심리전도 경기의 일부이니까 딱히 내가 경고를 줄 필요는 없다. 그리고 어차피 블루 팀에는 누나에 버금갈 정도로 심리전의 달인이기도 한 아리아가 있으니까 별로 상관은 없을 것이다. "어줍잖은 심리전은 오히려 걸지 않는게 더 좋을지도 모르죠. 유린 선배." "난 그냥 단순하게 작전을 다 짰는지에 대한 질문만 했을 뿐인데?" "글쎄요. 어떨까요." 묘한 대답을 하는 아리아. 그러고보니 저기 중에서 아리아 이외의 사람들은 누나와 서로 말을 주고받을 정도의 화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체리야 뭐... 성격이 워낙 소극적이니까 대항도 못할테고. 세리아는 말을 못하고. 엘리는... 뭐든 귀찮아하기 때문에 애초에 승부에서 논외되는 인물이다.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이는 유아 선배가 블루 팀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각오하라고. 블루 팀. 지면 식사당번 일주일 내내 하기로 한 거, 기억하고 있지?" "내기를 한 겁니까? 선배?!" "그야 당연하지. 내기 없는 승부는 재미가 없잖아." "......" 유아 선배의 말이 맞긴 하다. 내기 없는 승부는 자고로 김치 없는 김치찌개, 파 없는 파전, 닭 없는 치킨, 그리고 탄산 없는 콜라와 마찬가지다. 내기라는 것이 어찌보면 사행성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무언가를 걸고 서로 승부를 하는 것은 오락거리에 대한 흥을 더욱 돋구는 역할을 한다. 물론 '이긴다.'라는 말이 전제되어야지 재미있겠지만. 지는 쪽은 가뜩이나 져서 억울한데, 벌칙까지 받으려 하면 무지하게 억울할 것이다. ... 어차피 벌칙 수행을 받는 쪽은 나나 지아 선생님도 아니기 때문에 딱히 내기에 대한 반대는 하지 않는다. 당사자들이기도 한 레드 팀과 블루 팀은 이미 합의를 본 상태인 것 같고. 별다른 무리가 없다고 판단한 나는 우선 각 팀의 대표를 나오게 한다. 서로 앞으로 나온 인물을 확인한다. 블루 팀에서는 아리아가, 그리고 레드 팀에서는 옥신각신 했지만, 세린이 나오게 되었다. 유아 선배가 나오려고 무지하게 애를 썼지만, 가위바위보에서 세린이 이겼다. "그럼 서로 골대와 공을 정하기 위한 기위바위보를 하겠습니다." "그건 무슨 의식이야?"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는 세린. "의식이라기 보다는 그냥 단순한 게임이야. 공격 권한을 놓고 정한다는 것이라고 보면 될지도 모르겠네." "그래?"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사람이 공을 선택할지, 골대를 선택할지 정하는 거야. 골대를 선택하면 공격권은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고, 대신에 어느쪽 골대를 사용하고 싶은지 마음대로 정할 수 있지." "오호라... 그럼 공격권이 무조건 좋겠군? 우리 레드 팀은 공으로 할래." "무슨 소리야! 골대를 해야지!" "공이 우선이란 말이에요!" 벌써부터 레드 팀은 불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유아 선배와 세린의 말싸움이 또 한번 벌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뭐, 이제는 너무 많이 봐서 지겨워질 정도다. "말싸움부터 하기 전에 가위바위보를 먼저 이기는 게 순차적으로 옳은 거 아니냐." 내 말에 앗차 하며 그걸 이제서야 눈치챘다는 듯이 다시 자리에 서는 세린. 간혹가다 생각하는데, 이 녀석도 은근히 덤벙거리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그렇다고 덜렁이 수준은 아닌데. 그냥 그렇다는 뜻이다. 그리고 드디어 시작된 가위바위보. 결과는 가위를 낸 아리아가 보를 낸 세린에게 우선권을 따내게 되었다. 고민하던 아리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과감하게 골대를 택한다. "어느쪽 골대를 선택할래?" "산장 쪽에 있는 골대를 선택하겠습니다." "그래?" 지리적인 이점이라도 있는 것일까. 골대를 만들면서 전체적으로 경기장을 본 나였지만, 그리 눈에 확 들어올만한 지리적인 이점은 잘 모르겠다. 어쨋든 선공은 레드 팀으로 돌아가게 된 상황. 골키퍼가 누구인지 바라보니... ... 누나가 담당하고 있었다. 뭐, 분명 공격수로는 유아 선배와 세린이 들어갈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골키퍼로 누나가 투입된 것은 조금은 의외였다. 노아 교수님이 골키퍼를 맡게 된다면 불안불안한 것이 사실이지만, 나 같으면 운동신경이 좋은 누나와 세린, 그리고 유아 선배 3명으로 공격 라인을 짜는 것이 이득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만약에 내가 레드팀 감독이었다면 그렇게 포지션을 짰을 것이다. 중앙 미드필드로 누나가, 그리고 양쪽 날개 공격수로 세린과 유아 선배. 음... 괜찮은데.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계속적으로 상대방 편이 기가 질릴 정도로 맹공을 퍼부으면 자연스럽게 상대편은 수비적인 자세로 나올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공격수로 쓸 수 있을만한 인물은 레드 팀이 훨씬 많은 편. 운동신경 순위로 단연 톱 3 안에 드는 세린과 유아 선배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고, 여성진들 중에서 가장 달리기가 빠른 누나가 있으니까 공격 속도에 박차를 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기가 걸려있기 때문에 후방을 좀 더 신경쓴다는 측면을 강조한 것 같다. 그렇다고 달리기가 빠른 누나를 골키퍼에 배치한 건 매우 오류일텐데. "이쪽은 준비 다 되었어~!" 산장쪽 골대에서 한 손을 휘두르며 말하는 체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블루 팀 골키퍼는 체리인가. 레드 팀과는 다르게 블루 팀의 포지션은 상당히 좋다고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양궁을 오래 한 체리이기 때문에 날아오는 공에 대한 내성은 어느정도 있을거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격수로 엘리의 원 톱. 아리아가 서포트고 세리아가 수비다. 포지션 상으로는 개인적으로 내가 봤을땐 블루 팀이 먹고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고 평하고 싶다. 누가 작전을 짰는지 잘 모르겠지만, 블루 팀. 얕볼 수 없는 팀이다. 공격권을 먼저 가져간 레드 팀. 하프라인에 놓여있는 공을 먼저 세린이 잡는다. "시작은 언제 하는거야?" "내가 신호를 보내면 그때부터 경기가 시작된다고 보면 돼." "언제 시작하는데." "각자 준비가 다 되었는지에 대한 확인을 하고 나서." "무지하게 신중한 녀석이네. 그런 건 그냥 대충대충 하라고." "말은 그렇지만, 실제로 네가 심판을 보게 된다면 절대로 그런 소리가 안 나올걸?" "... 흥!" 서로 각자의 자리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나. 지금 당장 시작해도 무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 무렵, 오른손을 들고 드디어 경기 시작을 알리는 목소리로 크게 외친다. "그럼 지금부터 무인도 배 축구 경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뭐야. 그 촌스러운 명칭은." 세린의 태클은 애써 무시하자. "경기, 시작!" ============================ 작품 후기 ============================ 축구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생각해보니 오늘 월드컵 최종 예선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더군요. 우리나라는 간신히 올라갔다고 들었는데... 여하튼 월드컵 본선에서는 잘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나저나 우즈벡이 한골차로 떨어졌다고 알고 있는데... 무진장 열받겠군요;; 279화 경기 시작을 알리는 내 목소리와 함께 무섭게 돌진하기 시작하는 세린. "첫 골은 내 차지야!!" 라고 말하면서 엄청난 드리블을 선보... 이지 못한다. 발로 차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행동이라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물론, 나와 같이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아니면 웬만한 구기종목 한번 정도는 해봤을 정도의 수준이 된다면 사실 드리블이라는 것이 그리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린은 나와는 달리, 공이라는 것을 처음 발로 차보는 행동을 해보는 와중이기 때문에 매우 어설프게 보일 수밖에 없다. "에잇!" 차다 차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그냥 전방으로 뻥! 하고 공을 차버리는 세린. 기다렸다는 듯이 앞에 위치하던 아리아가 공을 잡는다. "적팀에게 패스를 하다니. 알고보니 세린 선배는 정이 넘치신 분이었나 보네요." "의, 의도적으로 그런 게 아니야!" "친절이라는 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죠. 저는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근슬쩍 심리전을 거는 것도 잊지 않는다. 역시나 아리아. 대단한 녀석이다. 공을 빼앗기자, 당연하게 이어지는 유아 선배의 질책이 들려온다. "이 바보! 왜 적 팀에게 패스 따위를 하는 거야!" "실수 할 수도 있잖아요!" "첫 판부터 실수 투성이라니. 너도 정말 허접스럽구나." "선배는 얼마나 잘하는데요?!" "적어도 너 보다는 잘할 자신 있어!" "반드시 두고 보겠어요!" 매번 보는 현상이긴 하지만, 설마 축구를 하는 동안에도 말싸움이 붙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협력 플레이를 요구하는 구기종목인 축구에서 저렇게 단합이 안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상당히 드문 일일텐데. 그런 면에서 보자면 어떤 의미로 진귀한 장면이 나오는 게 아닐까 평하고 싶다. 같은 편끼리 싸운다고 옐로우 카드를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공격권을 찾은 아리아가 공을 몰고간다. 아까 세린의 무턱대고 무작정 전진! 전법과는 달리, 아리아는 꽤나 신중하게 드리블을 시도한다. 무리한 공격보다는 우선 자신이 공에 익숙해지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아리아의 저런 빠른 태도 전환은 본받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공격수를 투 톱으로 포메이션을 짠 블루 팀. 이미 세린은 가볍게 제쳐버린(물론 본인의 실력으로 따돌린 것은 아니고, 세린이 혼자서 자폭을 한 것이지만 말이다.) 탓에 자신이 생각했던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는지 엘리에게 빠르게 패스를 한다. "엘리!" "... yes." 무슨 의도로 예스라고 대답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공을 건내받은 엘리였다. 자신의 얼굴 크기와 같은 커다란 공을 받은 엘리. 처음에는 약간 우왕자왕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이내 익숙한 몸놀림으로 드리블을 시전한다. 역시나 운동신경 하나는 정말 최고다. 여자 치고는 저렇게 빨리 적응하는 사람도 엄청 드물 것이다. 만약에 여성부 축구 감독이 엘리를 봤다면, 즉시 스카웃을 할 정도라고 생각할 정도라 보여진다. 공을 건내받은 엘리가 무섭게 질주한다. 작은 체구로 잘도 저런 속도를 내는구나 라는 생각은 이미 예전에 감탄을 받은 일이기 때문에 이제는 세삼 놀랍지도 않다. "어딜 가려고!" 중앙 미드필드 진에서 유아 선배와 마주친 엘리. 세린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엘리에게서 공을 빼앗는 게 우선 사항일 것이다. 운동신경으로 따지면 전혀 뒤질 이유가 없는 유아 선배. 과감한 태클을 시도하지만, 역시나 무인도에서 단련된 엘리의 3년 내공은 쉽게 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촤아악! 공과 함께 그대로 점프를 시도하는 엘리. 정확하게 공을 노리고 태클을 시도한 유아 선배였지만, 그대로 몸만 미끌어지며 유아 선배를 점프로 넘은 엘리가 안전하게 공과 착지를 한다. "말도 안 돼?!" 놀란 유아 선배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소리친다. 사실 나도 유아 선배와 마찬가지의 기분이다. 웬만한 프로 선수들도 하기 힘들다는 태클 피하기를 너무나도 간단하게, 그것도 고작 축구를 한 지 이제 1분이 채 되지도 않은 소녀가 해내다니. 내 손에 비디오 카메라가 없는 것이 엄청 후회되는 상황이었다. "자, 잠깐만... 꺄악!" 잔뜩 겁먹은 노아 교수님이 엘리의 무서운 질주를 막아낼 수 없다는 사실은 만 천하에 알려진 사실이다. 너무나도 가볍게 노아 교수님을 재쳐버린 엘리가 거침없는 드리블로 상대편 골대까지 가기 시작하는 거 아닌가. "와라! 엘리! 언제든지 상대해주마!" 자신만만하게 두 손을 활짝 펼치며 말하는 누나. 도대체 무슨 근거로 저런 말을 꺼내는 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결과야 두고보면 알 일. 누나의 저 말이 허세인지 아니면 진담인지. 과연. ... 이라고 말하기 전에. 공을 차면서 가던 엘리가 그대로... 그대로... 그대로...! ... 공을 차면서 끝까지 간다. "엘리! 잠깐 스톱!" "...?" 이미 골대를 한참 지나치며 반대편까지 넘어간 엘리가 의이한 듯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영어로 쏼라쏼라 말하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내가 엘리의 행동을 저지한 일에 대해 항의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보지만, 그 이전에 엘리의 행동 자체가 내 입장에서는 이해 불가다. "엘리. 공을 가지고 계속 차면서 앞으로 가는 게 아니라, 저 골대에 공을 발로 차서 넣는거야." "... Oh." 뒤늦게 눈치챘는지 엘리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연신 끄덕끄덕 해 보인다. 나의 축구 기초 강의 수강생이면서 저런 실수를 범하다니. 역시나 교육이라는 건 어렵구나 라고 다시금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나중에 무인도에서 나가게 된다면, 학교 선생님들 말을 잘 들어야지. 엘리의 어이없는 실수로 인해서 절호의 공격 찬스를 놓치게 된 블루 팀. 반면에 레드 팀은 시작하자마자 골을 먹힐 뻔 했던 아슬아슬한 위기 상황을 간신히 모면한 셈이다. 이건 순전히 레드 팀이 잘 해서 방금의 날카로운 공격을 막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단순히 엘리가 축구 룰에 대한 인지를 제대로 하지 못한 범실로 인해서 위기 상황을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방금과 같은 공격이 언제든지 또 나올 수 있다는 말과도 같은 뜻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순식간에 기선 제압을 당한 레드 팀. 이대로 상황이 흘러가게 된다면 분명 블루 팀의 승리로 시나리오가 흘러가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다급하게 외치는 유아 선배. "잠깐 작전 타임!" "벌써요?!" "어쩔 수 없잖아. 아무튼 레드 팀. 타임이야. 타임." 본래 축구에서는 농구와 같이 작전 타임이라는 개념이 없다. 대부분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축구에서 만약에 그런 것을 허용하다가는 전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을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인도 배 축구 경기 대회에서는 특별히 작전 타임이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아무래도 초보자들간의 경기이기 때문에 체력 회복이라는 점도 고려해서 일단 도입을 해봤지만, 벌써부터 레드 팀이 작전 타임을 요청할 줄은 몰랐다. 그 정도로 엘리의 공격이 위협적이었던 것일까. 물론 엘리의 방금 그 공격은 나도 인정하고 싶을 정도로 매우 위협적이었다. 만약에 내가 수비 진영으로, 그리고 엘리가 공격수로 각자의 포지션을 맡은 상황에서 똑같은 장면이 연출된다면, 나도 레드 팀과 마찬가지로 작전 타임을 요청했을 것이다. "유에. 빨리 와서 네 의견을 들려줘봐." "알았어요. 기다려 보세요." 작전 타임 제도에 약간 특수한 옵션까지 달아두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 '유에 사용권'이다. 내가 말하고도 내 자신이 쪽팔린 경우는 드물지만, 아무튼 그렇다. 명칭 그대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실제로 경기장에서 선수로 뛰는 것은 아니고, 감독이라는 지위를 잠시 맡아서 내 의견을 해당 팀에게 전달하는 것 뿐이다. 게임으로 치자면 일종의 '헬프(Help)'와 같은 것이라고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라 확신한다. 순식간에 모인 레드 팀. 내가 다가가자, 다짜고짜 세린이 내 팔을 잡은 채 붕붕 휘두르며 말한다. "엘리를 어떤 식으로 막으라고 이렇게 팀을 짜놓은 거야?!" "엘리는 충분히 막을 수 있어. 다만 유아 선배나 너의 팀 플레이가 이뤄지지 않고 있으니까 못 막는 것일 뿐이지." "무슨 소리야? 그거." 내 말이 영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세린. 뱅뱅 돌려서 간접적으로 언급한 사실이지만, 작전을 짠다는 것 이전에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있다. 바로 세린과 유아 선배가 서로 협력을 해야 한다는 점.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가장 무서운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부에 있는 법이다. ============================ 작품 후기 ============================ 이번주에 장마가 시작된다고 하더니, 어제 딱 한번 비가 오고 나서 그 이후로 비가 안 오는군요. 하필이면 나갈 날만 비가 엄청 쏟아지고, 집에 있을때는 쨍쨍하다니... 이런 걸 머피의 법칙이라고 하는 건가요. ㅜ_ㅜ 280화 "잘 들으세요. 선배. 그리고 세린하고 노아 교수님, 누나."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일동. 일단 부탁은 받았으니까 대답해드리는 것이 인지상정. 어쩔 수 없이 내가 생각하고 있던 비장의 한 수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준다. "우선 경계 대상은 엘리입니다." "그거야 다 알고 있는 기본적인 사실이고." 눈을 흘기면서 자신들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세린. 엘리가 레드 팀에게 가장 위협적인 적수라는 사실 정도는 아마 팀원들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나보다. 그나마 다행이군. "그럼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을 설명 해드리도록 하죠." "뭔데?" "바로 유아 선배와 세린이 너무 싸운다는 점입니다." "......" 부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마 자기 자신들 역시도 얼핏 알고 있었나 보다. 이건 굳이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같은 팀이면서도 제 3자인 노아 선생님과 누나도 충분히 알고 있을 터.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누나. "남동생. 너무 당연한 말을 하면 이쪽에서도 오히려 할 말이 없어진다고."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싸우는 게 두 사람이잖아. 그렇죠?" "......" 순식간에 침묵 모드로 들어간 견원지간.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에게 '허세 감독'이니 뭐니 하며 온갖 비난을 하던 세린도 차마 방금 내가 한 말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못한다. 아마 본인들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겠지. "엘리를 막기 위해서는 유아 선배와 세린. 이 두 사람이 서로 협력을 해야 막을 수 있어요. 그래야 거의 엘리와 동급으로 싸울 수 있을텐데, 협력하기는 커녕 오히려 싸우고만 있으니까. 문제죠." "유에의 말이 맞는 거 같아." 노아 교수님도 이 순간 만큼은 동의를 표시한다. "너무 싸우는 것도 좋지 않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협력을 강력하게 요하는 구기 종목에서 팀원들끼리 싸우는 모습은 팀의 분열을 초래하고, 패배를 야기하는 안 좋은 요인이기도 하니까." 아무리 축구 경기에 대해서 전무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팀플레이에 대한 중요성은 노아 교수님도 충분히 알고 계신 모양이다. 굳이 구기 종목 팀플레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유아 선배와 세린의 사이가 지나칠 정도로 안 좋다는 사실 정도는 이제 국제 상식이기도 하니까. 사실 레드 팀에게는 작전을 따지기 이전에 가장 중요한 팀플레이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래야 작전을 짜든 뭘 하든 할테니까. "세린과 유아 선배가 서로 싸우지 않겠다고 맹새한다면, 이 경기는 훨씬 더 유리하게 될 걸요." "......" "그러니까 둘이서 임시 동맹을 맺든 뭘 하든 하시죠." 서로를 마주보는 유아 선배와 세린. 그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손을 마주잡기 시작한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동맹을 하는 게 좋겠어." "별일로 의견이 맞는군요. 유아 선배." "너야말로." 둘이서 서로 자존심 싸움을 하는 것보다, 경기에서 패배하는 것이 더 싫은 모양이다. 어떤 의미로 정말 대단한 페어다. 그리고 평생 있을지도 모를만한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했다는 그런 느낌일까. 일생에 한번 볼까 말까 한 세린과 유아 선배의 동맹. 일명 '유세'동맹이라고 해야 할까. 왠지 선거권에 대한 용어 중 '유세'라는 단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그건 기분 탓일 것이다. 새롭게 태어난 유세 동맹. 레드 팀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는지 리아가 본능적으로 팀원들에게 말한다. "유아 선배하고 세린 선배를 조심해. 다들." "으, 응." 체리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세리아는 말을 못하고... 가 아니라 어느정도 할 줄은 안다. 하지만 아직까지 말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단계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쉽사리 대답하지는 못한다. 엘리는 뭐... 무엇을 하든지간에 예외 사항이니까 논외로 치고. 이제와서 눈치챈 것도 웃기지만, 생각해보니까 블루 팀과 레드 팀의 연령대가... 심하게 차이가 난다. 올드 걸 VS 영 걸이라는 구도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말이다. 레드 팀에는 제일 나이가 어린 사람이 나와 같은 동갑이기도 한 세린이고, 블루 팀은 가장 나이가 많은 연장자 플레이어가 아리아와 세리아, 그리고 체리다. 참고로 가장 어린 선수는 엘리. 그런데 가장 플레이가 뛰어난 선수도 엘리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역시나 유감없이 발휘되는 저 천재성 플레이. 정말 대단하다. 레드 팀의 골킥부터 시작하게 된 경기. 레드 팀의 골키퍼인 누나가 공을 들고서 나에게 묻는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데?" "하프라인 쪽으로 공을 멀리 차면 되는거야." "그냥 멀리 차면 돼?" "같은 팀 소속 선수에게 패스하는 거지." "멀리 차는데 어떻게 패스를 한다는 거야?" "나중에 숙달되면 다 그렇게 할 수 있어." "놀랍네. 축구의 세계란 것은." "괜히 월드컵 국가대표를 뽑는 것은 아니니까." "일단 해볼게." 라고 말하면서 잡고 있던 공을 살짝 떨군다. 그와 동시에 있는 힘껏 발로 차, 싸커! 기술을 시전. 사실 여성의 근력이라 그런지 공이 멀리 나가진 못했지만, 축구 경기장 자체가 그리 넓은 편이 아니라서 금방 하프라인 까지는 닿았다. 누나의 말로는 나름 발야구 계에서는 이름 좀 날렸다고 자만하는데, 과연 그게 정말인지. 아니면 허세인지 확인은 못하겠다. 일단 오랫동안 유린이라는 여자의 남동생으로 지내온 내 추측에 의하자면 허세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보여지지만. 어쨌든 공이 하프라인 부근까지 가자, 가장 달리기가 빠른 엘리가 먼저 공을 캐치했다. 볼 다루는 기술도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원래부터 달리기 실력도 매우 뛰어난 저 천재를 상대로 과연 유세 동맹이 어떠한 반격기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인지. 그 향방이 궁금하다. "이세린!" "알고 있다구요!" 유아 선배와 사전에 사인을 주고 받은 것이 있었는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세린. 볼 다루는 기술은 좋지만, 아직까지 패스를 해야 한다는 개념이 제대로 서질 않은 엘리는 무작정 다시 공을 잡고 돌진하기 시작한다. 이번에야말로 분명 골대 앞에서 슛을 쏠 기세. 아까 내가 제대로 교육을 시켰으니까 이번에는 예외 없이 엘리의 단독 돌파에 이은 슈팅이 나올 것이다. 레드 팀 역시도 이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엘리가 공을 잡자마자 유세 동맹 2인방이 엘리에게 달려들기 시작한다. 평상시에는 엘리의 움직임이 매우 빠르긴 하지만, 역시나 공을 몰고가야 한다는 드리블의 압박이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는 약간 느린 움직임을 선보인다. "잡았다!" 먼저 태클을 시도하는 유아 선배. 그러나 아까의 장면을 다시 비디오로 되감기 해서 영상을 재생시켜도 될 만큼 똑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공과 함께 살짝 공중으로 점프하는 엘리. 유아 선배의 태클이 너무 대놓고 들어갔다는 탓도 있지만, 엘리의 반사신경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2번이나 유아 선배의 태클이 실패했다고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아 선배의 표정이 남다르다. "그건 훼이크라고!" 유아 선배의 말에 곧바로 세린이 공중에 있는 공을 그대로 발로 차서 낚아챈다. 제아무리 엘리라 해도 공중에 부양되어 있는 상태에서 상대방의 공 뺏기를 방어할 수는 없었을 터. 그 순간을 노린 것이다. 공을 발로 차서 다른 방향으로 날리는 세린. 에상 진로에 미리 있던 노아 선생님이 공을 잡게 되었다. "나이스! 세린! 유아!" 누나가 뒤에서 크게 응원의 메세지를 보낸다. 확실히 방금의 팀플레이는 완벽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프로 경기에서도 좀처럼 나오기 힘든 만화같은 장면이기도 하지만, 이번의 성과를 거둔 공로는 역시나 유아 선배와 세린의 동맹의 힘이 컸다고 보여진다. 나와 지아 선생님이 생각했던 그대로 유아 선배와 세린이 엘리 한명을 상대로 1인분 역할을 할 것이라는 분석이 정확하게 적중한 모양이다. 공을 빼앗기자 엘리의 표정이 살짝 변한다. 아무래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공을 빼앗기니까 약간 심기가 불편해진 것일까. 하지만 그건 둘째치고. 문제는 유아 선배와 세린의 공격을 막아야 한다는 임무가 아직 블루 팀에게는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체리. 공에서 눈을 떼지 마." "아, 알았어...!" 설마 엘리가 공을 빼앗길 것이라는 사실은 아리아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다급하게 진영을 갖추라고 다른 팀원들에게 말한다. 빠른 대응은 좋지만, 엘리 없이 과연 다른 사람들이 유아 선배와 세린을 막을 수 있을지. 그리고 이 실책이 첫 골과 이어질 수 있을지는 앞으로 두고봐야 할 일이다. ============================ 작품 후기 ============================ 점점 한창 놀러가고 싶어질만한 날씨가 되어가는 2013년 중순입니다. 이번 여름은 정말 날 잡아서 어디 한번 놀러가고 싶군요. 근심과 걱정을 털어버리고 말이죠. ㅜ_ㅜ 281화 당당하게 막아서는 것 까진 좋았으나, 과연 유아 선배와 세린이라는 강력한 투 톱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할지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는 나 조차도 명확한 해답을 내릴 수 없다. 선취골을 차지할 수 있을 정도로 절호의 찬스라고 보여지는 기회. 아까 엘리는 축구에 대한 룰을 잘 몰랐기 때문에 레드 팀이 맞이했던 위기는 어이없이 빗나가고 말았지만, 이번에 블루 팀이 맞이하게 된 위기는 차원이 다르다. 엘리는 축구라는 문화를 전혀 접해보지 않은 여자아이고, 유아 선배와 세린은 전문적이라고 까지는 말하지 못하더라도, 일반적인 상식 수준은 갖추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발로 공을 차서 골대 안으로 넣는다는 이런 기초적인 상식 말이다. "유아 선배!" 별일로 세린이 유아 선배에게 패스를 한다. 방금의 현상 역시도 절대로 있을 수 없는 현상 중 하나일 터. 오늘따라 기적의 현장을 많이 보는 느낌이 마구마구 든다. 공을 건네받은 유아 선배. 마치 슬램덩크에서 나오는 서태웅이 강백호에게 패스를 한 순간과 비슷한 장면이라고 보여진다. 물론 그 만화에서 나오는 둘의 실력은 수준급일 테지만, 유아 선배와 세린의 축구 실력은 초보 of the 초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들이 믿는 구석이라고는 오로지 운동신경과 순간적인 센스 뿐. 그리고 가장 큰 요소는 상대편도 축구를 무지하게 못한다는 점이다. 그나마 운동신경이 좋은 아리아가 유아 선배에게 달려든다. "세리아 언니! 세린 선배를 맡아줘!" "...!"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리아의 말을 충실히 이행하는 세리아. 과연 어떤 수비 방식을 보여줄지. 나름 기대가 된다. "흥. 감히 날 막으려고?" "승부는 끝까지 두고봐야 아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유아 선배 VS 아리아. 기세 싸움으로는 분명 유아 선배가 유리하다. 그리고 운동신경이라든지 여러가지 순간적인 판단능력, 그리고 기타 등등 몸을 쓰는 일은 유아 선배가 아리아보다 조금, 아니 월등히 유리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유아 선배에게로 바짝 붙는 아리아. 공을 다루는 게 영 익숙하지 않는 유아 선배의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노렸다고 보여진다. 순간적으로 살짝 움칫하는 유아 선배였지만, 바로 공을 뒤로 살짝 빼면서 빼앗기지 않으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익숙한 몸놀림은 아니었지만, 순간적인 반응은 매우 좋았다고 보여진다. 아리아가 바짝 붙어 있는 것 만으로도 쉽사리 몸을 움직일 수 없어하는 유아 선배. 본래 이것이 바로 초보의 능력이다. 개인 기량이 출중한 선수라면 수비수 한 두명 쯤은 곧바로 재치고 들어가서 직접 슈팅까지 연결할 수 있는 장면을 연출할 것이지만, 여기에서 뛰는 모두가 축구에 대해 전혀 익숙하지 않은 초보들로 이뤄진 경기다. 물론 극히 예외도 있다. 바로 엘리. 누차 강조하지만, 엘리 역시도 초보다. 오늘 축구를 처음 해보는 완전 초보. 초보 중에서도 초보. 하지만 엘리의 실력은 나날이 상승중. 아니, 나날이 라는 단계를 사용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 분 단위 사이로 성장해가는 엘리였기 때문에 아마도 경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엘리의 실력은 몰라볼 정도로 상승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아가 택한 작전이 바로 저것이다. "엘리!" "... o.k." 하프라인 근처에서 순식간에 뛰어오는 엘리. 어린 엘리가 가진 특유의 기동성을 살린 작전이다. 엘리가 수비 진영으로 합류하기 전까지 시간을 버는 작전. 그것이 바로 아리아가 택한 작전이었던 것이다. 역시나 아리아라고 해야 할까. 보통은 수비수와 골키퍼 만으로 해결을 해야 한다는 다급한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공격을 나갔던 선수가 다시 수비 진영에 합류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용도로 수비 진영을 사용할 줄은 사실 나도 잘 몰랐다. 시야가 얼마나 넓길래 순식간에 저런 작전을 생각했던 것일까. 아리아도 제법인걸. "흥! 그런 얄팍한 수에 당할 우리가 아니지!" 라고 말하는 유아 선배. 모처럼 유아 선배와 세린이라는 두 사람이 동맹을 맺고 사상 처음으로 '협력'이라는 작전을 펼치고 있는 첫 공격인데,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기에는 뭔가 아쉬울 것이다. 그 순간. 세리아가 열심히 세린을 따라가지만, 역시나 유아 선배와 더불어서 여성진 운동신경 톱(Top)을 달리는 세린이 가볍게 세리아를 따돌린다. 그렇다. 아리아가 한 가지 간과했던 것. 그것이 바로 세리아와 세린의 기량 차이였던 것이다. "너, 반드시 넣어야 돼!" "감히 제 능력을 의심하는 건가요!?" 아리아가 '앗차!'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이미 공은 유아 선배의 품을 떠나서 세린에게로 향한 지 오래다. 세리아가 그렇게까지 신체능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노아 교수님과 더불어 허약 체질에 속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쉽사리 세린을 방어하지 못한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엘리가 오기도 전에 시간을 끌지 못할 게 뻔하다. 하지만 아리아가 뒤늦게 세린에게 붙는다 해도, 아리아 혼자서 유아 선배와 세린 두 사람을 막기에는 역부족일게 뻔하다. 그렇다면 결국 남은 수단은 단 한가지. "체리! 너한테 맡길게!" "나, 나한테?!" 아리아의 목소리에 놀란 토끼눈을 하는 체리. 당황한 표정으로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하며 허둥댄다. 어차피 수비는 세린을 따라갈 수 없는 상황. 그렇다면 결국 골키퍼와 1대 1 정면 승부밖에 남지 않는다. 무서운 기세로 공을 몰고 가는 세린이 쭉 뻗은 날씬한 오른쪽 다리를 뒤로 뺀 뒤에 외친다. "받아랏. 독수리... 슛!!!!!!!!" "독수리라고?!" 저 녀석. 설마 축구왕 슛돌이라도 봤던 경력이 있는 것일까. 위대하디 위대한 슛의 명칭을 입에 올리다니. 오오. 간만에 들어본다. 골대 앞에서 차면 하늘 위로 높이 솓구쳤다가 마치 독수리가 사냥감을 사냥하기 위해서 급 하강하는 궤도로 슛이 쏘아지는 모습을 따서 명칭을 '독수리 슛'이라고 붙였다는 전설의 슛동작. 물론 실제로 독수리 슛을 쏘면 하늘 위로 올라가는 것 까지는 똑같을 지 모르지만, 내려오진 않는다. 한 마디로 현실에서 절대로 따라해서는 안될 슛 넘버 1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세린이 바보가 아닌 이상, 골대 위로 슛을 날리는 멍청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말만 독수리 슛이라고 외쳤을 뿐. 그리고 내 예상 그대로 세린이 때린 슈팅은 골대의 좌측 상단을 파고 들며 날카로운 기세로 날아가기 시작한다. "꺄악ㅡ!" 비명을 지르면서 소심하게 팔만 살짝 뻗는 체리. 공에 맞을까봐 차마 몸을 날리거나 하진 못한다. 뭐, 여자애들이 축구하는 모습을 보면 실제로 축구 국가대표 골기퍼들이 하는 마냥 몸을 날리면서 적극적으로 막는 모습까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왜냐하고 물으신다면 대답해드리는 게 인지상정. 다칠까봐. 정말 간단한 이유 아닌가. 골대를 가르며 들어가는 슛! 그리고... "골인!" "아싸!!" 골인으로 인정하는 내 말에 세린과 유아 선배가 환호를 지른다. 일단 체리가 손을 뻗긴 했지만, 골대가 아무리 일반적인 골대보다 작다 해도 그런 정도로 쉽게 막힐 슛은 아니었다. 그래도 체리가 어느 방향으로 공이 날아오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캐치를 했었는지 정확하게 좌측 상단으로 손을 뻗은 것은 장한 일이다. 역시나 양궁을 했던 여자아이 다운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그 순간에 궤도를 눈으로 파악하는 세심한 능력은 뛰어나다고 본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본인이 자신에게 날아오는 무시무시한 기세의 공을 직접 막을만한 담력이 없다는 점일까. 그 점만 보완한다면 체리도 꽤나 훌륭한 골키퍼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레드 팀 1점. 블루 팀 0점." 지아 선생님이 확인사살을 하듯 스코어를 선언해준다. 침울해하는 블루 팀과는 달리, 레드 팀은 어느새 축제 분위기로 바귀고 있는 중이다. 고작 1점이라고 해도, 선취골이라는 것은 양 팀의 기세 싸움에 있어서 엄청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제법인데? 오늘은 너 답지 않게 잘했어." "칭찬으로 받아주도록 하죠." 말은 그렇게 해도, 서로 손바닥을 마주치는 유아 선배와 세린. 평소에는 매번 마주치기만 하더라도 말싸움이 전개되는 둘의 사이지만, 방금의 순간 만큼은 정말 잘 했다고 칭찬하고 싶다. 이제서야 팀플레이라는 협력 수단에 눈을 떴다고 표현해야 할까. 평소에도 저렇게 서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정말 좋을텐데. 이번 축구 경기로 인해서 둘이 조금이라도 친해졌으면 좋겠다. "......" 반면 블루 팀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엘리라는 강력한 에이스 카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취점을 빼앗긴 상황. 어떻게 상황을 극복할지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아리아의 눈빛이 살짝 변하기 시작한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ㅡ_ㅡ; 282화 뭔가 작전을 전달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팀 일동. 현재의 전력으로 보아서는 체리가 유아 선배와 세린의 슛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률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다고 보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한번 공에 대한 무서움을 가지게 된다면, 웬만한 강인한 정신력으론 그 공포심을 극복하기에는 너무나도 커다란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축구경기가 펼쳐지는 시간 내에서, 단시간 안으로 공에 대한 공포심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어지간한 마인드 컨트롤이 없다면, 불가능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두 가지. 우선 첫번째로 아리아와 세리아가 방어진으로 사전에 레드 팀의 투 톱 공격을 차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방금의 경우를 보았듯이,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상당히 희박헤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남은 방법은 단 한 가지. 바로 레드 팀이 블루 팀의 골대 근처에 가지도 못하게 오로지 '공격'만을 퍼붓는 것이다. "엘리! 작전 그대로!" "... all right."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듯이 대답을 하는 엘리. 하프라인에서 아리아에게 패스를 받은 엘리가 공을 몰고 간다. 하지만 아까와는 상황이 다른 것이, 엘리 뿐만 아니라 아리아도 공격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내가 예상했던 2번째 방법이 아리아가 내세운 비장의 작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아리아도 공격? 조금 의외인데." 옆에서 스코어를 채점하고 있는 지아 선생님이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말한다. 어차피 축구 경기장 내부 자체가 그리 큰 것도 아니기 때문에 굳이 실제 축구 경기처럼 심판이 되어서 이리저리 뛰어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지아 선생님 옆에서 서 있는 채 경기만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고 하니까요." "그 말은, 곧 수비를 포기했다고 받아들이는 편이 좋겠지?" "뭐, 거의 그런 뜻이지만요." "상당히 위험한 작전일텐데." 일반인인 지아 선생님의 생각 그대로 위험도가 매우 높은 작전이다. 실제 축구 경기에서도 1골 차이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경기가 거의 끝나가기 직전에 승부수를 띄우는 방법으로 공격수의 수를 왕창 늘리는 전법을 종종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그거야 경기가 끝나기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치루는 최후의 한 수일 뿐이고, 지금 이 경기는 시작한 지 이제 막 10분이 지나가고 있는 셈이다. 전반전과 후반전을 통틀어서 이제 겨우 4분의 1이 지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떻게 본다면 꽤나 이른 시간에 블루 팀의 핵심이라 부를 수 있는 엘리와 아리아를 둘 다 공격수로 투입하는 것은 모 아니면 도일 것이다. 흥하거나, 망하거나. "전문가의 소견으로 보면 어떻게 생각하지?" "그렇게까지 전문가는 아니에요." 지아 선생님이 상당히 낯뜨거운 말을 해주신 탓에 나도 모르게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인다. 축구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실제로 축구 선수를 꿈꾸고 있는 미래의 유소년 축구단원도 아니고. 단순히 애들끼리 취미삼아 축구를 할 뿐이다. 고작 그런 일이 전부인데, 지아 선생님에게 이렇게 극찬을 받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어색한 미소로 화답한 것이다. 그래도 나름의 소견을 말해주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나는 일단 내가 생각한 것을 말하기 시작한다. "운이 좋으면 성공하겠죠." "무지하게 애매모호한 대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어요. 뭐... 결과적으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딱 잘라 말해서 이거에요. 블루 팀의 갑작스러운 마구잡이 공격에 레드 팀이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책을 마련하고 그에 맞는 반응을 보인다면 레드 팀이 승리, 그리고 전자와는 다르게 당황해하며 허둥지둥 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 상태로 블루 팀의 승리겠죠." "한마디로 레드 팀의 행동 패턴에 의해 승부가 갈리겠다는 소리구나?" "네." 블루 팀의 사령탑은 아리아다. 엘리나 세리아, 그리고 체리라는 인물을 보아서는 그다지 리더십이 있는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르게 말하자면 블루 팀은 단합이 잘 된다고 볼 수 있다. 아리아가 작전을 짜고, 그 작전을 그대로 이견없이 이행하기만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레드 팀은 블루 팀과는 팀의 성격이 명확하게 다르다. 레드 팀에는 우선 유아 선배와 세린이 있다. 유아 선배는 실제로 검도부 부장까지 맡은 경력이 있기 때문에 리더십에 대한 자질은 논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세린 역시도 부활동의 부장이라는 지위를 맡은 적은 없지만, 펜싱부의 에이스 역할을 맡아왔다. 자신에게 부여되는 책임감이라든지 무게감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 반응을 해야 좋을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노아 교수님과 누나도 있다. 노아 교수님의 경우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교수님이라는 지위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꽤나 권위주의적인 지위라고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니까. 게다가 연장자라는 점이 노아 교수님이라는 인물에게도 어느정도 무게감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내 친누나.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그다지 스펙이 높은 경력은 없지만, 누나 이상으로 작전을 짜는 데에 그 이상의 센스를 발휘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간혹 누나의 반짝 아이디어 덕분에 실제 무인도에서도 많은 이득을 보고 있으니까 말이다. 한마디로 레드 팀은 너무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점이 부작용으로 작용할 수 있다. 개개인의 성량은 매우 뛰어나다고 볼 수 있겠지만, 너무 뛰어나면 오히려 단합이 안된다는 단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해야 한다. 그 증거로 유아 선배와 세린의 충돌을 들 수 있다. 그나마 지금이야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어서 아직까지는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지만, 언제 또 삐딱하게 토라져서 싸울지 모른다. 축구라는 것은 단합을 요하는 팀플레이 스포츠다. 개개인의 능력이 조금은 부족하더라 하더라도, 단합이 잘 된다면 충분히 그 부족한 능력을 커버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위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나는 블루 팀의 우세를 점치고 싶다. "너는 어느 쪽이 이길거 같니?" 지아 선생님이 나에게 한번 떠보기 형식으로 묻는다. 음. 굳이 숨길 필요도 없기 때문에 솔직하게 답변을 주도록 하자. "블루 팀이요." "그래? 나는 레드 팀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째서요?" 지아 선생님의 연륜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일단 질문을 던져보도록 하자. 잠시의 고민도 없이 레드 팀이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면 분명 무슨 근거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물어보는 나. 그러자 지아 선생님이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말한다. "여자의 감이야." 유아 선배의 성대모사를 하면서 말투를 흉내내보는 지아 선생님. 사실 그다지 똑같다고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은근히 귀여우시니 봐주도록 하자. 하지만 귀여운 것과 승부의 결과는 별개다. 나름 블루 팀이 이길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기 때문에 지아 선생님에게 살짝 제안을 해본다. "내기 하실래요?" "오호라. 너도 이제 나한테 적응했나 보구나?" "승부에서 내기가 있는 편은 좋은 법이잖아요. 블루 팀과 레드 팀도 서로 내기를 걸었던데. 우리들도 뭔가 걸어야죠." "그렇네. 음..." 고민하기 시작하는 지아 선생님. 선생님도 은근히 내기를 많이 밝히는 편이기 때문에 활짝 미소를 지으면서 오히려 내 제안을 반기는 듯한 반응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럼 레드 팀과 블루 팀의 내기에 같이 참여하는 걸로 하자." "요리 당번 일주일이요?" "그래. 너도 이번에 걸리면 같이 요리좀 배워두고. 가정적인 남자는 여자에게 사랑 받는다고." "노력해볼게요." 이 기회를 틈타서 나도 어느정도 요리를 배워두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뭐든지 한가지 씩 배워두면 적어도 나에게 손해는 발생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우리들이 서로 내기를 하는 사이에, 아리아에게서 공을 건네받은 엘리가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기 시작한다. 언제 봐도 정말 누가 초보라고 생각하겠는가 라는 질문이 절로 나올 정도의 드리블. 이제는 초보라고 표현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익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엘리의 학습능력은 축구에서도 그 위엄을 과시하고 있던 것이다.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진심으로. "지나가게 할 순 없지!" 유아 선배가 엘리를 가로 막는다. 노아 교수님은 아리아에게. 그리고 세린은 유아 선배가 엘리에게 뚫렸을 때의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해서 약간 후방에 위치한다. 이제는 말 안해도 서로 척척 들어맞는 호흡을 보여주는 두 사람이였다. ============================ 작품 후기 ============================ 날씨가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덥습니다... 283화 공을 건네받은 엘리. 유아 선배가 먼저 막아서지만, 역부족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유아 선배의 뒤에는 세린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별다른 부담 없이 엘리를 막아서는 유아 선배의 표정에는 한결 여유로운 미소가 보인다. "이번에는 쉽게 뚫릴 수 없지! 와라! 엘리!" "......" 무표정한 얼굴로 드리블을 해오는 엘리. 아까 아리아가 유아 선배를 마크했던 것과 동일하게 우선 엘리에게 달라붙은 유아 선배가 적극적으로 엘리를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어차피 순수 실력으로는 엘리에게서 공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저런 식으로 몸싸움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엘리가 아무리 운동신경이 좋다 해도,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요소가 한가지 존재한다. 바로 키 차이. 신장의 우위를 이용해서 엘리를 압박하는 유아 선배. 개인적으로 봤을땐 유아 선배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호수비라고 보여진다. 아리아의 빠른 돌파를 믿고 있었던 아리아가 살짝 당황한 눈빛을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지체했다간, 오히려 시간만 끌리는 꼴이 되고 공격 성공 여부에 대한 것은 불투명해진다. 그러나 엘리가 누구인가. 지난 3년동안 무인도에서 나름 야생의 감을 단련시켜 온 천재 소녀 아닌가. 오른쪽으로 돌파하려고 했던 엘리가 순간적으로 공을 뒤로 살짝 빼면서 눈속임을 건다. 그대로 엘리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간 유아 선배가 오른쪽으로 뻗어있는 발에 무게중심을 두려던 순간에 왼쪽으로 공을 빼돌리고 그대로 유아 선배의 품 안에서 빠져나가는 센스를 보여준다. "앗!" "......" 신장의 우위를 점하고 있던 유아 선배의 강점이 역으로 단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작은 체구의 엘리가 보기좋게 유아 선배의 틈 사이로 빠져나가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역시나 엘리라고 해야 할까. 뚱한 표정만 하고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두뇌회전이 상당히 빠르다. 보통은 저런 센스있는 플레이를 하기란 여간 쉬운게 아닐텐데. 지금 엘리의 실력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내가 친구들과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점심시간에 짬을 내고 축구 경기를 하는 데 그렇게까지 잘하는 친구는 아니고 그냥 단순히 적당한 수비와 공격을 번갈아 가면서 마치 박지성의 넘치는 산소 탱크와 차두리의 폭발적인 돌진력, 이영표의 넓은 시야와 퍼거슨의 용병술 기타 등등을 아주 조금만 갖춘 그런 친구와 같은 모습이라고 표현하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음. 문제가 있다면 그런 친구와 같이 축구를 해본 역사가 없다는 점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유아 선배가 돌파당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세린이 곧바로 치고 나오기 시작한다. "난 유아 선배와는 다르지롱~!" 상당히 애교있는 말을 내뱉으며 그대로 엘리에게 기세좋게 돌진! ... 하지만. "... pass." "어, 어?!" 놀란 세린이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왜냐하면, 돌파할 생각도 없었는지 곧바로 아리아에게 패스를 해버린 엘리의 행동 때문이었다. 마침 노아 교수님도 제대로 아리아를 마크하고 있지 않은 탓에 수월하게 공을 건네받은 아리아. 노아 교수님과 같은 축구를 처음하는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실수 중 하나다. 자신이 마크해야 할 상대방을 쫓아야 하는데, 어느 순간 자신의 역할을 깜빡하는 행동 말이다. 나도 처음에는 축구할때 저런 일을 많이 저질렀었는데. 욕도 많이 먹었지. 그래서 나는 오로지 공격수밖에 하지 않는다. 훗. "나이스 패스였어, 엘리!" "... thank you." 무표정으로 대답하는 엘리. 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엘리의 속도는 여성진들 중에서도 가장 빠르기로 소문난 누나 조차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감을 발휘한다. "이런...!" 앗차 하고 탄성을 내뱉는 세린이었지만, 이미 상황은 늦었다. 세린을 가볍게 따돌리고 순식간에 상대편 골대 앞쪽까지 치고 나간 엘리.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기 때문에 축구 초보인 아리아가 다시금 건네주는 공은 엘리 근처에 떨어졌다. "가만히 놔둘 수는 없지!" 역시나 누나라고 해야 할까. 공이 바로 엘리와 자신의 사이에 떨어지는 것을 보자마자 바로 앞으로 치고 나온다. 최대한 슈팅을 할 수 있는 각도를 줄이겠다는 심산. 누나가 축구 경기를 자주 본 편도 아닐텐데 저런 반응을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순간적으로 계산한 자신의 행동 패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엘리의 행동능력은 누나의 계산 능력 이상이었다. "......" 공을 그대로 살짝 자신의 머리 위로 띄운 엘리가 그대로... "오버 헤드킥(overhead kick)이라고?!" 진짜 축구 처음하는 녀석 맞는건지 모르겠다. 심판을 보고 있는 내 입장을 잊어버리고 소리칠 만큼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는 엘리. 그것도 정확하게 발에 맞은 공이 그대로 골대 안으로 들어가고 만다. ...... 진짜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설마. 아니, 예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는 표현은 딱 이 순간에 써도 좋을 만큼 적합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경기는 1대 1. 그리고 전반전이 끝나게 되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곧바로 시작된 후반전. 경기 스코어를 체크하고 있던 지아 선생님이 혀를 차면서 말하는 소리가 옆에서 들려온다. "엘리가 저렇게까지 뛰어난 아이인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건 저도 공감하지만요." 아직까지 경기가 끝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뭐라고 해야 할까. 엘리의 재발견이라고 할까. 사실 엘리의 천재성은 나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축구에서도 그 천재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중에 무인도를 나가고 난 이후에, 진심으로 엘리의 장래성에 대해 기대감을 가지게 될 만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천재는 정말 보기 드물텐데. 아무튼 계속해서 이어지는 경기는 팽팽한 기세 싸움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주 싸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유아 선배와 세린의 연합 VS 엘리의 개인 플레이와 아리아의 지략이라는 것이 핵심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아리아의 책략 덕분에 공세는 미세하게 블루가 앞서가는 분위기. 만약에 전반전 시간이 실제 축구 경기처럼 40분이었다면, 20분 째에 들어간 만회골의 기세를 그대로 타고 블루 팀이 압도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무인도에서 펼쳐지는 경기는 20분. 레드 팀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경기 시간이 20분이라는 것에 위안을 취해야 할 정도로 레드 팀의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블루 팀의 공격력은 막강하다. 사실 유아 선배와 세린이라는 투 톱도 꽤나 쓸만한 공격 카드임은 확실하지만, 지금처럼 블루 팀의 기세가 강할때는 아무리 유아 선배와 세린이라고 해도 블루 팀의 공격을 정면으로 막아설 수 없을 것이다. 레드 팀도 난항이겠구만. 아무튼 레드 팀의 공격으로 시작된 후반전. "레드 팀이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벌써부터 보이기 시작하는데요." 그리고 여지없이 아리아의 조롱이 이어진다. 공을 잡고 있는 유아 선배가 살짝 일그러진 얼굴로 아리아의 도발에 응수하기 시작한다. "허세떠는 것도 거기까지일걸." "과연 그럴까요? 저희 쪽에는 엘리가 있다구요. 선배. 필승 카드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죠." "으으..." 도발에 응수했지만, 본전도 못 찾았다. 아리아의 말에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유아 선배가 차마 뭐라고 반론을 펼쳐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먼저 도발을 걸긴 했지만, 현실을 직시해보면 일단 기세가 눌리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다른 팀에도 좋은 선수들이 많이 있긴 하지만, 그만큼 스타 플레이어가 있다는 사실은 상대하는 맞은 편에 있어서는 꽤나 까다로운 점이 없지않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엘리라는 존재가 레드 팀에게는 꽤나 위협적인 존재가 될 터이다. 스타 플레이어의 봉쇄. 그 것이 레드 팀의 커다란 숙제일지도. 어찌되었든 유아 선배가 세린에게 공을 건네주면서 경기가 시작된다. "이번에 반드시 넣어! 알았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다구요." 벌써부터 레드 팀의 균열이 생기는 것인가. 어쩐지 오래 간다 했다. 유세 동맹. 하지만 오고가는 독설 속에 싹트는 우정이라는 속담이 있기 때문에 어찌보면 저 말이 두 여자들의 애정표현일지도 모른다. 남자들도 서로 욕설을 하면서 우정을 키워가질 않는가. 나 역시도 마찬가지고. 뭐... 하지만 그렇다고 꼭 저 두 사람에게도 그런 말이 해당되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 작품 후기 ============================ 덥다고 차가운 물을 연거푸 마셨더니, 몇일동안 설사와 친밀도를 급속도로 쌓아가고 있습니다. 차가운 거 너무 많이 먹지 마세요. 여러분 ㅜ_ㅜ 284화 레드 팀과 블루 팀의 공격은 서로 각축을 벌이면서 경기는 서서히 후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블루 팀이 창이라면, 레드 팀은 방패에 비유할 수 있는 이 상황.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창과 방패의 싸움이 계속되는 와중에, 어느 팀이 먼저 집중력을 흐리는지에 승부가 달렸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엘리의 무시무시한 돌파력. 그에 대응하기 위해서 레드 팀이 생각한 것은 바로 유아 선배와 세린이 동시에 엘리를 마크한다는 전법이었다. 어차피 공격수라고는 엘리 혼자뿐. 아리아는 오로지 서포트 역할만 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아리아 본인이 유효 슈팅을 날린다든지 하는 그런 무리수는 감행하지 않는다. 너무 이것저것 생각이 많으면 괜히 '설마'하는 생각 때문에 만약이라는 상황을 생각하게 된다. 어찌보면 여러 방면으로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단순하게 생각을 해보자면 눈 딱 감고 저지를 수 있는 비장의 한 수가 없다는 말과도 같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축구와 같이 구기 종목의 스포츠의 경우에는 치밀한 계산보다는 오히려 동물적인 감각이 승패를 좌우하는 경우가 다반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리아 본인은 절대로 슛을 쏠 수 없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레드 팀의 투 톱을 엘리 전담으로 돌린 것이다. 하지만 방금의 단점은 레드 팀에게도 속한다. 투 톱이라고는 하나, 레드 팀의 경우에는 중앙의 미드필드 진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아 교수님이 공격과 수비를 전담해줄 수 있는 체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수비만을 보고 있기 때문에 레드 팀의 공격 역시도 유아 선배와 세린이라는 두 명의 카드에만 의존한 채 싸워야 한다. 물론 이 두 사람의 공격이 강력하긴 하지만, 역시나 수비로 돌아서는 엘리, 그리고 미드필드 진에서 활약하는 아리아와 세리아 이 3명의 수비진을 뚫기에는 역부족이다. 엘리가 체력이 떨어지기만을 간절히 소망해보는 레드 팀이었지만, 내가 봤을때는 그런 확률은 거의 없을 것 같고. 엘리는 아마 실제 축구 경기인 전반전과 후반전 각각 45분을 설정하고 놓아도 체력적으로는 전혀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풀(Full)로 뛰어도 상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창을 공격과 수비로 여러번 주고받는 경기를 관람하던 지아 선생님이 나에게 시계를 보여달라고 하며 말한다. "얼마 안 남았네?" "대략... 3분 정도 남았다고 해야 할까요." 아직까지 스코어는 1대 1. 동점이다. 그 동안 점수가 나지 않았고. 시합이 후반으로 치닫고 있을수록 지치기는 커녕, 오히려 양쪽 정신력이 살아나는 느낌이 들어서 쉽사리 서로 점수를 내줄 것 같지 않다. 그러던 와중에. "... 앗...!" 세린의 실수가 벌어지고 말았다. 유아 선배에게 패스를 하려고 했던 것이 도중에 엘리에게 가로막힌 것이다. 역시나 축구에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까 이런 범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 바보!" "어, 어쩔 수 없었다구요..." 유아 선배가 질책하듯 외치가, 세린이 움찔하며 작게 항의해본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닌 상황. "유아! 세린! 우선 수비로 돌아와!" "아, 알았어." 골키퍼인 누나가 둘 사이의 말싸움을 사전에 차단하면서 크게 외친다. 덕분에 퍼뜩 정신을 차린 둘이 다시 수비진영을 향해 열심히 뛰어가기 시작한다. 반면, 블루 팀의 상황은 쾌조를 달리고 있었다. "잘했어, 엘리!" "... thank you." 특유의 무표정으로 짧은 영어 단어를 내뱉는 엘리. 이제는 거의 완벽한 볼 컨트롤을 보여주면서 급속도로 레드 팀의 골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진짜 여성팀 축구 감독이 이 모습을 봤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엘리를 데리고 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뛰어난 축구 실력을 보여주는 엘리의 모습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이번이 마지막 공격이야. 집중하고 천천히 가자." "... ok."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했는지 빠른 속공보다는 신중하고 날카로운 공격을 택한 아리아. 그녀다운 판단이다. 하지만 나 같으면 속공을 택했을텐데.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하냐고? 그거야... 축구인의 감이다.(유아 선배 성대모사)본래 달리기 실력이라면 엘리가 월등하게 빠르다. 하지만 공을 몰고 가야 하는 엘리 덕분에 움직임은 평소보다 조금 느린 상황. 덕분에 유아 선배와 세린이 엘리를 따라잡을 시간은 충분했다. "그대로 통과하게..." "... 놔둘 순 없지!" 유아 선배와 세린이 엘리의 좌, 우에서 동시에 압박을 시작해온다. 아무리 엘리라 해도 신장도 꽤나 차이가 나고, 게다가 한 사람도 아닌 두 사람의 마크를 따돌려야 한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엘리 본인도 그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꼈는지 무리하지 않고 공을 살짝 뒤로 빼서 다시 아리아에게 패스를 한다. 엘리의 패스를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공을 받는 아리아. 그러자 이번에는 노아 교수님이 아리아의 앞을 가로막는다. 공을 받은 아리아. 노아 교수님이 몸치라고 해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자체가 아리아에게는 엄청난 방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아리아 본인이 직접적으로 단독 돌파를 시전한 적은 한번도 없다. 심지어 여지껏 돌파를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줄만한 시도 조차도 해본 적이 없다. 상대방이 그 '노아 교수님'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아리아의 표정이 살짝 바뀌면서 노아 선생님에게 말한다. "교수님." "...?" "이번에도 제가 엘리에게 패스할거라 생각하시나요?" 나왔다. 아리아 특유의 심리전. 이건 마치 가위바위보를 하기 전에 상대방에게 '나는 주먹을 낼게.'라는 말을 쓸데없이 꺼내서 상대방에게 '주먹을 낸다고? 그럼 나는 보를 내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가, '아니야. 단순하게 생각하면 주먹을 낼 리가 없잖아. 이 녀석을 어떻게 신용해. 내가 보를 꺼낼 것을 미리 유도하고 있는 행동일수도 있어. 그러니까 나는 주먹을 내면 되는거야. 그리고 주먹을 내도 어차피 비기니까. 안전하겠지?'라고 생각은 했지만 사실 '아니야. 내가 오히려 주먹을 낼 것을 미리 예측할수도 있어. 그럼 보를 내면 되겠군.'이라고 막 보를 내려던 찰나의 순간 바로 직전에, '그런데 말 그대로 주먹을 내면 내가 지는 거잖아? 안돼. 안된다고! 그럼 나는 이 녀석의 말을 믿어야 해? 말아야 해? 아! 나보고 어찌하라고!!!!'라는 절규 어린 목소리로 외치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 비유가 굉장히 길었군. 알아서 자체 편집해주기 바란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모, 아니면 도라는 것이다. 동전의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 선택해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원리. 한마디로 확률은 반반이다. 그 반반의 확률 앞에서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여주는 노아 교수님. "그, 글쎄..."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노아 교수님이 담당하고 계시는 과목은 '형법'이다. 확률과 통계라는 숫자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어찌보면 당연지사. 문과는 수학에 약하다는 편견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스포츠의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바꿔 말한다면 기적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리고, 기적은 아니고 미라클이 벌어지고 있었다. "숨겨왔던 저의 비장의 무기를 보여주겠어요!" 라고 말하면서 노아 교수님의 왼쪽으로 살짝 공을 차는 아리아. 본인이 재치겠다는 뜻인줄 알았더니... ... 그 곳에 있던 인물은 다름이 아닌 세리아였다. "공격수가 3명이라고?!" 놀란 유아 선배와 세린이 동시에 외친다. 설마 수비를 보던 세리아가 공격 진영까지 올라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나보다. 음... 설마 아리아가 초강수를 띄울 줄이야. 이건 아리아 본인의 성향을 벗어나서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 평가하고 싶다. 그 정도로 이기고 싶다는 뜻일지도. "...!" 세리아가 있는 힘껏 엘리에게 패스를 한다. 세리아의 등장으로 인해 흔들린 레드 팀의 수비진영. 그대로 공을 받은 엘리가 골대로 돌진한다. 그리고 결과는... "... 식사 나왔습니다." 노골적으로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유아 선배가 탁! 하고 테이블에 음식들을 내려놓는다. 축구 시합이 끝나고 나서 맛보는 저녁식사란. 정말 좋은 것이다. "너무 불친절한 웨이트리스군요. 유아 선배." "시끄러워." 아리아가 마지막까지 유아 선배의 심경을 건드린다. 이것이 바로 승자의 여유, 그리고 패자의 굴욕이란 말인가. 역시나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다. 이겨서 다행이다. 정말로. ============================ 작품 후기 ============================ 축구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이 다음 에피소드가 뭔지 저도 아직 확인을 안해서 잘 모르지만, 여하튼 이제 거의 막바지에 온 것 같습니다. 대략 남아있는 분량을 보니까, 이제 거의 막바지에 오지 않았을까 예상을 해봅니다. 우선 남아있는 분량을 전부 올리고 나서 새로 쓴 완결 에피소드까지 올리는 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럼 마지막까지 재미있게 봐주세요! 285화 EP 27. 무인도에서 싸우는 이야기 오늘도 평화로운 무인도의 아침... ... 이라고 매일 이렇게 소개글을 올리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무인도의 일정이었지만, 그것도 요새 들어서는 조금 많이 바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조용하고 한적하던 무인도의 아침 환경을 가장 크게 바뀐 요소라고 한다면 바로 이 둘. "그러니까! 아침부터 찐감자는 별로라구요!" "그거야 네 생각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할걸?" "아니요. 분명 다른 분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예요. 유아 선배의 식성이 특이한 것이라구요." "이래서 부잣집 따님들은 곤란하다니까.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니까." "오히려 유아 선배가 더 모르는 편 아닌가요?" "뭐가 어째?!" ... 이제 굳이 입 밖으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뻔한 말싸움. 괜히 입 아프게 두번 말하지 않아도, 유아 선배와 세린이 싸우고 있는 모습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장면 되시겠다. 왈가불가 쫄래쫄래 말다툼을 지켜보는 것도 이제는 거의 습관이 되다시피 한 산장의 일상. 저번에 축구 시합을 통해서 레드 팀이 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침 식사는 유아 선배와 세린이 속한 레드 팀이 이렇게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어째서 레드 팀이 어제의 축구 시합에서 진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게끔 왜 하필이면 저 두 사람이 함께 요리를 하며 말다툼을 하는 장면을 봐야 하는지 정말 그것이 알고 싶다. 이럴줄 알았다면 유아 선배와 세린을 각각 다른 팀으로 분리시켜 놓을걸. 맹렬하게 후회된 적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괜히 레드 팀에게 내기를 걸었다가 졸지에 같이 벌칙에 당첨된 지아 선생님이 이번에도 중재를 나서가 되었다. "그만 싸우고 그릇이나 옮겨. 둘 다." "아얏!" 국자로 유아 선배와 세린의 이마를 가볍게 톡 치신 지아 선생님이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한다. "애들도 아니고. 너희 둘은 언제까지 그렇게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 거리고 싸울거니. 조금은 지성인답게 행동해줄 수 없겠어?" "......" 역시나 선생님은 선생님. 아직까지 선생님이라는 지위가 가지는 권위가 완벽하게 사라진 것은 아닌듯 하다. 물론, 굳이 선생님이라는 자리가 가지는 영향력으로 갑론을박을 논하기 전에, 지아 선생님의 나이를 고려한다면 선생님의 나이에 안 따르고 못 버틸 정도이니까 말이다. 30대의 위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아 선생님 앞에서 유독 30이라는 숫자를 강요하게 된다면, 유아 선배와 세린처럼 똑같이 국자로 이마를 맞을 수 있다는 부정적인 효과를 창출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침밥 먹기 참 힘드네요." 아리아가 살짝 토라진 표정으로 작게 말한다. 그녀의 말에 노아 교수님이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니. 평소에도 저러는 걸." "그런데 도대체 왜 유아 선배와 세린 선배는 저렇게 서로가 서로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일까요." "글쎄..." 노아 교수님은 모르는 눈치다. 체리 역시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자신도 저 두 사람이 사이가 좋지 않은 원인을 알지 못한다는 의사표시를 전달한다. 물론 세리아도 마찬가지. 엘리야 뭐... 아는게 이상하겠지. "유에 선배는요." "나?" "네. 여기서는 그래도 유아 선배와 가장 연관성이 많은 사람이잖아요." "그러고보니..." 내가 검도부 생활을 할 때 그 검도부의 부장이었던 유아 선배였으니까. 하지만 아리아가 간과한 점이 하나 있었다. "유아 선배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아 선배와 세린에 관한 사연에 대해서는 나도 몰라. 나야 뭐 검도부 활동만 주구장창 했을 뿐이고, 펜싱부에 관련된 이야기는 도통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아는 게 없는 남자군요. 유에 선배는." "너도 모르면서 괜히 내 탓만 하지 마시지." 순식간에 역적으로 돌아설 뻔 했던 아슬아슬한 상황을 모면하고 말았다. 절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침 식사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상황. 주방 한 쪽에서는 여전히 유아 선배와 세린이 말다툼을 하는 소리가 도마 위에서 칼질하는 소리보다도 더 자주 들려오고 있었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침식사를 겨우 끝낸 우리들. 나무 자르기 작업도 끝났고, 증축 작업도 시작된 상황에서 오늘도 힘차게 노동에 힘쓰고 있는 나는 이미 관례로 자리잡은 듯이 상의를 벗은 채 바지만을 입은 상태에서 열심히 못질과 밧줄로 나무들을 연결하는 고난이도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무인도의 날씨가 점점 무더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들이 노동에 임하면 임할수록 흘리는 땀방울의 횟수도 점점 늘어만 가고 있었다. 무인도도 점점 여름에 접어드는 것일까. 혹시 이 무인도가 있는 지역도 사계절이 존재하는 장소라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사계절이 존재하는 지역이라고 보는 것보다 오히려 열대 지방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이 무인도의 모습에 더 어울릴텐데 말이다. 통나무 집 지붕 위로 나무 기둥들을 올린 채 미리 잘라 온 비행기의 몸체 철판을 나무 기둥 사이에 끼워둔다. 단순하게 나무 기둥만 세워서 엮게 된다면, 틈 사이로 바람이라든지 빗방울이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철판을 칸막이처럼 사용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비행기 철판을 잘라내는 데 애를 좀 먹었다. "후우..." 숨을 깊게 내쉬는 나.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치며 뜨거운 햇살을 그대로 맞고 있는 상황에서 내 도우미 역할을 맡고 있는 체리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체리야. 혹시 감기라도 걸린거야?" "아, 아니에요오..." 허둥대며 답변을 피하는 체리. 딱 봐도 뭔가 평소와는 상태가 다르다는 점을 한 눈에 알 수 있는데. 감기는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감기에 걸린다면 여러모로 난감할텐데. 맞은 편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누나가 나에게 말한다. "남동생. 넌 진짜 눈치라고는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구나." "갑자기 무슨 쌩뚱맞게 남 탓이야." "남 탓이 아니라. 엄연히 너 때문이잖아." "나 때문이라고?" "그래. 너. 영어로는 you." 내가 체리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일까. 지금까지 나의 모든 행동을 되감기 버튼을 눌러서 확인해보지만, 체리에게 민폐를 끼친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렇다고 내기까지는 할 수 없고. "... 모르겠는데." "여자의 마음을 모르는 남자는 죄인이라고. 남동생." "빨간줄만 안 그어지면 되잖아." "연애라는 감정 위에 빨간줄이 그어질 수도 있어." "... 그건 좀 무서운데." 아직까지 제대로 된 연애 조차도 못해본 나로서는 살떨리는 말이기도 했다. 여자들에게 잔뜩 미움받는 남자는 되고 싶지 않다고. 그래도 역시나 하나밖에 없는 혈육을 걱정하는 누나의 마음이 통했는지, 누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체리는 너 때문에 두근두근 거려서 저런 반응을 보여주는 거잖아." "유, 유린 언니!!" 당황한 체리가 황급하게 누나의 입을 막으려고 도중에 말을 끊지만, 누나는 그런 체리의 모습이 오히려 귀엽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계속 한다. "땀을 흘려가며 열심히 일하는 남자의 야성미 넘치는 모습에 반했다는 뜻이지. 그렇지 않아? 우리 체리." "......" 오호라. 그런 것이었나. 예전에 인터넷 같은 곳에서 본 적이 있다. 노동이라는 범위에 분류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답을 할 수 없지만, 이런거 말이다. 여자들이 잘 못 하는 못질이라든지 전구를 갈아 끼우는 거와 같은 것들을 척척 하는 남자가 간혹 멋있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고. 지금도 그것과 같은 원리로 해석이 될지도 모르겠다. 여자들이 제대로 할 수 없는 작업을 알아서 척척(물론 내가 봤을땐 정말 잘 하는 것 같다. 후후후.)하는 모습을 보고 소녀의 마음이 두근두근 거렸다는 뜻 말이다. 이래서 인기있는 남자는 피곤하다니까. 하하하. "남동생. 방금, 재수없는 독백을 하지 않았어?" "... 당신. 초능력자냐?!" "여자의 감이야(유아 선배 흉내내기)."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요 근래 들어서 유아 선배의 유행어를 다른 사람들이 부쩍 많이 따라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저것도 유아표 시리즈 중 하나일텐데. 나중에 유아 선배가 특허권을 주장하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지아 선생님에 이어서 누나까지 성대모사라니. 참고로, 유아 선배의 성대모사를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비슷하다고 말할수는 없다. ============================ 작품 후기 ============================ 여담 of the 여담입니다. 이번 에피소드는 이 전에 올라갔던 전(前) 무인도 표류일지로 치자면, 완결 바로 직전 에피소드에 속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자면 전 무인도 표류일지는 완결이 너무 흐지부지하게 끝난 감이 없지않아 있어서 완결 바로 전 에피소드라 해도 긴장감이 덜 느껴지더군요. 이번에는 확실히 완결을 보강해서 좀 더 에필로그다운 완결을 지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86화 체리의 반응에 조금은 자신감을 얻은 내가 누나에게 말해본다. "앞에로 무인도에서 이렇게 하고 다닐까?" "제발 내 눈 앞에서 사라져줘. 남동생." "... 농담이라고. 좀 웃어줘." "농담을 하려면 개그 콘서트에 가서 10년은 더 배우고 와야 할 거 같아." "나도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진심으로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가슴 아프니까." 개그에 소질이 없단느 사실은 예전부터 내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누나의 말에 쉽게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남을 웃기는 일은 정말 어려운가 보다. 갑자기 개그맨 분들이 존경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잠깐 이상한 곳으로 이야기가 새어 버렸지만, 그렇다고 도중에 작업을 중단할 일은 없다. 계속해서 못과 망치를 손에서 놓지 않으며 열심히 일을 하는 나. 시험 공부를 이렇게 열심히 했었다면 학과 수석은 무리더라도 적어도 학업성적 상위권까지 가지 않았을까 라는 쓸모없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게 계속 열심히 손을 움직인 결과. 이제는 얼추 형태가 갖춰진 2층 집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뭔가를 만들었다는 달성감에 대한 쾌락이 바로 이런 것일까. 나쁘지 않은 감정이다. "휴~..." 누나 역시도 힘들다는 듯이 깊은 숨을 내쉬면서 말한다. "잠시 쉬는 게 어때?" "쉬는 시간만 기다렸던 거 아니야? 누나." "너무하네. 이래봬도 성실하게 일했잖아. 휴식 시간으로 보답해달란 말이야." "... 알았어. 그럼 잠시 휴식."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인지 뒤에 있던 체리의 표정이 조금 밝아지기 시작한다. 사실 땀방울 흘리며 일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 체리는 그저 내가 가져달라 하는 공구들만 가져다 주고, 누나는 뭐... 굳이 엄청난 근력을 요하는 작업을 한 것도 아니니까. 사다리를 타고 다시 내려온 우리들. 상당히 오랜만에 대지라는 것을 밟아본 느낌이 든다. 그래봤자 3시간 밖에 안 지났지만. "수고했어." 수건을 가져오며 우리들에게 건네주는 노아 선생님. 차례차례로 수건을 받은 우리들은 우선 흐르는 땀부터 닦는 데에 열중한다. "다른 사람들은요?" 누나가 노아 교수님에게 묻자, 안쪽을 가리키며 말한다. "아직까지 계속 하고 있어." "그런가요?" 저쪽도 꽤나 오래 걸리는 것인가. 참고로 우리 3명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현재 1층 천장과 2층 바닥을 뚫는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천장에 설치되어 있는 나무기둥을 자르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문제는 비행기 철판을 자르는 작업이다. 있는 공구, 없는 공구를 총 동원해서 철판에 먼저 균열을 만들고, 그 사이로 열심히 자르기 작업을 시작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 유아 선배와 세린이 번갈아 가면서 작업을 하고 있었고, 세리아가 보조 역할을, 그리고 지아 선생님이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쪽은 작업 끝났어?" 지아 선생님이 우리들의 모습을 바라보자 가장 먼저 묻는 첫마디였다. 작업 종료에 대한 여부가 가장 궁금하셨던 모양이다. 우리들을 대표해서 내가 지아 선생님에게 대답을 해준다. "아직 한참 남았죠. 뭐." "금방 끝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천천히 해." "네. 그쪽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 "네가 보는 그대로야." 지아 선생님이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키자, 그 곳에서 의자를 밟고 서 있는 유아 선배가 철판과의 싸움을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다. "이거, 왜 이렇게 안 잘리는 거야!!!" "... 그야 일반 철판도 아니고 비행기 몸체로 사용되는 철판이니까요." 웬만한 기술로는 철판이 쉽게 잘려 나가지는 않는다. 유아 선배가 저렇게까지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것도 이해하지만, 뭐... 그렇다고 철판이 나무 판자로 바뀌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자. 괜한 철판에게 화를 부리는 유아 선배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간의 휴식을 마친 우리들은 다시 2층 증축 작업으로 투입되었다. 그리고 또 다시 몇 시간이 지난 이후. 오후 5시 쯤 전원 복귀를 마친 뒤에 식사 준비 조(라고 쓰고 축구 경기에서 패배했던 레드 팀 맴버라고 읽는다.)가 먼저 목욕을 하고 난 이후에 블루 팀(더하기 나) 맴버들도 목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식사 준비가 끝난 레드 팀의 음식들을 얌냠쩝쩝 맛있게 해치우고 난 이후에. 모두가 사전에 약속이라도 하듯이 그대로 대(大)자로 뻗어버린다. 워낙 오랫동안 노동력을 발산한 탓에 힘이 빠진 상황. "... 힘들다." 누나가 가장 먼저 입을 열며 말한다. 모두가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우리들. 그러자 아리아가 마침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한다. "우리 모두 기운을 차릴 수 있는 의식이 있습니다만." "그런게 있어?" 놀라운 표정으로 되묻는 유아 선배. 그러자 아리아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럼요." "뭔데, 뭔데?" "세리아 언니의 목소리를 듣는 거요." "......" ... 역시나 무한 언니 사랑. 세리아의 목소리를 듣는 것 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아리아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좋을지 도통 떠오르는 말이 없다. 아리아의 말에 당황해하는 인물은 바로 세리아. 그러나 전혀 상관하지 않다는 표정으로 세리아를 똑바로 바라보는 아리아가 강요하듯 말하기 시작한다. "자, 언니. 빨리 말해봐." "......" 부끄러워하기 시작하는 세리아였다. 사실 저번에 '아리아'라는 3글자를 입에 담고 난 이후로 세리아의 언어 실력은 나날이 갈수록 수직상승을 하고 있었다. 이게 다 아리아의 노고 덕분이라고 해야 좋을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아직까지는 약간 쉰 목소리가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충분히 짧은 '말'을 내뱉을 수 있게 되었어도 세리아는 자주 입 밖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주치의이기도 한 지아 선생님의 말을 인용해 보자면, '원래의 목소리 톤까지 되찾고 싶다면 계속해서 발성 연습을 하는 것이 좋아.'라고 말을 한 적이 있지만, 세리아에게 있어서는 아직까지는 그런 단계까진 오지 않았나 보다. 그러나 쉰 목소리라 해도 세리아의 목소리 자체만으로도 귀가 행복해진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아리아가 계속해서 세리아에게 말을 할 것을 재촉하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세리아가 자신의 목을 한 손으로 살짝 댄 이후에 입을 연다. "괜찮아..." 오. 이번에는 제법 발음까지 완벽한 말소리를 들려준다. 그리고 가래 낀 목소리도 이제 거의 없어지고 20대 또래 여자 아이의 목소리를 되찾아가는 느낌이다. 역시나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구나. 세리아의 목소리를 들은 아리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 "자, 이제 완벽하게 회복 되셨죠? 다들." "......" 표정으로는 전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물론 세리아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자랑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육체적으로 '힘들다'라는 것과 정신적으로 '힘들다'라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세리아가 치유해줄 수 있는 것은 '정신적인 피로함'일 뿐이고, 신체적인 피로함은 휴식으라는 수단을 통해 풀 수 있는 것이다. 의자에 앉은 채 따스한 녹차를 마시는 지아 선생님이 나를 호출하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세요? 선생님."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선생님의 맞은 편에 앉자, 선생님이 나를 응시하며 말한다. "내일은 하루 정도 휴식을 가지는 것이 좋겠어." "휴식이라..." 그러고 보니 나무자르기 작업 이후로 잠시 유흥거리를 삼아 축구를 했고, 그 이후로 증축 작업에 본격적인 박차를 가하는 중이기 때문에 가끔은 심신의 피로를 달래는 것도 좋다고 보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닌 지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말을 한다면, 엄청난 신빙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법률 문제가 생긴다면 변호사에게 상담받고, 몸에 이상이 있다면 의사에게 상담받고, 그리고 하루에 24시간 컴퓨터를 켜고선 질리지 않고 게임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상담하고자 할때는 에바트리체라는 사람에게 상담 받으라는 유명한 명언 말이다... 마지막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나 뿐만이 아닐거라 생각한다. 음... 내가 왜 이런 말을 했지? 아무튼 지아 선생님이 뭔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듯이 말한다. "바닷가로 바캉스라도 가볼까." "바캉스요?" "그래. 안 그래도 이 무인도의 해변가는 경치가 좋은 편이잖아. 그래서 가끔은 여유도 가질 겸 해변가에서 노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 어차피 해안가와 산장이 위치한 공터의 거리도 그리 멀지 않은 편이다. 그리고 투명한 바닷물 덕분에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휴식을 즐길수도 있고. 지아 선생님의 나이스한 의견이 마음에 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괜찮네요. 그거." ============================ 작품 후기 ============================ 드디어 취업을 했습니다. 수습기간이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뭔가를 달성했다는 사실이 정말 뿌듯하군요;; 아마 다음주에 부천으로 이사를 가지 않을까 싶은데... 돈도 없기 때문에 우선 고시텔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외로운 상경이 되겠군요. ㅜ_ㅜ 287화 빠른 밤을 지세우고 도착한 해변가. 사실 무인도에 머물면서 바다를 접할 기회는 여러번 맞이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 '생존'이라는 거대한 숙제 앞에서 바다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바캉스를 주최한 것은 굉장히 나이스(Nice)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바다라는 존재 자체가 생명의 어머니라 불리는 존재 아닌가. 모든 생명의 시작이기도 하고, 어떤 의미로 안구를 정화시켜주는 대 자연의 일부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늘과 더불어서 파랑색의 테마를 가지고 있는 자연의 풍경. 심리학적으로 초록색 계열은 심적인 안정, 그리고 심리적인 치유의 효과를 발휘한다고 한다. 그리고 파랑색은 우울증을 유발하는 색... 잠깐. 뭔가 모순되는데. 이거. 어쨌든 모순된 논리는 대략 넘기기로 하자. 괜히 깊게 빠져들면 손해니까. "바다라..." 오랜만에 꺼내든 '유아 표 수영복'을 걸친 우리들 중에서 허리에 한 손을 올린 채 중얼거리는 누나가 작게 말한다. "바다는 지겹다고 생각하지 않아?" 라고 말하면서 나를 바라보는 누나. 사실 누나의 말이 제대로 들어맞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싫은 표정은 아닌듯 누나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한다. "뭐, 지아 선생님이 생각하신 명안이니까 딱히 태클은 걸지 않겠지만." "지아 선생님이 아니라 내가 독단적으로 생각했었다고 말한다면 그 즉시 태클을 걸 의향이 다분하게 느껴지는 말투인데. 그거." "어머, 들켰니?" "너무 노골적으로 들켰어." 역시나 누나답다.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지. 누나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괜히 의사라는 직업이 있는 게 아니다. 물론 지아 선생님이 의사라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학교의 학생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양호 선생님이지 않은가.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은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그쪽 분야에 대한 지식은 일반인들보다 월등하게 높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한 몸에 받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의사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상황도 마찬가지. 지아 선생님이라는 인물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 바캉스에 대한 찬성을 얻어낸 것이지, 만약에 내가 독단적으로 이런 제안을 했다면 분명 '뭔 바강스야. 귀찮으니까 집에서 방콕(방구석에서 콕! 하고 박혀있는 타입을 말함)이나 하자.'라는 대답이 들려왔을 것이다. "그럼 우선 준비운동부터 하고 바다에 들어갈까?" "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하더니만. 지아 선생님의 말에 모두가 기운차게 대답을 한다. 스트레칭 담당으로는 유아 선배가 앞에 나서게 되었다. 검도부를 담당하면서 매번 부원들의 스트레칭을 주도하던 유아 선배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관처럼 저절로 앞장선 것이다. "날 따라하세요." 라고 말하면서 손을 머리 위쪽으로 쭉쭉 뻗어보이는 유아 선배. 역시나 검도부 부장답게 몸이 엄청나게 유연하다. 그리고 몸매도 끝내주고. 유아 선배의 말에 모두가 따라하며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 그리고 엘리도 동참한다. 아무리 운동신경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갑자기 찬물에 몸을 담그면 심장에 무리가 갈 수도 있는 증상이 발생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스트레칭을 하고 심장과 먼 신체부위부터 천천히 물을 적셔가기 시작한다. 수영장 물과는 달리, 해변가라는 낭만적인 장소를 연출하는 바닷가에서 투명한 물을 벗삼아 대부분이 바닷가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노아 교수님 외 체리, 그리고 세리아는 해변가 근처에서 발을 담그고 있을 뿐이고, 임시적으로 만든 휴식처에서 거대한 나뭇잎 그늘 아래에 쉬고 있는 지아 선생님까지 포함해서 4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바닷가에서 물장구를 치기 시작한다. -나 잡아봐~라~ -꺄악! 거기 안 서~♡ ... 라는 말도 안되는 대사들이 갑자기 튀어나왔길래 놀랐었다면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우리들 사이에 저런 닭살스런 대사가 나올리가 없지 않은가. 방금의 그 대사들은 순전히 '상상'일 뿐이고, 실제의 대사들은 이렇다. "유아 선배!! 일부러 저한테 물 튀긴거죠?!" "흥. 네가 못 피한 거잖아." "노리고 물을 뿌리는데 어떻게 피해요!!" "자신의 운동신경이 부족하다는 것을 남에게 빙글 돌려서 핑계삼아 말하는 건 나쁜 습관이라고 생각하는데." "악의를 품고서 마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선의의 피해자라고 과대포장하는 것이 더 나쁜 거 아닌가요?" "뭐가 어째? 내가 악인이라도 된다는 말이야?"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요?!" ... 거 봐라. 왜 서로 가만히 있나 싶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바캉스에서도 펼쳐지는 유아 선배 VS 세린의 혈전이 시작되었다. 바닷가라는 장소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의 사이 만큼은 스파크가 튀기는 것이 보일 정도로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저 분쟁 지역만 유난히도 온도 상승력이 높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굉장하다. 저 둘. 어느순간 유아 선배와 세린의 대결구도가 또 펼쳐지는 꼴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구경꾼들이 거리를 벌리고 저 둘의 싸움을 관람하기 시작한다. 내 옆으로 다가온 아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한다. "저 두 분은 전생에 무슨 원수관계였는지 가끔 궁금해지는 경우가 있어요." "지금도 그 경우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지?" "잘 아시네요. 유에 선배." 아리아가 자신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한 말이었다. 옆에 있던 누나도 상당히 흥미롭다는 듯이 말한다. "저 둘이 싸우게 된 원인, 궁금하지 않아?" "그야 궁금하긴 하지만,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잖아." 저번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우리들 중에서 저 둘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물론 당사자들은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그럼 당사자들에게 들으면 그만 아닌가? 하지만 이건 세리아와 아리아 때의 사건과는 다르다. 세리아, 아리아 자매에 관련된 사건은 둘의 원만한 해결을 위한 하나의 대응책으로 그녀들의 과거를 알고자 하는 것이었지, 지금 유아 선배와 세린의 경우에는 단순히 우리들이 호기심으로 인해서 알고 싶을 뿐이라는 가벼운 문제였기 때문에 쉽사리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특히나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고 쳐도, 남자인 내가 여자의 과거에 대해 직접적으로 묻는 것도 폼새가 안 난다는 요인도 있긴 하다. 아무튼 진짜 질리도록 싸우는 유아 선배와 세린의 모습을 보면서 휴식처에서 여유롭게 바다를 관람하고 있던 지아 선생님이 다가오며 말한다. "또 싸우는 거야? 저 둘." "아, 지아 선생님." 유아 선배와 세린의 말싸움을 말릴 수 있는 유일한 말싸움 종결자, 지아 선생님이 유아 표 수영복으로도 다 가려지지 않는 우월한 가슴 크기를 뽐내면서 팔짱을 낀다.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하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애들'이라고 불리기에는 약간 나이를 먹지 않았나 라는 생각도 들고요." 내 말에 지아 선생님이 살짝 언짢은 표정을 지어 보이시며 나를 향해 눈을 흘기기 시작한다. "내 앞에서 나이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20대 청년 님." "......" 잊고 있었다. 나이에 민감한 것은 곧 20대에서 30대로 접어드는 노아 교수님 뿐만 아니라, 30대의 길에 이미 들어서게 된 지아 선생님도 있다는 사실을. 여자들의 경우에는 남자들과는 달리 나이에 대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된다. 특히나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는 더더욱 주의를 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작품 후기 ============================ 부천으로 한창 이사를 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선 돈이 없기 때문에(...) 부천역 근처 리빙텔 2~3군데를 알아봤고요. 이번주 일요일에 올라가서 계약을 하고 바로 입주할 예정입니다. 정든 집과 부모님 품을 떠나 홀로 상경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외로움이 몰려오는 거 같습니다. ㅜ_ㅜ 288화 한번 벌어진 싸움을 이제 말리기도 귀찮다는 듯이 바라보는 지아 선생님과 같이 바캉스를 나온 뒤에 맞이하게 된 점심식사가 시작되었다. "짜잔! 오늘은 바캉스에 어울리는 음식들을 준비해봤습니다." 누나가 기운차게 대답하면서 미리 가져온 음식들을 펼쳐놓는다. 확실히 평소에 잘 볼 수 없는 음식들이 많이 보인다. 대표적인 음식들을 보자면... "... 이거. 설마..." 아리아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누나가 귀엽게 윙크를 해보이며 말한다. "정답." 왜 누나가 정답을 외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든다면, 곧바로 해답을 내놓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아리아가 왜 못볼 것을 보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느냐 하면, 바로 저번에 폭풍 설사라는 소동을 일으켰던 장본인이기도 한 바로 그 야자수 열매가 다시 등장했기 때문이다. "왜 하필이면 이 음식을 가져온 겁니까? 유린 선배." "그야 시원하고 맛있으니까." 정말 비위도 좋은 누나다. 보통 사람의 경우에는 아리아와 같이 웬만해선 야자수 열매에 대한 트라우마가 박혀버릴 정도로 이 열매 음료수를 싫어하게 될 것이 극히 평범한 반응인데, 누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야자수 열매 음료를 다시 선보인 것이다. 물론 저번에 지아 선생님의 분석에 의해서 순수하게 야자수 열매 음료가 가지고 있는 성분 덕분에 우리들이 단체로 급성 위장염에 걸렸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때의 상황을 다시금 회상해보면, 복통의 원인은 바로 누나가 야자수 음료에 첨가했던 정체불명의 흰색 가루였다는 것을 다시금 알 수 있을 것이다. 폭풍 설사 사건에서 유일하게 나와 지아 선생님만이 그 사건을 피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사실 우리들에게는 그다지 거리낌이 없긴 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인 사람들은 야자수 열매에 대한 혐오감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표정으로 열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누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 정도로 이 열매 음료에 빠져있는 누나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눈치없는 것도 정말 여전하다. "자, 괜찮으니까 다들 일단 마셔보세요. 저번과 같은 실수는 저지르지 않을거니까요." "흰색 가루만 타지 않는다면 당연한 말이겠지." "이번에는 아무런 첨가물도 넣지 않았으니까 순수하게 야자수 열매 음료를 즐길 수 있을거야. 내가 장담할게."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모르겠다니까." 그래도 누나가 저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한 마셔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단 음료수를 담은 컵 한 잔을 집은 뒤에 한모금 삼켜본다. 어차피 나는 체질상으로 저번과 같은 요인으로 설사병에 걸릴 일은 없을테니까 괜찮겠지. 마시고. 또 마신다. 마치 이게 알코올이라도 되는 듯한 그런 주량을 뽐내는 일동. 처음에는 야자수 음료를 안 좋은 과거의 기억 때문에 거절하다가, 그래도 한번 입에 들어가니까 거침없이 마시게 된다. 역시나 항상 처음이 중요하다. 첫 스타트만 무난히 넘어가면, 그 뒤로는 일사천리니까 말이다. 바캉스로 인해서 시원한 음료로 목을 축이던 와중에. 미리 가져온 음료들이 바닥나고 말았다. "이 정도로 인기 있을줄은 몰랐는데." 아이디어 제공자이자 '유아 표 시리즈'의 최대 라이벌로 급상승하게 된 중소기업, '유린 표 시리즈'의 대표 이사이기도 한 누나가 어색한 웃음으로 말한다. "더 없나요? 이거." 세린이 노골적으로 더 마시고 싶다는 듯이 누나에게 말을 걸어본다. 그러자 누나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세린의 대답에 만족스럽지 못한 답변을 들려주기에 이른다. "미안. 방금 것이 끝이야." "그렇군요..." 아직 바캉스를 끝내기에는 한참의 시간이 남았다. 이제 겨우 점심식사를 끝냈을 뿐이니까. 잠시 고민하던 유아 선배가 손뼉을 몇번 치며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더 구해오면 되지 않을까?" "좋은 방법이긴 한데. 어디 있는지 알아? 이 열매가 열리는 나무 말이야." 누나의 질문에 유아 선배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물론. 저번에 이 해변가 근처에서 본 적이 있는 거 같아." "오, 그래?" 누나도 반기는 기색을 엿보인다. 굳이 누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바캉스의 기분을 더 느끼고 싶은지 시원한 야자수 열매의 음료를 더 원하고 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럼 갔다올게." "아, 저도 같이 가죠. 선배." "너도?"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는 나에게 유아 선배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말한다. "어차피 남자의 힘도 필요할테니까 같이 가는 것도 좋겠어. 그리고..." 나를 대신해서 지아 선생님이 유아 선배에게 또 다른 제안을 내건다. "한명 더 데리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유아." "저야 상관은 없긴 하지만요..." "그럼, 세린도 같이 가." "... 네?" 얼빵한 표정으로 지아 선생님의 말에 대답하는 세린. 여기서 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의미를 담은 눈빛이라고 볼 수 있겠다. 유아 선배 역시도 왜 하필이면 이 녀석과 같이 가야 하나며 지아 선생님에게 따지기 시작한다. "잠깐만요!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 세린과 가야 하나요?" "그냥." "그냥... 이요?" 꽤나 논리적인 답변을 기대했던 것인지 유아 선배가 지아 선생님의 말에 한동안 말을 잃고 말았다. 단순하게 '그냥'이라는 아주 본능에 가깝고 생각이 없고 어이가 없고 말도 안되고 전혀 논리적이지도 않고 근거도 없어보인느 100%중에서 99.9%가 부족해보이는 답변을 할 인물은 누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지아 선생님이 이런 답변을 내놓으니까 유아도 할 말이 없어진 것이다. 유아 선배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지아 선생님이 약간 목을 가다듬으며 다시 설명해주기 시작한다. "여자의 감이야(유아 선배 목소리를 흉내내며)." "......" 저번에도 가끔 유아 선배의 성대모사를 내던 지아 선생님이긴 했지만, 그 때도 내가 말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무엇을? 성대모사를 하긴 했지만 그다지 안 똑같다는 말을. "... 전혀 똑같지 않아요." "그래? 나름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노아 교수님이 지아 선생님에게 딴지를 걸어본다. 음... 이건 아무리 연상의 여성이라고 해도 성대모사의 분야에서 본다면 극히 초보적인 발음이라고 할 수 있을거라 생각된다. 말도 안되는 지아 선생님의 답변이 있었지만, 마지막에는 거의 반 강제적으로 협박 아닌 협박을 한 지아 선생님의 무력행사(?) 덕분에 유아 선배는 세린과 같이 동행하게 되었다. 이 둘이 동행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많은 조합이라고 생각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이 둘 사이에 내가 있다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이 두 사람과 동행하게 되었단 말인가... 가만. 자세히 생각을 해보니까 내가 먼저 지원한 거 아니었나? 그럼 이건 100퍼센트 내 과실이란 뜻? 아니지. 나는 세린이 유아 선배와 같이 간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지원했던 거니까 이건 논외로 치자. "......" "......" 서로 아무런 말 없이 걸어가는 시간은 꽤나 길게 느껴지고 있었다. 지아 선생님에게서 받은 손목시계는 우리들이 해변가에서 야자수 열매를 구하기 위해 출발한 시간이 현재 10분을 넘어가고 있다는 알림을 해주고 있었지만, 체감상으로는 1시간이 지나간 느낌이다. 무슨 점심시간을 앞둔 4교시 수업을 듣는 것도 아니고. 왜 이리 시간이 안 갈까. ============================ 작품 후기 ============================ 청주를 떠나기 전에 친구들을 한번씩 만나서 이별의 잔(?)을 마시고 왔습니다. 새 출발을 위해 이제 열심히 노력해야지요. 부천이나 혹은 가까운 곳에 계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나중에 술이라도 한잔(...) 했으면 좋겠습니다. ㅜ_ㅜ 289화 ...... 이제와서 지아 선생님을 원망하는 것도 늦었다고 생각이 되지만, 그래도 원망하지 않고서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실제로 지아 선생님에게 '왜 내가 유아 선배와 세린 사이에 나란히 같이 가지 않으면 안되냐고요!!'라고 직접적으로 따질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나라가 그렇게까지 선생님에 대한 권위가 무너진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털어 넘기는 세린. 유아 표 시리즈 수영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세린의 늘씬한 몸매와 긴 금발이 실로 잘 어울리는 풍경을 연출한다. 그리고 세린의 몸매에 전혀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유아 선배 역시도 건강미 넘치는 매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살짝 보이는 복근과 쭉 빠진 다리. 역시나 운동을 하는 여성답게 탄력적인 피부도 매력 포인트라고 집고 넘어갈 수 있다. ... 다만 문제가 있다면 몸매 좋기로 소문난 이 둘이 사이가 무지하게 안 좋다는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대화없이 길만 따라 가다가, 유아 선배가 먼저 입을 열게 된다. "저기야." "벌써 도착했나요?" "그래. 내가 저번에 유린과 같이 열매를 따러 왔을 때가 바로 이 장소거든." "오호라..." 좀 더 깊숙히 숲 속으로 들어가자,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메달려 있는 야자수 열매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유아 선배가 말한 그대로 누나가 가져왔던 열매들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는 것처럼 다수가 나무에 달려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저 높이에 있는 열매들을 도대체 어떻게 따신 건가요." 내가 묻자, 유아 선배가 어깨를 으쓱 해보이는 제스쳐를 취한 뒤에 대답하기 시작한다. "비교적 작은 나무에 열려있는 열매들을 땄으니까. 막대기로 따면 금방 열매를 얻을 수 있어. 봐봐. 저런 작은 나무들." 유아 선배가 가리킨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대략 3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나무에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저 정도면 굳이 나무를 올라가지 않아도 나무 막대기 하나만 있으면 딸 수 있을 높이라고 보여진다. "그럼 제가 열매를 딸게요." "네가 하게?" "그래야죠." "초심자에게는 무리니까 내가 먼저 시범을 보여줄게." "... 그래도 됩니까?" "물론. 너희들은 보고만 있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나무 막대기를 집어 든 유아 선배. 열매가 열려있는 나무 아래로 발걸음을 옮긴 뒤에 막대기로 열매들 사이를 쿡쿡 찌르기 시작한다. 과연. 열매들이 달려 있는 꼭지를 건들여서 나무에서 떨어뜨린다는 전략인가. 유아 선배가 보여주는 스킬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쉽게 열매를 다수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자신이 열매를 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신이 난 모양인지, 유아 선배가 다른 나무에 달려있는 열매도 따주겠다고 선뜻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그 때. "잠깐만요. 선배. 혼자서 그렇게 가시면..." "잔말말고 따라오...!!" 순간적으로 유아 선배의 말이 비명소리로 바뀌게 되었다. 놀란 세린과 내가 다급하게 유아 선배가 있던 쪽으로 달려가지만, 우리들의 그련 행동이 엄청난 불행을 낳게 될 줄은 그 당시에는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꺄악!!" 세린의 비명소리가 유아 선배의 비명소리에 뒤이어 들려오기 시작한다. 세린과 유아 선배가 비명을 지른 이유. 그리고 나 역시도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있던 곳이 바로 작은 '절벽'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낭떠러지에 데굴데굴 구르면서 정체모를 장소에 떨어지고 만 우리들. 나와 세린보다 먼저 떨어져있던 유아 선배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나중에 떨어진 우리 둘을 바라보며 말한다. "괘... 괜찮아? 둘 다..." "... 다행히 살아 있지만요." 아직까지도 여유를 잃지 않는 내 말에 스스로 놀랄 뿐이었다. 어찌 이리도 태평스러운 대답을 할 수가 있지. 역시나 누가 뭐라해도 나란 녀석은 유린이라는 여자의 남동생이라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유아 선배는 무사한 것 같고... 세린의 상태를 물어보도록 하자. "세린. 너는 어때?" "... 발목을 삔 거 같아." "발목을?" 시선을 아래쪽으로 향하자, 빨갛게 부어오른 세린의 발목이 시야에 가득 보이기 시작한다. 한 눈에 봐도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외관상의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우리들이 떨어진 장소를 올려다본다. 가파른 절벽이 우리들 바로 머리 위에 위치한 상황. ... 생각지도 못한 트러블에 휘말리고 만 것이다. "... 잠깐만요."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여기저기 둘러보며 현재 우리들이 있는 위치를 파악해본다. 사실 나도 여기는 처음 와보는 지리인지라 제아무리 이렇게 주위를 살펴 본다고 해도 알 제간은 없다. 네비게이션도 아니고. 어떤 식으로 위치를 알아낼 수 있을지에 대한 방법은 도통 떠오르기 않고 있다. 그리고 위치를 알아낸다 해도, 우리들이 있는 위치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도, 그리고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도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주변에는 온통 낭떠러지들로만 이뤄진 상황. 만약에 우리들이 조금 더 아래쪽으로 굴러 떨어졌다면 세린이 발목을 부상당하는 일 말고도 더 심각한 부상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자칫 잘못했다간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을뻔한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는 소리다. 결국 우리들이 절벽에서 이 정도의 부상으로 끝난 것은 일종의 '행운'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둘러본 소감이 어때?" 부상자인 세린의 곁을 지키고 있던 유아 선배가 나에게 묻는다. "암울 그 자체네요." "... 가뜩이나 침울한 분위기를 더 무겁게 만들지 마." "그래도 현실을 직시하는 것도 때로는 나쁘진 않으니까요." 말장난 투로 말을 해보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올라갈 방법도 없고, 그리고 내려가기에는 더없이 위험부담이 크다. 특히나 부상자인 세린의 존재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기도 했기 때문에 함부로 위험성이 높은 자체 구조활동을 펼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찌해야 좋을지 마땅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 상황에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묻기 시작한다. "유아 선배는 어때요?" "아까도 말했지만 그다지 부상은 없어. 문제가 있다면..." 유아 선배가 살짝 시선을 돌려 세린을 바라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세린의 발목 부상에 대해서 가리키려는 의도라는 사실 정도는 나 역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 왜 그런 시선으로 보시는 거예요." 유아 선배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갑자기 세린이 퉁명스럽게 말을 꺼내고 만다. 순간적으로 유아 선배도 약간 기분이 상했는지 세린의 말에 반박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그 말투는 뭐야. 마치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이 기분 나쁘다는 것처럼 느껴지게." "걱정이 아니라 동정의 시선이겠죠." "동정의 시선?" "그래요. 동정. 어차피 저는 부상당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니까 유아 선배가 도와줘야 한다는 그런 동정심 때문이죠? 만약에 제 말이 맞다면, 지금 당장 그런 생각은 버리시는게 좋을걸요." "너, 이 상황에서도 나와 싸울 생각이야?" "선배가 먼저 잘못했잖아요." "......" 말이 없어진 유아 선배. 세린의 말이 지나치다는 사실 정도는 나도, 그리고 선배도 알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청주에서 마지막 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부천인이 되겠지요. ... ㅜ_ㅜ 290화 "... 이세린." 더 이상 둘이 진짜로 감정싸움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내가 입을 연다. 순간적으로 움찔한 세린이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한다. "... 왜." "여기서 유아 선배와 싸워봤자, 너나 우리들만 손해야. 알고 있지?" "......" 부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는 세린 역시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나보다. 그렇다면 어째서 세린이 이런 불편한 언행을 보여준 것일까. 그건 아마도... "... 불안해서야."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세린이 나와 유아 선배를 번갈아 바라보며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그랬던 것이에요." 직접적으로 유아 선배에게 '미안하다'라는 사과를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유아 선배에게는 어느정도 의사 전달이 원활하게 이뤄진 모양인지 선배의 입이 살짝 열리기 시작한다. "겨우 그런 일로 불안감을 느끼다니. 역시나 너도 아직 멀었구나?" "......" "바보. 불안할 게 뭐가 있다고. 우리가 너를 혼자 두고 가려는 생각도 없고, 그리고 분명 우리들은 이 절벽 모퉁이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거야. 이 무인도에 우리 셋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귀가 시간이 늦어지게 된다면, 이 곳으로 찾아올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테니까." "우리가 떨어진 장소를 알 수 있을까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 일대 주변으로 오게 되어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니까."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는 건가요?" "나 말고 이 지역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잖아." 라고 말하면서 유아 선배가 나를 가리킨다. 선배가 가리킨 것은 나지만, 그렇다고 이야기 도중에 나온 '사람'의 정체는 내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아니라 우리 누나인 유린이라는 여자를 가리키고 있을 터. 야자수 열매의 위치를 알고 있는 누나라면 분명 돌아오지 않는 우리들을 찾기 위해서 이쪽으로 올 것이다. 다소 시간이 오래 걸릴지 모르지만, 누나가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이 쪽으로 오게 된다면, 우리들은 인기척을 느끼는 순간부터 구조를 바라는 목소리를 크게 내지르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 순간적으로 말을 잃은 세린. 그녀의 표정과 언행과는 다르게, 유아 선배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세린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기 시작한다. 그러자 세린이 유아 선배의 손을 뿌리치며 말한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봐봐. 평소의 너다운 모습이 제일 보기 좋잖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유에." "저야 뭐..."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여준다. 사실 침울해있는 세린보다는 이렇게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생각되는 화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세린이 더 그녀에게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느낀 그대로의 감정을 행동 하나에 모두 담아서 표현한다. 유아 선배와 내 말에 순간 얼굴이 빨개진 세린이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침묵을 지키기 시작한다. 역시나 은근히 부끄러움이 많은 녀석이다. 시간은 언제나 멈출 수 없는 강물처럼 흐르기 마련이다. 계속해서 흘러가는 시간의 결과물로, 점점 저물어가는 해를 증거로 재출하고 싶을 정도의 기분이 드는 이 순간. 잊을수가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들이 멀쩡하게 살아 나가야 이 추억을 나름 그때 그 기분과 감정을 되살리며 회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손목시계를 바라보니 이제 곧 오후 6시가 다 되어가는 상황. 아까 유아 선배가 꽤나 상황을 긍정적으로 표현하긴 했지만, 선배의 말에도 한가지 불안요소가 있다. 바로 해가 저물기 전에 우리들이 구조를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 말이다. 아무리 사람들이 우리들을 찾으러 온다 하더라도, 시야가 급격하게 좁아지는 저녁에 이 곳으로 와봤자 별로 소득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밤의 숲속은 들짐승들로 가득 차있는 위험한 지대 중 하나이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들보다 수색에 나서는 사람들이 더 곤경에 처할 확률도 없지않아 존재한다. 결국 제일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해가 저물기 전에 구조를 받아야 된다는 점. 그러나 시간대를 고려해 보자면 아마 그건 힘든 일이 아닐까 라는 불안한 기분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서로 말을 잊은 지 오래인 유아 선배와 세린도 속으로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노을지는 하늘의 풍경이 아름답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이리라 하는 생각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먼저 입을 열기 시작한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들. 곧 있으면 구조가 올 거예요." "구조라니..." 살짝 한숨을 내쉬는 세린이 말 끝을 흐리며 말한다. 아까와는 다르게 그래도 절망적인 말투는 아니었지만, 오늘 안으로 구조되는 것은 조금 힘들지 않을까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그런 말이기도 했다. 유아 선배도 세린의 말에 어느정도 공감하고 있다는 듯이 나에게 말한다. "여기서 야영을 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야영이라 말이죠..." 낭떠러지 중간 언저리 부근에 있는 우리들에게 솔직히 야영 준비라고 하는 것이라고 해봤자, 근처에 잘 수 있을 정도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커다란 돌맹이 정도만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이 고작이다. 상당히 초라한 조취라고 보여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들이 이 한정된 장소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절대로 하찮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아니, 그것보다도 여기서 야영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일 자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도 날씨가 그렇게까지 춥진 않아서 다행이야." 유아 선배가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을 내뱉는다. 확실히 그렇게까지 날씨가 추운 편은 아니다. 어제, 혹은 오늘 낮 무렵에 비가 온 것도 아니고.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 이 어두운 숲 속에서 과연 하룻밤을 잘 지낼 수 있으려나 그것이 문제다. 주변을 둘러보던 유아 선배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도 산짐승들이 올 확률은 없어 보이는 장소라서 다행이야." "그러게요." 나도 유아 선배의 말에 공감의 한 표를 행사한다. 절벽 언저리까지 올라올만한 짐승은 별로 없을 것이고. 그리고 무슨 이득이 있다고 이런 곳에 일부러 사서 고생을 하며 올라올 필요성이 있을리가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유아 선배의 말이 옳다고 보여진다. 다만, 어두운 장소를 매우 싫어하는 세린에게 있어서는 하룻밤에 불과하지면 오늘 밤이 최악의 잠자리로 기록되는 역사적인 순간으로 남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증거로, 세린의 가녀린 몸이 살짝 떨리기 시작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평소와는 달리 살짝 불안해하는 모습이 내가 보기에도 위태위태한 분위기마저 느껴질 정도다. ...... 심적인 불안감이 동요되는 세린의 반응도 사실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그녀가 숲속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 만큼 힘든 일도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발목의 통증이 평소의 그녀와는 다르게 강한 행동제한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왕 처한 상황은 돌파해야 하는 법. "너무 걱정하지 말고. 혹시나 야영을 해야 하니까 준비하도록 하자." "오케이." 기운차게 대신 대답하는 유아 선배가 나와 같이 돌맹이를 치우기 시작한다. 어차피 부상자인 세린은 우리를 돕지 못한다. 우리들이 최대한 세린의 발과, 그리고 눈과 귀가 되어 행동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동료니까.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어제는 제가 짐을 옮기고 나서 그대로 뻗은지라, 본의아니게 연재를 쉬고 말았군요. ^_^;; 부천역에서 5분도 안 되는 거리 고시텔로 이사를 했습니다. 좁은 공간이긴 하지만, 나름 사람 살 만 합니다. 하하하하하;; 291화 "... 꼭 여기서 자야 하는거야?" 아직도 약간의 불만이 남아 있는지... 아니. 수정하도록 하겠다. 약간이 아니라 매우 많은 불만이 남아있는지, 투덜대면서 나에게 묻는다. 가급적이면 세린이 원하는 방향으로 긍정적인 답변을 해주고 싶지만, 불행하게도 상황은 그럴만한 여건을 허락해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원하지 않는 부정적인 답변을 들려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지." "... 최악이야." 볼을 잔뜩 부풀리면서 불만을 토로하는 세린. 그러나 저러나, 유아 선배는 그런 세린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른 쪽으로 질문을 던진다. "그보다도 네가 걱정해야 할 쪽은 다른 쪽 아니야?" "다른 쪽이라니요." "발목 말이야. 꽤 부어오른 거 같은데 괜찮아?" "...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라고 말하면서 부어오른 오른쪽의 발가락을 까딱거려 보이는 세린. 행동이 묘하게 귀여워보인다. 그런데 발목이 괜찮다는 거와 발가락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거와 무슨 관련이라도 있는 것일까. 의구심이 들긴 하지만, 굳이 질문을 해보진 않는다. 사소한 말에 일일이 태클을 걸 바에는 그냥 말을 아끼면서 최대한 에너지를 보존하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슬슬 해가 저물어가는 상황에서, 유아 선배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피식 웃는다. "그러고보니 넌 부상을 당해도 매번 괜찮다고 말하곤 했지?" "... 그게 어때서요." "바보. 아프면 아프다고 솔직하게 동아리 선배라든지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는 편이 오히려 좋은거야. 괜히 너 혼자 끙끙 앓고 있게 된다면 보는 사람들이 더 답답하게 느껴지니까." "......" 드물게도 유아 선배가 세린에게 이로운 충고를 해준다. 동아리 활동에 대해서 세린과 유아 선배와의 일을 이렇게 간접적으로나마 접해보는 것은 처음인지라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아 선배에게 말을 걸어본다. "궁금해서 그런건데. 세린하고 유아 선배가 서로 알게 된 계기같은 거 있나요?"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던지는거야?" "그냥... 궁금하다고 해야 할까요." 사실 나 뿐만이 아니라 무인도에 있는 모두가 궁금해하는 사항이기도 하다. 유아 선배와 세린의 과거 이야기에 대해서. 그리고 왜 이 둘이 이렇게까지 견원지간 사이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팔짱을 낀 채 고민하던 유아 선배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내 말에 대답한다. "그런건 없어." "없어요?!" "응. 그냥 어쩌다보니 알게 된 거야." "... 무지하게 단순한 이유네요." "사실 인간관계라는 것은 그렇잖아. 뭐든지 특출난 계기가 있어야 타인과 접하게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말한 것처럼 정말 단순하게 '어쩌다보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인간관계도 있어. 세린과 나 사이도 마찬가지고." "그럼 둘이 사이가 안 좋게 된 계기는요?" "안 좋게 된 계기?" 이번에는 오히려 유아 선배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왜 우리 둘 사이가 좋지 않다고 보는거니?" "... 아닌가?" 이번에는 세린에게 시선을 돌린 채 그녀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유아 선배에게서는 차마 내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 새어 나왔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타겟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세린 역시도 나를 올려다본 채 역시나 유아 선배와 마찬가지의 답변을 내놓는다. "난 왜 네가 그런 질문을 하는지에 대해서가 더 궁금한데." "......" 이상하다. 내 질문이 잘못된 것인가? 분명 20여년동안 대한민국에 살면서 나름 한국어 마스터를 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같은 한국인인 유아 선배와 세린에게는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사표현이 통하지 않는다. 가만, 그러고보니 세린같은 경우에는 엄밀하게 말해서 순수 계통의 한국인이 아니구나. ... 이게 문제가 아니잖아. "보통은 유아 선배와 세린의 관계를 보고 '서로 앙숙이다.'라는 표현을 쓰는 거 아닌가요."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나. 주변인들은 분명 사이가 안 좋은 두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본인들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더 신가하기 때문이다. 역시나 가벼운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는 유아 선배의 말이 이어진다. "정말로 사이가 안 좋아서 말다툼을 하는 것과는 다르지." "다르다고요?" "어떤 표현으로는 '관심'의 표시일지도 모르겠어. 그치? 세린." "... 확실히." 약간 못마땅한 것인지, 아니면 유아 선배의 직설적인 말에 부끄러워 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가지만, 세린이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유아 선배의 말을 이어간다. "난 유아 선배가 싫은 게 아니야. 단지,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한 사람이 처음이니까 말다툼 하는 형태의 대화가 오히려 익숙해진 것일 뿐이지." "그런 식?" "... 너, 내가 자란 환경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겠지?" 세린의 질문이었다. 그녀가 자라온 환경에 대해서는 나 역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굳이 예전부터 세린에 대해서 전혀 알고 있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대기업의 부잣집 딸내미이기도 한 세린이 어떤 식으로 교육을 받고, 어떤 대접을 받고 자라왔는지에 대한 상상력은 굳이 많은 생각을 요할 필요도 없이 보통 정상인이라면 너무나도 쉽게 알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세린의 말이 들려온다. "주변에서는 나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몰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 부잣집 아가씨라는 타이틀 때문에 함부로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고, 그리고 부담감으로 인해 나를 피해다니는 사람도 대부분이었지. 심지어 펜싱부 주장도 그랬고." "......" "하지만 유아 선배는 달랐어. 같은 동아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나에게 호된 말과 충고를 주기에 바빴지. 물론 처음엔 나도 그게 호의라고 생각하진 않았어. 오히려 나를 시기해서, 내가 자란 환경에 대해서 부러워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괴롭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 세린의 말에 유아 선배가 작은 목소리로 '내가 그리 속좁은 여자로 보였구나.'라는 식의 한탄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는 사실은 여담으로 남겨두자. 지금은 세린의 독백이 중요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런 언행이 유아 선배 나름의 애정 표현이었다는 것을 점차적으로 알게 되었지. 그래서 항상 이런 식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어. 어떤 의미로 습관으로 길들여졌다고 해야 할까." 이렇게 보면 세린도 나름 배포가 큰 여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보통은 제아무리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말이라고 해도 쓴소리로 충고 삼아 말하는 말투를 달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반응인데, 세린은 그런 점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어떤 의미로는 둔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결국 둔하든 말든 결과적으로 유아 선배와 세린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서로간의 독특한 친분관계를 쌓았다는 좋은 점을 창출하게 되었으니까 나쁘진 않다고 보여진다. 자기가 말하고도 엄청나게 쑥스러운 것인지 아까보다도 배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세린. 그런 귀여운 후배의 모습을 보던 유아 선배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뭐, 알고보면 이 녀석도 그렇게까지 나쁜 녀석은 아니니까." "전 원래부터 착한 여자라고요." "어머, 보통은 네가 착하다는 이미지를 느끼진 못할텐데.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니?" "뭐라고요?!" 아. 방금 전까지의 감동적인 대화들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또 다시 평소와 같은 말다툼이 시작되려고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녀들의 말다툼이 시작되기 직전에. 유아 선배의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밝은 말투로 입을 연다. "아무래도 우리 무인도 동료분들이 오신 거 같아." ============================ 작품 후기 ============================ 오늘은 일찍 자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아침잠이 많아서 벌써부터 걱정이군요;; 292화 EP 28. 그녀만의 세계 잠시 사건이 있었던 바캉스 일정이었지만, 정상적으로 구조가 된 우리들. 그 이후로 다시 본래 업무이기도 했던 통나무 집 증축 작업을 완료한 끝에 멋진 2층 집이 우리들의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1층 침실방과 2층 침실방으로 나뉜 상황에서 각자 어느 침실에서 잠에 들지 서로 고민하는 우리들. 사실 화장실을 왔다갔다 하는 일이라든지, 목욕을 하러 호수로 갈 필요성이 있다든지 하는 이런 일이 있을 경우에는 1층이 백배, 아니 천배 더 좋은 위치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층 침실의 경쟁은 매우 치열하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1층 침실에는 화로라는 난방 수단까지 있어서 따스한 보금자리까지 보장이 된다. 덕분에 서로 1층이라는 지리학적인 이점이 가득 담긴 위치를 차지하고자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 어느 고정 멤버들이 1층에서 머무르는 것 보다, 주기적으로 로테이션을 돌려서 1층과 2층 멤버들을 바꾸는 편이 좋다는 절충안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뭐... 그건 잠시 옆으로 재껴두고. 무인도에서 생활한 지 이제 거의 2달째가 다 되어가는 상황에서, 서서히 무인도 생활에 길들여진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무인도에서 만들 수 있는 천연 재료들을 섞어서 식사를 만든 다음에 얌냠쩝쩝 영향분을 섭취한다. "... 그러고보니." 식사중에는 본래 개도 안 건들인다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오늘은 왠지 꺼내고 싶은 말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이런 식으로 첫마디를 꺼내고 말았다. "다들 무인도에 익숙해진 거 같네요." "고작 그 말 하려고 했던거야?" 누나가 오히려 나에게 이런 질문을 퍼붓는다. 저 말을 다른 뜻으로 해석 해보자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런 사소한 일을 굳이 아침식사 하는 자리에서 해야 하는 것이냐. 이 우둔한 남동생아.'라고 말이다. 자칭 '유린 언어 분석 전문가'라는 칭호를 달고 있는 나이기 때문에 해석률에 대한 정확도에 대해서는 굳이 논의할 가치가 없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질문을 받았으니 대답해드리는 것이 인지상정. "단지 그것 뿐인데." 이번에는 누나가 아닌 유아 선배가 세삼스래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태클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갑자기 뜬금없는 말 때문에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누구나 2달정도 무인도에서 머물면 당연히 이 상황에 적응되는거 아니야?" "그거야 뭐..." 정론이다. 어떤 의미로는 유아 선배의 말이 매우 옳은 말이란 뜻이다. 제아무리 현대 도시 문명 사회에 찌든 사람이라고 해도, 무인도에서 별의별 일을 다 겪으면서 듣도 보도 못한 식습관과 생활 패턴, 그리고 주변이라고는 파란색과 초록색, 그리고 갈색밖에 존재하지 않는 자연환경에서 2달동안 머물면 누구라도 적응을 하게 될 것이다. 무인도에 와서 이런 말을 굉장히 많이 하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인간의 적응력이라는 것은 매우 무섭기 때문이다. 어느샌가 다들 무인도에서 적응해버린 탓에, 오히려 내 질문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까지 오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누나가 '왜 MP3가 없는거야! 이 무인도는!!'이라고 말하면서 엄청난 비명소리를 연신 내질렀던 것이 바로 엊그제였다. 그러나, 현대 가요는 둘째치고 전자기계에서 나오는 음악이라는 사운드를 접할 기회가 없는 우리들이었기 때문에 자연의 소리, 예를 들자면 새들이 지저귀는 정화되는 소리라든지, 아니면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 그리고 파도 소리 등등등 엠X스X어라는 학습능력 기르기 기기에서 들을 수 있는 자연의 소리가 귀에 익숙해져버렸기 때문에 예전과 같은 그런 투정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뭐... 오히려 그게 더 좋을수도 있지만. "잔말말고 밥이나 먹으세요." "... 그러도록 하지요." 세린이 퉁명스럽게 나에게 태클을 걸며 결국 사소한 한 마디에서 시작된 대화는 이것으로 종결되었다. 식사를 마친 뒤. 저번에 레드 팀과 블루 팀으로 나눈 음식당번 내기 기간이 끝난 탓에, 지금은 서로 번갈아가며 요리를 담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고정 논외 멤버인 나는 언제나 요리면에서는 예외로 치부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는 벌칙 기간이든, 아니든 별로 상관 없다. 아마도 상관이 있을거라 생각되는 사람은 바로 세린일 것이다. 저번에 절벽에서 떨어진 탓에 아직까지도 발목이 제대로 다 나은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몸을 많이 쓰는 일이라든지, 사냥같은 것 들은 대부분 제외가 되고 있었다. 세린의 빈 공백을 대신 최종병기 활이라는 원거리형 무기로 중무장하며 새로 탄생하게 된 신궁, 체리가 채워주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냥의 효율성은 사실 많이 저하되었다고 평하기 힘들 것이다. 사냥 면에서는 별다른 무리가 없고. 그리고 애초에 몸을 많이 쓰는 일은 거의 남자인 내 담당이었기 때문에 세린은 그저 완쾌를 위해서 몸을 편안하게 쉬고 있으면 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할 일이 없다고 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세린이라는 인물은 자존심이 매우 강한 여자이기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이대로 무인도에서 시간만 축내며 빈둥빈둥 거리는 생활을 하기 싫다고 입버릇처럼 나에게 매번 말하곤 한다. 덕분에 가뜩이나 나에 대한 불평불만이 매우 많은 세린이었기 때문에 그 불평불만 모드는 배가 되어서 내 청각을 테러하기에 매우 충분한 위력을 소유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여담으로 남겨두도록 하자. 오늘도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내가 작업하는 것을 멀뚱멀뚱 바라만 보는 세린이 또 다시 한 마디를 한다. "너 말이야." "나?" "그래. 너." 마치 군대에서 선임이 후임을 부르는 듯한 성의없는 호칭을 쓰는 세린이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왜 아침에 그런 쓸모없는 말을 했던 거야?" "쓸모없는 말이라니." "왜, 그... 이런 말 했었잖아. 다들 무인도에 이제 적응 한 것 같다느니 뭐니 하는 말." "아, 그거?" 사실 세린이 나에 대해 묻는 의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모른 척 하면서 확인 차원으로 거친 작업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귀찮지만, 이런 절차를 거치는 편이 서로에게 괜한 오해를 사는 일이 없기 때문에 자주 애용하도록 하자. "그냥 단순하게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인데." "별다른 의도는 없고?" "별다른 의도라니. 구체적으로 어떤 거?" "... 아무것도 아니야." 뭐랄까. 세린은 아침에 내가 했던 말에 대해서 뭔가를 느낀 것일까? 사실 마음속으로 심각하게 고민할 여지를 남겨둘 그런 소재를 제공할만한 대사는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세린이 내 말을 받아들인 것은 그렇지 않은 모양인가 보다. 개개인이 받아들이는 주관적인 관점은 사람마다 다를수도 있을테니까 이상한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한 말 중에 이상한 점이라도 있었어?"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이상했어." "그렇게 치고 들어온다면 이쪽에서 할 말이 없겠지만." "사실 그렇잖아. 2달동안 무인도에서 아무런 무리 없이... 아니지. 무리가 없다고 확답할 수는 없겠구나. 아무튼 그래도 나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식으로 다시금 이 생활에 대한 회유감을 느끼게 해주는 말을 하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내 말이 그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나도 놀랍게 느껴지는걸." ============================ 작품 후기 ============================ 이제 정말로 완결이 보이는군요. ... 아마도요; 293화 눈을 흘기면서 나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세린이 퉁명스럽게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 자기가 말해놓고선." 살짝 나를 밉상이라는 듯이 말하는 느낌을 팍팍 선사해주는 세린의 말을 얌전하게 받아들인다. 애초에 본래부터 이런 내적인 갈등을 유발시키고자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본의 아니게 세린에게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시간을 준 꼴이 된 거 같아서 사실 적극적으로 세린의 말에 반발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개울가에 던진 돌이 마침 물 속에서 수영을 하던 사람의 머리에 맞을수도 있는 꼴이 될테니까. 고의성이 없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타인에게 피해를 준 꼴이니 순순히 사과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중하게 사과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일광욕을 마친 세린이 살짝 발을 절뚝이며 실내로 들어간다. 지아 선생님의 물리치료 안마를 받을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인도에서 특별히 발목이 부운 증상에 딱 들어맞는 약효를 찾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린 탓인지라 차가운 물을 발에 담가 붓기를 빼고, 주기적으로 안마를 받으면서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등 지아 선생님에게 지극 정성으로 간호를 받고 있는 세린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은 평소와 같은 무인도에서의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밭에서 고구마와 감자를 캐온 아리아와 세리아, 그리고 체리까지 합해서 연하 트리오 조합. 그 중에서 아리아가 나를 바라보며 말을 걸어온다. "농땡이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군요. 선배." "... 이봐, 아가씨. 누가 들으면 평소의 내가 매우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발언이잖아. 그거." "전 사실만을 말할 것을 맹새할 뿐이에요." "누구에게?" "시청자에게요." "이게 무슨 TV 프로그램이냐." "공영 방송이라든지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그리고 토크쇼 같은 곳에서 보면 자주 나오잖아요." "그거와 이거는 별개지." "아니요. 별개가 아닐지도 몰라요." "... 무슨 뜻이야." "사실 우리들이 무인도에서 생활하는 것을 몰래 카메라 같은 것으로 찍고 있다든지 하는 그런 거 말이죠." "이게 무슨 트루먼 쇼냐. 그런 몰래 카메라를 하게." 발상 자체는 독특하다고 생각하지만... 역시나 현실적으로는 매우 무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원래부터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라는 주제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출연한 출연진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면 지금 우리들의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인위적인 것이라고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연출과 조난은 엄밀히 다르다. "뭐... 티비 연출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무인도에서 굶어 죽을 일도 없었겠지만." 이미 희생자들이 다수 나왔었다는 시점부터 아리아의 말이 근거없는 가설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시켜주는 것이다. 아리아와 나의 말을 듣고 있던 세리아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매우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 그래도... 재미있는 발상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세리아 언니." "응..." 세리아도 이제 간단한 회화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의 경지까지 오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가래가 잔뜩 낀 것과 같은 쉰 목소리였지만, 점차적으로 본래 20대 여성의 아리따운 목소리를 되찾아가는 그런 느낌이다, 특히나 세리아의 목소리는 외모에서도 풍기는 것과 같은 순결한 이미지 그대로 목소리 또한 매우 얌전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라서 듣기 좋기도 하다. 귀가 정화된다는 말은 아마도 이럴때 사용하지 않을까 라는 칭찬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니까 말이다. "... 저기. 이거..." "아, 미안." 체리가 거의 다 죽어간다는 목소리로 말하자, 아리아가 재빨리 사과하면서 체리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건내 받는다. 제법 양이 되는 모양이다. 여성 두명이서 '영차'하는 기합을 살짝 넣으면서 드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튼 수고해라." "선배도요... 아. 맞다." 지나가려던 찰나에 아리아가 발걸음을 멈추고 묻기 시작한다. "아까 아침에 했던 말 말인데요." "아침이라면... 무인도 생활 적응 여부에 대해서?" "네. 그거요." 세린도 그렇고, 아리아도 그렇고. 내가 아침에 했던 말이 매우 신경쓰이는 모양이다. 발언자였기도 했던 본인인 나는 정작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있는 부분인데, 의외로 다른 사람들은 매우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이게 바로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인가?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하는 여자들은 사소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많은 고민과 생각을 한다고 하니까. 예전에 인터넷에서 보던 여자 언어라는 것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난 별 뜻 없이 말한 것이었는데." "선배의 그런 말은 무인도에서 우리들이 생활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점에 대해서 한번쯤 다시 생각을 해볼 수 있는 전환점을 마련해주고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구요." "... 그래서 세린이 나에게 그런 말을 했었구나." "사실 그런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지만요." "그렇지? 나쁘진 않은 편이지?" "그렇다고 대놓고 다행이라는 식으로 말을 하면 오히려 제가 선배를 위로해준 방금의 행동이 조금은 후회되는데요." "... 그러냐." 세린이 앉았던 의자에 앉자, 체리가 아리아를 대신해서 말하기 시작한다. "선배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무엇을?" "무인도에 대해서요오..." "무인도라." 우리들이 조난되고, 2달이 지났다. 그 이후에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야생의 생활에서 꾸준히 살아 남았다고 자부할 순 있지만, 아직까지도 많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적응이 된 것은 좋지만, 그래도 역시나 원래 있던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당연하겠지." "선배는 무인도 생활이... 싫은 건가요?" 직설적인 질문. 사실 무인도 생활이 그렇게까지 싫은 편은 또 아니다. 원인 제공이 조난이라는 반 강제적인 수단에 의해서 무인도에 표류된 것일 뿐, 사실 막상 적응하고 보면 그래도 여기 이 섬 또한 사람이 충분히 살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을 벗삼아, 밤하늘을 천장삼아, 그리고 바다를 풍경으로 삼아 매일매일 천연요소와 같이 살아가는 이 생활패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인도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한 가지 종요한 점이 있기 때문에 무인도에서 나가고 싶다고 말한 거야." "중요한 점이요...?"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이유." 내 말에 아리아와 세리아가 체리를 대신해서 고개를 끄덕인다. 감이 좋은 이 은발의 자매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사실을 진작에 눈치챈 모양이다. 그러나 체리는 살짝 감이 안 온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나를 바라본다. 어쩔 수 없이 이 귀여운 후배에게 선배로서 좋은 말을 들려주는 편이 좋겠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아...!" 무인도에서 아무리 편안한 잠자리를 청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마음 편히 발을 쭉 뻗고 잠을 잘 수 없는 불편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님, 사랑하는 사람, 친구,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 기타 등등. 생사를 알 수 없는 우리들의 행방 여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서 안심을 시켜줘야 할 이유가, 그리고 목표가 아직까지 우리들에게 남아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무인도에서 나갈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그리고 지속적인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을 기한의 마을 역시도 한번쯤은 얼굴을 비출 때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저 구조대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자세보다, 기한이 이끌고 있는 생존자 집단과 같이 적극적인 생존 신호를 지속적으로 보내는 것 또한 나쁜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쯤이면 무슨 소득이라도 있을까. ...궁금하군. "그래서. 생존 신호의 성과가 궁금하니까 기한 씨의 마을에 갔다 오겠다는 말이니?" 다른 사람들이 없는 호수에 자리를 잡은 채. 노아 교수님의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와 조우한 유일무이한 생존자 집단이기도 하고, 구조 신호를 담당하고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좋다. 교수님 역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에 다시 한 번 기한의 마을에 방문하는 것에 대해 찬성을 한다. "그럼 다른 사람들한테도 생존자 마을에 대해 알려주는 편이 어떠니?" "괜찮을까요?" "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음..." 현재 기한이 소속되어 있는 마을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나와 노아 교수님, 유아 선배, 그리고 엘리가 전부. 말을 한다고 한다고 마음은 먹고 있었지만, 이게 생각보다 타이밍이 잘 나오지 않아서 일단 우리들끼리 알고 있던 사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더 깊이 들어가보자면, 예신의 존재 역시도 알고 있는 사람은 나와 엘리가 전부. 그 중에서도 엘리는 예신과 잠시 마주쳤을 뿐, 실제로 예신이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여자인지 조차도 모를 것이다. 예신에 관련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도록 하고. "오늘 저녁에 생존자 마을에 대해서 모두한테 말을 해두죠." "응. 그러는 편이 좋을 거 같아." 교수님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생각에 동의한다.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모두에게 생존자 마을의 존재에 대해 공표를 하고 난 이후에, 내일이나 모래쯤 다시 기한의 마을에 방문할 멤버를 새로 정해봐야 할 듯하다. 유아 선배의 부상도 있으니까 이번에는 선배를 제외하고 누구를 포함시켜야 하나. 그리고 또 가급적이면 한 번 갔었던 사람보다는 뉴 페이스를 포함시키는 편이 더 좋을 듯 하고... 엘리는 아무래도 남기는 편이 좋겠지. 예신의 행동 변화는 나 조차도 예상이 안 되니까. 벌써부터 '새로운 원정대 구성'이라는 과제 덕분에 관자놀이가 아파오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 작품 후기 ============================ 진짜로 에피소드 번호가 하나 건너 뛰어버렸군요;; 수정했습니다 ^_^; 그나저나 요새 차가운 걸 많이 먹어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계속 배가 아프군요. 요 3일동안 화장실만 대략 9~10번 갔다온 거 같습니다. 가뜩이나 고시텔이고, 방 안에 화장실과 세면실이 같이 있는 형태인데, 온 지 1주일도 안 되서 화장실 휴지통이 거의 꽉 차갑니다;; 294화 기한이 이끌고 있는 생존자 집단에 대해서 모두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은 결과. "세삼 놀랄 이유라도 있나요?" "......" 아리아의 한 마디로 모든 게 정리될 정도라고 표현해두는 편이 더 좋을까. 이 넓은 무인도에서 고작 생존자들이 우리들 밖에 없을거란 생각은 예전부터 하고 있지 않았다. 실제로 나 또한 예전 아리아와 세리아가 우리 집단에 합류할 시기 즈음에 낯선 생존자를 만난 경험도 있을 뿐더러, 노아 교수님과 함께 작은 돌 섬에 표류되었던 장소 근처에서 생존자의 흔적을 직접 목격한 적도 있다. 여담으로 이예신이란 존재 또한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여하튼. 아리아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 역시 다른 생존자의 여부에 대해서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기에 특별히 놀라거나 그런 반응을 보여주진 않았다. 오히려 우리 말고 다른 생존자들이 있을 가능성을 직접 확인한 사실에 대해서 오히려 그게 정상이라는 듯이 납득을 해버린 게 역으로 나를 당황시킬 정도였으니까. "유에의 말은 즉, 그 생존자 마을에서는 외부에 주기적으로 구조 신호를 보내는 역할을 자처해서 담당하고 있고, 이 시기 정도가 되었으니 우리도 한번쯤은 그 구조신호의 성과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말... 이지?" "정확하고 깔끔하게 정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아 선생님." "뭐, 선생님으로서 당연한 일이니까." 참고로 지아 선생님의 포지션은 교육을 담당하는 위치가 아니라 건강을 책임지는 양호 선생님이란 사실을 잊지 말도록 하자. 생존자 집단에 관련된 사실과 함께 마을에 방문할 시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와 같이 기한과 만날 새 멤버의 선발을 상의할 차례가 왔을 즈음에. "노아랑 아리아가 어떨까." 지아 선생님의 단편적인 제안이었다.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다소 무례한 느낌도 들 수 있는 해명 요구.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내 질문이었지만, 지아 선생님은 기분 나쁘다는 표정 대신 살짝 웃는 미소로 화답한다. "너는 확정 멤버니까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고. 노아의 경우에는 최단시간에, 그리고 가장 많은 마을 사람들과 친해진 케이스잖아? 노아가 합류하면 마을 사람들과의 친분을 이용할 수 있기도 하니까. 그리고 생존자 마을에 갔다오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제일 합리적이고 중립적인 시선으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인물은 나를 제외하고 아리아 밖에 없으니까." 세리아와 체리는 너무 정이 많고 여린 타입의 여성이기에 낯선 사람들과의 조우가 그리 원만하지 않을수도 있다. 세린의 경우는 약간 특이한 사례로 볼 수 있는 것이... 남성혐오증이라는 독특한 병적 증세가 발목을 잡는다. 기한의 성별부터 남자니까 말이다. 마을의 지도자와 눈도 마주치지 못할 멤버가 원정대로 들어오면 꽤나 난감하게 되겠지. "괜찮겠네요." "어른의 충고를 얌전히 새겨듣는 게 좋다잖아. 3명이면 적당할 거 같아." 유아 선배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아 선생님이 선배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는다. "아야얏?!" "너무 나이 강조하지 마라. 너는 뭐 평생 아가씨로 지낼 거 같니?" "노, 농담은 농담으로 받아들여주세요!" 간단한 마을 원정대를 꾸리고 무인도와 무인도 사이의 해변가가 바다 안에서 고개를 들고 모습을 드러낼 시간을 잘 계산해서 다시 작은 무인도 섬으로 오게 되었다. "여기는 변함이 없네." "당연한 말을 하시는군요. 유에 선배. 강산이 변하려면 적어도 10년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다고요. 옛 선조님들의 속담을 통해서 내려오는 기본 지식 아닌가요?" "너의 그 쏘아대는 말투 역시도 여전하구나." "제 말투는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게 더 걱정된다. 이 녀석아." 오랜만에 아리아와의 만담을 주고 받으며 무인도 섬에 도착. 여전히 우리를 반기는 난파선의 일부 잔해가 갈매기 소리와 함께 배의 모습을 드러낸다. "저게 말로만 듣던 그 난파선의 일부군요." 내리쬐는 햇빛을 피하기 위해 손을 이용해 임시로 햇빛 가리개를 만들어 난파선의 잔해를 바라보던 아리아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누구한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머물고 있는 무인도 섬의 난파선과 비교하자면 크기 자체가 작은 편이지만, 그래도 있다는 게 어디인가. 현대물품을 가득 싣고 있는 보물선과 같은 녀석이니까 함부로 무시할 수 없다. 크기의 규모를 놓고 따질게 아니라 있고 없고의 유무가 중요하니까. "이쪽으로." 길을 알고 있는 인물은 나와 노아 교수님. 그 중에서도 오랜만에 선두 자리를 꿰차게 된 노아 교수님이 아리아의 손을 잡고 길을 이끈다. 아리아는 어린 아이 취급을 받는 거 같아서 교수님의 손을 잡는 걸 꺼려했지만, 엘리와 붙어 생활하면서 유독 모성애 수치가 늘은 노아 교수님이었기 때문에 아리아의 거부 반응이 통하지 않았다. 여성 2명이 나란히 손을 잡고 앞장서서 걸어가고, 나는 주변 환경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어간다. 어차피 밤이 된 것도 아니고. 시간상으로 따지자면 대략 점심 시간이 약간 지난 오후다. 해가 질 염려도 없고, 중천에 떠 있는 태양이 자신의 업무를 내팽개치지 않는 이상, 갑작스레 어둠과 조우할 순 없다. 몇 분을 걸어갔을까. "...왜 또 왔어!" "오랜만이다. 인." "함부로 내 이름 부르지 마!!" 라고 말하며 대놓고 으르렁거리기 시작하는 작은 체구의 소녀. 이 무인도 섬에서 처음 조우했던 생존자 중 한 명인 꼬마 숙녀의 적대심 또한 아리아의 독설과 마찬가지로 10년이 지나도 변할 기세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럴 줄 알고 데려왔다. 생존자 집단 사이의 연결고리이자 친분의 대명사, 노아 교수님! "안녕? 오랜만이네." "......" 노아 교수님의 '태양과도 같은 미소' 스킬을 선보이며 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 시작한다. 나에게는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냈던 인이였지만, 노아 교수님의 모성애가 물씬 발동되자 이내 으르렁거리던 이를 감추고 수동적인 자세로 돌입한다. "지아 선생님의 안목이 여기서 대 활약을 하게 되는군요." "그러게." 설마 지아 선생님. 이럴 줄 알고 노아 교수님을 데리고 가라고 말씀을 하셨던 겁니까? 정말 그렇다면 이건 예언가 수준인데. 혹시 나중에 시간이 되신다면, 우리가 무인도에서 구조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예언 좀 해주세요. 제발요. ============================ 작품 후기 ============================ 첫 직장에 첫 출근으로 시간을 보냈던 이번주였습니다. 직장생활은 힘들군요. ㅡ_ㅡ;; 295화 "오! 유에 씨!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세요. 기한 씨. 잘 지내셨죠?" 얼마만의 재회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반가움의 수치 상승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무인도에서 몇 안 되는 생존자이기도 할 뿐더러, 우리보다 훨씬 규모가 큰 생존자 집단을 이끌고 있는 수장 이기한.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우락부락한 체격 역시도 변함이 없다. "노아 씨도 계시고... 그쪽은?" 교수님과는 이미 초면이 아니었기에 알고 있지만, 오늘 새로 동참하게 된 아리아의 존재는 기한의 상식 내에서는 미지의 인물이라는 이름의 카테고리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아리아 본인도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내가 말을 꺼낼 틈새도 주지 않으며 스스로 먼저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리아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외국인이신가요?" "네. 일단은요." 외국인은 외국인이지. 마음씨 안 좋은 외국인. 간단하게 아리아의 소개를 받은 기한이 재차 우리들의 두번째 방문을 환영하며 마을 안으로 이끈다. 우리의 모습을 보자마자 반가운 미소로 다가오는 마을 사람들. 특히나 생존자 마을의 대다수 여성들과 많은 친분을 맺은 노아 교수님이 우리 세 명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기를 달리고 있었다. 노아 교수님의 인기 절정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마음씨 안 좋은 외국인...이 아니라. 아리아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말한다. "유에 선배는 그다지 인기가 없어 보이는군요." "꼭 그렇게 사람이 아파하는 곳을 건들여야 속이 시원하겠냐?" "저는 그냥 눈에 보이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만." "그럼 가급적이면 본인 앞에서 이야기하지 말고 속으로만 생각해." "노력해볼게요." 상당히 건성으로 대답하는 아리아의 말투에서 전혀 반성의 기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 이 녀석이 세리아와 쌍둥이 자매가 맞는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를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국력을 이런 사소한 곳에 낭비시킬 순 없는지라 재빨리 머릿속에서 삭제를 시키도록 하자. 마을 꼬마 아이들이 우리 3명을 둘러보더니, 친근함을 가장 많이 쌓은 인기 절정의 인물, 노아 교수니에게 묻는다. "엘리는 안 왔어요??" 천진난만한 표정의 꼬마 아이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자, 노아 교수님이 귀여워 죽겠다는 눈망울을 하면서 친절히 대답해준다. "응. 오늘은 같이 안 왔단다." "우..." 노골적으로 실망해하는 아이들의 표정에서 엘리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차라리 내가 베이스 캠프에 남고 엘리를 데려올 걸 그랬나. 라는 후회감이 절로 들 만한 표정이라고 할까. 의도치 않게 별로 달갑지 않은 손님으로 낙인 찍혀버렸다. 마을 사람들과의 가벼운 인사를 뒤로 하고. 노아 교수님을 제외하고 나와 아리아는 기한을 따라 마을 한 가운데에 위치한 광장에 자리를 옮긴다. "...이거나 마셔." "땡큐." "흥!!" 여전히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성을 보여주는 인이 나와 아리아에게 마실 물을 건네준다. 오랫동안 계속해서 행군을 해왔기 때문에 목이 말랐던 찰나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 즈음. "마침 좋은 소식이 있는데, 여러분들에게 들려드릴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군요." "좋은 소식이라니요?" 첫 마디를 뗀 기한의 표정이 오늘따라 유독 밝다고 생각했더니만, 내 착각이 아니었나 보다. "이 마을에서 지속적으로 해오던 구조 신호 요청에 어느정도 성과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네에?!" 화들짝 놀란 나와 더불어 아리아 또한 괴상망측한 비명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서 반사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더라도, 아리아가 근래 이렇게까지 과민 반응을 보여준 적은 없었는데. 그만큼 우리들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해오던 무인도 생활에서 방금 들은 소식이 가장 충격적이고, 또 가장 쇼킹한 말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봐도 무방할 것이다. "저, 정말입니까? 구조대가 우리들을 발견했다는 건가요?!" 뒤늦게 체면을 차리기 시작한 아리아의 심경까지 대변해서 모든 궁금증을 전부 기한에게 털어놓는다. "진정하세요. 유에 씨. 저도 그렇게 확답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말 끝을 흐리던 기한이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사건의 전말을 토로한다. "저번에 유에 씨가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 얼핏 헬기 비슷한 소리를 들은 마을 주민이 있었단 사실을 접한 적이 있을 겁니다." "네. 그때는 분명... 어르신 한 분이 그 소리를 들었다고 했었습니다만." "그 때 당시에는 저 또한 그 분이 잘못 들으셨겠지. 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최근에 마을 주민 2~3명이 다른 소리를 들었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어떤 뜻인가요?" "헬기라는 구체적인 소리는 아니지만... 비행기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소리라고 할까요. 5초 정도 소리를 들었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헬기. 그리고 이번에는 비행기. 두 달 정도가 지난 무인도 표류기 생활에서, 단순한 제보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희망의 빛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이번 제보는 저번과 비교해서 확연하게 다른 점이, 단순히 한 명만이 아닌 2~3명이라는 다수가 소리를 접했다. 게다가 아주 정확한 시간은 아니지만, 5초라는 구체적인 증거도 있으니까. "계속 구조 신호를 보내면, 조만간 구조대가 우리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기한의 확신 넘치는 말. 분명 기한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자연에서 절대로 들을 수 없는 인위적인 소리가 생존자들의 귓가에 멤돌게 된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구조 신호를 요청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 말은 곧. "다른 쪽의 위협도 생각을 해 둘 필요성이 있겠군요." "...그러게요." 기한도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둘이 생각하고 있는 잠재적 위협 요소. 무인도에 서식하고 있는 덩치 큰 들짐승보다도, 갈대와도 같은 변덕스러움을 갖춘 날씨의 변화보다도, 그리고 제대로 된 의료 시설도 없는 장소에서 걸릴 수 있는 병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 이예신. "아마 그 여자도 마을 주민들이 들었던 소리를 접하게 되었다면, 보다 더 많은 방해 공작이 들어오겠죠." "그 부분에 대해서도 대책을 세워야 할 필요성이 있겠군요." 이예신이라는 여자를 막을 방법에 대해 생각해둬야 할 상황이 오게 된 셈이다. 무턱대고 구조대를 반기기 보다는, 무인도에서 최종적으로 장애물 역할을 하게 될 예신을 어떤 방식으로 대처해야 좋을지가 아마도 이 무인도 표류 생활에 있어서 마지막 숙제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나와 기한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는지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일관하던 아리아가 무인도에 표류되고 난 이후에 부쩍 자란 은발을 쓸어 내리면서 말한다. "...뭔가요. 이 무겁고 칙칙한 분위기. 도대체 출처가 어디에요." 아리아와 노아 교수님, 그리고 내가 잘 공간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휴게실을 임시 개조해 만든 공간. 여성 2명이 청소를 담당하는 동안, 나는 기한과 마을 사람 몇 명을 동원해서 다시 한 번 구조 신호를 담당하고 있는 거대 화로터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이다. "최근에는 경계를 많이 강화했죠. 덕분에 마을 남자들은 다 죽을 맛입니다." "하하..." 기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눈치를 하고 있었지만, 이것도 다 나 혼자 잘 되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들이 서로 잘 살기 위해, 좀 더 상세히 말하자면 무인도에서 구출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화로터에 많은 신경과 집중을 투자해야 하는 상황. 그렇기에 굳이 예신의 정체를 설명해줄 필요 없이, 마을 사람들은 기한의 빡센 불침번 근무 스케쥴을 이해해주고 있었다. 모 과자 CF에도 나오지 않았었나.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그 대사가 유독 가슴이 와 닿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곧 도착입니다." 해가 저물기 전에 화로터에 도착한 우리들. 이미 그 곳에서는 화로 지킴이라 임시로 붙여놓은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2명의 마을 주민이 화로터 근처를 관리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한 명에게 다가간 기한이 화로터의 전체적인 모습을 눈짐작으로 한번 쭉 보며 묻는다. "별다른 이상은 없었죠?" "네. 특별한 사항은 별로..." "알겠습니다. 다음 근무자들도 와 있으니, 이제 돌아가서 쉬도록 하세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인 전번 근무자들이 후번 근무자와 나에게도 가볍게 인사하며 마을로 내려간다. 군대에 있을때도 대략 이런 식으로 근무 교대를 했던 거 같은데. 당직사병이 근무자들을 이끌고 와서 근무 교대 하는 그런 방식 말이다. ...무인도에 오고 나서도 군대 생각이라니. 이런 내가 정말 싫어지는군. 잊고 싶다. 제발. ============================ 작품 후기 ============================ 요즘 정글의 법칙하고 더 지니어스 보는 맛에 주말을 보내고 있습니다. 홍진호가 진짜 머리가 좋군요... 개인적으로 홍진호가 우승했으면 좋겠습니다! 296화 무사히 근무 교대를 마치고, 또 화로터가 별다른 문제에 봉착하지 않았다는 점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뒤에서야 다시 마을로 내려오게 된 나와 기한. 이미 우리가 임시로 머물게 될 공간의 뒷정리를 미리 마치고 기다리던 아리아와 노아 교수님이 내 복귀를 반긴다. "어서와. 유에." "어서오세요. 선배. 영원히 안 오시길 바랬지만, 불행하게도 제 소원 수리가 하늘에 계신 높으신 분께 전달되지 않았나 보네요." 잠깐 취소. 내 복귀를 반기지 않는 인물 한 명 추가요. "넌 선배에 대한 존경심마저도 없어지려고 하냐." "그건 선배의 착각이겠죠." "나도 내 착각이었으면 좋겠다만." 착각은 오해를 낳고, 오해는 불신을 낳는다. 내가 아리아를 불신하게 되는 경우가 없었으면 좋겠다만. 그거야 아리아의 태도 변화가 많은 영향을 끼칠 거 같으니까 잠정적으로 포기하는 편이 좋겠지. "이거, 마을에서 받은 저녁식사야." 아리아와는 다르게 세리아와 체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아 교수님이라는 3대 천사표 멤버 중 한 명이기도 한 교수님이 너무나도 눈부시고 아름다운 미소를 선보이며 내 저녁식사를 건네주신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교수님. 그리고 아리아와 정말 다른 그 상냥한 태도,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어디보자. 오늘의 메뉴는 물과 고기. 우리가 사냥했던 멧돼지와 비슷한 형태의 육질을 자랑하는 고기를 한 점 뜯으면서 잠시나마 공복을 해결해본다. 역시 마을 규모도 클 뿐더러 인력도 많으니까 사냥 역시도 손쉽게 하는 구나. 우리가 올 때마다 고기 반찬이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도 이 마을에 합류를 해두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라는 후회감이 잠시나마 밀려온다. 뭐... 그래도 우리들끼리 있는 게 더 재미있긴 하지만. 가볍게 식사를 마치고 나서. 대략 2~3일 동안 기한의 마을에 머물면서 혹시나 모를 이예신의 등장에 대비를 했지만. 요 며칠동안 그녀는 코빼기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내가 이 마을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일수도 있다. 집단 행동을 하고 있는 우리들보다도, 개별 행동을 하고 있는 예신의 활동 폭이 더 넓을지도 모르니까. 어쨌든. 그 동안 묘하게 잠잠한 이예신의 행방이 궁금하긴 하지만, 그래도 계속 마을에 머무르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기에 일단 잠정적인 철수 결정을 내리는 나. 노아 교수님과 아리아에게는 기한에게 지금까지의 작업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다 전해들었단 말로 가볍게 복귀 의사에 관한 근거를 댈 수 있었다. "그럼 나중에 또 오겠습니다." "구조대가 오게 된다면, 제가 곧장 찾아가도록 하죠." "그래준다면야 더할나위 없이 고맙지요." 역시 이 사람은 착하다. 천성이 착해서 그런 것일까. 요즘같은 경우에는 나쁜 남자가 대세라고 하던데. 시대를 잘못 타고난 기한에게 잠시나마 심심한 위로를 전해주도록 하자. 마을을 떠나오고 난 이후에 다시 원래 우리들이 머물고 있는 베이스 캠프로 향하는 도중. "역시 집이 편하다니까." "그러게." 아리아의 말에 노아 교수님이 적극적으로 옹호를 해주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벌써 우리들이 베이스 캠프에 도달한 것은 절대 아니다. 단지, 그 동안 우리들이 오고 갔던 익숙한 길이 등장해서 저런 말이 나온 것 뿐이니까. 착각하지 말도록 하자. "아. 진짜로 다 왔다!" 기쁜 표정을 지으며 종종걸음으로 통나무 집의 문을 열려던 아리아의 행동이. 갑작스레 멈춘다. 그와 동시에. "어머. 처음 뵙겠습니다."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우리 시선 안으로 들어온다. 산장 바깥으로 모습을 내비치며 등장한 여성. 긴 머리의 흑발이 공터 한 가운데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너풀거리며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어서오세요. 유에." "너..." 우리 산장에 머물던 인물은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모르는 인물도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아는 사이니?" 노아 교수님이 의문 부호를 내비치며 나에게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져온다. 내 입에 올리기 싫은 이름 중 베스트 넘버 5 안에 들 법한 인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질문을 받았으면 아는 한도 내에서는 대답해드리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일단은요." 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그녀의 이름을 읊어본다. "이예신..." 솔직히 말해서 놀랐다. 내가 무인도에 오고 나서 가장 놀란 일 중 하나라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만큼 놀랐다고 표현한다면 모두가 공감해줄까. 어쨌든 이런 표현법을 사용할 정도로 많이 놀라버린 내 심정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다름아닌. 이예신이 너무나도 태연하게 우리가 머물고 있던 통나무 집 거실에 앉아있는 거 아닌가. 처음에는 내가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렇다 해도 청각과 시각을 동시에 착각할 순 없다. 무엇보다도 여기는 신기루를 볼 수 있을법한 환경인 사막 한 가운데도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나요?" "잠시 바깥에 일이 있다고 나갔어요. 조만간 들어올 거예요." "아... 그렇군요." 노아 교수님의 말에 친절히, 너무나도 친절히 답변하는 이예신. 정말로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예신이 맞나 싶을 정도로 180도 달라진 태도 변화에 어떤 코멘트를 달아야 좋을지 모르겠다. 예신의 실체를 알고 있는 나와 달리. 노아 교수님과 아리아는 얌전하고 참한 태도를 줄곧 유지하고 있는 예신이란 여자가 마음에 드는지 연신 말을 붙이면서 이 산장에 오게 된 계기와 과정 등등을 묻느라 여념이 없다. 대충 건너 건너 들은 내용을 토대로 설명하자면. 혼자서 무인도에 표류되고 난 이후에 지금까지 지내오다가, 생존자들이 머물고 있는 장소(즉, 이 통나무 집을 가리키는 것이다.)를 발견하고 오게 되었다는 말을 한다. 아무리 봐도 거짓말이란 사실을 알 수 있지만. 분명 저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함부로 판단할 순 없겠지. 노아 교수님은 사람 자체를 의심하지 않으니까 그렇다 쳐도, 아리아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을 해보지만. 이예신보다 더 완벽한 거짓 연기를 할 순 없을 거다. 그게 내가 내린 판단. ============================ 작품 후기 ============================ 예전에 연재했었던 '엘프와 결혼하는 방법'을 다시 연재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설명을 드리자면, 우연히 엘프와 마주친 청년의 유쾌 상쾌 통쾌한 먼치킨 판타지 이야기입니다. 이것도 다 언제 올릴지 모르겠군요;; 297화 무인도 내에서 만큼은 가히 최강이라는 칭호를 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예신일 것이다. 치밀한 심리전, 그리고 혼자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강한 생존력. 무인도라는 현대 문명과 상당히 동떨어진 원시시대 환경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개별 플레이를 보여주며 지금까지 살아 남았다. 게다가 생존하는 것 이상으로 다른 집단에게 알 수 없는 위압감을 선사해주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왔다. 그만큼 저 여자는 위험인물이다. 가급적이면 엮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독하게 위험한 여자. 그러나 가장 피하고 싶었던 상대가 공교롭게도 자진해서 우리들에게 찾아오고 말았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차라리 처음부터 적대감을 드러내며 접근했으면, 내가 예신을 경계하는 합리적인 근거를 다른 일행들에게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신은 지금 '착한 여자'를 연기하고 있다.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착하디 착한 여자를. "뒷정리는 제가 할게요. 다른 곳에 갔다 오시느라 피곤하시죠?" "아니에요. 혼자서 다 하시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니까 도와드릴게요." "어머, 고마워요." 노아 교수님과 예신이 주고 받는 말이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예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고 있지만, 계속 봐왔던 결과는 한 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 재수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생존자 집단의 리더들을 찾아가 암묵적인 공포심을 심어두고, 무인도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될 거라고 선언했던 그 악녀가 지금은 노아 교수님과 같이 오손도손 집안일을 하고 있다는 게 소름이 돋을 정도다. 실제로 닭살이 조금 난 듯한 기분이 드는데... 착각은 아닐 것이다. "착한 분이네요." "...과연 그럴까." 아리아의 말에 의미심장한 코멘트를 달아준다. 실제로 착한 여자는 절대로 아니다. 이예신의 실체는 다름아닌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물론 그녀의 정체에 대해선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무인도에 오기 전에 그녀가 무슨 일을 해왔고, 어떠한 연유에서 사회라는 집단을 극도로 증오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으니까. 잠자코 노아 교수님과 예신의 뒷모습을 지속적으로 응시한다. 행여나 노아 교수님에게 해를 가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만약을 대비해서 시선 고정. 그러나 아리아는 이런 나의 모습을 다른 쪽으로 해석한 모양인지 또 한 번 날카로운 지적이 날라온다. "여성의 뒷태에 많은 관심을 품고 있으시군요." "그런 불순한 의도로 저 두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니까." "선배의 말이 설득력이 없다는 것 정도는 본인이 가장 잘 알고 계시죠?" "......" 요즘 세상은 여성에 대한 인권이 급속도로 증가된 게 사실이다. 특히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선 더더욱. 여자를 3초만 바라봐도 성희롱이 인정되며, 3번 이상 고백을 할 경우에도 성추행이라고 인정될 정도로 희안한 나라속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아리아의 말에 부정적인 대답을 들려줄 자격이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이래서 대한민국에선 남자로 태어난 게 죄라니까. 여자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제기랄.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두 여자. 그리고 거실에 앉아있던 나와 아리아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들이 집단으로 침투하기 시작한다. "다들 이제야 오나봐요." "그러게." 아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바깥에 외출을 다녀온 일행들을 손수 반기러 향한다. 나도 가고 싶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예신과 노아 교수님 단 둘이 남겨두기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 많은지라 그럴 수도 없는 노릇. "다녀왔어." "어서오세요." 지아 선생님을 필두로 재활치료중인 유아 선배, 그리고 세린과 세리아, 체리와 엘리(머리 위에 올려져 있는 초호기도 포함)가 통나무 집 내부로 들어온다. "잘 갔다 왔어?" "보시다시피요." "뭐야. 말투가 퉁명스럽네." 유아 선배가 내 반응이 영 시원치 않다는 평가를 내리며 테이블 맞은 편에 자리를 잡는다. "그나저나 예신이하고 인사는 나눴어?" "대충은요." "어때. 엄청 착한 아이지?" "하하하..." 모르는 게 약이다. 이 속담이 지금처럼 가슴 속에 와닿은 적이 과연 살면서 몇이나 있을까. 예신의 실체를 알고 나면, 아마도 노아 교수님은 기절을 할 정도겠지. 유아 선배는 어느정도 정신적인 충격을 이겨낼 수 있을 거 같지만, 지금까지 보아왔던 예신의 모습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실망감과 동시에 일종의 배신감마저 느낄 가능성도 낮지는 않다. 배신감. 배신감이라... 예신이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고 우리 집단에 존재를 밝히면서까지 들어온 이유. 그리고 그 목적. ... 전혀 모르겠다. 솔직히 내가 두뇌 회전이 빠른 것도 아니고. 예신의 머릿속을 예측하고 다녔다면, 그녀에게 휘둘렸을 이유도 없다. 무슨 꿍꿍이일까. 괜히 심심해서 일부러 착한 여자 행새를 하며 우리들에게 접근한 건 아닐테고. 그것보다 더 알 수 없는건 따로 있다. "엘리." "...?" "잠깐 이리로 와 봐."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거리며 작은 다리로 총총총 걸어오는 금발의 여자아이. 오랜만에 언니들이랑 나들이를 다녀온 게 기쁜지, 유독 분위기가 업(Up) 되어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을 피해 잠시 엘리를 밖으로 데리고 나온 나는 말소리를 살짝 죽이면서 천진난만한 소녀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엘리. 우리 캠프에 와 있는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고 있지?" "...Yes." "그래. 그렇구나." 엘리는 예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 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그녀의 실체를 알고 있는 인물 중 하나. 하지만 엘리는 별다른 거부감을 보이지 않고 얌전히 예신을 받아들인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무인도에서 우리들의 주 적이어야 할 예신의 존재를 허락하다니. 내가 묻고 싶어하는 질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눈치를 챈 모양인지, 엘리가 길게 영어로 장문의 대화를 시도한다. 쏼라쏼라. ... 알아들을 리가 없나.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쪽은 엘리지만, 나는 엘리의 영어 대화를 아직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나 지금과 같은 장문의 회화 실력은... 없는 게 당연지사. 그래도 있는 영어 지식, 없는 영어 지식들을 모아 모아서 간단하게 조합해본 결과. '사람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착하게 개과천선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그렇지? 오빠♡' 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끝에 하트 표시는 뭐냐고? ...그러니까 추측한 거라니까. 절대로 내 사심이 가득한 문구가 아니라고. 이 사실을 기한에게 알릴까. 그나마 나와 함께 예신과 공동으로 대적할 수 있는 연합을 구성중인 사람이기도 한데. 어찌해야 좋을지 혼자서 고민을 해보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 때. "유에." 지금 상황에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거 아닌가. "나에게 할 말이 있는 거 아니야?" "...무진장 많지." 태연하게 남의 생존자 집단에 들어와서, 그것도 착한 여자 연기를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동화하고 있다니. 무인도 정복기는 어디로 간 거냐. 마녀 양반.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예신의 속내를 정확하게 추측할 수 없다면, 본인의 입에서 직접 듣는 수 밖에 없다. "엘리. 잠깐 자리 좀 비켜줄래?" "......" 나를 올려다보던 엘리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통나무 집으로 들어간다. 정말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로구나. 우리 엘리는. "자. 이제." 호흡을 길게 내쉰 뒤에. 똑바로 예신을 응시하며 말한다. "그 착한 여자 가면을 쓰게 된 이유부터 들어볼까." ============================ 작품 후기 ============================ 가면은 영어로 페르소나라고 하지요. 페르소나라는 비디오 게임이 떠오릅니다. 총공격 찬스!! 298화 "언제까지 착한 여자 가면을 쓰고 있을거냐. 이예신." "어머. 여자에게 그런 무서운 말투를 사용하면 비매너라구요." "상대방에게 매너 있는 대접을 받고 싶다면, 먼저 네가 매너 있는 모습을 평상시에 보여줬어야지."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 우리 나라에서는 꽤나 유명한 속담인데, 이예신이란 여자는 공교롭게도 이 속담의 존재 여부를 잘 모르나 보다. 아니면 알고 있지만, 모른 척 하고 있을 가능성도 크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거짓된 연기를 보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본래의 모습을 숨기고 있으면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뭐, 아무도 없을 때니까 잠시 가면을 벗어볼까." 라고 말하며 진짜로 가면을 벗는 듯한 마임을 선보인다. 어설프게 짝이 없는 모습이지만, 행동 주체가 이예신이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진다. 여자이면서도 이렇게나 높은 압박을 선사해주는 인물이 과연 또 있을까.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네." "알면서 묻냐. 그것보다 왜 이 곳에 있는 거야. 목적이 뭔데." "목적? 목적은..." 허리춤에 양 손을 올려놓은 예신이 너무나도 시원스러운 미소를 선보이며 말한다. "없어." "...뭐?" "있긴 했지만, 그것도 얼마 전에 끝나버렸으니까." "얼마 전이라니..." "정확히 말하자면 일주일 전." "......" 내가 노아 교수님과 아리아를 데리고 기한의 마을에 간 적은 3일 전이다. 그리고 복귀는 바로 오늘이기도 한 당일. 기한에게 들었던 구조기의 소리는. 예신이 언급한 기간인 '일주일 전'과 같은 날짜에 마을 사람들의 귓가를 자극시켰다. "조만간 이 섬에 있는 모든 생존자들이 눈치채겠지만, 구조대가 이 섬의 존재를 발견했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지?" "우리는 구조될 수 있다는 뜻이야?!" "정답." 세상에나. 무인도에서 몇 달을 버텼는지 조차도 까마득해질 시기에 구조대가 올 수 있다니. 희망적인 말에 나 또한 취하고 싶지만, 이 말을 하고 있는 당사자가 이예신이라는 점 때문이 무턱대고 맹신할 수는 없다. "날 속이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 "내가 무슨 이득이 있다고 너에게 이런 정보를 흘리겠어?" "우리가 생존자 마을에서 기한 씨에게 들은 정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의미였어. 절대로 '확신' 단계가 아니었단 말이야. 그런데 넌 무슨 근거로 '확신'할 수 있지?" "역시. 내가 점찍었던 장난감다워. 머리가 제법 돌아가는구나." "똑똑하고 뭐고를 떠나서 기초 상식이잖아." 사람은 사람을 믿지 않는다. 타인은 타인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 사회의 법칙. 나 자신이 아니고선, 100퍼센트 신뢰란 절대로 불가능하다. "이 섬을 지나간 건 AH-179. 구조와 탐색용으로 사용중인 소형 비행기의 소음이었어." "단지 소리 하나만으로 기체의 기종까지 알 수 있다는 거야?" "가능해. 왜냐하면 나라는 인물은 그렇게 커 왔거든." "... 무슨 뜻이지?" 바람에 너풀거리는 긴 흑발을 거칠게 훑어 내리는 이예신. 그녀의 눈빛이 점점 날카롭게 변하기 시작한다. 마치. 처음 그녀와 마주쳤을 때의 상황처럼. "난 살인청부업자니까." 솔직히 무인도에 표류되고 나서 내가 지금까지 가장 궁금하게 여기던 요소가 하나 있다. 이예신. 그녀는 어째서 무인도에 계속 남아있고 싶어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인간 사회에 대한 증오가 높은가. 또 비정상적인 그녀의 행태는 무슨 원인이 작용한 것일까. 그 모든 요소가 퍼즐처럼 머릿속에 차곡차곡 맞춰져가는 느낌이 전신을 통해 울린다. 인간 사회를 싫어하는 이유.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여준 이유. 그녀는 사람을 죽이는 일을 업으로 삼는 존재. "이번 유람선 내부에 의뢰인이 요청한 대상자가 있었어. 그래서 나도 배에 탑승하게 된 거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일이 커질 줄은 몰랐어." "설마 무인도에 표류된 사람들 중에서 네가 죽여야 할 대상자가 있다는 뜻이냐?" "천만에. 우연의 일치가 겹쳐서 이 무인도에 표류되어 온 것도 행운인데, 그 표류된 생존자들 중에서도 내가 죽여야 할 대상자가 있다는 건 말 그대로 길 가다가 벼락 맞을 확률과 똑같이 않을까." "고등학생 때부터 수학에는 취미가 없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만." "다음부터는 확률과 통계도 제대로 공부해." "노력해보마." 무인도에 표류된 사람들 중에서 예신이 죽여야 할 대상자는 없다. 뭐...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그건 상관 없는 일이니까. 중요한 건, 내 계획이 망가졌다는 사실이지." "무인도에 있는 생존자들을 데리고 너만의 세계를 만들겠다는 그 말도 안 되는 계획 말이냐?" "말도 안 되다니. 그런 섭섭한 소리 하지 마. 내가 보기엔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던 인간 사회가 더 말도 안 되는 걸?" "......" "넌 이곳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거야? 보이지 않는 억압 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인 무인도에 대해서. 한 없이 무한한 일탈을 즐길 수 있는 이 곳에서. 너는 탈출하고 싶다는 거야? 탈출해야 할 곳은 무인도가 아니라 인간 사회잖아. 암묵적으로 부여된 사회적 위치에 따른 책임을 너는 양 어깨에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가는 거야. 대학에 진학하고 난 이후에 취업을 하고, 가정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밤낮 없이 모든 시간을 직장에 투자하지. 마치 노예처럼." "......" "그런게 과연 네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회가 너에게 뭘 해줬는데? 네가 그렇게 뼈 빠지게 일을 한다고 무엇이 남는데? 무엇을 인정해주는데?" 사람을 죽이는 일을 도맡아온 그녀에게 있어선. 어찌보면 사회라는 하나의 인간 집단이 지옥처럼 보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가 보아온 사회의 어두운 단면. 추악한 면모. 그래. 저 녀석은 지금 자신이 내뱉고 있는 말들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하다. 이예신은 그런 녀석이니까. "무인도에 오고 나서." 호흡을 잠시 고르며 천천히 그녀의 말에 대한 답변을 내놓는다. "처음에는 정말 내가 처한 상황이 재수도 없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그렇다고 괴로운 기억만 있는 것도 아니었어." 무인도에서 나는 자연 환경의 고마움을 느꼈다. 무인도에서 나는 덧 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가치를 깨달았다. 그리고 무인도에서 나는. ...동료의 소중함을 배웠다. ============================ 작품 후기 ============================ 300편까지 단 두 편 남았습니다!! 그리고 '엘프와 결혼하는 방법'도 많은 관심과 애정과 사랑을 부탁합니다. ^_^; 299화 천천히 머릿속을 정리하며 예신에게 내 생각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어쩌면 아무런 구속이 없는 무인도가, 인간 사회보다도 훨씬 더 살기 편할수도 있지." 현대 문명과 동떨어져 살아가는 건 물질적으로도 힘든 일이다. 사소한 예시를 들자면, 화장지가 없어서 대변을 보고 난 이후에 뒷처리를 할 때도 나뭇잎으로 해결해야 하는 게 바로 무인도 생활이니까. 편한 생활은 무인도에서 꿈도 꾸지 못할 사치다. 편의점에 가서 얇은 지폐와 먹을 것을 교환할 수도 없을 뿐더러, 전화기를 들고 손가락을 몇번 두드리기만 하면 배달의 민족이라 불리는 우리나라 국민 중 배달 알바생이 친절하게 직접 음식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우리는. 몸이 편한 대신에, 정신적인 고통을 지속적으로 맛본다. 돈이 없으면 불편한 세상. 지위가 낮으면 차별받는 세상. 그것이 바로 사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무인도의 생활이 더 나아보일 수 있다. 몸이 불편한 건, 우리가 현대 문물로 뒤덮인 사회에서 자라왔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부터 아무런 문물 없이, 말 그대로 원시인 생활을 해왔다면 그다지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원시인이 화장지의 존재 유무를 알 수는 없을 테니까. 적응을 하면 된다. 불편함 따위는. 무인도에서의 불편함은 한마디로 극복 가능. 그러나 사회에서의 불편함은 과연 내 힘으로,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극복이 가능할까? 높은 사람에게 굽신거리며, 당장 내일 먹을 거리를 벌어야 하는 직장인의 비애를 과연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천만에. 그런게 있다면, 말 그대로 판타지. 굳이 소설책을 빌려 보지 않더라도, 간접적인 판타지 체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예신이 나에게 하고 있는 말. 무인도를 선택해라. 그리고 자유를 선택해라. 사회에서 구속구를 스스로 단 채 노예 생활을 할 바에야 차라리 무인도에서 마음 편히 생애를 보내겠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무인도에서 탈출한다는 게 우리들의 꿈이 되어버렸거든." "......" 예신의 표정이 본래의 차가움 속성으로 돌아온다. 착한 여자 가면은 온데간데 없이 박살난 상태. 저렇게 된다면, 분리수거도 못할 것이다. "이예신. 네 말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어. 말 그대로 요즘 사회는 각박하니까. 특히나 어두운 세계에서 자라온 네가 말하는 거라면, 더더욱 설득력이 높다고 나 또한 인정할게." "그런데 어째서 무인도를 포기하는 거지?" "말했잖아? 이미 탈출은 우리들의 '꿈'이 되었다고." 무인도에는 낭만이 있다. 하지만 그 낭만 속에서. 우리들은 탈출할 수 있다는 목표의식 하나만을 두고 지금까지 힘들었던 무인도 생활을 버텨왔다.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계기. 그것이 바로 목표니까. "목표를 잃은 삶을 사는 게 더 초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얼음 마녀 양." "...사탕발림이 많이 늘었구나. 장난감." "넌 말장난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진심이야. 왜냐하면 지금까지 무인도 생활을 하면서 내 동료들에게 배웠던 사실들이니까." "......" "그러니까 우리들은 이 섬에서 나갈 거야. 각박한 사회로 돌아간다 말해도 겁먹지 않아. 다시 감옥으로 들어간다 말해도 두렵지 않아. 결과가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가 '선택'한 거니까." 그래. 이것이 내가 무인도에서 내린 결정이니까. "구조대가 온다면, 우리도 적극적으로 기한 씨와 사람들을 도와 구조 신호를 보내도록 돕겠어." "결국 최악의 선택을 하는구나. 안타까워." "내 입장에선 씁쓸한 말을 하는 네 쪽이 더 안타깝지만." "이해해줄거란 생각은 안 해." "알아주니 고맙군." 이예신이란 여자는 원래 그렇다. 고독한 인생을 살아온 불쌍한 여자니까. "축하해. 네가 이겼어. 장난감." "말투는 그리 축하해주지 않는 말투인데?" "태생이 이러니까 네가 이해하는 게 더 좋을걸." 이라고 말을 하면서. 힘 빠진 웃음을 선보인다. 무인도에 와서 처음 보는 예신의 미소. 허무함이 다소 짙은 공허한 웃음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가 웃었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고 싶다. "그런데 말이야. 나는 사실 의외로 승부욕이 많은 타입의 여자거든." "'의외'가 아니라 '대놓고'야." 그 동안의 행실을 살펴보면, 예신만큼 대장부 기질을 보인 여자도 찾기 힘들다. 사회에서도 저 녀석처럼 독특한 언행을 보여주는 여자도 없는데. 하필이면 무인도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이것도 우연이라면 우연이겠지. "아, 맞아. 그래. 우연이야." 천천히 예신의 손이 오른쪽 바지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줄곧 '우연'이라는 단어만을 읊으면서. "그리고 내가 '이걸' 가지고 있던 것 역시도 우연이겠지?" "너...!!" 순간적으로 숨이 턱 하고 막히는 줄 알았다. 예신의 손에 들려나온 물건. 아니, 사실은 어찌보면 예신이 그걸 가지고 다니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저 녀석은 살인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암살자니까. '총'을 가지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사실은 최후의 수단까지 아끼려고 했었는데." 작은 권총. 실물인가. 아니면 비비탄이 들어가는 장난감 총? 우연히 주워서 진짜 권총인 것처럼 연기하며 나를 협박하려고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위험한 추측. 예신이 총을 가지고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근거를 내세운다면, 저 총은 진짜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사실은 알고 있었어. 내가 아무리 무인도에서 다른 생존자들을 협박해봤자, 어차피 구조대가 오게 되면 모든 게 끝이라고." 점점 총을 들어올리는 예신. 사람의 머리 위치까지 총구를 들어올린 그녀는. "지겹네. 여러모로." 자신의 머리 옆에 권총을 겨눈다. 자포자기의 감정을 담은 눈빛으로.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시선을 나에게 고정시킨 채로. 관자놀이에 겨눈 총구를 통해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단절시키려는 그녀의 의지가,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통해서 천천히 방아쇠에게 무게감을 더하기 시작한다. 당황스러운 건 나 또한 마찬가지. 무의식적으로 예신을 향해 달려가려던 순간. "잘 있어. 더러운 세상."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통해 전해진다. ============================ 작품 후기 ============================ 1편만 더 연재하면 300편입니다. 동시에 완결도 거의 가까워졌군요. 후기에 할 말이 잔뜩 남아있기에, 가급적이면 여담을 아껴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연재중인 '엘프와 결혼하는 방법'도 많은 관심을! 300화 손을 뻗는다. 그리고 최대한 예신이 서 있는 위치를 향해 뛰어간다. 하지만 닿을 수 있을까. 그녀가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기는 시간과, 내가 예신을 말리는 시간을 비교해서 본다면. 상대적으로도, 그리고 절대적으로도 예신쪽이 더 빠르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 그녀가 선택한 건 최악의 수단이다. 자살. 그녀만의 세계를 가질 수 없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수밖에. 그런 일념 하나만으로, 예신은 지금까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총의 여부를 다른 생존자들에게 감춰왔다. 협박용이 아닌 최후의 선택용으로. 어차피 무인도 내에서 예신을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없다. 하지만 그 상식이 점점 틀어지면서, 그녀에게 정신적으로 커다란 압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남자는 여자보다 근력이 높다. 생물학적으로 극복하기 힘든 성별의 차이이기 때문에, 무슨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나는 예신을 이길 수 있게 된다. 실제로 기한의 마을에서 예신과 맞붙었을 때, 그녀의 공격이 별로 아프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구조대가 다가온다. 그녀가 무슨 수단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무인도 전역에 퍼진 생존자들의 구조요청 신호를 막을 방법같은 건 전혀 없다. 결국. 그녀는 패배했다. 생존자들의 강한 의지에 의해. 그렇기에 그녀는 선택했다. 그녀만의 세계를 포기하는 것으로. 하지만 사람이 내 눈 앞에서 죽는 건 절대로 볼 수 없다. 설사 그게 악인惡人이라 하더라도. "뭐하는 거야!!!" "?!" 예신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 안으며, 강제적으로 그녀를 바닥에 넘어뜨리는 유아 선배. 뒤이어 세린도 예신이 움직이지 못하게끔 두 손으로 강하게 총을 잡은 손을 압박하며, 그 사이 엘리가 능숙한 솜씨로 예신의 손에서 총을 빼앗는다. 어두운 곳에서 급습을 당해버린 예신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겠다는 표정으로 넘어진 채 다른 사람들을 올려다본다. 그 대단한 이예신도 설마 남은 생존자 일행들이 자신을 덮치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겠지. 왜냐하면. "잘했어. 엘리." "......" 총을 나에게 건네주는 엘리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순간적으로 살기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예신이 소리치기 시작한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간단해. 엘리한테 네 정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주게끔 미리 말을 해뒀어." "뭐라고...?" "네가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니까.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엘리를 다시 산장으로 돌려보내는 척 하면서 작은 부탁을 한 셈이지. 설마 네가 총으로 자살을 할 생각은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럼 일부러 계속해서 말을 걸었던 것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기 위해서야." 눈 앞에서 사람이 죽는 꼴은 절대로 보기 싫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모습을 보고서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건 방관죄이기도 하니까. 예신이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살인청부업자라는 일을 해왔던 악녀라 하더라도. 하나의 똑같은 생명이다. 이예신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여자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를 포박해두는 건 레이디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평소 행실을 제대로 했으면 됐잖아." 팔과 다리가 묶인 채 산장 안에서 우리들을 지긋이 바라보는 예신. 저항할 생각조차 없었는지, 그녀는 얌전히 우리들이 밧줄로 그녀의 손과 발을 묶는 것에 대해 수긍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줬다. 혼자서 다수를 상대할 수는 없으니까. 예신다운 합리적인 판단이라 생각한다. "유에. 이런 사건이 있었다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저도 그렇고 싶었습니다만." 유아 선배가 나를 책망하기 시작한다. 덩달아 세린과 노아 교수님도 마찬가지. 세리아와 체리도 말은 안 하지만, 내 쪽을 계속해서 응시하는 것으로 봐선 아마도 그녀들 나름대로 할 말이 많이 쌓여있나 보다. 나중에 한꺼번에 들을 잔소리를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관자놀이가 아파오는군. 뭐... 엘리도 모든 정황을 상세히 아는 건 아니다. 왜 생존자 집단의 리더들이 예신의 존재를 꺼려했는지, 왜 밝힐 수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엘리도 전혀 모르는 사실. 다만, 예신은 악녀이고 지금 현재 착한 여자로 둔갑해서 우리들 앞에 등장했다는 사실 밖에 모른다. 정확한 속내는 엘리도 알 수 없을테니까. 결국. 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건 이 자리에선 나와 예신, 당사자들 뿐이라는 소리. "둘 사이에 더 숨기고 있는 사실이 있다는 건... 굳이 내가 언급하지 않아도 알겠지?" 역시나 연륜이 있으신 지아 선생님의 한마디. 통찰력이 높다고 해야 할까. 여하튼 지아 선생님의 눈은 못 속이겠다. "하지만 굳이 재촉해서 들을 필요는 없겠지. 때가 된다면 스스로 이야기 해줄 테니까. 그치? 유에." "네. 아마도요." "내가 원하는 건 가정법이 아닌 확신인데." "...알았어요. 조만간 모든 이야기를 다 털어 놓을게요." "좋아. 착한 아이네." 라고 말하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기 시작한다. 저는 애가 아나리고요. 선생님. ============================ 작품 후기 ============================ 300편입니다. 기분좋게 여유를 가지고 연재를 하려 했습니다만, 오늘 개인적인 모임이 있어서 술자리를 가지고 오는 길이라 많이 늦어졌습니다;; 그것보다 조만간 표류일지도 완결이 나겠군요. 길었던 여정을 끝낼때가 온 것 같습니다. 301화 사람은 적정한 수면 시간이 보장되지 않으면, 원활한 일상 생활을 할 수 없다. 잠과 밥은 보약이라고 하지 않는가. 충분히 잠을 자야, 그 다음 날에 활발하고 정상적인 움직임을 도출할 수 있다. 이 말을 반대로 표현하자면, 부족한 수면 시간은 일상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와 같다. "...졸려 죽겠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눈가에 생성되어 있는 눈꼽을 떼어낸다. 개인적으로 나 자신은 잠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부족한 수면 시간 덕분에 죽을 맛이다. 그 원흉은 바로. "잘 잤냐. 이예신." "...이 상황에서 잘도 잠이 오겠군." 당연한 말이다. 거실에 포박된 채, 게다가 몸의 자유를 빼앗긴 상태에서 계속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까지 있으니 과연 잠을 잘 수 있겠는가. 부연 설명을 더하자면, 그 '감시자'의 정체는 바로 아침부터 연달아 하품 콤보를 내뱉는 '나'다. 아침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바라보며 본의 아니게 예신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 "교대할 시간이야." 금발의 아가씨, 세린이 기지개를 피며 나에게 접근한다. 혹시 있을지 모를 비상 사태에 대비해서, 여성 멤버들은 전부 취침을 하게끔 만들어두고 혼자서 불침번을 섰던 나였기에 세린의 교대 신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반갑게 다가왔다. "그나저나 혼자서 이 여자를 감시할 생각을 하다니. 너도 참 강심장이다." "공포 영화 같은 건 혼자서도 잘 보거든." "자랑이다. 정말." 공포 영화를 잘 보면, 여자들에게 많은 플러스 요소를 얻을 수 있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듬직한 남자라는 이미지를 새겨줄 수 있으니까. 그러나 공포 영화를 아무리 잘 본다 해도, 여친이 안 생기는 남자는 안 생긴다. 여복女福이 없는 사람은 정말로 없으니까. 나 역시도 무인도에 표류되기 전에 여복의 수치가 주식이 떨어지듯 바닥을 치고 있었는데, 무인도에 표류되고 난 이후에 말 그대로 인기 폭발. 다수의 여자들과 급속도로 친해졌고, 육체적으로도 많은 진도가 나갔다. 유부녀인 지아 선생님과도 섹스를 했을 정도니까... 말 다했지. 뭐. 여하튼 한정적인 공간에서 그만큼 우리들의 유대감도 많이 높아졌다. 이제는 이 무인도를 빠져나가기 위해 최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 "화장실이라도 가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바깥으로 나가려는 나에게, 세린이 툭하고 질문을 내던진다. "아니. 잠시 짐 좀 꾸리려고." "짐이라니... 화장실을 가는 데 그만큼 많은 준비가 필요한 경우가 있어?" "내 목적지는 화장실이 아니라 기한의 마을이니까." "잠도 안 자고?" "지금은 태평하게 잠을 잘 시간조차 없어." 예신은 우리에게 잡혔다. 그리고 더이상 무인도에 남아있는 생존자들을 위협할 존재는 남아있지 않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 기회. "인생은 타이밍이야." 지금이 바로 그 '타이밍'이라고 굳게 믿고 싶다. 사람은 감과 촉이라는 육감에 의존할 때가 있는 법이다. 이성보다는 감에 의해서 상황이 180도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감을 이용해 살아가는 대표적인 인물이 내 주변에도 있으니까. 유아 선배가 바로 그 인물이기도 하다. "여자의 감으로 봤을 때, 네 말이 맞을수도 있겠어." 사기 스킬이라는 명칭을 붙였던 '여자의 감'을 발동시키며, 내 생각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유아 선배. 그리고 노아 교수님도 유아 선배와 마찬가지로 동의쪽에 의사를 표시한다. "구조대가 우리들을 발견하게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건 어쨌거나 좋은 행동이니까." 이로써 대략 우리들의 의견이 한 곳으로 모아졌다. 예신이 잡혀있는 상황에서, 이 기회를 틈타 좀 더 공격적인 구조 신호를 보낼 필요가 있다. 단순히 거대 화로터를 이용해서 구조 신호를 보내는 게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구조 신호를. 그 신호 방법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기한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많은 인력人力이 필요한 방법이기도 하니까. "저하고 세린이 갔다 올게요." 선발 인원은 단 두 명. 기한의 마을에 가기까지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가는 쪽이 훨씬 좋다고 판단한 나였기에 이런 멤버 목록이 나오게 된 것이다. 유아 선배는 부상으로 자연스럽게 제외. 그리고 예신의 감시와 행여나 있을지 모르는 불의의 사고를 대비해 엘리와 기타 많은 인원들을 남겨둘 필요가 있다.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번갈아가며 예신을 감시해야 하니까. "세린. 준비 다 됐어?" "왜 내가 너와 같이 그 마을에 가야 하는지에 대해선 많은 민원을 넣고 싶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구조 신호를 보내야 한다면야..." "그래. 참을성은 인간을 성숙시켜주는 중요한 요소니까." "시끄러워. 괜히 연상인 척 말하지 말라고. 기분 나쁘니까." 오늘도 세린의 까칠함은 여전하시다. 남자인 나에게만 저런 가시돋힌 말을 하는데. 만약 기한의 마을에 가게 된다면, 무슨 독설을 또 펼치게 될까. 남자들 대다수가 득실거리는 곳인데, 세린이 정신적으로 버틸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임상실험이라도 되는 건가... 그래도 궁금하긴 하네. 호기심은 잠시 고이 접어서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세린을 이끌며 건너편 무인도 섬으로 향한다. 바닷물이 빠져있는 사이에 길이 만들어진 틈을 타서 무인도로 건너가는 데에 성공.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 번 체감하게 되었다. 가는 길이 점점 익숙해진 탓에 시간도 단축되었음을 직접 체감한다. 익숙하면 편하다. 인간의 적응력이 가지고 있는 이점이 여기서도 발동될 줄이야. 늦지 않은 시간에 기한의 마을로 도착한 나와 세린.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우연이란 이름의 가면을 쓴 필연이란 녀석 덕분인지 몰라도 우리를 제일 처음 발견한 건 다름아닌 인이였다. "아! 또 왔어?!" "또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냐. 아가씨." "오지 말라면 오지 말라고! 차라리 다른 사람을 보내든가!!" "네 의견은 가급적이면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 물론 거짓말이지만. 작은 이를 드러내며 화난 강아지 마냥 으르렁거리는 인을 바라보며 세린이 작게 웃는다. "나, 왠지 저 여자애랑은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 같아." "......" 정말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방법을 너무나도 잘 아는 녀석들이다. ============================ 작품 후기 ============================ 비가 왔다 안 왔다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날씨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날씨는 습도만 높아서 땀이 주르륵 주르륵... 이래서 여름이 싫습니다;; 302화 기한의 마을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그 여자를 잡았다는 말입니까?!" 놀라움의 최상급 표현을 보여주는 기한의 말에 잠자코 고개만 살짝 끄덕여준다. 거짓말도 아니고 사실이니까.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기에 사실만을 언급할 것을 이 자리에서 엄숙히 선서합니다. "대단하시군요. 유에 씨. 역시 제 생각대로 큰 일을 해낼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칭찬이 너무 과하신데요." "아니요! 과한 정도가 아니지요!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이예신'을 포박했는데." "하하..." 기한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자면, 오랫동안 골머리를 아프게 해오던 문제점을 해결해버린 탓에 기분이 매우 업(Up)되어 있을거라 예상한다. 실제로도 그렇고. 그렇다고 기한의 말대로 내가 예신을 단독으로 잡았다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살하려던 그녀를 말린 인물은 나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이었으니까. 포박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는 예신의 목숨을 살려준 것이다.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에 대해서도, 그리고 우리가 그녀의 행동을 말렸다는 것에 대해서도 상세한 설명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서 기한에게 필요할 말만 전해준다. 특히나 이 사실은 더더욱. "예신이 말했던 내용중에, 기한 씨 쪽의 사람들이 들었다던 구조기의 소음에 대해서 한층 신빙성을 높여줄만한 말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네. 구조대가 이 근처에 있다는 거죠." "역시나." 예신의 체포보다 더더욱 값진 소식은 바로 구조대의 접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마을에 다시 왔으니까. 화로터의 역할이 중요하긴 하지만, 너무 임펙트가 없는 구조 신호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들이 준비한 비장의 수단을 이용하기 위해, 기한에게 상의를 하려고 왔다. 그건 다름아닌. "이, 이것은?!" 샘플로 가져온 '그것'의 정체를 기한에게 보여준 순간. 아까 이예신의 체포 소식보다도 더더욱 놀라운 표정을 선보여준다. 인간의 표정이 저렇게나 다양하게 변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기한의 놀라움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그것도 실시간으로 표출되는 중이다. 이름하여. "...불꽃놀이." 여객선은 다양한 이벤트와 함께할 수 있는 여행 스케쥴을 지니고 있다. 바다 위에서 볼 수 있는 불꽃놀이 역시도 이벤트 중 하나. 여객선 내부에서 우연히 불꽃놀이 박스를 발견한 적이 있던 세린의 도움을 받아, 기한의 마을로 오기 전에 잠시 난파선 내부에 들려서 불꽃놀이 봉지 중 하나를 가지고 온 것이다. "그나저나 설마 이게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러게." 세린의 말에 공감을 하지 않을수가 없다. 개똥도 약에 쓸 때가 있다고 하던가. 구조 신호용으로는 딱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언제 구조대가 올 지 몰랐기 때문에 아무때나 불꽃놀이를 쓰고 싶진 않았다. 구조대가 온다는 확신이 들어서야 사용할 수 있는 절대적인 구조 신호의 끝판왕. 시선을 급속도로 끌여들일 수 있는 수단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불꽃놀이를 우연치 않은 기회로 인해 구하게 된 세린에게 정말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전해주고 싶다. 물론, 남성혐오증이 고쳐지게 된 이후에. "확실히 이 불꽃놀이 재료들을 이용한다면 무엇보다도 확실한 구조 수단이 될 수도 있겠지만..." "제한사항이 많다는 거죠?" "네. 그겁니다." 기한도 나와 같이 핵심을 잘 생각하고 있다. 불꽃놀이는 밤에만 쓸 수 있는 시간적 제약이 붙어있는 구조 수단. 물론 소음 자체만으로도 크긴 하지만, 넓은 바다 환경에서 과연 그 소리가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게다가 구조대가 불꽃놀이 소음을 듣는다 하더라도 소리의 근원지를 찾는 것 또한 고역일 테니까. 우리들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기 위해서는 밤에 불꽃을 터뜨리는 편이 훨씬 이득이다. 청각 자체가 아니라 시각적인 효과까지 노린다는 의미가 되니까. 그리고 또 한가지 조건이 있다면. 구조대가 이 무인도 섬 근처를 지나갈 때 불꽃을 터뜨려야 한다. 거대 화로터와는 다르게, 불꽃놀이는 일시적인 수단이다. 지속해서 불꽃놀이를 장기적으로 하기에는 그 수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 우리가 당장 구했던 불꽃놀이 박스라고 해봤자 대략 20~30분이 끝이다. 실제로 실험은 안 해봤지만, 대략 그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구조기 신호가 또 다시 들려온다면, 그때 지체없이 불꽃놀이 박스들을 터뜨려야 합니다. 그래야 구조대들이 우리쪽을 볼 수 있을 테니까요." 기한에게 신신당부를 해보지만, 굳이 이런 말을 해주지 않아도 기한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거대 화로터를 운영하고 있는 마을의 지도자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어렵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구조기 신호가 다시 언제 또 이 무인도 섬을 방문할 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무인도의 장점이라 부를 수 있는 탁 트인 시야로도 비행기의 정확한 행보는 파악하기 힘드니까. 구조기가 아니라 구조선이라는 수단이 있다면, 훨씬 구조 신호를 보내는 데에 수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봐서는 넓은 바다를 수색하기엔 선박보다 비행쪽이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한 모양인지, 구조기 소음만 들려왔다는 제보 뿐이다. "잠시 마을 사람들을 모아주세요. 간략한 설명을 할 테니까요." 기한에게 소집령을 부탁하고 난 이후에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구상해왔던 구조 신호 보내기 대작전을 떠올려본다. 먼저 우리들이 선정한 장소는 바로 우리가 현재 머물고 있는 산장의 공터. 분산해서 불꽃놀이를 하기 보다는, 한 곳에서 모든 불꽃놀이 박스를 소비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량은 한정적. 그리고 두 군데 동시에서 불꽃놀이를 날려봤자 효과는 어차피 똑같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한 곳에 모아서 하나씩 박스를 사용하며 좀 더 불꽃놀이의 지속시간을 늘리자는 것이 바로 나의 핵심 전략 포인트.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공터를 선정한 이유는... 별거 없다. 그냥 우리가 편하자고 선정한 거니까. 어차피 불꽃놀이 박스를 사용하는 일에는 그다지 많은 인원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몸도 편하면 마음도 편하지. 암 그렇고 말고. ============================ 작품 후기 ============================ 비가 왔다가 안 왔다가 참으로 변덕스럽군요. 장마철 날씨와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습니다. 303화 기한의 마을에서 4~5명의 증원 약속을 체결하고 온 뒤에 가장 먼저 내가 한 일은 바로 예신의 현재 상태 체크였다. "얌전히 잘 지내고 있었겠지?" "보시다시피." 아직까지도 포박되어 있는 밧줄을 양 손으로 들어보이며 쓴웃음을 지어 보이는 예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준다. 이런 식으로 반응을 해줘봤자 예신에게는 별다른 위로가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것 보다는 나은 편이겠지. "조만간 이 공터에서 불꽃놀이를 할 거야." "무인도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일에 대해서 축하 행사라도 벌일 셈인가?" "천만에. 무인도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불꽃놀이를 하는 거니까 오해하지 말라고." "... 구조 신호를 보낼 생각이군." "어찌보면 무인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후의 구조 신호가 될 수도 있지." 역시 이 녀석은 머리가 잘 돌아간다. 불꽃놀이와 구조 신호를 연관시키면서 곧바로 우리가 행할 행동과 수단을 전부 예측해버리니까 말이다. 만약 이 녀석이 처음부터 생존자들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왔다면, 좀 더 무인도 생활에 대해서 적응도 쉬울 뿐더러 여러 가지 문제가 될 수 있을만한 요소 같은 건 쉽게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도 이제와서 지나간 일에 대해 후회할 생각은 없다. 지금 당장 눈 앞에 펼쳐진 희망의 끈을 붙잡기 위한 노력 하나만으로도 벅차니까. 기한의 마을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잠시 바깥으로 나가려던 와중에. "이봐." 잠시 나를 불러세운 예신이 여전히 달갑지 않은 미소를 나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 의외였는데. "성공하길 빌어주마." "......" 무인도에서 뼈를 묻을 생각으로 계속해서 일관적인 태도를 보여준 이예신. 인간 사회를 증오해왔기에, 사람을 대하는 일 자체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공포'라는 심리적인 압박 수단으로 사람을 컨트롤하려 했으니까. 저 말 또한 거짓 연기인지, 아니면 진심을 담은 말인지 현재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맙다." "천만에." 거짓이라도, 속아주는 것 또한 지금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위로의 수단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사람들끼리 모여있는 사회라는 곳이, 어쩌면 무인도보다 편할 수 있으니까. 이 말을 그녀 본인은 언제쯤 가슴에 와 닿을까. 기한을 포함해서 마을에서 증원을 오게 된 인원은 총 7명. 힘을 써야 하는 일이 아니기에 남자와 여자가 다양하게 섞인 성별을 유지하며 우리쪽 공터로 넘어오게 되었다. 우리 이외에 낯선 생존자들을 처음 접하게 된 지아 선생님과 세리아, 체리, 누나 등은 상당히 신선하다는 말을 나에게 넌지시 던졌다. 그 중에서도 체리는 워낙 낯선 사람을 대하는 데에 별다른 소질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세리아에게 딱 달라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 기한의 우락부락한 모습을 처음 본다면, 나 또한 체리와 같은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예신을 제외하고 전부 모인 생존자들에게 나는 마지막 지시를 하달해준다. 간단하고 명료하게. "비행기 소리가 들리면, 재빨리 공터 쪽으로 뛰어와서 불꽃놀이를 하면 됩니다." 라고 말이다. 별거 없다. 구조기 신호를 직접 듣는 순간, 앞뒤 사정 고려할 필요 없이 곧바로 불꽃놀이를 할 예정이다. 유일한 조건이 있다면, 구조기의 소음을 적어도 3사람 이상이 제대로 인식을 하고 난 이후에 불꽃놀이 박스를 터뜨린다는 조건이 있다. 혼자서 구조기 신호를 들었을 경우, 신빙성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대적인 구조 신호를 보낼 수 있는 기회는 이게 마지막. 그렇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드디어 마지막이구나." 노아 교수님이 감회가 젖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내가 무인도에서 처음 만난 생존자이면서 동시에 몸과 마음과의 거리가 제일 가깝게 맺어지기도 한 교수님의 한 마디에 지금까지 무인도에서 보내왔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지금은 바로 옆에 작은 호수가 있지만, 그때는 물조차 구하기 어려워서 소변을 마시곤 했었지. 이제와서 교수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그만큼 우리들은 무인도에서 생존이라는 목표 하나만을 두고 치열하게 자연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지금. 그 결실이 구조라는 결과물로 연결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마도 하늘에 계신 높은 분만이 알고 계시겠지. "마지막이면 마지막 답게. 멋지게 끝내자고." "저도 알고 있어요. 유아 선배." 선배가 내 등을 짝! 때리면서 기합을 넣어준다. 엘리 역시도 머리에 에바 초호기를 놓고서 나를 올려다본다. 그 뒤로 아리아가 평소와 똑같은 무표정으로 말한다. "선배답지 않게 긴장하지 마시고요." "누가 긴장한다고 그러냐." "세리아 언니도 괜히 선배가 긴장해서 실수할까봐 걱정된다고 전해달라네요." "거짓말 하지 마. 뒤에 세리아가 고개를 열심히 흔드는 거 안 보이냐." 누가 아리아 아니랄까봐. 마지막까지 독설이다. "집에 가면 오랜만에 가족끼리 외식이나 할까?" "누나는 좀 적게 먹어." "괜찮아. 살만 안 찌면 되는 거지." "하하..." 전 세계에 있는 여자들이 들으면 곧장 화를 낼만 한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서, 서로 힘내봐요!" "그래. 체리야, 너도 힘내." "내가 유아 선배보다도 제일 먼저 구조기 신호를 듣고 달려올 테니까. 1등은 미리 예약해두겠어." "이세린. 너는 마지막까지 와서도 승부욕을 불태우는구나." 유아 선배한테 만큼은 절대로 질 수 없다는 의욕적인 부잣집 아가씨의 멘트에 뒤이어. "무인도에서 나가고 나면, 맛있는 거 만들어줄게." "저도 맛보고 싶네요. 지아 선생님." 지금까지 무인도에서 보여준 요리 실력을 통해 추측하건데, 지아 선생님이 해주신 요리는 무엇을 먹어도 맛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어쨌든. 이제 슬슬 떠오르기 시작하는 둥근 달과 함께 서서히 무인도에서 할 수 있는 최후의 노력을 시작해 볼 시간이다. "스타트 해볼까요."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희망이란 이름의 막차에 올라타보자. ============================ 작품 후기 ============================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러분. 여태 차기작 기획서 제출과 함께 회사의 폭풍같은 야근 덕분에 그동안 연재하지 못했던 무인도 표류일지를 다시 연재해봤습니다. 감동의 눈물이 멈추질 않는군요 ㅜ_ㅜ 304화 해가 저물기 시작한 때를 노려, 각자 위치를 배정받은 곳을 향해 자리를 옮긴다. 내가 배정받은 곳은 엘리의 부모님이 묻혀 계시는 언덕. 각자 팀을 나눠 배치된 장소에, 나는 엘리와 같이 둘이서 언덕을 지키기로 했다. 가장 시야가 개방된 곳. 그리고 가장 소리가 잘 들릴법한 곳. 하지만 문득 뇌리를 스친 의구심이 있었다. "밤에도 구조기가 활동을 하나?" 그에 대한 답을 엘리가 들려줄 순 없다. 엘리 역시도 잘 모를테니까 말이다. 무엇보다도 근 3년동안 무인도에서 생활해 온 여자아이기 구조기가 무엇인지 조차도 알 수 있을지 의문이다. 유년시절을 무인도와 함께 보낸 엘리에게 정확한 답변을 들을거란 생각은 하지 않기에 혼잣말로 중얼거린 말이었는데. "지금같은 경우라면, 날아다닐 가능성도 있지." 낯설지 않은 여성의 음성.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들려서는 안될 목소리이기도 하다. "이예신! 어떻게 여길..." "멍청하네. 그 정도 속박은 아무렇지도 않게 풀 수 있다고." 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손과 발을 묶었던 밧줄을 내 발 밑에 던져준다. 예상치 못한 예신의 등장에 나도 모르게 긴장감이 감돌고, 엘리 또한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언제든지 덤빌 준비가 되어 있다는 눈빛을 한다. 하지만 예신은 오히려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우리들에게 의외의 말을 던진다. "그렇게까지 적대적인 의사를 표시할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네가 얌전히 있을거란 보장도 없으니까." "무턱되고 날 유죄 취급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무죄추정의 원칙도 몰라?" "이미 넌 전과범이잖아." "그건 부정할 수 없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방해하지 않고 얌전히 있겠다는 소리인가. 아직도 의심이 되지만, 그래도 여기서 예신과 투닥투닥 할 시간은 없다. 그런 노력은 다른 곳에 써야 할 예정이니까 말이다. 그것보다도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 있었으니. "구조기가 저녁에도 돌아다닐 가능성이 있단 말이야?" "물론." "밤이면 아무런 시야도 볼 수 없잖아." "밤이라면... 그렇지. 하지만 낮이라면 어떨까?" "무슨 소리야." 이해하기 힘든 말을 내뱉는 예신 덕분에 재차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긴 흑발을 거칠게 쓸어내리던 예신이 알 수 없는 미묘한 미소를 선보이며 말을 이어간다. "다른 생존자 마을에서 계속 유지하던 화로터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면?" "확신...은 아니지만 심증은 있다는 뜻이야?" "풀어서 해석하자면." 기한이 이끄는 마을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거대 화로터를 운영해왔다. 밤이나 낮이나. 물론 효과는 밤보다 낮이 월등히 높은 편이지만, 불꽃놀이의 화력에 비하면 극히 약한 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거대 화로터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한다면 역시 '지속적인 구조 신호' 유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구조대들은 우연치 않게 화로터에 나오는 연기를 보게 되었어. 그래고 이 일대의 수색 비중을 늘린거지. 최근에 구조기의 소음 소리를 들었다는 근거있는 소리들이 자주 나오는 이유가 바로 그거야." "넌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 "물론. 그래서 더더욱 화로터 운영을 방해할 목적으로 다가갔었지만." "...마침 내가 기한 씨와 만나게 되면서부터 힘들어졌단 이야기군." "정답이야." 인생은 타이밍이라 했던가. 구조대가 화로터의 존재를 어렴풋이 눈치챈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먼저 눈치챈 건 무인도 생존자들 중에서도 다름아닌 이예신이었다. 그렇기에 예신은 기한의 거대 화로터를 가만히 놔두면 안 되겠다는 일념하에 화로터를 망가뜨리려 했지만. 운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하늘이 도왔던 것인지 나는 기한과 그 마을 사람들의 존재를 접할 수 있었다. 나와 기한이 서로 힘을 합치는 순간부터, 예신은 구조신호의 방해에 엄청난 착오를 겪게 된 것이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1대 1로 가장 껄끄러운 상대가 바로 너였고, 생존자 집단중에서 가장 껄끄러운 상대는 바로 기한이라는 녀석의 집단이었어." "그 말인즉슨. 무인도 내에 살아있는 생존자 집단 중에서는 기한 씨의 마을이 가장 규모가 크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그래도 되고." 예신이 가장 꺼려하는 상대가 바로 나. 그리고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생존자 마을의 집단과 내가 힘을 합치게 되면서부터 예신은 직감적으로 패배를 느꼈을 것이다. 포기하면 편해. 모 유명한 농구 만화에서 나오는 명대사 아닌가. "그렇다면 너도 우리들과 같은 동료라고 인식해도 되는 거야?" "중립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좋을걸." "이유는?" "여자의 감." "...네가 무슨 유아 선배냐." 일부러 유아 선배의 유행어를 따라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처음으로 저 녀석이 하는 유머를 들었다. 별로 재미는 없었지만. "네 마음이 바뀐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 아직까지 예신을 전적으로 신용하는 건 아니다. 타인과의 교류는 하루 아침에 성사되는 그런 것이 아니니까. 신뢰란 녀석은 그 어떠한 건축학적 지식을 동원한다 해도 단기간에 쌓아올릴 수 있는 그런 건축물이 아니다. 쌓아올리기 어려운 녀석이긴 하지만, 그만큼 부서지기 힘든 견고함을 자랑한다. "나를 위해 움직여준 녀석은 너희들이 처음이었으니까." "......" "단지 그것 뿐이야." 이예신의 성장 배경을 명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대략적으로 그녀가 어떠한 삶을 살아 왔는지, 그리고 어떠한 비참한 인생을 살아 왔는지 정도는 나 또한 알 수 있다. 어찌보면 엘리보다도 더 가슴아픈 사연을 품고 지금까지 살아 왔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녀석은 오히려. 우리들보다도 더 동료를 원하고 있었을 것이다. 추측이긴 하지만. "슬슬 준비해야 할 때가 된 거 같네." 바람에 흩날리는 긴 흑발을 왼 손으로 지긋이 누르며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이예신의 말. 그와 동시에 나보다도 먼저 반응한 쪽은 다름아닌 작은 체구의 소녀, 엘리였다. "왜 그래? 엘리." 되묻는 나에게 엘리가 자신의 귀를 가리키는 제스쳐를 취한다. 소리. 설마... 이건. "구조기의 신호...!" ============================ 작품 후기 ============================ 폭풍같은 야근 덕분에 무인도 표류일지의 진도가 상당히 늦어지고 있습니다. 금요일에도 퇴근 15분을 앞두고 난데없이 1시간 반짜리 작업이 쏟아진 덕분에 야근을 했습니다만... ... 살려주세요 ㅜ_ㅜ 305화 구조기의 소리. 분명 내 귀에 현저히 들리기 시작한다. 그것도 우리가 서 있는 장소에 한해서가 아닌 무인도 전 지역으로. "엘리!" 내 말에 즉각적으로 반응한 엘리가 재빨리 뛰기 시작한다. 물론 나 역시도 마찬가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언덕을 내려간다. 그리고 산장 근처에 놓여있는 불꽃놀이 상자에 불을 피운다. 이게 우리들이 세운 무인도에서의 마지막 작전이자 최후의 일전. 하지만 언덕을 내려가던 도중. 가만히 서 있던 예신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힌다. "......" 나를 따라가던 엘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멈춰선 나를 지긋이 응시한다. 그래. 알고 있다고. 지금 우리에게는 일분 일초가 아까운 상황이니까. "...그래도." 무인도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자연의 위대함. 인간의 무기력함. 그리고 동료의 소중함. 그래. 동료의 소중함. 사람의 소중함. 그 어떠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나의 소중한 경험이다. "이예신!" 제자리에 서 있던 예신의 가녀린 손목을 거칠게 잡아서 내 쪽으로 끌어당긴다. 무인도에서 혼자 고생했을 그녀. 그래서인지 너무나도 손쉽게 내가 이끄는 방향으로 순순히 다가온다. "혼자서 무인도에 남을 생각은 하지도 마라." "그건 협박일까?" "아니." 예신은 무인도에서 죄를 지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에 머무를 때에도 살인청부업자라는 씻을 수 없는 족쇄를 발목에 지닌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불쌍해서가 아니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분명 유아 선배같은 평범한 여대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분명 노아 교수님과 같이 강단에 몸을 담는 지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자 가설이지만. 이예신이란 여자의 존재가 탄생하게 된 건.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갈 곳이 없다면 내가 만들어주겠어." "로맨틱한 대사구나. 장난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예신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한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내 이름은 유예야. 앞으로 기억해두라고." 엘리의 발자국 소리가. 그리고 잠시 정체를 겪던 예신의 발자국 소리가. 구조기의 소음과 함께 섞이기 시작한다. "...평생 기억해두지." 그나마 가장 가까운 거리여서 그랬던 것일까. 산장에 도착한 일행 중 우리들이 가장 빨랐던 모양인지 아직까지는 아무도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없으면 없는데로 하는 수밖에. "엘리는 산장 안에 가서 화로에 있는 불 좀 옮겨오고, 넌 나와 같이 상자 좀 옮기자." "여자에게 부탁을 할 때에는 정중하게 하라고 배우지 않았어?" "지금 그런 매너를 따지게 생겼냐?! 일단 살고 봐야지!" "뭐, 못 어울려줄 이유도 없지만." 예신의 저런 태도도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직까지 나는 저런 류의 농담에 잘 익숙해지지 못한다. 한편. 빠른 속도로 산장 안을 향해 뛰어가는 엘리의 모습을 지켜보며 근처에 놓았던 불꽃놀이 상자들을 한 곳에 모은다. 본래는 여러군데 나눠서 터뜨릴 예정이었지만, 이렇게 선명하게 구조기 신호가 들리는데 훗날을 기약하느니 어쨌느니 하는 그런 건 없다. 뒤를 생각할 바에야, 차라리 오늘 한 순간을 바라보며 하얗게 불태울 뿐. 상자 내부에 있는 포장지를 과감하게 뜯는다. 최대한 모든 불꽃놀이 제품을 한 곳에 모아두고, 나무로 미리 만들어뒀던 발사대에 불꽃놀이들을 꽂아 넣는다. 본래 이런건 불꽃놀이 전문가가 해야 안전하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그런 여유는 없다. 일단 터뜨리고 보는 거다. 얼추 준비가 다 되었을 무렵. "유에!" 저 멀리서 들려오는 유아 선배의 목소리. 그 뒤로 다른 일행들 역시 구조기 소음을 듣고 곧장 우리 산장이 있는 곳으로 뛰어오기 시작한다. "혼자서도 잘 꾸며놨네." 지아 선생님이 혀를 내두르며 칭찬 아닌 칭찬을 들려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참고로 이건 나 혼자 설치해놓은 것이 아니다. "생각지도 못한 조력자가 있었거든요." "누구?" "글쎄요." 라고 말을 하지만. 이미 모두의 시선은 예신에게로 향해 있었다. 일찌감치 산장 구석에 자리를 잡아 개별 행동중인 이예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던 지아 선생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뭐, 애들은 싸우면서 커간다고 하니까." "이미 애들이라고 불리기엔 나이가 좀 많긴 하지만요." "나이는 중요치 않아. 마음만 순수하고 청순하다면 누구든지 아이가 될 수 있다고 하잖아?" "그랬으면 좋겠네요." 엘리에게 받아든 불씨를 천천히. 그리고 신중히 불꽃놀이의 끝에 붙인다. "이게 무인도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노력이 되기를." 혼잣말로 중얼거린 대사지만, 아마 모두가 내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여기에 있는 전부가 나와 같은 생각을 지니고 있을 테니까.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파지직. 강렬한 소리를 내며 빠르게 불꽃이 터지기 시작한다. 하늘로 쏘아지기 시작하는 강렬한 밤하늘의 꽃. 어두운 천장 위로 새겨지는 화려한 꽃들의 축제. 밤의 꽃들은 마치 무인도에서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버텨온 우리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자 열심히 밤하늘 위에 아름다운 수를 놓기 바쁜 모양인가 보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야근전사 에바트리체입니다 ㅡ_ㅡ; 아마 내일쯤이면 에필로그 편하고 후기가 같이 올라갈 겁니다. 너무 늦어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ㅜ_ㅜ그럼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306화 <에필로그> 여름. 4계절 중 더운 쪽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녀석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렇다. 지금은 여름. 그리고 2학기의 새로운 시작. "더워라..." 매미가 울어대는 시끄러운 소음을 온 몸으로 뒤집어 쓴 채 학교를 향해 천천히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나아가기 시작한다. 새학기, 그것도 첫 수업. 학교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우렁차게 울리는 매미...가 아니라. 스마트 폰의 벨소리. 일단 사긴 샀는데. 아직까지는 스마트 폰에 적응이 잘 안 되서 난감할 따름이다. 그래도 뭐, 통화할 줄 알고, 통화 받을 줄만 알면 되는거지. "여보세요." 라는 말을 하자마자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너, 언제 올 거야." "일단 가고는 있어요." "지각이라고. 지각. 출석 부르기 전에 후딱 안 뛰어와?!" 오늘도 기운찬 유아 선배의 목소리. 덕분에 또 한 번 무더위가 찾아온 느낌이 물씬 풍긴다. "이 더운 날씨에 왜 뛰어요." "지각을 면하기 위해서." "한번 지각한다고 학점이 D가 나오거나 그러진 않아요." "그런 방심이 D가 나오는 지름길이라고 하잖아." "......" 반론을 펼칠 수가 없어졌다. 요즘 들어서 선배의 말솜씨가 하늘을 찌른단 말이지. 내 누나랑 자주 어울려다녀서 그런가. 이래서 친구는 잘 사귀어야 하는 법이다. 유아 선배의 독촉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강의실로 입장. 이미 앉아있던 학생들이, 뒤늦게 들어온 나를 향해 시선을 던진다. 그리고 그 중에서. "늦었어. 유에." "죄송합니다. 하하하." 이번 학기부터 정식 교수로 발령이 났는지 의욕적인 눈빛을 불태우며 강단위로 올라오는 한 여성. 깔끔한 정장 차림과 더불어 아름다운 외모는 학생들의 마음을 얻기에 충분하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교재를 펴고 상냥한 미소로 인사하는 교수님. "오늘부터 여러분들과 같이 공부하게 될 노아라고 합니다." 307화 <후기> 무인도 표류일지, 드디어 완결입니다. 사실 무인도 표류일지를 노블레스에서 연재하는 건 이번에 3번째입니다. 첫번째는 오드아이라는 소재로 판타지 형식으로 쓰여진 이야기가 있었고요. 두번째로는 순수한 생존물로 갔지만, 워낙 순식간에 엔딩을 지어버려서 좀 허무한 감이 없지않아 있었지요. 이번에 사실상 3번째 엔딩이지만, 개인적으로 많이 아쉽습니다. 시간을 들여서 좀 더 쓰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계속 무인도 이야기를 쓰는 것보다 다른 신작을 준비하는 편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본의아니게 이렇게 엔딩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무인도라는 소재 하나가지고 300편을 쓴 제 자신이 참 신기하기도 합니다. 소재가 안 나올줄 알았는데, 그래도 나오긴 나오는군요. 아하하. 총 306편이 진행되는 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봐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말 부족한 작품이지만, 그래도 제가 쓰고싶은 스타일의 글이 나와서 개인적으로는 만족하고 있습니다. 정통 판타지라든지 무협같은 것보다 좀 더 특이한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게 제 목표라서, 꾸준히 나오는 차기작들 역시도 쉽사리 볼 수 없는 그런 소재들로 꾸며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단 곧바로 연재될 차기작은 여러 가지 후보가 있었지만, '난파선 표류일지'로 정했습니다. 간략한 스토리를 설명드리자면, 무인도 표류일지에서 배경이었던 무인도가 난파선으로 옮겨진 것 뿐입니다. 정말 간단하지요? 연재 시작은 아마 내일부터가 될 예정이고요. 난파선 표류일지가 완결이 되면 다른 신작을 쓰는 형식으로 계속해서 작품을 써나갈 예정입니다. 이제 슬슬 마무리 멘트를 해야겠군요. 그동안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차기작에서도 꾸준히 뵙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입니다~!